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문(이청준 문학전집) 지은이:이청준 출판사:열림원 산노인과 젊은 방문객 남녘의 영산 지리산의 산역은 경상과 전라 3도에 걸치고, 함양과 산청, 남원, 구례, 하동의 다섯 고을에 뻗친다. 둘레가 7백리의 거대한 산해. 표고 1천9백15미터의 주봉 천왕봉에서 서 쪽 구례 땅의 노고단에 이르는 주 능선만 하여도 백여 리 먼길을 헤아리는 거리에, 낙동강 과 섬진강의 분수령을 이루며, 일대에는 제석, 반야, 영신, 덕평 등 해발 1천 미터가 넘는 20 여 준령들과 연봉들이 일망 무제로 운해 위를 달린다. 그러나 지리산은 어느 쪽 어느 고을 에서든지 그 산령 안으로 한 번 발을 들여놓고 나면, 고을과 고을의 경계들이 대번 무의미 해져 버린다. 첩첩이 이어져 나가는 운해와 산세 속에 고을의 경계 따위가 쉬 구분될 수도 없고, 또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산봉우리들이 미처 다 제 이름을 점지받지 못한 곳, 사람들이 때로 이름을 지어 붙여도 산들이 스스로 그 이름을 잃어버리고 지리산(!) 으로 돌아가 버리는 곳, 모든 것이 지리산의 이름 뒤로 숨는 곳, 모든 봉우리와 골짜기의 이 름들을 지리산으로 대신하며 그 하나의 이름만으로 온전한 세계를 이루고 있는 곳. 백상도 노인의 은거지가 자리한 곳은 그런 지리산 줄기의 한 서쪽 봉우리 아래다. 이곳은 천왕봉 서쪽 제석봉에서 연하봉으로 내려가는 산줄기의 한 남록으로, 관할 군청의 현황판이 라도 살펴봄이 업이 현지에선 전혀 일대의 지명이나 위치를 구분해낼 길이 없는 곳이다. 대 강의 거리와 방위를 어림잡아 말하면, 여기서 제법 온전한 세상풍물을 접해볼 만한 함양땅 덕진리까지는 30여 리, 벽소령과 반야봉, 노고단을 휘어도는 구례땅(마산면 화엄사 계곡)까 지는 서쪽으로, 그보다 서너 배나 더 되는 아득한 거리다. 더 이상은 도대체 자세한 설명조 차가 소용없는 곳이다. 그저 지리산 위 첩첩산중의 한 봉우리 아래, 바위와 바위 사이에 통 나무를 얽어 세운 노인의 산중 거처는 그러니까 역시 그밖엔 달리 설명이 불가능한 곳에 숨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이곳에선 더 이상 자세한 방위나 위치의 설명이 소용될 일이 없는 때문이다. 산이나 골짜기에 굳이 이름을 지어 부를 일도 없었다. 노인 한 사람밖엔 이곳을 알고 있는 사람도, 알아야 할 일도 없는 것이다. 깊은 산 속에서, 혼자서 잠을 깨고 혼자서 잠이 드는 노인에게도 그건 역시 소용되는 일이 아니었다. 노인에겐 다만 자신이 깃들어 하늘과 산과 골짜기를 내다볼 적당한 시야가 마련되어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노인에게 필요한 만큼의 시야는 충분했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 얽어 세운 통 나무 굴집이 산봉우리와 골짜기의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었다. 노인은 다만 그것으로 충분했 다. 노인은 이날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아침요기를 끝내자 그는 물에 불린 옥수수 한 줌 과 물자루 하나 그리고 땅벌을 불러들일 석밀과 소금이 조금씩 나눠 담긴 조그만 망태기를 꾸려 메고 여느 때처럼 무심히 굴집을 나섰다. 아직 여름이 한창인데도 산지의 아침은 벌써 바람기가 서늘했다. 노인이 통나무 굴집을 나서자, 멀고 가까운 산봉우리들이 언제나처럼 일 제히 자리를 고쳐 앉았다. 노인 앞에선 어느 것 하나도 이름이 없는 봉우리들이었다. 이름도 없고 찾는 이도 없이, 사람들에게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산들은 아예 이 세상엔 없는 것 한가지였다. 하지만 그 산들에겐 노인이 있었다. 노인이 있기 때문에 산들도 아직 거기 있었 다. 이름이 없어도 산봉우리들은 노인의 존재로 하여 거기 함께 의연히 거증되어 있었다. 노 인도 그걸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굳이 말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번거로운 생각들을 지닐 일도 없었다. 말을 하려도 할 사람이 없었다... 봉두난발 에 긴 수염을 가볍게 나부끼며 그는 한동안 묵연한 모습으로 첩첩이 멀어져 간 연봉들을 아 득히 굽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 하루의 산행을 위해 그가 이윽고 굴집을 둘러친 낮고 거친 돌각담 밖으로 발길을 천천히 내디뎠을 때, 그때 문득 평온하고 적막스럽기만 하던 이 산골의 한구석에서부터 어떤 예기찮은 작은 조짐이 비춰 들기 시작한다. 조짐의 형태는 물 론 노인의 눈에 처음 발견되고 그로부터 어떤 심상찮은 예감의 징후를 띠기 시작한 작은 움 직임이었는데, 그것은 실로 노인이 이 땅에서 자신의 육신이 스러져 묻힐 때를 기약하고 몇 달 몇 해고 참고 기다려온 그 절세의 침묵과 인고의 세월에 대한 또 한차례 무서운 시련의 시발이 되고 있는 셈이었다. 발길을 막 옮겨 디디려던 노인의 눈길 속에 골짜기 아래쪽으로 부터 얼핏 조그만 움직임 같은 것이 스쳐 왔다. 그러자 노인은 다시 발길을 멈추고 무엇인 가 새로운 예감에 사로잡힌 듯 급히 골짜기 쪽으로 눈길을 꽂아 내렸다. 그간의 침묵과 외 로움이 그토록 답답하고 깊었기 때문일까. 그리고 사람의 모습과 사람의 말이 그토록 기려 져 온 때문일까. 순간, 그러는 노인의 눈길 속엔 어떤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의 빛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골짜기의 움직임은 분명 어떤 사람의 형체였다. 그것도 골짜기를 치올라오고 있는 폼이 약초나 캐러 다니는 여느 산사람이 아닌 게 분명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형체의 움직임 이 점점 커지고, 거기 따라 그 움직임의 형체도 완연한 모습을 지어가고 있었다. 그 움직임 이 지호지간의 거리까지 다가와 젊고 건강한 한 사내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노인 의 얼굴에선 차츰 그 기쁨과 반가움의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기쁨과 반가움의 빛이 외려 믿을 수 없을 만큼 속도로 어떤 당혹스러움과 의혹의 빛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벌써 그럴 리가... 노인의 얼굴엔 이제 그쯤 낭패의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노인은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노인으로서도 실상 언젠가는 누군가가 그렇게 산을 찾아 나타나게 될 것을 알 고 있었다. 노인은 다만 그것이 그리 쉬울 수 없을뿐더러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를 알지 못 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가 아직은 사람을 부르고 싶어했거나 기다려본 바가 없 는 때문이었다.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노인 쪽에서 거의 그 시기를 짐작해온 터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떤 짐작도 없었거니와 그것을 깊이 바라온 바도 없었다. 보다는 오히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온 터였다. 한데 사내는 뜻밖이랄 정도로 일찍 서둘러 산을 찾아온 것이다. 여간만 난처하고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위인이 어떻게 그렇게 불쑥 산을 찾아들게 되었는 지, 절박스런 의구심부터 앞을 서고 있었다. 노인은 그가 어떤 위인인지 자세한 신분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자기를 찾아 이 산속을 헤매 들어온 위인일시 분명하다면, 그가 이쪽을 알고 있는 만큼은 이쪽도 그의 절반쯤은 알고 있는 셈이었다. 장담할 수는 없는 일 이지만, 노인으로서도 이미 사내의 산행 목적을 짐작할 수 있는 때문이었다. -부질없는 노릇이지. 그래봐야 역시 부질없는 노릇이야. 젊은이가 괜한 재앙을 부를 일에 발을 들여놓았어. 사내의 모습에 가까워질수록 노인의 얼굴엔 깊고 무거운 수심기가 끼여들고 있었다. 하지 만 노인은 이제와서 굳이 사내와의 대면을 회피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뒤늦게 몸을 비켜 숨기려 하지 않았다. 노인은 이제 거의 체념을 한 표정으로, 그러나 뭔가 끈질기게 자신을 찾아내고 있는 얼굴로 사내를 이윽히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도 이제는 그 노인의 기미를 알 아차린 것 같았다. 그는 알은체나 부름소리 한마디 없이 노인에게로 곧장 우거진 골짜기의 관목들 사이를 단걸음에 헤쳐 올랐다. 본격적인 등산복 차림에 등덜미에 묵직한 배낭까지 꾸려 짊어진 젊은 사내가 이윽고 노인 의 턱밑까지 다가와 걸음을 멈춰섰다. 그리고 그는 미리 노인의 소재를 알고 온 사람답게 첫마디부터 제법 푸념조로 나왔다. "아이구, 길이 이렇게 어려운 줄은 몰랐군요. 웬 거처를 이렇게 높이 지니셨습니까." 푸념과 함께 사내는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연신 수 건으로 훔쳐대며, 자신의 산행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확인해 보고 싶은 듯, 그가 방금 헤 쳐 올라온 골짜기를 다시 한번 멀리 훑어 내렸다. 하지만 그런 사내의 푸념 속엔 모처럼 사 람을 만난 반가움 보다 노인에 대한 어떤 언외의 신뢰감 같은 것이 짙게 깔려 있었다. 노인 은 그러나 섣불리 그 사내의 기미를 아는 척하지는 않는다. "보아하니... 산을 무척 타시는 모양인데... 어뜨케 이런 깊은 곳꺼지... 험한 길을 잡았소?" 사내의 기미를 부러 모른척, 노 인이 비로소 꽤 어눌스런 말투로 첫마디를 건넸다. 말씨가 그리 어눌스레 들리는 것은 노인 이 너무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본 탓인 듯싶었다. 사내는 그제야 다시 노인쪽으로 몸을 돌리 며 새삼스런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역시 새삼스런 목소리로 노인의 말에 응대를 해왔다. "예, 산을 좀 타기는 하지요. 하지만 아무리 산을 좋아한다구 할 일 없이 이런 험한 산속까 지 찾아들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렇담... 무슨 걱정이 있어... 찾아온 길이란 말이오?" 노인 의 어조가 약간 조급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러자 사내도 자신의 용건에 의외로 정직했다. "글 쎄요. 노인장이 아니시라면 이 산중으로 누굴 찾아오겠습니까." "날... 나를 찾아왔단 말이 오?" 바람결에 계속 수염을 나부끼고 있던 노인의 얼굴에 새삼 당황스러워하는 빛이 지나갔 다. 사내는 다시 골짜기 쪽으로 시선을 흘리며 노인의 추궁투에 간단히 응대했다. "예, 그제 아침 황전이라든가 하는 그 화엄사 쪽 동네에 우연히 노인장의 말씀을 듣게 됐지요." "화엄 사 쪽에서? 그쪽으론 내가 발길을 한 지가 한참 되는데... 그 사람들이 어뜨케 아직 내가 이 곳에 살아남아 있을 줄을 알고서...?" "그 사람들도 대개 그런 말을 하더군요. 노인장께서 산 을 내려오신 지가 반년을 훨씬 넘을 거라구요..." "그래, 이 늙은이한텐 무슨 볼 일이?" 노인 은 번번이 사내를 경계하는 어조였다. 하지만 사내는 그럴수록 말대꾸에 옹색해 하는 데가 없었다. "예, 지리산까지 온 김에 노인장한테서 석밀이나 좀 구해 갈까 하구요. 그 화엄사 쪽 아랫동네서 어르신의 석밀 이야길 들었거든요." 시원시원한 사내의 대꾸에 노인은 그제 서야 뭔가 좀 안심이 되는 듯, 표정이 한결 부드럽게 풀어졌다. 하지만 노인은 그것으론 아 직 다 사내를 안심해버릴 수가 없는 듯싶었다. "석밀이라... 돌꿀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길 래?" 그는 아직도 미심쩍은 기색을 털어버리지 못한 채 사내를 좀더 뜯어 살피려는 눈치였 다. 젊은 방문자가 그런 노인을 안심시키듯 말했다. "자연 석밀을 모를 리가 있습니까. 석밀 의 약효는 전부터 자주 듣고 있었지요. 하지만 제가 예까지 산엘 들어온 것은 그 황전 사람 들에게서 이곳 노인장의 이야길 듣게 된 소이지요. 그 사람들, 어르신을 이만저만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던걸요. 이 한두 해 동안은 돌청 한 방울 내보낸 일이 없으시다구요. 그 사람들 이 그토록 어르신의 석밀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제가 길을 나선 겁니다." "돌꿀 좋은 줄은 이 늙은이도 알고 있소. 하지만 내놓은 장사꾼이 아닌 담에야 그까짓 산꿀 몇 방울 구해 가 자고 이 험한 산길을 찾아 든단 말이오?" "분명히 듣거나 와본 일들이 없어서 사람들이 여 기 어르신의 처소를 제대로 일러주질 못했을뿐더러, 저도 첨엔 이쪽 길이 이렇게까지 깊은 줄을 몰랐으니까요. 남원이나 함양 쪽 같은 북쪽으로 해서라면 고생이 덜했겠지만, 노인장의 꿀 이야기를 들은 게 그쪽이었거든요. 노인장께서는 길이 더 먼데도 지금까지 늘 그쪽으로 만 꿀을 내보내셨다면서요... 하지만 제가 이토록 고생을 한 것은 그보다도 노인장께서 너무 오랫동안 산을 내려오지 않으신 탓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후벼도 사내 쪽엔 긁히는 대목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노인에겐 그럴수록 미심쩍은 느낌이 더해갔다. 그토록 멀고 확실치도 않은 길을 그리 한사코 찾아 들어온 길이라면 필시 그 돌꿀 나부랑일 위해서만은 아닐 듯싶 어진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이제 자신의 의혹을 그쯤에서 그만 눌러 참아두는 수밖에 없었다. 의심이 많으면 되려 이쪽이 더 큰 의심을 사게 될 수가 있었다. 시기나 경우가 전혀 엇갈리고 있는 걸로 보아 사내는 어쩌면 정말로 그저 산꿀 나부랑이나 구하러 들어온 등산 객에 불과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니 그가 혹시 무슨 낌새를 알아차리고 온 사람이라 하 더라도 이쪽에서 먼저 의심을 사게 하거나 위인의 경계심을 일깨워놓는 건 바랄 바가 아니 었다. 노인은 좀더 마음을 편하게 갖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좀더 기다려보기로 마음을 바꾸 었다. "그야 나도 내려보낼 꿀방울이 모아졌으면 왜 여태까지 내려보내질 않았겠소. 그 동안 에 거의 따 모은 게 없어서 그리 된 거외다." 한번 더 자신을 가다듬고 난 노인은 모처럼 사내가 물어 오지도 않은 말을 제물에 앞장서 털어놓고 있었다. 그리고는 제법 흉허물없는 손님이라도 맞아들이듯 자신이 먼저 돌담 안으로 발길을 되돌리며 젊은 사내를 함께 청해 들였다. "어쨌거나 길을 휘지 않은 건 재수가 좋은 편이지요. 하지만 아직도 내려보낼 꿀이 없으시다면 이 고생도 모두 허사가 되는 겁니까?" 젊은 사내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사양의 기색 없이 곧 노인을 뒤따르며 사람좋게 지껄여댔다. 두 사람은 이내 두 개의 바위 틈에 ㅅ 자 지붕을 얹어 이은 통나무 굴집 거처로 들어섰다. "거처가 이 꼴이니 권하기도 뭣하오만, 그래도 이 산중에 사람이 깃든 곳은 이곳뿐이니 여기서 잠시 쉬어 가도록 하구려." 노인이 그 지붕 아래로 싸릿대를 엮어 깔아놓은 돌마루 위로 사내의 짐을 풀게 했다. 사내도 그 노 인의 말대로 등덜미의 짐을 풀어 놓고 다리를 뻗고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돌담으 로 둘러싸인 경내를 살피다 말고 무심결인 듯 노인에게 물었다. "옥수수를 손수 길러 잡수 십니까?" 돌담 양쪽으로 수염을 빼물기 시작한 옥수수대를 두고 물은 말이었다. "예, 여기선 곡물을 올려 오기도 어려우니까요. 게다가 불기를 않고 씹을 만한 재배곡은 옥수수가 그중 나은 편이라오." 노인도 처음엔 별 의심없이 대꾸와 부연을 덧붙여 나갔다. "생식을 하시는 가요?" "이런 데서 매번 불기를 만들기도 번거로운 노릇 아니겠소. 입산후부터 생것을 씹기 시작한 것이 이젠 그럭저럭 아주 버릇이 되고 말았다오." "하지만 일기가 차서 재배할 곡종 이 많지 않을 텐데요." "그러니 바람기 적고 햇볕 잘 드는 의지를 찾아 이것저것 심어보곤 하지요. 옥수수나 감자 등속은 그런대로 조금씩 수확을 얻어요. 그것도 모자라니 여름 한철 엔 나무 열매나 고사리, 더덕 같은 나물 뿌리도 캐 말리고..." 사내의 물음은 그러나 그 정도 에서 금방 그칠 기색이 아니었다. 노인은 그 사내의 바닥 모를 호기심이 아무래도 찜찜하게 마음에 걸려왔다. 아니 그는 처음부터 이 호기심 많고 정체가 아리송한 내방객과 오래 머무 를 생각이 없었다. 작자를 좀더 붙들어 두고 싶은 생각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많 이 고이지 않아도 욕망은 순식간에 차오를 수 있었다. 기왕에 제 발로 찾아든 위인이니 작 자를 붙들어 두고 자신의 갈망과 믿음을 한번 더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 위험한 생사간의 대결을 사내와 더불어 결말지어 버리고 싶어지기도 하였다. 위인의 심상찮은 호기심을 느낄 때마다 그런 충동이 문득문득 가슴을 아프게 두들겨대곤 하였다. 하지만 노인은 참기로 하 였다. -이 작자로도 어차피 결말을 보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 공연히 한번 더 사람만 다칠 텐 데... 기왕지사 참기로 작정을 한 바엔 위인과 길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시간 을 끄는 것은 그만큼 힘든 참음과 고통의 연장일 뿐이었다. 작자와 빨리 헤어지는 게 현명 했다. "그럼 잠시 좀 기다려보시겠소?" 사내의 집요한 호기심을 피하여 노인은 이제 그쯤에 서 자리를 일어섰다. 그리고는 뭔가 다시 묻고 싶은 것이 있는 듯한 사내의 기미를 무시한 채 그간에 혼자 작심해둔 일을 서둘렀다. "돌꿀 때문에 예까정 오셨다니 말대접이라도 좀 해드릴 게 남아 있는질 봅시다." 말을 하고 나서 노인은 얼핏 그 동굴속 같은 껌껌한 거처 안으로 모아둔 물목을 찾아 들어가려 하였다. "저한테 지금 꿀을 주시려구요?" 노인의 그런 갑작스런 행동에 사내가 왠지 당황스런 표정으로 노인의 호의를 가로막고 나섰다. "그렇게 급히 서두를 건 없습니다. 전 이제 막 산을 올라온 참인데 숨이나 좀 돌리고 나야지요." "서 두를 일이 없는 건 노형 쪽이지요. 난 지금 산을 나가봐야 하외다." 노인이 다시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내를 나무라듯 퉁명스럽게 받았다. 그러는 그는 무언가 아직도 자신을 견디려 애 를 쓰고 있는 기미가 역력했다. 하지만 사내 쪽도 예까지 산을 올라왔을 때는 나름대로 생 각이 있었을 터였다. 노인의 일방적인 결정과 권유 앞에 그 역시 간단히 물러설 기미가 아 니었다. "그럼 저더러 지금 당장 산을 내려가라는 겁니까?" "아니, 지금 당장에 내려가시라 는 건 아니오. 그나마 여긴 내 집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니 쉬고 싶은 만큼 얼마동안이라도 쉬어 가도록 하시구려. 하지만 난 해가 떨어진 다음에나 돌아오게 될 사정이라 너무 오래 머무는 건 권할 수가 없소이다." "산중 인심이라는 게 원래 이렇지가 않을 텐데요. 하하." "아마 간밤에 노숙을 하셨다면 아침 요기도 그리 든든치가 못하셨을 텐데, 보다시피 지내는 형편이 워낙 이래놔서 그런 줄을 알고도 시장기 한 끼 메워드릴 엄두를 못내고 있는 형편이 라오. 게다가 예서 바깥세상까지는 하루 산길이 넘치는 곳이오. 너무 늦게서 길을 나서는 건 그리 현명한 처사가 못 될 거외다. 자, 그러니 내 미안한 인사로다가 남은 꿀이나 좀 나눠 드릴 테니..." 노인은 거의 사정투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사내대로 노인의 심중을 아 랑곳없이 엉뚱한 농기로 떼를 쓰고 들었다. "어르신의 배려는 고맙습니다만, 그러나 전 지금 꿀값을 내놓을 형편도 못 되는 걸요. 산사람 행장이 원래 그렇지만 전 실상 길을 나서면서 도 노인장을 만나뵐 자신이 많지 않았거든요." "이 늙은이도 무슨 꿀값 따위를 바라서가 아 니오. 산을 내려가지 않으면 무에 어디다 쓸 일도 없으니... 난 그저 예까장 온 사람 요기 한 끼 시켜드리지 못한 인사로다 그러자는 것뿐이외다." "등에 지고 온 게 아직 좀 남아 있어 서 노인장께 제 끼니 걱정을 끼쳐드릴 염려는 없을 겝니다." "..." "어쨌거나 노인장께선 일 을 다녀오십시오. 그 대신 저녁때 제가 아직 산을 내려가지 않고 있더라도 나무라지만 말아 주시구요." "그야... 여기가 네 산도 내 산도 아닌 담에, 누가 눌 내려가라마라 하겠소만..." 젊은이는 끝내 산을 내려갈 기미가 아니었다. 노인도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없는 처지. 그는 못내 꺼림칙한 표정으로, 그러나 바로 그 순간부터 갑자기 가슴으로 밀려드는 어떤 새로운 갈망과 전율스런 충동질 앞에 자신을 간단히 체념해버린다. 그리곤 아직도 농기가 가시지 않고 있는 사내를 버려둔 채 천천히 혼자서 산행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백상도 노인은 혼자서 굴집을 나와 해가 하얗게 치솟아 오른 동쪽 봉우리를 바라보며 골 짜기를 하나 건너갔다. 굴집을 한참 멀어져 가면서도 노인은 한번도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 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거처에 혼자 남겨두고 온 젊은이의 거취가 궁금해지고 있는 자 신을 견디려 함이었다. 노인은 능선을 하나 넘고 굴집 쪽의 시야를 완전히 벗어났을 때쯤 해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발길을 멈춰섰다. 산중턱 저만큼 바위 아래 하얀 도라지꽃이 한 무더기 무리를 이루고 피어 있었다. 노인은 잠시 숨을 돌리고 난 다음, 다시 그 도라지꽃 무 더기 쪽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겨갔다. 그리고 그 꽃무더기와 대여섯 발짝쯤 떨어진 곳에다 옆구리에 메고 온 망태기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 털썩 몸을 주저앉혔다. 구름 한 점 없는 화 창한 날씨. 따가운 햇볕이 바위산을 말갛게 씻어내리고 있었으나, 시원한 바람기가 넘나드는 산중턱은 거의 더위를 느낄 수가 없었다. 이마의 햇볕을 피하려 하지도 않고 썩어 누운 나 무토막 위로 차분히 몸을 주저앉힌 노인은 한동안 유심히 꽃무더기를 살핀다. 하얀 꽃송이 들 사이사이로 땅벌 몇 마리가 바람결에 하늘하늘 꽃대와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벌들은 물 론 순백의 꽃빛이나 시원스런 바람기를 즐기고 있는 게 아니었다. 놈들은 실상 제 꿀 주머 니가 차오를 때까지 이꽃 저꽃을 옮겨 다니는 탐욕스런 약탈꾼이었다. 약탈이 끝난 놈들은 아무리 빛깔이 고운 꽃에서도 쓸데없이 길게 머무르지 않았다. 놈들은 곧 꽃을 떠나 어디론 지 멀리 허공을 날아가버리곤 하였다. 노인은 그 벌들이 오가는 방향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 다. 벌들은 한 놈이 꿀집을 발견하고 나면 다른 놈들도 이내 길을 따라 쫓아왔다. 꽃이 많은 곳은 놈들의 노다지판 한가지였다. 소굴이 같은 놈들이니 오가는 길도 대개 같을 수밖에 없 었다. 노인은 이윽고 놈들이 오가는 방향을 읽어냈다. 그러자 그도 이제는 자리를 일어섰다. 그는 벗어둔 망태기를 집어들고 놈들이 날아간 방향으로 능선을 좀더 휘돌아 넘는다. 바야 흐로 도라지꽃이 한창인 철이다. 더욱이 이 산에는 도라지가 무리를 이루고 있는 곳이 많았 다. 첫 번 바위 아래서 한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다시 하얀 도라지 꽃 몇 송이가 하늘하늘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노인은 햇볕에 쉬 달아오르지 않을 작은 나무 접시에다 유리병 에 담아온 생꿀 몇 방울을 떨어뜨리고, 그것에다 다시 도라지꽃 옆 바윗돌 위로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자리를 멀찍이 물러나 앉았다. 햇볕 속에 놓인 꿀물접시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변 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노인은 따가운 이마의 햇살을 견디며 무언가를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다. 부근에 피어 있는 흰 도라지꽃 덕분이었다. 이따금 노인의 주위를 스쳐 지나가곤 하 던 무리 중의 한 마리가 마침내 길을 꺾어 그 꿀물 접시로 내려와 앉았다. 하지만 노인은 아직 서두르지 않았다. 첫 번 놈이 꿀물을 물어 가고 난 다음 두 번째 놈이 다시 나타날 때 까지도 시간이 거의 비슷하게 먹혔다. 두 번째 녀석이 다녀가고 세 번째 녀석이 나타날 때 부턴 시간 간격이 조금씩 좁혀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서부턴 첫 번째 꽃더미를 찾아가 던 놈들 중에 낌새를 알아차린 놈들이 눈에 띄게 늘어갔다. 노인은 거기서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햇볕에 말라가는 꿀물접시를 놓아둔 채 작은 약탈자들이 꿀물을 물고 사 라져간 방향으로 백 미터쯤 다시 자리를 옮겨갔다. 이번에는 맞은편 능선과 수평 방향의 골 짜기 쪽으로, 역시 도라지꽃 몇 송이가 무리져 피어 있는 곳이었다. 노인은 거기서 다시 다 른 접시 하나를 꺼내어 아까와 똑같은 작업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막 자리를 물러나 바윗돌 위로 몸을 걸쳤을 때-, 등뒤에서 갑자기 나뭇가지 스적이는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허물없이 지껄여대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마을로 내려보낼 꿀은 없으시다더니, 애써 따 모 으신 걸 이렇게 다시 나눠 주고 계셨던 거군요." 물을 것도 없이 거소에 남겨두고 온 젊은 사내였다. 젊은이는 그가 산을 올라올 때 지고온 배낭을 다시 어깨에 둘러메고 있는 차림. 하지만 그는 산을 내려가고 있는 길이 아니었다. 산을 내려가는 쪽은 이쪽이 아니었다. 할 일 없이 굴집에 앉아 노인을 기다리기보다 산을 함께 따라나서고 싶어진 게 분명했다. 노인 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노인은 으레 그가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기라도 하듯이 놀라 거나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 그리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아무렇게 꿀을 뿌리고 다니는 건 아니라오. 이 깊은 산중에서조차도 주는 것이 없이는 얻음도 없는 게 살아가는 법칙이라서 요. 이건 실상 놈들을 따라가는 방법이라오." 노인은 마치 오랜 길동무에게라도 일러주듯 대 범스런 어조로 젊은이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이 힘든 산길에 배낭은 웬 배낭이냐는 듯 비로 소 좀 유심스런 눈길로 사내를 건너보았다. 젊은이도 문득 그 노인의 말없는 추궁을 알아차 린 듯 변명조로 재빨리 양해를 구해 왔다. "노인장께서 언제 돌아오실 줄도 모르는데 무작 정 혼자 앉아 있기가 뭣해서요..." 허락없이 따라나선 걸 이해해 달라는 말투였다. 하지만 젊 은이는 제물에 자신의 대답이 비끌린 것을 알아차린 듯 다시 말을 고치고 있었다. "아, 이 배낭 말씀입니까. 글쎄요. 아까 노인장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전 워낙에 불청객이 되어놔서 요... 제 요깃거린 제가 알아서 져 가야지 않겠습니까." 노인은 이제 그런 젊은이를 더 이상 아랑곳하려 들지 않았다. 그가 무엇 때문에 불쑥 산을 찾아 들어와서 산행까지 굳이 동행을 하고 싶어하는지, 그런 덴 이제부터 상관을 않을 작정인 것 같았다. 아니 젊은이가 그것을 말하든 말하지 않든 간에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표정이 전혀 흔들리질 않았 다. 젊은이가 그를 알고 싶어하든 전혀 괘념을 않으려는 눈치였다. 그는 그저 말없이 주저앉 아 꿀접시로 날아드는 벌들이나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들이 약탈을 끝내고 소굴로 돌아가는 허공길만 끈질기게 지키고 있었다. 젊은이도 처음 얼마동안은 그러는 노인이 오히려 편하게 여겨졌다. 그는 한동안 전혀 말 이 없이 노인의 거동새만 한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노인의 작업을 이 해할 수가 없었다. 물어보고 싶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노인의 침묵이 너무도 길고 깊었다. 그리고 꿀접시와 벌들을 살피는 그의 주의력이 너무 차분하고 가지런하였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앞에 섣불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노인은 이제 그 두 번째 장소 에서도 벌들의 행로를 명확히 읽어낸 모양이었다. 그가 이윽고 다시 자리를 일어섰다. 그리 고 혼자서 스적스적 먼젓번 접시가 놓인 곳으로 되돌아가 햇볕과 벌들로 꿀물이 거의 다해 가고 있는 빈 접시를 거둬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그 두 번째 접시를 그대로 놓아둔 채 그길 로 다시 한참 산비탈을 돌아갔다. 이번에도 물론 벌들이 날아가는 허공중의 행로를 뒤좇아 서였다. 젊은이도 이제 그쯤의 눈치는 알아차리고 있었으므로, 두 번째 접시를 뒤에 놓아둔 채 세 번째 장소로 노인을 따라갔다. 그리고 이젠 더 참을 수가 없어져 모처럼 입을 열어 노인에게 물었다. "이렇게 줄곧 따라가기만 하면 정말로 벌집을 만나게 됩니까?" "글쎄요. 만날 때도 있고 못 만날 때도 있고... 도중에서 놈들의 행로를 놓치면 거기서부턴 또 다른 놈들의 행로를 따라가야 하니까..." 젊은이의 물음에 꿀접시를 나무 그늘 아래로 받쳐놓고 있던 노인이 혼자말을 하듯 무관심하게 대꾸했다. "꿀을 찾을 때까진 이런 일을 대개 얼마 동안이나 계속해야 합니까?" 노인의 마음에 들어하거나 말거나 젊은이는 계속 질문의 꼬리 를 이어나갔다. 노인의 특이한 채밀행각에 젊은이는 어떤 심한 충격과도 같은 기이한 느낌 이 스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쎄, 그것도 첨부터 결과를 정해두고 하는 일이 아니니... 재 수가 좋으면 하루 만에도 찾아내고, 그렇지 못할 땐 사흘이고 닷새고 한정이 없다오." "그런 데 노인장은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꿀을 따오신 겁니까. 이런 방법을 노인장께선 어디서 어 떻게 배우셨느냔 말씀입니다." 심상찮이 각별한 젊은이의 관심과 연이은 물음에 노인은 그 제서야 천천히 허리를 펴고 일어서며, 그러나 새삼 귀찮은 생각이 들어오는 듯 핀잔투의 어 조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디서 어떻게 배운 게 아니라 이건 내가 이 산에서 혼자 깨우친 방법이외다. 그러니 내가 이짓을 해온 것도 혼자서 그걸 깨우치고 익혀온 것만큼 한 세월이 될 거외다..." 그러다 노인은 문득 자신의 내력을 너무 한꺼번에 열어보인 느낌이 들었던지, 이번에는 그쪽에서 은근히 젊은이 쪽의 정체를 짚고 나섰다. "헌데 노형은 아까부터 그냥 산꿀을 구하러 온 사람만은 아닌 것 같구랴. 산꿀을 구하러 온 사람치고는 이것저것 호기심 이 너무 많아 보인단 말이외다..." 젊은이도 그 소리엔 부지중 내심을 엿보이고 말았다는 듯 표정이 슬며시 굳어졌다. 그는 잠시 말대꾸를 삼간 채 노인의 옆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런데 짐짓 시선을 산 아래로 흘리고 서 있는 노인의 표정 속엔 뜻밖에 단호하고 완강한 추궁기가 어리고 있었다. "아, 제가 너무 실없이 귀찮은 소리들을 여쭌 것 같군요." 엉겁결 인 듯 젊은이는 이내 사과를 하였다. 그리고는 전혀 자신을 숨길 건덕지나 그럴 필요가 없 는 사람처럼, 혹은 그새 무언가 내심의 작정이 내려진 사람처럼 한동안 장황하게 자신의 호 기심을 변명하고 나섰다. "하지만 제 성미가 워낙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놔서요. 호기심이 많은 편이기도 하지만, 그게 종당엔 제 밥벌이하고도 상관이 되고 보니 어쩔 수가 없나 봅 니다. 아까 노인장께서도 절더러 그냥 꿀이나 구하러 온 사람 같지가 않다고 하셨지만, 아닌 게 아니라 전 원래 소설 나부랭이나 써 먹고 살아온 처지거든요. 그것도 매사에 호기심이라 는 게 불가결의 무기처럼 되고 있는 추리소설을 말씀입니다. 어르신께서도 전에 혹 들으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주영훈이란 이름이 제 필명이지요. 본명은 따로 주영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만... 그러니 호기심은 제 천성이자 가장 소중한 밥벌이 밑천이 되고 있는 격이지요. 그래 사실은 이렇게 함부로 어르신의 산행을 따라나선 것도 어르신이 이미 말씀 하셨듯이 산꿀을 얻자는 욕심보다는 아마 어르신의 이런 채밀 요령을 보고 싶은 쪽이었을 겝니다. 그러니 뭐 제 호기심을 너무 괘념하거나 허물하려 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소설이니 뭐니, 산중의 노인에겐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어색한 소리들을 섞어가며 젊은이는 느닷없이 그렇듯 자기 소개까지 겸하고 넘어갔다. 노인에겐 어딘지 이해에 무리가 따름직한 소갯말이 었다. 하지만 그런 젊은이의 말투는 그 점을 미리 계산에 넣어두고 있었던 듯 노인 쪽의 이 해를 전혀 돌보는 기미가 없었다. 노인도 과연 젊은이의 말을 알아듣고 있었다. 아니 그냥 알아들은 정도가 아니라 젊은이의 일에 대한 자신의 주견을 조심스럽게 덧붙이기까지 하였 다. 젊은이가 자기 소개의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을 때, 노인은 그냥 골짜기 아래쪽으로 눈길 을 던져둔 채 한쪽으로 묵연스레 귀를 귀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추리소설쟁이라는 젊은 이의 정체가 자신의 입으로 말해졌을 때 노인은 이맛살이 잠깐 좁혀 들었을 뿐 그 정도는 애초부터 짐작을 하고 있던 사람처럼 시선이 이내 다시 가지런해졌다. 그러다 젊은이의 자 기 소개가 끝나자 노인은 아깟번과 똑같이 반쯤은 무관심하고 반쯤은 귀찮은 듯한 목소리로 혼자말처럼 되물어 왔다. "소설을 쓰신다... 추리소설을... 그래 이런 채밀 방법도 노형의 그 소설거리가 된다는 말이외까?" "아닙니다. 모든 호기심이 반드시 소설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소설에 앞서서도 살아가는 과정에서 흥미가 끌리는 일은 흔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짐작한 대로라는 듯 젊은이가 서둘러 노인의 물음에 대답을 이었다. "노인장의 일로는 소설을 쓰게 될 수도 못 쓰게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전 원래 어떤 일이나 그 일의 시말 을 제 자신이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는 글을 쓰지 못하는 형편이라서요." 노인과는 갈수록 어울릴 수 없는 화제요 말투들이었다. 하지만 노인 쪽도 거기까지는 미처 의식을 못한 듯 (혹은 이미 그럴 필요가 없어졌는지도 모르지만) 젊은이를 추궁하고 들었다. "소설을 쓰게 될 수도 있고 안 쓰게 될 수도 있다는 건 이런 일을 가지고도 소설을 쓰게 될 가망이 있다 는 말이 되겠구려. 한데 난 알수가 없는 것 같소. 내 옛날의 어두운 상식으로는 소설이란 머 릿속에서 지어내는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걸 일일이 몸으로 겪고 확인을 해봐야 옳 은 겐가 말이외다." 소박한 대로 그 나름의 소견이 분명한 말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체험 하고 상관없이 머릿속에서 그럴듯한 이야길 꾸며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전 워낙 머리가 부족해서요. 그리고 실상은 소설이란 게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나 그 방편의 한 가지가 아 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머릿속 생각보다는 세상 일에 직접 체험이나 취재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일 텐데, 소설쟁이가 소설을 쓴다는 게 손끝으로 이야길 써내는 경우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면, 그 역시 소설쟁이가 소설을 쓰는 행위의 일부분일 수 있겠고, 더 나아 가 소설쟁이가 그 소설로써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일 수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젊 은이는 열심히 설명했다.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토론이 벌어진 셈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제 으레 그런 이야기가 나올 차례라는 듯, 그리고 그 배후의 말뜻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읽어내려는 듯 어울리지 않는 화제나 말투엔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있었다. "체험을 하고 나 서야 소설을 쓴다, 그리고 그 소설로써 제 삶을 살아낸다..." 노인이 이윽고 그 젊은이의 장 황한 설명을 간단히 몇 마디로 요약했다. 그리곤 비로소 뭔가 수긍이 가는 듯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다시 벌들이 몇 마리씩 접시로 내려앉아 꿀물을 물고 날아가곤 하였다. 그 벌들이 계속 날아와서 꿀접시 쪽으로 새로운 행로를 만들고 있었다. 젊은이는 한동안 그 벌 들이 날아오고 날아가는 길목을 노인과 조용히 가늠해보다가 이윽고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힘들여 놈들을 따라가서도 끝내 꿀집을 만나지 못하면 실망이 여간 크질 않으시겠군요." 조금 전까지와는 반대로 화제의 방향이 다시 노인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노인은 이제 다시 자리를 일어섰다. 그리고 젊은이의 물음에 대한 응답을 미룬 채 먼젓번 꿀접시를 앞으로 옮겨갔다. 젊은이는 굳이 그 노인의 응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노인의 중간작업이 끝날 때까지 참을성 좋게 시간을 기다렸다. 노인도 이야기의 줄기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한 차례 그 접시를 옮기는 일을 끝내고 나서야 묵묵히 그를 뒤따라와 있는 젊 은이에게 금방 물어온 소리를 받듯이 말했다. "아니, 생각처럼 그렇게 실망이 크지 않다오. 아까도 말했듯이 꿀집은 항용 만나게 되는 수도 있고 못 만나게 되는 수도 있으니 말이외 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지니고 나서면 실망이 그리 클 일이 없지요." 그러자 이번에는 젊 은이가 좀더 대담스러워진 어조로 다시 물었다. "글쎄요. 어른께서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 고 계셔서 그럴까요? 그보다 전 어쩐지 노인장께서 산꿀 같은 건 아예 염두에도 두고 계시 질 않기 때문일 듯싶군요. 어르신의 작업을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자꾸 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까 제가 어른께 여쭌 말씀도 그래 바로 그런 뜻에서였구요." "허, 그래요? 내가 그런 탐욕스런 사람으로 보이질 않았다니 그것 참 듣던 중 고마운 말이구려. 하기야 이렇게 녀석들을 쫓아다니긴 하면서도 나 역시 노상 녀석들한테 약탈만을 꿈꾸고 있 는 것은 아니니... 허허." 노인은 이제 제법 농기를 섞어가며 어딘지 차츰 이야기의 핵심을 흐려놓고 싶은 말투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젊은이는 이제 분명한 작정이 서고 있었다. 그는 부러 핵심을 비켜가고 있는 듯한 노인의 그 고의적인 탈선을 정면에서 다시 가로막고 나섰 다. "아닙니다. 어르신의 탐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 말씀은, 어르신의 이런 작업이 처음부터 산꿀을 얻는 일하고는 큰 상관이 없을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꿀을 얻는 일과는 처음부터 큰 상관이 안 된다?" 노인에게서도 다시 농기가 걷혔다. 하지만 노인은 이내 다시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가볍게 응대해나갔다. "하기는 아예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을 거외다. 잠시 전에도 말을 했지만, 난 놈들의 곳집을 찾아내고 못하고는 처음부터 워낙 괘념을 않으 려 해왔으니..." 옹색스런 변명 역시 이야기의 핵심을 피하려는 어조였다. 젊은이의 속을 환 히 다 꿰뚫어보고 있는 증거였다. 젊은이는 그럴수록 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단 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제 추측이 크게 틀리지 않는다면 노인장은 이런 채밀 산행에서 벌꿀 따위를 얻는 일말고 뭔가 다른 일을 하고 계실 겁니다. 뭔지는 아직 알 수가 없지만, 전 지금 그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젊은이는 거의 단정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노인 쪽도 그런 정도로는 호락호락 내심을 털어놓을 낌새가 아니었다. "그거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구려. 이까짓 벌떼를 쫓아 다니는 일에 어째서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고 있을꼬..." "제 예감 때문일 겁니다. 추리소설쟁이의 예감 말씀입니다. 제 예감은 상당한 기간 훈련을 해와 서 신통한 대목이 많았거든요." "추리소설가의 예감이라니 함부로 무시할 순 없는 거겠지 만..." 두사람 사이엔 한동안 뜻모를 다툼이 이어져 나갔다. 하지만 젊은이가 밀고 들어오는 힘이 워낙 거세었던 탓인지 노인은 거기서 비로소 한 발짝쯤 뒤로 물러서는 기미였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기다렸다가 이번에는 문득 그 젊은이 쪽으로 다시 추궁의 화살을 돌려 댔 다. "그래, 그런 생각이 소설을 쓰는 사람의 예감 때문이라면, 노형은 결국 이 일을 가지고 소설을 쓰겠다는 겐가...? 꿀접시를 가지고 벌떼를 쫓아 다니는 일에 정말로 소설거리가 있 어 보이느냔 말이외다." "소설을 쓰게 될지 어떨지는 저도 아직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전 우선 제 호기심과 예감을 쫓아가 보고 싶은 것뿐이니까요." "그러다가 막상 소설을 못 쓰게 되면 실망이 여간 크질 않을 텐데?" "노인장께서 꿀집을 못 찾아내도 실망을 않으시듯 저도 그리 크게 실망을 않을 겁니다. 호기심이나 예감이 제게 늘상 소설을 쓰게 하는 것은 아니 니까요. 그러니 제가 실망할 염려는 마시고 어르신의 진심을 말씀해주십시오." 젊은이는 이 제 자신의 예감을 어쩔 수 없다는 듯 조금 전의 노인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내며 단정적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그건 바로 노인의 정체에 대한 노골적인 추궁의 소리 한가지였다. 노인도 이젠 어쩔 수가 없어진 듯 체념스런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소 짓궂은 어조로 예상보다도 당돌스런 젊은이를 은근히 공박해 왔다. "허허, 이젠 아예 노형 생각대로 단정을 해버린 말투로구만. 그렇다면 내 일도 그 영험스런 예감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 아니겠소. 도 대체 저 영감쟁이가 꿀을 따러 다니는 일말고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느냐고 말이오. 그래 노 형 생각엔 도대체 이 늙은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리라 여겨지오?" 그것은 이미 노인 쪽에 서도 젊은이의 예감을 수긍해주고 있는 소리에 진배없었다. 그리고 이젠 노인 스스로 그걸 확인해줄 우회적인 의향의 표시이기도 하였다. 젊은이가 그걸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는 쓸데없이 노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다. 이런 때의 말대꾸는 어느 경우나 노인의 실토를 지연시킬 뿐이었다. 그는 그저 말없이 잔잔한 웃음으로 노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은 다시 꿀접시를 옮기러 자리를 일어섰다. 그리고 그 꿀접시를 옮겨놓고 벌들의 내 왕을 기다려 무리의 행로를 가늠해낼 동안 이야기를 뜸뜸이 이어나갔다. "꿀을 얻는다기보 다 살아가는 지혜를 배운다고 할는지..." 노인의 이야기는 젊은이가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서두가 훨씬 더 직선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채밀행각에서 진짜로 얻고 싶은 것이 그 꿀보다 사람 살아가는 지혜라도 되는 듯이 이야기의 서두를 무겁게 시작했다. 젊은이가 이미 몇 차 례씩 놀라고 궁금해 해온 것도 바로 그 노인의 유인성 채밀행각과 관련한 노회한 지혜에 대 해서였다. 한데다 바로 그 노인의 입에서 사람의 지혜 운운의 소리가 나오자 이제는 거의 그 노인에 대해 모종 분명한 확인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는 한동안 노인 쪽의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으려던 작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확신을 억제하지 못한 듯 조급스레 한마디 끼여들었다. "그렇지요. 