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한 사람들 1 "구 선생 댁입니까?" 약간 호들갑스럽고 다급한 듯한, 그러나 둔중한 바리통 목소리였다. 조금 철떡거리는 듯이도 들린다. 전화 목소리만으로도 무언가 범상치 않은 불길한 얘감이 드는 수가 있는데 바로 그런 목소리였다. 송인하 여사는 반쯤 일어나 앉으며, 수화기를 왼손에서 오른소능로 옮겨 잡는다. "......" 잠시 아무 반응도 없었다. 수화기에 손을 덮어 얹고 옆사람과 수군거린다고, 송인하 여사는 퍼뜩 느껴진다. 일순 등이 오싹하였다. 윤이 나게 반들거리는 새까만 전화기도 윤이 나게 반들거려서 더 을시년스럽다. 금방 마악 낮잠이 들다가 깨어난 때문일 테지, 아직도 몽롱하고 애매한 의식속에서 송인하 여사는 다시, "여보세요. 구 선생은 안 계시는데요." 하고, 부러 큰 소리르 말하였다. 뜻밖에 저쪽에서는 다시 똑같은 목소리로, "거기, 구 선생 댁입니까?" "......? 네." "사무닙이시군요." "......그렇습니다만." "저어, 혹시 강성구라고 아시겠습니까?" "네? 강성구요?" 하고 나서 화닥닥 정신이 들며, "여보세요, 그이가 어쨌나요?"하자, 저쪽에서는 다시 아무 반응이 없었따. "여보세요. 여보세요." 절컥, 절컥, 전화기 버틔을 조바심이 섞어 몇 번 누르면서 불렀으나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다가, 하낯링만에야 똑깍 하고 수화기 놓는 소리가 들렸다. 별일이다. 송 여사는 이마에 내돋친 땀을 손등으로 한 번 훔치었다. 벽시계는 하오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별안간 강성구라니. 강성구와의(관계랄 것까지도 없지만, 관계라고 하면 관계랄 수도 있는) 관계를 아는 사람은, 월남한 동향인 가운데 지숙이 말고는 거의 없다. 별안간 그 강성구를...... 송 여사는 남펴넹게 이 불길한 일을 알려야겠다고 거의 무읫기적으로 신성 물산 사장실로 전화 다이얼을 돌려 가다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남편 회사의 저노하 번호도 손 끝에 달려 있기나 한 듯이 익숙해져 있어, 무의식 중에라도 정확히 그쪽으로 손이 돌아가는 것이다. 심지어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건다는 것이 얼결에 남편 회사에 걸리는 때도 있다. 그런 때마다 결혼 초의 분위기가 뎅겅 떨어져 나간 거울 반조각처럼 감겸 오는 것이고, 자기도 이제 어지간히 산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미 남편과의 어간에는 이 정도로 감정적으로나 실제로나 여러 겹의 장막이 둘려지고 있고, 더께가 앉아 있다. 그리고 사실 그런 더께나마 없다면 자기를 지탱해 갈 무엇이 더 남아 있을 것인가. 평생을 여일하게 사이가 좋은 부부를 떠올리기만 하여도 와락 지긋지긋하게 지겨운 듯한 느낌이 든다. 그건 사람도 무엇도 아니고, 두 어깨를 맞잡고 있는 두 마네킨일 것이다. 그 사이에 벌써 저노하가 걸려 있었다. "여보세요, 곽진성입니다." 여비서가 가다지 않고 어째 직접 우렁우렁한 남편 목소리가 들리자, 송인하 여사는 사알짝 수화기를 도로 놓았다. 똑깍 하고 소리가 났다. 무엇인가 몸 안에 괴었던 독기들이 사악 훑어내리듯이 개운해졌다. '응, 흥청망청 돈이나 벌고 외화나 벌어들이면 단가. 세상이고 집안이고 썩고 문들어져도.' 하고. 아닌게아니라 요즘은 남편은 그 나이가 지체에 어울리게 비곗살이 찌고 뚱뚱히졌지만, 부산 피난 시절 그 무렵만 해도 용수철처럼 단단하였다. 생활력 하나로만 온통 뭉뚱그려진 그런 사내였다. 차양잉 짧은 까만 중절모에 빳빳하게 풀 먹인 짙은 회색 코트를 바싹 죄어매듯이 입고 다녔다. 그때나 지금이나 말수가 적고, 사람을 보는 눈길은 정면으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 이마 너머로 엇비슷이 원경을 쳐다보는 듯, 약간 머엉한 눈길이다. 그것이 만만치 않게 깊고 음험하나 음모가의 인상을 풍긴다. 송 여사가 이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은 부산 피난 시절이었다. 그즈음 그는 노상 색안경을 끼고 있었고, 무슨 기관엔가 있다고 하였다. 1.4 후퇴로 이북에서 월남해 와, 금방 부산에 떨어진 송인하 형제에게(언니가 있다.) 어찌어찌 냄새를 맡았는지 가까이 접근해 와서는, 대신동 언덕배기에 방을 마련해 준다, 식량을 대 준다, 친 살붙이 위하듯 하였는데, 그 핑계는 같은 고향 근처 사람이라는 거였고 저도 외로운 홀몸이라는 거였지만, 이미 그의 은근한 속셈은 대강 들여다보였다. 그러나 그때의 송인하 형제는 워낙 궁색한 처지여서 그의 호의롤 거절하고 어쩌고 뻗댈 처지도 못되었다. 그때 송인하는 갓 스무 살이어서 아직 여학생 기분 그대로였고 결혼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 않고 있었지만, 그는 벌써 서른 살이 넘어 있었다. 저녁이면 인하 형제가 들어 있는 방에 꼭 들러 발고랑내를 풍기며 겨울 밤임에도 색안경을 그대로 끼고 앉았다가는 가곤 하였다. 언니인 순하가 곧잘 발씻을 물을 대야에 떠다가 바치기도 하였었다. 그럴 때마다 인하는, 어쩜 저 사람이 형부가 될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긴 언니에게는 짝에 맞을는지도 모르겠다고 내심 경멸 섞어 생각하기도 하였다. 항용 이런 사람이란 구변도 좋고 수다스럽고 모자도 히뜩 뒤로 젖혀 쓰고 되까져 있기가 쉬운 법인데, 어찌 된 셈인지 이 사람은 꽤나 수줍음을 타고 그러면서도 의뭉스러운 것 같았다. 시종 무뚝뚝하였고, 차려 입고 다니는 것과는 달리 위인은 지나치게 신중해서 도리어 어둠침침한 구석도 있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혼자서 꿍꿍잇속으로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기가 힘이 들었다. "언니, 아무래도 곽씨가 언니에게 생각이 있나 봐요." 인하 쪽에서 속을 떠 보듯이 슬쩍 지껄이면 언니도 별로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글세." 하고 빙긋이 웃곤 하였다. "언제 월남했는지 모르겠지만 고생깨나 했겠어. 벌써 사는 데 악바리가 되어 있지 않아. 곽씨에게 한 번 찍히면 천하 없어도 못 빠져 날 것 같아요." "모르겠다. 어쨌거나 되어 가는 대로." 순하는 그때 인하보다 세 살 위인 스물 세 살이었다. 이렁저렁 두어 달 지나는 동안에 인하 형제에게 있어 어느 새 이 사람은 한시도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순하도 이제는 노골적으로 그런 내색을 드러내어 의당 저와 부부 간이 될 사람이려니 한 겹 접어 두기라도 한 듯이 매사에 자연스러운 응대를 하였다. "이젠 되도록 식사는 여기서 하시지요." 조심조심 이렇게도 말하였고, "빨랫감도 염려 말고 내놓으세요, 내의랑." 또 혹은, "저녁 지어 놓을 테니 저녁에 들르세요." 하기도 하였으나 이런 때마다 그는 번번이 우물쭈물 그 특유의 먼 눈길이 되곤하여 본시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수줍음을 피워서 저려려니만 여겼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어느 날, 그는 가니 쪽이 아니라 동생인 인하에다 대고 구혼을 하였다. 마침 언니가 잠깐 방을 비운 사이 좁은 방에 단둘이 마주앉아 있었는데 띄엄띄엄 느릿느릿하는 소릴 자세히 들어 보니 구혼이었다. 특수 교육차 일본으로 건너가서 한두어달 있게 될 것이라면서 돈다발 묶음을 잠바 안 포켓과 즈봉 앞 뒤 포켓에서 내놓았다. 어쩌면 두 달이 넘어 서너 달 있게 될는지도 모르고, 어쩜 대만, 하와이까지 다녀오게 될는지도 모르니, 돈을 아껴 써야 할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하였다. 고향이 서로 근처라는 명분일뿐,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서 이런 식으로 생활비를 받을 때마다 인하 자매는 꽤나 난처하여서 쩔쩔매곤 하였지만, 더구나 지금 어니도 없는데 돈을 받으면서 인하는 여간 난처하지 않았다. "걷어 넣었다가 언니가 돌아온 다음에 내놓으시지요. 전 그런 거 몰라요." 인하는 발그레 상기되면서 우선 이렇게 말하였다. "......" 일순 곽씨는 드러내 놓고 후유하고 깊은 숨을 몰아쉬더니, 다시 주섬주섬 이얘기 저 얘기 두서 없이 늘어놓았다. 47년 봄에 혼자 월남을 했다는 등, 일본서 고등 기술 학교를 kesuTek는 등, 그러나 지금은 원체 난세여서 배운 기술을 써먹을 수는 없어 임시로 이런 데 있다는 등, 요즘 같은 전시에는 이런 직장이 괜찮다는 등, 월남 직후에는 서북 청년회에 들어가서 고생도 하였지만 어지간히 재미도 있었다는 등, 제주도 토벌 때도 빠짐없이 참가하였고, 문봉제, 김성주 등 선배들의 신세를 입었다는 등, 인하로서는 전혀 알아듣지도 못할 생소한 얘기까지 요령 부득으로 늘어놓아서, 그저 그러려니 건성으로 맞장구를 치고 머리를 끄덕였는데, 어느 새 그의 표정과 눈길이 차츰 이상해져서 활딱 놀라 자세히 들어 보니 구혼이었다. "전 인하씨와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곽씨가 거듭 이렇게 말했을 때에야 비로소 인하도 화닥닥 정신이 들며 "네?" 하고는, 하 어이가 없어 빙긋이 웃었다. "언니 이름은 인하가 아니라 순하예요. 인하는 제 이름이구요." 이름이 엇바뀌었으려니 하고 인하는 약간 낄낄거리듯 부러 활발하게 지껄였다. 그러나 곽씨는 비로소 똑바로 인하는 마주 건너다보며, "네, 알고 있습니다. 저느 나언니가 아니라 인하씨와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일순, 인하는 머엉한 얼굴이 되었다. 세상에 이런 법도 있는가. 밖에서 들어오자마자 순하도 자리가 예사로비 않음을 눈치채고 웬일들이냐고 물었다. 곽씨는 디룩디룩한 두 눈을 더욱 디룩거리며 또렷또렷하게 마라였다. "제가 인하씨헌테 구혼을 했습니다." 순하도 하 어이가 없는 모양, 한 번 빙긋 웃곤 아랫목 벽에 느슨히 기대어 앉아 헛물켰다는 듯이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따. 그후 인하는 며칠 동안을 앓아 누웠다. 그 정도로 충격이 컸던 것이다. 그러나 그후에도 여전히 곽씨는 저녁이면 통조림을 한 꾸러미씩 싸안고 들러 밤임에도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벽에 처억 기대어 앉았다가는 가곤 하였따. 이렇다저렇다 분명하게 말은 없었으나 애매하게 막연히 사과하는 기색만은 역력하였다. 그러나 물론 결혼 포기한다는 뜻의 사과는 아니라, 그 정도로 충격을 주어서 죄송하다는 뜻의 사과였다. 이렇게 며칠이 지나는 사이에 어느덧 인하도 곽시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누운채, 자기가 저 사라므이 구혼을 거절한다는 게 전혀 근거가 없다는 생각으로 조금씩 조금씩 눈물을 짜곤 하였다. 순하는 눈짓으로만 꿈쩍꿈쩍, 다 알아서 할 터이니 안심하고 그냥 돌아가라고 곽씨에게 신호를 보내었고, 곽씨도 푸시시 일어나 나갔다가 이튿날 저녁이면 다시 들렀다. 며칠 후 인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곽씨는 다시 구혼을 하였다. 이때는 언니인 순하도 같이 옆에 앉아 있었다. 역시 귀를 곤두세우고 자세히 듣자고 해야 알아들을 수 있는 그 정도로 요령 부득의 구혼이었지만, 여간 질기고 찐득거리는 억양이 아니었다. 요즘 외국 바이어들과 겨루는 것이 항용 그렇듯이 거머리처럼 드윽드윽 살갗에 들러붙는 듯하였다. 인하는 또 펄펄 뛰고 눈물을 쏟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처음부터 훨씬 약해져 있었다. 언니인 순하를 끌어안고 그저 절망적으로 몸을 흔들며 울 뿐이었다. 타향 나와 아버지 어머니도 없이 이게 무슨 억울한 꼴이냐는 셈이었지만, 순하는 우는 인하는 뒷 등을 힘없이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면서 순하의 두 눈을 곽씨를 마주보며 안심하라는 듯이 꿈쩍꿈쩍하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인하가 날이면 날마다 아무도 모르게 동광동 근방을 헤매곤 하였다. 강성구를 그 근처에서 한 번 만났었다는 소리를 지숙에게서 드렁싶던 것이다. 지숙은 같은 배로 피난을 나온 여학교 동기 동창생이었다. 원체 더펄더펄 한 계집애라 인하 쪽에서는 반신 반의하였지만 혹시 또 아는가. 인하는 강성구를 찾으려고 기를 쓰고 그 근처를 헤매었던 것이다. 2 강성구는 고향에 있을 때 끈덕지게 인하 뒤를 쫓아다니던 징글징글한 남학생 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 인하는 강성구를 거들떠보기는커녕, 학년은 같은 고3이었으나 인하보다 나이가 네 살이나 위라서, 그런 늙은이가 자기 뒤를 쫓아 다닌다는 것부터 꽤나 모역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고등 학교 시절 한 학년에서 네 살 차이란 대단한 차이이다. 남이 다 여덟 살에 국민 학교 1학년에 들어가는데 집안 평현이 여북했으면 열 두 살이 되어서야 겨우 국민 학교엘 들어갔을까. 키도 다른 애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맨 뒷전에 뎅그렁하게 서 이쓴 애어른 같은 국민 학교 1학년 학생, 인하는 그런 강성구를 상상만 해도 등이 오싹해질 정도로 징글징글하였다. 아닌게아니라 남자 고등 학생인 강성구에게는 국민 학교 1학년 때 대강 그랬을 것 같은 모습이 엉겨 묻엉 가엇떤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강성구에게는 그럴 만한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다. 그는 본시 이 고장 태생이 아니라 북쪽 끝 혜산진이 고향인데 국민 학교를 제대로 여덟살에 들어가긴 하였으나, 졸업 후체 4년 동안이나 공을 쳤던 것이다. 국민 학교 다니는 6년 동안은 늘 1등이었고 급장을 하였을 뿐 아니라 전교에서도 이름 난 수재로 알려졌던 모양인데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도 그는 서울의 제 2고보, 즉 지금의 바로 경복 중학에 응시를 했던 것이다. 그는 rnralsg 가교 5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홀어머니에 하나뿐인 형님마저 자동차 운저수로서 일본군에 징발되어 트럭을 끌며 만주 중국 등지를 드나들어, 두 달에 한 번이나 코빼기를 내밀까, 이미 장가를 들어 제 식솔도 만주땅 봉천엔가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강성구는 그때도 어린 나이에 혼자 서울로 시험을 치러 올라갔었다고 한다. 열 네 살 어릴 적부터 그 정도로 이미 되까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험 결과는 보기 좋게 미역국을 먹었따. 강성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1년 동안을 이마에 수건을 동여매다시피 혼자 자습, 이듬해는 도내 첫째로 꼽는 함남 중학을 응시했다가 또다시 미끄러지고, 세 번째로 이듬해에는 영생 중학에 응시했다가 또다시 미역국을 먹었다. 이때는 아무리 강성구지만도 어지간히 기가 죽어, 할 수 없이 국민 학교 적 은사의 소개로 혜산진 영림서의 말단 고원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때는 형님도 만주 쪽에서 급하게 철수해 와서 먼저 제 식솔만 끌고 훤씬 남쪽인 원산 거리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강성구도 홀어머니를 모시고 뒤늦게 이사해 왔으나, 여전히 형님 식구들과 한데 섞여들지 못한 채 방 하나르 세로 얻어 어머니와 몹시 궁색하게 지냈었다. 의당 그럴밖에 없을 것이 형님이 운전수 생활로 버는 것으로는 도저히 두 집 살림이 힘겨웠던 것이다. 그러나 강성구는 여전히 향학 열이 대단하여, 혼자 힘으로 이 거리 고등 학교에 편입학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딪므 이 거리 학생들 사이에서도 물건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은 바로 해방 직후의 혼란기여서 중학생들도 처음에 학생 자치회를 만들었다가 금방 당국에 의해 공청으로 일괄해서 묶여졌었는데 곧 이어 민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리하여 되까진 학생들 사이에서느 꽤나 반발이 있기도 하였으나 당국은 당국대로 그런 학생부터 포섭해 두기 위해 민청 간부로 흡수시켰다. 강성구는 여느 학생들보다 나이도 네 살이나 위여서, 금방 그런 식으로 눈에 띄어 학급 민청 책임 간사로 발탁이 되었다. 그러나 강성구는 이럴수록 더 기고 만장 형식적으로만 책임 간사 일을 볼 뿐 반동적인 언동은 여전하였고, 빨강색 표지의 오노케이 영문법 책을 항상 끼고 다니며 영어 공부에만 열을 올렸다. 아니, 이건 지금의 솔직한 얘기지만, 진짜로 영어 공부를 했다기보다는 그 특유의 반은 여느 애들의 기를 꺾기 위한 일종의 그다운 시위였다. 햐편, 아직 중학생들에게 뻗쳐 오는 민청 조직이 허술한 탓도 있어 중학생 여학생들 간에 그런저런 풍문도 흔하였는데, 내노라고 뽐을 내려는 남학생일수록 그 무슨 장식이나처럼 그런 풍문 한 가지쯤 갖고 있어야 하여다. 이를테면 이름만 여학생에게 점을 찍어 두고 저 여학생 아무개는 아무의 것으로 점을 찍어 두었으니 그리 알라, 이런 식으로 공고를 해 버린다. 그렇게 영웅심이 섞어 공공연하게 선언을 해 버리고는 당사자 여학생이 응하거나 말거나 열심히 뒤를 쫓아다니고, 연애 편지라는 것을 써서 보내고 한다. 여학생 경우에서도 그렇다. 일찍 점이 찍히면 그만큼 값이 올라가고, 남학생들의 그런 집적거림에 초연하면 초연할수록 더욱 값이 올라간다. 그렇다고 실속도 없이 그런 여학생을 계속 쫓아다니기만 하는 남학생 쪽은 쑥이 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도리어 그 정도의 여학생에게 점을 찍은 그 안목을 인정해주고, 그만큼 남학생 쪽의 값도 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성구 같은 남학생이 제 뒤를 쫓아다니게 된 것에 송인하는 진짜로 억울하고 화가 났던 것이다. 그 정도로 강성구에게서는 다른 남학생들의 애리애리한 것과는 달리 벌써 애 늙은이 같은 것이 엉겨붙어 있었던 것이다. 여느 애들보다네 살이나 위여서도 그랬겠지만, 마치 국민 학교 1학년 때의 키는 그대가 있고 그후의 나이는 가로만 먹은 듯이 작달만한 키에 체구는 모로 펴져서 여간 꼴불견이 아니었따. 게다가 하는 짓이나 지껄이는 것이나 더 더 어른 흉내를 내려고만 하였는데, 그것이 사사 건건 의젓해 보이기는커녕 더 더 징글맞게 보였다. 소년 시절이 없이 유년기에서 대번에 청년기로 성장해 가는 사람이기나 한 듯이 일거수 일투족이 부자연스러웠고, 덕지덕지하게 위선덩어리요, 비린 냄새를 풍기었다. 해방 직후 그 무렵 한때 흔하던 남녀 중학생 합동 웅변 대회 때도 강성구는 유별나게 설치고, 목소리도 유별나게 어른 목소리이고, 활발하면 활발할수록 촌티가 질질 흘렀다. 그렇듯 애늙은이 같은 생김생김과 거조로 하여, 강성구는 그 무렵 대학이라는 것이 없었던 그 거리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꽤나 징그럽다는 평판이 이미 나 있었고, 백 미터 거리 앞의 걸음걸이까지 이상스럽게 모로 휘뚝거리는 것 같던 그의 모습이 나타나기만 하여도 여학생들은 저 늙은이 온다고 키들거렸던 것이다. 