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도 1 이원영 주사는 주사가 된 지도 이미 2년이 넘었지만 고지식 주사로 통하고, 심지어 심한 경우에는 고문관이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다. 확보한 예산을 활용할 줄 모르고, 서무 경리를 4년을 했으면 소위 '야리꾸리'라는 것도 좀 할 줄 알아야 할 터인데 이건 죽자 하고 벽창호다. 심계 감사다 내무 감사다 할 때 감사원이 도리어 꿀릴 만큼 법조문을 내휘두르고 떵떵거리는 것을 보면 전혀 바보는 아닌 것 같은데, 과의 살림 꾸려 나가는 것을 보면 앞뒤의 아귀 맞추는 것은 믿음직하지만 영 융통이 없다. 무능 공무원 무능 공무원 하지만, 예산안을 짜서 올리고 총무과 기획실 경제 기획원을 거쳐 국회 통과까지 겨우 넘기면 확보된 그 예산은 곧 그 해 과의 자가산이나 다름이 없는데, 연말에 그것도 다 못 써먹고 국고에 돌려 보내는 사람이야말로 무능 공무원의 대표격이다. "세상에 못나다 못나다, 따낸 예산도 못 써먹고 돌려 보내는 사람이니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이 알아봤지. 땀흘려 따낼 땐 언젠데 국고에 돌리다니 말이돼?" "도대체 무능하다 무능하다, 그렇게 무능한 사람은 없어. 남은 예산도 써먹을 생각은 않고, 도리어 국고에 돌려 줄 생각부터 하니 그런 맹추가 어디 있겠어." 이원영 주사야말로 이런 소리를 듣기에 꼭 알맞은 사람이다. 그러나 도대체 이런 얘기부터가 이상하다 과연 어느 편이 유능 공무원이고, 어느 편이 무능 공무원일까. 아무리 예산을 따내기가 힘들고, 경제 기획원이다, 재무부다, 국회 재경 위원회다, 거치는 사이 모든 말썽을 뚫고 예산으로 확보대가다 할지라도, 그 돈은 엄연히 나라 돈이지 과의 돈이랄 법은 없을 것이다. 나라 돈이란 국민들의 돈이요, 국민들이 세금 바친 돈이라는 뜻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관리들, 특히 관리 생활도 오래 해먹은 능구렁이 관이일수록, 글세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원칙론과 실제 사정을 따로따로 떼어서 생각한다. 그리고 원칙론이란 신입 공무원들의 구두 시험에나 효험이 있을까 그 밖에는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누가 모르나? 나라 돈이 세금 낸 돈이고, 곧 국민들의 돈인 줄 누가 모르나? 이거 왜 이래? 피라미 중학생도 아니고, 사회 생활을 한다는 사람이 그런 교과서 같은 소리나 하고, 정신차려요 정신차려, 원칙론은 원칙론이고, 실제는 실제거든. 하긴 그렇다. 이 말에도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관리들이 천이며 천, 만이면 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이 굳어져 있는데, 혼자서만 주제넘게 원칙론을 고집한다는 것도 웬만큼 낯가죽이 두텁지 않고서는 힘들 터이다. 4.19를 겪고 5.16을 겪기는 하였지만, 관리들만은 용하게도 깊은 상처를 안입고 그 소용돌이를 넘기었다. 더러 높은 줄에서 바람을 맞은 자도 없지는 않지만, 그런 축은 너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고 지나치게 술수만 믿다가 그렇게 제 묘혈을 스스로 판 사람들이고, 정작 태반의 관리들이나 관청 기구 그 자체는 별반 정치 바람의 상처도 안 입었고, 따라서 관리들의 일반적 성격도 비교적 그대로 온존되어 온 셈이다. 자유당 때도 그렁그렁, 민주당 때도 그렁그렁, 5.16이후에도 그렁그렁 지내기는 뭐니뭐니 관리 생활이 괜찮다. 비록 겉으로는 장사하는 사람들을 부러워 하고, 혹은 매어 있지 않은 자유인들을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반은 진담이고 반은 엄살이기도 하다. 확실히 요즈음은 여기저기의 감사도 까다롭고 예산 지출만 해도 예전에는 없던 기획실을 거치는 등 꽤나 기강이 확립되어 가는 듯이도 보이지만, 그렇다고 관리들 자신은 그전의 벌릇, 그전의 타성을 버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관리도 백에 하나 천에 하나 없지는 않으나 그런 관리들은 지나치게 고지식하다는 소리나 듣고 혹은 뒤로 손가락질이나 받고 비웃음이나 당하기 십상이다. 바로 이원영 주사가 그런 사람이다. 2 저녁 퇴근 시간이 거의 되어 가고 있었다. 사무실 안은 하루 일의 마감을 앞두고, 제각기 서랍을 정리한다, 담배를 꺼내 문다, 라이터를 빌린다, 혹은 저녁에 만날 친구와의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전화를 건다, 느슨느슨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원영 주사 옆에 앉은 '꺽다리' 김 주사도 전화통을 붙들고 웃사람들의 눈치를 슬슬 보아 가며 작은 목소리로 주워 대었다. "에잇 여보슈, 말단 공무원이 돈이 어디 있어. 자네 같은 장삿군이나 왕창왕창이지, 그런 소리 말게, 말아." 저쪽에서 뭐라고 하는 듯, "그런 소리 말라니까. 여하간에 막걸리 한 잔 살 테야, 안 살 테야? 여기 전화바쁘니 빨리 대답만 해. 사겠으면 나가고 안 사겠으면 집으로나 곧장 가겠고." 저쪽에서 또 뭐라고 하는 모양으로, "팔자 좋은 소리 그만두게. 그것도 요새는 삼배수제여서 우리 같은 무실력파는 애당초에 글른 얘기고, 요즈음엔 가나오나 실력이지, 실력. 실력이 있어야 시험도 패스하거든." 하고는, 또 저쪽에서 기어이 한잔 사겠다고 한 모양으로, "일찌감치 그럴 것이지. 그럼, 을지로 입구 왕궁이네, 여섯 시 반까지. 오라잇, 알았어, 알았어." 전화를 끊었다. 끊고는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가볍게 하품을 할까 말까 할까 말까 하다가 손목 시계를 들어 보고 옷걸리 쪽으로 걸어갔다. 바바리 코트를 주섬주슴 입고는 과장과 계장을 번갈아 건너다보고, 그들이 그냥 앉아 있는데 먼저 나가기가 민망한 듯이 망설이다가, "그럼 전 약속이 있어서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하였다. 과장과 그 양쪽의 계장들은 저녁 신문을 읽고 있다가 신문을 그냥 든 채 머리만 끄떡하였다. 김 주사가 막 문을 열고 나서려고 할 때 김 계장이, "아, 참." 하고, "김 주사, 나 좀 보시오." 하고 급하게 불러세었다. 김 주사는 찔끔하여 돌아섰다. "그거 좀 생각해 봤소?" "뭐 말입니까?" "아, 그 공팔(예산 항목 명칭) 예산 말야, 그냥 국고에 돌릴 수는 없쟎아." 비로소 이원영 주사도 펜대를 놓고 머리를 들었다. 동시에 김 주사도 이원영 주사 쪽을 흘낏 건너다보고는 그와 눈길이 마주치자, 살짝 hdlaus을 하고 다시 김 계장을 쳐다보며, "생각해 보기는 했습니다만......" 하고 우물쭈물한다. "생각해 봤는데, 어떻다는 얘기요?" "......" 김 주사는 또다시 이원영 주사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듯하다가, "이 주사와 잘 타합해서 결정짓겠습니다." 한다. "타합이고 자시고, 아, 확보한 예산인데 빨랑빨랑 소화를 시켜야지, 그냥 국고에 돌려 보낼 텐가. 요즈음은 그전 같지 않아서 항목 변경도 안 되고, 어떻든 인쇄비로 확보했으니께 뭣 좀 만들어 봐요."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만 하지 말구, 알았으면 해야지. 벌써 지금이 11월 아니요. 겨우 한 달 남았는데 서둘러 써야지 이 사람들이 도대체." "알겠습니다." 김 주사는 꾸뻑 절까지 한다. 김 주사는 나이가 서른 셋이나 된 분수에 여간 소심하지 아낳다. 얼굴이 큼지막하고 체구도 큰데다가 수염까지 텁수록하여(물론 면도는 매일 하지만), 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고 얼핏 처음 보는 사람이면 국장쯤으로 오인을 할 만큼 관록도 있어 보이는데, 노는 것은 여간 쩨쩨하지가 않다. 상관이라면 덮어놓고 설설 기고 꼭 국민 학교 하갱처럼 순진한 데가 있다. 으레 상관이라는 살마들도 매사에 뻣뻣하게 대드는 부하 직원보다 이렇게 늘 고분고분한 사람을 좋아한다. 같은 욕사발을 퍼부어도 그런 부하가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닌게아니라 때때로, "젠장, 어떻게 된 것이 남이 당할 일까지 꼭 나를 불러서 못살게 군단 말야. 욕복을 타고 났는지 원." 하고, 혼자 투덜거리곤 하였다. 그는 민주당 정권 때 그럭저럭 안면을 통해서 들어온 사람으로 처음에는 국토 건설 요원으로 채용되었다가 그 사업이 중도 포기되면서 모두 각 부처로 분산 배치되는 바람에 이 과로 오게 되었다. 그전에는 국민 학교 중학교의 교사로 오래 있었고, 한동안은 소설 공부도 하려고 하였는데, 신춘 응모에 대여섯 번 떨어지고는 깨끗이 집어치우고 관리길로 나섰다. 재딴으로는 세상 사는 것은 뭐니뭐니 사교다, 웃사람에게 잘 보이고 동료지간에 호인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처신도 하지만, 웃사람들은 이런 그를 좋아는 하면서도 어느 구석인가 얕잡아 보고 있고, 동료들도 매사에 적당적당히 응대해 주긴 하지만 조금 치사하게 보고 있다. 지나치게 속셈이 되바라지고 노골적이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김 계장이란 사람은 김 주사보다도 훨씬 나이가 아래여서 이원영 주사와 동연배쯤 되는 젊은 사람이다. 고시 행정과에 합격해서 들어온 사람으로, 매우 깐깐하고 까다로운 사람이다. 도장 하나르 띵찍어도 사후에 책임이 짊어지워 불려 다닐 일이나 없는가, 하나하나 따져서 찍을 것은 찍고 안 찍을 것은 어떤 방법으로라도 피한다. 더구나 돈과 관계가 있는 것이면 같은 계장인 구 사무관쪽으로 넘기곤 한다. 구두도 티 하나 묻을 때가 없이 매일 반들반들하게 닦고, 술 한 잔을 마셔도 마셔서 괜찮은 술인가 그렇지 않은 술인가 요모조모로 살펴 보고서야 마시는 사람이다. 김 주사는 밖으로 나오자 오늘 따라 은근히 불쾌하였다. 마땅히 공팔 예산이라면 자기에게 물어 볼 성질이 아니라, 이 주사에게 물어 볼 성질이다. 헌데, 이 주사에게는 한 마디도 없고 자기만 불러서 떵덩거린다. 자기야, 남은 예산 써먹을 마련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1주일 전에 성안을 해놓았다. 기안을 하기 전에도 구두로 상의를 했었지만, 그때도 그 젊은 계장은 좋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제 남은 일은 돈줄을 잡고 있는 이 주사에게 달려 있다. 그가 흔한 말로 '단도리'만 해놓으면 일사 천리로 원고를 작성, 인쇄소에 넘겨서 인쇄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 주사에게는 한 마디도 않고 애꿎은 자기에게만 채근인 것이다. 김 주사는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놈의 계장도 이 주사는 어려워한단 말야. 무능하다, 고지시가다, 융통이 없다, 어디 딴 곳으로 보내야 할 텐데 받자는 데도 없다, 푸념하면서도 정작 이 주사 앞에서는 약간 주춤하거든. 그러군 애꿎게 나만 들볶는단 말야, 나이로 봐도 나하고 그럴 처지는 아닐 것인데.' 3 드디어 과장과 양쪽의 계장이 보던 석간 신문을 놓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과장이 보던 신문을 놓자, 그 양옆에 앉았던 두 계장도 보던 신문을 놓았다. 과장은 일본에서 무슨 시시한 대학을 나왔다는 50 가까운 사람이고 이마가 까진 대머리다. 자유당 때부터 공무원 생활을 해 온 사람으로 여간 능구렁이다. 그전에는 무슨 단체의 책임자 비서로도 오래 있었는데, 지난 4.19 바람에 쫓겨난 그 책임자와도 지금은 인연을 끊었고, 자유당 중엽 그 줄을 타고 공무원 길로 들어서서 처음에는 꽤 빠른 속도로 올라갔으나, 이젠 과장이 된 지도 5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상 별로 욕심도 없다. 더 올라가야 남의 눈에 돋보이기나 쉽고 그렇게 되면 골치나 썩기 쉽지 이렁저렁 익숙해진 자리에 오래 붙어 있고 싶은 것이다. 철도청 같은 사업 관청도 아니어서 말썽날 일도 드물고 그때그때 예산이나 적당히 써먹으며 심심치 않으면 된다. 물론 고양이 아침밥만큼 또 30 퍼센트 올라서 2만여 원은 되지만 공무원 봉급으로 여섯 시국가 산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다. 술값은 따로 계산하고도 한 달 자기 용돈이 될까 말까이다. 미리 이런 일을 짐자개헛 자유당 말기 그 한참 공무원 경기가 최고조일 때 돈 좀 벌어 두었고, 지금은 부업으로 택시를 서너 대 굴리고 있고 1년에 두세 건씩 별로 신경 쓰지 않을 한도 안에서 간단간단히 집장사를하여 이렁저렁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있다. 게다가 쌀은 시골에 전답을 조금 장만해 두어 매년 사지 않고도 먹을 수 있다. 이를테면 공무원치고는 팔자가 좋은 편이다. 무사주의 적당주의로만 살아가면 이렇게 저렁게 골치 썩을 일도 없고 별 어려울 것이 없을 터이다. 그날이 그날로 늘 무사 태평이다. 이따금 사무실에서도 튀근 시간 무렵이 되어 집에다 오래도로 전화를 건다. 그 전화라는 것의 내용을 간단히 들은 대로 옮겨 보면, "나야 나, 오늘 하루 종일 뭐 했소?" 절편에서 뭐라고 하는 듯, "또 하루가 지났는데, 어떻게, 여오하 구경이나 하려나?" 하고는, "그럼 그러지, 거기서, 그전 거기서 만나지. 가만, 가만, 그 큰애 있거든 바꿔 줘요." 하고 잠시 간을 두었다가, "나다. 아버지다, 아버지." 하고, 그 큰애가 뭐라고 하는 듯, "오늘 월말 고사 치르었니?" 하고 또 간을 두고, "음 잘했다. 여하간에 이번에 5등 안으로만 들면 부탁한 것 사 줄 터이니 열심히만 해, 오냐 알았다. 알았다니까." 전화를 끊는다.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나이에 비해서 큰애가 어린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늦장가를 간 것일까. 하긴 마누라가 더러 퇴근 시간 무렵에 들르곤 하는데 여간 젊지 않다. 신식 현애 여성이고 미인이다.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여자는 거의가 약간 징그러운데, 비교적 애교 있게 평안도 사투리를 쓰고 허여멀쑥하게 덕성스럽게 생겨 있었다. 게다가 여간 인사성이 바르지 않아, 사무실로 들어설 때마다 옆의 두 계장에게도 공손히 큰절을 하고 과원들에게까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목례를 잊지 않는다. 으레 김 주사는 이 마나님이 나타나면 자리에서 일어나서 의자를 내놓는 둥, 눈치 빠르게 움직이고, 다른 직원들도 기분 좋게 생긴 여자만 나타나면 누구나 그러듯 괜히 싱글벙글하지만 이 주사는 한 번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런 때일수록 더 무뚝뚝해진다. 공무원 생활도 최소한 저쯤은 되어야지 걱정이 없을 터인데. 과장은 어느 모로 보나 이렇게 선망의 눈초리를 받을 만하다. 신문을 놓은 과장이 조금 전에 김 주사에게 핀잔을 주던 옆의 김 사무관을 돌아보며 묻는다. "별일 더 없지요?" "네, 저는 별일 없습니다만." "그럼, 이제 나가 봅시다." 그러자 반대편에 앉은 구 사무관이, "가만, 벨이 났나요?" 하고 참견을 한다. "네에, 벌써 났지요." 김 사무관이 대답한다. 고장이 또 슬그머니 웃으면서 김 사무관을 돌아보며 말한다. "어떻게, 오늘 데이트요? 어떻게, 이젠 거의 되어 가는 겁니까?" 김 사무관은 낯을 약간 붉힌다. "글세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되어 가기는 되어 가야 할 터인데, 대학 영문과를 나온 애들은 대개 콧대가 세어서, 사무관쯤은." "에잇 여보슈, 아, 그 나이에 사무관이면 최고지. 지방 내려가면 군수요, 군수." 간부들께서 이런 잡담이 벌어지자 과 안은 갑자기 술렁거린다. 과원들도 저 저끔 저희들끼리 농담을 주고받는다. 사환 아이도 벌서 야간 고등 학교로 가고 보이지 않았다. 구 사무관도 과장고 김 사무관이 잡담을 시작하자, 슬그머니 일어서서 그쪽으로 걸어간다. 그는 일과 시간 중에는 고시파요 실력파인 젊은 김 사무관에게 늘 기가 죽어 있고, 사실 과장도 매서 어려운 일은 김 사무관 쪽과 의논을 하곤 하는 것이었지만, 이렇게 잡담이 벌어지면 그런 일방나적인 인생 경험은 자기가 한층 위라는 듯이 허붓이 웃으며 얘기에 끼여든다. "여보, 기 링사무고나, 이 늙은 총각, 아니 이제 뭐랬지? 영문과가 뭐? 아, 그걸 그냥 내버려 둬요? 영문과 들어가서 콧대만 높아지고, 아, 그런 걸 그냥 둬?" 일반 직원들도 듣는데 이런저런 체모도 가리지 않고 털털하게 지껄여 댄다. "아니 구 사무관, 장간 누가 갈려는데 엉뚱하게 당신이 흥분이요? 원, 별사람 다 보겠군." "글세 누가 가나마나, 아, 이렇게 진짜 속에서도 진짜 총각을 마다할 여자가 있다니, 말이 됐느냐 말임다. 말은 바른 말루 그런 여자야 눈일이 삐뚜루 배겼지." 김 사무관은 실실 웃고만 있다. "아니, 과장님, 정말 어떻게 생각하시우? 김 사무관이 금년을 또 이렇게 넘긴대서야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도대체." 과장도 구 사무관이 침을 튕기면서 지껄이는 바람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비죽비죽 웃고만 있다. 구 사무관은 하루 종일 우그러드어 있다가 이 시각이면 폭발적으로 온몸과 마음이 펴지는가 보았다. 그는 신탄진 담배 한 대를 꼬나물며 또, "정말 농담이 아니라 금년엔 국수 먹읍시다. 원 그렇게도 국수 먹기가 힘들어서야 어디......, 하긴 국수 먹어 봐야 골친 아프고 이것 저것 귀찮을 것인긴 하지만 말야. 그래도 사람이 살다가 이왕 치르는 거 빨리 하는 것이 좋거든. 그러구 아니할 말루 밀월 시대라는 것이 쓰윽 있구 말야." 구 사무관은 조금 침착하게 지껄이는 듯하다가 밀월 시대 운운하면서는 또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졌다. 그러자 김 사무관은 갑자기 여느 때의 깐깐하고 엄격하고 쌀쌀한 표정으로 홱 돌아오며 과장에게 묻는다. "과장님, 오늘 저녁 혹 약속 있으십니까?" "아니 뭐, 약속은 없습니다." 그 옆의 구 사무관은 멀쑥해진 얼굴로 그냥 서 있다. "그럼 셋이 나가다가 술이나 한잔씩 합시다. 여쭐 말씀두 있구." 목소리를 한결 낮추어 말하였다. 과원들도 제각기 큰 소리로 잡담을 나누다가 간부들 쪽이 조용해지자 한결 소리가 수그러들었다. "무슨 얘긴데?" 과장이 되묻는다. 김 사무관은 허리를 꺾고 어깨를 수그리며, 열심히 일만 계속하고 있는 이원영 주사 쪽으로 흘낏 눈길을 돌렸다가, "글세 몇 가지 일루." "그럽시다." 과장도 벌써 대강 짐작을 하며, 이 주사 쪽을 흘낏 건너다보고는 다시 구 사무관을 돌아보며, "구 사무관도 별 약속 없지요?" "네, 저야 머, 술 마시는 일이라면 다른 약속이 설사 있었드라도 포기지요, 포기." 하고, 구 사무관은 다시 저다운 활기를 회복하며 떠들썩하게 지껄인다. 순간 김 사무관은 미간을 약간 찡그린다. "그럼 나갑시다." 하고, 드디어 과장이 일어섰다. 으레 술 마시러 간다면, 근처의 화식집 도궁이다. 두 사무관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옷걸이에서 제각기 바바리 코트를 입고는, "자, 그럼 먼저 나갑니다." 과장이 모자에 살짝 손을 대며 말하였다. 두 사무관도 과원들 쪽을 향해 턱을 주억거리자, 과원들도 일제히 인사를 하고는 우르르 자리에서들 일어섰다. 세 간부는 문을 열고 나갔다. 갑자기 과는 우당탕하고 시끌시끌해졌다. "어이 어이 상대해, 권 주사 권 주사, 두 점 놓아야 해 두 점." 하고, 최 주사는 벌써 어디서 바둑판을 꺼내었다. 여행 때 기차칸 같은 데서 쓰는 소형 바둑판이었지만 소리는 제대로 나는 것이었다. 딱, 딱, 딱, 딱, "저녁 내기야." "돈이 어디 있어." "이거 왜 이래, 최 주사야 오야지가 벌지 않아, 오야지가." "그게 오야지 돈이지 내 돈인가." "왜 이래, 잔말 말구 저녁 내기야, 내가 지면 차 한잔은 살게." "그럼 한판 가르쳐 줄까." 그밖에 다른 패거리들은 모두 바바리 코트를 입는다, 다시 저노하를 건다, 그 옆에서 저노하를 기다린다, 등 등 등...... 전화를 기다리던 양 주사가 그냥 계속 책상 앞에 붙어 있는 이원영 주사를 건너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여보 이 주사, 그만 하지 그만 해. 그런다구 누가 알아 주는 것도 아니고 시간외 근무한다고 수당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이 주사는 못 들은 체하였다. "공무원 공무원 저런 공무원만 있었으면, 우리 나라도 선진국은 못 되어도 중진국쯤은 벌써 되었을지 모를 거라." 바둑을 두던 최 주사가 이 주사 쪽으로 눈길을 보내며 빈정대었다. 잠시 후 사무실은 텅 비고 바둑을 두는 딱 딱 딱 소리. "하하, 그거 한 수 잘못 놓았는걸, 거길 끊는 건데 그만." "하하, 바둑 졌는걸, 꽁수에 넘어갔군." 이렇게 푸념을 하는 최 주사의 목소리뿐이었다. 그러나 이원영 주사는 그냥 제자리에 앉은 채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디, 누가 견디나 보자.' 과장과 두 계장이 술집에서 무슨 소리를 할 것이라는 게 그 나름으로도 대강 짐작이 되었다. 4 과장과 두 사무관이 도궁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카운터에 앉았던 한복 차림의 중년 마담이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아이구우 얼굴 잊어먹겠수, 과장님. 원 그렇게도 안 보이시다니." 하고, 호들갑을 떨고는 두 사무관에게도 목을 까딱해 보이며 눈인사를 하고, 다시 과장에게 눈길을 돌리며 속삭이는 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방으로 들어가셔야죠?" "우린 먹걸리 마시러 왔는데. 이 집은 막걸리 없나. 모두 대폿집으로 전향을 했다더니, 다시 또 어느 새 이렇게 제자리로 둔갑을 했나. 우린 막걸리 마시러 왔는데에, 막걸 리가 없다면 나가야 되겠군." "네에 네에, 막걸리 드리께, 어이구우 넉살도 여전하시군. 자 어서 들어가요. 옥아아, 그 안방 좀 치워라." 마담도 과장의 허벅지를 꼬집는 시늉을 하며 익숙한 투를 부리더니 안쪽을 향해 나긋나긋 소리를 질렀다. 김 사무관과 구 사무관은 쑥스러운 듯 슬그머니 외면을 하였다. 하긴 이렇게 과장 술을 얻어먹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어서 여간 미안하지 않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저 그러려니 싶었지만 사람이 그대로 최소한의 도리는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두 사무관은 같은 식으로 술 살 형편은 못 된다. 가다오다 막걸리라면 한두 번 감당이 되겠지만 한 번 앉았다 하면 몇천 원은 간단하게 오르는 판이니 인사를 차리재도 차릴 수가 없다. "뭐,밖에 앉지요. 간단히 얘기나 하구 저녁이나 먹읍시다요." 김 사무관이 오늘은 천하 없어도 자기가 회계를 하리라 마음먹으며 말하였다. "어이구우, 저 젊은 김 계장도 여간 아니셔. 누가 발가먹겠댔나. 이젠 겨울두 가깝구 잠시를 앉었드래도 방에 앉는 것이 나을 성싶어서 그러는데." "마담이야 과장님과 연애하는 재미루 앉겠지만, 우리야 머 앉아 보아야 재미도 없구......" 김 사무관이 슬쩍 튕겼다. "그런 소리 말아요, 그런 소리. 나야 솔직한 말루 젊고 아직 총각인 김 계장님을 일 년 열두 달 삼백 예순 날 일편 단심으루 생각해두 원, 그렇게도 절벽이어서야." 마담이 또 이렇게 받자 과장은 싱긋이 웃고, 구 사무관까지 한 마디 곁들였다. "야하, 이거 오늘 저녁 젊은 총각 하나 녹아나는 모양인데, 이왕 이쯤 되었으면 들어갑시다." 누가 골탕을 먹건, 술자리에서는 맡아놓고 기분을 내기 좋아하는 구 사무관이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역시 계장님이시지. 구 계장님이 그저 호탕하시지." 김 사무관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가 하는 수 없이 따라 들어섰다. 그전에는 이렇게 간부 셋이 마시고 먹고 하는 것은 으레껏 과 앞으로 외상을 달아 놓고 어떤 방법으로라도 예산에서 몇 푼 떨어지도록 해서 갚곤 하였는데, 이 주사가 서무 경리를 맡고 나서는 전혀 그것이 안 통하게 되었다. 안 통하게 되었다느니보다 어물어물 지나는 사이에 그렇게 되었다. 그후부터는 자연히 과장 자신이 사인을 하고 과장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회계를 하고는 하는 것이다. 원체 과장이라는 사람이 이런 일에 자상히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고, 집아 살림은 아내에게 떠맡겨 두고 제 용돈으로 주로 자기 봉급이기 때문에 소위 '께찌께찌'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두 사무관으로서야 분수가 있는 것이지, 먼저 술 마시자 해놓고 과장이 낸대서야 요즘 대한 민국의 통레에 여간 어긋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여하튼 셋은 방을 차지하고 않았다. 이젠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목이어서 그런가, 아닌게아니라 따끈따끈한 온돌방이 여간 마음에 들었다. 서거덕서거덕 치마 스치는 소리를 내며 마담이 또 들어서자, 김 사무관은 약간 쌀쌀한 어조로 미리 쐐기를 박았다. "오늘 저녁은 간단히 저녁만 먹고 중요한 얘기나 하려는 것이니까, 그리 알고, 계집두 필요 엇구 간단히......" 하고는 과장 쪽으로 돌아보며, "참 과장님, 저녁은 무어승로 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대번에 마담도 꺼칠한 얼굴이 되며, 그러나 억지로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글세 누가 뭐랬나요 원, 김 계장님은 참 쓸데없이 까다로우시단 말야. 저녁을 자시드래도 좀 좋아요. 요 따끈따끈한 방이." 하자, 과장도 적당적당히 웃으며, "뭐, 아무렇게나 한상 차려 오래지." 하였따. 아닌게아니라, 김 사무고나의 이런 투는 괜스레 술자리를 썰렁하게 만들 때가 왕왕 있었다. 과 안에서 일처리를 잘하고 깐까나하게 부하 잘 다스리는 것은 다아는 일이지만, 그 정확 일변도로만 살아가는 것도 한도가 있는 것이지 구 사분 내려는 판인데, 김 사무관이 이렇게 나오면 기분 잡치는 것이다. 저녁이나 먹자면 애초에 이곳으로 안 왔으면 될 일이고, 얘기나 하련다면 다방 같은 데도 흔하지 않는가. 우선 와 놓았으면, 한두 번 온 손님이 아니것다, 마담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내버려 두든지, 아니면 애초에 오질 않든지, 와 놓고 떡떡거릴 것은 뭐람. 과장은 아랫목에 코트 차림 그대로 처억 모로 누워서 마담을 올려다보며, "마담 요새 이뻐졌군. 연애 하나?" 하고, 벌써 주저앉을 채비로 조크를 던졌다. "하면 어떠우?" "어허, 약속을 해놓구, 무슨 소리야." "약속이나 하면 뭐해요? 누군 독수 공방 혼자 지키랍디까. 다 약속도 이쪽사정 풀어 주고 나서 약속이지." "잘해, 잘해. 역시 우리 마담이 멋있거든. 척척 즉흥적으로 받아넘기는 데도 멋이 있거든." 구 사무관이 또 흥분을 하면서, "기분이다, 자 빨리 술상부터 들여보내. 술은 정종에다가." 하고 김 사무관의 눈길을 슬그머니 피하면서 호방하게 지껄였다. 그러자, 김 사무관은 기어이 제 고집을 그대로 세웠다. 얼굴 표정이 더욱 쌀쌀해지며, "가만, 오늘 저녁은 제가 회계를 할 터인데, 중요한 얘기두 있구, 본격적인 술판은 피하는 것이 어때요?" 다시 과장도 구 사무관도 그 마담까지도 표정이 굳어졌다. "에이 염려 말어요, 김 사무관. 이왕 들어왔으니, 자, 술이나 조금 하고 오늘 생선 어때? 싱싱헌 해물 쪽으루다 안주 나부래기나 하고 좀 가져와." 하고 과장이 말하였다. 비로소 마담도 얼굴이 훤해지며, "일찌감치 그럴 것이지, 얘 옥아아." 바깥쪽을 향해 은근한 소리로 부르며 손수 일어서 나갔다. 김 사무관이 다시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술 들어오기 전에 얘기는 미리 합시다. 다름이 아니라, 그 이원영 주사 말입나디가." 과장도 벌떡 되일어나 앉고, 구 사무관도 벌써부터 골치 아픈 얼굴을 하였다. "다른 곳으로 옮겨 줄 길이 정말 없을까요? 총무과장한테랑 좀 절충 못 해 보셨습니까?" 구 사무관도 덩달아 침을 튕기면서 마주 받았다. "정말 그 골치를 없애야 할 터인데. 뭐 좀 적당히 떨어질 것도 이건 전혀 벽창호 아닙니까. 감사 때 감사 나온 사람들에게나 맞서야 할 일을 과내 간부들에게 맞서고 나오니......" "아니, 맞서다니. 그럴 리야 있나. 직접 맞선단 말이오?" 과장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묻자, 김 사무관이 또 웃으면서 받았다. "아니 뭐, 직접 맞설 리야 있나요. 다만 잡아틀지요. 원칙론을 가지고 잡아트는 데는 골치거든요. 안 된다, 하면 이건 죽자 하고......" "글세 그건 나도 아는 일이고. 그러니 글세, 원칙적으로 그자 얘기가 틀린 얘기는 아니거든. 그러니 조심스럽게 다뤄야지, 함부루 본인도 모르게 딴 곳으로 발령을 낼 수도 없는 일이구. 총무과장하고도 얘길 했는데 영 안 먹어들어가누만. 어디서나 안 받겠다는 것이거든. 그렇다고 아무 이유 없이 덜커덕 지방으로 발령을 낼 수도 없는 것이구, 그자의 그 능력은 장, 차관까지 알고 있는 판이니까 말요." "그렇다구 이번 공팔 예산을 그냥 국고에 돌려 보낼 수도 없지 않습니까. 작은 액수도 아니구. 벌써 인쇄업자 하나는 냄새를 맡고 드나드는판인데, 연말에 가서 하다못해 과원들에게 돈 천 원씩이라도 생각해 주자 해도 그 길밖에 없어 보이는데." 김 사무관이 말하자, 비로소 과장은 처음 듣는 일이라는 듯이 적지않게 놀라는 얼굴이 되었다. "난 아직 모르고 있었는데." "과장님도 참. 아, 그걸 모르고 계시다니. 가장이 제 재산 목록을 모르고 계신 거나 마찬가지지. 아, 언젠가두 제가 얘기 안 했습니까?" 과장은 허붓이 웃었다. "난 그때도 그게 무슨 얘긴가 했지. 글세 그러지 않아도, 박 과장이 찐득찐득 달려부티겡 난 무슨 냄새를 맡고 저러나 했더니 그게 그거였군." "항목 변경이 요샌 안 되는데요." "거기도 무슨 인쇄할 것이 있다더군. 대체 공팔 남은 그 예산은 얼마나 되는데?" "많지는 않아요. 겨우 56만 원인가." "그래요? 그걸 어찌 내가 모르고 있었을까. 이상하다, 참 이상하다, 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과장은 56만원이 하늘에서 자기 앞으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싱글벙글하며 신명을 내었다. "과장님도 참, 그럼 그때 제 얘길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김 사무관도 씁쓰름히 웃었다. "난 먼젓번 얘기의 나머진 줄 알았지." 하고 또 불숙 물었다. "허넨, 그 예산이 어쨌단 말이오? 의당 써먹어야지, 안 먹어서야 말이 되나. 왜, 무슨 애로라도 있소?" "글세 이 주사 얘기가 바로 이 얘기가 아닙니까." 하고, 구 사무관이 얘기를 가로맡았다. "뭐, 이 주사가? 이 주사가 어쨌기?" 과장도 갑자기 두 눈이 번들번들해지고 표정에 서슬을 세우며 생기를 되찾았다. "잡아트는 거 아닙니까." "잡아틀다니." "죽어도 못 내놓겠다는 거예요." "그, 그, 미친 사람이로군. 아, 그 돈이 자기 돈인가. 못 내놓는다는 게 무슨 소리야." "돈을 써먹기 위해 억지로 일을 만드는 것은 못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 일에는 집행을 할 수가 없다는 얘기지요." "그자식, 거, 돈 애로군. 난 또 그런 줄은 몰랐군. 그렇게 나온다면 그건 가만둘 수 없겠는데. 아니, 그렇게 나와? 그자식 간덩이가 부었지그래, 다 굶어 죽어두 좋다는 얘기지그래. 난 그런 줄은 또 전혀 모르고 있었는걸." 갑자기 과장은 활기가 만만했다. "그러니까, 돈을 못 내놓겠다는 거요?" 이번엔 김 사무관에게 물었다. "바로 그거지요." "아, 누구 돈인데, 그게 제 돈인가." "모르지요, 전들." "그애, 그 미친 애로군, 돈 애로군." "......" "그럼, 일을 할, 써먹을 단도리는 마련됐소." "아까, 김 주사 불러서 묻던 얘기가 그 얘기 아닙니까. 애꿎게 그자만 달달 볶이고 있는 판이지요. 일 단도리는 해놓았는데 돈 단도리를 안 해 주니까. 난 그자만 불러서 닥드리구." "난 전혀 몰라쓴나걸." "아니, 그럼 과장님은 늘 그 자리 앉으셔서 무엇하고 계셨습니까. 그 일도 모르고 계시게. 원 참, 과장님도." 구 사무관이 웃으며 말하였다. 마침 조금 전의 마담이 다시 들어서고 덩치 큰 사내들 둘이 맞든 요릿상이 들어오고 있었다. 5 '어디, 누가 견디나 보자.' 하면서도, 그러나 이원영 주사도 이번 일만은 썩 자신이 서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말한다면, 물론 이편이 백 번 천 번 옳다. 과 예산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써먹어야 장땡이랄 수는 없는 것이다. 국민의 피땀으로 거둬들인 세금이 아닌가. 의당 그 피땀에 갚을 만한 값어치 있는 일을 해야 마땅하다. 그야, 정부에서 하는 일이 고스란히 전부가 꼭 필요 불가결한 일만일 수는 없는 것이고, 원래가 방대한 예산이고 큰 살림인만큼 더러 소모에 속할 만한 유명 무실한 일이 전혀 없응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공무원 각자가 국민의 공복임을 하앗아 명심한다면, 작건 크건 일다운 일과 일답지 않은 일을 가릴 줄은 알아야 할 것이다. 본디 이원영 주사는 4.19 무렵에 대학을 졸업하여 4.19때는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게 된 데모에도 가담했었다. 그 뒤 5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은 됐으나, 차일 피일 발령이 안 나고 질질 끌다가 5.16이 나고도 훨씬 지나서야 발령을 받았다. 그후도 이곳 저곳을 전전, 지금의 이 부처로 부임해 온 것이 3년 전이고, 2년 전에야 주사보에서 꼬리를 떼고 주사로 승진을 하였다. 동료들 간에는 고지식하다는 소리도 듣지만, 웃사람 아랫사람 할 것 없이 조금 그를 어려워하는 편이다. 말마디나 해야 할 때 태반은 입바른 소리를 피하며 눈치를 살피는 것이지만, 이원영 주사는 제 생각을 항상 정정 당당하게 주장하여 추호도 꿀리는 일이 없다. 게다가 이렇게 항상 떳떳하고 항상 옳은 소리를 하려면, 그 나름대로의 능력의 두시받침이 어느 정도 따라야 하는 법이다. 다행히 5.16 이후는 어느 부처를 막론하고 소위 차트 행정이라고 불릴 만큼 차트 작성이 유행인데, 이 일에 들어서는 장.차관도 알아 줄 정도로 이원영 주사는 명수다. 대통령 순시라든지 총리 순시 때도 차트 작성이 있어야 할 때는 꼭 이원영 주사를 부른다. 총무과로 혹은 비서실로 차출되어 며칠 밤을 새우며 무더기 일에 휘몰리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뿐이 아니다. 펜글시 붓글씨 할 것 없이 글씨 쓰는 데도 부처에서는 당할 사람이 없다. 물론 문장은 공보관실에 전문으로 쓰는 사람이 따라 있지만, 어쩌다가 장관이 어디 가서 연설을 해야 하는 경우에도 그 초고를 정서하는 것은 꼭 이원영 주사의 손을 거치도록 되어 있다. 이리하여 이원영 주사라면 이 부처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두루두루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반면에, 이런 호평에 못지않게 악평도 분분하다. 그 악평이라는 것이 대개는 둣구석에서의 은근한 손가락질인 것이다. 사람이 융통이 없다느니, 혁명은 저 혼자 도맡아하려고 한다느니, 고집이 세다느니, 웃사람에게 고분고분 하지 않고 맞서려고 한다느니, 대체로 이런 뒷공롱들인데, 그렇다고 맞대놓고 떠드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능력 있는 주사라는 호칭 이외에 이렇게 능력이 지나쳐 까다롱누 주사라는 호칭까지 받고 있는 터이다. 바둑을 두던 권 주사와 최 주사도 사무실을 나간 지 벌써 한 시간이나 넘어, 바깥은 새까맣게 어두웠다. 며칠 전부터 들어오는 스팀도 퇴근 시간이 되면 그치는 것이어서, 사무실 안은 여간 쌀쌀하지 않았다. 이 주사는 3.4반기 사업의 윤곽과 그 총괄적인 검토를 거의 끝내 가고 있었다. 그리고 혼자 생각으로, 이런 과는 솔직이 말해서 있으나마나 한 것이다, 참으로 정부가 실속 있게 일을 하려면 현재의 공무원 기구를 반쯤으로 축소시켜도 무방하리라 싶어졌다. 그러자 생각나는 일이 있다. 언젠가 다른 부처에 서기로 있을 때였다. 아직 공무원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탓도 있었지만, 자기가 맡은 일만 하고 봉급을 타먹는다는 것이 어쩐지 미안한 생각이 들어, 자기 업무와는 하등 관계도 없는 별의별 기안을 다 해 올리곤 하였었다. 어차피 정부에서 하는 일인 바에는, 부처 단위로 편의상 갈라놓았다 할지라도 다른 부처의 일에 전혀 관심이 반드시 없어야 된다는 법도 없을 터였다. 기차나 버스에 타서는 교통 행정을, 편지를 받으면서는 가신 행정을, 영화를 보고 혹은 방송을 들으면서는 공부 행정을, 그리고 어쩌다가 신문을 보다가 밀수 기사가 나면 상공 행정 혹은 내무 행정에도 항시 관심을 갖고 연구하지 말라는 법이 없을 터이다. 물론 말단 서기인 주제에 관심을 가져 보아야 별수는 없을 것이기는 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공무원 초년생의 의욕 과잉이라고 핀잔을 받아도 할 말은 없을 것이었다. 이래서 동료지간에서는 '대통령'이라는 별칭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전 부처의 행정에 골고루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한 데서 나온 별명이었다. 그밖에 '고문관'이라는 별명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었다. 웃사람들도 이런 이원영 서기를 반은 애교로서 웃어주었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전 부처의 기구와 직제를 면밀하게 조사하여 자기대로 가장 효율이 있을 만한 공무원 기구를 만들어 본 일이 있다. 각 부처끼리 중복이 된다든지 혹은 별로 쓸모가 없이 여겨지는 국이나 과를 없이 하고, 훨씬 축소시킨 행정 기구를 마련하여 기안을 해서 올린 일이 있다. 담당 사무관과 담당 과장은 반은 웃고 반은 그 성의에 탄복을 하였다. 과장이 그를 따로 불러 물었다. "미스터 리 심심한 모양이군. 그렇게도 할 일이 없나." "......" 이원영 서기는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과장은 또 웃으면서 말하였다. "미스터 리는 아직 세상 물정에 어두운 모양인데. 그 의욕은 가상하오만 괜히 쓸데없이 욕먹을 일은 피하는 것이 좋을 거야. 그런 거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구가 따로 있는 것이니까, 괜히 쓸데없이 그런 일에 삐치다가 잘못하면 몰매나 맞기 쉽지." "허지만, 관심을 가진다고 나쁠 것은 없지 않습니까." "물론 나쁠 것이야 없지. 그러나 사람이라는 것이 항상 자기의 분수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구, 추세에 따라가야지, 혼자 똑똑한 체한다고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란 말야. 우선 인생 수업부터 해야겠네, 미스터 리는. 아직 젊고 혈기가 많으니까 이해는 되네마는." "......" 이원영 서기도 그 당장은 말이 없었지만 내심으로는 불쾌하였었다. 여덟 시가 거의 가까워서야 이원영 주사는 사무실을 나섰다. 집은 노량진이었다. 도시락 봉투를 끼고 전차에 올라탔다. 전차 속은 러시 아워도 지나서 손님이 설핏하였다. 아까 퇴근 시간 무렵의 일이 새삼 떠올랐다. 그리고, 과장과 두 사무관이 무슨 은밀한 얘기가 있다면서 술 마시러 가던 일도. 그 은밀한 얘기라는 것이 무슨 얘기이리라는 것도 대충 짐작이 되었다. "김 주사만 애꿎게 골치를 앓는 판이지." 하고, 이원영 주사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청파동을 지나자 길 한가운데 기름불을 피워 놓고 인부들이 도로 공사를 하고 있었다. 순간, 또 언젠가의 일이 떠올랐다. 도로 공사도 각 부처와으이 긴밀한 연락 밑에 좀더 효율적으로 할 방법이 있을 터였다. 하수도 공사, 상수도 공사, 전화선 매설 공사, 단순한 도로 공사, 이런 것을 한목에 하면 훨씬 경제적일 터인데, 하수도 공사 따로 하고, 상수도 공사 따로 하고, 전화 공사도 따로 하고, 도로 공사도 따로 하고 하면, 일 년 여루 달 내내 도로를 파헤쳐야 할 판이다. 이것을 일원화시킨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이런 착안에서 그 방법도 기안해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해답은 좀더 복잡한 것이 있음을 알았다. 도시 실업자의 구제를 위해서는 그렇게 따로따로 공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적으로 경제적일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 실업자 구제 사업이 엇어진다는 것이었다. 이원영 주사도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었다. 새삼 행정 전반이 얼마나 어렵고 미묘 복잡한 것인가를 실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면 최선의 길은 어디서나 발견될 터이다. 실업자 구제와 도시 토목 공사를 반드시 일체화시켜서만 생각하는 타성을 버려야 할 것이다. 솔직이 말해서 실업자 구제가 하나의 소모적인 사업이어서는 악순환에서 헤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실업자 구제는 역시 뭐니뭐니 하루속히 기간산업을 육성하여 정상적으로 고용하는 길을 마련해 주는 것이 떳떳한 해결 방법일 것이다. 도시 토목 공사가 한낱 임시 실업자 구제의 방편밖에 안 된다면 실업자는 날로 늘어나기만 할 것이고, 토목 사업도 소모성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할 것이다. 전차 속에서 이원영 주사는 이런저런 생각을 두루두루 하였다. 거처는 노량진 시장 근처 단칸 셋방이었다. 마누라는 반색을 하며서 도시락 봉투를 받아들었다. "늦으셨군요." "조금 늦었어." "오늘은 별일 없었수?" "......" 이 주사는 대답을 않고 앞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살박이 어린 아들이 혀가 잘 돌지 않는 소리로 아빠를 부르며 무릎에 와서 앉았다. 낡은 여섯모꼴 벽시계는 거의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주사는 차려 온 밥상 앞에 다가앉았다. 6 차려 온 밥상이래야 보잘것이 없었다. 콩나물국에 김치, 시금치나물, 그리고는 있으나마낳나 간장 종지뿐이었다. 물론, 콩나물국이 싱거우면 치라는 간장일 것이지만, 원래 마누라는 간을 짜게 맞추는 편이어서 간장 종지는 놓으나마나다. 이원영 주사는 잔뜩 시장했던 판이라 밥상 앞에 앉자마자 팥과 좁쌀이 섞인 밥을 콩나물국에 통째로 엎어 말았다. 그 앞에 어린 것을 안고 마누라가 앉아 흘낏 남편의 얼굴을 살피고는 한숨 섞어 말했다. "어휴, 반찬이라고 너무 없어서 원......" "......" 이원영 주사는 언제나 그러듯 무뚝뚝하게 대꾸 한 마디 안 했다. 체구가 큰 편인 마누라는 반찬만 짜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림 꾸려 나가는 것도 짠 편이다. 얼핏 보기에는 덜렁덜렁한 성격이고 인근 이웃들과도 쉬이 사귀고 활발한 편인데 살림 꾸려 나가는 것은 여간 깐깐하지 않다. 사실 이원영 주사는 결혼 3년 남짓에 마누라 하나는 길을 잘 들여 놓았다. 물론 이렇게 길을 잘 들이자면 본디 남편도 남편하기 나름이려니와, 마누라 됨됨이도 제대로 들어맞아야 한다. 이원영 주사는 고향이 충청도 서천이었다. 학교 적부터 여늬 시체 청년들처럼 연애 맛 같은 것을 보았을 리가 없었고, 마누라도 마누라대로 대동 소이여서 시골 어른들끼리 말이 나서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성사가 되어 버렸다. 그 무렵 이미 이원영 주사는 서기에서 주사보로 승격, 안암동 근처에서 하숙 생활을 하였었는데 시골 아버지께서 급히 기별이 와, 어느 토요일 오후 부랴부랴 내려갔더니, 만사 젖혀놓고 약혼을 하고 올라가라던 것이었다. 그때 이원영 주사는 요새 흔한 신식 청년들처러 링자유 연애니, 케케묵은 낡아빠진 것이니, 봉건적 운운이니, 젊은 세대 어쩌고저쩌고 그런 흔해빠진 소리를 일체 않고 고분고분 선친의 뜻을 좇았다. 이런 점은 이원영 주사가 보수적인 면이 있다는 소리를 들을는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이런 면에서 진취적이어야 한다는 이유도 실은 없을 것이다. "이젠 너도 장가를 들어야지. 어련히 명심하고 있으리라 믿는다마는 네가 이 집안의 장손이여. 요즘 젊은이들이 촌구석에만 박혀 있는 것도 꼴이 안됐더라반, 애초에 널 시굴에 붙들어 둘 생각은 아니다. 하여간, 서울 생호라도 노상 하숙 생활을 할 수는 없는 일일 테니까, 장가를 가서 서울에 데리고 올라가도록 해." 젊었을 적에 면장을 지냈다는 아버지는 나름대로 속이 매우 깊어서 젊은 사람들 사정도 사정대로 알아 주고, 그렇다고 시골의 옛 풍습을 덮어놓고 타기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점에서는 봉건적이라고들 일컫는 면에 집착을 하는 점도 있었다. 낡은 것 가운데서 가장 좋은 우리네 것을 버린다면 뿌리 없는 나무나 매한가지다, 그것은 생명이 엇밑어진다, 이런 생각이시었다. "요새 서울 사람들이 너나없이 모두 환장들을 해가는 눈치인데, 너만은 내가 링디는다만, 정신 똑바로 차려. 우선 장손 며눌아이 될 네 새각씨만은 내가 정해 주는 사람으로 하도록 해. 나도 기이 생각해 본 연후에 결정을 내린 것이니까, 아예 딴 생각일란 말구." 평소에 이원영 주사는 아버지를 꽤나 어려워하던 편이어서 아버지 뜻에 거역하기도 힘들었을 터이지만, 이 일에 들어서는 그 자신 아버지 뜻이 대강 옳다고 여겨져 두말 엇밑이 좇았던 것이다. 이튿날 일요일에, 읍 거리의 음식점에서 양가 어른들 모시고 맞선을 보았는데, 그다지 좋은 줄도 몰랐지만 그렇다고 그다지 싫은 것 같지도 않고 그저 그렇게 덤덤하였다. 이미 양가 어른들께서 미리 결정을 내리고 형식적으로 맞선이라고 보는 것이어서, 누구 앞이라고 감히 싫다고 할 것인가. 