임꺽정 10권 지은이: 홍영희 명종 15년 경신 12월 임진삭 초일일에 상이 정원에 전교를 내리어서 삼공, 영 부사, 병.형조 당상, 좌우 포도대장을 고병조에 모이도록 밀유하라 하고 뒤에 봉 서를 내리었는데, 그 봉서의 사의는 대개 이러하였다.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 로 외람히 대위를 계승하여 주소 전전긍긍하게 지난 지가 지금 16년인데 그 동 안 여러 해 연거푸 흉년에 유리표박한 백성이 많아서 해서의 도적이 성함은 들 은 지도 이미 오래나 조처가 엄하지 못한 까닭인지 점점 더 기탄없이 횡행하여 심지어 전옥서도 깨치려고 하고 지방관도 해치려고 하였다는 말이 있어 듣기에 해연하기 짝이 없는데 이번 별견 선전관 정수익의 계사를 받아본즉 부장 연천령 이 도적에게 죽고 금교 역마도 도적에게 뺏겼다니 이런 변이 어디 있을까. 전자 에 도적을 경성에서 놓칠 때도 무참히 봉패하고 증왕에도 이러한 일이 한두 번 이 아니었는데 이번에 또 이러하여 국위가 땅에 떨어지고 국기가 해이하니 이 아니 한심한가. 근본을 돌이켜 추구하여 보면 나 같은 불민한 군주가 위에 있어 교화가 밝지 못하고 혜택이 아래 미치지 못하는데다가 더구나 열읍 수령이 침학 으로 일을 삼고 또 군적의 일이 다단하여 백성이 생업을 즐기지 못하고 흩어져 도적이 되어서 목전의 사는 것만 다행히 알고 마침내 형벌을 면치 못할 건 생각 지 못하니, 아, 슬프다! 나의 백성이 여기 이른것이 일변으론 불쌍하고 일변으론 부끄럽도다. 다만 일월이 오래된 동안에 도적이 이미 국가의 대환이 되어서 심 상히 조처할 수 없는 것을 토포하는 방책이 매양 인순고식에 흘러서 효과가 없 으니 특별한 큰 거조를 내지 않으면 완악한 무리가 무엇으로 징계되어서 금즙될 까. 나의 생각에는 무신 중에 지용이 구비하고 군사에 숙달한 자들을 택하여 대 장을 삼아 황해.평안.함경.강원.경기 각도에 한 사람씩 차견하여 오로지 포도 직 무를 맡게함이 좋을 듯하나 어떠할지 제경은 상의하여 회주하라.” 대신 등이 봉서를 받들어 뵈온 후 서로 합의하고 위에 회주하기를 “도적이 없는 세상은 없사오나 오늘날같이 심한 것은 전고에 없는 일이오며 오늘날 도적이란 심상한 서절구투가 아니옵고 궁흉극악한 반국역적이외다. 부장을 활로 쏘고 칼로 찌르 는 일이 전후에 이어 있다시피 하와 국가에 욕됨이 이에서 더할 수 없사온즉 불 가불 이 기회에 근적되도록 소탕하여야 하올 일이온데 다만 황해.평안.함경.강원. 경기 오도에 각각 대장을 정하여 내보내오면 민심 소동될 염려가 없지 않사오니 병조에 명하사 종이품 무신 중에 재간 있는 자 두 사람을 택하게 하와 순경사란 칭호로 황해.강원 양도에 내려보내옵서 양도 방백과 동사할 뿐외라 타도 감류와 도 협력하여 도적의 도타할 길을 방비하고 기어이 체포케 하옵시고, 도성 안에 국법의 무서운 줄을 모르고 장물 동분하는 이를 탐하여 적당을 거접시키는 자가 허다히 있다 하오니 형조에 명하사 저저히 사출하와 적당이 듣고 공동되도록 엄 형 치죄하게 하옵시고 적당의 종적을 탐지하여 고관하는 자와 계책을 내서 적당 을 잡아 바치는 자는 중상을 주게 하옵시고 적당의 후회하고 자수하는 자는 양 민이 되어 편히 살도록 조처하게 하옵시고 이외의 미진한 조령은 병형조와 순경 사와 같이 의논하여 마련하게 하옵신 후 팔도에 하유하심이 어떠하올지?” 이때 좌의정 이준경은 병으로 의론에 참예치 못하여 집에서 따로 헌의하였는데, 대체 의론은 중의와 별로 다름이 없고 다만 별견 선전관을 중히 치죄하고 선전관과 동사한 수령들을 감사 시켜 결벌하되 공을 세워 속죄하게 하자는 의론이 끝에 더 붙어 있었다. 병조에서 순경사의 망단자를 위에 올려서 황해도에 이사증과 강원도에 김세한이 각각 수망으로 낙점을 물었다. 위에서는 오도 대장을 내려고 하다가 대신들의 말을 좇아서 양도 순경사만 낸 것인데 사헌부에서는 양도 순경 사를 낸 것도 너무 과한 거조로 여겨서 순경사가 임명되자 곧 대계가 일어났다. “문무 겸전한 방백이 열읍 수령을 신칙하와 일심으로 도적을 잡으러 드오면 잡 지 못할 리가 없을 것이온데 구태여 순경사를 내보내서 흉년에 민폐되게 할 까 닭이 무엇이오니까? 금년의 황해.강원 양도 흉년이 타도보다 우심하온 터에 순 경사가 나가오면 등대.지공에 분주하올 무리가 다 굶주린 백성들일 터이온즉 백 성들의 입에서 차라리 도적을 만날망정 순경사는 만나고 싶지 않단 원성이 날까 저어하옵니다. 순경사 내보내는 것은 그냥 중지하옴이 마땅하오나 일이 정히 중 지하기 어렵사오면 순경사 대신으로 당하 호반 중에 강장한 자를 택하되 포도장 이라 칭하와 가서 수령들과 일을 같이 하게 하옴이 가할 듯하외다. 그리하옵고 정수익.이의식.장효범.이흠례.강려 등은 다 용서 없이 율에 비쳐 치죄하게 하옵소 서.” 위에서 대계차자를 감한 후 곧 비답을 내리었는데 그중에 대신과 해조에 물어서 다시 처리하겠다는 말씀이 있었으나 이것은 겉으로 간쟁 을 용납하는 성도를 보일 뿐이고 실상 대계를 좇아서 순경사를 변경할 성의는 없었다. 대체 대간의 버릇이 계를 한번 시작하면 임금이 성가시어 못 견디도록 그치지 않는 일이 종종 있지마는 이때 사헌부에서도 꺽정이가 국가의 대환인 줄 뻔히 알며 순경사를 중지하라고 지재지삼 임금을 성가시게 하기는 어렵든지 재 율 한번에 그치고 말았다. 대계가 그친 뒤에 신임 순경사들이 비로소 궐하에 하 직을 고하고 각각 떠나는데 병조에서 위에 품하고 순경사 한 사람에게 정병 50 명씩을 주었다. 군사는 지방에 가서 얼마든지 조발하여 쓸 수 있는 까닭에 더 많이 줄 것도 없거니와 흉년의 민폐라는 대계를 참작하여 아무쪼록 민폐가 덜 되도록 군사를 적게 준 것이었다. 좌변 포도대장 김순고가 서림이를 포청에 두 고 보느니 황해도 순경사에게 주어 보낼 생각이 들어서 순경사들 떠나기 전에 서림이를 한번 불러서 저의 뜻을 물어보았었다. “이번에 황해도와 강원도에 순 경사가 난 것을 너 아느냐?” “녜, 포교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소이다.” “내가 너를 황해도 순경사에게 천거해 줄 테니 따라가 보려느냐?” “소인은 아직 영 감마님 수하에 있기가 소원이올시다.” “네가 서울 있어 무어 할 테냐. 이런 기 회에 나가 공을 세워서 속죄를 해야 하지 않느냐?” “포교들의 말을 듣사온즉 황해도 순경사 이병사 영감께서 자부가 과합셔서 남의 말을 들으시는 법이 없다 구 하오니 소인같은 것이 천려일득으루 좋은 계책을 내서 바치온들 들어주실 리 있겠소이까. 소인은 영감마님 수하에 있솝다가 이 다음 기회에나 속죄하오려구 생각하옵네다.” “이번에 순경사가 나가서 꺽정이를 잡으면 이 다음 무슨 기회 에 네가 공을 세울 테냐?” “먼젓번에는 접전을 안하구두 꺽정이를 잡ㅇ르 수 있었습지요만 이번은 먼젓번과 달라서 꺽정이를 잡자면 접전을 안할 수 없을 것 이옵구 접전하면 관군이 꼭 득승할는지 마치 모를 일이외다.”“접전 안하구 잡 을 수가 있었으면 접전해서 낭패를 봤겠느냐.”“관군이 마산리루 몰려간 까락 에 아니 날 접전이 나 줄 아옵네다.”“마산리를 가지 않구 꺽정이를 잡을 수 있었단 말이냐?” “꺽정이의 소굴 청석골 근처에 관군 일대가 가서 곧 들이칠 기세를 보이오면 청석골 근처서 급보가 꺽정이에게루 갔을 것이옵구 꺽정이가 급보를 받으오면 주야 불분하구 쫓아왔을 것이온즉 꺽정이가 청석골루 쫓아올 때 길목에 사수를 많이 매복시켰다가 불의에 엄습하였사오면 꺽정이와 그 도당 이 다 만부부당지용이 있사와두 화살 아래 죽거나 중상하와 접전은 고사하옵구 항거두 별루 못했을 줄 아옵네다.” 서림이의 말하는 계책을 듣고 김포장은 별 안간 역정을 내며 “그런 계책이 있으면 진작 말할 것이지 어째서 일이 다 그릇 된 뒤에 말하느냐. 네가진심으루 귀순한 것이 아니라 속에는 아직두 딴맘이 있 구나.”하고 서림이게게 꾸지람을 내리었다. 3 서림이가 성복 후의 약방문과 같 은 소용없는 계책을 말할 때 소망이 저의 모사하는 재능을 김포장이 알아주기 바랄 뿐이었는데 김포장의 꾸지람 속에 저의 계책을 신통히 여기는 의사가 역연 하여 소마에 어그러지지 아니하므로 꾸지람을 듣고 속으로는 은근히 좋아하며 겉으로만 가장 황공한 체하고 “요전 선전과 행차는 소인이 미리 아옵지두 못하 였솝거니와 설사 미리 알았솝더라두 소인이 무슨 재주루 앞일을 내다보구 계책 을 생각하였사오리까. 지금 말씀 아뢴 되지 않은 계책은 선전관의 낭패 보신 이 야기를 듣자온 뒤 우연히 생각이 난 것이올시다.” 발명하는 말이 근리하여 김 포장은 역정을 더 내지 않고 “지난 일은 고만두구 이번 순경사가 나가서 꺽정 이를 잡는데 좋은 방침이 있거든 말해라.” 하고 온언순사로 말하였다. “소인의 생각을 기탄없이 아뢰오면, 강원도 순경사께서는 꺽정이의 그림자두 구경 못하 실 것이옵구 황해도 순경사께서 꺽정이를 만나실 것이온데 계책으루 잡으셔야지 힘으루 잡으시려구 하오면 먼젓번 선전관보다 더 큰 낭패를 다하시기 쉬울 것이 외다.” “꺽정이가 마산리서 어디루 도망한 것을 너는 대강 어림하느냐?”“마 산리서 도망한 곳은 아옵지 못하오나 지금 있는 곳은 청석골 일 줄로 아옵네다. ”“순경사 난 소문을 듣구두 청석골에 가만히 있을까. 어디 다른 데루 도주하 지 않구?”“소인의 욜야에는 다른 데루 도주할 리 없을 듯하외다.”“전에 황 해도서 체포하려구 하면 으레 강원도나 평안도루 도주한다는 놈이 어째 이번에 는 도주하지 않겠느냐?”“꺽정이는 전에두 항상 도망할 생각보다 항거할 생각 이 많았사옵는데 더구나 지난번에 칠팔 명 적은 수효루 관군 오백여 명을 대적 한 끝이오라 기가 높아져서 도망할 생각은 염두에두 둘 리 없을 듯하외다. 어제 사관청 에서 여럿의 말이 순경사 두 분께서 나가시면 황해도,강원도 각군을 순행합시리 라구 하옵기에 소인이 그 이유를 묻사온즉 꺽정이가 목하 어느곳에 가 숨어 있 는지 알 수도 없거니와 설령 청석골에 돌아와 있다손 잡더라두 순경사들 나가신 다는 선성을 들으면 거처없이 도망할 터이니까 순경사께서는 각군을 순행하시며 종적을 염탐하실 수밖에 없으리구 하옵디다. 청석골내성과 꺽정이의 성정을 모 르오면 누구든지 이렇게 생각하기 쉽사외다. 그러나 황해도 순경사 이병사 영감 께서 황해도초입 금교역말에 가서 유진하시구 황해도 각군에 관자하셔서 군사를 조발하여다가 청석골을 들이치시면 꺽정이를 잡구 못잡는 것이 여기서 판단이 나올 줄루 소인은 생각하옵네다.”“청석골 적굴이 첩첩산중이라지. 통로가 험하 겠구나.”“통로라구 길다운 길이 없사온 까닭에 목표를 모르구 들어가오면 첩 경 산속에서 헤매기가 쉽사외다.”“도둑놈들이 도망할 틈이 없두룩 적굴을 웨 워싸구 들이치자면 군사가 대개 얼마나 들겠느냐?”“군사를 잘 쓰오면 삼사백 명으루 넉넉하옵지만 잘못 쓰옴녀 천명 이천 명두 부족할 것이외다. 지금 관군 관 꺽정이패를 비교하여 보오면 꺽정이패는 거개 청석골 지리에 익숙하와 어둔 밤에 불 없이라두 드나들 수 있솝는데 관군은 그렇지 못하옵구 꺽정이패는 모두 불패천 불외지하는 것들이 되와 목숨을 아끼지 않솝는데 관군은 그렇지 못하온 즉 관군이 적굴을 철통같이 에워싸구 들어가옵더라두 꺽정이와 그 도당은 좀처 럼 잡히지 않을 듯하외다.”“아까 네 말이 계책으루 잡으면 잡을 수 있다구 했 지.”“녜.”“네가 생각한 계책이 있거든 말해라. 어디 들어보자.”“꺽정이와 그 도당보다 그놈들의 처자를 먼저 잡는 것이 한계책이 될 듯합네다.”“여러 놈의 처속은 청석골에 있지 않구 다른 데 있느냐?”“아니올시다. 청석골 안에 같이들 있소이다.”“같이들 있으면 먼저 잡구 나중 잡구 할 것 없지 않으냐?” “청석골을 쳐들어가올 때 개성부 가까운 동쪽이나 남쪽 일면은 튀워두옵구 군 사를 9대나 10대에 나누어서 사면 중 삼면으루 쳐들어가온면 꺽정이 이하 두령 이란 것은 거의 다 출동하게 될 터이온데 각대에서 다같이 지는 체 쫓기는 체하 와 아무쪼록 멀리 끌어내 가게 하옵구 그 틈에 틔워둔 쪽으루 정병 일대를 쫓아 들여보내와 소굴에 남아 있는 그처자들을 몰수히 잡아다가 개성부 옥중에 가둬 두오면 꺽정이가 반드시 개성부를 침범하러 올 것이옵구 개성부를 침범할 때 만 일 잡지 못하구 놓치옵거든 그 처자들을 서울 전옥에 갖다 가둬 두면 꺽정이가 필시전일의 무모한 계획을 되풀이하러 올 것이온즉 그때 서울서 잡기는 용이할 것이올시다.” 서림이의 꺽정이 잡을 새 계책을 김포장이 신통하다고 칭찬하는 말은 없을망정 역시 신통하게 여기는 듯 듣고 나서 고개까지 몇 번 끄덕이었다. 4 김포장이 서림이에게 “너를 황해도에보내구 안 보내는 것은 내가 이순경사 영감과 상의해서 작정할 테니 그리 알구 있거라.”하고 말을 일러두고 그이튿날 포청 공사를 마친 뒤 황해도 순경사 이사증을 만나러 그 집으로 찾아왔었다. 순 경사들이 이날 사폐하고 다음날 발정하기로 작정이 되어서 이순경사 사랑에 작 별하러 온 손들이 많았었는데 김포장이 오는 것을 보고 일어서 가는 손도 더러 있었으나 김포장과 친분이나 면분이 있는 손들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자리가조 용치 못하였다. 김포장이 다른 손들 가기를 기다리다 못하여 주인을 보고 “여 보 영감, 내가 포도 공사에 관해서 조용히 사의할 일이 있소.”하고 말을 내었 다. 다른 손들이 일제히 일어나려고 하는 중에 이순경사가 김포장더러 “강원도 순경사가 떠나기 전에 의논해둘 일이 있어 온다구 했으니 오거든 셋이 앉아 상 의하십시다.”하고 말하는 것을 김포장은 “김순경사하구 셋이 같이 상의해두 좋지만 주장 영감하구 상의할 일이오.”하구 대답하였다. 다른 손들은 다 가고 김포장 혼자 남아서 이순경사와 단둘이 마주 앉은 뒤 이순경사가 먼저 “상의하 실 일이 무슨 일인가요?”하고 물어서 두 사람 사이에 조용한 수작이 시작되었 다.“영감, 이번 길이 책임이 중한데 적괴를 잡을 성산이 있소?”“아직 아무 성 산두 없소.”“적당의 모주 서림이란 자가귀순한 건 아시지?”“녜, 알지요.” “그자가 모주 노릇하던 놈이라 모책을 내는 것이 제법입니다.”“그놈이 영감 계 무슨 헌책을 합디까?”“내가 어제 그자를 불러서 적정을 여러 가지 물어보 는중에 그자가 적괴 잡을 계책을 말하는데 그 게책이 바이 맹랑치 안을 것 같아 서 영감에게 말씀하려구 하우.”하고 말한 뒤 김포장이 서럼이의 계책을 자세히 이야기한즉 이순경사는 이야기를 다 듣고도 왈가왈부 말이 없었다. “그자의 계 책이 영감 생각엔 어떻소?”“영감은 어떻게 생각하시구 그 계책이 맹랑치 않 다시는지나는 모르겠소. 우선 청석골을 칠 대 일면은 튀워놓구 삼면으루 친다니 병법의 허실을 조금이라두 아는 놈이 있으면 틔워놓는 방면을 더 방비할 것이 구, 그렇지 않으면 그놈들 도망하기에나 편할 것이니 되지않을 말이구 또 그놈 들의 처속을 잡아다가 가둬 두면 그놈들이 빼가러 온다니 무지막지한 도둑놈들 이 무슨 인정과 의리가 있어서 저의 몸이 위태한 때 처속을 생각하겠소? 그것두 역시 되지 않을 말이오.”“지난 구월에 그놈드이 무엄 막심하게 전옥을 타파할 계획까지한 일이 었었다니 처속을 빼가러 온단 말은 근리하지 않소?”“서림이 란 놈의 횡설수설 지껄인 초사를 어떻게 믿을 수가 있소. 나는 그걸 순전한 거 짓부리루 아우.”“내가 알아보니가 지난 구월 초닷샛날 꺽정이패 여러 놈이 장 수 죽인 것두 사실입디다. 나는 그걸 터무니없는 거짓말루는 알지 않소.”“그것 이 거짓말인 증거를 내가 말씀할게 들어 보시우. 전옥에 갇힌 죄수는 빼가기가 어렵구 형조에 매인비자는 빼가기가 쉬운데 어려운 일을 계획했다는 들이 어째 쉬운 일은 계획하지 못하우? 그게 거짓말이 환하지 않소?” “글쎄 그렇게 의심 하면 그럴듯두 하우.” “그럴듯두 하다니 포도대장 말씀으루는 좀 모호하신데. ” 하고 이순경사가 웃어서 “포도대장이 모호해서 도적이 심한지두 모르지.” 하고 김포장도 고소로 웃었다. 5 서림이의 위인이 미덥지 못한 것은 김포장이 이순경사보다 더 잘알지만 꺽정 이를 잡는데 유용한 인물로 김포장은 확신하는 까닭에 이순경사더러 데리고 가 서 잘 조종하여 써보라고 말하러 왔더니 이순경사가 소견이 부족하여 미덥지 못 한 것만 생각하고 유용한 것은 생각지 못하는 모양인데, 게다가 고집이 세어서 자기 소견을 좀처럼 고칠 리도 없으므로 김포장은 숫제 서림이 데리고 가란 말 을 입밖에도 내지 아니하려고 생각하다가 공사를 위하여 온 본의를 돌쳐 생각 하고 “서림이 같은 적당의 재정을 잘 아는 놈이 적당을 체포할 때 소용이 될 듯한데 영감 생각엔 어떻소?” 하고 데리고 가란 운만 떼어서 물으니 이순경사 입에서 “쓰기에 달렸지만 쓸데가 있다뿐이오.” 하는 대답이 나왔다. “그럼 서 림이를 맡아가지구 계시기가 주체궂어서 내게다가 전장하실 생각이시오그려.” 이순경사는 실없은 말을 하며 웃는데 김포장은 정색하고 “나는 포도 공사루 알 구 의논하는데 영감 그게 무슨 말이오.” 하고 책망하니 이순경사가 잠시 무료 하다가 곧 얼굴빛을 고치고 “내가 가봐서 서림이를 쓸데가 있으면 곧 영감께루 기별할 테니 그때 보내주시우.” 하고 말하였다. 김포장이 상의하러 온 일은 이 로 끝을 막고 작별 인사나 하고 일어서려고 “영감 내일 어느때쯤 떠나시겠소? ” 하고 물었다. “우리는 오늘 곧 떠나두 좋겠는데 병조에서 군사 겨우 오십 명 주는 것을 오늘 해전에나 뽑아주겠다구 해서 못 떠났으니까 내일은 일찍 떠 나게 되겠지요.” “내일 일찍 떠나시면 모레는 금교역을 들어가시겠소.” “먼 저 해주 가서 황해감사하구 대개 방침을 의논해 놓구 그러구 각군을 순력 할 작 정이오.” “먼저 금교역에 가 앉아서 적괴가 청석골 소굴에 있구 없는 것부터 기찰을 시키는 게 득책이 아니겠소?” “그놈이 타도루 내빼지 않구 황해도 경 내에만 있으면 설마하니 못 잡겠소.. 소굴에 들어 엎드렸으면 들어가서 잡을 테 구 다른 곳에 가 파묻혔으면 그곳을 쫓아가서 잡을 테니까 감사를 만나보구 수 탐하기 시작해두 늦지 않을 것이오.” “영감이 어련히 잘 생각하셨겠소. 어떻게 하든지 정선전이 끼쳐놓은 국가의 수치를 영감이 쾌히 설치하구 오시우.” “해 서 적환을 평정해서 특별히 위임하신 상의를 만분 일이라두 보답할까 생각하우. ” “양도 순경사가 일시에 동서루 떠나는데 누구는 나가 보구 누구는 안 나가 볼 수 없어 전송하러 나가지 않을 테니까 오늘 이렇게 작별하겠소.” “영감, 약 주 한잔 잡수시려우?” “아니, 나는 곧 이렁나야겟소.” “왜 어느새 가시려구 그러시우?” “가다가 김순경사를 좀 보구 가겠소.” “좀더 기시다가 김순경사 가 오거든 아주 보구 가시구려.” “떠날 때 전송두 못할 텐데 집에까지 안 가 볼 수야 있소.” 김포장은 이순경사 집에서 김순경사에게로 오고 김순경사는 자 기 집에서 이순경사에게로 가다가 서로 만나서 둘이 다같이 탔던 말 위에서 내 려 노상에 서서 수어 수작하고 이내 작별 인사까지 주고받고 서로 헤어졌다. 김 포장이 바로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은 다시 말할 것 없고 김순경사가 이순경사 에게 왔을 때 좌정도 채 하기 전에 이순경사가 “좌포장이 영감께루 간다구 지 금 막 갔는데 길에서 교위가 된 모양이구려.” 하고 말하여 “지금 오다가 노상 에서 잠깐 만났소.” 하고 김순경사는 대답하였다. “포도 공사루 상의할 일이 있다구 다른 손들까지 쫓아놓구 급히 말하는 것은 꺽정이의 모주 노릇하던 서림 이란 놈을 나더러 데리구 가란 말입디다.” “그래 그놈을 데리구 가기루 했 소?” “데리구 가고 싶은 생각이 적어서 고만두었소.” “왜 데리구 가고 싶지 않소?” “그놈이 말할 수 없는 반복소인이라는데 그놈을 데리구 갔다가 도둑놈 들의 내응이나 해주면 긁어부스럼을 만드는 격 아니오?” 김순경사는 이순경사 와 소견이 달라서 적당의 내정을 샅샅이 잘아는 서림이를 데리고 가는 것이 좋 을 줄로 생각이 들었으나 김포장이 하후하박으로 이순경사에게만 말을 하고 자 기에게는 말을 안한 데 심사가 틀려서 서림이 안 데리고 가는 것이 잘한 일이라 고 이순경사의 소견을 찬동하여 말하였다. 이러한 곡절이 잇어서 서림이가 순 경사들 나갈 때 수행하지 못하고 좌포장 수하에 그대로 있게 되었었다. 이것이 청석골 꺽정이패에게는 한 가지 불행중 다행이었다. 6 꺽정이와 두령 여섯과 모두 합하여 일곱 사람이 마산리서 관군 5백여 명을 대항하고 무사히들 청석골 로 돌아온 뒤 승전을 축하하기 위하여 대연을 배설학자고 여러 두령이 공론들 하는 것을 꺽정이가 처음에는 “승전이 무슨 놈의 승전이냐. 간신히 목숨들 도 망한 것을 승전이라구 잔칠 하잔 말이냐. 창피스럽다. 그 따위 소리 하지들 마 라.” 하고 꾸지람으로 내리눌렀었다. 다른 두령들은 감히 다시 개구를 못하였으 나 그중의 오가는 자기가 먼저 큰잔치를 하자고 발론을 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두 령들이 대장의 허락을 받으라고 내세우는 까닭에 꺽정이를 따로 와서 보고 “대 장께선 마산리 쌈이 승전이 아니라구 잔치를 말리신다지요? 홑일굽 분이 배루 치면 칠칠이 사십구 칠십 배가 훨씬 넘는 대적과 접전해서 그 기세를 꺾구 용맹 이 무쌍하다는 오위부장을 한칼에 벤 것이 어째 승전이 아닐까요. 우리는 훌륭 한 승전으루 알지만 대장 말씀을 좇자서 승전이 아니라구 하구요, 그러구라두 우리 도중의 우두머리 일굽 부이 사지에 들어갔다가 무사히들 나오신 것이 도중 의 막대한 경사가 아닌가요. 이런 경사에 왜 잔치를 못하게 하실까요. 대장께서 정히 도중 잔치를 못하게 하신다면 내가 좀 주제넘지만 수양딸에게 물려주려구 아껴둔 사천으루 일굽분을 위해서 한번 위로연을 떡벌어지게 차릴 테요. 이건 허락하시겠지요?” 하고 수다를 떨었다. 오가가 일자 상처한 후로 수다도 잘 떨 지 않고 너스레도 잘 놓지 않고 혼감과 수선도 잘 부리지 아니하여 걸의 딴사람 같이 되었었는데 이날 수다가 의외라 “나는 오두령 수다가 다 없어진 줄 알았 더니 그래두 좀 남았구려.” 하고 꺽정이가 웃었다. “오십여 년 동안 떨 대루 다 떨구 조금 남은 수다는 속에 간직해 두었다가 저 세상으루 가지구 가려구 생 각했더니 저 세상에 가선 그나마 떨지 못할 것 같아서 이 세상에서 마저 떨어버 리구 갈 작정이오.” “저 세상에 갈 날을 언제루 받아놨소?” “갈 날을 내손 으루 받지 않아서 똑똑힌 모르지만 그다지 멀진 않겠지요.” “저 세상에 가면 마누라님을 다시 만나볼 줄루 아우?” “마누라쟁이를 꼭 다시 만나볼 줄만 알 면이야 지금 당장이라두 이 세상을 하직하구 가지요. 가다뿐이오.” “죽은 마누 라 생각 고만하구 젊은 첩이나 하나 얻을 생각하우. 내가 얻어주리까? 소원만 말하우. 양첩이 좋소? 기생첩이 좋소?” “그런 심려는 두었다 하시구 도중 잔 치나 어른 허락해 주시우.” “도망질해 와서 잔치했다면 청문이 사나워서 말라 구 했더니 오두령 청으루 허락하겠소.” 꺽정이가 마침내 대연을 배설하라고 명 령을 내리어서 두령으로부터 졸개까지 다들 좋아하였다. 돼지 잡고 소 잡고 떡 만들고 술 걸러서 도중 상하가 사흘 동안 연일 진탕 먹고 즐겁게 놀았다. 잔치 끝날은 한통속으로 지내는 근처 사람들까지 청하여 먹이었는데 그때 송도 김천 만이가 들어와서 경군이 청석골을 치러 내려온다는 주워 들은 소문을 전하여 꺽 정이가 진적한 조정 소식을 알려고 잔치 끝난 뒤 곧 황천왕동이를 서우로 올려 보냈다. 서울의 연락 맺고 지내던 곳이 거진 다 끊이었으나 남대문 밖에서 객주 하던 치선이 김선달은 서림이와 동치로 객주를 떠엎고 아직 윤영부사댁 도차지 손동지의 작은집에서 곁방살이를 하는데 곁방살이하는 중이라도 서로 연신을 끊 지 말자고 그 처남 된다는 사람을 전위해 보내서 기별한 일이 있는 까닭에 황천 왕동이가 서울 가서 조정 소식을 물어보려고 장대고 가는 사람은 곧 김치선이었 다. 