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천국 이청준 문학과 지성사 사자의 섬 1 새 원장이 부임해온 날 밤, 섬에서는 두 사람의 탈출 사고가 있었다. 탈출 사고는 실상 새 원장에 대한 우연찮은 부임 선물이었다. 새 원장은 부임 인사를 하지 않았다. 탈출 사고의 경위부터 조사하기 시작했다. 병원에 새 원장이 부임해왔다. 혁명이 있고 나서 병원은 한동안 원장이 없이 운영되어 오고 있었다. 김정일 의료부장이 원장을 대신하여 두 달 가까이나 병원을 이끌어오고 있었다. 한여름 복더위에 시달리던 섬 거리가 시원한 바닷바람에 식어가고 있던 8월 하순 어느 날 저녁, 그러다가 문득 현역 의무 장교 한 사람이 이 섬 병원의 새 원장으로 부임을 해 온 것이다. 조백헌 대령. 햇볕에 그을어서라기보다 피부 색깔이 원래 좀 그래 보이는 거무튀튀한 얼굴에, 여느 사람들에게서보다도 푸른색 유니폼이 훨씬 시원스럽게 어울려 보이는 이 장신의 현역 군인 원장은 이날 저녁 그의 보좌관 한 사람과 섬 위로 첫발을 올려닫기가 무섭게 벌써 심상찮은 기질을 엿보이고 있었다. "저 사람들 다 뭐요?" "웬 자동찰 다 끌고 나왔소?" 선창까지 마중나와 있는 병원 직원들과 자동차를 보고는 못마땅한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대고 있었다. 영접 인사나 자동차는 끝내 거들떠보지도 않고 의료부장 한 사람의 안내를 받아 저벅저벅 병원지대로 걸어 올라가고 있는 그의 걸음걸이 또한 무뚝뚝한 관서 사투리의 억양이 조금씩 섞여나오는 말투만큼이나 퉁명스러워 보였다. 어딘지 만만치가 않아 보이는 원장의 첫인상이었다. 한데 그 새 원장은 병원 관사에서 하룻밤을 쉬고 난 다음날 아침 첫 출근을 하고 나서도 부임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건 물론 간밤의 탈출 사고가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건 관례상 새 원장이 알은체를 하고 나설 일이 아니었다. 부임 인사도 치르기 전에 일어난 사고에 대해 그가 무슨 책임을 느끼거나 수습을 서두르고 나설 필요는 없었다. 사고의 뒷마무리는 의료부장이나 과장급 선에서 적당히 사무 절차나 취해놓으면 그만이었다. 원장은 나중에 보고나 받고 지나가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를 않았다. 부임 인사도 치르지 않은 원장에게 사고 보고를 낸 것이 지나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은 어차피 그렇게 되어지게 마련이었다. 원장 출근 전에 벌써 지도소(병사 지대의 치안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옛 순시소의 개칭)로부터 사고 보고가 병원 본부까지 들어와 있었다. 보건과장 이상욱이 신생리 지도 분소로부터 사고 보고를 받아놓고 있었다. 신생리 남독신사 원생 두 사람이 밤새 마을을 빠져나가 바다를 건너갔다는 것이었다. 알만한 일이었다. 뒤늦게 출근한 의료부장이나 다른 간부 직원들은 새 원장이 부임 인사나 치른 다음으로 보고를 미루자고 했다. "우리끼리 우선 뒷수습을 지어놓고 보고를 나중에 드리도록 합시다." 하지만 보건과장 이상욱이 그걸 반대했다. 탈출 사고는 원장이 새로 부임해올 때마다 환자들 가운데서 잊지 않고 꼭꼭 마련해 바치는 첫 부임 선물이었다. 흐지부지 뭉개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 첫번 부임 선물을 대하는 원장의 반응이 보고 싶었다. "감출 필요는 없을 줄 압니다." "감추자는 게 아니라, 오늘은 원생들을 집합시켜서 취임 인사도 치르셔야 할 테니까 그런다음에나......" "있는 대로 보여드립시다." "이번 일이 이과장의 소관 사항인 줄은 알아요. 하지만 좀더 생각을 해보는 게 좋겠소." 작달막한 키에 성격이 지나치게 꼼꼼스런 이 피부과 전문의는 도대체 말썽이라곤 싫어했다. 원장이 공석중인 지난 몇 달 동안도 원장을 대신하여 그는 환자 치료와 원생 후생 사업 같은 일에는 누구보다 열성적인 데가 있었으나, 말썽이라면 도대체 견디지를 못하는 위인이었다. 상욱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는 입을 다문 채 원장의 출근을 기다렸다. 2백여 명 본부 직원들과 함께 회의실에 모여앉아 원장의 출근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도 그는 끝내 의료부장의 충고에는 승복할 생각이 없었다. 8시 50분쯤, 원장이 마침내 서무과장의 안내를 받으며(라기보다는 뚱뚱한 서무과장이 오히려 헐떡헐떡 그를 뒤쫓아오고 있는 꼴이었지만) 성큼성큼 2층 그의 원장실로 올라오고 있었다. 의료부장을 비롯한 간부 직원 몇 사람이 원장 부속실로 가서 원장의 첫 출근을 맞이했다. 그런데 그때 원장의 첫마디가 상욱에겐 더없이 안성맞춤이었다. "밤새 별일 없었소?" 새 원장의 첫날 출근 인사치고는 싱겁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제복을 말끔히 새로 다려입고 허리에는 권총까지 매달고 나왔을망정, 병원 사람들과는 한동안 낯이 익숙해진 사람의 그것처럼 대범스런 인사말이었다. 그 싱거운 듯하면서도 얼마간은 조급스런 데가 있는 원장의 첫마디는 가벼운 긴장 속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부속실 사람들을 뜻밖에 당황하게 했다. 의료부장 김정일이 얼결에 흘끗 이상욱 보건과장을 건너다보았다. 상욱은 그 의료부장의 눈길은 아랑곳할 기색이 아니었다. "보고드릴 말씀이......" 상욱은 이미 등을 돌리고 원장실로 들어서고 있는 조원장의 발길을 끌어세우고 있었다. "본부 직원 전원을 회의실에 집합시켜놓았습니다." 돌아서는 원장 앞으로 의료부장이 얼핏 상욱을 가로막고 나섰다. 하지만 원장은 그 의료부장의 말에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 눈치였다. "당신이 보고할 일이라는 건 뭐요?" 똑바로 그를 쳐다보고 서 있는 상욱의 눈길에서 어떤 심상찮은 기미를 엿본 모양이었다. 재촉하듯 상욱을 마주 찍어보고 서 있었다. 상욱은 불시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부속실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그 상욱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그런 때 그는 그런 버릇이 있었다. 기억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있어온 버릇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사람들의 시선에 얹히는 것을 그렇게 싫어했다. 싫어했다기보다 두려워했다. 그런 시선 앞에선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앉곤 했다. 그리고 한번 그런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며칠이고 어떤 괴로운 환각 때문에 견딜 수 없도록 시달림을 당할 때가 많았다. 방안에 혼자 있을 때마저 그의 등뒤 어딘가서 숨을 죽인 채 까맣게 그를 노려보고 있는 눈동자의 환각을 떨어버릴 수가 없었다. 상욱은 등골에서 땀이 솟고 있었다. 이제 와선 어쩔 수가 없었다. 원장이 한 번 더 그를 다그쳐왔다. "따로 보고할 것 없이 예서 지금 말해보오." "어젯밤 탈출 사고가 있었습니다." "뭐라구?" 상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원장의 두 눈썹이 불쑥 곤두섰다. "탈출 사고라니, 누가 이 섬을 도망빼나갔단 말요?" "그런가봅니다. 가끔 있는 사고올습니다만......" 의료부장이 거봐란 듯 상욱을 눈짓으로 눌러놓고는 자기가 대신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러나 원장은 이번에도 의료부장의 설명은 맘에 들질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가봅니다가 뭐요, 그런가봅니다가. 도망갔으면 도망간 거구 아니면 아니랄 거지, 그래 도대체 어디오? 그자들이 섬을 내빼달아 났다는 데가 말요?" "신생리라는 마을입니다." "동넬 묻고 있는 게 아니오. 그자들이 어디로 해서 어떻게 도망을 뺐나 경위를 묻고 있는 게요." "아, 그건 신생리 마을 뒷해안 쪽에 돌뿌리라는 돌출부가 있는데 그곳이 통상 녀석들의 탈출 지점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어디 좀 가봅시다." "지금 말씀입니까?" "당신은 번번이 남의 말을 두 번씩 반복시키는 취미가 있구려." "하지만 지금은 병원 직원들이 원장님께 인살 여쭙고자 회의실에 모여 대기중입니다만." "상관없소. 갔다 와서 보겠소." "그리고 오늘은 원생들도 좀 집합을 해보셔야 할 텐데요." "상관없다지 않소. 그건 내가 보고 싶을 때 알아서 볼 테니 당신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의료부장 김정일은 자기도 모르게 부동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부속실에 서 있던 다른 직원들도 어느새 그 의료부장을 따라 빳빳한 부동 자세로 굳어져 있었다. 원장은 자기 방을 들어가보지도 않았다. 부동 자세를 취하고 서 있는 부속실 사람들은 더 이상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고 몸을 돌이켜세우더니, 생각난 듯 다시 힐끔 뒤를 돌아보고는 거침없이 상욱을 점찍어냈다. "아마 의료부장은 내 거동이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니 당신이 안낼 좀 맡아주구려." 새 원장은 결국 그 탈출 사고가 구실이 되어서 그런 식으로 자신의 부임 인사를 생략한 채 병원 출근 첫날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그건 좀 희귀한 일이었다. 2 이유야 어쨌든 새 원장이 부임 첫날 자신의 부임 인사를 치르지 않은 것은 이 섬 병원에서는 좀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원장이 새로 바뀌어올 때마다 한차례씩 가져보는 희망이었지만, 새 원장이 부임 인사를 치르지 않는 걸 보면 그는 아마 자신의 동상을 지니지 않은 모처럼 만의 원장일 수도 있었다. 새 원장이 오면 이곳에선 언제나 두 차례의 부임 인사가 치러지게 마련이었다. 첫번은 아침 일찍 직원 지대의 병원 본부에서 2백여 직원들을 모아놓고 병원의 새 운영 방침이나 직원들의 처우 개선 대책에 관한 신관으로서의 구상 같은 걸 펼쳐보이는 게 예사였다. 직원들의 타성적인 근무 태도와 무사 안일주의 (부임 첫날부터 어떻게 그런 자신 있는 단정이 가능한지)가 매도되고, 그 대신 새로운 병원 운영 쇄신책에 관해 번번이 일대 열변이 토해지곤 했다. 헌신적인 봉사 자세와 박애 정신의 발양이 거듭거듭 강조된다. 직원 지대의 신임 인사는 늘 그런 식이었다. 하지만 진짜 신임 인사는 병사 지대에서 행해지는 두번째의 그것이었다. 새 원장이 올 때마다 150미터의 완충 지대를 격해 있는 병사 지대 7개 부락 5천여 원생들은 보행이 불가능한 부자유 환자 약간 명을 제외하고는 섬 인구 전체가 중앙리 공원 광장으로 집합한다. 새 원장은 대개 직원 지대에서의 부임 인사 겸 첫 조회가 끝난 다음 자동차로 중앙리 공원으로 내려가서 원생들과의 첫 대면을 가지게 되어 있었다. 거기서도 물론 병원의 새 운영 방침이나 원생들을 위한 의욕적인 복지 시책들의 되풀이 다짐되고, 병사 지대 주민들의 환자로서의 권익 옹호와 이러저러한 사업 계획들이 약속된다. 병원이 세워진 이래 40여 년 동안 열몇 번씩이나 원장을 번갈아 맞으면서 그렇게 해온 일이었다. 이번 원장도 마땅히 그래야 할 일 이었다. 그레 당연한 관례였다. 그런데 이 마지막 번 원장은 이도저도 부임 인사 같은 건 염두에도 없는 눈치였다. 이 친구는 정말로 자기 동상을 지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 끌려가듯 원장을 뒤따라 내려오면서 상욱은 모처럼 고개가 갸웃해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좀 성미가 조급한 사내였다. 엉뚱스런 관심을 쏟아내고 있었다. 현관앞에 원장의 세단차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의료부장은 우리가 갔다 올 동안 업무 보고 준비나 갖춰놓구려." 현관까지 따라나온 의료부장을 향해 한마디 당부를 남기고 나서 원장은 곧 차에 올랐다. 상욱도 그 원장을 뒤따라 차로 올라갔다. 원장이 먼저 운전사석 옆자리를 차지해버렸기 때문에 안내격인 상욱이 뒷자리를 차지했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이과장이 좀 잘 설명을 드려주시구......" 의료부장이 차창 밖에서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보이고는 무엇인가 걱정스런 눈초리로 상욱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장은 이번에도 그 의료부장 쪽엔 별로 주의를 주지 않았다. "자 가자우." 운전사를 재촉하고 나서는 새삼스레 기분이 상해오는 듯 탈출자들을 저주하고 있었다. "제기랄- 어떤 백정놈의 새끼들이 내 쌍판도 보지 않구 도망부터 뺐어!" 화가 나서 욕을 하니까 유난스레 심한 사투리 억양이 섞이고 있었다. 하더니 원장은 자동차가 조그만 언덕을 하나 내려서서 직원 지대와 병사 지대를 갈라놓고 있는 150미터 간격의 완충 지대로 들어서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생각이 미친 듯 뒷좌석의 상욱에게 첫마디를 건네왔다. "당신, 이 병원에서 뭐요? 직책이 뭐냔 말이우다." "저 말씀입니까? 전 보건과 일을 맡아보고 있는 이상욱입니다." 말을 던져놓고 원장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버렸으므로 상욱도 뻣뻣하게 앉은 채로 대꾸를 해주니까 그는 다시, "보건과라... 보건과라는 데선 뭘 하오?" 부임초일수록 이것저것 병원 사정을 모두 꿰뚫어 알고 있는 듯이 행동하는 원장들과는 딴판으로 스스럼없이 되물어왔다. “의료부에 속해 있는 한 부섭니다. 저희가 맡고 있는 일거리로는 환자들 세균 검사나 요양 훈련 같은 것이 주무이고, 좀 특별한 일로는 환자들의 시체를 화장 관리시키는 사체 처리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그렇담 그 사람들 사정도 비교적 소상할 것 같은데 잘됐구려. 오늘 나하고 좀 수골 해쥐야겠소.” “아는 대론 말씀드리겠습니다.” 차가 완충 지대를 지나 병사 쪽 철조망으로 해서 장안리구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시원스럽게 바다의 한 조각이 내다보이고, 그 바다를 끼고 도는 찻길이 밝은 황토빛깔로 울창한 소나무숲을 길게 뚫어나가고 있었다. 호수처럼 맑은 바다 위로 드량만을 오가는 돛단배 몇 척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었다. 다도해 풍광이 아름답다지만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언제 보아도 조경이 빼어난 섬이었다. “좋은데... 경치가 아주 그만이야.” 원장 역시 이 섬의 조경에는 넋을 빼앗긴 모양이었다. 탈출 사고 때문에 불쾌해진 기분이 얼마간 누그러진 듯 한동안 차창을 스쳐가는 섬 경치에 시선이 끌려 있더니, 얼마 만에야 다시 뒷좌석을 돌아다보았다. “이 섬 크기가 대략 얼마나 되오?” “넓이로 한 150만 평쯤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관사 지대 3분의 1 정도를 빼고 난 나머지 섬 전체에 병사 지대 7개 마을이 꾸며져 있습니다. 지금 지나고 있는 곳이 장안립니다. 저 사람들 말로 직원 지대를 섬의 서울이라고 하니까 서울에 가까운 마을이래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답니다.” 시원스런 조경 때문이었을까. 상욱도 이젠 원장 부속실에서부터의 그 무적지근한 긴장감이 조금씩 풀려가고 있었다. 섬 경치에 취해가고 있는 원장에 대해 전에 없는 아량 같은 것이 생기고 있었다. 그는 원장이 원하지 않은 데까지 긴 설명을 덧붙이고 있었다. “섬 전체가 제법 커다란 공원 같은걸.” 동네 이름이야 어떤 연유로 해서 그렇게 지어졌든 알 바 아니라는 듯 원장이 다시 혼잣말처럼 뇌까리고 있었다. 상욱도 비로소 이 원장이 어떤 커다란 착각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원장의 그런 착각을 들춰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새 원장으로선 아마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멀지 않아 그것이 착각이라는 걸 알 때가 오겠지. “그야 이 섬 이름이 작은 사슴 아닙니까. 섬 이름이 소록도라고 지어진 것은 섬의 생김새 때문이 아니라 이 좋은 풍광 때문이라는 게 더 적절한 해석이라고들 하니까요. 하지만 공원이라면 또 진짜가 있습니다. 다음 마을이 중앙리라는 곳인데, 이따 들러보시면 아시겠지 만 그곳에 이 섬 전체 원생들을 위한 공원이 꾸며져 있습니다.” “게다가...” 원장은 거기서 다시 입을 다물고 혼자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차가 장안리로 들어서면서부터는 이따금 한 사람씩 마을 원생들이 차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인들은 대개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남자들은 양복바지와 여름 남방을 걸쳐입은, 이 섬마을 이외의 어디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광주리를 이고 저자를 다녀오느라 다리가 피곤해진 할머니, 들일에 열중하다 어린것 젖이 불어 종종걸음을 치는 젊은 아낙, 늦잠 끝에 지금 막 꼴망태기를 메고 나선 게으른 밀짚모자의 청년, 모두가 그런 느낌으로 아무렇지 않게 보고 지나칠 수 있는 그런 할머니, 그런 아낙, 그런 사내들이었다. 산비탈 무밭뙈기 사이에 주저앉은 여인네들도 늦여름 볕발을 피하기 위해 머릿수건을 접어 얹고 있는 모습들이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두루 색안경을 많이 끼고 있는 것이 다르다면 다르게 볼 수 있는 점이었다. 그리고 어쩌다 한 번 뿐이었지만, 자전거를 타고 오는 중년 사내 하나가 가까이 다가오는 걸 보니, 다리 하나를 잃은 채 하나뿐인 그 나머지 한쪽 다리로 교묘하기 짝이 없게, 그러나 휘파람까지 불어가며 능숙하게 원장차를 비켜나가고 있는 모습이 별나다면 좀 별나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원장은 역시 그런 데는 별 새삼스런 느낌을 가질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섬을 빠져나가는 사고가 어젯밤 말고도 자주 있었소?”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던 원장이 문득 다시 물어왔다. 도시 이런 곳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자들의 속셈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어조였다. 역시 착각이었다. 상욱의 입가에선 마침내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오래 전에 어떤 멋진 여류 화가 한 사람이 이 섬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 여류 화가는 섬을 찾아와서 한 가엾은 소녀를 만났다. 소녀의 어머니는 병을 얻어 이 섬으로 와서 세상을 잊고 살고 있었다. 소녀는 그 어머니를 잊을 수가 없었다. 얼마 후에 그녀는 간호원이 되어 자기도 어머니를 따라 섬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를 위해 오래도록 섬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화가는 소녀를 만나고 나서 이내 섬을 떠나갔다. 화가는 소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20년 동안이나 그녀는 때때로 소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20년이 지나고 난 어느 해 여름 화가는 소녀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소녀의 얼굴을 그렸다. 어떤 것은 머리 위에 꽃무리를 얹어 그리고, 어떤 것은 결혼식을 올리러 나가는 신부처럼 눈부신 면사포를 쓴 소녀를 그리기도 했다. 옆얼굴도 그리고 앞모습도 그렸다. 등꽃색의 연보라와 부드러운 주황색이 많은 그림들이었다. 소녀는 한결같이 예쁜 입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입술들은 그냥 두 개의 꽃잎이 겹쳐진 모습일 뿐이었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야기는 눈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수많은 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슬픈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화가의 개인전이 열렸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소녀의 눈동자에서 아름다운 섬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소녀와 섬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아름다운 소녀여! 사랑스런 소녀여! 그리고 소녀의 섬이여! 그들에겐 섬이 꿈처럼 아름다웠다. 사람들에겐 이곳이 바로 그 소녀의 섬이었다. “자주라곤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심심치는 않을 정돕니다.” 상욱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심심치는 않을 정도라...” 원장은 고개를 기웃했다. “특별히 새 원장님이 바뀌어 오실 땐...” “원장이 바뀌어 올 때 하필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요?” “우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같은 사고가 걸르고 지나간 기억이 없습니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다는 게요?” “글쎄올습니다. 특별히 말씀드릴 이유가 있을 순 없겠지요. 하지만...” “하지만?” “같은 우연이 겹치고 보면 그저 우연이라고만 보아넘길 순 없지 않겠습니까.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이번 사고는 새 원장님께 대한 부임 선물쯤으로 여기고 지내보시면...” “부임 선물이라... 거 참 부임 선물치고는 썩 맘에 드는 편이 아닌데, 내가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겠소.” “글쎄올습니다.” “말해보오. 작자들이 섬을 빠져나가는 이유가 내게 대한 부임 선물의 의미 속에 숨어 있다면 그걸 똑똑히 알아둬야지 않겠소?” “말씀드릴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없습니다.” 상욱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려고 했다. 원장은 다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자신이 없다... 그러고 보니 당신 아까부터 말투가 꽤 유식한 사람 같은데, 이율 알고는 있지만 나한텐 아직 그걸 일러줄 수가 없다, 이런 말이오?” 성급하게 상욱을 한바탕 힐난하고 나서는, “좋아요. 얘기해주기가 싫다면 내가 알아내겠소.” 단호한 표정으로 다시 시선을 거둬가버렸다. 상욱의 입가에 또 한번 희미한 미소가 지나갔다. 자동차는 그 사이 장안리를 지나 치료소 본부와 산업부, 그리고 천주교 성당 건물들이 모여 있는 중앙리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상욱이 차를 내려 잠깐 들러보지 않겠느냐고 의향을 물었으나 원장은 돌아오는 길에 다시 보자면서 계속해서 돌뿌리 사고 지점으로 차를 몰아가게 했다. 자동차가 마침내 신생리 돌뿌리 해안 근처에서 두 사람을 내려놓았다. 돌뿌리 해안 근처는 인가나 사람의 왕래가 드문 곳이었다. 여름 바다가 발밑에서 시원스럽게 파도치고 있었다. 바다 건너 맞은편 녹동항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녹동항까지는 똑딱선으로 10분쯤밖에 걸리지 않는 6백 미터 남짓한 바다 폭이었다. 이 1킬로도 못 되는 바다 폭은 환자들이 녹동 쪽에서 배를 타고 한번 이곳을 건너오기만 하면 다시는 살아 돌아갈 날이 오지 않는다는 한 서린 해협이었다. “여기서 어떻게 바다를 건너간다는 게요?” 묵묵히 녹동항을 건너다보고 있던 원장이 이윽고 상상이 미치지 않는다는 듯 상욱을 돌아보았다. “지나가는 고깃배를 빌어 타거나, 나무판자 같은 걸 의지해서 헤엄을 쳐나갑니다.” “물살이 셀 것 같은 데?” “그래서 헤엄을 쳐나가던 녀석들은 물살에 휘말려버리는 수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어젯밤 놈들은 어떻게 된 거요?” “배를 빌어 탔을 테죠. 하지만 헤엄을 쳐서 나가려고 했다면 녀석들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 “사고를 막으려고 여러 가지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긴 합니다만. 지금 차를 타고 들어온 외곽선 도로도 원래는 그런 탈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해변 순찰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할 수가 없어요.” “잘못하면 물살에 휘말려 죽을 줄 알면서 모험을 저지르는 자들한테 그까짓 대비책이 소용 있겠소?” “사실은 너무들 결사적입니다.” “...” 원장은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는 이제 더 알아볼 것도 없다는 듯 터벅터벅 혼자 차 쪽으로 걸어가버렸다. 하긴 사람 하나 얼씬하지 않는 이 돌뿌리 해변가에선 더 이상 알아볼 것도 없는 형편이었다. 원장은 곧 차를 되돌려세웠다. 차를 몰아 신생리 병사 지대로 들어가서 원생 몇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그것은 특별히 상욱의 수고를 빌릴 필요가 없었다. 자동차가 신생리 병사 지대로 들어서자 원장은 곧 차 곁을 스쳐가는 남자 원생 몇 사람을 손쉽게 만날 수 있었다. 원장은 성급하게 차를 뛰어내려갔다. 한데 그때였다. 탈출 사고를 부임 선물로 받은 것이 원장의 첫번째 낭패였다면, 그는 이 신생리 병사 지대 마을에서 그의 두번째 낭패를 맞게 된 것이었다. 원장이 차를 내려 사내들 곁으로 다가가자, 여태까지 지나가는 차인 줄만 알고 있던 사내들이 자기들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원장에게서 비실비실 이상스런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당신들, 어젯밤 이 마을에서 청년 둘이 섬을 탈출해나간 사실을 알고 있소?” 영문을 알지 못한 원장이 다짜고짜 물러서는 사내들에게로 다가서며 물었다. 사내들은 원장이 다가서는 거리만큼씩 뒷걸음질을 치며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묻는 말에 대답을 하려는 기색도 없었다. “나 새로 온 원장이오. 묻는 말에 대답을 해봐요. 어젯밤에 당신네 마을 사람 둘이 섬을 도망쳐나가지 않았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퍼런 유니폼에 권총까지 매달고 있는 새 원장의 모습이 이들의 눈엔 유난히 더 두렵게만 비치고 있었을까. 비실비실 겁을 먹은 듯한 표정들이 여차하면 금세 도망이라도 치고 말 형세들이었다. 원장과 사내들 사이엔 이상스럽게 기분 나쁜, 그리고 어느 쪽이 어느 쪽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무겁고 위태로운 침묵이 지나가고 있었다. 늦여름 한나절의 뜨거운 햇볕이 원장과 사내들 사이에서 소리없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상욱이 마침내 원장과 사내들 사이로 끼여들었다. “이분이 새로 오신 원장님이란 말요. 당신들 어젯밤 일을 알고 있지요?” 사내들이 이번에는 또 상욱에게서 대여섯 발짝 거리를 두고 몸을 물러섰다. 그리나 이번에는 끄덕끄덕 마지못한 듯 고갯짓을 보내왔다. “왜들 도망갔소? 이유를 알고 있소? 뭣 때문에 섬을 빠져나가고 싶어들 하는 거요?” 원장이 또 성급하게 덤벼들었다. 사내들은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원장은 참을 수가 없어진 것 같았다. “말을 해봐요, 말을. 왜 말들을 않는 거요?” “...” “아는 대로 대답을 해보시오, 어서” 상욱이 달래듯이 거들고 있었다. 그러자 사내 하나가 비로소 한손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고개를 반쯤 옆으로 돌린 채 입을 가린 손 뒤에서 비웃듯이 내뱉고 있었다. “당신들이 모르는 일이라면 우리도 모르는 일이오.” 겁을 먹은 듯싶던 작자의 눈빛이 갑자기 알 수 없는 증오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말을 끝내고 나자 그는 곧 몸을 돌이켜버렸다. 곁에 서 있던 다른 사내들도 같은 눈으로 원장을 건너다보고 있다가는 일제히 몸을 돌이켜세우고 있었다. “말을 해라, 말을. 너희는 알고 있다. 말을 해라!” 원장의 오른손이 문득 그의 권총집 근처에서 경련하듯 떨고 있었다. 그는 거의 광인처럼 악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몸을 돌이켜세워버린 사내들은 벼락이 쳐와도 끄떡 않을 듯싶은 걸음걸이로 유유히 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원장 역시 한번 불붙기 시작한 그의 성미를 좀처럼 가라앉힐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사내들이 끝내 길을 올라가버리자 이번에는 사내들을 버리고 느닷없이 근처 병사 쪽으로 몸을 날려 달려갔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남의 안마당으로 뛰어들며 함부로 사람을 불러냈다. 병사의 안방에선 소란에 놀라 아까번보다 좀더 나이가 지긋한 사내 하나가 문을 열고 나왔다. "눈으로 직접보기도 하고 계몽도 시키니까 어느 정도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신념은 이 섬 병원에서보다도 뭍으로만 나가면 더 좋은 약으로 더 잘 치료하고 더 빨리 나을수 있다는 쪽에 훨씬 깊이 기울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섬을 나가려는 자가 생기는 거 아니오?” 결국은 또 탈출 사고의 원인을 캐려는 쪽으로 말꼬리가 휘고 있었다. 섬을 거의 둘러보고 나서도 원장은 역시 보다 분명한 이유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공연한 소문 때문에 그런 친구들도 있긴 합니다.” 상욱은 원장의 말을 부분적으로 시인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 원장의 말을 송두리째 부인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분명한 탈출 동기로 믿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건 또 어째서요?” “요즘 병원에선 완치 환자들까지 섬 안에 붙잡아두려고 하진 않거든요. 오히려 섬에서 내보내려는 쪽입니다. 또 병이 다 낫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섬을 나가고 싶은 원생들은 누구든지 일정 기간 귀향 휴가를 얻어 바깥을 다녀올 수도 있구요. 한데 그럴 땐 오히려 섬을 잘 나가려고 하지 않는 게 보통이란 말씀입니다. “ 아니 그럼 목숨까지 내걸어가며 일부러 물길을 택해서 섬을 헤엄쳐나가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란 말이오?” “결국은 늘 같은 사람이지요.” “당신 지금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릴 하고 있는 거요? 섬을 나가랄땐 나가지 않는 사람들, 언제든지 맘만 내키면 자의로 섬을 나갈 수 있는 그 사람들하고, 일부러 모가지를 내걸고 섬을 도망쳐나가는 자들하고 늘 같은 사람이라는 거요? 제 발로 섬을 걸어나가도 말릴 사람이 없는 작자들이 뭣 때문에 일부러 그런 미친 지랄을 한다는 게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원장은 갑자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상욱은 그러나 잠꼬대커녕 목소리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었다. “설마 그 작자들도 무슨 재미로 그런 모험을 벌일 리는 없겠지요. 하지만 역시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인 건 사실인 걸 어떡합니까? “ 아무래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아니 우선은 당신 말부터 도대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건지 종잡아 들을 수가 없구려.” “ 사실은 간단한 얘기입니다.” “ 그 간단한 얘길 좀 들어봅시다” “ 전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섬을 나가래도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환자들입니다. 이자들은 병을 얻어 바깥 세상으로부터 이 섬으로 쫓겨 들어왔고, 이 섬으로 들어온 다음에도 그 바깥 세상에 대한 원망과 두려움을 끝없이 길러온 그런 환자들이란 말씀입니다. 하지만 모험을 겪으며 섬을 빠져나가려는 친구들은 이미 그런 환자는 아닙니다. 그들은 환자이기 이전에 인간인 거지요. 환자로서의 생존 양식과 일반의 그것의 그것을 구별짓기에 지쳐버린, 그래서 환자로서의 자신의 특수한 처지를 벗어버리고 보다 깊은 생존의 충동에 따라 인간으로서 섬을 나가고자 한 사람들이 이들이란 말입니다. 한데 그 환자와 환자 아닌 사람들이 실상은 같은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이 섬에 삶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환자로서의 남다른 처지와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인 존재 조건들을 두 겹으로 동시에 살아 나가고 있는 셈이지요. 우리로선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이 사람들의 행동의 모순은 바로 거기서부터 연유하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상욱은 자신도 모르게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원장은 아직도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은 역시 어려워. 말이 너무 유식하단 말요. 얘긴즉 간단하다고 하더니 무슨 요술을 하고 있는 거요?” 하지만 그것은 물론 상욱의 말을 원장이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는 이미 상욱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말이오, 지금 말한 당신 얘기가 정말로 모두 사실 그대로라고 하더라도 말이오. 당신 말대로 환자가 아닌 인간들이 섬을 나가는 데 반드시 그런 위태로운 모험을 택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오? 정말로 섬을 나가고 싶을 땐 언제나 당당하게 섬을 나갈 수가 있다지 않았느냐 말이우다.” 원장이 다시 추궁해왔다. 상욱은 이제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원장이 혼자 추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있어요. 그자들이 정말로 사람 노릇을 하고 싶어 그런식으로 섬을 나간 것이라면, 그럼 이 섬은 도대체 사람 노릇을 할 수가 없는 곳이란 말이 되지 않소? 이 섬이 정말로 그런 곳이오? 사람 노릇을 하고 싶으면 누구나 이곳을 도망쳐나가야 할 만큼 이 섬은 그런 흉악한 지옥이란 말요?” 할 수 없었다. 상욱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전 다만 그자들의 탈출 사고가 병원 처사에 불만이 많아서라거나, 육지에서 좋은 약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그런 간단한 동기에서라고만은 보아넘길 수가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대답을 적당히 얼버무리고 나서 차창 밖으로 얼른 시선을 피해버렸다. 원장의 추궁에 대한 대답은 실상 너무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너무도 분명한 해답들이 상욱의 목구멍 속에서 서물서물 그를 충동질해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참고 있었다. 아직은 좀더 기다려야 할 것같았다. 자동차가 마침 병원 본부 앞까지 올라와 있었다. 3 새 원장이 자기의 동상을 숨겨 지니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기대는 점점 깊어져가고 있었다. 원장은 섬을 한바퀴 둘러보고 돌아와서도 여전히 부임 인사 따위를 염두에 두는 기색이 없었다. 탈출 사고의 동기나 섬을 돌며 듣고 본 일들에 대해서도 생각보다는 조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으려 애쓰는 흔적이 역력했다. 그대신 그는 본부로 돌아오자 예사롭지 않은 지시를 한 가지 하달했다. 이날 낮 해가 지기전에 모든 병사 지대 마을에다 건의함을 각기 하나씩 설치토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날 저녁 본부 직원들은 한 사람 빠짐없이 모두 병사 지대로 내려가서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병원 시책에 관한 불만이나 시정 요구 사항, 또는 건의. 호소. 고발 따위 형식의 글이든 솔직한 개인 의견들을 적어넣도록 적극 권장하라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원생들의 투서가 담긴 건의함은 임의로 개함하는 일이 없이 다음날 정오까지 원장 앞으로 집결시켜 거기서 직접 원장이 원생들의 글을 볼 수 있게 하라는 것이었다. 원생들의 . 의견 . 개진이 자유롭도록 철저한 비밀 보장을 다짐한 원장이고 보면 건의함을 자기가 직접 개함하겠다는 것도 그런 비밀 보장책의 일환으로 하급직원들 사이에서 행해질지도 모르는 투서 내용의 첨삭 가능성을 사전에 배제해버리자는 의도 같았다. 원장은 그런 지시를 하달하고 나서도 별다른 공식 집회 같은 건 마련하지 않았다. 그는 곧 원장실에 깊숙이 틀어박혀 앉아서 무엇인가 혼자 골똘한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이따금 간부 직원들을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호출해 들여다간 신임 인사 겸 소관 업무에 관한 현황 청취 비슷한 것을 치러나가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체로 그런 일보다도 그냥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눈치였다. 건의함 설치에 상당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직원들은 그런 새 원장의 일거 일동에 신경들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었다. 모두들 긴장한 눈초리로 이 현역 군인 원장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 조금은 언동이 거친 듯하면서도 속쉽사리 점쳐낼 수 없는 사내 앞에 직원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빠르게 자신을 압도당해가고 있었다. 지시가 떨어지자 직원들은 모두 규격에 정해진 건의함을 만들어 가지고 마을로 흩어져 내려갔다. 섬 전체에 갑자기 이상한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런 긴장은 상욱에게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상욱은 차라리 새 원장이 취해놓은 조치의 결과를 미리 짐작할 수 있는 데서 비롯한 어떤 강한 호기심 같은 것이 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날 저녁엔 보육소의 서미연선생까지 그 원장의 일을 구실로 상욱을 다시 찾아왔다. 일과 시간을 끝내고 상욱이 막 그의 숙소로 돌아와 쉬고 있으려니 보육소의 서미연이 곧 그를 뒤따라와 방문을 두들긴 것이었다. 보육소의 선생이라면 새 원장의 병원운영 시책의 향배에까지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도 좋을 사람이었다. 보육소 일을 스스로 자청해서 섬으로 들어온 여인의 처지로는 더더구나 관계가 없을 일이었다. 서미연은 그러니까 한 달쯤 전서부터 이 섬 보육소의 미감아 아동들을 돌보고 있는 보모 겸 분교의 여선생이었다. 이 섬 국민학교나 보육소엔 가끔 그런 아가씨들이 찾아와서 얼마간씩 일을 하다 돌아가는 일이 많았다. 어느날 갑자기 섬을 찾아와선 가엾은 섬 어린이들을 위해 신명을 다하겠노라 간청들을 하고 덤벼들었다. 병원에선 물론 그런 아가씨들의 청원을 섣불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섬 사정을 자세히 설명해주며 좀더 생각을 해보라는 식으로 길을 다시 되돌려보내곤 했다. 아가씨들은 대개 그쯤에서 맘을 고쳐먹게 마련이었다. 생각을 다시 해보겠다거나, 부모들과도 좀더 의논을 해보겠다며 나루를 나가고 나면 대개는 다시 섬을 찾아오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가끔은 도대체 고집을 꺽지 않는 아가씨들이 있었다. 설득을 하다하다 이야기를 시켜보면 각오가 여간 단단하지 않은 아가씨들의 경우, 일단은 섬을 찾아온 뜻이나 신념을 사주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런 아가씨 중에 이 섬 병원 일을 맡아 남은 사람이 몇몇 있었다. 보육소나 분교 선생들 가운데도 그렇고, 간호원들 가운데도 그런 아가씨들이 한둘씩은 끼여 있었다. 서미연 역시 바로 한 달쯤 전에, 섬을 찾아왔다 돌아간 다른 모든 아가씨들이 그랬듯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념과 봉사 정신을 굳게 다짐받은 후에 비로소 보육소의 일을 시작한 육지 아가씨였다. 서미연 역시 바로 한 달쯤 전에, 섬을 찾아왔다 돌아간 다른 모든 아가씨들이 그랬듯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념과 봉사 정신을 굳게 다짐받은 후에 비로소 보육소의 일을 시작한 육지 아가씨였다. 서울에서 무슨 신학 대학을 다니다 말고, 이런저런 생각 끝에 결국은 이 섬에 뜻을 정하고 찾아왔노라는 조그맣고 귀여운 고집통이 아가씨였다. 거기다 누가 섬 일을 자청해오고 나서, 일단 마음이 주저 앉은 낌새를 보이기 시작하면, 더 이상의 자세한 개인 사정에 대해서는 누구나 서로 입을 다물어주는 것이 이 섬의 풍속이었다. 환자이거나 건강인이거나, 이 섬 일에 관계를 짓고 있는 사람들에겐 나름대로 어떤 말 못 할 내력이나 비밀들을 지니고 있는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미연에 대해서도 섬사람들은 물론 마찬가지였다. 서미연이 섬 안에 주저앉게 된 다음부턴 그녀의 그 정체 모를 신념의 내력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는 아닌게아니라 그 신학 대학을 다니다가 그런저런 생각 끝에 이 막다른 섬구석을 찾아들게 된 별난 서울 아가씨쯤으로 여겨지고 있었고 그래서 조금은 고맙게도 생각되고 조금은 또 건강인들에 대한 환자들 특유의 질시어린 눈길도 견뎌야 하는 그런 정도의 여자쯤으로 여겨져오고 있는 터이었다. 별로 원장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아가씨였다. 하기야 원장의 일이 아니더라도 서미연이 상욱을 숙소로 찾아온 것은 그것이 처음 일은 아니었다. 보육소 아이들의 건강 관리를 맡고 보건과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접촉의 기회가 많았던 탓도 있겠지만, 상욱을 어떻게 보았던지 그녀는 섬에 들어온 이후부터 유독 그 상욱한테만은 의논거리들을 자주 가지고 찾아왔다. 숙소나 취사 관리 따위와 같은 자자분한 일에서부터 보육소 근무의 요령이나 병원 풍속 일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일을 상욱에게 의논하고 의지해오는 형편이었다. 병원 직원 가운데선 상욱을 가장 스스럼없이 대해오고 있는 그녀였다. 건강한 여자만 보면 엉뚱한 봉변을 주어서 섬으로부터 내쫓고싶어하는 윤해원이라는 같은 보육소 남자 선생이 하나 있는데, 한번은 그 윤이라는 작자로부터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미연이 그 일을 의논한다는 핑계로 상욱을 찾은 다음부터는, 사내 혼자 지내고 있는 밤숙소까지도 몇 차례 내방을 해온 일이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상욱은 실상 그녀가 가지고 온 의논거리보다는 그 이상의 어떤 간절한 고백의 말 같은 것을 그녀의 분위기에서 자주 느껴오곤하던 터이었다. 의논거리를 꺼내놓으면서도 그녀의 눈은 무엇인가 늘 그것 이상의 깊은 이야기를 상욱에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무엇인가 분명 다른 이야기를 상욱에게 말하고 싶어하고 있었다. 보다 더 분명한 목소리로 상욱에게 그것을 말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녀는 번번이 그것을 말하지 못하고 말았다. 끝끝내 말을하지 못한 채 아쉽게 자리를 일어서버리곤 했다. 상욱은 종종 그녀의 그 숨은 이야기가 무엇인가를 혼자 상상해보곤 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어떤 비밀스런 내력이나 경험 같은 것에 상관이 되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았다. 어떤 것이든 상관은 없었다. 그것이 어떤것이든, 미연이 상욱이 자기에게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것은,그녀가 상욱을 믿고 싶어한다는 증거였다. 그에게 보여준, 그녀의 신뢰감만이 고마울 뿐이었다. 상욱은 언제부턴가 자기도 모르게 은근히, 그리고 고마운 마음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밤도 서미연은 물론 마찬가지일 터이었다. 그녀가 상욱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말이라는 것이 이날 낮에 취해진 새 원장의 조처와도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래서 원장의 그런 처사에 대해 서미연 그녀로서도 벌써 어떤두려운 궁금증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을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미연이 상욱을 찾아온 동기가 어떤 것이었든지, 그리고 그녀의 숨은 이야기가 어떤 것이 되었든지, 이날 저녁만은 상욱으로서도 다른 날처럼 그녀를 마음 편히 맞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관심을 모으고 기다려줄 수가 없었다. “알고서 한 일은 아니겠지만 이번 원장은 일을 꾸밀 줄 알아요. 모르면 몰라도 내일은 아마 썩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겝니다.....” 원장때문이었다. 그는 미연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싶어하든 이날밤은 온통 그 원장의 일에만 마음이 매달리고 있었다. 섬 전체가 온통 그런 식이었다. 원장의 지시 하나로 섬 전체가 어떤 기묘한 긴장감 속에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이튿날 아침이 밝아왔다. 이튿날 날이 밝자 원장은 아침부터 눈에 띄게 긴장을 하고 있었다. 어덟시도 되기 전에 벌써 출근을 서둘러 나온 원장은 그때부터 오로지 자기가 정해놓은 열두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가 않는 듯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쉴 새 없이 혼자 원장실 안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거동에는 점점 더 긴장감이 짙어져갔고, 직원들도 덩달아서 흥분기를 감추지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마침내 열 두시가 되었다. 그리고 예정대로 병사 지대에선 밤을 새운 일곱 개의 건의함이 병원 본부의 원장 부속실로 운반되어 왔다. 건의함 도착과 함께 병원 간부들도 빠짐없이 부속실로 모여들었다. 물론 원장의 사전 지시에 의해서였다. 원장은 곧 부속실로 나와서 말없이 일곱 개의 건의함에 대해 이상유무를 확인했다. 부속실은 마치 총선거를 치르고 있는 선거 관리 사무실처럼 분위기가 무거웠다. 투표함을 개함하기 직전의 침묵 같은 것이 부속실을 짓누르고 있었다. “자, 하나씩 열어봅시다.” 원장의 한마디는 마치 개표 선언을 하는 선거 관리 위원장의 그것처럼 엄숙했다. 드디어 첫 번째 상자가 개함되었다. 직원 지대에서 제일 가까운 장안리 지역 상자였다.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첫 번째 상자에는 아무 것도 들어 있는 것이 없었다. 기대와 의구로 부속실을 기묘하게 긴장시키고 있던 장안이리 건의함에는 원생들의 투서커녕 빈 휴지조각 한 장 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럴 리가? 당황하기는 병원 직원들도 원장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직원들은 잠시 말을 잃은 채 서로 얼굴들만 쳐다보고 있었다. 상자를 열기 전보다도 좀더 무거운 분위기가 부속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담 걸 열어보구레!” 원장이 마침내 두 번째 상자의 개함을 명령했다. 목소리에 그 관서 사투리의 강한 억양이 뒤섞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구북리 쪽 상자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건의함 속에는 역시 휴지조각 한장 들어 있는 것이 없었다. 원장의 거무튀튀한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상기되고 있었다. 하지만 원장은 얼굴 색만 벌겋게 상기될 뿐 따로 할 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다음 상자의 개함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안타까워 못 견디겠다는 듯 의료부장 김정일이 뛰어들어 성급하게 상자들을 열어 젖히기 시작했다.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상자마다 아무 것도 들어 있는 것이 없었다. 중앙리, 신생리, 동생리, 구북리, 남생리의 차례로 하나하나 건의함들이 열려나갔지만 텅텅 빈 상자 속의 사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상자들을 열어 나가는 의료부장의 손끝이 겁에 질린 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하나 상자들이 열려가고 있는 동안 붉어졌던 원장의 얼굴 색은 뜻밖에도 다시 원래의 그것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이럴 수가 정말...“ 일곱 개의 상자를 모두 열어보고 난 의료부장이 거북살스런 동작으로 천천히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얼굴빛마저 핼쑥하게 질려 보이는 의료부장이었다. 그는 원장을 대신하여 힐난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들이오?“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모두들 멍청스런 얼굴로 의료부장의 시선을 피하려 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꼭 한 사람 상욱의 입가에선 예의 그 알 듯 모를 듯 희미한 미소가 지나가고 있었다. ”말들을 좀 해보시오. 도대체 일들을 어떻게 하고 있는 거요?“ 한데 그 때였다. 무엇인가 혼자 말없이 고개를 끄떡거리고 있던 원장이 느닷없이 그 의료부장을 핀잔하고 나섰다. ”그만하오. 예서 뭘 더 알고 싶단 말요. 이만하면 알 만한 건 다 알게 된 거 아니오.“ 4 그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가서 고개를 끄떡끄떡 주억이면서 의료부장을 나무람한 원장이나, 뒷줄에 숨어 서서 남 몰래 가는 미소를 입가에 흘리고 있던 이상욱 보건과장 두 사람에게만은 적어도 그 일이 그토록 이상스럽게 여겨질 수 없었던 게 분명했다. 이날 오후였다. 이 날은 마침 미감아 보육소 아동들의 부모 면회가 있는 날이었다. 보육소 아동들의 면회는 한 달에 한 번씩 날짜를 정해 행해지는 서무과와 보건과의 협동 업무였으므로, 상욱은 곧 점심을 끝내고 나서 양과의 실무 직원 몇 명과 함께 미감아 보육소로 내려갔다. 미감아 보육소는 완충 지대로 넘어가는 직원 지대의 경계선 철조망 안에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유아 보육원과 직원 지대에 있는 이 섬 국민학교의 분교 역할을 겸하고 있는, 반병사 지대나 다름이 없는 곳이었다. 3백여 미감아 가운데서 취학 적령기가 된 아이들은 고개 너머 건강인 국민학교에 서류상의 입학 절차를 취한 다음 이 곳에서 따로 분교 수업을 받고 있었고, 나머지 유아기 아동들은 발병 증세를 보이지 않는 한 취학 적령기에 이를 때까지 그저 하릴없이 이 곳에서 격리 수용 생활을 참아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병사 지대에선 벌써 아이들의 부모들이 완충 지대로 들어와 있었다. 완충 지대와 건강인 지대를 가르는 철조망 뒤쪽에 일정한 간격으로 도열해 서서 각기 자기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면회 행사는 곧 시작되었다. 철조망을 기준으로 병사 지대 쪽 어른들이 먼저 2미터의 거리를 물러섰다. 군데군데 감시 직원이 배치되고, 이쪽 아이들이 제각기 자기 육친을 찾아 철조망 앞으로 다가섰다. 아이들 역시 철조망을 기준해서 2미터 거리를 표시한 직선 위에서 일정하게 발을 머물러 섰다. 그리고 이 때부터 이 섬이 생긴 후로 수많은 애화와 비원을 남긴 그들의 오랜 풍속이 다시 한번 반복되기 시작했다. 면회 시간은 5분간이었다. 하지만 그 5분간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보다도 많은 이야기와 사연이 오가는 시간이었다. 어른들은 철조망 너머로 먼저 자기 아이의 건강을 확인하고 학교 성적이라든가 그간에 있었던 다른 궁금한 일들을 묻는다. 그런 이야기들이 끝나고 나면 다음 번엔 병사 지대의 집안 소식과 면회를 나오지 않은 쪽 부모의 안부 같은 걸 전하고, 그리고 돌아올 면회 날까지의 안타까운 당부들을 남긴다. 그러는 중간중간에도 감시 직원의 눈을 피해 옷깃 속에 숨겨 가지고 온 음식 뭉치나 용돈 따위를 몰래 건네주는 일은 빠뜨릴 수 없는 면회 행사의 하나였다. 상욱은 물론 그 면회 행사에 끼여 들어 그런 데까지 미주알고주알 잔 간섭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런 행사가 탐탁스럽게 여겨지질 않고 있는 편이었다. 맡은 일이니까 현장 근처를 나와볼 뿐 대열 가까이에서 면회 장면을 지켜보거나 오가는 대화들을 엿듣는 따위의 일은 도대체 상관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번번이 대열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나와 서성서성 행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식이었다. 한데다가 이 날은 마침 새 원장까지 이 월례 면회 광경을 참관하러 내려와 있었다. “거 참 볼 만한 꼴 이구만 그래.” 건의함 일에 대해선 자기대로 속에다 따로 어떤 치부를 해두고 만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문득 상욱 곁으로 다가서오던 원장이었다. 상욱은 원장 곁에서 그 원장의 ‘구경거리’를 두울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들 문둥병이 어떻게 전염되는 줄을 모르는 모양이구만 그래.” 행사가 시작되자 원장은 마치 남의 말을 하듯 불쑥 내뱉고 있었다. “철조망까지 둘러쳐놓고, 게다가 또 뭐가 무서워서 저렇게 멀찌감치 씩 거리를 떼어놓고 있는 겐가.” 상욱은 원장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역시 성격이 썩 직선적인 위인이었다. 동시에 상욱은 이런 성격의 소유자일수록 보다 쉽사리 그리고 엄청난 배반이 감행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원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철조망을 둘러치고 거리를 떼어놓는 것은 불의의 감정 폭발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가끔 철없이 달려들어 제 부모들 품으로 안겨들 때가 많습니다.” “그렇겠지. 병을 앓아도 부몬 제 부모니까.” “원장님 말씀대로 이 섬 안에서는 모든 일이 입과 입으로 말해지는 것과 실제 행동 사이에 거리를 가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게 오히려 상식이 되고 있는 편이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가 그렇다는 게요.” 원장은 면회 대열에 눈을 주고 있으면서도 상욱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저흰 늘 저 아이들에게 나병은 유전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어떤 다른 병보다도 이 병은 전염성이 약하므로 너희들은 다른 건강한 아이들과 다를 데가 없는 떳떳한 어린이라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저 아이들은 직원들 자녀들이 다니는 고개 너머 국민학교로는 등교를 못 합니다. 뿐입니까. 이 보육소의 분교에서마저도 건강한 선생은 수업을 맡아주러 오는 분이 거의 없습니다. 보육소의 미감아 교실 선생님은 거의 모두가 음성 병력자들뿐입니다.” “그건 아무래도 좀 기분 문제가 있을 테니까.” “물론 그건 기분 문제입니다. 하지만 치료소엘 한번 나가보십시오. 거길 가보시면 그 기분 문제가 어느 정도인 줄을 아시게 되실 겁니다.” “치료소에선 또 뭐가 어떻다는 게요?” “환자에게 약을 나눠주는 간호원 한 가지만 예로 들겠습니다. 환자에게 약을 나눠주는 간호원들은 위생복에 위생장갑에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그것도 아직 기분이 꺼림직해서 핀셋 끝으로 주저 주저 약알을 손바닥에 놓아줍니다.” 원장은 대꾸가 없었다. 입을 다문 채 한동안 언덕 아래로 면회장 풍경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면회 대열 사이에서 다른 직원들과 함께 면회 감시를 하고 있던 직원 하나가 슬그머니 대열을 빠져 나와 상욱들이 서 있는 언덕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보육소의 말썽쟁이 윤선생이었다. “이과장님이시군요. 그렇잖아도 한번 찾아 뵐 일이 있었는 데 잘 나와주셨어요.” 건강한 여자만 보면 엉뚱한 봉변을 주어서 섬에서 내몰고 싶어하는 윤해원, 보육원의 동료 교사 서미연에게까지도 벌써 수상한 눈치를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는 윤해원, 그 윤해원 역시 눈가에 불그스레한 병흔이 남아 있는 음성 병력자였다. 하지만 이 윤이란 위인이야말로 섬 안에서는 가장 불가사의한 말썽투성이의 인물이었다. 그의 발병 내력이나 투병 과정에서의 일들은 둘째치고, 그가 이 미감아 보육소에서 보낸 몇 년 동안에 빚어온 이런저런 기행들로만 해서도 섬사람들은 그를 거의 미친 사람 치부를 하고 지내는 판이었다. 하면서도 그는 또 저주스런 병에 대해서만은 낙천적일 만큼 대범하고 천연스러워서 어떤 때는 마치 실없는 장난꾼처럼 허물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일면도 있었다. 그 윤해원이 곁에 서 있는 새 원장의 존재에는 조금도 아랑곳하는 기색이 없이 상욱에게로 다가들어왔다. “면회 시간은 끝난 거요?” 상욱은 작자의 출현에 공연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원장은 별로 윤해원의 출현엔 관심이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 윤해원의 출현엔 관심이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 윤해원이란 위인이야말로 원장에겐 누구보다도 먼저 소개를 해둘 필요가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일부러 상욱이 소개 말을 건넬 필요는 없었다. 상욱과 윤해원 사이에 몇 마디만 이야기가 오가고 나면 원장은 저절로 그를 알게 될 것이었다. 이자가 오늘은 또 무슨 장난기가 동한 건가. 상욱은 간밤의 그 서미연 선생을 생각하며 일부러 좀 추궁하듯 한 말투로 윤해원에게 물었다. 하니까 윤 쪽의 반응은 역시 짐작 한대로였다. “끝나나마나 그까짓 울고 짜고 하는 꼬라지들은 지켜봐서 뭘 합니까. 그보다도 오늘은 저 과장님께 또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요.” 다짜고짜 용건부터 들이댈 기세였다. “부탁이라뇨, 무슨?” “아 그 일전에 제가 말씀 드린 조 뭐라는 녀석 있잖습니까. 그 녀석 언제 한번 다시 데려다가 받아봐야겠어요.” “그 아이라면 검사를 받은 지가 일주일도 안 되지 않았습니까.” 상욱은 윤해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일단 작자를 안심해도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바로 며칠 전 일이었다. 윤해원은 조 모라는 보육소 아이 하나를 데리고 와서 일부러 세균 검사를 받게 한 일이 있었다. 외모로 보아서는 전혀 멀쩡한 아이였다. 한데도 윤해원은 굳이 검사를 부탁했다. 아무래도 예감이 수상쩍다는 것이었다. 검사 결과는 역시 마이너스였다. 마이너스로 판명되어 나온 검사 결과를 보고 이상스럽게 실망스런 표정으로 돌아서던 윤해원의 모습을 상욱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며칠 되진 않았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아무래도 제 검사 결과를 믿을 수가 없다는 건가요?" "그건..." "그게 아니라면 윤선생은 또 봄철도 아닌데 벚꽃 생각을 너무 하는 거 아니오?" "그야 봄철이 아니니까 그놈의 벚꽃 색이 너무 귀해서 그런지도 모르지요. 어쨌거나 이쯤 되면 한두 놈한테 선 꽃 소식이 나타날 때도 되긴 했는 데..." 분홍색이나 벚꽃 소식이란 이 병이 얼굴 근처에 첫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 자주 그 벚꽃의 분홍색을 볼 수 있는 데서 연유한 말이었다. 분홍색이나 자주색은 병이 나은 다음까지도 눈두덩 같은 데선 평생을 두고 떠나가주지 않는 이 병 고유의 색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섬사람들은 누구나 그 절망스런 분홍색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그것을 저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섬에는 무슨 인연인지 붉은 황토색이 많았고, 봄만 되면 그 분홍색 벚꽃이 구름처럼 섬을 뒤덮었다. 육지 사람들은 봄이 되면 떼지어 섬으로 와서 이 붉은 섬을 구경하고 돌아갔다. 황톳길과 벚꽃과 그리고 그 벚꽃의 분홍색이 원색의 그림자처럼 곱게 점 찍힌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돌아갔다. 분홍색은 절망의 색깔이었다. 누구나 그 분홍색을 저주했다. 하지만 섬 안에서 꼭 한 사람 그 분홍색을 저주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분홍색을 저주하기는커녕 진짜로 무슨 꽃잎 자국이라도 되는 듯 그것을 소중하게 기리고 다녔다. 봄철이 되어 섬 거리가 온통 벚꽃무리로 뒤덮이고 나면, 그는 마치 그 분홍색에 넋이 빠진 사람처럼 시를 쓴다, 그림을 그린다, 함부로 그 분홍색과 분홍의 섬을 입에 올리고 다녔다. 그는 이를테면 분홍색 미치광이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바로 그 자신에게서 분홍색을 기다렸고, 끝내는 그 분홍색의 절망까지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경험을 하고 난 위인이었다. 다름아니라 그는 애초 이 섬 미감아 보육소의 관리원직을 자청하고 왔을 때는 이 병과 아무 상관도 없는 건강인에 틀림없었지만, 이후 몇 년 동안 이해할 수 없는 분홍색 집착증에 빠져들면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서마저 초조할 정도로 분홍의 반점을 기다리기 시작했고, 끝내는 그 어이없는 분홍색의 절망을 스스로 경험하고 났던 것이다. 그는 분홍의 증세가 시작되자 행복스러운 듯이 철조망을 건너 병사 지대로 들어갔다. 섬 병원 40년 역사에서 건강인 지대의 병원 직원이 발병을 기록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병사 지대 안에 그의 누이 한 사람이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들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근 3년 동안 병사 지대의 누이 곁에서 치료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3년이 지나자 그는 조기 치료가 행해진 덕분이었는지 상흔도 그리 심하지 않은 모습으로 말끔히 건강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는 치료를 모두 끝내고 나서도 여전히 섬을 떠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누이는 증세가 훨씬 악성이라 했다. 그의 누이는 계속해서 병을 앓았고, 그는 섬을 떠나지 않은 채 다시 철조망을 건너 직원 지대 끝에 있는 미감아 보육소를 나다니기 시작했다. 미감아 분교의 선생이란 언제나 그 수가 부족한 형편이었으므로 그는 다시 그 곳에서 일을 계속하게 된 것이었다. 윤해원의 분홍색 집착증은 그의 누이에 대한 병적인 애정처럼 더욱더 심해져 있었다. 어쩌다 한 번씩뿐이었지만 아이들 가운데서 새 발병사고가 생겨나도 그는 도대체 낭패감에 젖거나 실의 같은 것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실의 한두 놈한테선 꽃소식이 나타날 때도 됐는데..... 상욱의 농담조에 윤해원은 아닌게아니라 굳이 부인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자기 역시 농담조로 말을 받고 나서는 실없이 픽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 웃음 끝에 쓸쓸한 수심기 같은 것이 어리고 있었다. "그 서선생이란 여자하곤 이번에도 또 사이가 시원칠 않은 모양이구려." 상욱은 좀더 알은체를 하고 나섰다. 윤해원을 대하고부터는 아무래도 그 서미연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해원 앞에서는 터무니없는 상상만이 아니었다. 병원 일을 자청하고 섬으로 들어왔다가, 이런저런 곡절 끝에 간신히 섬 안에 몸을 주저앉힐 작정을 하고 난 아가씨들이라 하더라도 따지고 보면 그녀들이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이 섬을 그리 오래 견뎌낼 수 있었던 아가씨는 몇 명이 되지 못했다. 한 달이 멀다고 금세 다시 섬을 떠나가 버리곤 했다. 윤해원 때문이었다. 윤해원이란 인물이 번번이 그 여자들을 못 견디게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그는 참으로 이상한 방법으로 그녀들을 괴롭혔고 마침내는 그녀들로 하여금 섬을 떠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버렸다. 서미연이란 여인에 대해서도 그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연이 일단 섬 안에 몸을 머물기로 작정하고 나서자 윤해원의 눈빛이 당장 새로운 음모로 빛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 윤해원의 방법에도 심상찮은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며칠 뒤 윤해원은 그 조라는 미감아 한 녀석을 상욱에게로 데리고 와선 엉뚱한 부탁을 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 녀석 좀 자세히 살펴봐주십시요." 마치 그 아이에게서 발병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상욱은 평소부터 위인의 됨됨이를 알고 있었던 터라 별다른 생각 없이 일을 끝내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윤이 데려온 아이가 새로 온 여자 선생에게서 특별히 귀여움을 사고 있는 녀석이라는 것이었다. 상욱은 금세 이상스런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윤해원이 녀석에게 특별히 따로 세균 검사를 받게 한 데는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았다. 보육소 아이들에 대한 여인들의 애정까지도 그는 건강 여인들의 오만스런 동정쯤으로 단정하고 마는 위인이었다. 그는 녀석에 대한 미연의 관심에서 자신이 어떤 모욕감을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결국 서미연이 조 소년을 배반하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년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오만스런 건강인들의 한낱 보잘것없는 동정심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따로 나서지 않아도 서미연을 더 이상 섬을 견딜 수 없게 된다..... 거기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조 소년을 또 하나의 어린 문둥이로 만들고 싶은 무서운 자기 집착에 빠져들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윤해원의 요량은 역시 그 상욱의 짐작에서 크게 벗어나질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곧 상욱의 말뜻을 알아들은 표정이었다. "글쎄요. 여기 온 여자들하고 제가 언제 사이가 좋아본 적이 있습니까." 역시 쓸쓸한 수심기가 어린 목소리였다. 하더니 그는 이내 또 무엇을 감추다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상욱에게 은밀스런 미소를 지어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엔 상욱 쪽에서도 괜히 작자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 꺼림칙한 기분이 되고 있었다. "그러게 말요. 윤선생한텐 대개 보름을 못 견뎌내는 줄 알았는데, 그 여잔 벌써 한 달이 훨씬 지났지 않아요?" "제가 뭐 여선생을 쫓아내는 문둥이 귀신쯤 되는 줄 아시는 모양이군요. 그 여자한테 절 너무 그런 식으로만 말씀하시면 전 영 낭팬걸요. 하지만 어쨌거나 그 여잔 멋도 모르고 애새끼들을 너무 좋아하고 있어요. 특별히 그 녀석한텐 더 위험할 때가 많아요." 윤해원은 서서히 어떤 질투 같은 것이 어리기 시작한 눈길로 천연스럽게 지껄여대고 있었다. 문둥이, 문둥이. 자학이 아니라면 이 섬 안에선 아무도 말하거나 듣기 좋아할 리가 없는 그 말을 아무렇게나 함부로 입에 담는 것도 그가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가만 놔둬보구려. 그러다 지치면 제풀에 물러설 때가 있겠지요. 녀석한테도 그게 아직 해로울 게 없었지요. 하지만....." "윤선생이 그토록 서선생을 염려해주는 줄은 내 미처 몰랐구려." "어쨌든 그 아인 한 번 더 검살 받게 해주셔야겠여요." 언덕 아래선 그 사이 면회 시간이 다 끝난 모양이었다. 철조망 양쪽으로 사람들이 다시 천천히 갈라져나가고 있었다. 윤해원은 한 번 더 다짐을 주고 나서 사람들이 이미 넓게 흩어져 번지고 있는 면회소 쪽으로 흐느적흐느적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보육소 아이들 가운데서도 가끔 발병 사고가 있는 모양이구만." 윤해원이 언덕을 내려가자 원장이 역시 상욱과 윤해원의 이야기를 귀에 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경우가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일년에 한두 명꼴로는 증세가 나타나서 병사 지대로 다시 돌아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상욱은 솔직하게 일러주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다시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면 그런 아이들은 대개 격리 조치가 늦어졌거나 부주의 때문이라는게 밝혀지곤 했습니다만, 어쨌든 아이들에겐 그 영향이 아주 나쁩니다. 녀석들은 언젠가 자기들한테도 그런 일이 생길 것처럼 생각하고, 그럴 바엔 차라리 일찍 병이 솟아나서 부모들 곁으로나 돌아가게 되길 바라고 있는 형편이니까요." "설명을 잘 믿지 않으려는 모양이군." "녀석들에겐 무엇보다 말로 가르쳐준 것을 믿도록 해주는 일이 가장 어려운 노릇이니까요." "무슨 얘긴지 알겠소. 한데 그 아인 어떻소? 아까 그 친구가 어떤 아이의 세균 테스트를 부탁한 모양이던데." "아, 그 아인 별일이 없을 겁니다. 그 사람이 괜히....." "별일이 없는데 공연한 세균 테스트는 두 번씩이나 거푸 시키려고해요? 그러지 않아도 그 친구 꼭 애녀석들한테서 병을 기다리는 투가 아닙디까." 원장도 벌써 그렇게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잘 보셨습니다. 그 친구 평소에도 좀 그렇게 보이는 데가 있습니다. 이 병에 대해선 전혀 무슨 혐오감이나 조심성 같은 걸 느끼지 않는 것처럼 대범스럽게 행동해 보이니까요. 이 병 알기를 무슨 몸살기나 되는 것처럼 천연스러워요. 섬사람들이 그래서 숫제 미친 사람 치부를 하고 지낼 정도지요. 하지만 알고 보면 무서운 데가 있는 작잡니다. 병에 대해서도 사실은 이상스럽게 무서운 집착을 보이고 있어요. 병을 피하거나 이기려 하기는커녕 오히려 작자가 그것에 반해 매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거든요. 그런 점에서는 이 섬 안의 누구보다도 더욱 어려운 증상의 환자가 바로 저 작자인 셈이지요." "보육소 선생이요?" 원장은 그것도 벌써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하면서도 일부러 그런 소릴 물어온 것은 어떻게 그런 미치광이 같은 사람이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보육소 일을 맡고 있느냐는 뜻이었다. "윤해원이라고 여기서 한 10년째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사람입니다만 적어도 아이들을 직접 다치게 한 일은 없었으니까요. 겉으로는 사람이 제법 허허해서 아이들도 허물없이 잘 따르구요. 그 자신은 중간에 병에 걸려 한 3년 일을 쉰 일도 있었지요." "그럼 그 사람 이 섬엘 들어와서 병을 얻었단 말요?" 원장은 비로소 목소리가 달라지고 있었다. 예의 그 끊임없는 질문의 홍수가 또 한차례 정신없이 쏟아져나올 기세였다. "섬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보다 먼저 그의 누이 한 사람이 병사 지대에서 몸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긴 했습니다만, 어쨌든 그는 건강한 몸으로 이 섬에 들어와서 병을 앓게 되었고, 병이 낫고 나선 다시 또 보육소 일을 맡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이 어지간히 독물인 게로군 그래." "이야기가 좀 많은 사람 같기는 합니다만 거기 비하면 또 깊은 내력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 위인이기도 합니다." 언덕 밑은 이미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상욱들도 이젠 천천히 사무 본관을 향해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번 둑이 터진 질문의 홍수는 거기서도 아직 기세가 꺾일 줄을 모르고 있었다. 몇 발짝 잠잠히 발길을 옮기고 있던 원장이 생각난 듯 문득 다시 상욱을 돌아다보았다. "한데 서선생이란 여잔 또 누구요? 그 여자 지금 그 윤이란 친구하곤 사연이 있는 모양이던데....." 이번에 다시 서미연 이야기였다. "사연이래야 뭐 대수로운 일은 아닙니다만....."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면..... 작자가 그 여자하고 무슨 연애질이라도 하고 있다는 게요?" 일부러 끝을 얼버무리는 듯한 상욱의 말투에 원장은 턱없이 조급해지고 있었다. "그야 어디 연애가 되겠습니까. 그 친구 늘 성한 여자들만 보면 섬을 떠나보내고 싶어 못살게 구는 방법이 그런 식인 것 같아요." "일부러 여잘 못살게 군다?" "원장님 말씀대로 그 친군 아가씨들이 나타나고 며칠만 지나면 사랑을 호소한다는군요." "성사가 되어본 적이 없었던 게로군." "그래서 그게 차라리 그 친구가 여자들을 쫓는 방법일 거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아가씨들은 그때마다 기겁을 하고 섬을 떠나가버렸으니까요." "아가씨들을 그처럼 못 견디게 하는 건 건강인에 대한 환자 특유의 질투 때문이겠구....." "물론입니다. 하지만 질투심에 불을 붙여주는 것은 또 그 아가씨들 쪽인지도 모릅니다. 이곳을 찾아오는 아가씨들은 한결같이 이 병에 대해선 깊은 이해를 맹세하건든요. 하지만 윤이란 친군 도대체 그걸 신용하지 않으려는 거죠. 그리고 그는 번번이 그런 자기 낭패를 통해서 여인들의 허세를 증명해낼 수가 있었구요. 여인들은 그가 결국 다른 건강인과는 끝내 같을 수가 없는는 사실만을 되풀이 확인시켜준 셈이지요." "질투가 맞아요. 그래서 작잔 서선생이란 여자가 그 아일 귀여워해주는 것조차 견딜 수가 없어진 거요. 그 아이를 자기 맘속에서 진짜 문둥이로 만들어버리고 싶을 만큼 여잘 견딜 수 없게 된 거란 말요." 상욱은 아직 윤해원과 서미연 사이에서 조 소년이 어떻게 관련이 되고 있는지는 설명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한데도 원장은 어느새 거기까지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는 제법 자신있는 판정을 내리고 있었다. 상욱은 좀더 말을 비약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마 어떤 식으로든 그 녀석이 문둥이가 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녀석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윤선생이 다시 여자에게 사랑을 호소하게 될 게고, 서선생도 그때 가선 결국 또 섬을 떠나게 될테니까요." 상욱은 아마 이번의 서미연만은 그렇게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그 서미연만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의 은근한 기대를 눌러버리면서 정연한 목소리로 단정을 내리고 있었다. "거 좀 볼 만한 구경거리가 되겠는걸." 역시 상욱의 말을 모두 알아듣고 있는 원장이었다. 그는 좀 장난스러울 정도로 상욱의 말에 쉽게 맞장구를 쳐나가더니 이윽고는 그만 입을 굳게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한동안 말없이 발길만 옮기고 있더니, 드디어는 다시 참을 수가 없어진 듯 침울하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모두들 참으로 무서운 병들을 앓고 있는 중이로군..... 이대로는 아무래도 탈출 사고를 막을 길이 없겠어. 몸으로 앓고 있는 것보다 더 무서운 질병을 앓아대고 있으니..... 섬을 빠져나가려는 자들이 생기는 걸 나무랄 수가 없겠어." 5 새 원장이 부임초의 탈출 사고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반가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원장은 과연 더 이상 이 섬을 원생들의 낙원으로는 믿지 않게 된 것 같았다. 탈출 사고가 일어나게 된 연유에 대해서도 그 나름의 이해를 보이기 시작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일은 오히려 좀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원장에게서 느닷없는 투지가 발동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 원장을 마침내 부임 연설을 결심하고 나섰다. 원장은 이날 아침 뜻밖에 출근이 늦고 있었다. 그는 아무래도 좀 모를 곳이 많은 사람이었다. 밤사이에 그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병사 지대로 내려가서 고스란히 하룻밤을 밝히고 돌아왔다는 소문이었다. 원장실에서도 관사 주변에서도 밤사이에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는데, 새벽녘에 병사 지대를 순찰하던 지도소 순찰원이 중앙리 근처를 지나다가, 그곳 천주교 성당 안에서 새원장이 비실비실 문을 걸어나오고 있는 걸 보았다는 것이었다. 성당 안에서 밤을 새운건지 , 그때 마침 그곳을 들러 나오다 거동이 눈에 띄게 된 건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 어쨌거나 원장은 그런 일로 해서 이날 아침 출근이 퍽 늦어진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한데 그 원장이 느지막이 사무실을 나와서는 갑자기 부임 인사를 서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나 원생들을 좀 보게 해주오.” 표현은 겸손했으나 결국은 그게 그 소리였다. 하기야 새 원장으로 섬으로 들어와서 끝끝내 부임 인사조차 치르지 않은 채 병원의 어른 노릇을 해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동안 너무 잠잠해 있기만 하던 원장의 거동에 비해 이날의 부임 인사는 뜻밖에 만만치 않은 행사가 되고 있었다. 원장의 지시는 지체 없이 하달되었다. 보행이 불가능한 신체 부자유자를 제외한 병사 지대 7개 마을 5천여 원생들은 오전 10시까지 빠짐없이 중앙 공원 광장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고 나서 원장은 곧 그가 이 섬 병원에 온 후로 모처럼 첫 조회 행사를 부탁했다. 한번도 공식 모임을 마련한 일이 없는 탓도 있었겠지만, 원생들 앞엘 나서기 전에 그로서도 직원들에게 먼저 할 말이 있었을건 당연한 순서였다. 원장은 그 모처럼의 직원 조회에서부터 좀 심상치 않은 연설을 했다. 새삼스럽게 여러분한텐 따로 할 말이 없다, 오늘 나는 원생들을 만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 혼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만나는 것이다, 오늘은 여러분도 나와 함께 그들을 다시 만나야 한다, 따라서 내가 오늘 그들을 만나 그들에게 주문할 일들은 여러분도 나와 함께 그들에게 약속하고 주문할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주기 바란다..... 다른 원장이 왔을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것은 곧 원생들에게 행할 연설의 전체나 서두에 부과했다. 무엇을 약속하고 무엇을 부착하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다. 그 간단한 몇 마디 가운데서도 그의 의도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가 무엇을 원생들에게 약속하고 또 무엇을 요구하든 그것은 자기 혼자만의 그것이 아니라 ‘우리들’모두의 이름으로 ‘함께’ 행해지는 것이라는 것, 그것은 바로 병원 직원 전체의 원장에 대한 무조건한 신뢰와 승복의 요구였다. 상욱은 불안했다. 결국은 이 사내에게도 동상이 숨겨지고 있었던 것인가. 그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약속하고 무엇을 구하겠단 말인가. 원생들이 집결할 시간을 기다렸다가 직원들과 함께 병사 지대로 내려가고 있는 상욱의 머릿속에선 원장의 그 새삼스런 거동에 대해 끝없는 의구가 일고 있었다. 하기야 사람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난 자 어느 부처님이라고 자신의 동상을 품어보지 않은 삼이 있을 것인가. 누구에게나 가슴속 깊은 곳에는 그런 동상이 하나씩 숨겨지고 있게 마련인지 모른다. 차이가 있다면, 사람에 따라 그것을 어떻게 숨기고 지내느냐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참으면서 그 동상의 환상에서 끝끝내 눈을 감고 견딜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더욱더 무리한 주문을 말한다면 어떻게 그 단단하게 굳어진 동상의 벽을 아픔을 무릅쓰고 스스로 헐어나갈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부임 연설 따윌 참지 못한다고 원장을 탓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약속을 해도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 약속이 원장의 가슴속에 은밀히 숨어 있을 그의 동상과 얼마나 가깝게 상관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원장 자신이 그의 좁은 가슴속을 튀어나와 만인 앞에 자랑스럽게 서고 싶은 그 은밀스런 동상의 충동을 어떻게 현명하게 견디어내느냐는 점이었다. 그의 약속이라는 것은 적어도 자기의 동상과 충동을 어떻게 현명하게 견기어내느냐는 점이었다. 그의 약속이라는 것은 적어도 자기의 동상과 그 동상의 충동을 외면하고 난 다음의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상욱으로서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중앙 공원 광장에는 벌써 병사 지대 5천여 원생들이 집합을 완료하고 있었다. 원생들은 부락별로 나눠져서 정연한 대열을 지은 채 조용히 새 원장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헛기침 소리 하나 일지 않는, 무섭도록 조용한 회중이었다. 직원들이 그 원생들을 마주하여 앞쪽으로 도열해 섰다. 김정일 의료부장이 먼저 단 위로 올라갔다. 병원 설립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그 구라탑 앞 반석이 이 광장의 연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20여 년 전 일본인 주정수 원장이 섬 밖으로부터 그 반석을 구해 들여다가 구라탑이 서기 전에 그곳에 세워져 있던 자신의 동상 앞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보은 감사일 기도를 거두던 바로 그 유서 깊은 장소 였다. “어어 오늘 이렇게 여러분을 일부러 모이게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의료 부장이 집회의 목적을 설명하기 시작해도 대열 가운데선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안 보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묵묵히 연단만 쳐다보고 서 있었다. 하지만 의료 부장 김정일은 이미 그런 일에는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 “......하니까 이미 알고들 계시겠지만, 우리 병원에선 이번에 다시 새 원장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새로 오신 원장님이 여기 계신 조백헌 대령님으로 지금까진 군 현역으로 전후방의 여러 병원에서 장병들의 위생 관리와 질병 퇴치에 전력을 기울여오시다가 이번에 마침 자비하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 병사의 일을 책임맡아 오시게 된 어른이십니다. 그새 몇 달 동안 우리 병원은 정식 원장님을 모실 수 없었던 관계로 치료 업무나 기타 제반 사업에 여러 가지 차질을 피치 못해 오던바, 이번에 훌륭한 어른을 새 원장님으로 모시게 되어 여러분과 함께 우리 다 같이 어른을 환영하고 부임을 경하해드려야 할 줄 압니다. 이제 원장님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 다소 장황스런 소개말을 끝내고는 단을 내려갔다. 대열 가운데선 역시 아무 반응도 엿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목덜미를 쏘아대는 여름 햇볕 때문에 고개를 움칫거리는 기미조차 쉽사리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들을 인솔해온 보육소의 서미연과 윤해원들이 맨 앞줄에 서 있는 게 보였지만 그들도 역시 참을성 있게 햇볕을 잘 견디고 있었다. 회중은 그냥 바다 밑처럼 무겁고 커다란 침묵의 덩어리로 엉켜 서 있었다. 의료 부장이 그 침묵의 한가운데로 원장을 안내해갔다. 원장이 단 위로 올라섰다. 말없이 마주선 1만여 개의 눈길이 일시에 그 원장에게로 쏠려들고 있는 것 같았다. 원장은 원생들을 대표해 나온 지도소 요원으로부터 거수 경례를 받고 나서도 한동안 입을 떼지 않고 있었다. 새 원장의 신임 인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의료 부장이 장황한 소개말에서 일부러 새 원장의 부임을 환영해달라는 부탁을 건넸음에도 불구하고, 박수 하나 보내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한 원생들의 결례 따위를 탓하고 있을 원장은 물론 아니었다. 그는 마치 그에게로 쏠려 있는 말없는 눈들이 자꾸자꾸 앞으로 다가들고 있는 듯한 착각 속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는 숨이 막힐 듯한 표정이었다. 훤칠한 키에 그렇게도 보기 좋게 잘 어울리던 유니폼까지 턱없이 어색해 보였다. 약모와 양 어깨에 매달린 은백색 대령 계급장들도 이상스러울 만큼 위엄을 잃고 있었다. “조백헌 대령입니다” 마침내 원장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우선 이 음산스럽고 불가사의한 침묵부터 깨뜨려놓아야겠다는 듯 첫마디부터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날씨도 덥고 하니 거두절미하고 우선 이곳엘 오고 나서 며칠 동안 이 섬에서 보고 들은 저의 느낌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장은 그러고 나서 이 이틀 동안 그가 이 섬에서 보고 느낀 일들을 단도직입적으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전 솔직히 이곳을 오기 전엔 이 섬이 어떤 곳인지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물론 몇 가지 기초적인 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병이 다 나아서 사회 복귀를 기다리고 있는 음성 병력자나 아직도 투병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전체 도민 수가 얼마만큼 된다든가, 그런 여러분을 돕기 위해 나라의 연간 국고 지출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된다든가 하는 따위들이 미리부터 제가 이 섬에 관해 알고 있었던 사실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주의 깊게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던 일은 이 섬이야말로 이젠 그 저주스럽고 절망스런 오욕의 세월에서 벗어나 여러분의 둘도 없는 낙토요 자랑스런 고향으로 변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천형의 질병으로 저주받던 상처는 나아가고, 생활과 복지 시설은 늘어가고, 짓밟혀온 인권은 나날이 보호 신장되어가고 있으며, 그렇게 해서 이 섬은 바야흐로 여러분의 참된 낙원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섬으로 왔습니다. 섬을 와서 보고 헛소문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여러분은 원하는 대로 치료를 받고 있으며, 병은 나날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풍광 좋은 섬에선 더 이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저의 오해가 있었습니다. 며칠 전 - 그러니까 제가 이 섬으로 와서 이곳에서 첫밤을 지내는 동안 여러분 가운데선 이 섬을 빠져나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섬에 대한 여러분의 뜻있는 부임 선물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여러분은 아직도 이 섬을 여러분의 낙토라고 생각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탈출 사고는 그걸 제게 일깨워준 것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 좀더 이 섬을 돌아보고 나서 금방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저의 오해였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무서운 병을 앓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물론 육신의 병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이 몸으로 앓고 있는 것보다 더 무서운 질병을 마음으로 앓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 섬은 구석구석이 온통 불신과 배신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이 섬은 지금까지 여러분이 몸으로 앓아온 것보다도 더 치명적인 그 불신과 배반이라는 질병을 뼛속까지 깊이 앓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상관없는 일입니다. 저야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든 여러분이 낙토가 아니라면 이 섬은 여려분의 진정한 낙토가 될 수 없습니다. 저에겐 그런 사실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 비로소 이곳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을 찾은 것입니다.“ 원장의 어조는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대열 쪽에서는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원장의 말을 듣고 있는지 어떤지조차 가늠할 구석이 없었다. 원장은 그 바다 밑처럼 무거운 침묵의 덩어리를 향해 기어코 어떤 반응을 얻어내고 말겠다는 듯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돋워올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 섬을 다시 꾸며야겠습니다.” 드디어 원장에게선 그 약속이라는 것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섬과 섬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해오던 일이 원장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섬을 다시 꾸미겠노라고 선언했다. 섬을 다시 꾸며서 이번에는 정말로 시 섬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을 자기의 행복스런 낙토로 믿게 해주겠노라고 힘있게 다짐했다. 떠나가선 다시 또 돌아오고 싶은 그리운 고향을 만들어 갖자고 간곡한 설득을 펴기도 했다. 환경도 보다 개선하고 이 섬에 살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의 생활을 각자가 창의적으로 개발해나갈 수 있도록 자활 대책을 연구하겠노라는 약속도 했다. “나라가 온통 재건 사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이때, 우리들이야 말로 이 섬을 다시 꾸미러 나서는 것은 어떤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도 값지고 보람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위해서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거기서 비로소 원장은 원생들에 대한 자신의 주문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먼저 여러분의 협조와 솔선수범입니다. 여기 서 있는 이 사람이나 직원 일동도 물론 이 일을 위해서는 여러분과 함께 신명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같이합니다. 하지만 이 일은 보다 먼저 여러분 자신의 일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발적인 의욕과 소명감이 굳게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한데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원장은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 추궁하듯 대열을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하더니 그는 느닷없이 격앙한 목소리로 단정을 내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없습니다. 자신이 없으므로 옛부터의 그 추악한 불신감과 배신감만 앞서고 있습니다. 좀더 심하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아직도 그 불신감과 배신감의 슬픈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은 무섭도록 자신을 깊이 움츠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입을 꼭꼭 다물은 속에서 이 사람을 의심하고 엉뚱스런 배신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해하려고는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가 없었겠지요. 그리고 누구도 여러분을 용서하려 하질 않았으니까요. 여러분은 거기서부터 이미 자신을 잃어버렸고, 그렇게 자신을 잃고 살아온 생애 가운데선 배반과 불신밖에 버릇될 수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이제 여러분에겐 용서받을 일이 없습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용서받습니까. 누가 감히 여러분을 용서합니까. 이 섬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좀더 당당해지십시오. 그리고 불신과 배반의 습성을 버리고 단결하고 협조하십시오. 여러분이 떳떳하면 떳떳해질수록 그것으 쉬워집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먼저 자신의 인간 개조를 이룩하십시오. 이 일을 위해서는 그게 절대로 필요합니다. 저의 말씀을 몇 마디로 닷 요약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 섬의 재건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다시 정정당당, 인화단결, 상호협조, 이 세 가지를 생활 지표로 삼아달라는 것입니다. 정정당당이란 물론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이웃에 대해서, 그리고 여기 서 있는 병원 직원과 바깥 세상 사람들 모두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당하는 말입니다. 인화단결이나 상호협조 역시 마찬가집니다. 이 역시 여러분 환우를 상호간이나 직원들에 대해서 다 같이 해당하는 말입니다. 이 사람을 비롯한 여기 선 직원 일동은 물론 기꺼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기필코 여러분 자신의 인간 개조를 이룩해내십시오. 여러분의 새로운 낙토를 위해 이 사람은 신명껏 그것을 돕겠습니다. 아니 강제라도 하겠습니다.” 입을 열고 나서부터는 제법 자신이 생긴 탓인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목소리가 고압적으로 격앙되어가던 원장의 그 필사적인 신임 연설은 거기서 간신히 끝을 맺었다. 연설을 끝내고 난 원장은 자기의 연설에 스스로 감동한 듯 얼굴이 검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열 쪽에서는 그래도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연설이 끝나고 나도 대열은 미동도 없이 새 원장의 다음 거동만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머리 위까지 치솟은 늦여름 태양볕을 그 거대한 침묵의 덩어리는 무섭도록 끈질기게 견디고 있었다. “그 작자들 도대체 내 얘긴 귓등에도 스치지 않은 것 같더군요.” 이날 저녁이었다. 원장은 간부 직원 몇 사람을 숙소로 불러다가 모처럼 술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런 자리를 빌어 직원들 입에서라도 좀 속시원한 얘기를 들어보자는 의도 같았다. 낮에 있었던 연설의 반응은 물론 섬 전체의 분위기를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어진 게 분명했다. 의료부장 김정일과 서무과장, 교도과장 들이 원장과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보건과장 이상욱도 근무 시간이 끝나기 조금 전에 다른 사람과 같이 원장의 부름을 받고 있었다. 그렇게 술자리가 시작되고 나서도 한동안은 누구 한 사람 낮에 있었던 원장의 연설에 관해선 입을 떼는 사람이 없었다. 새삼스레 할말이 있을 리 없었다. 원장 쪽도 자기가 먼저 입을 떼기는 뭣한 모양인지 우선은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의례적인 대화 속에서 술잔들만 부지런히 비워내고 있었다. 좌중은 빠른 속도로 취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삽시에 얼굴들이 번들번들 익어가고 있었다. 원장과 상욱만이 좀처럼 표정이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다. 원장은 여기저기서 건네오는 술잔을 분주하게 되돌려보내면서도 표정이 바뀌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원장이 취기를 아끼고 있는 기미가 엿보이자 상욱 쪽에서도 혈관 속을 흐르기 시작한 알알한 알코올기를 한껏 인색하게 견뎌내고 있었다. 하지만 원장은 미처 자기 외에 또 한 사람 이상욱 보건과장이라는, 이 기분 나쁘도록 얼굴색이 창백한 사내가 언제나처럼 조심스런 긴장의 끈을 풀지 않고 있는 낌새는 눈치를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방안 분위기가 어느 정도 흐느적흐느적 흔들리기 시작하자 마침내 원장은 참을 수가 없어진 듯 속셈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난 오늘 숨을 쉬고 살아 있는 사람들 앞에서 얘길 떠들어대고 있었던 것 같지가 않아요. 그 작자들 도대체 내 얘길 듣고 있다는 게 그 모양이었소?” 흐느적거리기 시작하던 분위기가 원장의 그 소리에 갑자기 다시 가라앉아버렸다. 아무도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말을 좀 해보시오. 그건 아마 내 말을 꽤는 열심히 듣고 있었거나 아니면 아예 아무 소리도 듣고 있질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쪽이었소? 어느 쪽 같았소?” “그건 아마 원장님의 말씀을 조심스럽게 듣고 있는 편이었을 겝니다.” 원장의 추궁을 피할 수 없게 된 의료부장이 자신 없는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여태까지 잡담 제하고 술잔만 들여다보고 앉아 있던 상욱이 느닷없이 의료부장의 말꼬리를 휘어잡고 나섰다. “하지만 그건 아마 아무것도 듣고 있지 않은 쪽일 수도 있을 겁니다.” 좌중은 다시 한번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듣고 있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건 또 무슨 뜻이오?” 원장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석연찮은 눈초리로 상욱을 건너다보았다. 섬을 오고 난 바로 그 다음날부터 이상하게 자주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상욱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의 주변을 살피면서 때로는 당돌한 듯싶다가도 때로는 알 수 없는 불안감 같은 것을 숨기지 못하던 위인이었다. “여러 번 느낀 일이지만 난 당신이 늘 쉬운 말을 배배 꼬아대는 데는 정말 취미가 없어요. 좀 알아듣기 쉽게 말을 해보오.” 원장의 목소리에 조급한 힐난기가 섞이고 있었다. 상욱도 이젠 내친김이라 말을 사양치 않을 기세였다. “말씀을 쉽게 드려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 사람들 원장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거나 그렇지 않았거나 애초부터 차이가 없는 일이니까요.” “점점 모를 소리로군.” “그건 저......” 난처해진 의료부장이 상욱을 가로막고 나서려 했으나, 그 의료부장을 상욱이 다시 앞질러버렸다. “좀더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아까 원장님의 말씀 도중에 그 사람들은 원장님의 음성이 아니라 그 사람들 속에 오랫동안 간직되어온 또 한 분 다른 사람의 음성을 듣고 있었던 거니까요. 그 사람들은 오늘 원장님의 목소리를 빌어 그들에게 오랫동안 간직되어온 그 목소리를 한번 더 되풀이해서 듣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담 내가 오늘 목소리를 빌려주고 있었다는 친구는 도대체 누구란 말요?” 원장은 비로소 상욱의 말뜻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상욱은 이제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당돌한 말씀 용서해주십시오. 그것은 아마 원장님께서 이곳을 오시기 전에 섬을 다녀간 여러 전임 원장님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목소리였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쉬운 예를 들자면 이 섬 병원의 네번째 원장이었던 일본인 주정수 같은 분을 들 수가 있습니다.” “......” “지금부터 30년쯤 전에도 아까 그 사랍들은 새 원장님을 맞기 위해 오늘처럼 대열을 지어 그곳에 모여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은 지금까지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새 원장의 감동적인 취임사를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새 원장의 연설에서 모처럼의 위로와 격려를 받고 새 희망과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상욱은 자기도 모르게 차츰 목소리가 흥분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오늘 30년 뒤에 또 그 사람의 약속을 되풀이하고 있었다는 거구려.” 원장은 이제 좀 맥이 빠진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원래 여유가 만만한 사내였다. 그는 바햐흐로 열이 오르기 시작한 상욱을 방해하려 하진 않았다. 맥이 좀 빠진 듯하면서도 이젠 그 상욱을 향해 빙긋빙긋 장난기어린 미소까지 지어보이고 있었다. 상욱은 그런 원장의 표정이나 말은 아예 상관을 않으려는 태도였다. “그분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섬을 나환자의 복지로 꾸밀 것을 약속했습니다. 학대받고 쫓겨다니며 서러운 유랑 생활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오손도손 서로를 위로하며 의지하고 살아갈 그들의 고향을 만들자고 설득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긍지와 보람을 누리자고 격려했습니다. 병사와 의료 시설을 늘리고 생활 환경과 후생 시설을 다시 꾸미자고 했습니다. 그러자면 먼저 환자들 자신부터 절망과 비탄에서 벗어나 추악한 유랑 습벽을 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충고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복지를 스스로 꾸며간다는 자부심과 자활 의욕이 솟아나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환자들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약속을 지켰겠지.”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킨 대신 이곳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원장의 얼굴에서 비로소 웃음기가 사라졌다. “당신 아무래도 좀 이상한 노이로제 증세가 있구만 그래. 동상 이야긴 벌써 두번째나 듣고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그 당신의 동상이라는 건 뭘 말하고 싶은 거요?” 원장은 당황하고 있는 게 분명했으나 상욱의 말을 중단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대결이 주위를 완전히 침묵시키고 있었다. 상욱의 어조에선 아직도 열기가 숙을 줄을 몰랐다. “동상이 무엇을 뜻하는가는 원장님께서도 벌써 충분히 짐작을 하고 계실 줄 압니다. 그보다도 제가 벌써 두 차례씩이나 동상이라는 말을 원장님 앞에서 입에 담게 된 것은 아까 그 원장님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 동안에 그러한 동상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을 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주정수 이후에도 새 원장님만 갈려오면 번번이 또 그 원장의 새 동상을, 아니 실인즉슨 또 하나의 주정수의 동상을 보곤 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오늘 낮 원장님을 뵙기 전에 벌써 열 번 이상이나 그곳에 서서 새 원장이 숨겨가지고 온 주원장의 동상을 보곤 했습니다. 누구든지 이곳에만 오면 주원장의 동상을 새로 세우고 싶어했습니다. 더러는 성공하고 더러는 실패도 했습니다. 어느 쪽이나 원장이 섬을 떠나고 나면 섬에 남는 것은 배반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성공을 하고 간 쪽이 사정은 더 나빴습니다.” “......” “그들은 결국 그런 식으로 어느 원장에게서나 똑같은 주정수 원장의 연설을 듣게 되었고, 그의 동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그들은 열 번 이상씩이나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원장님께선 아까 이 섬 전체가 온통 불신과 배신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런 불신과 배반이야말로 바로 그 수많은 주정수의 동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아마 원장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원장님의 말씀이 계속되는 동안 그자들은 또 한번 그 주정수의 연설을 들으면서 원장님에게서 그의 동상을 찾으려 하고 있었을 게 틀림없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술자리가 느닷없는 동상 시비장으로 변해버린 바람에 좌불안석이 된 다른 사람들은 바람이라도 쏘이러 나가는 양 하나둘씩 방을 빠져 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장과 상욱 사이의 이야기는 갈 데까지 가고 있었다. “참으로 알 수가 없는 일이로군.” 원장이 마침내 혼잣말처럼 지껄이기 시작했다. “이 섬에선 어디서나 죽은 자들만이 말을 하고 있어요. 살아 있는 사람들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아요. 이젠 모습도 찾아볼 수 없는 동상이 말을 하고, 섬을 빠져나가다가 물귀신이 되어간 사람들이 말을 하고, 그리고 납골당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망령들이 말을 하고...... 하지만 말을 하는 것은 오직 그들 뿐이란 말요. 이 섬은 온통 그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서 그들만이 입을 가지고 그들만이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옳은 말씀입니다. 아닌게아니라 이 섬에선 죽은 자들만이 말을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살아 있는 사람들은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이미 모든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들만이 가장 정직한 말을 하니까요. 그런 뜻에서 말씀드린다면 이 섬은 바로 그 사자들의 넋이 살아 있는 사자들의 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또 자기의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상욱은 모처럼 만에 원장의 말을 시인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방향은 이제 마지막 표적을 겨냥하고 있었다. 섬사람들에게 그토록 널리 만연되고 있는 불신과 배반의 풍조가 이상스런 방법으로 원장의 이해를 강요하고 있었다. “사자의 섬, 사자의 섬이라...... 그게 차라리 그럴듯한 얘기로군.” 원장도 이젠 제법 사정이 분명해진 듯 몇 차례 고개를 깊이 끄덕이고 있었다. “한데 그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은 어느 때쯤 그렇게 된다는 게요?” 원장이 마지막으로 다시 상욱에게 물어왔다. 상욱이 간단하게 그 원장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그건 물론 그들이 숨을 거두고 났을 때지요. 그들은 누구나 숨을 거두고 나서 비로소 말을 시작합니다. 사자의 섬에선 언제나 그렇듯이 사자들만이 말을 하니까요.” 6 원장의 부임 연설은 아닌게아니라 별로 달가운 편은 못 되었던 모양이었다. 상욱이 말한 것처럼 섬사람들이 다시 한번 그 원장에게서 옛날 주정수의 그림자를 보았는지 어쨌는지는 단언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원장 자신의 희망처럼 큰 신뢰와 새로운 용기를 심어줄 수는 없었던 게 분명해진 것 같았다. 다름아니라 바로 다음날 아침 섬에서는 또 한가지 원장의 약속을 배반하고 나선 사건이 생겼다. 중앙리 독신사에서 밤사이 자살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자살 사고는 새 원장에 대한 두번째 부임 선물이 된 셈이었다. 상욱이 사무실을 나왔을 때는 앞서 나온 원장이 의료부장과 함께 벌써 중앙리 쪽 사고 현장으로 달려간 다음이었다. “원장님이 현장으로 가시면서 이과장을 찾으시더군요.” 상욱에겐 본부 사무실에 남아 있던 서무과장이 소식을 알려줬다. 한데 상욱은 그 소식을 알려주는 서무과장의 태도가 어딘가 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어젯밤 이과장이 원장님께 너무 좀 심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소. 이과장을 찾다 말고 갑자기 이력을 물으시더군요.” “이력이라뇨?” “이과장의 경력 말이오. 원장님 말씀대로 한다면, 이과장은 아마 이곳 사정을 밑바닥까지 갈아엎고도 남을 섬두더지 같은데, 특별히 무슨 그럴 만한 내력이 있느냐구요. 말씀을 하고 나서 금세 웃어버리기는 하셨지만, 어젯밤엔 이과장이 좀 과했던 거 아닐까요?” 역시 심상치가 않은 대꾸였다. 상욱은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섬뜩해지고 있었다. 