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세계명작산책 6권 지은이: F.스코트 피츠제랄드 출판사: 살림출판사 1 다시 찾아간 바빌론 "그런데, 캠벨씨는 어디에 갔어?" 하고 찰리는 물었다. "스위스로 떠났습니다. 캠벌씨는 상당히 몸이 나쁘답니다, 웨일즈씨." "그것 안됐군. 조지 하트는?" 하고 찰리는 물었다. "그럼 '방울새' 놈은 어디 가 있어?" "지난 주일엔 여기 계셨는데 요. 하여튼 그 양반의 친구되시는 세퍼씨는 파리에 계십니다." 일년 반 동안이나 묵혀둔 묵은 리스트에서 튀어나온 그야말로 귀에 익은 정다 운 이름이다. 찰리는 수첩에 주소를 적고는 주소가 적힌 종이를 찢어냈다. "세퍼씨를 만나거든 이걸 드리게. 내 동서의 주소야. 난 아직 호텔을 정하지 않아서 말이야." 그는 파리가 이처럼 몽땅 비어 있는 것을 알았어도 그다지 실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츠 호텔 바의 조용한 분위기는 그에게 이상야릇하고도 불길한 느낌마 저 주었다. 이곳의 바는 이미 미국식 바가 아니었다. 안에 들어서서 예절바르게 굴어야 하는 것이 미국의 바와는 딴판이었다. 이곳은 본래의 프랑스 바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택시에서 내리자, 보통 때 같으면 도어맨이 으레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히 돌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출입구에서 제복을 입은 보이와 시시더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바 안 의 조용한 분위기를 느꼈던 것이다. 복도를 지나 걸어가는 도중에도 한때는 떠들썩하게 시끄러ㅇ던 부인실에서, 싫증난 외마디 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바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옛날 버릇대 로 똑바로 앞을 내다보면서 20보 가량 파란 양탄자 위를 걸어나갔다. 그런 다음 발을 발판 위에 디디고 몸을 돌려 실내를 두루 살폈다. 그러자 한 쪽 구석의 신문 뒤에서 누군가 두 개의 눈을 쑤욱 내미는 것이 눈에 띄었을 뿐 이었다. 찰리는 급사장 폴을 찾았다. 폴은 한창 경기가 좋았던 시절에는 주문하 여 만든 자가용 차를 타고 출근했었다. 그런데 좀 괴팍스럽게도 가장 가까운 길 모퉁이에서 그는 내리곤했었다. 폴도 오늘 시골 집에 가고 없었다. 그래서 알릭 스가 그에게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해주어ㅆ. "이젠, 그만 됐어" 하고 찰리는 말했다. "요즘 좀 삼가고 있네."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 알릭스는 찬사를 던졌다. "이삼년 전만 하더라도 선생님 은 대단했으니 말입니다." "이대로 지켜나갈 테니 염려 마" 하고 찰리는 자신 있는 듯이 대답했다. "벌써 일년 반이 넘었어." "미국은 사정이 어떻습니까?" "요 몇 달 동안 미국엔 가지 않았어. 난 프라그에서 일하고 있어. 거기서 몇몇 상사의 대리점을 보고 있다네. 그런데 거기서는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알릭스는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조지 하트가 독신자 만찬회를 가졌던 그날 밤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가?" 하고 찰리는 물었다. "그런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클로드 페센덴은 어떻 게 됐지?" 알릭스는 비밀이라도 말하는 듯이 목청을 낮추었다. "그 사람은 파리에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들르지 않습니다. 폴이 용서하지 않지요. 외상이 삼만 프랑이나 된답니다. 술이고 점심이고 저녁이고 모두 외상으 로 달았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일년 이상이나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 로 지불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글쎄 부도수표를 주지 않았겠어요." 알릭스는 슬픈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런 멋있는 분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외상값이 늘어날대로 늘어났으 니 말입니다." 그는 두 손으로 부푼 사과 모양을 만들었다. 찰리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마구 지르며 한쪽 구석에 자리잡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건 말건 변함이 없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증 권값이 오르건 떨어지건, 사람들이 일자리가 있건 없건, 저들은 영원히 저렇단 말이야." 그는 이 장소에 압박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주사위를 가져오도록 하여, 알릭스를 상대로 술내기를 해ㅆ. "이곳에 오래 머무르실 작정인가요, 웨일즈씨?" "딸자식을 만나기 위해 한 사오 일 동안 있을 거야." "네! 따님이 계셨던가요?" 바같에서는 불타는 듯한 빨간색과 가스등불과 같은 파란색 및 우령을 연상케 하는 녹색 등 갖가지 색깔의 네온사인이 고요히 내리는 빗속을 물들이듯 비치고 있었다. 저녁 무렵의 거리는 붐비기 시작했고 술집의 불빛이 어렴풋이 빛나고 있었다. 카프시느 가의 모투이에서 그는 택시를 잡았다. 핑크빛에 비쳐진 콩코르드 광장 의 위용이 차창을 스쳐갔다. 이어 적막에 싸인 세느 강을 건너갔다. 찰리는 차를 오페라 관 정면에 펼쳐진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르프류 크랑의 처음 몇 절을 회상했다. 끝없이 울리고 있는 자동차의 경적소리를 제2제국의 나 팔소리라고 상상하며 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브렌타노 서점의 철문은 닫혀 있었다. 듀발에서는 깔금하며 소시민적인 느낌 이 드는 울타리 뒤에서,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파리에서는 값싼 음 식점에서 식사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대중식사는 다석 가지 요리로 4프 랑 50, 즉 18센트였고 이에 덧붙여 포도주가 따르는 식사였다. 그는 지금 색다른 이유에서, 그 값싼 음식들을 먹어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라 고 생각했다. 왼쪽 강가를 향해 달리자 갑자기 시골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는 마음 속 으로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 이 마을을 망가뜨리고 말았어. 그 사이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 마침 이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군. 그 동안 무엇이고 죄다 없어졌 고 나라는 것도 없어지고 말았어.' 그의 나이는 서른다섯 살, 미남자의 풍채였다. 아일랜드계의 표정이 풍부한 그 의 얼굴도 양미간에 생긴 깊은 주름 때문에 의젓하게 보였다. 팔라티느 가으 동서댁 벨을 눌렀을 땐 그의 얼굴 주름이 양쪽 눈살을 긴장케 할 만큼 깊어졌다. 그는 뱃속에서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긴장을 느꼈다. 문을 연 하년 뒤에서 아홉 살 먹은 사랑스런 계집아이가 뛰어나오더니 "아빠!" 하고 소 리지르면서, 물고기처럼 몸을 비틀며 그의 팔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아버 지으 한쪽 귀를 잡고 얼굴을 옆으로 돌리게 하고는, 그 볼에다 자기 볼을 갖다 댔다. "아! 귀여운 내 딸!" "오! 아빠, 아빠, 아빠, 아빠, 빠빠, 빠빠, 빠빠!" 소녀는 아버지를 이끌고 객실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사내아이 하나, 그리고 자 기 딸과 같은 나이의 계집애 하나, 그의 처형과 그녀의 남편, 이렇게 온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감격이나 혐오를 나타내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목청을 가드듬으면 서 마리온에게 인사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노리어에게 시선을 던진 채 변함없는 불신을 되도록 나타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표정은 매우 차가웠다. 남자끼리는 아주 친한 듯이 악수를 나누었으며 링컨 피터즈는 찰리의 어깨에 잠시 손을 얹기도 하였다. 방안은 훈훈하고 미국식 분위기가 감돌아 아늑했다. 어린애 셋은, 다른 방으로 통하는 장방형의, 노란 빛이 감도는 출입구를 들락날락하면서 사이좋게 뛰놀고 있었다. 난로불이 활활 타오르는 소리며 부엌에서의 프랑스 사라다운 활기찬 소리에도 오후6시의 즐거운 기분이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찰리의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몸뚱이 속에서 꼿꼿이 도사리고 있었다. 다만 그가 사가지고 온 인 형을 두 팔에 안고 이따금 그에게 다가오는 딸에게서 자신을 얻고 있을 뿐이었 다. "정말 참 좋지요" 하고 링컨의 물음에 대하여 그가 말했다. "전연 움직이지 않는 사업도 많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어느 때보다 잘되고 있 습니다. 나는 내달쯤 누이동생을 데리고 와 집안일을 맡길 생각입니다. 작년 수 입만 하더라도, 제가 돈을 갖고 있었을 때보다더 많았으니 말입니다. 아시겠지만 체코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자랑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림컨의 눈에 드 러난 희미한 반발의 빛을 보고 그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댁의 자년들은 참 훌륭합니다. 잘 자라고, 행실도 좋고" "우리는 오노리어도 착한 아이ㄹ라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마리온 피터즈가 부엌에서 되돌아왔다. 그녀는 두 눈에 늘 수심이 있는 키가 큰 여인이었으나 그래도 한때는 싱싱한 미국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찰리는 그녀가 아름답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으며 사람들이 그녀의 미모에 감 탄할 때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들 사이엔 본능적인 적대감이 끼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노리어를 만나보고 어떻게 느끼셨지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아주 훌륭합니다. 열 달 사이에 그처럼 크다니 참 놀랍군요 애들은 다 잘 자 라고 있는 것 같군요." "일년 동안 의사 신세를 한 번도 지지 않았지요. 파리로 돌아오니 느낌이 어떠 세요?" "미국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아서 기분이 매우 이상하군요" "나는 기뻐요" 하고 마리온은 열을 띠고 말했다. "지금은 적어도, 상점에 들어 가도 백만장자라고 생각되지 않거든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통 을 받아왔지만 지금은 휠씬 즐거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이 그래도 좋았죠" 하고 찰리는 말했 다. "우리는 일종의 왕족이었으니 말입니다. 거의 틀림없는, 일종의 마력을 지니 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오후 바에 갔더니..." 그는 실언한 것을 눈치채고 는 더듬거니리며, "아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없었어요" 하고 말했다. 그녀가 그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바는 이제 지긋지긋하지 않으세요?" "잠깐 들렀을 뿐입니다. 매일 오후에 한 잔씩 할 뿐이지, 그 이상은 하지 않습 니다." "저녁 식사 전에 칵테일 한 잔 어떻소?" 하고 링컨이 물었다. "언제나 오후에 한 잔 할 뿐입니다. 오늘은 벌써 했으니까." "앞으로도 쭉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게요" 하고 마리온은 말했다. 그녀의 싸늘한 말투에는 혐오감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찰리는 미소 를 지을 뿐 잠자코 있었다. 그에게도 더 큰 계획이 있었다. 그녀의 공격적인 태도가 오히려 그에게는 편했다. 그리고 그는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는 그들도 알고 있듯이 자기가 파 리로 오게 된 목적에 대해 그쪽에서 먼저 입을 열어주기를 바랐다. 저녁 식사 때 그는 오노리어가 자기를 많이 닮았는지 엄마를 많이 닮았는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부모를 파멸로 이끌게 했던 두 사람의 단점들을 이 아이가 닮지 않았다면 좋 ㅇㄹ 텐데. 그러자 이 아이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큰 물결처럼 그에게 밀려 왔다. 그애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믿고 있었다. 그는 한 세대를 단번에 뛰어넘어 인생 출발 시로 되돌아가 인가 본성을 영원히 가치있는 본질적인 존재로 다시 믿었으면 했 다. 그밖의 모든 것은 다 낡아빠져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저녁 식사 후 곧 자리를 떴으나 숙소로 되돌아가지는 않았다. 예전과는 다른, 더욱 맑고 총명한 눈으로 파리의 밤거리를 보고 싶었다. 카지노좌 보조의자권을 사서 초콜릿 빛깔의 환상을 자아내는 조세핀 베이커의 춤을 구경했다. 한 시간 후에 그는 그곳을 떠나 몽마르크르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서 피갈 르 가를 빠져 불랑슈 광장을 들어갔다. 어느새 비는 그쳤다. 카바레 앞에서 내리 는 야회복 차림의 사람이 두서넛 보였다. 그리고 거기서는 밤거리의 여인이 혼 자서, 혹은 짝을 지어 서성거리고 있었다. 흑인들도 많이 오가고 있었다. 그는 불빛이 환한 어느 문 앞을 지나갔다. 안에 서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귀에 익은 소리이기에 걸음을 멈추었다. 바 브리크토 프였다. 한때 그가 많은 시간과 많은 돈을 쓰고 이별을 고했던 바로 그 바였다. 거기서 몇 집 더 가자. 옛날의 미로히 장소였던 또 다른 집을 발견하고 그는 자 기도 모르게 목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갑자기 오케스트라가 연주되기 시작하더니 직 업적인 댄서 둘이 의자에서 발딱 일어서고 급자상이 그에게로 뛰어오며 "손님이 오십니다!" 하고 큰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는 얼른 몸을 피했다. '이런 데 가면 곤드레만드레가 되고 말걸!' 그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바 젤리의 문은 닫혀 있었다. 주위의 쓸슬하고 불결한 값싼 호텔들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블랑슈 가로 나가니 거리는 몹시 밝았고 사투리 섞인 프랑스어를 지껄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시인굴'이라는 바는 없어졌으나 '카페 천국'과 '카페 지옥'은 아직도 그 큰 입 을 벌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관광 버스에서 내린 보잘것없는 손님들 또한 들 이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독일인, 일본인 그리고 미국인 부부, 이부부는 놀란 눈 초리로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몽마르트르의 노력이고 창의성이라 한들 모두 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곳 은 그야말로 조악한 시설로 악덕과 낭비의 욕구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 기 '방탕'이라는 말이 듯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것은 엷은 공기 속으로 사라져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유에서 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한밤중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 사람의 마음이 느슨해져 차츰 동작이 둔해지 게 되고 그 대가로 지불하는 돈이 점점 더 많아진다. 그는 한 곡을 연주시키는 데 천 프랑을 오케스트라에 던져주었으며, 차를 잡 아다라고 문지기에게 백 프랑을 던져 주던 옛일을 회상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 나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무가치하게 낭비 한 돈이라도, 마음에 새겨둘 만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 그런데 그것은 현재도 늘 회상되는 그런 일을 잊어버리기 위해 운명의 신에게 바치는 공물이었다.- 자 기 손에서 어리아이를 빼앗아 버몬트의 무덤 속으로 도피하고만 자기 아내에 대 한 것이었다. 어느 맥주 홀의 번쩍이는 불빛 속에서 여인 하나가 그에게 말을 거넸다. 그는 여자에게 달걀과 커피를 사주고는 그녀의 유혹하는 듯한 눈추리를 피하면서 20 프랑 지폐 한 장을 던져주었다. 그런 수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로 향했다. 2 눈을 떠보니 맑은 가을날이었다. 축구하기에 안성맞춤인 그런 날씨였다. 어제 의 우울은 깨끗이 사라졌고, 거리를 오고가는 사람들에게도 호감이 갔다. 점심 때 그는 르 그랑 호텔의 식당에서 오노리어와 마주앉아 있었다. 샴페인 이 딸린 저녁 식사나, 낮 2시부터 시작하여 희마하게 흐린 황혼 무렵에야 끝아 는 긴 주식에 대한 화상하지 않을 수 있었던 곳은 그곳뿐이었다. "자, 야채는 어때? 야채도 좀 먹어야지." "네, 먹겠어요." "시금차, 캐비지, 당근, 그리고 콩이 있는데?" "캐비지를 먹겠어요." "두 가지를 ㄱ이 먹는 게 어때?" "점심엔 대개 한 가지만 먹어요." 급사는 유별나게 어린이를 좋아하는 척하고 있었다. "참 귀여운 따님이시군요. 말하는 것도 꼭 프랑스 소녀 같군요." "디저트는? 좀 있다가 할까?" 급사는 사라지고 없었다. 오노리어는 무엇을 기대하는 듯 아버지 얼굴을 바라 보았다. "이제부터 뭘 하나요?" "첫째는 상 토노레 가의 장난감 가게에 가서 네가 좋아하는 건 뭐든지 사주마. 그 다음 암피일좌의 보드빌 연극을 구경하러 가자." 오노리어는 말설였다. "보드빌은 좋지만 장난감 가게는 싫어요." "왜지?" "아빠가 이 인형을 가져왔잖아." 오노리어는 인형을 갖고 왔다. "이것 말고도 많이 가지고 있어요. 게다가 우린 이제 부자가 아니잖아요." "그거야 옛날에도 부자가 아니었지. 허나 오늘은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사 주마." "그럼 좋아요" 하고 오노리어는 체념한 듯이 동의했다. 오노리어에게 엄마와 프랑스인 유모가 있었을 때는, 그는 엄격함 편이었다. 그 러나 지금은 너그러워지려고 짐짓 애쓰고 있었다. 그는 딸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엄마 노릇을 겸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딸자식에 관한 일이라면 무었이든 다알고 있어야만 했다. "나는 당신하고 가까이 지내고 싶습니다." 하고 그는 정중히 말했다. "우선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프라그의 찰리J. 웨일즈라고 합니다." "참, 아빠도!" 오노리어의 목소리가 웃음으로 변했다. "당신 이름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하고 그는 계속해서 물었다. 그러자 오노 리어도 얼른 자기의 배역을 맡았다. "오노리어 웨일즈라고 합니다. 파리 팔라틴느입니다." "기혼이십니까, 미혼이십니까?" "아니,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미혼입니다." 그는 인형을 가리켰다. "하지만, 부인에겐 어린애가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듣자 오노리어는 자기 애가 아니라고 말하기가 싫었는지 인형을 가슴 에다 꼭 갖다대고는 재빨리 생각해서 말했다. "네, 전에 결혼했지만 지금은 아니 예요. 남편은 죽었습니다." 그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어린애 이름은 뭐라고 하지요?" "시몬느입니다. 학교서 제일 친한 친구의 이름을 땄어요." "그래, 네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한다니 참으로 기쁘다." "이번 달에는 3등 했어요" 하고 오노리어는 자랑하며 말했다. "엘시는..." 엘시 는 오노리어의 사촌이었다. "겨우 18등이고 리처드는 맨 꼴찌예요." "넌 리처드와 엘시를 좋아하지, 안 그래?" "그럼 좋아해요. 리처드는 정말 좋아요. 엘시도 싫지 않아요." 찰리는 조심스럽게 슬쩍 물었다. "그리고 마리온 숙모와 링컨 숙부 중에 누구 를 더 좋아하지?" "그거야 링컨 숙부지요." 그는 점점 더 오노리어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들이 들어올 때 "참 귀엽 지?"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었다. 지금은 또 옆 식탁에 앉아 있 는 사람들이 말을 멈추고는 오노리어에게로 물건이나 되는 것처럼 그녀를 물끄 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왜 우리는 같이 살지 않지요?" 하고 오노리어가 갑자기 물었다. "엄마가 안 계셔서 그래요?" "너는 여기에서 프랑스 말을 더 공부해야 해. 아빠는 너를 그렇게 잘 보살펴 주기란 어려울 테니까." "어제 보살펴주실 필요는 없어요. 혼자서 다할 수 있으니 말이에요." 음식점을 나오는데 어떤 남자와 여자가 뜻밖에도 그에게 소리르 질렀다. "야 웨일즈, 오래간만이군!" "야, 이거 로레인, 그리고단크 아냐?" 갑자기 나타난 과거의 망령이었다. 단칸 세퍼는 대학시절의 친구이고, 로레인 퀼우즈는 나이 서른의, 아름다운 금발 여인으로 3년 전에한 달을 하루처럼 방탕 하게 살았던 당시으 생활을 도와주었던 여러 벗들 중으 하나였다. "제 남편은 올해는 올 수 없었어요"하고 그녀는 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매달 이백 달러씩 보내주면서 그걸로 최저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하 지 않겠어요...이앤 댁으 따님이에요?" "되돌아가서 다시 앉는 게 어때?"하고 단칸이 물었다. "그건 불가능한데." 그는 사양할 구실이 생긴 것을 기뻐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로레인에게서 정열적이며 도발적인 매력을 느꼈지만 그때의 그의 기분은 여느때와는 달랐다. "그러면 저녁 식사라도?"하고 로레인이 물었다. "볼일이 있어요. 주소를 가르쳐주십시오. 내가 전화를 걸죠." "찰리, 당신 술을 끊었군요." 로레인은 분별 있게 말했다. "정말 술을 끊었나보 군요. ㄷ크, 정말 술을 끊었는지 한 번 시험해봐요." 찰리는 오노리어를 가리켰다. 그들은 함께 웃었다. "자네 주소는 어딘가?"하고 단칸이 의심하듯 물었다. 찰리는 호텔 이름을 댈 마음이 내키지 않아, 우물쭈물 망설이고 있었다. "아직 정하지 않았어, 내가 전화 거는 게 나을 거야. 우린 암피일좌의 보드빌 을 보러 가는 길이야." "그래요? 나도 그걸 보고 실어요"하고 로레인이 말했다. "광대니곡예사니 요술쟁이니 하는 걸 보고 싶어요, 네? 우리도 그렇게 하죠, 단 크." "우린 먼저 볼일을 봐야겠어요"하고 찰리는 말했다. "어쩌면 거기서 만나게 되 겠군." "그럼 좋아요. 잘 가요, 귀여운 아가씨." "안녕!" 오노리어는 깍듯이 고개르 끄덕여ㅆ. 어쨌든, 달갑지 않은 해후였다. 그들이 그를 좋아한 것은 그가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가 성실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를 만나보고 싶어 했던 것은 그들보다 생활력이 강했기 때문이었고, 그에게서 자신으 생계에 도움이 될 만한 무었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암피일좌에서 오노리어는 아버지가 외투를 접어 그위에 앉히려는 것을 한사코 거절했다. 오노리어느 이미 자기 나름의 규범을 지니, 하나의 인격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찰리는 오노리어라는 한 인간이 완전히 고정되어버리기 전에 조금이라 도 자신을 그애게게 각인시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러나 그토록 짧은 시간에 딸을 알려고 애쓴다는 것을 무모한 일이었다. 막간 휴식 시간에, 그들은 로비에서 단칸고 로레인을 만났다. 거기서는 밴드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한 잔 할까?" "좋아, 그러나 바에선 말고, 테이블에 앉기로 하지." "완벽한 아버지군." 로레인 이야기에 멍청히 귀를 기울이면서, 칠리는 오노리어가 자기네들 테이 블에서 시선을 떼는 것을 지켜보았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이까 하고 생각하면 서 방안을 헤매는 그녀의 눈길을 뒤따랐다. 그러다가 눈길이 서로 마주치자 오노리어는 방긋 웃음을 던졌다. "저 레몬수 참 맛이 좋았어요" 하고 오노리어는 말했다. 아까 뭐라고 말했지? 그때 그는 무엇을 기대했던가?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가 는 길에, 이렇게 생각하면서 딸의 머리가 자기 가슴에 닿게끔 딸을 그에게로 바 싹 끌어당겼다. "오노리어, 엄마 생각한 적 있니?" "그럼요, 때때로..."하고 오노리어는 희미하게 대답했다. "엄마를 잊어서는 안된다. 엄마 시진 갖고 있니?" "네, 갖고 있을 거예요. 하긴 마리온 아주머니도 갖고 있어요. 그런데왜 엄마를 잊지 말라는 거예요?" "엄마는 너를 지극히 사랑했으니까." "나도 엄마가 참 좋았어요." 그들은 잠시 잠자코 있었다. "아빠, 나는 아빠하고 같이 살고 싶어요" 하고 오노리어는 갑자기 말했다. 그의 가슴은 뛰었다. 그는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넌 정말 행복해요. 하지만 난 누구보다도 아빠가 더 좋아요. 그리고 아빠도 누구보다 나를 더 좋아하지 않아요? 엄마가 안 계시니까 말이에요." "그거야 물론이지. 그러나 오노리어, 네가 언제까지나 이 아빠를 제일 좋아하 지는 않을 거야, 자라서 네 나이 또래으 누구를 만나서 그 사람과 결혼 하게 될 거야. 그러면 아빠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게 될거야." "네. 그건 사실일 거예요"하고 그녀는 조용히 맞장구쳤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9시에 다시 오기로 하였다. 그때 이야 기해야 할 일에 대비하여 그는 몸과 마음을 싱싱하고 새로운 활기에 채우고 싶 었다. "집에 잘 들어갔으면 저 창문가에 잠깐 나오도록 해라." "네, 알았어요. 안녕히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어두운 길가에서 그는 기다렸다. 마침내 그녀으 모습이, 온통 훈훈하고 행복감 에 넘친 그녀의 모습이 2층 창문가에 나타났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키스를 보 냈다. 3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온은 커피 세 잔을 앞에다 두고, 위엄 있는 까만 예복을 입고 앉아 있었는데 그 옷은 상복과 좀 비슷한 것이었다. 링컨은 방안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는데, 아까부커 이야기를 계속한 사람 같은 그런 활기를 띠 고 있었다. 그들 부부는 찰리와 마찬가지로 어서 그 문제를 의논하고 싶었다. 그는 즉시 말문을 열었다. "제가 동서를 만나보고 싶어하는 용건에 대해선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제가 왜 파리에 왔는가, 그 이유를 말입니다." 마리온은 목걸이에 달려 있는 까만 별 모양의 장식품을 어루만지며 얼굴을 찌 푸렸다. "저는 이제 가정을 갖고 싶어서 못 견디겠습니다."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노리어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그애 엄마 대신에 오노리어를 맡아주 신 데 대해서는 참으로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는 잠깐 주저했으나 그 다음엔 더욱 힘 있게 말을 이었다. "저 에겐 사정이 그야말로 변했습니다. 이 점을 다시 잘 생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삼년 전의 나의 지독한 행위를 부정할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허나 이젠 다 끝났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년이 넘도록 술 은 하루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 한 잔도 일부러 마시고 있답니다. 머 릿속에서 알코올에 대한 생각이 너무 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 말 뜻을 아시겠지요?" "모르겠어요"하고 마리온은 잘라 말했다. "말하자면 아슬아슬한 재주를 부리고 있는 것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균형을 잡 으려 하는 것입니다." "난 알겠어" 하고 링컨이 말했다. "알코올에 특별한 매력이 있다는 걸 시인하 고 싶지 않다는 거지." "그런 것입니다. 때로는 잊어버리고 안 마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시려고 합니다. 하여튼, 제 입장에서는 술 마실 여유는 없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대리점 사람들은 지금까지 해온 제 일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벌링톤에서 누이동 생을 데리고 와 집안일을 돌보게 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오노리어도 꼭 데리고 갔으면 합니다. 물론 제 엄마와의 사이가 나빴을 때에도, 오노리어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도록 했습니다. 저 애가 나를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고, 게다가 내가 그애를 돌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는 한 대 얻어맞을 각오를 했다. 한두 시간은 계속될 것이고 쉽게 해결되지 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개심개과한 죄인의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하면서 그의 떨쳐버리기 힘든 원망의 감정을 조절해 간다면 결국에 가선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참아라, 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타일렀다. 자기를 정당화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오로리어와 함께 살 수만 있으면 된다. 링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난 달에 편지를 받았을 때부터 우리는 줄곧 이야 기해 왔어. 오노리어가 여기 있어서 우리는 행복하게 살고 있어. 그애는 참 귀엽 고 착한 아이고 우리도 그애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이 기쁘지만 물론 이런 것은 문제가 아니지." 마리온이 갑자기 말을 가로막았다. "찰리, 얼마 동안 술을 끊을 작정이죠?" 하고 그녀는 물었다. "영원히 끊을 생각입니다." "누가 그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내가 일을 그만두고 아무 할 일 없이 이곳에 올때까진 폭주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헬렌과 함께 여기저기..." "헬렌 이야기는 끄집어내지 말아요. 헬렌 이야기를 그렇게 하다니 차마 들을 수가 없군요." 그는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는 이들 자매가 누이동생 생 전에 얼마나 서로 사이좋게 지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술 마신 것도 기껏해야 일년 반밖에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이 곳에 와서부터 내가 망할 때까지 말입니다." "일년 반이면 충분하지." "네, 충분하지요" 하고 그도 동의했다. "나는 전적으로 헬렌에 대해서만 책임을 느끼고 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만일 그애가 살아 있다면 나더러 어떻게 하기를 원했을까 하는 것을 애써 생각 하고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그 끔찍스런 일을 저지른 그날 밤부터 당신 이라는 인간은 내겐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어쩔 수 없어요. 그 애는 내 동 생이니 말이에요." "네." "동생이 숨을 거둘 때 오노리어를 잘 봐달라고 내게 부탁했어요. 그때 당신이 요양원에 들어가 있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는 대꾸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헬렌이 우리 집 문을 두드린 그날 아침의 일을 평생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 흠뻑 비에 젖은 채 부들부들 떨면서 내ㅉ더라고 말하더군요." 찰리는 의자 다리를 움켜잡았다. 이처럼 난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구차한 설명을 늘어놓고 싶었다. "내가 헬렌을 내쫓았던 그날 밤은..." 하고 말을 꺼내자 "그런 얘긴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요!" 하고 그녀는 말 을 가로막아버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 다음 링컨이 입을 열었다. "우린 문제에서 벗어나고 잇어. 문제는 마리온이 오노리어의 법률상의 후견인 역할을 포기하고 오노리오 를 돌려달라는 거지. 그런데 문제의 요점은 우리 집 사람이 자네를 믿느냐 안 믿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는데." "나는 마리온을 조금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하고 찰리는 천천히 말했다. "그 러나 나를 백퍼센트 믿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삼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비난받 을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지요. 물론 인간인 이상 언제 또 나쁘게 될지 모를 일 이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너무 오래 기다리면 오노리어의 유년시절은 다 지나가 고 따라서 가정을 갖게 될 기회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는 고개 를 흔들며 말했다. "그러면 오노리어를 완전히 잃게 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음, 알았어." 하고 링컨이 말했다. "그러면 왜 그 전에 이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고 마리온이 물었다. "이따금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헬렌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죠. 내가 후견인을 두는 데 동의했을 땐 요양원에서 누워 있었는데다, 증 권파동으로 빈털터리가 되어 있었지 않습니까? 물론 내가 나쁜 짓을 한 것을 알 고 있고 헬렌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일이라면 무엇이건 동의 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지금은 직분을 다하고 있으며 품행도 제기랄, 지극히 단정하지요. 다만..." "내게 야비한 말은 제발 쓰지 말아요" 하고 마리온이 말했다. 찰리는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한 마디 한 마디에 그녀의 혐오감은 더 욱더 분명히 나타났다. 그녀는 인생에 대한 온갖 공포를 하나의 벽으로 만들어 세우고 그를 이 벽으로 몰아세웠다. 이런 사소한 비난이 아마 몇 시간 전에 요리사와의 무슨 문제에서 생긴 결과 인지 모른다. 찰리는 그 자신에 대한 적대감이 넘쳐 있는 이런 분위기 속에 오 노리어를 두고 간다는 것이 점점 더 불안해졌다. 이러한 적대감은 조만간 어떤 경우에는 말 끝에, 또 어떤 경우에는 머리를 흔드는 데서도 나타나고야 말 것이 다. 그리고 그러한 불신감은 오노리어 마음 속에 심어져, 지울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기분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가슴 속에 간직해 두 었다. 덕택에 그는 짐 하나를 덜게 되었다. 링컨이 마리온의 말이 어리석다는 것 을 깨닫고 그녀에게, 언제부터 '제기랄!' 이라는 말을 그토록 싫어했는가 하고 가 볍게 물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하고 찰리는 말했다. "이제는 오노리어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인 여자 가정교사를 간 라그로 같이 데리고 갈 작정입니다. 새 아파트를 빌리는 계약도 해놓았지요." 그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여기서 말을 멈추었다. 그의 수 입이 그들 수입의 두 배가 된다는 사실을 그들이 고요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리라 고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다. "그거야 우리보다는 당신 편이 그애에게 더 사치스럽게 해줄 수 있겠죠"하고 마리온은 말했다. "당신이 돈을 물쓰듯 쓰고 있을 때 우리는 십 프랑을 아끼며 살았으니 말이에요... 당신은 또 그렇게 하기 시작할 참이군요." "아니, 아닙니다." 하고 찰리는 말했다. "나도 배웠어요. 과거 십년 동안은 다른 사람들처럼 열심히 일해왔지요. 그러 다가 증권에서 한 몫 단단히 보았지요.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요." 오랜 침묵이 흘렀다. 모두 다 신경이 예민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찰리는 일년만에 처음으로 술을 마시고 싶었다. 이제 링컨피터즈도 그 에게 오노리어를 돌려주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는 확신했다. 갑자기 마리온이 온몸을 떨었다. 그녀는 이제는 찰리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녀 자신의 모성애는 찰리의 요구가 당연하다는 것을 인 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오랫동안 하나의 편견을 갖고 살아왔다. 그것은 동 새이 행복하지 않았다고 믿는 그릇된 감정에서 빚어진 편견이었다. 그리고 그 편견은 끔찍스런 하룻밤으 축격에서, 그에 대한 증오로 바뀌고 만 것이었다. 이 무든 일은 그녀 인생으 한 지점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때 그녀는 잦은 병치레와 역경에서 오는 절망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명백한 악행을 저지른 그를 뚜렷한 악인으로 낙인 찍는 것이 자신에게도 필요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어!" 하고 그녀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헬렌 의 죽음에 얼마만큼 책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당신으 양심으로 해결해 야 할 문제일 거예요." 고통이 전류처럼 온몸에 밀어닥쳤다. 그는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는 말을 중얼 거리면서 일순간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이어섰다. 그는 순간순간 이를 악물고 꾹 참았다. "잠깐 기다려요"하고 링컨은 불쾌한 듯이 말했다. "자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 "헬렌은 심장병으로 죽었어요."하고 찰리는 힘없이 대답했다. "그럼요. 심장병이지." 마리온은 그 말에 또 다른 무슨 뜻이 있는 것처럼 말했 다. 그런 다음 그녀는 격분이 가라앉자. 뒤이은 맥빠진 허전한 기분으로 찰리으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그가 어쨌든 이 사태를 지배하게 된 것을 깨달았 다. 그녀는 남편에게로 힐끗 시선을 던졌으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을 알 았다. 그러자 그 따위 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갑자기 패배를 자인해버리고 말았다. "좋을 대로 해요!" 의자에서 ㅂㄹ떡 이렁서면서 그녀는 소리쳤다. "그애는 당신 자식이니까. 나야 어디 방해할 사람이 되나요. 만일 내 자식이라 면 차라리 그앨 만나서..." 그녀는 간신히 자기를 억제하였다. "둘이서 결정해요.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기분이 좋지 않아 나는 가서 자겠어요." 그녀는 황급히 방을 뛰쳐나갔다. 잠시 후 링컨이 말했다. "오늘은 그 사람도 목소리는 거의 변명하는 듯했다. "여자란 한 번 생각이 뒤 틀리면 말이야." "물론 그렇죠." "이젠 괜찮을 거야. 이제는 자네가 그 앨 키울 수 있다는 걸 알았을 테니 말이 야. 그러니 우리들이 자네를 방해할 수 없는데다 오노리어도 방해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거야." "미안합니다." "마누라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가보는 게 낫겠군." ]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거리로 나왔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그러나 보나파르트 가를 지 나 강가로 걸어오자 기분이 나아졌다. 강가으 불빛을 받아 싱싱하게 보이는 세느 강을 건너자 기분이 매우 좋아졌 다. 그럼에도 방에 들어가서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헬ㄹ네의 환영이 그를 사 로잡았다. 그토록 사랑했던 헬렌, 그러나 마침내는 분별없이 서로으 사랑을 헐뜯 고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마리온이 그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 는 그 무서운 2월의 밤에도 사소한 말다툼이 여러 시간 계속되었다 플로리다에서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때 헬렌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 러자 그녀는 식탁에 앉아 있는 젊은 웨부에게 키스를 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뭐라고 지껄였던 것이다. 혼자서 집에 돌아온 그는 격분한 나머지 자물쇠를 채워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 그녀가 혼자서 돌아오리라고 어떻게 짐작이나 했으랴. 게다가 눈보라마저 불어와 택시를 잡을 수 없을 만큼 당황하여 슬리퍼를 신은 채 거리를 헤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이런 소동이 벌어진 후 그녀가 기적적을 폐렴은 면했으나 거기에 따른 끔찍스러운 일이 잇따라 일어났 다. 둘은 '화해를 했지만 그것은 종말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광경을 직접 자기 눈으로 보고 그것이 동생의 수많은 수난극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상상했던 마리온은 그 일을 결코 잊지 않았던 것 이다. 이렇게 그때 일은 되새기자 헬렌이 점점 몸 가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새벽 녘, 반수상태에 빠진 그는 부드럽게 다가오는 희부윰한 빛 속에서, 다시 그녀와 대화하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헬렌은 오노리어에 대해 그가 취한 태도는 완전히 옳다고 말하면서 오노리어 르 데리고 가서 같이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또 그가 훌륭하게 된 것이 기쁘다느니, 점점 더 나아지는 게 기쁜다느니, 하고 말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지극히 애정에 넘친 말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흰옷을 입은 채 그네를 타고 있었고 그네가 점점 더 빨리 흔들 렸으므로 마지막에는 그녀가 말하는 것을 전부 똑똑하게 들을 수가 없었다. 4 눈을 떴을 때 그는 행복한 기분이었다. 세계의 문이 다시 열렸던 것이다. 오노 리어와 자기 자신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미래를 그려보았다. 그러나 한때 헬렌 과 더불어 세웠던 갖가지 계획이 생각나, 그는 갑자기 슬퍼졌다. 헬렌인들 죽기를 계획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만이 중요하다. 일을 하고 누구 를 사랑하고, 그러자 너무 지나치게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너 무 밀접하게 결합됨으로써 아버지가 딸에게 혹은 어머니가 아들에게 해독을 끼 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에 세상에 나갔을 때, 어린이는 결혼 상대자에게 똑같은 맹목적인 애정을 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찾지 못하면 사랑과 인생에 등을 돌리고 말 것이다. 그날도 맑고 상쾌한 날이었다. 그는 링컨 피터즈가 근무하고 있는 은행으로 그를 찾아가 간라그로 떠날 때, 오노리어를 데리고 가도 좋은지를 물었다. 링컨 은 늦출 이유는 없다고 동의했다. 그러나 한 가지 일, 즉 법률상의 후견인 문제가 남아 있었다. 마리온은 얼마 동안은 좀더 그 권리를 가지고 싶어했다. 이번 일로 그녀는 정말 마음이 뒤숭숭 해 있었다. 앞으로 일년 더 자기 마음대로 사건을 처리할 수 있다고 느끼게 한 다면 일은 순조롭게 될 것이 아닌가, 찰리는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불 수 있는 자기 자식이 있기만 하면 그만이었기에 구태여 반대하지는 않았다. 다음은 가정교사으 문제였다. 찰리는 주선인의 어둠침침한 사무실에 앉아서 심술궂은 베아르느인과 건장하게 생긴 부르타느의 농민과 이야기 했으나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음 날 만날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그리폰 식당에서 링컨 피터즈와 점심을 같이 하면서 자기으 환희를 가 라앉히려고 애썼다. "세상에 자기 자식만한 것은 없는 법이요." 하고 링컨은 말했다. "그러나 마리온의 기분도 이해해주어야지." "제가 저기서 칠년간이나 열심히 일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있어요." 하고 찰리는 말했다. "다만 그 하룻밤 일만 기억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 한가지 있지" 하고 링컨은 좀 망설이며 말했다. "자네가 헬렌과 함께 돈을 물쓰듯 쓰면서 유럽을 쏘다니고 있을 때 우리는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지. 나야 재산하고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지. 보험이외에 무슨 일을 해볼 만큼 앞선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마리온도 거기엔 무슨 부당한 것이 있다고 느꼈을 것이야. 자네는 나중에 가서도 전혀 일하지 않고 점점 더 부자가 됐으니 말이 야." "돈이 들어온 것도 빨랐지만 나간 것도 빨랐지요." "그래, 대부분은 호텔보이니 색소폰 부는 사람이니 급사장이니 하는 따위의 사 람들의 손에 들어갔겠지. 그래, 이젠 큰 무도회는 끝난 거야.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그 형편 없었던 몇 해 동안 마리온이 어떤 기분에 있었던가, 그것을 설명 하기 위해서였어. 오늘 저녁 6시경 마리온이 너무 피곤하기 전에 잠깐 들러보지. 그 자리에서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지." 찰 리가 호텔에 도착하자 속달이 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어떤 사람을 찾기 위해 자기 주소를 남겨두고 온 호텔 리츠의 바에서 다시 보내온 것이었다. 친애하는 찰리씨에게 일전에 당신을 봤을 때 태도가 하도 이상하기에 내가 무슨 기분 나쁜 짓이라 도 했는가 하고 생각했답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나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 이에요. 사실 지난 일년 동안 당신을 너무 생각해왔기 때문에 이곳에 오면 만나 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늘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잇었답니다. 그 열광의 봄, 우린 정말 즐거운 때를 갖지 않았던가요. 당신가 둘이서 푸줏간의 삼륜차를 훔치던 밤도 있었고, 대통령을 만난다고 하여, 당신이 헌 중산모자의 테만 덮어쓰고 철 사 지팡이를 짚은 일도 있었잖아요. 요즘은 누구나 다 늙어보이지만 저는 조금 도 늙은 것 ㄷ지 않아요. 오는 그리운 옛정을 풀어보기 위해 좀 만나뵐 수 없을 까요. 지금은 간밤의 술로 골치가 몹시 아프지만 오후가 되면 기분이 좋아질 거 예요. 리츠의 댄스 홀에서 5시경에 기다리겠어요. 언제나 헌신적인 사랑을 바치는 로레인으로부터 그가 맨 처음 느낀 것은, 자신이 성숙한 나이에 실제로 훔친 삼륜차에 로레인 을 태워가지고 한밤중에서 새벽녘까지 에트왈르 광장을 돌아다녔던가 하는 무서 운 상념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한바탕의 악몽이었다. 헬렌을 내쫓았던 사건은 그ㅡ이 다 른 일상생활과는 조화되지 않앗다. 그러나 삼륜차 사건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 사건은 수많은 사건 중의 하나였다. 그러니 그처럼 전연 무책임한 상태에 이르기까지에는 유흥에 방탕한 생활이 몇 주일 아니 몇 달이나 계속 되었던 것일까. 그 당시 로레인이 자기 눈에 어떻게 비ㅊ던가를 머릿속에 그려보려고 했다. 참으로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헬렌은 아무 말하지 않았지만 그 일을 불쾌하게 여기고 있엇다. 어제 음식점에서 만났을 때의 로레인은 수수하고 퇴색하고 닳아 진 것같이 보였다. 그는 정말이지, 로레인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알릭스 가 그의 호텔 주소를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을 기뻐했다. 그 대신 오노리어 를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제 같이 보내게 될 일요일이며, 아침에 주고받을 인사말이며 밤에도 자기 집에 있어 어둠 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5시에 그는 택시를 타고 가서 피터즈네 식구들에게 줄 선물을 샀다. 매끈한 천으로 만든 인형과 한 상자들이의 로마 병정, 그리고 마리온에게는 꽃, 링컨에 게는 콤직한 린네르 손수건. 아파트에 도착해서 그는 마리온이 이 피치 못할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알앗다. 이제는 위협하는 외부인이라기보다는, 한 집안의 반항하는 식구인 양 그 를 맞이하였다. 오노리어도 아버지를 따라 가게 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러 자기의 지나친 행복감을 감추려고 하는 것을 보고 찰리는 기뻤 다.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을 때만, 작은 소리로 기쁨을 속삭였으며, 다른 아이 들과 함께 방을 빠져나가기 전에 "언제?" 하고 물었을 뿐이었다. 그는 마리온과 단둘이 잠시 방안에 남아 있게 되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대담 하게 이렇게 말했다. "집안 싸움이란 참으로 쓰라린 일이죠. 어떤 규칙에 따르지 못하니까 말이죠. 고통이나 상처하고는 다릅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피부가 갈라진 것과 같은 것이 죠. 그런데 붙이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잘 낫지 않아요. 이제부터는 서로 의좋게 지냈으면 합니다." "그러나 좀체 잊어버릴 수 없는 일이 있으니 말이에요"하고 마리온은 대답했 다. "문제는 신용 여부죠."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마리온은 얼마 있다가 "언제 그 앨 데리고 갈 생각이죠?"하고 물었다. "가정교사를 얻는 대로 곧 데리고 가겠소. 될 수 잇으면 모레쯤으로 생각했는 데요." "그건 안되요. 그 애 물건을 챙겨주어야죠. 그러니까 토요일 전에는 안되요." 그는 양보했다. 방으로 돌아온 링컨은 한 잔 들자고 그에게 말했다. "그러면 날마다 마시는 위스키를 마실까요?" 하고 그는 말했다. 방안 공기는 따뜻했다. 식구들이 나로가에 모여들어 정말 아늑한 가정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은 마음놓고 귀염 받고 있었으며 부모는 진지하게 조심해 서 보살피고 잇었다. 자기가 이곳에 찾아 온 것보다 더욱 중요한, 어린이들을 위 해 해줄 일이 있었다. 그와 마리온 사이의 긴장된 관계보다는 한 알의 약이 그 들에게는 더욱 중요했다. 그들은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성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틀에 박힌 듯한 은행 생활에 서 링컨을 끌어내기 위하여 자기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현관 벨이 오래도록 요란스럽게 울렸다. 하녀가 방안을 지나 복도를 따라 내 려갔다. 벨이 또 한 번 길게 울릴 즈음 문이 열렸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객실에 있는 세 사람은 누굴까 하고 얼굴을 쳐들었다. 리처드는 복도가 보이는 데까지 나갔다. 마리온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복도를 걸어오는 하녀 바로 뒤쪽에서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불 밑에 이른 그들은, 다름아닌 단칸과 로레인 이 었다. 그들은 쾌활하고 흥겨웠다. 크게 웃는 소리로 떠들석했다. 잠시 차리는 대경실 색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피터즈의 주소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도무지 알 수 가 없었다. "야!" 단칸은 찰리에게 망나니처럼 손가락을 뒤흔들었다. "야아!" 그들은 다시 떠나갈 듯이 한바탕 웃어댔다. 걱정이 앞서고 어쩌할 바를 모랐 던 찰리는 재빨리 그들과 악수를 나누고는 그들을 링컨과 마리온에게 소개했다. 마리온은 끄덕였을 뿐,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는 난로가로 한 발짝 물러섰다. 작은 딸이 그녀 옆에 서 있었다. 마리온은 그녀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런 침입을 당하자 난처하고 성가신 감정이 더해왔지만 찰리는 그들이 변명 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칸이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난 다음, 입을 열었 다. "자네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기 위해서 왔다네. 로레인이나 나나 자네가 주소를 알려주지 않는 그 따위 교활하고 빈틈없는 짓을 그만 두기 바라네." 찰리는 그들을 현관 쪽으로 내밀 듯이 바싹 다가갔다. "미안하지만 난 갈 수 없네. 어디로 간다고 얘길 하면, 반 시간 후에 내가 전 화 걸겠네." 이런 말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로레인은 갑자기 의자 근처에 주저앉더니 리처드에게 시선을 던지고는 "참 예쁘기도 하지. 이리 온, 얘야!" 하고 말햇다. 리처드는 자기 엄마를 힐끗 쳐다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로레인은 노골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면서 찰리에게로 돌아섰다. "식사하러 가요. 당신 형님도 뭐라 하지 않을 거예요. 통 만날 수가 있어야지. 내가 취했나?" "할 수 없어"하고 찰리는 딱 잘라 말했다. "둘이서 하게. 전화 걸 테니까." 그러자 그녀의 목소리는 단번에 불쾌한 어조를 띠게 되었다. "좋아요! 우린 갈 테야.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새벽 네 시에 우리 집 문을 두드렸을 때 말 예요. 그래도 깍듯이 술대접을 해주었지. 자, 가요 단크!" 그들은 성난 얼굴을 한 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복도를 따라 나갔다. "미안하네!" 하고 찰리는 말했다. "실례했어요!"하고 로레인은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그가 객실로 돌아가자 마리온은 아까 그대로 그냥 꼼짝않고 있었다. 다만 그 녀의 아들놈이 다른 팔에 안기어 있었다. 링컨은 여전히 오노리어를 좌우로 흔 드는 시계 추처럼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놈들!" 하고 찰리는 토해내듯이 말했다. "망할 놈들 같으니!" 아무도 이에 대꾸하지 않았다. 찰리는 안락의자에 주저ㅎ아 술잔을 집어들었 으나 다시 그것을 아래로 내려놓고 말했다. "이년이나 만나지 않았더니 모두들 신경만 무디어지고..." 그는 여기서 말을 끊 었다. 마리온이 화가 치밀어오른 듯, "오!" 하고 외마디 소리를 토해내듯이 질렀 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그에게로 등을 획 돌리더니 쏜살같이 방에서 나가버렸다. 링컨은 오노리어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자 너희들은 식당에 가서 수프를 먹도록 해라" 하고 말했다. 아이들이 나가자 그는 찰리에게 말했다. "마리온은 몸이 불편해. 쇼크를 받으면 견디지 못한다네. 그런 종류의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은 정말 앓게 된단 말이야." "내가 여기 오라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형님 이름을 누구한테서 들었던 모양입 니다. 그놈들이 일부러!" "그래, 정말 안 좋았어. 이번 일은 도뭉이 되지 않았어. 잠깐 실례하겠네." 혼자 남겨진 찰리는 긴장한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식당에서는 애들이 간단 히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식사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이미 어른들 사이에서 벌어진 소동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쪽 방에서는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수화기를 드는 소리도 들려 왔다. 찰리는 당황하여 소리가 들리지 않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금 지나자 링컨이 되돌아왔다. "이봐, 찰리, 오늘 저녁 만찬은 그만두는 게 좋겠군. 마리온의 몸이 불편하니까." "저에게 화를 내고 있어요?" "그렇지" 하고 거칠게 그는 말했다. "몸이 약하니까." "오노리어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는 말인가요?" "지금은 꽤 분개하고 있지. 글쎄 어떨지, 내일 은행으로 전화 걸어 주게." "그놈들이 여기 오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고 잘 말씀해주세요. 저도 화가 납니다." "지금 뭐라고 그 사람에게 말할 수는 없네." 찰리는 일어섰다. 그리고 외투와 모자를 들고 복도를 걸어내려갔다. 그런 다음 식당 문을 열고 낯선 목소리로 "얘들아 잘 있어!"하고 말했다. 오노리어는 일어서서 식탁을 돌아 달려와서는 그에게 매달렸다. "잘 있어, 오노리어!" 하고 그는 희미하게 말해ㅆ. 그리고 이번에는 애써 무엇 을 달래려고 하는 듯, 목소리를 더욱 부드럽게 하면서 "얘들아, 안녕, 잘 있어"하 고 말했다. 5 찰리는 로레인과 단칸을 찾아내겠다고 격분하며, 리츠 바로 곧장 달려갔다. 그 러나 그들은 그곳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그는 피터즈네 집에서는 술에 손도 대지 않았으나, 그곳에선 위스키 소다를 주문했다. 폴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크게 달라졌지요" 하고 그는 슬픈 듯이 말했다. "전의 반밖에 세월이 없으니 까요. 제가 아는 사람 중 미국에 돌아가서 아주 망한 사람이 매우 많아요. 아마 첫번째 파산에서가 아니고 그 다음 번에 망했던 것 같아요. 당신 친구이신 조지 하트, 그분도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당신도 미국에 가 있었던가요?" "아니, 나는 프라그에서 사업하고 있어." "당신도 그 파산에서 손해를 많이 보았다고 들었는데요." "그랬어" 하고 그는 쓸쓸히 덧붙였다. "그러나 내가 바랐던 것을 모조리 잃은 것은 경기가 좋았을 때였어." "현물 없이 팔았군요." "아 그런 거야." 또다시 그 당시의 추억이 악몽처럼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헬렌과 함께 여행할 때 만났던 사람들, 일렬로 늘어선 숫자를 셈할 줄도 모르 거나, 제대로 된 문장 하나 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 헬렌이 선상 파티에서 춤추 기를 승낙했는데도 식탁에서 10피트나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모욕했던 그 키 작 은 사나이, 술이나 마약으로 날카롭게 울부짖다가 술집에서 쫓겨나간 아낙네와 젊은 여자들........눈 속으로 아내를 내쫓은 사나이들, 그러나 1929년(전세계를 휩 쓴 대공황이 일어났던 해:역주)의 눈은 진짜 눈이 아니었다. 그것이 눈이기를 바 라지 않는다면 돈을 갖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전화 있는 데로 걸어가서 피터즈의 아파트로 전화를 걸었다. 링컨이 전 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것은 이 일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마리온이 무슨 결정적인 말을 했나요?" "마리온이 매우 아파" 하고 링컨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이번 일이 전적으로 자네 잘못만도 아닌 것을 알고 있네. 하지만 그런 일로 아내를 성가시게 할 수 는 없어. 한 반년쯤은 그냥 내버려두어야 하지 않을까? 나로선 아내를 또 이런 상태로 몰아넣을 수는 없어." "알았어요." "미안하네, 찰리." 그는 식탁으로 되돌아왔다. 위스키 잔은 비어 있었다. 그러나 아릭스가 그의 의향을 물어보는 듯이 그 빈 잔에 눈짓을 했을 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 제 오노리어에게 선물을 보내주는 일 이외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그래, 내일 여러 가지 물건을 보내주기로 하자. 그러한 것도 오로지 돈으로 해 결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오히려 화가 치밀어올랐다. 돈이라면 정말 신물나도 록 여러 사람에게 주어버렸던 그였다. "아니, 이젠 그만하지." 그는 다른 급사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계산 얼마지?" 언젠가 또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올 거야. 그들 역시 언제까지나 그에게 그 대 가로서 고통만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식을 데려가고 싶었다. 이것 이외에 이제 그에겐 아무런 낙도 없엇다. 그는 이제 수많은 훌륭한 생각이나 꿈 을 지닌 젊은이가 아니었다. 자신이 이처럼 외롭게 살아가는 것을 헬렌도 바라 지 않는다고 그는 확신했다. 불타버린 뒤의 적막감 온당한 독법이 되지 못할는지 모르지만 '다시 찾아간 바빌론'을 정감 있게 이 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작가 스코트 피츠제랄드의 삶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스코트 피츠제랄드의 생애는 그의 소설 이상으로 다채롭고도 극적인 데가 있 다. 그는 19세기 말 미국 미네소타주의 세인트 폴에서 태어났는데 대학 때부터 문필에 재능이 있어 주위의 인정을 받았고 교지의 편집자가 되기도 했다. 작가 로서 그의 극적인 삶은 동창생이며 '미네소타주 뿐만 아니라 이웃 다코타주를 합쳐 가장 아름다운' 젤다 세이어와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젤다 세이어는 처음 피츠제랄드의 재능과 외모에 반해 서로 사랑에 빠졌으나 끝내는 이름 없고 간난한 문학지망생에 불과한 그를 버리고 만다. 그로 인해 실 의에 빠진 피츠제랄드는 몇 주일간이나 위스키에 빠져 지내다가 분발하여 쓰게 되는 작품이 장편 '낙원의 이쪽'이다. 미국적 물질주의에 매혹과 환멸을 동시에 나타내는 자전적 성장소설로서 그것은 그의 처녀작이자 대표작이기도 하다. '낙원의 이쪽'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스물다섯 살의 그를 일약 미국문단의 총아로 만들고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그 같은 성공에 힘입어 잃어 버린 사랑을 되찾고 마침내 젤다 세이어와 결혼하게 된다. 이어 '위대한 게츠비' 로 명성을 확고히 한 그는 헤밍웨이 포크너 등과 함께 이른바 '잃어버린 세대 (Lost Generation)'의 한 사람으로 1920년대 미국의 낙관주의를 대표하게 된다. 서른도 안된 나이에 부와 명성을 거머쥐게 된 그는 아름다운 아내 젤다와 파 리로 옮겨앉아 그 모든 것을 탕진할 때까지 술과 파티로 세월을 보낸다. 그러다 가 방탕한 그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공군조종사와 연애를 하는 등 분방한 생활 을 즐기던 아내 젤다가 정신분열증으로 입원하고 그 자신도 자살미수를 겪는 등 돌이킬수 없는 파탄에 이르러서야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뒤 또 다른 그의 대표작 '바람은 부드러워라'로 재기를 기도하나 세상의 평 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 뒤 젤다와 이혼한 그는 알콜중독에 빠져 세월을 허비하다가 다시 깨어나 마지막 장편 '최후의 대군'에 착수하지만 끝내 탈고하지 못하고 마흔넷의 젊은 나이로 숨졌다. '다시 찾아간 바빌론'은 단편집 '기상나팔 소리에 술을 마시다'에 실려 있는 작 품으로 몇 가지 지엽적인 사실을 빼고는 파리에서의 경험을 그대로 서술했다고 할 정도로 자전적이다. 여기서는 미국적 물질주의에 매혹보다는 환멸을 더 짙게 드러내보이는데 그 또한 자신의 쓰라린 경험에 바탕한 것이라 보아도 좋다. 몽마르트르의 노력이고 창의성이라 한들 모두 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곳 은 그야말로 조악한 시설로 악덕과 낭빙의 욕구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 기 '방탕'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것은 엷은 공기 속으로 사라져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유에서 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구절은 이미 파리 시절의 어느 참담한 아침 그의 자성록 속에서 끄적 거려졌을 법하다. 한때 그는 고레스(페르샤의 키루스 대왕)처럼 영광된 도시 바빌론에 입성했으 나 방탕과 무절제로 모든 것을 탕진하고 추방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 겨우 정신을 차려 돌아와보니 바빌론은 환멸의 도시로 변하고 옛 영광은 오직 돌아보는 쓸쓸함만으로 남았다.-이러한 바탕위에서 이 작품을 읽어나간다면 주 인공에게 느끼는 연민과 애절함은 한층 더해질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다시 찾아간 바빌론'을 이 책의 앞머리에 싣기로 하면서 내 가 한 작품을 판단하는데 이른바 '전기적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나 걱정했다. 그러나 작품 그 자체로 보아도 이 단편은 한 전범으로 나무랄데가 없는 성취도 를 보여주고 있다. 간명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체와 섬세한 심리묘사가 그렇거니 와 전편을 흐르는 불타버린 뒤의 적막감과도 같은 애조는 작가에 관한 전기적 지식이 없는 이에게도 흔치 않은 감동으로 다가들 것이다. '다시 찾아간 바빌론'은 짧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피츠제랄드적인 작품이다. 그 자신의 각색에 의해 '내가 마지막 본 파리'라는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번 방영되었다. 귀향 롤라를 데리고 간 것은 잘못이었다. 자그마한 시골 정거장에서 기차를 내리자 나는 곧 그것을 깨달았다. 가을 저녁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린 시절이 더욱 기억되는 법이다. 헌데 롤 라의 짙게 환장한 얼굴도, 그날 밤을 위한 '짐'이 들어 있을 것같지 않은 자그마 한 우리의 가방도, 작은 운하 건너편에 있는 낡은 곡식 창고나 언덕 위의 불빛, 해 묵은 영화 광고 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롤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디 시골로 가요." 그러자 제일 먼저 내 머리 속에 또오른 것은 비숍헨드런이었다. 지금쯤 그곳 에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 는 것을, 그러나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늙은 짐꾼조차 기억에 떠올랐다. 나는 말했다. "입구에 사륜마차가 있을 거요." 택시 두 대를 보면서 정든 옛고장이 다가오는 구나 생각하는 사이에 처음에는 몰랐지만 사실 있기는 있었다. 날은 아주 어두웠다. 그리고 엷은 가을 안개, 물기 머금은 나뭇잎 내음, 운하 의 물은 아주 낯익은 것이었다. "하필 왜 여기를 택했어요? 섬뜩해요"하고 롤라가 말했다. 그러나 내게는 조금도 섬뜩하지가 않았다. 운하변의 모래둔덕(세살먹었을 때 나는 그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해변이라고 생각했다)이 변하지 않고 여전히 제자 리에 남아 있다는 것을 설명해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다. 나는 가방을 손에 들고(앞서도 말했거니와 그것은 가벼웠다. 그저 남에게 의젓 하게 보이도록 들고 나섰을 뿐이었다) 가자고 말했다. 자그마한 곱사등이 다리를 건너 우리는 양로원을 지나쳤다. 다섯 살 때 나는 한 중년 사내가 자살하려고 이곳에 뛰어드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사내는 손에 칼을 들고 있었고 이웃 사람 들이 층계까지 그를 뒤쫓아갔었다. "시골이 이런 줄은 몰랐어요" 하고 롤라가 말했다. 회색 석조 상자 같은 보기 흉한 양로원들이 있었는데, 다른 어떤 것보다도 나는 그것들을 잘 알고 있었다. 걸어가는 것이 사뭇 음악이라도 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롤라에게 무언가를 얘기해주어야 했다. 롤라가 이 고장에 어울리 지 않는 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학교를 지나고 교회를 지나서 우리는 예 전의 넓은 중심가에 이르렀다. 그러자 태어나서 최초ㄹ 12년간이 의식되었다. 내 가 만약 귀향하지 않았더라면 그 의식이 이렇게 강렬한 것인 줄은 알지 못했으 리라. 왜냐하면 그 열두해 동안은 나에게 있어 각별히 행복했던 시절도, 별나게 불행했던 시절도 아니었으니까. 분명 그것은 평범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이제 장 작불의 냄새, 까맣고 축축한 포석에서 솟아오르는 냉기에 접하자 나는 나를 떠 받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천진성의 냄새 였다. 나는 롤라에게 말했다. "괜찮은 여관이오. 우리를 깨어 있게 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요. 저녁을 먹 고 술이나 몇 잔 하고 잡시다." 그러나 혼자 있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것이 큰 탈이었다. 