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冊) ; '책은 세수할 줄 모르는 미인이다.'라는 멋진 표현이 있죠. 서점에서 책을 살 때의 기분과 책을 빌리고 빌려주는 것에 대한 생각 등을 예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책을 청초한 여인으로 대한 표현할 정도로 그의 책에 대한 애착이 많이 드러납니다. 책(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더 '책'답다. 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책이다. 책은 읽기만 하는 것이라면 그건 책에게 너무 가혹하고 원시적인 평가다. 의복이나 주택은 보온만을 위한 세기는 벌써 아니다. 육체를 위해서도 이미 그렇거든 하물며 감정의, 정신의 사상의 의복이요 주택인 책에 있어서랴! 책은 한껏 아름다워라. 그대는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또한 제왕이기 때문이다. 물질 이상인 것이 책이다. 한 표정 고운 소녀와 같이, 한 그윽한 눈매를 보이는 젊은 미망인처럼 매력은 가지가지다. 신간란에서 새로 뽑을 수 있는 잉크 냄새 새로운 것은, 소녀라고 해서 어찌 다 그다지 신선하고 상냥스러우랴! 고서점에서 먼지를 털고 겨드랑 땀내 같은 것을 풍기는 것들은 자못 미망인다운 함축미인 것이다. 서점에서 나는 늘 급진파다. 우선 소유하고 본다. 정류장에 나와 포장지를 끄르고 전차에 올라 첫 페이지를 읽어보는 맛, 전찻길이 멀수록 복되다. 집에 갖다 한번 그들 사이에 던져 버리는 날은 그제는 잠이나 오지 않는 날 밤에야 그의 존재를 깨닫는 심히 박정한 주인이 된다. 가끔 책을 빌리러 오는 친구가 있다. 나는 적이 질투를 느낀다. 흔히는 첫 한 두 페이지밖에는 읽지 못하고 둔 책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에게 속삭여주려던 아름다운 긴 이야기를 다른 사나이에게 먼저 해버리려 가기 때문이다. 가면 여러 날 뒤에, 나는 아주 까맣게 잊어 버렸을 때 그는 한껏 피로해져서 초라해져서 돌아오는 것이다. 친구는 고맙다는 말만으로 물러가지 않고 그를 평가까지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경우에 그 책에 대하얀 전혀 흥미를 잃어버리는 수가 많다. 빌려 나간 책은 영원히 '노라'가 되어 버리는 것도 있다. 이러는 나도 남의 책을 가끔 빌려온다. 약속한 기간을 넘긴 것도 몇 권 있다. 그러기에 책은 빌리는 사람도 도적이요 빌려주는 사람도 도적이란 서적논리가 따로 있는 것이다. 일생에 천 권을 빌려보고 999권을 돌려보내고 죽는다면 그는 최우등의 성적이다. 그러나 남은 한 권 때문에 도적은 도적이다. 책을 남에게 빌려만 주고 저는 남의 것을 한 권도 빌리지 않기란 천 권에서 999권을 돌려보내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빌리는 자나 빌려주는 자나 책에 있어서는 다 도적됨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책은 역시 빌려야 한다. 진리와 예술을 감금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책은 물질 이상이다. 영양이나 귀부인을 초대한 듯 결코 땀이나 때가 묻은 손을 대어서는 실례다. 책은 세수할 줄 모르는 미인이다. 책에만은 나는 봉건적인 여성관이다. 너무 건강해선 무거워 안 된다. 가볍고 얄팍하고 뚜껑도 예전 능화지처럼 부드러워 한 손에 말아 쥐고 누워서도 읽기 좋기를 탐낸다. 그러나 덮어놓으면 떠들리거나 구김살이 잡히지 않고 이내 고요히 제 태로 돌아가는 인종이 있기를 바란다고 할까. 