원장이 사고 현장을 나가면서 보건과장을 찾았다는 것까지야 물론 이상할 게 아무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농담투로나마 원장이 벌써 그의 내력에까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면 그건 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야 물론 원장 쪽에서 그의 내력을 캐고 싶어졌다 해서 그의 과거가 간단히 옷을 벗어보일 리는 없는 터이었다. 서무과장한테 그런 걸 물었다 해도 그런 데서 그의 과거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얻어낼 수 있는 사정은 아니었다. 의과대학 본과 1년 중퇴의 짧은 학력과 6.25 전란중엔 육군 병원에서 4년 가까이나 위생병 노릇을 하고 지냈노라는 이력서상의 경력 이외에, 이섬 안에선 서무과장뿐 아니라 누구에게서도 상욱의 정확한 과거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비밀이 있다면 있다고 할 수도 있는 상욱이었다. 그의 생애를 통해 30년 이상을 혼자 가슴속으로 지녀온 비밀이었다. 이 섬 병원을 찾아오고 난 다음만 해도 10년 가까운 세월을 고이 잠재워온 사연이 있었다. 섬을 찾아온 사람들이 대개 다 그렇듯이 그런 걸 서로 묻는 사람도 없고 말할 일도 없다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만한 개인적인 사연은 누구에게나 으레 한 가지씩 말해지지 않은 것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젠 상욱 자신도 마음을 쓰고 있지 않은 일이었다. 원장이 원한다면 일부러 자신을 감추고 나설 필요도 없었다. 다만 시기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었다. 아직은 그럴 시기가 아닌 것 같았다. 원장에게 쓸데없는 편견을 심어줄 염려가 있었다. 전날의 연설에서도 벌써 수상한 조짐이 엿보이기 시작한 원장이었다. 이섬을 진짜 낙원으로 다시 꾸며놓겠노라 장담한 원장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뿐이었다. 그가 꿈꾸는 낙원에다 자신의 동상을 걸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를 조심스럽게 실패시켜야했다. 그래서 끝끝내 그의 가슴속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그의 동상을 고집할 수 없게 해줘야 했다. 상욱의 언동이 원장에게 어떤 편견을 만들어주어서는 안 되었다. 한데 원장은 어떻게 벌써 그의 내력에까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인가. 상욱은 어디선가 다시 그 보이지 않는 눈길이 그를 까맣게 숨어보고 있는 듯 기분이 으스스해져왔다. 그는 그런 찜찜한 기분으로 중앙리에 내려갔다. 그러나 마을까지 내려간 상욱은 거기서 한점 더 가슴이 섬뜩해지고 말았다. 사고는 아침에 미리 본부로 보고가 되어온 대로였다. 한민이라는 중앙리 독신사 청년이 밤사이에 약을 먹고 절명한 것이었다. 상욱이 마을로 내려갔을 때는 약 기운 때문에 전신이 불에 익은 것처럼 검붉게 변색한 몸뚱이를 치료소로 미리 옮겨다놓은 다음이었다. 상욱은 의외였다. 한이란 청년은 그로서도 전부터 이런저런 사정을 대강 다 알고 있는 사내였다. 그는 이미 환자가 아니었다. 섬을 찾아온지 6년만에 치료가 모두 끝난 사람이었다. 얼굴과 손사락 몇 곳에 병흔이 약간씩 남아 있긴 했었지만, 세차례의 세균 검상에서 모두 음성 판정을 받고 나서 희망에 부풀어 있는 사람이었다. 하기야 그 역시 음성 판정을 받고 난 다른 사람들처럼 병이 낫고 나서도 한두 해 동안 쉽사리 섬을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끈질기게 섬을 나갈 희망을 붙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열심히 자기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잡지사나 신문사로 끈질게 글을 내보내고 있었다. 저의 이야기가 귀지에 소개될 수 있을 만한 것인지, 고견을 받들고자 감히 이 글월을 보내올리옵니다. 원고라도 일차 읽어주신다면 더없는 보람이겠사옵니다. 반가운 하교를 바라나이다. 하교를 기다리나이다. 논픽션물 현상 모집 응모 때마다 별지에 따로 그런 부탁의 말을 적어넣으면서 한사코 희망을 잃지 않으려던 한민이었다. 그렇다고 물론 그런 부탁 때문에 그가 바라뎐 반가운 하교가 내려진 일은 거의 없었다. 뭍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그의 글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도대체 소견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원고만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말거나 그도저도 아주 서식이 깜깜해져버리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한민은 지칠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하교를 기다리나이다. 반가운 하교를. 내 이야긴 아무래도 기분이 좋질 않은가봐요. 하긴 그재간이 너무 짧은 탓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번번이 이렇게 퇴짜만 맞아야 하다니. 오늘 또 이렇게 원고만 되돌아왔어요. 이건 숫제 봉지도 뜯어보질 않은 것 같아요. 며칠 전에도 상욱을 만나 그런 푸념어린 농담을 건네오던 한민이었다. 상욱은 그때의 그 한의 얼굴에서 심각한 낭패감 같은 것을 읽어내질 못하고 만 셈이었다. 그 한민이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상욱은 입 속에 침이 말랐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런 감정을 얼굴에 내비치거나 오래 지니고 있으려 하진 않았다. 치료소에는 원장을 비롯한 몇몇 사람이 사고 경위를 따지고 있었다. 원장은 부임초부터 벌써 두번째나 잇닿은 사고에 적잖이 신경이 곤두선 모양이었다. 그 빌어먹을 . 그래 이 작잔 제 숨통을 끊어버리면서 유서 같은 것도 한 장 남기지 않았다는 겐가. 좋아요 그럼 평소에 이 작자의 언동이나 태도 같은 데서 이상한 구석을 눈치챈 사람도 없나. 한민의 자살 소동으로 원장은 또 한번 자존심을 몹시 상한 듯 목소리가 흥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 특별한 경위 같은 것이 따로 있을 리가 없었다. 섬 안에서나 흔히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자살 사고의 하나일 뿐이었다. 경위를 따지나마나 결과는 늘 비슷한 이유, 비슷한 사연이 남을 뿐이었다. 좀처럼 유서를 남기지 않는 이들의 자살 사고에 대해서는 이유나 사연을 따지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 걸 따질 필요가 없었다. 따지지 않아도 이미 사자가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자살 사고에는 사후 처리도 간단했다. 사망 진단서가 떼어지고 나면 그 즉시 화장터를 거쳐 만령당 한구석이 새로운 유골로 채워지기까지의 간단한 서류 절차와 동료들의 일감이 조금 보태질 뿐이었다. 한민에 대해서도 물론 같은 절차가 취해졌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생애를 미처 다 끝내지 않고 있었을 때부터 이미 다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미리 다 정해진 일에 자신의 소관 업무로 되어 있는 이상욱 보건과장이 간단한 수고를 보탰을 뿐이었다. 자살 동기 같은 것에 신경을 쓸 사람은 없었다. 그런 데까지 자명한 자살 사고의 원인을 원장이라고 처음부터 아주 깜깜해 있을 리는 없었다. 이과장 당신은 처음부터 나를 별로 신용하지 않은 눈치였는데 그자도 역시 내 약속은 신용할 수가 없었던 게지 아마. 치료소를 나서면서 원장이 이번에는 느닷없이 상욱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부임 연설 때 말한 그 낙토 이야긴 모양이었다. 상욱이 자기의 약속을 달가워하지 않은 것처럼, 한민이란 작자 역시 자기의 약속을 신용하지 않았으니까 성급하게 그런 자살극을 벌이지 않았겠느냐는 말이었다. 상욱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처럼 그렇게 정면에서 원장의 약속을 등져버린 용감한 친구를 만났으니 그의 낭패를 실컷 고소해하지 않겠느냐는 비난의 뜻이 역력한 말이었다. 이런 갑작스런 사고(적어도 원장이 보기에는)를 당하고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듯한 상욱의 태도에서 원장이 화를 참지 못한 것은 당연한 노릇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욱은 원장을 돌아보며 모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쨌거나 원장은 그런대로 사태를 조금씩 냉정하게 이해하기 시작한 징조가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저야 뭐 원장님의 약속을 신용하고 안 하고가 있을 리 있습니까. 하지만 그 친구가 아직 이섬을 자신의 낙토로 여기고 있지 않았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군요. 원장의 말을 한 번 더 조심스럽게 확인시켜주었다. 하니까 원장은 그 상욱을 다시 한걸음 앞지르고 있었다. 지금 이 섬을 낙토로 여기지 않은 것뿐 아니라 그 새낀 내일의 낙토도 믿지 않은 거요. 그래가지곤 희망이 없어요. 그리고 나서 그는 앞뜰에서 본관 사무실로 돌아가는 차를 타려다 말고 다짐하듯 한 번 더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가지곤 정말 안 돼요. 그래가지곤 그래서는 안 되지, 정말 그래서는 원장과 헤어진 다음 상욱은 혼자 망연스런 기분으로 원장의 마지막 말을 되씹으며 한민의 독신사로 발길을 향하고 있었다. 한에게 무슨 유품 따위가 남아 있을 리는 없었다. 이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 가운데는 유품커녕 글발 한 줄 제대로 남기는 사람이 없었다. 유서를 남기지 않는 것은 물론 이곳대로의 한 절실한 풍속이었다. 하지만 상욱은 아무래도 기분이 개운치를 않았다. 이번만은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두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한민이 얼마나 섬을 나가고 싶어했는가를, 그리고 그러한 소망이 얼마나 무참스런 배반감 속에서 허무하게 스러져 가버렸는가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보다도 상욱에겐 먼저 그 한만의 죽음에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일이 있었다. 상욱은 언젠가 그 한민에게 그가 알고 있는 한 섬 소년의 탈출 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귀띔해 준 일이 었었다. 한은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몹시도 좋아했다. 섬에 관해선 이런전런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었지만, 소년에 관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라면서 눈빛을 마구 빛내고 있었다. 한은 마마 그 후로 소년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가만있어여, 내 이과장님을 깜짝 놀라게 해줄테니. 그 녀석 이야기는 정말로 좋은 글이 될 거예요. 하지만 상욱은 막상 한이 쓴 소년의 이야기를 본 일은 없었다. 그가 정말소년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는지 어쨌는지도 나중엔 별로 확실치가 않았다. 그 후로 한은 소년에 관한 말은 별로 입에 담는 일이 없었고, 소년을 소재로 쓰겠다던 자기 글에 대해서도 경과나 결과를 말한 일이 없었다. 일이 잘못되었나 싶어 상욱 쪽에서도 거기 대해선 다시 말을 꺼내본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에게 일이 생기고 만 것이다. 소년의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아둬야 할 것 같았다. 이야기가 씌어졌거나 말았거나 그런 건 상욱으로서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다만 소년의 이야기가 한민과 함께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는지 어쨌는지 그것을 좀 분명하게 알아두고 싶었다. 방문이 열어젖혀진 채 텅 빈 한민의 독신사는 청소와 소독이 모두 끝나가고 있었다. 독신사라고 해야 미혼의 동성 두 사람이 방 한 칸을 함께 쓰게 되어 있었으므로 독방 생활과는 뜻이 다른 말이었다. 하지만 한민의 한방 동료는 월여 전부터 이미 휴가 미귀 상태가 되어 있어서 지금까지 한민은 혼자서 방 한 칸을 쓰고 있었다. 그의 방을 청소하고 소독하는 일 역시 자치회 위생부 사랍들이나 이웃 동료들의 수고에 의해서였을 터였다. 본부로 전해져오지 않은 고인의 유품 같은 것이 아직도 방에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방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주변에 늘 즐비하게 흩어져 있던 원고지 조각 하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원고지 같은 게 남아 있었다면 소관 사무 책임자의 확인 없이 위생부 사람들이나 동료들이 자의로 처분을 끝냈을 리는 없었다. 한민 자신이 사전에 모두 일을 끝내둔 게 분명했다. 마침내 부엌에서 그런 흔적이 발견되었다. 연탄부엌 아궁이 근처에 원고지 나부랭이를 불태운 자국이 꺼멓게 남아 있었다. 종이를 잔뜩 불태우고 나서 그 잿무더기를 물로 죽여 쓸어낸 흔적을 역력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소년의 이야기도 한의 다른 원고들과 함께 그 불더미 속으로 던져 졌을 것이 분명한 사실 같았다.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을 듯 싶었다. 하지만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상욱은 이상스럽게도 기분이 더 허탈해지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되지. 정말로 그래서는 부엌을 나온 상욱은 텅 빈 한민의 방문 앞 마루 끝에 걸터앉아 다시 한번 원장의 말을 뇌까리고 있었다. 원장 말마따나 정말로 그래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물론 상욱 자신도 처음부터 분명히 의식하고 있는 일이었지만, 원장이 그래서는 안되는 것과 그가 안 된다는 것은 결코 그 뜻이 같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상욱은 지금 자기도 원장과 같은 소리를 하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두 사람이 서로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원장은 한민의 자살을 부임 첫날밤에 일어난 탈출 사고와 같은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낙토를 꾸미겠다는 그의 약속을 신용하지 않고, 힘을 합해 그 낙토를 꾸밀 생각을 하지 않고, 한은 보기 좋게 그를 배반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것은 이섬과 낙토의 꿈을 등져버린 또 하나의 탈출 사고였다. 방법이 다른 두개의 탈출 사고였다. 원장에겐 그렇게 생각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래서 그는 두 가지 사고 앞에 그래서는 안 된다고 낭패스런 원망을 짓씹고 있는 것이었다. 당연한 노릇이었다. 상욱은 물론 그렇게 생각지를 않았다. 그는 원장의 생각에는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상욱에겐 두 가지의 사고가 오히려 정반대의 성질의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나를 진짜 섬에서의 탈출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그 집요한 탈출 의지의 마지막 좌절이었다. 그리고 이 섬에의 귀의였다. 한만의 그것은 탈출이 아니라 슬프고도 영원한 이 섬에의 마지막 귀의였다. 죽음이란 것이 이 섬에 붙박인 저주스런 운명의 기반을 벗어나가는 마지막 방법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병이 나을 수 없다고 생각되던 시절, 이 질병이야말로 하늘의 저주를 받은 추악한 유전성 질환이라고 생각되던 시절, 그리고 그러한 병을 안고 이 잊혀진 남해 한 끈 작은 섬으로 끌려들어와 절망과 비탄 속에서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가혹한 노력 착취를 당해야 했던 시절, 그런 시절 이곳 사람들에게는 이 섬과 이 섬의 무서운 질곡을 벗어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주어져 있었다. 하나는 죽음 을 무릅쓰고 바다를 헤엄쳐나가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운명을 조용히 감수하고 나서 때가 되면 새로운 복락과 위안이 약속된 주님의 날을 맞는 것이었다. 용기있는 사람들은 한사코 바다를 헤엄쳐나가려 했고 그러나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히 그 약속된 주님의 은총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섬 안에 흩어진 무수한 예배소와 교회당은 그러한 사람들의 깊고도 애절한 기구의 표상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이따금 그 약속된 날을 기다리기에도 너무 깊이 지쳐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그날을 기다리다 못해 마침내는 스스로 그 주님의 날을 앞당겨 맞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시절 섬에서는 자살까지도 그 가혹한 운명의 종말을 마감하는 마지막 방법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는 원장이 한민의 자살을 또 하나의 탈출 사고로 여겨 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었다. 병이 낫는다는 희망은 없고, 섬은 하나의 거대한 노예 수용소가 되어 참을 수 없는 노역이 강요되고, 그러다가 끝내는 섬 안에 슬픈 문둥이의 운명을 파묻어야 하는 절망밖에 보이지 않던 시절의 일이었다.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달랐다. 병은 치료되고 유전성 질환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밝혀지고 있었다. 옛날 같은 강제 사역도 없어지고 생활환경은 나날이 개선되어가고 있었다.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섬을 나갈 수도 있었다. 섬을 빠져나가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필요는 없었다. 자살은 오히려 섬에의 귀의였다. 한민의 경우에는 그 점이 더더욱 분명했다. 그는 정말로 끈질기게 섬을 빠져나가고 싶어했었다. 그는 병이 나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섬을 맘대로 나갈 수가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한데도 그는 좀처럼 섬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또 하나 엄청난 절벽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섬을 나가고 싶었지만 그것은 환자로서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세상 사람들 곁으로 가서 그들속으로 아무 스스럼 없이 함께 섞여들 수 있기를 원했다. 병을 치료하고 난 환자로서가 아니라, 온갖 인간적인 욕망이 되살아 난 한 인간으로서 바깥 인간들 속으로 자신을 섞으러 섬을 나가고 싶어한 것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병을 나은 사람이 다만 그 자기 병의 소지로부터 멀리 떠나가버리기 위해 섬을 나가고 싶어하는 것보다고 더욱더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에게는 이 특별한 처지의 인간 집단을 위해서 특별히 꾸며지고 있는 어떤 낙토도 이미 낙토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문둥이는 섬을 나가더라도 따로 마음놓고 살곳이 없다는 병원 관리자들의 오랜 협박쯤은 이미 한민에겐 문제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한민이 천성처럼 몸에 익혀온 두려움을 털고 세상 사람들 사이로 섞이고자 한 끈질긴 모짓들을 한번도 반을을 얻어낼 수 없었다. 절벽을 뚫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끝내는 그 절벽 앞에 지쳐 쓰러져서, 이 섬을 나갈 수 없었던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만령당 남은 한구석에 그의 뼈가 담기기를 선택해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탈출이 아니라 한민이 그토록 떠나고 싶어했던 이 섬과 섬의 운명, 그리고 영원한 문둥이에의 귀의였다. 약물과 검붉게 타버린 그의 모습이 그것을 더욱 잘 실감시켜주고 있었다. 원장이 그걸 이해할 리 없었다. 그는 한민을 위해서도 똑같은 낙토를 꾸미려한 사람이었다. 섬을 나가래도 나가지 않은 사람과, 죽음의 위험까지 무릅써가며 바다를 헤엄쳐나가는 사람들이 똑같이 이 섬 사람들이라는 것은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원장이었다. 어디서부터 어째서 그런 배반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원장이었다. 그는 다만 이섬이 아직은 낙톨로 여겨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그들에게 새로운 낙토를 약속하고, 그 약속을 이행해주기만 하면 그런 모순들은 저절로 해소될 줄로 믿고 있을 그런 원장이었다. 그 원장의 눈에 한민의 자살까지가 하나의 단순한 탈출 행위로 조여지는 것은 나무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지. 상욱운 마루 기둥에 빰을 기대고 앉아 서편쪽 십자봉 너머로 멀리 비껴 흐르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무연히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십자봉 너머로 푸르디푸르게 멀어져가고 있는 늦여름 하늘로는 아까부터 몇 줄기 검은 연기가 희미하게 번져오르고 있었다. 아마 봉우리 너머 화장터에선 한민의 영혼을 육신에게 풀어 주려는 마니막 작업이 서둘러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상욱은 그 거무스레한 연기의 자국이 한동안 하늘을 흐리다가 다시 희미하게 사라져가고 있는 모양을 바라보다가 문득 자리를 일어섰다. “녀석은 이제 진짜 말을 하게 되겠군. 아니 녀석은 벌써 말을 시작했어.” 그는 천천히 사무실 쪽으로 발을 옮기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원장이 저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언제쯤 원장은 저 사자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단 말인가.....” 조원장이 섬 안에 장로회를 조직키로 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의 일이었다. 상서롭지 않은 징조였다. 부임초의 잇따른 사고들이 새 원장에게 어떤 작용을 하게 될 것인가는 병원 주변의 상당한 관심사였다. 원장의 일거일동에 일일이 신경이 가고 있는 상욱으로서는 적어도 그것이 근래의 관심사였다. 특별히 어떤 기미가 엿보여서는 물론 아니었다. 부임 연설 때 잠깐 느낄 수 있었던 뚝심 비슷한 것을 제외하고 나면 특별한 경계할 만한 거동은 아직 눈에 드러나고 있는 것이 없었다. 부임 연설 때의 약속이라는 것도 섬을 찾아온 원장들애개선 언제나 빠짐없이 되풀이되어 온 일이었다. 그는 한동안 부지런히 물어대고, 열심히 관찰하고, 그리고 신중하게 생각을 추리고만 있었다. 좀처럼 자신을 못 갖는 기미였다. 새 원장이 자신을 못 갖는 듯한 기미야말로 상욱으로서는 일단 안심을 해도 좋을 현상이었다. 게다가 그 잇따른 사고들은 그런 원장을 더욱더 무력한 망설임 속으로 빠뜨려놓을수가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드디어 원장에게서 수상한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임초부터 잇따른 사고들이 원장에겐 상욱의 기대처럼 작용해주질 못했던 모양이었다. 상욱의 기대와는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가 빚어진 것이었다. 한민의 자살 사고가 있었던 며칠 뒤, 원장의 돌연 행동을 시작하고 만 것이다. 부지런히 물어대고 신중하게 생각을 재고 있었다는게 오히려 조짐의 시초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저런 의구와 망설임 속에서 충분히 자기 검진을 거친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이라면 그것은 더욱더 내용이 정연하고 완고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루 아침 원장은 병원의 새 운영 방침을 하달했다. 사무 본관과 치료소의 정면 벽위에서는 전암 원장의 병원 운영방침이 내려지고 이날 안으로 당장 조원장의 그것을 바꿔 써넣은 새 액자가 걸려있다, ‘인화단결’‘정정당당’‘상호협조’ ‘재건’의 네가지 새 병원 운영 방침은 며칠 전 원장이 취임 연설에서 긴 말로 밝힌 뜻을 보다 간결한 구호조로 요약한 것이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애초의 뜻이 변할 수 없다는 무언의 과시였다. 하지만 조원장이 이섬 원생들에게 익혀주고 싶어한 말은 아직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병은 낫는다-나병은 유전하지 않는다. 그 며칠 사이에 섬 안 곳곳에는 그런 말들리 쓰인 커다란 구호판들이 수없이 솟아나고 있었다. 다음으로 조원장이 조치를 취한 것은 병원 종사원들의 대환자 시료 행위의 개선이었다. “병이란 무서워할수록 더 무서워지는 법이오. 환자도 마찬가진 게요. 환자들을 혐오하고 경원해하면 할수록 그들은 그만큼 더 비참하고 추악한 존재로 복수를 해옵니다. 당신들은 이제 이병을 알고 있지 않소? 알고 있는 사람드로부터 태도를 바꿔야겠소.” 위생복, 위생장갑에 마스크까지 덮어쓰고도 원생들에게 약을 건네줄 때는 핀셋을 사용하느 따위의 경원스러운태도는 버리자고 충고했다. 보균자가 아니 음성 원생의 경우는 물론 양성환자를 대할 때라 할지라도 특별히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마스크나 위생장갑의 착용을 금지했다. 의사나 간호사나 병원 요원 모두가 원장의 지시를 이행토록 하라고 했다. 동시에 섬 전체 원생들에겐 양성이건 음성이건 건강인을 대할 때마다 4,5보 거리에서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거기다가 손으로 가리고서야 말을 건넬 수 있었던 규칙들을 일시에 모두 철폐시켜버렸다. 병사 지대의 환경 개선을 위해서는 그 옛날 주정수 원장 재임 시절부터의 그 힘겨운 노역과 학대의 역사를 상징하고 서 있는 중앙리 벽돌 공장의 높은 굴뚝을 철거해버림으로써 원생들의 가슴속에 도사린 오랜 구원의 뿌리를 뽑아버리는가 하면, 공원과 병사들은 원생들의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끼지 않도록 언제나 질서 있고 정결하게 단속되었다. 직원 지대와 병사지대의 경계를 가르고 있던 철도망을 철거시켜 버리고 한달에 한번씩 철조망 가에서 시행돼오던 미감아 면회 행사는 양쪽 면회 당사자들의 필요에 따라 개별적으로 날짜나 장소가 주선되게끔 제도가 바뀌었다. 원장은 사무 본관과 병사지대의 치료 본부 사이를 오르내리면서 쉴 새 없이 그런 새로운 조처들을 고안해내고 그것을 집헹헤나가고 있었다. 그런 원장의 여러 가지 조처들 가운데 가장 주위를 놀라게 한것은 미감아 아동들과 직원 지대 아이들의 공학 단행이었다. 원장은 어느날 돌연 미감아 보육소 안에 설치된 국민학교 과정의 분교 수업을 중단시켜버렸다. 그것은 물론 직원 지대 쪽에 있는 본교의 송교장과도 미리 의논이 된 일이었지만, 지금까지 그곳에서 분교 수업을 받던 아이들도 이후로는 직우너 지대의 본교로 등교하여 본교 아이들과 똑같은 수업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좀 성급한 조처였다. 병원 주변에서는 어이가 없는 표정들이었다. 직원 대사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병원 종사원의 가족들이었고, 그만큼 다른 곳에서는 관대한 이해가 기대됨직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 직원 지대에서부터 당장 반발이 일어났다. “그런 의논을 해오신 적은 있었지요. 문제가 간단칠 않으니 좀 시간을 두고 신중히 검토해보겠다고 했지요. 결정이 난일은 아니었어요.한데 다음날 아침에 당장 원장님한테서 기별이 왔더군요.....” 본교의 송교장마저 어안이 벙벙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원장의 결정에느 이제 변동이 없었다. 그는 직원 지대의 반발 따위엔 아예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했다. 한번 결정이 내려진 일에 대해서는 오로지 일사불란한 실행뿐이었다. 이튿날 아침부터 보육소 아이들은 기어코 본교 등교가 강행되었다. 직원 지대 아이들 몇몇이 학교를 쉬어가면서 불만을 나타냈으나, 원장은 그날로 이미 모든 일을 기정 사리화해버린 듯 더 이상 말을 하려하지 않았다. “됨됨이가 워낙 거인의 풍모거든. 일은 하여면 아예 그런 식으로 한 주먹에 때려부수듯이 해치워....... 하지만 우리 보육소 문둥이 선생들까지 본교로 가서 수업을 하지 않은 것만은 고맙지 뭔가, 거기까지 가랬다가 괜히 내 밥줄만 떨어지고 말라구.....” 보육원 윤해원은 실없는 익살처럼 거인증의 발로가 분명했다. 그것도 모처럼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한 위험스런 거인증의 발로였다. 문제는 그 무모하고도 파격적인 원장의 조처에 대한 병사 지대의 반응이었다. 섬 곳곳에 세워진 구호판에서 자신들의 병에 관한 새로운 각성을 요구 받거나, 새 원장의 통솔 방침을 접하고 나서도 원생들은 한결같이 그저 늘 그러나보다 하는 표정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저 그렇게 덤덤한 표정으로 공원길을 다듬으라 하면 공원길을 다듬고, 벽돌 공장 굴뚝을 헐어내라 하면 말없이 그것을 헐어낼 뿐이었다. 원장의 결정이나 지시에 ㅐ해서는 도대체 가타부타 말들이 없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갑자기 맨손으로 약을 건네주기 시작해도 그저 그러나보다, 자기들의 아이들이 직원 지대의 본교 건물에서 그곳 아이들과 똑같이 수업을 받으러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여전히 그저 그러나보다 하는 얼굴들이었다. 마음이 한결 꽁꽁 닫혀 있었다. 바닥이 느껴지지 않는 수렁 같은 침묵속으로 묵묵히 원장의 일거일동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리고 언제까지 그런 눅눅한 침묵만 계속하고 있을 것이지 속을 짚어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원장은 마침내 짜증이 나고 말었다. 그것은 차라리 말보다는 훨씬 음험하고 위협적인 거부 반응의 일종일 수 있었다. 그는 거대하고도 허망한 침묵의 벽 앞에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전 것이었다. 어떻게 하든지 그 미궁같은 침묵의 벽을 허물어 뜨리려고 한동안 무던히 애를 먹고 있는 기색이었다. 낙원과 동상 7 조원장이 섬 안에 장로회 조직을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그러니까 그런저런 곡절끝에 병사 지대 주민들의 생각을 풀어내기 위한, 이를테면 그 불안스런 침묵의 벽을 허물어뜨리기 위한 방책으로 고심끝에 창안해낸 구상임이 틀림없었다. 어쨌거나 상욱으로서는 기분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하지만 조원장은 이번에도 모든 일이 생각처럼 쉬울 수는 물론 없었다. 좋건 궂건 원장의 처분에는 말이 없는 그들이라 이번일에 대해서도 원생들이 무슨 별다른 반응 같은 걸 나타내보일 리는 없었다. 병사 지대 7개 마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나이 많은 사람들 각각 한 사람씩 뽑아 모으라는 원장의 지시가 떨어지자, 원생들 가운데선 기왕부터 마을 일을 보살펴오던 대표 일곱 사람이 정한 날정한 시각에 말없이 중아리 공회당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 일곱명의 마을 대표들 역시 원장의 이 새로운 제안에 대해선 전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앞으로 이 섬과 병원 살림을 꾸려나가는 데 있어서 모든 시책의 기본은 장로회 여러분의 모임에서 이루어지도록 할 작정입니다. 장로회는 병원 당국을 대표하고 있는 저 조백헌의 자문역을 담당해주셔야 할 것은 물론, 병사 지대 7개 마을 일 가운데서 여러분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 할 자치 사항에 대해서는 이를 최종적으로 심의 결정하는 공식 의결 기구로 삼도록 할 것 입니다.” 원장이 혼자 열을 올리거나 말거나 일곱 명의 마을 대표들은 시종 무관심한 얼굴 표정을 고치지 않은 채 돌바위처럼 무거운 침묵만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여러분은 각기 지금 병사지대 7개 마을에서 대표하여 이곳에 모였습니다. 그릭 지금 이사람의 생각으로는 앞으로 여러분 병사지대의 일은 병원 당국의 기본 시책을 벗어자지 않는 한 가능한 데까지 모든 사항을 스스로 결정하고 실천해 나가도록 다치적 기능을 진작시켜 나갈 예정인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마을과 동환들의 이익을 위하여, 그리고 이 섬을 여러분의 진정한 낙토로 만들기 위하여 기탄없은 여러분의 뜻을 개진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장의 목소리가 아무리 간곡해도 대표들은 끝내 마음을 움직이려는 기색이 않보였다. 관김보다는 오히려 두려운 예감에 사로잡혀 입이 얼어붙은 사람들처러 묵묵히 원장의 거동만 응시해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원생들의 반응이야 어쨌건 한번 말을 꺼내놓은 이상 조원장은 이제 거기서 물러서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일이 있고 난 다음날 아침 상욱이 원장실로 업무 보고를 하러 들어갔을 때 그는 몹시도 자신이 만만해 있었다. “그런데 이과장, 나 당신이 하두 주정수라는 사람을 자주 들먹여대길래 그 친구 내력을 좀 자세히 알아봤더니 사람이 꽤 시원시원했던 것 같더군요.” 업무 보고가 끝나고 나자 원장이 벼르고나 있었던 듯 느닷없이 주정수 원장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분이 일을 시원시원하게 많이 해치운 것은 사실입니다. 언젠가도 원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섬을 건설한 건 그 분이었으니까요.” 상운은 영문을 몰라 우선 그렇게 대꾸해 놓고 원자으이 다음말을 기다렸다. 원장이 말을 계속했다. “일을 많이 했을 뿐만 아니라, 일하는 방업도 첨에는 그렇게 나무랄게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적어도 처음에는 나무랄 데가 없었을 겁니다. 그분의 사업 계획을 듣고 나선 섬 전체가 온통 감동을 했었다니까요. 노력동원도 첨에는 거의 자발적이었다는 얘기더군요.” “그 친구가 원생들로 하여금 자진해서 작업장으로 나서게 한 것은 대단한 성공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일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원생들 자신들의 자치적 창의성이 발휘될 수 있는 제도적 기구가 필요했겠지요.” “그래서 주 원장은 각 마을에서 환자 대표 열명을 뽑아 평의회라는 기구를 만들었지요. 새로운 병원 시책의 결정 과정에서 원장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고 동환들의 권익을 대표하여 그들의 의사를 집약하고 반영하는 반자치 반자문 기구 비슷한 걸로 말씀입니다. 원장님께서 요즘 구상하고 계신 장로회 성격이 바로 그와 유사한 것 아닙니까.” 결국 그 이야기였다. 상욱은 이제 원장이 주정수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는 원장을 한 발 앞질러서 이야기의 핵심을 들춰버렸다. 상욱이 그렇게 나오나 원장도 이제 그만 속을 훌훌 털어놓기 시작했다. “역시 이과장은 말귀가 빨라서 좋군. 내 그래서 오는은 이과장한테 뭘 좀 알아보고 싶단 참이었는데 말요.” “... ...” “도대체 그치들 언제까지들 그럴 게요.” 상욱에게 무슨 허물이라도 있는 양 느닷없이 버럭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 장로회라는 것 말요. 그사람들 원장 대하길 꼭 소 닭 보듯 한단말요. 도대체 무슨 까닭이요.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입을 봉하고만 있는지 사연이 있을게 아니요.” “... ...” “이번에도 또 이섬이 죽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게요? 하지만 죽은 사람들에게 섬을 맡기는 것도 한정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닌 살아 있는 사람들한테 말을 한 게란 말요. 그것도 내가 뭐 그 사람들을 잡아먹겠다는 게요 뭐요. 당신들한테 무슨 애로 사항이나 건의할 일이 있으면 당신들 모임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병원 시책에 반영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 젊은 원장이 하는 일에 못마땅한 대목이 있거든 당신들 5천 명 환자를 대표한 장로회의 이름으로 시정 건의를 내어달라, 내뜻이 어디가 못마땅해서 벙어리들이 되어버리냐 말요.” “원장님의 뜻이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아마 그 사람들 배반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욱이 마침내 입을 열기 사작했다. 거세어진 원장의 어조와는 대조적으로 상욱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배반이라니? 누가 누굴 배반할 거란 말요? 이 조백헌이 그자들을 배반할까봐 그걸 지레 두려워하고 있다는 게요?” 원장은 이제 눈알까지 부라려대며 정면으로 상욱 쪽을 공박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상욱은 바로 그런 원장의 태도로 보아 그가 말한 배반이라는 어휘가 원장에겐 훨씬 가볍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상욱은 침착하게 말을 계속했다. “주정수 원장을 한 번만 더 인용하게 해주시니다면, 그 사람들은 결국 가서 그 주정수 원장이 자신의 동상을 세우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주원장의 동상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실상 원생들의 대표를 뽑아다가 그 평의회라는 기구를 설치한 바로 그때부터였다고 할 수가 있거든요. 주원장의 동상은 아마 이 섬이 남아 있는 한 영원히 저들의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 “그리고 저 사람들의 두려움은 아마 직접적으로 원장님께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 자신들의 배반에 관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쉽게 말해보오. 자신들의 배반이라는 건 또 뭐요?” 원장은 비로소 조금 기세가 누그려드는 어조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주정수 원장의 동상이란 실상은 그 자신이 직접 만들어 세운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동상 건립은 애초 그가 만든 평의회 위원들 입에서부터 발기 동의가 나온 일이었습니다. 동상은 원생들을 대표하는 평의회 위원 자신들이 스스로 지어 바친 것이었단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런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가는 원장님께선 좀 의심스러울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 섬에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좀더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이 섬 안에서는 비단 주정수 원장 시대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때라도 그런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상욱은 좀더 말을 하고 싶었다. 주정수 시대의 평의회에 관해선 원장에게 좀더 설명을 해두고 싶은 것이 있었다. 뭐라고 해도 평의회가 환자들의 권익을 대표하여 그들의 의사를 병원당국에 반영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원장이 허용할 수 있는 통치 원칙 한계 안에서 그칠 수 밖에 없었다. 통치라는 말이 좀 마땅치 않은 표현일는진 모르지만 이 섬 병원의 원장이라는 직위야말로 사실은 이 병원과 섬 전체를 통치한다고 해도 좋을 만큼 이곳대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 규율을 정하고, 그 규율을 시행하며, 그것을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필요한 처벌까지 가할 수 있는 원장의 지위였다. 원생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원장과 지배를 받는 원생들 사이에 극단한 이해 상충이 일어나고 보면 물러서야 할 쪽은 처음부터 자명했다. 그런 경우 이편의 뜻이 사지고 안 사지고는 오로지 원장의 아량 하나에 달리게 된다. 원장이 아무리 원생들의 이익을 배반하여 한다고 해도 평의회에선 그 원장까지 갈아치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바로 그 점이 가장 근본적인 물제겠지만, 한 원장에 대해 원쟁들이 자기 편의 주장이나 이익을 지켜날 수 있는 힘의 근거란 그 원장에 대한 최종적인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는 도대체 진정한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평의회에서 어떤 극단한 경우라도 원장을 선택하고 안 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평의회는 당연히 원장과의 극단적인 대치를 스스로 삼갈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원장의 아량과 관용의 한계안에서 스스로 그와 맞서기를 꺼려하는 것 또한 당연한 힘의 이치인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그런 시기가 지나고 나자 그들은 차츰 다스림을 받는 자보다 다스리는 자의 힘쪽에 가까이 있는 것이 자신을 위해 유리하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힘의 철학을 배우게 된다. 병을 앓는 사람도 인간적인 욕망은 그렇지 않는 사람과 매한가지인 것이다. 한데다 다스림을 받는 자의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것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소망도 커지기 마련이고 그것은 곧 자신 속에 기다리고 있는 그 지극히 나약한 인간적인 욕망과 손을 잡고 쉽사리 다스리는 자의 힘 곁으로 다가간다. 주정수가 거기까지 계산을 하고 일을 시작한 것은 물론 아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살인적인 노역과 날이 갈수록 도가 심해져가는 규제를 통해서 결과적으로 그의 평의회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였다. 평의회는 다스림을 받는 자의 편에서 서서히 다스리는 자의 편으로 다가가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그 다스리는 자를 위해 스스로 그의 동상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결정적인 배반은 평의회쪽에서 감행되어진 것이었다. 상욱은 차근차근 배반의 내력을 설명했다. 그리고 설명을 끝내고 나서는 어렴풋이 흥분기가 어린 눈으로 원장을 건내다 보았다. “문제는 평의회라 하더라도 자신들이 원장을 선택하고 안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이 좀 지나치지 조금은 염려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원장은 짐작대로 비위가 별로 거슬린 것 같지는 않았다. 상욱의 생각은 될수록 간섭하고 싶지가 않다는 듯 얼마간 무관스런 듯한 표정으로, 그러나 손에쥔 담뱃대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리고 있는 것도 잊고 있을 만큼 신중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자신을 배반했다기 보다 주정수의 업적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 아니갔소.” 상욱의 이야기 끝에 원장이 모초럼 반응을 보여왔다. 빙긋빙긋 눈가에 웃음기가 떠돌고 있는 걸로 보아 상욱은 물론 그것이 원장의 진삼이 아니라는 걸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농담을 하고 있을 만큼 감정의 여유가 없었다. “그렇지요. 그들의 배반은 그만큼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들 자신도 그때는 그것을 잘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배반자의 진실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배반자는 언제나 새 주인에게 더욱 충직스로운 법이라니까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적어도 자신들이 세워 바친 동상 앞에서 또 하나 살아 있는 주정수의 모습을 우러러 보고 서 있을때, 그리고 한 달에 한번씩 보은 감사일마다 그 주정수의 동상 앞에서 그의 송가를 목메이 부르며 그를 찬송할 때... 하지만 진실은 곧 드러났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 평의회 의원 한 가람이 같은 환우의 칼을 맞고 쓰러졌거든요. 그리고 마침내는 그 동상의 주인공마저 어느 보은 감사일 아침 자신의 동상앞에서 피를 쏟고 쓰러져갔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비로소 자기들의 배반을 똑똑히 보지 않을 수 없었지요.” 상욱은 얼굴 빛이 창백하게 변해갔다. “하지만 그건 벌써 몇 십년 전 이야기가 아니오?” “그 몇십년 동안 이들은 되풀이 해서 그 동상의 악몽에 시달려온 사람들입니다.” “거기다 이번엔 또 내가 그 동상의 악몽을 들춰대고 있다는 말이구려. 하지만 이젠 그만 악몽에서 깨어날 때도 되지 않았소? 어차피 난 동상은 세우지 않을 테니까 말요.” 원장의 어조에는 역시 은근한 농담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상욱은 그 질린 듯 창백한 얼굴색은 좀처럼 풀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원장님께서 동상은 원하시느냐 않느냐는 오히려 다른 문젭니다.” “한다고 언제까지나 그러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니오.”“아직은 어쩔수가 없습니다.” “아직이 아니에요. 아직이라니... 이제 이 섬에서 다시 그런 배반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소.” 원장은 마침내 단호하게 말하고 나서 자신도 모르게 자리를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성욱을 향해 안심하라는 듯 몇 차례 고개를 힘있게 끄덕여 보이고 나서 갑자기 엉뚱스런 부탁을 말해왔다. “그대신 아마 이과장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데, 당신이 그 사람들을 한번 따로 만나둬야 되겠소. 나로서도 아미 충분한 설명을 해둔 처이지만 이과장이 다시 그 사람들을 찾아가서 한 번 더 이쪽 뜻을 자세히 전해주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말요.” “...” “아니 뭐 이건 꼭 오늘이나 내일로 서두를 필요는 없는 일이고, 언제 이과장 마음이 내켜올 때...” “원장님께서도 부탁 말씀을 하실때가 있으십니까.” “아니, 이건 부탁이 아니오. 원장의 명령으로 알아야 하오.” 원장은 다시 웃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상욱은 원장실을 나왔다. 8 치료소로 내려가는 차는 이미 출발을 하고 없었다. 현관에는 원장의 지프만이 아직 주인의 거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원장은 언제 치료소로 내려갈지 예정을 알수 없었다. 상욱은 혼자 걸어서 치료소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건 부탁이 아니오. 원장의 명령으로 알아야 하오. 치료소를 들렀다가 황희백 노인이라도 만나볼까 생각을 했다. 장로회 사람들 가운데서 누구를 만난다면 황희백 노인이 가장 적당했다. 올해 예순이 넘은 중앙리 장로였다. 섬 암 5천여 원생 가운데 그 나름대로 한 맺힌 내력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섬의 비극은 이미 이 곳을 찾아와 살다 죽어갔거나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들의 수에나 맞먹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도 이 황희백 노인에겐 남달리 또 엄청난 내력들이 숨겨져 있었다. 병을 얻고 섬에 들어와서 그가 오늘날까지 겪은 일들에는 유난히도 끔찍스런 사연들이 많았다. 전설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 섬의 슬픈 역사의 표상이었다. 살아있는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말이 없었다. 의연하게 눈을 감고 시련을 감내하면서 언젠가 그 모든 시련이 끝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섬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그 황희백 노인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말없이 그를 따랐다. 노인이 기도할 때 그들도 기도했고, 노인이 하늘을 원망하면 그들도 비로소 하늘을 원망했다. 황희백 노인만 만나면 장로회 사람들 뿐 아니라 섬사람 모두를 만난 것이 될 수 있었다. 상욱은 이윽고 철조망 아래쪽으로 병사 지대를 내려다 보며 천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앙리 구역 안으로 활등처럼 휘어들어온 바다가 이 날 따라 유난히 파래 보였다. 하지만 노인을 만나고 나선 무슨 말을 한다는 건가. 앞에만 나서면 숨이 막힐 듯한 그 침묵의 심연 앞에 무슨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 이젠 그만 악몽에서 깨어날 때도 됐지 않소. 어차피 난 동상은 세우지 않을 테니까 말요. 문득 원장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상욱은 일순 어떤 생각의 실마리가 잡혀 오는 듯 발길을 흠칫 머물러 섰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다시 멈췄던 발길을 내디디며 저 혼자 고개를 가로 젓고 있었다. 정말로 그걸 장담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 원장에게선 물론 아직 명확한 해답을 구할 수가 없었다. 원장이 아무리 자신 있는 장담을 한다해도 그것은 아직 신용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선 기다리는 일밖에 없었다. 그는 주정수 원장을 생각했다. 해답은 오히려 그 주정수 원장 쪽에 있었다. 아직도 이 섬 안에 그 주정수 원장의 망령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한 문제의 해답은 벌써 그 주정수 원장에 미리 마련되어 있었다. 주정수 원장 역시 처음부터 그의 은밀한 동상의 꿈을 숨기고 있었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에게는 애초 이 섬을 정말로 쫓겨난 자들의 낙원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지극히 순정적인 열망만이 가득해 보였었다. 주정수 원장의 부임은 그때 벌써 1천명이 넘고 있던 이 섬의 원생들에겐 상당한 활기와 흥분을 불러일으켰을 정도였다. 섬 안에는 아직도 그의 부임 날을 잊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해 초가을 어느날 아침, 병사 지대 1천여 원생들은 관례에 따라 새 원장의 착임 연설을 듣기 위해 일제히 공화당 앞뜰에 모여 있었다. 시간이 되자 직원 지대로부터 차를 타고 내려온 새 원장이 원생들의 도열 앞으로 첫 모습을 나타냈다. 떠들썩하던 잡담들이 일시에 뚝 그쳤다. 단 위로 올라선 원장의 첫인상이 불시에 도열을 긴장 시킨 것이었다. 육 척 장신의 거구가 압도하듯 회중을 한동안 묵묵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새 원장은 거무튀튀한 안색에다 지나치게 끝이 휘어져내린 매부리코를 하고 있었다. 우람한 체격이나 얼굴 윤곽에 어울리지 않게 눈만은 유독 빼꼼한 참새눈이었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가 마침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음성도 여자 목소리처럼 가늘고 세찬 쇳소리를 내고 있었다. 강한 명예욕이나 야심을 지닌 수재형의 인물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눈, 그런 목소리였다. 하지만 도열을 짓고 서 있던 원생들은 이내 자신을 달래기 시작했다. 참새눈이나 쇳소리를 내는 목소리 따위로 사람의 됨됨이를 함부로 점쳐버릴 수는 없었다. 주정수는 이 섬과 원생들을 위해 그 자신이 원장직을 자청해 왔다는 소문까지 있는 인물이었다. 일본의 어떤 유수한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끝낸 데다가, 총독부 위생관을 시작으로 그가 걸어온 관계의 경력만 해도 전도가 이미 훤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보증된 출세의 길을 버리고 이 외진 섬으로 원생들의 치료를 자청해온 것이라면 그 나름의 깊은 뜻이 있음직한 일이었다. 그는 섬으로 부임을 해오기도 전에 벌써 구라협회의 기금을 끌어내어 그때까지도 일부 수용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던 섬 토지를 모조리 매수해 들였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었다. 외모만으로 사람의 됨됨이를 점쳐버려서는 안 되었다. 한데 이날 아침 주정수 원장의 취임 연설로 보아 그의 외모에서 풍기는 선입견을 씻으려고 한 원생들의 노력은 과연 크게 빗나가질 않은 것 같았다. 주정수는 그 여자처럼 가늘고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정력적인 취임 연설을 진행해 나가고 있었다. - 나는 여러분에게 약속하겠습니다. ...... 그는 무엇보다도 이 섬을 원생들의 낙원으로 꾸며놓겠다고 약속했다. 시책의 제일 목표를 새로운 병원 시설과 환자촌의 수용 시설 확충 및 요양 환경 개선 사업에 두겠다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이 섬을 동양 제일, 아니 세계 제일의 나환자 요양소로 꾸며서 버림받고 쫓겨온 사람들의 새로운 고향, 자랑스런 낙토로 만들어 놓고 말겠다고 장담했다. -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웃으로부터 끝없는 멸시와 박해를 당해왔습니다. 그 서러운 멸시와 박해의 기억을 안고 여러분은 그 절망적인 유랑의 길을 몇천리 몇만리나 걸어 헤매야 했습니까. 이제 여러분은 유랑에 지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은 여기 이렇게 새 이웃으로 모였습니다. 가엾은 이웃들과 함께 이곳에다 여러분의 새 고향을 꾸밉시다. 고향을 꾸며놓고 아직도 이웃과 가족들에게서마저 서러운 박해를 당하고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을 이곳으로 맞아들여 그들과도 정다운 이웃으로 오손도손 보람 있는 삶을 누려 봅시다. 감동적이기까지 한 주정수의 연설은 이미 그곳에 모여있던 원생들의 기우를 말끔히 씻어주고도 남았다. 그의 연설이 끝났을 때 원생들의 도열 속에서는 여기저기 조용한 흐느낌 소리마저 일고 있었다. 주정수의 부임 기억은 그처럼 고무적인 것이었다. 주정수는 거기서도 좀더 태도가 신중했다. 그 정도 반응으로 그는 간단히 일을 시작해버리려고 하질 않았다. 그는 부임 연설 이후에도 그의 낙토 건설 사업을 위한 몇 가지 사전 작업을 철저히 다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먼저 원생들 가운데서 120명의 대표를 뽑아 ‘환자 평의회’란 이름의 자문 기구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 평의회로 하여금 원장과 원생들을 연결지어주는 중간 교량역을 담당시켰다. 그러고도 그는 아직 주일마다 토요일만 되면 평의회를 열게 하여 새 낙토를 위한 건설 공사의 필요성을 되풀이 역설했다. 원생들 스스로가 새 낙토의 꿈에 부풀어 몸살이 날 때까지 충분한 설득을 계속했다. 마침내는 원생들 스스로가 공사 협력을 다짐하고 나서게끔 되었다. 주정수는 비로소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섬을 새로 꾸미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벽돌이 필요했고, 그 벽돌을 찍어낼 공장부터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평의회 대표 열 사람과 함께 그 벽돌 공장을 세울 부지를 설정하고 곧 이어 기공식을 올렸다. 그가 부임하고 나서 한 달 남짓 시일이 지난 어는 신선한 가을날 아침의 일이었다. 공장을 세우고 처음 얼마 동안은 중국인 벽돌공을 들여다가 벽돌을 굽는 기술부터 익혀냈다. 기술이 숙달되자 원생들은 이제 그 중국인 기술자를 내보내고 자신들이 직접 벽돌을 구워 내기 시작했으며, 그렇게 구워낸 벽돌들은 오래지 않아 곧 새로운 병사 건축의 가장 요긴한 재료로 쓰여지기 시작했다. 원생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열심히들 일을 했다. 병사 지대 3개 부락(당시)에서 작업이 가능한 사람은 매일같이 벽돌 공장으로 혹은 병사 신축장으로 고된 출역을 계속하면서도 누구 한 사람 피곤해할 줄을 몰랐다. 모처럼 일삯이라는 걸 받아보는 것도 대견스러웠지만, 자기 손으로 벽돌을 구워내고 자기 손으로 자기가 살 집을 지어낸다는 것이 더할 수 없는 위안을 느끼게 했다. 자기의 힘으로 자신의 낙원을 꾸민다는 자부심이 모처럼 가슴 뿌듯한 보람을 느끼게 했다. 작업 진행이 순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벽돌이 충분히 확보된 이듬해 봄부터 3년 동안 계속 사업으로 진행된 시설 공사는 그러므로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그 3년이 지나고 나자 병사 지대는 이제 기왕의 3개 부락 이외에도 동생리, 중앙리로 명명된 두 개의 새 마을을 더하여 원생 수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방대한 시설로 확장되었다. 그밖에도 병사 지대에는 불구 환자들을 위한 공동 취사장과 세탁소, 공회당, 정미소 따위의 공공 시설들을 새로 마련하여 한껏 요양 생활의 편의가 도모되었다. 원생들은 모든 것이 만족이었다. 원장을 원망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사 기간 중에는 배급 물량도 궁핍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작업 때문에 치료를 소홀히 한 일도 없었다. 원생들은 원장의 공덕을 칭송하기 시작했고, 공사가 끝나고 나서는 새로 지은 공회당을 열어 원생들이 꾸민 창극 「장화 홍련」으로 자축 행사를 벌이기까지 했다. 주정수도 만족했다. 그는 오직 원생들 때문에 즐거워지고 그들이 만족해하는 것을 보고 그도 함께 즐거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거기서 부터였다. 주정수의 낙원 설계는 그보다도 더욱 완벽하고 신념에 찬 것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제 일차 공사를 치른 경험을 통해서 보다 충분한 자신까지 얻고 있었다. 그는 거기서 다시 제2차 시설 확장 공사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주정수 원장에겐 그의 종말을 엉뚱한 비극으로 결정짓게 될 운명의 씨앗이 서서히 싹터 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 아무도 장담을 해서는 안된다. 아무도 장담을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상욱은 어느새 치료소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이 몹시도 혼란스러웠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어떤 무서운 전율 같은 것이 절절절 온몸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듯 한동안 머리를 하늘로 치켜들고 서 있다가는 이윽고 치료소 현관을 향해 발길을 서둘렀다. 9 상욱은 이날 낮 치료소 일을 끝내고 나와서도 황희백 노인을 찾아가지 않았다. 노인을 찾아가봐야 아직은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점심때가 지나서 치료소를 나온 상욱은 노인을 찾아가는 대신 구복리쪽 돌부리 해안으로 발길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돌뿌리 해안은 머릿속이 혼란해져 있을 때 상욱이 가끔 그 머리를 식히러 찾아오곤 하던 곳이었다. 물론 상욱은 이 돌뿌리 해변가를 찾아나서도 특별히 거기서 무슨 시간을 보낼만한 일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 바닷가 바위 위에 걸터 앉아 파도 건너 녹동 쪽 해변가를 바라보며 오랫동안 잊고 있던 한 소년의 이야기나 되새겨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 소년의 귀를 통하여 느릿느릿 섬 모퉁이를 지나가는 고깃배의 노래소리를 듣는 것이 그가 이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구복리 돌뿌리 해변가라면 옛날부터 이 섬 사람들이 육지로 물을 건너가는 소문난 탈출 거점이었다. 배반과 굴종을 익히다 못해, 이번에는 그들 스스로가 먼저 배반의 음모를 꾸미고 마침내는 그것이 함부로 감행되어지던 또 하나의 배반의 현장이 그 곳이었다. 그리고 그 돌뿌리 해안에는 오래 전에 그곳을 통해 이 섬을 빠져나간 한 소년의 이야기가 있었다. 언젠가 상욱이 한민이란 청년에게 소설을 쓰게 하기 위해 이야기를 들려준 일이 있는 그 소년의 이야기였다. 상욱이 고깃배의 노래소리를 듣는 것은 그 소년을 통해서였다. 고깃배의 노랫소리는 소년의 귀를 통한 기이한 환청이었다. 소년에게 그 기이한 내력이 간직되어 있었다. 그야 소년에게 간직되고 있는 내력이 기이하다 함은 비단 그 고깃배의 노랫소리에 한해서만은 물론 아니었다. 소년에겐 실상 그가 이 섬에서 태어나 섬을 떠나가기까지 겪은 일들 가운데 무섭고 기이하지 않은 일이란 한 가지도 없었다. 소년의 첫번 기억은 그가 자란 방에 관한 것이었다. 방문이 언제나 꼭꼭 걸어 잠겨져 있었다. 소년은 허구헌 날 언제나 그 문이 잠긴 방에서만 숨어 지냈다. 손가락 하나 문 밖으로 몸을 내밀어본 일이 없었다.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나갈까봐 어렸을 때부터 울음 소리 한번 맘대로 내어본 일이 없었다. 바깥에서 소리가 날 때는 이족에서 오히려 겁을 먹고 몸을 숨기기에 정신이 없었다. 어쩌다가 말소리라도 조금 커지거나 하면 소년의 어미가 먼저 기겁을 해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리곤 했다. 소년은 언제나 그렇게 방문이 꼭꼭 걸어 잠긴 컴컴한 어둠 속에서, 그것도 대개는 이불때기 같은 것을 얼굴까지 흠뻑 뒤집어쓰고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만 살았다. 어미가 일을 나간 낮 동안엔 함부로 문을 밀고 나가지 못하도록 등덜미를 끈으로 묶여 매인 채로, 어미가 돌아와도 소년은 이웃 사람 눈 때문에 여전히 그 어두컴컴한 이불더미 속을 함부로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그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처음부터 그렇게 사람들을 무서워했다. 소년도 결국은 그의 어미처럼 사람이 무서웠다.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 누군가가 집 문 앞을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만 들려와도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제 겁에 제가 질려 머리까지 이불자락을 뒤집어쓰며 숨을 죽이게 되곤 했다. 소년은 그 이불자락까지 뒤집어쓰고서도 마음이 놓일 때가 없었다. 어디선가 벌써 자기를 까맣게 노려보고 있는 눈동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을 때가 많았다. 아무리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도 어느 새 그 어둠 속까지 무서운 눈동자가 나타나서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소름이 끼쳐지고 있을 때가 많았다. 한데 그 소년에게도 그의 어미 외에 딱 한 사람 아직 무서움을 타보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가끔가다 밤이 까맣게 깊어지고 나면 남 몰래 소년의 어미를 찾아오는 사내가 있었다. 밤 늦게 방문을 숨어 들어오면 늘 새벽녘이 다 가까워야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가며 자기 집으로 가는 사내였다. 소년이 사내를 겁내지 않는 것은 그 역시 늘 그의 어미나 자기처럼 겁을 먹고 있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소년보다도 더 사람들을 무서워했다. 그가 갑자기 방문을 들어설 때 보면 그는 항상 말을 하지 말라는 시늉으로 두 개뿐인 그의 오른손 손가락은 입에 대고 있었다. 파랗게 질린 이마에는 언제나 땀방울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사내는 그렇게 방문을 들어서고 나서도 아직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듯 한동안씩 바깥 동정에만 귀를 기울이고 서 있기가 보통이었다. 겁에 질린 눈동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보다도 사내가 사람들을 몹시 겁내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숨소리 때문이었다. 사내가 비로소 자리로 앉고 나면 그는 자기가 그처럼 겁을 먹고 있는 것을 소년의 어미에게만은 되도록 그것을 숨기고 싶었다. 그는 늘 소년의 어미 앞에서 그 숨소리를 참아내려고 몹시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참아지지가 않는 것이 그 숨소리였다. 그는 소년의 어미 앞에서도 그것만은 끝끝내 숨길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사내는 오히려 소년의 어미만 보면 더욱더 겁을 먹고 숨소리도 점점 더 참을 수가 없게 되어 버리곤 했다. 사내가 숨소리를 참으려고 하면 할수록 초조한 불안기만 점점 더 해갔다. 사내는 소년의 어미만 찾아오면 새벽녘까지 늘 그렇게 캄캄한 어둠 속에 겁에 질린 숨소리를 견디다 돌아 갔다. 어떤 때 소년이 잠을 자다 깨고 보면 사내는 문을 스며든 기척도 없이 어느새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의 어미와 함께 무서운 숨소리를 견디고 있을 적도 있었다. 소년을 사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어미 역시 사내에 대해서만은 굳이 소년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소년의 오해 였을까. 소년은 나중 그가 가장 무서움을 모르던 바로 그 사내 때문에 그의 어미 곁을 떨어져 마침내는 섬을 떠나게 되고 만 것이었다. 늦장마가 진 어느 초가을께 의 일이었다. 열흘에 한 번 꼴로나 틈틈이 소년의 어미를 찾아오던 사내가 한 번은 며칠씩 계속해서 밤을 타고 와서 그녀를 만나고 돌아갔다. 그의 어미를 찾아 와선 밤새도록 웅얼웅얼 무슨 얘기인가를 주고받다 돌아갔다. 겁을 먹은 사내의 숨소리 대신 이번에는 그 어미의 꺼질둣한 한숨 소리가 밤을 밝혔다. 두 사람이 무슨 말다툼 비슷한 것을 벌일 때도 있었고, 가끔가끔 여인네의 낮은 흐느낌 소리가 들려 나올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소년의 어머니는 하루종일 일도 나가지 않고 소년만 붙들고 소리를 죽여 울고 있었다. 그리고 밤이 어두워지자 사내가 또 어둠을 타고 나타나서 아직도 눈두덩이 퉁퉁 부어 오른 여자에게서 소년을 빼앗아 가버렸다. 사내는 등에 들쳐 업고 캄캄한 빗줄기 속을 쏜살같이 달리다가 어느 바닷가 숲 덤불 근처까지 와서 소년을 내려놓았다. 지나가는 고깃배에 노랫소리가 들려오나 봐라 사내는 소년을 숲 덤불 속으로 밀어 넣고 나서 자신도 그 소년의 곁에 몸을 숨기고 엎드려서 지나가는 밤 고깃배의 노랫소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 밤은 일이 허탕이었다. 어둠이 워낙 짙은 데다가 빗줄기까지 심하고 보니 섬을 지나는 고깃배의 노랫소리 같은 건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방은 온통 나뭇잎을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와 파도 소리 바람 소리뿐이었다. 사내는 다시 소년을 등에 업고 마을로 돌아갔다. 하지만 소년은 다음날도 다시 남자의 등에 업혀나가 전날의 그 바닷가 숲 속에서 지나가는 고깃배의 노랫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 사흘 동안이나 같은 일이 계속되었다. 연 사흘을 날마다 비가 왔고 소년은 그 빗줄기 속을 사내의 등에 업혀나가 사내와 함께 고깃배의 노랫소리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삼 일 째가 되던 날 드디어 고깃배의 노랫소리를 찾아냈다. 느릿느릿 노랫소리가 섬 모퉁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남자가 소리 나는 쪽을 향해 옷깃 속에서 성냥 불을 한두 번 켰다 껐다 했다. 노랫소리가 그치고 잠시 후에 한 척의 고깃배가 어둠을 타고 섬 기슭으로 다가왔다. 뱃사람과 사내가 허둥지둥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고 난 다음 소년이 이내 배로 실려버렸다. 사내가 소년에게 비를 맞지 않게 윗도리를 벗어 덮어주었다. 뱃사람은 소년을 태운 채 다시 또 부리나케 어둠 속으로 노를 젓기 시작했고, 사내는 잠시 동안 물 기슭에 남아서서 빗줄기도 잊은 채 소년을 태운 배가 어둠 속으로 차츰차츰 모습을 감춰가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소년은 이날 밤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배가 타고 떠나면서 소년은 비로소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소리도 못 내고 울음을 깨물던 어미가 생각났다. 그리고 뱃사람이 무서웠다. 사내가 덮어준 윗도리를 쓰고 앉아서 소년은 오래도록 겁에 질린 울음소리를 참지 못하고 있었다. 뱃사람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소년을 다시 섬으로 실어다 내려주었다. 소년은 비를 맞으며 집까지 혼자 밤길을 걸어갔다. 아아, 그리고 거기서 그 뜻하지 않은 사내의 무서운 얼굴을 보았었다. 사내는 먼저 마을로 돌아와서 소년의 집에 그의 어미와 함께 있었다. 전에는 늘 겁에만 질려 있던 사내의 얼굴이 뜻밖에 다시 섬으로 돌아와버린 소년을 보자 처참하도록 무섭게 일그러져가고 있었다. 이 더러운 문둥이 새낄!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사내는 금방이라도 소년을 죽이고 말 것처럼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소년은 그처럼 행세가 사나운 사내의 모양은 꿈에라도 본 일이 없었다.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이날 일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또 마지막이었다. 사내는 결국 소년을 용서하지 않았다. 이튿날 밤 사내는 다시 소년을 바닷가 숲 속으로 데려갔다. 소년은 또 바닷가 숲 속에서 밤새도록 비를 맞으며 고깃배의 노랫소리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어둠 속을 지나가는 새벽녘 고깃배의 노랫소리를 불러들여 정말로 영영 섬을 떠나가고 말았다. 주정수 원장이 그의 야심에 찬 낙토 건설 사업에 한창 열이 올라 있을 무렵 바로 그 돌부리 해변 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상욱은 그 돌부리 해변가만 찾아오면 소년의 귀를 통해 그 때의 그 밤 고깃배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고깃배 노랫소리에 한동안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그는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며 알알한 흥분기마저 느끼게 되곤 하는 것이었다. 상욱이 애초 이 섬을 찾아오게 된 것도 사실도 바로 그 이상스런 뱃노래의 환청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너무도 일찍부터 소년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상욱은 실상 섬을 찾아오기 전에도 언제부터인가 자주 그 이상스런 노랫소리의 환청을 경험하는 일이 많았다. 학교를 다닐 때도, 피난 길을 헤맬 때도, 군영 시절 그 규제가 심한 제복 생활 속에서도 상욱은 늘 그 남해 기슭의 한 작은 섬을 생각했고 그 곳을 지나가는 밤 고깃배와 고깃배의 유장한 노랫소리를 듣곤 했었다. 그리고 어느 추운 겨울날 오후 마침내는 이 섬 선창가에 배를 내린 상욱이 무엇 때문에 그 잊혀지고 버려진 사람들의 땅을 제 발로 찾아 들고 있는지 이유를 발견할 수 없어졌을 때, 그는 새삼스레 그 고깃배의 노랫소리를 생각하고는 쓴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뭍에서와는 달리 상욱이 막상 섬을 찾아왔을 때는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환청으로 지니고 있던 고깃배의 노랫소리는 어디서도 들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섬을 지나가는 고깃배들은 있었다. 낮과 밤이 달랐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 고깃배들은 노랫소리가 없었다. 배들은 섬을 잊어버린 듯 소리없이 지나갔다. 상욱은 실망했다. 고깃배의 노랫소리가 지나가지 않는 섬은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마음속에 지녀오던 섬이 아니었다. 그는 노랫소리를 찾아내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생각나면 돌부리 해변 가를 찾아 나와 지나가는 고깃배에 귀를 기울이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고깃배들의 노랫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소년을 통해서였다. 이 날도 상욱은 소년의 귀를 통해 그 하염없이 유장한 고깃배의 노랫소리를 쫓으면서 한동안 혼자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날이 어둑어둑 저물어들 무렵에야 간신히 자리를 일어섰다. 하지만 상욱은 이 날 따라 이상스럽도록 마음의 안정을 잃고 있었다. 숙소를 향해 병사 지대를 빠져 나오다가 문득 보육소의 서미연이라도 좀 만나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졌다. 그는 숙소 대신 보육소 쪽으로 건너가서 서미연을 끌어냈다. 상욱 쪽에서 미연을 찾은 것은 그것이 편해질 수가 없었다. 미연은 한눈에 벌써 상욱의 그런 기분을 환히 다 읽어버리고 만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표정이나 언행이 한결같이 늘 침착하고 가지런하기만 하던 상욱의 동요 앞에 미연은 모처럼 만에 어떤 은밀스런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 것이었을까.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상욱의 기분을 쓰다듬어주기는커녕 서미연은 이날 저녁 상욱에게 또 한 가지 지극히도 불편스런 생각의 매듭을 더해준 것이었다. 주홍색 칸나꽃이 시들어가는 보육소 앞뜰가 풀숲 위에 주저앉아서 미연은 문득 몇 번이나 망설여온 그녀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었다. 상욱이 어슴푸레 짐작을 하고 있었던 대로 그것은 그녀의 출생의 내력에 관한 것이었고, 어느 온후한 목사님 댁의 양녀로 자라온 성장기와 신학교 진학으로부터 이 섬을 찾아 들기까지 사이에서 그녀의 생을 걸고 행해진 중요한 선택들과 그 선택의 동기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한마디로 하필이면 이 섬을 찾아와선 그녀 나름의 봉사와 헌신을 다짐하고 남아 있는 것이 그리 부자연스러울 수가 없는 그런 내력의 여자였다. 그녀는 그런 모든 이야기들을 마치 상욱에 대한 무슨 반발처럼 또는 그녀 자신을 향한 익숙한 자학처럼, 그러나 한숨 소리 한번 홀리지 않고 조용 조용 속삭이듯이 고백을 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마치 그녀가 상욱에게 그녀의 가장 깊은 내력을 건넸듯이, 이번에는 상욱 쪽에서도 뭔가 그의 가장 깊은 이야기가 그녀에게로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듯 조용히 상욱의 눈길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상욱은 이제 점점 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어졌다. 처음부터 전혀 예상을 못 하고 있던 사실은 아니었다. 그녀가 뭔가 자꾸 이야기를 망설이고 있는 기색을 눈치채고 나서부터 이미 그런 비슷한 예감이 들고 있던 상욱이었다. 상욱은 물론 그것을 바라오진 않았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가 그런 식의 비밀에 관한 것이 아니기를 은근히 바라오고 있었던 상욱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예감이 사실로 밝혀지고 있었다. 미연은 아마도 그녀의 비밀을 털어놓음으로써 그녀가 상욱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함께 해버리고 있는 셈이었다.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반가운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음으로써 그녀가 상욱에게 하고 있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응대해나가야 할지 상욱은 아무래도 분명한 자신이 서 오질 않고 있었다. 문득 소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충동이 머리를 지나간 일은 있었다. 소년의 이야기라면 아마 그녀를 제법 위로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상욱은 끝내 그 소년의 이야기마저 단념을 하고 말았다. 미연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혐오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위로나 동정보다는 정체 모를 실망감이 앞서고 있는 그 자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혐오가 때문이었다. 그 혐오감 사이를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신의 혼란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소년의 이야기는 그녀를 위로할 가장 저열한 수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그녀를 위해서도 참을 수 없는 모욕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이야기는 좀 더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은 미연을 찾은 일까지가 낭패를 하나 더 보태고 만 꼴이었다. 10 원장은 상욱이 장로회 노인들을 만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상욱에겐 처음부터 기대를 걸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상욱에게 뒷일을 묻지 않았다. 노인들을 만나보지 않은 것을 못마땅해 하는 눈치도 없었다. 그렇다고 원장이 그새 장로회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단념해버린 것도 물론 아니었다. 그는 묵묵히 혼자서 일을 추진해 나가고 있었다. 중앙리 교회에서 몇 번씩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지극히 모호하고 추상적이기만 하던 장로회의 기능에 몇 가지 구체적인 권한이 주어졌다. 어떤 명목이로든지 병사 지대에서 원생들의 노역 차출이 행해질 때는 반드시 장로회의 동의를 거쳐야 하는 것 외에 지금까지 원생들의 비행에 대해 원장 단독으로 형량을 결정지어 오던 30일 구류 이하의 처벌권 행사도 장로회의 심의 사항으로 변경되었다. 지금까지처럼 지도소 요원들의 고발에 따라 원장 혼자의 권한으로 원생들의 비행이 처벌되는 경우, 지도소 요원들의 감정적인 배행 해석에 대해서는 일시적이나마 원생들의 입장이 보호받을 길이 없었다. 지도소 요원들이 자행해온 사형이야말로 일정시부터(당시는 순시소)의 오랜 악덕이었다. 하던 것을 원장은 차후 모든 비행을 장로회에서 우선 심의하여, 이곳의 의결을 거쳐 처벌이 결정되도록 조처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장로회에 부여된 기능은 산업부의 운영 감독권이었다. 산업부는 병사 지대로 수용되는 모든 물량을 인수.관리.배급하는 병사 지대 주민들의 생활 동력선이었다. 병원 부서 가운데서도 이 산업부만은 중앙리 병사지대까지 사무실이 따로 들어와 있었고, 담당 직원들도 대개는 이재 능력이 있는 원생들 가운데서 일을 맡아 나와 있었다. 기왕부터 자치적 성격이 농후한 부서였다. 물량규모가 방대하므로 마을의 장로들이 이 산업부의 업무 관리에 진작부터 상담과 감독 역을 담당해오고 있던 터이었다. 그것을 원장이 이번에 다시 공식적인 장로회의 권한으로 확정시킨 것이었다. 산업부의 물량에 대한 관리 자문과 경리 장부 감사권 부여는 그것이 곧 이 부서의 핵심적인 운영 협의체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장로들은 반대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 몇 가지 원장의 조처들에 대해 적극적인 찬성이나 환영의 빛을 나타내는 일도 없었다. 여전히 그저 그러나보다 하는 식으로 원장의 뜻을 전해들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원장의 생각은 그것으로 어느 정도 윤곽이 분명해지고 있는 것 사실이었다. 기어코 무슨 일을 벌이고 말 기세였다. 이섬에다 그가 다시 세우겠다고 장담한 낙토의 본색이 그런 몇 가지 제도상의 개선만으로 간단히 만족되어질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닐 터 이었다. 그는 무엇인가 다른 일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그 다른 일을 시작하기 위해 원생들을 달래고 그들의 환심을 끌어내어 일의 기초를 다져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주정수가 하던 대로였다. 주정수 역시 그런 식으로 일을 시작했었다. 아니나다를까, 드디어 어느 날 원장의 첫 사업 계획이 드러났다. 그러나 원장은 상욱이 상상했던 것보다도 좀더 엉뚱한 위인 같았다. 원장의 사업 계획은 주정수처럼 벽돌 공장을 세우자든가 집을 짓자든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 길을 뚫거나 공원을 만들자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섬 안에 축구 팀을 만들자고 했다. 장로회 모임에서 그가 그런 의견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축구팀 결성을 위해선 장로회의 양해와 적극적인 협조가 요청되노라고 열심히 설득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축구팀을 만든다 해도 원장이 설마 투병중인 양성 환자들까지 공을 차게 한다는 건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어이없는 일이었다. 원장의 낙원 설계에 그런 축구팀 창설까지 끼여 있었다니. 원장의 낙원 설계에 그런 축구팀 창설까지 끼여 있었다니. 어이가 없다기보다 그것은 어떤 짓궂은 심술기마저 느껴 져 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원장의 설득은 진지하기만 했다. 여러분도 알고 계시겠지만 이 섬은 지금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사람들의 섬이 아니오.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모두가 유령입니다. 유령처럼 소리없이 섬을 떠돌면서 죽은 사람들 하고만 말을 하고 그리고 자신들도 언젠가는 진짜 유령이 되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아직도 병을 못 나아서 절망이 큰 사람들은 그래도 이해가 간다고 합시다. 하지만 병이 나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축구팀을 하나 만듭시다. 그래서 그 발이 없이 떠 돌기만하는 유령들이 제 발로 땅을 딛고 움직이는 사람 꼴을 좀 지녀보게 하잔 말이오. 병이 나은 사람들 가운데선 얼마든지 공을 찰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게요.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누워 있는 환자들을 위해서도 공을 차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섬이 유령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섬이라는 것을, 여러분 자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건 내 신념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권려하는 바입니다...... 원장의 설득은 대개 그런 식이었다. 웬만큼 병이 나은 원생들에게 공을 차게 해서 섬 안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싶은 것이 원장의 동기인 것 같았다. 그건 아무래도 달가운 신념은 아니었다. 치료가 끝난 사람이라 해도 공을 찰 수 있을 만큼 손발 운동이 자유로운 경우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아차 하면 발가락 한두 개쯤 달아나는 일은 옛부터 이 병의 상식이었다. 발가락 없는 발로 공을 찬다.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한데도 원장이 굳이 원생들에게 그런 짓을 시키고 말겠다면 그 원장에겐 또 그럴 만한 속셈이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원장은 아직 거기까지는 말을 털어놓지 않고 있었다. 속셈을 알 수 없었다. 절벽처럼 입을 다물고 앉아 있는 장로들 앞에 원장의 일방적인 설득만이 며칠씩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원장이 또 상욱을 조용히 원장실로 불러 들였다. “어서 오시오. 내 오늘은 또 이과장하고 의논을 해 볼 일이 생긴 것 같소.” 부름을 받고 가보니 원장은 미리부터 응접 소파로 내려앉아 그를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의논할 일이라 말씀하시니 오늘 아침엔 제가 좀 꾸중을 듣게 될 것 같군요.” 원장의 부탁을 이행하지 않은 일이 생각나서 사과말부터로 우선 얼버무리려고 드니까, “꾸중이라니 웬?” 원장은 도대체 자기가 부탁한 일은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대수롭지 않게 반문해왔다. “일전에 원장님께서 저에게 장로회 사람들을 따로 만나보라고 지시하신 일 말씀입니다. 어쩌다 보니 전 아직 그 사람들을 만나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그거 말요? 이젠 상관없어요. 그보다도......” 다른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입꼬리에 담배를 꼬나 문 채 상욱을 건너다보고 있는 원장의 표정에 어딘지 좀 장난기 같은 미소가 사라지질 않고 있었다. “그 일이 아니시라면......” “그보다도 내 요새 녀석들에게 축구를 좀 시켜보려고 한 거 말이오......” “아직도 결말을 못 내고 계십니까.” “못 냈어요. 그래서 내 오늘은 그 일 때문에 이과장한테 직접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글쎄요. 무슨 말씀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거 아무래도 좀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상욱은 결국 그 일이구나 싶어 말을 미리 자르고 나섰다. 하지만 원장은 실상 무리가 될 것은 하나도 없다는 태도였다. “무리라니, 무슨 무리라는 게요?” “세상에선 문둥이라면 손가락 발가락이 없는 사람들로 아는데, 그런 사람들이 공을 찬다는 건 뭐랄까요, 아무래도 좀 우스운 느낌이 드는군요. 잔인한 것 같기도 하구요.” “그 사람들이 어때서요? 그 사람들이 어디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런 문둥이들이오? 그 사람들이 왜 문둥이예요? 그 사람들은 병이 다 나은 사람들이란 말요. 다른 사람들하고 틀릴 게 아무것도 없어요. 잔인한 생각이 드는 것도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 임자네 생각 자체가 잔인한 거지, 그 사람들한테 공을 차게 하는 거 그게 잔인한 게 아니야요. 공을 못 찰 이유가 없어요.” “......” “한데도 그 친구들 영 자신이 없어 하누만요. 내 말은 도대체 귓등으로만 듣고 있어요. 뚱딴지같이 질투심만 대단하지요. 그 사람들 표정이나 눈을 좀 봐요. 온통 질투심 덩어리지 뭐요. 건강인들에 대한 질투지요. 자신을 못 가지니까 그런 질투나 불신감만 늘어가서 제풀에 자꾸 추악한 몰골이 되어가고 있단 말이야요. 무엇보다 우선 자신감부터 갖도록 해줘야 해요.” “제가 뭐 할 일이 있을까요?” “있고 말구.” 한데 거기서부터였다. 원장은 웬일인지 거기서부터 또 이야기의 방향을 엉뚱스런 데로 끌고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과장이 내게 해줄 수 있는 일보다도 이쪽에서 먼저 이과장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옛날의 그 주정수 원장 시절에 말요.....“ 느닷없이 주정수 원장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비식비식 다시 장난스런 웃음기를 머금기 시작하고 있는 원장의 태도로 보아 그 자신의 부탁이라는 건 아무래도 금세 말을 할 것 같지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 새 원장은 무슨 이유에선지 그 주정수 시절의 병원사정에 대해서도 꽤나 세심한 지식을 얻어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주정수 원장 시절에 대해 이것저것 기록을 들추다보니 재미있는 인물이 하나 나타나더군요. 사또라는 간호 수장말인데, 이 사람에 관해선 이과장도 물론 자세한 걸 다 알고 있겠지요?” “알고 있습니다만.” 상욱은 점점 의아스러웠다. 상욱은 물론 그 ‘사또’라는 인물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상욱뿐만아니라 이 섬에 발을 들여놓고 산 일이 있는 사람 가운데 사또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한 사람도 없을 정도였다. 사또는 30년 이상이나 그렇게 섬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희귀한 인물중의 한 사람이었다. 주정수의 시대는 곧 사또의 시대이기도 했다. 사또의 시대는 바로 주정수의 시대와 함께 막이 올랐다가 역시 주정수의 시대와 함께 막이 내려졌던 인물이었다. 사또는 주정수 원장의 그 우람한 체구에다 여자같은 목소리로 이상스럽게 섬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었을 때부터 이미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그리고 신임 원장의 감동적인 연설이 끝났을 때 잠깐 동안이었지만 사또는 그 신임 원장과 같은 단 위에서 간단한 부임 소개가 행해졌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 단 아래 모여 섰던 사람들 가운데선 이 땅딸막한 체구에 인상이 별로 유쾌하지 않은 신임 원장의 심복 부하에 대해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또는 곧 그 날로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그리고 섬사람들은 한 동안 그 사또라는 사내의 존재를 마음속에 깊이 지니지 않아도 좋은 무심스런 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천성이 원래 표독스러운 사또의 존재가 다시 태어나듯 서서히 섬사람들의 마음속에 되 살아날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1차 공사에서 자신을 얻은 주정수가 2차 확장 공사를 진행해 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주정수는 그 2차 확장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벌써 몇 가지 다른 부속 시설들을 완성시켜놓고 있었다. 사망자들의 유해를 봉안시킬 만령당 건립과 종각 신축, 그리고 섬을 지나가는 선박들의 길잡이를 위한 등대 시설 따위를 그 사이에 모두 완료하고 있었다. 만령당은 신생리 뒷산 중턱에다 원통형 건물 위에 갓 모양의 지붕을 얹어 세웠고, 등대는 섬의 남쪽 남생리 해안에서 첫 점등식을 가졌다. 종각은 남생리 뒷산봉에다 열 자 가량의 석축을 쌓아올리고 그 위에 법당 모양의 종루를 세웠다. 건물의 들보와 기둥에는 연꽃 무늬 속에서 황룡 청룡이 노니는 모양을 그려 넣고, 그 속에 무게 5백관이나 되는 큰 종을 달아매어 불교신자로 하여금 종을 지키고 섬 안에 종소리를 울리게 했다. 종소리는 섬 안뿐 아니라 건너편 녹동까지도 멀리멀리 바다를 메아리쳐 건너가곤 했다. 그런데 이런 시설 공사가 하나하나 진행되어 나가는 동안 섬 안에선 그 작업의 성격이 서서히 조금씩 달라져가고 있었다. 공사 경비가 원생들의 노력 봉사에 의해 충당되어지는 부분이 차츰 많아져갔다. 이 무렵부터 섬 안에선 병원 시설을 마련해 준 시혜자에 대한 ‘보은 감사일’이란 날을 정해 놓고 한 달에 한 번씩 감사 묵념회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이날 출역한 원생들의 작업 노임은 전액을 앞서의 시설 건립 기금으로 헌납토록 종용되었다. 원생들은 군말없이 노임을 거둬 바쳤다. 더러는 당국의 취지를 기꺼이 수긍했고 더러는 그리 발가운 빛을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환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평의회의 결의라는 형식을 빌어 정해진 일이라 싫거나 좋거나 원생들은 누구나 일을 했고 누구나 노임을 거둬 바쳤다. 작업 진도가 아무래도 시원칠 않았다. 어딘지 열의가 덜한 듯했고 능률도 기대치만큼 오르지 않았다. 원생들에게 작업 노임을 헌납시켜야 할 만큼 여유가 덜한 병원 사정이 이들을 더욱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작업 분위기가 1차 때와는 완연히 달랐다. 한데도 주정수의 신념은 변할 수가 없었다. 그의 낙원은 좀더 크고 화려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더욱더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질 수 없는 원장이 되어야 했다. 그는 드디어 본격적인 2차 확장 공사를 서둘렀다.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원생들에게선 1차 때와 같은 자발적인 열의를 기대할 수가 없었다. 마지못해 일을 했고 기회만 있으면 작업을 회피하려고 했다. 원생들은 원래부터 교육 수준이 낮았고 유랑과 무위도식의 악습에 물들어 있던 무리들이었다. 절망하기 잘하고 까닭없이 반항하고, 그리고 원망과 질투가 강한 병적 심리의 소유자들이었다. 주정수는 비로소 그 낙토 건설 작업에 동원되고 있는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자기의 기대에 부응해 올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작업 능률을 위해서는 지금까지처럼 원생들의 자발적인 열의만 기대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좀더 효과적인 조처가 필요했다. 그는 곧바로 조처의 구체적인 내용을 만들어냈다. 1차 공사 때부터 많은 공헌을 해온 평의회 위원들의 처우를 파격적으로 개선해주고, 그와 동시에 그 ‘평의회’의 기능을 더한층 강화시켰다. 그리고 그 평의회를 통하여 원생들을 회유하고 보다 더 적극적인 협찬을 설득해 나갔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효과적인 조처는 이른바 ‘상관단’의 설치였다. 주정수는 원생들의 치료와 작업 진행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각 마을에다 새로 건강인 직원을 몇 사람씩 배치하여 ‘상관단’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그 상관단과 원생 대표격인 평의회간의 협의를 거쳐 마을의 모든 일을 운영해가도록 했다. 상관단은 간호 주임을 책임자로 하여 간호수 1명과 간호부 2명, 농사 감독 비품 감독 서기 조수 각각 1명씩으로 구성하고, 그 밖에 다시 평의회 위원을 겸한 부락 대표 1명과 비품 조수 1명, 작업 조수 3,4명, 반장 2명을 두었다. 상관단을 이끌고 각 마을로 배치된 간호주임은 출신 성분이 대개 전직 형사나 경찰관서 또는 헌병 경력을 가진 일본인들이었다. 주정수는 거기서도 아직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직원 지대와 병사 지대 경계에다 순시소 본부를 설치하고 순시부장 1인과 순시 10여명을 배치하여 수시로 병사 지대를 순회 감독케 하고 감금실과 면허 업무를 관리케 했다. 가위 강제 노역소를 방불케 하는 엄중한 관리 조직이었다. 원생들은 더한층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지못해 일을 하는 꼴이었다. 노골적인 불만이 일기 시작했다. 이 무렵엔 중일 전쟁이 시작되고 있는 시기여서 일용품 배급마저 여간 인색해진 형편이 아니었다. 식량 배급도 줄어들고 치료약도 모자랐다. 일을 해도 노임이 제대로 지불된 적이 드물었다. 상관단의 통제는 갈수록 극성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간호주임들의 기세는 나날이 더 모질고 거칠어져갔다. 원생들의 대표기관인 평의회 사람들도 상관단의 거센 압력 앞에는 동환들의 권익을 들고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 꼴이었다. 평의회 사람들이나 한국인 순시들 가운데는 동병상련의 동료 의식은커녕 자신의 처지를 돌보느라 상관단의 눈치를 봐 돌기에도 여념이 없을 지경이었다. 자신의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 상관단에 대한 충성심이 입증되기를 소원하였고, 그렇게 되기 위해 동료 원생들의 처지를 함부로 배반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노루 사냥’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이 무렵에 섬 안에는 병사를 띠뜻하게 할 연료마저 부족하여 낮 시간엔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을 엄금하고 있었다. 밥을 짓는 일은 하루 조석 두 번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낮 동안엔 환자의 미음을 데우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구북리 여자 독신사에서 한 여환자가 같은 방에 누워 있는 동료 원생의 미음을 끓이기 위해 은밀히 불기를 쓴 일이 있었다. 감시 눈길이 많았으므로 그녀는 정말 잠시잠깐 일을 끝내려던 참이었다. 한데 그녀는 운이 나빴다. 때마침 독신사 부근을 지나가던 순시 하나가 연기를 보고 말았다. 불기를 본 순시는 그만 눈이 뒤집혀버렸다. 다짜고짜 집 안으로 뛰어들어 미음이 다된 냄비를 구둣발로 짓밟아버리는가 하면 여인에게까지 모진 행패을 가했다. 평소부터 일인들을 한 발 앞질러 설치고 다니며 동환들을 괴롭히던 이모라는 한국인 순시였다. 남몰래 어린애를 낳고, 그의 이웃과 섬사람들의 은밀한 배려 속에 그 아이를 숨겨 기르다 무사히 섬을 내보내게까지 된 일로 하여 그는 누구보다 그 이웃과 섬사람들에 대해 갚아야 할 은혜가 많은 인물이었다. 한데 그는 뜻밖에도 그 은혜를 거꾸로 갚아낼 심산인 듯 엉뚱한 방향으로 태도가 돌변해온 문제의 인물이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마을 청년들은 더 찬고 견딜 수가 없었다. 청년들은 이순시가 남몰래 아이를 숨겨 기르다가 섬을 내보낸 비밀을 병원 당국에 고발하는 대신 그들 자신이 이순시를 직접 보복해 주기로 결의했다. 청년들은 기회를 기다렸다. 마침내 그 보복의 기회가 다가왔다, 이순시가 섬외곽선 순찰을 맡은 날을 택해 청년들은 길가 수풀속에 몸을 숨기고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청년들에게 덜미가 붙잡힌 이순시는 그 자리에서 죽도록 매를 맞았다. 그냥 매를 맞고 있다가는 목숨마저 잃을 판이었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청년들의 매질에서 몸을 피해 달아났다. 산비탈을 데굴데굴 굴러내리다시피 하여 해변쪽으로 도망을 쳐버렸다. 독이 오른 청년들이 소리소리 지르며 이순시를 계속 뒤쫓았다. 소동을 눈치챈 마을의 간호주임 한 사람이 사연을 물으니, 마을사람들은 아마 노루 사냥이 있는 모양이라 대답했다. 기실은 마을 사람들 역시 산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정말 노루 사냥이라도 벌어진 모양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이순시는 진짜 노루 사냥이 있는 줄 알고 헐레벌떡 달려온 상관단 사람들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큰 화를 면했지만, 말썽을 일으킨 청년들은 그 일로해서 3개월에서부터 6개월까지 짧지않은 기간을 섬 감옥소에서 보내야 했고, 형기를 마치고 출옥을 해 나올때는 규칙대로 그 매정한 단종 수술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헌신짝도 짝은 있는데 죄지은 병신에다 자식은 해 뭐하냐고 사람이 사람의 불알을 잘라버려 어떻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늘이여 좀 말을 해보라 그무렵 감옥소를 다녀나와 강제 단종 수술을 당하고 난 한 청년이 남겼다는 이런 한 맺힌 절규는 지금까지도 이 섬사람들의 입에서 가끔 오르내리고 있는 이른바 그 유명한 문둥이시의 한 구절인 것이다. 이른바 노루 사냥이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야흐로 이 섬안에서 그 무서운 배반의 역사가 싹트기 시작한 상서롭지 못한 징후의 시초였다. 하지만 주정수에게는 아직 그런 건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 설계된 낙토의 건설 사업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탈없이 수행되어야 했고 작업 능률을 좀더 높혀야 했다. 그는 간호주임과 간호수들의 행패를 모른 척 눈감아버리고 있었다. 원생들의 불평같은건 아주 시치미를 떼고 모른 척했다. 노루사냥 사건에 대해서도 이순시 쪽 과실은 전혀 추궁을 하지 않았다. 하극상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노루 사냥 사건에서 그가 취한 태도는 다만 그뿐이었다. 3개월에서 6개월 동안 마을 청년들이 도내 감옥소 신세를 지고 나왔을때, 어떻게 된 셈인지 사건의 장본인인 이순시는 이제 지난날의 순시에서 구북리 마을을 대표하는 평의회 위원으로까지 직위가 승진되어 있었던 것이다. 평의회의 자진 결의라는 구실로 발령되는 각가지 규제와 강압 시책들은 날이 갈수록 그 가짓수가 늘어갔고 상관단의 횡포도 갈수록 더 기세가 등등해졌다. 그 상관단 간부 직원 가운데서도 유독 성미가 사나운 작자가 하나 있었다. 사람들은 차츰차츰 그의 매몰스런 얼굴 모습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나 일거일동에 유다른 두려움을 느끼고 그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간호주임을 비롯한 각 마을 상관단의 총지휘 자격인 사또라는 간호장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어려서 일찍 고아가 된 그는 주정수 원장이 양자로 데려다가 따로 수의 자리를 마련해서 그림자처럼 늘 곁에 데리고 다닌다는 인물이었다. 주정수 원장이 처음 이 섬으로 왔을때 자신의 착임 연설을 끝내고 나서 단 아래에 서있는 그를 불러올려다 몸소 소개를 맡았을 만큼 원장의 신임과 배려가 각별한 충복이었다. 언제나 목이 긴 가죽장화에다 손에는 길다란 채찍을 버릇처럼 흔들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그 사또라는 인물의 본성이 여지없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병사 확장 공사에 이은 선창 건설과 섬의 외곽도로 개설 작업 과정에서였다. 2차 확장공사가 있은 이듬해 여름 주정수 원장은 또다시 섬 남쪽 해변가에 선창공사를 시작했다. 섬을 드나드는 데는 이미 직원 지대 쪽으로 선창이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직원지대를 통한 물자 반입은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았다. 병사지대까지의 거리도 멀었고, 건강 지대를 거쳐야하기 때문에 직원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많았다. 병사 지대에 따로 선창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수심이 깊은 동생리 해변가에 자리를 정하고 곧이어 석축 작업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원생들을 공사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구차스런 설득이나 회유를 벌이지도 않았다. 기동이 가능한 원생들은 남녀 노유를 가릴 것 없이 작업장으로 몰아내는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작업 방법도 가위 강제 노역장을 방불케 할 만큼 가혹스러웠다. 작업 기구가 모자랐으므로 모든 일이 손발 하나로 이루어졌다. 바위같은 큰 암석들이 원생들의 목도질로 운반되었다. 조류 관계로 작업은 밤낮을 가릴 수 없었다. 때로는 초저녁에도 사나운 바닷바람을 견뎌가며 출역을 나서야 했다. 그런 작업이 넉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선창은 완성되었다. 모든 작업이 바로 그 사또라는 간호장의 무서운 가죽채찍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는 그 넉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이 선창 공사장의 주위에서 그의 긴 가죽채찍을 흔들어대며 인부들을 괴롭혔다. 이 더러운 문둥이 새끼들, 썩어 문드러진 몸을 아껴선 뭘 할테냐 엉뚱한 생각들 말아. 그런놈은 이 채찍님이 용서하지 않을게다. 제 명에 뒈지고 싶은 놈이 있거든 한번 나서봐도 좋다. 죽여 놓을테다. 난 너희를 죽여줄 수도 있단 말이다. 위협만 가하는게 아니었다. 이마에 반달형 칼자국이 뚜렷한 말상의 얼굴, 그 길다란 말코가 실룩거리며 히죽 한번 웃는 형국이 되면 벌써 그의 갈다란 가죽채찍이 누군가의 등줄기 위에서 사납게 춤을 추고 있었다. 기력을 잃고 땅바닥에 몸이 쓰러져 있다가도 그의 채찍질 세례에는 불에라도 덴 듯 사지를 솟구쳐 일어나고 말았다. 작업 감독을 따라나온 간호주임이나 다른 상관단 녀석들도 그의 채찍질 앞에서는 몸서리를 쳤다. 원생들은 사또의 그림자만 보아도 치를 떨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잔학성은 그 작업장에서만으로는 또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가죽채찍은 좀더 부지런했다. 그는 작업장 감시 업무중에도 틈만 나면 자주 마을까지 들어가서 병사 안을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다. 출역을 나오지 않고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작업 출역이 불가능할 만큼 몸이 쇠약해져 있어도 그의 채찍질을 면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작업중에 부상을 입어도 고의적인 작업 기피술책으로 몰아세우는 사또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사또앞에선 불만을 말하거나 반항의 기색을 엿보일 수가 없었다. 눈에만 벗어져났다 하면 죽도록 매를 맞고 감금실 신세가 되고 만다. 감금실을 다녀나오면 또 가차 없이 단종 수술이 강행된다. 사또는 그런 인물이었다. 선창공사는 그 사또의 채찍 밑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선창 공사 뿐만이 아니었다. 선창 공사가 끝나고 나자 이번에는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 사또의 채찍 밑에서 또 하나 업청난 공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주정수의 낙원 설계는 그렇지 않아도 아직 실현이 요원해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선창 공사가 끝나고 나니 그의 낙원 설계에는 또 한 가지 생각도 못했던 작업이 보태어지고 있었다. 선창 공사가 끝났을 때였다. 공사중에도 가끔 그런 사고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이때부터 원생들 가운데선 섬을 버리고 물을 건너가는 일이 터무니없이 자주 일어났다. 그것은 섬 안에다 원생들의 낙원을 꾸며주겠다던 주정수의 약속에 대한 괘씸하고도 노골적인 배반이었다. 주정수의 약속은 빛을 잃고 있었다. 주정수의 약속은 차츰차츰 온 섬사람들의 원망의 표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병사 시설이 늘어가고 새 선창이 생기고 종각과 만령당이 새로 지어져도 그것들은 원생들의 낙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낙원은 오직 주정수 원장 혼자 속에 있을 뿐이었고, 그러한 작업의 결과들도 그 주정수 원장의 낙원 설계 속에서만 뜻을 지닐 수 있었다. 원생들 쪽으로 보면 오히려 모든게 고역이었다. 시설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원망은 백 가지나 더 늘어났다. 처참한 출역의 기억들이 늘어가고, 그 작업의 결과를 손상 없이 유지해나가야 할 부담이 늘어갔다. 편리한 데도 없는 건 아니지만, 상관단의 극성스런 간섭 때문에 새로운 시설들은 이용된다기 보다는 조심스럽게 모셔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노임을 받기는커녕 이젠 숫제 치료조차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약품이 모자란건 둘째치고 심한 노역으로 인한 부상과 상처의 악화는 투병 능력을 형편없이 저하시켜갔다. 섬은 어쨌거나 주정수의 생각과는 달리 점점 더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시설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섬은 자꾸자꾸 지옥으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하나둘 섬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섬을 빠져나가려다 들킨 사람은 가차없이 처벌되었다. 섬 외곽선 순시가 몇 배로 강화되었다. 하지만 탈출 사건은 끊이지를 않았다. 하루하루 수가 더 늘어갔다. 탈출 루트를 조사해보니 구북리 십자봉 아래의 해변가였다. 십자봉은 하늘을 뒤덮은 노송과 잡목들이 꽉 들어차 있어서 노루가 많은 곳이었다. 탈출자들은 대개 이 십자봉의 비탈 숲속에 몸을 은신해 있다가 지나가는 어선을 매수하여 섬을 빠져나갔다. 나무 판때기 같은 것을 띄우거나 맨손으로 헤엄을 쳐서 바다를 건너가는 자들도 있었다. 더러는 성공을 하고 더러는 해협의 거센 물살에 휩쓸려 수중 고혼이 되어버린 자도 있었다. 한데도 이 필사적인 탈출극은 날이 갈수록 빈번해져갔다. 저들 위해 꾸민 낙토를 저들 스스로 버리고 가는 미욱한 인간의 말종들이라니, 이런 괘씸한 배신자들이라니, 주정수는 마침내 결심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육지 쪽에서 야음을 틈타 들어와 거목들을 마구 도벌해가는 일이 많던 참이었다. 십자봉 외곽 해안선을 따라 새 도로를 개설하기로 작정했다. 새 도로를 개설하여 순시를 재강화함으로써 도벌도 막고 탈출사고도 줄여보자는 속셈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외곽선 도로는 섬 전체를 균형있게 개발하려는 그의 낙원 구상에도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때가 하필 엄동설한이라 공사에 지장이 될 듯싶은게 흠이었다. 하지만 주정수는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는 곧 기공식을 올렸다. 또다시 강제 출역이 시작되었다. 사또의 가죽채찍이 때를 만난듯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십자봉 기슭은 여간 험준한 단애가 아니었다. 땅밑은 순전한 암반 덩어리였다. 