그날 저녁으로 장항선 기차를 타고 상경하였는데 사흘 후에는 결혼 날짜를 받아서 기별을 해 왔다. 이렇게 벼락치기로 결혼을 하였지만, 마누라는 이럭저럭 쓸 만하였다. 요새 흔한 여자들처럼 이런 맛 저런 맛 처녀 적에 다 맛보아서 주사라고 고리타분하게 여기지도 않고, 도리에 제딴으로는 시골 여학교나 겨우 나온 터수에 중앙 기관의 공무원에게 시집 온 것을 비록 월급은 쥐꼬리만할망정 사뭇 대견하게 여기는 듯하였다. 겨우 단 세 식구이긴 할망정 공무원 봉급 갖고 산다고는 입이 열 개 있어도 말할 수가 없다. 그야 이원영 자수도 되도록 봉급만으로 꾸려 나가 보라고 시시때때 입이 닳도록 권하지만, 마누라로서는 여간 벅찬 듯하였다. 다행히 시골에 전답이라고 조금 있어, 아버지께서 가을 추수 때면 1년 먹을 양식만은 올려 보내 주는 것이다. 이젠 독립해서 저대로 살아 보겠으니 그러지 말라고 하여도 세상의 아버지들이란 너나없이 다 그런 모양으로, 그러마 그러마고 하면서도 기본 양식에 철따라 된장이나 간장까지 어김없이 꼭꼭 올려 보내 오는 것이다. 이원영 주사는 이렇게 여분으로 오는 것은 저금을 하도록 일렀다. 본시 그런 성미이기도 하지만, 일단 살림 단도리를 지시해 놓으면 마누라에게 일임해 두고 자질구레한 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요새 어떤 남자들은 제 계집과 머리를 맞대고 가계부를 정리하는 중성이 다 된 남자도 있다지만, 이원영 주사야말로 그런 사람을 무지무지하게 경멸하고 있다. 남자가 할 일이 따로 잇고 체모가 있는 것이지, 계집 모양으로 그런 짓을 할까 보냐 싶은 것이다. 하여, 이원영 주사는 일단 봉급날 봉투째로 마누라 앞에 내밀고, "이걸루 한 딸 살아 보우. 시골서 올라온 쌀값, 된장값 같은 것도 계산해서 그건 따로 저금을 하도록 해 보구." 해놓으면 그 다음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일체 상관을 않고 밥상에 설령 간장 종지 하나만 달랑 놓였대도 반찬 타령 같은 것은 아예 하지 않는다. 마누라는 밥상머리에 앉아서 변변치 않은 반참임에도 먹음직스럽게 먹는 남편을 건너다보다가, "좀 천천히 잡수어요, 체하지 않게. 시장했다가 잡수시면......" "......" 묵묵 부답. 마누라는 남편이 집안에서 너무 말이 많아도 채신머리 없지만, 저렇게 너무 말이 없어도 젖은 나무 토막 같다는 생각을 조금 하며, "참, 내달에 계 타요." 하였다. 비로소 남편은 숭늉을 훌훌 마시고 나서, "벌써 그렇게 됐나." 하고 비죽이 우슨나다. 만 원짜리 계를 들었다는 얘기를 들은 지가 대여섯 달 되었는데, 그저 그런가 보다 여겼더니 벌써 내달에 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도 이원영 주사는 지나가는 농담삼아 지껄였었다. "차라리 남으면 은행에 저금을 하지, 괜히 뻥 터지는 날이면......" 마누라도 웃으면서 받았었다. "염려 없어요. 모두 가난뱅이들끼리 다노모시로 하는 것이니까, 뭐. 겨우 만원짜리구." "또 알아, 철도청 직원 마누라들이 끼인 몇백만 원짜리 계가 청도청 사건 이후 터졌다는 얘기 못 들었어?" "그거야 전문적인 사람들이지요." 그랬는데 그걸 벌써 타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누라는 싱글벙글하면서 말했다. "이번 계 타면 당신 양복이나 한 벌 마춥시다. 노상 꾀죄죄하게 그러구 다니지 말구." "......" "만 원이면 조금 모자랄 거예요, 양 복 한 벌 마추는데." "......" 좋으면 좋다, 나쁘면 나쁘다, 얘기를 해야 할 터인데 남편은 또 꿀 먹은 벙어리로 전혀 대꾸라곤 없었다. 마누라는 밥상을 내가고 들어오더니, 또 문득 생각이 난 듯이, "참, 깜박 잊었네, 오늘 시아버님께서 편지가 왔던디." 하였다. "뭐, 편지가? 뭐라고." "근간 한 번 올라오시겠다든디요." "어디 내놔 봐." 편지는 한지에 붓글씨로 쓰여져 있었다. 이원영 보아라.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어 있었다. 혁명 7년에 이제 나라 꼴이 좀 안정되어 가는 듯하구나. 데모 바람, 위기 바람도 금년엔 불지 않고 국가 공무원으로 주야 분투하는 너로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으리라 믿는다. 요즈음 부패 소리가 지상에 많이 오르나리는데 보건 사회부 산하 약사 행정이 말이 많은 모양인데 다행히 너와는 직접 관계는 업성서 안심이다마는, 설사 네가 그런 곳에 이다 할지라도 너만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고래로 우리 집안은 선비의 집안임은 너 자신도 명심하고 있으리라 믿는다마는, 네 5대조께서 벼슬을 하실 때도 인근에 청렴결백하고 봉사 정신이 대단하다고 명성이 자자했던 터이다. 그 당시는 민주주의 세상도 아니고, 양반이고 권력만 있으면 마음껏 백성들을 괄시해도 좋은 세상이었는데도 네 5대조께서는 벌써 민주주의 정신이 투철했었어. 하물며 요새 민주주의 세상에 그 5대손인 네가 벼슬길에 들어서서 불미한 생각을 추호라고 가질 수 있겠느냐. 아니, 벼슬길이라는 말부터가 어폐지. 옛날에는 벼슬길리 곧 개인의 출세길이었다마는, 요즘은 벼슬길을 무슨 출세길처럼 여겼다가는 큰일이다. 국민 각자가 저저끔 처한 입장에서 제자리를 잘 지키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듯이 공무원도 말 그대로 공무원으로서 공무를 맡은 자기 위치를 항시 명심 자각하고 망령되게 잘난 척하다가는 네 일신도 일신이려니와, 집안 망신시킨다는 것을 새기고 있거라. 그 사이 시골은 이상이 없다. 작년에는몇십 년래의 가뭄과 장마를 겪었지만, 상하 합심 횡적으로도 협동, 모두 피땀 흘려 고비를 넘긴 덕분에, 매년 찾아들던 절량 소리도 뜸한 눈치다. 네 각시집 안팎도 상하로 무고핫기다. 네 장모께서 얼마 전에 고질인 속병이 심하다더니, 요즘 약은 믿을 수 없다면서 육모초를 삶아 잡수시고 거뜬히 나았다나 보드라. 그래 너는 어떻느냐. 안사람도 탈이나 없느냐. 하긴 처음 정할 때부터 여자란 우선 몸부터 보아야 하느니, 구리 동전을 여남은 씹어 삼켜도 척척 소화시킬 수 있을 만큼 건강하게 생긴 것이 제일 믿음직했다. 이거 너무 쓸데 없는 소리를 많이 한다마는, 사실 우리 늙은이야 직접 만나면 위엄이나 부리고 어른 노릇 하느라고 우스운 소리 한 마디 못 하는 처지다 보니 이렇게 글월로나마 그것을 대행하고 싶은 심정이다. 근간 손자애도 볼겸 살아가는 형편도 살필 겸 올라갈 작정이다. 그리 알고 열심히 공무 사무 틀림없이 앞 뒤를 맞추고 괜한 부박한 미국 바람 들지 말고 분투분투하기 바란다. 이상이었다. 별로 웃음이라곤 모르던 이원영 주사도 이 편지를 읽곤 그만 폭소를 터뜨렸다. 아버님도 예순이 넘어 늙마에 들어서 위인이나 성격이 헤실헤실 풀어지고 어린애처럼 되어 간다는 생각을 하였다. 7 그날 밤 과장과 두 사무고나은 술상이 들어오고도 골칫거리인 이원영 주사 얘기를 틈틈이 주고받으며 내일이라도 당장 김 사무관이 그자의 본의를 타진, 고집을 꺾어 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튿날 아침 이원영 주사가 출근하자, 여느 때 없이 김 사무관이 생글생글 미소를 흘리면서 인사말을 건네왔다. "이 주사, 엊저녁도 오래까지 계셨소?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도 가지만, 몸도 좀 돌보시면서 하슈." 어렵소, 이런 희떠운 소리는 아무리 웃사람이지만 이원영 주사는 정면으로 받지 않고 아예 묵살하는 편이다. "......." 대꾸 한 마디 없자, 김 사무관은 약간 머쓱해하다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의 자리 쪽으로 다가오며, "이 주사도 요새 큰애는 꽤 컸겠군요." 하고, 신탄진 담배 한 대를 권하였다. 김 주사, 권 주사, 최 주사, 양 주사 모두가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아침 잡담을 벌인다 하면서도 김 사무관과 이 주사 쪽을 흘깃흘깃 곁눈질해 보았다. "아니 괜찮습니다. 저도 담배 있습니다." 이원영 주사는, 이거 갑자기 왜 이러시지, 남의 집안 사정에까지 따뜻한 관심을 돌리시구, 남의 아이 컸으면 어쩌겠고 안 컸으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저나 어서 장가를 갈 일이지, 생각하며, 아예 그런 소리는 또 묵살을 하고 권하는 담배도 마다하고 자기 포켓에서 필터 없는 싸구려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아니, 내 담배 한 대 피우면 못씁니까. 이거 한 대 피슈." "괜찮습니다. 전 이 담배가 입에 맞아서......" 처음부터 나오는 꼴이 무슨 꿍꿍잇속이 분명히 있다. 이원영 주사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딴청을 피우며 서류들을 꺼내 놓았다. "가만, 이 주사. 나하구 다방에 잠깐만 나갑시다. 의논할 것도 있고." "네, 다방에요? 무슨 얘기인지 여기서 하시지요." "아니, 잠까만 나갑시다." 김 사무관은, 비록 응대해 오는 말은 깍듯하나, 어딘가 노골적으로 차가운 것이 감도는 이원영 주사에게 불끈 불쾌해져 조금 우격다짐 비슷이 말하였다. 순간 사무실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과장도 책상 위에 양팔굽을 세우고 담배를 태면서 멀거니 이쪽을 쳐다보고 태반의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근무 시간도 됐고, 굳이 다방에 나가는 것보다, 사무실에서......" 이원영 주사도 그냥저냥 제 고집대로 맞서 보기로 한다. 그리고 이것도 하극상에 속하는가 어떤가 잠깐 생각해 보았다. 사실 하극상 하극상 하지만, 아무리 직속 상관이라곤 할망정 번연히 옳지 못한 일인 줄 알면서, 상관의가 명령이라면 덮어놓고 고분고분 좇아가는 것이 도리에 맞느냐, 아니면 이에 맞서 정정 당당하게 이쪽 입장을 설명하고, 옳지 못하기 때문에 응하지 못하겠다고 반발해 나서는 것이 옳은 태도냐, 애매 모호할 때가 더러 있다. 흔히 귀가 아프게들 지껄이는 인화 단결도, 어떤 원칙에서, 어떤 조건 속에서의 인화 단결이냐에 달려 있다. 나쁜 짓을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 단순히 바깥에 비밀이 새게 하지 않기 위해서 과장 이햐 전 과원이 상하 합심하고 인화 단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일정한 원칙이 전제되지 않은 인화 단결이란, 어떤 경우 결백하던 사람까지 망치게 하는 수도 아벗지 않을 것이다. 덮어놓고 인화 단결만 내세우며 상부에의 복종을 요구해 나선다면 비록 일사 불란한 행정 체제는 갖추어질는지 모르지만 행정 내용이나 사람 딤됨부터가 글러먹었을 경우에는 일사 불란한 행정 체제라는 것이 송두리째 나쁜 짓을 하기 위해서 어떤 개인의 이용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가장 좋지 않은 경우를 상정해서지만. 요컨대,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공무원 각자 각자가 자기 위치와 자기 임무를 항상 자각하고, 부정 불의와는 누가 뭐래도 맞설 수 있는 태세속에서만 창의와 능력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웃사람들이라고 항상 이쪽이 그들의 수족이 되랄 법은 없을 것이고, 인격면에서는 어디까지나 1대 1일 터여서, 이쪽이 옳고 저쪽이 옳지 않는 경우에는 인격적인 위엄으로 저쪽이 굽히고 나오도록 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이것이 이원영 주사의 평소 소신이었다. 기어이 다방엔 못 나간다고 하자, 김 사무관도 차츰 얼굴색이 달라지며 짜증을 부렸다. "아니, 이 주사는 누구에게 맞서는 겁니까." "아니, 맞서다니요. 제가 언제 맞섰습니까." 과장 이하 전 직원들은 더욱 조용해졌다. "그게 맞서는 것이 아니구 뭐요. 잠깐 다방에 나가자면 나가야 될 것이 아니오." "그럼 묻겠습니다. 공뭅니까, 사뭅니까?" 드디어 과장도 웃고 전 직원들도 모두 비시시 웃었다. "여보 이 주사, 너무 그렇게 고집 부리지 말구 김 사무관님 따라나가시유. 사람이 좀 융통이 있어야지 원, 젊은 사람이 그렇게까지." 웃사람에게 항상 알랑방귀는 도맡아 뀌면서도 욕사발은 도맡아 먹고 심지어 남의 욕까지 맡아 먹는 '꺽다리' 김 주사가 보다못해 끼여들며 한 마디 하였다. 그러나 이원영 주사는 그러거나 말거나 아예 묵살을 하고, "공뭅니까, 사뭅니까?" 하고, 똑같은 소리로 물었다. 비로소 김 사무관도 어이가 없어하듯이 웃으며, "공무요, 공무. 자, 어서 나갑시다." 타이르듯이 말하였다. 이런 경우의 이원영 주사는 꼭 황소 한가지였다. 누가 웃거나 말거나 얼굴이 시뻘개서 제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시골 사람 티가 물씬 나고 조금 모자라 보이기도 해서 고문관이라는 별명도 저래서 얻어들었을 터이다. "그럼 좋습니다." 하고, 이원영 주사도 벌떡 일어서서 먼저 문 쪽으로 휭 걸어나가다가 다시 돌아서며, "다방은 어느 다방입니까?" 하고 물어, 이번에는 사무실 내에 온통 폭소가 터졌다. 그러나, 여전히 이원영 주사는 웃지 않았다. "글세, 나하구 같이 나갑시다." 김 사무관은 그냥 싱긋이 웃으면서 과장 쪽을 향해 저러니 매사에 골치가 아느겠느냐는 눈길을 보내고 뒤따라나섰다. 물론 이원영 주사도 이원영 주사대로 다방에 나가서 상대가 할 얘기라는 것이 훤히 짐작이 갔다. 어제 퇴근 무렵에 세 간부가 모여서 무슨 얘기를 나누었으리라는 것도. 그 공팔 예산 조금 남은 것도 과장은 엊저녁에야 비로소 확실하게 알고, 그 너구리 같은 자가 하늘에서 제 앞으로 돈더미가 떨어지기라도 한 듯이 좋아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는 김 사무관더러 오늘 아침에 적당히 구워삶으라는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이원영 주사도 이런저런 내용을 저 나름대로 벌써 짐작하고 처음부터 훌훌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은근한 시위삼아, 그다지나 안 나간다고 고집을 피웠던 것이다. 다방에 나가 마주앉자, 김 사무관은 또 담배 한 대 피워 물며 딴 소리부터 하였다. "요새 이 주산 살기가 어떠슈. 내년에나 30프로 봉급이 오를 모양인데, 올라봐야 뭐 그게 그걸 것이구. 요즈음은 웬 그 보험이다, 저축이다, 오구잡탕이 많이 몰려오는지......" "......" 이원영 주사가 대꾸가 없자, 일순 김 사무관은 약간 무안을 느끼는 표정이다가 다시 싱겁게 물었다. "이 주사는 어떻게 생각허슈, 세상 살아가는 것을." "무슨 말씀입니까. 무슨 뜻인지 잘 알 수가 없구먼요. 세상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살아 나가는 것이지, 딴 것일 수도 없는 일이고." 우문에 우답을 하면서 비로소 이 주사도 히죽이 웃었다. 웃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직속 부하로서 직속 상관에게 이런 투의 대답은 누가 보더라도 불손하게 보일 것이라는 생각을 조금 하였다. 그러나 웃사람이 제대로 웃사람 구실을 하려면 추호라도 딴 마음이 없어야 할 것이다. 우선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떳떳하고 정정 당당함으로써만 대접도 대접대로 받을 수 있을 터이다. 웃사람에게 약점이 있는 경우 어떤 부하는 웃사람의 그 약점을 이용해서 제 잇 속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악질까지 더가 있다. 지금 자기의 말솜씨가 부지 불식간에 불손하게 나가는 것도 저편의 옳지 않은 저의를 미리 간파하고 벌써 경멸 비슷한 감정이 솟은 ?때문일 것이다. 매사에 깐깐하고 제 약점을 추호나마 드러내기 싫어하는 김 사무관도 지금 이 이원영 주사의 태도에는 은근히 화가 치밀어오르는 모양, "너무 그러지 마슈. 물론 이 주사는 이제 내가 무슨 얘기를 할 것이다 하고 지레 짐작하고, 그에 대항하기 위한 일종의 방패인 셈이긴 하겠지만, 당신의 상관으로서 꼭 내가 그 소리를 한다는 보장은 없지 않소. 솔직한 말이 이 주사의 그 고집은 나도 어느 면 존중하지 않는 바는 아니오. 그리고 더 솔직이 말해서, 오늘 아침에 당신을 부른 것은 과장님의 지시 사항이었소. 이 주사의 진의를 타진하고 고집을 꺾어 보라는. 그러나 이제 난 그건 포기하겠소. 과장님에게 난 이 짓 못 하겠다고, 직접 당신과 겨루어 보라고 하겠소. 하지만 나, 불쾌해요. 이 주사는 자기를 지나치게 과신하고, 자기 이외에는 모두 부정덩어리로만 생각하는 모양인데, 어떤 근거에서 그러는 거요? 그러구, 지금 나에 대한 당신의 그 태도도 뭐요. 그게 공무원으로서 옳은 태도라고 생각하는 거요? 당신이 떴덧하고 정정 당당하게만 대어들겠다면 좋소. 나도 그렇게만 응대해 줄 테니까. 요컨대 당신의 오늘 아침 나에 대한 태도는 불공손하오. 어떻게 생각하우." 이원영 주사는 너무나 뜻밖이어서 두 눈이 가히둥그래졌다. 역시 이 젊은 사무관이 머리가 잘 돌아가고 성깔이 보통이 아니다 싶었다. "미안합니다. 그 점은 백배 사과하겠습니다." 이원영 주사도 일단 사과를 하였다. 그러나 김 사무관은 입술을 악물고 노려보았다. "난 이때까지 이렇게 자존심의 상처를 받기는 처음이오. 그것도 아랫사람에게. 두고두고 기억해 두겠소." 그 이유가 나변에 있는지 아십니까, 당신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쏘아 주려다가 이원영 주사는 입을 다물고 속으로는 비시시 혼자 웃었다. '이자는 역시 보통나기는 아니군.' 하고 생각하였다. 8 김 사무관과 같이 다시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과장은 조간 신문을 들고 이리 뒤적 저리 뒤적 구석구석까지 샅샅이 훑어보는 듯하였지만, 실은 기사 내용보다도 이쪽의 결과가 더 궁금한 듯하였다. 오랜 공무원 생활을 하다 보면 가장 촉각이 예민해지는 것이 눈치다. 상관눈치 재빨리 파악해야 하고, 직원의 동정도 눈치로 그때그때 간파해야 하는 것이다. 과장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김 사무관의 표정으로 벌써 일의 결과가 그닥 신통치 않음을 간취하였따. 그러나 모르는 체하고 계속 신문만 이리 뒤적 저리 뒤적 하였다. 원래가 김 사무관이란 사람은 아직 나이 탓이겠지만 매사에 아무리 원숙한 투를 내려고 들어도 그때그때 그 기분의 상태를 얼굴 위에 항상 훤히 드러내고 있다. 집에서 조금만 우울한 일이 있었더라도 그 표정으로 직원들이 대뜸 알수가 있다. 눈치 빠른 과장뿐만 아니라 직원들이나 심지어 사환 아이까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패뜩패딪그 잘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이다. 따라서 직원들은 아침 출근과 함께 매사에 까다로운 김 사무관의 얼굴부터 살펴보고, '오늘은 기분 양호 양호' '쉬이쉬이, 오늘은 요 조심조심.', 서로 눈짓으로 이렇게 신호를 보내곤 하는 것이다. 제 심사가 뒤틀리고 언짢으면 자신에게만 그것을 한정시켜야 할 터인데,가 김 사무관은 그 자기 기분을 엉뚱한 데로 터뜨리고, 그리곤 그러면서도 사적인 이유가 아닌 그럴듯한 객관적인 이유를 곧잘 끌어 댄다. 머리는 좋고 깐깐한 사람이니 그 말하는 내용도 논리가 일사 불란하고 바늘 구멍만한 틈도 없다. 농담 진담으로 항상 지껄이는 것은, 자기가 얼마나 유능한 공무원인가, 얼마나 결백한 공무원인가, 이런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서 능구렁이 수완을 발휘하면 한몫 단단히 잡았을 터인데, 자기는 천하 없어도 그 짓은 못 하겠으니 얼마나 순진파고 얼마나 고지식파고 얼마나 양심적인 공무원이냐, 떠벌리며 한바탕씩 제 자랑을 늘어놓고는 하는데, 이 사람의 소리는 아무리 농담을 하노라고 해도 듣는 편에서는 농담으로 들리지가 않고 진담으로만 들리는 것이다. 늘 가잉 방어 상태에 있다고 할까, 늘 진지해 있고, 자기가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의식이 있다면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까 가령 김 사무관이 부정한 일을 한다면, 이것이 부정한 일이라는 의식 밑에서는 결코 할 수가 없고, 자기 나름으로 타당한 이유와 타당한 근거를 자기 앞에 제시해 놓고야 안심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년 동안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김 사무고나 스스로 이따금 생각하더라도, 처음 이 세계로 들어서던 때와는 천양지차로 달라진 자신을 새삼스럽게 느끼곤 하였다. 발령을 받고 처음 이 공무원 세계로 들어왔을 때는 그야말로 대한 민국 관청 일은 혼자서 다 맡아서 하래도 할 수 있을 만큼 의기 충천했고 야심 만만했다. 흔하게도 많은 법규들과 내규 사항들을 하나도 어기는 일이 없는 것은 물론, 식목일날 나무 심으로 나오라는 데 빠져 본 일 없고, 서울 운동장에서 무슨 행사 같은 것이 있어 적당히 빠져도 디가 수 있는 자리에도 절대로 빠지는 일이라곤 없었다. 해외 출장에 나갔다고 출장비 남은 액수를 돌아오자마자 국고에 바친 철저하게 결백한 전 외무 장관인가가 있었따 하지만, 이 무렵의 김 사무관도 모르기는 모르겠으되 이 줄에서 빠뜨린다면 섭섭했을 것이다. 그뿐인가, 처음 관청길에 들어선 눈엔 이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엄연히 국민의 세금으로 사들인 각종 용지르 띵허투로 소비하고, 심지어 하들하들 한 미농지 같은 것은 무더기로 휴지용으로 쓰고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원, 공무원으로서 저럴 수도 있을까 의아했을 정도였다. 처음부터 사무관으로 발령을 받았던 것이어서, 나이가 새파란 주제에 오랫동안 이 길에 젖어 온 사람들에게 그런 일로 떡떡거릴 수도 없는 처지고, 하여간에 납득이 안 가고 이상한 일 천지였었다. 그러나 1년 2년 3년 지나는 동안 차츰 그도 나름대로 서서히 익숙해졌다. 어차피 세상리나 이렇게 생겨먹은 것, 혼자서 잘난 체해 보아야 저 혼자 굶기에만 알맞으 나것이가. 적당적당히 요령껏 남의 눈에 과하게만 띄지 않을 한도 내에서 조금씩 쓱싹하는 것으가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 같았다. 쥐꼬리만한 공무원 봉급이야 높은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어서, 으레 어느 정도의 꿍꿍잇속이 있게 마련이 아닌가. 우선 뭐니뭐니, 먹고 살고서야 일이고 나라고 있을 것이니까. 이런 방향으로 서서히 생각이 굳어지기 시작하였다. 사실 2년 전엔가 부임했다가 몇 달 못 채우고 사임한 모 장관 때 그 뒷구석으로 많던 얘기를 떠올려 보라. 국장들 과장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주사라는 별명까지 들을 만큼 그 장관은 욕을 먹었었다. 욕을 먹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장관이라면, 큰 정치적 문제라든가. 부처 대 부처의 문제, 혹은, 대 국회 문제라든지 큰 문제가 산적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 내의 사소한 살림 문제에까지 잔신경을 쓴다는 점에서였다. 어차피 봉급만으로는 힘들 것이라는 점은 장관 자신도 불을 보듯이 아는 바엔, 그렇다면 조금만 생각이 깊고 철든 사람이라면 각 국 단위로 혹은 과 단위로, 지나치지만 않은 한도 내에서 조금씩 요령을 부리는 것은 부하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약간만 있다면 알고도 모르는 척, 쓱싹 눈을 감아 줘야 할 터인데, 그렇지가 못한 꽁생원이라는 거시었다. 기본 정황이 이런 판국이다. 이런 판국에 저 혼자 잘난 체해 보아야 병신 되기에만 알맞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처신해 오던 김 사무관이 이원영 주사에게 일생 일대 모욕을 받은 것이다. 까다롭기로 말하자면 자기 이상 따를 사람이 없고, 결백하고 모범적인 공무원으로서도 자기 이상 따를 사람이 없고, 행정 능력에 있어서도 제대로 하자고만 들면 자기 이상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자부해 오던 터이다. 그런데 이원영 주사의 그것은 여간 충격이 아니었다. 김 사무관이 사무실에 다시 들어와 앉자, 과원들은 벌써 '요 조심조심'하고 서로 눈짓들을 하며 서류들을 꺼내었다. 이원영 주사도 약간 상기한 낯색으로 그러나 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제 자리에 가서 앉았다. 과장은 신문을 다 보고도 그냥 써늘한 얼굴로 신문을 든 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흥, 또 목구멍에 가시 걸린 듯이 잔뜩 찌푸렸군. 이 주사 설득시키려다가 도리어 한 펀치당하고 들어온 눈치군. 가만, 잘못 건드렸다가는 나에게도 불똥이 튀어 올 것 같은데.' 이렇게 비죽이 혼자 웃으려는데, 아니나다를까, "과장님." 하고 김 사무관이 퉁명스럽게 불렀다. 비로소 과장은 보던 신문을 놓았다. 김 사무관 반대쪽 편에 앉았던 구 사무관도 보던 신문을 놓았다. 과원들도 제 일들에만 열중해 있는 척하면서 귓구멍은 잔뜩 그쪽으로만 궁금하였다. "그 일은 저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 못 하겠습니다. 과장님이 직접 나서서 해결을 지으시든지, 아니면 과 회의를 소집해서......" "알았쉬다." 과장이 못마땅한 낯색으로 잘라 말했다. 그런 일을 과원들도 다 있는데 대놓고 큰 소리로 지껄이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어조였다. "그러니까." "글세 알았쉬다.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더 아무 말 마슈." 김 사무관이 다시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을 과장이 다시 이렇게 가로막았다. 김 사무관은 약간 꺼칠한 얼굴이 되다가, 또 그 특유의 패뜩하게 상기된 얼굴이 되며, "솔직한 얘깁니다마는, 이건 제 소관이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구 사무관 소관이지요." "......" 과장은 입이 씨거운 모양, 대꾸 한 마디 없고, 사무실 안은 갑자기 조용해지고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점을 엄격히 해 주십시오. 구 사무관 소관과 제 소관이...... 엄격히 다른데...... 어째서 제가." 한 번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못하고 참지 못하는 성까인 김 사무관은 과장이 전혀 묵살을 하자, 더욱 끈덕지게 지분덕거렸다. 항상 그렇게 업무의 한계까지 정확하게 따져드는 사람이었다면, 어째서 엊저녁에 제가 자처해서 그런 발설은 하였는가. 이원영 주사의 일을 골치 아프다고 호소해 온 것은 바로 누구인가. 이원영 주사 일이 어째서 골치 아프다는 소리는 하는가. 여느 때는 얼렁뚱땅 적당히 어울려서 같이 할 짓 다하고, 이런 경우에 닥쳐서는 새삼스럽게 원리 원칙을 가지고 따져 오는 그 소갈머리는 무엇인가. 이원영 주사 문제도 그렇다. 물론 엄연히 따져셔 그의 직속 계장은 서무 경리 담당인 구 사무관이지만, 이번 일은 일의 성격상 직속 계장을 따지기에는 애매한 문제인 것을 김 사무관 자신도 알고 있기 때문에 구 사무관을 젖혀 놓고 제가 가로맡아 먼저 문제를 제기해 오지 않았는가. 그렇게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의논할 얘기가 있대서 술까지 먹고, 그 의논할 얘기라는 것이 이원영 주사 얘기고, 결국 과장으로서야 자연스럽게 김 사무관에게 일의 수습을 일단 맡겨 볼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헌데, 다방에 끌고 나가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기분이 나빴으면 나빳지, 제가 먼저 주도권을 잡고 일을 벌이고 추진해 오다가, 지금에 와서 쏘옥 빠져서 '일의 한계'운운하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관청 안이 아니고 동대문 시장이었더라면 여러 소리 할 것 없이 우선 귀싸대기부터 갈겨 주고 보겠지만 그럴 수도 없고, "여보, 김 사무관. 당신 어린애도 아니고, 과원들 앞에서 그게 무슨 얘기요. 애초에 이런 일이 있다고 얘기한 게 대체 누구요? 당신이 얘기했으니까 당신에게 일단 맡긴 것 아니오. 젊은 사람이 그렇게 비겁하면 못싸요, 못써." 과장도 처음에는 노여움을 참으려는 듯이 낮은 목소리다가 마지막에는 뒤유리창이 쩡쩡 울리게 관록 있는 소리를 질렀다. 김 사무관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하여간, 오후에 과 회의를 소집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한 마디 응수하였다. 9 이원영 주사는 일이 어떻게 뻗어 가건 관심조차도 안 가지려 했지만, 그렇다고 전혀 관심이 없을 수도 없었다. 과장과 김 사무관이 승강이를 벌이는 꼬락서니는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과연 김 사무관다운 형태였다. 현재 처해있는 문제에 총체적인 안목에서 점잖게 대어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파르게, 자기 자신만 이 일로하여 필요 없이 피해를 입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고, 따라서 자기만 이 일에서 직접 관련이 없게 된다면 괜찮다는 생각일 것이었다. 결국 일의 본질은 따지지 않고, 그 일에 대한 자기의 입장부터 따지는 셈이다. 그 일이 공무원으로서 기본적으로 옳은 일인가, 추진시킬 만한 일인가의 원칙 문제의 가부보다는, 자기가 직접 간여할 성질인가. 간여할 성질이 아니라면 일이 되건 안 되건 상관할 바 없이 애초부터 관계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괘아이란 사람은 오랜 공무원 생활에서 절어든 재래저긴 공무원 의식이어서 기왕에 그렇다치고라도 김 사무관의 사고 방식은 더 비겁하고 치사한 것 같았다. 이것이야말로 장삿군이 법망을 피해서 탈세할 연구만 하는 것과 어느 구석이 다를 것인가. 매사에 자기가 빠져나갈 구멍부터 우선 마련해 두고 사바으이 눈치 살피면서 쨀금쨀금 먹어 주자는 심보가 인나가. 먹어도 한 번 통이 크게 배짱 좋게도 못 먹을 위인이다. 게다가 오후에 회의를 소집하겠다는 심보는 또 무엇인가. 이원영 주사의 고집이 원칙적으로 옳다는 것은 그도 다방에서 승인을 한 것이고, 그렇게 승인을 했으면, 노상 진담 농담으로 제가 모범적인 공무원이라는 소리는 해 왔것다, 제 소신대로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할 것이 아닌가. 올혹 그름이 불을 보듯이 명확하다면 다수 소수가 문제가 아닐 터이다. 자기의 소신과 주장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말아야 할 터이다. 그런데 과 회의를 소집하겠다니, 이 일을 무슨 국회에서 다루듯 다수결 원칙으로 하자는 얘긴가. 결국 큰 문제가 벌어지면 과장 책임으로 돌리고, 과원들의 전체 회의로 돌리고, 자기는 불가피하게 다수결에 좇아갔을 뿐이라고 할 작정인 것이다. 그 심보도 더럽고 치사하다. 과 회의 어쩌고 김 사무관이 지껄이자, 과원들도 하나같이 벌써 내용을 대간 짐작하였다. 요즘 이원영 주사의 고집 때문에 애꿎은 김 주사만 며 차번인가 욕 듣는 것을 보았던 터이다. 사실은 과 회의라는 것도 이를테면 김 사무관이 그 나름의 아이디어로 창안 해 낸 것으로서 이 과에만 이따금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소집되었던 것이다. 업무의 분담이라든지 업무 내용의 상호 연관이라든지 기타 여러 가지 과 안의 일을 과장->계장->직원의 단순도식으로 해나가느니보다는 아랫사람들의 의견이나 경우를 충분히 감안하고 반영시키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보기에 따라서는 제법 건설적인 아이디어였다. 사실 처음 얼마 동안 효험도 있는 것 같고 저마다 일에 의욕도 낼 수 있어 괜찮은 듯하더니, 얼마 지나서부터는 김 사무관의 장광설, 제 유식 자랑이기가 일쑤여서, 스름스름 열이 사그라지기 시작하였다.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하더니, 이즘에 와서는 석 달에 한 번 하면 잘 하는 편이었다. 더더구나 먼젓번 회의 때는 이원영 주사와 김 주사가 마구 대결하여 싸움싸움하다시피까지하여 뒷맛이 그닥 개운하지가 못했다. 결국 저녁 퇴근 시간이 지나서 오랜만에 회의가 열렸다. 오늘 따라 기어이 김 사무관이 사회까지 사양하여, 할 수 없이 사회도 구 사무관이 맡아 보게 되었다. 신출내기 서기급 직원들은 이런 일을 처음으로 겪는 것이어서 약간 어리둥절 한 낯색이고, '꺽다리' 김 주사 같은 자는 이런 자리가 벌어져야 웃사가에게 알랑방귀를 뀔 수가 있어 벌써 자못 엄수간 낯색으로 만년필과 백지까지 책상 앞에 꺼내 놓았다. "그럼, 이제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오랫동안 소집을 안 했어서 하번......" 구 사무고나은 여기서 말끝을 마무리지 못하고 약간 주저하는 듯하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오늘의 토의 안건인 공팔 예산에 관해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설명해 나갔다. 이 회의의 안건이나 내용부터가 비공식이고 이 자리 안에서만 통용될 것이지,밖에 새나가지 않도록 각자 조심해 달라고 못을 박고, 의당 그만 한 양식들은 갖고 있으리라 믿는다고도 덧붙였다. 구 사무관으로서는 이 얘기를 제법 멋지게 매우 세련되게 하였다. 그러자 잔득 찌푸리고 앉은 김 사무관의 입가에 일순 보일 듯 말 듯 경멸하는 듯한 미소가 어리다가 스러졌다. 제법인데......하고 생각하는 듯하였다. 계속해서 구 사무관은 나직나직하게 공팔 예산의 내용을 설명하고, 현재 과의 입장으로서는 애초에 예산을 편성하던 때의 예상과는 달리 지금 당장 이것을 활용해 쓸 만한 여건이 아니고, 솔직하게 타악 털어놓고 말해서 이것을 국고에 돌려 보낼 의사가 없다, 적어도 과장이나 저나 김 사무관의 뜻이 그렇다 하자, 순간 김 사무관이 미간을 찌푸리며, "잠깐." 하고 손을 들었다. 구 사무관이 놀라면서 그쪽을 쳐다보았다. "저는 빼 주시오. 국고에 돌려 줄 의사가 없다는 대목에서." 구 사무관은 대뜸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고, 과장도 놀란 듯이 김 사무관을 돌아보았다. 과장이 무엇이라고 소리를 지르기 전에 구 사무관이 소리를 질렀다. "그럼 어제 얘기는 뭐요. 녹음까지 해 두었어야 되었다는 말이오?" 김 사무관도 새파랗게 질리면서 정면으로 맞섰다. "이 주사 얘길 했지, 국고에 돌려 주질 말자는 얘긴 한 일이 없어요." 이원영 주사가 보일 듯 말 듯 피시시 웃었다. "도대체 이 주사 얘길 꺼낸 동기가 뭐요. 공팔 예산 갖고 고집 부린다는 얘기 아니었소. 그게 바로 그 얘기가 아니오." "어째서 그게 같은 얘기요. 이 주삼 문제는 어디까지나 이 주사 문제고, 그 문제는 엄연히 그 문제지, 어째서 그것이 같은 문제요." 김 사무관의 말은 어거지 고집치곤 너무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과 회의는 처음부터 간부들의 말다툼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구 사무관은, 그 예산이 남아 있다는 것, 이것을 쓰느냐 안 쓰느냐의 문제, 쓴다면 대개 이런이런 일거리를 만들 수 있다는 문제, 여러분의 의향을 듣고 싶다는 얘기 등 등을 근근이 하였다. 과 안은 잠시 술렁거렸다. 구 사무관은 아직 이원영 주사의 얘기는 정식으로 한 마디도 거론 안 했지만, 과원들은 구 사무관과 김 사무관 사이의 실랑이로 미루어 일의 윤곽을 이미 짐작할 수가 있었다. 과원들은 우선 이원영 주사 쪼긍로 시선을 모았으나, 정작 이 주사는 머리르 띵조금 숙이듯이 앉아서 애시당초에 관심이라곤 없는 표정이었다. 김 사무관도 상기된 얼굴로 시종 비양거리는 표정으로 앉아 있고, 과장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내심 불쾌한 듯하면서도 그러나 되도록 표정에 드러내지는 않고 있었다. 순간, 난데없이 김 주사가 손을 들었다. 과장의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 가면서 완연히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저자는 또 무엇하러 벌써부터 삐치느냐는 낯색을 하였다. 구 사무관이 잠시 과장의 눈치를 살피다가 김 주사에게 턱을 들어 언권을 주었다.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고, 김 주사는 책상 모서리께에 눈길을 모았다가, "요는 까놓고 링라해서, 이원영 주사가 이 일로 고집 부리는 거 아닙니까. 도대체 하급자가 이런 일로 간부들의......" 하다가 문득 말이 막히고, 난데없이, "언어 도단입니다. 상식 밖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저만 성인 군자랍니까. 도대체 대한 민국 어느 관청치고 따낸 예산 돌려 보내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있으면 제 앞에 내놓아 보세요. 전 이 일을 다수결에 부쳤으면 합니다." 이렇게 횡설 수설하고 풀썩 앉았다. 그리곤 이원영 주사 쪽을 건너다보며, 어때 이새끼야 한 대 맞았지, 하는 표정을 하였다. 구 사무관이 일어섰다. "다수결로 하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이런 걸 다수결로 할 성질인지 전 모르겠지만, 약간 우습군. 다음 의견 있는 분 말해 주시오." 구 사무관의 눈길은 어느덧 이원영 주사 쪽으로 가 있었다. 그러자 과연 이원영 주사가 처넣나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과장을 비롯하여 모두가 긴장하였다. 일의 당사자여서 그렇기도 하지만 어느 구석인가 벌써 그다운 위엄과 서슬이 서려 있었다. 이원영 주사가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는 도대체 이런 일로 이런 회의를 소집하는 것부터가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정신이 있는 사람들인지 하는 생각입니다. 김 주사가 다수결의 원칙 운운했지만, 그 사람은 대학 모의 국회에나 가서 그런 소리 하라면 될 것이고, 도대체 이건 언어 도단입니다. 과장님이 소신을 갖고 처리할 일이지, 어째서 이것이 이렇게 회의를 소집해야 할 성질입니까. 요컨대 이 회의는 어떤 사람의, 구태여 지적하지 않드래도 여러분은 다 아실 테지만, 지적하겠습니다, 김 사무관님의 일종의 도피의 방법으로 이용되고 싶습니다." 김 사무관의 의자 등받이에 잔뜩 기대어 앉아 있다가 화닥닥 놀라며 등을 곧추세우고 제대로 앉았다. "김 사무관의 그런 작태야말로 저는 가장 비겁하다고 생각합니다. 공팔 예산이고 뭐고 간에, 한 살림을 하고 한 유대 속에 있는 더구나 간부로서,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항상 자기 방어욕과 자기가 얼마나 머리가 좋고 똑똑하고 유능한가 하는 과대 망상 속에서만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부정한 저의에서 자신이 주동이 되어 벌여 놓은 일을 자기 입장이 곤란하니까 쏘옥 빠져서 직무 한계 운운해 나서고, 과 회의 운운해 나서고 있습니다." 이원영 주사의 눈길은 김 사무관에게 곧장 향하였다. "김 사무관님에게 묻겠습니다. 김 사무관님은 그 일을 추진할 새각입니까, 아니면 추진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 점부터 입장을 분명히 하십시오." 김 사무관이 벌떡 일어서며 한 손을 이원영 주사 쪽으로 내흔들었다. "당신은 상관을 모독했소." 그러나 그 옆의 과장이 김 사무관을 가로막았다. "발언은 사회의 허락을 맡고 하시오. 아직 언권은 이 주사에게 있으니, 이 주사, 말 계속해요." 이원영 주사는 피시시 웃고, "여하튼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김 사무관님은 바로 저런 사람이올시다." 하고, "제 발언은 이상입니다." 하고 털썩 앉았다. 10 그날 저녁 귀로에 오른 이원영 주사는 기분이 홀가분하였다. 창자 속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꿇고 있던 오물을 깨끗이 훑어 내기나 한 듯 상쾌하기까지 하였다. 하긴 이런 일에 이편에서 기분이 좋으면 기분이 나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김 사무관이 그렇다. "당신은 상관을 모독했소." 얼굴이 시뻘개서 이렇게 지껄이던 김 사무관에게, "여하튼 여럽나도 보시다시피 김 사무관님은 바로 저런 사람이올시다." 침착하게 이렇게 말하고 처억 앉았을 때의 그 기분. 그 뒤, 물론 김 사무관 성미로 그냥 물러앉을 사람은 아니어서 그 나름대로 횡설 수설 쓸데없는 소리를 너저분히 늘어놓았으나, 사태는 이미 이원영 주사에게 절대로 유리하였었다. 결국 공팔 예산의 처리라는 기본 안건은 어느 새 문제 밖으로 밀려나고 김 사무관과 이원영 주사의 입싸움으로 회의는 시종하였는데, 과장이나 구 사무관도 은근히 이원영 주사 편을 들고 나와, 전체의 분위기도 단연 이편으로 유리하게 되었어따. 전차에 올라탄 이원영 주사는 새삼스럽게 자기가 옳은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는 느낌에 겨워 가슴까지 뿌듯이 차올랐다. 부정 부패다, 사람들이 썩는다 하지만, 따져 보면 그 계기는 사소한 데서부터 비롯된다. 으레 세상이 이런 세상이니까 세상 흘러가는 대로 좇아가자고 조금만 마음을 그런 쪽으로 삐딱하게 머그면, 그 당장부터 어느 새 그런 악의 소용돌이 속에 통째로 빠져들게 된다. 항시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고, 잠시도 국가 공무원으로서의 자기의 입지와 위치를 잊지 않고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면 아무리 사소한 일처럼 보이는 것도 정의의 편에서 막아 낼 수 있는 거싱고, 나라를 이하는 일이란 큰 일만 큰 일이 아니라, 도리어 아무것도 아닌 듯이 보이는 그런 사소한 일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모든 일은 작은 일부터, 자기의 사소한 주변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철칙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원영 주사는 전차 속에서 슬슬 휘파람까지 불었다. 심지어 무슨 큰 도사나 된 듯한 느낌이고, 자기야말로 우리 국가가 요구하는 사람일 것이고 근대화 추진의 첨병이라는 자존의 마음도 끓어올랐따. 그러나 다음 순간 곧, '너무 이렇게 마음먹는 것도 실수의 근본이지.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해냈을 뿐인데, 마음을 가라앉히자.' 이렇게 돌려 생각하가싶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여느 때의 자기답지 않게 이렇듯 흥분하는 것도 상대가 다름아닌 바로 김 사무관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예드러내 놓고, 기왕 이런 세상이니 나도 이럴 참이라고 노골적으로 나오는 사람이면 차라리 처리하기도 간단하다. 자기야 말로 똑똑하고 빈틈이 없고 어디서나 정정 당당하고 유능한 행정가이고 헌법, 행정학, 행정법, 통달하지 아니한 것이 없는 듯이 뽐내면서, 음성적으로 할 짓은 다 하려는 사람이야말로 더 경계해야 할 사람이다. 모범 공무원 대접은 모범 공무원대로 대접받고, 할 짓은 다 하겠다는 배포가 어디서 나온 배포인가. 이런 사람이야말로 음성적으로 공무원 사회에 끼치는 독소가 그만큼 큰 것이다. 영향력이 큰 대신, 독소도 큰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바로 이런 자를 힘들이지 않고 보기 좋게 때려 눕혔으니, 아무리 이원영 주사이지만 흥분할 만도 하였다. 전차에서 내려서 집 근처의 골목길로 들어서려는데 여느 때와 달리 마누라가 마중을 나와 서 있었다. 어랜애도 안지 않고 혼자 나와 서 있는 것으로 보아서 집에 누가 온 듯하였다. 이가언영 주사는 흔히 이런 사람이 그렇듯, 자상자상한 정이라곤 없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아니, 아버님께서 올라오셨나?" 마누라는 치마꼬리를 코에 갖다 대로 휭 소리를 내며 마른 코를 풀고는, "어머, 어쩜 그렇게 알아맞혀요." 하고는 무엇이 그렇게도 좋다는 것인지 어스무레한 속에서 싱글벙글하였다. 이원영 주사는 또 무뚝뚝하게, 그러나 완연히 농담조로(이 주사의 경우도 농담이 진담처럼 되는 버릇이 있다.), "그 코는...... 좀 위생적으로 노시지. 행주치마에 코 풀고, 밥상 차리면서는 거기다가 손 닦을 것 아니야." "어이구 어이구, 끔찍이 깨끗하시더라." 마누라도 얼결에 남편의 어깨를 때리는 시늉을 하면서도 조금 쑥스러워하였다. "그러엄! 청렴 결백한 공무원인 것을 이제 알았어. 나가나 들어오나 깨끗하구 청렴 결백하구." 하다가 새삼 물었다. "아버진 언제 올라오셨지?" "아까 세 시쯤 오셨어요." 하고, 마누라가 미적미적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을 알고 이원영 주사는, "그래서?" "반찬거리 값이 20원밖에 없어요. 내일 모레가 봉급날이어서......" "아니, 여늬 땐 반찬 가게 외상 잘만 통하던데. 그뿐인가, 순희네 집 방돌이네 집이랑 잔 거래가 많은 눈치던데." "......" 마누라는 대답을 안 했다. 말을 이런 식으로 꺼냈지만, 사실은 단칸방에 시아버지가 오셨으니 난처하다는 소리를 하고 싶었던 것인. 게다가 이런 소리는 공적인 자리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만, 부부간의 그 일은 두 사람의 건강을 생각하여 1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토요일로 정해 두었는데 오늘이 공교롭게도 화요일인 것인. 늙은 시아버님께서 이런 점은 스스로 알아서 피해 줘야 할터인데, 늙은 시아버님인들 오랴간만에 아들에 며느리에 손자까지 만났으니 호락호락 양보할 것 같지 않았다. 이원영 주사는 벌써 마누라의 속셈을 짐작하고, "오늘이 벌써 화요일이군그래." 하였다. 