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 저자:이문열 출판사:문이당 작가의 말 客觀式출제의 주요방식으로는 選多型, 眞僞型, 連結型 따위가 있다. 그런데 그 방식들에 공통된 특징은 응답자가 하나를 고르면 나머지는 반드시 틀려야 한다. 다시 말해 답이 한 문제에 둘 이상이거나, 진( )도 되고 위( )도 되는 것이거나, 아무쪽과 연결해도 맞는 그런 출제는 해서 안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살이의 여러 문제는 반드시 客觀式으로 출제되어 있지 않다. 이것도 답이지만 저것도 답이 될 수가 있고, 어떤 때는 오히려 여러 가지 답을 모아야 제대로 풀린다. 문학의 경우에서도 그렇다. 리얼리즘, 특히 사회적 리얼리즘이 현대소설문학의 한 중요한 조류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게 소설문학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답은 아니다. 그런데도 요즈음 보면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답이라 보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들의 눈에는 그것을 답으로 고르지 않은 사람은 作家도 文人도 아닌 것으로 비치는 듯하다. 여러 가지로 모자라는 이 글의 첫 번째 의도는 소설을 그런 객관식 응답장식으로만 이해하는 이들에 대한 이의제기다. 사회적 리얼리즘을 등에 없지 않아도 소설은 얼마든지 씌어질 수 있다. 한 사회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그 구성원을 특정의 기준에 따라 분류하는 것은 유용할 수도 있다. 또 사회발전을 위해서는 그렇게 분류된 계층 또는 집단의 병폐와 악덕을 들추어 내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분류가 처음부터 우리의 분류가 처음부터 우리의 분열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마냥 너그러울 수만은 없다. 또 병폐와 악덕의 들춤도 그 목적이 진단과 치유가 아니라 증오의 유발이나 증폭에 있다면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근년들어 우리는 우리자신조차 다 기억할 수 없는 여러 종류의 집단 또는 계층으로 분류되었다. 가진 자 못가진 자, 배운 자 못배운자, 누르는 자 눌리는 자, 노동자와 사용자, 화이트 칼라 블루칼라, 기층민과 중간층 상류층, 도시민과 농어민……. 우리는 처음 그게 우리 사회의 유용한 분석도구로 쓰일 줄 알았으나, 이제는 교묘한 분열의 수단이나 아니었는지 조금씩 의심이 간다. 우리는 또 일부계층의 병폐와 악덕이 들추어질 때 후련함을 느낌과 아울허 그것들이 우리 사회의 처방전 작성에 기초로 활용될 줄 믿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난 지금 그것들 또한 처음부터 오늘날 이 사회가 모진 병처럼 앓고 있는 증오와 섬멸의 열정을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나 아닌지 걱정스럽다. 제대로 익기도 전에 세상으로 불려온 이 글에 또 다른 목적이 있다면 바로 그런 분열과 미움에 대한 경계의 호소일 것이다. 계급의 조국은 피의 조국과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조국이 부딛칠 때는 피의 조국이 우선하기를,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우리로서 하나이기를. 내가 이 連作의 첫 번째 부분을 발표한 것은 1984년 봄이었고, 앞에 옮긴 창작동기도 그때 이미 메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 내 의식은 여러 가지로 굴절을 겪었으나 아직까지도 그 메모만은 유효하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그 거창한 동기에 비해 지나치게 거칠고 설익은 작품을 책으로 묶게 되었다는 점이다. 80년대의 묵은 감정은 80년대가 끝나기 전에 정리해버리고 싶다는 뜻에서 무리하게 얘기를 맺은 탓으로, 이 점 너그럽게 보아주시기를 엎드려 빈다. 끝으로 착잡했던 80년대를 마감하면서 나를 아껴주신 이들에게 감사와 축복을 드린다. 나를 부인한 이들에게도, 어쩌면 지난 10년 나의 가장 큰 격려는 바로 그들이 비판과 질책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1989년 12월 李 文 烈 차례 작가의 말 도입, 또는 확인작업 壯麗했느니, 우리 그 落日 제1차 收復전쟁사 25년 戰爭史 將軍과 박사 리얼리즘의 거부와 역사의 텍스트화 도입, 또는 확인작업 요즈음도 우리가 분단 국가란 것을 믿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우리나라가 삼팔선인가 휴전선인가 하는 고약한 선을 경계로 북에는 무슨 나라의 괴뢰정부가 들어섰으며, 남에는 또 무슨 나라의 혈맹우방(血盟友邦)이 들어섰다는 따위의 망발이다. 더구나 그 까닭이 무슨 주의(主義)니 이념(理念)이니 하는 것이라든가, 그 때문에 동족간이 서로 죽이고 죽는 끔찍한 전쟁을 겪었다는 걸 정말로 있었던 일처럼 이야기하며 혹은 분개하고 혹은 한탄하는 이들조차 있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멀쩡한 우리가 둘로 갈라졌다니! 거기다가 피투성이 싸움까지 했다니……! 정치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모양이다. 누가 해서는 되고 누가 해서는 안되며, 어디는 얼마나 썩었고, 어디는 얼마나 굳었으며, 무엇에도 헤프고 무엇에는 신경질적이다 따위 허튼소리가 무슨 병균처럼 번지고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나 중남미라면 모르겠다. 동남아의 몇몇 골치아픈 나라의 얘기라 해도 어느 정도는 믿을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우리나라에 그 따위 모욕적인 말이 떠돌고 있다니! 우리 사회에 대해서도 악의 섞인 헛소문이 떠돈다. 우리가 겉만 두리뭉실 하나로 멀쩡해보이지 속내는 무슨 계급, 무슨 계층, 무슨 집단하며 천 조각 만 조각 나 있고, 또 그 조각들 사이는 하늘을 같이 이지 못할 원수나 진배없다는 소리들이 그것이다. 못가진 놈은 가진 놈을 때려잡아야 살고 가진 놈은 못가진 놈을 쥐어짜야 산다. 배운 놈은 못배운 놈을 짓밟아야 수가 나고 못배운 놈은 배운 놈을 때려쫓아야 수가 난다. 노동자는 사용자의 배때기를 도려야 사람구실을 되찾고 사용자는 노동자를 조져야 체면이 선다. 권력 잡은 놈은 불쌍한 민중 누르는데 길이 있고 권력없는 놈들은 떼거리 지어 둘러엎어야만 길이 난다는 따위 되잖은 부추김이 우리에게 먹혀들어가, 어느 실없는 사회학자나 불화와 중오없는 세상에는 살맛 안난다는 별종들이 이리 저리 분류해둔 집단들을 돌게 만든 까닭이라 한다. 너는 중학 나왔으니 못배운 놈, 너는 고등학교 나왔으니 배운 놈, 너는 과장이니 누르는 놈, 너는 계장이니 눌리는 놈, 너는 차장대리니 근로자측, 너는 차장이니 사용자 측, 너는 셋방살이니 기층민, 너는 30평 미만이니 중간층, 너는 35평 이상이니 상류층하며 좁쌀 헤아리듯 헤어 분류해둔. 어림없는 소리다. 우리가 누구인가. 한핏줄 한겨례로 반만 년을 오손도손 살아온 민족 아닌가. 책이나 망상 속에 있는 계층과 계급에다 엉큼한 이들 컴컴한 방에 앉아 하는 탁상공론에 있는 그런 충돌과 반목을 먹은 마음 있어 부풀린 것일테지만, 너무 심했다. 경제에 대해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원료도 기술도 자본도 없는 공업화로 해안이 보름만 봉쇄되면 공장의 태반이 문을 닫아야 하고, 일 년만 봉쇄되면 모든 기계는 고철로 바뀌며, 삼 년만 되면 인구의 태반이 굶어죽고 말 거라는 엄살들을 떤다. 수출이란 게 수입한 부품과 빌린 기술 로열티를 합친 값이라 떨어지는 건 외제먼지뿐인 터에 덤핑으로 국내 시장만 엉망으로 만든다든가, 겁없이 쓴 빚만 늘어 국민이라면 젖먹이고 늙은이고 할 것없이 눈코 붙었다면 모두 팔십만 원씩 덮어쓰고 있다는 따위의 말로, 거기다가 우리가 원래 쌀알 세 알을 재놓고 참지 못하는 족속이라, 한푼 벌면 두푼을 써서 나라가 온통 과소비로 흔들이고 있다느니, 공연히 잘난 척, 있는 척하기 좋아해 수출 몇만 달러만 늘어도 신문 일면 톱에다 시커멓게 먹칠해대다가 세계의 보호무역 경향만 자극해 언제 적자로 돌아설지 모른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 어이없다 못해 울화까지 치민다, 여기가 어디 60년대 중반 브라질인가, 70년대 초의 멕시코인가. 아무리 찢어진 입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들 한다. 문화에 대해서는 한층 볼 만하다. 문화식민지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문화 시책을 우민정치(愚民政治)로 빈정거리는가 하면, 예술을 마취제나 최음제(催淫劑)로 단정하는 이까지도 있는 모양이다. 지금이 무슨 로마제국 말기나 되는가. 메테르니히의 반동(反動)시대란 말인가. 더군다나 그 대안이라고 내놓는 걸 보면 더 가관이다. 건강한 민중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예술의 전문성을 없애야 한다느니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집체창작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거 한 번 따져보자. 전문성 없앤다는 건 누구든 개발새발 쓰고 그려내면 예술이란 뜻인데, 그럼 라디오 고치는 전자상 점원은 과학자고 하루벌이를 수판으로 셈하는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수학자냐. 집체창작도 그렇다. 돌덩어리 많이만 모아놓는다고 금덩어리 되는 거 봤냐. 아무리 세금 안붙는 말이라고는 해도 정말 너무들 한다. 우리는 행복하다. 기어이 행복해지고야 말았다. 정치니 경제니 문화니 해서 거창하게 떠벌릴 필요없이 직접 우리 생활과 닿아 있는 부분으로 몇가지만 늘어놓아보자. 우리의 국민소득은 2만 불을 넘고 마음만 먹으면 이태리에서 가져온 우아한 소파에 앉아 색상 좋은 일제 비디오를 보다가 미제 대형 냉장고에서 꺼낸 네델란드산(産) 치즈나 칼리브해에서 난 철갑상어알을 안주로 나폴레옹 꼬냑 한 잔쯤은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세계에서도 몇 나라밖에 없는 프로 야구를 생활의 일부로 즐기게 되었으며, 프로 축구와 프로 농구에 우리뿐인 프로 씨름까지 생겨 우리의 여가는 바쁘다. 여공들도 테니스 라켓을 들고 다니고 스키나 골프도 이제는 더 이상 딴 세상 사람들의 놀이가 아니다. 또 어떤 이는 자동차 댓수로 그 나라 생활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데, 그거라면 정말 우리는 자신있다. 우리는 집집마다가 아니라 사람마다 자동차가 있어 걸어가면 십 분에 갈 거리를 자동차로 한 시간씩 다닐 정도다. 국영방송은 이 나라 팝송의 발전을 위해 돈을 아끼지 않고 놀란스니 둘리스니 하는 세계 정상급 가수들을 초청해오고, 민영방송도 질세라 국제 가요대회를 열어 대중가요에 대한 우리의 후진한 안목을 높여주려고 밤낮으로 애쓰고 있다. 뿐인가, 집안에서의 변함없는 식단에 입맛을 잃은 우리를 위해 호화찬란한 식당들이 수없이 생겨나고, 일에 지친 우리가 먼 길을 걷는 수고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한 집 건너 술집, 두 집 건너 사우나탕이다. 그리고 여자들, 도회의 구석마다 수많은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곱게 단장한 채 우리가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더러는 과감히 거리고 나와 우리의 소매를 끌기도 한다. 아아, 삶이란 다름아닌 즐기는 것이란 이 시대의 정의가 오래 모이고 쌓인 앎과 슬기의 소산일진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행복의 세세한 물목(物目)을 어찌 한자리에서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랴. 하기야 방금 댄 행복의 종류에 대해서는 반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국민소득 2만 불이라지만 분배가 제대로 안되면 2천 불보다 못한 수가 있으며, 우리가 잘사는 수준이 세계적이라면 못사는 수준이 세계적일 수도 있다. 십 년을 모은 문예진흥기금은 몇십 억도 못차는데, 작년 한 해 프로야구에 쏟은 돈만도 몇백 억이 훨씬 넘는다니 제대로 된 노릇이냐, 할짓 못할짓 다해가며 벌어들인 달러가 몇 푼이나 되는지 모르지만 남의 나라서 잘 벌어먹는 운동 선수들까지 몇 억씩 써가며 불러들여 국내선수 기죽이고 거꾸로 남의 나라에 송금시키는 건 뭐 잘하는 짓이냐. 세계의 외채 4강(强)과 일치하는 축구 4강에 들어간 게 무슨 대수며, 운동 선수의 연금이 독립 유공자의 연금보다 많은 건 옳은 일이냐, 대중가요에 대한 국민의 안목을 높여주는 것도 좋지만 몇 억씩 주고 저쪽 대중가수를 일 년에도 몇 번씩 데려와야 할만큼 다급하며, 연예의 국제화도 좋지만 물 건너서는 이류 삼류의 가수를 여비까지 대줘가며 모셔와 호화찬란한 국제잔치를 벌이는 것만이 그 길이냐. 클래식쪽이나 미술 연극 문학 등 다른 분야의 대가들은 모셔오면 국민에게 몹쓸 짓이라도 한 게 된단 말이냐. 또 먹고 마시고 쉬는 일도 그렇다. 즐기는 것도 정도 문제이지, 이러다간 지나간 어떤 망할 시대처럼 음식점 화장실에 미식가(美食家)들을 위해 게우는 걸 도와주는 직업이 생기겠구나, 캬바레와 디스코 클럽마다 의무적으로 분만실이 딸리겠구나. 거기다가 여자라니. 눈만 뜨면 계집 사내 붙어먹는 얘기로 멀쩡한 사람까지 변태성욕자로 몰아가는 판에 화냥년 많고 갈보 느는 것도 자랑이냐. 이런 반론들은 얼핏 들으면 모두가 그럴 듯해 보이지만 크게 개의할 필요는 없다. 어느 시대건 불평하는 사람은 있는 법이며, 아무리 볕좋은 날이라도 그늘진 구석은 있기 마련이다. 불평이란 한 번 맛들이면 점점 늘어나기 일쑤여서 공연히 눈밝은 체 어둡고 그늘진 구석만 살피다보면 두더지처럼 영영 밝은 해와는 등지게 되고 만다. 거기다가 그 불평이란 것이 기껏 즐기고 누리는 축에 끼지 못한 자들의 악다구니로 몰리게 되면 더욱 비참해진다. 「가난은 치욕이 아니며, 열심히 일해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야말로 치욕이다.」 만약 누가 당신의 불평에 대해 그렇게 점잖게 훈계한다면 당신의 고귀한 정의감은 얼마나 심하게 상처 을 것인가. 그러니 여럿이 입을 모아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하면, 그런 줄 알고 잠자코 있는 편이 좋다. 어쨋든 우리는 행복하다. 너무도 악착스레 행복해져서 오히려 요즈음은 그 지나침이 걱정될 지경이다. 사람들 가운데는 너무도 빠짐없이 갖추어진 행복이 지겨워 스스로 목숨음 끊는 이조차 생겨나고, 더러는 그 행복들 가운데 한둘쯤이라도 빠지게 해달라고 시위를 벌이다가 유감스럽게도 소요로 번지기까지 한다. 또 어떤 이는 불행이 주는 신선한 자극과 긴장에 향수와도 같은 감정을 품고 그런 불행의 회복에 삶을 걸기도 하며, 드물기는 하지만 몇몇은 그 회복이 이 땅에선 가망이 없다고 보아 좀 덜 행복한 나라로 망명해가는 일조차 있다. 지나침의 병이다. 오늘날의 이 행복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걸은 길고 쓰라렸던 도정(道程)을 돌이켜보라. 거기에 바쳐진 숱한 값지고 귀한 희생과 이 땅을 적시고도 남을 피와 땀과 눈물을 돌이켜보면 그 어디에 함부로 투정을 부리고 시비를 걸 여지가 있는가. 특히 이 세기초에 들면서 우리가 힘들여 넘긴 그 고비를 되돌아볼 때면 지금도 몸의 터럭이 올올이 서고 들줄기에 식은땀이 솟기까지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이 땅에 삶을 받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그 고비를 넘기게 된 경위가 모두에게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점이다. 개구리 올챙이시절 기억하기 어렵고 가멸해진 이 없이 살던 시절 잊지 않기 쉽잖다지만, 요새 젊은이들을 보면 몰라도 너무 몰라 걱정스럽다. 거기다가 단단한 비석에 새겨둔 글은 비바람에 깎이고 사람의 기억도 세월을 따라 희미해지니, 우리가 이 오늘의 행복을 거머쥐기 위해 헤쳐온 괴롭고 먼길 영영 이 땅에서 잊혀질까 두렵다. 이에 비록 아는 것 없고 재주 모자라나 들은대로 본대로 몇 줄 적어둔다. 壯麗했느니, 우리 그 落日 길게는 환단고기(桓檀古記) 1만 년으로부터 짧게는 삼국유사(三國遺事) 4천 년에 이르기까지 이 겨레가 지나온 영욕의 구비가 얼마일까만, 오늘의 이 행복을 위해 넘어야 했던 첫번째 고비는 아무래도 우리 옛 왕조가 끝날 때를 전후해 있었다는 편이 옳다. 그때 우리 왕가(王家)는 아시아의 여러 전제왕조들처럼 역사의 어둠 속으로 지고 있는 해(日)였으나 그 낙일(落日)은 장려하였다. 애잔하면서도 눈부신 그 잔영 속에 옛 우리가 지고 새로운 우리가 태어나며, 그 새로운 태어남이 바로 이 오늘의 행복을 향한 출발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우리 왕가와 마지막 임금님에 대해 별 희한한 소문이 다 떠돌고 있다 한다. 한마디로, 왜곡과 와전과 낭설들이 우리 자랑스런 왕조의 그 장려했던 낙일(落日)을 먹칠해 진상을 날이 갈수록 희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아는 이에게는 자신의 이력보다 더 뚜렷한 일인데도, 우리의 영광스런 과거를 치욕 속에 묻으려는 못된 세력이 점점 커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못된 세력이란 우리 중에 섞여살고 생김도 차림도 비슷하나, 피는 우리와 조금씩 달리하는 되(胡)트기, 양(洋)트기, 한자(韓子=일본혼혈아)들을 이른다. 앞으로도 종종 얘기되겠지만, 그것들은 어쩌다 제 핏줄에 튀긴 이족(異族)의 피가 무슨 요사라도 부리는지 좋을 때는 우리 중의 하나로 가만히 있다가도 정작 긴요한 대목에 오면 갑자기 한겨레 아닌 딴겨레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무엇이든 우리의 자랑이 될만하면 깎고 부끄러움을 보태며, 이로움은 피하고 해로움을 끌어들여 제가 사는 땅보다는 어느 쩍에 튀겼는지도 모를 피를 따라가 버리는 것이다. 그것들의 입이란 게 가죽이 모자라 찢어진거나 다름없으니, 그것들의 말을 다 말이라고 이러니 저러니 길게 끌 것 없다. 한마디로 우리 옛 왕가는 우리의 다함없는 존숭(尊崇)과 애도 속에 스러졌으며, 그 존숭과 애도는 다시 우리가 다 함께 끌어아야 할 그 무엇으로 바뀌어 자칫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역사의 고비를 거뜬히 넘기게 했다. 그리고―우리의 참된 얼이 기억하는 한 그 경위는 대강 이러했다. 민주니 공산이니 하는 멀리 바다 건너 눈알 푸른 사람들이 지어낸 생각 다발을 놓고 그게 옳으니 그르니하며 두 조각이 나서 다투다가 끝내는 저희끼리 피탈까지 본 일본이, 근년 들어서는 턱없이 우리 흉내를 내다가 일이 꼬여 곤욕을 치르던 끝에 우리에게 몇십억 불 빌어가 간신히 발등의 불을 끈 한심한 그 섬나라가, 한때 강성하여 겁없이 우리를 넘본 적이 있었다. 우리가 아직 지난 행복의 잔영(殘影)―은자(隱者)의 명상과 새벽의 고요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약삭빠르게 바다 건너 사람들의 재주 몇 가지를 배워 제도를 고치고 물산을 일으킨 덕분이었다. 하기야 그 무렵 턱없이 우리를 넘보기로 치면 그게 어디 일본뿐이겠는가, 먼저 코쟁이라면 이놈 저놈에게 한 번씩 터져보지 않은 데가 없을 만큼 붙었다 하면 깨져, 코피가 나도 여러 번 나고 갈빗대가 나가도 열 대는 더 나갔음직한 청국(淸國)이 그랬다. 염통 쓸개에 허벅지살까지 떼어주고 간(肝)만 남은 까닭인지 그래도 오기 하나만은 살아남아, 우리에게는 한사코 미꾸라지 먹고 용트림하는 것 같은 종주권(宗主權)을 내세우며 걸핏하면 퍼렇게 멍든 눈을 부릅뜨고 썩돌같은 주먹을 울러메던 그 꼴이 자못 불량스러웠다. 노국(露國) 또한 분수없이 날뛴 꼴로는 그 청국에 못지 않았다. 손톱 밑에 가시박힌 줄은 알아도 염통에 시스는 줄을 모른다고 발등에 떨어진 불 같은 제 나라 혁명은 제쳐놓고 얼지 않는 항구 찾는 데만 눈이 뒤집혀 설쳐대는 폼이 잘하면 뜨물에 애 생길 뻔도 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거문도까지 점령하고 나선 걸로 보아 영국도 이 땅에 바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지는 않고, 신미 병인 두 해의 작태로 보아 미국이나 불란서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났다고 발뺌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구왕실이 명함을 모아두지 않아서 그렇지, 찾아보면 독일이나 네델란드, 오스트리아의 명함은 왜 없겠는가. 어쩌면 남의 나라 넘보기가 그 시절 서양에 만연했던 괴질 이었는데, 일본이 쓸데없이 깝죽대며 그쪽과 오가다가 그 못된 병부터 먼저 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처음 한동안은 일본의 그같은 넘봄이 턱없는 짓 같지만도 않았다. 남의 뭣은 부지깽이로도 쑤셔본다는 기분으로 공연히 이 땅을 기웃거려 이 땅의 식민지화가 피할 수없는 운명인 것처럼 만들어놓고, 슬그머니 손을 뗀 나라들이 먼저 일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이미 일 벌여둔 곳이 많은 그들에 비해 이 땅밖에는 달리 비벼댈 곳이 없는 일본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사생결단으로 나서자 이런저런 구실로 손을 뗀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한몫 단단히 한 것은 영국과 미국이었다. 삼십 년도 안돼 제 목을 겨룰 칼끝인 줄도 모르고 노국의 남진(南進)을 막아준다는 말에 영국은 못이긴 채 인도로 돌아가버렸고, 미국은 태프트란 물렁한 외교관을 보내 이 땅을 필리핀과 어물쩡하게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본을 기고만장하게 만들어 준 것은 역시 오기와 허풍으로 큰소리 한번 질렀다가 진흙땅에 메다 꽂힌격이 된 청국과 노국이었다. 제 몸 하나 추스리지 못하는 주제에 이 땅에까지 걸레 같은 군대를 보내 일본에게 반도 출병(出兵)의 구실을 주고, 종당에는 제 등골까지 파먹히게 되는 청국의 꼴은 쌍말로 국 쏟고 뭣 데고, 사발 깨고 동네 개 싸움시키고, 잠자리에 서는 남편에게 따귀 맞은 계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베리아쯤 몇개 사단을 깔아놓고 기다리면 될 걸 구태여 대함대를 지구의 반이나 돌게 한 뒤 낯선 바다에 집어넣어 몽땅 수중고혼이 되게 하고, 나폴레옹과 히틀러에게도 한 것 없는 항복의 치욕을 맛본 노국 또한 그 꼴이 청국보다 크게 나을 건 없었다. 그리하여 그 두 번의 싸움으로 눈 앞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간덩이가 부풀어오른 일본은 요즘에는 좀 시들해진 감이 있는 그 식민지 놀고 놀음에 열을 올리게 된 것이었다. 갑진(甲辰)년에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시작하고 을사(乙巳)년에 억지 춘향이 격으로 보호국을 만들었다가 다시 경술(庚戌)년에 그 욕된 합방극(合邦劇)을 연출했다-요즘 퍼지고 있는 못된 소문이 말하는 그 다음의 경과는 대개 그러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정말 놀랍고도 기막힌 우리 왕조의 최후가 감추어져 있다. 슬프면서도 장려(壯麗)한 지난 시대의 낙일(落日)인 동시에 오늘날의 이 행복을 위한 출발이 되는 엄청난 일이. 그 출발을 되돌아보는 일은, 오, 언제나 눈시울 뜨거운 감격이다. 흐르는 물 같은 말솜씨인들 그 날을 이야기함에 떨리고 막힘이 없을 것이며, 사람을 놀라게 하고 귀신을 감동시키는 글인들 그 감격을 담아 처음과 끝이 가지런할 수가 있으랴. 그 가운데서도 특히 감격적인 것은 우리들의 마지막 임금님―그분과 그 자손들의 거룩한 피로 자칫 그릇되어 흘러갔을 뻔한 역사의 물길을 바로 잡으신 고종(高宗)폐하의 죽음이다. 생각하면 지난날 이 땅과 우리를 다스린 이들 가운데 그분처럼 욕되게 꾸며지고 거짓으로 뒤틀린 전설 속으로 사라져 가신 이도 드물다. 어려서는 아버지의 야심을 펴기 위한 도구였으며, 자라서는 드센 아내와 고집센 아버지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렸고, 끝내는 그 아내를 죽인 일본인의 꼭두각시로 날을 보내다가 어느날 비루먹은 말처럼 시름시름 죽어갔다는 터무니없는 얘기가 일부에서는 아직도 그분의 참모습을 그린 것으로 믿기워지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분의 욕됨은 거기서도 끝나지 않는다. 그 아들에 척(拓)이라는 이가 있어 다시 순종(純宗)이란 이름으로 아버지의 뒤를 잇다가 합방(合邦)이 되자 걷어채이듯 옥좌에서 밀려나 일본의 한 번왕(蕃王)으로 굴러졌다는 말이 있다. 또 딴 아들에 은(垠)이란 이가 있어, 하늘을 함께 이지 못할 원수 집안의 여자를 아내로 맞고 일본s의 육군 소장까지 지냈으며, 끝내는 노새처럼 후손도 없이 불모지에서 죽었다는 더 고약한 소문도 있다. 모두 한심하고도 속상하는 낭설들이다. 좀 나은 것이 강(堈)이란 왕자지만 그분도 우리를 위로하기에는 넉넉하지 못하다. <독립한 조선의 한 서민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皇族)되기를 원치 않노라>던 대동단(大同團) 사건 무렵의 기백에 비해 그 뒤의 생애는 애매한 점이 많다. 만일 그분이 정말로 그랬다면 그 뒤로는 수없는 탈출과 자결이 기도되었어야 할 것이지만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인멸된 것 같지 않은데도 그 생애는 너무도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한마디로 말해 요즘 떠도는 그못된 소문에는 우리의 마지막 임금님과 그 왕자들의 모습이 자칫 한심한 기분이 들 정도로 어리석고 못나게만 왜곡되어 있다. 누가 어떤 속셈으로 지어내 퍼뜨렸는지는 알 수 없으되, 적어도 우리와 우리를 다스리던 이들을 이간시켜 이득을 볼 자들의 소행이라는 것만은 금방 짐작이 갈 것이다. 한 왕조의 무너짐이 어찌 그리 허망할 수 있겠으며, 하늘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고른 성스헌 핏줄의 마지막 줄기가 또한 어찌 그리 한심하게 끝맺을 리 있겠는가. 과연 그러하니, 항간의 뜬소문과는 달리 우리 옛 왕조의 마침은 이러했다. 어떤 문명 국가도 외부로부터 침입해온 적에 의해서만 멸망당하는 법은 없다. 언제나 안에 있는 적에 의해 안에서부터 먼저 망한 뒤 다시 바깥의 적에 의해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데,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푸른 하늘 밝은 해 아래 그 이름이 드러난 을사년(乙巳年)의 다섯 도적을 비롯해, 비록 이름은 무사히 가리워졌지만 더 많은 도적들이 먼저 안으로부터 우리를 망하게 한 뒤에야 다시 바다 건너의 도적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높은 갓 쓰고 긴 수염 드리웠던 상고주의자(尙古主義者)들, 오직 한족(漢族)의 문화만이 세계를지배할 수 있고 그들의 땅이 바로 세계의 중심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모화사상사(慕華思想家)들 그들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내부의 도적들이다.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지 못하던 그 앞뒤없는 국수주의자들, 어쩌면 스스로를 너무 믿은 게 아니라 지나치게 믿지 못해 생겨났을 쇄국주의자들, 그들도 종종 그 이름이 빠지는 내부의 도적들이다. 새롭다는 것과 가치있다는 것을 혼동한 그 경박한 개화사상가들, 외족인 친구가 동족인 적보다틀림없이 나으리라고 믿은 그 얼치기 혁명가들, 그들 또한 손가락질받지 않은 내부의 도적들이다. 까닭모를 무력감에 빠져 한번 싸워보기도 전에 마음으로부터 손을 들어버리고 만 패배주의자들, 또는 제국주의에 최소한의 이해조차 없던 개국론자들, 그들고 역사이 어둠 속에 이름을 숨긴 내부의 도적들이다 이쪽저쪽 다 비난하며 중용이니 조화니 하고 떠들기는 했어도 기실 그들이 노린 것은 일신의 영달뿐이던 기회주의자들, 그들도 마땅히 기억되었어야 할 내부의 도적들이고, 티끌 자욱한 세상을 등지겠네 하면서 점잖게 돌아서도 마음 속은 다만 혼란과 불안뿐이던 그 은둔주의자들, 그들도 마찬가지로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내부의 도적들이다. 쓸쓸하여라, 일일이 듣자니 끝이 없다. 어떤 번들거리는 허울을 썼건, 무슨 어마어마한 명분을 앞세웠건 남보다 나를 위한 마음이 컸던 모든 자들은 하나같이 세월에 가리워진 내부의 도적들이 다. 그리고 그 모든 도적들에 이어 뻔뻔해져 오히려 정직해뵈는 을사년의 다섯 도적이 나타나 먼저 안으로부터 이 나라를 허물어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마지막 임금님은 역시 하늘이 그를 골라 우리와 이땅을 그 손에 부치신 이의 후예다우셨다. 지켜야 할 것과 버릴 것을 아셨으며, 비록 비극적일지라도 왕자의 책무와 존엄은 잊지 않으셨다. 오욕스런 을사년의 그날, 무장한 일본군들의 흉흉한 시위 아래 그 우두머리 이등박문과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가 대신들을 위협해 얻어낸 조약를 들고 어전으로 갔을 때였다. 우리 임금님께서는 단호하게 조인을 거부하셨다. 넓은 근정전을 가득 메운 것은 번쩍이는 총검을 든 이등(伊藤)과 장곡(長谷)의 졸개들이요, 늘어선 것은 이미 혼마저 팔아먹은 을사년의 다섯 도적들뿐이라 그 같은 항거는 거의 목숨을 내건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때껏 이 나라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줄 알고 신이 나 일을 꾸며오던 이등과 장곡은 잠시 아연했다. 몇십 년을 함께 살아온 왕비를 죽여도 별 반감이 없기에 무엄하게도 우리 폐하를 갈 데없는 무골충(無骨蟲)쯤으로 여겨온 그들이었다. 뜻밖으로 다 된 죽에 코빠질세라 안달이 나서 어떤 대신에게도 한 적이 없는 위협과 회유를 되풀이 했다. 그래서 될 일이 아니었다. 이등은 갖은 달콤한 조건을 다 내걸고 장곡은 무엄하게도 군도(軍刀) 자루에 손까지 댔지만 우리 임금님께써는 작은 흔들림도 없으셨다. 그대로 돌로 깎은 왕자의 상( 像)이었다. 그러기를 대여섯 시간, 어느새 밤이 되니 이등은 드디어 미리 꾸며둔 다른 방법을 쓰기로 작정했다. 장곡에게 슬쩍 눈짓을 하자 장곡은 곧 졸개들을 시켜 근정전 안에 있는 모든 대신들과 내시들을 멀리 궁 밖으로 몰아내게 한 뒤 태자 척(拓)을 끌어냈다. 나중에 순종이란 꼭두각시 황제가 되어 합방때까지 일본인들이 시키는 대로 따르다가 끝내는 독살당하고 말았다는 소문이 나돌게 된 이였다. 태자가 우리 임금님 앞에 끌려나오자 장곡은 무엄하게도 평소 뽐내며 차고 다니던 군도를 뽑아들고 소리쳤다. 「폐하, 폐하께서 기어이 조인을 않으시면 저희들은 여기 이 태자의 목을 천황폐하께 올려서라도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못한 죄를 씻어야겠습니다. 그래도 좋으시겠습니까?」 한번 얼러보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금세 칼을 휘두를 기세였다. 하지만 우리 폐하께서는 이미 마음을 정하신 뒤였다. 한동안 사랑하는 아들을 그윽히 내려다보다가 담담하게 이르셨다. 「먼저 가거라, 살아 왜왕(倭王)에게 무릅을 꿇게 되는 욕을 입느니보다는 조선의 태자로 떳떳하게 죽는 게 나으리라. 구천(九泉)에 가서 열성(列聖)을 뵈옵거든 아뢰거라. 못난 희(熙:高宗의 諱)도 곧 뒤따라가서 오백 년 왕업을 그르친 죄를 빌리라고.」 그리고 눈길을 돌려 등불에 일렁이는 단청을 가만히 바라보셨다. 부자간의 영결(永訣)치고는 너무도 조용했다. 우리의 태자도 그런 부왕(父王)의 아들로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한 목소리로 작별을 고했다. 「옛말에 죄가 바에 삼천 가지라도 부모 앞에서 먼저 죽는 불효보다 더 큰 죄가 없가 하였으나,이제 아바마마의 허락하심으로 먼저 죽는 죄 씻음을 받게 되니 소자 죽어도 남는 한이 없겠습니다. 부디 다음 세상에는 망국의 태자로 태어나는 일이 없기를 빌며 불초 척은 먼저 갑니다. 옥체를 보중하시어 광명한 날을 다시 만나시길 빌 따름입니다.」 그리고 엎드려 두 번 절한 뒤 장곡(長谷)의 칼 앞에 길게 목을 늘였다. 병약한 몸이라고는 하나 스물의 청년이라 맨주먹으로라도 저항하다 죽는 것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만승의 태자로서는 할 바가 아니다. 자칫 천박한 발악으로 오인받느니보다는 이미 기운 대세를 거역하지 않고 고요히 목을 내미는 쪽이 훨씬 의연하고 기품이 있었다. 그 같은 우리 임금님 부자의 태도에 이등(伊藤)도 잠시 멋 한 느낌이 든 모양이었다. 한동한 놀란 눈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 물건이 워낙 악물(惡物)이었다. 장차 일본으로 하여금 동양 삼국을 피로 물들이고, 마침내는 저희도 태평양을 저희 백성의 썩은 시체로 뒤덮으며 망할 준비를 하기 위해 내려온 살성(殺星)이라, 인두겁을 써도 모질고 독하기가 한이 없었다. 장곡(長谷)을 향해 한 번 눈을 깜박하자 장곡의 모진 기합소리와 함께 태자의 목은 근정전 마룻바닥에 굴렀다. 우리 임금님은 옥좌에 앉으신 채로 지그시 눈을 감으셨다. 얼핏 보아서는 이등의 그 방법도 효과를 낸 것도 같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잠시 후에 눈을 뜨신 우리 폐하께서는 한층 낮고 가라앉은 음성으로 이등에게 말했다. 「하늘에 죄를 얻지 않았으면 시체는 흩는 법이 아니니라.」 그리고는 그만이었다.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양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계실 뿐이었다. 그만하면 그 같은 방법으로는 뜻을 이루기 어렵다는 걸 깨달을 법도 하건만 이등과 장곡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래로 세 분 왕자를 차례로 끌어내어 우리 폐하를 위협하며 목숨을 앗기 시작했다. 피를 본 그 악물들의 흉성(凶性)이 발작한 것인지, 아니면 그 기회에 우리 왕가의 대를 끊어버리기로 미리 작정했는지,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우리 임금님은 잔혹한 고문과도 같은 그 시간을 끝내 옥좌 위에 앉으신 채 버티셨다. 눈 앞에서 죽어가는 자식들의 모습에 실성한 늙은이의 추태를 보이지 않은 것만도 왕자의 기품이 아니면 될 수가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대로 장곡의 칼 아래 뛰어들어 함께 죽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뒷날을 위해 참고 또 참으신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 임금님도 결국은 피와 살로 된 인간이셨다. 마지막으로 순빈(淳嬪)엄씨에게서 난 은(銀)까지 끌려와 죽자 지그시 감은 두 눈으로 한 줄기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소에 배운대로 왕자다운 품위를 지키려고 애쓰기도 해도 아홉 살의 나이 탓인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가늘게 몸을 떠는 막내 왕자의 애처로운 모습때문이었으리라. 그 눈물을 본 이등의 앙귀처럼 이죽거리며 물었다. 「위로 둘이나 죽어도 눈 한번 깜박하시지 않던 폐하께서 어찌 세째 왕자는 눈물로 보내시오?」 「척이나 강 등은 자기 갈 길을 알고 갔으나, 그 어린 것은 다만 시절을 잘못 타고 난 죄로 아무것도 모르고 베임을 당했으니 어찌 가엾지 않겠느냐?」 임금님은 대꾸라기 보다는 나무라심으로 그렇게 말을 받으셨다. 「그렇다면 차라리 여기에 어새(御璽)를 놓으실 일이지, 어찌 체신없이 용안을 눈물로 적시고만 계시오?」 이등이 들고 있던 조약서를 흔들어 보이며 다시 빈정이듯 물었다. 그 때 우리 임금님은 벽력같이 꾸짖으셨다. 「이놈, 네 말이 간교한 가운데 이로(理路)마저 뒤뚫렸구나. 아비와 자식의 정은 사사로운 것이요, 나라가 있고 없음은 이 나라 억조창생의 생사가 걸린 공변된 링 이니라, 아무리 무도한 섬오랑캐라 하나 그래도 한 나라의 상신(相臣)이 되어 그만한 의(義)도 모른단 말이냐? 네가 그릇 적으면서도 수단까지 혹독하니 반드시 제 명에 죽지를 못하리라.」 그런 우리 폐하의 눈에서는 한 줄기 번개가 쏟아지는 듯했다. 이등 그 물건이 능히 발끈할 만한 말이었으나 워낙 그분의 위엄이 무거우니 저도 질리는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눈초리가 사나워지는 장곡을 말리듯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사령관은 어서 시체를 치우고 이왕(李王)을 조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깊이 감추도록.」 「그럼 이 기회에 저 늙은이도 함께 베어버리지 않으실 겁니까?」 직함이 좋아 조선 주둔군 사령군이지 사람 백정이나 다름없는 장곡이 못마땅한 눈길로 이등에게 물었다. 이등은 한층 엄하게 그런 장곡의 사나움을 억눌렀다. 「그렇다. 아직도 쓸모가 있을지 모르니 살려두는 게 졸을 것이다」 「조인(調印)은 어떻게 해결하시렵니까?」 「그건 이미 준비가 돼 있다. 하야시(林董:당시의 駐韓公使)군이 이 년간이나 공들인 작품이지.」 그리고 다시 이등은 악귀와도 같은 웃음을 흘렸다. 평소부터 그 방면으로 밝은 이등의 못된 꾀를 우러러오던 장곡이라, 이등의 그 같은 웃음을 보자 더는 되묻지 않았다. 무언지는 모르지만 이미 모든 준비가 되었다고 믿어 시키는 대로 따랐다. 왕자들의 시체는 주한 일본군 사령부로 싣고 가 적당히 묻고 우리 폐하도 그 안에 있는 지하호에 가둬버린 것이었다. 물론 이 일을 처음 듣는 이에게는 이 모든 사실들이 놀랍다 못해 의심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또 처음부터 끝까지 저희 족속끼리만 해치운 일이니 증인도 구할 길이 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증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경복궁 근정전의 마룻바닥을 자세히 살피면 그때 우리 왕자들이 흘린 핏자국이 몇 군데 남아 있고, 또 거기 진열돼 있는 고종 임금님의 구식 승용차 뒷좌석에도 왕자들의 시체를 기다 묻은 핏자국이 있다. 뿐인가, 당시 주한 일본군 사령부 부근을 파면 어딘가 크고 작은 몇 구의 백골들이 나올 것이다. 그 뒤 얼마 안돼 벌어진 해괴한 조인극(調印劇)도 한 간접 증거로 쓰일 수 있으리라. 을사보호조약의 조인식은 그날밤이 제법 깊어진 뒤에야 바로 그 근정전에서 거행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휘황한 촛불 아해 우리 임금님과 왕자들이 모두 나와 서 있는 것이었다. 여우같은 주한 공사(公使) 하야시가 지난 이년간 이 땅을 뒤지다시피 하여 찾아내고 훈련시킨 대역(代役)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이 어찌나 우리 왕가의 사람들과 흡사하고, 궁중을 드나들며 왕족들의 특징을 꼼꼼히 살핀 하야시의 훈련과 분장이 얼마나 교묘했던지, 가까이서 모시던 대신들조차 그들이 가짜라는 걸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거가다가 깊은 밤에 촛불 아래서 조인식을 거행하니 일은 더욱 감쪽같았다. 간혹 우리 폐하나 왕자들의 행동거지가 전에없이 천박하고 어색한 걸 느낀 사람이 있었지만, 그들은 또 장소의 험악하고 살벌한 분위기에 억눌려 그 의심을 키워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을사년의 다섯 도적이 포함된 아홉 대신들은 물론 궁안의 내관들조차도 그 기막힌 바꿔치기를 알아보지는 못하는 사이에 대역을 맡은 일제의 꼭두각시들은 세계 역사에도 예가 드문 엉터리 조인극을 연출해갔다. 우리 임금님과 왕자들에 대한 갖가지 고약한 후문은 바로 그 대역들의 기막힌 솜씨였다. 그 후문들 가운데 가장 민망스런 것은 우리 임금님이 벌벌 떨며 이등박문에게 어새를 바쳤다는 것이었다. 왕자 하나가 퍼렇게 질린 얼굴로 이제는 우리 모두가 살게 되었느냐고 하야시에게 물었다는 것도 한심스럽고, 누구는 까무라쳐졌다는 것도 욕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미 앞서 말한 바 있는 순종 영친왕(英親王) 의친왕(義親王)의 후문들, 그 중에서 의친왕의 것은 좀 별나지만 그것은 대역의 과잉 연기였거나 무슨 올가미였을 지도 모른다. 그 바람에 우리 대동단(大同團)은 뿌리째 뽑히지 않았던가. 어쨋든 이걸로, 한 왕조가 망했는데 왕족 가운데 단 한 사람의 독립 투사가 없었다는 그 희귀한 예에 우리가 든 까닭은 밝혀진 셈이다. 그 틈을 타 어떤 양(洋)트기가 한때 미국에서 한국의 왕자 행세를 한 적도 있다지만, 어떤 의미로 우리의 왕자들은 일본과의 첫 싸움에서 산화환 투사들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을사조약이 진행될 무렵 지으신 것으로 보이는 우리 폐하의 단장시(斷腸詩)도 눈물겹다. 비분을 삼키며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뒷날을 기약하던 그분께서 멀지않은 망국의 한과 슬픔을 노래하신 그 시는 일본인조차 울릴 정도였다. 그러나 장지연(張志淵)의 사설은 널리 알려져도, 우리 폐하의 애절한 단장시를 아는 이는 드물고, 위로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 송병찬(宋秉瓚)같은 사대부들로부터 아래로 전봉학(全奉學) 윤두병(尹斗炳)같은 사졸(士卒)에 이르기까지 그날에 자결한 이들의 이름은 낱낱이 기록되어 있어도, 섬오랑캐의 강압에 굴하지 않고 의연히 죽음을 맞은 우리 왕자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옛 왕가와 마지막 임금님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을사년의 그 불행한 날에만 있지는 않다. 그 뒤 그분께서 겪으신 십여 년의 세월은 짐작하기에도 끔찍한 인고의 세월인 동시에 그 하루하루가 우리 모두를 감격시키기에 충분한 날들이었다. 한바탕의 바꿔치기는 그럭저럭 우리에게 들키지 않고 넘길 수 있었지만 그로부터 오래잖아 일본인들은 우리 폐하를 다시 옥좌로 모셔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왕자들이야 평소에도 대신들이나 백성들에게 그리 알려진 얼굴이 아니어서 오래된 내관만 바꾸면 계속 버텨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인금님에 이르면 아무리 모습이 닮고 분장과 흉내가 교모해도 가짜로는 오래 버텨나가기가 어려웠다. 당초에 저희끼리 생각한 대로 내친 김에 바로 합방까지 몰고 갔더라면 그런 어려움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왕가와 대신들만 손아귀에 넣으면 되리라는 계산에서였는데-그게 그만 뜻같지가 못했다. 한 번 굴욕적인 보호조약의 소문이 퍼지기 무섭게 온 나라 구석구석에서 벌떼처럼 의병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무력이야 대단치 않다고 해도 합방으로 아무래도 무리였다. 거기서 적어도 몇 년은 더 우리 왕가를 존속시킬 필요가 생기자 일본인들은 다시 우리 폐하를 끌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다시 나온 우리 임금님께서 그 뒤 십여 년간이나 저들이 시키는 대로 들어주신 데 대해서는 의혹이 생길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눈 앞에서 세 아들을 차례로 죽인 원수들과 어떻게 그 오랜 기간을 함께할 수 있단 말인가.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만이라도 그 끔찍한 일의 진상을 밝히고 자결이라도 하는 게 옳지 않은가. 그렇게만 돼도 언젠가는 그 진상이 궁 밖으로 새어나올 것이고, 마침내는 거국적인 항쟁의 원동력으로 변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대개 그런 종류의 의혹이 되겠지만 너무도 얕고 속된 바람이다. 쉽게 말해 우리 폐하이 처신이 다만 구차한 목숨을 위해서라는 추측에서 비롯된 의혹이며, 한 왕조를 닫는 일을 장사치 난전 거두듯 하라는 바람이다. 우리 임금님께서 죽음보다 더한 그 소무와 분한(憤恨)의 세월을 참고 견디신 데는 보다 깊고 거룩한 뜻이 있었으니, 그 한 뚜렷한 증거가 을사년으로부터 이태 뒤에 난 해아밀사(海牙密使)사건이다. 그해 화란(和蘭)의 수도 해아(海牙)에서 열린 회의는 말이 좋아 <만국평회회의>지, 내막으로는 일본과 한통속이나 다름없는 것들이 모인 <힘세고 못된 놈들 저희끼리 안싸우고 힘없는 놈 잡아 갈라먹기 회의>였다. 그런 아수라 먹자판에 도마 위의 고기 신세 같은 우리의 외로운 목소리가 제대로 닿을 리 없건만, 그래도 우리 임금님은 그들이 내건 그럴 듯한 공의(公義)에 한가닥 기대를 품었던 듯하다. 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세 사람을 뽑아 친서와 함께 우리의 외로운 처지를 전하게 하니 이른바 해아밀사(海牙密使)였다. 그들 셋은 해아까지는 무사히 갔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뿐이었다. 간교한 일본 대표 소림(小林)의 방해 공작과 거기에 넘어간 화란 정부 및 회장 넬리도프의 멍청한 판단으로 회의장에는 들어가보지조차 못했고, 개별로 만난 만국의 대표들도 한결같이 냉담한 반응이었다. 이미 말했듯, 아시아, 아프리카의 약소국들을 맛있는 먹이 정도로 생각하는 데는 일본과 다름없는 것들인데가, 그 모임이 또한 먹자판에 어떤 질서를 주자는 것이었으므로, 이미 일본의 입에 반이나 들어간 폭인 우리나라를 놓고 공연히 이러쿵저러쿵 간섭했다가 독오른 일본에게 따귀 맞을 게 겁난 모양이었다. 원래가 남의 힘을 빌어 어떻게 해보겠다는 발상 자체에 좀 문제가 있고, 일도 결국 이준 열사만을 이역(異域)의 외롭고 분한 넋으로 만드는 걸로 끝나고 말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 임금님께서 결코 도적들의 위세에 질려 나라와 백성들을 잊고 있지는 않으셨다. 정미(丁未)년의 물샐 틈 없는 감시와 삼엄한 경비를 뚫고, 한 사람도 아닌 세 사람이나 국권회복의 밀사로 수만리 타국에 보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저들 일본인들은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저들의 우리의 세찬 저항을 각오하면서까지 우리 임금님을 억지로 퇴위시킨 것도 그 사건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본래의 예정을 바꾸어 양위(讓位)란 이름 아래 가짜 태자로 하여금 우리 폐하의 자리를 대신케 했다. 그리고 갑자기 서둘 듯 식민지 놀음이 마지막 코스로 돌입해갔다. 그 첫째는 우리 임금님을 퇴위시킨 그 달로 꼭두각시 황제와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란 새 조약을 맥은 일이었다. 우리에게는 <정미 7조약(丁未七條約)>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합방의 전야제였다. 그 다음은 거창한 황제 즉위식과 황태자 책봉식이었다. 가짜 태자를 제위에 올린 것도 부족해 가짜 왕자까지 태자로 봉한 것인데, 저희 딴에는 그렇게라도 멀쩡한 임금님을 잃은 우리를 무마한다고 꾸며냔 각본 같았다. 다음은 명목적이나마 남아 있던 군대의 해산, 일본인 차관(次官) 임면, 재판소 설치-<정미 7조약>에 있는 대로, 이 나라 사법 행정양권(兩權)의 주된 기둥들을 뽑아버리는 작업이다. 퇴위한 우리 임금님을 창덕궁에 가둔 것은 그해 11월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어떻게든 시해(弑害)하고 싶었겠지만, 나라 안의 사정이 뜻 같지 못해 취한 차선책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이 땅은 우리 폐하의 억지스런 양위와 정미 7조약에 항거하는 의병들로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그 위에 퇴위한 임금님까지 시해했다가는 정말 어떤 큰일이 터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기야 남몰래 독살하고 을사조약때 구해둔 가짜로 대역을 시키는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앞서 말했듯 그것은 너무도 탄로날 위험이 많았다. 그 뒤 십년, 우리 마지막 임금님의 행적은 오직 저들 일본인들의 정책적인 배려에 의해서만 우리 앞에 드러났다. 정책적인 배려란 시해의 의심을 면하기 위한 저들의 정기적인 이태왕(李太王) 동정(動靜)발표를 말한다. 거기에 따르면 우리 임금님은 전형적인 망국의 못난 군주였다. 다시는 야심에 찬 계획을 세우는 일도 없고, 왕자다운 위엄으로 일본인들의 잔학에 저항했다는 소문도 들지리 않았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회한과 오욕 속에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 전부인 양 보였다. 하지만 오늘날에 널리 믿기워지고 있는 소문처럼 그분의 삶이 그대로 어이없이 끝나버린 것을 결코 아니었다. 비록 몸은 퇴락한 고궁에 같혀 있어도 우리와 이 나라를 위해 일찍이 품었던 깊고 거룩한 뜻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셨다. 필요한 것은 다만 그 뜻을 펼 기회뿐이었다. 그러다가―드디어 그날이 왔다. 언제 들어도 눈시울 뜨거워지는 감격의 그날, 천 년이 지나도 우리에게는 오히려 새로워질 그날이. 끝내는 가짜 태자로 세웠던 황제마저 폐하고 일본이 합방이란 그럴 듯한 이름 아래 이 땅을 삼킨 지 9년째가 되던 해였다. 그 기미년 정월 어느 날 우리 마지막 임금님은 마침내 오랜 감금에서 벗어나셨다.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보는 심경으로 때를 기다리시다가 저들 일본인들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 같혀 있던 창덕궁에서 몸을 빼내신 것이었다. 일본인들의 방심은 그 무렵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이 땅의 공기때문이었다. 명성황후 시해때부터 을사보호조약, 정미 7조약을 거치는 동안 그토록 일본을 성가시게 하던 의병들도 그 무렵엔 잠잠했고, 서울과 지방 도시에도 배일(排日)의 기운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철저하게 대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는 합방이란 사건이 너무도 엄청나 모두지 실감이 나지 않은 우리가 잠시 머뭇거리며 살피고 있었던 덕분일 것이다. 우리 마지막 임금님의 그 같은 탈출은 그분에게는 십여 년을 참고 기다려 거두신 보람이었고, 우리에게는 마비와도 같은 머뭇거림과 살핌에서 벗어나 빼앗긴 땅을 되찾게 되는 계기였다. 몸을 빼치신 길로 은둔한 지사(志士)의 집을 찾으신 그분은 당신에게도 마지막이고 우리에게도 마지막인 교지(敎旨)를 팔도에 내리셨다. 강포한 일본이 눈길을 피해 몰래 전해졌디만, 신통하리만치 이땅 구석구석까지 전해진 그 교지는 우리의 대표를 서울의 주산(主山) 북악(北岳) 기슭에 불러모으는 내용이었다. 그 신분에 따라서는 선비「士」대표, 농민(農)대표, 공인(工)대표, 상인(商)대표에 화공(畵工), 악사(樂士)며 광대 백정도 머릿수에 따라 대표를 보내도록 했다. 그 믿는 바에 따라서는 유림(儒林) 대표, 불가(佛家)대표, 도교(道敎) 대표에 동학(東學) 서학(西學)을 빠뜨리지 않았고, 그밖에도 무리가 있으면 가리지 않고 대표를 보내도록 했다. 대표는 남녀 2만 명에 하나씩 보내도록 하니, 그 수가 꼭 천명이었다. 하늘이 우리를 저버리시지 않으셨는지 이 겨레의 본성이 원래는 그러했는지, 그일만은 이천만이 하나같이 비밀을 지켰다. 정한 날이 되자 흰옷 입고 갓쓴 이들이 줄을 이어 북악 기슭을 찾아드는데, 귀신 같다는 고등계 형사며 눈썰미 매섭기로 이름난 헌병은 물론 어리친 일본 강아지 한 마리 짖어대는 법이 없었다. 정오가 되어 마지막 도승지격인 그 지사가 모인 대표를 헤아려 보니 그 수가 꼭 천이었다. 모두 다 모였다는 보고를 받으시자 우리 마지막 임금님께서는 모두에게 잘 보이는 높은 바위 위로 오르셨다.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몸에는 곤룡포에 옥대를 둘렀으며 손에는 한 자루의 보도(寶刀)가 들려 있었다. 그날에 대비해 창덕궁에서 몸을 빼칠 때 미리 준비해온 차림이었다. 그분께서 먼저 지목한 것은 한쪽 바위 그늘에 모여 있는 선비대표들이었다. 「너희 넓은 갓쓰고 수염 길게 드리운 자들에게 말하노라. 우리 태조(太祖)께서 너희에게 의탁해 아조(我朝)를 일으키신 이래 비유컨대 너희는 이 나라의 머리였다. 이 나라의 모든 제도와 형률이 너희로부터 나왔으며, 오백 년의 문물과 예악 또한 너희로부터 비롯되지 않음이 없었다. 너희는 그 앎과 슬기로 인해 다른 부류는 겪지 않을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마찬가지로 다른 부류가 누리지 못할 번성도 누렸다. 스스로 수고롭게 일하지 않으면서도 더 많이 먹고 씀으로 다른 부류에기 진 빚도 많았으되, 눈이 어둡도록 읽고 머리가 세도록 생각해 베풂도 많았으며, 밝지 못한 길을 앞장서 더듬어가는 어려움은 있었으되, 보다 나은 세상은 연다는 자긍(自矜)도 컸으리라. 그러나 이제 너희의 날은 짐의 날과 더불어 다했다. 많이 누린 자는 많이 내놓아야 하고, 많이 빚진 자는 많이 갚아야 하며, 편안했던 자는 더 수고로와야 하고, 자긍했던 자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너희 궁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도 못했고 나라를 넉넉하게 하지도 못했다. 너희 앎은 가버린 날들에 치우쳤고, 너희 슬기는 살과 뼈를 잊었으며, 그리하여 너희가 연 새 세상도 언제나 낡은 세상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이 나라를 망하게 한 것도 시절도 아니요, 바다 건너 오랑캐도 아니며, 목인(睦仁)이나 이등은 더욱 아니다. 바로 너희 굳음이며 낡음이며 치우침이며 작음이며 가벼움이며 얕음이라 할 수 있으되, 어찌하랴, 먼저 짐과 조종(祖宗)의 죄가 아울러 하늘을 가리니 너희 허물을 탓할 겨를이 없다. 다만 바라노니, 너희 선비여, 앞으로는 어떤 가르침에 너희 행함을 의지하고 너희 앎을 걸든, 오늘로 밝아올 새날에는 지난 허물을 거듭하지 말라. 옳더라도 굳어지지 말며, 좋더라도 치우치지 말고 맞더라도 낡아지지 말라. 새로움에 가볍지 말고 이로움에 얕아지지 말려 힘 앞에 작아지지 말라.」 그리고 이어 농민 대표를 향했다. 「그을린 얼굴에 거친 손발을 가진 자들아. 너희는 베옷에 나물죽으로 견뎌왔으나 비유컨대 아조의 배와 가슴이었다. 너희가 힘써 앎을 얻고 몸가짐을 닦으면 선비를 낳았고, 수고롭게 갈고 뿌리면 이 나라 물산(物産)의 바탕을 이루었다. 그러하되, 돌이켜보면 열성(列聖)의 제도는 두루 갖추지 못하고 그 보살핌도 모자라, 너희는 항시 힘쓴 만큼 얻지 못했고, 수고로운 만큼 누리지도 못했다. 너희 겉은 천하의 큰바탕「大本」으로 추킴을 받아도 기실은 큰 앗김「사取」이었을 뿐이었고, 너희 속은 제 선 곳에 편히 머물고 넉넉함을 앎「安分知足」으로 꾸며져도 또한 기실은 억눌림과 시달림에 지나지 않았다. 돌아보고 살필수록 부끄럽고 두려우나 그보다 더한 것이 이제 다시 너희를 모질고 독한 바다 건너 도적의 손에 붙이는 일이라. 자식을 버린 어버이가 이보다 더 부끄러울 것이며 빌 곳없는 죄인이 이보다 더 두려우랴. 다만 훨씬 크고 무거운 게 앞날임에 기대 지난 허물 비는 일을 잠깐 미룰 뿐이다. 이르노리, 너희 천하의 큰 바탕이여, 오늘로 밝아오는 새날에는 그 앗김과 시달림과 억눌림을 거듭 겪지 말라. 너희 참음이 힘있고 못된 자들이 업신여김을 길러서는 안되며, 너희 내놓음이 저들의 앗음을 도와서는 안되고 너희 굽힘이 저들의 억누름을 불러서도 안 되리라. 외적에게 맞설 때도 겨레를 대할 때도 아울러 지녀야 할 너희 마음가짐이어야 할진저…….」 그런 다음 눈길을 돌린 곳은 장사치와 장인바치의 대표들이 모여선 비탈이었다. 「짐이 오래 전부터 이날을 꾀할 제 마주하기 가장 두려웠던 이가 바로 너희 상천(常賤)의 부류였다. 너희는 비바람 불고 눈길 미끄러운 장삿길과 오뉴월의 달아오른 풀무가와 동지섣달 얼어붙은 강해(江海)을 마다 않고 이 나라의 손발이 되어 일했으나, 열성의 덕이 미침은 한결같이 가볍고 엷었다. 즈믄「千」밤을 세워 우리 살이의 가멸음과 편의로움을 궁리해도 그 열매는 너희 것이 아니었고, 손발이 부르트도록 몸이 수고로워도 그 거둠을 누리는 자는 따로 있었다. 재주가 있어도 학문을 닦을 길이 없었고, 요행히 학문을 닦아도 세상이 써주지 않았다. 더러는 그 슬픈 바람「願」을 자식에게 걸었으나, 서얼「庶孼」과 한 가지로 타고난 굴레가 무거워 쉽게 벗을 길이 없었다. 