변변한 토목 기구 하나 없이 순전히 지게와 곡괭이와 목도질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공사장에서 작업중에 떨어져나간 손가락 발가락들을 해진 옷자락 속에 싸감춰와서 밤을 새우며 눈물을 삼킨 사람들의 수효가 셀 수도 없었다. 하지만 매몰스런 사또의 채찍은 작업 개시 한달도 못되어 그 험한 암반을 뚫고 연장 4킬로의 새 도로를 거뜬히 완성해 놓았다. 사또, 그는 잊을 수 없는 악령이었다. 그리고 잊혀질 수 없는 배반의 원흉이었다. 그 자신의 섬에 대한 배반은 물론, 이 섬으로 하여금 배반을 배우게 하고, 원장이 섬을 배반하게 하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를 가장 충직스런 손발로 부려오던 자기의 주인 주정수 원장 바로 그 사람에게까지 이상하고도 참혹스런 배반을 감행함으로써 그 주인과 함께 자신의 시대에 종막을 내려버린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한데 조원장은 또 무슨일로 갑자기 그의 일을 묻고 있는 것인가. 상욱은 목이 마르고 있었다. 물론 사또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섬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치고 사또의 이야기를 모르고 떠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새 담배에 불을 붙혀물고 앉아있는 원장에게 상욱은 잔뜩 긴장이 된 목소리로 한 번 더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한다면 이과장은 그 사람을 어떻게 알고 있소? 이를테면 주정수란 원장과의 관계 속에서 임잔 그 사또라는 인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냔 말이우다. 원장은 여전히 장난기가 어린 표정이었다. 무엇인가 그가 미리 기대하고 있는 대답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상욱에게서 그 대답을 유도해내기 위해 그런 수수께끼 놀음을 벌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상욱으로서도 짐작이 가지 않는 바가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주정수 원장의 손발 노릇을 하면서 자기 주인을 온통 망쳐놓은 인물이지요. 이 자가 거기까지 이야기를 샅샅이 다알고 있을까. 원장은 이야기를 알고 잇었다. 상욱은 말뜻을 금세 알아듣고 있었다. 맞아요. 주정수를 몽땅 버려놓은 인물이오. 역시 상욱의 예상대로였다. 원장은 결국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거라고 상욱은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원장의 지금 그것을 상욱 자신에게 확인시켜주고 싶어하는가. 그것이 원장의 그 상욱에 대한 부탁이란 것과 무슨 상관이라도 있단 말인가. 상욱은 의심쩍어지면서도 원장의 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정수 원장의 허물을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사실 그 사또라는 인물에게서 저질러진 것이 대부분이라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원장이 그때 갑자기 다시 상욱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렇다면 말이오. 그렇다면 주정수에게는 실상 허물이 없었다는 말이 될 수도 있지 않겠소? 주정수는 일을 좀 잘해보려고 했지만, 사또라는 자가 그만 일을 그런 식으로 그르쳐버렸다면, 사또를 원망할망정 주정수의 처음 의도는 비난이 아니라 어쩌면 칭송을 받을 수도 있었지 않겠느냔 말이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었지요. 하지만 사또는 아, 사또는 물론 주정수가 데리고 온 사람이란 건 나도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관계가 아니더라도 주정수와 사또는 일단 공적인 상하 관계가 있으니까 사또의 허물은 곧 이 병원의 최고 책임자인 주정수에게로 돌아간다는 사리도 물론 자명한 노릇이구요. 하지만 그런 공식적인 해석을 떠나서 주정수와 사또 두사람만의 관계 속에서 이 일을 생각한다면 허물은 역시 사또 쪽이 더 크지 않겠어요? 주정수가 섬을 배반하게 한 것은 사실상 사또 그 녀석이 아니었냐 말요. 하지만 사또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주정수 원장에 대한 공명심 때문이었죠. 그는 이미 주정수의 심증에서 그런 배반의 여지를 보고 있었던 거라 할까요. 적어도 주정수 원장이 그런 사또를 모른 척 묵인한 것만은 사실이었으니까요. 주정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는 점도 고려되어얄 게요. 그는 숱한 약점을 지닌 인간이었단 말이오다. 그 약점을 나무라기보다 그걸 이용한 사또라는 놈이 역시 간악했어요. 사또가 아니었다면 주정수는 아마 그런 비극적인 종말로 인생을 끝맺지는 않았을게요. “그러나 사또의 자리는 다른 누구라도 그걸 이용하게 된다는 것도 역시 사실일 겝니다.” “그런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요.” “무슨 말씀입니까.” “난 주정수가 되고 싶지는 않소.” “........” “그리고 이과장은 그 사또의 자리가 얼마나 배반의 가능성이 많은 곳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소.” 원장이 마침내 속셈을 털어놓고 있었다. 입가에 번져 있던 장난기같은 미소가 어느새 깨끗이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이상스럽게 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상욱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원장이 드디어 그 부탁이라는 것의 정체를 밝혔다. “난 또다시 주정수가 되고 싶지는 않소. 이 섬은 한 사람의 주정수만으로도 이미 충분할 게요. 사또 역시 한 사람으로 족할 게요. 이과장이 사또가 되지 않는 한 나 역시 주정수가 될 염려는 없을 게요.” “절 아십니까?” “조금은...... 이과장은 날 조금도 신용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지요. 아니 그보다도 날 항상 경계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전 원장님을 신용하지 않거나 경계하고 있다고 말씀드린 일은 없습니다.” “말을 들은 일은 없지요. 하지만 느낄 수 있는 일이지요.” “전 그토록 원장님을 불신하고 있진 않습니다.” “그렇담 이과장이 불신하고 있는 건 역시 그 주정수란 인물이라고 말해야 정확할지 모르겠군. 하지만 당신은 늘 나한테서 그 주정수의 유령을 찾아내고 싶어하니까.....” “비약이 아니겠습니까?” “장담하진 마시오. 이래봬도 난 이과장에 관해서라면 뜻밖에 제법 많은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원장은 다시 그 수수께끼처럼 영문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으며 장난스럽게 상욱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상욱은 그 원장이 새삼스럽게 두려워지고 있었다. “도대체 원장님께선 제게 뭘 원하십니까.” “그저 나 하는 일을 구경꾼처럼 바라보고 있지만 말고 관심을 가지고 좀 도와달라는 것뿐이오.” “병신들에게 공을 차게 하는 일 말씀입니까. 그 병신들에게 기어코 공을 차게 하실 작정입니까.” “그렇지요. 당분간은 그저 그렇게 공이나 차게 하는 거요......” “두려운 건 바로 그 원장님의 신념인 것 같습니다.” 11 이날 오후, 상욱의 책상 위엔 무슨 원고 뭉치 비숫한 우편물이 놓여 있었다. 점심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와보니 누군가가 우편물을 책상 위에 놓고 간 것 같았다. 겉 포장지에 쓰인 주소를 보니 수취인은 상욱이 아니라 한민 청년이었다. 발송지는 서울의 어떤 신문사 잡지부. 상욱은 대략 짐작이 갔다. 한민이 투고한 원고의 한 가지가 뒤늦게 반송되어온 모양이었다. 포장지가 뜯겨진 겻으로 보아 누군가가 이미 내용을 조사해보고 상욱에게 뒤처리를 맡기러 가져다둔 모양이었다. 이건 또 무슨 얘기를 쓴 것일까. 상욱이 무심히 원고 뭉치를 꺼내들고 첫장을 들춰보았다. “귀향”이라는 제목이 붙은 1백 장 정도의 소설 원고였다. 상욱은 아직도 좀 덤덤한 기분으로 원고의 첫머리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때는 1930년대 초반의 어느 가을날 저녁. 장소는 화물차나 진배없는 야간 남행 열차의 한구석. 밤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인 듯 옷깃으로 얼굴을 깊숙이 가린 청년 하나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그 야간 열차의 구석에 자루처럼 초라하게 쭈그려 앉아 있었다. 그 청년의 맞은편 구석 희미한 전깃불 아래도 역시 옷깃으로 얼굴을 잔뜩 싸 가린 채 아까부터 자꾸 청년의 동정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여인이 하나 앉아 있다. 여인은 얼굴을 싸 가린 옷깃 속에서도 무엇인가 맞은편 사내의 정체를 읽어내려는 듯 한동안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이윽고 여인은 무슨 확신이 생긴 듯 맞은편 사내 곁으로 슬그러니 자리를 옮겨가서 속삭이듯 재빨리 귓속말을 건넨다. “섬을 찾아가시는군요.” 사내가 옷깃 속에서 흠칫 여인을 훔쳐본다. “아까부터 쭉 댁을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틀림없이 그런 것 같았어요. 겁을 먹고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는 모습이.... 하지만 이제부터 너무 불안해하지 말아요. 저하고 같이 가면 되니까요. 저도 지금 섬으로 가고 있어요. 여자가 계속해서 낮게 속삭여댄다. “보름 동안 휴가를 얻어 고향엘 다녀가는 길이죠. 어머니가 돌아가셨거든요. 휴가를 얻어 갔다는 게 마을까지도 못 들어가고 먼발치서 어머니 장례 행렬이나 구경하다 돌아설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에요. 여자가 말을 하는 동안 사내의 눈빛이 이상한 반가움으로 빛난다. 그러나 사내는 아무 말이 없다. 말없이 여인의 눈을 바라볼 뿐이다. 여인도 이젠 그만 입을 다물고 만다. 두 사람은 흔들리는 차체에 몸을 맡긴 채 말없이 서로 눈길만 주고받는다. 아직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 그리고 누가 누구를 동정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연민어린 두 사람의 눈길. 원고는 그런 식으로 서두가 시작되고 있었다. 상욱은 그쯤 이야기를 따라 읽어내려가자 지금까지 그 무심스럽던 표정이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무슨 이상스런 예감에라도 사로잡힌 사람처럼 열이 오른 눈초리로 계속해서 원고지의 이야기를 뒤쫓고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이순구. 그리고 그 스물다섯 안팎의 사내보다 나이가 서너 살쯤 낮아 보이는 여인의 이름은 지영숙. 두 사람은 그런 식으로 말없이 동행이 되어 이튿날 아침 어둠이 걷히기 전에 순천역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거기서부터는 도보로 하루 한나절 먼지길를 걸어 다시 이튿날째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간신히 섬으로 건너가는 녹동 마을에 다다른다. “집을 잘 떠나셨어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겠지요. 하지만 이제부턴 용기를 내셔야 해요.” “잘만 하면 병을 나을 수도 있을 거예요. 가끔씩은 병을 고쳐 섬을 다시 나가게 된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길을 걷는 동안 가끔 위로말 비슷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여자 쪽이었고, 사내는 그저 듣고만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은 이날 저녁 한배를 타고 그 녹동 앞바다 물길을 건너 나란히 섬으로 들어간다. 섬으로 들어온 사내에겐 뭍에서의 그의 생활과 꿈의 사연들이 어린 낡은 트럼펫 하나가 소중스레 간직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순구 -- 그 사내의 이야기가 틀림없었다. ‘노루 사냥 사건’때의 주인공 사내 이름이 바로 이순구였다. 상욱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원고를 읽어 내려가는 그의 눈길엔 점점 더 긴장기가 더해가고 있었다. 이순구의 이야기라면 노루 사냥 거기서 끝날 이야기가 아니었다. 섬을 나간 소년의 이야기가 있었다. 상욱이 죽은 한민 청년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그 소년의 이야기였다. 한민은 소년의 내력을 설명하기 위해 거기까지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섬으로 들어온 이순구는 남자 독신사로, 그리고 그를 안내해온 지영숙은 여자 독신사로 그날로 각각 격리 수용이 시작된다. 하지만 길을 같이 온 인연으로 해서 두 사람 사이는 오래지 않아 어떤 당연스런 관계가 이루어진다. 어느 날 밤 지영숙은 남독신사로 은연히 이순구를 찾아가서 그에게 자신의 보호자가 되어줄 것을 간청한다. 이순구 청년은 섬 풍속대로 닭을 잡아 주위에게 한턱을 낸 다음 이날로 곧 그녀의 오라비가 되어준다. 섬에서는 흔히 있어온 일이었다. 남녀간의 애정 관계가 전혀 용납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원생들간의 이성 결합은 반드시 남자 쪽의 단종 수술이 전제되어 있었다. 언제가는 병이 나아 섬을 나가게 되리라는 꿈을 버리지 않는 한 선뜻 단종 수술을 각오하고 나선 사람은 드물었다. 그렇다고 혼자서는 섬 생활이 너무도 괴로웠다. 원생들 가운데선 어느 사이에 끼리끼리 ‘오누이’가 되어 서로 은밀한 위로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순구와 지영숙도 이를테면 그런 오누이 사이가 된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거기서도 아직 끝이 나질 않는다. 이순구가 섬으로 들어오고 나서 며칠이 지난 다음날 저녁부터 마을 앞 바닷가 근처에선 때때로 구슬픈 트럼펫 소리가 멀리 어둠 속을 흘러 퍼지다 사라져가곤 했다. 물론 이순구의 나팔 소리였다. 그는 육지에서의 그의 젊은 꿈을 노래하던 나팔로 이제는 그의 절망을 슬프게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밤만 되면 그는 자주 바닷가로 나가 ‘고향의 봄’이나 ‘황성옛터’같은 노랫가락으로 흐느끼듯 어두운 허공을 흔들어놓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이순구가 이날도 그 바닷가 모래사장 한쪽에서 방금 그 어두운 허공을 뚫고 사라져간 유장한 트럼펫 소리의 여운에 스스로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여인의 가는 흐느낌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그가 서 있는 모래사장 근처의 수풀 속이었다. 어느 여인이 그 수풀 속에 숨어 그의 노랫소리를 몰래 듣고 있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었다. 이순구는 그만 발길을 돌이키려 한다. 하지만 흐느낌 소리가 그치지 않은 한 그는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는 결국 소리가 나는 수풀쪽으로 다가간다.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몸을 피해 달아나는 그림자를 붙들고 보니 소리의 주인은 지영숙이었다. 이날 밤 이순구와 지영숙은 두 사람 사이의 ‘오누이’를 단념하고 만다. 원고는 거기서 젭장이 끝나고 있었다. 상욱은 곧 이어 2장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2장의 이야기는 그 지영숙에게 새로운 생명이 잉태된 데서부터 첫머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무리 엄격한 통제와 간섭 속에서도 젊음이 있는 곳에서는 사랑의 장소도 찾아지게 마련이었다. 이순구와 지영숙의 사랑의 보금자리는 그 어두운 바닷가의 숲속이었다. 심한 작업과 감시의 눈길속에서도 이순구와 지영숙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밤이 어두워오면 남몰래 그 해변가 숲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살갗으로 배어드는 초겨울 추위마저 잊어버린 채 두 사람은 새벽이 될 때까지 쉴 새 없이 사라을 나누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이마를 맞대고 앉았다가 하루하루가 마치 세상의 마지막 날인 듯이 아쉬운 마음으로 길을 나눠 마을로 돌아가곤 했다. 이때 이미 여자에겐 새 생명이 잉태되고 있었다. 여자가 처음 그 놀라운 사실을 고백하던 날 밤 두 사람은 그 치열했던 사랑의 동작마저 잊어버리고 있었다. 기쁨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 두 사람은 자꾸 눈물만 치솟아올라서 동편 하늘이 희끄무레해올 때까지 서로 젖은 이마만 끝없이 비벼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며칠이 지나고 나니 두 사람 사이엔 이제 새로운 두려움이 싹트기 시작했다. 사실이 탄로나고 보면 두 사람 앞에 닥쳐올 재난은 보나마나 뻔한 것이었다. 단종 수술 같은 건 이제 나중 일이고 우선은 그 엄중한 금기를 범한 데 대한 병원 당국의 가혹한 벌책을 모면해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스스로 비밀을 자백하고 나설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뱃속의 아이를 떼어내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미적미적 시일이 흐르다보니 이젠 이웃간에서도 벌써 눈치를 채기 시작했고, 두 사람의 비밀은 어느새 섬 전체 원생들의 비밀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섬에서는 그 설명이 불가능한 수수께끼 같은 일이 실현되고 있었다. 섬 전체가 한 생명을 잉태하고 그 생명을 당국의 눈을 피해 자기들끼리 은밀히 길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섬사람들은 아무도 두 사람의 비밀을 말하는 일이 없었다. 두 사람의 비밀이 곧 자기 비밀이나 되는 양 쉬쉬 입을 막으며 주위를 깊이 감싸주었다. 두려운 눈길로 말없는 축복들을 보냈다. 지영숙의 잉태는 모든 원생들의 두려운 희망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 속의 열 달이 지나고 나자 지영숙은 마침내 섬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는 둣한 긴장 속에서 그녀와 그녀의 사내를 위한, 섬안의 모든 원생들을 위한 무거운 진통을 시작했다. 열 시간의 진통끝에 지영숙의 어두운 독신사에선 이 세상에서의 첫 울음 소리조차 이불자락 밑으로 조심스럽게 싸 숨겨야 했을 만큼 인색한 운명을 지닌 아이가 태어난다. 이튿날 아침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은 눈에서 눈으로 귀에서 귀로 순식간에 섬 전체로 퍼져나간다. 모든 마을 모든 원생들이 남몰래 안도의 한숨들을 삼켰다. 아낙들은 물기를 머금은 눈으로 그 기구한 생명의 내력을 축복했고 사내들은 먼 하늘을 쳐다보듯 무심스런 눈길 속에서 얼굴도 보지 못한 한 사내아이의 앞일을 걱정했다. 아이는 그런 섬사람들의 짐짓 무연스런 눈길 속에서, 바로 그 눈길을을 피해가며 몰래몰래 자라나기 시작한다. 아이는 그를 낳은 한쌍의 사내와 여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섬 전체가 그를 길러나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순구와 지영숙은 불안했다. 언제 누가 비밀을 꼬아바쳐 병원 당국에서 아이를 빼앗아가게 할지 알 수 없었다. 작업은 차츰 고되어져가고 원생들에 대한 당국의 통제와 감시의 눈길도 하루하루 더해가는 판이었다. 어느 하룻밤 아기의 울음 소리를 듣고 그 극성스런 순시 녀석들이 갑자기 문을 박차고 덤벼들지 불안스런 나날의 연속이었다. 아이를 늘 포대기 속에 숨겨놓고 바깥 동정을 살피기에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이순구는 지영숙보다도 한층 더 불안했다. 불안했기 때문에 그는 한사코 병원 부서 사람들의 신임을 사두고 싶었다. 그는 작업장만 나가면 눈에 띄게 일에 열심히었다. 마을 일도 무엇에나 남 먼저 앞장을 서고 나섰다. 그는 마침내 작업 성적이나 마을을 위한 열의를 평가받아 병원 당국으로부터 순시원의 자리를 얻어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원생들 가운데선 제법 신임도가 인정되고 있는 순시원직을 얻고 나서도 여전히 마음이 불한했다. 그는 마음이 불안한 만큼 더욱더 일에 열심히었다. 신임이 두터우면 두터울수록 주위는 거꾸로 점점 더 불안스럽기만 했다. 믿어지지 않는 세월이 5년이나 흘러갔다. 비밀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완벽했다. 하지만 이순구는 이제 더 이상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를 언제까지나 여자의 이불 속에만 숨겨두고 지낼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침내 어느 비가 몹시 내리는 여름 밤을 이용하여 아이를 등에 업고 나간다. 그리고 지나가는 고깃배를 섬 기슭으로 불러들여 어린 소년을 섬에서 내보내고 만다. 이야기는 거기서 제2장이 끝나고 다시 3장이 이어지고 있었다. 3장의 이야기는 소년을 내보내고 난 이순구의 배반에 관한 설명이었다. 이순구는 소년을 섬에서 내보내고 나서도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걷히질 않는다. 섬 안엔 이제 그 악명 높은 사또의 채찍이 기승을 떨기 시작하고 있던 시절--작업은 더욱더 가혹해져가고 그의 비밀은 언제까지나 비밀로 남아 있었다. 그 비밀이 언제 탄로나서 하찮은 직위나마 그이 순시원 자리가 달아나버릴지 모를 일이었다. 작업이 고되다보니까 순시원으로서의 그의 조그만 특권까지를 부러워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순구는 이제 동료나 이웃마저 의심스러웠다. 그 동안 공을 들여온 순시로서의 말단 관리직이나마 더없이 새로운 애착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그 순시원의 자리만은 지켜낼 결심이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불신은 무얼 좀 분명히해두고 싶어할수록 점점 더 깊어져가게 마련인 것. 그는 상관단 사람들의 눈에 들면 들수록 자신이 불안했고, 주위를 분명히하고 싶을수록 사람들이 온통 다 의심스러워지기만 했다. 이순구는 마침내 자포자기가 되고 만다. 어디 한번 입을 열 테면 열어보라는 식으로 동환의 원생들에게 마구 신경질스런 행동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비밀만은 절대로 입에 올리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말하는 것은 이미 이순구 개인의 비밀이 아니라 섬사람 전체의 금기가 된 지 오래였다. 이순구는 점점 더 거동이 자신만만해져가고 있었다. 병원 당국의 충직스런 손발이 되어 동료 원생들의 처지를 노골적으로 외면하고 나선다. 한민의 이야기는 거기서 비로소 그 유명한 ‘노루 사냥 사건’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그는 마침내 어느 비가 몹시 내리는 여름 밤을 이용하여 아이를 등에 업고 나간다. 그리고 지나가는 고깃배를 섬 기슭으로 불러들여 어린 소년을 섬에서 내보내고 만다. 이야기는 거기서 제2장이 끝나고 다시 3장이 이어지고 있었다. 3장의 이야기는 소년을 내보내고 난 이순구의 배반에 관한 설명이었다. 이순구는 소년을 섬에서 내보내고 나서도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걷히질 않는다. 섬안엔 이제 그 악명 높은 사또의 채찍이 기승을 떨기 시작하고 있던 시절---작업은 더욱더 가혹해져가고 그의 비밀은 언제까지나 비밀로 남아 있었다. 그 비밀이 언제 탄로나서 하찮은 직위나마 그의 순시원 자리가 달아나버릴지 모를 일이었다. 작업이 고되다보니까 순시원으로서의 그의 조그만 특권까지를 부러워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순구는 이제 동료나 이웃마저 의심스러웠다. 그동안 공을 들여온 순시로서의 말단 관리직이나마 더없이 새로운 애착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하든지 그 순시원의 자리만은 지켜낼 결심이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불신은 무얼 좀 분명히 해두고 싶어할수록 점점 더 깊어져가게 마련인 것. 그는 상관단 사람들의 눈에 들면 들수록 자신이 불안했고, 주위를 분명히 하고 싶을 수록 사람들이 온통 다 의심스러워지기만 했다. 이순구는 마침내 자포자기가 되고 만다. 어디 한번 입을 열테면 열어보라는 식으로 동환의 원생들에게 마구 신경질스런 행동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비밀만은 절대로 입에 올리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말하는 것은 이미 이순구 개인의 비밀이 아니라 섬사람 전체의 금기가 된 지 오래였다. 이순구는 점점 더 거동이 자신만만해져가고 있었다. 병원 당국의 충직스런 손발이 되어 동료 원생들의 처지를 노골적으로 외면하고 나선다. 한민의 이야기는 거기서 비로소 그 유명한 ‘노루 사냥 사건’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상욱은 이제 그만 원고를 덮고 말았다. 더 이상은 이야기를 읽어나가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상욱이 한민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다만 소년의 탈출에 관한 것뿐이었었다. 노루 사냥 사건의 주인공이 소년의 아비라는 관계는 말로 일러준 일이 없었다. 한데도 한민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노루 사냥 사건의 주인공 이순구의 내력에서부터 소년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한민이 알고 있는 가운데 더욱더 상욱을 놀라게 한 것은 후일 소년의 귀향에 관한 것이었다. 상욱은 소설의 제목이 ‘귀향’이라 붙여진 데 대해 처음에는 납득이 잘 가지 않았다.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고 있는지나 알고 싶었다. 원고지를 되집어다 끝부분 몇장을 들춰보니 소년은 후일 성년이 되어 다시 섬으로 돌아와 섬 일을 신념껏 돌보는 것으로 결말이 지어져 있었다. 그래서 아마 소설의 제목을 ‘귀향’이라 한 모양이었다. 소설 구성상으로 그런 식의 이야기 전개나 결말이 적합한 방법인지 아닌지는 상욱으로서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만 기가 질리고 말았다. 섬에서는 누구나 남의 내력을 들추는 일이 없었다. 내력을 알고 있다해도 모른 척 눈감아주는 것이 섬사람들의 오랜 습속이었다. 가명을 쓰는 사람도 많고 고향을 숨기는 사람도 많았다. 아무도 그것을 한민 역시 상욱이 귀띔을 해준 것 이상으로 소년이 섬을 나가고 난 다음 일에 대해서는 별로 깊은 관심을 나타내 보인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소년이 섬을 나가고 난 뒷날의 이야기도 이미 다 훤히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일이 거기까지 이르고 보니 상욱은 이제 다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원고지 포장이 뜯겨져 있는 것이 누군가 이미 이야기를 읽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누가 원고를 자기 책상에 가져다 놓았는지를 알고 싶었다. ---장담하진 마시오. 난 이과장에 관해선 뜻밖에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수수께끼처럼 영문을 알 수 없는 미소 속에서 장난스럽게 상욱을 건너다 보던 원장의 얼굴이 머리를 지나갔다. 상욱은 원고를 서랍 속에 쑤셔넣고 나서 자리를 일어섰다. 그리고는 그 길로 곧 서무과를 찾아가서 원고가 전해지게 된 자초지종을 알아보았다. 일의 경윈즉 역시 상욱이 예상한 대로였다. “아, 그 원고 말씀입니까. 별써 며칠 전에 다른 우편물 속에 끼여왔어요.” 늙은 서무과장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설명했다. 상욱은 그러나 그 서무과장에게 조급한 어조로 연거푸 물어댔다. “그래서 그 원고를 어떻게 했습니까?” “글쎄요, 한민이라면 지난번에 그 약을 먹고 죽은 친구 아닙니까? 주인도 없는 판에 마침 원장님이 곁에 계시다가 원골 구경하자고 가지고 가셨지요.” “원장님께선 원골 읽으셨나요?” “며칠 동안 가지고 계셨으니까 아마 몇 장쯤 들춰보실 수도 있으셨겠지요.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그 원고가 잘못된 거라도 있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아까 보니까 제 책상에 누가 그런 원고를 놓아두고 갔길래...” “아마 원장님께서 누굴 시켜 거기다 갖다놓게 한 모양이군요. 이과장이 알아서 처리하시라구 말입니다.” “알겠어요.” 상욱은 더 이상 캐물을 것이 없었다. 그는 서무과를 나왔다. 12 축구에 대한 원장의 집념은 상욱이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대한한 것이었다. 원장은 한번 말을 꺼낸 이상 이제부턴 그 축구공 한 가지로 섬을 온통 정복해버릴 결심이라도 한 듯 오로지 그 일에만 오만 정열을 쏟고 있었다. 마을마다 축구공을 나눠주고, 원생들 가운데서 웬만큼 볼을 다룰 만한 청년들을 선발해서는 섬을 대표하는 장로교와 천주교의 두 축구팀을 창설했다. 장로교와 천주교의 두 축구팀은 외지에서 초빙해온 코치의 지도아래 본격적인 합숙 훈련을 실시케 했다. 훈련중엔 며칠 만에 한 번씩 두팀간의 친선 시합을 갖게하여 상호 기량을 가다듬어나가게 했다. 그런 친선 시합이 무려 수십회나 치러져나가는 동안 두팀의 실력은 눈에 띄게 향상되어나갔다. 한 번은 섬 밖에서까지 축구팀을 초청해다 시범경기를 가진 일이 있었다. 원정군은 고흥군을 대표해 온 팀이었으나 섬에서는 오히려 2 대 0 이라는 스코어로 의외의 패배를 면치 못했다. 그런 친선 시합들이 치러져나가면서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물론 축구팀의 실력만은 아니었다. 보다 더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섬사람들의 태도였다. 섬의 분위기였다. 섬사람들은 처음 반강제나 다름없는 원장의 축구 보급에 대해 도 원장은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집무시간만 끝나면 합숙소로 내려가서 훈련을 간섭했다. 날이 갈수록 축구에만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섬사람들에게서도 마침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로교팀과 천주교팀의 시합이 회를 더해갈수록 섬사람들도 차츰 이 희귀한 구경거리에 관심이 기울기 시작했다. 열띤 응원전이 벌어지고 마침내는 섬 전체의 하루가 고스란히 이 축구 시합 구경에 바쳐지곤 했다. 섬사람들은 슬금슬금 축구에 취해 들어가다가 끝내는 스스로 열이 올라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거 참 볼 만한 구경거리가 되겠군 그래. 난 여태 외발잽이 축구시합이라는 건 구경을 해본 일이 없었는데, 우리 원장님은 워낙 상상력이 풍부한 분이시거든.” 실없는 악담을 내뱉아가면서도 한두 차례 시합 구경을 나다니던 보육소 윤해원마저 나중에는 다리를 걷어붙이고 운동장을 겅중겅중 뛰어들었을 정도였다. 친선 시합이 50여회를 헤아리자 이젠 섬 전체가 온통 축구열에 들떠 지내는 판국이었다. 시합이 벌어지고 있는 운동장의 선수들은 물론, 열띤 응원전을 벌이고 있는 운동장 가의 구경꾼들의 모습은 냉랭하게 말이 없던 원장 부임시의 그것과는 워낙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원장은 내내 그렇게 원생들에게 공만 차게 하고 있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남해의 겨울은 볕발이 짙은 날이 많았다. 원장은 겨울에도 계속 공을 차게 했다. 당분간은 그저 공이나 차게 하겠다던 말대로 원장이 그렇게 원생들에게 공을 차게 하는 데는 따로 무슨 목적이 숨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혼자서 무슨 다른 일을 꾸미고 있는 기미가 엿보이지 않았다. 무작정 그렇게 공만 차게 하고 있었다. 다시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원장은 마침내 자신이 생긴 모양이었다. 봄이 되자 원장은 이제 축구팀을 섬 밖으로 끌고 나갔다. 때마침 고흥군에선 무슨 기념일을 경축하기 위한 군민 체육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원장은 그 고흥 군민 체육 대회장으로 축구팀을 끌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 군민 체육대회의 최종 결승전에서 4 대 2 라는 큰 스코어 차로 우승을 차지했다. 기대 이상의 수확이었다. 조원장은 점점 더 자신이 굳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윽고 축구팀을 이끌고 두번째로 원정 시합 길을 나섰다. 광주에서 열리는 도내 춘계 축구 선수권 대회에 군대표로 출전 신청을 낸 것이었다. 섬 거리가 온통 연분홍 꽃무리로 뒤덮이기 시작한 4월 초순 어느날, 소록도 병원 축구팀은 트럭 위에 몸을 싣고 그 벚꽃길을 지나 모처럼 장거리 원정 시합 길을 떠나갔다. 벚꽃가지가 머리 위를 스치는 트럭 위세는 군복 차림을 한 조백헌 원장과 빨간 바탕에 손가락이 잘려나간 모양의 검정색 팀 마크를 부착한 유니폼 차림의 선수들이 지금 막 싸움터로 떠나가는 병사들처럼 흥분과 긴장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바뀌고 바뀐 세월 싸워가면서 암흑과 먹구름도 이제 개이고 동천은 밝아졌다 대지로 가자...... 치료소 앞 광장에서부터 나루터까지 벚꽃길 연도에 늘어서서 ‘소록도의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불러대는 섬사람들의 환송에 답하여, 차 위에 올라앉은 선수들도 주먹을 휘두르며 합창을 하고 있었다. 선수들이 탄 차가 먼지를 뿜으며 고갯길을 넘어갈 때까지, 그리고 그 선수들의 트럭이 나룻배에 실려 맞은 편 녹동 포구를 향해 섬을 멀리 떠나가고 있을 때까지도 섬사람들은 온통 붉은 눈자위가 더욱 더 붉어져서 노랫소리를 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번째 원정에서도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병원팀의 소식을 전해들은 주최측에서 출전 포기를 미리 종용해온 일이나, 병원팀에 대한 다른 건강인 팀들의 대전 기피 경향 같은 것은 오히려 사소한 말썽거리에 불과했다. 그런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꿋꿋하게 치러낸 시합의 결과는 더욱더 자랑스럽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적어도 조백헌 원장에겐 그건 기대이상으로 만족스런 결과였다. 병원팀이 마침내 도 선수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번에도 물론 축구실력이 평가받고 안 받고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원장의 집념이 문제였다. 섬사람들에게 건강인과 똑같이 싸워 그 건강인을 이길수도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던 원장의 집념이 이 병원의 축구팀으로 하여금 우승컵은 안게 함으로써 무엇보다 분명한 증거를 보여준 것이었다. 이 두번째 원정 시합에 대해서는 때마침 그 기이한 축구팀과 건강인과의 경기 모습을 취재한 기자가 았어, 훗날 다시 그의 글을 대할 수가 있었으므로 섬사람들은 누구나 그날의 시합 광경을 오래오래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었다. 그 기자의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건 참으로 묘한 축구 경기였다. 빨간 유니폼에 손가락이 몇개 잘린 그런 깜장 마크가 흡사 나치 독일의 국기만 같은 그 낯선 원정팀의 선수들은 볼 다룸새가 매우 서툴렀다. 팀워크도 서툴렀다. 볼에 몇사람씩 얽히어 달리다가 볼은 빼앗겨 이미 홈사이드로 들어가 있는데 달리던 관성대로 원정팀 선수들은 몇 명씩 한꺼번에 마구 달리다가 어이없는 범칙을 저지르기도 했다. 공을 세차게 걷어차고 난 빨간 유니폼의 선수들은 거의가 발이 아파 그 자리에 몸이 아뒹굴어지기도 했다. 정말 묘한 축구 경기였다. 빨간 유니폼이 볼을 몰고 가면 상대편이 태클을 해 들어오기는커녕 오히려 도망을 쳤다. 그러기에 서툰 기술인데도 게임은 빨간 유니폼 쪽에 유리하게 이끌려갔다. 이 게임이 시작되자 빨간 유니폼의 홈 사이드에 널려 서 있던 관중들은 거의 돌아갔거나 멀찌감치 물러서서 구경을 했다. 선수들이 볼을 따라 몰려가면 라인 근처에 서 있던 관중들은 물이나 끼얹은 듯 도망을 치곤 했다. 빨간 유니폼을 응원하는 관중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야유하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군복 입은 한 고급 장교가 라인 밖을 쳇바퀴 돌 듯 맴돌며 발악에 가까운 웅원을 했다. 군의관 대령인 이 장교는 지칠 줄을 몰랐다. 팀이 몰려 머뭇거리면 권총을 빼들고 힘을 내도록 협박까지 했다. ---임마 똑같은 사람이야! 똑같은 축구 선수란 말야! 다를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이닷! 장교는 고함치며 꺼져들려는 투지에 불을 붙이며 뛰어 다녔다. 팀의 마크처럼 손가락이 없는 선수들은 솜으로 축구화의 코를 메우고 공을 찼다. ---눈썹이 없다는 것과 문둥이라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해오지 않았나 말이닷! 눈썹들이 없었다. 하지만 장교의 말대로 이전에 문둥이였다는 것과 지금도 문둥이라는 것과는 달랐다. 선수 교대가 잦은 것은 발가락이 없거나 발 신경의 어느 일부분이 마비되었거나, 어딘가가 성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보결선수가 다 나간 후였다. 한 선수가 공을 차고 뒹굴더니 일어서질 않았다. 빼들었던 권총을 버린 장교는 주섬주섬 유니폼을 주워입고 이번에는 그 자신이 경기장으로 뛰어들었다. 관중들은 놀랐다. 이미 게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음성 환자들을 두고 어떤 사람이 어느 만큼 더 성자적인 시련을 감당해내느냐를 보고 있는 관중이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무심하던 관중은 빨간 유니폼에 환성과 박수를 보냈다. 몇몇 여학생은 돌아서서 울기까지 했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 장교의 염원이 저토록 간절할 수 있는가. 경기는 마침내 끝이 났다. 장교는 마이크를 빌려 관중에게 인사를 했다. -소록도 병원장 육군 중령 조백헌입니다. 문둥이를 이 경기에 끌고 와서 불쾌한 오후를 누리게 한 것을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느낀 불쾌감만큼만 이 약자를 위해 박애를 베풀었다고 여겨 주십시오. 이제 경기는 끝났습니다. 여러분에겐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이지만, 문둥이에겐 이제부터 시작인 것입니다. 문둥이도 축구 같은 걸 할 수 있구나 하는 조그마한 사연이 수만 나환자에게 벅차고 갈피잡을 수 없는 희망으로 받아들여지며, 그것이 그렇게 받아들여진 후에 일어날 그 벅찬 일들을 여러분은 상상할 수가 없을 겁니다. 나는 기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나와 수만 나환자로부터 감사받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경기를 보고 돌아가는 관중들은 그저 단순한 축구경기가 아니라 장렬한 한 편의 드라마를 보고 돌아가는 느낌들이었다. (이규태의 「소록도의 반란」, 「사상계」, 1966.10 일부 인용) 어쨌든 선수들은 이번에도 이기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들이 시합을 이기고 돌아오던 날 소록도는 이 섬이 생긴 이후로 가장 즐거운 잔치가 벌여졌다. 선수들이 건너오는 나루터엔 솔문을 만들어 세우고 교회에 걸어두었던 만국기를 가져다 바람에 나부끼게 했다. 바뀌고 바뀐 세월 싸워가면서 암흑과 먹구름도 이제 개이고... 선수와 섬사람들은 한덩어리가 되어 다시 「소록도의 노래」를 목이 터져라 합창했다. 군중들 사이에는 보육소의 윤해원이나 서미연까지도 서로간의 처지를 잊은 채 함께 뒤섞이고 있었다. 상욱의 반응을 얻을 수가 없어 그랬던지 상욱에게 비밀을 모두 털어놓은 다음부터는 이상스럽게 자꾸 그를 경원시해오던 서미연이었다. 그리고 그 서미연을 아직도 끈질긴 질투로 괴롭혀대고 있다는 윤해원이었다. 하지만 이날만은 누구에 대한 경원스러움도 없었고 질투 같은 것도 남아 있을 수 없었다. 모두가 함께 노래를 부르고 모두가 함께 감격을 했다. 상욱도 모처첨 그들 사이로 함께 뒤섞여들어 목청껏 노래를 불러댔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볼을 적셔내리고 있음을 느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노래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어나갔다. 「소록도의 노래」에 지친 사람들은 이제 기억에서조차 아득해진 「고향의 봄」을 노래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마침내는 언제부턴가 이 섬 사람들의 마음의 노래가 되어오고 있던 한 유행가의 노랫가락이 성가처럼 장엄하게 무리 사이를 흘러 번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 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노래의 물결을 따라 눈물과 흐느김이 함께 번져나가고 있었다. 한데 그때였다. 상욱은 어느 순간 갑자기 전기라도 맞은 듯 깜짝 소스라쳐 놀라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다가 어느 순간 그는 차 위에 높다랗게 서 잇는 원장의 모습을 본 것이없다. 조원장은 아직도 차를 내리지 않고 있었다. 역시차 위에 서서 이경사를 누구보다 깊이 흡족해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는 아직도 섬사람들의 기분에는 섞이질 않고 있었다, 상기된 얼굴에 어렴풋이 미소가 스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웃고 있었다. 상욱은 그 원장의 웃음 띤 얼굴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그만 기분이 오싹 가라앉아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원장의 웃음 띤 얼굴을 조심스럽게 지켜보면서 두렵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제 진자로 뭔가 시작될 모양이군. 도대체 어느새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운동 시함이란 자주 개인의 사소한 대립이나 이해 관계를 넘어서서 어떤 맹목적인 집단 의지 같은 것을 형성하는 데는 큰 공헌을 하는 수가 있었다. 그 거대하고 맹목적인 집단의 지속에서 잡다한 개인의 불평이나 의식의 편향 같은 것은 일거에 깨끗이 해소되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가끔 특정 집단의 작은 불평이나 이해 갈등을 해소시키고 그 집단에게 목적하는 바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 엉뚱한 스포츠 행사를 이용하는 수가 있었다. 그야 물로 모든 스포츠 행사가 그 스포츠 고유의 목적 이외에, 여러 가지 다른 부수적인 의의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당연했다. 이 섬에 대해 말한다면 원장은 그 스포츠 행사를 통해서 원생 개개인간 또는 병사 지대와 직원 지대간의, 원장과 원생들간의 인간적인 신뢰감을 회복시키고, 그들고 하여금 자기글 생에 대한 투철한 자신감을 기러주는 데에 보다 큰 목적이 있었다. 조원장 자신이 한 말이었다. 하지만 원장의 동기가 어디에 있어든 상욱은 역시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사람들이 너무 흥분하고 있었다. 어느새 이렇게 되어버린 건가? 운동 심함의 마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원장의 의도에 대해선 심상찮은 예감을 지녀오고 있던 상욱이었다. 하지만 그 상욱마저 이젠 어느새 그 시합의 마력에 말려들고 만 꼴이었다. 섬은 이제 5천 명 원생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니었다. 5천 명이 그냥 한 사람이었다. 5천 명이 한 사람처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흥분하고 있었다. 이제 아무도 원장을 경계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알 수 없는 자신감에 들떠 있었다. 그를 믿고 그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그 흥분 속에서 원장은 혼자 웃고 있었다. 그리고 상욱은 혼자 치를 떨고 있었다. 13 예상대로 원장은 곧 다음번 사업 계획을 내놓았다. 이튿날 아침 원장이 다시 상욱을 호출했다. “이젠 이 섬도 웬만큼 활기를 되찾은 것 같지 않소? 한번 일을 벌여봐도 좋을 만큼 자신들이 생긴 것 같던데, 어때요, 이과장 생각은?” 상욱을 대하자마자 원장은 대뜸 전날의 시합성과에 대해서 동의를 구해왔다. “어젠 참 다들 좋아하더군요. 축구를 시킨 보람이 있었어요.” 상욱은 원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원장이 갑자기 자리를 벌떡 일어났다. “됐어요. 이과장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제 다된 겁니다.” “...” “이제 공은 그만 차게 해도 됩니다. 이제부턴 진짜 일을 시작합시다.” “무슨 일을 말씀입니까?” “내 그 사이 공을 차는 일에는 이과장 협조를 크게 구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턴 당신도 본격적으로 나서줘야겠소.” “무슨 일인지 알아야지 않겠습니까.” “오늘 나하고 고흥 좀 나갑시다.” 원장에겐 역시 각본이 미리 다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모든 일을 그 각본대로 진행하고, 각본에 예정된 결과를 얻고 있었다. 섬 안에 축구를 보급시키고 시함에서 우승을 거둔 것들 모두가 그 원장의 각본에 의한, 각본에 예정되어 있던 성과 그대로였을 뿐이었다. 그가 새로 시작하고자 한 일 역시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각본의 계속 부분이었다. 그는 상우과 함께 나룻배로 섬을 빠져나온 다음 각본의 다음번 진행지를 비로소 상욱에게 설명했다. 바다를 잘라 막자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미 문둥이가 아닌 수천 명 섬사람들이 나라에서 주는 쌀 몇 줌 보리 몇 줌씩을 씹으며 하루하루 그 무서운 납골당의 어둠을 찾아들게 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손으로 땅을 이구고 자신들의 손으로 내일의 희망을 열어나갈 새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주자는 것이었다. 바다를 막아 그들의 내일 앞에 어두운 납골당의 절망 대신 꿈에 부푼 들판을 마련해주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고향을 잃고 육지에서 쫓겨난 이들에게 새로운 고향과 새로운 생활의 터전을 마련 해주자는 것이었다. 막을 바다는 고흥 반도 동쪽, 득량만이라 이름지어진 협만의 일부였다. 고흥군 도양의 봉암 반도와 풍양 반도를, 그 중간 지점에 자리잡은 오마도를 디딤목으로 이어 막아 대략 넓이 3백여 만 평의 농토를 얻어내려는 방대한 사업 계획이었다. 상욱은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무모하리만큼 엄청남 계획이었다. 하지만 원장은 상욱의 기색 같은 건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일대를 살필 수 있는 5만분의 1짜리 자세한 지도까지 마련해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날 시합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측량 기사 한 사람을 미리 초빙해다 녹동 여관에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상욱은 이미 계획에 대한 원장의 의논 상대가 아니었다. 계획은 벌써 결정이 나 있었다. 상욱은 그 원장의 결정에 따라 작업 진행 방법상의 의견밖엔 용납될 수가 없는 단계였다. 그는 하루종일 원장과 측량 기사를 따라 기초 측량 현장을 견학했다. 주정수 시대의 일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어지렵혀왔다. 하기야 조원장의 그런 사업 계획을 나무랄 수는 물론 없었다. 고향을 잃은 자에게 고향을 만들어주고, 납골당의 어둠이 기다리고 있는 저들의 내일에 그 죽음의 어둠 대신 활짝 트인 평원의 꿈을 심어주겠다는 원장의 동기나 명분은 누가 들어도 나무랄 데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정수 시대에도 명분이나 동기에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정수에게도 더할 수 없는 동기와 훌륭한 명분이 있었다. 문제는 오히려 그 명분의 지나친 완벽성, 명분이 너무도 훌륭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 명분에는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없었던 명분의 독점성이었다. 게다가 명분이라는 건 언제나 힘있는 자의 차지였다. 주정수는 최고 최선의 명분을 그 혼자 독차지해버리고 있었다. 그 주정수의 명분 앞에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자신을 주장할 자기의 명분을 따로 지닐 수가 없었다. 주정수의 명분은 물론 낙원이었다. 그리고 그 주정수의 낙원에는 공원이 빠질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훌륭한 명분 위에 시작된 공원 건설 작업이 주정수와 사또에겐 또 한번 치명적인 배반의 과정이 되고 있었다. 십자봉 외곽 도로 공사가 끝나던 해에 주정수는 일본 황실의 부름을 받아 일경을 다녀온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주정수는 병원 설립을 크게 도운 바 있던 일황 태후로부터 각별한 치하와 격려를 받게 되었다. 그는 병원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작위까지 봉함을 받았다. 주정수는 감격해서 돌아왔다, 섬으로 돌아온 주정수는 태후가 당신의 위로를 전하기 위해 원생들에게 내린 어가를 선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일황 태후가 내린 어가를 비에 새겨 길이 기념할 계획을 세웠다. 어가비는 금세 세워졌다. 십자봉에서 운반해내린 커다란 화강암에 태후의 노래를 새겨 공회당 앞에 우뚝 세웠다. -가기 어려운 나를 대신하여 끼리끼리 벗 되어라. 그 어가비의 제막식이 문제였다. 주정수가 공원 건설을 계획하게 된 직접 동기가 바로 어가비의 제막식에 있었다. 이 해 11월 중순께 거행된 어가비 제막식에는 총독부의 정무총감을 비롯하여 각계각처의 고위 인사들이 섬을 찾아왔다. 그리고 주정수가 이루어놓은 사업 실적을 돌아보고 그의 업적을 실컷 치하해주었다. 주정수는 그의 낙원이 자랑스러웠다. 자신이 이룩한 섬을 보고 감동하는 사람들을 보자 그는 다시 한번 벅찬 보람을 느꼈다. 그는 이제 이 낙원 건설 사업에 마지막 마무리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원이 있어야 했다. 가엾은 환자들이 남은 여생을 편히 쉬다 갈 공원을 만들어야 했다. 그는 곧 계획을 세우고 일을 시작했다. 이젠 설득이고 뭐고 필요가 없었다. 모두가 원생들을 위한 일이었다. 그들을 위한 일에 일일이 구차스런 설득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지금까지 이룩해놓은 모든 작업 결과가 주정수 자신뿐 아니라 섬을 다녀갔거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을 한결같이 감동시키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옳았다는 생각이었다. 그 칭송에 값하기 위해서도 섬을 좀더 멋있게 꾸며야 했다. 이 해에는 예년에 없이 일찍부터 혹한이 밀어닥치고 있었으나 주정수는 일을 미루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일본까지 연락하여 일급 원예사를 초빙하여 공원 건설 공사를 착수했다. 그는 우선 중앙리와 동생리 사이에 공원 부지를 정하고 진흙밭 매립 작업을 시작했다. 혹한 속에서도 원생들은 또다시 노역장으로 끌려나가기 시작했다. 그 동안 계속된 노역으로 대부분의 원생들은 병세가 악화되고 상처투성이의 손발들이 궤양으로 패여 들어가고 있는데도 노역을 피할길이 없었다. 원생들은 이제 어김없이 노예였다. 병원 처사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비판이 용납되지 않았다. 항거를 해볼 기력도 없었다. 기계처럼 산을 허물고 진탕을 메우고 산봉우리를 찾아 올라가 공원을 꾸밀 거목 거석들을 떼메어 나르곤 했다. 사또의 채찍 아래 원생들은 짓무른 육신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도 어김없이 짜내야 했다. 그 마지막 한 방울의 힘을 소모하고 나면 그들은 매정스런 사또의 채찍 아래 쓰려져 누운 채 조용히 숨길을 거두어가곤 했다. 자살 사건과 탈출 사고가 하루가 멀다 하고 꼬리를 물었다. 외곽선 도로의 순찰이 몇 배로 강화돼도 빈약한 나무토막 하나에 의지하여 바다를 건너가다 해협 물살에 휩쓸려가버린 사람들이 수를 셀 수 없었다. 그 숱한 인명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공사는 어김없이 진행되었다. 장흥과 완도 등지서 운반되어온 기암 괴석들이 여기저기 배치되고 공원 일대는 남국의 정취를 북돋우기 위하여 멀리 대만에서까지 남국 식물들을 주문해다 심었다. 이듬해 4월에는 어느 도회의 한복판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넓고 호사스런 공원이 그 마지막 작업을 끝내게 되었다. 주정수는 크게 만족했다. 하지만 원생들은 물론 만족할 수가 없었다. 주정수의 부임 이후로 는 거의 모든 일이 그랬듯이 이번에도 원생들은 즐거워할 줄을 몰랐다. 섬 안에 시설이 한 가지씩 늘어갈 때마다 그만큼 섬 전체가 천국에 가까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지옥으로만 변해가고 있었듯이, 이번에도 이 섬은 공원이 하나 더 늘고 그곳에 바쳐진 자신들의 노력과 희생이 크면 클수록 그 노력이나 희생의 크기만큼 섬은 점점 더 낙원과는 인연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원생들에겐 다만 새로운 원망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는 느낌 외에 보람 같은 건 눈곱만큼도 지녀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도 원생들에겐 공원을 자랑스럽게 관리하기 위하여 보다 많은 주의와 노력 봉사가 명령되었으므로 더 할 말이 없었다. 주정수는 공원 시설을 훼손할 염려가 있다 하여 원생들 마음대로 공원 지역을 출입하는 것을 금지했다. 공원을 언제나 깨끗하게 단장 시켜놓고, 섬을 찾아오는 손님만 있으면 어김없이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 이 섬에 건설한 그 자랑스런 원생들의 낙원을 증명해보였다. 도대체 모든 것이 배반의 연속이었다. 자신들의 낙원을 꾸미기 싫어 목숨을 내걸고 바다로 뛰어드는 사람들의 그것으로부터, 원생들의 휴식과 위안을 위해 만들어진 공원이 오히려 그것을 누릴 사람들에게 모셔지고 있는 데에 이르기까지 어는 한 가지도 배반 아닌 일이 없었다. 공원은 정말 원생들에게 모셔지고 있었다. 그렇게 모셔지고 있는 공원이 섬을 구경온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정수와 섬을 다녀간 엉뚱한 구경꾼들의 것이었다. 섬에 꾸며졌노라는 낙원 역시 원생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정수의 섬을 다녀간 사람들에게만 있었다. 소록도의 환자들에겐 낙원이 없었다. 환자들에게 낙원이 없는 한 소록도엔 낙원이 없었다. 그들의 이기적인 소문 속에서만 소록도의 천국은 존재하고 있었다. 명분은 믿을 것이 못 되었다. 섬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섬사람들은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상욱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명분이 아니라 그것을 갖게 되는 과정이었다. 명분이 과정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명분이 제물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천국이 무엇인가. 천국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마음으로 얻어 질 수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 구하고, 즐겁게 봉사하며, 그 천국을 위한 봉사를 후회하지 말아야 진짜 천국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원장의 계획은 어떤가. 명분만은 물론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지만 섬사람들이 진심으로 그 명분에 따를 수가 있을까. 따르려 한다 해도 손발이 성하지 않은 그들이 끝끝내 그 명분을 감당하고 견뎌낼 수가 있을까. 언젠가는 명분이 그들을 속인 결과가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가 있을까. 게다가 큰 명분의 뒤에는 알게 모르게 늘 누군가의 동상이 그림자를 드리우게 마련이었다. 원장에게 동상의 꿈이 숨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증명될 수 없는 지금 그를 온통 신용해버릴 수가 있을까. 명분만으로 그를 믿을 수가 있을까. 바다를 막는다는 일은 너무도 엄청난 계획이었다. 이날 저녁, 섬으로 돌아오는 길로 상욱은 오랜만에 황희백 노인을 찾아갔다. 이날만은 그를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원장의 생각은 이제 명명백백했다. 상욱 자신의 처지도 더할 수 없이 분명해져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배반이었다. 황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황희백 노인에겐 누구보다도 분명한 배반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이 섬 병원이 생긴 이래 최초로 일어난 살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첫번 살인이야말로 섬 병원 환자들이 스스로 그 배반의 한 부분을 담당해온 데 대한 명백한 자기 폭로극이었고, 주정수 원장에게는 그이 오랜 동상의 꿈을 실현함으로써 마지막으로 섬에 대한 그의 배반을 완성케 한 비극의 시초였다. 황희백 노인은 언제나 그 배반의 내력을 되풀이 이야기했다. 상욱은 이 섬과 자신에 견딜 수 없어질 때마다 노인에게로 가서 그 참혹스런 배반의 내력을 들었다. 노인은 상욱에게 이야기를 사양한 일이 없었다. 상욱은 노인을 알고 있었다. 왜 그가 그 배반의 이야기에 취해 일생을 살아가고 있으며 누구에게나 그 이야기를 사양치 않는지를 알고 있었다. 노인 역시 상욱을 알고 있었다. 노인은 상욱이 때로 무엇 때문에 자기를 찾아와서 그 무참한 배반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다 가는지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까지 서로를 속이고 있었다. 상욱은 노인을 모른 체하고, 노인도 상욱을 모른 체했다. 상욱은 그저 노인을 찾아가 이야기만 듣고 있었고 노인은 그저 몇 번이고 같은 이야기를 상욱에게 되풀이 들려줄 뿐이었다. 이날도 상욱은 그런 식으로 노인을 찾아갔다. 한 번 더 노인에게서 그 배반극의 내력을 들어두고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섬 병원과 원장을 견뎌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을 견뎌낼 수가 없을것 같았다. 노인은 이번에도 역시 이야기를 사양하지 않았다. “그때는 누구나 그럴 수가 있었지. 그때는 누구라도 그럴 수가 있었어.” 상욱이 그의 앞으로 자리를 잡아 앉자 황희백 노인은 눈꼬리를 가늘게 끌어모으며 손가락이 떨어져나간 손으로 마른 볼을 쓰다듬었다. 상욱의 머리 너머로 멀리 허공을 쫓고 있는 노인의 시선은 그러나 전광처럼 재빠르게 묵은 세월의 벽을 뚫고 있었다. 그때는 누구나 그럴 수가 있었지. 그때는--- 노인의 시선은 그 세월의 벽 저쪽에서 차근차근 이야기의 실마리를 더듬어나가고 있었다. “계속되는 노역과 학대 때문에 이젠 누구나 윗사람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게 되었거든. 그 평의회 사람들 말야. 일은 고되지, 먹을것은 모자라지, 게다가 병든 몸을 고칠 가망은커녕 무도한 채찍질로 상처만 날로 깊어가지.... 눈치 안 보고 배겨낼 장사 있나. 사람들이 모두 그 지경이 되어 있을 때 심판의 날이 오고 만 거야...” 다름아니라 주정수는 마침내 그의 천국 건설의 장엄한 대미를 자신의 동상으로 장식할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마지막 배반극이 감행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 우습도록 장엄한 비극의 시말은 애초부터 주정수의 천국 각본에는 예정이 없었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 마지막 배반극은 이를테면 주정수 원장과 섬사람들이 손을 맞잡고 지혜를 보태어 이룩해낸 합작품 같은 것이었다. 노인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 무렵 병사 지대에서는 보다 효과적인 노력 동원과 병원 사업에 대한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평의회 회의가 빈번히 소집되고 있었다. 평의회 회의장에는 각 마을을 대표하는 정위원 외에 간호수장 사또가 항상 감시역으로 임석하고 있었다. 위원들은 벌써부터 동환들의 처지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생지옥으로 변해버린 섬 생활에서 어떻게 하면 자기 혼자만이라도 그 혹독한 노역과 학대를 면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평의회 위원으로서의 작은 특혜나마 그것을 될수록 오래 누릴 수 있기를 염원했다. 사또나 병원 당국의 비위에 거슬릴 말은 전혀 금물이었다. 기회만 있으면 병원 당국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해보이고 싶어했다. 하루는 이순구라는 사람이 기상천외의 제안을 내놓았다. ‘노루 사냥 사건’때의 그 한국인 순시---그는 이제 누구보다도 병원의 신임이 두터운 마을 대표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주정수의 낙토 건설을 위해 가장 창의적으로 자신을 봉사시킴으로써 당국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백분 발휘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내놓은 제안이라 다른 것이 아니었다. 주정수 원장이 이 섬에 이룩한 업덕을 후세에까지 오래 기릴 수 있도록 섬 안에 그의 기념 동상을 모시자는 것이었다. 이의를 말한 사람이 없었다. 이의를 말하기는커녕 다른 대표들은 자신이 먼저 그런 생각을 해내지 못한 것이 애석하기 그지없는 듯 다투어 의견들을 보태기 시작했다. 평의회에서는 이날중으로 곧 기념 동상 건립 발기 위원회가 조직되고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대책과 방안들이 일사천리로 결의되어나갔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동상 건립 기금의 갹출이었다. 원생들에게서 헌금을 거두기로 결의했다. 고향 집에서 생활 보조금이 오는 원생들에게서는 송금액의 일정액을 공제하고, 일반 원생들에게서는 작업 임금의 3개월분을, 송금도 없고 작업 동원도 불가능한 신체 부자유 원생들에게서는 이들에게 지급될 식량과 의류의 배급량에서 상당액분을 공제하여 헌금액을 충당키로 했다. 이내 모금 사업이 시작되었다. 주정수는 말이 없었다. 동상 건립 결의가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리고 강제나 다름없는 모금 작업이 시작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는 말이 없었다. 자신의 동상 건립 계획을 사양하지도 않았고 모금 운동을 중단시키려 하지도 않았다. 아는 듯 모르는 듯 그 일에 대해서는 도대체 아랑곳을 하지 않았다. 사또가 그를 대신해서 모든 일을 추진해나갔다. 그리고 맨 처음 그 일을 제안하고 나섰던 이순구가 모금 운동에 앞장서 돌아다녔다. 모금 성적이 나쁜 부락 대표들에게는 갖가지 위협과 압력을 가했다. 마침내 4만 7천여 원(당시 일당 임금 3전)에 이르는 기금이 모아지고, 본격적인 동상 건립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주정수는 끝내 말이 없었다. 원생들은 다시 동상 건립장으로 노역을 나가야 했다. 공원 정면, 연단처럼 두드러진 구릉 위에다 동상을 세울 터를 정하고 거기에 다시 축대를 쌓아올렸다. 화강암을 18척이나 쌓아올린 그 축대의 전면에는 ‘주정수원장상’이 새겨지고, 그 후면에는 사또와 이순구를 비롯한 동상 건립 역원 명단이 새겨진 사방 3척 넓이의 커다란 동판이 부착되었다. 작업은 언제나처럼 하루도 예정에서 어긋남이 없이 정확하게 진행되어나갔다. 그해 8월 20일. 마침내 동상이 완성되어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섬에서는 다시 한번 성대한 의식이 벌어졌다. 일본 황실에서 보내온 축하 사절과 국내의 각 종교 단체 대표, 유지들이 수백 명씩 모여든 장엄한 식전이었다. 이윽고 주정수 가족 중의 어린 아이 하나가 축대 아래로 늘어뜨려진 포장의 끈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기자, 지금까지 부드럽고 흰 비단 포 속에 가려져 있던 또 하나의 주정수가 만장을 압도하듯 그 거대하고 시커먼 모습을 나타냈다. 이어 주악에 따라 이날 행사를 위해 특별히 지어진 원장의 노래가 합창되었다. 나라를 정화하기 위하여 몸을 바치신 우리들의 자부 원장 각하 은혜의 동산에 세운 동상을 축하하자 축하해 오늘은 즐거운 날..... 동상 건립에 특히 진력한 이순구에겐 원생을 대표하여 특별 공로 표창이 수여되고, 이어 섬 안에서는 오랜만에 하루 동안의 흥겨운 유흥이 벌어졌다. 하지만 주정수의 동상을 둘러싸고 일어난 그 우스운 배반극은 그것으로도 아직 끝이 나질 않았다. 동상이 세워지고 나서 원생들에게는 또 한 가지 새로운 부담이 늘어났다. 매월 20일을 새 ‘보은 감사일’로 정하고, 이날이 되면 병사지대의 모든 원생들은 공원 광장에 도열해 서서 동상 참배를 행해야하는 것이었다. 한 달에 한 번 20일만 되면 원생들은 남녀노소나 병세의 경중을 가릴 것 없이 공원 광장으로 모여와서 살아 있는 주정수와 그의 동상 앞에 경례를 바치고 훈시를 들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보은 감사일이었다. 병원이 세워진 지도 어언 25년. 아침부터 볕발이 제법 후덥지근한 열기를 뿜어대기 시작한 초여름 한낮. 마침내 이날 첫번째 살인이 저질러지고 말았다. 이날도 물론 원생들은 주정수의 동상 참배식에 나가고 병사 지대는 거의 무인지경으로 골목들이 텅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모든 원생들이 깡그리 공원 광장으로 휩쓸려나간 다음에도 아직 마을을 떠나지 않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노루 사냥 사건’때의 그 이순구였다. 그는 이날 하필 이상스럽게 몸이 불편해서 동상 참배를 슬그머니 빠지고 있었다. 주위가 온통 괴괴하게 가라앉은 다음 그는 자기 집 아랫목에 누워 편안히 몸조리를 하고 있었다. 몸이 조금 불편하다해서 누구나 동상 참배를 함부로 빠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어느 누구보다 상관단 사람들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는 사람이었다. 동상 건립시의 공로로 특별 표창까지 받고 있는 처지였다. 그만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일 수 있었다. 한데 사실은 이날의 동상 참배식을 빠지고 있었던 것은 이순구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어느 때나 되어서였을까. 아마도 그때쯤 공원 광장에선 참배식이 한창 엄숙하게 진행되고 있었을 터이었다. 그리고 그 참배식에 참가한 원생들의 목줄기에선 그때쯤 땀방울이 연상 방울방울 맺혀 흐르고 있었을 터이었다. 이순구는 가슴속까지 스며드는 여름 낮의 고요에 겨워 스르르 눈이 감겨져오고 있을 참이었다. 그때 느닷없이 이순구의 방문을 들어서는 사내 하나가 있었다. 이순구의 이웃에 살고 있는 이길용이라는 청년이었다. 이길용은 손가락이 없는 불구 환자였다. 그는 그 손가락이 없는 팔목 끝에 붕대로 비수를 친친 동여매 들고 있었다. 이순구는 이길용 청년의 갑작스런 행동을 의아해할 틈이 없었다. 반항을 해볼 여지도 없었다. 청년은 이순구가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불문곡직 팔목 끝에 감고 온 비수를 그의 가슴 깊숙이 꽂아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이 섬을 문둥이들이 살기 좋은 천국이라고들 말했지.”황희백 노인은 이제 이야기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노인은 또다시 그의 눈꼬리를 가늘게 끌어모으고 있었다. 담배가 다 타버린 그의 곰방대세선 이제 연기가 나지 않았다.“사람들이 그렇게 믿은 것도 무리는 아니야.”노인은 한두 번 그 타버린 곰방대를 헛빨고 나서 지금까지 이야기를 하나하나 매듭지어나가기 시작했다.“하지만 그 이길용이란 청년은 그렇게 믿질 않았던 모양이지. 그잔 나중에 자수를 하고 나서,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섬의 사정을 바깥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니까. 하지만 일은 물론 그가 바란 대론 될 수가 없었지. 그는 얼마 뒤에 섬 가막소에서 제풀에 목숨을 끊어버렸지만, 그걸 슬퍼해준 사람은 오직 이 섬 안에 살고 있는 더러운 문둥이들뿐이었거든. 하고 보면 이 섬을 우리 문둥이들의 천국으로 믿지 못한 것은 그 이길용 청년 한 사람만도 아니었던 모양이야. 나중엔 더욱더 고약한 일들이 생겼었지. 임자도 알겠지만 그 주정수란 사람한테 문둥이들이 저지른 행패만 보더라고 말이야. 그건 벌써 다른 문둥이들도 자기들의 천국을 참을 수가 없게 된 증거였거든...”황노인의 그 말은 이제 주정수 원장의 살해 사건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순구의 살해 사건이 일어나고 다시 일 년이 지난 이듬해 6월 20일. 그날도 마침 원생들은 주정수의 동상을 참배해야 하는 보은 감사일이었다. 원생들은 이날도 관례에 따라 아침부터 부락별로 열을 짓고 서서 이제나저제나 살아 있는 동상의 주인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나서 직원 지대로부터 승용차를 타고 내려온 주정수 원장이 수행원들과 함께 천천히 자기의 동상을 향해 대열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주정수가 막 중앙리 원생들의 대열 앞을 지나가고 있을 때 -그때 대열 가운데서 한 청년이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갑자기 주정수 원장 앞으로 튀어나왔다. 청년은 비수를 감추고 있었다. 주정수 원장은 청년의 비수에 정통으로 심장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도열해 있던 원생들이 소리를 듣고 머리를 들어 보았을 때는 주정수를 쓰러뜨리고 난 청년이 두번째 표적을 찾아 피 묻은 비수를 휘두르며, “사또, 사또 나오너라”고 미친 듯이 악을 써대고 있었다. 원장을 뒤따르던 수행원들조차 미처 손을 써볼 틈이 없었다. 섬안에선 성미 활발하고 의협심 강하기로 소문이 나 있는 성주 태생 이춘성 청년의 원한 맺힌 복수극이었다. 주정수는 어쨋든 그렇게 해서 갔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의 동상이 대개 다 그렇듯이, 그 주정수 원장이 비명에 가고 나자 드디어는 그의 동상마저 헐려지고 그 자리엔 이제 병원 설립 40주년을 기념하는 구라탑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 주정수의 비극적인 종말에 대해서는 굳이 더 설명을 보태지 않았다. 상욱 쪽에서도 이미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을 일인 데다 이날의 상욱은 그 주정수 쪽보다는 다른 데에 관심이 더 매달리고 있음을 환히 다 꿰뚫어보고 있는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 어쩔 수가 없는 배반이었지. 그땐 누구나 다 그럴 수가 있었으니까. 누구나가다...” 노인은 거기서 그만 뒷이야기를 모두 생략한 채 자기 다짐 비슷이 처음과 같은 말을 한 번 더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상욱은 입이 타고 있었다. 그는 애원하듯 노인에게 되묻고 있었다. “이순구라는 사람 말씀입니다. 어른께선 그 이순구라는 사람도 다들 그럴 수가 있었기 때문에 용설 하시고 계신단 말씀입니까.” 황노인이 그 상욱을 이상스럽게 연민이 어린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지…… 이순구라는 사람, 누구나 그런 처지에 서게 되면 그럴 수가 있을 테지. 원장이라는 사람 그 주정수도 마찬가지였을 게구...” “주정수는 그 처지 때문이 아니라 미리부터 그런 계략을 알고 있었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이순구가 동상 이야기를 꺼낸 것은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또한테서 미리 귀띔을 받고 있었을 거라는 소문 말씀입니다.” 노인이 다시 한번 상욱을 이윽이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작정이 선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들이야. 사또가 귀띔을 했거나 안 했거나 무슨 차이가 있나. 원장이 사또를 시켰다면 그렇게 해서 자기 동상을 갖고 싶어한 거나 아랫사람들이 그럴 지어 바친다고 하니까 맘이 쏠리기 시작한 거나... 어차피 그는 이 섬을 배반하지 않았나. 이순구로 보아도 그가 자의로 말을 꺼냈거나 사또의 시킴을 받아서거나 어차피 그의 배반은 더하고 덜할 수가 없는 것이지. 주정수고 이순구고 그 처지에선 그렇게 될 수밖에 도리가 없었던 게야. 우리가 굳이 그 일을 되돌아봐야 할 일이 있다면 다시는 서로 그런 처지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나 할지...” 노인은 말꼬리를 흐린 채 거기서 그만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상욱도 이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제 듣고 싶은 이야기는 모두 다 듣고 있었다. 그는 노인의 입을 통해 그로서는 너무도 아픈 배반의 내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난 셈이었다. 황노인을 너무도 간단히 이순구라는 사나이를 용서해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노인은 자신의 말처럼 그 인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았다. 노인은 이순구 한 사람의 배반을 용서한 대신 이 섬과 섬사람 모두를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순구라는 사내도 정말로 노인의 용서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욱은 그 동안 혼란스럽기만 하던 생각들이 정연하게 한 가지로 모아지고 있었다. 그 역시 이순구라는 사내에 대한 노인의 용서를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용서를 바라기는커녕 노인의 입을 통해 보다 분명한 사내의 배반을 듣고 싶었고, 그 배반에 대한 노인의 단죄와 저주를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젠 더 이상 노인의 이야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는 한동안 혼자 생각에 싸여 있다가 엉거주춤 자리를 일어서고 말았다. 노인은 상욱을 말리지 않았다. 그러나 상욱이 막 인사를 끝내고 노인의 방문을 나서려고 했을 때였다. “그런데...” 무언가 문득 생각난 일이 있는 듯 다시 상욱을 불러세웠다. “오늘 또 이런 소릴 시키러 온 걸 보니 임자 처지에 또 무슨 귀찮은 일이라도 생긴 모양 아닌가.” 엉거주춤 돌아서 있는 상욱을 보고 노인이 이날따라 전에 안 하던 소리를 물어오고 있었다. “아닙니다. 제 처지라니요…… 그저 어른을 한번 찾아뵙고 싶어 왔다가 쓸데없이 또 긴 말씀을 여쭙게 된 것뿐입니다.” 상욱은 흠짓 속을 놀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노인은 이미 그 상욱에게서 뭔가 눈치를 채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은 금세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별일이야 없겠지. 자넨 한번도 내게 자기 말을 털어놓은 일이 없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상욱을 건너다보는 눈시울에 알 듯 모를 듯 희미한 미소가 스치고 있었다. “드릴 말씀이 따로 있어야죠.” 상욱이 송구스러운 듯 변명을 보탰으나 노인은 그가 뭐라고 하든 이젠 모든 것을 다 훤히 알고 있는 사람처럼 한 번 더 같은 다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렇겠지. 나도 굳이 임자 이야길 듣고 싶은 건 아니니까. 하지만 어쨌거나 우린 서로 처지들을 아껴줘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이제 다시 이 섬에 치욕스런 배반이 일어나선 안 되니까 말이야...” “사람들은 모두가 이 섬을 문둥이들이 살기 좋은 천국이라고들 말했지.”황희백 노인은 이제 이야기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노인은 또다시 그의 눈꼬리를 가늘게 끌어모으고 있었다. 담배가 다 타버린 그의 곰방대세선 이제 연기가 나지 않았다.“사람들이 그렇게 믿은 것도 무리는 아니야.”노인은 한두 번 그 타버린 곰방대를 헛빨고 나서 지금까지 이야기를 하나하나 매듭지어나가기 시작했다.“하지만 그 이길용이란 청년은 그렇게 믿질 않았던 모양이지. 그잔 나중에 자수를 하고 나서,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섬의 사정을 바깥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니까. 하지만 일은 물론 그가 바란 대론 될 수가 없었지. 그는 얼마 뒤에 섬 가막소에서 제풀에 목숨을 끊어버렸지만, 그걸 슬퍼해준 사람은 오직 이 섬 안에 살고 있는 더러운 문둥이들뿐이었거든. 하고 보면 이 섬을 우리 문둥이들의 천국으로 믿지 못한 것은 그 이길용 청년 한 사람만도 아니었던 모양이야. 나중엔 더욱더 고약한 일들이 생겼었지. 임자도 알겠지만 그 주정수란 사람한테 문둥이들이 저지른 행패만 보더라고 말이야. 그건 벌써 다른 문둥이들도 자기들의 천국을 참을 수가 없게 된 증거였거든...”황노인의 그 말은 이제 주정수 원장의 살해 사건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순구의 살해 사건이 일어나고 다시 일 년이 지난 이듬해 6월 20일. 그날도 마침 원생들은 주정수의 동상을 참배해야 하는 보은 감사일이었다. 원생들은 이날도 관례에 따라 아침부터 부락별로 열을 짓고 서서 이제나저제나 살아 있는 동상의 주인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나서 직원 지대로부터 승용차를 타고 내려온 주정수 원장이 수행원들과 함께 천천히 자기의 동상을 향해 대열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주정수가 막 중앙리 원생들의 대열 앞을 지나가고 있을 때 -그때 대열 가운데서 한 청년이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갑자기 주정수 원장 앞으로 튀어나왔다. 청년은 비수를 감추고 있었다. 주정수 원장은 청년의 비수에 정통으로 심장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도열해 있던 원생들이 소리를 듣고 머리를 들어 보았을 때는 주정수를 쓰러뜨리고 난 청년이 두번째 표적을 찾아 피 묻은 비수를 휘두르며, “사또, 사또 나오너라”고 미친 듯이 악을 써대고 있었다. 원장을 뒤따르던 수행원들조차 미처 손을 써볼 틈이 없었다. 섬안에선 성미 활발하고 의협심 강하기로 소문이 나 있는 성주 태생 이춘성 청년의 원한 맺힌 복수극이었다. 주정수는 어쨋든 그렇게 해서 갔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의 동상이 대개 다 그렇듯이, 그 주정수 원장이 비명에 가고 나자 드디어는 그의 동상마저 헐려지고 그 자리엔 이제 병원 설립 40주년을 기념하는 구라탑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 주정수의 비극적인 종말에 대해서는 굳이 더 설명을 보태지 않았다. 상욱 쪽에서도 이미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을 일인 데다 이날의 상욱은 그 주정수 쪽보다는 다른 데에 관심이 더 매달리고 있음을 환히 다 꿰뚫어보고 있는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 어쩔 수가 없는 배반이었지. 그땐 누구나 다 그럴 수가 있었으니까. 누구나가다...” 노인은 거기서 그만 뒷이야기를 모두 생략한 채 자기 다짐 비슷이 처음과 같은 말을 한 번 더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상욱은 입이 타고 있었다. 그는 애원하듯 노인에게 되묻고 있었다. “이순구라는 사람 말씀입니다. 어른께선 그 이순구라는 사람도 다들 그럴 수가 있었기 때문에 용설 하시고 계신단 말씀입니까.” 황노인이 그 상욱을 이상스럽게 연민이 어린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지…… 이순구라는 사람, 누구나 그런 처지에 서게 되면 그럴 수가 있을 테지. 원장이라는 사람 그 주정수도 마찬가지였을 게구...” “주정수는 그 처지 때문이 아니라 미리부터 그런 계략을 알고 있었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이순구가 동상 이야기를 꺼낸 것은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또한테서 미리 귀띔을 받고 있었을 거라는 소문 말씀입니다.” 노인이 다시 한번 상욱을 이윽이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작정이 선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들이야. 사또가 귀띔을 했거나 안 했거나 무슨 차이가 있나. 원장이 사또를 시켰다면 그렇게 해서 자기 동상을 갖고 싶어한 거나 아랫사람들이 그럴 지어 바친다고 하니까 맘이 쏠리기 시작한 거나... 어차피 그는 이 섬을 배반하지 않았나. 이순구로 보아도 그가 자의로 말을 꺼냈거나 사또의 시킴을 받아서거나 어차피 그의 배반은 더하고 덜할 수가 없는 것이지. 주정수고 이순구고 그 처지에선 그렇게 될 수밖에 도리가 없었던 게야. 우리가 굳이 그 일을 되돌아봐야 할 일이 있다면 다시는 서로 그런 처지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나 할지...” 노인은 말꼬리를 흐린 채 거기서 그만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상욱도 이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제 듣고 싶은 이야기는 모두 다 듣고 있었다. 그는 노인의 입을 통해 그로서는 너무도 아픈 배반의 내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난 셈이었다. 황노인을 너무도 간단히 이순구라는 사나이를 용서해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노인은 자신의 말처럼 그 인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았다. 노인은 이순구 한 사람의 배반을 용서한 대신 이 섬과 섬사람 모두를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순구라는 사내도 정말로 노인의 용서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욱은 그 동안 혼란스럽기만 하던 생각들이 정연하게 한 가지로 모아지고 있었다. 그 역시 이순구라는 사내에 대한 노인의 용서를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용서를 바라기는커녕 노인의 입을 통해 보다 분명한 사내의 배반을 듣고 싶었고, 그 배반에 대한 노인의 단죄와 저주를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젠 더 이상 노인의 이야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는 한동안 혼자 생각에 싸여 있다가 엉거주춤 자리를 일어서고 말았다. 노인은 상욱을 말리지 않았다. 그러나 상욱이 막 인사를 끝내고 노인의 방문을 나서려고 했을 때였다. “그런데...” 무언가 문득 생각난 일이 있는 듯 다시 상욱을 불러세웠다. “오늘 또 이런 소릴 시키러 온 걸 보니 임자 처지에 또 무슨 귀찮은 일이라도 생긴 모양 아닌가.” 엉거주춤 돌아서 있는 상욱을 보고 노인이 이날따라 전에 안 하던 소리를 물어오고 있었다. “아닙니다. 제 처지라니요…… 그저 어른을 한번 찾아뵙고 싶어 왔다가 쓸데없이 또 긴 말씀을 여쭙게 된 것뿐입니다.” 상욱은 흠짓 속을 놀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노인은 이미 그 상욱에게서 뭔가 눈치를 채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은 금세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별일이야 없겠지. 자넨 한번도 내게 자기 말을 털어놓은 일이 없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상욱을 건너다보는 눈시울에 알 듯 모를 듯 희미한 미소가 스치고 있었다. “드릴 말씀이 따로 있어야죠.” 상욱이 송구스러운 듯 변명을 보탰으나 노인은 그가 뭐라고 하든 이젠 모든 것을 다 훤히 알고 있는 사람처럼 한 번 더 같은 다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렇겠지. 나도 굳이 임자 이야길 듣고 싶은 건 아니니까. 하지만 어쨌거나 우린 서로 처지들을 아껴줘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이제 다시 이 섬에 치욕스런 배반이 일어나선 안 되니까 말이야...” 출소록기 14 축구 경기를 보급시키고 시합의 승리를 맛보게 함으로써 섬사람들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한 조백헌 원장은 마침내 그의 본격적인 사업 계획을 드러내고 나섰다. 그러나 섬사람들의 반응은 아직도 그의 기대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조백헌 원장이 오랫동안 혼자 가슴속에 숨겨오면서 공을 들여오던 사업 계획을 실현해내는 데는 아직도 뛰어넘어야 할 수많은 장벽들이 가로놓여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먼저 싸워 넘어야 할 장벽은 5천여 소록도 주민 바로 그 사람들의 불신감이었다. 축구 시합 승리의 소식을 안겨다줌으로써 어느 정도 활기를 되찾은 듯싶던 섬사람들은 원장의 새 사업 계획이 드러나자 다시 또 냉랭하게 굳어져버린 것이었다.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이 섬을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을 위한 고향을 꾸미기에는 이섬은 너무도 비좁습니다...” 구름처럼 섬을 뒤덮고 있던 연분홍 꽃무리가 소리없이 자취를 감추고 난 어느 조용한 봄날 오후 조백헌 원장은 이날 각 마을 장로 일곱 명을 중앙리 공회당으로 모아놓고 모처럼 그의 사업 계획을 털어놓고 있었다. “물론 이 일은 지난날 이 섬에 있었던 어떤 다른 역사보다도 더 힘들고 긴 세월이 필요할 겁니다. 그리고 이 일은 과거의 다른 어떤 역사에서보다 그 혜택이 멀고 아득한 곳에 있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지니고 기도해온 약속이 내일 당장 우리에게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은 아마 이 일을 여러분의 손으로 이룩해내고 나서는 그 땅에서 얻은 것을 가지고 지금보다 더 배불리 먹게 될 수도 없을는지 모릅니다.” 원장은 5만분의 1 지도를 벽에 걸러놓고 그가 계획하고 있는 간척 사업의 개요를 설명한 다음 장로들을 간곡히 설득하기 시작했다. 장로들 쪽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바다를 막아야 한다는 원장의 말이 떨어지면서 차갑게 굳어지기 시작한 장로들의 얼굴 표정은 계속되는 원장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어떤 변화의 기미가 엿보이지 않고 있었다. 원장은 맥이 풀렸다. 지난 일 년 동안 그가 섬에서 이룩해놓은 것들이 일시에 다시 허사가 되어버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지난해 8월 이 섬으로 부임해왔을 때의 그 숨이 막힐 듯 깊고 거대한 침묵의 회중 앞에 땀을 뻘뻘 흘리고 서 있었던 바로 그날의 그 회중 앞에 다시 선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록 여러분은 오늘 여러분이 이룩해놓은 것의 혜택을 누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뒷날 여러분의 후손이 그것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후손의 미래를 위해서도 이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이 일에는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가까운 친구 가운데서도나는 이 일을 마음속으로 깊이 마땅찮아하고 있는 사람을 한 사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몇몇 사람의 반대 때문에 우리는 주민께서 이 섬에 내려주신 우리의 소명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나는 감히 이 일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소명이라는 말을 방금 사용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주님께서 나와 당신들에게 내려주신 모처럼 크고 값진 소명이 분명합니다.”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 원장은 함부로 그들의 주님까지 팔고 나섰다. 하지만 장로들은 역시 반응이 없었다. 원장의 말은 도대체 귓가에도 스치지 않고 있는 듯 끄덕들을 낳고 앉아 있었다. 땀을 흘리며 떠들어대고 있는 원장을 마치 무슨 진기한 구경거리나 되는 것처럼 유심히 바라보고 있을 뿐 누구 하나 잔기침 소리를 내는 사람조차 없었다. 원장은 그 장로들의 눈길에서 분명히 어떤 증오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소리없는 비웃음을 듣고 있었다. 그는 사력을 다해 말을 계속했다. “당신들은 결국 이 섬을 나가야 합니다. 당신들이 나가지 못하면 당신들의 후손이라도 언젠가는 이 섬을 나가게 되어야 합니다. 당신들은 아마 여기 서 있는 나보다도 그 점을 더욱 분명히 알고 있을 터이고 또 소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당신들을 섬에서 나가게 해줍니까. 당신들의 기돕니까, 뭍에 살고 있는 당신들의 친척입니까. 육지 사람들은 아무도 당신들이 이 섬을 다시 나오기를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점도 역시 여기 선 나보다는 당신들이 더욱더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당신들 스스로 나가야 합니다. 오늘 당장 섬을 나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당신들이 또는 당신들의 아들딸들이 이 섬을 나갈 수 있도록 당신들이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만 이것뿐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소.” 말을 끝내고 나서 원장은 한동안이나 이윽이 장로들의 표정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물을 끼얹은 듯 차가운 침묵 속에서 모두들 원장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섬 5천 원생들을 대표하여 여기 와 앉아 있소. 그리고 여러분과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중대한 결단의 순간을 함께 맞이하고 있는 게요. 여러분의 생각을 말해주시오.” 이윽고 장로 한 사람이 조용히 자리를 일어섰다. 중앙리 대표 황희백 노인이었다. 순간 원장과 다른 장로들의 시선이 일제히 노인에게로 집중되었다. 자리를 일어선 노인은 비로소 뭔가 중대한 결심이라도 말하려는 듯 원장 쪽을 향해 입술을 몇 차례 움직이고 있었다. “말씀을 하시오.” 원장이 노인을 재촉했다. 그러나 노인은 말을 하지 않았다. 말 대신 노인의 입술 가엔 이상하게 살기가 어린 비웃음기 같은 것이 번지고 있었다. 그런 눈길로 잠시 원장을 찬찬히 건너다보고 있던 노인이 이윽고 그 원장으로부터 조용히 몸을 돌이켰다. 그리고는 원장의 재촉 소리도 들은 척 만척 혼자 출입구 쪽을 향해 흐느적흐느적 발길을 옮겨버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앉아 있던 다른 장로들도 일제히 자리를 일어섰다. 자리를 일어선 다음 그들도 똑같이 그 살기가 깃들인 웃음을 띤 얼굴로 유령처럼 소리없이 노인을 뒤따랐다. “말을 해라, 말을. 왜 말을 않는 거냐!” 흥분한 원장이 어는 틈에 허리께의 권총을 뽑아들고 소리치고 있었으나 장로들은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은 채 휑하니 공회당을 나가 버렸다. 첫번째 장벽이었다. 조원장의 실망은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는 또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보건과장 이상욱의 노력의 흔적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 데 대해 섭섭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황희백 노인은 섬 안 장로들 가운데서 누구보다 신망이 두텁고 영향력이 큰 사람이라는 것을 원장으로서도 일찍부터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보건과장 이상욱이 가끔 그 황노인을 찾아가서 섬 일을 은밀히 의논하곤 한다는 것도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장은 그 황희백 노인의 언동에서 먼저 상욱의 의중을 읽고 있었다. 상욱은 노인을 설득하여 협력을 구해놓기는커녕 오히려 노인을 통해 원장을 방해하고 은근한 협박까지 해오고 있는 꼴이었다. 하지만 원장은 이제 또다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계획이 알려지고 나면 상당한 반발이 있으리라는 것도 미리부터 각오를 하고 있던 터였다. 이상욱 보건과장만 하더라도 이 일에는 그가 처음부터 섬사람들보다 앞장서 나서주기를 기대할 수 있는 위인이 아니었다. 원장이 알고 있는 내력이나 사람의 됨됨이로 보아 그는 마지막까지 일을 망설이고 있을 사람이었다. 그는 이 섬에서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선 사사건건 부정적이었다. 그가 이섬에서 겪은 일들이, 그 자신의 어두운 과거가 그를 그토록 비관적인 사고의 인물로 만들어버리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의 모든 사고의 근거는 오직 이 섬의 어두운 내력 한 가지뿐이었다. 걸핏하면 그는 이 섬의 내력을 들추어내어 그것만을 생각하고 그것 위에서 모든 일을 간단히 결론지어버렸다. 그는 자기의 어두운 경험 세계와 불행스런 섬의 역사에 짓눌려 언제나 우중충하고 무기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사람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이루려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이루어보려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섬에서 먼저 구해내야 할 사람은 상욱 바로 그 사람이었다. 하지만 원장은 아직도 그 상욱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번 공사는 상욱에게 그의 사고로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현실로서 그가 일찍이 겪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맛보게 할 수 있었다. 상욱을 구해내는 것은 이 섬의 모든 사람을 그 배반과 불신의 악몽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원장은 상욱의 그 철저한 불신과 망설임이야말로 그가 끝끝내 이 섬을 배반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증거로 여기고 있었다. 판단이나 결심은 얼마간 늦어져도 상관없었다. 그 대신 결단이 내려지고 나면 상욱은 어떤 일이 있어도 또다시 배반을 감행하고 나설 인물이 아니었다. 원장은 상욱을 포함한 섬사람들의 동의가 있건 없건 혼자서라도 우선 필요한 공사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는 며칠씩 섬을 비운 채 대규모 간척 사업이 벌이지고 있는 영암과 장흥 등지를 돌아다니며 견문도 넓히고 기술자도 불러들였다. 경험 많은 토목 기술자들로 하여금 공사 예정지에 대한 보다 세밀한 정밀 측량을 시행케 하여 한단계 한단계 공사 계획을 구체화시켜나갔다. 서울과 도를 오르내리며 공사 허가와 사업재원을 교섭하는데도 며칠씩 바쁜 시간을 잡아먹었다. 공사 계획이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들어서자 원장은 이제 마지막으로 제방이 뻗어나갈 예정 수면을 따라 백열 전구를 길게 가설했다. 고흥반도의 남단, 거기서 다시 바다로 내민 두 작은 반도가 까마득히 먼 백열 전들렬로 서로 마주 이어졌다. 풍양의 풍양 반도에서부터 오동도까지의 385미터와 오동도에서 오마도 남단 기슭까지 338미터, 그리고 그 오마도에서 도양면 봉암 반도까지 1,560미터의 해면이 수백 개의 밝은 전등렬로 경계 지어지고 그 전등렬로 이어진 경계선 안쪽으로 분매, 고발, 현도의 세 섬과 넓이 330만 평의 광활한 바다가 미래의 옥토로 구분지어졌다. 만 안에 흩어져 있는 다섯 개의 섬 가운데서 네 섬은 제방으로 연결되거나 그 안으로 사라지고 제방 예정선 바깥 해면에 위치한 만재도 한 섬은 제방 축성 작업에 필요한 바윗돌로 깎아 쓸 계획이었다. 만조시의 최고 수심이 8미터나 되는 바다였다. 그 바다 한가운데에 백열 전등렬 따윌 세워놓고 미래의 옥토를 그린다는 것은 나무 허황한 노릇인지 모르지만, 원장으로선 무엇보다도 우선 눈에 보이는 것을 한 가지라도 마련하여 섬사람들의 의욕과 용기를 유도해보자는 생각에서 그 일을 일찍 서두른 것이었다. 공사가 시작되고 나면 밤낮 가릴 것 없이 밀물 때를 따라 뱃길로 투석 작업이 행해져야 하기 때문에 전등렬은 그런 야간 작업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조원장은 거기까지 일을 끝내고 나서 다시 한번 장로들을 모이게 했다. 그 사이에도 섬사람들은 원장의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알은 체를 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원장을 따라다니면서 작업 과정을 하나하나 도와오고 있는 이상욱 보건과장마저도 앞으로의 일에 대해선 전혀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원장을 이해하려 하기는커녕 무얼 좀 궁금해해보는 일도 없었다. 조원장은 섬사람들의 그 심상찮은 무관심 속에서 혼자서 모든 일을 진행해나가고 있었다. 그는 이제 기다릴 만큼은 기다렸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장로들을 설득해볼 참이었다. 이번에는 조원장으로서도 말이 필요 없었다. 그는 배를 한 척 내게하여 장로들을 태우고 장흥으로 건너갔다. 득량만 바다를 가운데 두고 이웃해 있는 대덕면의 그 대규모 간척장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한편에선 아직도 바닷물을 밀어내는 일이 한창인데도 다른 한편에서는 이미 조수가 끊긴 갯벌을 농지로 개간해가고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넓이의 개척장이었다. 이 해부터는 바닷물을 씻어내고 모를 심기 시작한 곳도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장로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원장 혼자 사전 답사를 했을 때부터 이미 생각을 정해 두고 있던 일이었다. 원장은 두 시간 남짓 배를 몰아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로들도 말을 하지 않았다. 장로들은 묵묵히 원장을 따라 배로 올랐고 간척장에 도착하자 묵묵히 또 원장을 따라 배를 내렸다. 배를 내리고 나서도 원장과 장로들 사이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필요한 지시가 있으면 원장을 수행해온 이상욱 보건과장이 그를 대신했다. 배를 내린 원장은 따끔따끔 열기가 여물기 시작한 초여름 볕발 속으로 말없이 일행을 앞장서 나섰다. 장로들도 묵묵히 원장을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닷물을 막아 일군 새 농장은 둘레가 20리도 더 넘는 어마어마한 넓이였다. 더러는 파랗게 이른 모를 심어놓은 곳도 있었고 더러는 지금 한창 모를 심느라 사람들이 널려 있는 곳도 있었다. 원장은 점심도 굶은 채 끈질긴 침묵과 긴장 속에서 농장을 한바퀴 빙 걸어 돌았다. 그리고 해가 설핏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출발지로 되돌아온 조원장은 장로들은 다시 배에 태웠다. 허기와 피로가 극도에 달했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뱃머리를 다시 고흥 쪽으로 돌려세원다. 이번에는 공사 예정지로 장로들을 싣고 갔다. 세 시간 가까이 걸려서 원장 일행을 태운 배가 목적지 해면 근체에 이르렀을 때는 바다 위에 서서히 저녁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인부들에게 미리 일러놓은 대로 바다 위의 전등렬엔 불이 밝혀져 있었다. 어둑어둑한 바다 위를 길게 뻗어 있는 전등렬의 불빛이 뭍으로 이어지는 밝은 길목처럼 원장 일행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전등렬 안에 갇힌 바다가 이날따라 아늑한 정적을 안고 누워 있었다. 원장은 이제 거기서 더 이상 전등렬로 배를 가까이 가게 하지 않았다. 그 이상 가까이서 구경을 할 것이 없었다. 그는 바다 한가운데서 그냥 배를 머물러 서게 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꼼짝도 않고 서서 그전등렬로 경계지어진 바다 쪽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잘들 보아두시오” “지금은 저 바다 위에 한 줄 전등불밖에 늘어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가는 저 전등불에 둘에 둘러싼인 바다가 여러분이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둘 여러분의 땅으로 바꾸어질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에겐 아마 믿어지지 않은 일일는지 모릅니다. 믿고 싶지 않은 일일는지도 모르지요. 상관없는 일입니다. 난 오늘 여러분의 동의를 구걸하기 위해 하루종일 이 꼴을 하고 돌아다닌 것은 아니니까요. 여러분이 이 일을 동의하고 안 하고는 이제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처음부터 당신들의 일이며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을 여기까지 배에 태우고 와서 저 바다를 보게 한 것은 다만 한 가지 나의 약속을 말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 이 일을 동의하든 안 하든 저 바다를 막는 일에 당신들로부터는 땀 한 방울 바쳐지는 일이 없다 하더라도 저 바다는 결국 여러분 아닌 다른 사람들의 땀과 노력에 의해 기름진 옥토로 변해져서 당신들에게 바쳐질 날이 있을 것이라는 나의 약속을 말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당신들이 아니더라도 저 바다는 막아집니다. 내가 그렇게 하고 맙니다. 노임을 지불하면 일꾼은 얼마든지 사들일 수 있습니다. 이 일이 싫으시면 여러분은 그때 그냥 구경만 하고 있은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고 나면 당신들에게 바쳐진 땅에서 당신들은 씨도 뿌리지 않고 추수를 거둬들이기만 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장로들은 아직도 입을 굳게 다문 채 바위돌처럼 잠잠했다. 누구하나 원장의 말에 대꾸를 하고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한동안 말을 끊고 배 안을 둘러보고 있던 조원장이 천천히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난 여기서 한 가지만 더 말해두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당신들은 너무 지난날의 일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과거는 자랑거리가 될수 없습니다. 당신들의 과거가 무엇입니까. 치욕과 절망과 배반의 기억뿐입니다. 그 어두운 과거의 망령을 벗어나지 못하는한 당신들의 과거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또 앞으로도 끝끝내 문둥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를 버리지 않으려 함은 당신들 스스로가 문둥이로 자처하고 가련한 문둥이기를 고집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들 뿐만 아니라. 병이라고 앓아본 일이 없는 당신들의 아들딸까지도 그 추악스런 문둥이의 후손으로 영원히 이 섬을 떠나지 못하게 될 거란 말입니다. 당신들은 이미 병이 나았으니까 문둥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하겠지요. 당신들의 자식들도 물론 문둥이라는 소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들입니다. 자랑거리가 될수 없는 지난날의 악몽을 씻고 이젠 내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섬을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등은 이섬을 나가기 위해, 당신등의 후손들을 또다시 문둥이로 만들지 않기 위해 무슨일을 했습니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나는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러분의 기도를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주님이 단 한 번만 하늘에서 인간의 기도를 받아들여주시게 된다면 나는 아마 그것이 틀림없이 당신들의 기도여야 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나 역시 당신들의 처지가 위로를 받아야 할 것인 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주님의 위로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위로를 받는 것이 당신들의 권리일 수는 없습니다. 위로만 받으려고 하지 마시오. 당신들 스스로 자기의 처지를 이겨 넘어서려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언제까지나 당신들을 위로만 해 주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고 하신 말씀이야말로 당신들에겐 보다 큰 위로가 되리라는 점을 깨닫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말을 끝내고 난 원장은 이제 장로들의 반응 같은 것 기다려볼 생각도 없다는 듯 검은 하늘로 시선을 흘리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비로소 자신이 할 일을 다한 사람처럼 조용히 뱃머리를 섬 쪽으로 돌려 세웠다. 15 장로회 사람들의 반응이 나타난 것은 그런 일이 있고 난 바로 다음날 아침이었다. 이날 아침 조백헌 원장은 전날의 피로도 아직 채 덜 가신 채 습관대로 서둘러 잠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해가 높아지기 전에 공사장으로 건너가서 외지 인부들을 지휘하기 위해서였다. 잠자리를 빠져나온 원장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보니 마루 끝기둥 곁에 무슨 편지 봉투 같은 것이 하나 하얗게 놓여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일부러 작은 돌멩이를 눌러놓은 진짜 편지 봉투였다. 원장은 금방 어떤 직감이 작용했다. 병사 지대에서 누군가가 간밤에 관사를 다녀간 게 분명했다. 누군가가 원장에게 은밀한 전갈을 가지고 왔다가 건강 지대를 몰래 넘어온 허물 때문에 편지만 놓아두고 돌아간 게 틀림없었다. 원장은 무슨 소중한 물건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봉투를 집어 올려 사연을 꺼내 일기 시작했다. 짐작대로 그것은 병사 지대의 황희백 노인으로부터 원장 앞으로 보내진 것이었다. 원장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소. 노인의 사연은 서두로부터 가파른 핀잔조로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일 년 동안 원장을 보아왔소. 마찬가지로 그 일년 동안 원장도 우리를 보아왔소. 원장은 이제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 있소.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자손들을 문둥이로 만들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고 우리를 저주한 것은 원장이 아마 말을 잘못한 것일 게요.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문둥이가 아닌 사람으로 이 섬을 나가기 위해 갖은 시련을 겪어왔소.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속아왔소. 이것은 윈장도 모르고 있을 리가 없는 일이오. 섬을 나가고자 했던 우리의 소망과 노력 뒤에는 언제나 배반밖에 남는 것이 없었소. 위정자가 우리를 속였고 원장들이 속였고 병원 직원들이 우리를 속였소. 거짓 얼굴을 한 자선가들이 우리를 속였고 육지의 약장수들이 우리를 속였고 심지어는 고향의 육친들과 교회의 형제들마저도 우리를 속이거나 버리고 돌아서기 일쑤였소. 그리고 마지막에 문둥이 자신들이 자신을 속이고 자신을 배반했소. 우리는 그러나 이제 그 모든 일을 원망만 하고 있는 것 아니오. 우리의 지난날을 무슨 권리나되는 것처럼 들처 내세우고 싶어하지도 않고 있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가기 위한 값진 시련이었던 것이오. 그리고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그 시련의ㅣ 세월 끝에 끝내는 우리를 구해주셨소. 우리는 주님의 인자하신 위로 속에 있소. 주님의 그 크신 위로 속에서 우리는 주님만을 믿으며 아직도 이 섬에 살고 있소. 이제 우리에겐 시련이 끝난 것이오. 우리를 속이지 않은 것은 오직 주님뿐이오.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속이지 않을 것이오. 이 모든 일도 원장은 우리들 자신보다 더욱더 잘 알고 있을 터이오. 그런데 원장이 오늘 또 왜 이러는지 모르겠소. 황장로는 원장을 혹독하게 추궁하고 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소록도 반세기의 오욕의 역사를 낱낱이 지켜본 증인으로서의 황장로의 마자막 다짐이었는지도 모른다. 충혈된 눈빛으로 사연을 읽어 내려가던 조원장의 얼굴이 이윽고 환하게 밝아져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우리들의 시련이 아직 부족했나보오. 노인의 어조가 거기서부터 갑자기 급전하고 있었다. 주님께선 우리의 시련을 끝내시기 위해 다시 또 우리에게 원장을 보내셨는가보오.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 때문에 원장을 너무 상심시켜서 미안하오.하지만 이젠 우리가 원장을 믿기를 원하듯이 원장도 우리를 믿어주기 바라오. 원장이 하겠다면 우리도 하겠소. 우리가 정말로 새 땅을 얻어 섬을 나가게 될 일이라면 우리가 원장을 앞장서 나서야 한다는 것은 우리도 알고 있소. 더구나 그것은 우리들의 무고한 후손의 장래가 걸린 일일진대 그 후손의 장래를 원장에게만 맡겨둘 수가 없는일 아니겠소. 다만 하나 두려운 것은 주님의 참뜻이오. 이것이 정말로 인자하신 주님의 뜻이라면 당신께선 우리에게 이 일을 감당할 용기도 함께 주실 것이오. 이제 원장께 부탁하겠소. 원장은 어제 우리 이름을 빌어 당신으 뜻을 우리에게 전했소. 그리고 우리들의 후손의 이름을 빌어 우리를 책망하였소. 원장은 우리가 저 바닷속에서 우리의 땅을 거져내어 섬을 나가게 한다는 약속을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서약해주시오. 이 일이 만약 또 한번의 고난스런 시련으로 끝나고 말 때, 원장은 우리 주님과 후손의 이름을 가장 욕되게 팔고 있는 인간이 될 것이오. 이 일을 잊지 말아주시오. 주님은 진실로 우리를 속이시는 일이 없습니다. 하회를 기다리겠소......사연을 다 읽고 난 원장은 비로소 후 하고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이젠 아무것도 거리낄 일이 없었다. 서약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원장은 이날로 당장 공개 선서식을 행하기로 작정하고 황자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병원을 나가는 기로 곧 이사욱 보건과장을 불러 선서신을 행할 방법과 절차를 의논했다. 선서식 시간으로 미리 통보해둔 12시가 가까워오자 원장은 병원 직원들을 전원 인솔하고 그 자신의 선서식이 행해질 중앙리 공회당으로 내려갔다. 