황천왕동이가 서울 오는 길에 혜음령 고갯길을 돋우밟아서 마루턱까지 거 의 다 올라왔을 때 보행인 하나가 마루턱에 서서 내려다 보며 “청석골서 오십 니까?” 하고 알은 체하여 황천왕동이가 혜음령패의 망꾼이 보행인으로 가리고 나섰거니 짐작하고 선뜻 “그래.” 대답한 뒤 그 사람 앞에 올라와서 이목을 살 펴보니 당초에 낮모를 사람이라 황천왕동이가 그제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댁이 누구요?” 하고 곱지 않은 말씨로 물었다. 낯모르는 사람이 알은 체하는데 황천왕동이도 속이 좀 떨떠름하였지만 그 사 람은 섣불리 말 한마디 붙였다가 경치는 줄 알고 겁이 났던지 슬금슬금 뒤로 물 러섰다. “댁이 대체 누구요?” 황천왕동이가 재차 물어도 그 사람은 얼른 누구 라고 대지 않고 서슴는 말로 “서울 김선달 아시지요?” 하고 물었다. 김선달이 란 치선이 맣인 듯 황천왕동이는 속으로 짐작하면서도 짐짓 “서울 허구많은 김 선달에 어떤 김선달 말이오?” 하고 채치니 그 사람이 그제는 “남대문 밖에서 객주하던 치선이 김선달 말입니다.” 하고 똑똑히 명토를 박아서 말하였다. “김 선달 알구 모르는 건 왜 묻소?” “녜, 그이가 내 매형입니다.” “매형이라니? ” “누님의 남편이에요.” “녜, 그렇소.” 황천왕동이의 말소리가 비로소 부드 러워졌다. “내가 칠팔 일 전에 한번 갔었지요. 그때 마산리들 가시구 안 기시든 구먼요.” “다녀가셨단 말은 들었소. 그런데 전에 김선달 객주에서 나를 봤습디 까? 나는 본 생각이 안 나는데.” “전에 뵈인 일은 없지만 어림에 그런 듯해서 여쭤봤지요.” “어림잡는 재주가 용하구려.” “축지법 아신단 선성을 높이 들 었는데 지금 고갯길을 올라오는 걸음이 여느 사람 나려가는 걸음보다 더 빠르신 걸 보구 어림이 났습니다.” “그렇소. 그래 지금 어딜 가시는 길이오?” “매형 의 글월을 가지구 또 청석골을 가는 길입니다.” “나는 당신의 매형님을 만나 러 서울로 가는 길이오.” “지금 서울 가셔두 매형을 만나보시기 어려울걸요.” “어째서 어렵소?” “그 동안 서울서 야단이 났습니다.” “무슨 야단이오?” “청석골과 연락이 있을 듯한 사람들을 형조에서 잡느라구 지금 한참 야단입니 다.” “잡으면 형조보다두 포청에서 잡겠지?” “아니오. 형조에서 잡습니다. 들리는 말은 상감 처분이 형조루 나렸답디다. 우리 매형두 요전에 포청에서 잡 으려구 하던 것은 그동안 손동지의 힘으루 그럭저럭 어떻게 묵주머니가 되었는 데 새판으루 형조에서 이름을 지적하구 잡으려구 해서 그래 몸을 피했는걸요.” “당신 매형님을 만나볼 수 없으면 나는 서울 가두 소용없소. 당신에게 서울 소 문이나 좀더 들읍시다. 경군이 청석골을 치러 나려온단 소문이 있으니 그런 소 문이 서울두 있습디까?” “순경사들이 오늘 떠난다더니 오늘은 어째서 못 떠나 구 내일 떠난답디다.” “순경사가 무어요?” “그 동안 황해도, 강원도 순경사 가 났습니다.” “순경사가 경군을 거느리구 나려올 사람이오?” “녜.” “내괴 이 고개 주인들이 눈에 뜨이지 않더라니, 요새 풍색이 좋지 않아서 꿈쩍들 못하 구 들어앉았는 모양이로군.” “황해도, 강원도에는 어디든지 다 그럴걸요.” “ 나는 한 시각이라두 빨리 도루 가야겠소. 당신이 맡아가지구 오는 편지를 내가 가지구 먼저 갈 테니 당신은 뒤에 찬찬히 오시우.” “그럼 나는 청석골까지 가 지 않구 서울루 도루 가랍니다.” “편지 전하는 것 외에 다른 부탁은 받은 것 없소?” “녜, 다른 부탁은 받은 것 업습니다.” “그렇거든 편지만 나를 주구 돌아가시구려.” 황천왕동이가 혜음령에서 우연히 김치선의 처남을 만나서 청석 골로 전하러 오는 편지를 중간에서 받아가지고 그날 해 진 뒤에 돌아왔다. 여러 두령이 저녁밥들을 먹고 꺽정이 사랑에 모여 앉았다가 황천왕동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웬일이오?” “웬일인가?” “웬일이냐?” 모두 웬일이냐고 물었 다. 황천왕동아가 꺽정이를 보고 중로에서 돌아온 곡절을 말하고 품에 지니고 온 편지를 드리니 꺽정이가 받아서 옆에 앉은 이봉학이를 주고 읽으라고 하였 다. 8 “서울 소식은 달리도 들으셨으려니와 가는 아이의 구전으로 자세히 들으실 듯 모두 줄이오며.” 이봉학이가 편지 비두에 적힌 사연을 읽은 뒤 황천왕동이 를 바라보고 “서울 소식 이야기할 사람을 서울루 돌려보내구 왔네그려.” 하고 한마디 말하자 다른 두령 오륙 인이 그 뒤를 이어서 “편지 가지구 오는 놈을 여기까지 왔다 가랬으면 낭패 없을 겐데 중간에서 보낸 게 잘못일세.” “중간 에서 보낼라면 서울 이야기나 다 듣구 보낼 게지.” 황천왕동이를 책망하는 사 람도 있고 “김선달이 처남인지 첩처남인지 보낼 떼 서울 이야기를 가서 자세히 하라구 이러 보냈을 텐테 그 자식이 와서 이야기할 생각 않구 그대루 간 겔세그 려.” “고놈의 자식이 다리품 팔기가 싫어서 가라니까 웬 떡이냐 하구 간 모양 이오.” 김치선이의 처남을 욕하는 사람도 있고 또 “치선이두 치선이지, 지금 우리가 서울 소식을 어디서 들으리라구 ‘달리두 들으셨으려니와’가 다 무어 야.” “우리가 달리 들을 데 없는 걸 그 사람이야 알 까닭 있소.” “그러구 편 지를 안하면 모를까 이왕 할 바엔 대강은 편지에 적구 자세한 건 편지 가지구 가는 사람에게 들으라구 해야지 그러 덮어놓구 줄인단 말인가. 그렇게 줄일라거 든 숫제 편지를 하지 말구 사람만 보냈으면 좋을 것 아닌가.” 김치선이를 탓하 는 사람도 있었다. 여럿이 게가끔 지껄이는 통에 이봉학이가 편지를 읽지는 못 하고 혼자 보기만 하여 꺽정이가 여러 두령더러 지껄이지들 말라고 소리지르고 이봉학이를 돌아보며 “그 아래 적힌 사연이 다 무언가 어서 읽어보게.” 하고 편지 읽기를 재촉하였다. “좌포청 사건이 생긴 뒤 제가 손동지에게 통심정을 다하고 그의 힘을 보는 중이온데 어젯밤 그의 소실이 집에서 약주를 먹는 중에 동지가 저를 보고 너의 상전댁이 이번에는 뿌리빠지리라 웃음의 말씀을 하옵기 저 역시 웃으며 그것이 무슨 말씀인가 묻사온즉 좌포장댁 청직 한 사람이 무슨 청할 일이 있어 석후에 찾아와서 담화하던 끝에 서림이 이야기 났었는데 그 사 람의 말이 저의 주인 영감께서 서림의 지혜 많은 것을 신통히 보시고 특별 고호 하시므로 이번 순경사 나가서 쓸 계책까지 서림을 데리고 의논하시고 또 서림을 황해도 순경사에게 딸려보내실 의향이 계시다 하더라, 서림이 황해도 순경사를 따라가면 더 말할 것 없고 설사 따라가지 않더라도 아무개의 모사가 아무개 잡 을 계책을 내어 바쳤으니 그 계책이 범연하랴. 아무개가 이번에는 마산리에서와 같이 도망도 못하고 잡힐 터이니 두고 보라. 손동지의 말이 이러하더이다. 저의 생각에도,” “서림이란 놈이 제 요공하려구 우리를 잡으러 나온다. 그놈 참 죽 일 놈이다.” 하고 꺽정이가 별안간 볼멘소리를 하는 바람에 이봉학이는 편지 읽던 것을 그치고 “그놈이 우리를 잡으려구 하거나 안하거나 우리가 그놈을 잡 아 없애야지 후환이 없겠소.” 하고 말하였다. 곽오주가 이봉학이의 말끝을 달아 서 “잡아 없애야지, 그놈의 불여우을 세상에 남겨두면 사람의 오장 깡그리 다 빼먹구 말 게요.” 하고 말을 그만 그쳤으면 좋을 것을 짓궂이 “대장 형님, 불 여우한테 속은 게 인제 분하지요.” 하고 꺽정이를 오금박다가 “아가릴 찢어놓 기 전에 가만히 닥치구 있거라.” 꺽정이의 호령을 듣고 목을 음충맞게 움츠러 뜨리며 픽 웃었다. 곽오주의 웃는 꼴이 꺽정이 눈에 거슬려서 “꼴 보기 싫다. 여기 앉았지 말구 나가거라.” “밖에 동댕이치기 전에 냉큼 못 일어서겠느냐.” 하고 연거푸 천둥같이 호령하는데도 곽오주는 꿈질거리고 있는 것을 박유복이가 쫓아가서 등을 밀어서 밖으로 내쫓았다. 9 꺽정이는 서림이가 조정에 귀순한 줄을 안 뒤에도 서림이에 대하여 아직 용서 성이 많았었다. 서림이가 마산리 모임을 고발한 것은 용서하기 어려운 죄나 약 한 위인이 혹독한 단련을 받고 본의 아닌 소리를 지껄였거니, 서림이가 처자를 그대로 두지 않고 꾀바르게 빼간 것은 괘씸한 짓이나 저의 죄를 처자에게 연좌 쓸까 겁내기도 용혹무괴한 일이거니, 꺽정이가 이렇게 너그럽게 생각한 것은 서 림이를 자기의 제갈량으로 알아서 아니 들은 말이 없고 아니 쓴 계교가 없도록 종시 신임하였으므로 서림이 제 비록 조정에 귀순하였을지라도 자기의 은의는 잊지 아니하려니 믿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자기 잡을 계책을 내고 자기 잡으려 는 관군을 따라온다니, 이것은 분명 자기를 잡아서 저의 공명을 삼자는 것이라 꺽정이가 통분하기 짝이 없어하는 판에 눈치코치 모르는 곽오주가 분을 더 돋워 서 분이 꼭뒤까지 났었다. 아랫입술로 윗입술을 더받쳐서 입술 위아래 수염이 꺼칠하게 일어나고 숨쉬는 소리까지 씨근씨근하는 것 같았다. 다른 두령은 다들 입을 함봉하고 앉았는데 오가가 출반좌하고 좌중을 돌아보며 “오주는 서림이더 러 사람 아니구 불여우라구 하지만 오주 저두 사람은 아니야. 미련은 곰새끼구 우악은 억대우구, 오주가 우멍한 눈을 끔벅끔벅하는 걸 보면 나는 언제든지 탑 고개에서 뜸베질당하던 생각이 나네. 사람 치구 그 따위 무지하구 미욱하구 용 통하구 데퉁궂구 열퉁적구 별미없구 변모없는 위인을 우리 사위 양반은 무엇에 반했는지 처음부터 이날 이때까지 꼭 데리구 들어온 자식 두남두듯 속살루 은근 히 두남두느라구 애를 부둥부둥 쓸 때가 많으니 그게 아마 전생에 오주의 빚을 지구 이생에 와서 갚는 모양이야.” 하고 너덕거리었다. 오가의 너덕거리는 말도 우스운데다가 이봉학이가 오가더러 “오주가 웬 직함이 그렇게 많소.” 하고 실 없은 말을 정당한 말 묻듯 하는 것이 우스워서 여러 두령들이 혹은 소리내고 혹 은 소리없이 웃는 중에 꺽정이도 숨을 한번 크게 쉬고 나서 손으로 수염을 쓰다 듬기 시작하였다. 화가 나거나 분이 날 때는 수염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 꺽정 이의 버릇이라 수염을 쓰다듬는 것이 곧 분이 가라앉은 표적이었다. 황천왕동이는 아직 저녁밥을 먹지 못한 까닭에 꺽정이를 보고 “가서 밥 좀 먹고 오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꺽정이가 고개를 끄덕이었다. 황천왕동이가 밖 으로 나간 뒤 얼마 아니 있다가 곽오주가 들어와서 두 팔 짚고 엉거주춤하고 엎 드려서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고 꺽정이를 바라보며 “대장 형님, 날 들어오라구 부르셨소?” 하고 물었다. “나는 부른 일 없다.” “모두 여기서 여러 이야기들 하는데 나 혼자 등 너머루 넘어갈라니까 걸음이 안 걸립디다. 그래 치운 밖에서 몸이 꽁꽁 얼었소. 천왕동이 형님이 나와서 하는 소리가, 대장 형님이 굵은 지겟 작대기 같은 매를 해가지구 들어오라신다구 합디다. 고만 들어오라구 부르시는 데 거짓말을 보태서 날 놀리는 줄 알았더니 백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구먼 요.” 곽오주의 주워 지껄이는 말을 꺽정이는 듣는 체 만 체하는데 오가가 너털웃음 을 웃으며 “여게 오주, 자네가 지레짐작한 것만두 매는 좀 맞아야겠네. 어서 가 서 작대기 한 개 가지구 오게. 내가 대장 몸받아서 때려줌세.” 하고 말하니 “ 내 대신 작대기 가지구 와서 맞아보구려.” 하고 곽오주가 대꾸하였다. “저것 봐. 둘러쒸울 줄까지 아네. 자네 재주가 점점 느네그려.” “그 동안 좀 조신하 더니만 요새 왜 또 희룽희룽하우.” 곽오주의 말을 오두령이 받기 전에 꺽정이 가 곽오주를 보고 “지껄이는 소리 듣기 싫다. 네 자리에 가서 아가리 가만히 닥치구 앉았거라.”하고 소리질러서 곽오주는 얼른 녜 대답하고 먼저 앉았던 자 리에 가서 다시 앉았다. 곽오주가 그럭저럭 꺽정이의 용서를 받은 뒤 오가가 이봉학이를 보고 “곽두 령의 훼방이 인제 끝이 났으니 치선이의 편지두 마저 끝을 내시는 게 어떻소. 편지 끝에 또 무슨 말이 있나 들어봅시다.” 하고 말하니 이봉학이가 “끝에는 별말 없습디다.” 하고 대답하며 옆에 접어놓았던 편지를 다시 펼쳐 들고 먼저 읽다 그친 구절에서부터 내리읽었다. “저의 생각에도 서림이와 같은 도중 내정 과 산중 지리를 잘 아는 자가 순경사를 도우면 큰일이올 듯 염려 적지 않사외 다. 조변석개하는 조정 일이 오래 갈 리 없사오므로 순경사는 불과 몇 달 안에 소환되올 듯 그 동안 어디로든지 피신들 하심이 득책아니오리까. 염려되는 맘에 말이 넘난 데까지 미쳤사외다. 제가 처자들 몸붙여 있는 방에 와보온즉 마침 처 남아이 와서 있삽기 한번 걸음 더하라 이르옵고 등하에 수자 적사오며 내내 첨 위의 천금귀체를 만만 보중하심을 축수 바라나이다.” “편지가 어느 날 난 게 요. 연월일두 좀 보시우.” 하는 오가의 말에 “경신 납월 초삼일야라구 했으니 까 바루 어젯밤에 쓴 것이오.” 하고 이봉학이는 대답하였다. 꺽정이가 이봉학이 의 접어 주는 편지를 받아서 머리맡 손궤 위에 놓아두고 여러 두령들을 둘러보 며 “김치선이는 지금 이리저리 피신해 다닌단 사람이 우리게 기별해 줄 걸 잊 지 않았으니 고마운 사람이다. 아니 김치선이는 의리가 있는 사람이다.” 하고 김치선이를 의리 있다고 칭찬하는 말에 서림이는 의리 없는 놈이라고 타매하는 뜻이 나타났다. 이봉학이가 꺽정이의 말뜻을 받아서 “서림이 같은 의리 없는 놈이 천하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니 다른 두령들이 그 뒤에 연달아 서 서림이를 죽일 놈 살릴 놈 하고 제각기 한두 마치씩 말하였다. 이때까지 서 림이 말을 몹시 안하던 오가가 천참만륙하여 마땅한 놈이라고 큰소리로 떠들 뿐 아니라 여럿이 떠들 때 흔히 잠자코 듣기만 하는 박유복이와 서림이 위인을 잘 알지 못하는 이춘동이까지 다 말참례를 한몫 들었다. 그런데 말 한마디라도 지 독하게 모지락스럽게 해붙일 듯한 배돌석이가 평일의 박유복이 대번을 보는지 잠자코 듣기만 하더니 여럿의 떠드는 것이 한거품 꺼진 뒤에 비로소 꺽정이를 보고 “서림이놈을 속히 잡아 죽일 도릴 생각해야지 죽이느니 살리느니 헛소리 만 해서 무어 합니까. 우리가 백날 입으루 죽인다구 서림이놈이 죽습니까. 그러 구 여기 있는 서림이놈의 자식은 지금 당장이라두 죽여버립시다.”하고 말하는 것을 꺽정이는 듣고 한참 있다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내 말이 어디가 그릅 니까?” “서림이 자식은 아직 볼모루 두구 그놈의 애두 태워 주려니와 이 다음 그놈을 잡는 날 그놈 보는 데서 죽일 테다.” 곽오주가 별안간 손뼉을 딱 치고 “대장 형님 소견이 내 비위에 꼭 맞소.”하고 소리를 지르니 박유복이가 눈을 흘기었다. 여러 두령중의 한온이는 임진대적을 하기는 고사하고 구경조차 한 일 이 없는 사람이라 위험한 일을 겪어보고 싶은 맘도 바이 없진 아니하나 안전한 것을 좋게 여기는 맘이 더하여서 김치선이 충고대로 피신들 하기를 바라는데 피 신하자는 의론이 나지 않는 게 답답하여 “김치선이의 말이 유리한 말인 듯한데 어떻게 생가하십니까?” 하고 꺽정이의 의향을 물으니 꺽정이는 마치 시침 떼듯 “무어가?” 하고 되물었다. “피신을 하란 말이 유리한 말이 아닐까요?” “피 신할라니 할 데가 있어야지.” “광복산은 여기와 어떤가요?” “강원도에두 순 경사가 났다니까 광복 있는 아이들을 다 이리 오라구 해야겠다.” “광복은 그 렇겠구먼요. 평안도에두 피난처를 여러 군데 만들어 두셨다지요?” “우리 도중 상하 다솔이 지금 평안도를 갈라다간 길에서 낭패보게.” “그럼 순경사가 나오 면 어떻게 하실랍니까?” “어떻게 하긴 무얼 어떻게. 접전하는 게지.” “접전 하면 승산이 있을까요?” “승부는 접전을 해봐야 알지 그걸 어떻게 미리 알 수 있나.” 꺽정이는 한온이를 미경사 소년으로 알아서 묻는 말을 일일이 대답하여 주는데, 그 대답이 다 수월스러웠다. 한온이와 꺽정이의 문답이 끝난 뒤 박유복이가 꺽정이 나중 말의 말끝을 달아 서 “접전해서 이길 건 미리 알 수 없지만 이기두룩 준비는 미리 해야 하지 않 습니까?” 하고 말하는데 박유복이의 의사는 그럴 리가 만무하지만 언뜻 듣기에 흡사 꺽정이의 말을 책잡는 것 같아서 꺽정이는 미간을 잠깐 찌푸렸다가 다시 펴고 “준빌 누가 안한달세 말이지.” 하고 박유복이의 말을 대답한 뒤 곧 이어 서 “준비할 것이나 잘 생각해서 이야기들 해봐라.” 하고 여러 두령들을 둘러 보았다. 여러 두령이 다 각각 생각나는 대로 말한 것을 대강 추려보면, 군량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고 군기를 조수하여 만일 파손된 것이 있거든 속히 수보하고 탑고개 길목 지키는 것과 두령들 매일 행순하는 것을 중지하고 사산 파수꾼 수효를 곱절로 늘려서 안팎 장등에 겹파수를 보이고 광복산 졸개도 소환 하려니와 탑고개, 양짓말 등지에 나가 사는 두목과 졸개들도 거두어들이고 그리 하고 당보수를 멀리 내보내고 기외에 이목을 널리 늘어놓아서 관군의 동정을 일 일이 알아들이자는 말들이었다. 꺽정이가 여러 두령들의 말하는 것을 다 듣고 나서 이봉학이를 돌아보며 “모든 준비를 하나가 맡아 시켜야 일이 구김이 없을 테니 자네 맡아 시키게.” 하고 말을 이르니 이봉학이가 녜 대답한 뒤 “지금 말들 한 여러 가지 준비두 다 긴요하지만 제 생각엔 서울 소식을 더 좀 자세히 알아보는 게 제일 긴요할 것 같습니다. 순경사가 어떤 위인인지 경군이 얼마나 내려오는지 서림이가 과연 순경사를 따라오는지 안 오는지 다 알구 앉았으면 좋 겠구, 또 좌포장이 서림이 데리구 계책을 의논했다구 손동지더러 이야기한 좌포 장집 청지기는 그 계책이 어떤 것인지까지 혹 알는지 모르니 그걸 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만일 그 계책을 대강만이라두 우리가 미리 알면 방비하는 데 힘이 여간 덜리지 않을 겝니다.” 하고 말하였다. “글쎄, 알아보는 게 좋지만 치선이 가 숨어 다녀서 만나보기가 어렵다니 어디루 알아보나?” “다른 사람은 몰라두 한두령이 가면 설마 그것쯤 못 알아오겠습니까?” 꺽정이가 고개를 돌려서 한온 이를 바라보며 “너 서울 가서 알아올 수 있겠니?” 하고 묻는 말끝에 “다른 건 알 수 있겠지만 좌포장이 서가 데리구 이야기한 걸 알아낼 수 있을까?” 하 고 미심쩍게 여기는 말을 더 붙이었다.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알아낼 길을 찾 으면 혹시 있을는지 모르지요.” “그럼 서울 한번 갔다 오너라.” “순경사가 금명간 떠난다구 하더라는데 서울 간 동안에 여길 와서 에워싸서 들어올 길이 끊어지면 어떻게 하나요?” “아무리 철통같이 에워싸기루 우리 드나들 길이야 없으랴. 그런 염려 마라.” “그럼 내일 곧 떠날까요?” “그래 봐라.” 꺽정이 는 대답을 한마디 말로 그치고 이봉학이가 그 뒤를 받아서 “지금 일이 벌써 급 했네. 내일 첫새벽 떠나게. 자네 서울 다녀오는 것이 하루 이르면 하루 이가 있 을 테구 한 시각 빠르면 한 시각 이가 있을 테니 한 시각이라두 빨리 가구 빨리 오두룩 하게.” 하고 여러 말을 하였다. “요새 서울이 살얼음판이라는데 오래 있기두 재미 없으니까 알아볼 것 대강 알아보구 곧 오지요.” “서림이 일은 아 무쭈룩 자세히 알아가지구 오게.” “알아보는 데 날짜가 많이 걸리더라두 자세 히 알아가지구 올까요?” “자네가 서울 가면 빨리 알구 자세히 알 길이 있을 겔세.” “글쎄요.” “자네 가는데 무얼 타구 가려나?” “교군 타구 가겠세요. ” “복색은 어떻게 할라나?” “복색을 어떻게 하다니요?” “상복으루 갈라느 냐, 화복하구 갈라느냐 묻는 말일세.” “상제 복색이 좋지요.” “그럼 교군은 소교를 꾸미래야겠구 교군꾼은 교군 잘 하구 발 잘 맞는 아이들루 두 패를 뽑으 라구 하겠네. 그러구 교구꾼 외에 다른 하인은 데리구 가지 말게. 그래야 길이 빠르네.” 이때 윗간 방문이 열리며 밥 먹으로 갔던 황천왕동이가 들어왔다. 12 꺽정이가 황천왕동이 들어와 앉는 것을 보더니 눈살이 당장 곱지 않아지며 “ 밥 먹구 곧 오지 않구 무어 했느냐? 밥 먹으러 간 제가 언제냐. ” 하고 꾸짖는 데 황천왕동이는 대답을 못하고 머리 뒤만 긁적긁적하였다. 오가가 황천왕동이 를 바라보고 웃으면서 “대장 말씀에 왜 대답을 못하나. 밥 먹구 나서 어린 놈 재롱 보느라구 좀 늦었습니다구 대답하지. ” 하고 농담을 걸어서 황천왕동이도 역시 농으로 “귀뚜리 영신이요, 어찌 그리 용하게 아우. ” 하고 대거리하였다. 꾸지람을 듣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농지거리하는 것이 꺽정이 비위에 거슬렸다. “밥 먹구 무어 했느냐? 자빠져 자다가 왔느냐? ” “잠깐 누웠다 일어난다는 것이 잠이 깜박 들었었세요. ” “무엇이 어째? 우리가 지금 사생 결단할 일을 앞에 놓구 의론하는데 너는 혼자 가서 자빠져 잤단 말이냐. ” 꺽정이는 언성을 높이고 “어젯밤에 어린 것이 자지 않구 보채서 잠을 못 자구 오늘 길을 걸어서 피곤한데다가 배고픈 끝에 밥 한 그릇을 먹었더니 온몸이 나른해서 갱길 할 수 가 없습디다. 그래 잠깐 누웠었습니다. ” 황천왕동이는 발명을 부산히 하였다. 그러나 꺽정이가 황천왕동이의 발명을 세워 주지 않고 “지금 네 모가지에 칼이 들어간다면 식곤증 난다구 누워 있지 못하겠지. 도중 일을 네 일루 안 알기에 맘을 태평 먹는 것 아니냐. ” 하고 인정 없이 꾸짖었다. 꺽정이의 꾸지람이 끝 난 뒤 한온이가 꺽정이를 보고 “제게 더 부탁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 하고 물으니 꺽정이는 더 부탁할 말이 있거든 말하란 눈치로 이봉학이를 돌아보았다. “다른 거 없네. 그저 서림이 뒤만 잘 캐어보구 오게. ” 하고 이봉학이 말한 뒤 에 박유복이가 “서림이 타구 간 얼룩말이 어떻게 되었나 치선이 보거든 한번 물어보게. 요전 왔던 치선이 처남더러 물으니까 모르겠다구 하데. ” 하고 말하 였다. 오가가 박유복이를 돌아보며 “자네는 그 말이 그렇게두 아까운가? ” 하 고 핀잔 주듯 말하여 박유복이는 남의 속 모르는 말 하지 말라고 고개를 가로 흔들었는데, 이것을 오가는 그 말이 아깝지 않단 뜻으로 빗알았다. “그럼 왜 말 이야길 지재지삼 하나? ”“대장 형님이 그 말을 얻어가지구 오셨을 때 하두 좋 아하시던 게라 도루 찾을 수 있으면 찾을라구 그러우. ” “얼룩이 대신 황부루 가 생겨서 대장 타실 말이 있는데 무얼 그러나. ” “두 마리 말구 이십 마리 이백 마리라두 좋지. 그렇지만 얼룩이는 벌써 속공돼서 지금쯤 사복에 들어가 매었을지두 모르는 걸 물어보면 무어 하나. ” “그래두 혹시를 몰라서 물어보 란 말이지요. ” 박유복이의 맘이 충직한 것을 꺽정이는 새삼스럽게 느껴서 박 유복이더러 “네 맘은 무던한 맘이나 말은 오두령 말이 옳다. 얼룩이는 다시 찾 기 틀린 걸 물어보면 무어 하느냐. ” 말하고 나서 곧 “여보 오두령, 서가놈 맘 이 유복이 맘의 반의반만 해두 훌륭한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겠지. ” 말하고 서 글프게 웃었다. 