마침 공교롭게도 그 거리에 하나밖에 없던 남자 고등 학교는 거리 아래쪽에 있었고, 역시 하나밖에 없던 여자 고등 학교는 거리 위쪽에 있어서, 오르고 내리면서 하루 한 번씩은 부딪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성구는 고등 학교 학생치고는 항상 오연하고 떳떳하였다. 문자 섞어 이열 치열이라느니, 남자는 자고로 배짱이라느니, 저만큼 여학생들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 큰 소리로 뻥뻥거렸다. 양쪽 광대뼈가 쑥 빠져 나온 전형적 몽골리언의 그 얼굴도 가까이 건너다보면 볼수록 금방 산에서 나무를 찍다가 내려온 사람이기나 한 듯이 촌티가 질질 흘렀다. 그러나 마침, 늘 인하 옆에 춘향이의 향단이처럼 붙어다니며, 그런저런 말썽이 있을 때마다 제 일처럼 활발하게 가로맡아 나서는 '눈알바위'라는 별명을 지닐 정도로 눈이 크던 지숙이가 어느 기회엔가, "강성구, 동무는 인하보다 네 살이나 위 아냐. 그러니까 늙은이 아냐. 여동생 같은 애 갖고 뭘 그러니? 챙피하게." 하고 나서자 강성구도 여기엔 맞대꾸를 못 하고 피시시 웃기만 하였다. 그란 그후 어느 새 강성구와 지숙은 저희들끼리 꽤나 친하게 통하는 모양이었고, 여전히 강성구는 지숙을 통해 일편 단심이라느니, 남자의 한 번 결심이라느니, 못 하는 소리가 없이 더욱더 징글징글하게 인하를 못 잊어 하였다. 드디어 강성구는 자기의 이것이 여느 학생들의 반 장난보다 얼마나 진지하며, 또 강성구 자기가 얼마나 똑똑하고 배짱이 두둑하고 어른 뺨칠 정도로 구변도 좋은가 하는 것을 시위할 겸, 인하 집으로 사생 결단, 소위 담판이라는 것을 하러 왓다. 그 시절에는 그런 짓도 드물게나마 유행되었었다. 그때 인하 집은 부유한 편으로 2층집 양옥의 여관을 경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저녁답이었다. 밥하는 아주머니 말이 누가밖에서 찾는다기에 나가 보니, 강성구가 바로 집 앞 한길에 잠바 차림으로 까만 책보를 끼고 서 있었다. 마악 학교에서 나오는 길인 듯하였다. 그는 웃는 법도 없이 다짜고짜 그다운 큰 소리로 또박또박 느릿느릿 말했다. "아, 아, 전 지금 인하 동무 아버지를 좀 뵈러 왔습니다." "아부지는 왜요?" 인하도 앙칼지게 내쏘앗따. "아, 아, 그건 인하 동무가 알 필요 없습니다." "아부진 지금 안 계셔요." "그럼, 들어오실 때꺼정 여기서 기다리지요." "시골 가셨는데, 사흘 후에나 오실 꺼요." "그럼, 사흘 동안 여기서 기다리지요." 능히 연극으로라도 그럴 수 있는 강성구다. 학교에도 안 가고, 사흘쯤 굶으면서, 사라믈이 그 꼴 구경하러 오는 것쯤을 도리어 제쪽에서 거꾸로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충분히 그런 일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 그때 그 망신을 어찌 감당하랴. 인하는 안절부절하다 못해 허둥지둥하였다. 마침 그때 저만큼 아버지가 한길을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인하는 일순 집안으로 달려들어갔다. 급하게 층층다리르 달려올라가서 복도 창 너머로 내다보았다. 이미 강성구는 모자를 한 손에 벗어 든 채 아버지에게 무슨 얘기인가 지껄이고 있었고, 곧 이어 아버지는 강성구를 데리고 현관으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인하는 그만 복도 벽에 기댄 채 그대로 스르르 주저앉아 버렸다. 일본 어느 사립 대학을 나온 아버지도 강성구의 그 용기를 가상하게 여겨 빙긋빙긋 웃으면서 도리어 치하를 해 주고, 5년 후에 보자고 딱이 확약도 아니게 막연히 약속을 해 두었다. 그후로 강성구는 서로간에 약혼이나 한 듯이 동네방네 떠벌이고 돌아다녔던 것이다. 이것이 고등 학교 1학년 무렵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후 전국적으로 민청 조직이 째여지면서, 강성구는 이 일도 이 일이지만 형님이 월남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출신 성분상으로도 몰리는 입장이 되어 급기야 한 번은 전교 민청 대회에서 호된 비판을 당하였고, 이를 계기로 학급의 책임 간사 자리에서 쫓겨났을 뿐 아니라, '최후 경고'라는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하였다. 교내의 소위 자유주의적 기풍은 급속도로 스러져 갔다. 물로 니언은 여학교 쪽도 대동 소이하였다. 결국은 강성구의 인하에 대한 사모는 여전히 일편 단심이었을는지는 모르나, 이미 겉으로 드러낼 형편은 못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강성구도 지금 부산까지 피난을 나와 있다는 것이다. 그즈음 송인하는 물에 빠진 사람이 볏짚에 매달리듯, 혹시나 싶어 부산 바닥 가곳을 강성구를 찾아 헤매였으나, 그도 이미 군에 들어갔다는 소식이었다. 인하는 거듭 암담하였다. 3 이미 언니 순하도 인하의 일을 거의 그런 식으로 낙착됐지 별수 없으려니 하고 접어 두고 있었다. 인하의 눈치를 살피듯 하며 조심조심 말하였다. "이제 강성구를 만나 본들 별수 있겠니?" "누가 별수 있어 그러는가. 언니가 하도 언니답지 못하게 거지같이 노니까 그렇지." "이 비상 세월에 입에 풀칠하는 것만도 어디냐. 그거나마 대견하게 여겨야지. 니나 내나 이 험한 바닥에서 밥 벌어 먹을 재주는 없고." "그러니까 언닌 곽씨에게 날 팔아 넘길 작정이로군." "팔아 넘기다니.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끔찍한 소리냐, 내 생가에 곽씨가 나이는 좀 많고 사람이 의뭉스러워 보인다만, 그러면 어떠냐. 그럴수록 더 착실해 뵈고 믿음직하기도 하다는 거지. 어쨌든 난 모르는 일이니까 어디까지나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두고두고 내 원망은 말고." "......" 인하는 저런 식으로 남의 일 취급하듯 한나 언니가 야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부산 천지에서 언니와 단둘이 어쩔 것인가. 이미 곽시 아니고서는, 하루인들 목에 풀칠할 수가 없는 처지인 것이다. 더구나 지숙이까지도 이상스러워져 있었다. 고향에 있을 적에는 매사에 활기 만만하고, 강성구가 인하에게 집적거려도 제편에서 가로맡고 나서고 하던 것이었는데, 저도 피난 나온 이 부산 바닥에서는 잔뜩 기가 죽어 있었다. 그런대로 지숙이는, 제 오빠가 올케를 고향집에 남겨 둔 채 같이 나와 있어 인하 자매보다는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그 오빠는 처음에 부두 노동을 하다가 그즈음은 국제 시장에서 지숙이랑 같이 오누이가 양복 장사를 하고 있엇떤 것이다. 물론 어엿하게 점포 차린 장사는 아니고, 부두에서 흘러 나오는 군복을 싼 값으로 넘겨받아 두 팔로 휘감아 들고, '야앙복, 야앙복 사아지, 카아키, 야앙복, 야앙복'하고 시장 바닥을 돌아가는 그런 양복 장사인데, 오빠보다는 도리어 지숙이 쪽이 솜씨를 발휘하여 그것으로 오누이가 근건히 입에 풀칠이나 하는가 보았다. 같은 배로 월남해 온 터여서 지숙이도 처음부터 인하 쪽의 형편을 눈치고 대강 꿰고 있었고, 그렇게 인하랑이 기거하고 있는 방으로 자주 놀러 왔는데, 물론 인하도 곽씨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었다. 허구헌 날 자매가 방에만 들어박혀 있으면서도, 살림 기구며 양키 통조림 부스러기며 벌써 누군 가에나 수상쩍게 보였던 것이다. 가러니 인하 쪽에서 속이 켕겨서라기보다 의논 겸해서 털어놓았다. 징징 울 듯이 조바심 섞은 걱정처럼, 그러나 곽시 덕분에 이 정도로 지내고 있음을 어느 구석인가 은근히 자랑하듯이 속삭속삭 지껄였던 것이다. "그이도 이북에서 혼자 나왔대. 무슨 기관엔가 있다나 봐. 일본, 대만, 하와이까지 자주 오락가락하는 모양인데, 우리야 그 내용을 알 수 있니? 한 번싶기 갈 때마다 식량 며 가마니와 적지않은 돈을 언니에게 맡기는가 봐. 그런데 나이가 저렇게 층이 지가 않니. 그런데다 사람이 지나치게 그늘지구 무서워 얘. 입이 무겁고 과묵한 것이 믿음직해 보이기도 하지만, 원체 저렇게 나이가 많지 뭐니. 강성구 나이를 많다고 했었는데 네 살 차이면 얼마든지 좋겠어. 열 서너 살이나 차가 지니 말이나 되니 글세. 얘 지숙아. 네가 어떻게 좀 해줘, 말좀 해 줘." 하긴 지숙이 쪽에서도 경솔하게 함부로 나설 일은 이미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지숙으로서는, 강성구도 국군이 북족에서 진주할 때 국군 문관으로 트럭을 끌고 올라왔던 제 형의 트럭을 이용하여 부산 바닥에 나와 있는 것을 동광동 근처에서 보았다는 소리를 누구에게선가 들었다는 얘기 정도를 하기가 고작이었다. "어머, 그래? 그러니, 그게 참말이니?" 하고, 인하는 크게 놀라고 호들갑을 떨었으나, 지숙이 편에서는 시종 일관 무언지 서먹서먹해하는 얼굴이었고 오래 앉아 있지도 않고 금방 일어섰다. "난 이제 가 볼래, 장사하다가 왔지 머니?" 하고. 지숙이도 지숙이대로 이렇게 오래 앉았다가 그 곽씨라나 한 사람과 자칫 마주 부딪쳐서 인사를 하고 어쩌고 하게 되어도 몹시 난처해질 것이라고 철없는 중핵생 때라면 몰라도 이미 이런 일에 깊이 말려들 정도로 어리숙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인하는 더 더 조바심이 나게 궁지로 몰릴밖에 없었다. 순하 언니 그렇지, 학생 때는 노상 자기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곤 하던 지숙이 저렇지, 이미 여학생 시절의 그 풋풋하고 싱싱하던 인생은 멀찌감치 지나가 버렸고, 이젠 닥치는 일마다 마주치는 일마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그런 인생이 진자로 시작되었다는 말인가. 들쫓기듯이 몇 달이 지나며 사방 팔방으로 수소무하여 강성구의 행방을 겨우 알아 낸 인하는 그날로 대구 부대에 편지를 띄었다. 강성구는 헌병 하사관 시험에 응모하여 대구 헌병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학생 적의 그 일편 단심 그대가, 편지를 띄운 지 나흘째엔가 그는 부산으로 내려왔다. 헌병 바가지를 썼는데, 그것을 벗자 빡빡 깎은 맨머리바라미었다. 그 맨머리바람이 어찌나 궁상맞게 생겨 있고 징글징글했던지, 인하는 대번에 편지를 냈던 것을 후회하였다. "부대장 허락도 안 맡고 시내 근무 중 그냥 내려왔시다. 저녁까지 금방 올라 가야 합니다. 아버지는 나오셨습니까. 어머니랑 오빠도?" "언니하고 단둘뿐이에요. 배를 둘이서만 탔지요." "네? 아니, 그렇게 되었군요. 그거 아주 난처하게 됐군." 강성구는 금방 얼굴색이 달라졌다. 난처하게 됐군이 아니라 자신이 난처하게 걸릴까 보아 겁나는 표정이었다. 자칫 잘못 걸렸다가는 이 어렵고 험한 바닥에서 의지가지할 데 없는 두 여자를 떠맡게 될는지도 모르낟고, 뒷등이 써늘해지는가 가았다. 그러는 제 표정이 스스로도 화닥닥 의식이 되었던지, 아무리 낯짝에 두꺼운 철판 하나를 깐 강성구지만 살짝 당혹하며서 얼굴을 붉혔다. "저는 형님이 대구에 와 있어요. 제가 이북 있을 때 당한 거도 실은 이 형님때문이었지만요. 그자들이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아 버렸거든요. 이런 저를 민청의 비록 학급 책임 간사이긴 할망정 그런 자리에 그냥 안혀 둘 리가 있습니까. 게다가 저느 이북 있을 때도 노오 공부는 안 하고, 혼자 자습으루 영어 공부만 했거든요. 그 덕에 헌병 하사 시험에도 이렇게 합격을 했지만 어쨌든 나도 형님 따라 금방 월남을 한다는 것이 그만 차일 피일 하는 동안에...... 그건 그렇고, 참, 떠나기 전에 댁에도 들렀었는데 아버님과 언니만 계시더군." 강성구는 인하 쪽에서 경황도 없는 판임에도 주착없이 또 긴 사설을 늘어놓았다. "지금의 제 형편이라는 것도 그래요. 형님 쪽 식구는 저 혼자지만, 형수네 켠으로 식솔이 부글부글 끓어요. 형수의 친정 엄마에 친정 아버지에 대가리 큰 hedtod이 둘에, 하나는 전시 대학생이지요. 그러니 형님이 어쩝니까. 어깨가 휘어 질 지경이지요. 그래, 나도 계속 공부는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이 헌병에 뛰어 들어갔지요. 가마안, 그럼 인하씨랑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지요?" "염려 마세요. 폐는 안 끼칠 테니." 인하도 갑자기 싸늘해지면서 잘라 말하였다. 강성구느 비록 불원 천리하고 부산까지 내려오긴 하였지만, 아버지 없이 단둘뿐인 인하랑을 그닥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뻔하였다. 그날 밤 인하는 거의 반 강제로 당하다시피 곽시에게 침범을 당하고 말았다. 4 이미 옛날 일이 되어 버린 그 무렵의 그런저런 추억에 잠겨 있던 송인하는 밖에서 지숙이 들어오는 기척에 문득 제 정신을 차렸다. 비로소 이 방이 자기집의 안바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실은 지숙이네 집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송인하는 이즈음 와서 이런 실수를 곧잘 저지른다. 평상시는 자가용이 있어 버스 탈 기회가 별로 없기도 하지만, 때로 남대문 앞 버스 정류장 같은 곳을 지나다가 버스 속에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면 문득 버스를 타고 싶어져서 무작정 올라탄다. 물론 집 쪽으로 가는 버스임을 확인하고 올라타는 것이다. 그리고는 분명하게 어떤 생각으 띵붙들고 있지도 않으면서, 흡사 골똘하게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표정으로 멍히 바깥을 내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낯선 풍경에 화닥닥 정신이 든다. 웬 변두리 시장 옆을 지나가는 것 같아 옆사람에게 대체 여기가 어디쯤이냐고 물어 보면 엉뚱하게도 봉천동 같은 데 흘러와 있곤 하는 것이다. 그제야 황급하게 버스를 내려서 택시가 자가용 세워 둔 곳까지 되돌아온다. 이렇게 멍청한 짓을 곧잘 저지른다. 지금도 그런 식으로 자기 집의 안방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방이 지숙이네 집 지숙이 방이었다면, 대체 좀 전의 전화는 어떻게 된 영문일까. 전화로 '사모님이시군요.' 하고 지껄이던 그 '사무님'이란 호칭이 자기가 아니라 그러니까 지숙이었다는 말인가. 강성구에 관해서 물어 오던 것도 자기에게가 아니라 지숙이에게였다는 말인가. 하긴 어어 나30년이나 지나 버린 옛날 일이어서, 강성구와 상관되는 송인하 자기나 지숙이나 그게 그거로 마구 얽혀 있어 이제 와서는 강성구가 꼭 송인하 자기하고만 상관된다는 법도 없다. 그 점으로 말한다면, 어찌 강성구뿐이겠는가. 어릴 적부터 그리고 피난이라고 이 남쪽 땅으로 나와서 근 30년 같이 살아온 세월들이 줄곧 그랬다. 따로따로 독립해서 제 몫의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 둘의 몫을 한데 뒤섞어 소마면을 만들어서는 서로가 반을 뚝 잘라 나누어 가진 듯한 그렇게 두 사람의 삶이 마구 뒤섞여져 있는 셈이다. 물론 그러면서도 역시 자가용깨나 굴리는 인하 제 앞의 사는 몫이 따로 있고, 가럭 옆에 타고 지방으로도 오락가락하며 주모 시장 근처를 서성거리는 지숙이의 몫이 엄연히 따로 있긴 하지만. 지숙이는 그때그때 철 따라서, 지방 산물들(주모 농산물이었다. 딸기철에는 딸기, 수박철에는 수박, 김장철에는 야채, 마늘 등)을 트럭으로 떼어 와서 서울의 시장에다 넘기는, 여자치고는 꽤나 억센 장살띵 하고 있었다. 지숙이는 지금도 허리살이 오른 땅땅한 몸집에 까만 핸드백을 앞으로 안 듯이 하고 싱글싱글하면서 들어서고 있다. 지숙이는 금방 자다가 깬 눈으로 건너다 보는 인하의 표정이 멍청해 보여서인지, "오래 기다렸지? 심심했겠구나. 한잠 잤니? 한잠 푸욱 자지 그랬어." 하고, 마치 제 어린 것을 달래기라도 하듯이 수선스럽게 호들갑을 떨곤 인하 얼굴을 잠시 가까이 들여다보며, "왜 그래?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 있었니?" 하고 묻는다. 그제야 송인하도 다시 조금 전의 그 전화 생각이 나며 새삼 얼떨떨해졌다. "실은 말야. 조금 전에 이상스러운 전화를 받았어. 근데 네가 들으면 웃을 것이다만, 그 전화를 이 방에서 받았는지, 우리 집의 내 방에서 받고 너를 찾아왔는지 도통 몰라지누나." "어머 그게 무슨 낮도깨비 같은 소리람." 하면서 지숙이도 일순 상을 찡그렸다. "대체 우리 집에 오긴 몇 시에 왔니?" "열두 시경에 왔을까. 네가 없어서 오자마자 잠부터 잤어." "근데 그 이상한 전화라는 것의 이상한 점은 어떤 거지?" "사모님이냐고 묻더니 말야 혹시 강성구씨를 알겠느냐고 묻질 않겠어." "어머머, 강성구면 고향 있을 적의 머리통 크던 녀석 말이냐?" 지숙이도 강성구를 떠올리면서 우선 우스워지는 모양 비시시 웃음을 흘리었다. "그 강성구밖에 더 있겠어. 근데 넌 지금 대번에 강성구를 떠올린 모양이다만, 난 갑자기 생각이 나야지. 이름은 익숙해 있는데, 정작 사람이 잘 생각이 안 나다가 한참만에야 생각이 나더구나." "......" "그래서 잠시 우물쭈물하는데 저쪽에서는 금방 전화를 끊어 버리는 거야. 별일이군 글세." "남자 목소린데?" "그래. 어째 헐떡헐떡하는 목소리고, 전화 옆에 사람 하나가 더 있어 가지고 서로 쑤군쑤군거리며 거는 전화 같았어." "흥, 별일이다. 강성구면 너한테 전화를 걸면 걸었지, 나한테 걸 이유가 뭐니, 너 혹시 꿈을 꾼 것이나 아니냐?" "느닷없이 그런 엉뚱한 꿈을 꾸었을라고......" 송인하는 약간 얼굴을 붉혔으나, 지숙이는 모든 일을 그때그때에 깨끗이 처리해 버리는 데에 익숙해 있어, 그런 일쯤 벌써 훌훌 털어 내려는 듯하면서도 조금 궁금증은 남는가 보았다. 사실 지숙이는 어디서나 남편 성을 좇아서 미세스 구로 통하고 있고, 아니면 그냥 지숙씨, 혹은 피차에 해라로 말으 띵놓고 지내는 사이에서느 나지숙이로 통하고 있지만, 본인도 그런 호칭 따위는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고, 중뿔나게 자존심 같은 것을 내세우는 성미가 아니다. 그러나 그때그때 제 기분이나 근황을 안색이나 거동 혹은 몇 마디 말씨 속에 환히 드러내는 그런 종류으 가여자이다. 어찌 보면 속이 얕고 경망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저런 여자가 속이 얕고 경망스럽지 않았더면 어쩔 뻔하였을까 싶어 질 정도로 그러는 쪽이 쏘옥 어울리는 그런 여자이다. "아이, 어찌지요? 우리 애는 글세 편평족이래요. 저걸 어쩌지요?" "별걱정 다 하시네. 편평족이면 어떻다고 그래요?" "어머머, 편평족이 어떻다니요? 발바닥이 민숭해 빠졌는데두요. 찹쌀모찌처럼 말이에요. 징그렇구 을씬년스럽지. 게다가 조금만 걸어도 잘 부르트지요. 몽글몽글하게 살이 붙어 있으니 땀 많이 흘리지요, 그러니 냄새 고약하지요. 차라리 코 많이 푸는 것은 참을 수가 있겠어요. 볼품은 사납지만, 당장 냄새가 안 나니까요." "애 아버지가 편평족이신가 보군요?" "어머, 그걸 어떻게 아셨지요? 이상하시네. 사실 애 아범 편평족이지요, 큰 애 편평족이지요, 근데 작은애까지 편평족이지 뭐예요. 글세 발이면 발이고 다 똑같이 생겨 있을 것이지, 쓸데없이 웬 편평족이 다 뭐예요. 발음까지 고약하게 편평족, 편평족, 글세 편평족이 다 뭐냔 말이에요. 헌데, 어마, 우리 아범이 편평족인 건 댁에서 어떻게 아셨지요? 어떻게 아셨을까? 참, 이상한 일이네, 남의 애 아범 발이 편평족인 걸 대체 어떻게 알아 냈담. 발등도 아니고 발바닥을." 이런 식으로 늘 바글바글 끓고 있고, 도톰하게 간지럽게 생긴 입술도 잠시도 쉬임없이 늘 짓까불고 있지만, 듣는 쪽에서는 그런대로 시끄럽거나 귀찮지가 얻다. 