공회당에는 이미 장로회의 노인들 외에 병사 지대를 이끌어가는 각급 유지 대표들과 학교 관계자들이 2백여 명이나 모여와서 원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당 정면에는 간략한 식단이 마련되어 있고 그의 선서식을 주재할 신부님도 한 사람 미리 와서 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장 일행이 도착하자 선서식은 곧 시작되었다. ”이제 시작합니다.“ 원장이 스스로 말하고는 뚜벅뚜벅 신단 앞으로 걸어나가 신부에게로 다가섰다. 신부가 그의 앞에 성서를 내밀었다. 원장은 신분님이 시키는 대로 그 성서 위에 오른손을 얹고 기다렸다. ”이제 원장께서 서약하시겠습니다.“ 신부님이 주위를 한번 일깨우고 나서 원장에게 묻기 시작했다.”당신은 앞으로 이 섬과 섬사람들을 위해 당신이ㅣ 시작하고자 하는 일에 일신을 위해서는 물 한 모금 사사로이 취하지 않을 것임을 자비하신 주님과 여기 모인 증인들 앞에서 서약하시겠습니까?“ ”서약합니다.“ ”당신은 이 일을 하는 동안 당신 일신을 위해서는 어떠한 공훈이나 명예도 좇지 않을 것이며, 보답을 바라지 않고 우상도 만들지 않을 것임을 모인 증인들 앞에 주님의 이름으로 서약하시겠습니까?“ ”서약합니다.“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서약을묻고 있는 신부님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원장의 나지막하면서도 힘있는 대답 소리가 장내를 한층 더 숙연하게 만들고 있었다. ”원장님께선 서약을 하셨습니다.“ 신부님이 침묵에 싸인 증인군을 향해 말하고 나서 이제 그걸로 서약을 만족할 수 있느냐는 듯이 물었다. ” 원장께 또 다른 서약을 원하는 분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증인으 무리 중에 대답을 하고 일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황장로였다. 장래는 다시 한번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지금 원장께서 하신 서약을 우리 문둥이들의 가엾은 후손의 이름으로 한 번 더 행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그 서약대로 일이 이루어 지지 않을 때, 원장의 목숨을 이 섬 5천 문둥이를 대신해 여기 모인 주님의 증인들에게 맡길 수 있는가를 물어주십시오.“ ”알았습니다.“ 황장로가 말을 끝내고 자리로 주저앉자 신부님이 다시 원장을 향해 묻기 시작했다. ”원장께선 여기 모인 증인들의 뜻에 따라 다시 한번 서약을 하시겠습니까?“”서약하겠습니다.“ 원장은 아까번보다도 한층 더 힘주어 대답했다. ”당신은 지금 자비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서약하신 일들을 여기 모인 증인들과 그들의 후손의 이름으로 서약을 하겠습니까?“ ”서약합니다. 그리고......“원장은 대답하고 나서 이번에는 신부님이 묻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다음 순서를 대신해버리고 있었다. 원장은 공사석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그랬듯이 이날도 물론 육군 대령 계급장이 달린 푸른 군복 차림을 하고 있었고, 오른쪽 허리께에는 이제 그의 모의 일부분처럼 섬사람들의 눈에 익어진 가죽 권총집이 매달려 있었다. 원장은 느닷없이 그 권총집에서 진짜 금속물을 꺼내서 식단 위로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오른손은 성서 위에, 왼손은 그 권총 위에 올려놓고 신부님을 앞질러 스스로 서약을 계속해나갔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나는 지금 나 자신을 보다 분명하게 지켜줄 이 권총으로 나의 서약을 거듭해드리겠습니다. 나에게서 만약 배반이 행해질 때 나의 서약을 거듭해드리겠습니다. 나에게서 만약 배반이 행해질 때 나의 목숨은 물론 당신들의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이 권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주님 앞에서 행한 나의 서약을 지켜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주님이나 여러분에 앞서 이 권총이 나의 배반을 단죄할 것입니다.“ 조용하던 장내가 원장의 뜻하지 않은 행동으로 별안간 술렁대기 시작했다. 부러지도록 분명한 원장의 태도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도 있었고, 원장의 그 당돌스런 결의 앞에 오히려 겁을 집어먹고 놀라는 사람도 있었다. 원장은 그 사이에 서약을 끝내고 단을 내려왔고 신부님은 이제 마지막 축도라도 내릴 기색으로 잠시 소란이 멎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장로가 그때 또 자리를 일어섰다. ”배반은 원장님께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보다 더 추악하고 무서운 것은 그 배반이 바로 우리들 자신에게서 일어났을 때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소. 원장님께서 서약을 하셨으니 이제 우리가 서약을 해야 할 차례요. 우리도 망땅히 서약을 해야 하오.“ 황장로는 원자의 서약을 재촉하고 있을 때보다도 더욱더 무거운 얼굴로 말하고 나서는 그 자신 식단 앞으로 이끌어나갔다. 술렁대던 주위가 전기에 맞은 듯 일시에 다시 잠잠해져버렸다. 그 무거운 정적을 뚫고 조용히 식단 앞까지 걸어나간 황장로는 방금 원장이 손을 얹고 서약을 했던 성서 위에 이번에는 그 자신의 손을 얹어놓고 스스로 서약하기 시작했다. “자비하신 주님. 오늘 이처럼 저희가 살 땅을 마련하도록 의로운 사람을 보내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주님께선 저희에게 이처럼 의로운 사람을 보내주심과 같이 저희에게도 이 일을 감당하여 이 섬 5천 형제들이 다 함께 시련을 견뎌 이길 용기와 지혜를 허락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뜻이라면 이것이 저희들의 마지막 시련이되게 하여주시옵고, 이 섬 안에 한 사람도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게 하여, 저 의로운 사람과 주님의 불쌍한 종들이 다 함께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여주시옵소서. 저희 육신은 저희 것이 아니옵고 주님의 것이옵니다. 저희 마음도 저희 것이 아니옵고 주님의 뜻이옵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저희 육신을 요긴히 부려주시옵소서. 주님의 뜻에 따라 어리석은 저희로 하여금 가장 작은 배반이라도 저지르지 않게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저희보다 먼저 주님 곁으로 간 수많은 형제들의 넋과 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저희 불쌍한 후손의 이름으로 주님께 이 서약을 바치옵니다... 16 선서식이 있고 난 다음부터는 당분간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작업 개시 일자를 7월 10일로 정해놓고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기공 준비를 서둘렀다. 서울과 도를 오르내리며 미리부터 약속을 받아놓은 공사 허가를 맡아내고 근로 구호 양곡도 얻어왔다. 장로회 사람들과는 틈틈이 자리를 같이하여 작업 진행 방법과 공사가 완료될 때 까지의 생계 대책들을 의논했다. 설계대로 공사가 끝나고 나면 바다에서 건져낼 땅은 소록도 넓이의 두 배가 더 넘는 330만 평, 원장의 계산으로는 그 땅에 음성 환자 1천 세대 2500여 명과 일반 영세 농가 1천 세대 5천 명을 이주시켜 1인당 경지 면적 3백 평, 5인 가족 1세대에 1천 5백 평 정도의 농토가 분배될 수 있는 가경 면적이 나왔다. 신체 조건에 따라 원생 이주자들에게는 논농사보다 채소나 맥곡류의 밭농사를 권장하고 물을 필요로 하는 논농사는 일반 이주자들에게 맡길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채소나 잡곡류를 제외한 주곡 생산만 하더라도 연간 수확 벼 3만석에 보리 2만 석의 소출을 내다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사가 끝나고 난 다음에야 생각할 일이었다. 일을 하자면 그 동안에 우선 먹고 살아야 할 생계 대책부터 마련되어 있어야 했다. 작업 개시 후 공사 진행도 70퍼센트를 목표로 한 제1차년도의 예산 규모는 총 5천만 원에 달하고 있었다.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병원에서는 원생 1인당 쌀 두 홉 보리 두 홉 외에 사업장 출역 원생들에 대하여는 작업 종류에 따라 일당 노임 30원에서 35원까지를 별도 지급하기로 했다. 이외에도 원장은 사업을 이끌어갈 중요 재원으로 근로 구호 양곡을 따로 확보해놓고 있었다. 공사 진행 방법은 공사장 출역이 가능한 음성 환자 2천 명으로 2개 작업대를 편성하여 1천 명 1개 작업대씩 한 달 간격으로 일을 교대해나가기로 했다. 섬 주민 5천여 명 중 음성 병력자는 그 65퍼센트에 달하는 3,300명이나 되었고, 그 가운데서 공사장의 출역이 가능한 가동 인원만도 2,500명이나 되었으므로 작업대의 편성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2개 작업대와 일반 작업반을 총괄하는 기관으로는 ‘오마도 개척단’을 설치하여 조백헌 원장이 그 단장이 되고 황희백 장로가 섬 안의 모든 환자들을 대표하여 부단장 일을 맡기로 했다. 원장은 장로회와 병사 지대 유지들로 하여금 자체 작업대를 조직하고 그 선발대를 공사 현장으로 파견하는 한편, 그 자신은 장흥과 영암 등지의 간척장을 돌아다니며 공사 기술자들을 교섭하고 필요한 작업 공구들을 구해들였다. 조직이 끝난 자체 작업대에는 송목을 구해들여다 수십 척의 채석 운반선을 짓게 했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날들이 흘러갔다. 이윽고 예정한 작업 개시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을 때는 기공에 필요한 준비도 거의 다 끝나 있었다. 작업 공구도 어느 정도 확보되고 섬 밖에선 줄을 이어 인부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원장은 마지막으로 공사 현장에 작업 지휘 본부를 설치했다. 예정된 제방의 중간쯤 위치하고 있는 오마도 67고지 위에 지휘 본부 막사를 짓고, 손가락이 잘려나간 모양의 그 소록도 축구팀의 표지를 오마도 개척단의 깃발로 만들어 막사 앞에 높이 세웠다. 바닷바람에 힘차게 펄럭이는 그 오마기 아래에는 자신의 운명을 넘어선 한 불굴의 시인의 피맺힌 절규와 손가락이 없는 그의 검은 장압이 힘차게 내리찍힌 시판이 세워졌다. 문둥이가, 땅에서 못 살고 쫓겨난 한은, 땅에서 살아보려는 원은, 땅에서 살아보지 못한, 땅을 만들어... 살아서 마지막으로, 학대된 이름을 씻어... (주. 한하운의 시 「오마도」 중의 일절) 마침내 7월 10일. 시판에 쓰인 그 오랜 세월의 한과 원을 풀러 나설 기공식 날이 찾아왔다. 장관과 도지사까지 참석한 기공식 잔치로 하여 섬 안은 어느 때보다 들뜬 축제의 기분에 휩싸였다. 교회들은 종을 울려 공사의 성공을 기원했고, 중앙리 운동장에서는 섬을 온통 두 조각으로 갈라놓은 듯한 열띤 축구 경기가 벌어졌다. 국민학교에서는 어린이들의 노래와 춤 잔치가 벌어졌다. 기공식 현장에서는 공사장 인부들의 충고에 따라 돼지머리 고사를 지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돼지 세 마리를 세 방조제의 둑머리 마다 차려놓고 지신과 해신을 달랬다. 밤이 되자 바다 위에 가설된 전등렬이 일제히 불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작업 지휘 본부가 있는 오마도 일대는 대낮처럼 휘황하게 횃불이 밝혀졌다. 조원장은 그 오마고지 둔덕의 횃불 아래 작업대 원생들과 한데 얼려 휘황한 전등렬의 불빛 속에 떠오른 내일의 옥토를 눈 아래로 내려다보며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하지만 원장에겐 바로 그 기공식 날을 고비로 하여 또 하나의 크나큰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장은 미리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섬사람들을 설득해내는 것이 안으로부터의 첫번째 시련이라 한다면, 언젠가는 또 한차례 섬 밖으로부터 어려운 시련의 고비가 닥쳐오고 말리라는 것을 늘 혼자서 근심해오던 원장이었다. 하지만 원장으로서도 그 밖으로의 시련이 그토록 일찍 닥쳐오리라고는 짐작을 못 해온 형편이었다. 술에 취한 관사로 돌아온 조원장이 이튿날 아침 피곤한 잠에서 깨어나 지금 막 첫 기동을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공사장에서 밤을 새운 작업대원 하나가 느닷없이 숨을 헐떡거리며 관사문을 뛰어 들어왔다. 오마도 대안 일대의 마을 사람들이 수백 명씩 작당을 해서 성난 파도처럼 공사장을 습격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조원장은 그 길로 배를 내어 공사장으로 달려갔다. 원장 일행이 작업 지휘 본부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소동이 한바탕 섬을 휩쓸고 간 다음이었다. 배를 내려보니 측량 기사 두 사람이 뻘 투성이가 된 채 정신을 잃고 물가에 쓰러져 있었다. 측량 기구와 작업 도구들은 산산조각 박살나고 작업 지휘소 막사 앞에 세워둔 ‘오마기’도 갈가리 찢겨 땅바닥에 팽개쳐져 있었다. 문둥이가 땅에서 못 살고 쫓겨난 한은, 땅에서 살아보려는 원은... 오마기 깃발 아래 마련되었던 시판의 절규는, 일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 시판이 부서져나가듯 무참히 짓밟혀버리고 있었다. 막사 안의 정경은 말할 것도 없었다. 부서진 책상과 사무 집기들이 온통 목불인견의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창문 하나 성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막사를 지키고 있던 선발대원 한 사람이 뒤집힌 책상 밑에 깔린 채 아직도 이마에서 피를 쏟으며 끙끙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원장은 배를 내려 막사까지 올라오는 동안 분노 때문에 몸이 온통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한바탕 소동을 피우고 난 침입자들은 원장 일행이 현장에 닿기 직전에 벌써 섬을 빠져나가고 없었다. 몇십 척이나 되는지 알 수 없는 마을 사람들의 배들이 아직도 해변 쪽에 떼를 지어 몰려 있었다. 오마도까지 건너와서 작업 지휘소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갔다면 제방머리 쪽 사정은 더 알아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원장은 침입자들의 배가 몰려 떠 있는 바다를 멀리 노려보며 몇번이나 허리께의 권총집으로 손이 내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원장은 행동이 침착했다. 이럴 때일수록 행동이 침착해야 한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그는 우선 다친 사람들의 상처부터 살펴보고 동행해온 작업대 간부들에게 사고의 수습 방안을 지시했다. “다친 사람들은 지금 곧 병원으로 실어가시오. 그리고 여기 지금 파손을 입은 물건들은 무슨 수를 쓰든지 오늘 안으로 완전히 원상 복구를 해놓아야 하오. 저자들에겐 우리가 실망하거나 겁을 먹는 기색을 보이면 안 되니까... 작자들이 어떻게 나오든지 우리는 기어코 우리의 일을 하고 만다는 결의를 보여줘야 한단 말이외다. 이 점 잘 명심해서 오늘중에 깨끗이 원상 회복을 해놓도록...” 지시를 내리고 나서 그는 다른 배를 한 척 내어 그 혼자서 난동의 무리를 쫓아나섰다. 어차피 한번은 겪어내야 할 일이었다. 조원장은 인근 마을 사람들의 입장을 알고 있었다. 나환자 섬을 곁에 두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느 곳보다도 병에 대한 경계가 심한 사람들이다. 병에 대한 이해는 이제 어느 정도 깊어졌다 해도 그들의 섬 때문에 인근 해역에서 건져낸 해산물의 거래에서마저 항상 손해를 보아온 사람들이었다. 이제 공사로 인해 바다까지 막히고 보면 그나마 생업을 이어오던 조개류나 해태류의 어장이 몽땅 사라지고 만다. 농장을 이루어 육지로 상륙한 병력자들과는 마을을 이웃하여 거래를 트고 살아야 한다. 생업에 대한 위협과 나병에 대한 원시적인 공포감이 인근 주민들의 처지를 그토록 절박하게 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일이 터진 김에 원장은 이쪽 결의도 분명히 다짐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선 위험하지 않겠느냐는 주위의 걱정을 물리치고 그는 기관사 한 사람만을 태우고 마을 사람들 쪽으로 배를 몰게 했다. 습격자들의 배는 풍남 반도 쪽 제1호 방조제 둑머리 근처에서 바글바글 소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일부는 배를 내려 작업 공구창을 짓부숴대고 있었고 다른 일부는 아직도 배 위에서 제방 예정선을 따라 가설된 백열 전등렬을 바다로 마구 거둬 던지고 있었다. 원장의 배가 난동 현장으로 쏜살같이 달려들자 마을 사람들은 비로소 소란을 멈추고 말없이 그 원장의 거동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훤칠한 키에 아무렇게나 제복을 꿰어 걸친 조원장의 허리께에는 이날따라 무심스러워 보이지만은 않는 그의 권총집이 치렁치렁 길게 매달려 있었다. 달려드는 뱃머리에 우뚝 버티고 서서 그 권총집 근처의 허리께에 한 손을 짚어 얹고 있는 원장의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어딘지 문득 기가 질리는 표정들이었다. 원장은 배가 물 끝에 닿자마자 훌쩍 몸을 날려 사람들 사이로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은 그 원장을 비켜서지도 않았고 일부러 그의 주위로 몰려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냥 자기들이 서 있는 곳에서 위태위태한 침묵으로 원장을 계속 경계하고 있었다. 원장은 저절로 그 침묵의 한가운데로 갇혀들었다. “누구요? 누가 당신들을 이곳으로 선동해왔소?” 원장이 마침내 주위를 한바퀴 휘둘러보며 소리쳤다. 아무도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건 폭동이오!” 한동안 반응을 기다리고 있던 원장이 다시 한번 위협어린 목소리로 선언했다. 원장을 둘러선 무리의 입에서는 역시 아무 대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멀긋멀긋 원장을 지켜보고 서서 신중하게 그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들은 지금이 혁명 정부의 군정 치하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게요. 나는 소록도 병원 5천 원생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섬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할 현역 군인 원장으로서 마땅히 이 폭동 사태를 진압할 권리와 의무가 있는 사람이오.” 원장 혼자서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우선 침입자들을 적당히 협박해놓은 다음 서슬을 다소 누그러뜨리며 차근차근 설득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지금 이 폭동 사태를 나의 권리로만 다스리려 하지는 않겠소. 난 여러분의 입장을 알고 있소. 이 일로 해서 여러분의 바다가 막히고 나면 직접 간접으로 여러분이 입게 될 피해에 대해서 이 사람도 깊이 생각한 바가 있다는 말이외다.” 원장이 말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지금까지 그의 거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그의 주위를 두껍게 둘러싸오기 시작했다. 원장의 목소리에는 점점 더 자신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러니 자, 나하고 예기를 해봅시다. 이 일은 때려부수고 짓밟아 대는 것만으로는 절대 해결이 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짓밟고 때려부숴도 이 일은 몇 번이고 다시 시작됩니다. 그리고 끝내는 일을 이루어내고 맙니다. 왜냐하면 저 섬 5천 원생들은 여러분보다 더 지독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 모진 생명을 지탱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들은 이 일을 하나님의 지상 명령으로 알고 있고 저들의 하나님과 굳은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당신들 때문에 이 일을 단념할 수는 없게 되어 있습니다. 무모한 폭력으로는 해결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 나하고 이야기를 합시다. 이야기를 해서 쌍방의 이해를 조절할 수 있는 길을 찾아봅시다. 누굽니까. 어느 분이 여러분의 입장을 대표해서 나와 이야기를 해주겠소? 대표가 나와주시오.” “대표는 없소. 우리 모두가 대표요!” 무리 가운데서 누군가가 비꼬듯 한마디 대꾸해왔다. 원장의 기세가 예상보다 덜한 것을 작자들은 오히려 그를 만만하게 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 한마디가 계기가 되어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는 중구 난방으로 사방에서 원장을 공박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렇소. 대표는 따로 없소. 이야기를 하려면 숨어서 쑥덕거릴 생각 말고 여기서 우리 모두랑 함께합시다.” “이야긴 도대체 무슨 이야길 하자는 거요? 우리가 할 말은 이 일을 그만두라는 것 한 가지뿐이오. 그걸 설득할 생각이면 차라리 그 권총으로 우릴 쏘아 죽이든지 때려죽이든지 하는 편이 쉬울 거요. 그보다도 원장 당신이 먼저 말을 해보시오. 당신이 우리들 입장을 알고 있다니 도대체 뭘 어떻게 알고 있다는 건지 그것부터 좀 들어봅시다.” 어차피 대표는 나오기가 힘들게 되어 있었다. 대표를 정할 수 없는 대신 집단 담판에 응할 뜻은 분명했다. “좋소. 어차피 나도 이 일을 쑥덕공론으로 해결할 생각은 아니었소. 지금 여기서 함께 이야길 합시다. 내가 먼저 이야기하겠소. 그대신 당신들 편에서 내게 묻고 싶거나 요구할 말이 있으면 한사람 한사람씩 질서 있게 해주시오.” 원장이 주위를 가라앉히고 나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 물이 차오른 바닷가 자갈밭 위에서 마침내 기이한 노천 토론회가 벌어진 것이다. 원장은 먼저 이 공사로 인해 인근 마을들이 입게 될 피해에 대한 자기의 이해를 표현했다. 그리고 그런 이해 위에서 그가 어떻게 그 사람들의 피해를 조절하고 보상할 각오인가를 설명했다. 원장은 지금까지 소록도라는 나환자들의 섬으로 하여 인근 주민들이 겪어온 직접 간접의 피해뿐만 아니라, 앞으로 바다가 막힘으로써 해산물 채취장과 해태 양식장을 잃게 될 생업상의 위협을 솔직히 인정했다. 그리고 원생들의 작업장 상륙과 정착으로 하여 그들이 감당해내야 할 심리적 불안과 혐오감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표해보였다. 그러나 원장은 이곳으로 올 원생들이란 예전에 병을 앓았거나, 병을 앓은 적이 있는 사람들은 부모로 해서 태어났다는 허물 아닌 허물을 지닌 사람들일 뿐 지금은 일반 건강인과 아무것도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힘주어 설명했다. 그리고 이곳이 아니면 다른 어디로 가서라도 그들은 결국 자기들이 살아갈 땅을 새로 마련해야 할 처지에 있으며 이곳 아닌 다른 어느 곳에서도 똑같은 반발과 학대가 뒤따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그들은 이미 뜻이 덩해진 곳에서 그 싸움을 끝끝내 감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이웃 주민으로서의 간곡한 이해를 촉구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저들의 가까이에 있었으니까 누구보다도 저들의 처지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저들을 심판할 수 없습니다. 저들은 죄가 없소. 저들의 병력이 저들의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일이오. 설사 그들의 병이 저들의 죄의 증거라고 하더라도 그 죄를 심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우리들은 누구도 저들을 심판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그 처지를 누구보다도 깊이 알고 있는 여러분이 저들을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이곳에서 저들을 내쫓으려 하지 마십시오.” 원생들의 정착을 양해해주기만 한다면 잃어버린 바다 대신 농사를 지을 땅을 분배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무래도 원생들을 이웃해 살기가 싫어 이곳을 떠나겠다는 사람에겐 상당한 피해 보상을 감수할 각오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그 모든 원장의 약속이나 설득에도 불구하고 담판의 상대쪽은 좀처럼 그의 뜻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건 숫제 우리더러 여길 떠나라는 협박 공갈이구만 그래.” “문둥인 들여오구 우리더런 외려 여길 나가라구?” “말마라. 권총 찼으니까 하나님 아닌가베. 글쎄 우리더러 심판을 하지 말라면서 자기 혼자 들이고 쫓고 야단하는 걸 보면 자기가 바로 하나님 아닌가 말여.” 말을 하는 동안 여기저기서 계속 그런 투의 비아냥거림이 튀어나오고 있으려니 넘어갈 수도 있었다. 원장의 설득이 처음부터 온통 헛수고가 되고 만 것을 깨달은 것은 그보다도 그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났을 때였다. 원장이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 이제 당신들 쪽에서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그럼 이젠 우리가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회중 가운데서 한 사내가 느릿느릿 원장 쪽을 손짓하고 있었다. 40세가 좀 넘었을까 말까 한 나이에 얼굴 표정이 제법은 여유가 있어 보이는 친구였다. “좋습니다. 말하시오.” 원장은 다시 한번 자신을 도사리며 사내 쪽을 똑바로 건너다보았다. 하지만 사내는 원장의 예상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원장님은 도대체 의삽니까, 사회 사업갑니까?” 사내는 그 얼굴 표정만큼이나 여유가 있는 목소리로 느릿느릿 물어왔다. 말을 꺼내는 품으로 보아 입심이나 세상 물정이 어지간한 친구 같았다. 주민들을 뒤에서 지휘해온 인물 중의 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당돌스런 질문이었다. 원장은 물론 사내의 말뜻을 알아듣고 있었다. 원장 자신이 오랫동안 그와 같은 의문 속에서 갈등을 계속해오던 물음이었다. 아무리 해답을 구해보려 해도 마땅한 해답이 구해지지 않고 있던 물음이었다. 그는 유독 이 병의 병원체, 발병, 전염, 치료 등에 대해 의사로서 엄격히 의학적인 입장만을 고수하려 했을 때와, 이 병에 대해 지나치게 부당한 일반의 통념과 관련하여 벼원원장으로서보다 인간적인 환자관리자의 입자에 서려 했을 때와는 차이지는 일이 여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조원장이라는 인물은 원래가 그런 자자분한 데보다는 결단과 행동이 늘 앞서버리곤 하는 위인이었다. 그리고 그런 결단과 행동 속에서 그는 뒤늦게 그 어려운 질문들의 해답을 어렴풋이 조금 느껴보거나 말거나 하는 그런 위인이었다. 원장은 사내의 갑작스런 질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사내가 그 원장을 더욱더 난처하게 추궁해 들어왔다. “우리는 도대체 원장님이 문둥병을 고치고 그 병을 더 번지지 못하게 하는 의사님인지, 아니면 그저 불쌍해서 이런저런 그 사람들의 사정을 이해시키러 나온 지극히 인도적인 사회 사업간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단 말입니다.” “폭동을 진압하러 다니는 군인이라지 않아.” 누군가가 또 사내를 부추기고 나섰다. 하지만 사내의 추궁에는 그 의도가 좀더 깊은 곳에 감춰져 있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대답을 하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상관없는 일입니다. 우리 역시도 원장님께 굳이 그것을 알고 싶은 건 아니니까요. 원장님께선 의사이건 사회 사업가이건 또는 폭동을 진압하러 다니는 군인이건, 적어도 한 가지만은 확실할 겝니다. 원장님도 물론 우리들처럼 그 병을 앓으신 적이 없으실 테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 못지않게 그 병을 두려워하고 계실 것만은 틀림이 없을 테니까요. 우리는 원장님께 대해 그 점을 믿고 있으며 그 원장님께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 “원장님의 말씀을 외면하려 한다고 우리들을 너무 섭섭하게만 여기지 마십시오. 사실상 우리는 원장님께서 염려하고 계신 것처럼 이번 일을 그토록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지내보면 밝혀질 일이지만 우리들은 이 일이 정말로 실현되어질 수 있으리라고는 믿고 있지 않으니까요. 다만 한 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이 일로 해서 또 한 번 저 문둥이들의 끔찍스런 소동이 일지 않을까 하는 바로 그점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오히려 원장님의 처지를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원장님보다는 저들의 본성을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오랫동안 곁에서 그들을 보아왔으니까요. 피비린내가 물을 건너오는 살인극이 그 동안 몇 차례나 일어났습니까. 원장님은 아직 저들의 진짜 속셈을 모르고 계십니다. 두고 보십시오. 이 일이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때... 우리는 원하지도 않은 그 끔찍스런 참극을 또 한 번 구경해야 합니다. 원장님 말씀처럼 진정으로 이웃을 생각해야 한다면 이 일은 우리가 처음부터 시작을 막아야 합니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사내는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될 것을 굳게 믿고 있는 터이므로 원장의 말처럼 마을을 떠나거나 생업상의 위협 같은 건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말은 오히려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최소한의 양심을 지닌 선린으로서 또는 몸이 성한 사람들끼리의 동류 의식에서 원장을 위해 충언을 아끼지 못하노라는 식이었다. 원장이 거꾸로 설득을 당하고 있었다. 조원장은 그 사내의 노회한 궤변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건강인으로서의 동류 의식을 구실삼아 원장을 아예 자기들 편으로 만들어버리려는 수작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작자는 지금 한창 원장을 구슬려보기도 하고 음흉스런 협박을 가해보기도 하고 있었다.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떻소? 다른 할 말은 없소?” 원장이 주위를 둘러보며 누군가 다른 말이 있을 것을 기다렸으나 사내의 이야기가 끝나고 난 다음부터는 자기들도 모두 그 말에 동조하고 있노라는 듯 아무도 다시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조상 가운데 수상한 내력이 없다면 지금 그 말 잘 명심해서 들어둬야 할 거요.” 동료들 등뒤로 얼굴을 가려 숨긴 사내 하나가 마지못해 한마디 농기어린 충고를 지껄이자, 원장의 주위에선 노골적으로 그를 비웃는 웃음 소리가 번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해의 조절 따윈 염두에도 두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조원장은 일순 앞이 캄캄해왔다. 더 이상 입씨름을 벌이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말로써는 불가능했다. 말로 되지 않는 일은 행동으로 이쪽 뜻을 지켜나갈 뿐이었다. 원장은 그만 섬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그는 발길을 돌이키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그의 각오를 분명히해두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아마 조상 가운데 문둥이 내력이 있었던 모양이오. 그러니 이제 당신들과는 더 이상 이야기를 계속할 수가 없을 것 같소. 하지만 아까 말한 나의 약속들에 덧붙여 이것 하나만은 더 분명히 해두고 싶소. 당신들이 나를 의사로 알든 사회 사업가로 알든 또는 폭동을 진압하러 다니는 군인으로 알든 오늘 같은 일은 이 조백헌이 모가지를 내걸고 다시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걸 명심해두시오. 난 이제 오늘 같은 난동은 이번 한 번으로 족한 것으로 알고 돌아가겠소.” 17 기공식 이튿날 아침의 사건은 그러나 공사를 위해서는 차라리 전화위복이었다. 사고 소식은 섬에 있던 원생들을 크게 자극하여 자신들의 땅에 대한 새로운 집념과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부상자들이 동생리 선창가로 실려 들어왔을 때 섬에서는 마치 전승 영웅이나 맞이하듯 온 섬 원생들이 뱃머리로 몰려나와 있었다고 했다. 원생들은 그 길로 곧 제1작업대의 출발을 서둘렀다. 조원장이 섬으로 돌아와보니, 제1작업대 1천여 명 중의 일부가 이미 배를 출발시키고 있었다. 원생들은 자체 조직에 의해 작업대를 동원하고 스스로 조를 나눠 차례차례 섬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배를 나눠 탄 작업대가 선창을 빠져나가면서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소록도의 노래’가 바다를 쩡쩡 울려대고 있었다. 그 노랫소리에 화답하듯 선창가를 가득 메워 선 환송 인파의 만세와 함성 소리가 섬을 뒤흔들고 있었다. 출진가가 있고, 만세의 함성이 있고, 섬을 온통 털어낸 듯한 환송인파가 있고... 그것은 섬 역사 반세기 만에 비로소 출소록의 꿈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장엄한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다. 조원장은 선창으로 향하던 뱃머리를 돌려 작업대 선단을 앞장서서 다시 오마도 공사장으로 향했다. “조백헌 원장 만세!” 그의 배를 알아본 작업대의 이 배 저 배에서 그의 만세를 합창해 보내주고 있었다. 조백헌 원장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침결에 당한 일이 다시 생각났다. “하나님, 저들의 간절한 소망을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어떤 난관이나 위협 앞에서라도 저들에게서 당신의 자비로운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원장은 신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오래오래 간절한 기구를 외고 있었다. 배가 공사장에 도착하자 원장은 남은 원생들을 실어오기 위해 빈 배들을 섬으로 되돌려보낸 다음 자신은 현장에서 도착한 작업대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기 전에 남은 작업대도 모두 공사장에 도착했다. 원장은 1차 작업대 1천 명 중 풍남 반도에서 오동도까지의 제1방조제 공사에 3백 명, 봉암 반도에서 오마도까지의 제3방조제 공사에 6백 명을 각각 배치했다. 오마도에서 오동동까지의 제2방조제 공사는 일반 인부들만이 따로 일을 맡아 하게 하고 있었는데, 그 1천 명의 원생 작업대원 가운데서 몸이 허약한 사람 1백 명을 따로 골라내어 제2공구의 보급품 감독 및 작업 실적 기록원으로 배치했다. 해가 저물어들었을 때는 봉암과 풍남의 두 둑머리에 거대한 천막 마을이 생겨났고, 이날 밤은 마을 주민들의 재습격을 경계하여 특별히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작업은 날이 밝은 이튿날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제1단계로 착수한 일은 채석과 투석 작업이었다. 제1방조제 공구에서는 풍남 반도의 둑머리 근처에 있는 산 하나를 헐어내고, 제3방조제 공구에서는 둑 바깥 바다 가운데에 솟아 있는 만재도를 헐어내기 시작했다. 산과 섬을 헐어내어 캐낸 돌을 등짐이나 배에 실어다가 전등렬이 가설된 제방 예정선을 따라 바닷물 속으로 던져넣는 것이었다. 작업 성격이 단순한 데다 일하는 방법도 지극히 원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작업 진도가 빠를 수도 없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무모하기 한량없는 노릇이었다. 무작정 돌을 던져넣어 그 돌더미가 바닷물 위로 솟아오르기를 기다리는 작업이었다. 그 돌무더기가 최저 수심 8미터가 넘는 바닷물 속으로 장장 5킬로 이상을 뻗어나가야 한다. 시일을 기약할 수 없는 작업이었다. 기대할 것은 언제고 일이 끝날 날이 있을 것을 참고 기다리는 원생들의 믿음과 끈기뿐이었다. 다행히 원생들은 원장 이상으로 작업열이 대단했다. 충천한 의욕 때문에 공사판의 사기는 더 바랄 수 없을 만큼 드높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다를 사이에 둔 양쪽 채석장에서는 다이너마이트 터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쿵쿵거렸고, 등짐으로 또는 뱃길로 돌을 실어 내가는 운반조의 대열은 바다와 산비탈을 개미떼처럼 까맣게 뒤덮었다. 밤이 되면 그 바다 위에는 다시 환한 백열 전등렬이 밝혀져서 만조를 아끼는 작업 대열의 움직임이 더 한층 부산스런 광경을 이루고 있었다. 원생들은 어찌나 일을 열심히 했던지 작업 개시 후 첫 주일이 지나자 이젠 더 이상 일을 계속 하기 어려울 만큼 급작스레 힘이 지쳐나기 시작했다. 한 달 교대의 작업 기간을 보름쯤으로 단축시키지 않으면 안 될 정도가 되고 있었다. 한데도 원생들 쪽에서는 전혀 불평을 하고 나서려는 기미가 없었다. 아무도 출역을 기피하려 하거나 신병을 칭하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원장의 독려나 간섭 같은 건 전혀 필요가 없었다. 공사장 질서나, 취사, 경비, 인원 관리 따위의 모든 일을 장로회나 작업대 자체에서 일사불란하게 처리해나가고 있었으므로 오마도 개척단장으로서의 조백헌 대령은 당분간 전혀 신경을 따로 쓸 일이 없었다. 거기에는 물론 개척단 부단장으로 선임된 황희백 노인과 ‘장로회’사람들의 역할에 힘입은 바도 크겠지만, 그보다도 근본은 원생들 자신들의 각성과 그 각성이 밑바탕 된 의욕과 헌신적 봉사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가능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원장은 대만족이었다. 몸이 불편스런 원생들의 작업 공구인 제1, 제3방조제 쪽의 작업이 일반 건강인들의 작업 공구인 제2방조제의 그것보다 훨씬 더 진도를 앞서가고 있었다. 그 공사장 근처에서 원장이 중앙리의 장로 황희백 노인을 자주 만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즐거운 일의 하나였다. 개척단 부단장으로 선임된 황희백 노인은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난 다음 부터는 항상 그 공사장 근처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별로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어칠버칠 작업장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 노인의 얼굴에는 그러나 항상 신명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의 그 간절하고도 경건스런 기구가 어리어 있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곳에선 사람의 이름으로 해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났었지. 지금 우리들에게선 그 사람의 이름으론 이해해낼 수 없는 일이 또 하나 이루어지려 하고 있단 말이거든. 아마 이것이 그사람의 이름으로 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 가운데서 우리에게 행해지고 있는 마지막 이적이 틀림없을 게야. 이게 어찌 자비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소.” 원장을 마주칠 때마다 노인은 개미떼처럼 부산한 작업대의 행렬을 먼발치로 내려다보며 은근히 원장의 결단을 칭찬하곤 했다. 노인과 만나고 나면 그는 언제나 그 비정하리만큼 황량스러워진 섬사람들의 가슴속에 비로소 따뜻한 인간에의 신뢰가 싹돋아오르는 것을 보고 혼자서 기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원장은 그 황노인에게서 예기치 않은 위로와 용기를 자주 경험하곤 했다. 그러나 원장이 공사 현장에서 만날 수 있었던 사람 가운데 황노인 못지않게 그의 용기를 고무시켜준 또 다른 한 사람은 윤해원 선생이었다. 원장은 물론 부임초에 들은 작자의 심상치 않은 행적으로 해서 그 후로도 늘 작자의 소식에 대해서는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던 편이었다. 보육소에서 국민학교 과정의 분교 수업이 중지되고, 해당 연령층 아이들이 건강 지대의 본교 등교를 시작한 다음까지도 윤해원은 그냉 그 보육소에서 남은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윤해원이 섬에서 쫓아내기를 소원하고 있다는 서울 아가씨 서미연도 여태껏 그냥 보육소에 남아서 윤해원의 비위를 거슬리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그 서미연 아가씨만은 윤해원이 좀처럼 당해내질 못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상욱이 처음 예상했던 대로 윤해원은 마침내 그 서미연에 대해 짓궂게 사랑을 호소하고 나선 일까지 있었지만 윤해원은 그의 그 마지막 비방을 가지고도 끝끝내 여인을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상욱에 대한 그녀의 어떤 미묘한 반발심 같은 것에서였다던가. 다름아니라 서미연이 그 윤해원의 사랑 공세를 뜻밖에 수월히 받아들일 기세였기 때문에 사내 쪽은 오히려 기가 질려 여인을 멀리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윤해원이 그 서미연 앞에 떳떳하지 못한 것은 서미연에 대한 그의 구애가 사랑을 위한 호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때문이라했다. 그는 마치 약 기운이 떨어져가는 마약 환자처럼, 지금까지의 그 엉뚱스런 객기를 잃고 죽어지낸다는 소문이었다. -윤해원은 자기의 병을 약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작자였습니다. 그의 병력이 세상을 저주하고 증오하게 만들고 있었고, 거기서 그는 오히려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고 있단 말씀입니다. 그의 광태나 분홍색 집착증도 따지고 보면 다 그런 심리에서 비롯한 자기 지탱의 한 방편이였을 겝니다. 매사를 어렵게 생각하는 이상욱 보건과장이 그 서미연이나 윤해원의 일에 대해서는 이상스럽게 깊은 관심을 쏟으면서 조원장에게 한 말이었다. -그런데 작자는 이젠 그만 저주와 증오의 근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서미연이란 여자가 그의 꿈을 깨게 한 것이지요. 윤해원은 그 증오의 근거 - 이를테면 그이 생의 동력을 상실하고 나자 갑자기 다리가 휘청거리고 기력을 잃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자는 지금까지 그런 증오 속에서 자신을 속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윤해원은 자신의 증오를 확인하기 위해 그 숱한 여선생들에게 거짓 구애를 되풀이하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진실로 그녀들을 사랑하고 싶은 보다 깊은 자기의 욕망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바로 그 서미연이란 여인에게서 그의 증오 대신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고 싶은 자기의 정직한 욕망을 보고 말았을 거라는 말이었다. -윤해원을 위해서는 차라리 서선생이라는 여자가 혹독한 실망을 주어버린 편이 나았을는지 모릅니다. 윤해원은 자기가 정말로 건강한 여자를 사랑하고 싶다는 욕망을 깨달음과 동시에, 또는 그런 일이 자기에게서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 순간에 자기로서는 그것을 이루어내는 일이 여인을 미워하기보다 더욱더 어려운 일이라는 각성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는 절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서미연의 행동이 상욱에 대한 어떤 반발 때문이었으리라는 소문에서도 이미 심상찮은 기미를 눈치채고 있던 터이기는 했지만, 윤해원에 대한 상욱의 그런 태도에서 조원장은 어떤 짙은 질투의 감정을 엿보고 나서 은근히 혼자 고소를 금치 못했던 일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아마도 서미연이라는 여자가 상욱과 윤해원 사이에 그런 어떤 심각한 갈등을 빚어내고 있다면, 조원장으로서는 모든 것을 머리와 말 속에서 행해온 상욱보다는 윤해원의 그 처절스런 대범성과 행동 속에서 오히려 쉽게 해소되어질지도 모르며, 또 그러기를 바라온 터였었다. 그리고 그 후 어떤 구라 운동 잡지에서 아직도 병사 지대에 남아 있는 그의 누이에 대한 연민을 읊은 듯한 윤해원의 시를 보고는, 그것이 이미 누이에 대한 시가 아니라 누이의 슬픔을 빌어쓴 윤해원 자신의 사무친 자기 각성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로부터 더욱더 상욱의 심각해진 얼굴을 뜻있게 관찰하면서, 윤해원의 절망 쪽에 그 나름의 이해를 보태고 싶어해오던 조원장이었다. 구라 운동잡지에 실려진 윤해원의 시라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너의 얼굴에 분홍으로 고운 꽃얼룩은 아무도 꽃이라 말하지 않는다. 우리도 이젠 꽃이라 말할 수 없다. 너의 그 그리운 색깔을 위해 우리가 흘린 눈물이 낙화가 되었다면 누이여, 우리는 지금쯤 꽃길 위를 걷고 있으련만... 한데 조원장은 어느 날 제1방조제 채석 운반꾼 행렬 가운데서 우연히 돌덩이를 등에 진 윤해원을 발견한 것이다. “누이가 아직 병사 지대에 있습니다. 전 누이 때문에 이곳으로 왔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일할 힘이 없으니까요.” 그 윤해원이 비실비실 원장 하ㅍ을 피해 달아나면 변명처럼 늘어놓고 간 말이었다. 원장은 그때 윤해원이 자기 앞에 서기를 면구스러워하며 그 한마디를 남기고 쭈뼛쭈뼛 행렬 사이로 끼여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문득 머리를 깊게 끄덕이고 있었다. 그가 누구를 위해 작업을 지원해 나섰든 그것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윤해원이 그의 누이를 위해 그런 시를 썼거나 건강한 서미연에 대한 절망 때문에 썼거나, 또는 그의 말대로 아직도 병사 지대에 누워 있는 그의 누이를 위해 출역을 자청하고 나섰거나 그 건강한 서미연으로 인한 슬픈 자기 각성 때문에 그 절망을 견뎌 이기려고 돌짐질을 시작했거나 이 일에는 모든 섬사람이 마음과 육신의 힘을 한데 모아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원장은 다시 한번 확신이 솟아올랐다. 그런데 사실은 그 황희백 노인이나 윤해원보다도 조원장을 더욱더 흐뭇하고 놀라게 한 것은 그보다도 얼마 전 섬을 탈출해나간 축구부의 한 사람이 제 발로 다시 공사장으로 도아왔을 때였다. 투지나 볼 다룸새가 누구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에 원장의 관심을 끌고 있었던 유상길이라는 청년 -그러나 막상 중요한 공사 계획이 이루어지려하고 있을 즈음엔 무슨 낌새라도 눈치챈 것처럼 원장과 축구부를 버리고 미련없이 섬을 떠나가버린 배신자-, 한데 그 유상길 청년이 어느 날 홀연히 이상욱 보건과장과 함께 작업 지휘소의 조원장을 찾아 나타난 것이었다. 알고 보니 유청년은 공사장으로 돌아와서 일을 시작한 지가 이미 며칠이나 지났다는 것이었다. 원장은 물론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묻지 않아도 녀석이 왜 다시 섬으로 돌아왔는지는 짐작을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새삼스럽게 부탁을 할 말도 없었다. “이번에 돌아와줬으니 그만이지만 이담에 또 한 번 그딴 수작 했다간 마지막인 줄 알아.” 원장은 유청년을 퉁명스럽게 응대해 내보내고 말았지만 속으로는 이때처럼 사람이 반갑고 고마워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만 한 사람, 아직도 태도가 분명치 않은 것은 이상욱 보건과장 그 사람이었다. 이상욱은 공사가 시작되고부터 원장의 총참모격으로 항상 그의 곁에서 그를 돕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원장의 생각이나 작업 결과에 대해서는 어딘지 아직 겁을 먹고 있는 사람처럼 끝끝내 회의적인 눈치였다. 원장의 지시는 항상 성실하게 이행해나가고 있었으나, 그 대신 스스로 무슨 일을 만들려 하거나 원장의 생각에 자신의 적극적인 의견을 더해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글쎄요. 그 친그든 누구든 다시 이 섬을 버리고 떠날 사람이 생길지 어떨지는 장담할 수가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이 공사가 어떻게 소망대로 되어가느냐에 달려 있을 테니까 말씀입니다.” 유상길 청년을 원장에게 데리고 와서 그를 흐뭇하게 한 것도 이상욱 과장이었으나, 그 유청년과 같은 일이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원생들 사기를 위해서도 절대 안 되겠다는 원장의 걱정에 대해 지극히 냉담스런 반응으로 원장을 협박하고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이상욱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욱 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면(아니 그 이상욱마저도 일단 자기가 맡아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는 터이지만) 모두들 열심히 일을 했다. 작업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으므로 그 노력의 결과에 대해 원장처럼 조바심 같은 걸 지니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낮이면 뙤약볕 아래 구슬땀을 흘리며 돌등짐을 져나르고, 밀물이 높은 밤이면 백열 전등 휘황한 밤바다 위로 새벽까지 배질을 쉬지 않았다. 와르르 쿵... 이쪽 저쪽에서 산비탈 무너지는 소리, 바다로 실어낸 바윗돌을 물속으로 던져넣는 소리, 피곤기를 잊으려는 선박 운반꾼들의 영치기소리, 그 소란하고 부산한 공사장 분위기에 휘말려 원생들은 밤낮이 바뀌는 것도 잊은 채 하루하루 손발이 헐고 얼굴과 등덜미의 피부들이 온통 까맣게 익어가고 있었다. 18 공사 시작 보름 만에 원장은 결국 한 달로 예정된 1개 작업대 출역 기간을 절반이나 앞당겨 작업대 교대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생들의 무모하고도 광적인 작업열 때문에 출역 원생들 가운데선 병약자와 부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열흘쯤이 지나면서부터는 작업능률마저 눈에 띄게 쩔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태로는 한 달을 내리 끌어대기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원자은 마침내 결단을 내려 작업대의 교대를 명령했다. 지금까지 일을 해온 제1작업대 1천 명 원생들은 보름째 되던 날 저녁 배를 타고 섬으로 돌아갔고 섬에서는 다시 제2작업대 1천 명이 동생리 선창가에 미리 대기해 있다가 공사장으로 출발했다. 동생리 선창가는 또 한 번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로 장관을 이루었다.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뿐 아니라 이들을 맞아들이고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수는 그보다도 더 많았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선창 일대는 섬에서 켜들고 나온 횃불로 해서 주위가 온통 대낮처럼 밝았다. 들어오는 사람을 맞는 쪽은 십 년도 더 떨어져 있던 사람을 만난 듯이 흥분에 들떳고, 거꾸로 사람을 일터로 내보내는 쪽은 모처럼 당해보는 이별이 안타까워 눈시울까지 적셔가며 쉽사리 발길들을 돌이키지 못했다. 짧은 몇 달 동안이나마 그 이별과 만남 또한 이 섬 사람들에게는 희귀하고도 소중한 인간사의 한 향수어린 경험이 분명했으리라. 아니 이 섬에는 애초 섬을 떠나고 들어옴은 물론 사람을 떠나보내고 맞는 것조차도 경험해본 적이 드문 일이었으리라. 어쨌든 작업대는 그렇게 해서 보름 만에 일차 교대가 있었고, 다시 또 보름이 지난 다음에도 똑같은 교대 행사가 동생리 선창가를 들떠 붐비게 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어느 정도 능률이 떨어져가는가 싶다가도 작업대 교대가 행해지고나면 공사장은 다시 전날처럼 활기가 되솟아오르곤 했다. 작업은 별다른 기복 없이 꾸준하게 진행되어나가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 7월과 8월이 지나고 남해 바다가 어느새 차가운 회색빛으로 식어가는 9월로 접어들자 원장은 서서히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돌을 깨다 던져넣어도 바다 밑에서 도시 작업을 한 흔적이 나타나질 않았다. 열 길이나 되는 물속에서 한두 달 사이에 불쑥 돌둑이 솟아오리라고는 애당초 기대를 하지 않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바닷물 속에 무작정 돌만 깨다 던져넣기말 웬만한 각오와 참을성을 가지고는 견뎌내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원장은 마치 바닷속으로 던져넣은 바윗돌이 그때그때 다시 물결에 휩쓸려 아무것도 바닥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지 않나 싶어질 지경이었다. 잠수부를 동원해서 물 밑을 조사해보면 그런 건 아니었지만 원장은 날이 갈수록 마음이 불안하고 조바심이 더해갔다. 말없이 끈질기게 돌을 져나르고 있는 원생들이 오히려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원생들뿐이 아니었다. 그는 바다마저 두려워졌다. 돌을 던져도 던져도 하얀 거품만 솟아오르는 바다가 두려웠다. 그리고 그 자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따. 그러던 어느 날. 원장에겐 마침내 상서롭지 않은 이야기가 한 가지 들려왔다. 일이 시작된 후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원자으로서도 아직 거기까지는 상상을 못 하고 있던 불길한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건네준 사람부터가 뜻밖의 인물이었다. 그날도 원장은 돌둑이라고는 윤곽조차 찾아볼 수 없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오마도 67고지 작업 지휘소 근처만 맴돌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개미떼처럼 바다를 오르내리고 있는 우너생들이 금바잉라도 발길을 돌려 아우성 아우성 자기를 향해 몰려올 것 같은 환상에 시달리고 있는데, 아닌게 아니라 어느 때쯤 해선가 문득 그 인부들의 한떼거리가 허우적허우적 작업 지휘소 쪽을 향해 걸음을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원장은 제물에 잔뜩 긴장이 되어 산을 올라오는 일해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산을 가까이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보니 그들은 제2공구의 건강인 작업대 인부들이었다. 작자들의 거동이 아무래도 수상했다. 서슬이 시퍼런 인부들 사이에 한 키 작은 사내가 끌려오다시피 원장 앞으로 연행되고 있었다. 일행 가운데는 원생들 가운데서 작업 실적이 기록원으로 선발돼 나가 있는 음성 나환자까지 한 사람 끼여 있었다. 무슨 사고 생긴 건가? 사고는 아니었다. "원장님, 이 자식 잘 좀 족쳐보시십시오 아무래도 뒤가 수상한 놈입니다." 일행 중에서 기록일을 맡아 하고 있던 친구가 데리고 온 사내를 다짜고짜 원장 앞으로 밀어뜨리며 말했다. 원장은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사내를 데려오게 된 사연부터 물었다. "이 자식 품삯 받고 일하러 이런 데 떠돌아다니는 노동꾼이 아니야요. 캐보면 뭔가 틀림없이 다른 속셈이 있어서 일부러 우리들 사이로 끼여든 놈일 겁니다." 사내를 원장 앞으로 밀어뜨린 원생 녀석이 자초지종 말하기 시작했다. 인부들 가운데 아무래도 일손이 얼떠 보이는 녀석이 하나 끼여 있더라고 했다. 돌등짐질이 서툰 건 둘째치고 거동이나 말씨까지 여느 인부들하고는 동떨어진 데가 많더라고 했다. 전에 어디서 일을 하다 왔느냐고 물어도 곧이들릴 만한 다댑을 잘 못 하더란다. 며칠 동안 눈치를 살피다가 이날은 몇몇 인부들과 합심해서 까놓고 녀석의 정체를 추궁해보았으나, 작자가 좀처럼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한사코 속셈을 털어놓지 않으려는 것이 더욱 수상해서 녀석을 원장 앞까지 끌고 왔노라는 것이었다. 원장은 사내의 설명을 들으면서 한펴능로는 이 엉뚱스런 피의자의 면면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있었다. 땅딸만한 키에 가슴이 제법 넓게 벌어진 당당한 체구였다. 선이 굵은 검은 테 안경알 속에서 양순한 듯하면서도 만만찮은 시선이 원장을 줄곧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작업복 잠바가 땀과 황톳물로 찌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일판을 끼여든 지는 꽤 오랜 듯 싶었으나, 전력이 공사판 날품팔이꾼이 아닌 것은 한눈에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식의 손을 보십시오. 손만 보아도 그냥 품팔이꾼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곁에 서 있던 다른 사내가 금세 주먹이라도 한 대 쥐어박을 듯 험상궂은 기세로 덧붙였다. 원장은 사내의 손을 보았다. 돌에 씻겨 헐고 부르트기는 했어도 역시 그런 마구잡이 돌일과는 어울리는 손이 아니었다. "당신 뭐하러 온 사람이오?" 원장이 마침내 확신이 선 듯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사내는 이제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순순히 정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실은 저 C일보 기잡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신분증 보여줄 수 있소?" "이런 식으론 취재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 일만 하다 빠져나가려고 했습니다만..." 사낸ㄴ 지저분한 잠바 안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주며 객쩍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딴 데 웬 기삿거리가 있을 게라구!” 원장은 잠시 사내의 얼굴과 그가 내민 신분증 조각을 번갈아 들여다보고 나서는 꺼림칙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날 저녁이었다. 원장이 상서롭지 못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렇게 뜻하지 않은 인연으로 해서 만나게 된 C일보이 한 현장 취재 기자로부터였다. 조원장은 어쨌거나 작자의 의사가 고맙고 대견스러워 이날 저녁 그를 섬 관사까지 함께 대리고 갔다. 그리고 그 사이에 쌓인 자신의 긴장도 풀 겸해서 밤이 깊을 때까지 모처럼 만에 둘이서 함께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이름이 이정태라고 다시 한번 자기 소개를 하고 난 그는 알고 보닌 그 사이 벌써 대단한 취재 활동을 전개해오고 있었다. 그는 섬의 내력이나 공사가 착수되기까지의 경위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빠뜨림이 없이 속속들이 다 취재를 끝내놓고 있었다. 작업 분위기나 노역에 참가하고 있는 원생들의 실태에 대해서도 그는 오히려 원장보다도 훨씬 자세한 데까지 관심이 뻗쳐 있었다. “그런데 황희백 장로 라고 개척단 부단장 일을 맡고 계신 분 있지 않습니까?” 이기자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나중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그 황노인의 이야기를 꺼냈다. “원장님께선 그분이 어떻게 해서 문둥이가 되어 이섬으로 오게 되었는지 내력을 들어본 일이 있습니까?” “글쎄요. 그 노인 얘긴 몇 차례 귀띔을 받은 일이 있었지만, 그렇게 자세한 데까진 아직 관심을 가져보지 못했는걸요.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습디까?” 원자은 이기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어 자신 없는 어조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이기자는 그런 줄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나서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사연이 있지요, 물론 무시무시합니다. 하지만 제 말씀은 사실 그런 내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섬을 찾아들어온 사람치고 어디 황장로만하 내력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 있을라구요. 문제는 노인이 언젠가는 그 내력을 스스로 원장님께 말하게 될 때가 오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듣기가 어렵구만.”“바로 말씀드리지요. 노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노인이 누구 앞에서 그 무서운 자신의 과거를 들추어대기 시작하면 이 섬에선 반드시 변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노인은 지금까지 늘 그래왔었답니다. 좀처럼 자기의 과거를 들추는 일이 없는 노인이지만, 그 노인이 어쩌다 자기의 옛날일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하면 그것은 바로 이 섬 안에 무서운 비극이 일어나리라는 억ㅁ없는 예고가 된다는 것입니다. 일정시에도 그랬고 해방 후에도 그랬고, 노인은 그때마다 그 자신의 과거를 되씹으며 무서운 복수극을 감행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 “방조제 이야기입니다. 물 밑에 숨어 있는 돌둑이 언제 솟아올라와 주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돌둑이 쉽사리 떠올라주진 않는 한, 원장님은 이일을 미처 다 끝내기도 전에 언젠가는 그 황장로의 내력을 먼저 듣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원장님께선...” “알겠소.” 원장이 급히 이기자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리고 보니 이기자는 이 일의 결과에 대해 별로 신통한 기대를 걸고 있지 않은 것 같군요”또 한 사람 어려운 말썽꾼을 만나고 있다는 것은 벌써부터의 생각이었다. 등덜미가 벗겨지도록 인부들과 함께 돌등짐을 져나른 이기자였다. 이젠 손발 씻고 취재나 끝내고 돌아가라는 원자의 권유도 뿌리치고 그 인부들 틈바구니에서 며칠만 더 같이 지내보겠노라는 이기자였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해서는 조원자으로서도 충분한 각오를 다짐하고 나선 일이었다. 그느 이기자의 완곡한 추궁 앞에 자꾸만 무력해지려는 자신을 견디면서 완강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난 이기자에게 그걸 묻기 전에 내 쪽에서 먼저 말해두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소. 난 끝끝내 둑이 솟아오르지 않으면 그때 가서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이미 다 각오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일을 시작할 때 황장로하고도 다 서약을 했던 일이지요. 그러나 나는 아직은 걱정을 하고 있지 않아요. 황장로는 이기자의 생각처럼 그렇게 성미가 조급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저래 원장은 이제 황장로를 보기가 정말 두려웠다. 노인이 언제 그 무거운 입을 열어 그의 과거를 들어보일지 알 수 없었다. 두렵다 못해 원장은 이제나저제나 자기 쪽에서 먼저 그 황장로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심경이 되고 있었다. 원장이 그렇게 우와좌왕 자신이 흔들리고 있을 때였다. 설상가상으로 하루는 또 난처한 사고가 벌어졌다. 봉암리 제3방조제 공구 채석장에서 바윗돌이 무너져내려 그 밑에서 일하던 인부 한 사람을 깔아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이날 사고의 발단에 불과했다. 원장이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을 때는 옆에서 함께 변을 당할 뻔했던 동료들이 바위 밑에 깔린 사람을 끌어내놓은 다음이었다. 변을 당한 인부는 몸이 온통 피투성이로 불게 물들어 있었지만, 불행중 다행으로 생명에만은 큰 지장이 없어 보였다. 원장은 채석장 근처에 마련된 구호소로 부상자를 운반해다 자신이 우선 급한 응급 조치를 취했다. 응급 조치를 끝낸 다음 환자 후송선이 도착할 때까지 부상자를 구호소에 뉘어놓고 다시 작업을 계속시켰다. 거기까지는 흔히 있어온 사고였다. 돌이 구르거나 무너져내린 흙더미에 사람이 깔려 묻히는 일은 전서부터도 이따금씩 있어온 사고였다. 다행히 아직 목숨까지 잃게 된 불상사는 없었지만 이만한 공사판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돌짐을 지고 가다 넘어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치는 사람도 있었고, 배가 뒤집혀 반물귀신이 되었다가 간신히 다시 살아난 사람도 있었다. 날씨가 서늘해지기 시작한 뒤부터는 그런 사고가 점점 더 빈도를 더해가고 있던 참이었다. 이날 사고도 거기까지는 이를테면 그런 흔한 사고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진짜 사고는 오히려 그 다음부터였다. 작업을 다시 명령하고 나서 원장이 한동안 채석장 안전도 검사를 실시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느닷없이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원장이 번뜩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 사이엔가 그의 곁에 따라다니고 있던 황장로가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부리나케 뛰어가고 있었다. 원장은 전에 없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 곳은 구호소가 있는 데서 산등성이를 하나 더 넘은 골짜기 쪽이었다. 공사장 주변에서는 소위 ‘후생반’이라 불리는 잡상인 여인들이 언제나 인부들 근처를 빙빙 맴돌고 있었다. 작업대 인부들은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그 ‘후생반’ 여인들에게서 떡이나 빵 같은 것을 곧잘 사다 먹곤 했다. 이따금 여인을 불러다 앉혀놓고 아예 술자리를 펴는 친구들까지 있었다. 원장은 제발 무슨 일이 없었기를 빌면서 자신도 모르게 한달음에 산등성이를 넘고 있는 황장로를 급히 뒤쫓아갔다. 사태는 역시 그의 예감대로였다. 피투성이가 된 사내 한 녀석이 잡상인 여인 하나를 무참스럽게 깔아뭉개고 있었다. 방금 전에 부상을 입고 구호소 천막 아래 누워 있던 그 사내였다. 사내는 마치 개구리를 잡아 삼키려는 뱀처럼 여인의 작은 몸을 휘감아 안고는 정신없이 여인을 짓눌러대고 있었다. 이미 옷이 찢겨녀나간 여인의 젖가슴과 허벅지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자국이 낭자하게 얼룩져 있었고, 여인은 이제 비명을 지를 기력마저 잃은 채 난폭한 사내의 몸집에 깔려 바들바들 가는 경련만 일으키고 있었다. 산등성이를 달려 내려가던 원장은 그만 넋을 잃고 그 자리에 발을 우뚝 멈춰 서버렸다. 원장은 자신이 바로 그 사내의 몸뚱이 아래 깔려 짓뭉갬을 당하고 있는 듯 온몸에서 힘이 쫙 빠져나갔다. 그는 후들후들 떨려오는 다리를 간신히 버티어 선 채 한동안 그 자리에 두 눈을 감고 있었다. 황장로가 혼자서 사내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난폭한 동작을 그치지 않고 있는 사내의 머리칼을 끌어당겨 여인으로부터 간신히 녀석을 떼어놓았다. 하지만 사내는 아마 누가 오건 말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상관을 않을 작정이었던 것 같았다. “놓아! 놓아두란 말이닷!” 사내는 황장로에게 머리칼을 끄들려대면서도 고래고래 악을 쓰며 한사코 여인의 몸뚱이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거의 초인적으로 보이는 황장로의 완력에 끌려 몸이 일으켜진 사내가 불꽃을 튀기듯 붉게 충혈된 눈초리로 노인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그것도 순간뿐. 사내는 느닷없이 황장로의 뺨을 몇 차례 후려갈기고 나서는 제풀에 풀썩 몸을 땅바닥으로 주저앉히고 말았다. “왜 가만 놔두지 못하는 거야. 문둥이가 마지막으로 한번 사람 노릇을 해보고 죽자는데 왜 그것도 놔둬두지 못하는 거야. 놔둬두면 이 썩은 몸뚱이를 끌고 가서 돌더미 대신 바닷물에 몸을 던져 둑을 솟게 해줄 텐데 왜 그 짓도 못 하게 하느냔 말이다.” 사내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혼자서 울부짖고 있었다. 황장로는 사내에게 뺨을 얻어맞고 나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덤덤한 얼굴로 사내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원장 역시 아직도 두 발이 땅에 얼어붙어버린 듯 멍청스레 사내의 흐느낌만 지켜보고 서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그 원장의 주위에는 다른 원생이 십여 명이나 넘게 달려와 있었지만 작자들 역시 이 참담스런 광경 앞에선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려는 사람이 없었다. 깔려 있던 여인이 옷자락을 추스릴 틈도 없이 허둥지둥 골짜기를 빠져 달아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여자 쪽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사내만이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 목메인 절규를 계속하고 있었다. “바다를 막고 싶다면 맘대로들 막아보아. 원장이고 장로님이고 그게 정 소원이라면 소원 풀 일 하란 말야. 하지만 이제 쓸데없이 돌을 지라고 하지는 마라. 돌을 나르다 돌더미에 깔려 죽느니 차라리 쓸모없는 이 몸뚱이를 바닷물 속으로 던져넣어서 둑을 떠오르게 하란 말이다. 장로님도 벌써부터 그걸 알고 있으면서 입을 다물고 있는 판에 그러기 전엔 어떤 놈이 이 바다를 막아. 어떤 미친놈이 이 바다를 막아내냔 말이다...” 황장로가 마침내 자신의 그 소름끼치는 옛날 이야기를 들추고 나선 것은 그런 일이 있고 난 바로 다음날 일이었다. 사고가 있었던 다음날 오후. 조원장은 작업 지휘소가 설치되어 있는 오마도 언덕빼기에 올라앉아 하루하루 겨울색이 짙어져가는 잿빛 바다를 하염없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눈길이 전에 없이 깊은 수심에 차 있었다. 나뭇가지에 올라앉은 겨울 까마귀처럼 수굿하니 상체를 굽히고 있는 그의 모습에는 체구가 큰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이상스런 외로움 같은 것이 어려들고 있었다. 그는 다른게아니라 외로웠다. 그리고 피곤했다. 전날의 사고는 물론 마무리가 간단치 않았다. 조원장은 이날 밤 우선 사내의 수술을 끝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음성이건 양성이건 나환자의 외과 수술이란 웬만한 각오로는 감당해내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조원장은 이날 밤 그런 역겨움이나 피로감을 의식해볼 여유도 없이 두 시간 가까이 걸린 수술을 거의 혼자서 치러내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내를 살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조건한 절박감이 이날 낮부터 끊임없이 그를 강박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힘겨운 수술을 끝내고 난 것만으로도 이날의 사고를 아직 다 마무리지을 수가 없었다. 병원 일을 끝내고 관사로 돌아온 원장이 수술 뒤의 역겨움과 피로를 씻기 위해 이제 막 술병을 찾아내 들고 있을 때였다. 짐작하고 있었던 대로 바다 건너 마을에서 밤 뱃길로 원장을 관사까지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기공식이 있었을 무렵 공사장으로 몰려와 난장판을 벌이고 간 무리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안심하십시오. 우린 원장님께 일을 걷어치우시라고 말하러 온 것은 아니니까요.” 방문객들은 원장을 만나고 나서도 한동안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믿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우리도 이젠 저 바다 밑에서 하루빨리 옥토가 솟아올라와 주기를 고대하고 있단 말씀입니다.” 하루빨리 돌둑이 솟아올라 바다가 옥토로 변하여 자기들도 그 땅에서 원장의 환자들과 형제처럼 오손도손 농사를 짓고 살게 될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빌고 있노라 했다. 일을 꾸미자면 원생들에겐 제방 작업만 끝내게 하고 바다에서 정말 땅이 솟아오른 다음엔 원생들을 다시 섬으로 쫓아 들여보내고 나서 농장은 자기들끼리만 송두리째 차지해버릴 수도 있는 일이 아니냐고, 태도를 돌변하게 된 연유를 거꾸로 원장에게 납득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조백헌 원장에 대한 작자들의 짓궂은 비아냥거림일 뿐이었다. “한데, 그건 어쨌거나 그놈의 돌둑이 솟아올라와 주기나 한 다음 일이니까 우선은 그 돌둑부터 떠올라줘야 할 텐데 말입니다.” 녀석들은 숫제 원장을 동정하고 있었다. 언젠가도 그랬던 것처럼 작자들도 날이 갈수록 돌둑이 절대로 물 위까지 솟아오를 수는 없다고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설사 그럴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기적이 나타날 때까지 원생들이 참고 기다려줄 리가 없다고 믿고 있음이 분명했다. 작자들은 분명히 안심을 하고 있는 태도들이었다. 게다가 이날 낮 사고로 해서 작자들은 비로소 그 원장의 덜미를 단단히 틀어쥐게 되었다는 듯 은근한 여유들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밤 뱃길로 섬까지 원장을 찾아온 작자들이고 보면 그 정도로 간단히 시비를 끝내고 돌아설 위인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원장님께서 오늘은 좀 책임을 져주셔야 할 일이 있을 텐데요.” 일행 중의 한 친구가 마침내 섬을 찾아온 진짜 용건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오늘 낮 당신네 원생 하나가 우리 마을 부녀자를 겁탈한 불상사 말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린 이제 원장님이 하는 일을 방해하려고 하진 않아요. 원장님의 입장과 우리 입장이 다르지 않습니까. 원장님 일 때문에 가난한 이웃 마을 부녀자들이 문둥이들한테 함부로 겁탈을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일을 당하면서도 그냥 모를 척하고 참아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냔 말씀입니다. 자, 이 점에 대해서 원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차근차근하면서 다부진 추궁이었다. 조원장도 이미 그만한 추궁은 각오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물어물 넘길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날의 사고에 대해 성의껏 정중한 사과를 했다. 앞으로 다시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민들의 공사장 접근을 엄격히 금하겠다는 다짐도 주었다. 기왕의 사고에 대해서는 법이 허용하는 한 엄중한 책벌을 가할 방침이며, 피해자에 대해서도 절차에 따른 응분의 보상을 이행하겠노라 약속했다. 원장의 사과나 다짐들은 물론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방문객들은 가해자의 책벌이 재판을 통한 법적 제재 따위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가 가엾은 부녀자를 무도하게 덮쳐 눌렀듯이 책벌 역시도 그와 똑같이 야비하고 무참스런 고통으로 그 값을 치르게 해줘야 한다고 고집했다. 자신들이 직접 보복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승복해줘야 앞으로 다시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원장의 말을 곧이들을 수 있노라는 것이었다. 그러질 못한다면 원장의 약속들은 무엇으로 신용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밤이 깊도록 실랑이가 계속되었다. 원장이 녹초가 되도록 지쳐나는 것을 보고서야 방문객들은 서서히 자리를 일어섰다. “오늘밤 우리들이 한 말을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진 마십시오. 원장님께서도 오래지 않아 우리들의 입장을 이해하게 될 때가 올는지 누가 압니까. 저들의 본심이 터져나오게 되면 원장님인들 게서 어찌 원장님 자신이나 섬까지 따라와서 함께 고통을 겪고 계신 원장님의 가족들을 무사히 지켜낼 수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아, 그야 우리로서도 물론 그런 변을 당하기 전에 돌둑이 얼른 솟아올라와 주길 바라고는 있지만, 그게 어디 생각처럼 쉬운 일이어야 말이지요.” 문을 나가면서 작자들 중의 한 친구가 마지막으로 내뱉고 간 말이었다. 음흉스럽고 기분 나쁜 협박이었다. 돌둑이 떠오르더라도 그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살게까지 가만 놔두질 않겠지만 일은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풍지박산이 나서 원장은 무참스런 복수극을 겪게 되리라는 소리였다. 완전히 사면초가였다. 원장은 어느 곳에 등을 기대고 자신을 버티어나갈 의지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조원장은 공사 현장을 내려가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작업 지휘소 앞 언덕빼기에 주저앉아 맥없이 바다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개미떼처럼 바글바글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원생들의 모습이 오히려 두렵기만 했다. 그는 원생들의 무리가 지금이라도 당장 일손을 놓고 아우성아우성 자신을 향해 밀어닥쳐올 것 같은 환상 때문에 몇 번씩 몸을 떨고 있었다. 얼마 동안이나 그러고 있을 때였을까. 문득 등뒤에서 인기척이 있어 돌아다보니, 언제 올라왔는지 황장로가 너덧 발자국 뒤쪽에 등을 돌리고 서서 그 역시 원장처럼 물끄러미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거개다 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일을 뜻밖에 자기 힘으로 감당해낸 기억을 한 두가지씩 숨겨가지고 있게 마련이거든.” 원장이 자기를 알아본 기척을 느낀 황장로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느릿느릿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그런 내력이 때론 더욱더 엄청난 일을 감당해내게 하는 이상한 힘을 낳는 수가 있거든. 오늘 난 원장이 그러고 있는 모양을 보니 자꾸만 부질없는 충동이 들솟는구만 그래.” 노인의 말은 분명히 원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뭔가 원장에게 말을 하고 싶어하고 있었다. 조백헌 원장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노인이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원장 같은 사람들한테도 그럴 때가 있을까 몰라. 아마 있을게야. 지금 원장이 그러고 있는 모양을 보니까, 난 오늘따라 자꾸 옛날 얘길 하나 들려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아졌거든. 원장 탓이야. 하지만 이게 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늘어가는 늙은이 망령기가 아닐까 모르겠어......” 원장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올 것이 오고 만 것이었다. 노인이 마침내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들춰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노인은 그 이야기를 위해서 여기까지 일부러 원장을 찾아 올라와 있는 것이었다. 원장은 입이 얼어붙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말없이 두려운 눈초리로 노인의 옆얼굴만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비로소 몸을 천천히 돌이켜서 원장을 유심히 건너다보기 시작했다. “원장은 뭘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는 겐가?” 황장로가 다시 위엄어린 목소리로 원장을 나무랐다. “문둥일 두려워하면 그 문둥이가 점점 더 심술궂어진다는 걸 원장은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 아무래도 이야길 참아둘 수가 없겠어.” 노인은 그러면서 원장으로부터 다시 몸을 돌려 천천히 땅바닥으로 몸을 쪼그려앉았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담뱃대에 불을 붙여문 다음 한동안 말이 없이 또 바다 쪽에다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조원장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는 황장로 앞에 아직 입 한번 뻥긋해보질 못하고 있었다. 사지가 마비되어오는 듯한 긴장 속에서 무력하게 노인의 거동만 지키고 있었다. “글쎄, 어디서 밀려와서 어디로 밀려가는지 근본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패거리였지. 그 병자년 흉년 때 물밀듯 내리닥친 북쪽 사람들 말야.” 노인이 마침내 이야기의 실마리를 꺼내기 시작했다. 원장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노인은 이제 그 원장하곤 아랑곳도 없이 시선을 짐짓 외면하고 앉아서 차근차근 혼자 지난날의 기억들을 들춰나가기 시작했다. “원장도 아마 병자년 흉년이라면 애길 들어 알고 있겠지만, 그거 참 굉장한 난리였지.” 그 병자년 흉년 때 황장로는 평안도 묘향산 근처의 어느 산골 마을 변두리에서, 땜장이 일을 하는 늙은 할아버지와 그 땜장이 일을 거드는 꼬마둥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단다. 흉년이 들던 해 가을부터 겨울까지 북쪽에선 날마다 수백 명 수천 명씩 사람들이 떼지어 남쪽으로 몰려 내려가고 있었는데, 이 철부지 꼬마둥이 녀석에겐 그 그칠 줄 모르는 사람들의 떼를 구경하는 것이 무엇보다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늙은 땜장이 노인과 마을을 다녀와보니 그들의 외딴 움막집에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홀어미가 되어서도 차마 그 늙은 땜장이 노인과 어린 자식을 떠나지 못하고 있던 소년의 어머니가 무참한 죽임을 당해 있었던 것이다. 소년의 어머니는 벌거벗겨진 하반신이 온통 선혈로 낭자했고, 두 눈은 아직도 소년을 기다리고 있는 듯 천장을 멀겋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날도 산을 지나간 유랑민들의 짓이었다. 땜장이 노인과 소년이 죽은 어머니와 움막집을 버리고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는 유랑민들 사이로 끼여든 것은 바로 일이 있었던 날의 해질녘 일이었다. 노인과 소년은 있는 대로 옷을 끼어입고 집에 남아 있는 보리쌀과 소금 등속도 있는 대로 거적에 말아지고 길을 떠났다. 정처가 있을 리 없었다. 노인과 소년은 사람들의 떼에 섞여 무작정 남쪽을 향해 걸었다. 걷다가 날이 저물면 아무 곳에서나 길가에 거적을 깔고 밤을 새웠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곁에 쓰러져 누워 있던 사람들 중에 송장으로 변해 있는 사람도 많았다. 노인과 소년은 밤만 되면 언제나 둘이서 꼭 몸을 붙이고 잤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제법 추위를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집을 떠난 지 며칠 동안뿐, 지치고 늙은 노인과 소년은 체온은 두 사람의 것을 합해봐야 한 사람 몫을 넘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느날 아침 소년이 잠을 깨고 보니 이번에는 땜장이 노인마저 숨이 멎어 있었다. 노인은 그의 몸 속에 남아 있는 온기를 모조리 소년에게 건네주고 나서 아직도 아쉬운 듯 두 팔로 소년을 품안으로 꼭꼭 끌어안고 있었다. 소년은 그 노인의 뻣뻣한 팔에서 빠져나와 거적 속에 남아 있는 몇 줌의 보리쌀을 싸 짊어지고 다시 길을 떠났다. 황장로는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 목이 마른 듯 헛기침을 두어 번했다. 그리고는 묘하게 음산스런 미소를 입가에 흘리는가 싶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다시 이어나갔다. “하니까 그때 내가 웬 친절한 여편네를 한 사람 만난 것은 그렇게 다시 혼자 외톨박이로 길을 걷고 있을 때였지......” 소년 혼자 터벅터벅 길을 걷고 있으려니까 움막집에 버려두고 온 어머니 또래의 한 중년 아낙이 함께 길동무가 되어 가자고 사람 좋게 소년을 꼬드겨오더라는 것이었다. 노인은 그때 자기가 아낙을 만난 것이 무척이나 행운으로 여겨졌었노라고 했다. 아낙은 보리쌀과 밀을 섞어 삶은 것을 소년에게 나누어줄 뿐 아니라, 그 보리쌀 삶은 것을 열심히 씹고 있어 그런지 살집이나 혈색도 다른 사람처럼 초라해 보이지가 않아서 소년에겐 큰 의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행운에는 대가가 있었다. 그날 저녁 소년은 어느 산골 길가에서 아낙과 함께 거적을 깔았다. 그리고 깡마른 땜장이 노인 대신 이날 밤은 그 살집 좋은 아낙과 서로 체온을 의지하며 모처럼 기분 좋은 잠자리를 차렸다. 아낙은 소년의 손을 끌어다 자기의 젖가슴을 주무르게 했다. 움막집에 버려두고 온 어머니의 그것보다 훨씬 크고 따뜻한 젖가슴이 소년의 손길을 그득하게 했다. 소년은 한동안 그 아낙의 젖무덤을 즐기며 눈망울을 말똥말똥 밤별들의 장난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윽고 아낙이 소년으로부터 그 밤별들을 빼앗아가벼렸다. 아낙의 치마폭이 불시에 소년의 얼굴을 뒤집어씌워버린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소년은 아낙이 나눠주는 삶은 보리쌀을 몇 줌 얻어 씹으며 다시 그녀와 동행이 되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년은 이날도 해가 저문 다음 그녀와 함께 길섶에 거적을 깔고 밤을 지샜다. 아낙은 이제 소년에 대해 조금도 허물을 느끼지 않았다. 소년도 아낙의 눈치를 쉽사리 알아차렸다. 그는 아낙의 젖가슴을 빨아대고 치마 밑을 들추고 들어가서 그녀의 두 가랑이 사이에 머리를 끼워넣고 간밤부터 그녀가 몹시도 가려워하는 곳를 건드려주었다. 아낙은 혼자 킬킬거리며 좋아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아직도 그 가려움이 가시지 않은 듯 힝힝 앓는 소리를 하며 그 단단한 허벅지 살로 소년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졸라대기도 했다. 밤마다 그런 일이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늦게까지 아낙에게 부대끼고 난 소년은 아침잠이 부족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소년은 그 짓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몇 줌씩 얻어먹는 삶은 보리쌀이 소년을 아낙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아낙과 살을 맞대고 자는 훈훈한 새벽잠 역시 소년을 쉽사리 그녀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길을 걷는 것도 혼자서는 심심하고 겁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소년이 아낙을 떠나지 않기 위해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오직 그 한 가지뿐이었다. 며칠 동안이나 아낙과 함께 그런 밤을 겪고 난 다음이었을까. 그러나 소년은 마침내 그가 아낙에게 해줄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봉사마저도 기회를 빼앗기게 되는 날이 왔다. 아낙은 소년과 길을 걸으면서 앞서가는 무리를 따라잡게 되면 거기서 늘 누군가를 찾고 있는 눈치가 엿보였다. 앞선 무리 가운데서 사람을 찾아내지 못하면 뒤따라오는 무리를 기다렸다가 거기서 또 누군가를 찾기 위해 유심스레 눈알을 굴려대곤 하였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아낙은 충청도 땅 한 마을 어귀에서 역시 유랑민 사내들의 패거리를 한떼 만나게 되었는데, 아낙은 이날 밤 비로소 그녀가 찾고 있던 사람을 찾아낸 듯 쉽사리 그 사내들의 패거리와 얼려버렸다. 아낙은 그날 저녁도 역시 소년과 함께 사내들 사이에서 거적을 깔았으나 이제는 소년에게 가려운 곳을 맡기려 하질 않았다. 그녀는 패거리 중의 사내 하나와 밤새도록 몸이 엉켜 힘겨운 뒤집개질을 계속했다. 고마운 것은 이튿날 아침 그 사내나 아낙이 자기들의 패거리에서 소년을 아주 쫓아버리려 하지는 않은 것이었다. 소년은 그때부터 아낙과 함께 사내들의 패거리에 끼여 지내기 시작했다. 사내들은 한사코 길을 남쪽으로만 잡으려 하진 않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서두르는 일도 없었다. 아낙은 소년을 쫓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삶은 보리쌀을 나눠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보리쌀 외에도 아낙은 사내들로부터 뜨끈한 국물과 죽 같은 것을 얻어다가 소년에게 모처럼 간이 든 식사를 시켜주곤 했다. 하지만 소년은 이제 아낙에게 해줄 일이 없었다.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패거리의 사내들이 그 소년에게 새로운 일을 시켜주었다. 소년은 부지런히 일을 했다. 싫거나 좋거나 이젠 사내들이 시키는 일을 거역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패거리를 빠져나갈 생각도 없었으려니와, 그런 생각을 했다 치더라도 감히 엄두를 내볼 수 없을 만큼 사내들은 거칠고 난폭스러웠다. 그는 해가 저물고 나면 다른 유랑민의 떼가 몰려 쉬고 있는 잠자리로 스며들어가서 머리맡에 숨겨 넣어둔 보리쌀이나 밀기울 같은 것을 훔쳐 날랐다. 아낙네들의 뒷머리에서 비녀를 빼오기도 했고 밤이슬을 막기 위해 어린것의 머리를 뒤집어씌운 옷가지를 벗겨오기도 했다. 먹을 것을 못 먹어 시들시들 비틀거리는 개를 돌로 쳐 죽여가지고는 등덜미에 메고 낑낑거리며 사내들을 따라다닌 적도 있었다. 다른 유랑민의 떼가 밤을 새고 떠나간 곳에서 숨이 끊어져 남아 있는 젊은 여자를 발견하면 소년은 사내들에게 그 여자가 있는 곳을 알려주고, 사내가 그 여자의 아랫도리를 벗기고 괴상한 장난을 치는 동안 소년은 사내가 힘들이지 않고 그 짓을 할 수 있도록 시체의 뻣뻣한 두 다리를 벌려 붙잡고 멍청하게 앉아 있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사내가 그 짓을 다 끝내고 나서 침을 퉤퉤 뱉으며 그곳을 떠나고 나면 이번에는 소년이 그 여인에게로 달려들어 시체의 머리털을 깡그리 잘라오곤 했다. 한번은 조금이라도 더 머리털을 길게 자르고 싶은 욕심에서 가닥가닥 뿌리까지 머리를 뽑아오느라 사내들의 패거리를 아주 놓치고 말 뻔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마침내 사내들의 패거리를 떠나고 말았다. 그가 그토록 열심히 일을 해가며 따라다닌 사내들이 어렸을 때 땜장이 할아버지로부터 늘상 이야기를 들었던 그 무서운 문둥이떼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년이 패거리를 떠난 것은 사내들이 문둥이였기 때문에 그게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소년이 그런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 자신의 몸에도 이미 여기저기서 붉은 반점이 솟아나고 있었다. 소년은 자기가 이미 문둥이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시체를 움막집에 버려두고 길을 떠나올 때처럼,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땜장이 할아버지가 기척도 없이 송장으로 변해버린 것을 알고 났을 때처럼 조금도 서럽거나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문둥이도 되고 보니 별게 아닌걸. 소년은 오히려 이상한 용기가 솟았다. 오히려 이젠 패거리를 떠나서도 넉넉히 혼자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이상스런 자신감마저 생겼다. 어느 날 저녁, 그는 슬그머니 아낙과 사내들의 패거리를 빠져나와 거꾸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밤새도록 길을 걷고 나서 아침해를 본 것이 경상도 봉화 땅이었다. 황장로의 이야기는 갈수록 더 끔찍스러워져가고 있었다. 이삼 년 후의 일이었다. 봉화 땅 산중 고갯마루의 한 주막집에서 소년은 그 후 한 이태 동안 주동 노릇을 하고 있었다. 병세가 별로 눈에 드러나지 않아서 주막집 주인 녀석은 그때까지도 아직 소년의 비밀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 주막집 주인 사내는 성미가 마침 음흉스럽기 짝이 없는 작자였다. 작자는 주모 겸 밤색시감으로 엉덩판이 요란스런 계집 하나를 함께 데리고 지냈는데, 길손이 주막을 지내게 되는 날은 그 색시를 슬그머니 길손에게 안겨주고 자기는 그 손님의 물건을 훔쳐내는 데 재미가 붙어 있었다. 소년이 그런 눈치를 알아차리게끔 되자 녀석이 소년에게 그 짓을 대신 시켰다. 어쩌다 일이 빗나가서 말썽이라도 붙게 되면, 작자는 그제서야 두 눈에 불을 켜달고 나타나서 자기 계집 빼앗긴 사내 구실을 톡톡히 행사하곤 했다. 길손들은 잃은 물건을 다시 찾을 생각켜녕 엉큼스레 남의 계집 넘본 허물을 뒤집어쓰고 곤욕만 실컷 당하다 쫓겨가기 일쑤였다. 소년은 주인 사내를 그토록 번거롭게 할 일도 별로 없었다. 그는 이제 세상만사 거리낄 일이라곤 없었다. 소년은 이윽고 제 손으로 길손들을 붙들어다 색시를 붙여주고, 그 자신이 모든 일을 결말지어 버릴 수 있을 만큼 담이 커져 있었다. 물건을 훔치다 들키기라도 하면 그는 오히려 비실비실 맥빠진 웃음을 흘리며 품속에 숨기고 있던 부엌칼을 내보였다. 술에 취한 길손들은 덤벼들려는 사람이 없었다. 덤벼들어서도 안 되었다. 덤벼들기만 하면 소년은 정말로 칼침을 사양하지 않을 참이었고, 비실비실 맥빠진 웃음을 흘리고 서 있을 때 소년의 얼굴에는 언제나 그 이상스런 살기가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짓을 한 이태쯤 되풀이하고 나니 소년은 이제 그 짓도 그만 시들해지고 말았다. 소년은 다시 주막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때쯤 해서는 병세도 제법 눈에 드러나보일 정도가 되어 그러지 않아도 이젠 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늦은 가을. 하루는 주인 사내가 물건을 구하러 읍내 쪽으로 산길을 내려가버린 바람에 주막집에는 소년하고 색시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하룻길이면 돌아오곤 하던 사내가 웬일인지 이날은 밤이 늦도록 사립을 들어서는 기척이 없었다. 이날따라 주막을 찾는 길손도 없었다. 주인 사내는 길손이든 색시는 남자가 없으면 원래 잠시도 사지를 가만히 개고 앉아 있질 못하는 성미였다. 색시가 심심해 죽을 지경이었던지 끝내는 손님에게 한 가지 엉뚱한 선심을 베풀어왔다. 소년에게 자기의 젖을 먹여주겠다는 것이었다. 주인 사내가 돌아오지만 않으면 색시는 이날 밤 소년을 자기와 함께 곁에 재워주겠다고도 했다. 소년은 그러나 기분이 냉큼 내켜오질 않았다. 웬일인지 연전에 길을 걸어오다 만난 그 살집 좋은 아낙과의 일이 떠올랐다. 그는 불쑥 짖궂은 장난기가 솟아올랐다. 그는 색시에게 자신이 문둥병을 숨기고 있다로 일러주었다. 그리고는 곧이를 잘 들으려 하지 않는 색시에게 비실비실 실없는 웃음을 흘려보이며, 자주색 반점이 수놓인 자신의 속살을 들춰보였다. 색시가 비로서 질겁을 하며 소년에게서 도망질을 쳤다. 하지만 소년의 장난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 반쯤 맥이 풀린 듯한 웃음기를 입가에 흘리며, 부엌칼을 찾아들고 지긋지긋 심술궂게 색시를 쫓아다녔다. 그리고는 아직도 소년의 행동을 장난으로 믿고 싶어하는 계집의 옷을 벗기고 천성처럼 여인들이 늘 간지럼을 안고 다니는 곳을 알뜰히 도려내주었다. “주막집을 도망쳐나오면서 나는 옛날 움막집에 버려두고 온 어머니 생각을 했지. 생각을 할래서가 아니라 어쩌다 그때 일이 다시 떠오르더군. 아마 눈 못 감고 죽은 여자를 보게 되니까 그랬는지 모르지.” 황장로가 비로소 원장 쪽을 돌아보며 가만히 혼자 한숨을 삼키고 있었다. 그는 이제 그만 이야기를 끝낼 참인 것 같았다. 원장은 처음이나 이때나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때째로 오한 같은 것이 부르르 육신을 스쳐가는 자신을 견디면서 그는 줄기찬 침묵으로 노인과 맞서고 있었다. 차분차분 노인의 목소리가 가라앉아가면 갈수록, 원장의 두려운 침묵에는 그나마 초인적인 인내가 필요했다. 도대체 이 영감은 무얼 어쩌자는 것인가. 무얼 어쩌자고 저토록 잔인스런 이야기를 저토록 한가하게 들춰내고 있는 것인가- 결판을 내라, 결판을! 그래서 이젠 일을 그만두자는 것이냐. 그래서 당신은 오늘 또 어떤 무서운 음모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냐. 원장은 속으로 혼자 절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절규는 한마디도 원장의 입술을 통해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그런데 말씀이야, 원장. 지금까지 이야기가 이 늙은이 한 놈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원장도 벌써 익히 알고 있는 일이 아니겠나....” 황장로는 이제 이야기의 결론을 말하려는 듯 다시 원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황장로의 말은 뭐가 뭔지 당장 그 뜻을 분명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건 우리 섬 문둥이들 모두의 이야기야. 사정은 조금씩 다를지 모르지만 모두들 같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거든. 모두가 그런 녀석들이야. 모두들 무서운 일을 감당하면서 이 섬으로 왔고 섬으로 와서도 또 못지않게 무서운 일들을 감당해내면서 지금까지 살아 남았지. 한데 원장이 또 이번 일을 시작하자고 했지. 하지만 원장도 이미 다 그런 사정은 알고 대든 일이 아니었나 말야.”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원장이 결룩은 견디다 못해 다그치고 들었다. 황장로가 잠시 말을 끊고 그 원장의 얼굴을 조용히 훑고 있었다. 그리고는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원장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구만. 원장은 지금 나한테까지도 겁을 먹고 있는 얼굴이거든. 그게 탈이야. 원장이 그렇게 겁을 먹으면 일은 크게 빗나가지. 아까도 말했지만 문둥이는 누가 겁을 먹은 걸 보면 공연히 심술이 사나워져서 점점 더 추악하고 난폭한 꼴을 보인다지 않았는가 말야. 그 주막집 색시 애긴데, 생각해보면 그 여자도 아마 겁을 먹고 날뛰었기 때문에 엉뚱한 화를 부르게 된 꼴이었지. 겁을 먹은 걸 보니까 난 점점 더 심술기가 동했거든. 문둥이끼리라면 절대로 서로 겁을 먹을 일은 없으니까 말야. 문둥이들은 그걸 알고 있지.” 황장로의 말투는 지금까지 원장이 예상하고 있던 쪽과는 거리가 꽤 있었다. 원장은 지금까지 노인이 일을 벌이기 전에 자신의 각오를 한 번 더 매섭게 다지고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것이 황장로의 이야기에 대해 그가 들어온 공통적인 해석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지금 이야기의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끌어가고 있었다. 원장은 노인이 필시 그의 노회한 속셈을 숨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절더러는 지금 무얼 어떠헥 하라는 말씀입니까?” 원장은 이제 거의 신경질적인 어조가 되고 있었다. “무얼 어떻게 하다니? 원장이 내게 그럴 물어써 쓰나?” 황장로가 원장을 나무랐다. “그야 원장이 할 일이란 간단하지. 원장은 그저 앞으로도 뱃심좋게 우리 문둥이들을 부려주기만 하면 되는 거지. 문둥이들만 잘 부려주면 되는 게야. 지금까지 이야기도 내 그래서 원장한테 무슨 도움이 될까 하고 귀띔을 해주는게 아닌가 말야.” “......” “겁먹지 말고 죽도록 일을 부리라 이 말이지. 그렇게 지내온 놈들이라 하려고만 들면 무슨 일이고 끝장을 보고 말 녀석들이니까. 게다가 원장은 이번 일에 대해 추호도 망설일 필요가 없는 명분이 있지 않나. 그런 원장이 우릴 부려댈 명분도 명분이지만 우리들 쪽에서도 지금까지 감당해온 숱한 고난들 가운데서 모처럼 명분다운 명분이 서는 일이거든. 하지만 원장이 먼저 겁을 집어먹은 꼴을 보이면 모든 건 끝장이야. 저 녀석들 가슴속에 숨겨진 독기는 아닌게 아니라 제 몸을 던져 둑을 쌓아올리라면 능히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망, 원장이 겁을 먹은 기색을 보이고 보면 그건 하루아침 동안에도 썩 잔인스런 심술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니까.....” “......” “추위는 몰아닥치겠다, 돌둑은 솟아오를 기척이 안 보이겠다, 원장도 아마 어지간히 속은 썩을 게야. 그렇다고 이제 와서 발 개고 나 앉아버릴 수도 없는 일, 어쨌거나 맘을 더 크게 먹고 버텨나가자밖에. 겨울 걱정도 원장이 지레 할 일은 아니야. 제놈들 가운데 눈비 가리며 목숨 부지해온 놈이 몇이나 된다고 겨울 일 마다할 주제들이 되나. 막말로 제 몸뚱어릴 던져넣어서 둑으로 솟아오르래도 우린 아직 원장을 탓하진 않아.” 황장로는 비로소 할 말을 다한 듯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원장은 아직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노인의 뜻을 알 만했다. 노인의 충고에 원장은 손이라도 덥석 붙들고 싶을 만큼 고마웠다. 하지만 그는 그럴수록 노인이 두려웠다. 황장로는 자기의 진짜 내심을 숨기고 있었다. 노인에겐 말로 드러난 것 외에도 끝끝내 자기 속에다 혼자 숨겨버리고 있는 것이 있었다. 원장은 그런 황장로를 알고 있었다. 그는 원장보다도 더 줄기찬 인내로 자꾸만 무력하게 허물어져가고 있는 자신의 의지를 지탱해내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노인이 원장에게 한 말 가운데에 은연중 암시가 되고 있었다. 문둥이들은 가슴속에 숨긴 독기로 제 몸을 물 속으로 던져넣어 둑을 솟아올리라면 능히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바로 그 독기야말로 원장이 겁을 먹은 기미만 보이면 하루아침에 곧 잔인스런 심술로 둔갑할 수도 있는 것이라는 노인의 말은 그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문제는 그 독기의 향방이었다. 원장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황장로였다. 그리고 그 독기가 자꾸만 잔인스런 심술로 바뀌려 하고 있는 것도 그 황장로 자신에게서였다. 황장로는 원장 앞에 자꾸만 자신의 의지가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돌둑이 솟아오르지 않는 것을 보고 원장 못지않게 초조해하고 있는 것도 황장로 자신이었다. 그는 누구나 서로 배반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던 원장과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옛날의 심술이 되살아나려 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원장의 두려움을 보고는 더욱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을 터이었다. 그가 어느새 깊이 잠들어 있는 자신의 독기를 주물럭거리고 있었다는 것은 그 가장 좋은 증거였다. 하지만 노인은 끈질기게 참고 있었다. 그는 그 자신의 독기를 방둑이 떠오를 때까지 자신을 견디며 기다릴 인내력의 증거로 삼고 싶어했다. 노인은 마침내 조원장 앞에서 그것을 어느 정도 성취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원장은 이제 그 황장로를 안심할 수가 없었다. 노인은 지금 그토록 혹독한 자기 시련 속에서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할 만큼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노인은 자기의 이야기를 하면서 원장에 대해서보다는 기실 그 자신에게 더 많은 충고와 회유를 행하고 있었던 터이었다. 그러면서도 노인은 끝끝내 자신의 동요는 털끝만큼도 내색을 해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원장은 그런 노인을 알고 있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사태가 이제 막바지 고비까지 아 있는 셈이었다. 원장은 무어라고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노인은 그러고 있는 원장이 아무래도 미심쩍어진 모양이었다. 한두 발자국 천천히 비탈길을 걸어내려가던 노인이 다시 한번 다짐을 줄 일이 있다는 듯 원장을 돌아다보았다. “문둥이들을 어떻게 부리더라도 원장을 탓하진 않는다는 거 원장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야. 오해가 있을지 몰라 내 한 가지 더 애기해두고 싶은 게 있는데, 우리 문둥이들은 세상을 살아오면서 뼛속에 새겨두고 있는 일이 두 가지 있지.” “...” “그 두 가지가 뭔고 하니, 팔다리 성한 놈 어느 놈도 문둥이 위해 본심으로 일하는 놈 없고 선심 베풀고 싶어하는 놈 없다는 거 알고 있는 게 그 하나고, 그러니까 문둥이도 자기 말고 딴사람 위해 아무것도 생각할 거 없다는 생각 가지게 된 것이 그 두번째지. 문둥인 남이 자기 위해 일해준다는 거 곧이들을수 없고, 남 위해 일하는 법 없다는 소리야. 이건 원장한테도 마찬가지야. 우린 아직오 원장이 우리 위해 일한다고 믿고 있진 않아. 마찬가지로 우리 문둥이들이 원장 위해 일한다는 생각 역시 천부당 만부당한 생각이지.” “저도 이젠 누굴 위해서라거나 누구 바라서 이 짓 하고 있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원장이 오랜만에 결연스런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황장로를 똑바로 건너다보았다. “그거 참 옳은 생각이야. 그렇다면 우리 문둥이들이 원장을 탓하거나 원망을 지닐 리가 없다는 말도 믿을 수가 있겠구만.” 그러나 노인은 거기서 다시 고개를 지그시 기울이면 마지막으로 원장을 힐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마 원장의 맘이 다 그렇지는 못할 거야. 원장은 지금까지 그런 오헬 하고 있었던 흔적이 분명하거든. 원장은 우릴 위해 잉ㄹ하고 우리 문둥이들은 원장 때문에 일한다는 생각....... 그런 오해가 없고서야 오늘 와서 새삼 겁을 먹을 일이 있나.” “장로님께 제가 그토록 겁을 먹고 있는 걸로 보였다면 그건 아마 저 바다나 제 자신에 대해서였을 거라고 하는 편이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장로님 말씀처럼 전 앞으로 저 수많은 원생들에게 닥쳐들지도 모르는 만일의 실망에 대해서도 정말 아무두려움을 지닐 필요가 없을까요?” “그야 물론 그런 실망이 오게 해서는 안 되지. 오늘 우리 이야기도 종당엔 다 그런 실망을 미리 불러들이진 말자는 거니까.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긴대도 원장이 미리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겠지.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고. 그래서는 문둥이들한테 속마음을 들키기가 쉽게 되거든. 도대체 원장이 우리 문둥이 위해 일하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면 그거부터가 웃음거리니까. 게다가 우리 문둥이가 원장 위해 일하고 원장 때문에 실망을 하게 될 거라 생각한다면 그건 더 큰 웃음거리지. 글쎄, 문둥인 남 위해 일하는 법 없다는 데 그러는구만.” 공사장 일은 겨울 추위에 상관없이 강행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길고도 위태로운 싸움이었다. 그것은 스스로 인간을 용납할 주 모르는 비정한 바다와의 싸움이었고, 길고긴 겨 울 추위와의 싸움이었고, 사람과 사람이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마지막까지 시험해보고자 하는 인내려과의 싸움이었다. 원장으로선 그 바다보다도 겨울 추위보다도 사람과 사람끼리의 싸움이 더 한층 힘겨웠다. 그는 원생들과도 싸웠고 황장로와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생들이나 황장로도 그 원장을 상대로 같은 싸움을 계속했다. 원장과 황장로들은 서로 누구 쪽이 이 싸움에서 자신을 더 오래 견딜 수 있는가를 판가름내기 위해 끈질긴 인내를 발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결국 바다도 없고 추위도 없고 종극에ㅐ는 상대방마저 문제가 되지 않는 그 자기 의지와의 줄기찬 싸움이었다. 그 길로 쓰라린 싸움에도 종말은 다가오고 있었다. 한 해가 바뀌고 겨우내 총총한 회색빛으로 가라앉아 있던 남해 바다가 서서히 냉기를 벗기 시작한 이월 하순 무렵이었다. 어느 날 아침 조원ㅇ장은 오마 고지 작업 지휘소를 들러 나오다 거기 언제나처럼 눈앞을 가득 차오르는 바다 가운데서 문득 이상한 변화를 보았다. 풍남 반도와 오동도 사이의 제1방조제 작업장 일대의 해면 위에 전에는 볼 수 없던 긴 물띠 같은 것이 하얗게 뻗어 있었다. 원장의 눈길에선 일순 번갯불 같은 섬광이 지나갔다. 다음 순간 그는 정신없이 산비탈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몸을 굴리다시피해서 산을 내려온 원장은 그 길로 곧 배를 내어 오동도 쪽으로 나아갔다. 배를 타고 보니 좀더 분명히 떠올라 보여야 할 그 물띠는 다시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환각이었던가? 환각이 아니었다 . 원장은 곧 그것을 깨달았다. 때가 마침 사리 무렵이었다. 바다는 어느 때보다도 밀물이 높아지는 대신 썰물 때는 또 어느 때보다 바닥이 얇아진다. 는 대신 썰물 때는 또 어느때보다 바닥이 얇아진다. 지금은 그 바다 밑이 가장 얇아지고 있는 사리 때의 썰물이었다. 물띠는 바다 밑에 숨어 있던 돌둑이 비로소 그 얇아진 물길 속 어디쯤에서 안타까운 발돋움을 해 올라오고 있는 신호였다. 물띠로 보인 것이 바로 돌둑은 아니었다. 돌둑은 물 밑에서 파도를 죽이고 있었다. 넘어진 파도가 이어져서 하얗게 긴 물띠를 이루고 있었다. 그 물띠 밑에서 돌둑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물띠는 높은 곳에서나 분별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배에서는 다만 파도에 가려진 다른 파도를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원장은 실성한 사람처럼 황급히 배를 몰아갔다. 그리고 그의 배가 오동도를 지나 1호 제방 축성 수면 뒤로 들어섰을 때 그는 그 산 위에서 내려다본 물띠 밑으로 또하나 하얀 돌 줄기가 환상처럼 길게 뻗어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한두 길 물 밑까지 마참내 그 진짜 돌둑이 솟아올라와 있는 것이었다. 원장은 숨이 막힐 듯했다. 그는 벅찬 감동을 누르기 위해 잠시 동안 조용히 눈을 감고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그 하얀 돌둑이 요술처럼 금새 눈앞에서 다시 사라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제풀에 흠칫 소스라쳐 놀라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파도 아래로 돌둑은 여전히 길고 곧게 드러누워 있었다. 원장은 아무래도 그 돌둑이 돌둑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생애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무엇을 보고 있었다. 