마누라는 제 김에 벌써 부끄러워하면서 남편의 뒤어깨를 서너 번 가볍게 치는 시늉을 하였다. "뭐, 아버지랑 같은 방에서 주무시지. 그러구 그건 좀 참구. 나라일도 더러 시행 착오가 있는데 한 번쯤 공으로 넘겨두, 뭐." 이원영 주사는 여느 때 농담을 잘 하지는 않지만, 한 번 시작하면 어지간히 실력을 발휘할 줄도 아는 것이다. "......" 마누라는 조금 섭섭한 눈치였지만 다소곳이 남편의 뜻을 좇겠다는 것을 몸짓으로 표시하였다. "영감께서두 골라골라 화요일에 올 것은 뭐람. 내일쯤 오셨다가 토요일쯤 내려가시면 전혀 지장이 없었을 텐데." 오늘 가가에서 통쾌한 일이 있었던 때문인가. 그냥그냥 농담이 하고 싶어졌다. 그새 벌써 그들은 집 앞에 다 와 있었다. "쉬잇, 아버님께서 들어셔요." 마누라가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로 타이르고 먼저 들어섰다. 방문이 열리고 안에서 아버지의 쩔쩔매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허허, 오줌을 쌌나 보다. 이놈이 고 사이 어떠랴 싶어서 입은 채로 안고 있었더니 그만." 전등불 밑의 영감님께서는 사지를 벌리고 일어서서 오줌을 툭툭 털고 있고, 마누라도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린아이를 받아 안고 짜증을 부리듯이 아기의 엉덩이를 찰싹찰싹 쳤다. 아기인들 때리면 아픈 것은 매한가지여서 으아 울음을 터뜨렸다. "하, 그 치기는 왜 치느냐. 애들 오줌 노는 것이야 예사지. 아, 기저귀를 채워서 안겨 주든지 할 일이지 제 실수는 생각 않고 괜히 애만 들볶는구나." 그제야 마누라도 쑥스럽게 웃으면서, "저두 고 사이 어떠랴 싶어서 기저귀를 채울까 말까 하다가 그냥 나갔더니." 하였다. "그건 그렇구 그놈 오줌도 많이는 눈다. 어른 못지않군. 여하간에 이거 척척해서 그냥 앉지는 못하겠구나. 그 아애비 파자만가 바자만가 희한하게 생긴 속옷 없니야?" 가난한 살림이라 파자마는 한 벌밖에 없다. 그전 것은 헐어 터질 대로 입어서 벌써 마룻걸레가 된 지 오래이고, 마누라는 또 한 번 쩔쩔매더니 차마 단벌밖에 없는 파자마는 못 내놓겠는 모양으로 여름 반즈봉을 내놓았다. 눈치라곤 없는 노인께서는 서울 아들네 집이라고 왔더니 피자마 하나를 가지고도 인색하구나 하고 생각하는 모양으로 노골적으로 섭섭한 얼굴을 하였다. 이렇게 북새를 떠는 통에 이원영 주사가 정식으로 큰절을 하기는 5분이나 거의 지나서였다. 아버지께서 반즈봉을 갈아 입은 다음에야 새삼스럽게, "아버지 인사드리겠습니다." 하고는, 뭐 그만두거라 그만두거라 하는 것을 일어서서 큰절을 하니까, 아버지도 큰절 받는 기분은 나쁘지 않은 모양으로 새삼 위엄 있는 얼굴이 되면서 비로소 진지한 소리로 물어 왔다. "그래 관청 일은 지내기 이상 없니야?" 저편에서 아버지 위엄을 부리면 이편에서도 아들답게 별수 없이 우그러든 표정을 해야 제격이 될 것이어서, 이원영 주사는 무릎을 꿇어앉으며, "네, 이상 없습니다." 하였다. "편히 앉거라." "네." "편히 앉으래두." 비로소 이원영 주사도 편한 자세로 앉았고 아버지께서도 아들 하나는 잘 두었다는 생각을 곱씹는 듯하였다. 부엌에 있던 마누라도 방 안에서 두 부자의 갑자기 예의바른 대화로 시골 있을 적의 분위기가 느껴져서 새삼스럽게 황송한 마음이 되었다. 차츰 아버지는 그 사이 겪은 시골 얘기를 늘어놓았다. "요즘 시골두 어지간히 흥청거리고 있는 셈이다마는, 농촌 진흥청에서도 매우 열심이고 여기저기 간척 사업도 그렇고 경지 정리 사업도 이럭저럭 잘 되어 가고 있고." 이원영 주사도 비죽이 웃으며 언제부터 이렇게 아버지께서 농촌 근대화 사업에 관심이 많아졌는가, 우스워졌다. 그새 아버지는 재야 인사 시찰단에 끼여서 1주일쯤 전국의 건설상을 돌아보고 온 모양이었다. "희강이 녀석 덕을 본 셈이다. 파월 가족이래나 뭐래나 해서 아들 녀석 열대 지방의 이역 전선에 보내 놓고 그 값으로 호강이 웬말이냐고 사양을 해도 중앙에서 정해져 내려온 것이니 기어이 가라기에." 아버지는 말긍을 마무리지 못하고 큰아들 앞에 약간 수줍어하며, "늬 어머니더러 가랬더니 펄펄 뛰던구나." 하고는 수염 사이로 입을 벌리며 웃었다. 이원영 주사도 아버지의 저 웃음으로 미루어 그 일을 두고 늙은 내외간에 무슨 우스운 일이라도 있었다 보다 짐작하며 물었다. "안 가시면 안 가셨지, 펄펄 뛰는 것은 또 뭐예요." "글쎄나 말이다. 이 작은애 내보내고 그 대가로 팔도 강산 구경하게 됐느냐고 말이다. 펄펄 뛰는 것이여." "그 점은 아버지도 매한가지일 텐데요." "글세, 나도 그랬지. 당신만 작은애고 나에겐 작은애가 아니냐고. 당신 하는 소린 나에게도 해당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러니 일언이폐지하여 나도 못 가겠노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뭐래요?" "그러니까 '당신은 남정네가 아니유? 남정네들이란 이런 때 행세하라는 것이지 뭐겠이유' 하는 거다." 아버지의 그 어머니 목소리까지 흉내내는 것은 제격이었다. 30년쯤 살아서 피차에 속속들이 절어들어 내외간의 성격이 뒤섞여진 탓일까. 하지만 아버지로서는 오래간만에 그런 축에 끼였던 것이 꽤나 흐뭇했다 보았다. 지방에서 유지 행세하는 데 들어서야 왜정 때부터 익숙해 있어서 별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는데다가, 젊었을 때는 대꼬챙이처럼 엄격하고 결곡해서 헤벌어지게 우쭐대는 일이 없이 억제하면서 늙어 온 것이다. 그것이 이제 늙어지니까 젊을 때 참고 참았던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젊었을 때 누리지 못한 것이 억울해서 늙마에 한꺼번에 누려 보자는 속셈이 생긴 것인가. 중앙에서 아무도 왔더구나, 아무도 왔더구나, 중앙의 어느 신문사 주필도 왔더구나, 퇴역 윤군 장성 아무도 왔더구나, 이름 있는 인사들의 이름을 들어 누구와는 단둘이 술을 마셨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인품이나 격이 낮고 천격이라거니, 이편에서 무슨 말을 하니까 꼼짝을 못 하더라거니, 경제는 제법 아는 눈치지만 동양의 전통적 학문에는 원 그렇게도 벽창호일 수가 있느냐거니, 촌평을 내릴 뿐만 아니라 자유당 때 그렇게도 떵떵거리던 장군 아무개와는 한 방을 쓰고 있었는데 상상 밖의 얌전한 인물이고 목소리까지 여자 같더라는 소리를 하면서, 역시 사람이란 1대 1로 마주앉아 보면 별사람이 없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이어서 종이 한 장 차이더라고 기고 만장이었따. 중앙에서 떵떵거린다는 인사들 속에서 아버지 스스로를 겨누어 보며 여러 가지로 만족감을 느낀 듯하였다. 이원영 주사가, "아버님 술이나 한잔 하시렵니까?" 하자, "오냐, 받아 오면 마시지." 아버지도 히죽이 웃으며 선선히 응하였다. 곧 며느리는 소주 사홉들이 한 병을 외상으로 사 왔다. 11 아버지는 술이 한 잔 들어가자, 더욱 호기를 부리고 기승을 세웠다. 이원영 주사로서는 아버지와 이렇게 대작으로 술을 마셔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젠 자신도 처자 권속을 거느린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 엄게 아버지와 대작을 하면서 새삼 실감되었다. "참 모롱골 집 조카가 아들 낳았다. 딸 여섯에 비로소 아들을 본 셈이지." 아버지는 이런 소리도 하였고, "송골 집 며느리 알지? 그여히 뛰쳐나가지 않았니. 그 얌전하던 륵은 내외가 상심이 이만저만 아니다." 이런 소리도 하였다. 이원영 주사도 지나가는 소리처럼 지껄이는 이런 짤막한 소식에서 시골 구석에서의 그런저런 일들이 눈앞에 훤히 짐작이 되었다. 모롱골 집 조카가 아들을 낳았으니 온 마을이 들썩들썩할 만큼 축제 기분이 낭자했을 터이고, 송골 집 며느리가 뛰쳐나갔으니 마을 아낙네들의 뒷공롱들이 심했을 터이다. 근대화니 뭐니들 지껄이지만 농촌에서는 실상 그런 어려운 소리보다는 자질 구레한 일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직 두터운 장막 너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버지도 그 마을을 벗어나서 서울로 올라왔으니까 아들 앞에 이렇게 비교적 털털 할 수 있는 것이지, 시골 속이었다면 도저히 이럴 수가 없을 것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그 엄격한 구획선을 유지하려고 전전 긍긍했을 터이다. "그래, 요즘 시골은 어떻습니까. 조금 전에 아버지께서는 어지간히 근대화와 건설 의욕에 불타 있다는 뜻의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이원영 주사가 무릎을 꿇고 공손히 술잔을 드리고 술을 따르면서 이렇게 묻자, "편히 앉으려무나, 너무 그러지 말구. 여기야 서울인데 어떻겠니." 하고 쑥스럽게 웃으면서 한 마디 하고는, "글세, 구체적으로 어떻다고 쏘옥 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마는, 농촌 진흥청에서도 매우 열심히더구나. 지도원들이 나와서 일일이 지도를 하구." 슬금슬금 말꼬리를 피하려 들었다. "아버지도 혹시, 근대화 병에 걸린 것이나 아닙니까." "그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냐. 근대화 병이라니, 근대화면 근대화지, 근대화도 병일 수가 있느냐." "병일 수가 있지요. 별로 분명한 실속이나 분명한 내용이 없이 근대화라는 말잉 입버릇처럼 된 사람들 말입니다. 무슨 멋을 부리듯이 그런 말을 쓰는 사람들이 요즘 많아졌어요. 시골에서도 흔히 깨어 있다는 사람들이 이런 소리를 많이 쓰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이런 소리를 입에 올림으로써 자기가 옛날의 개화파이기나 한 듯한 착각에 빠져 있거든요. 허지만, 근대화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고 조금만 따져들면, 전혀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아버지처럼. 그럴밖에 업슨나 것이, 사실은 농촌의 현 실태에 전혀 관삥미이 아벗고 인근에서 유지 행세나 하고 유식자 행세나 하는 데 버릇이 붙었을 뿐이니까요. 그러자면 근대화라는 소리를 이마빼기에 달고 다녀야 우선 그럴듯해 보이거든요. 아버지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시골에 내려가면 매우 엄격하시고 보수적인 아버지 노릇 하기에만 온 신경을 쓰셨는데 서울로 올라오니까 갑자기 민주주의풍을 내고 싶어하시고, 아들인 저에게도 편히 앉으라거니 하시면서구습의 예의 범절에 너무 구애를 받지 말라는 것을 암시하시고 매우 털털해지셨거든요. 아버지와 이렇게 대작을 하는 것도 시골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까 아버지의 근대화라는 소리도 사실은 농촌의 실태에 깊이 들어앉아 있는 소리이기보다는, 어느 정도 먹고 살아가기 편한 입장에서 먼산 보듯이 건너다보면서 흘낏 구경한다든지, 혹은 어느 모범 농촌의 경지 정리 사업을 보았다든지, 혹은 농촌 진흥청 사람이 어느 날 저녁 공회당에 와서 농민들을 모아 놓고 얘기를 몇 시간 하는 것을 직접으로 듣지도 않고 풍문으로만 들었다든지 이런 것 말입니다." 술 기운도 얼근히 오른 김에 아들이 이렇게 알알이 드러내 놓고 얘기하자, 아버지는 내심 뜨끔해지는가 보았다. 우선 아들 옆의 며느리를 흘끗 건너다보며, 이거 며느리 앞에 시아버지 체모가 말이 아니군, 이런 표정으로 씽긋이 웃었다. 며느리도 며느리대로 한 손으로 남편의 옆구리를 조심스럽게 찔렀다. 시아버지도 난처하려니와, 시아버지 난처한 꼴을 보는 자기가 더 난처하다는 듯이. 그러나 이원영 주사는 내친 김에 더 극단적인 말까지 하였다. "요컨대, 아버지의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농촌에서 땅마지기깨나 있는 축의 근성이고 좀더 어렵게 말하자면 농촌에 있는 소시민 근성이라는 것입니다. 막말로 왜정 때의 면장 태를 완전히 벗지 못한 것이지요. 하긴 아버지가 왜정 때 인근에 호평이 자자한 명면장이었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고, 그 점은 저도 에누리없이 승인합니다마는, 거기서 절어든 일정한 땟국은 시대 착오적인 것이고 진부한 것이지요. 아버지는 아직도 그러한 입장에서만 농촌을 보시려고 하고 있거든요. 자기는 농촌의 흙바닥에 들어앉아 있을 사람이 애초에 아니다, 자기는 농촌의 지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비록 현역에서 물러서 있지만 아직도 농촌 지도자라는 점에서는 젊은이 못지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렇게 자처하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농촌 진흥청에서 농촌 지도원이 나오더라도 공회당에 가서 여느 농민들과 같이 마룻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기에 창피한 생각이 앞서고, 그런 사람과도 어느 안방에서 1대 1로 앉아서 농촌 지도원의 그 지도 사업 자체에 참견을 하려들고 싶어하시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제 얘기가 틀렸습니까?" 아버지는 취했던 술이 휭하게 깨어 오는가 보았다. 거무죽죽하게 초췌한 얼굴로 눈길을 밑으로 깔더니, 술 한 잔을 꼴칵 단숨에 비우고 카아 하고 숨을 내뱉고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술이 좀 역하구나." 점잖게 딴 소리부터 하고, "글세, 네 얘기도 일리가 없지 않다마는." 하고 애매하게 비비 돌리면서 그러나, 정작 별로 할 말도 없는가 보았다. 겨우 한다는 소리가, "그래, 너는 오늘의 농촌을 어떻게 본다는 얘기냐. 너 나름의 견해가 있을 테니까, 어디 들어 보자꾸나." 하였다. 이원영 주사는 이러는 아버지가 내심 아니꼽기도 하였지만, "그 문제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각기 살고 있는 분수에서 저저끔 오늘의 농촌을 보는 안목이 천차 만별이에요. 과거에 면장을 지내고 지금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이렁저렁 지내는 축들은 그런 입장에서 오늘의 농촌을 보고, 도시에서 돈을 벌어서 떵떵거리면서 지내는 사람도 그런 입장에서 같은 값이면 오늘의 농촌을 낙관적으로만 보려고 들지요. 당연히 그럴 것이, 그렇지 않다면 그 당자의 심사가 불편할 터이니까요. 우선 이렇게 관점의 근거부터 명확히 해 두어야 할 거예요. 내가 지금 실지로 땅을 파는 농민의 입장이냐, 아니면 도시 부유층의 입장이냐, 아니면 농촌 진흥청의 입장이냐, 아니면 농촌 소지주의 입장이냐, 아니면 조국 근대화라는 총체적인 관점에서의 농촌 근대화라는 매우 냉정한 입장이냐, 아버지 경우는 물론 마지막 경우일 테지요." 아버지는 차츰 기분이 언짢아지는가 보았다. "글세, 그건 그렇구, 너의 농촌에 대한 견해나 얘기해 보라니까." 하고 약간 역정을 쓰듯이 말하였다. 이원영 주사도 아버지의 심사를 대충 짐작하며 비시시 쓴웃음을 흘리었다. 순간 아버지느 우락부락한 얼굴로 술 한 잔을 또 꼴칵 입 안으로 들이뜨리더니 카아 숨을 내뱉었다.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원영 주사가 또 말하였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건 어느 신문의 사설이었는데요, 제 생각도 대동소이한 것이어서 그걸 찾아서 말씀드리지요." 하고는, 옆의 마누라를 시켜 스크랩북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마누라는 시골서 오랜만에 아들이랍시고 찾아올라온 영감님을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짓뭉개어 놓을 참이냐는 듯이, 이 정도로 끝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눈짓을 보내었다. "글세, 스크랩북을 어서 가져오라니까." 이원영 주사도 역정을 쓰듯이 말하였다. 할 수 없이 마누라가 일어서서 장롱 서랍에서 앨범 같은 것을 꺼냈다. 어지간히 취한 아버지는 술잔을 아들에게 넘기면서, "자, 너도 한 잔 마시거라." 하였다. 이원영 주사는 술이 취한 속에서도 하마터면 웃을 뻔하였다. 아버지의 그 '마시거라' 하는 '거라'의 억양이 왜 그렇게 우습게 들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원영 주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겨우 참고,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하고, 마누라가 가져온 스크랩북을 펴들고 그야말로 긴 사설을 늘어놓았다. "첫재로, 우리 나라의 농업 생산이 근년에 대체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시인하고 있는 사실이지요. 그러나 우리 나라의 농업은 천연적인 기후 조건이 풍나나이나 흉년을 좌우한다는 의미에서 아직도 후진적입니다. 이점은 기본적으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근년에 대체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실제적인 증산 정도에 관해서는 통계의 부정확과 특히 증감 여부의 기준이 되는 비교 기준 시기의 부적당 때무넹 통계상에 나타난 정도로 증산이 이룩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에요. 둘째로, 증산과 표리 관계에 있는 농민 소득의 향상에 있어서는 영농비 지출의 증가와 농산물 가격 정책상의 미흡이 돋보이지요. 결국 풍년이 되고 전체적인 증산은 보였지만, 농민의 경제적 지위는 생산면의 증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오히려 풍년 기근이라는 유행어가 나돌 형편입니다. 이건 가장 중요시되어야 할 문제일 거예요. 증산은 되었다, 수확은 늘었다, 일 년내 땀을 흘려 애를 쓴 보람으로 생산 실적은 올랐다, 그러나 총체적인 농가 생활을 살펴본즉 개개 농가의 실질 소득은 안 오르고 도리어 예년보다 더 궁핍한 실정이다 이겁니다. 이것이 어디서 온 것이냐, 이 점이야말로 눈똑바로 뜨고 분석해 보아야 할 문제지요. 실제 생산 실적은 올랐는데, 어째 실질 소득은 줄었느냐 하는 점 말입니다. 이 점이야말로 구조의 문제와 상관이 되는 것이지요. 셋째, 정부는 농촌의 이런 실정을 탈피시킬 궁여지책으로서 기업농과 협업농이라는 것을 내세우고 있는데 방향 설정으로서는 그럴듯하지만, 이러한 방향 설정을 했다고 해서 당장 기업농과 협업농이 전체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 농업의 먼 장래라면 몰라도, 아직 우리 농업의 전체적인 현황은 생계 농업의 형태에 있고, 농촌 정책의 주안도 어디까지나 이점에 잇어야지요. 그렇다면 섣부른 기업농, 협업농 운운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데마고기거나, 아니면 농촌 부유층에나 해당될 소리지요. 넷째로는 조국 근대화라는 전체적인 싯점에서 농업의 위치를 어디에 둘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점은 두 번째의 문제와도 관련이 되는 문제지요. 물론 정부의 정책은 최신의 개발 경제 이론에 따라서 농공 병진을 부르짖고 있고, 그건 저는 잘 모르긴 하지만 어느 정도 타당한 방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천에 있어서는 공업에 대한 여러 가지 특혜에 비해 농업 생산과 농업 경제에 대해서는 푸대접이 심하다 이겁니다. 심한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는 공업을 일으키기 위해서 농업을 짓밟는다고밖에 볼 수 없는 실정이지요. 또한 소위 농산물 가격의 국제 평준화라는 구호도 자칫하면 공업을 일으키기 위한 방편으로 농업을 짓밟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큰 것이에요." 여기서 이원영 주사는 스크랩북을 덮고, 조금 억양을 낮추어서 다시 말하였다. "저도 정부 공무원으로 있으면서, 흔한 얘기로 나라 녹음 타먹으면서 정부의 일에 지나치게 비판저이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나라녹을 타먹기 때문에 더욱 이러해야 할 성싶어요. 정부에 있는 사람이라고 반드시 정부의 일을 변명만 한다는 것도 말이 아닐 터이니까요. 여하튼 오늘날 우리 농촌의 근대화라는 문제는 가버지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농촌 지도원이 더러 들랑거리고, 경지 정리 사업이 어떻고, 동진강 지역 수리 간척 사업이 어떻고, 이런 식으로 피상적으로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에요. 간척 사업이라는 것도 그렇지요. 일부에서는 비판이 많은 것 같더군요. 바다를 메워서 전답을 만든다는 것인데,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투자 효율을 엄격히 따지면 낭비에 속한다더군요. 같은 돈을 좀더 유효하게 쓰일 곳이 얼마든지 많다는 것이에요. 그러나 여기에는 미국과의 관계도 있고 솔직한 얘기로 미국으로서는 그런 간척 사업 같은 것에나 돈을 쏟아 넣는 것을 환영한다더군요. 그런 문제는 이 자리에서 깊이 터치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얘기가 무슨 소리인지 어떤 대목은 못 알아듣겠는 모양으로 멀거니 아들 얼굴을 건너다보다가 한 마디 하였다. "글세 네 얘기도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한다만, 사람이라는 것이 젊었을 적부터 독창성을 가져야지. 겨우 신문 사설 쪼가리에서 얻어들은 것을 자기 소리처럼 한 대서야. 그것도 외웅지도 못하고 줄줄 읽는대서야." 이원영 주사는 앞의 술 한 잔을 꼴칵 마시고 아버지의 이 말을 받았다. "아버지의 그런 생각부터가 글러먹었어요. 아버지는 혹시 항상 어디서나 자기가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만 모든 문제에 관심을 갖고 계시지나 않는가요. 이런 얘기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무슨 운동 시합을 하듯 하지요. 네가 똑똑한 소리를 하나, 내가 똑똑한 소리르 띵하나 이런 식으로요. 농촌 문제에서 독창적인 생각이라는 것이 대관절 무엇입니까. 무슨 소용에 닿습니까. 그것은 농업 정책가나 농업 기술자에게나 해당될 일이고, 우리 경우는 가장 당연한 현실을 당연하게 상식으로서 파악하고 거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깊이 해야 할 것이지요." "가마안, 난 지금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생각이 났다. 네 하는 소리가 지껄이는 투는 꼭 빨갱이들 비슷하다는 얘기다. 얘기 내용도 더러 그런 냄새가 풍기고. 너무 진지한 체를 해도 꼭 그놈들 비슷해진다는 말이다. 네 생각도 충분히 옳고 일리가 없지는 않겠다마는, 그런 식은 자칫하면 빨갱이로 오해받을 소지도 있다는 말이다. 조심해야지." 순간, 이원영 주사는 웬만큼 술 기운이 오른 속에서도 온몸에서 모든 기운이 수울 빠져나가는 듯하였다. 잠시 머엉하게 입을 벌린 채 아버지를 건너다보다가 나지막한 소리로 받았다. "그렇게 나오면 이편에서는 더 할 소리가 없어지지요. 할 소리가 없어지는 것은 할 소리가 없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빨갱이와 비슷하다는 것만으로도 대번에 기분이 나바지니까요. 허지만 아버지와 같은 그런 식의 싯점과 히스테리가 있는 한, 객관적인 사태를 냉정하게 제대로 볼 수 있는 길으 나원척적으로 차단되고, 조국 근대화도 구두선에 그친다는 얘기입니다." "아니야. 그게 그렇지는 않은 거다. 넌 아직 어려서 해방 직후 한동안의 그 소용돌이를 경험하지 못해서 모르는 거다. 그건 경험하지 않고는 모르는 거야. 빨갱이들 지껄이는 것이야 얘기 자체로 보면 그럴듯하지. 허지만 겪어 봐야 아는 거야. 네 그런 생각은 자칫하면." "네네, 알았습니다. 어휴, 나이 들었다는 특권이 또 나오시는군요." 이원영 주사는 또 술잔을 들어 꼴칵 입 속으로 들이뜨리고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12 항용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얘기가 나오면 그 이상은 할 말이 없다. 한참 동안 떠벌리던 아들이 뜸해지면서 이제는 아버지 쪽에서 서서히 기를 펴기 시작하였다. "그놈들의 짓은 지금 생각해도 어제 겪은 일처럼 지긋지긋하다, 지긋지긋해. 사람이라는 게 어디까지나 사람인 다음에 무슨 일이건 있는 것이지, 사람 그 자체를 무시해 버리고 무엇이 남아날 것이냐. 그놈들은 바로 그 초보적인 인간성 자체부터 짓밟는다는 말이다. 그애들도 그야 입으로 지껄이는 것은 그럴듯하지. 그 통에 멋모르고 녹아난 사람도 숱하게 많은 거야. 원래가 공산주의자나 공산주의 사상이라는 것은 버젓이 내가 공산주의입네 하고는 나서지 않는 법이거든. 공산주의라는 것을 민중이 싫어한다는 것은 그들도 잘 알고 있으니까. 결국 교묘한 방법으로 살살 달려든나 것이지. 해서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산주의자처럼 보이게 되는 수도 많은 거다. 이 점은 언제나 명심해서 조심을 해야지." 아버지는 비로소 이런 소리를 하면서 아들 앞에 제대로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 대견한 모양으로, "너도 그새 여러 가지로 공부도 하고 여러 방면으로 폭도 넓어진 것을 인정은 하겠다만." 하였다. 잠시 이원영 주사는 아버지를 멀거리 마주 건너다보면서, 아버지도 결국 저런 식으로 늙어져서 어언 예순 살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을 새삼 하였다. 일말의 동정과 함께 가슴 쓰라린 구석도 없지 않았다. 아버지는 젊었을 적부터 인근에 인물로 알려졌던가 보았다. 흔히 좁은 시골 바닥에서는 주위의 눈길이 어느덧 본인으로 하여금 쉽게 그런 자격지시믓띵 갖도록 하는 것이다. 주위 사람이 인물로 보아 주니 사실로 인물임에 틀림없는가보다, 이런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들어앉고, 점점 선민 의식 같은 것이 부풀어오르고 그와 함께 근거 없는 허황한 사명감도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일거수 일퉈녹이 조심스러워지고 주위의 눈길을 그대로 유지해 가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결국 아버지는 그런 덕으로 30 안팎에 벌써 면장을 지냈고, 면장을 지내면서도 꽤나 인망을 얻었다. 면민들을 위해서 그야말로 분신쇄골, 면민들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치적을 올렸다. 치적이라지만, 일본의 식민 정책 치하라, 뚜렷한 것은 있을 리가 없고, 그저 늠름한 거조와 인격자입네 인물입네 하는 외양으로 면민들의 인망을 얻었다. 무슨 일을 잘 해서 훌륭한 면장이 아니라, 관후한 가정과 매서 사리에 밝은 듯한 언동만이 밑천이라면 밑천이었고, 분수 이상으로 거만을 피우거나 하지 않고 면민들 누구에가나 공손하고 겸손한 표정 하나로 그렇게 될 수 있었다. 쌀 떨어진 가난한 농민에게 좁쌀 몇 말을 보내 주었다든지, 8대 독자의 징용을 면하게 해 주었다든지 혹은 가뭄이 들던 해에 아래 웃마을의 물싸움을 잘 조정했다든지 이런 식의 물에 물탄 듯한 일화들이 적지않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도 아버지가 친일파로 몰리지 않은 데에는 사실 면민들의 이런 유의 호평이 밑받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렵 우리 나라의 어느 시골이나 그러해찌만, 곳곳에 인민 위원회라는 거시 이후 죽순처러 링돋아나기 싶가하였다. 아직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어서 온 날가 구석구석까지 갈팡질팡하던 판국이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오랫동안 면장을 지내면서 젖어든 그 나름의 근엄한 표정으로 섣불리 날고 뛸 것이 아니라 침착하게 슬기롭게 대처해야 한다고 역설, 인민 위워노히를 만든 사람들의 성급하 망동을 점잖게 꾸짖었다. 그 지방의 젊은 사람들도 처음에는 아버지의 인근에서의 인망과 영향력을 고려하여 아버지를 그들 편으로 포섭하려고 위원장 자리까지 제의하였으나 어바지는 완곡하게 거절을 하였다. 아버지는 요즈음도 그때 그 망동에 섞여들지 않은 것을, 자기가 얼마나 똑똑했고 얼마나 선견지명이 있었느냐 하는 것의 증거로 항상 내세우려고 한다. 차츰 해방 직후의 혼란도 가라가기 싶가하고, 드디어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될 무렵에는 인민 위원회 쪽은 이미 작살이 나고 사그라들던 것이었다. 어느덧 아버지는 정부 수립 이전의 혼란 속에서 섣불리 날뛰지 않고 근신을 했다는 것과, 빨갱이들의 광태에 휘몰리지 않았었따는 그 이유만으로서 새로운 대접을 받기 시작하가싶다. 왜정 때 면장을 지냈다는 것은 이미 아무런 흠이 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때도 면민드르이 신망을 한몸에 모았던 터라, 일제 말기의 그 험한 식민 정책 밑에서도 면민들을 어떤 방법으로라도 보호하는 데 혼신의 힘을 발휘했다는 엉뚱한 평가가 내려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시골에서 유지로서 깊은 뿌리르 띵박은 내력은 대충 이러한 것이었다. 나이가 들고 주위의 유임 권고에도 불구하고 면장 자리를 사양하던 때의 얘기도 그럴듯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제법 솔직한 소리를 하는 듯하고 양심적인 소리를 하는 듯하면서, 뒤에 이런 소리가 몰고 올 반응을 아버지 나름으로 면밀하게 계산에 넣었을 것이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일제 치하, 저 암흑 시절의 이 면 면장이올습니다. 오느 fto 세상이 열린 대한 민국에서, 동일인이 거듭 이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본인은 매우 송구스럽고 미안하게 여겨 오던 터입니다. 물로 나정부 수립 이전의 그 혼란 속과 그리고 정부가 새로 수립되어 너무나 중차대하던 마당에 면민 여러분의 간곡한 권고에 못이겨 본의 아니게 본인이 이 자리에 주저앉기는 하였지만 본인 내심으로는 여간만 꺼림칙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것도 하나의 과도기일 것이라고, 본인은 본인 나름으로 생각하여 이 자리를 받아들이고, 이때까지 계속 이 자리를 더렵혀 왔지만, 이제 본인도 물러날 대가 왔다는 것이 저의 거짓 없는 솔직한 생각입니다......" 운운. 이원영 주사도 훤씬 뒤에 인근의 풍문으로 들었지만, 그때 아버지의 퇴임사는 대개 이런 투였던 모양이다. 이원여 아주사도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읫 가런 행태를 그럴듯하게 여겼었다. 그러나 요즈음 와서는 전혀 생각이 달라졌다. 어떤 식으로 어떻게 달라졌느냐고 물으면 한 마디로 대답을 할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가 살아온 큰 윤곽이 쓴 웃음 섞여 짚이는 것이다. 한창 행세를 하던 때는 그 늘 위엄이 늠름하가 나표정과 지방 유지 가락이 그럴싸하게 보였었지만, 이편도 이편 나나름으로 세상을 알고 철이 들면서는 아버지가 아닌 천덕군을 건너다보듯 보아지는 것이다. 더욱이 현역에서 은퇴하여 지방 유지 간판은 여전히 이마빼기에 붙이고 다니지만, 이젠 여생이 얼마 안 나믄 럭마로 접어들면서는 한창 시절의 서슬고 위엄도 스러지고, 어딘가 적나라한 모습의 아버지가 여러 대목으롤 도아 나오는 것이다. 하기는 사람이란 늙어지면 적건 크건 다 그렇게 되기느 할 것이다. 이미 완결 된 인생은 그 완결되었다는 이유만으로써 분명한 분수와 윤곽을 드러내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그 분수와 윤곽을 들추어 내서 알알하게 보여 준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본인은 이젠 죽을 날박에 안 남났겠으니 언짢기나 할 것이다. 실패한 인생에 겆듭 침뱉기가 매한가지다 . 그리고 사람이란 생각나름이기는 할 것이지만, 누구나가 다 살아 버리고 나면 실패한 인생이엇따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자, 술 들거라." 아버지는 kwatl 풀이 죽어 있는 아들에게 술잔을 넘기었다. 이원영 주사도 잠시 감상적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버지도 이젠 늙으신 아버지다, 어찰피 도움이 안 될 바에는 위로나 해 드려야지 하고 마음을 고쳐 먹으며, "여하튼 아버지도 아버지 나름으로 훌륭하게 사셨다는 생각은 드는군요. 한평생 산다는 것이 결국은 이런 것이겠지요." 하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 어,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아, 내가 다 살았다는 얘기냐. 벌써부터 노인 대접을 하려구 드는구나." 하고 아버지도 점점 활기를 되찾았다. 아들의 이런 소리가 싫지는 않은가 보았다. 그 다음부터는 아버지나 아들이나 척척 장단이 맞았다. 아버지도 시골 바닥에서 체모만 차리느라고 어제 한 번 마음껏 술을 마신 일도 없었던 듯, 서울의 아들네 집에 와서 만취 기분을 맛보고 싶은 듯하였다. 며느리는 다시 나가서, 소주 두 홉들이를 두 병 가져왔다. 취한 아버지와 아들은 차츰 어느 편이 아버지고, 어느 편이 아들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곤드레가 되어 갔다. 정신이 멀쩡해서 옆에 앉은 며느리도 어느 편이 시아버지고 어느 편이 남편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취해 버린 두 남자를 건너다보며 비로소 격의 없이 마음놓고 폭소를 터뜨릴 수가 있었다. 13 아버지는 올라왔던 길에 사날 더 묵고 내려갈 심산인가 보았다. 간밤에는 그렇게나 흥분해서 허풍을 떨고 술이 취해서는 시골에서 유지 대접 받는 것을 음으로 양으로 자랑을 하고 아들도 아들대로 술이 취하자 중앙 가간청에서 자기가 얼마나 똑똑하고 청렴 결백하고 배짱 있는 공무원 노릇을 하는가 자랑을 늘어놓고 결국은 둘이 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시지요." "오냐, 그러니까 내 아들이다." 부자가 볼 만한 광경을 연출하여, 며느리는 잔심부름을 하면서도 남자들이란 늙으나 젊으나 저렇게 평생 철없는 아이들이기 마련인가 보다고 잠시도 웃음을 멈출 수강 가었는데, 아침이 되자 일찍 일어난 시아버지는 며느리 앞에 조금 쑥슬워하면서도 그 까다롭고 엄격한 시아버지로 어느 새 되돌아가 있었다. 아들 며느리와 툭 터놓고 지낼 때는 지내더라도, 일단 집안 살림 감독이나 그런저런 일에 들어서는 추호도 용서가 없다는 것을 억지로 시위나 하는 듯하였다. 매달 봉급이 얼만데 쌀값이 얼마 들고 반찬 값이 얼마 들고 교통비는 얼마며 꼬치꼬치 캐어들었다. 더욱이 교통비에 이르러서는, "여기서 몇 리나 되는데, 혹시 걷지는 못하겠다더냐?" 하고 무리하게 대어들기도 하였다. 드디어 며느리는 가계부를 보였다. 그것을 대강 훑어보고 나서야 시아버지는 안심을 하듯이, "대강 살림을 어떻게 해 왔는지 짐작은 간다." 하였다. 이원영 주사가 조반을 먹고 마악 출근길로 오를 무렵 해서야 시골에서 쌀에 고추장독에 참기름에 무엇무엇이 오늘 중으로 올라올 것이니 그리 알고 서울 역에서 인수를 하도록 분부를 내리었다. "아니, 자꾸 그러시면." 아들도 미간을 찡그리며 말하였다. "제 봉급만 가지고 살아 볼 요량을 하고 있는데, 자꾸 그러시면." 혹시 자기가 관청 생활에서 청렴 결백할 수 있는 것도 이렇게 먹고 살아가는 뒤가 든든하니까 그걸 믿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남이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자격지심이 일어오르는 것이었다. 정말 믿을 구석이 없이 철저하게 결백할 수 있어야지, 시골에서 갖다 먹을 것 다 갖다 먹고 나서 결백할 수 있는 것이야 누군들 못 할까. 아버지도 아들의 이런 말에는 약간 풀이 죽으며, "글세 나도 그러지 말자 했는데 니 에미께서 어디 그러디야? 그리구 고추장 독과 참기름은 네 처가집에서 장모가 보내는 것인갑다." "어머!" 하고, 마누라도 좋다는 것인지 놀랍다는 것인지 손으로 입까지 가리며 엄살을 떨었다. "아들딸 귀한 것이야 자고로 아비보다 에미들이 더한 법이 아니냐. 저엉 무엇하다면 이때까지도 그러했듯이, 올라오는 것은 저축을 해, 저축을. 쓸데없는 계 같은 것은 그만두고 은행에 정기 예금이라도 해서." 아버지는 이렇게 또 떵떵거렸다. 5분쯤 늦어서 과에 들어서자, 과 안은 어제 회의의 여운인 셈인가, 아직까지도 분위기가 썰렁썰렁하였다. 과장, 그 왼쪽 옆의 김 사무관, 과장 오른쪽의 구 사무관 모두가 조간 신문을 들고 앉았고, 과원들도 제각기 조간 신문 기사에들 파묻혀 있었다. 이원영 주사도 조간을 들고 기사를 읽는 체하며, 어제의 일과 결부를 시켜서 한 번 차분하게 되돌이켜보려고 하였다. 더구나 아버지의 상경은 자신의 새로운 면을 재인식하고 깊이 생각해 볼 재료를 제공해 준 셈이었다. 아버지가 시골에서 유지 행세나 하면서 그 멋으로 약간 떠 있는 기색이 있듯이, 자기도 방귀깨나 뀌는 시골의 터전을 믿고 혹시 안이한 생각을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는 것일까. 간밤에 아버지와의 일도 그렇다. 처음에만 제법 똑똑한 체하였으나, 결국은 자기도 아버지 투에 그대로 휘어들지 않았는가. 늙은 아버지를 위로해 드린다는 명분이기는 하였을망정. 그리고 어떤 종류의 타락도 명분을 찾자면 찾아질 터이다. 이 바닥에는 결국 결론적으로 별수가 없다는 논리가, 자기에게도 스름스름 젖어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때까지 살아온 아버지를 저만큼 거리를 두고 건너다보며, 자기 나름의 비평적인 안목은 서 있지만, 안목이나 서 있으면 무엇할 것인가. 자기도 그런 아버지를 이미 어쩔 수 없는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있고, 궁극적인 인생론을 쳐들어 용서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아닌가. 항용 그런 것이지만, 이런 대목에서의 궁극적인 인생론이란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고 소극적인 도피의 구실밖에 안 된다. 간밤의 아버지와의 술자리에서도 처음에는 소시민 근성 운운하였지만, 소시민 근성으로 치자면 자기도 마찬가지이다. 소시민 근성이라는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 소시민 근성에 빠져 있는 것은 더욱 치사한 소시민 근성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따지면, 이 바닥에서 똑똑한 체하고 제노라고 뽐을 내는 사람치고 소시민 근성이 아닌 사람이 없을 터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처해 버리면 그 자처해 버리는 순간부터, 시니컬한 방향으로 자기를 몰고 갈 길밖에 안 남는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이런 식으로 문제를 심화시키는 것도 어느 의미에서는 얇삽한 사변 취미밖에 안 된다. 사실 냉정히 따져 보자. 모든 사변을 털어 버리고 오늘의 생활에 밀착시켜서 자기 자신을 생각해 보자. 자기에게 딸린 식솔이 세 식구니망정이지, 권속을 더 많이 거느리고 있는 공무원으로서 공무원 봉급만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입이 열 개 있어도 살아 갈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간단하지 아낳다. 자기의 분수에서 청렴 결백한 가까 공무원임을 자처할 수 있는 것도 일단은 자기대로 생활 근거가 서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만일 자기도 공무원 봉급만 가지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고, 위기에 봉착했을 때도 시골에서 뒤를 보아 주지 못한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떳떳한 입장을 끝까지 버텨 갈 수 있을까. 부지불식간에 믿는 데가 있으니까 이러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적당히 지나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요령을 발휘한다는 것도 애매 모호한 얘기다. 과연 그 적당이라는 선을 어느 선으로 잡는다는 말인가. 한 번 그런 마음을 작정하면 적당이라는 선은 분수를 무한정하게 넘어설 공산이 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버릇이 붙기 시작하면 이미 볼장 다 보는 날이다. 공무원 봉급만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 이런 전제가 어느 새 모든 악에의 투신을 합리화시키고 자기 변명의 구실로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이런 타성에 젖어 들게 마련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길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번 공팔 예산의 경우도 철저히 다시 따져 보자. 현재 이 과에서 참으로 밥을 못 먹을 만큼 실질적으로 어려운 동료가 누가 있는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토록 까지 어려운 사람은 있는 것 같지 않다. 그저 국고에 돌려 보낼 수 없으니 적당히 일거리를 만들어서 요령을 부리자는 것일 뿐이다. 벨이 울리고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과장이 보던 신문을 놓자, 그 옆의 김 사무관, 구 사무관도 보던 신문을 놓았다. 모두가 또 하루를 그러어렁 때우고 퇴근 시간까지 그렁저렁 자리를 지키면 되낟는 그야말로 타성적인 분위기 속에서 제각기 서류를 꺼내 놓았다. 김 사무관은 어제의 그 일이 지금까지도 매우 신경에 쓰이는 모양, 잔뜩 미간을 찡그리고 약간 서툴게 담배를 뻑뻑 빨고 앉아 있었다. '꺽다리' 김 주사도 어제 회의에서 이원영 주사를 공격하면서 상관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다가 도리어 사태가 역전되는 바람에 입장이 난처하게 빠졌던 것이어서 건너편의 이원영 주사 쪽을 흘끔거리며 무슨 얘기라도 걸어 볼 틈을 찾고 있었다. 그때 과장이 이원영 주사를 불렀다. "여보 이 주사, 나 좀 봅시다." 그 목소리에는 부드러운 억양이 스며 있었다. 나이도 많고 공무원 생활도 오래 해 온 사람이어서 관록 있게 이 일을 가리 하리라는 저의가 보였다. 이원영 주사는 일어서서 과장 앞으로 갔다. "나하구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합시다." 딱히 고압적인 억양은 아니었지만 과장의 그 말을 차마 거절할 수 없이 이원영 주사도 고분고분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방으로 나가서 마주앉자, 과연 과장은 과장다운 관록과 깊은 사려를 내보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간밤에 나도 집에 가서 곰곰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리 김 사무관의 행태가 좋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어제의 일은 이 주사가 좀 지나쳤던 것 같아. 그런 일로 해서 과 분위기가 계속 나빠진다면 그것도 곤란한 일이고 좀더 현실적으로 실제적으로 생까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이 주사는 어떻게 생각허슈?" 이원영 주사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냐고 되물으려 다가, "글쌔, 전 잘 모르겠습니다. 자세히 얘기해 주십시오." 하였다. "원칙적으로 이 주사의 생각이 옳단느 것은 나도 알고 있소. 허지만 그 원칙이 그대로 문제의 해결책은 아니거든. 솔직이 얘기해서 이 주사가 고집하는 그 원칙 때문에 김 사무관은 부당하게 상처를 입은 셈이라는 말야. 그 사람도 그 사람 나름으로 유능한 사무관임은 부처 내에서 누구나가 인정하고 있어. 그것이 이 주사의 그 원칙으로 해서 피해를 입었다고 할 때는 이 주사의 그 원칙이 지니는 효용 가치나 그 실제적인 분수를 다시 한 번 냉정히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얘기지. 쉽게 말해서 지금 과 분위기는 그 일로 해서 아주 나빠져 있거든." "그러니까, 무슨 얘기입니까." "탁 터놓고 얘기하지. 이건 과장이라는 직권을 떠나서 하루이틀이라도 공무원 밥을 더 먹은 입장에서 하는 얘기지만, 이번 일은 이 주사가 한 번만 양보해 줘야겠소. 그렇게만 된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것 같소." 과장은 이렇게 말하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공팔 예산 말씀입니까." "그 얘기지." 이원영 주사도 과장의 이 간곡한 뜻은 일단 알 수 있을 듯하였다. 사실 그렇게만 된다면 백 마디의 말이 필요 없이 과의 분위기는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원영 주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하였다. "저에게 하루만 여유를 주십시오." 14 물론 과장의 말도 일리는 있다. 애초에 이원영 주사가 고집을 피우지 않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만 나갔다면 과 회의를 소집할 필요도 없었겠고, 더구나 김 사무관이 그런 꼴도 당하지 않아서 모범젖가이고 유능 공무원에 조금도 상처를 안 입었겠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로 간부들 사이, 즉 과장과 김 사무관 사이의 그 부자연스러운 꼴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과 분위기가 이렇게 자신 때문이라는 엉뚱한 얘기가 된다. 