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세계명작산책 4 삶의 어두운 진상 지은이: 이문열 출판사: 살림 '세계명작산책'을 내며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 속에 다양하면서도 잘 정리된 전범이 있어야 한다. 소설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일에도 좋은 전범들을 가지는 것은 원리의 탐구를 위해서건 가치판단의 기준으로서건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학문적 으로 승인받은 놀리에 따라 소설을 쓸 수도 있지만 그것은 문법만으로 회화를 배우는 것보다 더 비효율적이고, 풍부한 전범에 바탕하지 않은 이론중심의 연구 는 소설을 화석화시킬 우려가 있다. 이런저런 이름으로 문학, 특히 소설을 가르치는 자리에 서게 되면서 내가 늘 아쉽게 생각해온 것 중에 하나는 소설연구와 창작에서 아울러 전범이 될 만한 좋은 단편선집이었다. 여기서 지배적인 창작 및 비평의 풍토 때문이다. 요즘에는 조금씩 라지고 있지만 우리 문단의 등단절차는 대개 단편중심으로 되 어 있다. 평론도 사정은 비슷하다. 간혹 장편만으로 대중적인 이름을 얻는 수가 있기는 해도 단편으로 검증받지 않은 작가의 장편에 대해 진지한 평론은 대체로 의심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가장 강하게 추측되는 것은 전일적인 습작기간이 길게 허영될 수 없는 우리의 문학환경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른바 문학청년들 의 괴로운 성장과정은 근년까지의 각박했던 사회여건을 감안하면 일없는 빈둥거 림으로 여겨지기 십상이었다. 사회는 그런 젊은이들에게 관대할 수 없었고, 많이 나아졌다는 지금도 그들을 걱려하거나 그들의 미래에 투자할 여유까지는 기르지 못했다. 따라서 이 땅의 문학지망생이 고통스럽지 않게 쓸 수 있는 습작기간은 대개 학창시절의 자투리 시간과 졸업 후의 한두 해가 전부가 되고, 더 있어봤자 생업 을 따로이 가진 일요작가로서의 몇 년이 보태질 뿐이다. 그 경우 손쉬운 습작의 대상은 아무래도 장편보다는 짧은 시간에 완결을 볼 수 있는 단편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경험으로 미루어봐서 그런 습작방식도 반드시 나쁜 것 같지는 않다. 장편이든 단편이든 크게는 같은 소설이라는 점에서 습작의 많은 부분은 겹쳐지 기 마련이다. 더구나 단편에서의 철저함과 정확함을 익혀두는 것은 자칫 느슨해 지기 쉬운 장편의 형식미를 다잡아주는데 아주 유용하다. 장편작가와 단편작가 를 구분하는 듯한 서양에서도 대부분의 위대한 작가들은 그 둘을 겸하고 있는데 그 또한 단편습작의 유용성을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찾아보면 전범으로 쓸만한 국내작가들의 단편은 작가별 시대별 에, 때로는 주제별로까지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수고스럽게 이 책 저 책을 뒤져 찾지 않고도 그대로 교재가 될 만한 단편선집도 여러 종류 가 있다. 학자들이나 출판사의 노력도 있었지만 달리 보면 결국은 국문학 안 에서의 문제라 선별대상이 한정돼 있다는 점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현대소설의 전범을 찾는 일이라면 국내작품만으로는 안 된다. 어떤 논리로도 우리 소설이 서구의 현대소설을 전범으로 삼아 성장해왔다는 사 실만은 부인하지 못한다. 설령 그것을 우리 전통소설에 가해진 '서구의 충격' 이 란 말로 바꾼다 하더라도 세계 문학, 특히 서구의 현대문학이 지닌 전범으로 서의 중요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런데 외국단편들을 전범으로 가르치려 들면 먼저 빠지게 되는 것은 그 소재 를 찾는 어려움이다. 작가별로 단편집이 몇 나와 있기는 하나 기준이 무엇인가 짐작이 가지 않을 만큼 자가와 작품의 선정은 혼란스러고 묶는 방식은 한 권을 다 읽어내기에도 따분할 지경이다. 그래도 마음먹고 고른 흔적이 보이는 것은 서머셋 모옴의 '세계의 문학백선' 인데 그와 동시대에 접근할수록 난조를 보이고, 다음이 구가별로 묶은 '세계단 편선'류인데 그것은 또 천편일률적인 체제에다 대부분은 20년 이상 묵은 전집 들이라 도서관이 아니면 찾기 어렵다. 그리고 나머지는 구닥다리 세계문학전집 속에 흩어져 있거나 잡지사들이 생각난 듯 끼워넣는 해외명작소개란에 반짝 보 이고는 자취를 감춘 것들이었다. 어떤 작품은 끝내 번역되지 않아 해당언어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은 읽어볼 수 없게 되어 있기도 하다. 그 바람에 나는 여러 해 전부터 전범으로 쓸 만한 세계명작단편선집을 자신이 한 번 엮어보았으면 하는 분에 넘치는 야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좀체 여유가 나지 않다가 93년 말에야 '살림출판사'의 격려와 협조에 힘입어 본격적인 작품 수합에 들어갔다. 먼저 젊은 내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작품들의 목록을 작성하 고 이어 기존의 여러 선집들과 출판사 직원들이 복사해온 문학잡지의 해외 특 집란을 검토해 부실한 기억을 보충했다. 그리하여 94년에는 대략 지금 이 선집 에 실린 작품수의 두 배 정도로 목록이 압축됐다. 하지만 그 목록이 한 번 더 걸러지고 책의 편제가 지금과 같이 확정된 것은 95년 들어서가 된다. 마침 재직하는 대학에서 '현대문학특강'을 맡게 되어 나는 그 시간을 작품선택과 해설의 객관성을 검증하는 기회로 삼았다. 특별히 내용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강의인데다 그 작업이 학생들에게도 유익할 것이라 믿어 겁 없이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 내 강의안은 비교문학과 연관지어 나라별로 몇 주일을 할당하고 그 나라 단편들 중에서 전범이 될 만한 것을 골라 읽는 것으로 짜여졌다. 하지만 그 강 의안은 곧 철회되고 말았다. 그렇게 골라지는 작품들은 바로 기존의 국가별 명 작선집과 다를 게 없어 개별적인 감동의 기억은 줄지 몰라도 머릴 속에 정리된 효과적인 전범으로는 기능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수정한 강의안이 바로 지금 이 선집의 편제다. 나는 학생들에게 매주 한 주제로 전범이 될 만한 열 편씩을 골라주고 찾아보게 한 뒤 그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것 한 편씩을 골라 독후감을 작성하게 했다. 강의는 바로 그 독후감의 발표와 토의였고, 시험은 학생들이 그렇게 제출한 독후감에 대한 평점을 집게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물론 기존의 대학교 국문과 교과과정에 대해서도 나름으로는 용의 주도하게 배려했다. 국내작품의 전범집으로 쓸 만한 단편선집을 하나 골라 주교재로 삼고 내가 선정한 외국작품들은 부교재란 명칭을 달므로써 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교 과과정에 대한 경의는 충분히 표했다. 다만 주교재는 각자 집에서 읽어보는 것 으로 하고 부교재만 함께 토의해나가로 했을 뿐이었다. 처음 한두 주일은 그럭저럭 지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벌였는지 실감하기 시작했다. 수천 수만 편이 넘을 세계각 국의 단편 중에서 어떤 주제로 전범이 될 만한 작품 열 편만을 고른다는 것은 엄청남을 넘어 불가능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용기는 무지에서 비롯된 무모한일 뿐이었다. 선정의 객관성도 나를 몹시 괴롭혔다. 그게 바로 문학에 대한 내 안목을 드러 내는 것이란 데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모든 게 자신 없어졌다. 그때 다시 유혹 이 된 게 기존의 선집들이었다. 특히 브룩스와 워렌, 혹은 노튼 같은 문학이론가 들이 선정한 영문판 선집의 체제가 강렬한 유혹이 되었다. 그렇지만 양쪽 모두 선정기준에서도 많은 부분 동의 하기가 어렵거니와 주제별로 뽑는 데는 거위 참 고가 되지 못했다. 그 같은 어려움들을 해결하는 길은 결국 선정범위를 나의 독서체험으로 축소 하고 기준은 주관적인 감동을 삼는 것밖에 없었다. 네 번 째 주로 접어들면서 나는 학생들에게 처음의 자신만만함과는 달리 풀죽은 목소리로 그와 같은 범위 와 기준의 축소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을 읽을 이들에게도 솔직히 고 백한다. 내 희망은 틀림없이 전세계를 망라하는 객관적인 전범의 선정이었으나 이루어진 것은 내 대단찮은 독서범위 안에서 주관적으로 고른 작품들의 집합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선집의 유용함에 대해서는 한 가닥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선집에 적용된 범의와 기준은 거치나마 삼십년이 넘는 내 문학 체험의 한 결산이며, 나의 소설도 결국은 이 범위와 기준에 바탕하고 있다. 내가 쓴 모든 것이 한 점 남김없이 문학사의 쓰레기더미에 묻혀버리지 않 을 것이라면 이 선집도 단편소설의 창작에서든 연구에서든 약간의 유용함은 있 을 것이다. 특히 주제별로 세계각국의 단편들을 정리한 것은 이 선집의 한 자랑 이 될 것이다. 써놓고 보니 딱딱한 교재의 서문 같은 데가 있어 한 마디 덧붙인다. 틀림없이 이 선집을 엮은 의도는 소설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였지만 어쩌면 실제적 인 효용은 교양으로 접근하는 쪽에 더 높게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우리 삶의 다 양한 주제들이 세계 각국의 거장들에 의해 어떻게 소설로 표현되고 있는지를 비 교하며 읽을 수 있다는 것도 흔치 않은 교양체험이 될 것이다. 특히 인문교육이 강화되고 있는 지금의 추세에서도 청소년들에게 활용도 높은 문학교재가 될 수 도 있느리라고 믿는다. 아울러 밝혀두고 싶은 것은 이 무모한 시도를 도와준 사람들이다. 시작은 혼 자였지만 이 선집이 책으로 묶어나오는 데는 여러분의 도움이 있었다. 93년부터 내가 준 목록을 들고 이 도서관 저 도서관 뛰어다니며 작품을 복사하느라 애쓴 '살림출판사' 편집부 직원들은 그 만큼 내 노고와 시간을 절약시켜 주었다. 장경 렬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살림출판사'의 여러 편집위원들은 나의 천학과 단견 에 좋은 걸름장치가 되어주었으며 세종대의 강자모, 박유하 교수도 작품선정과 번역에서 귀한 시간을 쪼개준 분들이다. 한 학기 내내 작품조사와 보고서 작성 으로 고생한 '현대문학특강' 수강생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한 다. 1996년 봄 이문열 제5권 '삶의 어두운 진상' 서문 사물의 특성을 나타내는 말들은 언제나 상반된 의미로 짝지워져 있다. 우리에 게 일어나는 모든일은 기쁘거나 슬프며 괴롭거나 즐거우며 쉽서나 어렵다. 존재 하는 모든 것은 길거나 짧으며 크거나 무겁거나 가볍다. 우리는 그것을 사물의 양면성이라 부른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사물의 양면성이란 기실 인식 주체의 관점과 기준에 따른 자의적 분벼에 지나지 않는다. 무슨 일이 기쁘거나 슬프다는 것은 우리가 기준으로 삼은 어떤 일보다 기쁘거나 슬프다는 뜻이다. 무엇이 크거나 작다는 것은 우리가 기준으로 삼은 어떤 일보다 크거나 작다는 뜻이다. 거기다가 우리의 감각과 의식은 고칠 수 없는 편향성을 지녔다. 우리 시선은 동시에 상반된 것을 볼 수 없고 우리 의식은 한 사물에서 상반된 개념을 받아들 이지 못한다. 사물은 언제나 한 특성, 한 측면으로만 우리에게 파악된다. 그런 감각과 의식의 편향성은 일견 세계를 명료하게 만들지만 진실에서는 멀 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신있게 이 일은 어떻고 저것은 무엇이다, 라고 말하 지만 실은 자신의 주관적 기준에 따라 사물을 재단하고 있을 따름이다. 때로 사 려 깊은 듯 승인하는 존재의 다양성도 대개는 그런 편향성의 조합에 지나지 않 는다. 삶을 보는 우리의 태도는 더욱 그러하다. 슬픔과 외로움, 미움과 성냄은 긴장 이고, 그 긴장을 못견뎌하는 우리는 언제나 삶의 밝은 측면에 매달려 간장을 피 하려 한다. 몸은 일용의 양식을 위해 나날이 수고로움을 겪으면서도 그것은 다 만 일시적이며 삶은 그렇지 않은 그 무엇이라고 믿으려 애쓴다. 그렇지만 우리가 삶의 어두운 진상을 끝내 외면할 길은 없다. 주관적 기준을 버리면 모든 상반된 것은 이어져 있다. 어둠은 밝음의 일부분이거나 밝음은 어 둠의 일부분이다. 오히려 그 어두운 진상을 인식하는 것은 삶에 대한 우리의 지 식을 깊이있고 온전한 것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 많은 비관적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작가들도 오래 전부터 그 점에 유의해 왔다. 그들이 일쑤 삶의 밝고 아름다운 표피를 찢어발기고 감추어진 그 그늘을 들춰내는 것은 심술이나 비뚤어진 인생관 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삶은 적극적 으로 궁정하기 위해 오히려 의심하고 부정해 보아야할 명제인지 모른다. 이에 '삶의 어두운 진상'이란 표제로 한 권을 묶어본다. 골짜기 (In the Ravlne) 안톤 체홉 지음 김숙향 옮김 1 우클레예보 마을은 골짜기에 묻혀 있어서 큰길이나 정거장 쪽에서 보면 겨우 종루와 면직물 염색공장의 굴뚝이 보일 뿐이었다. 근처를 지난는 사람들이 이 마을에 대해서 어떤 마을이냐고 묻기라도 하면, 이 고장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렇게 대답했다. "이 마을은요, 장례식 때 교회 집사가 캐비어를 몽땅 먹어치운 바로 그 마을입 니다." 언제든가, 공장주인 코스추코프네 집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는데, 그때 늙은 교회 집사가 자쿠스카(러시아 스낵의 일종: 역주)속에 굵은 캐비어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정신없이 먹어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쿡쿡 찌르 기도 하고 소매를 잡아당기기도 하면서 눈치를 주었지만 그는 맛에 취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무슨 짓을 당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먹어대고만 있었다. 결국 그는 항아리 속에 들어 잇던 4파운드의 캐비어를 깨끗이 먹치웠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지도 이미 몇 년이 지나고 당시의 교회 집사도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 캐비어 이야기만은 아직도 잊혀지지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마을의 생활이 그 정도로 삭막했던가, 아니면 마을 사람들에게는 10년 전에 일어난 이 하잘 것 없는 사건 이외에는 기억할 만한 재주가 없었던가. 하여간에 우클레에 보 마을에 대하여는 달리 이야기할 거리가 없었다. 이 마을에는 열병이 그치지 않고 돌았으며, 여름철에도 곳곳이 진창투성이였 다. 늙은 갯버들이 가지를 드리워서 폭 넓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울타리 밑 같은 데는 더욱 질척질척했다. 공장에서 나온는 쓰레기와 면직물 염색에 쓰이는 초산 냄새가 항상 주위에서 풍겨나오고 있었다. 공장은 면직물 염색공장이 셋, 그리고 피혁공장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것이나 마을 한가운데가 아니라 마을에 서 약간 벗어난 변두링에 자리잡고 있었다. 모두 작은 공장들로 직공의 수는 전 부 합해 겨우 4백명 정도 밖에 안되었다. 피혁공장 때문에 개울물은 늘 악취를 풍겼고, 쓰레기는 목초 지대를 오명시켜 농가의 가축들을 탄저병에 걸리게 했다. 그래서 이들 공장에는 폐쇄령이 내려졌으나, 실제로는 지서장과 군의의 묵인하 에 모래 조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공장주는 매월 10루블씩 그들에게 뇌물을 바 치고 있었다. 마을 전체를 통하여 양철로 지붕을 이은 석조 건물은 겨우 두 채 뿐이었다. 한 채는 군청이었고, 다른 한 채는 교회 맞은편에 있는 2층 건물로 에 피판 출신의 그리고리 페트로비치 치부킨이라는 상인의 집이었다. 그리고리는 식품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것일뿐 뒤로 는 보드카, 가축, 피혁, 곡물, 돼지, 그밖에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다 취급하고 있 었다. 이를테면 수출용 부인모에 장식으로 다는 까치 깃털 주무을 맡아 한 쌍에 30코페이카씩 벌기도 하고, 삼림을 사서 목재를 베어내어 팔기도 하고, 고리 대 금에까지도 손을 댔다. 어쨌든 빈틈없는 영감이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장난 아니심은 경찰서 수사과에 근무하고 있어서 집에는 어쩌다 한 번씩밖에 들르지 않았다. 차남 스테판은 그를 도와서 가게 일 을 보고 있었는데, 신병이 있는 데다가 귀까지 멀어서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 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스테판의 처 악시냐는 몸매가 날씬한 미인으로, 명절 때 가 되면 모자를 쓰고 양산을 바치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여자였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에는 늦게 잤다. 스커트 자락을 살짝 치켜들고 열쇠를 짤랑거 리면서, 하루종일 창고에서 지하실로 지하실에서 가게로 뛰어다녔다. 그리고리 노인은 그런 며느리를 볼 때마다 흐뭇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때마 다 그녀가 장남의 아내가 아니라 여자의 아름다움 같은 것은 통 모르는 둘째의 아내라는 것을 애석하게 생가하는 것이었다. 노인은 원래 가정적인 사람이어서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자기의 가족을 사람 했다. 가족 중에서도 각별히 사랑한 것은 형사 노릇을 하는 장남과 둘째 아들의 처였다. 악시냐는 귀머거리 둘째 아들에게 시집온 그날부터 놀라운 장가 수완을 발휘해서, 어느 손님에게는 외상으로 팔아도 되고 어는 손님에게는 안된다는 것까지 환히 알고 있었으며, 온 집안의 열쇠를 맡아가지고 남편에게조차 건네주 지 않았다. 주판알을 튕기면서 계산을 맞추는 것을 보면 농부가 말의 이빨을 들 여다보듯 아주 정확했다. 하루종일 그녀의 웃음소리와 외침소리가 끊이지 않았 다. 노인은 그녀의 말 한마디, 행동 거지 하나하나가 다 신통해서 이렇게 중얼거 리는 것이었다. "대단한 며느리야! 그래그래, 예쁜 아가..." 그리고리는 홀아비였다. 그러나 아들이 결혼식을 치르고 나서 1년쯤 지나자 더 참을 수가 없어서 자기도 재혼을 하였다. 그른 우클레예보에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마을에 살고 있는 바로바라 니콜라예브나라는 쳐녀를 중매를 통해 아내 로 맞아들였다. 나이는 꽤 들었으나 가문이 좋고, 상당한 미인으로 몸매도 고왔 다. 그녀가 2층에 기거하게 되자, 온 집안이 마치 창유리를 몽땅 갈아 끼운 것같 이 갑자기 훤히 밝아졌다. 성상 앞에는 등불이 켜지고, 테이블에는 눈같이 흰 테 이브 보가 쓰워졌으며, 창가와 뜰에는 빨간 봉오리를 맺은 꽃들이 놓였다. 식사 때에4도 쭉 해오돈 대로 한 그릇에 담아놓고 모두들 다ㄱㅁ이 떠 먹는 것이 아 니라, 한 사람 앞에 한 개씩, 각자 자기 몫의 접시가 나왔다. 바르바라가 즐거운 듯 상냥하게 웃으면 온 집안이 그녀와 함께 미소짓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것도 예전에는 일찍이 없었던 일로, 거지나 순례자나 집시 차림의 여자들이 안뜰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우클레에보 여자들의 노래하는 듯한 애수 띤 목소리나, 술주정 으로 공장에서 쫓겨난 초라하고 염치없는 사내들의 조심스러운 기침소리도 창가 에서 들려왔다. 바르바라는 처음에는 그들에게 돈과 빵과헌옷 같은 것을 집어 주더니, 이 집 살림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가게의 물건까지 들어내게 되었다. 어 느 날 귀머거리 스테판은 그녀가 차를 4분의 1파운드나 가게에서 집어내는 것을 보고 기가 콱 막혔다. "어머니가요, 차를 4분의 1파운드나 가게에서 가져갔는데요..." 그는 나주에 아 버지한테 고자질했다. " 어느 장부에다 적어놓을까요?" 노인은 한 마디 대꾸도 없이 눈썹을 씰룩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이윽고 2층에 있는 아내의 방으로 올라갔다. "여보, 바르바르슈카(바르바라의 애칭), 가게 물건 중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뭐든지 가져다 써요, 얼마든지 써도 괜찮아."이튿날, 귀 머거리 스테판은 안뜰을 뛰어가면서 그녀에게 외쳤다. "어머니, 뭐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가세요!" 그녀의 자선행위 속에는 마치 등불이나 빨간 꽃에서 느껴지는 것 같은, 뭔가 새롭고 상쾌하고 밝은 마음이 배어 있었다. 금육일의 전날이나. 사흘 동안 계속 되는 수호 성자의 기념일 같은 때 이 가게에서는, 도저히 통 옆에서 있을 수도 없을 만큼 냄새가 지독한 소금에 절인 고기를 농부들에게 팔아먹었다. 주정뱅이 들에게 큰 낫이나 모자나 프라토크( 러시아 여자들이 머리에 쓰는 두건처럼 생 긴 스카프: 역주) 같은 것을 담보로 잡고 외상 거래도 했다. 질이 나쁜 보드카에 곯아떨어진 공장 직공들은 진흙탕 속에서 뒹굴었다. 이렇게 해서 겹겹으로 죄업 이 쌓여 주위에 안개가 낀 것처럼 자욱한 느낌이 들 때라도, 문득 그런 소금에 절인 고기나 보드카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성품이 온화하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 는 여자가 이 집의 안방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누구나 마음이 가벼워지고 안 심이 되는 것이었다. 그녀의 자선은 이 괴롭고 암담한 나날 속에서 기계의 안전 판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리의 집에서는 이것저것 항상 바빴다. 악시냐는 해도 뜨기전에 일어나 문간방에서 킁킁 콧소리를 내며 세수를 했고, 부엌에서는 어쩐지 불길한 소리를 내며 사모바르에서 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용모가 깨끗한 그리 고리 노인은 기다란 검은 프록 코트를 입고 면직물 바지에 번쩍번쩍 빛나는 긴 장화를 신은 채, 유명한 가극 속에 나오는 시아버지같이 뚜벅뚜벅 구두 소리를 내면서 이 방 저 방 거닐었다. 이윽고 가게의 덧문이 열렸다. 날이 샐 무렵 경주 용의 사륜 마차가 현관의 출입구에 도착하면, 노인은 커다랗고 차양이 없는 모 자를 귀 언저리까지 눌러 쓰고 젊은 사람처럼 날쌔게 마차에 올라탔다. 이럴 때 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가 쉰여섯 살 된 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아내와 며느리가 그를 배웅해주었다. 이처럼 산뜻한 프록 코트를 입 고, 3백 루블짜리의 크고 검은 종마가 끄는 마차에 올라 앉으면, 노인은 여러 가 지 청탁이나 하소연을 하러 오는 농부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원래 그는 농 부들을 싫어했기 때문에, 어떤 농부가 문 엎에 서서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기라고 하면 화를 내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왜 그런 데 멀거니 서 있는 거야? 저리 가!" 또 거지라도 서 있으면 이렇게 소리쳤다. "하느님한테나 받으러 가게!" 그가 장사일로 나가고 나면, 그의 아내는 검정 옷에 검정 앞치마를 두르고 방 을 치우기도 하고 부엌일을 거들기도 했다. 악시냐는 가게를 보았다. 병들이 부 딪치는 소리와 돈이 짤랑거리는 소리에 섞여 악시냐의 웃음소리와 외침소리가 안뜰에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어 보면, 가게에서는 이미 보드카의 밀매가 시작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귀머거리 스테판 역시 가게에 나가 있는 것이 예사 였고, 그렇지 않을 때는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한길을 서 성거리며, 멍하니 그 근처의 농가를 바라보기도 하고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다. 이 집에서는 하루에 여섯 번쯤 차를 마셨고, 네 번쯤 뭔가를 먹기 위해 테이블 에 둘러앉았다.그리고 밤이 되면 매상을 계산하여 장부에 기입하고 나서야 깊이 잠이 드는 것이었다. 우클레예보에서는 면직물 공장 세군데와 그 공장의 소유주들, 즉 플뤼민 형제 의 집과 쿠스추코프네 집에 전화기 가설되어 있었다. 그리고 군청에도 전화가 있었지만, 그 전화는 가설된 뒤 곧 불통이 되어버렸다. 전화기 속에 빈대와 바퀴 가 번식했기 때문이다. 군수는 무식한 사나이로, 서류를 작성하는 데에도 단어 하나하나를 그리는 형편이었다. 전화가 불통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이제부터 전화가 불통이니까 우리들도 여러 가지로 불편해지겠는데." 플뤼민 형제간에는 송사가 그칠 새가 없었다. 재판을 시작하면 화해가 성립ㅈ되 기까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조업을 중단하는 것이었다. 우클레에보 사람들에게 는 이 재판이 일종의 기분전환 거리가 되어주었다. 왜냐하면,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여러 가지 이야기와 뒷소문이 온 마을에 퍼졌기 때문이다. 축제일이면 쿠스추코프네와 플뤼민네는 서로 경쟁하듯 마차를 타고 멀리 돌아다녔다. 그들 은 온 우클레예보를 달려다니며 송아지를 치어 죽이기도 했다. 악시냐는 화장을 하고 풀을 잔뜩 먹인 스커트 자락을 와삭와삭 소리내면서 가게 주위의 한길을 이리저리 돌아댜녔다. 그러면 플뤼민 아우네 집 사람이 마차를 몰고 나타나 마 치 우격다짐하듯 그녀를 끌고 어디론지 데려가는 것이었다. 그런 때면 그리고리 노인도 자기 말을 자랑하려고 마차를 타고 외출했다. 언제나 바르바라가 동행했 다. 마차 멀리 타기 경쟁도 끝나고 날이 저물어 사람들이 슬슬 잠자리에 들 시간 이면, 플뤼민 아우네 집 안뜰에서는 누군가 값비싼 아코디언을 타는 소리가 흘 러나왔다. 달밤 같은 때에 그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가슴이 울렁거려서, 어 쩐지 마음이 들뜨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이 우클레예보도 초라한 골짜기라고 는 생각되지 않았다. 2 장남 아니심은 축제 때 말고는 집에 들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대신 그 고 장 사람 편에 곧잘 선물이나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는 언제나 누구 다른 사람이 달필로 대필한 것이었는데, 반드시 편지지 한 장에 청원서와 같은 격식으로 쓰 여 있었다. 그리고 그 편지는 아니심이 평소 이야기할 때에는 결코 사용하지 않 는 이상한 말투로 쓰여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두 분께서 즐겨 드시라고 새싹 으로 만든 고급 차 1파운드를 보내드리나이다.' 편지마다 끝에는 다 닳아빠진 펜으로 찍찍 긁은 것같이 '아니심 그리고리'라 고 서명이 되어 있고, 그밑에는 달필로 '대필'이라 쓰여있었다. 이런 편지가 올 때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모여 몇 번씩이고 소리를 내어 내용 을 읽었다. 노인은 감동해서 으레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 아이는 집에서 살기가 싫은갖봐, 워낙 학문이 있는 사회에서 출 세했으니까 말이야. 뭐 좋도록 하라지! 사람은 각각 제 갈 길이 있으니까." 사 육제를 앞두고 어느 날, 우박 섞인 큰비가 내린 적이 있었다. 노인과 바르바라는 바깥 형편을 살펴보려고 창가로 갔다가 놀랍게도 아니심이 역에서 썰매를 타고 집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아니심은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듯 한 초조한 기색으로 방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구뒤에도 계 속 변하지 않았고, 어쩐지 자포자기하는 듯한 데가 있었다. 별로 출발을 서두르 는 눈치도 없어서, 혹 근무처에서 목이 잘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바르바라는 그의 귀가를 기뻐하고 있었다. 그리고 능청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 라보고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저었다. "어떻게 된 거냐, 아니심?" 그녀가 말했다. "스물여ㄹ 살이나 되어 가지고 여 지껏 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ㅉㅉㅉ..." 옆방에서는 그녀가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씨로 'ㅉㅉㅉ...' 하는 소리만 들렸다. 그녀는 노인과 악시냐에게 귓속말로 무어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두 사람의 얼굴 에는 마치 음모라도 꾸미고 있는 것 같은 야릇하면서도 곡절이 있는 듯한 표정 이 떠올랐다. 그들은 아니심을 장가 보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아, 글쎄!...동생은 벌써 장가를 들었느데..." 바르바라가 말했다. "형이 되어서 마치 시장에 내다 놓은 수탉처럼 언제까지 이렇게 짝없이 지낼 셈이야, 제발, 색 시만 얻으면 뒷일은 다 잘되게 되어 잇어. 아니심은 근무처로 나가고 색시는 집 에서 집안일을 거들면 되잖아. 아니심 같은 젊은 사람이 혼자 있으면 생활에 절 도가 없어서 안돼. 아무래도 우리 큰아들은 세상의 순리를 몽땅 잊어버린 사람 같이 보여. 이거야 원, 정말이지 결혼을 하지 않고 늙어가는 건 죄악이라구." 그 리고리 가의 남자가 장가를 들 때에는 부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얼굴이 예쁜 색 시감을 골랐다. 그래서 아니심의 색시감도 예쁜 처녀가 선택되었다. 아니심으로 말하자면, 그는 볼품없이 생겼을 뿐 아니라 주변머리도 전혀 없는 남자였다. 허약하고 병자 같은 체격에 키도 작았고, 두 볼은 공기가 잔뜩 든 것처럼 볼록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눈을 깜박거리지 않아서 눈매만은 날카로워 다. 붉은 턱수염은 거칠게 자라 있었고, 무슨 생각에 잠길 때에는 수염을 이빨로 자근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더욱이 그는 술을 많이 마셧는데 그것이 표정에나 걸음걸이에 역력히 나타냐ㅏ다. 이런 사내인 데도 신부감이 나섰다는 것, 그것도 상당한 미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좋아. 나도 아주 볼 줄 모르는 건 아니니까. 우리 그리고리 가 의 남자들은 워낙 풍채가 좋으니까 말이야." 시의 변두리에 트루구에보라는 마을이 있었다. 최근 그 마을은 절반이 시로 편입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다. 시로 편입된 쪽의 땅에 작 은 집을 짓고 사는 어떤 과부가 있었다. 그 과부에게는 날품팔이를 하며 살아가 는 리파라는 나이 찬 딸이 있었다. 리파가 미인이라는 것은 오래 전부터 트루구 예보에 소문이 나 있었지만, 집이 너무 가난하여 청혼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래서 장차 어디 나이 많은 늙은이나 상처한 홀아비가 그녀의 가난을 탓하지 않 고 색시로 데려가든지, 아니면 구냥 막 돼먹은 사내에게 시집갈 거라고 사라들 은 말했다. 바르바라는 중매장이 여자로부너 이 리파의 이야기를 들은 죽시 마 차를 타고 트루구예보에 가보았다. 이윽고 격식대로 리파의 이모네 집에서 자쿠스카와 포도주를 차려 놓고 선을 보았다. 리파는 선을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새로 맞춘 장미빛 옷을 입고, 머리에 는 불꽃 간은 느낌을 주는 새빨간 리본을 화려가게 매고 있었다. 화사하고 품위 있는 얼굴에 날씬하고 가냘픈 몸매의 처녀였는데, 노천에서 노동을 한 탓으로 얼굴은 햇볕에 그을어 있었다. 얼굴에서 슬픈 듯한 수줍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 고, 눈매에는 호기심이 섞인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한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그녀는 젓가슴께가 겨우 사람의 눈에 띌 종도로 작은 계집애였다. 그러나 결 혼에 지장이 없을 만큼은 나이가 들어 있었다. 정말 상당한 미인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약간 마음에 걸리는 것은, 대장간의 집게처럼 축 늘어진, 사내처럼 턱없이 큰 두 손이었다. "지참금이 없다고 하시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바르 라라는 리파의 이모에게 말했다. "우리 둘째 아들 스테판도 가난한 집안에서 색 시를 데려다 짝을 지어주었느데. 지금은 아무리 칭찬을 해도 모자랄 정도로 훌 륭한 며느리랍니다. 집안일도 그렇고 장사일도 그렇고, 대단한 일꾼이예요." 리 파는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어째든 좋으실 대로 하세요. 저는 여러분들을 믿 고 있으니까요'라고 말학 싶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날품팔이인 그녀의 어머 니 플라스커비야는 겁에 질린 나머지 부엌 한 구석에 숨어 있었다. 그녀가 아직 젊었을 적에 어느 상인 집에 마루를 청소해 주러 다녔는데, 어느 날 상인이 무 슨 일로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며 그녀를 꾸짖었다. 그때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놀랐었느데, 그후부터 그녀의 마음은 공포에 사로잡혀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리하여 공포 때문에 언제나 손발이 떨리고, 볼은 실룩실룩 경련이 일어났다. 그녀는 부엌에 앉아서 손님들이 무슨이야기를 하는지 열심히 귀를 기울여 듣 고 있었다. 그리고 손을 이마에 대고 때때로 성상쪽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었다. 얼큰하게 취한 아니심이 부엌으로 난 문을 열고 서슴없이 말했다. "어머니, 왜 그런 데에 앉아 계세요?"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우리들이 영 심 심하고 지루하군요." 그러자 플라스코비아는 더욱더 두려워져서 바싹 마른 가슴에 두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어머, 별말씀을... 점말로 너무 과분한 혼담이 되어놔서요." 맞선을 본 뒤에 곧 결혼식 날이 정해졌다. 결혼날을 잡은 뒤로 아니심은 집에 있을 때면 줄곧 휘파람을 불면서 이 방 저 방으로 돌아다녔다. 그런가 하면 갑자기 무언가 깊 은 생각에 잠겨 마치 땅 속까지 투시하려는 것처럼 쏘는 듬ㅅ한 시선으로 마룻 바닥을 응시하기도 했다. 부활제가 지나고 곧 그 다음 주가 되면 결혼하기로 정해져 있건만 조금도 기뻐하지를 않았으며, 새색시를 만나고 싶어하는 기색도 없이 그저 무작정 휘파람만 불고 있었다. 그가 장가를 드는 것은 다만 아버지 와 계모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또 마을에는 그런 법도, 즉 집안일을 돕기 위하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한다는 법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 에 따르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는 근무지로 돌아가면서도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대체로 예전에 집에 왓다가 돌아갈 때와는 거동이 달랐다. 어쩐지 매우 자포자기한 듯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고 쓸데없는 말을 수없이 지 껄이기도 하느 것이었다. 3 시칼로보 마을에는 플레절런트 종파(13-14세기경 주세 유럽에서 시작된 광신 적 종파의 하나로, 이 종파의 신도들은 자신에게 채찍을 가하는 등 가혹한 고행 을 일삼음: 역주)를 믿는 자매가 양잠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결혼 의상을 주문받아서 그 가봉을 하러 왓다가 오래도록 차를 마시고는 돌아갔다. 바르바라는 검은 레이스와 유리 구슬 장식이 달린 갈색 옷을 맞추었고, 악시냐 는 가슴에 노란 천을 대고 치맛자락에 무늬를 한 초록색 옷을 맞추었다. 두 자 매가 옷을 다 만들었을 때, 그리고리 노인은 현찰 대신 자기 가게의 물건으로 옷 값을 지불했다. 자매는 바라지도 않던 양초와 정어리 통조림 꾸러미를 두 손 으로 그러안고 실망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을을 나서서 들판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언덕에 앉아서 엉엉 목놓아 울었다. 아니심은 결혼식 사흘 전에 집으로 돌아왓느데, 온통 새것으로만 치장하고 있 었다. 번쩍번쩍한 윤이 나는 고무 덧신을 신고, 넥타이 대신에 구슬 장식이 달린 빨간 끈을 매고, 외투 역시 새로 맞춘 것으로 소매를 꿰지 않고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기도를 올린 다음,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왔다고 인사를 하며 1루블짜리 은화 10개와 50코페이카짜리 은화10개를 드렸다. 그리고 바르바라에 게도 같은 액수의 돈을 내놓았고, 악시냐에게는 25코페이키짜리 은화 20개를 주 었다. 이 선물의 가장 큰 매력은 은화가 모두 새것이라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었다. 아니심은 근엄하고 교만한 태도를 취하려는 듯, 짐짓 얼굴표정 을 딱딱하게 하고 두 볼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있었다. 입에서는 술 냄새가 풍겼 다. 아마도 기차가 역에 도착할 때마다 식당으로 쫓아갔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그이 태도에는 어쩐지 자포자기한 듯한 어색한 구석이 있었다. 이윽고 아니심은 노인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자쿠스카를 들었다. 바르바라는 새은 화를 손에얹어 뒤집어 보기도 하고, 이 마을에서 도시로 이사간 사람들의 소식 을 묻기도 했다. "덕택에 별탈은 없어요. 모두들 무사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니심이 말했다. "다만 이반 예고로프네 집에 조그만 불행이 있었습니다. 뭐, 소피아 니키포로브 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뿐이에요. 폐병이었지요. 포도주도 나왔더군요. 농부들... 결국 이 마을에서 도시로 이사간 사람들인데... 그들도 2루블 반씩 냈어요. 하기 야 그들은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요. 농부들이 소스가 곁들여진 요리를 어떻게 먹겠어요." "2루블 반이라!" 노인이 말하고는 머리를 저었다. "물론이지요. 도시는 이런 시골과는 달라요. 뭘 좀 먹으려고 요리 집에 가도 한 접시 두 접시 주문하는 동안에 친구들이 모여들고, 그래서 술판이 벌어지고...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새벽녘이고, 계산서를 받아보면 한 사람 앞 에 3, 4 루블씩 계산이 돌아가느 게 보토이랍니다. 거게에 만약 사모르도프가 자 리를 함깨 하게 되면 문제가 달라져요. 그 녀석은 먹은 다음에는 반드시 코냑이 든 커피를 마시고 싶어하는데, 그 코냑이라는 것이 한 잔에 60코페이카 하는 형 편이니까요..." "흥, 바보 같으니!" 노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허풍만 치고 있군!" "저는 요 즈음엔 언재나 사모로도프와 어울려 다닙니다. 사모로도프가 바로, 집으로 보내 는 제 편지를 대신 써주는 바로 그 사람이에요. 아주 글씨를 잘 쓰는 친구입니 다. 그렇죠. 어머니?" 아니심은 바르바라를 보며 즐거운 듯이 말했다. "사모르도프가 어떤 사나이인지 이야기를 해봤자 어머니는 곧이듣지도 않으실 거예요. 우리들은 모두 녀석을 므후탈인라고 부릅니다. 워낙 온몸이 아르메니아 사람들처럼 새까맣거든요. 저는 녀석을 뱃속까지 꿰뚫어볼 수 있으니까 녀석이 하는 짓이라면 뭐든지 손에 잡은 듯 훤해요. 그것을 녀석도 눈치채고 있어서 제 뒤만 쫓아다니며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끊을려해도 끊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어요. 녀석도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눈치지만, 저와 인연을 끊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까 제가 가는 곳이면 녀석도 반드시 따라다니지요. 제 눈은요, 어머니, 일단 이렇다 싶으면 절대로 실수가 없어요. 이를테면요, 헌옷 시 장에서 농부가 셔츠를 팔고 있습니다. 그 농부를 한 번 보고는 '잠깐만, 그 셔츠 를 장물이지!'라고 합니다. 뒤에 조사해보면 틀림없이 장물이거든요!" "어떻게 그런 것을 알아내지?' 바르바라가 물었다. "어떻게고 뭐고 없어요. 어쨌든 제 눈은 그렇게 알아보게 되어 있답니다. 무슨 곡절이 있는 셔츠인가 하는 것까지는 할 수없지만. 그저 어쩐지, 이유없이, 머리 에 딱 떠올라서 이건 장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그뿐이에요.그리서 우리 수사과에는 모두들 이ㄹ게 말한답니다. '하하, 아니심 녀석. 또 사기꾼을 잡 으러 갔군'이라구요. 곧 장물을 찾아내러 갔다는 뜻이지요. 이거야 정말... 훔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숨기기는 아주 어렵거든요! 세상은 넓지만, 장물은 숨 길 장소가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우리 마을에서는 지난 주, 군트ㅓ레프네 집에서 숫양 한 마리와 암양 두 마리 를 잃어버렸는데..." 바르바라가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찾아줄 사람이 없어서..." "그러면 제가 찾아줄까요? 찾는 것이라면 문제없어요" 결혼식 날이 되었다. 쌀쌀하면서도 마음 들뜨게하느 화창한 4월의 어느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멍 에와 말갈기에 울긋불긋한 리본을 단 쌍두 마차와 3두 마차가, 절렁절렁 방울 소리를 내면서 온 우클레예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찌르레기도 마치 그리고리 네 집에 결혼식이 있는 것을 기뻐하는 것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울어댔다. 집 안에는 벌써 여러 개의 테이블 위에 가느다란 물고기와 햄, 내자을 빼내고 대신 양념을 넣어 요리한 새고기와 올리브 기름을 사용하여 만든 엄청나게 많 은 보드카와 포도주 병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고, 훈제 소시지와 쉬지근한 대하 냄새가 풍겼다.그리고리 노인은 테이블 둘레를 돌아다니면서 칼을 갈아주고 이 었다. 모두들 계속 바르바라를 불러대며 온갖 일들을 부탁했으므로, 바라바라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숨을 할딱이면서 부엌으로 달려가곤 했다. 부엌에 서는 리사가 새벽부터 일을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한 악시냐가, 삐걱삐걱 소 리나는 새 편상화를 신고 드러난 무릎과 가슴패기를 언뜻언뜻 내보이면서 회오 리 바람같이 안뜰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위가 온통 와글와글 들끓었고, 욕을 하는 소리도 들리고 무언가를 다짐하느 소리도 계속 들려왔다. 활짝 열어놓은 문 앞에는 길 가던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무슨 경사가 있 음을 느끼게 했다. "색시를 데리러 간대!" 한동안 방울 소리가 철렁철렁 울려오더니 그 소리도 멀리 마을 밖으로 사라져 갔다. 2시가 지나자, 마을 사람들이 뛰어나갔다. 다시 방울 소리가 들려왓다. 신 부가 도착했던 것이다.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가지가 달린 촛대에불이 밝 혀ㅛ졌고, 성가대는 그리고리 노인의 희망대로 악보에 따라 노래하고 있었다. 리 파는 등불빛과 화려한 의상 때문에 눈이 부셔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성가대의 높은 노랫소리를 듣고 있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녀는 난생 초음으로 몸에 댄 코르셋과 편상화가 몸을 잔뜩 죄어, 마치 기절했던 자가 겨우 숨을 돌렸을 때와 같은 얼굴을 하고서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잇었다. 검은 프락 코트를 입고 넥타이 대신 빨간 끈을 맨 아니심은 한 곳을 응 시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노랫소리가 한층 높아질 적마다 황 급히 성호를 긋는 것이었다. 그는 너무 감동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죽은 어머니와 성찬을 받으러 왔던 곳도 이곳이었고, 다른 소년들과 함께 성가대석에 서 노래를 부른 것도 이곳이었다. 그는 이 교회의 구석구석을 성상 하나하나를 낱낱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그는 결혼식을 올리려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법도 때문에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 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결혼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 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이 앞을 가려 성상을 볼 수도 없었고, 가슴을 꼭 졸라 매 는 것만 같았다. 그는 기도를 하면서, 머지않아 틀림없이 그의 머리 위에 덮쳐올 불행이, 마치 비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고 마을을 비켜 가는 가뭄 때의 비구름 처럼 무사히 자기 위를 그냥 지나가 주십사 하고 하느님께 빌었다. 그가 여태까 지 지은 죄업은 그 수가 너무 많아 헤아릴 수가 없었고, 더욱이 용서를 빈다든 가 도망친다든가 돌이킨다든가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런 것들쁜이었다. 그래도 그는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소리를 내어 흐느껴 울기조차 했다. 그렇 지만 사람들은 그가 과음한 탓이라고 생각했고 아무도 그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 이지 않았다. 갑자기 겁이 난 듯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엄마, 밖으로 나가, 빨리!' "조용히!" 신부가 소리쳤다. 그들이 교회에서 나오자 사람들이 뒤에서 졸졸 따라왔다. 가게 주위나 문 앞 에나 안뜰에나 창 밑에나 어디고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여자들이 축가를 부 르러 왔다. 신랑 신부가 문턱을 막 넘으려 할 때, 악보를 손에들고 미리 문간방 에서 기다리고 있던 합창대가 일제히 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고, 특별히 시내에 서 불러온 악대도 반주를 시작했다. 미리 준비했던 돈 산의 샴페인이 길쭉한 술 자에 담겨 나왔다. 그때 눈이 덮일 정도로 눈썹이 길고 짙은, 키가 크고 여윈 엘 리자로프라는 목수 영감이 신랑신부에게 말했다. "아니심과 너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서로 정답게 살아야 한다. 알겠지? 그러 면 하느님께서도 너희를 지켜주실 것이니." 그리고 그는 그리고리 영감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리, 자, 함께 우세. 기쁨의 눈물을 흘리잔 말이야!" 그는 큰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껄걸 웃다가, 이번에는 굵은 저 음으로 말을 계속 했다. "하하하! 이번 며느리도 틀림없이 좋은 며느리라구! 모 든 것이 흠잡을 데가 없어. 모든 것이 다 술술 풀려서 막히는 데가 없을 거란 말이야. 말하자면, 기계가 완벽하고 나사못도 제대로 다 있다는 말씀이야." 그는 예고리예프 군 출신이었는데, 젊어서부터 우클레예보 마을과 근처의 공장에서 일을 하다 보니 그만 원래 이 마을 사람이었던 것처럼 이곳에 정착해 버렸던 것 이다. 그 옛날, 바로 이 고장에 왔을 때에도 이미 늙은이였고, 게다가 바싹 마른 것도 그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옛날부터 '목발'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40 년 이상을 공장에서 기계수리만 한 탓인지, 그는 사람이거나 물건이거나간에 그 것이 견고한지 수리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를 우선적으로 따지게 되었다. 테이블에 앉을 때에도 으레 의자가 튼튼한가 어떠한가를 살펴 보고 나서 앉았 고, 음식 같은 것도 미리 슬쩍 만져보는 것이었다. 샴페인을 마시고 나서 모두들 자리에 앉았다. 손님들은 의자를 움직이기도 하 며 서로 지껄였다. 문간방에서는 합창대가 노래를 부르고 악대가 연주를 하고 있었다.한편 안뜰에서는 여자들이 장단에 맞추어 축가를 부르고 있었다. 한편 안 뜰에서는 여자들이 장단에 맞추어 축가를 부르고 있었다-이런 모든 소리들이 함 께 뒤섞여 괴상하고도 엄청나게 큰소리가 되었다. 이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현 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목발'영감은 의자에 앉은 채 좌우로 몸을 비틀면서 옆 사람을 팔꿈치로 집 적거리기도 하고, 이야기를 훼방놓기도 하고, 울다가 웃기도 했다. "자, 아가, 아가, 아가들아!" 그는 애칭을 사용하여 악시냐와 바르바라을 부르 면서 빠른 말투로 중얼거렸다. "얘, 악시뉴슈카하고 바르바르슈카야, 우리 모두 평화롭고 사이좋게 살아 보자꾸나. 우리 귀여운 아가들아." 그는 평소에도 술 이 약한 편이었으며 지금도 영국산 화주를 마시자, 모두들 두들겨 맞은 것처 럼 머리가 띵하고 혀가 꼬부라드는 것이었다. 손님 중에는 성직자도 있었고, 부부 동반해서 온 공장의 사무원과 딴 마을에 서 온 상인과 술집 주인도 있었다. 14년 동안이나 함께 근무하면서 그 동안 한 장의 서류에도 서명한 적이 없고, 관청에 온 사람이면 누구 하나 속이거나 모욕 을 주지 않고 그냥 돌려보낸 적이 없다는 군수와 서기도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 다 피둥피둥하게 살찌고 혈색이 좋았다. 둘 다 부정과 사기가 몸에 베어 있 어서, 얼굴의 피부조차 어쩐지 유달리 흉물스러워 보였다. 사팔뜨기에다 바싹 말 라빠진 서기의 아내는 자기 아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데리고 와서, 접시란 접 시는 모두 사나운 새처럼 곁눈질하다가 손에 닿는 대로 무엇이든지 접어서 자기 포켓과 아이들의 포켓에 쑤셔 넣었다. 리파는 여기 와서도 교회에서와 똑같은 얼굴로, 마치 화석이 된 것처럼 꼿꼿 이 앉아 있었다. 아니심은 첫 대면 이후 지금까지 그녀와 말 한마디 교환한 적 이 없었으므로 그녀의 목소리가 어떤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와 나란히 앉아 있으면서도 시종일관 침묵을 지킨 채 영국산 화주만 마시고 있었다. 취기가 돌 자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모에게 말을 걸었다. "내게는 사모로도프라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요, 대단한 놈이지요. 명예공민(어 떤 공적이나 교육 자격에 대해서 귀족이 아닌 사람에게 주는 칭호: 역주)의 자격 이 잇어서 이야기를 시키면 참 잘하지요. 그런데 이모님, 나는 녀석을 뱃속까지 꿰뚤어 보고 있고, 녀석도 그것을 알고 있어요. 어떠세요, 한 번 사모로도프의 건강을 비는 뜻으로 함께 건배하시지 않겠어요. 네, 이모님!" 바르바라는 몹시 피곤하고 들뜬 모습으로 손님들에게 요리를 권하면서 테이블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호화로운 요리가 푸짐하게 나와 있으니까 아무도 불평하는 이가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만족해 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날이 저물었으나 식 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점점 자기들의 무엇을 먹고 있고 무엇을 마 시고 있는지 분간 못하게 되었다. 또한 무슨 말을 지꺼ㅗ이고 있는지조차 분간 할 수 없었다. 다만 음악이 때때로 그쳤을 때, 어떤 여자가 이런 말을 외쳐대고 있는 것만 뚜렷하게 들렸다. "실컷 남의 피를 빨아먹다니. 천벌받을 놈, 뒈져 버려라!" 밤이 되자 다같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플뤼민 아우네 집안 사람들은 집에서 술을 가지고 왔 다. 그중의 한 사람은 카드리유(4명의 남녀가 서로 마주 보며 추는 프랑스의 사 교 댄스. 19세기경 온 유럽에 유행했음: 역주)를 출 때, 양손에 병을 하나씩 들고 입에 술잔을 물고 추었다. 이것을 보고 여러 사람들이 웃었다. 카드리유를 추던 그들은 갑자기 몸을 꾸부린 채 러시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초록색 옷을 입은 악시냐는 어찌나 빨리 추는지, 그 추는 모습이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치맛자락에서는 바람이 쌩쌩 일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스커트 단의 레이스를 밟 았다. 그러자 '목발'영감이 이렇게 외쳤다. "야아, 스커트의 허리판이 빠져 버렸단다! 애들아" 악시나는 거의 깜박이지 않는 잿빛의 앳된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에선 줄 곧 아리따운 미소가 가시지를 안ㅅㅎ았다. 이 깜박이지 않는 눈과, 가늘고 간 목 위의 작은 머리와 날씬한 몸매는 어쩐지 뱀 같은 인상을 주었다. 노란색의 가슴 판이 달린 초록색 옷을 입고 생글생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은, 이른 봄 에 어린 호밀밭에서 머리를 쳐들고 통행인들을 엿보는 독사와어딘가 닮은 데가 있었다. 플뤼민네 집안 사람들과 그녀는 아주 친한 것 같았는데,그들 가운데 제 일 나이 많은 자가 그전부터 그녀와 은말한 사이라는 것은 누구나 훤히 아는 사 실이었다. 다만 귀머거리 스테판만이 아무것도 모른채, 그녀쪽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마치 권총을 쏘는 것처럼 요란한 소 리를 내며 호드를 까먹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리고리 노인이 일어나 방 한가운데로 나서며, 자기도 러시아 춤을 추겠다는 신호로 손수건을 흔들었다. 그러자 집 안에 있던 사람들뿐 아니 라 안뜰에 있던 사람들에게서까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몸소 나오셨다! 몸소!" 그러나 춤을 춘 것은 바르바라였고 노인은 그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양쪽 발을 교대로 하며 구두 뒤축을 울리고 있을 뿐이었는데도, 안뜰에 있던 사람들은 서 로 밀치고 떠밀면서 창가에 매달려 환성을 울렸다. 잠시 동안이긴 하나 그에 대 한 모든 불평 불만을 잊고 있었다-그가 부자라는 것도, 또한 그가 자기들에게 지독하다는 것도. "잘하는데, 그리고리!" 사람들 속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힘을 내라! 그정 도면 아직 얼마든지 벌어들이겠구나! 하,하!" 밤이 깊어 1시가 지나서야 이 모든 소동이 조용해졌다. 아니심은 비틀거리며 합창대와 악대들에게 일일이 작별 인사를 하고 그들 모두에게 50코페이카짜리 새 은화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노인은 한 발로 걷는 것처럼 껑충거리면서 손 님들을 배웅했다. 그는 한 사람씩 붙잡고 말했다. "이 결혼시에 2천 루블이나 들었어." 손님들이 꾸역꾸역 돌아가느 사이에 누군가 자기의 헌 외투를 벗어놓고 시칼 로보 술집 주인이 입고 온 소매없는 고급 외투를 대신 입고 간 사람이 있었다. 아니심이 이 사실을 알고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가만 있어!내가 곧 찾아올게! 훔친 자식을 훤히 알고 있어! 기다려!" 그는 거 리로 달려나가, 어떤 사람의 뒤를 쫓아갔다. 이윽고 그를 붙잡아 팔을 끌고 집 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취한 데다가 화가나서 빨갛게 상기된 채 땀을 흘리면서, 그때 막 리파가 이모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던 방 안으로 그를 밀어넣 고 철컥 자물쇠를 잠가버렸다. 4 그로부터 닷새가 지났다. 아니심은 떠날 채비를 끝내고 바르바라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등이란 등에는 모조리 불이 밝혀져 잇고, 주위에서 는 향내가 자욱했다. 바르바라는 창가에 앉아서 빨간 털실로 양말을 짜고 있었 다.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느데..." 그녀가 말했다."아마 답답한 모양이지. 뭐... 우린 부족한 것 없이 마음 편히 잘 살고 잇지. 결혼만 해도 그래, 훌륭하고 실수 없이 치렀지. 아버님은 2천 루블이나 들었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지. 뭐, 그 한 마디로 버젓한 상인답게 사는 걸 중명하는 셈이야. 다만 이 집은 어쩐지 답 답해. 그야 물론 탐욕스런 짓만 하니까 그럴 거야. 난 아무래도 그게 마음에 거 려 못 견디겠어. 그 악랄함이란 것을 좀 생각해 봐. 말 한 마리를 바꾸는 데나, 뭔가 조그마한 물건 하나를 사들이는 데나, 사람을 고용하는 데에도 다 그렇단 말이야. 밤낮으로 사람들에게 사기만 치고 있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속임수 투성 이야. 우리 가게에서 팔고 있는 금육일에 쓰는 기름 같은 것은, 맛이 쓰고 썩어 서 다른 가게에서 파는 송진보다 못할 정도야. 