물밑을 달리고 있는 그 어슴푸레 휜 선분은 너무도 아름답고 환상적이었다. 그것은 영혼을 지니고 숨을 쉬며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체였다. 원장은 꿈길을 따라가듯 하얀 돌둑을 쫓아 조심스럽게 배를 몰아나갔다. 배가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간 만큼 물 밑의 선분도 앞으로 그를 앞장서며 물 밑을 뚫어 나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이 초봄의 남해 바다 위에서는 원장이 375미터 1호 제방 예정선을 따라 풍남 반도 쪽 둑머리로 올라설 때까지 한바탕 뜻하지 않은 해상 행진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원장의 배가 오동도를 지나면서부터 돌을 실어나르던 작업선들이 한척 두척 그의 배를 뒤따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그것이 제법 거창한 해상 행진의 대열을 이루며 바다를 온통 뒤덮고 말았다. “조원장 만세!” “소록도 만세!” “오마도개척단 만세!” 작업선의 원생들은 조원장의 배를 뒤따르며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질러댔다. 풍남 쪽 대안에서도 낌새를 알아차린 원생들이 하얗게 둑머리로 몰려나오고 있었다. 바뀌고 바뀐 세월 싸워가면서 …… 대안의 원생들은 갈퀴 모양의 개척단 표지가 그려진 오마기를 뒤흔들며 오랜만에 다시 그 「소록도의 노래」를 합창했다. 합창 소리는 이내 이쪽 선단까지 번져 건너왔다. 둑머리와 배 위에서 불러대는 합창 소리가 한 곳으로 점점 가까워지다가는 둑머리 근처에서 마침내 뒤죽박죽으로 서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둑머리 쪽 원생들은 물 밑으로 뻗어나온 돌둑을 따라 아랫도리를 적시며 바다로 몰려 내려왔고 배를 저어 온 원생들은 물가에도 닿기 전에 동료들 사이로 성급하게 배를 뛰어내렸다. 원장이 배를 내리자 둑머리 일대는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다. 원장을 에워싸고 다시 한번 만세 소리가 터지고 합창이 시작되었다. 흥분한 원생들은 차가운 줄도 모르고 무작정 둑을 따라 바닷물 속으로 밀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 와중에서도 아직 냉정을 잃지 않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언제 건너와 있었는지 황장로가 미리 원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흥분한 원생들을 제지하며 그 황장로가 원장 앞으로 나섰다. “모두들 기다릴 수가 없는가보오.” 황장로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그러나 원장은 그 노인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떨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오늘로 이 둑을 걸어 건너고 맙시다. 원장이 앞장을 서주시오.” 그건 참으로 이상한 제안이었다. 이 차가운 물 속으로 황장로는 지금 둑을 걸어 건너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원장은 황장로의 그런 제안이 조금도 이상스럽지가 않았다. “앞장을 서루 말구요. 풍남과 오동도를 걸어서 건너는 일을 누가 오늘 사양하겠소.” 조원장은 어느새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다들 원장님께 먼저 둑을 건너도록 해드려라.” 황장로가 원장을 앞질러 둑 위로 들어서 있는 원행들에게 소리쳤다. 모두들 원장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원장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릴 생각도 않고 하얗게 돌둑이 뻗어 있는 바닷물 속으로 성큼 들어섰다. 물론 신발도 발에 신은 그대로였다. 그는 여느 때의 차림 그대로 그냥 물 속을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그 사이 돌둑 위를 넘나들던 물길이 훨씬 더 낮아져 있었다. 바닷물은 원장의 오금 높이에서 이제 썰물이 끝나 있었다. 원장은 둑 위를 얇게 넘나드는 파도를 가르며 거인처럼 꿋꿋하게 바다를 걷고 있었다. 너덧 발자국 뒤에서 황희백 노인이 그 원장을 뒤따랐고, 그리고 다시 그 황희백 노인의 두를 이어 수백 명 원생들이 너나없이 돌둑을 가득 밟아나오고 있엇다. 바다를 건너가는 대열에선 합창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그 대열의 어떤 데선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한동안씩 행진을 멈칫거리고 있기도 하였다. 추위 같은 걸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행진을 앞장서 이끌어가고 있는 원장은 한번도 그를 뒤따르는 무리를 돌아다보는 일이 없었지만, 그것도 그가 아랫도리가 시려오는 것을 못 견뎌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비로소 바다를 이긴 개선 장군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다보다도 더 깊은 정망의 심연에서 5천 문둥이의 영혼을 되살려낸 개선의 행진이었다. 그 개선 행렬을 인도하고 있는 원장은 자신도 모르게 더운 눈물이 자꾸 볼을 적셔 내리고 있었다. 원장은 울면서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그는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다. 차가운 바닷물 속의 행진. 그것은 참으로 무모하고도 이상스런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행렬에 끼어들어 있는 사람들에겐 조금도 이상스럽다거나 무모할 것이 없는 행사였다. 그것은 오히려 그만큼 장엄하고 감동적인 한 편의 해상 드라마였다. 그리고 그 감동스런 해상 행진은 물론 그 한번만으론 족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직도 제2호, 제3호 방조제가 남아 있었다. 오동도와 풍남 반도를 연결하는 제1호 방조제 돌둑을 걷고 난 원생들은 꺼져가던 사기가 되살아나싸ㄷ. 공사장은 다시 활기가 넘치고 작업 능률은 어느 때보다도 급상승했다. 3호 방조제 바깥 바다 위에 떠 있는 돌섬 ㅁ나재도가 빠른 속도로 작아져갔다. 1호 방조제를 걸은 지 한 달 만에 조원장은 원생들고 함께 다시 2호 방조제 338미터 돌둑을 걸었다. 두번째의 방조제가 떠올라왔을 때는 상욱까지도 원장 곁에서 돌둑을 함께 건너고 있었다. 첫번째 돌둑이 떠올랐을 때는 걷잡을 수 없는 원생들의 흥분 속에서도 이상스럽게 오히려 겁을 먹은 사람처럼 표정이 잔뜩 굳어져 있던 상욱이었다. 그 상욱이 두번째 방조제가 떠올랐을 때부터는 제물에 성큼 돌둑을 들어서며 말없는 감동 속에 묵묵히 그 원장의 뒤를 따라나서고 있었다. 어쨋거나 이제 남은 것은 3호 방조제 뿐이었다. 만재도가 더욱더 빠른 속도로 헐려져나갔다. 4월이 지나고 5월로 접어들면서부터는 만재도마저 가물가물 해변 아래로 마지막 모습이 가라앉아 들어가고 있었다. 제3방조제 쪽은 시일이 아직 좀더 걸렸다. 길이도 길이지만, 이 3호 방조제가 연결되고 나면 간척장 안으로 들어가는 조수(潮水)가 끊어지고 둑 안에선 장차 옥토로 일구어질 해상(海床)이 떠오르게 된다. 물길이 끊긴 조수의 횡포가 이만저만 거세지 않을 터이었다. 3호 방조제에는 좀더 많은 돌을 던져넣었다. 5월도 하순 무렵이 되자 ㅁ나재도는 이제 침몰선의 돛대처럼 마지막 돌기둥 하나를 남긴 채 완전히 해면 아래로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원장은 마침내 만재도의 채석 작업을 중지시켰다. 뒷날 누군가가 그것 내력을 물으면 땅에서 쫓겨나 땅에서 살기를 염원했던 옛날의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후손을 위해 이 섬을 ㅎ헐어다 후손의 땅을 막으면서 한을 풀고 갔노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무심한 돌기둥 하나를 섬의 흔적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원장이 마지막으로 오마도와 봉암리를 잇는 제3방조제 1,560미터를 걸어 건넌 것은 그 5월이 채 다 가기도 전의 어느 날 일이었다. 원장이 그 3호 방조제를 걷고 나서도 한동안 더 돌을 던져넣자 이젠 제방 안쪽 해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해상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넓이를 더해갔다. 드디어는 만조 때가 되어도 돌둑을 넘어드는 파도가 없어지게끔 되었다. 조수는 몇군데 절강터로 남겨둔 물길을 타고 둑 안을 길게 뻗어 들어왔다 가곤 할 뿐이었다. 제방을 향해 기세좋게 달려들던 파도들이 넘실넘실 썰물 때까지 둑 안을 기웃거리다가 하릴없이 다시 심해로 물러가버리곤 했다. 가나안은 눈앞에 있었다. 제방에 갇힌 섬들이 이젠 거뭇한 개펄 위로 완전히 발부리를 드러내게 될 ㅁ나큼 돌둑이 높아진 어느 날, 조원장은 작업 지휘소가 있는 오마 고지 둔덕에서 다시 한차례 술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 술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둔덕에서 원장과 섬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룩해낸 역사(役事)의 결과르 ㄹ보고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땅과 바다가 완전히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늘펀하게 바다가 드러누워 있어야 할 그곳에 330만 평의 광활한 대지가 새로 솟아올라와 있었다. 해변 위에 점점이 뿌려져 있던 섬들은 이제 한낱 보잘것없는 언덕이 되어 지표 위에 납짝 엎드려 있었고, 벌판은 거기서도 아직 눈길이 아득할 만큼 먼 대안의 산기슭까지 펼쳐지고 있었다. 절강터를 비집고 들어선 물줄기가 그 넓은 벌판을 순례자처럼 이리저리 휘돌아나가고 있었다. 둑 바깥쪽 해면에는 눈에 익은 만재도가 사라지고 없는 것도 보는 사람의 감회를 새롭게 했다. 만재도가 떠 있어야 할 해면 위엔 엣 섬의 흔적으로 일부러 남겨진 석주 하나가 하얗게 가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제2의 천지 창조였다. 천지 창조라는 말이 신의 권능을 모독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마 그 신의 권능과 보살핌을 입은 인간들이 그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이룩해낸 가장 아름답고 장엄한 지상의 예술 작품 같은 것이었다. 조원장은 눈부신 오후의 태양빛 속에 가물가물 하얗게 떠올라 있는 그 해면 위의 돌기둥을 내려다 보고 있다가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두려운 전율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조원장은 문득 그 수많은 문둥이들과 그 문둥이의 후손들을 위해 바다 위의 석주에다 새겨 남기고 싶은 간절한 몇 마디 말이 떠돌랐다. 여기---- 그토록 인간을 소망하던 문둥이들에게 그 지친 영혼들이 안식할 땅을 위해 큰 산이 바다되고 바다가 다시 육지 됨을 보게 하여주신 거룩한 신의 섭리여! 背 1 21 투석 작업이 일단락지어지고 난 다음 공정(공정)은 솟아오른 돌둑 위로 흙을 돋워올리는 성토 작업이었다. 송토용 흙을 운반하는 데는 궤도차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리했다. 형편이 닿는데까지 많은 궤도차를 들여왔다. 흙을 실은 궤도차들이 채토장과 둑 사이를 부산하게 으로내렸다. 궤도차를 밀지 않는 사람들은 등짐과 뱃길로 흙을 날라다 부었다. 그것은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로 부작정 바윗돌을 던져 넣는 1단계 투석 작업 때보다도 훨씬 신이 나는 일이었다. 돌둑은 거센 파도를 견디면서 하루하루 안쪽 별이 두꺼워져갔다. 둑 벽이 두꺼워진 만큼씩 궤도차의 레일도 날마다 길이를 연장해나갔다. 일을 한 만큼 작업 성과가 눈에 드러나보였으므로 그만큼 사기도 높았고, 작업 진도 또한 저절로 가속도가 붙어갔다. 한데 그런 성토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던 7월 초순께부터였다. 공사장에 큰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태풍에 대한 걱정이었다. 멀지 않아 곧 태풍철이 시작될 시기였다. 조원장 나름으로는 벌써부터 그게 은근히 근심이 되어오고 있었다. 더욱이 이 해 8월 15일에는 민간 정부가 수립되어 병원장 직무는 민정 이양과 동시에 민간인 원장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었지만 때가 때인칸큼 조백헌 원장은 20년 가까운 군영 생활의 제복을 미련 없이 벗어던지고 스스로 민간인 원장이 되어 섬 안에 계속 주저앉아버리고 있는 터였다. 오마도 일을 시작할 때 서약을 걸었던 권총 한 자루를 증거로 남겼을 뿐, 조원장은 제복을 벗고 나서도 여전히 그 간척장 일에 매달리느라 전역의 아쉬움을 달래볼 틈도 없었던 처지였다. 하지만 방둑이 웬만한 바람쯤 쉽게 견뎌낼 수 있게 되기 전에 일을 ㅁ나나고 보면, 지금까지의 수고는 하룻밤 사이에 말끔 허사가 되어 버릴 염려가 있었다. 걱정을 하면서도 뾰족한 대비책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일을 서둘러서 진짜 태풍철로 접어들기 전에 방둑을 조금이라도 튼튼하게 돋워두는 수밖에 없었다. 이 해에는 마침 진짜 태풍철을 접어들고 나서도 아직 큰 바람이 일지 않은 채 그럭저럭 여름을 넘겨가고 있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쩌면 이 섬에 주님의 돌봄이 있어 이 해만은 아주 바람이 없이 위험한 시기를 넘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희망의 한철이었다. 한데 그런 식으로 그럭저럭 아슬아슬한 고비를 거의 다 넘겨가고 있는가 싶던 9월 초순의 어느 날이었다. 방둑 일의 진척 상태는 아직도 전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형편인데, 끝내는 그 비정스런 태풍 소식이 가차없이 전해져오고 말았다. 원장은 안절부절 못했다. 원생들의 동요가 염려되어 그는 함부로 불안스런 내색조차 드러낼 수 없었다. 하루종일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앉아 바랍의 진로가 바꾸어지기만을 빌고 있었다. 조원장 나름으로는 벌써부터 그게 은근히 근심이 되어오고 있었다. 더욱이 이 해 8월 15일에는 민간 정부가 수립되어 벼원장 직무는 민정 이양과 동시에 민간인 원장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었지만 때가 때인 만큼 조백헌 원장은 20년 가까운 군영 생활의 제복을 미련없이 벗어던지고 스스로 민간인 원장이 되어 섬 안에 계속 주저앉아 버리고 있는 터이었다. 오마도 일을 시작할 때 서약을 걸었던 권총 한 자루를 증거로 남겼을 뿐, 조원장은 제복을 벗고 나서도 여전히 그 간척장 일에 매달리느라 전역의 아쉬움을 달래볼 틈도 없었던 처지였다. 하지만 방둑이 웬만한 바람쯤 쉽게 견뎌낼 수 있게 되기 전에 일을 만나고 보면, 지금까지의 수고는 하룻밤 사이에 말끔 허사가 되어버릴 염려가 있었다. 걱정을 하면서도 뾰족한 대비책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일을 서둘러서 진짜 태풍철로 접어들기 전에 방둑을 조금이라도 튼튼하게 돋워두는 수밖에 없었다. 이 해에는 마침 진짜 태풍철로 접어들고 나서도 아직 큰 바람이 일지 않은 채 그럭저럭 여름을 넘겨가고 있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쩌면 이 섬에 주님의 돌봄이 있어 이 해만은 아주 바람이 없이 위험한 시기를 넘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희망의 한철이었다. 한데 그런 식으로 그럭저럭 아슬아슬한 고비를 거의 다 넘겨가고 있는가 싶던 9월 초순의 어느 날이었다. 방둑일의 진척 상태는 아직도 전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형편인데, 끝내는 그 비정스런 태풍의 소식이 가차없이 전해져오고 말았다. 원장은 안절부절 못했다. 원생들의 동요가 염려되어 그는 함부로 불안스런 내색조차 드러낼 수 없었다. 하루종일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앉아 바람의 진로가 바꾸어지기만을 빌고 있었다.오후 해가 설핏해질 무렵부터는 득량만 일대에도 벌써 파도가 하얗게 뒤집히기 시작했다. 잿빛 수평선을 넘어온 구름장들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머리 위를 빠르게 지나갔다. 그는 원생들의 작업을 중단시키고 막사 단속을 지시했다. 이날은 물론 야간 작업도 단념한 채 모든 작업 공구와 기재들을 한데 모아다가 바람의피해를 막게 했다. 토석 운반선들은 제방 안쪽 수로 끝에다 안전하게 대피시켰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원장은 철저한 야간 경비를 명령하고 나서, 그 자신도 이날 밤은 오마 고지 작업 지휘 막사에 남아 라디오 뉴스를 지키고 있었다. 제주도 남쪽을 치달아 올라오고 있는 바람이 이튿날 새벽녘 까지는 오마도 일대에도 본격적인 상륙을 시잣 할 것 같았다. 바람의 중심 세력이 스치는 지역의 피해는 예상을 불허할 만큼 심대하리라는 것이었다. 원장은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 들어오는 비극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었다. 제발 이곳만은 바람을 비키게 해주십시오. 바다와 육지가 온통 거꾸로 뒤바뀌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만은 제발... 원장의 기구도 아랑곳없이 자정녘이 지나서 부터는 세찬 바람기에 빗방울까지 흩뿌리기 시작했다. 원장은 이제 막사 안에 숨어 앉아 부질없는 기구만 외우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불현듯 우의를 뒤집어쓰고 작업지휘소 언덕길을 내려갔다. 빗속을 굴러내리다시피 하면서 둑머리에 도착해보니 원생들도 여태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둑머리 일대의 어둠 속에는 가마니 때기를 둘러싸고 몰려나온 원생들의 그림자가 장바닥처럼 여기저기 비를 맞으며 웅크리고 있었 다. 원장은 그 소리없는 원생들의 소망 앞에 다시 한번 가슴이 메어져 왔다. 하지만 엄청난 자연의 횡포 앞에 인간들의 기원 따윈 너무도 무력했다. 새벽녘부터 본격적인 상륙을 시작한 바람은 방둑을 요절내지 않고는 절대로 소동을 끝내고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기원을 해도 소용 없고 앙탈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거파들은 능히 방둑을 쌓아올린 바윗돌까지도 후려 나려버릴 만큼 기세가 사나왔다.바다와 하늘과 육지가 온통 한덩어리로 얽혀붙어 연 사흘을 미쳐 날뛰었다. 공사장 원생들은 그 사흘 밤낮을 잠 한숨 자지 않고 폭풍속에서 방둑을 지겼다. 제각기 거적을 한 장씩 둘러쓰고 둑가로 몰려나와 바람이 물러가 주기를 애가 타게 기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쉴 사이 없이 덮쳐드는 거파들에 시달리면서 방둑은 시시각각 허리가 가늘어지고 있었다. 원생들과 함께 연이틀 밤을 꼬박 새우고 난 원장은 이제 더 이상 그 방둑의 마지막 운명을 멍청하게 지켜보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사흘째 소동이 계속되던 날 밤 조원장은 마침내 도망이라도 치듯 원생들을 버리고 혼자 지휘 막사로 올라가버렸다. 그리고 그는 그날밤 그 지휘 막사의 어둠 속에서 마치 바다 밑이 갈라져나가는 듯한 몇 차례의 무서운 지동음을 들었다. 바람이 물러간 것은 그 삼 일째의 새벽녘부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늦은 시각이었다. 바람은 물러갔지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심술을 부릴 필요가 없을 만큼 방둑을 깨끗이 요절을 내고 난 다음이었다. 방둑은 흔적도 없이 다시 물 속으로 가라앉아버리고 끝이 보이지 않던 330만 평 벌판은 경계를 알아볼 수 없는 늘펀한 바다로 되돌아가 있었다. 거뭇한 벌판 위에 보잘것없는 야산 부스러기로 메말라 붙어 있던 섬들도 다시 바닷물을 만나 가물가물 옛모습을 돠찾고 있었다. 폭풍 뒤의 햇살은 얄밉도록 성급해서, 그렇게 다시 옛모습을 되찾은 바다 위엔 어디선가 바람을 뒤따라온 바닷새 몇 마리가 한가롭게 떠돌고 있었다. 길고도 무서운 배반극의 첫 시발이었다. 원생들은 말이 없었다. 밥을 먹으려 하지도 않았고 잠을 자려고 하지도 않았다. 거적을 뒤집어쓴 채 공사장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누워 뒹굴기만 했다. 그것은 참으로 끔찍스러운 광경이었다. 허탈감은 조원장도 마찬가지였다. 조원장 역시 처음 한동안은 그 엄청난 자연의 배반 앞에 원망스런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그는 다만 주체할 수 없는 허탈간 속에서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청스레 며칠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 며칠이 지나고 나자 조원장은 빌소 자신의 그것에 못지않은 수천 나환자의 무서운 절망감에 눈길이 미치기 시작했다. 원생들의 절망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떤 위험스럽기 그지없는 원망과 증오감으로 변색되어가고 있었다. 원생들의 원망과 미움이 누구를 표적으로 겨누게 될 것인가는 물으나마나였다. 원생들에게는 옳은 표적이 찾아질 리 없었다. 배반의 원흉은 물론 바람을 몰아온 자연의 심술이어야 했지만, 원생들의 미움은 그토록 먼 표적을 들춰낼 여유가 있을 수 없었다. 원생들의 표적은 그들에게 가까이 있는 조원장 자신일 수밖에 없었다. 조원장 자신도 원생들이 그렇듯이 그 자연을 원망의 표적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조원장은 차츰 자신에 대한 무서운 복수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문둥이는 남 위해 일하는 법이 없노라고 충고해준 것은 아마도 그 황희백 노인의 진심이 분명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둥이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그런 생각일랑은 앞으로 절대 지니지 않겠노라고 한 조원장 자신의 장담은 아마도 모두가 사실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야 말로 조원장은 생각이 분명했다. 그는 이제 황장로 말마따나 자기 아닌 누구를 위해 다시 일을 사작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오직 스스로의 복수심 때문에 어떻게든지 그 자연의 휭포를 견뎌 이겨내고 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은 집념 때문에 다시 일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결심을 하고 나서 어느 날 다시 그는 오마도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는 물론 자기 혼자의 결심만으로는 당장 일이 다시 시작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원생들은 아직도 거적때기 속에서 짐승처럼 뒹굴어대고 있었다. 그 원생들을 다시 공사장으로 몰아내려 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황장로 조차도 이젠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일을 시작하게 할 무슨 계기가 마련되어야 했다. 원생들로 하여금 그 살인적인 허탈감을 이기고 일어설 수 있게 해줄 새로운 계기가 있어야 했다. 그런 계기가 원생들 자신에게서 마련되어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원장이 계기를 만들어야 했다. 조원장으로서도 그것은 당장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섬에서는 이제 어떤 식으로도 그런 계기를 구해 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원장은 그것을 밖에서 구해들이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용히 혼자 섬을 떠나 낭인 처럼 다른 간척장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가까운 장흥과 영암의 그것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크고 작은 사업장들이 널려진 서해안 일대를 누비고 나서, 마지막엔 겨우 5정보 남짓한 농토를 얻기 위해 8년 동안 바닷물과 싸움을 계속해오고 있다는 덕적도의 3형제 가족 간척장까지 찾아 들어갔다. 다른 사업장들을 찾아 돌아다니다보니 조원장은 비로소 그가 지금 까지 오마도에서 해온 일이 결코 허사로 끝난것이 아니었음을 배우게 되었다. 파도에 휩쓸린 돌둑의 침하는 그날의바람이 아니었더라도 필연적인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바닷물속에 던져넣은 바윗돌은 일정한 기간을 두고 침하를 계속하게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돌둑이 가라않지 않을 만큼 지반이 튼튼해지려면 적어도 몇 차례의 침하는 더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몇 가지 기술적인 지식 이외에도 조원장은 그 간척장 답사 여행에서 보다 더 값진 교훈을 하나 얻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덕적도 3형제의 조그만 가족 사업장에서였다. 덕저도의 외딴 해변가에선 예정 면적 5정보의 땅을 얻기 위해서 삼십대 안팎의 3형제가 힘을 합해서 150여 미터의 방조제를 쌓고 있었다. 쇠망치와 목도질만으로 돌을 깨어 바닷속에 던져넣기 여덟 해. 그 여덟 해 동안 여덟 차례의 침하를 겪으면서 3형제는 아직도 꺽일 줄 모르는 집념의 세월을 꿋꿋이 견디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5정보의 땅을 얻기 위한 노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형제의 젊음을 털어바친 바다와의 피어린 싸움이었다. “이제 침하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태 이곳에 남아 있었던 것은 겨우 5정보의 땅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바다를 이기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기어코 바다를 이겨내고 말겠다는 집념하나로 우리는 지금까지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덟 해의 세월과 여덟 차례의 침하가 이들 3형제에게 길러준 것은 그 바다에 대한 끝없는 적개심과 그것윽 꺽어 이기고 말겠다는 강인한 투지 뿐이었다. 침하는 끝났지만 3형제는 이후로 다시 열 번 스무 번의 침하가 오더라도 자기들은 이제 열 번 스무 번을 되풀이해서 다시 돌둑을 쌓아올릴 수밖에 없노라는 것이었다. 조원장은 이제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떠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오마도로 발길을 돌이켰다. 하지만 원장에겐 아직도 숙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절마의 구렁텅이에 주저앉아 있는 원생들을 어떻게 다시 일으켜세울것인가. 원생들이 힘을 얻어 일어설 분명한 계기가 아직 마련되지 않고 있었다. 침하 현상에 대한 설명은 원생들에게 어느 정도 사실을 납득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의 납득만으로 일을 다시 시작하기에는 원생들의 실망과 상처가 너무도 깊었다. 덕적도 3형제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덟 번의 침하를 겪으면서 여덟 번을 다시 시작한 3형제의 이야기가 뜻한 바는 원장으로서도 이미 경험한 바가 있는 그 외롭고 힘겨운 자기 의지와의 끝없는 싸움이었다. 그것은 충격적일 만큼 감동스런 이야기였지만 원생들에게도 같은 충격과 감동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3형제의 이야기가 원생들에게도 감동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앞으로도 끝없는 희생과 절망을 되풀이 감수해야 한다는 냉혹한 각성에 이를 수 있을 뿐, 그 각성을 실현해나갈 3형제의 용기까지를 살 수 있을 것인지는 지극히 의문이었다. 용기를 사지 못한 사실의 각성은 공포일 뿐이었다. 원생들을 불러일으킬 계기는 아무래도 다른 데서 구해져야 할 걱 같았다. 한데 그것도 또 무슨 인연이었을까. 원장은 마침내 뚜ㅅ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그런 계기가 마련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조원장이 다시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 고흥 땅을 들어섰을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우연히 심상치 않은 소문을 한가지 듣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소록도 병원장이 갈리어 지금의 조원장은 곧 섬을 떠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조원장 자신의 신상에 관한 소문의로 아직은 그 소문의 당사자인 조원장 자신조차도 사정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일이었다. 내막을 알고 보니 그런 소문이 나돌게 된 다른 이유가 있었다. 소문의 표적은 조원장이 아니었다. 오마도 간척 사업장이 소문의 애초 목적이었다. 언젠가 공사장 근처에서 부녀자 겁탈 미수 사건이 있었을때, 인근 마을 청년들이 조원장에게 항의하러 왔다가 남기고 간 말이 있었다. 안심하십시오. 우린 원장님께 이 일을 걷어치우라고 말하러 온 건 아닙니다. 믿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우리도 이젠 저 바다 밑에서 하루빨리 옥토가 솟아올라와 주기를 고대하고 있단 말입니다. 거기까지는 되지도 않을 일에 헛수고는 그만하라는 비아냥거림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옥토가 하루빨리 솟아올라와서 자기들도 그 땅에서 원장의 환자들과 형제처럼 오손도손 농사짓고 살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고대하고 있노라는 넋두리에 이러서는 두고두고 뭔가 꺼림칙하게 짚여오는 것이 남아 있던 조원장이었다. 그리고 일을 꾸미자면 원생들에겐 제방 작업만 끝내게 하고 바다에서 정말 땅바닥이 솟아오른 다음엔 원생들을 다시 섬으로 쫓아 들여보네고 나서 농장은 자기들끼리만 송두리째 차지해버릴 수 있는 일이 아니냐고, 묘하게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여보였을 때는 조원장 쪽에서도 이미 그만한 각오를 다져주고 있었던 일이었다. 요컨대 사업장을 빼앗자는 것이었다. 바다가 농토로 변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이제 육지 사람들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아온 사실이었다. 한두 차례의 침하 역시 그들에게는 이미 상식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첫번 침하 사고야말로 그들에겐 다시 만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일 수 있었다. 일 년내 쌓아올린 방둑이 무너지고 나면 조백헌 너로서도 다시 덤벼들 엄두가 나지 않겠지. 너는 그럴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섬 문둥이들이 그걸 용납하진 않을 테니까. 그 기회에 일을 빼앗아 대신하려는 음모 였다. 작자들은 벌써 관계 요로에 대해 공사 업무 인수를 위한 청원 사무를 서두르고 있는 듯했고, 그것은 주민들의 상당한 호응까지 얻고 있는 기미였다. 그런 일은 공사가 완성 단계에 들어서고 나면 아무래도 명분이 뭣한 짓이었다. 지금처럼 일이 난관에 부딪혀 있을 때가 안성맞춤이었다. 환자와 인근 주민들 사이의 마찰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온 당국에서도 이런 기회에 차라리 일을 그런 식으로 매듭지어버리고 싶어할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었다. 조원장이 섬을 떠나리라는 소문은, 그러니까 이 일을 추진해나가는 데는 누구보다도 조원장이 가장 방해거리가 되리라는 계산에서 될 수만 있으면 그 조원장부터 우선 섬에서 내몰아버리고 싶은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쯤 낭패를 보았으면 너는 이제 손을 떼고 물러서는 것이 좋을 게다. 이 일은 이제 우리가 대신 해 주마. 끝끝내 방해를 하겠다면 우리가 너의 목을 자르도록 해주겠다. 능히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안에서는 구할수 없어던 계기가 마침내 밖에서 구해진 셈이었다. 원장은 곧 섬으로 돌아왔다. 소문의 진위를 자세히 따져 확일할 필요는 없었다. 소문의 충격이 원생들을 다시 일터로 끌어낼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해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것이 비록 원생들을 속이는 행위가 된다 하더라도 지금 조원장의 처지로는 거기까지 잔 신경을 써가며 일을 주저할 수는 없었다. 5천 원생들의 전체 이익을 위해서는 그 정도 독단이나 원장으로서의 통치 기교를 사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섬으로 돌아온 조원장은 우선 장로회를 다시 열어 방조제 축조 과정상의 기술적인 하자와 침하가 일어나게 된 경위부터 자세히 설명했다. 다른 공사장의 선례를 설명하고, 지금까지 쏟아넣은 땀과 정성이 다 한 번의 침하 때문에 결코 허사가 되어버리지 않았음을 힘주어 역설했다. 짐작대로 장로들에게선 별로 이렇다 할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원장은 다시 덕적도의 3형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5정보의 땅을 얻기 위해 여덟 차례의 침하를 겪으면서 아직도 후회 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그 3형제의 꿋꿋하고도 강인한 의지는 섬사람들에게도 상당한 감동을 주는 듯했다. 그러나 장로들은 역시 그뿐이었다. 원장이 이젠 당신들도 몇백만 평의 땅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나갈 의무가 있는, 그 인간의 이름에 값하기 위해서도 이일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노라고 말했을 때, 장로들은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3형제의 이야기로도 지쳐 넘어진 원생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심어줄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었다. 원장은 이제 마지막 처방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침내 이 사업장을 빼앗아서 일을 대신하고 싶어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뭍에서는 지금 그렇지 않아도 당신들이 이제 이 일을 단념해주기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소.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당신들은 벌써 그자들이 누군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게요. 아니 당신들이 단념을 하지 않으려 해도 일은 결국 그자들이 원하는 쪽으로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겁니다. 그자들은 지금 당신들을 영원히 다시 섬으로 쫓아 들여보내고 자기들이 이 일을 대신하고자 일을 꾸미고 있단 말이외다. 당신들이 안 된다는 일을 작자들이 미쳤다고 그럽니까. 작자들이 왜 그럽니까. 저네들은 이일이 헛되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오. 당신들이 지금까지 이룩해놓은 것을 거저 공짜로 떠맡아가겠다는 그 속셈이란 말이외다.” 원장은 이제 필요한 과장이나 협박술을 서슴지 않고 모두 동원했다. 그는 섬사람들의 가슴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유지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증오감을 일깨우기 위해 가능한 한 육지 사람들로부터 당해온 지난날의 학대와 저주의 세월들을 과장적으로 상기시켰다. 그리고 그 육지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공포를, 그 공포로부터 비롯한 생존에의 불가피하고도 본능적인 투지를 유인해내기 위해, 그 육지 사람들의 위협을 더욱더 절망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으로 과장했다. “당신들은 저들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을 게요. 저들이 당신들을 어떻게 저주해왔으며 당신들을 어떻게 심판해왔는가를, 당신들을 어떻게 이 섬으로 쫓아 들여보낸 사람들이었던가를 말이오. 그리고 이곳에 작은 당신들의 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여러분의 소망과 고만이 어떠했던가를 당신들은 아마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또한 잊어서도 안 될 일이구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금은 사정이 달라질 수가 있습니까? 이제 땅을 버리더라도 당신들은 그 육지로 가서 어디서든 다시 당신들이 살 땅을 용납받을 수가 있습니까. 어림없는 일입니다. 육지 사람들과의 싸움은 아직도 여전한 상탭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끝끝내 그 싸움에 지고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싸움의 패배는 그것이 곧 당신들의 마지막 생존원의 상실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은 당신들의 생존권을 건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싸움을 중단하고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조원장의 과장은 거의 어떤 선동에 가까운 연설조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를 더 이러고 있으면 우리는 그 하루만큼 저들에게 우리의 일을 빼앗아갈 구실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저들은 심지어 여기서 이러고 있는 저 조백헌이가 방해가 되어 나를 이 섬에서 쫓아낼 계략까지 꾸미고 있습니다. 저네들의 소망대로 아마 당신들 가운데도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줄 압니다만 어쨌든 귀찮기 그지없는 이 조백헌이가 여기서 사라져주고, 당신들은 다시 섬으로 돌아가버리기만 하면 모든 건 그만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실상 그렇게 간단하지가 못합니다. 당신들은 이미 당신들이 이곳으로 섬을 떠나올 때처럼 그렇게 간단히 다시 섬으로 돌아가버릴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그렇게 말했지요. 딩신들한텐 그냥 바윗돌이 아니라 당신네 몸뚱이를 던져넣어서 뚝을 솟아오르게 하라고 말이오. 과연 맞는 말이었소. 당신넨 지난 한 해 동안 그냥 바윗돌이 아니고 당신들의 육신을 저 바닷물 속으로 던져넣고 있었던 거요. 지금 저 물 밑에 가라앉아 방둑의 지반을 이루고 누워 있는 것은 그냥 바윗돌만이 아닌 당신네 육신의 일부도 그곳에 함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당신들은 섬으로 돌아가도 그 물 밑에 누워 있는 또 다른 당신들의 분신은 영원히 그곳에 남아 둑을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그 튼튼한 방둑 안에 지금 당신들이 섬으로 돌아가기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대손손 안심하고 풍성한 추수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22 섬사람들에게 공사를 중단시키고 싶어했던 사람들의 희망은 거꾸로 그 원생들에게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한 계기를 만들어준 셈이었다. 공사장에는 다시 다이너마이트 터지는 소리가 진동하고 돌을 실은 궤도차와 등짐꾼들의 행렬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파도에 휩쓸리고 침하로 인해 물 속으로 자취를 감춰 들어갔을망정 옛 돌둑의 흔적은 두번째 투석 작업을 훨씬 용이하게 했다. 일을 새로 시작한 지 3개월 또 한 해가 바뀌어갈 무렵 사라졌던 방둑은 다시 솟아올랐다. 솟아오른 돌둑은 열흘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가라앉아버렸다. 사람들은 그러나 이제 돌둑이 솟아오르거나 가라앉거나 아랑곳을 하지 않았다. 방둑이 솟아올라도 돌을 던져넣는 일손을 쉬는 일이 없었다. 그 방둑이 하룻새에 다시 물 속으로 자취를 감쳐버린 것을 보고도 원생들은 전날처럼 실망의 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묵묵히, 꾸준하게, 끝날 날이 없는 역사처럼, 또는 숙명처럼 원생들은 그저 그 바닷물 속으로 끊임없이 돌을 던져넣고 또 던져넣었다. 원생들이 다시 놀라운 인내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낱처해진 것은 이미 김칫국을 마셔두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뭍에서는 조원장과 공사장에 대한 반갑잖은 소문들이 점점 활기를 더해가고 있는 눈치였다. 조원장이 곧 목이 잘려 쫓겨나리라는 소리가 심심찮게 공사장까지 흘러 들어왔다. 신문이 오마도 나환자 정착 사업장과 인근 주민들 사이의 알력을 써낼 때도 있었고, 병원 상급기관에선 조원장에게 직접 그 알력의 진상을 물어오는 때도 있었다. 사태가 제법 심상치를 않았다. 조원장으로서도 그냥 언제까지나 모른 척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그런 식으로 슬그머니 섬을 쫓겨날 수는 없었다. 조원장은 곧 대응책을 마련했다. 그는 먼저 소문응 선수쳐서 ‘장로회’로 하여금 원생들의 새로운 여론 을 발의시키도록 유도했다. 원생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섬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문제는 결과였다. 결과가 좋으면 방법이나 과정은 얄해가 되어야 한다. 어쨌거나 그건 이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장로회는 이제 원장의 편일 수밖에 없었다. 장로들은 그 일의 필요성을 충분히 납득했고 원생들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섬에서는 곧 오마도 간척 공사에 대한 바깥 사람들의 부당한 여론과 간섭에 대항하는 당국에의 진정서가 작성되고 조백헌 원장의 공사 완료 전 전출설에 반대하는 전체 원생들의 청원 서명 운동이 벌어졌다. 과열한 원생들의 기세 앞에 음흉스런 육지의 소문이나 계략 따위는 더 이상 맥을 출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는 가운데도 투석 작업은 꾸준히 계속되어, 가라앉은 둑을 다시 솟아오르게 하는 데는 또 한 번 3개월의 세월이 흘렀다. 이번에도 돌둑이 수면 위에 모습을 드러내보인것은 며칠 동안뿐이었다. 둑은 다시 가라앉아버렸다. 가라앉으면 솟아올리고, 솟아올려 놓으면 다시 가라앉는 싸움이 끝없이 되풀이되었다. 제1, 제2, 제3, 세개의 방조제가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여기저기서 교대로 가라앉아 들어갔다. 제1방조제에서 10미터가 무너진 것을 쌓아 이어놓으면 제2방조제에서 20미터가 물러나앉았고, 그것을 어렵사리 이어 발라놓으면 이번에는 제3방조제 쪽에서 다시 30미터가 가라앉아 들어갔다. 원생들오 이젠 원장과 마찬가지로 그 싸움 자체에 대한 집념이 쌓이고 있었다. 원생들도 이제 땅에 대한 소망 같은건 둥째 문제였다. 틈만 나면 물 속으로 모습을 숨겨 들어가려고 하는 그 돌둑과의 싸움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싸움을 이기고 말겠다는 집념이 그들에게 돌을 던지고 또 던지게 했다. 돌둑은 벌써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기 위한 무의지한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서운 복수심을 가지고 인간의 의지에 끈질기게 거역해 오고 있는 두려운 생명체 였다. 하지만 그런 싸움이 무한정 계속되다보면 지쳐나가는 쪽은 역시 인가들 쪽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심신이 지치다보면 무엇엔가 터무니없는 곳에까지 의지의 손길을 뻗치기 마룐이었다. 여름철로 접어들면서부터는 한동안 뜸해 있던 사고까지 빈발했다. 한번은 채토장의 흙더미가 무너져내리는 바람에 밑에서 일을 하고 있던 작업 인부가 열 사람씩이나 한꺼번에 까려버린 사고가 있었다. 열 명 가운데서 아홉 명까지는 목숨이라도 간신히 구해낼 수 이었지만, 나머지 한 명은 이미 숨이 끊어진 채 흙더미 속에서 시체로 끌려나왔다. 또 한번은 작업선이 뒤집혀 인부 한 사람이 파도에 휩쓸려버린 익사 사고가 있었다. 원장은 그때 ㄷ\공사장의 모든 일을 중지하고 익사체를 찾는 데만 연사흘을 허비했다. 작업장의 사기는 급속도롤 저하되어갔다. 조원장을 대하는 원생들의 눈빛이 드러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력이 다한 원생들 사이에선 터무니없는 미신과 헛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애초에 안 될 일을 시작한 거야. 땅귀신 물귀신이 이 일을 좋아할리가 없어.” “귀신들이 방해를 놓고 있는 한, 일은 몇 해를 더 끌어가더라도 사람만 자꾸 상하게 할 뿐이야.” 원자의 설득이나 명령 따윈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으려 했다. 조원장은 어쨌거나 그 흉흉한 섬사람들의 인심부터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다. 원생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사양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한 번 더 고사를 지내기로 했다. 날짜를 잡아서 돼지를 잡고, 방조제마다 돼지머리를 바치고 다니며 바다귀신 땅귀신들의 노여움이 풀리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고사마저 효험이 없었다. 고사를 지내고 난 다음에도 침하는 여전히 계속되었고 원생들의 귀신 공포증은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갔다. 돼지머리쯤으로는 도내체 노여움이 달래질 귀신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 원생들의 소문 속에 감춰진 끔찍스런 음모의 정체가 드러났다. 어느 날 저녁, 조원장이 오마도 작업 지휘 막사에서 밤을 새우고 있을 때였다. 자정이 넘을 시각쯤 해서 이상욱 보건과장이 예고도 없이 불쑥 그를 막사로 찾아왔다. 그는 옷이 찢어지고 흙투성이가 다된 작업 인부 세 사람을 죄인처럼 막사 안으로 이끌고 들어섰는데, 불편하게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는 그 인부들 중의 한 사내는 얼마 전 채토장의 붕괴 사고로 심한 부상을 입고 있느 자였다. 원가 심상찮은 흥분기를 짓누르고 있는 듯한 네 사람의 분위기에서, 그러나 너무도 완벽하게 그 흥분기를 숨겨버리고 잇는 이상욱의 차디찬 표정에서 원장은 대뜸 불길한 예감부터 들었다. “오늘밤 살인극을 저지르려던 자들입니다.” 이상욱이 역시 냉랭한 목소리로 찾아온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날 밤 상욱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더라고 했다. 방둑 형편이나 한차례 돌아보리라 생각하고 혼자 둑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는데, 그의 발길이 아직 물 웅덩이가 남아 있는 한 침하 지점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였단다. 웅덩이 쪽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다급한 비명소리가 들려오더란다. 상욱이 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가보니, 작업반원생 두 사람이 방급 다른 한 동료 원생의 목덜미를 졸라대며 기쓰고 물 엉덩이 속으로 밀어넣으려 하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목덜미를 졸라매인 사내는 사내대로 물 속으로 몸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해 저항하고 있었지만 드 사내의 완력에 짓눌린 녀석의 저항은 이내 맥이 풀리기 시작했고, 비명 소리도 차츰 목구멍 속으로 희미하게 기어들어가고 있었다고 했다. 상욱이 끌고 온 사내들 중 두사람이 가해자였고,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는 한 녁석은 물귀신이 될 뻔한 피해자 였다. “무엇 때문에 동료를 죽이려 했나?” 자초지종을 듣고 난 원장이 사내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면서 모처럼 입을 열어 물었다. 사내들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을 뿐 대답이 없었다. “문둥이 꼴에 이젠 다리 병신까디 되었으니 세상은더 살아 뭣하겠느냐는 거랍니다. 블쌍한 이웃 원생을 위해 그런 식으로 일찌감치 목숨값이나 하고 죽을라고 말씀입니다.” 사내들을 대신해서 상욱이 비꼬듯 천연스럽게 설명했다. “이건 살인이야! 동료를 때려죽이는 백정놈의 짓이야. 누구한테 무슨 목숨값을 해준다는 게야.”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원장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상욱의 표정은 그러나 침착하기만 했다. “오늘 밤 살인극을 저지르려던 자들입니다.” 이상욱이 역시 냉랭한 목소리로 찾아온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날 밤 상욱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더라고 했다. 방둑 형편이나 한 차례 돌아보리라 생각하고 혼자 둑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는데, 그의 발길이 아직 물 웅덩이가 남아있는 한 침하 지점에 가까워지고 있었을 때였단다. 웅덩이 쪽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다급한 비명소리가 들려오더란다. 상욱이 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가보니, 작업반 원생 두 사람이 방금 다른 한 동료 원생의 목덜미를 졸라대며 기를 쓰고 물웅덩이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목덜미를 졸라 매인 사내는 사내대로 물 속으로 몸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해 저항하고 있었지만 두 사내의 완력에 짓눌린 녀석의 저항은 이내 맥이 풀리기 시작했고, 비명소리도 차츰 목구멍 속으로 희미하게 기어들어가고 있었다고 했다. 상욱이 끌고 온 사내들 중 두 사람이 가해자였고,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는 한 녀석은 물귀신이 될뻔한 피해자였다. “무엇 때문에 동료를 죽이려 했나?” 자초지종을 듣고 난 원장이 사내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면서 모처럼 입을 열었다. 사내들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을 뿐 대답이 없었다. “문둥이 꼴에 이제 다리병신까지 되었으니 세상은 더 살아 뭣하겠느냐는 거랍니다. 불쌍한 이웃원생들을 위해 그런 식으로 일찌감치 목숨값이나 하고 죽으라고 말씀입니다.” 사내들을 대신해서 상욱이 비꼬듯 천연스럽게 설명했다. “이건 살인이야! 동료를 때려죽이는 백정 놈의 짓이야. 누구한테 무슨 목숨값을 해준다는 게야.” 누구에게랄 것 없이 원장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상욱의 표정은 그러나 침착하기만 했다. 그는 마치 원장을 타이르려고 하기나 하듯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설명을 계속해 나갔다. “그건 원장님께서 이 친구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는 탓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방둑이 자꾸 가라앉고 있는 것이 단순한 침하 현상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 사람들 말로는 그게 다 이 오마도 다섯 섬 때문이랍니다. 오마도 바다귀신이 그 다섯 섬 대신 다섯 명의 목숨을 원하고 잇답니다. 그 다섯 사람의 산목숨을 제사 지내지 않고서는 바다귀신의 노여움이 몇 번이고 다시 방둑을 가라앉혀버릴 거라구요. 채토장이 무너지고 배가 뒤집혀 서 벌써 두 사람은 제사를 지내 셈이지요. 이 사람들은 이제 하루빨리 그 나머지 세 사람을 제사 지내고 싶은 것입니다.” “...” “오늘은 다행히 제가 현장을 붙잡아서 불상사를 면할 수가 있었습니다만, 앞으로의 사고에 대해서는 원장님께서도 아마 어떤 획기적인 대비책을 마련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방둑의 침하가 계속되는 한, 섬들은 끊임없이 산 목숨을 원하게 될 것이고 원장님께서 지금보다도 현명한 방법으로 저들의 미신을 그치게 해주시지 않는 한, 원생들은 기회만 있으면 또 누구인가의 목숨을 제사 지내고 싶어할게 아니겠습니까.” 원장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는 부들부들 온몸을 떨고 있을 뿐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지금당장은 자신의 육신조차도 뜻대로 가누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가! 다들 눈앞에서 꺼져 없어지란 말이닷!” 그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악을 써대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사내들이 비실비실 이상욱 보건과장 뒤켠으로 몸을 숨겨 들어갔다. 상욱만이 그 원장을 무슨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한동안이나 더 냉랭하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상욱과 사내들이 막사를 나가고 난 다음에야 원장은 비로소 상욱이 무엇 때문에 일부러 오밤중에 그에게까지 사고를 알리러 왔는지, 작자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물론 사고 자체에 대한 원장의 처벌이나 해결책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상욱은 사고를 빌어 원장에게 그의 말을 하고 싶었음이 분명했다. 동료의 손길에 물귀신이 될 뻔했던 사내마저 그것이 이젠 어쩔 수 없는 비극이듯 체념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피해자마저도 그토록 공범의식이 절실할 수 있었던 살인극이라니. 그것은 이제 이 오마도의 고통을 끝맺기 위 해서라면 원생들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원하는 일 까지도 극히 당연스런 일로 여겨질 수 있을 만큼, 바야흐로 그 살인적인 절망감이 일반화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상욱은 원장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음이 분명했다. 방둑의 침하가 계속되는 한 원생들도 계속해서 누군가의 목숨을 다시 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상욱의 뜻 깊은 경고였다. 그리고 그 오마도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진실로 원하는 바는 가엾은 자기의 동료가 아니라 조원장 바로 그 자신이라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당연히 조원장 그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욱도 아마 그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원장은 새삼 막다른 골목까지 와있는 자신을 의식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뜬눈으로 밤을 밝히면서 이 엄청난 시련을 뚫고 나갈 방도를 궁리했다. 상욱이 충고해온 그 ‘획기적 대비책’이나 ‘현병한 방법’을 따를 수는 물론 없었다. 상욱의 표정이나 어조로 보아 그것은 공사의 중단을 암시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황장로와 일차 의논을 해볼까도 생각했으나, 요새 와선 그 황노인 마저 몹시 자신을 잃고 있는 기색이었다. 원장을 대하는 황장로의 눈에서는 전에 볼 수 없던 고뇌와 망설임 같은 것이 문득문득 느껴져오곤 해서 조원장 쪽에서 자주 시선을 피해버리곤 해오던 터였다. 자신의 힘으로 시련을 뛰어넘는 도리 밖엔 없었다.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아침이 밝아오자 원장은 마침내 결심이 서고 있었다. 저들이 원한다면 나를 내주는 길밖에. 자신을 내줄 결의만 분명하다면 오원장으로서도 그들에게 마지막 주문을 할 수 있었다. 오마도 사람들이 그의 목숨을 원하고 그가 그들의 소망대로 자신의 목숨을 내줄 수 있다면, 원장으로서도 그들에게 그의 목숨값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값을 담보로 마지막 주문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언젠가 상욱이 그처럼 두려운 표정으로 다짐하여 덤비던 그 일의 명분이라는 것도 아직은 원장쪽에 속해 있었다. 목을 내건 마당에서라면 원장은 이제 그 명분의 힘도 충분히 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날로 당장 새 작업 진행표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것을 차질없이 시행해 나가기 위한 엄중한 지시 사항을 공사장 앞에 크게 써 붙였다. 공사장 앞 게시판에 나붙은 원장의 새 지시는 어느 때보다도 강경하고 혹독한 협박이 곁들인 일종의 선전 포고문 같은 것이었다. 그 지시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1. 본 오마도 간척 공사의제1차 사업단계인 3개 방조제 축조 작업은 그 최종시한을 금년 12월말일로 하고, 이 시한 안에 기필코 이를 완료해야한다. 2. 시한내의 작업 목표 달성을 위하여, 공사에 방해가 되거나 작업능률을 저하시킬 수 있는 일체의 언동이나 유언비어는 용납치 않을 것이며, 이 시간 이후 다음 각 항에 해당하는 금지사항 위반자는 당 공사와 다수 도민의 공공이익을 위하여 이를 단호히 처벌할 방침임을 경고하는 바이니 개척단원 제위는 각별한 유의 바람. ‘금지사항’ 가, 연말까지의 방조제 축조완료 시한 설정에 대하여 무단히 이를 반대하거나 비방함으로써 타 단원의 작업의욕을 손상케 하는 자 나, 오마도 수신,해신 운운하는 미신이나 기타 그와 유사한 유언비어로 공사장 인심을 현혹시키거나, 공포심을 조장하여 작업질서를 파괴한자 다. 타 단원에 대한 신체적 정신적 가해 행위, 또는 그러한 가해 행위의 정을 인지하고도 이를 선도,교정, 고치지 아니한 자 라. 작업진행에 불필요한 일체의 집회모의를 행한 자 마. 기타 당 사업 추진과정에 있어서 장애의 정이 현저하다고 인정되는 자 23 원장의 강력한 지시와 경고가 하달된 다음부터 공사장 분위기는 다시 한동안 잠잠했다. 침하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으나, 원생들은 불평없이 묵묵히 돌과 흙을 져 날랐다. 사고가 일어난 날도 공사장 원생들은 동요의 빛이 그리 없었다. 원장이 연말까지 작업시한을 정해 놓은 지 보름 안에 또다시 채토장 붕괴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흙더미 속에서 다시 두 사람이 시체가 되어 나왔다. 오마도 물귀신이 정말로 생사람을 원한다면 그것으로 이제는 네 사람째가 되는 셈이었다. 제물로 바쳐져야 할 사람은 이제 나머지 한 사람뿐이었다. 끔찍스런 사고현장을 목격하고도 원생들은 도대체 표정 하나 달라지는 기미가 안 보였다. 사고는 무슨 당연한 작업절차나 되는 것처럼 조용히 마무리지어졌다. 공사장은 천연스러울 정도로 평온스런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원장은 이미 그 기분 나쁜 침묵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몸서리가 나도록 조용한 침묵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그에게로 다가들고 있는 자기 운명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연의 횡포에 이은 인간들의 두 번째 배반극은 서서히 그 막이 올려지고 있었다. 이날 저녁 조원장은 섬 관사로 돌아오자 다시 한번 자신의 마지막 각오를 다짐했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고 기다렸다. 병원 직원 한 사람이 헐레벌떡 그의 관사로 뛰어들어 왔을 때도 그는 새삼스럽게 놀라는 빛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는 이미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원장님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달려온 병원직원은 오마도 원생들이 지금 한창 공사장을 버리고 섬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섬에는 이미 원장의 탈출을 막기 위해 해안선까지 모조리 봉쇄해 놓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로든지 우선은 좀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몰려오는 원생들의 형세가 이만저만 험하질 않습니다. 저자들은 필시 원장님을 해치고 말 기셉니다.” 다급한 전갈이 끝나기도 전에 조원장의 귀엔 벌써부터 바다를 건너오는 원생들의 합창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뀌고 바뀐 세월 싸워가면서 암흑과 먹구름도 이제 개이고 합창소리는 노호처럼 바다를 울리며 원장의 관사 아래쪽 해안으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원장은 그러나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언제까지나 그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몸을 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전갈을 가지고 온 직원의 재촉소리 따위는 귓가에도 스치지 않는 표정이었다. 괴롭고 힘든 남편의 섬 생활을 견디다 지쳐 혼자 뭍으로 돌아가버린 아내 이후로 조원장의 곁에는 이제 그가 따로 돌보아야 할 가족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 수 있었다. 병원 직원은 그 원장에게 오히려 기가 질려버린 듯 제풀에 비실비실 관사를 빠져 달아나 버렸다. 노랫소리가 점점 턱밑까지 다가들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노래소리가 아닌 노호와 함성의 뒤범벅이었다. 순식간에 섬 안이 온통 수라장이 되고 있었다. 조원장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언덕 위에 올라앉은 그의 관사 아래로는 바다와 언덕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바다와 언덕길이 온통 횃불로 가득했다. 원생들은 저마다 횃불을 하나씩 켜들고 있었다. 배들은 횃불더미가 되어 전장터처럼 바다를 가득 메우며 다가오고 있었다. 횃불의 선두는 이미 언덕아래 해변으로 내려서서, 원장의 관사를 향해 언덕길을 줄줄이 행진해 올라오고 있었다. 조원장은 이윽고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 권총을 뽑아 들었다. 예편을 하고서도 계속 서랍 속에 따로 간직해온 권총 탄알을 꺼내다가 그 중의 한 알을 조심스럽게 탄창에 장전했다. 그러나 그가 집은 탄환은 꼭 한 알뿐이었다. 그는 탄환을 장전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원생들의 대열이 좀더 가까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장 나와라!” 이윽고 횃불 빛이 관사 창문에 어른대기 시작하면서 원생들의 소란스런 합창가운데서 원장을 찾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조백헌이 새끼 빨리 나와라! 하나 남은 오마도 물귀신이 오늘은 네 놈의 피를 마시고 싶대서 데리러 왔다!” “문둥이들만 몰아대지 말고 너도 한번 우리 손에 물구멍으로 죽어 들어가서 방둑을 지켜보란 말이다!” 고함소리는 다시 원한과 체념과 복수의 못을 입어버린 「소록도의 노래』로 변했다가, 합창소리가 한 차례 지나가고 나면 다시 또 재촉을 계속해오곤 했다. “조백헌이 들어라! 조백헌이 네가 나오지 않으면 우리가 널 모시러 들어간다.” 마침내는 돌격대 몇 사람이 대문을 부수고 집안까지 뛰어들고 있었다. 원장은 비로소 천천히 방문을 밀치고 원생들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나섰다. 원생들은 이미 두 겹 세 겹으로 관사를 빙 둘러 포위하고 있었다. 원장이 침착하게 관사 뜰로 내려서자 원생들은 물을 끼얹은 듯 일시에 소란을 그쳐버렸다. 사위는 한동안 횃불 타오르는 소리만이 적막한 밤 공기를 조용히 흔들고 있었다. 원생들은 그 횃불 말고도 저마다 곡괭이나 쇠망치 같은 작업공구들을 하나씩 움켜쥔 모습으로 원장의 진로를 철통같이 막아서 있었다. 횃불 빛 속에 일렁이고 있는 수천 원생들의 일그러지고 성난 얼굴들을 대하고 서자, 원장은 그가 처음 부임 연설을 하기위해 중앙공원 연단위로 올라가서 그 거대한 침묵의 벽 앞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을 때처럼 별안간 숨이 막혀왔다. 일렁이는 불빛 속에선 누구 하나 눈에 익은 얼굴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원생들의 침묵이 그 때처럼 오래가진 않았다. “저새끼가 권총을 꺼내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침묵을 깨고 다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것이 신호가 되어 횃불의 무리가 무섭게 다시 일렁이기 시작했다. “저새끼를 빨리 잡아 죽여라!” “문둥이의 피를 팔아 제 명예를 사려고 한 조백헌을 때려죽이자!” “저새끼 제물이 되어간 우리 문둥이들의 원한을 풀어주자!” 하지만 이번에도 그 고함소리는 오래가질 못했다. 급박한 노호의 소용돌이 속에서 횃불 하나가 천천히 원장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횃불이 원장 앞으로 다가오자 원생들은 일시에 다시 숨가쁜 대면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조원장 앞으로 다가온 횃불의 주인공은 황희백 장로였다, 황희백 노인은 이제 이 섬에선 별로 문제가 되지않고 있는 ‘다섯 발짝의 금기’를 새삼스럽게 다시 상기시켜주고 싶은 듯 정확히 그만한 거리까지 조원장 앞으로 다가와 멈추면서, 자신의 횃불을 옆으로 슬쩍 비켜들었다. 그리고는 무슨 하릴없는 잡담이라도 하러 온 사람처럼 한가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말하기 시작했다. “원장 내 생각으론 말이야, 내 생각으론 아무래도 원장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분별해내는 눈이 우리 문둥이들보다도 못했던 게 탈이었던 것 같구만 그래...” 원장의 반응 같은 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듯, 노인은 그렇게 혼자 조원장의 주위를 천천히 맴돌면서 자기 말만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참, 언제던가, 육지사람들이 원장을 데려간다고 했을 때 말이야. 일이 결국 이렇게 끝날 주라 알았더라면 그때 그 사람들이 원장을 원했을 때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임자를 그만 놓아 보내주는 게 좋았을 걸 그랬어, 공연히 그때 원장을 붙들었지. 하지만 그 땐 누가 용케 일이 이렇게 까지 될줄을 알 수가 있었나... “저새끼가 권총을 꺼내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침묵을 깨고 다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것이 신호가 되어 횃불의 무리가 무섭게 다시 일렁이기 시작했다. “저새끼를 빨리 잡아 죽여라!” “문둥이의 피를 팔아 제 명예를 사려고 한 조백헌을 때려죽이자!” “저새끼 제물이 되어간 우리 문둥이들의 원한을 풀어주자!” 하지만 이번에도 그 고함 소리는 오래가질 못했다. 급박한 노호의 소용돌이 속에서 횃불 하나가 천천히 원장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횃불이 원장 앞으로 다가오자 원생들은 일시에 다시 소란을 멈추고, 이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두 사람의 기이하고 숨가쁜 대면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조원장 앞으로 다가온 횃불의 주인공은 황희백 장로였다. 황희백 노인은 이제 이 섬에선 별로 문제가 되지 않고 있는 ‘다섯 발짝의 금기’를 새삼스럽게 다시 상기시켜주고 싶은 듯 정확히 그만한 거리까지 조원장 앞으로 다가와 멈추면서, 자신의 횃불을 옆으로 슬쩍 비켜들었다. 그리고는 무슨 하릴없는 잡담이라도 하러 온 사람처럼 한가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말하기 시작했다. “원장, 내 생각으론 말이야, 내 생각으론 아무래도 원장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분별해내는 눈이 우리 문둥이들보다는 못했던 게 탈이었던 것 같구만 그래...” 원장의 반응 같은 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듯, 노인은 그렇게 혼자 조원장의 주위를 천천히 맴돌면서 자기 말만 계속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참, 언제던가, 그 육지 사람들이 원장을 데려간다고 했을때 말이야. 일이 결국 이렇게 끝날 줄 알았더라면 그때 그 사람들이 원장을 원했을 때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임자를 그만 놓아 보내주는게 좋았을 걸 그랬어. 공연히 그때 원장을 붙들었지. 하지만 그땐 누가 용케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을 알 수가 있었나... 그래 이젠 때가 너무 뒤늦은 얘기가 되고 말았지만, 우리가 그토록 앞일을 분간하지 못했다는 건 아마 우리가 일찍이 주님의 참뜻을 깨닫지 못했거나 그것을 깨닫고도 그 주님의 뜻에 복종하고 따르기를 주저하고 있었지 때문일 게야.” 황장로는 짐짓 한가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거듭거듭 원장의 주위를 맴돌아대고 있었다. “참 묘한 일이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분별지어주시는 주님의 뜻을 그나마 뒤늦게 알아차리고 있는 것은 항상 이 추하고 권세 없는 문둥이들뿐이었거든. 원장들은 한사코 그걸 알아차리려 하질 않는단 말야. 그게 화근이야. 그 벌써 20년 저쪽 시절의 일이었지만, 그 주정수 원장 말씀이야. 그 주정수란 사람 때도 그랬었지...” 겹겹이 횃불의 장벽을 이루고 서 있는 원생들은 마치 마지막 제례를 행하는 추장의 거동을 지켜보고 있는 식인종들처럼 언제까지나 험상궂은 침묵을 지키고 서 있었다. 톡, 톡, 탁. 횃불에서 불똥 튀기는 소리만이 침묵의 파편처럼 여기저기서 검은 허공을 향해 튀어 올라갔다. “주정수 원장 때도 그는 이 섬에다 문둥이들의 천국을 꾸며주겠노라 함부로 장담을 했지. 첨에는 그 말을 듣고 우리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감격을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건 주님의 참뜻이 아니었어. 주님은 실상 처음부터 우리를 말리고 계셨던 게야. 문둥이의 천국이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지. 한데도 주정수란 사람 끝끝내 고집을 버리려 하질 않더군. 원장도 벌써 아는 일이겠지만, 그래서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났었나... 끔찍스러웠지. 문둥이들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처럼 두려워사고 복종했던 그 주인에게 비수를 품고 덤벼들지 않았었나. 그리고 그 주정수 원장이 함부로 이 문둥이들에게 흘리게 한 피 값을 자기 피로 다시 갚게 하지 않았었나... 하지만 글쎄. 그 주정수인들 설마 이 문둥이들의 피를 보기 좋아하는 몹쓸 취미가 붙은 인간일 리는 없었겠지. 문둥이들의 천국을 꾸미면서 피를 좀 흘리게 한들 그게 무슨 큰 배신이 되리라곤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게야. 허물은 다만 그가 너무도 늦게까지 주님의 참뜻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뿐이지. 문둥이들도 벌써 그걸 알아차리고 있는데, 주정수 원장 혼자서만 유독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게 탈이었더란 말이지. 난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구만. 한데 이번에는 조원장이 또 그토록 답답한 사람일 줄을 누가 알았겠나. 묘한 것을 글쎄, 원장으로 오는 사람마다 이 한 가지 일에만은 뜻밖에도 늘 미숙한 데가 많은 점이거드. 도대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분별해내는 데는 이 문둥이들보다도 늘 깨우침이 늦단 말야. 그래서 오늘밤처럼 또 이렇게 섭섭한 일들이 벌어지고...” “그만두시오.” 흉몰스런 산짐승이 미리 사람의 혼을 뽑아놓기 위해 멀리서부터 빙빙 주위를 좁혀 들어오고 있는 듯한 노인의 사설에, 조원장은 그만 견딜 수가 없어지며 소리를 버럭 지르고 나섰다. 참혹스런 일을 저지르려 할 때면 언제나 조용조용 옛날 얘기들을 들추어내는 것이 노인의 버릇이라고 했던가. 조원장은 노인의 그 음침스런 예감이 깃들인 목소리가 마치 함정에 걸려든 날짐승을 다루는 거미줄처럼 끈적끈적 온몸을 옭아매 들어오고 있는 기분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을 견디고 있을 수가 없었다. 사냥에 성공을 한 거미가 먹이의 가슴팍에 독침을 꽂아넣기 전에 포획물으 생명이 충분히 죽어 시들기를 기다리듯, 노인은 원장의 영혼과 육신의 힘을 서서히 마비시켜 들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와서 그런 걸 내게 납득시키려는 건 당신들의 친절이 아닐게요. 막바로 말하시오. 당신들은 이제 날 어떻게 하겠다는 게요? 날 어떻게 하고 싶은 게요?” 조원장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를 쓰고 있었다. 스스로의 이야기에 취해버리기라도 한 듯 느릿느릿 원장의 주위를 맴돌고 있던 황장로가 그 바람에 문득 다시 발길을 멈추고 섰다. 그리고는 뭔가 그 원장 때문에 뜻하지 않은 낭패를 당하고 난 사람처럼 한동안이나 상대방의 얼굴을 천천히 건너다보고 있었다. 하더니 황장로는 비로소 조원장의 긴장한 얼굴에서 이날 밤 이 입장이 썩 난처해진 사내를 상대로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간신히 생각해낸 사람처럼 음산한 미소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렇구만. 원장한텐 그게 미상불 궁금한 일이기도 할 게야. 하지만 뭐 그렇게 조급하게 굴 건 없는 일이지. 이 사람들은 원장을 어떻게 하고 싶어 이렇게 집까지 떼를 지어 찾아온 건 아니니까. 이 사람들은 그저 다만...” “이 사람들, 이 사람들 하지 말고 우리라고 정직하게 말하시오. 그래서 당신들은 다만... 무업니까.” “그래 우리라고 해도 상관은 없겠지. 여기서 원장 한 사람을 빼고 나면 우리는 모두가 문둥이들이니까 말씀야. 그리고...” 황장로는 결코 말을 서두르려 하지 않았다. 그의 어조나 표정은 조원장과는 반대로 시종 지루할 정도로 한가해져 있었다. “그리고 원장은 말씀이야. 우리가 원장을 어떻게 하고 싶어 이러는건아니라고 말해도 영 곧이가 들리지 않는 것 같구만 그래. 우리가 원장을 어떻게 하고 싶어하다니 천만의 말씀이지. 원장을 어떻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그저 원장이 자기의 약속을 어떻게 지켜주는가를 지켜보러 온 것뿐이라니까 그러네.” “그 왜 원장은 지금도 권총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처음 오마도 일을 시작할 때 말씀이야. 원장은 그때 자신이 행한 서약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겠지. 이 일을 하면서 원장과 우리 사이에는 어떤 배반도 없게 해주십사고, 자비하신 주님과 우리들 5천 문둥이들의 후손의 이름까지 빌어가면서 행한 서약 말씀이야. 그때 원장을 만약 이 일에 어떤 배반이 생기게 되면 원장의 목숨은 우리들 문둥이의 것이어도 상관이 없노라고 했었지. 그렇다고 오늘밤 우리가 지금 원장에게 그 서약을 물으려는 건 아니야. 전에도 여러 번 말한 일이 있지만, 우리 문둥이들이 지금까지 원장 당신을 위해 일을 해오고 있었던 건 아니니까 말씀야. 그보다도 우리는 아무도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는 없는 주님의 가엾은 종일 뿐이거든. 주님의 종들 가운데서도 가장 더럽고 미력한 문둥이들이지. 우리가 원장을 심판할 수는 없어. 한데 말씀야. 문제는 그때 원장 스스로 자신의 권총을 걸어 행한 두번째 서약이야. 원장 혼자서 자의로 행한 두번째 서약은 바로 지금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그 권총이 증거였지. 우리는 그 총에 대한 원장의 서약이 어떤 것인가를 잊을 수가 없었어. 원장은 정말로 우리를 놀라게 했던 게야. 그리고 오늘... 못된 호기심이지만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그 임자의 권총에 대한 약속이 어떻게 지켜지는가를 구경하러 오게 된 게지. 다만 그것뿐이야. 우리가 원장을 어떻게 하고 싶어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그건 절대로 원장의 오핼 게야.” 말을 마치고 나자 황장로는 이제 원장에 대해 자기가 취할 절차는 다 끝났노라는 듯 원장으로부터 한두 발짝 몸을 비켜 물러섰다. 조원장은 이제 노인의 뜻을 분명히 알아듣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해도 이들은 결국 나의 피를 보고 싶은 거다. 원장 스스로 피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그대로 돌아설 사람들이 아니었다. 노인의 말은 무서운 협박을 숨기고 있는 최후 통첩 한가지였다. 조원장으로서는 물론 거기서 그만 모든 것을 황장로에게 승복새 버릴 수는 절대로 없었다. “그때 우리가 서약을 행한 것은 나 혼자뿐이 아니었소. 당신들도 나와 함께 서약을 하지 않았소.” 그는 한두 발짝 뒤로 물러서고 있는 황장로를 쫓아나서며 다급히 소리쳤다. “물론 그랬었지. 우리도 그때 원장과 함께 서약을 했지.” 황장로가 이런 딱한 사람이 있느냐는 듯 찬찬히 다시 원장을 돌아다보고 서 있더니, 이윽고는 그 원장을 타일러대기라도 하듯 새삼스런 표정으로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장은 아직오 이 점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구만, 우리가 오마도 일을 시작한 데 까지는 아직 배반 같은 건 없었다는 점을 말야. 배반은 그 일을 말리시는 주님의 뜻이 분명해진 다음부터였거든. 우리는 주님의 참뜻을 깨닫고 주님께 복종하고자 했으나 원장이 끝끝내 고집을 세우다보니까 거기서부터 배반이 생기기 시작한 거란 말씀이야. 주님의 뜻이 그처럼 분명해진 다음까지도 원장은 그 주님을 거역하면서 함부로 우리 문둥이의 피를 보게 하지 않았나... 제 피가 아니라고... 더러운 문둥이의 피라고... 함부로 남의 피를 흘리게 하는 데서, 거기서부터 배반은 시작되고 있었던 게란 말씀이야...” 기묘한 말의 요술이었다. 배반이 없게 하자고 똑같이 서로 서약을 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배반을 당한 기분으로 말하면 이날 밤 조원장 쪽에서도 결코 원생들만 못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배신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은 오히려 그 황장로와 원생들 쪽일 수도 있었다. 그것이 황장로의 말 속에선 처지를 정반대로 바꾸어놓고 있었다. 주님은 오로지 원생들의 편일 뿐이었고, 배신의 죄값을 치러 보여야 할 사람은 오직 조원장 한 사람뿐이었다. 이유는 다만 조백헌 그 한 사람만이 문둥이가 아니라는 점 때문일 터였다. 문둥이가 아닌 조백헌 한 사람과 문둥이들뿐인 섬사람들 사이에서 배반은 그토록 일방적으로 결판이 나고 있었다. 조원장은 아무래도 아직 그 자신의 배신을 스스로 승복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황장로를 추궁하고 나섰다. “그렇다면 오늘밤 당신들이 내 피를 보고 싶어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당신들 앞에 내 피를 보게 하는 것이 정말로 그 자비하신 주님의 뜻일 수가 있느냔 말이오.” 그러나 이제 황장로의 표정이나 어조는 놀랍도록 냉랭해지고 있었다. “함부로 피를 보게 한 것은 원장 쪽이 먼저였으니까. 우리 문둥이들이 자기들 일을 하면서 피를 흘린 만큼 원장은 자신의 일을 위해서 자기 피를 흘린 일이 없었거든. 원장은 언제나 우리에게만 피를 흘리게 했지. 우리가 이제 그만 피를 흘리고 싶다고 해도 원장은 계속해서 피를 흘리라 했거든. 그 후부터 우리는 아마 우리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원장을 위해 피를 흘리고 있었을 게란 말이지. 그야 누구의 것이 됐든 주님께서 피 흘리는 일을 좋아하실 리는 물론 없으시겠지. 하지만 앞으로 흘리게 될 열 방울으 피를 아끼기 위해 오늘 한 방울의 피를 보아야 되겠다면 주님께서도 아마 용서를 하실 게라고, 다들 그렇게들 말을 하더군...” 무서운 복수심이었다. 조원장은 더 이상 버티어낼 수가 없었다. “좋습니다. 배반이 있었다면 서약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겠소.” 그는 마침내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의 총신을 가슴팍에다 두어 번 쓱쓱 문지르고 나서 한 발짝 더 황장로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그 권총을 노인에게로 불쑥 내밀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자, 이 총을 가져다가 당신들 가운데서 누가 나를 쏘게 하시오.” “아, 그건 경우가 그렇질 않아...” 황장로의 대꾸는 그러나 갈수록 싸늘하기만 했다. 그는 입가에 차디찬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조롱기 섞인 어조로 내뱉고 있었다. “우린 원장을 심판하진 않는다고 했을 텐데 말씀이야... 서약에 대한 약속은 원장 스스로가 행해보여야지. 우린 다만 곁에서 그걸 구경만 하면 된다니까.” “심판을 하지 않는다구?” 원장이 거의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되묻고 난 원장은 그러나 이제 마지막으로 할 말이나 다 하고 말겠다는 듯, 노인의 대꾸도 기다리지 않고 모질게 상대방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어울리지 않는 궤변은 이제 그만두시오. 당신들은 벌써 마음속에서 열번 백번 나를 심판하고 있는 게요. 도대체 당신들의 자비하신 주님은 어째서 당신들 편에만 있고 내게는 그 주님이 있어주시지 않는단 말이오. 내게도 그 당신들의 주님이 함께 있고 내가 그 주님의 뜻을 배반한 일이 없다고 믿고 있다면 당신들도 또 누구의 이름을 팔아 나에게 서약의 약속을 이행해보이라 하겠소.” 갑작스런 원장의 추궁 앞에 황장로는 마침내 할 말이 궁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원장에게 총을 받으러 나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의 세찬 추궁을 외면하고 돌아설 수도 없는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언제까지나 대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한번 말길이 터지기 시작한 조원장은 굳이 그 황장로의 대꾸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말끝마다 당신들은 주님을 앞세우고 나서지만 당신들에게 주님이 계시다면 나에게도 나의 주님이 계실 것 아니오. 당신들에겐 다만 당신들의 처지가 가엾어서 당신들의 피를 아끼기 위해 오마도 공사를 그만 끝내라는 주님이 계시지만, 내게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 섬을 헤엄쳐나가다가 물귀신이 되어갈 더 많은 사람들의 피를 아끼기 위해 오늘 이 일을 끝내놓으라는 나의 주님이 계셔온 거란 말요. 당신들의 후손들이 이 섬으로 쫓겨 들어오고, 쫓겨 들어왔다가 다시 섬을 빠져나가기 위새 온갖 음모와 모험을 되풀이해야 하는 그 끝없는 유랑의 습성을 끝내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 후손들로 하여금 자기 손으로 자기의 땅을 일구며 당신들의 주님을 진심으로 찬미하고 살아갈 당신들의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이 일을 기어코 끝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님의 뜻이었단 말요.” 마지막을 모두 각오하고 나선 사람답게 원장의 어조는 추호의 망설임이나 두려움의 빛이 없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원생들의 심판과 자신의 마지막을 조금이라도 덜 욕되게 하기 위해 말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한번도 나의 주님을 당신들 앞에 내세우지 않은 것은 아직도 그곳에는 우리들 인간의 노력과 정성이 다 바쳐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소. 주님의 큰 뜻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아직도 우리의 피와 땀이 충분히 바쳐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단 말이오. 더 많은 피와 땀으로 우리 인간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먼저 증명되지 않고는 주님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도 증거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소.”“...”“당신들은 주님의 뜻을 믿으려 했고 여기 선 나는 인간의 힘과 우리 인간들끼리의 믿음을 먼저 행하려 했다는 건 그러나 그리 큰 차이는 아닙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들의 주님과 나의 주님은 그토록 뜻이 다를 수가 있을지도 모르겠소. 그 끝없는 유랑과 절망의 세월로 당신들의 이웃을 다시 거두어가는 것이 정말로 당신들의 주님의 참뜻인지 의심스럽소. 한두 줌씩 나눠주는 정부 양곡과 멸시어린 구호품을 나눠가지며 납골당의 어둠 속을 향해 뜻없는 발걸음을 한발 한발 옮겨가거나, 용감한 사람들이라야 해협을 건너가다 사나운 물살에 수중 고혼이 되어가는 것이 당신들의 주님의 참뜻일 수가 있는질 알 수가 없단 말이외다." "...." "나는 아직도 내가 자신을 쏘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소. 누가 진정 누구를 배반하고 있는가를 알 수 없기 때문이오. 하지만 이제 와서 당신들에게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소. 자, 오늘밤 내 한 사람의 피가 진실로 당신들의 피를 아끼는 길이라 믿는다면 주저하지 말고 어서 이 총으로 나를 쏘시오." 말을 마치고 나서 원장은 권총을 황장로 앞으로 내던졌다. "총알은 단 하나밖에 들어 있지 않소. 당신들이 심판해야 할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일 터이니 말이오. 탄환이 하나뿐이니 정확하게 쏘지 않으면 안 될 게요." 황장로는 그러나 총을 집으려 하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그는 그 원장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무도 총을 집으러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횃불이 차츰 시들어가면서 주윈는 점점 더 무거운 침묵 속으로 가라앉아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원장의 뒤쪽에서부터 땅에 떨어진 권총 앞으로 터벅터벅 몸을 드러내고 걸어나오는 살람이 있었다. 이상웅ㄱ이었다. 그는 물론 횃불도 켜들지 ㅇ낳은 채 원장의 두쪽 어둠 속에 숨어 서서 이날 밤의 소동을 시종 다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허리를 굽혀 땅에 떨어진 권종울 집어들고 나서는 황장로와 원생들 쪽을 천천히 한바퀴 둘러보다 말고 별안간 발작이 난 사람처럼 소리치기 시작했다. "뭐야, 당신들은. 뭐가 무서워서 당신들은 지금 그렇게 겁을 먹고서 있기만 하느냔 말이다!" 침묵에 싸여 있던 원생들 쪽에서 잠시 조용한 술렁임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뿐. 상욱의 흥분한 목소리가 금세 그 술렁임을 다시 덮어 눌러버렸다. "주님은 당신들에게 피를 아끼라고 했는데, 이 원장님이란 사람은 지금까지 자기 한 사람의 이름을 사기 위해 당신들에게 얼마나 피를 흘리게 했는가 말이다. 당신들은 오직 이 조백헌 원장 때문에 쓸데없는 땀을 흘리고, 그 원장의 고집과 명예욕 때문에 억울한 피를 흘려온 게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당신들은 오늘밤 이 원장에게 당신들의 피의 값을 받으러 몰려왔고, 여기 이제 원장님은 당신들에게 심판을 내맡기고 나서 있는 게 아니냐. 그런데 이제 와서 또 무엇이 두려워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 거냔 말이다." 상욱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원생들을 정신없이 다그쳐대고 있었다. 지독한 추궁이었다. 수많은 섬 원생들에 대한 무서운 혐오감의 토로였다. 그리고 자기 절망의 절규였다. 윤해원과 서미연들의 그 참담스런 자기 각성과 극복의 노력에 떠밀려 상욱과 서미연 사이는 이제 거의 명백한 파탄이 오고 말았다던가. 아름답고 갸륵한 여자여! 상욱의 절망은 어쩌면 그래서 더욱 난폭스런 절규가 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원장은 그 격렬한 상욱의 저주 속에서 원생들을 향한 매도나 힐난기보다는 오히려 조원장 자신을 겨냥한 어떤 무서운 추궁과 원망을 더 많이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그 처절스런 혐오감의 폭발이 무서운 대결 의식으로 조원장 바로 그 자신을 향해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자 어서 나와라. 누구라도 지금 당장 이 앞으로 나와 원장을 쏘아 죽이고 나면 당신들은 이제 더 이상 앞으로는 피를 흘릴 일이 없게 될 거 아니냐." "...." "아무도 없는냐, 정말 아무도? 그렇다면 좋다. 당신들이 원장을 심판할 수 없다면 그럼 이번에는 당신들이 심판을 받아야 할 차례다. 오늘밤 당신들의 소동이 그토록 터무니없는 것이었다면, 이 총 속에 들어 있는 한 알의 탄환을 바로 그 당신들의 배반극을 단죄하는 데 쓰여져야 예의가 될 게다. 원장을 쏠 수 없다면 자신의 배반을 단죄할 줄 아는 용기라도 보요야 할 게 아니냐. 자, 누구든지 지금 이 앞으로 나와서 원장을 쏘거나 자신의 배반을 심판받을 용기를 보이도록 해라. 누구냐? 누가 나서겠느냐!” 핼쑥하게 핏기가 가신 상욱의 이마에선 어느새 땀방울이 번들번들 얼룩져 흐르고 있었다. 그 울부짖음에 가까운 상욱의 절규는 거기서도 좀더 계속되었다. “왜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있는거냐. 어서 빨리 이 원장을 죽여 없애야 당신들은 다시 옛날의 그 문둥이다운 문둥이로 되돌아갈 수가 있을 거 아니냔 말이다. 원장을 쏠 용기가 없는 인간들이라면 오늘밤에 저지른 당신들의 배반을 원장한테 심판받을 용기라도 보여야 할 거 아니냔 말이다. 이 더럽고 못난 문둥이들아 ....” 문둥이들 앞에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던 어느 날의 그 황장로의 충고는 바로 이런 때를 두고 한 말이었을까. 그리고 이날 밤 그 문둥이들의 눈으로는 조원장의 태도에서 그처럼 전혀 겁을 먹고 있는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일까. “이상욱 과장 ....” 조원장에게 그런 충고를 주었고, 그리고 이날 밤엔 몸소 조원장 앞으로 원생들을 앞장서 나선 황장로가 이때 다시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그 상욱 앞으로 천천히 몸을 비켜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황장로의 다음 말은 아직도 그의 뒤로 진을 치고 지켜서 있는 원생들이나 조원장의 예상을 훨씬 빗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과장, 오늘밤은 아무래도 탄알을 아껴두는 게 좋겠구만 그래. 일을 공평하게 하자면 아마 탄이 두 알쯤은 들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거긴 겨우 한 알밖엔 아니라니까 말야.” 황장로는 천천히 상욱으로부터 권총을 빼앗아든 다음 유심스레 그것을 만지작만지작하면서 혼자서 말을 계속해나갔다. “아니 이제 와서 이 한 알의 탄알이라도 용도가 더욱 분명해지긴한 셈이지. 이과장이 욕을 해주니까 이상하게 속이 후련해지는구만 그래. 문둥이들이란 원래 그렇게 독한 욕을 먹어야 좋아하지. 욕을 먹고 내몰리면서, 개처럼 남에게 복종을 하면서 살아온 게 문둥이들 아닌가 말야. 농담이나 비웃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야. 농담이 아니라는 건 방금 이과장한테 욕을 먹으면서 한 가지 또 깨달은 일이 있었거든. 이 탄알로 말야, 이 탄알로 원장을 쏘지 못한다면 다음에는 그것을 누구의 가슴에다 겨눠야 할 것인지가 불을 보는 것 같아졌거든. 유감스러운 건 다만 이과장 자네 말처럼 우린 아직도 욕기가 모자란 모양이야. 용기가 모자란다는 건 아직도 시련이 모자란다는 증거지. 탄알을 좀 아껴두잘밖에 ....” 그는 다시 원장 앞으로 다가와 땅바닥 위에 권총을 공손히 놓아두고 물러서면서, 이번에는 그 원장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안 그렇소 원장? 당신도 알다시피 문둥이들이란 원래 이토록 비굴한 무리가 아니었나 말야. 말이 길어지면 오늘밤도 난 어차피 또 일이 이렇게 끝나게 될 줄 알았지만, 우린 원래가 이토록 못나고 비굴한 인간들이었거든. 이 늙은이만 해도 그랬었지. 눈 못 감고 죽은 어미를 떠나면서부터 오늘밤 이 소동이 일기까지, 할애비가 죽고 나서도 남은 보리줌이나 찾게 된 걸 좋아하고, 굶어죽은 여인네를 욕보이는 도둑때를 거들고 다니다간 가엾은 술집 여자의 피나 흘리게 하는 따위의 못된 짓에만 용감했지. 정말로 용기를 보여야 할 일 앞에서는 공연히 남의 눈치나 보고 핑계나 둘러대려 했지 ....” “....” “하지만 원자! 탄알을 좀더 아껴두잔다고 이 늙은이를 너무 심하게 나무람하진 말아주게나. 그렇다 한들 이 늙은이한텐 그래 제 배신을 알고서도 제가슴에 총을 겨눌 만한 용기조차 없었겠나. 탄알을 아껴두자는 건 아직도 이 문둥이들에게 남아 있는 제 몫의 시련을 마저 끝내게 하자는 바람 때문이었구만. 원장도 앞으로 그 점을 헤아려두면 조금은 도움이 될 게야.” “....” “자, 그럼 이제 그 권총으로 문둥이들의 쫓아주게. 이 못된 문동이들에게 다시 오마도 돌둑으로 내려가서 제각기 자기 몫의 시련을 마저 감당해내도록, 어서 그 총부리로 녀석을 쫓아달란 말이야.” 황장로는 말을 끝내고 나서 자신이 먼저 몸을 천천히 돌이켜세웠다. 노인이 언덕길을 내려가자, 그를 기다리고 서 있던 원생들의 무리도 이내 소리없이 그를 뒤따라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노인의 주문처럼 원장 쪽에서 따로 무슨 거동을 취할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사실은 전혀 그럴 엄두가 날 수도 없는 원장이었다. 황장로와 원생들은 어쨌든 이날 밤 안으로 모두 다시 오마도로 건너갔다. 이날 밤은 상욱마저도 더 이상 조원장에겐 별말이 없이 조금 전까지도 그가 그토록 저주를 퍼부어댄 원생들의 무리를 뒤쫓아서 겁도없이 그들과 함께 섬을 훌쩍 건너가버렸다. 조원장은 밤이 한참 늦을 때까지도 그냥 그 관사 앞뜰에 혼자 우두커니 못박혀 선 채, 어두운 밤바다를 밝히며 오마도로 건너가는 그 원생들의 횃불을 넋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24 공사는 다시 계속되었다. 그러나 연말까지 제방 축조 작업을 일단락지으려던 조원장의 당초 목표는 그 시한을 다시 이듬해 봄까지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원장은 그러나 이제 일을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지는 않았다. 그날 밤 사건이 있은 이후로 작업장 출역 원생들은 그런대로 또 묵묵히 참을성을 발휘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 해가 바뀌었다. 오마도 바닷물 속에 돌을 던져넣기 시작한 이후로 세번째 맞이하는 새해였다. 이 세번째로 맞이하는 새해 안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마도 사업장 일을 완전히 마무리지어놓고 말겠다는 것이 조원장의 결심이자 간절한 새해 소망이었다. 그러나 그 오마도 일이 조원장의 소망처럼 이 해 안에 그의 손으로 마무리가 지어지게 될지 어떨지는 지극히 의문스러운 바가 있었다. 어느 날 오마도 간척 사업장으로 반갑지 않은 손님 몇 사람이 조원장을 찾아왔다. 사내들이 오마도를 찾아온 것은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간척 작업의 실적 평가와 기술 조사를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사내들의 소속 단체는 대한정착사업개발회라는 곳이었으나, 그들이 오마도 사업장까지 기술 조사를 나오게 된 것은 도 당 당국 관계부서의 의뢰에 따른 것이라 했다. - 이럴 수가! 사내들을 만나보고 난 조원장은 대뜸 사태의 심각성을 예감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결정적인 배반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는 느낌과 함께, 피가 온통 몸 속을 거꾸로 흐르는 듯한 무서운 배신감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그는 개발 회사 사람들을 섬 안에 내팽개쳐둔 채 단걸을에 도청으로 쫓아 올라갔다. 정말로 그럴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는 그 일로 다시 골머리를 크게 앓을 때가 오리라고 미리 다난한 각오를 하고 있던 터였지만, 그 상이에 설마 거기까지 계략이 무르익어가고 있을 줄은 상상을 하지 않고 있던 일이었다. 한마디로 사업장을 빼앗기게 될 위험이 눈앞까지 닥쳐 와버린 것이었다. 작업 조사반이 섬까지 파견되어온 것은 단순한 실적 평가나나 기술 지도가 목적이 아니었다. 도청 쪽에서 거기까지 자상하게 관심을 기울여줄 리는 없었다. 자신들은 굳이 입을 열어 말하기를 꺼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벌서 사업장을 인수받으려는 누군가의 사전 준비 작업임이 분명했다. 사업장을 인수받으려고 하는 것이 어느 단체, 어떤 인물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이 섬 병원과 원생들에게 오마도 간척장을 맡겨두지 않으려는, 각계 요로에는 청원과 압력을 행사하면서 그렇게 일을 꾸며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원망스러운 것은 아량과 관용이 없는 선거 제도였는지도 모른다. 모든 승부를 수의 우열 한 가지로 결정짓고 마는 기계적인 선거 제도란 바로 그 수의 거래 행위와도 같은 것이었다. 소록도 원생들에겐 원래 투표권이라는 것이 없었다. 투표권을 주지 않을래서가 아니라 이 섬 병원은 원래 신원이 불확실한 유민 집단의 기착지 같은 곳이 되어 있어서 모든 원생들에게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시키는 데는 행정 절차상의 난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개개인의 이해가 한 가지 길로 쉬게 일치될 수 있는 사람들의 집단은 선거가 되면 그 집단 전체가 하나의 알뜰한 표밭으로 변할 가능성이 많은 곳이었다. 소록도는 손만 잘 쓰면 그대로 거대한 표밭이었다. 어느 해 총선 땐가 한 유능한 인사가 바로 이 섬 병원의 그런 이점에 착안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선거기가다가오자 이 섬 주민들이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케 하는 데에 많은 노력과 정성을 쏟아바쳤다. 그리고 그는 그 총선 투표에서 모처럼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하러 나온 원생들로부터 그의 노력과 정성에 값할 만큼 충분한 보답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는 이 고마운 섬 병원과 환자들에 대해 앞으로도 자신의 헌신적인 봉사가 계속될 것임을 다짐했고, 그는 그 다짐이 헛된 것이 되지 않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후로도 섬에 대해선 적지 않은 노력과 관심을 기울여야만 했었다. 일이 그쯤 되고 보니 이제 섬 병원과 원생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인사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선거를 기다리고 기회를 노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섬을 소홀히할 수 없었다. 누구나 섬과 섬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종’이 되기를 희망했다. 병원 원생들은 이제 지역내에서는 가장 큰 압력 단체였고, 선거를 노리는 사람들은 그 원생들에게 단단히 발목들을 붙들리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사정은 늘 그렇게 유리할 수만 없었다. 선거구 안의 투표 결과는 원생들의 그것만으로 결판이 아는 것이 아니었다. 선거구 전체를 따져 헤아리자면 원생들의 표수는 아직도 결정적인 숫자는 아니었다. 투표의 결과를 결정지을 수 있는 진짜 다수는 섬 바깥에 있었다. 그 다수의 섬 바깥 사람들이 오마도 사업장을 둘러싼 싸움에서 자신들이 지닌 표수의 위력을 내세우지 않을 리 없었다. 소록도는 손만 잘 쓰면 그대로 거대한 표밭이었다. 어느 해 총선 땐가 한 유능한 인사가 바로 이 섬 병원의 그런 이점에 착안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선거기가 다가오자 이 섬 주민들이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케 하는 데에 많은 노력과 정성을 쏟아바쳤다. 그리고 그는 그 총선 투표에서 모처럼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하러 나온 원생들로부터 그의 노력과 정성에 값할 만큼 충분한 보답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는 이 고마운 섬 병원과 환자들에 대해 앞으로도 자신의 헌신적인 봉사가 계속될 것임을 다짐했고, 그는 그 다짐이 헛된 것이 되지 않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후로도 섬에 대해선 적지 않은 노력과 관심을 기울여야만 했었다. 일이 그쯤 되고 보니 이제 섬 병원과 원생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인사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선거를 기다리고 기회를 노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섬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누구나 섬과 섬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종’이 되기를 희망했다. 병원 원생들은 이제 지역내에서는 가장 큰 압력 단체였고, 선거를 노리는 사람들은 그 원생들에게 단단히 발목들을 붙들리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사정은 늘 그렇게 유리할 수만은 없었다. 선거구 안의 투표 결과는 원생들의 그것만으로 결판이 나는 것이 아니었다. 선거구 전체를 따져 헤아리자면 원생들의 표수는 아직도 결정적인 숫자는 아니었다. 투표의 결과를 결정지을 수 있는 진짜 다수는 섬 바깥에 있었다. 그 다수의 섬 바깥 사람들이 오마도 사업장을 둘러싼 싸움에서 자신들이 지닌 표수의 위력을 내세우지 않을 리 없었다. 자신들의 다수를 담보로 출마 인사들을 자기들 편에 고용하기를 원한다면, 그 인사들은 불가피 섬 안의 소수를 단념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번 일은 아마도 그런 경로를 거치고 있었기가 십상이었다. 원생들로부터 간척장을 빼앗아내야 한다는 육지 쪽 여론과 명분이 어떤 식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주장을 따라 여기까지 일을 꾸며온 사람들이 어떤 입장에 있어온 사람들인지, 조원장은 듣지 않아도 이미 다 사정을 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조백헌 원장은 도청 관계자를 만나, 사태가 이미 그가 예상해오고 있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급박해 져 있음을 알고 나서는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주민 대표와 의뢰인들이 발이 닳도록 도청을 쫓아 올라다닌 것은 이미 그가 짐작을 하고 있던 대로였다 하더라도, 사업장 관리 단체의 변경은 그 계획의 검토나 추진 단계를 지나 이미 기정 사실로 매듭이 나 있는 판이었다. 도에서는 이미 대한정착사업개발회라는 곳으로 사업장 인수 예정 단체까지 결정을 지어놓고 있었다. 대한정착사업개발회라는 데서 오마도 사업장으로 작업 실적 평가반을 파견해온 것도 단순한 작업 진도의 평가나 기술 지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업장 업무 인수를 위한 사전 작업의 한 절차였음을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었다. “이제 조원장께서도 그만 단념을 해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조원장의 입장이나 심정을 개인적으로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이 일은 위아래로 워낙 신경들을 쓰고 있어서 저희들로서도 이젠 어찌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사업장 일로 도청을 드나들면서 알게 된 담당관의 말이었다. 위아래로 신경을 쓰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주민들의 청원 청탁이 도청 이상의 상급 기관까지 미쳐가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 일을 그런 식으로 결정지으려 하는 데도 도 이상의 고위층 양해가 미리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말이었다. “사리를 따지자면 이 일은 물론 조원장과 충분한 사전 협의를 거쳤어야 했을 줄 알고 있긴 합니다만 그런 식으로 순리대로 일을 처리하려 했다간 아마 쓸데없는 말썽만 자꾸 커지게 될 것 같아서 말씀입니다...... 오마도 일은 앞으로 몇 년을 더 끌어간다 해도 조원장 자의로는 단념을 하고 나설 리가 없다는 게 위아래로 다 똑같은 의견이었거든요.” 한마디로 감독 관청의 입장으로선 조원장이 지금까지 해온 일을 실패로 설명하고 싶은 눈치가 분명했다. 애초의 예정에서 몇 번이나 완공 기간을 연기해가면서도 작업 진도가 아직 그렇게 지지부진하고 있는 실정이라면 공사 관리권을 일찌감치 다른 곳으로 넘겨주는 것이 조원장으로서도 온당한 처사가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조원장께서는 좀 섭섭한 말씀이 되겠습니다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로는 공사 진도뿐만 아니라, 제방의 폭이 너무 좁게 축조되고 있어서 공사 설계 자체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야 뭐 보는 사람에 따라 말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이번 일은 조원장께서 너무 무모하게 덤벼들고 있었지 않았나 하는 감이 없지 않아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조원장께서도 이런 일엔 별로 경험이 없으신 분 아닙니까. 경험보다는 오히려 의욕이 너무 앞서버린 바람에 충분한 기초 조사도 없이 대뜸 일부터 시작해버린 조원장이셨지요. 게다가 기술이나 장비까지 충분치 못한 처지에 병원 환자들의 사기를 위해서는 작업 성과부터 우선 눈에 드러내보여야겠고......” 조원장은 당장 작자의 목뼈를 분질러놓고 싶었으나 그 길로 곧 자리를 차고 나와 지사실로 올라갔다. 지사를 만난 조원장은 다짜고짜 사업장 관리권 변경의 부당성부터 신랄하게 따지고 들었다. “이건 순 치사한 도둑질입니다. 문둥이가 성한 사람 것 버럭질하고 도둑질하는 일은 있어도 성한 사람이 문둥이 것을 도둑질하는 법은 천하에 없습니다.” 지사도 물론 조원장을 알고 있었다. 그는 조원장이 어떤 불평이나 공박을 해오더라도 자기로선 별로 할 말이 없다는 듯, 그를 대하고 나서도 공연히 난처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문둥이들의 비렁뱅이질을 무엇보다 싫어합니다. 그건 지사님께서도 마찬가지실 줄 압니다. 전 이 일로 해서 무엇보다 먼저 그자들의 더러운 비렁뱅이질을 그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조그만 땅이라도, 그들끼리 한곳이 모여 살 그들의 땅을 갖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이제 녀석들도 어느 정도는 희망을 가지게끔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저희 오마도 개척단 단기의 마크는 손가락이 잘려나간 문둥이의 몽당손 모양입니다. 원생들은 그 손가락이 없는 손을 그린 깃발 아래서 역시 손가락이 없는 손으로 돌을 나르고 둑을 쌓아올렸습니다. 저들은 아마 저들의 썩어 들어가는 몸뚱이를 물속에 던져넣어 둑을 싸아올리라 해도 능히 그렇게 할 각오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건져올린 오마도 땅입니다. 그런데 그 땅을 이제 작업 부진과 공사 기술 부족이라는 구실로 억울하게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그 누가 어떤 명분을 내세우며 일을 그렇게 만들어오고 있었는진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는 이 일에서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기술이 부족하더라도, 장비가 모자라더라도, 그리고 작업 기간이 일이년쯤 더 먹는 한이 있더라도 이 일은 기어코 제가 끝내고야 말겠습니다. 저와 저 손가락이 없는 문둥이들의 손으로 일을 끝내고 맙니다.” “일을 누가 끝내게 되든 공사가 완성되면 그 농토의 분배권만은 도에 속해 있도록 했으니까......” 조원장의 항변이 끝나자, 지사는 그를 달래기 위해 애써 생각해낸 말이 겨우 그 한마디뿐이었다. 농토의 분배권은 도가 갖게 되어 있으니까 지금까지 원생들이 바쳐온 노역의 대가는 그때 가서 충분한 보상을 받게 하겠노라는 뜻이었다. 조원장이 농장 일에서 손을 떼는 것은 지사까지도 이미 기정 사실로 쳐두고 한 말이었다. 조원장의 속마음을 밑바닥까지 다 헤아리고 있을 리는 없는 지사였다. “원생들로부터 오마도를 빼앗는 것은 저들에게 땅을 빼앗는 것만이 아닙니다. 문둥이들에겐 땅보다도 더욱더 값지고 귀한 것이 그 오마도에 있습니다. 모처럼 제 힘으로 세상을 살아보겠다는 희망과 긍지야말로 오마도 앞바다를 막아 건져낸 땅의 몇십 배 몇백 배 귀중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저들에게서 오마도를 빼앗는 것은 모처럼 움이 돋기 시작한 그 희망과 긍지와 저들의 삶 전체를 빼앗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번 한 번만이라도 저들에게 희망을 지녀보게 해주어야합니다. 이 밝은 태양 아래 사람으로 살아 있는 최소한의 보람과 긍지를 경험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저는 결코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조원장은 지사를 만나고 나서 그 길로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로 올라가선 장관까지 찾아가 만났으나 장관은 또 더더욱 할 말이 없는 사람 같았다. “예까지 날 쫓아 올라온 걸 보니 요즘 간척장 일로 신경이 꽤 피곤해진 모양이구만 그래.” 장관은 오히려 자기 쪽에서 무슨 양해라도 구하고 싶은 사람처럼 거북하게 말을 자꾸 얼버무리고 있었다. “고집이나 의욕만 가지고 모든 일을 혼자서 감당해내려는 건 아무래도 무리지. 사람사람마다 능력이라는 것이 따로 있고, 자기 처지라는 것이 있는 법이니까.” 조원장을 만나고 있는 동안 장관은 몇 차례씩이나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무슨 심통스런 어린애라도 달래듯 쉴 새 없이 그의 어깨를 두들겨대던 것이었다. 장관 역시 오마도 일로 꽤는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던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런 장관의 태도로 보아 본심이든 아니든 오마도 간척 사업장의 관리권 변경 문제는 그가 이미 상당한 정도까지 양해를 하고 있음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조원장은 맥이 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장관님이 어떻게 결정을 내리시든 저는 절대로 이 일에서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는 결국 저와 저희 병원 5천 문둥이들의 손으로 이 일을 끝내놓고 말겠습니다.” 