이성간의 우정 ; '우정은 연정의 유충이 아니다.'라 표현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구태여 이성간에 우정을 계획할 필요가 없다는 그의 생각이 재미있습니다. 같은 아는 정도라면 남자를 만나는 것보다 여자를 만나는 것이 우리 남성은 늘 더 신선하다. 왜 그런지 설명을 할 필요는 없지만 얼른 생각나는 것은 동성끼리는 서로 너무나 같기 때문인 듯하다. 다른 데가 너무 없다. 입는 것도 같고, 말소리도 같고, 걸음걸이도 같고, 붙이는 수작도 거의 한 인쇄물이요, 나중에 그의 감정이 은근히 이성을 그리는 것까지 같아버린다. 동일물의 복수, 그것은 늘 단조하다. 남자에 있어 여자처럼 최대, 그리고 최적의 상이물은 없다. 같은 조선 복색이되 우리 남자에게 있어 여자 의복은 완전히 이국복이다. 우리가 팔 하나 끼어볼 수 없도록 완전한 이국복이다. 우리가 조선어이되 우리 남자에게 있어 여자들의 말소리는 또한 먼 거리의 이국어다. 뜻만 서로 통할 뿐, 우리 넥타이를 맨 성대에서는 죽어도 나오지 않는 소리다. 우리가 처음 이성을 알 때, 그 이성에게 같은 농도의 이국감을, 어느 외국인에게서 느꼈을 것인가. 우리에게 여성은 완전한 이국이다. 사막에 흑인과 사자만이 사는 그런 이국은 아니다. 훨씬 아름다운, 기름진 향기로운 화원의 절도인 것이다. 오롯한 동경의 낙토인 것이다. 이 절도에의 동경을 견디다 못 해 서툰 수영법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로빈슨 크루소'들이 시정엔 얼마나 많은 것인가. 다른 것끼리가 늘 즐겁다. 돌멩이라도 다른 것끼리는 어느 모서리로든지 마찰이 된다. 마찰에서 열이 생기고 불이 일고 타고 하는 것은 물리학으로만 진리가 아니다. 이성끼리는 쉽사리 열이 생길 수 있다. 쉽사리 탄다. 동성끼리는 돌이던 것이 이성끼리는 곧잘 석탄이 될 수 있다. 남자끼리의 십 년 정보다 이성끼리의 일 년 정이 더 도수를 높일 수 있는 것은 석탄화 작용에서일 것이다. 타는 것은 맹목적이기 쉽다. 아무리 우정이라 할지라도 불이 일기 전까지이지 한번 한끝이 타기 시작하면 우정은 그야말로 오유가 되고 만다. 그는 내 누이야요, 그는 내 오빠로 정한 이야요 하고 곧잘 우정인 것을 공인을 얻으려고 노력까지 하다가도, 어느 틈에 실화를 해서 우애는 그만 화재를 당하고 보험들었다 타오듯 하는 것은 부부이기가 일수임을 나는 허다하게 구경한다. 우정이란 정보다 의리의 것이다. 부자간의 천륜보다도 더 강할 수 있는 것이 우정이다. 인류의 도덕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완고할 수 있는 것이 우정이다. 이런 굉장한 것을 부작용이 그렇게 많은 청춘 남녀끼리 건축해나가기에는 너무나 벅찰 것이 사실이다. 한 우정을 구성하기에 남자와 여자는 적당한 대수들이 아니다. 우정보다는 연정에 천연적으로 적재들이다. 주택을 위해 마련된 재목으로 사원을 짓는 짓은 곤란일 것이다. 구태여 이성간에 우정을 맺을 필요는 없다. 절로 맺어지면 모르거니와 매력이 있다 해서 우정을 계획할 것은 아니다. 매력이 있는데 우정으로 사귀는 것은 가면이다. 우정은 연정의 유충이 아니다. 연정 이전 상태가 흔히 그런 경우가 많지만은, 그것은 우정의 유린이다. 우정도 정이요, 연정도 정이다. 종이 한 겹을 나와서는 우정과 연정은 그냥 포옹해버릴 수 있는 동혈형이다. 사실 동성간의, 더욱 여성간의 우정이란, 생리적으로 불화일 뿐, 감정적으로는 거의 부부상태인 것이 많다. 그러기에 특히 정에 예리한 그들은 친하던 동무가 이성과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면 감정상 여간 큰 타격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벌써 우정의 경계선을 돌파한 이후인 증거다. 