한온이가 다시 꺽정이를 보고 “제게 다른 말씀 하실 것 없으면 저는 일찍 가서 자겠습니다. ” 하고 말하니 꺽정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라. ” 하고 허락하였다. “내일 식전 기침하시기 전에 떠나기 쉬우니까 지금 아 주 하직하구 가겠습니다. ” “첫닭울이에 떠나더라두 우리가 일어나서 떠나는 걸 볼 테니 하직이구 작별이구 다 고만두구 그대루 가거라. ” 한온이가 꺽정이 사랑에서 나와서 작은 첩의 집으로 자러 오는 길에 큰집에 들러서 서울 가는 것 을 말하고 큰집 앞 초막의 개미치를 불러내서 데리고 왔다. 권개미치는 서림이 의 편지를 맡아가지고 왔을 때 청석골 와서 살 허락을 얻고 처자를 끌고 와서 다시 한온이 집 그늘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한온이가 방에 들어앉아서 밖에 세운 개미치를 내다보며 “내가 내일 서울을 갈 텐데 서울 가서 뉘 집으루 들어 가는 게 좋을까? ” 하고 물었다. “글쎄올시다. ” “덕신이 집이 어떨까? ” “덕신이 부모는 댁 음덕을 잊지 못하겠습지요만 덕신이놈이 믿지 못할 놈입니 다. ” “문성이는? ” “문성이는 말씀두 맙시오. 그놈이 최가의 집에 댁 대령 하는 놈입니다. ” “집이 협착해서 가서 있긴 좀 비편하지만 만손이게루 가는 수밖에 없군. ” “부모 자식 다 미덥기가 만손이 집이 제일입니다. ” “치운데 오래 섯지 말구 가게. ” “내일 어느때 떠나실 텝니까? ” “첫새벽 떠날 텔세. ” “새벽에 오겠습니다. 안녕히 주뭅시오. ” 개미치가 나간 뒤에 한온이는 바 로 자리에 누웠다. 13 이튿날 새벽에 한온이가 자릿조반을 먹는 체 만 체하고 두패 교군을 타고 청 석골서 떠나서 송도 김천만이 집에 와서 아침밥을 시켜 먹고 장단읍에 와서 중 화를 하는 중에 복색이 선명하고 인물이 끼끗한 군사들이 객주집 앞으로 지나가 는 것을 보고 경군인 줄 알 뿐 아니라 순경사가 거느리고 오는 경군이려니까지 짐작하며 객주 주인을 불러들여서 점심밥을 재촉한 끝에 “문앞으루 군사들이 많이 지나가니 이 골에 무슨 일이 있나? ” 하고 물어보았다. “그게 경군입니 다. ” “글쎄 경군이 어째 내려왔나? ” “황해도 순경사 행차가 지금 읍에서 중화하는 중입니다. ” "옳지, 내가 송도서 들으니까 황해도와 강원도에 순경사 가 났다든군, 서울서 어제 떠난 모양일세그려." "어제 파주읍에 숙소했답니다." " 오늘은 송도 가서 잘 모양이군." "녜, 송도가 숙소참이랍디다." 한온이가 속으로 '내일은 청석골서 야단이 나겠다.' 하고 생각하며 "경군이 대체 몇명이라든가?" "오십 명이랍디다." 한온이가 또 속으로 '오십 명쯤 가지구는 청석골을 감히 범 접할 생읠 못할 텐데 송도서 발병해서 합세할 작정인가?' 하고 생각하며 "향자 에 관군 오백여 명이 평산 땅에서 적당 일굽 명하구 접전해서 참혹히 패진을 당 했다는데 오십 명 가지구 적당 한 명하구나 접전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말이 올시다. 청석골 근처에 가서 어리대다가는 몰사 죽엄이나 당하지 별조 없을 겝 니다." "청석골 적당이 여기두 혹 더러 오나?" "서울 왕래 혜음령 왕래에 늘 지 나다닙지요." "지나다니는 줄 알며 관가에서 가만 놔둔단 말인가?" "관가에 고발 할 놈두 없지만 관가에 입문되기루 어쩌겠습니까. 섣불리 그 사람네를 건드렸다 가 무슨 일이 나라구요. 황해도 봉산전 등내가 어째 그 사람네 치부에 올랐든지 신연 맞아 내려가는 길에 임진나루서 죽을 욕을 봤습니다. 그 사람네가 하러 들 면 송도 유수나 황해 감사는 욕을 못 뵈일 줄 압니까. 그러니 각골 원님들이 그 사람네를 왕신처럼 끄리는 게 당연한 일입지요." "그러면 청석골 적당이 드러내 놓구 다녀두 잡질 않겠네그려." "그 사람네가 어디 드러내놓구야 다니나요. 암행 어사 다니듯 하지요. 만일 출도할 일이 있으면 드러내놓겠지요." "그러면 각골 수령들은 적당 어사가 출도 않는 것만 다행으루 여기는 모양인가?" "꼭 그렇지 요. 올 여름에 파주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청석골 두령 중에 축지법하는 두령 하나가 서울 왕래를 자주 하는데 한번 서울 가는 길에 파주읍에 와서 점심 요기 하는 것을 얼굴 아는 사령이 보구 관가에 쫓아들어가서 목사 사또께 밀고를 했 더랍니다. 그때 목사 사또 말씀이 '너는 보구 못본 체하구 나는 듣구 못들은 체 하자. 그래야 파주가 조용하다' 그러셨답니다. 그 말씀이 퍼져나와서 관장은 듣 구두 못들은 체 관차는 보구두 못본 체란 말이 인근읍에서까지 동요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백성들이야 알구두 모르는 체할밖에 있습니까. 저두 십년 하방의 눈치꾸레기루 사람을 알아내는 것이 임진 사궁만 못지않지만 그저 알구 두 모른 체하구 지냅니다." 한온이가 경군 수효를 우선 좀 알고 싶어서 말을 묻 기 시작하였다가 주인이 수문수답을 잘하는 바람에 여러 말을 묻게 되었으나 아 닌보살하고 말 묻기가 낯간지러울 때 많았는데 주인의 알고도 모른 체한단 말을 듣고는 낯뿐 아니라 오장까지도 간질간질하여 말을 더 물을 뱃심이 없어져서 " 하여튼지 세상은 말세가 다 되었네." 하고 거짓 한숨을 한번 길게 쉬고 나서 "부 질없는 이야기에 길 늦겠네. 내가 길이 바쁘니 점심 곧 먹두룩 좀 해주게." 하고 말하여 객주 주인을 내보냈다. 한온이가 장단서 점심 먹고 떠날 때 일력은 파주 읍에 와서자면 마침맞겠으나 한 시각이라도 빨리 가고 빨리 오란 이봉학이의 부 탁을 생각하고 내일 길을 단 십리라도 더 줄이려고 교군꾼들을 자주 쉬이지 못 하고 오래 쉬지 못하도록 들몰았다. 교군은 가볍고 교군꾼들은 세차서 소교가 나는 듯하였다. 겨울 짧은 해에 하루에 일백사십 리나 길을 와서 혜음령 못미처 혜음령패 괴수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늦은 아침때 반갑고도 서먹서먹 한 서울을 들어왔다. 남소문 안에 사는 강만손이는 늙은 부모와 저의 내외와 아들 남매와 조자손 삼대 여섯 식구가 안방.건넌방 방 둘 있는 집에서 살았다. 안방에 젊은 내외 건 넌방에 늙은이 양주와 손자 남매, 방 둘이 그 식구에 꼭 알맞았다. 이 집에 한온 이가 와서 묵자면 두 방에 거처하는 식구를 한 방으로 몰아야 할 터이고 그리하 고 또 교군꾼들을 재울 방은 달리 구처하여야 할 터이라 모두가 비편하였다. 한 온이가 비편한 줄 알면서 와서 묵으려고 작정한 것은 오로지 사람들이 미더운 까닭이었다. 만손이의 늙은 어미는 한온이 조모가 계집아이로 부리던 사람이요, 만손이의 안해는 한온이 어머니가 손때 먹여 기른 계집아이로 한온이 어머니 초 상에 거상을 자원하여 입었었다. 한온이가 지각난 뒤로 만손이의 안해를 특별히 생각하여 집을 사주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대주고 만손이를 남부사령으로 구실 까지 붙여 주었다. 한온이 탄 소교가 강만손이 집 마당에 들어와서 놓일 때 만 손이 안해가 헛간에 쌓인 장작을 부엌으로 안아 나르다가 교군꾼의 쉬소리를 듣 고 안았던 장작개비를 내던지고 쫓아와서 소교 안을 들여다보며 "아이구 상제 님!" 하고 소리치고는 "집안에 아무 연고 없나?" 한온이의 묻는 말도 대답 못하 고 어린 듯 취한 듯 정신 놓고 섰었다. 건넌방의 늙은이 양주가 방안에서 며느 리 소리치는 것을 듣고 방문 열고 마당에 놓인 소교를 보고 두 늙은이 다같이 진동걸음을 쳐서 나올 때 만손이 안해는 비로소 정신을 차려서 "어머님, 상제님 을 안방으루 뫼시구 들어오세요." 하고 말하며 곧 먼저 안방에 들어가서 방안에 지저분하게 벌여놓인 것을 거듬거듬하여 치우고 시조부모 제사때나 내어 까는 돗자리를 꺼내다가 아랫목에 깔아놓았다. 한온이를 두 늙은이가 안방으로 뫼셔 들여다가 아랫목 돗자리 위에 앉힌 뒤 바깥늙은이는 다시 윗목에 내려가서 한온 이에게 절을 하였다. "늙은이가 절이 무어요. 망령이구려." "그게 무슨 말씀입니 까? 여러 날 못 뵈어두 절을 해야 할 텐데 못 뵈인 지가 벌써 몇 달입니까. 구 월.시월.동지.섣달, 달수루 넉 달입니다." "이리 와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아니 오. 여기 앉았겠습니다." "그러지 말구 가까이 와서 앉으우." "아니올시다." 하고 바깥늙은이는 윗목에 앉아 있으려고 하다가 상제님이 가까이 오라시는데 안 오 는 건 되려 도리도 아니고 또 인정도 아니라고 안늙은이에게 사설을 듣고 아랫 목에 와서 한온이 앉은 자리에서 모를 꺽고 앉았다. 안늙은이는 처음부터 한온 이 옆에 와 붙어 앉아온 한온이의 한 손을 두 송으로 잔뜩 붙잡고 있다가 “상 제님, 웬일이시우?” 하고 묻고 한온이가 미처 대담할 사이도 없이 곧 뒤를 이 어서 “이렇게 뵈입는 것을 나는 죽기 전 다시 못 뵈일 줄 알았지.” 하고 질금 질금 울고 눈물을 씻느라고 비로소 한온이의 손을 놓았다. 이 동안 만손이 안해 는 한구석에 가 비켜서서 한온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입가 에는 웃음이 떠돌았다. 반가운 말을 억제 말고 맘대로 하라면 미친 사람같이 웃 다 울다 울다 웃다 웃음과 울음이 종작없을을 것이다. 안늙은이가 며느리를 돌 아보며 “이애, 너는 그러고 섰지 말고 얼른 나가서 점심 진지를 지어라.” 하고 이르는데 한온이가 시장하지 않다고 점심은 고만두고 교군꾼들이나 어디좀 들여 앉히라고 말하니 “우선 건넌방에 좀 들어앉힙지요.” 하고 바깥늙은이가 일어 서려고 하는 것을 안늙은이가 가만히 앉았으라고 말하고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며 “여보 대감네, 저 건넌방으로들 들어가시우.” 하고 소리쳤다. 만손이의 아들 놈이가 밖에 놀러나갔다가 들어와서 한온이를 보고 “아이구 상제님 오셨 네!” 하고 절을 너푼 하니 벌써부터 저의 어미 치마꼬리에 와 붙어 섰던 만손 이의 딸 이뿐이도 제풀에 나와서 절 한번 납신 하였다. 안늙은이가 놈이를 보고 “너 얼른 마을에 가서 네 아비더러 노늘 일찍 나오라고 하고 일찍 못 나오겠거 든 잠깐 다녀가라고 해라.” 하고 이르고 또 “마을에 가서 상제님 오셨다고 떠 들진 마라.” 하고 이르니 놈이가 녜 녜 대답하며 바로 뛰어 나갔다. 만손이의 안해가 밖으로 나가서 오래 들어오지 아니하더니 그동안에 국수를 사다가 장국을 말아서 들여왔다. 한온이가 상을 받으며 “점심은 안 먹어두 시 장치 않을 텐데 장국은 왜 끓였어.” 하고 말하니 만손이 안해는 시아비 앞을 막아서지 않으려고 상머리에서 뒤로 물러서며 “저녁때가 상기 멀었는데 요기를 좀 하셔야지요.” 하고 대답한 뒤 “편육도 없고 김치맛도 좋지 않아요. 그러나 마 오래간만에 제 손으로 끓여 드리는 장국이니 좀 많이 잡수세요.” 하고 권하 는데 말은 차치하고 말소리까지 디정하였다. 한온이가 식성이 온면을 즈기기도 하지만 며느리가 정답게 권하는 외에 시어미 늙은이가 무작정 강권하여 국수 한 그릇을 거의다 먹어갈 때 놈이가 들어왔다. “아비가 못 온다느냐?” 하는 할미 묻는 말에 “같이 나왔세요.” 하고 손자가 대답하였다. 한온이가 놈이더러 “어 디?” 하고 묻자 곧 만손이의 헛기침 소리가 방문 밖에서 났다. 한온이가 상을 밀쳐서 물리고 방문을 내다보니 뜨에 섰던 만손이가 하정배를 깍듯이 하였다. “방으루 들어오게. 어서 들어와.” 한온이의 재촉을 받고 만손이는 방에 들어와 서 두 손길 맞잡고 섯는 것을 한온이가 또 앉으라고 권하여 윗목에 쪼그리고 앉았다. “요새 오부에 일이 많은가?” “네, 요새 좀 분주합니다.” “오늘은 못 들어오겠다고 아주 말하고 나왔습니다.” “잘했네.” “이 험난한 때 무슨 일루 행차하셨습니까?” “내 이야기는 차차 하구 서울 이야기를 먼저 좀 듣세. 요새 서울이 시끄럽다지?” “네 대단 시그럽습니다. 위의 처분이 깁셔서 형조 에서 자꾸 사람을 잡습니다. 잡혀갔다 곧 도루 놓여나온 사람은 말 말구 지금 잡혀 갇힌 사람만 수십 명이랍니다.” “잡혀 갇힌 사람 중에 우리 친한 사람두 많겠지?” “댁에서 서울 떠나신 뒤루 저는 예전 알던 사람과 일체 상종을 안해 서 누가 어떻게 된 것을 통히 모릅니다. 일전에 덕신이가 와서 하루를 같이 자 는데 몇 사람 이야기만 대강 들었습니다.” “덕신이가 왜 제 집을 두구 자네게 와 잤어?” “저희 집에 들어가면 잡힌다구 하룻밤만 재워달라구 하니 인정에 어떻합니까. 놈이 어미를 건너방으루 보내구 이 방에서 재워 보냈습니다.” “덕 신이 어른은 어떻게 됐다던가?” “어떻게 된 셈인지 저의 부모는 집에 있어두 상관이 없다구 합디다.” “덕신이가 그래 잡히지 않았나?” “시골루 내뺀다구 했는데 잡히지 않았을 겝니다.” “덕신이게 뉘 이야길 들었나?” “댁의 서사 보던 최서방하구 호상이 호불이 형제하구 문성이하구 녹쇠하구 함께들 잡혀갔다 구 이야길 합디다. 녹쇠 같은 것이 다 잡혀갔으니 저두 구실을 다니지 않았더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아니 최가가 잡혔어? 그놈이 좌포청에 일긴이라는데 어 째 잡혔을까?” “최서방이 무슨 수루 포청에 일긴이 되겠습니까. 한껏해야 포 교들에게 술잔 값이나 뺏겼겠습지요. 설혹 포청에 긴한 줄을 대구 있었기루 형 조 일에 그 줄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포도대장이 주선해 주면 놓여나올 수 야 있겠지.” “포도대장이 주선해 주었으면 곧 놓여나왔지 전옥에까지 들어갈 리 있습니까. 최서방 호성이 호불이 문성이 족쇠 다 지금 전옥에 가서 갇혀 있 답니다.” “하여튼 그놈이 포청 세를 믿구 우리 빕 팔구 세간 팔구 빚 투심 한 걸 죄다 집어먹었네.” “댁 재산을 그놈이 다 집어 먹었세요? 저런 죽일 놈 보 게. 저는 그걸 모르구 그놈을 가엾게 여겼습니다그려. 그놈 원악도 귀신 될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지금 전옥게 갇힌 놈들은 대개 다 원악도루 가리라고 합디다.” “그놈도 원악도루 가게 된단 말만 들어두 내 속이 좀 시원할 것 같애.” 하고 한온이가 속이 참으로 시원한 거같이 숨을 길게 내쉬는 것을 만손이 아비가 보 고 “상제님 기신 데 호걸이 많다니 그런 놈은 진작 죽여 없애게 하시지 왜 이 때껏 가만두셨습니까? ” 하고 물었다. 16 “근일 도중 공사가 다단한데 내 사사를 말할 수가 없어서 아직 책장을 덮어 두었었소.” “상제님이 할아버님 성정을 닮으셨더면 그런 놈은 벌써 어떻게 든 지 요정냈지 이때까지 가만두지 않으셨을게요. 할아버님 성정 참 무서우셨습니 다. 한번 어떤 놈이 댁에 들어올 상목을 반 동인 가 한 동 떼어먹구 어디루 도 망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놈의 종 적을 질지이심하게 찾아서 함경도 영흥 땅 으로 도망한 걸 아시구 사람들을 쫓아보내서 그놈을 용흥강 물귀신을 만드셨지 요. 사람들 보낼 때 부비가 너무 과다하게 들어서 첨지 영감이 고만두시면 좋을 듯이 말씀을 여쭈니까 소견 없는 자식이라고 꾸중하시구 나중에 타이르시는 말 씀이, 분풀이두 해야 하지만 이루 말하더라두 장래 몇 백 동이가 될는지 모른다 고 하십디다. 장래 몇 백 동이란, 그런 놈을 그렇게 본보길 내야 다른 놈들이 떼 어먹을 생의를 못한 단 말씀이오.” 만송이의 아비가 케케묵은 옜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아서 한온이는 듣기 싫증이 났다. 만손이가 한온이의 눈치이를 살피고 아 비의 옛야기가 또 나오기 전에 “서울 빚은 최가가 다 추심했답니까?” 하고 묻 고 “다 추심했는지 어쨌는지 그것두 난 모르지, 빚문서를 통히 최가에게 맡겼 었으니까. ” 하고 한온이가 대답하여 만손이 아비의 말참례로 중단되었던 한온 이와 만손이 둘의 수작이 다시 계속되었다. “최가가 댁의 덕택을 골수에 사무 치두룩 입은 놈이 댁을 배반하하다니 세상 인심 참말루 믿을 수 없습니다.” “ 그래 내가 서울 올 때 덕신이게루 갈까 문성이게루 갈까 망설이다가 아무리 생 각해두 자네네 식구만큼 미덥지가 못해서 비편스러운 걸 불계하구 자네 집으로 왔네.”“제 집을 방이 누추하구 음식이 맛깔적지 않아서 잠시라두 와서 기시기 가 불편하시지만 제 집을 두구 다른 데루 가셨더면 저의는 섭섭할 뻔했습니다. ” “내가 비편하다는 건 와서 있을 방이 없단 말일세. 나 하나만 같으면 오히 려두 모르지만 교군꾼들이 있으니 자네 집에 어디 재울방이 있나. 이웃집으로 보내주게.” “지가 명년 봄에 며느라를 보려구 건넌방 모퉁이에 방한칸을 들였 습니다. 도배 장판만은 아직 안했어두 아쉰 대루 거처할 만합니다. 교군꾼들을 그 방에 재웁지요.” “그러면 잘됐내. 그러구 나는 건넌방을 내주게.” “저의 식구가 건넌방에 가서 잘 테니 이 방에 기십시오. 이방이 건넌방보다는 좀 걔끗 합니다.” “깨끗지 않아두 좋으니 건너방을 날 주게.” “그러실 것 없습니다. ” “아니야. 지금 곧 교군들은 새 방으루 보내구 우리 단둘이 건넌방에 가서 조용히 이야기 좀 하세.” 만손이 어비가 바로 골이나 나는 것처럼 곤댓짓을 하 며“이 늙은 것들이 이야기를 좀 들으면 어떻습니까.“ 하고 한온이의 말을 탄 하여 ”놈이 할멈이 말을 낼까봐 말 안 들려주려구 그러네. ” 하고 한온이는 웃었다. 만손이가 저의 안해더러 “건넌방을 가서 정하게 치워 놓게.” 하고 이 르니 “건넌방에 교군꾼들이 들어앉았소. ” 하고 그 안해가 대답하였다. “새 방을 교군꾼들 들어앉게 해주구 건넌방을 치우게그려.” “어떻게 들어앉게 해 주란 말이오.” “바닥에 좀두둑하게 깔구 화루를 해놓으면 되지 않나.” “그걸 내가 어떻게 하우, 당신이 해줘야지.” “아이 밥병신 같으니.” 하고 만손이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며 “자네는 나와서 화롯불이나 해놓게.” 하고 말하여 만 손이 안해도 그 남편 뒤를 따라나갔다. 만손이 아비는 한온이가 조부의 이야기 를 귀담아 듣지 않는 것이 맘에 섭섭하든지 “인제 이 늙은것이 죽으면 선대 적 이야기두 들으실 데가 별루 없으리다.” “그럼, 그런 이야기 들을 데가 다시는 없구말구.” 하고 한온이가 대답한즉 만손이 아비가 또다시 한온이 조부의 행호 시령 하던 이야기를 깨내더니, 늙은이가 입심도 좋아서 그칠 줄을 모르고 지껄 였다. 한온이가 졸음이 와서 정신이 가물가물하여 이야기 소리가 멀리서 나는 것 같이 들리다가 나중에는 아주 안 들릴 때까지 있었다. 만손이 어미가 한온의 곤한 모양을 보고 자기 영감더러 이야기 고만 두었다. 한온이는 지난 밤에 잠을 잘못 잤다고 팽계하고 만손이 어미가 갖다 주는 목침을 베고 누워서 바로 혼곤 히 잠이 들었다. 17 도회청에 난데없는 불이 붙어서 붉은 불길이 용솟음을 치는데 불을 잡는 사람 도 없고 구경하는 사람도 없다. 사람이라고는 씨도 없더니 별안간 꺽정이 한사 람이 땅에서 솟아나듯 나서는데 얼굴과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보기가 끔찍하였 다. 한온이가 소스라쳐 잠을 깨었다. 방안에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몸에는 정한 이 불이 덮이었다. 방안 사람 나가는 것도 모르고 이불을 덮어주는 것도 몰랐으니 잠시일망정 잠이 곤히 들었던 모양이다. 꿈속에 본 광경이 생시 일 아닌 것만은 다행이나 헛꿈이 아니고 전조인 듯 생각이 들었다. 이번 순경사 손에 그런 일을 것인데 청석골 앉아서 대항하는 건 공연한 객기다. 객기인 줄 번연히 알며 객기 부리는 사람들 따라서 신명을 그르치면 그런 원통할 데가 어디 있을까. 자기는 다른 두령과 달라서 우선 청석골을 간 것이 잠시 피신길이고 또 같은 두령이로 되 예날곱 사람처럼 사생동고할 의리가 없는 터인즉 함께 몰사죽엄을 당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이왕 서울 온 길에 눌러 있고 다시 가지 말까? 그런 신의 없 는짓은 할 수가 없다. 그뿐 아니라 집안 식구가 다 청석골 있는데 혼자 빠질 수 도 없다. 사명맡은 대로 서림이 뒤를 속히 알아 가지고 가서 대항 말고 피신하 자고 주장하다가 주장이 서지 않거든 아주 여럿에게 공언하고 식구를 끌고 나오 겠다. 한온이가 잠이 깬 뒤에 얼마 동안 이런 생각을 하고 누웠다가 갑자기 이 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 앉아서 “만송이?” 하고 부르니 만손이가 건넌방에서 녜 대답하고 곧 건너왔다. “지금 해가 어떻게 됐나?” “승석때가 거의 다 되 었습니다.” "이리 와 앉아서 내 이야기 좀 듣게. “하고 한온이가 무릎 밑을 가 리키니 만손이는 한온이 할 이야기가 밀담인 줄 짐작하고 선뜻 가까이 와서 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편히 앉게.“ ”네.“ ”내가 이번 오긴 서림이의 뒤 를 파보러 왔네.” “서림이란 이요, 청석골 두령으루 조정에 귀순한 사람 말씀 이지요?” “그래, 서림이의 뒤를 잘 알자면 남대문 밖에서 객주하던 치선이 김 선달을 만난봐야겠는데.” “김선달을 지가 가서 불러올까요?" "어디 가서 불러 온단 말인가?" "지가 김선달을 만나봐야겠는데, ” “김선달 불러올까요?" "어 서 가서 불러온딘 말인가?” “지가 김선달객주를 전에 가본 일은 없지만 남내 문 밖에 나가서 물으면 알겠습지요." "이 사람이 참말 우복동 속에서 살다가 아 온 것 같애. 김치선이가 서림이 동티루 객주를 못하구 지금 피신해 다니네." ” 피신해 가 있는 곳을 대강 짐작하십니까?" "난 몰라." "그럼 어떻게 만나십니 까?" "영부사댁 도차지 손동지가 치선이 숨어 있는 데를 안다니까 손동지에게 말을 들여보내서 물어볼 생각일세." "남이 피신해서 숨어 잇는 곳을 잘 알기루서 니 여간 믿는 처지에야 모른다구 떼기가 쉽니 일러주기가 쉽습니까?" "그렇기에 손동지에게 다리 놓을 사람을 지금 자네하구 의논해 보잔 말일세." "제 주제에 무슨 좋은 생각이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전갈이나 편지 심부름을 해드릴 테니 상제님께서 그러럴 만한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지금 생각하는 사람은 덕신이 어른일세. 덕신이 어른이 손동지를 아는지 모르나 영부사댁 차지 하나하 구 절친하게 지낸는 건 내가 잘 아니까 덕신이 어른더러 그차지를 다리 놓구 물 어보라면 어떨까?" "그럼 덕신이 어른을 내일 가 불러오겠습니다." "내일 가서 불러올 게 아니라 지금 곧 가서 이야기하구 속히 알아보라구 부탁하게." "상제님 께서 보시구 부탁하시지요." "자네가 가서 내 말루 부탁하게그려.“그럼 지금 곧 가서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만손이가 나간 뒤 한온이는 다시 누웠는데 만손이 어미가 건넌방에 있다가 건너와서 청석골서 지내는 형편을 묻는데 미주알고주알 다 캐어물어서 묻는 말을 이루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해가 져서 어둡기 시작할 때 만손이가 돌아와서 “덕신이 어른더러 다 이야기하구 부탁했습니다.” 하고 말하여 “대답이 무어라든가?” 