저런 여자가 저런 멋으로 살지 않으면 과연 어떤 식으로 살았을 것인가 싶어지고, 그 항상 나불나불거리는 입술이나 송편처럼 몽글몽글한 목소리에서 웬 색감조차 풍기는 것이다. 요즘에 와서는 원체 나이가 들어가 그렇지도 못하지만. 아무튼 털끝만큼이라도 꺼끄러운 구석이 없기는, 지숙이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된 셈일까. 그 전화 목소리는 분명히 '사모님이시군요.' 했겠다. 그 호칭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지숙이에게 붙이는 호칭이기보다는 인하 자기를 염두에 둔 호칭인 것이다. 사모님이라는 그 호칭을 평소에 지숙이에게는 별로 안 쓰는 편이라면, 그렇다면 그 호칭은 인하 자기에게 쓴 호칭일 것이다. 그러니까 전화를 거는 쪽에서는 그 시각에 인하 자기가 지숙이 집에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물론 지숙이는 벌써 그 일 전체를 대견치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원체 장난을 좋아하니까 누가 장난을 했을 꺼야. 혹시 강성구 본인이었을지 누가 아니. 지금 전매청이던가 어디던가 수위로 있다고 했으니까, 그 덜렁거리던 사람이 좀만 심심할 꺼냐 말이다. 그래서 심심한 김에 네 저노하 번호 내 전화 번호 다 알아 두고 틈을 노린 거지. 그러나 수위로 있는 사람이 마땅하게 전화 걸 만한 핑계가 있을 게 뭐람. 남자 중학, 여자 중학 합동 동창회라도 있다면 모르거니와. 그래서 결국은 전화 걸 틈을 노리다가, 너한테 걸기는 아물래도 기분이 꺼림칙할 것 아니겠어. 너는 자가용깨나 굴리는 모이어서 피차에 사는 분수도 지나치게 층이 지고. 그러니 강성구 생각이 꽤나 복잡하고 주눅이 들어 있었을 것이거든. 그러니까 옛날부터 수월수월하게 대할 수 있어 꽤나 만만하던 나헌테 전화를 건 거지. 그랬다가 아무래도 전화 받는 분위기가 나 같지 않고 조금 이상스러우니까, 이크 하고 그 사람인들 약간 당황했을 꺼 아냐. 그 사람이라고 당황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 터이니까." 듣고 보니 과연 지숙이의 말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강성구가 전매청인가 어딘가에 수위로 있다는 소리는 초문이어서 송인하도 가볍게 놀라듯이 물었다. "아니, 지숙인 강성구가 그런 데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고 있었지?" "어머, 그랬구나. 언젠가 길에서 만났었어 얘. 어마, 내가 아직 너한테 얘길 안 했었니. 어머, 그럴 리가 아벗는데. 얘기 안 했었구나. 벌써 1년쯤 되었을 꺼야. 을지로 구 치안국 앞길을 걸어오는데, 앞에서 한 녀석이 마주 오는 것이 걸음걸이가 여간 익숙한 것이 아니지 머니. 참, 닮은 사람도 있다 싶어 그냥 지나치려는데, 뿔꺼덕 인사를 하는 거야. 지숙씨 아닙니까, 하고. 근데 여간 늙었더구나. 그게 또 기가 막히게 강성구답게 늙은 것이, 측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스워지는 것이 말야. 한길 가운데서 웃을 수도 없고. 전들 별수 있겠어. 역시 사람 싱겁기는 매한가지고. 와이셔츠 깃도 껍데기가 실밥이 돋아나게 닳아진 것이 근황이 대강 알 만하더구나. 구변 좋았던 것도 고향 있을 쩍의 얘기지, 지이기 이 서울 바닥에서 별수나 있겠어. 날고기는 자만 몽땅 몰려 있는 이 서울 인데. 게다가 어린 때, 그 늘 펀펀하고 늘 자신 만만하던 것까지 잔뜩 야코가 죽어서 말야." "결혼은 했다든?" "그야 했을 테지. 제까짓 게 안 하고 어쨌겠어. 제가 무슨 철학가고 독신주의 자라고 결혼을 안 했겠니. 보아하니 애도 주책없이 빼 낳아 쓸 것 같더라. 그러니까 어머, 우리보다 네 살이나 위였으니까 내일 모레 쉬흔이다 얘. 역시 그 인사성은 여전해서, '인하씨 근황도 잘 알고 있습니다. 부군께서 무역 회사를 크게 하시고, 지금 정릉에 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하는 거야. 이 바쁜 세월에 여전히 일편 단심 너더구나. '군대에 15년 넘겨 있다가 나와 보니까 이거 말이 아니군요. 완전히 낙오자가 된 셈입니다만, 두구 보십시오. 그래도 이 강성구라!' 어쩌구, 제 나이 쉬흔 살이 된 것도 모르고 뻥은 여전하더구나." "그럼 커피라도 마셨나 보구나. 길 한가운데 서서 그랬을 리는 없고." "말도 마. 다방에는 제가 가자 해놓고, 퍼키값 낼 때는 뒷전에 서서 미적미적 거리는 거지 머니. '아니 아니, 제가......' 어쩌고, 어깨 너머로 팔은 한 번 내흔들더라." 지숙이는 낄낄거리고 웃었으나, 송인하는 그래도 옛날 여학교 적에 유일하게 제 뒤를 쫓아다녔던 강성구가 지금 저런 대접을 받는다는 게 어쩐지 서운하여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수상하던 전화도 이렇게 지숙이 입에 올리자 어느 새 하찮은 일이 되어 있었다. 지숙이는 갑자기 두 눈에 광채를 발하며 무릎이라도 치듯이 한술 더 떴다. "그래 참, 좋은 생각 났다. 너도 요즘 그렇게 미치게 심심한 판이고, 강성구 그 사람도 꽤나 심심한 모양이고, 어쩌가. 한 번 쪼용히 자리를 만들어 보까. 내가 가운데 나서고 말야. 옛날 어린 때 기분을 다시 한 번 내보자꾸나. 어떻겠어? 기막힌 아이디어지?" 5 물론 남편도 송인하 자신의 입을 통해 강성구 얘기는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사실 남편은 부산 피난 시절 그런 식으로 거의 우격다짐으로 송인하와 결혼을 한 후 오늘의 신성 물산으로 일어서기까지, 밖에서 별별 파란 곡절을 다 겪고 이 나라의 기업들이 대체로 더듬어 온 부침을 겪어 오면서 더더 흉물덩어리가 되어 갔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탈이나마 유지 해 가자는 듯이 제 아내만은 하늘서 내려온 칠선녀 모시듯 하였고, 딸 대하듯이 대해 주었다. 지금도 여전한 송인하의 세상 물정 어두움, 그리고 어리광 버릇은 남편이 키워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남편은 인하와 결혼하자 위인이 홱 바뀌어 갑자기 딴 사람처럼 활달해지고 수다스러워졌던 것이다. 자연 인하 쪽에서도 결혼 전에는 징글맞게 보이던 남편이었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는 차츰 익숙해지며, 어리광 비슷이 고향 있을 적의 강성구 얘기도 수월하게 털어놓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송인하의 경우, 정작 얘길 하자고 들어도 싱거운 몇 마디밖에 할 말은 없었다. "그러니까 딴은 연애를 했다는 말이로군." 나이가 워낙 층이 져 있는 남편이 흔히 그렇듯, 매사에 필요 이상으로 어린 아이 취급을 하러 드는 버릇 그대로 남편도 입가에 경멸 비슷한 웃음부터 흘렸다. "중학교 다닐 쩍의 연애라는 거야 그게 연앤가. 보나마나 당신은 되우 비싸게 굴고 새침뜨기였을 테고, 그자는 뒷꽁무니나 쫓아다녔을 테지." 남편이 쏘옥 집어 내듯이 맞히는 것도 인하는 어쩐지 발끈해졌다. "중학생 여학생 장난치고는 엔간히 심각했어요." 거짓말로라도 이렇게 받았으니 남편은 시일시일 웃기만 하였다. "여기 피난 나와서도 피차에 어느 정도 조건만 허락되었다면 그이와 결하보디었을껄요. 난 그이를 찾아서 동광동 근처를 얼마나 헤매었다구요. 긔도 나를 찾다가 못 찾겠어서 헌병 모집에 응모를 했었다는군." "그걸 내가 미리 알았더면 헌병 시험에 떨어지게 해서 일선에 소모품으로 내보는 것을." "맘뽀를 그렇게만 쓰세요. 실은 당신과 거의거의 될 무렵에도, 난 대구의 그이 부대에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띄우고, 그이도 당신이라는 이리에서 날 구해 주기 위해 불원 천리 무단 초소 이탈로 부산까지 내려와 한 번인가 만났어요." "서로 얼싸안고 눈물바가지나 흘렸겠군. 그놈의 이리에서 헤어 나올 길이 없느냐고 말이지." "잘 아시네요." 물론 피차에 농담이었지만, 농담도 하다가 보면 농담만도 아니게 심각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농담을 하고 있는 당사자들도 그걸 의식하게 된다. 더구나 기혼한 사람들이란 항상 현재의 지체보다는 어쩌면 전혀 달랐을는지도 모르는 쪽에 미련과 동경을 느끼게 되고, 현재의 상태를 불만스럽게 여기기가 쉽다. 누구나가 억울한 결혼을 했다고 생각하기가 쉽지, 행복한 결혼을 했다고 생각하는 쪽은 드물다. 하물며 송인하의 경우에서랴. 그러나 강성구와의 일을 남편에게 마음놓고 털어놓던 그 시절이야말로 송인하로서는 밀월 시대였던 것이다. 지금도 남편은 강성구의 이름을 어슴푸레 기억은 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굳이 캐어 묻지 않고 모르는 체하고 있을 뿐일 것이지만. 사흘쯤 지난 오전 열 시께 느닷없이 지숙이가 정릉집으로 들이닥쳤다. 앉는 둥 마는 둥, 이마 목덜미 할 것 없이 부지런히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나, 바쁘다 바뻐." 하고는, 큰 일이라도 알리듯이 말하였다. "강성구하고 연락이 닿았다. 강성구가 틀림없었어, 전화 건 것이. 내 짐작이 맞더라니까. 내가 나올 줄 알고 저노하를 걸었는데, 어째 내 목소리 같지가 않고 너 같아서 질겁을 했대." "......" 송인하도 입을 뻥하게 벌리고 멍히 지숙이를 건너다보았다. 아무리 지숙이기는 할망정 이건 좀 지나치지 않는가 싶었으나, 도리어 얼었던 가슴 어느 모서리에 화뜻하고 불길이라도 닿는 느낌이 들었다. "몇심 년 전의 목소리를 전화로 어찌 그렇게도 잘 알까?" "원체 나라는 사람의 분위기가 있쟎니. 그런 건 전화로도 제꺽 알아질 것이거든. 내가 아니라 너라는 걸 안 것은 강성구의 독특한 후각인지도 모르고. 이제까지 몇십 년 동안, 변함없이 널 생각해 왔다는 증좌겠지." "아뭏든 마흔 살이 넘어서도 넌 극성두스럽다." 송인하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즈음의 송인하는 오로지 지숙이와 같이 있어야만 대번에 이렇게 상식적인 여인으로 돌아오고, 여기저기 얼고 맺혔던 응어리들이 저도 모르게 스를 풀려지고 쓸려 가는 느낌이다. 그렇게 송인하는 화색이 도는 얼굴색이었다. 다시 지숙이는 날렵하고도 조심스럽게 동서남북 주위를 살피는 듯한 눈길이 되었다가 조바심 섞어 재빠르게 말하였다. "헌데 야단났다. 네 허락도 안 맡고 약속부터 했어." "무슨 소리냐? 약속이라는 게?" 송인하는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차피 너한테 물어 보았자 우물쭈물할 것 같고 해서 그냥 약속부터 해 버렸다." "대관절 누구하고 무슨 약속이냔 말야?" 비로소 송인하도 약간 낌새를 차리며 드러내 놓고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하가싶다. "강성구하고지 누구겠니. 강성구하고 너하고 모레 여섯 시, 장소는 역시 남의 이목을 되도록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으슥하게 원효로 2가 중구집으로 정했어." "어마, 얘가 미쳤군." 하면서도 이미 송인하는 지숙이처럼 와락 상기된 얼굴색이 되었다. 아닌게아니라 지숙이는 이런 일 말고도 어디서나 모든 사람을 제 분위기로 휩싸 버리는 마력을 갖고 있고 그런 전염성을 갖고 있다. "뭐 어떻겠니. 한 번 그냥 만나만 보는 건데 뭐. 헌데 난 그 자리가 같이 끼지 않기로 했어. 모든 일 주선만 하고. 어제 틈이 나기에 혼자서 현지 답사까지 해 보았는데, 2층집으루다 맞춤해 보이던구나. 조금 골목길로 들어가서 으슥한 곳인데다가, 촘촘하게 있는 방문도 짙푸른 색깔이어서 적당한 분위기가 어둡고 말이다. 흔해빠진 호텔 식당보다는 백 배 나아, 어때?" "어머어머, 쟤가 미쳤구먼." 여전히 송인하는 입으로는 놀라면서도 두 눈은 웬 생기에 차서 윤이 나고 있었다. "그래, 강성구 그이는 뭐래?" "'네에? 중국집에서요?' 하고 왕창 놀라는 표정이더구나. 그러고는 드러내 놓고 내색은 안 하지만, 여간 좋아허는 게 아니야 얘." "......" "어찌 됐거나 모든 뒷감당은 내가 헐 테니 우선 만나나 봐. 이런 일이라도 없으면 넌 미쳐. 허구헌 날, 그러고만 있으니 미칠 일밖에 더 있어. 머쳐서 청량리 병원으로 실려 가는 꼴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이 눈 뜨고는 못 보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기분 전환 겸해서 강성구라도 만나 봐." "누가 미쳤는지 모르게구먼." 하면서도 송인하는 사알짝 눈길을 밑으로 내리까는 것이 지숙이의 그 말을 어느 일면 수긍하고 있엇꼬, 잠시 한숨을 내쉬고 싶은 듯한 슬픈 표정이 어리었다. "여하튼 난 지금 바버. 누구 말마따나 바쁘다 바빠야. 그러니 그냥 가겠어. 모레 여섯 시라는 것만 잊지 말구. 모레 다시 내가 전화를 할 테니까 넌 나올 준비만 하고 기다리면 되는 거야, 알아듣겠니?" 벌써 지숙이는 휭 나가고 있다. 이미 일은 결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모레 여섯 시." 송인하는 혼자 비시시 웃음을 흘리며 흔들의자 위에 주저앉았다. 실내의 차림의 그 모습은 흡사 큰 나비처럼도 보였다. 6 원효로 2가의 2층집 중국집을 현지 답사까지 했다는 지숙이의 말은 얼른 듣기에는 우스운 소리 같지만 따지고 들수록 자꾸자꾸 음습한 생각이 들고 은근한 기대조차 가져졌다. 지숙이가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면서 어딪너 심정으로 그 중국집의 2층방을 돌아보고 예약까지 했을 것인가 말이다. 송인하는 혼자서 거듭 곰곰이 생각할수록 서서히 화도 나고 괘씸해졌다. 도대체 아무리 어릴 적부터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 간일망정 자기가 여북 못났으면 이런 꼴을 당하는가 싶고, 자존심이 상하고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이었지만, 실은 기분은 도리어 달뜨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흔들의자에 흔들리면서 지나간 근 30년의 결혼 생활을 새삼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근 39년간은 백짓장처럼 빠안하고 단조로왔다. 얼른 생각하기에는 그 사이에 자기도 꽤나 달라지기는 하였다는 생각이지만, 세상이 달라진만큼의 몫으로 자기도 과연 달라지기는 달라졌을까. 어떻게 생각하면 세상 달라진 분수만큼 달라진 거도 같지만, 무언지 그 점은 애매 모호하고,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는 쪽으로 머리가 가로저어졌다. 세상의 흔한 예로 따지자면, 처녀 시절에느 나비록 새침뜨기였다가도 일단 결혼이라는 것을 해서 아이라도 두셋 빼 낳으면 별수 없이 살이 찌고 성격도 그와 비례하듯이 개방적으로 되고, 넉살군이 되어 가야 했을 것이다. 지숙이만큼은 아니라도 적어도 그 반만큼이라도. 헌데 웬일일까. 송인하 경우에서는 그렇지가 못하였다. 새침뜨기에서 뚱뚱한 중년 부인으로 옮겨 간 것이 아니라, 새침뜨기에서 그냥 새침뜨기로 옮아가고, 게다가 어리광까지 곁들여져 애리애리하던 소녀가 대번에 늙은 고지스러운 소녀로 둔갑을 해 버린 꼴이다. 그렇게 처음부터 바깥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 큰계집애 윤영이만 하여도 벌써 대학을 마치고 출가하였고, 그 밑으로 윤국이와 윤화도 대학 2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이다. 이렇게 1남 2녀의 어머니이면 그야말로 1남 2녀의 어머니답게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엉덩이도 펑퍼짐하게 퍼져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기는커녕, 이 아이들까지도 어머니를 제대로 어머니로 알기보다는 늘 저들 쪽에서 조심조심 위로를 해 주어야 하는 그렇게 무겁고 부담스러운 것으로 알고 있는 터였다. "대체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송인하도 이따금 이렇게 중얼거려 보지만, 자문 자답만 하고 앉아 있을 정도로 군살이 지나치게 박혀 있었다. 지숙이르 띵포함한 모든 여느 여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날로날로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그럴수록 조바심은 더욱 조바심으로 이어 갔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세월 흘러가는 것을 쫓아 그대로 흘러가는 데 비겨, 자기만은 어느 대목에서 삶의 실꾸러미가 삐끗 얽혀지고, 그렇게 정지당한 느낌인 것이다. 이게 과연 정지일까. 6.25 후 월남해서, 부산서 저 남편이라는 사람을 만나 그의 그늘에서 식물원 속의 식물처럼 자라면서, 애 셋을 빼 낳고, 남편의 바깥일에는 전혀 관심을 안 가지고, 남편 쪽에서도 그러기를 원했다. 헌데 웬일일까. 송인하 입자에선는 여직까지도 이 모든 것이 생판 허구처럼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1950년 그 해 겨울 어찌어찌 배를 타게 됐던 일부터, 그리고 부산서 어찌어찌 지금의 남편에게 우격다짐으로 결혼을 하게 된 것을 비롯하여 일남 이녀를 거느리고 이만한 가정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웬일인가, 아직까지도 문득문득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훌훌 털어 버리고 고향의 아버지, 어머니품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겠거니 하고 여겨지는 것이다. 마치 지금이라도 진짜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지난 스무 해 남짓 동안 이 남한에서 구축해 놓았고, 자신도 어언 마흔 살 퉁적에 넘게 늙은 일이 일거에 하룻밤 꿈으로 물러가 버리고, 자기는 스무 살 남짓의 그때 그 소녀로 되돌아가서 고향의 아버지,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틀림없이 그렇게 된다. 그렇게 다시 제대로의 삶을 살게 된다 싶은 것이다. 이러한 가한상이 대체 어디에서 연유된 것일까. 만일 실제가 그렇지 못한다면, 송인하 자기만은 너무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으로 온통 젖어 있다. 왜냐 하면 자기는 스무 해 남짓 동안 오직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바라며 모든 희생을 감수해 온 것이다. 부산서의 남편과으가 결혼이나 그후 애 셋을 빼 낳은 일이나 어찌어찌 바닷속 용궁으로 돌아온 데 불과하다. 이건 언제든 끝장이 날 허깨비 삶일 분, 돌아갈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모든 걸 훌훌 털어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그 무렵의 스무 살 전후의 나이로 돌아가면서. 송인하의 이런 착각이나 환각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혼자 있는 때일수록 이 점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기실 송인하의 모든 어리광이나 불건강해 보이는 삶은, 이 점에 연유가 있는 것이엇다. 