그러기에 동성연애란 명사까지 생긴다. 우정에게 있어 연정은 영구한 적이다. 결혼으로 말미암아 파괴되는 우정은 여성간의 우정 뿐 아니다. 남성간에는 별무한 편이나 남자와 여자간에는 더 노골적인 편이다. 여자끼리는 결혼 당시에만 결혼 안 하는 한편이 슬퍼할 뿐, 교양 정도를 따라서는 이내 그 우정은 부활할 수 있고, 도리어 과거의 우정에서 불순했던 것을 청산해서 우정은 영구히 우정으로 정화되는 좋은 찬스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성간의 우정은 한편이 결혼 후에 부활되거나 나아가 정화되는 것이란 극히 희귀하다. 그러니까 이성간에는 애초부터 연정의 혼색이 없이 순백한 우정이라 발생되기가 어려울 것이다. 아직 우리 사회상태는 어떤 처소에서나 동성끼리 접촉하기가 더 편리하다. 편리한 데서 굳이 고개를 돌려 불편한 이성교제를 맺는 것부터 그 불편리에 대가될 만한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성간에 본질적으로 있는 매력이다. 매력은 곧 미다. 인체에서 육체적으로나 심력저으로나 미를 발견함은 우정의 단서가 되기보다는 연정의 단서가 되기에 더 적절하다. 그런데 연애관계는 우정관계보다 훨씬 채색적이다. 인기와 물론이 높아진다. 거기서 대담한 사람끼리는 연애라는 최단거리를 취하고 소심한 사람끼리는 최장거리의 우정 코스로 몰리는 듯하다. 아무튼 이성간에 지면정도라면 몰라, 우정이라고까지 특히 지목할 만한 관계라면, 그것은 일종 연정의 기형아로밖에는 볼 수 없을 듯하다. 기형아이기 때문에 이성간의 우정은 늘 감상성이 붙는다. 늘 일보 전에 비밀지대를 바라보는 듯한, 남은 한 페이지를 읽다 그리초 덮어놓은 듯한, 의부진한 데가 남는다. 우정 건축에 부적한 원료들이기 때문이다. 그 일보 전의 비밀지대, 못다 읽고 덮는 듯한 최후의 페이지, 그것은 피차의 인격보다도 오히려 환경의 지배를 더 받을 것이다. 한부모를 가진 한피의 남매간이 아닌 이상, 제삼자의 시력이 불급하는 환경에 단둘이 오래 있어보라. 그 우정은 부부 이상엣것에라도, 있기만 한다면 돌진하고 남을 것이다. 현대 생활은 이성간의 교제가 나로 빈번해진다. 부녀자가 동쪽에서 나타난다고 눈을 서쪽으로 돌이킬 수 없는 시대다. 그 대신 본질적으로 우정 원료가 아닌 남녀끼리 우정을 계획할 필요는 없다. 알게 되면 요즘 문자로 명랑히 사교할 뿐, 특히 우정이라고 지목될 데까지 깊은 인연을 도모할 바 아니요 또 그다지 서로 매력을 견딜 수 없으면 가장을 할 것 없이 정정 당당히 연애를 정당한 방법에 의해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이성간의 우정을 절대로 부정함은 아니다. 적당한 원료는 아닐망정 집안과 집안 관계로, 혹은 단 두 사람의 사적관계로도 또는 연령상 서로 현격한 차이로, 수미여일한 우정이 생존하지 못하리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러니까 동성간이라는, 생리적으로 다른, 피차 적응성을 가졌기 때문에 제삼자의 시력 범위 외에 진출하는 찬스는 의식적으로 피해 나가야 할 것이다.남녀 문제에 있어 열 학식이나, 열 인격이 늘 한 찬스보다 약한 것은 영원한 진리이다.