이제 뉘우침 속에 가만히 돌이켜보매, 열성과 짐의 날이 다한 것은 하늘이 우리를 저버렸음이 아니라 우리가 하늘을 저버린 탓이라. 이 땅과 이 백성을 맡긴 하늘의 큰 뜻을 어겼으니, 그 가운데 가장 큰 어김은 너희를 바로 쓰지 못했음이다. 너희가 배타고 장사하는 일을 선비가 행실을 닦는 일과 나란히 추켜주었더라면, 저 미리견(美利堅) 아불리가(阿弗利加)의 넓고 기름진 땅이 어찌 양인(洋人)들의 오로짐함이 되었을 것이며, 자연의 법칙을 찾고 물(物)의 이치를 살펴 그 힘을 비는 일을 선비가 글을 읽음과 함께 높이 여겼으면, 어찌 철선(鐵船)과 화포(火砲)가 저들만의 것이었으랴. 그 어듭고 막힌 허물을 들추자면 한이 없으되, 그래도 한 가지 위자(慰藉)가 되는 일은 밝아올 새날이 너희의 날임일지라. 부디 스스로를 업신여기지 말고 너희 길을 가, 새날의 주인됨에 모자람이 없게 하라. 지난 외로움과 고달픔을 다시 겪지 않을 길도 그 같은 너희 길에 정진함이요, 이 땅을 삼키려는 외족들로부터 너희를 지켜가는 길도 또한 오직 그뿐이리라.」 우리 임금님께서도 그렇게 말씀을 맺으시자 사민(四民)이 잠시 숙연하였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원 통함이나 후회로움이 어찌 없으리오마는 무너져내리는 왕조의 장엄한 낙일(落日)이 주는 비감에 일시 마음 속의 원혐과 회한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거기다가 그 같은 우리 폐하의 말씀에는 무언가 단순한 자괴(自愧)의 뜻 외에 사죄와 격려를 아울러 보여주는 어떤 비장한 최후를 예감케 하는 데가 있어 한층 듣는 이를 감동시켰다. 잠시 당신이 신민들을 굽어보시는 우리 폐하의 용안(龍顔)에도 그들 못지않게 비감이 어렸다. 그러나 당신께서 그들을 불러모으신 까닭이 어찌 그런 감회를 펴심에만 있겠는가. 오래잖아 다시 왕자의 당당함을 회복하시더니 남은 무리를 향했다. 이번에는 그 믿는 바에 따라 대표로 뽑혀온 이들이었다. 「큰성인[大聖]과 버금성인[亞聖]의 높은 가르침도 끝내는 이 나라를 지켜주지 못했고, 석씨(釋氏)의 삼천불(三千弗)이며 노군(老君) 진인(眞人)의 법력(法力)과 도력(道力)도 이 겨레를 감싸기에는 넉넉하지 못했다. 서학(西學)이 비록 힘이 있다 하나 그 총에는 우리를 핍박하는 양이(洋夷)들이 오로지 하고 있으니 가히 믿을 바 못되고, 동학이 그들에게 항거코자 일어났으나 이니 오래 전에 꺽인 바다. 또 근자에 서양에는 이 같은 신불(神佛)의 가르침에 대신하여 무슨 주의니, 사상이니 하는 것이 일어나 사람의 마음을 끌고 있다고 한다. 워낙 그 갈래가 여럿이고 우기는 바가 각색이라 옳고 그름을 졸연히 분별하기 어려우나 그 또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진대 살피기도 어려울 만큼 대단할 거야 무에 있겠느냐? 곰곰이 헤아리면 너희가 지금까지 믿고 따라 온 옛 가르침들도 그 본뜻에서는 그릇됨보다 옳음이 많았듯이, 저들의 주의니 사상이니 하는 것도 생각건대는 다만 보다 잘살기 위한 사람의 궁리가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너히 모두에게 한 가지로 이르노리, 옛 가르침에 굳고 얽매이지 말 것처럼 새 가르침을 받아들임에도 지나치거나 흘리지 말라. 서로 마음을 열고 뜻을 합쳐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을 버리되, 먼저 이 나라와 겨레의 복된 삶부터 꾀하라. 다른 나라 다른 겨레를 생각함은 먼저 너희를 구한 뒤에도 늦지 않으리라. 이제 멀지 않아 홍수처럼 밀려들 무슨 쥐의니 사상을 대함도 또한 같다. 이 땅을 가르거나 겨례를 이간시키는 것은 그 이름이 아무리 아름답고 그 말이 아무리 그럴 듯해도 오히려 배척할 일이요, 이 땅을 살찌게 하고 겨레를 뭉치게 하는 것이면 그 이름이 소박하고 말이 서툴러도 마땅히 따르라.」 그 뒤에도 우리 폐하께서 다시 옥보(玉步)를 옮기시어 일일이 손을 잡듯 나머지 여러 부류의 대표를 찾으셨다. 한편으로는 숨김없이 지난 잘목을 비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앞날의 경계할 바를 일러주시기 거의 한 시각이었다. 그 말씀 어떤 것인들 버리고 취할 게 따로 있을까마는 전해야 할 말씀은 길고 주어진 시간은 짧아 한 가지로 모두 옮기지 못함이 한이다. 하지만 그래도 굳이 그 모두를 듣고 싶은 이가 있을까 일러두거니와,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즈음 매우 찾기 어려우나 그때 자기가 속한 부류를 대표하여 그 자리에 나갔던 할아버지들이 아직은 몇 분 살아계시고, 이미 고인이 되셨을지라도 똑똑한 자손을 둔 분은 구전(口傳)이나마 우리 임금님의 고명(顧命)을 전하셨다. 근세사의 한 비극적 종막이며, 우리 행복한 오늘을 위해서는 엄숙한 서곡이 되는 우리 마지막 임금님의 비장한 최후는 모든 백성들을 무리별로 마주하신 지 오래잖아 있었다. 정치와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던 이조 여인들의 유일한 예외일 수 있는 기생들의 대표를 보신 걸 끝으로 우리 임금님은 원래의 바위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를 향하여 크게 일렀다. 삼천리 구석구석까지 스미는 옥음(玉音)이었다. 「총성과 신애(信愛)로 이조 오백 년을 떠받쳐온 신민들이여, 그리고 본시 한 핏줄에서 갈라져 나온 겨레여, 다시 말하노니, 짐과 조종(祖宗)의 날은 다했다. 지난 날 하늘은 이 땅을 흐르는 여러 핏줄 가운데서 짐의 핏줄을 택해 이 나라를 맡기셨으나 불행히도 짐의 대에 이르러 남의 손에 앗기우고 말았다. 아득히 돌아보면, 이땅이 어떤 일도 짐과 열성이 이름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바 없으니, 이 나라를 망친 것 또한 짐의 핏줄이 되리라. 허나 아름다운 이름은 핏줄을 거슬러 그 조상에 미치어도, 죄와 욕은 핏줄기를 거슬러오르는 법이 아니다. 나라가 망한 것도 짐의 대(代)요, 모든 허물 또한 이 한몬에 있으니, 너희 원망이 핏줄을 거슬러 열성의 거룩한 넋에 미치지 않게 하라. 오늘날에는 미리견(美利堅)이나 태서(泰西)의 몇몇 나라들처럼 백성이 그 스스로 다스리는 제도가 생겼으나 우리 태조께서 이 나라를 여실 때는 만방을 둘러봐도 다스리는 이는 다만 군주뿐이었다. 설령 군주 한 사람이 나라를 좌우하는 제도가 그릇되었다 한들, 어찌 그 허물을 우리 태조대왕께만 돌릴 수 있겠는냐? 또 저쪽에서는 군주를 두면서도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가 부강해지는 제도가 궁리되기도 했으나 마찬가지로 열성의 시절 이 나라에는 너희가 견뎌온 그 제도밖에 알려진 게 없었다. 그 제도나마 거칠고 그듯되이 편 일을 말한다면 모르되, 그밖에 알지 못해 그 제도를 취하신 일이야 어찌 열성의 허물이 될 것이랴. 거기다가 나는 들었다. 서양의 발달된 제도란 것도 군주가 스스로 깨달아 베푼 것은 하나도 없다고. 모두가 그 신민들이 궁리하고 내세우고 싸워 마침내 이룩한 것일 뿐이니, 그렇게 못한 너희 허물은 또 어쩌겠느냐? 너희 가운데도 그릇된 다스림에 소리높여 항거한 이가 있고, 때로는 무리지어 난리를 꾸미기도 했으나 한결같이 그 과녁은 사람이었지 제도는 아니었다. 어떤 민란(民亂) 어떤 역모(逆謀)에 군주를 없애고 공화국을 열자고 내세운 일이 있으며, 세 정승 여섯 판서를 없애고 의회를 두자고 주장한 적이 있느냐? 다만 너희가 바란 것은 크면 임금을 바꾸는 것이요, 작으면 탐학하는 목민관(牧民官)을 벌하라는 정도였다. 그러므로 신민들이여, 겨레여, 이제 짐은 한 고명(顧命)으로 그대들에게 바라노라. 부질없이 지난 그릇됨을 따짐에 날을 허비하기보다는 망한 나라를 새로 일으키는 데 날을 바치거라. 몰라 저질러진 지난 허물을 원망하기보다는 알면서 행한 죄악에 분한(憤恨)을 품으라. 죽기로 싸워 저들 간악한 섬오랑캐에게 나라 빼앗긴 부끄러움을 씻으라. 이 자리를 끝으로 짐도 더는 그대들의 임금도 주인도 아니다. 태조께서 하늘로부터 받은 다스림의 권한을 너희 모두에게 돌리니 일후 이 나라는 짐의 것이 아니고 그대들의 것이다. 이천만이 각기 명군(名君)이 되고 현주(賢主)가 되어 일찍이 없었던 복된 나라를 이루거라. 짐은 다만 이 자리를 빌어 나라를 조정으로부터 물려받은 그대로 그들에게 돌려주지 못한 허물을 스스로 벌하고자 할 따름이다.」 그날 이 땅에서 우리 임금님의 그 같은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은 아마도 일본인들과 그 앞잡이들뿐이었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 땅과 우리를 조금이라도 더 쥐어짤 궁리와 만주를 삼킬 궁이로 겨를이 없고, 앞잡이들은 그런 일본인들이 던져주는 더러운 벼슬과 재물로 한몸 살찌울 궁리에 바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도 뒤이어 이 하늘을 뒤덮는 흰 빛줄기는 보았으리라. 우리 폐하께서 뽑으신 보도(寶刀)에서 뿜어져나오는 빛줄기였다. 「이 보도는 태조대왕께서 지리산 기슭을 치달으시며 왜구를 베이실 때 쓰시던 성물(聖物)이다. 내 이름 물려받고도 오히려 그 왜구의 후예에게 나라를 잃었으되 남은 일은 다만 이 칼로 스스로를 베어 벌함뿐이다. 내 주검을 염(殮)할 때는 얼굴을 가죽으로 싸매고, 관곽(棺 )과 봉분(封墳)은 서민의 예로 하라. 죽어 구천에선들 무슨 낯으로 열성을 뵈오랴. 무덤인들 뒷사람의 손가락질을 어떻게 감당하랴.」 그 비장한 외침과 함께 우리 마지막 임금님께서는 날선 보도(寶刀)를 안은 채 서 계시던 바위에서 뛰어내리셨다. 그리고 왕자들의 참혹한 죽음을 눈 앞에서 보시면서도, 그 뒤 욕스런 저들의 꼭두각시 노릇과 다시 고난에 찬 십년을 보내시면서도, 끝내 자진(自盡)하지 않으셨던 까닭을 그제서야 뚜렷이 보여주셨다. 사사로운 정분이나 분한(憤恨)으로 자결하신 것이 아니라 나라잃은 죄를 물어 공의로 스스로를 처형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났다. 우리 마지막 임금님의 옥체가 땅으로 굴러떨어지면서 안고 있던 보도에 베인 가슴이 열리는 순간 뇌성과 함께 한 마리 희고 거대한 용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흰구름처럼 까마득히 치속더니 곧 이천만 마리의 작은 용이 되어 비처럼 삼천리 구석구석까지 쏟아졌다. 얼핏 보아서는 마구다지로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우선 그 북악 기슭에 떨어진 것은 꼭 천 마리였다. 삼 대 열 아홉 명과 머슴에 침모(針母)까지 합쳐 가솔(家率)이 스물일곱 명인 인사동 김부잣집에는 꼭 스물일곱 마리가 떨어졌고 경상도 두메산골 홀로 사는 산지기 집에는 한 마리만 떨어졌다. 환웅과 웅녀이 자손이면 누구에게든 한 마리씩 떨어진 셈이었다. 이어 그 작은 용들은 익히 아는 길을 가듯 각기 한 사람씩을 찾아 그 가슴 속에 자리잡았다. 낮잠 자는 늙은이나 우는 아이에게는 크게 벌린 입을 통해 들어가고, 짐승을 겨냥하고 있는 포수에게는 크게 뜬 외눈을 통해 들어갔다. 대낮 정사(情事)를 엿듣고 있던 여관집 머슴놈에게는 귓구멍을 통해 들어갔으며 그 시각 칙간을 타고 앉은 아낙에게는 샅을 통해 들어갔다.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았고 남자 여자도 가리지 않았다. 친일파며, 저들의 앞잡이, 보조원, 정보원도 가리지 않아―어쨋든 이 겨레면 모두 작은 용 한 마리씩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그래도 빠진 자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 할미 가운데 하나가 임진왜란 때 겁탈을 당해 이땅에 떨어진 왜병의 씨일 것이다. 그밖에 또하나 덧붙일 얘기가 있다면 신통하게도 모든 친일파들이 그날로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춘 일이다. 우리 임금님의 마지막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우리 모두 가슴에 한 마리씩 품게 된 그 작은 용의 조화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래야 당연하다는 생각은 모두가 한결같을 줄 믿는다. 역사는 가정(假定)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에 그 같이 장려한 옛 왕조(王朝)의 낙일(落日)이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뒤 우리가 겪어야 할 불행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만약 우리 마지막 임금님께서 자신을 베어가며 새로운 충성의 구심점을 마련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갑작스런 권위의 부재로 큰 혼란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흐지부지 사라져버린 옛 권위에 대한 실망은 전통 속에서 어떤 원칙과 방향을 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을 가로막았을 것이고 맹목적일 만큼 어떤 새로운 것에서 그것들을 찾게 만들었을 것이다. 백 사람이 백 가지 주장을 내세우고, 천 사람이 천 가지 길을 걷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충성의 구심점이 없고 확립된 권위가 없으니, 시비는 커지고 다툼은 격화될 것이며, 분열과 반목을 이 겨례의 보편적인 고질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는 일본과의 효율적인 수복전쟁(收復戰爭)도 가능했을 리가 없다. 친일도 하나의 새로운 주의일 수 있으니, 나름의 논리만 마련하면 버젓이 활개칠 수 있었을 것이고, 기회주의도 하나의 세련된 행동철학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요행 반일 또는 구국의 세력이 모여도 머릿수가 열 명이면 파벌은 열한 개요, 모든 대일(對日)전쟁은 열에 아홉이 변절이나 밀고로 모의에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일본을 상대로 한 수복전쟁이 그 모양이 되면 이 나라의 회복을 싫어도 남의 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익도 크지만 투자와 위험도 큰 장사가 전쟁이다. 어떤 나라가 본전 밑가는 장사를 하려 들 것인가. 그렇게 되면 이 나라의 새로운……아아, 그만하자. 비록 가정이라 할지라도 공연히 우울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어쨌든 우리 마지막 임금님은 그렇게 돌아가셨고 우리 옛 왕조의 해는 그렇게 졌다. 그 뒤 그해 3월 1일에 바로 시작했으나 일년도 안돼 실패로 끝난 제1차 수복전쟁(또는 기미평화전쟁)이며, 이듬해 다시 시작해 중강진(中江鎭)부터 한치 한치 빼앗듯 우리 땅을 되찾은 제2차 수복전쟁(또는 25년 전쟁), 그리고 수복 뒤의 몇 가지 재미있는 사건이 있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다. 여기서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행복한 이 오늘의 출발에만 한정되었고, 이제 그 이야기는 끝났다. 제1차 收復전쟁사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대처 소처 가릴 것 없이 구석구석 골짝 골짝 온 놈이 온 입으로 온 말을 떠들어댄다. 3 1운동이네 만세 사건이네 하는 게 바로 그건데, 입이야 말하라고 뚫린 구멍이라고는 하지만 또 입은 가로 찢어져도 말은 바로 하란 소리도 있지 않은가. 나발을 불어도 바로 알고 분다면 누가 뭐라할까마는, 뭣도 모르는 놈이 뭣보고 탱자탱자 해대는 식이니 듣기도 민망스럽거니와 남 알까 겁난다. 마이크 좋다고 아무데서나 난 척하고 주절주절댄 어른, 볼펜 잘 나온다고 이책 저책에 함부로 개발새발 써갈긴 양반, 그리고 그것도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인 대로 읽은 대로 여기저기서 나불거린 친구, 모두가 다만 정수리에 호된 절구공이질이 제격일 따름이다. 먼저 이름부터 따져보자. 그 찬연한 역사의 날을 일컫는데 가장 흔한 것으로는 3 1운동이라는 게 있다. 3 1운동이라니? 아니 운동이라니? 우리가 뭐 그날 모여 뜀박질을 했나, 물구나무서기를 했나, 공을 찼나, 개구리헤엄을 쳤나? 잘 해야 양코배기들의 무브먼트란 말을 쉬운 대로 바꿔 쓴 것일 테지만, 세상엔 쉽다고 해서 함부로 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어느 싸가지 없는 놈이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간의 피가 튀고 살이 흩어지는 싸움에다 그런 낭창낭창한 이름을 붙인다더냐? 더 고약한 것을 기미만세사건이니 독립만세사건이니 하는 이름들이다. 사건이라니? 뭐 그날 강도가 은행을 털었나. 광산 막장이 무너졌다. 비행기하고 비행기가 박치기했나, 아니면 개가 사람함테 물리기라도 했나? 또한 양코배기들이 저희 행악을 얼버무리지 위해 만들어낸 크라이스시스나 카타스트로피 같은 역사 용어를 억지로 번역해 쓴 것일 테지만 꿔다쓰기치고는 정말로 되먹잖은 꿔다쓰기다. 일본 순사 나부랭이들의 보고서에서라면 모를까, 어떻게 2천만의 성전(聖戰)에다 버르장머리 없다 못해 해참하기까지 한 사건이란 말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또 따로이는 의거(義擧)란 말도 쓰이는 모양인데 그 역시 해괴하기는 운동이나 사건보다 덜하지 않다. 의롭게 일어났다(義擧)면 뭐 그 뒤에는 우리가 불의롭게 주저않기라도 했단 말인가. 도대체 쥐대가리가 아닌 담에야, 어떻게 그 엄청난 역사의 분수령에다 그 따위 일회성의 왜소한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인가. 무릇 귀 있는 자는 들어라. 기미년 3월의 그 일은 기우는 영광의 꽃그늘에서 잠시 졸다가 약삭빠른 섬나라 오랑캐에게 산과 들을 빼앗겼던 우리가 분연히 깨어나 벌였단 거룩한 수복전쟁(收復戰爭)이었다. 다만 뒤이은 25년의 대전역(大戰役)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까닭에 굳이 그것과 구분지어 이름한다면 평화전쟁 또는 제1차 수복전쟁쯤이나 될까. 그런데도 그걸 무슨 운동 어쩌고 하는 작자가 있거든 다음말 나오기 전에 귀쌈부터 올려놓고 보아라. 무슨 사건 어쩌고 하는 녀석이 있거든 배때기를 힘가짓껏 걷어차주고, 의거 어쩌면서 나서더라도 촛대뼈(정강이뼈)부터 구둣발로 까놓고 보아라. 듣기로 사람을 낱낱으로서건 무리지어서건 먼저 스스로를 업신여긴 다음에야 남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한다 했으니, 먼저 스스로를 업신여긴 그들이 무슨 꼴을 당한들 할말이 있겠는가. 하지만 더욱 해참하고 괴이쩍기로는 그 성전(聖戰)을 도맡아 치르어낸 사람들에 대한 엉터리 풀이들이다. 어느 시러베아들놈은 민족 지도자가 앞장서서 이끄니 민족이 따라간 것이라 하고 어느 개똥 통천(通賤)이는 인민(人民)의 지도자가 영도하여 인민이 궐기한 것이라 한다. 유식한 체 내뜨기 좋아하는 놈은 엘리트 계층이 어쩌고저쩌고 씨월거리는가 하면, 마구잡이로 후려대기 좋아하는 놈은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우리네 까막눈들의 한바탕 마당놀이쯤으로 뻑뻑 우겨댄다. 뭣이든 그쪽으로 찍어다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얼치기들은 여기에도 가진 자와 못가진 자를 끌어들여 넓죽대고, 핫바지에 뭣 볼가지듯 톡톡 볼가지 잘하는 놈은 또 여기다 민중인가 뭔가를 끌어와 두루뭉수리로 쳐바르려 한다. 야, 이 말똥 밟고 소똥에 엎어졌다가 닭똥이나 한 입 물고 일어날 같잖은 것들아. 잃은 제 땅 뺏긴 제 밥그릇 찾는 일에 민족 따로 있고 인민 따로 있더냐? 엘리트라니, 뭐 말라죽은 게 엘리트며 제비 한 마릭 봄을 만들어내는 것 봤냐? 가난한 게 무슨 큰 권리며 무식한 게 코에 쳐바르고 다닐 자랑이야? 다 합쳐야 2천만에 요리 가르고 조리 나누어 차(車)떼고 포(包)떼며 어쩌겠다는 것이냐? 그걸로는 <운동>이나 <사건>도 과분해 사고(事故)밖에 안됐을 게다. 그리고 민중 말인데―이제니까 털어놓거니와 너무 민중, 민중 하지 마라. 이 민중아, 시도때고 없이 자꾸 민중 내밀다 정작 민중 나갈 만한 단대목에는 헐값되어 못팔라. 거기다가 기미년 그 일의 원인이며 경과에 결과까지 다 꿰차고 앉았다는 듯 떠벌이는 수작들 보면 어이없고 속상하다 못해 허파가 뒤집히고 콩팥이 떨릴 지경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했고, 또 이르기를 칼로 지은 죄는 온[百]해면 씻기지만 말[言語]로 지은 죄는 즈믄[千]해를 간다 했다. 도적을 귀멀었다니, 도적이 한 말을 믿고 퍼뜨린 죄도 자손 3대(代)에는 미치리라. 무엇이든 우리의 것은 작고 못나게만 몰아간 섬나라 도적들의 말과 글을 그대로 믿고 퍼뜨리는 자, 참으로 두려워하고 또 두려워할 일이다. 이제 그 일이 진실을 말하리라. 내 진작에 우리가 오늘처럼 지겹도록 행복해지기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해두기로 작심했고, 또 그 출발은 이미 얘기한 바 있었다. 우리 옛 영광의 장려한 낙일(落日)에 대해, 우리 마지막 임금님의 처절하여 오히려 아름답고, 의로워 거룩했던 그 죽음에 대해. 그런데 그게 우리들 행복한 오늘로의 크고 밝은 길을 연 것이라면, 이제 얘기하려는 것은 그 길로 출발한 우리가 오늘에 이르기 위해 첫 번째로 넘어야 했던 높고 험한 재「嶺」였다. 먼저 기미평화전쟁「己未平和戰爭) 또는 제1차 수복전쟁이 터지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자. 그 전쟁이 일본을 상대로 한 것인 만큼 그 첫 번째 원일을 일본에서 찾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옳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례(實例)를 대는 데 이르면 지금껏 알려져온 것들은 아무래도 일본의 간교한 장난이 끼어든 것 같은 의심을 버릴 수가 없다. 아는 척 그 일을 말하는 이들이 항용 앞머리에 내세우는 일본이 헌병경찰 제도만 해도 그렇다. 그들이 헌병, 헌병보조원에다 이런 저런 앞잡이 끄나풀들을 풀어 우리 애국투사들을 죽이고 감옥에 처넣었다거나 일체의 결사(結社)운동 및 언론활동을 탄압했다는 따위, 막연하고 추상적인 얘기는 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실례에 대해서는 언제나 구렁이 담넘어가는 식이다. 다른 일이야 너무 끔찍해서 차마 말하지 못한다 해도 그때 일본 헌병들 중에는 우리 애국투사의 불알 말린 걸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자가 상당히 많았다든가. 헌병이나 경찰의 아이들은 학살한 우리 여인네에게 도려낸 아기집「子宮」을 풍선처럼 불며 놓았다는 얘기 정도도 왜 하지 않는가. 대정「大正」 말년 일본의 어떤 지방지(地方紙)에 보면 조선에서의 임기를 끝내고 돌아온 나까무라 곤조라는 퇴역 헌병대위가 귀향 선물로 자기 현(縣)의 주민 모두에게 말린 조선인 불알 두 개씩을 나누어주었다는 단신(短信)이 버젓이 나와 있고, 또 싱가포르가 일본에 함락된 해의 어떤 시사잡지에는 고무가 귀했던 어린 시절에 조선여인들의 아기집「子宮」을 불며 놀던 일을 추억하는 쪼무라 세이끼란 은행원의 감동적인 회고담이 실려 있다. 그런 얘기조차 점잖은 입에 담기 어려워 내놓고 못한다면 일본 헌병이나 경찰에게는 그때 몹시 재미있었던 <사무라이 흉내놀이>는 또 어떤가. 새 군도(軍刀)를 지급받으면 그 칼날이 한꺼번에 몇 명이나 벨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마침 잡혀와 있던 우리 애국 투사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베어보던 일이며, 담배내기로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사람의 목을 떨어뜨리는 시합을 벌여 역시 마침 그 부근에 있던 동포를 끌어다 목베던 일 따위는 요즈음 눈알 푸른 군대가 영내(營內)에서 하는 야구나 테니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모든 구체적인 실례는 다 놔두고 그저 투옥 학살 , 어쩌고 하는 식으로만 어물쩡 넘어가는 속내를 알 수 없다. 일본의 경제적 착취도 그렇다. 맨날 한다는 소리가 <토지 광산 철도 금융 등 모든 분야의 이권을 독점하였으며…… 우리민족의 경제 발전을 극도로 제한하여……>하는 따위 추상적이고 애매한 설명이거나 기껏해야 <국내의 대다수 농민들은 소작농(小作農) 화전민(火田民) 등으로 전락하였으며, 그나마도 살기 어려워 만주로 흘러가기까지 했다>가 든다고 드는 실례다. 지금이 아무리 행복하고, 또 괴로웠던 시절의 추억은 빨리 잊는 편이 낮다고 하지만, 그래도 기억에서까지 지워버리는 건 자식기르는 도리가 아니다. 우리네야 그럭저력 몇십 년만 뻗대면 지금의 행복을 누리면서 죽어갈 수 있으나 뒤에 남아 몇천 몇만 년 저들 일본인들과 상종하며 살아갈 자손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을 위해서는 저 간교하고 악독한 섬나라 족속의 옛 행해를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칠 게 없다. 굶어죽는 자식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우리 아버지들의 피눈물을, 삼베 홑적삼으로 매서운 만주 대륙의 찬바람을 견디며 중국인의 종살이를 자청해야 했던 우리 어머니들을.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베풀었던 그 철저한 우민정책(愚民政策)도 제1차 수복전쟁의 원인으로 내세울 때는 느슨해지는 감이 있다. <민족 의식의 성장을 억누르고 수준높은 학문이나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박탈했으며……> 따위의 말로 어떻게 그때 우리가 당한 정신적인 능욕을 다 드러내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참고로 1910년 일본 문부성(文部省)이 반도의 각급 학교장에게 보낸 비밀훈령 하나만 들어보자. 「반도(半島)에서 봉직하는 각급 학교장은 조선인이 열등감 무력감 및 자기비하(自己卑下) 심리를 고취 격려하되 특히 다음 사항을 조선의 청소년에게 주지시키도록 힘쓰라. 1. 조선에는 역사가 없다. 또는 예속의 역사다. 1. 조선에는 문화가 없다. 또는 예속의 문화다. 1. 조선에는 사상이 없다. 또는 예속의 사상이다.」 그 훈령은 다시 1918년이 되면 더욱 끔찍해진다. 「각급의 학교장은 기왕에 해온 정신 교육을 가일층 강화하여 아래 사항을 조선의 청소년으로 하여금 신념케 하라. 1. 조선이 대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역사이 영광이다. 1. 조선인이 천손민족(天孫民族)인 내지인(內地人)의 마소가 되어 일하는 것은 살아서의 보람이며, 살과 뼈로 천손을 봉양함은 죽어서의 거룩한 성취다. 1. 조선의 남자는 단종(斷種)으로 천리(天理)에 순응하고, 여자는 우수한 내지인(內地人)의 씨를 받는 것을 자랑으로 삼으라. 그리하여 되도록 조선인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인간임을 잊게 할 것.」 그밖에도 저들 교육정책의 혹독하고 악랄함을 보여주는 문서들은 따로 책을 묶어도 열 권을 될 만큼 많다. 그런데도 역사책은 언제나 알아듣지도 못할 염불 같은 소리만 되뇌다. 젊잖은 것이 틀림없이 미덕이긴 하되 모든 곳에 다 미덕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작 한심한 것은 그 다음부터이다. 제1차 수복전쟁의 두 번째의 원인으로 흔히 씨부렁대는 것은 윌슨인가 뭔가 하는 멀대가 소리소리 외쳤다는, 싱겁고도 웅큼해빠진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인가 민족자살권유인가 하는 것에 우리가 자극받고 고무됐다는 엉터리 수작이다. 우리가 뭐 등신인가 아니면 그때 우리 2천만이 한꺼번에 해까닥 해 무슨 골빈당이라도 꾸몄단 말인가. 그쪽 터럭 노할고 눈알 푸른 것들의 장단질에 놀아나다, 헤이그인가 뭔가 하는 곳에서 열린 <힘세고 못된 놈들 저희끼리 안싸우고 힘없는 놈 잡아 사이좋게 나눠먹기 회의>에서 욕을 봐도 쌍욕을 본 게 언젠데 또 그것들의 장단질에 놀아난단 말인가. 이준(李儁)열사의 이역의 외롭고 분한 으로 만들고, 우리 마지막 임금님을 그나마 옥좌(玉座)에서 끌어내린 것으로 끝나버린 그 밀사(密使) 사건이 있었는지 아직 13년도 채 차기 않았는데 또 그 비슷한 짓을 할 만큼 우리가 밸빠지고 속없었단 말인가. 먼저 그 윌슨인가 멀대가 대통령으로 있던 아메리카합중국이란 나라부터 한 번 짚고 넘어가자. 저희들이야 저희 나라 열린 얘기를 할 때 잔칫상 웃기처럼 청교도(淸敎徒)와 메이플라워호(號)부터 앞세우지만 거기부터 사(詐)자가 들어간다. 그 나라가 낡고 부패한 구라파의 찌꺼기들―날치기 들치기 소매치기 퍽치기에 강도 사기꾼 노름꾼이며, 이런저런 불한당과 변태성욕자, 생피붙은 놈, 색광(色狂)에다 절뚝발이 외팔이 애꾸눈 섞고, 빈털터리 한탕주의자며 종교적 광신자를 양반으로 얹어 처음 시작했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메이플라워호에 탄 패가 기중 낫다고 보아 저희 역사책 앞머리에 내세우지만 그들에게도 청교도 혁명의 피비랜내와 크롬웰의 독재를 가능케 했던 광신의 냄새는 어쩌지 못한다. 하기야 길가의 잡호가 더 질기고, 시궁창의 미꾸라지가 더 잘 살찐다고, 그들의 원초적 생명력 하나는 감탄해도 좋다. 어쨌든 이판사판 알정불정 덤비니 인디언은 박살나고 산과 물은 거덜나도 한 이백 년 지나면서부터는 살 만큼 되었다. 그러자 잘 참던 것도 못참아 일어난 게 독립 전쟁이고 우여곡절 겪은 끝에 세운다고 세운 나라가 호왈 아메리카합중국이다. 이제야 거드름 피워가며 옛말하듯 이리 꾸미고 저리 싸발라 그 시절 얘기를 서부극(西部劇)이란 그럴 듯한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 보여주고 있지만, 바로 말하자면 그게 어디 사람 살 곳이던가. 그래도 철이라고 든 것은 검둥이 뜯어먹는 문제로 저희끼리 수틀려 치고받다가 피탈이 나도 크게 난 남불전쟁 뒤부터가 되겠다. 이제는 검둥이들을 뜯어먹어도 살 만한게 된 동북부와 아직은 검둥이를 더 뜯어먹어야 할 남서부가 싸운 그 피투성이 내란에서 운좋게 동북부가 이기면서 그나마 인도(人道)라는 이상에 반문이라도 뜬 듯하다. 한때 수백만에 이르던 아메리카 인디언이 겨우 멸종의 위기를 면한 것도 그 덕분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타고난 핏줄이 있어서인지 건국 2백년에 대외(對外)출병이 없었던 해가 단 20년도 안되는 게 바로 그 나라라는 얘기는 이미 했다. 한때 몬로주의(主義)라는 걸 내세워 불간섭을 우긴 적도 있으나, 기실 그 몬로주의란 게 <엉덩이를 자유자재로 흔들 수 있는 권리>라는 마릴린몰로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쯤은 세상이 널리 아는 바다. 이핑계 저핑계로 미서전쟁(美西戰爭)을 일으켜 필리핀을 널름한 게 언제던가. 태프트가 가쓰라에게 한반도에서의 우월권을 인정해준 것도, 실은 태프트 개인이 물렁해서라기보다는 씹지도 않고 삼킨 필리핀의 일본이 토해놓으라고 덤빌까자 지레 속이 켕긴 본국의 훈령 탓이었다. 그 아메리카합중국의 대통령이 그런 소리를 떠들썩하게 해댄 것은 아마도 1차세계대전에서 얻은 그 나라의 자신감때문이었으리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또는 이웃집 불난 김에 오줌지린 속옷이나 말리고 보자는 식으로, 구라파 것들 싸움 구경이나 하고 있다가 눈깔 뒤집힌 독일 잠수합에 콧등이 쏘이고야 불끈해서 그 싸움판에 뛰어들었지만, 끝내 놓고 보니 뒷맛이 그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큰집인 셈이라 마음 한구석으로는 은근히 겁먹고 있던 구라파의 올망졸망한 것들 알고 보니 별 것 아니었고, 그때껏 앓고 있던 저희들의 구라파 콤플렉스가 오히려 터투니없었다. 그런 별볼일없는 늙다리들의 허세에 주눅들어 보낸 세월이 원통했고, 더구나 그들이 세상 구석을 모조리 나누어 차고 앉도록 구경만 하고 지내온 게 새삼 분통터졌다. 생각 같아서야 이것저것 볼 것 없이 귀쌈 한 대씩 올려붙이고, 아프리카건 아시아건 그 늙다리들이 차지하고 있던 것은 모두 뺏아버리고 싶었지만, 중구난방(衆口難防)이라고 그렇게까지는 차마 못해, 엇비슷이 해본 소리가 그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였던 듯싶다. 약소민족(弱小民族)이 들으면 눈물겹게 고마운 소리지만, 구라파의 늙다리들에게는 차고 앉은 것 다 내놓고 새로 시작해보자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그 속다른 소리에 들떠 자결(自決)을 하려고 들었겠는가. 자결(自決)을 자살로 보았다면 또 모르되, 민족 광복의 성전(聖戰)을 어떻게 수십만 리 바다 건너 노랑머리 대통령이 한 번 해본 소리만 믿고 시작했겠는가. 우리 스스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리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경박하고 속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행복해지기는커녕 그들에게 한 덩어리로 뜯기어도 큼직하게 뜯기었을 것이다. 이 비슷한 걸로 더욱 눈튀어 나올 소리는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떠들고 있을 무렵 레닌인가 뭔가 하는 작자가 했다는 그보다 더 엉큼한 수작이 우리 <인민>을 궐기시켰다는 주장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도 유분수고, 아니 밴 아기 내놓으라고 떼를 써도 유분수지,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보고 써대는 어거지들인가. 반만 년을 모여 살다 보니 우리 중에 더러 어리석은 짓을 한 사람도 있고, 때로는 무리지어 턱없이 촐랑대다가 낭패를 본 적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너무했다. 해도 너무했다. 저 윌슨을 얘기할 때처럼, 이번에도 먼저 그 레닌인가 옘병인가 하는 작자가 수상인지 주석(主席)인지 서기장(書記長)인지 하는 자레에 앉아 빨래 쥐어짜듯 제 백성을 쥐어짜고 있던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인가 뭔가 하는 그 놈의 나라부터 살펴보다. 얼마 전 우리 큰 광대 하나가 그 나라를 놓고 한판 잘 놀 적이 있는데, 그때 시작은 대강 이랬다. 시장이 팥죽이요 목마른 놈 샘파느니, 가보다 동서남북 위아래로, 어디 한 번 가보자. 섣달 그믐날 흰떡맞듯 오지게 얻어터지더라도 가보자. 동서남북 위아래고 곰같이 어그적 어그적거리는 러시아로 우리 한 번 가보자. 러시아로 들어간다. 러시아로 한 번 들어가는데 절차도 복잡하고 수속도 복잡하고 검열심문 눈초리도 아조 복잡하구나. 정식 나라 이름을 물어보니 한 놈은 이반, 표토르, 에카쩨리나의 짜르 러시아라 불러라 이르겄다. 한 년은 도스토엡스키, 레온체프, 솔로비요프의 메시아 러시아라고 불러라 이르겄다. 또 한 놈은 거만스럽게 가라사대 스텡카 라진, 푸카쵸프와 크로포트낀과 마프노의 왼갖 중생들의 민중 러시아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겄다. 택시를 잡아타고 거리거리 골목골목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털렁털렁 돌고 돌아다니며 운짱에게 이 나라 역사를 한 번 물어보니 운짱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털렁털렁거리는 택시 장단에 잉아걸이로 노래부르듯 아조 우렁차게 엮어댄다. 「흑해 북쪽 숲속에 칼파치라 산맥 동쪽 벌판에 드네프르류 강가에 살던 슬라브족, 이란족, 고트족과 뒤섞여 노르만족과 엇섞여 노르만에서 그리스로 가는 길가에 강물가에 숲속에 모여 키에프공국에 모여 모여 비잔틴의 그리스 정교 폴란드의 가톨릭 다 받아먹고 알렉산드르 베브스키 독일 기사단 무찔러 무찔러 돈스코이가 타타르족을 마침내 무찔러 몽고의 멍에, 폴란드의 멍에, 리투아니아의 멍에, 모조리 다 깨뜨리고 블라디미르 갈리치볼리니, 트베리, 노브고르드공국 싸그리 한데 다 합쳐 드디어 쌍두독수리 모스코바 대공국 러시아가 지구 위에 나타났겄다.」 식당에서 밥 먹다가 스탈린 같은 수염을 연속 빗질하고 자빠졌는 주인더러 계속 역사를 물어보니 손발 들입다 휘젓고 얼굴 표정 막 써가며 성호까지 그어대면서 신나게 떠들어댄다. 「법전이 공표되고 농노제도가 시작되었것다. 교회는 제 재산과 권리를 감싸려고 오오 알렐루야 모든 권력은 하늘로부터 나온 것이니 오오 알렐루야 이반 대공을 이제부터 짜르라 불러야 마땅하도다 오오 알렐루야 알렐루야. 전국회의를 소집하여 법전을 개정하고, 절대군주제, 중앙집권제, 국민개병제, 신분계급제, 인두세제와 공노의 일체 권리박탈을 선포한 뒤에 오프리치나, 오프리치나, 오오 무서운 무서운 오프리치나! 특수 영지는 꽉꽉 죄어 힘센 귀족들은 산 채로 불알을 까버리고 시베리아 꿀꺽, 볼가강은 후루후루, 아조프는 홀랑, 발트해로 쳐들어가 콱 거머쥐고, 북극해로 쳐들어가 확 잡아먹고 흑해를 왕창 크리미아를 와장창 폴란드를 와장창창 프랑스까지 쳐들어가 동방무역 서방무역 어서 옵셔 유럽문명은 언제나 문호개방 폴란드 독립운동 무자비하게 짓밟고 말뚝을 꽝 그리스 독립운동 윗전에서 살살살 부채질하며 남쪽으로 살살살살 에집트 독립운동에 감겨든 투르크 잽싸게 원군보내며 잽싸게 소아시아 꿀꺼덕 헝가리 독립운동 가차없이 짓뭉개고 혈을 질러 콱……」 (後略. 김지하 《南》중에서) 이 광대가 자칭과는 달리 먹물이 들어도 한참 든 데다 본시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라 그 소리가 부드럽고 말이 점잖으니, 자칫 그나라와 그 족속이 그럴 듯해 보일 수도 있으나, 그게 그렇지 못함은 또한 천하가 다 안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보면 그 땅이야 넓지만, 그걸 천(千)이라 쳐도 똑똑한 놈 셋보다 못한 얼음판이요, 거기 사는 인종도 따져보면 잡되고 지저분하기가 아메리카합중국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그 땅이 오죽했으면 저 걸신들린 게르만족이며 무작스런 훈족에 바이킹까지 쳐다보지 않았을까. 그 인종이 오죽했으면 유럽에서 제일 늦게까지 징기스칸 망령에 질려 있었으며 또, 유럽에서 제일 늦게까지 동족을 노예로 부리며 버텼을까. 땅이 넓고 길 멀고 날 차웠기 망정이지, 그 중 하나만 아니었더라면 그 뒤로는 그 나라 그 인종은 쑥밭이 나도 여러 번 날 뻔했다. 스웨덴 헛기침에 찔끔, 덴마크 눈부라림에 움찔, 프러시아 이악무는 데 흠칫, 폴란드 주먹 부르쥐는 데 오싹―그렇게 빌빌대던 그 나라가 그나마도 제대로 숨내쉬고 살게 된 것은 피턴지 표토론지 하는 대찬 임금을 만난 뒤였다. 피터 대제(大帝) 의젓하던 긴 수염 싹둑 자르고 개화다 근대화다 소리치며 설칠 때는 정말로 동(東)로마제국이 되살아나는 듯도 했다. 그 뒤 동궁(冬宮) 비까번쩍 닦아놓고 기병대다 근위대다 알락달락 색옷 입혀 저희끼리 내달을 때는 제법 볼 만하더니, 또 날씨 덕을 보았건 몸으로 때웠건 나폴레옹 둘러엎을 때만 해도 구석에서 어사났는가 싶더니,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궁전은 오스트리아 왈츠로 빙글빙글 돌고, 귀족은 불어(佛語)로 코맹녕이가 되고, 군대는 기합까지 프러시아식으로 넣었으나 백성은 여전히 슬라브요, 농노요, 코삭이라, 짜르 따로 귀족 따로 평민 따로 농노 따로가 그 나라가 놀아나는 실상이었다. 터졌다 하면 반한이요 벌어졌다 하면 전쟁에 시끌시끌하더니 데까브리스트 선 보이면서 수상쩍은 냄새가 났다. 짜르 딴에는 남 다자는 꼭두새벽에 잘난 척 깨어나 설친 것들 모조리 두드려 잡아 네바강(江) 얼음구멍에도 밀어넣고, <성(聖)베드로와 바울> 요새의 감옥에도 처박아 모든 게 끝날 줄 알았으나, 실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농민 공동체니 또 뭐니 하는 슬라브식 전통에다 이런스키 저런코프 아무개비치의 사상으로 범벅이 되어 수군수군 웅성웅성 삐그덕삐그덕 시끌벅적하더니, 마르크슨지 마른고사린지와 엥겔슨지 앵길순지의 합자회사 제품인 박래품(舶來品) 사상까지 곁들이자 결국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 얘기 다하자면 끝도 없거니와, 아까 말한 우리 큰광대 그 단대목을 휘몰이로 소리 한 게 있는데 가사 좋고 목청 좋으니, 우리 어디 다시 한 번 더 불러 한마당 들어보자. ……뾰촘킨 반란이다! 동궁 폭격. 오데싸 학살이다. 총체포령. 총파업이다! 총궐기다! 육군반란이다! 10월혁명이다! 노동병소비에트다! 사회민주당 정권이다! 하늘과 땅의 혁명이다! 반동숙청. 세계혁명이다! 브레스 트리토프스크 조약. 마르크스주의의 전략전술이다! 바쿠닌의 전략전술. 전세계의 노동자는 단결하라! 스파르타쿠스(단)학살 묵인. 스페인을 잊지 말자! 독 소불가침조약, 사회주의혁명이다! 인민민주주의. 공산주의 건설이다! 과도기. 내전이다! 빨치산이다! 백군(白軍)이다! 적군(赤軍)이다! 사회주의 공업화다! 신경제정책. 노동동맹이다! 농촌착취.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정치국 독재. 프로레트칼트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마르크스 레닌주의다! 일국사회주의 코민테른이다! 러시아 보위. 볼셰비키 독재다! 인민전선. 자본주의 타도하자! 포츠담 얄타. 반파쇼동맹이다! 즈다노프선. 자유의 왕국이다! 집단 수용소. 민주집중제다! 개인숭배. 인민통치다! 비밀경찰. 노동자경영제다! 국가관리 노동착취 근절이다! 초과노동. 여덟 시간 노동제다! 속도전, 생산수단의 노동자 소유다! 정치국 소유. 해빙기다! 감열강화. 공산주의 낙원이다! 시장사회주의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다! 체고, 헝가리, 폴란드를 가차없이 유린하라. 사회주의적 형제주의다! 주권제한론. [……] 꿈은 도솔천에 맡기고 심장은 수령에게 맡기고 배는 인민식당에 맡기고 대가리와 자지 보지는 당에 맡기고 손발은 공장 농장 지배인에게 맡기고 아이는 탁아소에 맡기고 노친네는 양로원에 맡기고 고독만이 내 것 무력감만이 내 것 거룩한 도솔천의 예언자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레닌은 마르도츠 플레하노프와 멘셰비키를 때려잡아 거룩한 도솔천의 성자 레닌의 이름으로 스탈린은 트로츠키 부하인 라데크 카메네프 지노비에프를 때려 잡아……(下略. 앞의 책) 대개 그 나라 그 족송이 그러한 데다, 기미년 그때는 아직 멘세비키며 백군(白軍)의 저항도 끝나지 않은 때였다. 제 일만 해도 오줌누고 뭣 들여다볼 틈도 없는 판국에 무슨 수로 멀리 우리까지 돌아볼 시간이 있었겠는가. 나중 동유럽에서 실패한 그것들이 뒤늦게 동아시아의 민족주의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는 것은 인정되지만 그 또한 우리의 제1차 수복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거기다가 마르크시즘과 민족주의의 결합이라니 이 무슨 장마도깨비 개울물 건너는 소리냐? 생떼라도 분수가 있고 어거지라도 등급은 맞추는 법이다. 그밖에 되먹잖은 역사책이며 시원찮은 기억들이 씨월거리는 것으로 비슷하면서도 아닌 것은 고종독살설(高宗毒殺設)이다. 그 무렵 우리 마지막 임금님이 돌아가셨는데 그게 일본의 독살이었다는 소문이 퍼져 온 백성이 들고 일어난 것이라는 그럴 듯한 수작이다. 하마 잊었는가. 우리 마지막 임금님께서 2천만 민족의 대표를 인왕산 기슭에 모아놓고 주권을 돌려주며 장렬하기 자진(自盡)하신 일을. 그때 그분의 가슴에 깃들였던 한 마리 거대한 용이 수만 길 하늘 높이 솟수쳤다가 2천만 마리의 작은 용이 되어 우리 모두의 가슴으로 스며들었음을.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주인이 되고 다스림을 맡아 이 땅 이 겨례의 오늘처럼 행복하게 가꾸어오게 되었음을. 그런데 독살이라니? 우리 임금님은 뭐 목숨을 둘씩이나 가지셨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 2천만의 대표 천 명의 2천의 눈으로 보고 2천의 귀로 들은 것이 모두 헛것이었다는 말인가. 침략자에 의해 불알 깐 돼지처럼 사육되다가, 농략 덮어 쓴 버러지처럼 독살당하고 만 한심한 위인이 우리 마지막 임금님이었다면, 대대로 핏줄의 다스림을 받아온 더욱 한심한 우리가 무슨 수로 그 침략자를 내쫓고 오늘 같은 번성을 누리겠는가. 하기야 이 부분에는 딴 소리가 있을 법도 하다. 서너 해 전 내가 어렵사리 작심하고 이야기를 시작해 먼저 그 우리 장려했던 역사의 낙일(落日)을 얘기했을 때, 한 안경 삐뚜름히 쓴 식자(識者)가 이렇게 볼멘 소리를 했다. 그러나<장려했느니, 우리 그 낙일(落日)>이 이처럼 비판적이고 역동적인 문학 공간을 형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에 따르는 역기능을 피하기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3 1운동이 이 작품의 내적 논리 속에서는 <장려한 옛 왕조의 낙일>의 덕분으로 발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실제에 있어서 치욕스런 왕조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갑오농민혁명으로부터 면면히 계승되어 성장 발전해간 민중의 주체적 역량과 민중 의식이 무시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작품을 낳은 빛나는 설화적 상상력이 내포하고 있는 본질적 한계는 바로 여기게 있다……운운. 요새 일본은 술을 먹고 엎어져도 민중적으로 엎어져야 하고, 오입질을 해도 민중적으로 해야 그럴 듯해 뵌다는 말이 있더니, 아무래도 그 식자의 취향이 왜색조(倭色調)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야 민중 안민중,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배운 이 못배운 이, 다스리는 쪽 다스림 받는 쪽 구별않고 오직 겨레로 두루 하나가 되어 행복과 번영을 추구해온 지 벌써 70년이 가까워오는 터에, 그리하여 이제는 겨레뿐만 아니라 사람 꼴만 갖췄으면 모두 <우리>로 보듬게 되어 한때 그토록 모질고 독했던 일본에게까지 한해 50억이 넘는달러를 수입초과란 구실로 나눠주는 터에, 또 앞으로는 온갖 목숨 있는 것은 모두 <우리>속에 받아들여 저 유태인이나 인도인의 상상보다 더한 낙원을 이 땅에 이룩하려는 터에 이제서야 민중 외치고 나서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또 약간 지각한 듯싶은 대로 역사와 현실과 미래가 오로지 민중과 필연에 의해서만 결정된다쳐도, 우리 그 장려했던 낙일(落日)이 짐될 것은 그리 없는 성싶다. 제 어미 가랑이 사이로가 아니라 혀끝으로나 머리통을 쪼개고 나온 별종(別種)이 없는 바에야, 그리고 진잔드로프스나 피테칸드로프스때부터 무슨 무슨 의식(意識) 갖춰 따로 진화해온 영장류(靈長類)가 없을 바에야, 민중도 결국은 시대 환경이나 교육의 소산이라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신민(臣民)들의 존숭(尊崇)과 애도(哀悼)속에 비장하게 침몰한 왕조의 기억이 반드시 민중 의식의 발아에 해로운 시대 환경이란 결론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들의 시대가 갔음을 깨닫자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음을을 스스로 단죄함과 아울러 우리 모두가 이땅과 스스로의 주인됨을 깨우쳐준 우리 마지막 임금님의 거룩한 죽음이,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의 뿌리와 지난날에 그리움과 사랑을 간직하고서도 새날을 향해 뻗어갈 수 있게 해준 그분의 가르침이, 어째서 꼭 민중의 태어남을 가로막는 것이라고만 하는가. 피투성이 싸움만이 가장 좋은 시대환경이며, 스스로의 고통을 지불하고 산 것만이 진정한 의식이란 것은 눈알 파란 인종들의 역사책에서 뽑아낸 공식일 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적의 원리일 수는 없지 않은가. 거기다가 마지막 임금님의 바람도 의식의 자극 또는 계기의 마련이었지 임무의 부여나 독단의 주입이 아니었다.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강요하고, 제대로 가르치기도 전에 부리거나 써먹을 생각부터 먼저하는 바나건너 못된 인종의 사이비 민중론자야 어째 그윽하고 환환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으랴. 그런데 그 얘기 했다고 <……그가 미래를 향해 스스로 닫혀 있고, 그리하겨 전망을 결여하고 있음으로……>어쩌고 하며 사람을 구박하는 것으로 보아 그 식자(識者)의 전망도 그리 넉넉한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곁가지는 이쯤서 치기로 하고 다시 우리의 수복전쟁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그날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 싸운 이유는 천 가지도 넘지만, 또한 따지고 보면 유별나게 내세워 조목조목 따질 이유는 하나도 없다. 제 땅 제 나라 빼앗기고 시달림을 받던 민족이 빼앗긴 것 찾겠다고 나서는데, 달리 조목조목 이유달 게 무엇 있겠는가. 더구나 기미년 그해는 우리가 그 지경이 된 게 어느새 10년에 가까워진 해가 아니던가. 오히려 이유를 댈 필요가 있는 것은 제 땅 제 나라 뺏긴 지 10년이 다 돼가도 두손 처매놓고 자빠져 있는 족속들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싸움의 전개 과정만은 차근차근 살펴보는 게 좋겠다. 고종 임금님께서 미처 말려볼 틈도 주시지 않고 자진하셨을 때만 해도 인왕산 기슭에 모였던 천 명의 민족 대표는 그저 놀라움만으로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비통한 울음이 터지고, 다시 그 울음 속에 당신의 말씀을 되새기다 이 땅에서 목숨을 받은 이래 처음 맛보는 벅찬 감격이 그들을 휩쌌다. 우리 대표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그 감격을 정리했다. 원래는 선비 출신이나 중인(中人)쯤으로 전락한 듯한 이였는데 콧날이 우뚝하고 눈매가 번뜩이는 게 범상해뵈지는 않았다. 「겨레 여러분, 나는 여러분 모두가 왕조의 다스림 속에 안주하고 있을 때부터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 새로운 사회를 꿈꾸어온 사람이오. 다스림의 힘이 군주 한 사람의 자의(慈意)에 맡겨지지 않는 세상, 그 타고난 신분이 삶을 영위하는 데 장애가 되는 일이 없고, 법이 사람을 구별하는 일이 없는 나라, 가멸음이 부당한 소수에게 몰리지 않을 것과 마찬가지로 못가짐으로 모두가 평등해지지도 않는 어떤 사회를 이룩하려했고. 이제 막 종언한 왕조로 보면 모반자일 것이나, 저 홍경래의 무리나 그밖의 여러 민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동학(東學)에 이루고자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꿍이었소이다. 태서(泰西) 근대사의 꽃이었던 이른바 혁명가로서 꿈을 길러왔던 것이오, 하지만 그러한 내게조차 오늘은 하나의 큰 감격이오. 이 감격은 단순히 스스로 그들의 시대가 갔음을 깨달을 줄 아는 우리 왕가의 현명함이나 일찍이 힘들여 거머쥐었고 또한 5백년을 누려온 통치권을 스스로 되돌려주는 그 용단을 기리는 것과는 다르오. 강성한 왜적의 총칼 앞에서는 끝내 굴하지 않은 그 굳건한 의지를 향한 것도 아니며-죽음이 주는 비장감(悲壯感)에 휘몰린 것은 더욱 아니오. 방금 우리들의 마지막 임금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큰 선물을 내려주시고 가셨소. 그 첫째는 우리가 혁명이라 불리우는 내전(內戰)으로 우리의 힘을 낭비하는 걸 막아주신 일이오. 나 같은 사람을 감히 <먼저 깨어난 자>라 일컬을 수 있다면 앞으로 깨어나는 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오. 한편으로는 깨어나는 자가 늘어날수록 더 깊이 잠들려는 자도 있을 것인바, 설령 그들이 소수로 몰리게 된다 해도 힘은 그 어느때보다 거세어질 것이오. 따라서 그 어느쪽이 먼저 시작하든 싸움은 반드시 일게 되어 있고, 비극적인 자기 소모도 필연적이오. 그런데 그분은 그걸 막아주셨소. 아직 우이 중에는 잠들어 있는 쪽이 훨씬 이로운 이들도 많지만 이제 더는 깨기를 마다할 수 없게 되었소. 두 번째로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없이 새로 시작해야 하는 허전함과 불안함을 없애주셨소. 우리가 먼저 피투성이 내부 투쟁을 통해 이나라의 주인됨을 회복해야 한다면 그 이전이 모든 것은 부정되어야 할 어떤 것, 아니 그 이상 혐오하고 멸절시켜야 할 악(惡)이 되고 마오. 그리하여 용케 그 싸움에 이겼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에서 새로 시작해야 될 것이오. 그런데 그분은 스스로를 내던져 우리가 애틋한 정애(情愛)로 보듬을 수 있는 과거를 남겨주셨소. 또 우리의 출발이 과거의 부인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면 미래 역시 막연하여 혼란될 수 밖에 없을 것이오. 모두가 저마다의 길을 내세워 어느 길로 가느냐를 정하는 게 또 새로운 싸움의 불씨가 될 것이오. 종종 그 싸움이 그 전의 싸움보다 더 큰 비극과 소모를 강요함은 태서(泰西) 여러 나라의 혁명사(革命史)가 잘 일러주고 있소. 그런데 우리 마지막 임금님께서는 그것도 막아주셨소. <위로부터 내려온>것이란 흠은 있으나, 우리 스스로의 깨우침을 갈음할 수 있는 그분의 가르치심은 우리를 한길로 몰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 함께 애틋한 정애로 보듬게 된 과거는 미래조차 하나가 되어 추구할 수 있게 해줄 것이오. 그러므로 겨레 여러분. 우리는 분별없는 슬픔으로 이 귀한 선물을 헛되게 하여서는 아니 되겠소. 선왕(先王)의 유해를 정성껏 수습해 모시되, 한편으로는 우리가 해야 할 더 큰 일도 이 자리에서 당장 시작하도록 합시다.」 비록 그가 말했으나 기실 그것은 천 명 대표 모두의 말이었고, 그 뒤에 있는 2천만 민족 모두의 말이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나머비 999명의 대표가 입을 모아 소리쳤다. 「그렇소, 싸웁시다. 먼저 빼앗긴 것부터 되찾은 뒤 다시 겨레의 복됨과 번영을 모도합시다.」 2천만이 혼연히 하나가 된 것이나 다름없는 수복전쟁의 결의였다. 그런데 이 같은 결의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시원찮은 역사책이나 옹졸하고 치사한 회고담은 엉뚱한 얘기들을 하고 있다. 천도교(天道敎)쪽에서 제일 먼저 발의했다느니, 무슨무슨 당[新韓靑年黨]이 파리고 아무개[金圭植]을 보낸 게 그 시발이라느니, 무슨 단[重光團]의 아무개[呂準] 아무개[李東寧]가 발표한 무오독립선언문[戊午獨立宣言文]이 그 효시라느니, 기독교 무슨 파[長老敎] 무슨 파[監理敎]가 먼저고 학생들이 그 다음이라느니, 재미(在美) 동포가 뭐 어쩌고 재일(在日) 유학생이 뭐 어쨌다느니, 하는 좁쌀 세는 소리들이 바로 그것이다. 게중에는 제법 이런저런 근거와 구체적인 사람 이름까지 대가며 제 옳다고 우기고들 있는데, 이왕 말이 났으니 어디 한 번 차근차근 따져보자. 먼저 천도교쪽. 천도교들 사이에는 나라를 되찾기 위한 대중봉기를 갑오(甲午)년 동학운동의 재현과 계승으로 보는 견해가 많아 경술국치(庚戌國恥)때부터 그 준비를 해왔으며, 그들 가운데는 자결로 먼저 싸움을 시작한 이만도 쉰 명 넘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갑진년(1904)에 있었던 개화 운동(開化運動)을 한 징검다리로 삼아 일으켰던 1912년의 거사 계획도 그 한 고리였다. 1911년 1월 16일 한떼의 교도들이 교주인 손병희(孫秉熙)를 찾아 기독교와 손잡고 거사할 것을 건의했고, 이에 대한제국 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와 보성사(普成社) 및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최린(崔麟) 등과도 거사할 걸 의논했다고 한다. 그해 10월 신민회(新民會)사건이 터져 주춤한 적이 있긴 하지만, 곧 사람을 시켜 농어민의 배일 감정을 조사하고 범국민신생활운동을 추진하는 등 활동에 들어가 마침내는 그 이듬해 7월 15일을 거사 일자로 잡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본 경찰에 사전 발각됨으로써 결국 일은 계획 단계에서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그 뒤 그들은 다시 불교쪽과 힘을 합치는 길을 찾기도 하고,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를 만들어 민족의 애국심을 기르는가 하면 무력 항쟁에 필요한 무기 구입을 도모하기도 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을 맞게 되었다. 그해가 마침 갑인(甲寅)년이라 갑오 갑진에 이은 길년(吉年)으로 보고,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이란 결사를 중심으로 이른바 삼갑운동(三甲運動)에 들어갔다. 