송인하 보기에는 지금 모든 사람이 영위하고 있는 삶은 제대로 온전한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오후 두 시경, 밖에서 막내인 윤화가 들어서자, 송인하는 이 막내딸 앞에서 조차 그 일을, 강성구와 만나게 된 일을 자랑하고 싶어질 정도로 비정상이라면 비정상이었다. "아까 지숙이 아줌마가 다녀갔다." 송인하는 방긋이 웃으며 스타카토로 말했다. "왜애? 지숙이 아줌마가 왜애?" 윤호는 노상 제 집 드나들 듯하는 지숙이 아줌마인데, 뭐가 새삼스러우냐는 듯 어머니를 빠안히 쳐다보며 한 발 다가선다. "맞혀 봐, 왜 왔겠는지?" "글쎄에 뭘까?" 윤호는 새끼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었다. 송인하는 다시 방긋이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너도 강성구란 사람 알지? 어머니의 옛날 남자 친구였다는 사람---" 윤호는 시원하게 생긴 큰 눈망울을 굴리며 잠시 '?' 하는 표정이더니, "응, 그이. 고향서 학교 다닐 대 사귀였다는 그이 말이지. 어머니에게 언젠가 들어서 알 뿐이지 머. 왜애? 그이가 왜애? 그이가 어쨌어?" "지숙이 아주마막 그이를 만나게 해 준댔어." "엄마를?" "그러엄. 엄마지 누구겠어." "어마아, 신난다. 그이는 어디 있대?" 윤화도 부러 맞장구라도 치듯이 신바람을 내었다. "전매청인가 어디에 수위로 있다나 부드라." "에게에......" 윤화는 드러내 놓고 실망하는 표정을 하였지만, 곧 어머니 뒤로 서서 흔들의자를 두 손으로 하늘르었다. 차마 앞에서 정면으로 어머니를 마주보기는 난처하고 민망하다는 듯이. "근데 윤화 넌 어떻게 생각하지? 엄마가 그이를 만나는 걸." "그야 엄마 나름이겠지 머. 엄마가 좋아하는 일이면 난 뭐든지 다 좋으니까머." "그래애?" "근데 정작 만나면 엄마가 실망하지나 않을가. 지금 그이가 전매청인가 어디에 수위라지 않았어. 그러니 정작 만나며 와르르 무언가 무너지는 듯하지나 않을까 몰라. 그렇게 또 현깃증이나 일으키지 않을는지 걱정이군. 게다가 그분도 이젠 늙었을 테고." "......" 그럴까, 하긴 그럴는지도 모르겠군. 잠시 간을 두었다가 송인하는 낮은 억양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몇 년 전, 7.4 성명이 나던 무렵만 해도 네 말대로 그랬을는지 모른다만......" "......" "물에 빠진 사람이 볏짚 잡기일 것 같다. 근데 윤화 넌 이런 엄마를 어떻게 생각허지?" "도리어 내쪽에서 되묻고 싶어. 다 큰 딸에게 엄마가 그런 시긍로 묻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하고." 윤화는 잠긴 억양에는 그러나 독이 스며 있었다. 송인하는 그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제 할 얘기만 그냥 지껄였다. "기왕 얘기가 난 김에 한다만, 지숙이 아줌마는 원효로 2가의 어떤 중국집 하나를 벌써 예약해 놓았다. 하필이면 원효로까지 나가서 구석진 중국집을 고를 것은 뭐였겠니?" "......" 비로소 윤화도 의자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나 송인하는 저 혼자서 두 팔굽에 힘을 주어 왈가당왈가당 거칠에 흔들어 대었다. 그 두 눈은 갑자기 뚜릿뚜릿해져 있었다. 다르게는 살 거리가 없어진 여자의 그 영악스러운 냄새가 왈칵 풍기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네 시경 전화가 걸려 왔다. 송인하는 가슴이 철러애며 수화기를 잡고는 조심스러 주위를 살피었다. 막내딸 윤화에게까지 제 입으로 다 털어놓았으면서도 정작 전화를 받으면서는 새삼 주위가 살펴졌다. "인하냐?" "나야." 목소리가 같이 부딪쳤다. 송인하나 지숙이나 그 정도로 급해 있었다. 얼결김에도 송인하는 웃음이 나왔다. "나 지숙인데." "응." 지숙이는 혼자 키들키들 웃는 듯하더니 조용하게 물었다. "나올 준비 됐니?" "준비래야 머." 인하 쪽에서 우물쭈물하자, "하긴 그래. 맞선 보는 것도 아닌 거고, 구면끼리 만나는데 머." 하고 지숙이는 덧붙였다. "근데 말이다. 일단 아테네 다방에서 만나기로 했어. 명동 아테네. 왜 언젠가 KAL 사람 만났던 곳 알지?" "응응, 알겠어." "그리고 다섯 시 정각에 나와. 꼭 시간 지켜야 해." "그래애." 송인하는 어째선가 스무 살 안팎 때처럼 가아는 목소리로 받았다. "그럼 나 바쁘니 전화 끊는다. 알았지? 꼭이야." 지숙이 쪽에서 호들갑스럽게 전화를 끊자, 인하도 사알짝 수화기를 놓고는 새까만 전화기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전화로라도 지숙이와 같이 말을 주고받는 동안에는 옛날 인하로 돌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다가도, 전화만 끊어지면 금방 사방이 콱콱 막힌 숨막히느 오늘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7 송인하는 문득 또 불안해졌다. 그러니까 강성구 쪽에서 이편의 눈치를 저 나름대로 미리 낌새를 차리고, 그런 식으로 피하자는 속셈이나 아닐까 하고. "아무리 옛날 그때는 죽을 둥 살 둥 좋아하던 여자였을망정, 이제 이순을 넘긴 나이에, 엄연히 남의 유부녀가 된 여자를 으슥한 중국집에서 만나고 어쩌고 저는 그러고 싶진 않습니다. 저는 그런 쓸개빠진 놈팽이는 아니란 말입니다. 요전번에는 얼떨김에 그저 깊은 생각 없이 그러마고 했습니다. 다시 깊이 깊이 생각해 보니까 인륜 도덕에도 어긋날뿐더러, 우선 제 자존심으로도 용납을 않는군요. 지숙씨도 익히 아시다시피 저도 이젠 처자 권속을 거느린 몸으로서!" 사람이 욱적북적 끓는 다방 같은 데 마주앉아 떵떵거리듯이 이렇게라도 지껄여서 지숙이를 무안하게 만들지나 않았을까. 그러나 원체 지숙이라 강성구의 그런 소리쯤은 눈하나 까딱 않고 고압적으로 너몃을 성도 싶다. 이북에서 고등학교 시절 '강성구 동무, 동문 인하보단 네 살이나 위 아냐. 그러니까 늙은이 아냐. 여동생 같은 앨 갖고 뭘 그러니.' 하고 강서욱쯤 제 손아귀에 틀어 쥐고 놀리던 실력은 여전한 지숙일 테니까. 아닌게아니라 지숙의 그런 종류의 넉살은 이 남쪽으로 나와서 물 만난 고기처럼 더 본격화되었던 것이다.난다 긴다는 도매군드로가 우락부락한 트럭 운전수들이 씨글씨글한 중부 도매 시장 같은데서도 너끈히 해내는 지숙이가 아닌가. 장사 수완도 수완이지만, 그 활발하고 억센 기력은 이북에 있을 때 어린 때부터 싹수를 발휘했던 것이었다. 한편 강성구란 사람은 도대체 그런 사람이었다. 이북 있을 때부터 사람이 많은 데서일수록 더욱 기가 나서 떵떵거리듯이 제 자랑만 하려들었던 사람인 것이다. 시내 남녀 고등 학생 전문 학생들이 모여 그 무슨 보고 대회라든지 열성자 대회라든지 열릴 때에도, 서로 하가교가 다른 낯설은 애들 틈에서일수록 더더활기 있게 제가 미치 뭐이기나 한 듯이 큰소리를 뻥뻥 치던 것이다. 목소리나 작았다면 모른다. 목소리까지 우렁우렁하게 바리통이어서 강당 저편 구석 자리에서 지껄이는 그의 목소리는 강당 이편 구석 여학생 자리에까지 찌렁찌렁하게 들렸던 것이었다. 참, 지금도 생각이 난다. 이북의 소위 애국가라는 것이 새로 정해지고 얼마 안 되었을 때도 무슨 보고 대회에선가 애국가 봉창이 마악 있고 나서였다. 마침 뒷자리 근처에 앉았던 강성구가 한 마디 또 빈정거리던 것을 역시 여학생 줄의 뒤편 자리에 앉았던 인하도 들은 일이 있었다. "흥, 나라 잘 되어 간다. 애국가가 둘씩 있는 놈의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어디 있겠어." 별로 우스운 얘기도 아니었지만 으레 강성구 목소리에 남학생 여학생 할 것 없이 그 소리를 들은 뒤쪽 학생들은 킬킬 한바탕 웃었던 것이다. 이건 뒤에 들은 얘기였지만 그 대회가 끝난 후 강성구는 그 일로하여 시 민청 본부 학생부에까지 소환을 당하여 조사를 받았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도 강성구는 눈하나 까딱 않고 제 할 소리를 다 했다든가. "저는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일구겡 국가라는 것은 사실 하나 있는 것이고 하나여야 마땅한 것이지 둘이 있다는 건 비정상 아닙니까. 어쨌든 우리 한반도는 한 나라이고 한 나라여야 합니다. 지금은 부당하게 남북으로 갈라져 있지만, 언젠가는 합쳐져야 할 한 나라 아닙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둘이라는 건 어쨌든 좋은 현상은 못 되지 않습니까." 조사를 담당했던 사람도 이 말을 듣고는 약간 어리벙벙해하며 그냥 강성구를 돌려 보냈다는 것이다. 그후 말할 것도 없이 이 소식은 남녀 학생들 사이에 쫙 퍼져서 강성구는 더더 유명해졌고 일종의 돈키호테처럼 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때 여학생 틈에서는 거의 대표적인 새침데기였던 인하입장에서는 그러면 그럴수록 그때 여학생 틈에서는 거의 대표적인 새침데기였던 인하 입장에서는 그런 강성구가 더욱더 징글징글하였다. 아무튼 그 무렵만 해도 강성구의 그 정도의 행태는 이북 세상에서도 통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데 강성구의 그 버릇이야 여전할 것이 아닌가. 세상에는 단둘만의 호젓한 자리에서라야 진짜 제 빛을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어중이떠중이 사람들로 들끓는 속에서만 진짜 제 빛을 내는 사람도 있다. 강성구란 사람은 후자 쪽이다. "중국집에서요? 더구나 원효로 2가의 으슥한 집으로 정헐 것은 뭡니까. 남보기에도 되레 수상쩍게 보일 것이니 명동 같은 데서 우선 만나지요. 그랬다가 한일관이라든지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이 점 오해는 마십시오. 제가 중국 음식을 싫어해서는 아닙니다. 중국집, 그야 좋지요. 무방하지만, 원효로 2가 같은 구석진 곳보다는 중국집이라도 명동 중국집 쪽이 훨씬 양명할 꺼라 이겁니다. 글세 값은 조금 비쌀는지도 모르지요만, 비싸 봤자 얼마 차이 안 날껄요." 이쯤 요만 정도의 일임에도 '오해는 마십시오.' 어쩌고 뻥뻥거리며 잘난 척하고 촌티가 물씬물씬 나게 너절부레 지껄였을지도 모른다. 송인하는 혼자 이렇게 저렇게 상상해 보며 벌서부터 휭하게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다섯 시 정각, 지숙이가 일러 준 대로 아테네 다방에 닿았을 때는 이미 지숙이와 강성구는 마시고 난 빈 주스컵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첫눈에 강성구는 30년전 그때하고 별로 달라진 점이 없어 보였다. 광대뼈가 남달리 삐져 나와 몽고종 토종으로 생긴 그 생김새의 특징이 원체 강해설까, 스무 살 안팎이던 그때와 쉰 살 안팎인 지금의 모습이 어슷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눈 가장자리의 주름살이며, 조금 군살이 쪄 보이는 얼굴 근육의 물컹한 느낌이며, 역시 강성구 나름대로 늙어 있기는 하였다. 당꼬 즈봉 같은 통이 좁은 카키색 즈봉에 회색 노타이 차림이었다. 그 수수하게 입은 옷차림으로도 이즈음의 지체를 능히 짐작해 볼 수강 가었다. 10여 년을 군대 하사관으로 wlsroh, 서른 살이 훨씬 넘어서 비로소 이 남한 사회라는 곳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의 그 어딘가 구질구질한 땟국이 첫눈에도 울컥 느껴졌다. 그러나 강성구의 그 여전한 촌티에 그 어떤 여겨움이 대번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강성구다운 그 점이 도리어 더 친근하게 따뜻하게도 느껴졌다. 강성구도 인하의 남편처럼 처음부터 이 바닥의 양지에 터를 잡고, 급한 변모를 보이고, 소위 세속적으로 세련되고 되바라지고 되까졌더라면, 송인하로서도 지금 이 마당에 이다지도 흥이 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이런 자리가 마련되었을 리도 없다. 첫눈에도 강성구는 옛날 모습 그대로였고 징글징글하게 늙은 소년 같던 옛날 분위기 그대로였다. 그것이 사르르 웬 따스한 향수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지숙은 금방 강성구 옆자리로 옮겨 앉으며 그편으로 걸어오는 송인하를 쳐다보고 비쭉비쭉 웃기부터 하였다. "드디어 귀부인께서 나타나시는군." 비로소 멍하게 이짜고을 보고 있던 강성구도 화닥닥 정신이 드는 모양, 급하게 피워 물었던 담배를 탁자 위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서 송인하를 맞이하였다. 그 모습은 여전히 옛날 그 늙은 소년 같던 모습 그대로 지금의 나이에 어울릴 만하게 이제는 고지식한 도학자 같은 중늙은이 표정이었다. 송인하느 분위기로 느껴지는 지숙의 넉살과 호들갑이 이 경우에는 와락 신경에 거슬렸으나 일단 묵살을 하였다. 이런 대면 자리에서는 상대편 남자가 형편 없이 초라한 행색이라는 것도 이편의 감정 폭발을 더욱 부채질하기에 알맞았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비로소 강성구도 두 눈에 연극적으로 힘을 주며, 여느 때의 그답지 않게 감상적인 표정 섞어 조용히 첫 입을 떼었다. 송인하도 눈물이 나오는 것을 겨우겨우 참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한 손으로 이마에 짚으며 골치라도 후려때리는 듯한 낯색을 한다. 그것은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응석받이 같은 표정이기도 하다. 산전 수전 겪을 일 다 겪어서 닳을 대로 닳아지고 눈치 하나는 빠를 대로 빠른 지숙도, 일단 같이 덩달아서 심각한 얼굴을 하였다. "어디 편치 않으신가 보군요." 강성구도 다시 자리에 앉으며 묻는다. 그러나 송인하는 그 소리를 듣는 둥 만 둥 마음 속으로 가장 아껴 온 사람에게라도 지껄이듯이, "뭐, 드셨나요?" 하고 침착하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웬일일까. 기껏 정겹게 지껄인다는 것이, 그 억양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여학교 적 그 소녀 시절의 새침데기 같은 투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게 차가운 억양이었다. 근 30년이 지났음에도 이 강성구 앞에서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아득하게 잊어버렸던 옛날 여학교 적의 그 새침데기 자세를 시위하게 되는 것이다. "네, 들었습니다." 강성구도 오나가나 어디서나 늘 떳떳하기만 하던 여느 때의 그답지 않게 설설매듯이 받았다. 깔끈깔끈한 콧수여미 나 있고 귀 밑에는 면도하다가 벤 자국이 꽤 크게 나 있었다. 요즈음 흔한 전기 면도기 하나도 아직 장만하지 못했는가 싶은데, 강성구는 이편의 그런 생각을 미리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허덕허덕 필터가 누런 싸구려 청자 담배 한 대를 꺼내 물며, "전 이것이 맞아서요. 산탄진이나 거북선이나, 또 그 뭐래드라 빨간 무늬 있는 참, 썬이라든가, 그런 건 비싸기도 하려니와 우리 성미에는 당최 안 맞더군요. 교제용으로라면 혹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헌데, 제 직업이라는 게 또 1년 열 두 달 가야 교제할 일이 있을 리 없구 말입니다." 신탄진이나 거북선을 못 피울 형편이면 형편이었지 그 정도 일 갖고 또 저렇게 말이 많은가. '교제용'이라는 말도 얼마나얼마나 촌스러운 말인가. 여전히 강성구답다고 생각하는데, 일순 강성구는 억양을 바꾸며 불쑥 물었다. "슬하에 1남 2녀라든가요? 그렇지요?" 퍼다다하게 웃는 얼굴을 하자, 양쪽 눈 가장자리에 주름살이 몇 줄 지어졌다. 그것이 금방 부드러운 느낌을 가미해 주었다. 여전히 그 툭 삐져 나온 광대뼈도 옛날 그때처럼 징그럽게만 생각되지 않고, 어쩐지 정력적으로 정력이 좋은 사내일 거라는 쪽으로 비쳤다. 송인하는 눈길을 살짝 내리깔면서 빠르게 받았다. "네, 1남 2녀예요." "그 정도면 우리 나라에서는 표준형 아닐까요?" "글쎄요." "제 생각은 그런데요. 2남 2녀나 1남 2년나 대강 그 정도면 표준형 아닐까요. 앞으로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까지는. 물론 미국 같은 나라는 다르지요. 죽은 로버트 케네디 같은 사람은 아홉인가 열을 낳은 것 같고, 그 형님 존 케네디는 1남 1녀지요. 아마 하나는 출산하다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존슨 전 대통령은 아마 딸만 둘이지요. 닉슨도 그 비슷하고, 포드도 둘이든가 셋이든가, 이번의 카터는 2남 2녀든가요?" 또 저런 식으로 나오고 있다. 도대체 그런 얘기들이 이 자리에 어떻게 상관이 된다는 걸까. 미국 대통령들이 그 슬하에 자식을 몇몇씩 거느렸건 그것이 이 자리에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좀 조용히 할 수 없으시까, 강성구씨. 여전히 입 정력은 어지간하시군." 듣다 못해 지숙이가 쐐기를 넣고는 낄낄거리며 웃자 그제야 강성구로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워지는 모양 비시시 쓴웃음을 흘렸다. 송인하는 무안당하는 강성구 편을 들 듯이 다시 물었다. "강 선생님은 슬하에 자제가 몇이나요?" "네, 저도 셋입니다. 그러니까 가만 보자, 2남 1녀지요. 이젠 단산했습니다. 서른 다섯 살에 장가가서 이 나이까지 셋 빼 낳았으면 어지간한 셈 아닙니까. 저 먹을 것은 제 팔자로 다 갖고 나온다고는 합니다만, 어쨌든 많이 나면 현실적으로는 양친 부모의 어깨가 무거워지는 건 사실이니까요. 백만 장자가 아니고서야." 강성구가 다시 이런 식으로 떠벌이고 나오자 송인하도 어느 새 민숭하게 깨어 오는 느낌이었다. 적당히 가라앉은 은근한 분위기 속에서 옛날 어릴 적의 기분이나마 맛보려고 하였는데 초를 확 끼얹힌 꼴이었다. "그건 그거구 진짜 앞으로 먹고 살 일이 야단이군요." 하고 강성구는 엎친 데 덮치듯이 한술 더 떴다. "저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올시다마나, 솔직하게 말해서 귀천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지만 매달 매달 당장 수입면에서의 심한 격차는 어쩔 수 없는 거다, 이겁니다. 그렇다고 전매청 수위 노릇 하면서, 전매청장과 똑같은 대우를 해 달라는 건 무리겠지만, 여하튼 봉급 갖고 애들 학비 대면서 최소한의 생활은 영위되어야 할 꺼 아니겠습니까. 누구는 거북선이나 썬을 피우고 싶지 않아서 못 피우는 줄 아십니까. 저로서는 도저히 그럴 형편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금방 조금 전에는 청자가 그 중 입에 맞아서 피운다고 하더니, 어느 새 딴 소리를 하였다. "그래요. 저는 잘 모르지만, 물가가 또 뛰어오르는 모양이더군요. 연탄값이 왕창 올랐지요. 기차삯, 버스삯, 체신료, 전화 요금에 --- 몽땅 오른느 모양이더군요." 송인하가 언제 이런 점에 관심인들 가졌더란 링라인가. 그러나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주워들은 소리를 풍문삼아 한 마디 하자 강성구는 다시 입에 거품을 뿜었다. "우린 전화 요금은 상관 않겠어요. 솔직하게 얘기한다면 전화 요금 같은 것은 올려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쪽이지요. 제가 전화를 못 놓아서 배가 아파서 이런 소리를 한다고 오해하실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말은 솔직하게 해야지요. 저는 본시 거짓말로 이리저리 둘러치며 얼렁뚱땅 먹고 사는 사람을 가장 쓰레기 인생으로 보는 사람이지요. 