하고 한온이가 물었다. “그만 일은 물어봐 달 랄 수 있다구 대답합디다." "속히 회답을 듣게 해달라구 말했나?” 덕신이 어른 이 곧 와서 보일 것인데 오을 영부사댁에 가서 차지를 보구 부탁해 두구 내일 아침에 아주 회답을 들어가지구 와 보입는다구 합디다." "잘됐네. “ 일이 이렇 게 요량한 대로 다 되면 내일 낮에 김치선이를 만나서 서림이 이야기를 듣고 저 녁때라고 곧 도로 떠나가려고 한온이는 속으로 작정하였다. 18 한온이가 만손이 내외의 지공스러운 접대와 지성스러운 공궤를 박고 하룻밤을 편히 지냈다. 이튼날 아침에 한온이는 덕신이 아비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아침때 오마고 했다는 사람이 이른 아침때가 지나고 늦은 아침 때가 지나고 해가 한나 절이 다 되도록 오지 아니하였다. 만손이나 집에 있었으면 한번 보내보기도 하 겠는데 만손이가 남부에 들어가고 없어서 한온이는 초조한 맘을 억지로 참으며 기다리었다. ‘윤원형 집 차지 방에서 인제 일어섰겠지.’ ‘지금쯤은 남촌을 건너섰으렸 다.‘ ’지금쯤은 남소문 큰길 어귀에 왔으렸다.‘ ’인제 다 왔겠는데.‘ ’아 니다, 볼일을 잊은 것이 있어서 윤원형 집에서 자기 집으로 도로 간게다.’ ‘볼 일 다 보고 인제는 나섰겠다.’ ‘가까운 샛길로 오나 큰길로 돌아오나. ’ ‘걸 음을 좀 재게 걸었으면 벌써 여기까지 왔을 텐데 인제 겨우 남성 밑골 갈림길에 나 왔지. ’ ‘굼벵이라도 그 동안에 굴러왔겠는데 여태껏 아니 온담.’ 한온이 가 이와 같이 생각으로 윤원형 집에서 만손이 집을 오기도 하고 또 덕신이 집에 서 만손이 집을 오기도 하였다. 덕신이집에서 만손이 집까지는 한번만 오지도 않고 두세 번 되거푸 왔다. 그러나 정작 사람은 오지 아니하여 한온이가 기다리 다 지쳐서 “무슨 까닭 있는 사람을 내가 공연히 기다리는군.” 하고 퇴침을 베 고 드러누웠다. 이때까지는 자주자주 방문을 열고 내다보느라고 방문 앞에 앉 아 있었던 것이다. 해가 한나절이 기운 뒤에 덕신이 아비가 비로소 왔다. 한온이 가 오래간만에 만나는 인사를 하기는 차치하고 받지도 않고 첫밗에 “아침때 오 마구 했다며 왜 이렇게 늦었소?” 하고 책망하는 말로 물었다. “만날 사람을 만나구 오느라구 늦었습니다. 어제 저녁때 가서 못만나구 오늘 식전에 가서 여 태까지 기다리다가 겨우 잠깐 만났습니다. ” “그래 김치선이 있는 데를 물어 봐 준다구나 합디까?" "김치선이 가서 있는 데를 아주 알구 왔습니다." "상제 님께서 곧 만나보시신 어려울 것 같은데, 그게 낭패 아닐까요?" "어디 가 있기 에?“ "시골 가 있답니다.”“시굴 어디?” “서울서 가깝긴 합디다. 용인이랍디 다.” “서울 있는 걸 시굴 갔다구 외대 주지나 않았을까?” “내가 박차지를 보구 김치선이 있는데를 손동지한테 물어봐 달라구 부탁하니까 박차지 말이, 김 치선이 거처는 손동지께 물어볼 것 없이 자기두 안다구 합디다. 그래 어디 있느 냐구 물은즉슨 손동지가 봐주어서 영부사댁 용인 전장의 마름을 얻어 해가지구 갔다구 합디다. 박차지두 차지들 중에 유력한 사람인데 마름출척이야 모르겠습 니까?” “언제 갔답디까?” “바루 엊그저께 처자까지 데리구 내려갔다구 합디 다.” “전장은 용인 어디랍디까?” “소지명은 물어보지 않았는걸요. 상제님께 서 용인을 내려가실랍니까?“ "아니.” “대체 김치선이는 무슨 일루 보실라구 그러십니까?” “치선이가 좌포장댁 청지기에게 무슨 들은 말이 있다구 해서 그 말을 좀 물어보려구 그러우.”“그럼 좌포장댁 청지기게루 바루 알아보시는 게 좋지 않습니까?” “좌포장댁 청지기루만 들었지 청지기 성명은 못 들었는걸.” “좌포장댁에 왠 청지기가 많겠습니까? 하나기가 쉽구 기껏 많아야 두서넛이겠 지요.” “좌포장댁 청지기에 혹 친한 사람이 있소?” “저는 없습니다.” “친 한 사람으루 다리 놓을 길은 있소?” “그건 알아보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 “그러면 그런 길 하나를 속히 뚫어보우. 그러구 물어볼 것은 좌포장이 서림 이란 자를 데리구 무슨 계책을 의논했는데 그때 청지기들두 들었다니 그 계책이 무슨 계책인가, 또 서림이란 자가 어디서 무얼하구 지내나 그걸 알구 싶소. 서림 이란 자가 조정에 귀순한 뒤 일은 샅샅이 알았으면 좋겠소.” “별일이 아니라 서림이의 뒤 파보는 일입니다그려. 그건 좌포장댁 청지기보다 좌포청 포교들이 더 잘 알는지 모르니까 어떻게든지 알 수 있겠습지요.” “글쎄, 지금 나는 알아 볼래야 알아볼 길이 없소.” “내가 어느 길을 뚫는지 뚫어가지구 자세히 알아 다 드리오리다. 설마하니 그런 일쯤이야 못 알아내겠습니까. 염려 맙시오.”하고 덕신이 아비는 곧 알아올 것같이 장담을 하였다. 덕신이 아비가 허튼수작을 잘 하는 사람도 아니고 더욱이 한온이에게 허튼수 작을 할리는 만무하지만, 당장 희떱고 시원스럽게 보이는 맛에 뒷갈무리 못할 장담을 곧잘 하는 버릇이 있는 까닭에 그 장담을 꼭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 나 한온이는 아쉬잡아 엄나무로 그 장담에 희망을 붙여서 “곧 좀 알아봐 주. 믿구 있을 테니 그리 아우.”하고 뒤를 다져 부탁하였다. “상제님 부탁을 범연 히 생각할 리 있습니까. 내가 발바닥이 닳두룩 돌아다녀서라두 그예 알아오겠습 니다.” “내가 서울서 오래 묵을 사세가 못 되니 속히 알아봐 줘야겠소.” “ 녜, 빨리 알아오리다.” “오늘 해전에 회보를 들을 수 있겠소?” “오늘 해전은 어려운걸요.” “그럼 내일은 되겠소?” “내일은 아시게 해드릴 수 있겠지요.” “내일 어느때쯤 알 수 있겠소?” “내일 이맘때 또 오겠습니다.” “내일 점심 때가 저녁때나 되지 않겠소. 기다리기 힘드니 에누리 속을 미리 알아둡시다.” “상제님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 나는 아침때 올라구 일찌거니 서둘렀지 만 남을 만나보자니 저편 사정이 어디 내 맘대루 됩니까. 그래 조금 늦었지요. 그래두 오늘은 빨리 만나본 셈입니다. 요전에 자식의 일루 그 사람을 만나볼 때 는 식전에 가서 저녁때까지 온종일 기다려서 겨우 만나봤습니다.” “참말 덕신 이가 어디루 피신했다지?” “녜, 그 자식 때문에 나두 그 동안 한번 형조에 끄 들려갔다가 박차지의 주선으루 놓여나왔습니다.” “이번 형조에서 사람 잡는 것이 우리 생각엔 좀 우습소. 우선 영감 부자를 두구 말하더라두 영감은 피신하 구 덕신이가 무사히 집에 있다면 혹시 모르겠는데 일이 뒤쪽이니 우습지 않소. ” “그건 최선칠이(최가의 자다) 한 일을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댁에서 서울을 떠나신 뒤에 선칠이가 댁 사업을 계적해 보려구 했는갑디다. 댁 사업으루 말씀 하면 영특하신 선조부 영감께서 터전을 잡아놓으시구 후덕하신 선영감께서 뒤를 받치셔서 남소문 안호령이 서울 안을 울리게 된 것인데 선칠이 같은 변변치 않 은 위인이 계적을 한다니 누가 말을 듣습니까. 술잔 값이나 생기면 흥흥 코대답 이라두 하지만 안 생기면 코대답이나 할 리 있습니까. 너는 너구 나느 나다 할 테지. 더구나 선칠이의 사지 어금니 같은 사람이란 게 문성이.호성이.호불이 이 런 솔봉이들이니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아이들 불장난밖에 더 될 것 있겠습니 까. 그런데 그 얼뜬 자식놈이 문성이 꾀임에 빠져서 선칠이게를 자주 다니는 모양이기에 다니지 말라구 누차 일렀지요. 그랬건만 그 자식이 아비를 기이구 꾀꾀루 다니다가 종말에 아비 기인 벌역을 받은 셈입니다. 이번엔들 잡힐 때 녹 쇠가 첫고등에 잡히구 그 다음에 선칠이며 선칠이 집에 다니는 놈들이며 다 잡 혀서, 녹쇠 같은 시라소니가 어떻게 잘못하다가 잡혀가서 여러 사람을 붙었는가 부다 생각했더니, 속내를 알아보니까 의외에두 녹쇠가 선칠이 집의 소위 도룩이 라구 꾸며 둔 것을 훔쳐다가 형조에 바치구 밀고를 했답디다. 그래서 다른 사람 들이 흑산도루 가게 작정이 되면 녹쇠는 곧 놓여나올 모양입디다.” “녹쇠가 최가를 고발했다! 그거 참 사람이란 알 수 없군. 그런데 최가의 집에 있는 도룩 을 어떻게 훔쳐냈을까?” “녹쇠가 선칠이 집에 가서 심부름해주구 있었답디다. ” “최가를 해내려구 근사를 모았구려.” “처음부터 그런 맘을 먹구 심부름꾼 노릇을 하러 갔는지는 마치 모르겠습니다.” 여담이 너무 길어져서 한온이가 오 늘 해를 이야기로 보내서는 안될터이니 미진한 이야기는 내일 하자구 말하고 행 중 소용으로 가지고 온 필찬 상목 댓 필 중에서 한 필을 꺼내서 술값으로 주고 어서 가서 일을 보아 달라고 덕신이 아비를 쫓아보내다시피 하였다. 덕신이 아 비를 보낸 뒤 한온이는 혼자 누워서 덕신이 아비의 장담을 믿기가 어려우니 오 늘 용인을 내려가서 김치선이를 찾아볼까. 소지명을 모르더라도 용인읍에 가서 영부사댁 전장 있는 곳을 물으면 대번 알 수 있겠지. 내일 덕신이 아비의 회보 를 들어보아서 용인을 내려갈까. 그 늙은이가 설마 내게다 헛장담을 했을 리 없 겠지. 생각을 질정 못하고 있는 중에 만손이 집안 식구의 말소리와 다른 여편네 말소리가 안방에서 나는데 그 말소리가 한온이 귀에 장히 익으나 말소리 임자는 언뜻 생각이 나지 아니하였다. 20 순이 할머니라고 부르는 매파가 만손이 아들 놈이의 혼인을 중매하여 정하였 는데 색시집에서 혼인 준비에 신랑집 의향을 알아다 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어서 순이 할머니가 만손이 집에를 왔었다. 순이 할머니는 한첨지의 여자 부하 중 구 군으로 한온이 집에를 무상출입하던 매파라 한온이가 목소리를 들으면 대번 알 것인데 목소리가 평일과 달라져서 몰랐던 것이다. 순이 할머니가 만손이 부모를 보고 색시집에서 부탁한 일을 대개 이야기한 뒤 “건넌방에 누가 오셨소?”하고 물으니 만손이 어머니가 영감의 입을 치어다보 다가 그저 “손님이 오셨소.”하고 대답하였다. “어떤 손님인데 손님 혼자 내버 려두고 주인은 모두 안방에 와 있소?” “손님이 낮잠을 주무시는가 보우.” “ 어디서 오신 손님이오?” “저 시굴서 오신 손님이오.” 만손이 어머니가 한온 이 온 것을 말 않고 모호하게 대답하는 중에 공교하게 이때 건넌방에서 한온이 의 기침 소리가 났다. 순이 할머니가 귀가 밝아서 대번 기침 소리를 알아듣고 “주인댁 작은상제님이 오신 모양인데 왜 나를 기이우.”하고 골을 내었다. “우 리가 마누라를 기이려는 게 아니오. 상제님께서 분부하시기를 일체로 뉘게든지 말 말라고 하셔서 그래서 말을 못했소.” “상제님이 아무리 그렇게 분부하셨더 라도 나를 고발할 사람으로 알지 않은 담에야 그럴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 “누가 마누라를 못 믿어서 말 안했을세 말이지.” “고만두우. 듣기 싫소. 상제 님은 날 보지 않으려고 하셔도 난 상제님을 좀 보여야겠소.”하고 순이 할머니 가 일어나서 건넌방으로 건너오는데 만손이 어머니도 뒤를 따라 건너왔다. 순이 할머니가 기임 받고 골난 것이 아직 사라지지 아니하여 건넌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곧 “여보 상제님. 인정이 없으셔도 분수가 있지 그런 데가 어디 있소. ”하고 사살부터 내놓았다. “순이 할멈한테 내가 무슨 인정 없는 짓을 했나 나 는 모르겠는데.” “내가 안방에 온 줄 아셨을 텐데 순이 할멈 게 왔나 이리 오 게 좀 하면 어떻소.” “순이 할멈이 온 줄 난 몰랐소.” “귀 어두운 나는 상제 님 기침 소릴 대번 알아들었는데 귀 밝으신 상제님이 내 말소릴 못 알아들으셨 단 말이오.” “목소리가 영 딴 사람 같으니 웬일이오?” “목소리가 좀 변했기 로 일년 이태 들으신 목소리요. 그렇게 아주 못 알아들으셨을 리가 있소. 알고도 모른 체하셨지 무얼.” “아니 참말 목소리 듣곤 몰랐소. 목이 좀 쉰 것 같소.” “초겨울에 고뿔을 앓고 목이 잠기더니 내처 시원하게 트이지 않아요. 그런데 상제님 나보고 하우를 하시니 웬일이오?” “그전에는 주인집 아들 자세루 늙은 이보구 하게를 했지만 지금이야 그럴 수 있소.” “지금은 주인이 아니란 말씀 이오?” “그럼 지금이야 주인이 무슨 주인이오.” “내가 첨지 영감 앞에서 죽 는 날까지 부하 노릇하기를 맹세하고 이름을 도록책에 올렸소. 이 목숨 지는 날 까지 댁 부하 사람이오. 지금은 주인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야박한 말씀이오. 아 스시우. 전대로 하게하시우.” “내가 전에 하게하던 늙은이에게 몰밀어 하우를 했는데 그런 말 듣기는 순이 할멈한테 처음이여.”하고 한온이가 눈에 눈물을 먹이었다.“하우받는 사람들도 인사가 틀리지만 상제님이 하우하시는 것부터 잘 하시는 일이 아니오.” “그래 요새 지내긴 어떻게 지내우?” 한온이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하오로 말하여 놓고 “아니, 어떻게 지내냐?”하고 말끝을 하게로 고치었다. “지내는 건 전이나 일반이지만 큰쇠란 놈이 포도대장댁에 상노로 들어가서는 걱정 한가지는 덜린 셈이지요.” “큰쇠가 순이 남동생이지? 그놈이 올에 몇살 이든가?” “열여섯 살지요.” “우변이야 좌변이야? 어느 포장댁이야?” “잿 골 사시는 좌포장댁이오.” “언제 들어갔어?” “인제 두어 달 됐세요.” “그 럼 아직 수청방 허드레 심부름이나 하겠군.” “아니오. 포장 영감 눈에 들어서 영감 사랑 방안 심부름을 지가 도맡아 하다시피 한답니다.” 한온이가 서림이의 일을 큰쇠에게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내가 죄포장댁 일을 좀 물어보구 싶은데 큰쇠를 한번 내게 데리구 올 수 없겠나?”하고 순이 할멈더러 물었다. 21 “상제님께서 물어보실 일이 없으시더라도 데리고 와서 문안을 시켜야겠지요 만 그놈이 집에도 한만히 나오질 못합니다. 물어보실 일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면 내가 가서 보고 물어다 드리는 게 어떨까요?” “그놈을 내가 꼭 좀 봤으면 좋겠네.” “그럼 어떻게든지 불러내서 데리고 와야겠구먼요.” 하는 순이 할멈 말끝에 만손 어멈이 나서서 “그저 나오라고 해서 잘 나올 것 같지 않거든 마누 라가 급살을 맞았다고 기별하구려. 그럼 근두박질해서 뛰어나올 테니.”하고 웃 으니 “이 늙은이가 얼쩡하고 남을 방자하지 않나.”하고 순이 할멈이 눈을 흘 기는 체하였다. “살기 싫증이 날 만큼 살고도 죽기는 원통하우.” “임자는 죽 고 싶어서 몸살이 났나.” “나는 얼른 죽기를 바라우. 얼른 죽어야 영감 손에 묻힐 테니까.” “난 묻어줄 영감도 없지만 영감이 있더라도 지금 죽으면 원통 해서 눈이 감기지 않겠소.” “무에 그리 지원 원통하우?” “아비 어미 없는 손자 남매를 일심정력으로 길러가지고 성취를 못 시키고 죽으면 원통하다뿐이 오. 큰쇠마저 장가를 들여놓고 죽어야지.” “큰쇠 장가 들인 뒤엔?” “순이 할 멈하구 이야기 좀 하게 쓸데없는 소린 고만 하우.” 한온이가 만손 어멈의 말을 중동무이시킨 뒤 순이 할멈더러 “만손 어멈 실없는 말을 본받는 것 같지만 큰 쇠에게 할멈이 병이 났다구 기별하면 그 댁에서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두 내 보내줄 것 아닌가?”하고 의논성으로 말하였다. “그야 내보내 주겠지만 그놈이 할미 앓는단 소릴 들으면 잠시라도 놀랄 것이 애색하지요.” “순이 할멈 그런 줄 몰랐더니 자애가 끔찍하군. 잠깐 애색한 건 참구 어떻게 그렇게 해보게.” “상제님 분부를 거역할 수 있소. 그렇게 해보리 다.” “그럼 지금 곧 가서 데리구 오게.” “내 걸음으로 지금 농포안 집에 가 서 잿골로 사람 보내서 불러내다가 데리고 오자면 해가 질 테니 내일 데리고 오 는 게 좋지요.” “내가 지금 시각이 바쁘니 오늘 좀 데리구 오게. 해 지면 어떤 가? 여기서 자지.” “나는 다시 오면 순라 때문에 가기가 어렵지만 그놈은 포 장댁 사람이란 패가 있어서 순라잡힐 염려 없이 밤에도 다니니까 그놈만 보내도 록 해보리다.” “그래두 좋지만 그놈이 이 집을 아나?” “전에 와본 일이 없 지요. 아마 집을 모르면 자세히 가르쳐 보내지요.” “그놈이 만손이 얼굴은 아 나?” “알구말구요. 놈이 할미도 아는걸요.” “그럼 저녁때 만손이더러 골목 밖 큰길에 나가서 기다리구 있으라구 함세.” “그놈이 서울 골목을 휑하게 다 아니까 잘못 찾을 염려는 없을게요.” “그럼 얼른 가서 한 시각이라두 빨리 보 내주게.” “놈이 어른을 좀 기다려 보고 가야겠는걸요.” “만손이를 보구 갈 일이 무언가?” “놈이 혼인을 내가 정해 주었는데 색시집에서 이 집 의향을 알 아달라는 일이 있어서 지금 와서 늙은이 내외를 보고 말하니까, 아들이 오늘 일 찍 나온다고 아들의 말을 듣고 가랍디다그려.” “그건 큰쇠가 왔다 갈 때 말해 보내면 되지 않겠나. 만손이 기다리지 말구 어서 가게.” 순이 할멈이 나간 뒤 얼마 안 되어서 만손이가 돌아왔다. 한온이가 만손이더 러 “순이 할멈이 지금 막 나갔는데 길에서 만났나?”하고 물으니 “골목 밖에 서 만났습니다.”하고 만손이가 대답하였다. “놈이 혼인에 물어볼 말이 있다는 데 말하던가?” “네, 들었습니다.” “순이의 남동생 큰쇠가 좌포장집 상노루 들어가 있다기에 내가 좀 불러 보내라구 했는데 그 말두 하던가?” “그 말은 못 들었습니다. 상노루 들어간 제 얼마 안되는 놈이 무얼 알까요?” “글쎄 서 림이가 어디서 무얼 하는 것쯤은 알는지 모르지.” “덕신이 어른 왔다 갔습지 요?” “아침에 온다던 사람이 점심때가 지남 뒤에야 왔는데 김치선이가 영부사 댁 마름을 해서 용인으루 내려갔다네그려.” “그럼 어떻게 하실랍니까?” “덕 신이 어른이 서림이 일을 자세히 알아온다구 장담은 했지만 그 장담을 믿을 수 가 있나.” “글쎄올시다.” “큰쇠가 여길 와본 일이 없다니 자네가 저녁때 골 목 밖에 나가서 기다리구 있다가 데리구 들어오면 좋겠네.” “그렇게 합지요.” 저녁때가 다 된 뒤 만손이가 골목 밖에 나가서 큰쇠 오기를 기다리고 섰는데 그 어멈이 나와서 자기가 대신 서 있을 터이니 잠깐 들어가서 저녁밥을 먹고 나오 라고 말하여 만손이가 집에 들어와서 저녁밥을 먹기 시작하자 곧 그 어멈이 큰 쇠를 데리고 들어왔다. 22 만손 어멈이 들어올 때 건넌방 앞에서 “상제님, 큰쇠 여기 왔습니다.” 하고 소리쳐서 한온이가 방 앞문을 열고 내다보니 큰쇠는 방 앞을 지나서 마루로 올 라가고 만손 어멈만 방 앞에 섰다가 웃으면서 “늙은것이 찬바람맞이에 나가 섰 느라고 혼났습니다.” 하고 공치사를 하였다. “누가 놈이 할멈더러 치운 데 나 가라구 했소.” “아들 대신 나갔지요.” “만손이가 여태껏 나가 섰다가 지금 막 들어왔는데 놈이 할멈이 무슨 요공이요.” “상제님 방문 닫구 들어앉아 기 셔두 바깥일을 용하게 아시네.” “방문만 닫혔지 내 귀야 닫혔나.” 큰쇠가 마 루로 난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한온이가 만손어멈더러 “치운데 혼났으 니 어서 안방 영감 옆에 가서 몸을 녹이우.” 하고 웃음 섞어 말한 뒤 앞문을 닫고 돌아앉아서 큰쇠의 절을 받앗다. “그 동안 몰라보게 컸구나. 내가 너를 정 초에 보구 거의 일년 만에 보는가부다.” “첨지 영감 상사 때 할미하구 같이 가서 뵈었습지요.” “그랬던가?” “창황중에 보셔서 잊으셨나 보이다.” “그 런게지. 네 저녁을 먹구 왔느냐?” “할미가 빨리 가 다녀오라구 재촉해서 저녁 두 못 먹구 왔습니다.” “그럼 저녁을 먹어야겠구나.” “아니올시다. 조그만치 입시는 하구 왔으니까 가서 먹겠습니다.” 한온이가 안방을 향하고 놈이 어멈을 부르니 만손이 안해가 녜 대답 소리 떨어지며 곧 건너왔다. “이애가 저녁을 안 먹었다는데 먹일 밥이 있겠나?” “숫밥은 없지만 상제님 얼마 안 잡수신 대궁 이 그대로 있습니다.” 만손이 안해가 한온이의 묻는 말을 대답한 뒤 곧 큰쇠를 돌아보고 “놈이 아버지가 지금 저녁을 먹으니 와서 같이 먹어라.” 하고 말하 였다. 큰쇠가 처음에 싫다고 사양하다가 한온이가 가서 먹으라고 이르고 만손이 안해가 가자고 끌어서 마침내 안방으로 건너갔다. 얼마 동안 지난 뒤 만손이가 큰쇠를 데리고 건너왔다. 만손이는 화로의 숯불을 부저로 집어가지고 불어서 등 잔불을 당겨놓고 곧 가려고 하는 것을 “왜 가려구 그러나. 저애 이야길 같이 듣세. 게 앉게.” 하고 붙들고 큰쇠는 두 손길 맞잡고 섰는 것을 “너두 게 앉아 라.” 하고 이른 다음에 한온이가 큰쇠를 보고 “내가 네게 물어볼 말이 많다.” 하고 말문을 허두를 내었다. “서림이란 사람을 너 아느냐?” “알다뿐입니까 늘 보는걸요.” “서림이가 지금 어디 있느냐?” “저의 댁에 있습지요.” “너 의 댁에서 하는 일은 무어냐?” “하는 일은 아무것두 없습니다. 사관청의 대령 포교들 이야기 소일이나 해줍지요.” “서림이의 식구는 어디 있느냐?” “저의 댁 행랑에 있습니다. 그 아들은 청석골 떨어져 있다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 었습니까?” “죽긴 왜 죽어.” “서림이가 식구들 데려올 때 아들이 안 온 것 을 보구 자식 하나 있던것 죽였다구 펄펄 뛰더랍니다.” “그 자식이 볼모루 잡 혀 있을 줄은 생각 못하였던 게지.” “서림이 아들을 청석골서 볼모루 잡아 두 었습니까. 그럼 서림이는 처자를 이쪽 저쪽 양쪽에 볼모 잡힌 셈이구먼요. 저의 댁 영감께서 서림이의 안해 딸 그외의 그 처가 떨거지까지 행랑에 두신 것이 역 시 볼모 잡으신 게지 별겝니까.” “서림의 처가 떨거지라니, 그 장모된다는 노 파두 너의 댁 영감이 붙들어 두셨느냐?” “서림이의 처남 내외두 댁 행랑에 와 있습니다. 그 처남이 서울와서 좀도둑질하다가 좌포청에 잡혀 갇힌 것을 서림이 가 빼놓으러 왔다가 저마저 잡혔답지요? 그 처남을 저의 댁 영감께서 백방으루 내놓아 주실 때 댁 행랑에 와 있을 조건으루 내놓아 주셨답니다. 행랑에 있으면 떨어 내쫓을 것들인데 뒤쪽으루 행랑에 끌어들이시는 걸 보면 서림이 도망 못하 게 볼모 잡아 두신게 환하지 않습니까?” “너의 댁에서 그것들 요를 먹이느냐? ” “서림의 처남은 저이 가지구 온 걸루 끓여먹구 지내구 서림이만 댁에서 먹 을 걸 대주시는갑디다. 서림이 내외는 행랑에 두셨지만 행랑 원역두 안 시키십 니다.” 안방문을 여닫는 소리가 나고 곧 이어서 마루에 콩콩 발소리가 나더니 만손 어멈이 건넌방 밖에 와서 "애 어미가 너를 좀 보잔다. 잠깐 나오너라.“하 고 만손이를 불러내었다. 23 만손이가 일어서 나간 뒤 한온이는 큰쇠더러 “대체 서림이가 잡힐 때 귀순하 겠다구 먼저 내통해 놓구 잡혔다더냐?”하고 말 묻기를 다시 시작하였다. “그 런 말씀은 듣지 못했는걸요.”“잡힌 뒤에 귀순한다구 했으면 포청에서 어리무 던하게 그걸 받아줬을 리가 있느냐.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었겠지.”“서림이가 엄 무엇이라구 변성명하구 서울 와서 있다가 잡혔습지요. 포교들은 서림이루 알 구 잡았는데 서림이가 서림이 아니구 엄 무엇이라구 내뻗다가 매를 맞게 되니까 서림이 말이 영부사댁 도차지가 저의 이성사촌이니 불러 물어봐 다라구 하더랍 니다.”“그래서?”