벌을 유인하여 꿀집을 찾아내는 노인장의 지혜야말로 몇 숟갈의 꿀 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유용한 것일 테니까요." 노인은 바로 그 말의 속뜻을 알아들은 모양 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얼핏 젊은이를 돌아보는 노인의 눈길에 순간적으로 어떤 뜨거운 노 기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노인은 그쯤으로 쉽게 마음이 흔들릴 나이가 아니었 다. 그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표정이 평상으로 돌아가며 자신이 할말만 침착하게 이 어갔다. "사람의 지혜란 원래 이런 식으로 벌집을 찾아내는 법을 깨우쳐내는 데서부터도 벌 써 심상치가 않은 것이겠지만, 진짜 그놈의 벌꿀집을 찾아내고 보면 사람의 지력이 얼마나 간특하고 무서운 것인가를 새삼 되새겨보게 되곤 하더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듣고 보니 노인 쪽도 그 채밀행각에서의 유인술의 지혜를 부정적인 식으로 말해가고 있었다. ...산능선 과 골짜기를 며칠씩 헤매다 간신히 벌집을 찾아내고 보면, 그곳엔 으레 여우나 너구리, 오소 리 따위의 산짐승들이 주위를 넘나들고 있기 십상이랬다. 놈들도 그 바위틈이나 고목 속의 벌꿀집 기미를 알고 몸살들이 나서 그러지만, 목숨을 내놓고 덤비는 벌떼의 방벽을 뚫고 끌 을 빼앗아내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살가죽이 두꺼운 멧돼지나 곰들이 가끔씩 그 매서운 독침의 공격을 무릅쓰고 일을 벌이고 가는 수가 있지만, 그 둔하고 무모한 놈들을 제외하고 놈들에게서 꿀을 빼앗아낼 수 있는 것은 녀석들의 그 맹렬한 공격을 사전에 방비하고 나설 줄 아는 두 발 달린 사람의 지혜뿐이라 하였다. 다름아니라 노인은 그 벌집을 파낼 때 온몸 을 방충망으로 둘러싸고 나선다는 것. "하긴 그걸 무슨 대수로운 지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놈들의 그런 결사적인 공격을 이기고 곳집 속 보관물을 빼앗아내고 나면 나름대로 각별한 승리감 같은 걸 맛볼 수도 있는지라..." 노인은 한동안 그런 식으로 이야기의 핵심을 우회하 고 있었다. 하지만 젊은이는 굳이 그러는 노인을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노인에겐 어차피 하 고 싶은 말을 모두 해버리게 하는 것이 좋을 듯싶었기 때문이다. 노인이 아직도 무얼 숨기 려 한다면 그쪽에서도 그만한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야 하였다. 노인이 스스로 말하고 싶어 지기 전에 무리를 해서는 오히려 낭패를 당할 염려가 있었다. "곳집을 모조리 약탈당해 버 리고 나면 벌들은 그럼 어떻게 됩니까?" 젊은이는 부러 감동한 빛으로, 그러나 끈질긴 참을 성 속에 간간이 노인의 이야기를 거들어 나갔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노인의 이야기는 한참 이나 우회를 계속했다. "꿀을 따내자면 벌집을 모조리 캐내야 하니까 놈들도 다시 집을 옮 겨야지요. 집이 못 쓰게 헐리기 시작하면 놈들은 저희 왕벌을 둘러싸고 큰 무리를 이루어 새집을 찾아 떠나갑니다." 하지만 노인은 벌집을 찾아내는 즉시 그걸 헐려고 들지를 않는다 하였다. 벌집을 찾아내고 나면 다시 굴집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채밀 기구들을 챙겨 가야기 도 했지만, 그보다도 다시 더 며칠을 기다려야 할 중요한 일이 있댔다. 벌집 근처는 다른 산 짐승들이 넘나들기 쉬우므로, 꿀을 캐기 전에 놈들을 옭아맬 덫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그리 고 며칠 놈들을 기다렸다 녀석들이 눈치를 채고 발길을 끊어버린 기미가 보이면 그때 마지 막으로 채밀작업을 시작한다고. 그러니까 노인이 그 벌집을 찾는 것은 석청과 산짐승들을 함께 사냥하는 일로, 재수가 좋으면 그 동안에 너구리나 오소리 따위도 가끔 묶을 수가 있 다는 것-. 노인은 일테면 그런 식으로 그 사람의 지혜라는 것에 의지해 그가 채밀행중에 겸해온 일 을 하나 더 일러준 것이었다. 지루한 우회에서 이야기가 비로소 본론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한마디로 노인이 꿀을 따는 일이나 산짐승들을 사냥하는 일이나 따지고 보면 그리 성질이 다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양쪽 다 노인의 생계를 위한 일이었고, 작업 방법도 벌들의 행 로를 쫓는 것으로 그의 지혜와 무관치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젊은이가 노인에게서 알고 싶 은 것은 거기서도 아직 더 한참이나 못 미쳤다. 노인도 과연 그걸 알고 있었다. 그는 아무래 도 그 사냥 이야기 따위로는 진짜 지혜다운 지혜를 설명해낼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 만 이런 건 뭐 사람의 지혜라고 할 수도 없을 거외다. 이런 건 그저 사람이 살아가면서 목 숨을 부지해가는 간지에 불과할 뿐이라." 노인은 거기서 돌연 자신이 말해온 그 사람의 지 혜를 한꺼번에 모두 폄하해버렸다. 그러고 나선 다시 그 사람의 지혜에 관한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진짜 지혜다운 지혜란 사람들이 자기 지혜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실상은 사람 살아가는 데에 그리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우치는 데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거외다." 노인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지혜가 지혜 아님을 깨닫는 데에서 비로소 참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생 각이었다. 노인이 다시 말을 계속했다. "우선 저 도라지꽃무리를 좀 보시구려. 저건 이쯤 거 리를 두고 보면 아름답고 평화스런 자연의 조화요, 생명의 합창이 아닐 수 없지요. 하지만 좀더 가까이 다가가보면 거기엔 무서운 약탈극이 한창인게요. 꽃송이마다 서물서물 분주하 게 움직이는 떼벌들은 분명 자기 탐욕을 채우려 나대는 생존의 전사들이 분명하단 말이외 다. 하지만 우린 그걸 약탈이나 싸움이 되풀이되는 먹이고리 현상으로만 말하질 않지요. 벌 들이 꽃에서 꿀을 따가는 것은 그 벌들 한쪽으로만 보면 무도한 약탈일시 분명하지만, 우리 는 그것을 더 크고 넓은 자연계의 질서나 생존법칙 안에서 보려고 해왔지요. 말하자면 우리 에게 참된 지혜란 그런 어떤 작은 인과관계나 이기적인 법칙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크고 넓은 생명의 질서 안에선 그러한 개별적이고 가시적인 생존법칙들이 진실이 아니라 는 것, 그것만으로는 진짜 지혜다운 지혜가 못된다는 것, 그것을 깨닫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외다. 거기서는 그러니까 지혜가 오히려 지혜 아닌 것이 될 수 있고, 약탈이 약탈 아닌 것이 될 수 있고, 심지어는 꽃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만으로 남을 수가 없게 될 수도 있는 거란 말이외다..." 노인은 결국 인간의 참지혜란 개별적이고 가시적인 생태현상이나 자기 중 심의 이기적인 법칙에서나 아니라, 인간의 눈에는 쉽게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그 세계와 생 명현상 전체의 어떤 큰 질서에 의지하고 순종해나가는 데에서 바르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라 말하고 있었다. 노인은 자신의 끝없는 채밀행에서 바로 자신이 그런 생명과 삶의 법칙을 익히고 있는 셈이라 하였다. 며칠 동안의 산행 끝에 벌집을 찾아내지 못하고 힘없이 산길을 되돌아오게 될 때도, 노인은 그래 그 깊은 허무감 속에서마저 생명과 우주의 넓은 질서를 새롭게 헐어내고 덫을 놓아 산짐승을 죽이면서도 그 큰 자연과 생명의 섭리 안에서 물 흐르 듯 형체 없는 삶이 더없이 편해질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아직 그의 삶 전체 로 그런 문을 확실히 들어설 수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에겐 그 큰 지혜의 문을 밟고 나서도 깨달음만으로는 도시 감당해낼 수 없는 더 큰 생명의 업보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노 인은 웬일인지 거기서 다시 그 두 번째 지혜마저 제물에 부인해 버리고 나섰다. "하지만 사 람이란 참으로 딱한 동물이더이다. 사람이란 동물은 그런 지혜를 말할 수는 있어도 그 지혜 에 쉽게 순응을 할 수는 없으니 말이외다. 사실은 이 늙은이의 경우가 그래 하는 소리오만, 생각으론 그걸 분명히 알면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행해지지가 않더이다. 지혜의 문을 알고는 있으되 아는 것만을 가지고는 딛고 넘어 설 수 없는 어떤 불가사의한 아집에 번번이 앞을 가로막히고 마니까요. 알고는 있으되 순응하고 행할 수 없는 지혜는 참지혜가 아니요, 참깨 달음이 아니지요... 사람은 결국 그 지혜를 깨닫고 말할 수 있을 뿐, 그 못된 아집 때문에 거 기에 쉽게 이를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싶더이다. 지혜란 원래가 노력만 가지고 얻어질 수가 있는 건 아닐 터이지만 말이외다." "그 아집이란 무엇입니까?" 젊은이가 모처럼 노인에게 물었다. 이 노인은 결국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노인의 사연을 구체적인 데까지는 자세 히 알 수 없었지만, 젊은이는 이제 그 노인의 말뜻을 어느 정도까지는 짐작해 들을 수가 있 었다. 하지만 그는 비약과 반전을 몇 번씩 거듭하고 있는 노인의 이야기 가운데에 그가 마 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가 그것으로 자신을 어느 만큼까지 드러내 보일 수 있을 것인지, 핵심과 깊이를 짚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노인도 이젠 이야기가 거의 마지막 고비에 이르고 있는 것 같았다. "글쎄, 그걸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졸지에 적당한 말 이 생각나질 않는구려..." 노인이 이번엔 지체없이 젊은이에게 대꾸해 왔다. "그 무슨 자기 집착이라고 할까. 바로 눈앞의 현상적 세계에 대한 자기 증거욕이랄까... 이 소리나 저 소리 나 다 마땅치가 않지만, 하나 이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거외다. 아집의 근원이나 정체를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으되,, 그 아집을 느끼는 길은 분명하니 말이외다. 치졸한 소리일시 분명하지만, 그것은 바로 외로움이라는 거외다... 아니 이렇게 산속에 혼자 틀어박혀 사는 데 서 오는 외로움 따위가 아니라 좀더 단단하고 깊은 어떤 절망감 같은 것... 무슨 생명에 대 한 허무감이라 할까, 아니면 그 허무감에서 벗어나려는 갈망 같은 것이랄까, 어쨌든 난 여기 서 그런 외로움을 끊임없이 느껴 온 거외다. 그리고 그 외로움이라는 게 바로 이 늙은이가 저 보이지 않는 섭리를 믿음 속에 살면서 참지혜로 나아가려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격이외 다." 노인은 다시 한번 자기 이야기를 비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야말로 젊은이가 무명중에 끈질기게 고대해 온 그 채밀행 중의 다른 작업 한 가지를 털어놓고 있었다. "하여 나는 그 지혜로 나아가기 전에 우선 내 외로움부터 달래야 했었다오. 그것이 아마도 이 채 밀산행 중에 꿀을 따는 일말고 다른 일이 있을 거라던 노형의 물음에 대한 진짜 대답이 될 수 있을 거외다. 내겐 이 채밀행이 어떤 지혜를 얻는 일보다 외로움을 달래는 일에 더욱 절 실한 작업이 돼왔으니 말이외다." 하고 나서 노인은 다시 젊은이가 알아듣기 쉽도록 그 자 기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에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데 그걸 달래는 방법이 어떤 건 줄 아시겠소? 노형은 필경 이 꽃과 벌을 좇으면서 그것들과 말을 하고 생각을 주고 받는 따위의 일들이나 상상을 할게요. 하지만 그게 아마 노형의 생각보단 훨씬 점잖치가 못 할지도 모르겠소." 노인은 거기서 다시 한 차례 말을 끊고 젊은이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간 이윽고 묘하게 음산스런 웃음기를 흘리며 속삭이듯 낮게 말해 왔다. "이 산엔 이 따금 고라기 바위 밑이나 동굴 속 같은 데서 죽은 사람의 백골이 누워 있는 수가 있다오. 노형도 알다시피 이곳은 한시절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싸웠던 곳 아니오. 이 산엔 아직도 연고 없는 사람의 유골들을 하나하나 수습해오고 있다오. 그런 걸 찾아 일부러 산속 을 헤매다니지야 않지만, 이런 채밀행정은 겸사겸사 산속을 살피기가 안성마춤이어서 말이 외다." 해가 어느새 중천을 비켜넘고 있었다. 도중에 한 차례 행로를 놓친 바람에 두 사람은 그 사이 새로 다른 벌들의 길을 좇아 산 능선을 세 개나 넘어 다시 네번째의 골짜기로 들어서 고 있었다. 젊은이로선 이제 첫 출발지가 어느쪽인지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벌들의 행로는 그런대로 계속해서 이어져 나갔지만, 놈들의 소굴은 아직도 가까워지는 기미가 없었다. 소굴 이 가까워지면 접시로 내려 앉는 놈들의 수가 늘어나게 마련일 텐데 아직은 그런 변화가 보 이질 않았다. 두 사람은 그쯤에서 물소리가 골골거리는 바위 아래 골짜기로 찾아 내려가 간 단한 점심요기를 하였다. 노인은 자루 속의 강냉이알을 물에 불리고 씹었고, 젊은이는 젊은 이대로 배낭 속에 지고 온 생쌀을 몇 줌씩 쥐어 마시는 것으로 요기를 대신했다. 젊은이의 배낭 속에는 다른 요깃거리도 한두 가지 남아 있을 법했으나, 벌들의 후각을 방해할까봐 노 인이 불기를 싫어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그렁저렁 점심요기를 끝내고 나서도 두 사람은 다시 능선 두 개와 골짜기 하나를 더 넘었다. 노인은 그 사이 그가 찾아 모으고 있다는 해 골들에 대하여 띄엄띄엄 다시 말을 보탰다. 산을 들어온 지 1년쯤 되던 어느 날, 노인은 어 느 골짜기의 묵은 동굴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날이 지새어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바 로 발 아래 하얗게 삭아가는 백골 한 구가 함께 누워 있더랬다. 그는 그때 두려움이나 불결 함보다도 오히려 어떤 소름 끼치는 감동 같은 걸 맛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그 내력 모 를 사람의 삭아가는 해골에서 뜻밖에 자기 외로움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며, 나아가 그때 까지 그가 산에서 구하고 익혀온 모든 삶의 지혜가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죽음의 외로움 앞 에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절망감 때문이기도 했다는 것-.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해골은 무척이나 오래된 거였지요. 그 오래고 외로운 침묵 앞에 내가 그간 쌓아온 의지나 지혜 나부랭이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 되고 말더이다..." 이름이나 연고를 알 수 없는 주검, 물어도 물어도 응답을 잃어버린 주검, 그렇게 그저 생전 의 내력과 함께 흔적 없이 스러져가고 있을 뿐인 주검, 그 주검과의 반향 없는 이야기는 노 인을 참으로 못 견디게 답답하고 절망스럽게 해온 것이었다. 그래 노인은 그때부터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산중에 흩어진 이름 모를 사람들의 유골을 찾아 헤메게 됐으며, 거기 서 만난 유골들을 상대로 끝없는 이야기들을 나누어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주검들이 입 을 열어 말하거나 생전의 내력이 밝혀질 리도 없었지만, 그러나 노인은 그가 살아 있는 사 람으로 그 주검들을 만나고 있는 것만으로 주검들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증거받고 있다는, 그것으로 그 절망적인 주검들의 외로움은 얼마간의 위로를 받게 되리라는 사실에 사무치는 감동으로 몸을 떨곤 하였다. 그리고 노인은 또 노인대로 그것으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어 갈 방편을 삼아온 것이었다-. 한데 이야기가 거기까지 갔을 때였다. 노인은 이제 그것으로 이날의 이야기는 일단 끝을 내고 싶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여태까지의 채밀행정도 바로 그 이야기를 위해서였던 듯 거 기서 그만 발길을 되돌려 세웠다. "해가 아직 좀 남았는데요." 젊은이가 좀더 이야기를 듣고 싶어 노인을 부추겼으나, 노인은 이미 작정이 내려져 있었다. "해는 아직 좀 남아 있지만 오 늘은 아무래도 가망이 없는 것 같소. 게다가 오늘은 손님까지 계시고... 쇠털 같은 날들에 뭐 서둘 일이 있겠소. 자, 이젠 이만 내려가봅시다. 예서 집의까지도 한나절 길인데, 해만 떨어 지고 나면 산길이 여간만 험해야지요." 하지만 노인 역시 젊은이가 아직도 이야기를 더 듣 고 싶어하는 눈치를 헤아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는 마치 아이를 달래듯 젊은이를 타이 르고 나서 서둘러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노인은 별반 미련이 없다는 듯 이때까지 따라가 던 벌의 행로를 버린 채 앞 뒤의 꿀접시들을 모두 거두어들여 버렸다. 꿀집이 가까워지는 기미가 있거나 동굴집 거처에서 거리가 멀어지다 보면 거기서 그냥 밤을 새우고 이튿날 길 을 이어 나서는 게 상례랬지만, 이날은 그 귀찮은 동행 때문에 길을 돌아서자고 작정한 모 양이었다. 젊은이도 이젠 어쩔 수가 없었다. 노인이 하자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노 인은 젊은이를 위해 길을 꺾어 돌아가면서도 굴집까지의 조급한 행정을 염려할 뿐 젊은이가 산을 내려갈 일은 걱정하질 않았다. 노인이 이날로 당장 산을 내려가라지 않는 것만도 젊은 이로선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그는 말없이 노인이 하는 대로 발길을 돌려 산을 되짚어 내 려가기 시작했다. 벌의 행로를 좇아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던 아침녘과는 달리 노인이 이젠 지름길을 택하고 있어 하산길은 한결 발길이 쉬웠다. 한데 손님격인 자신과의 이야기 를 위해 노인이 부러 산행을 택해 나섰을지 모른다는 젊은이의 추측은 옳았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산행을 멈춘 것으로 노인의 이야기도 거기서 정말로 끝이 난 모양이었다. 길을 꺾어 돌아설 무렵부터 노인에게선 아니게아니라 서서히 말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는 이제 전혀 할말 없거나 할말을 일부러 참고 있는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답답한 침묵 속 에 산짐승처럼 민첩한 동작으로 묵묵히 발길만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젊은이는 이제 확 신이 서고 있었다. 그는 벌써부터 노인을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는 이제 노인이 말한 그 외로움이라는 것의 크기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노인을 알기에는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노인이 무엇 때문에 이런 곳에서 그런 외로움을 견 뎌야 하는지, 그 동기가 사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확연히 밝혀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 역시 아직도 그것을 말하고 싶어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까닭이 아직도 확실치가 않았지만 노인은 뭔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서도 일부러 그것을 가슴속에 숨겨두고 젊은이 의 눈치를 살피고 있음이 분명했다. 젊은이는 자신의 예감으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예감은, 노인이 예의 외로움을 견뎌내고 있는 숨은 사연이야말로 그가 노인을 찾 아든 일에 대한 분명한 보답이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주었다. 젊은이의 확신은 그러나 무엇보다 노인 역시도 그의 출현에 대해 벌써부터 어떤 심상찮은 기미를 느끼고 있다는 점 에 있었다. 젊은이가 노인 쪽에 확신을 가졌듯이 노인 쪽에서도 이젠 젊은이에 대한 나름대 로의 확신을 지니게 되었음이 분명했다. 아직 더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도 젊은이를 경 계하여 그것을 부러 참아 버리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증거였다. 젊은이는 다시 한번 노인을 바로 찾아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노인 쪽에서도 이미 그걸 알고 있다면 이야기를 더 이상 망설이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자기 쪽에서 먼저 이야 기의 길을 터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군요... 그간 이런 입산 생 활이 꽤 오래되신 걸로 보이는데, 어르신께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식으로 오지까지 찾아들어 그처럼 무서운 외로움을 견디고 살아야 하셨는지 말씀입니다." 젊은이는 마침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나서, 그저 묵묵히 발길질만 재촉해가고 있는 노인의 등뒤에다 불쑥 한 마디를 던지고 나섰다. 그러자 그 노인에 대한 젊은이의 예상은 정확히 과녁을 적중하고 있 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늙은이 혼자 이런 산속을 찾아 들어와 살게 된 사연 말이오?" 노인이 마치 방금 전까지 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온 다음이듯 바로 응답을 보내 왔다. 발길에 잠깐 속도를 늦췄을 뿐 뒤조차 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노인 역시도 그 동안 내내 같은 생각 에 젖어 있었음이 분명했다. 한데도 노인은 그 숨겨진 사연만은 아직도 쉽게 털어놓으려 하 질 않았다. "글쎄오이다. 이렇게 산속에 박혀 사는 사람이란 사연이 있겠지요. 그 뭐 몹쓸 죄를 짓고 나서 다신 세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된 따위의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지 않더이 까. 뭐 그렇고 그런 사연이 좀 있었던 셈이지요." 젊은이가 말없이 기다리고 있는 기미이자 노인이 남의 말을 하듯이 담담한 어조로 자문자답을 하고 있었다. 굳이 들을 만한 이야기가 못 된다는 식이었다. 이야기를 쉽게 털어놓지 않으려는 낌새였다. 역시 무언가 속으로 망설 여지는 대목이 있음이었다. 젊은이는 이제 내친 걸음이었다. 노인의 속에 도사린 그 속사연 이야말로 노인을 만나러 산을 찾아온 당초의 목적이자, 그가 노인에게서 들어내야 할 가장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였다. "크게 괴로운 일이 아니시라면 사연을 마저 듣고 싶군요. 어르신 껜 필시 범상찮은 사연이 있으실 것 같아 말씀입니다만." 젊은이는 급한 김에 노인을 바싹 뒤쫓아 다가가며 보채듯이, 그러나 정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노인은 역시 이날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을 작정을 내려버린 것일까. 아니면 그의 사연이 너무 깊고 무거운 것이어서 입을 떼기가 그토록 망설여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번엔 또 그걸로다 소설을 써보고 싶어 서외까?" 노인이 어딘지 좀 농기가 밴 소리로 짐짓 반문해 왔다. 이야기의 핵심을 피해가려 는 방책이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제 섣불리 농조가 될 수 없었다. 거기서 한 발이라도 잘 못 물러섰다간 이야기를 아주 놓쳐버릴 수 있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뿌리를 뽑아보지 않 으면 안 되었다. "어르신께서도 이미 짐작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에게 소설을 쓴다 는 건 반드시 글을 만들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읽게 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아까도 잠 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저나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들에 관심을 갖고, 말로든 몸으로 든 그것을 함께 체험해보는 것, 그것 자체가 바로 소설을 쓰는 일에 맞먹는 거니까요. 어르 신의 외로움과 그 외로움의 사연은 분명히 제 소설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제 삶이 될 수도 있구요." 젊은이는 이제 기어코 노인의 사연을 듣고 말겠다는 듯, 말길을 앞장서 가 로막듯이 하면서 자신을 열심히 다짐하고 나섰다. 노인이 마침내 그 젊은이의 결심을 알아 차린 듯 문득 발걸음을 멈춰섰다, 그리고 위협하듯 똑바로 젊은이를 바라보며, 그 끈질기고 호기심 많은 사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닐 게요. 노형은 추 리소설을 쓴다고 했지요. 하지만 이런 건 노형의 소설거리가 못 돼요. 노형이 쓰고 싶은 소 설은 아마 그런 게 아닐 게요." 듣고 보니 노인은 젊은이가 짐작해온 대로 그의 속셈이나 정체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젊은이는 자신의 가슴속을 환히 다 꿰 뚫어보고 있는 듯한 그 노인의 눈길에 한순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소설이라뇨. 전 아직도 어르신으로 부터 이야기도 듣기 전인 걸요." 젊은이는 짐짓 노인의 추궁에 딴전을 부려보았으나, 한번 속마음을 발설하기 시작한 노인은 그런 젊은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아니 노형, 이젠 우리 서로 그만 불편한 말법을 걷어치우고 솔직히 얘기하도록 합시다. 우린 이미 피차간 상대방 에게 무엇을 구하고 있는질 알게 된 처지가 되지 않았소. 사람 살아가는 일이 바로 노형의 소설이라 했던가요. 그렇담 노형은 내 이야기를 듣기 전에 이미 쓰고 있던 소설이 있었을 게 아니겠소. 노형이 내게 원하고 있는 바도 그 소설을 도와달라는 것이겠고 말이외다?" 노 인의 말에 젊은이는 다시 한번 정곡을 찔린 듯 놀라고 있었다. "처음부터 저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어르신은 역시 피할 수가 없겠군요. 하지만 어르신은 어떻게 제게 그런 주문 이 있을 줄을 아셨습니까?" 그는 이제 어쩔 수가 없다는 듯 허심탄회한 어조로 노인에게 물 었다. 그러나 그의 그 허심탄회한 어조는 이제 노인 쪽에서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보인 데 대한 안도와 승복의 표시이기도 하였다. "그야 노형이 산을 올라왔을 때부터였달까... 그리고 노형이 이 채밀산행을 뒤쫓아왔을 때 난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소." 노인은 이제 다시 몸을 돌려 천천히 산길을 내려가면서 대범스런 어조로 등뒤로 말해 왔다. 젊은이가 그 노인을 바 싹 뒤따르며 남은 질문을 계속해 나갔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만으로요? 산을 올라온 것만 으로 어떻게 벌써 제 속마음을 읽어낼 수가 있었단 말씀입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산꿀을 구하러 온 사람치고는 호기심이 너무 지나쳤거든." "그건 제가 소설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 이라고 고백을 드렸지요." "그리고 노형은 이런 산속에 꿀이나 따 먹고 파묻혀 사는 늙은일 처음부터 제법 유식한 영감쟁이로 대접해 주었지요. 노형은 처음부터 날 막된 산사람 취급 이 아니었지 않소. 산사람을 대하는 이야기치고는 어조가 처음부터 너무 유식했지요." "하긴 그 점은 얼마간의 사전 지식과 예감이 있었으니까요." "그건 처음부터 노향이 이 늙은일 알 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지요. 노형도 일테면 그런 기미를 들키고 있었던 셈이랄까. 산꿀 따위 보다 오래잖아 내게 다른 구할 것이 있어 찾아온 사람이 분명하더란 말이외다. 그 짐작이 지금도 크게 틀리질 않았을 거외다." 노인이 다짐하듯 한번 더 단정했다. 젊은이가 이제 더 따져볼 것이 없었다. 이젠 어차피 두 사람간에 입장이 밝혀진 셈이었다. 그리고 그건 차라리 자신을 위해서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젠 굳이 내력을 숨기실 필요가 없겠군요. 어 르신이나 저나 어차피 서로의 입장을 알고 있고, 제가 바라고 있는 바를 어르신께서 미리 다 알고 계신 터이니 말씀입니다." 젊은이는 이제 다시 미뤄온 이야기의 핵심을 파고들었다. 사람을 잘못 찾아오지 않은 게 밝혀진 바에야 그가 알고 싶은 것은 실상 그쪽 일이기 때문 이었다. "어르신, 이젠 어차피 말씀이 나오신 김에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젊은이는 이제 아예 억지라도 쓰듯이 다그치고 들었다. 하지만 노인은 거기까진 아직도 마음이 내키질 않 는 것 같았다. 노인이 이윽고 다시 발길을 멈추고 젊은이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곤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역시 이대로 그냥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거외다." "전 이미 어 르신을 그만큼 알아버리고 있는 데두요." "노형이 이 늙은일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는진 모르 지만, 그러나 노형은 내게서 그 내력을 듣는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한 위해를 부르는 일인가 는 모르고 있을 게요. 허니 서로간에 이 정도로 그만 상대방을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게 좋을 거외다." 노인의 얼굴에 그 이상스런 충동의 빛이 한 번 더 스치고 있었다. 노인은 그 자신 의 충동을 참느라 애써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거기엔 차라리 자신을 달래는 듯한 은근한 애원기마저 일고 있었다. 젊은이는 그 노인의 표정이나 음색을 빠짐없이 모두 읽고 있었다. 노인은 역시 내심으론 여전히 이야기를 마저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쫓기고 있었다. 그러면 서도 한편으론 마음의 결단을 망설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하 지만 저는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산을 내려갈 겁니다." 그는 다시 한번 노인의 결단 을 다그치고 들었다. 젊은이의 그 한마디는 역시 효과가 있었다. 그대로는 좀처럼 물러설 것 같지 않은 그 젊은이의 한마디에 노인은 다시 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그 노인 의 얼굴에 잠시 경련기와도 같은 심한 고통의 빛이 지나갔다. 이어 그 노인이 자신을 내던 지듯 결연스런 어조로 젊은이에게 말했다. "좋소. 노형이 정 그걸 원한다면." 그러고 나서 노인은 다시 자신의 주문 한가지를 덧붙였다. "그러나 그 전에 내게도 노형께 한 가지 주문 이 있소이다. 노형이 정녕 그토록 이 늙은이의 사연을 들어야 한다면, 나는 그 전에 노형의 이야기부터 들어야겠단 말이외다. 노형이 지금까지 혼자 써오신 그 소설의 이야길 말이오. 그게 아마 내가 노형의 일을 제대로 돕는 순서가 될 듯싶으니... 이 늙은인 실상 아직도 노 형에게 무엇을 어떻게 도와드릴지 알질 못하고 있는 처지니 말이외다. 그 노형의 소설이라 는 것도 아직은 전혀 앞 뒤 사정을 모르는 터이고... 그러니 어떻소. 노형이 먼저 내게 그 이 야길 해줄 수가 있겠소?" 젊은이가 정말 소설을 쓰고 있는지 어떤지는 굳이 확인을 해보려 고도 안 했다. 덮어놓고 먼저 그쪽 이야기부터 해보라는 주문이었다. 노인이 이젠 그 내심의 충동을 억눌려버리려는 힘든 노력으로부터 자신을 풀어버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젊 은이는 아직도 노인이 무엇 때문에 한사코 자신의 이야기를 참아내려고 했는지 진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는 그 노인의 얼굴을 고통스럽게 스치고 지나간 충동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 다. 젊은이로선 별로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건 오히려 그쪽에서 은근히 바라던 일이기도 하였다. 노인에게 그의 숨은 이야기를 털어 놓게 하자면, 그리고 그게 노인에게 그의 숨은 이야기를 털어놓게 하자면, 그리고 그게 노인에게 소용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로선 사양 할 수도 사양을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르신께서 원하신다면 저도 물론 그렇게 해야 겠지요." 젊은이는 선선히 노인에게 응낙했다. 거래가 완전히 성립된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 으로 젊은이가 산을 올라와 노인과 만난 후로 두사람 사이에 끈질기게 계속되어온 그 어려 운 줄다리기도 마침내 끝장이 나게 된 셈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발길을 옮겨 산을 내려오 기 시작했다. 서쪽 산 위를 한뼘 남짓 남겨놓은 저녁 햇살이 멀고 가까운 능선들을 차례로 뿌옇게 지워가고 있었다. 세번째 추적자 백상도 노인은 이제 영섭의 하산을 재촉하지 않았다. 영섭이 산을 내려가지 않아도 되었 으므로 그에게 이야기를 재촉할 필요가 없었다. 어스름녘이 되어서야 굴집으로 되돌아온 두 사람은 그 길로 간단히 저녁요기를 끝냈다. 노인은 저녁에도 화식을 하지 않았다. 그는 산나 무 열매와 나무 뿌리 말린 것 약간하고 물에 불린 옥수수알 한 줌 정도를 계곡물과 함께 씹 어 넘기는 걸로 저녁 끼니를 대신하고 말았다. 굳이 생식을 하려면 쌀이라도 한 줌 씹어보 라고 영섭이 배낭에 넣어 온 것을 꺼내어 권해보았으나 노인은 그것마저 완강히 사양했다. 영섭도 그래 끝내는 화식을 단념하고 생식으로 저녁을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노인이 그 에겐 저녁을 익혀 먹으라 했으나 이래저래 일이 번거로워질 듯싶어서였다. 생식 후에 노인 이 특별히 돌꿀 한 숟갈을 물에 풀어준 것이 부실한 저녁을 조금은 보충해주었다. 그런 식 으로 대충 저녁 끼니를 때우고 난 두 사람은 불도 밝히지 않은 채 굴집 앞쪽의 싸릿대 바닥 위로 나란히 자리를 잡아 앉았다. 불은 밝히지 않았지만 중천쯤 떠오른 상현달빛이 눈앞 분 별엔 충분하기 밝았다. 그 달빛 속에 희미한 윤곽을 드러낸 멀고 가까운 산 능선들에서 밤 새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잔에 언젠가 이런 사건이 있었지요." 주영섭이 이윽고 그의 소설 이야기를 시작했다. 노인 쪽에선 전혀 조급스러워하는 빛이 없었으나, 영섭으로선 그게 당연한 순서이기 때문이었다. 영섭을 재촉하는 기미는 없었지만, 노인도 이젠 으레 그가 이 야기를 할 차례라는 듯 말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영섭은 군소리 덧붙이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소설 이야기를 엮어 나갔다. 소설의 이야기는 한때 꽤 세인의 관심을 끌어모았던 강도상해사건에서 취재된 것으로, 영섭은 그 사건의 실제 내용과 소설화된 자기 이야기 사 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필경은 그 모든 것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의 내용인 것처럼 이야기를 실감 있게 이끌어나갔다. 1976년 가을. 서울 동남방 한강변의 절경을 끼고 들어선 비밀별장지대의 한 전원주택 안 에서 좀 맹랑한 강도상해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자는 한때 2대에 걸친 국회의원까지 지낸 퇴 물정객으로, 의원직 재임시 국내유수의 재벌 회사와 관련한 매직 사건으로 의원직까지 중도 박탈당한 명예롭지 못한 이력의 소유자-. 그의 가족은 이미 유학이니 신병치료니 하는 속이 뻔한 형식으로 미국 이민이 이미 끝나 있던 데에다, 그곳 은행에는 엄청난 금액의 부정재산 을 미리 도피시켜 놓았다는 소문이 분분하던 권중현 씨. 방만스런 치부와 가위 패륜적이랄 만큼 부도덕한 사생활을 즐겨오던 그 권씨가 자신의 비밀별장에서 어느날 밤 졸지에 변을 당한 것으로, 범인은 그 자리에서 권씨에게 물경 5백여만 원이란 거액을 털고 나서도 아직 더 무엇이 부족했던지 그를 다시 해치고 달아나려 했던 것-. 그 사건의 개요는 이러했다. 경보장치가 설비된 안전방범철책에 아래채를 지키는 관리인 부부가 경비용 셰퍼드까지 기르고 있는 터인데다, 이날은 특히 나이 어린 새 여자를 동행하 고 있었으므로 권중현 씨는 이날 밤 방문단속 따위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날 새벽 두 시쯤 되어서였다. 누군가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대는 바람에 권씨가 눈을 떠보니,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긴 점퍼 차림의 사내 하나가 그의 목줄기에 차가운 칼날을 들이대 고 있었다. 그 엄중한 방범망을 뚫고 사내가 어디로 어떻게 들어왔는지, 관리인 부부나 셰퍼 드 녀석들은 그림자도 얼씬하는 기척이 없었고, 방안에는 대담하게도 전등불까지 환히 밝혀 져 있었다. -입다물고 조용히 시키는 대로 해야 하오. 고분고분 말을 들으면 사람을 해치진 않을 테니까. 그 대신 허튼 수작하면 귀한 목숨으로 값을 치르게 해줄 테니... 목숨하고 바꿀 만큼 소중한 것이 있거든 당신 맘대로 하시구. 복면의 사내는 속삭이듯 가만가만 말하고 있 는데도 권중현 씨는 워낙 겁에 질린 터라 작자의 몸짓이나 목소리가 어찌나 크고 우악스러 워 보이던지 손가락 하나 달싹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여 중현 씨는 사내보다 제풀에 신중해진 표정으로 위인에게 은밀스런 순종의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사내는 중현 씨의 그 두꺼운 목줄기에서 천천히 칼날을 거두고 이번에는 그 옆에 세상 모르고 녹아 떨어진 여자 를 깨우게 했다. 여전히 낮고 신중한 중현 씨의 채근질 끝에 여자도 겨우 반라의 알몸을 부 시시 추스리고 일어났다. 중현 씨와는 나이를 곱으로 헤아려야 할 정도로 앳되어 보이는 20 대 초반의 아가씨. 게다가 비로소 사태를 알아차린 여자의 경악에 찬 눈길. 사내는 역시 그 침착한 어조로 중현 씨로 하여금 여자를 안심시키고 고분고분 조용한 순종을 이르도록 당부 한다. 그리고는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여자에게 눈짓으로 우선 옷가지부터 대충 걸쳐 입게 한다. 그런저런 절차를 모두 끝내고 나서야 사내는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가 두 사람이 바깥 에서 지니고 왔거나 집안에 보관되어 있는 금품들을 모두 털어 내놓으라 명령한다. -댁들이 여기 지니고 있는 것 중에서 한푼이라도 숨겨놓은 게 발각될 경우엔 그 숨긴 것 만큼 당신의 몸으로 대가를 치르게 될 줄 각오하고... 그 일방적인 명령에 뒤이은 사내의 으름장. 낮고 침착한 목소리면서도 그만큼 살벌스런 강압기가 담겨 있다. 권중현 씨도 이미 그만한 눈치는 못 읽을 리 없는 나이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옷장 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천천히 옷장 문을 열고 옷저고리 주머니에서 돈지갑을 꺼내어다 사내에게 건네준다... 사내가 받아 열어 본 그 지갑 속에는 액면 1백만 원짜리 은행지불 보증수표 두 장과 1만 원짜리 고액권으로 30만원 정도의 현금이 들어 있다. -내 워낙에 현금을 지니지 않는 버릇이라. 게다가 여기는 하룻밤 잠만 자고 가는 곳이 고... 사내는 동태를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던 권중현 씨가 제물에 뭔가 뒤가 켕기는 듯 현금액 이 그리 많지 않은 데 대한 변명을 덧붙였다. 그리고는 아직도 뒤가 미심쩍은 듯 사내의 신 변가지를 미리 염려해 주고 나섰다. -소용이 된다면 내 개인수표를 더 뗄 수도 있겠소만 그건 댁한테 이로운 일이 못 될 테 구. 사내는 그러나 위험한 함정이 숨어 있음에 분명한 중현 씨의 친절 따윈 들은 척도 않는 다. 그의 현금과 수표를 몽땅 자기 주머니에 거두어 넣고 다시 이번에는 다시 여자 쪽을 향 한다. -이젠 당신 차례군. 그가 화장대 위에 놓은 여자의 악어 가죽 핸드백을 칼 끝으로 가리킨다. 순간, 여자의 표 정이 얼어붙듯 잠시 움직임을 정지한다. 그러나 여자는 금세 사람이 달라지듯 뜻밖에 바로 평정을 되찾으며 상냥스런 얼굴로 사내를 얼르고 나선다. -저한테두요? 그야 뒤져보시면 저한테두 용돈푼은 나오겠지만요... 하지만 댁도 짐작하고 계시듯이 저 같은 여자한테 무슨 돈이 얼마나 있을라구. 그러니 전 제발... -맞는 말이오. 솔직히 말해 남자 잠자리나 따라 다니는 여자에게 돈이 있으면 몇 푼이나 있겠소. 댁도 사내 대장부라면 아녀자 손지갑은 그냥 내버려둬 주는 아량을 베푸는 게 어떻 소? 중현 씨도 그제서야 제법 수컷다운 호기 속에 여자를 부러 더 비하시키고 나섰다. 사내의 손아귀에서 계집의 손가방만은 지켜보자는 수작이다. 사내는 그러나 역시 들은 척도 않는다. -당신은 공연한 빚을 만들지 않는 게 좋을 텐데. 그는 거의 확신에 찬 소리를 내뱉고 나서 두 사람 쪽으로 계속 칼끝을 겨눈 채 조심조심 뒷걸음질로 화장대 앞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그 화장대 위에 놓인 핸드백을 열고 다시 검고 조그만 돈지갑을 꺼낸다. 여자의 지갑 속에선 사내의 예상대로 남자의 주머니에서보다 도 많은 액수의 수표가 나온다. 1백만 원짜리 은행보증수표 세 장. 합계 3백만 원의, 하룻밤 화 대치곤 엄청난 금액이다. -흠, 이건 아무래도 장기계약 놀음인가? 그런데 저 양반 주머니에 아직도 수표가 두 장은 여분으로 남아 있는 걸 보면 당신은 그리 거래가 능하질 못했던 모양이지? 사내가 비웃듯이 여자를 동정한다. 여자는 이제 완전히 사색이 되어 있다. 중현 씨도 이제 는 체념을 한 얼굴로 장승처럼 멀거니 사내의 동태만 지켜볼 뿐이다. 강탈극은 이제 끝이 난 셈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웬일인지 아직도 별장을 빠져나가려 하질 않는다. -그럼 이제 두 분은 눈을 감고 나란히 꿇어앉아 주실까. 사내가 다시 두 사람에게 명령했다. 중현 씨와 여자는 그것이 이제 사내가 별장을 나가기 위한 방책인 줄 짐작했다. 그래 사내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감는 다. 하지만 사내는 거기서 다시 엉뚱한 복종을 다짐하고 나섰다. -이제 두 사람 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지금부터 잠시 동안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자 신이나 옆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절대로 눈을 뜨거나 몸을 움직여서는 안 되오. 눈 을 뜨거나 움직였다간 예정하지 않은 불상사가 생길 거니까. 하지만 그저 눈을 감고 참고 있으면 별 큰일은 없을 거요. 난 한 번 말하면 끝까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오. 내 말이 거 짓인가 아닌가는 얼마 전 이 별장촌에서 있었던 강도살인사건을 생각해보면 알 거요. 그때 는 난 일을 그렇게 크게 벌일 생각은 없었소. 헌데 그 양반이 내 당부를 소홀히 여긴 바람 에 그만 다른 방법이 없게 됐던 거요. 자, 그러니... 사내는 그 얼마 전에 있었던 같은 별장 촌의 한 끔찍스런 강도살인 사건까지를 자신의 범행으로 들추고 나섬으로써 두 사람에게 신 중하고 철저한 복종을 다짐했다. 중현 씨와 여자는 눈을 감은 채 사색이 되어 그의 다음 처 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작자가 두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가하려는지, 두려움 과 초조감이 중현 씨를 끝내 더 참을 수 없게 한다. -도대체 우릴 어떻게 할 셈이오? 그가 무언가 결심을 한 듯이, 그러나 사내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더욱더 굳게 감겨진 눈 길을 사내 쪽으로 향하여 만만찮게 대들었다. -아, 뭐 크게 걱정하실 일은 아니오. 