더욱 이성간의 우정, 이것은 흥분한 사상 청년 이상으로 끝까지 보호 관찰을 필요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남의 글 - '남의 글처럼 내 글이 쉬웠으면,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글을 쓸 때의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시작으로 해서 자기가 지은 글에 대학 애정과 고집에 대한 생각을 솔직히 표현했고, 글을 평가하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남의 글 남의 글처럼 내 글이 쉬웠으면,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자기가 쓴 것은 동사 같은 뚜렷한 말에서도 그 잘못된 것을 얼른 집어내지 못하면서 남의 글에서는 부사 하나 덜된 것이라도 이내 눈에 걸리어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다. "남의 눈에 든 티는 보면서 어찌하야 네 눈에 든 대들도는 보지 못하느냐?" 한 예수의 말씀은 문장도에 있어서는 좋은 교훈이다. 자식처럼, 글도 제게서 난 것은 애정에 눈이 어리기 때문인가? '여기가 잘못되었소'하면 그 말을 고맙게 들으려고느 하면서도 먼저는 불쾌한 것이 사실이요 고맙게 여기는 것은 나중에 교양의 힘으로 되는 예외였다. 내 글이되 남의 글처럼 뚝 떨어져 보는 속, 그 속이 진작부터 필요한 줄은 알면서도 그게 그렇게 쉽게 내속에 들어서 주지 않는다. 문장 공부도 구도의 정신에서만 성취될 것인가 보다. 오늘도 작문 40통을 앞에 놓을 때, 불현듯 도화 교원이 부러운 생각이 났다. 도화라면 백장인들 꼲기 얼마나 쉬우랴! 이것은, 그 자질구레한 글자를, 그렇게도 아낄 줄 모르고 많이만 늘어놓은 글자들을 한 자도 빼놓지 않고 발음을 해봐야 한다. 음미해야 하고 또 다른 것과 비교해야 한다. 도화나 작문이나 다 보아야 하는 의무는 마찬가지지만, 도화를 꼲는 것은 미용의 심사요, 작문을 꼲는 것은 신체검사라 할까. 얼른 들떠놓고 한눈으로 보고는 어떻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작문이다. 이 점에 있어 그림은 글보다 언제나 편리하다. 미술은 전람회장에 들어서면 두 시간에 내지 서너 시간에 수백명의 작품을 완전히 감상할 수가 있다. 그러나 문학은 <전쟁과 평화> 같은 것은 그 하나만 가지고도 여러 주야를 씨름해야 한다. 그런 글, 그런 문학이면서도 이 스피드 시대에 그냥 엄연한 존재를 갖는 것은 이상스러울 만한 일이 아닌가. 더구나 작문에 있어 점수를 매긴다는 것은 가장 불유쾌한 의무다. 그냥 '여기가 좋소' 그냥 '여기는 이렇게 고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투로만 보아나간다면 좋겠는데 교무상 채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과학에서와 같이 공식적인 해답을 쓰고 못 쓴 것이라면 한 문제에 몇 점씩으로 해서 그야말로 과학적인 정확한 채점이 될 수 있지만 글은 그런 계산적인 채점 표주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90점을 주면서도 이것은 왜 90점에 해당한다는 논리적인 설명을 할 수 없다. 대체가 감정 속에서 처리되는 것이므로 작문 점수란 영원히 부정확한 가점수일 것이다. 낮은 점수를 받은 학생의 불유쾌는 무론의 것이려니와 야박스럽지만 더 잘 쓴 여러 층의 사람들이 위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낮은 점수를 매겨야 하는 교사도 결코 유쾌할 수 없는 일이다. 점수가 적은 것을 들고 그 학생을 부를 적에는 남에게 변변치 못한 음식을 줄 때와 같이 손이 잘 나가지 않는 것을 학생들은 아마 몰라줄 것이다. 재능이든 선악이든 남을 전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요 또 좋은 업이 아닐 듯싶다. 더욱 남에게 "너는 종신 징역에 처한다." "너는 사형에 처한다." 하는 분들은 그 자신들부터 얼마나 신산할 것인가! 