아느 엉뚱한 얘기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과장도 바로 그 점을 암시해 오면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고집을 숙이라는 소리일 터였다. '그러니까' 하고 이원영 주사는 생각하였다. '그 공팔 예산건으로 내쪽에서 양보를 하게 되면, 간부들에게 얼마, 일반 관원들에게 얼마, 조금씩 돌아가는 것이 있으렷다. 그리고 그렇게 돈이 오고 가면서는 서로 낯짝 찡그릴 수도 없는 것이고, 간단히 술잔이나 나누면서 과장과 김 사무관의 관계도 대번에 정상으로 회복되겠다 그런 말씀이시군.' 저도 모르게 비시시 웃음이 나왔다. 이원영 주사는 다시 조금 전의 과장의 얘기를 떠올렸다. '원칙적으로 이원영 주사의 생각이 옳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 허지만 그 원칙이 그대로 문제의 해결책은 아니거든. 솔직이 얘기해서 이 주사가 고집하는 그 원칙 때문에 김 사무관은 부당하게 상처를 입은 셈이라는 말야. 그 사람도 그 사람 나름으로 유느한 사무관임은 부처 내에서 다 알고 있는 일이구, 그 것이 이 주사의 그 원칙으로 해서 피해를 입었다고 할 때는 이 주사의 그 원칙이 지니는 효용 가치나 그 실제적인 분수를 다시 한 번 냉정히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얘기지. 쉽게 말해서 지금 과 분위기는 그 일로 해서 아주 나빠져 있거든.' '탁 터놓고 얘기하지. 이건 과장이라는 직권을 떠나서 하루이틀이라도 공무원 밥을 더 먹은 입장에서 하는 얘기지만 이번 일은 이 주사가 한 번만 양보를 해 줘야겠소. 그렇게만 된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것 같소.' 요컨대 과장이란 이런 사람이다. 그리고 과장이 이런 사람이라는 뜻은 '여하튼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김 사무관님은 바로 저런 사람이올시다.' 하고 지껄이고 처억 앉았을 때처럼 개운한 느낌을 느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얼핏 듣기에, 과장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 옳은 말 같다. 공무원 밥을 한 그릇이라도 더 먹었다는 것을 내세우는데, 그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공무원 밥을 한 그릇이라도 더 먹었다는 뜻은 무슨 뜻인가. 이것 저것 세상 눈치를 많이 보아 왔다는 뜻이겠고, 청탁 합음, 맑은 것이나 탁한 것이나 삼킬 수 있게 그릇이 크다는 말일 것이다. 과장의 말은 사실 옳은 점도 없지 않다. 원칙적으로 이 주사의 주장이나 고집이 옳은 것은 자기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백 번 옳아도 효용이 현실적으로 없을 때는 무효다, 한데, 현실적으로는 괜히 과 분위기를 흐려만 놓은 결과가 되고, 시아좋던 과장과 김 사무관 사이를 갈라놓고, 엉망으로 만들어 놓지 않았는가. 이원영 주산느 오전 중 내내 찜찜하였다. 과장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에서 쟁쟁거리었다. 그 말 자체로 보면 한 과의 과장으로서 과 안의 분위기나 문제를 깊이 통찰하여 수습의 길을 제기하는 듯한데, 어딘가 더 깊은 곳에 불순한 것이 스며 있다고 생각이 되고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려지지는 않는 것이었다. '과장님에 대한 선입견이 지나치게 작용되어서 이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사실 과장 얘기는 옳거든.' 이원영 주사는 일이 손에 안 잡혀 계속 새 담배에 불을 부티염 골똘하게 생각하였다. 하긴 현실적으로 한 과를 책임 맡고 끌어 나가자면 원칙성에 철저하기보다는 현실성에 철저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원칙성이란 자칫하면 공리 공론인 경우가 흔하니까. 엄연한 공무원 기구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음은 바로 엄연한 현실이다. 과가 있는 것이 바로 엄연한 현실이듯이 과를 구성하는 근 20명의 인원 및 그들의 생활도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경우 한 과를 책임 맡고 있다면 과의 업무뿐만 아니라 과내의 모든 일, 심지어 과원 각자의 집안일, 과원 각자의 생활 문제도 자상하게 신경을 써야 할 터이다. 대국적인 관점에서 국가 공무원으로서 이것이 롱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의 여부보다도, 과 현실에서 이것이 불가피한 일이냐 불가피한 일이 아니냐가 문제일 것이다. 흔히 어린 때, '소년이여 대야망을 가져라.'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소년 시절에는 일정한 책이 없고, 부모 품에서 하루하루 편하게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대야망도 지닐 수 있고, 부푼 꿈도 꿀 수 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사회에 나서고 깊이 세상을 알면 알수록 점점 시계가 좁아지고 생각하는 것이 협량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 누구나가 내세우는 것이 소위 와 띵'구체적인 현실'이다. 진흙 수렁에 한 발 한 발 빠져들어서 끝내는 꼼짝을 못 하듯이, 누구나가 생활 현시 띵자체의 기성 논리에 휘말려서 꼼짝을 못 하고 종당에는 그 길로 굳어지게 되는 것이다. 과장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고, 그것이 원칙적으로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하는 것은 과장 자신도 자명한 일로 접어두고 있는 일이어서 더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핵심적인 문제는, 과의 현실에서 당면한 수습책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원영 주사는 개미 쳇바퀴 돌 듯 같은 생각만 되풀이하였다. 과장과 김 사무관 사이는 오늘도 냉전 상태 그대로였다. 주로 과장은 오른쪽 옆의 구 사무관에게만 뭐라고 수군거리고 혹은 지시를 내릴 뿐이지, 김 사무관에게는 종일 얘기도 안 붙였다. 이 통에 호인으로만 빠진 구 사무관도 과 안의 두 실력자가 냉전에 빠져 농담할 상대도 없고 농담할 처지도 아니어서 여간 난처해하지 않았다. 한편, 김 사무관도 김 사무관대로 오기로라도 과장 이외의 과원들에게는 여느 때 없이 필요 이상으로 부자연스러운 말을 거는 등, 나름대로 과원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다. "권 주사, 바둑이 몇 급이랬지요? 나하구 저녁에 한 번 얼러 볼래요." 바둑은커녕 오목도 못 두는 주제에 이런 소리도 하고, "엊저녁엔 누가 이겼소? 저녁은 누가 썼소? 보아하니, 최 주사가 또 쓴 모양이군." 이런 소리도 하고, "참, 양 주사, 요즈음은 낚시질 못 가서 안말이 나겠네." 이런 소리도 하였다. 그리고 극서은 하나같이 저쪽에서는 대답하기 궁하고 부자연스러운 그런 종류였다. 이쪽에서는 대답 대신 과장과 김 사무관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눈치나 살펴야 하는 것이었다. 괜스레 김 사무관에게 친숙한 투를 보였다가 과장에게 두고두고 미움이라도 사게 되지 않을까, 하고 염려가 되는 것이다. 사실은 과장 편에서는 아무렇게다 생각하지 않을 터인데 이편에서는 지레 그런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었다. 과원들은 모두가 과 안의 이상 분위기를 중압감으로 느끼며, 과장 편을 드느냐 김 사무관 편을 드느냐, 되도록 이런 경우에는 중립을 지키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실은 같은 값이면 힘센 쪽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어서 과장 쪽으로 쏠리게 되는 것이었다. 이럴수록 김 사무관은 더욱 조바심을 피워 심지어 추태까지 보였다. 점심때 이원영 주사는 김 사무관 옆으로 슬그머니 갔다. 딱히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얼결에 불쑥 말했다. "김 사무관님, 저하고 점심이나 하실까요." 평소에 일반 직원들은 도시락을 가져와서 먹고, 세 간부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셋이서만 늘 외식을 하였는데, 어제 그 일이 있고 나서는 세 간부께서 같이 점심하러 나가기도 난처한 눈치이고, 마침 이원영 주사도 갑자기 아버지가 올라오셔서 북새를 떠는 통에 도시락 갖고 나오는 것을 깜박 잊어먹었다. 하긴 자기가 잊어먹었는지 마누라가 도시락을 싸지 않았는지 알 길이 없지만. 김 사무관은 약간 굳은 표정이다가, "아니, 오늘 따라 웬일이오." 하고 피시시 웃으면서 되물었다. 그 옆자리에서 과장이 흘끗 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가 이내 외면을 하였다. "사실은 시굴서 아버지가 올라오셔서 북새를 떠는 통에 도시락을 갖고 나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내가 사지. 이 주사에게 점심 살 수 있는 것도 모처럼의 기회 같은데, 그 기회를 놓쳐서야 되겠소." 하고 조금 빈정기가 묻은 목소리로 받았다. 김 사무관과 근처 화식집에서 꼬치덮밥을 먹고 나서 점심 값은 비장해 두었던 비상금 5백 원짜리를 내려는데 기어이 김 사무관은 자기가 계사하련다고 외상부에 달아 놓게 하였다. 차라리 잘 되었다. 이편에서는 커피 한잔 사겠다고 근처의 다방으로 김 사무관을 끌었다. 김 사무관도 순순히 따라섰다. 한구석에 앉자마자 이원영 주사가 비죽이 웃으며, "우린 밥상머리에서는 얘기를 못 하겠더군요. 서양 사람들은 그렇지도 않는 모양이든데. 우린 어릴 적부터 공자님 말씀을 좇아 버릇이 들어서 그런지, 식사를 하면서는 당최 얘기를 할 수가 없어서." 하고 혀두를 꺼내고는 비로소, "어제는 실례했습니다." 하였다. 김 사무관도 일순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가 곧 씁쓰름하게 웃으며, "뭐, 다 지난 일인데, 피차에 잊어버립시다." 하였다. 이원영 주사는 김 사무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말했다. "아까 아치멩 과장님과도 잠시 말씀을 나누었는데요." "......" 김 사무관은 자못 긴장한 표정이 되어 급하게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과장님 말씀은 과 분위기가 이렇게 된 것이 제 탓이라고 하더군요. 과장님 말씀이 아니더라도 사실이 그런 셈이 됐습니다. 과장님 람씀은 제가 여기서 양보만 하면 과의 분위기가 정상으로 돌아올 것 같다, 양보를 할 수 없겠느냐고 하더군요." 김 사무관의 얼굴에 비아냥거리는 듯한 미소가 살짝 어리었다. "그야, 이 주사 소신대로 하는 거지, 과 분우기 때문에 양보하고 어쩌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글세 그것은 여하간에." 이원영 주사가 다시 받았다. "과장님 말씀도 그 자체로서는 괘나 일리가 있는 듯합디다. 그러나 무언가 불순하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솔직한 얘기입니다마는." "구렁이 같은 자식, 너구리 같은 자식." 김 사무관은 빠른 입놀림으로 뒤를 잇대어 말했다. "난 괜찮아요, 이 주사가 소신대로 밀고 나가세요. 이 주사가 이제 와서 포기를 한다면 설령 과 분위기가 회복은 될지는 모르지만, 그 회복된 분위기라는 것이 구태 의연한 것이라는 점은 왜 생각하지 못하오. 과장님으로서야, 원칙적으로 옳고 그르고는 여하간에, 과 안이 무사하고 바람만 일지 않으면 만사 오케이라는 생각일 테지요. 솔직한 말로, 나도 간밤에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그야, 이 주사에게 유쾌한 감정일 수는 없습니다. 허지만 이 주사가 역시 옳았다는 생각은 들더군요. 나도 이젠 이 주사 생각에 찬성합니다. 공팔 예산을 그렇게 어물어물 쓸 수는 없는 거지요. 이제 와서 과장님은 과 분위기를 간판으로 내세워서 이 주사의 약점으로 삼고 나오는 모양인데, 그거야말로 불순한 생각이징. 소신대로 밀고 나가세요." "알았습니다." 이원영 주사는, 김 사무관이 나이가 어리고 매사에 가벼운 점도 있지만, 정의감이 강하고 머리도 좋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였다. 15 점점 문제는 엉뚱한 쪽으로 감정적인 영역으로 치달리고 있는 셈이 되었다. 과장이라는 사람이야 애초부터 오랜 공무원 생활에서 젖어든 적당주의 무사주의여서 이 일도 그런 식으로 수습을하여 과 분위기를 다시 정상적인 궤도로 되돌이키고 김 사무관과의 미묘해진 관계도 제대로 돌려 놓자는 작정일 텐데, 그 호인성은 이해가 가지만 문제 의식도 패기도 애초에 없었다. 이런 능구렁이 방식으로 공팔 예산의 큰덩어리를 빼먹자는 탐욕의 소산으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이것이 아니라도 생활 기반이 넉넉한 그 사람이 하필 여기까지 눈독을 들일 까닭은 없을 것이었다.) 그저 그 나름으로 과의 분위기도 이 일로 나빠졌고 연말이 가까워 오는데 과원들에게도 다만 얼마씩이나마 쥐어주어 궁색한 생활에 보탬이 되면 오죽 조흥랴, 이 정도의 담박한 생각에서일 것이라고 일단은 좋게 생각하고 싶어다. 따라서 이 일을 두고 과장이 악질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싱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김 사무관의 경우는 다르다. 오후 시간 내내 이원영 주사는 다시 곰곰 생각하였다. 워낙 성질이 깐깐한 사람이어서 홀홀히 넘길 사람은 아닌 김 사무관이 이 일로하여 자존심이 상하였다면 그 장본인은 바로 이원영 주삭일 터인데, 어느 새 화살은 과장에게로 옮아져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공무원 제도 속에서 가장 대우에 층이 져 있는 것은 3급 갑류와 3급 을류다, 2급 공무원과 3급 갑류의 대우 차이는 그다지 심하지 않고 3급 을류와 4급 차이도 어슷비슷한데, 유독 3급 갑류와 을류 사이는 명색이 같은 3급인데도 천양지차이로 느껴진다. 봉급 차이는 여하간에 매사의 대우에 있어서도 그렇다. 이 차이가 바로 고급 공무원과 하급 공무원으로 갈려지는 분수령 같다, 이런 소리를 하면서 평소에 김 사무관은 불만이 많았던 터이다. 게다가 과장은 나잇살이나 먹고 매사에 무능해서 벌써 쫓겨났어야 마땅한 사람이고, 그 자리는 당연히 유능한 자기 같은 사람이 앉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오던 터이었다. 따라서 자연 잠재적인 적의도 쌓이고 쌓였던 것이어서, 이번 일을 두고도 정작 장본인인 이원영 주사에게는, 그까짓 잊어버립시다, 하면서도 과장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싸워 볼 심산임이 역력하였다. '이번의 이 일이 김 사무관의 이러한 불순한 저의에 부지불식간에 이용될 확률도 크다. 결코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이원영 주사는 이렇게 내심으로 다져 두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점점 문제가 간단해지지 않고 실꾸러미 얽히고 설키듯이 복잡해졌다. '우선 문제를 분명하게 제기시켜 보자.' 하고 이원영 주사는 메모지에다 끄적거리기까지 하였다. A, 과장님의 말씀 --- 이원영 주사의 고집은 원칙적으로 옳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과장과 김 사무관의 사이를 갈라놓고 과 분위기를 흐려 놓았다. 글니 직므이라도 이 주사가 고집을 숙이면 모든 일이 봄눈 녹듯이 스러지고 수습이 된다. B, 이에 대한 평가 --- 과장의 생각으 나어느 일면 타당하고 진실이다. 그리고 별로 악의나 저의가 없는 듯하고 호인 냄새가 난다. 그러나 청탁 합음식으로 인생이나 공무원 세계를 깊이 알고 있다고 자처하고 있는 바로 그 점에, 무사주의, 안의주의, 현실 추종주의 등 등의 독소가 숨겨져 있다. C, 김 사무관님의 말씀 --- 이 주사의 그 원칙을 포기한다는 것은 과장님의 현실 추종주의, 즉 악에 다시 휘어든다는 뜻이다. 새로운 기풍은 항상 순조롭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흑종의 저항, 긴장, 희생을 무릅써야 한다. 분위기도 좋고, 새로운 기풍도 일어나고 살 수는 없다. 그러니 끝가지 소신대로 원칙을 밀고 나가라. 자기도 적극 협조하겠다. D, 이에 대한 평가 --- 과연 김 사무관은 패기에 차 있고 새로운 공무원의 자세로서 볼 만한 점은 있다. 그러나 그의 자기 능력에 대한 과신이나 출띵제주의, 야심 등을 고려하고, 더욱이 2급 공무원 3급 갑류 등에 대한 그의 평소의 형태까지를 감안하고, 특히 항상 내심으로 과장이라는 사람을 인간면에서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면서도 능력면에서 경멸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그는 고급의 술수로서 이번의 이 일을 저 나름으로 이용하려 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공산이 다분히 있다. E, 결론 과장 --- 소박하고 호이니. 현실 추종. 속이 무르고 다루기 쉽다. 평점 60점. 김 사무관 --- 야심, 악랄한 저의 있을 수 있음. 독선주의 요 경계. 겉으로 보아서는 원칙에 투철해 있고 패기에 차 있으나 이기주의. 평점 30점의 가능성, 평점 90점의 가능성. 심심한 김에 이런 도식을 만들어 놓으니, 약간 유머러스한 속에서도 사태가 매우 분명히 떠올랐다. 그러면 다음은 이 사태에 자기는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교묘한 방법을 써서 원칙에도 알맞고 현실적으로도 가장 좋은 해결점을 모색할 것인가, 이 문제만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점은 간단치가 않을 것 같다. 참으로 창의성이 요청되는 것은 바로 이 국면에서일 터인데. 오후 시간 내내 이원영 주사는 메모지에 이런 도식까지 그려 내며, 모든 사무를 젖혀 둔 채 이 일만 생각하였다. 어떤 일이건 한 가지 일에 몰두하여 그 일에 결판이 안 나면 못 참는 약간의 촌놈의 성격까지 곁들여, 우직해 보일 만큼 골똘하였다.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그는 그 메모지들을 여러 겹으로 접어서 안포켓에 넣고 사무실을 나서다. 혹시 어떤 힌트는 나올지 모르니, 시골서 올라온 아버지에게 의논을 할까 작정하엿다. 그러나 어비지인들 시골에서 유지 노릇이나 하면서 달콤한 낙관주의와 안이한 자세가 젖어들어 있다. 현 당국의 하는 일은 무작정하고 다 좋고 다 의욕적이고 구정권과는 달리 일을 해 볼 자세가 서 있고, 그러니 매사가 다 훌륭하고 공무원들도 모두가 국민에 대한 봉사 정신으로 철저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늙어서 그럴까. 젊었을 쩍에는 그렇지도 안항싶는데, 사소한 한 가지로 매사를 수월히 규정해 버리고 쉽게 감격을 하는 습성이 붙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어버지는 어느 새 아들의 단벌밖에 없는 파자마를 입고 손자 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 무습이 웃음을 자아내었다. 며느리가 입으라고 주었는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아들에 가까워지고 싶고 아들의 살결에 닿고 싶은 욕심에서 주워 입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버지도 아들의 피시시 웃는 것을 보자 늙은이답지 않게 조금 수줍어하더니, "어째 이놈의 옷은 편편치가 못하구나. 통이 좁아서 답답하군. 이걸 어떻게 늘 입고 있느냐." 이런 싱거워빠진 소리를 한 마디 하고는, "이놈도 지 아비로 보는지, 네 옷을 입으니까 오줌을 안 싸는군." 하였다. 맞상으로 부자가 저녁을 먹고, 아버지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잠시 밖으로 산보나 할란다 하며 자리를 비켰다. 아마도 아들이 저 있는 데서 담배를 못 피울 터이니, 눈치껏 담배 피울 틈을 내준다는 속셈인 듯하였다. 이원영 주사는 비시시 쓴웃음을 흘리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마누라가 귓속말로, "간밤엔 어느 편이 아버진지 어느 편이 아들인지 분간이 안 섭디다." 하던 소리를 새삼 떠올린 것이다. 서울 아들네 집에 올라온 아버지의 달뜬 기분도 첫날뿐이지, 하룻밤을 자고 나더니 시골에서의 아버지 버릇이 되살아난 모양이었다. 아버지인들 감밤의 일이 종일 쑥스럽고 우습기는 했을 것이다. 더러 어쩌다가 체모 차리지 않아도 좋을 만한 자리에서 들어 본 서울 라디오 방송의 희극 장면 같은 것을 스스로 해낸 느낌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어떤 곳에서나 마음껏 기분을 내려고 들면 체모나 위엄 같은 것은 대번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우스운 거승나 간밤에 술을 마시면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담배를 피웠었는데, 지금 새삼스럽게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골 버릇은 저렇게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마누라가 부엌 문을 배시시 열면서 속삭이는 소리로 물었다. "아버님은 어디 나가셨수?" "아마 근처에 산보 나가셨나 보우. 내가 담배를 못 피울 것 같으니까." 마누라는 어안이 벙벙한 듯, "애개, 간밤엔 마주안아 잘만 피우시더니, 담뱃불을 마주 붙이기도 하시면서." 하였다. "그러니까 주책이라는 거지. 아버지가 주책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촌 버릇말이여." 마누라는 다시 씽긋이 웃고 부어 문을 한 손으로 잡은 채, "참, 이상도 하시다, 시아버님이나 당신이나." 하고는, 이런 남자들 세상이라느 것, 부자지간이라는 것이 개운하지 않는 모양으로, 무슨 소리르 할 듯 할 듯하다가 가만히 부엌 문을 도로 맏았다. 이원영 주사가 담배 한 대를 거의 피우는데,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면서 다시 들어섰다. 아들도 화닥닥 담뱃불을 비켜 껐다. 아버지가 그런 식이면 아들도 이런 식이라고 분명히 작저애나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다시 들어와 안자, 비로소 아들은 몇 겹아로 접어진 양면 괘지를 내밀었다. "아버지 이것 좀 보십시오." "그게 뭔데?" 하면서, 아버지는 재봉침 서랍에 넣었던 돋보기를 꺼내 썼다. 다 읽고 나서는, "사무실에 무슨 문제가 있냐?" 하고 또 물었다. 그제야 이원영 주사는 대강의 일을 간추려서 설명을 해 드렸다. "음, 문제가 간단치는 않구나. 요즘 중앙 관청에도 그런 사람이 아직 남아 있는가?" 하고 아버지는 잠시 생가겡 잠기는 표정이다가, "일이 거 매우 난감하고 까다롭구나. 허지만 그냥 어물어물 넘길 성질은 아니고, 문제를 아예 완전히 양성화시켜서 다시 과 회의를 소집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다.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한 과원 한 사람 한 사라므이 자세도 더 분명히 나올 듯하구. 너는 모든 것으 로안전히 털어놓고 다 얘기를 해서 문제를 제기시키구. 일단 그렇게 해서 아주 양성화시키고 나면 그 다음에 무슨 해결이면 해결, 실마리가 열릴 것 같은 생각도 드는구나." 이원영 주사도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하곤, "정말 아버지, 이번에 잘 올라오셨군요." 거듭 지껄이었다. 역시 늙은이라고 덮어놓고 얕볼 것이 아니라, 나이 든 사람들의 생각이 원숙한 구석도 있는 것 같았다. 16 이튿날 오후 이원영 주사는 직속 상관 격인 구 사무관에게 일과 시간 후에 과 회의를 또 소집했으면 하는 의향을 비췄다. 구 사무관은 안경 너머로 약간 의아해하는 눈초릴르 번뜩였다. 사실 과 회의는 주로 과장의 뜻으로 소집되는 일이 관례였지, 이런 일은 없었던 것이었다. 구 사무관은 무슨 일이나 틀에 박힌 일은 안심을 하지만 이렇게 유별나고 특별한 경우는 자기 단독의 재령으로 처리할 줄을 모르는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술 먹기 좋아하고 부하에게 까다롭지 않고 어디서나 호인 대접 받기만을 좋아하고 자기가 얼마나 높은 사람 티를 안 내는가, 간부로서 얼마나 소타라고 털털한가, 얼마나 위인의 스케일이 큰가하는 것을 음으로 양으로 시위를 하는 것이어서, 무슨 일이건 까다롭고 꺼끄러운 일은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과 회의는 바로 어제 그저께 하지 않았소. 과 회의는 또 소집해서 무얼 하게요?" 구 사무관은 어이없다는 듯이, 머엉한 얼굴로 되물었다. "허지만 그저께의 회의가 계장님도 보다시피 전혀 결론이 없이 끝나지 않았습니까." "......" "그 책임의 일단은 저에게 있는 것 같고, 아니, 일단이 아니라 전적으루 저에게 있는 것이고요." "......" 비로소 구 사무관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슬쩍 어렸다. "그리고 사실 따져 보드래도, 그 일이 그냥 이렇게 얼버무려져서 사장되느니 보다는, 어떻게든 결판을 내야 않겠습니까. 저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에." 과 회의를 다시 소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노라고 하였다. '이제야 할 수 없이 양보할 셈이로군. 양보하지 않으면 전들 별수 있을라구.' 구 사무관도 이렇게 제 멋대로 또 생각하는 모양으로, "일찌감치 그렇게 나올 것이지. 그럼 과장님과 의논해서 소집하도록 가밑시다. 애시당초에 그렇게 나올 것이지." 하면서 싱글벙글하였다. '일찌감치 그렇게 나올 것이라니, 떡 줄 사람 생각도 않는데 이건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로군.' 하고 이원영 주사는 히죽이 웃으면서, '이 악독하게 놀지도 못한 호인으로만 빠진 작은 너구리야.' 하고 마음 속으롱 가얼거렸다. 사실 구 사무관 같은 사람은 관리치고 드문 편이어서 구세대 축에 속할 것이다. 관리길에 들어서 행세할 수 있는 제 권한을 행세 못 한 것도 병신에 속할 것이가가 재래적인 태반의 관리는 생각할 것이지만, 구 사무관이야말로 그런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불쌍하기까지 한 사람이다. 관리길에 들어 있으면서 관료주의를 혐오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위인이 어느 모로나 관료주의적일 수가 없는 데서 그런 것이다. 과장의 무사주의, 안일주의, 적당주의는 그 나름으로 약은 구석이라고 있지만, 구 사무관의 그것은 실속도 전혀 없고 둔탁하기 짝이 없다. 호인 소리만 들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투이고, 국물 먹는 것도 제 소견으로는 못 먹고 남이 먹던 찌꺼기 같은 것이나 얻어먹는 격이다. 그러면서도 자기 딴으로는 어지간히 결백한 공무원 축에 들고, 그닥 유능하지는 못하지만 악질 공무원보다야 열배 백 배 낫다고, 자기야말로 백을 쓰지 못하고 웃사람에게 비위를 맞추지 못하여 씁급을 못 한다고 믿고 있고 어디서나 그렇게 지껄인다. 스스로는 관리다운 관리 행세를 제대로 못 하지만, 누구라도 그런 자기를 선망 섞어 대접해 주면 폭발적으로 감격을 해 버리는 것이다. "3급 을류면 어떤지방에 내려가면 군수지, 군수. 경찰로 치더라도 경찰국장과 맞먹지." 일반 사람들은 사실 이런 식으로 얘기해야 3급 을류라는 직위의 분수를 실감있게 알아 줄 터이다. "허지만, 우리야 뭐 빽이 있나, 남들처럼 평소에 잔 정치를 하나, 그야말로 실적 본위로 밀고 나왔지. 뭐니뭐니 해도 이게 최고야. 상관들에게도 매사에 정정 당당하게 나갈 수 있고 말야. 빽 믿고 들어온 자들은 사실 같은 3급 을류라도 우리 같은 사람 앞엔 한풀 죽게 마련이거든." 이런 희떠운 소리를 들어 주는 부하들이 원체 또 그렇게 그런 사람이라, 마음껏 호기를 부릴 수 있는 것이었다. 입끝으로는 관료주의와 관리 티를 가장 혐오한다고 하면서도, 누가 자기를 그런 쪽으로 대접해 주기만 하면 갑자기 관리 행세가 하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이다. "시굴 가면 군수나 경찰국장이야. 이거 함부루 보지 말라구." 농담처럼, 그런 전혀 농담만도 아니게 이런 소리를 하면, 이 사람의 이런 희떠운 소리르 열심히 들어 줄 사람이야 보나마나 그렇고 그럴 부하들이어서, 이런 구 사무관과 호형 호제하는 사이로 지내는 것을 대견하게 여기는 표정들을 짓는다. 이러면 구 사무관은 더욱더 이런 식으로 관리 행세가 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런 경우의 그의 관리 행세란 엄살이나 푸념이기가 쉬웠다. 자기는 너무 정치를 못 한다느니, 자기는 곧 죽어도 남들처럼 일과 시간 이외에 상관 집을 찾아보가 일이 없다느니, 일과 이외의 일로서는 아무리 장관이라도 넌 너, 나는 나로 1대 1이라거니, 자리가 자리라 못 하는 소리가 없다. 그러나 사실은 구 사무관이라는 사람은 국장이나 차관이 과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면 지레 얼어 버려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나이 사십이 가까운 사람이 보기 민망할 정도로 쩔쩔맨다. 그는 황해도 은율의 큰 지주 집안에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장손으로 호강, 커가면서도 일찍부터 요릿집 행각을 했다고 한다. 어느 상업 학교를 나오고 일본에서 전문 학교를 다녔다고 하지만, 집에서 부쳐 주는 돈으로 동경 하숙방에 자빠져서 공부합네 하고 있다가 종전을 맞이하였다. 종전 후, 고향으로 돌아와, 일본 물깨나 먹었다고 시골 바닥에서 주착없이 뽐을 내기도 했지만 곧 토지 개혁으로 몰수 바람을 맞아 월남을 하였다. 그 뒤로도 이렁저렁 몇 년을 견디다가, 부산 피난 시절부터야 본격적인 고생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민 방위군에 들어갔다가 나와, 아는 사람 편으로 8240부대인 줄을 모르고 들어갔다가 팔자에 없는 낙하산까지 타 보았다. 물러빠진 그 사람이 그런 특수 부대에 있었다는 것도 좀체로 곧이들리지 않았다. "거기서 나도 세상이 대강 어떤 것인지 알 만큼은 고생을 한 셈이지. 하하, 그때 일은 정말." 술어가나 한 잔 들어가면 직원들 앞에서 열을 내어 그때 얘기를 하고는 한다. 그러나 그렇게 고생을 했다면서도 여전히 사람이 무르고 호잉나이었다. 한때는 소설을 써보겠다고 몇 년 동안 계속 현상 응모 혹은 추천 응모에 내보았지만 번번이 미끄러져 그것도 집어치우고, 지금도 완전히 미련을 끊지는 못하여 몇 개의 문학지는 계속 매달 사 보고 있다. 그리고 내심으로 과장이나 김 사무관이 문학 예술면에 전혀 교양이 없는 것을 은근히 경멸하곤 한다. 뭐니뭐니 구 사무관의 진가는 술자리에서다. 봄이나 가을날 하루 잡아서, 과원 전체가 교외로 소풍하는 날이 바로 오랜만에 그의 진가를 발휘해 볼 더없는 기회였다. 자기가 얼마나 호탕한가, 사무실 속에서는 비록 모든 아니꼬운 꼴을 참고 있지만, 넓은 대자연에 일단 나오면 자기가 얼마나 남자답게 잘 노는가, 지난날 얼마나 큰 요릿집 작은 요릿집 수없이 드나들었겠고 돈을 뿌릭 가다녔겠는가, 미루어 헤아릴 수 있지 않는냐고 기고 만장해지는 것이다. 지난 봄 어느 날 정릉에 갔을 때도 그랬다. 정종 몇 병에 이학 도시락을 장만해 갔는데 골짜기에 도착하자 근처의 그렇고 그런 술 따르는 여자를 현지 조달하여 비로소 발휘되는 구 사무관의 실력은 과연 알아볼 만하였다. 능라도타령, 조선팔경, 양사도, 정선아리랑, 수심가, 그뿐인가, 옛시조, 무가, 그런가 하면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비롯한 최근의 유행가, 그 다음에는 술이 더욱 오르자 일본 노래가 쏟아져 나오는데 이건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일본 노래도 유행가뿐만 아니라 꺼이꺼이 소리를 내고 꼬리를 길게 뽑는 옛노래까지 척척이었다. 과장 이하 김 사무관에 전 과원이 온통 혀를 내둘렀던 것이다. 구 사무관은 더욱더 기가 나서, "이것 봐, 미스터 리, 이 구가가 지금은 이 꼴 됐지만 이렇게만 보지 말라구. 왕년에는 말이지......" 운운하며, 여자를 끌어안고 한국춤 서양춤까지 다 추고, 과 놀이는 가안전히 구사무관 혼자의 놀이였고, 과장 이하 과원들도 구 사무관 혼자 노는 것을 구경만 해도 충분히 유쾌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저녁 나절에야 모두 헤어졌는데, 취한 구 사무관은 끝내 그 현지 조달한 여자를 따라가가 쓱싹한 모양이었다. 이튿날 아침 느지막이 나온 구 사무관은 씨익 웃으며 과장에게 인사하고, 김 사무관에게도 머리를 한 번 끄떡하고는 제자리에 가 앉아 세상이 다시 재미없어진 듯이 잔뜩 상판을 찡그리고 있었다. 어제 그렇게 호탕하던 기운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맥이 풀려 있는 그 모양은 누가 보나 처량하고 불쌍한 마흔이 넘은 사무관이었다. 구 사무관은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일과 시간이 거의 끝날 즈음이 되자, 구 사무관이 옆의 과장에게 잠시 쑤군 쑤군하였다. 과장이 구 사무관의 얘기를 들으면서 머리를 끄덕이고 이원영 주사 쪽으로 한 번 눈길을 보내었다. 과장도 구 사무관과 같은 생각인 모양으로 희색이 만면에 떠 있었다. 그러나 구 사무관이 여간 지루하게 지껄이자 과장은, "알았쉬다. 그렇게 합시다." 딱 잘라 말하고는, 저쪽 옆의 김 사무관에게도 평소처럼 나지막하게 물었다. "시간 끝난 다음에, 김 사무관 별일 업겠지요?" "네 없습니다." 김 사무관이 약간 얼굴이 굳어지면서 대다하였다. 그러자 과장이 선언하였다. "여러분, 일과 끝난 뒤에 과 회의를 소집합니다. 요전날 회의는 필요 이상으로 신경들이 날카로와졌었는데 그것을 풀겸 겸사겸사해서......" 하고는, 또 한 번 이원영 주사를 향해, 자기의 뜻을 잘 받아 주어 고맙노라는 뜻의 웃는 눈짓을 보내었다. 이원영 주사는 약간 난처하였다. 17 구 사무관의 말을 듣고 과장도 철석같이 그렇게만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건 이원영 주사가 양보하려는 것이다. 전날 과장 자신이 한 말을 곰곰 생각하고 저만 양보하면 과 분위기가 다시 정상으롤 로아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고집을 수그러들려는 것이라고만 믿고 있었다. 과장은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 금년 크리스마스에는 자기 집에 초대를 할 테니 전 과원이 같이 밤샘을 하면서, 구 사무관의 재주만 구경할 것이 아니라 과원들 각자의 실력을 겨루고, 상품을 걸어 그런저런 놀이도 하자는 소리까지 하면서, "구 사무관이 아직 최신식 재즈만은 못 하지. 금년 크리스마스까지는 그것까지 마스터하도록 과업을 주어야겠군. 어떻소! 여러분." 이런 소리도 하였다. '꺽다리' 김 주사가, "그리 되면 뻔합니다. 우리가 놀아 볼 틈은 안 주고 또 구 사무관 혼자 독판치고 우린 구경이나 하게 되기가 십상이지요." 하자, 또 과장이, "비결이 있지, 그렇게 안 될 비결이 있어. 구 사무관이 잘 노는 것은 꼭 여자가 끼여 있을 때거든. 여자만 없으면 맥이 빠진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얘기가 이런 방향으로만 나오기 시작하면 대번에 구 사무관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흥분을 하는 것이었다. 구 사무관은 거의 침을 튀기면서 말하였다. "에이, 과장님도 참. 하긴 말이야 바른대로, 여자 없는 술은 그거 무슨 맛으로 먹습니까. 우린 그런 자리는 처음부터 불참이에요, 불참." '꺽다리' 김 주사가, "거 과장님, 괜히 털어놓았습니다. 구 가장아님이 안 나오신다면 무슨 멋으루 밤샘을 합니까." "하하, 김 주사는 저렇게 순진하거든. 아무려면 내 얘기를 그래, 그렇게 고지식하게 받아들여. 내 원 사람 참! 아, 키 큰 사람 싱겁다는 소린 들었지만, 저렇게 순진하다는 소리는 아직 못 들었는데." 과원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것이 이를테면 과장이 얘기하던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과 분위기라는 것인 모양이다. 이원영 주사는 이렇게 생각하며 전혀 말참견을 하지 않았다. 김 사무관도 전혀 말참견을 않고, 석간 신문만 보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 과장은 한참 동안 이런 얘기를 벌이다가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어? 벨 울렸소? 시간이 넘었군." 하였다. "조금 전에 울렸습니다." '꺽다리' 김 주사가 받고, 그러자 과장은 약간 굳어지면서 말하였다. "자, 그럼 이제부터 회의를 소집하기로 하지." 김 사무관이 보던 신문을 놓았다. 갑자기 구 사무관은 어릿어릿하는 얼굴이 되면서 일어섰다. "가만, 안건은 요전날도 설명을 해서 여러분도 잘 아시는 일이어서,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하고는, 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다가 과장에게 속삭이는 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할까요. 우선 이 주사에게 얘기를 시킬까요?" "그럽시다." 하고, 과장의 말이 떨어지는 등 마는 등 하는데 공교롭게도 문이 열리며 차관과 국장이 들어섰다. 과장도 당황을 하면서 일어섰다. "아직도 앉아들 있군. 시간이 넘었는데." 차관이 혼잣소리 비슷이 말하였다. "과 업무 분담 때문에 마침 과 회의를 하던 참입니다." 과장이 둘러 대었다. "그래요? 그럼 계속하슈, 나도 좀 구경도 할 겸. 그것도 재미있는 아이디어로군." 아이디어라는 소리를 하도 잘 써서 아이디어 차관이라는 별명까지 갖고 있는 차관이 빨느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과장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얼굴이 조금 붉어지면서 망설이는 눈치다가 조금 전의 얘기를 계속하는 시늉을 내며 지껄였다.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그러니까 업무 분량의 다과도 다과지만 그 질에 대한 평가도 문제인 것 같은데." 이렇게 갑자기 허두는 꺼냈지만, 과장도 자기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수가 없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하여간에 이때까지 지나 온 걸 대강 평가해 보면 서무를 맡은 이 주사가 어느 모로 보나 가장 모범적인 것 같습니다. 대개는 업무가 좀 많아 보이면 지레 겁부터 집어먹고 있는데, 정작 대들어 해 보면 별로 많은 일도 아니거든요. 결국은 자세와 생각 먹기에 달렸어요. 원래가 우리 과 일이라는 것이 직접적인 대민 사업이 아니어서 늘 고정되어 있고 일정한 것인데, 이럴수록 무사 안이주의와 매너리즘이 머릴르 들 소지가 있는 겁니다." 차관이 저쪽 문 앞에 기대어 서서 머리를 두세 번 끄덕였다. 그것을 본 과장은 더욱 흡족해진 모양으로 얼굴빛이 상기되면서 다시 한 번 그 말을 되설명하였다. "무사 안이주의는 일이 폭주하는 곳에서는 움틀 겨를이 없는 것이지요. 어느 정도 한가하고 노상 그날이 그날인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겁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과가 그렇습니다. 이런 회의를 주기적으로 소집하는 이유도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럴수록 긴장감을 항시 늦추지 않기 위한 방편의 하나입니다." 여기까지 듣다가 차관과 국장으 나싱거워졌는지 문을 열고 도로 나갔다. 과장은 피시시 웃었다. 과원들도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숨을 죽여 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과장은 이러는 것이 약간은 제 체모에 관계된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쇼를 했군. 갑자기 할 얘기가 있어야지. 여러분들도 이런 일은 적당히 양해해 주시오." 하고는, "자, 그럼 다시 시작합시다." 하였다. 구 사무관의 눈짓으로, 드디어 이원영 주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일어서서 잠시 말을 꺼내지 않고 간을 두었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방금 겪은 일을 두고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습니다마는, 과연 이게 웃어야 하는 일일까요. 저는 불쾌합니다." 그는 과장 쪽을 똑바로 건너다보았다. "물론 저도 그렇게 된 순간적인 어절 수 없는 사정이야 모른느 바 아니지마는. 저는 본래부터 이렇게 생겨먹은 사람이고, 또 이런 저의 분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씁닐다. 이걸 전제로 깔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저는 일과 시간이 끝난 직후에 과장님이 하신 말씀도 불쾌하였습니다. 그런 것이 왈 정상적인 과의 분위기라고 생각하신다면 저는 그런 분위기를 탐탁히 여길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하겠습니다. 대강 이렇게 말씀드린다면 이제부터의 저의 얘기 방향도 대강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저는 모든 것을 여러분 앞에 낱낱이 드러내 놓고 여러분의 양심과 양식에 호소하여 과연 우리가 그 일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겠는가를 토의에 부쳐 보려 합니다." 과장은 너무나 뜻밖이어서 구 사무관 쪽을 쳐다보았다. 구 사무관도 과장으 띵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미 침착하게 지껄여 나가는 이원영 주사를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김 사무관도 무슨 말이 나오려는가 하고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화닥닥 바로 앉았다. 그리고는 대번에 온몸에 뿌듯하게 열이 오르는 듯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과장 쪽을 슬그머니 곁눈질로 쳐다보고는 일순 씁쓰름한 미소가 어리다가 스려졌다. 과원들도 너무 뜻밖이어서 과장과 구 사무관, 김 사무관, 이 주사를 번갈아 건너다보면서 잔뜩 긴장을 하였다. 이원영 주사의 얘기는 그렇게 첫 허두부터 모든 사람을 단숨에 휘어잡을 수 있게 고압적이었다. "그럼, 그간의 사정을 간단 명료하게 제기해 보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추호도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사태를 사태대로 똑바로 냉정하게 볼 뿐입니다. 이미 요전날 구 사무관께서 말씀하셔서 여러분은 공팔 예산건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문제으 가발단은 여기서부터지만, 깊이 파로들어가면 문제는 여기에만 그치지 않고 본질적인 것이 그 속에 있음으 띵알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려서, 그 예산을 쓴다, 안 쓴다는 문제는 둘재로 하고, 그 이젠에 가려져야 할 문제는, 과를 통솔해 나가시는 과장님의, 과장으로서의 일상적인 생각에 잘못된 점이 있다는 가서이 이 일을 기회로 확실히 드러났고, 한편 기 링사무관은......" 이원영 주사의 눈길이 김 사무관 쪽으로 가자, 김 사무관은 놀란 토끼마냥 화닥닥 머리를 들었다. 이원영 주사는 그냥저냥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말하였다. "김 사무관은 더욱 비겁한 점이 노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과장님의 재래적인 안지우의, 무사주의, 자기 능력 과시주의, 요컨대 자기만의 출세 주의로서 더욱 경계할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그 능력을 지나치게 과장할 때 생기기 싶가하는 부작용은 더 무서운 독소일 것입니다. 여러 분은 김 사무관이 항상 업무 처리와 능력면에서, 그리고 실력면에서 과장님과 구 사무관을 경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철저히 규명되고 파헤쳐지고 피차에 반성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구악과 신악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격이 될 것입니다." 김 사무관은 낯색이 창백해지면서 의자 뒤로 등을 기대고 있다가 발작적으로 일어서면서 지껄였다. "가만, 중지하시오." 그러나 이원영 주사도 비싯 가웃으면서 게속하였다. "바로 저런 점이야말로 과장님의 무사 안이주의, 적당주의에 대응한 신악의 정체입니다. 좋습니다. 김 사무관이 얼마든지 대항해 온다면 이 점에 관한 한, 저는 정부 전 기구의 공무원 전체를 동원하여 누가 옳은가 나쁜가를 토의에 부칠 용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 언론 기관을 동원해서 토의할 용의도 있습니다." 