도대체 왜 좋은 기름을 못파느냔 말이야." "어머니, 사람은 각기 제 갈 길이 있답니다." "너는 그렇게 쉽게 말하지만, 사람은 모두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지.그러니, 정 말 네가 한 번 아버지께 말씀드려보는 게 어떨까!" "어머니가 직접 말씀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게 말이야, 나도 말씀을 드리기는 하지. 그렇지만 아버지는 단한 마디, 아니 심이 지금 말한 그대로 말씀하실 뿐이야...'사람은 각기 제 갈 길이 있다.' 하지 만 저 세상에 가면, 그야말로 사람은 각기 어떤 길을 걸었는가 반드시 조사를 받게 돼. 하느님의 심판은 언제나 올바르시니까." "설마 그런 것을 누가 조사하겠어요." 아니심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 다."왜냐하면 어머니, 어차피 하느님 같은 건 없으니까요. 조사하다니, 말도 안됩 니다!" 바르바라는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웃으면서 두 손을 모았다. 그녀가 그의 말에 너무나도 놀라 매우 별난 사람이라도 보는 것처럼 그를 쳐다보았으므로, 그는 당황해 버렸다. "그야 하느님은 있을지 모르지만 다만 믿음이 없단 말입니다. 요전 결혼식 때 에는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암탉이 품고 있는 달걀을 보면 속에서 병 아리가 삐약삐약 울고 있을때가 있지요, 꼭 그와 같이, 제 마음 곳에서도 양심이 울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식이 거행되는 동안 내내 하느님은 계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교회에서 나오자마자 그런 생각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 어요. 하느님이 있는지 없는디 그걸 어떻게 압니까? 저희들은 아주 꼬마 적부터 그런 것을 배워왔어요. 어머니 젖을 빨고 있을 때부터 배우는 것은 단 한 가지, 사람은 각기 제 갈 길이 있다는 것뿐이었어요. 첫째, 아버님도 하느님을 믿고 있 지 않아요. 어머니가 언젠가는 군트레프네에서 양을 도둑 맞았다고 말씀하셨지 여... 전 범인을 찾아주었습니다. 그것을 훔친 것은 시칼로보의 어느 농부였어요. 그런데 도둑질은 그놈이 했는데, 그 양의 털가죽은 놀랍게도 우리 아버지한테 있지 않겠어요... 이러고도 믿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아니심은 한쪽 눈을 깜박거리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군수도 하느님을 안 믿어요." 그는 계속했다. "서기도 그렇습니다. 교회 집사 도 그렇구요.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거나 금육일을 지미는 것은 남에게 욕 을 먹지 않으려고, 또 어쩌면 정말로 최후의 심판날이 다가오지 않는다고 장담 살 수 없기 때문이겠죠. 요즘 항간에서는 뭐 인간이 나약해졌다든가, 또는 양친 을 공경하지 않게 되었다든가, 그런 이유로 마치 세상의 종말이 온 것처럼 떠들 어대지요, 쓸데없는 짓이에요. 저는요,어머니,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요, 어머니, 어떤 것이라도 속까지 꿰뚤어보는 사람이니까 환히 알고 있어요. 딴 데 서 훔쳐 온 셔츠를 입고 있는 녀석이 있으면, 제게는 곧 그것이 직감적으로 느 껴집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음식점에 앉아 있다고 합시다. 어머니 같으면, 그 저 차를 마시고 있나보다 생가가하시겠지요. 그러나 저는 차도 차지만, 그밖에 그자식은 양심이 없는 자식이라는 것을 환히 알아봅니다. 하루종일 여기저기 돌 아다녀봤자 양심 있는 인간 같은 건 하나도 발견할 수 없어요. 이게 다 하느님 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건 그렇고, 어머니, 전 이만 물러갑니 다.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저를 나쁘게 생각지 마 駕첼얘" 아니심은 바르바라 의 다리께까지 몸을 굽혀 인사를 했다. "저희들은 만사에 있어서 어머니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어머니한테는 우 리 집안 사람 모두가 큰 은혜를 입고 잇으니까요. 어머니는 정말 훌륭한 분이십 니다. 저는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심은 매우 감동한 태도로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말을 계속했다. "저는 사모르도프 때문에 어떤 사건에 말려들었습니다. 부자가 되느냐 아니면 파멸이냐, 양단간에 하나입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에는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잘 위로해 드리세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 저... 하느님은 자애로부셔. 그보다도 아니심, 노 는 아내를 더 귀여워해 줘야 되네. 너희들은 둘 다 입을 꼭 다문 채 눈싸움만 하고 있잖아. 하다 못해 서로 웃는 얼굴이라도 보여주어야지." "예, 그런데요, 그 사람은 좀 별나요..." 아니심은 이렇게 말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모 르고 언제나 입을 꼭 봉하고 있어요.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린 겁니다. 좀도 어른 이 되오야겠어요." 현관 앞 계단께에는 벌써 키가 크고 살찐 흰 수말이 마차에 매여서 있었다. 그리고리 노인은 몸의 리듬을 조절해서 달려가 기운차게 마차에 뛰어 올라 고 삐를 잡았다. 아니심은 바르바라와 악시냐와 아우에게 키스를 했다. 현관 앞 계 단에는 리파도 나와 있었지만, 그녀는 몸도 까딱 않고 서서 마치 배웅하러 나온 게 아니라 그저 우연히 거기 있게 된 것처럼 엉ㄸ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 니심은 리파에게 다가가서 볼에다 가볍게 입술을 댔다. "잘 있어요."하고 그는 말했다.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어쩐지 애매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러다가 이내 얼굴을 떨기 시작했다. 모두들 그녀가 가엾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아니심도 마차 에 뛰어올라 허리에 손을 대고 의젓한 태도를 취했다. 자기가 미남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차가 골자기를 빠져나가는 동안 아니심은 계속 마을 쪽을 돌아다 보고 있었다. 맑게 갠 따뜻한 날이었다. 가축들은 이 해 들어 처음으로 들에 나와 있었고, 그 가축들 주위에는 나들이 옷으로 곱게 단장한 처녀들괴 부 인들이 거닐고 있었다. 들에 나온 것이 기쁜지 누런 황소가 음매음매 울면서 앞 발로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위아래 곳곳에서 종다리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심은 아름답게 흰 칠을 한 교회 - 그 교회는 최근에 하얗게 칠을 했다.- 쪽 을 자꾸 돌아다 보고, 닷새 전에 자기가 거기서 하느님께 기도까지 했던 것을 생각해냈다. 그는 또 초록색 지붕의 학교를 바라보거나 그 옛날에 멱을 감고 낚 시질하던 작은 시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즐거운 생각이 문즉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순간에, 땅 위에 갑자기 벽이 솟아올라와 자기 가 가는 길을 막고, 자기를 과거 속에서만 사는 인간이 되게 해 준다면 얼마나 졸을까 생각하는 것이었다. 정거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식당으로 들어가서 셰리 주를 한 잔씩 마셨다. 노 인이 돈을 치르려고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제가 낼께요!" 아니심이 말했다. 노인은 감동해서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애가 바로 내 아들이오!'하는 듯이 식당 주인 영감에게 눈짓을 했다. "아니심, 너는 집에서 장사일을 돌봐주었으면 좋겠다만..." 노인이 말했다. "넌 워낙 장사 솜씨가 좋으니까! 그러면 내가 너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돈으로 싸줄 텐데." "그렇지만 아버지, 아무래도 그건 곤란해요." 세리 주는 시큼하고 봉랍 냄새가 났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 잔씩 더 마셨다. 정거장에서 돌아왔을 때, 노인은 처음에 자기 집 새 며느리를 전혀 몰라보았 다. 리파는 남편이 집에서 떠나자마자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갑자기 명랑해졌던 것이다.그녀는 낡은 스커트를 입고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올리고, 맨발로 현관의 계단을 씻으면서 은방울을 굴리는 것 같은 높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걸레를 빤 물통을 들고 밖으로 나가서, 그녀가 곧잘 짓는 어린애 같은 웃음을 띠고 태양을 우러러볼 때에는, 그녀 역시 종다리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 였다. 현관의 계단 앞을 지나가던 늙은 고용인이 머리를 끄덕이며 만족해 했다. "정말이지, 당신네 며느리들은 하나같이 하느님께서 내려주셨나 봐. 그리고리! 정말 색시들이 모두 보물 덩어리야!" 5 7월 8일 금요일, '목발'이란 별명이 붙은 엘리자로프와 리파는 카잔스코예 마 을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들은 카잔의 성모를 예배하기 위해 교회 미사에 참례하러 갔던 것이었다. 그들의 훨씬 뒤에 서는 리파의 어머니 플라스커비야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몸이 아픈데다 숨이 가빠서 자꾸만 뒤처지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그래!..." '목발' 노인은 리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 그래! ...그래서?" "저는요, 아저씨, 잼을 무척 좋아해요." 리파가 말했다. "혼자 방구석에 앉아 잼을 섞어서 차를 마셔요. 그렇지 않으면 시어머니하고 마셔요. 그러면 어머니는 뭔가 뜻있는 이야기를 해주시지요. 우리집에는 잼이 엄청나게 많이 ... 네 항아리 나 있어요. '자, 먹어요, 리파, 얼마든지'라고 말한다구요. "그래? .... 네 항아리씩이나!" "굉장한 살림이에요. 휜빵과 함께 차를 마시고 쇠고기도 먹고 싶은 대로 양껏 먹을 수 있어요. 잘 살긴 하지만, 전 어쩐지 무서워요, 아저씨,무서워서,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뭐가 그렇게 무섭지?" 목발노인이 묻고는 플라스코비야가 얼마나 뒤처졌나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맨 처음에는요, 결혼식 뒤에 아니심이 무서웠어요. 뭐 야단치거나 하지 않는 데도, 그저 그이가 옆에 오기만 하면 전 온몸이 오싹해져서 뼛속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어요. 그래 저는 밤새도록 자지 않고 벌벌 떨면서 하느님께 기도했어요. 그리고 요즈음에는 악시냐가 무서워요, 아저씨. 그 사람도 특별히 어떻게 하는 건 아닝예요. 악시냐는 줄곧 웃고 있지만 때때로 창문 쪽을 바라볼 때가 있는데 그럴 때 그 눈매가 얼마나 무서운지, 마치 외양간에 있는 양처럼 초록색으로 번 쩍번쩍 빛이 나요, 플뤼민 아우네 사람들은 그분에게 이상한 짓을 권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 시아버지는 부초키노에 40헥타르의 땅이 있지'하고 말하지 않 겠어요. '그곳에는 모래도 있고 물고 있으니까, 악슷시(악시냐의 애칭), 거기에다 당신 돈으로 벽돌공장을 세워요. 우리가 한몫 낄 테니까' 이렇게 말한단 말이에 요. 벽돌은 지금 1천 개에 20루블이나 하니까 이익이 많은 사업일테죠,어제 점심 때도 악시냐가 시아버님께 이렇게 말하지 않겠어요. '저는 부초키노에 벽돌 공장 을 세워서 제 사업을 한 번 해보고 싶어요'라구요. 그리고 방글 방글 웃는 거예 요. 그러자 시아버님은 싫은 얼굴을 하셨어요. 틀림없이 악시냐의 말이 마음에 안 드신 것예요.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뿔뿔이 헤어지면 안돼. 모두 함께 살아 야지'라고 시아버님이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그분은 눈을 부릅뜨면서 이를 갈 지 않겠어요... 튀김을 내왓는데 먹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말예요, 전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일인데, 그분은 도데체 언제 자는지 몰라요!" 리파는 말을 계속했다. "그분은 30분쯤 잤나 싶으면 갑자기 발딱 일어 나서 그 근방 일대를 돌아다니며 살펴보는 거예요. 농부들이 어디에 불이라도 지르지 않나, 뭘 훔치러 오지나 않나 걱정스러운 거지요. 전 그분과함께 있는 것 이 무서워요, 아저씨! 그리고 플뤼민 아우네 집안 사람들은 결혼식이 끝난 다음 부터 밤잠도 자지 않고 재판하러 도시로 쏘다니고 있어요. 그게 모두 악시냐 때 문이라고 온 마을에 소문이 자자해요. 세 형제 중에서 두 형제는 악시냐에게 공 장은 세워주마고 약속했는데. 막내가 성을 냈다나 봐요. 이래저래 공장은 한 달 이나 쉬어버렸어요. 그 바람에 우리 프로홀 아저씨는 일자리를 잃고 이 집 저 집으로 빵부스러기를 얻으러 돌아 다니는 형편이예요.'아저씨, 들일을 나가시든 지 산판에라도 가서 일하시면 어때요? 그러고 다니시는 게 수치스럽지 않으세 요?' 라고 제가 말씀 드렸어요. 그랬더니 아저씨는 '하지만 리퓌니카, 나는 농 사일에서 손을 뗀 지가 오래되어서 이젠 아무 일도 못해!...' 라고 말씀하시지 않 겠어요." 두 사람은 싱싱한 당버들숲 앞에 멈추어 한숨을 돌리면서 플라스코비야가 다 라오기를 기다렸다. 엘리자로프는 수년 동안 도급을 맡아 목수일을 하고 있었지 만, 그때까지 말 한 필 장만하지 못해서 언제나 빵과 양파를 담은 작은 자루를 짊어지고 이곳조곳을 걸어서 다녔다. 그는 두 팔을 흔들며 큰 걸음으로 성큼성 큼 걷기 때문에 함께 나란히 걷기가 매우 힘들었다. 숲으로 들어가는 어귀에 경계표가 하나 서 있었다. 예리자로프는 그것이 든든 한가 어떤가 보려고 손으로 만져보았다. 플라스커비야가 숨을 헐떡거리면서 다 가왔다. 주름살투성이에 항상 두려운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도 오늘만은 행복하게 빛났다. 오늘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처럼 교회에도 나갔고, 교회에서 오 는 길에는 장터에 들러서 배를 넣은 크바스까지 마시지 않았던가! 그녀에게 있 어서 이런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즐겁고 보람있게 산 듯한 생각이 들었다. 잠시 쉰 다음에 세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해가 막 지려는 참이어서, 그 지는 햇빛이 숲 속에 비껴들어 나뭇가지들을 붉게 물들 였다. 수풀 앞쪽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계속 울려왔다. 그들보다 훨씬 앞서서 걸어가고 있던 우클레예보 마을 처녀들이 숲 속에서 쉬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버섯이라도 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야. 이 처녀들아!" 예리자도프가 소리쳤다. "야, 이쁜이들아!" 곧 이어 웃음소 리가 그 말에 응수했다. "'목발'이 왔다.'목발'할아범!" 그러자 메아리도 거기 따라서 웃었다. 이윽고 수풀을 지나왔다. 공장의 굴뚝 꼭대기가 보이기 시작하고, 종루의 십자가가 반 짝 빛나 보였다. 거기가 '장례식 때에 교회 집사가 케비어를 몽땅 먹어치운' 바로 그마을이었다. 여기까지 오면 벌써 집에 다 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머지 는 다만 이 넓은 골짜기로 내려가기만 하면 되었다. 맨발로 걷고 있던 리파와 플라스코비야는 신발을 신으려고 풀 위에 주저앉았다. 도급 목수도 나란히 앉 았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갯버들숲과흰 칠을 한 교회와 작은 시내가 있는 우클레예보는 아름답고 평화롭운 마을로 보였다.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돈을 아끼기 위해서 마구 새까만 색으로 칠해놓은, 공장의 지붕 정도였다. 건너 편의 바탈진 곳에는 호밀밭이 보였다- 노적가리로 쌓아 올린 것과 다발로 묶어 놓은 것은 마치 폭풍에 불려 흩어진 것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금방 베어 놓은 것은 가지런히 줄을 지어 누워 있었다. 귀리도 완전히 여물어서 진주조개 같이 햇빛에 반짝거리고 잇었다. 추수는 이제 한창이었다. 오늘은 축제 일이지 만, 내일 토요일에는 호밀을 거두어들이고 건초를 운반하지 各만 안된다. 그 다은 날은 또 휴일이다. 매일같이 먼 데에서 우뢰가 우르릉으르릉 울렸다. 무더 워서 금방이라도 비가 한바탕 쏟아질 것 같았다. 모두들 들판을 바라보며 어떻 게 해서든지 시기를 놓치지 않고 추수를 마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즐겁 고 들뜬 기분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어쩐지 불안한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요 새는 보리 베는 인부들 품삯이 비싸지요." 플라스코비야가 말했다."하루 1루블 40코페이카나 한데요!' 카잔스코에의 장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계속 줄을 이었다. 부인네들, 차양 없는 새 모자를 쓴 직공들, 거지들, 아이들... 짐마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 간 다음에 장에서 팔리지 않고 돌아오는 말이 달려왔다. 마치 자기가 팔리지 않 은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심술이 난 암소가 뿔을 잡힌 채로 끌 려왔다. 그뒤를 또 짐마차가 따랐다. 술취한 농부들이 그 위에 앉아 다리를 흔들 거리고 있었다. 어떤 노파가 커다란 모자를 쓰고 긴 장화를 신은 사내아이를 데 리고 터덜터덜 걸어왔다. 아이는 더위와 무릎을 급힐 수 없는 무거운 장화 때문 에 지쳐 보였는데, 그래도 장난감 나팔을 입에서 떼지 않고 열심히 그것을 불고 있었다. 노파와 아이가 언덕길을 다 내려가서 한길 쪽으로 돌아가 버린 뒤에도 나팔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이곳 공장 주인들응 모두 나쁜 녀석들뿐이어서 말이야..." 예리자로프가 말했 다. "한심한 일이라구! 요전에도 코스추코프 녀석이 '차양을 다는 데에 송판을 너무 많이 썼어'하고 성을 내고 야단이어서 내가 이렇게 말해주었지. '천만의 말 씀! 필요한 만큼만 썼을 뿐입니다. 코스추코프씨. 그럼 송판으로 죽이라도 끓여 먹은 줄 아시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이러잖아. '나한테 그따위 소리를 할 수 있 어? 멍청이! 얼간이! 주제를 알아야지! 자네를 청부업자로 만들어준 게 바로 나 란 말이야!' 이렇게 악을 쓰더란 말이야. 그래서 내가 '이거, 생색 좀 작작 내시 라구요. 청부업자가 되기 전에도 지금처럼 차 한 잔쯤은 마셨단 말이에여'하며 대들었더니 '자네들은 모두 사기꾼들이야'어쩌고 하면서 주둥이를 놀리잖아... 나 는 잠자코 있었지만 속으로 '흥 이 세상에서는 우리들이 사기꾼으로 몰릴지라도, 저 세상에 가보면 바로 너희들이 사기꾼들이야, 하하! 하고 웃어주었지. 그러나 그 이튿날이 되니 녀석이 얌전해져서 말이야, 이따위 소리를 하지 않겠어. '에리 자포르, 내가 그런 소리를 했다고 너무 회내지 말게. 설사 내가 좀 심한 소리를 했다 해도 그건 당연한 거야. 원래 난 일 상인이고 자네보다는 신분이 위니까 말이야... 그러니 자넨 내게 말대꾸하면 안되는 거야' 어쩌고 하면 말이야. 그래 서 나는 '그야 당신은 일등상인이고 나는 목수지요. 그건 틀림없어요.그러나 말 이오. 요셉 성자님도 목수였다고요. 우리들은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진실한 일 을 하고 잇는 겁니다. 당신이 꼭 위라고 생각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 해도 좋아요, 코스추고프씨'라고 말해주었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바로 생 각해보았어. 일등 상인하고 목수하고 도데체 누가 더 높을까를 말이야. 그러나 물론 목수가 위였지. 그렇지 않다면 이야기가 이상해지지 않겠어. 그렇지, 애들 아!" 목발은 잠시 생각해본 뒤에 덧붙였다. "그렇지 얘들아. 일하는 사람이나 고 통을 참는 사람 쪽이 언제나 위에 있는 거야" 해는 이미 저물었고, 작은 시냇물 위에도 교회의 구내에도 공장 주변의 공지 에도 짙은 우유빛 안개가 뿌옇게 덮이기 시작했다. 어둠이 왈칵 몰려와서 골짜 기에 묻힌 마을에는 등불이 반작이기 시작했고, 안게 속에는 마치 바닥 모를 심 연이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순간적으로,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두려움에 떠는 상냥한 영혼만 제외하고는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남에게 주면서, 평생 이대로 살아가리라 하고 생각하고 있는 리파와 그녀의 어머니에게도 이런 생각- 이 광대무변하고 신비로운 세계에서 영위되고 있는 수없는 생활속에서 자 기들도 무언가 의미를 가진 존재라는, 이 세상에는 자기들보다 못난 사람이 있 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을 스쳐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그들은 높은 언덕 에 앉아 있는 것이 더없이 유쾌했다. 그들은 행복한 미소를 띠면서 아래로 내려 가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집으로 돌아왓다.대문 옆과 가게 앞에는 밀을 베는 일꾼들이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우클레예보 마을에 사는 농부로서 그리고리네 집에 일하 러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일꾼들은 다른 마을에서 데려와야만 했다. 그 때 저녁 어스름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길고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게는 열려 있었고 구머거리 스테판이 어떤 아이를 상대로 바 둑을 두고 있는 것이 문 밖에서 보였다. 일꾼들은 거의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하면, 큰소리로 전날치 품삯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고리네 집에서는 그날 밤에 돌아가 버리면 다음 날의 일이 곤 란해지므로 그들에게 품삯을 지불하지 않았다. 프록의 저고리를 벗고 조끼만 입 은 그리고리 노인은 악시냐와 함께 계단 옆의 자작나무 아래에서 차를 마시고 잇었다.테이블 위에는 램프가 밝혀져 있었다. "할베요!" 밀 베는 일꾼 하나가 빈정대는 투로 문 밖에서 소리쳤다. "절반만이라도 좋으니 품삯을 주이소! 할배요!" 이어서 곧 와 하는 함성이 들렸으나, 한참 있으니까 또 다시 겨우 들릴 정도 의 낮은 소리만 들렸다. 목발은 차를 마시려고 자리에 앉았다. "뭐, 그래, 우리들은 장터에 갔다 왔지."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분좋게 놀다 왔지. 아이들도 무척 기분 좋아했지. 이게 모두 하느님 덕택이 야. 한데 말이야. 딱 한 가지 좋지 않은 일이 있었어. 대장간의 사슈카가 담배를 사고는 말이야, 가게 주인한테 50코카이카 은화를 내주지 않았겠나. 그런데 그50 코카페이카짜리가 사전이었단 말이야." 목발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낮 은 소리로 말한다는 게 마치 목이 졸려 죽어가는 것 같은 쉰 목소리가 되어버렸 으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잘 들렸다. "그 50코페이카짜리가 말이야, 사전이라는 것이 발각된 거야. 모두가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니까 말이야, 사슈카 녀석이 말 하기를 아니심 그리고리한테 받았다, 요전에 결혼식에 갔을 때 받았다,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래 경찰을 불러서 녀석을 넘겨버린 거야.. 그러니 그리고리, 당 신도 관련되지 않게 조심하는 것이 좋아.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할 테니 말이야..." "할배요!"아까처럼 빈정대는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왓다. "할배를 부르잖소!" 모두들 조용해졌다. "야아, 얘들아, 얘들아..." 목발이 재빨리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참을 수 없게 졸랐던 것이다. "차랑 설탕이랑 고마워요. 이제 슬슬 잘 시간이군. 내 몸은 이미 낡았어. 온몸 의 사개가 모두 어긋나버렸으니. 하, 하, 하 !" 그리고 돌아가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아무래도 나는 이제 슬슬 저 세상으로 떠날 때가 온 것 같아!"그러고는 갑자 기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리 노인은 마시던 차를 그대로 놓고 앉아서 갚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 집에서 이미 멀리 떨어진 거리를 걷고 있을 목발의 발소리에 귀 를 귀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틀림없이 대장간의 사슈카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거예요" 악시냐가 그의 마음 속을 헤아리고 말했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작은 꾸러미를 들고 다시 나왔다. 그가 꾸러미를 펴자 번쩍번쩍 빛나는 1루블짜리 새 은화가 여러 개 나왔다. 그는 그중의 하나 를 집어들어 이빨로 깨물기도 하고 쟁반 위에 굴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을 집어서 굴려보았다. "역시 이 루블 은화도 모두 사전이야..." 그는 악시냐의 얼굴을 보면서 아무리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 이 은화는 그.... 아니심이 그때 가지고 온 선물이야. 얘, 아가 , 너 이것을 가지고 가서 말이다..." 그는 귓속말을 하면 그녀의 손에 은화 꾸러미를 들려주었다. "이걸 가지고 가서 말이야, 우물 속에 던져버려라... 이런 돈은 보고 싶지도 않아! 조심해서, 이상하 소문이 나지 않게 해야한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주전자도 치우고 등불도 꺼라..." 리파와 플라스코비야는 창고 안에 앉아서 집 안의 등불이 하나씩 하나씩 꺼져가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2층 바르바라의 방에만 파란색과 빨간색의 등불이 켜져 있었고, 그곳만이 무척 평화롭고 여유있는 청정하나 분위기에 싸여 있는 것같 이 느껴졌다. 플라스코비야는 자기 딸이 부잣집으로 시집온 것이 도저히 믿어지 지가 않아, 이 집에 오면 매우 황송한 듯한 미소를 띠고 언제나 문간에서 주저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곳으로 차와 설탕 같은 것들을 내오는 것이었다. 리파도 이 집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남편이 도시로 돌아간 뒤부터는 침대에 서 자지 않고 부엌이나 창고 같은 데에서 자곤 했다. 그리고 날마다 마룻바닥을 닦거나 빨래를 하면서, 날품팔이 일이라도하고 있는 것처럼 지냈다. 오늘도 교회 미사에 침례하고 돌아온 두 사람은 부엌에서 식모와 함께 차를 마신 다음 창고 로 가서 썰매와벽 사이의 흙바닥에 드러누웠다. 창고 안은 깜깜하고 마구의 냄 새가 났다. 집 주위의 등불이 꺼지고, 이윽고 귀머거리 스테판이 가게를 닫는 소 리가 들렸다. 밀 베는 일꾼들이 안뜰로 가 각자 아무데나 자리를 잡고 드러눕는 기척이 났다. 저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플뤼민 아우네집에서는 값비싼 아코디 언을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라스코비아와 라파는 곧 잠들어버렸다. 두 사람이 무슨 발소리에 잠을 깨고 보니 밖은 이미 밝은 달밤이었다. 창고문 앞에 악사냐가 두 팔에 침구를 안고 서 있었다. "여기가 서늘할지도 몰라..."그녀 는 혼자말을 했다. 그리고 창고 안으로 들어와 달빛을 온몸에 받으면서 문턱 바 로옆에 누웠다. 그녀는 잠이 잘 안 오는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 더위를 못이겨 입은 것 을 거의 전부 벗어던진 채 괴로운 듯 한숨을 쉬었다. 매혹적인 달빛 속에서 그 녀는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자랑스럽고 생동감이 있어 보였는지! 조금 있으니 까 또 발소리가 들렸다. 온몸이 새하얗게 보이는 그리고리 노인이 문 앞에 나타 났다. "악시냐!" 그가 말했다. "너 여기 있니?" "왜요?" 그녀는 부아가 난 듯이 말했다. "아까 너한테 돈을 우물 속에 던져버리라고 일렀는데, 버렸니?" "아니, 보물 을 우물 속에 버리다니! 그건 밀 베는 일꾼들에게 주었어요..." "뭐, 뭐라구!" 노 인은 기겁을 해서 말했다. "넌 정말 형편없이 닳아빠진 계집이구나...아아, 이거 큰일을 저질렀구나!" 그는 부지중에 손뼉을 딱 지고 나서 그대로 나가버렸다. 걸어가면서도 뭐라고 자꾸만 중얼중얼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악시냐는 일어나 앉아서 부아가 끓어오 르는 듯이 휴유 한숨을 쉬었다. 그런 다음 침구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쩌자고 이런 집에 시집 보냈어요!"리파가 말했다. "하지만 얘야, 여자는 시집을 가야만 되지 않니.우리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이다" 두 사람은 위안받을 길 없는 슬픈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들은 저 높은 하 늘에서 별이 빛나고 있는 저 푸른 세계에서누군가가 하계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우쿨레에보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인간 세계에아무리 큰 죄악이 범람하고 있어도, 밤은 역시 고요하고 아름다 웠다. 그리고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세상 역시 이 밤과 같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진리가 여전히 존재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이 지상에 살고 잇는 모든 것들은 달빛이 밤과 융합되듯이, 스스로 정의와 진리에 융합되기를 갈망하 고 있는 것이다. 두 모녀는 다시 편안한 심정이 되어서 서로 몸을 기댄채 깊은 잠 속에 빠져들 었다. 6 아니심이 사전을 만들어 사용한 죄로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벌 써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뒤로 몇 달이 지나고 어느새 반년이 넘는 세월이 흘 렸다. 기나긴 겨울도 지나고 봄이 돌아왔다. 그 무렵에는 집안 사람들이나 마을 사람들이나 아니심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었다. 밤중에 이 집 옆이나 가게 앞을 지나게 되면 문득 아니심이 감옥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낼 정 도였다. 그리고 교회에서 종이 울리면 아무 까닭도 없이 아니심이 감옥 속에 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는게 고작이었다. 그리고리네 저택에는 그 어떤 그림자가 뒤덮고 있는 듯했다. 집안은 어두워지 고, 지붕은 녹이 슬고, 초록색 칠을 한 가게의 육중한 철문은 빛이 바래고- 귀머 거리 스테판의 말투를 빌리면, '바삭바삭해져'버렸다. 그리고리 노인도 어쩐지 어두운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생각되ㅇ다 그는 오래 전부터 머리와수염에 가 위를 대는 일을 그만 두고 자라는 대로 그냥 놓아두고 있었다. 율동적인 동작으 로 마차에 뛰어오르거나, 거지에게 '하느님한테 받아라!'하고 호통치는 일도 없 어졌다. 모든 일에 근력이 쇠약해진 것이 역력히 드러났다.이젠 사람들도 예전 같이 그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마을의 순경은 그전처럼 뇌물을 받아먹으 면서도 가게에 와서는 조서를 작성했다. 노인은 주류밀래 혐의로 조사를 받기 위해서 세 번이나 시내로 소환되었다. 증인이 출두하지 않아서 사건은 미적미적 연기되어 노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노인은 이따금 아들을 면회하러 가기도 한고, 변호사를 사기도 하고, 누구에겐 가 탄원서를 내기도 하고, 교회에 성기를 기증하기도 했다. 아니심이 갇혀 있는 교도소의 소장에게는 '영혼은 절도를 안다'라는 금언을 에나멜로 새긴 은제 컵 받침에 긴 숟가락을 곁들여 선물했다. "내 일처럼 힘써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군요." 라고 바르바라는 말했다. "저어... 누구든 똑똑한 사람에게 부탁했서, 세도있는 장관님께 편지라도 내보면 어떨까 요... 하다 못해 보석이라도 해 주십사 하고 말예요! 그 아이를 그렇게 고생시키 서 어떻게 하나!" 그녀는 슬퍼하기 했으나, 그래도 요즈음에는 약간 살이 찌고 피부새도 희어졌 다. 그리고 옛날과 다름없이 자기 방에 등불을 켜놓기도 하고, 방 안 구석구석을 청결하게 치우기도 하고, 손님에게 잼과 사과과자를 대접하기도 했다. 귀머거리 스테판과 악시냐는 가게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사업-부초키노 의 벽돌공장 사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악시냐는 거의 매일같이 마차를 타고 그 곳으로 갔다. 그녀는 몸소 고삐를 쥐고,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호밀밭에서 밖을 엿보는 뱀같이 목을 빼고는 수수께끼 같은 앳된 미소를 던지곤 했다. 리파 는 언제나 사순절전에 낳은 아기를 데리고 놀았다. 가엾은 생각이 우러날 만큼 조그맣고 여위어빠진 아기였다. 이 아기가 울기도 하고, 주위를 둘러보기도 하 고, 하나의 인간으로 취글ㅁ 받아 니키폴이라는 이름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 이 상할 지경이었다. 아기는 요람 속에서 자고 있었다. 리파는 문 앞까지 걸어가 인 사를 하면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니키폴님!" 그러고는 허둥지둥 아기한테로 달려가서 키스했다. 그리고 또 문앞으로 가서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니키폴님!" 그러면 갓난아기는 조그만 빨간 발을 동당거리면서, 목수 에리자로프처럼 웃 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묘한 소리를 질렀다. 마침내 재판날이 결정되었다. 노인 은 그 닷새쯤 전에 도시로 떠났다. 그 뒤 증인으로 소화돤 농부들이 마을에서 불려 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집에서 고용하고 있던 늙은이도 역시 소환되었다. 재판은 목요일에 있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일요일이 자나도 노인은 돌아오지 않았고 아무 소식도 없었다. 화요일 저녁 때에 바르바라는 열어놓은 창가에 앉 아서 어쩌면 영감님이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옆방에서는 리파가 아기와 놀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아기를 어르며 정신 없이 지껄이고 있었다. "너는 금방 자랄 거야, 아주 크게 자라구말구! 자라서 넌 농부가 될 거야. 그 러면 나랑 날품팔이 가자! 날품팔이 가자, 응!" "얘야," 바르바라는 기분이 언짢아 말했다. "날품팔이를 가다니, 해괴한 소리도 다 하는구나. 바보 같으니라구. 그애는 상인이 될 거라구..." 리파는 조그만 소리 로 노래를 불렀ㄷ. 그러나 잠시 뒤에는 언제 그런 말을 들었는가 싶게 또 이렇 게 말하는 것이다. "너는 곧 자랄 거야. 아주 크게 자라구말구. 너는 농부가 될 거야. 그러면 나랑 날품팔이 가자, 응!" "저런! 또 저런 서리를 하다니!:" 리파는 니키폴을 안고 문 앞에 서서 물었다. "어머님, 저는 어째서 이렇게도 애가 귀여울까요? 어째서 이렇게도 가엾지?"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빛났다. "이 아이는 누구 일까요? 어떤 인간일까요? 마치 새털이나 빵부스러기같이 가볍지만, 저는 이 얘 가 진짜 귀여워서 죽겠어요. 이 애는 아직 아무것도 못하고 입도 떼지 못하지만, 저는 이 애가 무엇을 원하는지 눈빛으로 척 알 수 있어요." 바르바라는 문득 귀 를 기울였다. 저녁 기차가 정거장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영감님은 돌아왔 을까? 그녀는 이미 리파가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 의미도 알 수 없 었다. 그리고 공포라기보다는 강한 호기심에서 시간 가느 것도 잊고 그저 부들 부들 몸을 떨고 있었다. 농부들을 가득 실은 짐마차가 덜커덩 소리를 내면서 바삐 지나가는 것이었다. 도시로 갔던 증인들이 정거장에서 돌아온 것이었다. 마 차가 가게 앞을 지나칠 때, 이 집의 늙은 고용인이 뛰어내려서 안뜰로 들어ㅇ다. 그가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묻는 말에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재산과 권리를 박살내구요..." 그는 큰소리로 지껄였다. "시베리아로 보 낸대요. 6년 유형이래요." 가게 뒷문으로 악시냐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조금 전 까지 석유를 팔고 있었던 모양으로 한쪽 손에 병을 들고 한 쪽 손에는 깔때기를 든 채 입에는 은화 몇 닢을 물고 있었다. "아버님은요?" 그녀는 입을 오믈오믈하면서 물었다. "정거장에 계십니다."고용인이 대답하였다."이제 좀 있으면 어두워지니까, 어두 워지면 돌아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님심이 유형의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이 온 집안에 퍼졌다. 그러자 부엌에 있던 식모가 마치 초상이나 난 것처럼 목을 놓아 울면서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 작했다. 이런 때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느 것 같았다. "아니심님, 독수리처럼 훌륭하신 젊은 서방님. 이제부터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나요, 서방님이 버리고 가신 우리들은 말이에요, 아니심님..." 개들이 깜짝 놀 라서 짖어댔다.바르바라는 창가로 달려가서, 어쩔줄을 몰라하면서 목청껏 소리를 질러 식모를 꾸짖었다. "그만 해. 스테파니다.그만 해! 우리를 괴롭히지 마라, 제발!" 모두들 사모바르 를 내는 것조차 입고 있었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모양이엇다. 라파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아기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노인이 정거장에서 돌아왓을 때, 식구들은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귀가 인사를 마치고는 온 집안의 방이란 방은 죄다 돌아다녔다. 저녁도 먹지 않 았다. "힘써주는 사람이 없었군요..." 바르바라는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누구 높은 살함에게 부탁해야 한다고 제가 말했잖아요... 그때 제 말을 귀담아 듣지 않더니만... 하다 못해 탄원서라도 보냈더라면..." "여러 모로 힘썼 어!" 노인은 말하면서 한 손을 저었다. "아니심이 판결을 받은 뒤에 나는 그 애 를 변호해준 나으리네 집에 갔었지. 그랬더니 '이제는 어쩔 수 없어요,늦었어 요'라고 말하더군. 아니심 녀석도 역시 '늦었어요'하고 말했어. 그래도 나는 재판 소에서 나오는 길로 어느 변호사에게 줄을 대서 손을 써뒀어... 앞으로 일주일 후에 다시 나가봐야지. 어떻게 될 지도 모르니까." 노인은 또 다시 입을 다문 채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녔다. 그리고는 바르바라의방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말 했다. "아마 내가 무슨 병에 걸린 것 같아. 머리 속이 이렇게 ... 안개가 낀 것 같단 말이야. 도무지 생각을 정리할 수 없으니." 그는 리파에게 들리지 않도록 문을 꼭 닫고는 조그만 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 나 말이야, 실은 그 돈 일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구. 당신도 생각나지? 아 니심이 결혼식 전에 새 루블짜리 은화와 50코페이카짜리 은화를 가져온 적이 있었지. 나는 그때 한 꾸러미는 치워두었지만., 나머지는 내 돈하고 막 섞어버렸 지... 이건 옛날 이야긴데, 우리 드리트리 피라티치 숙부님이 아직 살아 계실 때 숙부님은 항상 모스크바나 크림 등지로 물건을 사러 다니셨지. 숙부님한테 아내 가 있었는데, 이 아내라는 게 영감님이 물건을 사러 떠나서 집을 비울 때면 딴 사내와 놀아났다구. 아이가 여섯이나 되었지. 그런데 말이야, 숙부님은 한 잔 들 어 가기만 하면 으레'난 도무지 분간이 안 돼, 어느 게 내 자식이고 어느 게 남 의 자식인지 말이야." 어쩌고 하면서 웃으셨지. 느긋한 성질이었으니까. 결국 지 금의 나도 그때의 그 숙부님처럼 내 돈 주에 어느 게 진짜고 어느 게 가짠지 분간하 수 없게 되었단 말이야.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 가짜로만 보여." "어머, 당찮은 말씀. 하느님이 살펴주실 거에요!" "정거장에서 차표를 사면서 3루블을 치렀는데. 그게 아무거나 가짜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울렁울렁했어. 정말 병인가봐." "그야 그렇겠지만 만사를 하느님께 맡기세요... 저어, 저...." 그녀는 말하면서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이 점만은 염두에 두셔야 해요, 네, 여보...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당신도 이제 나이가 나이니까요, 만일 당신이 돌아가신다 면 모두들 저 손자에게 지독한 짓을 할지 몰라요. 모두들 저 니키폴에게 얼마나 가혹하게 대할 것이나 생각하면, 나는 걱정이ㅣ 되어 죽겠어요! 저 애는 아비가 없는 거나 마찬가리이고, 어미 역시 나이가 어린데다 우둔하고 보니... 당신은 저 거을 위해서, 저 애를 위해 하다 못해 토지라도, 저 부추키노라도 물려주면 어때 요, 네, 여보! 정말 착한 앤데, 가없어요! 내일이라도 나가서 서류를 꾸며달라고 하세요. 빠를수록 좋아요." "내가 손자 녀석 일을 잊고 있었군.." 그리고리가 말했다. "잠깐 얼굴을 보고 와야지. 그럼 뭐냐. 그 애는 잘 있단 말이지. 좋아, 좋아, 훌륭히 키워주마. 하느 님이 도와 주실 테니까 말이야!" 그는 문을 열고 손가락을 까딱거려서 리파를 불렀다. 리파는 갓난아기를 안고 곁으로 다가왔다. " 리퓌니카, 너 뭐든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래라, 뭐든지 먹고 싶은 게 있 으면 먹어. 우리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을 테니까. 네가 잘 있어주기만 하면 되니 까... " 그렇게 말하고 그는 갓난아기를 보면서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내 손자 녀석을 소중히 ㅣ돌봐줘야 한다. 자식은 없어지고 손자만 남았으니." 눈물이 노 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흐느껴 울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이내 그는 깊이 잠들었다. 그때까지 1주일 동안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던 것이 다. 7 노인은 얼마 동안 도시로 나갓다가 돌아왔다. 악시냐는 그가 유언장을 작성하 려고 공증인하테 갔었다는 것, 그녀가 벽돌공장을 세우고 있는 저 부초키노가 손자 니키폴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누구한테 선지 들었다. 그녀가 이 말을 들은 것은 아침이었는데. 그때 노인과 바르바라는 바깥 계단 옆의 자작나무 아래 앉 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악시냐는 한길과 안뜰로 난 가게문을 닫아 건 다음, 자기가 맡아 가지고 있던 열쇠를 전부 챙겨서 노인의 발 앞에다 철커덕 집어던 졌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당신들을 위해서 일하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큰소리로 외치고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건 뭐, 나는 이 집 며느리가 아니라 하녀나 마찬가지 아녜요? 마을 사람들이 다 비웃고 있어요. '봐라 그리고리네 집 에는 좋은 하녀를 두지 않았냐?'하고 말예요. 나는 이 집에 종살이 하러 온 게 아녜요! 거지도 하녀도 아니예요. 내게는 아버지도 있고 어머니도 있어요." 그 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눈물에 젖은 채, 분하고 원망스런 눈을 치뜨고 노인을 정면에서 노려보았다. 목청껏 악을 써서 얼굴과 목에는 벌겋게 핏대가 올라 있었다. "난 이 이상 여기서 혹사당하는 것은 사양하겠다구요!"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이제 난 완전히 지쳐버렸어! 악착스럽게 일하고, 하루종일 가게를 지키고, 밤에 는 밤대로 보드카를 사러뛰어다니고... 그런 걸 모두 나한테 시켜놓고서 토지는 저 유형수의 여편네와 그 새끼한테 줘버리다니! 저년은 이 집 안주인이고 마님 이고, 나느 그럼 저년의 종이군! 흥 뭐든지 저년에게, 저 유형수의 여편네에게 줘버리라고, 난 우리집으로 돌아갈 테니까! 나 대신 다른 바보년을 고용하면 되 겠지. 이, 인간 같지 않은 것들 같으니!" 노인은 지금까지 한 번도 아이들에게 욕을 하거나 벌을 준 적이 없었다. 또 식구들도 자기한테 폭언을 하거나 무례한 태도를 취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다. 그래서 그는 너무 놀라고 기가 질려서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 장롱 뒤에 숨어버렸다. 한편 바르바라는 너무 놀라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벌이라도 쫓듯 두 손을 휘휘 내저을 뿐이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짓이야?" 그녀는 공포에 질려서 중얼거렸다. "애가 왜 이 리 악을 쓰나? 그만, 그만... 남이 듣지 않니! 좀 조용히 ... 저런, 좀 조용히 하라 니까!" "부초키노의 땅을 유형수 여편네에게 줘버리다니..." 악시냐는 계속 악을 ㅆ다. "이왕에 이렇게 되었으니 뭐든지 저년에게 다 주지 그래. 나는 아무것도 필요없 다구, 다들 꺼져버리란 말이야! 당신네들은 모두 한 구멍 속의 너구리들이야! 난 이제 꼴도 보기 싫다구. 이젠 딱 질색이야. 당신네들은 통행인과 여행객들의 돈 을 알겨먹지 않았어! 이건 강도나 다를 바 없어. 늙은이건 젊은이건 할 것 없이 모조리 훔쳐먹었잖아... 허가도 없이 보드카를 판 건 누구야? 가짜 돈을 쓴 건 누구야? 궤짝 속에 가짜 돈을 가득 쌓아 놓고서 말이지.. 그러고는 이제 와서 나 를 내쫓아내려고 한단 말이지!" 열어젖혀 놓은 현관문 주위에 벌써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모두 안뜰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본다고 대순가!" 악시냐는 악을 썼다."나는 당시네들을 망신 좀 시 켜야겠어! 오래지 않아 부끄러워서 낯을 못 들고 다니게 될 거야! 내 발 앞에 엎 드려서 용서를 빌게 될 거야! 이봐요, 스테판!" 그녀는 귀머거리 남편에게 소리 쳤다. "빨리 집으로 갑시다. 나랑 우리 부모님한테로 가요. 이런 죄인들과는 같이 살 수 없으니까요! 자, 채비를 하세요." 안뜰에는 빨랫줄이 있고 거기에 빨래가 널려 있었다. 그녀는 채 마르지도 않 은 자기의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줄에서 잡아채어 귀머거리 남편의 팔에 획획 던 졌다. 화가 치밀 대로 치민 그녀는 안뜰에 쳐진 빨랫줄마다 뛰어다니면서 옷가 지를 한쪽에서부터 잡아채어 자기것이 아닌 것은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발로 짓 밟았다. "아아, 저 애를 말려 주세요!' 바르바라는 신음하듯 말했다."도대체 어찌 된 일 이야. 저 애에게 부초키노를 줘버리세요. 제발 부탁이니 줘버려요!" "야아, 별 여자 다 보겠네!" 문간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저게 여자냐, 저 행패 좀 봐 .... 대 단하군!" 악시냐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마침 리파 혼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식모는 빨래를 헹구러 냇가로 나가고 없었다. 조리용 난로 옆에 있는 빨래통과 가마솥 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오르고 있어서 부엌 안은 자욱한 게 숨이 콱콱 막혔다. 마룻바닥 위에는 아직 빨지 않은 빨랫감이 산덤비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니 키폴은 굴러 떨어져도 다치지 않도록 그 바로 옆 의자에 뉘어진 채, 조그만 빨 간 발을 버둥거리고 있엇다. 악시냐가 들어갔을 때. 리파는 마침 악시냐의 속옷 을 빨랫감 더미에서 집어내어 통 속에 담고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끓는 물 이 든 커다란 바가지로 손을 뻗치려던 참이었다. "이리 줘!" 미워 죽겠다는 눈초리로 리파를 노려보면서 악시냐는 통 속에서 자기의 속옷을 끄집어냈다. "내 속옷에 손을 대다니, 주제 넘은 짓은 그만둬! 너 는 유형수의 아내잖아. 조금쯤은 제 주제를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리파는 말도 못할 만큼 놀랐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랐으나, 문득 악시냐가 갓5난아기를 보는 눈빛을 깨닫자. 갑자기 그 뜻을 알아차리고 온몸이 저려오는 것이었다. "내 땅을 빼앗은 별로 이렇게 해주마!" 이렇게 말하며, 악사냐는 끊는 물이 담긴 바가지를 들어서 니키폴에게 끼얹어 버렸다. 이어서 우클레에보 사람들이 여태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무서운 비명 이 들렸다. 리파같이 몸집이 자고 가냘픈 여자가 그런 비명을 지를 수 있으리라 고는 쉽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안뜰이 온통 조용해졌다. 악시냐는 여느때와 같은 앳된 미소르 띠고서 말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귀머거리 스테판은 빨래 를 두 팔에 안은 채 안뜰을 서성거리다가 이윽고 말없이 그것을 다시 줄에 느릿 느릿 널기 시작했다. 식모가 냇가에서 돌아올 때까지. 부엌으로 들어가서 그안의 형편을 살펴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8 니키폴은 자치회에서 경영하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그날 저녁 때쯤 해서 결 국 주 고 말았다. 리파는 마차라 데리러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죽은 갓난 아 기를 조그 만 담요에 싸안고 집으로 향했다. 최근에 세운, 큰 창문이 나 있는 병원은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잇었다. 건물 전체 가 저녁놀에 붉게 물들어서 마치 그 내부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엿 다. 언덕 아 래에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엇다. 리파는 비탈길을 내려와서 마을 입 구에 있는 작은 연못가에 앉았다. 어떤 여자가 말에게 물을 먹이려는데. 말은 물 을 먹으려들지 않았다. "뭐가 더 필요해서 그래?" 여자가 망설이듯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필요 해서 그래?" 빨간 셔츠를 입은 사내아이가 물가에 앉아서 아버지의 장하를 씻고 있었다. 그밖에는 언덕 위에도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먹고 싶지 않은 게로구나..." 리파가 말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윽고 그 여자 도 가고 장화를 든 아이도 가버렸다.주위에는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태양은 잠 자리에 들어가서 붉은 보라빛 비단 잠옷을 입고 있었다. 하늘에서 비껴 흐르고 있 는 붉은빛 혹은 보랏빛의 가느다란 구름은 태양이 자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 고 있 었다. 어디선가 아주 먼 데서 알락해오라기가 마치 외양간에 갇힌 암소처 럼 애련하 고 공허한 소리로 울고 잇엇다. 이 신비로운 새의 울음소리는 해마다 봄이면 들려왔 으나, 그것이 어떤 새이며 어디 살고 잇는지는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언덕 위의 병원 에서도 연못가의 숲에서도 마을 편에서도 주위의 들판에 서도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 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뻐꾸기는 누구의 나이를 세다가 자꾸만 틀려서 처음부터 다 시 셈을 시작하고 있었다. 연못 속에서는 개 구리들이 성난 목소리로 죽어라고 서로 소리지르며 울어대고 있엇다. 그 소리는 마치 '네놈도 그렇지! 네 놈도 그렇지!'라고 지껄이는 것 같았다. 지독히 시끄러 운 밤이었다. 이들 온갖 생물들은 이 봄밤에 사 람 들을, 성난 소리로 울어대는 개 구리들까지도, 삶이란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것 이니 그 1분 1초라도 아껴 서 소중히 여기고 즐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늘에는 은빛 반달이 빛나고 수많은 별들이 총총이 떠 있었다. 리파는 얼마 나 오 래 연못가에 앉아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을 때에는 마을은 이미 잠이 드러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집까지의 거 리는 12킬로미 터쯤 되었는데, 걸을 힘도 없고 어떻게 걸어갈까 생각해볼 기럭조 차 없엇다. 달은 앞 쪽에서 비추다 점점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아까 울던 그 뻐 꾸기가 아주 쉰 소 리로, 조로이라도 하듯이 '저런 힘을 내라니까, 길을 잃는다 구!'하고 외쳤다. 리파 는 걸음 을 재촉했다. 언제 그랬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 의 머리에서 프라토크가벗 겨져 버 리고 없었다. 그녀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자기 아이의 영혼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자기 뒤에서 따라오는 것일까, 아니면 저 높은 별 근처를 날아다니면서 이 미 엄마 생 각 따위는 하지도 않는 게 아닐까 생 각해보는 것이었다. 이런 밤에 들판 한가운데서 자기가 노래조차 부를 수 없이 우울할 때 새들의 노랫 소리를 듣거나, 자기가 즐겁지 못할 때 즐거운 소리를 듣는다느 것은, 아아, 이 얼마 나 서글픈 일이란 말인가! 봄이거나 겨울이건, 사람이 살아있거나 죽었거 나, 그런 것 들하고는 아무 상관 없이, 혼자서 쓸쓸히 하늘에서 하계를 내려다보 고 있는 달과 단 둘이 있다니,아아,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이란 말인가... 마음에 슬 픔을 안고 혼자 외돌 토리로 떨어져 있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이랴. 이럴 때, 하다 못해 어머니 플라스 코비야라도 함께 있어주었으면! 목발할아버지라도, 식모 라도, 농부라도, 아니 그 누구 라도 좋으니 함께 있어주었으면! '부우'하고 알락해오라기가 울었다. '부우' 갑 자기 사람의 말소리가 뚜렷이 들려왔다. "짐마차에 말을 매게, 바빌라!" 바로 앞 길가에서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말이 풀을 뜯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이 윽 고 어둠 속에서 두 대의 짐마차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대는 통을 싣고 있 었고, 또 한 대의 작은 마차는 무슨 자루를 싣고 있었다. 그리고 두 남자 의 모습도 보 였다. 한 사람은 짐마차에 말으 매려고 말을 끌어 오고 있었고, 다 른 한 사람은 두손 을 뒷짐진 채 모닥불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짐마차 옆에 서 개가 짖었다. 그러자 말을 끌고 오던 남자가 멈춰 서면서 말했다. "누가 이리로 걸어오는 것 같은데." "샤알리크, 조용히 해" 또 한 사람이 개에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노인이 목소리였다. 리파는 멈춰 서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노인이 리파에게로 다가왔다. "안녕!" "할아버지, 그 개 물지 않아요?" "괜찮소. 지나가요, 물지 않을 테니까." "저, 병원에서 오는 길입니다."리파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엇다. "아 기가 병원에서 죽었어요. 지금 이렇게 안고 집으로 가는 길이에요.' 