작품애 작품애(作品愛) 어제 경성역으로부터 오는 기동차에서다. 책보를 메기도 하고, 끼기도 한 소녀들이 참새떼가 되어 재깔거리는 틈에서 한 아이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흑흑 느껴 울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우는 동무에게 잠깐씩 눈은 던지면서도 달래려 하지 않고, 무슨 시험이 언제니, 아니니, 내기를 하자느니 하고 저희끼리만 재깔인다. 우는 아이는 기워 입은 적삼 등어리가 그저 들먹거린다. 왜 우느냐고 묻고 싶은데 마침 그대들 뒤에 앉았던 큰 여학생 하나가 나보다 더 궁금했는지 먼저 물었다. 재재거리던 참새떼는 딱 그치더니 하나가 대답하기를 "걔 재봉한 걸 잃어버렸어요." 한다. "학교에 바칠 걸 잃었니?" "아니야요, 바쳐서 잘했다구 선생님이 칭찬해주신 걸 잃어버렸어요. 그래 울어요." 큰 여학생은 이내 우는 아이의 등을 흔들며 달랜다. "얘 울문 뭘 허니? 운다구 찾아지니? 울어도 안 될 걸 우는 건 바보야." 이 달래는 소리는 기동차 달아나는 소리에도 퍽 맑게 들리어, 나는 그 맑은 소리의 주인공을 다시 한번 돌려 보았다. 중학생은 아니게 큰 처녀다. 분이 피어 그런지 흰 이마와 서늘한 눈은 기동차의 유리창들 보다도 신선한 처녀다. 나는 이내 굴속으로 들어온 기동차의 천장을 쳐다보면서 그가 우는 소녀에게 한 말을 생각해보았다. "얘 울문 뭘 허니? 운다구 찾아지니? 울어두 찾아질 리 없고, 또 울어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우는 것은 확실히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울음에 있어 곧잘 어리석어진다. 더욱 이 말이 여자로도 눈물에 제일 빠른 처녀로 한 말임에 생각할 재미도 있다. 그 희망에 찬 처녀를 저주해서가 아니라 그도 이제부터 교복을 벗고 한번 인간 제복으로 갈아입고 나서는 날, 감정 때문에, 혹인 이해 상관으로 '울어도 안 될 것'을 울어야할 일이 없다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신촌역을 내려서도 이 '울문 뭘 하니? 울어두 안 될 걸 우는 건 바보야.' 소리를 생각하며 걸었다. 그러나 이 말이나 이 말의 주인공은 점점 내 마음속에서 멀어가는 대신 점점 가까이 떠오르는 것은 그 재봉한 것을 읽어버렸다는 소녀이다. 그는 오늘도 울고 있을 것 같고 또 언제든지 잃어버린 조그마한 자기 작품이 생각날 때마다린 조그마한 자기 작품이 생각날 때마다 서러울 것이다. 등어리를 조각조각 기워 입는 것을 보아 색헝겊 한 오리 쉽게 얻을 수 잇는 아이는 아니었다. 어머니께 조르고 동무에게 얻고 해서 무엇인지 모르나 구석을 찾아 앉아 동생 보지 않는다고 꾸지람을 들어가며 정성껏, 솜씨껏, 마르고, 호고, 감치고 했을 것이다. 그것이 여러 동무의 것을 제쳐놓고 선생님의 칭찬을 차지하게 될 때, 소녀는 세상일에 그처럼 가슴이 뛰어본 적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이제 하학만 하면 어서 가지고 집으로 가서 부모님께도, 좋은 끗수 받은 것을 자랑하며 보여드리려던 것이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 소녀에게 있어선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요 작은 슬픔이 아닐 것이다. 나도 작품을 더러 잃어보았다. 도향의 죽은 이듬핸가 서해형이 <현대평론>에 도향 추도호를 낸다고 추도문을 쓰라 하였다. 원고청이 별로 없던 때라 감격하여 여름 단열밤을 새어 썼다. 고치고 고치고 열 번도 더 고쳐 현대평론사로 보냈더니 서해형이 받기는 받았는데 잃어버렸으니 다시 쓰라는 것이다. 