“그날 밤 당번 부장이 서림이 거짓말에 속아서 매두 때리지 못하구 간에두 집어넣지 못했답니다.”“그래.”“서림이가 거짓말루 매를 모면 하구 나중에 포교들을 보구 하는 말이, 제가 들면 서림이뿐 아니라 청석골 대장 임 아무개까지 잡을 도리가 있는데 포도대장을 뵙게 해주면 포도대장께 다 말씀 하겠다구 하더랍니다.”“그래.”“저의 영감께서 포교들이 와서 여쭙는 말씀을 들으시구 서림이를 댁으루 데려오라구 분부하셨습니다.”“그래.”“서림이가 영 감마님 앞에 오더니 바루 제 성명이 서림이라구 직토하구 저를 일 년 동안만 용 서해 주시면 일 년 내에 임 아무개를 잡아 바치겠다구 말씀합디다.”“저런 죽 일 놈 봐. 그래서?”“구월에 장수원서 모인 것이며 지난 달에 마산리서 모일 것을 서림이가 다 고해바쳤습니다. 저의 댁 영감께서 이튿날 예궐하셔서 상감께 품하니까 상감께서 귀순시키라구 처분하셨답디다. 그러구 마산리 일 난 뒤에 상 감께서 서림이를 아주 저의 댁 영감께 맡기셨답디다.” 큰쇠가 서림이 귀순한 곡절을 막 다 이야기하고 났을 때 만손이가 안방에서 다시 건너와서 한온이는 만손이를 보고 “서림이란 놈이 제가 섬기던 대장을 조 정에 잡아 바치기루 하고 귀순했다네. 그놈 죽일 놈 아닌가.”하고 말한 뒤 “서 림이 잡힐 때 뒤에서 밀고한 사람은 누구라더냐. 너 혹시 들었느냐?”하고 큰쇠 더러 물었다. “전날 댁에 있던 서사가 포교에게 귀뜸해 주었단 말이 있습디다. ”“옳지. 최가가 좌포청에 등을 대구 지냈다더라.”“포교 몇 사람하구 친하게 지냈는갑디다.”“이번 형조에 잡힌 걸 좌포청에서 빼놓으려구 주선해 줄 듯두 한데 그런 말 없더냐?”“그런 말씀 듣지 못했습니다. 대체 포교들 친하다는 건 등치구 배 문질러 주는 것인데 소득 없는 일을 알뜰히 주선해 줄리 없지요. 그 러구 포교들이 주선해 줄 힘이나 웬 있나요.”“다 같은 배은망덕하는 놈들이지 만 최가는 서림이보다두 더 죽일 놈이다. 최가 이야긴 고만두구 서림이 이야기 나 더 듣자. 너의댁 영감이 서림이를 신임하신다니 그게 참말이냐?”“그건 헛 말입니다. 신임하실 것 같으면 맘대루 다니지두 못하게 하실 리가 있습니까? 서 림이가 포교를 안동하지 않구는 대문 밖에를 못 나갑니다.”“어디루 도망할까 봐서 맘대루 나가진 못하게 하더라두 가끔 불러서 일두 의논하구 계책두 물어보 구 한다니 그게 신임하는 게지 무어냐?”“그런 일두 별루 없습니다.”“우선 이번 순경사 나가는데 너의 댁 영감이 서림이 시켜서 계책을 내어 바치게 했다 든구나.”“그걸 상제님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단다. 내가 그걸 아는 게 괴상하냐?”“저의 댁에서두 아는 사람이 대령 포교 둘하구 세간 청지기하구 저하구 넷 뿐인데 먼데 기신 상제님께서 아셨으니 괴상한 일 아닙니까? 저의 댁 영감께서 어느 날 밤중에 서림이를 불러들여서 데리구 말씀 하시는데 수방청에서 들은 사람은 세간 청지기하구 저뿐입니다. 세간 청지기는 듣다 말구 졸리다구 누워 잤지만, 저는 상제님 가 기신 데 일인 줄 아는 까닭에 가만히 앉아서 끝까지 다들었습니다.”“네가 다 들었어? 들은 대루 자세히 이 야기해라. 어디 들어보자.”한온이의 무릎이 절로 앞으로 나왔다. 24 “그날 밤에 남판윤 대감께서 오셔서 댁 영감마님하구 두 분이 약주를 잡수시 며 밤 늦두룩 이야기를 하시구......”“가만 있거라, 남판윤이 누구냐?”“그 양 반이 저의 댁 영감마님 바루 전에 좌변 대장으루 기시다가 장통방에서 청석골 대장을 잡지 못하구 놓친 까닭으루 벼슬이 갈리셨다든구먼요.”“남치근이 말이 구나. 그래 그가 지금 한성판윤이냐?”큰쇠가 대답을 하기 전에 만손이가 앞질 러서 “한성판윤 하신 지 인제 한 보름 됐습니다. 상감께서 그 인재를 아끼셔서 특별히 판윤을 시키셨답디다.”하고 대답하여 한온이는 만손이를 돌아보며“특 지 제수일세그려.”하고 고개들 한번 끄덕인 뒤 다시 큰쇠를 보고 “그래 남판 윤이 와서 너의 댁 영감하구 무슨 이야기를 하더냐?”하고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지 그건 모릅니다. 두 분이 정분이 좋아서 가끔 서루 시방들 하시니까 별 이야긴 없었겠지요. 지가 약주상 들구 들어갈 때는 봉학이 가 누군지 봉학이란 사람의 이야기들을 하셨는갑디다.”“봉학이 이야길 무어라 구 하더냐?”“저는 이야기 끝만 조금 들었습니다. 남판윤 대감이 봉학이 버린 책망은 전 병판이 당연히 받아야 옳으니 하구 말씀하니까 저의댁 영감은 말씀이 책망을 받기루 하면 좌상 대감두 노놔 받으셔야 옳을걸 하구 두 분이 서루 웃으 시더구먼요. ” “이야기 갈래가 져서 못쓰겠다. 그래 너의 댁 영감하구 남판윤 하구 이야기들 하구 어떻게 했어?” “남판윤 대감은 약주 잡숫구 이야기하시다 가셨지요. 가실 때 밤이 늦어서 저의 댁 영감께서 취침하실 때가 지났는데 취침 하시지 않구 대령 포교를 불러서 서림이를 데리구 들어오라구 분부하십디다.” “그런 잔사설은 안 들어두 좋으니 서림이가 내어 바친 계책이나 자세 이야기해 라.” “서림이 말씀한 계책이 두 가진데 한 가지는 마산리 갔던 선전관이 이런 계책을 썼더면 성공했으리라구 말씀한 것이구, 또 한 가지는 이번에 황해도 순 경사가 이런 계책을 쓰면 성공할 듯하다구 말씀한 것입니다. 저이 같은 아무것 두 모르는 소견에두 두 가지 계책이 다 용한 것 같습디다.” “순경사가 나가서 어떤 계책을 쓰면 성공한다구 말하더냐?” “청석골 쳐들어가는 데 한쪽은 틔워 두구 열 군덴가 아홉 군데루 쳐들어가면 청석골 대장과 두령들이 죄다 나오게 된다나요. 대장과 두령들을 멀리 끌어내구 그 틈에 정병 일대를 틔워둔 쪽으루 들여보내서 소굴에 남아 있는 처자들을 잡아다가 송도 옥에 가둬 두면 청석골 대장과 두령들이 처자를 빼가려구 송도를 치러올 테니 그때 송도 유수와 황해도 순경사가 앞뒤루 에워싸구 잡으면 대개 잡힐 터이구 만일 잡지 못하구 놓치거든 그 처자들을 서울 전옥에 갖다 두구 전옥 파옥하러 오기를 기다리자구 계책을 냅디다.” 식구들은 잡아다가 미끼삼자는 계책이 궁흉극악한 데 한온이는 기가 막혀서 한참 동안 입을 벌리고 말을 못하였다. “그러구요, 선전관이 썼더면 성공할 뻔 했다는 계책은 제 생각에 더 용합디다.” 한온이는 지난 일에 대한 계책은 들으 나마나로 여기다가 큰쇠말에 끌려서 “그 계책마저 이야기해라. 어디 들어보자. ” 하고 말하였다. “서림이는 관군 오백 명이 마산리루 몰려간 게 잘못이라구 타박하구, 그러구 자기 계책을 말하는데, 관군 오백 명 중에서 활 쏘는 군사들을 백 명이구 이백 명이구 남겨놓구 그 나머지 군사루 청석골 소굴을 가서 쳤으면 청석골 대장과 두령들이 급한 기별을 듣구 허둥지둥 쫓아왔을 테니 그 오는 길 목에 활 쏘는 군사들을 매복시켰다가 일시에 내달아서 화살을 비 퍼붓듯 퍼붓게 했으면 아무리 천하 장사라두 죽거나 잡혔지 별조없었으리라구 합디다.” 소명 한 큰쇠가 더 용하다고 말하더니 한온이 생각에도 계책으로 빈틈 없는 품이 먼 저 들은 궁흉극악한 계책보다 더 나은 것 같았다. 한온이가 서림이 일을 들어보고 싶은 대로 대강 다 물어본 뒤 “이 다음에라 두 서림이가 어디를 가게 되든지 무슨 계책을 내서 바치든지 하거든 아는 대루 곧 이 집주인에게 알려두어라.” 하고 큰쇠에게 당부하였다. 큰쇠가 밤이 늦기 전에 가겠다고 일어나려고 할 때 “상제님 뫼시구 이야기나 좀더 해라.” 하고 만손이가 붙들었다. 25 만손이의 붙드는 까닭을 큰쇠는 고사하고 한온이도 몰라서 “일찍 가게 두지 왜 붙드나?” 하고 물으니 만손이는 주저주저하다가 “상제님 잡수실 밤참을 만 든다기에 큰쇠 먹일 것까지 만들라구 일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한온이가 만손이더러 “밤참은 무슨 밤참이야. 일찍 자는 게 좋은걸.” 하고 말한 뒤 큰쇠 를 보고 “이왕 밤참을 만든다니 먹구 가려무나.” 하고 일렀다. “언제 밤참을 먹구 있습니까. 곧 가야겠습니다.” 큰쇠는 한온이에게 말하고 “곧 먹구 가게 해줄 테니 가만 있거라.” 만손이는 큰쇠더러 말하였다. 큰쇠가 만손이에게 붙들려서 밤참 냉면을 먹고 한온이한테 간다고 인사할 때 한온이가 상목 한 필을 손 가까이 내놓아 두었다가 큰쇠 앞으로 밀어 내주며 “ 이것 가지구 가서 너의 할머니 찬수 공궤나 해라.” 하고 말하니 큰쇠는 “황송 합니다.” 하고 받았다. 큰쇠가 준비하여 가지고 온 손초롱에 불을 켜서 한손에 들고 상목을 한옆에 끼고 나가다가 문간에서 따라나간 만손이를 보고 “순라잡 힐 염려는 없지만 밤에 상목을 가지구 가는 건 아무래도 재미가 좀 적으니 맡아 뒀다 주시우.” 하고 상목을 맡기고 갔다. 한온이가 생각도 못한 큰쇠에게 서림이 계책을 자세히 들어서 그만하면 서울 온 보람이 넉넉하므로 덕신이 아비의 장담 하회는 기다리지도 않고 이튿날 새벽 일찍 떠나가려고 맘을 먹고 큰쇠 보내고 들어오는 만손이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내가 내일 일찍 떠나가겠으니 새벽밥을 좀 시켜 주게” 하고 이른 다음에 “ 자네가 걸음 잘 걷는 황씨를 전에 내게서 더러 보았지. 이 다음에 서울 알아볼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을 자네게루 보낼 테니 자네가 알 수 있는 대루 알아서 기 별해 주게. 그러구 덕신이 어른이 내일 오거든 내가 급한 기별을 받구 떠나갔다 구 말해 두게.” 하고 뒤일을 부탁하니 만손이가 “녜,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 답하고 끝으로 “놈이 혼인 부조는 이 다음 편 있을 때 보내겠지만 내가 이번에 가지구 온 상목이 온필은 다섯 필뿐인데 그 중의 세 필이 저기 남았으니 우선 급한 혼수 장만에 보태 쓰게.” 하고 말하니 만손이가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상목은 가지구 가시다가 길에서 쓰십시오.” 하고 사양하였다. “길에서 쓸 일 없네. 노수는 자투리가 따루 있으니 염려 말게.” “저이 식구 지금 사는 것이 통히 상제님께서 주신 건데 상목 서너 필을 안 받겠다구 사양할 리 있습니까. 그렇지만 상제님께 염반 몇 끼 해드리구 받기는 참말루 황송합니다.”“밥값으 루 친다면 자네 집 밥값은 한 끼 한 동씩 쳐주어두 내가 아깝지 않겠네.” 민손 이는 종시 맘에 미안한 듯 아비 어미에게 꾸지람을 들은 것이라고, 더구나 처에 게 나무람을 받을 것이라고 중언부언하는것을 그렇게 여러 말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고 한온이가 나무라서 말을 더 못하게 하였다. 이튿날 새벽 파루 친 뒤 한온이가 만손이 집 식구들과 작별하는데 만손이 부 모는 살아서 못 만나겠다고 말하며 질금질금 울고 만손이 아내는 말은 그렇게 안하나 다시 못 만날 작별같이 눈에 눈물이 듣거니 맺거니 하였다. 교군꾼들이 상목 댓 필 가벼운 짐이나마 올 때 돌려 지던 집이 없어져서 몸이 거뜬하고 하루 동안을 갑갑하게 갇혀 앉았다가 나와서 맘이 시원하고 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발이 가벼워서 가까우면 5리 한참 멀면 10리 한참을 놓았다. 서울서 떠나던 날은 고양 지나 파주 와서 중화하고 장단읍을 지나 어룡개 나와 서 숙소하고 다음날 송도를 지날 때 청석골 소식이 궁금하여 김천만이 집에를 들러서 순경사가 해주로 가서 도중이 아직 무고한 것을 알고 청석골로 나오니 해가 아직 점심때가 못되었었다. 한온이가 산에 들어오는 길로 바로 꺽정이 사랑으로 와서 마침 혼자 있는 꺽 정이를 보고 큰쇠에게 들은 이야기를 보탤망정 빼지않고 다 이야기하였다. 꺽정 이가 한온이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 “그놈들의 계책을 안 바엔 우리두 대책을 의논해서 세워야겠다.” 말하고 곧 신불출이와 곽능통이를 불러서 여러 두령들 에게 점심 먹고 도화청으로 모이란 전령을 돌리라고 분부하였다. 26 도회청은 벽도 없고 문도 없는 사발허통한 대청인데 뒤와 양옆은 휘장이나 꽉 둘러쳤지만 앞은 그대로 터놓아서 춥기가 한데와 별로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추위,더위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꺽정이가 자기 생각만 하고 겨울에도 매일 조사를 여기서 보고 중대한 일 있을 때 좌기를 여기서 하는 까닭에 청 밖에 섰 는 두목과 졸개는 말할 것 없고 청 안에 앉는 두령들도 덜덜 떨 때가 없지 아니 하였다. 이 날은 날씨도 잔풍하고 남향 대청에 낮볕이 들이쬐어서 도회청 안이 그다지 춥지 않건만 낫살 먹은 오가는 추워 죽겠다고 꺽정이에게 사정하고 화로를 갖다 놓고 쬐었다. 여러 두령이 하나 빠진 사람 없이 다 모인 뒤 꺽정이가 신불출이 와 곽능통이더러 도회청 근처에 오는 사람을 금하라고 분부하고 한온이더러 서 림이 계책을 여러 두령이 듣게 이야기하라고 명하여 한온이는 처음에 두 가지 계책만 대강 이야기하려고 하다가 서울 갔다온 이야기를 자세 듣기 원하는 두령 이 많아서 마침내 먼지 꺽정이에게 이야기한 대로 한번 다시 되풀이하였다. 꺽 정이가 한온이의 이야기 끝나기를 기다려서 “서림이놈의 계책이란 걸 다 들었 으니 인제 대책을 생각들 해서 말해 보라구.” 하고 두령들을 돌아보았다. 여러 두령이 다들 잠자코 있는 중에 오가가좌중에 들떼놓고 “나이값으루라두 내가 먼저 한마디 할씀하지.” 하고 말한 뒤 곧 이어서 “첫째 관군이 여러분을 멀리 끌구 나거려구 꼬이거든 그 꼬임을 받지 말구, 또 둘째 관문이 한쪽을 틔워놓거 든 그 틔워놓는 쪽을 더 경계하면 서림이 꾀가 허사가 되지 별수 있겠소." 하고 대책을 말하였다. 오가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봉학이가 고개를 가로 흔들고 "관군 이 우리를 꼬이다니, 우리더러 뒤쫓아나오라고 일부러 도망하는 체한단 말 아니 겠소? 일부러 도망하는 체하다가 뒤쫓지 않으면 도루 앞으로 대들 것은 정한 일 인데 도망하는 것 뒤쫓지 않을 수는 있지만 앞으루 대드는 걸 막지 않을 수야 있소? 그러구 관군이 가령 열 길루 쳐들어온다구 하구 우리 도중 상하 일백오십 여 명이 열 길루 갈려나간다면 한 길에 불과 열댓 명씩 나가게 되겠구려. 관군 의 쳐들어오는 길두 나가 막을 사람이 부족한데 쳐들어오지 않는 길까지 경게하 구 있을 사람이 남을 수 있겠소? 도대체 이번에 관군이 얼마나 올 줄루 생각하 시우? 내 생각엔 적어두 몇천 명이 올 것 같소. 우리 칠팔 인이 마산리에 모이 는 걸 잡으려구 자그마치 오백 여 명이나 왔구 오백 여 명이 와서두 이를 보지 못했으니까 이번 우리 소굴을 치러 오는 데는 몇천 명이 오지 않겠소? 순경사가 만일 단단히 준비하면 엄청나게 많은 군사를 거느리구 올는지두 모르겠소. 순경 사가 금교역말 같은 데 와서 유진할 듯한데 금교역말에는 오지 않구 해주 감영 으루 감사를 보러 간 것이 준비를 단단히 차리는 속인 듯싶소. 엄청난 대군이 올는지 모르지만 줄잡아서 이 삼천 명 올 샘 잡구 한 길에 이 삼백 명씩 열 길 루 쳐들어온다면 우리가 각각 두목 졸개 여남은씩 데리구 나가서 막을 수 있겠 소? 이 삼백 멍을 짓치고 빠져나가기두 쉽지 않거든 이 삼백 명을 못 들어오게 막기가 어디 쉽소. 막아서 뭇 들어오는 길이 더러 있더라두 여기까지 들어오는 길이 못 들어오는 길보다 더 많을 줄 알우. 그러구 보면 관군이 여기를 우리 몰 래 들어오는 건 차치물론하구 우리 알게두 들어올 것 아니오." 하고 긴말로 오가 의 대책을 반박한 끝에 “내 생각엔 식구들을 어디 안전한 데루 피신시켜 놓구 서 관군이 들어올 때 열 길루 들어오거나 스무 길루 들어오거나 우리는 일백오 십여 명이 한 길루 나가서 한 길씩 물리쳐서 다 물리치면 물론 좋구 그렇지 못 하면 목숨인들이라두 도망하는 게 상책일 듯하우.” 하고 자기의 대책을 말하니 다른 두령이 거지반 다 그 대책이 좋다고 찬동들 하였다. 여러 두령뿐 아니라 꺽정이도 이봉학이의 대책을 언짢진 않게 여기나 생각에 식구들을 보내 둘 만한 곳이 없어서 “안전한 데가 어디야. 마땅한 데 생각나는 데가 있나?” 하고 이 봉학이더러 물었다. 27 이봉학이는 꺽정이가 그런 말을 물을 줄 미리 알고 기다린 것같이 꺽정이의 말이 떨어지자 곧 “우리 요전 가서 하룻밤 자구 온 자무산성이 어떨까요. 더 마땅한 데가 없으면 거기두 잠시 피난처루 좋을 줄 압니다. 우리 식구들 가 있 는 곳을 관군두 알아선 안되지만 첫째 서림이가 몰라야 안전합니다.” 하고 대 답하니 꺽정이가 이윽히 생각하다가 “자무산성이 잠시 피난처는 될는지 모르나 여러 집 식구들이 가서 당장 거접할 데가 없는 걸 어떡하나?” 하고 말하였다. “집이 십여 호나 되니 원거인들만 어떻게 처치하면 우리 식구들이 잠시 거접이 야 못하겠습니까?” “원거인들을 어떻게 처치하잔 말인가. 광복산 처음 갔을 때처럼 모두 죽여 없애잔 말인가?” “죄없는 백성들을 죽일 것 있습니까? 어디 든지 가서 집 사가지구 살 만한 밑천들을 주어 보내두 좋겠지요.” “그럼 소문 이 나지.” “만일 소문들을 내면 어디든지 쫓아가서 집안을 도륙낸다구 을러 보내지요. 그럼 소문들을 못 낼 겝니다. 소문낼 것이 정히 염려되면 토막나무집 을 몇 채 지어주구 산성 안에서 밖엔들을 못 나가게 붙들어 주지요.” “그놈들 이 안식구들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것 같은가?” “우리 중의 누구든지 하나 안 식구들을 따라가 있을 것 아닙니까?” “글쎄”하고 꺽정이가 다시 생각하여 보 는 중에 “안식구들 갖다 둘 만한 곳을 내가 한 군데 말씀하리까?” 하고 이춘 동이가 말하였다. 꺽정이가 이춘동이를 돌아보며 “어디?” 하고 묻는데 여러 두령의 눈도 이춘동이에게로 모이었다. “해주 박대장 기신 데가 어떱니까? 내 생각엔 그만한 데가 없을 것 같습니다. 박대장은 의기가 태산 같은 분이라 전이 라두 여기 대장께서 위급한 때 식구를 좀 맡아달라구 하시면 못한단 말을 안하 실 텐데 지금은 더구나 두 분이 겹사돈을 정하신 터이니 싫다실 리 있습니까. 두말 않구 맡아서 자기 식구같이 보호해 주실 겝니다.” 하는 이춘동이 말에 꺽정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나서 “식구들을 연중이 노 인에게루 보내는 게 좋겠네.” 하고 이봉학이를 돌아보니 이봉학이도 자모산성 주장을 고집하지 않고 “거기가 좋겠습니다.:” 하고 찬동하였다. 꺽정이가 다시 이춘동이를 보고 “식구들을 해주루 보내자면 자네가 먼저 가서 사정을 이야기 해야겠네.”하고 말하니 “내행들 갈 때 내가 배행으루 가게 되면 그때 가서 이 야기해두 좋습니다.”하고 이춘동이는 대답하였다. “그러면 자네는 식구들 갈 때 따라가서 아주 거기 눌러 있을 텐가?” “내가 무재무능한 위인이지만 사람 부족할 때 충수라두 해야 하지 않습니까. 내행 배행을 가라구 하시면 내행들 데 려다 두구 곧 오겠습니다.” “여러 길루 갈려나가지 않으면 사람이 부족할 것 없으니까 자네는 거기 가서 식구들 봐주구 있는 게 좋겠네.” “그건 하라시는 대루 하겠습니다.” 이춘동이 말끝에 한온이가 꺽정이를 보고 “제가 대장께 말씀 한마디 여쭐 것이 있습니다.”하고 말하여 “무슨 말?” 하 고 꺽정이가 물었다. “이런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기는 부끄러운 일이나 저 루 말씀하면 접전할 때 여기 있어야 여러분을 도와 드리긴 고사하구 되려 여러 분께 누를 끼칠 위인이니까 저 이두령과 같이 가서 식구들이나 보호하구 있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온이의 말을 꺽정이는 웃으며 듣고 “그렇게 해라. ” 하고 선뜻 허락하였다. 28 대장과 두령들의 식구 수효를 저저히 쳐보면 꺽정이의 식구는 애기 어머니 모 녀와 백손 어머니 모자에 소홍이까지 다섯이고, 이봉학이는 소실과 그 소생 세 살 먹은 아들과 두 식구요, 박유복이도 안해와 네살 먹은 딸과 두 식구요, 황천 왕동이도 역시 안해와 젖먹이 아들과 두 식구요, 배돌석이는 단 내외뿐이라 안 해 한 식구요, 한온이는 식구가 제일 많아서 서모와 형과 형수와 조카와 안해와 큰 첩과 작은 첩과과 모두 일곱이요, 이외에 남은 두령 오가와 곽오주와 김산이 는 다 딸린 식구 없는 단신들이었다. 이상 식구가 도합 스물 네 명인데 이찬동 이와 한온이와 의원 허생원을 따라보내면 셋 모자라는 삼십 명이고, 두목과 졸 개들의 처자 사 십여 명을 함께 보내면 칠십 여 명이 하나가 넘지 않을 리가 없 었다. 조그만 산골 동네에 칠십 여 명이 들어가면 다른 건 고만두고 우선 방사 가 부족하여 다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라 두목과 졸개들의 처자는 보내지 말고 그대로 두자는 의논도 났었으나 두령들의 식구는 다 피난시키고 두목과 졸개들 의 처자는 피난시키지 않는다면 군심에 영향이 미칠 터이므로 각 집에서 하인같 이 부리는 졸개들의 처자는 식구들과 같이 보낼 수밖에 없고 그 외의 삼십 여 명은 다 내외 내외 껴서 양덕, 맹산, 성천 세 군데로 나누어 보내자는 의논이 돌 아서 그대로 작정이 되었다. 이렇게 많이 줄이고도 해주로 보낼 사람 수효가 어 른 아이 합하여 근 사십 명인데, 게다가 도중 공용 재물과 각집 세간 알천의 물 건짐이 바리로 여러 바리 될 터이므로 전날 광복산 피난 갈 때와 같이 관원의 내권, 선비의 안해, 촌가 여자 가지각색으로 차려서 띄엄띄엄 떠나 보내기로 준 비할 것까지 다 이야기가 되었다. 꺽정이가 좌기를 파하고 일어나려고 할 때 아 들 수남이를 맡아가지고 있는 박유복이가 꺽정이더러 “수남이두 식구들 갈 때 같이 보내시지요?” 하고 물으니 꺽정이는 대번에 고개를 가로 흔들며 “서가의 자식은 우리 있는 데 두어야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 하고 대답하였다. 꺽정이 가 자기의 의향을 돌리지 않으면 백 사람이 천 말을 하여도 다 빈말이지만 수남 이를 해주로 보내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 두령이 하나도 없었다. 도회청 회의가 끝난 뒤 권속들만 피난시킨다는 전령을 돌리고 즉시 준비에 착 수하여 이틀 동안 집마다 수선하고 사람마다 분주하였다. 제사흘 되는 날 꼭두 새벽부터 다음날 밤중까지 해주로 보내는 일행과 평안도로 보내는 두목,졸개의 남진계집들을 다 떠나 보냈다. 이춘동이,한온이 외의 황천왕동이도 배행으로 해 주를 가서 셋만 빠지고 뒤에 남은 여러 두령들이 맨 끝에 떠나는 사람들을 보내 고 꺽정이 사랑에 들어와서 모여 앉았는 중에 박유복이 집에 있는 졸개가 와서 수남이가 도망하였다고 고하여 다른 두령들도 놀라긴 좀 놀랐지만 박유복이는 맡은 책임이 있어 깜짝 놀라며 마루로 뛰어나와서 졸개더러 말을 물었다. “너 희들은 어디 가서 무어 했느냐?” “소인이 뒷간에 갔다와서 보온즉 앉았던 명 녹이는 누워서 잠이 들었솝구 누웠던 수남이놈은 일어나서 어디루 갔솝디다.” “뒷간엘 가든지 어딜 가던지 명녹이더러 일러두고 갈 것 아니냐. 그래 집안이 나 다 찾아봤느냐?” “소인이 명녹이를 깨워가지구 나서서 찾아볼 만한 데는 다 찾아 봤습니다.” 방안에서 꺽정이가 다른 두령들더러 “조그만 놈이 지금 어둔 밤중에 도망하면 얼마나 멀리 도망했겠느냐. 