사내가 중현 씨에게 간단히 대꾸했다. 그의 말씨는 턱없이 정중한 데가 있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자기 할 일에 그만큼 분명한 작정이 내려진 사람답게 차분하고 냉랭하다. -아마 당신들은 오늘 밤 이 일을 나보다도 더 비밀로 덮어두고 넘어가길 바랄 거요. 게다 가 이 일을 비밀로 만들고 안 만들고는 당신들 마음먹기에 달인 간단한 일일 거요. 고마운 일이지요. 하지만 사실 난 그게 별로 마음에 들지가 않아요. 당신들은 돈만 잃은 선량한 피 해자로 남고, 나 혼자 강도질로 쫓겨야 한다는 게 말이오. 그래 당신들이 오늘 밤 이곳에 함 RP 있었던 기념으로 조그만 흔적들을 하나씩 선물해드리고 싶은 거요. 그 뭐랄까, 강도에게 도 나름대로의 자존심이 있어서랄까. 한마디로 말해 당신들도 이 일을 비밀로 만드는 데 함 께 애를 좀 먹어달라는 거지요. -... -자, 그러니 이젠 고개들을 좀 바로 들어주시겠소? 그리고 이점 선생께서도 알고 계시지 만, 내가 일을 끝내고 방을 나간 다음에라도 쓸데없이 뒤를 밟아 나서는 따위의 만용은 없 어야겠지요? 말을 끝내고 사내는 잠시 더 두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중현 씨와 여자는 사 내가 바란 이상으로 이마들을 높이 쳐든 채 조용히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다. 그러자 이 윽고 검객처럼 날쌘 사내의 칼 끝이 한순간에 사내쪽의 이마에 X표 모양의 가는 상처를 그 어놓고 지나간다. 일이 워낙 짧은 순간에 일어난 데다 상처도 그리 깊지가 않은 탓에 중현 씨는 의외로 그 칼질을 침착하게 잘 견뎌낸 셈이었다. 칼끝 이마를 스칠 때 숨을 한 번 흠 칫 들이쉬었을 뿐, 일이 끝나고 나서도 그는 얼굴로 흘러내리는 핏줄기조차 훔쳐내려지 않 은 채 꼿꼿한 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다. 자세가 흐트러진 것은 오히려 그 기척에 자신이 일 을 당한 듯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기절을 하고 쓰러진 여자 쪽이었다. 사내는 이제 그 중 현 씨를 버려두고 발길 아래 방금 쓰러진 여자 쪽을 잠시동안 묵묵히 내려다본다. 그리고 위협기와는 딴판으로 처음부터 여자까지는 해칠 생각이 없었던 듯, 또는 여자가 갑자기 기 절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은근히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듯 더 이상의 행동을 자제하려는 낌 새다. 그는 오히려 여자의 기척을 알고도 겁에 질려 꼿꼿이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중현 씨를 나무란다. -선생, 아가씨가 지금 기절을 했나 본데, 그러고 계속 앉아 있기만 할 거요! 하지만 그게 지나친 친절이었다. 사내는 그러고 나서 중현 씨가 비로소 허겁지겁 여자에 게 매달리고 있는 틈을 타 재빨리 방문을 빠져 나갔다. 그런데 그때 사내는 끝내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중현 씨를 지나치게 겁쟁이로 믿고 안심해버린 탓이었다. 사내는 그가 중현 씨를 칼끝으로 복종시키고 있을 때 중현 씨가 내내 그의 기미를 살피며 자신의 침대 머리맡에 숨겨둔 권총을 몹시 아쉬워하고 있었던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별장을 빠져 나올 동안, 중현 씨가 단 몇 초 동안이라도 기절한 여자에게 매달려 있으리라 는 헛된 기대로 자신의 범행을 망쳐버린 것이다. 사내는 결국 그 중현 씨의 별장을 빠져나 갈 수가 없었다. 그가 막 별장 담벼락을 뛰어넘으려 했을 때 발작하듯 뒤에서 쏘아댄 권총 탄환 하나가 그의 허벅지를 뚫어버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물론 사내의 말대로 그 사내 쪽만의 실수는 아니었다. 그것은 역시 권중현 씨 쪽으로도 치명적인 실수였다. 실수가 된 사 연은 뒤에 가서 차츰 밝혀질 일이지만, 사내의 충고나 자신의 판단이 분명했음에도, 사내가 문을 빠져 달아나는 것을 본 순간, 중현 씨는 젊어 한때 취미삼아 익혀둔 그 정확한 사격솜 씨를 참아낼 수가 없었던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같은 순간의 충동 때문에 중현 씨도 이후 자신의 실수에 대해 범인 못지않게 녹녹찮은 대가를 치러야 할 처지가 되고 만 것이었다. 소설의 발단에 해당하는 사건의 경위는 대개 그러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대개 그 당장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사내의 충고를 명심해두지 못한 실수로 중현 씨는 그후 꽤 나 괴로운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그가 치른 대가가 어떤 것이었든지 중현 씨는 일단 자기 의 충동에 따라 총질을 하고 나서도 세상에 대해선 사건 자체를 은폐시키는 데 어느 만큼 성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서의 내용은 그러니까 후각이 남다른 한 주간지 기자의 끈 질긴 추적과 취재의 성과였다. 그리고 그 취재내용에 주영섭이 뒤에 다시 자신의 소설적 상 상력을 동원하여 완성해낸 반사실, 반가공의 이야기인 셈이었다. 어쨌거나 주영섭의 소설은 거기서부터 그 사건의 처리와 취재의 과정으로 줄거리가 다시 이어져 나갔다. ...수사당국은 처음부터 사건내용의 발표를 꺼렸다. 범행의 성질이나 장소가 매우 안 좋은 때문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사내의 범행이 있었던 그 별장촌에선 서너달 전에도 비슷한 강 도살인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유사사건의 연속에는 그 범행의 대담성이 나 방범상의 취약성 이외에도 몹시 난처한 문제점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 장소의 특수성 때 문이었다. 이 한강변의 교외 별장지대는 원래 녹지보호지역 안에다 서울 쪽 사람들이 불법 적으로 호화별장을 짓는대서 처음부터 말썽이 있었던 곳이었다. 그 별장들에 대해 제재 조 처가 어떻게 끝났는지, 세인들의 머릿속에서 흐지부지 관심들이 사라져가던 판에, 그 별장의 한곳에서 이름 있는 서울의 골동품 소장가 한 사람이 밤중에 변을 당한 강도살인사건이 일 어났다. 피해자는 바로 그 자리에 숨지고 범인은 끝내 붙잡히지 않았지만, 그리고 그 피해자 의 이마에 그어진 의문의 X표-마치 구약성서의 하나님이 제 아우를 죽인 카인을 용서하는 대신 그 이마에 징벌의 표시로 남긴 죄식을 연상시키는 그 칼자국 상처-를 무시해버린 채 당국은 그저 단순 강도살인사건으로 수사결과를 발표했지만, 그 사건의 담당 수사관이나 일 반인들의 가슴을 뭔지 모르게 섬뜩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어물어물 미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듯싶던 판에 또다시 같은 별장촌 안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번에는 현장 에서 범인이 붙잡혔지만, 주변 관계자들로서는 다시 한번 가슴이 섬찟해 오지 않을 수 없었 다. 그것은 두 사건이 같은 별장지대에서 동일 범인에 의해 연속적으로 자행되었다는 데서 추리될 수 있는 어떤 잔혹스런 배후의 계획성 같은 걸 감지한 때문이기도 하였고, 또는 범 인 자신이 너무도 간단히 자신의 범행(그것도 연속 범행)을 시인하고 나서 버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래저래 당국의 수사는 엄격한 비밀 속에 행해져야 하였다. 동기나 배후에 대한 의 문점을 남긴 채 사건의 내용이 세상에 알려졌다간 갖가지 심상찮은 억측들을 유발시킬 판이 었다. 경찰은 은밀히 사건의 수사를 진행시켜 나갔다. 그런 가운데도 사내의 범행내용은 너 무 명백했다. 범행 현장에서 총을 맞고 붙잡힌 사내는 범행을 부인할 여지도 업었으려니와 그 자신 기이하게도 그럴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범행사실이 명백하고 범인의 태도가 그 런 만큼, 수사상황도 진전이 빨랐다. 수사는 단시일 안에 현장검증을 거쳐 충분한 기소 자료 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사내는 이미 전자의 강도살인 범행까지도 순순히 모두 시인을 해 온 터. 그러나 경찰은 그걸로 당장 수사를 종결지을 수가 없었다. 범인의 신분과 사건의 동 기에 여전히 한두 가지 불투명한 의문점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범인의 이름은 최병진. 그의 신분은 함북 단천에 가호적을 두고, 범행 당시엔 예상찮게도 서울 답십리에서 하숙생 활을 하고 있는 현직 중학교 생물과 교사로 밝혀졌다. 사건 현장에서 중현 씨가 받은 인상 과는 달리, 나이 이미 46세나 된 단신 홀아비로 가족이 한 사람도 없는 위인이었다. 하고 보 니 당연히 그의 그런 신분에 다한 심상찮은 의혹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나이가 되도 록 홀아비 하숙생활을 하고 있는 점이 그랬고, 현직 중학교 교사라는 그의 직업 역시, 강도 상해나 살인범에겐 전혀 어울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범행 동기에 대해서까 지 강한 의혹을 낳게 했다. 단순한 금품 강탈이 범행 목적이었다는 자백에도 불구하고 작자 의 동기엔 아무래도 수상쩍은 냄새가 지워지질 않았다. 하지만 위인은 주민등록부상에 기재 된 정도의 인적사항 이외에 자기 신분이나 다른 범행동기들에 대해선 일절 입을 열지 않았 다. 재직한 학교에다 알아보아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50년대 중반 중등교원양성소를 거친 경력과 몇 차례의 전, 이직 사실 이외에 동료 교사나 학생들간에도 그의 사생활이나 신상시 의 범행동기가 미심쩍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수사 과정은 더 철저한 비밀의 장막 속에 감춰졌다. 사건의 낌새를 눈치채고 달려든 기자들이 전혀 없지 않았다. 그럴 경우 당국은 교권 타락상이 불러올 세론 악화의 방지와 수사상 필요한 보안을 내세워 간곡하게 기자들의 접근을 막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수사는 더 이상 큰 진전이 어려웠다. 최병 진은 현장에서의 범행경위와 전일의 골동품 소장가 관계의 범행에 대해서는 현장검증 과정 에서는 다소간의 의문점을 남긴 이외에 의외로 소상한 진술을 하였지만, 그 밖에 개인적인 신상사나 숨겨진 범행동기들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를 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피해자의 이마 에 일부러 X표 칼자국을 낸 일(경찰로선 그 점 역시 썩 예사롭지 않게 보고 있었지만)에 대하여도 위인은 그저 피해 사실을 스스로 숨기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현장에서의 궤변 투를 되풀이 할 뿐이었다. 수사진은 그 보이지 않은 범행의 배후와 여죄의 추궁에 한동안 전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범인 최병진 역시도 자신의 배후나 여죄에 대해선 끝내 완강히 입 을 다물고 버텨냈다. 그러던 어느날, 수사책임자(사안의 미묘성을 감안한 탓에선지 이 사건 의 수사는 초반부터 검찰의 직접 지휘를 받고 있었다)는 갑자기 수사를 종결짓고, 기자들에 게 약속한 결과 발표도 없이 전격적으로 법원에 기소를 해버리고 말았다. -이 사건에 특별히 수사력을 집중할 다른 배후가 없고, 이자에게는 2차에 걸친 연속 범행 이외에 더 이상의 여죄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사건 자체가 별다른 배후나 협의점 이 없는 단순강도살인, 강도상해사건으로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공소장에 적시한 사항 이외 에 사건의 내용이나 수사 경위에 대하여도 더 이상 특별한 주의를 요할 만한 발표거리가 없 다고 본다... 그것이 기소조치를 끝내고 난 수사당국자의 어정쩡하면서도 단호한 사후 변이었다. 취재 기자들은 맥살이 풀렸다. 사건은 이제 기사를 내보낼 가치가 없었다. 공소장에서 적시된 사 건의 경위나 범행내용이란 것이 그새 자신들이 접하고 예상해온 것보다도 훨씬 더 축소되고 단순화되어 버린 데다 사건 발생의 보도가 없었으니 속보를 내보낼 근거조차 없었다. 그렇 다고 시일을 끌게 된 구실이 될 만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 것도 아니었다. 기자들은 꺼림 칙한 대로 사건 자체를 아예 묵살해버리거나, 항용 있어온 강력사건 정도로 가볍게 보도를 흘리고 지나갔다. 이런 사건에 대한 당국의 '보도협조' 사항은 전부터도 거의 관례가 되어 오다시피 해온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기자들의 눈길마저 시들해져 버리 자 사건은 이제 세상의 관심권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 다. 그중에도 단 한 사람, 끝끝내 관심을 꺾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주간서울>의 양진호 기자였다. 양진호 기자는 일이 벌어졌을 당시부터 이 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가지고 있 었다. 그리고 범인 최병진의 태도와 사건이 보여준 몇 가지 특이한 점 때문에 누구보다 각 별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사건의 성격으로 보면 우선 피해자 권중현 씨의 신분이나 그 범행장소부터가 세인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양진호의 생각엔 그보다도 최병진 의 범행이 단순강도상해 사건치고는 그 수법부터가 너무 대담스럽고 가학적으로 보였다. 피 해자 권중현 씨의 정황이 그랬던 탓도 있었겠지만, 그는 마치 금품을 강탈한 목적에서가 아 니라 권씨와 호사와 패륜(그날 밤의 여자는 그의 처족간이라는 소문까지 있었다)을 징벌하 러(돈을 빼앗고 나서 피해자의 이마에다 무엇 때문에 굳이 그 X표 죄식의 상처까지 남겨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나타난 정의한이라도 된 것처럼 태도가 대담하고 호기스러웠다. 뿐더 러 그는 중현 씨의 사격으로 발목이 붙잡히고 나서도 너무 태연하게, 어쩌면 오히려 그렇게 되기를 바라기라도 한 사람처럼 전날의 그 끔찍스런 강도살인사건까지 포함한(그 동일한 X 표 죄식으로 인하여 수사진은 그걸 거의 의심치 않은 모양이었으나) 자신의 범행사실 일체 를 너무도 간단히 털어놓은 것이었다. 하면서도 그는 또 범행현장의 일 이외에 자신의 과거 사나 금품탈취 이상의 범행목적들에 대해서는 너무도 완강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야반강도 에게 재물탈취 이상의 다른 목적을 상상해보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은 일일는지 몰랐다. 하 지만 금품만을 목적한 범행이었다면 그 부질없는 X표 죄식까지 남겨야 할 필요가 없는 외 에도 최병진은 그의 신분에 반해 남의 재물에 대한 탐욕이 어울리지 않게 너무 지나쳤고 그 범행도 잦았던 편이었다. 그리고 범행 당시나 뒷날의 태도들이 너무도 방자하고 태연스러웠 다. 그런 점에서 양진호는 그 이마의 X표 죄식도 전자의 흉내일 뿐 그의 연속 범행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지울수가 없었다. 양진호 기자는 그처럼 처음부터 범인의 신상사나 동기들에 대하여 적지않은 의혹들을 느끼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그 사건에서 어떤 강한 응징성과 부정의 내막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고발적 폭로성을 감지한 것이었다. 하지만 양진 호의 그런 의혹 앞엔 너무도 두꺼운 장벽들이 가려져 있었다. 그 첫 번째가 우선 당국자의 벽이었다. 경찰에선 대체 어떤 근거로 최병진에게 특히 수사력을 집중시킬 만한 다른 배후 나 동기가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는지 자세한 경위를 밝힌 바가 없었다. 게다가 수사상의 필요와 세론 악화의 방지를 위하여, 그리고 피해자 보호의 구실을 내세워 취재진을 철저히 봉쇄해온 끝에, 수사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게 전격적으로 기소를 단행해버린 터였다. 당 국자의 태도가 그런 판국에 피해자의 입을 빌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 상대가 소문과 는 다른 여자였다 하더라도 권중현 씨는 처음부터 사건의 확대를 달가워 할 입장이 아니었 다. 이미 추측한 대로 권중현 씨는 그때 잠시 자신의 충동을 자제하지 못한 실수를 누구보 다 깊이 후회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범인 최병진의 당시의 말마따나 중현 씨가 그때 그 최병진을 고이 달아나게 했더라면 그는 아예 그날 밤 사고를 없었던 일로 넘겨버릴 수도 있 었을 터였다. 그랬더라면 그는 일금 5백만 원쯤 애초부터 손에 없었던 것으로 할 수도 있고, 이마에 얻어 지닌 X표의 상처도 굳이 내력을 밝혀야 할 필요가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일단 범인이 붙잡힌 이상 권중현 씨는 그것을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이 그날 밤에 겪었던 모든 일들, 이를테면 어린 여자와의 동침 사실이라든지, 그가 그 여자에게 건넨 잠자리 값의 규 모, 그리고 그가 그 범인 앞에 어떤 몰골로 굴고 있었는지 따위의 일들을 사실대로 모두 털 어놓아야만 하였다. 긁어 부스럼으로 난처한 처지를 자초한 격이었다. 하지만 중현 씨는 역 시 실력자였다. 실수는 실수였지만 그만 일로 그는 자신의 명예나 사회적 지위에 쉽게 손상 을 입을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신속히 조치를 취해 나갔다. 가능한 모든 영향력을 행사하여 외부로의 사건의 발설을 막게 하고, 일을 될수록 가볍게 몰고 갔다. 그는 한껏 일을 조용하 게 얼버무려 넘기고 싶어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신문에 응하는 일마저 극력 삼갔다. 그는 사건 피해자로서의 피해진술조차도 수사관서 대신 자신의 집에서 피해 금품 액수나 상 처의 부위·정도 등에 대한 형식적인 진술로 간단히 소정의 절차를 치르고 넘어갔다. 그리 고 여타의 난처한 일들은 자신의 전임 변호사로 하여금 일체의 과정을 대행하게 하였다. 더 하여 그날 밤의 색연비나 범인이 강탈해 간 금품액수, 이마의 상처 따위들을 시종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숨기고 축소시켜 나가게끔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점은 당사자가 원했든 원하 지 않았든 최병진의 죄질에도 상당한 득이 되었다. 가선의 진상은 가해자인 최병진 쪽의 진 술이 훨씬 더 상세한 편이었지만, 수사진은 오히려 피해를 줄이고 사건을 한사코 단순화시 켜 가고 있는 피해자 쪽의 진술을 훨씬 신빙성 있게 평가한 것이다. 그리고 직접 범행과 상 관없는 피해자의 주변사는 될수록 비밀을 지켜준 것이었다. 범행의 자백으로 기소자료가 충 분히 확보된 마당에 굳이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곳까지 일을 번거롭게 확대시켜 나갈 필요 는 없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범인인 최병진마저도 거기서 더 이상은 굳게 입을 다 물어버린 터였다. 권중현 씨로선 그도 또한 망외의 태도인 셈이었다... 그런 중현 씨가 귀찮 은 소문꾼에 다름없는 주간지의 기자를 위해 입을 순순히 열어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양진 호는 단념하지 않았다. 그런저런 사정으로 기사를 당장 내보낼 수는 없다 해도 <주간서울> 은 기사의 시효가 일간지처럼은 절대적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사건의 내용과 배후를 샅샅이 밝히게 될 때가 올 터였다. 그는 최병진에 대한 수사 내용을 가능한 데까지 캐내고, 담당수 사관과 권중현 씨와 관련된 피해인물들의 주변을 차례차례 모두 뒤지고 다녔다. 범행이 있 었던 별장 주변도 몇 번씩 되풀이 탐색을 계속했다. 권중현 씨나 그 주변의 인물들은 당연 히 그의 접근을 경계하고 기피했다. 중현 씨나 그날 밤의 여자는 아예 만나주지조차 않았다. 수사진 역시 그를 몹시 귀찮은 존재로 여겨 경계가 심했다. -쓸데없는 억지 추측은 마시오. 흔히 있어온 강도살인이나 상해사건을 가지고 무얼 그렇 게 헛수고가 많아요. 사건전모에 대한 양진호 기자의 깊숙한 추궁에 수사진이 오히려 당황하여 짐짓 딴전을 부 리곤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끝내는 그가 우려했던 대로 당국은 이렇다할 경위의 발표도 없 이 서둘러 기소를 단행해 버린 것이었다. 양진호로선 그만큼 사정이 더 조급하고 어렵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양진호에게 있어 무엇보다 두껍고 어려운 장벽은 사건의 당사자인 최병진 자신이었다. 양진호는 이제 차츰 주변 취재를 젖혀두고 사건의 범인인 최병진을 직접 만나 보기로 하였다. 이때까지는 검찰이 증거인멸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접견금지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그와의 면대가 불가능한 상태였지만, 기소가 되고부턴 그것이 풀리게 되어 이제는 접견이 가능해진 때문이었다. 하지만 양진호는 최병진을 만나는 절차에서부터 다시 높은 벽 을 만났다. 최병진 역시도 전혀 사람을 만나려질 않았다. 가족이 없는 그로서는 당연한 노릇 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만나야 할 사람도 그럴 필요가 있는 사람도 없노라는 것이었다. 사 선 변호인을 선임하지 않은 그에겐 국선 변호인이 선임되어 있었으나, 위인은 그의 죄과를 감싸줄 변호인의 접견조차 결연히 사절해오고 있었다. 자신의 범행을 스스로 시인했고 그 범행사실이 명백해진 이상 그걸 다시 부인하거나 변명할 의사나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재판 절차상으로도 국선 변호인의 조력을 받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설득에 고집이 간신히 꺾 어들기는 했으나, 그 국선 변호인 선임을 수긍하고 나서도 그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질 않았 다. 위인은 자신의 변호인에게 수사과정에서 이미 드러난 범행을 되풀이 확인할 뿐 그걸 새 삼 부인하거나 자신에게 우리한 변론의 자료가 될 만한 소리는 한마디도 귀뜸을 해주지 않 았다. 범행동기나 목적은 물론 자신의 과거나 주변사에 대해서도 새로운 말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 보면 마치 자신의 파멸을 부르기 위해 부러 그런 범행을 저지르고 나선 사람만 같았 다. 중현 씨로 하여금 사건을 숨기는 데에 애를 먹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그 이마의 X표 대 해서만 해도 그랬다. 그가 그걸로 무엇을 노렸든 그 X표 상흔은 결과적으로 중현 씨로 하여 금 사건을 숨기기가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게도 몹시 불리한 정황을 결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걸로 자신의 안전을 노렸다면 그런 상처는 남기지 말았어야 하였다. 어떤 가열한 징벌성과 고발적 폭로성, -거기에선 보다 더 그런 기미가 농후했다. 그 는 오히려 일이 그렇게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랐기가 쉬웠다. 그리고 아직 이유를 알수는 없 지만, 그런 식으로 왠지 스스로 자신의 파멸을 부르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였다. 범행을 숨 기거나 변명하기는커녕 뭔가 할 일을 다하고 나서 처벌이나 기다리고 있는 듯한 그 완강한 자기 체념적 태도-, 변호인에게마저 그런 식이니 양진호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더 이상 길 게 이를 바가 없었다. 면회를 신청할 때마다 번번히 거절이었다. 궁리 끝에 양진호는 변호인 의 양해를 얻어 그의 면담 때 한두 번 자리를 함께 끼여들어 보았으나 그 역시 결과는 마찬 가지였다. 양진호는 결국 최병진 자신에게서도 그가 알고 싶어한 것은 한가지도 더 알아낼 수가 없었다. 자신의 과거사나 범행 목적에 대하여, 또는 전날의 강도살인 범행(실은 그의 연속 범행 여부에 대해서도 아직 의문이 있었지만) 털어간 금품의 액수와 용도에 대하여, (그는 그때도 상당액의 금품을 강탈한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피해 당사자의 사망으로 인하여 당시 수사과정에서 추정에 그쳐야 했던 그 강탈금품의 액수만은 한사코 밝히려 들질 않았 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한마디도 해명이나 변명을 하려 들지 않는 그 불가사의 한 묵비권의 동기에 대하여 아무것도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양진호는 이제 그 최병진의 불가사의한 태도에서 오히려 어떤 분명한 확신이 생기 고 있었다. 그의 애초 추측대로 최병진은 아무래도 그저 자신의 물욕이나 채우려는 단순강 도범이 아니라는 확신이었다. 그에겐 분명히 다른 어떤 동기나 목적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범행을 후회하는 기미가 추호도 없었다. 처벌을 두려워하는 기미도 없었다.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원하고 있는 듯한 의연스러움마저 엿보였다. 범행 에 다른 숨은 동기가 없고는 그런 태도가 불가능했다. 그의 범행에 특별한 동기가 숨어 있 을 법한 또 다른 가능성은 그 범행의 면밀한 계획성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위인의 자백을 사실로 믿는다면, 그 골동품 소장가에게서부터 시작된 범행의 연속성에서도 그런 기미가 보 였듯이, 그의 범행은 전혀 우발적이거나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충분한 시일을 두 고 미리 면밀한 계획을 세워 감행한 범행이었다. 현장검증 때 드러난 일이었지만, 범행이 있 던 날 밤, 별장 관리인네 셰퍼드가 그를 쫓지 않았던 데에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현장 검증날, 그 관리인네 셰퍼드 녀석이 수갑 찬 최병진의 몰골 앞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댄 것이다. 복면을 쓰고 담을 넘어 들어왔다곤 하지만, 개짐승이란 원래 냄새로 사람을 알아 보는 축생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사건이 일어난 별장의 법적 소유주들은 앞이나 뒤나 모 두 범행의 직접 피해자들이 아니었다. 별장들은 모두가 관리인이나 인근 주민들의 명의로 되어 있는 집들이었다. 별장들은 일테면 그런 식으로 세상의 눈을 피해 잘 은폐되어 있던 셈이었다. 최병진은 그러나 원 별장주와 그 별장주들의 행락 시기까지를 사전에 탐지해 두 었던 게 분명했다. 이런저런 사정들만 보아도 최병진의 범행은 하루이틀 사이에 간단히 저 질러진 일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최병진이 단순강도살인이나 상해범이 아니 라는 확신은 그가 그 범행의 동기나 목적에 대해 너무도 완강히 입을 다물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동기나 목적에 그가 그토록 완강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음은 그저 단순한 금품탈 취 이외에, 징벌성이나 고발성과 관련한 다른 어떤 목적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양진호의 확 신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되고 있었다. 최병진은 그저 단순한 강도범이 아니었다. 그는 위 인의 그 숨어 있는 동기를 알아내야 하였다. 혹은 그것이 자신의 상상을 훨씬 넘어선 것일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가령 나라의 체제나 방첩 정신과 상관할 만한 고약한 내용일 가능성이 있었다면 수사진의 눈길이나 추궁을 그리 쉽게 피해냈을 수가 없었다. 수사진은 일찌감치 그런 쪽의 의심은 풀어버린 낌새였다. 그리고 양진호의 끈질긴 추적도 애초부터 그런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진실은 기어코 밝혀져야 하였다. 하지만 사태의 진행은 그 에게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수사과정에서부터 이미 예상이 된 일이었지만, 사건은 기소 가 되자마자 법원 쪽 심리마저 일사천리 식으로 진행이 빨라지고 있었다. 하기야 검찰 쪽의 기소사실만 가지고는 심리가 그리 길어질 것도 없었다. 범행 주변의 정황이나 목적 등에 얼 마간 불투명한 점들이 있다 하더라도 피고인 스스로가 시인한 범행 사실이 너무도 명백하였 으므로 그걸로 심리가 지연될 일은 없었다. 사건은 기소 2개월 만에 변호다운 변호도 받지 를 못한 채 선고재판 과정까지 다 끝이 나고 있었다. 범행에 애초 살해의사가 없었음이 인 정되어선지, 극형을 모면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이나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할까-. 하지만 양진호는 이제 그만 맥이 빠지고 말았다. 신문들은 그쯤에서 몇 줄씩 짧은 사건 마 무리의 기사들을 싣고 있었지만, 그리고 더러는 아무것도 자신의 죄과를 변명하려 들지 않 았을 뿐 아니라, 무기형의 엄청난 형량에도 오히려 그것을 기대하고 바라는 듯 안도의 표정 마저 지어 보인 피고인의 별난 태도를 가벼운 가십조로 소개한 곳도 있었지만, 양진호로선 그도 저도 도대체 흥미가 없었고, 한동안은 그저 기분만 잔뜩 암울해져 있었다. 하지만 사정 은 그가 언제까지나 그 같은 탈진 상태 속에 가만히 보고만 있게 하지 않았다. 최병진은 그 렇듯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도 그것을 억울해 하는 기미는 고사하고 오히려 당연한 결과이 기라도 하듯이 차일피일 무관심하게 소정의 항소기간까지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변호인이 독자적으로 항소를 대신하여 그나마 2심 절차를 거치게 되어 있었던 것. 하지만 최병진은 이번에도 역시 어떤 이유에선지 그 항소심 재판정에의 출정을 거부하고 나섰다. 뿐만이 아 니었다. 최병진의 그런 극단적인 태도에 무슨 색다른 낌새를 알아차린 때문이었을까. 당사자 인 최병진의 일견 자포자기식 태도에 반하여 1심을 관여했던 조일천 변호사가 국선답지 않 게 뒤늦은 열의 발휘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가 2심에서는 국선이 아닌 사선을 자임하고 나 선 것이었다. 그리고 항소포기 의사에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은 최병진을 설득하고 구치 소를 수시로 들락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양진호는 조 변호사의 그런 사실을 알고 나자 더더 욱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침내 다시 자신의 힘을 보태려 나섰다. 그는 어쨌거나 오랫동안 별러오기만 하던 기사의 마무리를 지어야 하였다. 아니 그는 이미 기사를 모두 써 놓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마무리가 아직 지어지질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걸 마저 마무리 짓는 것은 그 혼자 임의대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거기엔 최병진의 확인이 필 요했다. -나는 그렇게 잡혀 들어갈 계획이었다. 이제 양진호가 최병진에게 듣고 싶은 소리는 다만 그 한마디뿐이었다. 최병진의 그런 한 마디만 있으면 그는 이번 사건의 경위나 배후의 전모(심지어는 그가 무기형의 선고에도 안 도의 표정을 지어 보인 일까지도)를 백일하에 모두 써보일 참이었다. 그는 그 한마디를 얻 어내기 위해 다시 최병진의 일에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내는 모두가 허사였다. 최병진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변호인의 설득으로 간신히 2심 공판정엘 나가게 된 이 후에도 그는 시종 남의 일을 구경하듯 자신의 재판과정에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 만 양진호의 노력이 허사로 끝난 것은 그런 최병진의 고집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유는 오히 려 양진호 자신에게 생겼다. 조일천 변호사의 노력도 보람 없이 1심 형량을 그대로 받아들 인 2심 재판 선고를 마지막으로, 최병진이 끝내 대법원 상고를 거부한 채 무기징역수로서 기나긴 형기를 치르기 위해 서울구치소로부터 수감지가 안양교도소로 옮겨진 며칠 뒤의 어 느 날이었다. 양진호는 끝내 그가 별러 오던 기사를 쓰지 못한 채 홀연히 종적이 사라져버 린 것이다. 말이 용납되지 않는 어떤 불가시의 힘에 이끌려 강도살인범(그는 이제 단순한 강도살해범이 아니었다) 최병진이 그러했듯 양진호 그도 그것을 좇아 자신을 어떤 미궁 속 으로 내던지고 말았는지 모른다. 혹은 그의 끈질긴 탐색과 추적을 뿌리치려는 어떤 보이지 않는 음모의 허무한 희생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무엇 때문에, 어디로 어떻게 사라져 갔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잠적 후에 알려진 일이라곤, 그가 그 무 렵 위인의 새 복역지인 안양교도소의 최병진에게 웬 벌꿀 한 단지를 영치물로 전했다는 사 실뿐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 꿀단지에 대해선 별달리 관심을 둔 사람도 또 그럴만한 틈도 없었으므로, 그것이 양진호의 갑작스런 잠적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 의심을 해본 사람이 아 무도 없었다. 어쨌든 그 일을 전후하여 양진호는 무슨 일로 어디로 간다는 흔적이 전혀 없 이 회사와 집과 친지들 앞에서 홀연히 모습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돌연스런 실종 상태는 이날 이때까지 영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게 된 것이다. 소설의 줄거린지 실제 사건의 취재 노트인지 모를 주영섭의 이야기는 일단 거기서 한 가 닥이 끝났다. 소설의 줄거리라기엔 이야기의 진행이 너무 거칠고 끝대목이 엉성했다. 그렇다 고 또 취재 노트라기엔 앞 뒤 연결이 매우 부자연스럽고 가공적인 느낌이 짙은 이야기였다. 하긴 그 모두가 영섭이 원래의 사건에 소설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재정리한 이야기고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기는 하였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야기의 골격은 실제로 있었던 사 건의 실화였다. 아직은 추측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어쩌면 백상도 노인도 알고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기미를 섣불리 내보이 지 않았다. "그게 노형이 쓰고 있다는 소설 이야기의 전부요?" 주영섭이 첫 번 이야기를 일단락 짓고 나서 노인의 반응을 살필겸 잠시 침묵을 지키고 앉 아 있자, 여태까진 그저 말없이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만 있던 노인이 드디어는 좀 맥이 빠 진 어조로 영섭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 노인의 물음 속엔 양진호의 이야기에 별 느낌이 없 어하는 덤덤한 어조와는 달리, 그의 이야기를 어디까지나 현실이 아닌 가공의 이야기로 치 부해 들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아무려나, 그것이 설령 허구가 아닌 현실의 이야기가 틀 림없다 하더라도, 그리고 노인 역시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그저 가공의 이야기로 치부해 듣는 것이 그로선 훨씬 편했을 터였다. 거기엔 일종의 간접화법과도 같은 방충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섭은 물론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처음부터 이야기에 소설의 형식을 빌려 온 것이었다. "아니지요. 아직은 양 기자가 무엇 때문에 어디로 증발해 갔는지가 밝혀지지 않았지 않습 니까. 이야기는 아직 첫 번 한 가닥이 끝났을 뿐입니다." 노인도 의례 그쯤은 알고 있는 일이 아니냐는 듯, 영섭이 조심스럽게 말을 받았다. 노인의 결단에 따라서는 이야기를 더 계속해 나갈 필요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노 인은 아직도 결단이 서질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입을 다물고 혼자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산속은 이제 밤새 울음소리조차 잦아들어 버린 깊은 적막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중천을 훨씬 비켜선 달빛이 밤이 깊어갈수록 투명하게 빛났다. "하지만 노형은 이미 그 양 기자란 사람의 행방을 알고 있는 것 같소 그려. 그야 소설을 끝내자면 의당 그래야 할 테지만 말이외다." 노인이 이윽고 영섭을 돌아보며 한번 더 은근 히 의중을 짚어 왔다. 양 기자의 행방이 밝혀진다면 자연 최병진의 비밀도 밝혀질 수 있을 테니 그것도 모두 알고 있느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소설을 빌리고 있는 노인의 말투는 아직도 마지막 결단을 못 내리고 있는 낌새였다. 영섭으로선 아무래도 이야기를 마 저 끝내야 할 것 같았다. 그것만이 노인의 마음속 결단을 도울 수 있는 길 같았다. "물론 전 그걸 알고 있어야겠지요. 양 기자의 행방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앞에서 이야기한 그의 실종 전의 행적들도 추려내질 수가 없었을 테니까요. 사실을 말씀드리면 그 양 기자의 행적을 뒤 쭟은 사람은 제가 처음이 아니었거든요." 영섭은 자기 소설과 현실의 줄거리를 애매하게 뒤 섞어 노인 앞에 장담했다. "그래, 노형의 소설 속에선 그 사람이 대체 어디로 간 걸로 정해 진 거외까?" 노인이 다시 영섭을 재촉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야기를 끝내 소설의 그것 으로 듣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지 않고는 그것을 아직 현실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아무러나 영섭으로서는 크게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말씀드리지요... 하지만 양 기자가 무엇 때문에 어디로 갔느냐 하는 걸 말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 드릴 일이 또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도 물론 이 소설을 위해 제가 취재를 한 사건인 데, 그걸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 그 기자의 행방을 밝혀나가는 옳은 순서가 될 테니까요. 이 번에도 물론 실제 사건과 제 이야기 사이에 시각이나 순서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앞에서 도 그랬듯이 오늘 밤 제가 말씀드린 이야기들은 어차피 모두 취재가 끝난 다음 제가 나중에 이야기를 다시 앞뒤로 뜯어 맞춰낸 것들이니까요." 주영섭이 다시 취재담 반, 소설 반 형식으로 백상도 노인에게 들려준 두 번째 사건의 전 말은 이러했다. 1978년 봄. 그러니까 서울의 양진호 기자가 최병진의 2심 결심 재판 후에 돌 연 종적을 감추어버린 지 2년쯤의 세월이 지나간 다음이었다. 서울 가까운 인천 지역에서 부두 하역부 한 사람이 퍽 납득하기 어려운 자해행위로 목숨을 끊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주인공은 나이 마흔다섯에 부두일을 시작한 지 십수 년이 넘은 유민혁이란 위인으 로, 동료들간에는 당할 자가 없는 도박술사요, 막강한 완력의 주먹잡이로 그 사회의 숨은 실 력자로 알려져 온 인물이었다. 그 유민혁이 어느 날 아침 이 지역 항만노조지부 임시사무실 에서 스스로 팔목의 동맥을 끊은 자살체로 발견됐다. 그 무렵엔 마침 이 지역 화물선박회사 들의 부두 하역근로자 수급업무 대행사업체 격인 항만인력관리사업소와 사실상의 지역노조 소속 인부들 사이에 임금과 후생, 피용자의 무단취업 정지 문제들을 놓고 불화와 쟁의가 계 속되어온 데다, 그게 드디어는 일부 하역부들의 농성사태로까지 발전하여 연이틀째 소란한 소동이 빚어지고 있던 때여서, 성미 급한 한 친구의 불상사 정도로 가볍게 보아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건은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 재빨리 마무리되고 말았다. 유민혁의 자살은 그러니까 농성 하역부들과 노조 간부들, 그리고 사용자 쪽에 다같이 어떤 충격을 주 어, 사업소와 인부들 간의 갈등을 그런대로 신속하게 해결케 만든 공로가 있었고, 그러나 그 러한 사용자와 피용자 간의 불화와 배덕이 얼마나한 대가를 요구하고 지불해야 하며 거기에 또 얼마나한 희생이 뒤따라야 하는가를 가슴 깊이 새겨준 교훈의 효과도 남기고 있었다. 유 민혁의 자살사건은 어쨌거나 일단은 그런 정도로 조용히 마무리가 지어진 셈이었다. 그런데 막상 사건을 조사해온 구서룡 형사는 수사를 그런 식으로 종결짓고 나서도 못내 뒤끝이 개 운칠 못했다. 그형사의 느낌엔 사건의 주변에 아직도 불투명한 부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것은 우선 그 유민혁이란 위인의 불가사의한 주변사와 그의 자살 동기의 애매성 때 문이었는데, 사건에 처음 접해 들었을 때부터 구 형사는 벌써 곳곳에서 그런 의문점들과 맞 부딪히고 있었다. 수사 초반에 드러난 일이지만, 유민혁은 그의 행적이나 주변 사람들의 그 에 대한 태도부터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유민혁의 작업상 근무 성적은 특별히 누구 보다 낫거나 못한 것이 없는 평범한 것이었다. 하면서도 그는 누구보다 동료간에 신뢰가 두 텁고 의리가 깊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관리사업소의 사무직원들이나 조합 간부들조차 도 그에 대한 것만큼 부두 노역 종사자들의 신뢰와 이해를 얻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 것은 한마디로 신기에 가까운 그의 도박술수와 의협심이 강한 완력 때문이랄 수 있었다. 부 두 노역 인부들은 때로 일당을 털어 거는 노름질을 즐겼다. 처음엔 그저 하루 일당을 걸고 시작한 가벼운 장난기의 노름판이 때로는 한달치 노임을 몽땅 다 털어 바치는 불상사를 부 르기도 했다. 유민혁은 그러나 원래 노름판을 그리 즐겨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노름판 자리에 끼여드는 일이 없었다 하였다. 하지만 노름판 시간이 길어지거나, 종당에 가 서 한쪽 처지가 거덜이 날 지경이 되고 보면, 그는 어디선가 소식을 듣고 와서 슬그머니 자 리를 끼여들곤 했다는 것,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노름판의 형세를 마음먹은 대로 혼자 좌지 우지해 나갔댔다. -그러니 그가 한번 자리에 끼여들었다 하면 노름은 더 이상 해보나마나였지요. 판돈을 혼 자 다 끌어 모으고 싶거나 잃은 쪽 손해를 보충해주고 싶거나 결과는 뭐든지 그가 마음먹은 대로였으니까요. 다른 사람은 아무리 안간힘을 써대도 소용이 없었어요. 틀림없이 어떤 속임 수나 술수가 있을 법한데도 그런 흔적을 잡아낼 수도 없었구요. 제 손에 있거나 남의 손에 있거나 그 사람은 마치 모든 화투장을 마음먹은 대로 바꾸어버리는 신통한 요술이 있는 사 람 같았지요. 그의 동료들의 한결같은 증언이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사람의 참견을 꺼려할 수도 없었지요. 그 사람의 완력도 완력이었지 만, 우리같이 노름판을 보채온 치들 중엔 누구나 한두 번 그 사람의 신세를 안 진 사람이 없었거든요. 한 달치 노임이 거의 거덜이 나가는 참에 그가 끼여들어 손해를 거꾸로 봉창하 게 되거나, 한 곬로 몰아간 판돈을 싱겁게 돌려받는 경험을 누구나 한번씩은 겪어온 처지들 이니까요. 제 주머니가 불러올 때라도 그 사람의 참견을 마다할 수가 없었지요. 한데다 유민혁은 또 자신의 물욕엔 그만큼 엄격하고 뒤가 깨끗한 위인으로 되어 있었다. 판돈을 한곳으로 몰아치고 나서도 그가 돈을 주머니에 쓸어넣고 가는 일은 거의 볼 수가 없 었다는 거였다. -재미있게 놀았으면 그걸로들 되었어. 하지만 섣부른 손재간들 믿고 너무들 좋아할 짓거 리는 아니여. 판돈을 되돌려주며 그가 번번이 충고한 말이랬다. 예외가 있다면 꼭 한 번, 언젠가 그 부 둣가 여관방에서 외항선 선원들과 함께 벌인 무지무지한 규모의 도박판엘 그가 제 발로 끼 어들었을 때뿐이었다 하였다. 그리고 그때 그는 하룻밤 사이에 신세를 고쳐 잡아도 좋을 만 큼 큰 돈을 휩쓸어 갔는데, 그때만은 왠지 그도 판돈을 한푼도 되돌려주질 않았댔다. 하지만 그의 옛 동료들은 그때의 횡재 역시 위인이 절대로 자기의 물욕을 채운 게 아닐 거라는 장 담이었다. -그런 큰 돈을 움켜쥐고 난 뒤에도 그 사람은 전날과 조금도 다름없이 부두일을 나왔어 요. 마누라도 자식도 없이 단홀아비 셋방살이 자취생활 형편도 전일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구요... 