김 사무관은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저는 분명하게 다시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같은 과의 같은 가족입니다. 그리고 바로 민주주의 치하의 공무원들입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관계는 근본적으로 따뜻한 관계이어야 합니다. 제가 지금 하는 얘기도 그것을 전제로 하고서의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철저히 파헤칠 권리가 있고, 본인들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것을 일깨워 주어서 반성시킬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방금 말한 과장님과 김 사무관의 특징들을 이미 익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타성에 사로잡혀서 제기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제가 다시 하나하나의 데이터를 들어서 근거를 밝혀 보겠습니다." 여기서부터 이원영 주사는 유머까지 섞어 얘기를 끌어 나갔다. 그러나 유머 속에도 신랄한 관찰이 번뜩이고 있었따. 모든 엄숙한 얘기, 험한 얘기란 처음에만 엄숙할 뿐이지, 조금 시간이 지나면 차츰 그 모서리가 무디어지게 마련이다. 과장이나 김 사무관도 처음에는 굉장히 충격을 받는 듯하였으나, 이 주사의 얘기가 길어지면서 차츰 노기도 덜어지는 굉장히 충격을 받는 듯하였으나, 이 주사의 얘기가 길어지면서 차츰 노기도 덜어지는 듯하였다. "이 주사의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아니, 일리가 아니라 너무 옳은 말이 돼서 누구나 섣불리 입에 올릴 수 없는 것들이지요." 양 주사가 이렇게 말하고는, 한 마디 아픈 침을 찔렀다. "헌데, 피차의 비판이라는 것은 너무나 솔직해지고 너무나 본질에 철해 버리면, 하는 소리가 옳기는 전부 옳지만, 실제적인 효과는 별로 없고, 듣기에 현란 하기만 한 경우도 없지는 않겠더군요. 이 주사의 오늘 케이스도 그런 케이스가 안 되기르 띵바랍니다. 왜냐 하면 모든 악의 요소는 개개의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보다는 그 기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니까요." 자리는 다시 조용해졌다. 18 이원영 주사가 양 주사의 말에 찔끔하면서 그쪽을 건너다보았다. 양 주사다 그렇게 말해 놓고는 자조 섞어 비죽이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혼자 열을 올리고 그래 보아야 혼자 쇼하는 격밖에 안 되지 않느냐는 이원영 주사에 대한 힐문조도 서려 있었따. 사실 이원영 주사가 거의 웅변조로 문제를 제기해 나가는 데 반해서, 양 주사는 정식으로 언권도 안 빌고 그냥 자리에 앉은 채 팔굽을 책상 위에 올려 두손으로 턱을 받치고 나지막한 소리로 지껄인 것도 여러 모로 대조적이었다. 더구나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저 그렇게 홀려 듣기만 할 말이 아니요, 한 마디 한 마디 깊은 암시에 차 있음에랴. 이때까지 이원영 주사 독무대였던 회의가 일순간에 다른 양상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원영 주사는 남의 트집이나 끄집어 내기 좋아하고, 혼자 똑똑한 체나 하는 사람으로 내비치고, 어느 구석인가 대번에 천덕스러워 보이기까지 하였다. 과 안은 다시 양 주사 쪽으로 관심이 모아지며 조용해졌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양 주사는 시덥지근하게 웃으면서, 그 이상은 할 말도 엇고 이런 쓸데 없는 회의일랑 집어치우고 어서 퇴근했으면 좋겠다는 듯이 씽얼씽얼 웃으면서 또 말하였다.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하고 싶은 얘기만 한 마디 했을 뿐이지요. 흔히 토론이라는 건, 서로 똑똑한 것을 시위나 하기 쉽고 말꼬리나 잡고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그것과는 관계 없이 현실이라는 건, 혹은 비근한 예로 공무원 사회 공무원 기구 그 자체라는 것은 끄떡없는 것이 아닙니까. 문제의 본질은 거기에 있는 것이겠지요. 어떤 유형의 공무원이 있다 할 때, 그런 유형이 나오게 된 원인을 따져 올라가면 그 사람 자신에 문제가 있기보다는 여러 가지 외적 조건에 있는 것을 흔히 보지 않습니까. 사실 누구나 어떤 직업에 들어가서 세월이 흐르면 그 직업 특유의 때가 묻게 되는 것이지, 신선하고 순수한 자기를 유지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도리어 그런 사람은 병신에 속할 것입니다." 과장을 비롯하여 과원들이 하나같이 비시시 웃음을 흘리었다. 양 주사의 이 말은 이원영 주사를 빗대고 한 소리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 이원영 주사 쪽을 건너다보자, 그는 슬그머니 자리에 주저앉았다. "허지만." 양 주사의 말은 게속되었다. 여느 때나 바둑이나 두고 혹은 막걸리나 마시고 약간 익살풍으로 돌아가기나 하던 사람이었는데, 일단 이렇게 말을 하기 시작하자 나지막한 목소리가 청산 유수로 흘러 나왔다. "허지만, 제 얘기는 꼭 이 주사를 빗대고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해 마십시오. 그렇긴커녕 도리어 저는, 평상시 이 주사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아기너 솔직한 말입니다." 또 농담으로 받아들일까 보아선가, 여기서 양 주사는 조금 근엄한 얼굴을 하였다. "이 주사가 제기한 문제는 물론 의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허나 조금 전의 제 얘기에 비추어 본다면, 이런 회의 열기보다는 차라리 제각기 막걸릿집에 가 앉아서 방귀나 뀌고 있는 편이 낫다는 뜻이겠는데." 과 안은 또 왈칵 웃음이 터졌다. "제 이 말도 물띵론 극단론이지요. 그러나 여하간에, 인력으로 해 볼 데까지는 해 보아야 않겠습니까. 이렇고 이러니 아예 그만두는 편이 낫다, 이런 생각은 독이지요, 독.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고, 지나치게 똑똑한 놈보다는 조금 어수룩한 편이 낫다는 소리도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겠지요. 가만, 이러고 보니까 결론이 안 나는군." 과원들은 또 웃었다. 이원영 주사도 처음에는 양 주사의 말에 찔끔하면서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오려 낸 듯이 생각하였지만, 양 주사가 여기까지 지껄이자, 자기대로도 다시 할 말이 생겼다. 이원영 주사는 과원들이 웃는 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물론이지. 그런 유의 발상으로는 결론이 나지 않을밖에요. 사실은 저런 태도야말로 가장 타기해야 할 요소일 것입니다." 이원영 주사는 다시 벌떡 일어섰다. "양 주사의 말은 물론 부분적으로 옳고 부분적으로 그럴듯합니다." "내 말만 그런 게 아니지, 모든 사람 말이 다 그럴걸. 지나가는 거지 얘기도 부분적으로 옳고 부분적으로 그럴듯할걸." 양 주사가 앉은 채 이렇게 받자, 과 안은 또 웃음소리가 번져 갔다. 이제 과원들은 양 주사가 무슨 말만 하면 으레웃어야만 할 소리거니 하고 생각하는 듯하였다. 이원영 자삭 한 손을 들어, 양 주사를 가리키면서 소리질렀다. "양 주사, 당신 지금 재담 하고 있는 거요? 당신은 스스로 굉장히 머리가 좋다고 자처하는 모양인데, 똑똑이 아시오. 당신은 지금 매일매일 이 과로 출퇴근을 하는 주사라는 걸 아시오." 양 주사도 일순 찔끔하는 표정이다가, 다음 순간 씁스름히 웃으면서 받았다. "누가 할 소릴 누가 하시는군. 이 주사 당신은? 지금 한 얘기는, 그냥 고대로 이 주사에게 돌려 드려도 되겠는걸. '당신은 스스로 굉자히 머리가 좋다고 자처하는 모양인데, 똑똑히 아시오. 당신은 지금 매일매일 이 과로 출퇴근을 하는 주사라는 걸 아시오.' 과장이나 계장의 흠점을 전 과원 앞에서 과 회의라는 명목을 빌어 운운하는 것이 바로 그런 행세지 뭐요.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 "......" 이원영 주사가 다시 주저앉아 급하게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비로소 양 주사는 약간 숙연한 표정이 되며 흡사 이 속에 아무도 없고 이원영 주사가와 단둘이 있기나 한 듯이 나지막하게 지껄였다. "이 주삭, 지금 내가 하는 소리는 이 주사에게 하는 소리이기보다는 일종의 자조, 자기 조소일 거요. 발악이요. 실은 나는, 이 자리에서, 이 쓰레기같은 자들만 모여 있는 속에서, 가자 호감이 가고 가장 유대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이 주사, 당신이라는 걸 아시오. 그러나 나는 내가 못 하는 것을 당신이 한다는 데 선망 겸 질투 같은 걸 느끼고 자학 같은 것을 느끼오. 내 말은 일종의 궤변이고 쓸모없나나 사설일 뿐이요. 내가 당신에게 지금 하는 말은 적의라기 보다는 그 반대의 역설적인 표현이라는 것만 아시오. 어떻든 내가 못 하는 것을, 당신은 하고 있지 않소. 중요한 건 그거요. 다시 계속하시오. 그새, 방해를 해서 미안하오." 과 안은 그 나름으로 다시 숙연해지며 조용해졌다. 과장은 어찌했으면 좋을는지 몰라 그저 멍하게 구 사무관을 쳐다보고 있고, 구 사무관도 똑같이 멍한 표정으로 과장을 쳐다보고, 과원들은 양 주사와 이 주사와 과장을 번갈아 쳐다보고, 김 사무관은 의자를 바싹 앞으로 잡아당겨 앉아 이 주사와 양 주사 쪽을 뚫어져라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도 조금 전에 이 주사에게 공격을 받던 때의 흥분이 사그라지며 차츰 두 사람에게 그 어떤 연대 의식 같은 걸 느껴 가고 있었다. 양 주사가 다시 게속하였다. "말이란, 언어란 것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얼마든지 사태를 호도하고, 진실을 흐려 놓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왈 재주라는 것이고, 흔히 있는 얇삽한 인텔리들이라는 자들의 전매 특허가 아니겠소. 그들은 항상 적당히 말재주나 부리면서 그때그때의 상황이나 사태에 교묘히 적응을 하고, 혹은 그래야 할 때는 자기만 교묘하게 빠져나가곤 하지요. 사실 솔직한 얘기로 공무원 사회뿐만 아니라, 이 바닥을 원천적으로 뒤덮고 있는 체념과 매너리즘의 풍조는 그 근본을 따져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뿌리가 깊어지는 것이지요. 아무리 진지하게 대어들려는 사람이라도 어느 대목에서 중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고, 바로 그때부터 그의 타락, 상황에의 적응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까. 옳은 일을 하려면 철저하게 옳거나, 그렇지 않고 어중간한 것일나면 애초에 집어치는 것이 낫다, 난 이렇게 생각했었지요. 그 다음에 남는 것은 뭡니까. 기계가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모든 일이, 모든 사람이, 우스워 보이지요. 자기 까지도 우스워 보이지요. 의욕 상실증, 창의성 기피증, 이럭저럭주의, 이런 것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는 거지요. 요컨대 문제를 파헤쳐 보려고 일단 메스를 들어 보면 고질은 너무도 엄청나다 이겁니다. 이런 경우 그런 절망은 끝내는 서서히 자기도 그 고질 속으로 한데 휘말려 드는 길밖에 없다 이겁니다. 해서, 나의 생각은 개개의 문제는 개개의 문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천적인 점에 문제가 있고, 원천적인 점에 문제아 있는 이상......" 문득 이원영 주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리 쐐기를 넣었다. "지금 양 주사가 하는 얘기가 바로 방금 양 주사 자신이 타기한 인텔리적 관점이 아닐까요. 내 생각에는 역시 사태의 개개의 국면이 더 중요할 것 같은데. 물론 개개의 국면을 하나하나 따져 보면 사그리 썩어 있는 그 국면들을 꿰뚫고 있는 원천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지나친 원천에의 경도는 자칫 공소하게 관념화하고 추상화되는 것이 아닐까. 미리 결론부터 내리고, 그 결론에 맞춰서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 이를테면, 이 바닥은 어차피 썩은 바닥이다, 이런 대전제를 내려 버리면 그 대전제 밑에서 모든 것은 그런 각도로만 내다보이는 것이 아닐까. 바로 그런 점에서 이 바닥에서 가장 섣불리 정망하고 있는 사람들이 소위 인텔리란 작자들이고, 그 사람들의 그런 절망은 곧장 그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 무책임과 개인 향락주의로 나타나고, 날로날로 독물을 퍼지게 하는 것이 아닐까. 얻허게 생각하시오, 양 주사. 우리는 최소한 지나치게 모든 것을 단순화하는 버릇만은 버려야 하라 것입니다. 그때그때 나타난 문제를그 문제 자체에 즉해서 바라볼 줄 아는 습성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온당하고 책임 있게 사는 길이 아닐까요. 어떤 대전제와 선입견, 추상적인 원칙 안목, 이런 것으로 항상 사태를 재단하려고 하는 데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것이지요. 오늘 이 자리만 해도 그렇습니다. 당장 우리의 눈앞에 있는 문제는 우리의 과입니다. 문제를 여기에 한정시킵시다. 우리의 과는 대한 민국 공무원 기구 속의 과이고, 대한 민국 공무원 기구는 이렁러하고, 따라서 공무원 사회는 이러절하고, 대한 민국 사회 풍조 자체가 이러저러하고, 따라서 결국은 모두가 이러저러하고, 이런 식으로 따지지는 맙시다. 그런 속에서는 우리는 백 날 가고 백 년을 가도 우리 자신의 규범을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당장 우리 앞에 엄연히 있는 문제부터 우리 자신의 문제로서 해결해 나가려고 해야 할 것이지, 이러고저러고 다른 문제르 띵혹은 관상적인 원칙 문제 같은 것을 끄집어 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afn론 나라는 사람이 어느 정도는 우직하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세련되기만 한다는 것은 흔히 보듯이 이기주의와 요령주의, 향락주의의 한 속성이 아닙니까. 빤질빤질한 도시인의 그것보다는 역시 우리의 가능성은 우직한 시골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거듭 얘기지만, 양 주사, 우리는 조금은 겸허해집시다. 원천적인 소위 래디컬한 안목은 저 깊은 저변 속에 자기 혼자만의 울 안에 두고, 당장은 바로 앞에 나서 있는 문제에 즉해서 살아갑시다. 사실 저는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썩 자신은 없어요. 양 주사가 말하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인지도 모르지요. 아니, 모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렇겠지요. 그러나 항상 논리적으로 과학 적으로 원칙적으로 철저히 따져드는 것은 가나리적이라는 과학적이라는 원칙적이라는 국면을 더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우리 앞에 있는 현실은 개개로서 완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문제르 분명한 것으로 한정시키는 버릇을 가집시다. 오늘의 회의 앙나건은 공팔 예산의 활용건이고, 그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우리 과에서의 과장님과 김 사무관님과의 미묘한 감정적 대립 관계이고, 그 감정 관계를 이루고 있는 근본 계기가 뭐냐, 여기까지 문제를 한정시킵시다. 이런 일 자체가 쓸모없는 일이고, 객기에 찬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서 살아야 합니까." 이원영 주사의 간곡하도고 절실한 억양은 양 주사뿐만 아니라, 전 과원을 한결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휩사게 하였다. 처음의 웅변조와는 다른 나직나직한 목소리도 나직나직하기 때문에 더 설득력을 지니고 엄숙미를 더하였다. 어느 새, 과장도 주의 깊게 이 주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구 사무관도 마찬가지였다. 김 사무관도 오랜만에 이런 분위기에 접하여 꽤나 감격을 한 듯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사무실 안은 잠시 조용하였다. 창 밖은 벌써 어스름이 퍼지기 시작하여 조용한 과 안에 거리의 소음이 시끄럽게 돋아올랐다. 순간 어떤 곳에라도 삐치기 좋아하는 '꺽다리' 김 주사가 또 씨익 웃으면서 한 마디 하였다.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즉......" 하고, 잠시 간을 두고, "두 사람 말이 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양 주사 말은 양 주사 말대로 옳고, 이 주사 말도 이 주사 말대로 옳고, 그러니까 결론은 결국, 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 다 옳기는 옳은데." 그러자 과장을 비롯해 모두가 일제히 슬렁슬렁 웃었다. 권 주사가 있다가, "김 주사, 주체성을 좀 가져요, 주체성을.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 사람이 옳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저 사람 말이 옳고 한 것은, 결국 주체성이 없다는 뜻이지." 하자, 다시 웃음이 일어올랐다. 김 주사가 일부러 발끈하는 시늉을 하면서 물었다. "미스터 권, 혼자 똑똑한 체하지 말라구. 그럼 권 주사가 한 번 얘기해 보시지. 누가 옳은가, 어느 편이 옳은가 말해 보시지. 미스터 권은 말할 자신이 있소?" "있지, 왜 없어. 우리 유식하지는 못해도 남의 얘기 듣고 판정을 내릴 안목은 있단 말야, 최소한." 하고 권 주사도 장난조를 벗어나며, "말이 기왕 났으니 말입니다만,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이 주사의 말이 옳다고 봅니다. 물론 지금 두 사람이 논전을 벌인, 논전이랄 것도 없지만 --- 문제는, 오늘 가히의의 당면한 안건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져야 할 자세에 있어 꼭 한 번은 철저히 얘기가 되었어야 할 문제가 아닐까, 전 이렇게 생각합닐. 어떤 원칙적 자세의 문제가 거기 있는 듯합니다. 이렇게 비추어 볼 때, 아까 이 주사도, 아는 것이 도리어 병이라는 말을 했지만,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결국은 그것이 그것이고 이것이 이것이다, 지이가 중뿔나 보아야 이 세상에서 별수 있느냐, 거의 유행 사조처럼 되어 있는 이러한 자세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는 것을 정면으로 한 번 따져 본다는 것은 매우 의의 있는 일일 것입니다가. 결국 이렇게 되면, 저느 나그런 문제는 잘은 모릅니다만, 사회 구조 문제가 나오고 체제 문제가 제기되고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나올 것입니다만, 각자는 각자 나름대로 그런 것까지도 생각해야겠고, 의당 생각하고 있겠지요. 그러나 당장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에 즉해서 가려 보자는 태도는 옳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 어? 사회 구조에 체제 문제까지 나오는군. 약간 위험한데." 김 주사가 히죽이 웃으면서 쐐기를 넣었다. 바로 그때 김 사무관이 나서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제가 한 마디 하겠습니다." 모든 과원의시선이 김 사무관에게 일제히 쏠렸다. "우선 제 말씀을 올리기 전에, 미스터 리와 미스터 양의 얘기를 주욱 들은 저의 일반적 소감이랄까, 그런 것부터 얘기하자면, 저는 아시다시피 아직 젊습니다. 해서, 항상 막연하게나마 저 자신을 유일한 역군 비슷이 자처해 온 터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처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었느냐, 지금 생각하는 것이지만 참으로 어이가 없어지는군요. 저로서 이런 유의 토론은 학교 시절 학생 시절에 가져 본 이후는 지금 처음입니다. 저는 항상 학창 시절 같은 그 진지한 자기를 계속 유지해 오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참말로 착각이었다는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는 점, 이 점을 미리 밝혀 두고 싶습니다." 어디서나 늘 자기가 똑똑하다는 것을 음으로 양으로 자처해 오던 것이어서 과원들을 굉장히 신랄한 얘기가 나오리라 은근히 기대했었는데, 그의 허두가 이렇게 길자 약간 실망하는 눈치를 보였다. 더구나 금방 이 주사와 양 주사가 주거니받거이 한 소리가 어지간히 신랄한 소리였기 때문에 더 생채를 발하지 못하였다. 과원들의 이런 눈치를 재빨리 간파한 김 사무관은 여기서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허두 얘기가 좀 길어졌는데, 다시 말해서 이런 종류의 자리는, 매너리즘과 타성에 잡혀 있는 자신의 거울 구실을 가분히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자기가 지금 어느 정도의 지점에 와 있느냐, 어느 정도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내지는 조건의 대세에 휘말려들어 있느냐, 어느 정도로 자기 자신도 미처 모를 이중성을 지니고 살고 있느냐 하는 것 말입니다. 솔직이 말해서 이번 일로도 저는, 처음에 이 주사가 문제를 제기했을 때, 저 자신의 문제를 제기해 쓸 때, 여간 충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평소의 제 성격을 잘 아실 것이지만 그런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저는 아닙니다. 그러나 얘기가 진행되느 사이 저는 실로 저 자신을 오래간만에 내가 아닌 남을 살펴보듯이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두 분의 얘기를 들으면서 말입니다." 그의 말은 여전히 별로 빛이 나지 않았다. 김 사무관 자신도 그것을 느끼는 모양으로 차츰 조바심의 빛이 어리었다. 잠시 그는 간을 두었다가 씁쓰름히 웃으며, "정작 할 얘기가 많은 듯했는데, 어쩐지 잘 안 되는군요. 여하튼 결론적으로 말해서, 저는 이 주사의 저에 대한 지적을 이의 없이 받아들이겠고, 과장님의 그것보다도 저의 그것이 더 큰 해독의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도 전폭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의 극복 방법을 두고도 당장 오늘부터 철저히 강구책을 발견해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였다. 얼핏 듣기에는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형식적으로 하는 소리일 뿐이고 실은 더욱 마음 속으로 꽁하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인상도 없지 않았지만, 딱이 그런 것 같지만도 않았다. 어쨌거나 자신의 약점과 치명적인 결점이 여러 직원들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렸다는 것은 그의 경우에서 웬만한 치욕이 아닐 것이었다. 따라서 썩 기분이 유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잠시 자리는 조용하였다. 그러자 과장이 결단을 내듯이 구 사무관에게 흘낏 눈짓을 하였다. 그 눈짓은, 과장이 이 모든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 하는 것을 여실하게 나타내었다. 폐회를 선언하라는 것이다. 구 사무관이 일어나서, "그럼 더 이상 할 얘기도 없을 것 같고 오늘 회의는 이 정도로......" 입 안으로만 우물우물거리듯 폐회를 선언하려고 하자, "잠깐." 이원영 주사가 다시 벌떡 일어섰다. "과장님께서는 할 말이 없으십니까?" "......?" 과장이 화닥닥 놀라듯이 이 주사를 건너다보며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이원영 주사는 다시 구 사무관 쪽을 향해 말했다. "오늘 저녁 회의는 안건이 분명했던 것으로 아는데, 공팔 예산건을 어떤 쪽으로든 결정지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순간 과장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왈칵 고함을 질렀다. "뭐요, 뭐. 그러니까 그냥 돌려 보내겠다는 거요, 아니면 뭐 어쩌겠다는 거요. 당신부터 분명히 얘기하시오, 얘기해. 국고에 돌려 보내겠으면 돌려 보내겠다, 쓰겠으면 쓰겠다. 어린애들 장난이요, 뭐요. 이 자리가 당신들 유식하다는걸 전시하는 전시장인 줄 아시오. 구 사무관, 폐회하구 일어섭시다. 그리고 그 예산은 국고로 돌려 보내우." 그 단호한 한 마디에 자리는 대번에 험악해졌다. 구 사무관이 어물어물 폐회를 선언했다. 과장은 먼지도 묻지 않은 양복 아래위를 타악타악 털고 바바리 코트를 입으며, "자, 어서들 나가슈, 나가. 오래들 남아 있게 해서 미안하우." 하며, 제일 먼저 문을 꽈다당 열고 나섰다. 그제서야 과원들도 우르르 뒤를 따랐다. 이원영 주사가 창 곁에 서서 내다보니, 벌써 한길에 나선 과장은 택시 한 대를 잡고 있었다. 양 주사가 옆에 다가오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여다. "이형, 나하고 대포나 한잔 합시다." 19 과원들이 우르르 다 나가자, 구 사무관도 자리에서 뜨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김 사무관 쪽을 건너다보며, "김 사무관, 안 나가슈. 나갑시다." 조심스럽게 말하며 문 쪽으로 나섰다. "네, 먼저 나가쇼." 김 사무관은 냉랭하게 받았다. 잠시 후 사무실 안에는 김 사무관과 이원영 주사, 기고 양 주사 이렇게 세 사람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양 주사는 창 곁에 분어 서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이원영 주사 뒤로 바싹 붙어 서 있었고 같이 바깥의 거리를 내다보았다. 늦가을의 썰렁한 거리느 바야흐로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더욱 활기를 지니고 갑자기 때나 만난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새끼들아! 나와라 나와. 잘난 체하고 지껄이는 이 젖비린내나는 새끼들아, 나와라, 나와. 당장 샅벼 버릴 테다.'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듯하였다. 연쇄가의 점포에서는 안온한 불빛이 어두워 가는 거리 짜고으로 내비치고, 점포 물건들은 대낮보다도 환하게 열기와 윤기를 담고 있었다. 보도에도 사람의 물결이 늘어나고 쇳소리를 지르며 전차가 커브를 돌고 있었다. 어두워 가는 거리를 그 속에 같이 잠겨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은 어느 바깥에나 있는 듯한 착가고가 함께 내다보면, 밤으로 서서히 침잠해 들어가는 그 광경에는 일종의 리듬이 있어 보인다. 몸과 마음의 맥을 확 풀고 이렇듯 내다보면 전혀 분명한 의식이 없는 망막 속에도 거리의 율동이 어떤 일정한 가락의 리듬임을 느낄 수가 있다. 그것은 썩었다느니, 부패했다느니, 모두가 날로 타락해 간다느니, 혹은 그 밖의 이 비슷한 소리들, 소위 흔한 윤리 의식 같은 것이 문득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그런 것이었다. 거리의 실체는 누구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게 빤들빤들 금속성을 발하며 저렇듯 버티고 서 있고, 누구의 도움이나 누구의 발동을 거는 데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의 타성과 힘으로 회전해 가고 있는 것이다. 양 주사도 이원영 주사나 똑같이, 지금 저녁 러시 아워 무렵의 거리를 내다보면서 막연한 무력감에 젖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바닥에서 살아간다는 실체는 저런 것이고, 의식의 조작이라든지 윤리 의식이라든지 책임감 사명감 같은 것은 쓸데없는 사람들의 쓸데없는 군더더기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어이, 택시." 바바리 코트를 한 팔에 들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구두를 신고 금방 사무실 안에서 겪은 일이 기분 나빠, 약간 우락부락하게 큰 소리르 내지르며, 지나가는 택시를 잡는 과장의 모습. 물론 창 저쪽의 풍경이어서 목소리를 들리지 않았지만 얼음판을 미끄러지듯이 괴이한 삐걱 소리를 내지르며 급정거를 하는 택시로 미루어 짐작이 된다. 택시 운전수들도 그들 나름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과 경멸할 만한 사람, 무서워해야 할 사람과 무서워하지 않아도 좋을 사람은 대번에 가려 낼 줄 알고 있을 것이다. 과장의 차림이나 표정, 택시를 세우는 사소한 포즈로서 공무원이고 서기관쯤 될 것이라는 분수를 알아 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처음으로 만나는 사이이고 피차에 이렇다할 일정한 관계가 없는 터이면서도 이미 과장은 극히 자연스럽게 관료주의적인 펴종을 할 수 있고, 상대편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살아간다는 객관적인 실체는 바로 저런 것이고, 바로 저런 모습이다. 눈치껏 짐작으로 알고, 눈치껏 몸짓과 발짓이 움직여야 한다. 이 바닥이라는 하나의 거창한 차체는 이미 그 안에 있는 사람들도 하여금 절대 절명의 존재로서 요구해 나서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 속에 스스로 살고 있으면서 그 차체를 원칙적으로 따져 본다든지 혹은 그 전체의 분수를 저만큼 두고 건다본다든지 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않고, 바로 그러려는 순간부터 그는 튕겨져 나가고, 소외 속으로 자기를 몰고 나가야 한다. 가장 편리하게 살고, 혈기 왕성하게 살이 올라 사는 사람들은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명실 그대로 자기가 살고 있는 이 바닥의 분수를 좇아 자연스럽게 어울려 들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뭐요, 뭐? 그러니까 그냥 돌려 보내겠다는 거요? 아니면 뭐 어쩌겠다는 거요. 쓸데없는 얘기만 너저분히 늘어놓구 어쩌겠다는 거요. 당신부터 분명히 얘기하시오, 얘기해. 돌려 보내겠으면 돌려 보내겠다, 쓰겠다면 쓰겠다. 어린애들 장난이요, 뭐요. 이 자리가 당신들 유식하다는 걸 전시하는 전시장인 줄 아시오. 구 사무관, 폐회하구 일어섭시다. 그리고, 그 예산은 국고로 돌려 보내우." 끝에 가서 이렇게 호통을 치며 자기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과장의 이런 투야말로 압도적인 힘이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자마자 과의 분위기는 백팔십 도로 또 전환, 이때까지 이원영 주사나 양 주사 혹은 김 사무관, 그밖에 모두 제딴으론 진지하답시고 지껄인 소리들이 세상 물정 모르는 우물 안의 개구리놀음이나 어린애들 장난처럼 느껴지던 것이었다. 그렇게 과장의 얘기는 압도적인 현실감이 있었고, 바로 오늘 이 바닥의 정체, 그 중심에 자리해 있는 것을 에누리없이 나타내 보여 주었다. 이원영 주사와 양 주사는 둘 다 바깥의 어두워 오는 거리 풍경을 내다보며, 똑같은 무력감에 휘어감겨 있었다. "이형 나갑시다. 나가서 대포나 한잔씩 하고......" 다시 양 주사가 속삭였으나 이원영 주사는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그러자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비로소 이원영 주사와 양 주사도 김 사무관이 아직 나가지 않았음을 알았다. "계장님, 아직 안 나가셨군요." "네......" 하고, 김 사무관은 잠시 간을 두다가, "양형, 담배 있으면 한 대 얻읍시다." 하였다. 원래 담배를 피울 줄 몰라 술이나 마셔야 조금씩 피우는데, 이런 경우는 담배 생각이 나느가 보았다. 양 주사가 담배를 건네고 뒤이어 라이터를 켜댔다. 김 사무관은 서투른 솜씨로 담배를 빨면서 이원영 주사 쪽을 힐끗 한 번 쳐다보았다. 이원영 주사는 여전히 그냥 그대로 바깥을 향해서만 서 있었다. 사무실 안은 어느덧 완전히 우더웠다. 거리를 지나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번쩍번쩍 들이비쳤다가는 일순 사라지고, 혹은 차를 돌림에 따라서 환한 불빛이 한참씩 사무실 안을 들이비치기도 하였다. 그러헥 환해진 직후 빛이 사라지면 사무실 안은 다시 캄캄해지고 그러나 잠시 지나면 책상이나 의자들이 어스름 속에 둥두럿이 윤곽을 드러내곤 하였다. 이원영 주사는 지금 분명하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저 꼼짝도 하기가 싫고 무한정 이렇게 혼자 있고 싶었다. 온몸이 푸석푸석하게 피로한 듯도 하고, 한편으로는 온몸이 땅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진공 속에 둥실 떠 있는 듯이 착각되기도 하였다. "여보 미스터 리, 나가지. 나가서 술이나 한잔 하지. 오늘 저녁은 내가 한턱 쓸 테니까." 김 사무관이 벌떡 일어서면서 담배를 비벼 끄고 말하였다. 셋이 도궁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는 일곱 시가 지나 있었다. 요전날 과장이랑 같이 왔을 때와 똑같은 한복 차림으로 성장을 하고 앉았던 중년 마담이 역시 그때와 똑같은 반색을 하는 표정으로 카운터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어이구, 우리 까다로우신 김 계장님이 웬일이슈. 과장님은? 과장님은 조금 있다가 오시는 건가." 하고는 낯이 설은 이원영 주사와 양 주사에게도 고개를 까딱이며 상냥스럽게 미소를 던지고는 다시 김 사무관을 향하여, "어쩌실까, 방으로들 모실까."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그 억양은 언뜻 듣기에는 김 사무관과 여간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은근히 나타내려고 하는 듯하였다. 김 사무관은 미간을 조금 찡그리며 말하였다. "방 하나 내주슈." 순간 마담의 얼굴에는 은근한 웃음이 번지고 치마 끝을 끌며 카운터에서 나오더니 다시 상냥스럽게 이원영 주사와 양 주사를 건너다보며, "자, 어서들 올라오시지요." 하고는 안쪽을 향해 매끄러운 은근한 목소리로, "얘 옥아아, 손님 모셔라. 어서어서 화장들 끝내구 손님들 모셔야지." 하였고, 그러자 미닫이가 열리며 핑크빛 저고리 치마 차림의 체구가 커 보이는 여자가 나타났고, 다시 그 뒤로 웅기웅기 여자들의 얼굴이 내밀었다. "뭐, 들어갈 것 없이 여기서 간단히 마시지요." 이원영 주사가 바바리 코트를 벗어 한 팔에 걸고 여 의자에 주저앉으며 말하자, 마담이 또 웃음을 흘리며, "어이구, 저 손님은 꽤 애처가인 척하시네. 그러지 않아도 애처가인 줄 알고 애처가 대접을 해 드릴 테니 아예염려 마시구 들어가세요. 모처럼 김 계장님께서 모시고 오셨는데." 하고는 김 사무관의 코트를 벗겨 드리려는 몸짓을 하였다. 그러나 김 사무관은 재빠른 몸짓으로 코트를 벗어서 제 팔에 걸며 여전히 그닥 기분이 안 좋은 낯색으로 이원영 주사에게 말하였다. "뭐, 이왕 왔는데 들어갑시다. 이런 데는 뭐 그렇구 그런 사람만 재미 보라는 곳도 아닐 것이고." 이런 데 있는 여자도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눈치 하나로 벌어먹는 사람이라, 눈치 하나는 여간 빠르지 않았다. 마담은 방금 한 김 사무관의 말이 과장을 빗대고 한 소리로 짐작하였고, 처음부터 김 사무관의 낯색이 그닥 좋지 않은 것도 오늘 사무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짐작하였다. '그렇다면 어쨌거나 그런 기분은 풀어 드려야지. 기분 나쁜 손님이 기분 풀려고 왔으면 기분 풀어 드리는 것이 우리의 업이니까.' 이렇게 생각하였다. 요릿상을 두르고 셋이 앉고 여자들 셋이 각각 사이에 끼어 앉고, 마담은 한 동안은 자주 들락날락하며 서비스를 부리는 듯하더니, 이 방 저 방 손님이 끓기 시작하자 코빼기도 안 내밀었다. 김 사무관, 이원영 주사, 양 주사도 그렇다. 이런 데서 술 마시며 마음껏 기분 내는 사람들이야 이력이 그렇게 찬 사람들, 이를테면 과장이나 구 사무관 같은 사람들이나 제대로 놀 줄 알지, 지금 세 사람은 전혀 숙맥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긴 김 사무관은 더러 과장이나 구 사무관을 따라다녀 본 일이 있어서 좀 나을지도 모르나, 양 주사나 이원영 주사로서는 차라리 이런 데보다는 색시 없는 막걸릿집이 훨씬 활발하게 기분을 낼 수 있을 것이었다. 술판은 무르익을 줄을 몰랐다. 색시들은 판을 무륵익게 하려고 갖은 재주를 다 부리고 갖은 아양 다 떨고, 그래도 어떻게 생겨먹은 남자들인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반응이 없다. "저도 술 한 잔 주세요." 하고, 드디어 한 여자가 술을 조금씩 마시더니 어느 새 큰 컵으 띵가져오래서 벌컥벌컥 마시고는 저희들이 먼저 취해 버렸다. 결국 판은 거꾸로 되었다. 손님들은 조금 취할 듯하다가는 맨숭맨숭 깨어나고 하는데, 술 따라 주는 저희들로부터 취해 가지고 저희들끼리 놀고 이제는 손님드레게 시비조로 나오고 심지어는 행패를 부리려고 하였다. "뭐, 사내들이 이리 시시해. 꿔다 놓은 보릿자루 모양으로." 한 여자가 딸꾹질까지 하며 이렇게 지껄이면, "보릿자루가 되겠음 되라지 뭐. 자 옥아, 한 가락 뽑아라. 우리끼리라도 기분 좀 내자." 하였고, 벌써 취해 버린 옥이라는 여자는, "언니부터 한 가락 떼시유. 그 다음에 제가 받을 테니까." 하더니, 말과는 달리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바락바락 소리르 지르기 시작하였다. 한숨도 슬픔도 씹어서 씹어 삼키며...... 가사도 맞는지 안 맞는지 제 멋대로이고, 어느 새 세 여자가 젓가락을 두드리고 같이 합창으로 고함을 지르고, 남자 셋은 재미는커녕 휑하게 술이 깨며 벽 쪽으로 나앉았다. 저희들끼리 기분 내라고 이편에서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 버렸다. 씨팔, 모르겠다. 이때부터 이원영 주사와 양 주사도 막걸릿집의 기분을 내어 큰 컵으로 연방 주거니받거니 퍼마셨다. 끝내는 취한 양 주사가 기어이 벌떡 일어나서, "이 호랑말코 같은 년들아. 너희들이 손님이야, 우리가 손님이야!" 하며 상을 둘러엎고 말았다. 20 이럭저럭 마신 것이 꽤 취했었나 보았다. 이원영 주사가 집에 당도했을 때는 열두 시가 거의 되어서였다. 아버지는 이미 시골로 돌아가고 없었다. 기분이 안 좋은 상태로 폭주를 해서인지 몇 차례 꽥꽥 토해 냈다. 이튿날 아침 일어났을 때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통 기억해 낼 수가 없어다. 좌석 버스를 탄다고 좌석 버스를 기다린 거은 기억이 나고, 그때까지 양 주사가 옆에 있었고 그가 괜스레 행인들에게 시비를 걸고 하던 기억은 나는데 그때 김 사무관이 옆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통히 기억에 없었따. 그나저나 마누라의 말을 들으면 집 앞에까지 택시르 띵타고 돌아왔다니 누가 택시를 태워 준 것만은 틀림이 없고 김 사무관이 그랬을 성싶다. 택시 값은 마누라도 안 물었다는 것이고 자기고 무어 준 기억이 없으니 누군가가 미리 어림해서 냈던 듯하다. 아침에 일어나자 그는 다시 간밤의 술 마시던 일을 차근차근 떠올리며 토막토막 끊어진 기억을 되찾아 이어 보려고 애썼으나 전혀 헛수고였다. 그러나 문득 어제 퇴근 직전 사무실에서의 일이 와락 떠올랐다. 잠에서 금방 깨어나서는 한참 동아 나전혀 기억해 내지 못하고 그저 마음 속 어딘가 찜찜하게 미심한 가석이 있었던 듯이 여겨졌었는데, 이제야 어제 일이 환히 생각났다. 이원영 주사는 누원 채로 조용히 담배를 태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누라가 꿀물을 한 사발 탕 hkTek. 그것을 받아 한숨에 다 마셔 버렸다. "어휴, 좀 어지간히 마시지. 안 마시던 술을 웬 그렇게나 많이 마셔요?" "......" 마누라는 옆에 무릎을 세운 채 앉아서 싱글벙글하였다. 흡사 술 안 마시던 사람이 그렇게 마신 것이 귀엽기나 하다는 듯이, 이원영 주사는 아직 속이 좋지 않아 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아버지는 왜 그리 갑자기 내려가셨지?" "글세, 어제 하루 종일 집 안에 계시기가 매우 심삥미했던가 보지요. 오후가 돼서는 들락날락하시더니 심심해서 못견디겠노라고 내려가시겠다지 않아요." "......" "내려가시더라도 당신이나 들어온 다음에 내려가시랬더니, 그렇게 할 듯하시더니, 부랴부랴 가신다고 나가시기에 기르 띵쓰고 붙들 수도 없는 일이구 참, 아버님도 변덕이 여간 심하시지 않아요." "왜, 무슨 못마땅한 일이라도 있었는가?" "아니오, 전혀 그러신 것 같지도 않으신데. 그저 웃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조금 큰 빙르가 옮겨야 쓰겠다고 하시더군요. 한 방에서 있기가 미안해지는가 보아요." 마누라는 의미 있게 웃음을 흘리었다. 이원영 주사도 시덥지근하게 웃고 말았다. 열 시가 지나서야 사무실로 들어섰다. 김 사무관과 양 주사는 꺼칠한 얼굴로 벌써 나와 있었따. 과장이 들어서는 이원영 주사를 희뜩 쳐다보았다가 급하게 눈길을 밑으로 깔았다. 이원영 주사는 제자리로 가 앉아 우선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어다. 사무실 안의 분위기가 어째 여느 때와는 달리 약간 어석버석하다고 느끼어다. 이때까지 과장이 내 얘기를 하고 있었구나 하고 금방 짐작이 간다. 과장이 머리를 들고 조용히 이 주사를 불렀다. "여보, 이 주사." 이원영 주사가 일어서지 않고 머리만 돌려 과장 쪽을 쳐다보았따. "당신, 늦었으면 신고도 않는 거요? 간밤에 숙직했소?" "아닙니다. 숙직 안 했습니다." "그럼 왜 늦었는지 보고라도 해야 될 것이 아니오. 과장은 뭐 이 과으 가병신으로 안졔 놓은 줄 아시오." 과장은 벌떡 일어서면서 얼굴이 시뻘개져 소리를 질렀다. 과원 전체가 일제히 일손을 멈추고 머리를 들었다. "당신, 똑똑한 줄을 아는데, 똑똑한 사람이래서 안중에 과장이고 뭐고 없는 거요, 뭐요. 당신, 우선 당신붜 질서를 지켜야 될 것 아니야, 절서를. 입끝으로 나불거리고 혼자 잘난 척하면서, 당신부터 처신을 똑똑히 해야 할 것 아니야." 이 주사는 약간 돌아앉은 채 과장을 빠안히 마주 건너다보며 담배만 뻑뻑 빨았다. 과장은 그 담배 빠는 모습이 더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더욱 흥분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당장 지각한 이유서를 내시오, 이유서를. 늦었으면 늦게 된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니오. 당장 내시오." 옆에서 기어이 김 사무고나이 한 마디 하였다. "과장님, 우선 진정하십시오." 그 목소리는 일단 공손하였으나, 그 표정은 이미 공손치 않고, 뻣뻣한 것이 번뜩였다. 김 사무관이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 말하였다. "사실은 간밤에 저랑 같이 이 주사도 술을 한잔 했습니다. 아마 그래서 늦은 모양인데......" 과장은 다짜고짜 이번에는 김 사무관에게 대들었다. "그러니까 뭐요. 당신이랑 술 마신 것이 이 일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오? 술 마신 것과 늦은 것이 무슨 관계요?" "지금 과장님의 그것은, 과장님으로서의 직권으로서입니까. 그 직권을 행사 하시는 것입니까?" 드디어 김 사무관도 같이 맞서기 시작하였다. "뭐, 당신 맞서는 거야?" 하면서도 과장은 이미 눈에 뜨이게 풀이 죽었다. 구 사무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과장과 김 사무관 사이로 껴들었다. "김 사무고나, 가만히 게세요. 과장님 흥분했으니까 김 사무관이 참으세요." 하고 재빠르게 말하고, 이번에는 과장 쪽으로 어깨를 깊이 숙여서 말하였다. "과장님, 참으십시오. 일단 진정하십시오.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과장님도 이러는 것이 현명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마지막 소리는 거의 속삭이는 소리였다. 순간 이원영 주사가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일어섰다. "여러분, 우리 과의 가장이라느 자는 바로 저런 자올시다. 똑똑히 봤 둡시다. 이제 본색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로 본색은 저런 자가, 갖은 위장과 술수로 저 자리르 지탱해 왔습니다. 