그들은 일본이 반드시 패망할 것이란 판단 아래 국제 정세를 분석하고 대전 막바지가 되는 1918년에는 무오독립선언문(戊午獨立宣言文)까지 준비했다. 그러나 그해 말 독일이 패망하자 다시 주춤한 채 이듬해 1월의 파리강화회의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대개 그런 식인데 여기까지도 틀림없이 사실이다. 문제는 그 뒷부분,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에 격분해 있는 국민들을 보고 대중 봉기를 앞당겼다는 주장이다. 1월 말부터 기독교쪽과 접촉을 시작해 2월 15일까지는 유교 불교학생단 등과의 연락을 완료하고 3월 1일을 거사일로 잡았다는 것인데, 어느모로 봐도 아귀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구석이 많다. 만약 그 주장대로라면 그 수복전쟁에서 보여준 2천만의 예의없는 참여가 아무래도 설명되지 않는다. 천도교가 우리 2천만 모두에게 공통된 종교였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무렵의 사정은 그렇지가 못해, 그저 서너 손가락 안에 드는 종교의 하나였을 뿐이다. (고종이 독살됐다는 소문에 격분한 국민들을 보고……)란 보충 설명이 있다 쳐도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민족의 존망이 걸린 성전을 일시적인 대중 심리(격분)에 편승해 시작했다면 그 얼마나 책임 없고 경박한 짓이 되겠는가. 또 만약 그 전쟁이 그렇게 시작되었다면 어떻게 뒤이은 25년의 길고도 참담한 싸움을 우리가 감당해낼 수 있었겠는가. 동학운동의 재현 및 계승이라는 그들의 동기도 마뜩치 못한 느낌이 든다. 요즈음 뻑하면 그 운동을 끌어내다가 여기저기 두드려 맞추는 게 일부 식자들간에 유행인 모양인데, 아무리 감초라도 넣을 약봉지 있고 안넣을 약봉지가 있다. 갑오년 그해의 활동이 볼 만했다손 치더라도 전체와 부분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동학운동은 아무리 크게 잡아도 거기 가담한 이들이 그때 우리의 절반이 안되고, 따라서 그걸로는 우리 전체와 갈음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2천만이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목숨을 걸고 나선 수복전쟁을 그런 농민운동의 재현이나 계승과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잘해야 실속없는 공로 다툼으로 오해되고 잘못하면 30년 전의 기억에 얽매인 광신자들의 자기 도취로 단정될 그런 주장이 어째서 기억에 얽매인 광신자들의 도취로 단정될 그런 주장이 어째서 나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건 우리 모두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천도교 자체를 위해서도 이롭지 않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의 제1차 수복전쟁은 우리 모두가 누구의 부추김이나 앞장섬에 끌려감 없이 한꺼번에 들고 있어나 수행한 민족의 성전(聖戰)이었다. 어거지스럽기로는 기독교쪽도 천도교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즈음 잘 팔리는 어떤 백과사전에는 기독교의 활동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측의 독립 운동(3.1)은 관서(關西)지방의 장로교와 서울 경기 지역의 감리교 계통이 복합화되어 다른 종교단체와 대동 합류(大同合流)되었다. 즉 1919년 1월 말 천도교들이 복합화된 그리스도교측의 지도자인 이승훈(李昇薰)을 만나면서부터 본격화된 것이었다. 거기다가 다시 그해 2월 초순 상해(上海)로부터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의 선우혁(鮮于爀)이 국내와의 연락임무를 띠고 관서 지방에 와서 이승훈과 협의하게 되면서부터 독립운동은 더욱 활기를 더하게 되었다. 그 같은 항일 의식의 고조는 숭실 숭덕 숭의 숭현 등의 각급 학교 및 선천(宣川) 등의 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시위운동의 준비를 진행케 하였다. 그러다가 2월 5일 천도교의 민중연합운동의 취지를 이해하고 적극 참여키로 결심하고, 2월 15일 이승훈이 상경하여 그 참가를 쾌락하였다. 여기서 이승훈은 그리스도교 대표로서 동지 규합을 의논하고 거사일을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서울 경기지방에서는 대한감리파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남녀 학생을 포섭, 시위 운동을 계획하였다. 박희도(朴熙道)와 윤치호(尹致昊)가 그해 1월 하순경에 이미 연희전문학교 학생인 김원벽을 중간에 두고 강기덕 주익 한위건 김형기 이공후 주종선 등의 학생들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협의한 바 있고, 서울예수교 장로파의 이갑성(李甲成)도 2월 중순경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구내 그의 자택에서 전기 남학생 10여 명을 소집해 결정적인 시기가 오면 나서줄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천도교쪽처럼 가장 먼저 시작했다거나 수복전쟁을 그들의 종교전쟁과 동일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기독교쪽 역시도 자기들이 거기서 유별난 역할 또는 매우 중요한 활동을 했다는 걸 주장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풍기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정당한 몫만 가져가거라. 2천만분의 당시 기독교도 머릿수만큼을. 거듭거듭 말하거니와 2천만이 다 같이 한 일을 유독 자기들만이 또는 어떤 몇몇 단체가 어울려 해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功)을 도둑질하려 함에 다름아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넘보는 서양 오랑캐의 정신적인 첨병(尖兵)이란 혐의를 받는 데 괴로워서도 그들이 그 수복전쟁에서 힘을 다한 건 사실이지만, 또한 우리 2천만 중에 어느 누구도 그만 힘을 쓰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 과연 그날 학생들의 투쟁은 눈부신 바 있었다. 서울에 있는 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북으로 용정(龍井)에서 남으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교는 두 겹의 동원 조직으로 그 싸움에 뛰어들어 물불 안가리는 전위(前衛)로서의 몫을 다했다. 어린 소학생에서 아직은 전시대의 수줍음을 다 지우지 못한 여학생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그들도 또한 알아야 한다. 그날 우리 2천만 누구도 그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것을. 겨레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심성과 불의한 힘 앞에 비굴해지지 않는 용기는 물려받아 이어가되, 헛된 자부로 오만에 빠지거나 독선으로 흘러서는 안되리라. 상해의 어디 있었다는 뜬구름 같은 패거리들의 무슨 당(黨)이며, 시베리아와 만주 어디에 있었다는 무슨 군정부(軍政府), 무슨 단(團), 그리고 이승만인가 뭔가 하는 허깨비들이 미주(美洲)에서 결성했다는 무슨 협회(協會)가 우리의 제1차 수복전쟁에 불을 질렀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을ㅇ 수 있는 역사의 잠꼬대들이다. 대저, 제 나라 두고 남의 나라가서 제 나라 어려운 것 외고 다니는 이들 치고 처음과 같이 가지런한 이 드물거니와, 피가 튀고 살점이 흩어지는 싸움이 벌어진 것은 이 나라 이땅 안인데 그들이 해봤자 무슨 대단한 걸 했겠는가. 잘해야 말만 거창한 무슨 선언문 따위나 뿌리며 다녔거나 저 되놈 이 양코배기 찾아다니며 독립 구걸이나 했을 테고, 게중에 못된 것은 그 핑계로 어려운 동포들 돈이나 거둬 제 실속이나 차렸다. 독립자금 거두어 광목장사나 할까. 누구 얘긴지는 모르나 한때 그런 노래가 있었다는데 아무래도 그게 바람 안부는데 흔들린 나뭇가지 같지는 않다. 거기다가 얘기 난 김에 하나 덧붙여두고 싶은 것은 고종 임금님의 가슴에서 우리들의 가슴으로 자리를 옮겨 깃든 작은 용(龍)에 대해서다. 당신께서 보검을 들어 스스로의 가슴을 열던 그날 그 작은 용이 비처럼 쏟아져 우리의 가슴마다 스며든 것은 오직 이땅 삼천리 강산 안에서였다. 그 시각 남의 땅에 가 있던 이들에게는 그 용이 찾아들지 못했으니 그때부터 그들은 이 땅에 남아있던 이들과 같지 않았다. 속없이 외국바람에 휩쓸려서이건, 거기서 더 좋은 길을 찾아보겠다는 갸륵한 뜻에서이건, 앞으로도 이 땅 이나라가 괴롭고 어려울 때 떠나려거던 꼭 그때 일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밖에 아는 성스레 나서기 잘하는 것들이 어김없이 제1차 수복전쟁의 앞단계로 내미는 것으로는 <2 8독립선언>이란 게 있는데 그것도 따져보면 앞서의 경우와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제1차 수복전쟁이 터지기 한 스무 날 전쯤 동경(東京)에 있던 우리 유학생 4백여 명이 세 나라 말로 된 독립선언서와 민족대표소집청원서(民族代表召集請願書)를 뿌리고 독립만세를 외친 사건이 있기는 했다. 그 때문에 현장인 YMCA 회관에서 붙들린 40명 중 아홉 명이 일본으로부터 실형을 받았고, 다시 히비야(日比谷)공원에서도 그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나―그야말로 때없이 날아든 제비 한 마리 오지도 않은 봄소동만 일으킨 격이었다. 겨울방학에 집에 갔다가 흘려들은 몇 마디만 가지고 날짜도 모르고 유학생도 몇이 먼저 설친 모양인데, 하마터면 일을 망쳐도 크게 망칠 뻔했다. 자신에 넘쳐 있던 일본이 최고 금고(禁錮) 9개월로 가볍게 다루었기 망정이지, 만약 눈에 쌍불켜고 덤벼 이 땅까지 단속했더라면 어찌될 뻔했는다. 죽어도 무랍(물밥)조차 못얻어먹을 자발없는 소리들은 그 수복전쟁의 조직 과정에서도 계속된다. 우선 눈에 설고 귀에 거슬리는 것만 들어도 투쟁 수단과 민족대표 33인, 그리고 이른바 <기미독립선언문>이란 해괴한 문건(文件)해서 세 가지나 된다. 투쟁 수단에서 우리가 평화적 시위를 고른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무력 투쟁의 전단계로서, 아니 그 이상 통렬한 타격을 가하기 전의 엄중한 경고로 우리는 만세시위를 결의했는데, 그것은 또한 이웃한 민족끼리 피흘려 싸운 기억을 하나 더 보태게 되는 걸 피해보려는 우리의 성실하고 진지한 노력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게 우리의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처럼 말해 우리의 무력(無力)함을 은근히 암시하거나, 우리가 피투성이 싸움을 겁내 그 길을 택한 것처럼 말해 스스로를 비굴하고 나약하게 만드는 짓들을 함부로 하고 있다. 아니면 슬그머니 입을 다물어 우리의 선택에 더욱 고약한 해석이 가능하게 만들기도 하는데―모두가 하나같이 피가 의심스런 무리들이다. 임진왜한때 떨어진 왜군의 씨가 아닌 담에야, 누구 좋으라고 그 따위 수작들인가. 그 다음에는 민족대표 33인, 역사책들이 흔히 주장하기로는 그들이 모여 우리의 제1차 수복전쟁을 온통 다 주물러댔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서른셋이란 숫자부터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이미 말했듯 우리 마지막 임금님께서 소집한 우리의 대표는 지역별 직능별 천 명이었다. 그들 모두에 의해 발의되고 수행되었건만 어째서 우리 수복전쟁의 민족대표로는 그 서른셋만 남겨지게 되었는지 실로 어처구니가 없다. 아마도 민족대표란 말이 거창하니 거기서 뭐 얻어먹을 거라도 있는 줄 알고 되먹잖은 몇몇이 판쓸이를 한 모양이지만, 일없다. 그 대표란 게 실은 똑똑하고 잘난 사람 뽑아보낸 게 아니라 어쩌다 일없는 사람을 여럿이 추렴으로 노자주어 보낸 게 지나지 않는다. 그게 잘 이해 안되면 요즈음 부실 아파트에서 가끔 뽑아야 하는 입주자(入住者)대표 생각해보면 된다. 그런데 그것도 뭐 큰 벼슬이라고 나머지 967명은 한 구석으로 몰아쳐버리고 저희 이름만 내세운 못난 서른셋이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다가 한 술 더 뜨는 것은 그 서른셋의 성분이다. 가장 흔히 눈에 띄는 것은 천도교 대표 열다섯, 기독교 대표 열여섯, 불교대표 둘, 그렇게 합쳐 서른셋이라는 주장이다. 우리나라가 뭐 종교연합국가인가. 어째서 종교 지도자 몇 명이 막바로 민족대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유교(儒敎) 도교(道敎)를 믿거나 종교 없는 사람은 우리 민족도 아니란 말인가. 듣기로는 거사준비 과정에서부터 거사 당일 일본 경찰에 자수할 것을 동의(動議)하다가 그게 채택되지 않았는데도 거사 당일 일본 경찰에 무더기로 자수해버린 겁많은 대표들이 있었는데 짐작에는 그들이 바로 민족대표 전부인 양 잘못 알려진 듯하다. 일본이 다른 대표들의 자수를 권유하기 위해 고의로 흘렸거나, 그들밖에 잡지 못해 당황한 나머지 그들이 민족대표 전부라고 우긴 경찰 보고서에서 흘러나온 명단이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둔갑해서. 하지만 정말로 눈뒤집힐 일은 이른바 그 <기미독립선언서>란 글이다. 吾等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선언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여…… 이렇게 시작하는 그 글은 한동안은 자못 씩씩하게 우리의 뜻을 펴보이는가도 싶었다. 그러나 <丙子修好條規 以來時時種種의 金石盟約을 日本이 食하였다 하야……>가 되면서부터 점점 수상쩍어지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아직도 웅장하고 말은 잠잖았으나 그 뜻을 가만히 살피면 겁먹은 개 샅추리에 꼬리 말아넣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싸움을 시작하면서 상대가 성 내는 걸 걱정하는 격이요, 뺨 때린 놈은 가만히 두고 그놈 손후라는 곳에 있는 제 뺨만 탓하는 격이요, 빼앗긴 물건을 외상준 걸로 치부잡은 속없는 장사꾼 그 돈 받아 가게 늘릴 궁리하는 격으로 나가다가 겨우 한다는 게 남 등에 업고 하는 엄포다. 4억에 힘주의 지나인(支那人)을 앞세우나 그 덩치만 큰 지나인은 아직 일본에게 진 눈두덩이 멍도 삭지 않았고, 바다 건너 세계만방 끌어대봐도 그들이 바로 일본의 선생들이니, 노는 입에 하는 염불과 무엇이 다르랴. 제 힘으로 뭐 어쩌겠다고 겁줄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눈물섞어 애원하는 게 정직하기라도 하련만, 그건 안되겠는지 그 다음에 느닷없이 이어지는 게 떡 쥔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기다. 아아, 新平地가 眠前에 전개되도다. 威力의 時代가 去하고 道義의 時代가 來하도다……. 눈 지그시 감고 읊어대듯 이렇게 나가는데, 속내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벌써 일본이 보따리 싸 저희집으로 돌아간 줄 알만했다. 그러다가 겨우 끝이라고 맺는 게 공약(公約) 삼장인데, 이건 또 멀쩡한 놈 싸우는데 곰배팔이 흉내내게 해 넙치가 되도록 얻어터지게 만드려는 수작이나 다름없었다. 잘들 모르는 듯하니 감히 단언하거니와, 우리 수복전쟁에서는 결코 그런 해괴한 선언문은 발표한 적이 없다. 우선 <독립(獨立)>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의 공식 용어가 아니며, 들어주지 않을 경우에 대한 대응 조처나 후속 행동에 대한 아무런 다짐이 없는 일회성(一回性) 시위의 선동도 우리 뜻과는 사뭇 다르다. 누가 겨우 10년도 안되는 군사적 점령에거 벗어나는 걸 독립이라고 표현하는가. 중국은 몽고족에게 거의 백 년이나 다스림을 받았지만 중국이 몽고족으로부터 독립했다는 소리는 못들었고 2차대전때 불란서도 독일에게 완전 점령당했지만 전후 불란서가 독일에게서 독립했다는 소리는 못들었다. 또 그때 우리가 일본에게 밝히고 싶던 것도 너무 모진 일을 얼결에 당해 제대로 모아지지 않았던 응전(應戰)의 결의였다. 그널데 그처럼 약해빠지고 속없는 소리들만 늘어놓은 글을 우리의 선언문으로 어떻게 채택할 수 있겠는가. 믿지 않아도 도리 없지만 진상을 밝히면 이렇다. 그때 우리에게는 <기미대일권고문(기미대일권고문)이란 게 있었다. 우리 중 일부는 권고 대신 경고(警告)란 말을 쓰자고 나섰으나 바로 무력행동(武力行動)으로 나가지 않고 평화 시위를 앞세우게 된 것과 같은 이치로 권고란 말이 채택된 것이었다. 대일권고문(對日勸告文)만도 7천여 자(字)에 대내제언(對內提言) 10항(項)으로 된 그 글을 여기에 모두 옮기는 것은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그 수고로움에 값하는 보람도 없을 듯하여 알맹이만 추려보면 대강 이러하다. 본문인 대일권고문은 네 단락으로 되어 있다. 첫번째는 우리가 일본에게 권유하고자 하는 내용의 의전적(儀典的) 수사(修辭)를 갖춘 요약, 두번째 단락은 그들의 불의에 대한 준엄한 비판, 세번째는 반도철수(반도철수)에 따른 그들의 득실에 대한 냉철한 논의, 네번째는 권고에 불응할 때 그들이 직면하게 될 우리의 후속 행동과 결의이다. 부드러우면서 비굴하지 않고 굳세면서도 억누름이 없고 소박하면서도 거칠지 않은 게 가히 겨레의 뜻을 드러낼 만한 명문이었다. 그리고 대내제언 10항은 일종의 행동 강령으로 겨레의 힘을 효과적으로 집약할 수 있으면서도 상황이 바뀌면 즉각 대응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같은 명문(名文)은 까마득히 징혀지고, 한자(韓子=日本이 上古史에서 주장하는 朝鮮母系의 혼혈아)의 후예가 썼거나 일본의 위작(僞作)인 듯한 그 따위 너절한 선언문(宣言文)만 남아 돌아다니니 실로 뒷날이 걱정된다. 그밖의 우리 왕조의 장려한 낙일(낙일)로부터 제1차 수복전쟁의 개전일(開戰日) 기미년 3월 1일 까지 있었던 일로 지금의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 중에서 따지고 바로잡아야 할 것은 아직도 많다. 누구누구가 어디서 모임을 몇 번 가졌느니, 날짜는 언제 잡혔느니, 태극기와 선언문은 어떻게 인쇄되어 어떻게 나눠졌느니, 학생 동원은 누가 맡아했느니, 따위에 관한 것들인데 중요하지 않으니 그냥 넘어가자. 아직 바로잡아야 할 더 중요한 일도 많이 남았거니와 제법 날짜 대고 시간 대고 장소 대고 사람 이름 대가며 이 책 저 책에 거짓말 써갈겨논 사람들을 난처하게 하는 일도 이젠 지쳤다. 다만 개전의 결의가 대표들을 통해 2천만 겨레 모두에게 알려진 것은 2월 중순이며 태극기와 대일권고문(勸告文)이 전국 구석구석까지 나뉘어진 것도 2월 2일은 넘지 않았다는 것만은 기억해 두기 바란다. 수만의 헌병과 경찰에다 그 몇 배나 되는 보조원과 앞잡이를 거느리고 우리를 감시해온 일본이 우리가 모든 채비를 다 하고도 열흘이나 되도록 그 일을 냄새조차 맡지 못했다는 그 기적같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모두가 주모자가 되어 한순간도 방심하거나 흔들림 없이 스스로의 길을 갔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온 놈이 온 말을 한다 한들 그 엄연한 사실이야 터럭만큼인들 다칠 수 있으랴. 震天動地의 萬世聲, 太和館 萬世聲이 나자 同時에 塔洞公園에 會在하얏던 數萬의 學生이 朝鮮獨立萬世를 齊唱하면서 手舞足踏하면서 風湯湖湧의 勢로 長安을 貫中하니 枯木灰死가 아닌 우리 民族으로 誰가 感泣치 아니하리오. 一刻一刻 增加하난 萬世聲이 鐘路四街에 至하야는 天池가 震動하얏더라. 제1차 수복 전쟁의 개전 첫 날인 3월 1일 서울의 모습을 당시의 한 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천도교의 지하신문인 관계로 흔히 그 정확성이 의심받지 않고 있지만 일본의 혹독한 언론탄압을 상기하면 꼭 그럴 것 같지도 않다. 태화관(太和館)을 앞세운 것이나 학생을 위주로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특히 군중의 숫자를 겨우 몇 만으로 줄여 보도한 게 바로 그런 의심을 일으키는 부분이다. 닷새나 지난 뒤에야 그것도 짧게 보도하긴 했지만, 당시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新報)도 수십만 군중이 참여했음을 시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분위기만은 앞서의 보도가 비교적 정확히 전해주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가장 널리 인정되고 있는 일본의 공식적인 요약과도 일치한다. 1919년 3월 1일 오후 두 시 조선의 자칭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은 태화관이란 요정에 모여 독 립선언문 낭독식과 만세삼창에 들어갔다. 원래 그들의 거사 장소로 삼은 것은 파고다공원이었지만 거기 모인 다수 군중이 일시적 충동으로 폭동을 일으킬까 두려워한 나머지 그곳으로 장소를 바꾸었다고 한다. 이때 그 사실을 모르고 파고다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과 시민들은 당황한 나머지 강기덕등을 태화관에 보내어 민족대표들에게 항의하는 소동이 있었으나 식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서영환(徐永煥)을 시켜 총독부에 독립 운동의 결의가 다짐하는 간략한 인사에 이어 만세삼창에 들어간 것이다. 이른바 독립선언문의 낭독까지 합쳐 불과 15분 만에 식이 끝나자 민족대표 33인은 경찰에 자기들의 위치를 통고하고, 곧 달려온 경찰에 모두 스스로 체포되었다. 이때 파고다공원에 모여 있던 수천 명의 학생들은 30분이나 기다려도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거기서 별도 선언문 낭독식을 하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날의 시위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에서 상경했던 수많은 일반인들과 서울 시민들이 그 뒤를 따라 군중은 삽시간에 수만으로 불어났다. 시위 군중의 행진 경로는 대강 두 갈래였다. 한 패는 파고다공원 정문을 나서 종로를 지난 뒤, 서울역전·의주로·정동·미국영사관·이화학당으로 해서 다시 광화문·서대문·프랑스영사관·서소문·소공동으로 나아가다가 충무로 일대에서 급히 출동한 경찰의 저지를 받고 일단 해산하였으나, 다시 다른 군중과 연합하여 전보다 더 큰 집단을 이루고 광화문을 거쳐 대한문 앞에서 난세를 외쳤다. 그들과 달리 파고다공원 뒷문으로 밀고 나간 시위군중은 창덕궁·안국동·광화문을 거쳐 서대문으로 향했다가 프랑스영사관 앞에서 크게 만세를 외친 다음 이화학당·정동·미국영사관·대한문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들고 다시 충무로 방향으로 나아갔으나 경찰의 제지를 받음이 없이 동대문까지 가서 그문 위에서 한번 더 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이것이 어떤 총독부 문관(文官)의 요약인바, 서울 한 곳에 한정되어 있으나 일본인이면서도 객관적으로 보려고 애쓴 점은 금세 눈에 뛴다. 아니, 그 이상 우리 스스로의 기록이나 전언(傳言)에 비하면 그만큼이라도 써 남긴 게 가상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한 일본인이어서 어쩔 수 없었던 부분도 있으나 그걸 중심으로 그날의 참모습을 알아보자. 우리의 민족 대표가 33인으로 된 것이며, 그 역할이 실제 이상으로 크게 보이게 된 경위는 앞서 이미 얘기했다. 그런데 이제 이 일본인의 기록으로 보아 하나 더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주로 서울 지역 대표였던 듯 싶다. 을사조약 당시 서울 인구가 25만이었다니 기미년 그 무렵은 33만쯤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만 명에 하나씩 대표를 세우면 꼭 33인에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른 지역에 비해 아는 게 많은 것이 탈이 되어, 무저항운동이니 비폭력주의니 하는 물건너 것들 설익은 생각을 흉내내다 그리된 것이리라. 그 다음은 참가자의 성분인데, 집단 활동이 유달리 눈에 띄는 학생을 위주로 파악한 것은 좋지만 어디까지나 우리 일부만의 활동인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 일본인으로서 자기나라의 편을 들기 위해 일부러 그랬는지, 아니면 그의 숫자 개념이 축소 지향적이어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틀려도 너무 틀린다. 열 번을 말해도 수다스럽단 말은 안들을 소리가 바로 그 전쟁에 환웅과 웅녀의 피를 받은 이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나섰다는 게 아닌가. 왜 하필이면 개전(開戰) 시간을 그날 오후 2시로 정했는지는 이렇다하게 알려진 게 없지만, 그 시각이 되자 서울 거리뿐만 아니라 이 땅 전체는 참으로 볼 만했다.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걷지 못하는 환자나 앉은뱅이는 집 앞에 나와 소리로나마 그 싸움을 거들었고, 방 안에 뉘어둔 갓난아기도 그 시각만은 울음 소리가 만세로 바뀌었다. 마당을 뛰노는 강아지도 일본을 향해 짖었고 외양간에 매어둔 마소도 만세소리처럼 울었으며―그날만은 이 겨레가 모두 하나가 되어 뛰어나갔다……. 그 일본인의 요약에서 눈에 거슬리는 또다른 것은 시위 행진의 경로이다. 미국영사관과 프랑스영관을 거듭 찾아가 그 앞에서 시위를 벌인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외세(外勢)에 의지하려 했음을 넌즈시 비꼬고 있는 듯하다. 일본인으로서의 한계이거나 우연히 그가 뒤 게 된 군중의 시위경로가 그러했던 탓일 것이다. 그날 서울만 해도 20만이 넘은 군중이 거리를 누볐으니 어딘들 가지 않았겠는가. 구호가 대한독립만세라는 단조로운 것이었다는 것과 다른 지방과의 연계에 대해서 아무 말 않는 것도 의심스럽다. 그때 우리의 구호는 대한독립만세 외에도 일본의 철수를 요구하는 것과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 더 있었다. 우리의 요구를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한구석으로 몰아붙이려는 고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다른 지방과의 연계도―그날 같은 시각 이 땅 구석구석에서는 서울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고 읍내나 장터가 먼 산골짜기의 화전민은 저희 가족끼리만이라도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었다. 그런데도 깨끗이 그 일을 입다물고 있는 것 어디까지나 그날의 싸움을 부분적으로 몰아 하나의 운동이나 사건으로 몰려는 의도가 깔린 짓이나 아니었던지. 하기야 거기 대해서는 우리쪽의 기록도 오십보 백보다. 구호는 그 일본인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대한독립만세 하나로 되었고, 지방과의 연계도 이상하리만치 약화시켜놓고 있기 때문이다. 곧 서울과 같은 날 봉기한 것은 평양·의주·선천·안주·원산·진남포 여섯 곳뿐이었고, 그 다음날도 함흥·수안(遂安)·황주(黃州)·중화(中和)·강서(江西)·대동(大同)·해주·개성 등 주로 북쪽 지방에서만 했으며, 남쪽까지 호응하게 되는 것은 3월 중순 이후라는 것이다. 일본인의 기록보다야 낫지만 우리 봉기의 동시성(同時性)과 일제성(一齊性)을 흐려놓자는 수작이 어떻게 우리 손으로 기록되어 남게 되었는지 참으로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다. 그러나 이쪽 저쪽 할것없이 한 목구멍으로 나온 듯한 소리 중에 가장 용서 못할 것은 아무래도 기미년 3월에 시작된 그 일을 일회적인 사건들의 집적으로만 몰아가는 수작들이다. 이제와서는 거기 대한 반성도 없지 않지만 우리는 엄연히 일 년이란 기한을 정해 싸웠고, 그 수단이 비록 평화적인 구호가 시위로만 제한되어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어김없이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간의 전쟁이었다. 그런데도 그걸 우리가 그저 일시적인 격정에 들떠 여기저기서 한번 해본 일들의 모임으로만 처리해, 종당에는 3·1운동이니 만세사건이니 하는 망칙하고 분한 이름표를 달게 하고 말았다. 자랑스런 역사를 그 꼴로 싸말아놓고도 오늘과 같은 행복을 우리가 누리게 된 게 오히려 못미더울 지경이다. 수복전쟁을 만세<사건>으로 만든 생각의 얕고 가벼운의 한 연장이겠지만, 그 뒤 일 년에 걸쳐 간단없이 계속된 그 전쟁의 경과가 터무니없이 소홀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도 분하다 못해 한스럽다. 숨김없이 말한다면 그 악종등을―장차 동양 3국을 피로 물들이고 마침내는 태평양을 저희 썩은 시체로 뒤덮으며 망한 뒤에서야 겨우겨우 정신을 차릴 그 독한 섬나라 족속을, 사람으로 믿고 그런 물렁한 일을 벌인 데는 우리의 실수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인두겁을 썼으니 말은 알아들을 줄 알고 피흘리는 싸움은 피해보자는 뜻에서 비폭력 시위와 경고를 되풀이 한 것이지만, 일 년이나 겨레를 그들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맡긴 것은 아무래도 좀 미련했던 듯싶다. 처음에는 무슨 좋은 일이 났나 싶어 안어울리게도 일장기(日章旗)까지 들고 따라다니던 멍청한 것들도 있었으나, 일의 내막을 알자 이 악종들은 전에 없는 표독을 부리기 시작했다. 칼은 커녕 막대기 하나 들지 않은 우리 군중을 향해 저들 군대는 무슨 큰 싸움판 만났다는 듯 온갖 병기를 다 썼고, 우리의 구호 속에 담긴 경고는 다만 악에 받친 군가(軍歌)와 욕설로 맞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전쟁이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았으되 피와 살이 튀었고, 어느 쪽이 공격하고 어느 쪽이 방어하는지 구분은 안되었으나 공방은 일 년이나 거듭되었다. 전쟁터는 이 땅 삼천리가 모두였다. 만(萬)이 넘는 시(市)·읍(邑)과 장터는 말할 것도 없고, 때에 따라서는 논두렁도 외진 산골짜기도 싸움터로 변했다. 그들은 언제나 공격하고 승리했으나 돌아서면 또한 언제나 패배하고 기었다. 우리는 골깊은 산어귀의 샘이었고 여름 산등성이에 피어오르는 구름이었고 쉼없이 밀려드는 파도였다. 죽이고 가두고 후려서 흩었지만 다음날이면 또 어디선가 모여 항의하고 경고했다. 어찌 보면 그때의 우리가 미련한 듯도 싶으나 반드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뒤에 있었던 그들과의 25년전쟁과 거기거 흘린 피를 생각해보라. 거기서 잃은 양국의 물자와 노동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번영과 복지에 써야 할 시간의 허비를 생각해보라. 만약 일본이 제1차 수복전쟁의 삼백예순다섯째 날에라도 정신은 차려 저희 땅으로 물러갔다면, 비록 피흘리고 고통당한 것은 우리 뿐이었더라도 이익은 우리에게 있었다. 그런데도 그 거룩하고 고귀한 싸움은 역사와 기억은 몇 줄의 수치로만 갈음하고 있다. 그것도 집회 횟수 1,542회, 참가인원수 2,02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수 15,961명, 피체(被逮)인원수 46,948명, 불탄 교회 47개소, 불탄 학교 2개소, 불탄 민가 715채―하는 식의 일본 경찰 집꼐 그대로, 그러다가 정히 안됐으면 <제암리 학살>이나 유관순 열사(烈士)쯤 꺼내 손수건으로 눈시울이나 찍어대는 게 고작이었다. 우리는 물론 지금 행복하지만, 지겹고 미칠 듯이 행복하지만, 그래도 이래서는 안된다. 우리가이토록 행복해지기까지 지나온 고비고비를 기억하는 데 소홀해서는 안되며, 그때 살아남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고 간 이들을 기리는데 소홀해서는 안된다. 제1차 수복전쟁 삼백예순 다섯 날 동안 매일매일 수천 번씩 벌어졌던 거룩한 싸움들은 역사 속에 찬연히 복원되어야 하고, 수백의 제암리는 겨레의 성역(聖域)으로 보존되어야 하며, 장터마다 마을마다 음중신(陰中身)으로 떠도는 수만의 유관순은 겨레의 기억 속에 길이 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그 처절했던 제1차 수복전쟁의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 흔히 <3·1 운동의 결과> 또는 영향이라는 식으로 성의없이 얄팍하게 말해지는 부분이다. 민중의식 민족주의의 성장, 일본의 각성과 문화정책 실시, 임시정부의 성립, 지속적인 항쟁의 전통수립 따위나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사타그라하[無抵抗排英運動], 터키의 민족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反英自主運動)에 영향을 주었다는 따위가 그것이나―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려는 것은 그 따위 속알머리없는 수작이나 바람먹고 구름똥싸는 흰소리가 아니다. 우리가 오늘의 이 행복으로 한발 더 나가기 위해 넘어야 했던 또 하나의 높고 험한 재[嶺], 25년전쟁과 연결되는 역사적 고리로서의 그 결과이다. 제1차 수복전쟁이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우리 중에 일부는 그 전쟁이 이미 가망 없는 낭비임을 알았다. 일본의 표독스런 총칼 앞에 흘리는 겨레의 피를 아까워하는 소리가 높아졌고, 이튿날 아침이면 무위로 끝나긴 해도 거듭되는 매일매일의 승리로 일본의 근거 없는 자신이 자라는 걸 걱정하는 기색들이 여기저기서 완연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보다 더한 인내로 그 일 년을 채웠다. 이미 말했듯 언뜻 어리석고 속없이 보이지만 그럼으로써 얻을 더 큰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뒤 25년을 흔들림없이 이어갈 결의, 어떤 유혹에도 약해지지 않고 어떤 타협도 결연히 거부하며 한치 한치 이 땅을 피로 물들이게 되더라고 오직 우리 힘으로 그 성전(聖戰)을 수행하겠다는 결의였다. 어쩌면 침략자가 점잖은 항변과 권유만으로도 물러갈지 모른다고 생각한 그때 우리의 안일한 계획을 뼈저리게 반성하며, 또 팔만 벌리면 금세 다가와 구해줄 것도 같았던 다른 나라의 그 비정한 침묵을 가슴 속에 새기며. 그리하여...... 마침내 그 일 년이 차자 우리는 드디어 25년 전쟁으로 더 많이 알려진 제2차 수복전쟁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의 25년 전쟁사(史)는 겨레의 이동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중 산을 알고 용맹과 덕을 기리 는 이는 이 땅을 떠나 북쪽 장백산맥(長白山脈)으로 들어갔고, 물을 알고 지혜와 어짊을 기리는 이들은 남쪽 이어도로 갔다. 원수들과 같은 하늘을 이지 않겠다는 감정적인 이류보다는 거기서 각기 힘을 길러 빼앗긴 산과 들을 찾으려 함이었는데, 남과 북으로 갈라진 우리의 머릿수는 신통하게도 똑 같았다. 북으로 간 이들이 하필 장백산맥을 찾은 것은, 그 주봉(主峰) 백두산이 바로 우리 시조 환웅이 처음 발디디신 곳이요, 단군왕검께서 신시(神市)를 여신 곳이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줄기 줄기 대륙을 웅시하던 고구려 남아들의 씩씩한 기상이 맺혀 있기 때문이며, 골짝골짝 고토 회복의 꿈을 키우던 발해 용사들의 발자국이 찍혀 있기 때문이었다. 광개토대왕의 산이요, 대조영의 산이요, 최영의 산이요, 묘청의 산이요, 이징옥의 산이며, 강대한 대륙의 힘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던 모든 조상들의 산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어도도 심약한 문사(文士)들의 시나 소설에서 그려지고 있는 그런 말랑말랑한 감상의 섬이 아니다. 왕권 다툼에 실망한 장보고가 그리고 옮겨앉아 긴칼 고 대양(大洋)을 내려보던 곳이요, 당군(唐軍)에게 나라를 짓밟힌 백제인들이 물러나 백제 부흥의 칼을 갈던 곳이요,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용이 되어 터를 잡고 이 바다를 지키는 곳이요, 섬과 섬을 전전하던 삼별초가 마지막 닻을 내리고 대몽 항쟁(對蒙抗爭)의 의지를 불태우던 곳이요, 왜적과 큰 싸움이 있을 때마다 홀연히 나타나 이순신의 승리를 돕고 사라진 바다사나이들이 숨어사는 곳이며, 뭍이 이 민족에게 짓밟힐 때의 마지막 보루이자 대양으로 뻗어나가고자 할 때의 첫벌판인 섬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장백산맥과 이어도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키우고 단련했는가는 아무래도 다음번으로 미루어져야겠다. 그것은 이미 앞으로 다시 애기하게 될 25년 전쟁사(史)의 한 부분이므로, 이번 이야기는 처음부터 기미 평화전쟁 또는 제1차 수복전쟁에만 한정되어 있었고, 이제 그 이야기는 끝났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게 있다면 그것은 그날의 싸움과 관련된 가정(假定)이다. 역사는 가정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만약 그 싸움이 지금까지 얘기한 것과 달랐더라면 그 뒤 우리가 겪었어야 할 불행은 상상만으로 몸서리쳐진다. 만약 그날 우리 2천만 모두가 너무나 한꺼번에 일어나 싸우지 않았더라면, 함께 고통을 나누고 또한 함께 일본에 대한 증오를 키우며 다져가지 않았더라면, 그뒤 25년에 걸친 길고 괴로운 싸움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가 장백산맥과 이어도로 나누어 떠날 때도 따라나서지 않고 이 땅에 남은 무리가 생겼을 것이며, 그 무리는 틀림없이 친일파(親日派)로 자라갔을 서이다. 밖으로 싸움에서 철저하지 못하고 안으로 침략자에게 빌붙은 무리가 생긴다면 우리의 제2차 수복전쟁은 25년이 아니라 50년으로도 모자랐을 것이며, 가까스로 이겨 산과 들을 되찾았다 해도 어려움은 여전히 나게 됐을 것이다. 친일파의 식민지 근성은 일본을 대신해 자기들을 지켜주고 살찌워줄 새로운 외세(外勢)를 찾아나섰을 것이고, 그들이 팔벌리고 나서면 밖에서 기다리던 또다른 일본들은 옳다구나 이 땅으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몰려들면...... 아아, 그만하자. 비록 가정이라도 쓸데없이 몸서리치며 터럭 곤두세울 까닭이야 없지 않은가. 어쨌든 우리는 그 어려운 역사의 둘째 재[嶺]를 훌륭히 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이렇게 행복해지고 말았다. 미치고 지겹도록, 끔찍하게. 25년 戰爭史 일본침략군으로부터 실지(失地)회복 또는 일시적 강점(强占)상태로부터의 국토수복을 독립이라이름하는 것에 못지않게 싸가지 없는 짓거리가 그 투쟁기간을 무슨 식민시절 어쩌고 하는 나불거림이다. 앞서 말했거니와, 우리는 일본에게 잠시 국토를 점령당한 적은 있어도 주권을 넘겨준 적은 없기 때문이다. 역시 이미 말했거니와, 2차 세계대전때 불란서는 분명히 전 국토를 독일에게 점령당하고, 그 괴리정권까지 섰지만 그 시절을 독일 식민지시절이라 말하는 불란서인은 없으며, 더 멀게는 나폴레올이 한창때 유럽 각국이 그의 점령아래 들어갔지만 어떤 나라도 그걸 불란서 식민시절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정치적인 지도부가 존재하고 민족이 한 가지로 저항을 계속하는 한, 그 세월이 좀 길다해도 그것은 다만 좀 지루한 전쟁기간일 뿐이다. 그런데 요즈음들어 부쩍 자주 듣게 되는 소리 중에 더 속터지는 게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저쩌고 하는 소리다. 독립이니 운동이니 하는 말이 골 없고 밸빠진 이라는 제1차 수복전쟁사에서 벌써 얘기했으니 다시 곱씹지 않느다쳐도, 굳이 36년에 걸친 민족의 성전(聖戰)에 그런 이름을 부치는 저의를 헤아려보면 절로 치가 떨린다. 필시 우리 사이에 스며있는 한자(韓子)와 양(洋)트기, 되(胡)트기들이 저희 핏줄 끌리는 나라를 덕뵈기 위해 지어퍼뜨린 수작들일 것이다. 그것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우리중의 일부가 지각없이 받아써서 그런 고약한 말이 공식화(公式化)될 판이다. 하기야 이미 얘기한 바 있는 제1차 수복전쟁 또는 기미 평화전쟁은 그 수단에서 우리가 전쟁이란 말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는 좀 거리가 있다. 거기다가 하도 터무니없는 일을 당한 뒤끝이라 망연자실해 보낸 그전 몇 년은 우리의 저항이 소극적이고 산발적이라 자칫 우리가 일본의 도래(渡來)를 수긍한 것으로 의심받을 만도 하다. 그러나 그동안도 싸움을 멈춘 적은 없으니 식민지시절이란 말은 아무리 확대해석한다해도 우리에게는 당치않다. 하물며 뒤이어 벌어지는 제2차 수복전쟁 또는 25년전쟁에 있어서랴. 한치 한치 이 땅을 우리의 피로 물들이며 되찾아간 그 25년은 전쟁이라도 치열한 전쟁의 나날이었다. 그런데도 그 시절의 역사에 독립운동사란 욕된 이름을 붙인 자는 앙화있으랴. 그것을 그대로 믿고 퍼뜨린 자도. 아니, 그냥 듣고 있어던 자도. 더군다나 그 기간의 일을 토막내고 줄여 오직 식민지시절의 고만고만한 저항운동으로 비하시킨 자들에게는 억천만 조령(祖靈)의 저주가 있을진저. 그러하되, 세월이 지나면 사람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엄격한 기록에도 사(邪)가 인다. 한동한 찍 소리 못내고 숨어지내던 한자(韓子), 양트기, 되트기들이 옷솔기의 이처럼 스멀스멀 기고, 머리 검 은 우리 젊은이 중에는 몰색없이 낯선 새 것만 찾는 축이 늘어간다. 그 모든 게 죽이 맞아 뒤엉키다보면 거짓은 참이 되고 자랑은 욕이 될 수도 있으니 방금의 못된 개념규정, 돼먹잖은 시대구분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이에 재주없으나마 본 바, 들은 대로 우리의 25년전쟁을 얘기하려니와, 아는 이는 아는 대로 다시 한 번 그 감격을 함께 되새기는 데서 뜻을 찾으시기를. 제1차 수복전쟁에서 패퇴한 우리가 잠시 이 땅을 비워두고 남북으로 나누어 길 떠난 얘기는 이미 했다. 북쪽으로 떠난 패는 장백산맥에 자리잡고, 남쪽으로 떠난 패는 이어도에 닻을 내려 피로 피를 씻는 국토수복전의 채비에 들어갔음도. 하지만 그 무렵은 섬로랑캐 일본이 초장 끗발에 취해 얄[속의 작은말]이 벌어질대로 벌어져 있을 때였다. 말이 쉬워 남북으로 떠났지, 우리가 목적지에 이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가 못했다. 일본이 싸움에 맛들인 군대와 한창 손에 익은 새병기로 우리를 뒤쫓은 까닭이었는데, 그 바람에 25년전쟁의 첫 막은 바로 그 추격을 뿌리치는 전투로 시작됐다. 먼저 일본과 전단(戰端)을 연 것을 장백산으로 이동하던 북로군(北路軍)의 단후(斷後)대대였다. 일군(日軍)의 악착같은 추격에도 불구하고 노약자와 아녀자를 감싼 선발대가 장백산 깊숙한 곳에자리를 잡았다는 연락이 오자 일군의 추격을 뿌리치는 일을 맡고 있던 단후대대는 한 차례의 복견전(伏擊戰)을 결심했다. 그대로 두면 장백지 추격해와 우리가 잠시 의지해 전열을 정비할 본거지까지 귀찮게 굴 것 같은 일군(日軍)들이라, 그쯤에서 대타격을 주어 다시는 뒤쫓을 엄두를 못내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25년전쟁 첫 해, 서력으로는 1920년 9월 초순의 일이었다. 전투라면 먼저 갖춰야할 게 정보여서 우리는 그쪽부터 시작했다. 산 잘 타고 길 잘 아는 이들은 산 속으로 흩어져 복격전에 알맞은 지형을 찾으러 나섰고, 날래고 눈치빠른 이들은 저잣거리로 내려가 우리를 뒤쫓는 일군의 동태를 살펴보기로 했다. 며칠 안돼 저잣거리로 내려갔던 이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알아내 먼저 돌아왔다. 그들은 이곳저곳 쑤시고 다닐 것 없이, 한 군데 부엉이집 같은 곳을 털어 일군에 대한 정보를 무더기로 빼냈다. 바로 만주 혼춘(琿春)에 있던 일본영사관을 습격한 것이었다. 당시의 일본영사관은 침략의 전초기지라 그 서류함 속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게 모두 있었다. 거기 따르면 일본군의 추격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치밀했다. 병력은 14사단, 13사단, 그리고 21사단에 만철(滿鐵)수비대까지 합쳐 5만을 넘고 있었으며, 작전형태도 단순한 추격이 아니라 특정 지역에서의 포위섬멸을 기도하고 있었다. 곧 우리의 목표지를 어느 정도 예견하고 삼면으로 포위공격해 아예 뿌리를 뽑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밖에 그 정보에는 일본군의 움직이는 방향과 행군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13,14사단은 만주의주둔지에서 장백산의 장고봉(長鼓峯)을 거쳐 남하하고, 나남에 있던 21사단은 도문강(圖門江)을 건너 북상하며, 만철수비대는 송화강(松花江)을 건너 서진해 우리를 삼면에서 포위하려는 것이었다. 나남에서 북상해오는 21사단이 추격군의 전부인줄로 알았던 우리는 그 뜻밖의 정보에 적지아니 위축되었다. 단후대대(斷後大隊)가 비록 그때 우리의 가장 정예한 부대였지만 머릿수는 겨우 천오 백에 수복전 초기여서 화기(火器)도 아직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전단을 서둘러 열기보다 그대로 장백산의 본대와 합류해 소규모의 산악게릴라전으로 들어가자는 의견이 일어 우리의 전의가 흔들리고 있을 때, 산악으로 지형정찰을 나갔던 이들이 반가운 보고를 가지고 돌아왔다. 거기서 멀지않는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의 백운평(白雲平)으로 드는 골짜기에서 복격전에 알맞을 지형을 찾았노란 것이였다. 길이 80리에 짙은 밀림이 덮인 골짜기 양편의 경사는 성벽을 기어오른 것만큼이나 가파로워 몇 개 사단이라도 매복할 수 있었으며, 더군다나 그 사이로 난 길은 적의 대군이 반드시 지나야 할 길이었다. 멀지않은 곳에 그런 천혜(天惠)의 지형이 있다는 게 먼저 우리의 흔들리는 전의를 다시 굳혀 주었다. 거기다가 일본군의 진행을 그대로 용인하면 본거지로 예정한 곳이 포위되어 아직은 항전의 채비를 갖추지 못한 본대가 위협받을 염려때문에 모두의 의견은 곧 거기서 일전을 치르자는 대로 모아졌다. 우리는 본대 호위병력에서 1천 명을 추가로 지원받고 화기도 최대한 그 전투에 참가할 부대에 집중시킨 뒤 강행군을 시작했다. 우리가 먼저 그 골짜기에 들어가 매복하기 위함이었다. 합쳐 2천 5백의 병력에다 1백대가 넘는 치중(輜重)마차까지 딸린 행군이었으나 우리는 남하하는 일본군 부대보다 한발 앞서 그 골짜기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원래 우리의 계획은 거기서 기다리다 먼저 오는 적부대를 치고, 다시 몸을 빼쳐 북상해오는 부대에게 기습을 감행할 작정이었다. 송화강을 건너 서진해오는 부대는 우리에게 그 두번의 싸움을 치르고도 남는 힘이 있으면 타격을 주기로 했다. 그런데 아직 남하하는 적군의 부대가 우리의 매목망에 걸려들기도 전에 놀라운 정찰보고가 들어왔다. 「나남의 적 21사단이 벌써 오십 리 남쪽까지 진출해왔소.」 우리 대부분은 그런 고보에 걱정부터 먼저 했다. 자칫하면 2개 사단의 남북 협공에 의해 우리가 오히려 낭패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지만 우리 중에 전투를 잘 아는 이들은 달랐다. 골짜기의 방향도 살피고 얼마 남지않은 해도 쳐다보고 하던 그들은 오히려 손뼉까지 치며 기뻐하는 것이었다. 「잘됐소. 한꺼번에 두 마리 호랑이를 다 때려잡읍시다.」 「겨우 2천 5백 명으로 어떻게 남북에서 협공해오는 적 2개사단을 한꺼번에 칠 수 있단 말이오?」 싸움에 어두운 이들이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그들이 자신있게 말했다. 「두어 시간 뒤면 날이 어두워지는 데다 어리석게도 왜적들은 협공을 한답시고 반대 방향에서 진군해오고 있소. 거기다가 더욱 다행한 것은 양편 적의 도착에 시차가 있다는 것이오. 남하해오는 적부대는 이제 한 시간만 있으면 이 골짜기로 접어들 것이오. 그러나 북상해오는 적은 이곳의 포소리를 듣고 강행군을 한다해도 세 시간은 지나야 이 골짜기로 접어들거요. 우리는 그 두 시간의 시차를 이용하면 그들끼리 싸우게 할 수도 있소. 먼저 온 적군에게 한 차례 타격을 준 뒤 어둠을 이용해 서편 산등성이를 기어넘어 빠져버리면 양쪽에서 전진해온 적부대를 밤중에 만나 저희끼리 싸우게 될 것이오. 물론 저 험한 산등성이를 기어오르기가 힘들고, 적잖은 치중(輜重)마차를 잃는게 아깝다는 대가는 충분히 받을 것이오.」 그제서야 싸움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도 그들이 오히려 기뻐한 이유를 알 듯했다. 이내 마음속의 걱정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싸울 채비에 들어갔다. 우리가 매복의 장소로 정한 것은 골짜기를 따라 이어지는 길이 한 오 리 정도의 개활지인 백운평(白雲坪)이란 곳과 만나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 양쪽 비탈의 침엽수림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남쪽 관목숲과 바위그늘에는 소총부대를 매복시켰다. 우리의 배치가 끝나고 오래잖아 적의 척후조가 골짜기 북쪽에서 개활지로 조심조심 걸어 들어왔다. 그때 매복한 우리가 가슴 철렁했던 것은 적 척후병이 우리 치중마차를 끄는 말이 흘린 말똥을 발견한 일이었다. 놈은 그 방면에 경험이 많은지 장갑을 벗고 말똥을 만져보았다. 그 온도로 우리가 지나간 시간을 가늠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때는 9월이라도 만주의 9월이라 말똥은 벌써 식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걸로 우리가 오래전에 지나간 석이라고 단정한 척후조가 수기신호를 하자 적은 더이상의 정찰없이 개활지로 쏟아져 들어왔다. 전위사령(前衛司令)을 앞세운 기병(騎兵), 보병, 공병의 혼성여단이었는데, 병력은 어림잡아도 만 명은 넘어보였다. 지휘를 맡은 우리 중의 하나가 적의 전위사령을 쏘아 말에서 떨어뜨리는 것과 함께 우리의 공격은 시작되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아직 훈련도 조직도 제대로 안된 민병(民兵)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기습은 그뒤의 어떤 전투에서보다 성공적이었다. 우리 기관총의 총구가 벌겋게 달고 소총의 화약연기가 저녁 이내처럼 골짜기에 퍼져나갈 무렵 개활지는 쓰러진 적병으로 뒤덮여 있었다. 뒷날 밝혀진 저희 기록에 따르면 거기서만 적군 2천2백 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줄이고 줄인 것일테지만 그걸 믿느다쳐도 부상자를 합치면 태반이 쓰러진 셈이었다. 하지만 적군도 그때까지는 패배를 모르던 대일본제국의 군대다웠다. 용케 살아남은 자들은 곧 엄폐물을 찾아 전열을 가다듬었다. 거기다가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후속부대가 있어 해질 무렵해서는 제법 반격의 태세까지 갖추었다. 평가에 따라서는 놀라운 대응능력이지만 결과로 보면 그게 그들의 피해를 몇 배나 늘이는 요인이 된다. 싸움이 일방적인 매복기습에서 쌍방간의 화력전으로 양상이 변한 뒤에도 우리는 예정대로 저물때까지 버티었다. 병력과 화력 모두 적군에게 턱없이 못미쳤지만 먼저 차지한 지형의 이점이 겨우 우리를 지탱하게 했다. 그러나 양상이 그렇게 바뀌다보니 우리에게도 피해가 없을 수 없었다. 그럭저럭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이 죽고 다쳐 25년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우리가 퇴각을 시작한 것은 날이 완전히 저문 뒤였다. 먼저 무거운 기관총을 진 부대가 서편 등성이로 기어올랐고, 이어 골짜기 바닥의 소총부대도 서편 등성이로 붙었다. 그러나 잔류조 5백은 그사이 북상한 적 나남사단이 골짜기 남쪽으로 밀고 들 때까지 버티었다. 그러다가 나남사단이 등뒤로 바짝 다가들었을 때에야 갑자기 돌아서서 한 차례 벼락 같은 총질을 퍼붓고 슬며시 서편 비탈로 기어 올랐다. 북쪽 입구로 들어온 적의 혼성여단은 우리 마지막 병력이 서편 산등성이로 사라진 뒤에도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5백명 잔류조의 위장이 워낙 절묘한 데다 남쪽으로부터 진입한 저희 나남사단이 예정보다 너무 빨리 온 까닭이었다. 한 차례의 일제 사격 뒤에 우리의 총소리가 갑자기 멀어진 게 조금 이상했지만, 그게 설마 저희편 사단의 총질로 바뀌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우리가 한바탕 화력을 집중한 사격끝에 퇴각을 시작한 줄만 알았다. 비슷한 오해는 골짜기 남쪽에서 밀고 올라온 나남사단에게도 일어났다. 멀리서 나는 총소리를 듣고 저희편 병력이 우리와 조우한 것을 짐작한 나남사단은 애초의 목적대로 우리를 포위 섬멸하기 위해 강행군을 시작했다. 골짜기 입구에서 그들을 더 깊이 끌어들이기 위해 매복해있던 몇 안돼는 우리 유인조를 기세좋게 물리친 그들은 갑자기 우리의 5백 잔류조가 퍼붓는 화력에 몹시 혼란되었다. 이미 물리쳤다고 생각한 적이 그 몇십 배의 화력으로 기습해 온 데다, 앞뒤를 알아볼 수 없는 어둠이 거들어 혼란을 가중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패배를 경험하지 못한 정예한 황군(皇軍)이기는 골짜기 북쪽으로 진입해들어온 저희 우군부대와 다름없었다. 곧 전열을 정비해 반격해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우리의 5백 잔류조가 연기처럼 사라진 뒤라 그들이 총질하는 상대는 뻔했다. 북쪽에서 진입해온 저희 혼성여단을 퇴각한 우리 부대로 단정하고 아낌없이 총알을 퍼부어댄 것이다. 그 어이없는 저희끼리의 총격전은 밤새 계속되었다. 더구나 이튿날 새벽 그 골짜기에는 짙은 안개까지 끼어 일본군의 희생은 더욱 늘었다. 그러다가 둘 중 더 성미급한 사령관이 <도쯔께기(돌격)>를 외쳐 양군이 육박전으로 엉킨 뒤에야 그들은 비로소 그 어이없는 희비극을 막내릴 수 있었다. 하도 무참한 일이라 일본의 전사(戰史)에서조차 빠져, 그날밤 그들이 입은 피해를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인근 만주인들에 의하면 옮겨지믄 시체만도 살아서 옮기는 사람보다 훨씬 많아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승리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날 밤 1백20리나 달려 적의 포위망을 완전히 빠져나온 우리는 갑산촌(甲山村)이란 곳에 이르러 또 한 차례 적에세 따끔한 맛을 보여줄 정보 하나를 얻었다. 거기서 멀지않은 천수평(泉水坪)이란 곳에 적의 기병중대가 주둔해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이쪽 병력이 훨씬 우세해 우리는 거꾸로 그들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용케 도망친 넷을 빼고 중대장을 비롯한 중대원 전원을 사살하고 나니 다시 큼직한 정보 하나가 우리 손에 들어왔다. 사살된 적 중대장의 몸에서 나온 정보문서로서, 거기에는 적 19사단이 어랑촌(漁郞村)이란 곳에 포진 중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때 우리는 이틀 밤낮에 걸친 전투와 강행군으로 지쳐 있었지만, 그 대단한 정보를 손에 넣고도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길가다 쓰러지지 않을 만큼 짧은 휴식을 취한 뒤 어랑촌에 정찰부터 보냈다. 사단이라면 최고한 우리의 네 배는 되는 병력에 중화기(重火器)를 보유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섣불리 덤빌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마 후 돌아온 정찰조의 보고는 우리를 더욱 자신없게 했다. 적은 사단이라지만 지원부대가 더 있어 병력은 2만에 가까웠고, 그곳에 포진한 지도 오래되어 진지구축이 견고하기 짝이 없더라는 게 그들의 정찰담이었다. 그런 적을 2천 5백의 지치고 화력조차 변변찮은 병력으로 정면 공격을 한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때껏 싸움에서 그토록 멋진 지략과 담력을 보여주던 이들조타도 그 보고에는 자신없어 했다. 