언젠가 한번은 처지가 퍽 어려운 동료의 아들놈이 대학입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 기 한 달 노임을 몽땅 털어준 일도 있었지요. 하고서도 그 사람, '내야 뭐 단홀아비 살림에 돈 쓸 일이 있어야지.' 그 동료의 등을 툭툭 두들겨주면서 그 한마디뿐이더래요. 천성이 그처럼 물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어서 위인이 무슨 축재를 목적으로 저금통장 같 은 걸 지녔을 리도 없으니, 그날 밤 도박판에서의 엄청난 횡재도 그 비슷한 용도에다 써 없 앴으리라는 것이었다. 유민혁은 일테면 동료들에게서 그쯤 수수께끼의 인물로 치부되어온 셈이었다. 한데도 동료들은 또 위인의 개인사엔 깊은 내력을 따져 묻지 않는 것이 그간의 습관으로 되어오고 있었다. 작자가 워낙 자신을 내세우길 싫어하는 성미라서 그런 걸 묻는 대도 시원한 대답을 들어본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랬다. 위인의 그런 점은 그 귀신 같 은 도박 솜씨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위인은 그 수수께끼 도박술에 대해서도 이 렇다할 내력을 털어놓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 왕년에 어디서 크게 놀아먹던 솜씨가 분 명하다는 동료들의 농기어린 다그침에도 위인은 그저, -그래, 한때는 좀 한다고 했었지... 하지만 그런 재주는 한번 세상에 알려지고 나면 더 이 상 재주로 남을 수가 없는 걸세... 실없이 전력을 시인해 오는 듯하면서도 더 이상의 자세한 내력까지는 한사코 말끝을 흐려 버리곤 해왔다는 것. 어쨌거나 그러저러한 이유들로 부둣가 사람들은 유민혁이란 위인의 그 잔혹스러울 만큼 완벽한 노름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런 술수와 인간에 대한 신뢰가 더 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노름판에서의 그것처럼, 두려움과 경계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 거 꾸로 호감과 신뢰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은 유민혁의 그 불가사의한 완력 또한 마찬가지였 다. 그것도 물론 위인의 그 완력을 자주 행사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노름수처럼 유민혁은 그 의 완력을 함부로 휘둘러대는 일이 없었다. 어느 편이냐 하면 그는 가급적 자신의 힘을 자 제하고 숨기려는 쪽이었다. 동료들 가운데선 실제로 그가 완력을 함부로 휘둘러대는 일이 없었다. 어느 편이냐 하면 그는 가급적 자신의 힘을 자제하고 숨기려는 쪽이었다. 동료들 가 운데선 실제로 그가 완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그래 그에게 나이답지 않은 놀라운 힘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곧이들으려 하지 않은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유 민혁이 그런 친구들을 믿게 하기 위해 따로 자신의 힘을 시범해보일 필요는 없었다. 예수가 그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 때마다 이적을 행할 필요가 없었듯이, 위인이 그것을 드러내보 일 수밖에 없었던 한두 번의 불가피한 기회로 그의 완력은 충분히 시범됐다. -한번은 관리사업소의 젊은 친구 하나가 뭐가 못마땅했던지 제 아비뻘이나 되는 늙은 하 역부에게 듣기 거북한 반말지거리로 욕설을 함부로 퍼부어댐 일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 젊 은 친구의 욕지거리가 정도를 훨씬 넘어선 듯싶어지자 그때까지 곁에서 묵묵히 자기 일만 하고 있던 유씨가 햇빛에 이마가 부셔오는 사람처럼 눈살을 가늘게 졸여 당기면서 젊은 친 구 앞으로 슬그머니 다가갔어요. 하더니 그 사람 이말 저말 없이 그저 한 손으로 젊은이의 멱살을 집어올려 버리는 거였어요.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론 두 다리를 허공에서 볼품없이 바 둥대고 있는 젊은것의 턱뼈를 양쪽에서 힘껏 집어 눌러댔구요. 젊은이는 소리 한번 제대로 질러보지 못하고 몸뚱이가 바람개비처럼 허공에 매달린 채 금방 눈깔이 튀어나올 것 같은 형국이 되고 말았지요. 그 엄청난 뚝심에 기가 질린 젊은이는 감히 비명소리 한마디 내지를 여유가 없었다는 목 격자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유민혁은 그때도 굳이 무슨 질책의 소리 한마디가 없었다 하였 다. 고통스럽게 다리를 바둥대는 젊은이를 위인은 마치 무슨 생선 꿰미 들여다보듯 한동안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가는 이윽고 녀석을 땅바닥 위로 조용히 내려놓았을 뿐이었댔다. 젊 은이의 몸뚱이는 풀기 잃은 빨래모양 땅바닥으로 힘없이 주저앉아 내렸고, 그러자 다음 순 간 녀석은 비로소 자신이 방금 겪어낸 위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뒤늦게 실감한 듯 유민혁 앞으로 부리나케 몸을 일으켜 줄행랑을 놓았는데, 유민혁은 그걸 덤덤한 눈길로 바라보고만 있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그것만으로도 턱뼈가 굳어져 일주일 가까이나 말도 제대로 못하고 지내야 했다던가. 또 한번은 부두 인부들끼리 주먹다짐 끝에 있었던 일인데, 이번에는 좀더 여러 동료들이 그의 완력을 똑똑히 구경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부두 인부들 사이에선 그때까지도 이런저런 일들로 싸움과 폭력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사 업소 쪽에 모종의 뒷줄을 대고 늘 조합과 동료들 간의 일을 염탐하고 다니던 손용달이라는 위인과, 작자의 못된 행실을 두고 늘 한번 버릇을 고쳐주겠노라 기회를 별러오던 피해당사 자 박경준이란 사람 간에 드디어 노골적인 시비가 붙었다. 시비는 이내 앞 뒤 안 가리는 주 먹다짐으로 발전하여 누군가 한쪽이 산송장 몰골이 되어날 판이었다. 싸움이 정도가 그렇듯 지나치는 듯싶어지자 그때까지 그저 곁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동료들이 드디어는 그만 두 사람을 뜯어말리려 나섰다. 한데 때마침 거기 한데 섞여 구경을 하고 있던 유민혁이 왠지 실실 웃으면서 그것을 저지했다. 싸움이 갈때까지 가게 내버려두라는 것이었다. 몸뚱이가 한 데 엉켜 땅바닥을 나뒹구는 두 사람의 몰골은 바야흐로 누가 누군지 얼굴을 가릴 수조차 없 을 지경이 되어갔다. 옷이 찢어지고 얼굴이 터지고, 그 찢어진 옷과 터진 얼굴에 흙먼지와 핏물이 뒤범벅이 되어갔다. 유민혁은 그제서야 스스로 싸움을 말리고 나섰다. 그런데 그의 싸움 말리는 방법이 너무도 간단했다. 그는 맞붙어 엉킨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가 한 사람 한 사람씩 차례로 침착하게 팔목을 찾아 쥐었다. 그러자 뻘밭의 개들처럼 한데 붙어 나뒹굴던 두 사람이 마치 가시 삼킨 달구새끼처럼 사지들이 뻣뻣하게 굳어지며 엉거주춤 허리들을 세 우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별로 큰 힘을 걸지도 않은 것 같은 유민혁의 표정에도 불구, 두 사 람은 거의 움짝달싹을 못한 채 얼굴색이 금세 사색이 되어갔다. 싸움은 더이상 계속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민혁은 그렇게 싸움을 말려 놓은 것만으로 일을 끝내려 하지 않았다. -자, 이렇게 함께 사무실로 가자구 그는 여전히 두 사람의 팔을 붙든 채 이번엔 그대로 관리사업소(책걸상 하나씩과 헌 응접 소파 하나 그리고 벽에 걸린 작은 칠판 하나가 비품의 전부인 노조 사무실이 그 관리사업소 바로 곁에 껴붙어 있었지만 그는 왠지 그쪽을 택하지 않았다) 쪽으로 발길을 앞장서 옮겨가 기 시작했다. 마치 못된 쌈패 아이놈들을 붙들어 양손에 귀를 쥐고 교무실로 끌고 가는 훈 육주임 선생처럼, 그리고 그게 자신도 좀 우스워 보이는지 얼굴엔 여전히 그 장난기가 어린 듯한 웃음기를 띤 채로. 하지만 그러는 유민혁을 거역할수록 팔목의 고통만 더해갔으므로, 다른 두 사람은 매달리듯 양쪽에서 발길을 서둘러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꼴이었다. 유민혁은 사업소로 들어설 때도 여전히 그 모양 그 꼴인 채 얼굴에 웃음기를 잃지 않고 있 었다. 하지만 그가 두 사람을 그곳 사무실로 끌고 들어가 한 일은 그 얼굴과는 전혀 딴판이 었다. 그는 두 사람의 처참한 몰골에 놀라 어리둥절해진 사업소 사람들에게 일부러 사정을 설명하거나 허물을 따지려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그 몇몇 사람들에게 공손히 손수건을 청 하여 그것으로 두 사람의 상처를 씻게 했을 뿐이었다. 상처로 인한 핏자국과 흙먼지로 엉겁 결에 내민 사업소 사람들의 손수건을 차례차례 더럽히게 하였을 뿐이었다. 그것뿐이었다. 그 리고 그는 곧 두 사람을 데리고 말없이 사업소를 되돌아 나왔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완력이 요, 속셈을 얼핏 짚어내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유민혁이 그 완력을 자랑하기 위한 공연한 장난질이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부터 그 해괴한 무언극의 효과가 서서 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이 있은 뒤부터 손용달이란 작자의 간특스런 행실이나 그 동안 사업소 쪽에서 인부들을 상대로 일삼아 온 뒷장난질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십중팔구 그것은 그 유민혁의 무언극의 결과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부둣가 인부들 간에 오랫동안 길들여져온 그 맹목적인 불화와 주먹다짐의 버릇이 차츰 사라져가게 된 것도 그날의 무언극의 효과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유민혁은 더 이상 완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완 력을 함부로 휘두르기보다 그것을 자꾸만 감추려고 하였다. 그는 그 한두 번의 실력행사조 차 그것이 전혀 우연스런 일이었던 것처럼 대수롭잖아 하는 말투로 자신의 완력을 부인해버 리곤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동료들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그의 완력을 충 분히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 눈에 잘 띄지 않는 그의 괴력은 더욱더 신비스런 위 엄을 더해갔다. 놀라운 완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 완력을 사용함이 없이 유민혁이 그의 동 료들로부터 밝은 사리와 의리의 인물로 신망을 받고 있었던 소이였다. 이래저래 유민혁이란 위인의 주변은 대개 아리숭한 수수께끼 투성이었다. 부둣가 사람들 가운데는 유민혁의 그 뛰어난 노름솜씨와 기괴한 완력의 내력은 고사하고, 그가 무엇 때문에 여태 홀아비 살림을 고수해왔으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더 나은 일터와 수입을 도모해 나갈 수완이나 능력 이 충분했음에도 굳이 그런 힘든 노역을 견뎌오고 있었는지, 어느 것 하나 시원한 사연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그만큼 자신을 내세우고 나서는 것을 싫어하기도 했지만, 어 떻게 보면 부러 그런 식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겨오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였다. 자살극이 빚어지기까지의 이번 사건의 경위만 해도 그러했다. 당연한 소리가 될는지 모르지만, 유민혁 은 평소부터 자신에 대한 주위의 신망에 지극히 겸손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오고 있었 다. 무슨 일을 앞장서서 떠맡고 나서는 일이 없는 건 고사하고, 동료들이 아무리 간청해도 그걸 섣불리 받아들인 일이 한번도 없었다. 인부들의 직접적인 이해가 걸린 조합일에 대해 서마저도 그는 늘 그런 식이었다. 조합일엔 실상 그가 직접 나눠줘야 할 일들이 자주 생겼 다. 사업소 측과 인부들 사이에 이해의 이반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선박회사들과 이해를 같 이하고 있는 사업소 쪽은 애초 조합의 존재나 그 활동을 거의 도외시 하다시피 해오고 있었 다. 하역 근로자들이 자신들의 조합조직을 통해 피용자의 권익을 도모해 나가려는 데에 반 해, 사업소 쪽은 그러한 조합조직이나 활동이야말로 사용자와 피용자 간의 비생산적인 대립 과 반목을 유발할 뿐, 피용자를 위한 진정한 이익은 사용자와 피용자 간의 원활한 협조와 이해 속에서 보다 잘 증진되어갈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곤 하였다. 한데 그와 같은 사업 소 쪽의 일관된 태도는 인부들 사이에 미리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일부 친위 성향의 회원들의 활약으로 피용자 쪽에서도 상당한 호응을 얻게 되어 조합원들의 단합을 깨뜨리곤 하였다. 그것도 안 되면 사업소 쪽은 아예 출역보장을 않겠다는 식으로 노골적인 위협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런 때면 늘상 조합사람들은 유민혁이 좀 앞장을 서 나서주기를 바랐다. 그가 앞장 을 서서 흩어진 힘을 모아 싸움을 이끌어 가주기를 바랐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그 자신이 아예 조합 일의 책임을 떠맡아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왜냐하면 사업소 쪽의 농간에 휘둘려 조합의 책임자가 더 이상 버텨내질 못하게 되거나, 그 자신이 내용적으로 어느새 그쪽 사람 으로 돌아서 버린 사례가 자주 생기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민혁은 그런 때마저도 자 신이 직접 일을 떠맡고 나서주는 일이 없었다. 그는 늘 뒷전에서 조용한 충고자로 일이 되 어가는 형편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필요한 만큼의 사리판별력과 결단의 지혜를 빌렸을 뿐이었다. 그만만 해도 고마운 일이기는 하였다. 그는 언제나 사태를 가려 보는 눈이 정확했 고, 일단은 그 결과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끝내 일을 직접 떠맡고 나서지 않는 것은 피차간에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불가항력의 일이었는진 모르지만, 그에게도 실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상급단위 조직으로부터 지부 책임자가 아예 임명되다시피 해온 다른 조합 들에 비해 그나마 지부조직 자체의 의사로 그 책임자가 결정되는 이곳의 사정(그렇다고 전 혀 사업소 쪽의 입김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원칙의 면에서는)은 썩 다행스런 편이 었다. 하지만 그같은 자율성에도 불구하고 유민혁의 충고를 바탕으로 내세운 책임자를 번번 이 다시 바꿔야 하는 사태야말로 어느 정도는 그의 책임이 아닐 수 없었다. 물러나라, 못한 다, 네가 좋다, 내가 좋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구관을 물러나게 하고 전체 조합원들의 의견을 조정하여 조합의 새 책임자를 뽑아 앉히는 일은 보통 힘이 들고 시끄러운 일이 아니 었다. 더욱이 그런저런 소동을 치러 가며 새로 자리를 이어받은 사람이 번번이 또 실망을 안겨 오곤 하였다. 한데도 유민혁은 자신이 직접 나서려기 보다는 그때마다 새로 또 다른 사람을 골라 내세우곤 하였다. 깊은 속사연을 알 수는 없었지만, 결국은 유민혁 자신이 조합 일을 직접 맡고 나서주지 않는데에 그의 실수와 불행의 씨앗이 있었다. 그리고 그같은 불행 의 씨앗은 끝내 그 자신의 비극적인 파국까지 빚고 만 것이다. 그 자살극의 발단 원인부터가 지부 책임자의 그런 배신에 있었다. 이번의 책임자 역시 애 초에는 유민혁의 배후 지원에 힘입어 조합일의 책임을 맡게 된 인물이었다. 한데도 그는 유 민혁이나 동료들의 기대와는 달리 몇 달이 못 가서 다시 사업소 쪽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유민혁과 조합원들이 그런 기미를 알아차렸을 때는 시기가 너무 늦어버린 감이 있었 다. 책임자가 한번 사업소 쪽 사람이 되어버리고 보면, 자리를 바꿔내기가 이만저만 힘이 드 는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조합 쪽에서 기미를 알아차리고 사람을 바꾸려 나서자 그쪽 역 시 그간에 사업소 쪽과 주변에 다져온 지지기반을 동원하여 만만찮게 대항을 해오기 시작했 다. 유민혁들은 일단 정면대결을 피하여 당분간은 사람을 그대로 놓아둔 채 내부적으로 사 태를 호전시켜 나가려 하였다. 그리고 그런 방향으로 여러 차례 사태의 수습을 시도해 보았 다. 하지만 유민혁들의 그같은 노력은 매번 안타까운 실패로 돌아갔다. 조합조직이 거의 사 업소 쪽의 의향대로 움직여 나가다 보니 취역 인부들에 대한 사업소 쪽의 태도는 끝간데 없 이 방만스러워져 가고 있었다. 마치 이쪽의 힘을 시험해보기라도 하듯 열흘이 멀다 하고 새 로운 말썽의 빌미를 던져 왔다. 취역인부들의 임금이나 후생복지 문제들에 대한 호의적인 관심은 고사하고, 노임체불이나 이유 없는 출역정지 처분이 수시로 자행되곤 하였다. 한데도 조합 책임자는 그같은 사업소 쪽 행투에 항의 한번 제대로 하고 나서는 일이 없었다. 고작 말썽을 번지게 하지 말자는 것이 그가 동료들을 상대로 입버릇처럼 늘상 하고 다닌 소리였 다. 말썽이 커지면 일거리에 매달려야 할 이쪽의 피해만 늘게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하더라 도 그것은 부두 일꾼에겐 일방적인 설득과 협박의 효과를 꽤나 발휘하고 있었다. 사태는 갈 수록 악화일로였다. 그리고 사업소 쪽은 마침내 확신을 얻은 것 같았다. 사업소 쪽은 그 확 신을 시험해 보려는 듯 어느 날 돌연 무고한 노역부 10여 명에게 집단 출역금지 조처를 감 행하고 나서기에 이른 것이다. 사건이 본격화한 것은 오히려 이때부터였다. 유민혁이 비로소 앞장을 서고 나섰다. 자신의 실수를 그런 식으로 대신할 결심을 굳힌 것이었을까. 그날 아침 사태를 전해 듣고 나서도 그는 처음 별로 화를 내거나 누구를 탓하려는 기색이 거의 없었 다. 대신 그는 이날 오후께부터 사업소 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혼자서 묵묵히 침묵의 농 성을 시작했다. 권유나 선동을 받은 일은 없었지만, 인부들이 대부분 그를 뒤따라 농성을 시 작한 것은 이날 저녁 무렵부터였다. 사태는 바야흐로 일촉즉발의 험악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유민혁이 조합일로 그의 동료들을 앞장서 나선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것도 그리 시일이 오래 걸린 싸움이 아니었다. 사업소측은 그저 사태를 방관하는 태도로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유민혁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제력을 잃어가는 동참 동료들 의 흥분기를 등뒤로 견뎌내며, 이틀 밤 이틀 낮을 돌부처처럼 묵묵히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사흘째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그는 변소길이라도 가듯 혼자서 그 초라한 조합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조용히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싸움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가 그 싸움에서 보여준 행동의 전부였다. 밖으로 남은 결과로만 말하면 구체적인 주장은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새기자면 그가 그 자신의 죽음의 장소를 조합지부의 사무실 로 택한 것이나 그의 피로 그 사무실을 짙게 적셔놓고 간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도 있 었다. 그것은 마치 그 관리사업소 사람들의 농간으로 두 사람의 동료가 피를 흘리게 되었을 때, 그가 그 피를 사업소 사람들의 손수건으로 씻게 했던 일을 되새기게 하였다. 그런 유민 혁이 이번에는 관리사업소가 아닌 조합사무실을 택하여 그곳에 자신의 피를 뿌리고 간 것이 다. 그는 누군가가 그 피를 씻어냄으로써 그 스스로 자기 허물을 씻게 해주고 싶었을 수 있 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의 실수에 대한 허물도 함께 씻어 받기를 원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구 형사는 그 같은 연상이나 추측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 지을 수가 없었다. 유민 혁은 결국 그 마지막 싸움의 결장판에서마저도 끝끝내 제 정체를 숨기고 만 것이었다. 위인 의 신분이나 자살의 동기 따위에 대해선 분명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그저 위인의 껌껌한 배후에 감춰져 버리고 만 격이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의문점들보다도 구 형 사가 끝내 의혹을 지울 수 없는 일은 위인이 그 죽음에 즈음하여 남기고 간 몇마디 수수께 끼 같은 의문의 문구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유민혁은 그때 그 죽음을 전후하여 유언인지 뭔 지 모를 이상한 몇 줄의 기록을 남기고 있었던 것이다. 형제여! 외로워하지 말라. 그대의 무죄함을 내가 먼저 가 주님께 고하리라. 그대여 자임한 큰 죄의 참죄인을 내가 일찍부터 알고 있은즉. 사체 수습 과정에서 구 형사가 그의 옷주머니에서 찾아낸 유언투 문구였다. 누구에겐가 글을 쓰고서도 미처 부쳐 보낼 기회가 없었던 듯. 혹은 부쳐 보내기를 망설이고 있었던 듯, 봉투에만 넣은 채 수취인의 이름이나 주소가 밝혀지지 않은 서면이었다. 구 형사는 처음 물 론 위인의 신상사나 죽음의 동기를 캐내는 데에 거기 그것에 상당한 노력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글귀의 뜻이나 상대를 읽어내려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위인은 아마도 눈에 띄지 않게 지내온 기독교 신자(기이하게도 그가 평소에 기독교 교인으로서의 예배의식이나 언행을 행하는 것 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였고, 그 글을 어쩌면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어떤 '외로 운' 교우에게 보내려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식의 어슴푸레한 추측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 외 에, 외로워 말라든가, 그대가 자임한 큰 죄의 참죄인을 그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든가 하는 소리들에선 그를 향한 어떤 보이지 않는 강한 연대감 같은 것이 느껴지고 있었지만, 그 외 로움의 깊은 뜻은 물론, 묘하게 경구적인 성서투 어법으로 하여 '큰 죄'와 '참죄인'의 어의들 조차도 실제적인 비유인지를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앞 뒤 연결이 없는 글귀인 데다 글을 받 을 사람조차 밝혀 잇지 않고 보니, 더 이상은 부질없이 시간만 허비한 꼴이었다. 한데다 위 에서는 사건을 빨리 마무리지으라는 성화까지 대단했다. 농성사태도 그쯤 해결이 났겠다, 수 사의 손길이 늘 달리고 있는 마당에 그까짓 하역부의 자살사건 따위로 시일을 끌고 있을 게 무어냐는 것이었다. 위인의 주머니에서 나온 글귀 따위엔 아예 귀조차 기울이려지 않았다. 윗사람들의 그같은 성화에 못 이겨서도 구 형사는 그쯤에서 사건을 대충 마무리짓는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도 당장엔 별다른 이의를 달고 나설 사유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 지만 사건을 그런 식으로 마무리짓고 나서도 구 형사는 계속 뒤가 개운치 못했다. 위인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일이 그토록 간단할 수가 없었다. 위인의 죽음엔 아무래도 좀더 깊은 뒷사연이 있을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그가 남긴 유서 쪽지가 좀처럼 머리에서 사라지질 않 았다. 전에 어디선가 비슷한 말을 들었거나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던 것만 같았다, 아직은 그 뜻이 막연한 예감으로만 떠돌고 있었지만, 필경은 그것이 위인의 자살을 설명할 명백한 단서로 떠오를 때가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일단 사건을 종결짓고 나서도 혼자 마음속엔 계속 그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상사와 동료의 힐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에서 새로 할당받은 사건 이외에 그 혼자 예감 속에 유 민혁의 정체와 사건의 배후에 대한 탐색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가 그런 식으로 예감에 쫓기 며 과외의 노력을 기울여오던 어느 날, 구 형사는 마침내 자신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결정 적인 실마리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이미 월여 전에 화장을 해서(연고자가 없다는 사유로 해서였지만, 동료들도 그에겐 그편이 어울렸으리라는 생각들이었다) 재로 뿌려져 버 린 유민혁의 유서 비슷한 글귀를 되씹다가 불현 듯 머리에 떠올라 온 것이었는데, '그대의 무죄함을 내가 먼저 가 주님께 고하리라'고 한 한마디가 그 대구를 찾게 된 것이었다. 다름 아니라 바로 자기 죽음에 즈음하여 그 비슷한 말을 남긴 사람이 그의 기억속에 또 한사람 깊이 묻혀 있었다. 연전에 그가 서울 근무를 할 때 한강변의 한 별장에서 연속간도 살인을 저지른 흉악범, 그리고 그의 범행에 어쩌면 제3의 동기가 있었을지 모른다고 끈질긴 추적을 계속하던 한 주간지 기자의 노력도 보람없이 끝끝내 입을 다물어버린 그 범인의 마지막 진 술이 분명 그런 것이었다. 구 형사는 자신도 사건 수사에 얼마간 관여를 했던 터라, 그 양진 호 기자의 끈질기고도 극성스런 추적 취재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데 범인은 아마 그 양진호의 추측대로 진짜 다른 동기나 숨겨진 배후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미리부 터 자신의 범행에 대한 선고 형량을 극형쯤으로 확신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내게는 이미 당신들 앞에서 죄를 고하거나 변명해야 할 말이 없소. 나의 심판자는 오직 주님뿐이오. 유죄든 무죄든 나는 오직 그분 앞으로 가는 날 당신께만 모든 걸 고할 것이오... 1심 선고가 내리기 전 피고가 최후 진술에서 자기 변호의 말 대신에 내뱉은 소리가 그런 엉뚱한 선언이었다 하였다. 선거 공판을 보고 온 양진호가 푸념하듯 전해준 말이었다. 세월 이 한참 지나기는 하였지만, 유민혁의 유언은 그때 그 범인의 최후진술에 대한 앞 뒤 화답 으로 짝을 이루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그리 늦게서야 생각이 떠올랐는지 모르지만, 구 형사 의 머릿속에 맴돌던 예감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준 셈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을 계기로 두 사람의 정체를 연결지어 생각하니, 양쪽 주변사에 유사한 점이나 앞뒤가 서로 맞 아 들어가는 대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모두 신분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예수교 신자였다는 점, 그중에도 특히 어떤 강한 연대감 속에 현세의 삶을(그 죄지 음이나 무고함 전부를) 내세의 주 앞에만 고하고 싶어하는 듯한 일종의 비의적 계율성의 냄 새 같은 것이 양쪽에 다같이 드러나고 있는 점-, 그밖에도 두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 되고 있는 유사성들은 얼마든지 많았다. 첫째로 두 사람은 자신들의 신분상의 근거를 밝혀줄 분명한 원적지들이 없었다. 그 점은 전에 서울의 최병진에게서부터 애를 먹은 일이었지만, 이번의 유민혁도 최병진과 똑같이 6.25 월남민의 북쪽 원적지를 가지고 있을 뿐인데다, 그 가호적상의 원적지 동향인들 중에 이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자신들의 주변사나 전력들을 그렇듯 철저히 숨기고 살아오고 있었다. 아직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 가호적상 의 원적지들은 양쪽 다 위장의 수단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다음으로 두 사람은 별반 이렇다 할 이유가 밝혀진 바가 없이 똑같이 독신으로 생애를 보내온 위인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러 면서도 두 사람은 똑같이 주위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운 편이었고(최병진에 대해선 학교에서 뿐 아니라 뒤에 그의 복역지를 찾아가 다시 한번 확인한 일이지만, 우선은 그의 변호인이나 양진호 기자들의 그에 대한 호감어린 태도들만 하여도 그런 경향이 매우 짙었다), 어찌 보 면 무척이나 고립되고 무신경한 성미들인 듯싶어 보이면서도 자신들의 주위나 세상일에 대 해선 나름대로 강렬하고 특이한 관심들을 지녀온 흔적이 역력해 보이는 위인들이었다. 그리 고 또 하나-, 한 사람은 살인강도를 하고, 다른 또 한 사람은 뛰어난 도박술수와 놀라운 완 력의 소유자였지만, 그 부도덕한 힘과 행동의 배후에서 우연찮게 똑같이 어떤 사사롭지 않 은 공의의 그림자 같은 것이 어리고 있었다. 그 점은 특히 유민혁의 유서에 암시된 모종의 대속의 정이나 그를 둘러싼 어떤 강한 연대감 속에서 역력히 읽혀졌다. 그래서 파괴적인 힘 과 행동들의 결과가 인간의 패덕으로 비난받기보다도 일종 의로운 희생으로까지 돋보일 여 지들을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양자의 유사점은 그 죽음에 대한 태도에 있었다. 두 사람에겐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는 정도로는 표현이 모자랐다. 두 사람은 마치 도 그 주님 앞에 자신들의 삶을 고하려 서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었기라도 하듯 자신들의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한 흔적이 없었다. 두 사람의 언행엔 어딘지 늘 죽음의 날에 대한 꿈 이나 동경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던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꿈이 너무 깊었던지, 아니면 현세의 삶이 그만큼 힘들었던지, 한 쪽은 제 손으로(그것은 필시 기독교의 교리에 배반하고 있을 터임에도 유민혁이 그처럼 자살을 택한 것은 또 다른 수수께끼였다), 다른 한쪽은 이 승의 삶에 대한 마지막 체념으로 그 수수께끼 같은 자신들의 생애를 통째로 말살해버리고 싶어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어떤 보이지 않는 그물망에 연결되어 있었던 인물들 임에 분명해 보였다. 구 형사는 새삼 다시 힘이 솟구쳐 올랐다. 그래 나름대로 혼자 심증을 굳히고 그 길로 서둘러 서울로 올라갔다. 최병진과 양 기자를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최병진과 유민혁의 뜻하지 않는 관계는 이제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 관계 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최병진의 범행이나 유민혁의 죽음을 둘러싼 갖가지 수수께끼들이 한 꺼번에 모두 풀려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모든 일이 구 형사의 일방적인 심증뿐이었다. 무엇보다 심증이나 예감만으론 유민혁의 관계를 사실로 쳐놓고, 그 글귀가 유민혁이 복역중 인 최병진에게 보내려던 유언이었다 한다면, 그 글귀의 내용인즉 유민혁이 최병진의 옥살이 의 어려움에 대한 위로와 함께, 최병진의 무죄함을 자신이 주님 앞에 대신 증거해 주겠노라 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최병진이 자임한 '큰 죄'란 그가 무기형까지 받게 된 앞서의 강도살 인죄를 가리킴이요, 그 '참죄인'을 알고 있다 함은 자신이 진범이거나 그와 관련이 있다는 고백에 다름아닌 것이었다. 그렇다면 최병진은 남의 죄를 대신하여 형을 살고 있는 셈이었 고, 유민혁은 그의 주 앞에 자기 죄를 고함으로써 최병진의 무고함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이 었다. 그리고 그런 뜻으로 해서라며 최병진과 유민혁의 말들이 한 짝의 화답으로 이어질 수 있었고, 나아가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관계도 꽤나 가깝게 증거해 보일 수가 있었다. 하지 만 그 모든 것은 역시 두 사람의 관계가 먼저 밝혀진 다음이라야 했다. 두 사람 사이의 연 결선이 확인되어야 그 밖의 기이한 수수께끼들, 최병진이 무엇 때문에 남의 죄를 대신 떠맡 고 나섰으며, 그의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관련이 어떤 성질의 것이 며 유민혁이 과연 그 전범행의 진범인지 어떤지 따위의 의문점들이 대개 다 풀려나갈 수 있 을 터였다. 구 형사는 그래 그 두 사람의 관계부터 확실히 밝히기 위해 최병진이나 양 기자 를 만나보아야 하였다. 두 사람을 만나보면 뭔가 더 분명한 단서들이 나타날 것 같았기 때 문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일은 아직도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모든 건 아직도 구 형사의 조급스런 기대였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우선 최병진도 양진호도 생각처럼 쉽게 만나볼 수 없었다. 구 형사는 우선 서울로 올라와 옛날의 신문사로 양진호 기자부터 찾았다. 당사자 격인 최병진은 전에도 그 고집불통식 됨됨이를 들어 알고 있었을뿐더러, 그의 주변과 사건 의 뒤끝을 알아보려면 양 기자를 만나보는 것이 더 쉬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구 형사도 물 론 그 사건의 2심과정 직후에 양진호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버린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 형사로선 원래 그 최병진 사건엔 큰 책임이 없었던데다, 오래잖아 지방서 전출명 령까지 받게 되어 그때로선 양 기자의 잠적 사실을 그리 염두해 둘 일이 없었다. 그래 이번 그 양 기자를 떠올리고 나서도 그의 잠적 사실을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겨 넘기고 있 었다. -다 큰 사람이... 어련히 다시 나타나 빨빨거리고 다닐라구. 그쯤 간단히 위인의 귀환을 믿어버린 것이었다. 근자에 들어서 작자의 소식이나 기사를 접한 기억이 없는 게 미심쩍긴 했지만, 그것도 아마 자신이 마음을 쓰지 않았던 탓이리라 치부하고 말았었다. 그가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면 서 안에서 한두 번쯤은 그에 대한 이야 기가 있었을 터였다. 한데 자신의 무관심 탓엔지, 그런 소리를 전혀 주워들은 일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서울로 올라와 보니 양진호는 아직도 실종상태 그대로였다. 그가 몸담고 있던 신문사나 경찰에선 물론, 집에서마저도 이제는 그에 대한 수색이나 조기 귀환을 아예 단념 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신문사나 경찰에서는 그동안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작자의 행 방은 끝끝내 묘연했고, 그렇다고 무슨 납치나 불의의 사고 같은 걸로 생명에 위해를 입은 흔적도 나타나지 않고 있어, 드디어는 그 사건 자체가 오히려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미제 의 수수께끼로 남아버린 것이었다. 그는 당분간 전혀 만나볼 가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구 형 사는 그 양진호를 단념하고 이번엔 안양 쪽 최병진의 복역지를 찾았다. 하지만 구 형사는 이번 일 역시 낭패였다. 최병진의 수형지는 안양교도소가 틀림없었지만, 위인은 그 복역 태 도부터가 매우 유별났다. -마치 교도소엘 일부러 원해 들어온 사람 같아요. 면회를 찾아간 구 형사에게 선우 성씨의 교도소 교무부장이란 사람이 맨 처음 일러준 말 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교도소를 들어오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흉악스런 범행을 연속 적으로(그가 중형을 자청했을 경우라 하더라도) 감행했던 것일까. 아니면 극형까지 각오하고 나선 듯한 그 1심에서의 최후진술로 자신의 삶을 마음속에서 일단 마감해 버린 것이었을까. 최병진은 도대체 자신의 형량 같은 것은 괘념을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나이 먹은 무기수답게 언제나 평온하고 공손한 태도로 조용한 일과를 치러 나가고 있 다는 것이었다. 뿐더러 최병진은 그 죄질과는 딴판으로 온후하고 공손한 성품 때문에 어느 새 소내 동료들에게 마음의 후견인 노릇까지 맡아오는 처지라 하였다. 그것은 또한 그의 천 문학과 인체조직학에 관한 남다른 관심과 상식 때문이기도 하였는데, 알고보니 그는 그 천 문학과 생명조직에 관한 남다른 관심과 지식을 근거로 하여 소내의 기이한 '설교사' 노릇을 겸해 온 것이었다. 교무부장이 사전에 일러준 그만 정도의 정황 파악만으로도 구 형사는 위 인에 대한 자신의 예감이 더 한층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위인부터 만나 보고 싶었다. -우선 그를 한번 만나게 해주십시오. 구 형사는 그쯤에서 선우 부장에게 최병진과의 면담 을 요청했다. 그런데 거기서부터가 다시 벽이었다. -원하신다면 만나게 해드리겠지만, 아마 그 친구 애써 만나봐야 별무소득일 겝니다. 우선 그자가 당신을 만나주려고 할는지도 알 수 없구요. 교무부장이라는 사람부터 미리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인은 왠지 그 바깥에서와 한가지로 동료 죄수가 아닌 사람에게는 어떤 말도 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천문학이나 생 명조직 강의도 같은 수감자들에게 뿐이라 하였다. 같은 처지의 수감자에게밖에는 교무부장 이고 교도관이고 누구에게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을뿐더러, 심지어는 외부인을 만나려고조 차 않는다는 것이었다. -알고 계시다시피 그 친구한텐 아직 면회를 찾아온 사람도 없었지만, 연말이나 명절 같은 때 위문단이 찾아와도 그조차 순순히 맞아들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러면서 선우 부장은 면담의 자리를 주선한다 해도 위인의 입을 열게 할 수 있는지는 장 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작자가 근자 들어선 분위기가 특히 불편한 사형수나 무기 수 같은 중범들의 감방만 찾아가 지내는 일이 많아서 그에 대한 기대가 더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었다. 선우 부장의 말은 불행히도 모두가 사실이었다. 최병진은 과연 이야기는커녕 구서 룡 형사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만나볼 사람도 그럴 필요가 있을 일도 없노라는 것이었 다. 구 형사의 사정을 들은 교무부장의 협조로 작자를 특별히 사무실까지 데려다 함께 설득 을 시도했으나 그것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작자는 도대체 처음부터 입을 열려고 하질 않았 다. 구 형사가 복사해 온 유민혁의 유서를 들이대고 나서도 최병진은 그저 오불관언 식으로 눈빛 하나 표정이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긴 유민혁의 그 유서에 관해서나 최병진의 대형 가능성에 대해서는 교무부장마저도 고개를 저으며 어이없어했을 정도니 위인의 그런 무반응 을 탓할 수도 없었다. 더 이상은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위인을 상대로 한 직접적인 탐색 엔 좀더 여유 있는 접근에 필요했다. 사건 당시부터의 위인의 행적과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 나 다시 면밀히 살피면서 시일을 두고 천천히 일을 추려 나가야 하였다. 어쨌거나 이날 구 형사는 결국 최병진과의 면담을 실패하고 돌아섰다. 그러나 이날 그의 방문에 아무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면담을 실패하고 난 구 형사를 위해 선우 부장이 좀더 배려를 해준 때문이었다. 그는 그간에 자신이 전해 들은 일 외에도 다른 교도관과 그와 가까운 동료 죄 수 몇 사람을 불러 위인의 소내 생활을 간접 거론해준 것이었다. 자유의 문(2) 그런데 그 소내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최병진의 수형생활과 활동내역은 한마디로 철저한 신앙생활에 기초한 일종의 위무활동으로 일관해오고 있었다. 최병진은 이감되어 온 지 얼마되지 않아서부터 그의 감방 동료들에게 이 우주와 생명현상들에 대한 신기한 이야기 들을 해주곤 했는데,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본 사람은 어떻게 해선지 금세 마력에라도 걸 린 듯 그 이야기의 단순한 재미를 넘어 종내는 사람의 성정이나 생각까지 차츰 달라져 가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한두 번씩 입을 건너 들은 이야기고 보니 그가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는지 자세한 현장 정황은 잘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건너 들은 사실로만 말하면 위인이 동료들에게 해준 이야기들이란 별달리 새롭거나 신기한 것들은 아니었다. 그가 행한 설교의 내용이란 주로 이 우주가 얼마나 광대무변하며, 그 우주에 비하여 우리 인간의 존재 는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인가를 실감케 해주는 숫자풀이, 이를테면 지구 위에는 몇 억 몇 십 억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나아가 하나의 은 하계는 몇천 몇만 개의 별무리가 모여 이루어지며, 이 우주는 다시 몇천 몇만 개의 은하계 별무리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의 크기는 얼마나 되며 그 한끝과 다른 끝은 빛으 로 달려 몇십백만 년의 세월이 걸리는 거리가 되는가(거대한 항성집단인 안드로메다 소우주 까지의 거리는 1백7십5만 광년,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안드로메다의 모습은 175 만년 이전의 것일 뿐인 것이다) 하는 식으로 상식적인 지식의 한계를 크게 넘어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우리 인간의 생명현상에 대해서도 그는 주로 그 작은 것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변화와 생명의 현상들, 이를테면 생명세포들의 기능은 어떠하며, 하나의 생명체는 어 떤 생성의 변화와 질서를 거쳐 태어나게 되는가, 그리고 한 생명체 안의 각 기관들은 그 기 능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을 탈없이 조화시켜 나가는 힘은 어디서 오고, 무엇 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가-하는 것들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정도의 것들이었다. 소내 사람들 의 이야기로만 한다면 생물교사로서의 생명체 현상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과 우주물리학에 관한 기초 상식들이 이리저리 동원된 데 불과한 정도였다. 그런데 장소가 하필 그런 곳이기 때문일까. 아니며 특별한 화술의 마력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위인의 화술 쪽으로 말하면 그에겐 분명 그 동료 죄수들을 설득하기 위한 일정한 의도가 엿보이고 있는 게 사실 이었다. 밤하늘을 오래 쳐다본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해 알고 있듯이, 최병진의 우주 이야기 는 너무나도 막막한 그것의 광대함과 인간의 존재를 대비케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듣는 사 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 막막한 절망감 속에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었다. 