노인은 그 소리를 듣 고 속이 좋지 않은 듯, 가까스로 옆으로 비켜서면서 급히 말했다.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새댁. 다 하느님이 뜻이니까. 여보게, 뭘 꾸물거리고 있 나!"하고 동행을 보고 소리쳤다. "빨리 해!" "영감님, 말 멍에가 없어요." 젊은이가 말했다. "아무래도 안 보여요." " 이런 멍청이 보았나!" 노인은 불이 붙은 숯덩이 하나를 집어들고 후후 불엇다. 그의 눈과 코 언저리 가 환 히 밝아졌다. 이윽고 멍에를 찾아내자, 불을 들고 리파 옆으로 다가와서 그 녀의 얼 굴 을 들여다 보았다. 그의 눈에는 동정과 친절의 빛이 나타나 있었다. "새댁이 애 엄마요? 어느 엄마든지 모두 자식 때문에 슬픔을 겪게 마련이지."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한숨을 쉬고 머리를 저었다. 바빌라가 불에다 무엇인가 를 던져 넣고 짓밟았다. 그러자 갑자기 주위가 캄캄해졌다. 환영은 사라지고, 다 시 아까처럼 들판과 별과서로 잠을 방해한는 소란한 새소리만이 남았다. 모닥불 이 타던 그 자리에서 휘눈 썹뜸부기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1분쯤 지나자, 다시 짐마차와 노인과 후리후리한 바빌라의 모습이 나 타났 다. 짐마차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면서 길 위로 나왔다. "당신ㄷ은 성자님들이세요?" 리파가 노인에게 물었다. "아니, 우리는 필사노보 사람이야." "아까 할아버지가 저를 보셨을 때, 전 어쩐지 가슴이 확 틔는 것 간았어요. 그 리 고 젊은 분도 마음이 착하실 것 같았어요.그래서 전 틀림없이 성자님들이라고 생각 했어 요." "먼 데까지 가나?" "우클레예보까지요." "그럼 여기 타요, 크지멘키까지 태워다 줄 테니, 거기서부터 새댁은 똑바로 가 면 되고, 우리는 왼쪽으로 돌아서 가고." 바빌라는 통을 실은 마차에 타고, 노인과 리파는 다른 마차에 올랐다. 바빌라 가 탄 마차가 앞장 서서 느릿느릿 출발했다. "이 애는 하루종일 고통을 겪었어요.:"리파가 말했다. "조그만 눈으로 저를 쳐 다보 면서 아무 말도 안했어요.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거예요. 아아, 예 수님, 마 리아님! 저는 슬퍼서 내내 방바닥에 쓰러져 있기만 했어요. 아무리 해도 이 애 머리 맡에 서 있을 수가 없었어요. 네, 할아버지, 이렇게 조그만 애가 죽기 전에 왜 그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나요? 어른들이라면 남녀 불문하고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고통 을 겪는다지만, 이런 죄 없는 애는 무엇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나요? 네, 왜 그럴까 요?" "그걸 누가 아나!" 노인은 대답했다. 그뒤로 두 사람은 아무 말없이 30분쯤 타 고 갔 다. "세상만사 그 이유를 다 알 수야 없지... 왜라든가 어째서라든가 하는 그 이유 를 말이야." 노인이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새는 날개가 네 개 아니고 두 개만 붙 어 있는데, 이건 두 개만으로도 날 수 있으니까 그런 거지. 마찬가지 로 인 간도 만사 를 전부가 아니고 절반이나 4분의 1정도밖에는 알 수 없게 되어 있는 거야. 그래도 살아가는 데 꼭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은 다들 잘 알고 있지." "할아버 지, 전 역시 걸어 가는 게 편하겠어요. 이렇게 타고 있으니 어쩐지 가슴 이 두근두근해 서." "괜찮아 걱정 말아요. 지금 새삼스럽게 내릴 건 없어요." 노인은 하품을 하고 나서 가슴에다 성호를 그었다. "걱정 말아요.." 그는 되풀이했다. "새댁의 슬픔 같은 건 대단치 않아요. 사람 의 일 생은 기니까... 앞으로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을 거야. 별의별 일이 다 생긴 다 구. 우리를 낳아준 러시아는 무척 큰 나라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며 길 양쪽을 바 라보았다. "나는 이 러시아 안에서 안 가본 데가 없이 다 돌아다녔 지, 그리고 여러 가지 일도 당해봤지. 그러니 난 거짓말은 안한다구. 새댁. 좋은 일도 있고 나 쁜일도 있어. 나는 옛날에 마을에서 공무로 시베리아에 간 적도 있 어. 또 아무르에 도 갔고, 알타이에도 갔었지. 시베리아에서는 농사를 짓고 살기 도 했었어. 한데 말 이야, 그러다 가 어머니인 러시아가 그리워져서 고향으로 돌아 오고 말았지. 나는 러시 아로 돌아올때 에도 걸어서 왓어. 여윌 대로 여윈 나는 온 몸에 누더기를 걸친 채 맨 발로 추위에 떨 면서 빵 껍질을 씹고 있었지. 그때 그 나룻배에는 여행을 하고 있던 어떤 나라가 타 고 있었는데... 벌써 돌아가셨다면 부디 하느님의 가호가 있으시기 를.. 그 나리가 가 엾다는 듯이 나를 보더니 눈물 을 흘리면서 말이야.'자네의 빵은 검고, 자네의 세월도 검구나.....'라고 하셨지. 마 을에 도착했을 때에는 흔한 말로 빈털터리가 되어 아무것 도 없는 상태였지. 옛 날에는 여편네도 있었는데. 시베리아 에 남아 있다가 그곳 흙이 되어버렸지. 그래 서 지금은 날품팔이 농군으로살고 있 지만, 그뒤로 새댁, 나쁜 일도 있었고 좋은 일도 있었다구. 그래선지 죽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어. 앞으로도 20년쯤 은 더 살 고 싶다고 생각하지. 결국은 좋은 일 쪽 이 더 많았다는 거야. 어머니인 러시 아는 커니까 말이야!" 이렇게 말하며 그는 또 길의 양옆을 둘러 보거나 뒤를 돌아보 았다. "할아버지." 리파가 물었다. "사람이 죽으면 그 혼백이 며칠쯤이나 이 하계에 서 ㅂ황하나요?" "그런 걸 누가 알겠어! 어디 바빌라에게 물어볼까...녀석은 학교를 다녔지. 요 즈음 엔 학교에서 뭐든지 가르치니까. 여봐. 바빌라!" 노인이 말했다. "왜요!" "바빌라, 사람이 죽으면 혼백이 며칠이나 이 하계에서 있게 되나?" 바빌라는 잠시 말을 세우고 나더니 대답했다. "9일 동안이지요. 우리 카릴라 아저씨가 죽었을 때에는 혼백이 13일 동안이나 집 안에서 살았었지요." "어떻게 자네는 그걸 알았지?" "어떻게라니요, 13일 동안 난로 안에서 똑딱똑딱 소리가 났는데요." "그래, 좋아좋아, 자, 가자." 하고 노인은 말했지만 그가 한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크지멘키 근처에서 마차는 큰길 쪽으로 꺾어들었다. 리파는 거기서부터 걸어 서 갔 다. 벌써 동틀 무렵이었다. 그녀가 골짜기로 내려가니 우클레예보의 집들과 교회는 안 개에 싸여 있었다. 공기는 차갑고 아까 울던 뻐꾸기가 아직도 울고 있 는 것 같이 느 껴졌다. 리파가 집에 도착했을 때 가축들은 아직 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모두들 자고 있었 다. 그녀는 현관 앞 계단 위에 앉아서 그대로 기다렸다. 맨처음에 나온 것은 노인이 었 다. 그는 리파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금방 알 아차렸다. 그 리고 한참 동안 말한 마디 없이 입맛만 쩝쩝 다셨다. "아아, 리파."그가 말했다."너는 내 손자를 끝내 지키지 못했구나..." 이윽고 사람들이 바르바라를 깨웠다. 그녀는 두 손을 깍지끼어 쥐어짜면서 울 었다. 그리고 곧바로 죽 은 아기의 뒤치다꺼리에 들어갔다. "정말 착한 애였는데..." 그녀가 말했다. "외동아들을, 이걸 말이야, 끝내 지키 지 못 하다니, 바보야..." 그날은 아침 저녁으로 신공을 올렸다. 장례는 이튿날 거행되었다. 장례식이 끝 난 뒤, 조객들과 성직자들은 마치 오랬동안 굶었던 것처럼 배불리 음식을 먹었 다. 리파는 음식 시중을 들었다. 한 신부가 소금에 절인 버섯을 포크에 찔러 높 이 쳐들면서 그녀 에게 말을 했다. "아이의 일로 너무 슬프하지 마시오. 그런 애는 모두 천국에 간답니다." 손님들이 모 두 돌아가 버리자, 리파는 니키폴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는 것, 그 리고 앞으로도 영원 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비로소 절실히 가슴에 울려와 서 소리내어 울었다. 그녀 는 어느 방으로 가서 울어야 할지 몰랐다. 왜냐하면 아 이가 죽은 마당에 이 집 안에는 자기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 자기는 이 집에서 이제 필요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느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어머, 그런 데서 뭘 짖어대고 있지?" 악시냐가 문 앞에 얼굴을 내밀고 소리쳤 다. 장례식이라는데 새 옷을 입고, 얼굴에는 분을 바르고 있었다. "뚝 그치지 못 해?" 리 파는 울음을 그치려 했지만 암만 해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큰소리 로 흐 느 껴 울었다. "내 말 안 들리니?" 악시냐가 소리쳤다. 그리고 성이 나서 발을 탕탕 굴렀다. "누구한데 말하고 있는 줄 알아?자, 나가, 두 번 다시 여기 오지 마라. 유형수 의 여 편네야! 안 나갈래?" "얘야, 얘야, 얘야...." 노인이 당황해서 말했다. "악시냐, 그렇게 소리치는 게 아니 다, 얘야... 우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아이를 잃었잖아..." "무리가 아니지...'라..." 악시 냐는 노인의 흉내를 냈다."오늘 밤만은 집에서 재 워도 좋지만, 내일이면 저 여자 를 싹 쫓아낼 거예요! '무리가 아니지'라니!..." 그 녀는 다시 한 번 흉내를 내고는 깔 깔 웃 으며 가게 쪽으로 가버렸다. 9 가게의 지붕과 문에 새로 칠을 하고 나니 마치 새 집처럼 산뜻했다. 창가에는 예전 과 같이 제라늄이 즐거운 듯이 피어 있었다. 그리고 3년 전 그리고리네 집 안과 안 뜰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이제 거의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때나 마찬가지로 아직도 그리고리 노인이 이 집의 주인이기는 했지만, 사실 상 실 권은 모조리 악시냐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물건을 사고 파는 것도 그녀 가 도맡아 했으며, 그녀의 동의가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벽돌공장도 잘 되어가고 있 었다. 철도 공사 때문에 벽돌의 수요가 늘어나 1천 개에 24루블 까지 뛰었다. 부인네 들과 처녀들이 정거장까지 벽돌을 운반해서 그것을 화차에 실어주고 일당 25코페이 카씩 받고 있었다. 악시냐는 풀뤼민 집안과 동업을 했다. 그들의 공장은 이제 '플뤼민아우 회사' 라 불리고 있었다. 그들은 정거장 근처에 술집을 차렸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그 값비 산 아코디언을 타는 소리가 공장 쪽에서가 아니라 술집에서 흘러나왔다. 이 술집에 는 최 근에 무슨 거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우체국장과 역장도 자주 드나 들었다. 귀 머거리 스테판은 플뤼민 아우 집안 사람에게서 금시계를 선물로 받았 다. 그는 연방 그 시계 를 주머니에서 꺼내서는 귀에 갖다대고는 했다. 마을에서는 악시냐가 대단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그녀 가 아침마다 그 앳된 미소를 띠고 아름답게 빛나는 행복한 얼굴로 마차를 타고 자 기 공장으로 나가는 모습이나 공장에서 이것저것 지시를 하고 있는 모습 을 보면, 그녀 가 정말 대단한 권력을 갖게 된 것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집과 공장과 마을 그 어디에서나 모두 그녀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녀가 우체 국에 들르면 국장이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자, 앉으시죠, 악시냐 부인." 나이가 지긋한데도 엷은 나사로 지은 소매없는 외투를 걸치고, 니스 칠을 한 긴 장화를 신고 다니는 한 멋쟁이 지주가 그녀에게 말을 판 적이 있었는데, 그 지주는 그녀의 화술에 매혹되어 그녀가 값을 깍아달라는 대로 깍아주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명랑하면서도 교활한 빛이 흐르는 그녀의 눈 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악시냐 부인, 부인 같은 분의 마음에 드는 일이라면, 저는 어떤 일이라도 하 겠 습 니다. 제발 말씀해주십시오, 언제 당신과 조용히 만날 수 있을까요?" "네, 언제라도 당 신이 편리하실 때면 좋아요!" 그후부터 이 나이 지긋한 사나이는 거의 매일같이 맥주를 마시러 가게에 들렀 다 이 맥주란 게 형편없는 것으로 제비숙같이 쓴 맛이 났으나. 지주는 자꾸만 머리를 저 으 면서도 그것을 마셨다. 그리고리 노인은 이미 장사에서 손을 떼고 전혀 간섭을 하지 않았다.게다가 수주 에 모아놓은 돈도 없었다. 그 사건 이후로 그는 진짜 돈과 가짜 돈을 분간 할 수 없 어 돈을 모아둘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입을 다물고, 자기의 이런 약점에 대하여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식구들은 이제 식사 시간에 그가 안 보이더 라 도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되었다. 그래서 바르바라는 곧잘 이런 말을 했다 " 우리집 양반은 어제도 아무것도 안 들고 주무셨어." 이미 그런 데는 익숙해져 버려 서 예사롭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 된 까닭인지 노인은 여름이고 겨울이고 변함없이 털가죽 외투를 입고 밖으 로 돌 아다녔다. 아주 더운 날이 아니면 집에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이 없었다. 언 제나 털가 죽 외투의 깃을 세워서 몸을 꼭 감사고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거나, 큰 길을 따라서 정 거장 쪽으로 걸어가거나, 혹은 교회의 문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거나 했다. 벤치 에 가만히 앉아서 몸을 까딱도 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 이 인사를해도 답례를 하지 않았다. 여전히 농부들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누가 무얼 물으면 정확 하 고 정중한 말로 짧게 대답했다. 마을에서는 그가 며느 리한테 쫓겨나서 먹을 것도 못 얻어먹고, 사람들의 시헤를 받아 겨우 연명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재미있어 하는 사람도 있었고, 가엾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바르바라는 점점 살이 올라 안색이 환하게 피어났다. 여전히 자선을 베푸는 데에 힘쓰고 있었다. 악시냐도 그것만은 방해하지 않았다. 잼의 저장이 많아져서 이제는 새 딸기가 날 때까지 도저히 다 먹어치울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내버려두면 점점 굳어 지므 로, 바르바라는 그 잼의 처치에 골머리를 앓았다. 아니심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점점 잊혀져 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청원서 같은 큰 종이에 전처럼 달필로 쓴 운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이로써 그의 친구 사모르도프와 함께 유형을 가 있는 게 분명해졌다. 그 운문 밑에는 가까스로 읽어볼 수 있는 서투른 글씨로 단 한 줄 이런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저는 여기서 계속 병고에 시달리도 있 습 니다. 저는 고통스러워요. 부탁입니다. 저를 구해주세요.' 어느 화창하게 갠 가을날 저녁 때, 그리고리 노인은 교회의 문 옆에 앉아 있었다. 털 가죽 외투의 깃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코끝과 모자챙 밖에 보이지 않았다. 긴 벤치의 다 른 한쪽 끝에는 도급 목 수인 옐리자로프와 일흔 살이 다 돼 이가 빠졌는데도 학교의 수위 노릇을 하고 있는 야코프 노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목발과 수위 영감은 이야기 를 나누고 있었다. "자식들이 늙은이를 봉양해야지... 너의 부모를 공경하란 말이 있지 않나." 야코프 는 자못 분개하여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말이야, 그 집 며느리 는 말이야, 시아버지를 집에서 쫓아낸 거야. 그것도 시아버지가 산 집에서 말이 야. 영감 은 지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벌써 사흘이나 아 무것도 먹 질 못했다더군." "사흘씩이나!" 목발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보라구, 저렇게 가만히 앉아서 아무 말도 못해.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거야. 그 런데 왜 가만히 앉아만 있는지. 고소하면 안될까...재판소에서까지 설마 그 여자를 두 둔 할라구." "재판소가 누구를 두둔한다구?" 목발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라구?" "그래도 그 여자에게는 좋은 점도 있다구. 일 하나는 착실하게 하고 있잖아. 그 집 은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유지가 안 된다구... 이를 테면 나쁜 짓을 하지 않고서는 지 탱을 못한단 말이야." "시아버지가 산 집에서 시아버지를 쫓아버리다니." 야코프는 여전히 성이 나서 소리 쳤다. "자기가 돈을 모아서 산 집이라면 사람으 쫓아 내도 어쩔수 없지만! 쯧쯧, 생각만 해도 비위가 상하는 년이야! 천벌을 받을 년!" 그리고리 노인은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꼼짝달싹도 않고 앉아 있었다. "자기 집이건 남의 집이건 마찬가지야, 따스하고 여자들이 바가지만 긁지 않으면 말 이야... " 목발이 말하며 웃었다. "이래뵈도 난 젊어서는 우리 나스타샤를 무척 좋아 했 었지. 얌전한 여자 였어. 얌전 한 건 좋은데, 나스타샤는 두 마디째에는 벌써 '당신 집 을 사세요! 당신 집을 사세요! 당신 집을 사시라구요!' 했었지. 임종시에도 '여보 경 주용 마차를 한 대 사세요. 뭐 당신이라고 항상 그렇게 터덜터덜 걸어다녀야만 하나요 ' 어쩌 고 하면서 지껄여댔지. 그런데도 내가 그 여자에게 사준 것이라고는 고작 생 강떡 정도 였으니." "그리고 말이야, 그 여자의 남편은 귀머거리에다 더구나 등신이야." 야코프는 목발 이 하는 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 말만 계속했다. "쓸개 빠진 얼간이 자식 같으니. 말 하자면 꼭 거위 새끼 같은 놈이야. 그 자식이 아는 게 뭐 있나? 거위란 놈은 여보게, 몽둥이로 대가리를 쳐도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던가." 목발은 공장 안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났다. 아코프도 일어났다. 둘은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나란히 걸어갔다. 그들이 50보쯤 걸어 나갔을 때 그리고리도 따라 일어나서, 마치 빤질빤질 미끄러운 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런 걸음걸이로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느릿느릿 걸어갔다. 마을은 이미 저녁 어둠에 싸여 있었다. 태양은 뱀처럼 꿈틀꿈틀 기어 올라간 길의 위 쪽만을 비추고 있었다. 할머니들이 숲에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모두들 여러 가지 버섯이 들어 있는 바구니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정거장에 나가서 화차에 벽돌을 싣는 일 을 하고 있는 부인네들과 처녀들도 떼를 지어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들의 코ㅋ과 양쪽 눈밑의 뺨에 붉은 벽돌 가루가 묻혀져 있었다. 다같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앞장 서 서 걸어오고 있는 게 리파였다. 그너는 이날 하루도 무사히 마치고 편히 몸을 쉬게 되 는 것이 매우 즐겁다는 듯이, 가슴을 펴고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가냘픈 소리로 노래하 고 있었다. 행렬 중간쯤에 역시 날품팔이를 하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 플라스코비야가 끼여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 꾸러미를 들고 언제나처럼 헐떡헐떡 가쁜 숨을 쉬면서 걷 고 있었다. "안녕, 마카뤼치!" 리파는 목발을 보자마자 인사를 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안녕, 리퓌니카!" 목발이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아주머니, 처녀들, 이 돈 많은 목수 영감을 사랑해주시라구요! 하하! 얘들아, 얘들아, 나의 귀여운 아가들아!" 목발과 야코프는 저리 지나갔으나 두 사람의 이야기 소리는 또렷이 들려왔다. 이윽고 리파의 일행은 그리고리 노인을 만났다. 그러자 갑자기 모두들 말문을 닫고 잠잠해졌 다. 리파와 플라스코비야만 잠시 줄에서 조금 뒤쳐졌다. 노인과 스쳐 지나가게 되었을 때 리파가 정중히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어머니도 함께 인사했다. 노인은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 술이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괴어 있었다. 리파는 어머니가 들고 있던 꾸러미에서 피로시키(고기와 야채로 속을 넣은 러시아 식 만두: 역주) 한 개를 꺼내어 노인에게 주 었다. 노인은 그것을 받아 들고 먹기 시작했다. 해는 아주 넘어가 버려 길 위쪽을 비추고 있던 빛까지도 이미 사라져버렸다. 주위에 는 어둠이 깃들고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리파와 플라스코비야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오래도록 성호를 그었다. 작품해설 곱게 차린 악마들만 웃는 세계 '골짜기'가 보여주는 세상의 겉모습은 단조롭고 황폐하다. 십년 전에 일어나 대수롭지 않은 일이 두고두고 되풀이될 만큼 변화없는 마을에 염색공장과 피혁공장이 악취를 풍 기고 가축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사람들의 살이도 대부분은 무지와 가난으로만 드러 난다. 그런데 한 군데 식료품상 그리로기 노인의 가개만은 마을의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변화와 번성의 이면을 보여준다. 장사는 많은 이문을 남겨줘 그의 재산은 늘어가고 가 족상황도 마을의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변화를 겪는다. 우선 귀머거리 둘째 아들이 아름답고 영리한 아내를 얻어 가게의 활력을 키우고 이어 노인 자신도 착하고 젊은 아 내를 맞아들여 집안을 더욱 충족되고 평온하게 가꾼다. 맏아들 아니심은 일찍 도시로 나가 경찰로 있었는데 그것도 노인에게는 은근한 자랑 이었다. 휴가로 집에 돌아온 아니심을 결혼시켜 떠들썩한 잔치를 벌일 때가 그리고리 집안의 절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리는 둘째 며느리나 자신의 후처를 얻을 때와 마찬가 지로 맏아들에게도 ㅈ배산의 힘에 의지해 가난하나 예쁘고 순진한 리파를 얻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고리 노인과 그 가족들에게 그같은 변화와 번성을 가능하게 한 부는 기 실 자질구레한 죄업의 과일이었다. 장사에서의 이런저런 속임수와 그에 따른 폭리에 고 리대금이 그 죄업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죄업은 이제 그들 집안의 표면적인 번성과 는 또 다른 이면을 준비하고 있었다. 먼저 그리고리 일가에게 타격을 준 것은 아니심의 범죄였다. 맏아들이 주화를 위조해 사용한 죄가로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자 그렇게 탐욕스럽고 인색하뎐 노인의 기력은 절 반이나 꺽여버린다. 거기다가 위조한 주화를 아들로부터 얻어 자신의 주화와 섞어버린 사실은 그의 또 다른 약점이 되어 집안의 주도권은 영악한 둘째 며느리 악시냐에게로 넘어가 버린다. 악시냐는 젊은 날의 그리고리보다 몇 배나 탐욕스럽고 간교할 뿐 아니라 표독스럽기 까지 하다. 그녀는 뜨거운 물을 끼얹어 재산상 속의 경쟁자가 될 아니심의 어린 아들을 죽이고 그 명백한 살인행위를 그리고리의 약점과 가족들의 무지를 이영해 덮어버린다. 뿐만 아니라 리파를 쫓아내고 그리고리 일가의 전재산을 차지한 뒤 시아버지를 돌보지 않는다. 결국 번성하던 그리고리 일가의 구성원들은 일꾼이나 다름없이 악시냐에게 붙어사는 귀머거리 스테판을 제외하면 모두가 헐벗고 황폐한 겉모습의 세상으로 되밀려난 셈이 다. 마을의 예외적인 이면이었던 그리고리 일가의 번성은 이제 영악하고 표독스런 악시 냐의 독차지가 되었다. 웃고 이는 것은 예쁜 얼굴에 곱게 차려입은 작은 악마뿐이다. 이 작품에서의 악이 크건 작건 죄의식을 모르는 것처럼 선은 바보스러운 순진 혹은 무지를 특징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세상은 악이 언제나 선을 이기는 비극의 무대로 그 려진다. 하짐반 작가는 그 승리에 진정성까지 부여하지는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리 파 모녀가 보여주는 순진무구한 인간애는 일순에 악시냐가 누리는 번성을 무색하게 한 다. '골짜기'가 발표되었을 때 러시아 문단의 반항은 대단한 것이었다. 어떤 잡지 편집자 와 평론가는 울며 읽었고, 톨스토이와 고리끼를 비롯한 당대의 문호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역시 작가가 삶의 어두운 진상을 냉정히 그려내어서라기보다는 끊임없이 패 배하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선이 준 감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가 체홉에 대해서는 앞서 소개한 바 있어 되풀이 말하지 않는다. 원유회(The Garden Party) 캐더린 맨스필드 지음 장경렬 옮김 날씨는 더할 나위없이 좋았다. 특별히 주문을 한다고 해도 이보다 더 완벽하게 원유 회에 알맞는 날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람 한점 없이 따뜻하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떠 있지 않다. 다만 초여름이면 때때로 그러하듯이 옅은 금빛의 한 개가 푸른 하늘 을 덮고 있을 뿐이었다. 정원사가 새벽부터 일어나 잔디를 깎고 쓸어서 그런지는 몰라 도 데이지 꽃이 있던 곳의 잔디와 장미 무늬의 검고 평평한 장식이 한층 더 빛나 보였 다. 장미꽃에 대해 말하자면, 원유회에서 사람들에게 호감을 끄는 것은 유일하게 장미 꽃뿐이고 모든 사람이 다 틀림없이 알고 있는 꽃이라면 장미꽃뿐밖에 없다는 사실을 마치 장미꽃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수백 송이 가, 정말 문자 그대로 수백 송이의 장미꽃이 단 하룻밤 사이에 핀 것이다. 푸른 과목들 은 마치 대천사장이 방문하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천막을 치기 위해 일꾼들이 왔다. "엄마, 천막은 어디에다 치면 좋을 까요?" "얘야, 나한테 물어야 소용 없단다. 올해는 모든 것을 너희들한테 일임하기로 결정했 단다. 나를 너희들 엄마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영광스럽게 손님 정도로 생각하렴." 그러나 메그가 나가서 일꾼들에게 지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머리를 감았고, 초록색 터번을 두른 채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커피를 마 시는 그녀의 양쪽 뺨에는 밤색의 젖은 곱슬머리칼이 붙어 있었다. 나비와 같은 차림의 조즈는 항상 비단으로 된 속치마에 키모노 식의 품이 넓은 상의를 걸친 채 식당으로 내려왔다. "로라야, 네가 가야겠다. 넌 예술가 타입이 아니냐?" 로라는 버터 바른 빵 한 조각을 손에 든 채 날아가듯 뛰어나갔다. 집 바깥에서 무엇 을 먹을 구실이 생겼으니 얼마나 좋은 지 모르겠다. 게다가 그녀는 이것저것 배열하고 정돈하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항상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이 그러한 일에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셔츠 바람으로 간소하게 차려 입은 남자 네명이 정원 사이로 난 길에 모여 서 있었 다. 그들은 천막천으로 둘둘 감은 장대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커다란 연장 가방을 등 뒤쪽으로 메고 있었다. 인상적인 모습들이었다. 이윽고 로라는 이 버터 바른 빵 조각을 손에 쥐고 있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디에 놓을 데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던져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얼굴을 붉히고는 심각한 표정에 약간 근시인 것 같은 표정까지 지어 보이면서 그녀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엄마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그녀가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자신의 목소 리가 지나치게 꾸민 것같이 느껴져서 공연히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어린 소녀처럼 말을 더듬거리게 되었다. "저.... 그러니까.... 천막 때문에 오신 거지요?" "네, 그렇습니다, 아가씨!" 키가 제일 큰 남자가 말했다. 그는 마른 체격에 얼굴에는 주근깨가 있었다. 연장 가방을 추스리더니, 밀집 모자를 가볍게 쳐서 뒤로 젖혀 쓰고는 그녀를 내려다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일 때문에 왔습니다." 그의 미소가 너무도 평안하고 친근감이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로라는 곧 자신감을 되찾았다. 참 멋진 눈을 가졌구나. 작긴 하지만 검푸른 빛의 아주 멋진 눈이야. 그리고 곧 다른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니, 그들도 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운 내세요. 물어 뜯지는 않을 겁니다.' 그들의 미소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모두기 참 좋은 사람들이야! 게다가 얼마나 멋진 아침인가! 하지만 아침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야지. 사 무적이 되야 해. 천막치는 일을 해야잖아. "그럼 저 백합이 있는 잔디밭이 어떨까요? 괜찮을까요?" 그리고는 버터 바른 빵 조각을 들지 않은 손으로 백합이 있는 잔디밭 쪽을 가리켰다. 그들은 고개를 돌리고 그 쪽을 바라보았다. 키가 작고 땅딸막한 친구가 아랫입술을 내 밀었고, 키 큰 친구는 얼굴을 찌푸렸다. "안 좋을 것 같은데요." 그가 말했다. "눈에 확 드어오지가 않는데요. 아시겠지만, 천 막 같은 것은 칠 때는요, 어딘가 눈에 팍 띠는 곳을 찾아야 합니다. 제 말을 아시겠어 요?" 그는 느긋한 태도로 로라쪽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로라는 자신이 받은 고육을 의식하고 이끈이 자기에게 '눈에 팍 딴다'는 투의 말을 하는 것이 예의에 벗어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다. 어쨌든 그녀는 그 의 말을 알아들었다. "테니스 코트 구석은 어떨까요?" 그녀가 제안을 했다. "그런데 한 쪽 구석으로 악단 이 자리잡을 거예요." "흐음, 악단이 온단 말이지요?" 다른 일꾼 하나가 말했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검은 눈으로테니스 코트를 꼼꼼이 살펴볼 때 그의 눈매가 매서워 보였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주 작은 악단일 뿐이예요." 로라는 부드럽게 말했다. 아마도 그는 얼마나 작은 악 단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 키가 큰 남자가 끼어들었 다. "자, 보세요, 아가씨, 저기가 좋겠는데요. 저쪽에 있는 저 나무들 앞이 어떨까요. 저기 라면 괜찮겠어요." 카라카 나무들 앞쪽을 말한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카라카 나무들이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다. 그 나무들은 넓고 반짝거리는 잎사귀가 달려 있고 노란 열매 송이들이 탐스 러게 열린 아주 예쁜 나무들이다. 인적이 없는 외딴 섬에 자랑스럽게 홀로 자라서 잎과 열매를 태양쪽으로 받쳐들고 이른바 화려한 정적 속에 서 있음직한 그런 나무들이었다. 저 멋진 나무들이 천막에 가려져야만 하는가? 그럴 수밖이 없게 되었다. 이미 일꾼들은 장대를 어깨에 메고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다만 키가 큰 남자만이 뒤에 남았다. 그는 허리를 굽혀 라벤더의 잔가리를 하나 꺾어서 엄지 손가락과 집게 손가락을 집어 그 잔가지를 코에 대고는 향내를 맡았다. 로라는 그 가 하는 행동을 보고 그런 것에 마음을 쓰는 그에게 경이로음을 느끼는 가운데 카라카 나무들에 대해서는 아예 잊어버리게 되었다. 라벤더의 향내에 마음을 쓰다니! 그녀가 알고 있는 남자들 가운데 도대체 몇 명이나 저런 일에 마음을 쓸까. 아 얼마나 멋진 일 꾼들인가,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와 함께 춤을 추기도 하고 일요일 밤에는 식사 를 하러 오기도 하는 그 멍청한 남자 애들보다는 저런 일꾼들과 친구가 될 수 잇다면 훨씬 낫지 않을까? 저런 남자들하고라면 훨씬 낫지 않을까? 저런 남자들하고라면 훨씬 더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텐데.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건 다 이 불합리한 계급 차별 탓이야. 그녀가 이런 판단을 내 리고 있는 동안 키가 큰 남자는 봉투 뒷면에 무언가 둥글게 매듭지어 놓을 것이라든가 그대로 늘어뜨려 놓을 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었다. 어쨌든 그녀 쪽에서는 계급 차별 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조금도, 눈꼽만큼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때 나무망 치로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휘파람을 부는 사람도 있었고 노래하듯 고함을 지 르는 사람도 있었다. "어이 친구, 그쪽은 괜찮은가?" 어이 친구라니! 얼마나 친근감을 주는 말인가! 그리고 또 ...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보여주기 위해, 키가 큰 남자에게 얼마나 자기가 마음 편하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멍청한 인습에 대해 얼마나 경멸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로라는 봉투에 그려진 작은 그림들을 바라보 면서 버터 바른 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먹었다. 그녀는 스스로 일꾼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로라야, 어디 있니? 전화야, 전화!" 집안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가요" 그녀는 미끄러지듯 나가서 잔디를 넘은 다음 정원 길을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는 계단을 올라 베란다를 가로질러 현관으로 들어갔다. 현관의 홀에서는 아빠와 로리가 사무실에 나갈 차비를 한 채 솔로 모자를 털로 있었다. "얘, 로라야." 로리가 매우 빠르게 말을 했다. "오전 중으로 내 코트 좀 봐 주지 않겠 니? 다리미질이 필요한지 어떤지 좀 봐줘." "응, 그렇게 할게." 로라가 대답했다. 갑자기 그녀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로 리에게 달려들어 재빨리, 살짝 그를 껴안았다. "난 파티가 정말 좋아.오빠는?" 로라가 숨을 할딱이며 말했다. "그럼!" 로리가 따뜻하고 소년다운 목소리로 말한 다음, 그도 또한 로라를 껴안고 나 서 살짝 뒤로 밀었다."빨리 가서 전화 받아야지." 참 , 전화가 왔었지."여보세요. 아, 그래. 키티구나. 안녕, 키티? 점심식사 때에 오겠 어? 그래, 와. 물론 오면 얼마나 반갑겠어. 뭐 이것 저것 긁어 모아 준비하는 식사야. 샌드위치 부스러기며 머랭그 과자 조각, 뭐 그런 것들이야. 정말 좋은 날씨 아니니? 흰 옷을 입는다고? 아, 꼭 그렇게 해야겠다. 잠깐만 기다려 줄래, 끊지 말고. 엄마가 부르 셔." 그렇게 말하고 로라는 뒤로 앉아서 엄마에게 대답했다. "뭐라고요, 엄마, 잘 안들려요." 셔리단 부인의 목소리가 계단을 타고 흘러내려 왔다. "요전 일요일에 썼던 그 멋진 모자를 쓰고 오라고 이르렴." "우리 엄마가 너 요전 일요일에 썼던 그 멋진 모자를 쓰고 오래. 좋아. 그럼 한 시에 만나자. 잘 있어." 로라는 전화를 내려 놓고,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숨을 깊이 쉬고는, 쭉 폈다가 다 시 내렸다. "아아" 한숨을 쉬고는 빨리 자세를 고쳐 바로 앉았다. 귀를 기울이고 조용 히 앉아 있었다. 온 집안의 문이란 문은 다 열려 있는 것 같았다. 집안은 가벼운 재빠 른 발소리와 끊이지 않는 말소리로 활기가 넘쳤다. 초록색 천으로 덮은 브엌으로 통하 는 문이 활짝 열리더니 둔하게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번에는 끼득거리는 듯한 길고 묘한 소리가 길게 들려왓다. 뻣뻣한 물건 이동용 바퀴로 무거운 피아노를 옮기고 있었 던 것이다. 그런데 공기가 왜 이렇지? 가만히 주의해서 보면 공기가 항상 이런가? 희 미하고 작은 바람 한 점이 숨바꼭질을 하듯 창문 위쪽으로 들어와서는 문을 통해 나갔 다.그리고는 햇빛이 만든 작은 점 두 개가 하나는 잉크병 위에서 다른 하나는 은빛 사 진틀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귀여운 작은 점들이었다.잉크병 뚜껑에 있는 것이 유난 히 귀엽다. 상당히 따뜻한 느낌이다. 은빛의 따뜻하고 작은 별이었다. 그녀는 그 별에다 입을 맞출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현관의 벨이 울리자 날염한 천으로 만든 새디의 치맛자락에서 나는소리가 계단을 따 라 들려왔다.이윽고 남자의목소리가 현관에서 들렸으며, 무심한 어조로 새디가 대답하 는 소리도 들렸다." 전 아무것도 모르겠는데요. 기다리세요. 세리단 마님께 여쭈어 보고 올 테니까요." "새디야, 새디?" 로라가 홀로 들어서며 물었다. "꽃 가게에서 왔대요, 아가씨." 정말 그랬다. 현관 바로 안쪽에 넓고 턱이 낮은 쟁반에 연분홍빛 백합꽃 항아리가 가 득 놓여 있었다. 다른 종류의 꽃은 없었다. 백합 뿐이었다. 그것도 칸나 백합뿐이었는 데, 커다란 연분홍빛 꽃이 활짝 피어서 빛을 발하는 듯했으며,밝은 심홍색 줄기 위에서 놀랄 만큼 생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어머, 이럴 수가!" 로라가 놀라면서 말했다. 그 소리는 신음 소리와도 같았다. 그녀 는 타오르는 듯한 백합의 붉은 빛에 몸을 덥히기라도 하듯이 그 앞에서 웅크렸다. 백합 이 그녀의 손가락 안에, 입술 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그녀의 가슴 안에서 자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실수가 있었나봐." 가냘픈 어조로 로라가 말했다. "아무도 그렇게 많은 꽃을 주문하지는 않았을 거야. 새디, 가서 엄마를 좀 찾아봐." 그러자 마침 그때 세리단 부인이 그들에게로 왔다. "실수가 있었던 게 아니란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주문한 거야. 예쁘지?" 그녀는 로라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어제 꽃 가게 앞을 지나가다 진열장에 있는 것 을 보았단다. 그리고 일새에 한 번이라도 칸나 백합을 하나 가득 사 보아야겠다는 생각 이 갑자기 들지 않겠니? 원유회가 좋은 구실이 되었구나." "그렇지만 엄마 말씀이 관여하지 않을 작정이라고 하셨잖아요?" 로라가 말했다. 새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꽃집 점원은 아직 바깥에 서 있는 짐 차에 있었다.로라는 엄마의목에 팔을 감고 부드럽게 그리고 가만히 그녀의 귀를 물었 다. "그렇지만, 얘야, 논리적이기만 한 엄마를 좋아하지는 않겠지. 얘, 그만 둬라. 꽃집 점 원이 들어오지 않니." 그는 다시 백합을 쟁반 하나에 가득 담아서 들고 들어왔다. "현관 안쪽에 있는 통로 양쪽으로 나란히 놓아 주세요." 세리단 부인이 말했다. "로 라야, 그렇게 하는 게 어떻겠니?"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요." 응접실에서는 메그와 조즈, 그리고 꼬마 한스가 드디어 피아노를 옮기는 데 성공하였 다. "자 이제는 이 대형 소파를 벽 쪽에 붙여 놓은 다음 의자만 빼놓고 방안에 있는 것 을 모두 내놓는 게 좋겠는데. 그렇지 않니?" "그래" "얘,한스야, 이 테이블을 모두 끽연실로 날라 줄래? 그러고는 청소하는 사람을 불러 와서 이 융단에 난 테이블 자국을 없애 달라고 해. 한스야, 잠깐만...." 조즈는 하인들에 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들도 기꺼이 그녀의명령에 따랐다. 그녀는 언제 나 하인들에게 무언가 연극에 참여한 배우와도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엄마하고 로라한테 빨리 좀 와 달라고 해줘." "그렇게 해요, 조즈 아가끼" 그녀는 메그 쪽으로 몸을 돌렸다. "피아노 소리가 어떤가 들어 보고 싶은데. 오후에 사람들이 나한테 노래라도 하라면 어떡하니. '이 내 인생 우울해'를 한 번 해 볼까?" 꽝! 따-따-따 피아노가 갑자기 격렬한 소리로 울리기 시작하자 조즈의 얼굴 표정이 달라졌다. 그녀는 양손을 꽉 쥔 채, 슬프고 불가사의한 눈빛으로 방을 들어서는 엄마와 로라를 바라보았다. 이내 인생 우-울해 눈물과 한숨. 덧없는 사랑-이여 이내 인생 우-울해, 눈물과 한숨. 덧없는 사랑-이여, 이제는 ... 안녕! 그러나 노래가 '안녕'이라는 부분에까지 도달했을 때, 피아노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절 망적인 음조로 울려 퍼졌으나, 조즈의 얼굴에는 노래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엄마, 목소리 괜찮지요?" 미소를 띠면서 그녀가 말했다. 이내 인생 우-울해, 희망은 사라지고, 꿈인가, 현-실인가. 이 때 새디가 들어왔다. "새디야, 무슨 일이니?" "저, 마님, 요리사가 샌드위치에 꽃을 장식용 기가 준비됐냐고 묻는데요." "샌드위치에 꽃을 장식용 기라니?" 세리단 부인은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로 그 말을 반복했다. 그녀의 얼굴 표정을 보고 아이들은 그것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 렸다. "어쩌나..."잠시 망설이더니 그녀는 단호하게 새디에게 말했다. "십 분안에 보내겠 다고 요리사에게 일러라." 새기가 갔다. "얘, 로라야." 엄마가 빠르게 말했다. "같이 끽연실로 가자. 봉투 뒤 어디엔가 장식용 기에 써 넣을 샌드위치 종류 이름을 써 놓았거든. 나 대신 그걸 좀 옮겨 써 줘야겠다. 메그야, 넌 빨리 이층으로 올라 가서 그 젖은 것을 머리에서 좀 벗어 놓아라. 조즈는 빨리 가서 옷좀 갈아입어라. 알겠니? 말 안들으면 오늘밤 아빠 돌아오신 다음 말씀드린 다. 그래도 괜찮겠니? 그리고, 조즈야, 너 혹시 부엌에 가거든 요리사 좀 구슬러 주지 않을래. 오늘 아침은 그녀가 괜히 무섭더구나." 봉투는 마침내 식당에 있는 시계 뒤쪽에서 발견되었다. 어떻게 해서 그곳에 가 있게 되었는지 셰리단 부인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틀림없이 너희들 가운데 누군가가 내 가방에서 꺼낸 거겠지. 집어넣은 게 뚜렸하게 기억이 나니 말이지. 그건 그렇고, 크림 치즈에 레몬 커어드, 다 썼니?" "네" "달걀에다.." 세리단 부인은 봉투를 멀찌감치 들고서 바라보았다. "생쥐라고 쓴 것 같구나. 생쥐일 턱이 없는데 말이야." "올리브라고 썼네요, 엄마." 로라가 엄마의 어깨 너머로 보면서 말했다. "그래, 그래, 올리브구나, 둘을 합해 놓고 보니 정말 묘하게 들리는 구나. 달걀에다 올리브라니." 마침내 끝을 내고 로라가 그것을 부엌으로 가지고 갔다. 가보니 조즈가 계속 요리사 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요리사는 조금도 무서워 보이지가 않았다. "이렇게 멋진 샌드위치는 생전 처음이야>" 조즈가 황홀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 샌드위치가 몇 종류나 된다고 했지요? 열다섯이던가요?" "네, 열 다섯 종류예요, 아가씨." "아주머니, 정말 멋져요." 요리사는 길다란 샌드위치 칼로 빵부스러기를 쓸어 내면서 활짝 웃었다. "고버드 상점에서 사람이 왔어요." 새디가 식당 부속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고드버 상점의 점원이 창 밑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는 슈크림이 도착되엇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드버 상점은 슈크림으로 유명한데, 아 무도 집에서 그것을 만들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새디야, 받아다가 식탁 위에 놓아주렴." 요리사가 이렇게 지시했다. 새디는 슈크림을 갖다 놓고는 문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물론 로라와 조즈는 이제 슈 크림 같은 것에 진짜 마음이 빼앗길 정도의 어린 아이들은 아니었다. 그래도 여전히 슈 크림이 정말 맛있어 보인다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정말 대단히 맛있어 보였다. 요리사는 슈크림의 주변에 붙어 있는 가루 설탕을 털어 내면서 파티를 위해 가 지런히 배열하기 시작했다. "이걸 보면 옛날에 있었던 파티 생각나지 않아?" 로라가 말했다. "그런 거도같다." 옛날을 회상하는 일 따위를 좋아하지 않는 현실주의자인 조즈가 말 했다. "아주 아름답다고 느낄 정도로 깃털처럼 가벼워 보이는데." "아가씨, 하나씩 들어 보세요." 오리사가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님께 말씀 안 드릴께여." 그러나 정말 먹을 수는 없지. 아침 식사를 막 끝내고 나서 슈크림을 먹다니. 생각만 해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한 이 분쯤 지난 다음 조즈와 로라는 슈크림을 먹고나서 사람들이 짓는 무언가에 황홀래 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서는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뒤쪽 길로 해서 정원에 한 번 나가 보지." 로라가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천막을 어떻게 치고 있는지 보고 싶어. 정말 멋진 사람들이던데." 그러나 뒷문은 요리사와, 고드버의 점원과 한스가 막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이러났던 것이다. "쯧, 즛, 쯧," 요리사는 안절부절 못하는 암탉 같은 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새디는 치통이라도 앓고있는 듯한 표정으로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고 드버 상점의 점원만이 이야기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건 어차피 그가 꺼낸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왜 그러죠? 무슨 일이 있었나요?" "금찍한 사건이 일어났대요." 요리사가 말했다. "사람이 하나 죽었대요." "사람이 죽었다고요? 어디서요? 어떻게요? 언제 그랬대요?" 그러나 고드버 상점의 점원은 자기가 꺼낸 이야기를 바로 그의 면전에서 빼앗길 사 람은 아니었다. "이 아래에 작은 집들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을 아시죠, 아가씨?" 알고 있냐고? 물 론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스코트라는 이름의 ㅈ은 친구가 살고 있었는데 짐수레군이었대요. 오늘 아침 호크 가 모퉁이에서 이 친구의 말이 견인차를 보고 뒷걸 음질 치는 바람에 그 친구가 낙상를 당하게 되었는데. 머리 뒤쪽을 다ㅊ대요. 그래서죽 었다고 하더군요." "죽었다고요?" 로라는 고드버 상점의 점원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그를 일으켜 세ㅇ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고드버 상점 주 인인 점원이 재미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 올 때 마침 시신을 집으로 옮기는 중이었어요." 그리고는 요리사를 향해 말했다. "아내에다 어린 것을 다섯이나 남겨두고 갔다고 하더군요." "이리 좀 와 볼래." 로라는 조즈의 소매를 잡고 부엌을 가로질러 가더니 초록색 천으 로 덮은 문을 빠져나왔다. 문 밖으로 나와 잠시 멈추어 서더니 로라는 몸을 문에 기대 었다. 겁에 질린 목소리로 그녀가 조즈에게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다 중지시켜야 하 지 않을까?" "다 중지시키다니?" 조즈가 놀라서 큰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이니?" "물론 원유회를 그만두자는 거야." 조즈가 왜 모른 척하는 것일까? 그러나 조즈의 놀라움은 한결 더 커지지 않을 수없었다. "원유회를 그만두자니? 얘, 그런 바보 같은 소릴랑 아예 하지도 마라. 물론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지, 또 아무도 그걸 기대하지 않아.터무니없는 소리는 하지도 마라." "그럼 바로 대문밖에 살던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원유회를 할 수 있겠어?" 사실 그 말은 정말 터무니 없는 것이었는데, 작은 집들은 이 저택 으로 통하는 가파 른 고갯길 아래쪽 골목에 따로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이에는 널찍한 길도 하나 있었 다. 따지고 보면, 너무 가까이에 있기도 하다. 그 집들은 아마도 더할 수 없이 큰 눈에 가시와 같은 것들이었고, 그곳에 있어야 할 권리가 전혀 없어 보였다. 갈색으로 칠을 한 작고 초라한 집2들이었으며, 좁은 안뜰에는 양배추 몇 포기와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 조차도 가난에 찌들어 보였다 누더기 조각과도 같은 가냘픈 연기는 세리단씨 저택의 굴뚝에서 곧게 솟아오르는 은빛의 커다란 버섯 구름과 같은 연기와 비교도 할 수 없었 다. 그 골목에는 빨래ㅓ하는 여자들과 굴뚝 청소부들, 구두 수선공들이 살고 있었으며, 집 정면의 벽 하나 가득히 작은 새장을 걸어놓고 있는 사람도 살고 있었다. 아이들도 많았다. 세리단 가의 자식들이 어렸을 때 에는 그곳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상스러운 말씨를 배우거나 무언가ㅏ 병에 옮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다 자라도 난 다음 로라와 로리는 이따금 배회하다가 그곳을 지나가기도 했다. 불쾌하고 더러운 곳이었는데, 그들은 몸서리치면서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사람이 라면 어디든 가 봐야 하고 무엇이든 봐 두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들은 거기에 갔 던 것이다. "게다가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면 그 가엾은 여자의 귀에 어떻게 들리겠는가 한 번 생각해 봐 ." 로라가 말했다. "아니, 로라야, 너 정말..." 조즈는 심각하게 하를 내기 시작했다. "누구든 사고를 당 할 때마다 악단의 연주를 중지시켜 봐라 사는 게 얼마나 고달프겠니? 나도 역시 너처 럼 정말 안된 일이라고 생각해. 나도 마찬가지로 동정심을 느낀단 말이야." 그녀의 눈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은 어렸을 적 함께 싸울 때 짓곤 하던 표정으로 자매를 바라보았 다. "감상적이 된다고 해서 그 주정뱅이 일꾼이 다시 살아나는 건 아니잖아."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가 말했다. "주정뱅이? 누가 그 사람보고 주정뱅이래?" 로라는 격렬한 말투로 조즈에게 대들었 다. 그녀는 옛날에 그런 일이 있을 때 쓰곤 했던 바로 그 말투로 말을 했다. "엄마한테 가서 말해 버릴 거야." "그러렴." 조즈가 차분하게 말했다. "엄마, 들어가도 돼요?" 로라가 방문에 달린 유리로 된 커다란 손잡이를 돌렸다. "그럼. 왜, 무슨 문제라도 있니? 얼굴빛이 왜 그러니?" 세리단 부인은 화장대에서 몸 을 돌렸다. 그녀는 새 모자을 써 보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 사람이 죽엇어요." 로라의 말이 시작되었다. "설마 우리집 정원에서 죽은 건 아니겠지?" 엄마가 말을 끊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예요." "얘가 .... 사람 놀라게 하기는 !" 세리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커다란 모자 를 벗어서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그렇지만, 엄마." 로라가 말했다. 숨이 가빠 목이 맬 듯한 상태에서 로라는 그 끔찍 한 이야기를 엄마에게 했다. "당연히 파티는 할 수 없는 거죠?" 호소하듯 로라가 말했 다. "악단도 오고 사람들도 오잖아요. 엄마, 틀림없이 우리집에서 나는 소리가 들릴 거 예요. 이웃이라고 해도 될 만큼 가까운 곳에 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엄마는 조즈와 똑같은 태로를 취했다. 엄마가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 어서 그만큼 더 견디기가 어려웠다. 엄마는 로라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생각을 하 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얘야, 한 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렴. 어쩌다 우연히 그 애기를 들은 게 아니니? 만일 어떤 사람이 살 만큼 살다가 죽었다면, 우리는 그것과 관계없이 여전히 파티를 할 수 있는 거 아니ㄲ니? 사실 저렇게 비좁은 굴 속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어 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긴 하다만...." 로라는 엄마의 말에 그럴 수 있다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뭔가 다 잘못 되었다는 느낌은 떨칠 수 없었다. 그녀는 엄마의 소파에 앉아서 쿠션에 달린 주름 장 식을 손 끝으로 잡아 뜯는 시늉을 했다. "엄마, 우리 정말 너무 무심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요?" 그녀가 물었다. "애는!" 세리단 부인은 일어서서 모자를 손에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막을 겨를도 없이 엄마는 불숙 그 모자를 로라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얘, 그 모자는 네가 가져라." 엄마가 말했다. "너한테 참 잘 어울리는 구나. 나한텐 너무 젊은 애들 것 같애. 이렇게 그림같이 멋진 네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거. 너도 한 번 봐라." 그렇게 말하면서 엄마는 그녀 앞에 손거울을 비쳐 주었다. "그렇지만. 엄마" 자신의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옆으로 비껴서면서, 로라가 다시 말 을 잇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세리단 부인도 조즈와 마찬가지로 자제력을 잃었다. "로라야, 너 정말 왜 이렇게 바보짓 하니?" 세리단 부인이 차갑게 말했다. "그런 사 람들은 우리한테 희생을 바라지도 않아. 그리고 네가 지금처럼 행동해서 모든 사람의 즐거운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다면 그곳도 무심한 짓이 되기는 마찬가지야." "전 이해할 수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로라는 재빨리 방을 빠져 나와서는 자기방으 로 뛰어들어갔다. 방에 들어섰을 때 정말 우연히 제일 먼저 그녀의 눈에 뛴 것은 거울 에 비친 매력적인 소녀의 모습이었다. 황금빛의 데이지와 길고 검은 벨벳 리본으로 장 식된 검은 모자를 쓴 소녀의모습을 보앗던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엄마의 말씀이 옳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 다. 내가 터무니 없는 소릴 한 건 아닐까? 아마 그런지도 몰라. 그러나 아주 잠깐 그녀 의 마음에는 그 가엾은 여인과 어린 아이들과 집안으로 운반된 시신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그러나 모든 것이 신문에 나온 사진처럼 흐릿한 비현실인 것처럼 느껴졌 다. 파티가 끝난 다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녀는 이렇게 마음의 결정을 했다. 어쨌든 그것이 최선책 같아 보였다. 점심 식사는 한 시 반 전에 끝났다. 두 시 반까지는 왁자지껄한 파티를 위한 준비가 끝났다. 녹색의 옷을 입은 악단이 도착하여 테니스 코트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어머머, 저 사람들 어쩌면 저렇게 개구리 같니?" 키티 메이틀렌드가 혀를 굴려 노래 하듯 말했다. "저 사람들 연못 주위에 빙 둘러 세워 놓고 지휘자는 연못 한가운데 있는 잎사귀 위에 세워 놓지 그랬니?" 로리가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도중 사람들에게 환영 인사를 했다. 