여러분, 우리 똑똑히 구경해 봅시다." 과장은 의자 등받이에 처억 기대어서 잠시 동안 어안이벙벙한 듯이 이원영 주사를 건너다보았다. 일견 그 표정은 지금 이원영 주사가 과장 자기를 두고 얘기하고 있는 것을 못 느끼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전혀 관계 없는 사람을 거너다보듯이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과원 여러분, 왜, 우리가 저런 자의 저런 짓까지 감당을 해야 합니까. 저자는 우리르 과장이라는 직권으로서 우중 다루듯 하고 있습니다. 방금 여러분도 보다시피 저렇습니다. 저런 자에게 이번 기회에 본때를 보여 줍시다. 이미 조국 근대화를 향해 새로 돋아오르는 젊은 사람들이 얼마만큼 떳떳하고 비굴하지 않느냐는 것을 보여 줍시다. 저런 자의 저런 짓을 그대로 묵과하는 것은 노예근성의 시초입니다. 바로 노예 근성이 만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저자는 하급자들을 저런 식으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저런 자가 공복으로서의 의식이 바늘 구멍만큼이라도 있을 리가 없으며 일반 국민들을 어떻게 생각하가 있으 것입니까." 이원영 주사의 말은 원체 창졸간의 발작이어서 과장뿐만 아니라 두 사무관에 과원들까지도 정신이 어리벙벙하였다. 과 안의 이런 분위기는 이원영 주사 본인에게도 어색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이왕 내친 걸음이라, 그는 계속하였다. "저런 자를 저 자리에 그냥 앉혀 둔다는 것은 전 공무원의 모독입니다. 저런 자가 그만두거나 우리가 그만두거나, 양단간의 결정을 내야 할 것입니다. 논의는 차후로 미룹시다. 우선 저자를 쫓아 내든지 우리가 나가든지 합시다. 우리 과원 전체가 이 자리에서 우선 사표를 쓰기 결의합시다. 그리고 그 사표 내용은 저자를 이 과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전 공무원 기구에서 내어 쫓는다는 조건을 붙입시다. 그 조건이 이행된다면 물론 우리의 사표는 그냥 자연 철회되도록 합시다." 과장 옆에 있던 구 사무관이 화닥닥 놀라 이원영 주사를 돌아보곤 얼굴색이 파리해져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 쩔쩔매며 당혹해하는 광경은 이렇게 험한 판임에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잠시 사무실 안은 조용해졌다. 상기된 이원영 주사가 계속해서 소리지르려고 하자, 과장이 등받이에서 등을 떼며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하였다. "저새끼 꼭 빨갱이 새끼군. 하는 투나 하는 소리나 꼭 빨갱이군." 그리곤 다시 백짓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어 앉았다기보다 거의 맥이 빠져서 넘어져 있었다. "뭐요? 빨갱이?" 이원영 주사가 튕기듯이 소리를 질렀다. "저건 바로 저런 자의 누구나가 하는 상투 수단입니다. 똑똑히 보아 둡시다. 누가 진실로 이적 행위에 속하는가를 철저히 가려 냅시다. 공산주의 공포증을 휘두르는 것은 바로 저런 자의 자기 음폐수단이고, 자기 합리화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보아 둡시다. 반공이라는 국시가 저런 자의 사용으로 엄청나게 도용당하고 있는 사실을 간과하지 맙시다. 저런 자가 항용 저런 경우에 반공을 전매 특허처럼 내휘두르기 때문에 반공 이념인들 얼마나 왜곡당하고 있습니까. 공산주의가 우리 체제 안에 스며 있다면 다른 형태로가 아니라, 바로 저런 형태로 침식해 들어온다는 것도 명심합시다." 마치 철없는 애가 어른의 약을 올리듯 그는 계속 과장 쪽으로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고함을 지럴싼. "뭐 나더러 빨갱이라고? 똑똑히 아시오. 그런 상투 용어만 내휘두르면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난다는 방상부터가 이미당신의 시대 착오임을 아시오. 모든 부정 부패와 모든 악이 반공의 미명하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아직도 당신은 생각 하지만." 이원영 주사는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한 마디를 하고 주저앉았다. "여러분, 저자를 오늘로 당장 쫓아 냅시다." 잠시 조용해진 틈에 김 사무관이 일어서서 과장 앞으로 갔다. "과장님, 지금 이 자리에서 사표를 쓰십시오. 제가 부르는 대로 쓰십시오. 만일 쓰지 않는다면......" 과장은 한참 동안 김 사무관을 머엉하게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이렇게 과원들을 선동한 모양인데 좋소, 해 봅시다." 백짓장 같은 얼굴로 말하고는 휭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김 사무관이 구 사무관 쪽을 건너다보며 말하였다. "구 사무관, 태도를 분명히 하시오. 태도를 분명히 하시오." 구 사무관도 구 사무관대로 쩔쩔매면서, "네, 전 분명합니다. 과의 대세를 좇아서 전 항상 분명합니다." 하고 급하게 받았다. 이미 전 과원이 흥분 속에 휘어감겨 있었다. 21 일이 이 지경까지 되자, 가장 난처해진 것은 구 사무관이었다. 도대체 구 사무관이란느 사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이런 경우에 빠지는 것을 평소에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매사에 들어서의 그의 그 원만주의란, 말하자면 이런 난처한 경우에 안 빠지기 위한 일종의 방편이요, 수단이었던 셈이다. 너 좋고 나 좋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 호인이고 너털웃음 섞어 농담하고,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과장도 좋고 계장들도 좋고, 과원들도 좋고, 서로 까다로울 것없이 서로 따지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늘 이렇게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러나 아무리 스스로는 그런 입장에 놓이기를 극력 피하려 하고 그런 입장을 타기하려 해도, 이미 대세가 그렇게 자기에게 압박해 오는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태도를 분명히 하라는 김 사무관의 말도, 당장 양자 택일을 하라는 소리일 터이었다. 과장 편에 서느냐, 아니면 이편으로 서느냐, 둘 가운데 하나를 분명히 하라는 소리일 것이었다. 이에 대해, 자기는 과의 대세를 좇아 늘 분명한 입장이라고 하였지만, 과의 대세가 유동적일 때는 역시 자기도 유동 적이라는 소리일 터이다. 과원들 가운데에서도 아직 일부 몇몇 사람은 강 건너 불 보듯이 중립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꺽다리' 김 주사와 새로 며칠 전에 들어온 사람 하나, 그리고 여자 타이피스트 미스 정, 며칠 전에 들어온 사람과 미스 정은 그럴 만도 하리라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만 김 주사와 그 옆의 석 서기 경우는 역시 일상시의 그들다운 반응임에 틀림없었다. 그들도 역시 근본적으론 구 사무관의 처세 방식과 비슷한 것이었지만 뉘앙스에 있어 약간 다른 점도 있었다. 대개 젊었을 적에 고생을 많이 해서 이 세상을 탈없이 살아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일수록 이런 경우에 들어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으로 어려운 세상을 어렵게 살아오면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을 일종의 헤엄치기로 알고 있다. 구 사무관의 그것이 돈 있는 집 자식으로 호강을 하며 자라서, 다소 천진 단순한 반면, 그들은 나이는 어려도 세상의 쓰디쓴 물정을 속속들이 겪으며 그 터득한 물정에 밀착시켜 각자의 거취를 정하는 것이다. '꺽다리' 김 주사는 원래가 조금 싱거워빠진 사람이고, 어떤 자리에나 삐치기 좋아하고 자신을 내세우려고 들지만, 정작 궁극적으로 어느 한짜고을 선택해야 할 자리에 닥치면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빼는 그런 사람이었다. 진지한 자리에서도 싱거운 농담짓거리 같은 것으로 자리를 흐려 놓고, 이런 것도 본인은 제법 유머 감각으로 자처하고 있다. 어떤 일에 전면적으로 자기를 내건다는 것을 극력 피하면서 그것을 본인은 현명한 처신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자리에서나 제대로 온전한 사람 대접을 못 받지만 본인은 구태여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그렇긴커녕 주위의 그런 대접을 그 나름으로 거꾸로 이용하고 있다고 자처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떻든 그도 구 사무관과 마찬가지로 중앙 관서의 직원으로 있는 것을 대견하게 여기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그 대견하게 여기는 유형과 나타나는 양태는 구 사무관과는 전혀 상반된 것이었다. 김 주사는 본시 고향이 충남 예산이다. 아버지는 일찍 타계하고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어린 때부터 가난 속에서 자랐다. 시골 바닥에서는 제법 또렷또렷한 소년이었던 모양으로 국민 학교 때는 클래스에서 1,2 등을 다투었다. 졸업할즈음 교장 선생에게까지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느올 인정을 받아, 특별 추천 형식으로 근처 중학교의 사환을 겸한 학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어딘가 시시덕거리는 버릇은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기묘한 중학생으로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선생들은 물론이려니와, 같은 중학생들까지 미소 섞인 눈길로 그를 대해 주었다. 그는 학과 도중에도 시간이 되면 쪼르르 달려 나와서 댕강댕강 종을 흔들어야 하였다. 학교에 바쁜 일이 있어도 본업인 사환 일에 휘둘리어야 하였다. 다행히 또 한 사람 늙은 영감님이 사환으로 있었기 때문에 웬만한 일에는 빠질 수도 있었지만, 학교 당국으로서도 이런 소년 하나쯤 있다는 것이 심심치는 않았을 것이었다. '작은 도련님'이라는 애칭까지 붙었었다. 이렇게 흔치 않은 중학교 생활 속에서 알게 모르게 그다운 버릇이 절어들기 시작하였다. 어떤 열등 의식과 그것을 악착스럽게 활달한 투를 내고 두터운 표정을 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머리는 나쁘지 않아,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 고등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서도 그냥 학교 사환으로 머물러 있을 수 는 없는 일이었다. 마침 일이 잘 되려고 그가 졸업할 즈음 그 중학교 교장이었던 영감님이 이 지방에서 국회 의원에 출마, 어렵지 않게 당선이 되었다. 여느 때는 통히 말이라곤 없고 근엄하기만 하던 그 교장이 이 소년을 어떻게 보았던지 말단 비서격으로 채용, 꿈에서나 더러 그려 보던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운명은 단연 새로운 국면으로 열리게 된 것이다. 회현동의 그 국회 의원 집에 유숙을 하면서 그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을 맡아서 하였다. 그 자질구레한 일이라는 것도 결국 그 댁 하인 말하자면 일이었지만, 하인 행세치고는 명색이 구고히 의원 집이어서 그다지 탐탁하지 않을 것도 없었다. 본인은 어디서나 국회 의원 비서로서 행세할 수가 있었고, 그런 행세는 충분히 그의 자존심을 만족시켜 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어쩌다가 시골로 내려가면 서울서 몇십 년이나 산 듯이 서울 사람 행세를 하였고, 홀어머니도 아들이 서울 올라가서 어디에건 비벼 대며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대견하게 여겼던 것이다. 마침 그 무렵이 4.19 직후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내각 책임제하의 모부처 장관으로 그 국회 의원이 옮아 앉게 되자, 그도 일약 그 비서실의 말단 비서로 들어앉게 되었다. 이렇게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중앙 관서의 공무원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뒤, 정국의 송요돌이를 겪었지만, 그는 별로 바람을 타지 않고 남아 날 수가 있었다. 5.16이 일어나기 직전에, 분명히 선견지명이 있어서 그랬던 것도 아닌데, 그 국회 의원 장관의 허락 밑에 총무과장에게 교섭하여 비서실에서 다른 과로 옮겨 앉은 것이다. 그렇게 옮겨 앉고 불과 열흘도 안 되어 5.16이 일어났고, 그러자 그 장관은 물론이려니와, 그 밑에 있던 비서실 직원들도 그날로 벼락을 맞고 보따리를 싸야 하였지만, 그만은 살아남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욕심이란 한이 없어, 그가 요즈음 와서 후회하는 일이 있다면, 그 5.16 전후의 북새판에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사무관 자리 하나 따 두지 못한 일이었다. 그 무렵에 사무관 자리만 따 두었더라면 지금쯤은 슬금슬금 서기관 자리를 넘겨다보았을 것이 아닌가. 5.16 후의 격동도 스름스름 가라앉아 정국이 안정되고 공무원 기구가 틀에 잡혀지면서 승급이라는 것도 여간 어려워지지 않은 것이다. 3배수제 시험이다, 5배수제 시험이다 해서, 이젠 자기와 같은 가난한 경력이나 학력을 가진 자로서는 시험을 치를 자격도 부여받기 힘들지만, 설혹 시험을 치른대도 팔팔한 대학 졸업자들에게는 도저히 당해 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야, 현재의 김 주사는 주사 자리에만도 만족이었다. 군에 가면 군청의 과장에 해당되고, 도에 가면 계장 격인 이 자리가, 어재서 하급에 드느냐고 자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재작년엔가 시골에서 어머니까지 모셔 올리고서는, 이젠 시류의 저 아득한 바깥으로 밀려나 버린 왕년의 그 국회 의원 장관에게는 새해 인사조차 가지 아낳았다. 김 주사라는 사람은 대체로 이런 사람이었다. 한편, 석 서기는 이 부처 차관의 5촌 조카뻘이 되었다. 따라서 5급 공무원 시험도 안 치르고, 차관 비서실에 한 달쯤 근무하다가 낙하산식으로 이 과에 떨어져 앉은 것이다. 시시한 3류 대학을 갓 나오고 학교 시절에는 수영 선수였다고도 하는데, 사회에 한 발 나서자 지레 얼어 버려서 그런가, 운동 선수다운 활달한 구석은 전혀 없고, 얼핏 보매는 여간 얌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차관이 국장을 호출하여 점잖게 암시적으로 한 마디 하고, "총무과장한테도 대강 얘기해 두었으니......" 하자, 국장도 곧 과장을 호출하여, "차관님 말씀이......" 이 정도로서 간단히 이 과로 옮겨 앉은 것이다. 하긴 작금년에 와서는 모든 부처를 통틀어서 장관이나 차관의 수명이 풍전등화 격이 아니고 웬만큼 질긴 것이어서 비서실에 들어온 지 사흘 만에 보따리를 싼다는 일은 없지만, 그러나 공무가언으로 들어오느 나바에는 비서 쪼가리라는 것보다야 독립된 한 과의 직원으로 있는 편이 남 보매도 훨씬 떳떳한 것이었다. 과장이 나가자 태반의 직원들은 술렁술렁거렸다. 이 일에 들어, 그야말로 그 쪽이 이기느냐 이쪽이 이기느냐 사생 결단이 날 문제일 것이어서, 전 직원이 일치 단결해서 나가야 한다고 권 주사 같은 사람은 벌써부터 흥분해서 떠벌였다. 그러나 김 주사와 석 서기는 제자리를 지켜 앉은 채 전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안항싶다. 구 사무관과 타이피스트 미스 정도 제자리를 지키고 안장 있었다. 구 사무관은 난처한 경우에 빠졌을 때 늘 그러는 버릇이 있듯이 웃서랍 아랫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무슨 서류 하나를 찾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 밖의 직원들은 모두가 우르르 이원영 주사를 둘러싸고 몰려섰다. "사람은 이런 때 알아보는 거지, 결국은 이런 때 알아본다는 말야." 권 주사 같은 사람은 괜히 흥분을하여 김 주사 쪽을 흘끗 쳐다보기까지 하면서 이렇게 씨부리어다. 그 빈정대는 듯한 억양에는, 김 주사를 통하여 소신이 분명한 자기 거취를 대견하게 여기는 투도 서려 있고, 이원영 주사나 양 주사에게 그 어떤 아첨조까지 서려 있어 보였다. 그러나 양 주사도 정작 일이 이 지경으로 폭발해 버리자, 분명한 자기 입장을 쉽사리 내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이원영 주사를 쳐다보고, 그 다음 김 사무관 쪽을 건너다보면서 조심조심 말하였다. "어떨까요, 김 사무관님. 이런 식으로 일을 몰고 나가는 것이 반드시 좋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일단은 피차에 냉각의 시간을 조금 두었으면 합니다. 과장님에게도 그런 시간을 주고, 우리도 그런 시간을 갖고, 섣불리 문제를 표면화시키고 바깥에까지 터뜨릴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이 어떤 근본적인 해별책이 될 수 있다면 모르거니와, 해결책이 못 된다면 처음부터 무모한 짓이 아닐까요. 피차의 감정적인 것은 이런 중요한 마당에서일수록 되도록 억제하고 볼 일이지요. 자칫하다가는 과장이나 우리들 할 것 없이 몽땅 망신만 당하게 도지 않을까요. 이런 일이 바깥으로 새어 나갈 경우 결국 징계 위원회 같은 것에서라도 일단 다루어지게 되며느 이 일만을 좁게 한정시켜서 다룰 터이니, 망신살이 뻗치지 않겠습니까. 제 소극적인 생각일른지는 모르지만, 이런 문제는 흔한 쿠데타 같은 스릴만 맛볼 것이 아니라 신중히 다루었으면 하는데요." "글세, 그 말도 일리는 없지는 않지." 김 사무관이 애매하게 대답하고, 이원영 주사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이원영 주사가 퉁명하게 말했다. "일리로 치면야, 이런 경우에 무슨 말인들 일리가 없을라구요. 이왕 이쯤까지 왔으면, 저는 철저히 해 보겠습니다. 설령 양 주사 말대로 어차피 그렇게그렇게 될 것이 뻔하다 하드래도 이런 일을 철저하게 문제화시킨다면, 그 문제화시키는 데 따라서는 어떤 큰 계기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겠으니까요. 손톱끝만큼한 희생도 없이 누이 좋고 매부 좋자는 것은 사실은 좋자는 것이기보다는 뜨물에 뜨물 탄 격이 되자는 얘기지요. 이런 일로 인한 어떤 피해를 걱정하는 과원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구태여 가담해 달래지도 않을 테니까. 저는 저 단독으로라도 해 보겠습니다." 눈길은 김 사무관에게 향해 있었지만 말투에는 양 주사에 대한 가시가 돋혀 있었다. "저도 양 주사의 말뜻은 모르는 것은 아니지요. 문제가 확대된다는 것은 결국 국장, 차관, 장관으로 웃사람들에게 알려진다는 것인데, 낙하산식으로 뛰어들어온 사람들 말고, 공무원 생활 십수 년씩 해먹은 사람이 그 사람들일 터이니, 일의 귀착이 대개 어떤 방향일 거라는 것은 저로서도 뻔해요. 그 사람들의 현실주의는 공무원이 지녀야 할 기본 자세 운운하는 것보다는, 당장 이 부처에서 이런 일이 터졌다는 것이 신문지상에라도 오르내리면 성가시기도 하려니와, 부처의 망신이 된다고 생각할 터이니까요. 결국 공무원으로서의 기본 자세 운운하는 것은 3.1절 기념사나 5.16 몇 주년 기념사 같은 데나 양념삼아 넣어질 수식 용어밖에 안 될 터이지요. 허나, 문제를 제기하는 적극성에 따라서는 이것이 크나큰 계기도 될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어느만큼 철저하게 제기하느냐에 달린 것이지요, 문제는." 일순 다시 문이 열리며 과장이 부리부리한 얼굴로 들어섰다. 동시에 술렁거리던 사무실 안도 물을 끼얹듯이 조용해졌다. 과장은 제자리에 털썩 앉더니, 담배 한 대부터 꼬나물었다. 22 과장이 다시 들어서자, 과원들은 모두 슬금슬금 제자리에 돌아가서 앉았다. 모두가 제각기 일에 몰두해 있는 체하고 머리들을 제 책상 쪽으로 수그렸다. 그러나 신경은 날카롭게 과장 쪽으로 곤두세우고 있었다. 김 사무관도 조간 신문을 들었지만 읽고 있지는 않았다. 조금 전의 양 주사의 말도 옳고, 이원영 주사의 말도 옳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마당에 자기가 어떤 거취를 취하고 어떻게 나가야 할 것이냐 하는 것은 망설여졌다. 물론 거취는 이미 분명하다. 자기가 주동이 되어서 과장 배척 운동을 벌인 꼴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좀전의 양 주사나 이원영 주사의 얘기들을 구태여 참고하지 않더라도 이 일은 어느 대목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느냐 하는 점에 들어서는 썩 자신이 없었다. 이원영 주사 말대로 이 일이 웃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그 사람들은 부처의 체통부터 생각할 것이다. 이런 일이 바깥으로 발설되어 나근나 것부터 극력 피하려고 들 것이다. 그리고 당장은 이원영 주사나 김 사무관 자신이 극력 주장하는, 원칙적으로 옳은 소리들에 맞장구는 칠 터이지만, 수습에 들어서는 현실 주의적인 안목이 위주가 되고, 결국 끝에 가서는 유야무야로 얼버무리려 들 것이다. 완전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수습이 되어 버리고, 다시 세월이 흐르면 변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동료들 사이에서도 김 사무관 자기만 이상한 낙인이 찍히기 쉽다.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사람으로 뒷소문이 돌고, 웃사람인들 이런 사무관을 실무 계장으로서 달가와하지 않을 것은 뻔하다. 혈기라는 것은 옆에서 구경하기는 왕왕 그럴듯하지만 지나 놓고 보면 쑥스러워지는 경우가 흔한 것이니까. 이렇게 본다면 자기는 이원영 주사의 그 외곬으로 뻗친 혈기에 멋모르고 휘어든 격이 아닌가. 철부지 대학생에 흔히 있는 양심이라는 객기에 휘어들어서 앞뒤도 자세히 가리지 않고 경거 망동하는 꼴이 아닌가. 김 사무관은 이렇게 은근히 후회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단 자기가 과장에게 사표를 요구해 나선 이상 어떤 매듭은 지어 놓아야 할 것이다. 조금 전에는 너무 흥분해서 과장님에게 실례를 했다거니, 그러니까 피차에 냉정을 회복하여 수습을 짓자거니, 무슨 얘기든 꺼내야 할 판이었다. 사실 과원들은 지금 제각기 제 일들에 몰두하고 있는 체하지만, 사태의 진전에 예리하게 신경을 쓰고 있고 과장과 김 사무관 자기와 이원영 주사 쪽으로 촉각으 fehern나 있을 것인. 김 사무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기만 하였다. 계속 사표를 요구해 나선다면 사태는 더욱더 험하게 뻗고, 양 주사 말대로 결국은 양쪽이 다 망신만 당하는 꼴이 되기가 쉽다. 그렇다고 갑자기 과장 앞에 조금 전의 짓을 사과하고 냉정하게 수습으 띵하자고 하기에는 이원영 주사의 황소 고집이 덜미를 잡는다. 이원영 주사의 고집이 아니더라도 어쩐지 스스로도 체모가 서지 아낳고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상태로 시계 초침만 째깍째깍 소리를 냈다. 과장은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과장도 이미 후회를 하고 있었다. 대강 대세는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따라서 수습의 길은 어차피 이쪽에서 어느 정도 누그러들고 저쪽을 달래서 될 일도 아닐 것인. 문제의 근본을 따져 올라간다면 철저히 이편의 잘못만이 두드러질 것이다. 도대체 논리와 사리로는 당해 낼 수가 없다. 자기가 살아오고 살아가는 논리란 어디까지나 살아가는 방편이라는 것이 중심인데, 저편에서는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과장의 체모와 체신이 있는 것이지, 덮어놓고 수그리고 들 수도 없는 일이다. 이편도 적당히 낯이 서고 저편도 어느 정도 명분이 닿는 한도 안에서 수습이 되는 길밖에 없다. 조금 전에는 분한 김에 당장 총무과장실로 달려갔었지만 정작 총무과장 앞에 앉자 할 수리도 없었다. 김 사무관이 일부 과원들을 선동해서 과장 배척 운동을 벌이고 있고 하극상에 해당하는 일을 벌이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일이 백일하에 드러나 공공연해질 경우, 생각보다 간단치는 않겠다는 판단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도 우선 이게 웬 창피고 망신이냐 싶어졌다. "어째, 무슨 일이요? 어째 낯색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총무과장은 이렇게 물었다. "아니, 그저 들러 본 거지요." 하고 일단 어물어물 대답하였다. 총무과장은 대학의 동기 동창생이었다. 그러나 6.25사변 무렵의 동창이어서 별로 짙은 유대는 없는 편이다. 전시하의 북새판이어서 전시 대학생증이나 가지고 있으려는 속셈이어지, 학교에는 나가다 말다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부처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피차 안면이 있는 듯도 하였지만, 한참 얘기를 주고받고서야 자기들이 동기 동창인 것을 알아 냈을 정도이다. 총무과장이라는 사람은 부산 피난 대학에 잠시 적을 두고 있다가 곧 해병대 장교 모집에 응시르 띵하여 행정 장교로서 군 경리만 근 10년 동안 맡고 있었다. 이렇다하게 공부를 할 mxa도 없었고, 경리 하나는 펄펄 날았지만 그 밖에는 전혀 백지 상태나 매한가지였다. 사람은 워낙 육중해서 어디서나 채신 떨어질 일은 안 하고 분수에 알맞은 대접은 받았다. 구태여 구렁이 짓은 안 하였지만 경리 장교 생활 10년에 군 납품업자들을 주물러 온 이력이 붙어 있어서, 사람 다루는 것도 제법 능숙하였다. 그 나름대로 세상을 터득하고, 그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도 어느 정도 몸에 배어 있었고, 비록 영어 한 마디 못 할망정 누구 앞에 열등감을 느끼거나 하는 일도 없어다. 어디서나 모가 없는 자연스러운 거조가 특징이었고, 그러한 그는 누구에게나 원만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다. 5.16 직후 각군 행정 장교들이 대거 각 부처에 배치되면서 그도 발탁이 되어 처음에는 이 부처의 총무과 경리계장 자리에 들어왔다. 그러나 많은 군인 장교들이 지나치게 성급하고 지나치게 군대식이어서 하급 공무원들의 비난을 듣기도 하였지만, 그는 비교적 호평을 받았다. 군복을 입었을망정 형태는 민간인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후, 각 부처의 행정이 안정을 회복하면서 차출 되었던 많은 장교들이 원대 복귀되었으나, 그는 그냥 옷을 벗은 채 이 부처에 주저앉게 되었다. 곧 서기관으로 발령이 나고 총무과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원래 총무과장이라는 자리는 그 부처의 모든 살림을 맡고 있는 자리여서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여간 귀찮고 성가신 자리가 아니다. 인사 문제라든지 예산 집행이라든지 복잡한 일들이 모두가 총무과 소관이다. 그는 타고난 원만한 성격으로 모든 과에게 공평하게 마음을 쓰고, 그러나 그래야 할 만한 대목에 이르러서느 남자다운 결단력도 보이고는하여 인심도 얻었을뿐더러 존경도 받았다. 사소한 부탁이면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돌보아 주고, 사리에 어긋나더라도 인간적인 면에서 보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리 사욕을 꾀한다거나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 보였고, 어떤 점에서는 희생적이기까지 하였다. 일단 이런 인식만 주의 사람드렝게 박혀지면, 그 다음부터는 총무과장이라는 자리도 별로 어려울 것은 없다. 넉넉히 적당하게 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경우 5.16을 계기로 정부 부처 안으로 들어온 터임에도 5.16 정신이니 혁명 정신이니 공무원 자세니, 이런 소리와는 애초부터 상관이 없이 지내 왔다. 그런 소리는 늘 그의 경우 강 건너의 시끄러운 소음일 뿐이었다. 그는 그런 것과 상관이 없어 살아 오면서도 실수도 없고 웃사람들에게 잘못 보이는 일도 없이 지내 오고 있는 터이다. 공무원 훈련원에 가서 훈련을 받더라도 남들처럼 기를 쓰고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혁명 공약 하나쯤은 암기해 두었고, 그 조목조목의 해설도 이렁저렁 두드려 맞출 줄 알아서 중간쯤의 성적은 올리었다. 그러나 훈련이 끝나면 그런 골치 아픈 것은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항상 자연스러게 그때그때의 사태에 순응을 하면서 물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충분히 그렇게 살아갈 자신이 서 있다. 공복으로서의 자기 위치라든지 자기의 사명이라든지, 그런 어려운 소리를 어렵게 따지지 않더라도 공복으로서의 자기 맡은 소임만 다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소임이란, 총무과장의 입장에서는 원만한 인간 관계요, 부처 안에 귀찮은 일만 터지지 않으면 된다. "그 참, XX부 있는 방성욱이가 기획실장으로 발령이 났더군. 신문 보았소? DNFLE HDCKD 가운데서는 그자가 제일 빠른 셈이지, 아마." 총무과장이 비시시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 웃음에는 아무리 기획실장의 발령은 났더라도 그 인품으로 보아 별로 부러울 것은 없다는 태를 드러내었다. 방금 들어와 앉은 민 과장도 기지개를 켜면서 받았다. "음, 그렇더군. 나도 보았지." 두 사이에서는 이렇게 단둘이 만나면 애매한 반말짓거리 비슷한 것으로 동창생이라는 유대를 느끼고는 하였다. 그러나 총무과장이 원래 그런 사람이지만, 다른 과장이 같이 앉아 있는 경우에는 결코 그런 내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사소한 점 한 가지도 여간 철저하였다. "사람 팔잔 알 수 없다니까. 원래 경력으로 따지면야 나보다도 늦은데, 원래 XX부가 승급이 빠르지." 민 과장도 은근히 자기의 공무원 경력 10여 년을 내비치면서 이렇게 받았다. "왜, 자네도 곧 부이사관 자릴 바라볼 텐데. 우리 부의 서기관 서열로는 자네가 제일 빠른 편이니까." "이젠 그런 것도 싫고오." "호우, 늙은 소릴 하시는군. 갑자기 인생관이 바뀌어졌나?" "정말이야. 이젠 슬슬 물러났으면 싶어. 이것 저것 골치 아프기만 하고." 민 과장은 비로소 미간을 찡그리면서 말하였다. 그러나 총무과장은 그의 이런 소리도 지나가는 엄살로나 듣는 모양으로 비실비실 웃고만 있었다. 장관 비서실도 오후 시간 특유의 그 나른한 권태감으로 휘어들어 있었다. 한 구석에서 민원 비서가 턱을 한 손으로 괴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 낮잠을 자는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져 있지 않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자고 있는 것이 알려졌다. 그러나 장관실 문이 열리거나 복도로 이어진 가입문이 열리면 순간순간 눈을 떴다가는, 다시 눈을 감는 것이다. 과장이 들어섰을 때도 그는 일순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비서관 옆자리에 웬 손님 하나가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명함을 한 장 내보인 모양으로 비서관은 상을 찡그린 채 명함 뒤의 몇 자 적힌 글줄을 훑어 읽더니, "김 의원하고는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물었다. "네, 밭은 친척 간은 아닙니다만 같은 마을의 종씨올습니다. 제 조카뻘이 됩니다." 찾아온 사람은 순박한 시골 사람인 모양이어서 꾸뻑하듯이 온몸을 아픗로 굽히면서 말하였다. 국회 의원의 소갯장을 들고, 그렇고 그런 부탁을 하러 온 사람일 것이었다. 비서관은 상을 찡그린 채 그자에게 담배 한 대를 권하고 있었다. 과장은 마침 갓 나온 라이프 잡지의 사진들을 뒤적뒤적 훑어보면서 이렇게저렇게 궁리를 하였으나 묘책은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자 문득,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 자신의 어느 근본적인 생활 방식을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반성을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었다. 공무원 생활 15,6년에 자기에게 절어든 습성이란 이런 것이다. 이것을 좋다 나쁘다 가려 보고 따져 보는 일은 이때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어떻든 10여년 동안 자기는 이런 방식으로 얼마든지 통해 왔고 이런 방식에 추호의 의심을 품어 본 일도 없이 살아왔다. 어떤 일이건 원칙적으로 따져 보고 생각해 본다는 일은 어린애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아 온 것이었다. 세상은 과연 이제 자기와 같은 이런 방편으로는 안 통할 만큼 건전해진 것일까. 아무리 따져 보아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문제는 이원영 주사나 양 주사, 그리고 김 사무관이 공교롭게도 그런 유형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빚어진 것이다. 그런 사람만 없었더라면 애초부터 이런 문제가 야기될 수 조차 없다. 그렇다면 현재 이 바닥에서 그들이 이방인인가, 아니면 이쪽이 이방인인가. 이 바닥의 현재의 대세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아무래도 그쪽이 이방인인 것 같다. 물로 나자기도 대세가 전체적으로 건전해져서 그들의 주장이 보편적으로 실감으로 통한다면 그 길을 좇을 것이다. 그 이상 좋은 일은 더 없다. 그러나 지나 온 길에서 겪으며 보며 한 일이지만, 대개는 똑똑한 체하고 양심적인 체하는 축이 손해를 보고 당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이다. 그런 단순 도식을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그 위에 자기 나름의 살아가는 방편을 구축해 왔고, 충분히 별 모슨이 없이 그것을 구사해 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이제 자기는 구세대인이 되었고, 건강하고 패기 있는 신세대에 밀려나야 할 만큼 속속들이 썩은 것일까.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자기 성격이 원래 어디에나 잘 적응을 하고 대세의 가는 데 따라 맞춰서 살 수가 있는 사람이다. 적어도 자기는 그렇게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건전하게, 모든 사람이 명실 그대로 공복이라는 말에 해방하게 살아간다면, 자기라고 못 할 바도 아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은데 자기만 중뿔나게 그래 보아야 손해밖에 볼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도 그런 길을 좇았을 뿐이다. 당장 총무과장실에도 들러 보았지만, 총무과장이라는 사람도 자기 이상으로 그런 사람이다. 지금 자기가 겪는 이런 모슨 당착조차 느껴 본 일이 없는 그런 사람이다. 이 장관 비서실인들 마찬가지가 아닌가. 사방의 벽에 요란하게 사업차트는 붙어 있고 공무원 요강에 월간 지침, 월간 목표 등이 붙어 있지만, 그건 그런 수식에 불과할 뿐이다. 구태 의연한 것으로 치자면 근본적인 점에서 구태 의연한 것은 어디나 다 마찬가지가 아닌가. 서기관들은 너나할것없이 자기들의 승진 루트가 어딘가하여 눈이 벌개 있고, 인사 이동 눈치가 있으면 총무과장실이다 인사계장실이다 들락날락하며 눈에 핏발을 세우고, 외국 같은 데 나갈 길이 있으면 서로가 기갈이 들린 듯이 달려든다. 그건 인지상정이 아닌가. 관료 생활 속에서 관료주의가 절어든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얘기다. 아무리 민주주의 치하라지만 관료 기구는 엄연히 관료 기구가 안니가. 관료주의는 바로 관료 기구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이 아니겠는가. 민주주이가 체제하의 공무원이 국민의 총의를 수행할 소임을 맡은 사람이라는 것은 새삼 쳐들지 않더라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것을 백 번 지껄인들 무슨 소용인가. 민주주의 체제하의 공무원이 국민의 총의를 수행할 소임을 맡은 사람이라는 것은 새삼 쳐들지 않더라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것을 백 번 지껄인들 무슨 소용니가. 왜정 때의 관료 기구나 지금의 관료 기구나 관료 기구는 다 같은 관료 기구다. 도리어 행정이라는 분야에서 오래 근무하고 그것으로 반평생을 산 사람일수록 그런 이중 자세는 더욱 엄청난 것이 상례다. 민주주의 체제하의 공복으로서의 소임은 소임이고, 관려 기구는 관료 기구고, 그렇게 때와 장소에 따라서 따로따로 생각해 두고 있는 것이다. 공적인 자리에서 점잖게 한 마디쯤 해야 할 자리에서는 전자를 쳐들고, 사적인 자리에서는 후자의 경우가 부풍어오르고, 자기뿐만 아니라 이 점은 중앙 관서의 태반의 서기관이 다 그럴 것이다. 그리고 직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런 경향은 더욱 심해진다. 중공처럼 홍위병 난동이나 벌여서 그런 질서 자체를 원천적으로 거부하고 쳐부수지 않는 한, 그 악 순환은 막아 낼 도리가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질서란, 그 질서르 유지하기 위한 과정 속의 자질구레한 제악도 그 속에 포함시키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절대선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고, 그 절대선이라는 표준으로 함부로 칼부림을 한다면 당하는 쪽만 억울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과장은 자기도 모르게 감상적인 기분이 되고, 마음이 나약해 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자기가 공무원 속의 대표적인 구세대로서 제물에 오른다면 그건 천부당 만부당하게 억울한 일이다. 그럴 리도 없거니와 그럴 수도 없다. 어떻든 수습책은 발생한 문제를 바깥으로 확대시키지 않고 안으로 수습하는 길이다. 그러나 자기가 이런 식으로 나간다고 해서 이 주사나 양 주사가 호락호락 그대로 넘어갈 사람들도 아니다. 이것도 자기의 얕은 술수로 알 것이 아닌가. 과장이 거푸 담배 두 대를 다 피울 동안 사무실 안은 그냥 조용하였다. 이젠 '꺽다리' 김 주사와 석 서기만 자기 일에 몰두해 있는 투를 내고 그 밖의 과원들은 앉은 채 손을 놓고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혹은 흘끔흘끔 과장을 훔쳐보기도 하였다. 김 사무관도 아무 말 없이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이 주사와 양 주사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양 주사는 과장의 초췌해진 표정과 어딘가 초조해하는 듯한 기색에 일말의 동정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과장이 철저히 반성하고 이때까지의 작풍에서 철저히 탈피할 자세만 되어 있다면 조금 전의 생각을 돌릴 수고 있다. 과장의 나약하 나표정에는 그럴 수 있는 정상이 전혀 없지도 않은 듯이 보였다. 담배를 비벼 끄고 난 과장이 여프이 구 사무관을 돌아보며 나직한 소리로 말하였다. "구 사무관, 나하구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하구 들어옵시다." 그 나직한 억양에도 나약한 여운이 감돌았다. 물에 빠진 사람이 마지막으로 볏짚에 매달리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러자 구 사무관은 흠칫하면서 일순 난처한 얼굴을 하였다. 김 사무관과 이 주사, 양 주사를 재빨리 훔쳐보며 잠시 어물어물하였다. 따라나서야 좋을는지 안 나서야 좋을는지 망설이고 있다. 양 주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구 사무관님, 나가서 말씀하십시오." 그제야 구 사무관은, "네, 네." 하면서 괜히 또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과장님 나갑시다." 하면서 먼저 일어섰다. 23 과장과 구 사무관이 밖으로 나가자, 누가 먼저 제의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또 과 회의가 열리었다. 과원들은 모두 제자리에들 앉아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김 사무관 쪽으로 눈길을 모았다. "어, 왜들 이러우. 모두 나만 쳐다보는군. 내가 뭐 어쨌다구." 김 사무관은 평상시의 늘 칼칼하기만 하던 그답지 않게, 이렇게 약간 얼버무리듯이 말하곤, "너무 심각해지지들 말아요. 괜히 쓸데없이 골치만 아파지니까. 좀전의 과장님 눈치도 여러분은 보았겠고, 양 주사, 우선 양 주사가 적당할 것 같군. 이런 경우의 타개책으로 명 아이디어를 한 번 내보시지." 김 사무관의 이런 어투부터가 벌써 일정한 수습 방향을 암시해 주고 있었다. 양 주사도 김 사무관의 그런 저의를 짐작하며 김 사무관 쪽을 향해 비시 웃고는, "이거 왜, 김 계장님은 나보구만 이러슈. 난들 뭐 어쨌습니까. 김 사무관과 똑같은 경우지요. 장보러 가다가 남의 싸움판에 끼여든 격이지." 과원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원영 주사는 시종 웃지 않고 두 팔로 깍지를 끼고 앉아 있었다. 양 주사는 그 이원영 주사 쪽으로 흘낏 눈길을 보냈다가 약간 표정이 굳어지며 말하였다. "이미 이 주사도 어제 말했지만 되도록 이 문제는 우리 과 안으로만 한정시킵시다. 이미 과장님도 제가 보기엔 충분히 개전의 여지는 있다고 보여지고, 따라서 모띵링지기 우리는 그런 과장님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고, 존중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물론 과장님의 그런 작풍은 1,2년 안으로 생긴 것이 아니고 10여 년 동안에 절어든 것이어서 하루이틀 사이에 달라질 수는 없겠지만, 중요 한 것은 이번 일이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점이야말로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라도 살려 드리는 것이 우리의 본의여야 할 것입니다. 원칙 일변도주의나 문제의 공공연한 확대에서는 문제 자체의 호가대 재 생산은 있을망정 문제의 해결은 기대할 수 없고 센세이셔널한 관념화가 횡행할 가능성만 짙습니다. 그리고 괜히 억울한 한 사람만 지상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억울하게 희생당하게 될 것이 아닙니까. 여기에도 바로 민주주의적인 온정주의의 원칙이 살려져야 할 것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제의 국면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부터가 처음부터 관념적이고 제대로 설정된 문제 제기가 아니라고 생각해 왔습니다만,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세대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자세의 문제입니다. 물론 나이가 많고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할수록 나쁜 때는 더 묻게 마련이고 더께가 앉고 그것이 더뎅이져 있을 것입니다만, 이 도식을 단순하게 확대시켜서 절대 절명의 것으로 고정화시키는 점에는 반대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건너편에서 다소곳이 듣고 있던 이원영 주사가 잠시 상을 찡그리고 있다가 망설이듯이 말하였다. "문제를 혼동하지 말아요. 그리고, 문제를 그런 식으로 어물어물 호도하지 말아요." 그 낮은, 그러나 서슬이 선 어조에, 사무실 안은 다시 썰렁하게 긴장되었다. "어저께 내가 이 문제를 우리 과 안으로만 한정시키자고 한 얘기와, 오늘 양 주사, 당신이 이 문제를 이 과 안으로만 한정시키자는 얘기 사이에 차질이 있다고 당신은 생각 않으시오? 일부러 그런 차이점을 묵살하고, 같은 식으로 혼동시켜서 제기하는 것부터가 수상해요. 어제 내가, 이 문제를 우리 과 안으로만 한정시키자고 한 것은, 지나친 원칙에의 경도나 관념화, 현실과 밀착되지 못한 사변취를 사상해 내자는 의미였지만, 이미 사태는 달라졌어요. 행태로서 나타난 분명한 실체를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지 말아요. 벌어진 사태 자체에 정면으로 대들어야 될 것이 아니오, 대가리가 빠개지건 입술이 터지건. 