장관실을 물러나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단호한 결의를 다짐해 두기는 했지만, 장관의 태도마저 그런 식이고 보면 조원장의 처지는 이제 완전히 사면초가였다. 마지막 기대를 걸어볼 곳은 오직 섬사람들뿐이었다. 그는 풀이 죽어 다시 섬으로 돌아왔다. 섬으로 돌아오자 아직도 공사장에 남아 은밀히 공사 업무 인수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조용히 뭍으로 내보내고 나서 이날 밤으로 곧 장로회 사람들을 만났다. 조원장은 그 장로들의 모임에서 자기가 방금 도와 서울을 다녀오게 된 경위와 그 출장 기간중에 확인된 오마도 사업장으 운명과 관련된 그간의 사정들을 낱낱이 다 털어놓았다. 저들은 오마도 간척 사업이 오직 이 조백헌이 한 사람의 고집 때문에 시작된 일로 오해하고 있으며, 앞으로 당신들에게서 이 일을 빼앗아내는 데도 오직 이 조백헌이 한 놈의 훼방만 물리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일은 물론 누구 한 사람의 고집 때문에 시작된 일도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던 일이다, 마찬가지로 저들이 당신들에게서 오마도를 빼앗아가는 데도 이 조백헌이 한 놈의 배신 행위나 굴복만으로는 절대로 가능할 수가 없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믿고 있다...... 바깥에서 되어가고 있는 사정에다 원장이 일부러 그런 자극적인 소리를 덧붙인 것은 물론 섬사람들에게서 배전의 작업열을 발휘시키고 그것을 다짐받기 위함이었다. 조원장은 이제 누구도 오마도 일을 간섭하고 나설 구실이나 명분을 남겨주지 않는 길만이 사업장을 지켜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정식으로 사업장 인계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공사 완료를 선언할 수 있게만 된다면 저들로서도 오마도를 내놓으라 마라 할 명분이 서지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도 일을 더욱 서둘러야 한다, 사업장 관리권을 넘기라는 명령이 언제 떨어질는지 모른다, 일이 터지는 날까지 저들이 아직 오마도를 넘볼 구실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당신들의 손으로 이 일을 끝내는 걸 보고 싶다, 이 일은 당신들의 손으로 끝이 나야 한다...... 원장은 비장하게 호소했다. 장로들은 시종 이렇다 할 표정이 없이 묵묵히 원장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원장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장로들은 입에 바른 격려나 위로말 한마디 없이 지극히도 담담한 얼굴들을 하고 조심조심 원장 앞을 물러가버렸다. 하지만 이날 밤 그 장로들에 대한 조원장의 기대와 호소는 결코 부질없는 헛수고에 그쳐버린 것이 아니었다. 날이 밝기도 전에 섬에서는 한차례 소동이 벌어졌다. 정체가 드러나기 전에 조원장이 미리 개발 회사 사람들을 섬에서 내보낸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작업반 원생들 몇 사람이 이날 밤 안으로 은밀히 봉암리 쪽 개발 회사 사람들의 숙소를 덮친 것이다. 끔찍스런 사고가 모면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작자들로 하여금 한 발 앞서 섬을 떠나게 한 조원장의 사전 방책 때문이었다. 원생들은 물론 그쯤에서 작자들을 단념하려 하지도 않았다. 개발 회사 사람들이 이미 오마도를 떠나버린 것을 알고 난 다음에도 원생들은 밤새도록 숙소의 주변을 뒤져대는가 하면, 그 중의 몇몇은 녹동 쪽 찻머리로 쫓아나가 날이 밝을 때까지 꼬박 작자들의 도주로를 숨어 지키다 돌아왔을 정도였다. 간척장 일을 다른 사업 단체로 인계시키려는 구체적인 작업이 서둘러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 동안 설마설마하던 섬사람들에게 확실히 큰 충격을 주게 된 것 같았다. 눈에 보이는 복수의 표적조차 찾을 길 없는 섬사람들의 분노는 이튿날 아침부터 무서운 작업열로 변해졌다. 오마도 공사장은 이제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원생들의 집념과 복수심으로 전날까지는 거의 상상할 수도 없었던 무서운 작업열이 폭발하고 있었다. 오마도엔 겨울에도 밤낮이 없었다. 눈 내리는 날과 바람부는 날이 따로 없었고, 이제 와선 일의 성패를 따지거나 결과를 의심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다만 오마도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무조건한 집념과 그것을 빼앗으려 드는 자들에 대한 떨리는 복수심으로 그렇게 일을 했다. 추위 속에 밤낮없이 일을 해도 동상 환자 한 사람 나타나지 않았다. 원장은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그는 충천한 작업장 사기를 보고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저들에게서 이 오마도를 빼앗아가게 할 수는 없다. 그는 이제 그 원생들의 힘만으로도 그것이 충분하다는 자신이 생기고 있었다. 원생들의 기세는 이제 앞으로 한 달도 안 가서 섬을 빼앗고자 하는 자들의 모든 명분과 구실을 쓸어 없애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젠 침하도 웬만큼 뜸해졌겠다. 앞으로 한동안만 더 그런 식으로 일을 계속해주면 멀지 않아 마지막 절강제 행사를 치르고 제방 작업을 일단락, 마무리지어버릴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절강제까지 치러지고 난다면 그때 가선 어떤 얼굴 두꺼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 이 오마도를 넘볼 명분을 마련할 수가 없을 터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섬사람들의 뜨거운 열기였다. 설령 절강제가 치러지기 전에 사업장 인계 명령이 내려지는 경우가 온다 하더라도 원생들의 분위기가 그쯤 되어 있다면 아무도 그 원생들에게서 호락호락 오마도를 빼앗아갈 수는 없을 터이었다. -저들에게서 기어코 오마도를 빼앗고자 하는 자들이 있다면 지금 저들을 와서 보라. 저들의 저 무서운 집념과 열망을 보고 누구라서 감히 저들로부터 그것을 빼앗을 수가 있단 말이냐. 어떤 훌륭한 명분과 구실이 있어 저들로부터 그것을 빼앗을 수 있으며, 누구라서 감히 그것을 빼앗기고 난 저들의 피맺힌 저주와 복수를 감당할 수가 있단 말이냐...... 조원장은 그 원생들만을 굳게 믿었다. 그리고 사태가 더욱 악화되기 전에 어떻게 하든지 일을 어느 정도까지 자기 손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조원장의 처지로선 당장 그 이상의 대비책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원장에겐 아직도 실상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오마도 간척장을 빼앗기 위해 일을 꾸미는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그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 일을 꾸미는 사람이란 언제나 계략에 말려들어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쪽보다는 지혜가 앞서기 일쑤였다. 조원장은 다만 시간을 벌고 싶어했을 뿐, 일을 꾸미는 사람들 쪽에선 아예 그의 그런 지혜를 발휘할 기회조차도 빼앗아버릴 더 좋은 지혜를 마련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이젠 침하도 웬만큼 뜸해졌겠다, 앞으로 한동안만 더 그런 식으로 일을 계속해주면 멀지 않아 마지막 절강제 행사를 치르고 제방 작업을 일단락, 마무리지어버릴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절강제까지 치러지고 난다면 그때 가서 어떤 얼굴 두꺼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 이 오마도를 넘볼 명분을 마련할 수가 없을 터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섬사람들의 뜨거운 열기였다. 설령 절강제가 치러지기 전에 사업장 인계 명령이 내려지는 경우가 온다 하더라도 원생들의 분위기가 그쯤 되어 있다면 아무도 그 원생들에게서 호락호락 오마도를 빼앗아갈 수는 없을 터이었다. 저들에게서 기어코 오마도를 빼앗고자 하는 자들이 있다면 지금 저들을 와서 보라. 저들의 저 무서운 집념과 열망을 보고 누구라서 감히 저들로부터 그것을 빼앗을 수가 있단 말이냐. 어떤 훌륭한 명분과 구실이 있어 저들로부터 그것을 빼앗을 수 있으며, 누구라서 감히 그것을 빼앗기고 난 저들의 피맺힌 저주와 복수를 감당할 수가 있단 말이냐.... 조원장은 그 원생들만을 굳게 믿었다. 그리고 사태가 더욱 악화되기 전에 어떻게 하든지 일을 어느 정도까지 자기 손으로 마무리지을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조원자의 처지로선 당장 그 이상의 대비책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원장을 빼앗기 위해 일을 꾸미는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그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 일을 꾸미는 사람이란 언제나 계략에 말려들어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쪽보다는 지혜가 앞서기 일쑤였다. 조원장은 다만 시간을 벌고 싶어했을 뿐, 일을 꾸미는 사람들 쪽에선 아예 그의 그런 지혜를 발휘할 기회조차도 빼앗아버릴 더 좋은 지혜를 마련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조원장은 뼈가 비틀리는 듯한 아픔 속에서 때늦게 그것을 깨달았다. 조백헌 원장는 그 공사 관리권 인계 명령에 앞서 병원장 전임 발령을 먼저 받아버린 것이었다. 그의 놔두고 오마도 사업장을 인계시키자면 아무래도 말썽이 클듯싶으니까, 처음부터 아예 그를 섬에서 내쫓아버리고 일을 벌이려는 수작이었다. 고집이나 의욕만 가지고 모든 일을 혼자서 감당해내려는 건 아무래도 무리지. 사람마다 다 능력이라는 것이 따로 있고, 자기 처지라는 것이 있는 법이니까. 공연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추궁을 얼버무리려 들던 장관의 말뜻이 비로소 훨씬 분명해지고 있었다. 그야 원장이 정 말썽을 부리고 나선다면 녀석의 모가지부터 떼 옮겨놓겠노란 협박은 조백헌 원장으로서도 읍내 거리에서 자주 소문을 들어 알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일판의 처지가 어떻다는 걸 상하가 다알고 있는 처지에 설마하면 그런 식으로까지 야박스런 방법이 도원되라고는 차마 상상도 못 하고 있던 조원장이었다. 하지만 일은 결국 그 사람들의 장담대로였고, 그 거리의 소문대로였다. 그것도 또한 너무나 갑자기, 그리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해서였다. 조원장은 한동한 눈앞이 캄캄했다. 병원 일 외에도 방대한 간척장 업무 인계 기간을 감안해서인자, 신구 원장의 이착임일을 한 달 가까이나 앞질러 발령을 내려준 것만이 위안거리라면 마지막 위안거리가 될 수 있었다. 조원장의 새 임지는 마산에 있는 어떤 국립 요양원이었고, 새 원장의 병원 부임 날짜는 아직 한 달쯤 여유가 남아 있는 새달 3월 7일로 되어 있었다. 발령 전 상의나 전화 호출 한번 없이 전임 명령은 오직 그 간략한 서면 통보 한 가지뿐이었다. 전임 명령서를 접수하고 난 뒤로도 윗동네 관계관들로부터는 도대체 위로 전화 한 통이 없었다. 조원장은 당장 서울로 뛰어 올라가고 싶은 충동이 치받쳐오르기 시작했으나, 그로 인해 원생들의 사기에 또 무슨 좋지 않은 동요라도 생기지 않을지 염려되어 이미 사실을 알고 있는 병원 본부 직원들에게마저 별명이 있을 때까지는 일체 원장의 전임 사실을 비밀에 부쳐두도록 함구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그날부터 공사장 순행도 단념한 채 그 혼자 원장실에 틀어박혀 이 갑작스런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들을 곰곰 궁리하기 시작했다. 비판 2 25 이틀 동한 궁리 끝에 작정을 내린 것이 조백헌 원장은 결국 전임일 이전까지 작업을 좀더 서두르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오마도의 운명이 결판날 수 있도록 작업을 힘껏 서두르는 길뿐이었다. 전임일 이전에 절강제라도 치러놓고 보는 것이 우선의 급선무였다. 조원장은 작정을 내리고 나서 이틀 후부터 다시 공사장을 나가기 시작했다. 공사장으로 나가서는 새로운 작업 목표를 하달했다. 그는 먼저 오마 고지 작업 지휘소로 황희백 장로를 불러놓고 멀지 않아 그가 섬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음을 귀띔하고 나서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그전에 먼저 간척장 일에 가닥을 내지 않으며 안 되겠다는 자신의 결의를 분명히했다. “발령장 날짜대로 하면 전 늦어도 다음날 7일까지는 이곳을 떠나야합니다. 하지만 전 오마도 간척 공사가 어느 단계까지나마 이 섬 사람들 손으로 마무리지어지는 것을 보기 전에는 적어도 그 사람들의 손으로 마무리가 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전에는 섬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곳을 떠나기 전에 거기까지만 일을 서둘러주십시오. 전 그것을 보고서야 이 섬을 떠날 수가 있습니다.” 조원장은 자기 눈으로 절강제를 치르는 것을 보지 못하면 그때까지 그냥 섬 안에 몸을 주저앉히고 기다리기라도 할 사람처럼 단단히 오금을 박아 말했다. 아닌게아니라 그는 그러지 않고는 새 임지의 부임을 단념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 명령에 주고 사는 제복의 신분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런 결심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는 이제 군인이 아니므로 어느 때나 필요한 때 행사할 수 있는 편리한 권리가 한 가지 있었다. 사직서를 쓸 수 있는 것이었다. 사표를 내던지고 섬 안에 그대로 몸을 담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물론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다. 병원자의 직권이 없는 조백헌 개인은 그 경우 섬에 대한 자신의 충정을 증명해보이는 외에 별달리 효과적인 봉사를 바칠 수는 없을 터이었다. 어차피 거추장스런 인물로 섬을 쫓아 내보내려는 사람들이 그가 그대로 섬에 주저앉는다고 그에게 다시 힘을 보탤 여지를 남겨줄 리가 없는 사정이었다. 그건 좀 신중하게 생각을 해봐야 할 일이었다. 황장로는 언제나처럼 원자의 말에는 그리 별다른 느낌이 없는 사람처럼 그저 망연스런 눈초리만 하고 있었다. 망연스런 눈초리로 한동안이나 그저 먼 바다만 내려다보고 있던 황장로의 눈길이 이윽고 오마도 기슭을 오르내리는 흙차들 쪽으로 옮겨졌다가 그것이 다시 곁에 선 조원장에게로 되돌아왔을 때, 노인의 눈가에는 뜻밖에도 어떤 짓궂은 장난기 같은 것이 배고 있었다. “그 참, 최고집 강고집이 황소 고집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조씨 성바지가 또 자기 신세까지 그르치고 나설 황고집인 줄은 원장한테 첨 보는 일이로구만 그래.” 노인은 마치 지금까지 두 사람이 무슨 실없는 농담들을 지껄이고 있었기라도 하듯 조금도 힘을 들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우린 서로 남 위해 이 일 하는 것 아니라 말해왔는데, 원장이 우리 문둥이를 핑계하고 신세 망치려 드는 걸 그대로 모른 척해버릴 수가 있을라구. 절강제를 못 보면 팔자까지 그르칠 사람이 있다는데 우리도 원장이 절강제라도 보고 가도록 일을 서둘러 보아야지. 그래 원장 가지 전에 절강제를 지내자면 날짜는 언제쯤으로 잡았으면 좋을꼬.” 오마도 일이 가닥나기 전에는 섬을 떠나지 않겠노라는 조원장의 결의에 대해선 황장로 역시도 고마움이 앞서 절강제부터 서두르고 나섰다. 조원장은 물론 그 황장로의 말뜻을 알아듣고 있었다. 황장로가 그에게 발령 날짜대로 섬을 떠나라는 듯이 말을 했든 안 했든 이제 그에 대한 노인의 신뢰는 어차피 달라질 리가 없는 것이었다. 노인이 절강제를 서두르는 것은 그 역시도 원장과 섬사람들을 위해선 그 길 밖에 당장 다른 뽀족한 방도가 없었기 때문일 터였다. “3월 6일로 정합시다. 그날이 제가 이곳 병원의 원장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니까요.” 원장은 마침내 3월 6이로 절강제 날짜를 정했다. 3월 6일로 정해진 절강젯날까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방 공사를 모두 끝내야 한다는 새로운 작업 목표가 정해진 것이었다. 오마도 사업장을 빼앗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겹쳐, 그 사업장을 지켜주겠노라던 원장의 전임설까지 함께 알려지고 나니, 공사장 분위기는 또 한번 뜻밖의 변화가 일어났다. 조원장의 전임 전에 절강제를 치러야 한다는 새로운 작업 목표가 하달되고, 전임일까지 절강제를 치르지 못하게 될 경우 새 임지 부임을 단념하고서라도 계속 오마도 사업장을 지키겠노라는 원장의 결의가 결정적인 것으로 과장되어 전해지자, 원생들은 그 절강젯날까지의 작업 목표를 달성해내기 위해 또다시 결사적인 투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원장의 전임설은 오히려 원생들의 작업열에 대한 또 한차례의 점화제가 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 저녁은 조원장이 방금 전에 막 공사장의 적업 진척 상황을 살펴보고 섬으로 돌아와 있는 참이었는데, 작업장 근처에서도 수시로 얼굴을 마주하고 지내던 이상욱이 이날은 또 웬일인지 병원 옆 원장 관사까지 일부러 그를 만나러 왔다. 원장은 상욱의 새삼스런 내방에 우선 수상쩍은 생각부터 들기 시작했다. 병원이나 작업장 근처에서 수시로 얼굴을 대하면서도 사무적인 일 이외에는 좀처럼 입을 잘 열지 않는 위인이었다. 지난 연말 원장이 섬사람들의 습격을 받아 위급한 처지를 당해 있을 때는 의외로 그가 앞장서 나서서 사태를 무사히 수습해주기도 했었지만, 그때의 일에 대해서마저 상욱은 그 후 조원장 앞에선 빈소리 한마디 지껄인 일이 없었을 만큼 모질고 냉찬 성미의 사내였다. 그날 밤 일에대해 작가가 그토록 입을 다물어버리고 지내는 것도 조원장으로선 그지없이 기분이 불편스러운 일이었지만 , 그자 어쩌다 소관 업무 이외의 일로 입을 여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상욱은 늘 그날 밤 사고 때처럼 원장으로선 도대체 유쾌할 수가 없는 일이거나 이상스럽게 원장을 경계하고 비꼬아댈 일로만 해서였다. 조원장은 상욱을 방안으로 들여앉히고 나서도 계속 마음이 편해지질 않았다. 공사장에 무슨 사고라도 생겼다면 상욱의 거동이 또 그처럼 차분할 수가 없었다. 원장에게 뭔가 따로 할 말이 있어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상우 역시 무슨 일에 일단 작정이 서고 나면 쓸데없이 말뜸을 길게 들이고 있는 성미는 아니었다. “원장님께서 직접 손을 써주시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생겨서 일부러 원장님의 도움을 구하러 왔습니다.” 이윽고 상욱이 단도직입적으로 찾아온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지금 장로회를 중심으로 한 섬사람들 사이에 조원장의 전임 발령을 취소하라는 청원 서명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으니, 원장이 당장 앞장을 서 나서서 그 일을 중단시켜달라는 것이었다. “지금 형편으로는 누가 그 일을 말리려 해도 소용없고 또 말리려 나설 사람도 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지금 그 짓을 말리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만, 혹시라도 누구 하나 그 일을 반대하고 나서거나 협조를 하지 않으려 했다가는 그 당장 배반자의 낙인이 찍혀 곤욕을 치러야 할 형편이니까요. 원장님밖에는 이 일을 중단시킬 사람이 없습니다.” 원장이 나서주지 않는다면 이 이상스런 협박극은 섬 안을 진짜 배반자들로 가득 채우고 말 거라는 것이었다. 원장으로서는 도대체 그런 서명 운동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금시초문이었다. 언젠가도 한번 그런 예가 있기는 했었다. 그때는 조원장 자신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또 그러기를 바라기도 했던 일이라 처음부터 사정이 썩 밝은 편이었지만, 이번만은 그 조원장으로서도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이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상욱은 마치 조원장이 그런 사실들을 뻔히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시치미를 떼고 있는 줄로나 여기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그 새끼들, 그거 일은 하지 않구 공연히 쓸데없는 짓들을 하고 있었구만 그래. 임자래도 그걸 당장들 그만두게 하지 않구서......” 원장은 그런 일을 가지고 일부러 자기를 찾아온 상욱부터가 몹시 마땅칠 않았다. 그는 내일이라도 곧 사람을 불러 서명 작업을 중지시키겠노라고 상욱부터 우선 안심을 시켰다. 상욱이 바라는 대로 다짐을 해보이고 나서도 원장은 실상 그 상욱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그 일에 신경이 곤두서고 있는지에 대해선 작자의 속마음이 적이 불쾌했다. 조원장의 전임 발령 취소를 청원하는 서명 운동을 중지시켜 달라는 것은 바로 그 조원장더러 섬을 떠나달라는 말과 한가지였다. 원장의 유임 청원이 섬에 대한 배반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서명 운동을 중지시키지 않으려 했다간 그 원장마저도 상욱은 섬에 대한 배신자로 낙인을 찍고 말 판이었다. 조원장은 상욱의 그런 심사를 전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섬사람들이 원장에게 오마도 공사를 이해얼마 동안이라도 더 그가 이 섬에 남아 있어주기를 바라고 또 조원장 자신도 그러기를 소망하는 것이 어째서 이 섬에선 그토록 큰 배반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인지, 조원장은 상욱의 속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원장은 그 상욱이 괘씸스런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상욱은 원장의 기세에 눌려 쉽사리 자기 고집을 꺾고 물러설 위인이 아니었다. “한데 이과장의 생각은 어느 쪽이오? 난 그저 이과장이 그 서명 운동만을 중지시켜 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이 조백헌이더러 발령 날짜대로 냉큼 섬을 떠나달라는 건지 분별이 잘 가지 않는구려. 이과장한테 내 쪽에서 가끔 신세를 지는 일은 있었지만, 설마하면 그런 일로 이과장이 내개 무슨 원한 같은 걸 품었을 리도 없을 테고 말이오.” 짐짓 농섞인 어조로 튕겨보는 조원장의 말에 상욱은, “그야 원장님께서 이 섬을 떠나고 안 떠나시고는 원장님의 의사에 달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조원장과는 정반대로 정색을 히고 반문해왔다.원장이 섬을 떠나든 안 떠나든 그것은 원장 자신이 결정할 문제이며 거기 무슨 다른 사람의 의견이 보태질 여지가 있느냐는 태도였다. 원장이 섬을 떠나든 안 떠나든 상관을 않겠다는 것은 이 경우엔 결국 섬을 떠나라는 쪽이었다. “그 참, 갈수록 섭섭한 소리뿐이로구만 그래. 섬사람들이 모두 이 조백헌일 내쫓고 싶어한다 해도 임자만은 날 좀 붙들어주지 않나 싶었더니... 그야 이 섬에서 이과장보다 날 경계하고 못 미더워해온 사람도 없었을 터이긴 하지만, 그래도 세월이 이쯤 흘렀으면 무슨 믿음 같은 게 쌓일 줄 알았는데 이건 ...” 여유를 잃지 않으려는 듯 자꾸만 실없는 농조가 되고 있는 조원장의 말투에 상욱은 그 원장을 찾아온 의도가 점점 분명해져가고 있었다. “그야 섬을 떠나주기를 바라는 것은 굳이 원장님이 아닌 다른 분에 대해서라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요.” 상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정확하게 자기 할 말을 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전 오마도 간척장 일 역시 그 일의 시작과 결말이 원장님 아닌 다른 누구에 의해서든지간에, 굳이 특정한 한 사람의 책임일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일을 시작하신 것은 물론 원장님이었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전 그 일의 결말을 짓는 것도 반드시 원장님만이 하실 수 있는 원장님만의 책임이어야 한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외람된 말씀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전 사실 절강제만이라고 꼭 보고 말겠다는 원장님의 생각에 대해서도 별로 그래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 너 혼자뿐이라고 자만하지 마라, 절강제를 보고 싶어하는 것도 네가 시작한 일이니 네 손으로 끝장을 내고 말겠다는 부질없는 욕심일 뿐이다...”원장은 혼잣말처럼 상욱의 말을 되씹고나서, 이제 비로소 농담기가 가신 육중한 시선으로 상욱을 똑바로 건너다보기 시작했다. “전 원장님께서 절 이렇게 생각하시든 역시 원장님을 믿고 있는 편입니다. 믿고 있기 때문에 감히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굳이 원장님께서 모든 일을 끝내고 떠나려고 하지 말아주십시오. 이 섬 사람에겐 그런 원장님의 경험을 남겨주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 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 담배조차 피우지 않는 상욱의 어조는 갈수록 단호했다. “부인하고 싶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원장님께서 그간 이 섬에 이룩해 놓으신 일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원장님께선 이미 이 섬에서 너무도 큰 일을 이룩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원장님께서 절강제를 치르게 되시든 안 되시든 원장님께서 염려하고 계시듯 오마도 간척장을 다른 사람에게 억울하게 빼앗기는 경우에 있어서까지도 이 섬에선 이미 훌륭하게 성취되어진 것입니다. 절강제나 원장님의 전출 때문에 그것이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한데도 원장님께선 아직 이 일에 다른 사람의 힘이 보태지는 것을 원하지 않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의 힘이 더 보태질 여지가 없을 만큼 이 일은 원장님 혼자서 결말을 지어 놓고 싶어하십니다. 그것은 원장님의 지나친 욕심입니다. 왜냐하면 원장님 스스로도 이제 이 일엔 더 보태실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장님 자신이 기어코 이 일을 결말내고 싶어하시는 것은 원장님께서 이미 이 섬에 이룩해놓으신 것에 대한 원장님의 당연하면서도 인색스런 권리의 주장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 “ 동상 때문이겠군. 이과장은 아직도 그 동상의 망령이 내게 되살아 날까봐 겁을 집어먹고 있는 거 아니오?” 원장은 이제 노골적으로 불쾌한 어조로 말하고 나서, 그러나 그 동상의 망령에 대해서라면 전혀 안심을 해도 좋다는 듯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상욱은 이제 그만한 여유조차도 원장에겐 용납을 하지 않으려는 기세였다. “알고 있습니다. 원장님께선 자신의 동상을 지으실 생각을 가진 일이 없으시다는 걸 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장님께서 스스로 동상을 짓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지어 바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섬이 아니라면 동상이란 원래 그 편이 정상이니까요. 동상에 관해서라면 전 원장님을 의심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번 일엔 임자가 그렇게 근심을 안 해도 되겠구랴.” 상욱이 너무 힐난조로 나오다보니까 조원장 쪽에서도 가만히 성미를 죽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과장 말대로 동상이란 게 원래 본인이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데엔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이 지어 바치는 게 정상이라면, 내가 지금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고 있든 그건 나하곤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니냔 말이오. 하물며 내가 그것을 소망해본 일이 없는데도 이 섬 사람들이 그걸 내게 지어 바치겠다면 나로선 그걸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일이 아니겠소.” 조원장은 상욱을 못 견디게 하기 위해 일부러 뻔뻔스런 말만 골라 하고 있는 식이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좀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상욱이 다시 그 원장의 말꼬리를 물고늘어졌다. “ 이 섬 일이 아니라면 그건 물론 자랑스럽고 떳떳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섬에선 사정이 다릅니다. 원장님께서도 알고 있으시듯이 이 섬에서도 물론 동상이 세워진 일이 있었고, 또 그 동상은 동상의 주인공이 그것을 원해서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당사자는 말을 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그것을 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것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말을 하기 전에 스스로 그것을 지어 바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섬 사람들에겐 그가 그것을 말하거나 말하지 않거나 동상을 지어 바쳐야 할 사정은 어차피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임잔 그럼 아직도 내가 말을 하지 않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은근히 나의 동상을 바라고 있을 게라는 거요?”“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전 원장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섬 사람들이 이미 원장님의 동상을 지을 준비를 끝내고 있습니다.”“저들이 어떻게?” “원장님께선 아직 그 사람들을 나무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들 자신도 아직은 자기들이 멀지 않아 곧 시작하게 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질 모할 터이니까요. 하지만 원장님이 오신 후로 이곳 사람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달라져왔는가를 주의해 보시면 제가 지금 원장님께 드린 말씀을 이해하시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를테면 원장님께서 여기로 오신 후까지 한동안 끊이지 않던 그 골치 아픈 탈출 사고만 해도 요즘은 아주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그 위에다 원장님께서 그간 몇 차례 섬사람들과의 위태로운 대립에서도 한번도 물러서시는 일이 없이 언제나 주위를 잘 설득해서 원장님 뜻대로 일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원생들은 지금 무슨 일에나 원장님 뜻대로 잘 따라 이끌리고 있습니다. 저들은 심지어 몰이 아파도 아픈 척을 하지 않고 오마도에서 죽자사자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물론 원장님께서도 만족하실 일이고, 그러시는 원장님을 비난드릴 바도 없습니다. 하지만 원장님께선 저들이 이제 아무도 이 섬을 빠져나가려는 자가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훨씬 더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저들은 이제 아무도 원장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 원장님을 거역할 수도, 거역할 의사도 없게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그러나 결국은 그들을 어떻게 만들어놓고 말 것인가를 주의 깊게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진실로 원장님께서 이 섬을 떠나지 말아주시기를 바라고 있으면 있을수록 저들은 이미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원장님의 동상을 지니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결국 저들 스스로 그 동상을 원장님 앞에 지어 바치는 날이 오고 말 것입니다. ”“...” “원장님께서 부임 초에 말씀하셨던 대로 이 섬은 애초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유령들의 섬이었습니다. 원장님께선 그 유령들을 깨워 일으켜 땅 위를 걸어다니는 인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의 생에 대한 희망과 신념을 갖게 하고 이웃간의 신뢰도 심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처럼 만의 희망과 신념이 또 다른 속박에로의 안내등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상이란 언제 어느 곳에 세우게 되든 그것을 세우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속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이 섬에 다시 누구의 동상이 세워지게 된다면 그 동상이 이 섬 사람들에게 말하게 괼 바는 조금도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섬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원장님의 동상을 지니는 일까지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저들이 지니게 된 원장님의 동상이야말로 진실로 값진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값진 원장님의 동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원장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섬 5천 나환자 자신들을 위한 동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원장님께서도 즐거이 시인을 해주실 줄 믿습니다. 원장님께서 이 섬에 남아계시는 한 저들은 원장님의 동상을 저들 자신을 위한 동상으로는 그것을 완성할 수가 없으리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도대체 이과장이 내게 바라는 게 무엇이오?” 상대방의 존재조차 망각해버린 듯한 상욱의 열기에 눌려 한동안 묵묵히 입을 다물고 듣고만 있던 조원장이, 마침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진 듯 퉁명스럽게 상욱을 제지하고 나섰다. 원장의 퉁명스런 목소리로 보아 그는 지금까지 계속 되어온 상욱의 열띤 충고를 받아들이려 하기는커녕 오혈 걷잡을 수 없이 세찬 반발심만 열심히 돋우어오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니, 이과장이 내게 바라고 있는 게 무엇인가는 나도 이미 짐작을 하고 있소. 하지만 여태까지 이과장이 내게 해온 주문이나 충고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내가 우선 불타나 예수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부터 알아본 다음이어야겠구랴.” 원장의 말투는 거의 노골적으로 상욱을 비웃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밤엔가도 그랬듯이 상욱은 한번 열이 오르면 자신의 진실에 겨워 적당한 대목에 가서 그 열기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것이 탈이었다. 상욱은 조원장의 그 심사가 비틀린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끝끝내 정색을 한 어조로 상대를 괴롭혀오고 있었다. “제가 지금 원장님께 바라고 있는 것은 원장님께서 예수나 불타가 되셔야만 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전 지금 이섬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라고 있는 원장님의 동상이 아무리 값지고 귀한 거이라 하더라도 원장님 스스로 그것을 완성시킬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 드리려는 것뿐입니다. 그냥 섬을 떠나 주십시오. 원장님께선 때가 왔을 때 이곳을 떠나주시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그리하여 원장님께선 이 섬에 남아계심으로써가 아니라 이 섬을 떠나심으로써 섬사람들 스스로 저들을 위한 원장님의 동상을 완성해 지니도록 해주십시오. 아마도 그렇게 하시는 것만이 원장님께서 지금까지 이 섬에서 섬과 섬사람들을 위해 이룩해 오신 것들을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 암아 있게 하는 길이 도리 것입니다. 원장님으로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이제 이 섬에선 모두 이루어져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상욱 보건과장이 관사를 다녀간 다음에도 조백헌 원장은 여전히 그 절강젯날까지의 작업 계획표나 자신의 생각을 변경할 의사를 갖지 않고 있었다. 그는 도대체 상욱이 자기에게 무엇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섬을 떠나게 하고 싶어하는지, 아직도 그의 동기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납들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 상욱의 동기가 어떤 쪽이든 그가 그토록 자기에게 바라고 충고해온 일이란 한마디로 그는 이제 더 이상이 섬엔 남아 있을 필요가 없는.또 남아 있으려 해도 안 될 인물이라는 것을 본인 스스로가 깨닫도록 해주려는 것이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원장더러 이젠 이 섬을 떠나 달라는 그 한 가지 단순한 주문이 밤새도록 되풀이한 그의 가장 분명한 주문이었다. 그러나 조원장은 설사 그 상욱의 주문을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 해도 아직은 그가 절강제까지는 치르고 나서, 또 그것을 치러내는 원생들의 열망과 노력을 보여줌으로써 오마도의 일에 그 나름의 어떤 결말을 짓고 나서 섬을 떠나더라도 그쯤에서 떠나고 싶어했던 애초의 생각에는 별다른 변경이 필요한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상욱이 다녀가고 나서도 이날 밤 작자의 불편스런 주문들에는 조금도 구애됨이 없이 애초의 계획대로 끝까지 일을 추진해 나갈 결심이었다. 하지만 그 조원장마저도 며칠뒤엔 상욱과 섬사람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달리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욱이 조원장을 관사로 찾아와 만나고 며칠 뒤의 일이었다. 상욱은 원장에게 그날밤 늦도록 긴 충고를 하고 나서도, 아직도 뭔가 다른 말을 하고 싶은 것이 남아 있었던지, 혹은 그럼으로써 그날 밤의 긴 이야기들에 다시 한번 다짐을 주고 싶어서였던지, 까닭도 없이 홀연 섬을 떠나가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상욱은 지금까지 조원장이 그를 알고 겪어온 것보다도 더욱더 불가사의하고 요령부득의 인물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상욱은 섬을 조용히 떠나간 것도 아니었다. 옛날부터 이섬의 수많은 사람들이 자주 그렇게 해왔듯이 그 구북리 돌뿌리 해변가의 차가운 밤바닷물로 뛰어들어 그로서는 참으로 목숨까지 함께 내걸어야 했을 이상스런 방법으로 불편스럽게 섬을 나간 것이었다. 상욱은 입원 환자가 아니라 병원 요원이었다. 그는 다른 원생들처럼 고된 노역 때문에 섬을 탈출까지 할 필요는 없는 사람이었다. 한데도 그는 그 나루를 건너지 않고 내력 깊은 돌뿌리 해변가를 택하여 차가운 겨울 바다를 건너간 것이었다. 그냥 섬을 떠나간 것이 아니라, 그 섬을 버리고 간 또 하나의 ‘탈출사건’이었다. 돌뿌리 해변가에는 누구나 상욱이 그곳을 통해 섬을 탈출해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분명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물로 뛰어들기 전에 숲끝에 벗어 놓은 옷가지와 신발짝들이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해변으로 가기 전그가 밤늦게 병원 본관 사무실을 들러 숙직 직원들을 만나고 간 것도 실상을 자신의 행적을 용이하게 추리시키기 위함이었다. 모든 것은 상욱이 일부러 만든 소동이었다. 조원장은 어느 정도 상욱의 동기를 짐작할 수는 있었다. 상욱이 무엇 때문에 하필 그런 위험하고 불편스런 모험이 불가피해졌는지, 그리고 엉뚱스런 탈출극으로 상욱이 자기에게 하고자 한 말이 무엇인가는 조원장으로서도 어슴푸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상욱이 조원장으로 하여금 이제 더 이상은 섬을 견딜 수 없게 하려는 결사적인 압력 수단이었다. 조원장 자기로 하여금 끝내는 그 스스로 섬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하려는 음흉스럽고도 지능적인 협박 행위였다. 상욱의 동기가 어느 쪽이었든지간에 조원장으로선 어쨌던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때가 왔을 때 섬을 떠나주는 것이 조원장 자신을 위해서나 섬사람들을 위해 더욱 기릴만한 치덕이 되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조원장으로서도 어느 일면 상욱의 충고를 참아넘길 수가 있었고, 적어도 그의 진심만은 허심탄회하게 사줄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욱이 굳이 그 돌뿌리 해변을 통해 ‘탈출해나간 사실은 어느 모로나 유쾌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상욱은 자신의 탈출 소동으로 섬사람들의 가슴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어쩐 배반의 기억을 되살리고, 원장과 섬사람들 앞에 자신이 직접 그것을 시범해보임으로써 섬사람들을 노골적으로 충 돌질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섬사람들이 아직도 상욱의 내력을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상욱과 섬의 관계가 밝혀진 바가 없다는 덤이었다. 상욱이 탈출을 시범해보임으로써 원생들의 어떤 충동을 깨어나게 하고 싶었던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섬을 못 견디게 된 원생으로서가 아니라, 언제라도 그 섬을 버리고 떠나가 버릴 수 있는 건강인으로서 섬을 빠져 달아났다는 사실이 더욱더 고약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원장도 이젠 별수가 없어진 게지. 섬만 나가면 그만일 사람이 뭣 땜에 이런 고생을 더 사려고 하려구. ---꽁무니를 빼려는 수작인걸. 전임 발령 취소 청원 서명 운동을 중지시키고 나자, 그러지 않아도 원장의 일거일동에 색안경을 쓰고 보기 시작한 원생들이었다. 작업장 분위기가 형편없이 다시 가라앉아가고 있던 판이었다. 건강한 육지 사람들이 진심으로 섬을 생각할 리 없고, 원장도 결국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그 이상스럽게 체념스런 반발기 같은 것이 느껴져오던 섬 분위기였다. 끝끝내 자신의 내력을 숨겨버린 채 섬을 나가버린 걸 보면 상욱 역시도 그 점을 충분히 계산에 넣고 있을 수 있었다. 이런 때에 와서 건강인 한 사람이 섬을 떠나 버린다는 사실이 원생들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주고, 원장의 입장을 어떻게 만들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 상욱이 아니었다. 상욱은 건강인으로서 섬과 섬사람들을 보란 듯이 배반하고 간 것이었다. 조원장은 그 점이 더욱 난처했다. 아니나 다를까. 상욱의 ‘탈출’에 대한 섬사람들의 반응은 과연 조원장이 염려했던 그대로였다. ---이과장이란 작자까지 그렇게 겁을 먹어버린 걸 보면 일은 벌써 다 알고도 남을 조지. ---작자 말고도 이제 사지 성할 때 섬을 나가자면 바빠질 놈들이 많겠구만... 상욱의 일로 해서 원생들은 당장 눈빛까지 이상스럽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작업을 서두르기는 커녕 빈둥빈둥 게으름만 피워대기 시작했다. 조원장으로선 참으로 위태롭고 거북살스런 반발이었다. 한데다가 그 원생들 가운데서 유독 노골적으로 원장을 괴롭혀온 인물이 있었다. 보육소의 서미연이란 여자로 인해 상욱과는 특별히 미묘한 갈등을 빚어오던 분홍색 미치광이 - 그리고 그 서미연으로 인한 아픈 자기 각성을 견디기 위해 힘겨운 돌등짐을 지기 시작하면서부터(병사지대의 누이를 위해서 라는 본인의 변명은 있었지만)는 서서히 서미연에 대한 자신의 질투를 용납하게 되어가고 있노라던 윤해원 - 그 윤해원이 하루는 술이 곤드레가 되어가지고 밤늦도록 아직 오마도 작업장을 떠나지 않고 있는 조원장을 막사로 찾아왔다. “그 친구 문둥일 꽤 이해하는 척 버티더니 결국은 자신을 속이진 못하더군요.” 알고 보니 윤해원은 그동안 각고의 인내 끝에 서미연과의 사이가 제법은 바람직스럽게 무르익어 있던 참이었다. 두사람은 마침내 절강젯날쯤으로 날을 잡아 간단하게 혼인식을 올릴 약속까지 되어 있었다고 했다. 두 사람 사이의 혼인 약속은 이제 섬 안의 화젯거리가 되어왔을 만큼 공공연한 사실이 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상욱이란 작자가 끝끝내 우리 사이를 축복해주진 못하는군요. 문둥이 주제에 건강인 여자라니 눈뜨고 차마 넘길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윤해원 역시 상욱이 어렸을 때 미감아로 섬을 나가 자라 돌아온 내력(조원장에게도 그것은 상욱 자신의 입으로 말을 한 일이 없었지만)은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조원장에겐 그래서 윤해원이 더욱더 거북하고 불편스런 상대였다. 서미연에 대한 그의 소망은 건강한 상욱으로 하여 몇 배의 망설임과 자기 비하를, 체념어린 질투와 고통스런 인내의 세월을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터였다. 그 건강인이라는 상욱의 위용 앞에 그는 서미연을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절망이 거듭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그것을 이기고 넘어선 오늘의 두 사람 사이라 했다. 한데 그 이상욱이 마침내 윤해원들의 마지막 결합에 즈음하여 건강인으로서 건강인답게 보란 듯이 섬을 나간 것은, 바로 그 건강인으로서의 서미연과 자기에 대한 오만스런 선택권의 시위임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상욱의 탈출극은 윤해원의 경우에서 보다 심각한 파괴작용을 하고 있었다. 상욱의 탈출극을 윤해원은 오해려 그쪽에서 더 큰 동기를 찾고 싶어하고 있었다. 조원장으로서는 물론 윤해원의 그런 감정적인 반발에도 충분히 수긍할 만한 대목이 있다고 여겨졌다. 윤해원의 추측처럼 상욱은 아닌게아니라 두 사람의 결합을 견딜 수가 없었거나, 거기서 어떤 윤해원의 반발이나 자기 억제력을 유발시키기 위해 일부러 그런 연극을 꾸몄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가 끝끝내 자신의 내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하나의 증거일 수 있었다. 서미연을 사이에 두고 그가 자신의 비밀을 숨기고 있었던 사실이, 그가 윤해원 앞에 피부가 깨끗한 건강인으로 육박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이 윤해원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들고 그를 얼마나 망설이게 할 수 었었을는지를 상상해보지 못했을 리 없는 상욱이었다. 윤해원을 저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섬을 떠난 날까지 끝끝내 그것을 숨겨버리고 만 것은 윤해원의 추측대로 그의 엉뚱한 반발과 새로운 절망으로 인해 두사람 사이를 다시 파탄시키고 싶어서였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며칠 뒤에 서미연 자신이 조원장을 찾아와서 저간의 사정들을 털어놓고 있었을 때도 다시 한번 비슷한 의혹을 씻을 수가 없었던 일이었다. 서미연 역시 상욱이 섬을 나간 뒤로 형편이 달라진 윤해원과의 사이를 털어놓고 원장의 도움을 청해보려고 어느 날 은밀히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는 이제 윤해원이 원장을 찾아와 주정을 부리고 돌아간 때보다도 사정이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상욱의 탈출을 계기로 해서 윤해원의 그 건강인들에 대한 질투가 무섭게 다시 폭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윤해원은 거의 맹목적인 증오로 상욱을 질투하고, 건강인의 건강을 질투하고 그 건강을 지닌 서미연을 질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무서운 절망과 체념기 속에서 이상스럽도록 병적인 분홍색 집착증을 다시 보이기 시작하고 잇다는 것이었다. 그는 옛날 공사장 돌등짐질을 시작하기 이전으로 완전히 다시 되돌아가버렸으며, 절강젯날로 예정했던 결혼식도 허공의 꿈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또 놀라운 것은 상욱이 아직 그 서미연에게조차도 자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서미연이 상욱에게 자신의 내력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점 또한 조원장으로서는 처음 듣는 일이었지만) 상욱 쪽에선 그런 눈치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서미연에게조차 자신의 비밀을 숨기고 있었던 상욱의 태도가 우연이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떳떳치 못한 동류 의식을 빌어 그녀를 구하려 했을 상욱이 아니었으리라는 상상도 가능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서미연을 원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라면, 또는 그와는 반대로 서미연과 윤해원 사이를 허심탄회하게 용납할 수가 있는 심정이었다면, 그는 그 어느 쪽에 대해서든 당연히 그의 비밀을 밝혀 주었어야 했으리라는 것이 조원장의 생각이었다. 한데도 상욱은 부자연스러울 만큼 그럴 의사가 전혀 없었던 셈이었다. 윤해원에 대한 그의 건강을 의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의 건강이 두 사람의 접근을 억제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방치해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두 사람의 결합이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을 때 그것을 더욱 적극적으로 시위해보이고자 한 혐의를 씻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결합을 못 견뎌해서였거나, 상욱 자신을 포함한 세 사람의 모든 것을 함께 파탄으로 몰고 들어가고 싶어해서였거나, 자신의 비밀에 대한 상욱의 침묵과 건강인으로서의 그의 탈출극은 원장이나 서미연으로 하여금 충분히 그런 혐의를 걸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원장은 이제 그런 절망적인 서미연의 호소에조차 별다른 조언을 보낼 수가 없는 형편이 되어 있었다. 상욱이 미감아로 자라온 내력 따위는 이제 서미연에겐 아무런 뜻도 지닐 수 없는 비밀이었다. 자랑스런 선택을 과시하면서 섬을 나간 상욱의 그 오만스런 건강에 대한 해명도 감정이 이미 극도에 달해버린 윤해원에 대해서는 한낱 부질없는 사후 약방문 격일 터이었다. 조원장이 서미연에게 권해볼 수 있는 말은 다만 이제라도 그녀의내력을 고백하여 건강인에 대한 윤해원의 맹목적인 질투를 녹여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뿐이었다. 그리하여 원하는 일이라면 혼례식부터라도 우선 무사히 치러넘기고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조원장의 그런 조언조차도 서미연들에겐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저의 건강 때문에 그이가 받는 고통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제가 윤선생님 앞에 저의 비밀을 숨겨온 것은 저의 그런 알량한 건강을 자랑하자는 것이 아니었어요. 전 윤선생님이 저의 건강에 대한 고통을 이겨 넘기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끼리끼리 병신들끼리 모여 산다는 저열스런 나태감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건강한 여자에 대한, 건강한 사람에 대한, 건강에 대한 자기 모멸감과 질투를 잊고, 지신의 병력을 잊고 건강인 여자를 떳떳하게 차지하고 사노라는 지극히 당연하고 인간적인 긍지를 지니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지요. 앞으로도 전 그것을 단념할 수는 없어요. 적어도 그때까진 전 저의 비밀을 밝히지 않을 거예요. 혼인을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요. 끝끝내 입을 다문 채, 오늘의 고통을 딛고 다시 일어설 때를 기다리겠어요.” 원장의 조언에 대한 서미연의 대답이었다. 조원장은 그토록 다부진 서미연 앞에 섣불리 무슨 다른 할 말이 있을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무서운 결과였다. 상욱의 탈출 동기는 아직까지도 물론 분명한 것이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의 참 동기가 어느 쪽에 있었든지 간에 그의 탈출극이 계기가 되어 섬 안은 바햐흐로 이제 그런 식의 불신과 반발들로 또 한번의 엄청난 파괴를 꿈꾸고 있는 것이었다. 조원장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작업 진도를 독려하고 돌아다닐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원장실 구석에 죽치고 들어앉아 맥없이 전임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사정이 그 지경에 이르고 보면 이젠 사표를 쓰고서라도 섬 안에 남아 주저앉겠노라는 것은 또 한번의 속임수로밖에 보이지 않는 일이었다. 이것저것 될 일이 없을 바엔 굳이 전임 날짜를 기다릴 것 없이 섬을 미리 떠나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와서 그럴 수는 더욱이 생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27 조원장은 완전히 진퇴유곡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원장의 처지를 더 난처하게 만든 일이 또 한 가지 생기고 있었다. 그 무렵 어느 날인가 원장에겐 또 새 전화 통지문이 한 통 하달되어 왔다. 새 원장이 부임시 오마도 사업장 업무 인계를 위한 사전 준비를 모두 끝내놓으라는 지시와, 그에 대비한 별도의 공사 실적 평가반을 파견하였을 시 이들의 업무 수행에 만유루없는 협조를 바란다는 당부가 전통문의 골자였다. 이것은 이를테면 조원장의 감정적인 반발을 고려하여 사업장 업무를 일단은 후임 원장에게 인계시키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공사실적의 평가반은 실제 업무의 인수자로 대신 시킴으로써 편리한 대로 적당히 일을 얼버무려 넘기려는 인상을 씻을 수가 없는 주문이었다. 새로 파견되어올 공사 실적 평가반이란 사실상의 업무 인수 기관으로 내정된 앞서의 개발회 사람들임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원장으로서도 이젠 더 이상 그 일에 손을 쓸 여지가 없는 형편이었다. 모종의 분란을 각오하고서라도 상부의 명령과 맞서 싸울 길이 남아 있지 않았다. 평가반은 결국 다시 나타나게 되어 있었고, 그 사람들이 오고 보면 원장으로서 그 사람들의 신변의 안전을 모른 척해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살얼음 위를 가는 심경으로 다시 한번 간곡하게 원생들의 자숙을 당부했다. ---이번에 또 작업 진도를 평가하고자 사람들이 섬으로 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이제 분명하게 정해진 목표를 가지고 일을 하고 있는 이상 그 사람들을 적대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섬을 찾아와서 무슨 일을 하든 그 사람들 하고 싶은 대로 자기들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라.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의 일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우리가 정한 목표를 향해 우리 일만 착실히 계속해나가면 그만인 것이다. 한데 그 평가반 사람들이 막상 오마도 공사장에 찾아들어왔을 때였다. 평가반 사람들은 물론 전번에도 일차 공사장을 다녀간 개발회 소속 기술자들이었다. 원생들은 그 사람들이 섬을 찾아 들어온 일에 대해서마저도 전혀 무관심이었다. 조원장은 오히려 뜻밖이었다. 오마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능히 살인마저도 불사했을 원생들 사이에서 요행히 섬을 빠져나간 사람들이 또다시 같은 목적으로 섬을 찾아 들어왔는데도 원생들의 반응이 너무 싱거웠다. 그것은 이를테면 이제 오마도를 빼앗기든 원생들로서는 더 이상 상관을 않겠다는 것 한가지였다. 너희들 일이니 너희들끼리 맡아서 하라는 것 한가지였다. 역시 그 음험스럽고 위태로운 반발이었다. 도대체 이 꺼림칙하고 무표정한 원생들의 침묵을, 그리고 그 음산스럽도록 철저한 복종과 무반응을 어떻게 이해하고 응대해나가야 할지 조원장은 주위가 다 온통 으스스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그 원생들의 침묵이나 음산한 무관심 쪽보다도 평가반 사람들의 어이없는 횡포였다. 원생들이야 그를 어떻게 생각하든, 조원장은 일단 떠날 때는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작업장 일은 그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사업장 일이 어차피 병원 사람들의 손을 떠나 개발회 쪽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는 처지라면 그리고 그가 발령 날짜에 맞춰 섬을 떠나기로 한다면 조원장은 그 후임 원장 도착 전에 병원 업무의 인계 준비를 모두 끝마쳐놓아야 했다. 후임 원장의 부임 예정일은 이제 두 주일 남짓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형편이 바뀌어 그가 다시 이 섬에 계속해서 주저앉게 되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오마도 사업장의 공사 실적 평가만은 개발회 사람들의 손에만 가만히 맡겨두고 볼 일이 아니었다. 후임 원장의 입장을 위해서도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일을 유리하게 매듭지어둘 필요가 있었다. 구체적인 공정도 평가가 행해지고 있는 이상 절강제 따위는 이제 치러지거나 말거나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는 병원 일은 각 부·과장 들로 하여금 자기 기준에 따라 소관 부서의 업무 현황을 정리해두도록 당부하고 나서, 그 자신은 오마도 사업장 일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마무리지어주고자 대부분의 시간을 오히려 그 과욋일에다 할애하고 있었다. 그는 개발회 소속 평가반 사람들에게 늦어도 2월말 이전까지는 일체의 공정도 평가를 끝내도록 당부하고 나서, 자기는 또 자기대로 공사장 기술진으로 구성된 자체 평가반 요원들의 작업 수행 과정을 쫓아다니면서 그 공정도 평가 방법과 근거들을 하나하나 메모하고, 자기 나름의 어떤 기술적인 기준을 마련하고 있었다. 드디어 2월 하순경이 되자, 양쪽 평가반에서는 예정대로 각기 그간의 공사 실적 평가 결과를 종합해 내놓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피차간의 결론이 너무도 엄청나게 달라 있었다. 원장 지휘하의 개척단 쪽 결론은 2월 25일 현재 공사 진척도 83%로 평가되고 있는 데 반해, 개발회 쪽의 그것은 같은 날짜 기준의 공사 실적이 이쪽의 절반도 못 되는 40%로 평가되고 있었다. 83%와 40%. 조원장은 어이가 없었다. 그야 조원장으로서도 처음부터 그런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원장이 유독 그 공정도 평가에 관심을 가져온 것은 차후 사업장 관할권이 개발회 쪽으로 넘어간 다음이더라도, 원생들의 손으로 이룩해낸 작업 성과분에 대해서는 정당한 평가와 그에 따른 응분의 대가를 배당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업장 관리자가 바뀌더라도 개간 농지의 분배권은 도 당국에 속하도록 한다는 것과 그 농지의 분배 비율은 관리권 이관시의 공정도 평가에 관계하지 않는다는 당국자들의 자발적인 약속이 있었던 터이기는 하지만 조원장으로서는 어쨌거나 이 일에 대한 원생들의 기여도를 높이 평가받아 놓는 것이 섬을 위해서나 그 자신을 위해 절대로 필요한 일이라 여겨왔던 것이다. 그는 할 수 만 있다면 사실 이상으로라도 공정도를 높게 평가받아두고 싶은 욕심이었다. 조원장 쪽이 그럴진대, 사업장을 새로 인수받을 계발회 쪽의 입장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공정도를 가능한 데까지 낮게 평가해내는 것이 이를테면 그 개발회 쪽 평가반 사람들의 기본 임무인 셈이었다. 양편의 평가 결과에 현격한 차이가 나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 문제였다. 40대 83이라는 엄청난 수치의 차이는 조원장조차도 미처 상상을 못 해온 결과였다. 조원장은 물론 개발회 쪽 평가 결과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40%라는 수치가 산출되기에 이른 실적 평가 방법과 기준 근거들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쪽에서 제시한 방법과 근거들에 대하여 개척단 자체 기술진으로 하여금 엄밀한 검토를 가하게 하고 하자를 시정토록 했다. 조원장 자신도 그간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개척단 편의 입장을 열심히 옹호했다. 그는 개발회와 개척단 양쪽 기술진을 망라한 공동 평가반의 설치를 제의해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이해 상관이 엇갈린 양편의 주장은 어떤 논리나 설득으로도 양자에게 다 공평할 공동의 기준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공사는 시공 단계에서부터 허술적인 하자가 숱하게 발견되고 있어서 눈에 나타난 결과를 가지고 그대로 모두 작업 실적으로 평가해줄 수는 없다는 것이 개발회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발견된 하자의 보완 책임이나 부분적인 설계의 수정 변경은 눈에 나타난 작업 실적의 수치를 엄청나게 체감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제방의 폭을 넓게 잡아야 한다든가, 수심과 해류를 감안한 조수의 압력에 비해 제방의 외벽 경사각 변화가 무리하게 측정 설계되고 있다는 따위가 개발회 사람들로부터 지적받은 기술적인 하자의 실례들이었다. 개척단 기술진에서도 물론 그들대로의 주장은 많았다. 하지만 이해가 극단으로 상충하고 있는 입장에서, 개발회 사람들이 그들의 주장을 굽히려 하지 않는 한 조원장으로서도 별다른 뾰족한 수가 있을 수 없었다. 다만 상대편이 거리를 좁혀줄 의사가 없는 이상 조원장 쪽에서도 불리한 확인 절차를 취해줄 필요는 없었다. 조원장은 다시 한번 무참스런 배신감 속에서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진짜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또 조원장의 기분을 묘하게 허망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원생들의 태도였다. 원생들은 여전히 그 섬 일에 대해서는 감정의 변화를 엿보이지 않고 있었다. 원장이 정말 섬을 떠날 것인지 어떨지에 대해서도, 또는 이제 며칠 앞으로 다가온 절강제 행사가 정말로 제 날짜에 치러지게 될지 어떨지에 대해서도 무엇 하나 앞뒤를 궁금해하는 빛들이 없었다. 이 몇 년 동안 아마도 앞바다에 바친 자신들의 피땀어린 노력의 결과가 사업장 전체 공정의 40%에 불과하다는 실적 평가를 받고 났을 때도, 그리고 조원장이 그 수치를 조금이라도 더 높게 정해보려고 혼자 섬 안팎을 뛰어다니고 있는 꼴을 보면서도, 막상 이해의 당사자인 원생들 쪽에서는 아무도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원생들의 그런 불가사의한 침묵과 무반응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버릇이 되다시피 한 조원장으로서도 이번만은 그 원생들의 태도가 무척은 서운했다. 그는 마치 그 섬과 섬사람들에게 바친 몇 년 동안의 아까운 세월이 그의 생애 가운데서 문득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려고 하는 것 같은 허망스런 느낌이 들고 있었다. 아니 억울하기 그지없는 공정도 평가에 대한 원생들의 그런 무관심은 이미 그 복지에 대한 기대와 꿈만으로도 그것의 은총을 고달프도록 깡그리 누려버린 원생들에게 이제는 오히려 그 꿈이 현실로서 초라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의 허탈감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또는 그 허탈감으로부터 비롯한 무참스런 복수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싶었다. 조원장은 날이 갈수록 하루하루 자신의 처지만 점점 더 초라해져가고 있음을 느꼈다. 28 그러던 3월 초순 어느날. 그날쯤 해서는 조백헌 원장 자신에게도 정해진 날짜대로 섬을 떠나는 것이 이젠 거의 불가피한 사정이 되어가고 있었을 무렵이었다. 확실한 결정을 내린 바는 없었지만 조원장 스스로도 이젠 그런 자신을 어슴푸레 의식하기 시작한 그 어느 날 오후 --- 조원장은 이날 자신의 그런 심경도 좀 명확하게 정리해볼 겸 작업 지휘소가 있는 오마고지 둔덕으로 흐느적흐느적 몸을 이끌고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마치 기나긴 전투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싸움의 종말이 오기 전에 진지를 떠나게 된 지휘관처럼 아쉽고 착잡한 감회 속에 그 오마도 일대의 경관들을 오래오래 지켜보고 있었다. 바닷물 아래서 몇 차례나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던 광활한 개펄은 이제 월여 전보다도 훨씬 살이 찐 제방 안에서 허연 소금꽃이 피고 있었다. 눈이 가물거릴 만큼 끝이 먼 제방 너머로는 아직도 선득 선득 차가운 느낌을 주는 바닷물이 음흉스럽게 꿈틀대고 있었다. 만재도가 사라진 제방 바깥 해면 위엔 섬이 있었던 흔적으로 남겨진 돌기둥이 저녁나절 햇빛 속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 그토록 인간을 소망하던 문둥이들에게---그 지친 영혼들의 안식의 땅을 위해---큰 산이 바다 되고, 바다가 다시 육지 됨을 보게 하여주신 거룩한 신의 섭리여! 묵묵히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던 조원장은 문득 어디선가 그의 귀를 아프게 파고드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소리는 물론 조원장이 오랫동안 가슴속에 간직해온 그 자신의 마음의 소리였다. 언젠가는 오마도 일대가 진정한 나환자의 복지로 화하는 날, 이 땅을 위해 몸바친 사람들과 오래오래 그것을 지켜나갈 그들의 후손을 위해 만재도가 사라지고 남은 돌기둥 위에 새겨 전하리라 벼르고 별러오던 조원장 자신의 말이었다. 하지만 조원장은 아직도 그곳에 그의 말을 새기지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원장 자신은 이제 그의 손으로 그것을 새기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을 수조차 없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끝내는 저들이 이 땅의 주인이 될 수도 없었던 것을! 그리고 이렇게 나는 아쉬운 사람도 하나 남김 없이 섬을 떠나야 했던 것을! 원장은 알 수 없는 회한과 원망으로 몹시도 가슴이 아파왔다. 무엇보다도 그 돌기둥 위에 그토록 오랬동안 간직해온 한마디조차 남겨두지 못하고 섬을 떠나게 된 일이 견딜 수 없도록 안타까웠다. 이 땅의 주인이야 누가 되든, 저 돌기둥 위엔 그 말이 새겨졌어야 하는 것을. 이 땅의 주인이야 누가 되든, 애초에 이 바다를 육지로 바꾸려 했던 사람들이 누구였으며, 한 조각 땅을 얻어 그 땅의 주인이 되어보고자 했던 사람들의 소망이 과연 얼마만한 것이었기에 끝내는 그 일을 이룩해낼 수 있었던가를 보이기 위해 그곳에 그 말이 새겨졌어야 했던 것을. 그리고 또 이 땅의 주인이 누가 되더라도 저들의 기도와 노력만은 영원히 스러져버릴 수 없고 헛되어질 수도 없음을 보이기 위해 그곳에 그 말이 새겨 남겨져야 하는 것을...... 조원장이 그처럼 망연스런 심정으로 이젠 이미 때가 늦어버린 듯한 헛된 상년들을 좇고 있을 때였다. “원장도 그 동안 사람이 참 많이 달라졌구만 그래.” 등뒤에서 별안간 그의 상념을 방해하고 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착각이나 환청이 아닌 진짜 사람의 목소리였다. 돌아다보니 언제 다가왔는지 여남은 발짝 등뒤에 황장로가 시선을 반쯤 외면한 채 한가로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는 언젠가, 바윗돌을 아무리 던져넣어도 바닷물 속에선 좀처럼 돌둑이 솟아오르지 않는 것을 보고 실망과 두려움에 젖어 있는 원장을 이 오마고지 둔덕 위로 찾아 올라와서 그 나름의 고마운 격려와 용기를 주고 갔을 때처럼, 홀연히 한가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짐짓 시선을 먼 데로 흘리고 서 있었다. 이 노인이 오늘은 또 내게 무슨 할 말이 있었던고...... 조원장은 예기치 않았던 황장로의 출현에 갑자기 어떤 가벼운 긴장기 같은 것을 느끼며 노인의 표정을 지키기 시작했다. “사람이 달라지다니요. 제가 어떻게 달라졌다는 말씀입니까.” 그는 여태까지 노인과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던 다음이기라도 하듯 다짜고짜 황장로의 말꼬리를 휘어잡고 나섰다. 실상 조원장과 황장로 사이의 이야기는 다른 때도 늘 그런 식이었다. 황장로 역시 조원장과는 언제나 늘 그래왔듯이 처음 한마디를 불쑥 내던져놓고는 마치 자신이 한 말을 방금 다시 잊어먹어버리기라도 한 듯 원장의 대꾸에는 한동안 아랑곳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조원장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눈시울을 가늘게 좁히며 천천히 발 아래 경관을 한바퀴 둘러보고 나서는 그제서야 간신히 원장의 존재를 깨달은 듯 느릿느릿 입을 열기 시작했다. “원장이 처음 이 섬을 찾아왔을 때는 어두운 밤이었지? 그리고 불쑥 나루로 건너와선 출영 나간 사람들을 괜히 못마땅해서 무안을 주었다던가? 원장도 아직 기억을 하고 있는 일이겠지만, 난 그얘길 듣고 하도 신기해서 아직까지도 그걸 잊어먹지 못하고 있는 참이었거든.” 노인은 또 짐짓 딴전을 피우는 척하고 있었다. 그 역시 황장로의 화법이었다. 본심을 드러내 말하기 전에 으레 변죽부터 울려 들어오는 황장로의 독특한 화법이었다. 노인의 본심이 드러날 때까지 조원장은 한참 더 공손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랬었던 것 같습니다만...... 그런 일을 여태까지 자상하게도 기억하고 계시군요.” “기억하지 않구. 그게 내가 여태가지 생각하고 있는 원장의 변함없는 모습이었는걸. 무슨 소린지 알아듣겠나? 원장이 처음 이 섬을 왔을 때는 그처럼 소박하고 겸손한 위인이었더란 말이지.” 노인의 본심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날만은 황노인이 원장을 위로하거나 격려를 주기 위해 언덕을 올라온 것은 아닌 듯한 서두였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그렇게 보이질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지금은 그렇게 보이질 않아. 지금은 좀 달라졌어. 달라졌구 말구. 그리고 앞으로도 또 더욱더 달라지려 하고 있는 중이구!” “......” “원장은 지금 섬을 떠나는 데 너무 번거로은 생각들을 하고 있어. 아닌 척하면서도 이젠 제법 화려하게 섬을 떠나가고 싶어한단 말씀이야. 섬을 올 때하곤 그게 사뭇 달라졌지.” 이야길 듣다보니 노인은 이미 원장이 섬을 떠나는 것을 바꿀 수 없는 기정 사실로 못박고 있는 투였다. 그럴 수 있는 노인이었다. 조원장으로선 이제 그쯤은 신경을 쓸 일도 아니었다. 황장로의 지적이 너무도 뜻밖이었다. 섬을 화려하게 떠나고 싶어하다니? 내가 언제 그런 꿈을 꾸고 있었던가? 황장로와 섬사람들에겐 어느새 내가 그런 식으로까지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그게 제가 분명히 달라지고 있는 점입니까?” 조원장은 다소 언짢은 목소리로, 그러나 막판에 와서 굳이 감정까지 상할 필요는 없다 싶어 가능하면 자기 편에서 노인의 오해를 설득해볼 요량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한번 말을 꺼내놓은 황장로의 어조는 예상 밖으로 엄숙하고 완강한 것이었다. “원장이 이 섬을 화려하게 떠나고 싶어하고 있다면 원장 자신이 당장 아니라고 하겠지. 그건 아마 원장 자신도 모르고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 늙은이 눈에는 그게 환히 떠올라 보이거든. 내눈이 별로 틀리진 않을 게야. 내 지금 원장이 은근히 그런 바람을 숨기고 있다는 증거를 하나 말해볼까?” 노인은 정말 조원장이 옴짝달싹 못 할 분명한 증거라도 들이댈 참인 듯 한두 발짝 더 원장 곁으로 몸을 다가와서는 차분히 자리까지 잡아 앉고 있었다. 순간 조원장은 방금 전에 그가 마음속에서 혼자 만재도 돌기둥에 새기기를 염원했던 글귀가 떠올라서 제물에 가슴이 찔끔해왔다. 섬을 화려하게 떠나고 싶어한다는 이 노인의 말은 아마 부인할 수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장로의 다음 말은 물론 조원장의 마음속 깊이 감춰진 그런 글귀 따위에 대한 시비는 아니었다. “난 요새 원장이 저 공사장 작업 실적 때문에 개발회 기술자들하고 심하게 다투고 다니는 걸 자주 보아왔지. 아, 그야 원장이 우리 문둥이들 편에 조금이라도 더 공로를 인정토록 해주고 싶어하는 건 우리 들로서도 크게 감사할 일이고, 원장의 인품으로 해서는 더욱더 당연한 노릇일는지 모르지.” 노인은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 담배를 한 대 꺼내어 불을 붙여문 다음 천천히 그리고 시선만은 여전히 원장을 멀리 외면한 채 본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원장도 짐작하고 있었듯이 만재도 돌기둥에 새겨 남기기를 염원했던 그의 가슴속의 글귀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 글귀로써 그가 이 섬에 남기기를 소망했던 이상의 어떤 것, 이를테면 황장로나 원장이나 섬사람들이 그토록 조심스럽게 경계해오던 누군가의 동상이나 그 비슷한 것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황장로가 이날 일부러 오마고지까지 원장을 찾아와서 하고 싶었던 진짜 충고임이 분명한 것이었다. “원장이 그런 일에 신경을 써주는 건 어쨋든 고마운 일이지만, 그러나 난 원장이 아무래도 좀 모르는 게 있는 것만 같아.” “장로님께선 제가 작업 실적을 높게 평가받아놓고 싶어하는 것이 모두가 저의 공로를 크게 인정받고, 그래서 제가 섬을 떠날 때는 이섬 사람들의 넘치는 감사와 아쉬움 속에서 나룻배를 타고 싶은 사사로운 욕망에서라고만 보고 싶으신 거겠지요. 장로님께선 마치 이 오마도 땅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고 싶은 데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것처럼 말씀입니다.” “내가 잘못 듣고 있는진 모르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한 일이 얼마라고 정해지든간에 정작 농사를 지을 땅을 나눌 때는 도지사가 얼마를 떼준다고 미리 약속이 되어 있다더구만 그래.” “그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까 장로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모든 일이 약속처럼만 되어질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저 사람들에게 도장을 찍어 넘겨준 작업 실적표가 정말 땅을 나눌 때도 장로님께선 아무 상관이 안 될 듯싶으십니까.” “상관이 된대도 할 수 없는 일이지.” “그게 정말로 장로님의 진심일 수가 있습니까?” “진심일 수 있지. 우린 우리가 할 일을 다했을 뿐이고, 우리들한테 땅을 조금이라도 나눠주고 안 나눠주고는 이제 다음번 일을 맡아간 사람들의 일이니까. 설사 그 사람들이 우리한텐 한 조각의 땅도 나눠주고 싶지가 않다 해도 그 역시 이젠 그 사람들의 일이거든.” “이 섬 5천 원생들의 생각도 모두가 장로님처럼 태연할 수가 있을까요?” “같지 않아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아, 원장도 알지 않는가? 문둥이들이란 원래가 그런 식으로만 살아온 거란 말야. 그런 건 다들 벌써 익숙해 있을 게야.” 한다면 이제 일이 여기까지 분명해진 이상 내일이라도 당장 섬을 떠나는 것이 옳을 게다. 그때였다. 황장로가 이번엔 마치 그 원장을 위로할 차례라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동안이나 물끄러미 그를 돌아다보고 있다가는 서서히 어조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 이상욱이란 사람이 그러더구만... 아참, 그러고보니 내 여태 잊고 있었던 일이 한 가지 있는데, 그 상욱이란 사람 섬을 나가기 전에 날 찾아왔더라는 말을 원장한테 미리 일러주는 건데 말씀이야. 상욱이란 사람이 그날 밤 섬을 나가기 전에 나를 찾아왔었지. 날 찾아와선 섬을 나가겠노라 하더구만. 자기가 섬을 나가는 건 이러이러한 생각에라는 이야기가 꽤 길어지는 걸 보곤 나도 그 사람을 말릴 수가 없어졌구 말이야. 그런데 하여간 그날 밤 이과장 이야기 가운데 원장의 그 동상 이야기가 나왔었지. 그게 다 눈에 보이지 않은 원장의 동상일 게라고 말씀야. 그리고 우리 문둥이는 자칫 그 원장의 동상을 보지 못하고 동상의 종이 될 거라고 하더구만. 하지만 원장, 내가 이렇게 말을 한다고 원장까지 이 늙은일 너무 섭섭하게만 생각진 말아야 할 게야. 나 역시도 원장한텐 오해를 남기고 싶지가 않아서 하는 소린데, 이제 내 솔직한 본심을 말해볼까... 원장도 이젠 어차피 섬을 떠날 듯 작정이 선 듯싶어 뵈고 있으니 말씀이야...”“...”“바로 말을 하자면 난 우선 원장한테 고맙단 치하부터 해얄 게야. 웬 줄 아나? 기왕지사 동상 얘기가 나왔으니 나도 그 동상을 빌어 말하자면, 원장은 마지막까지도 용케 이 늙은이의 동상을 깨부숴버리질않았기 때문이지. 이 늙은이가 지닌 딱 한 사람의 소중한 동상을 말씀야.”뜻밖의 이야기였다. 노인은 여태까지 그가 원장에게 하고 있던 것과는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었다. 황장로가 동상을 지니고 있었다니? 그리고 그 동상을 끝끝내 깨부숴주지 않 았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원장을 고마워해야 하다니? “동상이라니요? 장로님께서는 방금까지도 제게 터무니없는 동상을 꿈꾸지 말라고 나무라지 않으셨습니까. 장로님께선 도대체 또 누구의 동상을 지니고 계시다는 말씀입니까?”원장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거푸 물어댔다. 그러나 황장로는 이제 점점 더 목소리가 느릿느릿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느릿느릿한 황장로의 말투에는 그만 노인 또래의 나이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어떤 깊은 신뢰와 확신 같은 것이 담기고 있었다. “그렇지,조금 전까지도 난 원장한테 엉뚱스런 동상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 말을 한 게 사실이지. 하지만, 바로 그게 원장의 오해란게야. 원장한테 하기야 무리도 아닐 테지. 내가 아깐 이 섬 문둥이들의 추한 목소리로만 말을 했거든. 원장의 결심이라도 좀 쉬워지라고 말씀이야. 기왕지사 떠나게 될 일, 원장이 좀 가벼운 마음으로 섬을 떠나게 되라고 말야. 하지만 그 문둥이가 아닌 온당한 사람의 목소리로 말을 하자면 내 말은 사실 반대였지. 원장도 한번 생각을 해봐. 아니 원장은 나보다도 사실 그걸 더 잘 알고 있을게야. 누가 뭐라고 해도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맘 깊은 곳에 각자 자기 나름의 동상을 지을 꿈을 지니고 있기가 십상이지. 그건 뭐 나쁠 것도 없는 일이야. 말썽은 다만 그 동상을 짓는 방법이지. 원장은 방법이 좋았어. 원장의 방법은 이 섬이 지닌 가장 나쁜 경험도 능히 뛰어넘을 수가 있었거든. 그래 사실은 원장이 그걸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간에 이 섬 문둥이들 마음속엔 이미 자기도 모르게 임자의 동상이 크게 들어앉아버렸단 게란 말야. 그 임자의 방법이라는 게 어떤 것이었는지 아나? 어째서 임자의 방법만이 유독 이 섬 문둥이들에게 제풀에 모두 임자를 제 동상으로 지니게 할 수 있었는 줄 아나 말씀야. 그야 임자 나름으론 그 때문에 쓰린 경험도 많았고 본심을 속인 적도 없지 않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내 보기론 임자만이 유독 그 동사이란 걸 남의 손으로 지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남들이 스스로 임자의 동상을 지니게 된 게란 말야. 하지만 상욱이란 사람은 그것도 용납을하려 들지 않더구만. 그것이 바로 원장과 원장의 동상에 종이 되는 길이라고 말야. 하지만, 이 늙은이는 달라. 나도 물론 그 사람 맘을 알고는 있지만 난 이제 너무 늙었거든. 기력이 파해가는 모양이야. 난 이제 내가 지닌 원장의 동상이 무서워지질 않는단 말야...”노인의 목소리가 좀 이상스러워지고 있는 듯싶어 돌아다보니 그는 언젠부턴가 말을 하면서 소리없이 혼자 울고 있었다. 원장을 외면하고 앉은 노인의 두 눈에서 흐리터분한 눈물 줄기가 조용히 뺨 위를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보고도 슬프거나 무서워할 줄을 몰랐다던 황장로가 추위에 얼어죽은 땜장이 할아버지의 품에서 잠을 깨고 나서도 한 줌 보리쌀이 남아 있어 즐겁게 다시 길을 걸을 수 있었노라던 노인이, 문둥병이 몸에 옮은 것을 알고도 별로 대단스레 놀라워할 줄을 모르고 지내왔노라던 그 황희백 노인이, 이제 비로소 그의 앞에 어린애처럼 스스럼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양을 보자, 조원장은 우선 기이한 느낌부터 들었다. 노인은 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도록 병으로 일그러지고 나이로 쪼그라든 두 뺨을 지난날 그가 겪은 고난과 원한의 세월을 아프게 되쏟아놓고 있는 듯 서서히 그리고 끊임없이 눈물로 적셔내리고 있었다. 조원장은 아마 그 자신마저도 자기의 눈물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 먼발치로 물끄러미 바다만 내려다보고 있는 노인의 황량스런 모습에서, 그 흐리터분한 눈물로 얼룩이 진 추하디추한 얼굴에서, 그러나 지금까지 끊임없이 그의 눈앞을 가리고 있던 장막이 활짝 걷혀지며 비로소 노인의 진짜 얼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의 진짜 얼굴을 보고, 문둥병 환자가 아닌 그의 깊은 인간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노인이 그에게 하고 있는 모든 말들을 비로소 똑똑히 알아들을 수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조원장은 아직도 그 노인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아니 노인의 눈물을 보고 그의 깊은 얼굴을 보고 비로소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더 하고 싶은 말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상욱이 섬을 나가기 전에 황노인을 찾아왔더라는 사실은 이제 새삼스레 원장을 놀라게 할 바가 없었다. 그가 노인을 찾아가서 주고 받았을 이야기들에 대해서도 노인이 다시 그를 찾아온 지금으로선 더 이상 깊이 궁금해할 바가 없었다. 궁금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황노인과 섬사람들은 그러면서도 무엇 때문에 아직 원장을 용납할 수가 없는가. 노인은 이제 원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데 무엇 때문에 그는 이 섬에서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가 없으며, 아무것도 이루어냄이 없이 섬을 떠나려는 그를 모른 척하고만 있는 것인가. "말씀을 들으면서 점점 더 알 수 없는 것은 그런데도 전 어째서 지금 이 섬을 떠나야 하는지를 모르겠군요. 이 조백헌인 아무것도 이룸이 없이 이런 꼴로 용서받지 못한 몸으로 섬을 떠나야 하는지를 모르겠단 말씀입니다.”조원장은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황장로는 그러나 이제 조원장의 그런 소리는 전혀 귀에도 들어오고 있지 않은 듯 여전히 그 먼발치의 바다만 황량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더니 그는 역시 원장의 추궁을 끝끝내 그런 식으로 묵살해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 듯 한참 만에야 다시 짤막하게 대꾸를 해왔다. “그건 아마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의 역사를 믿음으로 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테지.”“믿음으로 행하지 못하면 지금까지 장로님께선 이 섬 일을 무엇으로 행해오셨습니까”조원장이 곧 노인에게 되묻고 나섰다.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노인의 얼굴에선 어느새 그 눈물 자국이 다시 흔적을 감추고 없었다. “글쎄... ,믿음으로 행하지 못했다면 사랑으로 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니까...믿음과 사랑으로 행하지 못했다면 미움과 의심으로 행하고 있었다는 도리밖에 되질 않지 않아...?”“ 어째서 미움과 의심으로밖에 행할 수가 없었습니까? 장로님과 이 섬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닙니까.”“글쎄, 어째서 주님을 따른다는 자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도 더 의심과 미움으로밖엔 행할 수가 없었는지, 그 미움이나 질시가 어디에서 연유하고 있는진 나도 참 생각을 많이 했지. 이게 혹 우리 문둥이들의 진짜 습성이 아닌가고 말야. 주님의 이름을 빌어 그 주님의 믿음과 사랑을 팔면서도 사실은 아무도 그 믿음과 사랑을 행하지 않으려 했던 게 바로 우리 문둥이들의 습성 때문일 수가 있었거든. 그런데 그 이과장이란 사람이 말을 해주더구만. 섬을 나가기 전에 나를 찾아와서 말씀야. 그 사람은 그걸 자유라고 하더구만. 이과장이나 나나 이 섬 문둥이들이 지금까지 이 섬에서 행해온 것은 모두가 그 자유라는 것으로 해서였다고 말씀야. 그리고 문둥이가 누구의 종이 되지 않는 길은 그 자유라는 것으로 이루어내는 길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는구만. 생각해보니 그게 제법 옳은 소리 같더라니까. 이 섬에선 아닌게아니라 자유로밖엔 행할 수가 없었고 자유로밖엔 행해온 바가 없었거든. 이상욱이란 그 사람도 결국 모든 것을 그 자유 한 가지로 행하고 그것으로 섬을 나가고 만 사람 아닌가 말씀야. 그가 그토록 원장의 동상을 경계하고 섬사람들을 경계하고, 그리고 끝내는 스스로 섬을 버리고 나간 것 모두가 실상은 그 섬의 자유라는 것 때문이었거든.” 노인은 조원장이 이미 상욱의 비밀을 알고 있을 것을 전제로 그 상욱을 말하고 있었다. 조원장으로선 황노인이 미리 상욱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이상한 생각이 들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장로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그 자유로 행함이 이 섬 사람들의 습성이나 섬사람들이 저를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하고도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자유로 행함이 이 섬에선 무슨 허물이라도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허물이 될 수도 있지. 적어도 이 섬에서는 말씀이야. 내 요 며칠동안 생각 끝에 얻어낸 것이 바로 그거라니까. 글쎄 그 자유로 행함이 이 섬에선 어째서 허물이 되는 줄도 모르겠나 원장.”“...”“그건 이 섬에서야말로 자유라는 것보다도 더욱더 귀중한 다른 무엇으로 행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인 게야. 자유보다도 더 귀하고 값진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사랑이거든. 이 섬에선 자유보다도 사랑으로 앞서 행했어야 한다는 말씀이야.”“...”“자유라는 거 그거 말대로만 된다면 그보다도 더 좋은 것도 없지. 제 가고 싶은 대로 맘대로 가고,제 살고 싶은 대로 맘대로 살고, 제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생각하고 말하게 되는 것보다 우리 같은 문둥이들에게 더 소망스런 바람이 있을 수 있겠나. 하지만 원장도 알다시피 우리한텐 언제 한번 그 자유라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되어본 적이 있었나. 아옹다옹 언제나 싸움질만 되풀이되어왔지. 핍박과 원망과 의심의 버릇만을 길들여왔지.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그 또한 당연한 노릇인지도 모르는 일이야. 자유라는 게 원래가 그런 것이었거든. 자유라는 거 누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우리 문둥이들한테 가져다 바쳐주는 건 아닌 터에, 어차피 그건 제 힘으로 빼앗아 가져야 하는 거 아니던가 이 말씀야. 빼앗아 가지려니 싸움질을 해야 하고, 싸움질을 하다보니 그 사이에 자연 의심과 원망과 미움을 익히게 마련이지. 이상욱 과장이란 사람 모든 일을 그 자유로만 행하고 싶어했고, 또 오로지 자유로만 행할 줄은 알았어도 거기서 익혀진 몹쓸 버릇들, 일테면 덮어놓고 남을 의심하고 원망하고 마워하는 따위의 심성에 대해서까지는 미처 눈을 뜨지 못한 게야. 남을 용서할 줄은 몰랐지. 모든 것을 그저 그 자유 한 가지로만 행하려 한 허물이지. 걸핏하면 섬을 빠져나가려는 것도 그렇고, 원장이 문둥이들을 위해 아무리 피땀을 흘려줘도 믿지 못하고 고마워하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 미워하고 질투하는 것 모두가 그 자유라는 거 한 가지로만 행하려 해온 허물이었어. 빼앗는 자와 빼앗긴 자가 생기게 마련인 싸움이라 당연한 노릇일 게야. 그래 이 섬에서도 우리 문둥이들만의 독특한 버릇과 목소리가 생겨난 모양이겠구. 아까 내가 원장을 섬에서 나가랄 때 말한 그런 뻔뻔스럽고 고약한 문둥이의 버릇들 말씀이야. 생각해보면 자유라는 거 그거 믿음이 먼저 앞서야만 하는 건데, 믿음이 없이는 함부로 행할 것이 못 되는데, 우리 문둥이들한텐 그게 부족했거든. 믿음이 없이 억지로 자유를 하자니까 불신과 미움밖에 번지는 것이 없었단 말씀야.”“그렇다면 장로님께선 지금부터 이 섬에서 자유로 행하심을 단념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자유로 행하심을 단념하신다면 그럼 이 섬에선 장차 무엇으로 행하고 무엇으로 이룩함이 옳은 길입니까.”조원장은 이제 노인이 말하고 싶은 것을 거의 분명히 헤아려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조원장은 황장로에게 아직도 좀 미심스러운 것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 노인은 이제부터 정말로 자유로 행하기를 단념하겠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섬은 앞으로 도대체 어떤 모습이 되어갈 것인가. 그 위태롭고 부질없는 탈출극은 마침내 이 섬에서 자취를 감출 날이 올 것인가. 하지만 황장로는 이미 조원장의 그런 궁금증들에 대해서도 경탄스럴 만큼 명쾌한 해답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야 물론 사랑이어야겠지. 이제 이 섬은 자유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았으니 다시 또 그런 자유로만 행해나갈 수는 없을 게야. 자유라는 건 싸워 빼앗는 길이 되어 이긴 자 와 진 자가 생기게 마련이지만 사랑은 빼앗음이 아니라 베푸는 길이라서 이긴 자와 진 자가 없이 모두 함께 이기는 길이거든. 하지만 이건 물론 자유로 행해나갈 것도 지레 단념을 한다는 소리는 아니야. 아까도 잠깐 말했지만 이제 이 섬에선 자유보다도 더 소중스런 사랑으로 행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소리일 뿐이지. 자유가 사랑으로 행해지고 사랑이 자유로 행해져서, 서로가 서로 속으로 깃들이면서 행해질 수만 있다면야 사랑이고 자유고 굳이 나눠 따질 일이 없겠지만, 이 섬에서 일어난 일들로 해서는 자유라는 것 속에 사랑이 깃들이기는 어려웠어도, 사랑으로 행하는 길에 자유는 함께 행해질 수도 있다는 조짐은 보였거든. 그리고 아마 이 섬이 다시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그 사랑 속에서 진실로 자유가 행해지는 날이 오게 되면, 그때 가선 이 섬의 모습도 많이 사정이 달라질 게야.”황장로는 이제 그쯤 하고 싶었던 말이 거진 다 끝이 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말을 끝내고 나서 이젠 그만 내려가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듯 아래쪽 공사장을 향해 스적스적 언덕길을 몇 발짝 앞장서 걸어 내려갔다. 남해의 3월이라고는 하지만 바닷가 바람 끝이 제법 옷깃 속을 차갑게 스며들고 있었다. 조원장도 이젠 그만 자리를 일어서려던 참이었다. 한데 몇 발짝 언덕길을 앞장서 내려가던 노인이 이번엔 또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슬그머니 다시 발길을 멈추고 돌아서며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참, 인연하곤 참으로 이상스런 인연이란 말씀이야.”그러고 나서 황노인은 조원장 쪽에서 무슨 대꾸가 있건 없건 혼자서 계속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 섬에선 진실로 사랑으로 행해야 할 사람들은 그것으로 행할 줄 모르고 오히려 그것을 배워 알게 하여주십사 기도를 바쳐야 할 사람한테서 거꾸로 그것을 배워 깨닫게 된 인연이라니...”하지만 그것은 이미 조원장으로서는 무슨 대꾸도 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황노인의 그 마지막 몇 마디 말이야말로 이날 오후 그가 조원장에게 일깨워주고 싶고 기억시켜주고 싶었던 가장 값진 다짐의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원장은 그래도 하느라고 했거든. 지금 와서 보면 원장이 이 섬에서 행해온 것은 모두가 사랑으로 해서였던 게란 말야. 그 원장을, 원장과 함께 사랑으로 행할 수 없었던 못난 문둥이들이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게야. 그 알량한 자유 하나로 모든 것을 행하려 한 옹졸스런 문둥이들이 외려 그 원장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게란 말씀야. 일이 왼통 거꾸로만 되어왔던 심이지. 그렇다고 뭐 그 동안 원장이 이 섬에서 행해온 일들이 오늘로 모두 허사가 되어버릴 수는 또 없을 게야. 이 황량한 문둥이들의 가슴속에 원장은 그래도 제법 훈훈한 사랑을 보여주려 했었거든." 이 황량한 문둥이들의 가슴속에 원장은 그래도 제법 훈훈한 사랑을 보여주려 했었거든.“ 언제부턴가 다시 길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노인의 입에서는 마치 무슨 신이라도 내린 듯 거기서도 아직 한동안이나 더 혼잣말이 계속되어 나오고 있었다. “그건 아마 모처럼 이 섬에 남겨진 사랑의 동상이 될 게야. 눈에는 잘 보이지 않겠지만, 이 섬에선 그래도 처음으로 제 손으로 제가 지어 지니게 될 그런 동상, 아무도 목을 매어 끌어내리고 싶어할 자가 없는, 이 섬이 우리 문둥이들의 것으로 남아 있는 한 오래오래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할 단 하나의 사랑의 동상으로 말씀야...” 제3부 천국의 울타리 조백헌 원장이 섬을 떠나간 지도 어언 7년여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7년이라면 강산이 절반은 훨씬 변했어야 할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러나 7년여의 세월 동안 어느 곳보다도 변화가 많았어야 할 섬에는 오히려 아무것도 변해진 것이 없었다. 바뀌고 변한 것은 사람들뿐이었다. 그 동안 섬 병원 원장직을 맡아왔다 간 사람 수만도 세 명이나 되고 있었다. 어떤 경우는 불과 반년 남짓한 부임 기간 동안 원생들의 투병 실태나 여타의 섬 실정과는 제대로 손발이 익어지기도 전에 섬을 떠나가버린 원장도 있었다. 사람이 바뀐 것은 원생들 쪽도 마찬가지였다. 원생들도 쉴 새 없이 변하고 바뀌어갔다. 조원장이 섬을 떠날 무렵에도 나이를 먹고 있던 사람들은 그새 많은 수가 벌써 만령당 영혼의 집으로 갔고, 조원장의 마지막 친구였던 황희백 장로 역시 어느 해 가을 마침내 그 끝없는 ‘주님의 날’을 맞아 영원한 안식의 길을 떠나갔다. 섬에는 그러나 떠나간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수의 새 생명들이 태어나 자라가고 있었고, 그 새로운 생명들의 아비와 어미들은 그들보다 먼저 주님의 날을 맞아간 수많은 섬사람들을 뒤따라 성장하고 늙어갔다. 변하고 바뀌어온 것은 대체로 그 사람들뿐이었다. 사람들을 제외하면 섬에서는 7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오마도 간척지는 아직도 마무리가 지어지지 않고 있었다. 오마도 사업장은 제방 공사만 끝났을 뿐 더 이상 개간이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3백만 평 간척지엔 몇 년 동안 허연 소금꽃만 피어 있었다. 개간지 분배권을 넘겨받은 군 당국이 아직 땅 주인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섬사람들의 생활은 다시 그 오마도 공사를 시작하기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까지도 그 탈출자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잊을 만하면 별반 이유도 없이 탈출 사고가 생겨나서 섬 안에 새로운 말썽을 빚어냈다. 따지고 벼면, 섬에서 달라진 것이란 오직 그 사람들뿐이라 말한 것도 옳은 소리는 아니었다. 과연 그러했다. 섬에서는 그 사람들조차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셈이었다. 사람들이 달라진 것은 외모나 이름뿐이었다. 예나 이제나 마음속은 늘 마찬가지였다. 생활 습성도 이전 그대로였다. 섬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원장이 자주 바뀌게 된 것도 실상은 거기 원인이 있었다. 그야 이섬 병원 원장 자리가 어느 누구에게나 마음이 선뜻 내켜올 만큼 인기가 좋은 곳은 아니었다. 섬으로 가라 하면 대개는 마음이 주춤했다. 하지만 그 사이 벌써 네 번씩이나 원장이 바뀌어 들었다면, 그 책임이 원장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섬을 변하게 할 수 없었던 데에 원장이 자주 바뀐 이유가 있었다.섬을 변하게 하자면 무엇보다도 오마도 일이 옳은 방법으로 해결지어져야 했다. 애초의 약속과 희망대로 원생들로 하여금 그들이 땀을 흘려 일한 만큼 그들의 몫을 차지하게 해줘야 했다. 그들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수확을 거두게 해줘야 했다. 오마도 문제의 떳떳한 해결만이 섬사람들에게 변화를 줄 수 있었다. 오마도만이 섬사람들에게서 사라져가고 있는 믿음을 회복해줄 수 있었고, 오마도만이 그들에 버릇되어 있는 비생산적인 생활의 타성을 바꾸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원장들은 아무도 그것을 할 수 없었다. 아무도 오마도 간척지 분배 문제에 바람직한 해결책을 구할 수가 없었다. 원장들은 누구나 그 오마도 일부터 해결을 짓고 싶어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더 무력하게, 그리고 서둘러서 섬을 떠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마도 문제는 누구의 힘으로도 쉽사리 끝장이 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해 봄 3월 하순경이었다. 2, 3일 정도만 지나면 섬 거리 전체가 온통 구름 같은 벚꽃으로 뒤덮이게 도리 그 이른봄의 어느날 이 섬에는 한 낯익은 손님이 찾아왔다. 이제는 이미 환자와 건강인이 자리를 함께 뒤섞여 타고 있는 그 소록도와 녹동간 나룻배로 남해의 한 유서 깊은 해협을 건너온 사람은 C일보의 이정태 기자였다. 원장님, 아무쪼록 무작정 기다리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저들이 얼마나 더 기다려 줄 수 있을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마도 공사가 시작된 지 반년- 바닷물 속에 아무리 바윗돌을 던져넣어도 그 물 속에선 돌둑이 솟아오를 기미를 안 보이고 있을 때, 그때 마침 오마도 공사 현장 취재차 사업장 원생들 사이에서 함께 돌등짐질까지 했던 이정태 기자- 그리고 마침내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고통스러운 불길한 경고를 남기고 섬을 떠나갔던 그 이정태 기자가 섬을 다시 찾아온 것이다. 뭍에서는 무심히 넘겨볼 수 없는 기이한 결혼 잔치가 섬 안에서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벚꽃 피는 봄을 맞아 섬 안에선 미구에 건강인 처녀 한 사람과 음성 병력자 총각 사이에 들물게 보는 혼인 잔치가 치러질 예정이었다. 이정태 기자가 섬을 찾아온 것은 그 혼인식의 취재가 표면적인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혼인식 취재 이외에도 또 하나 다른 방문의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그 두 남녀의 어려운 결합을 성사시킨 혼사의 중매인 겸 후견인 노릇을 해온 한 집념의 사내를 만나보는 것이었다. 이정태는 이번 혼사의 당사자들인 윤해원과 서미연의 사연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결합에 남다른 관심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이 섬과 섬사람들에게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도 알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의 결합에는 한 후견인의 심상치 않은 역할이 크게 작용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결합을 성사시킨 것도, 그리고 두 사람의 혼인식을 때맞춰 마련하고 있는 것도 모두가 그의 주선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라 했다. 조백헌 전원장이 바로 그 인물이었다. 조백헌 원장- 그러니까 그 전임날로 예정한 절강젯날을 이틀이나 앞두고 있던 7년 전의 3월 초순 어느 날 저녁, 이렇다 할 이임 행사조차 없이 홀연 섬을 떠나갔던 조백헌 원장, 황희백 노인과 서무과장 두 사람만의 조촐한 배웅 속에 조용히 섬나루를 건너갔던 그 조백헌 전원장이 이젠 다시 섬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조백헌 원장이 다시 섬으로 돌아온 것은 그러니까 그로서는 사실 숙명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섬을 떠난 후로도 물론 섬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섬 소식을 듣고 있었다. 오마도 일이 끝끝내 원생들을 실망시키고 있다고 했다. 원장들이 쉴 새 없이 자주 바뀌어간다고 했다. 그는 마음이 잡히지 않아 자기 병원 일도 온전히 감당을 해낼 수가 없었다. 그는 그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진실로 그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으므로, 마산 쪽 병원일엔 자기가 잘 맞지 않고 있음도 알고 있었다. 그는 다시 섬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섬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는 관계 요로의 고위층 인사를 접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소록도 병원으로의 재임을 희망했다. 그의 청원은 번번이 묵살당했다. 그렇지 않아도 불이 붙어 있는 오마도 간척지 분배 문제에 또 하나 위험스런 불씨를 끌어들이지 안으려는 속셈에서였다면, 그건 너무나 당연한 노릇이었다. 사표를 써 던질까도 여러 번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전임 발령을 내주지 않아서보다도 더욱더 그를 망설이게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진실로 다시 섬어로 돌아가야 한다는 스스로의 구실과 명분을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섬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했던 황장로와 상욱들에 대답할 자기 명분이나 이해가 이직도 마련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섬은 자유로 행하려 하기 때문에 그를 용납할 수가 없다고 했다. 섬사람들은 자유로 행하려 했고 원장은 사랑으로 행하려 했음도 알고 있노라고 황장로는 설명했다. 하면서도 황장로는 그의 그런 개인적인 감사를 표했을 뿐,조원장의 그 사랑의 방법이라는 것을 말로써 인정할 수 있었을 뿐, 그들의 섬 위에서 그것을 용납할 줄을 몰랐었다. 그 섬에선 자유가 사랑 속에 깃들이는 것을, 그 자유를 사랑으로 행할 수 있음을 황노인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사랑의 징후를 말했을 뿐 노인은 그것을 느끼거나 믿을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는 끝끝내 조원장을 섬에서 나가게 하고 말았었다. 조원장은 아직도 그처럼 섬의 자유와 그 자신의 사랑이라는 것이 배타적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의 사랑의 방법이 진실로 섬사람들의 가슴에, 그들의 자유 속에 깃들일 수가 없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것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는 한은 전임 명령을 얻어낸다 해도 돌아갈 수가 없는 섬이었다. 돌아가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5년을 기다렸다. 자유와 사랑의 방법이 서로를 용납할 수 있는 길을, 그리고 그와 섬사람들 사이에서 그것이 그렇게 될 수가 없었던 수수께끼의 해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에게로 느닷없이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보다 한 발 앞서 섬을 버리고 갔던 이상욱에게서였다. 그리고 그 상욱의 편지 속에서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는 마침내 마산 병원을 스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길로 곧 섬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론 병원의 새 원장으로서가 아니었다. 섬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개인 조백헌의 신분으로서였다. 그리고 그가 다시 섬으로 돌아온 지 다시 2년여. 하지만 조백헌 원장(섬사람들이 그를 여전히 조원장 조원장 하듯이, 여기서 그를 원장이라 부르는 것은 전관의 예우로서도 당연한 호칭이 되리라)이 돌아온 이후의 그 2년여 기간 동안에도, 그는 아직 오마도 문제에 대해서만은 역시 별다른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모습조차 분명치 않은 상대와 기나긴 싸움만 계속하고 있었다. 더욱이나 그는 이제 현역 원장의 신분도 아니었다. 섬을 찾아 들어올 때는 그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생각했고, 그것이 그 자유와 사랑의 실천적 화해라는, 섬사람들과 원장 사의의 눈에 보이지 않은 갈등을 해소해나가는데도 결정적으로 유리한 입장일 수가 있다고 생각했던 조백헌 원장이었다. 하지만 막상 일을 당하고 보니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로서는 또 한번의 거듭된 실패였다. 사정이 그런 조원장이었다. 이정태 기자는 물론 조원장의 그런 자세한 사연을 다 알고 있지는 못했다. 그가 어떻게 해서 섬을 나갔고, 어떤 동기에서 어떤 각오로 다시 이 섬을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그의 생각을 들은 바도 없거니와 짐작을 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애초부터 이 섬과 섬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그 섬의 운명과 조백헌이라는 한 집념 질긴 사내와의 관계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이해를 가져오던 사람이었다. 조 원장이 섬을 떠난 후로도 이 섬에 대한 소문에는 늘 소홀히하지 않아왔던 이정태였다. 그러던 어느 해던가. 그는 그 조백헌 원장이 다시 떠 섬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언젠가 그 조백헌이라는 사내를 다시 한번 찾아볼 생각을 먹기 시작했다. 그를 찾아보고 그가 섬을 떠나게 된 경위와, 관직을 버리고 다시 섬을 찾아오게 된 동기하며 각오 같은 것을 듣고 싶었다. 이정태 기자가 보기에도 섬의 일은 실패가 분명했다. 조원장을 만나보면 그 눈에 보이지 않은 실패의 원인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를 한번 찾아가보리라. 조원장을 찾아가 만나보는 것이 거의 어떤 의무처럼 여겨져오던 몇 년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럭저럭 틈을 못 잡고 기회를 미뤄오고 있던 이정태였다. 그러던 이정태 기자에게 마침내 기회가 온 것이다. 섬 안에 벚꽃이 만발하는 4월에 보기 드문 두 남녀의 혼인 잔치가 벌어진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었다. 더욱이나 그 한 쌍의 결혼을 주선하고 두 사람의 혼인 잔치를 서둘러대고 있는 것은 이 병원의 현직 원장이 아닌 조백헌 그 개인의 노력이 크게 작용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 작자가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그는 겨우 섬을 찾을 것을 결심했다. 그리고 그 3월 하순 무렵의 따스한 일요일 아침 그는 마침내 섬을 들어가는 나룻배를 타게 된 것이었다. 섬 건너 녹동읍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난 이정태 기자가 나루를 건너 조원장 숙소를 찾았을 때는 그 일요일 아침 10시쯤이었다. 건강인 지대의 관사촌 빈집을 하나 빌려 쓰고 있는 조원장은 가족도 없이 한 음성 병력자 처녀의 시중 속에 혼자서 불편한 섬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정태가 조원장을 숙소로 찾았을 /대는 일요일 아침인데도 그는 벌써 집을 비우고 없었다. 일요일 아침나절이었으므로 원생들은 모두 교회당으로 가고 섬 안은 온통 길거리가 텅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조원장은 원래 교인이 아니었다. 원장은 아침부터 산으로 나무를 캐러 나가 있다고 했다. 처녀 아이가 곧 산으로 쫓아 올라가서 조원장을 데리고 왔다. "아니, 이게 누구요. 이정태 기자가 아니오!" 처녀 아이에게 미리 전갈을 전한 탓도 있었겠지만, 조원장은 아직 이정태를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을 할 뿐 아니라 그는 이정태의 방문을 진심으로 반기고 있는 기색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오? 어떻게 이런 먼 길을 다시 찾아주신 거요?" 나무를 캐러 갔더라는 사람이 마음이 바빴던지 조원장은 풀포기 하나 캐어오지 않았다. 그는 관사문을 들어서자 괭이와 삽을 처녀아이게게 맡기고는 이정태를 껴안을 듯 두 팔을 벌리고 덤벼들었다. 흙도 털지 않은 손으로 이정태의 두 손을 덥석 부여잡은 그는 오랫동안 인적을 몹시 그리워해왔던 사람처럼 티없이 반갑고 유쾌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는 이정태가 무엇 때문에 이번에 다시 섬을 찾아왔든, 그를 다시 만나게 된 것만이 즐거운 일이라는 듯 다짜고짜 그를 집 안으로 끌어들이기부터 했다. 