이 우주 속의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광대무변한 우주 의 질서 속에 태어남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을 창조하는 힘은 어디에 있으며 그 섭리는 누구의 것인가... 그런 절망과 의문의 유발은 우리 생명현상의 오묘한 섭리를 통해서 도 마찬가지였다. 극도로 미세하고 정치한 생명현상들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은 넓은 우주의 그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그러나 정국에는 그 오묘스런 섭리로 하여 똑같이 막막하고 절망스런 의문을 낳게 하였다. 인간의 무지와 힘없음에 몸을 떨면서 그 보이지 않는 역사의 창조자를 스스로 찾아나서 헤매게 하였다. 아아 우리가 보고 듣고 믿으려 하는 것들은 얼마 나 허무한 순간의 허울에 불과한 것들인가. 한낱 부질없는 순간의 꿈에 불과한 것들인가... 도대체 나는 무엇이고, 이 우주는 무엇이며, 그것을 조화롭게 창조해 나가는 섭리의 정체는 무엇인가... 더욱이 그같은 위인의 이야기에 일정한 의도가 숨겨져 있음이 분명한 것은 그런저런 사설 끝에 작자의 이야기가 언제나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해간다는 점이었다. 그가 주위에서 설교 사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는데, 최병진은 그때마다 번번이 이야기의 결 말을 하나님의 이름에 의지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그 모든 비밀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일 수밖에 없으며, 그분만이 그것을 알고 계실 뿐이다. 그리고 오직 그분의 권능만이 그것을 옳 게 향도해 가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 생명과 우주를 역사해 가시는 불가사의한 섭리요, 그 우주의 크기, 우리 생명현상의 오묘한 조화 바로 그 자체가 아닌가 말이다. 아니 그 불가사의성 자체가 아니신가 말이다-. 최병진이 막막한 절망감에 빠진 동료 죄수들을 달 래는 말은 늘상 이런 식이랬다. 그리고 그것은 무슨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구원의 문처럼 겁에 질린 동료들에게 이상스런 위안을 준다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그의 말에 역겨움을 느끼거나 저항을 하고 나선 사람이 여태까지 거의 한 사람도 없었다고. 최병진의 그 기이한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가 그에게서 어떤 편안한 안식감을 얻게 되고 성정까지 차츰 달라져 가게 된다고. 최병진은 일테면 그런 식으로 그 교도소 안 사람들에게 일종의 영혼의 구도사가 되고 있었다-. 그쯤만 해서도 구 형사는 소득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었 다. 평소엔 본성이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은밀스런 신앙생활, 방법은 다르지만 그 주님 앞에서의 고백을 향한 비위적 교리의 연대성-구 형사는 다시 한번 그에 대한 심증 을 굳히게 된 것이었다. 유민혁의 유서에 최병진이 철저한 무관심으로 외면을 하고 만 것도 차라리 그 비의적 연대성의 반증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교도소 면회를 다녀오고 나서도 구 형사는 계속 혼자서 최병진 사건의 시말을 뒤쫓았다. 그리고 유민혁과의 관계를 추적했다. 다른 한편으론 양진호 기자의 실종에 대해서도 가능한 데까지 행적수사를 다시 펴나갔다. 그것은 일테면 최병진 사건에 대해 양진호가 그래왔듯, 이번에는 그 양진호 기자에 대해 구 형사 쪽에서 비슷한 역할을 맡고 나선 셈이었다. 그런 구 형사의 책임 외 활동에 대해 동료 형사들은 물론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수사의 일손이 모자라는 형편에 지나간 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엉뚱한 공명심의 발로로나 치부되기 십상이었다. 구 형사의 그런 기미를 알아차린 상급자들도 그로 하여 시간 속에 묻 혀간 사건들이 다시 상처를 드러내 오지 않을까, 오히려 쉬쉬 입을 단속하곤 하였다. -구 형사, 세상에 예수님말고 남의 죄로 제 목숨을 버리겠다는 사람 봤어? 구 형사가 속 으로 무얼 노리는지 모르지만, 공연한 백일몽 그만 꾸고 제정신 차리는 게 어때? 그러다 괜 히 정말 숨은 고름 주머니라도 터져 나오면 어쩔려고 그래. 하지만 구 형사의 고집은 꺾일 줄을 몰랐다. 그는 계속해서 동분서주 자신의 예감의 그림 자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활약이 서서히 어떤 성과를 나타내어 경찰 자체 나 주위의 관심이 그쪽으로 조금씩 뻗쳐들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이번에는 그 수사의 주체 격인 구 형사 자신이 주위에서 문득 사라지고 말았다. 안양교도소의 선우 부장으로부터 뭔 가 요긴한 전화연락을 받고, 그를 찾아가 만나고 난 며칠 뒤의 일이었다. 하고 보니 경찰이 나 신문들에서는 비로소 다시 정신들이 들었다. 양진호의 실종과 구 형사의 그것이 반드시 어떤 인과관계가 있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동일 사건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사 람들의 잇따른 잠적은 그저 우연으로만 돌리기가 어려웠다. 경찰은 상당한 수사력을 동원하 여 구 형사의 행적과 소재 탐색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번에는 그 최병진 사건과 관련된 양 기자의 실종이나, 두 사람이 끈질긴 집착을 보였왔던 최병진의 범행과 인천 쪽 유민혁의 자 살사건들에 대해서도 참고 수사를 병행해 나갔음이 물론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구 형사에 대한 경찰의 노력은 이번에도 실패였다. 이유는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었다. 경찰 쪽 엔 구 형사나 양진호의 잠적에 전후한 초동수사 자료가 너무 부족한 형편이었다. 양진호나 구 형사가 관심해온 실종사건들의 동기나 배후에 대한 추리들을 너무도 가볍게 들어 넘긴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떤 이유로해선지(그것은 물론 경찰이 그쪽엔 그리 신경을 안 써온 탓 이기도 했지만) 최병진이 복역중인 안양교도소 쪽에선 양 기자나 구 형사가 잠적 직전에 마 지막으로 한 번씩 그곳을 찾았던 일을 경찰 수사진에 밝히지 않고 있었다. 그곳 교무부장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도 전혀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최병진이 계속 자신 과의 관련을 부인해버린 유민혁의 그 유서투 서면 이외에 두 사람의 예감이나 확신에 관한 또 다른 구체적인 근거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두 사람의 잠적 뒤엔 무엇을 짚 어낼 만한 수상한 기미나 뒷 흔적이 거의 없었다. 사정이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의 행방에 대 한 추적 작업은 처음부터 깜깜한 벽에 부딪히고 만 격이었다. 두 사람의 잠적이 자의에 의 한 것인지 타의에 의한 것인지조차 분간이 어려운 사정이었다. 수사는 끝내 별 성과가 없이 몇 달을 흘려 보내고 나서 제풀에 맥살이 풀리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번 사건도 또 하나의 미제 사건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어느 편이냐 하면, 경찰은 그나마 그 동안의 재 수 사 과정을 통하여 구 형사나 양 기자가 어느 제3자에 의해 실종을 강제당했을 가능성보다 는, 무슨 이유에선가 두 사람이 각각 자의에 의해 자취를 감춰가서 종적을 숨기고 있기 쉬 우리라는 낙관적인 결론으로 수사를 종결짓고 싶어한 것이었다. "하지만 경찰수사 과정이 어찌 되었든 그건 굳이 이 단계에서 상관할 바가 못 되고 제 소 설엔 그러니까 결국 이렇게 두 사람의 실종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영섭은 거기서 마침내 두 번째 이야기를 끝냈다. 백상도 노인은 한동안 아무 대꾸가 없 이 골짜기의 달빛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새벽녘으로 접어든 밤기운이 이젠 옷자락에 선득 선득 차갑게 젖어 들었다. 밤날은 맑을수록 이슬이 많은 법이었다. 노인은 그러나 밤공기가 찬 것도 못 느끼고 있는 사람 같았다. 영섭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도 그는 옷깃 한번 끌어 여미는 기척이 없었다. 유민혁의 자살과 구 형사의 실종에 관한 영섭의 이번 이야기 역시 소재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방향은 얼마나 다를지 몰라도 백상도 노인 역시 그 일을 대강 다 짐작하고 있을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는 그 구 형사의 실종을 포함한 사건의 전말을 영섭보다도 더 자세히 알고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영섭의 이야기에 한마디도 방해를 하고 나서려질 않았다. 마치도 그것이 자신과는 아무 상 관도 없는 영섭의 소설 이야기에나 불과한 일이듯-. 그러나 이번에는 노인이 영섭을 이기지 못했다. "도대체, 주 선생의 소설엔 주인공이 누구외까?" 영섭이 입을 다물고 침묵을 계속하고 앉 아 있자, 이번에는 그 노인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것이 소설이든 실제의 사건이든 거 기 대한 노인 자신의 관심은 엄격하게 억제해버린 채였다. 하지만 영섭은 이제 그것으로 노 인 역시 이야기의 진행에 마음이 몹시 조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어차피 내 친 걸음이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야기에 마저 끝장을 보아야 하였다. 이야기는 이제야 본격적인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 제 소설의 주인공 말씀입니까? 이제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여태까진 실상 진짜 주인공이 나오질 않았으니까요. 이제부터 진짜 주인공이 나옵니다." 천일야화 격으로 노인의 흥미를 북돋고 나서 영섭은 다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사건들을 한곳으로 종합하여 소설의 골격을 만들어줄 마지막 시선의 인물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건을 뒤쫓아 두 번째로 실종된 구서룡 형사에게는 평소 그의 수사업무와 관련하여 가 끔 작품 소재를 얻어가곤 하던 소설쟁이 젊은 친구 하나가 있었다. 주영훈 쪽으로 보면 그 러니까 그와 구 형사 사이는 무슨 지연이나 동창관계처럼 허물이 없는 처지는 못 되었다. 구 형사는 그저 영훈의 소설작업과 관련한 취재상의 편의나 수사업무에 관한 전문지식의 습 득을 위하여 간간이 사무적인 접촉을 가져온 조언자의 관계에 있던 사람이었다. 빈번한 근 무지의 이동 탓도 있었지만, 영훈이 그쪽 일에 도움을 구하는 것을 보고 어떤 친구가 소개 를 해준 후로 몇 차례 조언과 정보를 제공했을 뿐 아직은 맘 편하게 술자리 한번 제대로 마 주해본 일이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구 형사는 우연찮게도 자신의 실종 전에 이 주영훈에게 만은 몇 가지 기이한 암시와 심상찮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이번엔 진짜 내가 좋은 소설거릴 하나 드릴까요. 어느 날 주영훈이 그의 다 른 소설에 관한 조언을 얻으러 소풍삼아 인천까지 구 형사를 찾았을 때, 그는 영훈의 새 소 설에 관한 간단한 조언 끝에 농담처럼 갑자기 그런 말을 했었다. 영훈으로선 주변에서 흔히 들어온 권유의 말이었다. 들어보면 별로 신통치가 않은 일들을 사람들은 지레 자기 감동에 겨워 목소리부터 몹시 과장해 오기 일쑤였다. 게다가 그는 한창 구상이 무르익어가고 있는 다른 소설이 한 편 있었다. 영훈은 따로 마음이 끌릴 여유가 없었다. -무슨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있어요? 별로 호기심이 일고 있는 것 같지 않은 영훈의 대 꾸에 구 형사는 대뜸. -그럼요, 진짜 이야깃거리가 있고말고요. 자신만만한, 전에 없는 장담을 하고 나서는, 그 러나 아직은 자신도 뭔가 확신이 안 서는 구성이 있는 듯, -하지만 아직은 때가 좀 일러요. 당신한텐 끌릴 만한 데가 있는 이야긴 건 분명한데, 사 건이 아직 끝장이 나질 않아서... 몇 마디 자신 없는 소리를 덧붙이고 나서는, -그러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이건 분명히 기가 찬 소설이 될 수 있을 거요. 내가 짚어 나 가고 있는 쪽과 결말이 엉뚱하게 비끌려 나가지만 않는다면, 그때는 하다못해 내 자신이 소 설거리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하여튼 조금만 더 기다려 보아요. 내 어제도 그 일과 상관 하여 서울 쪽에서 어떤 사람을 하나 만나고 왔는데, 이젠 실마리가 거의 풀려가고 있으니 까... 제물에 몇 번씩 다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영훈은 아직도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영 훈도 물론 그것이 그 무렵 구 형사가 과도하게 관심을 쏟고 있는(영훈도 어느 정도 그런 낌 새와 소문을 듣고 있었다) 어떤 신문기자의 잠적 사건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쯤 눈치를 못 채고 있었던 바는 아니었었다. 하지만 영훈은 남이 이미 관심을 갖기 시작했거나 세상에 너 무 알려진 일에는 뒤늦게 호기심을 쏟으려지 않았다. 그래저래 영훈은 구 형사의 그 대단스 럽다는 이야기엔 처음부터 그리 흥미가 없었다. -정말 그렇게 재미가 있는 얘기라면 나도 함께 사건의 결말을 기다려야겠군요. 영훈은 그저 말대접삼아 그쯤으로 구 형사와 헤어지고 말았었다. 그런데 바로 그 며칠 뒤 에 구 형사의 종적이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영훈이 구 형사의 잠적 사실을 안 것은 그러 나 그 당장의 일이 아니었다. 경찰이 자체요원의 실종으로 인한 위신의 실추를 염려한데다, 그가 10여일 뒤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영훈은 한동안 방향이 전혀 다른 상상을 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수사업무 종사자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과도한 공명심을 상상한 탓이었다. 사건이 일단 종결지어졌거나 미제로 밀려난 사건들에서 어떤 새로운 혐의점을 발 견하고 나면 수사관들의 그런 공명심은 더욱더 맹렬하게 불타올랐다. 그리고 그런 공명심이 나 수사의 독점욕이 강해지면 질수록 당사자의 언동이나 수사 방식도 더욱 은밀스러워지기 마련이었다. 이제는 실마리가 거의 풀려가고 있다던 구 형사의 장담을 영훈은 그가 어떤 결 정적인 단서를 붙잡게 된 걸로 생각한 것이었다. 영훈은 구 형사가 사건을 마저 결단내려고 어디선가 한동안 잠행을 계속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그의 동료들이나 상사들, 심지어 는 집안 식구들에게마저 아무 말없이 종적을 감춘 것 역시 그쯤으로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 었다. '이제 끝났어요. 자, 그럼 이제 내가 약속한 소설거리 얘기를 들어보시겠소.' 영훈은 며칠 후에 곧 그 앞에 나타나 의기양양 지껄여댈 구 형사의 길다란 말상 얼굴을 상상하곤 혼자 미소를 흘리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거기서 더 며칠을 기다려도 구 형사에게선 영 소식이 없 었다. 한 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그의 행적은 깜깜 무소식이었다. 쉬쉬 함구 속에 은 밀히 진행되어오던 경찰측의 자체수사도 서서히 다시 기력이 시들해져 가는 눈치였다. 영훈 은 비로소 불안한 예감이 비춰 들기 시작했다. 영훈은 비로소 불안한 예감이 비치기 시작했 다. 구 형사의 신변에 정말로 어떤 심상찮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영훈이 마지막으로 구 형사를 만났을 때 그가 한 말들을 하나하나 다시 새로운 의미로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당신한텐 끌릴만한 데가 있는 이야긴건 분명한데 사건이 아직 끝나질 않아서... 내가 짚 어 나가고 있는 쪽과 결말이 엉뚱하게 비끌려 나가지만 않는다면, 그때는 하다못해 내 자신 이 소설거리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는 그때 분명 그 일에서 어떤 알려지지 않은 혐의 점을 감지해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모종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사건의 핵 심에 이르기 전에 자신마저 어떤 위험에 함께 휘말려들게 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 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였다. 실마리가 거의 풀려가고 있다면서 일이 엉뚱하게 끝나면 그 자신이 바로 소설감이 될 거라던 구 형사의 사족은 알고 있었거나 모르고 있었거나 이제는 그 자신에 대한 신통한 예언이 되어버린 격이었다. 더욱이 한 실종자의 뒤를 쫓고 있던 구 형사 자신의 장기간 잠적은, 영훈으로 하여금 그 앞사건에 대한 새로운 호기심까지 유발하 기 시작했다. 영훈은 마침내 자신의 일을 중단하고 구 형사의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인천 쪽 구 형사의 근무지와 그의 집을 번갈아 찾아 다니면서 그의 주변과 평소의 행적, 그 리고 유민혁 사건을 중심으로 한 근래의 수사활동에 관한 일들을 나름대로 하나하나 다시 정리해 나갔다. 구 형사를 그토록 몰입하게 만들었던 양 기자의 실종과, 구 형사가 나중에 관심을 가지고 쫓아다녔다는 안양교도소의 무기수 최병진, 그리고 그의 범죄와 공판 과정들 에 대해서도 그 경위와 배후들을 다시 주의 깊게 추적해 나갔다. 금세 어떤 해답의 실마리 가 나타날 수는 없었다. 구 형사는 원체 혼자서 일을 쫓고 있었던 데다, 그의 생각이나 수사 상황들을 온통 그 한손에 움켜쥐고 떠나버린 것이었다. 더욱이 경찰은 이번에도 사건의 불 필요한 확대를 경계하여 영훈의 눈길을 한사코 방해하고 들었다. 그는 구 형사가 서울 족에 서 마지막으로 만났다는 (그래서 거의 일의 실마리가 풀리게 되었다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 실을 상기하고,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찾아내려 애썼으나, 경찰쪽에선 여태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더욱이 최병진과 유민혁과의 관계, 그리고 최 병진의 대형에 대한 구 형사의 추측을 확인하기 위하여 주영훈이 최병진의 복역지 안양교도 소를 찾아갔을 때도 교도소 쪽에선 웬일인지 그에게 구 형사가 마지막으로 그곳을 찾아와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돌아간 사실에 대해선 전혀 어떤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래저래 영 훈은 구 형사의 잠적 속에 감춰져간 일에 대해 이렇다할 단서를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영훈은 전혀 예기치 않은 인물로부터 뜻밖의 단서 한 가지를 제공 받게 되었다. 영훈은 원래 신앙인이 아니었다. 그는 이즈막에야 가끔 동네 근처 예배당으로 일요 예배에 끌려다니고 있는 얼치기 신자가 되어가고 있는 정도였다. 그의 중학교 동창 조 효준 목사의 간곡하고 끈질긴 권유에 의해서였다. -실례지만, 혹시 성함이 조효준? -어, 역시 그렇구만. 나도 긴가민가 망설이던 참이었는데! 어느 날 아침 집을 나서다가 그렇게 산동네 고개 아래 골목길 입구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지 10년이 훨씬 넘은 옛 동창생 조효준을 만났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그가 다소 이단 적일 만큼 진보적인 신흥 전래교파의 신학교 진학을 택해 간 이후로는 전혀 소식을 알 수 없던 친구였다. 두 사람은 우선 근처 다방으로 들어가 그간의 안부와 서로의 주변사들에 대 한 이야기를 나눴다. 조효준은 물론 그간에 교회의 목사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바로 영훈네 산동네의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였다. 그런데다 그는 무척이나 내성적이던 옛날의 성격이 크 게 달라져 있었다. 그는 영훈이 신앙이 없다는 데에 여간 실망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당 장 기독교에의 입교를 권해 왔다. -자네... 글쟁이라는 게 바로 인간의 영혼과 운명을 다루는 작업이 아닌가. 그런 일을 하 는 사람이 신앙이 없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야? 처음부터 깊은 신앙심이 생길 수는 없으니 우선은 구경삼아 자기 교회를 나오라는 것이었 다. 그러면서 그는 단자리에서 영훈의 승낙을 받아내지 않고는 그를 놓아주려고조차 안했다. -내 좀 생각을 해보지. 영훈은 우선 자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엉거주춤 반승낙의 말을 하고서야 겨우 그를 헤어져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영훈은 다시 생각을 해보고 말 것도 없었다. 바로 그 다음 일요일부 터 조 목사는 몸소 영훈의 집까지 그를 인도하러 찾아왔다. 영훈은 아무래도 그런 조 목사 를 쉽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는 아닌게아니라 입교 여부는 뒷날로 미루더라도 우선은 교 회부터 나가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주일날 아침마다 영혼을 인도하 러 오던 조 목사의 방문도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게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바로 그 무렵 구 형사의 실종이 거의 확정적인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영훈에게 마음속 구실이 생긴 셈 이었다. 그는 일요일이고 뭐고 가릴 여유가 없었다. 그로부터 다시 날이면 날마다, 낮이나 밤이나 구 형사의 일에만 몰두하고 지냈다. 처음 한 두 번은 조 목사로서도 영훈의 태도를 두고 보자는 뜻에선지 그의 결석을 추궁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영훈이 연이어 몇 주일째 예배를 빠뜨리고 넘어가자 조 목사가 다시 영훈을 찾아왔다. 그 조 목사가 영훈을 집으로 찾아왔을 때는 그가 마침 그 유민혁 사건에 관한 스크랩을 꺼내놓고 사건 정리에 한참 골몰 해 있던 참이었다. 그는 물론 집까지 찾아온 조 목사에게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몇 주일 교회를 나가지 못하게 된 자신의 처지에 양해를 구했다. 그런데 그때 탁자 위에 펼쳐진 스 크랩에서 조 목사가 유민혁의 신문 사진을 보고 문득 심상찮은 소리를 했다. -그런데 참, 나 이 친구 아무래도 알던 친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던걸. 영훈은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알던 친구라니, 어디서 말인가? 영훈의 조급한 물음에 조 목사는 다시, - 글쎄, 이 사람 사건이 알려졌을 때 신문에 난 사진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었지만, 오 늘도 사진을 보니 같은 생각이 드는군. 한데 확언할 수가 없는 건 내가 생각하는 사람과는 이름이 조금 다르단말야. 그리고 아무리 중도 자퇴를 해 나갔다곤 하지만 신학교 문턱을 드 나들던 사람이 자살까지 했으리라는 것도 납득이 안 가고. 갈수록 심상찮은 소리를 보태고 있었다. 영훈은 그럴수록 열이 올랐다. 그는 치솟아 오르 는 예감을 억제하며 조 목사에게 좀더 차근차근 설명을 계속하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실마 리가 시작된 조 목사의 이야기는 영훈을 갈수록 흥분하게 만들었다. -세월이 꽤 지난 일이지만 우리가 다닌 <요한신학교> 시절에 유종혁이란 한 만학의 동 기생이 있었어. 그런데 그 친구 첫해 겨울 방학이 끝나자 웬일로 그만 학교를 그만두고 말 았었지... 어떤 사고가 생겨 퇴교를 당했거나 자퇴서 따위를 쓰고 분명하게 학교를 그만둔 게 아니 라 무슨 이유에선가 겨울 방학에 이은 장기결석으로 흐지부지 그만 자연 제적이 되고 말았 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린 뭐 그가 학교를 그만두게 된 이유 따위를 궁금해 하지는 않았어. 그 친구 우리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이나 많아서 한데 어울리기가 어려운 데도 많았지만, 그 친구말 고도 우리들 급우중엔 과정을 모두 끝마치지 목하고 중도 퇴교를 해나간 친구들이 많았으니 까. 자네도 들어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다닌 요한신학교는 선교 역사도 그리 길지 못한 데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이단적일 만큼 교리 해석이 진보적이었거든. 그래 정통적 보수파에 익숙해온 학생들은 수학에 다소 거부감이 많았었지. 하지만 나는 왠지 그의 퇴교 이유가 그런 데 있는 것 같지는 않았어. 겨우 1년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그 재학기간 사이에 누구 못지않게 신앙심이 깊고 선악관과 정의감이 남달랐던 친구였거든. 그래 나는 결국 지금까지도 그가 무엇 때문에 거기서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는지 자세한 속내막을 모르 고 있는 셈이지만. 조 목사는 그 유종혁이란 친구가 학교를 그만두게 된 구체적인 경위나 내막뿐 아니라, 학 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이끌어온 이 10년 가까운 동안에도 그에 관한 일을 거의 들은 것이 없었댔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조 목사가 문득 어떤 신문의 사회면에서 옛날 친구의 얼굴 모 습을 보게 된 것이었다. 1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라면 사람의 외모가 크게 변할 만한 기간 이기도 하지만, 조 목사는 사진을 대한 순간 그 변해진 모습에도 넙적한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매와 두툼한 입술의 윤곽들에서 그 유종혁의 숨겨진 옛모습을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하 였다. 적어도 얼굴로는 옛날의 유종혁 그자의 모습이 분명하더라는 것이었다. 확신을 가질 수 없게 한 것은 다만 유민혁이라는 그 이름의 '민'자 한 자가 다르다는 사실뿐이었다고. -유민혁과 유종혁은 어쩌면 같은 유씨 집안의 동항렬간의 인물이거나, 얼굴이 닮은 걸로 보아선 아예 친동기간일 수도 있는 일이거든. 조 목사는 못내 그 점이 미심쩍어 마지막 단언을 삼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영훈은 이제 그쯤 단서로도 더 이상 흥분을 참을 길이 없었다. 아닌게아니라 유민혁과 유종혁은 별개의 인물들일 가능성이 있었다. 조 목사의 말처럼 항렬이 같은 유씨 집안의 근친간이거나 아예 친동기간 사이일 수도 있었다. 하더라도 영훈의 예감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조 목사가 말 한 작자의 됨됨이나 그가 학교를 그만두게 된 심상찮은 경위들이 영훈의 예감을 갈수록 더 들뜨게 하였다. 둘 사이가 최소한 동기간만 되더라도 유민혁에 대한 신상자료는 찾아질 가 능성이 충분했다. 영훈의 그런 예감은 과연 사실과 정확하게 적중하고 있었다. 다름아니라 조 목사의 우연한 제보로 새 단서가 붙잡힌 유민혁 사건은 이후부터 주영훈의 끈질긴 집념 과 추적에 의하여 하나하나 그 깊은 비밀의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뿐더러 어느 정도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한 그 유민혁이란 위인의 사연을 통하여 그를 뒤쫓던 구 형사의 실종과 심지어는 구 형사가 그토록 관심을 기울이던 양진호 기자의 실종에 대해서까지도 결 정적 단서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아까번에 제가 어르신께 말씀드린 제 소설 중의 두 사건-아니 사실은 네 개의 사건이라고 해야겠지요. 최병진과 유민혁의 사건에다가 그 사건을 뒤쫓았던 사람들의 실종 이 각각 뒤따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영섭은 거기서 다시 백상도 노인에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 설명했다. 그리고 이어 주영훈의 사건추적 경위와 거기서 드러난 배후의 내막들을 차근차근히 설명해 나갔다. "어쨌거나 영훈 이전의 사건들에 대하여 제가 아까 어르신께 설명드린 이야기들은 그러니 까 이때까진 아무도 정확한 내용이나 연결을 모르고 있었던 것들이지요. 앞서도 잠깐 말씀 드렸듯이 자세하고 정확한 사건의 내력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추적이 시작된 그 영훈이란 인 물의 공로인 셈이니까요. 다시 말씀드려서 이것은 경찰 수사나 재판 과정들에 드러난 개별 적인 사건의 내역과 주변 정황들, 거기에다 주영훈 자신의 관찰과 추적으로 얻어진 정보들 을 자신의 시선 속에 조리 있게 종합하고 정리해 낸 사건의 줄거리란 말씀입니다. 그걸 편 의상 앞 대목에서 순차적으로 말씀드렸던 것이지요." 줄거리를 다시 정리하거나 말거나 당사자들의 종적이 묘연한 지금 먼젓번 이야기들이 그 주영훈이란 인물의 시선에 의해 비로소 그런 줄거리를 지니게 된 것은 애초부터 자명한 일 이었다. 왜냐하면 그 소설 속의 주영훈이란 인물은 바로 주영섭 자신의 변신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소설을 그렇게 꾸며온 것도 주영섭이었고, 그것을 노인에게 말하고 있는 것도 바 로 영섭 자신인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마 그편이 좀더 편했기 때문이었을까. 영섭은 한사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 속의 영훈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뿐더러 그 점은 백상도 노인에게도 듣기에 편한 점이 있는 모양이었다. 노인 역시도 영섭이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의 그것으로 대신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노인 쪽도 그 점에 대해선 끝내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참견으로 영섭의 이야기를 방해하고 드는 일이 절대로 없었다. 그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영훈에겐 곧 단서가 풀리기 시작했지요." 영섭은 여전히 그 영훈을 빌려서 자 신의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이번에는 그가 그 단서를 뒤쫓아 비밀의 내막을 밝혀낸 경위 였다. "영훈은 곧 서울의 동남방 교외로 그 조 목사가 수학한 요한신학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 고 대충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민혁이란 인물은 짐작했던 대로 그 조 목사가 말한 유종혁이 란 사람과 동일인물임이 드러났어요. 쉽게 내보여주려고 하지 않았지만, 학교에는 다행히 옛 날 학생들의 학적부가 고스란히 잘 보관되고 있었거든요. 그 학적부에 남아 있는 사진을 보 니 틀림이 없었지요. 사진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몇 가지 기록들이 조 목사의 말 모두 그대 로였지요. 하지만 그 사진과 기록들만으로도 아직 장담할 수가 없는 일이었지요. 주영훈은 두 사람 중 어느 한쪽도 직접 실물을 본 일이 없는 터였으니까요. 오래 전 일이나마 한쪽 얼굴을 1년 가까이 접해본 조 목사가 자신 없어 하는 일을 영훈이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었 지요. 하지만 그건 역시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영훈은 끝내 그 유종혁의 사진 외에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해냈거든요." 영훈이 그 학적부에서 찾아낸 또 다른 사실이란 유민혁이나 혹은 유종혁 자신들에 직접 관련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영훈은 그 유민혁과 유종혁이 동일 인물일 거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또 다른 예감이 샘솟기 시작했다. 그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학적부까 지 한권 한권 자세히 들춰 나갔다. 그리고 유민혁의 것보다 10년이나 앞선 50대 후반부의 학적부에서 또 하나의 수수께끼의 얼굴을 찾아냈다. 구 형사에 앞서 양진호 기자의 실종을 유발시킨 그 한강변 별장 강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무기형을 받아 복역중인 최병진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 역시 사진이 너무 낡은 데다 이름까지 최홍진으로 기재되어 있어 한마디로 단정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유민혁의 경우가 그랬던 것처럼 사진과 실물의 모습 사이엔 그 30년 가까운 세월의 흐름에도 뚜렷한 공통점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사건 당시엔 가호적으로 되어 있던 최병진의 북쪽 원적지와는 달리, 최홍진의 학적부상 본적이 영동지방의 한 해변 마을로 되어 있는 점도 영훈의 판단을 어느 정도 흐리게 하였다. 하지만 최씨 성씨가 아직 도 서로 일치하고 있는 점(유민혁 역시도 왠지 성명 석자를 완전히 바꿔버리지 않고 첫 이 름자 한 자씩만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필요에선지 모르지만 양자가 다같이 원적 지를 버리고 새로 엉뚱한 가호적을 취득하는 식으로 은밀한 변신을 감행했을 가능성들은 영 훈에게 오히려 또 다른 의미의 확신을 주었다. 한데다 그 최홍진 역시도 유종혁의 경우처럼 중도에서 1년 만에 이유 없이 학업을 중단해버리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학적부상에 나타난 두 사람의 원적지를 찾아가 얻은 결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학 당시의 것인 최홍진의 동해안 원적지나 유종혁의 남쪽 고향(유종혁의 학적부에는 그 의 본적지가 그렇게 밝혀져 있었다)에는 두 사람이 똑같이 오래 전에 실종신고가 내려져 있 었다. 두 사람에 대한 실종신고는 그 둘이 각각 학교를 그만둔 지 10년쯤씩 지나서 이루어 진 일이었다. 실종선고가 이루어지기 전이나 이후나 두 사람이 고행을 찾은 흔적은 아무것 도 없었다. 우편이나 인편을 통해서라도 호적관계 서류 같은 것을 해간 흔적이 한 번도 없 었다. 두 사람은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원적지를 말끔히 결별해버리고 있었다. 최홍진이나 유종혁은 그의 고행에서마저 이미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뿐더러 두 위인의 원적지 쪽에는 조 목사가 의심했듯 최병진이나 유민혁이란 이름을 가진 다른 가까운 형제간들도 없 었다. 영훈은 이제 더 의심할 바가 없었다. 그는 곧장 서울로 돌아와 사건을 하나하나 다시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사건들을 정리해 나가다 보니 그는 새삼 자신까지 긴 장이 되어 오기 시작했다... "사건이 아직 다 끝장나질 않았어요. 내가 짚어 나가고 있는 쪽 과 결말이 엉뚱하게 비끌려 나가지만 않는다면..." 구 형사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산 말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갈수록 무게를 더해가고 있었다. 구 형사는 그 무렵 이미 어떤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단서를 좇아 어느 정도 비밀의 핵심에까지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구 형사는 끝내 그것을 짚어 내보이지 못하고 말았다. 핵심을 드러내 보여주기는커녕 그 자신마저 의문의 잠적으로 수수께끼를 하나 더 보태놓은 것이었다. 자신이 소설거리가 될 수도 있다던 그의 말이 사실이 되어버린 셈이었 다. 어느 대목에선지 사건이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사건은 아직도 진행중에 있었다. 그 런데 이번에는 영훈 자신이 그 사건을 뒤쫓아 나서고 있었다. 끝나지 않은 사건을 뒤쫓고 있음은 영훈 자신도 이제는 그 사건의 한 부분이 되어가고 있는 격이었다. 그 사건의 나머 지 부분을 그가 마저 진행시켜 나가고 있는 격이었다. 사건의 진짜 마무리는 자신이 떠맡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번째 실종이 생길 수 있었고, 그 자신이 그 세번째 실종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는 새삼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사건의 핵심 근처까 지 너무도 가까이 다가서 버리고 있었다. 거기서 발길을 돌이켜 세울 수는 없었다. 영훈은 이제 일련의 사건을 두 가지 방향으로 정리해 나갔다. 최병진과 유민혁 사건에 대한 자료들 을 한 방향으로 묶고, 양진호와 구 형사들의 잠적 내지는 실종 사건을 다른 한 묶음으로 나 누어 정리했다. 그리고 거기서 각각 공통의 의문점과 사건 추적의 방향을 설정했다. 구서룡 형사가 그랬던 것처럼 최병진과 유민혁 사건이 어떤 동일한 배후의 작용을 받았거나, 적어 도 어떤 비밀의 연계관계 같은 것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은 이제 그도 다분히 점쳐볼 수 있 었다. 그걸 부인하기엔 두 사람의 주변이나 태도들 하며, 사건의 경위나 성격에 너무도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이 다같이 같은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렇다할 이 유 없이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과 주변에서 자취를 감추어버린 다음 새로운 이름으로 가호적을 취득하여 연고자 없는 단신으로 세상을 숨어 살아온 점 등등은 이제 거의 단정을 지어도 상관없을 일이었다. 게다가 최병진의 대속을 상정케 한 두 사람의 화답식 최후 진술 (한쪽은 법정에서, 한쪽은 죽음 앞에서 행한)도 우연의 일치로는 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나 연계의 가능성은 그 주님 앞에서의 자기 증거를 담보로 한 두 사건의 성격과 죽 음에 대한 화해적인(차라리 그런 마지막 파멸을 부르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을) 태도들에서 도 역력하게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사건의 배후에 어떤 불가분의 연대관계가 잠재할 가장 큰 가능성은 두 사람의 배후를 추적하고 나선 양진호와 구 형사의 같은 실종 사실에 있었다. 그러니까 이 점은 구 형사의 추리나 심증에 보다 더 분명한 근거 하나를 더하게 된 것이었다. 양진호와 구 형사의 의문의 실종이야말로 두 사건의 가장 뜻깊은 공통점이었고, 바로 그 공통점이야말로 최병진과 유민혁 사건의 배후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확신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훈은 최병진과 유민혁, 양진호와 구 형사 그 어느 한쪽만을 우선시 킨 일방적 정공법으로는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풀어가기가 어려웠다. 양지는 서로 한쪽이 다 른 쪽의 단서가 되고, 이쪽과 저쪽이 서로 추리의 과정을 확인시켜 주는 동시적 상환관계 위에서 일을 함께 진행시켜 갈 수밖에 없었다. 일테면 이제 그는 최병진과 유민혁, 그리고 그들을 뒤쫓던 두 사람의 실종을 같은 줄거리 위의 연속사건으로 다루어 나간 것이다. 그 모든 수수께끼들을 풀어 나갈 열쇠는 오직 하나만 찾아내면 그걸로 족했다. 어느 대목에서 든지 한곳만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하면 다른 일도 차례차례 앞뒤가 저절로 풀려 나가게 마 련이었다. 그런데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영훈으로서도 거기서 더 일을 진척시켜 나갈 수가 없었다. 그 하나의 열쇠가 어디서도 쉽게 찾아지질 않았다. 관련자료를 더 구해낼 수도 없었고, 추리력도 이젠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다. 그전에 이미 관심이 시들해진 경찰 쪽에도 별다른 도움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시일은 그 사이 다시 두어 달 가까이나 흐르고 있었다. 영훈도 끝내는 기력이 기진맥진 허탈상태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한데 그럴 무렵 어느 날 이었다. 영훈은 끝내 그 구 형사의 집에서 뜻밖에 중요한 단서 한 가지를 찾아내기에 이르 렀다. 영섭의 집념어린 노력에 대한 마지막 보상이랄까. 쓰는 법은 아직 이중삼중 어려운 고 비가 많았지만, 비로소 작은 열쇠 하나가 발견된 것이다. "주영훈이 구 형사의 집에서 찾아낸 단서란 실상 다른 사람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걸로 여겨질 수 있는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영섭이 이제 그 작은 단서를 중시믕로 그가 어떻게 이 산까지 노인을 찾아오게 되었는지, 그 경위와 사연을 막바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다름아 니라 영훈은 어느 날 버릇처럼 구 형사의 집엘 들렀다가 그 부인으로부터 한 장의 지저분한 명함을 건네받게 되었다. -지난 봄 그이가 세탁소에 맡겼던 겨울 잠바가 이제사 배달되어 왔는데요. 그 안주머니에 이런 명합장이 들어 있었던가 봐요. 세탁소 주인이 간수해뒀다가 다시 넣어 보냈는데, 이런 것도 무슨 도움이 될까 해서요... 구 형사에 관한 것이면 경찰과 영훈이 그간 옷주머니는 물론 소장해온 책장 속 하나하나 까지 모두 몇 차례씩 교대로 뒤져본 터였다. 하고서도 별다른 단서를 못 찾은 채 행여 무언 가 새로 발견되는 것이 있으면 휴지조각 하나라도 함부로 버리지 말고 자기에게 일러달라 한 영훈의 당부를 부인이 소홀히 넘기지 않은 탓이었다. 그런데 그 부인이 무심스레 넘겨준 명함장을 받아 보니, 그건 서울의 종로통에 자리하고 있는 한 양봉조합의 간부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무심스레 넘겨준 부인의 기대와는 달리 그녀의 남편의 실종 사건에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해준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명함장이야말로 영훈이 그토록 애타게 찾고 있던 제3의 배후와 그 소재를 일러줄 최초의 열쇠를 숨기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아, 그야 물론 그 명함짝이 그 당장 수수께끼를 풀어준 건 아니었지요. 영훈도 처음엔 그 것이 그가 찾고 있던 비밀의 열쇠인지조차 알아보질 못했고, 그것이 설령 어떤 비밀문의 열 쇠라는 걸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건지 용법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 니까요. 하지만 영훈은 그것을 처음부터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구 형사가 양봉 조합 사람을 만나고 있었던 사실은 이때까지 전혀 알려지지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기 때문 이었지요. 더욱이 그 부인조차 꿀이나 양봉 일엔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소리엔 적지않은 예감이 새로 발동해 오고 있었구요... 영훈은 그래 그 명함장을 단서로 다시 세밀한 추적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끝에 끝내는 해답을 얻어내고 말았어요. 이를테면 열쇠의 효능과 용법을 찾아낸 것이지요. 그리고 그 열쇠의 비밀을 좇아서 어느 날 남도 쪽의 한 산속으로 그 배후의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을 찾아가 만나게 되었어요." 영섭은 우선 결론부터 그렇게 말해놓고 그간의 경위와 단서의 내용을 차근차근히 설명해 나갈 참이 었다. 그런데 그때-. 영섭은 거기서 갑자기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어지고 말았다. 