나는 그 동안 고향에 돌아와본 적이 없었다. 그 고장을 내가 얼마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가를 나 는 깨닫지 못했었다. 모래둔턱과 같이 오랫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들이 되 살아나서 비감과 향수를 자아내는 것이었다. 아무리 비참하다 해도 큰 꿈을 가 지고 잇기 마련인 시절에 대한 단서를 되찾으며 그 소읍을 왔다갔다 했더라면 나는 그 날 밤 우수의 가을철에 알맞게 지극히 행복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다 시 내가 고향에 돌아온다면 그때는 지금 같지는 않으리라. 왜냐하면 그땐 롤라 의 기억이 있을 테니까. 롤라는 내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로 그 전날 어 느 술집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ㅈ아졌을 뿐이었다. 롤라는 괜찮았다. 함께 하루 저녁으 ㄹ보내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갖가지 기억과 어울리지가 않았다. 우리는 차라리 메이든헤드에라도 갔더라면 좋았을 것이었다. 거기도 역시 시골이다. 여관은 내가 기억하던 바로 그 장소에 있지 않았다. 공회당이 있었다. 그리고 무어 양식의 둥근 지붕이 달린 새 영화관과 카페 한 채가 새로 들어서 있었다. 어린 시절엔 없었던 차고도 생겼다. 나는 또 좌측으로 가면 별장들이 있는 가 파로은 언덕으로 이르는 갈림길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땐 저 길이 분명 없었는데." 나는 말했다. "그때라니요?" 롤라가 물었다. "말하지 않았던가? 이곳이 내 출생지요." "날 이곳으로 데려와서 스릴이 있겠군요." 롤라가 말했다. "어렸을 때 당신은 이런 밤을 생각하곤 했겠지요." "그러믄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렇게 말한 것이 그녀의 허물은 아니었으니 까. 그녀는 괜찮았다. 그녀의 몸내도 마음에 들었다. 립스틱의 색깔도 좋았다. 내 게는 많은 비용이 들었다. 우선 롤라에게 5파운드 그리고 숙식비, 차비, 술값이 나갔다. 그러나 내 고향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돈을 잘 썼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 길 아래쪽에서 서성거렸다. 무엇인가 마음 속에서 꿈틀러리는 것이 있었다. 그때 만약 왁자지껄 떨들면서 언덕길을 내려와 서릿발이 선 가로 등의 불빛 속으로 들이닥친 한 떼의 어린아이들이 없었다면 난 옛일을 기억하지 못했 을 것이다.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 그들이 뿜는 입김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린 에를 가방을 메고 있었고 어떤 가방에는 이니셜이 수놓여져 있었다. 그들은 제 각기 성장을 하고 있었으며 약간 수줍어했다. 어린 소녀들은 마치 포위된 듯 빽 빽이 무리를 지어 몰려갔다. 머리의 리본과 잘 닦여 반짝이는 구두와 조용한 피 아노 소리가 생각났다. 순간 모든 것이 생생하게 가슴 속에 떠올랐다. 그들은 내 가 어린 시절에 그랬듯이 댄스교습을 받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언덕의 중턱, 만 병초가 심어져 있는 차도변 네모 반듯한 작은 집에서 교습을 받고 오는 것이리 라. '무엇인가가 그림 속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 어느 때보다도 롤라와 함께가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녀가 더욱 어울 리지 않게 생각되엇다. 그리고 머리 속이 고통으로 화끝거렸다. 우리는 술집에서 몇 잔 들이켰다. 그러나 저녁은 반 시간이 지나야 준다는 것 이었다. 나는 롤라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 거리에서 억지로 쏘다니고 싶지 않겠죠. 괜찮다면 나 혼자 한 십 분 가량 거닐면서 전에 알던 곳이나 둘러보겠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술집에는 롤라에게 술 한 잔을 몹시 사주고 싶어하는 학교 교사인 듯한 시골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하루 저녁을 보내기 위해 그녀와 함께 런던에서 내려온 나를 그가 몹시 부러워 하고 있음을 역력히 느낄 수가 있 었다. 나는 언덕을 올랐다. 초입엔 새로 지은 집들뿐이어ㅆ. 나는 화가 났다. 내가 기억해낼 수 있을 만한 터전이나 대문 같은 것들을 새 집들이 가리고 있었다. 그것은 호주머니 속에서 젖어버려 겹겹이 한데 붙어버린 지도 같았다. 펼쳐보았 자 채색이 다른 부분들이 모두 알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턱에 이르자 차도변의 그 집이 정말 있었다. 아마 그 노부인이 교습 을 하고 있으리라. 아이들이란 나이를 올려보는 법이다. 그러니 단시 부인의 나 이는 많아야 서른댓밖에 되지 않았으리라. 피아노 소리가 들려쌓다. 그녀는 똑같 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일곱 살 아래는 오후 6시부터 7시까지. 여덟 살에서 열세 살까지는 7시부터 8시까지. 나는 대문을 조금 열고 들어가보았다. 나는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어떻게 해서 기억이 났는지 모른다. 생각컨대 그것은 예전의 선율과 다른 피아 노 소리 때문이 아니라, 그저 가을과 냉기와 서리가 묻어 축축한 나뭇잎 탓이었 을 것이다. 유난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사람이 있듯이 나는 어린 소녀 생각이 났다. 소 녀는 나보다 한 살 위였다. 그때 막 여덟 살이 되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소 녀를 열렬히 사랑했다. 구후 그렇게 열렬히 사랑한 사람이 없었을 만큼. 적어도 나는 아이들의 사랑을 비웃는 실수를 범한 적이 없다. 만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아이들의 사랑에는 헤어지기 마련이라는 끔찍한 불가피성이 있다. 물론 소녀 앞에서 자신의 용기를 보이기 위해 불난 집이나 전쟁이나 결사적인 돌격 이야기르 꾸며댄다. 그러나 결혼 얘기는 꾸며대지 못한다. 누가 들려주지 않더라도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해 서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나는 생일 잔칫날 술래잡기놀이 때 소녀의 몸에 손으 대볼 구실을 얻기 위해 서 그녀를 잡으려고 무척 애썼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소녀를 붙잡지 못 했다. 소년는 번번이 내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해 겨울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나는 기회를 얻었다. 함께 댄스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해 겨울의 마지막 댄스 교습 시간에 내년부터는 상급반으로 반을 옮기게 된다고 소녀가 말 했을 때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그것 은 우리의 유일한 접촉이 끊어지는 것이었다. 소녀 또한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표현할 길을 찾지 못했다. 나는 늘 소녀으 생일 잔치에 갔었고 소녀도 내 생일 잔치에 들르곤 하였다. 그러나 댄스 교습이 끝난 후 우리는 함께 어울려서 집 으로 달려간 적이 없었다. 그랬다면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었다. 그럴 생각이 우 리에게 떠오르지 않았으리라. 나는 나대로 떠들썩하니 소녀들을 놀려댄ㄴ 사내 아이들 사이에 끼어야 했고, 소녀는 소녀대로 둘러싸인 채 밀리면서 앙칼진 노 여움의 소리를 지르는 소녀들 사이에 끼어 언덕을 내려갔던 것이다. 나는 안개 속에서 몸을 떨며 상의 깃을 세ㅇ다. 피아노는 오래된 C.B.코크란의 레뷔(대화, 무용, 노래를 섞은 시사 풍자극: 역주) 중의 무도곡을 치고 있었다. 그것은 마지막에 가서 기껏 롤라를 발견하기 위해 떠나온 긴 여행 같았다. 천진 성 속에는 끝내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이 있다. 한 여자와 재미가 업으 면 다른 여자를 사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때 내가 기껏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정열에 가득 찬 사연으 적어 그것을 대문으 목조 부분에 난 구멍(모든 것을 고 스란히 기억하게 된 것은 별난 일이었다.) 속에 살짝 밀어넣는 일이었다. 한 번은 소녀에게 그 구멍 얘기를 했다. 조만간에 소녀가 그 구멍속에 손가락 을 넣어 사연을 찾아보리라고 나는 믿었다. 그 사연이 어떤 것이었을 까 나는 궁금해졌다. 그만한 나이 때는 많은 것을 표현 하지 못하느 법이라고 나는 생각 했다. 그러나 표현이 충분치 못하다고해서 그때의 고통이 지금보다도 가벼운 것 은 아니었다. 그후 며칠 동안이나 구멍 속을 더듬어보면 여전히 사연이 들어 있 었다는 사실을 나는 기억해냈다. 그리고 댄스 교습이 끝났다. 그 이듬해 겨울에 가서는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대문을 나서면서 나는 그 구멍이 여전히 남아 있는가를 살폈다. 그것은 남아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계절고 세월로부터 안전한 그곳에 그때까지 종이조각이 남아 있었다. 나는 종이 조각을 끄집어내어 펼쳐보았다. 그리고 성냥 을 켰다. 안개와 어둠속에 조그만 열기의 불빛이 있었다. 꺼져가는 조그만 불빛 에 드러난 조잡한 춘화를 보는 것은 하나으 충격이었다. 틀림없었다. 한 쌍의 남 녀의 치졸하고 보정확한 그림 밑에는 내 이니셜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 그림은 입김이나 린네르 가방이나 축축한 나뭇잎 혹은 모래둔덕처 럼 많은 기억을 떠오르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림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외설스러운 나그네가 화장실 벽에다 그려 놓음직한 그림이었다. 내가 기억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수했고 강렬했고 고통스러웠던 당시의 정열뿐이었다. 처음 나는 배반당했다는 느낌을 어쩔 수 없었다. "결국"하고 나는 혼자말을 하 였다. "롤라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군 그래." 그러나 그날 밤 늦게 롤라가 나에게 들을 돌리고 짐들어버렸을 때 나는 그 그림의 깊은 천진성을 깨달았다. 그 당시엔 무엇인가 독특하고 아름다운 의미 를 가지고 있는 것을 그리고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 그림이 음란하게 보이게 된 것은 30년의 생애를 보낸 뒤의 일이었던 것이다. 작품해설 의미에 간섭하는 시간 혹은 천진성의 의미 기억은 시간의 파괴력에 저항하는 우리으 유일한 수단처럼 보인다. 어떤 기억 들은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이나 가치 때문에 특히 추억이란 이름으로 소중히 갈 무리되기도 한다. 그리햐여 세월이 많은 것을 변화시키고 사라지게 한 뒤에도 옛 그대로인 그것들을 그리움과 화한으로 되돌아보거나 축복처럼 즐긴다. 하지만 결국은 기억도 시간으 파괴력에서 벗어나는 수단은 못되며 추억은 더 욱 그러하다. 시간은 우리의 의식에 작용함으로써 그것이 받아들이는 사물의 의 미에도 간섭을 한다. 특히 추억처럼 주관에 많이 좌우되는 기억은 더 많은 간섭 을 받는다. 이 작품은 적당히 속인이 된 중년의 주인공이 30녀만에 어릴 적 살던 곳을 찾 아가서 겪는 아야기로, 전편을 흐르는 감회는 돌아보는 쓸쓸함이다. 그가 떠난 뒤에 흐름 사간은 고향의 많은 것을 사라지게 하고 바꾸어 놓았다. 돌아보는 그 의 쓸쓸함 속에는 사라지고 변한 그 모든 것들에게서 느끼는 상실감과 허전함도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사간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파괴되어가고 있는 자 신을 확인하는 서글픔이 더 커보인다. 시들어가는 육체에 야망과 이상을 상실한 정신, 성숙이란 말 속에 감추어진 타락, 현명이란 이름으로 단련된 영악 같은 것 들이 그에게서 진행되고 파괴의 내용일터이다. 그런데 고행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아이들이 댄스교습을 받는 관행으로 그는 그것에 관한 기억을 따라 자신의 옛 천진성을 추적해본다. 그때 좋아했던 소녀에게 보낸, 아이 적의 순수한 사랑을 표현했다고 믿는 자신 으 쪽지를 찾아보는 일이다. 뜻밖에도 그 쪽지에는 조잡한 춘화가 그려져 있었고 당혹한 그는 묘한 배신감 마저 느낀다. 하지만 그는 이내 깨닫게 된다. 그 춘화는 틀림없이 천진성으로 그 려진 것이며 변한 것은 다만 그 의미뿐이라는 걸. 시간의 파괴력은 사물의 의메 에마저 간섭한다는 걸. 원래 이 작품의 제목은 '천진한 아이"였고 작가도 감상적인 귀향 소설로서 보 다는 천진성의 의미를 파고드는 쪽에 작의을 모르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어 떤 이유에선지 번역과정에서 한 번 데복이 '귀향'으로 바뀐 뒤로 국네에서는 실 기하리만치 그 제목으로만 알려지고 귀향소설의 한 전범으로 취급되었다. 나는 한때 이 작품에게 원래의 제목을 찾아주고 '비틀기와 뒤집기'편에 집어 넣으까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검토하면서 나는 꼭 그래야 할 필요성 을 찾기 어려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천진성의 문제도 시간으 파괴력이 사물의 의미에 간섭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 작품이 여기 실려 안될 까닭은 없다. 거기 다가 전편을 흐르는 담담하면서도 절실한 감회는 틀림없이 잘된 귀향소설의 한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 그레이엄 그린은 무엇보다도 소설을 '노블'과 '엔터테인먼트'로 나누어 문 학적 진지함과 대중적 오락성을 각기 그 특성으로 삼고 자신의 작품에도 엄격히 적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 두 특성의 치명적인 불화 때문에 문학적으 로는 일생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죽기 전가지 거의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 로 거론되었으나 끝내 '위대한 비수상자'의 대열에 남고 말았다. 그린은 오스포드 대학에서 공부했고 한때는 공산주의에 경도되었으나 곧 가톨 릭으로 개종한 사상적 이력을 갖고 있다. 작품으로는 장편 '내부의 나' '스템블 특급' '권력과 영광' '사건의 핵심' '정사의 종말' '말없는 미국인' 등 깊이와 무게 를 아울러 지닌 대작들과 '밀사'를 비롯해 '공포성'등 대중의 인기를 끈 일련의 스럴러물에 '스물한 개의 단편들'이란 단편집도 남겼다. 자신의 구분과는 달리 그의 작품들은 노블 속에서도 스릴러적인 요소가 있고 엔터네인먼트에도 내면적인 깊이가 있어 어떤 이는 그를 '형이상학적 스릴러 작 가'로 규정짓기도 한다. 많은 작품들이 영화화되었는데 우리에게는 '제3의 사나 이'가 잘 알려져 있다. 진홍빛 커튼 아주 오래 전에, 서쪽에 있는 늪지대로 물새 사냥을 간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목적지까지 철도가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뤼에이으 성 교차로를 통과하 는 합승마차를 타야 했다. 그 당시 마차 안에는 나 외에 한 사람의 승객밖에 없 었는데, 그는 어느 면으로 보건 매우 눈길을 끄는 사람이었고, 사교계에서 자주 만났으므로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를 편의상 브라싸르 자작이라 부르도록 허용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그렇게 조심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으 랴! 파리의 사교계 인사라고 자칭하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의 진짜 이름이 무 언지 단번에 알아맞힐 텐데... 저녁 다섯 시경이었다. 먼지 자욱한 길 위로 쇠잔한 태양빛이 드리우고 있었 으며, 길 양편으로는 포플러나무들과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그 길 위를 네 마리의 건장한 말에 의지해 달려가고 있었다. 마부가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말들의 근육질 엉덩이가 들썩였다.-마부라는 존재! 그것은 바로 우리 인생의 상 징인 셈이니, 출발할 때 채찍을 너무 요란하게 휘두르는 법이다. 그 당시 브라싸르 자작은 이미 채찍을 휘두를 나이는 지나 있었다. 하지만 그 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더라도 괜찮다고 우기면서, 자기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주장하면서 죽어갈, 진짜 영국인 같은 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실제로 그는 영국에서 자랐다). 우리의 실제 삶에서건 혹은 책에서건, 경험도 없으며 어리석 음에 그득 찼지만 행복했던 그런 나이에서 벗어났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젊다 고 자부하는 존재에 대해 우리는 비웃음을 던지게 마련이다. 더욱이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보일 때는 그러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예컨대, 마치 수그러들 줄 모르고 끊임없이 한 인간을 고취시키는 자존심처럼, 그 자부 심이 당당하게 보일 때면, 그 자부심이 전혀 엉뚱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 자부심은 적어도 쓸데는 없다는 의미에서-,그것은 수많은 엉뚱한 짓이 아름 다운 것처럼 아름다운 법이다.`항복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근위대 정신이 워털루 전투에서 영웅적으로 나타났다면, 그 정신은 노쇠함을 마주하고 서도 여전히 그럴 것이므로, 노쇠함이란 총검 같은 것이 지닌 낭만성도 없이 우 리를 가격하는 적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건 군인정신이 형성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위털루 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사에 있어`절대로 항복은 안 한다`는 것이 절대 신조가 되는 법이다. 매사에 항복하는 법이 없었던 브라싸르 자작은(그는 그러고도 살아남았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충분히 알 만한 가치가 있으므로-뒤에 다시 이야기하겠 다),내가 마차에서 그를 만났던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이 마치 젊은 여자들처럼 가혹하게도, 그리고 무례하게도 `미남 노인`이라고 부르던 나이였다. 하지만, 나 이 문제에 있어서 의미없는 빈말이나 헛된 숫자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에 드러나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브라싸를 자작은 그냥 `미남`으 로 통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꽤나 알려져 있고 그들 중 열두어 명을 데릴라에게 머리를 잘린 삼손의 신세로 만들어버린 어느 후작부 인이, 브라싸르 자작의 콧수염 다발을-이상스럽게도 흘러간 시간에 비해 훨씬 누렇게 변한 그 콧수염 다발을-금색과 검정색의 바둑판 무늬가 있는 큼직한 팔 찌의 깊숙한 곳에 허영스럽게 지니고 다녔던 것이다. 다만, 나이가 들었건 아니 건 이 `미남`이라는 표현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경박하다거나 야위었다거나, 혹은 강팍하다는 인상을 떠올리지 않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는 우리 브라싸르 자작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을 테니까. 그는 정 신이나 태도, 용모 등 모든 면에 있어서 넓고 듬직했으며 통이 컸고 귀족적 여 유가 있었다. 브루멜(영국의 유명한 멋쟁이 귀족:역주)이 미치광이가 되는 모습 과 도르세(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장군:역주)가 죽어가는 것을 실제로 목격한 나로서도, 그는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댄디보다 가장 멋진 댄디였던 것이다. 정말로 브라싸르 자작은 댄디 그 자체였다. 그가 조금만 덜 댄디다웠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프랑스의 제독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제1제정 말 기의 가장 뛰어난 장교 중 한 사람이었다. 나는 자작이 속했던 연대의 동료들로 부터 그가 무라(프랑스 제독이면서 나폴리의 영주였던 인물:역주)와 마르몽(프랑 스의 유명한 제독:역주)을 합쳐 놓은 듯한, 누구보다 뛰어나고 용맹스런 인물이 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 정도의 용기를 지닌 존재라면-그 용기와 함께, 전투의 북소리가 울리지 않을 때면 아주 냉정하고 단호한 판단력까지 지녔으니- 단숨에 군대서열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놈의 댄디기질... 장교에게 적합한 자질이 댄디기질과 함께 섞여 있다고 생각해보라. 규율감각, 직무수행에 있어서의 규칙준수 등등 장교로서 필요한 자질 중 그 어 떤 것이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화약고처럼 폭발해버렸을 것이 다. 브라싸르 자작이 그의 생애에 있어 스무 번도 넘는 폭발의 위험을 무사히 넘기게 된 것은, 모든 댄디들이 그러하듯이 그가 행운아였기 때문이다. 마자랭 (프랑스의 재상:역주)이라도 그를 기용하려 했을 것이며, 그의 조카딸들도 그러 했을 것이다.-그 경우 물론, 그가 아주 잘 생겼다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겠지 만. 그는 일반인들보다는 군인에게 더 필요한 법인 바로 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 었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젊음도 없는 법이며, 군대란 프랑스의 젊음의 상징이 아니던가! 게다가, 여자들뿐만 아니라 분위기 자체를 사로잡아버리는 그 아름다 움만이 브라싸르 자작의 목숨을 보호해주는 유일한 방패는 아니었다. 내 생각에 는 그가 노르망디의 핏줄을 이어받았으며, 정복자 기욤므의 후예가 아닌가 한다. 하기야 그는 정복도 많이 했다. 나폴레옹 황제가 폐위된 후 그는 자연스레 부르 봉 왕실로 편입되었으며 백일천하 기간중에도 그들에게 놀랄 만큼 헌신적으로 충성을 바쳤다. 또한 부르봉 왕가가 다시 득권을 하자 그는 샤를르 10세에 의해 친히 셍 루이 기사로 서품되었다. 왕정복귀 기간 동안 미남 브라싸르 자작이 튈 르리궁의 보초를 설 때면, 한번도 어김없이, 앙굴렘 공작부인은 지나는 길에 상 냥한 한 마디 말을 던지곤 했다. 불행한 일을 겪은 뒤 친절한 마음과 행동을 잃 고 살던 그녀가, 그에게는 친절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왕비가 그를 특별히 총애하는 것을 보고, 장관은 이 사내를 진급시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 었을 것이다. 하지만 온 세상이 호의를 가지고 아무리 애써본들, 사열식 날, 군 대 복무상태에 대해 항의한답시고, 연대 병력이 사열해 있는 앞에서 감독관 코 앞에 칼을 들이미는 이 격정적인 댄디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었겠는가? 그를 군 법회의에 소환되지 않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던 것이다. 브라싸르 자작 은 어디에서건 태평스럽게 규율을 무시하는 행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전쟁터에 서만 장교기질이 온전하게 되살아날 뿐, 다른 곳에서는 전혀 군대의 규율에 복 종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체포되면 평생 영창신세를 질지도 모르는데도 몰래 부대를 이탈해 이웃 마을로 놀러갔다가, 열병식이나 사열식이 있는 날이 돼서야, 그것도 그를 따르는 부하가 알려준 덕택에 돌아오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상관의 입장에서라면, 기질상 온갖 종류의 규율과 틀에 박힌 일을 혐오하는 부하를 수 하에 두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겠지만, 반면에 그의 부하들은 그를 대단히 좋 아했다. 부하들에게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용감할 것, 섬세할 것, 멋을 낼 것, 그래서 옛날 프랑스 병사의 모습을 실현할 것, 이것이 그가 병사들에게 요구하 는 것의 전부였다. 그가 바라는 병사의 모습은 `열 시간의 휴가`라든지 프랑스의 오래된 샹송 속에 정확하게, 그리고 매력적인 이미지로 간직돼 있는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결투를 권장했는데, 그것 이 그들 내부에서 군인정신이 함양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정부가 아니다. 따라서 병사들이 용감하게 결투를 하더 라도 그들에게 훈장을 줄 수가 없다. 내가 줄 수 있는 훈장은 장갑, 가죽장비, 군대규율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장식품들뿐이다(그는 개인적으로 상당 히 부자였다)”라고 그는 말하곤 했다. 그래서, 그가 지휘하는 부대는 옷맵시에 있어, 이미 정평이 나있던 왕실보호대의 어떤 부대와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 는 그런 식으로 프랑스에서는 언제나 자부심과 치장으로 나타나게 마련인 군인 의 개성을 지나치리만치 부추겼다. 자부심과 치장은 언제까지나 큰 유혹이 될 수 있는 것이, 전자는 그 자체가 주는 분위기에 의해 후자는 남들의 부러위하는 눈초리에 의해 매력적이 되는 것이다.이쯤 되면 같은 연대에 속한 다른 부대원 들이 그의 부대원들을 부러워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부대원이 되기 위해, 또 그의 부대에서 나가지 않으려고 싸움이라도 벌어질 판이었다. 이상이 왕정복고하에서 브라싸르 대위가 누렸던 아주 특별한 위치에 대한 설 명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제정하에서처럼 영웅적인 행동으로 모든 것을 용서 받게 될 기회가 매일 아침 생기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의 동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만드는 내기와도 같은 그 불복종 행위가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었는지 예상하거나 알아맞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내걸 듯이 상관에게 대드는 도박 같은 행위였으니까. 때마침 1830년에 혁명이 일어나 동료들의 걱정을-만일 그들이 진짜 걱정을 하고 있었 다면-덜어 주었고, 매일매일 그를 위협하던 불명예 제대의 수치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삼일천하 동안 크게 부상을 입은 그는, 그가 경멸하던 오를레앙의 새 왕조하에서 계속 군복무하기를 거부했다. 7월 혁명이 일어나 오를레앙가가 스스 로 지킬 능력도 없는 나라의 주인이 되던 그 당시 우리의 대위께서는 병상에 누 위 있는 몸이었느데, 그가 허풍스럽게 떠벌린 바에 의하면, 베리 부인의 최후의 무도회에서 춤을 추다 발을 다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병상에서 전장의 북소리 를 듣자마자 그는 그대로 벌떡 일어나서 부대와 합류했다. 상처 때문에 군화를 신을 수 없어서 무도회에 나가는 차림 그대로 에나멜 구두에 비단 양말을 신은 채, 대로에 포진해 있는 적의 소탕임무를 띠고 바스티유 광장에서 근위대를 지 휘했던 것이다. 아직 바리케이트가 쳐지지 않은 파리는 음산하고 무시무시한 분 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햇빛이 수직으로 내리쬐고 있었 는데 마치 빗발치듯이 연이어질 총격을 예고하고 있는 듯했다. 덧창들은 꼭꼭 닫혀 있었지만 금방 죽음을 토해낼 것처럼 보였다. 브라싸르 대위는 병사들을 두 줄로 정렬시킨 후 정면에서 날아올 총탄세례를 피할 수 있게끔 가능한 한 집 에 바짝 붙어 있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그 어는 때보다도 댄디기질을 한껏 발휘하려는 듯 길 한복판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길 양편으로부터 발사되는 소총, 권총, 장총의 표적이 된 채로 바스티유 광장에서 리슐리외 거리까지 돌진했지만 그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넓은 가슴에 한 방의 총알도 맞지 않았다. 그것도 마치 무도회에서 제 가슴을 뽐내는 여인네처럼 당당하게 앞가슴을 내민 채였다. 그러다가 리슐리외 거리 모퉁이에 있는 프라스카티 도박장에 이르러 길 앞에 쳐 져 있는 첫번째 바리케이트를 치우게 하려고 병사들에게 모이라는 명령을 내리 는 순간 그는 그 굉장한 가슴에 총알을 맞고 말았다. 넓은 가슴에다, 양쪽 어깨 에서 반짝이는 은빛 장식끈 때문에, 그는 이중으로 좋은 표적이었던 것이다. 그 는 돌에 맞아 팔에도 부상을 입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바리케이트를 치우게 하 더니 사기충천한 부하들의 선두에 서서 마들렌느 성당까지 진격했다. 바로 그곳 에서, 폭동이 일어난 파리를 마차로 탈출하던 두 여인이, 돌더미 위에 피투성이 가 되어 누워 있는 근위대 장교 한 명을 발견하였는데-그 당시 마들렌느 성당은 아직 공사중이었다-, 그녀들은 그의 요구대로 그를 라귀즈 제독이 살고 있던 그 로 카이유까지 데려다주었고, 그는 제독에게 씩씩하게 말했다. “각하, 저는 이제 두어 시간밖에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두 시간 동안이라도 저를 아무 부대에나 배속시켜주십시오.” 그러나 대위가 잘못 생각 했다. 그에게는 두 시간 이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의 가슴을 관통한 총알은 치명적인 것이 아니였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다음의 일인데, 그때 그는 의사나 의학을 경멸하는 투로, 그놈의 의사가 상처에서 열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한 방울의 술도 마시지 말라고 했지만, 보르도 포도 주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자기 목숨은 어림도 없었다고, 마치 뽐내듯이 말했다. 마시는 일에 관한 한, 그는 또한 얼마나 대단하게 마셔댔는지! 매사에 댄디인 그는 다른 어떤 일에서도 그러하듯이 술마시는 법에서도 댄디였다. 말 그대로 그는 폴란드인처럼 마셔댔던 것이다. 그는 보헤미아 크리스털로 된 멋진 술잔을 특별히 만들게 했는데, 맙소사, 보르도 포도주 한 병이 몽땅 들어갈 만큼 큰 잔 이었으며, 그 잔을 가득 채워 단숨에 들이켰던 것이다. 술을 마신 후에는, 자기 는 매사에 이런 통큰 게 좋다고 덧붙이곤 했는데, 그건 사실이었다. 세월과 함께 힘이라는 것-그 어떤 모양의 것이건-이 계속해서 떨어지게 되며 아마도 우쭐댈 것이 없어지는 법인데, 그는 마치 바송피에르 제독(프랑스의 제독. 리슐리외에 의해 바스티유에 갇혔다가 석방되었음:역주)이 그러했듯이 계속 우쭐댔으며, 제 독처럼 포도주를 지니고 다녔다. 나는 그가 그 보헤미아 술잔으로 단번에 열두 잔의 술을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얼굴에는 술마신 기색이 전혀 나타나 지 않았다. 또한 나는 점잖은 사람들에게는 `미친 술자리` 취급을 당하던 회식자 리에서 그를 종종 만난 적이 있었는데 지독한 독주를 거푸 마셔댄 후에도, 그는 군인 특유의 폼을 잡으며 그의 표현처럼 `약간 얼큰한 상태`에 머물 뿐, 그 한도 를 넘어서는 적이 없었다. 그 상태에서 모자에 술병을 얹어 놓는 군인 특유의 행동까지 했던 것이다. 이제부터 여러분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위해서 나는 그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를 여러분에게 납득시키고 있는 중인데, 그렇다면 이 19세기의 `허풍선이`(16세기 식의 생생한 표현으로라면 그를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에게 동시에 일곱 명의 애인이 헌신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야겠다. 그 는 그 애인들을 시적으로 `하프의 칠현`이라고 불렀는데, 나는 그 자신의 부도덕 성을 이런 식의 음악적 표현으로 가볍게 넘겨버리는 태도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 다. 하지만 독자 여러분은 무엇을 원하는가? 브라싸르 자작 대위가, 내가 지금까 지 여러분에게 감히 묘사한 바 있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더라면 내 얘기는 시시 껄렁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여러분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마음먹지도 않았을 것이다. 뤼에이으 성 교차로에서 합승마차에 올랐을 때, 거기서 그를 만나게 되리라고 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서로 만난 지도 오래되었고, 동시대인이면서 다른 동 시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인물과 몇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 니 그를 만난 것이 더없이 즐거웠다. 브라싸르 자작은 설사 그가 프랑스와 1세 의 방위부대에 들어가 갑옷으로 중무장을 했더라도 왕실 근위대 장교의 날씬한 청색 예복을 입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을 인물로서, 그 맵시나 균형에 있어서 요즈음의 그 어떤 젊은이들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장엄 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빛을 발했던, 지는 해와 같은 그의 우아함은, 지금 막 수 평선에서 떠오르고 있는 초승달과 같은 젊은이들의 맵시를 창백하고 변변치 못 하게 보이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니콜라스 황제의 아름다움에 비견될 만큼 미남이었으며, 특히 체격에 있어서는 더욱이 그러했다. 하지만 얼굴모양은 황제보다는 덜 완벽했으며 옆모습도 보다 덜 그리스적이었는데, 그 얼굴에 짧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 수염이나 머리카락은 아직 검은색 그래로였는데 무슨 신비스런 생체조직 때문이었는지 혹은 화장술 덕분이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 었다. 그 턱수염은 남성적이며 생기가 있는 뺨 위쪽까지 덮고 있었다. 한없이 고 상하게 생긴 이마,-부드럽게 곡선이 진데다 주름 하나 없이 여인네들의 팔뚝처 럼 새하얀 그 이마, 그위에 근위병의 털모자를 쓰고 있어 모자처럼 머리칼을 약 간 늘어뜨린 모양새가 훨씬 넓고 당당하게 만들어 놓고 있는 그 이마 아래로는, 거무스름하고 짙푸르면서도 정성들여 세공한 사파이어처럼 쏘는 듯한 두 눈이 검은 동공 속에 숨어 있는 듯 박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눈은 애써 남을 유 심히 살피는 표정을 지을 필요도 없었다. 그냥 그 자체로 남을 꿰뚫는 시선이었 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수를 한 후 이야기를 나누었다. 브라싸르 대위는 천천히 이야기를 했는데, 그 목소리는 명령 한 마디로 샹트 마르스 광장을 채워버릴 만 큼 울림이 있었다. 이미 말한 대로 어린 시절 영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는 영 어로 생각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느리긴 해도 막힘이 없는 그의 말투는 그 가 하는 이야기, 그의 농담에 독특한 분위기를 주었다. 말이 나온 김에 얘기지만 그는 농담을 아주 즐겼고 그것도 진한 농담을 좋아했다. 그는 이른바 재미있는 이야기꾼이었다. 과부가 된 이래 검은색, 자주색, 희색의 세 가지 색깔만을 입던 F공작부인의 말에 의하면 브라싸르 대위는 언제나 정도를 넘어서는 경향이 있다 는 것이었다. 마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유리한 점은 할 말이 별로 없을 때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는 점이고 그래도 누구에게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살 롱에서라면 그런 자유가 없다. 할 이야기가 없어도 예의상 억지로 말을 해야 하 고, 바보들, 천성적으로 말이 없는 사람들이 무언가 말을 해서 남들로부터 주목 을 받으려고 애쓰는 그런 공허하고 권태스러운 대화 한가운데 있게 되면, 이 죄 없는 위선은 일종의 벌을 받고 있는 셈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공중 마차 안에 서라면 누구나 남의 집에 와 있는 듯이 처신할 수도 있고 제 집에 있는 듯이 처 신할 수도 있어서 아무 거리낌없이 제 마음대로 침묵에 젖어들 수도 있고 대화 를 하다가 몽상에 빠질 수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내 삶에서 부딪치는 우연 한 사건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미건조한 것뿐이었고, 그 옛날까지(벌써 그때가 옛 날이 되었구나)스무 번도 넘게 합승마차를 탔었지만-오늘날 수없이 기차에 오르 듯-재미있고 쾌활한 말상대를 좀체로 만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브라싸르 자작과 길을 가다 만난 사건들, 세세한 풍경, 우리가 전에 만났던 곳에 대한 추억들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날 이 기울어 그 어둠속의 적막이 우리를 감쌌다. 가을밤은 마치 하늘에서 땅으로 뚝 떨어지듯 재빨리 찾아와 차가운 기운으로 우리를 휘감는 법이다. 우리는 외 투를 뒤집어쓰고는 이마로 벽을 더듬어 여행자에게 베개구실을 할 만한 단단한 구석을 찾았다. 내 길동무가 저쪽 구석에서 잠이 들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었 지만,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길은 이미 수 차례 다녀본 바 있어 내게 별 흥미도 없었기에,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달려 가면서 마차가 나아감에 따라 어둠속에서 사라지는 바깥풍경에 대해서 나는 아 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 기나긴 길, 마부들이 이미 오래전에 잘 라버린 그들의 변발을 기념해서 자랑스럽게 `변발의 리본`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길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작은 여러 마을을 지나쳤다. 주위는 불꺼진 화덕처 럼 새까맣게 변했다. 그 어둠속에서 우리가 지나고 있는 마을은 이상한 형상을 하고 우리에게 다가와 마치 우리가 이 세상의 끝을 여행하고 있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여기에서 적고 있는 이런 식의 느낌은, 이미 사라져버린 사 물의 어떤 상태에 대한 마지막 인상과 마찬가지로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 며 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그런 감정이다. 지금이야 철도가 놓이 고 마을 입구에 역이 세워져, 길 밖으로 도망가는 파노라마 같은 길의 풍경을, 마을에서 역마를 갈아타느라 잠깐 쉬는 동안에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여행객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지나온 작은 마을들은 가로등이라는 그 뒤 늦은 사치도 드물게 설치되어 있어서 우리가 떠나온 길들보다도 어두웠다. 길에 서는 최소한 하늘이 넓게 열려 있었고 탁 트인 공간이 어렴풋한 빛을 줄 수 있 었지만, 마을에서는 마치 입맞추듯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좁은 길에 드리 워진 집들의 그림자, 그 지붕들 사이에서 겨우 눈에 보일듯말듯한 하늘과 별들 이 어우러져, 이 잠이 든 마을에 신비스런 분위기를 주고 있었다. 그 곳에서 만 날수 있는 사람이라야, 호롱불을 들고 여관 앞에 기다리고 있다가 교대할 말을 데리고 와 마구를 채우면서 드센 말 때문인지 넘치는 기운 때문인지 휘파람을 불거나 욕설을 내뱉는 소년뿐이었다. 그리고는 언제나 잠에 취한 목소리로 승객 이 던지는 영원히 변치 않을 질문이 있을 뿐. 그는 창문을 내리고, 고요한 밤공 기 때문에 더욱 크게 울리는 목소리로 “마부 영감, 도대체 여기가 어디요?”라 고 묻는 것이다. 그외에는 잠들어 있는 승객들로 가득 찬 마차, 잠들어 있는 마 을 주변이나 그 어디에서나 어떤 살아 있는 존재의 기척도 들리지 않았고 그 어 느 것고 보이지 않았다. 마차안에 혹시 나처럼 몽상가가 있어 창문을 통해 어둠 속에서 흐릿해진 건물의 윤곽을 더듬어본다거나, 밤은 단지 잠을 위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렇듯 단정하고 소박한 관습의 작은 마을에 이토록 늦은 시각까지 불이 켜진 창문이 있으면 그것을 향해 자신의 시선과 상념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모든 다른 존재가 피곤한 동물성의 침잠과도 같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그 어떤 인간존재가 밤샘을 하고 있다면,-그것이 비록 보초병의 밤샘일 지라도-그것은 언제나 그 무언가 엄숙한 기분을 주는 법이다. 그런데 불빛이 새 어나오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사람이 있어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 커튼이 내려진 창문 뒤에서 도대체 누가 밤을 새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경 우에는 바로 그 알 수 없음 때문에 현실의 시에 상상의 시가 덧붙여지게 된다. 적어도 나로서는 깊은 밤 잠들어 있는 마을을 지날때, 불이 켜져 있는 창문이라 도 발견하게 되면 그 불밝혀진 사각의 틀 속에서 생각의 나래를 펼치거나, 그 내밀한 커튼 뒤의 드라마를 상상해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 무수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내 머리 속에는 그 창문들이 영원히 남아 우수어린 빛을 발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생각에 잠겨 꿈 속에서 그 창문들을 다시 만나 게 되면 이렇게 묻곤 하는 것이다. “그 커튼 뒤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었을까?” 그렇다. 내기억 속에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창문 중의 하나는(금방 여러분은 그 이유를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그날 밤 지났던 어떤 마을 길의 창문이다. 그 창문은 우리가 역마를 바꾼 호텔에서 세번째 집의 창문이다-내 기억이 매우 정 확하다-그런데 그 창문은 다른 간단한 역마 교대시간보다는 좀더 여유 있는 시 간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가 탄 마차의 바퀴 하나가 고장이 나서 수 선공을 깨우러 가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잠든 시골 마을에서 수선 공을 깨워일으키는 일, 그 노선의 경쟁상대조차 없는 마차의 나사를 조이도록 만드는 일은 몇 분만에 해낼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선공이 마차승객만 큼 잠이 들어 있어도 그를 깨우는 일은 쉽지 않았을 테니까... 내 자리에서 들으 니 마차 안에서 승객들이 코 고는 소리만 들릴 뿐 흔히 그러하듯이 좌석에서 내 려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본래 마차승객들은 마차가 멈추자마자, 자신이 마 차에 얼마나 재빨리 올라설 수 있는가 하는 솜씨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듯 마 차에서 내리는 법이건만(허영이라는 것이 프랑스에 그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 마차 좌석에서까지 그러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가 멈추어선 호텔이 잠겨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누구도 밤참을 들지 않 았다. 그 전에 역마를 바꿀 때 밤참을 먹었던 것이다. 호텔도 우리처럼 잠에 빠 져 있었다. 살아 있는 흔적을 보여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깊은 침묵을 깨뜨 리는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정문이 열려 있는 이 침묵의 호텔 큰뜰에서 누군가가(남자인지, 혹은 여자인지... 너무 어두운 밤이라서 알 수 없었 다) 내는 단조롭고 지친 듯한 비질 소리를 제외하고는. 그 질질 끄는 비질 소리 조차도 잠자고 있는 듯한 느낌, 혹은 최소한 졸려 죽겠다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호텔의 정면은 거리의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검은색이었으며, 그 집들 중에 딱 한 집 창문에서만 불빛이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 내 기억 속에 새겨져, 언제나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창문은 바로 그 창문이다! 2층만으로 된, 그러나 꽤 높은데 위치한 그 큰 집, 그 집에서 나는 불빛은 반짝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중의 진홍빛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불빛은 그 커튼을 통과해 희 미하고 신비스럽게 비추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싸르 자작이 혼자말을 하듯 말했다. “거 참 신기한 일이야! 여전히 똑같은 커튼인 것 같으니...” 나는, 이 컴컴한 마차 안에서 마치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기라도 한듯이 그에 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말과 길을 밝히라고 켜 놓은 마부석 밑의 등잔불도 방금 꺼져버린 참이었다. 나는 그가 잠이 들어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잠을 자지 않았고 나와 마찬가지로 그창문이 주는 분위기에 젖어 있는 듯했다. 게다 가 나보다 한 술 더 떠서 그 창문의 분위기에 얽힌 내막까지 알고 있는 듯했으 니! 그런데 그런 식의 말투-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우리의 브라싸 르 자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어서 나는 너무나 놀랐다. 나는 그의 얼굴 표정을 살펴보고 싶은 호기심이 일어 담뱃불을 붙이려는 척하고 성냥을 그었다. 성냥의 푸르스름한 불빛이 어둠을 갈랐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죽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죽음 그 자체의 낯빛이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창백해진 걸까? 그 독특한 분위기의 창문, 평상시에는 결코 얼굴이 창백해지는 법이 없는 다혈질의 사내, 더러 감정이 격해지면 머리끝까지 빨갛게 되는 이 사내의 창백해진 얼굴, 마차 안 좁은 공간에 가만히 앉은 내 팔 에 명백히 전해져오는 건장한 몸의 떨림, 그 모든 것에 이야기 사냥꾼인 나 같 은 사람이 그 진상을 밝혀내야 할 그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 대위님께서도 저 창을 보고 계셨나요? 게다가 안면도 있으시구요” 라고 내가 말했다. 대답엔 관심도 없다는 둣이 심드렁한 말투였지만 실은 호기 심을 감추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이지, 알고말고”라고, 윤기 있고 맑은 평상시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 답했다. 그 어떤 댄디보다 절도 있고 위엄이 있는 이 댄디에게 벌써 평온이 찾아온 것 이었다. 댄디라면, 여러분도 알다시피 모든 격정은 저열한 것으로 경멸하며, 멍 청이 괴테처럼 잘 놀라는 짓은 인간정신에 있어 결코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고 믿는 법이다. 브라싸르 자작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나는 이곳을 자주 지나다니지는 않아요. 게다가 일부러 피하기까지 하지. 하 지만 누구에게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오. 많지는 않지만 있기는 있지. 내게도 그런 일이 세가지 있소. 처음 입었던 군복, 처음 참가했던 전투, 처 음 관계했던 여자. 그리고 저창문은 내가 잊을 수 없는 네번째 일인 셈이지.” 그는 말을 멈추고 눈앞의 창문을 내렸다. 예의 그 창문을 더 잘 보기 위해서 였을까? 마부는 수리공을 부르러간 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갈아맬 말도 늦었 는지 아직 역참으로부터 도착하지 않았다. 우리를 끌고 온 말들은 아직 마차에 묶인 채, 피로에 지친 듯 머리를 다리 사이에 떨구고, 마구간에 가서 편히 쉬고 싶다는 재촉의 발길질도 않은 채로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우리의 마차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이야기 속에서처럼, 요정의 지팡이에 의해 숲속의 빈터 교차로에서 마술에 걸려 꼼짝도 못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말했다. “상상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저 창문에 표정이 있다고 할 만 하겠어요. ” “당신에게야 어떨지 모르지만 내게야 그 무언가가 있지요. 저 창문은, 내가 처음으로 배속받았을 때 살던 방의 창문이라오. 저기 살았었지...맙소사! 벌써 35 년 전이구만. 저 커튼 뒤... 그토록 세월이 흘렀건만 하나도 변하지 않은 듯하다 니. 게다가, 저렇게, 그때와 다름없이 저렇게 불이 켜져 있다니...” 그는 다시 말을 멈추었다. 생각을 억누르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려 애썼다. “대위님, 대위님의 소위시절이요? 작전 연구하느라 밤샘을 하시던 그때 말씀 인가요?” “무슨 치켜세우는 소리. 당시 소위였던 건 사실이었지만 작전 때문에 밤을 새운 건 아니었지. 내가 그 때아닌 시각에 불을 켜 놓은 건-규칙적인 생활을 하 는 사람들은 아마 그렇게 말하겠지-삭스제독의 전술책을 읽기 위해서도 아니고. ” “하지만, 그건 아마, 삭스 제독의 흉내를 내려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 라고 나는 라켓으로 공을 받아치듯이 재빨리 말했다. 그가 되받아넘겼다. “아, 내가 삭스 제독의 흉내를 내려했던 것은 그때가 아니요. 그건 훨씬 뒤의 일이지. 그 당시라야 나는 신출내기 소위일 뿐이었지. 군복을 입고 한껏 멋을 부 렸지만 여자들 앞에서는 어색한데다, 수줍기만 했어. 아마 내 생김새 때문인지 여자들이 절대로 믿어주질 않았지만. 여자들에게 내 수줍음 때문에 이득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게다가 그 좋은 시절, 난 아직 열일곱 살밖엔 되지 않았 었지. 그때 군사학교를 졸업했어요. 지금 같으면 군사학교에 입학할 나이에 그 당시에는 졸업을 시켰으니까. 사람을 물쓰듯하던 나폴레옹의 재위가 계속되었다 면 아마 열두 살짜리 병사도 생기고 말았을 거요. 이슬람왕의 어린 종녀들같이... ” `황제니, 종녀니 하는 얘기를 시작하면 건질 게 없을 텐데`라고 나는 생각했 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어쨌건, 대위님. 저 위에서 빛나고 있는 저 창문에 대해 대위님이 지금 그 어떤 추억을 간직하고 계시다면, 그건 저 커튼 뒤에 어떤 여자가 있었기 때문일 것 같은데요. 어떤가요. 내기를 걸까요?” “당신이 내기에 이긴 셈이요.” 그가 무게 있게 말했다. “아 그랬군요. 틀림없이 그런 줄 알았습니다. 당신 같은 분이, 당신이 첫번째 로 주둔을 한 이래 열 번 이상은 지내보지 않았을 이런 작은 마을에서, 어둠속 에서 지금 저렇게 반짝이고 있는 한 집의 창문에 몰두하게 된다는 것은, 포위공 격을 해서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든 손에 넣은 여성이 있었다는 얘기 외엔 다른 사연이 없을 줄...” “무슨 포위를 했던 건 아니고, 적어도 군사적으로는”이라고 그는 여전히 무 게 있게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 무게를 잡는다는 것은 바로 그가 농담을 한다는 신호인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그렇게 쉽게 항복해버리는 것도 포위작전이라고 말할 수있나? 어쨌 든 사다리를 이용해서건 아니건 여자를 정복한다는 것은, 이미 얘기한 대로, 당 시의 나로서는 능력 밖의 일이었소. 그러니 거기서 포로가 된 것은 여자가 아니 라, 바로 나였다오.” 나는 그에게 인사를 했다. 어두운 마차 안에서 대위의 눈에 뜨였을까? “드디어 베르콥줌(네덜란드의 도시. 프랑스 군대가 점령할 때 오랫동안 포위 공격한 것으로 유명하다:역주)을 정복한 셈이군요”라고 나는 말했다. 그가 덧붙 였다. “열일곱 살의 소위를 도저히 함락시키기 어려운 예지와 절제로 무장된 베르 콥줌에 비유할 수 있겠소.” “그렇댜면 보디발(성서에서 죠세프를 유혹했던 여인:역주) 부인이거나 그 딸 이거나”라고 내가 장난기 섞인 투로 말했다. 그러자 그가 “딸이었지요”라고 익살스런 투로 사람좋게 말했다. “대위님의 그 수많은 아가씨들 중의 하나란 말이죠. 단지 여기서는 죠세프가 군인이었고, 도망치지 않았다는 게 다를 뿐...” 그러자 그가 냉정하게 반박했다. “아뇨, 완전히 줄행랑을 쳤지. 너무 늦긴 했지만, 공포에 질려서! 저 네이 원 수가 `한 번도 겁을 먹어본 적이 없다는 저 장 프...한 자가 도대체 누구야`라고 말한 것을 내 두 귀로 들은 적이 있는데, 그가 그런 말을 할 만하다는 것이 이 해될 만한 그런 공포였었지. 그리고 고백컨데, 그만한 인물도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고 내게 많이 위안이 되었소.” “대위님께서 그런 감정을 겪으셨다니 정말로 재미있는 이야기이겠는데요.” 그러자 그가 갑자기 내 말을 받았다. “그렇구말구. 당신이 흥미가 있다면 그 이야기를 해줄 수 있어요. 강철판 위 의 염산처럼 내 인생을 갉아먹었으며, 내 방탕한 쾌락적 삶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검은 얼룩으로 남아 있던 그 사건에 대해서... 아, 방탕한 삶이 언제나 이롭 지만은 않은가 보오...” 그 말을 듣자 그리스 범선처럼 구리로 씌워져 있다고 내가 믿은 그의 낙천성 속에서 그 무언가 가슴을 저미는 우수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열었던 창문을 다시 닫았다. 마치, 버려진 채 꼼짝 않고 있는 마 차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건만, 그의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 그가 할 이야기 를 바깥의 누군가가 들을까봐 두려워하는 듯오했고, 호텔의 앞마당의 포도 위를 무겁게 오가는 규칙적인 비질 소리가 그의 이야기를, 홀로, 주위깊게, 그 소리의 자그마한 기색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진홍색 커튼이 쳐진 채 여전히 매혹 적인 불빛이 흘러나오는 창문, 대위가 이제 이야기를 펼쳐나갈 그 창문에 두 눈 을 고정시킨 채.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군사학교를 졸업한 몸이었소. 일반 전투보 병 연대의 소위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독일전선으로 떠나라는 명령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부대였지요. 황제는 그때 보통 1813년의 전쟁이라고 불리우는 전 쟁을 치르고 있었지요. 임지인,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마을로 합류하기 전에 시골 구석에 사는 노부와 잠깐 껴안고 인사를 나눌 시간밖에는 없었어요. 이 작은 마 을은 인구라야 기껏 천여 명 정도였고 주둔 부대도 2개 대대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두 대대는 이웃 마을에 주둔하고 있었구요. 당신이야 당신이 사는 서부로 돌아갈 때 잠깐 지나치는 것이 고작인 이 마을, 이런 마을에 살아야 한다는 것 이 어떤 것인지, 혹은 최소한 30년 전에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 습니까. 그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전쟁의 집행자라고 믿고 있는 그 우연이라 는 놈이 하필이면 제일 고약한 곳을 내 첫 주둔지로 골라주다니! 제기랄! 참으로 멋대가리 없는 곳! 그 이후 그 어떤 곳에서도 여기만큼 음산하고 지겨운 주둔지 는 경험한 적이 없으니까. 단지 나이도 어렸겠다, 처음 입는 군복에 취해-그 감 정을 아마 당신을 모를 게요. 입어본 사람은 다 알지-, 나중에라면 도저히 못견 뎠을 생활을 그럭저럭 지겹지 않게 겪어내고 있었소. 사실상 이 시골의 음산한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을 수나 있겠소? 여기서 살긴 살았지만 군복 속에서 살았 다는 편이 더 옳을 게요. 토마셍과 피예의 걸작품이었는데 나를 얼마나 사로잡 았던지. 내가 미쳐 있던 그 군복은 나를 감추어줌과 동시에 나의 모든 것을 아 름답게 만들었소. 좀 지나키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 군복이야말로, 문자 그대 로 내 주둔지였지. 움직임도, 흥미도, 생기도 없는 이 마을에서 답답함을 느낄 때 있는 장식이란 장식은 다 달고 완전 성장을 하고나면, 내 빳빳한 옷깃 앞에 서 그 답답함은 도망쳐버렸거든. 누구 기다리는 사람도 없으면서 혼자 화장을 하는 여인네와 다를바가 없었지. 나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옷을 입었던 거요. 나 는 오추 네 시쯤이면 혼자, 봐줄 사람도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햇빛에 반짝 이는 견장이며 칼손잡이 장식에 흐뭇해하며 아무도 없는 연병장을 걷곤 했소. 가슴이 한껏 부풀어올랐지. 뒷날 경험한 것이지만, 강변을 여자 팔짱을 끼고 걷 을 때 `정말 멋진 장교네` 하고 뒤에서 누군가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가슴이 부풀어올랐듯이, 그렇게 혼자서도 가슴이 부풀어올랐던 거요. 게다가 이 가난한 마을엔 변변찮은 상업도 없고 별다른 활동도 없는데다 거의 몰락해가는 몇몇 집 안이 있을뿐이어서, 황제가 대혁명 때의 도둑놈들이 먹은 것을 게워내게 하지도 못했다며 황제를 미워하는 통에 장교들도 환영을 못 받았지요. 그러니 모임도, 무도회도, 야회도 파티도 있을 턱이 있나. 기껏해야 일요일에-그것도 날씨가 좋 은 날-정오 미사가 끝난 후 부인네들이 성당 정원 한 귀퉁이로 딸들을 데리고 나와 두 시까지 보여주는 게 고작이었지. 두 시가 되어 오후 미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하면 소녀들을 싹 쓸어가버려 텅 빈 마당만 쓸쓸하게 남았다오. 그 정오 미사라는 데를 우리는 참석해본 적이 없었는데, 왕정복고가 되니까 군대미 사가 되어 연대 참모들은 의무적으로 참석하게끔 변했어요. 그게 이 죽음 같은 공허한 주둔지에서 최소한 생깅 있는 사건이었지! 사랑이나 여인을 향한 정열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우리들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에겐 이 군대미사가 샘물 같은 것이었다오. 특별근무를 해야 할 친구들만 빼놓고는 모든 장교들이 교회 신도석 여기저기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자리잡고 앉았지. 거의 언제나 우리는 미사에 오는 여자들 중 제일 예뿐 여자들 뒤에 진을 쳤어요. 여자들은 자기네들 이 주목받고 있다는 것을 틀림없이 알고 있었고, 우리는 목소리를 낮추어 가능 한 한 무심한 듯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척 했지만, 실상은 아가씨들에게 다 들으라고 하는 얘기였다오. 얼굴은 누가 제일 예쁘다느니 몸매는 누가 제일 좋 다느니 하는 얘기였지. 하, 그리운 군 미사시간! 얼마나 많은 이야깃거리들이 생 겨났는지! 젊은 처녀가 어머니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동안 의자 위에 걸 쳐 놓은 그녀들의 옷소매로 얼마나 수많은 감미로운 편지들이 들어 갔는지 아시 오? 다음 일요일이면 바로 그 소매에 그녀들의 답장이 들어 있었고, 그런데 그 건 나중의 일이고, 제정하에서는 군대미사가 전혀 없었어요. 그러니 이 작은 마 을에서 그러듯한 아가씨들에게 접근할 방법은 전혀 없었고 그녀들은 우리에게는 멀리에서나 바로 볼 수 있을 뿐, 베일에 감추어진 꿈 같은 존재일 뿐이었지. 마 을에서 가장 흥미 잇는 주인공들에겐 접근도 할 수 없었는데, 그 손실을 벌충해 줄 만한 것이 이 마을엔 전혀 없었다오. 점잖은 사이에서는 입에 올 리기조차 어려운, 그런, 외지인들 드나드는 여관들이, 당신도 아다시피 있기는 있었지만 으시시한 곳이었지요. 주둔지의 그 지긋지긋한 따분함에서 생기는 향 수병을 달래려고 병사들이 드나드는 카페는 견장의 명예를 생각하면 도저히 드 나들 수 없었고... 그 당시에는-지금이야 다른 곳처럼 사치가 넘치지만-이 마을 에는 장교신분에 어울릴 만한 식탁을 갖추고 숲속에서처럼 강도에게 털릴 염려 도 없이 지낼 만한 여관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니 우리들 대부분은 집단 생활을 포기하고 각자 하숙생활을 했는데, 별로 부자가 아닌 마을의 부르주아들이 가능 한 한 비싸게 방을 세 놓고는 형편없는 반찬값이라도 보태고 수입도 보충하곤 했다오. 나도 그들 중의 하나였소. 내 동료 한 명이 옛날 거기에 마차역이 있었다고 해서 `역마차 호텔`이라 이름 붙여진 집에 세들어 있었는데, 저기, 우리 뒤쪽으 로 몇 집 건너일 게요. 날이 밝았다면 그 집 정면 간판에 연백색 바탕에 반쯤 튀어나온 퇴색한 금빛의 해모양 그림이 보일 텐데. 그 밑에 `일출에`라고 써 있 는 그놈이 시계 구실을 했지요. 그 내 동료가 내게 제 이웃에 있는 집을 하나 구해주었는데, 그게 바로 높다랗게 창문이 달려 있는 저 방이었다오. 오늘 저녁 에 다시 보니, 그게 바로 엊그제 일인 듯 여전히 내 방처럼 여겨지는 구려. 나는 그 친구가 권하는 대로 했소. 그는 나보다 나이도 많은데다 연대에도 나보다 훨 씬 오래 전부터 근무한 친구였지요. 그는 내 초년병 장교생활의 이것저것 지도 를 해주었고, 내 경험없음-실은 내 데면데면한 성격이 더 큰 원인이겠지만-을 덮어주었다오. 내가 말한바 있지만, 군복을 향한 감정은, 평화협정이나, 철학적이 고 인도주의적인 광대극에나 익숙한 당신 세대는 얼마 안 가서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감정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내가 군인의 처녀성을 바쳐야 할(이런 군인식 의 표현을 용서해주시길) 최초의 대포소리를 듣는다는 희망, 바로 그것이 또 하 나 있었지. 그외에 다른 것은 아무 상관 없었어요. 나는 그저 이 두 가지 관념 속에서 살았다오. 그리고 특히 두번째 관념 속에서였는데, 그것이 희망이었기 때 문이라오. 사람은 그가 살고 있는 삶 속에서보다는 살아보지 않은 삶 속에서 더 욱 잘 사는 것 아니겠소? 나는 마치 수전노처럼 미래를 위한 나를 사랑했고, 하 룻밤 그저 지나가기만 해도 될 뿐인 그런 험악한 장소에 자리잡듯이 하늘나라를 마다하고 이 지상에 자리를 잡는 경건한 신자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지요. 군 인만큼 수도승과 비슷한 존재는 없다오. 그리고 나는 군인이었지. 난 그렇게 주 둔지에 자리잡은 셈이었소. 내가 조금 후에 말을 하게 되겠지만, 내게 집을 빌려 준 주인식구들과 식사를 하는 시간 및 군복무의 일과를 치르는 일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하숙방에서 짙푸른 바로크 가죽소파에 누워지냈소. 그 소파는 고된 훈련을 마치고 끼얹는 목욕물같이 시원했지. 일단 누웠다 하면 무기를 손 질해야 한다거나 친구인 루이 드 묑이 묵고 있는 건너편 집에 카드 치러 갈 때 가 아니면 일어날 생각이 들지 않았다오. 그 친구는 나보다는 덜 한가로웠는데 마을의 바람기 있는 계집애 중에서 꽤 쓸 만한 애를 주워다가 정부로 삼았는데, 그의 얘기에 의하면 시간보내기에 그만이라는 거였지. 하지만 그때 내가 여자에 대해 알고 있던 지식으로는 루이 드 묑의 훙내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오. 하기사 내 지식이라야 셍 시르 사관학교의 생도들이 외출할 때 배우는 지극히 통속적인 걱뿐이었지만... 또 세상에는 늦게 트이는 체질이 있는 법 아니오. 셍 레미라는 사람을 아나요? 마을 전체에서 유명한 바람둥이였지. 그 행실 때문에 우리는 미 노타우로스(희랍신화에 나오는 뿔이 있는 괴물:역주)라고 불렀는데 자기 부인의 정부를 죽였으니 뿔달린 괴물인 셈이었지만 그 때문에 그렇게 부른 건 아니지 요. 해치운 상대 때문에 그렇게 부른 거지.“ “녜, 압니다.”라고 나는 대답했다. “내가 알던 때는 늙었을 때였는데 나이 가 들었어도 행실을 고치기는커녕 매년 점점 더 심해지던 사람이었지요. 어후, 그 셍 레미를 내가 모르다니요. 브랑톰(`요염한 여인들`의 작가:역주)식으로 말한 다면 `사계의 권위자`라고 할 사람인데...” “그는 정말 부랑톰 소설에 나올 만한 인물이지. 그런데 그 셍 레미가 스물일 곱 살이 될 때까지는 술 한 모금, 여자 치맛자락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 아 니겠소? 원한다면 그에게 직접 확인해 보시길. 스물일곱 살일 때도 그는 여자일 에 관한 한 갓 태어난 아이처럼 아무것도 몰랐고, 그렇다고 설사 유모의 젖을 빨지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우유와 물밖에는 마셔본 적이 없는 그런 상태였다오. ” “뒤떨어진 진도를 빨리도 따라간 셈이군요”라고 내가 대답했다. “그래요. 그리고 나 역시도! 따지고 보면 나는 그보단 쉽게 따라잡은 셈이지! 내가 얌전하던 시기라야 이 마을에서 지내던 때가 고작이니까. 그때 내가 셍 레 미처럼 완전히 순결하던 때는 아니었다하더라도, 맹세코 마즈타 수도회(군대적인 종교단체:역주)의 진짜 기사 같은 생활을 했어요. 더구나 나는 태생부터 마즈타 수도회가 관계가 있었어요. 그건 모르셨겠지? 대혁명이 일어나서 그 수도회가 해체되지 않았다면 나는 우리 아저씨의 뒤를 이어 기사단이 되었을지도 모르오. 기사단이 없어진 뒤에도 가끔 기사단 휘장을 달고 다닌 적이 있다오. 무슨 허영 심이었는지!” 그는 말을 이었다. “내게 방을 빌려준 주인내외는, 전형적인 부르주아였지요. 남편과 아내 두 식 구뿐이었는데 나이가 들었지만 행동은 반대로 제법 품위가 있었지요. 나를 대할 때면,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운-그들 계급에서는 더욱 그렇죠-그런 예의도 갖추 었고 흘러간 시대의 향기 같은 것도 있었지요. 당시 난 관찰을 위한 관찰을 할 만한 나이도 아니었고, 하루에 두 번 점심과 저녁을 먹기 위해 정오와 저녁에 마주칠 뿐, 아주 피상적으로 맺어져 있는 그들 두 노인의 과거 같은 것을 파고 들 만큼 흥미를 느끼지도 않았다오. 더욱이 내 앞에서 나누는 그들의 대화에서 그들의 과거 모습은 내비치지도 않았지요. 대화라야 마을사람이나 마을일에 대 한 일상적인 화제주의에서 맴돌 뿐이었는데, 마을에 관해서 나는 많은 것을 배 울 수 있었다오. 영감에게는 날카로운 유머가 있었고 부인은 독실한 신자라 훨 씬 점잖긴 했지만 남편만큼 즐거워하는 것은 틀림이 없었지요. 하지만 이런 얘 기는 들은 거 같아요. 남편이 했던 얘기 같은데, 젊었을 때 누구 때문이었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모르나 여행을 했고, 훗날 돌아와 그를 기다리고 있던 부 인과 결혼을 했다지. 그들은 어쨌든, 선량한데다 품성도 온화 했으며 평탄한 운 명을 즐기고 있었다오. 아내는 남편의 양말을 뜨면서 평생을 보냈고 남편은 약 간은 음악광이어서 내 방 위의 다락방에서 케케묵은 비오티의 곡을 바이올린으 로 연주하며 보냈으니, 옛날에 아마 좀더 부자였을지도 모르지. 겉으로 말은 안 하지만 무슨 일로 재산을 잃었고 그래서 집에다 하숙을 칠 수밖에 없었던 것 같 기도 하고. 하지만 하숙을 친다는 사실 외에는 그런 티가 전혀 나지 않었다오. 향기로운 린네르 옷들, 묵직한 은그릇들, 새것으로 바꿔볼 생각이 들지 않을 만 큼 거의 부동산처럼 되어버린 가구들 등 그 집안으 모든 것들이, 이 집안이 옛 날에는 꽤나 풍부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 나는 거기서 잘 지냈소. 식사도 좋았 구요. 게다가 식모인 오리브 할머니의 말대로 `수염을 닦았으면` 그대로 식탁을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즐기고 있었다오. 참, 할머니도, 아직 채 자라지도 않은 세 가닥의 고양이 수염 같은 애송이 소위의 털가닥을 `수염`이라고 불러주었으니, 꽤나 내 체면을 봐준 셈이지.” “그렇게 반년을 난 주인부부나 조용하게 살았고, 나중에 그 집에서 만나게 될 존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들은 적이 없이 지냈다오. 그런데 어는 날, 늘 그 렇듯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방에서 내려오는데 식당에서 웬 키 큰 여자가 외출 했다가 방금 제 집으로 돌아온 듯한 태도로 까치발로 서서 모자를 벽에 걸고 있 는 모습이 눈에 띄었소. 옷걸이가 꽤 높이 걸려 있어서 몸을 활처럼 휘고 모자 끈을 걸려는 참이었는데, 마치 몸을 젖힌 발레리나처럼 눈부신 허리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오. 허리를 붙들어 묶은(어찌나 허리를 꽉 조였던지 말 그 대로 묶은 것과 같았지), 반짝이는 초록색 비단 레이스 코르셋이 흰 치마 위를 살짝 덮고 있었지. 치마는 당시 유행대로 엉덩이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 풍만한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고...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자 팔을 허공에 올린 채 그녀는 고개를 뒤로 돌렸고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오. 그렇지만 그녀는 마치 나라는 존재가 그곳에 있지도 않은 듯 모자를 거는 동작을 끝내더 니, 모자의 리본이 혹시 옷걸이에 걸다가 구겨지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것이었 소. 그것도 아주 천천히, 주의깊게, 거의 무례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동작이었 지. 아무튼 나는 인사라도 나누려고 거기 서서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으니 말이 요. 일이 끝나자 겨우 그녀는 나를 주목하더군요. 그 검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영광을 배푸셨는데 아주 차가운 눈초리인데다 티투스(성격이 격하고 방탕했던 것으로 유명했던 로마황제:역주)식으로 잘라서 앞부분은 말아올려 빗어 놓은 머 리모양 때문에, 보통 그 머리모양이 그러하듯이 그 시선에 그윽한 깊이를 더하 고 있었지요.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도무지 짐 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인들과 함께 식사하러올 사람도 전혀 없었는데... 어쨌든 그녀는 함께 식사하러온 것이 틀림없었다오. 식탁에 4인분의 식기가 챙 겨져 있었으니 말이오. 하지만 그때의 놀라움이야 정작 그녀가 누구인가를 알았 을 때의 놀라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오. 주인내외가 식당으로 들어오면서 그녀를 내게 소개했는데, 기숙학교에서 방금 나온 자기들 딸이며 이제부터 우리 와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겠소.” “그들의 딸이라니! 그 처녀가 그들의 딸이라니 도대체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었소. 아주 아름다운 미인이 아무 부모한테서나 태어나는게 아니라는 식의 놀라 움 정도가 아니었소. 그런 경우를 나는 알고 있으니까. 당신도 그렇지요? 생리학 적으로는 아무리 못생긴 부모라도 아주 아름다운 미녀를 낳을 수 있는 법이 아 니오. 하지만 그녀라니! 그녀와 그들 사이에는 완전히 다른 종들처럼 단절이 있 었던 거요. 뿐만 아니라 생리학적으로-우리 시대엔 그런 유식한 체 하는 표현을 안 썼지만 당신 세대의 그 말을 좀 빌리도록 합시다-그녀에게는 같은 또래의 처 녀들에게서도 쉽게 찾기 힘든 그런 독특한 분위기가 있어, 그것만으로 주의를 끌었다오. 무어라 한 마디로 묘사하기는 힘든데, 일종의 무감동한 표정이랄까... 그녀는 `야 대단한 미인인데`하는 감탄을 불러일으킬 만한 미인은 아니었고, 누 군가 그런 말을 하더라도 길에서 우연히 만난 참한 여자들한테 누구나 그러듯이 `참 예쁘구만` 이라며 주목을 하고는 금방 잊어버릴 정도의 얼굴이었습니다. 