곧 삼사십 명이구 오륙십 명 이구 풀어서 등불,횃불을 가지구 산 안팎을 뒤지게 해라.” 하고 말을 일렀다. 수남이가 서산 파수꾼에세 들키지 않고 서산을 넘어서 탑고개 나가는 길로 천 방지축 도망하다가 일 마장도 못 나가고 붙들러 왔다. 꺽정이가 수남이 붙들어 왔단 보고를 듣고 “고눔 어린 눔이라구 그래루 두어선 못쓰겠다. 지금 당장 물 고를 올려버려라.” 하고 분부를 내리었다. 서림이 아들 수남이는 구경 아비의 죄로 죽었다. 29 황해도 순경사는 그 동안 어디 가서 무얼 하고 있었던가. 황해도 순경사가 서울 서 떠나던 날 파주 숙소하고 다음날 개성 숙소하고, 개성서 숙소하던 이튿날은 유수와 이야기하다가 점심대접까지 받고 다 저녁때 떠나서 벽란도 나와 숙소하 고 다음날 숙소참은 연안이 알맞았으나 부사의 등대 범절이 태만하여 괘씸할뿐 더러 이튿날 해주를 대기가 어려워서 홰를 잡히고 삽다리 와서 숙소하고 그 다 음날 해질 무렵에 해주를 들어왔었따. 감사가 노문을 보고 순경사의 사처와 군 사들의 숙소를 미리 정하여 놓고 중군을 5리 밖에서까지 마중을 내보내고 사처 에 와서 든 뒤 예방비장을 내보내서 엄동설한에 원로행역이 얼마나 수고되시느 냐고 위로 전갈을 하였다. 예방비장은 감사 김덕룡의 서족인데 이사중이 등과하 기 전에 같은 한량으로 한사정에 다니던 사람이라 오래간만에 서로 만나서 반기 었따. 예방비장이 전갈 나왔다가 눌러앉아서 얼마 동안 서회하고 들어갈 때 순 경사는 감사에게 석후에 들어가서 보입는다고 답전갈하였다. 선화당에 등촉이 휘항 하고 배반이 벌어졌다. 감사가 성서한 주안으로 순경사 를 대접하는 중이었다. 선화당 수청외의 기생 사오 명이 좌우에 앉아서 청하한 노래와 번화한 웃음들ㅇ로 주흥을 돋우었다. 사오 명이 다 해주의 일등 기생이 라 얼굴이 어여쁘거나 태도가 아리땁거나 그렇지 않으면 노래가 명창으로 다 각 각 취할 모가 있었다. 여러 기생이 순경사 눈에 들려고 혹태도 짓고 혹 아양도 부리고 또 혹 추파로 정도 흘리는데 그 중의 한 기생만은 눈을 아래로 깔고 단 정히 앉아서 순경사의 얼굴도 별로 보지 아니하였다. 마치 순경사 인물을 맘에 차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저 얌전빼구 앉았는 년 술 한잔 부어라.” 분결 같은 두 손이 술잔을 들고 받기를 기다리었다. “한마디 있어야지.” 한 이가 보 일 듯 말 듯한 붉은 입술 사이로 나오는 나지막한 권주가 소리가 주안상 위에 떠돌았다. 순경사가 술을 받아 마시고나서 “너는 이름이 무엇이랬지?” 하고 물었다. “초운이라고 부릅니다.” “좋다, 초운이, 무산신녀가 네로구나. 그러나 하나 물어볼 것이 있다. 네가 아침의 구름만 되지 저녁의 비는 지을 줄 모르느 냐.” “남이 지어준 이름 뜻을 지가 어찌 아오리까.” 감사가 순경사를 보고 웃 으며 “영감이 양대운우에 뜻이 있으면 내가 영감을 위하여 일잔 바람을 도우리 다.” 하고 상없지 않게 농을 한 뒤 초운이더러 “너 오늘 밤에 순경사 사또 사 처에 가서 수청을 들어라.” 하고 분부하였다. 다른 기생들의 눈치는 초운이를 시새워하고 부러워하는 모양인데 초운이는 별로 좋아하는 기색이 없었다. 순경 사가 초운이의 기색을 보고 “내게 수청들기가 싫으냐? 싫거든 고마둬라.” 하 고 말은 웃으며 하는 눈치는 좋지 아니하였다. “하방 천기로 사또 같으신 귀인 을 뫼시는 것이 몸에 넘치는 영광이온데 싫다 할 리 있사오리까.” “그러면 순 상 사또 분부를 듣구 실심하는게 웬일이냐?” “사또께 실심한 것같이 뵈온 것 은 천성이 옹졸한 탓이외다.” “그건 둔사다. 그러나 네 둔사는 추가하지 않구 덮어두구 술이나 먹겠다. 자 또 부어라.” 맛있는 술과 재미있는 웃음에 밤이 가 는 줄 모르게 가서 어느덧 이슥하였다. 순경사가 감영에 들어올 때는 말을 타고 군사들을 앞뒤에 늘어 세웠었지만 사처로 나올 때는 통인을 초롱 들려 앞세우고 초운이를 뒤에 딸리고 걸어나왔다. 순경사가 사처에 나와 앉아서 대령 군사들을 물리고 초운이를 촛불 아래 앉히고 다시 보니 술자리에서 볼 때보다도 더욱 어 여쁘나 웃음에는 강작이 많고 미간에는 주름이 절로 잡히는 것이 속에 무슨 수 심이 있는 계집 같았다. 30 순경사가 점잖게 묻자면 “네가 무슨 근심이 있느냐?” 하고 물을 것을 실없 는 말로 “네 애부가 오늘 밤에 기다린다구 했느냐?” 하고 물으니 초운이는 대 답이 없었다. “어째 대답이 없느냐?” “어떻게 대답하올지 대답할 말씀을 생 각하는 중이올시다.” “지가 애부가 있다고 하오면 사또를 기망하는 것이옵고 없다고 하오면 사또께서 곧이 안 들으실 테니까 그래서 대답을 아뢰기가 어렵소 이다.” “그래 네가 애부가 없다는 걸 내가 잘못 넘겨짚었단 말이냐?” “바른 대로 아뢰자면 없다고 아뢸밖에 없소이다.” “전에는 있었구 지금은 없단 말이 냐?” “지금도 없고 전에도 없었소이다.” “그럼 아까 너의 감사가 수청 분부 할 때 실심한 건 무슨 까닭이며 지금 예 와서두 눈살을 펴지 못하구 앉았는 건 무슨 까닭이냐?” “지가 남과 같이 가식하는 재주가 없어서 속에 있는 근심 걱 정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엄적 못하는 까닭이외다.” “네 속에 무슨 근심 걱정이 있느냐?” “사또 앞에 구구한 사정을 아뢰긴 황송하오나 물으시니 대강 아뢰겠소이다. 지가 늙은 어미가 있사온데 어미는 재령 사는 오라비에게 가서 있솝구 저는 여기 사는 고모에게 얹혀 있소이다. 어미가 본래 다병한 사람이라 무슨 급한 병으로 방금 죽게 되었는데 죽기 전에 저를 한번 보아지라고 한다고 어제 전인이 와서 즉시 말미를 얻으랴고 청했솝더니 행수가 저하고 무슨 혐의가 있는지 중간에서 훼방을 놀아서 못 얻었소이다. 남의 자식 되어서 죽는 부모 가 슴에 못을 박아주면 살아서 무어 하오리까. 저는 지금 죽고 싶은 생각밖에 아무 다른 생각이 없소이다.” “친환에 말미를 안 주다니 그런 일이 어디 있겠느냐? 내가 내일 김사과에게 말해 주마.” “김사과라니요?” “예방비장 말이다.” “ 예방 나리 말씀 한마디면 며칠 말미는 고사하고 몇 달 말미라도 당장 허락이 날 것이외다.” “내일 어미를 보러 가두룩 해줄 테니 염려 마라.” 초운이 얼굴에 안심하는 빛이 나타나며 턱을 괴고 있던 손이 무릎 아래로 내려왔다. 이튿날 식 전에 감영 통인이 감사 전갈을 나왔을 때 순경사가 그 통인더러 “예방 나리께 바쁘신 일이 없거든 좀 나오시라구 말씀해라.” 하고 말을 일렀더니 통인이 들 어간 뒤 얼마 아니 있다가 예방비장이 나왔다. 밤 잔 인사 수작이 끝난 뒤 “내 가 자네게 청할 일이 하나 있네.” 하고 순경사가 말하니 “무슨 청입니까?” 하고 예방비장이 물었다. “저 초운이가 어머 병이 있어서 말미를 얻으려다가 못 얻었다네. 자네가 말해서 말미를 얻두룩 해주게.” “하룻밤을 자두 만리성을 쌓는단 말이 헛말이 아니올시다그려. 영감께서 특별 청하시는 일을 아니 들을 길이 있습니까. 영감 말씀대루 하겠습니다.” “내가 순상하구 공무를 좀 의논해 야겠는데 어트때쯤 좋겠나?” “어느때든지 좋을 줄 압니다. 그런데 영감께서 내일 떠나신다니 수일 동안 해주 구경이나 하시구 떠나시지요.” “공무가 바쁜 데 한만히 구경하자구 묵을 수야 있나.” “여기서 어디루 가실랍니까?” “재 령을 거쳐서 봉산으루 가겠네.” 예방비장이 초운이를 돌아보고 “네 어미가 봉 산 어디 있다지?” 하고 물어서 “아니올시다. 재령읍에 있습니다.” 하는 대답 을 들은 뒤 “그럼 좋은 수가 있구나. 오늘 밤까지 순경사 사또를 모시구 내일 행차 뒤에 따라가거라. 말미는 내가 오늘 얻어놓으마.” 하고 말하는데 순경사는 손을 홰홰 내저었다. “왜 그러십니까? 초운이 같은 이쁜 계집을 하루라두 더 보시는 게 좋지 않습니까?” "초운이는 이쁘기는 곧 궤어차구라두 가겠지만 순 경사가 도둑놈 안 잡구 기생 싣구 다녔다면 말썽스러운 양사에서 옳다꾸나하구 들구 나서라구.” “대론이 무서우면 내가 방지해 드립지요.” 예방비장의 실없 은 말을 “나는 자네가 그런 힘이 있는 줄은 몰랐네.” 순경사도 실없는 말로 말로 대답하고 실없는 말끝을 그대로 계속하여 “초운이를 오늘 제 어미게루 보 내주는 게 대론 방지하는 데 우물고누 첫술세.” 하고 말하니 “영감께서 정히 먼저 보내라시면 오늘 보내두룩 하겠습니다.” 하고 예방비장이 대답하였다. 31 재령군수가 순경사 온다는 노문을 본 뒤 백성들을 내세워서 연로의 치도를 시 키고 관속들을 내보내서 지경에 등대를 시키고 순경사의 사처를 친히 나와서 간 검하고 순경사의 조석 지공을 각별히 하라 색리에게 신칙하였다. 순경사가 이틀 밤을 해주서 자고 또 이틀길로 재령에 왔다. 재령읍에 들어올 때 해가 아직 높 이 있었으나 다음날 숙소참 봉산읍이 하룻길이 알맞은데 구태여 엇참을 댈 까닭 이 없으므로 재령읍에서 그대로 숙소하게 되었다. 순경사가 사처로 나와 보는 군수를 데리고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하기도 하며 듣기도 하다가 관청색의 진배 하는 저녁밥을 먹고 군수가 동헌으로 들어간 뒤 곧 취침하려고 의관을 벗을 때 기생 하나가 밖에 와서 문안을 드린닥 하여 불러들여 보니 곧 초운이었다. “너 이거 의외로구나. 그래 네 어미 병은 어떠냐?” “천행으로 좋은 의원을 만나서 병을 돌렸답니다. 지금 보아서는 죽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거 다행한 일이 다. 그래 저렇게 싱글벙글 좋아하는구나.”“저 좋아하는 속을 사또는 다 모르세 요.” “나 모르는 좋은 일이 또 무어냐? 말해라.” “싫어요. 말씀 안하겠어요. ” “버르쟁이 없이 굴지 말구 얼른 말해라.” “역정을 내시면 말씀하지요. 사 또를 다시 뵈니 좋아서 맘이 가득해요.” “네가 예 와서 말주변이 늘었구나. 해 주서는 묻는 말 대답두 변변히 못하더니.” “해주는서는 하루 통히 굶고 머리 싸고 누었던 끝이니 생기가 날 까닭이 있습니까.” “오늘 밤 생기가 난 때 다 시 한번 수청을 들겠느냐?”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입니다.” “네 자리옷을 가 져와야겠지. 사람 하나 불러주랴.” “지금 초저녁인데 어느새 취침하실랍니까. 길이 삐치셔서 곤하십니까?” “비가 오는 바람에 잠은 달아났지만 이왕 잘 차 비를 차렸으니 일찍 누워보자.” “약주 한잔 안 잡수시렵니까?”.“술이 어디 있느냐?” “잡수신다면 제가 나가서 한 병 사드들구 오겠습니다.” “술은 싫 지 않지만 치운데 나갈 것 없다. 고만드어라.” “자리옷도 제가 가서 찾아와야 합니다. 이왕 나가는 길에 사가지고 오지요.” “그럼 술만 몇잔 사가지구 오너 라. 안주는 찬합에 포쪽이 있다.”“지금 가서 한손에 술병 들고 한옆에 옷보퉁 이 끼고 오겠습니다.”초운이가 간 지 한식경이 못되어서 주안 한 상을 사람을 시켜 들려가지구 왔다. “이게 왠 주안이냐? 출처를 모르구는 안 먹겠다.” “제 가 사또께 드리려고 아가 올 때 오라비에게 부탁을 해두고 왔었습니다.” “네 오라비는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장교를 다닙니다. 사또께서 재령서 군사를 조발하자면 제 오라비도 사또 휘하에 따라가게 된다고 오라비는 은근히 바라는 모양이지만 도둑놈하고 접전한단 소리에 앓던 어미는 그렇게 될까봐 겁을 더럭 더럭 냅니다.” “너는 뉘 편을 드느냐. 어미 편이냐, 오라비 편이냐?” “제야 물론 어미 편입지요. 앓는 어미를 두고 전장에 가라고 오라비 편을 들 리가 있 습니까.” “그럼 네 오라비를 데리구 가지 말아달라구 나를 주안 대접하는게 냐?” “지가 사또께 술을 안 들이면 그만 청을 못합니까. 그런 정 밖의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야숙합니다.” “그럼 정으루 주는 술을 먹을 테니 상을 이리 가져오너라.” 순경사가 술을 서너 잔을 먹고 고만두려고 하다가 초운이 권에 못이겨 예닐곱 잔 가량 먹었다. 초운이가 주안상을 물려내서 들려가지고 왔던 사람을 주어 보낸뒤 순경사가 앞에 외서 “얼마 잡숫지도 않으시는 걸 공 연히 잠만 일찍 못 주무시게 해서 황송합니다.”하고 사과하듯 말하였다. 순경사 가 그 말대답은 안 하고 “자리옷은 어쨌느냐?”하고 물으니 “저기 있습니다. ”하고 초운이가 윗간 구석을 가리켰다. “옷을 바구어 입어라.”“주무실랍니 까? 그럼 먼저 누우십시오.” 초운이가 윗간에 내려가서 자리옷을 바꾸어 입는 동안 순경사는 눕지 않고 앉아 있다가 초운이가 다시 아랫간에 와서 촛불을 물 리려고 할때에 순경사가 아직 그대로 놓아두고 앉으라고 명한뒤 초운이의 무릎 을 당겨 베고 누웠다. 32 초운이가 순경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지가 이번 사또 덕택에 ”하고 말 을 내다가 별안간 “사또란 칭호가 듣기 좋으세요?”하고 딴소리를 물어서 “그 건 무슨 소리냐?”하고 순경사가 되물었다. “제 맘에는 사또라고 부르는게 영 감마님이라고 부르는 것만 못 할 듯해요. 정다워 들리지 않을 것 같아요. 인제부 터 영감마님이라고 부를까요?” “영감에 마님까지 받치지 않으면 더 정답지요. 그럼 영감이라고만 부를 테니 꾸중 마세요.” “오냐, 남 듣는 데만 그렇게 홀하 게 부르지 마라.” “남 듣는 데는 사또라 부르지요.” “그래 내 덕에 무에 어 쨌단 말이냐?” “영감 덕택으로 올에는 모녀 남매 한데 모여서 설을 쇠게 되었 세요.” “말미를 얼마나 얻었기에 여기서 설까지 쇠게 되느냐?” “한 달 얻었 세요.” “많이 얻었구나.” “아주 특별한 일이에요. 말미 못 얻게 훼방놀던 행 수년이 용심이 나서 죽으려고 하겠지요.” “네 어미 병이 나아두 말미 기한을 말미 기한을 다 채우구 갈 테냐?” “그러먼요. 그 얻기 어려운 말미를 하루라 도 썩일 까닭있세요. 꼭 정월 초아흐렛날 여기서 떠날 작정인데요.” “내 덕으 루 알거든 설 떡국 먹을 때 내 생각이냐 해라.” “영감께서는 어디 가서 설을 쇠시겠세요?” “어디가서 쇨는지 나두 모른다.” “만일 황해도 내에서 설을 쇠시거든 지가 흔떡 싸가지고 쫓아갈까요?” “그럼 작히나 고마울까.” “설에 쫓아갈 것 없이 이번에 아주 영감 가실데를 앞질러 가서 등대하고 있을까요?” “그러면 더욱 고맙지.” “영감께서 바깥 물론만 끄리시지 않는다면 지가 가겠 세요.” “성가신 물의만 없으면 내가 너를 꿰어차구라두 가겠다.” “여기서 며 칠 동안 묵으시면 공사가 낭팹니까?” “며칠 동안 더 묵는다구 낭패될 건 없지 만 일없이 묵울 까닭이 있느냐.” “낭패만 없으시거든 묵으세요. 단 며칠이라도 더 뫼시고 지냈으면 좋겠세요.” “글쎄, 어디 생각해 보자. 머릿속이 가려우니 좀 긁어다우.” “머리를 긁어 드릴께 여기서 묵으시도록 잘 생각하세요.” 초 운이가 순경사의 탕건을 벗기고 머리를 긁다가 “영감 머리에 신털이 많습니다. ”하고 호들갑스럽게 말하였다. “왜 신털을 보니까 정이 떨어지느냐?” “영감 을 언제 젊으신 양반으로 알았을세 말이지요.”“그럼 나를 늙은이로 보았단 말 이냐?” “늙은이는 아니시라도 사십은 넘으셨지요.” “머리속이 시원하니까 잠이 오는구나.” “그럼 자리에 가 누우세요.” 그 밤을 지내고 이튿날 식전에 순경사는 노독이 났다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먼저 노문을 놓은 봉산 에는 풍한에 촉상되어서 수일 조리 후에 간다고 기별을 띄웠다. 봉산군수 이흠 례가 순경사의 기별을 받고 문후하기 겸 기병할 방침을 취품하려고 재령을 왔 다. 순경사는 병중이라 옹금하고 앉아서 봉산군수를 접견하였다. 이흠례가 마산 리에서 봉패한 원인을 말하는데, 도적을 업신여긴 것과 계책을 미리 정하지 않 은 것과 지리를 상세히 알지 못한 것과 군기가 해이한 것과 지휘와 호령이 한 사람에게서 나지 못한 것을 열거하고 이번에 순경사가 열읍 군병을 통솔하고 청 석골을 공격하면 일거에 소탕할 수 있으나 다만 청석골이 강원도 지경에서 멀지 않고 강원도에도 적굴이 있어 도적들이 강원도로 도주할 염려가 불무한즉 강원 도 순경사에게 통기하여 양도 접경을 방비하게 한 후 청석골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득책이라고 진술하였다. 순경사는 재령을 아직 떠나기 싫은 욕심에 이흠례 의 말을 유리한 말이라고 허여하고 본쉬와도 상의한다고 재령군수까지 불러내었 다. 순경사가 두 군수와 상의한 결과 7일 후인 20일까지 양도 접경을 방비하여 달라고 강원도 순경사에게 통첩을 보내고 서흥부사와 평산부사에게 각기 기병할 준비를 차리고 등대들 하라고, 금교찰방에게 적굴 동정을 상세히 염탐하라고, 또 풍천부사가 군사에 익다고 하므로 풍천서 기병하여 20일 이내에 재령으로 오라 고 각각 관자를 부치었다. 33 청석골서 내행을 박연중이에게로 치송하던 날이 순경사가 재령 도착하던 날과 한날이었다. 청석골 내행이 박연중이 사는 동네에 들어갔을 때 박연중이가 이춘 동이더러만 반갑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싫은 내색 을 보이지 않고 온채집 세 채와 망 일곱과 그외의 방 둘을 억지로 변통하여 근 사십명 일행을 안돈을 시키었다. 박연중이 사는 동네가 땅은 해주에 붙었으나 읍은 재령이 가까워서 재령 읍내장을 보는 곳인데 청석골 일행이 온 뒤 장날 장 에 갔다온 사람이 재령 읍내에 순경사가 와서 묵는다더라고 말하여 다심한 늙은 이 박연중이가 순경사의 동정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맘을 먹고 이춘동이 한온이 두 사람을 불러가지고 의논하였다. 황천왕동이는 내행을 따라왔다가 안돈들 하 는 것만 보고 청석골로 도로 갔었다. 세 사람이 알아볼 도리를 의논한 끝에 이 춘동이가 재령읍에서 멀지 않은 촌에 사는 처남을 찾아가 보고 부탁하게 되었 다. 이춘동이의 처남은 재령서 통인을 다니다가 어느 퇴리의 데릴사위가 되어 처가살이를 하는 사람이라 저의 이력이 있는 위에 장인의 반연까지 있어서 재령 홍살문 안 일은 무슨 일이든지 알아낼 수가 있었다. 이춘동이가 처남 장가갈 때 와서 처남의 장인도 인사하고 처남의 댁도 상면하여 다 아는 처지인데 그 집에 와서 들어가지 않고 처남을 밖으로 불러내었다. “형님, 오래간만이오. 어서 들 어가십시다.” 하고 처남이 집으로 들어가자고 끄는 것을 “내가 길이 바쁜데 들어가면 자연 지체가 될 터이니 못 들어가겠네. 자네가 나하구 같이 읍으루 들 어가세.” 하고 이춘동이가 뒤쪽으로 처남을 끌고 읍으로 들어오며 길에서 온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읍에 들어와서 이춘동이는 어느 술집에 들어앉고 처남은 순경사의 동정을 알아보러 갔다. 처남은 가장 쉽사리 알아보고 왔지만 이춘동이 는 퍽으나 오래 기다린 듯하였다. 이춘동이가 술집에서 나와서 이번에는 자기가 돌아갈 길로 처남을 끌고 오며 역시 길에서 처남의 이야기를 들었다. 순경사가 열이튿날 왔는데 하룻밤 자고 바로 봉산으로 간다고 하더니 열사흗날 아침에 갑 자기 노독이 났다고 누워서 일어나지 않고 봉산군수를 오라고 기별하였던지 열 나흗날 봉산군수가 와서 순경사 사처에서 본군수까지 셋이 한동안 밀담한 후 순 경사는 그날 바로 각처에 관자를 부치고 봉산군수는 그 이튿날 봉산으로 돌아가 고 또 본군수는 그 뒤부터 군사 조발할 준비를 차린다는 것이 이야기의 대강이 었다. 처남이 이야기를 마친 뒤에 “순경사가 지금두 노독으루 앓는다던가?” 하고 이춘동이가 물으니 처남은 고개를 가로 흔들면서 “처음부터 멀쩡한 사람 이 노독이 났다구 핑계하구 한 이틀 동안 자리보전하구 지냈답디다.” 하고 대 답하였다. “가려구 예정한 길을 갑자기 병 핑계하구 한 이틀 동안 안 간 건 무 슨 속내가 있는 일이겠지. 그 속내를 알아봤나?” “재령 장교 김전돌이란 사람 의 누이가 해주 감영 기생인데 순경사가 말미를 얻어주어서 먼저 그 오라비에게 와 있다가 순경사 오던 날부터 밤마다 수청을 든답디다. 순경사가 재령서 유진 하는 건 그 기생 때문이라구 말들 합디다.” “순경사가 기생에게 반해서 묵을 일 없는 데서 묵는단 말인가. 그게 속내 모르구 하는 말들 아닐까?” “무슨 속 내가 또 있는진 몰라두 관가 일을 제일 잘 아는 통방에서 그렇게들 말합디다.” “순경사 일은 재령 관가 일이 아니니까 통방에서 잘 알지 못하기두 쉽지만 설 혹 알더라두 말을 내서 못쓸 일이면 자네더러 말할 리 없겠지.” “말이 나면 목이 달아날 일이라두 나를 기이구 말 안할 린 없을게요.” “그래 다른 이야기 더 들을 건 없나?” “들은 이야기는 그뿐이오.” “그럼 고만 자네는 들어가게. 나는 나대루 가겠네.” “내가 집에를 잠깐 다녀올 테니 형님 여기서 좀 기다리 시우.” “왜 그러나?” “나두 형님하구 같이 가서 누님 좀 보구 오겠소.” “ 이번에는 고만두구 이 다음에 와서 보게.” “누님이 대체 지금 어디 기시우? 그거나 좀 가르쳐 주구 가시우.” “지금은 집두 절두 없이 떠도는 셈일세. 어디 든지 가서 자리를 잡구 살게 된 뒤 자네게 기별함세.” 이춘동이가 처남을 작별 한 뒤는 걸음을 부지런히 떼어놓았다. 부지런히 각 부지런히 오건만 중간 지체 에 하루해가 걸려서 이른 아침 먹고 나온 사람이 저녁 해질 때에 돌아왔다. 34 박연중이가 한온이와 같이 앉아서 심심풀이로 기묘년의 이문목견한 일을 이야 기하여 들리는 중에 이춘동이가 돌아와서 옛날 이야기는 끝 안난 채 고만두고 이춘동이의 알아온 순경사 이야기를 같이 들었다. 이춘동이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 한온이는 대번에 “큰일났네. 우리들 여기 와 있는 소문이 순경사 귀에 들어 간 겔세.” 하고 말하고 박연중이도 한온이의 말 뒤를 받아서 “그런 염려가 없 지 않은 걸. 그렇이 않으면 재령 와서 묵을 까닭이 있다구. 기생 때문에 묵는다 는 건 말이 안되는 것이 해주서 친한 기생이면 해주서 데리구 놀지 구차스럽게 말미를 얻어줘서 재령으루 보낼 까닭이 있나. 순경사가 감사에게 절제받는 관원 이 아닌데 감사가 무서워서 해주서 묵지 못할까. 그러구 순경사가 아무리 호색 하는 사람이래두 공무를 돌보지 않구 기생 때문에 묵을 린 만무한 겔세.” 하고 말하였다. 이춘동이가 한온이를 보고 “나두 처음에는 자네 말하는 것 같은 의 심이 들었는데 곰곰 생각을 해보니 그런 건 아닌 듯하네. 만일 우리 여기 와 있 는 것이 소문이 나서 순경사가 알았다면 여기를 벌써 와서 들이쳤지 이때까지 가만 있을 겐가?” 하고 말하는데 한온이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어째 그렇 지 않단 말인가?” “우리의 허실을 자세히 몰라서 선뜻 들이치지 못하는 게지. ” “순경사 휘하의 경병이 오십 명이라두 재령서 군총을 뽑으면 적어두 이삼백 명을 뽑을 텐데 그걸 가지구 조그만 산촌 하나 들이칠 엄두를 내지 못하겠나?” “마산리는 대처라 오백여 명이 몰려갔나! 내 생각엔 마산리에서 봉패한 것이 전감이 되어서 단단히 준비하느라구 지체하는 것 같애. 우선 관자를 각처에 붙 였다는 것이 각처 군사를 모아들이는 것이겠지 별것이겠나.” “글쎄 자네 말을 들으니 그럴 듯두 한데.” 하고 이춘동이가 박연중이를 돌아보고 “만일 그렇다 면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내 식구두 안전하게 보호할 재주가 없으니 청석골다가 기별해보게.” 