이를테면 부로커 같은 사람 말입니다. 사실 말하자면, 흔한 장삿군들, 업자들, 그거 다 뭐하는 사람들이지요. 전화나 놓고 사는 사람들이야, 돈푼깨나 남아 나는 족속이고 거드럭거리는 족속이 아닐까요. 사실 전화 요금 같은 것은 세 곱 네 곱으로 올려도 무방할 꺼예요. 연탄값, 쌀값, 버스값, 그런 게 문제지 전화 요금 정도는 별문제지요. 전화 요금 정도는 올려서 무방해요." 이쯤 되자, 송인하는 어느 새 이 강성구라는 사람과 근 30년 만에 이렇게 처음으로 만나느 것이 아니라, 일 년 열두 달 노상 만나 온 사람이나처럼 대번에 속속들이 익숙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칫하면 헛돈을 쓸라나 부다, 저녁 한 끼라도......' 송인하는 혼자 생각하고는 스스로도 슬그머니 놀라졌다. 대체 자기는 이 강성구와 만나서 어쩔 작정이었더란 말인가. 한참 떠벌이던 강성구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라는 것도 잠시 잊은 듯 볼일을 보려고 자리를 피했다. 그러자 지숙이가 미간을 찡그리며 재빨리 속삭였따. "저래 가지고야 어디......" "......" "어쨌든 원효로까지는 갔다가 보자. 기왕 중국 요리 몇 가지도 미리 시켜 놓았으니. 곧 죽어도 명동에서 만나 같이 택시 타고 가자고 고집을 피우던구나. 요즘 택시 잡기가 얼마나 힘든 줄도 모르고 말이다." 지숙이는 강성구의 저 꼴로 미루어 이미 사세는 뻔한 것이라고 작정하는 듯 우락부락 지껄였다. "난 갔다가 적당한 시간에 자릴 피해 줄 테니까 그까짓 기왕 장난인데 너도 이런저런 응어리나 풀 겸 한 번 대담하게 나가 봐." 하였다. 강성구가 볼일을 보고 다시 자리에 돌아오고 있었다. 셋은 곧 다방을 나와서 명동에서 택시를 잡았다. 지숙이가 냉큼 앞자리에 타더니 양쪽 가장자리가 비쭉 치오른 색안경을 꺼내 쓰면서 운전수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였다. "원효로 2가로 갑시다." 뒷자리에는 송인하와 강성구 순서로 탔다. 송인하도 택시에 오르자 금방 색안경을 꺼내 썼다. 강성구도 무안해 오는 것을 얼버무리듯이, "참, 지숙씨답기는 하군요. 이 근처에서 만나면 어때서 원효로 2가로까지 나갈 것은 뭔구. 한식, 양식, 중국집 할 것 없이 음식점으로 말하면야 이 명동 바닥이 낫지." 하였다. "어머, 김칫국부터 마시는군. 누가 강씨에게 양식 사 준답니까. 도대체 양식을 먹을 줄이나 알면서 양식 소릴 하는 거예요?" 하고 지숙이도 어느 새 '씨'자를 붙이는 둥 마는 둥 거의 반말지거리 억양 비슷이 벌써 둘은 수작을 벌이고 있었다. "지숙이도 이 남한으로 잘 나왔지. 안 나왔다면 언제 그런 색안경인들 써 보았을 것이며, 이런 자동차인들 타 보았을라구. 말은 바른대로, 이 남한 나와서 팔자 폈지, 폈어." "흥, 저느? 강성구씨, 저는?" "나야 당장 돈이 없어 그렇지. 허우대만 보더라도!" "웃기시네. 다들 저 맛에 사나 보지. 강씨야말로 이북에 남아 있었떠면 어쩔뻔했으니까. 아오지 탄광으로나 가지 않았을까. 가나오나 잘난 척하고 뻥이나 까다가......" "천만에, 이 허우대를 보라구. 권위있게 나온 이 광대뼈를 보고. 이북 남아 서 잘만 했으면 도당 위원장 정도는 따 놓은 당상이었을걸." "흥, 좋아허시네. 이북에선 눈이 삐었다고 강씨 같은 사람을 그런 자리에 앉혔을라고. 암튼 가만히 앉아 있다가 떡상 들어오면 떡이나 주워 먹어요. 무슨 잔소리가 이리도 많을까. 예나 지금이나!" 지숙이가 톡 내쏘자 강성구는 묵사발이 된 얼굴로 그러나 씨겁게 웃고 있었고, 운전수까지 따라 웃었다. 송인하도 마지못해 씁쓰무레하게 웃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살짝 부로캐한 낯색이 어리며 지숙이의 뒷 등을 지그시 노려본다. 강성구가 그런 식으로 당하는 것이 자기에 대한 모독이기나 한 듯이 --- 송인하의 감정은 벌써 이런 식으로 앞자리에 앉아 있는 지숙이를 저만큼 어느 바깥 둘레로 물러서게 하고 강성구를 자기 혼자서만 가득히 차지해 보고 싶어져 있었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강성구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강성구인데 지숙이 편에서 제멋대로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이 심히 못마땅한 느낌이었다. 지숙이도 백미러 속을 흘낏 들여다보며 새침데기 송인하의 지금의 느낌을 금방 알아차리고는 지숙이답게 또 비시시 쓴웃음을 흘린다. 자동차는 어느 새 퇴계로로 빠져 나왔고 송인하와 지숙이의 그 사소한 마음의 갈등은 그 나름의 그늘을 차 안에 내리우며 약간 무거운 분위기가 되었다. 하긴 강성구와 지숙이의 수작이 끊어지자 자동차 속의 침묵은 갑자기 송인하의 분위기로 들어차고 있었다. 마치 지숙이나 강성구는 쉬임없이 입을 놀려야만 그들다운 기척이 풍기는 데 반해 송인하 경우는 그 여백의 침묵을 통해 그녀다운 분위기를 비로소 발산하기라도 하는 듯하였다. 어떤 그늘진 독한 향취 같은 것이 그녀 속에는 생득적으로 스며져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송인하의 한 손이 우연히 건드려지는 듯이 강성구의 한쪽 손을 슬쩍 건드려졌고, 그 순간 강성구도 철렁해지는 느낌으로 후딱 손을 피하려고 하였는데, 어느 새 송인하의 손은 와락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강성구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이 조용해져싼. 잘못 잡혀진 손을 살그머니 뺄 기회를 엿보려고나 하는 듯이, 두 눈길도 자동차 바깥의 먼 원경에 고정시켰다. 얼굴 근육도 굳어져 오고 어느 새 잡힌 왼손에서부터 그 어떤 찬 기운이 짜르르하게 어깨쪽으로 차올라오는 듯하였다. 송인하의 손은 그 정도로 섬뜩할 정도로 차가왔다. 이런 일이란 불과 몇 초 동안이 여느 때의 몇 시간에 해당할 부피를 지닌다. 강성구도 어느 새 서서히 그런 상태에 익숙해지며 깊은 숨을 살그머니 내쉬었다. 잡힌 손에서는 진땀이 배어져 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얼굴은 그쪽으로 들리지 못하고 반대쪽 창 바깥만 내다보았다. 송인하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얼굴 표정은 더욱 싸늘해져 있었고 서슬이 돋아 있었다. 눈길로 으늑으늑한 광채를 발하며 지숙이의 두시 등을 빠안히 쳐다보다가 문득 백미러 속을 들여다보았다. 바로 그때 지숙이도 백미러 속으로 이편을 쳐다보고 있어 눈이 마주쳤다. 지숙이 쪽에서 먼저 장난기 있는 웃음을 살짝 흘리었다. "옳지, 옳지, 잘해. 그렇게 대담하게 고압적으로 나가야지. 그래야 저자 야코가 죽어." "허지만 이걸 어쩌지? 어쩌지? 얼결에 손은 잡았지만, 이걸 더 이상 어쩌지? 어쩌지?" "지금 강성구 얼굴은 안 보이누나. 백미러 속에서도 안 비치고." "......" "우선 첫 스타트는 잘 끊었어. 그 너절부레한 입놀림에 견제 효과도 나고." "......" "이젠 그물에 걸린 새지 별수 있나. 다만, 네편에서 변덕만 안 부린다면." "......" 지숙이와 송인하의 눈길은 이런 식으로 백미러를 통해 말을 나누고 이썽싶고, 자동차가 어느 새 갈월동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송인하의 손은 여전히 강성구의 손을 덮치듯이 잡은 채였다. 원효로 중국집 앞에 닿아 내리면서야 비로소 송인하는 강성구의 손을 놓아 주었다. 일순 강성구는 눈길을 어디다가 두어야 할는지 꽤나 망설이더니 씨익 혼자 싱거워빠지게 한 번 웃었다. 8 일상시에는 지숙이의 그 왜자자한 분위기에 말려들어 거의 응석으 띵부리곤 하는 송인하지만, 정자 가요긴한 대목에 이르면 그녀 특유의 독기르 바루히하기도 하는 것이다. 다방에서 만났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택시에 처음 올라탔을 때만 해도 지숙이는 저 나름대로 생각했던 것이다. 일은 결국 글러진 일이라고. 그러나 송인하는 그야말로 놀라운 솜씨로 이 일 전체에 새 조명을 비쳐 놓은 것이다. 이쯤 되었으면 지숙이는 이제 있으나마나였다. 아니, 있으나마나가 아니라, 있어 봤자 강성구와 수작이나 벌이면서 더 김만 새게 할 것이었다. 송인하와 강성구가 중국집 2층방에 마주앉아 있을 때는 이미 지숙이는 감쪽 같이 사라져 있었다. 구석진 중국집이라지만 그런대로 청초한 맛이 났다. 다다미 3조방쯤 되게 좁은 방이지만 그런대로 아늑하고 오밀조밀한 분위기였다. 벽은 연한 하늘색 페인트로 새로 칠해져 있었고, 밑이 잘룩한 핑크색 커튼은 약간 노골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천한 느낌이기까지 하였다. 하긴 관능에의 욕구치고 천하지 않은 것이 없을 터이다. 점잖은 관능이란 이미 관능이 아니다. 커튼 틈으로는 목욕탕의 벽돌 굴뚝이 내다보였다. 그리고 다시 그 너머로는 아득하게 텅 빈 흐린 하늘이 편쳐져 있었다. 강성구는 시종 어릿어릿하였다. 소금에 절인 생선 토막마냥 주누깅 들어 있었고 연신 눈곱을 파내는 시늉을 하며 송인하를 정면으로 마주보질 못하였다. 송인하 쪽에서 거의 드러내 놓고 노골적으로 달려드는 것을 강성구 편에서는 노골적인 것이 안 되도록 악착스럽게 두 손을 내저으며 절망적으로 막아 보려는 투였다. 이런 일을 두려워하는 듯한 심정과 한편으로는 이 세상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이런 일에 자꾸 말려들어가고 싶어하는 심정이 마구 뒤섞여져 있었다. "지숙씨는 갔나요?" 한참만에 비로소 강성구는 겁겁한 얼굴로 송인하를 마주 쳐다보며 물었다. "......" 송인하는 대답 대신 타오르는 눈길로 정면으로 빠안히 건너다보기만 하였다. '이젠 급할 것은 없지. 강성구의 베이스도 일단 되찾도록 해 주자. 그래야 그쪽에서도 수동이 아니라 서서히 능동적으로 되는 기분일 테니까. 이런 일이란 사내들 제쪽에서 능동적이라고 느껴야만 할 것이거든.' "볼일이 있나 봐요. 이따가 다시 들르겠지요. 원체 그앤 예나 지금이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해서요." 갑자기 송인하는 범상한 표정으로 돌아오면서 말했다. 비로소 강성구도 제대로 안심하느 표정으로 돌아오며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그럼 집 소식은 통 모르겠구먼요." "알 수 있나요. 나온 후로는 감감이지요." 송인하는 힘껏 잡아당겼던 끈을 놓아 주는 심정으로 받았다. 강성구가 다시 활기 있게 말했다. "저는 형님 스리쿼터로 나오다가 인하씨 집엘 들렀었지요. 오라버님이랑 떠났다고 하던가. 지금 잘 기억은 안 나누만요." "오빠는 선창가까진 나왔는데 배를 못 탔어요.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원체 북새판이어서 서로 엇갈리면 그뿐이었지요." "그래도 뒤에라도 남족으로 나왔으려니 했는데." 둘은 엉뚱하게도 아득한 그 옛날 피난 나오던 얘기를 벌이고 있었따. 송인하는 그 무렵의 일이 새삼스러운 모양으로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나 나왔더면." "오빠도 나왔자 피난 초에는 고생이었을 테지요. 군대에 가지 않았으면 군속으로 징발되었을 테고." "......" "하긴 오빠가 나왔다면 인하씨 형제는 든든하긴 했겠지요." 틈을 주었다가는 아까 택시 속에서처럼 그런 난처한 지경에 또 빠질는지도 모른다고 강성구는 급하게 지껄였다. 이렇게 그들은 먼 옛날 얘기를 주고받으면서도 조금 전에 택시 속에서 손을 마주 잡았던 일은 배음으로 깔 듯이 강렬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얘기는 사실은 들떠 있엇지만, 그러나 송인하는 어느 새 그 얘기 속의 옛날 세계로 빠져들었다. 송인하는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며 격한 감정에 휘말려들 듯이 내쏟았다. "바로 내 얘기가 그거예요. 이렇게 이 꼴로는 되지 않았을 꺼예요. 이렇게 억울하게는 되지 않았을 꺼예요. 아버님도 고향서 강성구씨에게 한 말도 있었고." "......" 강성구는 또 가슴이 철렁해졌다. 그전에는 몰랐던 횡포한 그녀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는지 꽤나 당황해졌다. "사실 저는 성구씨를 찾았었어요. 결혼 직전에 어쨌든 한 번 만나나 보자고. 그러다가 어찌어찌 군 주소를 알고 대구로 편지를 냈었지요. 성구씨도 편지를 받자마자 내려왔지만, 그후 나는 어쩐지 홧김에." "무슨 뜻인지 알 만합니다." 송인하는 갑자기 헤실헤실 풀리는 듯한 기분으로 지나간 모든 일이 그저 우스워졌다. 맥주를 더 시켰다. 그저 양껏 취하고 싶었다. 송인하가 거북선 담배를 시키면서 핸드백을 여는 것을 강성구는 흘낏 들여다보아다. 조폐공사에서 금방 찍어 나온 듯한 천 원짜리 다발이 너댓 개나 되었다. 강성구는 그걸 보자 이상스럽게 긴장이 되었다. 송인하와 이렇게 마주앉아 있는 것이 갑자기 황공한 느낌이 들었다. 강성구는 비굴하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참, 얼마 전에 전화받았었지요?" "네, 참 그 일로 만나 놓고 내 정신 좀 봐." 송인하도 어느 새 취하여 웃으면서 받았다. 일순 강성구의 얼굴에 서운해하는 듯한 기색이 슬쩍 어리었다. "사실은 저와 같이 있는 수위 한 사라밍 장난을 한 거지요. 근데 지숙이네 저노하 번호와 그만 엇바뀌어졌지 뭡니까. 제가 늘 얘기 했었거든요. 인하씨 얘기를요. 그러구 지금은 무지무지하게 부자로 산다는 얘기도 했지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덮어놓고 전화를 걸었지 뭡니까. 좋은 자리에다 취직이나 시켜 달라고 하라구요. 난 말리고, 수위실에서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졌어요. 그런데 절꺽 전화가 걸렸지 뭡니까. 그래서 제가 탁 쳐서 끊었지요. 제꺽 전화를 끊었어요." 강성구도 어느 새 취했다. 돈다발을 보고 난 강성구는 갑자기 애걸애걸하가 억양이었고 비굴해져 있었다. "정말 주인님한테 얘기해서 어디 취직이나 좀 시켜 주시지요." 송인하는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고는 엉뚱하게 받았다. "우리 그인 그냥 젖은 나무 토막인걸요." "아니면 얼마쯤 장사 밑천이라도 돌려 주시든지." 송인하는 맥주 한 컵을 주욱 들이키고 손을 살래살래 내저었다. "직접 얘기하세요, 직접, 직접, 난 그런 건 몰라요. 아휴,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람." 송인하는 와락 신경질을 부렸다. 9 실은 강성구가 전매청 수위로 들어간 것도 어언 10년 가까이 된다. 수위 소리만 들어도 지긋지긋하던 6.25 무렵 생각이 나는데다가, 세상에 해먹을 일 숱한데 굶어 죽으면 죽었지 하필이면 또 수위 생활일까 싶었지만, 정작 군대에서 옷을 벗고 나와 실제로 당해 보니까 세상은 넓고 마땅한 직장은 선뜻 나서 주지 않았다. 서울 거리는 강성구 같은 사람이 제대해 나와서 잘 살고 지내라고만 넓은 것은 아니었고, 그런 뜻으로만 화려한 것도 아닌 성싶었다. 그러나 강성구도 강성구 나름대로 고집이 웬만하지는 않아서, 견딜 대로 견디며 참아 보다가 도저히 더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되어서야 전매청 수위 자리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제대하고 나서 5,6년 동안 견뎠으면, 어지간히 견디기는 견딘 셈이었다. 아무려면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칠까, 운운하면서 퇴직금 받은 것으로 이일 저 일에 손을 대 보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밀짚 모자에 검정색 장화를 신고 난장 시장에 나가서 야채 장사에 손을 댔었다. 교외에서 들어오는 야채르 띵넘겨 받아서 파는 일이었다. 언뜻 남들하는 것을 볼 때에는 그저 먹는 장사처럼 보이더니, 정작 직접 손을 대 본즉 그게 아니었다. 이놈의 야채 금이란느 것은 도대체 처음부터 일정한 값이 있는게 아니어서, 시장에 야채의 정량이 모자라면 왕창 비싸지고 반대로 남아 돌아가면 왕창 값이 떨어지곤 하는 것이다. 헌데 강성구 같은 초심자로서는 당최 그 오르내리는 감을 잡으 ftn가 없었다. 게다가 위인이 흥분을 잘 하고 떠벌리기만 좋아할 뿐이어서 장사는 입끝으로만 하였다. 야채 금이 올랐다 하면 시장 안을 온통 누비고 돌아다니면서 생야단법석을 피우고, 시장 안에 있는 야채를 통째로 혼자 도맡기라도 하려는 듯이 휘뚜루 맛뚜루 비싼 값으로 사들이는 것이다. 내일만 되면 단단히 재미를 본다가 판단, 미리 축하주부터 마셔 놓고 잠자리에 들면 어째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아니나다를까, 이튿날 아침이 되면 시골에서 야채 트럭이 밀어닥쳐 있고, 아침부터 야채 금은 폭삭 내려앉는다. 몇 년씩 해먹은 야채 장사들은 기상 조건을 비롯하여 려러 가지 변수를 미리 참고해서 귀신처럼 요령을 부리는 것이었는데, 강성구로서야 당해 낼 재간이 없다. 그렇다고 그들 밑으로 한풀 꺾이고 들어가서 스승 모시듯 하며 야챔 금 오르고 내리는 요령을 배우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었따. '평생 야채 장사 해먹을 것도 아니겠고, 이까짓 것 배우겠다고 대가리 숙이고 들어갈 꺼야 없지.'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몇 번 그 짓을 되풀이하다가 보니까 이럭저럭 기분으로만 마신 술값도 웬만하지 않았거니와 목돈으로 탔던 퇴직금까지 야곰야곰 추긍띵 내게 되었다. 이러던 어느 날, 근처 복덕방에 나오고 있던 허위대가 큰 늙은이 하나가 평소 강성구를 눈여겨보아 두었던 모양, 깍두기 한 가지만 놓인 대포 두어 잔을 사더니 대뜸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자네, 호탕한 멋도 있고 호연지기도 있어 뵈서 꽤 유망해 보이는 의욕적인 젊은이 같은데 우선 자세가 글러먹었네. 평생을 두고 하고 싶은 일이 아니거든 아예 일찌감치 그만둬. 그만두라는 말야. 사람의 일이라는 게 평생을 작정하고 대어들어도 되는 일보다는 안 되는 일이 많은 법이어늘 ---" "......" 강성구는 피시시 웃었다. 늙은이의 엄포가 우선 기분에 맞았다. 강성구 자신 늙어져서 꼬장꼬장해지느니보다는 돈이야 있거나 없거나 저런 식으로 시원시원하게 늙었으면 하고 은근히 혼자 바라고 있던 바로 그런 형의 늙은이였다. 왜정 시대에는 일본서 대학에도 다녀보고 야구 선수 노릇도 해 보았다는 것인데, 요즘 사는분수로 보아서는 어째 곧이들리지가 안항싶다. 그러나 때 ae은 뿌연 검정색 오버는 이 늙은이의 이즈음의 가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면서, 그거조만은 어느 구석인가 귀티가 흐르고 있긴 하였다. 듣자하니 평안 북도 삭주 근방의 몇천 석 큰 지주였는데, 북한에서 재산 몰수를 당하고 1.4 후퇴때에 월남을 했다는 것이다. 늙은이는 부지런히 두어 사발 들이키고는 다시 말하였다. "자네, 우선 장가부터 들게. 장가부터 들고 나서 무슨 일이든 시작을 해. 장가갈 나이도 이미 지난 것 같은데." 강성구도 차츰 귀가 솔깃해졌고,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튿날 저녁에는 곧장 맞선을 보았다. 상대는 바로 늙은이의 외동딸이었고, 이미 과년에 접어들어 서른 한 살이었지만 언뜻 보기에는 제 나이보다 더 먹어 보여 매우 실망하였으나, 본인보다도 장인이 마음에 들었다. 사리로 따지더라도 여자 나이 서른 한 살은 많고 남자 나이 서른 다섯 살은 적다는 법은 없을 터였다. 게다가 지금와서는 이렇게 저렇게 가릴 계제도 아니다. 