하 지만 그 표정이란... 그녀의 부모와는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과 도 구별되는 그 표정. 정열도, 감정도 없는 듯한 그 표정. 아마 당신이 맞닥뜨리 게 된다면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게 될 그런 표정이었지요. 당신은 알고 계신 지 모르겠지만 벨라스케즈의 `스파니엘개와 함께 있는 왕녀`라는 그림이 주는 분위기와 비슷하달까, 오만한 것도 아니고 경멸적이랄 수도 없고 건방진 것도 아니고, 아니 그저 단순히 무표정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분위기 말이오. 오 만하다든지 경멸적이라든지 건방지 태도야 그래도 상대방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 정해주는 태도 아니오. 적어도 상대방을 멸시하고 깎아내리는 정도의 수고는 해 주는 셈이니까.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저 조용히 `내게 당신은 존재하지도 않 아요`라고 말을 하는 듯 했어요. 그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계속, 내게는 지금까 지 도저히 풀릴 수 없는 의문이 남아 있는 셈이라오. 이 키 큰 여자애가 어떻게, 그 노인네, 부인이 만든 잼 색깔의 피부에, 목덜미엔 혹이 솟아 있고, 그위에 수 놓은 모슬린 넥타이를 걸친 이 영감, 황녹색의 외투에 흰 조끼차림이며 거기다 말도 더듬는 이 노인네에게서 나올 수 있었을까? 아버지 편이야 그렇다 칩시다, 어머니 쪽으로 이해를 하려 해도 정말 요령부득이었어요. 알베르틴느양(하느님이 이 부르주아 부부를 조롱하려는 듯 하늘로부터 떨어뜨려 놓은 이 고귀한 공비의 이름이었소)의 부모는 그 긴 이름을 편의상 그냥 알베르트라고 불렀고, 그 이름 이 그녀의 표정이나 행동거지에 더욱 잘 어울렸는데, 어쨌든 그녀는 그 부모의 어느 쪽 딸로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 첫 저녁 식사 때나 그 이후로도 그녀는 교육을 잘 받은 처녀로 보였지요. 억지로 꾸민 태도도 없었고 언제나 말수도 적 었으며, 말을 할 때도 해야 할 말만 요령 있게 할 뿐 그 이상을 넘어가는 경우 가 없었다오. 그외에 그녀가 내가 모를 그 어떤 기지나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지 도 모르지만, 식사시간에는 결코 보여주지 않았으니 알 도리도 없었지요. 딸이 함께 하고 나서, 당연히 그 두 노인네의 수다에도 변화가 생겼다오. 마을에서 있 었던 작은 염문들은 화제에서 사라졌지요. 문자 그대로 비가 오느냐, 날씨가 좋 으냐 하는 정도의 화제만 식탁주위에서 맴돌 뿐이었어요. 그리고 알베르틴느양 인지 알베르트인지, 처음에는 그 무관심의 표정으로 나를 그토록 놀라게 했던 그녀에 대해, 그것 이외에는 그녀가 내게 더이상 보여준 것이 없기 때문이었지 만, 나 역시 심드렁해졌다오. 내 천성에 맞는 그런 사교계에서 그녀를 만났더라 면 그 무관심한 표정은 틀림없이 생생하게 나를 자극했을 거요. 하지만 내게 그 녀는 눈으로라도, 추파를 던질 만한 여자가 아니었다오. 그 부모집에서 하숙을 치고 있는 내 입장은 꽤나 미묘한 것이었고 조금만 삐끗해도 난처해질 수밖에 없던 처지였으니. 그녀와 나는, 삶에서 무슨 의미가 생길 만큼 가까은 사이도, 먼 사이도 아닌 채 생활했고, 나 또한 특별히 의도한 것도 아닌데, 그녀의 무관 심에 똑같이 완벽한 무관심으로 대하게 되었다오. 그런 상태는 그녀 편에서건 내편에서건 변함없이 지속되었지요. 우리들 사이에는 지극히 냉정한 예의범절, 간단하기 그지없는 몇 마디 말밖에는 없었다오. 내게 그녀는 겨우 보일까말까한 그림 같은 존재였는데, 그년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그녀는 식탁에서-거기 서 말고는 만날 기회도 없었지-물병마개나 설탕그릇만 쳐다볼뿐 나라는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는데, 언제나 정확한, 그리고 조리있는 그녀의 말만 듣고는 그녀가 어떤 성격의 인물인지 도무지 알아낼 재간이 없었다오. 그리고 내게 그게 무어 그리 중요한 일이었겠소? 이 조용하고 무례한 소녀의 안 에, 스페인 왕녀 같은 저 어울리지 않는 표정 속에 그 무엇이 들어 있는지 살펴 볼 생각도 없이 그저 한 평생을, 그냥 지나올 수도 있었다오. 그런데, 내가 이제 부터 당신께 이야기하려는 그 사태가, 천둥소리의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내려친 벼락 같은 그 사건이... 알베르트양이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쯤 되던 어느 날 저녁이었소. 우리들은 식사를 하기 위해 식탁에 모여앉아 있었지. 그녀가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었기에 늘상 하던 바와는 다르게 그 작은 변화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다오. 의 당 놀랬어야 했을 일인데... 평상시라면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앉았더 랬소. 어쨌든, 내가 냅킨을 무릎 위에 펼치려는 순간이었는데-그래, 그때의 내 기분, 놀람이 어느 정도였는지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구려-웬 손 하나가 탁자 밑에 있는 내 손을 대담하게 잡는 것이 아니겠소.난 꿈이라도 꾸는 듯했소. 아니 아무 생각도 없었다는 편이 차라리 옳겠소. 냅킨 밑에 있는 내 손을 더듬거리는 그 대담한 손에 대한 믿을 수 없는 감각 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니. 놀 라운 일이었고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오! 내 온몸의 피가, 그 촉감으 로 불이 붙어, 마치 자석에 끌리듯 심장으로부터 그녀의 손을 향해 쏟아지더니 이어서 펌프로 뿜어낸 듯 심장으로 다시 쭉 밀려들어오는 것이었소. 난 혼이 빠 졌고, 귀가 멍멍했다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었겠지, 기절해번릴 지경이었으니 까. 소년의 손처럼 힘있게 내 손을 덮쳐 누르는 그 두툼한 손의 살집 때문에 형 언할 수 없는 황홀경 속으로 녹아내릴 지경이었고...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인 생의 초창기에는 치런 관능적 쾌락은 좀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는 법, 그래서 나 는 그 미친 듯한 손으로부터 잡힌 내 손을 빼내려고 했다오. 그러자, 그 손은, 그 손이 내게 쏟아붓고 있는 쾌락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듯이 내 손을 더욱 꼭 잡아서 그 권위와 힘을 과시했고, 더없이 따뜻하고 숨막히는, 그리고 감미로운 그 감싸임 속에서 내손과 내 의지를 모두 장악해버렸다오. 벌써 35년 전의 일인 데다, 내 손의 감각은 이제 여인들의 포옹에 무뎌져 있으리라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아직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그토록 무모한 정열로 내 손을 폭압적으로 잡고있던 그 손의 감각이 여전히 느껴진다오. 내 손을 감싸고 있는 그녀의 손이 내 온몸에 불어 넣은 그 전율에 사로잡힌 채, 나는, 그 부모에게, 딸이 면전에서 그토록 대담한 짓을 하고 있는 바로 그 부모에게 내 감정이 탄로날까봐 두려워 했지요. 하지만 스스로 타락에 몸을 던지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냉정한 태도로 자신의 탈선을 숨기고 있는 이 여자보다 나는 얼마나 사내답지 못하냐는 생각에 부끄러워서, 나는 초인적인 힘으로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나의 욕마의 떨 림을 멈추려 애를 썼다오. 의심이라곤 전혀 없는 저 가엾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말이요. 그리고 나는 전에는 전혀 유심히 본적이 없는 그녀의 손, 내 손을 잡고 있지 않은 그녀의 나머지 손이 어디 있는가 눈으로 찾아보았소. 그런 데 그 손은, 이 위험한 순간에, 태연스럽게도 식탁 위에 놓인 램프의 심지를 올 리고 있는 것이었소.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던 거요. 나는 그 손을 바라보았다오. 그래 저 손이, 하나의 화로처럼, 어마어마한 불칼을 확확 뿜어대며 그 불칼을 내 혈관을 타고 전신에 뻗치게 하는 그런 화로처럼 나의 손 안으로 파고드는 바로 그 손의 다른 한쪽이란 말인가! 약간 두툼하지만 손가락이 길고 선이 고운 그 손은, 그 손 위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램프 불빛 아래서 장미빛으로 투명하게 빛 나고 있었소. 그리고 전혀 떨림없이 정확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게다가 비할 나 위 없이 우아하게 램프불의 심지를 돋우고 있었다오! 하지만 그런 상태로 있을 수는 없었소. 식사를 하려면 우리의 손이 필요했으니까. 알베르트양의 손이 내 손으로부터 떠났소. 그런데 그 손을 빼내가면서 이번엔 그녀의 발이 손만큼이나 그 욕망을 보여주는 발이, 똑같이 침착하게, 똑같은 정열을 가지고 거역할 수 없 도록 내 발 위에 얹혀지는 것 아니겠소. 너무 짧은 식사시간 내내 그녀의 발은 내 발 위에 얹혀지는 것이었소. 처음에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가 차차 익숙해져 나중에는 아주 쾌적한 기분에 젖게 하는, 그런 목욕을 하는 기분이었 소. 그 기분은 마치,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라도 때로는 지옥의 화염 속에서도 물 속의 물고기처럼 시원스럽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지요. 그날 저녁, 밥이 제대로 목구멍으로 넘어갔는지, 또 고지식한 주인부부의 세상이 야기에 내가 제대로 한 몫 낄 수 있었는지는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소. 어쨌든 주인부부는 식탁 밑에서 무슨 어마어마하고 해괴망측 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소. 그들은 아무것도 알아차리 지 못했소. 하지만 그 무언가 낌새를 챘는지도 모르고 실제로 나는 그들이 걱정 이 되었다오. 나나 그 딸보다도 그들이 더 걱정이었던 거요. 내게는 아직 열일곱 살의 성실성과 연민이 있었던 거라오. 나는 생각했지. `원래 뻔뻔한 여잔가? 아 니면 미쳤나?`라고... 나는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그 미친 여자는 식사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의식을 거행하는 듯한 왕녀의 표정을 결코 허물지 않았다 오. 그 얼굴표정이 너무나 잔잔해서 지금 내 발 위에서 그녀의 발이 하고 있는 행동이 정말 그녀의 발이 하고 있는 행동인가 의심할 정도였다오. 고백하지만 그녀의 그 어처구니없는 행동보다는 그 태연자약함에 나는 더 놀랐지요. 경박한 책들속에서 품행바르지 못한 여자들 이야기는 많이 읽은 상태였다오. 군사학교 에서 교육도 받은 몸이었고, 그러니 적어도 공상 속에서 나는 자만심 강한 로블 라스(영국 태생의 시인이며 극작가. 미남으로 사교계의 총아였다:역주)였다오. 자 신이 미남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젊은이들이 다 그렇듯이, 문 뒤나 층계 구석 따 위에서 어머니가 부리는 몸종의 입술을 훔치는 그런 로블라스 말이요. 그런데 그 사건이 이 열일곱 살 먹은 로블라스의 변변찮은 침착성을 온통 흔들어 놓았 던 거요. 여자들이란 아무리 격렬하고 깊은 감정이 있어도 교묘히 그것을 감추 는 놀라운 힘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법이라고 읽기도 했고 듣기도 했지만 그 사건은 정도가 심했소. 생각해보시오. 그녀는 열여덟 살이었던 거요. 진짜 열 여덟은 맞는 건지? 그녀가 기숙학교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녀 어머니가 딸애에 게 보여주는 도덕성과 신앙심으로 보아 의심의 여지가 없었소. 그런데 털끝만큼 도 거기낌이 없는 행동, 분명히 말해 신중함이 전혀 결여되어 있는 태도, 어린 소녀로서 무모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을 쉽게 지배할 줄 아는 의지력, 그토록 엄청나게 앞선 행동을 저지른 상대방 남자에게 단 한 번의 몸짓이나 눈짓으로 미리 알려주지도 않는 태도 이 모든 것이, 내 감정이 온통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와중에서도 내 머리에 또렷이 떠올랐지요. 하지만 그때나 그 후로나 그 문제로 골치를 썩진 않았다오. 그처럼 무서울 정도로 조숙 하게 타락에 물든 소녀의 행동 앞에서 짐짓 무서워하고 싶지 않았기도 했고, 게 다가 나는 단번에 제 품에 뛰어드는 여자라고 해서 타락한 여자라고 여길 나이 에 있지도 않았지요.-훗날이었어도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을 아 주 단순한 것으로 생각하려 했고 누군가 `가엾은 여자 같으니`라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동정의 표시라기보다는 겸양의 표시가 아니겠소. 요컨대 나는 수줍 어하긴 했지만 얼간이가 되기는 싫었던 거요. 제 아무리 나쁜 짓도 일단 행하고 나면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 프랑스인의 위대한 이성이 아니오. 나는 물론 그 소녀가 나를 향해 가졌던 것이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지금도 의심하지 않는다오. 사랑은 그렇게 조심성 없이 뻔뻔스럽게 진행되는 것 이 아닌 법이며, 따라서 내가 그녀를 향해 가졌던 감정도 사랑이 아니란 것을 또한 완벽하게 잘 알고 있었다오. 하지만 사랑이건 아니건,-그게 무엇이건 난 그 걸 원했었소! 식탁에서 일어날 때에 이미 결심이 섰었지... 날 붙들기 전엔 전혀 생각지 않던 그 알베르트의 손은 이제, 내 존재 저 깊은 곳에, 그녀 전체를 향해 나를 꽁꽁 묶어 놓고 싶다는 욕망을 남겨 놓았지요. 마치 그녀의 손이 내 손을 꽁꽁 묶어 놓았듯이... 나는 거의 미치광이처럼 되어 내 방으로 올라갔소. 생각을 가다듬고 좀 침착 해지자, 이번에는 악마와 같이 도발적인 처녀와, 시골 사람들이 말하듯 `밀통을 완벽하게 성공시키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을 했지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야-더 자세히 알려고 애써본 적도 없었으니-그녀가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 대개는 어머니와 나란히 거실 겸 식당의 화롯가에 앉아 늘 똑같은 바느질을 한다는 것, 마을에서 그녀를 마나러 오는 친구도 없고, 일요일마다 부 모와 함께 저녁미사에 가는 것 빼고는 거의 외출도 없다는 것 정도였지요. 그렇 다면? 그 모두가 용기를 줄 만한 것이 아니었어요. 나는 새삼, 그 선량한 두 부 부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던 게 후회스러웠소. 내가 뭐 그리 거만하게 행동했던 것은 아니더라도 내 삶에서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을 대하듯, 공손 하긴 했어도, 조금은 아무렇게나 무심코 대했던 게 사실이거든요. 하지만 그렇다 고 그들과의 관계를 새삼스레 바꿀수는 없다고 생각했소. 내 저의를 들켜버리거 나 의심하게 만들 우려가 있었으니까... 알베르트양과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래야 내가 방으로 오라가거나 방에 서 내겨갈때 층계에서 마주치는 것뿐이었소. 하지만 층계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면 남의 눈에 쉽게 띄거나 말소리도 새나갈 것 아니겠소? 이토록 규칙적으로 꽉 짜여 있고 사람들 팔소매가 닿을 정도로 좁은 집에서 내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오. 그토록 대담하게 식탁 밑의 내 손을 잡을 줄 아는 그 손이라면, 내가 그녀에게 건네주는 쪽지를 아무런 낌새도 남기지 않고 접수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나는 편지를 썼지요. 상투적인 편지로서, 애원조 이기도 하고 명령조이기도 한 투로,행복의 첫 술잔을 마신 이래 두 잔째를 구하 고 있다는 사나이의 마음을 전하는 쪽지였어요. 그걸 전하기 위해 다음 날 저녁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는데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그렇지만 마침내 그 시간, 저녁 식사 때가 되었소. 하루 종일 내 손 위에 놓여져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던 그 손, 그 유혹적인 손이, 전날처럼 어김없이 식탁 밑에서 내 손을 찾아오더군요. 알베르트양은 내 손에 쪽지가 있음을 눈치채고는 내가 예상했던대로 그것을 잘 받아쥐었지. 그런 데 뜻밖에도 그녀는 그 거만한 무관심으로 모든 것을 굽어보는 스페인 왕녀 같 은 표정으로 그 편지를 레이스 달린 옷의 허리춤에 넣는 것이었소. 얼마나 자연 스럽고도 재빠른 동작이었던지, 수프를 나눠주느라 아래쪽으로 눈을 향하고 있 던 그녀의 어머니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녀의 멍청한 아버지는 바이 올린 생각만 하며 곡조를 흥얼거리는 사람인지라 뭐가뭔지 아무것도 몰랐다오. ” “다 그런 법 아닌가요, 대위님” 이라며 내가 끼여들었다. 그의 이야기가 너 무 빨리 주둔지에서의 외설스런 이야기로 넘어갈 듯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 만 이야기가 어디로 흐를지 어디 알 수 있었겠는가! “참, 요 며칠 전 오페라에 갔었을 때 일인데요, 내 옆 자리에 당신이 말한 알 베르트와 아마도 비슷한 부류에 속하는 듯한 여성이 앉아 있었습니다. 물론 열 여덟 살은 넘었지요. 하지만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는데 그보다 우아하고 정숙해 보이는 여성은 보기가 드물 정도였습니다. 오페라가 계속되는 동안 그녀는 대리 석조각처럼 꼼짝 않고 있었어요. 단 한번도 고개를 좌우로 돌리지 않았지요. 그 녀는 퍽이나 아름다운 어깨를 내놓고 있었는데, 그 어깨를 통해서 본 것일까요? 내 자리, 말하자면 우리들 바로 뒤에 한 청년이 있었던 거예요. 그 역시 상연되 고 있는 오페라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지요. 보통 남자 들이라면 그런 공공장소에서는 멀리서 점잖은 체하면서 여자들에게 고개를 까딱 하는 애정의 의사표시 같은 걸 하는 법이잖아요. 하지만 그 청년은 그런 티도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정말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극이 끝나고 언제나 그 렇듯이 사람들이 자리를 뜨는 혼잡한 순간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군요. 그리고는 망토의 단추를 잠그면서 그지없이 낭랑하게 그리고 명령조로 `앙리, 내 외투 좀 집어주세요`라고 남편에게 말하는 것이 었죠. 그러자 서둘러 외투를 집 으려고 고개를 숙인 앙리의 등 너머로 팔을 뻗치더니 그녀는 청년이 전해주는 쪽지를 받더군요. 마치 남편의 손으로부터 부채나 꽃다발을 받는 듯 덤덤한 표 정이었습니다. 그때 그 불쌍한 남편이 아내의 외투를 들고 일어났지요. 붉은색 사틴외투였는데 그의 얼굴이 더 붉을 정도였습니다. 기절할 위험도 무릅쓰고 의 자 사이에서 그걸 주워올리느라 몸을 이리저리 구부리고... 맙소사, 그걸 보고 극 장을 나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자기 머리 위에서 갑자기 돋아나올 노여움 의 불을 가리기 위해서라도 그 외투를 아내에게 돌려주는 대신 자기가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그러자 자작이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 이야기, 그럴 듯해요. 다른 곳에서는 아마 남자가 한 술 더떴을 거요. 자, 내 얘기나 마저 끝낼 수 있게 해주구려. 나는, 그녀가 그녀인 만큼 쪽지가 어떻게 될까에 대해서는 잠시도 걱정을 하지 않았소. 어머니 허리띠에 묶어 놓 았더라도 내 편지를 읽고 답장할 방도를 찾아낼 여자였으니까. 그리고 주고받는 데는 우리고 구축한 식탁 밑의 그 진지가 아주 안전하리라고 생각하며, 다음 날, 전날 내가 건네준 편지의 답장을 무조건 받을 수 있으리라는 달콤한 생각에 들 떠 식당으로 들어갔던 거요. 그런데 식기의 위치가 바뀌어 있는 것이 아니오. 나 는 내 눈이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였소. 알베르트가 예전과 다름없 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앉아 잇는 것이 었소. 왜 이렇게 자리를 바꾼 거 지?...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아버지나 어머니 중 누군가가 무언 가를 수상쩍게 본 것일까? 내 맞은편에 알베르트양이 있었고 나는 이런 내 의 혹을 알아달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지. 내 눈에는 스물대여섯 개도 넘는 의문 부호가 찍혀 있었지만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말이 없었으며 심드 렁했어요. 그 눈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어요. 무슨 물건이나 보듯이 사람을 향해 있는 그 조용한 시선만큼 나를 안달하게 하는 시선은 본 적이 없었 다오. 호기심과 불만과 불안, 산더미 같은 실망과 울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소.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는지, 그 섬세한 피부밑에는 신경조직 대신에 나같은 남자들의 근육질만 있는 것인지, 어떻게 내게 자그마한 신호를 보낼 생 각조차 않을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소. 우리는 똑같은 비밀을 지니고 한 패로서 공모하고 있다든가, 아니면 최소한 알려주거나 느끼게 하고 전달할 수 있는 그런 신호 말이요. 그 여자가 진짜 식탁 밑으로 손과 발을 내게 건네주었던 그 여자가 맞는지. 또 전날 편지를 받고는 부모 앞에서 마치 꽃을 꽂듯이 허리춤에 자연스럽게 넣은 여자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지요. 그런 짓들을 했을 정도라면 내게 시선 하나 주는 일은 눈 하나 깜짝 않고 해치울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아니었어요. 정말로 아무 것도 없었다오.내가 기웃거리듯하며 기 다리던 그 시선, 내 시선에 불을 지르기 바라던 그 시선, 그 시선을 한 번도 받 지 못한 채 식사가 끝나버렸지. 식당을 나와 내 방으로 올라가면서 나는 `내게 답장할 다른 방법을 찾은 걸거야`라고 생각했다오. 그 여자가 그렇게 믿을 수 없 을 만큼 돌진을 한 이후에, 물러서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없지 않았겠 소. 또한 그녀가 그 무엇을 두려워한다거나 조심할 여자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 지. 더욱이 그렇게 환상에 빠져 하는 일에서야... 사실 나는 그녀가 나를 향해 최 소한 어느 정도의 환상을 품고 있으리라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오!”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생각했다오. `부모가 의심을 품어서 그리 된 게 아니라면, 식탁 배치가 그렇게 된 것이 우연이라면 내일은 다시 그녀 곁에 앉게 되겠지`라고. 하지만 다 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나는 알베르트양 옆에 앉을 수 없었으며 그녀는 여전히 그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편안한 말투로 이런 시골 부르주아의 식탁에서 흔히 오갈 수 있는 별 것도 아닌 이야기나 하는 것이 었다오. 짐작하시겠지만 나는 그 무엇에 대해 대단한 흥미를 지닌 사내처럼 행 동하면서 그녀를 관찰했어요. 그녀는 조금도 거북스럽지 않은 모양이었소. 그러 나 나로서는 어찌나 불편한지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고, 화가 나서 몸이 두 쪽으 로 갈라지 정도였다오. 게다가 그 속마음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있었으니... 그녀 가 언제나 잃지 않고 있는 그놈의 냉정한 표정 때문에 그녀와 나 사이에 놓인 탁자의 길이보다 그녀와의 거리가 더 멀어지는 듯했다오. 나는 너무도 격분한 나머지, 결국 그녀의 시선을 맞받아쳐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게 될 수도 있고 그 런 행동을 겁내지 않고 해내게까지 되었다오. 그녀의 그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두 눈, 언제나 얼어붙은 채 있는 그 커다란 눈에 위협적으로 이글거리는 내 눈 을 쏘아보냈던 거지. 도대체 무슨 잔꾀를 부리고 있는 건가? 아니면 교태인가? 아니면 단순히 변덕 이 이어지는 것뿐인가. 혹은 천치인가? 니농(당시 여류 명사:역주)은 `그 순간을 알았다면`이라고 말했지요? 니농이 말한 그 순간은 이미 지나가버린 건가? 하지 만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지. 무엇을? 한 마디 말, 하나의 신호, 식탁에서 일어날 때 어수선한 틈을 타서 내게 전해질 그 어떤 표시, 그런 것이 었소. 하지 만 그 어느 것도 받지 못하자 이 세상에서 정말 가장 어리석은 공상에 빠져 들 었다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볼 때 그녀는 내게 우편으 로 편지를 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푹 빠져버린 거지. 그녀는 섬세하니까 어 머니와 함께 외출할 때 우체통에 슬쩍 편지를 넣을 거야... 그 생각에 사로잡히 니까 하루에 두 번씩, 그러니까 우체부가 집 앞을 지나기 한 시간 전부터 온 몸 의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이었소... 또한 그 시간만 되면 목이 졸리는 듯한 목 소리로 올리브 할머니에게 물었다오. `할머니, 내게 편지 온 거 없나요?` 그러면 그녀는 언제나 ` 아뇨, 없는데요`라고 태연스레 대답했지요. 아, 그러면 신경은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졌지. 좌절된 욕망은 증오로 바뀌었 다오. 나는 알베르트를 증오하기 시작했고, 기만당한 욕망에서 비롯된 증오심으 로, 그녀가 내게 했던,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한껏 경멸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 애썼다오. 증오란 경멸을 목마르게 갈구하는 법이니... 경멸이란, 바로 증오를 재우는 감주가 아니겠소! 나는 `비겁한 바람둥이 년, 편지 한 통 겁나서 못주다니!`라고 중얼거렸다오. 보다시피 이제 욕설이 나오 게까지 된 거지요. 욕을 하면서도 그녀는 욕을 먹어도 싸다고 생각했다오. 가장 군대적인 용어로 그녀를 벌집을 만들어 놓는 것 외에는 그녀에 대한 생각을 않 으려 했지. 그런데 루이드 묑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하자-그래, 결국은 그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 놓았지. 그녀가 나를 하도 극단으로 몰아 넣는 바람에 내게서 기 사도 정신이고 뭐고 남아 있을 턱이 없게 되었으니 내 선량한 루이에게 내 모험 담을 다 털어 놓은 거야- 그는 긴 금발 턱수염을 꼬면서 내 얘기를 듣더니 멸 거리낌없이 이렇게 말하더군. 하기사 우리 27연대가 도덕군자의 집단은 아니었 으니까. `나처럼 해보게. 새 못은 있던 못을 밀어내는 법이거든. 마을의 바람난 계집애 한 명을 애인으로 만들고 그 망할 계집앤 잊어버려.` 하지만 난 루이의 충고를 결코 따르려 하지 않았다오. 그러기엔 난 너무나 게 임에 몰두해 있었소. 내게 애인이 생기고, 그녀가 그것을 알도록 할 수만 있다 면, 질투심을 이용해 그녀의 마음과 그녀의 허영심에 채찍질을 할 겸 한 명 사 귀어 볼 수도 있었을 거요. 하지만 그녀는 알 도리가 없었을 테지. 그 사실을 도 대체 어떻게 알릴 수가 있겠어요. 내가 애인을 하나 만들어 그녀를 루이가 제 집으로 끌어들이듯 내 집으로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내가 세들어 있는 주인과의 결별을 의미하게 될 것인즉, 그들은 내게 다른 하숙집을 찾아보라고 즉석에서 간청하게 될 터인데... 그리고 나는, 그런 대담한 짓을 저지르고도 여전히 무감동 의 위대한 왕녀로 남아 있는 그 저주스러운 알베르트의 손과 발을 되찾을 가능 성-비록 손과 발밖에는 소우하지 못 하게 되더라도-을 포기할 수 없었다오. `무감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무가능성의 아가씨라고 하지`라며 루이는 나를 놀렸다오. 그런 식으로 한 달이 흘렀어요. 알베르트를 잊으려고, 그녀만큼 무관심해지려 고, 돌에는돌, 얼음에는 얼음으로 대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매일매일 매복과 도 같은 초긴장의 나날들이었지요. 사냥할 때 조차 매복은 질색인 내가! 그래요, 나의 하루는 정말 매복의 연속이었다오. 점심 먹으러 내겨가면서, 첫날처럼 그녀 가 식당에 혼자 있지나 않을까 기대하는 것도 매복이었으며, 저녁 식사중에 앞 이나 옆으로 그녀의 시선과 맞추려 애쓰는 내 시선-필경은 맑고, 저주받을 정도 로 평온한, 그리고 내 시선을 피라는 것도 그렇다고 맞받는 것도 아닌 그런 시 선과 만나게 될 뿐인 가엾은 내 시선의 하는 짓도 매복이었으며, 저년 식사 후 에 두 여자가 바느질을 시작할 때까지 식당에 남아, 그녀가 골무나 가위나 헝겊 따위 아무거나 떨어뜨리지 않을까, 그러면 그걸 주워주는 척 하면서, 내 머릿속 을 꽉 채우고 있는 저 손을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며 노리고 있던 것도 매복 이었지요. 내 방에서는 어떻고. 내 방으로 올라와서는, 그렇게 단호한 의지로 내 발을 밟던 그녀의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멀어져갈 때까지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란! 계단에서까지 그 매복은 이어졌으니 그녀를 혹 마주칠까 기대에 차 있었다오. 어느 날인가는 보초처럼 서 있는 나를 올리브 할멈이 발견하고는 깜 짝 놀라기까지 했지. 저기 보이는 저 창문, 저 창문도 매복 장소다오. 그녀가 어 머니와 외출한 낌새가 있을 때마다 꼼짝 않고 서서 기다렸으니. 하지만 그 짓도 다른 짓들이나 마찬가지로 그냥 헛수고였지. 그녀는 외출할 때 젊은 여자들이 흔히 걸치는 숄을 두르고 나갔는데-지금도 잊혀지지 않소. 빨간 색과 하얀 색 줄무늬가 있고 가운데 두 줄에는 검고 노란 꽃무늬가 있는 숄이었지-나갈 때 단 한 번도 그 오만한 고개를 돌리는 법도 없었고 돌아올 때도 여전히 어머니 곁에 붙어 있을 뿐, 내가 기다리고 있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들거나 눈길을 보낸 적 이 한 번도 없었으니. 이상이 그녀가 내게 강요했던 비참한 훈련이었소! 여자란 남자를 무릎굻리기 위해 온갖 짓을 다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도 그 정도쯤 되어서는! 이 미 죽은 줄 알았던 그 옛날의 자존심이 지금도 여전히 들쑤시고 일어나는 게 느 껴지는군! 아, 나는 더 이상 군복이 주는 기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 소.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훈련이나 사열 같은 거였죠-집으로 재빨리 돌아오곤 했지만 방 안 가득 쌓여 있는 회고록이나 소설,-그 당시 내가 탐독하던 것 들이 었는데-을 읽기 위해서는 아니었다오. 루이 드 묑의 집에도 더이상 가지 않았어 요. 칼도 만지지 않았고. 마음의 동요가 커서 심신을 괴롭힐 때 그것을 진정시킬 담배라는 수단도 없었지. 나보다 후대인 당신들은 그 담배라는 것을 즐기지요. 하지만 그 당시 27연대에서는, 병사끼리 북을 엎어 놓고 카드를 칠 때 외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오. 그러니 나는 몸은 할 일이 없는 채 그냥 무언가 갉아 먹으며 지냈지요. 그게 아마 심장이었을지도... 어쨌든, 사방 여섯 걸음의 방에 놓여 있던 그 소파도 옛날엔 그토록 좋아했건만 이젠 시원하지도 편안하지도 않 았고 나는 그저 그 방에서 싱싱한 살코기 냄새에 흥분해 있는, 우리에 갇힌 사 자새끼꼴이었지. 낮이 그런 식으로 지나갔다면 밤의 대부분도 그런 식으로 보냈다오. 늦게 잠 자리에 들었지만 제대로 잠이 오지 않았소. 그 지옥의 알베르트, 그녀가 나를 잠 들지 못하게 했던 것이오. 그녀는 내 핏줄에 불을 질러 놓은 채 자기가 저지른 범죄 현장을 되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린 방화범처럼 멀어져버린 것이지. 나는 이 렇게 오늘밤처럼, 커튼을 내린 채...“ 자작은 얘기하다말고 장갑을 벗어 눈앞에 있는 유리창에 어리기 시작한 수증 기를 닦아냈다. “그래, 저것과 똑같은 진홍빛 커튼을 내렸었지. 바로 저 창문에... 지금이야 다 달려 있었지만 그때는 겉창이 없었다오. 요즘은 옛날보다 시골 사람들이 훨 씬 호기심이 많아져서 방 안쪽을 남의 눈에 뜨이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해달은 모양인데. 내 방은 그 당시의 양식으로 된 방이었지요. 소위 제정시대 방식으로 바닥에는 헝가리식 마루를 깐 채 양탄자는 없었으며, 야생벚나무 재목 위에 청 동으로 여기저기 장식을 한 방이었소. 우선, 침대 네 귀퉁이에는 스핑크스 머리 모양이 있었고 네 다리에는 사자 다리모양이 붙여져 있었지. 그리고 책상서랍과 장롱서랍엔 온통 사자의 얼굴이 부조되어 있었고 그 푸르스름한 색의 입에 구리 고 된 고리가 달려 있어 그 고리를 잡아당겨 서랍을 열 수 있었다오. 다른 가구 들보다 더 붉은 빛을 띤 벚나무 목재로 만든 네모난 책상이, 창과 화장실 사이 의 벽에 붙은 채, 침대 맞은편에 있었는데, 겉에 회색의 대리석을 입혔고 구리로 격자 무늬를 넣은 것이었지요. 그리고 벽난로 앞에는 내가 벌써 몇번 말한 큰 소파가 있었고... 천장고 높고 꽤나 넓은 그 방 네 귀퉁이에는 가짜 중국칠기를 한 세모꼴의 선반이 있었고, 그 선반 중의 하나 위에는, 속된 부르주아 가정으로 서는 놀라운 일이었지만, 고풍의 니오베 흉상이 그 어두운 구석 한가운데서 신 비스러운 흰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오. 하지만 그놈의 불가해한 알베르트가, 실은 그 이상 놀라운 존재였지만... 엷은 누런 색 위에다 기름을 덧 입힌 벽 위에는 그림도 조각도 없었지요. 금박을 입힌 긴 구리 못에 내 무기를 단지 걸쳐 놓았을 뿐이었소. 내가 이 커다란 조롱박 같은 방-시적인 표현이라고 할 줄 모르는 루이 드 묑 중위가 우아하게 갖다붙인 이름인데-을 빌렸을 때 나 는 그 한가운데에 커다란 탁자를 놓게 하고는 그위에 군사지도, 책, 서류 등을 올려 놓았다오. 그게 내 책상이었던 셈이지. 쓸 게 있으면 거기서 썼지요.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아니 차라리 어느 날 밤이었소. 소파를 그 커다란 탁자 앞으로 끌고 와서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오. 한 달 전부터 나를 사로잡고 있던 유일한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반대로 그 생각에 더 빠져들 기 위해서였지요. 내가 그리고 있던 것이 바로 그 수수께끼 같은 알베르트의 얼 굴, 경건한 신자라면 악마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만큼 내가 사로잡혀 있던 그 마녀의 얼굴이었던 것이라오. 아주 늦은 시각이었소. 거리는, 오늘날처럼 각기 반대 방향에서 두 대의 마차가 지나가곤 하던-한 대는 0시 45분이고 다른 한 대 는 새벽 2시 30분이지요-, 그리고 역마호텔에서 말을 바꾸기 위해 멈추어 서는 것도 똑같았는데, 그 거리는, 마치 우물 깊은 속처럼 고요했다오. 파리가 날아가 는 소리도 들릴 정도였소. 하지만 어쩌다 파리 한 마리가 내 방에 있었다 하더 라도, 유리창 어느 한 구석이나 비단 교직으로 만든 빳빳한 커튼 주름 사이에서 잠들어 있었을 것이오. 커튼 길이를 풀어 놓았기에 커튼은 창문 앞에 수직으로 드리운 채 꼼짝 않고 있었소. 그러니 이 깊고 완벽한 침묵 속에서 들리는 소리 라야 내 연필과 지우개 소리뿐이었다오. 그렇소, 나는 그녀의 얼굴을 그리고 있 었던 것이오. 정성스레 애무하는 손길로, 그리고 불타는 듯한 집중력을 가지고! 그런데, 갑자기 자물쇠 소리를 듣지도 못했는데, 경첩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방문이 반쯤 열린 채 그대로 있는 것 아니겠소? 마치 자기가 방금 냈던 소리를 두려워한다는 듯이... 나는 눈을 치뜨며 문을 잘못 닫아서 어쩌다 문이 열린 거라고 생각했지요. 잠이 들려는 사람의 몸을 떨게 하고 잠이 든 사람을 그 잠에서 깨우는 소리였소. 나는 일어나서 문을 닫으려고 했지. 그런데 반쯤 열 린 문이 아주 조용히 더 열리면서 이 조용한 집에 예의 그 신음소리 같은 날카 로운 소리를 퍼뜨리는 게 아니겠소. 문이 활짝 열리고, 내가 거기서 본 것은, 바 로 알베르트..., 그래, 그녀가 거기 서 있었소. 분명히 그녀는 겁을 먹고 조심을 했겠지만 그 망할 놈의 문이 삐걱소리를 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던 거였지. 아, 그런 청천벽력이! 유령을 믿는 사람들은 유령에 대해 이야기하지요. 하지 만, 그 어떤 초자연적인 유령이라 할지라도, 알베르트가, 그 놀라움, 그런 충격보 다 더한 충격을 내게 줄 수는 없었을 거요. 열리면서 문에서 났던 소리에 겁이 나서, 르리고 문을 닫을 때 똑같은 소리가 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그 알베르트! 내가 아직 열일곱 살밖에 안되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오. 그녀는 틀림없이 자기의 두려움에 비추어 나의 두려움을 알아차린 듯했소. 그녀는 기운 찬 몸짓 으로 내 입에서 터져나오는 비명을 막았다오.-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밖으로 터 져나왔을 거요.-그리고 그녀는 문을 닫았는데, 천천히 닫으면 소리가 난다는 것 을 알고는, 그 소리를 피하기 위해 재빠르게 닫았다오. 재빨리, 더 솔직하고 분 명하게 단 한 번의 찰깍하는 소리로 문이 닫혔소. 문이 닫히자 그녀는 무슨 다 른 소리가 들리지 않나 귀를 바짝 들이댔소. 그건 아마 더 불안스럽고 무서운 소리였겠지... 그녀가 비틀거리는 것 같았소. 나는 몸을 날려 그녀를 금방 품안에 앉았소.” “아,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 알베르트양은” 이라고 나는 대위에게 말했다. 그러나 대위는 약간 놀리는 투의 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당신이라면 아마 그녀가 공포에 질려, 혹은 열정 때문에, 혹은 정신이 다 나 가서 내 팔에 쓰러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누군가를 몹시 뒤쫓고 있거나 반 대로 꽁무늬를 쫓기고 있는 그런 여자처럼... 여인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어딘가 들어 있게 마련이라고들 말하는 악마, 그들의 비겁과 수치심이 대항할 힘을 잃 게 되는 날이면 언제고 그들을 지배하게 마련인 그 악마에 몸을 맡겨버렸을 때, 그리하여 미친 짓을 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되는 그런 여자들처럼... 헌데, 절대로 그런 게 아니었소.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지. 그녀에게는 그런 식의 속되고 노골스럽다할 두려움이 없었소. 내가 그녀를 팔에 안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안은 것이었다오. 처음에는 이마를 내 가슴에 묻었지만 곧 고개를 들더니 그 큰 눈으로-참으로 왕방울만한 눈이었소-나를 쳐다보았소. 마 치 그렇게 제 팔로 껴안고 있는 존재가 틀림없이 나인가 확인하려는 듯이 말이 요. 그녀는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창백했는데, 그녀의 얼굴이 그렇게 창백해진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오. 하지만 왕녀 같은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오, 여전히 금속처럼 흔들림없이 단호한 표정이었지. 단지 입술이 약간 부풀어오른 그 입가에 행복한 정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도 어렵고 다가올 행복을 기대해 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그 무언지 모를 일탈의 표정이 떠돌고 있었을 뿐 이라오. 그런 순간의 표정은 무언가 음울한 기분을 주는 것이라서 나는 그것을 외면하기 위해 그녀의 붉은, 도톰하면서 아름다운 그 입술에, 승리한 왕의 욕망 을 담은 대담하고 맹렬한 키스를 퍼부었다오. 입술은 열렸지만... 하지만 그 눈, 그윽하게 검은 눈, 긴 속눈썹이 내 속눈썹과 닿을 듯이 가까이 있던 그 눈은 결 코 닫히지 않았고, 심지어 깜빡거리지도 않았소. 그냥 두 눈 깊은 곳에서, 아까 입술에서 느껴졌던 그런 일탈의 표정이 느껴질 뿐! 그 불 같은 키스에 빨려든, 그녀의 입안으로 파고드는 내 숨결에 숨을 빼앗긴 그녀를 그대로 찍어내듯 안아 서, 푸른 모로코가죽 위에 눕혔소. 한 달 전부터 성자 로랑의 형틀이 되었던 의 자, 온종일 그녀를 생각하며 뒹굴던 의자였소. 그녀의 벗은 등 밑에서-그녀는 거 의 반라상태였었다오-그 의자는 관능적으로 삐걱대기 시작했지요. 그녀는 침대 에서 빠져나와, 믿지 않겠지만 이곳으로 오려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방을 지나와야만 했다오. 그녀는 손을 앞으로 내민 채 두 손으로 더듬거리며, 가 구에 부딪쳐 소리가 나고 그 소리에 부모가 깨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며 그 방을 지나온 거라오.” “어휴! 참초 속에서라도 그보다 용감하진 못하겠는데요. 그녀는 군인의 애인 으로는 아주 적격이었겠네요.” 내가 말했다. 그러자 자작이 말을 이었다. “그래요. 첫날 밤부터가 그랬다오. 그녀는 나만큼 격렬했다오. 내가 얼마나 격력했는지도 맹세할 수 있고... 하지만 그래봤자 마찬가지지. 대가가 있었으니! 그녀건 나건 아무리 힘 있게 격정을 나누고 있더라도, 그녀가 우리 둘에게 가져 온 그 무서운 상황은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오. 자신이 손수 찾으러 왔고 내 게도 전해준 그 행복의 품에 안겨서도, 그녀는 단호한 의지와 집요한 정열로 결 행한 행동에 대해 조금은 아연해 있는 듯했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난 별 로 놀라지 않았소. 나 역시도 질려 있었으니까. 그녀에게 말하지 않고 보여주지 도 않았지만, 그녀가 숨막힐 정도로 나를 껴안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무시무시 한 불안감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오. 나는 그녀의 한숨소리, 그녀의 입맞 춤, 잠들어 있는 그리고 신뢰에 차 있는 이 집의 고요함 너머에서 그 무언가 무 시무시한 것에 대해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거지. 그것은 혹 그녀의 어머니가 깨 어나지 않을까, 그녀의 아버지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거였다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어깨 너머를 통하여, 소리가 날까봐 그녀가 열쇠도 뽑아 놓지 않은 저 문이 다시 열려, 우리가 대담하게 그리고 비열하게 속이고 있는 두 노인네가 어 둠을 뚫고 분노에 찬 새하얀 얼굴, 메두사의 두 머리를 내밀지 않을까 두려워하 며 그 문을 보고 있었다오. 사랑의 여신이 울려주는 소리인 양 삐걱거리는 관능 에 찬 소파의 소리조차 나를 무서움에 떨게 했지... 내 가슴이 그녀의 가슴에 대 고 두방망이질을 쳤고, 그녀의 고동도 그에 대답하는 것 같았소. 한없이 취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그 취기를 싹 가시게 하는 그런 순간이었는데, 어쨌든 으시시 했었지! 뒤에는 그 모든 것에 익숙해졌지만... 뭐라야 좋을지 모를 이 무모한 행 동을 무사히 계속해감에 따라, 그런 모험 가운데도 평온을 찾을 수 있었던 거요. 언제고 현장을 덮칠 수 있다는 위험 가운데 지내다보니 무신경해진 것이고, 그 위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오. 오로지 행복해지는 데만 신경을 썼지. 그 무시무시한 첫날 밤, 다른 날에도 여전히 그녀에게 으시시하게 여겨졌을 그 첫날 밤 이래로 그녀는 이틀에 한 번 정도 내 방으로 오기로 결심을 했다오. 내가 그녀의 방으로 갈 수가 없었으니-그녀의 방은 그녀 부모의 방 쪽으로밖에 는 문이 나 있지 않았다오.-그녀가 이틀마다 한 번씩 내게로 온 거지. 하지만 그 녀는 결코 첫날 밤의 그 감각, 최초의 경악을 잃지 않았다오. 시간은 나를 무감 각하게 했지만 그녀는 결코 그렇지 않았던 거지. 그녀는 매일 밤 위협이 되고 있는 위험 앞에서도 무디어지지 않았소. 언제나 그녀는 내 가슴에 가슴을 맞댄 채 조용히 있었으며, 거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소. 당신은 그녀가 말솜씨가 좋으 리라고 믿고 있겠지만... 훗날 마음이 좀 편안해지자 우리들 사이에서는 이미 과 거지사가 되어버린 일, 그러니까 처음 접근했던 그날 이후 그녀가 보여주었던 이해하기 힘든 냉대와 적의에 대해 그녀에게 마치 정부에 대해 쓰는 말투로 물 어보았을 때, 실상은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할 뿐이지만 사랑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붙어다니는 그 만족할 줄 모르는 모든 궁금중에 대해 물어보았 을 때, 그녀가 해 준 대답이라야 기나긴 포옹뿐이었소. 그녀의 슬픈 입술은 모든 것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있을 뿐... 그 입맞춤은 빼고 말이요! `난 당신을 위해 몸을 망쳤어요`하는 여자들이 있지요. 혹은 `당신 곧 나를 버 리겠지요?`라고 말하는 여자도 있을 거고. 그런 것은 사랑의 숙명을 각기 다른 식으로 표현한 거지요. 하지만, 그녀, 그녀는 아니었소!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오... 참으로 이상한 일! 그리고 더욱이 그녀는... 그녀는 내게 안에서부터 타오르고 덮혀지는 두꺼운 대리석 덮개 같은 것이었소. 어느 순간에는 결국 그 뜨거운 열기로 대리석이 쪼개지고 말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천만에, 그 대리석은 결코 그 단단한 밀도를 잃지 않았다오. 밤마다 나를 찾아오면서도 느슨해진다거 나 말을 한다거나 하지 않았소. 이런 교회 용어를 쓰는 것이 허락된다면, 그녀는 내게로 왔던 첫날 밤과 똑같이 언제나 `고해시키기 힘든` 여자였다오. 더 이상 아무것도 끄집어낼 수가 없는... 낮 동안 더욱 차갑고 무심해지는 만큼 더 격렬히 탐해보고 싶은 아름다운 입 술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는 말이래야, 기껏해야 한 음절의 낱말뿐, 그 낱말로는 도대체 그녀라는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알수가 없었다오. 그녀는 정말로 스핑크 스 같은 존재, 그녀 하나만으로도 제정시대풍의 내 방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스핑크스상들 보다 더 스핑크스 같은 존재였지요.” 그때 내가 다시 끼여들었다. “하지만 대위님. 그 모든 것에도 결말은 있었을 게 아닌가요? 당신은 강인한 남자이고 스핑크스들이래야 가공의 동물들일 뿐인데. 현실에서야 그런 것은 없 지요. 결국은 그 여자, 그녀의 가슴 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었는지 알아내셨겠지 요?” “결말이라! 그래요, 결말이 있긴 있었지.” 브라싸르 자작은 갑자기 창문을 열면서 말했다. 그 넓은 가슴에 공기가 모자 라서 이야기를 끝내려면 공기가 더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댜고 해서 그 이상한 여인의 가슴이 열린 것도 아니지. 우리의 사랑, 우리의 관계, 우리의 음모-아무튼 당신 마음대로 택하시구려-는, 그 알베 르트-아마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그리고 나도 사랑하지 않았을-보다 더 사랑했 던 수많은 여인들과의 관계애서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그런 감각을 우리에게, 아니 차라리 나에게, 그래요, 오로지 나에게 주었다오. 내가 그녀를 향해 지닌 감정이 무엇인지, 또한 그녀가 나를 향해 지닌 감정이 무엇인지 나는 전혀 이해 할수 없었고, 그런 식으로 여섯 달을 보냈으니! 그 여섯 달 동안 내가 이해한 것 이라곤 젊었을 때는 도저히 알기 어려운 일종의 행복뿐이었다오. 무언가 남에게 감추고 있을 때의 행복감을 나는 이해했던 거요. 나는 무언가 공모할 때 그 비 밀 속에서 일어나는 환희를 이해했던 것이고, 성공하리라는 희망이 없어도 왜 죄의 공모자들이 불치의 병처럼 자꾸 이어지는지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오. 알베 르트는 부모들과 함께한 식탁에서건 어디에서건, 내가 그녀를 처음 보던 날 내 게 그토록 감명을 주었던 왕녀님 그대로였어요. 푸르스름하도록 새까만 머리를 굵게 말아 눈썹에 닿도록 가까이 그러나 단단하게 올린 그 모습, 그 밑으로 드 러나보이는 그 이마에서는 죄에 물든 간밤의 흔적을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고, 붉게 물드는 일조차 없었다오. 그리고 나도 그녀만큼 속을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려고 애를 썼었지. 하지만, 누군가 유심히 나를 살펴보았더라면 열 번도 더 들 켰을 것임이 뻔한데도, 나는 내 깊은 속으로부터,그녀의 그 기막힌 무관심의 태 도가 온통 내 것이라는, 그녀는 나를 위해 정열의 비열함까지도-과연 정열이 비 열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감수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건방지게도 만족을 하 고 있었다오. 우리를 제외하고는 이 지구상에서 아무도 모른다... 아, 그 생각은 얼마나 달콤했던지! 그 누구도, 심지어 내 친구인 루이 드 묑까지도 모르고 있었 으니... 내가 그 행복한 날을 맞이한 이래 그애게는 아무 이야기도 안했었소. 하 지만 그 친구, 말은 안했어도 모두 눈치챘었는지도 모르겠소. 워낙에 입이 무거 운 친구였으니까. 언제 물어보길 했어야지. 우린 어렵지 않게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갔고 일상복이나 정복을 입고 다시 연병장 산책을 시작했으며 무술과 펀치 술도 다시 찾아왔소. 그래요, 행복이란 놈이, 마음 속에 마치 치통과도 같은 것 을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매일 밤 규칙적으로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매일매일이 그냥 즐겁게 단순화되는 거라오.” “그런데, 그 알베르트의 부모란 사람들은 `마법에 든 일곱 형제`처럼 잠만 자 고 있었나요?” 내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 옛 댄디의 말을 자르며 약간 비웃는 투로 이죽거 렸다. 그의 이야기에 너무 사로잡혀 있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는데, 댄디와 함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대접을 받고 싶으면 농담을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 기 때문이었다. 자작이 내 말을 받았다. “내가 뭐 사실도 아닌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지어서 한다고 생각하시오? 천만 에, 난 소설가가 아니오! 이따금 알베르트가 내 방에 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 지. 경첩에 기름칠을 해 놓아서 이제는 솜처럼 부드러워진 그 문이 밤새 열리지 않은 때도 있었단 말이오. 부모의 방을 더듬거리며 지날 때, 그녀의 어머니가 기 척을 느끼고 소리를 지르거나 아버지가 그녀의 모습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지요. 냉정하고 침착하기 그지없는 알베르트는 그때마다 변명거리를 잘도 찾아냈다오. 아파서 그랬다 등등...” “ 그 냉정하고 침착한 행동은 당신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희귀한 경우도 아니 잖아요.” 내가 다시 끼여들었다. 뭔가 반발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신의 그 알베르트도, 할머니가 커튼 뒤에서 잠들어 있는 바로 그 방에서 매일밤 창문을 통해 애인을 맞아들이던 처녀보다 더 강심장인 것 같지는 않은데 요. 그려는 모로코식 소파가 없었기에 그냥 양탄자 위에서 격식 차리지도 않고 일을 치렀다죠? 당신도 그 얘기는 아실 겁니다. 어느 날 저녁인가, 틀림없이 너 무 행복에 겨웠던 그 처녀 입에서 나온 것일 텐데, 여느 때보다 신음소리가 크 게 나오는 바람에 할머니가 잠에서 깨어나서는 `얘야, 무슨 일이냐`라고 커튼 위 에서 물었다죠. 애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기절해버릴 노릇인데도 그냥 그 상 태에서 `양탄자 위에 떨어진 바늘을 찾고 있는데 코르셋이 너무 꽉 끼어서 그래 요, 할머니. 아직 바늘을 못 찾았어요`라고 대답 했다는 겁니다. “그래요. 나도 그 이야기라면 알고 있죠.” 자작이 다시 말을 받았다. 알베르트란 인물에다가 그런 식의 비유를 들이댄 것에 대해 조금 모욕감을 느낀 것 같았다.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당신이 방금 얘기한 처녀는 기즈 가의 처녀일 게요. 그 가문의 처녀답게 잘도 위기를 넘겼지요. 하지만 그 날 밤 이래로 애인에게 다시 창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은 부인을 못하시겠지. 그 애인 이름이 누 아르 무티에 씨가 아니었던가 싶은 데,... 하지만 알베르트는 생각지도 않던 그 오싹해지는 장애를 겪은 바로 그 다음 날도 내게로 왔고, 그저 아무 일도 없었 다는 듯 그 위험스런 일을 계속했다오. 그 당시 나는 수학엔 그저 젬병인 데다 거기엔 별 신경도 안쓰던 소위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확률이라는 것을 조금이라 도 생각해 볼 줄 아는 사람에게는 언젠가,...어느 날 밤엔가, 무슨 사단이 일어나 리라는 것은 틀림없었소...” “아, 그래요. 대위님, 당신에게 공포감을 가르쳐준 그 결말 말씀이군요.” 이야기를 바로 시작하기 전에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해내고 내가 말했다. “바로 그거요”라고 그가 내가 억지로 꾸며내고 있는 가벼운 말투와 확연히 구별되는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당신도 잘 알지요. 테이블 밑에서 내 손을 잡았던 때부터 밤에 내문을 열고 유령처럼 나타날 때까지 알베르트는 내게 온갖 마음의 동요를 한껏 겪게 했다는 것을... 그녀는 영혼 속에서 전율 이상의 것을, 공포 이사의 것을 경험하게 해주 었소. 하지만 그건 아직 우리 옆을 스쳐지나가는 총탄이나 바람소리를 내며 날 아가는 포탄 소리가 주는 느낌에 불과 했을 뿐이었다오. 떨리긴 하지만 앞으로 나아 갈 수는 있으니까. 그런데, 그건 더 이상 그런 것이 아니었소. 그것은 완벽한 공포, 진짜 공포, 알 베르트와 함께 할 공포도 아니고 오로지, 그래 오로지 나홀로 감당해내야만 할 공포였소. 내가 겪었던 것은 얼굴뿐만 아니라 심장까지도 창백하게 만들 그런 공포였으며, 수개 연대의 병력을 한꺼번에 격퇴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그런 공 포였다오. 당신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는, 그 영웅적인 샹보랑 연대 병사들이, 말고삐도 다 내던지고 땅바닥을 기다시피, 연대장 이하 장교들을 에워 싼 채 패주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오만, 그 당시에, 난 아직 견문도 없었고...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을 겪고야 말았다오. 자, 들어보시오. 어느 날 밤이었소. 우리들이 유지하던 그때의 생활에서 보자 면 여는 밤과 다름없는 어는 날 밤일 뿐이었소. 기나긴 어는 겨울 밤... 가장 고 요했던 어느 날 밤이라고는 내 말 한하리다. 우리들의 밤은 언제나 고요했으니 까. 행복한 사람들에게 밤은 언제나 고요해지는 법 아니겠소. 우리는 장전된 대 포 위에서 잠자고 있었던 셈이오. 터키인들의 지옥으 다리처럼, 깊은 심연을 가 로질러 놓인 사브르 칼날 위에서 사랑을 나누고 잇으면서도 우리는 조금도 불 안하지 않았던 거지. 그날 알베르트는 오래 함께 있고 싶어서 여는 때보다는 좀 일찍 왔었소. 그렇게 그녀가 내게로 왔을 때, 나의 첫 애무, 나의 첫 사랑의 행위는 우선 그 녀의 두 발, 녹색 혹은 자주색의 장화를 벗어버린, 나의 두 귀여운 발, 내 기쁨 의 원천인 그 두 발에게 바쳐졌다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맨발로 부모의 방 에서 반대편 내 끝방까지 오느라 복도 벽돌의 냉기가 고스란히 스며든 발. 나 때문에 언 발, 나 때문에 그 따뜻한 침대를 마다하고 무서운 가슴의 병 같은 것 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를 그 발을 나는 덥혀주었다오. 나는 그 차갑고 창백한 발 을 따뜻하게 해주는 법, 그 발에 장미빛 혹은 진홍빛의 색조를 다시 떠올리는 법을 알고 있었소. 하지만 그날 밤은 그 방법이 효과가 없었서ㅗ. 입으로, 그 둥 글게 희 매력적인 발목까지, 내가 즐겨 그러했듯이, 진분홍 꽃잎 같은 핏기를 빨 아올리려 했지만 헛일이었던 거오. 그날 밤, 알베르트는 그 어는 때보다도 더 조용히 날 사랑해주었소. 그녀의 포 옹은 때로는 느슨했다가 때로는 강렬해서 마치 내게는 그 어떤 언어와도 같았다 오. 내가 그녀에게 이야기를 할지언정, 그녀에게 대답을 요구하거나 내게 말하기 를 요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표현해낼 수 있는 그런 언어 말이요. 그녀의 포옹으로 나는 그녀를 듣고 이해했던 것이라오. 그런데 갑자기 아무것도 내게 들려오지 않았소. 그리고 가슴으로 나를 부둥켜 안았던 두팔이 스르르 풀리는 게 아니겠소. 나는 그녀가 종종 그랬듯이 절정의 순간 혼절한 것이라고 믿었다오. 단지 평상시라면 혼절중에도 경련하듯 나를 꽉 끌어안고는 했는데... 당신과 나는 속 좁은 여자들 사이가 아니지요. 사내들끼리니까, 사내들끼리 할 수 잇는 얘기를 다 하겠소. 나는 알베르트가 황홀한 절정감에 오르는 때를 경험한 바 있었소. 그 절저의 순간에도 내 애무는 계속되었었고... 나는 그녀의 의식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그 전에 그랬듯이 그녀의 가슴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더랬소. 내 감각 밑에서 그녀 의 감각이 되살아날 것이다. 관능적 기쁨의 타격을 한 번 더 받으면 그 힘으로 그녀는 다시 되살아나리라고 건방지게 확신하면서 말이요. 하지만 내 경험은 보기 좋게 어긋났소. 나는 내 몸에 찰싹 달라붙은 채 푸른 소파에 누워 있는 그녀를 그냥 그대로 바라보았소. 커다란 눈꺼풀 속으로 사라 져버린 두 눈이 언제 다시 되살아나 그 이글거리는 까만 비로드 눈동자를 보여 주게 될까를 살피면서. 목에 짧게 입을 맞춘 후 천천히 어깨를 따라 내려오는 그 행위만으로도, 이빨이 으스러지도록 꽉 다물고 있는 그 입이 다시 벌어져 숨 을 내뱉게 되는 순간을 기다리면서... 하지만 눈은 다시 떠지지 않았고, 이빨도 풀어지지 않았소. 알베르트의 발의 냉기가 그녀의 입술에까지 올라왔고 내 입술에도 전해졌소. 그 무서운 냉기가 느껴지자 나는 몸을 반쯤 일으켜 그녀를 자세히 살펴보았소. 그리고 나는 소스 라치듯 그녀의 팔에서 빠져나왔던거요. 그녀의 두 팔 중 한 팔은 그녀의 몸 위 로 툭 떨어졌고 또 한 팔은 누워 있던 소파로부터 바닥 쪽으로 미끄러져 흔들거 리고 있었소. 나는 얼이 빠져버렸지만 아직 정신이 좀 남아 있었던지 내 손을 그녀의 가슴에 대어보았소. 아무 기척이 없었소. 팔목에도, 관자놀이에도, 다른 그 어떤 맥에도... 어디든 죽음만이 있었을 뿐이며, 벌써 몸이 무섭도록 뻣뻣하게 굳어가고 있었던 것이요! 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소... 하지만 그걸 믿고 싶지가 않았소! 인간이란 존재는, 명백한 증거나 명백한 운명 앞에서도 그것을 부인하는 어리석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법! 알베르트는 죽었소. 헌데 무슨 이유로? 나는 알 수가 없었다오. 나는 의사가 아니었소. 하지만 죽은 건 틀림없었소. 내가 하는 일이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는 것은 한낮의 빛처럼 명백했건만, 나는 거의 절망적으로 그 무익한 짓거리를 다 해보았소. 지식도, 도구도, 약도 없는 절대적인 무의 상황에서 나는 그녀의 이마 에다 내 향수를 몽땅 쏟아부었소. 자그마한 소리에도 몸이 떨려오곤 하던 이 고 요한 집안에서, 소리가 날 위험도 무릅쓰고 그녀의 손을 힘껏 쳐보기도 했소. 제 4기병대 장군이었던 삼촌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했소. 말을 응급처치 할 때는 대개 사혈을 하는 법인데, 친구 중 한명이 위기에 빠졌을때 사혈침으로 피를 뽑아 생명을 구해주었다는 얘기였다오. 내 방에 무기는 얼마든지 있었소. 나는 단도를 손에 들고 알베르트의 팔을 피가 나도록 그었소. 그 눈부신 팔을 도륙을 해댔는데도 피는 흐르지 않았다오. 다만 몇 방울의 피가 엉겨붙었을 뿐, 피가 이미 응겨로딘 것이었소. 입을 맞추어도, 입으로 빨아대도, 꼬집어 뜯어도 이 뻣뻣해진 시체, 내 입술 아래서 시체가 되어버린 그 몸에 활기를 불어 넣을 수는 없었던 거요.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위에 그냥 누워버렸소. 죽은 영 혼을 되살린다며 토다튀르즈 마술사들이 쓰던 수법인데, 그렇게 해서 다시 생명 을 불어 넣으리라 기대도 하지 않으면서 행동은 꼭 그걸 기대하기라도 하는 양 했던 거요! 그때, 알베르트의 갑작스런, 그 기막힌 죽음 때문에 오게 된 혼란의 와중에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하나의 관념이, 알베르트의 얼어붙은 몸 위에 누워 있자 내게 또렷이 나타났소... 그것은 공포였소! 아, 그 공포, 그 어마어마한 공포! 알베르트가 내 방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녀 의 죽음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 인가! 그 생각이 들자, 머리를 감싸고 있던 내 손, 이 끔찍한 공포에 사로잡힌 육신의 내 손이 모두 바늘끝이 되었다오! 내 척추가 녹아서 한 줌 진흙덩어리가 된 기분이었고, 그런 창피스런 느낌을 억누르고 싶었지만 소용이 없었소... 나는 침착해야 하다고 속으로 말했소... 어쨌든 난 사내가 아니냐... 게다가 군인이고... 나는 머리를 손으로 감싸쥔 채, 생각이 어느 정도 돌아가기 시작하자, 내가 처해 있는 무서운 상황에 대해 차근차근 따져보려 했소... 그리고 그 상황을 고정시키 고 살펴보기 위해, 내 머릿속을 잔인한 채찍처럼 때리고 있는 모든 생각들을 일 단 중단해 보기로 했소. 자 저기 명백히 내 방에 시체가 있다... 이제는 제 방으 로 되돌아갈 수 없는 알베르트의 생명 없는 몸이...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그녀 의 어머니가 욕보인 채 죽어 있는 그녀의 시체를, 소위 `장교 나으리의 방`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필경은 제 딸을 욕보이려다 죽었다고 믿게 될 그녀의 어 머니 생각을 하니, 알베르트의 시체 자체보다 더 가슴이 짓눌리는 듯했소. 죽은 사람을 숨길 수는 없는 법, 하지만, 내 방에 시체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 에 증명될 그 불명예에서 벗어날 방도는 없을까? 그게 내가 던지고 있던 질문이 었고 내 머리 속에 못박힌 하나의 생각이었다오. 그 생각에 골몰할수록 어렵다 는 생각이 커지더니 이윽고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이기 시작했소. 아, 그 때, 무시무시한 환영이! 알베르트의 시체가 부풀어올라 내 방 전체를 채우더니 그로부터 끌어낼 수가 없게 되었던 것! 아! 그녀의 방이 부모의 방 뒤켠에 있지 만 않았더라도, 그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녀 방으로 옮겨 놓을 수 있었을 것을! 내가 어떻게 그녀의 시체를 팔에 들고, 그녀가 살아 있을 때 대담하게 했 던 일을, 할 수가 있었겠소? 내가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 방을, 한 번도 들어가보지도 않은 방, 그녀의 부 모가 가벼운 잠에 빠져 쉬고 있는 그 방을 가로질르는 모험을 할 수가 있었겠 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일어날 일에 대한 온갖 상상과 내 방에 있는 시 체에 대한 공포가 미친 듯이 날뛰는 바람에, 저 가여운 여자의 명예도 살리고 그녀 부모의 원망, 나의 부끄러움에서 벗어나는, 요컨대 이 절망적 상황에서 벗 어나는 유일한 방도는, 오직 알베르트를 자기 방에 갖다 놓는 방법뿐이라는 터 무니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오. 당시의 내 머릿속 상태가 그랬었지. 믿을 수 있 겠소? 지금 내가 생각해도 나 자신도 믿기질 않아요. 알베르트의 시체를 들 힘은 내게 있었나보오. 그녀를 두 팔로 들어올려 어깨 에 걸쳤소. 아! 단테의 지옥에 유배된 자들의 몸뚱아리보다 더 무거운 그 허물! 불과 한 시 간 전만 해도 내 욕망의 피를 끓게하더니 지금은 날 배신한 채 누워 있는 그 허 물,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가 알려면 나처럼 그걸 어깨에 짊어져 보아야만 할 거 요. 그게 어떤 거라는 것을 잘 알려면 그걸 옮겨봐야만 해요... 난 시체를 업은 채 문을 열었소. 그리고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그녀처럼 맨 발로 문이 저 안 깊은 곳에 있는 부모의 방까지 이어지는 복도를 걸었소. 그 쇠 잔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둠에 잠긴 이 집에서 무슨 소리라도 나지 않나 귀를 기울이기 위해 멈추어서면서 말이요. 하지만 크게 울리는 내 심장 고동소리에 다른 소리가 들릴 턱이 없었다오! 아주 긴 시간이었지. 움직임이라곤 아무것도 없었고. 단지 한 걸음만 대디딜 뿐... 그러나, 무시무시한 그녀 부모의 방문에 다 다랐을 때, 알베르트가 돌아갈 때를 생각해서 잠가 놓지 않은 그 방 앞에 이르 렀을때, 그 꼭 거쳐야만 하는 방, 세상 모르고 편안히 잠든 두 불쌍한 노인이 길 고 나지막하게 숨소리를 내는 그 방을 감히 넘을 수가... 어둠속에서 검게 입을 벌린 그 문지방을 도저히 넘을 수가 없었소. 나는 물러났소. 아니, 내 무거운 짐 과 함께 도망쳤소. 그리고는 알베르트의 시신을 소파 위에 올려 놓고 그옆에 무 릎을 꿇고 앉아 거의 애원조의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오. `어떻게 하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때 내 속에서 그 무언가 붕괴하는 듯한 느낌과 함께 6개월 동안 내 정부였 던 이 아름다운 여인의 몸을 창문밖으로 던져야겠다는 잔인하고 황당한 생각이 떠올랐소. 나는 창문을 열었다오. 그리고 저기 보이는 저 커튼을 제치고는 흡사 어둠의 구덩이 같은 거리 쪽을 바라보았지. 그날 밤 밖은 칠흑같이 어두웠다오. 길바닥도 보이지 않았지. `자살인 줄 알 거야.` 난 그렇게 생각했소. 그리고는 알베르트에게로 돌아가 그녀를 들어올렸다오. 그런데 그 순간 제 정신이 아닌 머리에 한가닥 상식이 섬광처럼 번뜩였소. `그녀는 어디서 죽은 게 되는 거지? 내일 내 창문 밑에서 그녀를 발견하게 된 다면, 그녀가 어디서 뛰어내린게 되는 거지?`라고 나는 자문했던 것이요.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나를 휘갈겼던 거지요. 나는 창 문을 닫았소. 쇠붙이에서 삐걱 소리가 났지요. 커튼을 다시 쳤는데, 그 소리에 그냥 사색이 되버렸다오. 결국 창문을 통해서건 계단을 통해서건 계단 위건, 복 도 안이건 그 어디건 이 영원한 고발자인 시체를 처분해서 모독을 가할 만할 곳 은 없었다오. 시체를 조사해보면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고, 그 잔혹한 소식을 알 게된 어머니는 의사나 판사가 그녀에게 감추려하는 것도 모두 꿰뚫어보리라... 그 모든 것을 견딜 수가 없었소. `사기가 죽어버린`(이 말은 나폴레옹 황제가 한 말인데 나중에 그 뜻을 알 수 있었다오) 비겁한 정신상태에 빠져, 권총 한 방으 로 끝내버릴까 하는 생각이, 내 방 벽에 걸려 번쩍이는 무기들을 보면서 들기도 했다오. 하지만 어떻게! 솔직히 말하리다. 난 아직 열일곱 살이었고, 난 내 검 을, 그 놈을 사랑할 때였는데... 내가 군인이 된 것은 기질상 취미에 맞았기 때문 이었소. 난 아직 전쟁도 치루어보지 않았고, 그게 보고 싶었단 말이요. 내게는 군인으로서의 야심이 있었지. 당시의 영웅이었던 베르테르도 우리 연대에서 농 담거리였고, 우리 같은 장교들에겐 동정의 대상일 뿐이었다오. 그러자 평생을 수 치 속에서 보내야 할 이 사태를 자살로 모면해보려는 생각이 사라지고, 문득 그 뒤엉킨 막다른 골목에서 구원의 손길이라 할 수 밖에 없는 해결책이 떠올랐소. ` 연태장한테 가본다면...` 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요. 연대장은 군대에서 아버지와 같은 존재요. 나는 마치 비상령이라도 울린 것처럼 다급히 옷을 입었소. 군인다운 조심성으 로 총도 챙겼다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게 뭐예요? 나는 열일곱 살 난 남자의 감성으로-사람은 어제나 열일곱 살 먹은 사내처럼 감상적인 법이지-, 살아 있을 때나 죽어서나 말이 없는 알베르트, 6개월 동안 그토록 황홀한 침묵의 애정으로 나를 채워준 알베르트으 그 말없는 입술에 마직막으로 입을 맞추었소. 나는 발돋음으로, 주검이 남겨진 그 집 계단을 내려왔소. 쫓기는 사람처럼 숨 을 몰아쉬며 거의 한 시간여 헤맨 끝에(한 시간은 족히 걸린 것 같았소.), 대문 빗장을 열고 커다란 열쇠를 자물쇠 속으로 밀어 넣어 문을 연 다음, 도둑고양이 처럼 조심스레 다시 자물쇠를 채웠소. 그리고 그 길로 내빼듯이 연대장의 집으 로 갔다오. 거기서 미친 듯이 벨을 눌렀지요. 마치 적이 연대깃발을 탈취하기라도 하듯이 트럼펫처럼 요란하게 벨을 울려댔던 거요. 나는, 이런 시각에 상관의 방에 들어 가는 것을 저지하레는 당번병까지도 밀어젖히며-걸리적거리는 것은 다 제치며- 돌진했다오. 내가 내는 소란통에 연대장이 잠에서 깨어나자 나는 다 말씀드렸소. 너무 화급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자초지종을 단숨에 씩씩하게 말씀드린 후에 구 해달라고 빌었소. 연대장은 역시 사나이였소. 그는 한 눈에, 내가 어떤 곤경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더군요. 그는 자기 `아이들`-그는 우리를 그렇게 불렀다오-중 에서도 막내인 나를 측은히 여겼던 거요. 연대장은 정말 프랑스다운 판결을 내 게 내리더군. 즉각 이 마을을 떠나자마자 그가 부모들을 만나볼 것이다, 그러니 10분 후에 역마호텔에 말을 바꾸러 오게 될 마차를 타고 출발해서, 지정해준 마 을로 떠나라, 나중에 편지를 주겠다, 라는 것이엇소. 그는 내게 돈도 주더니-돈 을 갖고 나오는 것을 난 깜빡했었지-노인의 회색 수염을 다정하게 두 뺨에 맞추 며 작별을 고했소. 알현이 끝난 지 10분 후에 나는 마차 꼭대기 자리로 올라탔 고(그때 그 자리밖에 남은 게 없었다오), 마차는 죽은 알베르트를 내버려두고 온 그 방, 오늘밤처럼 불이켜져 있던 그 방 창 밑을(아까 내가 어떤 눈초리를 던지 던가요?) 지나 달려갔다오.” 브라싸를 자작은 말을 멈추었다. 그 굵직한 목소리의 기가 약간 꺾여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농담을 건넬 기분이 들지 않았다.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에 내가 그에게 물었다. “그리고는요?” “아, 그 다음은 몰라요. 나도 오랫동안 정말 무척 궁금했었는데... 난 무조건 연대장의 명령을 따랐었죠. 그가 어떻게 했는지, 내가 떠나온 뒤로 어떻게 되었 는지 알려줄 편지를 초조히 기다렸는데... 그의 한 달을 기다렸소. 한 달이 지난 후에 연대장으로부터 내가 받은 것은 편지가 아니라,-적의 얼굴에 칼로 금을 긋 는 것 외에는 무얼 써보는 사람이 아니었죠-전보발령장뿐이었소. 막 전투에 투 여 될 참이었던 35부대로 24시간내에 합류하라는 명령서였지. 전투, 그것도 처음 으로 벌이는 전투에서 벌어지는 신나는 일들! 전투, 피로, 그리고 수많은 여자들 과의 모험 때문에 연대장에게 편지쓰는 일도 자꾸 뒤로 미루게 되었고 알베르트 의 이야기에 얽힌 잔인한 추억으로부터도 벗어날 수가 있었아오. 물론 완전히 지울수는 없었지만... 그건 마치 빼낼 수 없는 총알처럼 내게 박혀 있다오. 나는 언젠가 연대장을 만나면 내가 알고 싶어하는 바를 알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 는데, 그는 라이프찌히 전투에서 선봉에 섰다가 전사했다오. 루이 드 묑도 그보 다 한 달 전에 이미 전사했고... 뭐, 꼭 바람직한 건 아니겠지만, 아주 건장한 영혼 속에서도 모든 것이 가라앉 을 수 있어요. 혹은 차라니 아주 건장하기 때문인지도... 내가 떠난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던 그 강렬한 호기심이 결국은 조용히 가라앉더군. 몇 년 전이 라도, 나는 이미 변한 모습이 었을 테니, 들킬 염려없이 이 작은 마을로 돌아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만이라도, 내 비극적 모험 중 밖으로 새어나온 것만이라 도 알아보려고 할 수도 있었을 거요. 하지만 내 평생 동안 무시해온 사람들의 입방아가 두려워서도 아닌 그 무엇이, 내가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그때 의 그 공포와 비슷한 그 무엇이 나를 막았던 거요.”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 댄디가 조금도 멋을 부리지 않고 그토록 슬픈 실제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에서 받은 감동으로 꿈에 잠겼 다. 