같은 글을 다시 쓸 정열이 나지 않았다. 마지못해 다시 쓰기는 썼지만 아무래도 처음에 썼던 것만 못한 것 같아 찜찜한 것을 참고 보냈다. 신문, 잡지에 났던 것도 미처 떼어두지 않아서, 또 떼어뒀던 것도 어찌어찌해 없어진다. 누가 와 어느 글을 재미있게 읽었노라 감상을 말하면, 그가 돌아간 뒤에 나도 그 글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 찾아본다. 찾아보아 찾아내지 못한 것이 이미 서너 가지 된다. 다시 그 신문, 잡지를 찾아가 오려 오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꽤 섭섭하게 그날밤을 자곤 하였다. 이 '섭섭'을 꽤 심각하게 당한 것은 장편<성모>다. 그 소설의 주인공 순모가 아이를 낳아서부터, 어머니로서의 애쓰는 것은 나도 상당히 애를 쓰며 섰다. 책으로는 못 나오나 스크랩채로라도 내 자리 옆에 두고 싶은 애정이 새삼스럽게 끓었다. 그러나 울지는 않았다. 위에 기동차의 소녀처럼 울지는 않았다. 왜 울지 않았던가? 아니 왜 울지 못하였는가? 그 작품들에게 울 만치 애착, 혹은 충실하지 못한 때문이라 할 수밖에 없다. 잃어버리면 울지 않고는, 몸부림을 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작품을 써야 옳을 것이다. 일분어(一分語) 십분심사일분어(十紛心思一分語)란, 품은 사랑은 가슴이 벅차건만 다 말 못 하는 정경을 가리킴인듯하다. 이렇듯 다 말 못 하는 사정은 남녀간 정하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 표현이 모두 그렇지 않은가 느껴진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뜻을 세울 수가 없고, 말을 붙일 수가 없어 꼼짝 못 하는 수가 얼마든지 있다. 나는 문갑 위에 이조 때 제기 하나를 놓고 무시로 바라본다. 그리 오랜 것은 아니로되, 거미 줄처럼 금간 틈틈이 옛 사람들의 생활의 때가 푹 배어 있다. 날카롭게 어여낸 여덟모의 굽이 우뚝 자리잡은 위에 엷고, 우긋하고, 매끄럽게 연인처럼 자연스럽게 변두리가 훨쩍 피인 그릇이다. 고려자기 같은 비취빛을 엷게 띠었는데 그 맑음, 담수에서 자란 고기 같고 그 넓은, 하늘이 온통 내려앉아도 능히 다 담을 듯싶다. 그리고 고요하다. 가끔 묻는 이가 있다. 그 그릇이 어디가 그리 좋으냐 함이다. 나는 더러 지금 쓴 것과 같이 수사에 힘들여 설명해본다. 해보면 번번이 안 하니만 못 하게 부족하다. 내가 이 제기에 가진 정말 좋음을 십분지 일도 건드려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욱 그럴싸한 제환공과 어떤 노목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번, 환공이 당상에 앉아 글을 읽노라니 정하에서 수레를 짜던 늙은 목수가 톱질을 멈추고, 읽으시는 책이 무슨 책이오니까 물었다. 환공 대답하기를, 옛 성인의 책이라 하니, 그럼 대감께서 읽으시는 책도 역시 옛날 어른들의 찌꺼기올시다 그려 한다. 공인의 말투로 너무 무엄하여 환공이 노기를 띠고, 그게 무슨 말인가 성인의 책을 찌꺼기라 하니 찌꺼기될 연유를 들어야지 그렇지 못하면 살려두지 않으리라 하였다. 늙은 목수 자약하여 아래와 같이 아뢰었다 한다. 저는 목수라 치목하는 예를 들어 아뢰오리다. 톱질을 해보더라도 느리게 다리면 엇먹고 급하게 다리면 톱이 박혀 내려가질 않습니다. 그래 너무 느리지도 너무 급하지도 않게 다리는 데 묘리가 있습니다만, 그건 손이 익고 마음에 통해서 저만 알고 그렇게 할 뿐이지 말로 형용해 남에게 그대로 시킬 수는 없습니다. 아마 옛적 어른들께서 정말 전해주고 싶은 것은 모두 이러해서 품은 채 죽은 줄 아옵니다. 