그의 모 습을 보자 로라는 갑자기 그 사건이 다시 생각났다. 그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만일 로 리도 다른 사람과 생각이 같다면, 그러면 틀림없이 자기가 잘못 생각한 것이 된다. 그 래서 그녀는 그를 따라 현관의 홀로 들어갔다. "오빠." "야!" 그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로라를 보더니 그는 갑자기 놀랐 다는 듯이 볼을 부풀리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대단한데! 로라야, 너 정말 굉장하구나!" 로리가 말했다. "야, 그거 멋진 모자구나." "그래, 오빠?" 이렇게 힘없이 대답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로리를 올려다 보았다. 결국 그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곧 사람들이 잇따라 몰려들기 시작했다. 악단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임시로 고용된 급사들이 집과 천막 사이를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어디를 보아도 쌍쌍의 남녀가 한가롭게 거닐거나 몸을 굽혀 꽃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서로 인사를 나누거나 잔디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어디로 가는 지 모르지만 길을 가는 도중 오는 오후에만 세리단씨 저택의 정원에 내려 앉은 화려한 색깔의 새들과도 같았다. 아, 모두가 다 행복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과 악수를 하거나 뺨을 부비기도 하고 또 서로의 눈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어머, 로링야. 너 정말 멋지구나." "정말 모자가 너한테 잘 어울린다, 얘" "로라야, 너 스페인 여자 같아 보여. 이처럼 멋진 네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걸." 그러면 로라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말하곤 하였다. "차는 드셨어요? 얼음 과자 안 드시겠어요? 시계꽃 열매를 넣은 얼음 과자가 정말 별미예요." 그녀는 아빠한 테 달려가서는 이렇게 조르기도 하였다. "아빠, 악사들한테도 뭐 좀 마실 것 갖다 주면 안돼요?" 이윽고 그 완벽한 오후는 서서히 ㄸ을 활짝 피우고 서서히 시들다가 마침내 서서히 꽃잎을 오므리게 되었다. "이렇게 즐거운 원유회는 처음인 걸요..." "대단한 성공이에요..." "아주 대단합니다." 로라는 엄마를 도와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엄마와 딸 은 현관에 나란히 서 있었다. "휴우, 이젠 끝났구나, 끝났어." 세리단 부인이 말했다. "로라야, 남은 사람들 좀 불러 모아라. 가서 새로 끓인 커피라도 마시자. 완전히 지쳤 는 걸. 그래, 정말 대성공이었어. 그렇지만, 이렇게 자꾸 파티를 여는 것이 힘들지도 않 니? 뭣 때문에 애들이 자꾸 파티을 하자고 조르는지 모르겠어." 모든 사람들이 이제 손 님들이 떠난 천막 안에 모여 앉았다. "어빠, 샌드위치 좀 드세요. 장식용 기에 글씨를 쓴 건 저예요." "그래, 고맙다." 세리단 씨가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먹었다. 그는 또 하나를 집었다. "오늘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 모르고 있겠지?" 그가 말했다. "여보." 세리단 부인이 한쪽 손을 멈춘 채 말했다. "들었어요. 그것 때문에 원유회가 망가질 뻔한 걸요. 로라가 뒤로 미루자고 고집을 부렸지 뭐예요." "아이, 엄마 " 로라는 그 일 때문에 놀림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끔찍한 일이었어." 세리단씨가 말했다. "게다가 그 친구 결혼한 몸이더군. 바 로 아래 골목에 살던 사람인데, 아내와 대여섯의 애들이 있다고 하더군." 약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세리단 부인은 안절부절 못하며 커피 잔을 들었다 놓았 다 하였다. 아빤 정말 눈치도 없이... 갑자기 세리단 부인이 눈을 들었다. 눈을 들어 보니 식탁 위에는 샌드위치며, 과자며, 슈크림이 손도 안 댄 채 그대로 있었다. 이걸 그냥 두면 다 버리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음식을 보고 그녀는 기발한 생각을 했다. "그렇지!" 그녀는 말했다. "바구니에 이것들을 꾸리자. 그 불쌍한 사람들에게 이 훌륭 한 음식을 보내도록 하자. 아무튼 아이들에겐 아주 멋진 대접이 될거야. 그렇게 생각 안 되니? 그리고 분명히 그집 여자가 사람들을 부르기도 했을테고, 뭐 그러지 않았겠 어? 그럴 때 음식 준비가 다 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몸을 벌떡 일으키며 그녀가 말했다. "로라야! 층계 쪽 선반에 가서 큰 바구니 하나 가져다 주렴." "그렇지만, 엄마, 정말 괜찮다고 생각하세요?" 로라가 물었다. 다시 한 번 묘하게도 로라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의견이 다른 것처럼 보였다. 파티의 남은 음식을 가지고 가다니. 저 가엾은 여자가 그걸 정말 좋아할까? "물론이지, 너 오늘 웬일이니? 한두 시간 전만 해도 동정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 지 않았니?" "아, 알앗어요." 로라는 급히 가서 바구니를 가져 왓다. 바구니가 채워졌고, 채워진 바구니 위에 세리단 부인은 음식을 산더미처럼 더 담았다. "얘, 로라. 네가 가지고 가려무나." 그녀가 말했다. "그대로 빨리 갔다오렴. 아, 잠깐 기다려라. 이 백합꽃도 좀 가져가렴. 그런 계층의 사람들이 이런 백합ㄲ을 보면 감동할 게다." "줄기 때문에 레이스 달린 드레스가 더럽혀지겠네요." 현실주의자인 조즈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때 맞춰 잘 이야기한 것이다. "그럼, 바구니만 거져 가거라."엄마가 그녀를 따라 천막 밖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로라야,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뭐예요, 엄마?" 아니, 그런 생각을 아이의 머리 속에 심어 주지 않는 게 좋겠지!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자, 그럼 빨리 갔다 오렴." 로라가 정원 문을 닫았을 때는 막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커다란 개 한 마리가 그림 자처럼 뛰어 나갔다. 길은 뿌옇게 빛나고 있었으며, 아래쪽 움푹 패인 곳에 있는 작은 집들이 짙은 그림자에 가리워져 있었다. 파티가 끝난 오후 세상은 뜬 채 누워 있는 곳 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그녀 는 잠시 멈춰 섰다. 입맞춤과 사람들의 말소리, 스픈이 그릇에 부딪혀 나는 딸그락 소 리, 웃음소리, 짓밟힌 풀에서 나는 냄새가 어쨌든 그녀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것 같았 다. 그녀의 마음에는 그밖에 다른 것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얼마나 묘한 일인가! 회 백색으로 바뀌어 가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 '그래, 정말 최고로 멋진 파티였어'라는 생각밖에는 다른 아무 생각도 그녀의 마음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이윽고 큰 길을 건넜다. 칙칙하고 어두운 골목길이 시작되었다. 목도리를 걸친 여인 네들과 트위드 천으로 만든 모자를 쓴 남자들이 서둘러 지나갔다. 남자들이 울타리 주 변에 모여 있었고, 아이들이 문밖에서 놀고 있었다.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초라하고 작은 집 안에서 흘러 나왔다. 어떤 집에서는 등불이 어른거리고 있었고, 게딱지 같은 그림자가 창문 위로 지나가기도 했다. 로라는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재촉하였다. 코트 를 입고 나왓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레스가 환화게 빛나는 것이 마음 에 걸렸던 것이다. 게다가 벨벳 리본이 달란 큰 모자라니ㅃ 모자만이라도 다른 걸 쓰고 나왔더라면!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을까? 그럴 게다. 애초에 길을 나선 것이 잘 못이었다. 오면서 내내 잘못 나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지 않 을까? 아니, 이미 늦었다. 이 집이 바로 그 집이다. 그 집임에 틀림없다. 어두운 표정의 사 람들이 밖에 모여 있었다. 문 옆에 아주 나이가 많은 노파가 목발을 짚고 의자에 앉아 바라고보 있었다. 노파의 발에는 신문지가 깔려 있었다. 로가가 가까이 다가가자, 사람 들의 말소리가 그쳤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녀에게 길을 터주었다. 마치 그녀가 여기에 올 것을 알고 미리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로라는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졌다. 벨벳 리본을 어깨너머로 넘기면서 옆에 서 있는 어떤 여인에게 물었다. "여기가 스코트 씨 댁인가요?" 야릇한 미소를 띠며 그녀가 말했 다. "그래요, 아가씨" 아아, 여기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비좁은 뜰안 길을 따라 걸어가서 문을 두드리면 서 그녀는 실제로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 중얼거렸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아니면, 그 여인들의 목도리라도 좋으니 그걸 뒤집어 쓰고 자신의 복장을 가릴수만 있다면! 바구니째 놓아 두고 가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바구니 를 비울 때까지 기다리는 일조차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 문이 열렸다. 검은 옷을 입은 키가 작은 여자 하나가 어두침침한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로라가 물었다. "스코트 부인이세요?" 그러나 기가 막히게도 그 여자가 이렇게 말했 다. "자, 들어오세요, 아가씨." 로라는 통로에 갇힌 셈이 되었다. "괜찮습니다. 안에까지는 안 들어가도 돼요. 바구니만 전해 주면 돼요. 저희 어머니가 보내셨어요." 어둠침침한 통로에 서 있던 키가 작은 여인이 로라의 말을 듣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자, 이리 오세요, 아가씨." 붙임성 잇는 목소리로 그녀가 이렇게 말했고, 로라는 그녀 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이윽고 로라는 천장이 낮고 공간이 좁은 형편없는 부엌 안으로 안내되었다. 흐릿한 둥불이 실내를 밝히고 있을 뿐이었으며, 난로 앞에는 한 여인이 앉아 있엇다. "얘, 엠아." 로라를 안내해서 들어오게 한 키 작은 여인이 말했다. "엠아, 아가씨가 찾아왔어." 그 여인이 로라 쪽으로 돌아보면서 의미심장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저 애의 언니되는 사람이에요. 저 애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겠어 요?" "아이, 뭘 별 말씀을 다하세요." 로라가 말했다. "부탁입니다만, 부인에게 방해가 되 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저는 단지 이것을 전하러 왔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그 순간 난로 앞에 앉아 있던 엠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몸을 돌려 이쪽을 바 라보았다. 보기에 끔찍할 정도로 그녀의 얼굴은 벌겋게 부어 있었으며 눈과 입술도 퉁 퉁 부어 있었다. 왜 로라가 여기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온 것인 가? 낯선 사람이 바구니를 들고 부엌에 와서 서 있는 이유가 무엇이지? 이게 다 무엇 때문이지? 그녀의 가련한 얼굴에는 또 다시 주름이 잡혔다. "알았다, 알았어." 키 작은 여인이 말했다. "내가 이 아가씨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 지." 그리고 나서 다시 한 번 그녀가 말했다. " 아기씨, 부탁입니다만, 이 애의 실례를 용 서해 주세요. 용서하시겠죠?" 그녀의 얼굴 역시 부어 있었는데,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지 으려고 애를 썼다. 로라는 다만 밖으로 나가서,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다시 통로로 나왔다. 문이 열렸 다. 그녀가 곧장 걸어가니 침실이었고, 그곳에는 세상을 떠난 남자의 시신이 눕혀져 있 었다. "한 번 뵙고 싶으시지요." 엠의 언니가 이렇게 말하고는 로라의 옆을 지나서 침대 가 까이로 갔다. "겁내지 말아요, 아가씨." 여인의 음성은 다정하고 어딘가 장난기가 섞인 듯하였다. 그녀는 다정하게 시신을 덮어 놓은 천을 들쳤다. "그림 같아요. 아무 표정이 없는 걸요. 이리 가까이 와 보세요." 젊은 남자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너무도 곤하게. 너무도 깊이 잠들어 있어서 그를 바라보는 두 사람과는 멀고도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아, 이렇게 초연하 게, 평화롭게 잠들어있다니! 그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를 결코 다시는 깨우지 말아야 한다. 그의 머리는 베개에 푹 파묻혀 있었으며 눈은 감겨 있었다. 감겨진 눈꺼풀 아래 에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꿈에 잠겨 있는 것이다. 원유회 나 바구니나 레이스 달린 드레스가 그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는 그 모든 것에서 떨어져 먼 곳에 있는 것이다. 그의 모습은 아주 멋지고 아름다웠다. 그들이 큰소리로 웃고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는 동안 이런 놀라운 일이 이 골목을 찾았던 것이다. 행복이 란... 행복이란... 그 잠들어 있는 얼굴은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바 로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만족한다. 하지만 여전히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지 않고서는 그 방을 나설 수가 없었다. 로라는 어린애처럼 큰소리로 흐느껴 울엇다. "이런 모자를 쓰고 와서 미안해요." 그녀가 말했다. 이번에는 엠의 언니를 기다리지 않았다. 혼자서 문으로 나가는 통로를 찾아서 그 모 든 우울한 표정의 사람들을 지나 골목길을 따라 내려왔다. 골목길 모퉁이에서 그녀는 로리를 만났다. 그는 그늘에서 나와 물었다. "로라니?" "응" "어머니께서 걱정이 되기 시작하나봐. 괜찮니?" "응, 괜찮아. 아, 오빠!" 그녀는 그이 팔을 붙들고 그에게 몸을 기댔다. "아니, 울고 있는 것 아니니?" 그녀의 오빠가 물었다. 로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는 울고 있었던 것이다. 로리느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울지마." 그가 사랑스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 했다. "무섭지 않든?" "아니, 무섭지 않았어." 훌쩍이며 로라가 말했다. "그냥 아주 놀라웠어. 그런데, 오 빠..." 그녀가 멈춰 서서 로리를 바라보았다. "인생이란..." 더듬거리며 그녀가 말을 이었 다. "인생이란..." 그러나 인생이란 어떤 것인지 로라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상관 없었 다. 그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것 아니겠니?" 로리가 말했다. 작품해설 소유가 연출하는 세상의 양면성 이 작품에 나오는 세리단 일가의 사람들은 특별히 악하거나 무정하지는 않다. 다만 그들의 소유가 결정한 삶의 조건에 길들여져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적을 뿐이다. 주인공 로리도 그런 일가의 한 구성원이었다. 가든 파티, 쾌청한 날씨, 잘 가꾸어진 넓은 정원에 쳐지는 천막, 집안을 꾸미고 있는 꽃들, 배달되어 오는 파티용 물품들- 모든 것은 아직 충분히 철들지 않은 로라를 들뜨 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람은 대개 자신이 몸담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 양 착각하는 법이다. 그날 로라에게도 세상은 잘 가꾸어진 정원에서 열리는 즐거운 파티 준비로 시 작되었다. 그런데 파티 준비가 다 되어갈 무렵 우연히 엿듣게 된 불행한 소식이 로라의 관심을 그녀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이끌었다. 길 아래편 가난한 이들이 사는 마을의 한 마부가 사고로 죽은 일이 그랬다. 그 마부는 아직 젊은 데다 한 집안의 가장이었는데 특히 로 라를 가슴 아프게 한 것은 그가 남긴 미망인과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에게는 그 사건이 별 것 아니거나 거의 무의미했다. 가까운 곳에 서 사람이 죽었으니 파티를 연기하자는 로라의 제의는 한 마디로 거부되고 파티는 예 정대로 진행된다. 그러다가 파티가 끝나고 손도 안댄 음식이 남게 되자, 버리가 아까운 여분이 생겨서야 이는 가진 자의 자선심이랄까, 다른 가족들도 비로소 이웃의 불행을 떠올린다. 로라는 그들 나름의 자선심이 담긴 음식바구니를 죽은 마부의 집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데 거기서 자신이 익숙해져 있는 세계와은 전혀 다른 세계를 보게 된다. 우아함, 교양, 예의같이 자신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나 삶의 양식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삶이 있고 파티에서 남은 케이크 따위로는 전혀 위로가 될 수 없는 불행이 거 기 있었다. 그런 낯선 세계와의 접촉은 로라에게 충격을 주거 삶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만든다. 아직 어려서 세계와 인생의 전모를 다 볼 수 없지만 적어도 밝게만 보아온 그뒤에는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어두운 진상이 감쳐져 있다는 자각 정도는 얻은 듯하다. 머지않 아 그녀는 못다맺은 마지막 말 "인생이란..." 의 뒤를 마저 채우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원유회'를 분류하면서 '성장과 눈뜸'편에 넣어야 할지 '삶의 어두운 진상'편 에 놓어야 할지 망설였다. 그만큼 이 작품에는 그 두 측면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 지은이 케더린 맨스필드는 뉴질랜드에서 출생해 주로 영국에서 활동한 여류작가이다. 외롭고 고통스레 살다가 지병인 폐결핵으로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일기와 서간집 평론집 약간이 있고 소설 작품은 모두 단편뿐이다. 체홉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녀를 현대 영미 최고의 단편작가로 평하는 사람도 있을 만큼 사 후의 평가는 대단하다. 비계 덩어리 기 드 모파상 지음 진형준 옮김 며칠 동안 계속해서 패잔병들이 거리를 지나갔다. 그들은 군대가 아니라 지리멸렬한 패 거리들이었다. 모두들 수염은 길게 자라 지저분했으며 누더기 같은 군복을 걸치고, 깃 발도 대열도 없이 기진맥진하여 걷고 있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기진맥진하여 아무 생 각도 작정도 없이 그저 타성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며, 발걸음을 멈추는 순간 금방 피로로 인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소총의 무게에 눌려 허리를 펴지 못하는 징집병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는데 그들은 본래 유순한 사람들로서, 연금으로 조용하게 살던 사람들이었다. 걸핏하면 겁을 먹고 곧잘 흥분하며, 돌격할 때나 후퇴할 때나 언제나 재 빠른 어린 유격병들도 있었고, 큰 전투에서 궤멸한 정규사단의 패잔병인 붉은 바지차림 의 사내들도 끼어 있었다. 침울한 포병들이 각양각색의 이들 보병들과 함께 줄지어 가 고 있었다. 이따금 무거운 발을 이끌고 자신보다는 발걸음이 가벼운 보병들을 뒤쫓아 가느라고 고생하는 용기병의 번쩍거리는 핼멧이 눈에 뛰기도 했다. 이어서 '패배의 복 수자-무덤의 시민-결사대' 등의 용맹한 칭호를 ㅂ인 의용군들이 산적 무리처럼 지나갔 다. 그들의 지휘관들은 어쩌다가 군인이 되어, 돈이 많다거나 수염이 길다고 해서 장교로 임명된, 왕년의 포목상, 곡물상, 기름장수 혹은 비누장수들이었다. 그들은 무기와 플란 넬과 휘장 등으로 몸을 감싸고, 쨍쨍 울리는 목소리로 작전계획을 논의하고, 자기들만 이 빈사사태에 빠져있는 조국 프랑스를 그 허세만 남은 어깨 위에 떠받치고 있다는 듯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끔 턱없이 용감해져 약탈과 방탕을 일삼는 자기네 병 정들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프러시아군이 루앙으로 진격해 온다는 말이 떠돌았다. 두 달 전부터 국민병들이 근방에 있는 숲 속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정찰을 했고 이따 금 실수로 자기편 보초병을 쏘기도 했으며 덤불 밑에서 토끼 새끼가 부스럭 움직이기 만 해도 전투태세를 취하곤 했는데, 그들은 이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들의 무기와 군복, 예전에 국도 연변의 30리 안팎을 위압하던 모든 살륙 도구 일체가 졸지에 그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뒤에 처진 프랑스 병사들이 드디어 세느강을 건너 상 스배르와 부우르 아샤아르를 거쳐 퐁 오드매르로 향하고 있었다. 그 맨뒤로 절망에 빠진 장군이 두 부관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질서를 잃어버린 이들 오합지졸들로는 그 어떤 것도 해 볼 도리가 없었으며, 언제나 승리에 익숙해 있던 민족이, 그 전설적인 용기를 발휘했음 에도 불구하고 무참하게 패배하고 만 사실 때문에 스스로 넋이 빠져있었다. 얼마 후 도시 위로, 깊은 정적과 공포에 질린 고요한 기다림이 찾아왔다. 장사에 길 들여 나약해진, 많은 배불뚝이 부르주아들은 고기를 굽는 쇠꼬챙이나 커다란 부엌칼을 무기로 간주하지나 않을까, 겁을 내면서 정복자들을 불안스러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 었다. 삶이 정지된 것 같았다. 상점들은 문을 닫고 거리에는 침묵이 흘렀다. 이따금 이 침 묵에 겁을 먹은 주민이 벽에 몸을 붙이고서 바쁜 걸음으로 줄달음쳐 가곤했다. 프랑스군이 떠나간 다음 날 오후에, 어디서 왔는 지 알 수 없는 프러시아 창기병들이 급히 이 거리를 지나갔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검은 옷의 무리들이 상트 카트린 언 덕을 내려왔으며, 또한 다른 두 갈래의 침략군의 물결이 다르느탈과 보아기욤 가도 쪽 에서 나타났다. 이 세 부대의 전위부대는 같은 시각에 시청 광장에 합류했다. 그리고 인접해 있는 길들을 통해서, 질서정연한 발걸음으로, 프러시아 군대의 대열이, 포도를 울리며 행진해 왔다. 목에 힘을 준 알아듣기 힘든 명령 소리들이 죽은 듯 인기척 없는 집들을 따라 울려 왔으며, 닫아 놓은 덧문 뒤에서는 사람들의 눈이 '전쟁의 권리'에 의해서 이 도시의 재 산과 생명의 주인이 된 승리자들을 엿보고 있었다. 주민들은 컴컴한 방 안에서 온갖 지 혜와 힘을 짜내도 어쩔 수 없는 대홍수나 혹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는 대지진을 당하 기나 한 것처럼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이러한 감정은 기성 질서가 뒤집히거나, 안정상태 가 무너져, 인간의 법칙 또는 자연의 법칙의 보호를 받고 있던 것들이 몰지각하고 잔인 한 야만의 힘에 내팽개쳐졌을 때에는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인 것이다. 집들을 무너뜨려 사람들을 모조리 그 밑에 깔아 죽이는 지진, 죽은 소들과 지붕에서 떨어져 나온 들보들 과 함께 물에 빠진 농부들을 휩쓸고 가는 범람한 강물, 방어하는 사람들을 학살하고, 남은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며, 총칼의 이름 아래 약탈을 감행하고, 포성을 울리며 자기네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숭리의 군대 등은 모두 다, 영원한 정의에 대한 모든 신 념, 우리가 배운 하늘의 가호와 인간의 이성에 대한 모든 신뢰를 뒤틀어지게 해놓고 마 는 무서운 재앙들이다. 얼마 후, 집집마다 병사들이 나타나 문을 두드리더니, 집 안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침 략 후에 오는 점령이었다. 정복자에 대해서 친절을 베풀어야만 하는 피정복자의 의무가 시작되었다. 얼마가 지나서, 최초의 공포가 일단 가시자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많은 ㄴ집안에서 는 프러시아 장교가 상머리에 앉아서 식사를 했다. 이따금 교양있게 자란 사람도 끼어 있어서, 체면상 프랑스를 동정하고, 이러한 전쟁에 참가하는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것에 감사했다. 그런데다가 언젠가는 그의 보호를 필요로 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를 돌보아 주면, 먹여주어야 할 병사를 덜 떠맡 게 될지도 몰랐다. 자신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자의 무모한 짓일 것이다. 영웅적으로 자기 도시를 방어해서 그이름을 빛냈던 루앙의 시민들은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무모 할 만큼 용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프랑스적인 본래의 상냥함을 이유로 내세 우면서, 남이 보는 앞에서만 외국 병사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면이야 집안에서 친 절하게 대하는 것은 무방하지 않느냐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바깥에서는 서로 아는 체하지 않았지만 집안에서는 기꺼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프러시아 군인은 저녁 마다 가족이 함께 모이는 난로가에서 불을 쬐며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다. 도시 자체도 점차 평상시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아직도 별 로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거리에는 프러시아 병정들이 우글대고 있었다. 또한 거리 위를 커다란 살인도구를 질질 끌면서 오만스럽게 다니는 푸른 군복의 경기병 장교들도, 지난 해에 같은 카페에서 술을 마셨던 프랑스의 엽기병 장교들보다 일반 시민들을 특 별히 멸시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공기 중에는 무엇인가 미묘하고 알 수 없는 어떤 것, 견딜 수 없는 야릇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터뜨리는 것 같은 침략자의 냄새가 떠돌았다. 이 냄새가 집 안이 나 공공장소에 가득 찼으며, 음식 맛을 변하게 했고, 아주 멀리 떨어진 위험스러운 야 만족들이 사는 나라를 여행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풍겼다. 정복자들은 돈을, 그것도 많은 돈을 강요했다. 주민들은 끊임없이 돈을 치르고 있었 다. 하기는 주민들이 부자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노르망디의상인이라는 것은, 부자가 되 면 될 수록, 제아무리 사소한 희생도 치루기 싫어하며 자기 돈이 한 푼이라도 남의 손 으로 건너가는 것을 참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그런데, 읍내에서 20-30 리쯤 강물을 따라 내려가면, 크로아새, 디애프, 비애시르 근 방에서 뱃사공들이나 어부들이 군복을 입은 채로 퉁퉁 부은 프러시아 병사의 시체를 물 속에서 끌어내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칼이나 몸둥이로 살해당했거나 돌로 머리가 깨졌거나, 혹은 높은 다리 위에서 떠밀려 물 속에 빠져 죽은 시체였다. 강물 바닥의 진 흙은 음산하고 살벌하고 그러면서도 정당한 이런 복수행위, 알려지지 않은 이 영웅적이 행위, 대낮에 벌어지는 전투보다도 오히려 더 위험스럽고, 승리의 나팔도 울리지 않는 이 소리없는 공격을 묻어버리고 있었다. 외국인에 대한 증오심은, 언제나, 대담한 사람들로 하여금 이념을 위해서 죽음을 무 릅 쓸 준비를 하게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결국, 침략자들이 엄격한 통제 밑에 온 도시를 굴복시키기는 했지만, 승리를 거두는 곳에서 내내 그들이 행했던 악명 높은 무시무시한 짓을 여기에서는 전혀 저지르지 않 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담해졌으며, 상인들이 마음은 다시 장사할 필요성에 의해 움직 이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이 프랑스군의 점령하에 있는 르 아브르와 나름대로의 이해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배를 탈 수 있는 디애프까지 육로로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르 아브르 항구에 가려고 했다. 그들은 친해진 프러시아 장교들의 힘을 빌어서 사령관의 여행허가증을 손에 넣었다. 마침내, 여행에 사용할 커다란 사두마차가 마련되었는데, 모 두 열 명의 자리를 예약했다. 마차는 화요일 아침, 삶들이 몰려드는 것을 피하기 위하 여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하기로 결정되었다. 얼마 전부터 날씨는 꽤 추워지더니, 벌써 땅은 꽁꽁 얼어 붙었으며, 월요일 에는 세 시경부터 북녘에서 밀려온 시꺼먼 구름이 눈을 몰고 와서 저녁내 그리고 밤새도록 쉴 새없이 눈이 내렸다. 새벽 네 시 반에 여행자들이 마차를 타기로 한 노르망디 호텔 마 당에 모엿다. 그들은 아직도 잔뜩 졸음에 취해 있었고 담요을 두르고도 추위에 떨고 있었다. 어두 워서 서로 잘 보이지는 않았다. 무거운 겨울옷을 겹쳐 입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할 것 없이 긴 제의를 입은, 살이 찐 성직자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들 중 두 명의 남자가 서로를 알아보았고, 또 다른 한 사내가 그들에게로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난 아내를 데리고 왔지요." "나도 데리고 왔소." "나 역시 그래요." 맨 먼저 말한 사람이 덧붙였다. "우린 루앙으로 돌아오진 않을 거예요. 만약에 프러시아군이 르아브르까지 진격해 온 다면 우린 영국으로 건너가겠어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계획 또한 똑같았다. 그런데 아직 마차에 말을 매놓지 않았었다. 이따금 마부의 손에 들린 조그마한 들불 이 컴컴한 문으로부터 나왔다가는 금방 다른 쪽 문으로 사라지곤 했다. 말들은 말똥으 로 범벅된 두엄 위에서 발굽을 구르고 있었다. 짐승들을 향해서 욕지거리를 하는 소리 가 건물 안에서 들려왔다. 가볍게 방울이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는 짐승의 움직임에 따 라서 곧 또렷하게 장단이 맞는 울림 소리가 되었다. 방울 소리는 간간이 그쳤다가는 편 자를 붙인 말굽이 땅을 구르는 둔중한 소리와 더불어 급격히 흔들려 다시 들려 오곤했 다. 갑자기 문이 닫혔다. 모든 소리가 뚝 그쳤다. 추위에 얼어붙은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들은 꼼짝도 않고 뻣뻣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하얀 눈송이의 장막이 끊임없이 땅으로 내리면서 쉴새없이 번쩍거렸다. 그 눈은 온갖 형태를 지워버리고 모든 것을 얼음의 장막으로 덮어버렸다. 겨울에 파묻힌 고요한 거리 의 깊은 침묵 가운데서 내리는 눈송이의 유동적이고 형용할 수 없는 어렴풋한 스치는 소리만이 들려 올 뿐이었다. 그것은, 소리라기보다는 차라리 감각이었다. 그것은 이 공 간을 메우고 온 세상을 감싸는 듯한 가뿐한 미립자들이 서로 얽히는 감각이었다. 등불을 들고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 나오기 싫어하는 처량한 말을 고삐 끝으로 끌어 당긴 그는 말을 마차에 매고 멍엣줄을 맸다.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있어서 한쪽 손 밖 에는 쓰지 못했기 때문에 마구를 단단히 매느라고 한참 동안 빙빙 돌아야만 했다. 두 번째 말을 끌고 오다가 승객들이 모두들 벌써 하얗게 눈을 쓰고 꼼짝하지 ㅎ고 있는 것을 보더니 말했다. "왜 마차에 타지 않으세요? 그래도 눈은 피할 수 있을 텐데요." 그들은 미처 그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들은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세 사람의 남자 들은 그들의 아내들을 안에 앉히고 뒤따라 올랐다. 다음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눈을 뒤집어쓴 나머지 사람들이, 말 한 마디 주고받지 않은 채 맨 뒷자리를 차지했다. 바닥에는 짚이 깔려 있어서 그 속에 발을 묻을 수 있었다. 안쪽에 앉은 부인들은 화 학연료를 피우는 작은 놋난로를 가지고 와서 거기에 불을 ㅂ이고는, 낮은 목소리로, 그 녀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난로의 장점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늘어놓았 다. 마침내 마차가 준비를 끝냈다. 평시보다 마차 끌기가 더 힘들 것 같아서 말은 네 마 리가 아닌 여섯 마리를 마차에 맸다. 밖에서 묻은 소리가 들렸다. "다들 타셨어요?" "그렇소." 안에서 대답했다.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는 천천히 천천히, 조심조심 전진했다. 바퀴가 눈 속에 푹푹 빠졌다. 차체는 온통 둔중하게 삐걱거렸다. 짐승들은 미끄러지며 숨울 몰아쉬고 있었다 마부의 어마어마한 채찍은 쉴새없이 윙윙 소리를 내면서 불끈 힘을 쓰느라고 불룩 솟은 엉덩이를 마치 실 뱀처럼 꿈틀거리면서 찰싸닥 갈기곤 했다. 날은 서서히 밝아왔다. 루앙의 토박이 승객 한 사람이 목화비라고 비유했던 가벼운 눈송이도 이젠 내리지 않았다. 어둡고 묵직한 두꺼운 구름을 뚫고 뿌연 ㅎ빛이 새어 나 왔다. 들판에는 서리가 내린 커다란 나무들이 줄지어 나타나기도 했고 때로는 감투처럼 눈을 뒤집어쓴 오두막집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마차 안에서 사람들은 이 새벽의 처량한 밝음을 이용해. 서로서로를 호기심에 가득 차 바라보고 있었다. 포도주 상점의 점원이었던 루와조는, 사업에 실패한 주인으로부터 영업권을 모두 사 들인 다음, 수완을 발휘해 돈을 벌었다. 그는 시골의 영세 소매상들에게 아주 질아 나 쁜 포도주를 헐값으로 팔았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나 친구들 사이에서는 술책이 능란하 고 능글맞은 노르망디의 본토막이 장삿꾼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속임수의 명성이 어찌나 높았던지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지 사 관저에서, 우화와 샹송 작가이며, 실랄하고 날카로운 재능으로써 그 고장의 영광을 차지하고 있는 투르넬씨가 꺼덕꺼덕 졸고 있는 부인들에게 루와조 볼르 놀이를 하자는 제안을 했으며, 그 말은 지사의 살롱으로부터 거리의 살롱들에 널리 퍼져서 한달을 두 고 그 고장 사람들을 웃겼던 것이다. 루와조는 익살을 타고 났으며 선의의 농담이나 짖궂은 농담을 잘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누구나 그에 대해 말할 때면 "이 루와조라는 새는 천만금으로도 살 수 없지" 라고 꼬리를 붙이고 했다. 그의 키는 지나칠 정도로 작았으며, 배는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그 부푼 배 위로 구렛나루를 한 붉은 얼굴이 놓여 있었다. 키가 크고, 억세고, 결단성 있는 그이 아내는 굵은 목소리와 빠른 결단력으로 이 상 가의 질서을 잡으며 주판알 노릇을 하고 있었고 루와조의 활력과 합쳐서 그녀의 활동 은 상류계급에 속하는 카레 라마동씨가 자기잡고 있었다. 그는 레종 도뇌를 훈장을 받 은 퇴역장교인데다가, 도의회 의원이며, 세 개의 제사공장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방직계 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세력가였다. 그는 제정시대를 거치면서 끝까지 온건한 야당의 영수로 지내 왔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그가 온건한 투쟁을 벌임으로써, 그의 공화제 가담이 보다 값있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였다. 남편보다도 휠씬 젊은 카레 라마동 부인은 루앙의 수비대에 파견되어 온 명문 출신이 장교들에게는 커다란 위안거리였다. 부인은 남편과 마주 앉아 있었다. 아주 조그마하고 귀엽고, 예쁘게 생긴 이 부인은 털옷에 싸여 있었다. 부인은 딱한 표정을 짓고 한심스러운 마차 안을 두럴보고 있었다. 부인 곁에 있는 위베르 드 브레빌 백작 부부의 가문은 노르망디 지방에서 가장 역사 가 깊고 고귀한 가문 중의 하나였다. 풍채 좋은 노신사인 백작은, 몸치장에 공을 들여 서 앙리4세가 브레빌 집안의 어떤 부인을 잉태시킴으로써, 그부인의 남편은 백작의 칭 호를 받았으며 도지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위베르 백작은, 도의회에서 카레 라마동씨와 동료인 동시에, 이 지방의 오를레앙 당 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낭트의 보잘 것 없는 선주이 딸과 결혼하게 된 내력은 언제까지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러나 백작 부인은 품위가 높았으며, 누구보다 도 사람을 접대하는 일에 능숙한데다가, 심지어는 루이 필립 왕의 아들 중 한 명의 사 랑을 받은 일까지 있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귀족계급 누구나가 백작 부 인을 극진하게 대하는 터였다. 그래서 백작 부인의 살롱은 이 지방에서는 첫손에 꼽혔 고, 옛날의 범절이 남아있는 유일한 곳으로서 거기에 출입하기는 꽤 까다로웠다. 브레빌의 재산은 모두가 부동산이었는데, 그 연 수입은 50만 리브르에 달할 것이라고 들 했다. 이 여섯 명이 마차 안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종교적 신념과 학식을 갖추고 있 고, 연금도 받는, 이른바 태평하고 권세있는 신사분들의 계층에 속했다. 무슨 우연에서인지는 몰라도 부인들은 모두가 같은 쪽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백작 부인 곁에는, 기도문을 중얼중얼 외며 기다란 묵주를 굴리고 두 명의 수녀가 앉아 잇었 다. 한 수녀는 늙었는데 얼굴 정면에 기관총을 들이대고 일제 사격이나 한 것처럼 곰보 투성이였다. 도 한 수녀는 퍽 가냘프게 생겼는데, 순교자나 종교적인 환상가를 만들어 내기 마련인 격렬한 신앙심에 억눌린 병든 가슴 위로, 예쁘기는 하지만 병색이 도는 얼 굴을 하고 있었다. 이 두 수녀와 마주 앉아 있는 한 쌍의 남녀가 모두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남자는 유명한 민주주의자 코르늬데였다. 그는 사회 명사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20년 전부터 그는 모든 민주주의적 카페의 큰 맥주잔에 적갈색의 텁수룩한 수염을 적 셔 왔었다. 옛날에 과자장수를 했던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으나, 그것을 동지들이며 친구들과 함께 몽땅 들어먹어 버렸으며, 혁명을 위해서 이렇게 모든 것을 소비한 대가로 그럴 듯한 자리 하나쯤은 차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고와제의 세 상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9월 4일, 무슨 짓궂은 장난에 의해서였는데, 그 는 자기가 도지사로 임명되엇다는 것을 정말인 줄 알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취 임하려고 하니, 저희들끼리만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관청의 급사들이 거부하는 바람에 별 수없이 물러나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퍽 선량하고, 악의가 없고, 남의 일에도 발벗고 나서는 성미였으며, 방어진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는 비길 데 없는 열성 으로 활약했었다. 들판에 웅덩이를 파놓게 하고, 근방에 있는 숲들의 어린 나무들을 베 어 눕히게 하고, 길목마다 덫을 놓게 하고서 적군이 접근해 오면, 자기가 차려놓은 만 반의 준비에 만족해 하며 재빨리 시내로 후퇴했던 것이다. 이제는 조만간에 새로운 바 어공사가 필요하게 될 르아브르에서는, 자신의 유용성이 한층 더 발휘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그는 하고 있었다. 한편 여자는 소위 매춘부라고 불리는 족속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조기비만증으로 인 해서 불 드 쉬이프(비계 덩어리)라는 별명을 받고 있는 터였다. 키가 작은 데다가 어디 나 뭉실뭉실 비곗살이 찌고 포동포동한 손가락들은 마디마디 잘룩잘룩 맺혀 있어서 마 치 짤막한 소시지를 염주처럼 꿰어 놓은 것 같았다. 팽팽한 살결에는 윤이 돌고, 엄청 나게 큰 유방이 옷 밑에서 불룩 솟아오른 이 여자는, 그런대로 남자들의 구미를 돋구었 으며 인기도 대단했다. 그녀의 싱싱한 자태는 그만큼 보는 눈에 즐거움을 주었다. 그녀 의 얼굴은 빨간 사과나 금방피어 오를 듯한 모란 봉오리 같았다. 얼굴 윗부분에는 눈동 자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길고 짙은 속눈썹으로 윤곽이 잡혀 찬란한 검은 두 눈이 반짝 열려 있었다. 얼굴의 아래쪽은 , 반짝이는 자그마한 이로 장식된 귀엽고 작은 입 이 키스를 기다리듯 젖어 잇었다. 그밖에도 이 여자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가지가지 매력이 그득히 담겨 있다고들 했 다. 그 여자의 정체가 드러나자, 정숙한 부인들 사이에서는 소근소근 말이 오고 갔다. '매 춘부'또는 '사회의 수치'라는 말들이 꽤 크게 들려 오자 여자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여자가 하도 대담하고 도전적인 눈으로 이웃 사람들을 훑어 보는 바람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루와조만을 빼놓고는 모두가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루와조는 재미있다는 듯이 그녀와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금방 세 부인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다시 오고 갔다. 이 매춘부의 출현이 갑자 기 그들 사이에 우정을 가져오게 하고 친밀감까지 느끼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부인들 은 파렴치한 이 매춘부를 앞에 놓고 아내로서 자기들의 위신을 세우는데 힘을 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합법적인 사람은 언제나 그의 동류인 자유로운 사랑을 멸시하는 것이니까. 세 남자들 역시 코르뉘데를 앞에 두고 보수적인 본능으로 서로 가까워져서 빈민들에 대한 모욕적인 어조로 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위베를 백작은 프러시아 군대 로 말미암아 입은 자기의 손해, 도둑맞은 가축과 잡쳐 버린 수확 때문에 일어난 손실에 대해, 이러한 손실이 기껏해야 일년간쯤의 타격에 지나지 않는 자기보다 열 배나 부자 인 대영주와도 같은 태연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면사계에 조예가 깊은 카레 라마 동씨는 어느 때고 목이 마르면 먹을 수 있는 배 한 개쯤으로 생각하고60만 프랑을 진 작 영국에 송금해 놓은 바가 있다고 했다. 루와조는 술창고에 남아있던 포도주를 몽땅 프랑스군의 병참부에 팔아 치웠기 때문에 국가가 자기에게 막대한 빚은 지고 있어서 르 아브르에 가기만 하면 이 돈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재빠르게 정겨운 눈길들을 주고 있었다. 비록 사회적인 신분이 다르기는 했지만, 돈에 의해서 결합돤 이들은, 가진 자들이 은밀한 동지의식을 서로 느끼고 있었 다. 마차의 속도가 하도 느려서 오전 열 시가 되엇는데도 겨우 40리 밖에 오지 못했다. 그들은 세 번이나 내려서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토오트에서 점심을 먹을 예정 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밤이 되기 전에 그곳에 도착하기 는 다 틀린 일이었다. 모두 길가에 주막이라도 있지 않나 하고 살피는 판에, 마차가 눈 더미에 묻혀서 빠져 나오는데 두 시간이나 걸리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시장기가 덮쳐 와서 정신들을 차릴 수가 없었다. 프러시아군이 가까이 오고 굶주린 프랑스군이 자주 지나가는 통에 장사치들 모두 겁을 집어 먹고 숨어버렸는지 싸구려 음식점 하나, 선술집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남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려고 길가에 있는 농가들을 쏘다녀 보았으나 빵 한 조각도 찾아내지 못했다. 닥치는 대로 약탈해 가는 굶주린 병정들에게 빼앗기는 것이 두려워, 농부들이 먹을 것을 모조리 숨겨 버렸기 때문이다. 오후 한 시쯤이 되자, 루와조는 위에 큰 구머이 ㄸ린 것 같다고 했다. 벌써 오래 전 부터 누구나가 다 루와조와 같은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더해가는 굶주 림 때문에 오가던 이야기도 그치고 말았다. 이따금 누가하품을 하게 되면 곧 다른 사람이 그뒤를 따랐다. 각자가 차례료 자기의 성격, 처세, 사회적 지위에 따라서, 입김이 새어나오는 벌려진 구멍에 재빨리 손을 가져 가며, 혹은 요란하게 ㅎ은 얌전하게 입을 벌리는 것이엇다. 비계 덩어리는 치마 밑에서 무엇인가 찾는 듯 몇 번이나 몸을 굽혔다. 잠깐 망설이다 가 옆의 사람들을 쳐다보곤 다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모두들 얼굴빛이 창백한 채 긴 장해 있었다. 루와조가 햄 한 조각에 천 프랑을 내도 아깝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그의 아내는 항변의 몸짓을 하려다가 잠잠해졌다. 돈을 낭비한다는 말만 들어도 이 여자는 언제나 괴로웠으며 그 문제에 대해서는 농담조차도 통하지 않았다. "정말 견딜 수 없는데. 어떻게 먹을 것을 가져올 생각을 못했을까?" 백작이 물었다. 누구나가 똑같은 자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코르뉘데는 럼주를 채운 수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그것을 내놓았으나 모두 들 쌀쌀하게 사양했다. 루와조만이 두어 모금 받아 마시고 돌려 주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어잿든 좋군요. 몸이 더워지고 시장기가 잊혀지니까요." 주기가 돌자 루와조는 기부이 들떠서, 노래에 나오는 작은 배 위에서 그랬듯이, 제일 살찐 손님을 잡아 먹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비계 덩어리를 간접적으로 암시한 이말은 교양있는 사람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코르늬데만이 미 소를 지었다. 착한 두 수녀들은 중얼거리던 기도를 그치고 커다란 옷소매 속에 두 손을 쑤셔넣고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완강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폼이 하늘이 그려 들에게 내린 시련을 꾹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느새 세 시가 되었으나 마을 하나 보이지 않고 끝없는 벌판만이 게쇽될 뿐이었다. 비계 덩어리는 재빨리 몸을 굽히고 하얀 보자기를 씌운 커다란 바구니를 의자 밑에서 꺼냈다. 그녀는 바구니에서 조그마한 사기접시와 화사하게 생긴 은잔을 꺼낸 다음 잘게 칼질 해서 젤리로 재어 놓은 통닭 두 마리가 들어 있는 큰 그릇을 내놓았다. 그밖에도 바구 니 안에는 포장해 넣은 다른 맛있는 음식들, 파이, 과일, 과자 등 객줏집 음식의 신세를 지지 않고서도 사흘 정도의 여행을 할 수 있게 준비돤 음식들이 눈에 띄었다. 음식물 봉지 사이로는 네 병의 술병 모가지가 삐죽이 나와있었다. 그녀는 날갯죽지를 하나 집 어들고 노르망디 지방에서는 '레장스'라고 부르는 작은 빵조각과 함께 얌전하게 먹기 시작했다.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냄새가 풍겨서 사람들의 콧구멍을 벌름거리게 했고, 입에서는 군침이 돌게 했으며, 귀 밑의 턱을 고통스럽도록 당기게 했다. 이 매춘부에 대한 부인들의 경멸감은 극도에 달해서 그녀를 죽여 업리든가, 잔이고 바구니고 음식물 이고 간에 그녀와 몽땅 함께 마차 밖의 눈 속으로 내던져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루와조의 눈은 닭이 담긴 그릇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참 잘 하셨군요. 부인은 누구보다 용의 주도하셨쏘. 항상 모든 일에 생각이 미치는 분들이 있어요." 루와조가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에게 말했다. "좀 드시겠어요? 아침부터 굶는다는 게 여간 일이 아녜요." 그는 반색을 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사양할 수 없군요. 전쟁시에느 전쟁시답게 해야지요. 그 렇 지 않아요,부인?" 그리고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나서 덧붙였다. "이런 판국에 은혜를 베풀어 주는 사람이 잇다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지요." 그는 바지를 더럽히지 않도록 신문지를 펴놓고, 항상 호주머니 속에 간직하고 있는 칼끝으로 젤 리가 번지르르 흐르는 닭다리를 재빨리 꽂아 들었다. 그가 어 찌나 흡족해 하며 닭다리를 뜯고 씹는지 마차 안에서는 괴로운 한숨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러자 비계 덩어리는 겸손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수녀들에게 함께 먹기를 권했다. 두 수녀는 지체없이 제안을 받아들이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중얼거린 후 눈을 내리깐 채 마구 먹어대기 시작했다. 코르뉘데 역시 이웃 여인의 권유를 거 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릎 위에 신문지을 펴고 수녀들과 더불어 식탁 비 슷한 것을 꾸몄다. 입들은 쉴새 없이 열리고 닫히며 집어 넣고 씹고 꿀꺽꿀꺽 삼키고 했다. 한 구석에서 열심히 먹고 있던 루와조가 낮은 목소리로 아내에게도 먹으라고 권했 다. 한동안 아내는 고집을 부렸으나 창자 속에서 경련이 일어나자 굴복 하고 말 았다. 남편은 부드러운 말씨로 '상냥한 동행자'를 향해 마담 루와조에 게도 한 조 각 나누어 주어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렇구 말구요." 비계 덩어리는 애교있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릇을 내밀었다. 보르도 포도주이 첫 번째 병마개를 뽑앗을 때에 난처한 일이 생겼다. 잔이 하 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잔을 닦아서 차례로 돌렸다. 코르뉘데만이, 여자에 대 한 예 절에서 그랬겟지만 비계 덩어리의 입술이 닿아서 젖은 자리에 곧 자기 입술을 갖다 댔다.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음식 냄새에 숨이 막히 브레빌 백작 내외와 카레 라마동씨 내외는 '탕타르의 형벌(영원한 기아의형벌)'에 시달리 고 있었다. 별안간에 공업가의 젊은 부인이 한숨을 내쉬는 바람에 모두들 돌 아보았 다. 부인의 안색은 창 밖의 눈처럼 창백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고개를 떨어뜨리 더니 의식을 잃었다. 남편은 몹시 당황해서 사람들에게 구원을 청했 다. 아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나이 먹은 수녀가 환자의 머리를 받쳐들고 비계 덩어리 의 잔을 환자의 입술 사이로 들이민 다음 포도주 몇 방울을 마시 게 했다. 예쁜 부인은 몸을 움직이며 눈을 떴다. 그리곤 웃음을 띠면서 다 죽 어가는 목소리로 이젠 퍽 기분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녀는 재발을 막기 위해 포도주 한 잔 가득히 따라서 억지로 막시게 했다. 그리고는 "시장해서 그랬겠지요. 별다른 건 없어요." 하고 덧붙였다. 그러자 당황해서 얼굴이 새빨개진 비계 덩어리가 굶고 있는 네 손님들에게 더 듬더듬 말했다. "어떻게 하나... 저 어른들과 부인들이 잡수어 주셨으면 좋겠지만.." 비계 덩어 리느 실례될까 두려워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루와조가 대꾸했다. "사실 이런 판국에서야 누구나 할 것없이 동기간이나 다름 없으니까 서로 도 와야지요. 자, 부인들, 체면 차리지 말고 호의를 받으시지요. 상관 있나요! 오 늘 밤을 지낼 집 한 채라도 찾을 수 ㅇ있을지 모르잖아요? 이렇게 가다간 내일 정 오까지 토ㅇ트에 도착하긴 다 틀렸어요." 아무도 선ㄸ 그럽시다하고 나서는 사람 은 없었고 망설이기만 하였다. 그러자 백작이 마침내 문제를 해결했다. 백작은 수줍어하는 뚱뚱한 매춘부 를 향해서 신사다운 품위을 갖추면서 말했다. "감사히 받겠소, 부인." 첫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웠을 뿐이다. 일단 루비콘 강을 건너고 보니 체면 이 고 뭐고 없었다. 바구니는 금방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간으 로 만 든 파이, 종달새 파이, 훈제한 소시지, 크라산의 배, 퐁 레베크으 향료과 자, 작은 과자, 부인들이 모두 그렇듯이 비계 덩어리 역시 날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초에 담근 오이와 양파가 가득히 들어 있는 단지 등등이 남아 있었다. 여자의 음식을 먹으면서 그녀에게 말을 건네지 않을 수는 없었다. 처음에 는 조심성을 보였으나 여자가 퍽 상냥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모두들 허물없이 대하 게 되었다. 처세술이 능란한 브레빌 부인과 카레 라마동 부인으 ㄴ점잖 고 우아 한 태도를 보였다. 더욱이 누구와 접촉하더라도 흠 가지 않을, 푹 고귀 한 부인들 만이 가질 수 있는 애교있고 너그러운 태도를 지닌 백작 부인이 그 녀에게 특히 상냥했다. 억세고 무뚝뚝한 루와조 부인만이 여전히 새침한 채 말도 없이 먹고 만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전쟁이 화제에 올랐다. 프러시아군의 잔인한 행위와 프랑 스 군의 용감한 공훈 등에 관해서 이야기가 오갔다. 모두 다 도망가는 처지에 있는 이 삶들이 남의 용기를 찬양하는 것이었다. 곧 자기네들의 경험담이 시작 되엇다. 비계덩어리는 흔히 창녀들이 숨길 수 없는 분노를 토로할 때에 그러하듯이, 열 띤 어조로 자신이 어떻게 루앙을 떠나오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 저는 그대로 남아있을 생각이었어요. 저휘 집에는 먹을 것도 충분히 있고 해서 정처없이 떠도는 것보다는 병정 몇몇을 먹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 어요. 그런데 막상 그 프러시아놈들을 눈앞에 보니 정말 참을 수 없더군요!화가 치밀고 피가 끓었어요.분에 못이겨서 온종일 울었답니다. 아! 내가 남자라면 정 말! 저는 창가에서 뾰죽한 철모를 쓴 큰 돼지새끼 같은 놈들을 보고 있었 어요. 제가 놈들의 등에다 세간을 집어던질까봐 두려워서 하녀는 제 손을 붙들었답니 다. 그러자 몇 놈이 저의 집에 묵겠다고 왔어요. 그래서 저는 맨앞에 들어선 놈 의 목을 겨누고 뛰어들었어요. 놈들의 목을 졸라매서 죽이기가 딴 사람들의 목 을 조르는 것보다 어려울 거야 업지 않겠어요! 뒤에서 머리채를 낚아 채는 놈만 없었더라면 그놈을 해치우고 말았을 거예요. 그일 때문에 저는 숨어야 했어요. 마침 기회가 있어서 이렇게 떠나오게 되었답니다." 모두들 그너를 크게 칭찬했다. 그만한 용기를 보이지 못했던 동행자들의 존 경 을 받고 비계 덩어리는 우쭐해졌다. 코르뉘데는 이 여자의 말을 들으면서 사도 와도 같이 찬동과 호감을 보이는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하나님을 찬양하 는 신도 의 소리를 듣고 잇는 목사와도 같았다.수염을 기른 민주주의자들은 제 의를 걸친 자들이 종교를 전매하듯이 애국심을 전매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차례가 돌아 오자 쿠르뉘데는 매일 벽에 나붙는 포고문에서 따온 과장과 설교 조의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바댕개(루이 나폴레옹)라는 바보 녀석!" 하며 도도 하게 쏘아붙이는 웅변의 한 토막으로 말을 했다. 그런대 보나파르트 파인 비계 덩어리는 금방 화를 냈다. 그녀는 앵두보다 도 더 새빨개져서 화가 치밀어 말까지 더듬거렸다. "당신네들이 그분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보고 싶군요. 