그리고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댄디즘에 있어서 완두콩꽃 정도가 아니라 양 귀비꽃이라 할 만한 멋쟁이 브라싸르 자작, 영국인의 풍모를 지닌 호탕한 술꾼 브라싸르씨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겉보기보다는 깊이가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그가 처음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평생동안, 그의 방탕한 삶의 쾌락에 칼집을 내었던 `검은 얼룩`이라는 말이... 그때 그가, 나를 한층 더 놀라게 하려 는 듯, 갑자기 내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잠깐! 저 커튼을 좀 봐요.” 날씬한 여인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알베르트의 그림자요.” 그러더니 그는 씁쓸한 듯이 덧붙였다. “오늘밤은 우연이라는 놈의 장난이 너무 심하군.” 커튼에선 이미 사람 그림자가 사라지고, 붉은 불빛만이 흘렀다. 자작이 이야기 를 하는 동안 마차수리를 하던 수리공이 마침 일을 끝낸 참이었다. 교대할 말도 준비가 다 되어, 불꽃을 일으키며 땅을 박차고 있었다. 털모자를 귀까지 덮어쓴 마부가 장부책을 입에 문 채 고삐를 잡고 올라왔다. 그리고 마부석에 자리를 잡 자, 맑은 목소리로, 어둠속에서 명령을 내렸다. “이랴!” 그러자 우리는 달리기 시작했고, 그 진홍빛 커튼이 내려진 신비의 창문을 금 방 지나쳤다. 지금도 가끔 내 꿈 속에 나타나곤 하는 그 창문을... 해석 안되는 과거의 길고 쓸쓸한 여운 회상은 시간이 파괴해버린 과거를 기억으로 재생하는 일을 말한다. 모든 소설 은 본질적으로 자전적이듯이 또한 회상적이다. 우리가 편의상 귀향소설이라 부 르는 것도 크게는 회상소설의 범주안에 들어갈 것이다.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조만간에 어떻게든 해석된다. 그리고 그 해석에 따라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기억 속에 저장된다. 그런데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해석 안되는 과거가 있다. 분명히 일어났으나 그 의미는 종내 밝혀지지 않은 채 의식 속을 떠도는 사물의 기억이 그러하다. 브라싸르 자작은 진홍빛 커튼이 쳐 있는 방과 그속에서 일어났던 일을 끝내 해석하지 못한다. 알베르트의 도발적인 행동에서 그뒤에 이어지는 기이한 정사 며 돌연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부인물인 일인칭 화자의 어렴풋한 암시외에 해석 의 단서는 거의 없다. 심지어는 연대장에게 맡기고 떠난 뒤처리며 후일담조차 온전히 미지로 남겨져 있다. 그러면서도 그 과거가 브라싸르 자작에게 미친 영향은 오래고도 깊어보인다. 거의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야 할 만큼 길고 생생한 서두의 약전은 분명 열일곱 의 소위가 겪었던 해석 못할 과거와 연관이 잇다. 무모할 정도의 용감성을 지녔 으면서도 위계질서에는 끝내 승복하지 못하고 일탈한 군인, 멋쟁이며 난봉꾼, 허 무주의적 호사가로서의 남은 생애가 진홍빛 커튼과 무관한 것이라면 거기 대한 화자의 긴 서술은 이 작품의 사족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홍빛 커튼 뒤에 있는 과거는 해석되지 못했기 때문에 브라싸르 자작 의 기억 속에 더 선명하게 각인 되엇을지도 모른다. 열일곱의 나이 뒤에 숨어 해석을 포기하고 그 해결까지도 상관에게 미룬채 달아나고 말았던 그 사건은 그 때문에 더 속깊은 상처로 그의 의식에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브라싸르 자작의 분방하고 요란스런 나머지 삶은 그 과거를 해석하기 위한 무의식의 노력 은 아니었던지. 그 동안에도 그의 보이지 않는 상처는 끊임없이 피흘리고 있엇 던 것이 아니었던지. 작가 도르빌리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반낭만주의, 반자연주의 작가이다. `장발 장`으로 널리 알려진 빅토르 위고와 동시대에 살았던 그는 `동전 몇 닢에 회개 하고 몇 시간씩 양심과 싸우다가 개과천선하는 그런 인간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며 위고식의 낙관적이고 도덕적인 세계관에 맹공을 가했던 작가로 유명 하다. 사교계의 남성이나 귀족 여인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도르빌리 소설의 특 징은 일상에서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의 위악적인 모습, 순간적으로 포착되는 인간의 악마적 속성을 살짝 열려진 창틈을 통해 들여다보듯 파헤치는 데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진홍빛 커튼`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 `마녀들`에 수록 된 소설이다. `마녀들`은 어차피 천상의 순결함과 악마의 모습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담고 싶어한 그의 작가적 욕망을 선명하게 보여준 작품집이다. 그러나 그의 소설이 악을 미화한다는 주장이 강하 게 제기되면서 `마녀들`이 재판에 회부되고 초판본 4백 80권이 압수되는 필화사 건을 겪기도 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유행하던 살롱을 들락거리며 탁월한 논객으 로 이름을 떨쳤던 그는 보들레드, 발자크와 특히 친밀한 교분을 쌓으며 사회적 으로 마찰을 빚던 그들의 작품을 적극 옹호했다. 고향 나는 혹독한 추위를 무릅쓰고 2천여 리나 떨어진 먼 곳에서 20여년 동안 떠나 있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침 한겨울이라 고향이 가까워짐에 따라 잔뜩 찌푸린 날씨에 차가운 바람이 선창 안으로 불어닥쳐 윙윙 소리를 냈다. 뜸 사이로 밖을 내다보니 어슴푸레해 지는 하늘 아래 여기저기 쓸쓸하고 황폐한 마을이 생기를 잃은 채 가로누워 있 었다. 내 가슴엔 울컥 슬픔이 솟아올랐다. `아! 여기가 내가 20년 동안 늘 그리워하던 고향이란 말인가?` 내가 기억하는 고향은 전혀 이렇지 않았다. 내 고향은 훨씬 더 좋았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가슴에 그리며 좋은 점을 말해보려 하면 그 모습은 순식간에 지 워지고, 표현하고자 했던 말도 없어져버린다. 그 옛날의 고향도 아마 이랬을지 모른다. 그래서 난 스스로를 위로하며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고향은 원래부 터 이랬었다. 발전이 없는 대신에 내가 느낀 것과 같은 쓸쓸함도 없는 것이다. 단지 달라진 것은 내 자신의 심경일 뿐이다. 왜냐하면 나의 이번 귀향은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이번 귀향은 실은 고향과 작별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가족들이 오랫동안 같이 모여 살던 옛집은 이미 남에게 넘겨 주기로 이 야기가 되었고, 양도 기한은 올 연말까지였다. 그래서 아무래도 정월 초하룻날 이전에 정들었던 옛집과 이별을 고하고, 정들었던 고향을 멀리 떠나 내가 생계 를 꾸리고 있는 타향으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우리 집 대문 앞에 이르렀다. 기와지붕 위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시들어 부러진 줄기들이 바람에 떨고 있엇 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이 집의 주인이 바뀌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듯했 다. 함께 살던 친척들은 거의 모두 이사를 한 모양이어서 몹시 조용했다. 내가 우 리 집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께서 벌써 마중을 나와계셨고, 뒤따라 여덟 살 난 조카 홍얼도 뛰어나왔다. 어머니께서는 무척 기뻐하셨지만 여러 가지 착잡한 심경을 감추고 계신 듯했 다. 내게 앉아서 쉬며 차나 마시자고 하시면서도, 이사에 관한 말씀을 선뜻 꺼내 지 못하셨다. 홍얼은 나와 처음 대면하는지라 멀리서 이쪽을 향해 서서 바라보 고만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끝내 이사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저쪽 셋집 계약은 이미 끝났고 약간의 가구도 사두었으니 이제 집 안에 있는 나무그릇들을 모조리 팔고 몇 가지를 새로 장만해야겠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께서도 찬성하시면서 짐짝 정리도 대강 끝났고, 운반하기 불편한 나무 그릇들은 절반쯤 팔아버렸는데, 단지 돈을 받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셨 다. “하루 이틀 쉬거든, 떠나기 전에 친척 어른들을 한 번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 라.” 어머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그리고 룬투 얘긴데 말이다. 그애가 너를 꼭 한 번 만나고 싶은지, 집에 올 때마다 언제나 네 소식을 묻더라. 네가 집에 도착할 날짜를 대강 알려줬으니, 아 마 곧 찾아올 거야.” 그때 내 머리 속에는 퍼뜩 한 폭의 신기한 그림이 떠올랐다. 진한 남빛 하늘 에 황금빛 보름달이 걸려 있고, 그 아래는 끝없이 파아란 수박밭이 펼쳐진 바닷 가의 모래사장인데, 그 가운데서 은목걸이를 한, 열두어 살쯤 되는 소년이 손에 쇠작살을 들고서 한 마리의 오소리를 힘껏 찌른다. 그러나 그놈은 날쌔게 몸을 틀어 도리어 소년의 가랑이 밑으로 빠져 도망쳐버린다. 그 소년이 바로 룬투였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겨우 열몇 살밖에 안되던 무렵으로, 지급으로부터 30 여 년 전의 일이엇다. 그땐 아버님께서도 살아계셨고, 집안 형편도 좋아서 나는 말하자면 집안의 어엿한 도련님이었다. 그해는 우리 집에서 조상의 큰 제사를 치러야 할 차례였다. 그 제사는 삼십몇 년만에 겨우 한 번 돌아오는 것이어서 아주 정중하게 지내야 했다. 정월에 조상에게 제사지낼 때에는 차려 놓는 물건도 많고 제기에도 정성을 들 이는데, 제사 보러 오는 사람이 많아서 제기를 도둑 맞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우리 집엔 망월이 한 사람 있었는데,- 우리 고향에서는 고용인을 세 가 지로 나눈다. 1년 내내 일정한 집에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을 장년이라 부르고, 날짜를 정해서 남의 집에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을 단공이라 부른다. 자기 농사 를 지으면서 정월이나 명절 때, 또는 도지료를 받아들일 때만 일정한 집에 가서 일하는 사람을 망월이라 한다- 어찌나 바빴던지 그 망월은 자기 아들 룬투에게 제기를 지키도록 하면 좋겠다고 아버님께 말했다. 아버님은 승낙하셨다. 나도 대단히 기뻤다. 난 일찍이 이 룬투라는 이름을 들 은 일이 있었고, 그애가 나와 거의 같은 또래인데 윤달에, 그것도 오행 중에서 토가 빠진 날짜에 태어났다고 해서 그애 아버지가 이름을 룬투라고 지었다는 것 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애는 또 새덫으로 새를 잘 잡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새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새해가 되면 룬투도 올 테니까. 가까스로 섣달 그믐께가 되었는데, 어는 날 어머님께서 룬투가 왔다고 일러주 셨다. 나는 날아갈 듯이 기뻐하며 뛰어나가 보았다. 그애는 마침 부엌에 있었다. 발그스름한 둥근 얼굴에 조그마한 털모자를 쓰고 목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은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이것은 그애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애가 죽을까봐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고 목걸 이로 룬투를 지키도록 한 것이다. 룬투는 사람 앞에서는 몹시 부끄럼을 탔지만 내게만은 그렇지 않았고, 옆에 아무도 없을 때면 내게 이야기를 걸어왔다. 그래 서 한나절도 못되어 우리는 곧 친해졌다. 우리가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단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룬 투가 성에 들어온 후 지금까지 못 보던 것들을 많이 구경했다고 몹시 기뻐하던 일뿐이다. 이튿날 나는 룬투에게 새를 잡아달라고 졸랐다. 그러자 룬투는, "그건 안돼. 큰 눈이 와야 해. 모래사장에 눈이 오면, 눈을 쓸어 빈터를 만들어 놓고, 짤막한 막 대기로 대나무 소쿠리를 버티어 놓고 나락을 잡아당기기만 하면 그 새는 소쿠리 안에 갇혀 도망칠 수 없게 되는 거야. 무엇이든 잡을 수 있어. 볏새든, 뿔새든, 산비둘기든, 파란 새든..." 하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눈이 내리기만을 몹시 기다렸다. 룬투는 또 내게 말했다. "지금은 너무 추워. 여름에 우리 고장으로 놀러와. 우리는 낮엔 해변에 가서 조개껍데기를 줍는데, 붉은 것, 푸른 것, 뭣이든 다 있어. 귀신쫓기 조개도 있고, 부처님손 조개도 있단다. 밤엔 아버지하고 수박을 지키러 간단다. 너도 갈 수 있 어." "도둑을 지키러 가는 거야?" "아냐! 지나가던 사람이 목이 말라서 수박 한 개쯤 따먹는 일 따위는 우리 동 네에선 도둑질로 치지 않아. 지켜야 하는 것은 두더지, 고슴도치 그리고 오소리 야. 달밤에 사각사각 소리가 나면 그건 오소리가 수박을 깨물어먹는 거야. 그러 면 쇠작살을 들고 살그머니 다가가서..." 그때 나는 이 오소리는 것이 어떤 짐승인지 전혀 몰랐다.-지금도 그렇지만, 그 저 어쩐지 조그만 개 같은 모양을 한 영악스러운 동물이려니 하는 느낌이 들었 다. "그놈은 물지 않아?" "쇠작살이 있잖아. 다가가서 차를 발견하면 곧 찔러야 해. 이 짐승은 매우 영 리해서 사람 쪽으로 오히려 달려들어선 가랑이 밑으로 빠져 달아나버리거든. 그 놈의 털은 기름처럼 매끄러우니까..." 그때까지 나는 세상에 이렇게도 신기한 일이 많은 줄은 몰랐다. 바닷가에는 오색의 갖가지 조개껍데기가 있고, 또 소박에 그렇게 위험한 내력이 있다는 것 을 몰랐다. 그때까지 나는 과일가게에서 파는 수박밖에 몰랐다. "우리 모래사장엔 말이야, 밀물이 밀려들면 날치들이 펄떡펄떡 뛰어오른단다. 청개구리처럼 두다리가 달린 놈이 말이지..." 아아. 룬투의 가슴 속엔 나의 보통 친구들이 모르는 신기한 일들이 무진장 간 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룬투가 바닷가에 있을 때, 그애들은 모두 아무것도 모르 는 채 나처럼 마당르 둘러친 높은 담장 위의 네모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 이다. 안타깝게도 정월은 지나버리고 룬투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 룬투도 부엌에 숨어서 울뿐, 동아가려 하지 않았 다. 하지만 결국엔 아버지에게 끌려가버리고 말았다. 그애는 후에 조개껍데기 한 꾸러미와 아름다운 새깃 몇 개를, 자기 아버지에 게 무탁하여 내게 보내주었다. 나도 두어 번 선물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뒤로 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제 또다시 어머님한테서 그애의 말을 듣자, 어렸을 때의 기억이 별안간 번 갯불처럼 되살아나 나의 아름다운 고향을 찾은 것만 같았다. 나는 어머니께 물 었다. "그것 참 반갑군요! 룬투는 어떻게 지내요?" "그애 말이냐? 역시 살기가 힘든 모양이더라."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밖을 내다보시더니 다시 말씀하셨다. "또 저 사람들이 왔구나. 나무그릇을 사러왔다면서 멋대로 물건을 가져가니 잠 깐 나가봐야지." 어머니는 일어서서 나가셨다. 문밖에서는 몇몇 여자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 는 응얼을 가까이 불러다가 글시를 쓸 줄 아느냐, 다른 고장에 가보고 싶으냐 등을 물어보았다. "우리, 기차를 타고 가는 거예요?" 암, 기차를 타고 가지." "배는요?" "먼저 배를 타야 해. 그리고..." "어쩜! 이렇게 컸네! 수염도 이렇게 길고!" 별안간 날카로운 괴성이 들렸다. 내가 깜짝 놀라서 급히 고개를 들어보니,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입술이 얇은 오십 전후의 여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두 손을 허리에 짚고 치마도 입지 않은 채 두다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제도기계의 두 발 벌린 콤파스와 조 금도 다름이 없었다. 나는 놀라움에 언안이 벙벙해졌다. "날 모르겠어? 안아준 일도 있는데!" 나는 더욱더 어안이 벙벙할 쁜이었다. 마침 다행스럽게도 어머니께서 들어오 셔서 옆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앤 오랫동안 외지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깜ㅎ게 잊어버렸을 거야." 그러시면서 나를 보고, "너도 생각이 날 텐데. 우리 집 건너편으로 마주 보이는 양씨 집 둘째 아주머 니시다. 왜 그 두부가게를 하던..." 아. 생각이 난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 건너편의 두부가게에서 거의 하루 종일 앉아 있던 양씨 집 둘째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보고 '두부집 서시'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때는 분칠을 하고 광대뼈도 이렇게 튀어나 오지 않았으며 입술도 이렇게 얇지는 않았고, 더구나 종일 앉아 있었던 탓에 이 런 콤파스 같은 자세를 본 적이 없었다. 이 여자 덕분에 두부가게도 번창한다고 당시의 사람들은 말했었다. 하지만 나 는 나이 탓으로 아무런 인상도 받지 못해기 때문에 완전히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 콤파스는 몹시 비위에 거슬렸는지 경멸하는 듯한 표정으로 마치 나 폴레옹을 모르는 프랑스인이나, 워싱턴을 모르는 미국인을 비웃기라도 하듯 냉 소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잊었어? 정말 귀한 사람은 눈이 높아서..." "어떻게 그러 수가...전..." "그럼 내 자네에게 말하지. 쉰이 자네는 부자가 됐고, 또 이렇게 무거운 걸 운 반하기도 거추장스러울 테니, 이런 잡동사니를 ㅁ에 쓰겠나, 내게 주지 그래. 우 리같은 가난뱅이에겐 쓸모가 있을 테니." "난 부자가 아닙니다. 난 이걸 팔아서 그 돈으로..." "아아니! 지사까지 되고도 부자가 아니라고? 자네는 지금 소실이 셋이나 되고 밖에 나가려면 여덟 사람이 떠메는 큰 교자를 타면서도 부자가 아니라고? 호호, 날 속이지는 못해." 이제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서 있 었다. "흥! 부자가 될 수록 지갑끈을 죄고, 지갑끈을 죌수록 더욱더 부자가 된다더니 정말." 콤파스는 화가 나서 돌아서더니 투덜대면서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나가 면서 슬쩍 어머니의 장갑을 바지춤에 쑤셔 넣고 가버렸다. 그후엔 또 이웃의 친척들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들을 응대하는 한편, 틈틈 이 짐을 챙겼다. 그렇게 사나흘이 지났다. 몹시 춥던 어느 날 오후, 나는 점심을 먹고나서 차르 마시며 앉아있던 나는 사람이 들어오는 인기척에 돌아다보았다. 나는 그를 보고는 그만 놀라서 황급히 몸을 일으켜 맞으러나갔다. 들어온 사람은 바로 룬투였다. 보자마자 대뜸 그가 룬투임을 알았지만, 그러나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 룬투는 아니었다. 키는 배나 커졌고, 옛날의 발그스름하던 둥근 얼굴은 누렇고 윤기없이 변했으 며,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눈도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언저리가 온통 벌 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바닷가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하루 종일 불어닥치는 바닷바람 때문에 대개 이렇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는 너덜너덜한 털모 자를 쓰고, 얇은 솜옷을 입었을 뿐, 초라한 모습으로 추위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 고 있었다. 손에는 종이봉지 하나와 기다란 담뱃대를 들고 있었는데, 그 손도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통통하고 혈색 좋은 손은 아니었다. 거칠고 울퉁불퉁한데 다 금이 가고 터져서 마치 소나무껍데기 같았다. 이때 나는 너무 흥분하여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단지, "아, 룬투 형, 반갑군..." 하고 말했을 뿐이었다. 계속해서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이 꿰어 놓은 구슬같이 연달아 떠올랐다. 뿔새 며, 날치며, 조개껍질, 오소리... 그러나 어쩐지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한 느낌이 들고, 그 말들은 머리 속에서만 빙빙 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멈춰섰다. 기쁨과 처량함이 섞인 표정이 얼굴에 역력히 드러났다. 입술을 움직이긴 했지만 그도 역시 아무 소리도 못했다. 마침내 그는 공손한 태도를 취하더니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나으리!" 나는 오싹 소름이 돋는 듯했다. 우리 둘 사이가 슬프게도 두터운 장벽으로 막 혀져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뒤를 돌아다보며, "쉐이성아! 아느리께 인사드려라." 그리고 등뒤에 숨어 있던 아이를 앞으로 끌어냈다. 그 아이야말로 20년 전의 룬투였다. 단지 안색이 나쁘고 야위었으며 목에 은목걸이가 없을 뿐이었다. "이놈이 다섯째 아이입니다. 아직 세상 구경을 못해서인지 부끄럼만 타고..." 어머니와 흥얼이 말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2층에서 내려왔다. "노마님, 보내주신 편지는 벌써 받았습니다. 정말 어찌나 기뻤는지, 나으리께서 돌아오신다는 것을 알고..." 룬투는 이렇게 서먹서먹하게 구나. 옛날에는 너마하고 부르지 않았나? 예날같 이 쉰이라 하게." 어머니는 기쁜 듯이 말씀하셨다. "노마님두 무슨 말씀을...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땐 어린 아이여서 아무 것도 모르고..." 하면서 룬투는 또 쉐이성에게 이리 와 인사를 드리라고 했지만 아이는 부끄러 워서 저의 아아버지 등 뒤에 숨듯이 바싹 붙어 있었다. "그애가 쉐이성인가? 다섯째지? 낯선 사람뿐이라 부끄러워하는 것도 당연하 지. 흥얼아, 데리고 나가 놀아라." 하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흥얼이 이 말을 듣고 쉐이서에게 손짓을 하자, 쉐이성은 가벼운 걸음으로 흥 얼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룬투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셨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자리에 앉았는데, 긴 담뱃대를 탁자 옆에 세워 놓고 종이봉지를 내밀면서 말했 다. "겨울이라 변변한 게 없습니다. 이건 푸른 콩을 말린 것인데, 얼마 안되지만 저희 집에서 말린 것입니다. 나으리께서 맛보시라고..." 내가 그의 생활형편을 묻자, 그는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 "말이 아닙니다. 여섯째 아이까지도 거들고 있지만, 그래도 먹고 살 수가 없어 요, 세상이 뒤숭숭하고, ...일정한 규칙도 없이 마구 돈만 걷어가고 ...게다가 작황 은 점점 나빠져요. 농사를 지어서 팔러가면 세금만 몇번이고 바쳐야 하고, 본전 만 까먹고 들어가죠. 그렇다고 팔지 않자니 썩어버릴 뿐이구요..." 그는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 얼굴에는 숱한 주름살이 새겨져 있었지만, 마치 석상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았 다. 느끼는 건 괴로움뿐인데 그것을 표현하려 해도 표현할 수가 없는 듯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더니, 이윽고 담뱃대를 집어들고 묵묵히 담배를 패웠다. 어머니가 물어보니 그는 집안일이 바빠서 내일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또 점 심도 먹지 않았다고하여 부엌에 가서 손수 밥을 데워 먹도록 일렀다. 그가 나간 뒤, 어머니와 나는 탄식을 하며 그가 사는 형편에 대해서 이야기했 다. 많은 아이들, 흉작, 가혹한 세금, 군인, 도적, 관리, 향신 그런 것들이 한데 어 울려 그를 괴롭히고 그를 마치 장승처럼 만들어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내게 가 져가지 않아도 될 물건은 모두 그에게 주어서 그가 갖고 싶은 걸 손수 고르게 하자고 말씀하셨다. 오후에 근느 몇 가지 물건을 골랐다. 기다란 탁자 두 개, 의자 네 개, 향로와 촛대 한 벌, 저울 한 개였다 그는 또 재-우리 고향에서는 밥을 지을 때 짚을 때 는데, 그 재는 모래사장의 비료가 된다.-를 전부 달라고 했다. 우리가 떠날 때에 배로 나르겠다는 것이었다. 밤에 우리는 또 잡담을 했는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들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는 쉐이성르 데리고 갔다. 그로부터 아흐레가 지나 우리도 떠날 날이 되었다. 룬투는 아침 일찍 와 있었 다. 쉐이성은 데려오지 않고 대신 다섯 살짜리 여자애를 데리고 와서 배를 지키 게 했다. 우리는 하루 종일 몹시 바빴개 때문에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었다. 손님도 많 았고, 전손허러온 사람, 물건을 가지러온 사람, 전송도 할 겸 물건도 가져갈 겸 해서 온 사람 등 가지각색이었다. 저녁 때 우리가 배에 오를 무렵에는 이 집에 있던 므고 작은 온갖 잡동사니들이 비로 쓴 듯이 깨끗이 없어져버렸다. 우리의 배는 앞으로 나아갔다. 양편 강기슭의 푸른 산들은 황혼에 검푸른 빛 깔로 물들며 하나하나 배 뒤쪽으로 사라져갔다. 흥얼은 나와 함께 선창에 몸을 의지하고 바같의 아스라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 었는데, 그애가 별안간 이렇게 물었다. "큰아버지! 우린 언제 돌아오지요?" "돌아와? 너는 왜 가기도 전에 돌아올 생각부터 하니?" "하지만, 쉐이성이 자기 집으로 놀러오라고 했는걸..." 흥얼은 크고 검은 눈을 똑바로 뜨고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나와 엄너니는 지친 듯이 멍해 있었는데, 흥얼의 말에 다시금 룬투의 이야기 를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그 '두부집 서시'라는 양씨 집 둘째 아 주머니는 우리 집이 이삿짐을 챙기면서부터 매일같이 찾아왔는데, 엊그제 그년 는 잿더미 속에서 접시와 그릇을 열몇 개나 찾아내고는 이리저리 따져보면서, 룬투가 재를 나를 때에 함께 가져가려고 숨겨둔 것이라고 단정했다고 한다. 양씨 집 아주머니는 이 발견을 큰 공이라도 세운 것처럼 자랑하며 '구기살'이 것은 우리 고장에서 양계에 쓰는 도구이다. 나무그릇 위에 창살을 치고 그속에 모이를 담가둔다. 닭은 목을 길게 뻗어 쪼아먹을 수 있지만 개는 그럴 수가 없 어서 그저 바라보며 속을 태울 뿐이다.-을 집어들고 쏜살같이 달아났는데 어떻 게 그녀가 뒤축이 높고 작은 전족으로 그렇게 빨리 뛰어가는지 모르겠다고 어머 니는 말씀하셨다. 옛집은 점차 내게서 멀어져갔다. 고향의 산천도 점차 작아졌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미련도 느끼지 않았다. 나는 단지 보이지 않는 높은 담에 둘러싸여 외톨 이가 되어 몹시풀이 쭉어 있는 자신을 느낄 뿐이었다. 저 수박밭 위에은목걸이를 한 작은 영웅의 영상은 무척 또렷했는데, 지금은 그것조차도 갑자기 모호해지며 나를 매우 슬프게 만들었다. 어머니와 흥얼은 잠이 들었다. 나도 자리에 드러누었다. 배 밑바닥에 철썩철썩 부딧히는 물소리를 들으며, 난 내가 나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룬투와는 이미 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어린애들의 마음은 아직 하나로 이어져 있다. 흥얼은 바로 쉐이 성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난 그애들이 또다시 나와 다른 사람들처럼 단절이 생겨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서로으 마음을 잇기 위해서, 모두 나처럼 괴롭게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기는 결코 바라지 않는다. 또 그들이 모두 룬투 처럼 괴롭고 마비된 생활을 하는 것도 원하지 않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괴 로워하면서 방종한 생활을 하는 것도 역시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마땅히 새로 운 생활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아직 경험해본 일이 없는 생활을! 희망이라는 것을 생각한 나는 갑지기 무서워졌다. 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달라 고 했을 때, 그는 오로지 우상을 숭배하는 인간이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는 희망 역시 내가 만들어낸 우상이 아닌가? 단지 그의 소망이 현실에 아주 가까운 것이라면, 나의 소망은 막연하고 아득하 다는 것뿐이다. 몽롱한 나의 눈앞에 바닷가의 파란 모래사장이 떠올랐다. 짙은 남빛 하늘엔 황금빛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한 수 없다. 그 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 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1921년 1월 작품해설 전망을 남긴 애상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는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으나 걸어가느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된다. 수많은 귀향소설 중에서, 노신의 '고향'을 고른 것은 순전히 이와 같은 그 마 지막 구절 때문이었다. 몰락한 집안과 팔아버린 옛집, 어쩌면 영영 다시 돌아오 지 못할 정들었던 땅에 대한 절제된 감회는 볼 만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전범으로 내세울 만한 것은 아니다. 룬투와의 추억을 중심으로 드러내는 예날에 대한 그리움도 정감 있지만 노신만의 자랑은 아니다. 30년이 지난 뒤에 만남 룬 투의 초라한 변모, 피폐한 고향의 삶에 대한 연민과 비감도 가슴저린 감동은 주 지만 다른 모든 작품들을 제치고 이 작품을 내세워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하지만 비감과 애상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전망을 찾아내는 태도는 노신만 의 자라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예가 흔치 않다. 애국적이고 계몽적이며 사실적 인 작가가 사회주의적이고 비판적이며 전투적인 문사로 변모하기 전의 예비단계 같은 게 느껴진다. 작가 노신은 20세기 중국문학의 거장이다. 중국 저장성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국민당 정치탄압으 여파로 폐결핵을 앓다 죽어간 그의 파란 많은 삶은 이미 소 년시절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대부호이자 집안의 중심이었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체포, 투옥되고 이로 인해 그의 일가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사건이 발생한 것 ㅇㄴ 그가 열세 살 나던 해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는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고 어머니와 그의 헌신적인 간호에도 불구하고 3년 뒤 셋ㅇ을 떠났다. '누구라도 평온한 가정에서 곤궁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이 있겠지만 나는 이 과정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가지 대부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닥 생각한다. '첫번 째 소설집 '눌함'의 자서에서 달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거니와 갑작스런 집안의 몰락을 통해 까 배운 것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를 움직하는 냉혹한 힘의 놓리였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 곤궁한 어머니로부터 8원의 학비를 받아 난징으로 향한 그는 여기에서 자신의 삶을 결정짓게 될 '천연론'이란 작품을 읽게 된다. 헉슬리 의 '진화와 윤리'를 발췌, 번역하여 여기에 역자으 의견을 삽입한 이 책을 읽고 청년 노신은 '자연선택'이나 '적자생존'의 원리가 사회와 국가에도 적용될 수 있 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을 느낀다. 즉, 중국이 열강과의 경쟁 속에서 도태되지 않 으려면 당시의 상황을 혁신하여 강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민족 적이고 애국적이 염원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 그느 집요하게 고민했고 스물여 섯 살이 되던 해인 1906년, 다니던 일본 의학전문학교를 그만둔다.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중국을 변활시키고 민족혼을 바로잡는 데는 의학보다 문예가 적당하 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18년 애국적 계몽잡지 '신청년'에 단편 '광인일기'를 발표하며 작가로 출발한 노신은 이후 '공을기' '풍파' '약' 등의 단편소설과 장편' 아Q정전'을 통해 '문학혁명'에 철저히 복무했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으나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된다.'는 '고향'의 마지막 구절은 사실 노신의 일생을 관통한 삶의 철학이었다. 이 같은 철학에 입각해 그는 보수적인 당시의 습속으리 맹렬히 비판했다.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평론가 수필가로 왕성한 저작활동을 전개하던 그는 1927년 10월, 국민당 정부의 문화예술인 탄압을 피해 상해로 피신한다. 그는 그 곳에서 '중국좌익작가연맹'의 발기인으로 활동하고 '민권보장동맹'의 집행위원으 로 참가하는 등 국민정부의 민중탄압에 격렬히 항의 하는 일련의 사회주의적 운 동가로 변모하고 결과 정부의 암살명단에까지 올랐다. 위험을 피해 일본인의 아 파트에 칩거하며 쉬지 않고 글을 써대던 그는 마침내 폐결핵에 걸렸고 1936년 10월 숨을 거두었다.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노신이 '민족혼'이라 새겨진 흰 천을 덮고 상해 만 국공모의 한 귀통이로 향하던 날 1만명이 넘는 상해의 학생과 시민이 구뒤를 따 르며 애도했다고 한다. 지금도 중국 여러 곳에 그를 기려'노신 공원'이 있고, 크 고 작은 동상들이 서있다. 크리스마스에 걸려온 전화 지은이 : 알베르토 베빌라꽈 옮긴이 : 한형곤 ㅍ데리코는 난생 처음 크리스마스 날 혼자서 만찬을 들었다. 스스로 요히한 음식을 앞에 두고 식탁 머리에 앉아서, 어느 땐가는 자삭들과 부인이 앉았었지 만 지금은 텅 빈 의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마지못한 듯 억지로 먹어치웠다. 그리고는 서재로 가서 잠들었다. 책들이 방바닥에 쌓여 있는 조그만 서재였다. 침실은 칸막이로 구분되어 떨어져 있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자식들이 멀리 가버린 후 아파트의 한쪽 부분을 파느라고 큼직한 집 한가운데에 벽을 세워 놓 았기 때문에 그에겐 고작해야 ㅜ건들이 가득 찬 비좁은 방 두 개만이 남겨졌을 뿐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계속해서 울렸다. 페데리코는 잠에서 깨어나려고 애쓰면서 크리스마스 날 저녁, 이 시간에 도대체 누가 전화를 걸까 하고 무의식적으로 자 문하였다. 오래 전부터 그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친구들만이 드물게 전화 를 하였다. 그는 팔베개를 하고 있었는데 전화벨 소리는 머리 너머로 어색하고 도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고요한 밤중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머리 를 들어보니 눈내리는 어두운 밤이 창에 비쳤다. 바닥엔 축제 때 쓰는 장식용등 이 있었다. 수화기에 손을 얹었다. 마치 벨 소리가 손을 꿰뚫는 것 같기도 했고 손에 붙 잡힌 교활한 짐승이 꿈틀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수화기를 들고 "여보세요"라고 말했다. 대답이 금방 나오지 않았다. 귓속으로 감정에 북받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그를 갑자기 찻간시켰다. "여보세요." 되풀이 말했다. 그때 "페데리코씨" 하고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냘픈 여인의 목소리가 헐떡거리는 숨소리에 섞여 있었다. 페데리코는 어느 늙은 여인의 소리려니 하고 생각했다. "누구시죠?" "당신이 모르는 사람입니다." 라는 대답이 나왔다. "무슨 일이시죠?" 페대리코는 또다시 물었다. 그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낯선 목소리 속에 어떤 즐거운 기운이 고조되어가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기뻐하 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여인은 똑똑히 밝혔다. "당신을 알고 있다는 것만 말하 고 싶군요. 내내 당신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열다섯 살 때부터죠. 당 신에 대해선 전부, 즉 당신의 진한 금발머리는 내가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이젠 잿빛으로 되었고, 당신은 사랑에 빠졌던 일도 있으며 결혼하여 자식들을 가졌고 부자였던 당신이 이젠 가난해졌고 정으로 얽혀 살다가 이젠 외로움 속에 처해 있다는 것 등도 다 아록 있지요. 무두가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이지요." "그만! 그 따위 어리석은 이야기로 사람을 방해할 시간도 아니고, 또 그렇게 할 만한 밤도 아니잖소?" 페데리코는 성난 소리로 외쳤다. "다른 데나 걸어보시 오!" 그는 귀에서 수화기를 떼어내려고 했다. 맥빠졌다기보다는 뭔가에 홀린 기 분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한사코 다정함을 지키고 있었다. "페데리코씨, 수화기를 놓지 마세요. 바보짓이 아닙니다. 당신을 놀리는 게 아니란 말예요. 입증해드릴 까요?" "입증이라니, 무슨?" 그는 외쳤다. "열다섯 살 때 당신은 부상을 입어 오른쪽 관자놀이에 아직도 휴터가 있지요? 당신은 아벤티노의 성사바에서 사셨습니다. 앞에 커다란 나무들이 있는 집이지 요." 그년는 약간 멈뭇거리더니 계속 말했다. "스물두 살 때 결혼했는데, 그때 당 신의 부모님은 안 오셨습니다. 부친께서 그 여자를 반대하셨지요. 원하지 않았던 거지요. 그래서 당신들은 종종 다투었지만 당신은 그녀와 결혼했습니다. 스물 두 살 때 딸을 하나 낳았..." "그만! 그만!" 페데리코는 소리르 버럭 질렀다. "그런 걸 온통 다 말하시는 걸 로 봐서 날 아시는군요. 그럼 나도 당신을 알 텐데, 누구시죠? 그 따위 얘기는 그만두고, 왜 이런 농담을 하시죠? 누군지 말해주십이오."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말했다. "페데리코씨, 화내지 마세요. 그래야 소용없으니까요. 당신은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당신의 좋은 점만을 원했던 사람들을 믿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불신감 때문에 당신은 고독해진 것이지요. 그렇죠? 제 말대로지요? 당신은 날 모릅니다. 어쩌면 한 번도 못 봤을 테지만 난 항상 당신을 보면서 이웃에서 살아왔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왜 이러십니까? 제발 이러지 마세요." 페델;코는 간청했다. 그녀는 웃었다. "제가 한 가지 질문을 하면 아실 겁니다. 고민 끝에 생각해본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또 처음엔 그를 알고 싶었는데 그는 조금씩 조금씩 자기로부터 멀어져가 도저히 붙 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가 여러번의 사랑을 거쳐 결혼을 하거나 아니면 타성적 인 감정을 소유하게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집의 창문 뒤, 길 혹은 자동차 안에서 갖게 되는 영상으로나마 그 사람과의 어떤 가능성을 모 색하면서 그를 좋아하고 따라다니는 일을 그만둘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그 영상은 온통 당신의 생명이 되는 겁니다.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지요." "농담이시군요. 성탄절 밤에 하기에는 지나치게 멍청한 농담이십니다." 페데리 코는 웃으면서 말했다. "날 사랑한다느니, 영상이니, 생명이니, 그래 지금 무슨 장난을 걸겠다는 거요?" 낯선 여인은 침묵을 지켰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였다. "생명이라구요? 어째서 지금 그렇다는 것이지요?" 라고 덧붙였다. "이게 크리스마스로서는 마지막 밤이 될 거고,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 밤중 의 하나가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내게 이 순간이 온 것이지 요." "무슨 뜻이지요? 어떤 순간이란 말씀이지요?" 페데리코가 물었다. "페데리코 씨, 당신이 잊어버리려 했던 것들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순간이지요." 침묵이 뒤따랐다. "전화드리겠어요" 라고 그녀는 끝을 맺고 수화기를 내려놨 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페데리코는 소리쳤다. 이마에 땀이 배어났다. 그날 밤은 추었다. 그는 전화기 앞에서 곤욕을 치른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났다. 페데리코는 사무실에 돌아왔다. 지난 번의 장난 전화가 그를 치욕스런 기분에 젖게 하였다. 그에겐 고통스럽고 심지 어 잔인스럽기까지 하였다. 지난 날 자기에게 사납게 전개되었던 과거 자체에 대해서 그 나이에 받게 되는 일종의 반사작요이었다. 전화 사건이 있고 나서 그 는 '농담이야... 바보 같은 농담에 지나지 않아...' 라는 생각을 하며 잠을 설치곤 하는 괴로운 밤을 보냈다. 그런데 지금도 사무실을 나오며 씁쓸하고 놀라운 기 분과 자신이 지니고 있는 걱정을 제쳐놓고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과 낯선 여인이 그에게 새겨놓은 자국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책 상 위의 서류들을 정리하고 의자 등받이에 있는 저고리를 입은 다음 사무실을 나왔다. 복도를 통과하면서 자기를 알고 있는 친지나 친구들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였다. 그의 머리 속엔 고작해야 죽은 여인들의 이름 만 오락가락하였다. 젊은 시절의 여자 친구들, 그를 사랑했던 소녀들, 또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 등등. 그는 자식들이 없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자식들이 멀리 달아나버린 때부터 깊은 고독감에 사로잡혀 정이라곤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외 로운 삶을 보내고 있는 노인네였다.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서로간의 몰이해가 그 들 사이의 반목을 낳았다. 페데리코는 정말로 외로운 노인이었다. 모든 회사의 사무실들이 한 층, 또 다른 한 층, 심지어는 꼭대기 층이나 다락에 이르기까지 즐비한 창문들을 닫아버리고서 그를 받아주지 않았지만 그의 어깨위에 한 회사 가 지부를 맡겨주었다. 행운을 낳지 못한 일련의 사업들을 통해 경영자나 지부 장으로서 아래층에서, 문서 관리국에서, 아니 문서 기록자 하나 없는 사무실에서 처음 직업을 가지는 사람의 자세로 그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회사 가 ㅇ운좋게 큰 시장으로 활로를 개척해나간 다음, 그를 그 자리에 붙잡아두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게 하려고 한 처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런 외로운 노인에게 전화가 걸려와 허탈감에 빠지게 했다. 그는 멍청하게도 기쁜 마음으로 거기에 대해 생각하였다. 그라는 개인고 장난을 하고 또 그의 고독을 없애줄 수 있는 것으로서 그가 살아 있다는, 또 그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외시당하고 있지 않다는 생명력으 표시였기에 어떤 농담도 그를 고통스럽게 하진 않았다. 그는 눈 속을 걷기 시작해서 어느새 버스 정류장에 이러렀다. 한때는 전차가 있었는데 하고 그는 생각했다. 버스에 올라 아직도 축제 기분에 싸인 로마 시내 를 지나 아벤티노에서 내렸다. 그가 결혼할 당시까지 양친고 함께 살았던 집 쪽 으로 가ㅆ. 앞에 커다란 나무들이 있는 집이었다. 대문을 찾아 들어가려고 했을 때 두 사람이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 다. 그는 붉은 벽의 중앙에 이르러 외국 대사관 간판이 문위에 있는 것을 보고 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페데리코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대답하고선 주위를 돌아다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눈 속에 묻힌 대리석 벤치들도 예나 다름없고,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려고 잎사 귀를 따냈던 사철마누도 마찬가지였다. 두 집 사이에 좁게 난 길과 들녘도 똑같 았다. 대사관 옆에는 단지 집 두 채만 있었다. 길 건너편 조그만 집들에 이르기 까지 반은 깨끗하고 반은 눈 때문에 질퍽질퍽한 길이 길게 뻗어 있었다. 그 낯 선 목소리가 진실을 말했고, 또 그게 농담에서 나온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 었다. 자기가 살고 있는 건물에서 유리 뒤에 커튼을 드리우고, 긴 발코니가 있는 창문을 통하여 자신을 그 보이지 않는 증인이 지켜봤으리라고 생각했다. 높은 곳에서 지신을 지켜보고 있는 형체가 어두운 커튼에 가리워져 마치 물 속에 잠 긴 몸을 조금 드러내 모습을 나타낸 것처럼 상상되자 그는 오싹해졌다. 곧 정신을 차렸다. 그 환영에서 벗어나려 했다. 쓸쓸하게 살아오는 동안 그가 의식할 수 없을 만큼 진실한 정이 그를 붙어다니다니, 그것이 그에겐 괴상스럽 게 여겨졌다. 머리르 저었다. 어리석은 짓이야! 그는 거듭 생각했다. 그의 생은 살아온 그대로라는 것이다. 다시 버스르 타러 왔다. 머리를 창에 기댄 채 그가 살아오면서 사람들을 만나 고 일을 보던 시내의 광장, 길, 다리가 그의 눈앞에 전개되는 동안 그에겐 마지 막으로 변화가 생기는 듯했다. 많은 갈등 끝에 고통이 서서히 고조되었다. 사실 일 리가 없는, 정말로 농담일 듯한 고통이. 그날 밤도 또 다음 날 밤도 전화는 한 통도 걸려오지 않았다. 페데리코는 한 사코 전화기 옆에 앉아서 팔베개를 벤 태 늦도록 자지 않고 있었다. 외부 세계 로부터의 그 끈질긴 소리라도 듣고자 수화기를 들곤 했던 전화기는 그가 기다리 고 있는 사실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래도록 버티고 있었다. 여명이 밝아올 때까 지 그랬다. 그제서야 그는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자 침대로 갔다. 4일째 되는 날 밤이었다. 페데리코는 전화기 옆에서 기다리지 않았다. 이전처 럼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도 없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 2시까지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고선 창가로 가 어둠속을 바라보았다. 길들은 아직 그다지 밝지 않았고 시내 중심으로부터 생긴 섬광이 언덕 너머로 높이 솟아나고 자동차들의 불빛이 번쩍였다. 드디어 그는 침실로 건너갔다. 더 이상 전화가 오 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서자 그는 서둘러 잠을 청했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 집의 정적을 깨뜨렸을 때 그는 아주 오랜 잠에서 깨 어난 듯했다. 잠은 깼으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벨 소리를 하나씩 하나씩 헤아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일어나지 않고 전화벨 소리가 그치 기를 기다리려고 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침실에서 나와 서재로 들어갔다. 전화통 을 꼭 붙잡고 벨 소리, 정적, 어둠, 신비 등이 야기시킨 야릇한 공포를 의식했다. 수화기를 들었다. "주무시는데 죄송합니다. 그러나 제 잘못은 아니예요." 그 목 소리였다. 페데리코는 과거에 생각해두었던 말들을 온통 털어놓고서도 한 번도 끊긴 일 이 없었던 대화에서처럼 훈훈하고 위안을 주는 그 목소리에 그만 자신을 맡겼 다. "저는 밤에만 전화할 수 있답니다. " 그녀는 계속 말했다. "나의 마지막 위기 인 성탄절부터 낮에는 말을 하거나 움직일 수가 없거든요. 난 어둠속에서 상처 입은 야수처럼 기어다니지요. 어쩌면 자신을 쳐다보거나 아직껏 살아 있다는 것 을 아는 게 부끄럽..." "못 알아듣겠소."페데리코는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그 따위 얘기들을 늘어놓 는 이유나, 당신이 내게 왜 그런 전화를 하는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또 말씀드립니다만 조금 있으면 너무나 늦을 겁니다. " 그녀는 되풀이했다. "당신에게 느끼는 이 멍청하고 약간 미친 감정, 즉 나의 이 무기-당신은 그렇게 부르기를 더 좋아하시겠지만 -가 나의 마음 속에 묻힌 후 내 육체와 더불어 묻 혀버리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라고 내가 생명에 대해서 숙고했듯이 아직도 깊이 생각했으면 했지요." 그들의 숨소리는 페데리코의 손을 부들부들 떨게 하는 긴장감 속에서 자주 일 어나는 침묵의 순간과 일치하였다. 낯선 여인은 계속 말했다. "결국 난 어쩌면 당신의 부인인 셈이지요. 당신을 만져보지도 않았고 당신 곁에서 걸어보지도 않 았습니다. 사실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뒤돌아보면 날마다 수치감을 느껴 스파이 처럼 숨어서 당신 뒤에서 당신의 발자국 위를 걸어다녔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몸짓을 따르기 위해서 나는 어떠한 부인보다도 더욱 강인했고 실제적이었습니 다."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당신의 사진을 침대맡에 두고 있는 걸 아세요? 당신이 진정으로 내 삶 속에 존재했으며 당신이 날 버렸다거나 혹은 내가 당신을 버렸든지, 아니면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날 아는 사람들 가운 데서 누군가가..." "사실인지 알고 싶소"하고 페데리코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사실이라니, 뭐가요?" "이 모든 것이 말입니다. 난 늙은이라오. 나 같은 늙은이는 바보짓도 믿게 되 고 그 바보짓을 사실상 자비 속에 변형시킬 수도 있소" 그녀는 말했다. "살아오던 방법 그대로 말씀하시는군요. 페데리코씨, 당신은 희 망을 갖지 못했지요. 희망이란 다른 사람들을 믿는 것이지요. 그러니 당신은 다 른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갖지 않았단 말이지요. 당신은 한 여자와 결혼하게 되 었지만 당신이 정말로 좋아하거나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에고이즘 때문에 그랬어요. 그녀의 에고이즘이 당신의 것을 위안해주고 정당화시켜줄 것이나까요. 그녀는 결점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희망도 없고 또 평생 동안 자신 속에 잠겼던 고독에 도움이 되리라 보았기 때뭉에 그녀와 결혼한 것이겠지요." "틀렸소, 제발..."그가 간청하였다. "계속하겠습니다. 당신의 자식들과도 마찬가지지요. 어떻게든지 그들을 사랑한 다거나 그들에게 믿음을 주기엔 너무나 두려웠겠지요. 그 믿음이란 결국 당신의 절망감을 더욱 입증시켜주는 결과를 초래하리라 믿으셨을 테니까. 당신은 하고 있는 일마저 과거의 당신, 즉 타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던 당신에 대한 반발처럼 느꼈지요. 결국 일에 있어서마저 자기 자신을 위한 희생을 갈구했었거든요." 그들은 그 밤에 오랬동안 얘기했다. 페데리코는 저항도 동정심도 아닌 어떤 감정이 깃든 행복감과 자신의 과오를 다시 발견했다. 그것은 진실이 되는, 항상 진실이 되는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였다. "당신은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거듭 말했다. "당신이 알아차려 야 했던 다른 많은 것들을 못 알아차린 거와 마찬가지로." 태양이 밝기 시작했다. 창 아래 있는 나무들의 장벽을 넘어서 태양은 길, 언 덕, 지평선에 어떤 소리를 깃들게 하는 것 같았다. 이전엔 아무런 소리도 깃들지 않았을 성싶었던 것들에게. 페데리코는 태양이 건물들 사이로 솟아올랐음을 알 았다. 페데리코는 물었다. "당신 지금 어디 있소? 어디서 전화하는 거요?" "여기 바로 여기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에요. 내 침대에선 당신의 창도 보이고 또한 당신도 보이지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난 당신을 보고 있어 요." "제발, 이름이라도 말해주구려." 페데리코는 간청했다. "안되요. 말씀드렸듯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수치스러우니까요" 그녀는 반대했다. "당신의 이기심을 위해서 의미없는 다른 것을 알려고 하지 마세요." "또 전화할 거요?" "네, 하겠어요." 대화는 중단됐다. 페데리코는 잠시 동안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초저녁에 그랬던 것처럼 일어나서 창가로 갔다. 그의 집 건너편, 새로 지은 건물 들의 엉성한 골조가 벌써 들어찬 뜰의 반대편에 커다란 건물 하나가 몇 개의 창 문에 불을 밝힌 채 우뚝 솟아 있었다. 바로 저기다, 저기. 그러니까 그 대사관 옆에 있는 조그만 건물의 하얀 커튼으로부터 일어났던 것이리라고 그는 생각했 다. 그러나 어떤 창문일까? 그는 하나씩 하나씩 관찰하면서 미세한 움직임마저 놓치지 않으려 했다. 추위는 더욱 혹독했다. 페데리코는 늦도록 자지 않았다. 그날 저녁의 대화가 그를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게 한 것뿐 아니라 방의 추위를 피하여 침대 속에 그 냥 있는 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는 모든 일이 잘되어 손댈 필요마저 없 는 서류들을 정리하기 위해 책상 위에 있어야 했다. 사실 그에게 지급되는 몇 푼 안되는 돈을 꼬박꼬박 기다리는 것이 고작해야 그의 일이었다. 그것은 몇 해 전부터 그가 자진해서 의무화하고 완고하게 해놓은 자유의지로서, 중요하지도 않은 그의 사업에 적용하는 정확성과 의무감등은 단지 타인들으 무관심에 대한 일종의 반응에 지나지 않았다. 사무실로 가는 동안 그는 걸음을 가끔 멈추었다. 눈 기운을 깊이 들여마셨다. 현란한 눈빛을 보면서 길게 호흡하니 현기증이 일어났다. 사무실에 들어가 자리 에 앉았으나 책상 위에 서류가 쌓이도록 내버려두었다. 다리를 길게 뻗고 턱을 괴고서 자기 앞의 막연한 점을 응시했다. 전날 저녁의 전화 내용을 다시 생각했 다. 그녀와 나눈 얘기, 암시, 또 바로 그 숨소리와 침묵 등을 다시 생각했다. 자 신의 환상이 다른 측면에서 지워놓은 이해할 수 없는 점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그의 창문 맞은편에 있는 창문들 중에서 어느 한 개의 창 뒤에 얼룩진 점이었 다. 건물 전면의 창들은 눈빛의 휘황한 백색에 잠겨 있었다. 그 얼룩진 점 속에 누가 있었을까? 그에게 전화하던 여인의 얼굴은 어떨까? 그의 추상과 결혼한 추상적인 아내는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어떠한 신비력으로 인하여 그 여자가 페데리코에게 과거지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했을 뿐만 아 니라, 그의 정이 아직껏 살아 있으며 쓸모 있는 것이라는 환영을 주게 되었을 까? 진실이건 거짓이건 또 농담이건 사실이건 혹은 미친 것이건 간에 페데리코 는 어떤 얼굴이나 육체에 자신을 결합시키듯이 그 낮선 목소리에 자신을 결부시 키고 있었다. 더 이상 질문, 가상, 의심을 하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또 하루 종일 심지어는 저녁이 되도록 그러고 싶은 욕망 때문에 편안해지지 못했다. 페데리코와 낯선 음성의 주인공은 과거에 대하여 얘기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제 그들은 연말에 대해서나 지난 날의 로마, 사람들이 꽉 찬 가게들, 주고받아 야 할 선물들에 대해서 말했다. 그녀도 처음의 전화에서 나타났던 고통스런 기 운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전화 대화만 끝났다 하면 페데리코는 뜰 건너 편에 있는 커다란 건물의 창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호기 심은 더욱더 강렬해졌다.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행복에 대한 새로운 관점 이었다. 혹은 그의 에고이즘에 대한 그녀의 비난과도 같았다. 아무튼 무언가 할 수 있는 때가 왔다. 그는 아파트 건물에 들어 있는 일반 가 정집의 이름들을 전화번호부에서 조사하리라 생각했다. 얘기가 시작된 이래 처 음으로 내린 구체적인 결정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게 진 실이 되어 나타날까 두려워 결정내리길 피했었다. 그러나 이젠 별 문제거리가 아니었다. 긴 목록에서 이름과 성, 또 전화번호를 알아맞히기만을 바랐다. 여러 차례 읽었다. 아무렇게나 번호를 하나 골라잡아 다이얼을 돌렸다. 어느 하녀가 요란한 목소리가 대답하였다. 페데리코는 머뭇거리며 안주인에 대해 물었다. 남부 사투리로 말하는 두번째의 목소리가 우울하게 들려올 때까지 그는 제법 오랫동안 수화기를 귀에 대고 기다렸다. 페데리코는 머뭇거리며 실례했다고 하 고서 수화기를 내려놨다. 또다시 해봤으나 가슴이 뛰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좋지 못한 행위를 저지 르는 것 같았으며, 자기에게 일어나는 신비가 피상적인 몇 마디로 인하여 침해 될지 모르는 하나의 성스러움을 갖고 있는 듯 싶었다. 이번엔 남자의 목소리였 다. 그는 한 마디로 할 수 없었다. 수화기를 내동댕이쳤다. 세번째 번호를 돌리 려다가 그만두었다. 소용없는 일이였다. 그는 일어나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아 직도 해가 지려면 멀었다. 그는 창문을 꽉 닫아버리고 어둠속에서 도둑처럼 움 직였다. 마치 자기를 먼발치에서 쳐다보고 있는 눈들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존 재하며, 그 따위 속임수에서 벗어나 자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늘이 어두워짐을 알았을 때 그는 또 하나의 속임수를 꾸몄다. 오버를 걸쳐 입고 길로 나왔다. 뜰을 지났다. 눈에 젖은 신축 건물들의 골조 사이에 드문드문 있는 전등은 기하학적인 야릇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버려두었던 제설기로 파헤 치고 석회석을 뿌려 눈이 녹아 드러난 땅을 지나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의 널따란 뜰 한복판에 와 머리를 치켜들고 전화로부터 받은 모든 세 세한 부분들을 마음속에 떠올렸다. 그 세세한 점들을 가능성 있는 표지로 간직 하고서 곰곰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곳에든지 이름 모를 창문들은 빽빽 했으나 흘러나오는 목소리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 페데리코는 산처럼 높이 솟 은 벽들 사이로 드러난 높다랗고 좁은 하늘과 몇 개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왔다 갔다 했다. 그의 양옆에는 서로 마주 바라보고 있는 층계가 두 개 있었다. 왼쪽의 층계를 골라 몇 계단 올랐을 때 한 사내가 바로 위에 나타났다. '누구시죠? 어디 사시죠?' 의심스럽게 묻는 것 같았다. 페데리코는 당황하여 그 문지기를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숙이고 되돌아가 한 마디 말도 없이 건물에서 나왔다. 자신의 전화를 즉각 확인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무슨 전화에 대한 얘가냐 는 질문을 받고 그는 괴로운 것이라고 대답했다. "괴로운 거죠." 그는 배를 움켜 쥐며 말했다. 모든 것이 자명하게 밝혀지는 날, 모든 비난을 철회하고 순수하고 도 단순한 진실을 털어놓으리라고 다짐했다. 환영 때문에 생긴 늙은이의 허언이 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를 이해할 것 같았다.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간 그는 전화검사 청원서에 서명하고 귀가했다. 이제 두 개의 비좁은 공 간에서 가까스로 참느라고 생긴 열기만이 남아 있었다. 침실에서 서재로 건너왔 다. 그리고 그는 창가로 다가갔다. 망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보여주기 위 해서. 보일 수 있도록 유리 뒤에 서서 책상과 벽에 밝혀진 불빛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뒷짐을 지고 머리를 높이 쳐들어 반항이라도 하듯 꼼짝 않은 채 의례적으로 된 전화약속이 속히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몸의 동요가 책더미 사이로 전해질 때까지 그는 곧은 자세로 서서 가능한 한 오랫동안 버티려 했다. 유리창에서 벗어나기 전에 자기를 알리고 인사를 전하려 는 듯한 제스처로 얼굴 가까이 손을 들어 흔들는 순간이었다. 멀리 있는 불꺼진 창문 뒤에서 다른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손가락을 눈앞에 펼쳤을 때 그는 목덜미가 오싹해짐을 느꼈다. 비참한 제스처를 하며 공포를 느꼈다. 관능적이고 현혹적이었다. 정말로 모두가 악몽이었다면? 단순히 망상이거나 광란의 소리였 다면? 진정한 광기가 낯선 여인의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것이었다면? 처음 몇 번의 전화가 걸려오고 난 다음 그에게 생긴 것과 같은 결함으로, 그가 여러 해 동안 정직하고 깨끗한 관계를 찾아서 이룬 역설적인 변형과 함께 퇴화해버린 다면? 그는 안락의자에 쓰러졌다. 이미 쓸데없는 질문들이었다. 조금 있으면 알 듯싶 었다. 몇 시간만 있으면, 몇 시간이 어쩌면 전 생애만큼이나 가치가 있었으리라. 그는 움직이지 않으려고 마음속으로 노력했다. 움직이지 않고 있는 시간의 흐름 을 쉽게 참을 수 있었다. 피부가 빳빳해지고 관자놀이가 서늘함을 느꼈다. 한편 무릎 위에 있는 손도 무감각해졌다. 현실로부터 그를 떼어놓는 이상한 형태의 잠이 다가와 그를 정중하게 모셨다. 전화벨이 매우 늦게 울렸다. 깊은 밤중이었다.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똑같은 목소리였다. 이번엔 말하는 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드디어 자동적으로 신비를 풀어줄 전화 접촉일 따름이었다. 단순히 "페데리코..."하는 소리만 들렸다. 목소리가 변했다. 한 번, 두 번 이름을 되풀이 불렸지만 그녀에게서는 다정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칠게 숨을 쉬며 가까스로 애쓰고 있는 것처럼 들릴 뿐이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그는 외쳤다. 목소리가 끊겼다.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안절부절 못하며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전화 체크 결과를 알려줄 다른 전화를 기다렸으나 아침 일찍에야 왔다. 전화번호와 이름을 드디어 받았을 때 페데리코는 문서 기록 일을 하며 배웠던 정성을 기울여 종이에 큰 글씨로 똑똑하게 적었다. 펜을 놓고는 종이를 주시했 다. "세실리아..."그는 그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기 시작했다. 팔을 뻗쳐 전화 다이 얼을 만졌으나 그만두었다. 아직 너무나 격렬한 감정이었다. 기다렸다가 종이를 호주머니에 넣고 내려가는 게 더 나았다. 그 아파트 건물 로 가서 층계를 올라가 초인종을 누르는 게 나았단 말이다. 오후에 하고 싶었다. ㅁ 때문에 오후에 한담? 왜 조금 있다가 말고 당장 못하는 거지? 어째서 몇 시 간만 있으면 걸려올 전화보다 앞서서 전화로 할 이야기를 직접 생생한 대화로 바꾸어놓지 못할까? 그는 길로 나왔다. 며칠 전 밤에 갔던 길을 또 걸었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선, 바람이 흐느적거리고 있는 신축 건물들의 뼈대 사이로 나아가면서 뜰을 통과하 였다. 예전의 바로 그 마당이 나타났다. 똑같은 사람이 그의 어깨 위로 나타났 다. 이제 페데리코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에 대하여 물을지 정확히 알았다. 이름 을 대고서 올라가야겠다고 말했다. 문지기는 머뭇거렸다. 페데리코는 그의 그림자속에서 딱딱한 인상을 받았다. 드디어 그가 대답했다. "올라가세요. 하녀가 있을 겁니다. 친척인가요?" "친척이냐고?" 페데리코가 물었다. 몇 계단 더 올랐다. 빙빙 돌아가는 층계의 철 난간 안쪽에서 그림자가 페데리코에게 말했다. "부인은 돌아가셨소. 엊저녁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앰뷸런스에서 죽었지요." 문지기의 말이었다. 페데리코는 고개를 떨구었다. 자기 주위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았 다. 자기 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받은 것같은 힘을 내어 힘차게올 라갔다. 그녀가 살았던 층에 도달했다. 아파트의 문은 조용히 닫혀 있었다. 그는 들어갔다. 현관은 희미한 조명으로 음침했다. 방으로 들어가니 한복판에 침대와 옷장이 있고 바닥엔 빨랫거리가 쌓여 있었 으며 퀴퀴한 약 냄새가 가득했다. 침대맡 오른쪽 탁자 위에 전화기가 눈에 띄었 는데 벽에 부착시킨 전화선이 꼬여 있었다. 또 닫혀진 유리창문이 하나 있었다. 그 창 속엔 멀리 뜰 건너편에 있는 그의 집이 노랗게 얼룩져 있었다. 한 소녀가 의자에 앉아 침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몇 발짝 떼었 을 때 그녀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를 바라보면서 "무슨 일이죠? 누구시죠? " 라고 물었다. 페데리코는 시선을 돌려 둘러보다가 결정적인 것을 보았다. 받침대 위에 스무 살 때 찍은 자신의 사진이 있었던 것이다. 웃음 띄운 그으 젊은 얼굴 주위에 은 으로 된 액자의 테가 둘러져 있었다. 잠시 그녀를 응시하면서 "아무것도 아냐, 아무 일도 아니야, 난 아무도 아니거든"하고 말했다. 아파트의 문 옆에는 크리스마스가 표시된 커다란 달력이 반쯤 찢어진 채로 매 달려 있었다. 페데리코는 나머지 반과 허연 표지가 드러나도록 남은 종이들도 다 찢어버렸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 아파트 건물을 나왔을 때 다시 눈이 오기 시작했다. 눈이 페데리코를 둘러싸 며 지상으로 떨어져 소리없이 떨어지는 바람 속에 응고되고 있었다. 레드 지은이: 서머셋 모옴 선장은 바지 주머니에 한쪽 손을 간신히 집어 넣었다. 주머니가 앞쪽으로 붙 은데다 그는 아주 비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커다란 은시계를 꺼냈다. 시간 을 확인하고 나서 그는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키를 잡고 있는 카나카 원주민은 그를 슬쩍 보았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선장의 눈이 다가가고 있는 섬에 가 멎었다. 하얀 물거품 한 줄기가 산호초의 소재를 뚜렷하게 알리고 있었다. 그는 배를 통과시킬 수 있을 만큼 널찍한 통로가 산호초 사이에 나 있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다가갈수록 자세히 보일 것이다. 아직 해가 지기 까지는 한 시간 가량 남았다. 산호초 안쪽은 물이 깊어서 편하게 닻을 내릴 수 있을 것이었다. 벌써 야자수 사이로 모습을 나타낸 마을 추장은 항해사의 친한 친구였으므로, 오늘밤 상륙 역시 유쾌할 것이다. 바로 그때 항해사가 다가왔다. 선장은 그에게 말했다. "술을 한 병 가지고 상륙하도록 해. 아가씨들도 데려와 춤을 추고 말야." "입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카나카 원주민이었다. 살같이 검은 데다가 몸매가 단단해서 마치 로마제 국 말기의 황제를 연상케 하는 외모였다. 다소 뚱뚱해지려는 기미가 보였으나 얼굴 윤곽은 뚜렷하고 말쑥했다. "분명히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야."선장은 쌍안경을 눈으로 가져가며 대꾸했 다. "이상하군. 왜 보이지 않는 걸까? 이봐, 사람 하나를 돛대에 올려 보내 살펴보 도록 해야겠어." 항해사는 선원 중 하나를 불러서 명령을 내렸다. 선장은 돛대를 향해 기어올 라가는 카나카 원주민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카나카 원주 민은 높은 파도가 이어져 있을 뿐 입구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선장은 마치 본토박이처럼 사모아 원주민 말을 구사했는데 느닷없이 욕지거리를 해댔다. "그냥 저 위에 계속 있으라고 할까요?" 항해사가 물었다. "도대체 저 녀석 할 줄 아는게 뭐야." 선장은 말했다. "얼간이 같은 녀석, 뭐 하나 제대로 할 줄도 몰라. 내 목숨을 걸고 내기를 하지. 내가 저 위에 올라가면 당장 찾아내고 말 텐데, 제기랄." 그는 화가나서 가느다란 돛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야 자수에 올라가 살다시피 한 원주민이라면 모르지만 뚱뚱하고 둔한 몸을 가진 그 로서는 물론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내려와!" 그가 소리쳤다.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죽은 강아지만도 못한 놈. 할 수 없지, 입구가 보일 때까지 산호초를 따라 좀 돌아 보는 수밖에." 그 배는 석유 발동기 보조 기관을 장착한 70톤짜리 범선이었다. 맞바람만 없 으면 시속 4-5노트로는 항해할 수 있었다. 훨씬 전에는 하얀 색으로 칠을 했었 는데 지금은 여기저기 얼룩이 져서 말할 수 없이 더러웠으며 몹시 초라해 보였 다. 석유 냄새와 언제나 화물로 싣고 있는 코프라 냄새가 지독하게 코를 찔렀다. 산호초에서 100피트도 떨어지지 않은 곳을 배는 항해하고 있었다. 선장은 기관 사에게 입구가 발견될 때까지 산호초를 따라 계속 돌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몇 마일쯤 달렸을 무렵 그는 자신의 배가 입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배를 돌리도록 해 다시 한 번 천천히 되돌아갔다. 산호 초의 물결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날으 점차 어두워졌다. 선장은 바보같은 선원들 을 원망하며 이튿날 아침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여기서 정박할 수는 없으니 배를 돌려라." 배가 조금씩 바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해가 지고 말았다. 그들은 닻을 내렸다. 배는 균형을 잃고 심하게 기우둥거렸다. 에이피아 사람들은 얼마 안있어 그 배가 뒤집어져 타고 있던 사람들이 죽을거라고 아야기하고 했다. 선주는 매 우 큰 상점을 경영하고 있는 독일계 미국인인데 그 또한 제 아무리 많은 금상자 를 실어주더라도 이 배만은 탈 생각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덕지덕지 때가 묻은 누더기 같은 희 바지에 얇은 희 셔츠만 입은 중국인 요리사가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알려왔다. 