거기다가 그때까지의 전과도 결코 작은 것은 아니어서 우리의 중론은 강한 적을 우회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하지난 그 선택권도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정찰을 보내고 의논을 모으느라 지체하는 사이에 우리 부대의 접근이 적의 최후에 걸려버린 것이다. 기마대에 자동차까지 있는 적군이 2만 병력을 풀어 추격전을 벌인다면 아무리 산악을 탄다해도 무사히 빠져나가기는 글러버린 일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으로 돌파합시다. 정히 안되면 우리 모두가 죽을 때까지 싸워 배달겨레의기백을 보여줄 뿐이요!」 지략보다는 담력과 열정으로 우리의 우러름을 받던 이가 그렇게 비장한 결의를 내놓았다. 그때우리 중에서 가장 싸움의 경험이 많고 전술에 뛰어난 이가 침착하게 우리의 섣부른 체념을 막았다. 「이제 이 거룩한 전투에 나선 이상 우리의 몸은 우리 것이 아니오. 빼앗긴 삼천리를 되찾을 때까지 우리의 몸은 겨레의 도구요, 밑천으로써 소중히 보살펴져야 하오. 옛말예 이르기를 죽기로 나아가면 오히려 살길이 열린다 했으니 우리 한 번 그 길을 찾아봅시다. 먼저 찾을 수 있는 한의 유리한 지형을 찾아 방어전을 펴되, 하나가 백을 당한다는 각오로 싸운다면 안될 것도 없소이다. 임진년 저들의 침략때 행주(幸州)나 진주(晋州)에서의 큰승리가 병력이 많아서였소, 화력이 우월해서였소?」 그러자 그 말에 무슨 암시를 받았던지 정찰조로 나갔던 사람 중에 하나가 미뤘던 지형정찰보고를 뒤늦게 냈다. 「비록 강물을 두르지는 않았지만 행주산성과 매우 흡사한 고지 하나를 봐두었습니다. 여기서 멀지않은 마록구(馬鹿溝)란 곳에 있는 고지인데, 뒷편은 적이 우회해서 에워싸기 불가능한 산맥으로 이어졌고, 좌우는 산짐승도 기어오르기 어려울 만큼 가파르며, 오직 전면만 보병의 접근이 기능했습니다. 그 전면에 우리 화력을 집중하면, 설령 적이 사단 전체를 들어 쳐올라온다해도 막아낼 수 있을 듯 했습니다.」 이어 용기를 되찾은 우리는 곧 마록구로 이동했다. 과연 멀지않은 곳에 정찰조가 말한 그 봉우리가 있었다. 대개 알려진 대로였는데 더 좋은 것은 적의 접근이 가능한 전면의 폭이 좁아 우리의 방어에 훨씬 유리하리라는 점이었다. 거기다가 그 봉우리 부근에는 차도는커녕 우마차 다닐 길도 닦여있지 않아 적은 보유한 야포(野砲)조차 활용할 수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고지를 점령하는 데는 예상못한 어려움도 있었다. 적들 또한 그 고지의 전략적 가치를 알아, 그 위에 관측소를 설치하고 중기관총을 지닌 일개 소대를 배치해놓았기 때문이었다. 지키기 좋은 곳이라면 빼앗기 어려운 법, 고지 위의 적에 비해서는 백 배의 병력과 화력을 지닌 우리였으나 제 목숨을 던져 적의 기관총 좌지(座地)를 날린 젊은이가 우리 셋이나 나오고서야 겨우 그 고지는 우리의 것이 되었다. 적의 본대가 그 고지를 에워싸고 공격을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도 안되서였다. 먼저 전면 경사가 완만한 비탈을 돌격을 감행한 것은 저희편 기병중대가 갑산촌에서 전멸했다는 소식에 격분해있던 적의 나머지 기병중대였다. 하지만 장한 것은 다만 기세였을 뿐이었다. 몇 백인지 모를 기병대가 까맣게 경사면을 치달아왔으나 6부능선에도 이르지 못하고 우리편 기관총에 쫓겨 밀려났다. 그때 돌아가는 말에 임자가 타고 있는 것은 절반이 채 안되었다. 이어 악에 받친 적 보병의 육탄 공격이 시작되었다. 대련에서 여순에서, 노문한에서 톡톡히 효과를 본 그들의 돌격방식이었으나 워낙 전면 비탈의 폭이 좁아 시체에 시체를 쌓을 뿐 역시 6부 능선도 돌파하지 못했다. 두 번의 공격에서 실패한 적은 한편으로는 전열을 정비하면서 한편으로는 포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야포는 끌고오지 못했으나 박격포와 척탄통(擲彈筒)은 상당히 위력적이었다. 충분한 야전축성(築城)을 못한 우리는 머리 위를 뒤덮은 듯한 포탄에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포격의 효과를 감지한 적은 세번째의 공격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보기(步騎)의 혼성 공격파였 다. 쉴새없는 적의 포격때문에 우리의 화선(火線)이 엷어져 그때부터 제법 본격적인 고지공방전이 벌어졌다. 적은 그 공격에서 8부능선까지 돌파했다가 우리의 안간힘을 다한 반격에 밀려났다. 그로부터 꼬박 이틀밤 이틀낮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계속됐다. 저 행주산성의 전투가어떠하고 진주성의 전투성의 전투가 어떠했는지 잘은 모르나 그때 우리가 겪은 것보다 더 치열하지는 않았으리라. 우리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잠에 떨어지곤 하는 서로를 꼬집어가며 쉴새없이 총질을 했다. 기관총은 물을 퍼부어도 총열이 벌겋게 달아 나중에는 총탄이 발밑에 툭툭 떨어질 판이었다. 아무리 지형이 절묘하고 우리의 투지가 매서웠다해도, 워낙 적의 인원과 화력이 우세하다 보니희생이 없을 수 없었다. 그 이틀밤 이틀낮 동안 백 명에 가까운 젊은 형제들의 넋이 조상의 영령들이 계신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그 전투에서 일본군이 치른 대가는 아무리 적이지만 참혹했다. 뒷날 그들의 전사(戰史)는 마록구 전투에서 전사자를 1천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맹세코 우리는 전투전에 결의한 일당백(一當百)을 이루었다. 그 산비탈에 켜켜이 쌓인 적의 시체들 중에서 한 켜만 걷어도 2천은 넘었을 것이다. 우리의 퇴각은 그 고지에서 이틀밤을 새운 뒤의 새벽에 이루어졌다. 이틀밤낮의 격전으로 식량과 물뿐만 아니라 탄약까지 부족을 느끼게 된 우리는 그 여명에 있는 적의 발악적인 공격을 물리치는 그 즉시 퇴각을 결정했다. 채비를 마친 우리는 여러 곳에 모닥불을 피워 남은 탄알을 한줌씩 던져놓고 뒤편 산록으로 어들었다. 우리가 첫번째 봉우리로 접어들 무렵 아물거리는 우리의 모닥불쪽에서 콩볶듯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한 줌씩 묻어놓은 총알이 모닥불의 열기에 드디어 터져 이미 텅빈 진지를 아직도 우리가 남아 완강히 저항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뒷날 그 전투에서 <청산리 싸움>이란 이름이 붙여지고, 우리와 일본간에 벌어진 첫번째의 근대적인 전투로 공식인정됐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그 전투의 세세한 경과나 성과를 말하는 데 이르면 다시 듣다가 분통터져 죽을 소리가 한둘이 아니다. 무슨 전투는 내가 지휘했느니, 무슨 전투는 늬가 지휘했느니, 아무개가 중대장이고 아무개는 무슨 사령이었느니 거시기는 총을 몇 방 쏘았고, 머시기는 수류탄을 몇 발 깠느니, 죽인 건 몇 명이고 죽은 건 몇 명이라느니, 누구는 무슨 주의자(主義者)였고 누구는 무슨 파(派)였느니 그 싸움의 진행은 이러했고, 효과는 저러했느니―그런다고 뭐 얻어걸릴 일 있는 줄 알고 달린 입이라고 이리저리 씨월거리는 자들이 더러 있는 모양인데 그러는 게 아니다. 사운 것은 다만 <우리>였으며 목적은 국토수복이었고, 효과는 그 목적을 위한 전열정비의 시간을 번 것 뿐이었다. 그때 우리는 사람죽이는 재미로 싸운 것도 아니고, 뒷날 자랑삼자고 싸운 것도 아니며, 그 자랑 코에 걸고 한 자리 얻자고 싸운 것은 더욱 아니다. 이어도로 간 남로군(南路軍)도 섬오랑캐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서는 한바탕의 싸움이 불가피했다. 대강이긴 해도 북로군의 첫싸움을 꽤나 길게 얘기했으니, 그 남로군의 싸움도 수캐 이 잡듯이나마 동은 잇기도록 해보자. 이어도―지도에도 없고, 환웅과 웅녀의 자손s이 아닌 니들에게는 잘 눈에 띄지도 않는, 그러나 우리가 외적의 침노로 고달프고 어려워질 때면 어김없이 돌아가 힘을 기르며 뒷날을 기약하는 그곳, 저 북쪽의 장백산과 나란히 겨레의 우러름을 받는 그 남쪽바다의 성지(聖地)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 있다. 그 섬을 대만 시인의 감상이나 소설가의 들큰한 상상력으로 함부로 가지고 놀아서는 안된다는 것도. 남쪽으로 길을 잡은 우리가 그 이어도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북로군이 장백산으로 들기 두어 달 전이었다. 그러나 남쪽 우리의 이동과 집결은 북쪽 우리의 그것에 비해 좀 수월했다. 당시 이땅으로 진출한 일군(日軍)은 육전(陸戰)을 위주로 한 편성이어서 바다로 빠져나가는 우리에게는 악착을 떨 형편이 못되었다. 거기다가 저희 해군은 청일(淸日), 노일(露日) 양 전쟁에서의 승기를 해전에서 잡았던 터라 우리의 해상세력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 바람에 우리 남로군(南路軍)은 반도를 떠나 이어도로 집결할 때까지는 북로군(北路軍)과 같이 추격전에 시달리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처음에는 해안에서 우리가 줄어들다가 마침내는 반도 남쪽이 통째 비어가기 시작하자 일본군도 문제의 심각성을 눈치챘다. 그리고 남아있던 한자(韓子)들에게 수소문해 남쪽의 우리가 이어도로 옮겨갔다는 걸 알자 뒤늦은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감히 누가 내배 다차랴 하며 한껏 제끼고 앉은 저희 해군에게 추격과 수색을 의뢰하는 한편 지상군을 쪼개 해안 지대에 배치하고 그 수색조도 풀었다. 그때 해상 수색과 추격을 맡고 나선 게 제1차 세계대전도 끝났고해서 심심하던 차에 잘 걸렸다는 식으로 시모노세끼를 떠난 야마모도(山本)함대였다. 사령장관은 뒷날 진주만기습때 반짝했던 야마모도 이소로꾸(山本五六)의 맏형 야마도고 이찌니(山本一二)였는데, 노일전쟁때 동해에서 고물 러시아 군함 몇 대 가라앉힌 걸로 이십 년이 다 돼가는 그때까지 기세가 대단했다. 그 야마모도가 기함(旗艦) <데이고꾸(帝國)>와 호위전함 2척, 구축함, 순양함 각 세 척씩에 적지않은 어뢰정까지 딸리고 남해로 들어서자 이어도의 우리에게 적지않은 어려움이 생겼다. 섬과 본토 사이가 차단됨으로써 국토수복전에 필요한 물자의 반입이 막힌 까닭이었다. 이어도가 원래 물산(物産)이 넉넉해 우리가 먹고 입는 것은 그럭저럭 댈 수 있었지만, 병기를 제조하는데 필요한 광물이나 화약까지는 넉넉하게 내놓지를 못했다. 거기다가 이어도의 우리를 더욱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추격이 뒷북이 되고 만 야마모도 함대의 수색을 핑계로 한 횡포였다. 그들은 우리를 찾는답시고 뭍에 올라가 우리의 항구를 부수고 집을 불태우는가 하면 다도해를 샅샅이 뒤져 재물을 약탈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을 괴롭혔다. 남은 사람들―피에 왜물(倭一)이 튀어서였건, 양(洋)물이 튀어서였건, 되(胡)물이 튀어서였건―그들도 우리가 이 땅을 수복한 뒤에는 어쩔 수 없이 우리와 이 땅에서 무리지어 살 사람들이 아닌가. 아무런 저항이 없자 방자한 만큼이나 집요함을 더해가는 그들의 수색도 손 처매고 들어앉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데가 있었다. 우리의 이어도란 게 비록 피를 달리하는 족속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고, 요행 찾아냈다 해도 접근이 쉽지 않는 곳이기는 하지만, 만에 하나 그들이 그곳을 알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실로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가 물러설 마지막 땅인 동시에 기대어서 몸을 일으킬 수 있는 겨레의 은밀한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적당한 선에서 그들의 추격과 수색을 끊어버리는 것이 장백산의 우리들 못지않게 이어도의 우리에게도 필요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력으로 1920년 9월, 청산리에서는 북로군의 단후전(斷後戰)이 한창 치열하게 벌어지 고 있을 무렵, 이어도의 우리도 추격군과의 일전을 결의하게 되었다. 물론 그 전 10년을 당한 것에 대한 복수전의 성격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본질은 북로군과 같이 단후전이었다. 하지만 싸움이란 게 본시 결의만으로는 되는 게 아니다. 그렇잖아도 전투가 못된 세월따라 점점 사람보다는 병기에 의존하는 정도가 늘어나있는 데다, 우리의 그럼에 선택도 어쩔 수 없이 해전(海戰)이 될 수밖에 없어 더욱 그랬다. 벌써 오래전부터 해전에서는 결의, 용기, 순국열(殉國熱) 같은 전사(戰士)의 개인적 미덕보다는 성능좋은 전함과 우수한 화력(火力)이 승패를 가름하는 조건이 되고 있었다. 4백 년 전 임진란때 자랑스런 조상들이 성능좋은 전함과 현자포(玄字砲), 지자포(地字砲) 같은 우수한 화력의 도움에 힘입은 바 크지 않았던가. 따라서 이어도의 우리가 가장 먼저 힘을 쓴 것은 신식 군함으로 짜여진 적 함대와 맞설 싸움배와 화력(火力)의 마련이었다. 우리 중에 머리좋고 꾀많은 이들이 이 궁리, 저 수단을 짜냈다. 궁하면 통한다고, 칼 안들고 간 내먹기도 바이 길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여러 날 의논끝에 대강 두 가지로 방책이 세워졌다. 그 한 가지는 우리 안에서 마련하는 길이었다. 눈알 푸른 것들의 몹쓸 문명에 이제는 한물 간 걸로 구박받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먼저 철갑선을 만든 조선술의 전통이 있었으며, 사거리가 짧고 화력 또한 신통찮아도 화포(火砲)의 제작 또한 한때는 남에게 뒤지지 않은 이력이 있었다. 거기다가 나라문이 열리면서 새로이 들어온 기술 몇 개 얹으면 전함이건 대포건 꼭 못만들 것도 없었다. 다른 한 길은―비싼 값을 치러야겠지만―적에게서 빼내오는 것이었다. 손자(孫子)가 이르기를 적에게서 하나를 빼내 내것으로 만드는 것은 내게 둘을 더하는 것과 같다 했다. 만약 우리가 야마모도 함대에거 어뢰정 한 척만 빼낼 수 있어도 우리에게는 두 척이 생기는 효과를 준다는 뜻인데 우리 젊은이들은 바로 그것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걸었다. 세상 모든 일을 어둡고 어렵게만 보는 이들에게는 기적같게도, 그 두 가지 방책은 두 달도 안돼 우리에게 바다에서의 싸움을 흉내라도 낼 수 있는 배와 화포를 마련해주었다. 배로는 거북선 두 척에 판옥선(板屋船) 다섯 척, 순양함 한 처그 어뢰정 한 척이요, 화포로는 불랑기(佛郞機) 백여 문(門)에 천자포 2백여 문, 신식산포(山砲) 5문이었다. 거북선과 불랑기, 천자포는 이어도에서 우리가 밤낮없이 만든 것이요, 순양함과 어뢰정 그리고 신식 산포(山砲)는 야마모도 함대와 일본 지상군에게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거북선 판옥선이라 해도 옛대로는 아니었다. 우리들은 틀림없이 조상의 법을 바탕으로 거북선을 모았(지었)으나 장갑(裝甲)은 두 치 두께의 철판에 스무 쌍의 노는 두대의 어선용 발동기와 스쿠류로 바뀐 신형(新型)이었다. 적의 기함 데이고꾸호의 19인치 주포(主砲)만 정통으로 맞지 않는다면 견뎌낼 쾌속철갑선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판옥선도 옛대로는 아니어서 철갑은 없어도 돛과 노는 발동기로 갈아 속도만은 적 함대의 어떤 배에도 뒤지지 않았다. 불랑기와 천자포도 왕조(王朝)시대의 것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달랐다. 장영실과 박연(밸테브레)과 이장손의 자들이 물려받은 솜씨에다 새로이 받아들인 기술을 더해 불랑기는 한 관짜리 포탄을 4천 보(步)나 날리고, 포신(砲身)이 짧아 사거리(射距離)가 보잘 것 없었던 천자포도 관반(貫半)자리 포환(砲丸)을 3천 보나 날렸다. 거기다가 최무선의 자손이 화약을 개량하니 한 관짜리 포탄만으로도 한 치 철갑은 찢을만 했다. 순양함과 어뢰정을 얘기하자면 먼저 그것을 얻기 위해 산화한 수십 명의 젊은 우리의 넋에 대해 묵념부터 드려야 한다. 순양함<쇼오리>(승리)호는 수색을 핑계로 갑판원의 대부분이 인근 항구에 내려가 분탕질을 치는 사이 맨몸에 칼 한자루만 입에 문 젊은 우리에게 점령당했는데, 우리 또한 남아 배를 지키던 그들 수병(水兵)의 발악에 열여섯의 꽃다운 목숨을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뢰정 가끼히찌마루(??8?)는 함대를 벗어나 다오해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가 기관고장으로 표류하던 것을 우리 바다 사나이들이 나포한 것이지만, 그역시 겨레의 씩씩한 사나이를 다섯이나 조상의 영령곁으로 보낸 뒤에야 우리 손 안에 들어왔다. 다만 산포만은 우리 군자금에서 나간 황금 몇 덩이로 저들 지상군의 썩은 지휘관에게서 사들인 것이었다. 그 경위야 어쨌건 그렇게 대강이라도 채비가 갖춰지자 우리는 곧 어느 곳을 전장(戰場)으로 삼을까를 의논했다. 먼저 옛일에 밝은 이가 말했다. 「한산도 부근이 어떻겠소? 임진년 왜란때 이 충무공께서 크게 적을 무찌르신 곳이니 조령(祖靈)의 가호가 있을 것이오.」 그러나 바다싸움에 대해 잘 아는 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적과 우리의 힘이 비슷해서 바다 위에서의 용전(勇戰)만으로도 승리를 얻을 수 있었소. 그러나 지금 우리는 싸움배에서도 화포에서도 적에게 어림없고 다만 사람의 머릿수와 필사의 각오에서만 앞설 뿐이오. 사람의 머릿수가 그대로 힘이 될 수 있는 뭍에서의 싸움을 곁들이지 않는다면 이길 가망은 전혀 없소.」 「배 위에 탄 적을 어떻게 뭍으로 끌어올린다 말이오?」 처음 한산도를 들고 나온 이가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바닷싸움을 잘 아는 이가 받았다. 「적이 배에서 내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뭍에서 싸울 수 있으면 되오.」 「뭍에 있으면서 멀리 바다에 떠 있는 적과 어떻게 싸운단 말이오?」 다시 누군가 그렇게 의문을 나타내자 바닷싸움을 잘 아는 이가 이미 보아둔 곳에 있는지 자신있게 말했다. 「해협을 전장으로 삼으면 되오. 우리의 포탄이 닿을 만한 해협 양쪽에서 포대를 설치하고 적의 함대를 그곳으로 유인해들이면 우리는 뭍에서도 배를 탄 것처럼 싸울 수 있소이다.」 「하지만 그런 마춤한 해협이 어디 있겠소?」 「다도해요. 여기서 서북 백여 리쯤 되는 곳의 다도해에는 섬과 섬 사이가 5천 보를 넘기지 않게 몰려있는 곳이 있소. 그곳 해안에 우리가 가진 모든 화포를 건 뒤에 적의 함대를 꾀어들이면 비록 우리의 싸움배가 적고 화력이 약해도 크게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 여러 가지로 미뤄 우리가 싸움배를 마련한다 화포를 만든다 분주하던 그 두달 동안 그는 남해한을 샅샅이 뒤지며 우리에게 알맞는 전장을 찾아 다닌 듯했다. 그가 몇 마디 더 보태기도 전에 바닷싸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라면 모두 그를 편들고 나서 전장은 이내 그가 말한 곳으로 결정되었다. 전장이 결정되자 곧 그에 따른 전투준비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가진 모든 화포는 좁은 바다를 포위하듯 둘러선 여섯 개의 작은 섬으로 은밀히 옮겨져 설치되고, 우리 함대는 그 무렵 부산 앞바다에서 얼쩡거리는 야마모도 함대를 유인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우리의 유인작전은 적의 지상군이 주둔하는 진해 앞바다의 무력시위로 막을 열었다. 우리는 거북선 두 척과 순양함 한 척, 어뢰정 한 척으로 함대를 구성한 뒤 이어도에 있는 수백 척의 고깃배까지 모조리 이끌고 그곳에 이른 뒤 지상군의 진지에다 함포를 퍼부었다. 자신들에게 대항할 무력이 이 땅에는 남은 게 없는 줄 알고 있는 적 지상군은 당연히 놀랐다. 고깃배건 나룻배건 바다에 뜬 것은 모조리 전함으로 헤아려 야마모도 함대에게 숨넘어 가는 소리로 알렸다. 우리가 수백 척의 함정을 이끌고 상륙전을 감행하여 한다는 지상군의 무선연락을 받은 야마모도 함대의 사령장관은 깜짝 놀랐다. 두 달이나 이잡듯 서남해를 뒤져도 코끝에 안보이던 우리가 갑자기 대함대로 나타난 까닭이었다. 곧 야마모도 함대에는 비상이 걸리고, 부산포에 상륙해 해롱거리던 일본수병들은 달려온 사관들에게 귀쌈까지 얻어맞아가며 배로 끌려 돌아왔다. 하지만 경박한 만큼 재빠르기도 한 게 그들 섬나라 족속의 특징이라 함대가 출발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무력시위를 시작한 지 한 나절도 안돼 적의 함대는 벌써 동쪽 수평선 위로 점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이미 비전투선은 모두 이어도로 돌려보낸 뒤였던 우리 함대는 그들을 보다마자 미련없이 퇴각했다. 그러나 무턱댄 퇴각은 아니었다. 우리가 고른 전장은 거기서도 아직 삼백 리 길이 넘어 한두 번은 더 강한 자극이 있어야 적의 함대를 그리로 끌러들일 수 있는 까닭이었다. 예상대로 적은 퇴각하는 우리를 보자 거침없이 추격을 해왔다. 함대랄 것도 없는 우리 선단의 규모에, 저희 눈에는 중세의 구닥다리고밖에 비치지 않는 거북선까지 두 척 끼어 있지 우리를 한껏 얕본 것이었다. 지난날 청(淸)의 북양(北洋)함대며 아라사의 발틱함대와 맞서 이겨온 기억이 있는 그들로서는 그럴 법도 했다. 우리 함정이 수백척이 넘더라는 저희 지상군의 전문은 물론 가볍게 무시되었다. 우리는 적 함포의 사정거리를 간신히 벗어난 상태로 적 함대를 한산 앞바다로 유인했다. 적이 추격에 싫증을 내기 전에 한번쯤 타격을 주어 자극하려고 미리부터 정해둔 곳이었다. 대단찮은 편싸움에도 유난스레 나서서 설쳐대는 사람이 있기마련이듯이 야마모도 함대에서도 그런 배는 있었다. 적 호위전함간또오(關東)호가 바로 그 배로서 해군사령부의 책상물림으로 돌다가 처음으로 바다에 나온 함장 아까끼(赤木) 대좌는 섣부른 공명심으로 함대와의 거리도 무시하고 앞장서 우리를 뒤쫓아왔다. 우리로 봐서는 안성마춤인 먹이었다. 먼저 한산 앞바다에 이른 우리는 그 옛날 충무공의 전법을 본받은 배치를 했다. 함대의 주력은섬그늘에 감추고 판옥선 몇 척과 어뢰정과 우리 사냥감의 미끼로 서남쪽 바다에 띄어놓은 것이었 다. 오래잖아 거기가 제 죽을 곳인 줄 모르고 적 전함 간또오호가 뛰어들었다. 함장 아까끼 대좌 이하 3백의 성질 마른 일본 수병들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나포되어 저희에게 어뢰를 쏘아붙이는 가끼하찌마루(かき8丸)에 눈이 뒤집혔다. 앞뒤 살피는 법도 없이 천방지축 포를 쏘아대며 한산 앞바다 깊숙이 뒤쫓아 왔다. 적함이 뒤돌아서기 어려울 때쯤하여 섬그늘에 숨어있던 우리의 선단이 일제히 내달았다. 그 옛날처럼 학익진(鶴翼陣)은 아니었으나, 외톨이가 된 간또오호를 에워싸듯한 함대 배열은 오히려 그 옛날보다 더 위력적이었다. 일이 그 지경에 이르자 적의 함장 아까끼는 정신의 번쩍 들었다. 그제서야 함대와의 거리를 확인해보니 기함 데이고꾸는 최대속력으로도 한 시간은 걸리는 거리에 쳐져 있었다. 급해진 아까끼는 배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선미쪽에는 잃어버린 저희 순양함 쇼오리호와 이상스레 위압적인 거북선이 포탄을 퍼부우며 길을 막고 있었다. 아까끼는 앞을 헤치고 넓은 바다로 나가려고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더욱 안될 일이었다. 판옥선이며 거북선 어뢰정이 겉보기에는 한없이 어수룩해도 많은 수로 이곳 저곳에서 포화를 퍼부어대니 그 화력이 여간 아니었다. 이것도 저것도 마땅찮은 간또오호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어뢰 한 발이 선미를 쳤다. 그리고 거기 당황한 적 수병들이 제대로 응사하지 못하는 틈을 타 우리 선단이 벌떼처멀 간또오호를 덮쳤다. 하지만 전함 간또오호가 원래 그리 허술한 배가 아닌 데대 우리의 화력도 구들이 느끼는 것만큼 대단하지는 못했다. 화력의 대부분은 결전장이 될 다도해의 해안포대로 빼돌린 까닭이었다. 거기다가 적의 후속전함까지 생각보다 재빨리 접근해와 우리는 애석하지만 그을다만 간또오호를 버려두고 서둘러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다도해의 결전장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두 번 더 야마모도 함대를 자극했다. 바다가 우리 바다인 만큼 더 밝은 지형지물에 대한 지식을 활용한 매복과 기습으로, 거기서 우리는 다시 함대에서 이탈한 적 순양함 한 척을 그을고, 어뢰정 한 척을 격침시켰다. 그 동안 완전히 노출된 우리 함대의 보잘 것없는 구성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적은 우리가바란 이상으로, 약올라 하며 커다란 덫과도 같은 결전장으로 끌려들어왔다. 마땅히 지녀야 할 경계심도 침착성고 모두 팽개친 마구다지 추격이었다. 유인을 시작한 날로부터 이틀 뒤인 새벽 우리는 마침내 처음부터 결전장으로 점찍어둔 해역에 이르렀다. 올망졸망 흩어진 섬사이로 좁게난 해로가 30리쯤 이어진 곳으로, 그 양편 섬에는 우리의 해안포대가 치밀한 화망(火網)을 구성하고 있었다. 만약 적의 함대가 그 좁은 해로로 끌려들어오기만 한다면 그 섬들은 그대로 흔들림 없는 함포를 장비한 거대한 전함으로 바뀔 것이었다. 그 해협으로 들기 직전의 넓은 바다에서 우리는 마지막 유인전(誘引戰)을 벌였다. 약간의 희생을 각호하고서라도, 우리의 전함선을 동원해 정면으로 야마모도 함대와 충돌해본 것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단 30분간의 해전에서 우리는 그때껏 요긴하게 써왔던 어뢰정과 판옥선 두척, 거북선 한 척을 잃었다. 특히 거북선은 그 옛날처럼 적함 사이를 뚫고 이리저리 싸우다가 적 기함 데이고꾸의 주포(主砲) 한 방울 등어리에 맞고 남해바다 깊숙이 가라앉았다. 거기 비해 선박손실이 한 척도 안난 적의 함대는 기고만장해졌다. 우리 선단의 남은 배들이 다도해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숨어들자 그들은 앞다투어 추격해왔다. 선박의 손실은 참으로 가슴 아프지만 바란대로 적함대를 그 해협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성공적인 작전이었다. 적의 선두전함 뎅구(天狗)호가 비로소 역전의 전함다운 감각을 회복한 것은 이미 해협 속의 추격 십 리나 진행된 뒤였다. 함장구키 요시다까(九鬼嘉降)대좌는 자신의 배가 한 줄로 길게 늘어선 함대의 선두로 해안포대의 사거리 안에 있는 섬사이의 해로를 항진하고 있음을 깨닫자 섬뜩해졌다. 해로가 너무 좁아 그리된 것이지만, 만약 강력한 해안포대라도 설치돼 있으면 함대 전체가 한척한척 정조준 된 지상포화(地上砲火)의 밥이 될 우려가 있었다. 요시다까는 급히 그 우려를 무전으로 기함 데이고꾸에 알렸다. 그때는 데이고꾸호도 해로 깊숙이 진입한 뒤였다. 그러나 요시다까의 전문을 받은 사령장관 야마모도이찌니는 태연했다. <운요오호(雲揚號)를 잊었는가. 조센진들에게는 그만큼 사거리가 긴 포가 없다. 있다면 1인치 철갑도 뚫지 못하는 포탄에 유효 사거리 몇백 미터밖에 안되는 구식화포뿐일 것이다. 요시다까군(君)두려워 말고 전진하라. 대동아의 꿈에 감히 맞서려는 무리를 섬멸해 황은(皇恩)에 보답하라.> 그런 답신으로 요시다까의 전진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 전문을 받자 요시다까도 약간 마음이 놓였다. 하기는 이제와서 함대를 돌려세운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기분 나쁘지만 이대로 뚫고 나가는 수밖에―그런 생각으로 수병들을 몰아 앞으로 내달았다. 그런데 요시다까가 저만치 마주 선 섬 사이로 넓은 바다가 열린 걸 보고 막 안도의 숨을 내쉬려할 때였다. 그때까지도 달아나기에만 바쁘던 조선인의 선단이 갑자기 돌아서서 포화를 퍼부으며 몇겹으로 해협을 틀어막는 것이 아닌가. 뿐만이 아니었다. 그때껏 무인도로만 보이던 작은 섬 이곳저곳에서도 포탄이 날기 시작했다. 우리의 반격이었다. 우리는 적이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빠져들기를 기다려 총공세에 들어가다. 해협출구를 막고 있는 배들은 화력보다는 그 자체가 바로 출구의 마개였다. 버티고 응사하다가 적의 함포에 피격되면 그대로 가라앉아 물길을 막았다. 섬뿌리가 맞닿아 별로 깊지 못한 물목이라 웬만한 배 몇 척만 가라앉아도 적의 전함은 이미 지나갈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적의 함대는 일렬로 늘어선 채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지한 목표물에 대한 수 백의 해안포대가 정조준한 포탄을 퍼붓는 게 우리의 노림이었다. 뎅구호가 화력을 뽐내며 물목의 우리 배들을 격침시킨 게 모든 걸 우리 뜻대로 만들어갔다. 우리 승무원들은 기다였다는 듯 피격된 배를 버리고 섬으로 헤어가고 배들은 연이어 가라앉아 출구가 될 해협의 물길을 얕게 말들었다. 해안포대의 포격으로 벌서 여기저기 상처가 난 뎅구호는 물 위가 열린 것만 보고 전속력으로 항진했다. 어서 빨리 그 불구덩이 같은 해협을 빠져나가기 위함이었으나 결과는 한층 더 굳게 저희편 출구를 틀어막은 꼴이 되고 말았다. 가라앉은 우리 배에 걸려 배 밑바닥이 여기저기 뚫린 뎅구호가 서자 야마모도 함대가 그 해협에서 빠져나가는 길은 돌아서는 길밖에 없었다. 적 함대의 사령장관 야마모도이찌니가 그 모든 사태를 파악한 것은 이미 기함 데이고꾸 갑판에도 우리의 포환이 떨어지고 있을 때였다. <모든 함포는 적의 해안포대를 견제하고 후미부터 차례차례 배를 돌려 빠져나가라. 대화혼(大和魂)으로 감투하기를 빈다.> 야마모도는 황급히 그런 전문을 띄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좁은 해협에서 대소 함정 여남은 척으로 된 함대가 선수를 돌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은 배는 포격에 약해 미처 뱃머리를 돌리기 전에 우리 해안 포대에 격침되고, 좀 큰 배는 뱃머리를 돌리느라 꾸물거리는 통해 너무 많은 포탄을 맞아 가라앉았다. 우리에게는 통쾌해도 적에게는 참상인 만큼 그날의 싸움을 길게 얘기하는 건 삼가자. 어쨌는 그 한나절의 싸움끝에 야마모도 함대에서 반파(半破)상태로나마 그 해협을 빠져나간 것은 단 네척뿐었다. 기함 데이고꾸에 구축함 두 척, 순양함 한 척이었다. 다만 인명피해는 함정에 비해서는 좀 덜 심했다. 한 번의 대 타격으로 적의 계속적인 추격과 수색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던 우리는 적의 목숨에는 그리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 덕분에 적은 이미 시체가 되어 바다에 뜬 천여 명을 빼고는 저희 수병을 모두 건져갈 수 있었다. 우리의 철수는 놀라고 겁먹은 적이 뒤도 안돌아보고 황급히 수평선너머로 사라진 뒤에 이루어졌다. 근처 섬그늘에 미리 숨어 미리 기다리던 우리의 고깃배들과 싸움을 거치고 남은 배들은 다음날 해가 뜨기도 전에 그 자랑스런 전투게 참가했던 3천의 우리를 태우고 무사히 이어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한번 데인 일본해군을 필승의 태세를 완비하기 위함이란 핑계로 다시는 이어도 근처에 얼씬 않아, 우리 남로군은 그로부터 3년 뒤 본토 상륙전을 감행하기까지 아무런 방해없이 힘을 기를 수 있었다. 북로군의 청산리 싸움에 못지않기 멋진 단후전(斷後戰)이었고, 그 빛나는 승리였다. 그런데 그 싸움에 대해 근래 억장 무너지는 소리들이,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서 나오고 있다고 한다. 곧 그런 싸움 같은 것은 없었으며, 그 얘기는 다만 일없는 문사(文士)가 정신적인 수음(手淫)으로 지어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임진왜란때 일본에게 깨강정이 난 조상들이 사명당(四溟堂)얘기를 지어내고, 월남에서 피 본 미국 사람들이 람보를 지어내듯이. 우리네 앞사람과 뒷사람, 늙은이와 젊은이를 이간질하는 소리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잘한 일은어떻게하든 깎아내리고 깔아뭉개 스스로를 값어치 없고 낮게 느끼게 만들려는 못된 종자들의 수작이다. 일본이 입 싸악 씻고 앉았고, 세월도 벌써 70년 가까이 흘러 어제 오늘 일같이 뚜렷하지는 않겠지만, 정히 못미덥거든 당장이라도 다도해 사남단의 무명 군도(群島)를 찾아가보시라. 하다못해 바닷속에서 이제는 물고기들의 좋은 놀이터가 되어 있는 야마모도 함대의 잔해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남북 양로군(兩路軍)의 본토진공전(本土進攻戰)은 크게 두 가기 단계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본거지를 의연히 이어도와 장백산에 두고 소규모의 부대를 출동시켜 치고 빠지는 식의 전투를 한 단계이고, 다른 하나는 사령부까지 본토로 옮겨와 대규모의 국토수복전에 들어간 단계이다. 첫 단계, 곧 유격전 형태의 본토진공전을 먼저 시작한 것은 북로군이었다. 청산리에서 적에게 대타격을 입히고 추격을 뿌리친 우리 북로군은 그로부터 3년, 장백산을 근거로 이를 악물고 국토수복의 성전을 준비했다. 젊은이들은 일당백의 전사(戰士)로 자라기 위해 산악과 들판을 내달으며 피나는 훈련을 했고, 늙은이와 부녀자는 그들을 기르기 위해 밭을 일구고 논을 떴다. 광맥에 밝은 이는 금맥 실한 금광을 찾아내고, 말 잘하는 이는 장개석과 스탈린을 찾아가 군자금을 얻어왔다. 이재(理財)에 밝고 거래에 능한 이는 만주를 중심으로 상로(商路)를 열어 군자금을 키우는 한편 봉천의 무기시장이며 아라사를 떠나는 체코여단에서 흘러나온 신식 무기를 사모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나가자 북로군의 전력은 눈에 띄게 불었다. 청산리 싸움에서는 3천을 못채운 병력이 2만으로 늘었으며, 무기도 중포(重砲)와 전차는 못갖춰도 경보병(輕步兵)의 편성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그렇게 되자 혈기넘치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본토진공론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청산리 싸움에 참가했던 젊은이들의 눈에는 이제 그만한 전력이면 세상에 겁날 게 없어보였다. 하지만 나이든 이들의 눈으로 보면 달랐다. 그들의 식견과 사려에 비추어 보면 아직은 국내진공을 서두를 때가 아니었다. 「자네들은 섬오랑캐의 군사가 얼마인지나 아는가. 이 땅에 건너온 것만도 강병(强兵) 백만에 아직도 그 다섯 배는 저희 땅에서 더 긁어모을 수가 있네. 공연히 숲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했다가, 저것들이 모진 마음을 내어 일시에 이리로 몰려오면 우리가 오히려 의지할 근거지만 잃고 말 걸세.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 저것들은 이미 동아(東亞)에 살겁(殺劫)을 일으켜 그 피바람을 타고 있네. 절대로 이대로 멈추지를 못할 것이네. 머지않아 중국과도 전단을 열고, 어쩌면 그 때문에 전세계와 대적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리되면 강병 백만을 그대로 이 땅에 묶어놓을 여유가 없고, 그때는 우리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네. 그때까지만 꾸욱 참고 힘을 기르세.」 나이든 이들은 젊음이들을 그렇게 달랬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도 들을 만한 주장은 있었다. 「만약에 저것들이 지금의 상태로 자족하여 지키기만 하고 있으면, 우리는 땅을 삼키우고도 영원히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거기다가 청산리 싸움이 있은 지 벌써 3년, 아무 저항없이 저들의 행패를 보고만 있어온 세월도 너무 길지 않습니까? 비록 저들을 모두 몰아낼 힘이 없더라도 전단은 열어두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전단을 열지 않으면 저들은 이 땅에 식민(植民)을 시작할 것이고, 그것은 나중에 저들의 기득권으로 악용되게 됩니다. 자칫하면 우리 역사에 지금껏 없었던 식민지시 대라는 욕스런 시기가 보태지게 됩니다. 또 세계의 이목을 위해서라도 이제 전단은 열려야 합니다. 우리가 저들과의 싸움이 계속 중이라는 걸 세계사람들에게 기억시켜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그렇게 외치고 나서자 나이든 이들고 신중론만 가지고 맞설 수는 없었다. 그 결과가 한만국경(韓滿國境)에 가까운 도시를 공격 목표로 한 대일유격전이었다. 우리는 5백 명 단위의 독립부대 열둘을 편성해 되도록이면 장백산의 본거지와는 무관한 듯 위장하고 국내로 진공하게 했다. 동으로는 무산·회령·종성·온성·경원이 목표가 되었고 서로는 중강진·갈전·자성·만포·초산·삭주·의주까지가 공격의 범위안에 있었다. 주재소를 기습하고 하루쯤 탈환해 있다가 적의 본격적인 토벌대가 나타나면 국경을 건너 만주로 피신하는 형태로, 각 부대는 세 번출동하고 나서는 만주의 산악을 타고 장백산으로 귀환하여 대기중인 딴 부대와 교대하게 되어 있었다. 그 사이도 장백산의 본거지는 농사와 교역으로 물자를 비축하고, 점점 늘어나는 전투병력에 부족함이 없이 무기를 장만하는 한편, 교대하고 돌아온 부대들의 훈련을 담당하기로 했다. 서력으로 1920년대 중반부터 30년대 초반까지 하루도리로 일어나던 한만국경의 전단은 그렇게 열렸다. 우리는 그곳의 읍군(邑郡)소재지를 하루나 이틀쯤 점령했다가 적의 대부대가 반격해오면 적당한 타격을 주고 만주로 빠졌다. 일본은 되도록이면 세계에 한반도 점령이 완료돼 식민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위장하려 했지만 될 일이 아니어다. 어쩌다가 한두 번이 아니라 거의 매일같이 국경지방의 어느 도시인가는 우리 북로군의 지배 아래 있게 되니 아무리 보도를 엄하게 통제해도 그 소문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란대로 세계는 오래잖아 우리가 일본에게 식민지로 예속된 게 아니라, 일시적인 강점상태에서 끊임없이 교전 중임을 모두 알게 되었다. 북로군이 일본을 상대로 전단을 연 지 얼마 안돼 남로군도 거의 같은 생각으로 전단을 열었다. 남로군은 주로 작고 빠른 함정과 다도해 부근의 복잡한 지리를 이용해 바다에서 적을 괴롭혔다. 소규모의 수송선단이나 호남에서 쌀을 실어가는 화물배가 목표였는데, 효과는 국경지방의 도시를 공격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번 두 번 바다에서의 공격이 되풀이 되자 세계는 차츰 우리가 바다에서도 일본과 전단을 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점점 더 힘이 난 남로군이 해안도시에 상륙전까지 감행하자 거기 거주하던 외국인들을 통해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 상태로 떨어진게 아니라는 게 한층 더 명백해졌다. 그 시기에 우리와 일본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전투를 일일이 다 얘기하는 것은 지루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 전투의 양상이 비슷비슷할 뿐만 아니라 대소 천회(千回)가 넘은 교전이라 대략만 써도 두터운 책으로 열 권이 넘는 전사(戰士)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 양로군에게 있었던 가장 그림 같은 전투 둘만 얘기하겠다. 20년대 말 북로군의 한 단위부대에 의한 동흥읍 점령은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사람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린 별난 사건이었다. 주재소를 불사르고 수비대를 전멸시킨 것까지는 다른 전투와 비슷했지만 그 뒤 72시간에 걸친 점령기간 동안의 연출이 아주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 도시에 있던 일본일들이며 한자(韓子), 되트기, 양트기는 물론 서양인 선교사와 의료진까지 모두 불러모아 놓고 사령관 자격으로 단상에 오른 것은 우리의 딸들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아리따운 열아홉의 소녀였다. 그녀가 하이얀 한복에 역시 눈빛같이 흰 말을 타고 우리를 사열하며 들어설 때부터 거기 모여있던 일본인과 트기들은 물론 서양인들까지 완전히 얼어붙은 표정이었다. 자기들의 죽고사는 게 그녀의 손에 달렸다는 데서 온 두려움보다는 그녀의 눈부신 아름다움이 뿜어내는 신비한 힘 때문이었다. 그녀는 짐짓 절대의 복종을 연기(演技)하는 우리 전사(戰士)들을 시켜 먼저 영국인 선교사 부부 와 독일인 베네딕트파 신부, 그리고 백계 러시아인 의사에게 술 한 잔을 내리게 하고 말했다. 「당신들이 우리의 적이 될 것인지 귀한 손님이 될 것인지는 당신들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만일우리를 도울 수 없다면 하루 빨리 이 땅을 떠나십시오. 여기 남아 저들을 돕는다면 다음에는 저들과 마찬가지 처단해야 할 침략자로 당신을 대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려보낸 뒤 트기들을 향했다. 「당신들이 우리들을 따라나서지 못함을 우리는 잘 이해합니다. 또 우리의 집이 허물어지지 않고논밭이 묵지 않게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당신들은 당신들의 몫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기억하십시오. 당신들의 몸에는 분명 이(異)민족의 피가 흐르지만 당신들이 발딛고 사는 땅의 무게도 그 피보다 가벼웁지는 않습니다. 저들이 돌아가면 결국 당신들은 우리와 더불어 이 땅에 살게 되리란 점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저들에게 당신들의 생존에 필요한 정도를 넘는 협조를 하는 것은 뒷날 돌아오는 우리에게 범죄를 구성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일본 민간인들에게는 사뭇 말투부터가 달랐다. 「돌아가라. 모든 겨레붙이는 각기 살아가기로 정해진 땅이 있다. 이곳은 너희가 살 땅이 아니니 이만 돌아가라. 이번에는 전열(戰列)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그냥 놓아 보내지만 전면적인 국토수복전이 일어나면 그때는 아무도 너희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렇게 말할 때는 그들의 등골에 찬 서리가 내리는 것 같았다고 뒷날 어떤 일본인은 술회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녀는 사령관도 아니고, 그저 한 차례 야무진 연기로 우리의 승리를 장식해주었을 뿐이지만, 그러한 연출의 효과는 우리가 기대한 이상이었다. 한만국경에서 일어난 그 숱한 유격전의 보도에 그렇게도 엄격한 통제를 받던 일본의 언론이었으나, 그 사건만은 <비적(匪賊) 미녀사령(美女司令)>이란 제하(題下)에 일제히 호들갑을 떨고 있기 때문이다. 남로군의 해안활동 중에서는 아무래도 <목포사건>이라 불리우는 기습전이 먼저 얘기되어야 할 것 같다. 20년대 말 남로군의 한 선단이 대담하게도 목포시를 야습해 일본 헌병대를 들부수고, 이튿날 다시 대낮에 배를 보내 미창에 보관돼 있던 쌀 5백 섬을 실어간 사건이다. 남로군의 해안도시 기습은 전에도 자주 있었지만, 대개는 이어도와 다도해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 안의 작은 포구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호남 제일의 항구요, 일본이 수탈한 호남미를 저희 땅으로 실어내는 선창으로 쓰던 목표를 기습함으로써 그 사건은 시작부터 이미 이 땅뿐만 아니라 저희 섬까지 발칵 뒤집어놓았다. 항구 그 자체로도 엄중하게 확보되어야 할 곳이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군사적인 자존심의 유지였다. 신예 경비정을 여남은 척씩이나 보유한 해안경비대와 헌병연대 가 주둔하는 곳이기도 한 지역에 남로군이 상륙을 감행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해안경비대로부터 목포 앞바다에 수상쩍은 배 몇 척이 나타나 경비병 두 척이 추격을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을 때만 해도 헌병사령관 사사끼(佐佐木) 대좌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추격나 간 두 척의 경비정이 돌아오지 않아 다시 세 척의 경비정을 풀었다는 두번째 보고에도 사사끼는 흔히 있는 일로만 여겼다. 그런데 저물 무렵, 세 척의 경비병이 되돌아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한 시간도 안돼 일이 터졌다. 「적 선단이 해안경비대 본부를 기습해왔습니다. 나포된 듯 보이는 우리 경비정 세 척을 앞세우고 해안에 접근 갑작스레 상륙공격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저녁상을 받고 있다가 그런 급보를 받은 사사끼는 얼른 연대에 비상을 걸었다. 그 무렵의 잦은 우리 남로군의 활동으로 출동 경비를 나간 병력이 많아 연병장에 모인 것은 천 명을 크게 넘지 않았다. 사사끼가 너무 우리를 깔보지 않았더라면 출동은커녕 자체경비에도 넉넉치 못한 병력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육전(陸戰)에서는 턱없는 자신을 가지고 있던 일본육군 출신답게 사사끼는 출동을 서둘렀다. 그때 사사끼의 판단을 더욱 흐리게 만든 해안경비대의 급전이 날아들었다. <적이 상륙을 시작 본 경비대를 공격하고 있음. 추산 육전병력 5백 정도. 긴급한 구원 요망.> 적 병력 5백 정도라면 소사(掃使)아이까지 합쳐 2백 남짓한 해안경비대로서는 어렵겠지만, 자기들에게는 힘 안들이고 공을 세울 기회같이만 보였다. 거기서 사사끼에게 군인으로서의 출세를 단념케 한 결정이 내려졌다. 「각 대대는 환자의 평상시의 경비병력만 빼고 모두 출동한다.」 그것은 곧 환자를 포함 보초병 백여 명만 남기고 모두 출동한다는 뜻이었다. 어두운 밤길을 20리나 달려 해안경비대 본부에 이르렀을 때만해도 사사끼는 자신의 결정이 옳았음 을 믿었다. 그들의 도착과 함께 콩볶듯하던 총소리가 그치고 금세 해안경비대 본부를 함락할 기세로 덤비던 상륙군이 밀물처럼 해안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사끼연대의 1천 가까운 병력을 그런 상륙군은 물가까지 뒤쫓았다. 우리 상륙군을 아무런 미련없 이 풍덩풍덩 바다에 뛰어들어 멀지않은 자기들 배로 헤어갔다. 원래가 헌병대라 중포(重砲)가 없는 데다, 급히 달려오느라 공용화기조차 제대로 가져오지 못한 사사끼 연대는 뱃전에 부서지는 물결소리를 들을 만큼 멀지않은 곳에 떠 있는 우리 남로군 배들의 그림자를 보면서도 어찌해볼 수단이 없었다. 어둔 바다 위로 천방지축 헛총질만 하다가 배에서 퍼부어지는 사격에 쫓겨 해안 깊숙이 물러 났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사사끼 연대는 처음 우리 상륙군을 격퇴한 것만으로도 공을 세운 양 신나했지만 차츰 이상한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적의 선단이 떠나지 않고 계속 바다에 떠 있다가 자기들이 본부로 귀환할 기색만 보이면 다시 상륙을 시도하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돌아가자니 뒤가 땡기고, 그냥 거기서 밤을 새우자니 텅 비우다시피한 연대본부가 시간이 갈수록 불안해졌다. 「적이 우리를 여기 붙잡아두려는 계략인지 모른다. 간편(簡便) 1개 대대만 남고 나머지는 본부로 귀환한다.」 이윽고 사사끼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갑자기 연대본부쪽 하늘이 훤해지더니 오래잖아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잇따라 들렸다. 사사끼는 얼른 무선으로 본부를 불러보았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무선은 전혀 응답이 없었다. 그 서야 정신이 홱 돌아온 사사끼사 부관을 찾고 있을 때 부관이 숨이 넘어갈 듯한 하사관 하나를 데리고 나타났다. 「경비병은 전멸하고 연대본부막사는 적에게 뺏겼습니다.」 그 하사관이 헐떡이며 알린 내용은 그랬다. 아마도 본부에 잔류시키고 온 백여 명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인 듯했다. 우리의 노림이 어쩌면 처음부터 자기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사사끼는 후회나 근심보다 약이 올라 미칠 것 같았다. 대일본제국 육군이 죠센징에게―아직도 그런 황당한 감정에서 깨나지 못한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모두 돌아간다. 해안경비대 본부는 자체방어에 맡기도록.」 작전이고 깻목덩이고를 생각할 겨를이 없게 된 사사끼는 앙갚음만이 급해 그렇게 명령을 바꾸었다. 해안경비대쪽에서 보면 비정하기 짝이없는 변경이었다. 하지만 그날밤 사사끼 연대는 그 연대장의 경솔함의 속좁음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연대본부로 귀환하는 도중 벌써 거기까지 나와 매복해 있던 우리에게 걸려 얼빠진 사격전을 벌이다가 그새 해안경비대 본부를 불태우고 뒤를 덮친 우리 상륙군에게 또 한번의 타격을 받고 광주 쪽으로 내빼고 말았다. 그날 작전에 참가한 우리 남로군은 비록 목선이지만 배가 백여척에 육전병(陸戰兵)만 2천 명 가까운 대군이었다. 일본군은 그 한 번의 야습에서 수백의 인명손실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植民), 어쩌고 할 만큼 떠들던 점령군으로서의 체면은 완전히 깎이고 말았다. 해안경비대와 헌병연대의 본부가 터도 망도 없이 타버린 데다 거기 있던 무기와 탄약은 그대로 우리의 보급품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허파를 뒤집은 일은 다음날에 있었다. 다음날 저희 본토에서 왔다는 1천 톤이 넘는 화물선이 목포항에 들어와 호령까지 하며 미창(米倉)에 쌓여있던 쌀 5백 섬을 실어내갔는데, 며칠 뒤 그 선원들만 조그만 고깃배에 실려 남해바다를 떠돌다가 저희 군함에게 구조된 것이었다. 역시 우리 남로군의 솜씨였다. 전날의 야습으로 항만의 일본인들이 얼이 빠져있는 것을 틈타 나포한 적의 수송선으로 대낮에 공공연하게 쌀을 실어냄으로써 한번 더 그들의 허파를 뒤집어놓았다. 그렇지만 우리의 남북 양로군의 본격적인 국내 진공전(進攻戰)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일 본이 기어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가 된다. 서력으로 1932년 허욕에 눈이 먼 일본은 드디어 만주로 출병을 개시해 동북의 네 개 성(省)을 점령하고 만주국 건설이라는 꼭두각시 놀음에 들어갔다. 하지만 중국이 아무리 군벌들의 분탕질로 개판이 났다 해도 전혀 사람 없는 게 아닌 만큼, 그 큰 땅 덩이를 공으로 먹을 수는 없었다. 중원에서 쫓겨온 되놈들 모아 만주군이니 뭐니 하며 총알받이를 만들어 보았으나, 그보다는 저희 군대가 더 많이 필요했다. 야금야금 불은 관동군(關東軍)이 이십만을 넘어서면서부터 이 땅을 메우고 있던 주둔군이 차츰 듬성듬성해져갔다. 그 나라 계집이 한꺼번에 새끼를 열몇 마리씩 내지르는 개량종 암퇘지가 아니고 보면, 아랫 돌 빼어 윗돌 괴는 식이 안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참고 기다리던 그 <때>가 온 셈이었다. 만주사변이 난 그 이듬해 여름 마침 국내진공을 결정한 우리 북로군은 압록강을 건넜다. 만주가 저들의 지배 아래 떨어진 이상 그쪽 장백산이 더 유리할 것도 없는 데다, 큰 싸움 없이 군사만 기르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병력은 늘어 정예만으로 5만, 무기도 항공기를 빼면 대강은 갖추어졌는 데도 남는 것 없는 유격전으로만 세월을 보낼 수는 없었다. 국내로 돌아온 북로군은 처음 백두산 남록 원시림에 본영을 세웠다가 다시 개마고원을 가로질러 묘향산맥으로 본영을 옮기고 거기서부터 수복지구를 넓혀나갔다. 그러나 국내진공 초기의 활동은 몹시 조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은 중국이란 수렁에 발목밖에 빠지지 않은 일본이 우리가 켕겨 만주를 포기하고, 그 앙심으로 이를 갈며 덤비면 싸움이 쓸데없이 힘들어질 게 뻔했다. 따라서 초기의 국내진공전은 적극적인 국토수복전이기 보다는 인구가 희박한 지역을 슬그머니 차지하고 근거나 굳건히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사정은 역시 북로군과 비슷한 시기에 본영을 이어도에서 뭍으로 옮긴 남로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남로군은 상륙부터가 우리의 기억에 있는 무슨 무슨 상륙작전 같은 것과는 달랐다. 가장 일본의 경계가 없는 해안을 골라 야간에 상륙을 마친 뒤 또한 야간행군으로 가만히 지리산에 숨어든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 역시 전투병만도 5만이 넘는 병력으로 지리산에 본영까지 설치했지만 제 흥에 취해있던 일본은 그저 지리산에 약간의 저항분자가 든 정도로 알았다. <요오시. 만주만 삼키면 보자. 그깟 한줌도 안돼는 비적쯤이야……> 일본의 생각은 대강 그랬을 것이다. 거기다가 일본이 더욱 마음 느긋이 대륙쪽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비(非)전투원들의 귀환이었다. 국내진공을 결정한 날 북고군 본영에서는 전투요원으로 선발된 이들을 뺀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오며 의논했다. 「우리가 비록 총칼을 들고 전열(戰列)에 설 영광은 얻지 못했으나 함께 돌아갑시다. 전사(戰士)들 이 우리 땅으로 들어간 이상 우리도 국내로 돌아가 그들이 놀 물이 되어줍시다. 늙은이와 여자를 보살피고 어린것들을 기르며, 저들이 필요한 것을 대어줄 수 있도록 합시다. 우리가 지난 10여 년 장백산과 이어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러다가―피와 땅을 필요로 하면 우리 스스로를 전사들의 총칼로 내던집시다.」 편평족(偏平足)과 근시(近視)로 전사단에 들 수 없게 된 열혈의 젊은이가 먼저 그런 의견을 내놓았다. 생각 깊은 만큼 걱정도 많은 중년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자네 말은 옳지만 저 섬오랑캐의 군대가 어떻게 나올런지. 십삼 년 전 저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떠나오던 때를 생각해보게. 그리고 지난 십 년 우리 전사(戰士)들이 저들을 괴롭힌 걸 생각해보게. 그 모든 게 전사들 뒤에 우리가 있음으로써 가능했으니 필시 우리를 반갑게 맞지는 않을 것일세. 만약 그들이 맨손에다 아녀자와 노인들까지 데리고 있는 우리를 총칼로 막는다면 무슨 수로 돌아가겠나. 또 무사히 돌아간다 해도 저들이 이 악물고 괴롭힌다면 무슨 수로 견딜 것이며, 전사들이 또 어떻게 돕겠나? 자칫하면 이들에게 수백만의 포로만 안겨준 꼴이 되어, 우리 때문에 전사들이 마음놓고 싸울 수 없게 될까 겁나네.」 그때 다른 사람이 나섰다. 앞서 말한 이처럼 생각은 깊지만, 쓸데 없는 걱정이 많지 않고, 어려움 속에서도 벗어날 길을 잘 찾아내는 이였다. 「두 분의 말씀이 다 옳은 만큼 그 좋은 점만 취해 우리의 할바를 정해봅시다. 먼저 우리가 전사들과 함께 우리 땅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놀 물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마다할 수 없는 우리의 역할일 것이오. 그러나 또한 저들 섬오랑캐의 보복이나 적대로 걱정 아니할 수는 없소. 돌아가되, 그 대책을 마련해 돌아가도록 합시다. 바둑판이 눈금 마다에 수가 있고, 우리 모두가 머리를 짜낸다면 왜 길이 없겠소?」 먼저 그렇게 입을 뗀 그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날에 대비해 생각해온 사람처멀 거침없이 이어갔다. 「내 생각에 저들 섬오랑캐는 만주에 큰 전단(戰端)을 새로이 연 이상 되도록 우리 땅을 평온하기를 바랄 것이오. 그들의 그러한 심리를 이용해 속여봅시다. 욕되지만 우리 모두 일장기(日章旗)와 백기를 들고 국경을 건넙시다. 저들이 신사(神社)에 절하라면 절하고, 천황만세를 외치라면 기꺼이 그대로 외칩시다. 그러면 저들은 세계의 이목 때문이라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들이기 않을 수 없 것이오. 그리고 이제는 우리의 땅뿐만이 아니라 사람까지 지배하게 되었다는 안도감에서, 한층 마 음놓고 대륙으로 바다로 전선을 늘여갈 것이오. 물론 우리의 전사들이 적극적인 진공전(進攻戰)을 펼치면 문제가 생기겠지만, 세상에 나라잃은 백성이 되는 것보다 더 참기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소? 