그리고는 다다미방 응접실에 그를 혼자 앉게 해놓고 자신은 한동안 사람도 없는 집 안을 여기저기 들추고 다니면서 손님 접대 준비를 서둘렀다. 흙 묻은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그리고 심부름을 하는 처녀 아이에게 이것저것 시중거리들을 부탁했다. "휴게실에 정순이란 아이 나왔거든 이리로 차 좀 보내달래라. 손님이 오셨다구." "난 오늘 누가 찾아와도 안 만날게니 공판장에 가서 술이나 좀 가져오도록 해라. 안주 할 것 있으면 안주도 좀 하고" "그리고 참 이따가 구라회관 내려가서 최영감한텐 손님 쉴 방 하나 덥혀놓으시라 일러놓아야 할 게다." 그는 이정태의 의향은 묻지도 않고 이거저것 모든 일을 마음대로 결정해버리고 있었다. 묻지 않아도 이정태의 방문 목적이나 체재 일정을 짐작하고 있다는 식이었다. 그야 결혼식 취재를 하고 가자면 어차피 하루이틀은 밤을 묵어갈 곳을 정해놓아야 할 이정태의 형편이기는 했다. 그러고 나서야 조원장은 간신히 이정태와 자리를 함께하면서 이제부턴 둘이서 우선 술이나 실컷 취해보자는 것이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우린 술이나 합시다. 이기잔 아마 결혼식 때문에 섬을 찾아왔겠지만 결혼식은 4월 초하루로 날을 받아놓았으니까 아직은 며칠 시간이 남았어요. 섬 거리에 벚꽃이 활짝 피어줘야 하거든요. 그때까진 안심하고 술을 마실 수가 있겠지요." 이윽고 휴게실의 한 음성 병력자 처녀 아이로부터 차가 날라져오고 술자리도 곧 마련이 되었다. 두 사람은 아침부터 무슨 굶주린 술귀들처럼 술잔을 비워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취기를 돋우다 보니 이정태는 문득 한 가지 새삼스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조백헌 원장은 원래 성격이 그리 유쾌한 위인이 아니었다. 유쾌하다기보다는 무뚝뚝한 편이었고, 호탕하다기보다는 우직스런 쪽이었다. 그런데 그는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이정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그는 유쾌히지고 있었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호탕스러워져가고 있었다. 술기가 어지간히 배어오르기 시작하면서 그의 호탕스러움은 이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어떤 거센 광기 속으로 휘말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정태는 알고 있었다. 조원장은 진실로 유쾌해하고 진실로 호탕스러워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유쾌함, 그 호탕스러움에서도 이정태는 이상스럽게 처절스런 어떤 조원자의 광기 같은 것이 느껴져오고 있었다. 이정태는 오히려 그 원장의 광기 속에서 그의 소망과 괴로움을 볼 수 있었다. 외로운 침묵 속에 얼마나 많은 말들이 참아져오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었다. 입을 다물고 견딜 수밖에 없는 그의 진실이 얼마나 힘겹고 외로운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사람을 만나 그의 고통스런 말들을 나누어 지녀주기를 바라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었다. "내 이형한테 하나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데, 이형은 이게 뭔지 말을 해줄 수가 있겠소?" 술이 어지간히 취해오자 조원장은 이제 이정태 기자를 이형이라 불렀다. 한 되들이 청주 한 병이 다 비워지고 새 술병이 들어왔을 때, 조원장은 갑자기 생각이 떠올라오는 듯 이정태를 손짓해 불렀다. "난 벌써 이형 쪽에서 물어올 줄 알았더니... 저게 이형은 뭘로 보이오? 저 구석에 세워진 거 말이오." 조원장이 가리킨 것은 무슨 커다란 고목나무 뿌리를 둥치째 캐어다 세워놓은 것이었다. 하얗게 껍질을 벗기고 잔뿌리를 잘라낸 고목뿌리 둥치에는 거뭇거뭇 불지짐질을 가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저게 뭡니까. 무슨 고목나무 뿌리가 아닙니까?" 이정태는 영문을 몰라 원장에게 되물었다. 원장의 말은 그러나 물론 그것을 물은 것은 아니었다. "맞아요. 고목나무 뿌리를 캐다가 껍질을 벗겨놓은 겨요. 하지만 내가 이형한테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야요." "그럼 뭘 묻고 싶으신 겁니까." "저게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느냐 어떠냐는 거요. 이형은 도회지에서 많이 보았으니까 알 게 아니오. 이를테면 전람회 같은 델 가보면 저런 조각품 비슷한 것들이 많지 않소? 하지만 비슷한 것만 가지고는 장담을 못 하지요. 저게 정말로 작품이라 수가 있는 거냐 어떠냐 그걸 알고 싶단 말이우다." "원장님께선 그럼 조가 작품으로 손수 저걸 다듬어놓으신 겁니까?" "아니지요. 난 거저 고목 뿌리를 캐다가 껍질을 벗기고 잔뿌리를 적당히 잘라냈을 뿐이오. 그래놓고 보니 아닌게아니라 이게 진짜 무슨 작품이라도 된 것 같단 말야요. 아름답지 않아요? 그래서..." 하고 보니 그가 그 산으로 나무를 캐러 나간 것은 살아 있는 나무가 아니라 죽은 나무 뿌리나 고목 둥치 같은 것을 구하기 위해서였던 모양이었다. 집 안에 여기저기 그런 물건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하루이틀 나다닌 일이 아니었다. "원장님께서 아름답게 보고 계시다면 그걸로도 작품의 가치는 충분한 것 아닙니까." 이정태는 대꾸가 차츰 조심스러워지고 있었다. 조원장은 아직 그쯤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런 소릴 듣자는 게 아냐요. 난 확신을 얻고 싶어요. 일테면 공인을 받자는 것이지요. 나 혼자서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게 작품이라 할 수가 있느냔 말이오. 다른 사람들도 이 나무 뿌리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과 말을 할 수가 있느냔 말이오." " " 엉뚱하게도 원장은 지금 예술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원장이 묻고 있는 것은 이를테면 창작자와 창작물 사이의 대화에 관한 것이었다. 창작자와 대상과의 영혼의 교감에 관한 것이었다. 조원장으로서는 아마 당연한 노릇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그 역시 원장의 광기의 한 모습이었다. 이정태는 잠시 대꾸를 잃고 앉아 있었다. "난 이런 생각을 자주 해왔어요. 눈을 뜨고 찾아내려고만 하면 이땅 위엔 아름답고 귀한 것이 얼마든지 많을 거란 생각 말이오. 하지만 그 아름답고 귀한 것들은 우리가 눈을 뜨고 찾아내지 않으면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보이질 않습니다. 볼 수가 없습니다. 누구의 눈에도 띄어본 일이 없이 우리 눈앞에서 숨어 사라져버리는 것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이정태가 대꾸를 않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조원장 스스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제 번들번들 눈빛을 빛내가며 추궁하듯 이야기를 계속해나가고 있었다. "바로 저 나무 뿌리가 그런 서 중의 하나지요. 산에만 올라가면 저런 고목나무 뿌리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모두가 땅속에 숨어 있어요. 놔두면 제물에 썩어 없어져버릴 것들이지요. 하지만 내가 올라가 땅을 파고 썩어가는 뿌리를 찾아주면, 저것들은 제 몫의 아름다움을 되찾아 지니고 저렇게 내게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요즘 사람들 현상의 실첸가 뭔가를 찾아낸다고 생 유치창을 주먹으로 두들겨 깨기도 하고, 새끼줄을 이리저리 얽어매는 따위의 어려운 짓들까지 하는 모양입디다만, 이 나무 뿌리는 그렇게 힘이 들 필요가 없어요. 일부러 뭘 만들어낼 필요가 없어요. 제가 원래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 있거든요. 그 숨어 묻혀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주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놔두면 그냥 땅속에서 썩어 없어질 나무 뿌리를 찾아내주기만 하면 그만이란 말이우다. 그게 예술이 안 됩니까. 그래선 예술 작품이 안 되는 거웨까?" "하지만 원장님께서도 그냥 나무 뿌리만 찾아 내다놓은 건 아니 것 같군요. 여기 이렇게 불지짐을 해놓은 건 무업니까. 원장님께서 일부러 불자국을 낸 거 아닙니까. 나무 뿌리 자체로는 부족하니까 거기서 아마 원장님의 만족스런 조형 의지를 실현해낼 목적으로..." 이정태는 아무래도 그 거뭇거뭇한 불지짐 자국 쪽에 더욱 주위가 기울고 있었다. 이정태의 추궁에 대한 조원장의 대꾸는 너무도 진지하고 분명했다. "아 그거 말이오! 그거 다 내가 나무 뿌리하고 말을 한 흔적이오." "말을 한 흔적이라뇨?" "싸움에 지치고 나면 혼자서라도 말을 해야 하니까요. 이렇게 말하면 이형은 이미 짐작이 가겠지만 싸움이 오죽 많습니까. 오마도 농장 일에, 원생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반발에... 의사가 부족한 일이라 가끔가다 선심삼아 돕는 일이지만 그 지겨운 문둥이 수술 때의 긴장하며..., 덮어놓고 기다리는 것도 못 견될 싸움입니다. 그렇다고 누구 눈에 보이는 싸움의 상대나 있습니까, 이웃이 있습니까. 그때 나는 말을 해야만 했어요. 혼자서라도 말야요. 혼자서 말을 하는 방법이야 많이 있지요. 술도 마시고 산으로 올라가 나무 뿌리도 캐고...그것으로도 부족하면 그땐 쇠꼬챙이를 불에 달구어 저것들을 저렇게 지져대곤 했어요. 내 몸을 지지는 아픔을 느끼면서 저걸 저렇게 지져대곤 했어요. 그런 것이라도 하고 나야 속이 좀 후련해집니다. 그게 내 말입니다. 검은 상처들은 모두가 저 나무 뿌리와 나 사이에 오간 말의 흔적일 뿐입니다. 그래야 겨우 자신을 지탱해나갈수가 있었거든요. 일부러 작품을 만들자고 한 짓은 아니야요." 조각가가 작품을 제작할 때마다 그 피조물과 정말로 무슨 말을 주고받고 있는 것일까. 하더라도 사람과 작품간의 영혼의 교감이 조백헌 그 사람에게서처럼 치열할 수가 있을까. 듣고 보니 원장의 나무 뿌리는 참으로 귀중한 예술 작품이 아닐 수 없는 것 같았다. 땅속에 묻힌 아름다움을 찾아내주고 그것과 말을 하고 영혼의 교감을 통해 가장 값진 위로를 받고 있다면, 원자의 나무 뿌리야말로 그에게는 가장 진실한 의미의 예술품이 아닐 수 었었다. 그리고 그 나무 뿌리의 아름다움과, 그것과 원장 사이의 영혼의 교감과 위로가 다른 사람에게도 함께 전해질 수만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원장이 원하듯 만인의 예술로 공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적어도 이정태 스스로는 그것을 충분히 확언할 수가 있었다. 거뭇거뭇 불자국이 남은 나무 뿌리의 모습이 이정태 기자 앞에서 서서히 숨을 쉬기 시작한 생명체로, 원자의 말과 영혼을 간직한 아름다운 구원자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조원장 자신이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것은 어쩌면 이섬 사람들과 조원장 그 자신과의 어떤 불가결하고도 치열스런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 역시도 또한 조원자의 광기의 한 모습이었다. 그는 때로 핀을 뽑은 폭발물을 손에 쥔 사람처럼 불안스런 투지와 자신감에 넘쳐 보이기도 했고 때로는 이제 모든 것을 단념해버린 무기력하고 지친 한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했다. 자신감에 넘쳐 있거나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거나 이정태는 조원장의 그런 모습과 언동에서 쉴 새 없이 일렁이고 있는 그 무서운 광기와 불안스런 감저의 소용돌이를 느끼고 있었다. "섬에만 오래 계시더니 원장님은 이제 무엇엔가 잔뜩 미쳐가고 계시는 것 같군요." 이정태는 그 원장을 두고 마침내 참고 있던 한마디를 뱉아버리고 말았다. 아니게아니라 이정태는 원장이 이제 미쳐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정태는 물론 그것을 위태롭게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더더구나 이정태 자신으로선 그런 원장을 발견한 것이 무엇보다도 다행스러울 지경이었다. 오랫동안 망설이고 있던 그의 숙제를 한 가지 풀어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원장의 광기를 보자 그는 섬까지 다시 그를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오랜 숙제에서 무거운 짐을 한 가지 내려놓은 듯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미쳤다구요? 이형한테도 내가 그렇게 뵈오?" 이정태의 갑작스런 말에 원장은 비로소 술기가 조금 가셔진 얼굴로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정태는 원장이 성을 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정태도 조원장도 이젠 새삼스럽게 화를 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조원장도 물론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 않아요 난 섬사람들한테 가끔 그런 소릴 듣고 잇는 판이니까. 나도 그걸 알고 있어요." 원장은 다소 기가 꺾인 어조로 제풀에 실토를 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난 부끄럽진 않소, 이런 식으로 미쳐 지내기라도 하지 않으면 난 이 섬을 참을 수가 없어요. 미치기나 해야 견딥니다. 알겠소? 이 섬은 미치지 않고는 견뎌낼 수가 없단 말요." "저도 그걸 힐난하자는 건 아닙니다." 이정태도 이젠 사뭇 목소리가 가라앉고 있었다. 아니게아니라 조원장은 이제 그런 광기가 아니고는 더 이상 자신을 지탱해나갈 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있는 이정태였다. "원장님이 미쳐 계신 것을 힐난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 오히려 그런 원장님을 보게 된 것이 저 개인으로는 무척 다행스런 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하고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다행스럽다니?" 원장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정태를 건너다보았다. "전 사실 섬을 찾아온 목적이 있었거든요. 원장님께 술이나 얻어 마시러 여기까지 올 수는 없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야, 찾아온 목적은 있었겠지. 내일 모레면 이 섬에 그 혼인 잔치가 벌어질 테니까." "혼인 잔치도 물론 구경을 해야지요.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지요." "그보다 중요한 목적이라면?" "이 섬에서 거인의 우상을 부수는 일이라고 할까요?" "....." "전 사실 이 섬과 원장님에 대해선 이상스럽게 거북한 빚을 한 가지 지고 있었지요. 저 나름의 어떤 해답을 풀어내야 할 숙제 같은 거라고 할까요.....?" "....." "언젠가 전 원장님이 그 오마도 공사를 시작했을 때, 어느 잡지에 원장님과 이 섬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지요. 아마 그건 제가 그 오마도 사업장에서 일주일 동안 일을 하고 간지 한 달쯤 지난 다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쓴 기사가 제겐 오히려 다른 숙제를 한 가지 남겼던 겁니다. 전 그때 섬을 떠나갈 때 원장님께는 아마 덮어놓고 일을 기다리려고만 했다가는 언젠가는 필시 원생들쪽에서 원장님을 무섭게 배반하고 나설지도 모른다고 기분 나쁜 충고를 드리고 갔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전 그때 섬을 나간 다음에는 그와 반대의 글을 썼었지요. 오마도 공사는 결국 성공을 하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조백헌이란 원장의 인간 됨됨이나 그 초인적인 집념과 의지의 힘으로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서슴없이 장담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가 결국 이형에겐 난처한 숙제를 남겼다는 것이겠구만?" "그런 셈이었죠. 원장님은 제 기사 속에서 굉장히 거인으로 묘사되고 있었으니까요. 사실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공사는 그럭저럭 끝났다 해도 일의 결과는 처음 예정과는 딴판으로 되어가고 있질 않습니까. 오마도 일은 결말이 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원장님은 오늘도 또 시간만 무작정 기다리고 계시는 형편이니 말입니다. 이점은 아마 원장님께서도 솔직히 시인을 하실 줄 믿습니다." "이형도 아마 이 섬 일을 실패로 보고 계신 모양이군요." "적어도 이 시점까지 해서는 실패로 볼 수밖에 없는 형편 아닙니까." "그래서 엉뚱한 영웅만 한 사람 만들어 놓은 결과가 되어, 그 기사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었던 게로구만...." "이해해주시니까 제 이야기가 쉬워지는군요. 제가 기사에서 잘못 소개한 영웅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 영웅에 대해 다시 옳은 기사를 써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영웅은 가짜였다고 쓰면 되겠군." "그럴 수만 있다면 일은 쉽겠지요. 혹은 그 반대로 원장님께서 앞으로 오마도 일을 기어코 섬사람들 기대에 배반하지 않도록 마무리를 지어주셔도 그만일 테구요. 하지만 그게 간단치가 않은 것은 사실 그때 제가 쓴 기사에 대한 책임은 오마도 공사로만 변명되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던 거죠." "....." "전 그때 원장님을 위해서 원장님을 거인으로 썼던 게 아니라, 이 섬을 위해서 필요한 거인을 한 사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결국 이렇게 되어왔고 보면, 이 섬을 위해선 그런 거인이 진실로 필요한 존재였느냐 아니었느냐 하는 회의가 생기게 마련이었지요. 원생들은 아직도 섬을 빠져나간다더군요. 아무도 이제 이 섬에선 낙토를 꿈꾸는 사람이 없다더군요. 오마도 일이 저렇게 되고 보니까 원생들의 불신은 전보다도 더 심해졌다더군요.... 영웅은 결국 실패를 했더군요. 영웅의 실패는 더욱더 고통스럽고 외로운 법이지요. 섬을 위해서도 그건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전 기사를 다시 써야 했습니다. 영웅이 왜 실패를 하느냐, 영웅이 섬을 다스리는 데 섬은 왜 더욱 불행해져가야만 했느냐, 이 섬에 진실로 영웅이 필요했느냐, 이 섬 사람들의 행복은 과연 어디에서 책임져야 하느냐..." "....." "미안한 일입니다만, 해답은 모두가 원장님께 대해서는 부정적인 쪽뿐입니다. 제가 다시 써야 할 기사도 물론 원장님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담 이 조백헌이가 죽일 놈이었다고 써버리면 그만일 것을 뭘 그깟 일로 숙제니 뭐니 그토록 망설이고 있을 필요가 있었지요?"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원장님이 정말 이 섬에서 끝끝내 실패를 하고 만다 하더라도 전 아직 원장님의 희생과 선의의 동기가 있었더라도,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는 일은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지, 어느 한쪽의 선의나 의욕만으로 끝나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원장님의 실패도 아마 원장님께 그런 선의나 희생이나 의욕이 없어서가 아니라 원장님의 다스림을 받는 원생들과의 관계에서의 실패일 것입니다. 그래서 전 다음번 기사를 전번과는 아무리 부정적인 방향으로 쓴다 해도 원장님 개인의 선의와 동기만은 배반을 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원장님에게도 그것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입니다. 전 원장님 개인만은 구해드리고 싶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막상 저의 부정적인 기사 속에선 개인적으로나마 원장님을 구해 들릴 방법이 늘 막연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원장님을 아직 잘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이번에 원장님을 만나 뵙고 보니..." "날 구해줄 방법이 떠올랐단 말요?"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말요?" "원장님께서 미쳐 계시는 걸 보고....., 원장님께서 미쳐가고 계신 걸 보니 이 섬 이야기에서 원장님 스스로 이미 자신을 구해낼 길을 마련하고 계신 것 같군요. 전 미친 원장 이야기만 쓰면 그걸로 제 글에서도 원장님은 구해지실 수가 있을 것 같단 말씀입니다." "고맙소. 내 구원을 그처럼 늘 생각하고 계셨다니! 하지만....." 조원장은 진심으로 이정태가 고맙다는 듯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유심히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 이정태를 말처럼 그렇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아직도 잘 곧이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형이 그토록 나의 구원을 생각해주셨다면 난 이제 나의 실패를 설명해야 할 번거로운 짐을 안게 되어버린 셈이겠구려. 나를 구할 길이 마련되었다면 이형은 이제부터 진짜로 이 섬의 실패에 대한 이형의 숙제를 풀어야 할 차례가 되고 있을 테니 말이요." 조원장은 이제 그 이정태가 마음대로 섬을 물으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을 해놓고도 이정태에게 당장 자신의 실패를 시인하려 않았다. "그러려면 우선 섬부터 한바퀴 둘러보는 게 좋을 게요. 이야기를 듣느니보다 이형의 눈으로 직접 보고 이형의 머리로 판단을 한번 내려보라는 말이외다. 이형은 벌써 섬을 알고는 있겠지만, 그 사이 또 달라지고 변한 것도 많을 테니까...." 그 달라지고 변한 것을 이정태 자신의 눈으로 직접 살펴보고서야 이 섬이 정말로 실패를 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또는 실패를 하고 있다면 그 원인이 어디 있으며 어떤 모습으로 실패를 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가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원장은 이제 당장이라도 그 이정태에게 섬을 몸소 구경시켜주려는 양 술상을 박차고 자리를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다. 조원장이 이정태로 하여금 자신의 눈으로 섬을 보고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을 내리게 하려 한 것은 물론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조원장을 따라 섬 안을 둘러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정태의 눈에는 새삼스러운 느낌을 주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길가의 벚나무들은 가지마다 불그스럼한 꽃망울들을 촘촘히 머금고 있었다. 벚꽃이 만발하면 그것은 꽃잎의 구름이었다. 꽃들의 함성이요 아우성이었다. 남쪽으로 뻗은 가지 끝에 이미 한두 방울씩 성급하게 흰 꽃송이가 터져나온것도 있었지만 그것은 차라리 어느 날의 눈부신 합창을 위한 조심스럽고도 가슴 두근거려지는 개화의 예행 연습 같은 것이었다. 그 벚나무가 줄을 늘어선 도로 아래로는 부드러운 봄바람이 여인네의 머리채를 빗질하듯 수북한 보리밭 이 "병을 나은 원생들에게 그런 일부터 시켜가면서 자활 의욕을 길러 주자는 뜻도 있지만 병을 다루는 당사자격인 건강지대의 사무요원과 가족들에서부터 먼저 병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선입견을 씻어주려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는 일이지요. 하지만 이건 물론 내가 결정한 일은 아니고, 지금 원장이 단행한 일입니다. 난 그저 옆에서 조언이 보탰을 뿐이지요." 조원장의 설명이었다. 병원 직원들이나 가족들은 처음 원장의 처사를 몹시 언짢아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스스로 자기 선입견을 씻고 나서, 나중에는 제 발로 휴게실을 드나들며 병흔이 완연한 그곳 처녀 아이들에게도 별다른 스스럼이 없게끔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음성 병력의 원생들이 건강인 지대를 들어와 있는 것은 물론 그곳뿐만이 아니었다. 구라회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육지에선 때로 환자들을 위문하거나 건강한 사람들 나름의 이해를 보태기 위해 일부러 먼 길을 섬까지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았다. 섬안에는 이들이 머물러 있을 시설이 따로 없었다. 부득이 밤을 지내야 할 경우 손님들은 원장의 관사 신세를 지게 되거나, 저녁에 나루를 건너 녹동으로 가서 밤을 진 다음, 이튿날 아침 다시 섬으로 들어오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구라회관이란 원래 그런 고마운 육지 손님들이 섬을 나가지 않고 밤을 쉬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여인숙 같은 곳이었다. 병원 본관 건물과 원장 관사의 중간에 위치한 건물로 원래는 물론 건강인들이 그곳 일을 맡아 해오던 곳이었다. 그러던 것을 새 원장이 마침내 사람을 모두 바꿔버렸다. 외상이 적은 원생들로 하여금 직접 구라 "섬을 찾아온 분들은 누구보다 이곳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고 병에 대해서도 이해가 깊은 분들이지요. 그런 분들이라면 그분들은 위한 구라회관 일도 당연히 원생들 자신이 맡아야지요. 하지만 사실은 재미있는 일이 많아요. 구라회관에서 내놓은 식사는 좀처럼 손을 대려고들 하지 않는다지 않아요. 그냥 여관인 줄 알았다가 원생들을 보고는 잠자리도 덮으려 하지 않아요. 체면상 싫다는 소리는 차마 못하고 새우등으로 밤을 지내고는 다음날로 당장 섬을 나가고 만답니다. 어쩌면 그게 당연스런 일인지도 모를 일이긴 하지만 말요." 나병에 대한 부당한 편견을 불식시키고, 환자들에게 인간다운 삶의 길을 열어주고자 섬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아직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라고, 조원장은 씁쓸하게 덧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어쨋거나 섬은 변하고 있었다. 미감아 아이들을 부모 곁에서 떠나 있게 했던 보육소도 패쇄해 버렸고(부모들 품으로 돌아간 아이들에게선 발병률이 오히려 줄고 있단다.),섬을 들고나고 싶으면 누구나 마음대로 나룻배를 탈 수 있었다. 원생들의 비뚤린 인간 체험을 감안하여 갖가지 정서 순화책도 마련되고 있었다. 공원을 꾸미고, [보리피리]의 시비를 세우고, 사슴 동물원을 마련해 놓는 따위는 모두가 그런 마음의 치료 효과를 위한 시설이었다. 뿐만 아니라 섬마을 청소년들 사이에는 문예반이 조직되어 책읽기와 글쓰기가 제법 활발했다. 학교 아이들은 물론 마을마다 젊은 청소년들, 특히 나이 어린 아가씨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합창단이 노래 연습이나 음악 감상회 활동도 눈에 띄게 활발했다. 마을마다 세워진 교회당 또한 가장 소망스런 영혼의 정화소가 아닐 수 없었다. 축구 시합과 오마도 공사를 계기로 유령의 잠에서 깨어나 격앙되기 시작한 원생들의 그 무질서한 성정들이 이제는 제풀에 제법 안정된 정서의 순화기를 맞으려 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 "마산에서 돌아와보니 이 작자들 아직도 결판이 나질 않고 있지 않아요. 애초에는 공사판 절강젯날 혼인식을 올리려다 그 보건과장을 하던 이상욱이란 친구가 섬을 도망빼나간 바람에 끝내는 파탄이 오고 말았던 거지요. 어려울 때 섬을 도망빼나가는 건강인을 보고 오랫동안 여자의 노력으로 달래놓은 그 건강인에 대한 질투가 다시 폭발해 버렸기 때문이었지요. 상욱에 대한 질투가 여자에 대한 증오로 변한거죠. 원래가 그렇게 좀 병적인 데가 많았던 친구니까. 그 친구가 섬을 찾아와 있는 것도, 섬을 찾아왔다가 병을 앓게 된 것도 모두가 그 누이에 대한 묘한 집착 때문이었는데 말야요. 내가 다시 섬을 돌아왔을 때까지도 그 친구 더러운 술주정뱅이가 되어 있지 워요. 여자는 또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는 편이고 말요. 보육소가 폐쇄되어버린 다음부턴 그래도 두 사람이 다 중앙리 국민학교 쪽으로 의좋게 자리를 옮겨앉아 있는게 신통했어요. 그래 결국은 내가 나섰지요... 나로서는 또 그럴 만한 사정도 있었지만.” 혼사를 이루기까지의 경위에 대한 조원장의 설명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성사가 된 혼인 잔치를 위해서 섬은 바야흐로 잔치 준비가 한창 무르익어아고 있었다. 모든 잔치 준비는 물론 현임 원장의 양해를 얻은 조백헌 전원장의 뒷주선에 의해서였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철거된 그 병사 지대와 건강인 지대를 가르는 철조망 중간 완충 지대 위치에다 원생들로 하여금 아담한 집까지 한 채 짓게 해놓고 있었다. 물론 윤해원과 서미연 부부의 신혼 살림을 위한 집이었다. 그는 이제 이 섬에서는 건강인도 환자도 따로 나뉘어 살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자신들 스스로 몸을 합해 그것을 행해보이려는 두 사람을 위해 그곳에 집을 짓게 한 것이라 했다. 한 채로 시작된 마을이 세월따라 차츰차츰 집 수가 늘어 번져가서 종당에는 섬 전체가 환자 마을도 건강인 마을도 따로 없는 하나의 커다란 동네로 변해지기를 바라는 뜻으로 그곳에 두 사람의 집을 세우게 했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위한 조원장의 계획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결혼 당일 축제 분위기를 돋워주기 위해서 한동안 뜸해졌던 축구 시합까지 새로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4월 초순경엔 남해안 각처에서 벚꽃 구경꾼이 수없이 몰려들던 여느 해의 관례를 이용하여 인근 고을마다 그날의 결혼식 잔치를 널리 알리게 했다. 중앙리 교회 목사님으로 주례도 미리 부탁을 해놓고 예식장은 그 중앙리 교회당으로 정해서 병사 지대 학교 남녀 교사들로 하여금 식장 치장을 맡기고 있었다. 섬은 참으로 나루를 건너오면서 지니고 있던 생각과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그야 이정태로서도 아직 한두 가지 미심스런 느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잔치 준비에 들떠 있어야 할 원생들의 모습이 너무도 좀 무표정하기는 했다. 원생들은 그저 묵묵히 일만 할 뿐 두 사람의 혼인을 자신의 일처럼 허심탄회하게 기뻐해주는 기색이 눈에 띄지 않고 있었다. 그건 이정태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욱더 알 수 없는 일은 모든 규제가 풀리고 있는 이 섬에서 아직도 그 요령부득의 탈출 사고가 끊이질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섬에서는 잊힐 만하면 아직도 그 같은 사고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두 가지 그런 미심쩍은 점만 아니라면 이정태는 이제 섬을 들어올 때의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장담을 할 수 가 없었다. 조원장의 표정이나 말투가 그의 판단을 그토록 망설이게 하고 있었다. 그는 아마 자기가 아직 섬을 잘못 보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말을 한다면 섬은 어쨌거나 이제 옛날과는 그 모습이 훨씬 달라지고 있었다. 섬이 실패만을 계속하고 있었다고는 함부로 단정을 지을 수 없었다. 섬은 실패하지 않았으나 조백헌 원장 개인만이 실패를 하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탈출이라는 그 해묵은 섬 풍속이 근절되지 않고 있는 데 대한 조원장의 지나친 완벽주의, 그리고 그 오마도 일을 매듭지어놓을 수 없는 데 대한 조원장의 낭패감 쪽에 그의 실패는 원인을 두고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조원장이 그 개인의 실패를 섬 전체의 실패로 과장할 이유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정태는 역시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과연 조원장은 그런 모든 이정태의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심을 보류시킬 마지막 길 안내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조원장은 섬의 어떤 숙명적인 실패가 간직되고 있는 그 중앙리 교회당 옆의 특별 병사를 찾아 내려가는 길가에서부터 벌써 지금까지와는 전혀 정반대의 사실을 한 가지 털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참 골치 아픈 일이 한 가지 있어요.” 조원장은 길을 가다 말고 갑자기 생각이 떠올라오는 듯 이정태를 돌아보며 걱정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 윤해원이란 친구 말야요. 그 친구가 요즘 엉뚱한 고집을 부리고 있어요. 어차피 이형 귀에도 들어갈 얘기니까 미리 말하지만, 작자가 혼인식 전에 기어코 제 불알을 까달라고 졸라대고 있단 말야요. 그 우라질놈의 단종 수술이라는 걸 말이오.” 병원에서 그 수술을 해주지 않으면 윤해원은 혼인식마저 작파하고 말겠다는 식으로 느닷없는 협박을 가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슨 이율까요. 기왕지사 결혼을 작정하고 나선 마당에 말입니다.” 이정태의 물음에 조원장은, “그야 물론 그 단종 수술이라는 게 이 섬에선 워낙 원한이 맺힌 풍속이라서 그렇겠지요. 그리고 여기선 아직도 단종 수술을 많이들 권해오고 있었거든요. 시집가고 싶은 처녀 아이들 눈썹 성형 수술하며 혼전 단종 수술이라는 건 이 섬에서만 유독 많이 보는 수술이지요. 거기 대한 반발도 클 거예요. 하지만 일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병원 쪽에서도 이번에는 막상 작자가 원하는 수술을 행해줄 수가 없는 처지에 있다는 점이지요.” “어째서 수술을 할 수가 없습니까.” 어렴풋이 짐작이 가면서도 이정태는 원장에게 그것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작자의 반발이 사실은 보다 더 뿌리깊은 불신과 섬에 대한 절망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이 섬은 지금까지 문둥이들의 후손을 팔아 다스려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후손의 이름을 빌린 그 미래를 구실로 하여 현재가 다스려지고 있다는 생각, 그러나 섬의 현실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 현실이 미래로 인해 속고 있다는 생각, 그러나 사실 이 섬에선 미래보다도 현실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 그런 생각들 때문에 그런 반발이 생기고 있는 것 같아요. 현실을 위한 미래 부정이라기보다, 근본적으로는 그 현실의 실패 때문에 섬의 현실이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하자는 생각이 그런 식의 반발로 연결이 되어나오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자식을 갖지 않겠다는 건 결국은 현실의 실패에 대한 작자들 특유의 야유어린 추궁이야요. 하고 보니 이쪽에선 수술을 해줄 수도 안 해줄 수도 없는 형편이지요. 수술을 해주는 건 곧 현실의 실패를 자인하는 행위가 되거든요.” “여자 쪽도 그것을 동의하고 있나요?” “작자는 처음부터 여자 쪽의 양해를 구해놓고 있었다는구려. 하긴 여자 쪽도 워낙 가파른 데가 많은 성미였으니까. 게다가 이젠 그 여자도 섬 사정을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는 편이구...”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이 다 섬의 현실을 그런 식으로 실패로만 보고 있나요?” “글쎄요, 실패로 보고 있는지 아닌지는 내가 결판을 낼 일이 아니지만, 자식을 갖지 않을 수술을 원하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자신들의 현실만을 문제삼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걱정입니다. 어쨌든지 그 현실이라는 게 보다 많이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덴 나도 어느 면 공감을 하고 있는 곳이 많은 터이고 보니 말이야요...” 조원장은 거기서 그만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이윽고 그 중앙리 교회당 옆 특별 병사로 이정태를 안내해 들어갔을 때 그는 그 병원의 참상으로 하여금 그의 입을 대신하여 그 눈에 보이지 않은 깊은 섬의 현실을 스스로 말하게 하고 있었다. 조원장이 이정태를 안내해 들어간 병사의 첫번째 건물에는 손가락이나 발가락, 심한 경우에는 팔다리까지 떨어져나간 나이 많은 불구 환자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기동이 자유로운 젊은 원생 몇 사람이 불구 환자들의 보호자 겸 간호역을 맡고 있었다. 병사 마을에서 뜻있는 젊은 원생들이 자진 봉사로 그 일을 맡아 나와 있다고 했다. 환자들은 대부분 성경책을 읽고 있거나, 젊은 원생들이 읽어주는 성경 말씀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거나 했다. 숙연히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동이 불가능한 환자들이 대부분이어서 식사나 배변까지도 모두 남의 도움을 받고 있는 형편이라 했다. 병사의 다음 건물은 팔다리뿐 아니라 눈이나 귀와 코와 같은 중요한 감각 기관들이 마비된 환자들이었다. 눈이 성하면 귀가 멀었고 귀가 들리면 눈이나 코를 잃은 환자들이었다. 눈이나 귀의 어느 한편이 남아 있는 쪽으로 모든 지각 활동을 대신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번에도 젊은 원생들이 불구 환자의 모든 병시중을 들고는 있었지만 그 참상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원장은 말업이 마지막 병사까지 이정태를 안내해 갔다. 이번에는 아예 일그러진 입 하나를 제외한 모든 감각 기관을 상실한 환자들이었다. 네 팔다리와, 눈, 코, 귀가 하나도 성해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코와 귀와 눈들이 흔적도 없이 짓물러버린, 흡사 옷에 싸인 살덩이 한가지의 모습들이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지가 오래 되어 입을 열어도 사람의 그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괴상스런 소리들을 내고 있었다. 이런저런 특별 병사 환자들의 수를 모두 합하면 3백 명 이상이나 될 것 같았다.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하는 것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하나님의 은총과 위로에 충만해서 그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을 하진 못하더라도 이 사람들의 기도만은 하나님께서도 그 누구의 기도보다 즐거이 들어주고 계십니다. 저토록 말이 서투른 저들의 기도를 우리들 인간들은 들을 수가 없어도 하나님만은 누구보다 분명히 그것을 알아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기도가 이곳보다 깊은 소망과 진정을 담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병사를 나오면서 조원장이 무겁게 몇 마디를 덧붙이고 있었다. 그는 다만 몇 마디뿐 다시 한동안 묵묵히 입을 다문 채 병사를 떠나가고 있었다. 진실을 보여줄 수 있을 뿐 그 자신도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정태도 그 원장을 뒤따르면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런 모습으로 살아 있을 수가 있다니. 인간의 삶이 저기서도 기도를 하고 감사를 지닐 수가 있다니... 그것은 참으로 이정태로선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형언하기 어려운 이상스런 감동이었다. 더 이상 원장의 입을 빌 필요가 없었다. -실패로 보고 있는지 아닌지는 내가 결판을 낼 일이 아니지만... 그 현실이라는 게 보다 많이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덴 나도 어느 면 공감을 하고 있는 곳이 많으니까... 조원장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귓가에서 쟁쟁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과연 그것은 미래라는 것과는 거의 상관을 지을 수 없는 섬의 모습이었다. 미래보다는 당장의 현실이 그들의 삶에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가 더욱더 절실한 섬의 참모습이었다. 이정태는 그 동안 뭔가 눈앞을 가리고 있던 것이 다시 한번 서서히 모습을 바꿔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조백헌 원장의 그 이상스런 광기의 정체에 대해서도 비로소 더욱 깊은 이해가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되고 있었다. 오마도를 둘러싼 긴 싸움에서, 말없는 섬사람들의 압력 속에서, 그를 무겁게 짓눌러온 의혹 속에서, 몰인정한 일반의 편견 속에서, 진실로 이 섬과 섬사람들을 위한 조원장의 소망은 갈수록 깊이를 더해갔고, 그러나 그것은 또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곤 없었다. 그런 뜻에서는 바로 이 섬 사람들 전체가 조원장 못지않은 광인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이 섬과 섬사람들 전체의 실패일 수 있음도 물론이었다. 32 이날 저녁이었다. 이정태는 이날 저녁 섬에서 첫밤을 조원장이 미리 정해준 구라회관 그의 숙소에서 혼자 맞고 있었다.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그냥 자기 숙소에서 함께 지내도록 하자는 조원장의 권유가 있었지만, 이정태는 병사 지대를 돌아나오는 길로 곧 저녁을 핑계로 잠자리를 구라회관 쪽으로 정해 온 것이었다. 섬을 찾아온 사람들이 하룻밤만 그 구라회관 신세를 지고 나면 다음날로 당장 꽁무니를 빼고 섬을 달아나버리더라는 조원장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오마도에서 원생들과 함께 돌등짐질까지 한 이정태로서는 구라회관에서 밤을 묵는 것쯤 아무것도 마음 꺼릴 데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방을 찾아들고 나니 이정태로서도 생각처럼 기분이 아주 편하지만은 않았다. 회관 규모에 비해 인적이 너무 뜸했다. 인적이 뜸한 정도가 아니라 사람의 그림자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회관 식객은 오직 이정태 한 사람뿐이었는 데다가 손님에게 일부러 성치 않은 모습을 내보이기가 싫어 그런지 회관 관리인들도 이정태에게 방을 안내해온 관사 영감님 한 분이 문 앞을 잠시 어른대다 갔을 뿐, 다른 사람은 그림자조차도 얼씬을 하지 않았다. 저녁상을 차려왔을 때에도 누군가가 문밖에서, “손님, 저녁 진짓상 가져다놓았습니다. 진지 드시고, 상을 밖으로 내놔주십시오.” 조용히 전갈을 들여 보내왔을 뿐 이정태가 문을 열고 상을 받으러 나갔을 때는 이미 모습이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이정태가 저녁을 끝낸 뒤에 빈 상을 다시 문밖에 내다놓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누가 상을 치우러 나오는 기척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문을 열어보면 아직도 상이 그대로 남아 있곤 했다. 그러다가 다시 어느참쯤 되어선가 문을 열어보니 이번에는 발소리의 기척도 없었는데 어느새 감쪽같이 상을 들어내가버리고 없었다. 모든 것이 그런 식이었다. 한데 이정태가 저녁을 마치고 혼자서 다시 그 구라회관 숙소를 나서려던 참이었다. 어떻게 알았던지 조원장이 그 이정태의 밤외출을 방해하듯 어둠 속에서 불쑥 그의 앞을 가로막고 나타났다. “내 그러잖아도 오늘밤 이형이 가만히 앉아 있지만은 않을 것 같아 쫓아왔지요. 지금 혼인할 처녀 총각들을 만나러 갈 참이었지요?” 조원장은 으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리고 그것만은 절대로 허용할 수가 없다는 듯 이정태를 다시 방안으로 밀어넣으며 단정적인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사실이었다. 이정태는 윤해원과 서미연들을 만나러 나가려던 참이었다. 어차피 한번은 만나봐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간의 경위나 혼인식을 앞둔 두 사람의 심경이며 각오 같은 것을 본인들의 입으로 직접 들어둬야 할 의무가 그에게는 있었다. 이날 낮 조원장과 한나절을 지내고 나서부터는 더욱더 두 사람을 따로 한번 만나보고 싶던 이정태였다. 저녁 식사를 구실로 조원장과 일찍 헤어진 것도 실상은 그 나름대로 그런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케도 잘 짐작을 하고 계셨군요. 전 어차피 두 사람의 혼인식 취재를 구실로 섬을 왔으니까요.” 하지만 조원장은 반대였다. “일을 너무 성급하게 서두르려다간 낭패를 보기 쉬울 게요. 무슨 일에나 순서라는 것이 있는 법이니까. 환자가 환자 아닌 사람과도 결혼을 해서 잘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나 각오 같은 걸 본인들한테서 직접 들어두는 것도 해롭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한 남녀의 결합에 대해 그런 식으로 유별난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이미 환자와 건강인의 구분을 염두에 둔 선입견의 소산이라는 식으로 보여진다면 그건 좀 바람직한 노릇이 아니지요. 각오가 이미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아까도 설명했던 것처럼 아직은 조심스런 데가 있는 사람들이니까 말야요. 그야 이형 입장으론 어떤 식으로든 두 사람을 직접 한번 만나보고 가셔야 하긴 하겠지요. 하지만 두 사람의 결합과 이 섬을 진심으로 생각해주신다면 그런 식으로 일을 다그쳐대는 건 생각을 해봐주셔야겠어요. 적어도 그 단종 수술에 대한 말썽이 어떤 식으로든 결말이 날 때까지는 말야요. 두 사람을 만나보는 건 혼인식을 치르고 난 다음이라도 때가 아주 늦진 않을 거 아니오. 그 대신 내 이형한테 오늘밤 재미있는 걸 하나 보여드리리다.” 그러고 나서 조원장은 두 사람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이정태에게 웬 편지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형도 기억하고 계실는지 모르지만 전에 이 병원 보건과장으로 있다가 섬을 나간 이상욱이란 사람한테 받은 편지요. 마산 병원에 있을 때 그 사람이 내게 보낸 편진데, 그걸 읽어보면 이형도 아마 이 섬의 숙명이랄까, 그런 어떤 실패의 모습 같은 걸 볼 수 있을 게요. 이형도 사실은 그걸 알고 싶었던 게 낮부터의 관심이 아니었소? 아까 그 낮에 이 조백헌이 개인의 구제책이 마련되었노라고 한 다음서부터 말이오.” 이정태는 일단 윤해원들을 만나 보려던 계획을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원장의 말이 모두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자상한 배려 또한 이정태로선 전혀 우연스런 느낌이 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금 읽어봐도 되겠습니까." 자리를 잡고 나서 이정태가 물으니까 조원장은 물론 그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다시 그 인적 소리조차 없는 적막한 집 안을 향해 무작정 큰 소리로 외쳐대고 있었다. "얘, 거기 안에 누구 없을까...... 누구 있으면 공판장 가서 여기 술 좀 가져오너라. 귀한 손님 이 오셨는데 이대로 그냥 주무시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니냐. 손님 덕분에 오늘밤은 나도 좀 맘 편히 취해보고 싶구 하니까......" 이정태는 그러는 조원장을 내버려둔 채 그가 건네준 상욱의 사연부터 우선 읽기 시작했다. 조원장의 설명대로 그것은 상욱이 섬을 나간지 5년 만에 그 역시 섬을 떠나 있던 조백헌 원장에게 길고긴 자기 고백을 적고 있는 글이었다. 이정태는 그 상욱의 긴 사연을 읽어 내려갈수록 이날 밤 숙소까지 일부러 그를 찾아온 조원장의 의중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욱의 편지는 두 가지로 되어 있었다. 하나는 이상욱이 섬을 나간 지 5년 만에 마산 병원의 조원장에게 써보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상욱이 7년 전 원장을 한 발 앞서 섬을 나갔을 때부터 이미 써 지니고 다니던 것을 뒤늦게 함께 동봉해 보내온 것이었다. 조원장님. 원장님께 이런 글을 올리려 하니 새삼스런 느낌부터 앞을 서오는 군요. 원장님께서도 아마 의외로 여기시리라 믿습니다....... 조원장에 대한 문안 인사에 이은 상욱의 첫번 편지는 그런 식으로 사연이 계속되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전 그해 봄 원장님에 앞서 불시에 섬을 떠난 이후부터 언젠가는 한번 원장님께 대한 저의 사죄와 감사의 말씀을 전해 올릴 기회를 기다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섬을 떠나게 된 동기나 이유에 대해 보다도 분명한 저 나름의 해명 말씀을 드리고자 마음을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원장님께서도 이미 저의출생에 관한 내력을 알고 계실 것으로 믿고 솔직하게 말씀 드립니다). 자신이 없었던 것은 저와 저를 포함한 그 섬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원장님을 용납할 수가 없었는지를 스스로 설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전 섬을 버리면서까지 원장님을 배반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설사 그때 제 자신이 구실을 마련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누구에게나 부끄럼이 있을 수 없는 정직하고 당당한 것이었는지 어쨌는지를 분별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물론 제게도 나름대로의 구실은 마련되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리고 저는 그것을 글월로 적어서 원장님께 전해올릴 작정까지 세우고 있었답니다. 하지만 전 결국 그 글월을 원장님께 전해올릴 수가 없었지요. 글월 대신 어느 날 저녁 원장님을 찾아가서 못난 소리들만 늘어놓다 자리를 물러서버린 저였습니다. 그리고 섬을 떠나버린 저였습니다. 그 글월 가운데서 제가 주장하고 있던 이유들에 자신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가령 저나 저의 이웃들에 부끄러움이 없는 진실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러면 도대체 그런 식으로 원장님과 저희들이 그 섬에서 함께 이룩해온 것들을 부인해버리고 난 다음에는 섬은 과연 어떻게 되어가야 하며, 무엇을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대답할 바를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해 자신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원장님께 지금 글월을 올리고 있는 이날 이 시각까지도 아직 사정이 달라지질 못하고 있는 형편이니까요.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전 원장님께 전해올리지 못했던 저의 글을 섬을 나온 후로도 계속해서 지니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것을 되풀이 읽으면서 저와 저의 행위에 대해 그리고 원장님과 섬의 운명에 대해 수없이 많은 자문을 되풀이해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전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언제나 원장님께서 그 섬에 기울여주신 관심과 원장님의 개인적인 노고에 대한 감사의 마음뿐이었습니다. 감사를 하면서도원장님의 천국을 전면적으로 수락할 수는 없었다는, 그것을 수락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때 섬을 떠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섬과 원장님과 저의 처지 모든 것이 그것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었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섬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저의 처지라고 하면 아마도 원장님께서는 어떤 야릇한 상상을 하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사실 섬을 떠난 이후로 제가 그 섬을 버린 일로 하여 윤해원과 서미연 젊은 한 쌍의 결합을 방해하고 있었다는 후문을 들어 알고 있으니까요. 원장님께서도 저와 서미연들과의 관계를 짐작하고 계셨으리라 믿고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그 두 사람의 일로 해서 저는 그때 신경이 좀 날카로워져 있었거나, 그로 해서 더욱더 음흉하게, 그리고 보다 더 결정적인 섬의 파탄을 갈구하고 있었으리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때 건강한 사람으로 섬을 버리고 가는 것을, 건강한 사람들이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섬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쪽이 더욱 큰 동기였을 것입니다. 후문에 의하면 원장님께서도 사실은 그 점을 무엇보다 난처해하셨다니 말씀입니다. 원장님께 괴로운 기억을 다시 들춰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원장님께서 아무리 다시 돌이켜보고 싶지 않으신 일이라 하더라도 저희가 어찌하여 그토록 원장님의 천국을 수락할 수가 없었고 원장님을 끝끝내 용납할 수가 없었느냐에 대해서는 좀더 이야기를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글을 원장님께 올리기 위하여 전 너무도 긴 세월을 기다려왔고, 그리고 아직도 그것에 대한 속시원한 해답을 구해내질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다림 끝에 해답을 구해내서가 아니라, 그것을 알 수 없는 답답함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면 저는 벌써 훨씬 전에 원장님께 글월을 쓰고 섬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을 아직도 그 섬에 대해 각별한 관심이 머물러 계실 원장님께밖에는 말씀을 드릴 분이 없으며, 원장님께 다시 한번 그것을 여쭙고 싶어 이 글을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야 물론 제가 그때 섬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이나, 그 섬이 끝끝내 원장님을 용납해드릴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그 나름대로 사정이 분명했던 점은 있었지요. 동봉해 올린 전번 글에서도 그것을 여러 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한마디로 원장님과 섬사람들의 길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장님이 아무리 섬사람들을 생각하고 섬을 위해 노고를 바치고 계셨다 해도 원장님은 결국 그 섬 사람들과 같은 운명을 사실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원장님께서 꾸미고자 하신 섬사람들의 공동의 천국이라 하고 저들은 원장님의 천국이라 말하게 되겠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운명이라는 건 - 그 거리가 얼마나 깊고 멀다는 걸 전 섬을 나온 후로부터 더욱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전 섬을 나온 이후부터 이것저것 참 여러 가지 일을 해봤습니다. 일을 통해 육지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 속으로 자신을 섞여들어보려구요. 하지만 섞일 수가 없었습니다. 섬 생각이 사라지게 하질 않았어요. 육지 사람들이 절 그렇게 만들었고 저 자신이 저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흔적 없이 섞인다는 건 불가능한 것 같았습니다. 억지로 섞여들면 숨는 꼴이 되었구요. 초인적인 인내와 용기가 없는 한 운명을 같이하기란 그토록 힘이 드는 일이었지요. 그래서 전 저 자신에게서나마 그 숨어 산다는 생각이 가실 때까지 이 육지를 견뎌보려고 오늘까지 이 안간힘을 써가며 버티고 있는 꼴입니다. 어쨌거나 그 섬과 원장님 사이의 화해가 불가능했던 것은 처음부터 양쪽 다 각자의 운명을 따로따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섬사람들은 그들의 운명의 가르침대로 자유를 행해야 했고 자유로써 그들의 운명을 살아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끊이지 않은 탈출극의 윤리가 섬과 섬사람들의 내력 깊은 자유에 근거하고 있었음을 원장님께선 이해하고 계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섬에 어딘지 아직 잘못이 있었어요. 원장님과의 불화가 섬사람들의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탈출이 목적일 수도 없습니다. 불화와 탈출 외에 섬에서는 이루어지는 것이 없어왔어요. 아무것도 섬에서는 이루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룰 수도 없었고 이루어낸 것도 없었어요. 그것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원생들이 바라는 섬의 모습도 아니었구요. 어딘지 아직 잘못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전 아직도 그 잘못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어디가 잘못되어 있는지도, 무엇 때문에 그런 잘못이 저질러져오고 있는지도, 그리고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도,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전 끝끝내 이 육지 사람들 사이에서 운명을 섞을 수는 없는 저를 알고 있습니다. 섬을 떠나 나와 있더라도 저의 운명은 그 섬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결국 다시 섬으로 돌아가야 할 저의 숙명을 알고 있습니다. 섬을 떠나 나와 있더라도 저의 운명은 그 섬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결국 다시 섬으로 돌아가야 할 저의 숙명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장님께서는 이제 그 섬을 떠나 계십니다. 섬을 떠나 계신 지가 벌써 5년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장님은 그 섬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직 섬에 대해 이해가 더욱더 맑고 깊어지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언젠가 제가 다시 원장님을 찾아뵙게 될 때 원장님의 그 깊은 지혜를 제게 주십시오. 원장님께서 섬을 떠나계시기에 감히 이런 청원을 말씀드릴 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때늦은 인사나마 원장님께서 섬사람들을 위해 그 섬에 이룩하고자 행하신 노력과 정성에 대해 다시 한번 개인적인 감사를 바치오며, 그러한 원장님의 노력과 정성으로 하여 섬에서 이루어진 바가 있거나 없거나, 그것은 영원히 잊혀짐이 없이 섬과 섬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기를 기원하옵니다 - 상욱의 첫번 글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그리고 다음에 다시, 그가 섬을 떠날 때의 생각을 적은 것이 참이든 거짓이든, 분명한 이유도 없이 섬을 떠나 조원장을 괴롭혔던 그날의 죄과를 사과드리고 뒤늦게나마 그때의 이유와 심경을 밝혀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 그때 쓴 편지를 동봉해 보낸다는 추신을 몇 줄 덧붙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추신을 덧붙여 보내온 것이 아까번 것보다도 5년을 먼저 써두었던 것이라는 소리가 되지요. 하긴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내 손으로 받아 읽은 것은 2년 전쯤 내가 아직 마산 병원에 있을 때 일이었지만 말야요." 이번에는 방안까지 날라져온 술상 앞에 혼자서 잔을 따르고 있던 조원장이 모처럼 만에 하마디 끼여들었다. 이정태는 그 원장을 내버려둔 채 계속해서 두번째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번 것은 첫번째 것보다 더 내용이 가파르고 길이가 긴 글이었다. 조원장에 대한 추궁과 설득으로 일관한 상욱의 그 두번째 편지의 사연은 이러했다. 존경하옵는 조원장님- 이 글월을 정말로 원장님께 전해올리게 될지 어떨지는 저로서도 아직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금 이 글월을 쓰고 있는 순간까지도 이미 작정된 저의 행동에 대해 저 자신 속시원한 해명의 말씀을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동기와 목적에 대해 또는 그 명분과 정당성에 대해 일도 양단식의 명쾌한 설명의 말씀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 이제 이 섬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만은, 이제 이 섬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만은, 무엇보다도 제게 확실한 일이 되고 있습니다. 제게 이미 작정되어진 행동이란 바로 이 섬을 나가는 일인 것입니다. 전 이제 섬을 나가겠습니다. 그것은 저로서도 이미 변경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동기나 목적이 불분명하더라도, 구실이나 명분을 떳떳하게 설명드릴 수가 없더라도, 전 어쨌든 이제 섬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섬을 떠날 저의 결심에 덧붙여 오늘은 원장님께 대한 그간의 저의 모든 생각들을 숨김없이 말씀드릴 기회를 빌어보고 싶습니다. 그것이 원장님 먼저 섬을 나가게 될 저의 원장님께 대한 최소한의 도리가 되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 이 글월을 원장님께 전해올리게 된다 하더라도 원장님께 전해올리게 된다 하더라도 원장님께서 그것을 읽으실 때는 저는 이미 이 섬을 나가고 난 다음이 되리라 믿습니다. 비굴한 말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마, 하기야 전 그래서 원장님께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정직해질 수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상욱은 그러니까 그가 섬을 떠날 때는 그의 말처럼 그 글을 조원장에게 전해주지 못하고 만 셈이었다. 글을 전하는 대신 그날 밤 조원장을 직접 만나 그에 대한 자기 나름의 추궁과 암시만을 남기고는 그 길로 섬을 나갔던 셈이었다. 그리고 5년 후에 비로소 섬을 나가 있던 조원장에게 그 글을 다시 부쳐온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니까 상욱의 글은 그가 직접 조원장을 만나고 있었을 때보다도 그 어조가 훨씬 더 신랄하고 분명했다. 상욱의 글은 이제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이 시작되고 있었다. -원장님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 우선, 원장님께선 이제 때가 왔는 만큼 그만 이 섬을 떠나주심이 좋겠다는 저의 생각입니다. 이제 원장님께서 이 섬을 떠나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은 물론 어제 오늘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원장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전 원장님께서 이 섬으로 오신 후로 끊임없이 원장님을 의심하고 경계를 해온 것도 이제 더 이상은 부인할 수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전 언젠가 때가 오면 원장님께서도 허심탄회하게 이 섬을 떠나실 마음의 준비를 갖춰 지니고 계시기를 끊임없이 소망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원장님께서 섬을 떠나주셔야 할 바로 그때가 온 것입니다. 원장님께선 아마, 어쩌면 아직도 무엇 때문에 제가 원장님을 그토록 심히 경계해왔고, 이제 와선 감히 섬을 떠나주시기를 바라고 있는지, 확실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감히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아마 원장님께서 지금까지 이 섬에 대해 잘못 이해를 하고 계신 몇 가지 근본적인 오해만 해명드리고나면 해답이 스스로 자명해질 줄 믿습니다. 이 섬에 대해 원장님의 오해가 행해지고 있었던 곳이란 다름아닌 그 원장님의 의욕적인 천국에서부터였습니다. 문둥이들의 천국-그렇습니다. 원장님은 분명히 이 섬을 문둥이들의 새로운 천국으로 꾸며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리고 원장님의 정직한 노력과 성실성으로 언젠가는 이 섬이 진짜 이 섬 5천 나환자들의 자랑스런 고향으로 변할 날이 오고 말리라는 굳은 신념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원장님께선 이 몇 해 동안 섬을 위하여 정말로 피나는 정력을 쏟아오셨고, 그 결과 이젠 그간의 공적을 칭송받아 마땅할 만큼 현저한 성과를 이룩하고 계신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원장님의 그 의욕적인 천국 설계에는 처음부터 몇 가지 오해가 따르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제 와서 다시 원장님께 그 주정수 원장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은 아닙니다. 주정수 시대의 동상의 망령을 구실로 원장님을 애꿎게 허물하려 해서도 아닙니다. 주정수의 동상으로 인한 섬사람들의 오랜 의구와 경계심은 그 동안 원장님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제 말끔히 소제되고 있습니다. 원장님께선 그 동안 원장님 개인의 온갖 인간적인 욕망들을 감내해내시면서, 오랫동안 그 동상의 망령에 시달려온 섬사람들 앞에 참으로 비범한 인내와 봉사로 원장님의 진실을 적절히 증명해보이셨습니다. 망령에 시달려온 섬사람들 앞에 참으로 비범한 인내와 봉사로 원장님의 질실을 적절히 증명해보이셨습니다. 망령에 시달려온 섬사람들 앞에 참으로 비범한 인내와 봉사로 원장님의 질실을 적절히 증명해보이셨습니다. 전 이제 원장님의 동상을 걱정하고 있진 않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걱정해왔고 또 지금도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원장님의 동기가 이나라 그 천국의 진실인 것입니다. 원장님의 진정어린 동기에도 불구하고 원장님 자신도 미처 어쩔 수가 없었던 그 천국의 깊은 정체인 것입니다. 도대체 그 원장님의 천국이란 누구를 위해 꾸며지는 누구의 천국입니까? 원장님께서는 물론 쫓기고 학대받아온 이 섬 5천 나환자를 위해 천국을 꾸미고 싶어하셨고 지금고 그런 믿음에는 변함이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원장님께서 이 섬 위에 꾸미고 께신 나환자의 천국이 진정 저들의 천국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원장님 자신도 아직 장담을 하실 수 없는 몇 가지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원장님의 천국에는 아직도 높은 철조망이 둘려쳐져 있다는 점입니다. 철조망 울타리가 둘려쳐진 천구 -그것은 누구에게도 진짜 천국일 수가 없습니다. 이 섬에 무슨 철조망이라니- 원장님께선 물론 이 섬 안에 아직 무슨 철조망이 남아 있느냐고 반문을 하시겠지요. 원장님께서는 섬의 병사 지대와 건강인 지대를 갈라놓고 있던 높다란 철조망을 원장님 스스로 철겨시켜버린 사실을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고 계실 테니까요. 하지만 원장님께서는 설마 그 눈에 보이는 철조망을 제거해버린 것으로 이 섬에서 진실로 모든 철조망이 자취를 감춘 것으로는 믿고있지 않으시겠지요. 이 섬에 관한 그 철조망은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욱더 근원적으로 원생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원장님께서도 충분히 짐작을 하고 계시겠지요. 아니 원장님께선 사실 그 눈에 보이는 철조망을 제거하밋ㅁ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느 보다 더 높고 튼튼한 철조망으로 섬을 은밀히 둘러싸고 싶으셨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누구나 오늘의 자기현실을 최종적으고 불가변의 것으로 살아가고 잇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현실은 내일 다시 선택적으로 개선해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 위에서 그 오늘의 현실이 아무리 만족스럽고 행복한 것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다시 내일의 선택이 전제되지 않는 한 그 현실은 누구에게도 천국일 수가 없습니다. 선택과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필생의 천국이란 오히려 견딜 수 없는 지옥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섬 위에 꾸미고 계신 원장님의 천국은 어떻습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그것은 이 섬 원생들의 천국이기 전에 우선 원장님의 천국인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오직 원장님 한 분만의 천국일 수도 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이 섬 원생들이 목슴을 다할 때까지 편안히 지내다갈 수 있는 그런 천국을 꾸미고 싶어하십니다. 원생들 역시 즐거이 그 천국을 받아들여야 하리라고 굳게 믿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일 다시 그 천국을 바꾸거나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믿고 계십니다. 원장님께서는 그처럼 누구도 그 원장님의 천국을 거역할 수 없는 필생의 천국을 만들고 싶어하십니다. 하지만 진정한 진정한 천국이라면 전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에게 먼저 선택이 행해져야 할 것이고, 적어도 어느 땐가는 보다 더 나은 자기 생의 실현을 위해 그 천국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하는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천국이란 실상은 그것의 설계나 내용이 얼마나 행복스러워 보이느냐보다는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선택 행위와 내일의 변화에 대한 희망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수 있느냐에 더욱 큰 뜻이 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식만 있었을 뿐 원생들의 진정한 선택이 있을 수 없었던 그 마지막 정착지로서의 천국-필생의 천국-그것은 원생들의 천국이 아니라 다만 그렇게 믿어주기를 바라면서 거의 일방적으로 그것을 점지해주고 싶어하신 원장님이나 그 원장님과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섬 바깥에서 이 섬을 저들의 천국이라고 말하게 될 바로 그 사람들의 천국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은 그것을 이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완벽하게 만들어갈수록 그것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숨막히는 지옥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원장님께서는 결국 그와 같은 천국으로 이 섬에 또 다른 철조망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보다는 더욱 높고 비정스런 철조망의 울타리를 세우고 계셨던 것입니다. 원장님의 천국에 또다시 눈에도 보이지 않는 철조망이 둘러쳐지고 있다는 증거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원장님의 천국이 진정 저들의 천국이 될 수 없다는 보다 더 좋은 증거는 바로 원장님 자신의 국외자적 편견 속에도 있습니다. 원장님께서 이 섬을 그냥 누구나 살기 좋은 인간의 천국이 아니라, 쫓기고 학대받아온 문둥이들을 위한, 그 문둥이들만의 천국으로 만들고 싶어하고 계신 바로 그 점이 또한 그 천국의 철조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장님께선 이 섬을 모든 나환자들의 자랑스런 고향으로 만들어 그 나환자끼리 이곳에서 오손도손 함께 살아가기를 희망하십니다. 나환자들의 슬픈 인생 역정이나 습성과 관련하여 그 나환자들만을 위한, 그리고 나환자들에게 알맞는 여러 가지 특별한 풍속과 질서들을 섬 위에 새로 만들어오셨습니다. 그것은 물론 건강한 사람이라면 반가워할 리도 없고 결코 익숙해질 수도 없는 가엾은 문둥이들만의 천국이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나환자들이 그 천국을 찾아오고 아무도 그 천국을 버리고 나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오셨습니다. 여기 너희 천구이 마련되어 있는데-원장님께서는 이미 섬을 빠져나가려는 원생들을 이 섬과 동환에 대한 배신자로 낙인찍고 계십니다. 문둥이들만을 위한 천국-여기에 또한 원장님의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모습의 철조망이 마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록 불행한 병을 앓는다 하더라도 저들에게도 온갖 인간적인 소망과 자기 생의 실현욕은 근본적으로 여느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기구한 생의 역정을 걸어온 사람들이라 하더라고 저들이 기구해온 천국이 여느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다르 수는 없습니다. 저들이 비록 그것을 망각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우리가 저들에게 그것을 다시 찾아주어야 합니다. 원장님께서는 그러나 저들에게 그냥 인간의 천국을 지어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문둥이의 천국을 지으려 하고 계십니다. 원장님의 천국 계획은 처음부터 이 나라의 나환자를 한데 모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섬 원생들이 섬을 떠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섬 안에 낙토를 꾸미시겠다는 원장님의 계획은 섬을 나가기만 하면 육지 사람들의 무서운 복수를 면할 수가 없으리라는 협박으로 원생들의 발목을 섬 안에 붙들어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소망과 방법이 다를 뿐 효과에 있어서는 목적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저들이 그냥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특수한 조건과 양보 위에 그것을 수락할 수 있는 문둥병 환자로서만 이해하려 하심으로써 오히려 저들고 하여금 원장님 자신의 문둥이 천국을 짓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야 가난한 자의 천국은 우선 재산을 누리는 곳에서, 병을 앓는 자의 천국은 건강으 되찾는 곳에서 먼저 만나질 수가 있을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재산이나 건강은 그것이 극도로 결핍된 처지에 서나 어떤 특수한 천국의 내용이 될 수 있을 뿐, 그것들이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천국의 내용릴 수는 없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 누구에게서도 너희의 병을 용서받아보지 못한 가엾은 문둥이들이므로-, 너희의 과거는 너무도 쓰리고 아픈 상처의 자국뿐 이므로- 원장님께서 저들에게 만들어주시려는 천국이야말로 결국은 돈 없는 자에겐 돈으로, 병을 앓는 자에겐 걱강으로 각각 그의 천국을 삼게 하는 것 이상의 뜻을 지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가난한 자와 병을 아ㅎ는 자에게, 가난하고 병을 앓을망정 아직도 차마 눈감아 버릴 수 없는 뜨거운 진실과 인간적인 소망이 살아 남아 있는한, 그 진실과 소망 그리고 그 인간에 대한 오만스럽고도 난폭한 테러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울타리가 둘러쳐진 천국이 진짜 천국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문둥이를 위한 문둥이들만의 천국을 꾸미시려는 원장님의 의지 바로 그것 속에 이미 그 보이지 않는 철조망을 마련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장님께선 지금까지 한번도 그 철조망을 생각해보신 일이 없으셨을 줄 압니다. 원장님의 그 천국에 대한 신념은 차라리 어떤 신성 불가침의 계시처럼 언제나 확고부동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아마 원장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 섬 사람들이 원장님의 천국을 그토록 수락할 수가 없느냐고 묻고 싶으시겠지요. 원장님의 선택이 섬사람들의 선택과 일치할 수도 있는 것을 원장님으로 인해 그 선택이 행해졌기 때문에 무작정 배척을 받아야 할 까닭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려 하시겠지요. 원장님의 선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으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사실은 바로 그 믿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불행히도 섬사람들은 원장님께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지닐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절대의 믿음을 지닐 수 없었기 때문에 원장님과 원장님의 선택을, 그 원장님의 천국을 무조건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기야 섬사람들이 원장님께 대한 절대의 믿음을 지닐 수 없었던 것은 원장님께 허물할 일은 못 됩니다. 원장님께선 처음부터 섬사람들과는 길이 다른 분이었으니까요. 섬사람들에게는 섬이 평생의 천국이어야 하지만 원장님께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원장님계서 섬에 꾸미시려는 천국은 원장님 자신의 운명을 묻을, 사실 원장님 자신의 삶의 천국은 아니었으니까요(불행한 문둥이들을 위해 섬 위에 문둥이들의 천국을 꾸미시겠다는 말씀의 뜻을 다시 한번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장님은 언젠가 이 섬을 다시 떠나게 되실 가능성은 부인하질 않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원장님이 이 섬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신 원장님의 사정은 동기나 경위야 어떻게 되었든 마지막으로 그것을 똑똑히 증명해보이고 있습니다. 원장님은 이 섬이나 섬사람들과 운명을 같이하시지 못합니다. 운명을 같이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절대의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더욱이나 이 섬에서는 사정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같은 운명을 살 수 없는 사람들 사이의 믿음이 없는 사랑이나 봉사는 한낱 오만한 시혜자로서의 작 도취적인 동정으로밖에 보일 수가 없습니다. 믿음을 줄수 없는 사람을, 그 사람의 천국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시혜자의 일방적인 동정이라 해도 그 이유 한 가지만으로 그의 값진 봉사가 함부로 배척되어서는 안 될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또 그 때문에 원장님을 탓할 일도 아닐는지 모릅니다. 원장님과 섬사람들은 애초부터 서로가 다른 운명을 살게 마련이었으니까요. 그렇더러라도 아직 문제는 있습니다. 문둥이들의 천국이라는 것은 거기에서 스스로 그 한계와 정체가 분명해지고 있으니까요. 원장님의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철조망 말씀입니다. 원장님은 어쨌든 그렇게 해도 자신도 모르게 이 섬 위에 문둥이의 천국이라는 이름의 또 하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높이고 계셨으니까요. 그리고 본의든 아니든 원장님께선 그 높다란 철조망 울타리 안에서 지금까지 이 섬 사람들을 너무도 잘 다스려올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바람직스럽지 못한 사실의 확인이 지금 제가 원장님께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목적은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그러한 사실의 확인이 아니라, 그 철조망으로 하여 이 섬에 꾸며지고 있는 원장님의 천국이 지금까지 어떤 모습으로 변해왔으며 또 앞으로는 어떻게 변해갈 것이냐는 점입니다. 그것을 알아보자면 원장님 부임 이후로 이 섬에서 차츰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그 원생들의 탈출사고에 대해 지금까지 그것이 이 섬에서 어떤 뜻을 지녀온 것인가부터 미리 말씀을 드려둬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원장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이 섬의 탈출 사건들은 물론 원장님께서 이 섬에 꾸며내고자 하신 천국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배신 행위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탈출-그것은 물론 이 섬에서 행해진 노역과 핍박을 더 이상 견디어낼 수가 없어졌을 때, 그때부터 그것은 시작되었습니다. 섬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사람들이 저들을 회유하기 위한 그 황홀한 낙토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 끝없는 노역과 폭압으로 해서 이 섬 전체가 온통 견딜 수 없는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을 때, 저들은 그때부터 한사코 섬을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고향에 두고 온 사람들이 못 견디게 보고 싶어 섬을 빠져 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때로는 물 건너에서 흘러들어온 터무니없는 치료약의 소문 때문에 이 섬을 버리고 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원장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언제부턴가 이 섬에서는 전혀 그런 위태로운 탈출의 모험이 감행될 필요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옛날 같은 가혹한 노력도 없어지고, 뭍으로부터는 쓸데없는 헛소문이 흘러 들어오는 일도 뜸해졌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젠 옛날처럼 한번 섬을 들어와버린 사람은 살아선 다시 이곳을 나가지 못한다는 그 절망적인 강제 수용 제도도 사라진 지가 이미 오랩니다. 원하기만 한다면 섬사람들은 이제 그 위험스런 돌뿌리 해안을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떳떳하고 안전하게 섬을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환자가 넘쳐나서 건강이 웬만한 원생들에겐 오히려 뭍으로 나가 살기를 권하는 형편일 때도 있었습니다. 탈출극도 당연히 자취를 감춰야 했습니다. 한데 사실은 어쨌습니까. 탈출극은 아직도 한동안 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원장님께서 이곳을 오셨을 무렵까지만 해도 그것은 아직 골치 아픈 문젯거리로 남아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원장님께서 이 섬 병원으로 부임을 해오신 바로 직후의 일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전 그때 이 섬 사람들의 오랜 탈출 거점이 되어오고 있던 돌뿌리 해안가로 원장님을 모시고 가서 원생들의 탈출 동기에 돤해 말씀을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요즈음 병원에서는 완치 환자들까지 굳이 섬 안에다 붙잡아두려고 하지는 않느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섬을 내보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혹은 병이 다 낫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섬을 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일정 기간 귀향 휴가를 얻어 섬을 나갔다 올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때는 아무도 감히 섬을 나가려고 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다, 하면서도 저들은 기회가 나면 자주 이 돌뿌리 해변을 통해 목숨을 내걸고 섬을 빠져나가려는 이상스런 모험을 감행하는 일이 많은 형편이다- 원장님은 그때, 순순히 섬을 나갈 때는 나가려고 하질 않는 사람과 일부러 위험스런 탈출극까지 벌여가며 불편스럽게 섬을 나가려는 사람이 어차피 같은 섬사람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사실에 대하여, 그리고 그 불가사의한 행동의 모순에 대하여 도대체 납득을 못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전 그때 그런 원장님께 대해 섬을 나가랄 때는 나가지 못하는 사람과 일부러 위험스런 모험까지 감행해가면서 섬을 빠져나가려는 사람을 따로 ‘환자’와 ‘인간’으로 구분지어 말씀드린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 그 환자와 인간의 구분을 통해 그들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의 모순을 좀더 자세히 설명드릴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때도 말씀드렸듯이, 섬을 나가라고 해도 감히 나갈 수가 없는 자들은 물론 그‘환자’쪽입니다. 이들은 병을 얻어 바깥 세상으로부터 이 섬으로 쫓겨 들어왔고, 한번 섬으로 들어온 이들에겐 병원 당국에서 다시 섬을 나갈 용기가 나지 않도록 바깥 세상에 대한 끝없는 원망과 저주와 두려움을 길려줍니다. -너희는 참으로 무참한 학대와 핍박을 견디면서 세상을 살아왔고 마침내는 이 섬을 찾아왔다, 너희가 마음놓고 살아갈 곳은 이 섬밖에는 없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끼리 이섬에서 살아야 한다, 섬을 나가려면 또다시 무서운 학대와 복수가 너희를 쓰러뜨리고 말 것이다, 탈출은 병원이 벌하기전에 먼저 바깥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무서운 복수를 받을 것이다, 너희 같은 환자들에겐 건강한 사람들의 땅이 오히려 지옥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아마 원장님께서도 오마도 일을 시작하기 전 그 오마도 앞바다로 장로들을 싣고 가서, 이 일은 당신들의 일이며 원장님 자신을 위한 원장님의 일은 아니라고 말슴하신 일이나, 돌을 던져도 던져도 둑이 떠오르지 않았을 때, 그리고 그 오마도 방조제가 바람에 휘말려나갔을 때 섬사람들의 용기를 복돋워주기 위해 육지 사람들의 학대와 박해를 빌어 원생들을 설득하려 하셨을 때 그 육지 사람들의 학대와 박해들을 얼마나 위협적으로 과장하고 계섰던가를 상기해보신다면 수긍이 가실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바깥 세상을 빌어 길러놓은 원망과 저주와 공포감 때문에 이들은 감기 다시 섬을 빠져나갈 생각조차 해볼 수가 없는 철저한 ‘환자’로 만들어져버립니다. 병원이 이들에게 순순히 섬을 나가도 좋다고 말할 때도 이들은 이제 어쩔 수 없는 환자일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그 병원이 이들에게 익혀준 철저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섬을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그 저주스런 땅으로의 두려운 추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도 가끔은 그 자신의 ‘환자’에서 해방을 꿈꿀 때가 있습니다. 그들도 근본적으로는 ‘환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인 것이며, 그 환자로서의 생존 양식과 일반의 그것을 구별짓기에 지쳐버린자들은 종종 환자로서의 자신의 특수한 처지를 벗어버리고 보다 깊은 생존의 충동에 따라 섬을 벗어나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것은 물론 이 섬과 병원 당국에 대한 배반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섬 환자들에게 그런 배반이 음모되기 시작한 이상 그들은 이미 ‘환자’가 아닌 ‘인간’으로 되돌아가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섬에 삶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환자로서의 남다른 처지와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인 생존 조건들을 두 겹으로 동시에 살아나가고 있는 셈이며, ‘환자’로서의 특수한 처지를 지나치게 강요당할 때, 이들은 오히려 그 환자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인간을 향한 자각과 모험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환자로서 두려운 땅으로 섬을 쫓겨나가는 추방의 길이 아니라, 섬의 지배자들이 저들에게 버릇들여온 공포를 박차고 자신의 선택과 용기에 의지한 희망찬 인간에의 모험을 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고 보면 그 동기야 어느 쪽에 있었든, 그리고 그 무모한 기도들이 성공을 거두었든 실패했든, 이 섬 사람들의 탈출극은 이를테면 섬에 못박힌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보려는 치열하고도 눈물겨운 몸부림의 표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지배자가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강요해온 그 뜻없는 천국에의 통쾌한 배반이었습니다. 체념과 복종 속에서 무기력하게 ‘주님의 날’만을 기다려야 하는 그 종신의 천국에서 한번만이라도 자기 운명의 짐을 스스로 짊어져보려는 갸륵한 모험이었습니다. 탈출은 생명을 받고 살아 있는 자의 마지막 자기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섬이 아직도 슬픈 유령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섬일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탈출이 계속되는 한에서만 이 섬은 아직도 숨을 쉬는 인간들의 그것으로 살아 남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탈출은 이 섬에 관한 한 그처럼 지고한 미덕이었습니다. 한데 원장님이 오신 후로, 이제 마침내 탈출극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원장님께선 물론 이 섬엔 뛰어넘어야 할 철조망조차 없는, 진짜 낙토가 이루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오셨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이제 이 섬이 부질없는 탈출극의 악몽에서 깨어나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합해 일하고 있는 모범적인 요양소로 변해가는 증거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하고 싶으시겠지요. 과연 그럴까요. 탈출자가 생겨나지 않는 이유가 정말로 뛰어넘을 철조망이 없기 때문이며, 탈출자가 자취를 감추게 되어버린 뒤로 섬은 정말로 소망스런 낙토가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저는 아직도 그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원장님의 신념과는 오히려 정반대의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이미 말씀드렸듯이 섬에선 아직도 철조망이 완전히 걷히질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장님 이전의 모든 분들이 그랬듯이 원장님께서도 이 섬에 오신 후로 변함없는 주문을 한 가지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물론 이섬 원생들 모두를 보다 더 환자다운 환자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원장님께서는 원장님 자신의 소망을 완벽하게 이룩해내셨습니다. 원생들은 참으로 환자다운 환자가 되어갔습니다. 아무도 함부로 섬을 나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원장님께선 다른 분들처럼 덮어놓고 협박만 하신 것이 아니라, 더욱더 적극적으로 원생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 섬을 꾸미게 하고 그곳에 남아 사는 데 불만이 없을 만큼 각별한 긍지를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환자의 환자다운 긍지를 심어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철조망을 둘러쳐놓고 덮어놓고 겁만 먹게하는 것이 아니라, 원생들 스스로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철조망을 높여가게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원생들은 참으로 환자다운 환자가 되어갈수록, 그리고 그들의 천국이 자랑스러워지면 자랑스러워질수록 아무도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뛰어넘으려 하지 않는 울타리보다도 더 높고 안전한 울타리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원장님께서 이 섬 위에 세우고 계신 천국이란 어떤 것입니까. 환자다운 환자들에게만 천국일 수 있는 천국, 환자로서의 불행을 스스로 수락하는 체념 위에서라야 비로서 천국일 수 있는 천구, 오직 그런 뜻의 천국일 뿐이었습니다. 원장님의 천국이 섬사람들에게도 천국일 수 있는 것은 원장님의 천국의 윤리에 섬사람들의 생각이나 욕망이 스스로 한정당하고 익숙해지기 시작할 때뿐이었습니다.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는 일이 짐승에게 씌워진 굴레처럼 다스림이 편해질 때 다스림을 받는 것도 편해지는 이치의 비밀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할 수만 있는 일이라면 하루빨리 섬사람들은 탈출을 잊고 원장님의 천국에 익숙해져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원장님, 그러나 이제 탈출이 끊어진 섬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이 섬은 이제 생명의 증거를 잃어버린 죽음의 섬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원장님께서 섬 위에 이룩하시고자 하신 천국이 가까워오면 올수록 이 섬은 그 원장님의 단 하나의 명분에 일사불란하게 묶여버린 얼굴없는 유령 집단의 섬이 되어갈 뿐입니다. 하여 점점 더 다스리기가 쉬운 그러나 개개인의 삶을 찾을 수 없는 생기 없는 유령들의 섬이 되어갈 뿐입니다. 그리고 아마 원하기만 하신다면 원장님께서는 끝끝내 이 섬을 그렇게 만들어놓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장님께서 지금까지 늘 그래오셨듯이, 앞으로도 원장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섬사람들을 설득하고 조정해나가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닐 터이기 때문입니다. 섬사람들을 원장님 뜻대로 설득하고 조정해나갈 수 있다는 말씀이 맘에 들지 않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마 그 역시도 틀림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저의 경험에 따른다면 어떤 형태의 울타리 속에 격리된 사회의 질서란,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 성원의 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개는 그 사회를 지배하고 대표하는 몇몇 상층부의 의사에 따라 좌우되게 마련이며, 이 섬에 관한 한 모든 원장들의 시대가 그것을 똑똑히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원장님도 대개 거기서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그야 원장님께서는 다른 어느 분보다도 섬 살림을 이끌어오시는 데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오셨고 대부분의 경우 원장님은 그 사람의 의견에 승복하고 따라가는 형식을 취해오고 계시기는 했습니다. 원장님은 먼저 장로회를 만들어 무슨 일에서나 그 장로회의 자문과 동의를 주문하시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형식적인 절차 이상의 뜻을 지닐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장로회에선 스스로 일을 발의한 일이 없었으며, 언제나 원장님의 뜻에 따라 원장님의 계획들을 원의로 확정시켜주는 절차로 봉사하면서, 원장님의 명분을 마련해드릴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아니 전 지금 그렇다고 그 장로회 사람들을 나무람하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지금까지 이 섬에서 겪어온 그 사람들의 경험이나 높다란 울타리로 만족스러울 만큼 격리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이 섬의 형편은 비록 장로회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 밖엔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전 사실 원장님 부임 직후부터 이 섬의 선의의 지배자로서의 원장님과 그에 대한 피치자로서의 원생들과의 사이에 어느 정도까지 협의적인 지배 질서가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지극히 깊은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전 마침내 원장님에게서마저도 저의 그런 기대가 얼마나 부질없는 환상이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절대 상황 안에 격리되어진 인간 집단 안에서는 그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협의 관계에 의한 지배 질서란 궁극적으로 그 상황의 벽을 무너뜨리는 순교자적 용기와 희생 없이는 가능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스리는 자의 선의나 정의와는 상관없이 그리고 그의 지배권이 어디에서 연유했든 그것만은 끝끝내 절대 전제가 되어 있는 한, 다스림을 받는 쪽은 항상 감당해낼 수 없는 상황 자체의 압력 때문에 스스로가 무력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불행한 사회의 질서란 우리가 흔히 믿고 있듯이 다중의 희망이나 기도같은 것과는 일단 상관이 없이, 우선은 그 지배자 한 사람의 책임과 각성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의 슬픈 결론입니다. 결코 장로회 사람들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원장님께서는 다만 그 원장님의 천국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섬을 나갔을 때 그들이 육지 사람들로부터 당하게 될 저주와 학대를 적절히 설명하심으로써 원생들 스스로가 그들의 울타리를 높여가게 하고, 그 울타리 안에 고정된 적절한 상황 의식을 되풀이 환기시켜줌으로써 그 장로들과 섬사람들을 얼마든지 뜻대로 조작해오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전 결국 이 몇 년 동안 원장님과 원생들의 관계에서, 한 선의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들 사이의 어떤 대등한 상호 지배 질서, 만인 공유의 화창한 지배 질서가 탄생하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한 지배자가 어떤 불변의 절대 상황 속에 갇힌 다수의 인간 집단을 얼마나 손쉽게, 그리고 어느 단계까지 저항 없는 조작을 행해갈 수 있는가 하는 슬픈 지배술의 시범을 보아왔던 셈입니다. 그 지배자가 최초에는 아무리 성실한 인간성과 선의의 명분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 갇혀진 인간의 무리가 아무리 그들의 지배자를 바로 경계한다 하더라도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다 함께 그들을 가두고 있는 울타리에 대한 깊은 각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다스리는 자는 결국 그의 무리를 일방적으로 조작해나가게 마련이며, 다스림을 당하는 자들 또한 다스리는 자의 뜻을 재빨리 수락하고 그것에 봉사해 나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는 한 원장님께서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런 조작이 가능하십니다. 그리고 원장님께선 결국 이 섬 위에 원장님의 천국을 완성해놓으실 수도 있으십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아마도 그것은 이 섬 원생들이 즐겨 누리게 될 천국이기에 앞서 그것을 이루어내실 원장님 한 분의 획기적이고 생기 없는 천국이 될 수 있을 뿐일 것입니다. 원생들은 그 자기 천국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받들고 복종하는 그 천국의 종으로서 괴로운 봉사만을 강요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장님 그러므로 전 이제 원장님께 이 긴 글을 드리게 된 마지막 동기를 말씀드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원장님, 원장님깨선 굳이 이 섬 위에 일사불란한 그 원장님의 천국을 완성해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천국을 완성해내시고서야 섬을 떠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절강제라도 보시고 가겠다는 원장님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완성하지 못하고 섬을 떠나시게 되심을 섭섭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은 이 가엾은 섬사람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원장님 자신을 위해서도 지극히 현명하고 다행스런 결단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섭섭한 말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원장님께서 끝끝내 원장님의 천국을 고집하실 경우, 원장님께서는 아마도 그 천국의 꿈이 섬 위에 실현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원장님께 대한 그 천국의 견딜 수 없는 배반과 복수가 새로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얘기지만 이 섬 원생들은 실상 천국이 다 완성되어지기도 전에 벌써 그 천국의 모든 축복을 누려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원장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신 일일 줄 믿습니다만, 이 섬을 다스려온 분들은 섬사람들을 달래고 설복시키기 위해 전부터 자주 그 천국의 축복을 가불해주는 버릇들이 있었습니다. 천국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사람들을 그 몇 년 뒤의 천국의 꿈에 취하게 하여 그들을 손쉽게 지배해오곤 했습니다. 내일의 꿈을 오늘 미리 가불해주고, 그 가상의 현실을 당장 오늘의 그것으로 착각하고 즐기게 하여 진짜 현실의 갈등을 잠재워버리는 말의 요술은 이 섬을 다스려온 사람들의 해묵은 수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오늘의 삶이라는 것이 늘 힘겹고 짜증나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지극히 손쉽고 효과적인 지배술의 하나였습니다. 알고 계셨든 모르고 계셨든 지난 몇 해 동안 원장님께서도 이 섬사람들에 대하여 그러한 조작을 부단히 계속해오고 계셨음은 이제 부인할 수가 없으실 것입니다. 한다면 막상 그 천국의 꿈이 현실로 실현되는 날 섬사람들은 더 이상 그 천국에서 무엇을 얻어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저들은 이미 저들이 꿈꾸며 꾸며온 천국에서는 모든 축복을 미리 가불해다 누려버린 처지에서 말씀입니다. 천국은 저들에게 아무것도 새로운 축복을 내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축복이 없는 천국은 다만 그 천국 안에 저들의 삶을 한정시키려는 답답한 울타리를 깨닫게 할 뿐일 것입니다. 복수가 시작될 것입니다. 배반이 감행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복수는 물론 원장님께서 저들에게 내일의 천국을 가불받아 살게 했음에서부터일 것이며, 또한 그 배반은 일사불란한 천국의 울타리에 대한 저들의 각성에서 비롯된 탈출의 모험으로 해서일 것입니다. 원장님의 천국은 이룩되어질 수도 없는 것이며, 이룩되어져서도 안 될 것입니다. 원장님으로 인해 원생들의 그 오마도 농장을 이룩해나간다 해도 그 역시 출소록의 길이 아니라 또 하나의 더욱더 완벽하고 안심스런 저들의 울타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떳떳하게 섬을 나가주십시오. 원장님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또 그것을 원장님 대신 실현해내고자 할 사람이 나타나리라는 협박은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때 또 그런 사람이 나선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원장님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원장님께서 저들의 천국을 원하신다면, 이 섬의 진정한 주인이어야 할 저들에게도 그들 스스로 자기들을 시험해볼 기회를 주십시오. 이 섬은 원장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원장님만이 이 섬을 위하고 원장님에게서만이 진실로 그 천국이 가능하며 원장님만이 오직 선이라는 그 오만스런 독선이야말로 오히려 이 섬을 사람의 천국이 아닌 추악한 문둥이들의 수용소로 만들어갈 뿐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원장님은 결국 이 섬이나 섬의 환자들과는 운명을 서로 섞을 수가 없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간절한 소망 말씀을 드리면서 이제 이 글을 끝맺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이제 저의 이 소망이 얼마나 크고 진정어린 것인가를 다짐드리기 위해 필요하다면 오늘밤이라도 당장 이 섬을 떠나가겠습니다. 원장님으로 인해서는 이제 더 이상 이 섬에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바가 없으며, 이 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 역시도 원장님께 그것을 확인시켜드리는 것 이외에 다른 보람스런 일은 아무것도 있을 수가 없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도 이 섬이 하나같이 자신의 삶의 얼굴을 잃어버린 유령의 집단이 아닌 살아 있는 개개 인간들의 섬으로 살아 남아 있음을 증거하는 마지막 방법을 잊지 않고 있으며, 지금 이 섬에 남아 살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곳에 남아 살아갈 사람들에게 오래오래 그것을 기억케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원장님 부디 저의 뜻을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아마 이 글로써도 다하지 못한 저의 뜻을 원장님께서 밝히 헤아리실 수 있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바라옵건대 주님께서는 인간의 말로는 다 가누기 어려운 저의 진심을 밝히 원장님께서 감득하실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릴 뿐입니다. "전 도대체 원장님이 이렇게까지 심한 공박을 당해야 할 이유를 납득할 수가 없군요. 그 상욱이란 사람 자신도 자기의 글 속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이 섬에선 모두 일이 무엇 때문에 꼭 이런 식으로만 행해지고 이런 식으로만 이해되어와야 했었는지에 대해서도 말씀입니다.“ 조백헌 원장은 이제 이정태를 기다리면서 혼자서 마신 술로 얼굴이 벌겋게 익어 올라 있었다. 그 조원장이 이번에는 이정태에게도 비로소 술을 한 잔 가득 채워 건네면서 의미있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실 테죠, 이형은. 그야 이상욱이란 사람 자신도 이 조백헌이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심한 곤욕을 치러야 했는지, 또 그 자신이 그런 식으로 섬을 나가야 했는지 그런 일들에 대한 자신있는 명분을 내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니까요. 하지만 뭐 그건 간단한 거지요. 그 왜 개척단 부단장 일을 맡고 있던 황희백 장로라는 분 있었지 않소. 그분이 어느 날 그걸 썩 적절하게 설명해주시더군요.” “그분은 그걸 무엇 때문이라고 했습니까?” 이정태는 앞에 놓인 술잔을 훌쩍 비우고 나서 조급하게 다시 물었다. 조원장은 그 이정태의 술잔에다 다시 술을 한 잔 가득 채우고 나서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상욱이란 사람 글에도 그런 얘기가 잠깐 있었지만, 그분 말씀으론 그게 다 자유라는 것으로 행하려 하기 때문이라더구만. 이 섬은 모든 일을 자유로 행하려 하기 때문에 그 자유라는 것이 애초에 싸워 얻어야 하는 것이 돼놔서, 서로간에 자연 갈등과 불신이 생긴 탓이라고 말이야요. 이상욱이란 사람도 결국 그 섬의 자유를 말하고 그런 섬의 자유를 행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 자신이 그렇게 말을 한 대목도 있었구요. 하지만 그자는 자신의 입으로 자유를 말하고, 그 자신이 그것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황희백 장로의 경우처럼 바로 그 자유 자체에 대한 깊은 자각에는 이르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자유의 행사가 빚고 있는 결과나 현상들을 바로 그 자유로서 설명할 줄을 몰랐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 때문에 섬이 이 꼴로만 되어가야 했는지, 그것을 근심하면서도 그 자신은 이 섬을 버려야만 했던 이유나 나를 그토록 공박할 수 있는 분명한 명분을 찾지 못하고 있었어요. 글 가운데서 작자는 그걸 외려 내게 묻고 있었지요. 