푸른빛의 작업복 바지와 소매 엇는 러닝셔츠만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손목까지 문신을 한 팔뚝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제기랄, 바다 위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다니." 선장이 투덜거렸다. 기관사는 아무말도 않았다. 두 사람 다 조용히 저녁 식사를 마쳤다. 선실에는 희미한 석유 램프가 흐르고 있었다. 맨 마지막으로 살구 통조림을 먹고 나자 중 국인이 차를 날라 왔다. 선장은 여송연에 불을 붙이고는 갑판으로 나갔다. 섬은 밤하늘 아래 까만 하나의 물체가 되어 가로놓여 있었다. 별이 매우 아름다웠다. 파도소리가 여기저기 쉴새없이 들렸다. 선장은 힘없이 갑판 의자에 기댄 채 멍 하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잠시 부 선원 서너 명 올라와 걸터앉아있었다. 한 사람은 밴조를 들고, 한 사람은 콘서티나를 가지고나와서 연주했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노래를 했다. 이런 악기에 맞춰서 들으니 원주민의 노래가 아주 이국 적으로 들렸다. 이윽고 두 사내가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눈동자를 쉴 새없이 움직여야 할 만큼 손발을 빨리 움직였는데, 아주 원시적이고 관능적이었 다. 몹시 육감적인, 그러나 그것은 정열을 동반하지 않은 관능이었다. 겉으로는 동물적인 것을 느끼게 하지만, 신비가 느껴지지 않은 이상야릇함, 바꿔 말하면 거의 어린애 수준인 천진함이다. 시간이 흐르자 그들도 피로에 지쳐 갑판에 누 워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그러자 주위는 아주 조용해졌다. 선장은 따분한 듯 의 자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선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열대 야 때문에 그는 숨이 가빴다. 다음날 아침, 고요한 바다에 해가 떠오르자 어제 발견하지 못했던 산호초의 입구가 바고 동쪽에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범선은 ㅅㄴ호초 가운데로 들어 갔다. 바다는 파도 하나 없었다. 산호초 사이를 깊숙이 헤엄치고 있는 아름다운 물고기떼가 보였다. 선장은 닻을 내리고 아침 식사를 끝낸 뒤 갑판으로 나왔다. 구름 한점 없는 태양이 빛나고 있었으나, 아직 아침이라 공기는 상쾌하고 시원 했다. 일요일이었다. 조용한, 모든 것이 휴식을 쉬고 있는 것 같은 고요가 그에 게 형언할 수 없는 평안을 가져다 주었다. 가만히 앉아서 푸른 나무에 덮인 해 안을 보며 그는 나른하고 유쾌한 기분에 잠겼다. 잠시 후 잔잔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피어나는가 싶더니 그는 피우던 담배 꽁ㅇ초를 바다에 휙 내던지며 말했 다. "상륙하겠다. 보트를 내려라." 그는 비척비척 사다리를 내려가서 보트를 작은 만으로 향했다. 가로수로 심은 것도 아닌데 야자수가 자연스럽게 규칙적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물가에까지 죽 뻗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정숙한, 그러면서도 들뜬 노처녀의 발레와도 같은 운치로, 지나간 시절의 야릇한 웃음을 회상하게 하는 그런 교태를 부리고 있었 다. 그는 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걸어 어느새 넓은 샛강의 가장자리까지 나왔 다. 그곳에는 야자수를 통째로 열 개쯤 길게 이어 만든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그런데 이 야자수들은 단지 다른 야자수의 나뭇가지를 강바닥에 거꾸로 꽂아 그 것이 받침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둥글면서도 폭이 좁은, 미끄러지기 쉬운 통나무 위를 건너려면 조심스런 발디딤과 강단이 필요했다. 선장은 한동안 머뭇거렸다. 그러나 맞은편 숲사이로 서 있는 백인의 집이 보였다. 그는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는 조심조심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주의깊게 발 밑을 보면서, 통나무와 통나무를 이은 곳의 높낮이가 불규칙할 때마다 조금씩 그의 몸이 비틀 거렸다. 마지막 통나무에 이르러 마침내 땅바닥에 발을 내려놓았을 때 그는 자 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건너는 데만 열중해서 다른 사람이 자신 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 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지요. 특히 이런 다리는."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보ㅇ던 그 집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다. "머뭇거리는 것 같아서..." 사내는 입가에 웃음을 보이면서 계속 이야기했다.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농담이겠지요." 이제 자신감이 생긴 선장이 대답했다. "실은 나도 다릴ㄹ 건너다 물에 빠진 적이 있소. 그래, 밤이었소. 사냥에서 돌 아오는 길이었는데 총을 비롯한 모든 짐들을 모두 든 채 말이요. 그래서 요즘은 이이들에게 총을 맡기고 건넌다오." 그는 아무리 잘 쳐주어도 젊다고는 말할 수 없는, 수염이 반쯤이나 하얀데다 가 아쥐 야윈 사나이였다. 민소매 셔츠에 진바지, 구두도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 에다가 약간의 사투리가 섞인 영어로 말을 하고 있었다. "혹시 당신이 닐슨씨가 맞나요?" 선장이 물었다. "그렇소만." "소문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 근처 어딘가에 살고 계시리라고 짐작했죠." 그는 선장을 작은 방갈로로 안내했다. 선장은 그가 권하는 대로 의자 깊숙이 몸을 실었다. 닐슨이 위스키와 컵을 가지러간 틈을 타 방안을 살펴보았다. 그는 놀랐다. 그토록 많은 장서를 그는 여지껏 본 적이 없었다. 책꽂이가 사방 모두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어쪄 있는데 거기에는 책들이 빼곡이 꽂혀 있었다. 또 커 다란 피아노 위에는 악보가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여러 가지 잡지들도 흩어 져 있었다. 그는 몹시 당황했다. 닐슨이 괴짜라는 이야기는 들었다. 꽤 오래전에 섬에 왔는데 그를 잘아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다만 그를 좀 아는 사람들은 그 가 괴짜라는 것에 누구 하나 이론을 달지 않았다. 그는 스웨덴 사람이었다. 닐슨이 돌아오자 선장은 말했다. "책이 아주 많군요." "책이라면 해를 끼치지 않고 안전하니까." 미소를 지으며 그는 대답했다. "모두 읽은 책입니까?" 선장이 물었다. "거의 대부분은." "나도 책을 좋아합니다.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지를 오래도록 구독하고 있지 요." 날슨은 독한 위스키 한 잔을 손님에게 건넨 뒤 담배를 권했다. 선장은 그가 처한 사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도착했습니다만, 입구를 찾지 못해 외곽에서 닻을 내렸습니다. 지금 까지 이쪽으로 항해한 적은 없습니다만, 거래처에서 이쪽으로 보내는 화물이 있 다고 해서... 그렇지, 그레이라는 사나이를 아십니까?" "네, 저쪽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사니이지요." "그 사람이 통조림 주문을 많이 주문합니다. 게다가 이곳에 코프라가 있다고 해서요. 아무튼 회사 쪽에서는 제가 에이피아에서 빈둥거리게 두느니 이쪽으로 보내서 일을 시키자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나는 대부분 에이피아와 파고파고를 왕복하고 있는데 그쪽은 지금 한창 천연두가 도는 바람에 장사가 형편없습니 다.." 닐슨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 었지만, 뭔가 이상해서 선장이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선장에 대한 호기 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집이군요." "열심히 가꾸는 편입니다." "숲을 잘 만드셨군요. 훌륭합니다. 코프라 값이 아주 좋으니까. 나도 예전에는 숲을 조금 가꾸어 보았습니다. 우폴루에서였는데, 하지만 그것도 팔아버렸죠." 그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방을 둘러보았다. 무수한 책들이 알 수 엇는 적개심 같은 것을 내보이는 듯 여겨졌다. "그런데 조금 외로울 것 같군요." 선장은 말했다. "익숙해졌습니다. 이곳에 온 지도 25년이나 되었으니까요." 선장은 묵묵히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닐슨 역시 침묵을 깨뜨리지 않았다. 그 는 그저 손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6피트쯤 될까, 체격이 좋은 사나이였 다. 천연두 자국이 있는 불그스레한 얼굴에 가느다란 혈관들이 푸른 그물처럼 얽혀 있고, 눈, 코, 입, 모든것이 뚱뚱한 살 속에 묻혀 있는 것 같았다. 눈은 빨갛 게 충혈되어 있었고 목 역시 살 속에 파묻혀 있었다. 머리는 완전히 벗겨져 뒤 통수에만 거의 백발이 된 긴 곱스머리가 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총명함 을 느끼게 할 큼직하고 번쩍이는 이마였지만 그는 오히려 반대로 바보 같은 느 낌이었다.파란 플란넬 셔츠와 몹시 낡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셔츠는 깃이 벌 어져 텁수룩한 붉은 가슴털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 뚱뚱한 배를 불룩 내밀고는 역시 뚱뚱한 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여간 단정치 못한 게 아니었 다. 탄렬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몸이었다. 젊었을 때는 도대체 어떤 사나이였 을까. 닐슨은 느닷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이 피둥피둥 부어오른 사니이에게도 즐거운 소년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선장이 위스키 한 잔을 다 마셔버리자 닐슨은 병을 그쪽으로 밀어주었다. "자, 자작으로 합시다." 선장은 몸을 내밀어 커다란 손으로 병을 잡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곳에 오셨습니까?" 선장이 물었다. "글쎄요. 건강을 위해서였죠. 폐가 나빠서 1년도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었 는데 지금은 아주 건강하다오." "아니, 내 말은 왜 이런 곳에다 살 곳을 정했느냐, 그 말입니다." "글쎄, 음 나는 좀 감상적인 편이오." "하하하..." 선장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짐작했다. 그의 검은 눈엔 장난기가 어 려 있었다. 아마 바보같아 보이는 선자의 모습이 도리어 그에게 말을 계속하고 싶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당신은 다리를 건널 때 균형을 잡느라고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이래봬도 여기 는 아주 깨끗하고 좋은 곳이라오." "네, 정말 훌륭한 집입니다." "아아. 그런데 말이오. 처음에 여기에 정착하려 했을 때 이런 집은 없었소. 원 주민의 움막이 한 채 있었을 뿐이오. 벌집처럼 생긴 자붕과 기둥, 빨간 꽃이 피 는 울창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으며, 주위에는 풀이 무성했지요. 저기 노랗고 빨 간 금빛 잎사귀를 가진 저 나무 말이오. 저것이 무슨 무늬처럼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지요. 거기에 주위는 온통 야자수 숲이었는데 마치 여자처럼 새침하게 생긴 야자수가 물가에 서서 종일 자기의 그림자를 즐기고 있는 듯했어요. 그때는 나 도 젊었다오. 25년 전이나까. 나는 생각했죠. 아차리 어두운 흙 속으로 들어갈 텐데 사는 동안만이라도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껏 누리자고, 그 때 나 는 이토록 아름다운 곳은 달리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거요. 한 번 본 순간부터 환 전히 매혹된 거지요. 울고 싶을 정요였어요. 아무튼 그 때 내 나이 스물다섯 살 이었거든. 되도록 태연한 척하고 있었으나 죽고 싶지는 않았소. 그러나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곳이 조금은 차분하게 나의 운명을 맞이해주는 듯한 생각이 들었소. 이 섬으로 옮겨왔을 때는 그때까지의 내 생활, 스톡홀름이나 그곳의 대학, 그리 고 본에서의 생활, 그런 것들이 갑자기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오. 모든 것이 남의 일같이 생각되어 그 박사니 뭐니 하는 자들이 열중해 서 토의하는 그 '실재'라는 것이 비로소 확실하게 내 것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 었어요. 1년, 앞으로 1년이다. 1년이 지나면 나는 죽는다 하고 말이오. 스물다섯 살이라면 어리석은 감상에 젖어들 나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인간은 오십이 되어야 비로소 현명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자, 시시한 얘기니까 마셔요." 그는 야원 손울 들어 병을 가리켰다. 선장은 컵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손을 뻗어 위스키 병을 잡으면서. "당신은 왜 조금도 마시지 않습니까?" 하고 말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오." 그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물론 나도 위하 기는 하죠. 좀더 고상하게 취하고 있는 셈이지만 결국 그것도 허무하긴 마찬가 지지요. 하지만 효력은 이것보다 훨씬 길고 좋으며 뒷맛이 개운한 것만은 확실 해요." "미국에서는 코카인을 마시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더군요." 선장이 말했다. 닐슨은 코웃음을 쳤다. "사실 백인은 나에겐 아주 귀한 손님이오. 오늘만은 위스키를 조금 마신다해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 컵에 술을 조금 따르고 소다수를 넣어 한 모금 마 셨다. "그런데 한참 지나는 동안에 알았소. 어째서 이곳이 이 세상답지 않은 아름다 움을 지니고 있는지 말이오. 이를테면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이곳에 사랑이 그 발을 멎게 한 일이 있었다오. 저 철새가 대양 한복판의 배 위에서 잠시 동안 이지만 피곤한 날개를 쉬듯이 말이오. 내가 떠나온 고향에는 5월이 되면 목장에 산지나무의 향기가 풍기고 있듯이 아름다운 사랑의 향기가 여기에도 풍기고 있 었소. 사람이 사랑을 했거나 고통스러워한 장소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미한 향기 같은 것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그러한 장소는 무언가 신비한 영혼의 힘을 얻더 그것이 지나가는 사람의 마음에까지 닿 는 것으로 생각되요. 이같은 생각을 좀더 분명항게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 데..." 그는 미소를 지으며 결론을 내렸다. "이해해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는 잠시 이야기를 멈췄다. "즉 이 장소는 말이오, 두 사람의 연인이 매우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웠던 곳이 오. 그래서 내겐 이곳이 더없이 아름다운 곳이었소." 그는 양쪽 어깨를 으쓱거렸 다. "아니, 어쩌면 나의 심미감에 대한 자만이었는지도 모르지. 청춘의 사랑과 그 것에 어울리는 환경이 멋있게 어우러졌다는 오직 그것만으로 말이오." 그는 닐슨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선장처럼 머리가 둔한 사나이가 아니었더라도 사내의 말을 쉽사리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 이다. 사내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쩐지 자기의 말을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말하 자면 그의 감정이 하는 말을 그의 지성은 하찮은 것아라며 비웃고 있는 것 같았 다. 그는 조금 전에 자신의 상격을 감상적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감상이 회의 와 함께 있다면 그야말로 그것은 최악이다. 그는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가만히 선장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다가 별안간 무언가 이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말이오. 사실 나는 당신을 어디선가 본 듯한 생각이 들어요"하고 그는 말했다. "글쎄요, 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하고 선장이 대꾸했다. "그 점이 이상해요. 나는 아무래도 당신 얼굴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그 게 어디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소. 바로 그것 때문에 아까부터 마음이 꺼림찍하 고 견딜 수가 없단 말이요." 선장은 산처럼 커다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섬에 와 본 지 30년이나 되다 보니 이곳에 있는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 거든요." 스웨던 사람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한번도 가 보지 못한 장소인데도 뭔가 이상하게 익숙하게 여겨질 때가 가끔 있기는 해요. 당신을 만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도 아마 그런 거겠죠." 그는 야릇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마도 그런 것 같소. 언젠가 전생에서라도 가 까이 지냈는지 모를 일이지. 아마 당신은 고대 로마 노예선의 선장이었고, 나는 노를 저었던 노예였을지도 몰라요. 그련데 당신은 30년 전 이곳에 왔었다고 ㄴ 말했나요?" "네, 정확히 30년 전에 이곳에 왔었습니다." "그렇다면 레드라는 사나이를 알고 있소?" "레드?" "나도 그렇게 부르는 이름밖에는 모르오. 물론 직접 알고 있는 것도 아니오.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그 사나이를 직접 만나기나 한 것처럼 익 숙해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훨씬 생생하게 말이오. 예를들면 몇십년이나 매일 함께 살아온 형제보다도 선명하게 그의 모습이 그려진단 말이오. 내 기억 속에 서는 가령 파올로 말라 테스타나 로미오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소. 그런데 당신 은 단테니 톄익스피어니 하는 것은 읽은 적이 없겠지요?" "아마 그렇겠지요" 하고 선장이 말했다. 닐슨은 담배를 피우며 의자에 등을 기대 조용한 공기속으로 떠다니는 동그란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에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 그러나 그의 눈은 여전 히 심각한 표정으로 선장을 향하고 있었다. 볼썽사나올 만큼 뚱뚱한 이 사나이 의 몸은 그를 견딜 수 없이 불쾌하게 만들었다. 비만형이 흔히 보이는 다혈질적 인 자기 만족, 추악하다고까지 생각되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자꾸만 닐슨을 자극 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앉아 있는 이 바보 같은 사나이와 그가 마음 속 에 그리고 있는 사나이의 그 심한 대조는 도리어 유쾌하기까지 했다. "레드라는 사나이는 대단한 미남이었가 보오. 나는 그 므렵 레드라는 사나이를 본 적이 있다는 사람들, 물론 백인이지만 그 사람들과도 여러 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를 한 번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넋이 나갈 정도로 미남자였다고 말하던군요. 불타는 듯한 빨간머리, 그 때문에 모두들 그를 레드라고 불렀다오. 그 길게 늘어뜨린 머리는 자연스러운 물결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지요. 아무튼 말할 수 없이 멋진 빛깔을 가진 머리결이었음에 틀림없소. 옛날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이 열중한 바로 그 빛깔말이오. 물론 본인은 그것을 자랑하지는 않았을 거요. 훨씬 더 순진한 청년이었을 거라고 생각되니까요. 하기야 뽐냈다 하더라도 누구나 당연하다고 여겼겠지만, 키는 6피트 1,2인치쯤 되었을까, 전에 여기 있었 던 원주민 집의 지붕을 받친 한복판의 자연목 기둥에 그의 키를 잰 칼자국이 있 었소. 마치 그리스의 신상 같았을 거요. 어깨가 넓고 허리가 잘록한, 아폴로의 상 같은 모습이었지. 그 프랙시텔레스가 새긴 부드러운 곡선, 그것을 그대로 빼 다 박은 것이었소. 그리고 신비할 정도로 매혹적인 여자와 같은 부드러움, 투명 하다고 해야 할 흰 살결, 비단 같은 매끄러움, 마치 그것은 여자의 살결을 보는 것 같았소!" "이래봬도 나 역시 젊었을 때는 살결이 흰 편이었는데요." 선장은 핏발이 선 눈을 번쩍이면서 말했다. 그러나 닐슨은 그의 말엔 아예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얘기를 계속했다. 자기 말을 중간에 가로채는 것은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굴도 체격 못지않게 멋있게 생겼었소. 커다란 눈, 눈동자는 짙은 푸 른 빛을 띠고 있었소. 그래서 검은 눈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요. 그것 뿐이 아니었소. 붉은 머리를 가진 대다수의 사나이들과는 달리 검은 눈썹 과 검은 긴 속눈썹이 깔끔하고 단정하게 자라 있었소. 입술은 마치 붉은 상처라 도 보는 것 같았소. 그때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소." 여기까지 말하고 스웨덴 사람은 마치 극적 효과를 노리가라도 하듯이 잠시 말 을 멈추고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매우 독특한 존재였다오. 그만큼 아름다운 청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사 람들은 말했소. 잡초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지 말라는 법이 없듯이 그의 존재는 벌써 세상의 모든 이치를 초월한 것이었소. 말하자면 그는 자연이 만든 훌륭한 우상이었던 거요. 어느 날 청년은 이곳의 작은 만, 아마도 오늘 아침에 당신이 지나왔을 그 작 은 만에 상륙했소. 미국 해군의 병사였는데 에이피아에서 군함을 탈출했던 거요. 그리고 선량한 원주민을 설득해서 에이피아에서 사포토로 건너는 작은 배를 타 고 왔다가 다시 통나무 배로 여기에 이르른 것이었소. 그가 왜 탈출했는 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 무료한 군함 생활을 견디기 힘들었는지도 모르지요. 그게 아 니라면 무슨 말못할 사연이 있는지도 몰라요. 게다가 아마 이 남해의 낭만적인 섬들이 그의 머리에 사무친 것이었겠지. 이 남해라는 곳은 때때로 사람을 이상 한 매혹의 포로로 만들고 말거든요. 그리고 일단 이것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거 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옴쭉달싹도 할수 없단 말이오. 어찌됐든 그의 내부 어딘 가에 약한 구석이 있었던 게죠. 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푸른 언덕의 아담한 모양이나 푸른 바다는 마치 데릴라가 삼손의 힘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북 방인의 강인함을 빼앗았던 거요. 아무튼 그는 도피하고 싶어했어요. 그의 배가 사모아를 출발할 때까지만 사람으 발길이 닿지 않는 이곳에 숨어 있으면 괜찮을 거이라고 생각했소. 작은 만이 있는 곳에 바로 원주민의 집이 한 채 있었다소. 그가 집앞을 서성 이며 어디로 갈 것인가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안에서 젊은 아가씨가 나와 들어오라고 말했소. 물론 그는 원주민 말은 거의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아가씨 역시 영어를 할 줄 몰랐지요. 그러나 그는 아가시의 미소와 아름 다운 몸동작, 그리고 손짓 등을 통해 아기씨가 말하는 뜻을 알 수 있었소. 그는 뒤따라 들어갔소. 그가 돗자리 위에 앉자 아가씨는 파인애플을 잘라 그에게 건 네 주었소. 좀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레드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가 전해들은 것 이오. 아가씨와는 그 일이 있는지 3년 뒤에 만났지요. 그때도 처녀는 겨우 열 아 홉살이 되까말까한 나이였소. 아,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소. 말하자면 무궁화의 그 정열적인 아름다움과 풍부한 색채, 마치 그것 같았 소. 커다란 두 눈은 마치 맑은 물이 괸 종려수 그늘의 샘과 같았고, 검은 머리는 등까지 굽이쳐 흘러 향기로운 꽃 너울로 장식한 것 같았죠. 게다가 그 아름다운 손이란. 귀엽고 투명한 모양만으로도 그녀의 손은 우리들의 마음을 못 견디게 뒤흔들어 놓을 정도였소. 그 무렵엔 방긋방긋 잘 웃기도 했죠. 그녀가 특유의 기 쁨에 가득 찬 미소를 짓기만 해도 우리들의 무릎은 벌써 이상하게 떨리기 시작 했소. 살결은 마치 여름날에 무르익은 보리밭을 보는 것 같았소. 아아, 말로는 그 모든 것을 다 표현 할 수가 없소. 이 세상의 말로는 그 아름다움을 다 찬양 한 수가 없기 때문이오. 이 두 사람의 젊은이, 열여섯 살의 여자와 스무 살의 남자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소. 그야말로 깨끗한 사랑이었지. 동정이나 공통된 이해나 공통된 사 상 같은 데서 오는 사랑이 아니라 오직 한 줄기의 순수한 사랑이었소. 아담과 이브의 젖은 눈동자가 뚫어지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에 느낀 바로 그 사랑이었소. 이 세상에 기적을 행하고 인생에 무한히 깊은 의미를 주는 그런 사랑말이오. 당신은 모르겠지만 파랑스의 총명한 소설가가 한 말이 있소. 두 사람의 연인들 사이에서 반드시 사랑하는 것은 한쪽 뿐이며, 다른 한 사람은 다만 그 사랑을 받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오. 대개의 인간이 운명이라고 단념하 지 않으면 안될 이 말은 슬픈 진실이라오. 그라나 극히 드문 일이긴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그렇지 않았소. 두 사람은 서로 함께 사랑하고 사랑을 받았단 말 이오. 이들의 사랑이야말로 마치 조슈아가 이스라엘의 신에게 기도해서 태양이 그 빛을 멈추고 움직이지 않았다는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었소. 모든 것이 희미한 옛날의 꿈이 되어버린 지금도 나는 그 젊고 아름답고 순수 한 두 사람과 그들이 꽃피운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껴 요. 마치 가끔씩 구름도 없는 밤에 보름달이 산호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볼 때처럼 내 마음은 찢어지는 것만 같소. 완전한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것은 항상 고통스러운 일이거든요. 두 사람은 너무 어렸소. 아가씨는 남자가 다정하고 섬세한 마음씨를 가진 사 람이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몰랐소. 하지만 레드라는 사나이는 순수한 젊 은이였을 거요. 그의 마음 역시 육체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웠을 거라고 나는 생 각하고 싶소. 그러나 아마도 그는 태초부터 숲의 빈터에서 새끼 사슴들이 수염 을 기르고 반인반마에 올라타 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을 부렵, 갈대를 꺾어 피 리를 만들고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목욕을 하면서 자연을 벗삼아 살고 있는 숲속의 정령들처럼 정신이라는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을 거요 정신이라는 것은 귀찮은 것이니까. 정신이 성숙해지면 인간은 에덴 동산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으 니까요. 그런데 레드가 이 섬에 왔을 무렵에는 백인들이 이곳에 몰고 온 전염병이 창 궐해서 섬 주민들의 3분의 1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오. 그 아가씨도 가족을 모두 잃고 먼 친척 집에 얹혀 살고 있었소. 식구라고는 허리가 굽은 주름투성이의 할 머니 두 사람, 젊은 여자 두 사람, 또 남자와 사내아이 하나였소. 레드는 며칠 동안 이 집에 숨어지냈소. 그러나 해안이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소. 만약 백 인이라도 만나면 자기의 거처가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아니면 같이 사는 사람들 때문에 두 사람만의 즐거움을 빼앗긴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는지도 모르지.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두 사람은 몇 개 되지 않는 아가씨의 물건을 챙겨 서 집을 나왔소. 그리고 야잣 그늘의 풀길을 지나 드디어 예의 그 샛강까지 오 게 된 거요. 당신이 아까 건넌 그 다리를 그들도 건너야만 했소. 남자가 겁을 먹 고 주춤거리자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소리를 내며 웃었소. 첫번째 나무를 건 널때까지 아가씨의 손을 잡고 시도해보았으나 결국 그는 겁이 나서 되돌아갔지. 그는 옷까지 홀라당 벗고 간신히 건너기는 했소. 옷은 아가씨가 머리에 이고 왔 소. 그리고 두 사람은 여기에 있던 아무도 없는 움막에 짐을 풀었소. 이 섬에서 는 토지 소유권이라는 것이 복잡했는데 아가씨에게 움막을 소유할 권리가 있었 는지 아니면 소유자가 전염병으로 죽고 없었는지 나는 그것까지는 알지 못하오. 그러나 아무도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소. 잠을 자기 위한 돗자리 두개와 거울 조 각, 찻잔 한두 개가 그들 살림의 전부였소. 이 즐거운 곳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충 분히 생활할 수가 있었소. 행복한 인간에게 역사는 없다는 말이 있지요. 행복한 연애에도 그런 것도 없 었소. 그들은 온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하루하루가 너무나 짧았소. 아가 씨에게는 그 지방에서 부르는 이름이 있었지만 레드는 그년를 샐리라고 불렀소. 여자는 곧 쉬운 말부터 영어를 배웠지요. 그는 종종 몇 시간이나 돗자리 위에 가만히 누운 채 그녀가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었소. 남자는 말을 하지 않았소. 그의 마음은 아마 꾸벅꾸벅 졸고 있었을 거요. 섬의 담배나 판다누스의 잎으로 여자가 만들어 주는 담배를 그는 하루 종일 피웠지요. 여자가 풀로 익숙 하게 돗자리를 만들고 있으면 그는 조금도 싫증을 내지 않고 그것을 지긋이 바 라보고만 있었소. 가끔 원주민들이 찾아와서 그때까지 부족간의 싸움으로 떠들 썩했던 섬의 옛날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가기도 했소. 때로는 그도 산 호초에 나가서 아름다운 빛깔의 고기를 바구니에 가득 잡아 올 때로 있고, 밤이 면 등을 들고 왕새우를 잡으러 가기도 했소. 움막 주변에는 피오가 우거져 있었 고 여자는 곧잘 바나나를 구워 간단한 식사를 만들었지. 야자 열매로 맛있는 요 리를 하기도 하고 샛강 근처의 나무에서도 과일을 땄소. 축제일에 그는 돼지를 잡아 돌 위에서 구운 요리를 만들었소. 그들은 샛강에서 함께 목욕을 하고 밤이 되면 산호로 가서 커다란 노가 달린 통나무 배로 뱃놀이를 하기도 했소. 바다는 매우 푸른 색이었지만 해가 지면 호메소르가 그린 그리스의 바다처럼 포도줏빛 으로 변했다오. 그러나 산호초 한 가운데는 남옥, 자수정, 취옥 등 가지각색의 색으로 시시각각 변하곤 했소. 그리고 노을이 지자마자 그런한 모든 것들은 금 빛으로 변해 출렁거렸다오. 게다가 또 갈색, 흰색, 연분홍, 진분홍, 갖가지 산호의 빛깔이 있었으며, 그 생김새 역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오. 마치 지상의 꿈의 동산이라도 보는 것 같았소. 바쁘게 왔다갔다하는 물고기는 지상의 나비라고나 할까, 어쨌든 모든 것이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소. 산호초 사이에 는 드문 드문 하얀 모래 바닥이 드러난 길이 있었소. 물이 맑을 때는 거기서 목 욕도 할 수 있었지. 이윽고 황혼이 되면 그들은 손을 맞잡고 상쾌한 몸과 기쁜 마음으로 부드러운 풀길을 밟으면서 샛강으로 돌아왔소. 야자수 숲에는 무수하 게 많은 구관조 떼가 끊임없이 노래를 하고 있었소. 거기에다가 밤이 되면 황금 빛을 빛나는 하늘, 그것은 유럽의 하늘과는 다르게 매우 높고 넓게 보였소. 활짝 연 움막으로는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오고 기나긴 밤이 그들에겐 안타까울 정도 로 너무 짧았소. 여자는 열여섯, 남자는 스물이 될까말까한 싱싱한 젊음이었소. 이른새벽, 빛이 소리도 없이 움막의 기둥 사이로 들어와 서로 부둥켜 안은 채 잠자고 있는 이 아름답고 젊은 연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었소. 아침 해는 마치 그들의 꿈을 헐클어뜨리지 않으려는 듯 찢어진 큰 파초의 커다란 잎사귀 뒤에 숨어 있었소. 그러다가 페르시아 고양이가 앞발을 뻗어 장난치듯이 그들의 잠든 얼굴에 심술궂은 금빛 햇살을 화살처럼 던지는 거요. 두 사람은 졸음에 가 득 찬 눈을 비비며 다시 새날을 맞이하는 기쁨의 미소를 띠지요. 이윽고 세월이 흘러 1년이 지났소.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소. 그러나 불타는 듯한 정열이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소. 정열이라는 것은 무언가 한 가닥의 비애, 식어 버리고 말 용 광로 같은 것이기 때문이오. 이것은 처음으로 만남 두 사람의 젊은이가 서로의 가슴 속에 신의 모습을 다짐한 그 첫날처럼 그대로, 조금도 변치 않는 마음을 온통 쏟은 사랑이며 또한 깨끗한 사랑이었지 때문이오. 만약에 누군가가 두 사람에게 물었더라도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에 종말의 날 이 있으리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했을 거요. 사랑에 없어서는 안되는 또 다른 영 원성을 믿는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아마도 레드의 몸 속에는 최초의 순간부터 그 자신도 모르게 더더구나 며자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의 가슴 속에서 는 권태라는 모양으로 성장해 가는 조그만 씨앗이 심겨져 있었던 것 같소. 어느 날 작은 만에서 온 원주민 한 사람이 바로 맞은편 바닷가에 영국의 표경선이 정 박해 있다는 말을 전했소. '마침 잘됐군'하고 남자는 말했소. 호두나 바나나로 담배를 일이 파운드쯤 바 꿀 수 없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던 거요. 날마다 지치지도 않고 샐리가 만들어 주는 판다누스 담배는 독하기도 하려니와 맛도 좋았소. 하지만 그에겐 무언가 그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있었소. 별안간 냄새가 짙고 강한 진짜 담배에 대한 갈망이 되살아난 것이오. 벌써 몇 달이나 파이프 담배를 피워보지 못했으니까. 생각만해도 그의 입 안에 침이 고였소. 그때 조금이라도 불길한 예감을 했더라 면 여자는 그를 가지 못하게 말렸을 텐데, 오로지 한결같은 사랑의 감미로운 술 에 도취되어 있던 그녀는 자기한테서 남자를 빼앗아갈 만한 림이 이 세상에 있 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요.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산으로 갔소. 그 리고 아직 푸르기는 하지만 달고 물이 많이 나오는야생 오렌지를 커다란 바구니 에 넘치도록 따가지고 왔소. 집 주위의 숲에서는 바나나와 야자와 빵을 만드는 열매와 망고를 땄소. 그것을 들고 그들은 작은 만으로 가서 흔들거리는 카누에 실었소. 그리고 레드는 이 소식을 들고온 원주민 아이와 함께 노를 저으며 산호 초를 넘어 여자를 떠났소. 이날을 마지막으로 그는 여지껏 돌아오지 않았소. 이튿날 원주민 아이가 환자 돌아왔소. 울면서 아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했소. 그들이 오랫동안 노를 저어 겨우 포경선에 닿자 레드가 배에 탄 사람들 에게 말을 걸었소. 한 사람의 백인이 뱃전에서 내려다보며 그득에게 올라오라고 했소. 두사람은 싣고 온 과일을 가지고 올라가서 갑판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 소. 레드는 무언가 백이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얼만후 이야기가 잘 끝난 것 같 았소. 선원 한 사람이 아래로 내려가서 담배를 가지고올라왔소. 레드는 당장 한 움큼 지벋니 파이프에 불을 붙였소. 그는 맛있게 연기를 빨아들이더니 힘차게 내뿜었소.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무언가 말을 하는가 싶었고 그는 선실로 들어 갔소. 원주민 소년은 신기해서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보았소. 그들은 술병과 컵을 가지고 왔소. 레드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소. 선원들은 무언가 그에게 묻고 있는 듯했소. 그는 고개를 흔들면서 웃고 있었소. 맨 처음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백인도 함께 어울려서 웃으며 레드에게 자꾸만 술을 권했소. 그러면서 그들은 계속 떠들고 마셨소. 시간이 흐르자 소년은 자신에게는 조금도 재미 없는 광경 에 싫증이 나서 갑판에 몸을 굽혀 그만 잠들고 말았소. 하참을 자다가 누군가 발길로 자신을 차는 바람에 눈을 떴소. 벌떡 일어나보니 배는 조용히 산호 가운 데에서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소. 테이블 앞에는 두 팔 안에 머리를 묻은 채 깊 이 잠들어 있는 레드의 모습이 보였소. 레드를 깨우려고 생각하고 한 걸음 내딛 는 순간 거친 손이 그의 팔을 잡았소. 무서운 얼굴을 한 사나이가 무슨 뜻인지 알수 없는 말을 지껄이면서 뱃전을 가리켰소. 소년은 다시 큰소리로 레드를 불 러보았으나 붙잡혀 물 속으로 던져지고 말았소. 소년은 가까스로 앞에 표류하고 있는 카누까지 헤엄쳐가서 카누를 의지해 산호초까지 밀고 갔소. 그리고 겨우 카누에 기어올라 울면서 돌아왔다는 것이었소. 모든 것은 확실했소. 포경선은 탈출자나 아니면 병자가 생겨 사람의 손이 부 족했으므로, 선장은 레드가 배에 올라왔을때 계약을 부탁했지요. 하지만 그가 거 절하자 술에 취하게 해서 그를 납치했던 거요. 슬픔에 빠진 샐리는 거의 미칠 것 같았소. 사흘 동안 밤낮없이 그녀는 눈물로 지새웠소. 원주민들은 진심에서 여러가지 말로 위로했으나 그녀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소. 음식을 먹지도 않았소. 그러다 결국은 지쳐서 벙어리처럼 우울한 허탈 상태에 빠지고 만 거지요. 그녀는 날마다 작은 만에서 그를 기다리며 지냈 소. 행여나 레드가 무슨 구실을 만들어 탈출해오지나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를 가지고 산호의 물을 바라보고 있었소. 그리고 밤이 되면 피곤한 다리를 끌고 샛강을 건너 이제는 행복이 지나가버린 작은 집으로 돌아왔소. 레드와 만나기 전에 함께 살았던 친척이 다시 돌아오라고 권했으나 그녀는 그 청을 거절했소. 틀림없이 레드가 돌아올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기 때문이오. 넉 달이 지난 뒤 그녀는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서 그만 아이를 사산하고 말았소. 그녀가 앓고 있는 동안 도와주러 왔던 할머니가 그대로 움막에 남아 함께 살게 되었소. 그녀 는 삶의 모든 기쁨을 빼앗기고 말았소.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고뇌는 조금씩 사 라지기 시작했으나 그 대신 깊은 만성의 우울증에 빠졌소. 격렬하기는 하나 아 주 변하기 쉬운 감정을 가진 원주민들 속에 이토록 언제까지나 일편단심으로 사 랑을 할 수 있는 여자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요. 언젠가는 ㄹ드가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그녀는 절대로 포리하지 않았소. 그래서 그녀는 변함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소. 그리고 그 가느다란 야자수의 통나무 밟는 인 기척이 들릴 때마다 그녀는 밖을 내다보았소. 언젠가는 그가 돌아올 것이라 믿 었기 때문이었소." 닐슨은 잠시 이야기를 중단한 채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 여자는 결국 어떻게 되었나요?" 하고 선장이 물었다. 닐슨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니까, 3년 뒤였소. 그녀는 어떤 백인과 사귀게 되었소." 선장은 잘찐 얼굴에 비꼬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게 그들의 통속적인 인생 행로이니까요." 하고 그는 말했다. 닐슨은 증오에 찬 눈으로 상대를 흘끗 보았다. 어째서 이 뚱뚱한게 살찐 사나 이의 말에 자신이 심한 반발을 느껴야만 하는지 그로서도 그 사실을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끝없는 그의 추억은 차례차례로 지난날으 기억을 가슴에 되살렸다. 25년 전이었다. 그는 술과 도박과 욕망에도 싫증이 나서 한때는 격렬 하게 야심을 불태운 성공의 희망도 차가운 체념 속에 파묻어버리자고 마음먹고 아픈 몸을 이끌고 이 섬으로 왔다.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희망도 모두 버린 뒤였다. 이제는 다만 간신히 이어질 몇 개월간의 삶을 조용히 마감하는 것만으 로 스스로 만족하려고 남몰래 결심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몇마일쯤 되는 해변의 원주민 부락 변두리에 가게를 열고 있는 혼혈인 상인 집에 묵고 있었는데, 우연 히 정처 없이 야자수의 숲속을 거닐다가 샐리가 살고 있는 움막 앞으로 오게 되 었다. 그렇재 않아도 이 숲속의 아름다움이 그의 마음을 고통스런 환희로 가득 차게 샜는데 그때 마침 샐리를 본것이다. 그는 이제껏 그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본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 검고 큰 눈에 가득 찬 슬픈 빛이 이상하게 그의 마음 을 움직였다. 카나카 원주민은 아름다운 종족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미 모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공허하면서도 슬픔에 찬 이 새까만 눈동자는 신비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무언가 어둠 속을 더듬는 영혼의 고뇌처럼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는 상인으로부터 그녀의 과거에 대해 들었는데 바로 그것이 그의 마음을 더욱 동요케 했다. "그 남작 돌아올 것 같습니까?"하고 닐슨이 물었다. "아니요. 돌아올 수 없을 거예요. 계약이 끝나려면 2년은 있어야 합니다. 그렌 데 그는 아마 그때쯤 여자에 대한 기억은 까맣게 잊어버릴 겁니다. 어쩌면 술에 서 깨어나 자기가 유괴된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미칠 것 같았겠죠. 하지만 결 국은 웃으며 참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뭐 한 달쯤 지난 뒤에는 용케 도 섬을 벗어나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닐슨은 이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자기 자신이 잘 생기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남의 아름다움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는것 같았다. 그는 그때까지 열렬한 사랑을 한 기억도 없었다. 그래서 이 두 젊은이들이 나 눈 사랑은 그에게 야릇한 환희를 느끼게 했다. 말하자면 형언할 수 없는 절대적 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ㄴ 더 샛강의 움막을 찾아갔다. 그는 어 학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부에도 취미를 가진 정열적인 마음의 소유자였다. 이때까지 이 지방의 언어 견구에도 적지 않은 흥미를 가지고 있던 터였다. 습관이란 쉽사리 없어지지 않아 그는 그때도 마침 사모아어에 관한 논 문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샐리와 함께 사는 할머니가 나와서 좀 쉬었 다 가라고 말했다. 그녀는 카바 술을 내놓고 궐련 담배를 권하기도 했다. 할머니 는 어쨌든 말상대가 생겨 기뻐했으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의 정신 은 온통 샐리를 향해 있었다. 문득 그는 나폴리 박물관에 있는 프시케 상을 떠 올렸다. 바로 그 상과 닮은 모습의 선이 그녀의 얼굴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더욱이 그녀는 어린애를 낳았는데도 불구하고 처녀와 같이 아름다운 몸매를 간 직하고 있었다. 여자가 그에게 말문을 튼 것은 두세 번 만나고 나서였다. 하지만 그 말이라는 것도 에이피아에서 레드라는 남자를 혹시 만나지 못했느냐는 오직 그것뿐이었 다. 그가 사라진 지 벌서 2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그 남자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닐슨은 자기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간신히 굳은 의지로 매일이라도 샛강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몸은 샐리 곁에 없지만 생각만은 항상 그녀에게 날아가 있었다. 처음에는 죽음에 직 면해 있는 자기으 건강을 생각하며 다만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 그리고 때로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위안을 받으려 했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그의 사랑은 그를 묘한 행복에 들드게 했다. 그 맑고 깨끗함에 그는 더없이 큰 기쁨을 맛본 것이다. 아름다운 그녀에 대한 희미한 공상을 둘러싸고 그이상 그 는 아무것도 그녀에게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맑은 공기, 일정한 온도, 충분한 휴식, 간소한 식사, 그러한 것들이 뜻밖에도 그의 건강을 호전시켜 주기 사작했 다. 밤이 되면 신기하게 체온이 차차 정상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기침도 줄어들 고, 체중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취근 6개월 동안은 한 번도 피를 토하지 않았다. 그리고 별안간 그는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 의 병을 면밀하게 연구했다. 만약에 세심한 주위만 기울인다면 병의 악화를 막 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희망과 서광이 비치기 사작했다. 다시금 미래를 꿈 꾸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들떴다. 그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 웠다. 활동적인 생활은 불가능하더라도 이 섬에서 살아갈 수는 있다. 약간의 수 입만 있으면 다른 데서는 몰라도 여기서는 식생활을 해결할 것이다. 야자수를 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히 돈은 된다. 그리고 책과 피아노도 보 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민감한 그의 마음은 이러한 모든 일이 필경은 그의 가슴에 달라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하나의 소원,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마저 숨 기려는 애절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샐리를 갖고 싶은 것이다. 아름다움만이 아닌, 그녀의 슬픈 눈동자와 그 속에 담긴 몽롱한 영혼까지 그는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랑으로 여자를 도취시키면 얼마 못가서 그녀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신에게 는 이미 허락될 수 없는 것으로 단념하고 있었던 행복을 지금 뜻하지 않게 기적 처럼 얻고 보니, 그러한 행복을 그녀와 함께 나누고 싶은 꿈을 꾸게 된것이다. 결혼하자고 그는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거절했으나 그것은 진작부터 짐작 하고 있었던 일이었으므로 그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여자의 마음 이 움직일 것이라는 확신이 그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불태 워버리는 사랑이었다. 그는 먼저 할머니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원주민들은 벌써부터 두 사람 사이를 눈치채고 오히려 그의 청에 따르 도록 여자에게 끈질기게 설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원주민들은 모두가 백인과 가정을 꾸리고 싶어했다. 거기에다가 일반적인 기준에 의하면 닐슨은 오히려 부 유한 신분이었다. 닐슨이 하숙하고 있는 집 주인이 그녀를 찾아가서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라,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고 말하며 레드가 돌아온다 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자에게 이야기했다. 여자가 거절하면 거절할 수록 닐슨의 사랑은 더해갈 뿐이었다. 처음에는 아주 순수한 사랑이었던 것이 이제는 고통에 가까운 치정으로 변해갔다. 어떤 장애가 놓여 있더라도 극복해보 겠다고 그는 결심했다. 샐리에게 마음이 가라앉을 여유마저 주지 않았다. 애원도 해보고 화를 내보기도 하는 그의 끈질김과 끊임없는 설득과 주위 사람들의 한결 가은 설득에 드디어 그녀도 고집을 꺾고 동의 했다, 그러나 이튿날 기쁨에 가슴 을 두근거리면서 그녀를 찾아갔을 때 여자는 레드와 살았던 움막을 깨끗하게 불 태워버린 뒤였다. 할머니가 샐리를 욕하면서 그에게 달려왔다. 그러나 그는 손을 흔들어 말렸다.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움막이 탄 자리레 새로 방갈로를 만 들고 , 피아노나 수많은 장서를 들여 놓으려면 유럽식 가옥이 훨씬 편리하기 때 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 그가 오랫동안 살고 있는 작은 목조 집이 만들어졌고 그는 샐리를 아내로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황홀한 몇 주일, 오직 여자가 주는 것만 으로 그가 만족했던 시기가 지나고 보니 그는 행복다운 것은 하나도 잡지 못했 음을 깨달았다. 여자는 변함없이 레드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가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에 레드의 소식이라도 있으면 그의 애무, 동정, 관요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그야말로 한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그를 버리고 레드에게 달려갈 것이다. 닐슨은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슬픔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갑자기 고뇌의 포로가 되어서 시무 룩하게 자기를 거절하고만 있는 그녀의 고집스러운 자아를 향해 계속하여 힘껏 두드리고 있었다. 사상은 이제 고통이 되었다. 친절로 여자의 마음을 녹여보려고 도 했다. 그러나 여자의 마음은 여전히 돌처럼 단단했다. 또 어떤 때는 무관심을 가장해보기도 했으나 그녀는 그보다도 더 냉담한 것 같았다. 참다못해 화를 내 고 욕을 퍼부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아무말도 없이 울기만 할 뿐이었다. 여자의 마음엔 그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는 드디어 영혼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한 것일 뿐 그가 여자의 성스러운 마음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결국 그녀가 영환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 다. 이제 그의 사랑은 오히려 날마다 탈출을 꿈꾸는 감옥으로 변하고 말았다. 다만 문을 열고 - 열기만 하면 그것으로 되는데 - 대기속으로 내딛는 힘, 그것 이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지옥의 괴로움이었다. 이윽고 그는 희망도 아무것 도 없는 허탈감에 빠지고 말았다. 사랑의 불꽃은 이제모두 타버리고 만 것이다. 혹시라도 그녀가 그 가느다란 통나무 ㄷ리에 누을 옮기는 것만 보아도 그으 가 슴엔 노여움이 치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조에 가까운 질투심이 생겼 다. 이제 벌써 수십년동안 그들 두 사람은 다만 습관과 타성에 젖어 함께 살아 온 것이다. 그는 지난날의 사랑을 동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여자가 빨리 늙는 이 섬에서는 벌써 그녀는 노인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제 그는 그녀에 대해서 사랑 을 느끼지 않는 대신 대신 관용을 베풀로 있었다. 여자도 그에게 간섭하지 않았 다. 그 또한 오직 피아노와 책에 파묻혀 살았다. 이윽고 그의 회상이 말이 되어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레드와 샐리의 슬프고 열렬한 사랑을 이제와서 돌이켜 보며 나는 생각한 다오. 사랑의 눈금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두 사람을 영원히 헤어지게 한 잔인한 운명에 대해 그들은 오히려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오. 그들은 고뇌에 찬 삶을 보냈을 거요. 거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고통이었소. 사랑의 진정한 비극 이 뭔지 알지 못한 채 헤어졌으니 말이오." "무슨 뜻인지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선장이 말했다. "사랑의 비극은 결국 죽음도 이별도 아니란 말이오. 그 두 사람 중 어느 한쪽 이 상대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날이 언젠가 오리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 을까요/ 지난날에는 하루만 만나지 않아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했던 여자를 지금은 다시 만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면 그야말로 그보다 무서운 비극은 없 소. 사랑에 있어 진짜 비극은 무관심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말 상대 는 분명히 선장이었으나 그는 선장에게 이야기를 건넨다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위해, 가슴 속에 품었던 생각을 말로 대신하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 다. 눈동자는 뚫어지게 눈앞의 사나이를 향해 있었지만 그를 보고 있지는 않아 ㅆ.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의 영상이, 지금 그의 누앞에 보고 있는 이 사나이의 영상이 아닌 다른 한 사나이의 영상이 그의 눈망울에 생생하게비친 것이다. 그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괴상하게 비치거나 아니면 형편없이 길쭉하게 보이는 무스 도깨비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는데, 다만 이 경우는 바로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추하고 군살이 붙은 노인 속에서 그는 그림자처럼 아름다운 젊은이의 영상을 희미하게 본 것이다. 그는 뚫어지도록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았 다. 우연한 산책이 어째서 이 사나이의 발을 이곳으로 이끌었을까? 그는 가슴 속에 일기 시작한 세찬 전율을 느끼면서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엉뚱 한 생각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 설마!설마 그럴 수가. 그러나 그는 사실을 부 정한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글쎄 이름을 들어본 지 하도 오래되어서 나 자신도 잊어버릴 지경이오. 하지 만 30년 전에 이 섬 사람들은 나를 레드라고 불렀소." 조용히,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웃으면서 그는 비대한 몸집을 흔들었다. 그 것은 어딘가 추악하기까지 했다. 닐슨은 소름이 돋았다. 레드는 매우 즐거워했 다. 핏발이 선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마저 흐르고 있었다. 닐슨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 한 여자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원주민 여자였다. 어딘가 범할 수 없는, 뚱뚱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살색이 검고 단단한(원주민은 뇌쇠와 더불어 피부가 검어진다.) 하얀 머리결을 가진 여자였다. 검은 마더 하버드를 입고 있었는데 얇은 천을 통해서 묵직한 두 개의 유방이 보였다. 드디어 그 순간이 온 것이다. 여자는 집안일을 두고 닐슨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대답했다. 자기가 느 끼기에도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으므로 그의 그런 침착하지 못한 음성을 그녀가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고 그는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여자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는 별로 흥미도 없는 듯이 흘끗 보았을 뿐 암 말없이 방을 나갔 다. 아주 잠깐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닐슨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충동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 말문을 텄다. "어떻소. 함께 식사라도 하시죠? 매일 먹는 음식이라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글쎄요." 레드가 말했다. "나는 그레이라는 사나이를 찾아 물건을 넘겨주는 대로 바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게다가 내일 에이피아로 돌아갈 예정이어서." "그럼 애를 시켜 길을 안내해드리도록 하지요." "아, 대단히 감사합니다." 레드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닐슨은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한 꼬마를 불렀다. 선 장의 행선지를 말하자 꼬마는 앞서서 다리를 건너갔다. 레드가뒤따라 건너가려 하자 닐슨이 말을 걸었다.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뭐,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리를 건너는 그의 뒷모습을 닐슨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동안 바라보고 있 었다. 그의 모습이 야자수의 숲 속으로 사라진 뒤에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 리고 나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나의 행복을 방해한 사나이가 바로 저 사람 이란 말인가? 긴 세월동안 샐리가 사랑하며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남자 가 바로 저 사나이란 말인가? 기가 막힌 일이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므려 그는 모든 것을 때려부수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속았다. 완전히 속았다. 실제로 방금 두 사람은 재회했으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도 못하지 않았던가? 그 는 웃기 시작했다. 서먹서먹한, 그러나 드디어 발작적인 웃음으로 변했다. 모든 게 신들의 잔인한 장난이었다. 어느새 그들에게 남은 것은 늙은 모습뿐이었다. 샐리가 들어와서 식사 준비가 준비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여자와 마주앉아서 억지고 몇 숟가락을 먹었다. 만약에가까 그 의자에 앉아 있었던 비곗덩이의 늙 은 남자가 그녀가 젊은 날에 그토록 열렬하게 사랑했던,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 고 가슴 속에 지니고 있는 연인이라고 말했더라면 여자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 까? 전에 그를 불행하게 만든 여자를 아직 미워하고 있었을 무렵의 그였다면 오 히려 기꺼이 말해버렸을 것이다. 그때 그는 자기가 상처를 입은 것처럼 상대에 게도 상처를 입혀주고 싶었다. 미움도 또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마음이 전혀 일지 않았다. 그는 울적한듯이 어깨를 으쓱했 다. "그분은 왜 오신 거예요?"그녀가 물었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도 지금은 나이를 먹은 뚱뚱보 원주민 여자 가 되고 말았다. 도대체나는 무엇때문에 이 여자를 그토록 열렬하게 사랑했을 까? 이 여자의 발 밑에 내 영혼의 모든 보물을 던졌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것 들에게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낭비! 이게 무슨 낭비냐! 지금 그녀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모멸감뿐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말했다. "범선의 선장이야. 에이피아에서 왔다더군." "그랬군요." "고향에서 전갈을 가지고 왔는데 말야, 큰형이 많이 아프대. 가봐야만 될 것 같아." "오래 걸리시나요?" 그는 단지 어깨를 들먹일 뿐이었다. 살아 있는 송장 지은이: 이반 투르게네프 아아 오랫동안 괴로워하던 조국이여! 러시아의 백성이 살고 있는 따이여! -츄체프- 이튿날 아침 나는 아주 일찍 눈을 떴다. 해는 이제 방금 솟아올랐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사방은 모든 것이 두 배로 빛나고 있었다. -아침의 새로운 빛이 엊저녁의 소나기가 지나긴 자리를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마차 준비를 시키 고 있을 동안 나는 빈둥빈둥 작은 과수원 쪽으로 걸어갔다. 과수원은 여태까지 는 거칠대로 거친 뜰이었으나 그 주워가 흠뻑 젖어서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아 밝은 하늘 아래에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다는 것은 얼마나 기분좋은 일인가. 맑디 맑은 하늘에는 종달새가 지저귀고 그 방울 같은 울음소리가 은구슬처럼 내려온다. 그 날개에는 틀림없이 이슬 방울을 싣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노래조차도 이슬에 젖어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나는 모 자를 벗고 가슴 가득히 기분좋게 숨을 들이켰다. 낮은 골짜기의 경사진 울타리 가까이에 벌집이 보였다. 그리고 그쪽으로 키 큰 풀이 두꺼운 벽처럼 우거진 사 이를 뚫고 뱀처럼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통해 있다. 그 길 위에는 어떻게 나왔는 지 짙은 녹색의 삼풀 줄기가 뾰족한 작대기 모양으로 자라고 있었다. 나는 그 오솔길을 따라서 벌집이 있는 데까지 갔다. 그 곁에는 가느다란 나뭇 가지를 얽어서 만든 오두막이 서 있었다. 그것은 겨우내 벌집을 넣어 두는 곳이 었다. 나는 반쯤 열려 있는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안은 어둡고 조용했 으며 공기는 아주 건조했다. 그리고 박하오 향유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구석에 는 네다리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위에는 헝겊으로 덮은 작은 무엇이 있었다. ... 나는 거기를 막 떠나려고 했다. "도련님, 도련님! 표트르 페트로비치님!"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약한, 조용하고 쉰 목소리였다. 마치 갈대가 나부끼는 소리 같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페트로비치님! 제발 좀 들어와주세요"하는 목소리가 계속됐다. 그것은 구석의 침대 위에서 들여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 곁으로 다가가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앞 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가로누워 있었다. 허나 그것은 무었일까? 말라빠진 머리는 온통 검붉은색이었다. 마치 낡아서 누렇게 된 생선 같았다. 날카로운 코는 뾰족한 칼 같았고 입술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 다. 그저 이빨과 눈만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수건 아래에는 노란 털이 몇 줄기 이마 위에 흩어져 있었다. 이불이 접혀져 있는 턱 밑에는 마찬가지로 검붉은색 의 작은 두 손이 움직이고 있었는데, 나뭇가지 같은 작은 손가락이 따로 놀고 있었다. 나는 더욱 주의해서 보았다. 그것은 추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아름다운 얼 굴이었다. 그러나 어딘지 처절한 느낌이 있었다. 그 얼굴이 나에게 한층 더 처참 하게 느껴진 것은- 그 금속 가은 뺨 위에서 괴롭고 고통스러운 듯한 미소를 보 았기 때문이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도련님!" 하고 그 목소리가 다시 속삭였다. 그러나 소 리를 내는 입술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지요, 당연한 일이지요, 어찌 저를 알아보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ㄹㅋ케 리아입니다....기억하고 계실는지요. 당신의 어머님 스바스코오에님의저택에서 무 용을 가르쳤습니다. ...기억하고 계십니까? 합차의 지휘도 했던 저를..." "루케리아!" 하고 나는 외쳤다. "너였나? 그런가!" "예, 도련님. 저는 그 루케리아입니다." 나는 할 말을 잊었다. 다만 죽은 사람같이 맑은 눈을ㄹ 나에게 던지고 있는 어둡고 움직이지 않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 미아라 같은 구케이라가 -우리들 집안에서 제일 아름답던 그 여 자라고는! 루케리아에 대해, 나의 그 영리하던 루케리아에 대해 젊은 사나이들이 라면 누구나 그녀의 사랑을 원했고 나도- 그 당시 십육 세의 소년이었던 나도 남몰래 가슴을 태웠던 것이다. "오오, 루케리아!" 이윽고 나는 소리쳤다. "대체 어찌된 일이야?" "네, 아주 처참한 꼴이 되었습니다. 만약 싫지 않으시다면 제 신세 타령을 좀 들어주세요. 이 작은 통 위에 걸터앉으시고 - 좀더 가까이! 그렇지 않고서는 이 야기가 들리지 않으니까요...이제는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질 않습니다...그러나 뵐 수 있어서 기쁩니다. 어떻게 도련님은 이 알렉세예프카까지 오셨습니까?" 루케리아는 아주 조용하고 약하나마 말을 중단하지 않고 물었다. "사냥꾼 엘모라이와 같이 왔지. 그러나 그것보다도 듣고 싶은 것은..." "제 신세타령 말입니까! 예, 이야기하구 말구요. 아주 오래 전에 - 육, 칠년 전 일입니다. 그때 저는 바실리 폴리야코프와 금방 결혼했던 때입니다. -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름다운 곱습머리를 가진 참으로 훌륭한 사나이로서 도련님 어머님 의 시중을 들던 남자였습니다. 하기야 그때 도련님은 시골에 계시지 않으셨지요. 모스코바에서 공부하고 계실 때였으니까. 바실리와 저는 깊이 사랑하고 있었습 니다. 저는 아무리 해도 그 사람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일이 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날이 샐 무렵이었지요. 저는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 습니다. 꾀꼬리는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고운 목소리로 뜰에서 울고 있었습니 다....저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그 울음소리를 들으려고 계단까지 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꾀꼬리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그칠 줄 모르고 노래를 부르고 있 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누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바실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루케리아, 하고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사방을 둘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직 잠이 채 깨지 않았던 탓이겠지요. 그만 헛디뎌 맨 윗 계단에서 아 래도 굴러 떨어졌지요!그러나 저는 그리 대단하게 다쳤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 다. 곧 일어서서 제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까요. 그저 몸 속 어딘가 상처를 입었던 것 같습니다....도련님 조금 숨을 돌리겠습니다. ...조금만...죄송합니다." 루케리아는 이야기를 멈추었다. 나는 그녀를 보면서 놀랐다. 그녀는 재미있다 는 듯이 거의 숨도 쉬지 않고 신음소리도 안 내고 불평도 하지 않고 동정도 바 라지 않는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 하고 루케리아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점점 마르고 여위기 시작했습니다. 살결은 검은빛으로 되고 걷는 것도 힘들어졌습니다. 그러고나서, 저는 아주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고 설 수도 앉 을 수도 없게 되어 종일 누워있게 되었습니다. 식욕이 아주 없어지고 건강은 점 점 나빠져갈 뿐이었습니다. 도련님의 어머님은 친절하게도 의사에게 보이기고 하고 입워ㄴ 시켜 주셨습니다. 하지만 병원에 입원해서도조금도 호전되질 않았 습니다. 더구나 의사들은 무슨 병인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온갖 방법으 로 치료를 했습니다. 