죽음조차 마다 않고 내 땅 내 나라를 지켜온 조상들을 돌아본다면 우리가 참지 못할 게 무엇이겠소?」 그가 그렇게 말하자 우리 비전투원 거의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될 싸움에 각오를 다지며 국내로 돌아갈 채비에 들어갔다. 그 비슷한 논의는 남로군에서도 일어났다. 모든 비전투원들은 전사들이 상륙해 국내진공전으로 들어가면 거의 지원이 불가능한 이어도에 남아있기 보다는, 괴롭더라도 뭍으로 돌아가 전사들을 뒷바라지 할 수 있기 바란다. 거기서 출애굽기(出埃及記)와 흡사한 우리 비전투원의 귀환이 시작되었다. 만주사변이나던 해의 겨울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한만(韓滿)국경과 서남해안은 늙은이와 아녀자를 뒤딸린 우리 비전투원 의 귀환행렬로 메워졌다. 손에 손을 잡고 걸어서, 혹은 조각배에 의지해 우리가 밀려들자 일본의 국경수비대나 해안경비대는 처음 우리를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조차 가늠이 서지 않았다. 다급한대로 정지를 외친 뒤 상병은 병조장에게, 병조장은 하사에게, 하사는 대위에게, 대위는 연대장에게, 연대장은 사단장에 게, 사단장은 조선주둔군 사령관에게, 어떻게 할까를 물어올라갔다. 하지만 가늠이 서지 않기는 당시의 조선주둔군 사령관 겐베에(近衛)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것 이 어느날 갑자기 자취를 감춘 뒤 십년이 넘도록 이 땅에서는 만나기조차 힘들던 우리가 무리무리 되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와 어린이까지 있는데다 무장하지 않을 걸 보아서나, 손에 손 에 일장기와 백기를 든걸로 보아서 싸우려 덤비는 것 같지는 않지만, 정확한 속내를 모르면서 무턱 대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에 조선군 사령관 육군 참모총장에게, 육군참모총장은 대본영(大本營)에, 대본영은 내각에 그 처리를 문의했다. 도오조오(東條)내각도 한동안은 그 문제를 놓고 골머리를 앓았으나 결론은 우리가 바란대로였다. <그들이 비전투원이고, 또 귀순의 의사를 밝히면 막지 말고 받아들일 것. 단 그들의 동태에 대해서는 감시를 게을리 말 것이며, 돌발사태가 있으면 긴급히 보고할사.> 내각은 조선주군군에게 그런 전령을 띄우는 한편 대대적인 대외홍보에 들어갔다. 외국기자들을 이 땅으로 실어보낸다. 돌아오는 우리의 사진을 전세계의 통신사에 전송한다. 이 땅의 식민지화를 늦으나마 세계로부터 승인받기 위해 법석을 떨었다. 분별있는 이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아직도 외국인들 중에는 간혹 우리가 일제의 식민통지를 받은 걸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때 일본의 선전에 깝북 넘어간 탓일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시작된 우리의 귀환은 그 뒤 모두가 전에 살던 곳에 되돌아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몇 달이나 조선주둔군의 눈과 귀를 잡아놓았다. 그리고 그 시끌벅적함 속에 우리 남북 양로군의 국내진공은 더욱 은밀하게 진행될 수 있었으며, 어쩌다 조선두둔군에게 일부가 탐지되어도 실제보다 훨씬 작게 취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남북 양로군이 국내로 본영을 옮긴 뒤에도 전면적인 국토수복의 전단을 열 때까지는 다시 몇 년이 더 필요했다. 첫째는 돌아온 우리 비전투원들이 이 땅에 뿌리 내리기를 기다리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점점 간이 커진 일본이 더욱 넓게 전선을 벌여 우리가 움직여도 뒤돌아볼 겨를이 없을 때를 기다리기 위함이없다. 만약 그 두 가지 조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채 무리하게 전면전을 벌였다간 싸움 자체도 몇배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진작에 걱정한대로 우리 비전투원이 적에게 인질로 이용당할 우려가 있었다. 하늘이 무심치 않아 남북 양로군이 국내로 본영을 옮긴 지 4년만에 드디어 우리가 기다리던 때가 왔다. 꼭두각시 황제를 세워 그럭저럭 만주를 삼킨 일본은 그래도 한이 안차는지 칼끝을 중원으로 돌렸다. 노구교(蘆溝橋)란 곳에서 그러잖아도 제 살 한덩이 크게 베이고 울근불근해있는 중국의 귀쌈을 후려 다시 엄청난 싸움을 벌이니 이름하여 중일전쟁(中日戰爭)이다. 아무리 오졸없는 중국이라도 그 꼴까지 당하고는 참을 수 없어 덩치로라도 뭉개보려고 맞주먹을 내지르자 싸움은 제대로 모양을 갖춰 갔다. 얼핏 보아서는 이번에도 판은 일본판 같았다. 무인지경 가듯 밀고든 일본군은 싸움이 시작된 지 몇 달 되지도 않아 중국의 태반을 석권했다. 장개석 정부는 중경(重慶)으로 달아나고, 철도가 지나가는 도시는 하나하나 일장기가 꽂혀갔다. 하지만 실상 일본의 초장 끗발은 이미 그때부터 죽어가고 있었다. 전선이 화중(華中) 화남(華南)으로 전개되자 싸움은 전같지가 않고, 물렁해뵈던 장개석도 뜻밖에 집요한 항전으로 나왔다. 거기다가 애숭이 마적두목이 서안사건(西安事件)인가 뭔가로 모택동이까지 싸움판에 불러들이니 일은 점점 꼬여갔다. 청일전쟁, 노일전쟁때처럼 한주먹 오지게 앵기고 눈 부릅떠 항복받는 재미는 물건 너가고, 수렁 같은 장기전(長期戰)으로 끌려들게 된 것이었다. 참고 기다리던 우리 양로군(兩路軍)이 대대적인 공세에 들어간 것은 바로 일본이 중일전쟁의 수렁 허리까지 잠겨 들어간 뒤였다. 이제는 이 땅으로 대군을 돌리기 어렵다 싶자 먼저 남로군이 움직였다. 지리산의 본영에서 세 방면으로 출격한 남로군은 동으로 함양(咸陽), 산청(山靑), 서로 남원(南原), 구례(求禮) 네 군(郡)과 남으로 진주시까지 수복지구(收復地區)로 선포했다. 열한군데 헌병 분견소와 두군데 헌병대대, 그리고 다섯 군데 경찰소와 스물일곱 군데 주재소를 쓸어버리고 난 뒤의 전과(戰果)였다. 남로군의 출격을 뒤따르듯 북로군의 주력도 적유령산맥의 본영을 나섰다. 그리고 닷새 만에 전투 운 전투도 없이 남로군에 못지않은 수복지구를 확보했다. 희천(熙川), 영변(寧邊), 덕천(德川), 개천(介川), 안주(安州) 다섯 개 군(郡)에 세 개 읍(邑)이였다. 우리 남북 양로군의 그 같은 움직임에 일본의 조선주둔군은 재빨리 반격에 나섰다. 그사이 우리를 얕보는 게 버릇된 그들이라. 우리의 실제 전력에 대해서 제대로 된 정보는커녕 관심조차 없는 마구다지 반격이었다. 거기다가 야금야금 중일전쟁의 수렁으로 빨려들어간 수 또한 적지않아 전력 전만 같지 못한 그들이고 보면 결과는 뻔했다. 비적토벌작전이란 이름으로 벌어진 그 한 달의 전투에서 일본의 조선주둔군이 받은 타격은 한마디로 참담했다. 부족한 전력으로 미치 쳐둔 그물에 뛰어든 격이 된 그들은 지리산지구에서만도 7천 가까운 병력의 손실을 입었다. 토벌은커녕 수복지구의 확대조차 막기가 급급해진 꼴이었다. 마침 새로 부임한 지 얼마 안돼는 조선주둔군 사령관 이찌끼(一木)중장은 잇따라 들어오는 패전보고에 놀랍고도 분했다. 항상 자신 같은 지장(智將)을 조선같이 한가한 구석에다 처박아버린 <대본영의 돌대가리들>에게 욕을 퍼부어대던, 그 자부심이 유별난 사내는 두번째의 강력한 반격을 지시했다. 조선에 이는 전병력과 화력을 집중해 남북의 비적들을 쓸어버리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이었다. 함부로 덤비다가 한번 호된 맛을 본 현지 지휘관들은 한 목구멍에서 나온 것 같은 보고를 띄워 올렸다. <비적의 전력은 예상 이상으로 호대함. 묘향산지구 추산병력만도 최고 15만에 야포까지 갖추었음.> <지리산지구 적 추산병력은 최소 12만. 섬멸을 위해서는 내지의 중원이 반드시 있어야할 것으로 사료됨.> 이번에는 지나치게 과장된 우리의 전력이었다. 그러나 그런 과장에도 불구하고, 이찌끼는 전쟁터에서 반평생을 보낸 사람답게 사태의 심각성을 이내 알아차렸다. 만리장성 위에서 오줌을 누면 고 비사막에 무지개 선다, 어쩌고 하며 관동군(關東軍)이 북지(北支)에서 허풍을 떠는 사이에, 이미 삼켜 소화까지 된 걸로 알았던 이 땅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일전쟁사를 보면 1938년 9월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일본군이 잠시 수비태세로 전환해 그 해를 넘기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찌끼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관공군으로 갈 병력과 보급품이 이 땅으로 돌려딘 까닭이었다. <긴급전문 제1호. 수신:대본영 발신:조선 주둔군사령관 본관은 금(今)5월 조선주둔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이래, 3개월에 걸친 비적토벌작전을 실시하였던 바, 다음과 같이 엄청난 사실이 드러났으므로 긴급 보고함. 一. 我國은 20년 전에 조선과 합방, 식민지화 했다고 믿어으나 이는 오판인 듯함. 一. 조선에는 민족정권과 군대가 존재함. 一. 민족정권은 원시적인 민족공동체의 발전형태인 듯하나 그 응집력 및 일체감은 놀라울 정도임 一. 군대는 북부와 남부의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하고 있는 바, 병력은 각기 10만 내외로 추산됨. 현지지휘관 의견: 조선에 대규모의 병력을 출동시켜 민족정권 및 군대를 시급히 섬멸할사. 지나(支那)전선을 일시 동결시키더라고 반드시 선결되어야 할 과제로 보임. 조선을 장악하지 않고서는 지나작전도 무망할 듯.> 이찌끼의 그런 전문을 받은 대본영은 발칵 뒤집혔다. 등 뒤에 적을 두고 수십개 사단을 북지(北支)에 전개시킨 꼴이 된 그들로서는 당연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집안이 망하려면 고집불통이 나오고, 나라가 망하려면 극단파가 득세하기 마련이다. 일본도 꼭 그래서 이직도 대외정책의 우이(牛耳)는 모든 것을 낙관하는 극단파에 잡혀있었다. 일이 되려면 지나에서뿐만 아니라 반도에서도 철병해 저희 섬이나 제대로 지키는 게 옳았으나, 이미 패신( 敗神)에 홀린 그들에게 그런 생각이 떠오를 리 없었다. <이번에 지나로 증파되는 관동군 10개 사단은 조선을 경유한다. 5개 사단은 지리산 지구를 통과하며 그곳에 자리잡은 조선 비적을 소탕하고, 5개 사단 묘향산맥으로 들어가 근래 그 일대에 준동하는 불령선인(不逞鮮人)집단을 뿌리뽑을 것. 조선주둔군은 정탐 및 안내를 맡는다.> 여러 날의 갑론을박끝에 일본의 대본영이 내린 결정은 그랬다. 그것도 조선주둔군 사령관 이찌끼 의 보고를 믿어주어서가 아니라 <관례상의 후방강화>란 명목이었다. 그러나 명목이야 어떠했건 그 10개 사단의 래도는 우리에게는 그것 지 아니한 위협이었다. 아직은 초장의 신바람에 들떠 있는 중일전선으로 증파되는 군대라 사기도 상당한 데다, 병참 또한 당시 일본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인 정예부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기세등등하게 부산항에 상륙을 시작하자 그 정보는 곧 우리 남북 양로군에게 들어갔다. 국내진공 뒤로는 그전과 달리 통합군(統合軍)형태로 작전을 펼쳐나가던 양군은 그런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 북악에서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우리의 마지막 임금님께서 우리에게 주권을 되돌려준 그 자리로, 그날로부터 거의 이십 년 만이었다. 「적의 주력은 이미 중국이란 수렁에 허리까지 빠져 있소. 쉽게 손을 씻고 되돌아서 나오지는 못할 것이오. 거기 비해 우리는 지난 20년 참고 참으며 힘을 기르고 뜻을 벼르었소. 이왕에 전단을 열었으니 내쳐 본격적인 국토수복전으로 들어갑시다. 서울을 최종 집결지로 하고 남북군이 주력을 움직이는 것이오. 비전투원으로 도회와 들판에 터전을 잡은 이들과 전투원으로 산악에 웅거한 우리가 하나가 되어 밀고 나가면 아니될 것도 없소.」 참기와 기다리기에 지친 주전파가 먼저 일본과의 전면전을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신중파도 만만하지 않았다. 「일본이 비록 대륙에 출병했다 하나 그 수 아직 몇십 만에 이를 뿐이오. 저희 섬에 남아있는 6천 만의 인총(人叢)으로 미뤄보면 전력이라 할 수 없소. 게다가 최근의 해외정세를 보면 일본의 대륙 진출을 놓고 열강(列强)의 압력이 거센 듯하오. 미국, 영국, 불란서가 가만히 안있겠다는 눈치고, 독일과 이태리를 뺀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눈길이 곱지 못하오. 머지않아 일본은 새로운 전단을 열고 정말로 죽기살기의 한판을 치르어야할 것 같소. 그때까지 다시 한번 물러나서 기다립시다. 이번에 확보한 수복지구를 모두 내어주고 우리의 전력을 온전히 보건해 각기 산악 깊숙이 움츠리는 것이오. 그러다가 적이 다시는 우리를 돌아볼 틈이 없을 정도로 전선을 확대한 뒤에 우리의 모든 전력을 들어 결전을 치르도록 합시다.」 신중파의 주장은 그랬다. 냉정하게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분명히 사려깊고 분별있는 주장이었으 나, 이번에는 주전파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신중한 것도 좋고 앞뒤를 잘 헤아리는 것도 좋지만 다시 물러나는 것은 아니되겠소. 생각해 보시오. 적의 군화가 이 땅을 짓밟은 지 벌써 이십여 년, 우리 명색 국토수복전을 시작한 지도 벌써 18 년이 지나갔소. 아무리 우리가 전의를 잃지 않고, 싸움을 계속해왔다 한들 세계의 어느 나라가 알아주겠소? 자칫하면 우리의 이러한 상태가 일본에 대한 예속으로 기정사실화되어 우리 자손에게 치욕과 불리를 가져오게 될 것이오. 거기다가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참고 기다리기에 이미 지쳤소. 이미 20년을 기다렸는데 또 얼마나 떠 기다리라는 것이오?」 「그로인해 우리의 희생을 단 한 명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20년이 아니라 50년을 기다려도 아깝지 않소.」 「하루라도 빨리 자들을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다먼 백 명이 목숨을 내던져도 아깝지 않다는 말 또한 가능하오. 자랑스런 죽음의 하루가 욕된 천 날보다 더 값있다고 믿는 이도 우리 중에는 많소.」 「군자의 복수는 백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는 말 벌 써 잊으셨소? 그게 국토수복전을 시작할 때 조급의 유혹을 달래던 우리의 격언 아니었소? 더구나 이제 날은 다 되었소. 짧으면 3년 길어도 5년 안에는 저들 섬오랑캐의 단기(短氣)가 일을 내고 말 것이오. 아니, 저들이 참으려해도 중일전쟁이 장기화로 접어든 이상 이대로는 견딜 수가 없소. 그 전쟁에 필요한 석유와 고무를 얻기 위해서도 새로운 싸움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을 거요.」 「그렇다면 더욱 싸움을 서둘러야 하오. 저들이 새로운 전단을 열고 안열고가 우리에게 달린 게 아니라면 외적은 하루라도 빨리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게 났소.」 「그렇지만, 저들이 새로운 싸움을 자제하고, 전력을 기울여 우리를 압박해오는 날이면 그 피해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하오. 자칫하면 우리는 다시 이 땅 밖으로 밀려나 또 얼마나 긴 세월을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소.」 그렇게 논의는 점점 열을 어갔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어떤 겨레인가. 무엇이든 극단론으로 스스로를 망쳐버리는 일은 없는 우리답게 그 두 가지 상반된 주장도 조화의 타협점을 찾아갔다. 그리하여 꼬박 하루밤낮의 논의끝에 남북 양로군에게 하달된 원칙은 이런 것이었다. <하나, 싸움의 양태는 유격전으로 전환한다. 둘, 수복지구는 경우에 따라서 포기해도 좋으나 또한 적이 주둔할 수 있게 해서는 아니된다. 셋, 적이 주력으로 본영을 압박해오면 대타격을 주어 격퇴한다. 단 이때에도 추격전을 수복지구를 늘리지는 말 것.> 곧 유격전이 배합된 방어전·지구전으로 전환해 주전파의 신중파를 어느 정도는 함께 만족시킬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우리의 그러한 결정을 알리 없는 일본이 10개 사단의 중원군을 주축으로 공세를 벌이기 시작한것 은 그해 10월 초순이었다. 전단은 먼저 지리산을 낀 남로군의 수복지루에서 열렸다. 적 103사단, 105사단, 126사단, 127사단 및 2개 혼성여단은 그 일대 주둔군으로 임시편성된 다섯 개 전투단을 길잡이 삼아 다섯 방면으로 지리산을 압박해갔다. 적은 조선주둔군 사령관 이찌끼의 과장된 보고 때문에 적어도 사단규모의 회전(會戰)은 있을 줄 알고 각오들이 대단했다. 그런데도 어찌된 셈인지 도로를 낀 도시에서는 전혀 저항이 없었다. 적은 처음 그게 은근히 불안했으나, 사흘도 안돼 우리의 수복지구를 모두 재점령하자 이내 그들의 버릇된 오만함이 되살아났다. 기껏 그들이 되찾은 것은 도시와 도로뿐인데도, 어림없이 에워싼 지리산을 두고 벌써 큰소리를 쳐댔다. 「너희들은 독안에 든 쥐다. 우리는 닷새면 지리산 소탕을 끝내고, 일주일 뒤에는 장강(長江)을 건 너 장개석 군대의 숨통을 끊고 있을 것이다.」 적은 아마도 지리산을 저희집 뒷동산쯤으로 여긴 모양이지만 싸움은 기실 그때부터였다. 그들이 미처 지리산으로 접어들기도 전에 우리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호된 맛을 본 것은 화개면쪽으로 진입하려던 적 103사단 320연대였다. 내일같이 토벌을 앞두고 이제 막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 조심없이 야영을 하려던 그 연대는 그날 밤 한숨도 눈을 붙일 수 없었다. 들판을 에워싼 봉우리마다 횃불이 오르고 꽹과리 소리가 들리는 게 포위가 되어도 몇 겹은 포위가 된 것 같았다. 급하게 된 적 연대장은 경계태세에 들어가는 한편 이웃 321연대를 무전으로 불렀다. 하지만 시골 국민학교를 빌어 야영하던 그 연대도 처지는 같았다. 역시 사방으로 포위된 듯하나 무전을 개방하고 대기해달란 부탁이었다. 적 연대장은 다시 사단사령부에 연락해 보았다. 지휘소의 회신은 예하 3개 연대뿐만 아니라 포병 사령부까지도 비슷한 보고를 해왔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 연대장은 공명심만큼이나 간이 큰 자였던 듯하다. 어둡고, 지리를 잘 모르는 만큼 날이 밝은 뒤에 토벌을 시작하라는 사단사령부의 명령도 무시하고 겁없이 수색작전을 벌였다. 우리에게 일개 사단의 전예하부대를 동시에 포위할 능력이 없다고 확신하고, 중대 단위의 수색대를 푼 것이었다. 그런데 날이 새고 나니 놀라운 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전날밤 수색을 나간 어덟 개의 수색중대 중에서 돌아온 중대는 하나도 없는 데다 그중에 세 중대는 거의 전멸에 가까운 상태였다. 악에 바친 그 연대는 날이 새기 바쁘게 인근 야산을 뒤지지 시작했다. 간밤 횃불이 올랐던 봉우리를 중심으로 펼친 철저한 소탕작전이었으나 해질 무렵까지 그들이 찾아낸 것은 간밤에 나갔다 돌아 오지 않은 저희 부대원의 시체 백여 구뿐이었다. 소득없는 수색으로 하루를 허비한 그 연대는 그날 밤 역시 지리산에는 들지 못하고 대대별로 분산해 야영에 들어갔다. 전날밤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이번에는 대대별로 야간작전을 개시해 산봉우리에 흩어진 우리의 소수병력을 포위 섬멸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병력의 우위를 믿고 한 배치였지만 다음날 아침의 결과는 그전날보다 더 나빴다. 이번에는 가장 외진 곳에 있던 대대가 바로 야습을 당해 이웃 대대가 구원을 갔을 때는 이미 쑥밭이 난 뒤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상태에 빠진 것이 그 연대뿐이 아니란 점이었다. 지리산을 포위하고 압박해 가던 적의 전부대가 그 비슷한 상태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그대로 지리산지구에 진입하자니 아직 병력규모조차 가늠이 되지 않는 그 야습병력이 마음에 걸렸고, 그들부터 소탕하자니 도무지 그림자를 잡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나타날 수 없어 보이는 곳에서 갑작스레 몇 백씩 나타났다가, 한 차례 타격을 주고는 참새떼처럼 흩어져버리는 까닭이었다. 그 바람에 5일내에 지리산지구 소탕을 호언하던 적 사단들은 첫눈이 내릴 때까지 지리산에는 발도 한발짝 들여놓지 못한 채 피곤한 숨바꼭질만 계속했다. 그것도 많건 적건 매일 얼마간의 출혈은 피할 수 없는 숨바꼭질이었다. 대강 10월 초순부터 11월중순까지 일로, 그동안 적 5개사단이 입은 손실은 전사 3천에 야포만도 한 개 포병사령부를 꾸밀 만한 숫자였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바로 그런 경우를 말함이리라. 그러면 어떻게 그런 싸움이 가능했을까. 적의 대공세를 맞아 우리 남로군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편제의 개편이었다. 남로군 본영은 그때껏의 피라밋형 정규편제를 해체하고 전병력을 6백 명 단위의 전투단으로 편성했다. 그리고 적의 작전이 시작된 날로부터 일정한 시한을 주어 각 전투단에 독립적인 작전권을 부여했다. <언제건, 어디서건, 줄 수 있는 타격이 얼마이건, 그 적이 어떤부대든, 안전한 퇴로만 확보되면 적을 친다. 우군끼리의 구원의무는 면제되며, 포로도 전리품도 요구되지 않는다. 다만 각자, 각 전투단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고 첫눈이 올 때까지 적을 지리산 지구밖에 묶어둘 것. 천왕봉 본영으로의 귀환은 평야에서의 강설(降雪)이 한치가 넘을 때로 하며, 그때 만약 적의 추격이 있으년 각 전투단간의 구원 협조의 의무는 부활됨.> 그게 그 작전에 출동한 전투단이 받은 지시의 전부였다. 하지만 벌써 5년째 그 일대에서 활동해 지리에 밝고, 정규전부다는 그런 유격전에 훨씬 일숙한 우리 전사들에게는 그보다 더 훌륭한 편제도 없었다. 어둠을 틈타 물 스미듯 다가와서는, 벼락치듯 후린 뒤 참새처럼 흩어져버리는 우리 전투단을 제국 육군의 전통, 어쩌구하는 되잖은 격식에 굳어버린 적이 무슨 수로 당해낸단 말인가. 우리가 그 전투단의 작전기한을 강설량에 맞춘 것은 우세한 적의 화력과 수송력이 무력해지기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는데, 그것도 우리 뜻대로 되었다. 적은 우리 전투단이 모두 천왕봉의 본영으로 귀환한 뒤에도 소탕작전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동안의 적지않은 타격에 얼이 빠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경보병만으로 눈덮인 지리산을 뒤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한 2년 뒤 중국의 석태선(石太線-石宿蔣에서 太原까지의 철도) 연변에서 이른바 <백 개 연대의 전투>라는 큰 싸움이 일본군과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적이 있다. 그때 투입된 중공의 백 개 연대는 주덕(朱德)과 팽덕회(彭德懷)의 지휘 아래 있었으나 독자적인 작전권을 가지고 싸워 일본을 대파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것도 중공군이 우리 남로군의 지리산 지구 싸움을 전해듣고 규모를 키워 활용한 게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정말로 속 시원한 승리는 우리 북로군이 수행한 <청천강 전투>에서 있었다. 아마도 25년 전쟁사 전체를 통해 가장 눈부신 것이 될 그 전투의 경과는 대강 이러했다. 일본군의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우리 북로군은 남로군과는 처음부터 다른 작전을 구상했다. 곧 남로군이 주력을 백 개의 독립된 소(小)전투단으로 분산시켜 전형적인 유격전을 펼치기로 한데 반해, 북로군은 오히려 역량을 한 군데로 결집해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적의 토벌작전을 단념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병력은 비슷하다쳐도 화력과 장비에서 적에게 터무니없이 열세인 우리 북로군이라, 그들 역시도 들판에서의 대규모적인 정규전을 벌일 처지는 못되었다. 무언가 적에게는 없고 우리에게만 있는 이점을 활용해야했는데 그게 그리 흔하지가 않았다. 「우리에게는 적에게 없는 강력한 협조 세력이 있소. 이 부근에 정착한 우리 비전투요원만 무장시켜도 5만의 민병대는 얻을 수 있소. 그들을 동원해 머릿수로 밀어부칩시다.」 「그렇지 않소. 아직은 그들을 동원할 때가 아니오. 마지막 섬멸전의 단계에 이를 때까지는 우리 비전투요원들이 적의 경계를 사서는 아니되오, 섣불리 그들을 끌어냈다가는 전국적으로 적의 잔인한 보복을 불러일으켜, 결국은 우리의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꼴이 되고 말거요. 그보다는 이번에도 저 청산리때처럼 지리를 이용합시다.」 「이곳은 우리땅이라는 데서 청산리와 다르오. 적은 그때와는 견줄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지리(地利)를 이용하는 걸 경계할 것이오. 차라리 우리도 남로군이 그러듯 참새떼처럼 모였다 흩어졌다 하 는 전법을 쓰는 게 나을 것이오.」 그렇게 시작된 논의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을 때 옛일예 밝은 이 하나가 한탄처럼 불쑥 한마디 했다. 「저기 흐르는 저 청천강은 옛적의 살수(薩水), 을지문덕 장군처럼 저 물로 적을 쓸어버릴 수는 없을런지…….」 그러자 누군가가 빈정거리며 받았다. 「옛날의 싸움법 중에서 화공(火攻)이나 땅굴은 아직도 더러 쓰인다고 들었소만, 물로 적을 어찌했다는 소리는 못들은 지 오래요. 또 물을 모으려 한다한들 이 같은 가을날에 무슨 물이 있으며, 물이 있다한들 누가 강물을 막는단 말이오? 어디 그뿐이오? 물이 넉넉한 강을 막았다 한들, 적이 뭣 때문에 강변에 몰려 떠내려 가기를 기다리겠소?」 그 말에 거기 있 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옛일을 말한 이는 얼굴이 벌개져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날에 이르도록 크고 작은 싸움에서 그 빼어난 슬기와 꾀로 우리에게 여러번 승리를 안겨준 이가 갑자기 두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그렇소. 청천강이요. 우리가 의지할 것은 바로 이 강물이요!」 「아니, 그게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아직은 조금전의 웃음을 다 지우지 못한 우리 중의 하나가 알 수 없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그가 흔들림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진심이오, 그 까닭은 바로 그것이 불가능해보이기 때문이오. 첫째는 요즈음은 아무도 싸움에 물을 쓰지 않고, 둘째로 지금때는 가을이라 물을 쓰려해도 많지 않으며, 셋째로 누구도 짧은 동안에 강물을 막았다 터놓을 수 없다면 아무도 싸움에서 물걱정을 않을 것이오. 바로 그 점을 노리면 적을 몽땅 물로 쓸러버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큰 싸움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릴 수는 있소!」 그가 그렇게 나오자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의심이 풀리지 않는 이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 세 가지 불가능해뵈는 것은 어찌 해결하시겠소?」 「첫째는, 그 점이 오히려 적을 물가에 끌어내기 좋은 점이 될 수도 있소. 더군다나 요즈음의 중요한 병기는 평지에서 쓰기좋게 되어있어 강변은 흔히 주둔지로 쓰이지 않소? 두번째 것도 정말로 안될 일은 아니오. 물은 비록 실개울이라도 한 시간만 막아두면 집채를 떠내려 보낼 수 있소. 가을물이 적다지만, 웬만한 내라도 사나흘만 물을 가둘 수 있으면 아래쪽에 한 차례의 홍수는 흘려보낼 수 있을 거요. 그리고 세번째, 강을 막는 일은 앞서 어느 분이 말한 우리의 비전투요원을 동원하면 되지않소? 인근 사람들에게 가마니 열 장씩만 가져오게 해도 몇십만 장은 금세 모일 것이오. 거기에다 흙모래를 채워 강폭이 좁고 양쪽으로 언덕이 내민 곳을 골라 막으면 한 며칠 물을 가두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외다. 그런 다음 우리 주력이 그 하류 물가에 있는 알맞은 고지에 집결해 있으면 …….」 그가 그렇게 자세히 설명해나가자 더는 맞서는 사람이 없어졌다. 결국은 우연찮은 말 한마디가 그 빛나는 승리를 낚아올린 작전의 골격이 된 셈이었다. 한번 그 골격에 결정되자 더 많은 그 쪽에 밝은이들이 거들어 작전의 세부적인 지침까지도 이내 마련이 되었다. 강물을 막을 곳과 적의 대병력을 유인할 곳이 결정되고, 비전투요원의 동원도 은밀하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일본의 완편(完偏) 5개 사단과 1개 혼성여단이 2개 군(軍)으로 나누어 영변과 순천 두 방면으로 밀고들기 시작한 것은 우리 북로군이 그 싸움준비로 바쁘게 돌아가던 그 해 시월 중순이었다. 지리산지구보다 출동이 한 열흘 늦어진 셈인데 소문으로는 그게 병참문제 때문이었다고 하나 그 정확한 까닭은 알려져있지 않다. 순천, 안주, 영변 들의 수복지구에 나가있던 우리 전사들은 이렇다할 저항없이 그곳을 포기하고 청천상을 따라 천천히 철수했다. 묘향산 북쪽 미리 골라둔 청천강 기슭에 포진하고 있는 본영으로 집결함과 아울러 아직은 초반의 경계심을 버리지 않고 있는 적을 그곳으로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도 수복지구 희천(熙川)의 한 강기슭에서는 흙모래를 담은 가마니와 그 상류에서 떠내려보낸 통나무로 둑쌓기가 한창이었다. 처음 며칠 일본군의 추격은 신중하기 그지 없었다. 우리의 포기가 너무 쉽고 철수가 너무 재빨라 의심을 산 탓도 있었지만, 그 지휘관들이 남로군을 토벌하러 갔던 자들보다 신중했던 까닭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순천, 안주, 개천에 이어 영변까지 내놓자 그들에게도 본성과 같은 경박과 오만이 되살아났다. 사단끼리의 경쟁이 벌어지면서, 포병·공병에 치중부대까지 갖춰야 진군을 하곤하던 조심성이 사라져 경보병만의 추격이 시작되었고, 삼사십 리나 앞서 보내던 척후와 수색활동에 게을러졌다. 공명심에 들떠 우리의 섬멸을 호언하는 자들이 늘어가는 것도 그들의 경계가 풀려가는 증거였다. 그 모든 변화가 우리의 바람대로이기는 했지만, 우리에게도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의 하나가 일본군의 추격속도가 너무 빨라 우리의 수공(水攻)준비에 차질을 줄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아무리 상류라 해도 명색 강물을 끊어 물을 가두는 일이 그리 쉬울 까닭이 없었다. 너나 할것 없이 그리고 빼돌릴 수 있는 인력은 모두 모여 북쪽 가을의 찬 강물을 싫다않고 둑쌓기에 들어갔지만 적이 이르기 전에 필요한 만큼의 물이 가둬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벌이게 된 게 어룡(魚龍)이란 작은 포구에서의 전투였다. 후방으로부터 적의 진격을 하루만 더 늦춰달라는 요청에 따라 우리 전사들은 그곳에서 소규모의 복격전(伏擊戰)을 계획했다. 스스로 선봉을 자임하고 앞장서 추격해오는 적 우끼다 병단(兵團)의 한 기병중대가 그 희생물이었다. 일주일이나 이렇다할 저항을 받음없이 진군해온 그 중대가 어룡마을에서 방만한 야영을 하고 있는 걸 우리는 5백명의 전투단으로 야습해 전멸시켰다. 그 싸움에서도 그림 같은 광경은 더러 있어지만, 이틀 뒤에 있을 청천강의 대회전을 위해 감동을 아껴두자. 은근히 선두다툼까지 벌이던 적은 그 뜻밖의 일격에 주춤했다. 비로소 조선주둔군의 보고가 허풍이 아님을 깨닫고 다시 신중한 진격으로 전환했다. 이튿날 새벽 어룡마을에 이른 우끼다 병단은 그 때까지의 무턱댄 진군을 그만 두고, 강 복쪽의 저희 107사단이 오기를 기다려 천천히 밀고 올라왔다. 우리의 주력이 포진하고 있던 곳은 묘향산(山名이 아닌 청천강가의 地名) 북쪽 십리쯤 되는 곳에 있는 장군봉이란 고지였다. 좌우로 두 개의 무명고지를 거느리고 청천강 상류로 돌출해 있는 고지인데, 강물의 수량(水量)이 많은 때는 그대로 천험의 요새라 할 말했다. 그러나 때는 가을리라 가뜩이나 줄어있 던 강줄기가 다시 그 삼십 리 위쪽에서 우리의 비전투원들에 의해 막히니, 고지 아래는 그대로 넓은 평지나 다름없었다. 강 남안(南岸)을 따라 진군해오던 우끼다 병단이 장군봉 앞에 이르렀을 때는 그해 10월 19일 오전 열 시경이었다. 우리는 적의 척후대를 통과시키고 본h대가 오기를 기다려 고지에서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섬멸을 목표한 것이 아니라 적의 후속부대가 합류할 때까지 발을 묶어두려 함이었다. 보기(步騎) 혼성부대였던 적은 우리의 예상대로 놀라 고지 발치에서 물러났다. 산기슭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넓은 강변에 병력을 산개한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우리의 사거리(射距離)는 벗어났지만 엄폐물 하나 변변한 게 없는 강변이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우끼다 병단은 잠시 동요사 있었으나 때마침 강 북안(北岸)에 이른 적 107사단이 그걸 가라앉혔다. 이미 물이 줄어 실개천이 되어있는 강을 건너자 절로 한 덩이가 된 우끼다 병단과 107사단은 그 기세로 장군봉의 전면을 공격해왔다. 장군봉에 포진한 우리 주력도 병력으로는 결코 그들에 뒤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역시 우리의 장악 아래 있은 그 좌우의 무명고지에서도 화력을 보태니 아무리 적이 정예라 해도 마구다지 고지 탈환전으로는 얻을 게 없었다. 두 시간에 걸친 치열한 교전끝에 적은 다시 원래의 진진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이번은 소소한 빨치산부대같지는 않소. 이찌끼 중장이 말한 적군의 주력이 저 고지에 포진한 게 틀림없소. 병력도 우리에게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화력도 상당하오. 거기다가 유리한 지형까지 차지하고 있으니 돌격전은 애궂은 보병만 희생할 뿐이오.」 피해만 입고 격퇴한 변명삼아 그렇게 의견을 맞춘 우끼다 병단의 사령관과 107사단장은 이어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지형상의 유리를 자기들의 우세한 화력으로 압도하자는 결정을 보았다. 그들은 아직 몇 리 후방에 있던 예하 포병대를 급히 불러 장군봉 아래의 강변에 포를 방렬시키고 장군봉을 향해 포격을 퍼붓게 했다. 병단 포병대와 사단 포사령부의 80문(門) 가까운 중포(重砲)가 불을 뿜는 데다 크고 작은 보병의 박격포까지 보태지자 그 위력은 대단했다. 우리로서는 개전 후 처음으로 맛보는 본격적인 화력이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그 고지에 자리잡아 참호와 교통호를 깊게 판 우리들이라. 그 포격에 위력있다해도 위협을 느낄 만큼은 아니었다. 한 시간의 포격 뒤에 시도된 적의 두번째 파상공격도 그리 힘들이지 않고 물리칠 수 있었다. 두번째 공격에서도 실패하자 적은 정말로 심각해졌다. 실패 그 자체보다는 우리에게 그만한 전력이 있다는 게 충격을 준 듯했다. 그 한 근거가 적 107사단장이 선임 사단장이자 방면군 부사령 관으로 내정되어있는 마다하찌 중장에게 날린 전문이다. <19일 11시 적 주력 포착. 15시 현재 우끼다 병단과 합류해 고지에 포진해 있는 적과 접촉 중. 2차에 걸쳐 공격을 시도해보았으나 적의 저항은 예상보다 완강함. 적이 현재의 전력을 유지한 채 묘향산맥 깊숙이 잠적해보리면 제국의 우환이 될 것이므로 각하의 결단이 요망됨.> 그런 문면에는 우리를 경시하는 구절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적 선임 사단장도 정규의 대규모 작전에 임하는 태도로 답신을 보내고 있다. <무리한 공격을 멈추고 접촉만 유지할 것. 우군 114, 115사단을 적이 포진한 고지와 묘향산맥 사이의 개활지로 진출해 적의 퇴로를 끊고, 121사단은 적 측면 무명고지를 제압할 것임. 적 주력의 전면은 본사단이 그 지역에 도달할 것으로 보이는 20일 04시 이후 공력할 예정. 잠정 H아워는 06시로 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출 것.> 하지만 그들의 불행은 그 작전이 우리의 예상안에 이는 것이란 점이었다. 그런데도 적은 거기까지는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들의 작전명령에만 충실했다. 그날밤 우끼다 병단과 107사단에 의해 밤새도록 계속된 포격과 간헐적인 양동(陽動)공격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음날 노획한 적의 문서에서 앞서 말한 전문들을 발견할 때까지는 그들의 작전개요를 몰랐으나, 우리는 우리대로 사전에 수립된 작전을 차질없이 수행해 나갔다. 우리의 공격시간은 20일 03시 그때 우리 주력의 양동작전이 시작됨과 아울러 상류 30리 지점에서 강물을 가두고 있는 둑이 폭파된다. 우리가 계산한 유속(流速)으로 홍수가 적 주둔지를 휩쓰는 것은 약 30분 뒤, 우리의 주력은 04시를 기해 홍수가 휩쓸고 간 전면의 적을 공격 분쇄하고, 좌우 무명고지의 전사들은 있을지 모르는 적의 지원부대에 대비한다. 전면의 적을 격파 또는 섬멸한 뒤의 우리 행선지는 적유령(狄踰嶺)―대개 그런 순서였다. 우리가 묘향산맥의 본영으로 귀환하는 대신 적유령산맥으로 들 계획을 세운 것은 바로 적 114, 115사단이 펼치고 있는 것 같은 차단작전을 예상해서였다. 적의 포격과 양동작전으로 밤이 깊어 어느덧 03시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전 화력을 한꺼번에 구사할 양동작전에 들어갔다. 비록 소총과 자동화기뿐이었지만 수만의 총구가 한꺼번에 불을 뿜어대자, 그 엄청난 소리에 30리 상류에서 둑을 무너뜨리는 폭발음은 간단히 묻혀 버렸다. 긴장한 적도 그 어느때보다 거센 화력으로 응사해왔다. 그렇게 어둠 속의 사격전이 한 20분쯤 계속됐을까. 갑자기 전면의 적진지가 알아보게 술렁거렸다. 헝겊으로 가린 전조등을 반딧불처럼 깜박거리며 차량행렬이 적 진지로 들어서는 걸로 보아 증원군이 도착한 듯했다. 비로 적의 선임 125사단이 서둘고 서둔 끝에 예정보다 40분이나 일찍 도착한 것이었다. 비록 어둠 속이지만, 증원군의 도착으로 오른 적의 사기는 고지 위의 우리에게도 느껴져 왔다. 포들이 전진배치가 되는 게 금세라도 전면공격으로 나올 듯했다. 하지만 오래는 못갈 적의 사기였다. 갑자기 적의 응사가 뚝 끊어지며 우리의 발 아래서 전과는 다른 음향이 들려왔다. 사격을 멈추니 쏴아하는 물소리와 사람의 다급한 비명소리가 어두운 강변을 메우고 있었다. 어둠 곳이라 보이지는 않아도, 강변에 방열했던 대포와 차량, 치중들이 역시 그곳에 야영하던 병력과 함께 물에 휩쓸려가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 소리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안돼 물소리는 차츰 잦아지고 이번에는 잔여병력을 모으는 외침과 호각소리가 요란했다. 물이 어느 정도의 타격을 주고 갔는지 볼 수는 없었지만, 귀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의 기척은 드러날 만큼 줄어들어 있었다. 그때를 기다려 눈사태 같은 우리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강 남안(南岸)에서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강 북안(北岸)에서는 처음 한동안 제법 거센 응사가 있었으나 그것도 우리의주력이 강을 건넜 을 때는 끝나버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강물이 덮치기 바로 전에 도착한 적 125사단의 병력이었다. 포병만 전진배치하고 전열을 정비하다가 그 지경을 당하자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않고 퇴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그 싸움에 관한 일본의 공식기록이다. <소화 13년 10월 북지(北支)로 가던 我 107, 114, 115, 125, 129사단과 우끼다 병단은 조선을 경 유, 묘향산맥을 근거로 활동중이던 土匪들을 소탕하다. 작전기간 12일, 연병력 6만을 투입하여 적을 소탕한 결과, 적 점령지 5개 군(郡)을 탈환하고, 다수한 포로와 무기를 노획하다. 그 작전에서 아군은 가을장마로 인한 산사태, 홍수 등에 야포 3문과 차량 십여 대를 유실했으며 약간 명의 인명피해도 있었다. 작전 종료일인 19일 殘匪들은 묘향산맥의 근거지를 버리고 적유령산맥으로 도주하다. 아군은 제2차 작전으로 끝까지 잔비를 추적 소탕하려 했으마 대본영의 명에 따라 北支로 출전한다……> 아무리 전사(戰史)라는 게 보는 눈 따라 다른 법이라지만 해도 너무한 기록이다. 우리의 수공(水攻)을 가을장마로 돌린 것까지는 참을 수 있다쳐도 야포 3문 차량 10여대 유실에 약간 명 피해라니. 하기야 그날 물에 휩쓸려간 백여 문의 야포와 2백여 대의 차량 대부분은 며칠 뒤 하류의 강바닥에서 건져내긴 했다. 그러나 맹세코 그것은 그만한 수의 고철덩어리로서였지 야포나 차량으로서는 아니었다. 약간 명의 인명피해도 그렇다. 그것들의 산술이 원래가 저희편 죽은 건 머릿수를 헤지 않지만 6천명이 넘은 병단(兵團)하나가 날아간 게 어찌 약간 명 피해인가. 우리의주장이 정히 못미덥거 1939년 12월의 북지방면군(北支方面軍) 중원부대 명단은 보라. 앞서의 다섯 개 사단은 있어도 우끼다 병단은 없다. 청천강 전투 후 다시 사단편성을 하면서 모자라는 머릿수를 채우다가 보니 우끼다병단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 눈부신 승리에도 적유령산맥 깊숙이 숨어든 우리 북로군은 거기서 다시 몇 달 은인자중의 세월을 보냈다. 남로군이 눈덮인 지리산에 조용히 숨어있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되도록 우리의 전력을 노출시키지 않음으로써 적이 승리를 가장하고 북지를 떠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바란대로 일본의 증원군 10개 사단은 그해를 넘기기되 전에 북지로 투입되었다. 우리의 활동이 멈추어져 앞서의 기록에 근거가 된 거짓보고가 저희 대본영에 먹혀든 데다, 중국에서의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간 덕분이었다. 답답하게 된 것은 3개 사단과 12개 헌병대대만으로 우리를 막아야 하는 조선주둔군 사령관 이찌끼 중장뿐이었다. 이삐끼는 갖은 증거를 대 그 10개 사단이 당한 사실상의 패전을 대본영에 알리고 조선에서의 상존하는 위험성을 일깨웠으나, 대본영을 자기들이 믿고싶은 대로만 믿었다. 거기다가 우리 남북양로군까지 한동안 동면상태로 들어가니, 이찌끼로서는 대본영으로 달려가 할복하기 전에는 우리의 위협을 증명할 길이 없었다. 우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 이듬해 여름부터였다. 그해 6월 녹음짙은 계절이 시작되면서 작전을 개시한 남북 양로군은 각기 열흘도 안돼 이전의 수복지구를 되찾았다. 우리에게는 쫓겨간 헌병 분견대와 경찰 주재소의 보고를 받은 이찌끼는 펄펄 뛰었다. 이번에는 긴급전문도 젖혀놓고 직통전화를 들어 <대본영의 돌대가리들>에게 호통을 쳤다. 관동군을 끈떨어진 조롱박 신세로 만들 작정인가. 조선을 잃고 어찌해 보갰다는 것은 칼도 안들고 간 내먹겠다는 수작아닌가고. 대본영도 그때는 조금 긴장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아직 조선보다는 중국대륙에 더 열중해 있었다. 이미 반이나 삼킨 그 기름진 땅덩이에 비해 이 땅은 너무 좁고 척박해 보였다. 그게 투자 우선순위를 바꾸어 수렁 같은 중국에는 그 한해만도 열 개가 넘는 사단을 쏟아넣으면서 이찌끼에게는 겨우 애숭이들로 급편성된 후방사단 셋을 보내왔을 뿐이었다. <귀관은 점령이 완료된 지역의 주둔군 사령관으로서 현지조달의 원리도 모르는가. 병원(兵員)이 필요하면 징집하고, 물자가 모자라면 징발하라. 조선의 위수(衛戍)에 더이상의 전투병력을 묶어둘 수는 없다.> 그런 은근한 힐난과 함께였다. 대본영의 그 같은 결정에 이찌끼는 한숨부터 나왔다. 우리의 전력(戰力)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알고 있는 그의 계산으로는 새로운 6개 사단을 합쳐봐야 자기들을 지키기도 바빴다. 하지만 이찌끼는 군인으로서는 훌륭했다. 한번 그런 결정이 나자 그는 대본영에 대한 불평과 험구로 세월을 낭비하는 대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았다. 되도록이면 방어선을 줄여 현상을 유지하면서 대본영이 그토록 중점을 두고 있는 지나작전이 성공히에 끝나기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 결심에 따라 이찌끼는 유리에 대한 공세를 단념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점령상태의 유지가 불가능한 관북일대와 소백산맥 이동(以東)지역에서 모든 병력을 철수시켰다. 싸움도 않고 우리의 수복지구를 늘려준 셈이었으나 실은 가장 현명하게 시간을 버는 길이기도 했다. 저희 우군이 지나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까지의. 그로부터 2년 가까운 소강상태는 바로 그런 이찌끼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우리는 갑자기 몇 배나 늘어란 수복지구의 관리와 방어에 힘이 분산된 대신 이찌끼는 절반으로 줄어든 점령지역을 집중된 힘으로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과 기호지방이 완벽하기 그에기 장악되어 있는 한 이 땅은 아직 그에게 장악되어 있다는 편이 옳았다. 물론 우리가 모든 역량을 집중해 밀고든다면 승산은 틀림없이 우리편에 있었다. 화력이 우수하고 훈련이 잘 되었다 해도 이찌끼가 거느린 병력은 10만을 채우지 못했고, 증원군도 중일전쟁이 계속되는 한 크게는 기대할 수 없는 게 그들의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전면적인 수복전으로 들어가기에는 우리에게도 아직은 망설임이 있었다. 첫째로 께름직한 것은 중국만으로는 탕진될 것 같지 않는 일본의 잠재력이었고, 둘째는 마침내 중국을 포기한 일본이 사생결단을 우리를 향해서만 덤벼오는 경우였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우리는 그런 중얼거림으로 문득 문득 앞뒤없이 끓어오르는 우리의 피를 달랬다. 머지않아 따가 이를 것 같은 느낌도 우리의 무분별한 복수의 유혹을 달래는데 큰 힘이 됐다. 엉거주춤한 대치상태에서도 세월은 쉬임없이 흘러 서력으로 19년대가 끝나고 40년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두번째 해 12월, 마침내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왔다. 중일쟁의 장기화와 구미(歐美) 열강의 압력에 견디다못한 일본이 드디어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일본의 초장 끗발은 대단했다. 진주만부터 묵사발을 만들고 시작한 일본은 뒤이어 태평양으로 태평양으로 신나게 밀고 나갔다. 일본과의 결전을 재촉해오던 우리의 주전파들마저 가슴이 서늘할 정도의 무서운 잠재력이요, 눈이 아릴 정도로 빛나는 승전의 연속이없다. 하지만 우리의 헤아림 밝고, 사려깊은 이들은 그게 바로 꺼져가는 촛불이 마지막으로 한 번 피워올리는 불꽃임을 알아보았다. 대중화(大衆化)·소중화(小中華)를 피바다로 만든 이 살성(殺星)이 이제 제 피를 뒤집어쓰고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댈 란도 멀지 않았구나―나이든 이들 중에는 그렇게 잘라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 같은 판단 위에서 남북 양로군의 총공세는 시작되었다. 먼저 공세로 나아간 것은 그때 이미 청천강 이북을 사실상 수복해있던 북로군이었다. 25년전쟁 개전 22년차가 되는 1942년 1월 중순 우리 북로군은 본영을 적유령산맥에서 순천으로 옮기고 총공세에 들어갔다. 6만 병력을 전부 투입해 얼어붙은 청천강을 건널 때만 해도 서울 수복은 며칠 남지 않는 일로 보였다. 북로군에 호응해 남로군도 그해 정월에는 본영을 지리산에서 평야지대로 옮기고 공세로 나왔다. 7만 병력이 일제히 북상을 시작하자 사흘도 안돼 호남의 대부분이 수복되었다. 앞서 말했듯 조선군사령관 이찌끼는 적이지만 군인으로서는 훌륭했다. 그는 우리의 공세가 시작되자마자 동경의 대본영에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이미 오래전에 세워둔 방어전략을 실천에 옮겼다. 대동강과 금강을 방어선으로 하여 저희 구원군이 올 때까지 버틴다는 게 그 골자가 되는 전략이었다. 이번에는 일본의 대본영도 신속히 대응했다. 일본은 이찌끼의 급전이 날아든 지 닷새 만에 인천에다 4개 사단을 부려놓았다. 태평양에서 써먹으려고 길러온 사단을 아낌없이 투입한 것이었다. 이제와서 돌아보면, 우리의 북로군이 아직 대동강이 얼어있는 때 건너두지 않은 것은 작전상의 과오로 지적될 수도 있겠다. 그 이북지역을 미련없이 포기한 일본군이 대동강을 방어선 삼아 갑작스런 표독을 부리는 바람에 며칠 얼거주춤한 사이 적의 증원된 2개 사단이 다시 방어에 가담해 강을 건너지 못한 채 봄을 맞게된 것이었다. 남로군도 그런 점에서는 비슷한 실수를 했다. 후방강화니 뭐니해서 수복지구의 확대에 힘을 분산할 게 아니라 적의 증원군이 이르기 전에 금강부터 건너두고 봤어야 했다. 그런데고 목포나 군산 같은 해안도시까지 병력을 쪼개보내는 바람에 적의 증원군이 먼저 금강 방어선에 투입된 것이었다. 통상으로 공격군의 병력은 방어군보다 두 배는 많아야 된다고 한다. 그런데고 비슷한 병력에 화력은 오히려 우세한 적이 대동강이나 금강 같은 자연의 방어선을 끼고 버티니 싸움은 교착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기세좋던 공세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한 채 남북으로 두 강을 낀 지루한 공방전을 바뀌고 말았다. 거기다가 우리의 수복전을 더욱 지루하고 힘들게 만든 것은 이찌끼의 현명한 판단과 그에 따른 전략의 구사였다. <우선은 증파하는 이 4개 사단으로 조선의 점령상태를 유지하라. 인도지나와 필리핀 평정이 끝나는 대로 증원군을 늘리겠다. 미국이 항복하거나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가 이루어지면 그때는 조선 전토를 황군(皇軍)으로 덮어 그들 대동아 공영(共榮)의 이상에 거역하는 무리를 섬멸할 것이다.> 증원군을 보낼 때 대본영은 그렇게 호기로운 언질을 보탰으나, 이찌끼는 싸움터에서 반평생을 보낸 군인다운 감각으로 그 증원군이 마지막이 될 것임을 알아차렸다. 따라서 그는 당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가망없는 공세로 병력을 헛되이 낭비하는 짓은 않았다. 「불침전함(不沈戰艦)이라고? 그런 게 어디 있는가. 물에 떠있는 것은 언젠가는 가라앉기 마련.」 일본이 야마도(大和)니 무사시(武藏)니 하는 거함을 만들어 불침전함이라고 자랑하자 그렇게 내뱉았다는 야마모도 이소로꾸(山本五六) 사령장관에 견줄만한 이찌끼의 감각이었다. 강을 끼고 한 달 정도의 소득없는 공방전을 치른 뒤에야 이찌끼의 속셈을 알아차린 우리의 남북 양로군도 전략을 바꾸었다. 기다리는 일이라면 이미 32년이나 잘해온 우리가 아닌가. 공연한 서두름으로 전력을 낭비하는 대신 우리도 그 교착상태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충청, 경기, 황해 3도(道)를 뻬고는 거의 수복된 땅을 근거로 생산을 격려하고 병력을 기르며 새로운 전기(戰機)가 오기를 기다렸다. 새로운 전기는 미처 그해가 다 가기도 전에 다가왔다. 그해 여름을 고비로 일본의 초장 끗발은 내려앉아, 미드웨이에서는 그 함대가 미국에게 박살나고, 중국에서도 국공(國共)연합으로 좋던 세월은 끝나버렸다. 태평양도 중국대륙도―한창 잘 나갈 때는 화수분처럼 보였지만―밑없는 독이 되어 저희 젊은이와 물자를 삼켜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해 말 다시 강물이 얼어붙기를 기다려 우리 남북 양로군은 제2차 공세에 들어갔다. 그새 양로군은 모두 전투병력만도 10만이 넘게 불어 있었다. 거기다가 태평양과 중국에서의 전황으로 미루어 일본이 증원군을 보낼 여유가 없다는 게 명백해진 이상 더 기다려야 할 까닭도 없었다. 하지만 바다 밖의 저희 우군이야 물고기 밥이 됐건 진뻘에 빠져죽었건, 일본의 조선주둔군은 흔들밀이 없었다. 「경동(輕動)하지 말라. 조선주둔군은 건재하다.」 언젠가 이찌끼는 점령구역에 그런 요지의 포고문을 낸 적이 있는데, 조금도 허풍이 아니었다. 여름내 보루를 높이고 참호를 깊게 한 일본군은 우리의 공세에 완강히 저항했다. 요즈음 우리 아이들 교과서에 나오는 <육탄(肉彈) 12용사>나 <장렬 17영령(英靈)> 같은 얘기는 바로 그때 빚어진 애화(哀話)들이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육탄 12용사>는 금강 도하전(渡河戰)때 우리 젊은이 열둘이 포탄을 안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의 포대를 날리고 길을 연 것이며, 장렬 17영령은 적의 포격으로 얼음이 깨진 대동강을 헤엄쳐 건넌 우리 전사(戰士) 열일곱이 목숨을 던져 교두보(橋頭堡)를 확보한 얘기다. 남로군이 금강을 건너 충청도로 밀고 들어간 것은 1943년 1월 말이었고, 북로군이 대동강을 건너 황해도로 밀고든 것은 그 며칠 뒤인 2월 초순이었다. 양쪽 다 적지않은 희생을 치른 도하전이었으나 그 효과는 뜻밖에도 적었다. 적이라도 거듭 칭찬할 수밖에 없는 이찌끼의 빈틈없는 헤아림 때문이었다. 우리가 수복지구에서 식산을 장려하고 병력을 늘릴 때 이찌끼도 가만히 처매놓고 있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점령지역의 주민들과 우리의 공격중지로 여유가 생닉 군인들을 빼내 제2, 제3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즈음 우리 군(軍)도 유사시 방어선으로 생각하고 있는 지형을 골라 참호를 파고 보루와 포대를 촘촘히 설치한 것이었다. 일본군의 북쪽 제2방어선은 해주와 산막을 잇는 선으로서 주로 멸악산맥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3방어선은 개풍군 남단과 연천을 잇는 선인데, 이번에는 임진강을 따라 설정돼 있었다. 남쪽의 제2방어선은 청양, 조치원, 충주 선이었고, 제3방어선은 평택에서 원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 남북 양로군이 그같은 제2, 제3방어선을 뚫고 서울로 들어설 때까지의 수없는 싸움들을 여기서일일이 다 얘기하는 것은 피하자. 스스로 목숨을 내던져 겨레의 터전을 되찾은 이들의 얘기는 아무리 거듭해도 죄될거야 없겠지만, 어떤 싸움은 그 하나만 얘기해도 사흘밤이 모자란다. 거기다가 그 대부분은 이미 자랑스런 역사의 일부가 되어 알고 있는 이도 많으니, 그 부분에 대해 특히 자세하게 알고 싶은 이들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낸《25년 전쟁사》제12권부터 31권까지를 읽으면 될 것이다. 우리는 얼마가 죽었고, 적은 얼마나 죽었으나, 무엇이 얼마나 소비되었고, 무엇을 얼마나 노획했다는 따위 알쏭달쏭한 숫자놀음도 그만두자. 그런거야 보기 따라 헤아리기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지않는가. 그렇지만 한 가지―거기서 우리가 흘린 피는 살펴봐야겠다. 이왕에도 우리는 일본과의 싸움에서 많은 피를 흘렸지만, 그 세번의 방어선을 뚫는데 흘린 피만으로도 이 땅 삼천리를 한치 빠짐없이 적실만 했다. 곧 우리는 이 땅을 한치 한치 우리의 피로 물들이며 되찾은 셈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땅을 한치 한치 피로 물들이며 되찾은 싸움은 남북 양로군 모두 제3방어선을 돌파한 뒤에 있었다. 일 년이 넘도록 버티느라 일본군은 대동강, 금강 방어선때의 3분의 1로 줄어 있었지만 전의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맹장 밑에 약졸(弱卒)없다고, 이찌끼가 있어 그랬는지, 정말로 대화혼(大和魂)이란 게 있어선지는 모르지만 마지막으로 몰릴수록 더 악착같은 게 그들이었다. 거기다가 방어선의 길이가 줄어들수록 병력의 밀도가 높아지니 공격하는 우리는 그만큼 더 희생이 늘 수밖에 없었다. 다시 피투성이 공방전이 서울 근교를 경계로 두어 달 계속되었다. 