자세의 문제도 요컨대는 여기에 귀착되는 거지요. 과연 양 주사 당신의 방금 한 소리는 당신 나름의 일관성을 보여 주고 있어요. 철저히 까발기고 까부셔야 할 마당에 와서 정작 당신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사람 웃기지 말아요. 이미 문제는 그러헥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자세 문제가 새로 제기되고 있어요. 당신은 선민이오? 당신은 완전 무결합니까? 당신은 과장의 그것을 이끌어 주고 바로잡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시오? 건방진 소리 말아요. 당신은 민주주의적인 온정주의의 원칙이 살려져야 할 것이라고 했는데, 어떤 형식으로요? 어떤 겨로가르 띵낳고서요? 이미 당신의 정체가 그 정도로 드러났으면 당신의 그 정체도 새로운 도마 위에 올려 놓아져야 할 판이오." 이원영 주사의 말은 양 주사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문제를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려고 드는 김 사무관에게 대한 화살이기도 하였다. 양 주사는 그것을 대뜸 직감하였고 김 사무관도 마찬가지였다. 김 사무관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가 웃음엣소리 비슷이 말했다. "이 주사, 그런 식의 문제 제기는 너무 험한 것 같은데. 그건 꼭 중공 홍위병 논리 아니오? 홍위병이 별것인가, 저런 식이겠지." 그제야 이원영 주사도 약간 피시시 웃으며 아버지가 하던 얘기와 어쩌면 그렇게도 흡사히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럼 전도 웃지요. 웃는 것이 민주주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저도 웃지요." 하곤, 이상하게 상을 찡그려뜨리며 억지로 웃었다. 그러나 다시 표정이 금방 굳어지며, "어떻든, 제 경우에서는 이런 식으로 타협은 못 하겠습니다. 과장이 나가거나 제가 나가거나 두 가지 가운데 한 길을 명확히 선택하겠습니다. 제가 나가야 한다면 서슴없이 사표를 내지요." 하곤, 털석 자리에 앉아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이렇게 되면 이제 이 사건은, 과장과 저와의 단둘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나 아직도 성이 안 찼던지 부리부리한 얼굴로 다시 말하였다. "우리는 항상 부딪친 사태 속에서 부딪친 문제를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제기하고 해결해 가는 습성을 길러야 할 거예요. 항용 구세대라고 불리어지는 층에 만연되어 있는 경향은 그들이 살아온 연륜에서 필연적으로 묻은 더께일 것이고, 거기에는 이 바닥 자체의 논리라는 배경적인 의미가 훨씬 더 깃들여 있을 것입니다. 요전번에도 양 주사와 토론을 벌이었지만, 그 문제는 매우 복잡하고 어렵고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거점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문제여서 매우 매우 힘든 문제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것으 띵포기할 때 우리 자신의 양심의 마비가 오기 시작하는 거지요. 우리는 우리 사회의 사회 정의라는 문제를 고식적으로 하나의 문제로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깊은 문제로 받아들이면서 나 자신이 처해 있는 여러 모순을 드러내고, 그리고 우리의 현 조건 속에서의 최소한의 방법을 항상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 조건의 실체를 항시 더듬어 보아야 할 것이고, 조건의 근본적인 개조가 필요하다면 그 가능성도 모색해 나가야지요. 우리의 악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순간순간 속에서 움터오르는 것일 거예요. 그것은 그때그때는 모르지만, 세월이 뢍 흐르면 무서운 것으로 군림하게 되는 거죠. 이번 일은 과장님 자신의 일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일로 명심해야 할 성질이지요." 이미 이원영 주사의 말에는 허해진 듯한 초조한 기운이 감돌았다. 자기가 차츰 고립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 알려진 것이다. 이런 경우 하는 소리는 대개 옳은 소리이기는 하였지만, 어딘가 겉도는 듯 맥이 빠진 기색은 역력하게 드러났다. 과연 그는 과장과 1 대 1로 맞붙어 스스로 사표를 쓰든지 과장의 사표를 받든지 할 배짱이 있을까. 김 사무관이나 양 주사를 비롯하여 전 과원이 손가락 틈 사이로 물이 빠지듯이 빠져나간 이상, 그건 무모한 짓일 터이다.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이런 읫기이 그 자신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양 주사가 쓴 웃음을 머금은 채 이원영 주사 쪽을 건너다보면서 말했다. "모든 일은 적다한 선이 있는 겁니다. 이형." 그 '이형'이라는 호칭에 이원영 주사는 웬일인지 뭉클해졌다. "그리고 그 적당한 선은 항상 어느 정도는 상투적인 것이지요. 일정한 질서, 일정한 울타리는 바로 그 상투적인 적당한 선이 지탱해 주는 거지요. 궁극적으로 진지하기만 한 자세가 반드시 궁극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에요. 그것은 결국 비타협과 끝내는 피의 투쟁으로 필연적으로 옮아가지요. 적당한 선이라는 것이 어째서 나쁜 것입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자는 것이 어째서 나쁩니까. 누이만 좋거나 매부만 좋은 것보다는 어떻든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까. 철저하게 근원적인 안목이라는 것도 따뜻한 것과 결부가 되고서야 제대로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저도 이 점에 들어서는 아직 썩 자신은 없지만, 지금의 이형을 보고 갑자기 느껴진 일이어서 한 마디 했을 뿐입니다." "뒤에 서서히 다시 생각해 보지요." 이원영 주사는 완연히 풀이 꺾이며 맥없이 중얼거렸다. 24 한편, 다방으로 나온 과장은 구 사무관을 앞에 놓고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 아까 나오자고 할 때의 구 사무관의 표정이나 반응에서 벌써 구 사무관다운 위인의 어느 두드러진 점을 보았던 터였다. "어떻게, 과장님, 무어승띵 시키겠습니까. 생강차나 쌍화차......" 구 사무고나은 맞은편에 앉아 두 손을 맞잡고 비굴하게 웃으며 쩔쩔매듯이 이렇게 말하였다. "아니, 차는 뭐 그만둡시다." 과장은 갑자기 쌀쌀맞게 말하고는, "구 사무관 혼자 드슈." 하였다. 구 사무관이 다시 허겁지겁 말하였다. "아니, 과장님, 저에게 뭐 언짢으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저에게 뭐 언짢으신 일이라도......" 구 사무관이 거듭 말했을 때에야 과장은 짜증 섞어 퉁명하게 내쏘았다. "언짢은 일이 설혹 있으면 어떻소. 내 눈치를 그다지나 볼 것은 없지 않소." 구 사무관은 낯색이 창백해지며 더욱 몸둘 바를 몰라했다. "구 사무관에게 난 내편이 구태여 되어 달라고 한 일도 없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아요. 설령 내편이 된다고 하드래도 구 사무관 같은 사람은 있으나마나고." 물론 과장은 이러려고 구 사무관을 불러 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주앉자 마자, 과장님 과장님 하고 나오는 구 사무관에게 순간적으로 왈칵 역증이 난 것이다. 과장은, 자기가 잠시 자리를 비웠던 사이에 사무실 안에서 어떤 공론들이 벌어졌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정작 구 사무관과 다방으로 나와서 마주앉자마자 왈칵 불쾌해진 것이다. 잠시 뒤에 과장은 불쾌한 기분을 애써 억제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 없는 사이에, 모두 뭐랍디까." "뭐 별얘기들은 없고요." 구 사무관도 허겁지겁 또 담배를 피워 물었다. "제가 보기에는, 아까 과장님이 너무 흥분을 하셨던 것 같더군요. 좀더 냉정하게 침착하게 나왔더면 좋았을 것을요." "......" 과장은 살짝 상을 찡그리며 대꾸를 안 했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글세, 그건 기왕 지난 얘기고, 내가 과에서 나온 다음에 김 사무관은 뭐래요?" "김 사무관은 아무 말 없고, 양 주사가 한 마디 하더군요. 저도 양 주사의 얘기에 동의를 했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문제를 외부에까지 확대시킬 것이 없다, 과의 망신이다, 냉정하게 일을 수습하도록 하자, 이러더군요." "그러니까?" "김 사무관은 가만히 있고, 이 주사는 별로 달가와하는 기색이 아니더군요." "그자야 그럴 테지." "이 주사는 원래가 그런 사람이니까 그렇다 하구, 제일 냉정해 있는 것은 김 주사하구 석 서기구요." 이 경우, 냉정해 있따는 얘기는 과장을 반발해 나서는 과의 대세에 맞장구를 치지 않고 슬슬 뒤꽁무니를 뺀다는 소리일 것이다. 김 주사는 구 사무관에게도 숨겨 왔지만 과장의 복심으로서 이런저런 정보를 심심치 않게 제공하던 자였으니까 당연히 그럴 것이겠고, 석 서기도 차관의 소개로 낙하산식으로 들어온 자이니까 알 만하였다. '골고루군.' 과장은 마음 속으로만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김 주사가 공팔 예산건을 미리 자기에게 얘기해 주지 않았던 것이 이상스러웠다. 구태여 알릴 만한 값어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몇 당 동안 은밀하게 일을 해 보았지만, 과장 편에서 별로 신통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으니까, 제 김에 맥이 빠져서 포기해 버렸던 것일까. 사실 이런 버릇은 그닥 좋은 버릇은 아니었지만 자유당 시대에 성행하던 것이었다. 과장으로 부임을 하면 우선 과 안에서 비교적 어수룩해 보이는 사람으로 골라서 은밀하게 복심으로 삼는 것이다. 일상시에는 전혀 그런 내색을 안 내고, 일요일쯤 늘 과장 집으로 놀러 오도록 일러 둔다. 그리고는 그자를 통해서 과장이 모르고 있는 사무실 안의 이 일 저 일을 탐지해 내는 것이다. 과장이 이런 사람으로 김 주사를 택한 것은 잘 택한 셈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서글서글한 성격이지만 겁이 많고 왜소해빠진 사람이 이런 일에는 적격인 것이다. 성격이나 위인이 복잡하거나 깊지 않고 단순한 사람일수록 부려먹더라도 부담이 적고 후환이 없다. 그러나 지금, 그 김 주사에게도 구 사무고나에게서 느껴지는 것과 똑같은 혐오 감이 왈칵 이는 것은 웬일일까. 골고루 같은 꼬락서니로 빠진 그들에게서 지금 이 지경에 빠져든 자기의 어떤 편린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일은 좀 난처하게 되었는데. 구 사무관은 어떻게 생각하시우?" 과장이 새로 담배 한 대를 꼬나물고 표정을 누그러뜨리면서 또 이렇게 물었다. 구 사무관은 과장이 자상스러운 표정으로 나오는 것이 대견한 듯 대번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면서, "저야 솔직한 얘기가 일이 잘 수습되기를 바랄뿐이지요. 솔직한 얘기입니다만 어린애들도 아니겠고, 이런 일에 과가 두 파로 갈리어서 으릉으릉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든 일을 엄격하게 따진다고 하드래도 그 한 사람이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셈이지만, 기 링사무관 나오는 짓은 또 뭡니까.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 것 같은데. 여하튼 제 생각은 과장님 편에서 일단은 수그러들었으면 싶은데요. 그러기만 하면 깨끗이 수습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골도 꼭 구 사무관답다. 괜히 흥분을 하고 열을 올려 횡설 수설하는 것도 영락없이 구 사무관다왔다. '솔직한 얘기가''솔직한 얘기지만' 소리를 두세 마디에 한 마디씩 넣는 것도 그렇고. 과장은 도무지 씁쓰름하였다. "나도 이참에 그만두었으면 싶어. 공무원 생활도 그만큼 했으면 무던히 한 셈이구. 더 붙어 있어서 이런 꼴 저런 꼴 보지 않구, 그만두면 어떨까 생각하는데." "그럴 것까지는 없을 것 같아요. 솔직한 얘기가 그럴 필요가 뭐 있습니까. 누군 뭐 잘나서 붙어 있는 겁니까. 견딜 대로 견뎌 보시지요. 저도 말주변은 없읍니다만, 이 일의 수습을 위해서는 적극 노력할 터이니까요." "어떻게, 구 사무관이 어떻게 노력을 해?" 과장이 또 쓸쓸하게 웃으면서 묻자, 구 사무관은 허겁지겁, "어떻든 저로서도 전혀 외면은 할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가. 자격기야 있든 없든, 저도 이 과의 간부의 한 사람인 이상 전혀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겠고. 이제까지는 주로 사태를 옆에서 관망해 오기만 했습니다만, 어떤 형식으로든 일이 확대된다면 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구 사무관과 마주앉아 있어야 결국은 이런 소리뿐이다. 처음부터 같이 다방으로 나오는 것조차 꺼리고 있었던 구 사무관이 아닌가. "하여튼 감사하우. 자, 이젠 알았으니 들어갑시다." 과장이 일어서자, 구 사무관은 당황하는 얼굴이 되며, "과장님 너무 언짢게는 생각 마십시오. 다 이 바닥의 사람인 이상, 덮어놓고 과장님을 잡아먹자고야 하겠습니까." 무슨 뜻인지 분명히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한 마디 하였다. 과장과 구 사무관이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술렁거리던 사무실은 조용해졌다. 25 그러나 그 뒤 일은 뜻하지 않게 엉뚱한 국면으로 뻗어 갔다. 과장이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국장실의 아가씨가 쪼르르 따라들어와 국장님이 부르신다고 알려 왔다. 국장실에 들어섰을 때 이 국 산하의 다른 두 과장도 벌써 와 있었다. 주무 과장인 박 과장이 대뜸 말하였다. "민 고장, 자리를 좀 지켜요, 자리를. 노상 다방에만 나가서 앉아 있지 말고." 방금 들어선 과장은 그런 소리에는 아랑곳없이 국장 쪽을 건너다보았다. 국장은 제자리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국장은 공무원 생활을 그닥 오래 한 살마은 아니다. 더러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지만, 어물어물 몇 년 지나다가 보니까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어느 새 이런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되는 그런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일수록 어느 모로든 자기 자신의 현 위치를 시위하려 들고 내세우려 든다. 그는 요즈음 흔한 군인 출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학가의 학자 출신도 아니다. 4.19 전까지만 해도 어느 국영 기업체의 일개 계장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 뒤, 어떤 연줄로 모 대학의 강사로 있다가, 그의 맡은 강의가 다행히 행정학이어서 벼락치기로 발탁이 된 것은 5.16 이후였다. 그가 행정학의 강의를 맡게 되었던 내력도 알고 보면 어이가 없었다. 대학은 경제과를 나왔지만 해방 직후의 혼란 속이어서 간판만 얻었을 뿐, 실속 있게 공부를 한 일도 없는 터였다. 그 무렵 미 군정의 엉뚱하게도 수산 관계 사무원으로 있으면서 영어 회화는 조금 배워 두었었다. 해서, 행정학은커녕 행정이라는 말조차 생소한 판이었는데 어찌어찌하다가 행정학 강좌를 맡게 된 것이다. 여느 사람 같았으면 처음부터 못 한다고 거절을 했을 것이지만, 배짱 좋게 그것을 맡았다는 데에 그다운 두터운 점이 있었다. 그만큼 두터우면 설령 맡더라도 못 해낼 바도 아니었다. 우리 나라처럼 모든 일이 아직 어수선한 속에서 누구는 사계의 권위가 되어서 강사 노릇을 하는가, 누구라도 하면 못 할 바도 아닌 것이다. 이렇듯 그는 공부한 것이나 지나 온 경려고가는 전혀 관계도 없는 행정학 강좌를 맡고 지면에 두어 번 끄적거린 일이 있은 연후로 서서히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즈음이 바로 행정 행정 하던 판국이어서 충분히 그럴 만도 하였다. 그는 주위의 눈길로 자기 자신을 쉽게 그렇게 자처할 수 있을 만한 두터움도 아울러 갖고 있었다. 그 뒤, 공무원 훈련소의 간부로도 있었고, 행정 자가 붙은 모 대학원의 교수 직함도 갖고 있다가, 드디어 이 부처로 전임해 온 것이다. 전임해 올 때는 이미 부이사관이었다. 처음에 이 부처로 전임해 올 때만 해도 그는 무보직으로 약 1년 동안은 해외로 돌고 있다가, 지금의 국장 자리로 보직을 받은 것이 2년 전이었다. 그가 진짜로 어리둥절해지기 싶가한 것은 사실은 그때부터였다. 이때까지는 자기 자신이 분명하게 책임을 질 만한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포즈와 손짓 발짓만으로서도 능히 자신의 위치를 유지해 갈 수가 있었고, 외국 사람이랑 같이 모이는 칵테일 파티 석상에서도 영어마디나 지껄일 줄 알아, 그다지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어도 되었지만, 공무원 생활 10여 년씩 하면서 나름대로 구렁이들이 다 된 본바닥의 국장으로 발령이 나고, 이 자리에 앉아 보면서는, 모든 일이 이때까지 생각해 온 것처럼 간단치만 않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한 국의 국장으로서 그 국을 통솔해 나가자면 어차피 자신의 정체가 속속들이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이때까지는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위장하는 데만 급급했고, 그런 것이 어지간히 통해 올 수도 있었는데, 아제는 그렇지가 못하였다. 그는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바까에서 얼핏얼핏 듣기에는 중앙 관서의 국장으로만 앉으면 팔자 고치는 것으로 들었는데, 정작 들어와 보니 전혀 딴판이 아닌가. 먹을 수 있기는커녕 냄새조차 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일정한 보직 없이 해외로 나돌고, 혹은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던 편이 신경 쓸 일도 없어서 편했을뿐더러, 수입면에서도 연구 수당이다, 무슨 수당이다, 괜찮았었다는 생각이었다. 더구나 순풍에 돛단 배 격으로 순조롭게 출세길에 오르고 살림이 윤택해지자, 외아들도 고등 학교를 졸업시키자마자 대학은 미국으로 보낸 터여서 그 뒷 감당도 이젠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뿐인가, 만누라라는 사람들은 어느 집이나 대개 어슷비슷할 터이지만, 가장 어렵던 시절의 남편보다는 가장 윤택하던 때의 남편을 표준으로 삼고 바가지를 긁어 대는 것이다. 국장으로 보직이 된 것을 즐거워하던 마누라도 차츰 간판만 화려하고 별로 실속이 없는 현 위치에 남편 못지않게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인근의 체면이 있다느니 아들아이 학비가 어쨌다느니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국장은 점점 더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런 경우 초조해지면 질수록 기술적으로 이때까지 위장해 오던 자신의 정체를 더욱더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나 할 것이다. 국장으로서의 몸짓이나 언동에만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쓸 뿐이고, 행정 행정 하고 이젠 버릇이 된 소리르 항상 지껄이지만, 실제의 국면은 그런 추상적인 소리가 소용이 없음을 날로 깨달아 갈 뿐이었다. 이 국 산하의 과장이라는 사람들도 그렇다. 매일 아침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국장실에 모여서 이 일 저일 의논도 하고, 혹은 세상 돌아가는 잡담들을 나누면서 제법 피차에 털어놓는 소리들을 하지만, 어느 대목에 들어서는 완강하게 사리는 것이다. 문서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무리 훑어보아도 앞뒤가 꼭꼭 맞아 있어서 국장으로서는 도저히 뚫고 들어갈 구멍이 없다. 하부 말단에서부터 시작하여 과장쯤까지 올라왔으면, 이런 일에 들어서는 10년 묵은 구렁이들이 다 되어 있었따. 틈 있을 때마다 암시적인 소리로 아무리 뚫어 보아도 쇠귀에 경 읽는 격일 뿐이었다. 할 수 없이 각 과마다 복심 부하를 하나씩 두어서 살펴보려고 하였지만, 그것도 막무가내였다. 경리 서무 담당 주사들에게 더러 눈치를 보여 봐도 그때그때에만, "과장님이나 계장님과 상의해서 강구해 보겠습니다." 할 뿐, 그후는 꿩 먹은 소식이었다. 국장도 그 나름대로 조여 봤다 늦추어 봤다, 별의별 방법을 다 해 보았으나 신통한 반응이라곤 없었다. 5.16 이후 각 부처마다 행정이 어느 정도 틀에 잡히고 공무원의 부정 색출이 원체 심해서 이러한가, 바깥에서 보기와는 달리 사실은 공무원들 말대로 불쌍한 것이 공무원인가, 아니면 자기가 능숙하지가 못하고 이런 일에 원체 풋나기여서 구렁이 과장들을 잘 주무르지 못하는 탓인가. 오늘 세 과장을 일부러 호출한 것도 아예 솔직하게 털어놓고 얘기를 해 보려는 것이었다. 자신의 사정도 털어놓고 얘기하며, 이렇게 저렇게 사정이 어렵노라, 아시다시피 이사관 봉급 갖고는 도저히 꾸려 나갈 수가 없지 않느냐, 과장제씨들은 대개 어떻게들 살아가가 있느냐, 내 형편이 이러이러하게 당장 딱해 있으니 세 과장이 무슨 방법이든 강구해 주었으면 좋겠노라...... 국장은 금방 끄적거린 것을 접어서 항공 봉투에 넣고 문 가에 앉은 아가씨를 불러 부치고 오라고 이르곤 비로소 과장들을 돌아보며, "다 모였군. 괜히 유학인지 뭔지 보내 가지고 골친데." 안경 속의 눈이 가늘어지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럼요, 엄청나게 들 테지요. 구라파 쪽은 조금 괜찮은 모양입니다만, 미국은 원체...... 헌데, 무슨 잡 같은 것은 아직 못 갖고 있나요? 통째로 뒷감당을 하자면 그거 여간만 힘들지 않을 텐데요." 주무 과장이 이렇게 받았다. "잡은 무슨 잡이오. 원래 아직 어려 놓아서. 게다가 주변머리도 없는 편이어서." 국장은 이렇게 말하고 과장들이 앉은 자리로 옮아 앉았다. 담뱃갑을 꺼내서 세 과장에게 골고루 한 대씩 뽑게 하며 슬그머니 엉뚱한 얘기부터 꺼냈다. "곧 부이사관 발령이 있을 모양이던데 세 분 알고들 계슈?" "네, 그야 티오가 비어 있으니 언제 발령이 나도 발령이야 날 테지요." 주무 과장 박 과장이 말하곤, 그닥 낯색이 좋아 보이지 않는 민 과장을 건너다보았다. 민 과장은 과에서 있었던 일을 잠시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가 곧 부이사과느이 발령이 있으리라는 소리에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가만, 세 분 중에서는 누가 서열이 빠르지요? 민 과장하구 박 과장 두 분중에서는 누가 먼접니까?" "물론 민 과장이 먼저지요. 민 과장에 비하면 저는 아직....." 박 과장이 또 이렇게 받았다. 비로소 민 과장은 미적지근하게 입을 떼었다. "저야 뭐 자격이 됩니까? 서열은 빠르지만 요즈음이야 실적 위주고 능력 위주니까." "왜, 민 과장이 어떻다고. 실적도 그만하면 됐고, 능력도 나 보기에는......" "이젠 저도 슬슬 물러날랍니다. 저도 이젠 구세대에 속해서." "왜 이래, 갑자기. 부이사고나 자리는 맡아 놓았다는 엄살인가." 박 과장이 또 이렇게 빈정거렸으나 민 과장은 못 들은 척하고 국장 쪽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엄살이 아니라, 솔직한 얘깁니다. 이것 저것 골치만 아프고." "왜, 골치가 무슨 골치요. 새삼스럽게 안 하던 소리를 하는군." 국장도 이렇게 말하며 민 과장을 건너다보았으나, 민 과장의 어딘가 우울한 낯색은 자리를 약간 서먹서먹하게 만들었다. 국장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정작 하고 싶은 소리를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부이사관의 발령이 곧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이런 소리를하여 세 과장의 호기심을 미리 돋구어 놓으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하여튼 장관님 말씀이 곧 빈 자리들을 채울 방침이라고 하셨으니까, 세 분 모두......" 하고, 채 말끝을 아물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 과장의 경우로 보자면 이런 소리는 새삼스럽게 놀라울 것이 없이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는 일이었다. 부이사관 티오가 셋이나 비어 있고, 곧 승진이 있을 것이라면 서기관 누구나 구미가 안 당길 사람은 없다. 제각기 어떤 방법이나 어떤 술책이든 모색을 할 것이다. 그런 소리를 구태여 이런 자리에서 꺼내는 것은 괜스레 세 과장을 쑥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일은 알고도 모르는 척, 혹시 얘기가 나오더라도 슬쩍슬쩍 농담짓거리로나 할 일이다. 왜냐 하면, 세 과장이 다 그 자리를 노리고 있을 터이니까. 사실 국장은 이런 면에서도 그다운 유치한 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소리를 해야 국장의 국장다운 태가 난다는 셈일까. 그러지 않아도 세 과장들은 국장에 대해서 공통적인 은어 같은 것을 갖고 있는 것이다. '대우해 달래면 대우해 주고오'가 그것이다. 주무 과장인 박 과장이 매사에 활달하고 익살꾸러기여서 그가 만들어 낸 은어였다. 국장은 항상 세 과장 앞에서뿐만 아니라, 국의 직원 누구에게나 자기가 국장임을 어떤 면으로라도 필요 이상 강조를 하고 있는 데서 이런 소리도 나가았을 것이다. 항상 사소한 일에 있어서도 직계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고 국장 대우를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세 과장은 이런 국장을 두고 서로 눈을 꿈쩍꿈쩍하면서, "대우해 달래면 대우해 주고오/" "얼마든지 대우해 주고오." "최경례도 하루에 열두 번씩 해 달래면 해 줄 수 있고오." 이렇게 주고받으며 킬킬대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우해 달래면 대우는 해 주지만, 실속은 이편에서 차리자는 속셈 일 것이었다. 그러나 국장이 집요하게 그런 면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대우해 달래면 대우해 주고오.' 정작 국장이 간이 타게 노리는 실속은 미안스럽지만 채워 줄 수가 없다는 소리이다. 국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드디어 마음먹었던 소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오늘 하고 싶은 얘기는 우리 국의 업무와는 직접 상관은 없는 얘기입니다. 미리 세 분에게 말씀드려 두지만, 제 일신상에 관한 문제예요. 좀 쑥스러운 얘기지만......" 그 다음의 얘기는 들으나마나 뻔할 터였다. 국장은 가안전히 풀이 꺾인 표정으로 자기 집안 얘기를 털어놓고, 당장 이러저러하게 급한 판국이니 무슨 방법을 강구하기는 강구해야 할 터인데, 세 분이 타합을 지어서 어떤 길이든 모색해 봐 달라고 하였다. 얘기를 이 정도로 얼버무리기는 하였지만, 하고 싶은 소리는 다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26 양 주사의 말은 이원영 주사의 어느 본질을 도려 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설령 양 주사의 말이 매사에 미적지근하고 타협적인 그의 정체를 드러낸 것이라 하더라도, 양 주사가 이원영 주사에게 한 말은 어느 정도 예리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원영 주사도 차츰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낸 관념의 괴뢰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미 사태의 진행을 냉정하게 살펴보지 않더라도, 이 일에 같이 가담했던 김 사무관이나 양 주사는 그들 나름의 현실적인 안목으로 어느 선에서의 타협을 생각하고 있고 과 전체의 분위기도 차츰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항시 옳은 일은 옳게 생각되어서 옳은 일이 아니라, 현실적인 효용면에서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이었다. 현실 사태와 괴리된 채의 독주는 하나의 무모한 쇼밖에 될 것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느 점에서 어떻게 타협을 짓고 수습을 해야 할 것인가. 김 사무관이나 양 주사의 그것은 어느 선에서의 현실 순응이고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은 결국은 별수 없다는 체념이며 패배주의이다. 궁극적으로 진지하기만 한 자세가 반드시 궁극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양 주사의 말은 매우 정곡을 찌른 듯한 소리지만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은 역시 비굴한 소시민 근성이요, 어느 정도는 허무주의적인 싯점이다. 그러나 소시민 근성, 허무주의적인 싯점 운운하는 것도 어찌 보면 관념의 유희일 수가 충분히 있다. 그런 식으로 따진 다면 이 바닥에 소시민이 아닌 사람이 있는가. 자기 자신은 그럼 그런 유의 소시민 근성에서 초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날 저녁 일과 후에 양 주사와 이원영 주사는 단둘이 대폿집에 들렀다. 양 주사는 대포 한 잔을 들이사미고는 단도 직입적으로 말하였다. "나는 애초부터 이런 식으로 될 줄 알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다. 이형은 나의 이것이 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속성으로 진단하려 들 테지만, 그건 일견 타당한 얘기이긴 하나, 그런 식의 발상은 지나치게 광범위한 것이어서 차라리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야. 그런 식의 발상은 지나치게 광범위한 것이어서 차라리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야. 그런 것은 이미 어느 정도는 진부해진 것이 아닐까. 사태가 객관적으로 판정하는 데는 그럴듯한 척도가 될 것이지만, 무슨 일을 하자고 들거나 어떤 일을 수습하자고 들 때는 아무 소용도 없는 관념으로만 머물러지고 말거든. 그것은 역사적 숙명론으로 정립되어지기가 십상이지." "그러니까, 자네는 그 역사적 숙명론에 벌써부터 안주해 있고, 그것이 차라리 원숙하고 어른다운 태세댜 그 얘기인가?" "그런 셈이 될 테지. 그렇지 않고는 별수가 없으니까. 나 자신의 역사적 조건은 궁극적으로는 빠져날 수가 업슨나 것이겠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니까. 첨예한 상황에 닥치면 닥칠수록 그러한 사소한 거취의 역사적 의미는 더욱더 잔인할 만큼 드러나는 것이거든. 자네는 자네 분수 이상의 역사적 몫까지를 살고 싶어하고 그렇게 욕심이 많은 듯하지만, 결국은 자네 분수 이상은 될 수가 없을 테니까." "천만에, 난 그렇게 생각 않네." 이원영 주사가 두 눈을 부라리며 받았다. "자네의 그것은 패배주의이고 현실 추종주의이고, 전형적인 쁘디 뿌르적 속성이고......" "그 다음, 또 있나? 또 무슨 어휘가 있나?" 양 주사가 빈정거리듯이 웃으면서 받고는, "또 동원해 보게. 그 밖에도 많은 어휘들이 있을 성싶은데. 벌서 그렇게 자네는 사태의 냉정한 국면에서 벗어져 있지 않나. 물론 자네 말이야 맞지. 틀린다고는 하지 않아. 그런 식으로 우직하게 밀고 나가다가 우연하게 맞아떨어질 경우도 없지는 않을 터이니까. 그러나 결국은 내 말이 맞을 것이야. 두고 보게." 물론 이원영 주사도 양 주사의 이런 소리를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과장과이가 그 문제에서 중도 포기한다는 것이 어느 모로 보더라도 개운하지가 못한 것이다. 사태가 바깥으로 확대될 때 어떤 식으로 확대되리라는 것도 뻔하게 짐작되고도 남는다. 술자리에서 양 주사와 어려운 소리들만 지껄였지만, 피차에 분명한 소리는 한 마디도 못 한 격이 되었다. 사태는 처음부터 결정지어져 있고 전제되어 있다는 느낌이 새삼 무겁게 짓눌려 올 뿐이었다. 그러나 전차 소에서 거듭거듭 곱씹어 보아도 새삼스럽게 괘씸하게 여겨지는 것은 김 사무관과 양 주사의 거취였다. 어떤 점이 어떻게 괘씸한지는 분명하지 않았으나 괘씸하다는 확신에는 요동이 없었다. 민주주의적인 온정주의를 운운하고, 일정한 질서를 지탱해 주는 적당한 선을 운운하고, 항상 철저하게 근원적인 안목이라는 것은 따뜻한 것과 결부가 되고서야 제대로의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운운하였지만, 지금 일정한 거리르 두고 양 주사의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그 소리들의 현란한 외양을 벗겨 버린다면, 이 정도의 선에서 과장도 과장대로의 현상 유지를 어느 정도 용납해 주고, 이쪽도 이쪽대로 체모가 깎이지 않을 한도에서 양보를 하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두 달쯤만 이렇게 지나 버리면 썩은 호수는 여전한 그 호수이고, 조금도 변한 것은 없게 될 터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안 될 방법은 무엇인가. 어떤 경우에나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대담하게 부정하기는 쉬운 일이지만, 그것 자체가 곧 해결책일 수는 없다. 그에 대한 확실한 대안이 있어야 할 터이다. 이원영 주사의 경우, 그 대안은커녕, 그 근처에는 생각의 실마리조차 뻗어 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고, 그것이 거의 절망적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양 주사가 이런 식으로 물어 올 때는 대폿잔으로 그의 상판을 갈겨 주고 싶을 만큼 불쾌하였다. "이건 자네에게 실례되는 말이고 대답도 뻔하리라고 믿지만, 자네가 워낙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묻겠는데, 자네는 본질적으로 우리 나라의 현 체제를 어떻게 생각하나? 긍정하는가, 아니면 부정하는가?" 이원영 주사는 와락 성이 오르는 것을 꾸욱 참고 양 주사를 잠시 머엉하게 건너다보다가, 대포 한 사방을 주욱 들이사미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웃을 테지. 웃을 줄 알았네. 그런 식으로 물어 오면 더 할 말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나." "잘 아는군. 긍정 부정이 문제가 아니라......" "원칙적으로 긍정하되, 운운하는 것이겠지. 허지만, 자네의 경우 원칙적으로 긍정한다는 것도 철저히 생각해 본 연후의 그것인지 의심이 가는군. 그 전제가 혹시 상추적인 것은 아닌가." "그건 아니야." 이원영 주사는 한 팔을 내흔들며 이렇게 받았다. "그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지는 말아 줘. 거기서는 피차에 생산적인 얘기는 한 마디도 나올 수 없는 것이니까. 체제의 근본 문제에 결부시키다 보면 결국 모든 비생산적인 요소도 체제 탓으로 돌리고, 현상 자체에 안주할 길밖에 없다는 결론이 체념 비슷이 나올 테니까 말야." "자네의 지금 같은 고집 앞에서는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네. 도대체 자네는 어쩌겠다는 건가. 전혀 혼란에 빠져 있는 거 아냐." "......" 이원영 주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심드렁하게 말하였다. "그 얘긴 그만 하세. 오늘 저녁 집에 가서 다시 생각해 보지. 그러나 미리 얘기해 두지만, 이런 고비를 어떤 식으로 넘기든, 그 넘기는 방법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일 테지. 하나는 사표를 내버리는 길이고, 그리고 또 하난는 과장과 타협하는 길, 나로서는 두 가지가 다 바람직한 일이 못 될 거야. 내가 사표를 내는 경우에는 나 자신을 소외 속으로 몰고 가는 것이겠고, 과장과 타협을 하는 경우에는 하나의 비굴한 레테르가 붙게 되지. 그리고 그 비굴한 레테르를 스스로 비굴하게 여기고는 못견딜 터이니까, 자네와 같은 미적지근한 자기 합리화의 길을 준비해 둘 테지. 결국 때가 한 꺼풀 더 묻는 것이겠고, 그 땟국을 땟국으로 여기지 않기 위해서도 더욱 추잡한 현실 논리를 마련할 테지." 이원영 주사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곰곰 생각해 보았으나, 이미 곰곰이 생각 할 거리도 없었다. 일은 자명한 것이었다. 두 길 가운데 한 길을 선택하는 길밖에 안 남았고, 요컨대는 선택의 문제뿐이었다.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이젠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한 선택을 놓고 양쪽의 그것을 극명하게 살펴보고 비교해 보는 길밖에 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이 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 전체로서도 궁극적인 선택의 양상을 지닐 것이 뻔하였다. 사표를 던져 버린다면 자기로서 사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체제의 논리로까지 자기를 몰아갈 공산이 크다. 지금 현재로서 그것은 너무나도 엄청난 일이고, 무모하기까지 한 일일 터이다. 반대로 과장과 타협을 하게 된다면 그 다음에 열려지는 지평은 완전히 둔탁한 속물이 되는 길일 뿐이다. 27 그날 저녁 민 과장은 백화 수복 두 병을 사 들고 국장 집을 찾아갔다. 그로서는 궁여지책이었다. 아까 낮에 국장실에서 나와서 곧장 다방으로 나간 세 과장은 국장이 저 지경으로 노골적으로 나오는 것을 두고 빈정대기만 했던 것이다. 민 과장과 신 과장은 별로 말이 없었지만, 주무 과장인 박 과장이 야트막한 입술을 잠시도 쉬지 않고 맡아 놓고 지껄였었다. 어느 부처에나 과장급에 이런 사람이 한두 사람쯤 꼭 있게 마련이지만, 상급자를 뒤에서 빈정거리는 일이 거의 매일매일의 이로가처럼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뒤탈은 없다. 동료들끼리 모이면 노상 상급자를 헐뜯지만, 도리어 그 상급자 자신들은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별로 까다롭게 신경도 쓰지 않고 으레 저 사람은 저러려니 하고 관대하게 보아넘기곤 하는 것이다. 어디서건 잠시도 쉬지 않고 입술을 놀리고, 상급자를 빈정거리지만, 그것이 어떤 일정한 기능을 발휘할 수도 없다. 정반대로 그 본인의 경박한 위인만을 더욱더 드러내게 된다. 헌데 묘한 것은, 이런 식으로 경박한 부하는 상급자로서 차라리 편한 축에 드는 것이다. 정면으로 따져들거나 대어드는 하급자가 다루기 어렵지, 뒤로 돌아서서 나불나불거리며 헐뜯다가도 앞에서는 생글생글 웃으며 애교를 떠는 쪽이 훨씬 쉬운 것이다. 아까 박 과장 쉬임 없이 입술을 나불거리며 국장을 빈정댄 것도 관기라는 것을 빗대고서였다. 요즈음의 관기가 어느만큼이나 엄격하다는 것은 봉니 스스로 알 터인데 낯짝이 두꺼워도 분수가 있지, 어떻게 그렇게 노골적으로 요구해 나서느냐는 것이다. 요즘이 어느 때인데 세월 모르는 소리를 펑펑 지껄이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박 과장의 이런 식의 빈정거림도 그 외양뿐이지, 사실은 그는 국장의 그런 딱한 사정을 까닭 없이 기분 좋게 여기고 있었다. 비록 적게는 국장과 과장이라는 엄격한 차이지만, 저편에서 저 정도로 하급자에 머리를 수그리고 거의 애원해 나서는 것이 흠쾌한 것이다. 결국 가나오나 실속이 최고다. 실속을 쥐고 있으면 웃사람인들 머리를 수그리고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줄까 말까 줄까 말까 들어 줄까 말까 들어 줄까 말까, 가능성 여부는 둘째로 하고, 기분으로라도 이쯤 망설여 볼 수 있는 것이 썩 나쁘지 않다. 전들 수그리고 나왔지 별수 있을라고. 국장 위엄이나 부리고 국장 낯짝을 종일 한다고 해서 별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급자 쪽에서 묵살을 하면 넉넉하게 묵살이 되는 것이다. 해서 국장이라는 사람도 과장들에게 잘못 보이면 깨끗이 미역국을 먹을 수도 있다. 과장들이 자진해서 보아 줄 수 있어야 어떤 국물이든 국물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 점에 들어서는 그야말로 능수 능란해야 한다. 공적인 관계와 사적인 인간 관계가 교묘하게 잘 조화되어서 공적인 질서 유지나 상하 유별에도 흠이 없고, 사적인 인간 관계도 원만해야 매사가 미끄럽게 돌아갈 수가 있다. 이런 식으로 풋나기 상급자를 하급자가 맹물 먹이기는 간단하다. 이 점에서도 관록이라는 것은 드러난다. 관록이 붙은 사람일수록 이런 그늘진 관계도 능숙하게 다루어 나가는 것이다. 박 과장이 국장을 두고 입술을 나불거리며 관기 운운한 것도 사실은 빈정대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는 관기가 엄격해서 할 짓 못 하였는가. 물론 자유당, 민주당 시절과 대국적으로 비교하면, 행정 그 자체가 틀에 잡혔듯이 일반적으로 관기라는 것도 어느 정도는 뿌리가 박혔다곤 하지만 먹는 데 들어서는 더 그늘지고 능숙해졌다. 그러나 오랜 관청 생활을 한 사람일수록 주기적으로 한 번씩 닥쳐오는 관기의 물결을 그들 나름으로 헤엄쳐 나오는 방법도 터득하고 있는 터이다. 공무원의 요릿집 출입 단속이다 뭐다 할 때는 미리부터 정보를 알아 버리고, 그 기간 동안만 조심을 하면 된다. 걸리고 걸리지 않고는 대개가 운 노름이어서 운이 나쁜 사람만 걸리게 되어 있다. 신통하게도 낙인이 찍힌 사람들은 안 걸리고, 전혀 엉뚱한 사람이 걸려드는 예를 적지않게 보아 온 터였다. 사실 흔한 말로, 해먹자고 든대서 반드시 먹어지는 것도 아니다. 공무원 기구의 실제를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알고 있지만, 대번에 낙하산식으로 국장 자리에 얻어걸린 사람을 두고 팔자나 고친 듯이 일률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과장이나 그 밑의 계장 혹은 담당 직원이 공식적인 표정만 짓고 공식적으로만 대하면, 국장인들 손을 써 볼 방법이 없는 것이다. 결재란에 도장을 찍으면서 이것 저것 캐어물어 본다 한들, 국장 자리에 앉아서는 하부 직원들의 하는 일을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조사해 볼 수도 없는 일이다. 각 과의 살림이라는 것도 반드시 공식적인 예산 집행만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저렇게 비공식으로 떨어지는 것이 있지 않고는 꾸려 나갈 수가 없다. 하다못해 한 달에 한 번이나 석 달에 한 번이라도 무슨 핑계로든 회식을 하더라도 쥐꼬리만한 봉급에서 공제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 눈치는 국장인들 알고 있지만, 그런 것까지 눈을 부릅뜨고 꼬치꼬치 캐어물으면 이쪽이 치사해진다. 이 점도 자유당 시절에 비하면 작금년은 더 음성화되었다. 자유당 때는 1년 과 예산의 몇 분지 1은 거의 노골적으로 쓱싹할 수가 있었고, 매달 국장에게 얼마, 과장이 얼마 식으로 흡사 정상 수입처럼 배당이 되곤 하였지만, 요즘은 더 그늘져 있다. 자유당 때를 지금 돌이켜본다면 그건 행정도 뭐도 아니다. 따낸 예산의 몇 분지 1은 아예 드러내 놓고 나누어 먹기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었다. 혜화동에서 내려서 걸어올라가면서도 민 과장은 이 생각 저 생각에 골몰하였다. 역시 자유당 민주당 시절에 비하면 공무원 세계도 많이 변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그것이 좋은 방향이냐, 나쁜 방향이냐 하는 것은 차치하고, 모든 것이 퍽 합리적으로 되고 틀에 잡힌 것만은 확실하다. 해먹더라도 그 시절처럼 생무우 잘라 먹듯 원시적으로는 못 먹게 되어 있다. 아니, 먹는다는 의식부터가 거의 스러지고 말았다. 무슨 일이든 일을 한다는 의식이 일반화된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런 외양 뒤에서 쓱싹하는 길도 그전처럼 공공연하게 노골적인 것이 아니고 훨씬 기술화되어 있다. 어쨌든, 어제 오늘 과에서 벌어진 일은 사실대로 털어놓기만 하자. 그리고 이 벌어진 사태에 대해서 과장으로서 질 만한 책임은 다 지겠고, 국장의 처분만을 기다린다는 투로 나가자. 그러니까, 이 사태를 국장이 주체가 되어서 수습해 주어야겠노라는 투로 나가자. 