아니, 더 정 확히는 그럴 기회를 잃고 만 것이었다. 영섭의 이야기가 거기까지 계속되자, 백상도 노인도 그쯤 해선 이미 사실을 알아차린 듯 긴장기가 훨씬 더해가고 있었다. 지금까진 그저 영섭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만 앉아 있던 노인의 자세에 언제부턴가 자꾸만 주의가 흐트 러지는 기미가 일고 있었다. 여유만만 영섭을 외면하고 앉아 있던 그 의연스런 침묵 속에 심사가 편찮은 잔기침 소리가 가끔씩 끼여들고 있었다. 그가 이제는 영섭의 이야기에 마음 이 쫓기고 있는 증거였다. 하지만 노인의 지혜는 영섭을 늘 한 발짝쯤 앞서고 있었다. "이제 그쯤하면 알겠소. 주 선생은 참으로 대단한 소설가인 듯싶구려. 이야기를 꾸며 나가 는 솜씨나 추리력이 이만저만 놀랍지가 않소이다. 그걸 뒷받침해온 끈기와 노력도 놀랍구요. 하여간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없소이다..." 노인이 느닷없이 침묵을 깨뜨리고 영섭의 이야기에 감탄을 하고 나섰다. 영섭이 그를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붙이기 전에 그가 영섭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이제 두 사람이 줄곧 소설의 형식에다 의지해온 그 우회적 화법을 버리고 바로 사건 당사자로서의 본 모습을 드러내야 할 계제에서였다. 그는 일테면 영훈이 찾아낸 단서의 내용이나 그것을 풀어 나간 그간의 경위 따윈 더 이상 긴 설명이 필 요없다는 듯, 이번에는 그 영섭을 향해 마지막 확인의 물음을 던져 왔다. "그러나 그 주영훈이란 주인공 말이오. 그 주영훈이란 사람, 그렇게 애를 쓰고 나서 사람 을 정말 옳게 찾아 만났을는지... 그가 산을 찾아가 만난 사람이 정말로 사건의 배후가 틀림 없었느냔 말이외다. 그걸 주 선생이 자신할 수가 있겠소?" 여전히 소설 속의 영훈을 빌리고 있었지만, 노인은 어쨌거나 이제 자신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영훈에겐 아 예 막바지까지 몰아붙일 호기로 여겨졌다. "그렇지요. 그는 사람을 제대로 만났습니다. 아까 이미 비슷한 말씀을 드렸지만, 영훈이 산으로 사람을 찾아갔을 때 한 노인분이 마침 돌꿀을 찾아서 당신의 굴집을 나서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노인분이 그 돌꿀을 찾아가는 기이한 방법을 보고 영훈은 모든 걸 확신하게 된 겁니다." 영섭은 자신 있게 노인에게 단언했다. "어뜨케... 그저 단순히 꿀 이야기 하나로 해서만은 아닐 테고... 서울의 양봉조합하고 이쪽하 고 무슨 상관이 있었다는 말씀같은데, 그 꿀을 찾는 방법이 어쨌길래요? 그 서울 사람들이 어디론지 사라져간 것과 꿀을 찾는 방법에 어떤 상관이라도 있었다는 거외까." 노인이 궁금 하다는 듯 조심스럽게 영섭에게 되물었다. 영섭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지요. 상 관이 있었고말고요. 다름아니라 그건 유인술이었습니다. 그 노인분이 꿀을 따는 방법은 자신 이 먼저 꿀물로 벌을 유인하여 그 행로를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노인분이 유인 술을 행한 것은 산 속의 벌들에 대해서만이 아니었습니다. 노인분의 꿀물은 서울까지 보내 져 사람까지 유인을 해가고 있었습니다." "유인이라... 유인, 그거 참 일리가 있는 말씀 같구 려. 소설 쓰는 사람이라 직감력이나 추리력이 참 대단하외다. 하지만 주 선생도 혹시 자신의 그런 직감력이나 추리력을 너무 믿는 것 아니시오? 내 꿀이 어떻게 서울까지 올라가서 누구 를 어떻게 유인했더라느냐는 말이외다. 서울에 어떤 꿀이 나돌았다 치더라도 그게 어떻게 내가 내려보낸 꿀이라고 단정할 수가 있었구?" 노인은 이제 아예 그 소설을 빌려 온 우회적 화법을 버리고 자신이 직접 정면으로 나서고 있었다. 하면서도 그는 아직 더 확인해보고 싶은 대목이 남아 있는 듯 자신과의 관련을 시 인도 부인도 않는 어정쩡한 어조 속에 계속 영섭 쪽을 다그치고 들었다. 영섭도 이젠 그 노 인의 화법대로 정면에서 마지막 화살을 먹여댔다. "아니 제 추리는 그처럼 단순한 예감에서 가 아닙니다. 나름대로 분명한 근거들이 있었지요. 아까 잠깐 이야기를 건너뛰었습니다만, 구 형사의 부인에게서 건네받은 명함에는 보통 심상치가 않은 메모가 있었거든요." 영섭은 이제 아예 이야기를 거기서 마무리짓기 위해 서울에서의 과정을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자 세히 설명했다. 영섭이 노인에게 털어놓은바, 구 형사의 부인으로부터 명함을 건네받은 후의 그의 추적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명함의 뒷면에는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은 알 수 없는 산들의 이름이 몇 개 흘려 적혀 있었다. 설악산, 태백산, 계룡산, 지리산, 내장산 따위였다. 양봉조합 간부의 명함장에 적힌 것이니 벌꿀 산지들을 적은 듯싶었지만, 하여튼 영섭은 그 산들의 이름이 풍겨 오는 새로운 예감 속에 그걸로 곧장 그 명함의 인물을 찾아갔다. 그리고 구 형사의 사진과 함께 이런저 런 그에 관한 인적사항들을 설명하고, 그런 사람이 언제 조합이나 그를 찾아왔었는지를 물 었다. 황병우라는 이름의 그 양봉조합 간부는 자신의 명함을 확인하고 나서도 시일이 한참 이나 지나간 일이라 처음엔 금방 기억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이다 간 결국 몇 달 전의 기억을 찾아내어, 위인의 방문의 목적뿐 아니라 그에 대한 전후사까지 모두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아, 그래요. 그게 아마 지난 봄이었을 겝니다. 석청에 관한 걸 물으러 왔었지요. 자기 가 까운 친지 한 사람이 어디선가 석청 한 단지를 보내온 일이 있었는데, 그 꿀을 이미 먹어 없애버렸지만, 뒤늦게 무슨 필요가 생겨 그 꿀의 채밀지를 좀 알고 싶다구요. 하지만 여기선 자연 석청은 취급치 않고 있어서 그걸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을 알려드렸지요. 꿀을 직접 가 져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낸 사람의 주소지도 모르는 터라, 우리로선 채밀질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래 금방 기억이 떠오르질 않는 것 같습니다만, 필요하시다면 제가 그 양반 을 소개해 드린 석청 전문 가게를 알려 드리지요. 그 가게가 바로 이 길 건너... 영섭은 물론 그 석청 전문 가게로 다시 사람을 찾아갔다. 석청가게 사람은 다행히도 조합 의 황병우보다 구 형사의 일을 더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분이었어요. 사내는 금세 영섭이 건네준 구 형사의 사진을 확인하고 나서 그가 그 석청의 산지를 알고 싶어하는 폼이 여간만 간절해 보이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그래 자신이 알고 있는 한에서 석청이 나올 만한 전국의 산들을 대충 다 일러준 바가 있었다고 하였다. 황병우 씨의 명함 뒤쪽에 산이름들을 적어준 것도 알고 보니 그 가게 사내였다. 한데 영섭이 사내로부터 얻어 낸 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구 형사가 그 석청의 산지를 알고 싶어한 저간의 이유였다. -꿀을 이미 먹어치우고 없는 데다 포장이나 용기들도 버려진 다음이라니, 그걸 보내온 산 지를 알아내기는 어려운 일이었어요. 도대체 교도소 안에 갇혀 앉아 꿀을 받아 먹었다는 그 친구라는 사람도 자기에게 그 물건을 보내준 사람을 알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니까요. 전 그저 대표적인 산지의 산이름들이나 적어 드릴 밖에요. 하지만 그분 그 꿀이 무슨 피해 가 생겨서 그러는 건 아니라더군요. 꿀을 먹은 사람이 그걸로 무슨 해를 본 것은 아니라니 까요. 그저 꿀을 보낸 사람을 찾고 있는 것뿐인 것 같았어요. 사내가 마지막으로 지나가는 소리처럼 흘린 말이었다. 하지만 영섭은 이제 그것으로 수수 께끼가 반쯤이나 풀린 셈이었다. 사내가 말한 교도소의 친구란 두말할 것 없는 안양교도소 의 최병진 그 사람이었다. 최병진이 어디선지 발송인 미상의 인물로부터 산꿀 선물을 받고 있음이었다. 구 형사는 그런 사실을 알고 나자 그 석청의 발송인을 최병진의 배후로 단정하 고, 그 석청의 산지를 찾아나선 것이었다. 앞뒤를 자세히 연결지어 보니, 그의 종적이 사라 진 것도 그가 꿀가게를 찾아간 것과 시기가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하여 영섭은 다시 안양 교도소로 쫓아가 예의 선우라는 교무부장을 찾아 만났다. 전번에 한두 번 허탕을 치고 간 일이 있었지만, 최병진의 일에는 교무부장이 늘 앞을 서 나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교무 부장과의 이번의 면대는 허탕일 수가 없었다. 영섭이 이번에는 최병진의 석청을 수취한 사 실을 기정의 사실로 내댔을뿐더러, 그러한 사실과 구 형사의 잠적을 분명한 유관사로 단정 짓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선우 부장은 오래잖아 모든 걸 시인했다. -그런 일이 있었지요... 하지만 저도 처음엔 그런 물건이 영치되어 온 것을 모르고 있었어 요. 그런 물건은 영치 규칙에도 어긋날 뿐더러 송부자의 주소조차 모르는 물건이었다니까요. 그래 영치물 취급부서 한 녀석이 중간에서 물건을 빼돌렸던 모양이예요. 물론 당사자인 최 병진의 양해를 얻어서였지요. 최병진 씨 자신도 누가 보낸건지 알 수가 없다며 그런 물건 자기가 받을 이유가 없다더라나요. 그런데 그 소리가 어떻게 내 귀까지 흘러 들어왔어요. 꿀 은 아마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된 다음이었지요. 하지만 난 혹시나 싶은 생각에 구 형사를 불러 그런 사실을 알려줬어요. 그런데 뜻밖에 구 형사까지 며칠 후에 자취가 사라졌지요. 선 우 부장은 거기까지 솔직히 사실을 털어놓고 나서 변명삼아 몇마디 더 덧붙였다. -하지만 뭐 그런 사실을 여태 말하지 않은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는 아니었어요. 처 음에는 그 사람이 사라진 것이 그 일하고 큰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얼마 있으면 어련히 다시 나타날까 하는 생각이었지요. 구 형사의 행적을 잘 몰라 그랬겠지만, 경찰에서 도 이쪽에 별로 관심이 없는 터에 뒤가 개운찮은 일을 드러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도 없었구요. 그냥저냥 그렇게 시일이 흐르다 보니 나중엔 외려 더 입을 열기가 거북해진 것뿐 이지요. "제가 예까지 산을 찾아오게 된 경위는 대개 그렇게 된 겁니다. 구 형사가 결국 그 석청 을 내려보내 주는 사람을 찾아간 것처럼, 저 역시 구 형사의 뒤를 따라서 말씀입니다." 영섭 은 거기까지 설명하고 나서 잠시 말을 끊은 채 노인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노인은 거 기까지도 아직 설명이 흡족칠 못했던 모양이었다. "아니 그렇더라도 나는 아직도 믿기지 않 는구려. 주 선생의 말씀은 구 형사나 그 이전의 양 기자까지도 모두 이곳을 찾아왔을 거라 는 뜻으로 들리는데, 그렇다면 그 구 형사라는 사람은 이 나라 천지의 석청 산지를 찾아서 전국의 모든 산들을 헤매다녔단 말이외까. 그러다가 결국은 여기까지 발길을 들여놓게 되었 을 거라는 거외까. 게다가 그 양 기자라는 사람까지도?" 영섭의 설명이 중단되고 나서도 한 동안 계속 침묵만 지키고 있던 노인이 끝내는 다시 석연찮은 의문점을 들추고 나섰다. 하지 만 영섭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설명의 완벽을 기하기 위해 영섭 역시 그 점을 좀더 밝혀두려던 참이었다. "아니, 전혀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 석청 일을 알고부터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 게 없었 으니까요. 저 역시 앞서의 두 사람처럼 그 꿀 냄새에 끌려든 거랄까요. 제가 이곳을 찾아오 게 된 것은 구 형사의 길을 그대로 밟아온 셈이었을 텐데, 전 지금 이렇게 간단히 이곳을 찾아내지 않았습니까. 어르신께서도 미리 다 그 점을 계산해서였겠지만, 저도 물론 처음엔 길이 이렇게 멀 줄은 모르고 화엄사 근처나 피아골 일대에서 부질없이 며칠을 헤매기도 했 지만요. 어르신께선 예서 더 길이 가까운 남원이나 함양 쪽을 놔두고 웬만큼 집념이 강한 사람이 아니고는 좀처럼 발길이 미치기 어려운 구례 쪽 먼길로만 꿀을 내보내고 계셨으니 말씀입니다." 영섭은 다시 일사천리 격으로 남은 설명의 마무리를 지어 갔다. -아닌게아니라 영섭은 지리산을 마지막 목적지로 찾아오는 데에 전국의 모든 산들을 누 비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석청의 송부자가 주소와 이름을 밝혀주진 않았지만, 소포물 수취 확인전에는 발송지의 우체국명이 기록되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섭은 뒤늦게 그 사실 을 떠올리고(석청가게 사람의 명함장 메모가 무용지물이 된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으리라) 교도소 관할지인 안양우체국을 찾아갔다. 그리고 거기 보관된 수취확인전철에서 소포물 발 송지인 구례우체국을 확인했다. 하여 며칠 후, 그는 화엄사와 피아골 근처를 헤매던 끝에, 그 마지막 체념의 단계에서 노인의 거처를 찾아내기에 이른 것이다. 화엄사 아랫마을에서 행운으로 몇 차례 노인의 하산 사실을 목격한 사람을 만난 덕분이었다. 구 형사는 물론이려 니와 양 기자의 경우에서도 대개 비슷한 경로의 추리가 가능했다. 그리고 영섭은 그 점까지 분명히 확인해두고 있었다. 다름아니라, 그 안양교도소의 교무부장이란 사람은 양 기자 역시 도 그의 잠적 전에 최병진에게 같은 꿀단지를 전하고 갔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 다. 왜냐하면 그때 양 기자가 만난 것은 후일 안동교도소 쪽으로 자리를 옮겨 간 사람이었 던 데다가, 그때의 일은 후임인 선우 부장 이전의 소관사였던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섭은 이 번 일을 캐어 나가던 과정에서 양 기자의 잠적 직전에 최병진에게 같은 물건이 전해진 사실 을 알아내기에 이르렀다. 누구로부터 어떻게 물건이 전해졌는지 상세한 경위까지는 알지 못 했지만, 선우 부장이 이번에 꿀을 가로채간 자들에게서 전일의 죄과까지를 실토 받아 놓은 때문이었다. 물건을 전한 것은 물론 양 기자였을 테지만, 애초에 그것을 마련해 보낸 사람은 그가 아닌 제3의 인물이었을 터였다. 그때도 주소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겠지만, 물건의 발송자는 이번의 경우와 동일한 인물이었을 게 뻔했다. 그리고 그때의 물품의 배달지는 안 양교도소가 아닌 서울 쪽 구치소로 되어 있었다는 담당자의 뒤늦은 확인이었다. 따지고 보 니 그때는 최병진이 2심 판결이 내려지고 나서 복역지를 안양 쪽으로 옮겨온 지 며칠이 지 나지 않았던 때였다. 그래서 발송인은 1심 공판과정 중의 최병진의 수감지인 서울구치소로 물건을 보냈던 게 분명했다. 최병진의 신변사를 이리저리 사방으로 뒤쫓고 다니던 양 기자 가 용케 그 사실을 알게 됐을 터였다. 그래 그는 그 물건의 배달지 우체국인 서대문 우체국 에서 발송지 우체국명을 찾아낸 것이었다. 그리고 손수 그 우편물만을 안양의 최병진에게 전한 채 자신은 그 우편물 발송지인 구례 근처 지리산 쪽으로 그 수수께끼의 발송인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영섭은 굳이 필요가 없었지만, 확인차 한번 더 서대문 우체국을 찾아가 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세월이 너무 흐른 탓에 그곳에는 이미 그 발송국이 기재되어 있을 소포물 수취확인 전철이나 다른 근거 서류가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영섭은 이미 그 물건의 발송지역을 알아냈을 뿐 아니라, 양 기자도 당시엔 거기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게 분명한 터이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역시 영섭이 믿고 온 그대 로였다. 무엇보다 영섭은 이제 그 앞에 노인을 마주하고 있음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어르신을 만나기까지의 이런 과정을 제가 앞장서 열어 온 것이라곤 절대로 말할 수 없겠지요. 제 앞서 먼저 두 사람이 이런 과정을 거쳐 언 터이고, 어떤 의미에서 저는 그 저 그 사람들의 발자국을 뒤쫓아 따라 격이니까요..." 영섭은 이제 그것으로 자신의 이야기 를 마저 끝냈다. 자신에 앞서 두 사람이 이곳을 찾아 들어왔음을 기정의 사실로 못박고 있 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건 이제 노인 쪽에서 이야기의 순서를 받아 나가라는 추궁의 뜻이 담긴 선언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노인은 거기서도 아직 분명한 승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렇지 않소... 내 다시 한번 경탄을 금할 수 없는 일이오만, 주 선생의 상상 력이나 소설을 짜나가는 치밀성은 정말로 놀랍고 존경스럽소..." 영섭의 말이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던 노인이 드디어는 자신의 말차례를 의식한 듯 영섭을 다시 한번 치켜 세우고 나섰다. 하지만 그건 아직 승복의 표시가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그 모든 것은 아직도 그럴듯한 개연성에 불과할 뿐 사실은 아니지 않겠소?" 어찌보면 노인은 이제 곧 모든 걸 시인하고 그의 말대로 개연성만이 아닌 진짜 사실을 털어 놓을 듯하면서도, 어딘지 아직 좀 영섭을 곯리고 있는 듯한 웃음기까지 흘리면서 마지막 반 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가령 주 선생이 자신의 상상력과 추리력을 좇아서 이곳까지 나를 찾아오고, 그렇게 주 선생과 마주치게 된 이 늙은이가 그 일에서 보이지 않는 배후로 지목했던 인물이라는 것까 지도 다 사실이라 칩시다. 하지만 그걸로 앞서의 두 사람까지 여길 찾아왔으리라는 단정은 아직 무리가 아니겠소? 주 선생이 아까 무슨 유인이라는 말을 했던가요? 아닌게아니라 내 가 그 사람들을 돌꿀로 이곳으로 유인해 들었다면, 그러기 위해선 우선 내가 일일이 그 사 람들의 소재를 미리 알고 있어야 했을 텐데, 내가 어떻게 이 깊은 산골 속에 들어앉아 그 사람들에게 그걸 내려보낼 수가 있었겠느냔 말이외다." 하지만 노인의 그런 추궁은 앞에서 이미 다 간접설명이 된 것이었다. 영섭은 한번 더 그걸 상기시켜 나갔다. "아닙니다. 어르신께선 일일이 그걸 알고 있을 필요가 없으셨지요. 그들이 제 바로 어르신 을 찾아들기까지는 그 자들이 누군지도 알질 못하셨구요. 어르신께선 이 산에서 벌꿀의 곳 집을 찾아가실 때처럼 그저 산 아래로 돌꿀을 내려보내서 적당한 목만 지키게 해두면 되었 거든요. 다름아니라 바로 그 최병진이 어른께서 꿀을 놓으신 목이었지요. 그리고 양 기자나 구 형사들은 그 방향을 좇아서 이곳까지 찾아든 위인들이었구요. 어른께선 일일이 사람을 찾을 필요가 없이 그저 한두 번 산을 내려가 꿀물만 내려보내면 그만이셨지요. 그것도 좀처 럼 근거지를 찾아내기 힘이 들게끔 여기서 가까운 남원 쪽이나 함양 쪽 아닌 구례 쪽 먼길 을 택해서 말씀입니다." "유인이 목적이라면 길을 쉽게 찾아들도록 했어야 할 일을 부러 먼 길로 구례까지 나간 것은 또 무슨 연유에서였을꼬...?" "그야 후각이 매우 예민해서 꿀냄새 에 깊이 취해 들 사람밖에는 이곳을 찾아내지 못하게 해야 하셨으니까요. 추적이 손쉬우면 귀찮은 사람들이 끼여들 수도 있었거든요. 말하자면 어른께선 귀찮은 추적자들을 따돌려 버 리자는 뒷단속까지 미리 다 해두셨던 셈이지요." "그렇더라도 그 최병진이라는 사람이 유인 의 길목이었다면, 그 사람이 있었던 곳만은 미리 알고 있었어야 할 텐데, 그 사람한테로 가 는 꿀단지가 처음엔 서울 쪽으로 갔다가 나중엔 안양 쪽으로 보내졌더라면서? 그렇다면 내 가 그 사람의 수감지를 일일이 뒤쫓아 알아냈어야 했을 텐데, 그래 주 선생은 내가 여기 앉 아 그걸 어떻게 알아냈다는 거외까." "그것도 실상 그리 힘이 드는 일은 아니었지요. 그야 맨 처음 양 기자를 불러들인 최병진의 사건을 만나시게 된 데는, 그와 어르신 사이에 어떤 남 모르는 밀통 관계가 있어서였든, 아니면 그간에 산을 내려가 종종 세상 소식을 접해온 과정에서 우연히 알게 된 행운에서였든, 제게는 그보다 어른께서 그 최병진을 택해 유인의 목으로 삼게 된 어르신과 그 사람과의 뒷사연이 더 궁금한 일입니다만, 우선은 어쨌든 거기 좀 힘이 드셨겠지요. 하지만 다음번 구 형사의 경우엔 여기 그냥 앉아서도 저절로 사정을 다 아실 수가 있었지요. 구 형사 때는 이미 양 기자가 이곳을 찾아온 뒤였고, 그 양 기자는 그때 이미 최병진의 안양교도소 이감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사실은 바로 그 점 이 두 사람의 실종을 연속사건으로 읽어낸 한 단서가 되어준 셈이었구요." 영섭이 거기까지 하나하나 추리의 근거를 대고 났을 때였다. 노인은 이제 그 영섭의 치밀하고도 막힘 없는 설명에 더 이상 할말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그는 그만 한동안 질문을 중단한 채 깊은 신음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하더니 이윽고는 마음의 작정이 내려진 듯 무겁게 마지막 질문을 던 져 왔다. "그래... 그럼 그걸로 주 선생의 소설은 끝이 다 난 거외까...?" 이젠 더 이상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뿐더러 이제는 사실을 시인하고 승복을 해오려는 기미마저 역력했 다. 영섭도 끝내는 그때가 오리라는 걸 믿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영섭은 그렇게 거기서 이 야기를 마무리지을 수는 물론 없었다. 이야기는 오히려 이제부터가 본장이었다. 노인이 이제 부터 그 본장을 맡아 주어야 하였다. "아닙니다. 소설은 오히려 지금부터가 본마당이지요." 그는 새삼 다시 완강한 어조로 노인의 주의를 일깨웠다. "전 아직도 그같은 유인극의 목적 을 모르고 있거든요. 그 유인극의 목적이 과연 어떤 것인지, 그 배후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 어르신과 최병진이라는 사람의 관계나 먼젓번 두 사람의 그후 행적들... 지금까지 그저 어르 신 한 분을 만나뵙게 된 것밖에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질 않습니까. 그래 어르신께 그 소 설의 뒷부분을 도와주십사 지금까지 제 긴 사연을 말씀드린 거구요." 백상도 노인이 그에게 감추고 있는 사실들을 이제부터 솔직하게 털어놔 달라는 영섭의 마지막 추궁인 셈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자신의 정체가 그렇듯 거의 다 윤곽을 드러내게 된 지경에 이르러서도 아직 은 자신의 속을 호락호락 모두 털어놓을 기미가 아니었다. "그래 주 선생은 이 늙은이가 그 것을 쉽게 다 말해주리라 생각했소? 주 선생 생각처럼 내가 가령 그 모든 일을 알고 있다손 치더라도 말이외다. 주 선생 말대로라면 일의 내막이 그리 간단치도 않겠거니와 나 역시 그 렇듯 만만찮은 영감태긴 아닐 터에 말이외다." 영섭의 결의를 마지막으로 한번 더 시험해 보기라도 하듯 아까번의 그 느슨한 농기마저 다시 말끔히 가셔버린 어조로 반문해 오고 있 었다. 하지만 이제 그쯤은 영섭으로서도 충분히 예상을 하고 있던 바였다. 그가 알고 있던 사건이나 인물들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노인을 만난 것만으로 수수께끼가 모두 풀리게 되 리라곤 영섭으로서도 기대를 않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영섭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건에 너무 깊숙히 뛰어들어 버리고 있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그리 고 이제는 그 자신이 자신의 몸으로 이야기의 마무리를 직접 맡아야 한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쯤은 그도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 각오를 노인에게 분명히 밝혀주는 수밖에 이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노인을 설득해 승복시키는 길밖에 없었다. "아 닙니다. 저도 그렇게 일을 쉽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노력해봐야지요. 저도 이제 어차피 그 어르신의 꿀냄새에 끌려 들어온 이상엔, 이제부턴 바로 제 자신을 이 야기 가운데로 내던져서라도 말씀입니다." 그는 될수록 노인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공손 하게, 그러나 이대로는 절대로 물러날 수가 없노라는 결연스런 어조로 다시 한번 집념에 찬 결의를 다짐하고 나섰다. "아까번 낮에도 말씀을 드린 일이 있습니다만, 전 어차피 남의 이 야기를 듣고 그것을 베끼는 것으로 소설을 쓸 수 있는 위인은 못 되니까요. 저는 바로 제 소설 속에 자신을 던져넣어서 그 소설을 살고 그것을 써내온 위인이거든요. 전 이 산을 찾 아올 때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제 자신이 직접 사건의 한 부분을 맡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전 기어코 제 소설을 여기서 어르신과 함께 끝내고 말 겁니다." 그것은 일테면 영 훈이 그 스스로의 퇴로를 끊어버린 배수의 결의인 셈이었다. 한데도 노인은 아직도 뭔가 미 심스러운 게 있었던지, 이날은 끝내 더 마음을 못 열고 있었다. 영섭의 그같은 단호한 결의 에도 노인은 이날 밤 자신이 마무리지어야 할 이야기의 뒷몫을 끝내 침묵으로 대신하고 말 았다. "글쎄, 그게 생각처럼 그렇게 쉬울 일인지..." 거기서도 아직 더 영섭의 다짐이 필요한 사 람처럼 지레 걱정만 앞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영섭은 이제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이제 자신 이 할 몫의 이야기는 거의 해버리고 있었다.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자신의 결의도 충분히 다짐해 보인 터였다. 노인도 그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아니, 두 사람은 이제 서로의 입장을 속속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노인이 그것을 알고 있는 한엔 서두를 필요가 없는 일 이었다.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노인은 결국 말을 해야만 하게 되어 있었다. 영섭은 좀더 여유를 가지고 노인이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서편 하늘을 떠돌던 조각달이 그 새 검은 능선 위로 가라앉아 들어가고 있었다. 사람의 길, 하늘의 길 1 새벽녘에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것이 영섭은 그만 아침해가 하얗게 치솟아오를 때까지 늦잠 을 자고 말았다. 전날 하루 종일 산을 탄 데다 밤이슬기나 겨우 피할 정도의 잠자리가 그처 럼 불편했던지, 늦잠에서 깨어난 심신이 두들겨 맞은 듯 무겁고 피곤했다. 하지만 백상도 노 인은 원래부터 그런 덴 몸이 익어온 사람이었다. 노인은 벌써 오래 전부터 아침기동이 시작 되고 있었다. 영섭이 자리를 털고 나왔을 때 노인은 여느 집 노인네들처럼 어느새 울안을 말끔히 소제하고 아침준비까지 끝내놓고 있었다. 노인은 이제 영섭의 기침만을 기다리며 이 날 하루의 산행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야기로 밤을 새운 사람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그 노인의 아침 준비라는 것도 영섭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다. "주 선생한테는 아무래도 생식이 무리일 것 같아서... 내, 허락도 없이 짐꾸러미에 손을 좀 댔소이다." 잠시 뒤 노인은 영섭에게 아침상판을 들어다 권하면서 적이 미안한 얼굴을 하였 다. 하지만 노인은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소금알을 부벼 뿌린 산나물 데침에 불에 익힌 밥을 얹은 화식 차람판에는 수저나 밥그릇이 하나씩 뿐이었다. 노인은 아침에도 화식을 피 하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아침거리로는 영섭의 쌀 한줌도 한사코 사양했다. 영섭의 쌀 대 신 그는 이날도 물에 불린 강냉이와 생땅콩 몇 알을 씹었을 뿐이었다. 하면서도 굳이 손님 을 위해선 그새 어디서 불까지 지피고 있었던지, 영섭으로선 어쨌든 망외의 후의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노인의 후의는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치가 않았다. 그것은 새삼 영섭에게 노 인과 자신의 섭생 습관의 차이를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그같은 차이의 뒤편에는 영섭에 대 한 노인의 냉랭한 거부의 손짓이 도사리고 있었다. 미리 마음에 두었거나 말았거나 고집스 럽게 혼자 날곡만 씹고 있는 노인 쪽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영섭이 조심스레 그 차림판의 그릇들을 비우고 났을 때였다. 노인은 과연 영섭을 한번 더 떠보고 싶은 듯 방 심스런 흘림투로 영섭에게 물었다. "그래 어떻소. 어젯밤 생각은 아직도 여전하외까?" 간밤 의 결심이 바뀌지 않았느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노인의 농기어린 말투엔 영섭의 생각이 야 어느 쪽이 됐든 자신은 별로 마음 내키는 일이 아니라는 부정적인 음색이 짙게 깔려 있 었다. -이 노인이 나를 한번 더 다짐해두고 싶은 것이렷다? 영섭은 이내 그런 노인의 심중을 읽고 있었다. "어르신께선 제가 이대로 산을 내려가 주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 같군요." 영섭 도 부러 여유 있는 어조로 노인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노인은 영섭의 반어법을 못 알아들 은 척 좀더 노골적으로 그의 하산을 권했다. "실은 그렇소이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이대로 그냥 산을 내려가는 게 좋겠소마는..." "제 각오는 어젯밤에 이미 충분히 말씀드린 줄 압니 다." 영섭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노인 쪽에서 그렇게 나오는 이상 영섭 쪽도 다시 한번 자 신의 결심을 분명히 해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영섭의 결연스런 태도에 노인으로서도 이 젠 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한동안 골짜기 쪽만 이윽히 내려다보 고 있었다. 그 얼굴에 새삼, 답지 않은 망설임과 고뇌의 그림자가 스치고 있었다. 하더니 마 침내는 스스로 무엇인가 체념을 하고 난 사람처럼 은근한 공박투의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 다. "거 세상엔 때로 보이지 않는 비밀 속에 감춰져 있어야 참진실이 될 수 있는 일이 있을 게요. 그 비밀의 장막이 벗겨질 때 그 빛과 힘을 다 잃고 마는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 외다. 그래 때로는 어떤 일을 그냥 비밀인 채로 남겨두는 게 그 일의 장막을 벗겨내어 실상 을 지켜주는 일이 되는 게요. 굳이 그 진실의 장막을 벗겨내어 실상을 드러내 보이려 할 때 는 거기 그만한 값을 치러야 하는 게고, 한데 주 선생에게 과연 그런 진실의 값을 치를 각 오가 있으실지?" 그런 노인의 푸념이 고집불통 격인 영섭의 무모성에 대한 단순한 원망에서 가 아님은 물론이었다. 그것은 일테면 영섭에 대한 노인의 마지막 다짐인 셈이었다. 영섭은 물론 대답을 망설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만한 각오쯤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주 선생께 그걸 치르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뒤에 가서 주 선생이 후회를 하게 될 일은 없을 지..." "후회하게 되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이건 처음부터 제가 원해서 뛰어든 일이니 까요." "허나 이건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일이 아니외다. 장막 뒤에 가려진 사안의 성질에 따라서 사람의 목숨까지도 걸고 나서야 할 위험한 모험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니까. 만에 하 나 일이 게까지 이르게 되고 보면 주 선생은 과연 얻을 것이 무어겠소. 주 선생의 소중한 소설을 위해서나 자신의 열성스런 삶으로 해서나 세상엔 아무것도 증거를 할 수가 없게 될 마당에 말이외다." 일종의 비의로 받아들여야 할 말일 수도 있었지만, 노인은 이제 아예 푸 념조의 공박과 충고를 넘어서 영섭에 대한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더욱이 그의 증거 운운 의 소리는 저 최병진과 유민혁 사이에 짝을 이루던 말들을 다시 한번 머리에 떠올리게 해와 서, 양진호들의 잠적이나 노인의 정체에 대한 새로운 확신에 앞서 그의 기분부터 섬찟거리 게 하였다. 하지만 영섭은 이제 거기서 뒷걸음질을 칠 수는 없었다. 비밀의 장막을 벗겨보는 대가로 목숨까지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모험이 과연 어떤 것인지, 그같은 노골적인 경고 의 의도가 무엇인지, 영섭은 아직도 노인의 깊은 속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비밀 의 장막을 벗겨보는 대가로 그 자신이 다시 세 번째의 실정자가 되는(그런 위험성은 처음부 터 각오를 해온 터였다) 한이 있더라도 영섭은 이제 거기서 단념을 하고 물러설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수수께끼의 해답이 이제는 너무도 가까운 곳에 있는 듯싶었고, 노인의 충고 또 한 사실적인 느낌이 너무 짙었기 때문이었다. 영섭은 오히려 그럴수록 노인에 대한 만만찮 은 대결의식이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그같은 대결의식은 어쩌면 그 백상도 노인에 대한 까 닭 모를 신뢰감에 의지해 있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사실을 만나는 데에 그게 불가피한 길 이라면 전 아닌게아니라 제 목숨이라도 걸 수 있을 겝니다." 영섭은 다시 한번 단호하게 자 신의 결의를 다짐했다. 노인이 숨기고 있는 비밀의 크기가 그만한 대가를 필요로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용기를 더 한층 부추긴 것이었다. 노인은 그제서야 영섭의 결의 를 확인한 모양이었다. "주 선생 고집도 참 어쩔 수가 없구려. 어쨌든 좋소. 이제부터 모든 건 주 선생의 결정에 따르는 일일 뿐이니까, 주 선생이 그 점만 염두해 두어주신다면..." 노 인은 비로소 자신도 마지막 작정이 내려진 듯 불쑥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아침에 차려놓은 산행 채비를 다시 안으로 들여놓고 나서 빈몸으로 영섭을 앞장서 나섰다. 방금 전 지의 그 낭패스런 고뇌와 망설임의 빛은 씻은 듯이 사라진 거동새였다. "갑시다, 그럼. 오늘 은 먼길을 갈 일이 없을 테니 등짐은 그냥 여기에 놔두시고..." 이야기를 털어놓기 전에 영 섭에게 먼저 한 가지 보여줄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영섭도 이내 그 노인을 뒤쫓아 빈몸으 로 울밖 숲길을 따라나섰다. 노인이 영섭을 데려간 곳은 그의 바위굴 거처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산 을 오르는 쪽이 아니라 골짜기 쪽으로 한참 접목과 돌자갈을 뚫고 내려간 내리막길 쪽이었 다. 20여분 남짓 수풀 사이를 묵묵히 헤쳐 내려가다 말고 서너 길 높이의 바위층이 절벽을 이루고 있는 골짜기께에서 노인이 문득 발길을 멈춰섰다. 그리고는 이내 등뒤로 다가온 영 섭에게 그 바위절벽의 아래쪽을 가리켜 보였다. "저 아래쪽을 좀 보구려. 이 바위 아래 숲 덤불 사이를 말이외다. 위험할 데니 절벽 가까이 내려가지는 마시고 그냥 이 위에서..." 영섭 은 영문을 모른 채 노인의 주문대로 절벽 위에 그냥 멀찌감치 발길을 멈춰선 채 그의 시선 을 좇아 아래쪽 숲덤불 속을 살폈다. 발 아래 지형은 바위길을 방벽삼아 햇볕이 아늑하게 모이고 있는 곳이었다. 지형이 그토록 아늑한 탓인지 돌자갈이 많은 일대의 지력치고는 숲 덤불도 유난히 무성한 편이었다. 그 숲덤불 사이사이로 사람의 손길이 스쳤음직한 가지런한 공간들이 여러 곳 숨겨져 있었다. 높직한 암벽에 둘러싸인 데다가 일대의 무성한 숲덤불까 지 울울하여 모양새가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었지만, 그 공간들 하나하나엔 나지막한 토분들 이 은밀히 숨어 들어앉아 있었다. 부러 봉분을 낮게 쌓아 숨긴 사람들의 무덤들이 분명해 보였다. 영섭의 느낌은 틀림이 없었다. "보아서 벌써 알아봤겠지만 저건, 모두가 진짜 사람 의 유골이 묻혀 있는 무덤들이라오. 아마 전부 해서 스무 기쯤은 되리라." 영섭이 미처 느낌 이나 생각을 추릴 여유도 주지 않고 노인이 먼저 확인을 해주었다. 영섭은 다시 한번 등줄 기로 서늘한 바람기가 지나갔다. -아니 그렇다면 저 무덤들은? 그는 아깟번 노인이 다짐해온 협박조의 충고 이후 줄곧 머릿속을 떠돌고 있던 그 양진호, 구 형사의 신상에 관한 어떤 불길스런 의혹의 실상을 눈앞에 직접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는 새삼 긴장된 눈길로 백상도 노인의 옆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노인은 아직도 번번히 그의 예상을 뒤엎고 있었다. 영섭이 지나치게 상상을 비약한 탓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돌연 그 무덤들을 대하고 보니 전날 산행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미처 생각해 낼 수가 없었던 때문 일 수도 있었다. 노인의 표정은 그새 지극히 한가롭고 태연스럽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마치 난생 처음으로 선산을 따라온 나어린 손주에게 할아비가 그러하듯, 바위끝으로 차분히 자리를 잡고 앉아서 무덤들의 내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어저껜가, 그 벌떼를 쫓아다니 는 길에 더러 사람의 유골을 만나는 수가 있다고 했을 거외다. 저게 모두 그런 유골들을 한 데로 수습해다 제각기 무덤들을 지어준 거라오." 영섭은 그저 그 암장분 비슷한 무덤들을 묵묵히 지키고 선 채로 이야기에 조심스럽게 귀를 모으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산행 중에 사람의 유골을 수습해오기 시작한 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그 이름 모를 해골과 동굴에 서 하룻밤을 무심히 지내고 난 다음부터였는데..." 노인은 이제 그 영섭 쪽은 거의 아랑곳을 않은 채 혼자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그건 아마 내가 이 산을 들어온 지 두어 해쯤 되어가던 가을이었을 거외다. 그 동안엔 어떻게 그런 걸 한번도 못 만났는지 모르지만, 그 무렵엔 나도 제물에 그 땅벌들의 행로를 쫓아 돌꿀을 찾아내는 요령까지 터득 하고 있던 때였으니까... 무심히 하룻밤 동굴잠을 자고 나서 아침에 발치께서 함께 누워 있 는 유골을 보았을 때의 놀라움이란 새삼 말을 할 필요도 없을 거외다... 헌데 뒤에 알고 보 니 그렇게 버려진 사람의 유골은 그뿐이 아니었어요. 그 첫 번으로 해서 주의가 한번 그쪽 으로 쏠리다 보니, 이 산엔 이름없는 외로운 유골들이 곳곳에서 내 발길을 기다리고 있었어 요. 뜨거운 햇볕과 이슬 젖은 풀숲 속에, 어둡고 음습한 동굴의 침묵 속에, 그 첩첩한 망각 의 세월 속에... 모두가 가엾고 허무한 인간사의 흔적들이었지요. 그중에도 특히 애처로웠던 것은 저 50년대의 6 25전란 때 사람이 하도 많이 죽어가 단심폭포라는 별명까지 생겼다는 저쪽 너머 골짜기의 물가를 헤매다가, 역시 바위틈에 숨어 있는 한 동굴에서 속절없이 삭아 가는 유골을 만났을 때가 아닌가 싶구려. 그 유골이 엉켜 누워 있는 동굴 벽에 무슨 쇠꼬챙 이 같은 것으로 긁어 파놓은 말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질 않았겠소. '어머님, 용서하십 시오. 불효자는 먼저 갑니다.' 54년 4월 몇 일인가 하는 기록 연월과 '이종식'이라는 이름 석 자까지 뚜렷한 글귀였는데-그 밑엔 고향을 적은 흔적도 보였으나 그것이 습기에 지워져 버 린 것이 무엇보다 애석한 일이었지만 어쨌거나-죽음에 즈음해서 동굴을 찾아든 사람이 자 신의 마지막을 당해 남긴 유서였겠지요... 또 한번은 저쪽 칠선봉께 바위 아래서 몇 점의 무 기류, 취사용구들과 함께 엉성하게 가매장된 유골을 파낸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함께 파낸 유류품들 가운데 식기들은 녹이 슬어 삭아가고 있는데, 유독 그 시계만은 단단한 껍질 속에 문자반이 아직 하얗게 보존되고 있질 않겠소. 비록 시간은 멈춰 있었지만, 언젠가는 잃어버 린 시간을 다시 찾아 그 망각의 시간을 다시 헤아려 나갈 꿈을 꾸고 있는 양 말이외다... 하 지만 애처롭고 덧없는 죽음들이 어찌 그 한두 유골들의 경우뿐이었겠소. 고무조각만 남은 겨울 신발의 흔적이나 녹슨 철모 부스러기와 함께 수풀 속에 흩어져 나뒹구는 해골덩이, 여 름 소나기에 새로 패인 도랑물로 흙 속에서 씻겨 나온 엉겨붙은 뼈마디들... 그 모두가 이 산의 내력과 애처로운 고혼들의 외로운 자기 증거의 숨결들이 아니겠소?" 노인의 이야기는 거기서도 한동안이나 더 길게 계속되어 갔다. 그러니까 노인은 그때마다 그 해골들을 하나 하나 그의 거처 쪽으로 수습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산행을 나가서는 이곳저곳 일부러 그 것들을 일삼아 찾아 헤매기도 하였고, 한동안은 아예 그 일에만 정신이 팔려 지낸 적까지 있었다 하였다. "처음엔 그저 별 생각없이 시작한 일이었지요. 뭐라고 해야 할지... 이름 모 를 산야에서 흔적없이 죽어간 그 고혼들의 외로움에 몸서리가 쳐져서였달까... 그 유골들이 나마 한곳으로 모아다가 저승의 집다운 무덤을 마련해주고 그 외로움을 달래주고 싶은 생 각, 대개 그런 생각으로다가 시작한 일이었을 거외다..." 하지만 노인이 유골들을 수습해다 무덤을 지어주는 일은 절차가 그렇게 간단치를 않았다. 처음엔 유골을 만날 때마다 그것을 수습해다 바로 무덤을 만들었지만, 저 단심골의 동굴벽 유서 글귀를 만나게 된 이후로는 자 신이 해온 일의 뜻이 달라진 때문이었다. 동굴벽의 기록은 말하자면 그 이름으로 표상된 이 승의 삶과 그것이 스러져 간 때와 자리, 바로 그 죽음의 피맺힌 자기증거의 하나였다. 산야 에 아무렇게나 죽어 버려진 유골들을 어느 것 하나도 그 내력을 거두어 줄 증인을 얻고 갔 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참으로 죽음 자체보다도 더한 절망이요 외로움일 수 있었다. 기록의 주인공은 그래 자신의 죽음에 당하여 스스로 그의 죽음을 증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하 여 노인을 만나 비로소 이승의 증인을 얻게 된 셈이었다. 노인이 이내 그 주검의 말을 알아 들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외로운 죽음의 증인이 되어줄 수 있음에 스스로 감사하며 깨달은 것이었다. 사자에게는 그 삶과 죽음의 증인을 소망할 권리가 있었고, 생자들은 죽은자가 누 구이든지 그의 죽음을 증거해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노인이 유골들에게 제 무덤을 지어주 는 일은 그가 그 사자들의 증인이 되어 주는 일에 다름아니었다. 그 무덤은 이승의 삶을 끝 낸 자들이 지상에 지닐 수 있는 마지막 증거의 권리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무덤으로 표 상된 죽음의 증거야말로 사자에겐 더할 수 없는 위로일 터이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그래 그 유골을 수습해다 암굴 거처에서 며칠을 함께 지냈다. 그리고 그간에 작은 돌을 깎아다가 동굴에 새겨진 그의 이름을 다시 새겨 유골과 함께 첫 번째 작은 무덤을 만 들어 주었다. 하고 보니 일은 거기서부터가 더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무덤을 만들고 이름을 찾아주는 일은 사자에 대한 또 하나의 값진 선물이었다. 무덤의 이름은 사자의 죽음뿐 아니 라 그 삶의 내력까지도 증거해 줄 수 있었다. 그래서 노인은 이후,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무 덤들에도 제각기 그 이름들을 찾아주고 싶었다. 그래 그로부터 노인은 유골을 만날 때마다 금방 무덤을 짓는 일을 미루었다. 유골의 자세나 부식 정도에서부터 주변의 유류품들을 남 김없이 조사하고, 그 위치와 주위의 산세들까지 샅샅이 살펴가며 죽음의 정황을 찾는 일에 다름아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전혀 가능한 일 이 아니었다. 이름을 남기고 간 건 그 단신골 동굴 속의 한 경우뿐이었고, 다른 유골들은 거 의 그 내력을 점쳐낼 만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유골들이 입을 열어 스스로 말을 해줄 리도 없었다. 백상도 노인도 그 무렵엔 이미 사람의 말을 차츰 잊어가던 참이었 다. 하지만 그는 그 유골들을 상대로 해서마저 몇날 몇밤씩 간절한 침묵의 통화를 시도했다. 그 막막한 외로운 침묵 뒤의 사연들을 위하여 생자와 사자 간의 교령의 통로를 얻으려 애를 썼다. 때로는 유골들이 침묵 속에 안고 있을 원망을 달래주기 위해 그 적막스런 주검의 얼 굴 위에 눈물의 입맞춤으로 밤을 지새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자들은 역시 말이 있을 수 없 었다. 