하고 박연중이가 대답하였다. 기별을 하려면 한 시각이라도 빨리 하는 것이 수라고 세 사람 의론이 일치하여 이춘동 이가 그날 밤에 밤길로 떠나게 되었다. 두목, 졸개의 손재주 있는 사람을 뽑아 서 도회청 넓은 대청에서 헌 군기들을 수보시키는데 김산이가 일을 하는 것을 동독하고 있는 중에 한눈팔던 졸개 하나가 급한 말로 “마산리 이두령이 오십니 다.” 하고 말하여 “이두령이 오시다니?” 하고 김산이가 밖을 내다보니 이춘 동이가 도회청 옆을 지나서 대장 사랑으로 올라가는데 의복이 휘주근할 뿐 아니 라 사람도 의복같이 풀기가 없었다. 오지 않을 사람의 오는 것이 놀랍고 기운 씩씩한 사람의 기운 숙은 것이 이 더욱 놀라워서 김산이는 황황히 뛰어나오며 “춘동이 자네 왠일인가?” 하고 소리치고 이춘동이가 걸음을 멈추고 서는데 쫓 아오며 또 “자네 어째 오나?” 하고 물었다. “일이 있어 오네.” “무슨 일?” “한두 마디루 이야기할 일이 못되니 대장 사랑으루 가세.” “대관절 거기 별 연고는 없나?” “아직은 아무 연고 없네.” “그런데 나는 자네 오는 걸 보구 무슨 큰 연고나 있는 줄 알구 깜짝 놀랐네. 식구 없는 내가 이럴 젠 식구 있는 사람들은 더할 것일세.” “내가 맡아가지구 간 식구들을 내버리구 오는 줄루 알았나?” “자네 모양을 보구 방정맞은 생각이 왈칵 났었네.” “내 모양이 무 슨 일을 당하구 오는 사람 같은가?” “자네가 풀기가 하나두 없으니 웬 일인 가?” “어제 밤새두룩 밤길을 걸어오구 게다가 오늘 아침을 잘못 먹어서 지금 기운이 없어 죽을 지경일세.” “기운이 없는데 이러구 섰지 말구 어서 대장 사 랑으루 가게.” “자네는 왜 안 가려나?” “나는 지금 여러 사람 일을 시키는 중이라 못 가겠네.” “무슨 일인가?” “흔 군기 손질시키는 거야.” “내 이야 기는 안 들을라나?” “여럿이 같이 들을 이야기면 나두 오라고 부르겠지. 나는 이따가 부르거든 갈 테니 자네 먼저 가게.” 김산이는 도회청으로 도로 들어가 고 이춘동이만 꺽정이 사랑으로 올라왔다. 35 꺽정이와 이봉학이가 사랑에 같이 앉았다가 이춘동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어 째 오느냐, 무슨 연고가 있느냐 들이 연달아서 묻는 바람에 이춘동이가 꺽정이 에게만 겨우 절 한번 하고 이봉학이에게는 인사 수작도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서 어제 재령읍에 들어가서 순경사의 동정을 알아보고 곧 밤길로 떠나온 사연을 일장 이야기하였다. 꺽정이가 이춘동이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 이봉학이를 돌아 보고 “식구들은 여기 두었으면 아직은 아무 염려 없는 걸 공연히 피난시킨다구 순경사 손에 갖다가 넣어준 셈이 되었으니 저걸 어떻게 하면 좋은가. 식구들을 이리 도루 데려온단 말인가. 우리들이 마저 그리 간단 말인가?”하고 안식구 피 난시키자고 주장한 이봉학이를 탓하듯 말하니, 이봉학이가 머리를 잠시 숙이고 있다가 치어들고 “형님, 저 이두령더러 말 한마디 물어보구 나서 선후책을 의 논하십시다.”하고 말한 뒤 “순경사가 각처루 관자를 부쳤다니 어디어디 부쳤 다던가?”하고 이춘동이더러 물었다. “모두 다섯 군덴데 첫째 강원도, 그 다음 에......” “강원도 어느 골?” “강원도란 말만 들었소.” “황해도 순경사가 강 원도 수령에게 관자할 까닭이 있나?” “그래두 알아온 아이가 강원도라구 말합 디다.” “그런 관자가 아닐 겔세. 강원도 순경사에게 공문이나 사찰을 부친 모 양일세. 그러구 그 다음엔?” “봉산, 서흥, 평산, 금교 네 군덴가 보우.” “봉 산군수하구 상의하구 또 봉산다가 관자를 할 리가 있다구?” “봉산은 아니오. ” “그럼 한 군데는 어디야?” “어디든가 그 골 이름이 입에서 뱅뱅 도는데. ” “해준가?” “아니오.” “재령서 가까운 신천, 안악, 문화 이런 골인가?” “그런 군이나 현이 아니고 도호부 같은데.” “황해도내 사도호부의 서흥과 평 산은 들었으니 그 나머지 연안이나 풍천일세그려.” “옳지, 풍천이오. 풍천이 그렇게 얼른 생각이 안 났소.” “우리 식구들 있는 곳을 공격할 작정이면 첫째 해주서 군사를 조발할 것인데 해주가 어째 빠졌을까?” “그 속은 모르겠네.” 그 동안에 이 춘동이 왔단 말을 듣고 황천왕동이, 배돌석이, 박유복이, 길막봉이가 차례로 오 고 맨 나중에 곽오주가 왔다. 먼저 온 다른 두령들은 이춘동이를 보고 “자네 왔나.” “웬일인가?” 이와 같은 간단한 인사만 하고 이봉학이와 이춘동이의 문답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앉 았는데, 곽오주는 와서 앉으며 바로 이춘동이더러 “처음부터 이야기해야 나중 온 사람두 알지, 그 속을 모른다니 그 속이 대체 무슨 속인가?”하고 두덜거리 었다. 이춘동이가 순경사의 수상한 동정을 다시 이야기하여 여러 두령들에게 들 려주는 동안에 이봉학이는 꺽정이와 선후책을 의논하였다. “순경사가 우리하구 식구들하구 따루 떨어져 있는 것을 알구 우리와 식구들을 동시에 공격할 계획인 가 봅니다.” “어째서?” “식구들 있는 데만 공격할라면 강원도 순경사와 약 속할 일두 없을 것이구 또 금교 찰방에게 관자할 일두 없을 것 아닙니까? 내 요랑에는 순경사가 자기 데리구 온 정병과 풍천, 재령 두 골 군총을 거느리구 식구들을 공격하구, 봉산, 서흥, 평산 세 골 수령과 강원도 순경사와 서루 호응 해서 우리를 공격할 계획인 것 같습니다.” “식구들을 도루 데려오지 못하면 우리가 한 패는 거기 가서 식구들을 보호해야겠네.” “우리가 두 패루 갈리는 건 우리에게 대단 불리하니까 우리가 다 함께 식구들 있는 데루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여기는 어떻게 하구?” “여기는 내버리구 가잔 말씀입니다. 여기 가 전 같으면 그대루 있을 만한 곳이지만 여기 지리와 우리 허실을 샅샅이 잘 아는 서림이가 조정에 귀순한 뒤에는 잠시두 맘놓구 있을 곳이 못됩니다.” “ 여기를 아주 버린다면 우리가 어디루 가나 그걸 생각해 봐야 하지 않나?” “향 일에두 말씀했지만 자무산성을 우선 웅거하구 앉아서 서서히 좋은 자리를 구하 는 게 어떻습니까?” “글쎄, 자무산성을 가서 웅거하다니 있을 집두 없구 먹을 양식두 없는 걸 어떻게 하나?” “지금 토역을 할 수 없으니까 우선 급한 대루 목벽으루 눈비 가릴 의지간이나 더러 만들구 또 산성 근방 동네 백성들을 어르 구 달래서 손아귀에 넣어놓으면 과동할 양식은 어떻게든지 변통이 될 줄 압니 다.” “도회청 회의를 열구 여럿의 의견을 들어보세.” “도회청을 치우구 말구 할 것 없이 이 사랑에서 회의를 여시지요. 지금 오두령하구 김두령만 오면 다 모입니다.” 꺽정이가 가까이 있는 신불출이를 보내서 오가와 김산이를 곧 오라 고 불렀다. 36 오가와 김산이가 와서 두령 도합 아홉 사람이 자리들을 정돈하고 앉았다. 도 중에 중대한 회의가 열리는 까닭에 여러 두령이 다 정숙하였다. 그중에 몸이 고 단한 이춘동이는 어디 가서 눕고 싶으련만 그런 말을 감히 하지 못하였다. 꺽정 이가 이춘동이의 온 까닭과 이봉학이의 낸 계책을 대강 이야기하고 끝으로 청석 골을 아주 버리고 가는 것이 도중의 중대한 일이라 여럿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 정을 짓겠다고 말하였다. 꺽정이 옆자리에 앉은 오가가 꺽정이를 돌아보며 “일 을 소상 분명히 알지 못하구는 의견을 말씀할 수 없으니까 일에 대해서 의심나 는 걸 먼저 좀 여쭤보겠소.”하고 허두를 내놓은 뒤 “지금 식구들 가서 있는 데가 위태할 것 같으면 식구들을 어디루든지 다시 피난시킬 것이지 우리들이 새 삼스럽게 피난갈 까닭이 무엇이오?”하고 물었다. 피난간단 말이 꺽정이 비위에 거슬려서 “누가 피난간다구 말했소.”하고 뇌까렸다. “여기를 버리구 자무산성 으루 간다니 그게 피난가는 게지 무어요.”하고 오가의 들이대는 말에 꺽정이는 대답할 말이 막히어서 이봉학이를 보고 “자네가 말하게.”하고 대답을 떠맡기 었다. “여보 오두령, 나하구 이야기합시다.” “녜, 말씀하시우.”하고 오가가 얼굴을 이봉학이게로 돌리었다. “지금 식구들 가서 있는 데가 위태하니 우리가 가서 보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식구들을 도루 데려오거나 어떻게든지 해야지 그대루 내버려 둘 수는 없지요?” “식구들을 그대루 내버려 두다니 말이 되우. 그런 말은 물을 것두 없소. 다른 말 길게 할 것 없이 대장께 여쭤본 말씀을 다 시 한번 말씀하면 자무산성이구 어디구 안전할 데루 식구들을 다시 옮기는 건 부득이한 일이겠지만 여기서 관군을 대항하기루 작정한 우리가 갑자기 여기를 버리구 다른 데루 옮겨갈 까닭이 무어냔 말씀이오.” “우리가 지금 여기두 지 키구 식구들두 가서 보호하자면 힘이 두 군데루 나누일 텐데 부족한 힘을 두 군 데루 나눴다간 두 군데서 다 낭패보기가 쉬우니까 여기는 아주 비어버리구 식구 들 있는 데루 같이 가서 순경사 대군과 거기서 접전하거나 형편 봐가며 자무산 성을 가서 웅거하구 대항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유리할 줄루 나는 생각하우. ” “자무산성이 어떤 곳인지 나는 가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거기두 안전친 못할 것이오. 우리가 가서 산성 안 백성은 어떻게 잘 처치하더라두 산성 근방 백성들 입에서 소문이 처져나가면 관군이 곧 뒤쫓아올 것 아니오.” “자무산성으루 피 난하러 가자는 줄 아시우? 아니오, 자무산성을 웅거하구 앉아서 관군을 대항하 잔 말이오. 소문나는 걸 저어할게 무어 있소.” “관군을 대항하기루 말하면 여 기가 자무산성보다 훨씬 낫지 않겠소. 다른 설비는 고만두구 군량 한가지만 가 지구 말하더라두 여기는 지금 관군이 수설불통하게 에워싸두 한 달쯤 넉넉 지낼 군량이 있지 않소. 그것만 해두 어디요.” “그건 그렇지만 우리가 아무 승산 없 이 여기 앉았으면 한달 지내구 그 뒤는 어떻게 하우? 서림이가 여기를 목표 대 구 꾀를 내바쳤는데 서림이 모르는 자무산성 같은 데 가서 접전을 하게 되면 서 림이 꾀가 어긋나서 우리게 유리할 것 아니오. 군량으루 말하면 옛날 유명한 장 수는 일부러 없애버리구 대적과 접전한 일두 있답니다. 군량이 넉넉치 못한 게 되려 접전에 이가 될는지 누가 아우.“ ”여기를 버리구 자무산성으루 옮기자는 건 구경 서림이가 무서운 까닭이구려.“ ”서림이의 꾀를 꺽어놔야 우리게 승산 이 많으니까 그 꾀를 꺽잔 말이지 서림이가 무서울 거야 무어 있소.“ ”우리가 다년 근사를 모아서 이만큼 만들어놓은 근거를 헌신짝같이 버리구 다른 데루 간 다는 게 순전히 서림이 때문이니 그게 무섭지 않아두 똥싸는 격이오.“ ”청석 골을 버리구 가는 게 우리게 유리하면 버리구 가는 게지 아깝다구 지키구 앉았 다가 낭패 볼 가닭 있소. 우리가 만일 이번 접전에 지는 날이면 서림이란 놈을 공명시켜 주게 될테니 사람이 애성이 있지 않소. 이번 접전은 어떻게 든지 꼭 이겨야 하우.“ ”서림이가 잘될까 봐.“ 하고 오가가 이봉학이의 말을 뒤받으려 고 말 시초를 낼 때 황천동이로부터 시작하여 맨 나중 박유복이까지 여러 두령 이 모두 이봉학이의 말이 옳다고 떠들어서 오가의 말은 마침내 중동무이되고 말 았다. 오가가 한동안 입술을 빼물고 앉았다가 꺽정이를 보고 “여러분은 죄다 자무 산성패가 되어버려서 다른 의견이 더 없을 모양이구 나 하나만 청석골패루 떨어 졌는데 좋은 의견을 낼 주제가 못되니 대장께서 잘 생각하셔서 얼른 결정지으셨 으면 좋겠소. 일이 결정난 뒤에 나는 따루 대장께 청할 일이 한가지 있소.” 하 고 말하여 “따루 청할 일이 무어요?” 하고 꺽정이가 물었다. “일을 결정지으 신 다음에 나중 말씀하지요.” “먼저 말하나 나중 말하나 마찬가지 아니오. 말 하우.” “말하라시면 먼저라두 말씀하리다. 그건 다른 청이 아니라 만일 여기를 버리구 가기루작성하시거든 나만은 여기 남이 있게 해달란 청이오. 내가 여러분 뒤를 따라가서 조금이라두 조력할 일이 있으면이야 이런 말씀을 어찌 하라까만 쓸데없는 나이는 많구 특별한 재주는 없구 말하자면 도중의 무용지물이니까 옛 소굴의 지킴 노릇이나 하게 해주시우.” “그건 허락하기 어려운 청이오.” “청 해서 허락을 못 받으면 나중에 장령 거역하구 군율이라두 받을는지 모르겠소.” “오두령두 반심이 생겼소?” “반심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하늘이 내려다 보시지 내가 서림이같이 반복한 놈이란 말씀이오?” “그러게. 장령 거역한다는 게 웬 소리요.” “나는 여기를 버리구 가느니 차리리 여기서 죽구 싶소.” “진 정이오?” “진정이다뿐이오. 나는 청석골서 죽는 게 고소원이오.” “진정 그렇 다면 내가 다시 생각해 봐서 회의 끝난 뒤에 말하리다.” 꺽정이가 오가와 수작 을 그치며 바로 여러 두령들더러 “너희두 다른 의견이 있거든 다 말들 해라.” 하고 말을 일렀다. “오두령이 혼자 뒤에 떨어진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안될 말 입니다.” “안간다구 어거지를 쓰면 목을 빼가지구 가나요 어쩌나요. 할 수 없 지요.” “오두령은 차차 물론하구 졸개들까지두 다 각각 자원을 받는게 좋을 듯합니다.” “자원을 받으면 군기가 문란해집니다. 군령으루 시행해야 합니다. ”“도중 상하 백여 명이 한데 몰려가면 군량 변통이 참말 큰일입니다.” “접 전을 하자면 졸개가 많을수록 좋을 텐데 있는 것들을 두구 갈 까닭이 있습니까. 군량은 노략질해서 먹일 수가 있지만 졸개야 노략질 해서 쓸 수가 있습니까.” “마산리서 지내보니까 졸개들 없는 것이 되려 주체궂지 않아서 좋습니다.” 여 러 두령이 이런 말들을 옥신각신 지껄일 뿐이고 청석골을 버리고 가는 데 대하 여는 오가의 말과 같이 다른 의견들이 없었다. 꺽정이가 마침내 식구를 보호하 러 가기로 결정을 지어서 말한 뒤에 “오두령의 청은 어떡할까?” 하고 이봉학 이를 돌아보니 이봉학이는 오가의 가고 안가는 것을 대수롭게 알지 않은 듯 “ 오두령 생각대루 하라시는 게 좋겠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박유복이가 이봉학 이의 뒤를 받아서 “오두령이 혼자 떨어져 있겠다는 건 망령의 말입니다. 허락 하지 마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을 꺽정이는 미처 대답하기 전에 먼저 오가가 볼멘소리로 “여보게 이 사람. 자네가 이 늙은 놈이 효수당하는 걸 눈으루 보고 싶은가. 자네가 그런 말씀 하는 건 일가에서 방자하는 셈일세.” 하고 박유복이 를 나무랐다. “왜 자청해서 효수를 당한단 말이오. 그게 망령이지 무어요.” “ 망령이거나 본정신이거나 하여간 나는 죽으면 죽었지 청석골을 버리구 다른 데 루 가진 못하겠네.” “왜 전에 없이 공연한 고집을 세우시우.”“내가 이번 고 집이 처음 겸 마지막일세.” “처음이구 마지막이구 고집 세울 까닭이 무어요. 나는 까닭을 모르겠소.” “나는 청석골에 살지 못하면 청석골서 죽는 것이 신 상에 편한 가닭일세.” “순경사 난리 치른 뒤에 다시 와서 살면 고만 아니오. 공연한 고집 세우지 마시우.” “내가 남유달리 청석골에 정이 깊어 들어서 잠 시두 떠나구 싶지 않은 걸 어떻게 아나.” 박유복이는 오가의 얼굴을 뻔히 보며 쓴입맛을 쩍쩍 다시는데 황천동이가 박유복이 대신 나서서 “여보 당신이 청석 골에 정이 깊이 들어서 잠시두 떠나구 싶지 않다는 건 멀쩡한 거짓말이오.” 하 고 오가의 말을 타박하였다. 황천왕동이가 타박에 오가는 골을 벌컥 내며 “내가 거짓말을 했으면 사람의 새끼가 아닐세.” 하고 맹세지거리를 내놓았다. “청석골에 정이 들어서 잠시두 떠나지 못하겠단 말이 그래 정말이오?” “거짓말루 알아두 고만이지만 남의 말 을 무턱대구 거짓말이라구 타박하는 법이 어디 있나. 아무리 우리네 무간한 사 이라두 그건 인사불성일세.” “내 생각엔 거짓말이 분명한 걸 어떡하우.” “무 어야, 거짓말이 분명해? 이 사람이 뉘 부아통을 터트릴 작정인가? 분명하거든 분명한 증거를 대게.” “올 여름 광복길은 마누라님 병환 급보를 듣구 경황없 이 간 게니까 말할 것 없지만 작년에 광복 갈 때 어째 그런 말이 없었소? 작년 까지 설들었던 정이 올해 와서 갑자기 깊이 들었던 말이오? 그게 거짓말 아니구 무어요.” 오가가 오금을 박히고 할 말이 없는 것같이 한참 아무 소리 못하다가 풀기없이 한숨을 한번 쉬고 나서 “작년 광복두 나는 가구 싶지 않은 걸 죽은 마누라쟁이가 발동을 해서 마지못해 갔었네. 말하자면 마누라쟁이가 죽을 자리 보러 가는 데 따라간 셈일세.” 하고 스러져가듯 말하였다. “당신이 전에는 판 관사형 구실하느라구 마누라님 꽁무니를 따라 갔지만 지금은 묘지기 노릇하느라 구 마누라님 산수 밑을 떠날 수 없는 게지. 당신이 돌아간 마누라님 위해 세상 에 난 사람인 건 내남없이 다 아는 터인데 그렇게 실토루 말하면 누가 무어라겠 소.” “자네 조롱은 내가 받아 싸지만 내 진정은 자네가 좀 덜 알았네.” “당 신 속울 내가 꿰어뚫구 보듯이 알았지, 무슨 소리요.” “자네가 아무리 소명하 기루서니 내 속이야 나만큼 잘 알겠나. 마누라의 무덤두 내가 여기 있어 수호해 야 묵뫼가 안되겠지만 그 보다두 내가 죽어서 묻힐 땅이 여기니까 나는 여길 더 날 생각이 없네.” “죽어 묻힐 땅이란 게 죽은 뒤 마누라님하구 한 구뎅이에 묻힌 잔 말이 아니오. 내가 덜 알긴 무얼 덜 알아.” 황천동이의 오가 오금박는 것을 빙그레 웃고 보던 꺽정이가 홀저에 정색하고 “도중 공론하는 자리에 실없 는소리 작작 지껄여라.” 하고 황천동이를 나무란 뒤 오가를 돌아보고 “그래 정말 죽기 한사하구 여기를 못 떠나겠소?” 하고 다져 물으니 오가는 선뜻 “내 소회는 다시 더 말할 것이 없소. 인제 좌우간 대장 처분만 바랄 뿐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꺽정이는 청석골을 아주 비어버리고 가느니 한 끝을 남겨두는 것이 마음에 합당하여 “그러면 오두령은 아직 여길 지키구 있어 보우.” 하고 오가 의 청을 들어주었다. 여러 두령 중의 박유복이가 얼굴에 좋지 않은 기색을 나타 내는 것이 꺽정이의 처분을 언짢게 여기는 모양이나 본래 입이 굼뜬 사람이 더 구나 대장의 처분을 거슬려 말하기가 어려워서 말은 못하고 끙끙거리기만 하였 다. 오가가 이것을 보고 “자네가 또 일가에서 방자할 생각인가 앗게 앗게.” 하 고 손을 홰홰 내저은 뒤 곧 꺽정이를 보고 “내가 대장 위해서 청석골 유수 노 릇을 잘할 테니 대장께서 소원 성취하시는 날 나를 송도유수루 승차나 시켜주시 우.” 하고 너털웃음을 내놓았다. 오가 수다떠는 바람에 박유복은 말문이 열리지 못한 채 그대로 막히었다. 꺽정이가 오가의 실없은 말은 대꾸 않고 “누구든지 가구 싶지 않은 사람은 오두령하구 같이 여기 남아 있어두 좋다.” 하고 좌우쪽 여러 두령들을 돌아보니 배돌석이, 황천왕동이, 곽오주, 길막봉이 네 사람은 혹 시 자기들더러 남아 있으랄까 겁내둣이 간다고 뒤떠들고 이봉학이, 박유복이, 이 춘동이, 김산이 네 사람은 잠자코 있었다. 이봉학이는 청석골을 통히 비어버리고 가자고 주장하는 사람이고 이춘동이는 길라장이로 가야 할 사람인즉 다시 가네 안 가네 말할 나위가 없지마는 박유복이와 김산이는 남아 있을 의향이 있는 것 같이 보이었다. 꺽정이가 먼저 박유복이더러 “너는 오두령하구 같이 여기 있을 라느탸?” 하고 물으니 박유복이는 “아니오 갈랍니다. 오두령은 망령으루 안 간다지만 제야 왜 안가요.” 하고 대답하고 그 다음에 김산이더러 “너는 여기 있을 테야?” 하고 물으니 김산이는 처음에 “가든지 있든지 대장께서 하라시는 대루 하겠습니다.” 하고 두동싸게 대답을 하였다가 접전이 무서워서 갈 생각이 적으냐고 황천왕동이에게 조롱받고 또 다른 사람이 다 간다고 분명히 말하는데 혼자 두동싸게 말한다고 이춘동이에게 책망 듣고 “저두 가겠습니다.” 하고 고 쳐 대답하였다. 꺽정이의 명령이 아니면 오가와 같이 남아 있을 두령이 하나도 없는데 꺽정이가 명령하지 않고 가고 안 가는 것을 두령들 자의대로 하라고 말 하여 오가 하나 빼놓고 두령이란 두령은 다 가게 되었다. 39 두목과 졸개들은 어떻게 하느냐 의론이 났을 때 박연중이 사는 동네 형편이 두목, 졸개를 다 끌고 가면 우선 잠시라도 들여앉힐 처소가 없는데 추운 동절에 한둔도 시킬 수 없고 난처하다고 이춘동이가 말하여 신불출이, 곽능통이 두 시 위 외의 두목, 졸개 십여명만 뽑아서 데리고 가고 그 나머지 팔십 명 사람은 아 직 오두령에게 맡겨두자고 의론이 귀일하였다. 갈 바에는 한 시각이라도 빨리 가는 것이 좋고 또 청석골을 비다시피 하고 가는 것을 가근방백성들에게라도 알 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이날 밤에 밤길로 떠나기로 하고 말과 노새를 있는 대로 다 타고 가는 것이 좋고 또 군용에 쓸 재물을 넉넉히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고 두령 외의 시위들까지 다 부담을 태우기로 하여 대무한 것만 꺽정이가 작정한 뒤 그외의 여러 가지 길 떠날 준비는 이봉학이에게 통히 쓸어맡기었다. 회의 파 한 뒤에 이봉학이가 곧 도중 재물 맡은 박유복이와 도중 살림 보는 김산이를 데 리고 길 떠날 준비를 차리는데 이봉학이는 청석골을 다시 올 생각이 없는 사람 이라 병장기의 쓸만한 것과 재물의 가지고 갈 만한 것을 하나 남기지 않고 다 골라서 부담 속을 채우고 남는 것은 데리고 갈 두목, 졸개의 질짐을 만들게 하 였다. 가지고 갈 물건을 손모아 놓은 것이 너무 많아서 되골라 내놓았건만 부담 스무짝 외에 짐 열댓짝이 착실히 되어서 대개 열 명쯤 뽑으려던 두목, 졸개를 짐짝 수효대로 늘려 뽑았다. 청석골 안이 술렁술얼하는 중에 저녁이 지나고 밤이 되었다. 대장이 탈 황부 루에만 안장을 지우고 두령과 시위가 탈 말과 노새 열 필에는 부담을 실리고 두 목, 졸개 열다섯은 저희들의 질 짐짝을 각기 맡아 가졌다. 혼자 떨어져 있을 오 가가 꺽정이에게 하직하고 여러 두령과 면면이 작별할 때 생리 곧 사별이 될것 같이 앞짧은 소리를 많이 하였다. 황천왕동이가 오가를 조롱하느라고 자발적게 조상하는 시늉으로 곡하는 소리를 내었다가 꺽정이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 다. 섣달 스무남께 가까운 때 밤길을 가자니 춥기야 춥지마는 이삼일 전보다 추위 가 훨씬 풀리고 또 달이 새벽까지 밝은 까닭에 밤길이라도 낮길 못지않게 많이 갔다. 일행이 많고 그중에 무거운 짐을 진 짐꾼이 맣아서 홀가분하게 차린 단신 행인같이 길이 빠르지 못하지만 이튿날 해전에는 박연중이 사는 동네를 대어 들 어갈 수 있었다. 이춘동이 떠나온 뒤 무슨 일이 났는지 몰라서 중로에서 황천왕 동이를 보행으로 먼저 보내보았다. 황천왕동이는 안식구들 갈 때 한번 갔다온 길이라 나는 듯이 가서 보고 저녁때 수십리 밖까지 되마중을 나와서 동네가 무 사하고 백손 어머니가 지난 밤에 순산 생녀하였다는 소식을 알리었다. 