그겋다면 지금 대감께서 읽으시는 책도 옛 사람의 찌꺼기쯤으로 불러 과언이 아닐까 하옵니다. 환공이 무론 턱을 끄덕였으리라 믿거니와 설화나 문장이나 그것들이 한 묘의 경지의 것을 발표하는 기구로는 너무 무능한 것임을 요새와 점점 절실하게 느끼는 바다. 선승들이 불립문자설에 더욱 일깨워짐이 있다. 화단(花壇) 찰찰하신 노주인이 조석으로 물을 준다. 거름을 준다, 손아들을 데리고 일삼아 공을 드리건마는 이러한 간호만으로는 병들어가는 병들어가는 화단을 어찌하지 못하였다. 그 벌벌하고 탐스럽던 수국과 옥잠화의 넓은 잎사귀가 모두 누릇누릇하게 뜨기 시작하고 불에 불에 덴 것처럼 부풀면서 말라들었다. "빗물이나 수돗물이나 물은 마찬가지 일텐데......" 물을 주고날 때마다, 화단에서 어정거릴 때마다 노인은 자못 섭섭해 하였다. 비가 왔다. 소나기라도 한줄기 쏟아졌으면 하던 비가 사흘이나 순조로 내리어 화분마다 맑은 물이 가득가득 고이었다. 노인은 비가 갠 화단 앞을 거닐며 몇 번이나 혼자 수군거리었다. "그저 하눌물이라야...... 억조창생이 다 비를 맞아야......" 만지기만 하면 가을 가랑잎 소리가 날 것 같던 풀잎사귀들이 기적과 같이 소생하였다. 노랗게 뜸이 들었던 수국잎들이 시꺼멓게 약이 오르고 나오기도 전에 옴츠러지던 꽃봉오리들이 부르튼 듯 탐스럽게 열리었다. 노인은 기특하게 여기어 잎사귀마다 들여다보며 어루만지었다. 원래 서화를 좋아하는 어른으로 화초를 끔찍이 사랑하는 노인이라, 가만히 보면 그의 손이 가지 않은 나무가 없고 그의 공이 들지 않은 가지가 없다. 그 중에도 석류나무 같은 것은 철사를 사다 층층이 테를 두르고 곁가지를 짜르기도 하고 휘어붙이기도 하여 사층나무도 되고 오층으로 된 나무도 있다. 장미는 홍예문같이 틀어올린 것도 있고 복숭아나무는 무슨 비방으로 기른 것인지 키가 한자도 못 되는 어린 나무에 열매가 도닥도닥 맺히었다. 노인은 가끔 안손님들까지 사랑마당으로 청하여 이것들을 구경시키었다. 구경하는 사람마다 희한해 했다. 그러나 다행히 이러한 화단이 우리 방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번도 노주인의 재공을 치하하지 못한 것은 매우 서운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있는 재주를 다 내어 기른 그 사층나무 오층나무의 석류보다도 나의 눈엔 오히려 한편 구석 응달 밑에서 주인의 일고지혜도 없이 되는 대로 성큼성큼 자라나는 봉선화 몇 떨기가 더 몇 배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이다. 무럭무럭 넘치는 기운에 마음대로 뻗고 나가려는 가지가 그만 가위에 짤리우고 철사에 묶이어 채반처럼 뒤틀려 있는 것은 아무리 봐도 괴로운 꼴이다. 불구요 기형이요 재변이라 안 할 수 없다. 노인은 푸른 채반에 붉은 꽃송이를 늘어놓은 것 같다고 하나 우리의 무딘 눈으로는 도저히 그런 날카로운 감상을 즐길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불유쾌를 느낄 뿐이었다. 자연은 신이다. 이름 없는 한 포기 작은 잡초에 이르기까지 신의 창조가 아닌 것이 없다. 신의 작품으로서 우리 인간이 손을 대지 않으면 안 될 만한 그러한 졸작, 그러한 미완품이 있을까? 이것은 생각만으로도 어리석은 일인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파괴하고 불구되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창조하거나 개작할 재주는 없을 것이다. 출처 etext down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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