말도 안돼 요. 그분을 배반한 건 바로 당신네들이에요! 당신네들 같은 부랑당들이 저원을 잡 았 다면 프랑스에 남아있을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 줄 아세요?" 크르뉘데는 태연 하게 멸시와 우월감이 뒤섞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자 백 작이 나서서 진 지한 의견은 모두 존중해야 한다는 말로 위엄있게 타일러 격분한 창부를 진정 시킬 수 있었다. 그러지 못했다면 더욱 심한 언쟁이 벌어졌으리라는 것은 뻔 한 일이었다. 한편 백작부인과 공업가의 부인은 상류사회의 인사들이 공 화제 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터무니 없는 증오심과 전제정부에 대해서 모든 여성 들 이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호감을 똑같이 품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과 감 정이 비슷하고 위엄에 충만한 이 창부에게 저도 모르게 마음이 끌렸다. 바구니는 비었다. 열 시가 되었을 때에는 바구니가 더 크지 않았던 것을 아 쉬 워하며 바닥을 내고 말았다. 이야기가 얼마 동안 오고 갔으나, 먹기를 다해 버린 후로는 이야기가 좀 냉랭해졌다. 밤이 오고 어둠은 점차로 짙어져 갔다. 소화가 되는 동안에는 한결 더 심하 게 느껴지는 추위 때문에 비계 덩어리는 비겟살이 쪘는 데도 떨리고 있었다. 그러 자 브레빌 백작 부인이, 아침부터 몇 차례 숯을 갈아 넣은 발난로를 내 주며 발 을 쪼이라고 했다. 비계 덩어리는 발이 얼어붙던 참이라 사양하지 않 았다. 카레 라마동 부인과 루이조 부인도 자기네 것을 두 수녀에게 내 주었다. 마부가 등에 불을 켰다. 등불은 환해서, 마차를 끄는 말들의 땀이 흐른 엉덩이 에 뭉게뭉게 오르는 김과 요동하는 불빛의 반사를 받으며 펼쳐가는 듯한 눈길을 비추었다. 마차 안에서는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비계 덩어리와 코 르뉘데 사이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났다. 어둠 속을 눈으로 더듬고 있던 루이 조는 수염을 기른 사나이가 소리없는 일격을 단단히 얻어맞은 듯 훌쩍 물 러나는 것을 본 성싶었다. 작은 불빛들이 도로의 전면에 나타났다. 토오트였다. 열한 시간을 왔지만, 말 에게 귀리를 먹이고 숨을 돌리게 하느라고 네 차례 휴식했던 두어 시간을 합치 면 열서너 시간 걸린 셈이었다. 마차느 ㄴ시내로 들어서서 상공회이소 앞으로 갔다. 마차 문이 열렸다. 귀에 익은 소리에 승객들은 모두 오싹 떨엇다. 그것은 칼집 이 땅에 부딪치는 소리였다. 곧 뭐라고 소리치는 프러시아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멈추었지만 나가면 학살당할 것을 미리 짐작이나 하고 있는 것처럼 아 무도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마부가 손에 등불을 들고 나타났다. 등불이 마차 안까지 환히 비추자, 당황해서 입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얼굴과 놀라움 과 두려움에 부릅뜨고 있는 눈들이 드러났다. 마부 옆에는 온몸에 불빛을 받고 프러시아군 장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지 나 치게 마르고 금발머리의 후리후리한 이 젊은 장교는 코르셋을 입은 소녀처럼 꼭 끼는 군복을 입고, 초를 먹인 납작한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있었다. 그 모자 때문 에 그는 영국 호텔의 보이처럼 보였다. 곧고 긴 수염털로 이루어진 그 의 코밑 수염을 정말 우스꽝스러웠는데 양쪽으로 한없이 가늘게 뻗어 가다가 마지막에는 단한 오라기의 금빛 털마으로 끝나고 있엇다. 그 끝은 하도 가늘 어서 눈에 보이 지도 않았다. 수염이 볼을 당기며 입가를 짓누르는 듯 입술 위에 밑으로 처진 한 줄기의 주름살을 그어놓고 있엇다. 그는 알사스 지방투의 프랑스 말로 무뚝둑하게 승객들이 내리기를 종용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내리시라요." 두 수녀가 무슨 일에나 복종하는 데에 익숙한 성녀들의 순종심으로 맨 먼저 명령에 따랐다. 백작 부부가 그 다음에 내리고 공업가 부부가 뒤를 따랐다. 그리 고는 루와조가 몸집이 큰 아내를 떠밀며 나갔다. 루와조는 발이 땅에 닿기가 무 섭게 장교를 향해. "안녕하십니까?" 하고 예의를 차려서라기보다는 몸조심하는 마음에서 인사 했 다.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자들이 그러하듯이 오만무레한 상대방은 답례도 하지 않고 루와조를 노려보기만 했다. 비계 덩어리와 코르뉘데는 출입구 가까이에 앉아 있었으나 적의 눈앞에서 침 착하고 당당한 태로를 보이며 맨 마지막에 내렸다. 뚱뚱한 창녀는 자신을 억 제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민주주의자는 약간 떨리는 손 으로 기다란 갈색 수염을 어설프게 비비 꼬고 있었다. 이러한 만남에서는 누 구를 막 론하고 다소간 자기 나라를 대표하고 있다느 ㄴ사실을 인식하고 있었 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위신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동행자들의 무 기력함에 비계 덩어리와 크프뉘데는 다같이 분개했다. 그래서 비계 덩어리는 옆에 있는 훌륭한 부인들보다도 더욱 도도한 태도를 보이려고 애썼으며 코르뉘 데는 자기가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통감했기 때문에, 도로를 파서 방 어진을 칠 때부터 시작 된 그의 저항의 사명을 모든 태도에 있어서 견지하고 있었다. 여관집의 넓은 식당으로 들어서자 프러시아 장교는 사령관이 서명한 여행허가 증을 제시하라고 했다. 여행허가증에는 각자의 이름과 서명과 직업이 기재되 어 있엇다. 그는 오랫동안, 기재사항과 인물을 대조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모 두를 검열했다. 그리고는, "좋소." 불쑥 한 마디 하곤 나가 버렸다. 그제서야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배는 고파서 저녁을 시켰다. 저녁을 준비하는 데 반 시간이 걸렸다. 두 종업원이 저녁을 차리는 동안에 사 람 들은 방을 보러 갔다 .방들은 모두 가다란 외길 복도를 따라서 있었다. 복도 끝 에는 무슨 뜻이 있는 듯한 번호가 표시된 유리문이 나 있었다. 이윽고 식탁에 막 앉으려는 참인데 여관 주인이 나타났다. 그는 예전에 말 장 수를 했던 뚱뚱한 천식병 환자였다. 늘 씩씩거렸으며, 목소리가 갈라졌고, 목구 멍에서는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포랑비'라느 ㄴ이 름을 물 려받았다. "엘리자베트 루세양 계세요?"하고 그는 물었다. 비계 더어리느 깜짝 놀라서 돌아다 보았다. "저예요." "프러시아 장교가 급히 할 말이 있답니다." "저한테요?" "그렇습니다. 아가씨가 틀림없이 엘리자베트 루세라면." 비게 덩어리는 당황했 다. 그녀는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뚝잘라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가지 않겠어요." 주위에 있던 사람이 웅성거렸다. 제각기 이 명령이 내려진 이유를 찾으려 논 의가 벌어졌다. 백작이 다가왔다. "부인, 그래서는 안됩니다. 당신이 거역함으로써 비단 당신뿐아니라 동행한 모 두가 크게 낭패를 볼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생살여탈권을 가진 자들이 비 위를 거슬러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지금 이 일에는 별로 위험이 따르 것 같잔 않습니 다. 아마 수속절차에 빠진 것이라고 있겠지요." 모두들 백작과 합세해서 그녀를 달래고 타일러서 드디어 그녀를 설득하고야 말앗다.누구나가 무모한 짓으로 말미암아 일어날지도 모르는 말썽을 두려워했 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지요. 여러분을 위해서예요!"그녀는 마침내 이렇 게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 백작 부인은 그녀의 손을 붙잡앗다. 비계덩어리는 밖으로 나갔다. 남은 사람들은 함께 식사를 하려고 그녀를 기 다 렸다. 이 사납고 다루기 어려운 창부 대신에 자기가 불려가지 못한 것을 저마다 애 석해 했으며, 머릿속으로는 자기 차레가 와서 불려가는 경우에 늘어놓을 비열 한 말들을 준비하고 있엇다. 그런데 10분쯤 지나자 금방 숨이 막힐 듯이 얼굴이 충혈해서 격분한 비계 덩 어리가 숨을 몰아쉬며 돌아왔다.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아, 고약한 놈! 고약한 놈!" 모두들 영문을 알고 싶어서 몸달았지만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백작의 간 청에 못이긴 척 그녀는 지극히 도도하게 대답했다. "말씀드릴 수 없어요. 여러분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러자 그들은 양배추 냄새가 풍기는 우묵한 수프 그릇을 가운데 놓고 둘러 앉았다. 뭔가 불안그러 운 일이 있기는 했지만 저녁 식사는 즐거웠다. 사과주 맛 이 좋았다. 루와조 부 부와 수녀들은 돈을 아끼느라고 사과주룰 마셨다. 다른 사 람들은 포도주를 청 했다. 코르뉘데는 맥주를 시켰다. 코르뉘데는 병마개를 맥주 에 거품을 일게 하 고 유리잔을 기울여 맥주를 이리저리 들여다보고는 빛깔을 더 잘 감상하기 위 해서 등불에 비춰보는 독특한 방식을 보여 주었다. 그가 맥주를 마실 때에, 그가 사랑하는 맥주빛과 비슷한 수염은 정다움에 떠는 듯했다. 그의 눈은 잠 시도 맥주잔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곁눈질을 하고 있었으며 그는 오로지 술을 마시기 위해서 태어난 자신의 유일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의 정신 가운데에는, 자신의 전생활을 차지하고 있는 두 개의 정열, 즉 백맥주와 혁명 사이의 친화력이 맺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한쪽을 생 각 하지 않고서는 다른 한쪽을 맛볼 수 없었던 것이다. 포랑비 부부는 식탁 맨끝에서 식사를 했다. 고장난 기관차처럼 헐떡거리는 포 랑비는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식사 중 말을 하기가 힘들엇다.그러나 그의 부인 은 잠시도 입을 닫아 두는 일이 없었다. 프러시아군이 들이 닥쳤을 때 에 받은 갖가지 인상이며, 그들이 한 일들, 말한 내용들을 욕설을 퍼부어 가며 이야기했 다. 첫째로는 그들 때문에 돈을 낭비했고, 다음으로는 아들 둘이 프랑 스군에 입 대하고 있기 때문이엇다. 그녀는 고귀한 부인과 이야기하는 것이 자랑스러워서 유난히 백작 부인게게 말을 붙였다. 그리곤 목소리를 낮추고서 미묘한 일들을 이야기했다. 남편은 이따금. "여보, 입좀 다물구료." 하며 아내의 말을 막앗으나 그녀는 전혀 아랑곳없 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쩌면 부인, 그놈들은 감자하고 돼지고기를 먹는 일 밖엔 할 줄 모르는 놈들 이에요. 지저분하긴 이를데 없구요. 말씀드리기도 송구스럽지만 그저 아무데나 대고 대소변을 본다니까요. 낮에 그놈들이 훈련이라고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저 쪽 들판에서 하는데요,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이리 돌고 저리 도는 지랄뿐이 예 여. 땅이라고 갈고 제놈들의 나라에서 길이라도 고친다면 오죽이나 좋겠어요! 정 말이지 부인, 군대란 누구한테고 이로울게 없어요! 고작해야 사람 죽이는 짓을 가르치기 위해서 가난한 백성이 군대를 먹여 살려야 한 단 말씀이에요! 저는 사 실이지 교육도 받지 못한 노파에 불과하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걷기만 해서 심 신을 지치게 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이로운 일 을 위해서 퍽 많은 발명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해로운 일을 위해서 그렇 게도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사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것이 프 러시아 사람이건 영국 사람이건, 폴란드사람이건, 프랑스 사람이건간에 극악 무도한 짓이 아닐까 요? 가령 자기에게 잘못했다고 해서 복수를 하면 벌을 받 으니까 죄악이 되고, 우리네 자식들을 새나짐승처럼 마구 총으로 쏘아 죽일 때엔 제일 많이 죽인 자 에게 훈장을 주니, 그게 잘한 짓일까요? 정말이지 저는 알 수 없어요" 코르뉘데가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평화로운 이웃을 공격할 때에 전쟁은 만행입니다. 그러나 조국을 수호할 때 전쟁은 신성한 의무랍니다.:"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옳아요, 자신을 지킨다는 것을 별문제예요. 그러니 자기네의 즐거움을 위해 서 전쟁을 하는 왕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편이 차라리 낫지 않겠어요?" 코르 뉘데의 눈은 불붙은 듯 빛났다. "여성 동지 만세!" 카레 라미동씨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엇다. 그는 저명한 장군들을 열광적으 로 숭배하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이 시골 여자의 평범한 상식 때문에, 만일에 몇 세 기를 두고 성취해야 할 대사업들에 이렇게도 숱한 무위도식배들, 따라서 낭비적 인 인적 자원과 비생산적인 힘을 투입한다면, 국가에 얼마나 큰 복리 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엇던 것이다. 그러나 루와조는 자리를 떠나서 여관주인과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뚱뚱보 주인은 웃다간 클룩거리며 연방 가래를 뱉었다. 그의 어마어마 하게 큰 배는 루와조의 농담에 신이 나서 불룩 거렸다. 그는 봄에 프러시아군 이 떠나면 쓸 생각으로 여섯 통의 보르도 포도주를 루와조로부터 사고야 말았 다. 모두들 극도로 피곤했기 때문에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주변을 주의 깊게 살펴온 루와조만은 아내를 자리에 들게 하고 나서 소위 그가 말한 바 '복도의 비밀'을 탐지해 내려고 열쇠구멍에다 혹은 귀를 혹 은 눈을 가져갔다. 한 시간쯤 지나자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재빨리 내다보앗다. 흰 레이스로 테를 두른 파란 캐시미어 파자마를 입었기 때문에 더욱 뚱뚱해 보이는 비계 덩어리가 눈에 뛰었다. 촛대를 손에 들고 그녀는 복도 맨 끝에 있는 굵 직 한 번호가 붙은 방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옆 방의 문이 비긋이 열렸다. 비계 덩어리가 돌아오자 멜빵을 걸치고 있는 코르뉘데가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들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비게 덩어리가 완 강히 자기 의 방문을 막고 서 있는 것 같았다. 불행히도 루와조는 그들의 말 을 듣지는 못 했으나 끝에 그들이 언선을 높인 덕분에 그중 몇 마디를 주워들 을 수 있었다. 코르뉘데가 조급하게 졸라댔다. "이봐요, 정말 바보로군. 이게 무슨 큰일 날 일이야?" 여자는 화가 난 듯이 대 꾸했다. "안돼요, 그런 짓도 할 때가 따로 있어요. 이런 데선 부끄러운 짓이란 말이예 요." 아마도 코르뉘데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이유를 물었다. 여 자는 발끈 화를 내면서 더 큰소리로 쏘아붙였다 "왜냐고요? 그래 이유도 모르겠다는 말이에요? 이 집에 프러시아 놈들이 득실 거리오 있으니 옆 방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냔 말이에요?" 그는 입을 다 물었다. 적을 앞에 둔 자리에서는 절대로 애무를 받지 않겠다는 이 창녀의 애국적인 수치심이 정녕 스러져가던 그의 위신을 마음 속에 다시 불 러 일으켰 음인지 그는 한 번 껴안기만 하고는 살금살금 제 방으로 돌아가 버렸 다. 루와조는 몹시 흥분해서 열쇠 구멍으로부터 물러났다. 그는 방 안에서 덩 실 춤을 한바탕 추고 나서 마드라(옷의 이름)를 걸친 후 해골같이 딱딱한 아내가 덮고 있는 담요를 들쳤다. "여보, 나를 사랑하지?" 중얼거리며 키스를 하는 바람에 아내는 잠을 깨었다. 이젠 온 집안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곧 지하실로부터인지 혹은 다락에서인 지 분간하기 어려운 방향으로부터 세차고 단조롭고 규칙적으로 코를 고는, 마 치 증 기의 압력을 받고 주전자가 들먹이는 듯한 둔하고 여운이 긴 소리가 들 려왓다. 포랑비씨가 잠을 자고있는 것이었다. 다음 날은 여덟 시에 떠나기로 했기 때문에 모두들 그 시간에 식당에 모였 다. 그런데 포장 위에 눈이 쌓인 마차가 말도 마부도 없이 마당 한가운데 쓸쓸히 놓 여 있엇다. 마구간으로, 사료창고로, 차고로, 마부를 찾아다녔으나 허사였다. 남 자들은 온 마을을 뒤져 보기로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광장에 이르렀다. 광 장 끝에는 교회가 서 있었고 프러시아 병정들이 들어 있는 낮은 집들이 양 쪽에 늘어서 있었다. 맨 처음 눈에 띈 병장은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좀 더 가까 이 가자 두 번째 병정은 이발소에서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눈까지 수 염이 텁수 룩한 또 하나의 병정은 우는 아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달래며 어 르고 있었다. 남편들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둥뚱한 아낙네들이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정복자 들에게 손짓으로 일을 시키고 있었다. 장작을 패는 일, 빵에다 스프를 적시는 일, 커피를 빻는 일들이었다. 그들 중의 하나는 심지어 전신불수가 된 주인 노파 으 속옷까지 빨고 있엇다. 놀란 백작 주교관에서 나오는 수위에게 물었다. 그 늙은 신자가 대답했다. "오! 저자들이야 마음씨가 좋지요. 프러시아 사람들이 아니라고들 하더군 요. 어디서 왓는지 잘은 모르지만 더 먼 데서 왔데요. 고향에 처자를 남겨 놓고 왔 다는군요. 그러니 전쟁하는 것이 좋을 턱이 있어요? 필경 그쪽에서도 남편 이나 자식을 보내 놓고 울고 있을 거예요. 전쟁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나 마 찬가지로 저 사람들에게도 큰 불행이지요. 여기서는 아직은 저자들이 못된 짓도 안하고 자기네 집에 있는 것처럼 일을 잘 해주니 당장은 불행하지 않지 요. 불쌍한 사람 끼리는 서로 도와야 하지 않겠어요.... 전쟁이야 높은 양반들이 제멋대로 하는 짓 이니까요." 코르뉘데는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에 이렇게도 다정하게 화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분개해서 여관에 처박혀 있는 편이 속 편하리라 생각하여 돌아 오고 말았다. 루와조가 농담삼아 한 마디 했다. "빈 자리를 채우고 있는 거요." 카레 라마동씨가 진지하게 말했다. "속죄하고 있는 거요." 마부는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마을의 술집에서 장교의 연락병과 다정하 게 식탁에 마주앉아 있는 그를 찾아냈다. 백작이 따졌다. "여덟 시에 마차를 채비하라는 말을 못 들었나?" "듣고 말고요, 그런데 그후에 딴 지시가 내렸답니다." "무슨 지시야?" "절대로 마차에 말을 매지 말라구요." "누가 그 따위 지시를 했어?" "나참! 프러시아군의 사령관이지요." "아니 왜?" "그걸 제가 압니까? 가셔서 물어보시지요. 말을 매지 말라고 하니까 저야 안 했을 뿐이지요." "바로 사령관 자신이 지시했나?" "아뇨. 여관 주인이 그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전달하더군요." "언제 그랬어?" "어젯밤에 제가 자리에 들려는 참이었지요." 세 남자는 심히 불안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포랑비씨를 만나려고 했으나, 하녀가 주인은 천식 때문에 열 시 이전에는 일 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주인은 불이나 나면 모를까 그 시간 이전에 깨우는 것을 절대로 금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교를 만나려고 했으나 비록 한 집에 유숙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다. 민간인의 일에 관해서는 포랑비씨만이 그와 이야기할 수 있는 허가를 받고 있 엇다. 그래서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여자들은 다시 자기들의 방에 올라가서 무 의미한 짓으로 시간을 보냈다. 코르뉘데는 불이 훨훨 타고 있는 부엌방의 높 다 란 벽난로 아래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그곳으로 작은 커피 쟁반과 맥주병 을 가 져오게 하고서 파이프를 꺼냈다. 이 파이프를 민주주의자들은 코르뉘데 를 존중 하는 만큼이나 존중하고 있었다. 마치 이 파이프가 코르뉘데에게 봉 사함으로써 조국에 봉사하고 있기나 하는 것 같았다. 탄복할 만큼 담뱃진이 밴 이 해포석 파이프는 주인의 이빨처럼 까맣지만, 구수한 냄새, 구부러진 모양, 번쩍이는 윤 택을 가지고 주인의 손에 익어서 주인의 용모의 일부가 되 어 있었다. 벽난로에 서 타는불이나 혹은 맥주잔 위를 덮고 있는 거품을 물끄 러미 바라보면서 코르뉘 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 모금 들이마실 때마다 만족스럽다는 듯이 마르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기름때가 묻은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거품이 슬처럼 달 라붙은 코밑 수염을 혀로 쓸고 있었다. 루롸조는 발이 저리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갔을 때, 이 고장의 소매상들에 게 포도주를 팔기 위해서였다. 백작과 공업가는 정치를 논하기 시작했다. 그들 은 프 랑스의 장래를 전망햇다. 한쪽은 오를레앙 파를 믿고 있었고 상대방은 미지의 구원자, 말하자면 모든 것이 절망에 빠졌을 때에 홀련 나타날 영웅을 믿고 있었 다. 이 구원자가 개스크랭같은 사람일지 또는 잔 다르크 같은 사 람일지? 혹은 또 하나의 나폴레옹 1세일 것인지? 아! 황태자가 그렇게 어리지 만 않다면! 코르 뉘데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운명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처럼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의 파이프는 방을 담배 냄새로 가득히 채웠다. 열 시가 되자 포랑비씨가 나타났다.그는 곧 질문의 화살을 받아ㅆ. 그는 똑같 은 말을 두세 번 되풀이할 수 밖에 없었다. "장교가 나한테 이렇게 말하더군요. '포랑비씨, 내일 이 승객들의 마차에 말 을 매지 못하게 하시오. 명령이 있을 때까지 그 사람들은 못 떠납니다. 알았 소? 그 뿐이오." 사람들은 장교를 만나려고 했다.백작이 카레 라마동씨의 이름과 칭호를 자 기 의 명함에 함께 기입해서 장교에게 보냈다. 프러시아 장교는 점심을 먹고 나서, 말하자면, 한 시경에 이 두 사람과의 면담을 허럭한다는 회답을 보내 왔 다. 부인네들이 다시 나타났고, 모두들 불안하긴는 했지만, 조금씩 식사를 했 다. 비계 덩어리는 몸이 불편하고 심기가 편치 않은 듯했다. 커피를 마시고 났을 때 연락병이 신사들을 부르러 왓다. 루와조도 함께 가기로 했다. 그들은 교섭에 있어서 한층 격식을 갖추기위하 여 코르뉘데까지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그는 프러시아놈과는 여하한 교섭도 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벽난로 옆의 자리로 돌아가서 맥주를 또 한 병 청 했다. 세 사람은 장교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인도되었다. 이 여관에서는 제일 좋 은 방이었다. 장교는 벽난로 위에 발을 올려놓고 긴 사기파이프로 담배를 피우 며 안락의자에 누워 있었다. 그는 아마도 저속한 취미를 가진 어는 부르 주아의 빈 집에서 훔쳐 온 듯한 새빨간 실내복을 걸치고 있었다. 장교는 일어 나지도 않 았으며 그들에게 인사도 없었고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이 자는 승리한 군대 에세 으레볼 수 있게 마련인 야비한 행동의 표본을 보여 주고 있었 다. 얼마 후에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왜 왔소?" "저희들은 출발해야겠습니다." 백작이 말을 꺼냈다. "안됩니다." "죄송하지만 거절하시는 이유를 알 수 없을까요?" "이유는 내가 원치 않기 때문이요." "장교님, 죄송하지만 사령관께서 디애프까지 갈 수 있는 여행허가증을 우리에 게 교부해 주셨다는 것을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은 이렇게 엄한 처 분 을 받을 만한 일은 조금도 한 것 같지 않습니다." "내가 원치 않으다니까... 이유는 그것뿐이요... 내려들 가시오." 세 사람은 모두 허리를 굽히고 물러나왔다. 비참한 오후였다. 프러시아놈이 변덕을 부리는 이유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해괴한 생각들에 그들의 머리는 어지러웠다. 다같이 부엌방에 앉아 서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일들을 상상해 가며 밑도 끝도 없이 논의를 벌리고 있었 다. 인질로 잡아 두자는 것일까? 혹은 그보다느 차라리 상당한 액수의 석 방금을 요구하려는 지? 바로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들은 미칠 듯한 공포에 사로잡혔 다. 가장 돈 많은 사람들이 누구보다도 두려워했다. 목숨을 건지기위해 서 이뻔뻔 스러운 프러시아놈의 두 손에 황금이 가득 찬 돈자루을 쏟아 주지않 을 수 없는 자신들의 꼴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그들은 어떻게 그럴싸한 거 짓말로, 부자라 는 것을 숨기고 말할 수 없이 가난한 사람으로 행세할 수 있 을까 머리를 짰다. 루와조는 시계줄을 풀어서 호주머니 안에 감추었다. 밤이 되자 두려움은 더해 만 갔다. 램프에 불이 켜졌다. 저녁 식사까지는 아직도 두 시간이나 남아 있 었다. 루와조 부인은 트럼프 놀이를 하자고 했다. 기분전환이 될 법도 했다. 닫를 찬성 했다. 코르뉘데까지도 예의상 파이프를 끄고 한 ㅁ 끼었다. 백작이 카드를 쳐서 돌렸는데. 비계 덩어리가 단번에 으뜸패를 잡았다. 놀이에 신이 나서 그들의 머리를 괴롭히던 공포심도 이내 가시고 말았다. 코르뉘데 는 루와조 부부가 속임수를 쓰려고 서로 눈짓하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다. 사람들이 막 식탁에 앉으려던 참에 포랑비씨가 다시 나타나ㅆ. 담이 걸려 서 글글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프러시아 장교가 엘리자베트 루세양의 생각이 아직도 달라지지 않았는지 물 어 보라고 합니다." 비계 덩어리는 새파랗게 질려서 서 있었다. 이윽고 안색이 새빨게지더니, 너무 나 분통이 치미는 지 숨이 막혀 입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말문이 터 졌 다. "그더러운놈, 그 프러시아의 썩은 송장한테 말하세요. 내가 절대로 말을 듣 지 않겠다구요, 아셨어요? 절대로 말을 듣지 않겠다구요." 뚱뚱한 여관 주인이 나갔다. 그러자 모두들 무슨 일이 있었는 지 말해 달라고 졸랐다. 처음에는 말 을 듣지 않았으나 곧 분노에 못 이겨서 그녀는 부르짖고 말 았다. "그놈이 무엇을 원했느냐고요? 그놈이 무엇을 바랐냐구요? 나하고 함께 자자 는 거예요." 그렇게 노골적인 말에도 아무도 충격을 받지 않았는데, 그들의 분노가 너 무 컸기 때문이었다. 코르뉘데는 맥주잔을 탁자 위에 꽝 놓다가 깨뜨렸다. 이 무지 막지한 군인에 대해서 비난의 아우성이 일어났다. 노기충천해서 마치 비 계 덩어 리가 당한는 수난의 일부를 각자에게 부담하라고난 한 것처럼 모두가 항거하기 위하여 일치단결했다.백작은 그놈들이 옛날의 야만족과도 같은 짓을 한다고 혐 오에 찬 한 마디를 했다. 특히 부인들은 진심으로 깊은 동정심을 비 계 덩어리에 게 보였다. 식사시간에 모습을 보이는 수녀들은 머리를 숙인 채 말 이 없었다. 그러나 당초의 분노가 가시자 모두들 저녁을 먹었다. 별로 말도 없이 생각 에 잠겨 있었다. 부인들은 일찍 물러갔다. 남자들은 담배를 피우면서 트럼프판을 벌였다. 거기 에는 포랑비씨도 초대 받았다. 프러시아 장교의 고집을 꺽을 수 있는 방법을 그 에게 교묘하게 물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트럼프장에만 정신이 팔 려서 남의 말은 듣지도 않았고 대답도 안했다. "노름이나 해야지. 자 노름이나 합시다." 하는 말만 연방 되풀이했다.침 뱉는 일도 잊고 있을 만큼 그는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래서 그의 가슴 속에서는 글 글 끓는 풍금소리가 계속 울려 나왔다. 씩씩거리는 그의 폐에서는 천식의 온갖 음계가 나왔다. 그것은 낮고 깊은 소리로부터 어린 수탉이 소리를 지 르느라고 짜내는 날카롭고 목쉰 소리에까지 다양했다. 마누라가 졸려서 못 견 디겠다고 부 르러 왔는데도 그는 방에 올라가기 싫다는 것이었다. 마누라는 혼 자 자러 가고 말았다. 마누라는 언제나 햇님과 더불어 일어나는 새벽파였고, 영감은 언제난 친 구들과 함께 밤을 새우려 드는 저녁파였기 때문이다. "레 드 푸르(계란을 탄 우 유)나 불에 올려놓아." 그는 소리를 지르고 다시 승 부에 열중했다. 그로부터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잘 시간이 되었다고 하면서 제각기 잠자리로 돌아갔다. 다음 날도 역시 막연한 희망과 더욱 강해진 출발에의 욕망과 이 지긋지긋한 여관에서 또 하루를 지내야 한다는 두려움을 안고 사람들은 꽤 일직 일어났다. 아! 말들은 마구간에 그대로 있었고 마부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따분해서 마차 주위를 맴돌았다. 조반 시간은 처량했다. 비계 덩어리를 향한 무엇인지 모를 쌀살한 공기가 감 돌았다. 밤 사이에 곰곰 생각한 끝에 그들의 판단에 수정이 가해졌던 것이다. 일 행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뜻밖의 희소식에 놀라게끔, 비밀리에 프러시아 장 교를 찾아가지 않았다는 데 대해서 사람들은 지금 이 창부에게 거의 원망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그보다도 더 간단한 일이 어디 있겠는 가? 더욱이 누가 알기라도 한단 말인가? 일행의 슬픔이 딱해서 왔노라고 장교 에게 말한다면 체면을 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런 여자에게 그런 일이 대 수로울 것이나 있 단 말인가! 그러나 아직은 아무도 이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아ㅆ. 오후에 모두들 지루해서 못견뎌 하는 것을 보고 백작이 마을 언저리로 산보나 가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난로가에 앉아 있는 편이 더 좋다는 코르뉘데와 교 회 나 신부의 집에서 일정을 보내는 수녀들을 빼놓고는 제각기 몸을 잘 감싸 고서 이 작은 집단은 밖으로 나섰다. 나날이 혹심해 가는 추위가 코와 귀를 에는 듯했다. 발이 하도 시려서 한 발 짝 옮겨 놓기도 고통스러웠다.들판이 보였다. 끝없이 휜눈에 덮인 들판은 소 름이 끼치도록 음산해보여 모두들 얼어붙은 마음과 조여드는 가슴을 안고 곧 돌아서 고 말았다. 부인들 넷이 앞장을 서고 세 남자들은 좀 떨어져서 뒤를 따랐다. 루와조는 자기네들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저 계집'이 언제까지나 자 기들을 이런 곳에 붙들어 둘 작정니가 하고 불쑥 말을 던졌다. 언제나 점 잖은 백작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희생은 어떤 여자에게라도 강요할 수 없는 일이니, 여자가 자진해서 해 주기ㄹ를 바랄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했다. 카레 라마동씨 는 만일에 프랑스군이, 자기들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디애프 쪽에서 역 습해 온다 면 필시 토오트에서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생각은 다른 두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 "걸어서 도망치는 것이 어떨까요?" 루와조가 말했다. 백작은 어개를 으쓱해 보였다. "이 눈 속에? 여자들을 데리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소? 그렇게 되면 곧 추격 당하고 10분도 못 가서 병정들에게 꼼작없이 붙잡혀 다시 끌려 오고 말 거요."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부인들은 옷차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는 있었으나 어쩐지 어색해서 자연스럽 지가 않았다. 길 저쪽에서 프러시아 장교가 불쑥 나타났다. 지평선을 그어 놓고 있는 흰 눈 위에 군복을 입은 날씬한 그의 키 큰 자태가 측면으로 떠올랐다. 그는 정성을 들여서 닦은 장화를 더럽히지 않으려는 군인들의 독특한 동작으 로 무릎 사이를 버리며 걷고 있었다. 부인들의 옆을 지나갈때에 그는 머리를 숙이고 인사했으나, 모두들 위엄을 지 키느라고 모자를 벗지 않은 남자들에 대해서는, 멸시하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루 와조가 모자를 벗어려는 몸짓을 잠깐 하기는 했다. 비게 덩어리는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결혼한 세 부인들은, 그 군인이 그 렇게도 무례하게 대할 수 있었던 창부와함께 있는 모습을 그에게 보인 것에 말 할 수 없는 모욕을 느꼈다. 그러자 그 장교의 풍채며 용모 등,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많은 장 교들을 알고 있으며 훌륭한 감식가로서 그들은 판단할 줄 아는 카레 라마동 부 인은, 그 장교가 제법 쓸만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가 프랑스 사람이 아닌 것 을 퍽 유감스럽게까지 여겼다. 그만하면 썩 멋있는 경기병 장교로서 틀림없 이 여자들을 모두 반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막상 여관에 돌아오고 보니 무엇을 해야 할 지 알수 없었다. 하찮은 일에 도 가시 돋힌 말이 오고 갔다. 저녁 식사는 침묵 속에서 이내 끝이 났다. 잠든 사이 에 시간이 경과해 주기나 바라고 제각기 잠자리로 올라갔다. 다음 날도 모두 지친 얼굴과 안타까운 심정으로 내려왔다. 부인들은 비계 덩 어리에게는 말도 건네지 않았다. 종이 울렸다. 세례식을 알리는 종소리었다. 뚱뚱한 창부에게는 이 보트의 농가 에서 기르고 있는 애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그애를 1년에 한 번도 잘 만나 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별로 생각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곧 어떤 아이가 세례를 받게 된다느 ㄴ생각이 그녀의 마음 속에 자기 애에 대한 갑작 스럽고도 뜨거운 애정을 불러 일으겼다.그녀는 세례식에 가보지 않고서는 견 딜 수가 없었 다. 비계 덩어리가 떠나자마자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의자 를 서로 가까이 했다.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기 때문이 었다. 루와조가 묘안을 내놓았다. 비계 덩어리 하나만 붙잡아 두고 다른 사람들은 출 발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장교에게 하자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포랑비씨가 다시 심부름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올라가기가 무섭게 다시 내 려 왔다. 인간의 본성을 잘 알고 잇는 장교는 그를 쫓아내고 말았던 것이다. 자 기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한 그는 이 사람들을 모두 다 붙잡아 두겠다는 것이 었다. 그때에 루와조 부인의 상스러운 성미가 터져나오고야 말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여기서 늙어 죽을 수야 없잖아요. 어느 사내하고난 그 짓을 하는 것이 그 갈보계집의 직업이고 보면 이 남자는 좋고 저 남자는 싫다는 등 가릴 권리가 어디 잇어요. 생각해 보세요, 글세 루앙에서는 심지어 마부하고까지 도 닥치는 대로 그 짓을 했지 뭡니까! 정말이에요, 부인, 군청의 마부란 말씀 이 에요! 그 자가 우리 집에서 술을 사기 때문에 잘 알지요. 그런데 우리들을 궁지 에서 빼내줘야 하는 이 마당에서는 얌저능 빼고 있단 말이에요. 그 갈보 년이!... 나는 그 장교가 퍽 점잖다고 생각해요. 아마 오랫동안 여자가 아쉬웠을 거에요. 틀림없이 우리 세 사람이 더 마음에 있었겠지요. 그런데도 우리들을 다 젖혀 놓 고 그 계집으로 만족하겠다느 것이죠. 그사람은 남편이 있는 우리 부인을 존경 하고 있어요. 그사람이 지배라라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이, '내가 하고 싶다'하면 그만이지요. 병정들을 동원해서라도 우리를 겁탈할 수 있지 뭡 니까." 두 부인은 몸서리쳤다. 예쁜 카레 라마동부인의 두 눈은 번쩍 빛났다. 그 리고 벌써 장교에게 붙잡히기나 한 것처럼 얼굴빛이 약간 창백해졌다. 따로 떨어져서 이야기하고 있던 남자들이 가까이 왔다. 루와조는 노기를 띤 어조로 그 더러운 계집의 손발을 묶어서 적에게 내 주자는 것이었다. 그러 나 삼 대에 걸쳐서 대사직을 지내온 가문의 출신이며 외교관적인 기질이 풍부 한 백작 은 수단방법을 중시하는 쪽이었다. "그 여자의 마음을 돌리도록 해야지요." 하고 그느 말했다. 그래서 모두들 모의를 했다. 여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제각기 의견이 속출해서 이야 기 는 누구에게나 일반적인 문제 (성에 관한 문제) 로 번져갔다. 분위기는 더 없이 합당했다. 부인들은 지국히 음탕한 이야기를 할 때도 슬쩍 돌리는 말과 교묘하 고 매력적인 표현을 찾아냈다. 딴 사람이 들으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분간 할 수 없을 만큼 말씨에 조심성을 지키고 있었다. 사교계의 여성들이 누구나 뒤 집어 쓰고있는 정숙이라는 엷은 베일은 표면만을 가리고 있는 법이어 서 실상 그 녀들은 이렇게 잡스러운 이야기를 하면서 흥에 겨워 있는 것이었 다. 또한 그녀 들은 남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탐욕스런 요리사와 같은 감정으 로, 욕정을 주물럭 거리고, 이제야 핵심에 들어섰다고 느끼며 미친 듯이 좋아하 는 것이다 . 마지막에는 하도 이야기가 흥겨워서 그들은 즐거운 기분을 되찾았다. 백작 은 이러한 농담이 지나치게 노골적이라는 생각을 했으나 표현이 너무 교묘했 기 때 문에 미소짓지 않을 수 없엇다. 루와조는 더 지독한 상소리를 했으나 아 무도 기 분을 상하지는 않았다. 루와조의 아내가, "그 짓이 그 갈보년의 직업 인데, 무엇 때문에 이 사내는 좋고 저 사내는 싫다느 거예요?" 라고 했던 노골 적인 표현이 모두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귀여운 카레 라마동 부 인은 자기가 비 계 덩어리였더라면 다른 남자보다는 도리어 이 프러시아 장 교를 택했으리라는 생각까지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모두들 마치 포위하고 있는 요새를 공략할 것같이 오랫동안 전투준비를 했 다. 각자가 맡은 역할, 들고 나설 논법, 실행해야 할 책략 등에 합의를 보았다. 이 살아있는 요새가 꼼작없이 그품 안에 적을 안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하기 위해 서 작전 계획, 전략, 기습을 결정했다. 그러나 코르뉘데는 시종일관 떨어져 이러한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다들 너무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계 덩어리가 들어오는 것도 알지 못하였 다. 그러나 백작이 "쉿"하고 가볍게 주의를 주어서 모두들 고개를 들었다. 비 계 덩어리가 옆애 와 있었다. 황금히 입을 다물었으나 어쩐지 어색해서 곧 그녀에 게말을 걸 수도 없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살롱의위선에 능숙한 백 작 부인이 "세례식은 재미 있었나요?" 하고 물었다. 아직도 감동이 가시지 않은 창부는 교회에 나온 사람들의 얼굴, 태도등 심 지 어는 교회의 생김까지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덧붙였다. "가끔 기도를 드리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예요." 비계 덩어리의 신뢰심을 확고히 해주어 자기네의권유를 그녀가 쉽게 따르게 하기 위해 점심 식사를 할 때까지 부인들은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식탁에 앉자마자 행동은 개시되었다. 처음에는 희생정신에 관해선 막연한 이 야기가 오고갔다. 옛날에 당치도않았지만, 류크레스와 섹스튜스, 그리고 적 장들 을 모조리 자기의 침실로 끌어들여서 노예와 같이 만들어 버린 클레오파 트라를 인용했다. 그리고는 이 무식한 백만장자들의 상상에서 우러나온 황당 무계한 이 야기가 전개되었다. 로마의 여성들이 하니발과 그의 장수들, 그리고 수많은 용병 들을 그녀들의 품 안에서 잠들게 하기 위하여 카푸로 갔다는 것 이었다. 자기들 의 몸을 싸움터로 하고,승리의 수단과 무기로 삼아서 정복자를 막아낸 모든 여 성과 흉악하고 가증한 적을 영웅적인 애무로써 굴복시키고,복 수와 충성을 위해 서 정조를 희생시킨 모든 여성을 인용했다. 자기의 몸에 일부러 무서운 전염병을 접종시켜서 나폴레옹에게 옮겨 주려고 했으나, 나폴레옹은 이 치명적인 밀회의 순간에 갑자기 양기가 빠져서 기적적 으 로 위기를 모면했다는 영국의 명문출신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애매한 표 현으로 나왔다. 이 모든 사실을 예의와 절도에 벗어남이 없이 이야기하기 는 했 으나 경쟁심을 북돋기 위해서 이따금 의식적으로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마침내 이 세상에서 여자가 해야 할 유일한 역할은 끊임없이 자기몸을 희생해 서, 졸병들의 변덕스러운 욕정에 언제나 몸을 내맡기는 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두 수녀는 깊은 사색에 잠겨 있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해던 것 같았 고, 비계 덩어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날 오후 내내 사람들은 비계 덩어리를 잘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 러 나 예전처럼 그녀를, '마담'이라고 부르지 않고 다만, '마드모아젤'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아무도 뚜렷한 이유는 모르고 있었지만 이 여자가 터무니 없이 받고 있는 존대의 지위로부터 이 여자를 끌어내려서 그녀의 수치스러운 신분을 자각 시키고자 하는 것 같았다. 스프가 나왔을 땡에 포랑비씨가 나타나서 그 전날 하던 말을 되풀이했다. "프러시아 장교가 아직도 엘리자베트 루세양의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나 물어 보라고 합니다." 비계 덩어리는 쌀쌀하게 대답했다. "변하지 않았어요." 저녁 식사 때에는 공동작전이 힘을 잃었다. 루와조는 서투른 말을 세 번이 나 하고 말았고 제각기 새로운 전레를 찾아 내려고 고심했으나 아무것도 찾아 내지 못했다. 그런데 백작 부인이 아마 미리 생각한 바는 아니고 다만 종교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고 싶은 막연한 생각에서였는지. 성자들의 생애의 가장 위 대한 행적 에 대해서 나이 많은 편인 수녀에게 물엇다. 수녀는 많은 성자들이 우리의 눈에 는 죄악으로 보이는 행위를 했으나 그들이 신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 그러한 일을 범했기 때문에 교회는 이러한 대죄를 무난히 용서 했다느 ㄴ말을 했 다. 그것은 강력한 논거였다. 백작 부인은 이내 그것을 이용 했다. 이 늙은 수녀 는 묵약에서였건, 혹은 제의를 걸친 사람이면 누구나가 곧잘 베푸는 가면적인 자비심에서였건, 또는 단순히 전화위복이나 구원의 결 과를 가져오는 어리석음과 우둔함의 결과에서였건간에 이 음모에 놀라운 뒷바침 의 역할을 한 것이었다. 수 줍어하는 줄로만 알았던 이 수녀가 대담하고도 수 다스럽고 억센 일면을 보여 주 엇다. 그녀는 얌심문제로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 녀의 교리는 철석같이 굳었고 신 앙은 주저할 줄 몰랐다. 그녀의 얌심에는 추호 의의혹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늘에서 내린 명령이라면 당장 생쯤은 지극히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녀 의 의견으로는 ㄸ하는 바가 훌륭할 경우에는 어떠한 일도 주님의 뜻을 거역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백작 부인은 이 뜻밖의 공모자의 거룩한 권위를 이 용하여 그녀로 하여금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하는 격언을 알기 쉽게 풀이하고자 했다. 백작 부인은 수녀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수녀님은 동기만 순수하다면 하나님이 온갖 수단과 그 행위를 용납 해 주신다고 생각하시나요?:" "누가 그것을 의심할 수 있을까요, 부인! 그 자체는 비난받을 행위일지라도 그 행위를 부추긴 사상에 의해서 그것은 흔히 가치있는 일이 되는 법입니다. " 그녀 들은 이처럼 신의 뜻을 통찰하고 신의 판결을 예측하며, 사실인즉 신과는 아 무런 관련도 없는 일에 대해서 신을 결부시키면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이 모든 것은, 신중하고 교묘했으며 은밀했다. 그런데 수녀모를 쓰고 있는 이 성녀의 한 마디가 창부의 분연한 항거에 조금씩 금을 가게 하고 있었다. 이야 기 가 약간 방향이 바ㄲ어 묵주를 드리운 이 여인이 자기네 수도단체, 수녀원장, 바 로 자기 자신, 그리고 옆에 있는 귀여운 수녀 상 니세포르가 살고 있는 수 도원 에 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자기네 두 사람으 ㄴ천연두에 걸린 수백 명 의 병사 들을 수용하고 잇는 병원에서 그들은 간호하기 위하여 르 아브르로 불 려 간다느 것이엇다. 그녀는 이 불쌍한 사람들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그들의 병에 관해서 상세한 설명을 했다. 프러시아 장교의 변덕 때문에 중도에서 이 렇게 붙들려 있 는 동안에도 아마 자기네들이 구해낼 수도 있는 수많은 프랑 스병사들이 죽어가 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군인들을 간호하는 것이 이 수녀의 임무였다.그 녀는 크리미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도 갔었다. 자기가 겪은 싸움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북소리와 나팔소리를 들으며 전 선을 쫓아 전투의 와중에 서 부상병을 거두어 들이고, 규율없는 떼거리 군인 들을 그들의 대자보다도 더 훌륭하게 말 한 마디로 다룰 수 있는 수녀들 중 의 한 사람이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갑자기 드러내 보였다. 수없이 구멍이 파 여서 얼룩 곰보인 정말 훌륭한 수 녀 랑 탕 프랑의 얼굴은 전쟁의 황폐를 상징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좌중에서는 아무도 감히 입을 여는 사람이 없을 만큼 효 과는 훌륭했다. 식사를 끝마치고서 사람들은 황급히 자기들 방으로 올라갔다. 다음 날은 모 두 들 늦도로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점심 식사는 퍽 조용했다. 그 전날 뿌린 씨가 싹이 터서 열매를 맺을 여유 를 주자는 것이다. 백작 부인이 오후에는 산보나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자. 미리 합의가 된 일 리라, 백작은 비계 덩어리의 팔을 붙잡고 다른 사람들보다 뒤처져서 이 여자 와 함께 걸었다. 백작은 비계 덩어리에게 허물없고, 딸을 대하는 듯한 그리고 의젓한 사내들 이 창부에게 쓰는 다소 얕잡는 어조로 이야기를 했다. 백작은 그녀를, "여봐요 "하고 불렀다. 그는 자기의 사회적 지위와 말할 나위없이 고귀한 신분을 잊지 않고서 이 여자를 오연한 태도로 다루었다.곧 그는 문제의 핵심을 찔렀다. "그래, 지금까지의 생활에서는 수없이 남자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었으면서도 이번만은 싫다고 하니, 프러시아군이 패망했을때에 그대 자신이나 우리들을 모 면할 수 없는 위험 가운데 버려두는 편이 좋다는 말인가?" 비계 덩어리는 아 무 대답이 없었다. 백작은 감언이설로 유혹하고 이치와 감정에 호소했다. 그는 필요에 따라서 는 은근히 비위를 맞추기도 하고 마침내는 애교를 피우면서도 자신이, '백작 나으 리'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 여자가 자기들을 위해서 하게 될 봉사 를 찬 양하고 그 고마움이 어떻다는 거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는 별안간에 즐 거운 듯 그녀에게 아주 친근한 말씨로 말했다. "여봐요, 그 장교가 말야, 자기 나라에서는 볼 수도 없는 예쁜 여자를 맛봤다 고 자랑할 거 아냐?" 비계 덩어리느 아무 대답도 없이 일해에 합류했다. 여관에 돌아오는 길로 그녀는 방에 올라가더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 들 의 불안으 ㄴ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할 작정인가? 끝내 말을 듣지 않 는다 면 무슨 낭패인가. 저녁 식사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모두들 그녀를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그러자 포랑비씨가 들어와서 마드모아젤 루세는 몸이 편찮으니 먼저 식사를 하라고 알 렸다. 누구나 귀가 번쩍 뜨였다. 백작이 여관 주인에게 다가가서 아주 낮은 목소 리로 물었다. "잘 되어 가요?" "그렇습니다." 체면상 일행에게는 아무 말고 하지 않았으나 백작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끄덕 해 보였다. 곧 큰 안도의 한숨이 모두의 가슴에서 터져나오고 얼굴에는 생기 가 돌았다. 루와조가 소리쳤다. "제기랄, 이 집에 샴페인이 있다면 내가 한턱 낸다." 여관 주인이 샴페인 네 병을 손에 들고 들어왔을 때 루와조 부인은 가슴이 아 팠다. 누구나가 별안간에 수다스러워지고 떠들썩해졌다. 그들의 마음은 잡스러운 기쁨에 충만해 있었다. 백작은 카레 라마도 부인의 매력에 끌리고 있는 것 같았 으며, 공업가는 백작 부인의 비위를 맞추고 있엇다. 이야기는 활기를 띠고 흥겨 웠으며 표현은 풍부 했다. 별안간 루와조가 얼굴에 불안한 빛을 띠더니 팔을 들며 소리쳤다. "조용히" 모두들 깜짝 놀라고 이내 겁에 질려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루와조는 손 짓 으로"쉬!"하며 귀를 기울이고 천장을 쳐다보도니 평상시의 목소리로 돌아 가서 말했다. "안심들 하세요.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가 했으나 곧 미소들을 띄웠다. 15분쯤 지나자 그는 또 한 번 똑같은 익살을 부렸다. 그리고는 저녁내 몇 번 이나 그 짓을 되풀이했다. 루와조는, 외판원들 사이에서 쓰는, 두 가지 의 미를 가진 낱말을 사용하여 위에 있는 그 누군가에게 질문도 하고 조언도 하 는 식의 익살을 부리기도 했다. 그는 때때로 슬픈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 숨을 내쉬고 는, "불쌍한 계집" 하기도 했고, 때로는 분격한 표정으로 이를 악 물면서, "거지 같은 프러시아 놈아, 꺼져라!"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이따금, 사람들이 그일을 잊을 만하면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몇 차례나 "그만! 그만!" 하고 소리질렀다. 그 리고는 혼자말이나 하듯이, "다시 그 계집을 만날 수 있도 록 그 망할 놈이 그녀 를 그 짓으로 죽이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것이었다. 그의 농담은 꽤나 역겨운 것이었니만 모두들 듣고 좋아했으며 아무도 기분을 상한 사람은 없었다. 분개의 감정도 다른 감정이나 마찬가지로 분위기에 달려 있 기 나름인데. 그들 주변에서 서서히 조성된 분위기는, 음란한 생각으로 꽉 차 있 었기 때문이다. 후식이 나왔을때는 부인들까지도 조심스럽게 재치있는 암시들은 했다. 눈들 은 광채를 띠었으며 마구 술들을 마셧다. 트럼프 패를 던지는 데 있어서까지 도 존 대한 위엄을 지키는 백작이, 북극지방의 겨울나기가 끝나서 이윽고 남쪽 으로 길 이 트이는 것을 목도하게 된 조난자들의 기쁨과 자기들의 형편을 그럴 듯하게 비 교하기도 했다. 신바람이 난 루와조가 샴페인 술잔을 들고 일어났다. "우리의 해방을 위해 축배를 듭시다!" 모두 다 일어서서 그에게 갈채를 보냈다. 두 수녀까지도 부인들의 권에 못 이 겨서 한 번도 맛본 일이 없는 거품이 이는 술에 입술을 적셨다. 그녀들은 이것 이 레몬 사이다와 비슷하지만 더 미묘한 맛이 있다고 했다. 루와조가 현 상황을 요약하듯 말했다. "카드리유(4인조 무용)곡이라도 한 곡 쳤으면 좋겠는데 피아노가 없어서 유 감 입니다." 코르뉘데는 말 한 마디, 몸짓 하나 하지 않았다. 그는 퍽 무거운 상념에 잠겨 있는 듯했다. 이따금 긴 수염을 더욱 늘이려는 듯이 세게 잡아당기기도했다. 자 정무렵 모두 자리를 뜨게 되자 루와조가 비틀거리며 쿠르누데의 배를 별안가에 툭 치면서 횡설수설 말을 걸엇다. "오늘 저녁에는 재미가 없으신 모양이군요, 아무 말이 없으시니 말이요, 동 지?" 그러자 코르뉘데는 고개를 번쩍 들고 사납게 번쩍이는 눈으로 좌중을 ㅎ어 보 더니 부르짖었다. "여러분들은 모두 오늘 저녁에 치욕적인 짓을 했소!" 그는 일어서서 문으로 나 가섣니 다시 한 번 "치욕적인 짓을 !" 하는 말은 되 풀이하고 나가 버렷다. 그 당장에는 모두들 등골이 싸늘했다. 루와조는 어리둥절해서 멍하니 한참 서 있었으나 곧 침착성을 되찾고는 갑자기 요절할 지경으로 웃어젖히며 되뇌었 다. "그림의 떡이란 말이지, 그림의 떡!" 모두들 무슨 말인가 의아해했는데 그가 '복도의 비밀'을 알려 주엇다. 그러 자 다시 말할 수 없이 흥겨운 분위기로 바ㄲ었다. 부인들은 미칠 듯이 좋아했 다. 백 작과 카레 라마동씨는 웃음이 북받쳐서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정말로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설마! 정말이요? 그사람이 그랬다고.." "내 눈으로 봤다니까요." "그래 그여자가 싫다고 했단 말이지..." "옆 방의 프러시아 장교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럴 리가?" "틀림없어요." 백작은 웃음이 나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공업가는 배를 움켜쥐었다. 루와조 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제 아셨겠니담, 오늘 저녁 그자는 이 계집에 관한 일이 영 언짢았단 말씀이 지요." 세 남자들은 또 다시 뱃살이 아프고 숨이 막히도록 웃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들은 곧 헤어졌다. 심술궂은 루와조 부인은 잠자리에 들어가면서'새침데 기'인 카레 라마도 부인이 저녁개 씁쓸하게 억지로 웃고 있더라는 말을 남편 에게 했 다. "그런 여자들은 말예요, 프랑스 사람이건, 프러시아 놈이건 군복을 입은 남 자 라면 다 마찬가지로 좋아하지 뭐예요. 기막힌 일이지." 밤새도록 복도의 어두 움 속에서는, 숨소리 같기도 하고, 맨발로 살금살금 걷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렴풋이 삐걱이는 소리 같기도 한 분간하기 어려운 가벼운 소리가 들려왔다. 문지방 사이로 오래도록 가느다란 불빛이 새어나왔던 것으로 보면 다들 늦게 까지 잠들지 않았던 것은 분명했다. 샴페인을 마신 탓이었을 것 이다. 그 술을 마시면 잠이 안 온다고들 하니까. 다음 날은 맑은 겨울날의 햇빛을 받고 백설이 눈부시게 빛났다. 드디어 말을 매어 놓은 마차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장미빛 눈 동다 가운데 까만 점이 박힌 비둘기 떼가, 탐스러운 날개털을 퍼덕이며 여 섯 필 의 말 다리 사이를 이리저리 의젓하게 돌아다니면서 김이 나는 말똥을 파 헤치고 먹이를 찾고 있었다. 이젠 비계 덩어리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나타났다. 비계 덩어리는 거북해 하고 부끄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일행이 있는 곳 을 로 조심스럽게 걸어왔다. 다들 그녀가 오는 것을 못 본 것처럼 일제히 획 뒤돌 아서 버렸다. 백작은 위엄을 보이며 아내의 팔을 붙잡고 불결한 접촉을 피해 몸 을 뺐다. 뚱뚱한 창부는 당황해서 우뚝 서고 말았다. 그러나 용기를 다해 공업가의 아 내에게 다가서며 인사말을 중얼거렸다. "안녕하십니까, 부인." 공업가의 부인은 그 때문에 자신의 부덕에 흠이라도 간 듯한 눈짓을 하며 고 개만을 끄덕하는 식으로 불손한 답례를했다. 모두들 분주한 체하고 마치 비 계 덩어리가 차마 속에 전염병이나 담고 온 것처럼 앞을 다투어 마차에 올랐 다. 비 게 덩어리는 맨나중에 홀로 마차에 오르더니 처음 길을 오는 동안에 차지했던 자리로 가서 말없이 앉았다. 다들 이 여자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는 태도였다. 그런데 루와조 부 인은 멀리서 화난 둣한 눈으로 이 여자를 지켜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남 편에 게 소근거렸ㄷ. "저 계집 옆에 앉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육중한 차체가 흔들리고 여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비계 덩어리느 감히 시선을 들지도 못했다. 그 와 동시에 이 여자는 자리를 같이하고 있는 모든 인간들에 대한 분노와그들의 위선에 의해 던져진 프러시아놈의 품 안에서, 그놈의 키스로 몸을 더럽힌 데 대 해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곧 백작 부인이 카레 라마동 부인을 돌아보면서 이 견디기 어려운 침 묵을 깨뜨렸다. "애트랠 부인을 아시지요?" "그럼요, 저와 친구예요." "정말 매력있는 여성이지요!" "황홀할 정도예요! 