비록 희생은 커도 전력(戰力) 대로라면 우리는 늦어도 1944년 말에는 서울을 탈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무렵 해서 일본군이내놓은 뜻밖의 카드가 다시 전선을 지루한 교착상태로 몰아넣었다. 북로군의 대부대가 북한산을 좌우로 돌아 구파발과 이아리쪽을 압박하고 남로군의 전위부대가 한강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한강만 얼어붙으면 남북 양로군이 일시에 서울을 탈환하려고 기다리는데 일본군 사자가 우리의 총본영―그때는 이미 남북 양로군의 지휘체계가 합쳐진 뒤였다―에 이찌끼의 친서를 전했다. <우리 황군(皇軍)은 천황폐하의 별도 어명이 없는 한 전원 옥쇄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본 사령관은 3만 장병의 꽃다운 목숨을 가긍히 여겨 천황폐하께 항복의 재가를 요청하였다. 조선군 총본영도 이에 부응하여 오늘 이후 일체의 공격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현재 우리 조선주둔군의 장악 아래 있은 귀국 민간인 백만과 고궁(古宮) 기타 문화유적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남경(南京)을 기억하라. 그리고 사이판을 기억하라.> 이찌끼가 보낸 친서의 내용은 그랬다. 우리로서는 실로 뜻밖의 복병을 만난 셈이었다. 더군다나 말미에 상기시킨 남경과 사아판은 우리의 공격을 중지시키기에 충분한 예(例)가 되었다. 승승장구해 내려가는 길에, 그것도 장개석이 그냥 내주는 바람에 무혈입성(無血入城)한 남경에서, 아무런 저항없는 민간인을 수십만이나 학살한 그들이 아닌가. 거기다가 그 무렵은 사이판뿐만 아니라 태평양의 크고 작은 섬 곳곳에서 들리느니 <전원옥쇄>라는 그들 특유의 집단자살 소식이었다. 조선주둔군 또한 그들과 씨가 같으니 막판으로 몰리면 옥쇄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그때가 되어 악에 바치면 우리 비전투원 백만쯤 학살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그 바람에 우리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리 않을 수 없었다. 하기야 얼마를 더 기다려도 그들이 곱게 항복해준다면, 그들을 섬멸하려들 때 치러야할 우리의 엄난 희생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해봄직한 거래였다. <석 달을 주겠다. 그때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섬멸전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꽤 강경한 답신을 보냈으나, 그 석 달이 지난 뒤에도 섬멸전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 어떤 명분이 동포 백만의 피와 갈음할 수 있겠는가. 거기다가, 물이 마르면 가제는 기어 나오는 법, 그 무렵들어 미군 공습에 매일 불바다가 나는 저희 본국의 사정도 어느 정도는 우리를 느긋이 기다릴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성급한 이들이 그 사이에도 여러 번 섬멸전을 주장했으나, 우리는 그래도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그러다가―드디어 감격의 그날, 8월 15일이 왔다. 오래전부터 예견돼 왔으나 막상 듣게 되자 역시 갑작스러운 히로히도의 항복방송이 있고 삼십 분도 안돼 이찌끼의 사자가 항복문서를 가지고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 조선주둔군의 항복을 통고함. 전병력은 용산에 있는 사령부에서 귀국의 무장해제를 기다리겠음.> 이제는 갑작스럽다 못해 허망하게까지 느껴지는 승리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서울 입성이 시작되면서 우리의 감격은 실감있게 되살아났다. 그날 우리는 실로 36년 만에 이룩 국토수복의 감격 속에 온전히 하나가 되어 얼싸안고 울고 웃었다. 조선주둔군 사령관 이찌끼는 끝까지 제국의 장군답게 삶을 마쳤다. 우리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러 용산의 그들 사령부로 갔을 때 그는 이미 자결한 뒤였다. 사령부에 걸려 있던 일장기(日章旗)와 군기(軍旗)를 불태우고, 멀리 저희 임금을 향햐 절한뒤 일평생 아끼던 군도로 스스로의 배를 가른 것이었다. 하라끼리(할복한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칼로 목을 쳐주는 것)를 맡았던 그의 부관 요시다 대위도 그를 따라 배를 갈라 우리를 숙연하게 했다. 지금도 우리 국립묘지에 가면 이찌끼 중장과 요시다 대위의 묘비가 있다. 비록 적이지만 훌륭한 군인에 대한 우리의 예우로 거기 들게 된 것인데, 듣기로 그들의 유골은 일본과의 국교가 다시 열린 그 이듬해 자손들에 의해 그들의 나라로 옮겨졌으마 묘비는 그대로 남겨졌다 한다. 이렇게 우리의 25년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한 가지―어쩌면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그일을 새삼 들먹여 지루하리만치 길게 얘기한 까닭은 밝혀야겠다. 특히 어찌보면 당연한 그 일이 어떻게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넘어야 했던 고비 중의 하나가 됐는지도. 만약 그때 우리가 모두 하나가 되어 이 땅을 한치 한치 피로 물들이며 되찾지 않았다면 그뒤의 일은 상상만 해도 비참하다. 그리되면 누군가 힘있는 나라들이―아마도 미국과 소련이 되었겠지만―일본을 이겨줘야 우리는 일본에서 풀려날 수 있었을 것이고 우리는 강대국의 전리품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은 자신들을 위해 싸웠으면서도 그들은 틀림없이 해방자를 자처했을 것이며,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해왔을 것이다. 물건은 하나인데 빚쟁이가 둘이면 쪼개는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이 나라는 둘로 나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눠진 둘은 새롭게 대치한 두 제국의 변경이 되고……. 정말이지, 가정(假定)만으로도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런데 우리는 25년전쟁을 통해 잃은 땅을 스스로의 힘으로 되찾음으로써 바로 그 비참을 피할 수 있었다. 우리의 행복한 이 오늘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고비를 그렇게 힘들었지만 멋지게넘긴 것이었다. 겨레가 한 땅에서 하나로 사는 이 행복을 위해.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에겐 이미 덤덤해졌지만, 이데올로기로 요란하게 장식된 새로운 형태의 패권주의에 의해 겨레가 나뉘고 땅이 갈라진 나라들에게는 눈물나게 부러운 이 행복을 위해. 將軍과 박사 다시 한 번 되풀이하거니와, 우리는 행복하다. 우리에게 유일한 불행이 있다년 그것은 우리 행복 의 목록이 너무도 빠짐없이 짜인 것일 뿐, 이라는 말도 전에 했던가. 하지만 이번 이야기의 목적은 그 숱한 행복의 목록을 시시콜콜하게 들춰 이미 싫증나기 시작한 그 정신적 자위행위(自慰行爲)를 되풀이하려는 데 있지 않다. 벌써 수십 년째 끈질기게 우리 사회 의 구석구석을 떠도는 고약한 소문―지금으로부터 꼭 44년 전에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어떤 장군과 박사의 이야기―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이 글을 쓴다. 따라서 우리들 행복의 점검도 그런 목적에 맞는 항목이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다만 정치적인 행복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정치적 행복의 내용 중에서 다른 불행한 나라의 사람들이 가장 뜨겁게 바라면서도 잘 얻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 지도자와의 일체감일 것이다. 그것은 별 실속도 없으면서 사람을 기분좋고 으쓱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의 행복까지 몇 배로 뻥튀기해주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그 지도자와의 일체감에서 이 세상 어떤 땅의 사람들보다 더 큰 행복을 누리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통치가 없고 관리(管理)만 있으면, 그 관리의 역할마저 완벽한 기회균등의 제도에 따라 우리 모두에게 골로루 할당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다른 불행한 나라에서 정치적 지도자라 불리는 이들은 우리에게는 관리인(管理人)이 되는 셈인데, 그 관리인과 우리와의 관계는 일체감 정도가 아니라 바로 일치(一致)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묘한 습성이 있어 뻔한 것도 뒤집어보기를 좋아하고, 모두가 맞다고 하면 일부러 아니라고 우겨보기를 즐기는 데가 있다. 특히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그런 경향이 심해, 나이든 사람들이 말짱하다고 하면 말짱한 그릇도 깨졌다고 보고, 나이든 사람들이 곱다고 하면 이제껏 소중히 들고 다니던 꽃다발도 무슨 더러운 물건 내던지듯 팽개치는 게 유행처럼 퍼져간다고 한다. 우리의 완강한 행복을 흔들만큼 많은 수도 아니고, 또 그게 병이라도 한때의 병이라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이런 얘기를 할 때는 절로 눈치가 보인다. 더군다나 이 글이 우리끼리만 돌려보고 만다는 보장이 없으니, 지금의 우리 같은 상태가 까마득한 꿈일 뿐인 다른 불행한 나라 사람들에게는 더욱 못미더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위해서라도 앞서의 추상적인 주장을 구체적인 예(例)로 바꾸어보자. 설령 그게 우리끼리는 다 아는, 흔해빠진 일일지라도. 얘기가 좀 빗나간 듯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먼저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몇 달 전 나는 오뉴월 감기보다 더 고약한 어떤 관리업무의 당직(當直)에 걸려 꼬박 일주일 동안이나 초죽음을 당한 적이 있다. 바로 청와대 당직으로 다른 불행한 나라에서는 거기서 일하는 최고 책임자를 대통령이니 뭐니 하며서로 말기를 다툰다지만, 다 알다시피 우리에게는 그게 얼마나 힘들고 지겨운 당직인가. 처음 그 당직 통지문을 받았을 때 나는 솔직히 터무니없이 일찍 돌아온 내 순번에 부정의 의혹을 품었었다. 그러나 알아볼 대로 알아보고 확인할 대로 확인해보아도 누가 순번을 조작했거나 부당하게 담합해 나를 원래보다 일찍 그 당직에 끌어들인 혐의는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질병, 기타 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 사유도 발생하지 않아, 나는 하고 있던 온갖 급한 일을 일시 미뤄두고 청와대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일주일의 끔찍함이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또 내 순번은 우리들의 <신성한 약속> 중의 하나라 겨우겨우 하루하루를 때워나가기는 했어도, 일생에 두번 다시 그곳 당직이 돌아온다면 나는 서슴없이 감옥행을 택할 것이다. 회의는 왜 그렇게 많고 사람은 또 왜 그리 몰려들던지, 회의, 숙의, 회동(會同), 요담, 밀담, 회담, 접견, 예방―거기다가 끊임없이 서명을 요구하는 결재, 승인, 추인, 허가, 인가……. 일주일 내내 머리는 금세 터질 것 같았고 잠은 턱없이 모자랐다. 밥은 모래를 씹는 맛이었고, 없던 소화불량의 증세가 나타났으며, 나중에는 코피까지 줄줄이 쏟아졌다. 가까스로 일주일을 채우고 돌아오니 내가 그전에 하던 일은 밀려 엉망이 돼 있고. 그렇지만 곰곰 헤아려보면 나는 아직도 몇 번인가그널 괴로운 당직을 더 남겨놓고 있다. 청와대는 이미 때웠으니 남은 곳은 도청(道廳)이나 부처(部處) 같은 데라 일은 좀 가벼울지 몰라도 대신 이번에는 당직기간이 훨씬 기니 고생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그러한 당직은 이 땅에 살려면 한 번은 돌아오기 마련일 것을. 곧 우리에게 통치는 없고 관리만 있으며, 그 관리인이 되는 것은 권력의 획득이 아니라 의무 수행일 뿐이다. 따라서 원래의 논의로 돌아가면, 지도자와의 일체감이란 우리에게는 오히려 괴로울 정도의 일치(一致)로 실현되어 있는 셈이다. 그리고 지도자와의 일체감이 그 정도라면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정치적 행복의 다른 내용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낡고 애매하고 다분히 선동적인 그런 용어들은 아직도 권력을 잡은 지도자의 <통치>를 받고 있는 다른 불행한 나라나 전(前)시대에 속한 말일 뿐 우리네 정치학사전에는 이미 사어(死語)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요즈음 항간에는 그런 우리의 정치적 행복을 정면으로 의심케 하는 근거없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한다. 우리에게는 바로 앞서 말한 바와 같은 관리인이 있는 게 아니라 전혀 일체감을 못므끼는 권위주의적 지도자가 있으며 그것도 둘씩이나 된다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이 되면 그 소문은 이렇게 발전하기도 한다. 곧, 그들 중 하나는 장군이며 하나는 박사로서, 40여 년 전부터 이 나라를 남북 둘로 쪼개 다스리고 있다는 식으로, 거기다가 좀더 신이 나면 제법 소상한 후일담까지 보태는데, 거기 따르면, 북쪽을 차지한 장군을 반세기나 권력을 잡고 있었어도 양이 안차 이제는 그 아들에게 물려줄 궁리가 한창이고, 남쪽의 박사는 12년만에 쫓겨났지만 그 뒤로도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그 자리를 잇는 바람에 그쪽 사람들의 정치적 불행도 북쪽에 못지 않다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말, 마른 날에 날벼락 맞아죽을 소리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무슨무슨 강대국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느니, 그래서 남과 북이 피가 튀고 살점이 흩어지는 싸움까지 몇 년씩 했다느니 하는 따위의 유언비어나 근원이 같아 보인다. 행복에 겨워 심심해진 나머지 꾸며낸 가상극(假想劇)이거나, 한자(韓子)와 되(胡)트기, 양(洋)트기가 먹은 마음이 있어 지어퍼뜨린 낭설임에 분명한 까닭이다. 조금만 분별있는 사람이라면 그걸 다 말이라고 귀 있다 해서 듣고 앉았고 입 있다 해서 수군수군 옮겨대는 짓거리는 않을 터이다. 하기야 어떤 이는 비록 그게 헛소문일지라도 그 치밀한 구성이나 빼어난 상상력은 인정해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또한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는 것이 그 얘기의 원형이나 전개방식에는 어딘가 일본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기들어 한 끗발 잡은 일본이 앞뒤없이 촐랑대다가 낭패를 당해도 크게 당한 뒤에 겪은 일과 요즈음 우리를 노엽게 하는 그 헛소문이 몹시 닮아 있다는 뜻이다. 일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저 서력(西曆) 1945년의 패전이 몰아다준 혼란을 틈타 넓지도 않은 그 땅을 두 토막낸 금촌(金村) 장군과 목자(木子) 박사를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땅덩어리뿐만 아니라 그 나라 사람들의 마음까지 두 동강 낸 자들로, 일본 사람들은 그때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두 사람이 남긴 상처에 시달리고 있다. 이왕 얘기가 나왔을 뿐더러 우리로 보면 가까운 이웃의 일이니 이 기회에 한 번 살펴봐 두자. 타산(他山)의 돌이 비록 쓸모가 없어도 내 칼을 가는(磨) 데는 좋은 숫돌일 수 있느니.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지 모른다고 이웃 일본이 뒤늦게 배운 식민지 놀음에 미쳐 한동안 담부랑댄 이야기는 이미 했다. 그러나 초장 끗발이 파장 맷감이요, 영감 상투 긁어봐야 문지방 넘을 때 알아본다더니, 일본이 꼭 그랬다. 병들어 비실대는 사자 운좋게 때려눕히고, 염통에 쉬쓸어 성질만 사납던 북금곰 엉덩이 한 번 호되게 걷어찰 때까지는 좋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간이 배 밖에 나와도 유분수지, <박멸 미영귀축(米英鬼畜)>이라니 무리라도 너무 암팡진 무리였다. 과학기술 전쟁기술 식민지놀음 모두에서 저희 스승이요, 후견자요, 선배인 그 두 나라에 초장 끗발만 믿고 칼끝을 들이댄 것이었다. 하기야 이번에도 한동안은 초장 끝발이 통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영국이 누구고 미국은 누군가. 특히, 아으, 그 미국의 물량(物量). 그때 유럽과 태평양에서 동시에 터진 대전을 치르면서도 남는 구축함 50척으로 태평양 무슨 제도(諸島)를 영국으로부터 사들일 수 있던 게 미국이었다. 거기다가 어디 미영(米英)뿐이던가. 옛적에 엉덩이 호되게 걷어차 멀찌감치 내쫓았다 싶었던 북극곰, 그 사이 환골탈태해 북쪽에서 넘실대니 이름하여 소련이다. 서쪽이 바빠 동쪽으로는 연방 일본에게 헤픈 웃음 흘리고 있었으나, 스탈린그라드에서 묘수(妙數)나자 금세 동쪽을 보는 눈길부터 달라졌다. 차르와 귀족에게서 뺏은 빵으로 <인민>을 어루었건, 언(凍) 볼 주먹으로 치고 헐벗은 정강이뼈 군화발로 내질러 짜 내었건, 한 20년 군대깨나 모으고 총칼깨나 마련했으니 필경엔 동쪽으로도 써먹을 게 뻔했다. 말이 난 김이니 하는 소리지만 저희 자충수(自充手)는 또 어땠는가. 조개 주우려고 바닷물 퍼내 는 게 낫지, 만주로는 모자라 진창 같은 화북(華北)·화남(華南)에 출병하더니 급기야는 태평양이 다고 한껏 전선을 벌였다. 남의 일이라 쉽게 말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 놓고도 본토에 종자(種子)할 게 남았으니, 우리말로 눈알이 빠져도 그만하기가 다행이었다. 그 파장에 그들이 당한 참상을 길게 얘기하는 건 삼가자. 군자는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법이 아니거니와, 이 얘기의 목적도 거기에는 있지 않다. 애시당초 우리가 그들 얘기를 꺼낸 것은 패전 뒤를 살펴보기 위함이었으니. 마지막까지도 본토결전, 본토결전 하며 바락바락 악을 쓰다가 원자탄인가 뭔가로 정신 번쩍들어 손들고 보니 이미 판은 복기(復棋)도 못해보게 쓸린 뒤였다. 그러나 항복뒤에 그들이 겪은 낭패 중에서도 가장 큰 낭패는 권력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이었다. 앞장서 악쓰던 놈은 전범(戰犯)으로 잡혀가고, 엉큼한 놈은 큼직한 오리발 하나 구해들고 어슬렁거리고, 겁많은 놈은 꼬리 팍 내리고 숨어버리니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따로 없었다. 금촌(金村)이란 자는 바로 그런 때를 틈타 관서(關西) 지방에 나타난 자였다. 그는 스스로를 불세출의 영웅이며 애국자며 장군이며 이념가라 자처했다. 그는 일찍부터 군부의 불장난과 그 불장난에 놀아나는 천황(天皇)이 조국 일본을 망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만주로 망명한 그는 반천황(反天皇) 구국결사대란 유격대를 조직해 그릇된 조국의 군부와 싸우게 된 게 애국자요 영웅으로서의 출발이었다. 그런 그의 전설과 신화는 뒷날로 갈수록 요란뻑적지근해졌다. 먼저 그의 사격솜씨부터 살펴보자. 처음 관서지방으로 돌아왔을 때만 해도 그의 총솜씨는 나무에 달린 사과낱이나 떨어뜨리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깡통이나 쏘아맞히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차츰 날아가는 외기러기 눈깔을 쏘아 맞혔다던가 만 피트 상공의 적 전투기 조종사의 마빡을 뚫었다는 식으로 부풀더니 80년대 들어서는 마침내 일석이조(一石二鳥) 신화가 나왔다. 일석이조 신화는 갈공산 전투인가 뭔가 하는 유서 은 전투에서 총알 하나로 적 우두머리 둘을 한꺼번에 잡은 얘기다. 그날 전투는 매우 치열하여 쌍방이 모두 전사하고 이쪽은 금촌 장군, 저쪽은 제국주의 파쇼군대 사단장과 그 부관만 남았는데, 불행히도 금촌 장군의 소총에는 총알이 하나뿐이었다 한다. 이에 영명한 금촌 장군은 총구에 군도(軍刀)날을 대고 그 둘을 겨낭해 쏘았더니 총알이 두 쪽으로 갈라져 둘 모두의 심장에 가서 박히더란 것이었다. 금촌 장군의 기마술에 관한 전설도 사격솜씨에 못지않다. 안장없는 말을 타고 남만주의 산악을 평지처럼 치달았다는 얘기에서 시작된 신화는 차츰 달리는 말에 탄 채 땅에 떨어진 권총을 주워 들었다는 식으로 발전해갔다. 그러다가 70년대에서는 말배에 불어 몇십 리를 달리는 게의 전기(傳記)영화에 선보이더니 요근래에는 그가 암말 엉덩이 사이로 들어갔다가 입으로 나오는 걸 봤다는 기록문까지 나오게 되었다. 들리는 말로는 그 장면도 영화로 찍고 싶었으나, 스필버그를 가르친 감독조차 그런 장면을 만들어낼 자신은 없다고 손을 내젓는 바람에 기록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감동적인 동지애(同志愛)도 여러 갈래의 전설로 전해진다. 굶주린 동지들을 위해 한 달 내내 곡식 한 톨 입에 넣지 않았다던가, 추위에 떠는 동지들에게 벗어주는 바람에 한겨울 내내 훈도시 한 장으로 버텼다는 따위가 그 초보다. 중급으로는 굶주리는 동지들에게 한톨의 곡식이라도 더 돌아가게 하려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눈 속에 버렸다는 게 있고, 고급으로는 어느 핸가의 어려운 농성전때 허벅다리를 잘라 동지들을 먹인 바람에 지금도 왼편 허벅지 아래는 의족(義足)이라는 주장이 있다. 금촌 장군의 탁월한 능력이나 인간적인 미덕으로 넘어가면 지금까지 말한 사격솜씨나 기마술 따위는 또 한수 처진다. 그 너그러움이며 참을성·용기·지혜·박식에다 통찰력·예견력·분석력·결단력은《불멸의 횃불》이라는 전기(傳記)와《영원의 금자탑》이라는 그의 어록(語錄)에 하나같이 찬연한 단원을 이루고 있다. 전기는 추리고 추렸다는게 스물두 권이요, 어록은 고르고 고른 게 일흔일곱 권이나 되는 데다, 나는 또 재주가 짧고 시간까지 없어, 여기에다 요약하지 못하는 게 실로 유감이지만 특별히 그쪽으로 관심있는 분은 직접 원본을 구해 읽어보시기 바란다. 하기야 너무 쉽게 원본을 구해보란 말을 하니 어떤 이는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갰다. 사실 예전에는 반일(反日)이니 멸일(滅日)이니 해서 그런 것을 구하기는커녕 구경하기조차 어려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약삭빠른 출판장사꾼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독자의 일시적인 호기심을 노려 마구다지로 복사해 뿌려대니, 발에 채이는 게 그 전기요, 손에 걸리는 게 그 어록이다. 뿐인가. 원래 그쪽에서 만들어진 책은 충견(忠犬) 같은 그쪽 관료들의 과잉충성으로 우리가 읽기에 역겨운 데가 많이 있었던 모양인데, 우리 귀신 같은 출판업자들은 그 문제까지도 해결해놓은 경우가 많다. 우리 독자들을 역겹게 할 부분은 알아서 빼고 적당하게 편집해 제법 읽을 만하게 만든 뒤 판다고 한다. 출판업자로서는 가장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금촌 장군을 소개하는 데 앞서의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은 혁명가, 이념가로서의 면모이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의 정액에 섞여있을 때부터 혁명가였으며, 방년 9세가 되어서는 드디어 소비에트식 사회주의만이 조국 일본을 구하는 유일한 길이요, 답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뒤 풍찬노숙 20여 년 그 사상을 갈고 다듬은 그는 서른넷의 나이로 관서(關西)지방에 귀향할 때 이미 그 사상을 창시한 천재적인 유태인에 못지않은 사상가로 자라 있었다. 그 뚜렷한 근거가 서력 1960년대에 접어들어 그가 창안했다는 자체사상(自體思想)이다. 선배격인 스탈린이나 모택동이도 혀를 내둘렀다는 그 사상을 구체적으로 다 소개할 수는 없으나 어쨌든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게 위대한 사상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듣기로 그 사상에 따르면 그곳 인민은 모두 그의 자식이며, 그들이 먹을 것 입을 옷 살 집은 모두 그가 준 것이고, 때로는 그곳의 해와 달도 그가 만든 것이라고도 한다고 한다. 거기다가 그 사상의 구조가 얼마나 정밀하고 논리적인지, 최근에는 우리 똑똑한 아해들 중에도 자사파(自思派)란 게 생겨 그 사상의 위대함을 즐기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어쨌든 금촌(金村)은 인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조국 일본으로 돌아갔고, 그 이듬해는 관서(關西)지방에 준(準)통치기구까지 마련했다고 한다. 미국과 소련이 전쟁도발의 책임을 물어 일본을 동서로 분할하는 바람에 소련군의 점령지역이 된 지방이었다. 금촌의 관서정권 수립시기에 대해서는 그뒤 일본 국내에서 일게 된 분단책임에 관한 시비와 더불어 이설이 많다. 목자(木子)박사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관동(關東)지방에 세운 정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인데 어떤 이는 서슴없이 금촌의 관서정권이 먼저라고 한다. 앞서 준(準)통치기구라고 한 무슨 위원회를 근거로, 그 위원회가 설치된 걸 바로 정권의 수립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촌이 정식으로 서(西)일본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것은 목자(木子)의 대일본민국수립을 선포한 몇 뒤여서, 어떤 사람은 먼저 단독정부를 세운 책임을 목자의 관동(關東)정권에 묻기도 한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사실 금촌(金村)이란 인물 자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이설이 있다. 지금까 지 전한 것은 그래도 대개는 금촌에게 긍정적인 쪽이지만, 그의 반대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사뭇 다르다. 남의 흉은 길게 말하는 법이 아니니 대강만 말해보자. 그 반대자들에 따르면, 그의 반제(反帝)유격활동부터가 생판 거짓말이 된다. 할일 없는 건달로 만주를 떠돌다가 마적패에 가담한 그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다니다 치른 몇 번의 조우전을 그렇게 떠벌렸다는 것이다. 이념가·혁명가로서의 면모도 마찬가지로 그의 사회주의사상이랬자 기껏 만주에서 마적토벌에 긴 그가 소련으로 넘어가 그곳 외인부대(外人部隊)에 투신한 뒤에 얻어진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나마도 소련군의 정훈(政訓) 교육 수준을 크게 넘지못해 과연 그를 사회주의자로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문스럽다는 주장이다. 관서(關西)인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것도 말같잖은 말이란 지적들이 있다. 관서에는 원래 명망가(名望家)들이 많은 데다 사회주의 계열로도 그보다 몇 배나 관록과 명성을 쌓은 국내파(國內派)가 여럿 있어 그는 거의 무명(無名)의 신인에 가까웠다는 게 그 근거다. 소련 점령군이 우격다짐으로 끌어낸 군중을 그렇게 과장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정권수립에 관해서도 의심은 많다. 이념 턱없이 민감하고 흑백논리에 잘 들뜨는 일본인의 국민성이 경박한 편가르기에 나서 그를 어느 정도 도왔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보다는 괴뢰정권 수립에 급급한 소련 점령군의 총칼이 더 힘이 됐을 거란 얘기다. 남의 나라 일이라 그 시비를 일일이 가릴 수는 없지만―하여튼 금촌이란 인물은 대강 그렇다. 그러면 관동(關東)지방에 나타난 목자(木子)란 인물은 누구인가. 여러 가지로 뜯어 맞춰보면 이 목자(木子) 또한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말 많기로는 금촌(金村)에 못지않다. 역시 금촌의 선례에 따라 조목조목 짚어나가 보자. 목자는 혈통부터가 금촌과 달리 화려하다. 어떤 이는 고대(古代)의 방계(傍系)일 뿐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당시 일왕실(日王室)의 근친이라고 해 서로의 주장이 엇갈리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가 일왕가(日王家)의 혈통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그는 일생 그것을 은근히 내세웠으며, 미국에서는 한때 일본의 왕자를 자처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런 종류의 인간에 예외 아니게 애국자, 구국(救國)의 화신을 자처했는데 그 구국의 행각 은 대강 이러했다. 일찍이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조국 일본을 위해 몸바치기로 결심하고 태어난 그는 세상이 놀랄만한 신동으로 자랐다. 그러다가 나이 열다섯 되던 해 왕가가 점차 군부(軍部)의 손에 넘어사는 걸 보고 조국의 위기를 직감한 그는 먼저 국내에서의 반(反)군부투쟁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의 방대한 전기(傳記)가 <투쟁의 서막>이란 이름의 장으로 서술하는 바를 보면, 그 무렵 그는 주로 <반(反)군부·평화협회>라는 진보적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것 같다. 그 단체는 또 《평화신문》이란 최초의 순 가다가나<일본글> 신문을 만들어 여러 가지 사회운동을 벌였는데 그 공로는 실로 혁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의로운 자에게는 고난이 따르는 법이라던가. 그도 곧 엄혹한 시련에 빠졌다. 한창 대륙침략의 열정에 들떠있던 군부 과격파가 내각을 장악하면서 목자(木子) 그룹에게 조직적인 탄압을시작한 것이었다. 거기서 <반군부·평화협회>는 반란단체로 규정되고 목자는 그 수괴(首魁)급으로 체포되어 끔찍한 고문을 겪은 뒤 사형을 언도받았다. 목자가 어떻게 교수대를 면하고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해설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일왕(日王)이 혈육의 정으로 특사를 내렸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차후 일체의 정치활동을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군부의 용서를 받았다고도 한다. 극적인 것으로는 체포 안된 동지들의 도움으로 탈옥을 했다는 것도 있고, 그에게 악의 품은 후문으로는 동지를 팔아 그 한 목숨을 구했다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의 전기는 그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 때문에 함부로 사형에 처할 수 없게 된 군부가 사형 대신 출국을 간청해 왔다고 한다. 거기다가 그 또한 더이상 국내에서는 희망이 없음을 알고 해외투쟁으로 방식을 전환해 그 망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단은 공식적인 기록을 믿어주기로 하자. 목자(木子)의 미국 망명시절은 그의 전기(傳記)에서 <길고 외로운 투쟁>이란 장으로 장황하게 서술돼 있다. 거기에 따르면 방년 스물둘의 나이로 미국에 건너간 목자가 먼저 힘을 쏟은 것은 배움이었다. 그는 턴스프링이란 명문대학에 들어가 뒷란 그의 공식호칭이 된 박사학위를 따고 난 뒤에야 구국활동으로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그가 어떤 전공을 택해 무슨 박사를 땄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전기는 뒷날 정치가로 대성한 그답게 그의 학위를 정치학박사로 밝히면서 <천황가와 군부의 결탁>이란 논문제목까지 밝히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가 대단할 것 없는 신도(神道)의 지식을 영어로 대강 얽어 어리숙한 미국의 동양학자를 홀리고 동양철학으로 박사를 딴 것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껏해야 학생 70명 정도의 시골교회 부속 신학대학에서 논문도 없는 신학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라고도 한다. 전공이야 어찌됐건 그가 박사학위를 땄다는 것에는 모두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를 박사로 부르는 데는 지장이 없을 듯하다. 그뒤 불의(不義)한 조국이 패망할 때까지 30여 년―박사는 오직 조국에 남아있는 동포의 자유와 권리회복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웠다. 한때는 남가주(南加州)에 망명정부를 세워 세계의 지지를 호소하며 조국을 권으로 통치하고 있는 군부파쇼 정권과 싸웠으며, 그 망명정부가 간악한 정보정치에 의해 와해된 뒤에는 주로 외교전(外交戰)을 펴 불의한 조국의 패망을 앞당기는 데 전력하였다……. 그가 통치하는 관동(關東)의 대일본민국 문부성이 공식으로 인정하는 기록들은 대강 그렇게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상반된 주장은 여럿 보인다. 그 첫째가 망명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이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대륙 침략을 시작한 뒤 해외로 망명한 일본의 민간지도자들에 의해 망명정부가 성립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초기 한때 목자 박사가 개입했던 것도 사실이나, 마치 그가 지도자로 시종 일관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일시 요직에 앉은 걸 기화로 재미교포들이 모아준 구국성금을 유용(流用)했다가 탄핵받아 해임된 뒤 다시는 망명정부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뒷날 일본이 패망한 뒤 귀국한 망명정부 인사들이 한결같이 목자 박사를 백안시한 걸 보면 그 주장이 훨씬 사실에 가까운 듯하나 남의 나라 일이라 잘라 말할 수는 없다. 또 목자 박사를 편들어 말하는 사람은 그 망명정부가 오래잖아 일본 군부정권의 공작정치에 와해된 것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도 사실과는 다르다. 이미 말했듯 패망 직후 일본에 돌아온 정치세력 중에는 버젓이 망명정부를 앞세운 일단이 있어다. 목자(木子) 박사가 구미(歐美) 여러 나라를 상대로 화려하게 펼쳤다는 외교전(外交戰)에 대해서 도 곧, 만만치 않은 이설(異說)이 많다. 말이 구미지 실은 그가 유럽으로 건너가 무슨 외교활동을 한 적은 없고 다만 워싱턴에서 그것도 미국무성을 상대로함 활동했는데, 그게 외교에 속한 활동인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목자 박사의 활동내역은 대강 이렇다. 목자 박사가 몇몇 자신의 영향력 아래 든 재미동포를 조직해 단체를 만든 적은 있었으나 그게 한번도 외교권을 행사할 만한 규모가 된 적은 없었다고 한다. 단체가 워낙 빨리 분열하기 때문에 미처 제대로 클 수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얘기가 좀 빗나가는지 모르지만 그가 개입하기만 하면 어떤 단체든 분열하고 마는 것은 당시 일본 교포사회에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한 번은 하와이에 있던 어떤 일본인 단체가 둘로 나누어져 목자 박사를 수습차 파견했더니 얼마 후 그 단체는 셋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전의 두 파(派)에다 목자 박사의 파(派) 하나가 더 늘어난 것이었다. 따라서 목자 박사의 외교활동이란 것은 주로 개별적인 것인데, 어떤 사람은 그걸 <타이프 라이 터> 혹은 <투서(投書) 외교>라 비꼬아 부르기도 한다. 워싱턴 빈민가의 셋방에 타이프라이터 한 대를 놓고 무슨 작은 일만 있으면 끊임없이 미국무성 서한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항의, 요구, 경고, 충고 등의 여러 형식을 한 그 끝에는 있지도 않은 이런저런 이름의 일인(日人)단체를 내세우고 스스로 그 회장으로서 서명한 개인적 투서였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목자 박사의 방식을 얕볼 것만은 아닌 듯하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그런 서한을 받아 들이던 국무성 관리들도 10, 20년 되풀이 되자 차츰 목자(木子)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일본의 민간지도가 중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까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종전 후 패전 일본의 관동지방에 점령군을 보내고, 그곳에다 자신들이 원하는 정권을 세워야 할 필요가 생겼을 때 맨먼저 그의 이름을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목자 박사가 환국했을 때 그 외교적 활동의 성과는 대단해 보였다. 그는 관서(關西)의 금촌(金村) 장군이 소련 점령군으로부터 받았던 것에 못지 않은 대우를 관동(關東)의 미점령군으로부터 받아 특별군용기편으로 동경공항에 내릴 수 있었다. 그를 환영하는 국민들의 열광도 대단했다. 미점령군의 입김이 작용했다기보다는 그가 미점령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는 걸 알아챈 정치모리배들과 전범(戰犯)들이 이익과 보호를 구해 몰려든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하지만 어쨌든 환영인파는 환영인파―그리고 그들은 곧 관동(關東)에 단독정권을 수립하는데 든든한 배경이 되어줌으로써 표현(表現)의 하자는 치유된다. 일본의 금촌(金村) 장군과 목자(木子) 박사는 대강 그러했다. 여기까지 듣고 나면 요즈음 우리사회 구석을 돌고 있는 고약한 소문에 대해 어지간히 속아있던 이도 그 진원이 어딘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그 소문을 일본의 복사판으로 보기에는 그래도 좀 찜찜한 구석이 있다. 우리 옛말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리란 것이 있듯이, 아무리 이웃나라에 그런 일이 있었기로니, 우리에게는 생판 없었던 일이 그렇게 끈질긴 소문이 되어 떠돌리는 없기 때문이다. 조용히 진행되긴 했지만 근간에 있었던 우리 현대사학회(現代史學會)의 대대적인 점검은 그 바람에 있었다. 우리의 저명한 현대사학자들은 켜켜이 앉은 세월의 먼지를 떨고, 항간에 떠도는 소문의 근거로 가능할 만한 소지가 있는 인물들과 사건을 찾아보았다. 그런데―놀랍게도 있었다. 일본과는 경우를 달리하지만 우리에게도 장군과 박사가 오기는 왔었다. 그리고 그 발견이 실은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이 이야기의 발단이 된 것이다. 25년전쟁―아는 이는 알고 있겠지만, 서력 1920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가 침략자 일본과 싸워 이 땅을 한치 한치 피로 물들이며 그들을 내쫓은 전쟁―직후의 일이었다. 조선원정군사령관 이찌기(一木)는 불타는 일장기(日章旗) 곁에서 배를 가르고, 나머지 조선원정군 패잔병은 우리 남북군(南北軍)에 항복한 며칠 뒤 소련군 극동사령부와 미군 태평양사령부에서 각기 경축사절이 왔다. 그런데 바로 그 경축사절에 묻어 그 어이없는 장군과 박사가 왔던 것이다. 하기야 가만히 앞뒤를 재보면 미국과 소련의 경축사절단이란 것도 수상한 구석은 있었다. 25년간이나 피흘려 싸워 제 땅 제 나라를 되찾은 우리에게야 그 마지막 승리가 감격스럽기 그지 없겠지만 미소(米蘇) 저희들에게야 그게 무에 그리 사절단까지 보내가며 경축할 만한 일이겠는가. 좀 심한 짐작인지는 모르지만, 일본을 관서(關西), 관동(關東)으로 분할점령해 재미를 본 그들이 은근히 우리에게도 그런 재미를 기대하고 경축을 구실삼아 정탐을 보낸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간다. 소련군도 미군도 사절단이랍시고 보낸 게 맨 첩보전문가, 정치공작전문가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이 겨레가 어떤 겨레인가. 저 경박한 일본인들같이 미소(米蘇)가 멀쩡한제 땅에 선을 긋는다고 동(東)이네 서(西)네 갈라설 리 없고, 민주가 어떠니 공산(共産)이 어떠니하며 꾄다고 좌(左)니 우(右)니 다툴 리 없었다. 거기다가 우리는 일본과 달리 전쟁도발의 책임 같은 것도 없으니 설령 불칙한 기대가 있었다 해도 요새 아이들 말로 혹시나, 정도였을 것이다. 소련 극동사령부의 경축사절단 백여 명이 육로(陸路)로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서력 1945년 8월 중순이었다. 이미 말했듯 첩보전문가 정치공작요원들로만 짜여진 사절단이었는데, 우리의 장군은 바로 그들 틈에 끼어있던 여나믄 명 현지인 보조요원들 중의 하나였다. 그럼 여기서 잠시 그때의 목격자가 남긴 기록을 빌려 우리의 장군이 처음 이 땅으로 들어설 때의모습을 살펴보자. 그 기록에 따르면, 그때는 더위가 한창인 8월 중순인데도 장군은 소련식의 위엄을 뽐내느라 개털모자를 귀밑까지 내려쓰고 놋쇠단추가 줄줄이 달린 소련군 외투를 목깃까지 여미고 있었다고 한다. 또 여느 사람은 너무 더워 발걸음을 옮기기조차 힘이 드는데 그는 긴가죽 장화의 번쩍임과 밑창에 박힌 징소리를 드러내기 위해 보폭(步幅)이 평균 다섯 자는 되었다 한다. 거기다가 사람들만 보면 다와리시, 어쩌구하며 손을 번쩍번쩍 쳐드는 게 한낱 보조요원답지 않은 기세라 꼭 뭔 일을 낼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고 목격자들은 전한다. 하지만 그 좋던 기세도 닷새를 넘기지 못했다. 차량행군을 한껏 늦춰 회령쪽으로 들어온 지 닷새 만에 평양에 이른 소련군 사절단은 생각을 바꾸었다. 그 닷새 숙영때마다 올빼미처럼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수집한 첩보를 종합한 결과 혹시나, 했던 것은 역시나, 안될 일로 판단이 난 까닭이었다. 다시 말라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어떤 겨레인가. 그 바람에 맥이 빠진 소련군 사절단은 소득도 없는 길을 더 가고 싶지 않아 평양에서 서울로 어물쩍 경축메시지나 띄우고 제 땅으로 돌아가려 했다. 일본처럼 갈라먹기 하기가 틀린 바에야 구태여 찜통 같은 길을 시원치도 않은 자동차로 몇백 리나 더 가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그때 인솔자인 스티코프 준장 앞에 나선 게 꼬붕 몇을 거느린 우리의 <장군>이었다. 「단장동지, 너무 쉽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제가 보기엔 일본의 관서지방처럼 이 땅도 북쪽 절반쯤은 위대한 붉은 군대의 전리품이 될 수 있습니다.」 「틀렸소. 그동안 수집한 첩보를 종합하건대, 이곳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일본과 다르오. 첫째는 이 땅의 사람들인데, 아무리 보아도 일본인들처럼 제 땅을 동강내는 데 호락호락 따라줄 것 같지 않소. 공연히 건드렸다가 만주까지 내놓으라 덤비면 모택동 동지만 골치아프게 된단 말이오. 둘째는 점령의 구실이요. 일본이야 전쟁을 일으킨 죄가 있으니 우리[米蘇]가 분할점령해도 할말 없겠지만, 이 나라는 오히려 피해당사자가 아니요? 그런 이 나라를 무슨 구실로 분할한단 말이요?」 스티코프가 핀잔주듯 그렇게 대꾸했다. 하지만 장군은 단념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단장 동지. 나는 저들과 같은 피를 나눠받고 또 이 땅에 살아봐서 잘 압니다만 아무래도 이번 판단은 성급하신 것 같습니다. 첩보가 과장된 게 아닌지 모르갰습니다. 지금 저들은 겉보기에는 슬기로운 척 잘 뭉치는 척 하고 있지만 본성을 들여다보면 형편없습니다. 저들이 이민족의 지배에 떨어지는 경우를 보면 열에 아홉은 저희끼리 싸워 먼저 저항세력을 처치한 뒤 성문을 활짝 여는 형식입니다. 또 저들의 본성은 모래와 같아서 옛적에는 이 조그만 땅덩어리에 나라가 셋씩이나 서서 피투성이 싸움을 한 적도 있습니다. 이번에 요행히 일본을 물리쳤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천에 하나 있는 예외일 뿐입니다.」 우리의 장군이 우긴 내용은 대강 그랬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로 보면 그것은 스스로가 우리와 피를 달리하고 있음을 밝힌 꼴밖에 안된다. 이왕 피 얘기가 나왔으니 이쯤에서 한번 그의 혈통에 대해 따져보자. 나이든 어른들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김일성이란 우리식 성과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모양도 겉으로 봐서는 우리와 비슷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가계(家系)까지 제법 소상하게 대고 있어 자칫 우리와 같은 피를 가진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우리 피가 섞인 것은 인정할 수 있어도 순수한 우리 겨레는 아니라는 게 오늘날의 정설이다. 여러 가지 조사를 통해 확인된 바에 따르면, 첫째로 그와 우리의 피가 다른 점은 그의 염통에는 작은 용이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지작 황제께서 자결하시고 하늘에는 2천만 마리의 작은 용이 떨어졌을 때 우리는 모두 가슴으로 그 용을 한 마리씩 받았으나 어찌된 셈인지 그는 예외였다. 그의 염통에 짙게 괸 되(胡)피가 그 용이 살기에 적합하지 못했다는 말도 있고, 달리는 그 아비가 바로 되놈이라 에초부터 아들에게 물려줄 용을 가슴으로 받지 못했다는 말도 있다. 그 다음 그의 피가 우리와 같지 아니함을 드러내는 것은 평화전쟁 또는 제1차 수복전쟁이 실패한 뒤의 행적이다. 그는 장백산으로 들어가 북군(北軍)으로 싸우지도 않았고 이러더로 건너가 남군(南軍)의 대열에 들지도 않았다. 이 나라를 버리고 떠나 이 땅 저 땅을 헤매다가 소련군 외인부대에 편입돼 그날에 이른 것이었다. 무릇 환웅과 웅녀의 피를 이어받은 겨레라면 예외없이 밟은 길을 유독 그만 벗어난다는 게 그의 피가 우리와 다름을 증명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의 피에 대해 의심이 들게 하는 또다른 근거는 바로 그가 소련군 경축사절단장에게 했다는 말이다. 그가 우리와 같은 피를 가진 자라면 어찌 남 앞에서 우리 본성을 <모래와 같다>고 비하시키고, 우리 역사의 유년에 있었던 부끄러운 분열상(分裂狀)을 함부로 들출 것인가. 스티코프는 처음에는 영 장군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으나 장군이 자꾸 우겨대자 차츰 마음이 달라졌다. 첩보야 어떠하든 제가 나서서 한번 해보겠다는데 굳이 말릴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면 그만이요, 들키면 장난이라고, 절하면 소비에트는 코에 손 안대고, 코푸는 격이 되 한번 도박을 걸고 싶어졌다. 「좋소. 소좌 동무, 한번 해보시오. 하지만 우리에게 대단한 지원을 기대해선 안되오.」 마침내 스티코프는 그런 다짐과 함께 장군의 청을 들어주기에 이르렀다. 장군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지원은 별로 필요없습니다. 호위병 약간과 조선인 요원들만 제게 남겨주십시오. 그걸고 충분합 니다.」 우리를 얕보아도 한참 얕본 소리였는데, 그가 그렇게 된 이유에는 몇 가지 종류를 달리하는 설명이 있다. 그중 가장 볼품없는 것은 음주만취설(設)이다. 돌아가기로 작정하는 바람에 느슨해진 통제를 틈타 훔쳐마신 소련군 보드카에 너무 취해 헛소리를 한 거라는 주장인데 아무래도 믿음이 가지 않는 까닭은 때난 뒤에도 자신이 한 말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이 금촌(金村) 영향설이다. 일본에서 거두고 있는 눈부신 성공에 자극을 받았다는 것으로, 거기에는 어느 정도 귀기울일 만한 데가 있다. 소련군 극동사령부에 근무하면서 자신과 크게다른 처지가 아니던 촌이 저희 나라에 돌아가 비록 관서만의 반동아리지만 정권까지 장악하는 걸 그의 눈으로 보았으니 그같은 야심이 생길 법도 하다. 마지막은 혈통성(血統設)이다. 그것은 주로 분단에 대한 그의 무감각에 바탕한 것으로, 피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그는 앞장서서 이 땅을 동강내는 일을 자청할 수 있었다고 한다. 뚜렷이 결론지어진 바는 없어도 그 세 가지 중에 답 하나가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모두 합쳐져 그를 내몰랐다는 게 온당한 설명일 듯 싶다. 어쨌든 장군이 무슨 대병력을 요청하는 것도 아니라 스티코프는 그가 원하는 걸 좀 넉넉하게 들어주었다. 소련군 병사 열 명과 조선인 보조요원 일곱 명에다 트럭 한 대와 성능이 좋은 마리크까지 얹어준 것이었다. 그뒤 얼마간 평양을 중심으로 벌어진 <장군소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남쪽의 박사가 이 땅에 들어온 경위는 북의 장군과는 좀 다르다. 그가 미군 경축사절단과 함께온 건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거기 소속된 요원은 아니었다. 한 민간인으로서 미국의 의도를 알아차리자마자 재빨리 그것에 편승했을 뿐이었다. 그러면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목격자들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이승만이란 우리식 이름을 쓰고 있었고 옷차림이며 모습도 당시의 우리네 늙응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말이며 행동거지에 이르면 전혀 아니었다. 그의 혀는 이미 미국식으로 뒤틀려 우리말보다는 그쪽 말에 훨씬 익숙했고 손짓 발짓에서 걸음걸이까지도 우리네보다는 그 나라 사람과 비슷했다. 거기다가 눈알 푸른 그의 아내에 이르면 아무래도 그를 우리 중의 하나라 여기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가 언제 미국에 건너갔으며 얼마나 그 땅에 머룰렀는지 명확하게 알려진 바 없다. 짐작으로는 우리와 일본간에 25년전쟁이 벌어지기 얼마전의 어수선하던 때에 실속없이 양(洋)바람이 든 우리 젊은이 몇 명이 그리로 건너간 적이 있다는데 그도 그중의 한 사람인 듯싶다. 그리되면 그가 그 땅에 머문 것은 대강 40년이 넘어, 우리말을 하기에는 너무 심하게 꼬부라져버린 그의 혀나 눈알 푸른 그의 아내를 설명하기 어렵지 않다. 그가 어떻게 미군 태평양사령부의 경축사절단 파견과 그뒤에 숨겨진 워싱턴 당국의 의도를 알아차리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국무성의 잡역부로 알히다가 귀동냥한 것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조심성 모자라는 국방성 관리가 택시 안에 흘리고 간 서류봉투를 운좋게 주운 던분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그는 그 기막힌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국무성으로 달려가 그 무렵 신설된 극동국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두어번의 거절끝에 어렵사리 면담이 이루어지자 거창한 자기소개와 함께 말하였다. 「조선 사람 그렇게 쉽게 보아서는 아니됩네다. 당신네 코큰 사람들만 가서는 분할점령은커녕 일시 주둔도 어려울 겝네다. 나, 싱만 리를 앞세워야만 워싱턴 당국의 뜻이 이루어질 거라 이말입네다.」 극동국장은 물론 그 엉뚱한 동양 늙은이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떼를 쓰며 덤비는 게 싫어 신중하게 고려하겠노란 약속과 함께 돌려보내려 했다. 「나, 싱만 리 그렇게 간단한 사람 아닙네다. 워싱턴에 힘있는 친구들 많이 있어요. 그들을 통해 백악관을 바로 찾아 볼 수도 있어요. 이 제안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된다 이말입네다.」 박사는 함참이나 더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다가 그 말을 덧붙인 뒤에야 자리에거 일어났다. 하지만 때는 태평양전쟁이 막 승리로 끝난 참이라 국무성 극동과는 너무 바빴고, 박사 또한 매우 인상적인 사람이긴 해도 그 바쁜 극동국장이 그의 말까지 명심해줄 정도는 아니었다. 들을 때는 한번 검토해보리라 싶었으나 갑자기 긴박해진 중국문에제 휩쓸혀 깜박 잊고 말았다. 박사가 그 특유의 끈질김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그는 자신이 무시당했다 싶자 그 앙갚음과 아룰러 자신의 이른바 <힘있는 친구들>을 최대한 끌어냈다. 그가 한 앙갚음의 시작은 길고도 격렬한 투서였다. 그는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 하원의장을 비롯해 국무성 극동과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어보이는 부처의 장(長)들에게는 모조리 극동국장의 업무태만을 비난하는 글을 보냈다. 명의는 한결같이 있지도 않은 조선인 단체의 회장이나 의장으로 돼 있었는데 어쩌면 박사는 이미 그때부터 일본의 목자(木子) 박사 흉내를 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힘있는 친구들에 이르면 일본의 목자도 우리의 박사보다는 한수 아래다. 당시 우리 박사는 워싱턴 전역에 체인망을 가진 슈퍼마켓 주인과 백악관 이발사, 그리고 국무장관 부인 친정의 정원사를 친구로 삼고 있었다. 또 슈퍼마켓 주인은 지역구 하원의원을 비롯해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여럿 있었고 백악관 이발사는 매일 대통령의 얼굴을 매만질 뿐만 아니라 그 비서관과도 매우 낯익게 지냈으며, 국무장관 부인의 친정에서 수십 년째 일하고 있는 정원사는 무엇보다도 그부인을 통해 국무장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일이 되려면 뜨물에도 애가 생긴다는데 그렇게 힘있는 친구들이 모두 나섰으며 안될 게 무엇 있겠는가. 그러나 워싱턴 당국의 최종결정은 사실 박사의 투서나 그 <힘있는 친구들>의 조력보다는 소련 극동사령부의 사절단 파견 결정에 자극받은 것이란 설(設)도 있다. 어쨌든 박사가 우여곡절 끝에 미(米)태평양사령부의 경축사절단에 끼어 서울에 도착한 것은 북의 장군이 평양에 온 지 두 달뒤의 일이었다. 우리의 장군과 박사는 대강 그런 경위로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어느 곳에 왔다갔다고 해서 반드시 무슨 소문이 남는 것은 아니다. 오게 된 경위야 어떠했건 우리의 장군과 박사도 이 땅에서의 행적이 별게 없었다면 오늘날처럼 요란뻑적지근한 소문은 남기지 않았을 게다. 하지만 우리의 장군과 박사는 그렇지가 못했다. 애초에 먹고 온 마음이 따로 있으니 아무리 이 땅의 형편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더라도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순서가 그랬으니 이번에도 북쪽에 왔던 장군이 한 우스꽝스런 짓거리들부터 살펴보자. 당치도 않은 게 지도자로 나서려면 먼저 비틀고 끼워맞추기를 해야 되는 게 역사다. 우리의 장군도 그것만은 신통하게 알아, 먼저 그 짓부터 시작했다. 