뜨거운 인두로 척추를 지지기도 하고 얼음으로전신을 마사 지하기도 했으나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전신이 아주 마비되고 말았 습니다. 그리고는 의사로부터 그이상 치료해도 소용없다는 선고를 받았고, 벼ㅇ 를 도련님 댁에 두어 봤자 별 수 없으므로... 말하자면 그와 같은 이유에서 이리 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친척도 있고 해서 여기서 이렇게 지내고 있습 니다." 루케리아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미소를 띠었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 한데... 이런 곳에서!"하고 나는 외쳤다. 그러나 정작 할 말이 나오질 않아 나는 또 물어보았다. "그래서 바실리 폴리야코프는 어떻게 됐나?" 그것은 참 어처구니 없는 질문이었다. 루케리아는 잠깐 시선을 피했다. "폴리야코프는 어찌 됐느냐는 말씀이시죠? 그이는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그린 노에 태생의 아가씨와 곧 결혼했습니다. 그린노에를 아시지요? 여기서 멀지 않 습니다. 아가씨 이름은 아그라페나였습니다. 그이는 정말 저를 사랑했습니다. 하 지만 그는 젊어서 언제까지 독신으로 있을 수는 없는 걸요. 그리고 이 꼴이 되 고만 저로서는 그이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이가 고른 색시는 얌전하고 어 여쁜 아가씨였습니다. 게다가 벌써 아기까지 낳았습니다. 그이도 여기에 살고 있 는데 근처에서 서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도련님의 어머님이 신원보증을 서서 휴가를 즐기고 있습니다. 잘들 지내고 있는 모양입니다. 다행한 일이죠" "그럼 너는 줄곧 여기에 누워 있었군?" 하고 나는 다시 물었다. "예, 벌써 칠년이나 됩니다. 여름에는 이 오두막에 누워 있습니다만 추워지면 목욕탕 있는 데로 옮겨갑니다." "누가 시중을 들어주지? 간호해주는 사람이 있어?" "예, 그거야 어디든지 친절한 사람은 있는 법이니까요. 여기에서도 저를 그대 로 내버려두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저는 여러 사람들에게 많은 수고를 끼치지 않아도 됩니다. 음식도 남들처럼 먹고 물은 이병 속에 들어 있습니다. 언제나 이 병에는 맑은 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병까지는 손이 닿으니까요. 한쪽 팔은 아직 쓸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기에는 고아인 작은 계집아이가 가끔 와서 시중을 들 어줍니다. 그애는 아주 친절한 아이입니다. 아까도 왔었는데요...만나지 못했나 요? 참 귀엽고 예쁜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가끔 꽃을 가져다 줍니다. 옛날에는 뜰에 꽃들이 많았지요. 그러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습니다. 그렇지만 들꽃 향기 도 참 좋아요. 정원의 꽃보다 더 진한 향기가 납니다. 저 산백합꽃 같은 건...참 좋은 냄새가 나지요." "그래도 루케리아, 너는 심심하다든가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저는 거짓말을 하기는 싫습니다. 처음에는 꽤 괴롭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차츰 익숙해져서 지금은 참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 중에는 저보다 더 불행한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게 어떤 사람들이지?" "세상에는 비바람을 피할 오두막 하나 없는 사람도 있고, 눈이 보이지 않는 사 람,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도 있느데, 저는 어쨌든 똑바로 볼 수 있고, 무엇이든 들을 수 있습니다. 두더지가 땅 속에서 굴을 파는 소리까지도 저에게는 들립니 다. 그리고 아무리 약한 냄새라도 맡을 수 있습니다. 밭에 있는 보리나 들의 보 리수에 꽃이 피면 저는 그것을 누구에게 듣지 않고도 먼저 알 수 있습니다. 바 람이 냄새를 실어오는 것이지요. 신의 뜻을 거역한 사람은 저보다 훨씬 더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어요. 정말입니다. 몸이 성한 사람들은 누구라도 죄를 범하기 쉽지만 저는 이젠 죄와는 인연이 멀어졌는 걸요. 얼마전에도 알렉세이 신부님이 성찬식을 드리려 오셨을 때 '너는 참회할 필요가 없을 거야, 이렇게 하고 있으면 죄를 범할 도리가 없을 테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 니다. '마음 속에서 범하는 죄는 어떻게 하지요?라고 신부님은 '글쎄, 대단한 죄 는 아니겠지'라고 하면서 웃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마음 속에서도 큰 죄 를 범하고 있지 않습니다."하고 루케리아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왜냐하면 저는 사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더욱이 지나간 일을 생각해내지 않 으려고 애써 왔으니까요. 그래서 시간은 아주 빨리 흘러갑니다." 나는 매우 놀랐다. "루케리아, 너는 항상 혼자 있는데 어떻게 생각을 하지 않고 견딜 수 있단 말 이냐? 내내 잠만 자고 있을 리도 없는데." "아니 도련님! 내내 잠을 자다니요. 별로 심하게 아픈데는 없지만 그래도 오른 편 안쪽과 뼛속은 아파서 마음대로 잠들 수가 없는 걸요. 그러나 이렇게 홀로 누워 있으면서도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살아 있어서 숨 을 쉬고 있다는 걸 느낄 따름이고, 그것에만 정신을 쏟고 있습니다. 저는 눈을 뜨고 있든지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꿀벌은 벌집 속에서 윙윙 날아다니기도 하고, 웅성대기도 합니다. 비둘기는 지붕 위에 내려앉아서 구구 울어댑니다. 암 탉은 병아리를 거느리고 빵부스러기를 쪼아 먹으려고 옵니다. 그리고 새나 나비 가 날아들기도 하고 -꽤 재미있고 위안이 됩니다. 작년에는 제비가 저쪽에 둥지 를 틀었지요. 새끼를 몇 마린가 깠습니다.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어미가 둥지로 날아와 새끼에게 먹이를 줍니다. 그리고는 곧 날아가버립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날아와 또 다른 놈에게 먹이를 주지요. 어떤 때는 어미가 둥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지나쳐 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린 새끼들이 짹짹거리며 울어대 지요...저는 이듬해에도 또 와달라고 기원했으나 듣자니 어떤 사냥꾼이 총으로 쏘았다지 뭐예요! 대체 그런 것을 잡아서 어쩔려구 그러는지! 제비 따위는 풍뎅 이벌레만큼도 쓸모가 없을 텐데...사냥이라는 것은 아주 참혹한 것입니다!" "나는 제비 따위는 쏘아본 일이 없어" 하고 당황해서 대답했다. "하지만 한 번은" 하고 루케리아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참 우스운 일이 있었어요. 언젠가 토끼 한 마리가 뛰어들어온 거예요. 산토끼 말입니다. 아마 사냥개한테 쫓긴 것이겠지요. 문 안으로 들어왔지요. 바로 제 곁 에 웅크리고 앉아서 꽤 오랫동안 가만히 있더군요. 쉴새없이 코를 킁킁거리기도 하고 수염을 움실움실 움직이기도 하면서 말이죠-꼭 나으리나 되는 것처럼! 그 리고는 저를 바라보는 겁니다. 틀림없이 제가 무섭지 않다는 것을 알았나봐요. 마침내는 깡총깡총 뛰어가서 문밖을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어 떻게 이야기하면 좋을지! 참으로 우스운 장면이었어요." 루케리아는 '우습지 않으세요? 라고 하듯이 나는 보았다.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나는 웃었다. 그녀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겨울이 되면 아무래도 쓸쓸해집니다. 언제나 어두컴컴하니까요. 촛불을 켜는 것도 비참하고 켜보았자 소용 없는 걸요. 책을 읽을 때라면 모르겠지만요. 저는 예전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읽어야 좋을까요? 읽을 책이 라곤 한 권도 없는 걸요. 있다 하더라도 손에 들 수가 있어야죠. 알렉세이 신부 님이 위안이 될 거라고 하시면서 달력을 가져오셨지만 소용 없으리라 생각하시 고는 도로 가져가셨습니다. 하지만 캄캄한 어둠속에서도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 면 항상 무슨 소리가 들립니다. 귀뚜라미가 울거나 쥐가 뮐 갉아대는 소리. 바로 그럴 때지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말씀드린 것은!" "그리고 저는 항상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루케리아는 잠깐 숨을 돌리고나서 또 말을 이었다. "사실 저는 그리 많은 기도의 말씀을 알지는 못해요. 게다가 신에게 폐를 끼칠 일이 있어야지요! 제가 새삼스레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신은 제게 필요 한 것을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걸요. 신은 제게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그것 은 신이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죽음의 기도''마리아의 찬미'나 '모든 괴로워하는 자의 소원'을 되풀이하고는 다시 조용히 누워 있습니다. 아무것도 생 각하지 않고, 아무 일 없이 저는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얼마쯤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 침묵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좁은 통 위에 꼼짝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내 앞에 누워 있는 이 살아 있는 비참한 생물의 처참한 돌과도 같은 적막이 나에게도 옮아왔다. 나는 어쩐지 마비되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래, 루케리아!" 하고 나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어떨까? 너를 병원에, 시내에 있는 좋은 병원에 입 원시커주려고 생각하는데, 어때? 혹시 나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야, 어쨌든 이 렇게 홀로 내버려둘 수는 없어..." 루케리아의 눈썹이 약간 움직였다. "아닙니다, 제발" 하고 그녀는 난처하다는 듯이 나직한 소리로 대답했다. "병원 같은 곳에는 보내지 마세요. 제 걱정은 마세요. 그런 곳에 가면 도리어 고통이 더해질 뿐입니다. 이제 이렇게 된 이상 나을 가망은 없습니다....얼마 전 에도 의사가 오셔서 저를 진찰해보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제발 소원이니 그냥 내벼려두라고 부탁했지요. 그래도 그는 저를 이리저리 눕히고 손발을 두드 려보고 잡아당겨본 후, '나는 학문을 위해서 이렇게 한다 나는 학문의 종, 즉 학자이다. 그러니 너는 결코 불평해서는 안된다. 나는 여러 학문에 공로가 많아서 상을 받았다. 그리고 너희들과 같은 인간을 위해 힘쓰고 있는거야?라고 말하는 겁니다. 의사는 군데 군데 툭툭 두드려보고는 저의 병명을 알려주었습니다. - 아주 긴 병명이었습니 다만은-그리고는 그냥 가버렸습니다. 그후 일주일 동안 뼈가 쑤셔서 견딜 수 없 었습니다. 도련님은 제가 언제나 혼자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 다. 동네 사람들도 가끔 와줍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별로 부탁할 것도 없어요. 쳐녀들이 와서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하고 수녀들도 길을 잘못 들어 내게 와서는 예루살렘이나 키에프 이야기, 그밖의 여러 성지에 대한 이야기도 해줍니다. 게다 가 이제 저는 혼자 있어도 조금도 무섭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편이 좋을 만큼- 예, 정말 그래요. 그러니까 도련님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병원에는 데려가시지 마세요...친절은 너무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발 염려바세요, 부디!" "정 그렇다면 네 좋을 대로 할밖에. 루케리아, 나는 그저 너를 생각해서 말한 것뿌이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저를 걱정해서 말씀하신 것은, 그러나 도련님, 저를 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누가 다른 인간의 마음속까지 들어갈 수 있을까 요?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도련님은 제 얘기가 진실로 들리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가끔 무척이나 쓸쓸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온 세상에 저밖에는 아무도 엇는 것같이 느껴지는 겁니다. 꼭 저 혼자만 살고 있는 것같이. 그러다가 문득 누군가 저를 축복해주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정말 이상한 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대체 어떤 꿈을 꾸는 거지, 루케리아?"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꿈입니다. 도련님, 잘 설명할 수 없어요. 게다가 곧 잊어 버리고 맙니다. 구름 같은 것이 내려와서 쭉 퍼지는가 하면 아주 맑아지기도 합 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좀처럼 알 수 없어요. 또 사람이 곁에 있을 때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 것요. 그저 저의 불행밖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 다." 루케리아는 가쁜 듯이 숨을 쉬었다. 그녀의 호흡도 손발과 마찬가지로 제 마 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도련님은 무척이나 저를 염려해주시는 것 같군요." 하고 그녀는 다시 이야기 를 시작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안심하시라고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얼마나 ....기억하고 계십니까? 제가 예전에는 얼마나 명랑한 여자였던가요! 정말 말괄량 이였지요...그래서 도련님, 저는 지금도 노래를 부를 때가 있는 걸요." "노래를 불러...네가?" "네, 옛날 노래며, 합창가, 연회의 노래, 크리스마스 노래, 그외 여러가지 노래 를 불러요. 저는 예전에 외웠던 노래를 아직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무용의 노래만은 부르지 못합니다. 몸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까." "어떻게 부르지? 화풀이로 부르는가?" "네, 갑갑증을 풀기 위해서입니다. 쿤소리는 내지 못하지만 남이 알아들을 만 큼은 부르는 걸요. 아까 조그마한 계집아이가 저의 시중을 들어준다고 말씀드렸 는데 그 아이는 정말 영리한 아이입니다. 저는 그 아이게게 노래를 가르쳐주었 습니다. 그애는 지금은 네 가지 노래를 할 줄 알아요. 이런 이야기가 곧이 들리 지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잠깐 기다려보세요. 노래를 불러보겠습니다..." 루케리아는 숨을 돌렸다.... 반쯤은 죽은 듯한 인간이 노래를 부르려고 하다니, 나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거러나 내가 한 마디하기 전에 길게 뽑은, 겨우 들릴까말까 하지만 맑고 전잔한 가락이 내 귀에 울려왔다... 그것은 두세 번 연거푸 들려왔다. '목장에서'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노래를 했다. - 허나 돌같이 굳은 열굴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눈마저 한 곳에 고정한 채. 실연기처럼 흔들리고 한 없이 가늘게 퍼져가던 그 목소리가 얼마나 강한 호소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 이던지. 그녀도 얼마나 간절하게 자신의 영혼을 노래 속으로 불어 넣던지... 나는 이제 아무런 공포도 느끼지 않았다. 나의 가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연민의 정 으로 숨이 막혔다. "아아, 이제는 틀렸습니다." 갑자기 루케리아는 말했다. "이제 힘이 없습니다. 도련님을 만나뵌 기쁨으로 마음이 뒤집힌 것 같습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나는 그 차갑고 자그마한 손가락 위에 내 손을 얹었다.... 그녀는 슬몃 나를 보 았으나 금빛 눈썹으로 둘러싸인 검은 눈은 다시 감기고 낡은 조각처럼 조용히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두 눈이 어둠속에서 빛났다. 눈물에 가만히 앉아 있었 다. "저는 정말 바보예요." 루케리아는 불쑥 힘차게 말했다. 그리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녀는 눈을 깜 빡이면서 눈물을 떨어뜨리고 했다. "부끄러워요. 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오랫동안 없었는데...작년 봄 바실 리 폴리야코프가 왔던 날 이후로는 없던 일이에요. 그이가 제 곁에 앉아서 이야 기하고 있을 동안은 아무렇지도 않았ㄴ느데 가버린 후 갑자기 쓸쓸해져서 얼마 나 울었는지 몰라요. 저는 왜 눈물을 흘렸을까요. 우리 여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눈물을 흘리지만요, 도련님!"하고 구케리아는 덧붙여 말했다. "도련님 손수건 가지고 계시죠?...죄송하지만 좀 닦아주세요." 나는 얼른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손수건을 루케리아에게 주었다. 처음에 그녀는 그것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란 것을 받아서 제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녀는 말했다. 그 손수건 은 과히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직 깨끗하고 하얀 것이었다. 나중에야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쥐고서는 놓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드디어 그 방의 어둠 에 익숙해져서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얼굴의 검붉은 피부 아 래도 흐르는 섬세한 혈기마저 알아볼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아직 그 얼굴에는 아름다웠던 옛날으 모습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도련님, 잠잘 수 있느냐고 물으셨죠?" 구케리아는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잠자는 시간은 아주 짧지만 그때마다 꿈을 꿉니다. -그것은 정말 굉장한 꿈 이에요. 꿈 속에는 병이 없습니다. 꿈 속에서 저는 언제나 튼튼하고 젊은 걸요... 그저 슬픈 일이 있다면 잠에서 깨어 마음놓고 기지개를 켜려고 할 때마다 마치 쇠사슬에 매인 것처럼 몸이 자유롭지 않다는 거지요. 한 번은 대단한 꿈을 꾸었 어요. 구것을 말씀 드릴까요? 들어보세요. 저는 목장에서 서 있었어요. 그 주위 는 온통 금빛으로 익은 높이 자란 보리밭이었지요... 저는 붉은 강아지를 한 마 리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낫을 한 자루 들고 있었습니다. 보통 낫이 아니었지요. 바로 낫모양을 한 달님이었습니다. 저는 달님으로 보리를 베지 않으 면 안되었어요. 그러자 저는 더위에 매우 지쳐버렸고, 달님의 빛이 저의 눈을 톡 톡 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맥이 풀려 쉽게 피곤해지는 거예요. 해바라기꽃 이 그 근방에 가득 자라고 있었어요. 저는 정신 없이 그것을 따려고 했습니다. 바실리가 오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우선 꽃다발을 만들 만한 시간은 있으리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꽃을 따지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따도 따도 손가락 틈으로 흘러버리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꽃다발을 만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애태우는데 누가 제 곁으로 와서. '루케리아!루케리아!'하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아직 만들지 못했는데! 속상해서 어쩌나'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러 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저는 해바라기 대신에 달님을 머리 위에 얹었습니다. 제가 관처럼 그것을 쓰나까 곧 온몸이 빛나기 시작하고 사방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보리 이삭 사이를 지나서 빠른 걸음으로 제게 다 가오는 분은 바실리가 아닌 그리스도였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염이 없고 키는 컸으며, 전신을 희 꽃으로 감고 허리띠만 금빛 이었습니다. 그분은 손을 제게 내밀면서, '두려워말라, 곱게 단장한 나의 신부여! 나를 따르라. 너는 천국의 합창무도를 지휘하고 천국의 노래를 부를지어다.' 라 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저는 그 손에 매달렸습니다. 개도 제 뒤를 따라왔습니 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들은 공중으로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이 앞장서고... 오 리 같은 그 날개를 하늘에 하나 가득 펼치고 - 나는 구뒤를 따르고, 그러나 저 의 개는 땅에 남아 있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저는 알았습니다. - 그개가 저의 병이라는 것과 천국에는 병이 없다는 것을." 루케리아는 잠깐 숨을 돌렸다. "그리고 또 하나의 꿈이 있습니다." 그녀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은 환영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저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입니 다. 저는 이 오두막에 누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양친, 아버지와 어머 니가 오서서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서 제가 '아버지 어머님 대체 어쩐 일로 저한테 절을 하십니까?' 하고 물어보았 습니다. 그러니까 두 분은 '왜라니? 너는 이 세상에서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 때문에 너는 너의 영혼을 구했을 뿐더러 우리들의 무거운 짐마저 벗겨주었다. 그러므로 저 세상에 가 있는 우리들도 대단히 편하다. 너는 이미 너의 죄를 다 씻고 지금은 우리들의 죄까지 없애주고 있는 것이다.' 라고요. 그렇게 말씀하시 고 저의 양친은 한 번 더 저에게 절을 하더니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저 는 그 일이 마음에 걸려 나중에 참회할 때에 신부님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신부 님은 그것이 환영이 아닐 거라고, 환영은 수도자들에게만 나타난다고말슴하셨습 니다." "하나 더 이야기하지요"하고 루케리아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꿈 속에서 저는 길가의 버드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짐 을 어깨에 지고 손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마치 순례자처럼,저는 어딘지 먼 곳으로 수행의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순례행렬은 그칠 사이 없이 저의 곁을 지 나갑니다. 터벅터벅 걸어와서 모두 같은 방향으로 가버립니다. 모두들 피로한 기 색이 역력했습니다. 마침내 저는 그 사람들 틈에 끼여 어슬렁거리는 여자를 보 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만큼 키가 크고 이상한 옷을 입었는데 -러 시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얼굴도 묘했지요-야위고 험상궂은 얼굴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여자를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걸음을 멈추고 저를 바 라보았습니다. 그 눈은 노란 빛이고 크고 맑아서 마치 매의 눈 같았습니다. 저는 '누구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나는 네 죽음의 귀신이다.' 라 고 말했습니다. 저는 고금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단히 반가웠습니다. 저는 스스로 십자가를 그었습니다. 그러자 제 죽음의 귀신이라는 그 여자는 '가 엾구나 루케리아,아직 너를 데리고 갈 수는 없다. 잘 있어' 라고 말했습니다. 저 는 얼마나 슬펐던지요... '데려가 주세요. 네, 아주머니! 데려가 주세요' 라고 저는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의 귀신은 저를 돌아보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 무 엇인지 확실치 않은, 뜻도 모를 말이었습니다. '성 베드로의 축제가 지나고나서' 라고 말했습니다. ... 그 말을 듣고 저는 잠에서 깨었습니다. ... 아주 이상한 꿈이 었습니다.." 구케리아는 위쪽을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밖의 슬픈 일로는 이따금 일주일쯔 한숨도 못자는 때가 있어요. 작년에 어떤 부인이 오셔서 수면제를 한 병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번에 마흔 방울씩 마시라 고 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효과가 있어서 잠이 잘 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은 약이 다 떨어져버렸습니다. 도련님은 알고 계시겠지요? - 그것이 무슨 약입 니까?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습니까?" 그 부인은 루케리아에게 아편을 주었음에 틀림없다.나는 그것과 같은 약병을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인내력에 대하여 다시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유, 도련님!"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인내력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둥 위에 서 있는 수도사 시메온 말입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정말 인내력이 있었습니다. 삼십년 동안이나 기둥 위에 서서 지냈다고 하는 걸요.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성 도는 산 채로 가슴팍까지 파묻혀서 개미가 얼굴을 파먹도록 참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학자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나라에 이스마엘 사람이 전쟁을 일으켜 그 나라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이고 온갖 행패를 부렸으나 무력한 그 나라의 백성들은 어찌할 수 없었답니다. 그런데 그때 깨끗하고 용감한 처녀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그 처녀는 긴 칼을 차고 팔 파운드나 되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적군 이스마엘 사람들을 공격하여 바다 밖으로 몰아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적을 몰아냈을 때 그 처녀는 적에게 '나를 화형에 처해달라. 내 나라를 위하여 화형을 받고 죽겠다고 맹세했으니까' 라고 말했다는 거예요. 이스마엘 사 람들은 그 여자를 화형시켜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그 나라 사람들은 그때 부터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야말로 참으로 고귀한 행동이라 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런 것에 비하면 저 따위는 대체 무었이겠어요." 나는 어떻게 '잔다르크'의 전설이 그녀의 귀에 들어갔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 했다. 그리고 잠깐 있다가 그녀의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물어보았다.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른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왜 나이를 물으십니까? 저는 아직도 할 얘기가 있는데요..." 루케리아는 갑자기 숨막힐 듯한 기침을 하고는 신음했다.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좋지 못한 게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고 그녀는 들릴락 말락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제 이야기는 그만 하는 게 좋겠지요. 그러나 상관없어요. 도련님이 가버리 시면 저는 언제까지라도 잠자코 있을 테니까요. 어쨌든 가슴이 후련해진 걸요." 나는 작별의 인사를 했다. 나는 약을 보내주겠다고 다시 한 번 약속했다. 그리 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거든 말하라고 했다.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이것으로 만족합니다." 하고 그녀는 매우 벅찬 듯이,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여러분들이 다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도련님! 도련님의 어머님께 한 마 디 부탁드려 주십시오 - 이 근처 농부들은 모두 가난합니다. - 만약 소작료를 조금이라도 감해주실 수 있다면... 농부들은 토지도 적고 돈도 없습니다. ... 그렇 게만 해주신다면 모두들 얼마나 고마워할까요? .... 그러나 저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아주 만족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루케리아에게 그녀의 소원이 꼭 이루어지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 고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 그녀는 다시 나를 불렀다. "기억하고 계십니까? 도련님."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눈 속에는, 그리고 입술 위에는 무엇인지 이상한 광채 가 보였다. "옛날 저의 머리카락이 어떠했는지를 무릎까지 내려왔다는 것을, 기억하고 계 시지요? 그것을 큰 마음먹고 잘라버렸어요. 훨씬 오래전의 일입니다. ... 그 아름 답던 머리를! 하지만 빗을 수도 없는 걸요. 이런 몸이 되고 보니... 저는 눈물을 머금고 잘라버렸어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도련님! 이제는 더 말할 기운이 없 습니다...." 그날 사냥을 나가기 전에 나는 마을의 순경과 루케리아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나는 그에게서 루케리아가 동네에서 '살아있는 송장'으로 불리고 있다는 말을 들 었다. 또 그렇게 불편한 몸으로 살면서도 남에게 조금도 폐를 끼치지 않고 있다 는 것을, 그리고 조금도 군소리나 불평을 하지 않느다고 들었다.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무얼 해주어도 기뻐합니다. 참으로 보기 드물게마음씨 고운 여자입니다. " 하고 순경이 말을 이었다. "그 여자가 하나님께 벌을 받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 나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여자가 벌을 받고 있는 건지 아닌지, 글쎄 - 그런 시비는 않겠습니다. 그대로 가만 두는 것입니다." 몇 주일 후 나는 루케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죽음의 신이 그녀에게... 더구나 성 베드로의 축제가 끝나고나서 왔던 것이다. 소문에 따르면 그날 그녀 는 종소리를 하루 종일 듣고 있었다는 것이다. -알렉세이프에서 교회까지는 5마 일 이상 떨어져 있었고, 게다가 그날은 일요일도 아니었는데, 그러나 루케리아는 종소리가 교회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들려온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마 그녀도 구태여 하늘로부터라고는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추억 지은이: 다자이 오사무 1 황혼 무렵 나는 고모와 나란히 문간에 서 있었다. 고모는 누군가를 업었는지 포대기를 두르고 있었다. 그때의 어슴푸레한 거리의 적막을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고모는, 임금님이 돌아가셨다고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그분은 생불이라고 덧붙였다. 생불이라, 하고 나도장안스레 중얼거려 보았다. 그리고 내 가 무엇인가 해서는 안될 불경스러운 말이라도 했었나보다. 고모는 그런 말을 입에 담아서는안돼, 돌아가셨다고 하는 거야, 라며 나를 타일렀다. 대체 어디로 돌아가셨느냐고, 나는 그 말의 뜻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물어보아 고모를 웃음짓게 했던 일이 떠오른다. 명치 42년(1909) 여름에 태어난 나는 이 천황이 승하하였을 때, 달력 나이로 네 살이 조금 지나 있었다. 아마도 비슷한 무렵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고모와 나는 둘이서 우리 마을에서 2리정도 떨어진 어느 마을의 친척집에 간 적 이 있었다. 그때 그곳에서 보았던 폭포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폭포는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아 산 속에 있었다. 새파랗게 이끼가 낀 절벽 위에서 폭이 꽤나 넓은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모르는 남자의 어깨에 올라타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이름 모를 신사가 옆에 있었고, 그 남자는 나를 그곳으로 데리고 가, 나에게 여러 가지 말 그림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는 점점 우울해져 결국 앙앙 울어대고 말았다. 나는 앙앙 대며 고모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고모 는 멀리 떨어진 움푹 패인 곳에서 친척 어른들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내 울음 소리를 듣자 서둘러 일어났다. 그때, 자리에 발이라도 걸렸는지, 마치 큰절이라 도 하듯 몸을휘청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보고, 취했군 취했어 하며 고모를 놀려댔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를 내려다본 나는 너무도 분하고 화가 나, 결국 에는 아주 큰소리로 울어대기도 했다. 또 어느날 밤에는, 고모가 나를 버리고 집 을 나가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고모의 가슴은 현관의 조그만 쪽문 가득히 차 있었다.그 홍조를 디고 있는 커다란 가슴에서 땀방울이 알알이 맺혀 떨어지고있 었다. 고모는, 네가 싫어져서야, 라며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나는 고모의 그 젖가 슴에볼을 대고 그러지마, 가지마, 라고 빌면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고모가 나를 흔들어 깨웠을 때, 나는 이불 속에서 고모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참 에서 깨어나서도 나는, 아직도 그 슬픔이 가시지 않아 한참 동안이나 훌쩍이며 울었다. 하지만 그꿈 이야기는 고모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하지ㅇ았다. 고모에 대한 추억은 여러 가지 있지만, 그 무렵의 부모님에 관한 추억은 공교 롭게도 하나도 기억나는 것이 없다. 증조할머니,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 셋, 누나 넷, 남동생 하나, 그리고 고모와 고모의 딸 넷 등, 이렇게 대가족이었지마, 내 나이 대여섯 살이 되기 전까지의 고모를 제외한 다른 식구들에 관한 추억은 거의 나의 기억속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옛날, 넓은 뒷정원에 는 커다란 사과나무가 대여섯 그루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잔뜩 찌푸린 날 그 나무에 여자아이들 여럿이 기어 올라가고 있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리고 같은 정원 한편에는 국화밭도 있었다. 비가 오던 날, 나는 역시 여러 명의 여자아이들 고 함께 우산을 받쳐 쓰고 앉아, 국화가 가지런히 피어 있는 화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대충, 이런 어릴 때의 내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다. 그 리고보니 그 여자아이들이 내 누나나 사촌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예닐곱 살이 되었을 때부터의 추억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난느 타케라는 가정부에게 책 읽는 것을 배웠고, 추리 둘은 여러 가지 책을 함께 읽었다. 타케 는 나를 가르치는데 아주 열심이었다. 나는 몸이 약했기에 주로 누워서 많은 책 을 읽었다. 읽을 책이 떨어지면 타케는 마을의 주일학교 등에 나가 어린이용 책 을 덥석덥석 빌려와 나에게 읽게 하였다. 나는 묵독하는 법을 알고 있었기에아 무리 책을 읽어도 결코 힘들지 않았다 타케는 또, 나에게 도덕을 가르쳐주었다. 자주 절에 나를 데리고 가 지옥과 그락의 그림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불을 지른 사람은 시뻘건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바구니를 등에 짊어지고 있었고, 첩을 거느렸던 사람은 목이 두 개 달린 파란 뱀에게 온몸을 감싸여 괴로워하고 있었 다. 피 연못이랑,바늘 산이랑, 무간나락이라는 하얀 연기가 가득 찬 기이를 알 수 없는 깊은 구멍 등, 가는 곳마다 창백하게 여윈 사람들이 입을 작게 벌리고 울부짖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면 지옥에 가 이렇게 도깨비에게 혀를 뽑히는 거 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무서워서 난 그만 울고 말았다. 그 절 뒷편에는 약간 높직한 묘지가 있었는데, 황매화나무인지 뮌지 하는 나 무로 된 울타리를 따라 수많은 솔도파들이 숲처럼 서 있었다. 그 솔도파들에는 보름달만한 크기의 수레처럼 생긴 검은 쇠바퀴가 붙어 있었다. 그 바퀴를 돌려 보라, 빙글빙글 돌다 멈취선 바퀴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으면, 바퀴를 돌린 그 사람은 죽어서 극락에 가고, 한 번 멈출 듯이 섰다가 다시 획 하고 거꾸로 돌아가면 그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타케는 말했다. 타케가 돌 리면 좋은 소리를 내며 한바탕 돌고 난 뒤, 항상 죽은 듯이 딱 멈춰서는 것이, 모하게도 내가 돌리면 꼭 다시 뒤로 돌아가버리는 것이었다. 아마도 가을쯤이었 으리라 생각하는데, 나는 혼자서 절에 가 쇠바퀴를 돌려보았다. 그런데 마치 내 가 오기 전에 짜기라도 한듯, 어느 것을 돌려보아도 모두 거꾸로 다시 돌아가 버린 날이 있었다.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화통을 꾹 참아가며, 몇십 번이 고 끈질기게 바퀴를 돌려보았다. 하지만 날이 저물어 하는 수 없이, 나는 절망 속에 휩싸인 채 그 묘지를 떠났다. 부모님은 그 무렵 동경에 살고 게셨는지, 고모는 나를 데리고 상경하였다. 나 는 꽤 오래 동경에 있었다고들 하는데,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그 동경에 있던 별채로 때때로 찾아오는 할망구가 있었다. 나는 그 할망구가 정말 싫었다. 그래서 그 할망구가 올 때마다 울었다. 할망구는 나에게 빨간 우체국 자동차 장 난감을 사주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이윽고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는데, 추억도 그와 함께 일변한다. 타케는 언제부터였는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느 어촌으로 시집 을 간 것이었지만, 내가 자기를 쫓아올지도 모를까봐 나에게는 한 마디 말도 없 이 돌연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 다음 해였던가 언제였던가, 타케가 추석을 맞 아 우리 집에 놀러온 적이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쌀쌀맞게 나를 대하였다. 나 에게 학교성적을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가 대신 가르쳐주었 다. 타케는 자만하지마, 이 한 마디뿐이었다. 달리 나를 칭찬하지도 않았다. 그 무렵, 고모와도 헤어질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겼다. 고모의 둘째딸은 시집 을 갔고. 셋째딸은 일찍 죽고 말았다. 그리고 큰딸은 치과의사를 데릴사위로 받 아들여 그와 결혼하였다. 고모는 그 큰딸 부부와 막내딸을 데리고, 어느 멀리 떨 어진 마을로 분가해 가버렸다. 그것은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고모와 함께 썰매 위 한편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썰매가 떠나기 전에 내 바로 위의 형이, 데릴사위, 데릴사위하고 나를 놀려대며, 썰매를 씌운 포장 사이로 자꾸만 내 엉덩이를 찔러댔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이 굴욕을 참아냈다. 나는 고모네로 양 자가 되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학교에 들어 갈 때가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학교에 들어갔을 때 나는,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학교 뒤 공터에는 여러 가지 잡초가 무성히 나 있었는데, 어느 맑게 개인 여름날, 나는 그 풀밭 위에서 남동생의 코모리로부터 숨막히는 놀이를 배웠다. 내가 여덟 살 정도였고, 코모리 도 그 무렵 아직 열너댓을 넘지 않았었다고 생각한다. 거여목을 우리 고향에서 는 '말풀'이라고 불렀는데 그 코모리는 나보다 세 살 어린 내 동생에게 네잎 말 풀을 찾아오라고 쫓아버린 후,나를 겨안고는 뒹굴뒹굴 구러다녔다. 그리고 우리 들은 곳간 안이라든가, 반침 속 같은 곳에 숨어서 놀았다. 내 동생은 정마링지 거추장스러운 녀석이었다. 반침 밖에 혼자 남겨진 동생이 훌쩍훌쩍 울어대 내 바로 위 형에게 들통난 적도 있었다. 형이 동생에게 왜 우느냐고 물어보고 그 반침대를 열었던 것이다. 코모리는 반침 속에서 돈을 잃어버렸다고 너무도 태연 히 말했다. 거짓말은 나도 늘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인가 3학년일 때였다. 히나마츠리때 학교 선생님에게는 부모님이 오늘은 인형을 장식해야 하니까 빨리 오라고 했다고 거짓말을 한 뒤 수업은 단 1시간도 받지 않고 집에 와버렸다. 그 리고 집에 와서는 식구들에게 오늘은 히나마츠리라서 학교가 쉰다고 또 거짓말 을 했다. 그렇게 거짓말을 늘어놓고, 히나마츠리 준비하는 식구들 옆에서 걸리적 대기만 한 적도 있었다. 또 나는 작은 새의 알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참새알은 우리 집곳간 지붕기와를 들추면 언제나 많이 얻을 수 있었으나, 까마귀 알같은 것은 우리 집 지붕 위에는 굴러다니지 않았다. 그 타오르는 듯한 녹색 알이랑 묘하게 생긴 점이 찍혀 있는 알을, 나는 학교 친구들로부터 받았다. 그 대신 나 는 내 장서를 다섯 권씩 열 권씩 묵어 주었다. 그렇게 모은 알은 솜으로 둘둘 싸서 책상 서랍 속에 가ㄷ 넣어 두었다. 내 바로 위 형은 나의 그 비밀거래를 눈치채고 있었던 듯싶다. 어느 날 밤, 나에게 서양 동화책과, 또 한 권, 무슨 책 인지는 잊어버렸지만 어쨌든 그렇게 두 권의 책을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형의 그런 심통이 몹시도 얄미웠다. 이미 그 책 두 권은 모두 알과 바꾸는데 투자해 버려 나에게는 있지도 않았다. 형은 내가 없다고 하면 그 책의 행방을 따지고 들 참이었다. 나는, 분명히 있으니 찾아보겠다고 답했다. 나는 내 방은 물론, 온 집안을 램프를 켜들고 찾으ㄹ 돌아다녔다. 형은 내 뒤에 붙어 따라오면서, 없지 없지 하며 실실거리고 있었다. 나는 틀림없이 있다고 끝까지 우기며 버텼다. 부 엌 찬장에까지 기어올라가 찾아보았다. 형은 결국에는 야, 됐다 됐어 하며 가버 렸다. 학교 글짓기시간에 지은 작문도 몽땅 엉터리였다. 나는 나 자신을 온순하고 얌전한 착한 아이라고 설정해 놓고 글을 쓰려고 부던히도 애를 썼다. 그렇게 쓰 며 모두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곤 했다. 심지어 표절까지도 했다. 당시 선생님이 걸작이라고, 잘 썼다고 칭찬해주셨던 '동생의 그림자'라는 것도 사실은 무슨 소 년잡지에서 일들에 당선된 것을 내가 그대로 훔쳐 베낀 것이었다. 선생님은 나 에게 그것을 붓으로 깨끗하게 다시 쓰게 한 후 전함회에 제출하게 하였다. 하지 만 얼마 못가 책읽기를 좋아하는 어떤 녀석이 그것이 표절임을 알아내고 모두에 게 말하고 말았다. 나느 그 녀석이 죽기를 빌었다. 역시 그 무렵에 썼던 '가을밤' 이라는 것도 모든 선생님으로부터 칭찬 받았다. 그 내용은 대충 이러하였다. 너 무도 열심히 공부만 하고 있던 나는 머리가 아파왔다. 잠시 바람을 쐴까해 뒤마 루에 나가 정원을 둘러보았더니 휘영청 달 밝은 밤에 연못에는 잉어랑 금붕어가 가득 뛰놀고 있었다. 나는 그 정원의 고요한 풍경에 빠져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 었는데 옆방에서는 어머니와 식구들의 왁자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 에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두통에서 벗어나 있더라. 하는 짤막한 문장 이었다. 이 글에 진실은 단 한 마디도 들어 있지 않았다. 정원의 묘사는 분명히 누나들의 글짓기 장에서 뽑아낸 것들이었다. 그리고 다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는 머리가 아프도록 공부했던 기억 따위느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학교 를 싫어했고 따라서 교과서를 들여다본 적도 없었다. 허구헌날 잡지책만 읽고 있었다. 우리 집 식구들은 내가 책만 붙들고 있으면 공부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작문시간에 진실을 써 넣으면, 반드시 좋지 않은 결과가 일어 났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등, 부모님에 대한 불평을 글짓기에다 잔뜩 늘어놨다가 담임선생님에게 교무실에 끌려가 혼쭐이 났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이라는 제목을 받고서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우 선 지진, 그 다음이 벼락, 화재, 그리고 우리 아버지라고 썼다. 만약 이것들 이상 으로 무서운 전쟁이 터진다면, 우선 싶은 산속으로 도망친다. 도망가는 김애ㅔ 선생님도 데리고 간다. 선생님도 인간, 나도 인간, 전쟁이 무섭기 는 마찬가지일 테니, 라고 썼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 둘이서 나에게 달 려들어 닥달했다. 도채체 무슨 생각으로 이 글을 썼는냐고 물어보기에, 나는 그 냥 장난삼아 써본 것뿐이라고 적당히 둘러댔다. 교감선생님은 수첩에 '호기심'이 라고 서 놓았다. 그리고나서, 나와 교감선생님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선생 님도 인가, 나도 인간이라고 써 놓았는데, 인간이면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원래 입이 무거운 편이었다. 이어서 교감선생님은 그럼 나와 이 교장선생님은 똑같은 인간인데도 어째서 받 는 월급이 다르냐고 물었다. 나는 이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것은 하는 일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냐고 대답했다. 갸름한 얼굴에 금테안경을 걸친 교감선생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나서 이 선생님으 나에게 이 런 질문을 했다. 네 아버지와 우리들은 똑같은 인간이냐고, 나는 할 말이 없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우리 아버지는 너무도 바쁜 분이어서 집에 계실 때가 거의 없었다. 집에 계시 더라도 우리들과 같이 놀아주지 않으셨다. 나는 이런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아버지의 만년필이 너무도 탐이 났었지만, 감히 말을 꺼낼 엄두조 차 내지 못했다. 그래서 혼자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번민하 끝에 이런 방법을 써보았다. 어느 날 밤인가 나는 마루에 누워, 눈을 감고 잠들은 척 하였다. 그 리고 만년필, 만년필하고 잠꼬대를 해보았다. 옆방에서 손님과 말씀을 나누고 계 시던 아버지에게 들리게 일부러 큰소리로 했다. 물론 그 잠꼬대는 아버지의 귀 에도 마음 속에도 들어가지 않았던 것 같지만 나와 내 동생이 살 가마니가 잔뜩 쌓여 있는 널따란 쌀 창고에 들어가 신나게 놀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가 입구를 막고 서서는 네 이 녀석들 어서 나오지 못해, 누가 여기서 놀라고 했어, 하며 우 리들을 야단치셨다. 등 뒤에서 빛을 받고 있어서 아버지의 커다란 모습이 새까 맣게 보였다. 나는, 그때의 공포를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어머니에 대해서도 나는 그다지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유모의 젖을 먹고 고모의 품 속에서 자란 나는 초등학교 2.3학년 때까지 어머니라는 존재를 몰랐 었다. 우리 집에 있던 남자 하인 들이 나에게 남자들이 손으로 하는 그것을 가 르쳐주었다. 어느 날 밤, 옆에서 자고 있던 어머니는 내 이불이 아래위로 움직이 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고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난 몹시 당황해 허리가 아파 주무르고 있는 거라고 얼떨결에 답했다. 그럼 주물러야지 그렇게 두들기고만 있어봐야 소용없다고 어머니는 졸린 듯이 말했다. 나는 잠자코 한동 안 허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울적한 적이 대부분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나는 장롱에서 형의 양복을 꺼내 입고 뒷정원 화단 사이를 혼자서 어슬렁거리다. 즉흥적으로 작곡한 애조 띤 노래를 읊조려보고는 내 노래 에 스스로 감동해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는 그 차림으로 우리집 하숙생과 놀고 실어져 가정부 하나를 부르러 보냈지만, 하숙생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나는 뒷 정원에 있는 대나무울타리를 구두 끝으로 사각사각 긁어가며그를 기다리고 있었 는데, 결국 기다리다 지쳐 바지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울기 시작했다. 내가 울 고 있는 것을 본 어머니는 무슨 까닭에서였는지, 그대로 쫓아와 그 옷을 홀랑 벗겨내고 내 엉덩이를 철썩철썩 두들기기 시작했다. 난 그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치욕을 느꼈다. 나는 어려서 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다. 셔츠에 소매단추가 붙어 있지 않으면 절대로 입지 않았다. 하얀 플란넬 셔츠를 즐겨 입었다. 속옷의 옷깃도 하얀새깅 어야만 했다. 목 언저리에서 그 하얀 옷깃이 빼꼼히 보이도록 했다. 추석이 되면 마을 학생들은 모두 나들이옷을 입고 학교에 갔지만 나는 매년 똑같은 두툼한 갈색 줄무늬가 새겨진 플란넬로 짠 기모노를 입고 가, 학교의 좁은 복도를 여자 처럼 나긋나긋하게 종종걸음으로 뛰어가 보곤 했다. 나는 이처럼 멋을 부리면서 도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몰래했다. 우리 집 식구들은 내 얼굴이 형제들 중 제일 못났다고 놀려댔다. 그런 못난 놈이 그 꼴에 이렇게 멋을 부리고 다니는 것이 알려지면 모두에게 웃음거리가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옷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고. 그것은 어느정도까지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누구 눈으로 보아도 나는 센스 없고 촌스럽게 보였음이 틀림없었다. 내가 형제들과 함께 밥상 앞에 앉아 있으면 할머니랑 어머니는 늘 내 얼굴이 못 생겼다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나는 정말 속이 상했다. 나는 자신을 꽤 괜찮은 남 자라고 믿고 있었기에가정부들 방에 가서 우리 형제들 중 누가 제일 잘 생겼냐 고 너지시 떠보기도 하였다. 가정부들은 대충 큰형이 제일 멋있고 그 다음이 나 라고 말했다. 나는 괜시리 쑥스러워져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역 시 불만스러웠다. 큰형보다도 잘 생겼다고 말해주기를 바랬던 것이었다. 나는 외모뿐만 아니라, 손재주가 없는 점으로도 할머니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젓가락 쥐는 법이 영 서툴러 밥 먹을 때마다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또 내가 절 을 하면 엉덩이가 너무 높이 올라가 보기 흉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나는 할머니 앞에 똑바로 앉아 몇 번이고 몇번이고 절 연습을 해야ㅁ 했다. 하지만 아무리 연습해보아도 할머니는 잘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할머니는 나에게 있어서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동경의 쟈큐사부로우 연극단이 우리 마을 극장에 온 적이 있었다. 이 연극단은 매일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나와 공연을 하는 , 말하자면 오프님 전문 연극단이었다. 나느 그 공연이 흥행되고 있는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러갔다. 그 극장은 우리 아버지가 세운 것이었기에 나는 언제든지 공짜로 들어가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학 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끝에 작은 연필을 매단 가느다란 은사슬을 허리띠에달고 극장으로 달려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부키란 것을ㄹ 알았고, 나는 너무도 흥분해 쿄우겐 을 보고 있을 때도 몇 번이고 눈물을 흘렸 다. 그 공연 흥행이 끝나고나서, 나는 동생과 친척아이들을 모아 놓고 연극단을 만들어 직접 연극을 해보았다. 나는 전부터 이런 연극 같은 것을 좋아해, 남자 하인들과 가정부들을 모아 놓고는 옛알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슬라이드나 활동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때에는 '야마나카시 카노스케' 과 '하토노이에'과 'ㅋ포레' 이렇게 세 가지 쿄우겐을 들려주었다. 야마나카시카노스케가 냇물이 흐 르는 골짜기의 벼랑에 있는 어느 찻집에서 하야기와아유노스케라는 하인을 얻는 장면을 어느 소년잡지에서 발췌해, 그것을 다시 내가 각색했다. 나로서는 야마나 카시카노스케라고 하고 있지만, -이런 긴 단어를 가부키의 칠오조로 고치느라 정말 애먹었다. '하토노이에'은 몇 번을 반복해 읽어도,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나는 장편소설로 그중에서도 특히 슬픈 장면을 2막으로 구성해 만든 것이었다. 'ㅋ포 레'는 자쿠사부로우 연극단이 막을 내리기 전에, 언제나 배우들 모두가 총출동해 춤추던 것이기에 나도 그것을 마지막에 추기로 했던 것이다. 대엿새쯤 연습을 하고 드디어 공연날 서재 앞 널따란 복도를 무대로 삼고, 옆에서 열고 닫을 수 있는 작은 막도 설치해 놓았다. 정오 무렵부터 이렇게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었 는데 그만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연극공연에 쓰려고 준비해 놓은 막의 철사로 이 핼미를 죽일 생각이냐, 당장이 딴따라 짓거리 그만두지 못하겠냐고 난리셨다. 그래도 나는 그날 밤 남자하인과 가정부 열 명쯤을 모아 놓고 공연을 감행하ㅇ 다. 하지만 할머니가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 내 가슴은 무겁게 메워지기만 할 뿐 이었다. 나는 야마나카시카노스케 역과 '하토노이에'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역을 맡고 ㅋ포레도 추었지만 조금도 흥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참을 수 없이 우울해 졌다. 그후에도 나는 '우시누스비토'랑 '사라야시키'랑 '쥰토쿠마루'등의 연극을 했 었지만 할머니는 그때마다 이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고 계셨다. 나는 할머니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잠 못드는 밤에는 할머니의 존재가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불면증에 걸려, 밤2시, 3시가 되어도 도무지 잠들지 못했다. 그래서 견디다못해 자주 이불 속에서 울었다. 자 기 전에 설탕을 좀 먹어두라든가, 시계가 째짝거리는 소리를 세보라든가, 참물로 두 발을 식혀 보라든가, 자귀나무 잎을 베개 및에 깔아보라든가. 여러 가지 자자 는 방법을 집 식구들이 가르쳐주었지만 거의 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사소 한 일에도 끙끙거리고 신경쓰는 성격이있다. 그냥 두면 될 별 것도 아닌 일들을 시시콜콜 따지고 들어 더욱더 잠들지 못했던 것 같다. 어버지 안경을 몰래 갖고 와 주물러대다가 깨뜨려 먹었을 때는, 몇 날 밤을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 우리 집에서 한 채 떨어진 이웃에 있던 집화상에서는 약간의 책도 팔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그곳에서 부인용잡지에 실린 그림을 보다 노란 인어를 그린 수채화 그 림 한 장을 발견하였다. 나는 이 그림이 탐이 나 견딜 수 없어 훔치기로 마음먹 고, 주인 몰래 잡지에서 잘라내려 했다. 이때 나를 본 조인이 내 모습을 수상히 여기고, 오사무, 오사무 너 지금 뭐하니, 하며 다가왔다. 나는 그 잡지를 힘껏 가 게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집까지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갔다. 이런 일 또한 나를 한숨도못 자게 만들었다. 나는 또, 이불 속에서 불이 날까봐 겁이나 까닭 없이 고민 하였다. 이 집이 불타버리면 어쩌나 하고 생각하면, 이건 도저히 잠만 자고 있을 수 없었다. 언제였던가. 밤에 있었던 일이다. 자기 전에 뒷간에 가다가 보 니, 그 뒷간과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던 깜깜한 하숙생 방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우리집 하숙생 하나가 활동사진을 틀어놓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백곰 한 마리가 빙산 벼랑 위에서 바다에 뛰어드는 모습이, 창호지에 성냥갑만 한 크기로 가물가물 비쳐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엿보고 저 백곰의 모습이 바 로 하숙생의 속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 하숙생이 너무나도 불상하게 생각되었다. 이불 속에 누워서도 그 활동사진을 생각하면 가슴이 쿵쾅거려 도처 히 잠이 오지 않았다. 하숙생의 운명을 걱정하기도 하고, 또 그 영사기 필름에 불이라도 붙어 집이 불타기라도 하면 어쩌나하는 생각으로 노심초사했다. 그날 밤은 새벽 무렵까지 한숨도 못잤다. 할머니가 고맙게 생각된 것으 ㄴ바로 이런 밤이었다. 우선 저ㄴ 8시가 되면 가정부가 나를 자리에 뉘여놓았다. 그리고는 내가 잠들 때까지 그 가정부도 내 옆에 지키고 있어야만 했는데, 나는 가정부가 나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있는 것이 안쓰러워 자리에 눕자마자 바로 잠든 척 하였다. 가정 부가 살그머니 내 방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 잠든척하고 있었 다. 그리고는 오로지 잠들려고 안간힘을 다 쓰고 있었다. 열 시쯤까지 이불 속에 서 뒤척이다가 나는 흘쩍훌ㅉ 울어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시간이 되면 우 리 집 식구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으며, 오로지 할머니만이 깨어 있었다. 할머니 는 경비원 할아버지와 부엌 화롯불에 둘렁앉아 말씀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잠 옷을 입은 채고 그 사이에 끼어들어 이분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이분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언제나 동네사람들에 대한 소문들이었다. 어느 깊은 가을밤에 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소근소근대는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있었는 데, 멀리서 병충해 퇴치 행렬의 북소리가 둥둥하고 들려왔다. 이 소리를 듣고, 야아, 이 시간까지도 안 자고 깨어 있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이렇게 많았구나 하고, 꽤나 안심했던 것만은 잊지 않고 있다. 음악에 관한 추억을 떠올려본다. 우리 큰형은 그 무렵 동경에 있는 대학에 다 니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되어 고향에 돌아올 때마다 음악과 문학 등의 새로운 취미생활을 가지고 와, 고향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큰형은 연극공부를 학 있었다. 어느 지방 잡지에 발표한 '사랑의 약탈'이라는 단막극은 동네 젊은이 들 사이에서 아주 평판이 좋았다. 이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 큰형은 우리 형제들 을 다 부러 모아 놓고 그 줄거리를 들려주었다. 무두,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모 르겠는 걸, 하고 있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한 막이 끝날 때 나오는 , 어두운 밤이구나, 하는 한 마디로 함축되어 있는 시마저도 나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리고 나는 '사랑의 약탈'보다는 '엉겅퀴풀'이라는 제목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형이 쓰다버린 원고용지 귀통이에 내 의견으 ㄹ조그맣게 써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형은 아마도 이것을 못 보았는지 제목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발표 해 버렸다. 레코드로 상당히 많이 모아 두었었다. 우리 아버지는 집에서 잔치라 도 벌어지면 반드시 멀리 떨어진 큰 마을 에서 게이샤들을 불러왔다. 나에게도 대여섯 살 무렵부터 그 게이샤들에게 안겨서 '옛날 옛날하고도 옛날'이라든가 '저것은 키노쿠니의 귤배'등의 노래와 춤을 배우던 기억이 있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큰형이 모아둔 레코드의 서양음악보다도 국악 쪽에 일찍 친숙하게 되었다. 어느 날 밤, 자려고 자리에 누웠을 때 형 방에서 좋은 소리가 흘러나와, 베개에 서 머리를 들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형 방에 가서 닥치는 대로 레코드를 이것저것 걸어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찾아내었 다. 어젯밤 나를 잠들게 할 만큼 흥분시켰던 그 레코드는 란쵸우였다. 하지만 나는 큰형보다 둘째형과 잘 어울렸다. 둘째형은 동경에 있는 상업학교 를 우등으로 나왔다. 그리고 졸업하자마자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에 있던 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다. 둘째형 역시 나처러 집안 식구들 사이에서는 냉담한 대접을 받았다, 나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제일 못난 남자는 나이고, 그 다음이 둘째형이 라고 하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둘째형이 인기가 없었던 것도 그 용모가 원인 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필요없어. 난 그저 얼굴만이라도 남자답 게 잘 생기기를 바래, 넌 안그러니 오사무야, 하고 반쯤은 나를 놀리듯이 중얼거 리며 농담산아 하던 말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둘째형의 얼굴이 못 행겼다고 진심으로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머리도 우리 형제들 중에서 제일 좋다고 믿고 있었다. 둘째형은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할머니와 싸웠다. 나 는 그때마다 할머니를 미워했다. 막내형과 나는 서로 반목하고 있었다. 이 형은 나의 여러 가지 비밀을 알고 있어서 언제나 대하기 거북하였다. 게다가 막내형과 내 동생과는 얼굴생김새가 닮아 있었는데 모두로부터 잘 생겼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나는 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위아래에서 압박장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견딜 수 없게 숨이 막혔 던 것이다. 그 막내형이 동경에 있는 중학교로 가고나서 나는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동생은 형제 중 막내였고 얼굴도 얌전하게 생겨, 언제나 아버지에게 도 어머니에게도 사랑을 받았다. 나는 끊임없이 동생에게 질투심을 느껴 때때로 때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로부터 야단을 맞았고 나는 어머니를 원망했다. 내가 열 살인가 열한 살 때였다고 생각한다. 내 펴츠와 속옷에 깨를 뿌린 듯이 이가 꼬어들은 것을 동생이 보고 웃었고, 나는 그 이유로 말 그대로 동생을 두 들겨 패, 반쯤 죽여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두들겨 패고나서도 역시 걱정이 되어 동생 머리에 생긴 혹에다 '먹지 마시오'라고 쓰인 약을 찾아 발라주었다. 나는 누나들에게는 귀여움을 받았다. 제일 큰누나는 일찍 죽였고 둘째누나는 시집을 갔으며, 나머지 두 누나는 각각 다른 마을에 있는 여학교에 다니고 있었 다. 우리 마을에는 기차가 들어오지 않아서 기차를 타려면 3리 정도 떨어진 다 른 마을까지 가야만 했다. 여름에는 마차, 겨울에는 썰매, 그리고 봄이 되어 눈 이 녹을 때와 늦가을에 진눈깨비가 흩날릴 때에는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누나 들은 썰매를 타면 멀미를 해. 겨울에도 걸어서 돌아왔다. 나는 그때마다 동구 밖 에 재목이 쌓여 있는 곳까지 마중나갔었다. 해가 완전히 기울어도 길은 눈 위에 비추인 달빛으로 주위는 환했다. 이윽고 옆 마을 숲그늘 사이로 누나들이 든 초 롱불이 가물가물하게 나타나면, 나는 야아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두 손을 흔들 었다. 세째누나가 다니던 학교는 네째누나가 다니던 학교보다 작은 마을에 있어서 사들고 오는 선물도 네째누나의 그것에 비하면 언제나 초라하였다. 언젠가 세째 누나가 살 말한 게 없어서, 라고 얼굴을 붉히며 불꽃놀이 화약 대여섯 다발을 가방에서 꺼내 나에게 주었는데, 나는 가대 가슴이 메어지는 듯 아팠다. 이 누나 도 역시 얼굴이 못났다고 우리 집 식구들로부터 구박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 누나는 여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증조할머니와 단둘이, 안채에서 떨어진 손님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누나를 증조할머니의 딸이라고만 생 각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증조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돌아가셨 다. 하얀 소복을 입고 작게 누워 계시던 증조할머니 모습을 납관할 때 잠깐 본 나는, 이 모습이 오랫동안 내 눈가에서 지워지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였다. 나는 이윽고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우리집 식구들은 나를 고동초등학교에 1년만 더 다니게 했다. 몸이 건강해지면 중학교에 보내주 마, 하지만 건강에 좋지 않으니 형들처럼 동경에 있는 학교에는 보내지 않고 시 골학교에 보내주겠다고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중학교 따위는 별로 들어가고 싶 지도 않았지만, 작문시간에는 몸이 약해 진학을 못해서 너무 속상하다고 써, 선 생님으로부터 동정을 사기도 했다. 이때부터는 우리 마을에서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었는데, 이 고등초등학교는 우리 마을고 부근의 대여섯 개 마을이 공동으로 출자해서 만든 학교였다. 이 학 교는 우리 마을에서 반리 정도떨어진 소나무숲속에 있었다. 나는 병 때문에 자 주 학교를 빼먹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학교의 학생대표가 되었기에, 타지에서 온 우등생들이 많이 모이는 이 고등초등학교에서 일등이 되도록 노력하지 않으 면 안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공부를 하지 않았다. 곧 중학생이 될 것이라는 나의 자긍심이, 이 고등초등학교를 나에게 불쾌하게 느끼게 만들었 던 것이다 나는 수업시간중에 주로 만화만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되면 성대묘사를 해가며 그것을 학생들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만화를 그린 수첩이 네댓 권이나 쌓였다. 책상 위에 턱을 괸 채 교실밖 풍경을 멍하니 보면 서 한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내 자리는 창가에 있었는데, 유리창에는 누가 눌러 죽였는지 파리 한 마리가 오랫동안 붙은 채로 있었다. 멍하니 창밖을 보다 가 그것이 내 시야 한 귀퉁이 큼지막하게 들어오면 나에게는 ㄲ이나 산비들기로 보여 몇 번이고 깜짝깜짝 놀래곤 했다. 나는 나를 따르던 우리반 애들 대여섯과 함께 수업을 빼먹고, 소나무숲 뒤에 있던 늪 주변의 풀밭에서 뒹굴며 여학생들 얘기도 하고, 모두 옷을 걷어내리고 거시기에 난 솜털을 서로 비교하면서 놀았 다. 이 학교는 남녀공학이었지만, 나는 단 한번도 내가 먼저 여자아이들에게 접근 한 적은 없었다. 나는 몹시 여자를 밝히는 편이었기에 그것을 억제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두세 명의 여자아이들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 을 알고 있었으나 언제나 모른 척하고 지냈다. 