나중에 쓴 편지에 보면 그땐 어느 정도 그런 자각이 있었던 것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때도 아직 만족할 만한 자기 해답은 구하질 못하고 있었던 게 “자유로 행하려 하면 갈등과 불신이 생기고, 이루어짐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 황희백 장로나 원장님은 이 섬에서 그 자유를 부인하고 계셨다는 말씀입니까.” 이번에는 원장과 이정태의 술잔이 서로 엇바뀌어가며 술이 채워지고 있었다. 술잔은 그렇게 계속해서 두 사람 사이를 쉴 새 없이 왕래했다. “아니지요. 이 섬의 내력과 섬사람들의 오랜 경험을 빌어 말한다면 섬사람들은 당연히 그 자유로밖엔 행할 방법이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섬사람들에겐 그게 오히려 당연한 주장이요, 권리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다시 한번 황장로의 생각을 빌어 말한다면 이 섬은 자유로만 행하려다 실패하였으니 자유보다도 더 나은 것으로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황장로는 그럼 그자유로 해서보다 더 나은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까.” “그 양반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더군요. 사랑은 자유처럼 뺏음이 아니라 베풂이라고, 사랑은 자유처럼 투쟁과 미움과 원망을 낳는 대신 용서를 가르친다고 말이야요. 그러면서 뭐 섬을 다스리는 내 쪽에선 그래도 그 사랑이라는 걸 하노라곤 했다나요. 사랑으로 행해야 할 자기들은 정작 자유로만 행하려 해왔던 데 비해 섬을 다스리는 내 쪽에선 그래도 그 사랑으로 행하려 한 흔적이 있었노라고 말이야요. 하지만 그 양반 굳이 그 자유하고 사랑이라는 걸 따로따로 다른 것으로 나누어 생각하려고만 한 것 같지는 않았어요. 뭐라 할까, 사랑으로 해서나 자유로 해서나 그것들이 서로 상대편 쪽에 깃들여질 수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고 했거든요. 자유로 행하되 그 자유 속에 사랑이 깃들이거나, 사랑으로 행하되 그 사랑 속에 반드시 자유가 깃들인다면, 결과는 마찬가지일 거라던가요.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자유를 사랑으로 행하고, 사랑을 자유로 행한다는 이야기나 한가지인 셈이겠지요.” “그런데 그것을 알고 있었던 황장로는 어째서 그의 자유 속에 사랑을 깃들일 수가 없었을까요. 그리고 원장님은 또 그것을 알고 나서도 어찌해서 그 자유를 원장님의 사랑 속에 깃들이게 할 수가 없었을까요. 황장로는 그것을 말하면서도 결국 원장님을 섬에서 떠나보냈고, 원장님도 끝내는 섬을 떠나야만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아마 서로간에 믿음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황장로는 믿음이 없이는 자유라는 것을 함부로 행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믿음이 없이 자유를 행하니까 싸움과 갈등과 불신과 미움밖에 남는 것이 없다고 말했지요. 그리고 믿음으로 행하지 못함이 곧 사랑으로 행하지 못하는 것이니 믿음이 없는 사랑을 행함은 사랑을 행하지 않음만 같지 못하다고 말입니다. 그 럽에서도 결국 사랑과 믿음이 같은 차원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만, 나중에 곰곰 생각해 보니 입장의 차이는 조금씩 있는 이야기였던 것 같더군요.” “입장의 차이라면요?” “섬에서는 말입니다. 이 섬에서는 다스림을 받는 입장이 되고 있는 원생들이 숙명적으로 그 자유로밖엔 행할 길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섬을 다스리는 원장의 몫은 자연히 그 사랑 쪽이어야 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었지요. 다스리는 사람은 사랑으로,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자유로 하는 식으로 말이야요. 그리하여 다스리는 자의 사랑 속에 다스림을 받는 자의 자유가 깃들이고, 다스림을 받는 자의 자유 속에 다스리는 자의 사랑이 깃들여서 결국은 양자가 한 길로 화해스런 조화를 이룩해나갈 수 있게 되는 그런 정도의 입장의 차이 같은 것 말입니다. 원장인 나는 사랑으로 행하고, 원생들은 또 그들의 옳은 자유로 행해야 했었지요.” “하지만 결국 양쪽이 다 그것을 감내하지 못했다면 원장님과 섬사람들 사이에선 서로간의 그 믿음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이정태의 질문은 끝없이 계속되어나가고 있었다. 조원장 역시 이제 그 이정태의 끊임없는 질문에 대답을 사양하려는 빛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어떤 사명감마저 느끼고 있는 듯한 정력적인 목소리로 열심히 설명을 계속해나가고 있었다. “그렇지요. 믿음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섬을 떠나야 했었지요. 나도 그땐 그걸 두고 많은 생각을 했었구요. 황장로는 도대체 거기까진 설명을 하고서도 바로 그 믿음을 구하고 싶은 빛은 전혀 없었거든요. 난 그때 황장로도 아마 거기 대한 처방까지는 마련을 못 가지고 있는 게라고 생각을 했었지요. 그 자유라는 것이, 믿음이 없는 자유라는 것이, 불신이라는 것이 황장로로서도 달리 어쩔수가 없는 이 섬의 숙명인 게라고 말이오. 황장로는 처음부터 내가 섬을 나갈 것을 전제로 하고 말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거든요. 서로의 믿음을 구해서 이 섬에가 사랑을 심게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나에 대한 믿음을 애초부터 단념하고 있었던 황장로였어요. 한데 난 나중에 이유를 깨달았지요. 황장로나 나나 서로가 그 믿음을 구할 수가 없었던 이유를 말이야요.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인연으로 해서였지요. 섬을 떠난 지 5년이나 지난 다음에 그 마산 병원에서 이상욱이란 사람의 글을 받고였으니까요.” “아까 읽은 그 친구의 글 말입니까?” “그래요. 바로 그 글을 받고 나서 난 그간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어요. 황장로가 제게 믿음을 단념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되더군요. 그리고 그 오랜 수수께끼가 풀리자 그 길로 난 곧장 이섬을 다시 찾아왔던 것이지요. 상욱이란 사람은 내게 섬을 나가게 한 글을 썼고, 두번째는 내게 다시 섬으로 돌아오게 한 이상스런 인연의 글을 쓰고 있었던 셈이지요.” “원장님께서 찾아내신 수수께끼의 해답을 듣고 싶군요.” “그래요. 내 이젠 그렇지 않아도 그걸 말씀드릴 참입니다. 그건 다름아니라 바로 그 편지 속에 말한 공동 운명이라는 것이었어요. 상욱이란 사람 그러니까 그 자신이 그것을 말하고서도 이번에도 그는 그 말의 뜻하는 바를, 그 공동 운명이라는 것이 이 섬의 자유와, 자유로써 행함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짐이 없는 고질적인 퇴행 현상들과의 관계는 깊이 보질 못하고 말았던 셈이지요. 그리고 내게만 그것을 묻고 있었지요. 아까 그 믿음이 생길 수 없었던 이유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절대의 믿음이란 궁극적으로는 작자가 말한 그 운명을 같이할 수 있는 데서만 생길 수 있는 것이었단 말입니다. 작자가 즐겨 쓰는 그 천국이라는 것을 두고 생각하면 이해가 더욱 쉽겠지요. 내가 꾸민 천국을 믿지 않으려는 이유, 나의 동기나 천국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 섬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성실한 봉사를, 나의 선의와 노력을 자기 도취적인 동정으로만 폄하하려는 이유, 그 모든 이유는 결국 이 섬 원생들과도 같은 운명을 살아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었지요. 상욱이란 사람이 비록 그는 섬을 떠나 있다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이 섬의 운명을 살고 있노라는 그런 운명 멀리 십자봉 쪽 소나무 숲을 타고 내려온 밤바람 소리가 이정태의 남녘 숙사 창밖을 속삭이듯 고요히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조원장은 이제 결론을 생각하고 있는 듯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 유심스레 이정태의 표정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촉수 낮은 숙사의 백열 전등빛이 불그스레 술에 익은 그의 얼굴색을 묘하게 침울스럽게하고 있었다. “원장님께선 그럼 섬으로 다시 오셔서 믿음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까. 이 섬과 섬사람들의 운명을 함께 살아오시면서 원장님이 구해오신 믿음 속에서 이 섬의 자유와 사랑을 옳게 행하실 수가 있었느냔 말씀입니다.” 한동안 침묵 끝에 이정태가 먼저 조원장에게 말을 재촉했다. 그제서야 조원장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기 시작했다. 이정태가 미리 예상하고 있던 대로였다. “실패였어요. 이형도 보셨다시피. 그 특별 병사 사람들 말이야요. 이 섬에 진정한 자유와 사랑이 행해질 수 있다면 그런 비극은 벌써 자취를 감춰 없어졌어야지요. 아니 자취를 아주 감출 수는 없더라도 우린 지금 그 사람들을 위해 신념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고 있어야겠지요. 하지만 우린 지금 그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어요. 여전히 행함이 없는 것이지요. 보고만 있는 형편이야요. 그 윤해원이란 사람 일만 해도 그렇지요. 이 섬에 자유와 사랑이 옳게 행해지고 있다면, 그 사람 애초에 혼인을 앞에 놓고 그런 수술을 요구해오는 일도 없어야겠지만, 그 일이 기왕 문제가 되고 있는 이상은 또 그걸 옳게 대처하고 해결지을 길이 있어야지요. 하지만 이 섬이나 병원은 지금 거의 속수무책이 아닙니까. 작자가 그런 난처한 수술을 요구해오는 것이나, 그리고 병원이 그의 수술을 감당해 주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모두가 그 자유나 사랑을 옳게 행하는 길은 못 됩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무서운 싸움입니다. 섬사람들은 이 싸움이 어떻게 매듭지어지게 될 것인가를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일을 결말내든 그것은 다만 또 하나의 실패를 더하게 얏 “......” “하긴 그 이상욱이란 사람은 이번에도 아마 생각이 훨씬 다를는지 모르지요. 그 사람은 어디까지나 이게 이 조백헌이 개인의 실패지 섬의 실패로는 생각하지 않고 있을는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 친군 원래 이 조백헌이 개인을 실패시킴으로 해서 그것으로 그 사람들의 자유를 행하려 했고, 그러한 나의 실패를 섬과 섬사람들의 자유의 승리로 삼고 싶어한 위인이었으니까요. 언젠가는 다시 섬을 돌아온다고 해놓고, 그리고 섬을 돌아올 때 그가 이곳에서 다시 행할 바를 묻고 싶다고 해놓고 그 후로 다시 작자에게서 소식이 없는 걸 보면 그잔 여전히 나를 용납할 수가 없는 게 분명하거든요. 그가 묻고 싶은 것에 대한 나의 대답이란 게 이를테면 내가 다시 이 섬으로 돌아 온 것이 되고 만 셈인데, 작자가 여태 꼴을 나타내지 않고 있는 것은 이번에도 또 그런 나를 용납할 수가 없는 때문일 거란 말입니다. 이번에도 결국 나를 실패시키고 싶은 작자의 소망은 훌륭하게 성취가 된 셈이지요. 그리고 그 작자의 성취 속에 이 조백헌이한텐 그 숙명적인 실패가 점지되고 있었던 셈이구 말이야요. 어쨌거나 이 섬은 이제 생성을 거의 중지해버리고 있는 상태니까.” “알 수 없는 일이군요. 원장님께선 믿음을 구해 섬으로 돌아와 섬원생들과 운명을 함께하고 계신데도 이 섬에 자유와 사랑을 옳게 행하실 수가 없으시다면 그렇다면, 그 이유는 또 무엇이었습니까.” “이형도 물론 그게 궁금하겠지요. 알고 보니 그건 아주 간단한 이치였어요. 난 섬을 돌아오고 나서 곧바로 그것을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무슨 이유에서냐 하면 난 섬을 돌아올 땐 이미 이 섬 병원의 원장이 아니었거든요. 원장으로서 섬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섬을 위해 일을 해갈 아무런 힘도 없는 평범한 한 섬 주민으로 돌아온 것 뿐이었단 말입니다.” “그게 그토록 큰 차이가 았는 일일까요?” “자유나 사랑을 행함에는 차이가 큰 일이었지요. 섬사람들과의 한 운명 단위 속에서 서로 믿음을 얻고 나면 일단 그 자유나 사랑을 함께 행해나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무엇으로 행해가겠소. 사랑은 무엇으로 행해가겠소. 자유나 사랑을 행함에는 절대로 힘이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힘이 없는 자유나 사랑은 듣기 좋은 허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자유나 사랑으로 이룩해나감은 그 자유나 사랑의 속에 깃들인 힘으로 해서일 겝니다. 사랑이나 자유의 원리가 바로 힘이 아니더라도 그것들이 행해지고 그것들이 이룩해져 나가는 실현성이나 실천성의 근거는 그 힘이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자유나 사랑이나 다 같이 그 실천적인 힘이 근거하여 비로소 제 값을 지닐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두 가지가 다 같은 차원의 가치 개념으로 이해할 수가 있는 것들이겠구요. 내말은 결국 같은 운명을 삶으로 하여 서로의 믿음을 구하고, 그 믿음속에서 자유나 사랑으로 어떤 일을 행해나가고 있다 해도 그 믿음이나 공동 운명 의식은, 그리고 그 자유나 사랑은 어떤 실천적인 힘의 질서 속에 자리를 잡고 설 때라야 비로소 제 값을 찾아 지니고, 그 값을 실현해나갈 “원장님께서는 결국 원장으로 다시 섬을 들어오지 못하셨기 때문에, 원장의 권능으로 섬을 다스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또다시 그 자유와 사랑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운명을 같이하지 않는 한에서의 어떤 힘의 질서는 무서운 힘의 우상을 낳을 뿐이겠지요. 하지만 운명을 같이하려는 작정이 있은 다음에는 내게 그 원장의 권능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그 허심탄회한 힘의 질서 속에서 섬의 자유와 사랑이 행해져나가야만 했었어요. 하지만 난 이미 이 섬 병원의 원장이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지금의 원장은 어떻습니까. 지금의 원장이 그 섬의 운명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깊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원장님의 실패의 비밀을 알고 계시다면 그분의 현직 원장의 권능으로 그 자유와 사랑을 옳게 행해나갈 길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정태는 이제 술잔을 비우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조원장만이 가끔 이야기를 한 대목씩 끝내고 날 때마다 잠깐 목을 축여 넘기곤 할 뿐이었다. 하지만 조원장은 이번에도 그 이정태의 물음에는 여전히 부정적인 대답뿐이었다. “그렇지요. 난 사실 지금 원장과도 자주 섬 일을 의논하고 있으니까. 그분 역시 이 섬에 대해선 누구보다 이해가 깊은 편이지요. 하지만 그 원장이나 누구나 이 섬의 운명을 함께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33 “참으로 지독한 공박이군요.” 상욱의 글을 다 읽고 나서 한동안 멍청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던 이정태가 이윽고 조원장을 건너다보며 입을 떼기 시작했다. 원장이 설령 그럴 각오가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야요. 황장로나상욱이란 사람들도 이미 그걸 알고 있었던 일이 아니었던가 싶은 일이지만, 사람의 운명이란 어느 쪽이 어느 쪽에다 그것을 합하고 싶어한다고 그렇게 하나로 보태질 수 없는 것이니까요. 결국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은 자생적인 거라는 말이지요. 보태고 싶다 해서 보태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내가 지금 이 섬의 운명을 함께 살겠노라 하고 있는 것도 나 자신 역시 의심스런 바가 없지 않은 터이지만 말이우다.” 조원장의 어조에는 이제 서서히 어떤 침통스런 낭패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하다보니 이제 답답하고 낭패스런 느김은 그 조원장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원장님은 결국 이 섬에서는 더 이상 행할 바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이정태는 참을 수 업다는 듯 엉뚱스럽게도 그 조원장을 향해 힐난 조의 목소리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조원장은 이정태를 조금도 괘념하는 빛이 안 보였다. 이정태의 그 힐난조의 추궁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는 조원장의 목소리에는 이제 그의 생애를 일관해온 어떤 신념과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의 무게가 온통 다 실려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운명이 자생적인 것일 수 바가 없는 것이라면, 그 자생적인 운명의 일부분으로서 선택되어져야 할 힘의 근거가 그 원장이라는 직위와 권능이 오늘날처럼 섬사람들의 운명이나 선택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일방적으로 군림해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선 어쩔 수가 없는 일이겠지요......” “자생적인 운명의일부분으로서 선택되어져야 할 힘의 근거라는 말의 뜻은, 그 원장의 권능이 섬사람들 자신의 의사에 의해 그들 가운데서 선택되어져야 한다는 뜻입니까......” “물론이지요. 그렇지 못한 힘은 언제나 그 힘 자체의 욕망을 충족 시킬 지극히도 이기적인 명분을 지아내게 마련이니까요. 명분은 언제나 힘에 대한 봉사만을 일삼아왔으니까요. 그리고 그게 이 섬을 실패시키고 있는 가장 깊은 원인이겠지요.” “이 섬에서 과연 그런때가 올 수 있을까요?” “그런 때가 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섬이 끝끝내 실패만 하고 있지 않으려면 그때는 결국 와야겠지요. 그게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라도...... 그게 아마도 상상 이상으로 긴 세월이 걸리게 될 일인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야요.” 조원장은 거기서 다시 술 한잔을 비우고 나서 자기의 빈 술잔에다 다시 술을 채우고 있는 것을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원장이 이번에는 이정태 앞에 놓인 빈 술잔에도 마져 술을 채우고 나서 모처럼 만에 먼저 이정태에게 물어왔다. “그래, 이쯤 얘길 했으면 이형도 좀 사정을 이해할 수 있겠소? 이 섬과 내가 어째서 이토록 처참한 실패만 거듭해오고 있는지를 말이오?”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니 이젠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해진 듯 그의 입가엔 이상스럽게 헤프디헤픈 웃음기가 어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이정태는 그 조원장 앞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깊이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좀더 조심스럽게 원장에게 물었다. “원장님은 그럼 아직도 이 섬을 견디면서 기다릴 작정입니까. 이섬과 원장님에겐 그토록 실패만 거듭되고 있다면 원장님은 더이상 이 섬에 남아 앉아 있을 이유가 있을까요. 더욱이 원장님 말씀처럼 그 운명을 합한다는 일조차도 생각과는 다른 일일 수가 있다면 말입니다.” 조원장은 여전히 입가의 웃음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 허심탄회하고 끈질긴 미소 속에 조원장은 그러나 실패를 거듭한 사람답게 필사적인 자제력이 담긴목소리로 자신의 각오를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야 물론 기다려야지요. 운명을 합하는 일이 실제로는 얼마나 어렵다 하더라도 난 그것으로 일단 섬사람들의 믿음의 씨앗만은 구할 수가 있었으니까요. 이제 다시 섬을 떠남으로써 모처럼 움터오른 그 믿음의 싹을 짓밟아버리고 떠날 수는 없어요. 믿음의 씨앗과 싹만 있으면 그 믿음 속에서 기다릴 수는 있는 거지요. 그것이 처음에는 아무리 작고 더디고 약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라서 그 공동 운명의 튼튼한 가교로 이어질 때를 기다리면서...... 그것으로 우리가 이 섬위에서 비로소 무엇을 이룩해낼 수 있을 때가 아무리 오랜 세월을 기다리게 한다고 하더라도 말이야요. 믿음은 이 섬에 관한 한 모든것의 시작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닙니까.” “아, 그야 물론 무작정 기다리는 것만은 아니지요. 그 믿음의 싹만 있으면 이 섬에선 지금부터라도 뭔가 할 일이 있지요. 믿음 속에서 가능한 일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작고 보잘것 없는 일이라도 우린 거기서부터 하나하나 힘을 모아 무언가를 이루어나가도록 해야지요. 그게 바로 믿음을 넓혀가는 일일 뿐더러 이 섬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기도 하구요. 그 눈에 뜨이지 않는 작은 일이란 이를테면 우선 한 건강인 여자와 병력자 사내의 결합 같은 거라고 할까요.” “윤해원과 서미연의 결혼 말씀입니까?” “윤해원과 서미연의 결합은 무엇보다도 한 건강인과 원생 사이의 첫번 결합이라느 점에서 이 섬이 있어온 후로 그 건강인과 원생들 사이를 이어주는 가장 분명한 신뢰감의 확인이며, 그것의 첫출발이 되고 있거든요. 그래서 난 이번에 이 일에 발을 벗고 나섰던 겁니다. 섬에서 뭔가 다시 시작을 해야 하고 지금부터라도 그것은 가능할 수가 있는일이며, 그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니까요.” “.......”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이 섬은 그 자신의 힘을 기르면서 진실로 그의 자유와 사랑을 행하고 그들의 운명을 선택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 날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이형께서도 아마 이형 나름으로 힘을 보태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4월 1일 마침내 윤해원과 서미연의 결혼식날이 다가왔다. 결혼식날 아침날은 기대했던 대로 남해안 특유의 따스하고 화창한 봄날씨를 보이고 있었다. 산간을 뻗어 돌아간 황토길들은 밤사이 함성처럼 피어난 벚꽃 무리로 하여 불을 켠 듯 환하게 뚫려나가고 있었고, 벌판을 휘돌아 어우러져나가고 있는 보리밭의 푸르름은 바야흐로 한창 봄의 약동을 합창하고 있는 듯했다. 십자봉을 비껴 흐르는 하늘은 정봉의 소나뭇가지보다도 드높았고, 섬을 휘감아 돌아간 득량만의 물빛은 어느새 그 선뜩선뜩하고 암울스런 겨울빛을 말끔히 벗어버리고 있었다. 결혼식은 12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식장 치장이나 잔치 진행 계획 같은 것은 전날까지로 빈틈없이 준비가 다 끝나 있었다. 완충지대 중간에 세워진 두 사람의 신접 살림집도 전날까지 이미 안팎이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거식 후의 신혼여행도 두 사람의 소망에 따라 오마도 간척장을 당일로 잠깐 돌아보고 오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어 있었다. 모든 일이 제법 순조롭게 풀려나가고 있는 셈이였다. 무엇보다 그 조원장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던 윤해원의 수술건을 시전에 조용히 해결본 것은 무척이나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참으로 섬사람들의 그것과 비로소 마음을 함께하려는 조원장의 깊은 이해력과 신효한 비방의 한 결과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였다. 윤해원 쪽에서 끝끝내 그 혼전 수술을 고짐하고 나서는 한조원장의 낭패는 거의 기정 사실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한데 조원장은 이정태가 섬을 찾아 들어온 그 이튿날 저녁 마침내 결단이 선 사람처럼 갑지기 윤혜원을 찾아나사더니 그 길로 곧 일을 손쉽게 결말지어버리고 돌아온 것이었다. -이제 이 섬에서 문둥이의 단종 수술을 권한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지. 그건 이미 지금 원장 한테도 양해를 구해놓은 일이니까. 병원에선 미감아 문제가 골치 아파 아직까지도 결혼 화자들에겐 단종 수술을 권해오고 있던 처지였거든. 병우너에서 단종 수술을 권하지 않겠다는 약속 대신 윤해원에게서는 병원에 대해 다시 혼전 수술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문둥이의 후손의 이름으로 섬의 미래를 팔아 섬을 다스리려는 것을 막기위해 혼전 수술을요구해오고 있었다는 윤혜원이었다. 그 윤혜원이 오히려 이 섬에선 아예 그런 수술을 배척해가는 쪽과 거꾸로 자기 약속을 바꾸었다는 것은 납득이 쉬 가지 않는 모순이였다. 하지만 선을 알고 섬 사람들의 마음과 역설에 익숙한 조원장으로선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임 원장이 아닌 그로서는 섬 안에서의 단종 수술 배척을 약속하는 일만이 어렵고 까다롭게 여겨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문둥이의 자식을 팔아 미래으 이름으로 섬을 속여 다스린다는 것도 뼈에 사무친 진실이 담긴 소리지만, 그 혼전 단종 수술이라는게 저 사람들한테는 워낙원한이 많은 풍속이였거든. 그 풍속에 대한 점면적인 반항이였을까. 아니면 그의 결혼이나 여자에 대한 어떤 믿음의 시험이였을까. 그런 심리적인 일면이 작자한테 강했을 테니까. 더욱이나 작자는 아직도 그 서미연이라는 아가씨를 순수한 건강인으로만 믿고 싶었거든...... 결국은 작자에게서도 자식을 낳아보고 싶은 욕망이 없었을 수는 없었던 셈이지, 다만 그 자식을 좀더 떳떳한 땅에서 떳떳하게 낳아보고 싶었달까...... 윤혜원을 위하여, 어차피 문둥이 집안끼리 끼리끼리 모여살게 된다는 체념어린 패배 의식을 허용하지 않기 위하여 건강인 여인에 대한 윤혜원 자신의 떳떳한 자기 극복을 위하여, 조원장과 서미연 사이에선 아직도 그녀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윤혜원에게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조원장은 이제 이정태에게 그 두 사람의 떳떳한 결합을 위해 그의 힘을 보태자던 것이였다. -이형의 직업은 남의 비밀 파내는게 한 속성이니까 이번 일도 이형 쪽에서 먼저 눈치를 채게 되면 괜히 엉뚱한 말썽을 빚을 염려가 있어서 미리 얘기해두는 거지만 서미연이라는 여자도 사실은 미감아로 자란 여자였더란 말이오. 하지만 그런 사실이 섬 안에선 지금까지도 본인하고 나 조백헌이밖엔 아무도 모르고 있는 일이란 걸 명심해둬야 하오. 윤혜원 그 작자는 물론 이 섬 사람들 누구도 그건 알고 있지 못해요. 이형도 그렇게만 알아두면 좋겠소. 이번 혼인은 어디까지나 한 건강인 여자와 환자 사이의 결합이라는 걸 말이오.” 어쨌든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의 혼사는 모든 것이 조원장의 사려깊은 이해와 결단 속에 그럭저럭 탈없이 혼인날을 맞게 된 것이엇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연들이 너무나 깊고 복잡하게 얽혀 있어 이정태로서는 감히 당사자들의 사전 면담은 엄두를 내지 못한 채 혼인식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조심스럽게 기다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결혼날이 되고 보니 섬 안은 이정태나 조원장이 생각해온 것보다도 훨씬 더 평원스럽고 화창한 분위기 속에 두 사람의 혼인식 잔치 준비가 서둘러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혼사 뒤에 얽힌 내력 같은 것에 굳이 마음을 쓰고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날씨는 화창했고 사람들의 표정 역시 그 봄날씨처럼 맑고 너그러웠다. 건강지대로부터 중앙리로 들어가는 길목은 아침 10시께나 될가 말까 했을 때부터 벌써 식장을 찾는 하객들로 줄을 잇기 시작했다. 식장을 찾는 하객들 가운데는 건강인 지대의 직원 가족도 있었고, 병사 지대의 원생들 가족도 있었고, 꽃구경을 겸해 이날의 잔치 소식을 전해 듣고 나루를 건너 들어온 육지 사람들도 있었다. 섬 일에 특별한 관심을 쏟아온 고흥 군수와 군청 직원 몇 사람도 이미 나루를 건너 섬을 들어서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정태가 묵고 있는 구라회관쪽에서도 벌써부터 길을 서둘러 나선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구라회관엔 하루 전부터 미리 섬을 찾아 들어온 구라 운동 관계 인사와 나환자 출신 사회 유지 몇 사람이 함께 하룻밤을 묵고 있었다. 구라회관에서 잠을 지낸 손님 가운데서도 제일 먼저 식장을 향해 집을 나선 사람은 양녀의 갸륵한 혼인을 위해 일부러 먼 섬길을 찾아온 서미연의 양부모 내외였다. 서미연이나 누가 미리 당부를 해놓았던지, 본인들도 그녀를 곱게 길러온 어버이답게 양부모의 흔적 같은 건 전혀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이날의 신부를 식장으로 인도해가기 위해 일찌 감찌 숙소를 떠나간 것이었다. 11시가 거의 가까워질 무렵부터는 이정태도 서서히 식장으로 내려갈 채비를 서두르고 숙소를 나섰다. 숙소를 나와 알아보니 조원장이 아직 식장으로 내려간 기미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정태는 병원 본관 근처에서 잠시 그 조원장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직원지대의 그의 숙소 쪽에는 여전히 길을 나서는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중앙리 식장 쪽에서 올라온 사람도 조원장을 보지 못했다 했고, 뒤늦게 식장으로 내려가는 현임 원장 일행 속에서도 조원장의 모습은 찾아 볼수가 없었다. 이정태는 차츰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혼자서 먼저 식장으로 내려갈까 하다가 직원 지대의 그의 숙소 쪽으로 우선 발길을 재촉했다. 누구보다도 먼저 식장으로 달려갔어야 할 조원장이 거식 시간이 거의 임박하도록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수상쩍은 느낌이 들어왔기 때문이였다. 한데 이정태가 그 직원 지대의 한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조백헌원장의 숙사를 찾아 들어섰을 때였다. 이정태는 거기서 참으로 에기치 않았던 광경에 머릿속이 잠시 어리둥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조원장의 텅 빈 숙소 앞 마루 한쪽에 웬 사내 하나가 조원장의 반안 동정에 귀를 기울이고 서 있다가는 숙사 문간을 들어서는 이정태에게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기척을 죽이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이정태는 처음 식장에서 원장을 데리러 온 사람인가 싶어 영문도 모른 채 사내가 시키는 대로 그냥 기척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기척을 죽이며 조원장의 방안 동정을 함께 살피려다보니, 아무래도 어디선가 전에 작자를 본 기억이 있는 느낌이 들어왔다.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보니 이정태는 과연 자기의 느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작자는 바로 이상욱 그 위인임이 분명했다. 이상욱이 마침내 다시 섬으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정태가 어리둥절해진 것은 그런 이상욱의 출현만이 아니었다. 상욱의 출현보다도 더욱더 이정태를 기이하고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 방안에서 들려나오고 있는 조원장의 목소리였다. “......마지막으로 난 신랑과 신부에게 나 역시 이젠 이 섬 사람이 된 도리로 간절한 당부를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조원장의 방인에선 그 조원장 한 사람밖엔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텐데도, 웬 그런 연설조의 말소리가 우렁우렁 방문을 흘러 나오고 있었다. “아니, 전 이 자리에서 제 당부를 말씀드리기 전에 이날의 결혼식에 당하여 제가 느끼고 있는 유별난 감상 한가지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오늘 이 결혼식을 당하여 별나게 느끼고 있는 감상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벌써 오래 전 일입니다마는 여기 모이신 여러분도 우리들의 피와 땀이 서린 저 오마도 간척지의 절강젯날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날을 기억하고 계신분들은 그 오랜 간척 공사가 양쪽 둑을 이어 막는 절강제 행사로서 어려운 고비를 넘어선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음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듣다보니 조원장은 아마 이날 두 사람의 혼인식에서 그가 행할 축사의 줄거리를 혼자 미리 연습해 보고 잇는 중이었다. 그리고 섬을 들어 오는 길로 곧장 그의 숙소를 찾아든 이상욱은 문간에서부터 그 원장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축사 내용에 주의가 글려든 모양이었다. 조원장의 독백조 연설은 그런 식으로 아직도 한참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조원자의 목소리를 좇고 있는 그 이상욱의 표정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어떤 엄숙한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을 정도였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정태는 그 상욱을 함부로 말리고 나설 수가 없었다. 목소리에 제법 열기까지 오르고 있는 조원장을 중간에서 방해하고 나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정태는 자신이 이미 그 기이한 웅변에 대해, 그리고 그를 엿듣고 있는 상욱의 태도나 관심에 대해 그 나름의 깊은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상욱과 함께 시간을 기다리며 원장의 축사를 좀더 들어보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를 엿들으며 기다리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이정태였다. 마침 또 기이한 조원장의 축사는 거기서부터가 진짜 본론 대목을 들어서고 있는 것 같았다. 거침없이 문밖으로 흘러아오고 있는 조원장의 목소리에 상욱과 이정태는 쑥스러운 줄도 모르고 두 사람 다 도둑괭이들처럼 조용히 숨을 죽이고 서 있었다. “하지만 전 불행이도 그날의 즐거운 절강제에도 참석을 못 한채 섬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제방을 막아 이은 것은 제가 이 섬을 떠난 다음날 여러분끼리서만이었습니다. 전 그때 오래동안 그 절강제를 고대해왔으면서도 제 눈앞에 그 방둑이 이어지는 것은 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무척도 재수가 없는 놈이었지요. 그런데 오늘 신랑 윤해원과 신부 서미연양의 결합으로 해서 저는 오늘 비로소 그때의 제 소망을 이룩한 것입니다. 그때 제앞에서 이어지지 못했던 소망의 방둑이 또 하나 오늘 저의 눈앞에서 굳게 이어지는 것을 보게되었다는 말씁입니다. 아니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그 오마도 방둑은 여태까진 제대로 이어진 적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손으로 절강제를 치르고 나서도 그 오마도의 방둑은 여태까지 진실로 서로 이어진 적이 없었던 게 사실일 것입니다. 방둑이 진실로 서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오마도는 아직도 땅의 구실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주인 없는 땅이 되어 버려져 있지 않습니까.” 조원장은 거기서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청중들의 반응을 살피려는듯 잠시 동안 말을 끊고 있었다. 상욱은 아직도 그 조원장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이 잘가지 않는 모양으로 점점 더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창문 너머 조원장의 심장이라도 꿰뚫어버릴 듯 세찬 추궁기가 어린 눈빛으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 방안 쪽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조원장은 물론 그 바깥의 상욱이나 이정태의 동정에는 아랑곳을 할 일이 없었다. 시간에 쫓겨 말을 서두르는 기색도 없었다. “오마도는 아직도 절강제가 끝나지 않고 있는것 한가지인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흙더미가 쌓여 방둑은 이어졌으되 그 이어진 방둑을 오가야 할 사람들의 마음이 이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갈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와 누구의 마음이 다시 이어져야 하며, 누구와 누구의 마음이 갈라져 있었고, 누구 때문에 그토록 마음이 갈라지고, 이어진 방둑마저 제구실을 못 하게되었느냐는 허물은 여기서 굳이 따져묻지 않기로 합시다. 어쨌거나 사람의 마음이 이어지지 못하고 흙과 바윗돌만을 가지고 그것을 튼튼히 이를수가 없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는 사실입니다. 흙과 돌멩이보다는 사람의 마음이 먼저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윤해원과 서미연 두 사람의 결합은 이 두 사람의 처지가 특히 남다른 바각 있었던 만큼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일 가운데 더욱더 뜻이 깊고 튼튼한 결합이 아닐수 없습니다. 흙더미나 돌멩이로 겉모양만 이어진 채 버려져 있던 두 개의 방둑이 오늘 비로소 우리 눈앞에서 굳게 이어지는 절강제를 보게 된 거란 말씀입니다. 이건 참으로 옛날의 절강제를 보지 못한 저로서는 이중의 행운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리고 고마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긴장을 하고 잇던 상욱의 얼굴 위에 비로서 희미한 미속가 한가닥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정태는 아직도 그 상욱의 웃음의 뜻을 읽어낼수는 없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조원장의 그 너무도 직선적이고 순정적인 생각에 다소의 감동을 받고 있는 듯싶기도 했고,어찌 보면 그 조원장에게 오히려 어떤 연민어린 그의 비웃음을 보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방안의 조원장은 이번에도 그 상욱의 반응에는 상관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참을성 좋게 다시한번 목소리를 침착하게 가다듬었다. 그러고 나서 좀더 허심탐회한 어조로 다음 말을 천천히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기왕 여기까지 말이 나온 김이니 이날의 결혼식이 원생과 건강인 사이의 결합이라는 특수성에 대해서도 무슨 금기처럼 지나치게 말을 삼갈 필요는 벗노라 전제한 다음, 두 사람의 결합으로써 이 섬과 건강인들 사이의 가장 튼튼한 방둑을 마련해준 용기에대해 진정어린 찬사와 경의를 표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목소리를 한층 드높여 힘있게 다짐해나가기 시작했다. ” 하지만 오늘 이 두 사람이 우리 앞에 이어놓은 마음의 방둑은 아직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주의를 둘러싸고 있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직도 웅리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숱한 편견과 무지한 인습의 파도를 견뎌 이기기에는 너무도 힘이 약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이 방둑이 다시금 험상궂은 파도에 휩쓸려나가지 않도록 끊임없이 여러분의 힘을 보태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곳에 자리를 함께했거나 아니 했거나, 원생들 여러분에게나 건강한 사람들에게나 똑같은 의무이며 하느님의 뜻에대한 순종의 길이 될 것입니다. 원생들 여러분은 여러분이 이 오마도에서 이미 그렇게 해왔듯이 이 새로운 둑길에도 마음의 흙을 한줌 한줌 더하여 우리의 둑을 날로 살찌게 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저 오마도에 버려진 우리의 둑길도 영원히 우리들의 것으로 지닐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이 뜻이 그곳에서 이루어지든지 못 하든지간에, 여러분이 그땅의 주인이 될수 있든지 없든지간에 우리는 오늘 이 두 사람으로 하여 또다시 길을 놓은 우리들 마음속의 방둑을 튼튼하게 지닐수 있음으로써 이미 오마도의 그것도 우리의 그것으로 풍족하게 누리고 있음을 볼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우리의 뜻을 튼튼하게 쌓아 이어놓았을때, 비로서 떳떳하게 이웃을 기다리고, 그 이웃이 그곳에 오가게 되는 날을 볼수 있을것입니다 혼인식이 시작될 시간이 이미 지나고 잇는데도 조원장의 축사 연습은 좀처럼 끝이 날 기미가 안 보였다. 상욱 역시 여전히 그 뜻을 알수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미동조차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날의 혼인식엔 어차피 시간이 늦을 사람들이 많아질 모양이었다. 혼인 잔치를 보기 위해 나루를 건너온 육지 사람들이 아직도 그 벚꽃이 만발한 중앙리 예식장 쪽 길을 유랑민처럼 줄줄이 떼지어 넘어가고 있었다. 거의가 이날의 혼인식에는 시간이 늦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목소리에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조원장은 자신이 이미 식장의 시간을 늦고 있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는 판이었다. 시간이 이미 늦어버린 속에서도 조원장의 능청스런 축사 연습은,그리고 그 자신의 광기에 못 이긴 기이하고도 진지한 연기는 아직도 한동안이나 더 도도하게 계속돼나가도 있었다. 이젠 두분에 대한 저의 당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이제 비로소 윤해원과 서미연 두 삶에 대한 그의 당부라는 것을 말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두분에 대한 저의 당부라는 건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앞서도 이미 말을 했듯이 두 분은 기왕에 남다른 사랑과 용기로 이 일을 이룩하였으니 앞으로도 계속 자신들의 방둑을 허물어뜨리지 말고 누구보다 굳세게 그를 지키고 살찌워 나가달라는 것입니다. 절벽을 허물어뜨리고 그 절벽 대신 따뜻한 인정이 넘나들 믿음과 사라의 다리가 놓여져야 할 곳은 많습니다. 제가 두 분의 신접 살림을 직원 지대와 병사 지대의 중간에 마련하고자 했던 것도 사실은 그런뜻이 있어서였습니다. 두분의 결합과 정착지를 시발점으로 해서 하루빨리 이섬에서부터 두 마을이 하나로 합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분의 정착지가 하루빨리 새로운 마을로 번성하여 이 섬 안엔 건강 지대와 병사 지대가 따로 없는 하나의 마을로 채원지기를 빕니다. 이제 두 사람으로 해서 그 오랜 둑길이 이어지고 길이 뚫렸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이웃은 힘을 합해 그 길을 지키고 넓혀나갈 것입니다.” <해설> 자유와 사랑의 실천적 화해 김현 이 글은 이청춘의 당신들의 천국을 가능한 한 자세하게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것은 그 소설이 나에게는 근년에 발간된 가장 좋은 소설 중의 하나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청춘의 소설에 대해서 하나의 평문을 초한다는 것은, 무학비평가로서의 내가 소설가로서의 그에게 빚지고 있는 상당량의 부채를 갚고 싶다는 의욕의 한 표현이다. 경제적.사회적.정치적인 여러 복합적 이유 때문에, 몇 사람의 동세대 작가들이 글을 쓰지 못하고(혹은 글을 안 쓰고) 있는 상황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정열적으로,어떻게 생각하면,거의 순교자적인 태도로 작품에 달려들고 있는데서 연유하는,그에대한 존경심을 나는 이 청준에게뿐만이 아니라,박경리의 토지에대해서도 느끼고 있다. 그 작가들의 제작 태도를 보고 있으면, 사업주의에 어떻게 여합할수 있을까,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내책을 사줄 독자의 비위를 맞출수 있을까에만 신경을 쓰는 듯이 보이는 작가들에게 이런 작가들이 있다는 것을 크게 알려죽 싶다. 박경리의 토지는 그러나 아직 완결되지 아니한 작품이다. 거기에 대해서 짤막한 단평 한두 개로 자제하고 있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그러나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은 완결된 작품이고, 그런 의미에서 해석자의 분석을 기다리는 작품이다. 한 작가가 시대적인 제약에 의해서 그가 드러내보이고 싶은 작품의 주제를 직선적으로 내보이지 못하고, 그것을 우회적으로,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게 표현한다는 것은 있을수 있는 일이고, 또 그래야만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 문학사를 자세히 관찰하여보면, 그런 우회적 수단을 발견한 작가들은 몇 되지 않는다. 카프 작가들의 예에서 그명히 보듯이, 대체적으로 작가를ㄹ 억압하는 상황에서 도피해버린 자신의 태도를 정황의 제약이라는 편리한 이유로 변명해버리는 것이 통례이다. 일상적인 삶이라는 것을 경멸하는 척하면서도 거기에 안주해가지고 이렇게 된 것은 정황 때문이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정황의 의미를 따지고, 거기에 새로운 출구를 마련하려는 힘든 노력을, 자신의 무력함을 증명하는 일로 뒤바꾸는 정신적인 곡예! 거기에서 한걸음만 더 나아가면 문학이라는 것이 이런 어려운 시대에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라는 문학 포기론으로 귀착한다. 문학이라는 것이 별것인가, 중요한 것은 살아 남는 일이다. 그럴듯한 주장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태도야말로 문학을 매명의 도구로 만들고, 문학을 문학에서 소외시키는 태도라 하지 않을수 없다. 문학은,인간을 자신의 생존 욕망속엣만 갇혀 있는 포유 동물과 구별하게 만드는 변별적 장치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없다면, 인간으로서 살아 남는다는 말을 감히 할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그것을 제약하는 상황 그 자체의 기호가 됨으로써, 그것을 초월하는, 인간만이 가진 장치이다. 문학이 없어지는 날, 감히 말하거니와, 인간다운 삶도 없어진다고 할수 있다. 문학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문학을 억압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가장 강렬한 응답인 것이다. 내가 박경리나 이청준에게 존경심을 표현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포유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변별적 장치의 문학의 쓰임새를 그 누구보다도 투철하게 깨닫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복합적 시선의 소산이다. 그의 상당수의 소설이 취하고 있는 격자소설적 양식을 그것은 취하고 있지 않다. 그런면서도 격자소설의 기본 구조인 복합적 시선, 하나의 사건이나 인물을 여러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는 격자소설적 시선을 그대로 차용하고있다. 그의 격자소설이 시간적으로 고정된 하나의 사건이나 인물을 여러각도에서 분석하는 것이라면, 당신들의 천국은 시간적인 변모를 감수하는 한 인물을 여러각도에서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표면적인 개요만을 따라가자면, 당신들의 천국은 조백헌이라는 인물이 소록도의 병원장으로 취임하여, 그곳의 나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켜주기 위해 애를 쓰는 얘기이다. 그 얘기는 3부로 나누어져 서술된다. 1부는 현역 대령인 조백헌이 소록도 병원장으로 취임하여, 그곳 환자들에게 새로운 천국을 만들어주기 위해 득량만 매몰 공사에 착수하여, 그것이 어느정도 이루어지는 이십일개월 동안의 나환자와의 싸움을 그리고 있으며, 2부는 매립 공사를 둘렀싼 구개월간의 조원장의 정신적 방황을 그리고, 소설의 대단원을 이루게 될 3부는 조원장이 섬을 떠난 지 5년이 지난 후의 삼월에 한사람의 시민으ㅗ 소록도에 되돌아와 이 년 후 사월에 미감아 두 사람의 결혼식 주례를 맡는 것을 그리고 있다. 당신들의 천국의 표면상의 주인공은 그러니까 조백헌이다. 그 조백헌과 맞서는 인상적인 인물이 2부에서 크게 제시되는 황장로이다. 표면적인 구조만으로는 당신들의 천국은 조백헌이라는 야심 많고 정열적인 한 인물의 무용담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진정한 의도는 그 조백헌의 단순한 제시에 있는 게 아니라, 그인물에 대한 복합적 비판에 있다. 그 비판을 가능케 하는 인물이 이상욱과 이정태이다. 1부와 2부의 기술응 조백헌에 관한 한, 이상욱의 시선에 의지해 있다. 그의 시선은 조백헌이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는 인물이 아닌가 하는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록도에 천국을 세운다는 미명하에 그가 실제로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명예욕이나 과시욕을 충족시키자는 것이 아닌가. 그 이상욱의 비판적 시선은 당신들의 천국의 1부를 단순한 기인의 기행 기록이 아니라, 비판되어야 할 권력인의 힘의 과시 기록으로 느껴지게 한다. 2부에서 간단히 등장하는 이정태는 거기에서는 별다른 역할을 맡고 있지 않다. 2부에서도 기술은 이상욱의 시선에 의지해 있지만, 2부의 특이성은 이상욱의 조백헌 비판이 나환자 비판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백헌과 황장로의 인상적인 대립이 있던 날 밤의 이상욱의 절규는 이상욱의 시선이 황장로로 대표되는 나환자에게도 비판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ㅎ한 증거이다 3부의 서술은 이정태의 시선에 의거해있다. 신문 기자라는 직업때문이겠지만, 그의 시선은 이상욱처럼 본질적인(급진적인)비판적 시선이 아닌,사태를 마무리짓고,의심나는 점을 조백헌으로 하여금 해명시키는,종합적인 해결적 시선이다. 조원장이 복합적 시선의 포로라는 점에서, 당신들의 천국도 격자소설의 기본선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인물이 그 시선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폭넓게 감싼다는 점에서, 그 소설은 조백헌 개인의 성장을 그린 교양소설적인 측면을 또한 갖고 있다. 조백헌은 이청준의 소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긍정적 인물이다. 그때의 긍정적이라는 말의 뜻은 “자아와 세계(혹은 타인)사이의 간극이 불화적인 것이 아니라 화해적인 것이라고 이해하는 이라는 뜻이다. 조백헌은 자아와 세계가 한치의 간극도 없이 합칠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의 그러한 신념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에 대해 작가는 아무런 암시도 하고 있지 않다. 소설 속에서의 그의 삼은 정확하게 그가 고록도 병원장으로 취임한 8월 하순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런 신념을 얻게 되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그가 세계와 자아 사이의 합일을 확신하고 있다는 증거를 나는 당신들의 천국의 여기저기서 찾아낼수 있다. 3부의 마지막에 나오는 조원장의 흙과 돌멩이보다는 사람의 마음이 먼저 이어져야 합니다라는 경구적 진술은 그의 화해적 성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 긍정적 성격은 기본적으로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신념위에 기초해 있다. 긍의 신념은 이 땅에 천국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행동을 표현하는데에 그는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그는 서슴지 않고 자기의 목숨까지를 내놓는다. 원생들이 득량만 매몰공사에 지쳐 그에게 반기를 들었을때의 그의 대답은 이렇다: ”하지만 이제와서 당신들에게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소. 자,오늘밤 내 한사람의 피가 진실로 당신들의 피를 아끼는 길이라 믿는다면 주저하지 말고 어서 이 총으로 나를 쏘아버리시오.“그의 대답에서 주목해야 될것은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단호한 태도이다. 그것이 그를 만만하게 보지 못하게 하는 큰 요소이다. 그의 그 화해적 인간관은 그러나 당신들의 천국에서 상당한 수정을 받는다. 인간은 화해할수 있지만, 그것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사랑과 자유를 소유하고 있을때에 가능한 것이지, 하나는 힘을 마음대로 행사할수 있는 지배자로서, 하나는 그 힘의 일방벅인 지배를 받는 피지배자로서 둘이 만날때는 불가능하다는 수정이 그것이다. 그의 천국론은 이상욱과 황장로는 굴종의 의미를, 이상욱은 감시와 비판의 의미를,각각 조백헌에게 알려준다. 피해자의 화해적 굴종은 지배자가 ” 일신을 위해서는 물 한 모금 사사로이 취하지 않을 것임을 “일신 위해서는 어떠한 공훈이나 명예도 좇지 않을 것이며, 보답을 바라지도 않고 만들지 않을 것임을” 선언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감시와 비판은 그석이 정말로 행해지고 있는가 않는가를 따지는 것이라는 것을, 조백헌은 이상욱과 황장로에게서 배운다. 그 때 화해적 굴종은 사랑이 되고 감시와 비판은 자유가 된다.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런 신념을 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세계와 자아 사이의 합일을 확신하고 있다는 증거를 나는 당신들의 천국의 여기저기서 찾아낼 수 있다. III부의 마지막에 나오는 조원장의 “흙과 돌맹이보다는 사람의 마음이 먼저 이어져야 합니다”라는 경구적 진술은 그의 화해적 성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 긍정적 성격은 기본적으로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신념 위에 기초해 있다. 그의 신념은 이땅에 천국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행동을 표현하는 데에 그는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그는 서슴지 않고 자기의 목숨까지를 내놓는다. 원생들이 득량만 매몰 공사에 지쳐 그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의 그의 대답은 이렇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당신들에게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소. 자, 오늘밤 내 한 사람의 피가 진실로 당신들의 피를 아끼는 길이라 믿는다면 주저하지 말고 어서 이 총으로 나를 쏘아버리시오.” 그의 대답에서 주목해야 될 것은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단호한 태도이다. 그것이 그를 ‘만만하게’ 보지 못하게 하는 큰 요소이다. 그의 그 화해적 인간관은 그러나 당신들의 천국에서 상당한 수정을 받는다. 인간은 화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사랑과 소유하고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지, 하나는 힘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지배자로서, 하나는 그 힘의 일방적인 지배를 받는 피지배자로서 둘이 만날 때는 불가는하다는 수정이 그것이다. 그의 천국론은 이상욱과 황장로에 의해 섬세한 수정을 받는 것이다. 그 수정에 있어서, 황장로는 굴종의 의미를, 이상욱은 감시와 비판의 의미를, 각각 조백헌에게 알려준다. 피지배자의 화해적 굴종은 지배자가 “일신을 위해서는 물 한 모금 사사로이 취하지 않을 것임을,”“일신을 위해서는 어떠한 공훈이나 명예도 좇지 않을 것이며, 보답을 바라지도 않고 우상도 만들지 않을 것임을” 선언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감시와 비판은 그것이 정말로 행해지고 있는가 않는가를 따지는 것이라는 것을, 조백헌은 이상욱과 황장로에게서 배운다. 그때 화해적 굴종은 사랑이 되고 감시와 비판은 자유가 된다. ‘자유와 사랑의 화해적 결합’을 통해, 조백헌의 개인적 신념은 사회적 신념으로 확산해간다. 조백헌이라는 긍정적 인물을 통해 이청준이 제시하고 있는 문제는 사회적 구조에 관한 근본적 급진적 문제이다. 그 문제 제시야말로 이청준이 가장 공들이고 있는 것이고, 사실상 이청준의 정치학의 핵심 문제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인간 사회는 천국이 될 수 있는가? 권력의 행사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 점에 대해서 이청준이 제시하고 있는 주장은 대체로 두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하나는 힘의 행사는 사랑과 자유 위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천국이 다른 인간의 천국과 대립되는 개념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힘의 행사는 사랑과 자유 위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자우 없는 힘은 끊임없는 배반만을, 사랑 없는 힘은 강요된 의무만을 낳을 뿐이다. 자우와 사랑에 기초한 실천적 힘이야말로 인간 사회를 천국으로 만드는 기본 여건인 것이다. 그는 동시에 자유만 있는 사회, 자유뿐인 사회의 가능성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다. 황장로의 다음 진술은 그것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자유라는 거 그거 말대로만 된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도 없지. 제 가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가고, 제 살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살고, 제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생각하고 말하게 되는 것보다 우리 같은 문둥이들에게 더 소망스런 바람이 있겠나. 하지만 원장도 알다시피 우리한테 언제 한번 그 자유라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되어본 적이 있었나. 아웅다웅 언제나 싸움질만 되풀이되어왔지. 핍박과 원망과 의심의 버릇만을 길들여왔지.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그 또한 당연한 노릇인지도 모르는 일이야. 자유라는 게 원래가 그런 것이었거든. 자유라는 거 누가 가만 앉아 있어도 우리 문둥이들한테 가져다 바쳐주는 건 아닐터에, 어차피 그건 제 힘으로 빼앗아 가져야 하는 거 아니던가 이 말씀야. 빼앗아 가지려니 싸움질을 해야 하고 싸움질을 하다보니 그 사이에 자연 의심과 원망과 미움을 익히게 마련이지.”황장로의 의견으로는 자유에 앞서는 사랑이 천국의 기본 여건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 사랑으로 행할 때, 시회는 천국스러워진다(그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별이 애매해질 것이다). 자유와 사랑, 아니 자유를 배태하고 있는 사랑의 정치학은 이청준으 그것이 도덕적 정결주의에 기초했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베푸는 사랑은 도덕적 결단, 믿음에 기초한 결단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천국이 다른 인간의 천국에 대립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다른 주장은 앞의 주장에서 자연히 도출되는 주장이다. 그룹과 그룹과의 대립 역시 사랑에 의해서 해소시켜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예를 들자면, 문둥이들의 천국은 그것이 밖의 인간의 천국과 대립될 때, 이미 천국이 아니라, 문둥이들의 수용소이다. 대립되어 있을 때에는, 어느 한편을 버릴 수 있는 자유와, 다른 편을 수락하는 사랑이 다 같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천국이란 형식만 있을뿐 선택이 불가능한 천국이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천국이란 “그것의 설계나 내용이 얼마나 행복스러워 보이느냐보다는 그것을 누리고자하는 사람들의 선택 행위와 내일의 변화에 대한 희망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수 있는냐”에 달려 있다. 이상욱에 의해 표현되는 그 천국은 제도적 천국이 아니라 변화가 가능한 발전적 천국이다. 이상욱이 대변하고 있는 이청준의 천국-유토피아는 헉슬리나 오웰과 마찬가지로 멋진 신세계도, 닫힌 동물 농장도 아니다. 그것은 변모할 수 있는 열린 천국이다. 그 천국에서 나는 이청준의 열린 개인주의의 흔적을 찾아낸다. 개인의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이 없는 천국은, 그 천국을 버릴 수 있는 선택이 가능하지 못한 천국은 이미 천국이 아닌 것이다. 이청준 정치학의 기본 구조는 도덕적 정결주의에 뿌리를 박은 열린 개인주의이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내세운 신아의 정치학에 또한 다름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야말로 믿음 소망 사랑을 가장 중요한 살ㅎ의 요서에 내세운 이론가인 것이다. 그의 개인주의가 사회적인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은 사랑을 전제로 한 결혼에 의해서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윤해원과 서미연이라는 병력자와 미감아의 결론이 당신들의 천국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사랑을 전제로 한 이들의 결혼은, 열린 개인주의가 사회화하는 제일 좋은 전범이다. 그것은 개인과 개인을 화해롭게 모으고, 그것을 통해 개인과 개인 사이의 울타리를 열어버린다. 그 결혼식에 대한 조백헌의 다음과 같은 축사는 의의 진술을 간략하게 요약한다: “두 분운 기왕에 남다른 사랑과 용기로 이 일을 이룩하였으니 앞으로도 계속 자신들의 방둑을 허물어 뜨리지 말고 누구보다도 굳세게 그를 지키고 살찌워 나가달라는 것입니다. 절벽을 허물어뜨리고 그 절벽 대신 따뜻한 인정이 넘나들 다리가 놓여져야 할 곳은 많습니다. 다리의 이쪽과 저쪽이 한동네 한마을로 섞이고 화목해야 할 자리는 많습니다. 제가 두 분의 신접살림을 직원 지대와 병사 지대의 중간에 마련하고자 했던 것도 사실은 그런 뜻이 있어서였습니다.”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족을 통해 따뜻한 인정이 넘나들 다리가 놓일 수 있다. 그 관점을 더 밀고 나가면, 이상욱의 회의 불안의 자유주의는 그가 실패한 가정의 아이라는 데서 그 뿌리를 찾아낼 수도 있을것이다. 힘의 행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조백헌은 I II부와 III부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는 I부와 II부에서는 힘의 행사자이지만, III부에서는 힘의 행사자를 보조하는 역할 이상의 것을 맡지 못하고 있다. I II부에서는 그는 병원장으로서의 막강한 힘을 자유롭게 행사하지만 III부에서 일개 시민으로, 새 병원장에게 조언을 한는 것 이상의 것을 행사할 수가 없다. 당신들의 천국에는 세사람의 원장 보조수들이 등장한다. I II부의 의료부장과 보건과장, III부의 조백헌이 그렇다. 그리고 그 셋의 성격은 극히 대조적이다. 의료부장 김정일은 피부과 전문의인데, 기능인답게 “말썽이라면 도대체 견디지를” 못하는 인간형이다. 그는 무사 안일주의의 한 표본이다. 그러나 자기의 전문 분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열성적인 데가” 있다. 그는 그러니까 자신의 기능에 갇혀 있다. 보건과장 이상욱은 문제 제기적인 인물이지만, 문제 해결에는 근본적으로 회의적인 인물이다. 조백헌과의 관계에 있어, 그는 그에게 소록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것을 핵심적으로 제시하나 그 문제의 해결에는 회의적이다. 문제를 제기하여 상대방의 반응을 보고 싶어 하면서도 그 문제와 관련된 일에는 그는 회의적이고 미온적이다. 소록도 병원에서는 새 원장이 취임해올 때마다 병원을 탈출하는 환자가 생긴다. 일종의 부임 선물이다. 이상욱이 생각하기에는 그것은 병원장에 대한 원생들의 상징적 배반극이다. 그것은 그들의 자유를 확인시키려는 행동이다. 그 탈출극은 조백헌이 새로 원장으로 취임했을 때도 일어난다. 그때 그는 그것을 덮어두려는 의료부장의 제안에 반대하여 원장에게 부임 첫날 그것을 꼭 알리려고 한다. 그의 반응을 보고 싶어서이다: “탈출 사고는 원장이 새로 부임해올 때마다 환자들 가운데서 잊지 않고 꼭꼭 마련해 바치는 첫 부임 선물이었다. 흐지부지 뭉개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 첫번 부임 선물을 대하는 원장의 반응이 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가 제기한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고 그것을 제기하려는 원장의 노력에 미온적이다. 이상욱의 입가에 자주 피어오르는 희미한 미소나, 원장의 표정이나 말에 “아예 상관 안” 하려는 태도 등은 그런 것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힘의 보조자로서의 조백헌은 그의 긍정적인 성격처럼 행동적이다. 그는 이상욱처럼 회의하지 않고 그가 옳다고 생각한 해결책을 원장에게 조언하고 그것의 실천에 애를 쓴다. 그러나 그 실천에는 한계가 있다. 그는 언제나 원장의 “양해 밑에서”일을 추진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조백헌의 정치학의 뿌리를 이룰 ‘자생적 운명에 근거한 힘의 행사’에 대한 자각이 생겨난다. 조백헌은 소록도를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거기에서 ‘자유와 사랑을 행사’하려고 민간인으로 소록도로 다시 온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기가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으면, 자유와 사랑에 의거한 힘의 행사는 불가능하다는것을 깨닫는다. “원장니께서는 결국 원장으로 다시 이 섬에 들어오지 못하셨기 때문에, 원장의 전능으로 섬을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에 또다시 자유와 사랑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입니까?”“운명을 같이하지 않는 한에서의 어떤 힘의 질서는 무서운 힘의 우상을 낳을 뿐이겠지요. 하지만 운명을 같이하려는 작정이 있는 다음에는 내게 그 원장의 전능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그 허심탄회한 힘의 질서 속에서 섬의 자유와 사랑이 행해져나가야만 했었어요. 하지만 난 이미 이 섬 병원의 원장이 아니었어요.” 조백헌에 의하면 “운명은 자생적인” 것이며, 자생적 운명은 자생적인 힘의 행사를 요구하는데, 조백헌이나 새 원장은 그 자생적 운명에 끼어 있지 않은 ‘자생적 운명’에의, 작가의 어투를 빌면, 타생적 끼여듦에 불과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허심탄회한 힘의 행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의 진술에서 나는 긍정적 인간의 운명적 실패를 느끼게 된다. 긍정적 인간은 자아와 세계의 합일을 가능한 것으로 상징한다. 그것은 그러나 사르트르가 말하듯 시(=신화)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산문(=현실)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의 실패는 운명적인 것이다. 그 운명적 실패는 그러나 그 화해의 가능성에 대한 부단한 암시를 이룬다. 그 암시는 당위성의 강조를 오히려 뜻한다. 이정태 기자의, 자생적 운명에 근거한 힘의 행사가 이루어질 때가 과연 올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조백헌의 대답이 그렇다.“이 섬에서 과연 그럴 때가 올 수 있을까요?”“그럴 때가 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섬이 끝끝내 실패만 하고 있지 않으려면 그때는 결국 와야겠지요. 그게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라도...” 조백헌이 힘의 행사자를 돕는 보조자의 위치로 내려오지 않았다면 이끌어내지 못했을 그 결론은 이청준 정치학의 결론이기도 하다. 힘의 행사는 자유와 사랑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 그 힘은 동시에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들의 자생적 운명에 근거하고 있어야 한다. 그 진술은 이청준이 획일적으로 밖에서 주어지는 천국을 천국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에 또한 다름아니다. 이청준이 당신들의 천국에서 조백헌을 이상욱보다 더 중요한 인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의 소설적 분위기에 젖어 있는 독자들에게 야릇한 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그의 중요한 중.장편소설은 대개 지식인을 그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그때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회의나 불안을 통해 그가 비평하고자 하는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순 그 자체가 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당신들의 천국에서도 그런 그의 지식인 유형에 꼭 일치되는 한 인물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이상욱이라는 병원 보건과장이다. 작가는 당신들의 천국에서 조백헌과 이정태를 제외한 대부분의 등장인물의 과거를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주고 있는데, 이상욱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상욱의 시선에 의해 소설의 I부는 진행되는 것이므로 그의 과거를 작자는 한민이라는 소설 지망생의 습작 소설을 통해 대충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는데, 그 습작 소설을 읽는 것은 물론 이상욱 자신이다. 그 과거는 그가 한민에게 암시해준 것을 그가 더욱 정확하게 정리한 것이므로, 이상욱에게 있어서 그 습작 소설이란 감추고 싶으면서도 드러내고 싶은 그의 과거의 명백한 노출을 의미한다. 그 자신이 조백헌의 행위를 감시하듯 그의 과거는 대략 다음과 같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독신으로 원생이 된 환자들인데 서로 사랑하여 병원에서 금기로 되어 있는 아이를 배고 그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는 전원생들의 자유와 사랑의 상징이 되어 비밀리에 자라지만, 그 비밀을 감추기 위해 그의 아버지는 일본 식민지 치하의 병원장에게 결사적인 충성심을 보여, 그의 사랑을 숨겨준 원생들에게 배반감을 안겨준다. 그 아이는 후에 몰래 육지에 보내지는데, 그 아이의 성장 과정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 아이는 성장해서 다시 소록도에 돌아와 환자를 위해 봉사한다. 그 아이가 바로 이상욱이다. 이상욱 자신은 그러니까 한때 원생들에게 자유와 사랑의 상징으로 비친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 자유와 사랑을 배신한 배신자의 혈육이다. 그의 과거는 영광과 오욕의 덩어리인 것이다(개인적인 추측으로는 그 배반자가 식민지 시대의 한 작가를 염두에 두고 작가가 구성한 인물이 아닌가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그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원생들의 배반자가 되지 않기위해, 다시 말해 원장의 입장에서 환자를 대하지 않기 위해, 그는 부단히 원장의 힘의 행사를 감시하고, 소록도 삶의 구조적 모순을 원장에게 문제로 제기한다. 그러한 감시 역할에 지칠 때면 그는 황장로에게서 원생들의 어려은 삶을 확인하고, 자기 아버지의 비극적 말로를 이야기 들음으로써 그 감시를 더욱 강화한다. 그러나 그 감시는 어디까지나 감시에 지나지 않을 뿐, 그가 원장에게 어떤 의견을 개진하거나, 거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는 않는다. 협력은 곧 감시의 배반이기 때문이다. 그의 과거 중에서 나의 흥미를 이끄는 것은 그가 언제나 자기를 노려보는 사람들의 까만 눈동자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의 부모들이 그를 비밀리에 키우기 위해 언제나 방 속에만 그를 가둬놨기 때문에 생겨난 심리적 외상이다. “소년의 첫번 기억은 그가 자란 방에 관한 것이었다. 방문이 언제나 꼭꼭 걸어 잠겨져 있었다. 소년은 허구한 날 그 문이 잠긴 방에서만 숨어 지냈다. 손가락 하나 문밖으로 내밀어본 일이 없었다. ... 소년도 결국 그의 어미처럼 사람이 무서웠다.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 누군가가 집 문앞을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만 들려와도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제겁에 제가 질려 머리 끝까지 이불자락을 뒤집어쓰며 숨을 죽이게 되곤 했다. 소년은 그 이불자락까지 뒤집어쓰고도 마음이 놓일 때가 없었다. 어지선가 벌써 지기를 까맣게 노려보고 있는 눈동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을 때가 많았다.” 문학 작품의 경우 상당수는 방 속에 있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는 주인공을 그리고 있다. 소위 요나 콤플렉스라는 것으로 방 속에 있다는 것은 그때 어머니의 자궁 속과 같이 편안한 곳으로의 도피를 의미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행복스러운 도피이다. 그러나 이상욱의 방 경험은 안락이라든가 행복과 결부되어 있지 아니하고, 죄의식과 결부되어 있어, 인간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방해물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방 속에서까지도 그는 편안하지를 못하고, 누군가의 감시를 받고 있는 것이다. 방이 편안한 것은 그곳이 누구에 의해서도 침범을 받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청준의 방에는 항상 새까만 눈동자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소문의벽」의 박준을 미치게 만든 전짓불과 같은 상징적 감시자이다. 그 감시자가 있는 한, 방도 편안할 수 없다, 이상욱의 회의와 불안은 바로 그 심리적 외상에 의거하고 있다. 그는 선천적으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니고 생겨난 인물인 것이다. 그 죄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그 죄의식이 그의 아버지의 배반과 결부되어 힘과의 결탁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나는 다시 이청준의 도덕적 정결주의를 만나게 된다. 과거에 지은 죄는 비록 그것이 그의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씻기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더 이상의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그러나 이상욱에게 있어서의 본질적인 죄란 무엇일까? 그것은 힘의 횡포가 빚어낸 규제를 범한 것이 아닌가. 그 규제는 영원한 것이 아니고 깨뜨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의 배반은 비합법적인 그의 출생을 은폐하려는 절망적인 노력이 아니었을까. 그는 왜 그의 아버지의 배반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이상욱이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그 방 체험 이후에 전연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과 아마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는어머니의 사랑에 대해서 눈을 감고 잇는 것이다. 그의 의식은 언제나 명료하다. 그는 퇴행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저항감을 내보인다. 서미연의 사랑을 거절하여 가족주의에의 경사를 막고, 자신의 행동을 가능한 한 의식화하려 한다. 소위 의식하는 의식의 병을 앓고 있다고나 할까! 그는 그 자신의 알리바이에만 신경을 쓰는 소시민적 감시자이다. 그 독신주의자의 자기 감시가 혹시 광태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나는 조원장과 황장로의 인상 깊은 대결의 밤에 외친 그의 절규에서 받게 된다. 황장로의 이상욱 비판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이상욱 과장이란 사람 모든 일을 그 자유로만 행하고 싶어했고, 또 오로지 자ㅇ유로만 행할 줄은 알았어도 거기서 익혀진 몹쓸 버릇들, 일테면 덮어놓고 남을 의심하고 미워하는 따위의 심정에 대해서까지는 미처 눈을 뜨지 못했던 게야. 남을 용서할 줄 몰라지... 이상욱의 경련적인 자기 감시, 그 어느 것에도 완전히 편들지 못하는 중립주의(그것은 동양의 중용주의와 완전히 다른, 극단적으로 자기의 위치를 지키려는 중립주의이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독선주의는 그 나름의 기능을 갖고 있다. 하나는 현상에 만족하여 무의식적으로 현상을 유지하려는 세력에 하나의 경종을 울리는 각성자의 기능이며, 또 하나는 현실 개조 의사가 감추고 있는 영웅주의, 유토피아를 상정하여 모든 사람을 그곳으로 이끌어가려는 힘의 행사 속에 감추어져 있을지 모르는 힘의 횡포를 감시하는 감시자의 기능이다. 그 기능이야말로 사실은 진보적 예술이 맡고 있는 기능 중의 하나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 누구보다도 현대 예술이 보여주어야 할 인간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이청준이 이상욱을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고 조백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목을 「당신들의 천국」이라고 붙인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당신들의 천국」의 당신들의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때의 당신들은 소록도에 천국을 세우겠다는 의욕을 가진 원장들을 지칭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이상욱이 소록도를 탈출하면서 쓴, 조백헌이 오 년 후에 받게 된 편지 속에 교묘하게 암시되어 있다. 그 편지에 의하면 조백헌은 “인간의 천국을 지어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문둥이의 천국을 지으려” 하고 있다. 섬을 문둥이의 천국으로 만든다는 것은, 환자를 더욱 환자답게 만든다는 것을 뜻하며, 그런 의미에서 “원장님의 천국의 윤리에 섬사람들의 생각이나 욕망이 스스로 한정당하고 익숙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뜻한다. 소록도에 진정으로 세워져야 하는 천국은 환자들의 자생적 운명에 근거한 힘의 행사, 자유와 사랑에 기초한 힘의 행사에 의한 천국이다. 그 천국은 이상욱까지를 포함한 환자들 모두의, 일인칭 복수 우리들의 천국이다. 그러나 그 자생적 운명에 의거하지 아니한, 원장의 윤리에 기초한 천국이란, 환자를 환자답게 만드는 이인칭 복수 당신들의 천국이다. 그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이 조백헌이라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구성이다. 이상욱이 주인공으로 되었을 때의 「당신들의 천국」의 결말을 나는 환히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에서는, 「소문의 벽」에서의 박준의 운명처럼 영원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천국에의 꿈 때문에 광태에 이르는 한 지식인의 심리적 과정이 처절하게 그려질 것이다. 이청준은 이미 그 얘기를 썼다. 그는 이제 다른 얘기를 써야 할 상황에 처한 것이고, 그 상황에서 훌륭하게 한 편의 소설을 써냈다. 그것이 「당신들의 천국」이다. 「당신들의 천국」에서 나를 가장 가슴 아프게 만드는 것은 황장로가 조백헌 앞에서 자기의 과거를 털어놓는 대목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여러 번 그 소설을 다시 읽었지만, 그 대목만은 언제나 그냥 넘기고 싶은 곳이었다. 그의 비문화적인 삶은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것을 내가 나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동시에 그런 삶을 살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인간은 무엇보다 먼저 행복하게 살게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행복하게 그의 삶을 영위하는 자는 정말 드물다. 그렇다면 인간은 불행하게 살게 만들어졌단 말인가? 천국에 대한 환상은 거기에서 싹트며, 거기에서 또한 천국을 그들의 천국으로 만들려는 원장들의 시도에 대한 배반이 싹트는 것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뛰어난 소설이다. 이 글을 끝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은 그것뿐이다. 한 가지 바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청준의 소설에서는 극히 희귀한, 행복한 결혼을 하게 되어 있는 윤해원과 서미연의 결혼 후일담을 술자리에서나마 듣고 싶은 것이다. 신판해설 모범적인 통치에서 상호 인정으로, 상호인정에서 하나됨으로 -‘조백헌’이라는 인물 정 과 리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문학과지성사, 1984)은 인간 역사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인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그것을 위해 작가는 소록도라는 나환자들의 공간과 현역 군인 원장을 등장시킨다. 소록도는 인간 소외, 따라서 피지배의 양상을 극단적으로 제시하는 곳이며 현역 군인 원장은 그 출신과 직함 자체로 지배의 성격을 가장 두드러지게 함유하고 있다. 즉 그 두 개의 주요 변수는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줄 수 있는 압축된 공간이며 인물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많은 평자들에 의해 일종의 알레고리 소설로 이해되어온 것은 그 때문이다. 「당신들의 천국」을 알레고리 소설로 읽는 종래의 평가에 동의한다면 편집자의 요구인 ‘문학 작품에 나타난 의학의 모습’을 살펴보는 일을 사실상 무익한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알레고리라는 것을 “꽤 복잡하여 혹은 상황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파악되거나 표현되기 어려운 것을 구체적인 혹은 비유적인 형상을 빌어 표현하는 기법”이라고 정의한다면, 「당신들의 천국」에 나타나는 조백헌 원장이나 나환자들은 의사-환자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기보다는 정치적이거나 혹은 일반적인 세계의 구조적 정황을 드러내는 데에, 정치적 검열을 피하기 위해 혹은 극명한 인상을 주기 위해 동원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들의 천국」을 간단히 알레고리 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작품에 그러한 우의적 요소들이 상당히 내재해 있다 하더라도, 작품 속의 인물들의 삶은 현실의 정치적 상황이나 혹은 일반적인 지배-피지배의 도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자율적 삶을 이루고 있다는 증거를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작품의 제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왜 굳이 ‘당신들의 천국’인가. 작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굳이 사족을 더할 바가 없겠지만, 소설의 제목 「당신들의 천국」은 당시 우리들의 묵시적 현실 상황과 인간의 기본적 존재 조건들에 상도한 역설적 우의성에 근거한 물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어느 땐가 그것이 ‘우리들의 천국’으로 바뀌어 불려질 때가 오기를 소망했고, 필경은 그때가 오게 될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때가 오게 되면 ‘당신들의 천군’이라는 사시적 표현이나 그 책의 존재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었다.(「개판본을 다시 꾸미면서」) 열쇠가 되는 것은 “역설적 우의성”이라는 두 단어의 결합이다. ‘우의성’은 한편으로 작품이 현실 상황 혹은 인간의 존재 조건에 대한 알레고리임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역설적’이라는 어사는 작품이 현실 상황이나 인간의 존재 조건을 직접적으로 대입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고 확실한 거리를 두면서 오히려 그 반대되는 특성으로 현실 상황 혹은 인간 조건을 비판적으로 조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즉 작품 공간은 세계 일반과 기본 구조를 공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실재의 섬 소록도에 대한 르포르타주가 아님이 분명하면서도,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모양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통해 세계 일반을 에둘러 환기할 뿐 세계 일반 자체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다. 그 자신만의 독특한 모양이란 소록도라는 국지적 공간과 세계 일반이라는 보편적 시.공간 사이에 긴장을 놓여 있는 허구의 공간의 모양에 다름아니다. 소설은 한 국지적 공간의 특수한 자울적 삶을 충분히 보존하는 한편, 그것을 “소설의 의도에 알맞게 첨삭,변경,재구성”(「초판서문」)함으로써 특수한 삶을 보편적 체험의 자리로 이끌고 간다. 그런 점에서 지배-피지배의 일반적 문제는 건강인-병인 그리고 의사-환자라는 소록도 특유의 문제를 경유함으로써만 비로서 생생하게 부각될 수 있다. 사실상 작품의 가장 중심 인물인 조원장은 우선은 의사라기보다는 병원 원장으로서의 행정가의 모습으로 제시되고 있으나, 그는 분명 한 사람의 의사이다. 그가 뒤늦게 행한 취임 연설에서 “여러분은물론 육신의 병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이 몸으로 앓고 잇는 것보다 더 무서운 질병을 마음으로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이다. 이 섬은 구석구석이 온통 불신과 배반으로 가득차 있습니다”라고 역설할 때, 그는 환자에 대한 치료자의 의식으로 소록도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지배-피지배라는 인류의 일반적 문제가 여러 개별적인 삶들을 단순히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특수한 삶 들, 즉 정치적 권력자-피권력자, 사회적 생산 수단 소유자-비소유자, 유한 계층-빈곤 계층, 학력 우위자-미학력자 그리고 치료자-피치료자 등등 다양한 층위에서 특수한 위계 관계를 이루고 있는 개별적 삶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형성해내고, 그 일반적 문제는 다시 그 다양한 층위의 삶들에 자신의 지배-피지배의 종합적 내용을 새겨놓는 상호 순환의 작용을 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조백헌 원장의 인물분석을 위해 마련된 지면에 얼핏 무관하게 보이는 일반론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연유가 여기에 있다. 조원장은 행정 관리자로서나 정치 권력자로서가 아니라 바로 한 사람의 의사로서 소록도의 지배-피지배의 관계에 참여하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사실은 세계의 지배 질서와는 동떨어져 보이는 의사-환자의 관계가 그 자체로서는 순수할 수 있지만, 그 자신 세계 내부에 속해 있는 하나의 삶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그 자체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세계의 지배적 질서를 이미 자신의 구체적 삶 속에 안고 있다는 것을 엄중하게 가리키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반증을 의료부장 김정일의 경우를 통해서 볼 수 있다. “환자 치료와 원생 후생 사업 같은 일에는 누구보다 열성적인 데가 있었으나, 말썽이라면 도대체 견디지를 못하는” 그는 스스로 한 사람의 기능인으로 머물고자 함으로써 소록도의 뿌리깊은 문제를 외면하고 온존시키는 데에 저도 모르게 일을 거들고 있는 것이다. 작품은 조백헌 원장의 소록도 부임과 함께 시작된다. 그리고 작품의 표면적 구조는 조원장이 중심 인물로서 한편으로는 소록도의 나환자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섬 밖의 보통 사람들과 갈등하고 대결하며 화해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의 문제를 추구하는 개인의 연대기”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는 소설에 대한 일반적 정의에 이 작품이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중요한 두 가지 측면에서 고전적인 소설들과 구별된다. 첫째, 김현의 적절한 지적(「자유와 사랑의 실천적 화해」)처럼 중심 인물인 조원장이 “자아와 세계(혹은 타인) 사이의 간극이 불화적인 것이 아니라 화해적인 것이라고 이해하는” 특이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조원장은 자아와 세계의 불화가 극단적인 체험으로 다가오는 위기를 매번 겪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아와 세계가 하나로 합치될 수 있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또 그것에 의해 위기를 극복해낸다. 둘째, 표면적 구조에서는 조원장의 개인적 일대기로 드러나지만 심층적으로는 다양한 차원에서의 복수 인물들의 관계얽힘이 그 표면적 구조를 떠받치고 잇다는 것이다. 첫째 사실은 「당신들의 천국」을 한 개인의 영웅적 일대기로 읽을 소지를 남긴다. 사실 그렇게 읽은 평자도 있거니와, 그럴 때, 작품은 자칫 통속소설 혹은 동화적 위인 전기로 폄하될 수 있다. 하지만 두번째 사실이 그러한 위험을 방지해 준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작품을 조원장/세계의 대립으로 읽게 하는 표면적 구조에서는 조원장에 반대하거나 보조하는 부차적인 인물들에 불과하지만, 복수 인물들의 관계얽힘으로 읽게 하는 심층적 구조에서는 아주 뚜렷한 개성을 가지면서 다양한 차원에서 여러 상대 인물들과 통합적,계열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작품 세계를 구성하는 독특한 주인공들이다. 작품의 기본 대립 구조인 건강인/병인을 기준으로 갈라볼 때, 전자의 범주에 조원장,이정태,서미연,주정수를 넣을 수 있다면 후자에는 황장로,이상욱,윤해원,한민이 들어간다. 그러면서 조원장-황장로, 이정태-이정욱, 서미연-윤해원, 주정수-한민은 각각, 대결의 관계를 보여주는 행동적 유형, 관찰과 감시의 기능을 하는 성찰적 유형, 살아냄의 실제를 보여주는 생활적 유형, 작품의 분위기를 밑받침하고 예시하는 징후적 유형으로 나뉘며 묶인다. 이러한 복수 인물들의 다양한 관계맺음은 지면을 달리하여 살펴볼 중요한 문제이지만, 어째든 조원장의 신념에 찬 행동적 삶은 그 복수 인물들과의 비판, 갈등, 대결, 조정, 적용, 화해등의 관계를 통하여 끊임없이 변모하고 재구성된다. 그렇다. 조백헌 원장의 원설적 삶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일관되게 자신의 신념을 고수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세계 혹은 타인과 치열하게 만나는 과정을 경유하면서 스스로 그 신념의 허위를 깨닫고 교정하며 재구성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런 점에서 조원장은 흔히 소설이론에서 말하는 ‘발전적 성격’의 인물에 속하거니와, 바로 그것이 주인공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인물로 만든다. 그것이 생생한 것은 그러한 끝없는 자기 성찰과 갱신(그 성찰과 갱신 속에는 얼마나 큰 고뇌와 고통이 들어 있는가)이 곧 말의 바른 의미에서의 사람의 삶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동물이 아니라 사람인 것은 그가 부단히 변모하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조원장의 변모의 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가를 수 있다. 그 세 단계는 작품의 1,2,3부에 그대로 상응한다. 조원장의 첫번째 모습은 이른바 모범적 통치자의 그것이다. 그는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는 부임 첫 날의 탈출 사고를 그냥 넘어가지 않고, 부임 인사도 거른 채, 그 경위를 조사한다. 그리고 나병인 몸의 병보다도 불신과 배반이라는 마음의 병이 소록도에 더 심각하다는 나름의 판단하에 환자들 스스로 ‘정정당당, 인화 단결, 상호 협조’를 생활의 지표로 삼아 인간 개조를 이룩함으로써 “여러분의 새로운 낙토”를 건설하자고 호소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신명껏 돕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나환자들의 반응은 감동은 커녕 “귓등에도 스치지 않는 것 같은” 표정이다. 그들은 저 옛날 주정수 원장 시절의 끔찍한 악몽을 이미 겪었기 때문이다. 주정수 역시 “이 섬을 나환자의 복지로 꾸밀 것을 약속”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환자들 자신부터 절망과 비탄의 습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충고”했으며 “스스로의 복지를 스스로 꾸며간다는 자부심과 자활 의욕이 솟아나야 한다고 촉구”했던 것이다. 그 감동적인 연설에 박수를 아끼지 않고 낙토 건설 사업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환자들은 그러나 곧 배반을 맛보게 된다. 한 가지 일의 성취는 주정수의 현시욕을 불태우며 또 다른 일거리들을 계속 증식해냈고 그것들은 갈수록 물리적 강제와 수탈의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급기야는 환자들로부터 거액의 모금과 노역을 통해 주정수의 동상을 건립하기까지 이르렀었다. 애초의 약속의 땅은 채찍과 족쇄의 지옥으로 변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조백헌 원장의 약속과 호소 역시 주정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배반으로 귀착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하지만 작가가 보건과장 이상욱을 통하여 보다 중요하게 환기하고 있는 것은 약속을 진정 이행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조원장과 환자들의 관계가 다스리는 자-다스림을 받는 자의 관계인 한 배반은 필연적이라는 사실이다. 조원장은 낙토를 만들자는 약속과 호소를 하면서 만일 원생들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하겠다”고 선언하고 있고 지배자의 의도가 선하기만 하다면, 다시 말해 자신을 희생해 봉사할 각오를 진심으로 하고 있고 동상 따위를 세우려는 사심이 없다면 충분히 이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생각이 그를 동상의 소유자로 만든다. 이미 지적됐듯 그가 원생들에게 호소한 것은 ‘정정당당, 인화 단결, 상호 협조’였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그가 자기 권한을 강제적으로 발동했을 때, 원생들은 이미 정정당당히 자기 삶을 스스로 꾸밀 기회를 박탈당해버린 것이며 상호 협조, 인화 단결은 커녕 명령과 복종, 마지못한 따름을 학습했던 것이다. 그럴 때 그 그럴싸한 민주적 내용들은 원생들은 원생들 사이의 일일 뿐, 조원장이 그들 위에 군림하여 자의적으로 조정하는 것이어서 사실상 그 내용 자체를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축구 경기에서 우승한 감격에 젖어 모두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조원장 홀로 “차 위에 높다랗게 서” 있는 채로 흡족이 미소를 짓는 꼴이며, 그렇게 높은 곳에 올라 있는 조원장은 자신이 인정하고 원생들에게 확인시키지 않더라도 이미 동상 그 자체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모의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 축구에서 빠져나와, 득량만 매립 공사라는 실제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 소록도 사람들은 예전의 냉담한 태도로 되돌아가서 조원장의 신념에 찬 행동을 거부한다. 하지만 조원장은 자신의 신념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실행하는 모범적 통치자인 것 이상으로, 또 다른 모습을 아울러 갖고 있다. 그것은 그가 말 그대로 순진성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으 변모의 과정내내 그를 떠받쳐주고 있는 그 유별난 순진성은, 한편으로 그의 신념에 사심이 깃들일 여지를 완벽히 봉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행동이 장벽에 부딪혔을 때, 그 장벽의 소리를 진솔하게 귀담아 듣게 하고 행동을 수정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해서 조원장의 두번째 모습, 아니 차라리 조원장과 원생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태어난다. 그것은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첫째, 소록도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보조자 얻기, 둘째, 종래의 권한 발동의 방식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 자살한 한민이 남긴 소설을 통해 상욱의 과거를 짐작하게 된 조원장은 상욱을 자신의 보조자로 택하며 그것을 상욱에게 부탁한다. 자신의 보조자를 구함으로써 힘을 얻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얼핏 주정수가 사또라는 심복을 둔 것을 되풀이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사또가 주정수에 대하여 충실한 충견이며 심지어는 그의 동상욕을 유도하기까지 했다면, 조원장은 상욱을 자신을 부단히 경계하고 감시하는 비판적 보조자로서 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소록도 사람들의 삶이 자신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끌려갈 것이 아니라 나름의 개별적 몫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개별적 삶이 자신에게 전하는 한과 비판과 소망을 자신의 내부에 수용하겠다는 의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상대방 인정을 통해 조원장은 원생들에 대한 명령과 권한 발동의 태도를 탈피하여 설득과 자발적 실천, 그리고 원생들의 자발적 수락을 지향한다. 매립 동사의 계획이 원생들의 냉담한 반응에 부딪혔을 때, 그는 1부에서처럼 강제로 노역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공사 준비를 하고 장로들에게 그 현장을 보여주며, 소록도 사람들 스스로의 판단을 기대하며 설득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한다. 이러한 태도의 변모는 두 개의 결과를 낳는다. 우선, 소록도 사람들의 독특한 삶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들이 조원장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며, 따라서 외부의 건강인들과 자유롭게 만나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다(그들의 과거가 어쨌든 그들의 후대, 즉 미래는 건강인일 것이기에) 는 것을 의미한다. 득량만 매립 공사는 바로 그러한 보통 세상으로의 나아감을 의미한다. 득량만 매립 공사는 바로 그러한 보통세상으로의 나아감을 실현하는 상징적 통로로서 설정된 것이며, 2부의 한 장의 제목이 「출소록기」인 것도 그것을 증거한다. 이러한 방향은, 소록도를 ‘나환자의 복지’로 만들자고 했던 주정수원장이나 “이 섬은 여러분의 진정한 낙토”이어야 한다고 열변한 1부의 조원장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그들이 소록도 사람들을 영원히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고립된 공간에 유폐시키려 했던 데에 반해, 2부의 조원장은 소록도를 일반 세상의 정당한 한 지역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결과가 있다. 그것은 조원장과 원생들의 관계가 상호 믿음에 의거한 동등한 계약의 관계로 변모한다는 것이다. 조원장이 원생들의 독특한 삶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가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서로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커다란 차원에서 하나이면서 작은 차원에서 서로 다르다는 것이 인정될 때, 비로소 동등한 차원에서 계약이 성립된다. 그래서 매립 공사를 수락하면서 원생들의 대표자인 황장로는 서로의 배반이 없을 것을 서약하자고 제안하고 조원장은 목숨을 걸어 서약에 응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 인정에 의한 동등한 계약은 심각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 한계는 서로가 상대를 인정하고 비판하며 공동의 이익을 향해 나아가게 할 수는 있지만 서로가 상대방의 삶을 대신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계약 자체의 차원에서는 그 계약은 공동의 이익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만 계약 당사자들 각각의 입장에서는, 오로지 자기 이익(조원장에게는 신념의 실현, 원생들에게는 보통 인간으로의 복귀)의 관철을 위해 계약이 존재하는 것이지 상대방의 이익을 결코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둥인 남이 자기위해 일해준다는 거 곧이들을 수 없고, 남 위해 일하는 법 없다는 소리야. 이건 원장한테도 마찬가지야. 우린 원장이 우리 위해 일한다고 믿지 있진 않아. 마찬가지로 우리 문둥이들이 원장 위해 일한다는 생각 역시 천부당만부당한 생각이지”라는 황장로의 말은 그러한 사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매립 공사가 극도로 힘들어졌을 때, 원생들은 조원장의 책임을 물어 그의 목숨을 요구하는 반란을 일으키고, 조원장에게는 그것이 “처지를 정반대로 바꾸어”놓은 얼토당토않은 주문으로 들리는 것이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그 계약이 형식상 동등한 계약이지만 실제로는 우열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양자의 상호 계약이 ‘건강인’을 목표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신념적 행동인인 조원장 개인과 나환자들 사이의 계약은 분명 동등한 계약이다. 그러나 조원장의 그 신념과 행동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그가 건강인이라는 사실을 밑받침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럴 때, 조원장이나 원생들이 모두 건강인을 목표로 두고 있는 한, 조원장이 속해 있는 건강인의 집단에 칼자루가 쥐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나환자들이 애써 메워놓은 득량만을 자신들의 몫으로 강탈할 궁리를 하고, 그러한 일에 방해가 되는 조원장을 다른 곳으로 전출시킨다. 원생들의 반란 때, 계약의 상호성을 환기시키고 책임이 쌍방간에 있음을 주지시킴으로써 당시의 위기를 모면했던 조원장으로서는, 그 상호성을 지키려 하는 한 당국의 조처에 반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원생들 편에서 할 수 있는 한의 노력을 해보고, 그 모든것들이 실패로 돌아가자 전임일 이전에 절강제라도 치름으로써 원생들의 노력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이 지극한 순진성의 행위는 그러나 그 덕분에 저도 모르게 또 다른 동상을 품게 된다. 그는 건강인도 환자도 아닌 예외인으로서 떨어져나오게 되며, 그 예외인으로서의 모습을 나환자들을 위한 헌신적인 봉사자의 그것으로서 불가피하게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소록도 사람들과의 동등한 계약을 지키려고 한 행위가 역설적이게도 그를 범상한 인간과는 구별되는 우월한 초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욱의 말처럼 원생들은 “스스로 원장님을 따르고” “아무도 원장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게” 됨으로써 결국은 “거역할 수도, 거역할 의사도 없게 되는” ‘자기 속박’, 그 동상의 엄청난 무게를 짊어지고 마는 것이다. 조원장은 상욱의 이러한 비판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당국의 교묘한 술책에 말려 결국 절강제를 치르지 못하고 소록도를 떠나고 만다. 그 후 소록도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득량만은 그대로 방치되고, 원장들은 무시로 갈리고 원생들은 생활 습성의 아무런 변화 없이 탈출 사고 역시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런 지 5년 후 조원장은 소록도로 되돌아간다. 조원장의 동상을 비판한 후 그보다 한 발 앞서 섬을 빠져나갓던 상욱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은 후, 공직을 버린 개인 조백헌의 신분으로서였다. 그 편지의 핵심적인 뜻은 “운명을 같이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절대의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같은 운명을 살 수 없는 사람들 사이의 믿음이 없는 사랑이나 봉사는 한낱 오만한 시혜자로서의 자기 도취적인 동정으로밖에 보일 수가 없습니다”라는 구절 속에 압축되어 있다. 그 구절은, 1부의 통치자로서의 조원장이건 2부의 상대방 인정의 계약자로서의 그이건, 그는 인간/환자의 대립적 인식과 그 양자의 운명이 같지 않다는 판단에 근거해 있으며, 그가 원장이라는 직함을 버리지 않는 한, 즉 환자들보다 우월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한 대표자임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환자들의 자유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야 할 천국의 건설에 올바로 참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추악한 방해를 할 뿐이라는 것을 가르키고 있다. 조원장이 개인의 자격으로 섬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그러한 상욱의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소록도내의 평범한 주민이 됨으로써 그곳의 주민인 나환자들과 운명을 같이할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직함의 변동으로 그의 의식과 생활 전체가 단번에 나환자들의 의식 생활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지금까지 오랜 세월에 결쳐 쌓여진 나환자들의 생활 습성이 천국을 스스로 건설하려는 의식적이고 실천적인 새로운 모습으로 일거에 변모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3부의 조원장이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바람의 완전한 실현이 아니라, 한 평범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동상 욕구와 끊임없이 갈등하고 싸우는(나무라는 대리물을 통해 그것과 대화를 나누면서) 한편, 그러한 바람을 실현할 수 있는 실제적인 토대들을 하나씩 쌓아가는 생활인의 모습이다. 작품이 윤해원-서미연의 결혼식 주례 연습으로 끝나고 있는 것은 그 점에서 무척 시사적이다. 그들이야말로 인간과 환자의 운명을 생활의 차원에서 어떻게 하나로 만들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시도하고 실천해온 생활인들이 아닌가. 작가가 3부의 조원장의 변모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그러한 사정일 것이다. 즉, 첫째 인간과 환자는 서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병은 인간의 보편적 조건 혹은 인간의 이면이라는것, 둘째, 그럼에도 인간/환자를 구별하고 그 사이에 절대적 우열 관계를 설정하려는 의식, 무의식이 인간의 거대한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 셋째,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한 개인의 유별난 힘이나 윤리적 결단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들 하나하나가 그것을 깨닫고 ‘작고 보잘것없는 일’에서부터 하나하나 힘을 모아“믿음을 넓혀나가고” “무언가를 이루어나가도록”하는데서 가능하다는 것. 그 세 가지는 얼핏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러나 나의 무의식은 얼마나 자신에게서 병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며, 병든 사람을 대할 때 어느새 선민의 우월감과 비인간을 보는 혐오감을 품는 것이 아닌가. 「당신들의 천국」이 마지막으로 환기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자기 기만의 가능성을 두고 있는 우리의 의식에 대한 감시이며 경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