본래 잘 생긴 데다가 퍽 교양이 높고 뛰어난 예술가예요. 누구나 도취할 만큼 노래도 잘 부르고, 그럼에도 나무랄데 없이 정통하지요." 공 업가는 백작과 이야기하고 있엇다. 유리창이 덜그렁거리는 가운데 이따금 이런 말이 들려왓다. '배당, 기한, 차액, 기한부' 잘 닦지도 않은 테이블 위에서 5년동안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카드놀이에 익숙 해진 루와조는 아내와 둘이서 베지그 놀이를 하고 있었다. 두 수녀는 허리띠에 늘이고 있던 묵주를 집어들고 둘이 함께 십자를 그었 다. 그리고는 별안간 입술들을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마치 기도드리기 경쟁이나 하듯 이 점점 더 급하게 알아들을 수도 없는말을 중얼거렸다. 이따금 성패에 입을 맞 추고느 또 다시 십자를 긋고서 빠르고도 끊임없는 중얼거림을 다시 시작하는 것 이었다. 코르늬데는 꼼짝 않고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떠나온 지 세 시간쯤 지났을 무렵에 루와조는 트럼프장을 걷어치우고 말했다. "배고프군." 그러자 그의 아내는 끈으로 묶은 꾸러미를 풀어서 송아지 냉육 한덩이를 꺼냈 다. 그것을 적다하게 얇고 빳빳한 조각으로 베어서 둘이 함께먹기 시작했다. "우리도 먹었으면 좋겟어요." 하고 백작부인이 말했다. 모두들 동의했다. 백작 부인은 두 집 내외의 몫으로 준비해온 음식물을 풀 어 놓았다. 음식물은 토끼고기 파이가 안에 들어 있다는 거을 표시하기 위하 여 뚜 껑에 사기로 만든 토끼를 붙여놓은 길쭉하게 생긴 단지 안에 담겨 있었 다. 여러 갈래로 하얀 기름이 흐르고 있는 먹음직한 돼지고기가 잘 다져 놓은 다른 고기 와 석여 있었다. 두 수녀는 마늘 냄새를 풍기는 동그란 소시지 도막을 펴놓았다. 코르뉘데 는 펑퍼짐한 외투의 큼직한 양쪽 호주머니에 두 손을 한꺼번에 쑥 집어놓더니 한쪽 에서는 삶은 계란 네 개를 또 한쪽에서는 빵 한 조각을 꺼냈다. 그는 껍 질을 벗 겨서 발 밑의 밀짚 속에 던져 버리고 그대로 씹어 먹기 시작했다. 텁 수룩한 수 염 위에 반짝이는 노른자위 부스러기가 떨어져서 수염 위에 반짝이는 노른 자위 부스러기가 떨어져서 수염 속에 박힌 것 같았다. 비게 덩어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당황스럽고 조급해서 아무것도 준비할 겨 를이 없었다. 그녀는 분노에 숨이 막히고 화가 치밀어서 태연하게 먹고있는 이 들 모두를 노려보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에 먼저 온몸이 떨렸다. 입술 까지 밀려나온 욕설을 퍼부어 그들이 한 행위를 고발하려고 했으나 하도 분이 치밀어 서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누구 하나 그녀를 쳐다보거나 생각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를 희생시키 고 나서, 이젠 더럽고 쓸모없는 물건처럼 그녀를 내던져 버린 이 점잖은 무 리들의 멸시 속에 자기 자신이 빠져 있음을 느꼈다. 그러자, 이 자들이 굶주린 이리떼같 이 먹어 치워버린 맛있는 음식들이 그득히 담겨 있던 커다란 자기의 바구니, 젤 리를 바른 번지르르한 두 마리의 닭, 파이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세 게 잡아당겨 서 툭 끊어진 끈처럼 갑자기 분노가 사라지더니 곧 울음이 터져 나올것만 같았 다. 기를 쓰며 온몸에 힘을 주어 어린애처럼 오열을삼켰으나 눈물이 솟아나와 눈시울을 적시더니 양쪽 뺨 위로 천천히 흘러 내렸다. 이윽 고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와서, 바위에서 스며나오는 물방울처럼 흘 러나왔고 불룩한 저가슴 사이로 뚝뚝 떨어ㅈ다. 아무도 자기를 바라보지 않기 만을 바라며, 그녀는 굳어버 린 창백한 얼굴로 한 곳만을 노려보고 똑바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백작 부인이 알아차리고 손짓으로 남편에게 알렸다. 그는, '그게 어 떻 단 말야, 내 잘못은 아냐.'라고나 하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 올렸다. 루와조 부인 은 소리없이 승리의 미소를 띄우고 중얼거렸다. "부끄러워서 우는 거야." 계란을 다 먹어치운 코르뉘데는 앞자리의 의자 밑으로 기다란 다리를 뻗더니 몸을 뒤로 ㅈ혀 팔짜을 낀 채, 재미나는 희극이라도 금방 보고난 듯이 미소 를 띄우고서 마르세예에즈(프랑스 국가)를 휘라람으로 불기 시작했다. 다들 얼굴을 찌푸렸다. 이 민중적인 노래가 분명히 옆 사람들의 마음에는 들 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신경질이 나고 울화통이 터져서, 서투른 풍금소 리를 들은 개들처럼 금방 짖을 것 같은 표정들을 하고 잇었다. 코르뉘데는 이 러한 기 미를 알아챘으나 멈추지 않았다. 그는 드문드문 가사를 흥얼거리기까지 도 했다. 조국에 바친 성스러운 사랑이여, 이끌라, 떠받치라, 복수의 우리 팔을, 자유여! 그리운 자유여! 그대를 지키는 자와 더불어 싸우라 눈이 다져졌기 때문에 마차는 더욱 빨리 달렸다. 디에프에 닿을 때까지 계 속 된 음산하고 긴 여행 동안, 밤이 오고 마차 안이 짙은 어둠에 싸였을 때도, 그는 악착스럽게 이 복수심에 차고 단조로운 휘파람을 내리 불고 있었다. 그 의 휘파 람 소리는, 지치고 약이 오른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로라도 이 노래의 첫머리에 서 끝까지 좇아갈 수밖에 없게 하였으면 각 소절마다의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비계 덩어리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이따금 억누르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흐 느낌이 노랫가락과 노랫가락 사이에서 들려오곤 했다. 작품해설 양파 벗기기 이 비계 덩어리에 나오는 인물들은 우연히 한 마차 안에서 만났다고 보기는 어려울 만큼 다양한 외양들을 가졌다. 애국심으로 치장한 정치가와 부유한 상 인 에다 자부심에 가득 찬 귀족이 있고 정숙함이 넘쳐 흐르는 숙녀와 거룩함의 후 광을 둘러쓴 수녀가 있다. 그런가 하면 그 한 구석에는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는 싸구려 창녀도 있다. 이 어루리지 않는 일행을 사실적인 수법을 쓰면서도 자연스럽게 한 자리에 불 러 모으는데 작가는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을 활용한다. 하지만 다시 그들을 자 연스럽게 어울리게 하는 여러 설정과 장치는 치밀하면서도 정교하다. 거기 다가 그들을 감사고 있는 상식적 가치들을 한 꺼풀 한 꺼풀씩 벗겨내 그 안에 감추어 진 본성을 드러내는 수법은 이미 절정에 이른 작가의 기량을 유감없이 보여준 다. 우화인지 실화인지 모르지만 원숭이를 약오르게 하는 데는 양파를 주는 것고 한 방법이 된다고 한다. 껍질 자체가 바로 그 식물을 재배하는 목적임을 모르 는 원숭이는 매워 눈물을 흘리면서도 한꺼풀 한꺼풀 양파의 껍질을 벗겨나간 다. 그 러다가 끝내 그 안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면 맹렬하게 성을 내게 된다는 것이다. 소년시절의 끄트러미쯤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바로 그 원숭이롸 흡 사한 느낌을 받았다. 인간들이 둘러쓰고 있는 그럴 듯한 껍질 안에 들어있는 진 실이 고작 도덕적 나약함과 위선과 이기뿐이라는 게 어찌 그리도 서운하 던지. 그 껍질을 냉정하게 벗겨가는 작가의 자연주의적 태도도 그때는 잔인함을로만 느껴졌다. 애국심과민족주의가 다 가리지 못하는 욕정과 이기, 재산과 신분의 자부심 은 일시적인 배고픔에도 무력하기 그지 없었고 교양과 예절은 한낱 가면이었 다. 정 숙은 천박한 성적 호기심을 감추는 기술이었으며, 신 앞에서의 경건한 서원도 속세의 상식적인 인정이 거래 수준에조차 미치지 못했다. 그게 우리 인간성의 진실이라더라도 너무 끔찍한 진실이었고 구 추구는 너무 잔인했다. 굳이 위로를 찾자면 그것은 오히려 비계 덩어리라고 불리우는 창녀 쪽에서이 다. 그녀의 소박한 인정과 애국심, 그지없는 자기희생은 어둠속에 있는 한 줄기 빛처럼 우리 인간성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미덕들은 본 능적이거나 무지의 결과에 가까웠고, 설령 그것들이 진정성을 갖추었다 하 더라 도 젊은 내게는 하필이면 가장 천박하고 추악한 외양 속에다 그것들은 담 은 작 가의 악의가 혐오스러웠다. 작가 모파상은 이 작품 외에도 여러 곳에서 우리가 소중하게 품어온 가치의 껍질들을 무참하게 까발리고 짓뭉겠다. 여인들만 하더라도 그들이 가질 수 있 었 던 아름다운 이름치고 그를 거쳐 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 아내 연인 숙녀 영양 같은 세속의 이름들은 물론 수녀처럼 성스러움의 너울 아래 있는 이 름도 용서받지 못했다. 세계와인생을 이토록 가혹하게 해석한 자는 고독 속에 미쳐 죽어도 싸다- 그게 작가 모파상에 대한 젊은 날의 내 악담이었 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인간성의 진실과그것들이 빚어낸 우리 삶의 어두 은 진상을 밝게 꿰뚫어본 것은 오히려 그였고 그의 불행한 죽음도 세계와 인 생에 품었던 악의에 대한 응보가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다 맞게 된 순사로 느 껴질 때 가있다. 나도 어느덧 아름다움의 공허함과 아울러 진실의 무게를 알게 된 나이 에 이른 것일까, 아니면 세월과 함께 닳아빠지고 삭아 일찍이 세계와 인생을 향 해 품었던 순수한 환상과 사랑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일까. 이혼한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 감화를 많이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 모파상이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한 것은 보불 전재이 후가 된다. 법률공부를 하던 스무 살 때 전쟁이 발발하자 모파상은 다니던 학 교 를 그만두고 자원입대해 끔찍한 살륙의 현장을 체험한다. 그 뒤 심한 우울 증에 사로잡힌 그는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플로 베로 밑 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플러베 르의 소개 로 졸라를 알게 되고 졸라가 주축이 돼 엮은 단편집 '메당야화'에 작 품을 수록하 게 된다. 이 작품을 통해 촉망받는 문인으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진 그는 단편 집 '피피양' '메종 텔리에'와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을 연달 아 발표하여 프랑스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그러나 20대부터 앓 아온 신경질환은 모파상 의 생활을 끊임없이 위협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 하는 인물들 중 성격파탄자, 염세주의자 등 이상성격자들이 많은 것도 작가의 이같은 병력과 무관하지 않다. 줄기차게 써대는 데서 오는 피로와 문란한 여자 관계 등으로 병세가 악화된 그 는 마흔 두 살 되던 해에 자신의 목을 베어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 파리 근 교 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초승달 노사 지음 이욱연 옮김 1 그렇다. 나는 또 초승달을 본다. 한기를 띤 희붐한 조각달을 본게 몇 번인 가. 지금과 같은 이런 달을. 조각달은 볼 때마다 늘 다른 느낌과 다른 모습을 하 고 있다. 앉아서 초승달을 볼 때마다 내 기억 속의 푸르른 구름에 걸려 있곤 한다. 잠들려는 ㄲ을 깨우는 저녁바람처럼 나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2 처음으로 초승달을 보았을 때, 한기를 머금은 초승달은 무척 차가워 보였다. 내 기억 속의 첫 초승달을 쓰라린 것이었다. 힘없고 희붐한 달빛이 내 눈물어 린 얼굴을 비추었다. 그때 나는 짧은 빨간 솜저고리를 입은 일곱 살자리 여 자아이 였다. 어머니가 기워준 작은 모자를 쓰고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남색천 에 자잘 한 꽃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조그만 집 문간에 기대어 초승달을 바라 보앗다. 그 대 집안은 약냄새와 담배냄새, 어머니의 눈물과 아버지의 병으로 가 득했다. 나는 홀로 외롭게 계단에 앉아 초승달을 바라보곤 했다. 나도 집안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들 아버지의 병을 입에 올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엇보 다 내 자신이 비참하게 여겨졌다. 춥고, 배가 고팠다. 아무도 나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초승달이 질때까지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 는 끝내 울음소리에 가려졌다. 아버지의 신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아버지 얼굴에는 이미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 나는 그 하얀 천을 들추고 아 버지를 보고 싶었지만 무 서워서 그러지 못했다. 아버지는 조그만 방을 다 차 지하고 누웠다. 어머니는 휜 옷을 입었고 , 내 빨간 저고리 위에도 옷깃 쪽을 박지 않은 흰 두루마기가 ㅅ워 졌다. 그 옷자락의 흰 실밥을 자꾸 뜯던 일이 기억난다. 다들 바쁘게 움직였다. 시꿀벅적하고, 몹시 울었지만, 별로 할 일은 없었다. 떠들 일도 없는 것 같았다. 얇은 널빤지로 짠 관 속에 아버지를 넣었다. 관은 사방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 었다. 구런 뒤 대여섯 명이 메고 갔다. 어머니와 나는 뒤에서 울었다. 나는 지금 도 아버지를 기억하고, 그 나무관도 기억한다. 그 관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마감 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지면 그 관을 열어야만 아버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관은 땅 속에 깊이깊이 묻혀 있다. 성 밖 어디에 묻혔 는지 나는 안다. 그러나 지상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아마도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다. 3 어머니와 나는 계속 흰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다시 초승달을 보았다. 추운 날 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성 밖에 있는 아버지묘에 갔다. 그때 어머니는 얇 은 종이를 한 묶음 쥐고 갔다. 그날따라 어머니는 각별히 나에게 잘해주었고, 내 가 걷기 힘들어 하면 업어주었고, 성문 어귀에는 군밤도 사주었다. 날씨가 어찌 나 추웠던지 밤만 따끈할 뿐 모든 것이 다 차가웠다. 먹기가 아까워 밤으로 손 을 덥혔다. 그날 얼마나 많이 걸었는지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꽤 많이 걸은 성싶 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던 날은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는 지 그렇게 멀게 느껴지 지 않았엇다. 그런데 어머니와 단둘이, 그것도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 고 나도 그러했기에 적막한 상태로 황톳길을 걷노라니 한없이 멀기만 했다. 게울해는 짧 았다. 무덤이라고 해보았자 고작 조그만 흙 한 더미였다. 멀리 황 토 언덕 위로 해가 기울었다. 어머니는 나를 한족 가에 내버려 둔 채 무덤을 붙잡고 울었다. 나는 무덤가에 앉아 밤을 가지고 놀았다 .어머니는 한참 울고나서 종이를 태 웠 다. 종이는 재가 되어 내 눈앞에서 두 바퀴를 그리다가 땅에 가만 내려앉 았다 바람은 여렸지만 아주 추웠다. 어머니는 또 울었다. 나도 아버지가 생각 났지만 그 때문에 울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어머니가 우는 것이 너무 불 쌍해 보여 눈물을 떨구었다. "엄마, 울지마, 울미 마." 어머니 손을 끌자 더욱 서럽게 울엇 다. 어머니가 나룰 품에 안았다. 금방 해가 질 것 같았다. 주위에 는 아무도 없었 다. 우리모녀 둘뿐이었다. 어머니도 약간 무서웠던지 눈물을 머 금은 채 나를 이 끌고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얼마만큼 길을 갔을까, 어머니는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 보았다. 이미 어두워져 아버지의 무덤을 식별 할 수 없었다. 무덤들 이 무더기로 언덕밑까지 널려져 있는 것만 보였다. 어머 니는 한숨을 쉬었다. 우 리는 지쳐 겨우 걸음을 뗐다. 성문에도 못 왔을 때, 나 는 초승달을 보았다. 사방 이 깜깜했고, 소리 하나 없었다. 초승달만이 차가운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쓰 러졌고,어머니가 나를 안았다. 어떻게 성에 들어왔 는지 모른다. 하늘에 초승달이 있었던 것만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4 여ㄹ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이미 물건을 저당잡힐 줄 알았다. 돈을 빌려오지 못하면 우리 모녀가 밥을 먹지 못한다는 것도, 달리 어떤 작은 방도만 있어 도 어머니는 나를 보내지 않으려 한다는 것도 알았다. 어머니가 내게 작은 보자기 를 내어줄때면 부엌솥에 죽 한 숟가락 남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 고 있었 다. 우리집 솥은 체면 차리는 과부처럼 깨끗하곤 했다. 때가 봄철이어서 우리 솜 옷은 벗기가 무섭게 전당포로 맡겨졌다. 이제 거울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거울 을 들고 조심조심하면서도 빨리 가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전당포는 무을 일찍 닫았다. 나는 전당포의 붉은 대문과 그 높고 긴 계산대가 두려웠 다. 그 대문만 보면 가슴이 콩당거렸다. 그러나 어쨌든 들어가야 했다. 문턱 이 어찌나 높은지 기어넘다시피 했다. 나는 안간힘ㅇ르 쓴 끝에 겨우 물건을 내놓고 소리쳤다. "잡 히러 왔어요." 돈과 전표를 받아 손에 꼭 쥐고는 재빨리 집으로 뛰었다. 어머니 가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당포에서 거울을 받아주지 않았다. '1호'와 함께 가져오 라 고 했다. 나는 '1호'가 무엇인지 알았다. 그래서 나는 거울을 가슴에 안고 죽 어라 집으로 달렸다. 어머니는 울었다. 어머니는 다른 물건을 찾지 못했다. 좁 은 방이 눈에 익어 그런지 나는 좁은 방이지만 그래도 돈이 되는 물건들이 꽤 많다고 생 각했엇다. 그런데 막상 어머니와 함께 잡힐 만한 물건을 찾아보고서 야 쓸 만한 게 적다는 것을, 아주적다는 것을 내 어린 마음은 비로소 깨달았 다. 어머니는 전 당포에 가지말라고 했다. "엄마, 우리 뭘 먹어?" 그러자 어머니 가 시집올 때 가 져온 은비녀를 빼주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은붙이였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외가에서 해 준 것이다. 이제 어머니는 이 마지막 은붙이 를 내게 주며, 거울 내 놓으라고 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전당포로 달려갔 지만 그 무서운 대문은 꼭 닫혀 있엇다. 은비녀를 손에 꼭 쥔 채 문턱에 앉아 있었다. 차마 크게 울음을 터뜨리지 못한 채 하늘을 보았다. 아아, 또 그 초승 달이 나의 눈물을 비추었다. 오래도록 울었다. 어머니가 어둠 속에서 다가와 내 손을 꼭 쥐었다. 따뜻한 손, 나는 모든 괴로움을 잊었다. 배고픔조차도, 나를 잡아주는 어머니의 이 따뜻한 손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나는 훌쩍거리며 말했다. "엄마, 우리집에 가 서 자고, 내일 아침에 다시 와, 응?" 어머니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엄마, 저 초승달 좀 봐,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도 저렇게 비스듬히 걸려 있었는데, 어째서 늘 저렇 게 비스듬히 거려 있는 거야?" 얼미쯤 걷다가 내가 물었다. 어 머니는 여전히 말 이 없엇다. 어머니 손이 조금 떨렸다. 5 어머니는 온종일 남의 빨래를 해주었다. 나는 어머니를 돕고 싶은 마음이 간 절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어머니 옆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 니가 일을 끝내기 전에는 결코 잠자러 가지 않았다. 어떤 때는 초승달이 뜰 때 까지도 어머니는 빨래를 했다. 그 냄새나고 소가죽 같은 양말들은 가게 종업원 들이 가져온 것이다. 어머니는 그 소가죽을 빨고 나면 밥을 먹지 못했 다. 나는 어머니 옆에서 달을 보았다. 박쥐들이 마치 은색 실에 꿴 마름처럼 달빛 아래를 오가다 어느새 어둠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어머니가 불쌍하게 느껴질수록 나는 초승달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초승달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 속이 탁 트이기 때문이었다. 초승달은 여름이면 더욱 사랑스럽다. 늘 얼음 처럼 서늘한 기운을 담 고 있다. 나는 지상에 자그마한 그림자를 만들었다가 금세 사라지고마는 초승달 을 사랑한다. 초승달은 어스름하고 또렷하지 않다. 그 림자조차 없어지고 나면 세 상은 일순 아주 짙은 어둥므로 변하고, 별은 유난히 밝아진다. 꽃도 향기를 하한 다. 우리 이웃에는 꽃나무들이 많았고, 커다란 아카 시아 나무는 우리에게 눈처럼 꽃을 떨어뜨렸다. 6 어머니의 손이 갈라졌다. 그 손으로 등을 긁어주면 아주 시원했다. 그러나 빨 래를 하느라 그렇게 된 것이기에 차마 자주 긁어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어머 니 는 양말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자주 밥을 못 먹어 야위었다. 나는 뭔가를 생각 하고 잇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빨래를 한족으로 밀어놓고 멍하니 앉 아있곤 했다.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7 어머니는 내게 괴팍스럽게 굴지 말고 고분고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했다. 내 게 아버지를 다시 찾아 준 것이다. 아버지는 진즉 무덤속에 묻혔기 때문 에 이 사람은 다른 아버지라는 것을 안다. 어머니는 내게 그런 당부를 하면서, 눈길은 다른 곳을 더듬고 있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있었다. "널 굶어 죽일 수는 없어!" 어머니는 나를 굶어 죽이지 않기 위해 내게 다른 아빠를 찾 아 준 것이다. 아직 세상일에 어두운 나로서는 좀 두렵기도 했지만 이제 더 이상 배를 곯지 않 겠구나 하는 희망에 부풀기도 하였다. 정말 공교롭게도 우리가 그 작은 집을 떠 나던 날 하늘에 다시 초승달이 결렸다. 이번 초승달은 여느대보다 또렷했고, 두 렵게 느껴졌다. 그 동안 살던 이 작은 집을 떠나야만 했다. 어머니는 꽃가 마에 탔다. 가마 앞에는 놀이꾼 몇 사람까지 있었는데 실력들이 엉망이엇다. 가마가 앞서 갔고, 그 두려운 초승달이 한점 빛을 부리고 있었고, 마치 서늘 한 바람에 떨고 있는 것 같았다. 길에는 아무도 없었고, 개들만 놀이꾼들으 쫓 아오며 짖어 댔다. 가마는 걸음을 재촉했다. 어디로 가는 걸까? 어머니를 성 밖으로, 묘지로 데려가는 것은 아닐까? 그남자가 내 손을 잡고 데려가서, 나는 숨도 쉴 수가 없 었다. 울려고 해도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 남자의 손에 땀 이 나 마치 물고기 를 쥔 것처럼 선뜩했다. 하마터면 "엄마"하고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 그러지 못했 다. 얼마 후 달은 구름 속에 숨어 버렸고, 가마는 작은 골목 으로 들어갔다. 8 삼사년 동안 초승달을 보지 못한 것 같다. 새아버지는 내게 잘 해주었다. 두 칸짜리 집이 있었다. 그와 어머니가 안쪽 방에서 지냈고, 나는 바깥에서 잤 다. 처음에는 어머니하고 자고 싶었지만 며칠이 지난 뒤부터는 내 작은 방이 더 좋 았다. 방안의 벽은 하얗게 칠해져 있었고, 긴 탁자와 걸상 하나가 놓여 있었 다. 이 모든 것이 다 내것 같았다. 내 이불도 예전보다 두껍고 따뜻했다. 어머니도 점점 살이 쪘고,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돌았다. 갈라졌던 손도 치치 밀끔해졌 다. 전당포에 간 지도 퍽 오래되었다. 새아버지는 나를 학교에 보냈다. 어떤 때는 나 와 놀아주기도 했다. 나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왠지 그를 아빠 라고 부르는 게 내키지 않았다. 그도 그런 사정를 아는 지 나를 보면 늘 웃음 을 지었다. 웃을 때 그의 눈은 참 예뻤다. 어머니는 내게 아빠라고 부르라고 귀 뜸하 곤 했다. 나도 모나게 굴고 싶지는 않앗다. 나도 속으로는 어머니와 내가 이렇게 먹고 입고 사는 게 아버지 덕택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 이 삼사년 동안 초승 달을 본 기억이 없다. 아마 보았어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아버지가 돌 아가시던 날의 그 초승달, 어머니 가마 앞에 떠있던 그 초승달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그 가녀린 빛, 그 싸늘한 기운은 늘 내 마음 속에 있으며 다른 무 엇보다도 밝게 빛나고, 다른 무엇보다도 서늘하다. 그리고 가끔 그것을 떠올리면 옥처럼 손에 만져지는 것 같기도 한다. 9 나는 학교 가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학교에는 꽃들이 많다고생각했지만, 실은 꽃이 없었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들판 여린 바람 속에 비스듬히 걸려있 는 초승달을 떠올리듯이 학교하면 으레 꽃바람을 떠올린 뿐이다. 어머니는 꽃 을 좋 아했다. 살 수는 없었지만 다른 사람이 꽃 한 송이 주면 너무도 기쁘게 머리에 꽃곤 했다. 간혹 나도 꽃 한두 송이를 꺾어다 주면 어머니는 그 꽃을 받아 꽂았 다. 그럴 때면 어머니의 뒷모습이 한결 젊어 보였다. 어머니가 즐거 워하자 나도 기뻤다. 학교에서도 즐거웠다. 아마 이런 이유들로 내가 학교를 떠올릴 때마다 꼿이 생각나는 걸까. 10 내가 소학교를 졸업하던 그해 어머니는 다시 나를 데리고 전당포에 갔다. 새 아버지가 왜 갑자기 떠나버렸는 지 나는 모른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어머 니도 모르는 눈치였다. 어머니는 나를 계속 학교에 보냈고, 머잖아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는 여러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고, 편지 한 장 없 었다. 내 생각에는 어머니가 다시 양말을 빨아야 할 것만 같았고, 이 것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럴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아니 오 히려 어머니 는 몸치장을 하고 꽃을 머리에 꽂았다. 이상했다. 어머니는 눈물 대신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무엇 때문일까? 알 수 없었다. 내가 학교가 파 해 돌아오면 어머 니는 문 앞에 서 있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날도 나는 학교가 파해 돌아오 는데, 어떤 사람이 나를 불렀다. "얘, 네 에미에게 가서 기 별하거라.""너는 팔지 않으련? 아이구 이린 것." 나는 불화로를 뒤집어 쓴 것 처럼 낯이 뜨거워서 고개 를 들 수 없었다. 나는 알았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머니에게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그럴 수 없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주 잘해 주었다. 간혹 아주 정 생를 하고 "공부를 해라, 공부를."이라고 말하기 도 햇다. 어머니는 글을 모르면서 왜 자꾸 공부를 하라는 것인지, 나는 의심스 러웠다. 의심에서 출발하여 어머니가 나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어머니는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면 어머니에 게 한바탕 욕을 퍼붓고 싶었다. 그러나 다 시 생각해 보면 어머니를 도울 수 없는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소학교를 졸업하면 무 엇하나? 언제인가 친구들과 그런 얘기를 나눈 있다. 작년 졸업생 가운데 여 러 명이 남의 첩으로 들어갔다고 했고, 누구는 매춘 부가 되었다고도 했다. 난 그런 일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는 게 뻔한 그런 일을 가직 수군거 리길 좋아했다. 그 애 들은 그런 얘기를 하며 얼굴을 붉히기도 했고 우쭐해 하기 도 했다. 나는 더욱 어머니를 의심했다. 내가 졸업을 하면 혹시 ……. 이런 생각 을 하면 집에도 가 기 싫었고, 어머니 보기가 두려웠다. 간혹 어머니가 뭘 사 먹 으라고 돈을 주었 지만 나는 쓰지 않고 고픈 배를 움켜ㅈ 채 체조수업을 하다 쓰 러지곤 했다. 다 른 아이들이 먹는 것을 보면 얼마나 맛있게 느껴지던지! 그러나 나는 돈을 아 껴야 했다. 만일 어머니가 날더러 나가라고 하면 어쩔 것인가. 내 수중에 돈 만 있다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돈이 가장 많을 때도 고작 몇십 전 뿐이었 다. 그럴 때면 나는 대낮에도 하늘을 쳐다보면서 나의 초승달을 찾았다. 내 마 음 속의 어려움을 어떤 형상을 빌어 비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초승달 일 것이다. 초승달은 의지할 데 없이 부유스름한 하늘에 걸려 희미한 빛을 내다 가 금세 어둠 속에 묻히고 만다. 11 나를 제일 괴롭게 한 것은 내가 차츰 어머니를 원망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원망할 때면 나도 모르게 어머니가 나를 업고 아버지 묘에 가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그 생각을 하면 어머니를 원망할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은 여전히 초승달 같았다. 한순간의 빛남, 그리고 끝없는 어둠, 어머니 방에는 늘 남자들이 드나 들었고, 어머니도 더는 나를 피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개처럼 나를 흘겨보며 혀를 내밀고 침을 흘렸다. 그들이 나를 더 눈독 들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 나는 갑자기 많은 일들 을 알아버렸다. 내 스스로 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내 몸에 어떤 값 나가는 곳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는 내 몸에서 나기 시작한 어떤 향기를 맡을 수도 있었다. 그것이 나를 수줍게 하였고, 예민하게 하였다. 나를 보호할 수도 있고, 나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힘이 내게 생긴 것이다. 나는 강하기도 했 지만 약하기도 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을 지를 모를 때가 많았다. 나는 어머 니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즈음 어머니에게 물을 일들이 많았고, 어머니의 위로가 필요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시기에 나는 어머니를 피해야 했고 어머니를 원망 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 자신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밤에 잠이 오지 않 을 때 냉정하게 가만 생각을 해 보면 어머니를 용서할 수 있기도 했다. 어머니 는 우리 두 입을 책임져야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나는 어머니가 내 게 주는 밥을 거절하였다. 내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동안 잠잠했다가도 다시 더욱 사납게 몰아치곤 하는 겨울바람 같았다. 조용하다가도 분노가 끓어오 를 때면 주체할 수가 없었다. 12 좋은 방도를 생각할 틈도 없이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어머니가 내게 물었 다. "어떠냐?" 내가 진정 어머니를 사랑한다면 마땅히 어머니를 도와야 한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도 더 이상 나를 돌볼 수 없다는 거였다. 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말 같지가 않았지만 어머니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나도 이제 금방이면 늙는다. 두 해만 더 지나면 공짜라고 해도 원하는 사람이 없을 게야." 사실 그랬다. 요즘들어 어머니는 분을 많이 발라도 얼굴에 주름이 역력했 다. 어머니는 한술 더 떠 한 남자만을 섬기려 했다. 여러 남자를 받들기에는 이 미 기력이 쇠한 것이다. 자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 가야한다고 생각한 것이 다. 만두집 주인이 어머니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어엿한 처녀였고, 어렸을 때처럼 어머니 가마 뒤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내 자신을 건사할 방도를 생각해 야 했다. 내게 어머니를 돕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어머니는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있고, 나는 어머니를 대신해 돈을 벌어야 한다. 나는 정말 어머니를 대신해 돈을 벌고 싶었으나 그런 돈벌이 방법은 두려웠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날더러 반백 노인인 당신처럼 그렇게 돈벌이를 하라는 것인가? 어머니 마음도 독했지 만, 돈은 더욱 독했다. 어머니는 날더러 그 길을 가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나 스 스로 선택하게 했다. 그녀를 도울 것인가 아니면 두 모녀가 각자 자기 길을 갈 것인가. 어머니의 눈에는 이젠 눈물도 없다. 진즉에 말라벼렸다. 나는 어떻게 해 야 하나? 13 나는 교장에게 말했다. 교장은 마흔남짓한 부인으로, 뚱뚱하고 그리 총명하지 는 않았지만 퍽 후덕했다. 나는 정말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렇지 않으면 어 떻게 내가 어머니 일을 꺼낼 수 있었겠는가.전에 교장과 가까웠던 것도 아니었 는데... 교장에게 한 마디 한 마디를 꺼낼 때마다 마치 벌겋게 단 숯덩이가 목구 멍을 지지는 것 같았다. 한참만에야 겨우 한 마디씩 꺼내곤 했다. 교장은 나를 돕고 싶어했다. 그녀가 내게 돈을 줄 수는 없었고, 내게 두 끼 밥과 학교 급사와 함께 쓸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필경사를 도와 글씨 쓰는 일을 하라고 했지만, 내 글씨로는 훈련이 필요했기에 바로 그 일을 시키지는 않았다. 두 끼 밥과 잠자리를 해결한 것은 나로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되었다. 어머니는 이번에는 가마도 타지 않고 인력거를 타고 어둠 을 더듬으며 갔다. 내 이불은 내게 주었다. 떠날 무렵 어머니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았지만, 가슴 속 저 밑바닥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자신 의 딸인 내가 다시는 찾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어떻게 울어야 할지도 잊었다. 흐느낄 뿐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는 그녀의 딸이고 친구이자, 그녀를 위 로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코 내키지 않는 그 일 말고 내가 어머니를 도 울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나는 우리 모녀가 주인 없는 개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더 이상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알았 다.왜 우리에게는 먹을 것이 없는가? 그 이별은 지난날의 모든 고초를 잠재웠다. 내 눈물이 어떻게 흐르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하늘의 초승달마저 나오지 않았 다. 어둠뿐이었다. 반딧불도 없었다.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 귀신처럼 그림자도 없이 떠났다. 어머니가 죽는다해도 아버지와 같이 묻히지 못할 것이다. 나조차도 어머니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 지 모를 것이다. 내게는 그런 어머니, 그런 친구밖 에 없었다. 나의 세상에 이제 나 혼자 남았다. 14 어머니는 이제 영원히 볼 수 없다. 사랑은 내 마음 속에서 죽었다. 서리 맞은 봄꽃처럼. 나는 교장을 도와 이러저러한 것들을 베껴쓰기 위해 열심히 글씨 연 습을 했다. 남의 밥을 먹고 있는 처지라 반드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했 다. 나는, 온종일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는지, 무엇을 얘기하는 지만 신경을 쓰는 다른 여학생들하고는 달랐다. 나는 내 자신에 관심을 기울였 고, 내 그림자가 내 유일한 벗이었다. 마음 속에는 늘 나 자신만이 있었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엇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 신을 불쌍하게 여기고, 나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나 자신을 타일렀다. 나는 나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 몸에 생 기는 조그만 변화 때문에 두려워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이상야릇해지 기도 했다. 나는 한 송이 여린 꽃을 들고 있듯이 나 자신을 손에 들고 있다. 내 게는 눈앞의 현재만 있을 뿐, 앞날이란 없다. 깊이 생각할 수도 없다. 남의 밥을 먹기에 점심과 저녁 때만큼은 가늠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정말 시 간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희망이 없으면 시간도 없다. 나는 마치 해와 달이 없는 곳애ㅔ 못박혀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나 는 친구들처럼 그렇게 방학이나 명절, 설 같은 것을 고대하지 않았다. 방학이니, 설이니 그런 것들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러나 나의 몸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러자 나는 더욱 아득해지고 나 자신이 안심이 되지 않았다. 내가 커갈수록 예뻐진다는 것이 다소 위로가 되었다. 아름다움이 내 신분을 높혀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근본적으로 신분이란 게 없다. 자기 위안은 처음은 달 지만 끝은 쓰고, 그 쓰디씀이 나중에는 나를 또 오만하게 한다. 가난하다, 그러 나 예쁘다. 이것이 나를 또 두렵게 한다. 어머니도 예쁘지 않았던가. 15 나는 다시 초승달을 자주 보지 못했다. 무척 보고 싶었지만 차마 볼 수가 없 었다. 나는 진즉 졸업을 했지만 학교에서 계속 살았다. 저녁이 되면 학교에는 잡 일하는 나이든 남자와 여자 둘만이 남았다. 그들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 랐다. 선생도 아니고, 일하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일하는 사람비슷했다. 저녁이면 나는 늘 혼자 뜨락을 거닐다가 초승달에 쫓겨 방으로 들어오곤 했다. 초승달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ㄷ. 하지만 방에서도 초승달이 어떤 모양인지 상상할 수 있 었다. 산들바람이 불 때면 더욱 그랬다. 산들바람은 초승달의 여린 빛을 내 마음 에 불어다 주어 내가 지난날을 떠올리도록 했고, 그럴수록 눈앞의 슬픔이 더했 다. 나의 마음은 달빛 속의 박쥐 같았다. 빛 속에 있지만 나 자신은 여전히 어둡 다. 어둠운 것은 설사 날 줄을 안다 하더라도 여전히 어둡다. 나는 희망이 없다. 하지만 나는 울지 않는다. 늘 눈살을 찌푸릴 뿐이다. 16 내게 돈이 좀 생겼다. 학생들에게 뜨개질을 해 주면서 생긴 푼돈이다. 교장이 허락을 했다. 학생들도 뜰 줄을 알았기 때문에 큰 돈벌이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 만 급히 떠야 되는 데 시간이 없거나 식구들에게 장갑이나 양말을 떠주어야 할 경우에는 나를 찾았다. 그래도 내 마음은 한결 나았다. 어머니가 그 길을 가지 않았어도 내가 어머니를 모실 수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번 돈을 새 ㅔ어보면 그것은 한낱 꿈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해졌 다.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었다. 어머니가 나를 보면 분명 나를 따라 올 것이고,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이 있을 것이다. 꼭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나는 그 렇게 생각했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고, 어머니는 늘 꿈속에서 왔다. 어느 날이었 다. 나는 학생들을 따라 성 밖으로 여행을 갔는데, 돌아올 무렵에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네 시가 넘었다. 그래서 빨리 돌아오려고 우리는 지름길을 걸었다. 그 때 나는 어머니를 보았다. 한 작은 골목에 만두집이 있었고, 문 박에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만두가 바구니에 담겨 있엇다. 어머니는 벽 쪽에 앉아 허리를 구부 렸다 폈다 하면서 풀무질을 하고 잇었다. 꽤 먼 거리였지만 나는 그 나무 만두 와 어머니를 알아 보았다. 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안다. 다가가서 어머니를 안 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학생들이 내게 이런 어머니가 있다는 것 을 이해해 주지 않고 웃을 것 같아서 였다. 어머니 쭉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고 개를 숙였다. 눈물 속에서 나는 어머니를 보았지만 어머니는 나를 보지 못했다. 우리들이 어머니를 스쳐 지나도 어머니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풀무질만 열심 이었다. 한참 멀어진 뒤 다시 돌아보아도 어머니는 거기서 그대로 풀무질을 하 고 있엇다. 어머니 이마에 머리가 흘러내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작은 골목의 이름을 외웠다. 17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작은 벌레가 내 마음을 물고 잇는 것처럼 나는 어머니 를 보지 않고서는 마음이 진정될 것 같지 않았다. 바로 그때 학교이 교장이 바 뀌었다. 뚱보 교장이 내게 다른 방도를 찾아보라고 했다. 그가 있는 한 먹고 잘 수는 있었지만 새로 온 교장이 그렇게 해주리란 보장은 없었다. 나는 모아둔 돈 을 세어 보았다. 모두 2원 70전 가량이었다. 이 돈이면 며칠은 굶지 않을 것이 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하나? 멍하니 앉아 걱정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방 법을 찾아야 했다. 어머니를 찾아가자. 맨처음 떠오른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나 를 받아주겠는가? 어머니가 나를 받아 줄 처지가 못 되는데도 찾아갔다가는 어 머니와 그 만두집 주인 사이에 분란까지 생기지는 않더라도 어머니는 분명 괴로 워할 것이다. 어머니를 생각해야 했다. 그녀는 나의 어머니이기도하고 아니기도 했다. 우리 모녀 사이에는 가난이 만든 장벽이 가로놓여 있다. 생각 끝에 어머니 를 찾아기지 않기로 했다. 내 고생은 나 스스로 떠맡아야 한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것을 감당할 것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 세상이 너무 작게 느껴졌다. 나와 내 작은 이부자리 하나 놓을 자리가 없다. 차라리 개였더라면 아무데서나 잠을 잘 텐데. 나는 길거리에서 잘 수 없다. 그렇다, 나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도 개 보다 못할 수 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신임 교장은 나를 밖으로 내쫓을 것이 다. 남이 쫓아낼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봄이었다. 꽃이 피고 잎이 프르른 것만 보일 뿐 따뜻한 봄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붉은 꽃은 그저 붉은 꽃이었 을 뿐이고, 푸르른 잎은 그저 푸르른 잎일 뿐, 나는 여러 다른 색깔을 보지만 모 두 한가지 색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 그런 색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봄은 내 마음 속에서 싸늘했고, 죽은 것이었다. 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눈물 이 절로 흘러내렸다. 18 나는 일을 찾으러 다녔다. 어머니를 찾지도 않았고 다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았다. 내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했다. 꼬박 이틀 동안 희망을 안고 나갔다가 먼지와 눈물을 안고 돌아왔다. 내 차지로 돌아올 일은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진 정으로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고, 진정으로 어머니를 용서했다. 어머니는 그래 도 냄새나는 양말이라고 빨았지만 난 그런 것도 못하고 있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간 것이다. 학교에서 내게 가르쳐 준 지식이나 도덕은 모두 웃음 거리에 불과했다. 배부르고 할 일 없을 때나 하는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친구들 은 내게 그런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매춘부 어머니라고 쑤군 거렸다. 그들에게는 먹을 밥이 있으니 당연 그렇게 보일 것이다. 내게 밥을 주는 사람만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머니는 참으로 대단 하다. 죽을 생각도 해보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아니, 나는 살아야 했다. 나 는 젊고, 예쁘다. 살아야 한다. 부끄러움은 나의 것이 아니다. 19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벌써 일을 찾는 것 같았다. 상쾌하게 뜰을 거닐었고 봄 날의 초승달이 하늘에 걸려 있었다. 그 아름다움이 보였다. 하늘은 어두웠고 구 름 한 점 없었다. 밝고 부드러운 초승달이 여린 빛을 버들가지에 조용히 뿌리고 있었다. 남쪽에서 향기를 담고 불어 온 미풍이 버드나무 가지를 담장 밝은 곳까 지 밀고 갔다가 다시 어두운 곳으로 밀어오곤 했다. 빛은 강하지 않았고 그림자 도 진하지 않았다. 바람은 여리게 불었고 모든 것이 부드럽고 졸리운 듯 했지만 그러다가도 다시 가볍게 움직였다. 초승달과 버들가지 사이에 있는 한 쌍의 별 은 미소짓는 선녀의 눈 같았다. 비스듬히 걸린 달과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 를 놀리고 있었다. 담장 옆 나무들의 활짝 핀 하얀 꽃이 여린 달빛을 받아 한쪽 은 눈처럼 하얗게 빛나고, 다른 쪽은 잿빛 그림자를 띠고 있었고, 더없이 순결해 보였다. 이 조각달은 희망의 시작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20 나는 뚱보 교장을 찾아갔다. 집에 없었다. 한 청년이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아주 번듯하고 상냔했다. 나는 평소 남자를 두려워했지만 이 청년은 아니었다. 그는 날더러 얘기를 하라고 했지만 부끄러워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가 웃었 고, 그러자 내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나는 교장을 찾아 온 이유를 말했다. 그는 아주 흔쾌하게 자기가 도와 주겠노라고했다. 그날 밤, 그는 내게 2원을 가져 왔 다. 내가 받으려 하지 않자 그의 숙모인 뚱보 교장이 주는 거라고 했다. 그는 또 숙모가 묵을 곳을 잡아 놓았고, 내일 바로 이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믿기 지 않았지만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웃는 얼굴이 내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내가 그를 의심하는 것이 미안하게 생각되었다. 그는 저리 부드럽고 사랑스러운데! 21 그가 웃는 입술을 내 얼굴에 대었다. 그의머리 위로 미소짓고 있는 초승달을 보았다. 취한 듯한 봄바람이 봄구름을 헤치자 초승달과 봄별 몇 쌍이 나타났다. 강가에서는 버들가지가 조용히 흔들이고 봄개구리는 사랑가를 부르고, 어린 향 포의 향기가 봄날 저녁 포근한 대기 사이로 퍼졌다. 나는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린 향포에 생기를 주는 것 같았다. 항표가 쑥쑥 자라는 것을 상상하였다. 촉촉 한 땅에서는 작은 민들레가 자라고 있었다. 봄기운을 받아 그것을 몸에 녹여 향 기로 뿜어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잊었다. 봄바람과 달의 여린 빛 속으로 내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달이 갑자기 구름에 가렸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 했다. 나는 그초승달을 잃었고, 나 자신도 잃었다. 나는 이제 어머니와 같아졌다. 22 후회했다. 스스로 위로도 했다. 울고 싶었다. 기쁘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랐다. 도망가서 여원히 다시 그르 보지 않으려고도 했다. 그러나 이내 그가 보고 싶었고, 나는 외로웠다. 두 칸 집에 나 혼자였다. 그는 매일밤 온다. 그는 언제나 멋지고 늘 따뜻했다. 그는 내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었고, 나에게 새옷 몇 벌도 사주었다. 새 옷을 입자, 내가 보아도 아름다웠다. 그런 옷은 질색이었 지만 안 입자니 아까웠다. 나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생각하는 것이 싫었다. 그렇게 되는 대로 지냈다. 두 볼은 언제나 붉었다. 화장하는 걸 싫어했지만 그렇 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료하기 그지 없었고 뭔가 할 일을 찾아야 했다. 화 장할 때는 나 자신을 사랑하다가도 화장을 다하고 나면 자신이 미웠다. 눈물이 어느새 흘러내렸지만 나는 울지 않으려 애를 썼다. 눈은 온종일 젖어 있었고, 사 랑스러웠다. 어떤 때는 미친 듯이 그에게 입을 맞추고는 다시 그를 밀쳐내기도 했다. 그에게 욕을 퍼붓기도 했다. 그는 웃기만 했다. 23 나는 진즉부터 알고 있엇다. 내게 휘망이 없다는 것을, 한 점 구름으로도 초승 달을 가릴 수 있다. 나의 장래는 어둠이다. 과연, 얼마 안 있어 봄은 여름으로 바뀌었고 나의 춘몽도 끝이 났다. 어느 날 점심나절에 한 젊은 부인이 찾아왔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귀엽지는 않았고, 흡사 자기처럼 활기가 없었ㄷㅏ. 집에 들 어서자마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물어볼 것도 없이 나는 벌써 짐작했다. 보 아하니 나와 다툴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난 더더욱 그럴 생각이 없엇다. 그녀 는 착했다. 그녀는 울면서 내 손을 잡고 말했다. "그 사람이 우리 둘을 속였어 요!" 그녀도 '애인'인 줄로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의 처였다. 그녀는 나와 다투지 도 않고, "그 사람을 놓아 주세요!"라는 말만 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랐다. 이 젊은 부인이 불쌍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녀가 웃었다. 그녀의 모 습을 ㅂ자 자기 남편 되찾는 것만 알뿐 다른 물정에는 까막눈인 사람이란 생각 이 들었다. 24 나는 한동안 길을 걸었다. 아주 쉽게 그 젊은 부인에게 대답을 했지만, 나는 어떡하나? 그가 내게 준 것들은 원하지 않는다. 이왕 헤어지는 마당에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들말고 내게 남은 것이 무엇 있는가, 어디로 가나? 어떻게 끼니를 때울 것인가?그래, 그 물건들이 었어야겠다. 방법이 없다. 나는 몰래 이사를 했다. 나는 후회하지는 않는다. 단지 공허할 뿐. 한 조각 구름 처럼 기댈 곳이 없다. 조그만 방으로 이사를 하고나서 나는 하루 온종일 잤다. 25 나는 어떻게 절약을 해야 할지를 알고 잇엇다. 어려서 돈이란 귀한 것이라는 것을 터득했다. 다행히 수중에 돈이 얼마 있으니 바로 일을 찾으면 될 것 같았 다. 뭔가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위험이 닥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가 한두 살 더 먹었다고 해서 일이 쉽게 찾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굳게 마음을 다 졌다. 그래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노릇이었지만, 왠지 그래야 될 것 같았다. 여 자가 돈을 번다는게 이렇게 어렵구나! 어머니가 옳았다. 여자에게는 한 가지 길 밖에 없다. 어머니가 간 바로 그 길이다 나는 당장 그 길을 가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몸 부림을 칠수록 마음은 더욱 두려웠다. 내 희마은 더욱 작아졌다. 끝내 나는 젊 은 아가씨들과 함께 작은 식당에서 면접을 치렀다. 식당은 작았지만 주인은 아 주 컸다. 다들 예쁜데다 소학교까지 졸업한 소녀들이 황제의 간택이라도 기다리 듯이 미욱하게 생긴 주인의 선택을 기다렸다. 식당 주인은 나를 골랐다. 그에게 고맙지는 않았지만, 분명 통쾌하긴 했다. 그 여자아이들은 나를 부러워하는 것 같았고, 어떤 애들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고, "빌어먹을!"하며 욕을 하는 애들도 있엇다. 여자란 얼마나 값싼가!" 26 나는 작은 식당의 2번 종업원이 되었다. 음식을 차리고 나르고, 계산을 하고 요리 이름을 외치고 하는 일에 나는 문외한이었다. 다소 두려웠다. 그런데 '1번' 이 자신도 할 줄 모른다고 조급해 할 것 없다고 말했다. 샤오순이 다 알아서 하 고, 우리들은 손님들에게 차나 따르고 수건이나 건네주고 계산서나 가져다 주면 되고, 다른 일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1번'이 옷소매를 높이 쳐들었는데 하얀 옷소매에 조금도 때가 묻어 있지 않았다. 어깨에 휜 수건 을 걸치고 있었고, 그녀는 온종일 분을 바르고 입술은 피처럼 빨갛게 칠했고 손 님들에게는 아주 잘 접대를 하고 어떤 손님은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눈을 내리 깔고 못 본 체 했다. 그가 접대하지 않는 손님은 내가 접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남자가 무서웠다. 내 그간의 경험이 사랑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남자는 어 쨌든 무섭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더구나 식당에서 밥을 먹는 사내들은 호기 를 부리며 싸우듯이 자리를 권했고 서로 계산하겟다고 나서는가 호기를 부리며 싸우듯이 자리를 권하고 서로 계산하겠다고 나서는가 하면 결사적으로 술마시기 내기를 하였다. 그들은 짐승처럼 먹으면서 툭하면 트집을 잡고 남을 욕햇다. 고 개를 숙인 채 차를 따르고 수건을 건네는 나는 낯이 뜨거웠다. 손님들은 일부러 내게 이런 저런 얘기를 걸면 나를 웃기려 했으나 나는 웃을 마음이 없었다. 저 녁 아홉 시가 넘어서야 일이 끝나기 때문에 몹시 피곤했다. 내 작은 방에 돌아 오면 옷도 벗지 않고 해가 뜰 때까지 곯아떨어졌다. 일어나면 그래도 마음이 기 뻤다. 지금나는 내 손으로, 내 노력으로 밥을 먹고 있다. 나는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갔다. 27 '1번'은 아홉 시가 넘어서야 나왔다. 내가 나온 지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 녀는 나를 무시했지만 일부러 나를 못살게 굴지는 않았다. "그렇게 너무 일찍 나 올 필요 없어. 여덟 시에 누가 밥먹으러 와. 그리고 한 마디 하겠는데, 그렇게 죽을 상을 하고 있지 좀 말아. 넌 여종업원이지, 누가 여기서 제사를 지내레? 고 개 푹 숙인다고 해서 술값 더 주는 사람 없다구, 뭐하러 여기 온거야. 돈벌러 안 왔어? 그리고 네 옷 칼라가 너무 낮아. 