그가 한 줌도 안되는 졸개들을 시켜 맨처음 비튼 것은 우리의 25년 전쟁사였다. 장군의 졸개들은 소련군이 남겨주고 간 고성능 마이크를 들고 이 땅 북쪽 곳곳을 누비면서 우리의 처절한, 그리고 끝내는 영광스럽게 끝난 25년 전쟁사를 깡그리 부인하고 대신 어둡고 한심한 식민지사(植民地史)를 내밀었다. 곧 우리는 총 한방 쏴보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그뒤 36년이나 그들의 쓰라린 지배를 받았노란 조의 왜곡으로 오래전에 몇몇 한자(韓子=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혼혈아)들이 지어 퍼뜨린 적이 있는 못된 소문의 재탕이다. 차이가 있다면 새것이 옛것보다 좀더 세련되었다는 정도일까. 그들이 그런 짓을 한 까닭은 뻔하다. 우리에게는 다만 치욕스런 식민사만이 있어야 자기들 우두머리인 장군의 엉터리 신화가 끼어들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아마 거기서도 금촌(金村)이 일본에서 한 짓은 좋잖은 뜻으로 참고가 된 듯하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있지도 않은 우리 식민지사의 한 모퉁이에 끼어든 장군의 전설과 신화는 참으로 휘황찬란한 것이었다. 금촌처럼 책으로 묶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그리 되기만 했다면 우리 장군의 전기(傳記)만도 두터울 장정본으로 서른 권은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과 우리가 원래 비슷한 데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이번에도 장군이 일본의 금촌을 본보기로 삼아서인지 줄거리는 서로가 많이 닮아 있다. 중복을 피한다는 뜻에서, 여기서는 다만 그 차이만 잠깐 살펴보자. 우리의 장군과 일본의 금촌이 다른 점은 첫째로 그들이 맞서 싸운 상대이다. 금촌이 동족인 군부파쇼세력과 싸운 데 비해 우리의 장군은 이민족인 침략자와 싸웠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유격전은 둘 모두에게 공통되지만 그 전개양상은 우리의 장군쪽이 훨씬 진지하다. 무슨 봇도랑(洑) 전투에선가 우리의 장군은 일제(日帝)침략군 수만 명을 잡아 포를 떴다고 하는데, 같은 민족끼리면 아무리 나쁜 편에 선 군대라도 그렇게 잔인하게 다룬 걸 자랑하고 나서지는 못할 것이다. 그 다음 우리의 장군과 일본의 금촌이 다른 점은 소련군과의 관계다. 금촌은 일본 관동지방을 점령한 소련의 군정 아래서 비교적 쉽게 괴뢰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지만 우리의 장군은 그렇지가 못했다. 애초에 소련군이 우리 땅을 점령한 적이 없고, 더구나 군정(軍政) 같은 것은 생각조차 못한 터라 우리의 장군은 다만 몇 안되는 호위병과 그저 비슷한 혈통의 졸개들만 데리고 일을 꾸려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군정청의 도움 부분을 말로만 때우다보니 장군의 신화가 금촌보다 몇 배내 휘황찬란해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우리의 장군과 금촌의 차이점은 이념가·혁명가로서의 본질이다. 나중에 자체사상(自體思想)이란 걸 만들어 약간 개판을 치기는 해도 금촌을 어디까지나 공산주의자라 할 수 있었다. 소련군 내의 정훈(政訓) 수준이건 말건 그래도 금촌이 배우고 익힌 원리는 그 사상에 입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장군은 정규군에 편입되지 못하고 다만 정보 부소속 민간요원이었을 뿐이어서 그런 정훈교육조차 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를 잘 알고 지낸 적이 있는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장군은 아주 뒷날까지도 마르크스와 레닌과 엥겔스가 사돈이나 처남 남매간인 줄만 알았으며, 공산주의는 화투의 공산광을 최고로 여기는 사상쯤으로 알았다고 한다. 그 증언이야 믿을 수 없다쳐도, 그가 정말로 공산주의자라 할 수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는 게 우리 현대사가(現代史家)들 사이의 통설이다. 그러나 앞서 든 세 가지를 빼면 장군이 처음 이 땅에 들어와 벌인 행각은 일본의 금촌과 모든 면에서 너무도 닮아 있다. 어쩌면 요즈음 이 땅에 도는 그 고약한 소문이 일본의 현대사와 비슷해 보이는 것은 바로 우리의 장군과 일본의 금촌이 한 짓거리들이 닮아있어서인 것이다. 북의 장군이 되(胡)트기 졸개들을 시켜 깡깡이, 꽹과리에 때때 나팔까지 한창 신명나게 불어젖히고 있을 무렵 우리의 박사도 남쪽으로 들어와 일을 벌였다. 그러나 박사의 출발은 장군에 비해 훨씬 불운했다. 대단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장군은 소련군사절단의 지원을 받은 반면 박사는 미군사절단과의 불화 위에서 그 어림없는 장사를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박사와 미군사절단이 불화하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고 박사가 처음부터 그들과는 소속을 달리하는 사람이었다는 데 있었다. 태평양사령부 나름대로는 우리를 정탐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팀을 짜서 보냈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뒤늦게 난데없는 민간인 하나가 날아오니 아무리 워싱턴 당국을 업고 있다 해도 기분좋을 리가 없었다. 특히 정탐 결과에 따라서는 자신도 한반도 남쪽에서 맥아더가 일본에서 누리는 바와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빠져있던 사절단장 하지는 우리의 박사에게 은근히 경쟁심 이상의 적의까지 느꼈다. 박사의 성격적인 결함도 그들과의 불화를 깊게 하는 데는 한몫을 단단히 했다. 턱없는 오만과 고 집에다 이 땅과 우리에 대해서는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식의 독선이 바로 그것이었다. 박사는 마치 그 사절단이 처음부터 자신을 돕기 위해 파견된 특수부대인 것처럼 다루었고, 자신은 그 실상의 지휘자인 양 그들 위에 서려고 했다. 그전 몇 달 일본에서 승리의 단맛을 한껏 보고 온 미군사절단으로서는 서의 모욕감을 느낄 정도였다. 거기다가 하지가 본국에 남아 있는 지인(知人)을 통해 알아 결과도 우리의 박사에게는 그리 유리하지 못했다. 그 뒤에는 정가(政街)의 어떤 거물도 있는 것 같지 않다는 게 지인들의 한결같은 회신이었기 때문이다. 박사가 쥐뿔도 없으면서 껍죽대는 것이란 생각이 들자 하지는 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처음에는 박사의 말에 귀라도 기울이는 척하고 숙소도 단장실 곁에 잡아주던 사절단의 태도가 차츰 쌀쌀맞아지더니 급기야는 박사를 한쌈에 넣어주지도 않으려는 것으로 바뀌었다. 어지간하면 넉살로 버텨보려던 박사도 일이 그쯤 되자 더는 참지를 못했다. 어느 날 하지와 대판 싸우고 보따리를 싸 워싱턴으로 후루루 날아갔다. 하지를 비롯한 사절단은 제까짓 게 가봤자, 했지만 일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박사가 돌아간 지 열흘도 안돼 그들은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를 너무 깊이 믿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현대사학회의 연구는 비교적 자세하게 그때 워싱턴으로 돌아간 박사가 한 <활동>에 대한 추적을 해놓고 있다. 거기 따르면 박사는 먼저 슈퍼마켓 주인을 선술집으로 불러내 남의 일 얘기하듯 말했다. 「일 안되더군, 도둑질을 해도 손발이 맞아야 해먹지. 나는 자네들에게 적어도 뉴욕시의 세 배는 되는 시장을 만들어 주려고 애썼네마는 태평양사령부의 돌대가리들이 통 들어먹어야지.」 「엉, 그게 무슨 소리야? 태평양사령부의 돌대가리들이라니? 또 그들이 뭘 어쨌기에?」 시장이란 말에 귀가 번뻑 뜨인 장사꾼이 그렇게 물었다. 박사는 조금도 감정이 섞이지 않은 어조로 자신이 이 땅에서 당한 일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감정이 섞이지 않은 것은 어조뿐이었고 내용은 과장되기 짝이 없었다. 거기다가 이 땅 북쪽은 이미 소련이 차지해 소련장사꾼들이 슬슬 재미를 보기 시작하더란 말까지 슬쩍 보태자 아무것도 모르는 그 미국 장사꾼은 담박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냥 둬서는 안되겠군. 당장 매카시 의원을 만나야겠어. 하지 그놈부터 모가지를 때어놓아야지!」 그러면서 당장에 선술집 문을 박차고 나서려 했다. 박사가 그런 슈퍼마켓 주인을 잡아 위스키 한 잔을 더 권한 뒤에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 의원나리가 힘이 있는 건 알지만 너무 혈기로만 나서지 말게. 먼저 사람들을 모으라고, 사람들을. 자네처럼 새로운 시장에 관심이는 친구들을 말이야. 그들과 함께 몰려가 입에 거품을 물어야 겨우 들은 척이라도 할 걸세.」 그런 다음 지나가는 말처럼 슬며시 덧붙였다. 「친구끼리니까 하는 말이네만 만약 이번에 내가 갔던 일이 잘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한 번 생각해 보게. 내 뜻대로만 됐으면 비록 반동가리 땅에서지만 나는 대통령이 됐을 거네. 그러면 내가 나를 위해 애써준 자네를 잊을 수 있겠는가? 오랜 친구인 자네를……. 적어도 그 땅에서 슈퍼마켓 영업권은 자네 혼자서 몽땅 차지할 수 있었을 텐데.」 슬쩍 하는 말이지만 돈독이 오른 장사꾼 하나를 돌게 하기에는 충분한 제안이 감추어진 것이었 다. 그리고 그 말에 넘어간 슈퍼마켓 주인이 그날부터 물불 안가리고 뛰니 하원의원 한 사람을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덩달아 들떠 미국의 잘못된 극동정책을 성토하는 전국의 장사꾼들로 매일 백악관과 국무성 앞이 메어터질 판이었다. 박사가 백악관 이발사와 국무장관 처가의 정원사를 만나서 한 일도 대강은 슈퍼마켓 주인을 만났을 때와 비슷했다. 박사는 사절단의 비협조를 과장되게 말한 뒤에, 이발사에게는 이 땅 남쪽에서의 이발권을, 그리고 정원사에게는 조경사업(造景事業) 독점권을 넌즈시 약속하면서 도움을 청했다. 이에도 효과는 만점이었다. 후끈 단 이발사는 친구인 청소부며 잡역부들뿐만 아니라 어슷비슷 알고 지내는 비서관들이며 심지어는 대통령에게까지 이 땅으로 파견된 <돌대가리 군인들>을 헐뜯었다. 또 정원사는 정원사대로 국무장관 부인이 된 옛날의 아씨를 찾아가, 아무래도 장관께서는 극동정책의 시행과정에서 중대한 실책을 저지르고 계신 듯하다는 여론을 심각하게 전하며 태산 같은 걱정을 늘어놓았다.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대통령이나 국무장관은 짐작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어찌됐거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하찮은 일이라도 곁에 두고 부리는 사람이 게거품을 물고, 아녀자의 말이라도 매일 끼고 자는 아내가 베갯머리송사를 해대니 기억쯤은 하게 되었다. 그때쯤 해서 박사가 무슨 멋진 마감질처럼 펼친 게 이미 전에도 크게 효과를 본 적이 있은 투서작전이었다. 상대는 소련과의 긴장관계를 틈타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극우(極右)신문과 승진 쥐의 들뜬 분위기에 편승해 고양이 가죽만 보아도 호랑이 5백마리를 보았노라고 휘갈겨대는 노랑신문들이었다. 소련의 극동군사령부는 경축을 핑계로 사절단을 보내 한반도 북쪽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태평양사령부가 보낸 사절단은 무얼하고 있느냐. 이러다낙 북쪽뿐만 아니라 남쪽까지도 몽땅 소련에게 먹히고 말겠다. 그 땅의 명망 높은 망명정객을 앞세워 펼쳐보겠다면 대응전략은 어찌 되었느냐. 극우신문에 보내는 투서의 내용은 주로 그랬고, 한반고 남쪽을 겨냥하고 간 미국의 사절단은 단장부터 말단수행원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부패하고 타락했다. 그들은 그곳의 술과 미녀에 취해 미국의 국익을 깨끗이 잊어버렸다. 특히 그 단장 하지는 부패하고 타락한 데다 야심까지 이어, 그곳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매우 유리한 그곳 출신 망명정객을 돕기는커녕 방해하고 있다. 국무성의 공작금으로 예쁜 정부(情婦)를 일곱 명씩이나 둔 주제에……. 노랑신문에 가는 투서의 활자는 대강 그랬다. 이번에도 결과는 박사가 노린 것 이상으로 나왔다. 극우신문과 노랑신문이 그런 박사의 투서를 몇 배나 부풀리어 재미를 보자 점잖은 신문들도 그냥 있지 못했다. 외면하는 척하면서도 슬금슬금 그 기사들을 인용하자 이내 미국은 되먹잖은 극동정책과 그 선발대격인 사절단을 비난하는 여론으로 들끓었다. 본국(本國)이 그 모양이 나고 보면 이 땅에 와 있던 사절단에도 영향이 미칠 것은 뻔한 이치였다. 박사가 떠나자 앓던 이라도 빠진 듯이 시원해 하던 사절단은 채 열흘도 안돼 갑자 딱딱해지기 시작한 본국의 훈령(訓令)이 갈수록 경고조로 바뀌자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 경고가 소환과 처벌의 위협으로까지 발전하자 비로소 일이 심상찮음과 아울러 책상을 둘러엎고 떠난 박사를 떠올렸다. 이에 하지는 다시 본국의 지인들에게 박사의 행적을 알아보게 했다. 회답은 여전히 박사의 연줄이 대단찮음을 알리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자신에 차 있지는 못했다. 박사가 만난 사람이나 활동 형태가 워낙 남의 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어서 이전에 띄운 정보를 고집하고 있기도 해도 뭔가 꺼림직한 데는 있다는 어조들이었다. 하지로서는 적이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박사가 이 땅으로 되돌아온 것은 그런 하지의 불안이 한껏 부풀어 있을 때였다. 그 무렵 들어 구체적으로 박사의 이름을 들어가며 현지인 지도자와 협력관계를 소홀히 한 점을 꾸짖는 본국의 훈령이 부쩍 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떠날 때보다도 몇 배는 거만한 태도로 사절단 숙소를 찾아온 박사는 다시 이름깨나 들어본 듯한 본국의 상하의원 몇과 신문편집장 몇의 협력촉구서신을 디밀어 정치경험 없는 그 직업군인을 한 번 더 기죽인 뒤 말했다. 「워싱턴 친구들 걱정이 많습니다. 투르만씨도 이곳 일에 큰 관심을 가진 듯하고 내가 때마침 가지 않았더라면 장군은 아주 어렵게 됐을 뻔 했습네다. 더군다나 신문 만드는 친구들이 얼마나 극성인지.」 그렇게 시작해서 한동안 얼르고 달래다가 슬며기 자기 의지를 단장석 윗자리로 옮겨버렸다. 그러나 하지도 영 맹물은 아니었다. 미국이 태평양을 자기네 호수로 만들 작심을 하면서부터 벌이기 시작한 이 전장 저 전장을 떠돌아 다니며 주름이 는 그라, 눈치놀음이나 감잡기에도 기본은 있었다. 이 늙은 노랑 것이, 하고 울컥 속이 치밀었지만 꾹 눌러 참고 슬슬 보따리나 싸기 시작했다. 실은 그러잖아도 보따리를 싸려던 그들이었다. 그 몇 달 이 땅 남쪽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정탐해보았지만 그들의 결론 역시 소련 사절단과 마찬가지로 <별 가망없음>이란 것이었다. 그야말로 강철같이 단결하여 왜적에게 짓밟힌 삼천리 강토를 한치 한치 피로 물들이며 되찾은 우리가 아니던가. 그런 우리를 어정쩡한 이념으로 유혹하여 분열시키고, 그런 이 땅을 동강내어 한 토막을 어물쩡 삼켜보려던 사령부의 책상물림들이야말로 뭣도 모르고 탱자탱자, 하는 등신들임에 분명하였다. 하지는 박사와의 쓸데없는 신경전으로 정력을 낭비하는 법 없이 그같은 정보를 본국의 정책입안자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온힘을 쏟았다. 박사가 들쑤셔 일으킨 근거없는 여론에 휘말렸던 워싱턴 당국도 차츰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그리하여 장기체류로 공연한 경비만 나는 사절단의 철수가 결정된 날, 하지는 통쾌한 기분으로 그 사실을 박사에게 알렸다. 「박사, 다시 워싱턴으로 가서 힘있는 친구들을 좀 만나봐야겠소이다. 우리 사절단에게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소.」 그때 하지가 기대한 것은 박사의 우거지상이었다. 그런데 박사의 표정은 뜻밖에도 태평이었다. 「현명한 결정입네다. 이 땅에서의 일은 이 땅 사람들에게 맡겨야지요.」 끈 떨어진 조롱박 신세를 걱정하는 눈치는커녕, 오히려 잘됐다는 듯 그렇게 받았다. 거기다가 더욱 눈튀어 나올 일은 철수할 무렵 사절단에게 날아온 본국의 호령이었다. 「잔여분 공작금과 장비 일체는 싱만 리에게 인계하고 철수할 것.」 결국 박사를 가망없는 땅에 홀로 남겨 공탕을 먹이게 된 게 아니라 자기들만 오히려 그 박사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로 몰려 사령부로 불려가게 된 꼴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그 사이 경축사절단을 가장한 어릿한 그들보다 몇 배는 똑똑하고 쓸 말한 협조자들을 이 땅에서 찾아낸 박사가 몰래 손을 쓴 결과였다. 그러면 박사가 이 땅에서 찾아냈다는 그 협조자들은 누구였을까. 제1차 수복전쟁 또는 평화전쟁에거 실패한 우리가 잠시 이 땅을 떠난 적이 있다는 얘기는 이미 했다. 그때 우리는 모두 장백산 아니면 이어도(島)로 떠나 북군(北軍)아니면 남군(南軍)으로 섬나라 침략자들을 협공하게 되니만 그렇다고 이 땅이 그대로 비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한자(韓子)들은 피를 따라 기뻐하며 이 땅에 남았고, 되(胡)트기, 양(洋)트기도 그대로 남았다. 박사가 협조자고 찾아낸 것은 그들 중에서 바로 한자와 양트기였다. 한자와 양트기들이 박사 주위로 몰리는 데는 다 까닭이 있었다. 한자들은 이 땅에 남아 침략자인 일본인보다 더 몹쓸짓을 많이 한 죄가 있고, 양트기들은 박사 뒤에 미국이 있다는 데 강한 치의 이끌림을 받은 것이었다. 몇 달 늦기는 했지만 결국 박사도 북의 장군에 못지않은 졸개들을 이 땅 남쪽에서 얻은 셈이었다. 그뒤 몇 달 이 땅은 그들로 하여 남쪽과 북쪽이 아울러 소연하였다.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장군소동>과 서울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박사난리>가 그것이다. 지금까지 그랬으니 이번에도 장군소동부터 살펴보자. 장군의 신화가 여러 면에서 일본의 금촌(金村)을 흉내낸 것 같다는 얘기는 이미 했다. 하지만 원래 가짜가 더 번쩍거리고, 실속없는 것일수록 포장이 더 요란하다더니, 장군이 바로 그랬다. 뒤따라가는 자의 이점을 최대한으로 살혀 신화를 짓고 전설을 꾸며대니, 실상을 제쳐놓고 그 졸개들의 얘기만 들으면 <민족의 태양>이나<겨 레의 어버이> 정도로 끝날 게 아니라 <천지만물의 주재자>라 해도 오히려 모자랄 지경이었다. 거기에 따르면, 우리 삼천만이 이를 사려 물고 피를 뿜은 25년 전쟁의 영광은 모두 그의 것이었다. 그는 남북군(南北軍)이 이 땅 곳곳에서 치른 모든 전투의 선두에 있었으며, 탁월한 영도력 전략으로 항상 우리에게 빛나는 승리를 안겨주었다. 때로는 분신술(分身術)을 부려 같은 날같은 시작에 살수(薩水)싸움과 행주(幸州)싸움을 동시에 지휘하기도 했고, 때로는 도력(道力)으로 왜인들의 소굴인 동경(東京)에 지진과 불비[火雨]를 앵기기도 했다. 그동안에 얼마나 많은 침략군을 죽였는지 적어도 그 신화와 전설에 따르면 이 땅에서 장군의 탁월한 작전에 걸려 죽은 일본군만도 대일본제국의 육군을 다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 혁명가, 이념가로서의 장군도 눈부신 바 있다. 장군은 공산주의 철학의 완성자요, 투철한 실천가며, 마르크스의 진정한 전인(傳人)이었다. 당시 30대 중반에 지나지 않은 나이가 벌써 60년 전에 죽은 마르크스와 연결짓은 데 장애가 되었지만, 그 문제도 곧 어렵잖게 해결되었다. 무덤을 쪼개고 나온 마르크스의 삭다만 유골이 스탈린에게 잘못 전해져 있던 의발(衣鉢)을 빼앗아 우리의 장군에게 내렸다는 주장으로 글쎄, 말로 꾸며 안될 게 무엇 있겠는가. 처음 한동안은 장군의 졸개인 되(胡)트기들에게 뭔가가 될성부르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사실이건, 그들이 떠벌리고 다니는 얘기가 워낙 재미있어 적잖은 사람들이 귀기울여 주었고, 더러는 박수에 푼돈까지도 던져주었다. 그들이 하고 있는 게 개인의 우상화(偶像化)작업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사람들이 그들을 장터에서 얘기를 파는 전문 얘기꾼으로만 안 까닭이었다. 우리의 장군에게도 처음 한 몇 달은 신나는 세월이었다. 그가 나타나는 곳이면 어디든 사람이 수월찮게 모여들었고, 또 스스로도 불안하게 여기며 친 허풍까지 감탄하며 들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도 자신에게 유리하게만 한 오해였다. 사람들이 그에게로 끌어들인 것은 그가 빌려입은 소련군 좌관(佐官)군복과 파리가 앉다가 미끄러질 정도로 닦은 자죽장화 그리고 조금이라도 잘 보이게 위해 짙게 화장한 얼굴이었다. 그를 외국서 연기공부를 하고 돌아온 신파(新派)배우쯤으로 안 까닭인데, 아 그거야 요즘도 탤런트나 가수가 길거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는가. 그런데도 그 고약한 소문은 마치 북쪽의 <인민>들의 우리의 장군을 열렬히 환영하며 받아들인 것처럼 꾸며대고 있다. 역사의 희극적인 막간극(幕間劇)도 못되는 그 소동을 턱없이 부풀리어 우리를 욕되게 하는 헛소리를 지어내고 퍼뜨리는 자들에게 앙화 있을진저, 그것도 말이라고 듣고 전하는 헛똑똑이들에게도. 그 무렵 하여 남쪽에서 벌어진 <박사난리>도 그 대강의 줄거리는 북쪽의 <장군소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박사를 새주인으로 모셔들인 한자(韓子)와 양(洋)트기들은 박사보다고 그들 스스로를 위해 발벗고 나섰다. 25년쟁이 진행되는 동안 저지른 친일부역의 죄값을 물지 않기 위해서, 또는 미국이 들어오면 얻어걸리게 될지 모르는 핏줄의 이득을 위해· 그들 역시도 첫번째로 손댄 것은 역사였다. 그들은 자진해서 오히려 찬연한 우리의 25년 전쟁사를 깡그리 부인하고 그 자리에 답답하고 비굴한 식민지사를 갖다놓았다. 그리고 우리의 해방은 온전히 미소(米蘇)의 선물이란 어이없는 주장으로 밑자리를 깐 뒤, 따라서 그 두 강대국은 당연히 이 땅에 지분을 가졌다는 해괴한 논리도 넌즈시 웃기로 얹었다. 그때 우리는 막 길고 힘든 싸움을 끝낸 참이라 재미와 웃음에 굶주려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떠돌이 동포 하나가 눈알 푸른 아낙을 데리고 나타나 씨알도 먹히지 않는 수작을 해대니 성이 나기보다는 재미부터 났다. 거기다가 지난 전쟁동안 한 싸가지없는 짓거리들만으로도 끽소리 못하고 엎드려 있어야 할 한자와 양트기까지 그를 도와 할 소리 안할 소리 떠들어대자 남쪽 사람들은 아무 주저없이 웃을 준비로 들어갔다. 하도 터무니없는 수작들이라, 남쪽도 북쪽처럼 깜박 속은 것이었다. 곧 박사와 한자, 양트기들이 미안함이나 죄책감에 시달린 나머지 오랜 싸움에 지친 우리를 위해 산뜻한 코미디 한 프로를 준비하는 것쯤으로. 따지고 보면 그때가 박사에게는 좋은 때였다. 서투른 그의 우리말이 늙은 만담가(漫談家)의 사람 웃기기 위한 고안(考案)으로 오인되었건, 눈알 푸른 그의 아내가 삭막한 그 시대에는 좋은 구경거리가 되어서였건, 그가 나서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모여들었고 이야기도 제법 귀담아 들었다. 그런 박사 주위에 쇠파리떼처럼 모여 웅웅거리던 한자와 양트기들에게도 한동안은 괜찮은 세월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뒤집은 역사 비튼 논리도 재담(才談)의 한 방식으로만 알았고, 그런데도 그들이 제김에 신이 나서 입에 거품을 물면 이번에는 그걸 물건너 사람들이 말하는 그 블랙 코미디쯤으로 짐각했다. 따라서 그들만 나타나면 심심파적 삼아 모여들곤 했는데, 그들은 그걸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만 해석한 것이었다. 하지만 장난도 한두 번이고, 농담도 분수가 있지, 차츰 장군과 박사가 하는 소리가 우스개라 아니란 게 알려지자 형편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땅은 미소(米蘇)에 분할점령된 일본이 아니고, 우리는 싸가지 없는 일본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지금까지의 얘기순서와 맞아떨어진 것이지만 낭패도 먼저 본 것은 장군이었다. 장군이 되트기 졸개들과 함께 북녘을 휘젓고 다닌 지 한 석 달이 지나면서부터 사람들은 차츰 그들에게 냉담해지기 시작했다. 장군의 분장(扮裝)에 싫증이 나고, 그 졸개들의 헛소리도 더는 우습지 않아서였다. 그런데도 우리의 장군과 그 졸개들은 미련스런 오해와 어림없는 환상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점점 모여드는 사람이 줄어들고, 몇 안모인 사람마저 그들의 얘기를 빈정거리게 되도 그 가망없는 작업을 그치지 않았다. 일본의 금촌(金村)이 누리는 권력의 단맛을 잠시나마 구경한 게 그토록 사람을 깊이 돌게한 듯하다. 그러다가 참담한 끝장이 왔다. 결국 장군과 그 졸개들이 획책하는 것은 이 땅과 겨레의 분단이며, 그들이 전하여 하는 것은 인류역사상 가장 고약한 사이비 종교에 지나지 않음이 명백해지자 북녘 사람들은 더이상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야유하기 위해 장군과 그 졸개들 주위로 몰려들기도 하고, 때로는 돌팔매질까지 해 정신이 들게 해주기도 하다가, 드디어는 엄혹한 제재로 그 소동을 막내리게 했다. 닭똥으로 치약을 삼고 말오줌을 양칫물로 하여 거짓말한 입을 씻긴 뒤 개피[犬血]를 덮어씌워 장군을 국경 밖으로 내쫓고, 그를 따라다니던 되(胡)트기들은 물푸레나무 도리깨로 오뉴월 보리타작하듯 흠씬 두들긴 뒤 그런 쓸데없는 피가 더 퍼지는 걸 막기 위해 모두 불까기[去勢]를 해버린 것이었다. 남녘에서 박사가 당한 낭패도 북녘의 장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듣기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고, 아무리 심심파적 거리라도 여러 번 되풀이되면 싫증이 나기 마련이라, 박사네 패거리도 장사를 벌인 지 석 달이 넘으면서부터는 하마 이전 같지가 못했다. 그런데다 눈치는없으면서 고집은 쇠고집인 박사와 그 졸개들은 갈수록 더 열을 올리니 결과는 뻔했다. 남녘에서 북녘과 거의 비슷한 반응이 진행되다가 일은 드디어 막판에 이르렀다. 결국 박사와 그 패거리들 역시 꾀하는 것은 이 땅과 겨레의 분단이요, 퍼뜨리려는 것은 낡고 부패하고 타락한물건너의 미신이라는 게 모두에게 명백해졌다. 거리다가 어떤 섣부른 양(洋)트기가 이 땅을 미국의 쉰한번째 주(州)로 만들자고 한 주장이 사람들을 격분시켜 박사와 그 졸개들에게 마지막 날이왔다. 남녘 사람들은 박사를 소오줌으로 위세척을 시키고 잿물로 관장을 시켜 컴컴한 속을 씻긴 뒤, 조각배 한 척에 노 두 개를 주어 태평양에 띄웠다. 눈알 푸른 그 아내와 함께 미국까지 저어가게함이었는데, 그래도 석 달 양식은 실어주었다. 그렇지만 박사의 졸개들을 처리한 방식은 북녘과 많이 달랐다. 남녘의 한자와 양트기들은 워낙에 수가 많아 북녘처럼 불까기를 한다해도 뒤끝이 남을 듯해서였다. 그 바람에 남녘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그들을 이 땅 밖으로 추방하는 것이었다. 곧 한자(韓子)는 제 애비의 핏줄을 따라 일본으로 내쫓고, 양(洋)트기도 각기 그 핏줄을 따라 미국과 구라파로 내쫓은 것이었다. 그렇게―<장군소동>과 <박사난리>는 일단 끝이 났다. 아시아의 다른 지역이나 아프리카에서 하던 수작으로 이 땅과 겨레의 나누어 삼키려던 미국이나 소련의 <혹시나―>도 그걸로 뜨끔한 끝장을 보았다. 실제로 당시 그 두 나라의 원수(元首)였던 스탈린과 트루만의 회고록을 보면 한결같이 그때 그들이 직접 이 땅에 손을 대지 않고 장군과 박사를 내세운 데 대해 가슴을 쓸고 이는 듯한 구절들이 있다. 우리 시골말로 눈알이 빠져도 그만하기 다행이란 소리겠다. 장군과 박사의 뒷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소문이 이지만, 우리 현대사학회의 추적결과는 이렇다. 그때 이 땅에서 쫓겨난 장군은 소련군 정보요원으로 복직했다가, 나중에는 외인부대(外人部隊)로 옮겨 대좌(大佐)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있지도 않은 항일유격전 경력을 너무 자랑하다가 소련군 월맹지원단으로 파견돼 20년 전 하노이폭력때 전사했다고 한다. 한편 간신히 태평양을 건너간 박사는 미국 정부의 배려로 어떤 시골 대학의 교수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워낙 실력이 모자라 학생들에게 쫓겨난 뒤 로스앤젤레스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다가, 역시 20년 전쯤 여든 몇의 나이로 늙어 죽었다는 게 우리 현대사 학회의 추적결과다. 전에도 이미 말했지만, 역사에 가정(假定)은 당치 않다. 그러나 워낙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이라, 한번쯤은 장군과 박사의 뜻대로 됐을 때의 이 땅과 우리를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되겠다. 만약 그때 우리가 겨레간의 뜨거운 정과 슬기로 그 두 사람을 여지없이 거절하지 않았더라면, 이 땅은 어김없이 일본처럼 체제를 달리 하는 두 개의 나라로 분단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늘 우리의 행복은 어림도 없다. 그 두 체제는 나뉘어진 우리를 주도권 다툼으로 더욱 이간시켜 서로에 대한 증오를 부추겼을 것이다. 거리다가 그럴듯한 이데올로기에 경망하게 들뜬 사람들이 나타나 촐싹거리면 저 일본처럼 동족상잔은 필연적이다. 언제부터 공산이고 언제부터 민주라고 애비와 자식이 돌아서고, 형제가 서로 눈흘기며, 이웃이 이웃의 가슴에 죽창을 찔러넣는 판세가 나면, 그 피로 분단은 더욱 고착될 것이며, 그렇게 나뉘어진 겨레는 적어도 몇십 년 피를 달리하고 말을 달리하는 세계의 어떤 족속보다 더 멀고 미운 적이 될 것이다. 일본의 관동정권과 관서정권이 그러하듯 나뉘어진 겨레 사이의 그 허무맹랑한 증오와 의구심을 악용한 권력이 양쪽을 각기 지배하며 온갖 횡포를 저지를 것이고―아아, 그리하여 일본의 현대사가 겪고 있는 참혹한 불행은 그대로 우리에게서도 되풀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일본이 요즈음 들어 겪고 있는 통일 문제를 중심한 갈등은 가정(假定) 속에서조차 섬뜩하다. 아무리 남의 나라 일이라도 지나쳐보기 애처로울 뿐 아니라 잘못된 본보기로 유용한 만큼 지루하더라도 여기서 한번쯤 더듬어보자. 지금 우리의 행복을 다시 확인하고, 그 방어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라도. 읽고 들어 아시는 분이야 다 아시겠지만, 그래도 잘 모르시는 분을 위해 설명조가 되더라도 용서하시기를. 원래 일본에서의 통일이란 관동·관서정권 모두에게 심심하면 불러보는 좀 심각한 노래 같은 것이었다. 죄없이 백성 겁주거나 얼뺄 일이 있으면 서로 써먹는 동침(東侵) 서침(西侵)이란 말처럼, 자기 <인민>이나 <국민> 다독거리거나 감탄시킬 필요가 생기면 금촌도 목자와 그 후계자들도 어김없이 통일을 내세웠다. 하지만 요즈음 일본열도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통일 논의는 그전과는 약간 질을 달리한다. 전에는 관동·관서정권 모두가 자신의 필요게 따라 써먹느라 한편이 떠벌리면 한쪽은 짐짓 귀를 막는 식의 일방통행이었는데 최근에 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관동과 관서의 정권 모두에게 그 통일이란 카드가 절실하게 필요해진 까닭이었다. 관서정권(關西政權)에게 통일이란 카드가 필요해진 까닭은 무엇보다도 금촌(金村)의 장기집권과 관계있는 듯하다. 금촌은 태평양전쟁이 끝난 그해부터 45년이 다 돼가는 오늘까지 계속하여 관서지방을 다스려왔는데, 요즈음은 그것도 모자라 그의 아들 직월(直月)에게 다시 그 절대권력을 승계시키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라고 한다. 요즈음 관서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대를 이어 충성하자>란 현수막이 바로 그런 움직임을 보여주는 뚜렷한 예가 된다. 하지만 아무리 어수룩한 관서인민들이라 해도 그런 중세적 수작에는 말들이 없을 수 없고, 그래서 금촌에게도 비상한 카드가 필요했다. 통일은 그런 금촌이 내밀 수 있는 카드 중 가장 끗발이 높은 것이 될 것이다. 물론 금촌이 그동안 써먹은 카드는 그외에도 여럿 있다. 위기의식의 조장, 전인민의 조직화, 자체사상, 효(孝)개념의 정치화 따위가 그 중요한 목표이다. 위기의식의 조장은 주로 <일본전쟁>으로 알려진 동서전쟁(東西戰爭) 뒤 한 20년간은 아주 유용하게 써먹은 카드였다. 중소(中蘇)의 지원을 받은 관서정권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그 전쟁은 한때 금촌의 야망대로 되는가도 싶었다. 그러나 UN군을 앞세운 미국의 개입으로 좋다만 꼴이 됐는데, 그때 관서정권은 정말로 호된 맛을 봤다. 미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수도격인 경도(京都)에는 성한 집이 꼭 두 집 남았을 정도였다. 결국 전쟁은 우여곡절 끝에 휴전으로 막을 내렸지만 금촌은 그 뒤로도 20년은 족히 미제국주의자의 침략을 내세워 관서의 인민을 옴쭉달싹할 수 없게 휘어잡을 수 있었다. 전인민의 조직화도 시작은 <일본전쟁>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일종의 동원체계로 시작된 인민의 조직화는 곧 정치적인 통제수단으로 전환되었다. 오가작통(五家作統)이니 뭐니, 해서, 아시아의 전제국가들이 그 폭압의 절정기에 일쑤 써먹던 수법을 상기해보면 뭔가 짚이는 게 있을 것이다. 자체사상(自體思想)에 대해서는 앞서도 잠깐 소개한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간단한 외양소개에 지나기 않았던 만큼, 이번에는 그 내면적 구조를 살펴보자. 뭐니뭐니 해도 그 사상이 강조하고 있는 것을 두어 마디로 뭉뚱그리면 그것은 민족과 주체성쯤이 될 것이다. 민족과 주체성, 듣기만 해도 얼마나 신나고 그럴 듯한 말인가. 더구나 방금도 외세에 의해 동서로 분단되어 있는 일사람들에게는 그보다 더 절실하고 매력적으로 들리는 말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그 배경을 살펴보면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세계의 주변국가들에게서 되풀이 나타나는 통지의 양태를 크게 이분(二分)하면 군사주의와 문민주의(文民主義)가 될 것이다. 또 문화의 양태는 전통적 문화에 집착하는 문화적 국수주의와 문화의 비교우위(比較優位)를 인정하는 세계주의로 대분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군사주의 통치는 효율성과 보상의 원리에 기초하며 통치자에게는 종종 말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오지만 일반 민중들에게는 경원되는 경향이 있다. 거기 비해 문민주의 통치는 정통성과 합법성의 원리에 기초하며 일쑤 노정되는 비능률성과 무질서로 권력핵심에 골머리를 앓게는 해도, 일반민중들에게는 민주(民主)와 동의어처럼 여거지는 경우가 많다. 문화적 국수주의와 세계주의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문화적 국수주의는 민족주의와 주체사상이란 매혹적인 외양을 갖추지만, 종종 거기에는 문화의 정체나 퇴영이란 역기능의 그늘이 있다. 거기 비해 세계주의는 진보와 발전이란 현란한 구호에도 불구하고 문화의 비교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주변국가에서는 일쑤 사대주의(事大主義) 양태를 띤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러한 통치형태와 문화형태의 결합방식이다. 적어도 역사를 통해서 되풀이 확인할 수 있는 그 결합방식은 군사주의 통치와 문화적 국수주의, 문민주의 통치와 문화 세계주의이다. 우리의 역사에 있어서도 당시의 핵심인 대륙세력에 대해 가장 저항적이며 민족자주를 내세운 정권을 어김없이 군사주의 정권으로 그 대표적인 예는 고려의 최씨정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비해 문화적 세계주의는 왕조(王朝)가 문민화(文民化)한 후의 정권 아래서 이른바 사대주의(事大主義)란 모습으로 나타난다. 군벌 출신인 개국태조(開國太祖)의 군사주의 통치가 문민정치로 전환되는 고려의 광종(光宗) 이후, 그리고 근세조선의 세종 이후에 나타나는 문화형태는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만약 이러한 관찰이 일리 있는 것이라면 금촌의 자체사상(自體思想)은 그 통치형태에 따른 필연의 선택이 된다. 금촌의 관서정권이 세계에서 그 유례를 보기 어려운 군사주의 통치형태란 것에 대해서는 오늘날 부인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곧 금촌의 자체사상은 그의 개인적인 신념이나 경향과 무관하게 선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과 주체성이란 말이 가지는 위력은 대단해서 금촌의 자체사상은 관서의 <인민>들뿐만 아니라, 관동의 <국민>들에게도 적잖은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다. 방금도 관동의 진보주의 대학생 일부에게는 그 자체사상이 무슨 신주단지처럼 모셔지고 있다는 얘기는 이미 했던가. 그렇지만 현대 세계사에도 유례가 드문 장기집권과 대만의 장대석 외에는 그리 성공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부자세습(父子世襲)을 위해 금촌(金村)이 고안한 것 중에 가장 절묘한 것은 효(孝)개념의 정치화가 될 것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일본의 관서인민들은 금촌을 <어버이 두령 동지>로 부르도록 교육받아 와서, 요즈음은 그게 공식명칭을 넘는 고유명사가 되어 있다고 한다. 사람을 존경해 붙이는 호칭은 수천 수백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금촌이 유독 어버이란 호칭을 가장 앞세운 것은 무슨 까닭인가. 권력의 유지를 위한 고안(考案) 중에서 가장 흔해빠진 것은 권력자 개인의 카리스마화(化)이다. 지도자의 무오류성(無誤謬性), 완전성을 골자로 하는 그 조직적인 프로파간다는 세계 여러 곳에서 권력의 장기화(長期化)에 아주 효율적인 기능을 수행해 왔다. 그런데 그보다 한 수 위인 것이 일찍이 아시아의 전제왕조들이 고안해낸 효(孝)의 정치화이다. 그들은 군부(君父)라 하여 정치정인 지도자에 어버이의 의미를 더하고, 그 신민(臣民)의 아이적부터 충효(忠孝)를 가르쳐 두 존재의 동일성을 고정관념으로 키워나가게 했다. 카리스마는그 무오류성과 완전성에 대한 존경과 신뢰 위에 존재하지만 어버이 개념은 그런 선선조차도 필요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굴복의 강요이다. 설령 오류가 있다한들 어버이를 어쩔 것인가. 설령 완전하지 않다한들 어버이를 어쩔 것인가. 그 바람에 세살먹은 어린 아이도 한 번 왕관을 쓰면 절대적인 복종의 대상으로 충성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인데 금촌(金村)에게 필요했던 것은 바로 그런 피지배계층의 멘탈리티였다. 하지만 금과 그 추종세력의 고안이 아무리 정교한 것이라 해도 요즈음―20세기도 다해가는 대명천지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들볶아도 40년이 넘다보니 전쟁걱정은 시들해지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 가는 데고 여행허가서를 얻어야 하는 조직화 또한 세월이 길어지다 보면 신물이 나기 마련이다. 자체사상이 그럴 듯하다 하나 손에 쥐어주는 게 없고, 어버이 놀음도 이미 수천 년 당해온 사기라 곧 수상쩍어질 판이다. 거기다가 자급자족이 자립경제니 하는 자(自)짜항렬 구호만 너무 찾다보니 한동안은 관동(關東)보다 잘 나가던 경제에도 한계가 왔다. 국제화다 첨단화다 다국적기업이다 해서 세계가 두루뭉수리로 돌아가는 판에 쌀 서너 섬 윗목에 놓아두고 내 배 다칠라 하며 문닫아 걸고 앉았기도 하루이틀이었다. 뒤늦게 개방이다 외국자본이다 법석을 떨어본들, 쌀 빨리 먹자고 더디게 자라는 벼이삭 잡아뽑을 수야 없지 않은가. 이래저래 앞수 몰리고 뒷수 막히니 기중 낫다 싶어 내민 게 통일이란 카드였다. 잘되면 연방제네, 어쩌네 하며 관동(關東) 것들까지 호려 전 일본을 적화하는 수도 나고 못돼도 벌써 못견뎌 들을 비비꼬고 있는 관서의 <인민>들 얼이라도 한동안 빼놓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관동정권에게는 왜 통일놀음이 필요했을까. 관동정권의 담당자들이 요근래에 와서 부쩍 통일놀음에 열을 올리게 된 것도 냉정히 따져보면 관서(關西)의 금촌에 못지않게 절실한 이유가 있다. 다 알다시피 관동정권의 수립은 목자(木子) 박사의 주도 아래 이뤄졌건만, 그뒤 40년 동안의 우여곡절은 관서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복잡다단하다. 금촌과는 달리 목자의 집권은 겨우 12년만에 끝나고 번갈아 정권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은 조금씩 달리해도, 필요할 때마다 통일놀음을 벌인데 있어서는 목자 이후의 다섯정권에 공통된 형상이다. 우선 목자의 통일은 시종일관 멸공(滅共) 서진(西進)통일로서, 오늘날만은 일본학(日本學)의 권위자들이 설명하는 바로는 진정한 통일보다는 분단의 고착화에 더 큰 뜻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때는 대(對)국민 충격요법의 한 방식으로, 어떤 때는 대(對)미국 공갈용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통일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그래도 관동에서의 통일논의가 제대로 모양을 갖췄던 것은 목자(木子)의 망명 뒤 수립된 제2기정권 초기였다. 목자의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데 앞장섰던 학생층의 주도로 이루어진 통일논의로 다분이 충동적이고 감상적인 데가 있었지만, 그 진정성으로 보아서는 분명히 한 단계 발전한 논의였다. 하지만 그 논의는 당시의 집권층과 무관하게 이루어진 데 한계가 있었다. 정권을 잡는데 많은 빚은 진 학생계층의 주장이라 맞대놓고 반대는 못해도 이제 막 관동이라는 밥상을 받아든 격인 집권층으로서는 떨떠름하고 껄끄럽기 그리없는 메뉴가 끼어든 셈이었다. 그래서 울도웃도 못하고 허둥대는 사이에 논의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갔고 마침내 사회분위기는 관동의 극우 보수세력에게 생존권이 위협당하는 위기상황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 필연의 결과가 관동의 제3기 정권인 목정(木正)군부정권이었다. 쿠테타로 제2기 정권을 수립 1년 만에 전복한 목정(木正) 장군은 극우세력 지지 아래 관동에 새로운 정권을 세웠는데, 통일논의가 가장 소극적인 것은 아마도 그의 치세(治世) 전반(前半)에 해당되는 제3기 정권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때까지 일었던 여러 통일논의를 이적(利敵) 행위로 간주해 단호히 처벌했고, 관제(官製)를 제공하는 데도 아주 인색했다. 그러나 세월도 상황도 변화하기 마련, 끝내는 목정(木正)정권에게도 통일놀음이 필요해질 때가 았다. 10년이나 장기집권하던 목정이 집권연장을 위해 <제2유신>을 외치면서 뭔가를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흔히 유신정권으로 더 잘 불리는 관동의 제4기 정권은 어떤 의미에서 출발부터가 통일놀음에 의지하고 있디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서력(西曆) 1970년대 초의 어느날 대일본 국민들은 관동정권 비밀정보국장의 갑작스런 담화에 경악의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용인즉, 그때까지만 해도 국민들은 같은 해를 이고 살 수 없는 적으로만 알았던 관서정권의 수도격인 경도(京都)를 다른 사람도 아닌 비밀정보국장 그 자신도 다녀왔다는 것이며, 또한 관서정권쪽에서도 둘째 두령격인 부수상이 동경(東京)을 방문해 관동정권의 수뇌들을 만나고 갔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그 왕래에서 그때껏 범죄와 동일시되었던 통일이 진지하게 논의되었으며, 결과로는 상호 비방금지, 전쟁포기 등이 쌍방에 의해 합의를 보았다고 했다. 당연히 동서(東西) 일본의 국민들은 경악에서 깨어나자 마자 기쁨과 흥분으로 들떴다. 그때 일본에는 대략 천만이 넘는 동서 이산가족이 있었고, 그게 아니라도 그 불행한 민족이 기뻐하고 흥분할 이유는 수백 가지가 넘었다. 민족의 이질화(異質化), 산업의 파행적 발전, 국토의 기형적 개발, 외세의 침탈 따위 동서 일본이 함께 앓아온 고통들이 모두 그 분단에서 비롯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몇 달은 금방 뭐가 될 것처럼 왁작거리는 동안에 흘러갔다. 하지만 어차피 깨어지게 되더있는 환상의 세월이었다. 순진하게도 동서 양쪽 스피커가 하는 말을 믿고 휴전선을 무시하려 했던 어느 청년이 뒤통수에 아카보 소총과 카빈 소총을 동시에 맞고 나자빠진 사건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듯이 관동·관서의 합의는 똑같이 <진의(眞意) 아닌 의사표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비밀회담이나 막후협상이 그러하듯, 이번에도 어느 쪽이 먼저 그 모양새 나던 합의를 어기기 시작했는지는 뚜렷이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미뤄보아 먼저 화를 내고 테이블을 박한 것은 관서정권쪽인 듯하다. 적어도 그 통일놀음은 그들이 필요해서 시작된 게 아닌 데다 시간이 갈수록 관동정권의 속셈이 수상쩍어졌기 때문이다. 그들 또한 속셈은 따로 두고 혹시나 해서 관동정권이 마련한 테이블에 앉았으나, 결과는 역시나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관동정권이 자기들을 이용하려는 기색마저 보이니 화가 날 것은 뻔한 이치였다. 하지만 관동정권이 기다린 게 바로 그거였다. 화난 김에 지른 관서정권의 몇 마디 거친 소리를동침(동침)의 구체적인 조짐으로 몇 배나 뻥튀기해 관동의 허파에 바람든 국민들을 후려댄 뒤 벼락같이 내민 게 이름하여 <제2유신>이다. 백 년 전 저희 조상이 막부(幕府)를 타도하고 천황을 옹립한 것처럼 자기들도 조국의 위기에 즈음해 비상한 결단을 내린 것이라지만 모든 게 실은 각본대로였다. 그때의 통일놀음에 삼선(三選)개헌으로도 모자란 목정(木正)정권의 한판 잘해먹은 사기극이란 건 오늘날 관동의 어린 학생들조차 다 안다. 그뒤 목정은 불만을 품은 부하장군에게 살해될 때까지 두번 다시 통일문제를 힘주의 말한 적이 없었다. 목정에 이은 관동의 제5기 정권에서도 통일은 심심찮게 국정연설이나 담화문의 메뉴로 쓰였다. 이렇다할 준비도 없고, 모의과정도 충분하지 않은 채 정권을 인수받아 내외고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은 게 제5기 정권이었지만, 적어도 통일놀음만은 염치없게 써먹지 않았다는 게 그 정권에 대한관동사람들의 기억인 듯하다. 그 다음에 이제 우리에게 가장 흥미로운 관동의 현정권이 벌이는 통일놀음이다. 이직도 많은 것이 진행중이라 함부로 잘라말할 수는 없지만, 제6기 정권에 해당되는 현(現)관동정권의 통일논의도 여러 번 당해본 뒤끝인 관동사람들에게는 곧이곧대로 믿기지 않는 듯하다. 특히 관동의 재야인사들은 그것이 군부출신인 현정권 수반의 정치적 컴플렉스가 짜낸 낡은 묘수(妙手)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이미 역사에 편입된 앞서의 여러 정권들과는 달리 제6기 정권은 현재 관동을 장악하고 있는 정권이고, 그들의 정권 출범 벽두에 대형 형수막처럼 내건 통일도 아직은 지속적인 추구를 다짐하고 있는 한 나라의 정책인 만큼 그게 지금껏 해온 놀음의 하나라거나 아니라거나에 대해서는 막말을 삼가자. 이웃나라의 현정권에 대한 예의로도 그렇고, 아직은 끝장이 나지 않고 진행중이란 점에서도 그렇다. 그 어느 쪽이든 지금 관동지방을 휩쓸고 있는 갈등과 혼란을 보는 우리의 눈길에서 연민과 동정이 지워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도. 작년 이맘때쯤인가. 관동의 현정권 수반이 통일을 지향한 일곱가지 조항을 발표했을 때, 솔직히 우리도 약간은 흥분되었다. 아무리 이웃나라의 일이지만, 너무도 그림 같은 조항들이었기 때문이다. 관동이 이렇게 자랐는가―일본의 현실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까지도 그렇게 감탄의 말을 쏟을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그런 느낌을 받게 된 데는 적지않은 근거도 있다. 사실 요근래 몇 년 관동의 발전은 외국인인 우리가 보기에도 놀라운 것이었다. 군부독재정권의 보상적(補償的) 특성에 기인했던 3,4,5기 정권 아래서의 관동경제는 눈부신 성장을 했다. 매판자본 시비도 일고 외채문제로 시끄러운 적도 있지만, 부존자원도 자본도 기술축적도 모두 시원찮은 상태에서 관동의 경제는 20년 내리 두 자리수의 경제성장지수(指數)를 유지했고, 숫자놀음이건 뭐건 GNP도 아시아에서는 우리 다음가는 고소득으로 올라섰다. 거기다가 88년에는 동경에서 터억 올림픽까지 치러냈으나 우리가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튼 관동정권의 그 같은 제의가 있지 관서정권도 노상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렇잖아도 지금쯤은 통일놀음을 제대로 한판 벌여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있는데, 관동정권이 때맞춰 건드려준 것이었다. 이에 관서정권은 자기들의 다급함을 눈치채이지 않으려 딴전으로 뜸을 들이는 한편 그들의 오래고 경험많은 대동적화(對東赤化) 전략을 동시에 발동시켰다. 그 첫 솜씨가 관동의 사회단체 대표에 대한 초청장 발송이었다. 외신(外信)에 따르면 금년 초 금촌(金村)은 현(現)관동정권의 원수(元首)를 비롯해 3개 야당당수, 2개 재야단체 대표, 그리고 2개 종교단체 대표에게 통일문제를 의논하자는 명목으로 초청장을 띄웠다고 한다. 얼핏보면 작년에 있었던 관동정권의 제안에 응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적잖은 노림수가 감춰진 대응이었다. 정권수립 이후 40년이 넘도록 금촌의 절대권력 아래 단일체제를 유지해온 관서정권이 비해, 미국식 민주주의를 도입한 관동정권은 애초부터 정치력의 결집에는 불리한 체제였다. 미국식 민주주의란 게 원래가 다원화(多元化)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데다 정통성을 의심받는 정권이 40년에 여섯 번이나 뒤바뀌는 동안에 분열과 대립은 더욱 격렬해져 관동에는 공공연히 정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사회단체가 줄을 잇는 판이었다. 거기다가 최근 20년의 군부정권은 감옥에 다녀온 게 훈장으로 여겨질 만큼 반정부세력에 정당성을 부여했고 소홀했던 분배정책은 경제의 외형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기층민(基層民)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반체제단체가 의지할 수 있는 언덕을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금촌이 초청장을 보낸 것은 바로 그런 단체의 대표들이었다. 보수적이라 욕을 먹건 말건 야당은 본질적으로 현정권과 권력장악을 경쟁하는 만큼 금촌이 기대할 여지가 있게 마련이다. 금촌이 그 대표를 초청한 사회단체도 관동의 현정권을 타도할 수 만 다면 누구하고도 손잡을 각오가 돼 있는 반정부단체이고 얼른 보아서는 구색을 맞춘 것에 지나지 않아보여도 종교단체 또한 마찬가지로 그 갗은 고려에서 선택되어 있었다. 금촌이 초청장을 보낸 것은 기독교의 구교와 신교 지도자들로 구교야 <교회는 하나>라는 원칙 에 묶여있어 대표가 저절로 추기경으로 결정나기만 신교는 중구난방이라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금촌이 고른 것은 가장 관동정권에 감정이 많은 단체였다. 거디다가 그런 금촌의 선택을 더욱 잘 드러내는 게 관동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믿고 있는 불교지도자를 초청대상에서 뺀 것이었 다. 호국불교의 전통에다 그 은둔적 성격으로 현실참여에는 소극적인 불교에는 별볼일이 없다는 뜻이겠다. 어쨌든 그런 초청인사들이 경도(京都)에 모여 관서쪽 관제(官製)단체 대표자들과 연석으로 통일문제를 의논한다고 상상해보라. 방 안마다 관서쪽의 우세요, 투표마다 금촌의 뜻대로 결정난 것을 불을 보듯 뻔하다. 더군다나 관동정권의 원수가 밸 없이 그 연석회의에 참가했다고 해보자. 그때 그는 관동을 대표하는 8명 중의 하나가 될 뿐이 아니겠는가. 금촌의 그 같은 초청장에 대해 관동정권은 당연히 발끈했다. 그 결과가 신경질적인 반박성명과 아울러 관서정권과의 개별적 접촉을 금지하는 반공법(反共法) 폐지의 보류였다. 일부에서는 관동정권의 그같은 대응을 일관성이 없느니 어쩌느니 하지만 냉정히 살펴보면 관서고 관동이고 그 나물에 그밥이다. 진정이라고는 개미 뭐만큼도 안담긴 통일이란 빈깡통을 심뽀 컴컴한 놈과 속 엉큼한 놈이 들고 부딪치니 소리가 어찌 요란하지 않겠는가―라는 어떤 독설가(毒舌家)의 촌평도 한번쯤은 귀담아 들어볼만하다. 그런데 소동이 처음 일어난 것은 그런 싹수 노란 주구받기가 오간 지 한 달도 안돼서였다. 일민맹(日民盟=일본민족주의연맹)인가 뭔가 하는 단체가 먼저 금촌의 초청에 응하겠다고 나선 일이었다. 어버이 수령동지께서 오라시는데 아니 가고 어쩌리오―하는 식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군부독재잔당>인 제6기 <물정권>이 끼워맞춘 것보다도 훨씬 볼 만한 통일방안이 관서와 금촌에게 있다고 믿은 것만은 틀림없었던 듯했다. 그들이 뭍길로 경도(京都)를 향해 떠나리라 발표하자 관동지방은 적잖게 술렁거렸다. 아이들은 구경거리에 신나하고, 못가진 어른들은 빈주머니 만지며 헛꿈도 꾸어보고, 가진 어른들은 자다가 가위눌리고, 정부는 이미 해놓은 소리때문에 오히려 더 약이 올라 이리저리 왁작왁작 시끌시끌했다. 하지만 결국 갈 수는 없는 길이었다. 아무래도 그냥 보낼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 관동정권이 경찰을 풀어 길목을 막으니 일민맹(日民盟) 간부들은 동서 경계선인 각문관(角門館)까지도 못가보고 버스째 붙잡혀 되돌아왔다. 옳고 그름이 어디에 있건, 이웃나라 서생(書生)이 보기에는 쓸쓸하기 그지없는 희비극이었다. 세상에 순수와 아름다움과 정의만으로 찬 사람이 있다더냐. 세상에 탐욕과 잔인성과 권력욕만으로 뭉쳐진 인간이 있다더냐. 인간이 그렇게 양분되어 태어나지 않는 바에야 칼로 베듯하는 시비의 구별은 의미도 없거니와 옳지도 않다. 다만 그들은 보고 다시 한번 가슴쓸며 확인하는 것은 분단되지 않은 나라에서 그런 소동안보고 살아가는 우리의 행복일 뿐이었다. 통일논의와 관계해 관동에서 두번째로 벌어진 소동은 문사(文士)들에 의한 것이었다. 금촌으로부터 초청받지는 못했지만 이번에는 문인들이 통일의 선봉을 자임(自任)하고 경도(京都)로 가보겠다고 떼지어 나섰다. 관서문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통일의 물꼬를 트겠다는 주장이었다. 이 자리에서 다 말할 수 없지만 요즈음 세계에서 가장 활기찬게 관동문인들이란 말이 이다. 20년의 군부정권에다 분배의 불평등 핵(核), 공해(公害) 따위 세계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모든 문제가 그 좁은 땅에 다 몰려있어, 이놈 치고 저놈 나무래다 보니 하루가 마흔여덟 시간이라도 모자란다는 얘기였다. 거기다가 더욱 신나는 것은 정치판과 문학판의 판세가 정반대로 뒤집혀 있는 점이다. 정치꾼들은 경찰과 군대 같은 제도를 장악하고 있는 여당과 친정부인사가 아직도 우세하지만, 문학판에서는 벌써 칠팔 년 전부터 그게 뒤집혀 있었다고 한다. 곧 친정부나 중간파는 어용이나 보수(관동에서는 보수란 말이 욕설이 되어 있다)로 몰려 눈치보기 바쁜 데 비해 반정부파만이 진보와 새로움의 미덕을 독점한 채 목소리를 높여온 것이다. 그런 현상은 외형상의 군부정권이 끝나가는 제5기 정권 말기에 더욱 두드러져, 반정부파가 기존의 문인단체를 어용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문인단체를 만드니 관동문인의 80%가 그리고 쏠릴정도였다. 