약하고 미안한 표정만을 짓자. "국장님, 저로서는 이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지휘자라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능력 부족으로 해서 같이 맞싸우는 꼴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젠 국장님이 나서서 수습해 줄 길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리고 사태를 이런 식으로 만든 데 대한 책임은 전폭적으로 제가 지겠습니다." 겸손한 표정으로 이렇게 지껄이며, 문제는 대뜸 딴 양상으로 비약을 해 버릴 공산이 큰 것이다. 민 과장은 바로 이 점을 노리고 있었다. 과에서 벌어진 사태를 국장에게 자상히 보고해 올리는 형식을 취하면서, 암시적인 소리로써 그 못 써먹은 공팔예산을 주역으로 끌어들이는 편이 어느 모로나 편리한 것이다. 물론 이원영이라는 애가 국장이 끼여든다고 해서 간단히 물러설 애는 애초부터 아니지만, 그땐 그때대로 이미 싸움은 이원영과 국장의 싸움으로 옮아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원영은 보나마나 제풀에 주저앉아 버리게 되고, 그 틈바귀로 민 과장도 모든 일을 없었던 일 정도로 치고 깨끗이 묵살해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요컨대 과장 자기로서 빠져나갈 돌파구는 이 길밖에 없다. 국장인들 아까 아침나절의 얘기로 미루어 보아서 형편이 여간 어렵지 않은 모양이니까, 슬쩍 공팔 예산을 쓱싹 요령할 길만 암시해 주면 침을 흘리며 제 발로 끼여들어올 것이 뻔한 일 아닌가. 그렇게 국장이 욕심을 내면 과장 자기는 슬그머니 그 일에서 빠져 나오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이번 이 건에 한해서는 국장 혼자 통째로 차지하게 되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국장 집까지 거의 가까워지자, 과장은 나잇살이나 먹은 주제에 정종병 쪼가리나 들고 다니는 자신이 창피스럽게 느껴졌다. 나이 말고도, 체모로 보나 세상 경험으로 보나 하다못해 공무원 경력을 따지더라도 이쪽이 앞서 있는 터수에, 아무리 직속 상관이기는 하지만 쬡오다 같은 자에게 이런 것을 들고 다니다니. 솔직이 따지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사는 분수로 보더라도 이쪽이 훨씬 나은 편이다. 국장은 이를테면 중도에 어쩌다가 관길에 들어선 피라미 국장이어서, 생활 전체를 국장이라는 직함에 의존하고 있지만, 과장 자기의 경우는 다르다. 살아갈 마련은 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까짓 서 푼어치 과장 자리쯤 당장 내놓더라도 별로 위협이 될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정종병 쪼가리를 들고 다니는 것이 스스로도 볼품 사나왔다. 서로의 직계만을 빼놓는다면, 어느 모로 보거나 자기 편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훨씬 상급인 것이다. 국장 집 앞에 닿아서도 과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왕 나선 길인데 하고 다시 접어 생각하고 대문 앞 벨을 눌렀다. 국장은 집에 있었다. 알록달록한 파자마바람으로 반색을 하며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 조그만 체구와 어딘가 빈약해 보이는 소프라노 목소리도 국장이라는 체모와는 전혀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위인도 갑자기 경박해 보이고 훤씬 어려 보였다. 같은 부처 안에 있을 때는 서로의 계층 차이가 엄격하게 있는데다가, 그렇게 익숙해져 있어서 벼로 느끼지 못하였지만, 이렇게 집으로 찾아와서 1대 1로 만나게 되니까 그 인상이 완전히 무너져 보이는 것이다. 집 안 꾸려 놓은 것도 과장 자기 집에 비하면 훨씬 못 하였다. 책장이라는 것도 행정학을 노상 쳐드는 사람으로 쳐서는 너무나 초라하였고, 가구나 뭐나 할 것 없이 초라하였다. "어쩐 일이오? 연락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게다가 어린 사람들도 아니고 뭐 그런 걸 들고 다니슈." 국장은 과장을 제 서재로 안내하곤, 비죽이 웃으며 또 이렇게 말하였다. 과장도 창피한 듯이 건너편 벽을 건너다보며 씨겁게 웃었다. 그러나 국장도 그 나름으로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다. 아까 아침나절에 그 정도로 얘기한 것이 이런 식으로 벌써 반응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부이사관 승진이 곧 있을 테니까, 그것까지도 감안한 짓일 것이다. 한편으로 조금 의아하게 느껴지는 점도 있었다. 보통 때는 만만치 않게 고자세이던 민 과장인 것이다. 은근히 자신의 밥그릇 관록으 띵시위해 보이며, 쩨쩨하게 상관의 비위나 맞추고 드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가. "가만, 민 과장은 우리 집이 처음인가요? 그렇지는 않지요? 옳지, 지난 4월에 내 생일 때 한 번 와 보셨군. 박 과장과 신 과장은 자주 드나들었지만......" 국장이 이렇게 말하자, 과장은 또 웃는 둥 마는 둥 하였다. 가져온 정종 술을 몇 잔 건네면서 둘 다 거나하게 취하게 되자, 어느 새 두 사람 다 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취할수록 국장은 어린 소년처럼 경박해지고, 말끝마다 제 자랑이었고, 그러는 국장을 비죽비죽 웃어 가며 조금씩 비양거리기나 하는 과장 편이 훨씬 육중해 보였다. 국장을 과장으로 보고 과장을 국장으로 보면 꼭 어울릴 것 같았다. 과장은 술잔을 입끝으로 핥듯이 마시면서, 너무 취해도 말하기가 곤란할 터이니 미리 까붙이는 것이 좋겠다고 본론을 꺼내었다. "오늘 저녁 제가 찾아온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과장이 낮은 억양으로 이렇게 허두를 떼자, "알아요, 알아. 그것쯤 모를까 봐 그러우." 벌써 약간 취기가 돈 국장이 낼름 이렇게 받았다. 과장은 어이가 없는 듯이 잠시 머엉하게 국장을 건너다보았다. "부이사관 승진건이지요? 우리 솔직하게 얘기하지 머." "......" 과장은 새삼 어이가 없었다. 결국 국장이란 사람은 저 정도로 철이 없는 사람이다. 부이사관 승진이 자기 힘으로 좌지 우지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국장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저런 식으로 지껄이는 것이다. 어느 과장이나 막론하고 병신이 아닌 바에는 부이사관 승진에 국장쯤이 힘을 쓸 수 있다고 믿을 사람으 나없다. 손을 쓴다면 굵직한 곳으로 손을 쓰지, 미쳤다고 국장을 찾아다니고 어쩌고 할 것인가. "국장님, 오해하고 계신느군요." 과장이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부이사관 승진에 국장님이 힘을 쓸 수 있다고 믿는 과장은 우리 부처 안에 없을 겝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비단 국장님뿐만 아니라 다른 국장 rruddn도 마찬 가지지요. 사실은 이미 인선은 거의 완료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누구누구냐 하는 것까지도 나는 알고 있고, 그 누구누구라는 사람들이 어느 줄로 어느 코스로 손을 써서 어떤 사람을 동원해서 장관님에게 작용을 했다는 것까지 알고 있지요. 관청 생활 15년에 그 정도 모르겠습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난 그닥 욕심도 없어요. 욕심만 있었다면야, 나도 나대로 운동을 하고 뛰어 볼 만한 데는 있었지만, 요즘은 옛날 같지도 않아서요. 주사 때 사무관 올라가는 기쁨이 역시 최고였지요. 국장님, 저를 그런 식으로 어린애 취급은 말아 주시죠. 국장님도 아직 관청 생활을 오래 안 해 보셨기 때문에 잘 모르실 테지만, 그런 운동이 국장 상대로 벌어질 운동이 아니라는 것도 명심하시구. 자, 잔이나 받으슈." 국장은 한 대 맞은 꼴이 되었다. 미처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과장이 다시 말하였다. "솔직하게 말합니다. 오늘 저녁 제가 온 것은 아까 아치멩 국장님이 하신 말씀과 관련해서예요. 듣자하니 국장님 사정도 매우 딱하신 것 같은데, 그래서 세 과장이 다시 나와서 토의를 해 보았지요. 역시 묘안은 안 나선다 이겁니다. 헌데, 이건 다른 두 분의 과장은 전혀 모르고 있는 일지만, 우리 과에 아직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예산 일부가 남아 있다 이런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써먹지 못한 예산이지요. 이미 박 과장은 눈치를 알고 있기는 있는 모양입니다만." 과장은 여기서부터는 조금 가노가는 달리 더욱 저자세를 취하였다. 일순, 국장은 술이 얼근한 속에서도 정신이 번적 드는가 보았다. 비교적 털어놓고 지껄이다가도 피차에 돈 얘기만 나오면 자리가 뻐득뻐득해지듯이, 국장은 갑자기 자기 지체를 지체대로 시위하려는 표정이 되었다. "그런 게 있었어요? 그게 뭔데?" 슬쩍 이렇게 되물으면서 과장을 빠안히 마주 건너다보았다. 이때까지 없던 일이다, 하고 내심 생각했다. 다른 과장뜰도 그렇지만, 이 능구렁이 같은 민 과장이 어지간해서는 이런 얘기를 할 리가 없을뿐더러 설혹 한 대도 저렇게 저자세로 나올 리는 없는 것이다. 약간 이상한 일이 있는 모양이다, 하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 예산을 두고 조금 난처한 일이 생겼다 이겁니다." 옳아, 역시 그랬구나. 국장은 자기 예감이 적중하는 데 스스로 감탄을 하면서도 대견치 않은 듯이 물었다. "대체 그 예산이라는 건 얼마짜리나 되는데요?" "6,70만 원 되는 모양이더군요." "그런데, 문제가 있다는 건 뭐요?" 이 정도에서 민 과장은 어리숙한 투를 내며 뒤통수를 긁고는, "말씀드리기는 약간 난처합니다......" 하고, 요 며칠 사이 사무실 안에서 벌어졌던 일을 대강 요약해서 털어놓았다. 연말은 가까워 오고, 보너서는 못 줄망정 과원들에게 다만 돈 천 원씩이라도 줘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오늘도 국장님이 말싶므하셨지만, 국장님의 딱한 형편을 뻔히 알면서도 어찌해 볼 수라곤 없었는데, 이번의 이것으로 하급자로서의 인사 정도나 차리게 되지 않겠는가 생각했다는 것, 그리하여 요령을 부리려고 하였는데 서무 경리 담당인 이원영 주사가 원칙론을 내휘두르며 잡아트고 있고, 여기에 양 주사, 김 사무관 등이 가담해서 일종의 과장 배척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고, 이만저만한 폭풍이 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소상하게 털어놓고는, "그러지 않아도 미리 보고를 올리려고 하였지만, 우선 창피해서 견딜 수강 벗구, 어떤 방법으 띵써서라도 나 단독의 힘으로 수습을 하려고 했습니다." 하고 계속 또 침통한 억양으로, "허지만 이미 일이 이쯤 된 이상 국장님의 손으로 수습이 되더라도 저는 사표를 낼 의향으로 있습니다. 간밤에도 곰곰 생각해 보았지만 이제 우리 같은 사람은 떠나야 할 때도 된 것 같습니다." 하고, 국장을 건너다보며 쓰디쓰게 웃었다. 국장도 이런 소리가 나오자, 아랫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일순 심각한 표정을 하였다. "민 과장, 나도 발생한 사태는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생각할 것은 없는 것이구요. 문제가 그 정도로 험악하단 말입니까? 그러구, 김 사무관이 가담하다니! 김 사무관이 그쪽에 가담해서 선동을 하고 있다는 소린 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하긴 아직 나이가 어린 사람이니까 그런 요소도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 "문제의 초점은 뭡니까. 그 예산을 그런 식으로는 못 써먹겠다는 것이 이원영이군요. 그러니까 국고로 돌려 보내겠다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요. 허지만, 저 자신이 그렇게 이미 지시했습니다. 잡음이 심한 판이니까요. 헌데, 그 이원영이라는 자는 이 문제를 계기로 해서 딴 문제까지 물고 든다 이겁니다." 민 과장은 생각만 해도 창피한 듯이 또 한 번 쓰디쓰게 웃었다. "딴 문제라니요?" 국장이 또 이렇게 되물었다. 사실 이렇게 또박또박 묻는 국장은 아까와는 달리 제법 유능한 국장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민 과장은 과장 배척 운동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버렁지게 되었다는 것을 대강 설명하고, 아침에 늦게 나온 이원영 주사에게 화통을 터뜨렸던 일까지 털어놓았다. "아니, 도대체 난장판이군. 그거 무슨 학교에서 하는 모의 뭣 같군요." 국장도 비시 웃으면서도, 일이 난감하게 되었다는 듯이 약간 심각한 얼굴을 하였다. 이미 술 같은 것은 마시지도 않고, 국장은 수첩을 꺼내들고 이것 저것 과장에게 더 물어 보고 끄적거리고는 하엿따. 예산건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말이 없고 어디까지나 산하 과에서 벌어진 이 문제를 수습한다는 식의 낯색이었다. "알았쉬다. 내일 김 사무관이나 이원영이를 부르지요. 너무 염려는 말구, 나한테 일임하슈." 국장의 결론이었다. 아무리 피라미 국장이지만, 역시 이 정도의 능력은 있는 것이었다. 아니,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앉혀도 이 정도는 해낼 수 있을 것이다. 28 이원영 주사도 이미 일이 어떻게 뻗어 가리라는 것은 eorkd 짐작되었다. 양 주사와 술 몇 잔 마시고 헤어져 집에 돌아와, 거듭 혼자 곰곰 생각할수록 결국은 끝머리에 가서 쑥스러운 꼴이 되었다는 느낌뿐이었다. 선택의 문제 운운했지만, 이 바닥에서는 그런 고급 용어부터가 뿌리내릴 터가 없고 단지 붕뜬 관념어의 구실으 띵하고 있는 것이다. 이틀 동안 사무실 안에서 열을 올리고 핏대를 올린 것도 지금 새삼스럽게 저만큼 넘어다보니까, 차라리 같잖게 천박하게도 느껴진다. 모든 일은 애초부터 완강하게 전제되어 있었다. 그 벽을 혼자 힘으로 뚫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상대로 꼭 들어맞았다. 이튿날 아침 출근을 하자마자 국장실에서 호출이었다. 이원영 주사가 들어섰을 때 사무실 안은 여느 나로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과장은 가운데 자리에 상반신을 잔뜩 의자 등받이 쪽으로 젖히고 앉아 두손으로 조간을 겅중 든 채 기사를 읽고 있었다. 어제까지의 그런저런 일은 아예없었던 일로 묵살하려는 것 같고, 일거에 짓뭉개어 버리려는 것 같다. 어젝자가 그 무슨 대학 같은 데서 흔히 하는 모의 구고히 같은 모의 연습쯤 했다고 착각을 하도록 만들려는 것 같다. 양쪽의 두 계장도 열심히 조간 신문을 읽고 있다. 구 사무관은 반듯하게 앉아서, 김 사무관은 책상 위가에 신문지르 띵펴놓고 머리를 수그리고, 김 사무관도 벌써 지레 위축이 되어 있고 어제까지의 일을 쑥스럽게 창피하게 느끼고 있음이 역력하였다. 과원들도 하나같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압도적으로 감겨 오는 그 분위기에 그대로 휘어들며, 가운데 자리의 과장에게 꿉벅 한 번씩 절을 하고는 제자리에들 가서 앉는다. 과장은 인사를 받기도 하고 묵살을 하기도 한다. 인터폰을 들어 필요 이상 큰 소리로 이국 저국의 과장들고 가농담짓거리도 하고, 혹은 저희들끼리만 통할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거리며 키들거리기도 한다. 저러는 저것은 연기로 친대도 명연기다. 과원들 하나하나를 대뜸 자기 페이스로 말려들도록 만드는 마력 같은 걸 갖고 있는 것이다. 과장은 사무실에 출근을 하면 곧 국장실에 2,30분 가 있다가 오는 버릇이 있는데, 오늘따라 그러지도 않는다. 과장이 저런 식으로 버티고 앉았고, 양쪽의 계장 이하 전 직원이 과장의 저런 부누이기에 처음부터 휘어든 셈이어서 새삼스럽게 이원영 주사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열을 올리고 할 수도 없거니와, 설사 그런대도 먹혀들어갈 것 같지가 않다. 모든 것은 이원영 주사가 짐작했던 대로 너무도 완강하였다. 물거품이 한 번 일고, 그 다음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 싶을 정도로 천연스러워져 있었다. 직원들이 자리에들 앉고 시무 벨이 울리자, 과장은 보던 신문지를 놓고 의자 등받이에서 상반신을 떼며 사무실 안을 한 번 휘 둘러보았다. 바로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과장이 낼름 받고, "네? 이원영 주사요?" 하면서 이원영 주사 쪽을 빠안히 건너다보면서, "알았습니다. 곧 보내지요." 하곤 수화기를 잘칵 놓으면서, "미스터 리, 이원영씨, 국장님이 부르는데 가 보우." 하가 부드럽지도 차갑지도 않게 차라리 어느 편이냐 하면 차분하게 가라앉은 억양으로 타이르듯이 말했다. 김 사무관이 조슴스럽게 눈길을 들어 이쪽을 건너다보고 있다. 양 주사도, 그리고 전 직원이 하나같이 그랬다. 그 눈길은 어?쩌면 그렇게도 하나같이 한 가락이었고, 그 한 가락의 무관심을 드러내는 눈길들이 이워녕아 주사로 하여금 불끈 화나게 하였다. 그는 와락 흥분하면서, 그러나 극히 억제된 목소리로 과장에게 물었다. "미리 물어 보겠는데, 혹시 국장님이 나를 찾는 것이 그 일 때문입니까?" 일순, 과장은 들었던 조간 신문을 다시 스르르 놓으며 하 어이가 없어 피시시 웃는 듯한 얼굴을 하였다. "저새끼가 왜 저렇게 계속 짖어 대지. 정말 못 먹을 것을 먹었나?" 하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고는, "젊은 사람이 너무 그렇게 흥분부터 하지 말구, 국장님 방으로 가 보구서 얘기해요, 가 보구. 그렇게 눈만 뜨면 왕왕대지만 말구." 전혀 흐트러지는 기색 하나 없이 평상시 억양 그대로 타이르듯이 말하였다. 김 사무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원영 주사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등을 한손으로 가볍게 쓰다듬듯 하며 어서 같이 나가자는 태도를 보였다. 복도로 나와, 김 사무관은 이원영 주사의 눈길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되도록 피하면서 말하였다. "과장님 말씀대로 일단 국장실로 가 보우. 그가게 혼자 설쳐 댄다고 디가 일도 아니니까." 속삭이는 소리지만, 이미 어느 정도 차가운 기운이 스며 있었따. "설치다니! 김 사무관 눈엔 설치는 것으로밖에 안 보입니까." 이원영 주사가 발끈하듯이 되물으면서 비로소 두 눈에 와락 눈물이 글썽였다. "그러니까 김 사무관께선 어제의 일을 후회한다 이겁니까?" "글세 그런 소리 노상 해 보아야 소용없어요. 어서 국장실로나 들어가 봐요. 들어갔다가 나온 다음에 양 주사랑 같이 얘기합시다." 서둘러 국장실로 들어섰다. 국장은 제자리에 앉아서 무엇인가 쓰고 있다가 드어서는 이원영 주사를 보곤 안경 속의 눈이 생긋이 한 번 웃으며 사근사근하게 지껄였다. "거기 앉소. 어째, 요샌 좀 야윈 것 같군. 업무량이 너무 많은가. 하긴 아무리 많아두 미스터 리가 감당하지 못할 일이란 이 부처에 없을 것인데. 안 그래. 잠깐, 잠깐, 잠깐만 기다리우." 그러나 불과 30초도 안 걸렸다. 국장은 금방 쓴 것을 몇 겹으로 저벙서 서랍 안에 디밀어 넣고는 곧장 응접 세트 쪽으로 옮겨 앉았다. 담배 한 대를 권하며 빠른 입놀림으로 재잘재잘거리듯이 말했다. "요샌 어때. 과로하지는 않은가. 듣자니까 신경이 좀 쇠약해 있다던데, 하긴 쇠약해질 만도 하지. 원래가 일구으로 너무 알려지면 가나오나 그렇게 되낟나 말야. 부처 안에서 미스터 리 얘기만 나오면 어디서나 칭찬이 자자하거든. 본인으로서는 그런 게 골치지, 골치구말구. 그런 식으로 부탁해 오는 ldf 안 할 수도 없는 일이구 마량. 헌데, 그 뭔가." 여기서 국장은 잠시 이원영 주사를 지그시 마주 쳐다보며, 목소리와 억양을 조금 더 낮추었따. "이건 어제 오후 그 과의 다른 직원을 통해서 들은 얘긴데 말야. 그게 누구냐는 것은 미스터 리 경우에서는 알 필요가 없고. 과장하고 정면으로 붙었다면서? 잘 해, 잘 해. 때론 남자가 그러는 멋도 있어야지. 과장과 정면으로 맞붙을 만한 용기도 있어야지. 원래 그 과장이라는 자는 별명이 곰 아냐. 구렁이지, 구렁이. 그런 곰과 붙어서 어쩔려구 그래. 그건 어느 모로 보나 처음부터 판정은 나 있어. 괜히 왕왕거려야 입이나 아팠지. 솔직한 말이, 이런 소리는 미스터 리에게만 하는 소리지만, 나도 5.16이후 들어와서 이 부처에선 신파나 다름없지. 구파의 그 구렁이들 판에서는 어림도 없다는 얘기야. 말은 국장이지만, 피라미 한가지야. 관청 기구라는 것이 이런 것이었는가 하고, 새삼새삼 매일매일 절감하게 되는군그래. 대학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아. 도대체 행정학, 행정법이 다 무슨 소용이야. 그것이 소용 닿을 수 있는 한계는 처음부터 미리 정해져 있어. 모든 문제는 그런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문제, 자세의 문제, 모랄의 문제로 귀착이 될 것 같어. 이거 괜스리 지나치게 거창한 얘기가 되었는데, 나도 미스터 리와 마찬가지로, 지체만 가곰 다를 뿐, 기분은 신진이다 그거야. 소위 왈, 새로운 혁신파에 들지. 다만 문제는, 때가 있고 시기가 있어. 행정의 혁신이라는 것도 요컨대는 사람의 혀긴이고 자세의 혁신인데, 이것이 급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거든. 바로 이 점에 문제가 있지. 여하튼 미스터 리도 요즈음 꽤나 신경이 피로해 있는 모양 같은데, 어때, 서너 달 출장 비슷이 시골 좀 가 있어 볼래? 미스터 리는 어찌 생각하든지 간에, 나로서는 아끼고 싶은 부하요 후배로 알고 있으니까. 그 늙은 곰새끼 같은 자 하구 쓸데없이 신경을 썩이지 말구, 한 서너 달 내려가 있지 그래, 어때." 청산 유수였다. 이원영 주사도 어느 정도 미리 각오하곤 있었지만, 설마 이 지경이리라고는 예상 못 했었다. 그는 우선 이상스럽게 히죽이 한 번 웃었다. "어때, 내려가 있어 볼래? 자리는 아주 휴양에 안성마춤인 자리지. 간섭 없고 성가신 일 없고, 현지 진척 상황을 공식적으로 보고만 하면 될 테니까. 차관님께서는 우리 부처의 직접 소관도 아니니 그만두자고 하는데, 미스터 리가 내려갈 의향만 있다면 차관님께 설득은 시키지. 설득하나마나 미스터 리 얘기만 하면 그 당장으로 오우케이일 텐데 머, 어때?" "그만두겠습니다." 이원영 주사는 잘라 말하였다. "국장님의 그 뜻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신경 쇠약도 아니고 피로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시골 안 내려가겠다는 소리는 이 자리에서 명확히 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국장님의 그런 호의와 관계 없이 불가피한 명령이라는 문제가 달라지겠습니다만. 그리고 또 한 가지, 국장님의 그 털어놓고 솔직하게 저에게 하시는 말씀도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가려 내기가 힘들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개 대학가에 있던 인텔리 출신의 관료가 어떤 점으로 보면 머리는 샤프하고 매사에 있어 예리하지만, 구악 못지않게 간교한 신악을 형성하고 있는건아닐는지요. 물론 이건 국장님을 빗대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국장은 약간 앞쪽으로 숙였던 상반신을 일으키며 대번에 어색해하는 낯색이 되었다. "글세, 그런 복잡한 얘기는 내가 자네하고 마주앉아서 이런 자리에서 할 성질은 아니겠고." "물론 저도 그 점은 명심하고 있습니다. 국장님이 꺼내신 말씀이기 때문에 저도......" "그래, 그래. 요컨대, 시골로는 안 내려가겠다는 얘기인가?" "네, 안 내려가겠습니다." 하고, 이원영 주사는 국장을 정면으로 건너다보면서 새삼 따져들 듯이 말하였다. "국장님,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일순 국장도 흠칫 놀라면서, "솔직이라니, 그럼 내가 뭐 미스터 리 앞에 숨기고 있는 일이라도 있다는 얘긴가?" "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까붙이고 말씀드리지요. 국장님도 혹시 그 공팔 예산에, 아직 써멎가지 못한 공팔 예산에,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무슨 얘기지?" 국장은 갑자기 두 눈을 가늘게 오므리며 먼산 보는 낯색으로 조용하게 그야말로 조용하게 되물었다. "미스터 리, 그건 무슨 얘기지? 난 전혀 못 알아들을 소리군그래." "못 알아들으셔도 좋습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용서하십시오. 허지만, 저로서는 국장님을 위해서 하는 말씀입니다. 과장님은 그 공팔 예산을 두고 당장은 저를 피할 요량에서 국장님에게 기술적으로 이렇게 인계를 시켰을 것이니까요. 조심하십시오. 과장님의 얕은 수에 넘어가지는 마십시오." "정말 노이로제 아니야, 미스터 리.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못 알아들을 소리를 혼자 하는데. 정말 잔심으로 얘기인데, 당분간 쉬어야겠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도 받아야겠구운." 얘기 꼬리르 길게 끄는 것도 묘하게 벌써 이 자리의 분위기를 상투화시키고 있었다. "이원영 주사는 국장을 빠안히 마주 건너다보다가 제김에 비죽이 웃었다. "네, 쉬기는 쉬어야겠습니다. 제 생각도 매한가지입니다." 하고, 나지막하게 혼잣소리처럼 말하곤, "그밖에 별 얘기는 없으십니까, 국장님?" 하고 물었다. 국장이 결론을 내듯이 말했다. "거듭 말하지만, 내 얘길 들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시골 가서 서너 달 쉬었다가 오는 것이 좋을 것 같어. 사흘쯤 여유를 줄 터이니까 잘 생각해서 가부를 알려요." 이원영 주사는 말없이 나왔다. '가부를 알려라!' 그러니까 가인 경우는 시골 내려가는 것이지만 부인 경우는 사표를 내라는 암시가 아닐까.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마당에 더 어떤 식으로 일을 벌인다는 말인가. 29 한편 이원영 주사가 국장실로 가 있는 동안 과에서는 과장 중심으로 대강 그 방향의 잡담이 벌어졌다. 과장은 한가한 사담 비슷이, 일정한 누구를 꼭 집어서가 아닌 전 과원들 상대로 지껄인 것이다. "어대요들. 국장님은 이원영씨를 당분간이라도 시골로 내려 보냈으면 하던데. 차관님 지시인 모양인데, 누구를 차출하느냐 하는 저믓로 여간 고민을 하더군. 아마 지금 이원영씨를 부르는 것이 그 일이 아닌가 싶군. 어때요, 김 사무관, 이원영씨가 당장 빠지면 업무에 무슨 지장이 있을까요? 김 사무관 업무 경우는 어떠시우?" 과장이 이런 식으로 대어들자, 김 사무관도 꼼짝없이 그 페이스로 말려들었다. 얼굴색이 상기되고 약간 당황하면서, "뭐, 별로 그런 점은 없습니다." 하곤 왈칵 자기 혐오가 느껴지는지, 오만상을 찡그리며 눈길을 책상 위로 떨구었다. 과장은 다시 구 사무관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구 사무관 경우는 어떠슈. 이원영씨가 빠지면 업무에 크게 지장이라도 있을 것 같소?" 구 사무관은 사무실 안의 분위기가 이런 식으로 다시 제자리를 잡아 가는 것이 기분에 맞는가 보았다. 노골적으로 안존해하는 기색을 드러내었다. "아니, 그럴 리가 있습니까. 서무 일이라는 거야, 특별한 능력을 오하는 것도 아니고, 맡으면 누구나 해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구 사무관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받자, "그렇지는 않지. 서무 경리라는 것도 기술은 기술에 속할 터이니까. 구 사무관 말대로라면 상업 학교라는 것은 애초에 필요가 없게. 그건 지나친 얘기라는 거지." 하며, 과장도 껄껄걸 웃었다. 구 사무관이 다시 능청떨 듯이 말했다. "아니, 과장님. 너무 그렇게 극단론으로 가져가지는 마십시오, 제 얘기를. 솔직한 말로, 과 단위의 서무 경리라는 거야 뻔한 것 아닙니까. 전문적으로 주판을 놓는 것도 아니고......" "글쎄에, 그렇게 또 흥분하지는 말고. 이원영 씨가 능력은 있는 사람이야. 적어도 구 사무관보다는 능력이 있어. 다만 문제는, 아직 어리다는 거지. 철저히 반골형이라면 보아 줄 데도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거든." 과장은 또 지나가는 소리 비슷이 이렇게 잘라 말하였다. 과장의 이런 소리는 설드겸 여부는 차치하고, 그 분위기로 사무실 전체를 대번에 휩싸고 도는 힘은 있었다. "좀더 세상을 배워야지. 곧이곧대로 나간다고 모든 일은 그런 식으로만 순조롭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과장은 잇대어서 말했다. "야하튼, 과에 조금 잡음이 있었던 점, 그 책임 소재가 누구에게 있었던 간에 이 과를 책임지고 있는 과장이라는 입장에서 여러분 앞에 사과드립니다. 물론 이 이상 잡음이 날래야 잡음이 날 수도 없는 일이고, 저도그렇겠지만, 여러분도 모두 그 일은 잊어버리기로 합시다." 눈길이 양 주사 쪽으로 향하여 과장은 비죽이 웃음을 흘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미스터 양도 괜히 찜찜하게 여길 것은 없어, 미스터 양 자신도 모르게 말려든 셈이었으니까 말야. 그런 걸 왈 호사가라 부르는 거지. 허지만 지나고 나서 하는 얘기지만, 미스터 양도 속에 구렁이 너댓 마리는 들어 있는 것 같애애." 양 주사도 대번에 얼굴을 붉히면서 쑥스럽게 한 번 웃었다. 자기 능력의 저력을, 외국어로 그런 것을 포텐셜리티이라 하든가, 그런 것을 만유감 없이 발휘한 셈이니까. 어때 미스터 양, 그렇게 생각 안 하나?" "......" 양 주사는 또 한 번 쑥스럽게 웃을 뿐이었고, 그 웃음 하나로 피차에 뻑뻑거리던 것이 깨끗이 미끄럽게 소통되고 있었다. 이 정도 얘기하는 동안, 사무실의 분위기는 어느 새 종전의 그 분위기로 완전히 돌아와 있었다. 비로소 과장은 약간 진지한 얼굴로 김 사무관에게 타이르듯이 말하였다. "김 사무관, 국장실에서 이원영씨가 나오거든, 김 사무관이 다방으로 데리고 나가서 차나 한잔 마시고 들어오구레." 이런 소리에도 무엇인가 이미 전제를 집어 두고서의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김 사무관이 미처 뭐라고 대답을 하기 전에 마침 이원영 주사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일순, 사무실 안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물론 이원영 주사도 그 사이에 사무실에서 어떤 식의 얘기가 벌어졌으리라는 것을 대번에 짐작하였다. 그는 약간 화가 난 듯한 상기된 얼굴로 뚜벅뚜벅 제자리에 가서 앉았다. "국장님이 뭐랍디까, 이원영씨." 과장이 전혀 천연스럽게 물었다. 이원영 주사도 이 뻔뻔한 자식아 하듯 빠안히 과장을 마주 쳐다보다가, "국장님이 뭐랬는지가 알고 싶은 게 아니겠지요. 국장님의 얘기에 제가 어떻게 대답을 했으며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알고 싶으시겠죠." 하고 태연하게 웃으면서 천천히 이렇게 받았다. 과장은 살짝 당황을 하다가, 난처한 입장을 얼버무리듯이 진짜로 너구리 소리를 내어 한 번 웃는 듯하고는, "그래, 그럼 그렇다 합시다. 국장님의 얘기는 뻔히 그 얘기여을 테니까, 그에 대해 이원영씨는 뭐라고 대답을 하셨는지......" 하자, 재빨리 되튕기듯이 이원영 주사가 되물었다. "물론 대답은 뻔할 테지만, 그전에 제가 물어 보지요, 당신은......" 일부러 '당신'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잠시 간을 두었다가, 다시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국장님의 얘기에 고분고분 응했으리라고 봅니까. 그러는 것이 물론 당신의 경우에서는 편했을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군. 나는 무지무지한 퀴즈가 나오는 줄 알았더니, 퀴즈를 내고 스스로 해답을 해 버리는군. 역시 이것도 성미 급한 이원영 씨답군." 과장은 껄걸 한 번 웃곤, "그건 그렇고, 모두 일어서서 이원영 주사 쪽으로 다가갔다. 이 사이, 이미 이원영 주사는, 자기가 이젠 완전히 혼자요 외톨이라는 것을 전실하게 느껴다. 과원들은 모두가 어느 시워느이 영역, 어쩔 수 없이 막혀 있는 그 어느 종래의 울안 속에 되주저앉아 있었다. 어찌 이 사무실의 직원뿐이랴, 이 점에 들어서는 누구나가 마찬가지다. 이런 판에서는 뛰는 놈만 병신이다. 얼마간 뛰다가 돌아보면 어느 새 자기만 공중에 겅중 떠 있고, 전체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자신만 괴리되어 있는 것을 느끼게 되곤 한다. 김 사무관과 다방에 나와서 마주안자, 이원영 주사는 쓰디쓰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여러 소리 더 하고 싶지가 않았다. "미안합니다. 괜히 김 사무관님에게 결과적으로 폐만 끼친 꼴이 되었군요." "뭘요. 폐가 될지 이로울지는 뒤에 가서야 가려질 일일 터이지만, 국장님에게는 뭐라고 대답했소?" "시골로는 안 가겠다고 했지요. 나는 신경 쇠약도 아무것도 아니니까." "국장님은 뭐랩디까?" "그까짓, 까붙이고 털어놓았지요. 어쨌거나 일이 이쯤 되었으면 나도 나대로 자존심이 있는 마다엥 그냥 되주저앉을 수도 없다는 생각이 왈칵 나더군요, 순간적으로. 사실 어제 미스터 양과 술 한잔 마시고 집으로 들어가서도 곰곰이 생각했지만, 이런 사태가 벌어지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했으면서도 이에 대처해서 내가 어쩔 것이냐 하는 것은 결정을 못 지었었는데, 순간적으로 그렇게 됩디다, 사표를 내자! 난 국장님에게 까붙이고 무렁싶지요. 국장님도, 써먹지 못한 그 공팔 에산 냄새를 맡고 이러는 것은 혹시 아닙니까 하고......" "뭐요? 저런." 김 사무관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곤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들키들 웃었다. 이원영 주사의 이런 짓이 설령 무모할는지 모르지만 재미는 있고, 덮어놓고 시원하기는 하였다. "그러니까, 국장님은 뭐랍디까?" "뭐, 별로 펄펄 뛰지도 않습디다. 여하튼 사흘쯤 여유를 줄 터이니 심사 숙고 해서 가부를 알려 달라더군요." "가부라!" 김 사무관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고 담배르 띵꺼내 물었다. 그러나 불을 당기지 않고 입술끝으로 담배를 굴리기만 하다가 한참만에 물었다. "꼭 사표를 내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소?" "그밖에 어떤 길이 있습니까." "같이 낯 두껍게 뻔뻔해지지 머. 같이 뻔뻔해질 수가 있지 않소." "그러구, 속은 살아 있다 이겁니까." 하며, 이원영 주사는 빙긋이 웃었다. "그런 경우, 속이 살아 있다고 운운하는 것은 거짓말이거나 자기 위안이겠지. 그런 식으로 기만하는 자들은 더 비천해 보이던군. 전략 전술이라는 서 푼어치 짜리 용어를 동원하면서 할 짓은 다 하겠다는 배짱이니까. 외양이 그러면, 결국은 내실도 그런 거예요. 그건 상식 아닙니까, 상식대로 믿어야지요." "허지만, 누구나 조금쯤, 숨쉴 구멍은 있어야 될 것 아니오. 이형 식으로 생각한다면 너무나 뻑뻑해서 살아가기가, 처신해 가기가......" "그거야, 각자 나름이겠지요. 김 사무관 같은 방식이 물론 있을 것이구. 허지만 김 사무관이나 양 주사 방식인 경우에도, 저 같은 방식을 안 겪은 것보다는 겪는 편이 나을걸요. 그 점은 확실할 수 있어요. 주제넘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물론 제가 사표를 던진다는 것은 전면적으로 모든 것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도리어 저는 요 몇 년 동안 어느 점, 활력을 다이내미즘을 느낍니다. 나 자신이 그 한가운데에 있었으니까요. 경제적으로 근대화시키자는 노력은 가상한 것이고, 어느 정도 효과도 나타나는 것 아닙니까. 그 효과의 내실이 건전한 것인지 비건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좀더 두고 보아야겠지만, 그러나 사표를 내면서 한 가지 확신은 있습니다. 설사 모든 일이 날이 갈수록 잘되어 간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한데 섞여져 있는, 완강히 버티고 있는 구제 불가능한 요소, 어느 정권도 아직 그곳까지는 메스를 가할 수 없었던 요소, 메스를 가했다가는 도리어 부작용이 더 클 수도 있는 요소, 그런 장막 너머의 부정적인 요소를 철저히 부정적으로 드러내면서 이 자리를 그만두는 해우이는 효과 여부는 여하튼지 불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져요. 부정적인 것이 지배적인 판국에서, 긍정적인 거만 좇아서 가는 거솔 안 좋아요. 밝은 미래를 예견하면서, 그 속에 섞여 있는 부정적인 요소에 눈을 감고 모든 사람이 상투적으로 우르르 좇아만 가는 그 소위 밝은 면만 보려고 하는 것도 경계해야겠지요. 도리어 이런 마당에서는 부정적인 영역에 몸으로 부딪치고 전면적으로 부딪쳐서 불꽃을 가티기며 부서지는 것이 나을 겝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저 자신이 우리의 현 사태르 띵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믿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런 순교자가 되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습니다. 이번에 나에게 부딪쳐 온 이 문제에 한해서는, 사표를 내고 깨끗이 물러나는 것이 온당한 길일 것 같습니다." 김 사무관은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30 사흘 뒤, 이원영 주사는 사표를 냈다. 그간 이틀 동안 그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 그가 출근을 하지 않는 동안 양 주사가 과장 집을 찾아갔었으나, 그건 헛수고였다. 이미 과장에게 이원영 주사를 용서해 달라고 어쩌고 할 처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장 자신부터가 용서고 뭐고 없었다. 문제는 이원영 주사 자신에 달려 있엇던 것이다.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은 없었던 셈치고 그냥 붙어 있으면 넉넉히 붙어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내가 뭐 어쨌소. 나는 아무렇게도 생각 안 해요. 의당 있을 수 있는 일이 이었다는 정도지요. 그러나 본인 경우에서 쑥스러워서 그만둘 의사인 모양인데, 나라고 쫓아다니면서 붙들 처지도 아니쟎소. 솔직한 얘기가 그 일을 두고 김 사무관에게도 감정이 좋지 않을 수는 있지요, 내 입장으로서는. 허지만 일이 자연적으로 저절로 수습이 된 마당에 꼬치꼬치 캐고 따지고 할 성질은 아니거든." 과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물론 이것이 솔직한 본심일 터였다. 이원영 주사의 사표가 수리되기까지에는 약간의 실랑이가 없지 않았다. 국장도 과장도 생각을 돌리기를 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결의는 이미 완강하였다. 결국 사표가 수리되고, 송별회가 벌어진 저녁에는 과장 이하 전 직원이 모여서 중국집에서 한잔 마셨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자리에서는 과장에 구 사무관까지도 이원영 주사를 맞대 놓고 칭찬하였다. 자리가 자리여서 단순히 입 끝에 바른 소리는 아니었다. 이원영 주사는 이 잔 저 잔 받아 마시면서 핏대 올리는 소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술이 취해도 시종 차분히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런 그는 더욱 더 과원들의 호감을 샀다. 모두가 그를 둘러싸고 앉아서, 흡사 마지막에 비록 지기는 했지만, 잘 싸운 자기 편 운동 선수를 두고 꽤나 아쉬워하는 듯한 그런 표정들이었다. 눈치 빠른 과장과 구 사무관은 미리 자리를 피하였다. 술이 얼근하게 오른 과장도 이원영 주사와 헤어지는 악수를 하면서 자못 서운한 듯이 지껄였다. "어디 가나 새롭게 일할 자리는 있을 거요. 더구나 미스터 리처럼 능력 있는 경우에는. 다만 우리 같은 건 버얼써 물러나야 할 것인데 아직 이 모양이지만." 이 말도 물론 이 자리에 한해서는 과장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원영 주사도 별로 말은 안 하였지만, 담담하게 웃는 낯을 하였다. 이원영 주사에게서는 불과 며칠 사이에 10년쯤 성숙한 듯한, 모든 사태를 우선은 사태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고 본다는 식의 여유와 호활한 풍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는 제자리에 주저앉아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이미 결단을 내어 사표를 내던진 저편 언덕에서 건너다보고 있는 것이다. 건너다보는 입장이란, 역시 말년의 정다산처럼 일정한 거리가 있기 때문에 훨씬 편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과장과 구 사무관이 나가고도 김 사무관과 나머지 과원들이 남아서 흡사 대학 갓 나온 사람들처럼 요란 법석을 피우며 게속 마셔 댔다. 양 주사는 거푸 술잔을 비우고 이원영 주사에게 잔을 넘기고 하며 요긴한 얘기는 한 마디도 안 하였지만, 세상은 개차반이라는 투의 기색은 역력히 드러내었다. "야야, 네가 제일이다, 니이가 제일이야, 첫째야." 어쩌고 횡설 수설을 늘어놓기도 하엿다. 술자리가 더욱 무르익으면서 과원들은 사방의 인물을 끌어 대어 욕사발을 퍼붓고는 하였다. 꼭 사회 참여에 나선 대학생들 한가지였고, 대학을 갓 나와서 사회에 첫발을 내어디뎠다가 동창회 같은 데 모여서 억눌렸던 회포를 푸는 자리 한가지였다. '내일 아침이면 모두 제자리로들 돌아가서 한 가락의 표정들일 테지.' 생각하며, 이원영 주사는 술기운이래서가 아니라, 자기만 진자로 약간이나마 중뿔나게 돋아오른 듯한 이상한 착각이 들었다. 술도 별로 취해지지가 않았다. 중국집에서 나와서 모두 헤어지고, 김 사무관이 이끈느 대로 양 주사와 셋이서만 맥주나 한잔씩 더 마시려고 하였으나, 양 주사가 너무 취해 있어 김 사무관이 택시에 태워 보내 버렸다. 김 사무관도 별로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오비 홀에 들러 단둘이 마주안자 김 사무관이 두 손으로 턱을 괴며 불쑥 물었다. "그래, 앞으로는 어쩔 작정이오, 진짜 시골 갈 의향이오?" "그밖에 길이 없으니까." "가서는?" "농사나 짓지요. 농민들과 같이 살아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허지만 상록수식은 아닙니다. 차라리 그 속에 일단은 깊이 묻혀 있을 수 있으면 해요. 그것이 소망이지요," "글세에, 묻힐 수 있을까? 이것 저것 본 것, 들은 것도 많고, 힘들걸." 김 사무관이 비시시 웃으며 다시 말했다. "결국은 내려가 있을 농토라도 있으니 미스터 리는 다행이지, 그게 백본이었던 셈 아냐. 허지만 그 성질에, 내려가서 살면 더할걸. 아니꼬운 것이 더 많아질걸. 현지민들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감당하는 데도 이력이 붙었을 것이지만."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요. 허지만 우선 내려가서 겪어 보느 나거지요. 현지 농민들이 그런 식으로 당한다면 나 혼자 당하지 말라는 법도 없을 터이니까. 허지만 요즈음은 많이 나아진 것이 아닐까요, 그전보다는." "글세, 소문은 그렇지만." 김 사무관이 침통한 얼굴로 받곤 맥주 한 컵을 들이켰다. "어째, 여느 때의 김 사무관답지 않군요." 이원영 주사가 술 컵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하자, "두 가지로 살아가는 것이지 머. 냉연하게 보고 구경하면서 살아가는 자기와, 올개미 속에 들어앉아서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자기와. 요즈음은 어느 누구에게도 조그만치의 한가한 틈도 용납이 되지 않는 거 아냐. 근시안, 근시안밖에는 있을 수가 없지. 그 점에서 본다면, 미스터 리의 결단은 설령 시골이라는 백본을 감안하더라도 용감한 편에 속할 테지. 그렇지만 내려간들, 내려간 그 속에서 그 나름의 양태로 쉬이 늙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그렇지 않을 길이 어떤 길인지는 모르겠고, 어떻든 그렇지 않기를 충심으로 바라지만." "조금 쎈치해졌군요. 너무 그런 식으로 모든 일을 어둡게 채색하지 말아요. 어떤 양태로든 요즈음 도시나 시골이나 활려고가 다이내미즘이 들끓고 있지 않습니까. 외국에서들의 평가도 그런 것 같고. 우선은, 대국적으로는, 그런데 기대어 보면서 나대로의 일할 길을 찾아야지요." 이원영 주사의 이 말에 김 사무관은 시종 비아냥거리듯이 싱얼싱얼 웃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칼로 베어 내듯이 웃음을 거두고 조용히 말했다. "여하튼 편지는 하라구. 어느 의미에서가 아니라, 진짜로 나 같은 사람이 패배주의일 거야. 미스터 리 경우는 앞길이 있어, 분명히 있을 것 같어. 그 용기나 뚝심이나, 휘어들지 않고 뚝 꺾어 버리고, 다시 찾아서 가는 자세에 있어서나. 그런 속에서만 길은 열린다고 봐아겠지." 이튿날부터 이원영씨는 사무실에 나오지 않았고, 며칠 후에는 시골로 내려갔다는 편지가 김 사무관 앞으로 왔다. 그것도 짤막한 사연뿐이었다. 과장이나 태반의 과원들은 이미 별로 관심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