우리같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칼라가 높고 비단 손수건이 있어야 되는 거야. 그래야 사람들이 알아보는 거야." 호의해 서 그런 거라는 걸 나는 알았다. 내가 잘 웃지 않으면 그녀도 손해를 본다는 것 을알았다. 팁은 다같이 나누어 갖도록 되어 있었다. 그녀를 결코 무시하지 않았 다. 어떻게 보면 나는 돈벌기 위해 애를 쓰는 그녀에게 감탄했다. 여자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길밖에 없다. 다른 길은 없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따라 배우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녀보다 더 트여야만이 먹고 살 수 잇다는 것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경우이다. 어찌 해볼 길이 없는 부득이한 상황이 저 앞에서 우리 여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단지 며칠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할 수 잇을 뿐이다. 이것이 내게 이를 악물게 했 고 내 마음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여자의 운명은 자기 손 안에 없다. 다시 사흘 을 일했다. 그 키 큰 주인이 경고를 했다. 이틀 동안 더 두고 보겠다고 말했다. 오래 머루르며 일을 하려면 '1번'처럼 해야 한다고 했다. '1번'이 농담 반 권유반 으로 얘기했다. "널 물어보는 사람이 있더라. 왜 그리 멍청하니? 우리가 어떤지 누가 몰라? 우리들 가운데 은행가에게 시집간 사람이 쌔고쌨어. 얼굴 좀 펴고해, 우리가 빌어먹을 그놈의 자동차를 타야지." 이것이 나의 기분을 건드렸다. 내가 물었다. "그래 넌 언제 자동차를 타는데?" 그녀는 붉은 입술을 내밀면서 말했다.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마.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뭐. 타고난 실팍한 엉덩이가 있는데 그까짓 것 못하겠어?" 나는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1원 50전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28 최후의 어두은 그림자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것을 피한다는 것이 더욱 다 가간 것이었다. 그 일을 그만 둔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그 어둠의 그림자는 정말 두려웠다. 나를 다른 사람에게 파는 것, 나는 할 수 있다. 그 일이 있고난 뒤 나는 남녀 사이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여자들이 조금 틈을 보이면 남자들은 냄새를 맡고 온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몸이고, 그들은 짐승의 힘을 발산한다. 그러면 얼마간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생긴다. 그런 뒤 여자에게 욕을 퍼붓거나 때리고, 여자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주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이렇게 자신을 팔 며 간혹 우쭐해하기도 한다. 나도 그런 적이 있다. 우쭐할 때는 천상의 언어만 말하다가도 얼마 지나면 얼마 지나면 고통과 낙심뿐이다. 한 남자에게만 팔면 그 래도 천상의 언어를 말할 수 있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팔면 그러지도 못한다. 어 머니가 바로 그러했다. 두려움의 정도가 다르다. 나는 '1번'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자가 하나라면 덜 두려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를 팔기 싫다. 나 는 남자가 필요없다. 더구나 나는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었다. 처음, 나는 남자와 함께 있으면 재미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같이 있으면 남자는 개가 두려워하는 일을 요구했다. 그랬다. 그때 나는 봄바람에 맡기듯이 하자는 대로 했다. 뒤에 생각해 보니, 그는 나의 무지를 이용해 자신의 만족을 채웠다. 그의 달콤한 말이 나를 꿈속으로 끌어들였다. 깨어보니 꿈이었고, 공허했다. 내가 얻은 것이라곤 두 끼니 밥과 옷 몇벌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렇게 밥벌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밥은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일을 해서 벌어야 한다. 그러나 밥벌이를 할 수 가 없을 때 여자는 자기가 여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몸을 팔아야 한다. 달포가 되었지만 나는 아직 일을 찾지 못하였다. 29 우연히 동창 몇 사람을 만났다. 중학교에 진학한 애들도 있었고 집안일을 하 는 애들도 있었다. 그들과 상대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얘기하다 보니 내가 그 애 들보다 똑똑한 것 같았다. 전에 학교 다닐 때는 그 애들이 나보다 똑똑했다. 그 러나 지금은 그 애들이 멍청해 보였다. 그애들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화 장도 아주 예쁘게 했다. 가게 진열품처럼. 그 애들 눈은 젊은 사내들을 쫓아 다 녔고, 마음속으로 사라의 시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ㅏ나는 그 애들이 우스웠 다. 그렇다. 나는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 애들은 밥걱정을 안 하니 늘 사랑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그물을 짜 상대를 잡는다. 돈이 있는 사람은 그물을 크게 만들어 여럿을 잡은 뒤 그중에서 하나를 여유있게 고른다. 나는 돈이 없다. 그물을 짤 곳도 찾지 못했다. 나는 직접 남자를 잡든지, 잡혀야 한다. 나는 그 애들보다 세상을 더 잘 알고, 더 현실적이다. 30 어느 날 나는 그 젊은 부인과 마주쳤다. 자기처럼 활기가 없던 그 여인, 마치 내가 자기 피붙이라도 되는 양 내손을 잡았다. 약간 두서가 없어 보였다. "당신 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나 후회했어요. 당신더러 그 사 람을 놓아달라고 한 것 말예요. 차라리 그대로 둘 걸 그랬어요. 글세. 또 다른 여자를 만들었는데. 더 좋은지 한 번 가더니 돌아오지를 않아요." 얘기를 나누다 가 그들이 연애결혼을 했고, 그녀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또 달아나 버렸다. 나는 이 젊은 부인이 가련해 보였다. 아직도 꿈 을 꾸고 있었고, 사랑이 신성하다고 믿고 있었다. 지금 형편을 묻자, 그래도 남 자를 찾아야겠고, 끝까지 그 남자와 살겠다고 했다. 만약 남자를 찾지 못하면 어 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부모와 친정부모가 있어 그 녀는 자유가 없다면서 돌볼 사람이 없는 나를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나를 부러 우하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우스웠다. 내게 자유가 있다니, 웃기는 얘기다. 그녀 는 먹을 것이 있고, 나는 자유가 있다. 그녀는 자유가 없고, 나는 먹을 것이 없 다. 우리는 둘 다 여자이다. 31 그 자기 같은 젊은 부인을 만나고나서 나는 한 남자에게만 나를 팔고 싶지간 않았다. 즐기기로 결정했다. 다시 말해 낭만적으로 밥벌이를 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누구 때문에 도덕적 부담 같은 것을 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배가 고팠다. 배가 불러야 낭만적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낭만적으로 살아야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것은 둥근 원 같은 것이다. 어디서 가든 상관이 없다. 그 동창생들 과 자기 같은 젊은 부인도 나와 마찬가지인데. 그들이 나보다 몽상에 더 젖어있 고, 나는 그들보다 더 솔직할 따름이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최고의 진리이다. 그리하여, 나는 팔기 시작했다. 나의 모든 것을 싸게 팔아서 최신 유행으로 단장 를 했다. 나는 확실히 예뻤다. 나는 거리로 나섰다. 32 나는 즐기고 싶었다. 낭만적으로, 그러나 나는 틀렸다. 나는 아직 세상물정을 몰랐었다. 남자들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그리 쉽게 걸려들지 않았다. 조금 문명 의 물을 먹은 사람들을 끌려면 기껏해야 한 두 번 입맞춤만 해주면 될 줄 알았 다. 그러나 다들 그런 꼬임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값싸게 즐기 려 했다. 영화를 보러가거나 거리를 거닐면서 아이스크림이나 사주었다. 나는 배 를 곯은 채 집에 가야 했다. 소위 '문명인'입네 하는 자들은 내가 어느 하교를 졸업하고 집안은 무엇을 하는지나 물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ㄷ. 그런 태도를 보 고 나는 알게 되었다. 남자들이 나를 원하게 하려면 그들에게 뭔가 좋은 것을 제공해야 하고 내가 그들에게 좋은 것을 바치지 않으면 그들은 아이스크림이나 사주고 입이나 한 번 맞추고 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왕 팔려면 통쾌하 게 팔자. 나는 이것을 깨달았다. 도자기 같은 젊은 부인은 이것을 몰랐던 것이 다. 나와 어머니는 그걸 깨우쳤던 것이다.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어졌다. 33 어떤 여자들은 낭만적으로 밥벌이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자본이 부족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몸을 팔기로 했다. 그러나 집주인이 집을 나 가라고 했다. 주인은 퍽 체면을 따지는 사람이엇다.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이사를 했다. 어머니와 새아버지가 살던 그 방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 사람들은 체면을 따지지 않았고, 성실하고 사랑스러웠다. 이사를 한 뒤 내 장사는 썩 잘되 었다. 문명의 물을 먹은 사람들도 왔다. 나는 팔고 그들은 산다고 여기며 '문명 인'들이 자주 왔다. 그들은 손해도 보지 않았고, 체면도 잃지 않았다. 처음 시작 할 때 나는 두려ㅇ다. 나는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었다. 그리나 며칠 지니자 두려 움이 가셨다. 그들은 자기들이 축 늘어져야 비로소 됐다고 여기며 만족했고, 또 나 대신 무료 선전을 해주기도 했다. 몇 달을 그러고 나니 나는 아는 것이 더 많아졌고, 사람을 보기만 하면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맞추게 되었다. 돈 있 는 사람은 항상 몸값을 먼저 물어며 자신이 나를 살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런 사람들은 사창가에서도 독점을 하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난 받지 않 는다. 그들은 성깔을 부려도 무섭지 않다. 집에 가서 당신 부인에게 이르겠다고 말한다. 소학교에서 몇 년 배운 것이 헛것은 아니어서, 그러면 대개 나를 위협하 지 못한다. 교육이란 씀모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어떤 사람은 행여 속임에 넘어갈까봐 전전긍긍하며 돈 일원을 손에 꼭 쥐고 온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서 비스에 따라 가격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 그러면 귀엽게도 돈을 가지러 집에 가곤한다. 정말 재미있다. 괘씸한 것은 돈을 쓰려고도 하지 않 으면서 담배나 크림 따위를 슬쩍해 가지고 달아나는 괘씸한 녀석들이다. 그렇다 고 그런 녀석들에게 미움을 살 수도 없다. 그들은 안면이 넓어 한 번 미움을 사 게 되면 경찰을 불러 소란을 피운다. 그들에게는 등을 돌려서는 안되고, 그들을 먹여살려야 한다. 그러다가 내가 경찰과 안면을 트고 나서 하나하나 손을 보아 주었다. 세상은 약육강식이고, 나쁜 놈들이 이익을 본다. 제일 가련한 것은 호주 머니에 1원자리와 동전 몇 푼을 넣고 찰랑거리면서 콧잔 등에 땀을 흘리는 학생 같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드링 불쌍했지만 그들에게도 똑같이 팔았다. 내게 무 슨 방법이 있겠는가. 나이든 영감님들도 있었다. 다들 단정하고 예절바른 사람들 이거나 아들 손자들이 수두룩한 사람들이엇다.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 랐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돈이 있고 죽기 전에 쾌락을 사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고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험들로 인해 나는 돈과 사람을 알게 되었다. 돈은 사람보다 더 지독했다. 사람이 짐승이라면 돈은 짐승 의 쓸개다. 34 나는 몸에 병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 이 때문에 나는 몹시 고통스러웠다. 나는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쉬면서 거리를 거닐었다. 목적없이, 그 냥 걸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어머니는 분명 나를 위로해 줄 것이다. 나는 내가 곧 죽을 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골목을 돌며 어머니를 볼 수 있기를 고대했다. 문 밖에서 풀무질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만두집은 이미 문을 닫았 다. 물어도 어디로 이사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이 오히려 내 결심을 더 욱 굳게 했다. 나는 기어이 어머니를 찾기로 했다. 넋나간 사람처럼 며칠 동안 거리를 쏘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가 죽지나 않았는지, 아니면 만두집 주인이 천 리 밖으로 이사를 간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울음이 북받쳤다. 나는 옷을 갖추어 입고 화장을 하고 침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렸다. 머잖아 죽을 거라고 나는 믿었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나를 찾았다. 그래, 그를 받자, 그리고 병을 최대한 그에게 옮겨 주다. 나는 이렇게 하는 것에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이것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기뻤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나는 벌써 삼 사십 먹은 사람 같았다. 내 눈시울은 까맣게 되었고, 손바닥은 열이 났지만 상관 하지 않았다. 돈이 있어야 살 수 잇다. 먼저 배불리 먹고 보자. 나는 아주 잘 먹 었다. 누가 나쁜걸 먹으려 할 것인가. 난 자신에게 맛있는 것과 좋은 옷을 사주 어야 스스로에게 덜 미안할 것 같았다. 35 어느 날 아침, 아마 열 시쯤이었을 것이다 내가 장포를 쓰고 방에 앉아 있는 데 미당에서 발소리가 났다. 어떤 날은 열 시에 일어나도 열두 시가 되어서야 옷입을 생각을 한다. 요즘에는 더욱 게을려져 옷을 어깨에 두른채 한두 시간 멍 하니 앉아있곤 했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또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 다. 그저 홀로 멍하니 그렇게 앉아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내 방문 밖에0서 났 다. 아주 가볍고 느렸다. 얼마 후, 나는 방문 유리로 안을 들여다 보는 눈동자를 보았다. 조금 보더니 숨어버렸다. 나는 움직이기가 싫어 그냥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그 눈동자가 다시 나타났다. 나는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가만 문을 열었다. "엄마!" 36 우리 모녀가 어떻게 방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울었는지도 기억나 지 않는다. 어머니느 이미 볼품없이 늙었다. 어머니 남편은 어머니에게 돈 한 푼 남겨놓지 않고, 말 한 마디 없이 몰래 고향으로 가벼렸다. 어머니는 얼마 안 되 는 물건들을 팔고 집을 빼서는 여러 집이 함께 모여 사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는 벌써 나를 반달 넘게 찾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곳을 떠올렸지만 나를 찾을 것이라는 희망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왔는데 나를 찾은 것이었 다. 어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어머니를 부르지 않았다면 아마 그냥 갔을 것이다. 울음이 그치자 나는 미친 듯이 웃었다. 어머니는 딸을 찾았지만, 딸은 창녀이다. 어머니가 나를 키울 때 그렇게 해야만 했듯이 이제 내가 어머니 를 돌볼 때가 되어 내가 그렇게 해야 한다. 여자의 직업은 세습되고, 전문직이 다. 37 나는 어머니가 날 위로해주길 바랬다. 원래 위로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어머니 입에서 위로의 말이 나오길 바랐다. 어머니들 은 간혹 거짓말로 사람들을 달래곤 한다. 나는 어머니 거짓말을 위로라고 불렀 다. 그런데 나의 어머니는 이제 그것도 잊어버렸다. 어머니는 무척 배가 고팠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탓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 물건을 하나하나 검사하고 수입과 쓰임새를 물었다. 딸이 이런 돈벌이 하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듯했다. 나는 병이 났다고 말했다. 며칠간 쉬라고 해 주길 바랐다. 그런데 아니었다. 약을 사주겠다는 말뿐이었다. "우린 언제까지나 이래야 하지요?" 내가 물었다. 어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어찌보면 어머니는 분명 나를 보호하고 싶어했고, 나를 사랑했다. 내게 밥을 해주고 몸이 어떠냐고 묻기도 하고, 엄마가 잠든 아이를 보듯 그렇게 슬쩍 나를 살펴보곤 했다. 이 일을 그만 두라는 그 말 만은 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다소 불만이 있었지만, 나도 속으로 알고 있었다. 이 일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우리 모녀가 입고 먹어야 했다. 이것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모녀 관계가 무엇이며, 체면이 무엇인가? 돈은 무정하다. 38 어머니는 날 보호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람들이 나를 유린하는 것을 보고, 들어야 했다. 나도 어머니를 잘 대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어머니가 몹시 싫었다. 무엇이든 상관하려고 했고, 특히 돈에 대해서 그랬다. 어머니의 눈은 젊 었을 때의 빛을 잃었지만 돈만 보면 눈이 번쩍거렸다. 손님이 오면 시중을 드는 사람으로 자청하다가도 손님이 팁을 적게 주면 욕을 퍼부었다. 이 때문에 나감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런 일 하는게 돈을 벌기 위해서이긴 하 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일을 하면서 욕을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나도 어떤 때는 손님을 잘 대하지 않을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손님이 화를 내지 않게끔 다른 방법을 쓴다. 어머니 방법은 너무 아둔하고, 사람 들에게 욕을 먹기 딱 십상이다. 돈벌이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남에게 욕을 먹지 말아야 했다. 내 방법이 아직 젊고 뭘 모르는 데서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어머니 는 너무 만사불문하고 오직 돈만 밝혔다. 어머니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맣다. 몇 년 지나면 나도 저렇게 될까?사람이 늙 으면 마음ㄷ 따라서 늙어 돈처럼 점점 딱딱해져가는 모양이다. 어머니는 사양하 지 않았다. 소님 지갑을 빼앗기도 하고 손님 모자나 값나가는 장갑, 지팡이를 빼 앗기도 했다. 나는 일이 터질까봐 불안했지만 한편으로 어머니 말이 옳기도 했 다. "하나라도 더 모으는 게 상수야. 우리들 일년 사는 게 다른 사람들 십년 사 는 거야. 칠팔십 먹으면 누가 우릴 원할 줄 알아?" 손님이 술에 취할 때면 어머 니는 그를 부축하고 나가 인적이 드문 고에 앉혀놓고서는 신발까지 빼앗아 왔 다. 이상한 것은 그런 일을 당한 사람들이 집에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 마 인사불성이 되었거나 큰 병에 걸려버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그일을 당하고 그 쓴맛 때문에 다시 못 오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망신을 당할까봐 두려 웠지만 우리들은 아니었다. 39 어머니 말이 옳았다. 우리들 일년 사는게 다른 사람들 십년 사는 거라는 말이 옳았다. 이삼년을 하자 나도 내가 변한 것을 느꼈다. 살결은 거치러졌고, 입술은 늘 까칠하고 눈은 힘없이 핏발이 서려있었다. 잠을 푹 자도 정신은 여전히 흐릿 했다. 내 자신도 느낄 정도였으니 손님이 알아차린 것은 물론이었다. 단골 손님 이 점점 줄었다. 새 손님에게 나는 더욱 열심히 대하려 했지만 그들이 더욱 싫 어졌고, 내 스스로 성질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나는 거칠어졌고, 입도 험해졌다. 나는 이미 내가 아니었다. 내 입은 나도모르게 험악한 소리를 해대고, 거의 습관이 되엇다. 그러자 '문명인'이란 사람들은 나를 찾지 않았다. 그들이 늘 "작은 새 사람을 따르네"라고 읊조리던 그런 여인의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 다. 나는 다른 매춘부들에게 배워야 했다. 꼴같지 않게 화장을 해야 문명의 물을 먹지 않은, 문명인이 아닌 사람들을 끌 수가 있었다. 그들은 통쾌해 했다. 나는 이미 나의 죽음을 보았다. 돈 일원이 들어오면 나는 그만큼 죽어가는 것 같았다. 돈은 생명을 연장시키는 법이다. 그러나 내가 돈을 버는 방법은 그 반대였다. 나 는 내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고, 나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 른 모든 것은 일절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 그만이었다. 어머 니는 나의 그림자이다. 나도 머잖은 장래에 어머니처럼 변할 것이다. 한평생 몸 을 팔고 남은 것이라고는 백발과 주름진 검은 피부뿐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 다. 40 나는 억지로 웃고 일부러 미친 척도 했다. 내 고통은 눈물 몇 방울 떨어뜨린 다고 해소될 것이 아니었다. 나같은 이런 생명은 아까울 게 하나도 없엇지만, 그 래도 생명은 생명이었다. 그저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내가 한 일들은 내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삶이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죽음의 고통이 결코 두렵지 않다. 나의 고통은 이미 죽음보다 더하다. 나는 삶을 사랑한다. 이렇게 살지 말아야 했다. 나는 이상적인 삶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꿈 은 금세 사라져버렸고, 현실 삶은 나를 괴롭게 했다. 이 세상은 꿈이 아니라 진 정 지옥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시집을 가라고 했다. 시집 가면 밥이 생기고 어머니는 양로금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어머니의 희망이다. 나 는 누구에게 시집가야 하나. 41 접촉한 남자들이 하도 많아서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벌써 잊었다. 내가 사랑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나 자신도 사랑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데 내가 누구 를 사랑할 것인가. 결혼할 생각이면 사랑하는 척해야 하고 그와 평생을 살고 싶 다고 말해야 한다. 나는 무수한 사내들에게 그렇게 말했고 맹세도 했다. 그렇지 만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돈의 지배 속에서 사람들은 다들 총명하다. 사창가 를 드나드는 것보다는 도둑질이 낫다. 돈이 남으니까, 내가 돈을 달라고 하지 않 으면 다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틀림없이. 42 바로 그럴 때 경찰이 나를 잡아갔다. 우리 시에 새로 온 괸리는 도덕을 각별 히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고, 사창가를 없애려 했다. 정식 기녀들은 세금을 바치 기 때문에 그대로 영업을 했다. 세금을 내면 정당하고, 도덕적이었다. 그들은 나 를 잡아 순화 훈련원에 넣고 일을 가르쳤다. 빨래, 요리, 뜨개질 등을 모두 배웠 다. 이런 것들로 밥벌이를 할 수 있다면 애초에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도 그들은 그럴 리 없다며, 나더러 가망없고 부도덕 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내게 일을 가르치면서 일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일을 사랑하면 제 손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고 시집도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들 은 낙관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았다. 그들이 실적은 참 좋았다. 이미 십여 명의 여자들이 순화 교육을 받고 시집을 갔다고 했다. 여기서 여자를 얻으려면, 수속비2원을 내고 믿을 만한 상점 명의의 보증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남자들이 보기에는 값이 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웃기는 것이다. 나는 아예 이런 순회교육을 거부했다. 높은 관리가 와서 우리를 검사할 때 나는 그의 얼굴 에 침을 뱄었다. 그런 뒤 위험분자라고 나를 풀어주지 않았다. 그들도 더 이상 나를 순화시키려들지 않았다. 나는 장소를 바꾸어 감옥으로 갔다. 43 감옥은 좋은 곳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인류가 나아진 점이 없다는 것을 믿게 한다. 꿈에도 이런 추악한 유희를 보지 못했다. 감옥에 들어 온 뒤 나는 나갈 생 각을 단념했다. 내 그간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세상이라고 여기보다 나을 게 없 다. 여기서 나가면 더 좋은 곳이 있으면 나는 죽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 실은 그렇지 않고 어디서 죽으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여기서, 나는 다시 나의 오랜 벗 초승달을 보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를 보지 못했던가! 어머니는 무엇 을 하고 계실까? 나는 모든 것을 떠올렸다. 작품해설 근대화 과정 속에 뒤틀린 여성의 삶 '초승달은 근대화 과정에 있는 중국의 한 서민층 결손가정의 여자 아이가 매 춘부로 자라가고 종당에는 감옥에서 끝을 보게 되는 어두운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한 여성의 애처로운 전락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각도를 달리하면 처절한 생존투쟁의 이력이 될 수도 있다. 여성이 아직 독립된 생산주체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사회에서 여성이 살아가는 방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곧 결혼으로 남자의 생산력에 의지하면 서 가사노동을 분담하거나 성을 상품화해 생존에 필요한 물자들을 얻는 것뿐이 다. 그러나 결혼도 남자에게 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또 은폐되어 있기는 하지 만 남편이 아내에게 자신의 생산을 나눠주는 동기에는 상당 부분 제공된 성의 대가라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결혼과 매음은 유사성을 지닌다. '초승달'의 주인공이 사는 근대화 과정중의 중국사회는 겉으로는 제도적인 여 성교육이 있고 일거리도 주어진다. 하지만 교육은 여성이 독립된 생산주체가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 못하고 일자리도 불완전 취업의 한 형태로 그 급여로는 홀로 살아가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거기다가 부모의 보조도 바랄 길이 없는 주 인공은 처음부터 예정된 길을 가듯 매음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는 그런 여성의 삶에 짐지워진 불리한 조건들을 사회적 정 치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데 있는 것 같지 않다. 사실적이면서도 담담한 필치 는 주인공에 대한 연민도 비난도 싣고 있지 않으면 주인공이 그렇게 밀려갈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분석하거나 비판하는 데도 별로 열의가 없다. 저 광란의 문화혁명 와중에서 홍위병들에게 끌려나갔던 작가가 며칠만에 시체로 발견된 배 경에는 그런 문화적 태도도 한몫 했을 것이다. 이 작품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끼닭은 무엇보다도 간명하면서도 유려한 문 체에 있었다. 아마도 주관적 묘사에서의 절제된 감정과 객관적 묘사에서의 성실 한 관찰이 어울려 만들어진 문체인 듯했다. 그게 초승달의 이미지와 묘하게 연 결되어 중국문학에서는 흔치 않는 섬세함과 애조를 드러낸다.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작가의우리 삶에 대한 느 깜도 감동을 키워준다. 작가는 정명론과도 흡사한 속절없음으로 주인공의 인생 유전을 그려 나간다. 낯선 공간과 시간속에서 이루어지는 주인공의 삶을 위한 안간힘을 우리 가여운 누이의 그것처럼 가슴저린 연민으로 보게 하는 것은 어쩌 면 그 속절없음에 대한 공감인지도 모른다. 노사는 현대 중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세 살 때 부친을 여읜 그가 베 이징 사범학교를 거쳐 고등사범을 졸업하고 교사로 성장하는 데는 타고난 재능 과 근면이 무기가 됐다. 한때 중하교 교사로 생활하뎐 그는 1924년 런던대학으 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문학을 전공한 라오서는 귀국 후 칭다오의 산둥대 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 37년 '낙타상자'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며 그를 일약 국제적인 작가로 인정받게 했 다. 그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문예계 항적협회를 결성하는 데 앞장서고 중구문 예계의 핵심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인민예술가의 영예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66년 반당분자로 몰려 사망했다가 78년 명예가 회복되기도 했다. 마땅한 대책도 없이(Without Visible Means) 아서 모리슨 지음 장경렬 옮김 런던 동부 지역의 사람들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거나, 열을 지어 모여 다니 거나, 길가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와 소란을 부리거나, 텅 빈 부엌에서 고함을 치 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총파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파업에 미 리 대비하고 있던 어느 한 집단의 노동자들에게 파업에 들어가라는 명령이 떨어 졌고, 그리하여 그들은 파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여기저기 소규모 집단을 형성하 고 잇던 노동자들에게는 동조 파업에 들어가라는 지령이 떨어졌고, 그리하여 아 무 대비도 없던 그들도 파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집단에 속해 있던 노동자들에게까지 파업이 한창이니 파업에 들어가라는 지령이 내려졌 고, 그리하여 그들 역시 파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윽고 연계 업종에서는 파업 이 진행되는 바람에 일감이 떨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 리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다른 지방에서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들 보다 먼저 왔던 사람들이야 사정 이야기- 부두로 몰려가서 소란을 피우고 난입했다는 투의 표현을 의도적으로담고 있는 이야기- 를 듣고는 이미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버린 상황이었지만, 새로 온 사람들은 자 기네들보다 먼저 왔던 사람들의 본을 받아 하는 일 없이 떼를 지어 빈둥빈둥 돌 아다니고 있었다. 아무튼 런던의 동부 지역은 대단히 소란스러웠고, 대부분의 사 람들이 배를 주리고 있었다. 한편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대단한 흥미를 갖고 이 지역에 눈길을 주었으며, 진심 어린 충고를 던지기도 했지만 실제 ㅇ해하는 것 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파업 수당도 받지 못하고 있는 데다가 사정이 이로 운 쪽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 가 있음직한 맨체스터나 버밍엄, 리버풀이나 뉴카슬 등을 향해 도보 여행을 떠 나기 시작했다. 런던에서북쪽으로 뻗은 북부 대로를 따라가다 보면, 열 명 또는 스무 명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때로는 혼자 또는 두사람이 함께 묵묵히 걸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일자리를 찾아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버데트 로에서 모여 빅토리아 공원, 클랩튼, 스탠포드힐을 거쳐 엔필드 로를 따라 걸어 가고 있는 참이다. 일행의 뒤쪽에는 세 사람이 작은 무리를 이루어 함께 가고 있었다.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입심 좋은 사내, 그보다 나이가 좀더 들어 보 이는 과묵한 사나이, 그리고 안색이 창백하고 얼굴에 근심이 어린, 키가 작은 사 나이가 연장이 든 배낭을 둘러멘 채 이따금씩 발작적인 기침을 하면서 앞선 일 행을 뒤따라가고 있엇던 것이다. 일행은 거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채 생각에 잠겨 묵묵히 보도와 도로를 따 라 자기 갈 길을 가고 있엇다. 아무튼 이들 노동자의 모습을 보면 뜨내기 일꾼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얼굴도 깨끗했고 옷도 잘 손질이 되어 있어서, 지방 법원 에 가서 재판에 배석한 다음 돌아오는 배심원들로 본다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였다. 조그마한 밭을 사이에 두고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 이르게 되자 주위를 둘 러보기 시작했다. 일해의 맨앞에 서서 가고 있던 사람은 아직 마음에 걸리는 식 솔을 거느리지 않은 젊은 친구였는데, 그는 이번 여행을 기분전환을 위한 심심 풀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엇다. 그래서 아코디언까지 메고 나왔던 것이다. 전체적 인 분위기가 침울하다는 것을 못마땅히 여긴 그는 자기네들이 지금 알렉사드라 궁전으로 가고 있다는 투의 농담을 하면서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했다. 그때 배 낭을 메고 맨 뒤쪽에서 따라오던 키 작은 사나이가 자기도 모르게 주머니에 손 을 집어넣더니,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앞을 응시하면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주 머니에서 손을 꺼낸 다음 그는 자기 손에 쥐어져 있는 3실링의 돈을 내려다 보 았다. "어째 이런 일이!" 그가 말했다. "여편네일꺼야, 이런 짓을 한 건. 길을 떠날 때 몰래 살짝 넣은 거겠지! 자기는 애들하고 1실링밖에 없을 텐데." 그는 걱정스 러운 듯 갑자기 진땀을 흘렸다. "우체국에서 도로 부쳐주어야겠군. 그러면 되겠 지." "부치다니오? 그건 말도 안되지!" 그의 옆에서 함께 걸어가고 잇던 입심 좋은 젊은 사나이가 강한 경멸감이 담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부인께선 괜찮을 거 니, 당신 앞가림이나 하쇼.. 여자들은 항상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합디다. 곧 피눈물이 날 정도로 그 돈이 필요할 걸.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 테니, 그냥 갖고 계쇼. 노형, 안 그렇수?" 그는 데이브라는 이름의 과묵한 사나이에게 동의 를 구했다. "거참, 이상하구먼." 과묵한 사니이가 대꾸했다. "우리집 여편네는 내가 떠나기 전에 주머니 밑바닥까지 털어 갔거든. 게다가 돈을 곧 얼마쯤 더 보내지 않으면 자기를 빌어먹게 했다고 사람을 보내고 난리를 필 게 틀림없단 말이야. 여자도 여자 나름이야." 도보 여행은 계속되고, 갈수록 길은 점점 더 먼지 투성이가 되었다. 맨앞에 서 서 가던 쾌활한 사나이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팔머즈그린에 당도했 을 때, 네 명의 사나이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팔머즈그린에 당도했을 때, 네 명의 사나이가 엔필드의 병기 공장에 일자리가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하 면서 곧장 앞으로 가 버렸다. 별다른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머지 사 람들은 방향을 왼쪽으로 바꾸어 퍼터즈바 쪽으로 갔다. 조이 클리이튼이라는 이름의 키 작은 사나이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 가 데이브에게 이렇게 물었다. "데이브, 어느 쪽이 더 가까운가? 뉴카슬이 더 가 까운가, 아니면 미들즈브러가 더 가까운가?" "미들즈브러가 더 가깝지. 내가 실제 걸어가 본 적이 있거든." "걷는다는 것도 결국 그리 고된 건 아니군, 안 그런가?" 조이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어조로 말했다. "어때었나, 괜찮지 않았었나?" "거기까지 가긴 갔었지. 길이 고되긴 고되지만, 형편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법 아닌가? 운이지, 운이야. 내가 걸어갔을 땐 일기가 나빴어." "가서 편하고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거기서도 젠장 파업이나 일으킬까 보다." 입심 좋은 젊은 사나이가 이렇게 말했다. "거기서 파업을 일으키겠다고?" 조이가 놀란 듯이 큰소리로 반문했다. "어떻 게? 누가 가서 사람들을 불러내지?" "왜, 내가 하지요. 나한테도 그만한 능력은 있소이다, 안 그렇소? 노동자들이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부와 풍요와 사치를 생산해 놓고도 그 한가운데서 할 일 이 없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다면, 노동자 형제들이여, 이제 일어설 때가 아니 겠습니까! 노동자를 혹사하여 살이 뒤룩뒤룩 찐 자본가들을 무릎 꿇게 할 때가 아닌가요!" "찬서이오,찬성!" 조이 클레이튼이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열을 올려 갈채를 보 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뉴먼, 아주 멋지구만!" 뉴몬이라는 이름의 이 젊은 사나이는 기회만 있으면 언제나 이런 식으로 한바탕 연설 연습을 하는 버 릇이 있었다. 토론회에서 그런 재주를 익혔던 것이다. 그리고 조이 클레이튼은 항상 열성적인 청중 역할을 했다. 잠깐 주위가 조용해진 다음 아코디언에서 다 른 곡조가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이때 뉴먼이 또 한 마디의 열변을 시도했ㄷ. "공장에서 모두 나를 보고 농때이꾼 뉴먼이라고 합니다. 왜냐? 거야 물론 내 가 농땡이꾼이기 때문입니다." "찬성이오, 찬성." 이번에는 데이브가 어렴풋한 어조로 말했다. "여러분, 난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난 철저하게 농때이꾼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농땡이꾼으로 남을 겁니다! 노동자가 일을 덜 하면 할수록 자보 가들은 노동자를 고용해야 하지 않소? 안 그렇소? 그래서 난 농땡이를 치겠다, 이 말입니다. " "한두 주일 정도라면 자네 맘대로 농땡이를 치게나." 데이브 버지가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지만 말 좀 삼갔으면 쓰겠구만." 포터즈힐에 다다르자, 일행은 발길을 멈추고 울타리 아래에 앉아 빵 한 덩어 리와 치즈를 먹거나 또는 빵 한 덩어리만 먹은 다음, 깡통에 든 차가운 차를 마 셨다. 아무것도 준비해 오지 않았던 농땡이꾼 뉴먼은 그의 두 동료한테 얻어 먹 고 마셨다. 일행이 다시 길을 재촉하여 북부 대로에 들어섰을 때 뉴먼은 허리를 편 다음 교활한 눈으로 조이 클레이튼 쪽을 슬쩍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나한테 한두 실링만 있다면 노형들한테 맥주 한 잔씩 앵길텐데요." 조이가 심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글세, 자네한테 돈이 없으면 나라도 한턱 내야 되지 않겠나." 편치 않은 듯한 어조로 이렇게 대꾸했다. "글세, 그런 식으로 멋을 부리는 건 잘하는 짓 같지 않은데." 나중에 조이는 적어도 2실링은 부쳐야겠다는 생각에 우체국 앞에서 멈추려 했 다. 그러나 뉴먼이 이에 반대했다. 비상시에 필요할지도 모르는 돈을 손이 안 닿 는 곳에다 보낸다는 것은 얼마나 지각없는 행동인가를 세세하게 설명하기도 하 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는 것이 여자라는 자신의 논리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조이는 적어도 하루이틀 동안은 뒤로 미 루었다가 돈을 부치기로 마음먹엇다. 길 사정은 점점 더 나빠지고 더욱더 많아졌다. 사람들의 행색이 점점 더 뜨내 기를 닮아가고 잇었다. 이따금씩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저녁 무렵이 가까이 되어서는 완전히 멎고 말았다. 연주를 하던 사람도 지쳤지 만, 걷는 일에 곧 싫증을 느끼게 된, 일행 가운데 몇몇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아 코디언 소음을 짜증스러워했던 것이다. 먼지 때문에 기침이 한층 더 심해진 조 이클레이튼에게는 발작적인 기침이 일고 난 다음에 들리는 아코디언 소리가 특 히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지금가지 열댓 번은 되풀이해서 연주되었던 곡조들의 느리고도 웅웅거리는 소리는 정말로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지 자신도 잘 모르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하트필드 역에서 일행 가운데 앞장을 서서 가던 두 사람이 어느 승객을 거들 어 무거운 짐을 날라 주고는 동전 몇 닢을 받았다. 딕스웰힐까지 왔을때는 함깨 모여 가던 사람들이 흩어져 길다란 줄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조심을 하고 있 었다. 이윽고 밤이 되었다. 밤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고 밤 공기는 감미로웠다. 웰원과 코디코트 중간 지점에서 일행은 잠을 청할 만한 헛간 같은 곳을 찾아 모 두 흩어졌다. 아코디언 연주가만은 웰원에 있는 자그마한 주막에 머물렀는데, 한 곡조 연주를 해서 운이 좋으면 맥주 한 잔에다 헛간 한 구석(아니면 더 좋은 곳)이라도 얻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데이브 버지가 외따로 떨어져 있는 한 채의 초가 오두막을 찾아냈는데. 그 안에는 아직 묶지 않은 거초더미가 쌓여 있었다. 뉴먼은 곧장 건초더미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가장 아늑한 구석자리로 가서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데이브 버지는 뉴면이 깔고 누운 자리에서 건초더미를 약간 끌어낸 다음 그 다음으로 좋아 보이는 장소에 조이 클레이튼을 도외 그의 잠자 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이내 잠이 들어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이 는 하룻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기침을 하면서 이리저리 뒤척거렸다. 이런 환경에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몇 달 동안 감옥 신세를 지게 될까뵈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 헛간에서 잠을 자기 로 한 모든 사람들 사이에 그 이야기가 심술궂게 돌았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엔 다행히도 코디코트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북쪽으로 자전거 를 탁 가던 세 사람이 음식점에서 냉육과 빵을 사서 골고루 대접해 주었던 것이 다. 아코디언을 가진 사나이가 그들을 따라갔다. 잠자리와 아침 식사, 그리고 8 펜스의 돈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히친에 머물러서 적어도 하 루를 보내기로 작정을 했다. 그 다음 일행과 헤어져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떠 돌아다닐 계획이었다. 그래서 히친을 지나고부터는 음악이 없었다. 이윽고 조이 클레이튼의 발걸음이 처지기 시작했다. 뉴먼이 마음속으로 무언 가 계획을 꾸미고 있는동안, 세 사람은 일행과 떨어지게 되었고 조이는 비틀거 리며 힘겹게 다른 두 사람의 뒤를 겨우 따라가고 있었다. 수면도 부족했고 체력 도 달렸던 것이다. 데이브 버지가 연장이 든 배낭을 들어주었다. 그래도 몇 번이 고 쉬지 않으면 안되었다. 뉴먼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동료들과 떨어지지 안 겠다는 결심을 피력한 다음 한 잔하자고 넌지시 말햇다. 데이브 버지는 헨로우 에 있는 철도 횡단로에서 기차가 지나가는 동안 놀라서 날뛰는 말을 잡아 주고 2펜스의 돈을 벌었다. 그때부터 조이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황토색의 누런 길만 보아도 현기증이 일었으며, 세상이 어떤 때는 빨갛게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파랗게 보이기도 했다. 잦은 기침 때문에 몸의 상태가 그야말로 엉망이었 던 것이다. 때로는 동료의 부축을 받고 때로는 혼자 비틀거리며, 걷고 있다는 사 실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일행 가운데 다른 사람들은 한참 멀 리 가 버려서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풍차가 있는데 거기에 가서 쉬겠 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비들스웨이드 바로 외곽쪽에 있는 강가의 낡은 선승 대기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잠에 취해서 비틀거리며 걷던 조이는 무너져내리 듯 바닥에 쓰러지더니 그대로 누워해질 무렵부터 그 다음 날 아침 해가 훤할 때 까지 꼼짝하지 않고 잠을 잤다. 눈을 떠보니 데이브 버지는 문 쪽에 앉아 있었으나, 뉴면의 모습은 보이지않 았다. 또한 연장이 든 배낭도 눈에 띄지 않았다. "찾아보았자 헛일이지."데이브가 말했다."그놈 짓이거든." "뭐라고?" "그놈의 농뗑이꾼이 자네 연장을 슬쩍해 갖고서 연자을 슬쩍해 가지고 도망쳐 버렸어. 그놈이 지금쯤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겟나." "그럴 리가!" 조이가 새파랗게 질린 채 벌떡 일어나 숨을 헐떡이며 이렇게 말 했다. "연장을 훔쳐 가다니... 설마 그럴 리가... 맙소사, 그 배낭 안에는 15실링이 나 나가는 값비싼 연장이 들어 있었는데. 두께나 지름을 재는 데 쓰는 연장 있 지 않은가... 설마 그 친구가 도망이야 갔을라고..." 데이브 버지가 덤덤한 표정으로 그게 사실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머니도 뒤져보게나. 아마 거기에도 손을 댔을 걸." 그가 말한 대로였다.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 작은 키의 사나이를 엄습했다. "어째 이런 일이. 그 2실링은 집에 부칠 돈이었는데... 게다가 연장도 없어졌으니 일은 어떻게 하지? 일자리를 못 구하면 그거라도 저당 잡혀 집에다 돈을 부칠 작정이었는데 어째 이런 일이... 이건 정말 너무하군!" 많이 걸은 데다가 잠까지 너무 오랫동안 자고 보니 온몸이 쑤시고 뻐근했다. 그런 조이를 다시 걷게 하느라고 데이브는 진땀을 빼야만 했다. 어제 오후 일을 기억하지 못하던 조이가 처음엔 앞서 가던 일행에 대해 묻기도했다. 몇 마일 동 안을 둘은 말없이 터덜터덜 걸었다. 그러다 갑자기 조이가 길가의 풀덤불에 몸 을 던졌다. "왜 아무도 나를 살게 내버려두지 않는 거지?" 그가 훌쩍이며 말했다. "난 누 구한테도 해를 끼친 적이 없는 그런 친구란 말일세. 리터슨 공장에서는 어린 시 절부터 근 20년 동안이나 일을 했다네. 그런데 그들이 와서 나가라고 하길래 다 른 사람들과 함께 나와 버린 거지. 아무런 소란도 피우지 않고 조용히 나왔단 말일세. 나야 일을 그만두고 싶었던 건 아니지. 이건 하나님도 알고 계셔. 그런 데 그들이 나보고 나가라고 하길래 즉시 나와 버린 거란 말일세. 그러다가 섬에 가서 다른 일자리를 구했더니, 덩치 큰 친구들 네 명이 몰려와서 나를 반쯤 죽 여 놓더구먼. 난 그곳이 파업 대상 구역인지 몰랐단 말일세. 그 친구들 가운데 두명이 경찰에 검거되었을 때 조합에서 그들을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하라고 하더 군. 그렇게 하면 파업 수당을 다시 주겠다고 했단 말일세. 그래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했지. 그런데 파업 수당을 주기는커녕 실컷 조롱한 다음 쫓아내더란 말일세. 이젠 길 바닥에 나ㅇ아 굶어 죽게 되었으니... 그 농뎅이꾼이... 맙소사, 그 친구 가 나한테 그런 짓을 하다니!" 그 무렵 조이는 화물차 뒤에서 빼낸 무를 먹는 법도 배우고, 철 이른 무나마 감지더지하게 여길 줄도 알게 되었다. 또한 구걸하거나 도둑질하는 수완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에는 엄두도 못내는 사람에게 떠돌이 생활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도 여러 가지 면으로 배웠다고도 할 수 있엇다. 어쨌든 그는 줄곧 기침을 했으며, 심할 경우엔 기둥이나 문을 붙잡고 기침을 하다가 어떤때는 피까지 토 했다. 입을 다물고 아무것에도 눈을 주지 않은 채 그는 기계적으로 터벅터벅 걸 을 뿐이었다. 한 번은 마치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럽게 물었다. "다른 사람 들은 없었던가?" "다른 사람이라니?" 잠시 어리둥절해진 데이브가 이렇게 되물었ㄷ. 그리고는 말했다. "아. 그렇지, 다른 사람들도 있엇지. 자네도 알다시피, 벌써 앞으로 가 버 렸네." 입을 다문 채 반 마일 가량 터덜터덜 걸어가더니, 조이가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들도 역시 힘들겠지." "뭐, 그렇겠지." 데이브가 말했다. 잠시 동안 기침을 할 때만 빼 놓고 조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다 시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은 아코디언을 갖고 가지 않는 여행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아코디언을 갖고 있더군. 아주 잘 지내던데. 아코디언으 ㄹ연주하면서 가면 그렇게 힘들건 없지." 데이브 버지는 머리 위의 모자를 손으 로 문지르면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조이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운수가 사나운 날이었다. 농가에서 빵 부스러기를 좀 얻어 먹었을 뿐이었다. 언덕을 넘고 다른 길로 들어서도 끝도 보이지 않는 누런 빛깔의 길이 그들의 불 안한 마음에 조소라도 퍼붓듯이 한없이 펼쳐져 잇을 뿐이었다. 이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 조이는 데이브 버지보다 한결 더 차분하게 견더 내고 있었 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조이가 다시 입을 열엇다. "아무렴, 아코디언을 연주 하면서 가면 그렇게 힘들 건 없지. 그 사람들 아코디언을 아주 잘 이용하더구 먼... 빌어먹을." 그러다가 갑작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우리 모두는 아코디언과 같은 신세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숨을 헐떡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우 리는 단지 아코디언을 수없이 모아 놓은 것이나 다를 게 없지." 겨우 숨을가다듬 게 되었을 때 다시 말을 이었다. "그사람들이 우리를 아코디언 다루듯이 다루어 자기들이 원하는 거라면 아무 곡조나 연주해 댄단 말일세. 그걸고 먹고 사는 거 지. 여보게, 데이브, 우리 모두는 아코디언 같은 신세란 말일세." 그렇게 말하고 서 그가 웃엇다. "글세, 그런 것도 같군." 데입가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를 하면서 상대의 표정 을 묘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조아한테서 그런 식의 웃음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이는 이 기발한 비유에 넋이라도 빼앗긴 듯이 이따금씩 아코디언 이 야기로 되돌아갓다. 어떤 때는 혼자 중얼거리듯이 그 이야기를 입에 올렸던 것 다. "모두가 아코디언이란 말일세. 빌어먹을. 그들이 시키는 대로 어떤 곡조라도 뽑아내는 아코디언이란 말일지... 우리가 아코디언 신세라고? 아니야, 그 정도도 못돼. 우리야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건반에 불과할 따름이지. 곡조에 맞춰 그들이 제멋대로 눌러 대는 건반일 뿐이야... 빌어먹을, 양철 조각같이 보잘 것 없는 건 반인 셈이지...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건반이란 말이야... 그동안 나를 갖고 꽤나 잘 놀더군. 오랫동안 나를 갖고 놀더란 말이야." 데이브 버지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는 화제를 바꿔보려 고 했다. 그러나 조이는 데이브의 말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동안 나를 갖고 꽤나 잘 놀더군. 오랫동안 나를 갖고 놀더란 말이야." 고집스럽게 그가 말 을 이었다. "한 번은 어떤 친구가 나를 갖고 놀았는데 그만 스프링이 끊어지고 말았네." 밤에는 운수가 더욱더 사나웠다. 가죽 각반을 차고 개를 데리고 다니던 사니 이가 모처럼 찾은 그럴싸한 헛간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얼마를 가 보았지만 적당한 잠자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윽고 다듬어 놓 은 건초더미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꼭대기까지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위 로 올라가 보니 잠을 잘만한 자리가 있엇다. 한밤중에 버지는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 축축한 손으로 자기 얼굴을 만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깨어나서 보니 짙은 안개가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데이브, 자네 아닌가?" 