가문이라는 것이야 아무리 좋다 한들 이 남쪽에서 누가 믿어 줄 것이며, 그밖에 모은 재산푼이 있나, 남 봄에 생기기를 잘했나, 어느 점으로 보더라도 정상적으로 머리가 박혔다면 쉽사리 딸줄 데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리하여 그야말로 휘딱휘딱 결혼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후 2남 1녀를 낳기까지 무진 고생을 하였다. 야채 장사를 때려치우고 인근에서 리어카 한 대를 사서 끌어 보기도 하였고, 전기 기구 부속 사오히의 보조원 비슷이 있어 보기도 했고, 동회 사무소가 바쁠 때는 부정기적으로 일당으로 일을 돕기가 해싼. 이런 식으로 근근 입에 풀칠이나마 해 온 것이었다. 그러다가 보니 제대할 때 목돈이라고 갖고 나온 퇴직금은 흐지부지 없어지고 가판잣집 하나 장만했던 것이 그나마 요행인 셈이 되었다. 이젠 하루 세 끼 밥만 먹을 수 있다면 전매청 수위 아니라 그보다 더 못 한 자리에라도 들어갈 판인데, 그런 자리도 항상 입을 쩌억 벌리고 강성구르 띵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던 것인데, 그 기회라는 것이 몇 년이 자니서야 겨우 틈이 생겼던 것이다. 그곳의 경비 책임자가 왕년에 군대 있을 때의 동료였었다. 이렇게 장가를 들고 2남 1녀를 거의 연년생으로 빼 낳고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시달리면서야 비로소 강성구도 이 남한 사회라는 것이 군대 안에서 순진하게 생각했던 것처럼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니 여전히 자신의 단순한 행동거지는 그에 맞춰서 고칠 수가 없었다. 오랜 하사관 생활의 그 매사에 단순한 소견은 이미 강성구에게도 그 정도로 깊이 젖어들어 있었던 것이다. 강성구가 송인하와 지숙이의 소식을 들은 것은 그러니까 인하 언니인 순하를 통해서였다. 군대 있을 때부터 그런절너 인편으로 송순하의 풍문은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기어이 한 번도 제대로 시집을 못 가고 다방 마담, 혹은 왜식집 같은 곳을 전전하면서 횟가루에 범벅이 되듯이 늙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정신 상태도 이상해져 가고 이썽싶다. 명동, 소공동, 무교동, 충무로 근처의 이 다방 저 다방을 순례하듯이 돌고, 주황색의 화투짝만한 명함 내용도 두 달이 멀다 하게 바뀌고 이썽싶던 것이다. 자택 전화 번호도 항상 동생인 인하집의 전화여서, 한 이웃에 방 하나를 얻고 기거하면서 실은 거의 인하에게 기생하고 있다시피하는가 보았다. 그러나 더러는 저보다도 나이 어린 사내와 며칠씩 혹은 드물게는 몇 달씩 시내의 이 호텔 저 호텔과 여관을 누비고 돌아가기도 하였다. 그렇게 한동안 종적을 감추었다가도 사내가 떨어져 나가면 다시 기신기신 동생 집으로 애들 과자 꾸러미라도 사 갖고 들어선다는 것이다. 강성구가 풍편으로만 더러 듣고 있던 이 송순하를 정작 만난 것은 몇 년 전이었다. 다방에서 만났는데, 무지무지하게 뚱뚱해진 그냐가 무지무지하게 화장한 얼굴로 무지무지하게 반가와하면서 인하의 근황을 속속들이 알려 주고 지숙이 소식가지 전해 주었던 것이다. 두 여자의 전화 번호를 안 것도 이 송순하를 통해서였다. 이미 강성구 보기에도 송순하의 언동은 반 미친 여자의 그것이고 호나장해 버린 여자였지만, 강성구 자신인들 서울 거리에서 언제 한 번 제대로 사람 대접 받은 일은 없었던 터여서,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막상 막하로 시끌짝하게 떠벌렸던 것이다. "어머, 이게 누구예요. 강씨 아니에요. 어머, 별로 안 늙으셨네. 어릴 적 모습이 고대로예요. 키도 고대로고, 가만 거기 좀 앉아요. 얘기 좀 합시다." 하고 강성구가 들어서자마자 카운터에서 발딱 일어서며 대번에 알아보더니, 쪼르르 강성구 자리에 와 앉으며 다시 조잘거렸다. "어머, 어머. 원, 그렇게도 소식이 없담. 부산서 우리 인하 결혼하기 전에 대구서 내려와서 만났었따는 소린 들었지만. 어머, 정말 안 늙으셨네. 그래, 결혼은 하셨겠지. 애는 몇이나 되구." "벌써 2남 1녀외다." "어머, 벌써가 뭐유, 벌써가. 제 나이는 생각도 않아요. 옛날 같으면 손자 보고도 나마요. 그 나이게 세종 대왕 같은 분은 스무나문 명이나 아들을 두었다든데요. 그 시절엔 딸은 치지 않았으니망정이지, 딪라까지 합쳤더면 쉬흔도 넘었을걸요. 헌데, 정마 띵중학생 쩍 고대루에요. 조금 얼굴이 뚱뚱해졌을까, 그밖에 는 전혀 안 늙었군요." 이런 식으로 미처 강성구 쪽에서 말 대답할 틈도 없이 속사포로 지껄여서 처음에는 거의 정신을 못 차리다가, 약간 숨을 돌리고 나서는 강성구도 막상 막하고 같이 떠들자, 이번에는 송순하 편에서 약간 멍한 얼굴로 강성구를 쳐다보았다. 그 눈길은 마치, '나에게 막상 막하로 마주 지껄일 엄두를 내는 걸 보니, 당신도 이미 싹수르 띵훤하고 실속은 아무것도 없겠군.' 하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듯하였다. 그렇게 송인하와 지숙이 전화 번호를 알아 두었고 강성구 편에서도 지나가는 인사 비슷이 제 직장의 전화 번호를 가르쳐 주고 금호동 집의 주소도 가르쳐 주었었는데 그야말로 이게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게 뒤늦게 밝혀졌다. 그후부터 그녀는 직장으로 열흘이 멀다하게 싱거워빠진 전화를 걸어 오곤 하였다. 그리하여 강성구는 슬슬 피하였지만, 이 사실을 뒤늦게 안 그의 한 직장 동료들이 도리어 미치도록 좋아하였다. 아닌게아니라 수위라는 직업은 늘 이 정도로 심심한 것이다. 바로 그런 일환으로 동료 하나가 지숙이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10 강성구는 두 팔에 꾸러미 하나씩을 끼고 비트적거리며 금호동 언덕을 올라간다. 오른쪽 팔에 낀 것은 4천원짜리 생과자 꾸러미이고 왼쪽 팔에 낀 것은 요아래 금호동 푸줏간에서 산 쇠고기 한 근이었다. 생과자 꾸러미는 송인하가 애들에게나 갖다 주라고 을지로 4가를 지나다가 잠간 택시르 띵세우고 사 준 것이었다. 돈 4천 원이면 현금으로 받는 편이 훨씬 쓸모가 있지, 생과자 나부래기나 먹으면 무엇할 것인가. 이 소리가 입긍에까지 뱅뱅 돌았지만 아무리 술이 취한 김에라도 차마 입 밖에까지 나오지는 않았다. "현금으로 주세요. 4천 원이면 삥라이 몇 말인데." 이렇게 말이다. 그러나 까짓 기분이다. 당장 밥은 굶더라도 더러 이러는 멋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일 년 열 두 달 눈깔사탕 하나 제대로 한 번 못 사 준 이 애비가 아닌가. 이런 때 이런 횡재쯤 있어야 애들인들 살 맛이 날 것이 아닌가. 애비만 중국집에서 팔보채에 탕수육에 맥주 마시고, 애들은 일 년 열 두 달 가도 군것질 한 번 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 터였다. 실은 금호동의 허름한 과자점에까지 들어가긴 들어갔었다. 4천 원짜리 과자 꾸러미를 2천 5백 원쯤만 받고 팔아 버릴 요량이었는데 그러나 장삿군들이란 큰 장삿군이나 작은 장삿구니나 생판 도둑놈들이어서 단돈 천 원을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강성구는 2천 원이라는 소리를 잘못 들었는가 싶어, "2천 원요? 그러니까 꼭 반값이군. 좋소. 그까짓 2천 원은 버린 셈 잡고, 2천 원 내슈." 했더니, "2천 원이 아니라 그냥 천 원요. 아시겠지만, 이 근처 빈촌에서 가런 고급과자를 누가 먹습니까. 우리도 팔 때는 무슨 핑계든 대어야 하고, 어쨌든 흠이 있는 물건인데." 하여, 강성구는 다시 두 눈을 부릅뜨며, "아니, 말조심해요. 이게 어째서 흠이 있다는 말입니까. 방금 만나당에서 따끈따끈한 것으로 싶러어 오는 길이오." 하자, 저편에서는 시종 시큰둥하게, "글세, 누가 그렇질 않댔나요. 댁에서는 그걸 직접 보았겠지만, 이걸 사는 사람으로서야 어쨌거나 께름할 것 아닙니까. 흠이라는 거야 꼭 흠이 있어서 흠인가요, 비싸게 산 것을 싸게 팔면 그게 바로 흠으로 보이는 게지." 강성구는 하도 어처구니 없어 그 중년 사내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풀썩 웃으며, "하긴 그 소리도 옳군요. 옳으신 말씀이지 ---" 하고는 그대로 휭 나와 버렸다. 그러나 나와서도 여전히 서운하였다. 강성구 자신은 팔보채에 탕수육에 그밖에도 이름 모를 중국 요리에 맥주까지 잔뜩 마시고 애들도 4천 원짜리 생고자면 온통 뒤집어 쓸 것이겠지만, 오글쪼글 같이 늙어 가는 마누라 생각을 하면 마음이 서운하였다. 그렇지 안하온 송인하와 만나는 것을 마누라도 대강 눈치 나마 알고 있을 것인데. 그러자 강성구는 퍼뜩 생각이 나, 한 손을 뒷꽁무니 호주머니에 급히 넣어보았다. 있다. 틀림없이 있었다. 거스름돈 7백 원씩 두 번 틀림없이 천 4백 원일 것이었다. 그 원효로 중국집에서 송인하는 보이를 시켜 거북선 담배를 한 갑씩 두 번을 샀는데, 살 때마다 천 원짜리를 냈다. 이런 경우는 그냥 외상으로 청했다가 전체 계산에 합산을 해도 되는 것인데 송인하는 번번이 천 원짜리를 냈던 것이다. 보이도 일순 그냥 가져오고 계산은 나중에 해도 된다고 한 마디 하려 하다가 핸드백에서 천 원자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보이는 보이대로 거스름돈 7백 원을 갖고 오면 그냥 팁으로 줄는지도 모른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헌데 번번이 그 거스름돈을 강성구가 우물딱주물딱 쓱싹해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낯가죽 두껍게. 보이가 천 원짜리를 받아들고 나가자, 강성구는 갑자기 또 떠들썩하게 지껄이면서 마음 속으로 궁리를 하였던 것이다. 담배 한 갑과 거스름돈 7백 원이 디밀어질 때 틀림없이 송인하는 '나머지 거스름은 가져요.' 하고 그 보이에게 선심을 쓸 것인데, 그러기 전에 재빨리 손을 써서 이편에서 쓱싹하리라는 배포였다. 술 취한 속에서도 강성구는 여간 신경을 곤두세우지 아낳았다. 이런 때는 개소리 쇠소리 얼렁뚱땅 지껄여서 상대편 송인하의 얼을 빼는 일이다. 강성구는 한편으로 그 보이가 언제쯤 되돌아오는가, 방 바깥의 기척에 온 신경을 모으면서도 입으로는 떠벌렸다. "요즘은 어떻게 된 것이 백 원짜리도 구경하기 힘들더군요. 전탕 5백 원짜리 천 원짜리지. 그뿐 아니라 5천 원짜리, 만 원자리도 지천으로 널려 있는 듯해요. 우리야 원체 가난해서 늘 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5백 원자리나 천 원짜리를 내면 버스 차장이 여간 신경질을 부리지 않거든요. '천 원자리를 내면 어떻게 해요.'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나도 '이년아, 은행에 가서 묻든지 조폐 공사에 가 물어 보려무나. 버스 타고 다니는 주제에 천 원짜리 내는 내 심정은 오죽 하겠니.' 이런다는 말입니다. 이러면 같이 타고 있는 옆사람들이 더러는 하하하고 웃거든요, 웃는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때 문 바깥에 가까이 다가서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비시시 미닫이가 열리며 거북선 담배 한 갑과 거스름돈 7백 원이 들어왔다. 보이도 담배는 성큼 내밀었지만 7백 원은 그냥 가지라는 소리가 나오려니 하고 기대하듯이 약간 미적미적거렸다. 강성구는 날렵하게 그 디밀어진 담배를 받고 그리고 미적미적하는 거스름돈 7백 원을 잡아채듯 하며 더 큰 소리로 지껄였다. "버스 안 사람들이 웃지요. 웃는단 말입니다. 허지만 웃으라지요. 누가 웃는거 무서워하는 줄 압니까. 웃는 것쯤은 무섭지 않다 이겁니다." 강성구는 더욱 왜자자한 표정으로 송인하를 정면으로 마주 쳐다보며 방금 보이에게서 낚아챈 그 거스름돈을 얼결에 실수로 제 포켓에 넣는다는 듯이 기술 적으로 쓱싹해 버렸던 것이다. 송인하도 그 낌새를 훤히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지, 아니면 진짜 몰라서 모르는 것인지, "여전하시군요. 암튼 강 선생님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시구먼." 하였다. '흥, 공돈 7백 원을 간단히 벌었구먼.' 하고 생각하며 강성구는 연속 줄담배로 다시 맹렬히 피워 대었고 불과 한 시간이 못 되어 절반씩 피울까 말까한 담배 꽁초만 다시 재떨이에 수북이 쌓여지고, 담뱃갑은 금방 바닥이 나 버렸다. 어떤 것은 두서너 번 빨았을까 말까한 것이 그냥 재떨이에 쑤셔 박아져 있었다. 이리하여 송인하는, "담배를 너무 피우시는군요. 너무 많이 피우면 안 좋다든데." 하면서 다시 핸드백에서 돈 천 원짜리를 꺼내며 보이를 불렀다. 강성구는 얼시구나 하듯이 두 손으로 손뼉을 쳐서 보이가 오도록 하였다. 어지간히 취한 강성구는 더욱 배짱이 두둑해졌다. 보이는 조금 전에 당한 일이 있어 거푸 남 좋은 일만 할 수 없다고 작심한 모양으로 이번에는 딱 부러지게 나왔던 것이다. "돈은 그냥 넣어 두세요. 전체에 포함시켜 뒤에 계산하셔도 되니까." 하자, 강성구는 보이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네가 그런 데까지 참견할 것은 없어. 사 오라면 사 올 것이지, 담배 가게까지 걸음하는 게 뭐 그다지나 어렵다고. 어서 낼름 못 갈까." 하여, 송인하도 약간 우물쭈물하듯이 다시 돈 천 원을 그쪽으로 내밀었던 것이다. 그리고 7백 원 거스름이 온 것은 다시 우물딱주물딱하듯이 제 포켓 속에 쓱싹해 버렸다. "정말 어쩌다가 이 나이들이 됐는지. 원 이럴 줄 미리 알았으면 아마 월남하지 않은 사람이 태반이었을껄요. 이렇게 몇십 년씩 갈라져서 살 것을 미리 알고서야 누가 그 길을 택했을라구요. 통일은 여하간에 가 보기라도 했으면 좋겠구먼.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았으면 어떻게들 살고 있는지, 진짜 노력 동원에만 동원되어 죽지 못해 살고 있고 영양 실조로 뭐라드라. 요상한 이름의 병이 돌고 있는지, 암튼 슬쩍 한 번 가 보기라도 했음 좋겠어요. 월남하지 못한 동창생 애들은 또 어떻게 지내는지." 하면서. 이때는 얘기가 얘기라 송인하도 강성구가 거스름돈 쓱삭하는 것은 미처 보지 못하고 한 발 나앉으며 물었다. "강 선생님은 이북에 누가 남아 있나요? 형님이랑 다 월남했다면서." "어머니가 남아 있지요. 누님 두 분하고." "참 그렇겠군요. 허지만 어머니야......" "여든 살이 가깝지요. 이젠 가 본들 저 세상 가셨을껄요. 묘지나 제대로 있을라는가 원---" "누님들은." "두 분 다 환갑 가깝지요. 서루 얼굴이나 알아볼라는지 모르겠군요." "참, 생각해 보면 이게 다아 무슨 짓들인지. 아이 답답해. 나도 그 담배 한 대 주세요." 송인하도 한숨을 내쉬며 어색한 솜씨로 담배를 꼬나물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어물어물하는 동안에 거북선 담배 두 번 사고 남은 천 4백 원 거스름돈을 간단히 쓱싹했던 것이다. 물론 치사한 것으로 치자면야 강성구 본인 이상으로 치사하게 느껴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여북하면 이러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치사한 것은 치사한 것이고 벌이는 벌이다. 강성구로서는 두 번 치사햄짐으로써 천 4백 원 공돈 생기는 편이 실속면에서 훨씬 나은 것이다. 강성구는 금호동 근처까지 송인하와 같이 택시로 왔다. 이런 일이란 강성구로서는 3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물었다. 당장 기억을 더듬더라도 2년 전이든가, 군대 있을 때의 동기생 하나와 술을 같이 마시고, 그가 부득부득 집까지 데려다 준다기에 금호동까지 택시로 와 본 일이 있었다. 그때도 그 동기생 덕에 곁다리 비슷이 탔던 것이지만, 어쨌뜬 제 돈 내고 타건 남의 돈으로 타건 택시 탄 기분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러니 강성구인들 이런 절호의 기회를 함부로 놓칠 것인가. 낯익은 안면들이 노상 들끓고 있는 복덕방 바로 앞에서 여봐라는 듯이 택시 문을 쾅 닫고 내렸다. 헌데 어렵쇼, 복덕방은 벌써 문이 닫혀 있었다. 심심하면 가다 오다 들러서 늘 떠벌리고, 쥐구멍에도 쨍하게 해뜰날 있다고 늘 뻥뻥거리던 대로, 강성구도 이렇게 택시 타고 돌아오는 날 있다고 한바탕 뽐내려고 하였는데 벌서 문이 닫혀 있었다. 강성구는 곧장 오던 방향으로 백 팔십 도 돌리는 택시에 눈길을 돌렸다. 그 속에는 송인하가 뒷자리 가에 바싹 붙어서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끄덕끄덕 졸고 앉아 있었다. 제 말이 이 정도로 취해 보기는 평생에 처음이랬으니까 꽤나 취한 모양이다. 택시는 그냥 그렇게 되돌아갔다. "어쨌거나 오늘은 횡재에 걸렸군. 생과자는 애들이 좋아할 테고." 잠시 후 강성구는 의젓하게 근처의 푸줏간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는 애 업은 푸줏간 아주머니에게 떵떵거리듯이 지껄였다. "늘 오십 원어치 백 원어치만 산다고 우리 집사람이 창피해하던데, 이렇게 우리도 쨍하게 해뜨는 일 있다구요. 여기 쇠고기 한 근만 주소." 애 업은 푸줏간 아주머니도 저게 웬일이냐는 듯이 일순 두 눈이 휘둥그래졌으나, "원, 아저씨도, 별소릴 다 듣겠구먼. 창피하긴 뭐가 창피합니까?" 하며 쇠고기 한 근을 달아 신문지에 둘둘 말아 싸 주었다. 11 집에 들어서자 마누라는 남편보다도 양팔에 하나씩 끼어든 꾸러미부터 반색을 하듯이 받아들었다. 그러는 마누라의 그 속셈이 무언가 적나라하게 노골적으로 흘낏 들여다보이는 듯하였다. 하긴 세상에서 뭐니뭐니 해도 가난이란 인정 사정이 없다. 사람들로 하여금 가릴 체모고 뭐고 없이 가장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마누라는 혼자서만 중얼거리듯이 별로 그 일에는 흥미를 안 느끼듯이 씨부렸다. "그 옛 애인인가 뭣인가 하는 사람, 만나기는 만났던 모양이구먼." "......" 강성구는 술기운이 얼큰한 속에서도 입이 쓰거웠다. '옛 애인인가 뭔가'라니. 찌든 가난 속에서만 살면서 이 정도로 질투도 뭐도 없어져 버린 마누라가 약간 측은한 생각도 들었지만, 남편인 자신이 이 정도로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싶어 확 김이 새었다. 마누라는 맨발로 봉당에 선 채 재빨리 꾸러미를 끌러 보고는, "어마, 생과자." 하며, 약간 놀라고 약간 시큰둥한 낯색이더니 쇠고기 꾸러미를 헤치면서는, "이건 뭐요? 약간 물컹한데." 하고는, 시뻘건 쇠고깃덩어리 하나가 나오자, "이게 쇠고기예요? 어째 돼지고기 같네요이. 좀 좋은 것으로 달라지 않고." 하고 벌써 들떠서 혼잣소리를 하며, 코끝을 들이대어 킁킁 하고 냄새까지 맡아 보는 것이 아닌가. "상하지나 않았는가 모르겠소." 하고 다시 강성구의 얼굴을 돌아보며 허줄구레 웃는다. 강성구인들 이 마누라의 모습을 조금 전에 만났던 귀부인 차림의 송인하와 마음 속으로 비교해 보며 심회가 복잡해졌다. 이런 종류의 냄새에는 애들인들 여간 빠른 것이 아니다. 일곱 살잡이와 그 밑의 다섯 살박이 계집애가 벌써 아글타글 생과자 꾸러미에 달려들고 있었다. 그러자 마누라는 또 빼락 소리를 질렀다. "저리 배켜, 이 악마구리들아. 아, 못 비키겠니. 못 비키겠어." 마누라는 큰 소리를 지름으로써, 오랜만에 제대로 애비 노릇을 한 제 남편을 대견하게 여기자는 셈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 곁따라서 자기 자신도 본때 있게 어미 행세를 해 보자는 속셈일 터였다. 두 꾸러미를 든 채 마누라가 방으로 들어서자, 애들도 우르르 따라들어왔다. 