노산이고 더구나 오래 단산한 끝에 순산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여러 두령들은 꺽정이에 게 분분히 치하하나 꺽정이 당자는 욕심으로 “이왕 나면 쓸 자식이나 날 것이 지.” 하고 시뻐하였다. 산기슭에 일자로 붙은 동네집이 게딱지 같은 것까지 수효에 넣어 쳐야 열에 겨우 하나 더한 열한 집뿐이었다. 동네 사람은 남녀노소 합해야 불과 이십여 명 이나 배보다 배꼽이 더 틈 셈으로 두번에 온 청석골 일행이 짐승은 치지 말고 사람만 근 칠십 명인즉 아홉 집이 사람 사태에 파묻히지 않을 수 없었다. 양식 은 미리 준비하여 놓은 까닭에 식사는 외려 여차고 방간은 갑자기 늘릴 도리가 없는 까닭에 방에 잘자리 부족한 것이 제일 큰 탈이었다. 여편네는 여편네끼리 사내는 사내끼리 각각 몰려 자고 집집마다 부엌까지 사람이 자도록 변총하였건 만 그래도 주인의 수하 사람과 손의 졸개들 자는 곳은 몸을 눕힐 틈이 없어 서 로 기대고 앉아서 눈들을 붙이었다. 방이 어떻게 째이든지 백손 어머니 해산방 에도 같이 자는 사람이 방안에 그들먹하였다. 여러 사람이 한 방에서 같이 자게 되니 자연히 방문을 수세게 여닫아서 집안의 산모가 촉상이 되었다. 40 청석골 두령, 시위 들은 박연중이 큰집 이간 사랑방에서 자고 꺽정이는 박연 중이를 따라 그 작은집 건넌방에 와서 같이 잤었다. 방이 단간이나 단둘이 자기 에는 비좁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식전 꺽정이가 기침하기 전에 시위들이 와서 대령하고 있었고 기침한 뒤 여러 두령이 와서 문후들 하고 가고 소세하고 조반까지 먹은 뒤 아들 백손이 가 문안하러 와서 일찍 올 것인데 의원 허생원을 불러다가 어머니의 병을 보이 느라고 늦었다고 말하고 어머니의 병을 고모는 산후발이라고 하는데 허생원은 감기로 집증하더라고 이야기하였다. 꺽정이가 안식구들을 찾아보기겸 동네를 한 번 돌아보려고 백손이를 데리고 나섰다. 다른 두령들은 전날 들어오는 길로 식 구들을 찾아보았지만 꺽정이는 박연중이와 사랑방에 같이 앉았다가 잘 처소에 같이 와서 잔 까닭에 와서 본 백손이 외의 다른 식구는 아직 보지 못하였던 것 이다. 백손이 말이 고모도 어머니 해산방에 같이 있다고 하여 꺽정이가 먼저 누 님과 산모를 보려고 해산방으로 오는 중에 이봉학이와 박유복이가 앞에 가는 것 을 보고 “어디들 가나?” 하고 소리하였다. 두 사람은 일시에 돌쳐서서 꺽정이 에게로 마주 왔다. “황천왕동이가 아까 아주머니를 가 뵙구 와서 밤새 병환이 나서 대단하시더 라구 하기에 우리는 밖으루라두 잠깐 다녀올라구 가는 길입니다.” 이봉학이가 백손 어머니에게 문병하러 가는 것을 말하니 꺽정이가 턱으로 백 손이를 가리키며 “저 자식이 의원을 불러다 뵈니까 의원 말이 감기라구 하더라 네. 대단친 않은 게지.” 하고 대답한 뒤 “그러나 나두 지금 그리 가는 길이니 같이들 가세.” 하고 두 사람과 같이 가는데 백손이는 길인도하라고 앞세우고 두 사람은 뒤에 딸리었다. 꺽정이가 동네 뒷산을 살표보며 천천히 가는 중에 조 그만 집에서 떠들썩하게 지껄이는 사내들 말소리가 들리었다. “대체 이게 무슨 고생인가?” “난리 피난 온 사람들 때메 우리가 난리를 만났네.” “아직 언제 갈는지 모르지?” “언제든지 가긴 가겠지.” “그 따위 오뉴월 쇠불알 같은 소 리 하지 말게. 그 동안 우리는 다 죽으란 말인가. 사람이 밤에 잠을 자야 살지 않나.” “자네들 사정봐서 내가 다 쫓아버릴까. 허허허.” “영감에게 등장을 들어보세.” “영감은 무슨 별수 있는 줄 아나? 영감두 속은 짠 모양이데.” “ 그럼 우리가 모두 각각 단봇짐들을 싸세.” 박연중이 수하 사람들이 밖에 지나 가는 청석골 두령들 듣거라하고 떠드는 것 같았다. 꺽정이가 고개를 숙이고 그 집 앞을 다 지나온 뒤 홀저에 걸음을 멈추고 “우리 오늘 가세.” 하고 뒤에 오 는 이봉학이를 돌아보았다. “어디루 가잔 말씀입니까?” “어디루든지 가야겠 네.” “청석골서 올 때두 말씀했지만 자무산성으루나 가시까요?” “자무산성 두 좋으니 오늘 식구들 다 끌구 그리 가세.” “오늘이야 어떻게 갑니까.” “왜 못가?” “산성 안 백성들 처치라든지 양식이나 부정지속 변통이라든지 다 먼저 해놓구 가야 하지 않습니까.” “가 앉아서 처치할 거 처치하구 변통할 거 변통 하면 되지 않나.” “그러구 아주머니를 오늘 어떻게 뫼시구 갑니까. 삼두 아직 안나갔구 더구나 병환중인데.” “갈 수 없는 사람은 아직 여기 남겨두구 가지. 동네 인심이 그악하기루서니 식구 몇간 남아 있는 거야 설마 민주대겠나.” “ 오늘 식구들을 다 끌구 가려면 길 떠나기가 자연 늦을 테니 내일 일찍 떠나두룩 준비를 차리게 하구 오늘 선진 한패를 보내서 내일 일행이 들어가기 전에 우선 산성안 집들이나 비어놓게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자네는 얼른 가서 선진 보낼 사람들을 작성하게. 나는 연중이 노인한테 내일 떠난단 말이나 하구 자네네들 있는 데루 나감세.” “이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아주머니께 잠깐 다녀 가시지요.” “나중에 다시 와서 보지. 어서 도루 가세.” “백손아, 너만 가거 라.” 꺽정이가 백손이는 혼자 보내고 이봉학.박유복이 두사람은 다시 뒤에 딸리 고 천천히 가던 길을 바쁜 걸음으로 돌아왔다. 41 이봉학이와 박유복이가 사랑방에 와서 여러 두령 중의 밖에 나간 사람까지 다 불러 모아놓고 상의한 끝에 박유복이.배돌석이.황천황동이.길막봉이.이춘동이 다 섯 두령이 두목.졸개 십여 명을 데리고 선진으로 가기로 대개 작정하고 짐짝에 서 가지고 갈 병장기들을 꺼내놓는 중에 꺽정이가 나와서 갈 사람 작정한 것을 듣고 이봉학이 더러 “자무산성으루 가는데 일체 일을 맡길 테니 자네가 선진을 거느리구 가게.” 하고 말을 일렀다. “아까 의논들을 할 때 유복이두 나더러 가 는 게 좋겠다구 말을 합디다만 나는 여기서 안식구들 길 떠날 준비를 시키려구 빠졌습니다.” “길 떠날 준비야 별거 있겠나. 여기 남은 사람이 시켜두 넉넉할 톄니 염려 말구 가게.” “녜, 형님 분부대구 선진을 밭아가지구 가겠습니다.” “그러구 오주는 왜 여기 남겨두나. 오주두 마저 데리구 가게.” “그럼 내일 내 행할 사람이 아주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오주를 내행 배행할 사람으루 남겨놨나? 만일 어린애들이나 울면 길에서 미쳐 날뛰라구.” “오늘 산성 아래 동네 도평 가서 동네을 모아놓구 우리 일에 거행을 잘 하두룩 일러두자구 의논 들 했는데 오주가 가서 만일 해거나 부리게 되면 우리 위신이 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주는 빼놨습니다.” “유복이가 가는데 무슨 염련가. 오주를 다잡는데 유복이 윗수갈 사람이 또 어디 있나.” 꺽정이의 말과 같이 곽오주를 다루는 데는 박유복이만한 사람이 다시 없었다. 곽오주가 어린애 우는 소리에 광증이 발작될때 꺽정이의 호령질로도 제지는 되 지마는 박유복이는 곽오주의 뒤를 지성스럽게 쫓아다니며 발작 안되도록 미리 단속하고 혹시 발작되더라도 않는 아이 다루듯 하여 곱게 가라앉히고 꺽정이같 이 큰소리를 내지 아니하였었다. 먼저 가기로 작정한 다섯 두령 중의 이춘동이가 그 모친에게 간단 말아고 온다 고 나가더니 한동안 착실히 지난 뒤에 와서 무슨 말을 할 텐데 입이 잘 떨어지 지 않는 모양으로 주저주저하여 “무슨 할 말이 있나?” 하고 꺽정이가 물으니 이춘동이는 그제야 입이 떨어져서 “나는 내일 내행 갈 때나 가겠으니 오늘 선 진에서 빼주시우.” 하고 말하였다. “오늘 못갈일이 무언가?” “지금 어머니께 가서 나는 먼저 자무산성으루 가니 나중오시라구 말씀했더니 어머니가 억지공사 루 나더러 여기나 그대루 있지 다른 데루는 갈 생각 하지 말라구 말하십디다. 그래서 모자간에 그러니 안 그러니 한참 말다툼을 하다시피 한 끝에 나는 갑니 다하구 나오니까 어머니가 위에 쫓아나오시면서 너는 가거나 말거나 나는 안 간 다, 자식이 어미 말을 안 들으면 모자간 의절이다 하구 소리소리 지르십디다. 공 영한 망령의 말씀이지만 내가 오늘 그대루 가면 참말 뒤에 안 오실는지 모르니 까 사리대루 말씀을 잘해서 의향을 돌려가지구 내일 일행에 같이 가시두룩 할 생각입니다.” “오늘 갈 일행 중에 대궐고갠가 어디루 가는 직로를 잘 아는 사 람이 자네뿐이데 자네가 안갈 수 있나. 가게. 자네 어머니가 다른 데루 가기 싫 다시면 여기 기시게 하구 자네도 나중에 다시 와서 뫼시구 있게그려. 자네가 어 머니을 뫼시구 있거나 우리를 따라오거나 그건 나중 다시 이야기할 셈 잡구 오 늘은 가게.” 꺽정이 말에 이춘동이는 녜 다답을 아니하지 못하였다. 이봉학이가 다섯 두령 외에 곽오주까지 두령 여섯 명과 두복.졸개 열 명을 거 느리고 늦은 아침때 길을 떠났다. 도평을 해 지기 전에 대어보려고 점심참 외에 는 별로 쉬지도 않고 길을 건몰았건만 짧은 해에 칠십리 길을 오자니 자연 일력 이 모자라서 캄캄 어두운 뒤 겨우 대어왔다. 42 도평 동네 존위의 집이 동네 중의 제일 잘 견디는 집이고 또 집도 큼직한 것 을 잘 아는 이춘동이가 일행을 그 집으로 인도하였다. 겉으로 위풍을 부리려고 동구 밖에서 봇짐에 싸가지고 온 병장기들을 꺼내서 혹 손에도 들고 혹 몸에 지 닌 까닭에 그 집에서는 아닌밤중에 난리가 쳐들어온 줄 알고 경겁들 하였다. 이 봉학이가 주인을 불러서 하룻밤 자고 갈 뜻을 말하고 경겁하지 말라고 안위를 시켰다. 주인이 늙어서 눈이 어둡든지 또는 놀라서 정신을 잃었든지 처음에는 이춘동이를 보고도 몰라보다가 나중에야 미로소 이춘동이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 “자네가 마산리서 대장일 하던 춘동이 아닌가?” 하고 아는 체하였다. 주인의 말이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첫밗에 배돌석이가 나서서 “아니꼽살스럽게 뉘게다 가 하게야.” 하고 책을 잡고 그 다음에 황천동이가 또 나서서 “마산리 대장쟁 이는 하게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청석골 두령은 하게를 안 받는다. 그 따위 말버 릇을 함부루 하다가는 신털 난 대가리가 모가지하구 작별하게 될 테니 조심해 라.” 하고 얼러대니 동네의 제일 어른 존위 샌님이 구상전을 만난 듯이 벌벌 떨었다. 큰방 둘을 치우고 두령과 두목.졸개가 두 방에 나누어서 헐숙하는데 인심이 몰라서 조심성으로 한 방에 한 사람씩 돌려가며 자지 않고 이날 밤을 지내고 이 튿날 식전에 이봉학이가 주인을 보고 “우리가 이 동네 사람들에게 이를 말이 있으니 온 동네를 다 모을 건 없구 동네의 두민과 동임들만 곧 좀 모아 주시우. ” 하고 분부할 것을 듣기 좋게 부탁하듯 하였다. “동네 사람을 모으면 어디루 모아라구 할까요?” “어디루 모이라니? 이리 모이라지.” “아니 사람이 여남 은 모일 텐데 방이 좁을 듯해서 여쭤보는 말씀입니다.” “한데가 좀 춥겠지만 뭐 오래 걸릴 것 아니니 이 앞마당에 모이게 하우.” 주인이 네 대답하고 갔다. 한동안 지난 뒤에 유수한 동민과 일이삼좌.소임.풍헌 이 다 모였다고 하여 이봉학이가 방 앞 봉당 위에 나서서 마당에 웅긋쭝긋 섰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큰 기침 한번 하고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청석 골 임대장의 부하인 것은 말 안해도 다들 알았겠지. 우리 대장께서 이번에 잠시 피접을 나실 일이 있어서 자무산성에 와서 과동하시기루 작정하셨는데 산성 안 백성들을 그대루 내쫓아두 고만이지만 연부년 흉년에 간신이 구명도생하는 것을 추운 동절에 집을 뺏구 그대루 내쫓기가 불쌍하니 이 동네서 맡아서 곁방살이루 라두 거접들을 시켜달라구. 우리가 맡긴 뒤에 만일 열의 한 집이라두 거산하게 된다면 그 죄는 이동네서 져야 할 줄 알아. 그러구 군량.마초와 일용 제구를 나 중에는 청석골 있는 것을 운반해 오거나 또는 달리 변통할 테지만 우선 당장 쓸 것은 이 동내서 지공할밖에 없는데 파는 물건은 곧 값을 내줄테구 팔지 않는 물 건은 나중에 물건으루 갚을 테야. 물건이 있는대루 성심껏 지공하면 동네에 해 가 없을 거구 만일 있는 물건을 숨기구 없다구 속이러 들면 물건은 물건대로 뺏 기구 죄책은 죄책대루 받을 테니 그리 알라구. 이외에두 일러두구 싶은 말이 많 으나 추운 데 오래 붙잡구 늘께 있나. 고만두지. 동임들만은 우리 아침밥 먹은 뒤에 다시 와서 우리 심부름을 좀 해줘야겠어.” 이봉학이가 말을 마치고 방으 로 들어가려고 돌아설 때 “잠깐 여쭤볼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 이 있어서 되돌아서서 마당을 내려다 보니 동네 사람들 중에 외양이 가장 똑똑 해 보이는 사람 하나가 두 손길을 마주 잡고 봉당 앞으로 들어섰다. 43 “저는 이 동네 삼좌올시다.” “그래 할 말은 무어야?” “저희 동네는 자래 루 빈동이온데다가 더구나 올해 같은 재년을 당하온 까닭에 지금 동네에 조석 끼니를 바루 먹는 집이 열의 두세 집두 안됩니다. 저희 동네 형편으루는 각항 지공두 하기 어렵솝지만 우선 산성 안 열세 집 식구를 맡아서 먹일 도리가 없소 이다.” “내 분부를 거행하지 못하겠다구 방색하는 말이냐.” “방색하려구 여 쭙는 말씀이 아니올시다.” “그려면 무어냐?” “산성 전후 좌우에 있는 동네 가 여럿 아니오니까? 다른 동네는 다 고만두구 여기서 가까운 마산리.사주리 두 동네만 가지구 말씀하더라두 두 동네가 다 저희 동네보다 호수두 많구 또 동네 두 포실합니다. 이 두 동네 사람을 부르셔서 저희와 세 동네가 산성안 사람들을 갈라 맡고 각항 지공을 같이 하라구 분부합시면 동네 부담두 좀 수월하려니와 첫째 분부 거행이 잘될 듯 생각하옵는데 처분이 어떠실지 여쭤보는 말씀이올시 다.” 삼좌의 말이 유리하여 이봉학이는 그 말을 쫓아 마산리.사주리 사람들을 불러오려고 생각하고 “두 동네 사람을 아침 전에 다 불러올 수 있겠나?”하고 묻는데 사람 대접으로 하대하던 언사를 고치었다. “두 군데가 다 오리 좀 남짓 합니다. 지금 곧 사람을 보내면 아침때 지나기 전에 올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 곧 사람을 보내서 두 동네 동임들만 오라구 부르게.” "저희 동네 사람만 가두 불러오긴 하겠솝지요만 단단할 성으루 수하 사람들 한둘씩 같이 가게 해주 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사람은 아직 아침밥들을 안 먹었을걸.” “분부만 합 시면 먼저 입시들을 시켜서 같이 가게 합지요.” 이봉학이가 두목 둘을 불러서 각각 졸개 둘씩 데리고 동네 사람들과 같이 가서 마산리, 사주리 동임들을 불러 오라고 분부한 뒤 방에 들어와서 도평 삼좌가 사람이 똑똑하다고 창찬하였다. 아침밥들을 먹고 한동안 지났을 때 마산리와 사주리에 보낸 사람들이 두 동네 동임들을 데리고 와서 도평까지 세 동네 동임들을 한데 모아놓ㄱ 이봉학이가 먼 저 도평 사람에게 이르던 말을 다시 되풀이하여 일렀다. 사람 겨우 일곱이 관군 오백여 명 대적하는 것을 눈으로 본 사람과 귀로 들어도 본 이나 진배없이 잘 들을 사람들이라 일 분부 시행으로 녜 녜 대답들 하였다. 이봉학이가 다른 두령들과 상의하여 군량, 마초 기타 물품을 아쉬운 대로 쓸 만큼 몇 섬 몇 짐 또는 몇 개 아주 작정하여 발기로 적어서 세 동네 동임들을 내주며 빨리빨리 수합하여 산성으로 올려보내라고 이르고 일행을 거느리고 산성 에 올라와서 열세 집에 사는 사람들을 세 동네로 몰아 내려보내는데 살림살이 제구중의 긴한 것은 아직 두고 쓰고 긴치 않은 것은 세 동네 사람과 소가 왔다 가는 회편에 보내주기로 하였다. 열세 집의 방 면색이 통히 스물여섯인데 그중 의 가장 널찍한 방이 전에 와서 하룻밤 자던 집 안방이라 이것을 대장의 사랑 겸 두령의 도회청으로 정하여 맥질한 벽에 종잇장을 붙이게 하고 삿자리와 기직 자리를 새 것으로 바꾸어 깔게 하고 그 나머지 방들은 비질만 정하게 시키었다. 두령들로부터 졸개들까지 잠시 편히 앉았지 못하고 이집 저집으로 왔다갔다 하 는 중에 저녁때가 다 되었다. 미처 자리도 잡아놓지 못한 양식섬도 풀고 된장독 도 열고 새로 걸어놓은 가마솥들도 부시어서 칠십여 명이 먹을 저녁밥을 준비하 기 시작하였다. 이봉학이가 곽오주와 이춘동이는 산성에 남아서 두목과 졸개들 의 저녁 준비하는 것을 보살피게 하고 그외의 두령들은 다 데리고 사주리로 내 려왔다. 사주리와 도평과 마산리에서 각각 홰꾼을 열명씩 내서 사주리 홰는 해 주서 오는 길로 나가고 도평 홰는 사주리로 오고 마산리 홰는 산성 너덜에 와서 기다리도록 지휘하였다. 꺽정이는 전날 길 떠날 준비를 다 시켜서 이날 첫새벽 떠났건만 내행이 많은 까닭으로 길이 마냥 늦어져서 사주리도 홰 없으면 캄캄하 여 못 올 뻔하였고 산성은 밤이 삼경이 다 된 때 들어왔었다. 백손 어머니가 산 후탈로 못 오게 되어서 해산 구원하는 애기 어머니도 못 오게 되고 애기는 어머 니와 같이 온다고 아니 오고 백손이는 어머니 옆에 있으라고 못 오게 하고 의원 허생원과 심부름할 졸개 내외를 남겨두고 또 이춘동이의 가족 세 식구를 그대로 남아있게 하여 열 명이 줄어서 상하 소솔이 육십여 명이 되었다. 이날 밤은 되 는 대로 방을 벌려서 자고 이튿날 방들을 정하는데 꺽정이가 자기 방과 소홍이 방으로 방 둘을 쓰고 방이 서넛이나 있어야 겨우 식구를 주체할 한온이에게 방 셋 있는 집 한채를 주고 내외 가진 두령 다섯과 시위 들에게 매 일 명 방 하나 씩 주고 홀몸 두령 셋에게 방하나를 주고 방 스물 여섯의 나머지 방 열셋을 두 목, 졸개 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청석골서 바로 자모산성으로 왔던들 방들이 좁 아서 불편하였을 것인데 해주서 된통을 치르고 온 까닭에 불편하단 소리들이 없 었다. 꺽정이가 이와 같이 자모산성에 와서 구차스럽게나마 자리를 잡았다. 자모산성(하) 청석골에 남아 있게 된 두목과 졸개들이 대개 다 순경사 소문에 놀라고 안식 구 피난네 겁이 났지마는 대장과 두령들을 태산같이 밑어서 겨우 안심들 하고 있었는데 대장과 드령들이 버리고 가니 밑음의 태산으로 진정되었던 마음이 흔 들리고 들뜨고 뒤집히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꺽정이가 떠나기 전에 술렁술렁 하던 청석골이 떠난 뒤에는 곧 난장판같이 떠들썩하여졌다. 오가는 사방 초막에 서 떠들거나 말거나 내버려두고 방문을 닫아 걸고 혼자 누워서 억제할 수 없는 고적한 생각을 마을속으로 곰새기었다. 청석골을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 다 정 이 든 곳이요, 수하 사람은 어중이떠중이나마 수효가 자그마치 팔십여 명이건만 웬 셈인지 자기 신세가 게발 물어던진것 같았다. 처음에 마누라와 딸을 끌고 산 속 깊이 들어왔을 때 딸은 말할 것 없고 마누라까지 호젓하여 못살겠다고 사설 이 많았으나 자기는 지금같이 외롭고 쓸쓸하지 아니하였었다. 자신은 팔자에 없 기에 딸자식 하나 있던 것까지 없어졌겠지만 마누라만 살아 있었으면 이 산속은 고만두고 온 세상에 사람의 새끼가 하나 없더라도 외롭고 쓸쓸할 리가 만무할 게다. 마누라가 죽을 나이도 아니고 죽을 병도 아닌데 죽은 것이 생각할수록 불 쌍하나 이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사는것은 차라리 죽는 것만도 같지 못하니 살아 잇는 자기가 죽은 마누라보다 더 불쌍하였다. 오가가 술로 시름을 잊으려고 생 각하고 자리에 일어 앉아서 눈물을 씻은 뒤 문간편을 향하고 홍록이를 불렀다. 홍록이는 오가가 하인같이 가까이 두고 부리는 졸개의 이름이다. 문간방이 엎드 려지면 코닿을 데 있는 데 한번 불러서 대답이 없고 두번 세번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이 자식이 첫잠이 깊이 들었나.” 자는 사람이 초풍하여 일어날 만큼 소리를 질러서 불렀다. 그래도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허, 이 자식두 떠드는 판에 한 참례 들러 간 게로군.” 오가가 목촛대의 촛불을 떼어들고 마루에 나 가서 찬탁자에서 술병과 데울 그릇을 찾아서 한손에 겸쳐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술을 데우려고 화로를 잡아당겨서 헤쳐보니 불이 거의 다 사위어서 데우기는 고 사하고 냉기도 가실 수가 없었다. 술을 불이 없어 데우지 못하고 안주는 다시 나가 찾기가 싫어서 찬술을 강술로 한 병 다 먹으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가 저리고 속이 떨려서 한병의 반의반도 다 못 먹고 불불이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고만 술이나마 술기운이 몸에 돌며 바로 흔곤이 잠이 들어서 자는 중에 방 밖에 서 소리가 나서 잠결에 “어떤 죽일 놈들이 여기까지 와서 떠드나.” 괘씸하게 생각하고 정신을 차린 뒤 다시 들어본즉 방 밖은 고사하고 초막들에까지 떠드는 소리가 없어진 듯 사방이 괴괴하였다. “꿈을 꾸었던가?” 하고 생각을 돌리고 번듯이 누워서 기지개를 치며 하품을 소리내서 하였더니 방 밖에서 인기척하는 기침소리가 났다. “그게 누구냐?” “소인이올시다.” “누구야?” “홍록이올 시다.” “너, 어디 갔다 왔느냐?” “지금 자다가 나왔소이다.” “아까 내가 목청이 떨어지두룩 불렀는데 그래 자느라구 몰랐단말이냐. 그런 쇠귀신 같은 잠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밀이냐.” “아까는 초막에서들 하두 기탄없이 떠드옵기에 무슨 일이 있나하구 한번 돌아보구 왔소이다.” “너는 지금 무슨 일루 내 방 앞에 와서 기탄없이 떠들었느냐?” “떠든 일 없소이다.” “떠드는 소리에 내 가 잠이 깨었는데 떠든 일이 없다니 무슨 소리냐.” “서산 패두 천이가 소인을 깨우느라구 혹시 소리질렀는진 모르겠소이다만 소인은 들어와서 주무십니까구 두어 번 여쭤보다가 대답이 없으셔서 고만두구 도루 나가려구 하던 차이올시다. ” “천이가 왜 왔더냐? 서산에 무슨 일이 있다더냐?” “여간 일이 아니올시 다. 한 시간쯤 전에 두목 두 놈과 졸개 세놈이 어디루 도망할라구 서산을 넘어 가는 것을 파수꾼이 가루막구 어디들 가느냐구 힐난하온즉슨 그놈들 말이 우리 는 대장께루 간다하구 파수꾼을 미리 제치구 나갔답니다. 천이가 지금 그 말씀 을 여쭈러 왔답니다.” “알았다. 나가 자거라.” “천이가 지금 소인의 방에 있 솝는데 들어오라구 부르오리까?” “고만두구 가라구 그래라.” 다른 처분이 있 기를 바라는지 홍록이가 나가지 않고 한동안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가 “도망질 하는 놈즐을 가만 내버려주실랍니까?” 하고 묻는 것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으 면 네가 쫓아가서 붙잡아 올라느냐?” 하고 오가는 평소에 흔히 하는 실없는 말 투로 대답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