제국미술전람회 입선그림집을 아 버지 서재에서 끄집어내 그속에 숨겨진 하얀 그림에 얼굴을 붉히며 헌제까지고 골똘히 바라보기도 했고, 내가 카우고 있던 한 쌍의 토끼를 종종 교미시켜, 숫토 끼의 봉긋하게 솟은 등을 보며 가슴을 설레이기도 하며 욕정을 참았다. 나는 꽤 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이었기에 누구에게도 자위행위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책에서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읽고 그만두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으나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렇게 멀리 떨어진 학교까지 매일 걸어 서 다닌 덕분으로 몸도 건강해지고 제법 살도 쪘다. 이마 언저리에는 좁쌀 같은 작은 여드름이 나왔다. 이것도 창피하게 생각했다. 나는 고약을 빨갛게칠했다. 큰형은 그해에 결혼했다. 혼례를 치룬 그 첫날밤에 나와 내 동생은 새형수 방에 몰래 가보았다. 형수는 방 입구를 등지고 앉아 머리를 묶고 있었다. 나는 겨울에 비친 새색시의 미소 띤 하야스름한 얼굴을 살짝 보자마자 동생을 끌고 도망쳤 다. 그리고 나는, 글쎄 아무것도 아니라니까!하고 힘주어 허세를 부렸다. 약을 발 라 빨간 내 이마 때문에 괜시리 더 기가 죽어서, 더더욱 이렇게 반발해보인 것 이었다. 겨울이 다가오자 나는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잡지의 광고를 동경에 여러가지 참고서들을 주문했다. 하지만 결국 그것들은 내 책장에 전시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한 글자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시험치려고 한 중학교는 내가 살던 현에서 제일 큰도시에 있었다. 지원자도 항 상 정원의 두세 배는 몰려왔다. 나는 때때로 낙방의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렇게 두려울 때는 나도 공부했다. 일주일이나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나자 꼭 붙을 것 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한 번 공부를 하게 되자 밤 12시 가까이까지 안 자고 공부를 했고, 아침에는 대개 4시에 일어났다. 공부할 때에는 타미라는 가정부를 옆에 두고 군불을 지피게도 했고 차를 끓여 내오게도 했다. 타미는 아무리 늦게 까지 잠 안자고 깨어 있다가도 다음 날 아침 4시가 되면 반드시 나를 깨우러 왔 다. 내가, 수학에서 쥐가 새끼를 낳는 응용문제로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타미 는 옆에서 얌전히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나중에 타미 대신에 중년의 뚱뚱한 가 정부가 내 시중을 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어머니가 뒤에서 시킨 것임을 안 나는 어머니의 저의를 알 수 없어 얼굴을 찡그렸다. 그 이듬해 봄, 눈이 아직 깊게 쌓여 있을 무렵, 내 아버지는 병원에서 피를 토 해내고 돌아가셨다. 집 근처 신문사에서는 아버지의 부음 사실을 호외로 알렸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보다도 오히려, 유족들의 이름과 함께 내 이름도 신문에 실 려 있다는, 그런 센세이션 쪽에 더욱 흥분을 느꼈다. 아버지의 시신은 커다란 관 에 누워 썰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여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이웃 마 을 근처까지 마중을 나갔다. 이윽고 숲 사이로 여러 대의 썰매행렬이 보이기 시 작했다. 그 썰매에 씌운 포장이 달빛을 받으며 미끄러져 오는 것을 보고 나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우리 집 사람들은 아버지의 관이 놓여 있는 불상을 모셔놓은 방에 모였다. 관 뚜껑이 열리자 모두가 소리내서 울었다. 어버지는 잠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높다란 콧날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나는 모두의 울음소리를 듣고, 따 라 눈문을 흘렸다. 우리 집은 그 후 한달간, 불난 집처럼 뒤숭숭했다. 나는 이 난리에 휩싸여 시 험공부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있었다. 고등초등학교 학년말 시험에서도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죽을 쑤고 말았다. 나의 성적은 전교 3등이었지만, 이것은 분명히 담임선생님의 우리 집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 나는 벌써 이 무렵부터 기억력 의 감퇴를 느끼고 있었다. 공부를 하지 않고 가면 시험지에는 단 한 글자, 아무 것도 쓸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2 썩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해 봄, 중학교 입시에 합격하였다. 나는 새 정장바지에 검정양말에 끈 달린 구두를 신고, 지금까지의 허름한 담요자락 대신 에 나사로 만든 망토를 멋쟁이답게 앞 단추를 채우지 않고 앞을 벌린 채 걸치 고, 그 바다가 있는 작은 도시로 떠났다. 그리고 우리 집과 먼 친척뻘되는 그 도 시의 포목집에 여장을 풀었다. 입구에 너덜너덜한 포렴이 걸려 있는 그 집에서, 나는 계속 머물며 신세를 지게 된 것이었다. 나는 별거 아닌 일에도 그냥 혼자 좋아하고 들뜨기 쉬운 성격이었는데, 입학 당시에는 동네 목욕탕에 갈 때도 학교 모자를 쓱 정장바지를 입었다. 그런 내 모습이 길가 유리창에라도 비추어지면, 나는 흐뭇한 미소르 지으며 거기에 가볍 게 인사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학교생활은 조금도 재미있지 않았다. 교사는 시외곽에 있었다. 건물 에는 하얀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으며 바로 뒤에는 해협에 면한 평평한 공원이 있어, 수업시간에도 파도소리와 소나무의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도 꽤 넓었고 교실 천창도 높았다. 나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선생님들만은 나를 몹시도 박해하였다. 나는 입학식 날부터 어느 체조 선생님에게 맞았다. 내가 건방지다는 이유에서 였다. 이 선생님은 입학시험 때 나의 구두시험 담당이었다. 어버지가 돌아가셔서 공부도 제대로 못했겠구나하고 나에게 따뜻하게 말을 건네주어,나를 고개 떨구 게 했던 사람이었던만큼 내 마음은 더욱 상처입었다. 그후에도 나는 여러 선생 님들에게 맞았다. 왜히죽거리냐는 둥, 하품을 했다는 둥, 별의별 이유로 나는 벌 을 받았다. 수업시간중에 하는 내 하품소리가 하도커서 교무실에서도 유명하다 는 소리도 들었다. 나는 그런 쓸데없는 소리까지 떠들고 다니는 선생님들을 이 상하게 생각했다. 나와 같은 마을에서 온 한 학생이 어느 날, 나를 교정의 모래 산을달진 데로 불러냈다. 네 테도는 내가 봐도 건방지게 보인다. 그렇게 선생님들에게 밉보여 허구헌날 맞기만 해서야 낙제할 게 뻔하다고 충고해주었다. 나는 너무나도 충격 을 받았다. 그날 방과후, 나는 해안선을 따라 혼자 발걸음을 재촉해 집에 돌아가 고 있었다. 구두밑창에는 파도가 밀려왔고, 나는 한숨을 쉬면서 정신없이 걸었 다. 양복소매로 이마의 땀을 씻다 문득 앞을 보니, 쥐색의 어마어마하게 큰 돛이 바로 눈앞으로 휘청거리며 지나갔다. 나는 시들어지기 시작한 꽃잎과 같은 하찮은 존재였던 것이다. 약간의 바람에 도 흔들렸다. 남들에게 어떤 사소한 업신여김을 받아도 죽네사네하고 고민하였 다. 나는, 내 자신을 머지않아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했었고, 영 웅으로서의 명예를 간직하고 살아 왔었다. 따라서 그 어느 누구 하나, 설사 그 상대가 어른이라고 해도 나를 깔보는 자는 용서할 수 없었을 만큼 자존심이 강 했다. 그만큼이 낙제라고 하는 불명예도 나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구후 나는 전전 긍긍하며 수업을 받았다. 수업을 받으면서도 이 교실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백 명의 적이 있다고 생각하며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아침에 학교에 가기 전 에 내 책상 위에 트럼프 카드를 늘어놓고 일일이 그날의 운명의 점쳐보았다. 하 트는 대길이었다. 다이아몬드는 반길, 클러머는 반흉, 스페이드는 대흉이었다. 그 리고 그 무렵에는 오늘도 또 오늘도 계속 스페이드만 나왔다. 그리고나서 곧 시험이 닥쳐왔다. 나는 물상도, 지리도, 도덕도, 교과서 글자 토 씨 하나 틀리지 않고 톤째로 외우려고 애썼다. 이것은 나의 모 아니면 도 식의 결벽성, 즉 틀릴 문제는 틀리되 맞을 문제는 확실하게 맞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을 게다, 하지만 이 공부법은 나를 위해 좋지 않은 결과를 불렀다. 나는 공부를 원래 잘 하지도 못했거니와, 시험 볼 때도 전혀 융통성이 없어 거 의 완벽에 가깝게 답을 써낸 문제가 있었는가 하면, 사소한 한 글자 한 문장에 얽매여 끙끙거리다가 그나마 외운 것까지 몽땅 까먹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답을 써대, 그저 답안용지를 더럽히고만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1학기 성적은 우리 반3등이었다. 품행도 갑을 받았다. 낙제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고 있던 나는 이 통지표를 한 손에 쥐고, 또 한 손에는 구두 를 든 채 학교 뒤 해안까지 맨발로 뛰어갔다. 기뻤던 것이다. 1학기가 끝나고 처음으로 고향 나들이를 갈 때, 나는 고향의 동생들에게 나의 짧은 중학생 생활의 경험을 될 수 있는 한 멋지게 설명 해주고 싶어졌다. 내가 그 서너 달간에 익힌 모든 것, 있는 얘기 없는 얘기,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모두 보따리에 담았다. 마차에 흔들리며 이웃 마을 숲을 빠져나오자, 사방 몇 리에 이르는 푸른 논의 바다가 전개되어 있었다. 그 푸른 논이 끝나는 곳에 우리 집 빨간 지붕이 솟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한 10년만에 보는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방학 한 달만큼 득의 양양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나는 동생들에게 중학교란 곳에 대해 있는 대로 부폴려 꿈처럼 얘기해주었다. 그 작은 도시의 모 습도죌 수 있는 대로 신비하게 말해주었던 것이다. 나는 풍경을 스케치하거나 곤충채집을 하며, 들판과 골짜기 사이를 누비고 다 녔다. 수채화 다섯 장과 희귀곤충표본 열 가지를 모으는 것이, 선생님이 내주신 방학 숙제였다. 나는 잠자리채를 어깨에 매고, 동생에게는 팬셋, 마취약이 든 채 집가방을 들게 하고 배추흰나방과 메뚜기를 쫓으며 하루를 여름 들판에서 보냈 다. 밤에는 정원에서 화토불을 활활 피워 놓고, 날아드는 수많은 벌레를 잠자리 채와 빗자루 한쪽 끝으로 쳐서 쫓았다. 막내형은 미술학교 조소과에 들어갔느데, 매일 정원 한가운데 있는 큰 밤나무 아래에서 찰흙을 주물러대고 있었다. 이미 여학교를 졸업한 내 바로 위 누나의 흉상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역시 그 옆에서 누나의 얼굴을 여러 장 스케치하였다. 그리고 형과 상대의 작품을 보 고 서로 헐뜯어댔다. 누나는 진지하게 우리들의 모델이 되어주었는데, 이럴 경우 대개 내 수채화 쪽편을 들어주었다. 이 형은 어렸을 적부터 모두에게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콧대가 꽤나 높아 나의 모든 재능을 무시하고 있었다. 내 가 쓴 문장을 보고도 초등학생 수준의 작문이라며 비웃었다. 나도 그 당시에는 형의 예술적 능력을 까놓고 경멸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그런 막내형이 내가 자고 있는 방에 들어와, 오사무야 이거 아주 희한한 걸 잡았어, 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며, 웅크리고 앉아 모기장 아래로 휴지로 싼 것을 가만히 밀어 넣어 주었다. 형은 내가 진귀한 곤충을 채집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휴지 속에서는 사각사각 벌레가 발버둥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희미한 소리에 육친의 저을 느꼈다. 내가 거칠게 그 작은 종이보 따리를 풀자, 형은 도망가잖아, 잡아 잡아, 하며 숨이라도 넘어갈 듯이 말했다. 가만 보니 그건 평범한 하늘가재였다. 나는 그 갑충류도 내가 채잡한 열가지 희 귀곤충표본 속에 넣어 선생님께 저출하였다. 방학이 끝나게 되자 나는 우울해졌다. 고향을 등지고 그 작은 도시의 포목점 2층으로 돌아와 혼자 보따리를 풀었을 때에는 나는 거의 울기 일보직전이었다. 나는 그렇게 외로울 때에는 서점에 가곤 했다. 그때도 나는 근처에 있는 서점으 로 뛰어갔다. 거기에 늘어서 있는 각종 간행물의 겉표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 의 우울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 서점 귀퉁이 서가에는 내가 갖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책이 대여섯 권 있었다. 나는 가끔, 그 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멈추어 서 서는 무릎을 떨면서, 뜻도 모르는 그 책 페이지를 넘기며 훔쳐보기도 했다. 그러 나 내가 서점에 가는 것은 절대로 그런 머리아픈 의학 얘가가 섞인 기사를 읽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 당시의 나에게 있어서는 어떤 책이라도 휴양과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학교 공부는 점점 재미 없어졌다. 하얀 지도에 산맥과 항만, 그리고 하천을 그 림물감으로 기입하는 숙제 따위는 무엇보다도 저주스러웠다. 나는 워낙 한 가지 일에 몰두해버리는 성격이어서, 이런 지도에 색깔 칠하는 데만 무려 서너 시간 이나 소비하였다.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은 일부러 공책을 만들게 해, 거 기에 수업요점을 적으라고 명령했으나 전생님의 수업은 교과서를 그대로 읽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자연히 그 공책에도 교과서의 문장을 통재로 베끼는 것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나는 성적에 미련이 있었기에, 그런 숙제들을 매일 열심히 해냈다. 가을이 되자 그 도시 중학교끼리의 체육대회가 열렸다. 시골에서 온 나 는 야규시합 같은 것은 본 적도 없었다. 만루라든가, 유걱수라든가, 중견수라든 가, 이런 용어들은 소설책에서 보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간신히 그 시합 보는 법을 배웠지만 남들처럼 열광하며 즐길 수준은 못되었다. 야구뿐만이 아니라 정 구에서도 유도에서도, 다른 학교와의 시합이 있을 때마다 선수로서 참가는 못했 지만, 나도 응원단의 한 사람으로서 선수들에게 성원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이 더더욱 나의 중학교생활을 정나미 떨어지게 만들어버렸다. 응원단장이라 는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 일부러 꾀죄죄한 차림을 하고 일장기가 그려진 부채 ㄸ위를 들고 다녔다. 그 녀석이 교저의 조그마한 언덕배기에 올라가 일장연설을 늘어 놓으면 학생들은 그 응원단장의 모습을 보고, 야 좀 씻어라 씻어, 하며 즐 거워 하였다. 시합이 벌어질 때 사이사이에 짬이 생기면, 단장은 부채를 나풀거 리며 일어나, 올 스탠드 엎 하고 외쳤다. 우리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보라 색의 작은 삼각기를 일제히 휘두르며, 나가자 싸우자 어쩌구하는 응원가를 불러 댔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창피한 일이었다. 나는 틈을 보아 그 응원에서 빠져 나와 집으로 도망ㅊ다. 그러나 나에게도 스포츠의 경험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내 얼굴은 검푸 른 색을 띠고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된 것을 내 손장난 때문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남들로부터 내 얼굴색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나는 그 비밀을 지 적당한 것처럼 몹시도 당황하였다. 나는 어떻게서든지 혈색을 좋게 보이게 만들 고 싶어 스포츠를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혈색 때문에 고심해왔었다. 초등학교 4.5ㅎ년 무렵, 막내형으로부터 데모크라시라는 사상을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그놈의 데모크 라시 때문에 세금이 엄청 뛰어 농사 지은 쌀 거의 전부를 세금으로 뜯겼다고 손 님들에게 푸념하던 소리도 들었다. 나는 그 사상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할 수 없어 허둥대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남자 하인들을 도와 정언 진디깎기를 하기도 했고, 겨울에는 지붕 위에 쌓인 눈 치우는 일에 손을 빌려주기도 하면서, 남자하 인들에게 데모크라시 사상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하인들이 내가 도와주는 것을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음을 이윽고 깨달았다. 왜냐하면 내가 깎은 풀들은 나중에 그들이 다시 한번 깎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인들을 돕 는다는 핑계를 대고, 사실은 내 얼굴색을 좋게 만들려는 의 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만큼 노동을 했는데도 내 얼굴색은 좋아지지 않았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나는 스포츠를 통해 내 얼굴색을 좋게 하려고 마 음먹었다. 무더운 한여름에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했다. 나는 평영이라고 해서 청개구리처럼 두 다리를 벌리고 헤엄치는 방법을 좋아했다. 머리를 물에서 바로 위로 내밀고 헤엄치는 것이어서, 파도가 위아래로 흔들 때 생기는 포말의 세세한 모습도, 물가에 핀 파란 잎도, 흘러가는 구름도, 전부 헤엄치면서 바라볼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태양에 가까운 곳에 얼 굴으 ㄹ갖다대, 빨리 태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또 이런 짓도 했다. 당시 내가 머물던 집 뒤에는 넓은 묘지가 있었다. 나는 그 곳에 백 미터 직선코스를 만들고, 혼자서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 묘지를 키 큰 포플러 나무가 우거진 숲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뛰다 지치면 나는 묘지의 솔도 파에 새겨진 글씨 등을 읽으며 거닐었다. 월천담저라든가, 삼계유일심이라는 문 구들은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어느 날 나는 어떤 비석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 비석에는 우산이끼가 잔뜩 껴 있었고, 거무틱틱한게 습기가 차 있었다. 나는 그 비석에 쓰인 적성처용거사라는 이름을 발견하고나서 꽤나 마음이 들떴다. 그 묘 앞에 새로 갖다 놓은 종이 연꽃의 하얀, 잎사귀에, 나는 지금 땅 밑에서 구더 기들과 놀고 있다. 는 어느 프랑스 시인에게서 암시받은 시구를 집게손가락에 진흙을 발라 마치 유령이 써 놓은 것처럼 손가락으로 가느다랗게 써두었다. 그 다음 날 저녁, 나는 운동하러 나가기 전에, 우선 어제의 묘비에 가보았다. 그랬 더니 아침 이슬빙 망혼의 글자는 그 근친들을 울리지도 못하고 흔적도 없이 씻 겨져 없었고 연꽃의 하얀 잎사귀도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나는 그런 짓을 하 며 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뛰는 것도 매우 잘 하게 되었다. 두 다리 근육도 뭉실 뭉실하게 부풀어왔다. 하지만 얼굴색은 여전히 종하지지 않았다. 검은 표피 아래 에는 언제나 탁한 푸른색이 음산하게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얼굴에 꽤나 흥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읽다 질리면 손거울을 꺼내, 웃어보기도 하고 눈썹을 찌푸려보기도 했다. 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보 기도 하며, 나의 그 표정을 질리지도 않고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느 틀림 없이 남들을 웃길 수 있는 표정을 터득하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코에 주름을 세운 뒤, 입으 조그맣게 뾰족히 앞으로 내밀면, 마치 새끼곰 같아 귀여웠다. 나 는 불만이 있ㄲ거나 당황했으 때 이 표정을 지었다. 내 바로 위 누나는 그때 마 을현립병원 내과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나는 누나 병문안 갈 때마다 항상 이 표 정을 지어보였다. 내 얼굴을 본 누나는 배꼽을 잡고 침대 위를 굴러다녔다. 누나 는 집에서 데리고 온 중년의 가정부와 단둘이서만 병원에서 지내고 있었기에, ㅁ억이나 쓸쓸해했다. 그러기에 병원의 긴 복도를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내 발 소리를 들어면 벌써 어린아이처럼 좋아 어쩔 줄 몰라했다. 내 발소리는 보통 사 라들보다 훨씬 컸다. 내가 만약 한 주라도 병원에 가지 않으면, 누나느 가정부를 시켜 나를 부르러 보냈다. 내가 가지 않으면 누나의 열은 이상하리만치 올라가 요태가 심상치 않아진다고 그 하녀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 무렵에는 나도 열대여섯 살이 되어 있었다. 손등에는 파란 정맥혈관이 희 미하게 비쳐보였고, 몸도 이상하게 무게가 느껴졌다. 나는 같은 반에 있던 자고 까무잡잡한 학생과 몰래 사라을 나누고 있었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갈 때 에는 꼭 둘이서 나란히 걸었다. 서로의 새끼손가락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얼굴을 붉혔다. 언제인가 둘이서 학교 뒷길으 걸어 돌아오던 길이었다. 미나리랑 ㅕ꽃이 파랗게 자라난 논두렁안에 도룡뇽이 한 마리 떠 있었다. 이를 본 그 친 구는 잠자코 도룡뇽을 손으로 퍼 나에게 주었다. 나는 도룡뇽은 싫어했지만 기 분 좋은 듯이 떠들면서 그것은 손수건으로 감쌌다. 집에 갖고 돌아와 안뜰에 있 는 작은 연못에 풀어 놓았다. 도룡뇽은 짧은 목을 내밀고 휘휘 헤엄쳐 다녔지만,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도망치고 없었다. 나는 자존심이 센 사리이었기에, 내 생각을 상대에게 털어놓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그 친구에게는 평소에도 말을 잘 걸지 않았었다. 또 같은 무렵, 이웃에 살고 있던 마른 여학생도 나는 의식하고 있었으나, 이 여학생과는 길에 서 마주쳐도 거의 상대를 무시하듯이 휙하고 얼굴을 돌려버리곤 하였다. 가을이 었다. 한밤주에 불이나서 주위가 매우 시끄러웠다. 나도 잠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가보니 이미 근처에 있던 신사 뒷부분에 불이 번져 불똥을 튀기며 타오르고 있었다. 신사의 삼목잭 그 불꽃을 둘러싸듯이 시커멓게 서 있었고, 그위를 수십 마리의 작은 새들이 마치 나엽처럼 미쳐 날뛰고 있었다. 나는 이웃 집 대문 앞 에서 하얀 잠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내쪽을 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옆모습만을 그쪽으로 내밀고 계속 불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꽃의 붉은빛을 받고 있던 내 옆모습은 분명히 멋있을 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다. 항상 이런 식이었기에 나는 우리반 친구와도 또 이 여학생과도 더욱 발전된 교제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혼자 있을때의 나는 무척이나 대담하였다.거울에 비치 ㄴ내 얼굴에 한쪽 눈을 감고 웃어보이기도 했고 책상 위에 주머니칼로 얇 은 입슬을 새겨 놓고 거기에 내 입술을 포개보기도 했다. 이 입술에는 나중에 빨간 잉크를 칠해보았으나, 뭐가 잘못되었는지 거무칙칙하게 되어 꺼림칙하였기 에, 나는 주머니칼로 완전히 파내버리고 말았다. 내가 3학년이 되던 해의 어느 봄날 아침, 등교 길에 있던 주홍색으로 칠한 다 리의 둥근 난간에 기대어 서서 나는 한동아 ㄴ멍하니 섯 있었다. 다리 아래에는 스미타가와 와 닮은 넓은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나는 완전히 멍하게 되어 아무 생각없이 서 있었다. 이런 것은 그때까지의 나에게는 없던 경험이었다. 뒤 에서 누군가가 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나는 언제나 무엇인가 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있었던 것이다. 나의 이러한 사소한 하나하나의 행위에도 그 친구 는 당활해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뒤 뒷볼으 긁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래서 말야, 하며 계속해서 설명구를 붙이고 있었기에나에게 있어서 흠, 이라든 가, 나도 모르게 그만, 이라든가 이런 동작들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리 위 에서의 멍한 상태에서 깨어난 후, 나는 외로워 어쩔 줄 몰랐다. 그런 기분이 들 때에는 나 또한 자신의 지나온 날들과 앞으로다가올 나날을 생각했다. 다리를 터덜터덜 거넌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떠올려보고, 또 몽상에 빠져보았다. 그리고 종내에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이렇게 생각했다. 과연,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까. 이때를 전후해서 나의 마음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일에 대해 충 분히 ㅁ고하지 못하였기에 언제나 공허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나에게는 열 겹 스무 겹의 가면이 씌어져 있었기에 무엇이 얼마큼 슬픈 것인자. 전혀 분간해 낼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어느 쓸쓸한 배출구를 찾아내고 말았다. 창작 이었다. 이곳에는 많은 동류가 있었다. 그들 모두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 연유를 알 수 없느 전율을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작가가 되자 작가가 되자, 하고 나는 가만히 꿈을 꾸고 있었다. 동생도 그해 중학교에 입학해 나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나는 동생과 상의해, 초여름 무렵에 대여섯 명의 친구들을 모아 동인지를 만들었다. 내가 묵던 집 맞은편에 큰 인쇄소가 있어 그곳에 맡겼 다, 표지도 석판으로 아름답게 인쇄하였다. 반 아이들에게 그 잡지를 나누어 주 엇다. 나는 그 잡지에 매달 한편씩 작품을 써 발표하였다. 처음에는 도덕을 주제 로 한 소설을 철학자라도 된 듯이 썼다. 한줄이나 두 줄짜리 단편적인 수필도 자신 있었다. 이 잡지는 그후로 약 1년 정도 계속되었으나, 나는 이 일로 큰형과 사이가 서먹서먹하게 되어버렸다. 큰형은 내가 문학에 미쳐 지내는 것을 걱정해 고햐에서 장문의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화학에는 방정식이 있고, 수학에는 정리가 있어 그것을 풀 수 있는 완전 한 열쇠가 주어져 있지만, 문학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허락된 연령, 환경에 이르 지 못하면 문학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고 아 주 예의 바른 말투로 써 보냈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자신을 그 허락받은 인간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바로 큰형에게 답장을 보냈다. 형님이 하신 말씀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훌륭하신 형님을 모시고 있어 참으로 행 복합니다. 하지만 제가 문학 때문에 공부를 게을리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옵 니다. 오히려 더욱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하고 과장된 감정까지 편지 여기저기에 섞어 넣어 큰형에게 답장을 보냈다. 어쨌든간에, 우선 너는 무슨 일이들지 잘해야 한다는 나 스스로에 대한, 약간 은 강박에 가까운 생각에서였지만, 실제로 나는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3학 년에 올라와서 나는 언제나 반에서 1등이었다. 물론 아이들에게 점수벌레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며 1등 자리를 지키기란 쉽지 않았지만, 나는 그런 조롱을 받 지 않았을 뿐더러 반 아이들은 다루는 법까지 터득하고 있었다. 문어라는 별명 의 유도부주장조차도 내 앞에서는 고분고분하였다. 교실 구석에 휴지를 버리는 큰 통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가끔씩 그것을 가리키며, 문어야 이걸 집이라고 생 각하고 한 번 들어가 보지 않겠냐, 하면 문어는 그 통속에 머리를 넣고 웃었다. 웃음소리가 통 속에서 울려 이상항 소기가 났다. 학급의 미소년들도 대개 나를 잘 따랐다. 내가 얼굴에 난 여드름에 반창고를 삼각형, 육각형, 그리고 꽃모양으 로 잘라 덕지덕지 붙이고 학교에 와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 정도였 다. 나는 이 여드름만은 내 뜻대로 되지 ㅇ아 고심하였다. 그때에는 바야흐로그 숫자도 엄청나게 불어나,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손바닥으로 얼굴으 매만져 보며 얼만큼 늘었는가 확인하였다. 이 약 저약 사다 발라보았지만 효과가 없었 다. 나는 약국에 갈 때에는 종이조각에 그 약이름을 써들고 가, 이런 약이 있습 니까? 하고 마치 남에게 부탁받아 사러온 듯이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그 여드름이란 것을 욕정의 상징이라고 생각해 눈앞이 캄캄해질 만큼 창피해하 고 있던 것이다. 차라리 죽어버릴까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내 얼굴에 대한 우리집 식구들의 말도 절정에 달하였다. 다른 집에 시집간 우리 큰 누나는, 오사 무에게 시집올 여자는 아마 없을 거라고까지 말했다고한다. 나는 부지런히 얼굴 에 약을 발랐다. 동생도 내 여드름을 걱정해 수없이 나 대신 약을 사러 다녔다. 나와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사이가 나빴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볼 때에도 나는 동생이 떨어 지기를 빌었을 정도였으나 이렇게 고향을 떠나 둘이서 지내다보니, 동생의 고운 심지를 조금씩 조금씩 알 수 있었다. 동생은 자라면서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 되 어갔다. 우리들의 동인지에도 가끔씩 짤말한 글을 지어 발표했으나 하나같이 약 해빠진 소리만 늘어놓는 문장이었다. 나와 비교해보았을 때 학교성적이 좋지 못 한것을 언제나 괴로워하였다. 그때마다 내가 위로라도 해주면 오히려 그것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또 자기 앞머리에 난 머리털이 후지산 모양처럼 삼각형으로 되어 있어 여자 같은 것을 몹시도 싫어하였다. 이마가 좁아서 머리가 그렇게 나 븐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동생에게만큼은 무엇이든지 다 허락하였다. 나는 그 무렵, 사람과 대할 때에는 전부 감추어버리든지, 전부 드러 내 놓고 보여주든지, 둘 중 하나였다. 우리들은 무었이든지 털어놓고 이야기했 다. 초가을의 어느 달 없는 밤에 우리들은 항구 선창에 나가 해협을 건너 불어오 는 바람을 맞으며 빨간 실에 대하 이야기했다. 그것은 언젠가 학교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들려주신 이야기였다. 우리들의 오른쪽 새끼발가락에는 눈 에 보이지 않는 발간 실이 묶여져 있는데, 그것이 쑥쑥 길게 자라나 실 한쪽 끝 이 반드시 어떤 여자의 같은 오르쪽 발가락에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두 사 람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실은 끊어지지 않으며, 또 아무리 가까워져 도 설령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다고 해도 그 실은 엉키는 법이 없다. 그렇게 우 리들이 어떤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르 처음 들었을 때에는, 당장 집에 돌아오자마자 동생에게 바로 얘기 해조었을 만큼 너무도 흥분되어 있었다. 우리들은 그날 밤도 파도소리랑, 갈매기 뭉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이야기를 했다. 네 아내 될 여자는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하고 동생에게 물으면 동생은, 선창의 난간을 두어번 양손으 로 흔들어 보고나서 ,정원을 거닐고 있을 거야, 하며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큰 정원용 나막신에 부채를 들고 달맞이꽃을 보고 있는 소녀는 정말로 동생과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차례가 되었으나 나는 어두운 바다 쪽에 시선을 둔채, 빨간색 띠를 둘렀겠지.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해협을 건너오는 마치 큰 여인숙처럼 많은 방마다 노랗게 불을 밝힌 연락선이 가물가물 수평선에서 떠올 랐다. 이것만큼은 동생에게 감추고 있었다. 내가 그해 여름방학 때 고향에 돌아 갔을 때 자그마한 몸집에 유카타를 입고 빨간 띠를 두른 새로 온 가정부 하나 가, 거칠은 동작으로 내옷을 벗겨버렸다. 미요라고 했다.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담배 한 대를 맛나게 피우며, 소설의 서두를 어떻게 쓰면 좋을까하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미요는 어느틈엔가 그것을 알아버렸 는지, 어느 날 밤 내 방에 와 이불을 깔아준뒤 베개머리에 재떨이를 갖다 놓아 주었다. 나는 그 다음날 아침, 방청소를 하러온 미요에게, 난 담배를 집 식구들 몰래 숨어서 피우는 것이니 재떨이는 갖다 놓지 말라고 명령했다. 같은 방학중 에 있었던 일이다. 마을에 나니와부시 공연단이 왔을때 우리 집에서는 부리고 있던 하인, 가정부 등 모두를 극장에 보내주었다. 나와 동생도 가라도 했으나 우 리들은 촌에서 하는 공연을 무시하고 일부러 반딧불을 잡으러 논에 나갔다. 이 웃마을 숲 근처까지 가보았으나 그날 따라 너무도 밤이슬이 맣이 내려 반딧불을 찾기 힘들었다. 나와 동생은 고작 스무 마리 남짓의 반딧불을 잡아 바구니에 담 아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미요에게 이부자리를 펴게 하고 모기장을 치게 한 후 우리들은 부을 끄고 그 반딧불을 모기장 안에 풀어 놓았다. 반딧불은 모기장 안 을 여기저기 누비며 날아다녔다. 미요도 한동안 모기장 밖에 서서 반딧불을 보 고 있었다. 나는 동생고 나란히 뒹굴면서 반딧불의 파란 불빛보다도, 미요의 희 미한 모습을 더 느끼고 있었다. 나니와부시는 재미있었냐고,나는 좀 무게를 주고 물었다. 나는 그때까지 가정부에게 용무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말을 걸은 적이 없었다. 미요는 조용한 말투로 아니요. 라고 말했다. 나는 픽 하고 웃 음 을 터뜨렸다. 동생은 모기자에 다라붙은 한 마리 반딧불을 부채로 탁탁 쳐 쫓으며 잠자코 있었다. 나는 괜시리 머쓱해졌다. 그 무렵부터 우리는 미요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빨간 실이라고 하면 미요의 모습이 가슴 속에 떠올랐다. 3 4학년이 되었을때 부터 내 방에는 매일같이 두 친구가 놀러왔다. 나는 포도주 와 말린 오징어를 대접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많은 엉터리 지식을 가르쳤다. 연탄불 피우는 법이 한 권의 책이 되어나왔다든가. '짐승의 가계'라는 어느 신진 작가의 저서에 내가 끈적끈적하게 기ㅖ기름을 발라두고 이 책은 원래 이렇게 발 매되었는데, 아주 희한한 표지가 아니냐는 둥, 여기저기 가위질 당한 채 발간된 '미모의 친구'라는 번역서의 빈 공간에 내가 준비한 기상천외한 문장을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인쇄소에 비밀리에 부턱해 찍어 넣은 뒤 바로 이런 것을 보고 기 서라고 하는 거라는 등 그런 깃으로 친구들을 놀라게 하곤 하였다. 미요에 대한 나의 생각도 차츰 엷어져갔다. 사실 나는 같은 집에 사는 사람끼 리 좋아하는 것을 이상스럽게도 떳떳하지 못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에 는 여자들 욕만 해온 전력도 있었기에, 미요에게 설사 아주 잠깐이기는 했지만 마음을 빼앗겼던 나 자신에 대해 화가 치밀어오를 때도 있었다,. 동생에게는 물 론 이 친구들에게도 미요의 일만큼은 말하지 않고 접어두었다. 그런데 그무렵 나는 , 어느 러시아 작가의 유명한 장편소설을 읽고 또 생각을 바꾸어버렸다. 그 책은 한 여자죄수의 지나온 날들을 회상하는 장면에서부터 시 작되고 있었다. 그 여자기 인생을 망쳐버리게 되는 그 첫걸음은 그녀 남편의 조 카뻘 되는 귀족 대학생에게 유혹받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그 소설에서 음미해야 할 더욱더 중요한 부분은 까맣게잊어버리고 ,그 두 사람이 만발한 라 일락 꽃 아래서 첫 키스를 나눈 페이지에 낙엽을 꽂아두었다. 나 또한 이렇게 휼륭한 소설을 남의 일처럼 , 아ㅁ지도 않게 읽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그 두 사람의 관계가 미요와 아와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조금만 더 모든 것에 뻔뻔스러워진다면, 틀림없 이 이 귀족과 똑같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의 소 심한이 덧없이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소심함이 나의 과거를 너무도 평범하게 해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 자신이 인생의 빛나는 수난자가 되고 싶어진 것이 었다. 나는 이것을 우선 동생에게 털어 놓았다. 밤에 잠자리에 눕고나서 나는 엄숙 한 태도로 말할 참이었으나, 그렇게 의삭하고 자세를 갖춘 것이 오히려 역효과 를 불러, 결국엔 들뜬 상태로 말하고 말았다. 나는 목줄기를 만졌다가. 두 손을 부벼대다 하며 기품없이 말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나의 습성 을 나는 슬프게 생각했다. 동생은 얇은 아랫입술을 가만히 핥으며, 한 번 뒤척 이지도 않고 내말을 듣고 있다가 결혼할 거냐고, 매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웬일인지 순간 흠칫하였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고 일부러 풀죽어 대 답했다. 동생은 아나 못하지 않겠냐는 의미의 말을, 뜻밖에도 어른스러운 말투로 넌지시 돌려 조용히 말했다. 그것을 듣고 나는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확실히 알아냈다. 이불 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아올라와 나는 몹시 격앙되어 있 었던 것이다. 이불 속에서 상반신을 내밀고 그래서 싸우는 거야, 난 싸울 거야, 하고 소리 낮취 힘 있게 말했다. 동생은 무늬가 새겨진 이불 아래에서 몸을 굽 히고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으나 나를 훔쳐보듯 보고 살짝 미소지었 다. 나도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이야, 라며 동생에게 손을 내밀었 다. 동생도 부끄러운 듯이 이불 속에서 오른손울 내밀었다. 나는 낮게 소리를 내 웃으면서, 두어 번 동생의 힘 없는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 나의 이런 결의를 이해시킬 때에는 이렇게 마음 고생하지 않아서 좋았다. 친구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것저것 여러가지로 좋은 방법 이 없으까 궁리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내 이야기를 다 듣고나 서 내 생각에 대해 동의 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한 즉 그 동의에 효과를 더하기 위한 것에 불과함을 나는 알고 있었다. 사실 내 생각 그대로였었다. 4학년 여름방학 때에 나는 이 친구들 두 사람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외관상 이유는 셋이서 고둥학교 입학시험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은 이들 에게 미요를 보여주고싶은 마음에 억지로 친구들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나는 내 친구들을 보고 우리집 식구들이 흉 보지 않기를 빌었다. 우리 형의 친구들은 모두 지방에서도 한가닥씩 하는 집안의 청년들뿐이었다. 내 친구들처럼 금단추 두 개밖에 달리지 않은 윗도리 따위는 입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우리 집에서는 집 뒷켠 빈터에 커다란 양계장을 만들어 놓았었다. 우리 들은 그 옆에 있는 망 보는 움막에서 오전중에만 공부를 했다. 움막 바깥쪽은 흰색과 녹색페인트를 칠해 놓았었고, 속에는 두평 남짓한 마루방이 있었다. 막 니스칠을 끝낸 새 탁자와 의자도 말쑥이 놓여 있었다. 큼직한 문이 동쪽과 북쪽 으로 두개나 나 있었고, 남쪽으로도 서양식의 여닫이 창문이 있어, 그것을 모두 활짝 열어 놓으면 바람이 솔솔 불어 들어와 책갈피가 팔랑거리며 날렸다. 주변 에는 잡초가 옛날 그대로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 노란 병아리들이 몇십마리씩 몰려와 그 잡초들 사이에 숨었다. 나왔다하며 놀고 있었다. 우리들 셋은 매일 점심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움막에 어느 가정부가 식사시간을 알리러 올 것인가가 문제였던 것이다. 미요가 아닌 다른 가정부가 오면 우리들은 탁자를 탁탁 두들기거나 혀를 차며 난리를 쳤다. 미요가 오면 모 두 잠잠해졌다. 그리고, 미요가 돌아가면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곤 하였다. 어느 화창하게 개인 날, 동생도 우리들과 함께 그곳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밥 먹을 때 가 되자 오늘은 누가 올 것인가 하고, 여느 때처럼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두런 두런 얘기하고 있었다. 동생만은 이 이야기에서 빠져, 창가를 왔다갔다하며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우리들은 여러가지 우그갯소리를 하며, 책을 서로 던져대 기도 하고 발을 굴러 바닥을 울리기도 했는데, 그때 나는 좀 까불어대고 말았다. 나는 동생도 우리들 사이에 끌어들이고 싶어져서, 너는 아까부터 아무 소리 안 하고 있는데 말야, 그러고 보니 너 혹시, 하며 입술을 가볍게 깨물고 동생을 째 려보았던 것이다. 그러자 동생은 아니야. 하고 짧게 외치며 오른손을 크게 휘둘 렀다. 손에 들고 있던 단어카드 두세 장이 획하고 떨어져나가 흩어졌다. 나는 깜 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그 눈깜짝할 사이에 나는 힘든 결정을 내렸다. 미요 생 각을 오늘 하루만은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리고나서 바로 마치 아무 일도 없 었던 것처럼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크게 웃어버렸다. 그날 식사시간을 알리러온 것은 다행히도 미요가 아니었다. 모두는 안채로 통 하는 콩밭 사이의 좁다란 길을 한 줄로 나란히 서서 걸어갔다. 나는 그 줄 뒤에 붙어서서, 뭐가 그리고 신이 났는지 혼자 떠들며 둥근 콩잎을 몇 장이고 몇 장 이고 뜯어냈다. 희생이라는 것 따위는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단지 싫었던 것이다. 무성한 하얀 라일락꽃이 흙탕물을 뒤집어 썼다. 특히 그장난꾸러기가 육친이라 는 점이 더더욱 싫었다. 그리고나서 이삼 일은 여러 가지 생각에 괴로웠다. 미요 역시 정원을 걸을 때 가 있지 않은가. 그녀는 내가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면 대개는 당혹한 얼굴을 하 였다. 그것은 즉,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 있어. 누군 가를 좋아한다는 것만큼 심한 치욕은 없었던 것이다. 같은 무렵, 좋지 않은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어느 날 점심 식사때였다. 나는 동생이랑 친구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는데, 그 곁에서 미요가 붉 은 원숭이 얼굴이 그려진 그림부채로 우리들을 부치며 시중을 들고 있었다. 나 는 그 부채 바람의 양으로 미요의 속마음을 몰래 알아보고 있었다. 미요는 나보 다도 동생쪽을 많이 부쳤다. 나는 절망감에 빠져 커들릿 접시 위에 탁하고 포크 를 내려 놓았다. 그래, 모두가 다 같이 나를 놀리고 있는 거야, 그렇게 나는 믿어버렸다. 친구 들도 모두 벌써부터 알고 있었음이 틈림없어, 하고 무턱대고 사람을 의심했다. 이제는 미요를 잊어버릴 테니 괜찮아, 하고 나는 혼자서 마음을 정하였다. 다시 이삼 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간밤에 담배를 피 우다 대여섯 개피쯤을 남겼다. 아직 남은 담배가 들어 있는 그 담배갑을 깜박 잊고 베개머리맡에 둔 채로 움막을 나왔다. 나중에 담배갑에 생각이 미쳐 허둥 지둥 움막에 돌아가보았으나, 방은 이미 깨끗이 정리되어 담배갑은 온데간데 없 는 것이었다. 나는 각오르 단단히 했다. 미요를 불러, 담배 어쨌어, 분명히 봤지, 하고 야단치듯 물었다. 미요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바로, 방위에 달린 반침에 발돋음하듯 서서 그뒤로 손을 넣었다. 금빛의 두마리 박쥐 가 날고 있는 녹색의 작은 종이갑은 그곳에서 나왔다. 나는 이 일로 용기백배하였다. 이전부터의 겨의에 다시 한 번 눈을 떴다. 그러 나 동생을 생각하면 역시 마음이 답잡해져, 미요에 대한 와제로 친구들과 떠드 는 것도피하였다. 그리고좀 치사하지만 동생을 여러 가지 면에서 멀리 했다. 내 가 먼저 미요를 유혹하는 것도 삼갔다. 나는 미요가 먼저 나에게 고백해오기를 기다리기로했다. 나는 얼마든지 그 기외를 미요에게 만들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종종 미요를 방으로 불러 전혀 필요없는 일들을 시켰다. 그리고 미요가 내 방에 들어올 때, 나는 어딘지 모르게 허점이 느껴지는 편안한 자세를 지어보였 다. 미요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나는 얼굴에도늘신경을 썼다. 그 무렵이 되어 서는 내 얼굴의 여드름도 그럭저럭 나아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습관에 젖어, 나는 이런저런 방법을 다 동원해 얼굴을 꾸며댔다. 나는 뚜껑에 담쟁이덩굴처럼 길게 구부러진 덩굴풀이 가득히 새겨져 있는 아름다운 은제 콤펙트를 갖고 있었 다. 가끔씩 그것으로 나의 울퉁불퉁한 얼굴살결을 메우고 있었는데, 그것을 더욱 정성들여 얼굴에 발라댔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미요가 결심하기 나름이라고생각했다. 그러나 기외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움막에서 공부하다말고, 때때로 빠져나와 미요를 보러 안채로 돌아갔다. 거의난폭하다고해도좋을 정도로 퍽, 퍽 소리를 내며 빗자루질을 하고 있는 미요 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럭저럭 시간은 흘러 여름방학도 끝이 나, 나는 동생과 친구들과 함게 고향 을 떠나와야만 했다. 하다못해, 다음 방학 때까지라도 나를 잊지 않고기억해줄 수 있는 조그마한 추억거리라도하나 미요의 가슴 속에 심어 놓으려 했으나 그것 도 여의치 못했다. 드디어 집을 떠나는 날이 되었다. 우리들은 집에서 마련한 검은 마차를 타고 가기로 되어 있었다. 미요도 식구들과 함께 현관 앞에 나와 우리를 배웅해주었 다. 미요는 나에게도 동생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연두빛 멜빵을 어깨 아래 로 내리고, 염주알처럼 두 손으로 매만지며 아래만 보고 있었다. 마차가 움직이 기 시작했으나 미요는 그대로였다 나는 노무도, 너무도 커다란 아쉬움과 후휘를 남긴 채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가을이 되자, 나는 그 도시에서 기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 해안 온 천지에 동생을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우리 어머니와 병에서 막 회복한 막내누 나가 온천탕 치료를 하기 위해 마련한 집이 있었다. 나는 쪽 곳에 머물며, 시험 공부를 계속했다. 나는 수제라는 거창한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서,무슨 일이 있 어도 중학교 4학년(당시의 중학교는 5년제였음:역주)에서 바로 고등학교에 들어 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이 되어 학교는 더더욱 싫어졌지만, 무언 가에 쫓기고 있던 나는 그럼에도 오로지 공부만 하고잇었다. 나느 그곳에서 기 차로 학교에 다녔다.일요일마다 친구들과 놀러왔다. 이미 우리들은 미요를 잊은 듯이 지냈다. 나는 친구들과 꼭 야외로 놀러 나갔다. 해안에 있는 넓고 편편한 바위 위에서 고기를 사다 전골요리를 만들어 포도주와 곁들여 마셨다. 동생은 목소리도 좋았고, 새노래도 많이 알고 있었다. 도생은 우리들에게 그 노래들을 가르쳐주었고, 우리들은 다 같이 입을 모아 노래불렀다. 그렇게 놀다 지치면 그 대로 바위에 엎드려 잠들곤 했다. 그러다 눈을떠보면 만조가 되어 해안과 이어 져 있던 그 바위는 어느 틈엔가 외딴 섬이 되어 있었고, 우리들은 우리가 아직 꿈에서깨어자지 않은 줄로만 알았다. 나는 이 친구들 얼굴을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서운했다. 그 무렵에 있었던 일 이다. 바람이 드세게 불던 어느 날, 나는 학교에서 선생님께 두 뺨을 호되게 얻 어맞았다. 그것이 우연히도 나의 옳은 행동 때문에 그런 처벌을 받았었기에 내 친구들은 모두 분개하였다. 그날 몰아내자고 이야기했다. 수업거부, 수업구부, 하 고 소리높여 외치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놀라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만약 나 하나 개인을 위해 수업거부를 할 생각이라면 그러지 말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 선생님을 미워하지 않아. 이 사건은 간단한 거야. 아무것도 아니니까 제발 그 만두라고 모두에게 부탁하였다. 친구들은 나에게 비겁하다. 그래 너 잘났다고 했 다. 나는 숨이 막혀 와 그 교실을 막차고 나왔다. 온천지에 있던 집으로 돌아와, 나는 바로 더운 물에 몸을담갔다. 거칠은 바람에 시달려 상처입은 파초잎 두세 장이, 그 정원 한 귀퉁이에서 욕조 안으로 파란 그림자를 드리우고있었다. 나는 욕조 끝에 걸터앉아 생가겡 잠겼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도 실감나지 않았다. 망신스러운 추억이 엄습해올 때는 그것을 떨쳐버리기 위해 혼자서, 그건 그렇 고, 하며 중얼거리는 버릇이 나에게 있었다. 간단한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속삭여본 뒤, 여기저기를 어슬렁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나는 목 욕물을 손바닥으로 퍼올렸다 흘렸다, 퍼올렸다 흘렸다 하면서, 그건 그렇고, 그 건 그렇고, 라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다음 날, 그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어제 일을 사과하여, 다행히 수업거부 사태 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들과도자연스레 화해하였지만, 이 사건은 나를 어둡게 만들었다. 미요 생각이 끊임없이 났다. 나중에는 미요를 만나지 않으면 자신이 이대로 추락해버릴 것같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바로 그 무렵 어머니도 누나도 온천탕 치료를 마치고 돌아가게 되었다. 그 떠 나는 날이 마침 토요일이었기에, 나는 어머니와 누나를 집까지 바래다준다는 핑 계로 고향 집2에 돌아갈 수 있었다. 친구들에게는 비밀로 해두고 몰래 돌아갔다. 동생에게도 고향에 돌아가는 진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비록 말은 안했지만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모두가 그 온천지를 떠나, 우선 동생과 내가 신세를 지고 있던 포목점에 드렀 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나, 나 이렇게 셋이서 고향으로 떠났다. 열차가 플랫폼을 떠날 때, 배웅나와 있던 동생이 열차 창에 파르스름한 이마를 들이대고, 잘 해야 해, 하고 한 미디하였다. 나는 그 말을 나도 모르게 받아들이고, 그래 그래 알았 어. 하고 기분좋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차가 옆 마을을 지나 점차로 우리 지벵 가까워지자, 나느 도무지 안정을 찾 을 수가 없었다. 이미 해는 저물어, 하늘도 산도 칠흑같이 어두웠다. 논의벼이삭 이 가을 바람에 날려 사각거리며 움직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보면, 그 소리마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였다. 끊임없이 창밖의 어둠에 눈길을 주고 있다 가, 길가에 난 참억새 무리가 눈앞에 하얗게 두둥실 떠오르면, 하들짝 놀라 몸을 뒤로 획 젖혀대기도 했다. 어슴푸레한 현관불 아래에 집안 사람들 모두가 몰려나와 마중하고 있었다. 마 차가 멈추었을 때, 미요도 바쁘게 현관으로 뛰어나왔다. 추운 듯이 어깨를 둥글 게 움추리고 있었다. 그날 밤, 이층 방에서 자면서 나는 몹시도 우울한 생각을 했다. 범속이라는 관 념이 나를 괴롭혔다. 미요를 사랑하게 되고나서, 나도 바보가 되어버린 것이 아 닐까. 누구라도 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한 마디로 잘라 말하 수는 없지만 달랐다. 내 경우에는 모든 의미에서 저질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 정도의 남자람녀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 을까. 그러나... 나는 내 담배연기에 목을 메며 고집을 피웠다. 내 경우에는 사상 이 있다! 나는 그날 밤, 미요와 결혼하는데 있어, 반드시 넘어야 할, 필할래야 피할 수 없는 집 식구들과의 마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나는 등이 오싹해질 만 큼 용기를 얻었다. 나의 모든 행위는 범속이 아니다. 역시 나는 이 세상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확신하였다. 그래도 몹시 우울 하였다. 이 우울함이 어디에서 찾아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나는 또 그 짓을 했다. 미요는 완전히 내 머리 속에서 배제한 채였다. 미 요를 더럽힐 생각은 추호는 없었던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가을 하늘이 높게 활짝 개어 있었다. 나는 일찌감치 알어 나, 건너편 밭에 포도를 따러 나갔다. 미요에게 큰대나무 바구니를 들고 따라오 게 하였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미요에게 그렇게 시켰기에, 아무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포도 선반은 밭 동남쪽 끝에 열 평 정 도의 넓이로 펼쳐져 있었다. 포도가 익을 무렵이 되면 갈대발로 울타리르 쳐 사 방을 에워쌌다. 우리들은 한쪽 귀통이에 있는 자그마한 쪽문을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 후끈하고 따뜻하였다. 두세 마리의 노란 쌍말벌이 붕붕소리르 내 며 날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지붕에 걸린 포도잎과 둘레의 갈대밭 사이로 밝게 비추고 있었다. 미요의 모습도 연두색으로 보였다. 그곳에 가던 중에는 나도 이 것저것 못된 계획을 세워보고 혼자악당처럼 음흉한 웃음도 지어보았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미요와 단둘이ㅁ나 있게 되니, 너무도 어색하여 그곳에 있기조차 거북해져버렸다. 나는 그 나무판잘 된 쪽문을 일부러 활짝 열어두었다. 나는 키가 커서 발판없이도 뚝,뚝 하고 정원용 가위로 포도송이를 땄다. 그리 고 하나하나 그것을 미요에게 건네주었다. 미요는 그송이송이마다 맺혀 있는 아 침이슬을 하얀 앞치마로 능속하게 닦아 밑에 내려둔 바구니에 넣었다. 우리들은 한 마디로 하지 않았다. 매우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사이, 나는 점점 화 가 치밀기 시작ㅎ다. 포도가 이제 막 바구니 가득히 되려고 할 대였다. 미요에게 건네주려고 포도 한 송이를 내밀자, 미요는 그것을 받으려고 한 손을 뻗다말고 움찍하며 거두어버렸다. 나는 포도를 미요 쪽으로 억지로 떠넘기고, 이봐 왜 그 래, 하며 혀를 찼다. 미요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꾹 누르고 숨을 들이키며배에 힘 을 주고 있었다. 벌에 쏘였냐고 물으나. 예, 라고 하며 눈이 부신 듯 눈을 가늘 게 '떴다. 바보, 하고 나는 야단쳐버렸다. 미요는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이 이상 나는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약 발라 줄게, 하고 그 울타리 안에서 뛰쳐나왔다. 곧바로 안채로 데리고 돌아와, 나는 암모니아 병을 약 상자에서 찾아 주었다. 그 보랏빛 유리병을 될 수 있느 한 거칠게 미요에게 건네주었을 뿐 내가 발라주려 고는 하지 않았다. 그날 오후에 나는 요즘 들어 우리 마을에 새로 다니기 시작한 잿빛 포장이 달 린 조잡해보이는 승합자동차에 흔들리며 고향을 떠났다. 우리집 식구들은 마차 로 가라고 했으나, 가문의 휘자이 새겨져 검게 번쩍번쩍 빛나는 마차는 마치 무 슨 대단한 귀족이라도 된 것처럼 보여 나는 싫었다. 나는 미요와 둘이서 딴 한 바구니의 포도를 무릎 위에 올려 놓고 낙엽이 깔린 시골길을 의미심장에게 바라 보았다. 나는 만족하고 있었다. 그만한 추억거리라도 미요에게 심어 놓은 것으로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요는 이미 내 여자가 되었 닥 안심하였다. 그해 겨울방학은 중학생으로서 마지막 방학이었다. 고향에 돌아갈 날이 가까 워짐에 따라 나도 동생도 약간은 기분이 어색해짐을 서로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함께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우선 부엌의 돌화로를 마주보고 책상다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리번 두리번 집안을 돌아보았다. 미요가 없었 다. 우리는 두번이고 세 번이고 불안한 눈동자를 마주쳤다. 그날 저녁 식사를 마 치고나서, 둘째형은 우리를 방으로 불렀다. 셋이서 둘째형 방에 가 코타츠에 들 어가, 카드 놀이를 했다. 나에게는 어떤 카드 패도 그저 까맣게만 보일 뿐이었 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마침 자연스레 미요 얘기를 꺼낼만한 계제가 나왔기에, 나는 눈 딱 감고 둘째형에게 물었다. 가정부 하나가 안 보이게 된 것 같던데 하 고 손을 들고 있던 대여섯 장의 카드로 얼굴을 가리며 별 관심없다는 듯이 물었 다. 만약 둘째형이 캐물어오기라도 하면 다행히 동생도 마침 그 자리에 있었기 에 다 털어놓고 분명히 말해버리려 마음먹고 있었다. 둘째형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어떤 패를 낼까 망설이고 있었다. 미요 말이냐, 미요는 할머니하고 싸우고 시골집으로돌아가버렸다. 걔 성깔이 보통이 아니더라 이렇게 중얼거리고, 획 하고 한 장을 버렸다. 나도 한 장을 던졌다. 동생도 잠자 코 한 장을 버렸다. 그리고 사오 일이 지났다. 나는 양계장 움막에 가, 그곳을 지키고 있던 소설을 좋아하는 청년에게 더욱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미요는 어느 하인에게 딱 한 번 겁탈당했고, 그것을 다른 가정부들이 모두 알게 되자 더 이상 우리 집에 있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 하인은 그밖에도 여러 가지로 못된 짓을 저질러, 그때 는 이미 우리 집에서 쫓겨난 후였다. 그건 그렇다치더라도 청년은 좀 쓸데없는 말까지 해버렸다. 미요는, 그만뒤, 이러지마, 하고 나주에 속삭였다는 그 하인의 무용담까지 곁들어서. 정월이 지나고 겨울방학도 끝날 무렵이 되었을 때 나는 동생과 둘이서 서고에 들어가 여러 가지 장서와 족자를 보며 놀고 있었다. 높다란 채광용 창문으로 눈 내리는 것이 가물가물 보였다. 아버지 대에서 큰형 대로 바뀌자, 우리 집은 방안 장ㅅ에서 부터 이런 장서랑 족자 종류까지, 물밀 듯이 바뀌어갔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고향에 돌아올때마다 흥미 깊게 보고 있었다. 황매화나무가 물위에 흐트 러지고 있는 그림이었다. 동생은 내 곁에 커다란 사진첩을 꺼내 들고와, 수백 장 이나 되는 사진을 곱은 손가락 끝에 가끔씩 하얀 김을 쐬어가며 열심히 보고 있 었다. 얼마 안 있다 동생은 나에게, 뽑은 지 아직 얼마 안돼 보이는 사진 한 장 을 건네주었다. 그 사진을 보니 미요가 최근에 우리 어머니를 모시고 고모 집에 라도 갔었는지 그때 고모와 셋이서 찍은 사진인 듯 싶었다. 어머니는 혼자서 낮 은 소파에 앉아계셨고 그 뒷켠에는 비슷한 키의 고모와 미요가 나란히 서 있었 다. 배경은 장미꽃이 어우러지게 핀 화원이었다. 우리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잠 시 동안 그 사진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예전에 동생과 화해하였고, 미요와의 그 일도 한다한다하면서 꾸물대다가 아직 동생에게는 말 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비교적 침착하게 그 사진을 볼 수 있 었던 것이다. 미요는 사진을 찍다 움직였는지 얼굴에서 가슴에 걸친 부분의 윤 곽이 흐려 있었다. 고모는 두 손을 허리띠 위에 모은채 앉아계셨다. 눈이 부셔 보였다. 나는 닮았다고 생각했다. 공주인형 마리아 필라르와 호세 도노소에게 1 내가 이렇게 된 이유는 이상하기 그지 없는 그 카드가 그녀의 존재를 일깨워 주었기 ㄸ문이었다. 나는 그 카드를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 어느 책에서 발견했 다. 그 책은 어린아이의 유치한 글씨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책을 정리하고 있 었따. 그건 정말 오랜만에 하는 일이었다. 책장 위에 처박힌 몇몇 책들은 오랫동 안 읽지 않은 채 버려둔 것이었기에 나는 정리하는 도중에 그 책들을 보면서 깜 짝깜짝 놀라곤 했다. 책 페이지 가장자리들은 떨어져나가 있었고, 그래서 누런 먼지와 희뿌연 비늘모양이 뒤섞인 종이 부스러기들이 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나는 육체들은 뒤덮고 있던 겉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처음에는 꿈속에 서, 그리고 후에는 우리가 함께 갔던 발레 첫 회 공연이라는 실망스런 현실속에 서 희미하게 엿본 것이었다. 그책은 내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것이었고- 아마도 수많은 어린이들이 읽었을 책이었다.- 우리 형들이나 누나들의 무릎위에 쪼그ㄱ 리고 앉아 여러 번 "왜그래?" 라고 물을 정도의 속성을 지니 대표적인 잔인한 이야기들을 서술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부모들에게 불효 막심한 자식들, 신사들 에게 강간당한 후 수치심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가지만 자진해서 집을 나가는 젊은 처녀들, 이미 기일이 지난 빚을 탕감하는 조건으로 빚진 가족 중에서 가장 달콤하고 그래서 고통받는 소녀를 아내로 요구하는 늙은이들에 관한 이야기였 다. 그래서 우리는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라고 물어보아야만 했다. 나는 그 질 문에 대한 대답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얼 룩진 페이지 사이로 아밀라미아의, 보기에도 형편없는 맞춤법으로 쓴 하얀 카드 한 장이 훨훨 날며 떨어졌다는 사실뿐이다. 그 카드에는 '아미라미아는 내 친구 를 잃지 않고 있어. 내가 그려 준대로 이리로 날 차자와'라고 쓰여져 있었따. 카드 뒷변에는 x지점에서 출발하는 조그만 오솔길이 그려진 지도가 있었다. 그 장소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지겹기 짝이 없는 정규학교교육애 반항하던 내가 사춘기였을 ㄸ, 수업시간도 잊응ㄴ 채 몇 시간씩 책을 읽던 공원의 벤치였다. 그 책들은 내가 쓴 것이 아니었지만 나의 상황과 매우 흡사했다. 모든 해적들과 러 시아 황제 짜르의 모든 편지들, 그리고 나보다 약간 나이는 어리지만 미국의 거 대한 강을 따라가는 거룻배 위에서 온종일 노를 젓는 소년들이 단지 내 상상속 에서도 흘러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의심할 것인가? 나는 벤치가 기적을 일으키는 안장인 것처럼 그곳에서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발걸음이 처음에는 공원 자갈길을 살며시 걷더니 이내 달려와 내 등 뒤에서 멈추었다. 바로 아밀라미아였다. 나는 그날 오후에 ㄱ녀가 온지도 모르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상태로 침묵을 지켰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심술궂게 민들래 꽃잎으로 내 귀를 간질일때까지 그렇 게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꽃잎을 든 채 내게 두터운 입으로 살며시 휘파람을 불며 윙크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 이름을 물었다. 이내 아주 심각하게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 니 미소지으며 자기 이름을 말했다. 그 웃음은 순진무구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너무 헤픈 웃음도 아니었다. 얼마되지 않아서 나는 그녀의 표정이 나이에 걸맞 게 순진하면서도 제대로 교육받은 아이들이 알아야만 하고 흉내내야만 하는 어 른들의 미소-특히 자기를 소개한다거나 작별 인사를 하는 엄숙한 순간에-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밀라미아의 그런 과묵함은 오히려 그녀의 천부적 재능이었다. 반면에 그녀가 자연스런 행동을 보이는 순간에는 배워서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틀동안 가졌던 아밀라미아의 고정된 이미지를 떠올리고 싶다. 그 이미는 바로 그녀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 혹은 그녀가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쳐다보며 무언가를 물어보는 듯 하면서도 사 실은 별 관심업 ㅅ이 움직였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별로 놀라지 ㅏ는다. 나는 앨범에 있는 것처럼 영원히 멈춰있는그녀의 이미지를 떠올려야 한 다. 저 멀리 산등성이가 기우는 곳에 있는 ㄱ녀, 그리고 클로버가 드리운 호수에 서 내가 앉아있던 벤치에 앉아 푸른 벌판을 바라보는 그녀를 떠올린다. 어둠과 햇빛이 한 몸이 되는 산등성이에서 내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그녀와, 산 아래 쪽으로 뛰어내려오다가 멈추자 치마가 바람에 휘날리면서 허벅지 근처에 가터벨 트를 한 팬티를 드러낸 채, 숨을 헐떡거리며 즐거워 웃으면서 입과 눈을 살며시 다문 그녀의 모습을 회상한다. 더불어 유칼리 나무 아래에 앉아서 내가 자기에 게 다가오게끔 거짓으로 눈물을 흘리는 척 했던 것도 떠오른다. 그리고 손에 한 웅큼 꽃을 쥔 채 고개를 숙여 냄새맡던 그녀의 모습도 기ㅓ한다. 그것은 버드생 이나물 꽃잎이었는데, 나중에 나는 그 꽃이 그 공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라는 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도 그녀가 가끔씩 푸른 체크무늬 앞치마에 있던 주머니에 그 하얀 꽃을 가득 담아온 것으로 볼 때, 아밀라미아가 살던 집의 정 원에서 기르는 것 같았다. 또한 초록색 벤치에 양 손을 놓고 책을 읽던 나를 회 색 눈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지켜보던 아밀라미아의 모습도 기억난다. 그리고 책 에서 나온 이미지를 내 눈망울 속에서 예측이나 하듯이, 그녀가 단 한 번도 내 게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로 떠오른다. 또한 내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 내 머리 위로 빙빙 돌릴때 미소짓던 그녀의 모습도 회상한 다. 그때 그녀는 공중에서 천천히 돌면서 마치 세상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내게 등을 돌리고는 팔을 높이 들면서 손가락을 흔들며 작별을 고하던 아밀라미아의 모습, 내가 앉은 벤치에서 수천 가지 자세를 취하던 아밀 라미아의 이미지도 기억 중에서 지울 수 가 없다. 그녀는 내 머리를 잡고ㅓ 다 리를 벌려 약간 부풀어오른 팬티를 보여주기도 했고, 자길길에 앉아 다리를 꼬 고 손으로 턱을 괴기도 했으며, 잔디밭에 누워 햇빛이 빛나는 그녀의 배꼽을 보 여주기도 했다. 또 의자 밑에 숨어서 나뭇가지를 엮었고, 나뭇가지로 동물 모습 을 진흙바닥에 그렸으며, 벤치의 등을 핥았고ㅓ, 아무 말하지 않은 채 고목나무 기둥의 갈라진 껍질을 갉아냈으며, 눈을 감고 콧노래를 불렀고, 새나 개, 고양이 , 닭 혹은 말의 소리를 흉내내곤 했다. 이런 것이 내게 남아 이쓴ㄴ 전부였지만, 실제 현실 속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않았다. 이런 것들이 그녀가 나와 함께 있는 방법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개의치 않고 공원에 그녀가 호로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래, 내가 그녀를 이렇게 단편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책을 읽는 도 중에 토실토실한 그녀의 햇빛이 반사에 따라 밀짚 빛깔이 되기도 하고 혹은 짙 은 갈색이 되기도 하는 그녀의 매끄러운 머리칼을 ㄸ때로 쳐다보았기 때문인지 도 모른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나는 그 순간 아밀라미아가 내 인생의 또 다른 버팀점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그녀는 우유부단했던 내 유년 시절과 독서를 통해 내 것이 되기 시작한 축복 받은 대지의 열린 세상 사이에서 긴장관계를 조 성하던 버팀점이 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느 그렇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내 책에서 등장하는 여자들 을 꿈꾸었다. 그러니까 ㅏ왕비로 위장에서 비밀리에 목걸이를 사는 암컷들- 이 단어는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 말이다.- 이나침대에서 군주들을 기다리는 신화 적인 여인들-신체의 반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또 다른 반은 흰 가슴 과 축축한 아랫배를 지닌 도마뱀-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유년시절의 동반자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 그녀의 진지함과 매력을 아무런 느낌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에 이미 열네 살이던 나오 일곱 살이던 그녀의 몸이 달아올 랐던 것이다. 