뒤따라들어선 애들은 가지런히 웃목 벽에 기대어 서서는 이상스럽게도 공손하고 겸허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곧 벌어질 생과자의 향연이 그저 엄청나게만 여겨진다는 듯이. 마누라는 애들은 아랑곳없이 남편에게 물었다. "그래, 마났수?" "뻔하지 않어. 보면 모르는가." 강성구는 술이 휭하게 깨어 온다. "그래, 뭐랍디까. 정말 그렇게다 부자는 부자입디까요? 원, 그런 사람들은 무엇으로 그렇게도 돈을 버는가, 삽으로 버나, 괭이로 버나. 그래, 당신보고는 뭐랍디까? 진짜로 반가워하기는 반가워합디까? 늙었다고 했을 네지. 그래도 제법이군. 무슨 생각으로 고급 새오가자에 쇠고기까지 이렇게. 기왕에 생색 쓰려거든 서너 근 사 줄 것이지 주먹만한 것이 원. 부자 채신이 있는 거지---" "쇠고기는 내가 샀네." 그 돈의 출처 내용을 물을까 보아 강성구는 덧붙였다. "저녁에 당면 넣고 국이나 끓이지." 마누라는 그 일만 궁금한 모양으로 다시 지껄였다. "그래, 정말 반가워나 합디까? 원, 당신의 지금 그 꼴로 보아서는 중학교 쩍에 그런 일이 있었따는 것도 전혀 믿어지지가 않지만, 당장 이 새오가자 꾸러밀 앞에 놓고서야 안 ael을 도리도 없고. 그래, 뭐랍디까. 혹시 예나 지금이나 너저분하게 지껄이는 건 마찬가지라고나 하지 않습디까. 필경은 그랬을 테지." 비로소 마누라는 과자 꾸러미를 완전히 헤쳐 놓고, "얘, 성완아, 부엌 칼 좀 가져온---" 하고 여느 때 없이 부드럽게 일렀다. 마누라는 어느 새 생과자 귀퉁이를 베어서 한 뭉텅이르 띵우선 제 입에 틀어넣고, 다시 한 뭉텅이를 베어서는 남편에게 내밀며, "꽤나 단데요. 당신도 하나 잡수어 보구려." 하였따. 강성구는 그 마누라를 잔뜩 미간을 찡그리며 건너다보고는, "애들에게나 주지. 난 이것 저것 줏어 먹어서 그닥 생각이 없구먼." 하였다. 그제야 마누라는 아랫목 벽에 가지런히 선 애들을 돌아보며, "자, 그럼 니네들 오나. 덤비지들 말고 얌전하게 ---" 비로소 애들도 한 떼거리로 와락 달려들었다. 애들이 탐스럽게 먹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면서 강성구는 역시 저 아래서 현금으로 안 바꾸기를 천만 번 잘했다고 생각하였다. 오늘따라 마누라도 제 남편이 퍽이나 대견하게 느껴지는가 보았다. "당신보고 정력 좋겠다는 소린 안 합디까?" "왜 안해. 노골적으로 그런 소리야 어떻게 하겠어. 교양 있는 여자들인데." "흥, 교양 좋아하시네. 미친 것들---" "눈짓으로만 갖은 아양을 다 떨더군. 강아지 꼬리 흔들 듯이. 허지만 내가 이리 뵈두 그런 유혹에 넘어갈 성 부른가, 어림도 없지." 택시 속에서 손이 잡혔었다는 소리는 아무리 입이 싸구려로 생겼을망정 강성구도 차마 제 입으로는 말하지 못하였다. 사실로 중국집에서는 둘이 다 급하게 술만 들었지 그 이상은 별일은 없었던 것이다. "어이구, 어이구, 잘났구먼. 잘났구먼. 용하구먼---" 마누라도 건성으로 받고는, "그까짓 돈만 왕창 벌어 오구려. 살짝살짝 그쪽도 사정 보아 주면서, 그 대신에 돈만 왕창 벌어 오면야 누가 뭐래나요." 마누라도 농담 반 진담 반 말하고는 실실 웃기만 하였다. 애들은 4천 원짜리 생과자 꾸러미 하나르 띵거의 다 처치해 가고 있었다. 셋이 한결같이 얼굴은 새오가자 부스러기로 온통 범벅이었다. 비로소 강성구는 벽에 느슨하게 기대어 앉으면서 느슨하게 하품을 하였다. 근 30년 만의 해후가 겨우 이것이었는가, 고작 이런 일밖에는 있어질 것이 없는가 싶어 새삼 어처구니가 없었다. 12 그대로 강성구와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온 송인하는 제 침대 머리에 조그마한 웬 노트 같은 것 하나가 얌전하게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어 무심결에 집어들어싼. 옷도 갈아 입지 않은 채 외출복 그대로 그걸 집어들면서, 살그머니 침대 머리에 앉았다. 겉장을 넘기자, 언니인 송순하의 불펜 글씨가 깨알 박히듯이 자잘하게 적혀 있었다. 인하 보아라. 이제부터 유서를 쓰자고 드니 막상 막막하고 우스워지기부터 하는구나. 내 주제에 무슨 유서야 싶기도 하고 --- 허지만 지금 나느 나파자마 바람으로 앉아 양담배 켄트를 입에 문 채 이 유서랍신 글을 쓰고 있다. 이런 지금의 내 모습이야말로 에누리 없는 나의 현주소 같다. 인하는 놀랍기는커녕 차라리 뜻 모를 웃음이 비어져 나오며, "흥, 꼴값 하는군." 싶어졌고, 깨알 박히듯 박힌 노트장을 발랑발랑 몇 장 넘겨 보았다. 비로소 송인하는 지금가지도 자신이 취해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비트적비트적 외출복을 벗어 옷장에 넣고 실내의로 갈아 입었다. 그리고는 밥하는 애를 가렀다. 예쁜 토끼 두 마리가 수놓여진 하얀 앞치마 차림의 밥하는 애가 들어서자, 송인하는 애들 이모가 언제쯤 왔었느냐고 물었다. 한 30분 되었다는 대답이었다. 얼마쯤 있다가 갔느냐니까 고속 버스 타러 나간다면서 금방 나가더란다. "꽤 바쁜 것 같든데요. 빽 하나만 들고 있었어요." 밥하는 애도 무시로 제 집 드나들 듯하던 애들 이모를 여느 때와는 달리 고주알미주알 캐어 묻는 것이 의아스럽다는 듯이 멀뚱멀뚱 건너다보았다. "알았다." 하고, 송인하느 나비로소 제대로 읽을 채비가 끝났다는 듯, 한쪽 다리를 꼬아올리고 침대 머리에 앉아 읽어 내려간다. 막상 이런 걸 끄적거리자고 드니 우스워지는구나. 유서라는 것까지 써 놓고도 정작 죽지 못하게 된다면 어떡허나, 그 무안해지는 느낌이 어느 정돠 될까 하고 엉뚱한 생각부터 드는구나. 내갖 가말로 죽을 수 있을까 하고 유서랍신 이런 걸 끄적거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전혀 내가 죽는다는 쪽으로는 느낌이 안 든다. 대체 어째서 이럴까. 내가 죽어 낼 수 있을까, 결행할 수가 있을까, 그런 의심부터 드는구나. 오죽이나 살아온 세월이 어줍이 않았으면 이 순간에 와서까지 자신을 이 지경으로 불신하는가 싶어 와락 나 자신이 측은해지기도 한다. 송인하는 이쯤에서 잠깐 쉬었다. "흥 이 여편네가 정말로 죽을 것 같진 않군. 정말로 죽을 여편네면 유서라고 이런 식으로 쓸 것이람." 하고 중얼거리며, 인하는 반은 맥이 빠진 뒷장을 뒤적뒤적해 보며 무언지 스스로도 어색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일순 대체 무엇이 어색하게 느껴졌을까하고 따져들다가 금방 그 까닭이 알아졌다. 여편네라는 호잎이 언니인 순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거이다. 나이쉰에 남편 없이 잎사가 하나 없이 살아온 언니가 아닌가. 게다가 지금의 이 글을 끄적거릴 때도 파자마바람에 양담배를 물고 있었다지 않는가. 이런 여자에게 여편네라는 호칭이 적합할 수 없을 터였다. 게다가 나이 50먹은 여자로 유서를 쓰고 자살이라니, 징글맞다 못해 추하다는 생각이 울컥 든다. 그뿐인가. 제 말마따나 진짜로 죽을지도 의문이다. 입끝으로는 노상 죽는다는 소리였지만, 한 번도 결행하는 것을 못 보았다. 생각만 해도 지겹다. 그 동안 근 30년을 시집 한 번 제대로 못 가고, 다방 마담이요 술집이요 저전하면서 하나밖에 없던 친 살붙이 동생을 말도 못 하게 들볶고 속 썩이던 일을 생각하면, 언니가 이제 죽는대서 눈하나 깜짝해질 것 같지 않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죽어라 죽어라 하고 죽으메올 내몰고 싶다. 아니, 죽어라 죽어라가 아니라, 이젠 제발 빌겠으니 더 이상 속 썩여 주지 말고 죽어 다오 죽어 다오, 하고 빌고 싶다. 이북에서 친 살붙이라고는 단둘이 피난 나온 터수에 여북하면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그새 나이 50이 되도록 언니르 띵거쳐 간 사내는 열 손가락으로도 부족하다. 두 달, 석 달, 길어야 1년 남짓 살림을 차렸다가는, 핸드백 하나만 댈룽 들고 한 손엔 새오가자 꾸러미나 들고 인하에게로 기어들곤 기어들곤 하던 언니였다. 본시 타고나기를 낙천적이기도 하였지만, 기어들 때마다 주눅이 들거나 눈물을 찔찔 짜기는커녕, 애들이 좋아할 생과자 나부래기나 들고 오는 것으로 다였다. 그렇게 뒷방이라도 하나 차지해 놓고 보면, 집 안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버리곤 하였다. 그 뒤죽박죽이라는 것도 어느 구석이 어떻게 뒤죽박죽인지 쏙 집어 내기 힘들게 탁하고 몽롱한 부누이기를 피워서, 막연히 온 집 안을 야고야곰 침식시키곤 하였다. 그러나 애들이 커 가고 자기도 늙어지면서 마음도 약해지고 염치도 차려지는 모양으로 차츰 발걸음이 뜸해지더니, 느닷없이 이런 것이나 디멀어넣고 있다. 어디 가서 진짜로 죽거나 하면 여북 좋고 시원하랴만, 보나마나 그럴 것 같지도 안항싼. 유서 쓰는 사람이 드러내 놓고 유서 쓴다고 하는 것도 미덥지 않거니와, 정말로 죽을 사람이라면 무슨 경황에 허두부터 그런 잡소리를 늘어놓겠는가 말이다. 이 여자가 또 무슨 속세으로 어떤 복선으로 이런 짓을 벌이려드는가 하고 의심부터 났다. 그런대로 마저 읽어나 보자고 뒤를 대어 읽어 내려간다. 인하야. 어쩐가 내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결국은 내가 이 지경이 됐는가 하고 생각하자니까 정말로 새삼 막막해지는구나. 우리가 처음 월남할 때가 내 나이 스물 한 살이었고, 너는 열 아홉 살이었다. 이제 이 대목을 쓰자니까 비로소 눈물이 앞을 가로막는구나, 어쩌다가 우리는 둘이서만 월남을 하게 되었는지, 몇십 년 전의 그 일이 어제 일처럼 새삼 떠오르는구나. 그날이 그러니까 1950가 12월 4일인가 5일이었지. 이미 국군이 입성하기 전에 거리는 미군 폭격으로 온통 박살이 나 버린 폐허였다. 여기저기 굴뚝만 삐죽삐죽 솟아 있엇고, 듬성듬성한 집들 사이로 짙푸른 겨울 바닷가 바로 지척으로 퍼져 있었다. 그때 생각나니? 나는 지금 갑자기 선연하게 떠오르는 구나. 우리는 피난가 있던 시골 외갓집에서 국군이 수복해 올라온 나흘 후던가 닷새 후에 다시 거리로 돌아왔던 거다. 그때 너는 용돈 국민 학교 골목을 빠져 나오자마자 미군의 폭격으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휑한 너머로 그냥 바닷가 보이자 '어머, 이상해졌다. 바닷가 저렇게도 가까웠었군.'하고 일순 간 머엉한 표정이었지. 아, 그때 열 아홉 살이던 네 얼굴의 보조개가 지금도 선연하게 떠오르는 것이 왜 이렇게도 가슴이 옥죄어 오는지 모르겠구나. 국군이 수복해 올라온 거리는 온통 수런거렸었어. 다행히 해안통의 큰 창고가 폭격을 면하여 그곳이 주둔군 헌병대 파견대가 됐고, 조선소 기사로 있었던 오빠는 북새통에 갑자기 흰색 완장을 팔에 차고 질서 회복에 앞장 나섰어시. 너도 아다시피 오빠는 조선소 기사로 있으면서 이북의 당에도 들었었던 거다. 그러나 본시 말이 없고 실팍한 위인이어서 누구에게나 필요 없이 미움 살 일은 안 하나 모양이고, 키도 헌칠하게 크고 잘생겨서, 국군 수복 후에는 하룻동안 간단히 조사만 받고 금방 풀려 나왔던 거다. 이건 우리 끼리 얘기지만, 그때 오빠가 간단히 풀려 나올 수 있었떤 건, 오빠가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그들 군대에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한 달 동안쯤 산에 숨어 있은 덕이었어. 또 한 가지는 오빠가 일본에서 공업 학교라도 다녀서 순종 노동자 출신은 아니었다는 점과 우리 집의 가정 성분이 누가 보나 전형적인 장사치였다는 게 유리하게 작용했던 거지. 이북 세상에서의 모든 평가 기준이 출신 성분을 철저히 따지듯이, 역시 국군이 수복해 올라와서도 그와 정반대쪽으로 성분을 중요시하더구나. 요즘도 흔히 듣는 얘기다만, 이북에서 남쪽으로 쳐내려왔을 때, 가장 가시운 평가 기준이 손바닥에 군살이 박혔는가 안박혔는가를 따졌다니 않니. 군살이 박혔으면 순종 노동자 농민 출신이어서 처음부터 저희들 편으로 믿어 주었다는 거지. 자연 국군이 수복해 올라와서는 그 평가 기준 정도가 이북보다 덜 엄격하였다뿐이지, 일단 손바닥이 귀공자로 생겨서 야들야들하고 얼굴색이 말갛게 생겼으면 호감을 가졌던 거다. 더구나 왜정 때 중학교 정도 다녔다고 하면, 더 이상 까다롭게 따지고 자시고 없이 믿어 주었던 거다. 오빠도 덕을 본 것은 그 점이었을 거야. 왜정 때 일본에서 공업 학교 정도 마쳤다는 것이 가게 작용을 했던 거다. 그때 일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르는구나. 국군 수복 후 가장 먼저 공고를 내붙인 것이 그때까지 이북 체제에서 공직에 있엇거나 노동당원이었던 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당국에 자진 신고하라는 것이었어. 만일 신고를 안 한 것이 추후에 밝혀지는 경우에는 엄벌에 처한다는 것이었지. 오빠도 이 명령을 좇아 신고를 해썽싶지 왜. 근데 심사는 꽤나 엄격하게 진해오디어 몇 급으로 나뉘어 판정을 했던 모양인데, 오빠는 그 이튿날로 모든 과거를 용서받고 우리 구역 자치대 간부로 발탁되었던 거다. 그때 조사를 받고 돌아온 오빠가 아버지 어머니랑 우리가 한데 모여앉은 자리에서 비시시 웃으면서 하던 소리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구나. 심사하던 사람이 그러더라는 것이 아니겠니. '당신은 멀끔하게 잘생기고 중하굔까지 일본서 다녀서 머리에 든 것도 있는 사람일 텐데 어쩌다가 그 무지막지한 판에 끼어들었지?' 하고는 미처 오빠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알 만하구먼. 당신 같은 사람까지 당원으로 묶어 들였으니, 놈들의 극성이 어느 정도였는지.'하고 스스로 판정을 내리더라는 거지. 그리고는 그 당장으로 흰 완장을 하나 내주면서 내일부터 자치대 대원으로 열심히 활약하여 과거의 오욕을 씻어 내라더래. 그때 오빠는 아랫목 벽에 느슨히 기대어 앉아 꽤나 착잡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었어. 암튼 그 이튿날부터 오빠는 구역 자치대원으로서 거리의 질서 회복에 나섰던 거다. 그때 생각나니? 해안통 일대에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던 군수품들 말이다. 그건 한 마디로 어마어마하다는 얘기로밖에 할 수가 없었어. 그 하늘과 땅이 온통 맞닿을 정도로 쌓여 있던 물자들, 물자들. 하루아침 사이에 온 거리로 흩어져 나가던 날씬하게 생긴 깡통들, 가지가지 고기 맛들. 껌과 초콜릿을 처음 먹어 보았을 적의 그 짜릿하고도 놀라운 쾌감. 정말이다. 그때 처음 먹어 보던 그 껌맛과 초콜릿 맛은 지금까지도 아지랑이 피어나듯이 혀끝에서 감도는구나. 아, 그때 우리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어머어마하고 얼마나 달콤한 나라냐 하는 것을 오로지 그 어마어마한 물랴오가 그리고 껌 맛 초콜릿 맛으로 미루어 헤아렸던 거다. 세상에 이렇게도 근사한 나라가 있느냐고 엄청나 했던 것이 아니냐. 그리고 생각나지? 아직 파괴된 전기 시설이 회복되기 전이었는데, 해안가에 큰 발전선 하나가 정박하여 밤이고 낮이고 해안 일대와 거리의 요소요소, 그리고 폭격을 면한 민간집에 전기를 공급해 주던 일 말이다. 전기라는 것이 배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때까지의 우리는 상상이나 했겠니. 해안 일대의 밤은 그야말로 불야성이었어. 그뿐이냐. 바다에 수없이 정박해 있던 배들도 밤이면 온통 불빛이었던 것을. 인하야, 우리는 그때 얼마나 신이 나 있었는지 모른다. 밤마다 너와 나는 팔짱을 끼고 불빛 밝은 해안통 일대를 거닐곤 했었지. 그러나 두 달이 못 지나서 날벼락이 떨어졌던 거다. 후퇴한다는 것이야. 그때 우리는 그 소리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중공군이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이렇게도 엄청난 물자와 이렇게도 어마어마한 미국군이 어떻게 후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하고 말이다. 그러나 소문은 뜬소문이 아니었어. 후퇴 소문이 어디선가 떠돌자마자 순식간에 온 거리를 뒤덮더구나. 모두가 아비 규환이었지. 그래도 여전히 해안통 일대는 불빛이 환하고 배들도 그대로 정박해 있더니, 드디어 12월 3일 낮부터는 거리의 분위기가 홱 백 팔십 도로 달라지더구나.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니. 마치 미국 사람들의 그 엄청난 물자와 혀 끝에 감치고 입끝에서 살살 녹는 껌 맛과 초콜릿 맛이 거리의 공기를 그 동안 분수에 겨웁도록 달콤하게 만들었었는데, 그 공기가 일거에 바뀌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어. 거리의 분위기는 공기부터 깡그리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는 것 같았어. 마치 공기는 그 입자 하나하나가 갑자기 새파란 비수라도 품은 듯 하였어. 이튿날 4일이 되자, 항구에 정박해 있던 그 엄청난 배들은 밤새 깡그리 없어져 있었고, 어느 사이에 원래의 바다로 되돌아가 있었지 뭐니. 그새 바닷바람도 매운 줄 모르겠더니, 그 엄청난 배들이 떠나 버리자 바닷바람도 여전히 그전의 그 바닷바람으로 되돌아가 있었어. 그건 무슨 환각 같더구나. 지난 두 달 동안이 그 무슨 꿈 속이나 아니었는가 싶게 이렇게도 깡그리 달라질 수 있을까 싶었어. 그리고 해안에서는 삼엄한 경비가 행해지는 가운데 미처 못 싣고 간 물자들을 태우는 불덩이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지 뭐니. 그 연기가 자욱하게 거리를 뒤덮는 가운데 이 거리의 사람들은 미친 듯이 우왕 좌왕하고 있었어. 군인 가족들과 군속 가족들부터 웃거리 항구로 집합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거리를 누비는 가운데 사람들 떼거리는 그쪽으로 미친 듯이 몰리고 있었어. 그때까지도 우리는 아무 결단도 못 내리고 있었어. 아버지나 어머니나 오빠나 모두가 어정쩡해 있었어. 보따리를 싸 가지고 집을 나서야 할는지, 나선다면 대체 이 판국에 어디로 간다는 것인지, 웃거리 해안으로 가면 과연 순순히 배는 태워나 줄는지, 도무지 막막한 판이었지. 그런데 오후가 되자 해괴한 소문이 떠돌더구나. 사흘 동안이라도 이 거리에서 빠져나가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원자 폭탄의 폭격을 받는다는 것이었어. 어디서부터 나온 뜬소문인지 모르지만, 이 거리서 사방 90리 바깥으로 빠져 나가야만 그 폭탄의 피해를 면한다는 거다. 아버지는 저번에 피난갔던 시골로 나가야 할는지 배를 타러 나가야 할는지 꽤나 망설였었어. 바로 그런 판국에 밖에서 클랙슨 소리가 빵빵 울렸어. 그 시각에 너는 한 구역 건너 이모 집엘 갔었는지 집엔 없었는데, 대갈망치 강성구가 스리쿼터에서 내려서 들어 서더구나. 너를 찾는 거다. 흘낏 운전수 자리를 보니까 군복 차림의 사내가 그냥 무심하게 앉아 있었어. 그때 강성구는 큰 소리로 아버지에게 지껄이더구나. 지금 이 스리쿼터는 동해안 쪽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거야. 철령을 넘어서 서울 쪽으로 갈 수도 있지만, 동해안 쪽이 훨씬 안전할 거라면서. 그러나 아버지는 마침 오빠도 그때 집에 없었고, 당사자인 너도 없고 어째야 할는지 여간 안절부절하시지 않더구나. 설령 간대도 온 가족을 끌고 나서야 할터인데, 썩 자신은 없으신 것 같았어. 오빠가 한데 있었더라도 대체 무얼 믿고 그 스리쿼터에 올라타느냐는 생각이셨을 거야. 아버지는 매사에 그 정도로 신중하셨지. 그러자 강성구는 할 수 없다면서, 미진한 듯이 꾸뻑 절을 한 번 하고는, 다시 스리쿼터로 돌아가는 거였어. 그 스리쿼터라는 것도 이미 사람들로 빽빽하여 더 태울 자리도 있어 보이진 않았어. 그러고 나서 금방 네가 돌아왔다. 