뿐만아니라 유골들에게 말할 입이 없는 것은 들을 귀도 없는 것과 한가지였다. 유골들 은 결코 생자들의 말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어둠과 침묵의 심연일 뿐이었다. 노인은 한 때 하다못해 그 유골들의 삶과 죽음의 증거를 위하여 산 아래로 몇 차례 수소문의 나들이를 내려 다닌 일까지 있었다. 최소한의 일용품(소금이나 성냥, 입성거리 따위)들을 구해 들이기 위해 그 사이 몇 차례 돌꿀을 내갔던 가까운 마천 쪽을 중심으로 근동에서 옛날에 겪어낸 전란상을 차근차근 되살피고 돌아다닌 것이었다. 하지만 그도 다 부질없는 노릇이었다. 노인 의 짐작대로 마천골 근동의 지리산역 마을들에도 무덤을 못 지닌 주검의 이야기들은 적지아 니 흔했다. 죽음의 자리나 무덤을 못 지닌 것이 차라리 그 시절의 죽음의 관례였다. 토박이 고을 사람들의 경우도 그랬고, 싸움을 붙혀온 외지 사람들의 경우 또한 그러했다. 죽음들엔 그 생시의 이름만 있었지 마지막 죽음의 장소가 없었다. 거기 비해 그가 수습해온 침묵의 유골들엔 그 이름이나 삶의 사연 대신 풍우에 씻겨온 죽음의 장소만 있었다. 그 죽음의 자 리와 짝을 지어 맞출 잊혀진 이름이나 삶의 사연들은 찾아내질 가망이 거의 없었다. 노인의 소망은 거기서도 낭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유골들이 입다문 죽음의 사연을 마을 쪽에서 거꾸로 찾으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유골들의 무덤에 그 이름으로 생시의 삶까지 증거해주 려던 소망은 그래서 끝내는 노인의 망상으로나 끝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런 것만 도 아니었다. 노인이 끝내 그 유골들의 이름이나 내력을 찾아주지 못하고 무명의 무덤들을 짓고 만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무덤 속의 주검들과 더할 수 없이 역력한 이름과 사연으로 오랫동안 피아간의 교령을 가져온 것이었다. "옛날 남녘 섬고을 우리 고향 마을에 안장순이라고 하는 한 유순한 아이가 있었지요. 가 세가 퍽 어려워 소학교엘 한 1영쯤 다니다 그만두고 낯모르는 곳으로 남의 집 깔담살이로 머슴살이를 나갔는데, 그 8 15 해방이 되고 나서 몇 년을 지나고 나니, 글쎄 그새 이 자가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나 그 당시 국방경비대의 제복을 입고 마을엘 다시 나타났어요..." 노 인은 거기서 문득 언제부턴가 곁으로 비스듬히 자리를 잣고 앉은 영섭 앞에 옛 고향마을 사 람들의 이야기를 회상해 나가고 있었다. "사연을 알고 보니 그 청년, 남의 집 머슴살이가 하 도 지겨워 어떻게 줄을 얻어 그 국방경비대라는 델 들어갔던가 보외다. 한데 그 청년, 그때 그냥 휴가를 나온 게 아니라 부상 위로 휴가를 나온 거였나 봅디다. 경비대엘 들어가선 당 시 여수 근방에 주둔해 있던 연대에 소속이 되어 있었는데, 그 연대는 6 25전란 전에도 이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이 잦았다는 거외다. 그래 그 청년도 토벌을 나갔다가 부상을 입게 되 어 대강 치료를 끝내고 위로 휴가를 얻어 나온 참이었는데, 왼쪽 귀 뒤에서 얼굴 쪽 눈밑으 로 총탄이 빠져나간 상처 자국이 아직도 번들번들 벌건 채였어요. 사람들은 그래 그 장순 청년에게 위험한 부대로 다시 들어가지 말고 몸을 피해 어디로 달아나 버리라고까지들 했어 요. 사람이 제 목숨부터 살고 봐야지 그런 위험한 델 다시 가야 쓰겠느냐고... 허지만 그 친 구 몸집만 우람했지 원래부터 성품이 유순하기 그지없었던 데다 그놈의 머슴살이가 그리 지 겨워서였던지, 귀대일자가 다가오자 여축없이 다시 부대로 돌아가고 말았지. 그리고 그 얼마 뒤엔 아닌게 아니라 산 사람 대신으로 하얀 유골상자 하나가 돌아왔고 말이외다... 마을에선 물론 면장이나 지서 주임 같은 면내 유지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 었지요. 헌데 뒤에 떠도는 소문을 들으니 그 유골상자는 그저 모양새일 뿐인 거짓 빈 상자 였다는 거외다. 그 장순의 아비 되는 사람이 하도 허망하여 아무도 모르게 상자를 열어보았 는데, 그 속엔 그저 마른 흙 몇 줌이 들어 있을 뿐이더라고 말이외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과수댁의 외아들로 전란이 한창일 땐 용케 징집을 잘 피해 넘기고 있었다 했다. 그러다 전 란이 한고비를 넘기고 난 53년 겨울께에 이 청년 역시도 순창 쪽 병역길을 찾아가게 됐었다 고-. 이제는 이미 큰 전란이 끝난 데다 순창지역의 한 경찰지서에 친척형이 근무하고 있다 는 소식이 있어 그를 찾아간 것이었다. 전란은 끝났어도 기피자의 신분으론 세상살이에 걸 리는 데가 많았던 데다, 그쪽에선 마침 서남지구 경찰대의 지리산 잔비 토벌작전이 시작되 고 있어, 지서 주임으로 있는 그 친척형의 힘을 빌려 현지 전투원 형식으로 병역을 대신하 고 나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도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이번에는 전사도 아닌 전투 중 실 종이었다. 거짓 유골상자조차 돌아온 일이 없었다. 뒷날 그 친척형이 알려온 바로는, 아닌게 아니라 어떻게 줄을 달아 현지 입대 전투원으로 작전을 따라다니게까지는 되었는데, 그 무 렵부터 부쩍 전투가 치열해져 간 어느 날 그의 종적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버리고 온 것인지 찾지를 못한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거짓 유골상자를 싸 보낼 수밖에 없게 된 처 지에 전사통보보다는 실종 쪽을 낫게 본 그 친척형의 배려에서였던지, 어쨌든 그의 시신은 발견된 바가 없었다는 부대장의 실종통보였다. 전사가 아니라면 혹은 당사자가 겁을 먹고 제물에 도망쳤거나, 아니면 적진에 포로로 끌려갔을 경우도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끝끝내 다른 소식이 없었고 보면 그 역시 종말이 뻔한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훨씬 뒤에 고향의 외숙부님한테서 들어 안 일이지만, 그자의 실종엔 그러니까 그 유골상자조차 마련하 지 못할 자리없는 죽음에 다름아니었던 거외다... 하고 보면 이제 저 무덤들이 누구의 것인 지를 알 수 있지 않겠소?" 노인은 이제 그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지어 가고 있었다. "그 홀어미 과수댁의 아 들... 그 죽음의 자리를 몰랐던 젊은이... 거기다 아까 그 동굴벽에 어머니를 부르고 간 젊은 이... 그들이 바로 같은 사람들 아니겠소. 저 무덤 속엔 바로 그 과수댁의 아들이 묵혀 있을 게요. 그리고 그 가짜 유골상자로 돌아온 장순이란 청년의 외로운 영혼도..." 그런데 영섭은 거기서 잠시 노인의 설명을 잘못 알아듣고 있었다. 아니 그도 물론 노인의 말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영섭은 그 영혼들과의 교령에 관한 노인의 말들이 너무도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른께선 저 무덤들에 하나하나 정말로 이름을 정해 주었다는 말씀입니까. 이런저런 개연성은 물론 충분하지만, 그것만으로 무덤들 에 이름을 지어 정한다는 것은 역시..." 영섭은 자신도 다소 아둔스런 느낌이 들면서도 거기 까지 확인을 해두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 물음의 꼬리를 거두어 들이지 않 을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인이 천천히 머리를 가로젓고 나선 때문이었 다. "아니, 이름을 하나하나 나눠 붙여야 할 일이 무어겠소. 저들은 서로 제 이름을 함께 하 며 저기에 함께 모여 묻혀 있는 게요. 그것이 이종식이든 안장순이든 또 다른 누구든..." 노 인은 일단 완강하게 부인하고 나서 서서히 한탄조의 뒷설명을 이어갔다. "내 고향동네서 이쪽으로 간 것은 그 앞서 말한 둘이지만, 그것도 어디 꼭 그 두 사람뿐 이겠소? 야학을 열어 동네 아이들 글을 가르치다 싸움터로 끌려간 이, 소학교만 나왔다가 군대로 출세길을 잡겠다고 나간 사람, 국군으로 의용군으로 방위군으로, 전란통에 끌려가고 제 발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우리 마을에서만 해도 열사람이 넘었는데 말이외 다. 그 사람들 모두가 이쪽은 아니더라도 그 절박하고 외로운 죽음의 자리들을 다 마찬가지 아니었겠소... 게다가 그렇게 싸움터엘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것이 내 고향 젊은이들의 일 만도 아니겠고, 그이들도 모두 이 땅의 젊은이란 이름으로 저기 함께들 묻혀 있는 건 아니 겠소." 무덤들의 사연에 관한 노인의 이야기는 거기까지로 대강 끝이 났다. 그런 식으로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씩, 그러다 차츰 해가 지나면서부터 한 해에 한 번이나 두 번꼴 정도 로 바위 벽 아래의 무덤 수가 늘어갔다. 그리고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 수가 무려 20기 가까이에 이르고 있었다. 한마디로 노인은 그 이름없는 유골들을 찾아 수습해오 고, 무덤을 만들어 그 외로움을 지켜주는 것으로 일을 삼다시피 해오고 있었다. 그것은 깊이 따지고 보면 바로 그 자신의 외로움의 이야기이기도 하였다. 영섭은 백상도 노인의 이야기 에 그 버려진 유골들의 외로움보다 노인 자신의 그것이 더 절절이 느껴져 온 것이었다. 노 인이 맨 처음 그와 밤을 같이한 백골을 발견하고 전율을 느낀 것은 그 백골의 깊은 외로움 에서 자신의 외로움과 절망을 목도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름을 알 수 없는 주검, 그렇게 그저 허무한 침묵 속에 허무하게 사라져가고 있을 뿐인 주검, 그 주검의 절망적인 모습에서 자기 외로움의 크기와 소멸을 본 때문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참지혜란 이 세계와 생명현상 전체의 큰 질서에 의지하고 순종해 가는 데에서 바르게 얻어질 수 있다고 말한 노인이었다. 유골의 침묵과 허무한 스러짐 역시 이 우주와 생명현상의 한 큰 질서임이 분명했다. 그런 점에서 노인이 굳이 그것들을 거두어다 무덤까지 지어주는 일은 그가 이 산에서 오랫동안 얻어 익힌 자신의 지혜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짓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 백골 앞에 섰을 때 스스로도 살아있는 사람들의 말을 잃어가고 있던 참이라 했던가. 그는 필경 그 격절스런 주검의 침묵과 외로움 앞에 자기 죽음의 얼굴을 보았을 게 분명했다. 그래 자 신의 외로움과 절망감을 감당할 수가 없어져 그 말없는 유골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교령을 시도했을 터였다. 그가 유골들의 무덤을 만들고 스스로 그 죽음의 증인이 되어주고 싶어한 것도 그 유골들의 절망적인 처지를 빌어 자기 외로움에 대한 위로와 증거를 구하고 있었음 이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영섭은 그 노인의 외로움과 깊이에 자신도 적지아니 몸서리 가 쳐졌다. 그런데 노인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곳에 혼자 그런 외로움을 10년 넘어씩이나 감 내해가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노인에게 분명 그럴만한 사연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건 아 마 최병진이나 유민혁 혹은 양 기자나 구 형사들의 실종과도 모종의 연관이 있는 일일 수 있었다. 하지만 노인이 거기까지는 아직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더욱이 그가 그 무덤들의 내력을 영섭 앞에 털어놓은 목적에 대해서도 영섭 스스로 그 외로움의 크기를 절감케 한 이 외에 아무것도 이렇다할 언질이 없었다. 영섭은 자꾸 어떤 으스스한 긴장감만 더해갈 뿐 노 인의 속셈은 좀처럼 헤아릴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노인에게 그것을 캐내려 섣불리 보채고 들 수도 없는 일-. 하지만 노인의 속셈이 무엇이든 그것들은 모두가 차후로 영섭에게 들려 줄 본이야기의 전주나 전제 격이기 쉬웠다. 공연한 한담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노인이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엔 스스로 작정한 순서가 있게 마련이었다. 노인을 재촉하거나 방해를 해서는 안 되었다. 영섭은 그저 노인의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가 주기만을 기다리며 끈질 기게 자신을 참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 아침도 노인의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가 주기만을 기다리며 끈질기게 자신을 참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 아침도 노인의 이야기는 끝내 거기서 더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노인의 의중이 어떤 쪽이었든, 날씨가 우선 갑자기 안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남쪽 산줄기에 검은 구름 몇 점이 걸려 흐르는 것을 보고 노인이 이내 그것을 알아차렸다. "자, 그럼 이제 그만 일어나도록 합시다. 바람기가 심상치를 않소이다." 지금까 지의 이야기는 한낱 객담쯤으로나 치부하듯 노인이 아직 기미를 기다리고 있는 영섭에게 한 마딜 건네고는 불쑥 자리를 일어서 버린 것이었다. 백상도 노인은 그러나 이제 영섭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이제는 영섭이 채근하지 않아도 노인 쪽이 먼저 이야기를 잇고 나선 것이다. 두 사람이 굴집으로 돌아와 간단한 점 심 요기를 끝내고 나서였다. 비가 와준 것이 부조였는지 모른다. 줄이 굴집으로 올라오는 사 이에 하늘이 금세 검은 구름장으로 뒤덮이기 시작하더니, 점심 요기를 끝냈을 땐 맞은편 산 줄기들이 뽀얀 빗줄기 속으로 아득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산행은 아예 틀려버린 날씨였다. 두 사람은 차분히 굴집 입구로 자리를 잡고 앉아 한동안 그 빗줄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 지만 노인은 그 무덤들의 비밀을 보여준 데서부터 이미 작정이 서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 럼 이제부터 내 옛날 이야기나 좀 들어보시려오?" 그는 한동안 빗줄기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던 끝에 이제는 그것이 당연한 순서인 듯 그렇게 문득 이야기의 서두를 꺼냈다. 그리고 그 혼자 그렇듯 격절스런 외로움을 살고 있는 이유들과 상관하여 하나하나 그 사연을 밝혀 나가기 시작했다. 영섭은 계속 그저 말없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시한 채 노인의 이야기에 귀 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야기 가운데에 노인의 내력이나 정체가 밝혀지면 그의 배후나 영 섭이 여태까지 뒤를 밟아온 두 사람의 실종의 행방에 대해서도 수수께끼가 차츰 풀려 나갈 터였다. "헌데 이야길 쉽게 풀어 나가자면 주 선생은 우선 이것부터 알아야 할 거외다. 주 선생도 이미 짐작하고 오신 모양이지만, 그게 뭐냐하면 이 늙은이 역시 한때는 대처에서 신 학교까지 다니던 목사 지망의 예수쟁이였다는 사실을 말이외다." 최병진과 유민혁의 일을 염두해 두었음인지, 노인의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얼마간 기이해 보이기까지 한 그 생애의 한 별난 고비에서부터 첫 서두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 노인의 사연은 이러했다. 젊었을 적 백상도의 신학교 입학은 그의 나이 이미 스물여섯 때이던 1953년 겨울의 일이 었다. 그 무렵은 아직 6 25 전란 뒤의 혼란기였던 데다, 학교 기틀도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 던 탓에 백상도 청년의 신학교 입학엔 그 나이나 입학시기가 별로 문제되지 않았었다. 하지 만 그는 원래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어렸을 때 고행마을의 예배당 종소리와 동지 무렵에 찾아오는 그 예수님의 생일이라는 탄일절 이외에 교회 일에 대해서는 인연도 아는 것도 별 로 없어온 터였다. 백상도가 교회와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나이 스물셋을 헤던 해 초여름 전란이 터지면서 이른바 지원이라는 형식으로 휘말려 들어간 그 도륙과 아비규환의 북새통 속에 겪어 보낸 지옥의 삼년간을 통해서였다. 전쟁은 너무도 많은 젊은 목숨들을 죽음의 나 락으로 떠밀려붙였다.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한번 그 죽음의 길목으로 들어선 젊은이들은 자기 죽음의 값이나 이유 하번 조용히 가려볼 틈이 없이, 또는 억울한 불평의 소리 한마디 남길 틈이 없이 줄줄이 사신의 어두운 아가리 속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어떤 지휘관들은 그 것을 자랑스런 구국과 정의의 싸움이라고 했지만, 그리고 더러는 불가피한 사상간의 싸움이 라고도 했지만, 전투를 치르는 전장의 사병들에겐 애초에 그런 데데한 명분 따위는 없었다. 병사들에겐 무슨 애국심이나 사상성보다도 맹목적인 복수심과 자기 죽음의 차례가 있을 뿐 이었다. 백상도가 전란 속에 보낸 3년간은 바로 그 뜻없는 줄죽음 속에 보낸 절망의 세월이 었다. 그리고 그 자신 죽음의 행렬에 휩쓸려가면서도 끝끝내 그 나락을 비켜선 공포와 행운 의 3년간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누가 뭐래도 사람의 힘이나 소망만으로는 절대로 붙잡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 졸병 백상도로서는 사실 그런 행운을 소망해본 일조차 없었다. 전장에서의 졸병들의 죽음은 무작위적 선택의 확률의 순서였고, 병사들에 있어 전투는 그같은 맹목적 죽음의 순서를 가리는 절차에 다름아니었다. 그런 전쟁터의 가차없는 살생의 생리를 경험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듯이, 졸병 백상도도 어느때부턴가는 아예 자기 목숨 에 대한 부질없는 집착을 내던져 버리고 있었다. 어느 편이냐 하면, 그는 차라리 자기 죽음 의 차례를 기다리는 쪽이었다. 전투를 한 차례씩 치르고 날 때마다 중대원은 엄청나게 숫자 가 줄어들곤 하였다. 한 번의 치열한 전투는 중대인원을 한꺼번에 2,3할이나 7,8할까지도 줄 어들게 하였다. 줄어든 인원은 신병들로 계속 보충되어 나갔지만, 고참병은 그만큼 인원수가 자꾸 줄어들게 마련이었다. 전투의 횟수를 거듭해 갈수록 살아남은 구병들은 서른에서 스물 로, 다시 스물에서 열 몇 명쯤으로 계속 숫자가 줄어가고 있었다. 죽음의 확률이 그만큼 높 아갔고, 차례로 그만큼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사람의 힘이나 지혜로는 절대로 피해낼 방법이 없는 순서였다. 백상도는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하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에겐 그 차례조차 쉽게 찾아와 주지 않았다. 그는 용케도 마지막 살아남은 몇 명 의 고참병 속에 번번이 목숨을 부재해 남곤 하였다. 그 흔한 부상 한 번 당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물론 백상도 자신의 소망이나 지혜, 용감성 따위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 다. 그저 어떤 우연의 소산이랄까. 전쟁이란 북새통엔 원래 그런 엉뚱한 착오도 흔한 법이어 서 예의 죽음의 순서나 확률이 뒤바뀐 탓일 수도 있었다. 백상도는 일테면 그렇듯 그것을 자신의 행운으로 감사하기보다도 그쯤 시큰둥하게 여겨 넘긴 것이었다. 전쟁은 아직도 무한 정 계속되고 있었고, 그는 그 질기게 살아남은 목숨을 후속 신병들 속으로 뒤섞어 넣으면서 진짜 자신의 차례를 맞을 때까지 언제까지나 계속 다시 나가야 하였다. 그의 죽음은 일테면 일종의 유예상태일 뿐이었다. 뿐더러 그 죽음의 임시 유예상태는 오히려 공포심과 조바심만 더해 왔다. 그것은 남다른 행운이라기보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죽음의 고문일 뿐이었다. 백상도가 전쟁터에서 보낸 첫 몇 달간은 그래 그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이 누구보다 자 심했던 연옥의 시기였달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몇 달이 지나고 나자 백상도에게 그것을 참행운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싶어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에게 그 끝없는 죽음의 공포와 고 통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생명과 그 섭리자에게 지극한 감사를 바치게 하고 싶어한 그의 연 대 군목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 작전을 거쳐 다시 38선 근처에서 피아간 공방전 이 한창이던 51년 초봄께의 일이었다. 강원도 동부전선의 산골에 박혀 있던 그의 연대군종 과의 강현섭 군목이 하루는 그를 유별난 독종으로 지목한 듯 위로 겸 교화차 그와의 은밀한 특별면담을 청해 왔다. 백상도는 어느새 부대 주변에서 그만큼 악발이 독종으로 알려졌고, 그 악발성은 그가 전쟁터에서 그만큼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실로 충분히 입증이 되고 있던 탓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 사람 좋은 강 군목은 악발이는커녕 무서운 공포감에 질려 떨고 있는 한 '어린 양'의 절망스런 모습 앞에 우선 무한히 감동스런 얼굴빛부터 짓기 시작했다. 하다가는 그가 그 엄청난 행운을 전지전능하신 섭리자 '주님'의 은혜로 받아들이 지 못하고 있는 우매성에 느닷없이 질타의 소리를 내질렀다. -아니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이오. 그는 부지중 백상도의 두 손까지 힘 있게 끌어쥔 채 치솟는 흥분기를 가누지 못한 목소리로 기도조의 질타를 계속했다. -이 힘없고 어리석은 종은 아직 아버지 하나님의 참뜻이 어디 계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우리 주님께서 당신 같이 작고 힘없는 어린 양을 그처럼 무서운 죽음의 고 통으로 시험하시려는 것은 분명 아니실 겁니다. 그분께선 당신에게 시험의 고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크나큰 위로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주님께선 우리 생명과 죽음의 주재자이십니 다. 이것은 역사가 아닙니다. 인간사의 운명놀이도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하나님께서 당 신을 통하여 이땅에 이룩해 보여주시려는 당신의 기적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분의 은총에 늘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특별히 당신을 통하여 그분께서 마지막으로 이룩하시려는 뜻이 무 엇인가를 기도 속에 깊이깊이 생각하십시오. 강 군목은 그러므로 그를 택해주신 주님께 감 사하며,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면 그는 그 주님의 역사에 자 신을 바친 상으로 더 큰 위로와 가호를 얻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그 강 군목과 주님의 뜻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강 군목은 모든 삶과 죽음의 주재자는 사람이 아닌 하나 님이라 단언했다. 백상도는 우선 그 점에서부터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가 진정 인간의 운명의 주재자라면 그에겐 다른 모든 전쟁터의 죽음들에도 책임이 있어야 하였다. 그런데 그의 은총과 권능은 어찌하여 다른 생명들은 외면하고 그저 아무렇게나 버려두고 있는 것 인가. 어찌하여 오직 백상도 그 한 사람만을 택하여 , 그에게서만 그 뜻을 이루고 증거하려 하는가. 그것을 아무래도 공평한 처사일 수가 없었다. 아니 거기엔 백상도가 미처 알 수 없 는 어떤 섭리가 숨어 있다고 치자. 그래 다른 사람들을 그보다 일찍 당시 곁으로 불러 데려 간 데도 뜻이 있다 치자. 하더라도 그들을 데려가는 데에 어찌 그리 한결같이 참혹스런 방 법뿐이란 말인가. 쏟아진 배창자를 제 손으로 제 뱃속에 쓸어담으려 애를 쓰다 숨이 끊어져 간 사람, 두 눈알이 빠져 나간 피투성이 얼굴로 유령처럼 어정어정 허공을 더듬다가 남은 육신마저 탄우 속으로 갈갈이 찢겨 죽은 사람, 마지막 소망으로 물 한 모금을 찾다가 그 작 은 소망마저 헛되이 뒤로 한 채 눈을 감고 간 사람-당신 곁으로 데려가는 모습들이 어찌 그런 꼴들이어야만 했더란 말인가-. 백상도는 아무래도 그런 주님은 저 독생자 예수님의 부 활만큼이나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권능과 섭리의 하나님은 강 목사처럼 쉽사리 받아들 일 수가 없었다. 그 자신이 자기 생명과 죽음의 주재자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스스로 도 체득해온 바 있었지만, 오히려 그 강 군목의 사무친 감동과 질타 앞에서는 그 전능한 우 주의 주재자를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백상도가 끝내 자기 생명의 진정한 주재자를 만나 그의 '주님의 뜻'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역시 강 군목을 만남으로 인해서였다. 그러나 그 것을 진정한 은혜와 축복의 만남으로 인연지어 준 것은 강 군목 자신이 아닌 전혀 다른 사 람이었다. 그러니까 백상도는 그후 계속된 강 군목의 설교에도 주님의 은혜에는 눈이 멀고 귀가 먹은 채 지내온 셈이었다. 그리고 계속 불사조 백상도로, 악발이 고참병의 대명사가 되 어온 것이었다. 한데 그 늦은 봄, 치열한 전투가 한고비를 넘기고 나서 잠시 소강상태로 들 어가 있던 참이었다. 그는 비로소 좀 정신을 가다듬고 오랜만에 고향 집으로 문안편지를 띄 어 보냈다. 남녘 완도의 고향 섬마을로는 전에도 한두 번 그런 편지를 띄운 일이 있었지만, 성격이 깐깐하신 그의 아버지나 공부를 마다하고 일찌감치 집을 나가 제 여자를 끌어와서 딴살림을 차려 사는 바람쟁이 형에게선 아무 소식이 없는 대신, 이전부터 불가 쪽에 인연을 맺어오던 한 동네 외숙만이 '몸을 잘 보전했다 무사 귀가하라'는 간단한 응답을 보내오곤 했을 뿐이 었다. 그래 이쪽도 간간이 발송되는 부대장의 공한으로 한동안 소식을 대신해오던 끝이었다. 그런데 이번 역시 답신을 보내온 건 아버지나 형님 대신 동네 외숙 쪽이었다. 게다가 이번 에는 그 문맥이 매우 심상치를 않았다. -사정이 허락하면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집엘 한번 다녀가도록 하여라. 너하고 긴히 의논 할 일이 있음이니라... 외숙은 불문곡직 그의 휴가를 요망하고 있었다. 뿐더러 휴가를 나오게 될 양이면 당신한테 미리 연락을 띄어서 자기를 먼저 보게 하라는 당부를 덧붙이고 있었다. 백상도는 아무래도 느낌이 예사롭지 않았다. 고향집에 어떤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긴 것만 같았다. 그는 곧 부대에 사정을 호소하여 휴가를 얻어냈다. 그리고 외숙의 간곡한 당부대로 휴가 출발 며칠 전에 그런 사실을 외숙에게 알렸다... 외숙은 그 날짜보다도 이틀씩이나 앞 서 읍내 차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차에서 내린 그를 다짜고짜 당신이 묵고 있던 여관방으로 끌고 갔다. 먼저 알아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간의 사정 이 백상도의 예감보다도 훨씬 더 참혹했다. -사지를 헤매다 온 네겐 차마 못할 말이다마는 일이 일인 만큼 어쩌겠느냐. 우선 속마음 단단히 다져먹고 내 말을 듣거라... 뜨거운 음식상을 앞에 하고 앉아서도 젓가락도 집지 않 고 다그치고 드는 생질 앞에 외숙은 마침내 어쩔 수가 없어진 듯 자신도 접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외숙의 이야긴즉 각설하고 그의 집안은 이미 몇 달 전에 멸문지경의 쑥밭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래 나이 쉰일곱이던 초로의 아버지는 어느 날 밤 동구 밖 정자나무에 몸이 묶여, 마지막으로 술 한잔만 마시고 가게 해 달라는 애절스런 소망을 같은 마을 사람들의 성급한 몽둥이질 앞에 '용서 못할 부르주아지 의 더러운 소망'으로 남기고 떠나갔고, 당신의 한동네 바람쟁이 맏자식은 위인들 앞에서의 애원을 대신하여 엉뚱스레 '공화국 만세'를 외치다가 그 역시 같은 길을 따라간 것이었다. 그런데 그 형님은 반주검이 된 채 짚가마니에 넣어져 그대로 흙구덩이로 내던져졌는데, 그 때까지 아직도 목숨을 부지해볼 희망을 놓을 수 없었던지 구덩이가 흙으로 덮여들때까지도 한사코 그 '공화국 만세'를 외쳐대고 있었다고. 그렇게 횡액을 당해간 식구가 그의 어머니와 형수, 그리고 다섯 살 난 어린 조카아이까지 두 집에 남아 있던 다섯 식구 한 가족 전부였 다. 그것도 이미 지나간 여름철에 휩쓸고 간 재앙으로, 당신한테까지 화가 미칠까 두려워 그 끔찍스런 자리를 피하지 못하고 함께 따라다닌 외숙 자신도 직접 목도한 사실이랬다. (그래 외숙은 차마 그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백상도의 무사귀가만을 당부하곤 해온 것이었다.) 물론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섬마을 살림치곤 그의 집 가계가 마을에서 그중 탄탄했 던 것이 우선의 허물이었다. 맏자식은 제가 싫어 길을 비켜갔지만, 그의 아우 둘째(백상도) 에겐 3년제 중학과정일망정 도회지 상급학교 문을 밟아보게 했을 만큼 전대부터 물려받고 불려 온 것이 얼마간은 남 앞을 서고 있었던 것이다. 성격이 꽤 꼿꼿한 그의 아버지도 남 앞에 듣기 싫은 소리를 그리 참아온 편이 못 되었다. 그런 가세에 그런 성미에, 경위야 어찌 되어서였든 아들녀석 하나까지 마을에선 유일하게 제 발로 '국방군'의 옷을 입으로 간 집안 이었다. 편을 갈라 따지고 남의 허물을 캐야 할 세상이 되고 보면 영락없는 반동이요 죄인 의 집안이었다. 그러나 외숙은 실상 그런 걸 참극의 이유로 보지 않았다. -너도 다 세상을 살아봐서 알다시피 그런 것이 어디 큰 허물이겠느냐. 너의 집이 무슨 대 단한 재산가도 아니고, 성미가 다소 깐깐한 대목이 있었다곤 하지만, 네 부친이 그 성미로 누굴 못 살게 해 원망을 산 바도 없고... 게다가 네가 본심으로 갔든 원해 갔든 억지로 끌려 갔든 국군 옷을 싸움터엘 나간 것이 그 사람들한테까지 무슨 원한을 살 일이더냐. 집엘 돌 아오다 도중에 멋모르고 휩쓸려 들어갔다는 뒷소식밖에는 나도 네가 어떻게 입대가 된 것인 지 실상을 모르고 있는 터에 말이다... 재앙의 내용을 대강 다 귀뜸해주고 나서 외숙은 한숨 섞인 소리로 한탄하였다. 그리고 모진 꼴을 겪고 난 사람답게 백상도를 사려 깊게 단속해 왔다. -그 모두가 사람들이 제정신을 잃고 만 무지와 무명의 탓이니라. 제정신을 잃고 나니 숨 어 있던 탐욕과 질투심, 증오심만 미쳐 날뛰게 된 세상, 남에 대한 이해나 우애 대신에 까닭 없는 시샘과 미움과 잔악성만이 판을 치게 된 세상... 누구들은 이번 싸움을 빈자로 억눌려 온 사람들을 위한 싸움이요, 그래서 많이 배우고 크게 아는 사람들의 생각까지는 잘 알 수 가 없다만, 내 보기엔 그거 다 어림도 없는 헛소리들 같더라. 이 싸움에도 무슨 사상이 있다 면 그건 아마 그 눈이 먼 시샘과 미움과 잔악성들이 제멋대로 놀아난 굿잔치판을 꾸며준 그 무지와 맹목의 멍석깔이 사상이라고나 해야 할는지... 적어도 내가 본 우리 마을 일들은 그 런 식이었다. 아마 네가 싸움터에서 겪고 본 일들도 그러리라 생각된다마는... 그러니 이번에 네 집안이 당한 일이 무슨 큰 허물로 해서는 아닌 게다. 지금의 네게는 물론 받아들이기가 몹시 어려운 일일 게다만, 그게 무슨 허물로 해서라기보다는 그저 그 증오심과 잔학성을 부 추긴 눈이 먼 시대의 억울한 희생이 되어 갔다고나 할까... 무참스런 참극을 두려움 속에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자책감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의 외숙은 역시 불가와의 인연 속에 몸과 마음을 닦아온 사람답게 아직도 속이 썩 부드럽고 사려가 깊었다. 그러나 외숙의 백씨가에 대한 그같은 무고성의 거론은 살아 남은 생질에 대한 단순한 위로나 자책의 뜻에서만은 물론 아니었다. 보다도 그것은 전투복 차림에 총까지 지니고 온(단독무장이 그 무렵까지의 휴가병들의 차림이었다) 백상도의 들끓 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그 예기찮은 복수심의 폭발을 막으려는 데에 더 큰 목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의 네겐 물론 그리 생각하기가 어려울 게다만, 네 육친들의 무고한 죽음이 앞서 말 했듯 눈이 먼 이 시대의 희생이라 한다면... 내 생각 같아선 그 일에 네가 깊은 원한을 지니 거나 조급하게 죄과를 물으려 덤비지 않는 것이 좋을 듯싶구나... 내 이 몇 달간 괴로움 속 에 깊이 생각해온 일이다만, 이 일이 무지와 무명의 허물로 저질러진 일이라면 그 무지와 무명에 원을 품고 죄를 물을 수는 없는 일이더구나. 세상이 이럴수록 우리라도 제정신을 잃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더라는 말이다. 그래 내가 미리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번엔 마 을을 조용히 다녀가도록 하라는 것이다. 지금 네가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힘있고 무서운 모습은 네가 여전히 제정신을 잃지 않고 있는 의연스런 자세가 아니겠느 냐... 외숙은 결국 백상도에게 부질없는 보복극을 자제하고 삼가라는 단속이었다. 미리 그같은 당부를 주기 위해 그는 이틀이나 읍내 여관에서 조카의 휴가길을 기다려온 것이었다. 그리 고 그같은 외숙의 배려는 어쨌든 백상도에게 충분한 효과를 거둔 셈이었다. 아니, 백상도는 그 외숙의 기대를 앞질러 아예 마을을 들어가보지조차도 않았다. 그도 물론 처음엔 뜨거운 불덩이를 삼킨 듯한 분노에 온몸이 이글이글 끓어올랐다. 마을 사람들에 대한 원한과 복수 심으로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부드럽고 완곡한 그 외숙의 충고의 소리조차 제대로 들어오질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부대를 나설 때부터 비슷한 예감을 지녀왔던 터 였다. 그 예감이 그의 가슴속에서 끈질긴 복수의 불기름이 되고 있었다. 외숙에게선 그의 예 감을 사실로 확인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절망적인 사실의 확인은 그의 복수심에 마지막 불기름을 털어부은 셈이었다. 외숙의 조심스런 당부의 말이 끝났을 때쯤엔 그는 오히려 그 분노와 증오심이 불기 잃은 화덕처럼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치고 멍한 표정으 로 뜻모를 고갯짓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 간곡한 외숙의 당부처럼 제정신을 놓치지 않으려 서가 아니었다. 잃어버린 정신을 되찾으려서도 아니었다. 그는 이제 제 속의 분노와 증오심 에 스스로 넋을 놓고 지쳐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모든 일이 귀찮고 두려워지기 시작 한 것이다. 외숙은 과연 사려깊은 어른이었다. 그의 육친들의 무고한 죽음은 눈먼 이 시대의 억울한 희생일 뿐 이유나 허물 따윈 없는 거라 했었다. 그 무지와 맹목의 굿판에는 죄과를 물을 자도 없다고 말했었다. 백상도 역시도 싸움터에서 그런 죽음들을 수없이 보아온 터였 다. 그 이유 모를 무조건의 확률놀음, 맹목과 무작위의 떼죽음의 순서들... 뿐더러 증오나 복 수심으로 말하면 그도 이미 죽일 만큼 죽여온 터였다. 하면서도 거기 별반 그럴만한 이유를 못 느껴온 터였다. 오히려 진저리가 쳐지는 일이었다. 고난과 역경 속에 그의 신앙심으로 다 져온 지혜였을까. 외숙은 보지 않고도 똑같은 죽음의 값과 그 풍속을 말하고 있었다. 백상도 는 이제 한마디로 모든 것이 귀찮고 부질없어 보였다. 더 이상 사람의 피를 보기가 싫었다. 그러나 그가 마을을 들어갔다 하면 뒷일을 자신도 장담할 수 없었다. 가족들의 유해도 수복 직후 외숙이 젖은 구덩이 속을 수습해다 10리 밖 선산 쪽에 안장을 끝내놓은 터라 했다. 마 을엘 들어간다면 그에게 남은 일은 다시 한번 더러운 피를 보는 일뿐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두려웠다. 마을을 들어갈 수도,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외숙과는 뜻이 훨씬 먼 곳에 있었지만, 막다른 악에는 용서나 복수보다 그 악을 외면하고 지나쳐 버리는 것이 더 나은 책벌이라는 생각도 어슴푸레 지나갔다. 하여 백상도는 둘이 함께 그 선산 쪽 식구 들의 새 무덤들만 둘러보고 그리고 옛집과 전답들의 뒷정리를 외숙에게 당부하고(외숙의 의 향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그 길로 발길을 되돌려 휴가를 중단하고 돌아오고 만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땐 그 외숙조차도 굳이 그의 발길을 붙잡으려질 않았던 셈이었다. 외숙으로서도 그게 외려 안심이 되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외숙은 그때 돌아서는 조카에게 마지 막으로 당부해 온 말이 있었다. -이렇게 떠나 보내기가 가슴이 아프다만, 네 생각이 그렇다니 말릴 수도 없구나... 이젠 내 독자사유로다가 네 의가사 제대를 서둘러 보겠다만, 부대로 돌아가서도 남은 기간 모쪼 록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리고 지내다 나오거라. 이제는 가문에 오직 너 한 사람뿐이다. 더욱 이 그간에도 사지에 무사히 몸을 잘 보전해온 네가 아니냐. 너 하나라도 목숨을 부지케 한 것은 그럴만한 섭리가 있어설 게다. 그 뜻을 깊이 생각하고 섭리를 중히 여겨서, 어렵고 힘 이 들면 그 뜻과 섭리의 큰 힘을 의지로 삼는 길을 갈 수도 있을 게다... 안도와 불안이 엇 갈린 표정 속에 외숙이 그에게 당부해 온 말인 즉, 백상도에게 그 큰 섭리의 힘에 의지할 신앙의 권유였다. 그리고 드러내고 표현은 안 했지만, 그 신앙이란 바로 자신이 몸담아온 불 가에의 구연을 뜻했을 터이었다. 어쨌거나 당시의 백상도로선 전혀 귀에 깊이 머물 만한 소 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이윽고 귀대를 하고 나서였다. 부대에서 며칠 할 일없이 뒹굴다 보니, 그는 그 외숙의 당부의 말들이 머릿속에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싸움터에서나 고향골에서나 그 하나 목숨이 용케 부지된 것은 아닌게아니라 무슨 기적처럼만 여겨졌다. 뿐더러 그것은 진작부터 강 군목이 그의 주님의 은총과 축복의 놀라운 증거로 삼고자 해온 바였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역시 사람의 일에 대한 생각이 비슷비슷한 것인가. 외숙의 그 섭리의 큰 힘이라는 것 역시도 강 군목의 믿음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역시 자 기 생명의 주재자가 아니었다. 그 어차피 기적이라는 말로밖엔 설명이 될 수 없는 끈질긴 행운의 생존 뒤엔 과연 어떤 보이지 않는 뜻과 힘의 움직임이 있는 듯만 싶었다. 그는 이제 차라리 그 뜻과 힘에다 자신을 통째로 내맡겨버리고 싶어진 것이었다. 하여 그는 이후부터 새삼 제 발로 연대의 강 군목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런 백상도의 태도의 변화에 강 군 목은 그 백상도에게 그의 고향에서의 말 못할 불행까지도 주님의 오묘하고 깊은 뜻으로 고 맙게 받아들이며, 그것이 오히려 구원의 증거됨을 믿고 기다리기를 간절히 권유했다. 그리고 백상도는 그런 강 군목의 간절한 기도 속에 전에 없이 마음으로부터의 위로를 느끼기 시작 했다. 그의 삶에 비로소 어렴풋한 소망과 믿음의 불빛줄기가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외 숙이 그에게 조심스럽게 당부한 큰 섭리에의 인연이 이를테면 그렇게 불가 대신 가까운 강 군목 쪽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강 군목이 그에게 거꾸로 끈질기게 구해오던 그 주님 의 축복과 은총의 기적은 그 외숙의 먼 소망에 힘을 입어 비로소 증거를 보이게 된 셈이었 다. 그러니까 그 두 해 뒤, (고향 쪽 외숙의 진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의 만기제대 시기에 가까워질 때까지도 의가사 사유의 단기제대 혜택이 주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 그 단기 제대 혜택이 내려진 것은 만기제대 시기를 겨우 다섯 달 정도 밖에 남기지 않고 있던, 그리 고 어차피 미구에 휴전의 성립을 보게 되어 있던 그 53년 초여름녘이었다.) 백상도가 아직 도 그 두배나 넘게 계속된 위험스럽고 지루한 군복무 기간을 마치고 그런대로 무사히 군문 을 나오게 된 것도 어찌 보면 그 강 군목과 백상도 자신의 진심어린 기도에 힘입음이 컸다 할 수 있었다. 그 2년간도 백상도의 처지엔 수많은 위험이 닥쳐들곤 했지만, 그리고 이후부 터 백상도의 행동거지엔 그닥 악발기를 읽을 수가 없었지만, 그는 그 강 군목과의 심심찮은 기도 속에 큰 불행을 모두 잘 피해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론 아직 그 백상도 앞에 믿음의 문이 분명히 열린 것은 아니었다. 거기서도 사정이 좀 달랐더라면 그는 그 아비규환 의 북새통 속에서 제 목숨 하나 무사히 구해 나온 것으로 더 이상 하느님이나 그를 위한 기 도 같은 건 생각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와 그 강 군목 사이엔 거기서도 또 다른 인 연이 이어져 나갔다. 강 군목 말마따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예정이었는지 모른다. 그 의 주님은 백상도가 그의 기도와 가호 속에 자신의 목숨만을 구해 달아나게 해주질 않았다. 제대를 하고 나도 그는 이제 어디 마땅히 돌아갈 곳이 없었다. 고향 마을은 이미 외숙이 가 대를 다 정리해버린 터인 데다, 그로선 발길을 들여놓기조차 저주스런 곳이었다. 게다가 그 사이 외숙네마저도 마을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갈 수가 없다며 두 집 가산을 몽땅 다 정리하여 읍내로 나와 있었다. 얼마동안은 거기서 외숙네와 함께 지낼 수도 있었지만, 그 렇다고 그저 길게 눌러앉아 지낼 처지는 못 되었다. 고향동네가 그리 먼 곳도 아니려니와, 이제는 그 외숙의 몸에 배인 은은한 불가의 냄새도 외려 어딘지 거북스럽게 느껴졌다. 외숙 이 그의 낌새를 알아차리거나 그것을 깊이 상관해 올 바는 아니지만, 백상도로선 지레 배신 자처럼 그 외숙이 송구하고 거북스럽게 느껴지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이래저래 그는 앞일 이 막연해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런 백상도의 처지를 강 군목이 제 일처럼 환히 다 헤아 리고 있었다. -당신은 오늘부터 더 넓고 따뜻한 주님의 참사랑의 길을 떠나기를 바라겠소. 연대까지 부러 제대 출발의 소식을 알리러 갔을 때 강 군목이 그에 앞서 건네 온 말이었 다. 하고 나서 그는 미리 기다리고 있었기라도 하듯이 서울 동남쪽 소재의 <씨알성서학교 >(이 성서학교가 바로 그 이듬해에 정식 신학교로 발전 개편된 요한신학교였다) 소재와, 그 학교의 담임목사의 이름을 적어 담은 봉투 하나를 건네주며, 다시 진심어린 충고를 덧붙였 다. -아마도 당신에겐 이 사랑의 길만이 이 싸움터에서 당신의 생명을 지켜주신 주님의 가호 와 은총에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오. 그것은 또한 그 높은 분의 뜻이 당신에게 큰 영광을 이루시게 해드리는 당신의 마땅한 의무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길이 쉬운 것은 아니지요. 하 지만 마음을 지어먹기에 따라선 그 길을 얼마든지 즐겁게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럼 여기... 일후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당신에게 그 길을 인도해줄 안내자의 소개장 이오. 그의 의향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더욱이 당사자인 백상도의 동의 따위는 의심할 여지 도 없다는 듯, 모든 걸 미리 다 정해주고 나아가는 식이었다. 그리하여 백상도는 아닌게아니 라 부대를 떠나온 길로 곧 서울 교외의 그 씨알성서학교부터 찾아갔다. 그로서도 당장엔 그 밖에 다른 길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해 가을, 고향읍 외숙네에게서 몇 달 간 심신을 쉬고 난 다음엔 다시 그 학교로 담임목사를 찾아가 바로 그 이듬해부터 정구 대 학과정이 인가된(3년제 중학 졸업뿐인 그의 학력미달 상황은 그 인가 시기의 덕을 본 셈이 었다. 뒤에 알고 보니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었던 듯한 데가 있었지만) '요한신학'의 한 만학의 신학도가 되었다. 백상도가 교회와 인연을 맺고 그 높고 큰 '섭리자의 뜻'을 좇게 된 저간의 경위였다. 그는 이후부터 나이는 좀 늦었으되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여호와 하나님의 자랑스런 전사 (종이나 사도 대신 노인은 유난히 이 말을 즐겨 썼다)로서의 믿음을 쌓아갔다. 