나느 그녀에 대한 향수와 기억에 흥분했던 것이 아니라 그녀의 과 거와 현재에 대해 관심이 일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나약함에 이끌리도록 나 자 신을 내버려 두었다.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초원을 뛰어다녔었다. 그리고 우리 는 함께 소나무 가지를 흔들어 떨어진 솔방울을 주웠고, 아밀라미아는 그것을 자기 앞치마 주머니에 간직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우리는 즐거워 소리를 지 르며 언덕 밑으로 굴러 내려왔다. 아밀라미아는 내 가슴 위에 있었고, 나는 그 소녀의 머리칼을 내 입에 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 귀로 그녀의 가쁜 호흡 소리를 들었고, 내 목을 달콤하게 껴안고 있는 그녀의 팔을 느꼈다. 나는 화가 나 그녀의 팔을 치워ㅏ고, 그러자 그녀는 바닥에 넘어졌다. 아밀라미아는 피가 난 무릎과 팔꿈치를 어루만지며 울었고, 나는 내 벤치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나서 아밀라미아는 집으로 돌아갔고, 다음날 내가 앉아 있던 벤치로 와서는 아 무 말없이 종이 하나를 건네주고 콧노래를 부르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카드를 찢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내가 읽고 있던 [농장의 오후]라는 책 속에서 보관할 것인가를 망설였다. 내가 책읽는 것조차 아밀라미아의 옆에서는 유치해 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그 소녀는 공원으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며칠 후에 방학이 끝났고, 나느 중학교 1학년이 해야만 할 일로 돌아갔다. 그 이후 나 는 그 소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2 이제 나는 전혀 환상적이지 않았고, 익숙치도 않았던 이미지를 떨쳐버리고 있 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었기에 더욱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정원으로 되돌아온다. 소나무와 유칼리 나무가 어우러진 가 로수 길 앞에 서서, 인근의 울창한 공원에서 알았던 그 조그만 소녀를 기억한다. 기억은 내 상상력의 파도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하게 그녀를 그렸다. 왜냐 하면 이곳은 슈트로고프와 허클베리핀, 윈터 부인인 밀라디와 브라반테의 게노 페파(허클베리핀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핀의 모험'에 등장하며, 밀라디아는 알렉산더 뒤마의 '삼총사'에 등장하는 인물이고 블반테의 제노베바는 프리드리히 헤벨의 '게노페파'의 여주인공임:역주)가 태어나고 말하고 죽은 곳이기 때문이다. 바로 축축한 쇠창살로 둘러싸이 조그맣고, 마구 자란, 고목 몇 그루만이 있는 조 그만 정원에서 그들은 태어나고 죽었던 것이다. 이 정원에는 나무 모양의 시멘 트 벤치가 하나 덩그렇게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보자 나는 잘 달궈진 쇠로 만든 멋진 내 벤치를 떠올린다. 사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과거를 회상케하는 정돈된 내 열병의 일부분일뿐이었다. 그리고 언덕빼기는....... 어떻게 바로 그 언덕이 아밀라미아가 매일 산책하면서 오르내리던 언덕과 우리가 함께 뒹굴던 가파른 언덕 기슭이라고 믿게 되었을까? 거무스름한 풀더미가 전혀 눈에 띄지 않게 조금 쌓여 있었을 뿐인데, 내 기억은 그것을 보자 과거를 돌이키기 시작한다. 내가 그려 준 대로 이리로 날 찾아와. 그러려면 정원을 가로질러서 숲을 뒤로 한채, 솟아 있던 풀더미를 지나 조그만 개암나무 밭-틀림없이 그 소녀가 흰 꽃 잎을 주웠던 곳이 여기었다.-을 지나야 한다. 삐걱거리는 쇠창살의 공원 문을 열 면 갑자기 기억이 되살아날 것이고, 거리 한복판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자 사춘 기 시절의 오후가 마치 기적처럼 도시의 모든 맥박을 멈추게 했으며, 클랙슨 소 리, 종소리, 목소리, 울음소리, 자동차 엔진 소리, 라디오 소리, 욕소리 등의 도시 의 현기증을 무력화했다는 사실을 알고 또 기억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 을 가능케 한 진짜 마술은 무엇일까? 조용한 정원일까 아니면 시끄럽게 달아오 른 도시일까? 나는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멈추라는 붉은 신호등을 쳐다 보지 않은 채 길을 건너 반대쪽 보도로 간다. 그리고는 아밀라미아의 종이 쪽지 를 다시 살펴본다. 마침내 조잡하기 그지없는 그 지도는 내가 살고 있는 순간의 진정한 마력이 되고, 단지 그것을 생각만 해도 나는 마구 흥분하기 시작한다. 열 네 살 때 잃어버린 사춘기 시절의 오후를 보낸 후 내 인생은 엄격한 규율을 지 켜야만 했고, 스물 아홉이 된 지금 나는 정당하게 학위를 받았으며, 한 사무실의 주인이며, 얼마 되지느 ㄴ않지만 안정된 수입이 있고, 부양할 가족이 없는 총각 이고, 비서들과 잠자리를 하는데 약간은 신물이 나 있고, 돌발적으로 가는 시골 이나 해변가에도 별로 흥분하지 ㅇ낳으며, 책을 읽으면서 느끼거나 공원이나 아 밀라미아에게서 느꼈던 이전의 매력 같은 것도 사라진 지 오래이다. 나는 형편 없이 우중충한 이 변두리 거리를 거닌다. 단층 집들은 모두 긴 창살과 색바랜 대문을 하고서 단조롭게 줄지어 있다. 가끔씩 거리의 행상들이 외치는 소리가 주택단지 의 단조로움을 깰 뿐이다. 이곳저곳 에서 칼 장수의 칼가는 소리와 구 두장이의 망치소리가 들린다. 옆에 있는 울타리 쳐진 정원에서는 동네 어린아이 들이 뛰어놀고 있다. 손풍금 소리가 어린아이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뒤섞여 내 귀에 들려온다. 나는 잠시 멈추어 서서 그들을 쳐다본다. 그리고 어쨌든 스쳐지 나가는 감정이지만 곡예사들의 방탕함을 좋아하던 아밀라미아가 발코니에서 자 신의 양 허벅지에 걸친 꽃무늬 팬티를 뻔뻔스럽게 보여주면서, 앞치마 주머니에 흰 꽃을 가득 담고 있지나 않을까 해서 어린 아이들을 쳐다본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생애 처음으로 스물 두 살 먹은 그 아가씨를 상상한다. 그리고 만일 아 직도 그녀가 적어준 주소에 살고 있다면, 나를 기억하며 웃을 것인지, 아니면 정 원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잊지는 않았는지 상상하고 싶어진다. 그 집은 단지 내의 다른 집들과 똑같다. 대문과 창살 달린 두 개의 창문과 문 기둥들이 있다. 그리고 빨랫줄에 걸린 옷들, 물탱크, 식모방, 헛간과 같은 옥상의 잡동사니들을 숨기기위해 가짜 18세기 풍난간으로 장식된 단층집이다. 나는 초 인종을 누르기 전에, 모든 환상을 떨쳐버리려 한다. 아밀라미아는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살지 않을 수도 있다. 15년 동안 똑같은 집에서 계속 살 이유는 없지 않 은가? 그 소녀는 너무도 조숙하게 독립적이었으며 고독했지만, 옷도 잘 입고 제 대로 교육받은 소녀 같았다. 그런데 이 지역은 그런 우아함과는 이미 거리가 있 다. 틀림없이 아밀라미아의 부모들은 이사를 했음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집에 새로 이사온 사람들의 그 소녀의 주소를 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느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린다. 나는 다시 초인종을 누른다. 아무도 집에 없 는 것 같다. 그건 또 다른 우연이었다. 그럼 나는 도다시 내 어릴 적 소녀를 찾 을 필요성을 느낀 것인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춘기 시절의 책을 다시 들 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한 그런 책 속에서 우연히 아밀라미아의 카드를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느 일상생활로 돌아갈 것 이고, 스쳐지나가던 그녀에 대해 생각했던 중요한 순간을 틀림없이 잊을 것이었 다. 나는 다시 초인종을 누른다. 그리고는 현관문으로 귀를 가까이 가져가다가 깜 짝 놀란다. 현관문 안쪽에서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힘들 어하느 소리가 케케묵은 시가의 역겨운 냄새와 더불어 현관의 갈라진 널빤지 사 이로 스며들고 있었따. "안녕하십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내 목소리를 듣자 어떤 사람이 불안한 듯이 굼뜬 걸음거리로 몸을 피하는 소 리가 들린다. 이번에 나는 소리를 치면서 다시 초인종을 누른다. "여보세요! 문 좀 열어주세요! 내 말 안 들려요!"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느 계쏙해서 초인종을 누르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다. 그러자 나는 아주 조그마한 틈새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현 관에서 물러난다. 마치 그렇게 거릴를 두면 더 잘 보이고, 심지어는 그 안으로 파고들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느 ㄴ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 그 저주받은 현관문을 쳐다보면서 내 뒤쪽에 있던 길을 건넌다. 바로 그 때 과격하게 눌러대 는 시끄러운 클랙슨 소리가 나고, 나는 다행이 목숨을 건진다. 나는 클랙슨을 눌 러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을 멍하니 쳐다보지만, 거리로 사라지는 자동차만을 바라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때 나는 전봇대를 붙잡는다. 그리고 차가운 피가 뜨겁고 땀에 젖은 피부를 지날 때 생기는 갑작스런 현기증을 느끼고 전봇대에 몸을 의지한다. 나는 아밀라미아의 집이었음에 틀림없는 그 집을 쳐다본다. 이미 알고 있따시피 난간 뒤쪽으로는 빨랫줄에 걸린 옷들이 너풀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옷들이 속옷인지 파자마인지 블르우스 인지 잘 모른다. 단지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빠래 줄에 집게로 접힌 채 팽팽히 걸려 있던 푸른색 체크무니의 조그만 앞 치마 뿐이다. 앞치마는 옥상의 흐니 벽에 바힌 못과 쇠기둥 상이에 걸린 빨랫줄 에서 너울거리고 있었다. 3 등기소에서는 그 집이 발디비아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 있으며, 그는 집을 임대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임대한 사람이 누구일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 리고 누가 발디비아일까? 그는 자기 직업을 상업이라고 적고 있었다. 어디 살지 요? 당신은 누구죠? 라고 등기소 여직원이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거만하게 물었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 지 못했다.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꿈도 나의 피곤함을 씻어 주지는 못했다. 발 디비아가 누구일까? 등기소에서 나와서 햇빛을 보자 기분이 상한다. 나는 낮게 깔린 구름 ㄸ문에 안개가 자욱하고 채로 까분듯한 태양 빛이 야기하는 역겨움을 어둡고 축축한 공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그건 아 니다. 그건 단지 아밀라미아가 그 집에 살고 있는지, 그리고 왜 내게 문을 열어 주시지 않았는지를 알고 싶은 욕망일 따름이다. 그러나 가능한 한 빨리 내가 떨 쳐 버려야 할 것은 밤새 나를 한 숨도 자지 못하게 만든 황당한 생각이다. 나는 옥상에 걸려 있는 앞치마를 보았따. 그것은 주머니에 꽃을 간직하던 바로 그 앞 치마였다. 그래서 나는 바로 그 집에 내가 열 네살인가 열 다섯 살대 알았던 일 곱 살짜리 소녀가 살고 있다고 맏었지만...... 아마도 그녀는 딸이 하나 있을 것이 다. 그래, 스물 두 살이 아밀라미아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 일것이다. 아마도 그 녀와 똑같이 옷을 입고 , 그녀와 닮고 그녀와 똑 같이 장난치면서 아무도 모르 게 공원에 가는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그 집의 현관에 이르른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 안쪽에서 헉헉거리는 소리가 나 길 기다린다. 하지만 내 예측은 빗나간다. 내게 문을 열어 준 여인은 쉰 살이 채 안된 듯 하다. 그러나 화장하지 않은 얼굴에 굽낮은 신발과 검은 옷과 숄을 두 르고 있다. 그리고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희끗희끗한 머리칼은 모든 환상이나 청 춘시절의 모든 열정을 포기한 듯이 보인다. 그녀는 거의 무감각하고 잔인한 누 빛으로 날 뚫어지게 바라본다. "뭘원하죠?" "발디비아씨가 보냈습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면서 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는다. 나는 사무실에 가서 서 류가방을 들고 왔어야만 했다. 그때서야 나는 서류가방 없이는 내 역할을 제대 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발디비아씨라고요?" 여인은 아무런 관심도 없고 전혀 놀라지도 않은 듯이 되려 내게 묻는다. "예. 집주인 말입니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인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다. 그녀는 나를 쳐다본다. "아, 그래요. 집주인 말이군요."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형편없는 코미디에서 손님들이 한 발 앞서 들어가는 이유는 그의 면전에 서 문을 쾅닫어ㅏ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 도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 여자는 문에서 비켜나 내게 한 손으로 제스처를 지 으며 현관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현관 안쪽에는 색바랜 나무와 유리로 된 문 이 하나 있다. 나는 현과닙구에 깔린 노란 타일 위로 걸어 그 문까지 간다. 그리 고는 종종걸음으로 나를 뒤쫓아오고 있는 여인을 쳐다보며 다시 묻는다. "이리로 갑니까?" 여인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가 흰 손으로 작은 로사리오를 갖고 끊임없이 만지작 거리는 것을 본다. 나느 어렸을 때 이후 그렇게 오래된 로사리오를 보지 못했다. 나는 그런 사실을 말하려고 하지만, 그녀가 갑작스럽고 단호하게 문을 열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없는 대화를 나눌 수는 없다. 우리는 길 고 좁은 거실로 들어간다. 여자는 서둘러 현관문 옆에 있는 창문을 열지만, 우아 한 도자기 화분에서 자로고 있던 네 개의 다년생 식물과 무늬 있는 창으로 인해 거실 안은 여전히 어둡다. 거실에는 단지 등나무로 된 등높은 오래된 소파 하나 와 흔들의자만이 있다. 그러나 내 관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희귀한 가구이거나 식물은 아니다. 여자는 먼저 내게 소파에 앉으라고 권한 다음에 흔들의자에 앉 는다. 내 옆에 있던 등나무 테이블에는 잡지책이 한 권 펼쳐져 있다. "발디비아씨가 직접 못오셔서 죄송하다고 그러십니다." 여인은 눈 깜짝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흔들거리고 있따. 나는 만화가 그려진 그 잡지를 곁눈질로 쳐다본다. "인사를 전해달라고..." 나는 여인의 반응을 기다리면서 말을 멈춘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흔들거 리고 있을 따름이다. 잡지에는 빨간 색연필로 낙서가 도어 있다. "....며칠 동안 잠시 귀찮게 해드릴지도 모른다고 전해달라고 해서..." 내 눈은 재빨리 그 다음 말을 찾는다. "....등기부 ㄸ문에 가옥 감정 평가를 다시 해야만 한다고 하더군요. 가옥 가격 을 평하한 지가 벌써... 당신 가족은 계속 여기에서 살았습니까?" 끝이 뭉툭한 립스틱이 의자 밑에 떨어져 있다. 여자는 미소를 짓고 있다. 작은 로사리오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미소를 짓고 있다. 그순간 나는 그녀사 이런 말 을 비웃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전혀 일그러지지 ㅇ낳 는다. 이번에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 적어도 15년은 되었지요. 그렇죠?"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창백하고 야윈 입술에는 립스틱을 바른 흔적이 하나도 없는데..." "....당신과 당신 남편 그리고.....?" 그녀는 얼굴 표정을 하나도 바꾸지 ㅇ낳은 채, 계속해서 말하는 나를 거의 도 전적으로 뚫어지게 바라본다. 우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앉아있다. 그녀는 계쏙 해서 작은 로사리오를 어루만지고 있고., 나는 허리를 앞으로 약간 굽힌채, 무릎 위에서 손을 놓고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오늘 오후에 필요한 서류를 갖고 다시 오겠습..." 그녀는 좋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는 동안 아무 말 없이 립스틱을 줍고 만화 잡지를 들고서 자기 숄 사이로 숨긴다. 4 무대는 바뀌지 않았다. 그날 오후 나는 노트에 상상한 숫자를 적으면서 을씨 년스런 바닥의 나무 판자의 결과 가옥의 규모를 측정하는 데 관심을 보이는 척 하고 있다. 그 동안 여자는 흔들의자에 앉아 흔들거리면서 손가락으로 조그만 로사리오 아릉ㄹ 어루ㅁ지고 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거실의 목록을 끝내자 한숨을 내쉬며 집안의 다른 쪽으로 가자고 부탁한다. 여자는 길고 검은 팔로 흔 들의자 팔걸이를 잡고 일어나면서 좁고 뼈만 앙상한 어깨에 숄을 두른다. 그녀는 우중충한 유리문을 연다. 우리는 거의 가구가 없는 식당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니켈과 스펀지 고무로 되ㅓ 네 개의 의자와 함께 있던 둥근 튜브 다리의 식탁은 그럴듯해 보이던 거실 가구들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 다. 그곳에는 콘솔도 없고 선반받이도 없다. 식탁 위에는 단지 검은 포도 한 송 이와 두 개의 복숭아를 담은 과일 그릇과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 파리만 있을 뿐이다. 여자는 팔짱을 끼고 무표정한 얼굴로 내 뒤에 서 있다. 나는 가옥 평가 를 할 ㄸ의 정상적인 순서를 깨기로 마음 먹는다. 이런 평범하기 그지 없는 집 은 내가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해 아무 ㅡ단서도 제공하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땜누 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묻는다. "옥상에 올라가도 될까요? 그 방법이 전체 표면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최고 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평소의 눈빛과는 대조적인 빛을 발하면서 나를 쳐다본다. 아마도 식당의 어둠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는 마침내 입을 연 다. "그럴ㄹ 필요가 있을까요ㅕ? 집 ㅕ적은.... 발디비아씨가 .... 아주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집주인의 이름ㅇ 앞뒤로 머뭇거린 그녀의 말은 마침내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 을 교란시키고 있다는 최초의 증상이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녀는 비꼬듯이 말해야만 했던 것이다. "글ㅆ요" 라고 나는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한다. "제가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점 검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뿐입니다.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진행한느 것 보다는....." 내 거짓 웃음은 이제 안전부절 못하고 있다. "당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요"라고 여자는 말하면서 무릎 위에 팔을 엇갈리게 놓은 채, 검은 배 위에 은제 십자가를 놓는다. 나는 희미하게 미소짓기 전에 어둠 속에서 그런 내 제스쳐는 쓸데 없는 것이 며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죽으로 장정된 노트에 소리를 내면 서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눈을 떼지 않은 채 숫자와 감정가격을 적는다. 이런 숫자의 허구성-이것은 약간 붉어진 내 볼과 딱딱한 언어의 사용이 말해주고 있 다.-은 아무에게도 쓸모 없는 것이다. 엉터리 기호와 펴방미터, 수학 공식등을 블록 페이지에 가득 채우면서, 내가 왜 도대체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하는가를 나 자신에게 붇는다. 즉, 아밀라미아에 관해 물어보고 나서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은 후 이곳에서 왜 나가지 못하는가를 내심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런 길을 택한다면, 대답을 얻는 한이 ㅇ더라도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다. 나와 함께 있는 야위고 조용한 여인은 만일 내가 거리에서 만난다면 발길을 멈추고 쳐다볼 만한 특징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 나 시원찮은 가구들과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 집에서 그녀의 얼굴은 도시 에서 지나치는 모르는 얼굴이 아니라, 신비스러운 얼굴로 변하고 있다. 이런 것 이 바로 역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밀라미아에 대한 기억이 또다시 내 상상 력의 욕구를 일깨웠기 때문에 나는 게임의 법칙을 따를 것이고, 겉으로 드러난 허상을 끝까지 파헤칠 것이며, 로사리오를 들고 있는 여인이 내 길 앞에 펼쳐놓 은 뜻하지 않은 베일을 통해 해답-아마도 그것은 간단하고 명확하며 즉시 얻을 수 있는 분명한 것이다.- 을 얻기 전까지는 편히 쉬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이 완 고한 여주인에게 낯선 존재에 관해 물어보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단지 내 상상속의 미로 속에서 아밀라미아를 생각하며 더욱 즐길 것이다. 파리들은 윙윙거리며 과일 그릇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그러나 복숭아의 상한 끝부분, 즉 한 입을 물어뜯은 부분에는 앉지 ㅇ낳는다. 나는 적을 것이 있다는 핑계로 그곳 으로 다가간다. 그런데 카펫같은 복숭아 껍질과 과일의 누런 알맹이에는 이빨자 국이 나 있다. 나는 여자가 있는 쪽을 바라보지 않는다. 나는 계속해서 무엇인가 를 적는 척 한다. 그 과일에는 이빨자국이 나 있지만 손으로 만진 흔적은 없다. 나는 어깨를 웅크리고 그 과일을 좀더 자세히 쳐다본다. 그리고 식탁에 손을 댄 채, 마치 손대지 않고 물어뜯으려는 행동을 반복하려는 것처럼 앞으로 입술을 가까이 한다. 그때 나는 눈을 내려 아래를 쳐다본다. 그리고는 내 발 주위에 또 다른 흔적이 있는 것을 본다. 그곳에는 자전거 모양을 한 두 개의 눈물 방울과 색바랜 나무바닥에 두 개의 껌 조각이 길쭉하게 달라붙어 있다. 그 껌 조각은 식탁까지 온 다음, 바닥을 따라 여자가 있는 곳 까지 점점 희미하게 펼쳐지며 사라진다. 나는 내 노트를 덮는다. "계속합시다. 부인."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자, 나는 그녀가 의자 등 위에 손을 올려 놓은 채 서 있 다는 사실을 안다. 그녀 앞에는 두툼한 어깨의 남자가 검은 시가 연기를 내뱉으 며 앉아 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다. 그의 눈은 늙은 거북이의 목과 비슷하게 주름져있고 퉁퉁부어 있으며 두껍고 늘어진 눈까풀 속 에 숨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는 계쏙해서 내 행동을 주의깊게 쳐다보고 있다. 형편없이 면도하여 수천 개의 을씨년스런 수염으로 가득 찬 그의 뺨은 튀어나온 광대뼈에 매달린 듯이 흐느적 거리고 있고, 푸른 힘줄이 보이는 두 손은 양 겨 드랑이 속에 숨겨져 있다. 그는 푸른 색의 거친 셔츠를 입고 있고, 그의 헝클어 진 곱슬머리는 작은 소라로 범벅이 된 배의 밑창고 ㅏ흡사하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의 존재가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힘들게 내 쉬는 씩씩 거리는 숨소리(마치 이런 호흡만이 그의 불같은 성미와 격앙된 감정과 그의 쇠 약한 육체라는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뿐이었다. 그런 숨소리는 이미 현 관문 틈 사이로 내가 들었던 것이다. 그는 겸연쩍게 "안녕하시오..."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미스터리, 아밀라미아, 가 격 감정, 아밀라미아의 발자취 등의 ㅗ든 것을 잊기로 한다. 천식에 걸린 늑대 같은 남자의 모습을 보자 나는 얼른 그곳에서 도망치기로 한다. 나는 "안녕하세 요"라고 말하지만, 이번에는 작별 인사를 하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자 그 남자의 거북이 가면은 부서지면서 잔인한 미소로 변한다. 그의 육체는 모두 버들처럼 하늘하늘한 껌과 썩어서 다시 색칠한 고무로 만들어진 것 같다. 그는 팔을 뻗어 내 발걸음을 멈춘다. "발디비아는 4년 전에 죽었고"라고 숨막힐 듯 희미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서 그 소리는 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창자에서 나오는 것 같ㅌ다. 그것은 희미 하면서도 떨리는 목소리이다. 나는 맹수의 발톱에 사로잡힌 힘없는 짐승처럼 신음하면서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고 말한다. 나를 쳐다보고 있는 양초와 생고무로 만든 것 같 은 두 얼굴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히든 카드로 나 자신에게 말하는 척 한다. 나는 중얼거린다. "아밀라미아....." 바로 그것이다. 이제 아무도 더 이상 거짓으로 행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팔을 붙잡고 있던 주먹은 순간적으로 힘을 가하더니, 이 내 힘이 빠지고 마침내 힘없이 떨면서 내 팔에서 떨어져나간다. 처음으로 당황한 모습을 보인 여자는 마구 짓밟힌 새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흑흑거리며 울기 시작한다. 하지만 무서운 유령같은 그녀의 얼굴은 그대로이다. 내 상상속의 흡혈귀느 ㄴ고독하고 버림받았으며 상처입은 두 늙은이로 갑자기 변한다. 그들은 벌벌떨면서 두 손을 잡고서야 비로소 간신히 기운을 차린다. 그런 모습을 보자 나는 몹시 창피해진 다. 아밀라미아에 대한 환상은 나를 벌거벗은 식당까지 데려와 내가 그들과 공 유할 수 없는 삶으로 추방당한 두 늙은이의 은미랗게 감춘 비밀까지 짓밟은 것 이다. 나는 그ㄸ처럼 내 자신이 혐오스러운 적이 없었다. 나는 그처럼 거칠고 나 쁜 말을 내뱉은 적이 없었다. 그 어떤 제스처도 소용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두 사람의 손을 잡을까? 그리고 부인의 머리를 어루만질까? 아니면 내가 그들일에 참견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할까? 나는 겉옷 주머니에 내 공책을 집어 넣는다. 나 는 탐정소설 같은 이런 실마리ㅡ 모두 망각의 늪으로 던져버린다. 즉 만화 잡지, 립스틱, 이빨 자국이 난 고일, 자전거 자국, 푸른색 체크 무늬의 앞치마등을 까 맣게 잊어버린다. 나는 아무말 하지 않고 그 집에서 나가기로 마음먹는다. 노인 은 두꺼운 눈까풀 뒤에 있던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음에 틀림없다. 그 는 씩씩 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밀라미아를 아나요?" 그들이 매일 자연스럽게 떠올렸을 그녀의 과거는 내 환상을 산산히 부숴버린 다. 바로 그 질문에 해답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알았다. 그게 몇해 전인 가? 아밀라미아 없는 세상을 몇 년 동안이나 살았을까? 그녀는 우선 내 망각에 의해 살해되었고, 겨우 어제 비로소 무기력하고 쓸쓸한 기억에 의해 부활되었던 것이다. 항상 홀로 있던 정원 속에서 기쁨을 만끽하며 놀라움을 금지 못하던 과 묵한 그녀의 회색 눈이 언제 나를 떠났을까? 울상짓기나 과묵함 속에서 가냘퍼 지던 그녀의 입술을 본 것이 언제던가? 이제서야 나느 아밀라미아가 허망하다고 직관했던 그런 인생을 발견했고 그런 일생에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 우리는 공원에서 함께 장난을 했습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죠." "아밀라미아가 몇 살쯤 되었을 ㄸ가요?" 라고 아직 죽어가는 목소리로 노인이 말한다. "아마 일곱 살쯤 되었을 겁니다. 맞아요 일곱살 이상은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자 여자가 애원하듯 팔을 올리며 일어나 말한다. "어떻게 생겼었찌요? 어떻게 생겼었는지 말해보세요..." 나는 눈을 감는다. "아밀라미아는 역시 내 기억의 전부이기도 합니다. 단지 그녀가 공원에서 만지 고 가져오고 발견했던 것들로만 그녀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이 제야 그녀가 언덕빼기를 내려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니, 언덕빼기가 아니라 목 초가 약간 솟아 있던 지역에 불과한 것인지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건 풀이 무성 한 언덕이었고, 아밀라미아는 자기가 오가던 오솔길을 따라 왔었습니다. 그리고 는 언덕에서 내려오기 전에 높은 곳에서 내게 인사를 했지요.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예, 그건 내 눈의 음악이었고, 내 코가 맡는 그림이었지요. 그리고 내 귀가 듣는 맛이었고, 내 촉감이 느끼는 냄새였으며...... 내가 꿈꾸고 있는 것인지..... 내 말을 듣고 있습니까? 그녀는 내려오면서 인사하고 있었습니 다. 흰 옷과 푸른색 체크무늬의 앞치마를 걸치고 있었는데.... 당신들이 옥상에 걸어 놓은 바로 그 앞치마를....." 그들이 내 팔을 잡았지만 나는 눈을 뜨지 않는다. "아밀라미아가 어땠지요?" "회색 눈을 지니고 있었고, 머리색은 태양이 반사되는 정도와 나무 그림자들에 따라 변했고..." 두 사람은 부드럽게 나를 인도하고 있다. 나는 남자의 콜록콜록하는 소리와 여인의 몸에 부딪히는 로사리오의 십자가 소리를 듣고 있다. "말해보시오.... 제발..." "그녀는 달려오면서 바람 ㄸ문에 눈물을 흘렸지요. 내가 앉아있던 벤치까지 왔 는데, 뺨은 기쁨의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나는 눈을 뜨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옥상으로 올라가고 있다. 두번째 계단, 다섯번ㅉ 계단, 여덟번째, 아홉번째, 열두 번째 계단을 오른다. 네 개의 손이 내 몸을 인도하고 있다. "어ㄸ지요? 아밀라미아가 어ㄸ지요?" "그녀는 유칼리 나무 아래에 앉아 나뭇가지로 머리를 땋고 있었어요. 그러고는 내가 독서를 그만두고 그녀에게 다가오지 낳게끔 눈물을 감추며..." ㄱ{단은 삐걱거리고 있다. 냄새는 모든 것을 앗아가버린다. 그것은 나머지 감 각을 모두 흩어버리고, 내 환상 속의 권좌에 앉은 황색 몽골인처럼 의자에 앉는 다. 그것은 구리처럼 무겁다. 그리고 느슨하게 드리워진 바삭거리는 실크처럼 매 우 암시적이다. 그것은 터키 군주의 왕좌처럼 장식되어 있으며, 깊은 폐광처럼 어둠침침하고, 죽은 별처럼 빛난다. 두 사람의 손이 나를 놓아준다. 나를 에워싸 고 있는 것은 눈물이라기보다는 떨고 있는 두 노인들이다. 나는 천천히 눈을 뜬 다. 우선 나는 내 각막에서 흘러나온 너울거리는 ㅇ게와, 그 다음으로 향수와 수 증기와 ㄱ의 되살아난 듯한 꽃잎으로 내 속눈썹이 질식할 것만 같은 방을 발견 한다. 여기에서 살아 있는 피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바로 그런 꽃들이 모습뿐이다. 그것은 들고추의 달콤함과 두형나무의 구역질나는 냄 새, 그리고 감송으로 에워싸인 무덤이자 치자나무의 사원이다. 타오르는 무거운 대형 초의 달아오른 손톱에 비치는 창문 하나 없는 조그만 방, 초와 축축한 꽃 내음의 흔적은 우리 신경체의 중심으로 향한다. 바로 인생의 태양인 그곳에서 되살아나서 흩어진 꽃들과 대형 초 뒤로 손때 묻은 장난감이 쌓이 모습과 색색 의 반지와 바람 빠져 주름진 풍선. 투명한 낡은 자루가 보인다. 산산이 부서진 갈기의 목마, 악마의 스케이트, 머리칼 없이 눈 빠진 인형, 톱밥이 빠져 안이 텅 빈 곰, 구멍 뚫린 생고무 오리, 온통 좀 쓸은 개, 다 썩은 서커스용 밧줄, 말라비 틀어진 사탕으로 가득 찬 유리 항아리, 낡은 신발, 세발자전거-바퀴가 세개 달렸 을까? 아니다. 바퀴는 두 개만 있다. 하지만 두발 자전거는 아니다. 앞바퀴가 빠 져 뒷바퀴만 평행하게 달려있다.-가죽과 실로 만든 신발도 그곳에 있었다. 내 손 이 닿을 만한 맞은 편에는 종이꽃으로 장식된 푸른 상자 위에 조그만 관이 놓여 있는데, 이번에는 삶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카네이션, 클로버, 해바라기, 양귀비, 튤립과 같은 꽃들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저번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죽 음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들은 은빛의 관 안에서 검은 실크 침대보를 덮고, 흰 융단과 같은 솜과 함꼐 있는 그녀의 얼굴이 풍기는 잠자는 죽음의 밀실의 모든 요소들이다. 움직이지 않고 고요한 모습을 한 그녀의 얼굴은 레이스 달린 헤어 네트를 쓰고 있으며,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다. 눈썹은 가장 얇은 아이펜슬로 그 렸으며, 눈은 감고 있고, 두껍고 진짜 속눈썹같은 눈썹은 공원에서 함께 보낸 나 날들처럼 건강미 넘치는 뺨 위로 은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아밀라미아의 입술은 애가 가까이 다가와 장난칠 수 있도록 화를 내는 척 함녀서도 인상쓰던 붉고 진중한 입술이었으며, 손은 가슴 위에 다소곳이 포개고 있다. 그녀의 어머 니 것과 똑같은 작은 로사리오는 그녀의 부드러운 목을 조르듯이 걸려있다. 그 녀는 어리고 깨끗하며 유순한 육체를 감싸는 희고 조그만 수의를 입고 있다. 늙은이들은 꼼짝하지 않은 채 흐느끼고 있다. 나는 팔을 뻗어 내 여자 친구의 도자기 얼굴을 손가락으로 스치듯이 만진다. 나는 죽음으로 가득 찬 이 황실의 화려함을 이끌고 있는 공주인형처럼 그려진 그 얼굴에서 한기를 느낀다. 도자기, 회반죽 그리고 솜, 아밀라미아는 네 친구를 잃지 않고 있어. 내가 그려 준대로 이리로 날 찾아와. 나는 가짜 시체에서 손가락을 뗀다. 그러자 내 지문이 인형 피부위에 남는다. 그리고 대형 초의 연기와 닫혀진 방 속의 두형나무 냄새로 가득찬 내 뱃속에 서는 구역질이 날 것만 같다. 나는 아밀라미아의 묘에 등을 돌린다. 중년 부인의 손이 내 팔을 만진다. 멍한 눈을 하고 있지만 그녀의 희미한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떨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오지 말아요. 당신이 아밀라미아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다시 는 이곳에 오지 말아요." 나는 아밀라미아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노인을 구역질날 듯한 눈으로 바라본다. 나는 그 방을 나와 거실로 향하는 계단 을 거치고 정원을 지나 거리로 나온다. 6 1년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틀림없는 것은 9개월이나 10개월정도가 흘렀다는 사실이다.. 그 우상에 대한 기억은 나를 더 이상 나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나는 꽃향기와 차가운 인형의 이미지르 ㄹ잊었다. 진정한 아밀라미아는 이미 내 기억 속으로 들어갔고, 나는 만족하지는 않을지라도 다시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고 느 꼈다. 공원과 살아있는 소녀, 사춘기 시절의 내 독서는 병적인 것과도 같았던 환 영을 극복했다. 삶의 이미지가 죽은 소녀의 이미지보다 더욱 강했떤 것이다. 나 는 죽음의 캐리커쳐를 이겨낸 나의 진정한 아밀라미아와 영원히 살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되뇌인다. 그리고 언젠가 용기를 내어 내가 거짓 감정가격을 적었던 종이 노트를 다시 훑어볼 것이다. 그 노트에선 아밀라미아의 유치하기 그지없는 글씨와 공원에서 자기 집으로 가는 약도를 그린 카드가 다시 떨어진다. 나는 그 카드를 주으며 미소짓는다. 나는 크드 한쪽 모퉁이를 살며시 물어뜯으며 불쌍한 노인 두 사람이 어ㅉ고나 이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재킷을 걸치고 휘파람을 불며 넥타이를 맨다. 그들은 방문에서 소녀의 글씨가 담긴 이 종이를 주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단층집으로 달려간다. 비가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고, 그 빗방 울은 금세 마술을 부리는 양 땅에서 축축한 축복의 냄새가 솟수치게 한다. 그 냄새는 썩어가는 땅냄새를 제거하고 땅바닥 속에 뿌리박고 있는 모든 존재가 자 라나게끔 서두른다. 나는 초인종을 누른다. 빗방울은 더욱 거세지고 나는 계속해서 초인종을 누른 다. "곧 나가요!"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영원한 로사리오를 든 어머 니의 입술이 나를 맞기를 기대한다. 나는 외투 깃을 올린다. 또한 비를 맞자 내 옷과 내 몸도 다른 냄새를 풍긴다. 문이 열린다. "왜 그러죠? 아, 당신이군요. 어쩐 일로 왔나요?" 휠체어를 타고 있던 가짜소녀가 내 구레나룻 위로 한 손을 멈춘다. 그리고는 형언할 수 없는 인상을 지으며 내게 웃는다. 볼록 나온 가슴 부분은 옷을 육체 의 커튼으로 변화시킨다. 그러나 교태의 분위기를 자아내던 흰 천은 이내 푸른 색 체크무늬의 앞치마로 변한다. 그 조그만 여인은 앞치마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고, 재빠르게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인다. 그리고는 꽁초에 오렌지 색으로 칠한 입술이 흔적을 남긴다. 담배 연기는 그녀의 아름다운 회색 눈을 찌 푸리게 한다. 그녀는 외롭고 궁금해하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며, 파마를 한 푸 석푸석한 구릿빛 머리를 매만진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시선은 그 무언가를 갈 망하기도 한다. 이제 그녀의 눈은 겁을 먹고 있다. "카를로스, 안되요. 어서 가세요. 그리고 더 이상 오지 말아요?" 그 소리와 동시에 나는 집안에서 새어나오는 노인의 커다란 기침 소리를 듣는 다.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들린다. "어디 있지? 초인종이 울려도 나가 보지 말라고 했잖아! 아직도 그걸 모르나? 어서 돌아와! 빌어먹을 년 같으니라고! 다시 한 번 채찍을 맞고 싶어?" 빗물은 내 이마로, 그리고 나서 뺨으로, 그런 후에는 입으로 흘러내린다. 그리 고 그녀의 놀란 조그만 손은 싸구려 잡지를 축축한 묘 위로 떨어뜨린다. 서러워라 늙는다는 것은 지은이: E.아리아스 수아레스지음 1 나는 20년만에 고향을 찾아왔다. 독자들은 2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살마이나 강산이 어떻게 변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까? 우리 어디 한 번 어린애를 하나 놓 고 관찰해보기로 하자. 말썽꾸러기 어린애가 20년이 ㅈ나면 제법 점잖아지고 장 난감대신에 자동차나 청춘사업을 하면서 젊음을 재미나게 보낸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 이층집만 하더라도 큰 빌딩으로 둔갑하는 세상이 아닌가? 그러니 지금 독자들이 바라보는 쓸쓸한 거리도 자동차나 버스가 각양각 색의 사람들로 가득 찬다고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하간 나느 ㄴ고향인 이 읍에 와서 그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기이한 감상에 젖었다. 사진을 통해 보았을 ㄸ는 그저 그런가 보다 했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 모든 게 정말 너무나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읍에 도착해서 내가 처음으로 한 일은 하숙방을 하나 구하는 것이었다. 한 달치를 속시원하게 선불한 나는 그뒤부터 아무런 부담없이 고향의 거리를 둘러 보기 시작했다. 낮이고 밤이고 나는 노상 쏘다녔다. 내가 어렸을 때 늘 놀던 들판이 바로 여 기 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어졌다. 저 멀리 베드로와 내가 고기를 잡던 시냇물 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고기르 잡고난 후에 나무에 올라가 과일을 따먹곤 했는데, 지금 그 나 무들도 기억에 남는 장소를 찾아다니며 이미 사라진 흔적을 되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중심지는 모든 게 너무나 달라져 있어 이미 옜 것을 확인하기가 매우 힘 들었다. 아마 여기쯤 학교가 있었을 거고, 저쪽은 술집이 있었을텐데.... 내가 처 음으로 찾아가 본 것이 바로 이 술집 자리였는데 지금 그 흔적은 하나도 안 남 았고 대신 은행이 떡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거리를 쏘다니다가 나는 인디언들의 싸구려 물건들을 들여다보고 있었 다. 실컷 보고나서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한 사십은 지났을 부인 하나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등뒤로 느꼈다. 나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녀가 누구라 는 것을 대뜸 알아보았다. 그녀도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들은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꼰스딴띠노!" "메르세데스!" 그녀는 메르세데스였다. 나의 사촌 여동생 말이다. 내가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정말 온 정열과 영혼은 다 바쳐 사랑했었지...... 20년을 두고 잠시도 내 머릿속에 서 사리지지 않았던 단 하나의 여인, 바로 나의 사촌 여동생인 메르세데스가 지 금 내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나는 오한을 느꼈다. 아마 얼굴이 파랗게 질렸던 모양이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정황중에서도 나는 20년 동안 아름다운 여인의 용모가 어느 정도로 변했나 세밀히 관찰했다. 결론 적으로 말해 메르세데스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늙어버렸다. 나는 지금 내 앞의 메르세데스를 지난 날 꿈 속에서 늘 방글거리며 웃고 있는 메르세데스 와 비교해보았다. 그 차이란 하늘과 땅 사이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이마와 예쁜 눈만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메르세데스! 아무리 세월 탓이라 하더라도 그때 당신이....." 나는 그녀의 변해버린 모습이 마치 그녀의 잘못이기나 한 것처럼 약간 비난하 는 조로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긴 그건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니까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반갑다는 표시로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사촌 남매로서 포옹을 했다. 나는 이 포옹을 통해서도 세월이 메르세데스를 변하게 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포옹은 거의 기계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 큼 차가웠기 때문이다. 20년 전의 메르세데스는 감정이 풍부해서 내가 고향을 떠날 때 붙들고 울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메르세데스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품 고 있었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몰라보게 변했어요." "물론 많이 변했지. 그런데 메르세데스는 내가 그 동안 많이 늙었다는 걸 말하 고 싶은 모양인데 하긴 왜 안 늙었겠소? 세파에 시달리는 동안에 어느덧 오십이 넘었구료." "저도 많이 변했지요?" "아니, 메르세데스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뭘...." 나는 메르세데스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녀가 집으로 들어가자고 잡아끄 는 것을 나는 간곡히 사양했다. "아니, 들어가는 것만은 사양하겠어. 보아하지 결혼을 한 모양인데 남편이 어 떤 사람인지도 모르잖아?" "그런 염려는 할 것도 없대두요. 오빠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이도 오빠를 잘 알고 있어요." 메르세데스는 발까지 구르면서 팔을 끄는 판이라 나는 억지로라도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따다. 정말이지 잘 사는 집은달랐다.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이든 값지고 특이했다. 모 자이크 물건들이 여기저기 알맞게 놓여 있었고, 뜰에는 분수가 보였고, 고급 유 리램프를 곳곳에 달아놓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구두라도 좀 닦고 옷도 다른 것으로 갈아입었을 것을. 후회막심이었 다. 하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오빠는 너무 야심이 많아서 나하고 결혼을 하지 ㅇ낳더니 그것보세요. 결 국..." "하긴 메르세데스와 결혼을 안한 죄로 얼마나 일생을 고달프게 살았는지 몰라. ㄱ렇지만 그 때문만도 아냐. 실은..." 그 순간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사촌과 결혼하면 집안 망할 줄 알아라. 우선 너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자식을 낳더라도 천치바보나 병신 자식을 낳게 될 것이다. 우리 주위에도 이런 경우가 얼마든지 있지 않으냐?" 결국 나는 어머니의 권유대로 메르세데스와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이 다. 메르세데스는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 나의 어머니와 형제 들의 죽음과 또 자신의 결혼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아들 둘, 딸 하나, 이렇게 삼남매를 두고 있다고 했다. "큰애는 딸이에요. 벌써 처녀가 다 되었어요. 다들 처녀 시절의 나하고 똑같다 고 그래요. 아들들은 자기 아버지를 쏘옥 뺀 거나 다름없이 닮았고..." 메르세데스의 남편은 육십을 넘은 노인으로 어느 모로 보나 훌륭한 분이라고 했다. 원래 의학박사였는데 도중 사업에 손을 대어 크게 치부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메르세데스의 생애는 글자그대로 평탄하고 안락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메르세데스와 이갸기가 끝나자 나는 내가 살아온 생애를 이야기 했다. "그저 난 여행을 해서 여행객이 됐고, 또 여행객이 됐기 때문에 여행을 했을 뿐이야. 메르세데스, 그동안 숨낳은 곳을 찾아다녔고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 지.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피곤을 느꼈어. 새롭고 신기한 경치를 관망하는 것도 지겨워졌지. 다시 말해서 어디 가서 푹 쉬고 싶었어. 나이가 드니까 가정이 그리 워지더군." "그럼 오빠, 우리 집에 와 계세요. 여기서 편히 쉬실 방을 마련해 드릴께요. 조 금도 부담을 느끼지 마세요. 오빠의 어머니가 저를 기르지 않았어요? 그러니 난 오빠 어머니나 오빠에게 태산 같은 은혜를 입은 거에요. 그러니 우리 집 그이한 테 조금도 미안할 게 없어요. 더군다나 오빠를 내가 모셔온 건데요 뭐. 어쨌든 내일 당장 우리 집으로 오세요" 물론 나는 굳이 사양했짐나 그녀도 웬간해서 고집을 굽히려 들지 않았다. 잠시 후에 두 아이가 들어왔다. 학교에서 오는가 본데 망나니들처럼 막 뛰어 오다가, 엄마가 어떤 사나이와 부담없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이 둥그 레져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메르세데스는 내게 애들을 소개시켰다. "꼰스딴띠노 아저씨다. 왜 엄마 사촌오빠라고 늘 이야기하던 바로 그 아저씨란 말이야." 나는 두 애를 껴안았지만 애들은 나를 경원하는 눈치였다. 말도 않고 ㅣ분 나 쁜 표정으로 뚱하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못해 메르세데스가 "너희들은 정원으로 나가 놀아라."하고 말하자 애들은 그제서야 신이 나서 밖 으로 뛰어나갔다. 물론 나도 애들이 나가는 것을 보고 속이 후련하도록 시원했 다. 뭐 메르세데스와 단둘이 있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솔직ㅎ리 말해서 나는 이 애들에게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두 녀석이 한결같이 뚱뚱 하고 못생기고 게다가 어린 놈들이 벌써부터 거만한 냄새까지 피우니 말이다. 어째서 저렇게 상냥한 메르세데스가 저런 곰퉁이 같은 아들들을 낳았을까? 박사도 얼마 안 있어 귀가했다. 정말이지 이 위인도 어쩌면 자기 아들들을 닮 ㅎ았는지 모르겠다. 뚱뚱한 데다가 흑발이고 거만하고 억척스러운 것이 그야말 로 이경우에는 자전부전이다. 박사는 나를 보자 흠칫.놀라는 기색이었지만 그것은 순간의 일이었고, 여간 예 의바르게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이ㄸ 메 르세데스가 재빨리 나를 남편에게 소개했다. "내가 늘 말하던 사촌 오빠에요. 지금 고향으로 돌아오셨다는데 당분간 우리 집에 와서 머물게 될 거에요." "정말 이렇게 만나보니 반갑소. 언제 도착했소? 그런데 내가 상상했던 것 보 다 더 젊고 멋있게 생겼는데.... 난 나이가 더 많은 사람으로 알고 있었거든..." 박사는 반색을 하면서 고급 여송연을 권했고, 반세기나 묵힌 최고급 포도주까 지 가져오게 하였다. "그래 많은 곳을 여행했다니 참 재미있었겠소. 얘기 좀 들려주시지요." 내가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인의 짧게 내 딛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집 아가씨에요. 근처 집에 놀러 갔다가 지금 돌앙오는 모양이에요." 나는 메르세데스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과연 '아가씨'였다. 응접실 문이 열리 면서 나타난 것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었다. 나는 자 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용수철 튀듯 벌떡 일어나면서., "메르세데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순간적으로 내 존재의식은 20년전으로 돌아왔다. 그렇다! 지금 나타난 여인이 야말로 바로 20년 전의 바로 그 메르세데스가 아닌가? 뭐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그 메르세데스 자신인 것이다. 어쩌면 저렇게도 얼굴이 같을까? 아, 저 초 록빛의 눈하며 꿀이 철철 넘쳐흐를 듯한 입술은 바로 너의 눈이고, 너의 입술이 었단다. 내 사랑하는 메르세데스야. 너는 아침마다 붉은 미소와 생기발랄한 모습 으로 내게 인사를 하러 왔었지. 그런데, 바로 그때의 네가 그때의 그 모습 그대 로 지금 나타나다니, 정말 꿈만 같구나. 그렇지만 나는 바로 지금 너의 자태를 지난 20년동안이나 내 마음 속에 언제나 품어두고 있었단다. 물론 모두들 내가 쩔쩔매는 꼴을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메르세데스는 나를 보고, "아니, 이 애의 이름은 나처럼 메르세데스가 아니라 로사리오라고 부른다우"하 고 말하면서 자기 딸을 내게 소개했다. 나는 로사리오를 보면서, "인사하자마자 자리를 뜨는 것은 결례겠지만 너무 늦었으니 이만 용서해줘요. 곧 또올께요. 그리고 참 속도 좋지 않구먼. 아까 그 독한 포도주가 아무래도....." 하고 우물쭈물 자리를 뜰 구실을 말하자 박사도, "하긴 오래된 술이라 무척 독하지요. 그러고 보니 나도 속이 좋지 않은걸."하 고 맛장구를 치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2 그날 밤 늦게 간신히 눈을 붙여 잠이 들자, 나는 꿈 속에서 여행을 하고 있었 다. 나는 배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로사리오를 보았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니 로사리오는 그 맑고 커다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보니 그 크고 푸른 바닷물 전체가 그 눈동자를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 대목에서 그만 눈을 감고 침대에서 돌아누웠다. 깨어나서 가만 생각 해보니 나같이 늙은 게 그런 꿈을 꾼다는 게 도대체 웃기는 일 같았다. 나는 일찌감치 일어나서 그 다음 날 떠날 준비를 했다. 아예 이 고장을 하직 할 작정이었다. 그때 하녀가 들어와서 로드리게스 박사가 나를 찾아와ㅆ고 전해 주다가 짐싸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란 어조로, "아니 벌써 떠나세요?" 하고 물었다. "내일 첫 차로 떠나겠소." "그렇지만 벌써 한 달치 방값을 선ㄴ불하셨잖아요?" "뭐, 그건 그때 사정이었으니까..." 하녀가 나가자 이내 박사가 들어왔다. "이렇게 일찍 방문에서 실례가 막심하외다. 그러나 하루라도 이런 하숙집에 머 물게 하는 것이 나로서는 더 큰 결레가 되는 것 같아 빨리 집으로 모셔가려고 온 거니 과히 허물마시오" 하고 너스레를 늘어놓으면서 자기 집으로 가자고 끌 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박사님, 내일 당장 출발하려고 이렇게 짐까지 다 싸놓았습니다." "그렇지만 허락 없이는 출발 못할 거요. 이건 내 단독 의사가 아니라 내 아내 와 딸애의 의사도 들어있소. 그러니 제잡담하고 짐들은 그대로 두시오. 곧 사람 을 보내서 짐으로 가져오도록 할테니까...." "박사님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급한 용무 때문에 곧 돌아가지 않으면 안될 일이 생겼어요." "구구한 말은 필요없소. 솔직히 말해서 용무란 바로 이 고향에 있는 게 아니 오? 가족들이 있는 여기 말이요. 메르세데스, 로사리오, 애들이 다 가족이고 또 나도 그 축에 끼지 않소?"" "죄송합니다. 박사님. 정말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고집을 부려 죄송하지만, 저는 어쨌든 예정대로 출발해야겠습니다." "꼰스딴띠노씨, 나는 그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오. 내 아내의 부모. 즉, 내 장인 장모되는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메르세데스가 졸지에 천애 고아가 된 것을 당신 어머니가 길러주지 않았소? 그러니 당신어머니는 메르세데스에게는 그야말 로 친어머니보다 더한 분이요. 낳은 정ㅇㅇ보다 기른 정이 더 하다고 하지 않 소? 그러니까 나도 당신의 어머니, 아니 메르세데스의 친어머니보다 더한 분에 게 태산 같은 은혜를 입은 거나 다름 없단 말이요. 따라서 내가 당신을 우리 집 으로 모시고 가는 건 기쁨이란 말이요. 내 말 알아듣겠소?" "박사님께서 제게 친절을 베푸시는 것을 은혜갚는 것으로 생각하신다면, 저로 서는 더욱 더 수락할 수 없읍니다." "글쎄, 그 쓸데없는 이론은 그만두고, 자, 우리 집에 오는 거로 결정합니다. 그 럼 이따 봅시다. 기다릴 테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박사가 말한 것을 기억나는 대로 여기에 옮겨 놓았지만, 어쨌든 그의 말에는 성실성이 철철 넘칠 정도로 차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메르세데스에게 은헤를 베풀었다고 해서 그걸로 어떻게 할 새ㅇ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정오쯤에 방문 앞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 웬일인가 하고 일 어나서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원 이런 극성들이 있나? 박사님, 메르세데스, 또 로사리오까지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는가! 그것까지는 좋은데 그들은 승낙도 없 이 막무가내로 트렁크를 들고 나가지 않는가? 이렇게 되니 나는 억지로라도 그 들의 정성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고 하숙집을 나와 새로운 가정으로 들어가게 됐던 것이다. 3 나의 새로운 방은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정원에 붙어 있는데다가 햇빛도 잘 들어오고 또 전망도 좋았다. 멀리 시선을 던지면 예쁜 마을이 눈을 황홀하게 했고 저 아래쪽으로는 맑은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내 방 은 또 어떤가 하면 누가 봐도 잘 정돈되어 있고, 깨끗했다. 내 침대 곁에는 어머 니의 사진이 있고 정면에 걸려있는 라파엘의 '성모마리아오 아기예수'의 명화가 방안 분위기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그외에 파이프 하나와 서반아 및 외국의 유 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나란히 책상 위에 꽂혀 있었고, 무수한 작은 그림들은 벽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것이 정성스런 손으로 다듬어 지고 가꾸어진 흔적이 눈에 띄었다. 이 정도면 아주 편하게 지낼 수 있어. 참 마음에 들어. 나는 혼자 있을때마다 방 안을 왔다갔다하며 중얼거렸다. 나는 창가로 가서 고개를 내밀어 정원의 향기를 맡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음 껏 들이마셨다. 카나리아 새들이 내 방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비둘기들 이 내 방 창가로 날아들기도 했다. 이 집으로 와서의 며칠 동안 나의 생활은 그저 편하고 즐겁기만 했다. 메르세 데스는 항상 상냥했고 박사는 그 이상 더 친절할 수가 없었다. 내가 곰퉁이라고 흉을 봤던 애들까지도 여간 조심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침에 재 방 앞을 지 나갈 때면 혹시 내가 깰까봐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발소리를 죽이고 걸어갔다. 로사리오는 나를 어린애로 아는지 눈깔사탕도 갖다주고 했지만, 내 방에 꽃을 꽂아주는 것도 역시 그녀였다. 또 내가 좋아하는 음반을 골라 축음기를 틀어주 기도 했다.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면서 외국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그러나 왜 그런지 나는 그런 편안한 생활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했다. 언제나 여행하고 있는 기분이엇다. 기차의 기적소리는 나를 기다리느라고 못 떠나는 기 선의 고동소리처럼 들렸고, 정워느이 향기는 외국에서 본 멋진 정원들에 대한 회상을 되살려 주었다. 그리고 방 안까지 들리는 거리의 소음도 마치 바다의 노 호소리처럼 들렸다 방 안에 얌전히 놓여 이쓴ㄴ 트렁크만 봐도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속이 답답했다. 왜 나는 아직도 그 트렁크를 갖고 떠나지 않는가? 그러 고저러고 내가 영영 여기서 떠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어쨌든 나는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책이나 읽고 또, 그렇지 않으면 로사리오 엥게 이야기나 들려주며 시간을 보내는ㄴ 그런 생활엔 도대체 익숙해 질 수가 없었다. 어느덧 나는 트렁크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 렇게라도 하지 안흥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라도 해야 여 행을 하고 싶은 열망이 다소 나마 가라앉았다. 아니면 옛날에 찍은 사진들을 들 여다보기만 해도 답답하던 속이 어느정도 후련 해 질 수 있었다. 어느 날, 내가 또 예의 광증을 부리고 있을때, 느닷없이 들이닥친 로사리오에 의해 들키고 말았다. 로사리오는 방바닥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것들을 보고, "아저씨, 왜 이것들을 정리 안해요? 지금 당장 정리해요."라고 하더니 모든 것 들을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물건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희귀 한 보석들, 여자 사진들, 원색 사진들, 일기장 등, 로사리오는 이렇게 정리한 것 들을 한 묶음씩 묶어서 트렁크에 넣고 잠갔다. 그것을 본 나는 갑자기 장난감을 뺐긴 어린애 같은 꼴이 되고 말았다. 더 심하게 말해서 양로원이라도 간 기분이 었고 앞으로는 정신병어ㅜ에 갈 일밖에 없을 것 같았다. 4 몇 주일이 지나자 나는 나는 현저하게 달라진 집안의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 었다. 누구든지 집에 손님이 오래 묵게 되면 그 존재에 대해 거의 무감각해지고 만다. 따라서 손님이 처음 왔을 때와 비교해서 주인의 대하는 품이 사뭇 달라진 다. 이거야 말로 극히 자연스렁누 현상이다. 나는 이 집에서도 그러한 자연스러 운 변화를 몇 주일이 지나자 느꼈던 것이다. 그럼 어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박사의 귀하신 두 아드님은 학교에 가려고 일찍 일어나서 이제ㅡ 나의 존재에 대해서는 통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뜻인지 아무튼, 큰소리와 함께 휘파람을 불 고 킁킁거리며 집이 떠나가도록 법석을 떨었다. 이렇게 되니 나도 이런 분위기 에 맞추어 아침 여섯 시에 눈을 뜨는 습관을 기를 수 밖에 없었다. 여섯 시라면 애들이 일어나기 몇 분전이었다. 그뒤부터는 잠이 깬 채 문 여는 소 리와 큰소 리로 지껄여대는 애들의 말소리들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하긴 애들이란 누구네 집 애든지 그런 법이니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달라진 박사의 태도였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거만하고 억 척스러운 인상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식탁에 앉았을 때만 해도 전에는 애써 명 랑쾌활한 표정을 지으면서 가끔 내게 질문도 던지곤 했다. 피라미드의 칫수가 얼마냐는 둥, 고대 세계에 대한 여행 안내서가 있으면 보여달라는 등, 자기도 그 곳을 방문하고 싶다는 등, 여러가지를 묻고 떠들고 했던 것이다. 또 로사리오처 럼 나의 과거지사에 대해서도 들려달라고 했다. 나는 아는 대로 모르는 대로 외 국을 돌아다니면서 일어난 일, 고생한 일 등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박사는 굳게 입을 봉한 채 식사만 끝나면 벌떡 일어나 정원으로 직행했고 커피느느 그곳에서 자기 아내와 딸과 함께 마시는 것이었다. 그나마 식사시간 이외는 그 잘난 얼굴 처다보기가 하늘의 별따기였으니, 그 까 닭은 늘 사무실에만 처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메르세데스의 태도는 조금 변한 것 같긷도 하고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내 신상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나 흥미가 없는 듯했고, 박사 처럼 식사시간에야 겨우 몇 마디 말을 걸곤 했다. 그러나 식사시간 이외에 얼굴 을 마주 대하게 되면 으배에서 일어나는 제반사에 대해 곧잘 지껄였다. 조금도 변함이 없는 건 로사리오뿐이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내게 가까이하려 는 것이, 개인 지도를 받던 것도 금나두고 그 시간을 나와 같이 지ㄴ느느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진종일 나와 같이 붙어 있는 편인데, 그렇다 고 무슨 심각한 화제라도 있어서 서로 열이 나서 주고받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 었다. 그저 걱정 많은 인생에게는 따분할 정도로 들리는 그저 그렇고 시시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래, 로사리오는 애인이 있나?" "그럼요, 이름이 루시아노예요. 그러나 아저씨가 오고 나서 깨끗하게 헤어졌어 요." "그건 왜?"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루시아노가 어딘지 모르게 시답잖았어요." 로사리오야 말로 황혼에 접어든 나의 인생에 빛을 비쳐주는 사랑의 천사가 아 니고 그 무엇인가? 그러나 나는 어쩐지 두려웠다. 더욱이 그녀는 내가 마음 조 이는 것을 아무 거리낌없이 해냈다. 그림을 들여 다본답시고 그 금빛처럼 빛나 는 머리카락으로 내 얼굴을 간지럽히기도 했고 나의 건강을 염려해주는 가 하 면, 노상 방을 치워주는 것도 그녀였다. 또 그뿐인가? 내가 카나리아의 노래소리 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자기 새장을 내 방 옆에 걸어주는가 하면, 파이프는 항상 영국제 고급 여송연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해냈다. 박사에 대해서 말이다. 박사는 집에 들어 오기만 하면 제일 먼저 부르는 것이 로사리오의 이름이었다. 그러면 로사리오는 할 수 ㅇ벗다는 듯이 나를 버리고 자기 아버지의 시중을 들러갔다. 박사는 억지 로라도 구실을 만들어서 로사리오에게 무엇이든 시켰다. 장부책을 정리해라. 손 수건을 갖다 달라. 또 무엇 무엇을 가져와라... 이렇게 되니 로사리오는 아버지가 돌아오는 소리만 들리면 내 손을 한 번 꼭 쥐고는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는 것이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호로 버림을 받은 듯한 씁슬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비록 로사리오의 위로를 받아도 말이다. 지겹고 밉살스런 애들까지 이제는 정말 참을 수 없는 장난을 하기 시작했다. 카나리아 새장을 아주 먼 곳으로 갖다버린 것이다. 이것까지는 좋은데 어느날, 나는 신발을 신으려다 그만 땅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애들이 못으로 신발을 땅바닥에 박아 놓았기 ㄸ문이다. 그러나 그 뿐인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이미 이 집에서 사라진 지 오래고 대신 들리는 것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유행가 부스 러기뿐이었다. 예를들면, '벽돌'이라는 노래 말이다. 어느 땐가 내가 그 노래를 듣 기만 해도 지겹다고 투덜댔더니, 그 짓궂은 애들이 서른 네 번이나 연달아 그판 을 틀어대는 것이 아닌가? '벽돌은 감옥에 있다네...."로 시작되는 그 노래를 말이 다. 이렇게 되니 정말 감옥에 갇혀 있는 놈은 내가 되고 말았다. 결국에 가서 동생들이 나를 못 살게 군다는 사실을 안 로사리오는 문제의 판을 산산조각 내 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집안은 난리판이 됐고 나중에는 박사가 개입해서 새 판 을 사주겠다고 애들에게 약속함으로써 사건은 겨우 일단락지어졌다. "이제부터는 너희들 마음대로 들어라. 누가 뭐라나 보게." 박사는 이렇게 말하면서 악머구리 끓듯 하는 자식들을 달랬다. 그렇지만 약속 은 지키지 않았다. 또 어느 ㄸ는 큰 녀석이 자기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하던 끝에 나를 '늙은 이'라고 부르는 것을 얼핏 들었다. 늙은이- 이제 나는 이 집에서 늙은이가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박사는 '아 빠'고 메르세데스는 '엄마'고, 로사리오는 '로사리오'고 나는 '늙은이'라는 칭호를 얻은 것이다. 이거야말로 비극이 아니고 그 무엇이랴! 늙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결코 불행이 될 수 는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늙 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같이 당하면서 부부가 함께 늙어 간다면 그거야말로 행복한 일일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귀여운 자식들이 목에 매달리면서 재롱을 떠는 것을 보면 늙는 것도 하나의 낙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경우 '늙은이'가 돼버린 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슬프고 기막히고 원통하 고 절통한 일이라고 안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결심했다. 떠날 것은... 그러나 떠나려면 무슨 구실을 만들어야 된다. 갑 자기 친구의 급한 전보를 받았다고 꾸며댈까? 다음 날 아침, 박사는 사업관계로 시골로 떠나버렸다. 그가 들어오기 전에 떠 날 새ㅇ을 하고 나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뭐 이러니 저러니 하고 박사에게 길 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사리오는 내가 떠난다고 말하자, 내 목을 껴안으면서 울음을 터뜨렸따. 오 하나님! 이미 늙은이가 된 처지에 이렇게 꽃다움 처녀로부터 사랑을 받게 해 주 시다니, 정말 너무합니다. 로사리오가 울고 있는 동안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의 금빛 머리카락을 만지작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저 더도 말고 스무살만 더 젊었어도... 나는 로사리오를 위로하기 위해, 이 읍을 떠나지 않고 여관으로 가겠다고 말 했다. 한달치를 선불했으니까 그저 짐만 갖고 가면 된다고 했다. 이말을 듣자 로 사리오는 진정이 되는지 울음을 그치고 짐 싸는 일을 도와주었다. 나는 짐꾸러 미 하나를 로사리오에게 주면서 "이 짐꾸러미는 아주 값나가는 것들만 들어있으니 로사리오가 보관하고 있는 게 좋겠어. 내가 죽어버리면 그때는 로사리오가 영원히 간직해. 보석들이니 아주 값진 것들이야. 이 오팔로 말할 것 같으면 해가 가는데 따라 색이 변하고 저 동 양의 진주들은 언뜻 보기에는 죽어 있는 것 같지만 로사리오가 어느때라도 쓰게 되면 다시 빛을 발하게 될거야. 참 이건 '궤린'(불란서서가:역주)의 진짜 그림이 야. 그리고 여자 그림들은 다 찢어도 좋은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의 그 림만은 그냥 놔둬요. 그런데 로사리오. 보석이니 뭐니 해도 이세상에서 가장 값 있는 것은 오직 젊음과 아름ㅁ다움 뿐인 것 같아." 잠시 후 메르세데스가 내 방에 들어왔지만 내가 짐을 챙기는 것을 보고도 그 리 놀라지 않았다. "떠날려고요?" "응, 여관으로 돌아가겠어." 메르세데스는 더 이상 캐묻지도 않고 오히려 짐싸는 일을 도와주었다. 나는 두 모녀를 양쪽에서 껴안고 작별의 키스를 하고는 그 집을 나와버렸다. 트렁크 는 두 짐꾼에게 맡겼기 때문에 나는 빈 몸으로 따라만 갔다. 마음은 그 무엇을 지고 가는지 무척 무거웠다. 거리에 나와 뒤를 돌아다보았 더니 베란다에서 아직도 로사리옥가 손수건을 흔들고 있었다. 5 기차는 들판을 지나 신나게 달리면서 길게 기적을 울렸다. 철길 가에 있는 집 들의 뒷마당은 쉴 새 없이 내 눈앞에 가까이 왔다간 또 멀리 가는 사이, 집이니 나무니 개울 등이 빙글빙글 돌면서 내 뒤로 밀려 가고 있었다. 저 뒤에서는 아 직도 그 누군가 베란다에서 손수건을 흔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평선이 멀리 보였다. 저 푸른 하늘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