밤이 되자 발전선도 철수하고 난 칠흑 어둠 속에 해안에서는 계속 물자 태우는 불기둥이 솟고 있었고 그야말로 무시무시하더구나. 이따금 공포 소린지 뭔지 정체 모를 총소리도 울리는 거였어. 삼엄한 통행 금지가 펴진 가운데 우리 집 근처는 그러지 않아도 폭격으로 폐허여서 여간 을씨년스러운 게 아니었어. 가족끼리 밤새 의논을 벌여 어떻게든 결정하려고 했으나, 우리 집 여덟 식구 이 대가족을 이끌고는 어쩔 길이 없었어. 덮어놓고 배를 타고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얘기라는 거였지. 그 중 완강한 분이 아버지 이셨어. 아버지 말씀도 일리는 있으셨다. 배를 타면 어디에든지 태워다가 안전한 곳에 내려 주긴 하겠지만 그 다음을 어딪허게 믿겠느냐는 거야. 그야 미국이라는 나라가 저렇게 물자 흔한 나라니까 뒷감당은 해 줄 것이지만, 어쨌든 아버지로서는 제 고장 땅을 무작정하고 떠난다는 데에 처음부터 불안을 느끼시는 것이어어. 원자 폭탄이 그렇게 쉽사리 떨어질까마는, 설령 떨어진다면 그 기간만 피해 있으면 될 것이 아니냐고. 허지만 이 추운 겨울에 90리 밖의 어디로 피난을 갈 것이냐고. 그러면서 오빠의 의견을 물으셨어. 오빠는 그들의 군대를 피했었고, 국군 수복 후에는 그 질서 회복에 협조했으니까 중공군이 나온다면 가장 크게 경을 칠 꺼라는 거였지. 그런데 오빠는 웬일인지 좀체로 말을 않는 거였어. 너도 그때의 일이 지금까지 기억이 날는지 모르겠다만, 조금 더 사태 돌아가는 걸 관망하자는 거였어. 아버지는 사태야 뻔한 것이지 그런 뜨듯 미적지근한 소리가 어디 있느냐고 하자, 오빠는 그제야 무겁게 다물었던 입을 열어 짤막하게 말하는 거였어. 저는 그냥 이 집을 지키고 있을랍니다 하고. 대체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나는 그때 그 말을 이렇게 받아들였었다. 오빠는 원체 매사에 굼뜬데다가 어떤 일에나 겉껍데기로 떠서 돌아가는 그런 성격은 아니어서, 괜히 방향 없이 군중 속에 섞여 우왕좌왕하느니, 자기 책임 밑에 사태에 정면으로 대어들어 볼랍니다 하는 뜻으로 말야. 오빠는 본시 그런 사람이었지. 사실 지금 그때를 되새겨 보아도 그때 그판에 그런 사람이 오빠 말고 또 어디 있엇겠니. 중공군이 나오면 그 동안의 행적이 샅샅이 추궁당하고 반동으로 몰리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 더구나 그들 체제에서 가장 악질 취급당하는 것이 당원으로서 당을 배반한 분자라는 것을 익히 알면서, 후퇴 대열에 자진해서 끼이지 않겠다는 생각이 무슨 망발같은 생각이었느냐 말이다. 아버지도 꽤나 조심조심 말하는 거였어. '집은 네 어머니와 내가 지키마. 그러니 너는 순하, 인하나 데리고 잠시라도 피했다가 오려무나. 밑의 애들은 그냥 내가 데리고 있으면서 사세 보아 어떤 방도든 차릴 테니까. 그게 어떻겠니?' 그러나 오빠는 여전히 묵묵 부답이었고, 한참 후에는 내 의견을 묻는 거였어. '모두 배탄다고 아우성인데, 우리도 뒤에는 어찌되든 나서 봐야 하지 않겠어요.'하고. 그 뒤를 곧 아버지가 잇대었어. '내 생각도 그렇구나. 늙은이나 애들이야 무슨 그다지 큰 탈이 있겠냐. 나는 너희들 에미하고 밑의 애들이나 하고 집 지키고 있을 테니, 너희들 셋은 날 밝거든 부두로 나가도록 해. 나간다고 쉽게 배가 타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러구 설령 배를 탄대로 그후의 일이야 누가 알 것이냐. 금방 돌아오게 될는지, 아니면 뜻밖에 오래 걸릴라는지 그걸 누가 알 것이냐. 그러나 당장은 어쩔 도리가 있니. 날 밝거든 간단히라도 짐 챙겨 떠나도록 하는 게 좋겠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사세가 급하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더구나. 거리는 이상스럽게도 가라앉듯이 조용했어. 왜 이렇게도 갑자기 조용해졌을까. 미처 치우지 못했던 집 앞 공터의 가로 넘어진 전봇대며, 폐허 구석구석의 휴지쪽이며 그런 것들 하나하나도 무언가 칼 하나씩을 품고 있는 듯이 서슬이 서 있었어. 거리를 에어싸고 뻗어 간 산들도 여느 때보다 더 시꺼멓게 육중하고 뚜릿뚜릿해 보였어. 그 산들도 무언가 커다란 눈 하나씩을 갖고, 그 눈을 크게 벌려 뜨고 내려다보는 듯하였어. 오빠는 시종 꺼림한 낯색이었지. 원체 과묵한 사람이었지만 더 말이 없었어. 그저 머엉한 얼굴이던 것은 지금도 뚜렷이 기억이 난다. 오빠는 큰 륙색 하나를 짊어지고 너와 나는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끝내 잠깐 며칠 다녀오겠다는 듯이 집을 나섰지. 밖은 날씨는 추웠으나 햇볕이 맑았었다. 우리는 어린 나이여서 철이 없어 그렇기도 했겠지만, 맑은 햇볕이라는 것은 이런 판국에도 사람을 어지간히 낙천적으로 만들더구나. 이런 맑은 햇볕 밑에서는 피아 적까리도 싸우지 못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막연히 들었었으니까. 저렇게 햇볕이 좋은데 서로 싸우기가 미안하지나 않을까 싶고 말야. 암튼 우리는 그렇게 가볍게 소풍이라도 가듯이 집을 나섰던 거다. 아침나절이고, 게다가 이미 중공군을 피해 도망해야 할 사람들은 미리 몽땅 북쪽 선창가로들 몰려가 있어서 거리의 한길은 텅 비어 있엇어. 그 길을 셋이서만 터벅터벅 올라가기가 어쩐지 민망했었어. 우리는 해변가의 작은 길을 따라 올라갔었는데 그때 그 해안은 엉망이었어. 그 어마어마하던 물자들이 한꺼번에 떠나고 혹은 불태워지고 난 자욱은 그야말로 뭐라고 할까, 무언지 불결하게 느껴졌었어. 바다도 텅 비고, 선창가 바싹 붙어서는 벌써 어느 틈에 돛단배와 인근 항로를 오락가락하는 통통선들이 정박하고 있었어. 뱃군들도 여전히 뱃군 차림 그대로였고. 그때 통통배 하나가 어디론가 떠날 듯이 통통거리면서 조그만 연통에서는 새파란 연기가 통통 소리에 마줘어 퐁퐁 내뿜던 일이 어제 일처럼 떠오르는구나. 맑은 하늘 밑에 햇볕이 쨍쨍한 속의 그 정경은 여간 평화롭지 않았다. 우린 의아했었지. 어느 새 이런 배들이 다시 나왔느냐고 말야.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어. 그새 부둣가에 정박해 있던 그 어마어마한 물자들과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커다란 선박들로 가려진 지난 두 달 동안은 그 조그만 배들이 보이지 않았었다뿐이지 그 배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은 변함없이 한 구석에 정박해 있었던 것이어썽. 서호진 가는 배, 방구미리 가는 배들은 그제나 이제나 변함없이 제 시각에 가고 오고 그렇게 여전히 그전대로 하루하루 살고 있었던 거야. 우리가 웃거리 선창가로 올라갔을 때 다시 그곳엔 어마어마한 정경이 벌어지고 있었어. 커다란 수송선 몇 척이 먼 바다에 정박해 있는데 선창가는 배를 타려는 인파로 해서 그야말로 수라장이었지. 그것은 이때까지 그렇게도 어마어마하던 것이 마악 떠나고 나서 남는 찌꺼기 같은 것이었다는 느낌이, 그때 당장은 몰랐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선연하게 집히는구나. 우리는 바로 그 대열에 껴 있었던 거다. 해안선을 따라서 삼엄한 경비가 펴진 속에 군인 가족, 군속 가족부터 순서대로 줄을 서서 배를 타는데, 인근에서 구름처럼 모여든 군중은 아비 규환이었어. 겨울 해가 짧기도 했지만, 눈 깜박할 사이에 하루가 다가고 저녁때가 되었어. 그날 따라 마악 서산으로 넘어가던 햇덩이는 어찌 그다지도 핏빛으로 붉었던지. 드디어 해가 지고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군중들은 정신 없이 허둥지둥 바다 쪽으로 몰려나가는 것이었어. 이미 경비도 뭐도 없고 떠날 만한 사람은 다 떠난 속에서 제 발 등에 불이 떨어진 겁난 사람들로만 들끓고 있었어. 그리고 바다는 땅거미가 지는 속에서 중유덩어리처럼 시커멓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위로는 앞 끝이 삐죽하게 오른 상륙정들이 가로 세로 부웅부웅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하나 둘 오더구나. 선창가에 몰려선 사람들은 그 상륙정이 닿을 때마다 한 무더기씩 곤두박질을 쳐서 타는 거다. 모두 미친 사람 한가지였었지 뭐냐. 마치 저 배를 못 타면 이젠 마지막이라는 듯이 모두가 사생 결단이었어. 이때 우리 셋도 제가끔 정신이 없었다. 어찌어찌 너와 내가 손을 맞잡은 채 마침 와 닿는 상륙정에 올라탔을 때는 어느 새 금방 배 속은 꽉 차 버려서 파도에 기우뚱거리며 뱃머리를 돌리고 있었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오빠가 타지 않은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지 뭐니. 뒷배로라도 오겠거니 하고 우리는 기다렸지. 수송선에 옮겨 타자 우리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선상에서 뒤로 뒤로 오는 사람들 속에 오빠를 기다렸으나 오빠는 끝내 오지 않았어.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하고 우리는 서로 안달을 했으나, 난 그때 이미 느꼈었다. 오빠는 부러 오지 않았으리라고. 오빠의 성격으로 봐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오빠는 본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부산에 닿아서도 우리는 혹시 오빠가 뒤따라나오지나 않았나 사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으나 기어이 오빠는 나오지 않았어. 그건 아무튼, 그렇게 너와 나만 단둘이 월남해 와서 그후 줄곧 나는 매일 매일을 임시로 자처하며 살았어. 이건 임시다, 이건 임시다. 이제 언제고 통일이 되면 그날로 돌아가야 할 몸이다, 하고 마량. 그렇게 허구헌 날 임시를 자처하다 보니, 뿌리를 깊이 내리면서 살아질 리가 없었지 뭐니. 그러면서도 정작 나는 이 남쪽의 껌 맛과 초콜릿 맛은 물론, 양주 맛, 담배 맛, 그 밖에도 이 자유 세계라고 일컬어지는 곳의 가지가지 단맛이라는 맛에 흠벅 빨려 들고 있었다. 입끝으로는 임시다 임시다 하면서도 말이야. 정작 육신은 더욱 거칠 것 없이 자유 분방하게 자유를 만끽하고 방종에 내맡겼어. 이렁저렁 하루하루 지나다 보니 어언 세월이 흘러 제대로 시집 한 번 못 가 보고 쉰 살을 바라보게 되었구나. 허망하다 허망하다 해도, 이렇게도 허망할 데가 어디 있겠니. 유서랍시가 끄적거리다 보니 갑자기 죽긴 왜 죽어, 악착같이 끝까지 살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왈칵 드는구나. 이런 충동이 대저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때까지 무언가 엄청나게 속아 온 것 같은 느낌이고, 이렇게 속은 것을 앙갚음하기 위해서라도 내 몸 하나 끝장이 날 때까지 악착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무튼 모르겠다. 죽을 작정하고 이런 글도 너에게 남기는 거니까, 일단 목적했던 대로 훌쩍 어디로든가 지방으로라도 떠나겠다. 바닷가 보이는 어느 호텔에라도 묵으면서 술이라도 취하면, 충동적으로 다시 죽고 싶은 생각이 나서 훌쩍 죽음을 결행하게 될는지 누가 아니. 그거 나현지에 가 봐서 그때 형편에 맡기기로 하겠다. 다 쓰고 나니까 우스워지는구나. 무엇을 끄적거렸는지 스스로도 뭐가 뭔지 모르겠구나, 이만 쓰겠다. 다 읽고 난 송인하는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손끝의 힘이 스르르 빠지면서 노트는 소리 없이 침대 모서리를 스쳐 맨바닥에 떨어졌다. 그러자 꽤나 충동적인 성격인 언니가 정말로 죽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와락 놀라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씁나 다음 순간, "그럴 리는 없다. 언니는 호락호락 죽을 사람은 아니야." 하고 스스로 다지듯 하며 도로 침대 머리에 살그머니 앉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이 일을 혼자서 감당하기는 너무 벅찰 듯하여 지숙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13 지숙이는 집에 있었다. 그러나 정작 지숙이 목소리가 전화를 통해 들리자, 송인하는 어리둥절해졌다. 당장 이 일을 어떤 식으로 얘기해야 할는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작정 언니가 죽었어, 할 수도 아벗는 일이고, 언니가 유서를 남기고 나갔어, 하기도 듣는 쪽에서 너무 당돌해할 것 같았다. 분명히 그러자고 마음먹은 것도 아닌데, 송인하는 극히 억제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우리 언니, 거기 안 들렀든?" 지숙이는 인하가 늘 골칫거리로 여기던 언니 순하에 관해 물어 오는 것이 의아스럽게라도 여겨진 모양으로 되받아 물어 왔다. "누구? 순하 언니 말이냐?" "그럼 순하 언니지, 나헌테 언니라고 달리 누가 있어?" "왜, 왜 갑자기 언닐 찾고 이 야단이지, 늘 골칫거리로 여기고 있었으면서." "실은 말야, 언니가 유서를 써놓고 나갔군. 읽어 보니까 유서인지 뭔지......" 정말 죽을 사람 같지는 않기도 하다만, 하고 한 마디 덧붙이려다가 마는데, 지숙이는 벌써 기겁을 하듯이 놀랐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손하 언니답지도 않게." "글세, 누가 아니래. 이젠 늙어지면서 노망이 들어 그냥 사람을 놀라게 해놓자는 뜻인지,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구나." "참, 그러지 않아도 아까 우리 집에 들렀드라는데." 비로소 생각이 났다는 듯이 지숙이는 호들갑스럽게, "가다 오다 그냥 들르듯이 들렀드라는 것 같든데. 나도 조금 전에야 집엘 들어왔거든. 그래서 그냥 심심해서였거나 아니면 돈이나 좀 돌려 달라고 들렀었거니 하고, 조금 늦게 들어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어. 가만, 이제라도 내가 자세히 물어 볼 테니 전화 끊지 말고 기다리렴." 하고는, 저노하 수화기를 든 채 밥하는 애를 요란스럽게 부르는 소리가 그냥 그대로 이쪽과 통화하듯이 들려 왔다. "몇 시에 왔었어?" "대강 말이야." "어이구 애도 굼뜨기도. 누가 충청도 아니랠까 봐." "혼자서? 응, 응, 여행 백 같은 걸 하나 들고." "차림은? 응, 응."하고, 밥하는 애와 주고받는 소리도, 이쪽에서 직접 듣거라 하고 일부러 수화기를 이쪽에 들이댄 met이 잘 들렸따. 지숙이는 금방 다시 전화 앞으로 나오면 큰 소리로 지껄였다. "여행 백 같은 걸 하나 들고 여행 차림으로 모자까지 하나 쓰고 들렀드란다. 내가 들어오기 약 한 시간 전이라니까, 얼추 잡아서 한 시간 반 가량 되었겠다. 그러구 마악 대문을 나서면서 혼잣소리 비슷이 중얼거리드래. 누군가를 찾아가볼가, 하고. 그가 김씨인지 이씨인지 무슨 씨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강씨가 아니었는가 싶다는 것으로 미루어 강성구 같으다. 강성구밖에 더 있겠어." "어머, 그이는 좀 전에 마악 헤어졌는데. 회사에 안 들어가고 곧장 집엘 갔고." "원체 극성꾸러기 순하 언니라 너나 나는 이제까지 강성구씨 집을 모르고 있었지만, 혹시 아니. 그 언니는 강성구씨 집에 무상 출입하듯이 출입했는지도 모르는 거 아냐. 그건 그렇고 나 나온 다음에 재미는 좀 보았니? 네 성질로 뻔했을 것이다만." 지숙이도 이미 순하 언니가 유서를 쓰고 나갔다는 소리는 전혀 신빙성이 안가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일종의 연극이거나 어떤 저의갇 arls 술수일 거라고 받아들이는 모양, 조금 전에 헤어지고 돌아온 강성구와의 일이 더 궁금한 듯하였다. 비로소 인하도 강성구와 마셨던 술이 완전히 깨어난 것을 의식하며 멋적게 지껄였다. "이 나이에 재미가 무슨 재미냐. 괜히 네 극성에 또 말려들었던 거지. 사람도 여전히 싱겁고, 게다가 남쪽으로 나와서 일찌감치 애들을 많이 빼 낳아 기르느라고 고생깨나 했는지 사람이 쩨쩨해지고 말이다." "왜, 혹시나 담배 사 오라고 네가 핸드백에서 꺼내 준 천 원짜리에서 담배 사고 거스름 갖고 온 것을 술 취한 척하고 쓱싹하든? 강성구, 그랬을 것이 뻔하지 머." "어머, 넌 어짜머 그렇게도 잘 알지? 그야말로 쏘옥 집어 내듯이 아는군. 넌 점장이를 했음 기가 막혔을 거야. 실은 그 짓도 한 번이면 괜찮겠어." 이번에는 지숙이 편에서 벌려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가 보았다. "어머 기막혀. 그런 짓을 한 번이면 족허지 두 번씩이나. 해도 너무 했군. 아무리 강성구지만. 그 정도 됐으면 완전히 알아볼 만하다. 네가 정나미가 떨어지고 등골이 오싹했겠구면. 네 성질에 여북했겠니." "아니, 나도 조금 가치해 있었으니까 그렇게까지. 그렇지는 않았어. 그저 치사하다 싶긴 했지만, 그런 짓도 원체 강성구답게 뻔뻔하게 해내니까 도리어 그쪽이 정상이나 아닌가 싶어지는 게 말야. 도리어 그런 걸 쩨쩨하게 생각하는 내쪽이 쩨쩨한 거나 아닌가 하고 말야." "그야 나름이지. 혹 순간적으로 착각을 할 수도 있겠지 머. 자기 돈 거스름으로 알고 말야. 허지만 강성구 경우는 아니야! 그 광경이 훤히 보이는데." "어머어머, 어쩜 넌 그렇게 본드키 얘기하지?" "그래서, 그뿐이었어? 별 특별헌 일은 없었고?" "특별헌 일이 뭐가 있었겠어. 그렇게 두어 시간 동안 술 취해서 왈왈거리는 소리만 들어 주다가 택시를 태워선 그이 집 근처까지 데려다 주고 조금 전에 들어와쓴나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언니가 유서를 써놓고 있으니." "대체 그 유서라는 건 뭐라고 썼는데?" "응, 꽤나 길어. 우리가 피난 나올 때의 얘길 너저분하게 썼지 뭐니. 주로 그때 나오지 못헌 오빠 얘기를. 그러구 맨 뒤에다가는 죽지 않을는지도 모르겠다고 써놓았군." "그래, 내 생각도 그렇군. 이때까지 그렇게 살아온 순하 언니가 지금 와서 갑자기 죽을 리가 있겠어." "허지만 혹시 아니. 그런 언니였으니까 충동적으로 저지를는지도." "허긴, 그런 일은 모르는 일이라고는 하드라만 그러다고 당장 어쩌겠니. 어딜 갔는 줄 알고 찾겠어. 기다려 보는 수밖에." "그렇다고 그냥 죽치고 앉아 죽길 기다릴 수만도 없는 거 아니니." 하고, 인하는 하긴 이런 마당에는 지숙인들 뾰족한 길이 없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아뭏든 기다려 볼밖에 없지 머." 하고 나지막하게 약간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그럼 전화 끊을게. 다시 걸 일이 있으면 걸겠고." 그냥 살그머니 수화기를 놓았다. 그대로 잠시 멍하게 앉았던 인하는 피시시 웃음이 나왔다. 하필이면 30년 만에 고향 사람 강성구를 만나는 날, 언니의 이 유서라니 싶었다. 두 가지 일이 그냥 우연만은 아니고, 그 어떤 관련이 있지나 않은가 싶어지지만, 어떤 식으로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는 분명하게 잡히지가 않았다. 다만, 언니의 그 유서라는 것이 어째서 월남해 오지 못한 오빠 얘기가 중심이 되어 있는지 아물아물 짐작이 될 듯도 하였다. 어느 새 인하도 언니가 죽고 안 죽고는 별로 관심이 안 가고 언니가 끄적거린 그 옛날 남쪽으로 나오던 일이 하나하나 다시 떠오르며, 그 동안 거의 잊어 버리고 살아온 오빠의 일이 새삼스러운 부피를 지닌 채 몸 가까이 감도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