그간의 무명 과 방황을 만회하기 위하여 그 믿음과 소양을 쌓는 일에 휴일도 방학도 가리는 일이 없었 다. 시내에서 20여 리나 멀리 격리되다시피 한 숲속의 학교가 저절로 외출을 어렵게 하고 있어서 백상도에겐 그것도 일조가 되어준 셈이었다. 그런데 불철주야 그런 식으로 눈코 뜰 새 없는 한 해를 보내고 나서였다. 첫 겨울방학을 맞아 모처럼 가족들의 산소도 돌아볼 겸 한 며칠 고향읍내로 외숙부네를 찾아가 지내고 있는데, 하루는 웬 낯선 남자 한 사람이 그 를 찾아왔다. -일면식도 없이, 미리 양해를 구하지 않고 이렇게 불쑥 찾아와 미안합니다. 용서하십시오. 나이가 한 마흔 살 가량 되어 보이는 그 낯선 남자는 먼저 그렇게 양해를 구한 뒤, 자신은 백상도가 재학하고 있는 신학교와 얼마간의 비공식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지금은 어떤 도회 변두리 교회의 목회를 맡아보고 있노라, 스스로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하였다. 하지만 다 만 그뿐, 사내는 이후 돌아설 때까지 더 이상의 자세한 신분상의 이야기나 거기까지 어떻게 백상도의 소재를 찾아왔는지에 대해선 일체 속시원한 언급이 없었다. 하지만 백상도는 뒷날 참으로 오랜 세월을 두고 그가 왜 그토록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기를 꺼렸으며, 그의 소재를 찾아온 경위조차 끝내 밝히려지 않았는지, 그 까닭을 스스로 깨우쳐 이해하게 되었다. 당시 로선 그가 잘 알아차릴 수 없었지만, 사내의 돌연스런 방문을 계기로 백상도는 이후 그 자 신의 끝없는 잠행생활이 시작되기에 이르렀고, 그 길로 긴 잠행을 통하여 그러한 침묵이 그 에게 얼마나 엄중한 계율인가를 알게 된 것이었다. 사내는 한마디로 백상도의 그간의 믿음 을 시험하고, 그의 영혼과 육신을 통한 진정한 접신에의 문을 열어준 새 세례자였다. -내 물음에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면 고맙겠소. 그는 아직도 좀 어리둥절해 있는 백상도에 게 다짐을 하고 물었다. -당신은 그새 혹시 신학교 입학을 후회해본 일이 없었소? 이 1년 동안의 공부의 성과를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오. 당신은 진실로 우리 주님의 평생의 종으로 신명을 다 바칠 각오가 되어 있소...? 그리고 그는 그 백상도와의 진지하고 세심한 문담 끝에 마지막으로 은근히 이 렇게 물었다. -알겠소. 미리 짐작을 하고 온 일이지만, 당신의 믿음은 역시 소망스럽기 그지없소. 내 이 렇게 당신을 찾아온 보람을 느끼겠소... 그런데 거기서 더 굳건하고 소망스런 믿음의 길을 위해 별도의 기도과정을 들어가볼 생각은 없소? 당신에게 앞으로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말이오. 사내의 권유인즉, 알려져 있진 않지만 학교에 별도의 신앙심 단련을 위한 기도과정 이 있는데, 그 과정을 한번 밟아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백상도는 물론 사양할 이유가 없 었다. 그는 이제 주님의 종의 길을 택해 나선 터이었고, 그의 학교과정이 그 주님의 옳은 소 명을 구하는 길이라면, 하루라도 그 길을 서둘러 택해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이 미 리 고려되었는지 모르지만 입학자격 학력마저 모자랐던 터에 그는 오히려 남다른 행운을 얻 게 된 기쁨으로 두말없이 사내의 제의를 수락했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뒤늦게 그 별도 기 도의 과정이 어떤 것인지를 사내에게 물었다. 그런데 사내는 거기까지도 이미 다 예상을 하 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사내는 이제 그쯤 백상도를 안심한 듯 그 학교와 별도 과정에 대하여 백상도가 일찍이 짐작조차 못해온 놀라운 사실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건 지금 선생한테밖엔 절대 비밀사항으로 되어 있는 일이오만, 우리 학교에는 오래 전 서부터 그같은 비밀기도 과정이 마련되어 왔었지요... 백상도를 느닷없이 '선생'으로까지 불 러가며, 그리고 그 '우리 학교'라는 말로 그 학교에 대한 자신과의 관계를 묵시적으로 은근 히 확인해 보이면서 사내가 그에게 귀뜀해준 사실에다, 뒷날 백상도 자신이 직접 겪어낸 경 험들을 종합해보면, 그 학교의 별도 기도과정이란 내용이 대략 이러했다. 백상도의 학교에는 애초 그 씨알성서학교로의 개교 당시부터 복음연구와 전파를 위한 두 가지 다른 신앙 연수과정이 있어왔다. 하나는 백상도가 입학해 다니고 있고 그것이 학교 공 부의 전부라고 믿고 있는 정규과정이고, 그에 대해 다른 하나는 보다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복음전파와 그 증거를 위한 특별수련 과정이었다. 다시 말해 후자는 정규과정 학생들 중의 몇몇을 골라서 형식상으로는 그 학교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이 별도 관리되어 나가는 비정규 적 비밀 과정이었다. 그 구체적인 관리 운용 방법은-, 학교에 신입생이 들어오면 우선 일정 한 정규 실습기간을 거치게 한 뒤, 눈이 보이지 않는 몇몇 관리자들의 적절한 평가에 의하 여 그 중의 몇 사람이 그 별도 과정의 대상자로 선발된다. 그리고 그렇게 선발된 사람은 제 적이든 자퇴든 정규과정 학생들의 주의를 끌지 않는 방법으로 학교를 물러나 특별과정의 비 밀연수기로 들어간다... 하지만 정규과정을 물러난 사람이 비밀리에 밟게 되는 그 별도의 과 정이란 어떤 일정한 연수기간이나 학과목이 미리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교수나 교 사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필요한 만큼의 기간 동안에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을 찾아 만나서 자신의 신앙생활에 필요한 교리를 익히고, 그 교리로써 자신의 신앙심 을 다져 나가는 일종의 자율적 수련기간이었다. 다시 말해 어느 누가 그 별도의 과정을 들 어서게 되면, 그는 그때부터 일체의 행동을 스스로의 믿음과 양심에 따라서 오직 자기 한 사람의 책임 아래 비밀로 행해 나가야 하였다. 학생수나 연수과정들이 정규의 학교과정으로 불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거기서 한번 선발이 되고나면, 누구나 학교에서 그 이름까 지 지워져 다시는 옛날로 돌아올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그는 일테면 그것으로 학교와는 영영 그만이며, 그런 사정은 그가 언젠가 과정을 모두 끝내고 났을 때도 마찬가지로 되어 있었다... 그건 아무래도 정상적인 학교과정이기보다 오히려 그 마감이요, 끝인 셈이었다. 하지만 백상도는 그 당장 그처럼 자세한 사정까진 알지를 못했다. 사내는 그 당장 백상도 의 결심에 필요한 몇 가지 사항 외에 더 이상의 깊은 성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데다 사 내는 백상도의 결심을 당장 그날로 받아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백상도의 조급스런 결 정에 오히려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마음이 끌리더라도 거기서 당장 정규과정을 그만두려지 말고, 남은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우선 그에 대한 자기 고백의 기도부터 시작해보라는 권고 였다. 그래저래 백상도는 그 당장엔 무슨 큰 마음의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래 그 자 신의 열망이나 기대에 비해서도(앞으로 걷게 될 그의 멀고 험난한 삶의 역정에 비해서는 더 욱) 비교적 단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의 새로운 수련의 길을 들어설 수가 있었다. 그는 일단 그 자기 고백의 기도부터 시작해보기로 하고, 며칠 후 사내가 그 기도의 장소로 그에 게 소개하고 간 수원 근처의 한 기도원(기도원의 이름이 <밑강물기도원>이었다)으로 그의 기도의 인도자를 찾아 갔다. 그러나 자신은 알고 있지 못했지만, 그것은 실상 백상도의 운명 에 마지막 결정이 되고 있었다. 아니, 사내가 그 앞에 나타났을 때 백상도의 운명은 그때 이 미 모든 것이 결정나 있었던 셈이었다. 그 앞엔 이미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이 미리 다 예 정되어진 격이었다. 백상도는 그로부터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손들의 움직임에 의해 그 길 을 계속 떠밀려가게 된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 밑강물기도원을 찾아간 백상도는 그로부터 즉시 그 자기 고백의 기도를 시작 했다. 그리고 그는 이후 1년 동안에 자신이 평생동안 해야 할 기도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행 하였다. 기도라고 하지만 그것은 두 손 두 무릎 모으고 인간의 죄를 주 앞에 비는 식이 아 니었다. 여호와 아버지께 자기 죄를 고하고 사함과 계시를 구하는 데에도 규범적인 격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다도 그가 살아온 생애 가운데서 사랑이나 혹은 정의 같은 것들과 상관하여 진실로 자신의 몫으로 남기고 싶은 것이 어떤 것들인가를 찾아내는 일이었 고, 또한 그 사랑이나 정의와 관련하여 자신의 삶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무가치한 것이었는 가를 스스로 깨달아가는 자기 고백의 과정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또 볼품없는 자신의 과 거를 버리는 과정이었고, 세속적인 인간 욕망의 옷을 벗는 일이었으며, 그 자기 버림의 과정 을 통하여 새로운 사랑과 정의에의 각성을 스스로 이루어 나가는 과정이었다. 일정한 격식 이 없이 행해지는 그의 기도는 그러므로 그것을 받아주고 응답해줄 주재자도 없었다. 그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높은 분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상대로 한 것이었고, 그러므로 그 기 도의 응답자 역시도 하느님이 아닌 자신이 되어야 하였다. 어쩌다 그의 기도를 거들어준 것 은 오직 그가 미리 소개를 받고 온 그곳 김 목사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때로 그 자기 기도의 방향이나 명제에 대해서, 또는 그가 행할 기도의 내용에 대해 서 이따금 그 김 목사의 조언을 구하곤 하였다. 아니 그의 고백과 버림의 기도의 첫 인도자 도 사실은 마로 그 김 목사 자신이었다. 김 목사는 말하자면 그처럼 유일무이한 그의 기도 의 조력자였고, 그와의 의논이나 토론의 기회도 그만큼 많았던 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도움 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도의 명제나 방법에 대한 그와의 적지 않은 토론에도 불구하고 실제 기도의 과정이나 그 어려움은 끝끝내 백상도 자신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하 지만 그는 한번 기도를 시작하자 이내 그 과정 속에 몰입해 들어갔다. 방학이 끝나고 이미 개학시기가 되어서도 그냥 끈질기게 기도를 계속해갔다. 이미 그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듯 학교에서도 이미 누구에 의해선지 그의 학적부의 이름이 지워지고 말았지만, 그로선 그런 사실도 알지 못한 채였다. 그렇듯 그가 먼저 자기 고백과 버림의 기도를 통하여 혼신의 힘 으로 안고 싸운 명제는 이른바 '실천선'과 '절대선' 이었다. 모든 기독교의 교리나 진리는 복음서의 말씀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복음서들의 말씀의 기초는 우리 인간의 구원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로 인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지고 한 자기 희생의 사랑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사랑이 복음서상의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자기 희생적 실천의 덕목임을 증거함인 것이다. 사랑의 말씀이 하나님의 몫이라면, 그 말씀과 사랑의 참값을 세상 가운데에 실천으로 드러내 증거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었다. 복음서의 사랑은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의 실천과정에 참값이 있음이었다. 그러므로 세상 가운데에 사랑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자들은 말씀을 전하는 일보다 자신이 말씀 가운데서 그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으로 드러내고 증거해 나가야 하였다. 그것이 바로 '실천선'의 진실 이었다. 한마디로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자들은 그 스스로 한 알의 사랑의 씨알이 되어야 하였다. 씨알을 나눠 주는 사람보다도 그 자신 한 알의 씨알로 썩어가 내일의 들판 을 푸르게 해야 하였다. 주님의 영광과 사랑을 그 실체로써 증거해야 하였다. 거기엔 물론 때와 장소가 가려져서도 안 되었다. 씨알들이 묻힌 땅은 어디나 가야 하였다. 가서 함께 묻 히고 함께 우거져야 했다. 밝은 햇빛 속에선 씨알이 썩기 어려웠다. 어둡고 습기찬 곳일수록 썩기가 더 쉬웠다. 더욱이 그런 곳일수록 사랑의 씨알이 떨어져 묻힌 일이 드물었다... 가난 하고 더러운 곳, 슬프고 억울한 곳, 불의하고 난폭한 곳, 그런 곳일수록 한 알의 작은 사랑 의 씨알이 더욱더 소망스런 곳이었다. 그 사랑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주님의 전사라면 마 땅히 그런 곳을 앞서 찾아가서 고난과 어려움을 함께 해야 하였다. 그것은 물론 보통 어려 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말로만 행해져 오던 종래의 복음전도 방법이 아니었다. 복음전도라기보다 아예 세상 가운데로 함께 섞여 들어가 사는 일에 가까웠다. 설교도 교회 도 교직도 필요없었다. 교회나 교직 대신 자기 지움의 사랑과 희생의 결단이 필요할 뿐이었 다. 백상도는 그 끊임없는 기도와 고백으로 스스로 그 결단에 이르러야 하였다, 자신을 온전 히 버리는 일도 어렵거니와 그 실천적 자기 희생의 사랑은 각오만으로는 될 일이 아니기 때 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차라리 꽃길이었다. 보다 더 막막하고 험난스런 길은 그 '절대선'의 영접과 순응의 계율이었다. 주님의 전사로서 백상도가 이 땅 위에서 스스로 실천하고 증거 해 보여야 할 사람과 정의는 다시 말하거니와 복음서 말씀들의 내용 그 자체였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더하고 덜함, 의심하여 바꾸고 새로이 함이 있을 수 없는 절대 진리였다. 이른바 주님 몫의 '절대선'이었다. 거기 비하여 사람의 몫이란 오직 그 사랑의 말씀을 실천하고 증 거하는 것뿐이었다. 더욱이 그러한 사랑의 드러냄이 자신을 위한 증거가 되어서는 안 되었 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과 봉사에 유형무형의 보상을 소망한다. 인하여 그를 위해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서둘러 드러내고 싶어하고, 때로는 과장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참선행 은 참사랑이 그러하듯 보상을 구하거나 탐하려 들지 않는다. 인간에게서는 그것을 구하거나 재촉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사랑의 힘을 시들게 할 뿐 아니라 과장과 거짓과 속임수를 낳게 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참되고 값진 사랑은 주 하느님께서 밝히 알고 계시며, 그분으로 부터 가장 크고 빛나는 보상을 받는다... 사람들은 그의 사랑과 선행으로 자기 자신을 증거해서는 안 되었다. 다만 그의 주님의 사 랑만을 증거하되, 그것도 자신의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되었다. 그 사랑이 다만 당신의 역사로 이루어지고, 당신의 영광으로 나타나게 해야 하였다-. 사람들은 그 일을 오직 주 하느님 한 분께 증거할 결단을 지녀야 하였다. 그는 오직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날, 그분 앞으로 나아 가 제 일을 고하고 그분의 심판을 기다려야 하였다. 그날까지는 제 일을 스스로 심판해서는 안 되었다. 드러내 증거하고 보상을 구함은 스스로 제 일을 심판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거짓 으로 주님과 자신을 속이려는 일일 뿐 아니라, 주님의 권능을 욕되이 넘보려는 짓이었다. 심 판은 오직 주님만의 권능이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행하라 하였다. 오로지 그분의 심판날을 참고 기다려야 하였다. 백상도는 한마디로 그 세상 가운데서 주님의 사랑 을 행하되, 스스로 비밀로 행해 나가야 하였다. 드러내 증거하거나 대가를 구함이 없이 침묵 속에 숨어 행하다 주님 앞으로 가야 했다. 그것이 바로 '절대선'에의 길이었다. 그럼으로써 그의 사랑 또한 인간의 심판을 떠난 주님의 사랑의 역사, 그 절대의 섭리의 일부가 될 뿐더 러, 그가 누릴 가장 은혜스런 보상이 되는 것이었다. 참으로 힘들고 막막한 길이었다. 그것 은 차라리 절망의 벽이었다. 하지만 백상도는 끝내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믿음 속으로 안아 들일 수 있었다. 자신을 버리고 오로지 주님의 이름없는 종으로서 당신의 사랑의 역사만을 행해 나갈 자신의 앞길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힘을 얻은 것이었다. 밤을 세워 가며 계속된 김 목사의 말 가운덴 씨알이나 밑강물, 세례자 요한의 인용이 특히 빈번했다. 씨알의 비유는 내일의 생명과 그 영광을 위한 자기 희생의 사랑을 뜻하거니와, 밑강물의 비 유에도 그 비슷한 사랑의 힘이 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강물의 흐름을 눈에 보이는 겉모양새로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흐름새일 뿐 더 많은 강물은 수면 아래 로 보이지 않게 흐른다. 수면의 흐름새는 그 밑흐름에 얹혀 가는 것일 뿐임에 비하여, 보다 더 힘있는 강물의 주류는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깊은 강심 속의 밑흐 름 쪽인 것이다. 세상의 움직임이나 흐름도 마찬가지다. 교회까지를 포함한 세상 일들도 흔 히 남 앞에 나선 몇몇 사람들의 지혜나 힘으로 이끌려 나가고 있는 듯 싶어 보이지만, 그것 을 움직여 나가는 본바탕의 힘은 그보다 이름없고 보이지도 않는 세상의 수많은 인총들의 복판을 흐르고 있는 것일 때가 허다하다. 세상의 무수한 인총들 속에 섞여 그 속에 이름없 이 함께 흐르는 힘, 크고 깊은 흐름이면서 눈에 띄지 않는 힘, 그 밑 강물처럼 깊은 힘의 흐 름-, 주님의 사랑도 그 인자들을 통하여 그런 침묵의 힘으로 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연유로 김 목사는 자꾸 그 세례자 요한을 누구보다 위대한 지상의 성자로 숭배했다. 그리고 그의 외로움과 영광을 보이려 백상도 앞에 그의 생애를 읊어주곤 하였다. -세례 요한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광야에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따르 며 당신을 이스라엘의 구세주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증거하 신 바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통하여 오직 뒤에 오실 참구세주 그리스도를 증거하셨을 뿐입 니다. 그리고 그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셨을 뿐입니다. -뒤에 오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껜 그 백성들의 엄청난 박해가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그 러나 세례 요한님께서는 그 박해를 크게 경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선 그 백성들의 박해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끔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박해를 예수 님이 아닌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 실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구세주라 했을 때, 그렇다 내가 이스라엘의 왕이다, 한마디만 하셨으면 그렇게 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해서 말하지 않았습니 다. 그는 그 사람들의 소망을 물리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증거하셨습니다. 왕 으로 나아가는 그 박해의 제의를 스스로 사양하신 것입니다. 오직 그 자신만이 그것을 알고 거기서 자신을 바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날에 겪으신 외로움과 오늘의 영광이 어 떠합니까. 그는 과연 자신을 증거하지 않은 그 외롭고 단단한 침묵(말없음이 아니라 자신을 증거함 이 없이 주님 뜻만을 따르려는 결의로서의)의 생애로 인하여 오늘은 그 김 목사의 교회들에 서 지상의 성자로 경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백상도는 그 밀알이나 씨알, 밑강물 같은 말들이 그의 주변 학교나 교회들의 이름으로 많이 택해지고 있는 것도 전혀 우연한 일 이 아닌 것 같았다. 더욱이 서울의 요한신학교의 이름이 성자 요한이 아닌 세례자 요한에 근거했던 사실도 필경은 그와 어떤 연관이 있을 일일 터였다. 하지만 역시 그의 믿음과 자 기 결단의 힘은 그 끈질기고 고통스런 기도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기도야말로 주님의 말씀을 옳게 만나고 자신의 믿음을 반석처럼 굳게 해나가는 참지혜의 길이요, 용기 의 원천이었다. 그는 실상 그 동안 영혼의 눈빛이 흐려지고 결심이 흔들리려는 위험한 고비 를 수없이 겪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광야를 헤매는 세례자 요한의 외롭고 고통스런 기도로써 그같은 위기를 넘어서곤 하였다. 기도만이 주님의 참뜻을 보게했고, 기도하는 자만 이 자기 참음 속에 먼 뒷날의 심판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일견 신성과 인간성과의 싸 움과도 같은 그 기나긴 1년간의 기도 끝에 백상도는 드디어 그 아집과 무명의 자기 껍질을 벗어던지고 주 그리스도의 참사랑의 전사로서, 이른바 그 실천선과 절대선에의 힘든 길을 마음속에 굳건히 닦아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아직 그의 기도가 모두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1년간의 기도과정이 끝나자 즉시 또 다른 교회의 기도원을 찾아가, 거기 서 다시 새로운 기도를 시작해야 했다. 이번에도 역시 기도의 명제는 실천선과 절대선에 관 한 것이었지만, 그 시각과 방법을 썩 달리한 것이었다. 앞서 1년간이 그 실천선과 절대선의 이해를 통한 자아탈피와 각성, 결단의 과정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그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궁 구, 자신의 삶 속에 추체험시켜 나가는 단련과 습합의 기도과정이랄 수 있었다. 그는 그러한 잠행과 기도생활을 이후 다시 1년 가까이나 계속했다. 이리저리 교회와 기도원들을 여섯 곳 이나 계속 바꿔 옮겨다니면서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거기까지 이끌어온 보이지 않는 힘과 조직 그리고 자신의 운명의 변화에 대하여 새삼 놀라운 각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는 이제 다시는 옛날의 학교로는 돌아갈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옛날의 자신으로도 돌아갈 수가 없었다. 기도 기간이 끝나면 그가 살아온 과거의 삶과는 일체의 인연을 끊어 없애고 새로운 이름의 새로운 인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그는 일체의 복음전도 행위를 일생을 걸어 그의 새로운 이름으로 혼자 행하고, 이 지상에서의 삶 이 끝나야 그가 땅 위에서 이룩한 것들과 함께 주님께 나아가 당신의 심판을 구할 수 있었 다. 이 땅 위에 살아 있는 동안은 누구에게도 그것을 증거하려 해서는 안 되었다. 땅 위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증거하려 해서는 안 되고, 더욱이 그것을 자신의 이름으로 기억시키려 해서도 안 되었다.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역사만을 증거해야 하였 다. 어찌보면 그것은 그 주님에의 믿음을 위하여 인간에의 믿음을 버리는 일처럼도 보였다. 자신의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증거할 수 없고,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도 없음은 곧 인간에의 길을 닫아버리는 것뿐 아니라, 바로 그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인간 자체를 부인하는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것이 진정 인간을 위해 행하고 세상을 움직여 나가는 정결스 런 힘으로, 그 인간의 삶의 마당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것은 누구보다 세례자 요한의 길 을 숭상하고 그것을 전도의 교리로 삼고 있는 이들 교회(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교단이라 할 수 있었다)의 절대계율이었다. 그런데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를 거기까지 이끌어온 그 눈에 보이지 않은 조직과 힘의 움직임이었다. 그 조직과 힘의 움직임은 참으로 은밀하고 정확했 다. 신학교에서 그가 이 별도과정의 대상으로 선발되고 그 기나긴 기도과정을 거쳐 비로소 주님의 한 소망스런 전사로 길러지기까지는 그를 뒤에서 끊임없이 이끌어온 보이지 않는 손 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가 선발된 과정에서부터 그가 그 동안에 만나고 헤어져 간 여러 교직자들, 학교와 교회와 기도원 사람들이 그 힘의 뿌리요 얼굴들일 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이 세상 곳곳에 널리 뻗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조직이나 힘의 얼굴 은 언제나 한 사람의 그것으로만 나타날 뿐 전체의 모습은 윤곽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얼굴과 얼굴 간에도 그리 긴 연결선이 없었다. 하나의 얼굴은 다른 한 얼굴과만 만나고 지 나갔다. 그리고 한번 지나간 얼굴은 다시 그 앞에 나타나는 일이 없었다. 맨 처음 시골 외숙 네로 백상도를 찾아와 그에게 이 기도의 길을 권했던 사내조차 그 자신밖에는 뒷일을 맡아 줄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그래 그도 다만 밑강물기도원의 소재와 그곳 김 목 사의 존재를 일러 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그도 그만이었다. 백상도는 이후 다 시 그를 만난 일도 만날 필요도 없었다. 그 잠행식 기도기간뿐 아니라 이후의 생애에서, 그 의 곁을 지나간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랬듯이 사내는 오직 그 한 번뿐의 역할로 다시 그 앞 에 얼굴을 나타낸 일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 배후는 실제의 조작이나 얼굴이 없는 어떤 힘의 움직임에 불과한 것일 수 도 있었다. 그러나 백상도는 그의 기도기간동안 그 움직임의 거대함과 완벽성 같은 것을 끊 임없이 느끼고 있었다. 기도를 시작한 지 반 년쯤 뒤에 자신의 학적이 이미 정리되어버린 사실을 전해 듣고 그것을 어슴푸레 알아차리기 시작했지만, 그런 힘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 는 그림자처럼 그의 주위에서 자주 느낄 수 있었다. 후일의 최병진과 유민혁 사건 비슷한 일들을 백상도는 이 무렵부터 이미 자주 보아온 것이었다. 백상도의 기도와 토론 동참자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교회나 바깥 세상일에 대해 은근히 정확한 예언을 보인 일이 많았다. 그 의 기도가 2년째 접어들고 있을 무렵, 한번은 그의 기도와 토론에 동참해오던 교회 장로 한 분이 당대의 세도가이던 정 모 현역군 소장을 심하게 매도해댄 일이 있었다. 불의한 권력을 함부로 휘둘러 이 나라의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히고, 세상을 악으로 병들게 해온 그 위인은 미구에 주님의 '불벼락'의 심판을 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인물은 몇 달이 못 가서 자기 집 앞 골목에서 불의에 그 부하의 총질을 받고 숨져갔다. 다른 한번은 정치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그쪽 감각도 꽤 예민한 목사님 한 분이 있었는데, 그 혈기방장한 젊 은 목사님은 당시 나라일을 마음대로 짓주물러대던 ㅈ당의 막강한 조직과 힘에 대항할 야당 세의 분열상을 늘상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당시의 야당세는 보수와 혁신에 신구와 남북의 여러 정파로 사분오열되어 있던 판이라, 이듬해로 다가온 ㅈ당과의 대권경쟁 전망이 거의 절망적인 상태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정계 일각에 범국민적 통합 야당으로서 의 ㅁ당의 창당이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외에도 일정한 교직이 없이 자기 기도에만 열 심이던 평신도 한 사람은 웬일로 저 남해상의 천질의 수용소(요양소라기보다) ㅅ섬의 비참 하고 열악한 관리 실태와 그 역질의 특징적 병리현상을 놀랍도록 깊이 통달해 있기도 하였 다-. 그런 일들은 마치 모든 세상일들을 미리 다 투시해보는 전지자의 은밀스런 예언행위와도 같았다. 그리고 다만 그 소망과 신통력의 행사뿐 아니라 자신들의 간여나 힘의 행사가 뒤에 서 조용히 이루어져 오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래 백상도는 때로 자신뿐 아니라 이 세 상 모든 일이 가시적 일상의 힘과 질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어 둠 속의 조직과 힘의 작용으로 움직여 나가고 있는 듯한 느낌에 스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해 하곤 하였다. 눈에 보이는 힘과 질서는 한낱 외관에 불과할 뿐, 세상을 움직여 나가는 참정 의와 진실의 힘의 근원은 오히려 지하의 어둠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렇듯 그 보이지 않는 힘의 움직임은 정계나 경제, 문화계 할 것 없이 교회 안팎으로 두루 깊숙히 스며들어 세상 을 은밀히 경륜해 나가고 있는 식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교 회였다. 백상도로서는 이때까지 상상조차 못해온 지하의 교회였다. 지상의 교회가 밝은 빛 속에 드러나 움직이는 교회라면, 이 힘의 흐름과 복음전파 활동은 그것을 밑강물처럼 떠받 쳐주고 있는 지하의 교회였다. 그리고 이 땅엔 그 두 교회가 서로 안팎의 힘으로 이어져 비 로소 주님의 온전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백상도는 이를테면 그 예상치도 못했던 기도과정을 통하여 비로소 그의 교회의 다른 한쪽을 보게 된 것이었다. 자유의 문(3) 그 길고 긴 백상도의 기도가 모두 끝난 것은 그로부터 다시 1년쯤이 더 흘러간 57년 초여 름녘, 그런저런 잠행과 극기의 세월 끝에 마지막 여섯 번째로 소개받고 간 어떤 시골농장 근처 교회의 늙은 장로님과 함께 21일간의 금식기도를 마치고 나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도가 끝났을 때, 백상도는 스스로의 굳은 신앙심에 의해서뿐 아니라, 그를 거기까지 이끌 어온 그 보이지 않은 지하교회의 움직임들에 의하여 완전무결한 새 교리와 계율들로 무장된 새로운 인간, 이를테면 시정의 필부들과 함께 스스로의 삶 속에서 그의 주님의 사랑과 복음 을 전하고 당신의 놀라운 역사를 증거해 갈 축복과 계시의 전사로 다시 태어났음을 깨달았 다. 자신의 신앙심과 신념에 대해서는 새삼 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 지하교회와 힘의 각성은 이제부터의 그의 삶이 어떠해야 하며 그의 복음사업이 어떠해야 하리라는 것을 스스 로 깨닫고 지켜 나가게 해준 것이었다. -나의 몸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요, 나의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 의는 의 가 아니다. 나는 나의 몸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나의 삶으로 의를 살아 아버지 하나님의 사 랑과 구원의 역사를 알리리라. 그리고 나는 나의 생애의 모든 행업을 오직 한 분, 나의 생명 과 삶의 주재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심판이 내리실 때까지 땅 위의 인 간의 이름으로는 누구의 증거도 구함이 없으리라... 마지막 기도가 끝나던 날, 백상도는 그 기도 가운데서 다시 한번 굳게 서약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는 자신의 삶이 이미 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약속받은 듯, 기쁨 속에 세상 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둘렀다. 아니, 그는 이제 그 세상 가운데로 자신이 섞여 들어가는 데 에도 별다른 준비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곳(그 농장과 교회의 장로님)을 떠나면서 그가 할 일은 다만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것들과 마지막 결별을 고하는 것뿐이었다. 그의 기도 가 운데에서 그간에도 끊임없이 그래 왔듯이 지금까지 지내온 그의 이름이나 삶의 내력들, 심 지어는 그간에 그가 거쳐온 교회와 기도원과 그곳 사람들을 포함한 기도과정 자체까지도, 그의 지난날의 삶 전체를 마지막으로 깨끗이 벗어버리는 것이었다. 그 일과 상관해서 장로 님도 다시 한번 냉엄한 당부의 말씀을 주셨다. -알고 계실 일이지만 내가 한번 더 당부를 드리겠소. 이제, 형제의 옛날 이름들일랑은 이 곳에 버려두고 가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제부터는 모든 일을 형제의 새 이름으로 혼자서 행 해 나가시오. ...우리에게 그 이름을 가져오지 마시오. 형제의 새 이름으로 행한 것들을 다른 형제들에게도 증거하려 하지 마시오. 형제가 행한 것은 이제 저 높은 분의 섭리와 역사의 한 부분이 될 뿐인 것이오. 우리는 누구도 믿음을 지니고 행해 나갈 뿐, 그분의 역사를 사람 의 이름으로 증거하려 해서는 안 되오. 나는 여기서 형제를 떠나 보내고 나면 나는 이미 이 곳에서 없는 것이 될 것이오. 이곳은 형제가 다시 돌아올 곳이 아니오. 밑으로 흐르는 강물 이 바다에 이르러 비로소 그 이웃을 만나듯, 우리가 우리의 이름으로 다시 만날 수 있는 곳 은 이 어려운 땅 위의 일들이 감당되고 났을 때 저 자랑스런 주님의 나라에서뿐인 것이오. 길이 아버지 하나님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기원하겠소. 그리고 형제의 일엔 늘 보이지 않는 다른 형제들의 뜻과 그들의 팔이 함께 하고 있음을 명심하기 바라오. 자 그럼 이제 형제가 떠나가야 할 때가 도래한 듯싶소... 사람의 길, 하늘의 길 2 노인의 이야기는 거기서 한고비를 넘기고 나서도 아직 한참 더 길게 계속되어 나갔다. 백 상도가 마침내 정완규라는 새 이름으로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전쟁의 혼란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세상은 신분의 위장에 그리 어려울 일이 없었다. 그 대신 마땅한 일자리를 구 하는 것도 그만큼 쉽지가 않았다. "난 우선 무엇보다 호구지책 마련부터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지요. 그것도 사람들 과의 접촉이 웬만큼 용이한 곳으로다 말이외다. 하지만 전란 뒤끝이 혼란스런 세상에서, 그 나마 신분마저 확실치가 못하고 보니 마땅한 일자리가 쉬웠겠소. 난 우선 더 넓고 사람 많 은 서울로 올라가 서울역 근처에서 지게꾼 노릇을 시작했다오. 그 시절 역이라면 어디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거니와 일대에 그대로 고여 눌러붙어 어려운 연명을 해나가 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백상도 노인은 이제 그가 정완규란 새 이름으로 세상 가운데서 행한 본격적인 활동을 털 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서울역 근처에서의 지게꾼 노릇을 그리 오래 계속하지 않았 다. 지게꾼 노릇으로는 자신의 호구지책조차도 어려웠거니와 역이란 원래가 사람이 늘 스쳐 흘러 지나가게 마련인 곳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늘 그의 주위를 흘러 스치고 지나 갈 뿐이었다. 역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랬고, 함께 지게 품팔이를 하고 지내던 사람들도 그 랬다. 거기다 껌팔이나 신문팔이 아이들처럼 얼굴이 제법 익어질 만큼 거기 함께 머물러 남 은 붙박이들은 그 생존이 오히려 곤욕의 수렁이었다. 그의 능력 안에 있는 사랑이나 정의 따윈 그림조차도 드리울 곳이 없었다. 거기서 그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꼴로 어물 어물 서성대고 있다가는 자신마저 그 수렁속으로 속절없이 녹아 가라앉아버릴 것 같았다. 그는 우선 자신부터 힘을 얻어야 하였다. "그는 오래잖아 그곳을 뒤로 한 채 남쪽으로 밤열차에 몸을 실었제..." 노인은 이제 그런 식으로 남의 이야기를 전하듯, 그간 정완규가 헤매 지내온 곳들을 몇 군데 소개해 나갔다. 뿐더러 이제 그 노인의 이야기에선 노인 자신이나 백상도의 존재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 었다. 노인 자신이 거기서부터는 정완규만을 계속 내세운 때문이었다. "그 정완규가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처음 찾아든 곳이 저 서남쪽 해안의 한 간척사업장이 었소..." 그런데 그게 그의 첫 시험의 자리로 예비되어 있었음인지, 정완규 청년이 찾아든 간 척장은 그 무렵에 마침 근처 마을의 토박이 가난뱅이들에다, 동란중에 북쪽 황해도 일대에 서 밀려 내려온 피난민 무리로 사업장 취업질서가 말이 아닌 곳이었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겠지만, 무엇보다 안타깝고 한심스런 취업 인부들이 일을 하고도 노임을 제 대로 못 받는 실정이었다. 공사판 안에는 취역 인력이나 회계 따위를 관리하는 사업소측 인 원과 바윗돌과 흙을 캐고 궤도차를 밀어나르는 현장작업 인원 이외에, 그 두 부류에 세력을 두루 침투시켜 갖가지 방법으로 작업 노임을 약취해 가는 폭력성 기생조직이 함께 하고 있 었다. 출역 인부들이 주로 가난한 현지주민과 전란에 지친 피난민들로 이루어져 있음에 반 하여, 폭력과 지략을 두루 갖춘 이 기생조직의 인원성분은 애초에 사업장 관리층을 따라 들 어온 외지 출신의 낭인배들이었다. 이들은 언제부턴가 사업주관 회사의 현장작업 관리인원 이 부족함을 기화로 그 현장사업소 관리책임자들과 결탁하여 노역인력 동원이나 노임지불 업무와 같은 사업장 관리권을 대부분 손에 넣고 있었다. 그리고 진짜 회사 사람들은 저만치 뒤로 물러서 있게 하고 공사 진행상의 업무의 대부분을 저희들 마음대로 좌지우지해 나갔 다. 출역 희망 인부수가 늘 필요 인원수보다 넘쳐남을 이용해 이자들은 그 모자란 출역 기 회 배정에 재량권을 마음껏 행사했으며, 그 출역 배정권 한 가지만으로도 현장 인부들은 아 무도 이들의 비위를 건드릴 짓을 하지 못했다. 그래 이들이 인부들을 상대로 자행해온 갖가 지 횡포와 비리의 목록들은 그저 원망으로나 넘길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위인들은 우선 노임 지불이 보름 만에 한 번씩 현금으로 계산되는 기간을 이용하여 터무니없는 선이자부의 돈표 매입장사를 하였다. 인부들이 하루의 일을 끝내고 나면 일당으로 주어지는 것이 출역 배정표에 감독인의 도장을 찍은 노임전표 한 장씩이었다. 하지만 당장에 밥도 먹고 술도 먹 어야 하는 공사판 인부들에겐 보름만큼 씩 돌아오는 현금 계산날짜를 참고 기다릴 수가 없 는 형편이었다. 조직 착취배들은 이를 이용하여 얼마간의 현금을 미리 마련해놓고 터무니없이 높은 선이 자율로 이들의 전표를 사들였다. 하루 3푼 정도의 선이자를 떼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니 보름씩이나 계산날을 기다려야 하는 전표는 거의 절반액에 가까운 선이자를 물고서 급한 현 금을 구하는 식이었다. 이자가 비싸다고 그짓을 마다할 수도 없었다. 비싼 이자 물기가 싫은 사람이라도 결국은 그 전표를 들고 밥집이나 술집으로 저들의 손아귀에 관리권이 모두 붙들 려 있었다. 현금이 아닌 전표 외상값은 같은 율의 선이자분이 깎이고 계산됐다. 그리고 그 전표들도 결국은 어차피 일당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술집과 밥집까지 용케 벗어 난 전표가 있어도 이번에는 또 노름판이 그것을 기다렸다... 어떤 식으로든 노임전표는 결국 일당의 손으로 넘어가게 마련이었다. 그것을 끝끝내 거부하거나 불평의 기미를 보이는 자에 겐 다음번 출역의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위인들은 그런 짓을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았 다. 지략과 폭력을 겸비한 일당으로선 실상 그럴 필요조차 없는 셈이었다. 그 위협적인 힘과 협잡질로 위인들은 그저 무엇이나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인 것이었다. 정완규는 그런 비리와 부조리 속에서도 한동안은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지냈다. 그로 선 우선 그런저런 세상 물정부터 배워야 할 처지인데다, 첫판부터 막바로 그런 상황을 만나 게 될 때에 대한 다음의 대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오래고 강건한 육신의 인부들조 차도 위인들의 횡포와 자신들의 피해엔 그럴 수 없이 길이 잘들어 있는 판이었다. 그런 터 에 섣불리 참견을 하고 나섰다간 제 코부터 먼저 깨져 쫓겨나게 될 형편이었다. 하지만 정 완규는 그 공사판을 찾아든 지 두 달쯤이 지나고부턴 사정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 완규는 이때부터 자신이 그 폭력과 착취조직에 두 발을 깊이 들여놓게 된 것이다. 다름아니 라, 그게 옛날 사선을 넘어 살아남을 수 있었던 투지와 2년여에 걸친 기도의 지혜로 얻어낸 방법이었다. "사정이 그런 곳이니 언제까지나 그저 눈을 감고 지낼 수만은 없는 처지였지. 하지만 정 완규에겐 방법이 없었어요. 일당의 엄청난 힘의 횡포 앞에 정완규 자신을 포함한 인부들의 처지는 순하게 길들여진 오합지졸 꼴이었으니... 그래 거기서 짜낸 지혜가 그 방법뿐이었지 요. 그리고 그가 그런 방법으로 거기서 행한 활동이란 긴말하지 않아도 실은 자명한 것이겠 고..." 하고 나서 다시 덧붙인 노인의 부연인즉, 어떤 옳지 못한 사태의 개선 작업은 그 바깥 에서보다 내부의 핵심에서 그 조직과 힘을 와해시켜 나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수가 있다 는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현명한 방법이었다. 개선이 필요한 쪽이 그것을 원하는 쪽보다 월등한 조직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에서라면 그것은 더더욱 지혜로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정완규가 거기서 그같은 방법으로 어떤 식의 활약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구 체적인 설명을 생략했다. 그 대신 노인은 그의 주님의 숨은 전사답게 정완규가 1년 동안 거 기서 거두게 된 성과의 하나로 그 조직의 우두머리 격인 '변 상사'(노인도 그 이름까진 잘 기억하지 못했다)라는 위인의 다분히 희극적인 변신의 과정을 소개해주었을 뿐이었다. "그 무렵에 마침 정완규의 간척장 일터 근처 마을에 신도수가 몇 명 안 되는 작은 교회 하나가 있었지요..." 여전히 그 젊은 정완규를 내세운 노인의 이야기-. ...그런데 이 교회로는 사변 직후부터 외국으로부터 보내온 난민구호품들이 적지 아니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 게 시골마을 교회까지 들어온 구호품이라야 대개는 그리 쓸모가 대단찮은 물건들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