그 모두가 골수 민주세력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관동문단의 판도를 짐작하는 데는 훌륭한 근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재작년 선거로 민선 대통령이 들어서고 정부와 여당이 거꾸로 민주화를 부르짖게 되자관동문인들은 좀 혼란되었다. 그때껏 그들이 힘을 모아 외쳐온 것은 군부타도, 민주회복이었는데, 갑자기 그 구호의 호소력과 설득력이 반이나 줄어든 것이었다. 거기서 관동의 민주문인들 사이에는 잠시 논란이 일었다. 일부는 제6기 정권의 골격이 아직 많은 부분 제5기 정권 사람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고, 대통령도 군부출신이란 점에 착안해 빛이 좀 바래긴 했지만 군부타도, 민주회복을 그대로 쓰자고 주장했고, 다른 일부는 민족통일로 구호를 바꾸자고 나왔으며 나머지 소수는 반핵운동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 논란을 자연스럽게 끝내준 게 제6기 정권이 내놓은 문제의 그 선언(그쪽에선 9·9선언이라 불린다)이었다. 그 어설픈 선언이 민주문인들의 선택을 통일로 유도한 셈이었다. 사실 이러한 해석은 진정으로 민족의 통일을 열망하는 관동의 민족주의 문인들에게는 모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든 날짐승이든 무리를 잘 지어야 한다. 까마귀떼 사이에 황새 몇 마리가 섞여 있다 해서 아무도 그걸 황새떼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거기다가 집단이 되고 운동성을 띠면 원래의 순수성은 전략이니 효율성 재고니 해서 어느 정도 왜곡되고 변질되기 마련 아닌가. 민주문인단체가 성명을 통해 경도행(京都行)을 발효하자 관동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관동사람의 일부는 그들의 용기있는 결정에 갈채를 보내고 그 뜨거운 민족주의에 감격했다. 그들이야말로 이 시대 양심의 표상이며 민족혼의 결정이며 일본의 지성(知性)이 지닐 수 있은 모든 미덕(美德)의 화신(化身)이었다. 그들의 아름다운 꿈 하나로 이와테산(本州 북쪽의 高山)과 구니미다케산(九州 남쪽의 高山)이 얼싸안고 춤을 출 줄 알았으며 그들의 민족혼에 찬 노래 한 구절로 비와호(京都 곁의 큰 호수)와 동경만(東京灣)의 물이 하나로 합쳐질 줄 믿었다. 아카보 소총도 M16도 그들의 살갗은 뚫지 못하고, 미그25도 F16도 그들의 뜨거운 염원에 부딪히면 격추되리라 보았다. 관서 인민공화국 군대도 관동 민주공화국 군도 동서의 문인교류만 이뤄지면 바람 앞의 짚 검불이요. 그리하여 그들이 튼 통일의 물꼬는 내무서도 경찰서도 흔적없이 휩쓸어버릴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만만찮았다. 동경(東京)에는 3천 명 가까운 문인들이다. 반체제니 어용이니 회색분자니 해서, 넓어야 반경 1백km도 안되는 도시에 살면서도 저희끼리는 몇 년씩 얼굴을 맞대지 않고 지내면서 수백km 서쪽 경도(京都)에 있는 문인들과 교류하는 것만이 통일을 앞당기는 것이냐? 같은 체제 안에서도 서로 화합하지 못하면서 체제를 달리하는 쪽과는 얼싸안을 수 있다니 뭐가 잘못된 거 아니냐? 통일이란 게 민족의 결속을 의미한다면 먼저 관동의 문인끼리부터 부둥켜안아야 되지 않느냐? 지척에 있는 동료는 배암보듯 하면서 멀리 있는 사람들은 어찌 그리 잘 믿느냐? 그런 게 대강 관동문단을 잘 아는 사람들의 의문이었고, 문단 밖의 현실주의자들은 또 이렇게 빈정거렸다. 이루어질 수 없는 줄 알면서도 진지하게 추구된 꿈이 우리 역사를 진전시킨 적도 있지만, 헝클어놓은 적도 많지 않으냐. 펜이 칼보다 강하다지만 그건 칼 쥔 놈이 해보는 소리지 언제 펜과 칼이 정면으로 부딪쳐 이겨본 적이 있느냐. 통일 그거 좋은 거지만 함부로 가지고 놀지 말아라. 돌 던지는 아이들은 장난이지만 개구리는 죽을 지경이라지 않더냐. 너희들은 꿈으로 기분으로 해보는 소리지만, 그거 잘못되면 모가지가 날아가고 재산이 날아가고, 살아도 사는 것 같지 못하게 살아야 되는 사람이 동과 서에 작게 잡아도 천만씩은 있다. 그런데 바로 그들이 쥐고있는 게 총칼이고 돈이고 힘 아니냐. 겁탈할 재간도 없이 지분거리면 계집 콧대만 높아지고, 넘지도 못할 담 자꾸 기웃거리면 그 집 개새끼 성빌만 버려놓는다. 공연히 주척거려 일 어렵게 만들지 말고, 눈치보아 짬보아 될성부를 때 나서거라. 그러나 시비야 어찌됐건 결과는 일민맹(日民盟)과 비슷했다. 그들 역시도 각문관(角門館)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닭장차 신세로 되돌아 왔다. 그래도 그 두 사건은 뒤이은 통일소동으로 보아 장으로 치면 초장이요, 막으로 치면 서박에 지나지 않았다. 이 봄 들기 바쁘게 일본의 관동정권은 성나고 기막혀 허파가 뒤집힐 외신(外信) 몇줄을 받았다. 연초 금촌의 초대를 받은 관동의 목사 한 사람이 정부의 거듭된 엄포에도 불구하고 멀리 길을 돌아 경도(京都)에 도착했다는 내용이었다. 붕헤이(交平)라고 하는 반체제운동의 지도급 인사였다. 붕헤이 목사는 대(代)를 잇는 목회자(牧會者)요, 민족 민주지사의 가문 출신으로 관동의 <제2 유신>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온 사람이었다. 군부정권에 의해 여러 차례 투옥당한 경력이 있고 연초에는 가장 강력한 재야단체인 일민맹(日民盟)의 고문으로 추대되어 새로운 활동이 기대되던 그 방면의 원로라고 한다. 나이는 벌써 일흔이 넘었지만 불 같은 기백으로 민주회복의 늙은 기수(旗首)역을 담당해왔다는데 갑자기 통일의 선봉으로 노익장의 순발력을 보인 것이었다. 법석은 먼저 경도에서 벌어졌다. 금촌을 비롯한 관서정권의 권력핵심들은 분단 뒤 처음으로 찾아든 제대로 된 선전거리를 효과적이고도 인상적인 무대를 갖춰 맞아들였다. 금촌 자신이 공항까지 영접을 나가고 상징적인 포옹이 거룩하게 나눠지고 감동의 눈물이 온 사람 맞는 사람에게서 줄기줄기 흘렀다. 아쉬운 대로라면 그리고 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런 사람 하나쯤은 납치라도 해올 판에 붕헤이 목사가 제발로 걸어들어왔으니 관서쪽의 눈물은 진정일 수도 있겠다. 고의였든 아니었든 붕헤이 목사도 그런 관서정권의 기분 한번 화끈하게 맞춰주었다. 마치 망명이라도 온 것처럼 관동정권과 그 수반은 아무개정권, 아무개로 부르면서 금촌에게는 깍듯이 수령동지를 붙였고 일본의 통일은 다만 관동의 반동세력 때문에 안되는 것으로 단정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관동에는 수백만의 애국학도가 민주시민이 통일을 열망하고 있다는 보고를 함으로써 그들이 마치 금촌을 지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 마침내는 몇 년 전 금촌이 내놓아 관동정권에게는 명백히 거부된 통일안과 비슷한 것에 합의한 뒤 일통투(日統鬪)인가 하는 촌스런 이름의 관제단체와 공동성명까지 내놓기에 이르렀다. 일이 그쯤되자 외신을 통해 보고 있는 관동에서는 그 몇 배나 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설마설마하고 보고 있던 관동정권은 이제 허파가 뒤집힐 지경을 넘어 눈알이 다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실제로 해외토픽란에 보면 그 무렵 관동의 정부청사 마당에는 관련부처 고관들의 튀어나온 눈알이 자갈처럼 굴려다녔다 한다. 관동의 일반국민들 사이에 벌어진 찬반의 논의도 소동이란 말이 조금도 지나치지 않았다. 둘만 만나도 붕헤이 목사요, 셋이 만나면 통일이었다. 아침에 만나도 그 얘기요, 저녁에 만나도 그 얘기였으며, 지하철에서, 목욕탕에서도 그 얘기였다. 확인은 못했지만,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한다고, 그 무렵에 관동의 개새끼들까지도 멍멍이나 왕왕 대신 붕헤이, 붕헤이, 통일, 통일하고 짖어댔다는 소문이 있다. 부질없기로야 남의 시비를 가려주는 일보다 더한 게 있을까만, 이왕 얘기를 낸 김이니, 그 찬반(찬반)의 내용들이라도 살펴보자. 관동당국에 의해 <붕헤이(交平) 밀입서(密入西) 사건>으로 공식명명된 그 일이 터지자 그곳 젊은이와 진보적임을 자처하는 지식인 다수는 어김없이 붕헤이 목사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들은 그 사건을 분단 45년 제1의 쾌거로 치기에 주저치 않았으먀, 그게 통일에 기여하는 바는 혁명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붕헤이 목사님의 결단은 그 한 몸으로 민족의 염원을 보듬어안은 것이며, 그 실행은 통일이란 민족적 과업을 향한 거룩한 출발이었다. 돌아오면 닥칠 파쇼·반동·악질 군부정권의 박해에 개의치 않고 떠난 것은 자신을 던져 민족을 구하겠다는 애족혼(愛族魂)의 극치이며, 금촌과의 포옹은 원수를 사랑하라던 기독(基督) 그 자신보다 더욱 완벽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지지는 거기서도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차츰 개인숭배로까지 발전해 그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사(家族史)까지도 미화(美化)되었다. 역시 목사로 재직하다가 군국주의정권의 신사참배 강요와 기독교 탄압을 피해 관서에서 만주로 망명했던 그 선친(先親), 패전 후 다시 관서로 돌아왔으나 금촌과 공산당의 박해를 못이겨 관동으로 옮겨야 했던 그 자신과 다시 관동의 목자(木子) 독재정권 및 군부정권의 박해를 못이겨 이제는 낯선 미국땅을 유랑하는 일부 그 아랫대, 그 삼대(三代)에 걸친 수난사는 실로 전해듣는 이마저 숙연해지는 데가 있었다. 더군다나 그 자신도 한때 미국의 풍요와 평온에 안주할 기회가 있었으나, 진작에 마다하고 관동으로 되돌아와 그 서슬 푸른 <제2유신> 시절에 의(義)를 위한 투쟁의 첫발을 내디뎠으니 아마도 그는 그의 하느님이 동방의 불행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특별히 지어보내신 사람 같다는 게 그 지지자들의 결론이었다. 그러하되, 참으로 알지 못할래라 사람의 눈과 귀여, 머릿속이여, 대상이 되는 인격도 행위도 다만 하나인데 그 판단과 해석은 또 어찌 이리 다를 수 있단 말인가. 관동에는 또 그만큼의 붕헤이 목사를 싫어하고 그의 서행(西行)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애꾸눈인 사람을 옆모양만 보면 그는 장님이거나 성한 사람일뿐이다. 그런데 지금 일본의 관동에는 사람의 옆모양만 보고(그것도 자신이 보고 싶은 쪽만) 판단하는 게 유행하는지, 붕헤이 목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얘기는 또 너무 다르다. 우선 그들은 붕헤이 목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미화하던 그의 가족사에 대해서부터 비난의 포문을 연다. 우선 그들은 붕헤이 목사의 선친이 위대한 목회자(牧會者)로 미화되는 것부터 반대한다. 군국부의 시절에도 진정한 목자(牧者)는 수난받는 그 양떼와 더불어 본토(本土)에 남아 있었으며, 관서가 적화되었을 때도 진정한 목자는 그 양떼와 남아 순교까지 당했다. 그런데 두번씩이나 양떼를 버린 목자를 찬양하는 것은 양떼와 함께 남아서 죽지 않았다고 나무라는 것만큼이나 억지다. 그 아랫대도 그렇다. 관동에 왔으면 그대로 눌러살지, 그곳이 좀 불안하다고 제 나라를 버리고 미국까지 가? 혹시 그 일가 원래 조금만 불편하면 제 살던 곳 버리고 뛰는 피 아냐?―그렇게 나가다가 나중에는 붕헤이 목사 신상에까지 모욕적인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 사람 혹시 좋은 것만 너무 따라다니는 사람 아냐? 생각해 보라구. 동서전쟁 전 관동의 많은 사람들 공산당 의심받을까봐 기도 제대로 못펼 때 피난온 관서사람 거기다가 기독교인 얼마나 당당했겠어? 또 동서전쟁때는 그 사람 UN군 통역했다며? 우리가 굶주림에 떨고 있을 때 권총차고 양키 장교식당에서 잘 지냈겠지. 우리 괴롭던 50년대 60년대 그 사람은 어디 있었나? 미국유학 거 좋지. 가족 대부분이 이주하고……. 그러다가 우리 정계 데뷔는 1974년, 고생은 꽤나 했지만 그뒤 십여년 만으로 그만한 자격 생길까? 우리가 45년씩이나 피땀흘려 가꿔논 이 마당을 제것처럼 휘저을.다 안다구, 다 알아 거 뭐 일민맹(日民盟)인가 하는 단체, 연초에 통합할 때 주도권 다툼깨나 있었다면서? 노욕이 뻗쳐 어떻게 한번 쥐어흔들고 싶은데 젊은패들이 고문으로 한쪽에다 밀어붙여 버렸다면서? 혹시 이번 경도행(京都行) 그러 어떻게 한번 만회해보려고 따낸 묘수(妙手) 아냐? 금촌(金村)이나 목정(木正)에게서 한수 배운……. 그 경도행(京都行)의 효과를 가지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사람, 무엇보다 그 동지들에게 몹쓸짓 했어. 자리보구 다리 뻗으랬다고 아직은 보수세력 눈이 시퍼런데 그래 놓으면 그 동지들은 어쩌란 말이야? 더구나 의논도 제대로 안하고 갔다며? 통일도 최소한 몇 년은 후퇴시켰어. 좀 궁상맞은 소리 같지만 당장은 동서 양쪽 정권이 소리소리 함께 통일을 외쳐대고 있으니 좀 지켜보는 것도 괜찮잖아? 아무래도 총칼 가진 놈 무시하고 될 일은 아니잖은가 이말이야. 눈알 푸른 사람들 속담에 불행은 반드시 떼를 지어 온다는 게 있다더니 올해 관동정권의 운세가 바로 그런 모양이었다. <붕헤이 일입서(密入西) 사건>이 아직 채 가라앉기도 전에― 그후 돌아온 붕헤이 목사는 관동의 공안당국에 의해 수감되었다.―관동정권은 다시 새로운 돌풍에 휩쓸렸다. 이른바 <모리(森)양 사건>으로, 이번 초여름에 터진 그 사건은 올해 일본이 겪고 있는 통일소동의 한 절정이 될 듯 싶다. 이번에는 모리(森)라는 관동의 여대생이 관동의 일대맹(日本대학생연맹)을 대표해 경도(京都)로 날아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리양의 방서(訪西)에 대해서는 일본의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약간의 설명을 해야 될 것 같다. 앞써 지나가는 얘기로 관동의 올림픽을 말한 적이 있는데 실은 그게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올림픽을 유치한 제5기 정권이 정말로 오늘날과 같은 그 효과를 계산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유치 초기에는 지식인들의 반대고 많았지만 작년에 동경에서 우리에게조차 뜻밖일 만큼 성공적으로 치러진 88올림픽은 관동정권에게 쓰라린 것은 그 대회의 눈부신 대외홍보 효과였다. 그전에도 관동정권은 공업화다, 수출 몇백억 불이다, 하며 기세를 올렸으나, 세계는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관동정권이 총력을 기울여 동경을 거대한 전시장처럼 만 결과 찾아 온 세계는 깜짝 놀랐다. 오늘날 관동의 대일본민국을 아시아에서는 우리 다음의 선진국으로 공인하게 된 것도 바로 그 올림픽 덕분이었다. 이에 앙앙불락하던 관서정권이 꿩 대신 닭이라고 유치해 들인 게 바로 세계청년축전이라는 행사였다. 주로 사회주의 국가의 청년들이 모여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는 국제대회로 올림픽보다는 규모도 지명도(地名度)도 어림없지만, 잘만 하면 관서의 일본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해서 곧 죽어가는 나라는 아니라는 것쯤은 세계에 알릴 만 했다. 모르긴 해도 관서정권이 그 대회를 준비하는 데 들인 공도 관동정권이 올림픽을 준비하는 데 들인 공보다 적지는 않을 것이다. 워낙 일사불란한 체제라 한 몇 년 공을 들이니 경도(京都) 또한 남에게 보이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되어갔다. 관동처럼 참가국과 참가자 숫자에도 안간힘을 다해, 그냥가도 괜찮은 대회가 될 만해졌는데―작년 관동정권의 9·9선언이 금상첨화의 힌트 하나를 주었다. 그 축전에 관동의 대학생 대표를 끌어들인다는 것이었다. 최근 관동 공안당국의 발표를 보면 모리(森)양의 입서(入西)는 관서정권의 치밀한 공작에 따른 것이라 한다. 그러나 관동의 학생운동권 내막을 살펴보면 뭐 그렇게 기를 쓰지 않아도 관서정권의 뜻대로 관동대학생 대표가 경도에 나타났을 듯 싶다. 왜냐하면 관동의 학생운동 주도권은 관서정권이 일대맹(日大盟)에 초청의사를 공표할 때 이미 자사파[自體思想波]에 잡혀있었기 때문이다. 사상의 조국이 부르는데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하기야, 세계에서 이름난 반공국가요, 더구나 아직까지도 군부정권 시비가 심심찮은 관동의 대학생운동이 어떻게 좌파 중에도 가장 과격한 자사파(自思派)에게 넘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의심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꼭 이해안될 것도 없다. 어떤 관동시인의 노래 중에 <버스를 갑자기 우로 몰면 승객은 좌로 쏠린다>는 게 있다. 관동의 군부정권이 실시 극우적인 정책들에 대한 반발이 일반민중들을 오히려 좌파로 기울어지게 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랬다. 그리고 한번 의식이 좌파로 길을 잡자 그 다음 운동지도부는 그 주도권 다툼과정의 상승작용으로 급속히 과격화하게 된 것이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관동의 학생운동지도부는 사회주의란 말조차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그러나 차츰 공산주의까지 서슴없이 말해지더니 5기 정권 끝무렵엔 마르크스와 레닌이 공공연히 인용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근년에는 그것으로도 부족해 과격경쟁이 일어나더니 마침내 주도권은 가장 과격한 자사파(自思派)에게로 낙착을 보았다. 만약 금촌의 아들 직월(直月)이 자체사상보다 새로운 사상을 끼워맞추기만 하면 관동 학생운동의 이 다음 주도권은 틀림없이 그 사상으로 무장한 일파에게 돌아갈 것이다. 어쨌든 관서정권의 초청의사가 이르기 무섭게 자사파에 주도된 일대맹(日大盟)은 참가의사를 밝혔다. 이래저래 속을 썩이던 관동정권은 그때부터 이미 골머리를 앓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막자니 남북교류추진이란 9·9선언의 한 항목이 걸리고 보내자니 뻔한 관서정권의 수작에 걸려드는 게 싫었다. 자기네 정부 입장 알만한 데도 준비없이 쏟아낸 선언 한 구절 걸고 들어가 억지를 써대는 일대맹(日大盟) 아이들도 염치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어쩌자고 그런 방비도 없이 멋부린 선언부터 먼저 쏟아내 그 지경으로 몰린 관동정권도 딱했다. 하지난 아무리 멋적어도 보낼 수 없는 것이라 정부가 끝내 허락하지 않자, 일대맹이 결행한 게 바로 모리(森)양의 밀파였다. 모리(森)양이 누구이며, 어떻게 선발됐고, 어떤 길을 돌아 경도까지 갔는지에 대해 장황하게 얘기하는 건 그만두자. 하도 기발한 착상이라 우리 신문에도 몇 번 소개됐으니 웬만하면 모두 알 것이기 때문이다. 허풍치기 좋아하는 사람은, 소련 비밀경찰 열명 찜쪄먹고도 미국 중앙정보부원 하나는 입시심으로 해치울 만한 게 일대맹의 모리양 밀입서(密入西)작전이라고 한다. 그뒤 관서에서 있었던 북새통과 관동의 호들갑에 대해서도 생략하겠다. 이미 말했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제 스무 살을 갓 넘은 어린 아니 하나 간 걸 두고 외국 원수라도 온 듯 각부(各部) 요인에 80이 넘은 금촌(金村)까지 나서서 주접을 띤 꼴도 가관이지만, 기자회견까지 하고 돌아올 때까지는 뭐가 어떻게 돌아간지도 제대로 모르던 관동정권의 무능도 한심스럽다. 하지만 그 소동에 끼어들어 하마터면 배보다 더 큰 배꼽 될 뻔 했던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얘기는 좀 해야겠다. 그 역시 오랜 군부정권의 산물로 관동에는 한 십여 년 전부터 정의사제단이란 비정규적인 사제들의 모임이 있었다. 천주교의 정식기구는 아니나 지난 십 년 꽤 볼 남 한 일을 많이 한 단체였다. 모리양의 경도(京都) 도착이 매스컴에 떠들썩하게 알려지고, 관동전체가 그 찬반의 다툼으로 벌컥 뒤집혀 있을 무렵, 그 사제단은 외국에 나가 있던 신부 한 사람을 관서(關西)로 파견했다. 치밀한 사전계획과 정확한 자금조달체계에다 세계를 반 바퀴나 돌아 경도까지 간 당찬 아가씨지만, 사제단에게는 어디까지나 한 마리 길 잃은 양일 뿐이다. 그 소식이 전해지면서 관동은 다시 한번 뒤집혔다. 특히 그 신부가 연설을 통해 관서정권이 되풀이 주장해오던 통일 원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관동정권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권유함과 아울러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 안에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란 위협까지 곁들이자, 그때껏눈치만 보고 있던 보수세력도 일제히 성토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 신부편을 드는 사람들이 맞받아침으로써 한동안 관동은 그 시비로 엉머구리 들끓 듯했다. 그 신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로 성경해석을 통해 논지를 세워나갔다. 통일이란 게 워낙 건드릴 수 없는 지상(至上)이라 반통일세력 소리를 안들으려면 그 길밖에 없었다. 그들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란 구절을 의지해 교리의 초월성과 세계주의, 그리고 평화와 피폭력원칙을 강조하며 그 신부와 그가 속한 사제단이 성경을 잘못 해석했다고 꾸짖 었다. 어떤 이는 그들의 지나친 정치화를 비난했고, 심하게는 그 사제단이 중세적(中世的)인 교권(敎權)우월의 환상에 빠져있는 것이라고 빈정대는 사람도 있었다. 물어보나마나 그 신부를 지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먼저 성경해석의문제에서 자신들이 정당함을 강경하게 주장했다. 기독(基督)의 드러난 언행에서 정치적인 부분은 확실히 적었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며, 틀림없이 초월성이 현실성보다 더 강조되고는 있지만 그게 바로 세속에서의 삶에 대한 방관이나 무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교리의 세계주의적 특성도 분명히 인정되나 민족공동체를 저버리란 뜻은 아니고, 평화와 비폭력도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기독이 덜 헬라화(化)된 갈릴리를 중심으로 포교를 시작한 것,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채찍으로 내쫓은 것, 착한 사마리아인을 추켜세운 것 따위를 들었다. 그들에 따르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하는 구절로 기독의 사상에 어떤 근거로 삼으려는 시도야말로 피상적인 성경해석이며 십자가 위에서의 진실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보다는 <아버지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쪽에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 어느 편과도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우리들이라 뱃속 편하게 그 시비에 가담할 수도 있 지만,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누가 그런 시비에 최종적인 판정을 내려줄 수 있단 말인가. 공산주의의 사상적 근원을 원시기독교의 공동생활에서 찾는 사람도 있는 만큼, 말려들어봐야 골치만 아픈 게 그 시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시비와는 무관하게 아무래도 딱하게 된 것은 그 신부와 사제단일 듯싶다. 뒤이어 표명된 주교단의 의견과 관동 평신도협의결의가 생판 거짓이 아니라면, 그들의 성경해석이 옳아도, 틀려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의사제단의 성경해석이 옳다면 불행하게도 그들은 방향착오를 일으켰거나 주제넘은 짓을 한 게 된다. 내 코가 석자라고 엉망인 가톨릭 내부를 놔두고 정치에 배 놔라, 감 놔라 할 수 있겠는가. 일껏 기독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결행해놓은 일에 <유감운운>의 의견을 표명한 완고하 고 보수적인 주교단, 아무래도 성경을 잘못 해석한 듯하니 빨리 갈아치워야 할 것이다. 교회를 현세기복(祺福)의 장소쯤으로 여기는 저 홍몽천지의 평신도들, 그 우매한 대부분은 재교육시키거나 파문해야 한다. 뿐인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한 선배 보프 신부를 불러다가 공연히 겁준 교황청도 그냥둘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은 버려둔 채 정치의 불의에만 목청높이고 있다면 이는 바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요,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못보면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주겠다>는 격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들의 성경해석이 틀렸다면 그 자체로 낭패이고―요새 아이들 말로 <용코로> 딜레마에 걸린 셈이다. 모리(森)양에 대한 시비는 대략만 전하겠다. 저희끼리는 중요한 시비이고, 모리양이 관동으로 돌아간 지금은 실정법(實定法)문제까지 얽혀 앞으로 한동안은 박터지는 쌈질을 하겠지만 우리에게는 어차피 강건너 불이다. 모리양을 지지하는 쪽의 의견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옳다 니(네)가 바로 낙다르크라는 것이 될 것이다. 부디 파쇼군부정권에게 항복하지 말아하. 그들의 장작더미 위에서 타죽으면 네가 바로 구국(救國)의 성녀(聖女)다..... 하지만 프랑스에게 구국의 성녀의 영국에게 재앙의 마녀(魔女)가 된다. 관동의 보수세력(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관동분들 화내지 마시길)은 말한다. 지난 한 달 관서지방을 짤랑거리고 다니며 사람 허파 뒤집는 소리만 해댈 때는 철없는 계집아이가 아니라 정말로 작은 마녀(魔女) 같았어……. 그밖에 통일과 관계해 요즈음 일본이, 특히 관동이 겪고 있는 갈등과 혼란의 원인이 된 사건은 수없이 많다. 미쓰이(三井) 재벌총수의 관서방문, 사이코(西卿) 위원의 밀입서(密入西) 사건, 기토오(木藤) 관방장관의 경도방문설 따위가 그것인데……. 남의 나라 얘기가 너무 지루한 것 같아 줄이기로 한다. 궁금한 게 많은 분은 도서관으로 가서 요미우리나 마이니치 금년치를 읽어보시도록. 그렇지만 아무리 강건너 불이고 당장 우리가 속태울 것 없는 남의 나라 일이지만, 가까운 이웃으로 그 소동을 보는 감회마저 없을 수는 없다. 우리가 먼저 느끼는 것은―미움도 원한도 세월이 기자면 속절없이 씻기우고 마는가― 이 불행한 이웃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다. 동서로 나뉜 것만도 괴로운데, 다시 그 동서가 조각조각나 대립하고 다투니 그 민족이 겪는 고통이 오죽할까. 더군다나 그 갈등과 불화가 민족이 다시 하나되기 위한 것이라는 아이러니에는 동정을 넘어 애잔한 연민까지 느낀다. 그 다음은―남의 불행을 우리가 즐기고 있다고 성내지 않는다면―충고의 유혹도 있다. 특히 관동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들은 무엇보다고 사고(思考)의 일관성을 가져라. 왜 어떤 부분에는 그렇게 현실적이고 치밀하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그렇게 환상적이며 무모한가. 어서 어떤 부분에는 그렇게도 냉정하고 회의적이면서 어떤 부분은 또 그토록 맹목적인 믿음으로만 대하는가. 왜 어떤 쪽은 그렇게 비관하면서 다른 쪽에 대해서는 그토록 터무니없이 낙관적인가. 진정으로 당신들이 불행한 역사를 청산하고자 한다면, 공격하는 쪽이건 방어하는 쪽이건 편향될 대로 편향된 시각부터 교정하거라. 우리하고 정식의 국교관계가 있어 살펴보기에 훨씬 용이한 관동의 각 세력이 지닌 편향성만 예를 들어보자. 그쪽 정부여당의 편향성은 예부터 이름이 나 있다. 예컨대 어떠한 통일논의건 그 옳고 그름은 논리가 아니라, 논의의 주체가 이편이냐 저편이냐에 따라 판정돼 왔다. 하지만 그 반대편이라고 해서 조금도 나을 것은 없다. 우리가 보기에 관동에서는 인간성에 대한 이해와 세계해석을 아직도 전근대(前近代)적 극단론에 의지하고 있는 것 같다. 곧 악으로만 뭉쳐진 인간성과 선으로만 뭉쳐진 인간성, 전적으로 낙관정이거나 전적으로 비관적인 것으로만 나눠진 세계, 그것이 그들이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도식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계기로 한번 선의 판정을 받으면 그 인간의 행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한 것으로만 이해되고, 한번 악으로 규정되면 그에게서는 손톱만큼의 선도 인정되어서는 안된다. 세상도 그와 마찬가지로 양분되어 한번 낙관적으로 보기 시작한 세계는 끝없이 낙관적으로 전개되고, 한번 비관적으로 단정된 세계는 그대로 비관적으로 끝장보게 결정돼 있다는 식이다.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자기들이 지지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와 선으로만 뭉쳐있고, 그 통일논의는 낙관적인 결말이 보증돼 있다. 그러나 반대편은 말 그대로 악과 탐욕만의 덩어리이며, 그 통일논의는 오직 비극적인 결말에 이를 뿐이라고 단정한다. 현실과 이상을 너무나 자의적으로 분배한 탓으로, 거기에 우리의 일관성에 대한 충고가 나오게 된 것이다. 불행한 이들이여, 현실과 이상을 골고루 분해할 줄 알아아. 세상에는 악으로만 뭉쳐진 인간이 없는 것처럼, 선으로만 뭉쳐진 인간은 없느니, 이기(利己)에 찬 자본주의적 고안(考案)도 위대한 발명으로 인류의 복리증진에 공헌할 수 있는 것처럼, 치밀한 논리와 빛나는 이성으로 짜맞춰진 이념이 오히려 인류의 족쇄로 기능할 수도 있느니. 그 다음 우리가 특히 관동 사람들의 통일논의에 해주고 싶은 것은 진지성이다. 그들의 분단은 이미 40년이 넘었고, 또 한차례 죽고 죽이는 싸움까지 치른 것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분단의 해소는 준(準) 혁명적 상황이 될 것인데, 우리가 보기에 관동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통일논의에는 그러한 준혁명적 상황에 걸맞는 진지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듣는 이는 저마다 화날 테지만, 기껏해야 좀 심각하고 거창한 놀이, 아미면 이도 저도 막힐 때 내던지는 정략적 카드, 또는 다급한 땜질을 주가 진지하다 말하겠는가. 남은 최루탄가스 속을 박터져가며 이리뛰고 저리뛰고 하는데, 기껏해야 좀 심각하고 거창한 놀이라니, 거 아무리 물건너 양반들이라 해도 너무 하잖소? 관동정부의 형무소와 경찰은 폼으로 있고, 간첩죄 보안법은 사람 못죽이는 줄 아시오? 뭐 최루탄가스는 샤넬향수쯤 되고 경찰봉은 안마기 대용품인 줄 아시오? 라고 관동의 재야와 급진학생들은 우리에게 항의해올지 모른다. 물론 우리도 그들의 행위 그 자체가 진지하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들의 통일안이다.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답이며, 정부가 그것만 인정해부면 통일은 때논 당상이라는 식의 행동방식이 영 이덥지 못한 것이다. 우리 보기에 당신네 통일은 먼저 당신네 사천만이 내부적으로 인치하여 몇 년이고 진지하게 머리 쥐어뜯으며 답을 짜낸다 해도 온전한 답일 가능성은 적다. 거기에 또 수없이 수정과 가감이 곁들여져야만 근근이 그 꼬일 대로 꼬인 민족의 대사를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로서는 그 객관성과 합리성을 승인하기 넉넉찮은 몇 사람이, 경우에 따라서는 편향된 이념과 설익은 지식의 책상물림 몇이, 머리 맞대고 얽어논 그 통안을 정답으로 우기고 사회전반에 강요하고 들어?―거기에 그들의 진지성에 대한 우리의 의심이 있다. 만약 그들이 겸손하게, 우리가 이런 방안을 생각해보았는데 종합답안 작성에 참고로 하시지요, 라고만 하고 나왔더라도 우리의 생각은 달라질 게다, 아니, 좀 대담하게 우리 것이 거진 정답 같으니 어디 당신네 답하고 같이 국민투표라도 부쳐봅시다 하고만 나와도 우리는 그들의 진지성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국민적인 합의과정에는 무관심하게―또는 일방적인 프로파간다로 강요하며―제 것만 옳다고 우기니, 국민 무시하기로는 저희 정부나 다를 게 무엇 있겠는가. 그 때문에 우리는 그 진지성을 믿지 못하고 있다. 비록 바다 건너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밖으로는 세계정세에 순응하고 안으로는 민족의 점증하는 열망에 부응하여 금번의 통일안을 내놓았다. 정부의 책임있는 각료는 물론 사계의 권위들을 망라해 내놓은 이 통일안에 대해 무슨 카드니 땜질이니 하며 진지성을 의심하는 귀(貴) 국민들의 태도는 실로 유감이다. 이는 국제예양에도 어긋나는 바이므로 귀(貴) 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함과 아울러 그 사정을 엄중히 요구한다 운운.> 어쩌면 이 글을 읽은 관동정부는 외무부를 통해 이런 항의각서를 전달해올지도 모른다. 물론 국제예양상으로는 미안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할말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도 귀(貴) 정부의 진지성에 대해 전적으로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 안출(安出)기간이 짧고, 담당자의 선임과정에 이의가 있다쳐도, 기능주의에 입각한 당신네 통일안 또한 명분론(名分論)에 집착한 반대편의 통일안에 못지않게 볼만한 데가 있음을 안다. 그렇지만 국민적 합의를 끌어내는 방식이나 과정에 이르면 역시 진지성을 의심받을 구석은 많다. 무조건 당신네들 것만 정답이라 우기지 말고 적극적인 대(對)국민 설득에 나서보는 게 어떤가. 얼마든지 수정할수 있다는 유연성을 가지고 일정기간 보완을 거친 뒤에, 마찬가지로 그런 과정을 거친 다른 통일안과 나란히 국민투표에 부쳐보는 건 어떤가. 그런 적극적인 합의도출의 과정이 없는 한, 당신네 전(前)정권의 형태를 익히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 진지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쯤이면 그 항의각서에 대한 대강의 답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특히 지금 정신적 내란(內亂)상태에 빠져있은 관동지방에 하고 싶은 충고는 목적 못지않게 수단과 과정도 중시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보기에 동서(東西) 일본의 통일이 피로 피를 씻는 동족상잔이나, 어느 쪽에든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사람을 수천수백만 만들어내지 않는 길은 두 체제 모두의 승리에 의한 것(말이 좀 안맞는 듯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방법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이어야 할 듯 싶다. 통일이 비록 민족의 절대지상의 과제라 할지라도 그 값이 너무 비싸다면 살 수 없기도 할 것이다. 겨레가 다 죽고 땅이 몽땅 뒤집혀지는 통일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따라서 지금 관동에서 먼저 있어야 할 일은 통일이란 목표 그 자체뿐만 아니라(기실 그 목표에 대한 합의는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좋다) 그것을 달성하는 수단과 과정에 대한 국민의사의 통일이다. 의식은 천 동가리 만 동가리 갈라져 있고, 지역간, 계층간의 불화는 토막난 땅을 다시 몇 토막으로 갈라놓고 있는 판에 관서(關西)와 통일만 서두는 것은 무언가 순서가 바뀐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러한 내분을 방치란 채 동서의 통일만을 서두른다면 그 목적은 뻔하다. 관서의 칼을 빌려 관동 내부의 원쑤를 쓸러버리려는 음모를 통일이란 이름으로 위장하는 것이거나, 또다른 정치적 필요에 의해 국민들의 눈과 귀를 통일이란 거창한 명제에 묶어두려는 정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느 편도 관동의 국민 대다수가 생각하는 진정한 통일과는 거리가 먼, 그리하여―그 통일은 일방의 일방에 대한 섬멸이란 형태의 끔찍한 것이거나, 쌍방 모두가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흘리고 난 뒤 함께 나자빠지는, 양패구상(兩敗具傷)의 터무니없이 값비싼 무성이 될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일본을 삼킬 좋은 기회가 되겠지만) 그러하되, 부질없다. 남의 시비를 가림이여. 무망하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를 물 밖에서 깨우치려 함이여. 시비는 거들어 오히려 커지고, 이미 위와 허파에 물이 차는 이에게 헤엄치는 법을 일러주는 일은 놀림이나 다름없다. 자칫 남의 불행을 즐긴다는 혐의을 받지 않으려면 우리의 얘기로 돌아감이 옳으리라. 만약 그때―저 빛나는 25년 전쟁이 승리한 아침에―우리가 슬기롭고 차분하지 않았던들, 우리가 그 엉뚱한 장군과 박사를 그토록 냉대하여 돌려보내지 않았던들, 오늘날 일본의 동서가 겪고 있는 불행은 반드시 남의 일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때 우리의 장군과 박사가 소련과 미국에게서 지급받아 마구 흩뿌린 이념의 깃발을 우리가 경박하게 집어들었다면, 겨레는 그 깃발의 색깔에 따라 나뉘었을 것이고 종당에는 땅까지 남북으로 토막나고 말았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땅이 나뉘고 겨레가 나뉜다면 일본이 겪은 저 참혹한 동족상잔을 우리라고 어떻게 면할 수 있었겠으며, 그뒤 40년이나 진행된 민족의 이질화(異質化) 또한 우리가 막을 수 있었으리라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그리하여 뒤늦게 통일논의가 일었을 때 오늘날의 일본보다 그 진통과 갈등이 적으리라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장군과 박사를 거부했고, 그리하여 우리가 넘어야했던 역사의 마지막 고비를 훌륭히 넘겼다. 앞서의 그 어떤 고비도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크나큰 행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넘겨갸할 것이었지만 특히 이 마지막 고비는 결정적이었다. 자칫하면 소비에트제국의 변경과 아메리카제국의 변경으로 분단될 뻔했던 이 땅은 그로써 구함받고, 자체사상(自體思想)이란 그럴듯한 포장의 해괴한 신왕조(新王朝)이론과 자유민주주의란 때깔나는 화장의 교묘한 신식민(新植民)논리에 조각조각났을 겨레의 얼 또한 그 결단으로 무사히 보존된 까닭이다. 오늘날처럼 균형있는 발전을 이룬 국토며, 쓸데없이 대치의 전비(戰費)로 낭비되었을 뻔한 재화가 우리의 결제적 번영에 공헌한 것은 또 얼마인가. 그러나 평안할 때 위태로움을 걱정하고 가멸할 때 가난함을 대비하라는 것이 옛성현의 가르침이다. 비록 옛날의 장군과 박사는 갔지만 그들은 앞으로도 심심찮게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그게 언제 어느 곳에서건 우리는 예전의 그 슬기와 단합으로 그들을 제 온 곳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어쩌면 이 땅, 우리 안에서도 그런 장군과 박사가 생겨날지 모른다. 그 또한 끊임없이 경계할 일이며, 그래도 나타나면 아예 발붙일 구석조차 주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가슴 안에서도 그 장군과 박사는 빚어질 수 있다. 안된다. 안된다. 세 번 안된다. 그때는 차라리 그 가슴을 담고 있는 작은 나[小我]를 부숴버려라. 우리 모두의 이 오늘을 위하여. 우리의 이 불꽃 같은, 숨막힐 듯한 행복을 위하여. 리얼리즘의 거부와 역사의 텍스트화 문학평론가 이 동 하 널리 인정되고 있는 바와 같이 소설은 모든 문학장르들 가운데에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많은 형태상의 모험이 허용되는 양식이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몇 가지 사정이 개입되어 있다. 우선, 서정시나 희곡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장르들의 경우에는 일찍부터 비교적 엄격한 규범이 확립된바 있지난, 소설이란 워낙 그 역사가 짧은 지라 아직 그런 게 생겨나 정착될 겨를이 없었다. 또한, 소설이 처음부터 자유분방한 민중의 장르라는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출발하였다는 사실도, 이 장르가 고정된 규범의 굴레에 좀처럼 매이지 않게끔 만든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소설이 인쇄문화가 보급된 시대의 산문로서 <고독한 독서>의 대상으로 선택될 것임을 원천적으로 예상하고 있다는 점, 따라서 집단적인 공중에게 획일적으로 수용되어야 할 필요성이 없다는 점도, 이 장르가 다른 장르들보다 더 큰 자유를 누리도록 도와준 요인으로 꼽힐 수 있으리라. 물론, 지금까지 전개되어 온 소설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거기에서 우리가 <주된 경향>이라고 일컬음직한 것을 발견할 수는 있다. 그것은 바로 좁은 의미에서의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될 수 있는 경향이다. 이것은, 표현을 바꾸어서 이야기하자면, 쇼울즈와 켈로그가 말한 설화의 세 가지 유형―전통적 설화, 경험적 설화, 허구적 설화―가운데에서 소설은 두번째의 유형을 가장 선호해온 편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문학의 역사를 돌아볼 때 통계적으로 그러한 경향이 추출된다는 이야기일 따름이며, 그같은 관찰을 토대로 해서, 소설장르의 본질 속에 리얼리즘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원리가 내재해 있다는 투의 단정을 내릴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리얼리즘의 기법이 <작품을 앞에 놓고 불신의 자의적인 중단을 당장에 할 수 있을 만큼 문화적·문학적인 자질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독자에 의해서 주로 구성된 사회>에 대응한다는 정명환의 설명을 우리가 간단히 부정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오늘날의 사회는 이미 그러한 사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설장르는 과거와 다름없는 활력을 과시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는 자명해진다. 사실 지금까지 소설장르의 주된 경향이 리얼리즘으로 요약될 수 있었던 것은 소설장르의 본질속에 그러한 경향으로 수렴을 요구하는 원리가 내재해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문학외적인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진실에 부합될 듯싶다. 그리고 이와더불어 또 한 가지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이처럼 리얼리즘의 부상을 가능케 했던 여러 요인들이 오늘날 상당부분 퇴색하고 있으며, 따라서 리얼리즘의 위력 역시 아무래도 이전만은 못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정명환의 설명을 언급하는 가운데 지적한 독자층의 수준에 있어서의 변화라는 현상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가리키는 사례의 하나로 들어질 수 있다. 리얼리즘의 위력이 전만 못하게 되어간다는 것은, 그동안 소설장르에 어느 정도 안정된 모습을 부여해 주었던 요소가 사라지거나 적어도 위축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혼란을 불러오게 된다. 하지만 이 혼란은 결코 부정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다. 부정적인 것이기는커녕, 반대로 그것은 소설이 원래 가지고 있는 자유의 가능성을 좀더 크게 신장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유의 가능성의 신장은 당연히 창조의 가능성의 신장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같은 가능성의 신장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겨냥하면서 진행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하여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대답이 나올 수 있으려니와, 그 중 하나로, 앞에서 언급한 설화의 세 가지 유형에 관한 이론에 기대어, 경험적 설화에 맞서는 허구적 설화의 측면을 강화시켜 나가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리라는 답을 상정해볼 수 있다. 이제와서 새삼 전통적 설화에로 회귀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만큼, 위의 3분법을 존중한다면, 경험적 설화에 새로운 옷을 입히는 방식을 제외하면, 사실 개방되어 있는 활로는 허구적 설화의 영역밖에 없는 셈이다. 허구적 설화에서 지배적인 것은, 쇼울즈와 켈로그의 설명에 따르면, 로맨틱한 충동과 교훈적인 충동이다. 이것은 경험적 설화가 주로 역사적 요소와 모방적 요소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과 대응한다. 지금까지 나는 소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관하여 다소 장황한 논의를 전개해 온 셈이거니와, 이문열의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를 대상으로 하여 씌어지는 이 글에서 이처럼 길게 원론적인 이야기를 펼친 것은, 바로 이 소설이야말로 위와 같은 일반론적 고찰에 빈틈없이 맞아들어가는 하나의 표본과 같은 작품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문열은 이 소설에서 하나의 패러디를 보여주는게, 여기서 패러디의 대상이 되고 있는 원래의 텍스트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20세기 한국의 역사 그 자체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음 두가지이니, 그 첫째는 역사를 하나의 텍스트로 간주했다는 점이요, 그 둘째는 역사를 패러디화함으로써 리얼리즘의 요건을 완전히 말살해버린 자리에서 자유분방한 상상의 무도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첫번째의 항목은 나중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두번째의 항목에만 관심을 집중시키자. 그래도 무방한 것이, 바로 이 두번째의 항목이야말로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라는 소설이 이 글의 앞부분에서 길게 이야기된 원론적인 내용과 얼마나 기막히게 잘 맞아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요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문열이 이 작품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갖가지 재미난 이야기들―고종이 백성들의 대표를 모아놓고 감동적인 연설을 한 다음 장력하게 자결했다든가, 우리 국민들이 25년 동안 영웅적인 전쟁을 벌인끝에 결국 일본을 내쫓았다든가, 전쟁 후 일본은 동서로 분단되었지만 우리나라는 국민들이 현명하게 행동한 덕분으로 그러한 불행을 미연에 막아냈다든가 하는 기발한 이야기들―은 많은 사람들이 소설에서 당연한 것으로 요구하는 리얼리즘의 기준을 철저히 무시한 것일 뿐 아니라, 그것 가체로서 리얼리즘의 규범에 대한 조소 혹은 풍자의 몸짓이 된다. 이처럼 과감한 무시 및 조소를 행함으로써 그는 소설이 지닌 자유의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한 가지 흥미로운 방식의 모델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여기에 이르러 분명히 우리의 소설문학은 의미있는 새로운 영토를 하나 더 점령했다고 말할 수 있거니와, 그 영토의 위치는 크게 보아 허구적 설화의 공간에 속하는 것임에 틀림었다. 그리고 이 영토확장의 작업을 가능케 한 원동력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상의 세계를 꿈꾸는 로맨스적 충동과 우리 모두에게 자신의 역사에 관한 반성의 계기를 부여하려는 교훈적 충동의 복합이었다고 이해하면 별로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쯤되고 보면,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라는 소설이 앞에서 거론된 일반론과 적절히 부합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입증된 것으로 간주해도 좋으리라.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이 소설이 기법의 차원에서 상당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닐 수 있는 근거의 일단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제는 다음 순서로 넘어가서, 앞서 우리가 언급을 유보해 두었던 문제, 즉 이 작품이 역사를 하나의 텍스트로 간주한 자리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문제를검토해보기로 하자. 이 문제와 관련하여 맨 먼저 떠올려 볼 수 있는 생각은 이문열이 역사 자체를 패러디가 가능한 한 권의 책과 같은 존재로 상정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 작가의 도저한 관념 편향성 내지 <텍스트 편향성>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내가 세계를 만난 것은 책 속에서이다.>라고 고백한 사르트르의 <말>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지나친 연상일까? 한데, 바로 이지점에서 시야를 조금 넓혀 생각해보면,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에서 나타나는 이같은 관념편향성 내지 텍스트 편향성이란, 반드시 이문열(혹은 사르트르)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라는 느낌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에서는 그것이 매우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는 것뿐이요, 좀더 낮은 정도에 있어서는, 그런 증세란 이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보편적으로 공유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은 추론이 만약 타당하다면,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는 우리 시대의 문화가 지닌 한 특징을 극단화시켜 선명하게 드러내준 사례로서 의의를 획득할 수도 있을 법하다. 한편, 이 작품이 역사를 하나의 텍스트로 간주하고 그것에 대해 과감한 패러디를 감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작품 내적인 차원에로 눈길을 돌려서 관찰해보면 서술자의 목소리가 엄청나게 큰 무게를 지니게 된다는 현상과 표리의 관계에 놓이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국의 현대사를 하나의 텍스트로 간주하고 그것을 대담하게 비틀어 버림으로써, 이 작품의 서술자는, 그 혼자의 힘으로 한국 현대사 전체와 맞서 싸우는 형국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서술자를 팽팽한 긴장으로 충만케 하며, 그것은 곧, 소설 속에서 서술자의 목소리가 놀랄만큼 큰 울림을 갖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과연 이 작품에서는 서술자의 목소리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으며, 그 결과, 독자는 단 한 사람의 작중인물도 뚜렷한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만나지 못하고 오로지 서술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만 시종할 수밖에 없다. 비유를 써서 얘기하자면, 이 소설의 독자에게는 눈이란 필요치 않고 오로지 귀만 있으면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귀도 그다지 민감한 것일 필요가 없다. 서술자의 목소리가 워낙 크고 분명해서 웬만큼 어두운 귀를 갖고도 그 말의 뜻을 다 알아들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말의 뜻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이 물음은, 표현을 바꾸어서 쓰자면, 이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세계관과 역사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된다. 한데 이 질문에 대하여는 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으니, 그 첫째는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 스스로가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은 찾아나가는 게 옳겠다는 것이고, 그 둘째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상당히 많은 수의 비평가들이 이미 여러 차례 이문열의 세계관에 대한 해명을 시도한 바 있는데 그러한 시도의 결과로 나온 이야기들을 근본적으로 뒤집거나 바꾸어놓을 만한 요소가 이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이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세계관 및 역사관에 대한 검토는 일차적으로 독자들 개개인의 주체적인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할 성질의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이문열에 대한 기본의 여러 평문들(특히 구모룡, 김윤식, 성민엽, 유종호 그리고 나의 것들)을 참조하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검토의 작업을 진행함에 있어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작품의 제1주인 <장려했느니, 우리 그 낙일>에 대한 성민엽의 비판적인 지적을 작가 자신이 바로 제2부인 <제1차 수복전쟁사>에서 인용하고 거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변을 제시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비평가와 작가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은 토론이 아주 특이하고 흥미로운 형태를 시범한 것으로 이해되거니와, 여기서 독자들은 이 작품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는 물론이요, 이문열이라는 작가의 성격에 대해서도 많은 시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