클레이튼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고, 난 자네를 잃었나 해서 걱정했지. 여기 이게 다 뭔가? 설마 물은 아니겠지? 물에 빠진 건 아닌가? 옷이 몽땅 젖어 있구만." 버지 자신도 속옷까지 몽땅젖어 있엇다. 그는 조이를 눕게 하고선 어서 자라 고 했다. 그러나 기침이 발작적으로 나서 그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코디언 소리 때문이네. 그게 내 잠을 깨우고 말았네." 기침이 멎자 조이가 이렇게 해명 삼아 말했다. 이럭저럭 밤이 가고, 한기가 느껴지는 여명이 세상을 감싸면서 새벽이 가까워 졌음을 알렸다. 이들 두 명의 떠돌이는 잠자리에서 내려 왔다. 오들오들 떨리는 몸을 녹이기 위해 발에 힘을 주어 쿵쾅거리면서 한길로 나갔다. 그날 아침 조이는 이따금씩 엄습하는 현기증에 잠깐 동안 정신을 잃곤 했다. "스프링이 끊어져 버렸단 말일세." 다시 정신이 들면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야철 조각같이 보잘 것 없는 그놈의 빌어먹을 건반이 고장 나 버리고 만 거야." 그리고 한 번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이제 한 곡조 더 올릴 참이네. 말 도 안돠는 죽음의 행진곡을 울릴 참이지." 마을을 벗어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조이가 어느 집 문에 기애어 기침을 하고 있을 때였다. 풍채가 당당한 노부인이 조그만 털북숭이 강아지를 데리고 걸어 나가다가 그에게 1실링짜리 돈을 쥐어 주었다. 손이 말을 안들어 조이는 그것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데이브가 그것을 주워 주면서 이렇게 해명 삼아 말했다. "여 보게, 1실링짜리야. 어떤 마나님이 자네한테 주는 거네. 자, 어서 가서 맥주라도 한 잔하세." 그들은 데이브가 전날 번 돈으로 2페니짜리 빵을 사가지고는 조그만 주막의 술청으로 들어갔다. 데이브는 맥주를 주문했으나, 조이는 1페니어치의 찐을 섞은 독한 맥주를 주문했다. 이윽고 찐을 섞은 독한 맥주로 인해 머리끝까지 취하자 조이는 자기도 모르게 탁자 위로 머리를 떨구었다. 1실링을 내고 받은 거스름은 옆에 그대로 남겨 둔 채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데이브가 일어서서 아직 남은 빵 조각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술 청 구석에 있던 당구 놀이에 사용되는 흑판에다 백목을 집어들고 이렇게 썼다. '제발 부탁입니다만, 이 사나이를 구빈원에 데려다 주십시오.' 이으고 식탁 위에 널려 있던 동전을 한데 모아 놓고 그는 조용히 거리로 나갔 다. 작품해설 분배의 그늘에서도 엇갈리는 삶의 명암 생산에서의 불평등은 개인의 능력이나 운수의 문제로 치부되어 오랫동안 사람 들은 그로 인한 소유의 집중에 관대했다. 하지만 그럴 때도 부정한 수단을 쓴 과다한 생산은 진작부터 비난받고 경계당했다. 거기다가 불평등한 생산으로 집 중된 소유는 곧 힘으로 전화돼 분배의 불평 등을 심화시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서 생산의 불평등 문제는 분배의 불평등 문제로 수합되었다. 분배의 불평등은 일쑤 우리 삶을 밝음과 어둠으로 갈라놓는다. 그로 인한 소 유의 집중은 대개 그만큼 다른 동료의 몫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 다. 집중된 소유의 초과분이 향상된 생산력과 정확히 일치해서 다른 동료의 몫 을 건드리지 않은 경우에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번에는 상대적 빈곤감이 불화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마땅한 대책도 없이'는 바로 그런 분배의 불평등이 연출한 세상의 어두운 측 면을 그려보이고 잇다. 곧 소유의 집중으로 노동력밖에 가진 게 없게 된 사람들 이 파업으로 노동력을 팔 기회조차 잃고 떠돌면서 겪는 일들을 짤막하지만 인상 적으로 그린 단편이다. 이런 얘기를 쓸 때 흔히 작가들이 빠지는 유혹은 세상을 눈먼 정의로 재단하 는 것이다. 곧 힘없음과 못가짐을 바로 선으로 간주하고 그래서 그 반대편에 있 는 힘있고 가진 자들을 악으로 단정하는 게 그렇다. 그리하여 한쪽에는 끝없는 미화를 바치고 다른 한쪽에는 그 악덕의 한없는 과장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유혹에 빠져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선 눈길을 끈다. 작가는 틀림없이 그들 힘없고 못가진 부랑 노동자 집단에 대해 연민을 품 고 있기는 하지만 무조건적이지는 않다. 다같이 어두운 삶에 던져져 있어도 거 기에는 나름의 분별과선악이 있음을 작가는 날카롭게 꿰뚫어 보고 있다. 뉴먼은 언젠가는 노동운동 현장에서 목소리 높은 선동가로 나타날 것임에 틀 림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선량한 동료를 등치고 궤변으로 자신의 게으름을 합리하다 마침내는 도둑질 중에서도 가장 비열하고 파렴치한 도둑질로 정체를 드러낸다. 이에 비해 데이브는 진정한 동료애로 병든 클레이튼을 돌본다. 그도 끝내는 클레이튼을 버리지만 그때도 절규화같은 판서를 남긴다. '제발 부탁입니 다만, 이 사나이를 구빈원에 데려다 주십이오.' 인정의 애틋한 묘사도 이런 종류의 작품들이 가지는 상투성에서 벗어나 있다. 조이 클레이튼 부부가 아마도 그들의 마지막 재산인 듯한 3실링을 놓고 벌이는 실랑이는 비록 몇 줄 삽화로 처리되어 있지만 읽는 이를 눈물겹게 한다. 가진 자를 비난하는 백 마디의 격렬한 구호보다 분배의 그늘에서 죄없이 고통받으면 서도 따뜻한 사랑과 인정을 잃지 않는 이들의 행태가 집중된 소유의 부당함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일개워 주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분배의 불평등보다도 그걸 받아들이는 인성의 차이에서 삶의 명암이 엇갈린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은이 아서 모리슨은 영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다. 기자로 활동하던 1880 년대 초엽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 1894년 단편집 '초라한 거리의 이야기'를 출간 하면서 유명해졌다. 그의 대표작은 1902년 발표된 '벽에 있는 구멈'이며 1894년 부터 마틴 헤위트를 주인공으로 해 발표한 일련의 탐정소설들도 널리 알려져 있 다. 동양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일본의 화가들'이란 책을 내기도 했으며 말 년에는 소설 창작을 그만두고 영국과 유럽 대륙을 돌며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하 는데 열정을 바쳤다. 종시형(Life Sentence) 마르틴 A. 넥쇠 지음 정병조 옮김 마티스 로우는 늙은 부모를 둔 외아들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사 십대였고 아버지는 그보다도 열 살이나 위였다. 그는 젊고 혈기왕성한 부부에게 하나님이 내려 준 선물이 아니라 이미 나이 걱정을 하는 두 사람에게 때늦게 태 어난 걱정거리였다. 모든 아이는 많건 적건 어른의 나이를 짊어지고 나오는 법 이며, 이 경우처럼 늦게 아이를 낳을 때도 역시 그렇다. 마티스가 이 세상에 나 왔을 때 그이 부모는 그들의 넘치는 활력을 완전히 소진해버린 다음이었다. 그 는 실히 세 사람 몫의 기운이 있었지만 어머니의 우는 소리와 아버지의 흐릿한 눈 밑에서 불 같은 기운을 겨우 꺼지지 않도록 태우기란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들은 그가 장난을 치고 노는 강한 충동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을 시 들게만 했다. 이런 짓도 못하게 하고 저런 짓도 못하게 했다. 헐어빠진 어부의 오막살이 회벽에 숯으로 낙서를 해도 안되고,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전나무로 만든 소박한 테이블을 무슨 물건으로 치는 것도 안되엇다. 대개의 부모들처럼 그들은 살아있는 아이보다 생명없는 물건을 더욱 중히 여겼다. 그래서 어린 마 티스는 이내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없는 존재라는 것을 똑똑히 알았다. 어린 소년이 갈퀴의 이를 부러뜨렸다든지 낡은 어망의 코를 몇 개 망그러뜨렸다 든지 하고도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은 확실히 양친의 무한한 호의에 힘입은 것이 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리로 말하자면 벌써두들겨 패서 녹초가 되게 했어 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마티스의 양친은 그렇게 몹시 아들을 때리는 부모는 아니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자비심 때문에 또 한 번 정의를 굽힌다는 것을 알려 줄 뿐이다. 끊임없는 위협인 양 회초리가 그의 소년 시대를 억누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자기 몫의 일을 해야 했다. 그것은 그에게는 조금도 귀찮지 않았다. 그는 단지 혼자 그 일을 하고 싶었다. 혼자서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일이 저절로 아주 재미나는 놀이로 변하는 것이엇다. 그러나 아버지나 어머 니가 곁에 있으면 금방 짜증나는 고역이 되었다. 이런 모든 악조곤에도 불구하고 그는 참다운 소년으로 성장해서 학교 교실보 다 항구와 해변을 좋아했고 일단 세상에 나가면 써먹게 될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박차고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는 그 어촌의 어떤 아이도 무서워하지 않았고 부모는 그의 일상적이지 않은 행동과 무 모한 장난릉 들면서 투덜투덜 불평을 했다. 그들은 그가 쉬는 시간에도 창가에 앉아서 손에 책을 들고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어디 있는지를 알고 뭘 부수 거나 너무 과식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누가 찾아오면 그는 얼 마나 쓰고 읽기를 잘하나 보여줘야만 했다. 그들은자기네가 교육받지 못한 것을 아마 그를 통해서 벌충하려는 듯했다. 어쨌든 그가 집에 돌아와서 교회 단상의 맨 앞자리에 앉았었다고 말하던 날만큼 부모를 즐겁게 해 준 일은 없엇다. 견진례를 마치고 그의 학급 아이들은 대부분 사방으로 흩어졌다. 가난한 집 자식들은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는 법이다. 그 해안 촌락에서는 목사가 아동 시 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축복을 내리기가 바쁘게 보금자리를 떠나는 것이 젊은이 들의 습성이었다.. 무엇이 있는 자는 바다로 나가고 그렇지 못한 자는 도시나 먼 섬으로 가서 취직을 했다.-하여간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등신 바보나 집에 처져 서 땅과 여자들을 돌보는 것이엇다. 오래 전부터 바닷가에는 두 종류의 남자가 있었다. 젊은 시절 바다에 나가서 지금은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고 땅을 파 먹는 빙충이가 있었다. 어린 시절을 통해 마티스는 자기가 때만 되면 바다로 나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멀리, 아무도 그 깊이를 모르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치 걱정스러 운 암탉처럼 꼬꼬댁거리면서 해변에서 지켜 보지 못하는 먼 곳으로, 그럼에도 그는 단념을 하고 집에 남아 두 늙은이가 하던 일을 맡아 하게 되었다. 간혹 그 가 박차고 나가려는 계획을 품으면 그드릉ㄴ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아버지는 그를 손바닥만한 땅으로 데리고 나서 마치 그것이 세습 재산인 양 이 야기하며 모든 것을 버리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 때문에 마 을에 있는 누군가가 밤에도 잠을 못 잔다고 낄낄거리면서 가만히 알려 주곤 했 다. 그가 줄곧 집에 남아있기만 하면 장농 밑 깊숙이 감춰 둔 돈이 있는 어여쁜 아가씨를 언제든지 찾아낼 수 있다고 했다. 마티스는 그런 약속이나 사탕발림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오막살이집은 성 냥갑보다 눈꼽만큼도 나을 것이 없었고, 자기가 아는 여자보다는 얼굴도 보지 못한 여자가 더욱 매혹적이었다..그는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타르를 먹여 오크 제목으로 만든 거대한 요람을 굽이치는 파도가 항구에서 항구로 실어보내 는 곳이로. 사실 나가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가 바다농어를 잡아 가지고 아서 고기를 팔려고 범선에 나란히 뉘어 두면 흔히 선장이 그를 고용하겠다고 제의하는 것이었다..- 하는 일이라고는 배에 올라서 조류를 따라 기슭으로 작은 부속선을 띄워 두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슬아슬한 고비에서 그는 남았다. 오막살이에서 투덜거리는 두 늙은이에 대한 의무가 강력하게 그를 붙들었다.-그 는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그들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무거운 노를 당기면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미티스로서는 바다로 노를 저어 나가는 것이 돌아보는 길보다 언제나 쉬웠다.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지긋지긋한 의무에의 길이었고 그 러기에 한결 힘이 드는 것이었다. 그는 자식으로서의 사랑을 조금도 느끼지 못 했다. 부모라는 이름 밑에서 항상 그의 생활을 억누르는 두 늙은이를 돌보는 일 이 조금도 그의 가슴을 흐뭇하게 해 주지 않았다. 만약 죽음이 그들을 데려간다 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버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집에 남아 통풍에 걸린 늙은 아버지 등에 실린 짐을 덜어 어망을 손질하고 손바닥만한 땅을 갈았다.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했으나 먹을 것은 풍족했다. 어머니를 위해서는 말라빠진 암소 두 마리의 젖을 짰고 돼지 머깅 풀 을 썰었고 해마다 두 번씩 세금을 내러 도시에 나들이를 했다. 이렇게 빈둥빈둥 지내자니 마음이 살찔리는 없었다. 그는 늘 입을 다물고 동작도 굼뜨게 되었다. 그가 굳게 결심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결코 시골 처녀 때문에 발목을 잡히 지 않겠다는 게 그것이었다. 일단 부모가 죽기만 하면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그러면 이 세상 어디든지 마음 끌리는 곳으로 자유롭게 가고 싶었 다. 로우 내외는 섬 안쪽, 1마일 안쪽에 위치한 로우엔호프 농장 출신이었다. 이 농장은 마티스의 숙부인 한스 로우의 소유였다. 농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그 뿐이었으므로 그는 일족의 우두머리 대접을 받았다. 그는 거만하고 천성이 몰인정했다. 다른 일가들은 가난한 사람답게 재산을 가 졌지만 그는 여러 가지로 방종했다. 그는 노름과 난봉에는 앞뒤를 가리지 않는 다는 평판이었다. 가난한 일가들은 이것을 부농다운 태도라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 농장이란 그리 크지도 않고 비옥하지도 않았다. 땅의 대부분은 바위 였다. 그래도 농장은 농장이었고 로우 일족은 모두가 지주의 후예임을 자랑했다. 늙고 주름진 마티스의 아버지 눈가에까지도 그런 자랑이 번득했다. 한스 로우는 상당한 나이에 접어들었으나 아이가 없었다. 그러므로-적어도 정 식으로 말하자면- 조카나 질녀 중 누구를 골라서 농장을 물려 주느냐가 문제였 다. 그리고 그것은 한스의 임명을 받은 자가 될 것이라는 근거있는 믿음을 모든 일가들이 은근히 품고 있어서 음밀히 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엇다. 이런 이유로 로우 일가는 그 지방의 다른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 그들의 태도에는 자기네가 지금은 그저 숨어 살아가지만 언젠가는 가난뱅이 딱지를 벗어던질 것 이라는 생각이 은연중 베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제에 맞지 않는 점잔을 뺀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하루는 로우엔 호프 농장의 주인이 그이 집 낮은 지붕 밑에 나타났다. 뜻밖의 일이었다. 마티스는 장작 헛간 뒤에서 헌 보트에 타르칠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한 스 로우가 오는 것을 봤으나 그대로 일을 계속했다. 숙부가 나타날 때마다 부모 가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면 화가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후에 그의 어머니가 종종걸음으로 집 모퉁이를 돌아 뛰어왔다. 어머니가 그렇게 급히 뛰는 것은 좀처럼 보지 못하던 일이었다. "너를 보러 오셨어."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그의 소매를 끌었다."아마 네가 발탁되어서 농장을 소유하게 되나 보다. 이제 좀 의젓하게 해!!" 마티스는 일을 계속하며 어머니가 지껄이게 내버려뒀다. 어머니가 거기 있다 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그가 붓으로 타르를 칠하는 동작을 조심 스럽게 지켜보아야 했다. 어머니는 그를 쫓아다니며 쉴새없이 잔소리를 늘어놓 았다. "'때를 잡아야지. 이번만은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어머니는 계속 졸라댔다. "한스 숙부님이 너하고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는거야. 이번만은 좀 의젓하게 굴 면 어때!"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어머니는 방안의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를 파악하기 위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치맛자락이 발 뒤꿈치에서 춤을 췄 다..평새에서 가장 신나는 날이었던 것이다. 마티스는 눈을 들지 않았으나 어머니가 수선을 떠는 소리를 듣고 화가 치밀었 다. 한스 숙부며 농장이며 그런 모든 것이 그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한스 숙부는 자기가 필요할 때만 일가를 만났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어머니가 빠른 걸음으로 돌아왔을 때 마티스는 무슨 연장을 둘러메고 해변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나 어머니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한스 로우는 농장을 마티스에게 물려 주고자 했다. 그가 죽은 후에 소유이전이 되고 그때까지 마티스와 양친에게 1년 에 백 탈러(3마르크에 해당하는 옛 독일의 은화: 역주)를 주는데 단 한 가지 조 건은 마티스가 곧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엇다. 그의 아내감으로 한스 숙부는 로 우엔 호프의 가정부인 보딜을 골랐다. 자기와 농장을 위해서 청춘의 꽃다운 시 절을 희생한 착하고 성실한 여자였다. 그녀의 충성에 보답하기 위해서 한스 로 우는 그녀가 좋은 짝을 얻어서 살기를 바랐고 자기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떠 난 후라도-얼마 안 남은 장래에- 농장에서 주부로 남아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마티스는 양친을 부양할 의무를 면하기만 하면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를 굴복시키는 데는 힘이 들었다. 그러나 늙은 부모는 그를 못살게 굴었다. 그들은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그에게 보챘고 언젠가는 부농 이 되어서 일족의 우두머리 노릇을 할 수 있다고 그를 유혹했다. 이것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자 늙고 일에 지친 늙은이의 짐을 가볍게 해주기 위해서 자식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않으려고 한다고 징징 울었다. 그들은 그가 가까이 갈 때 마다 한숨을 쉬었고 식사 때는 자식들을 위해서 죽도록 고생하고 그 보답으로 가장 암담한 배은망덕을 거두는 부모 이야기로 반드시 말머리를 돌리는 것이엇 다. 마티스로서는 이런 모든 것을 곧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러서는 도저히 참아 낼 수가 없었다. 의무감이 견딜 수 없게 길을 내놓아서 그 길으 다시 밟고 가기 란 쉬웠다. 그는 자기를 희생하는 게 습관이 돼 있어서 결국 양보를 해버리고 말았다. 그것만이 한 줄기 빛을 들이는 창구멍인 것만 같았고 세상은 절벽같이 문이 닫혀 있는 것 같았다. 마티스의 숙부는 그가 결혼한 후 이상하게도 기운이 회복되어서 늙은 부모는 몹시 분개했다. 아들이 지주가 되려면 아직도 요원했기 때문이다. 마티스는 이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는 남과 섞이지 않았고 보딜이 이내 사내 아이를 낳아 주었 는데도 더 상냥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남아있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생겼 음을 의미할 뿐이었다. 마티스는 아이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러기를 기대하지 않았 다. 그는 눈에 가시처럼 아이를 대했다. 아이가 무심코 좋아하는 것을 봐도 화가 났고 경험으로 미루어 아버지를 피해도 역시 화가 났다. 나중에는 아이가 눈앞 에 나타나기만 해도 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그는 아이에 대한 자기 감정의 이유 를 정확하게 따져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에는 변명이 있기 마련이듯이 마티스는 자신하지만 교육적이라고 스스로 변명했다.. 다른 사람은 아이가 처음 으로 어린 아이다운 장난을 하는 것을 눈감아 주었으나 그는 확고하고 엄준한 행동을 취했다. 그의 소년시절은 고생스러웠다. 지금은 그 유산을 아이에게 물려 주고 잇는 것이었다. 보딜은 감히 그에게 항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티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몰랐다. 그는 결코 아내를 비나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를 두려워했다. 마티 스의 눈은 아내에게 조심할 것을 강요하는 듯한 빛을 띠고 있었다. 마티스가 아 이를 다루는 태도에 관해서 그와 말다툼을 해봤자 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자 신이 돌파구를 찾지 못한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마티스는 어린 한스에게 풀었다. 하루는 마티스가 아이를 잡았다. 소년은 헛간에 나가서 맷돌을 빙빙 돌리고 있 었는데 돌과 바닥 사이에 물이 쏟아지면서 튀는 것이었다. 아이는 장난에 정신 이 팔려서 아버지가 목덜미를 잡을 때까지 마티스가 곁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 닫지 못했다. 덮치고 있는 아버지를 보았을 때 한스는 무서워서 미친 듯이 비명 을 질렀다. 그런데 이 비명이 마티스의 마음속 무엇인가를 자극시켰던지 그의 억센 손이 멈칫 했다. 어리둥절한 채 그는 아이를 건초 더미 속에 내던지고 어 린 것이 자신을 무시무하게 겁내는 데 질려서 비틀거리며 자기 일을 하러 갔다. 소년의 발악하는 듯한 슬픈 울음소리는 일하고 있는 곳까지 울려와서 도끼질 소리가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 소리는 마치 아버지인 자신을 고발하는듯했 다. 그는 울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더욱 힘차게 도끼를 내리쳤으나 그 소리에 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더 참을 수가 없어 도끼를 내던지고 일어 섰다. 망할 것, 저 경을 칠 아이새끼가 다시는 아가리를 못 벌리게 할 막대기가 어딨지! 그는 화가 나서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모든 것이 -그의 분노와 그밖의 모두가 - 그의 내부에서 균 열되더니 허물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이마에 손을 얹고 두려운 눈으로 헛간의 벽을 바라보았다. 혼이 난 소년이 거기 웅커리고 앉아 벌벌 떨면서 더 호되게 매를 맞을까봐 울음을 삼키려고 애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티스 자신이 었다.그리고 맷돌- 그래, 자기도 몰래 숨어 들어와서 그것을 돌렸고 돌이 정말 돌아가면서 물이 튀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빨리, 빨리! 그때는 무 엇이든 빠르게 움직이도록 하고 싶었다. 맷돌이 빨리 돌수록 더욱 거세게 튀는 물을 보면서 얼마나 즐거워했었던ㄱ. 그러나 이것은 금지된 놀이였기 때문에 남 몰래 해야만 했다. 그러면 바닥이 온통 젖고 언젠가는 한 번 호되게 혼이 나는 것이다.- 지금 저 아이가 당하는 것처럼. 사실 바닥은 흙이었으니까 더럽힐 것 도 없었다. 그때 마티스는 어렸지만 무엇인지 그 놀이에는 응결된 감정이 있다 는 것을 인식했고,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는 자라면서 한 조각 한조 각씩 항복하는 게 습관처럼 되었고, 결국은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가 혹하고 쓸모없는 심술쟁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 어린 아이의 죄 없는 즐거 움을 뒤좇아 짓밟아 버리는 푹군이 되어 버렸다. 흐느끼다가는 다시 터지는 아이의 울음이 자꾸만 그에게 비난을 퍼붓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그를 산산이 부수는 듯했고 마침내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아서 숨 을 쉴 수가 없었다. -저 소리를 그치게 해야만 한다! 그는 또 막대기를 찾는 것 처럼 어쩔 줄을 모르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이에게로 뛰어가 그를 번쩍 안아올린 자신의 손바닥이 놀라울 만큼 따뜻했다. 누구를 안는다는 것이 이렇도록 다정스러운 일이가! 그는 아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얼굴을 가 리고 있는 아이의 조그맣고 더러운 손을 떼려고 했다. 아들의 손바닥 생김새가 자기 손과 꼭 같았다. 아들의 손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한 쌍의 가래였다. 손등이나 손바닥 생김새가 자기 손과 꼭 같았다. 마티스도 손을 아끼 지 않고 장난을 한 아이엿다. 소년은 잠자코 얼굴을 가린 손을 떼었다. 아마도 겁이 나서 시키느 대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티스의 눈을 쳐다보지는 못했다. 얼굴을 돌린 채 마티스의 무 릎에서 내려가려고 발버둥쳤다. 마티스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잠시 머뭇거리던 마티스는 아이를 헛간 으로 데리고 들어가 물이 사방으로 튀도록 맷돌을 돌렸다. 소년은 의심을 가득 품은 채 문간에 서 있었다. 그러나 눈빛은 흥미로움을 감추지 못한 채였다. 가만 히 눈동자를 굴려 무엇인가를 열심히 보려고 했다. 그러다가 물줄기가 뻗어 제 발밑까지 갔을 때 아이는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자아, 아버지 솜씨가 어때?" 마티스는 이렇게 말하며 문간으로 갔다. -자신을 아버지라고 말한 것도 처음 이었다. 소년은 아직도 약간 자신이 없는 표정으로 맷돌에 덤벼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장난이 벌어졌다. 희끄무레한 물줄기가 장닭 꼬리 모양으로 송았다가 물이 사방으로 튀는 이 장난에 마티스도 재미가 났다. 여기 이 맷돌 곁에서 약간 늦 었으나마 마티스는 자신이 보낸 소년시절의 편린을 되찾고 웃으면서 아들과 승 부를 겨뤘다. 한스는 처음 수줍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마티스가 그에게 가까이 가야만 했다. 그는 아들이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것이 섭섭했고 때로는 화가 났지만 하 는 수 없는다. 그래서 가능한 한 자신을 낮추고 아이에게 접근했다. 다른 말은 듣지 않다가도 맷돌 장난을 하자고 유혹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즐거워하는 것이 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꼬마는 스스로 찾아와 큰 손에 조그만 자기의 손 을 꼭 쥐어 주었다. 마티스는 어린 아이가 그토록 빨리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마 음을 가졌다는 사실에 놀라는 한편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어 떻게 할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은 오랫동안 응결되어 있어 서 이제는 변형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들과 같이 있음으로써 자기 소년시 절의 다른 한 면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마땅히 그랬어야만 하는 소 년시절을. 이 때문에 그는 한스 없이는 살 수가 없게 되었다. 맷돌 장난과 더불어 놀며 일하는 모든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스가 좀도 커지 자 맷돌이 아닌, 그보다 훨씬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한스는 낚시질을 배우고 돛단배를 탔으며 아버지 농사일을 도왓다. 소년은 항상 마티스 뒤에 있었다. 그 들은 잠시도 서로 떨어져 있지 못했고 세월이 갈수록 더욱더 친밀해졌다. 그러 나 마티스는 한스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예전 그대로 심술궂고 냉정했으며 게 다가 이제는 한스 편을 들어 그를 변호하는 일까지도 맡았다. "그 애는 나처럼 만들지 않아야지." 마티스는 이렇게 자신에게 타이르고 될 수 있는 대로 속박을 받지 않도록 돌 봐 주었다. 마티스가 장래 무엇이 될 것인가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계획을 세 우거나 하면 그는 때가 오면 스스로 선택할 것이라는 간단한 말로 그런 논의를 중단시켰다. 마티스는 소년이 무엇을 택할 것인가를- 한스가 알기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 고 그것을 앎으로써 즐거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감정을 감추었고 한 스의 견진례가 있은 직후 그를 도시로 데리고 가서 선원 고용계약을 맺도록 했 다. 집으로 돌아온 마티스는 헛간으로 갔다. 그리고 하루종일 거기 앉아 맷돌에 자국을 내면서 추억에 잠겼다. 몇 주일 후 소년이 집으로 돌아와 배가 새기 때문에 출항을 못해 계약을 해약 하고 돌아왔다고 설명하자 마티스이 생활은 비로소 생기를 되찾았다. 마티스는 한스가 다른 바닷일을 찾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사실에 대해 설명이 있어야 한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그를 덜 귀여워하거나 책망하 지는 않았다. 같이 일하면서 그들은 새로 한스를 고용할 사람을 수소문해 보자고 자주 이야 기했고 마티스로서는 그 말이 진정이기도 했다. 그는 결코 아들의 장래를 방해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한스는 목수일을 배워서 목 수로서 배를 타겠다고 선언했다.그래야 더 많은 임금을 약속받을 수 있다는 것 이다. 마티스는 약간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단한 이유는 아니어서 아들의 뜻에 동의했다. 그 해 여름, 로우엔 호프 농장 주인이 마침내 죽었다. 마티스의 양친은 아직 살아 있었으나 그들은 노쇠해 있었다. 로우엔 호프에 가서 산다는 희망이 그들 의 수명을 뜻밖에 연장해 준 것이었다. 마티스 자신은 농장을 팔아버리고 싶었 으나 늙은 양친과 보딜이 반대했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을 로우엔 호프로 이사 시키고 자기만 오막살이에 남았다. 그는 농장과 아무 상관도 없었으며 게다가 그들 세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의 삶을 옭아맸다는 느낌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야-그는 모든 억압적 기반에서 풀려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유롭지 않았 고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를 묶고 있던 주변이 그 의 살을 갉아먹는 일은 이제 없었다. 여기 오두막집에서 그는 자기 생명과 연결 되어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마음 속에 노 래를 심어 준 바다와 한스였다. 한스는 일을 배우는 동안 그와 같이 살았고 마티스는 한스의 젊은 마음으로부 터 자신에게로 따뜻한 빛이 전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와 한스가 조만간 헤어져 야한다는 생각은 참기 어려웠다. 소년은 그와 세상을 연결하는 고리였고 그것을 통해서 그는 살고 숨을 쉬는 것이어ㅆ. 그는 이미 자신의 장래에 대해 아무런 욕망도 없었다. 모든 것은 소년을 위한 맹목적인 사랑과 봉사에 바쳐졌다. 그는 이미 먼 나라조차도 동경하지 않았다. 그가 인생에 대해 아직 기대할 것이 있다 면 이제는 한스를 통해 채워져야 하는 것이었다. 한스는 마티스를 위해 인새을 경험할 것이었다. 마티스가 젊어서 잃은 모든 것이 이 소년에게 기꺼이 주어져야 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스를 보낼 수 도 없었다. 이런 감정이 점점 가슴을 에는 아픔으로 변해서 자신을 위해 소년을 희생시킨다 는 자책으로 옮아갔다. 하루는 마티스의 머리에 명백하고 가차없는 생각이 떠올 랐다. 자기가 가는 길을 한때 다른 사람들이 방해했듯이 지금 자기는 한스의 앞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이 생각은 지금 그를 몹시 괴롭게 했 다. 그러나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을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그것은 고독으로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자기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자기를 즐럽게 해 주 는 유일한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것이다. 단념을 하는 데는 길이 들어 있는 마 티스였으나 이번만큼은 피나는 싸움을 하고서야 비로소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 다. 어느 일요일 아침, 그는 한스를 바다로 데리고 나갔다. 대여섯 시간을 그들은 농어가 몰려 잇는 어장에서 농어잡이를 했다. 그리고 육지를 향해 부는 미풍을 따라 와서 닻을 내린 채 정박해 있는 여러 선박에 이것을 팔았다. 한스는 보트 에 남아서 저울질을 하고 마티스는 배 위로 올라가서 뱃사람들과 흥정을 했다. 돛이 셋 있는 어떤 범선에서 기어내려오는 마티스의 동작은 매우 이상했다. 한스는 '배 위에서 술을 퍼먹은 게 틀림없군'하고 언뜻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 생각을 물리쳤다. 아버지는 술을 못 마셨다. 마티스는 노젓는 자리에 앉아서 자 기 앞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무섭게 진지했고 거의 화석이 된 듯했다. "너는 지금 곧 배를 타는 게 좋겠다."하고 그는 목쉰 소리로 말했다. "목수가 필요하다는데 임금도 괜찮게 주겠다는 거야." 아들의 얼굴에는 갑작스럽게 즐거운 빛이 떠올랐다. -늙은 아버지의 빛 잃은 시선에 눈이 미쳤을 때까지. "그렇지만- 아버지는요?" 그는 천천히 물었다. "나? 난 보트로 가서 네 짐을 꾸려 오마. 어둡기 전에 돌아오겠다-그때까지는 바람 방향이 안 바뀔테니까"하면서 마티스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예, 그래도 전 말이예요... 그리고 아버지는 어떻게 하실 거냔 말이에요?" "난 어떡할까? 글쎄-나야-." 마티스는 힘없이 말하다가 뚝 그쳤다. "같이 가요, 아버지! 마음에 걸릴 건 아무것도 없어요. 여기든지 다른 배든지 같이 고용해 달라고 해요. 같이 바다로 가요. 아버지!" 마티스는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거나, 또는 머나먼 음악에 귀를 기울이듯 움츠리고 거기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가 몸을 꼿꼿이 일으켰다. "그래, 같이 가자, 너하고 나하고."하고 한스의 손을 움켜쥐었다. "자아, 이제 배에 올라가라." "이불도 두 채 가지고 가요." 한스가 난간에서 소리쳤다. 마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불 두채! 한스는 정 말 그러라는 걸까? 그의 젊음이 다리에 무거운 짐 덩어리를 끌고 다니는 일에 종지부를 찍는 것 을 요구하지 않을까? 뻐꾸기 새끼처럼 뜻밖에 그의 보금자리에 나타난 한스는 착하고 귀여운 아들이었다. 마티스는 그 아들에게서 받을 맡큼 아니 분에 넘치 도록 많은 것을 받았다. 이제는 끝장을 내야 한다. 배에는 자기가 탈 자리는 없 었다. 그는 아들의 짐과 이부자리를 꾸려서 다른 사람을 시켜 보냈다. 직접 그것 을 가지고 갈 수는 없엇다. 그는 눈으로 보트가 범선에 닿을 때까지 따랐다. 그 리고는 연장을 넣어 두는 헛간으로 들어가서 그물을 고치기 시작했다. 그는 바 람 방향이 바뀌는 것을 느꼈고 앞바다에 있는 범선과 다른 돛단배들이 지금 닻 을 올리고 있을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눈을 들지 못했다. 그는 이제 자기 감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돌아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작품해설 어둡게 파악된 삶의 다른 이름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감동이다. '종신형'은 여러 종류의 감동중에서 우리에 게 가장 익숙하면서도 삶의 본질에 닿아있는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지식과 정 보의 양이 많아지고 사회의 여러 기능들이 세분되기 시작한 이래 작가들도 삶에 대한 총체적인 해석이나 정의를 자신없어 해왓다. 그런데 넥쇠는 이 길지 않은 작품에서 삶이 무엇인가를 인상깊게 정의하고 있다. 어찌 보면 주인공 마티스가 받은 종신형은 그 개인의 불행일 수도 있다. 모든 아이들이 늙은 부모님에게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또 부모가 늙었다고 해도 모 두가 자식을 자신에게 얽어매두려고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결혼도 그렇고 아들과의 관계도 그렇다. 특히 아들과의 화해와 거기서 자라난 사랑이 주인공의 종신형에 마지막 확정판결을 내리는 과정은 콧머리가 시큰할 정도로 감동적이면 서도 아주 별난 인정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문득 그게 별난 주인공의 개인적인 불행이 아 님을 깨닫게 된다.우리도 모두 주인공와 다름없이 종신형을 받은 존재이며 눈여 겨 보면 우리에게도 일생을 갇혀 지내야 할 초라한 어촌과 손바닥만한 땅뙈기와 낡고 작은 고깃배가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를 거기에 가둬놓는 부담스럽지만 저버릴 수 없는 늙은 부모와 한스의 농장처럼 과장되어 있는 전망과 불같이 사 랑하지는 못해도 영 못견딜 정도는 아닌 아내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석방기키 고 싶은 사랑스런 아들이 있다. 결국 종신형은 좀 어둡게 파악되기는 했지만 우리 삶의 다른 이름이다. 모두 들 얼마나 열려하게 자신이 갇혀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꿈꾸는가. 그러나 또한 얼마나 다양하게 그래서는 안될 이유들을 가지고 있는가. 지은이 마르틴 A.넥쇠는 데마크가 자랑하는 최고의 소설가이다. 덴마크의 수 도 코펜하겐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11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어릴적부터 삶 의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온갖 막일꾼 노릇을 하면서 일찌감치 밑바닥 생활을 체험한 그는 교사로 재지하던 청년시절 문학에 뜻을 두 고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스물 아홉 살이 되던 해에 단편집 '그림자'를 낸 것이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되오 이어 발표한 소설 정복자 펠레 가 성공하면서 전 업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유럽의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작가로 평가받는 넥 쇠는 노동문학을 표방한 다수의 작가들이 획일적이고 설교적인 글을 쓰는데 반 해 정갈한 문장으로 인간적인 고뇌와 온유함이 넘쳐 흐르는 소설을 창조해냈다. 이것은 작가가 소년시절 몸소 겪은 빈민층의 삶과 언어가 문학 속에 그대로 형 상화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록된 '종신형'역시 작가의 성향을 매우 잘 보여주 고 있다. 여든 다섯 살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일평생 글쓰기를 계속하 면서 삶과 사람에 대한 애정을 충실히 실천해 나갔던 그는 제 1차 세계대전 이 후 반나치 성향이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강제수용쇼에 투옥되는 등 탄압을 받기 도 했다. 형리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지음 인태성 옮김 목로주점 컴컴한 테이블에서 형리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점 주인이 세워 놓고 간 한 자루의 촛불이 그을음을 올리고 있었다. 그 불빛 속에서 핏빛 옷을 입은 이 덩치 큰 사나이는 망나니의 낙인이 찍힌 자신의 이마에 손을 댄 채로 테이블을 향해 앉아 있었다. 동리의 영감들이며 젊은 직공들이 같은 모양의 테 이블 저편에서 맥주잔을 놓고 떠들고 있었지만, 그가 있는 쪽에는 아무도 없엇 다. 여급은 돌바닥 위로 발소리를 죽이고 걸었다. 잔에 술을 따를 때 그의 손은 덜덜 떨렸다. 한 견습공이 살그머니 소리없이 들어와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그리고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집어 삼킬 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은 술이 아닙니까, 영감님!" 하고 한 직공이 소리쳤다. "이 집 안주인이 처형장에서 도둑놈의 손가락을 잘라다가 그놈을 술통 속에 실로 매달아 놓았거든요. 영감님깨서는 다 알고 계시겠지만요. 안주인으로 말하 면 자기보다 나은 술을 빚는 놈이 있면 기분이 상해서, 손님을 위해서라면 그야 무슨 짓이든 다 해주죠. 아무튼 처형장에서 얻어 온 손가락만큼 술맛을 좋게 하 는 것은 없다니까요. 네, 그렇지 않아요?" "그건 그래. 그 쪽에서 가져온 건 뭣이든 다 이상한 힘이 잠겨 있거든." 입이 비뚤어지고 몸집이 조그만 구두 수선장이 영감이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 으로 반백이 된 윗수염에 묻은 술을 씻어 냈다. "정말 굉장하거든요." "정말이지. 장담해. 지금껏 기억하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 고향 쪽에서 농부가 밀렵을 한 것이 탄로나서 목 졸려 죽은 것을 본 일이 있지. 자기는 그런 일이 없다고 발뺌을 했지만. 그래서 결국 나리가 발판에서 그놈을 걷어차서 밧줄이 팽팽히 당겨졌어. 그 순간 그놈은 단번에 빠져 버렸지. 그러자 그 근방 언덕 일 대에 어느덧 냄새가 확 풍겼어. 꽃은 다 축 늘어지고 동쪽 목장은 풀이 녹초가 되어 버렸어. 그때는 서풍이 불었거든. 아무튼 그해 여름엔 그 근방 일대가 형편 없는 흉년이 되어버렸어." 그들은 폭소를 터뜨리고 테이블 위로 몸을 일으켰다. "그래 그래. 나도 아버지한테 들은 일이 있어. 아버지 젊었을 때 피혁 제조공 이 의남매간인 여동생하고 좋아 지냈다구 교수형을 당한 일이 있었다는데, 그 남자가 일을 당했을 때에도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거야. 그처럼 삽시간에 세상 허섭스레기 냄새를 뿜어내는 판이니까 아무튼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그 래 그 바람이 휙 불어 와 모두들 급히 뒤로 물러서자 구름이 한 뭉치 하늘로 올 라가는 것이 보였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만큼 새까만 구름인데 뒤족 끝에 악마가 앉아서 부지깽이로 키를 잡으면서 죄인의 혼을 데리고 갔어. 그 냄새를 맡고는 무척 만족스러운 듯 싱글싱글 웃고 기뻐하더라지." "너희들의 멍청이 같은 이야긴 시시하다." 노인은 말하고 형리 쪽을 훔쳐보았다. "난 진지한 이야길 하고 있는 거야. 그것엔 엄청난 힘이 있다는걸 말이야. 어 쨌든 이건 사실이니까 말이지. 글세 크리스텐을 보란 말이야. 안나의 자식이야, 걔는 자랄병을 일으키면 땅바닥에 나가떨어져서 거품을 북적거렸거든. 나도 여 러 번 개를 부축해 주고, 입을 여는걸 도와준 일이 있는 걸. 정말 지독한 놈한테 걸려든 거지, 나도 그런 건 본 일이 없어. 그런데 말이야, 걔 어머니가 대장장이 이에르켈이 처형장에 있을 때 자식을 데리고 가서 피를 먹였단 말이야. 그러자 씻은 듯이 나아서 그뒤부터는 한 번도 쓰러진 일이 없거든." "그래..." "난 그네들 이웃에 살고 있지만 너희들도 다 잘알고 있는 이야기일 텐데." "그렇구 말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 "그런데 살인자의 피가 아니면 안돼. 그것도 아주 지독한 놈이라야 되거든, 그 러잖으면 소용없어." "당연하지." "아무튼 이상한 이야기야, 정말..." "학질 걸린 아이에게 망나니 칼에서 긁어 낸 피를 먹이면 병이 낫는다는 말은 나도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어"하고 노인이 말했다. "이 지방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거야, 그리고 산파가 망나니 집에서 피를 얻 어온다는 말은 정말인가요? 영감님." 형리는 이쪽을 보지 않앗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흔들흔들 흔들리는 불빛 속 에 그이 크고 무표정한 얼굴은 손으로 가리운 그림자로 인해 거의 보이지 않았 다. "정말 그래. 악한 것에는 병을 고치는 힘이 있어. 거짓말이 아냐."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세상사람들이 그런 것을 손에 넣으려고 애쓴다는 건 정말 찬동할 수 없는 이야기지. 내가 밤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처형장 옆을 지나치노라면 닥닥 득득 하는 소리가 나거든. 소름이 쫙 끼쳐 심장이 정지해 버 릴 것만 같지. 약장수다, 마술사다, 사교의 마법사다 하는 작자들이 괴상한 특품 을 어디서 구해 들이는지 알 만하지 않은가. 그놈을 가난뱅이 허섭스레기 인간 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해서 번 큰 돈을 주고 사들인단 말이야. 이야길 들으 니 거기엔 완전히 긁어 내서 뼈다귀만 앙상한 해골도 있다는 거야. 옛날에 목숨 이 있었던 인간이라곤 생각할 수도 없다는 거야. 물론 나 역시도 알고 있어. 그 것엔 굉장한 약효가 있어서 마침내 막판에 가서는 그놈이 없어선 안된다는 것쯤 은 말이야. 나도 나 자신이 시험해 본 적이 있거든. 여편네한테 말이야. 하지만 난 말해 두겠어. 싫은 일이지.쳇, 짐승 같은! 시체를 먹고 살고 있는 건 돼지나 까마귀만이 아니야. 우리네 역시 마찬가지야." "제기랄, 웬만큼 해둬. 네 이야길 들으니 가슴이 메스꺼워. 그래서 무슨 약을 먹었다는 거냐?" "뭘 먹었다고는 안해. 말할 게 뭐야. 악마에게 욕을 할 뿐이지. 그쪽에서 오는 것엔 모두 그놈이 자빠져 있는 거야. 정말일세." "쳇, 쓸데없는 소리. 오늘밤엔 들을 만한 이야기가 안 나오는군. 이젠 자네의 너절한 이야긴 듣기 싫어." "왜 안 마시는거야?" "웬만큼 마셨어. 자네야말로 좀 들게나. 이 주정뱅이 늙은이." "그렇지만 어쨌든 신비스러운 효력이 있어 소용이 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응?" "그런데 사실 그렇거든." "응, 그놈은 두 가지 역할을 하거든. 접근하는 것은 우선 위험하다는 거야." 그들은 이야기를 그치고 술잔을 밀어 놓았다. 그리고 테이블에서 약간 몸을 떼어 놓았다. 반대쪽을 향해 십자를 긋는 사람도 있엇다. "풍문에 의하면 망나니란 작자한텐 나이프건 환도건 들질 않는다는군."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말없이 앉아 있는 커다란 덩치 쪽을 훔쳐보았다. "물론 사실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거짓말이겠지." "그런데 나리들 중에는 '단단한'것이 있거든. 나는 젊었을 때 들은 일이 잇어. 그것이 그 단단한 나리였어. 그 나리가 인간의 할 도리가 아닌 짓을 해버려 칼 로 처형을 당하게 됐어. 그런데 칼날이 들질 않았거든. 그래서 도끼를 가져왓지. 그러자 이번엔 그게 처형자의 손에서 떨어졌어.그래 어쩔 도리가 없어서 방면해 버렸지. 그 나리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돼서 말이지." "터무니없는 소리!" "아냐, 이 이야긴 정말로 있었던 이야기야. 내가 지금 이렇게 앉아서 떠들고 있는 것처럼이나 확실한 거야." "멍청이 같으니라구. 쓸데없는 소리 말아. 나리들이라도 다른 너절한 놈들과 마찬가지로 칼이나 도끼로 처치 당하셨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것 아닌가. 저 옌스 나리를 보게나. 자기의 도끼로 당하시지 않았나!" "아아, 옌스 말인가. 그런 이야기가 다른지. 그 나리는 그 패가 아냐. 할 뜻이 없어서 불행히 당해 버린 거지. 가엾은 나리야. 그래 부인과 자식을 떨어질 수 없다고 구명을 애걸하셨어. 이건 이야기는 달라. 이 나리는 도무지 그 집업이 성 미에 맞지 않았어. 처형장에 나가서도 흉악한 범인보다 더 겁을 집어 먹고 계셨 으니까. 말하자면 마성을 지닌 것이 두려웠던 거지, 그렇지. 그놈이 두려워 어쩌 지 못하는 만큼 나리는 허망하게 가버리고 만 거야. 어쩌는 수가 없었다고 난 생각해. 그래 그 나리는 가장 좋은 친구인 스테판을 죽이게 된 거지-내가 말하 고 싶은 것은 도끼 쪽이 나리보다도 훨씬 강했다는 거야. 그놈이 나리를 집어삼 킨 셈이거든. 나리는 거역할 힘이 없었지. 결국 마지막엔 거기서 꼼짝없이 당하 게 돼 버린 거거든. 그렇게 될 줄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정말 그래. 그 나리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어. 그러나 힘을 가진 나리들한 테 걸리면 뭣을 가지고 덤벼들든 전연 소용이 없는 거야." "그렇고 말고, 망니니에겐 다른 인간에게 없는 힘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어. 첫 째로 마성에서 그토록이나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말이지.그런데다가 그 도끼니 뭐니 하는 것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틀림없어. 도끼라든지 망나니가 만진 것에는 아무도 손을 대려고 하지 않는 건 그 때문이거든." "그래, 바로 그 말대로야." "그것들에겐 인간이 알아낼 수 없는 힘이 있는 거야. 이건 틀림없는 거야, 그 런데다가 마성이란 놈은 한 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니까." "아니, 자넨 모르는 것 같아." 하고 지금껏 잠자코 있던 한 사나이가 말참견을 했다. "마성이란 것은 좀처럼 똑똑히 알순 없는 거야. 아는 날이면 쫓아내 버리거든. 나도 그다지 많이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전에 한 번 그놈한테 붙잡혔던 일이 있었거든. 말하자면 그저 한 번 내게 잠깐 선을 보였던 셈이지. 그런 일을 겪고 보면 평생 잊혀지지않기 마련이야. 그런데 묘하게도 한 번 부닥치면 그 다음엔 두려움이 없어지거든." "허허허" "사실인가. 어쩐지 그건..." "아니 글세, 내가 어째서 두려워하지 않나 듣고 싶다면 이야길 해볼까. 자네들 이 거기서 지껄이고 있는 동안에 생각해 냈지만." "그건 내가 아직 어렸을 때의 일이었지. 대여섯 살 먹었을 때였을 거야. 우리 집 은 아버지의 조그마한 농장에 있었지. 좋은 농장이라 어느것 하나 아쉬운 것 이 없었어. 나는 외아들이어서 무척이나 귀염을 받았지.아무튼 지나치게 귀염을 받고 있었을 거야. 내게는 행복한 가정과 이를데 없이 부드러운 부모가 있었어- 이젠 두 분 다 돌아가셨지만, 저승에서도 행복하게 지내시길 기도하고 있지. 그 런데 농장은 마을에서 얼마쯤 떨어진 외딴 곳에 있어서 나는 곧잘 혼자서, 때로 는 아버지나 어머니와 함께 집 근처를 산책하곤 했지. 집 모양이나 언덕, 담, 남 쪽에 있던 채소밭 같은 건 지금껏 잘 기억하고 있지. 이젠 이미 다 없어져서 볼 수도 없지만 아직껏 내 몸 속에 깃들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언젠가 여름날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해서 풀을 베러 나갔어. 그래서 어 머니는 마을 어귀까지 아버지에게 점심을 가지고 갔지. 내가 따라가기엔 너무 멀어서 혼자 집에 남아 있었어.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더운 날씨였지. 현관 돌 위에 언덕의 외양간 아래 매일 아침 젖을 짜는 곳에는 파리가 윙윙 날아다니고 있었어. 나는 그 근처를 돌아다니고, 사과밭에도 들어가고, 장작 더미가 있는 곳 에도 가 보고, 벌집을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어정거리고 있었어. 벌통 구멍 언저 리엔 벌이 퉁퉁 부은 것처럼 해 가지고 기어다니고 있었지. 그리고는 어찌된 영문인지-심심해졌던 탓인지 모르지만-나는 담을 타고 넘어 전에 좀 걸었던 일이 있는 오솔길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지. 이번엔 좀더 멀 리 가 보니 전연 낯선 장소가 나왔어. 길은 비탈을 따라 뻗어 있었거든. 둘레는 깊은 숲이라 나무 줄기며 이끼가 핀 바위 틈에서 졸졸거리는 시냇물 소리가 들 려왔어. 거길 걸어가니 기분이 좋더군. 상쾌한 여름날씨며 모든 것이 다 내 마음 에 들었어. 햇님은 나뭇가지 위에 주무시고 딱다구리는 딱딱 나무 쪼는 소리를 내고 있고, 수애기 향긋한 냄새를 풍기고, 주위엔 온톤 지저귀는 새소리로 가득 하고. 얼마를 걸었는지 모르지만 앞쪽에서 바스락바스락하는 소리가 나고 우거진 숲 저편에서 뭔가 움직이면서 일어났어. 뭔가 보려고 급히 달려가니 굽어진 모퉁이 에서 달리고 있는 뭔가가 보여 뒤를 쫓아갔지. 땅바닥이 좀 평평해졌어. 숲도 점차 엷어지고 나무가 듬성해져서 공지가 트여 앗어. 그러지 아이들 둘이 달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였어. 둘 다 나이는 내 또래 쯤 되었지만 옷 입은 건 전연 다르더군. 공지 저쪽에서 두 아이는 멈춰 서서 주 위를 둘러보았어. 그리고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어. 나는 붙잡아 보려고 뒤를 쫓 아갔지. 그런데 이 아이들은 길을 벗어나서 이따금씩 우거진 숲 속에 숨어 보이 지 않게 되었어. 처음에 나는 얘들이 나랑 숨바꼭질을 하려고 하는구나,하고 생 각했지만 차츰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 그런데 나도 이 아이들을 만나서 함께 좀 놀고 싶었으니까 점점 서둘렀지.그래서 자구 따라갔어. 마침내 두 아이 는 서로 떨어지고 한 아이가 쓰러진 전나무 밑에 기어들어 숨는 것이 보였어. 나는 뒤쪽에서 뛰어 덤벼들었지. 그아이는 달아나려고 머리를 들더군. 겁에 질린 눈을 하고 입은 뒤틀려 짓궂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말이야. 빨간 머리털은 짧게 깎은 데다가 얼굴엔 너절한 상처투성이었어. 몸은 거의 벗은 거나 다름없이 너 덜너덜하게 해진 여자 쉬미즈를 입고 나뒹군 채로 벌벌 떨고 있었어.마치 짐승 을 잡은 것 같은 기분이었어. 좀 이상한 놈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놓아주질 않았지 -별로 탐탁한 놈이라고 생 각되지도 않았으니까 말이야, 일어나려는 것을 무릎으로 꽉 누르고 '절대로 도망 치진 못해'라고 말하고 웃어 줬지. 그러자 얌전해지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는 거 야. 그래도 대답은 안해. 그런데 좀 지나서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됐지. 그 아이도 도망치지 않을 것을 알자 놓아줘서 둘은 일어났지. 나란히 걷기 시작했는데 함 께 있는 동안 줄곧 나를 경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겠더라구. 또 한 아이도 숨엇던 곳에서 나왔어. 그 애 여동생이더군. 오빠되는 아이가 동생한테로 가서 뭐라고 귀띔을 하니까 동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듣더군. 조그만 얼굴은 파래 져서 무척 겁을 먹고 있었지만 내가 다가가도 도망치진 않았어. 놀 수 있는 곳까지 오자 곧 두 아이는 먼저 놀기 시작하더군. 전부터 알고 잇 는 굴 구멍에 숨기도 하고 발견되면 다음 굴가지 말없이 달려가곤 하면서. 거기 는 거의 평평한 땅이라 큰 바위나 쓰러진 나무들이 뒹굴고 있었어. 이 아이들은 근처의 일이라면 뭣이든 다 잘 알고 있는 모양이라, 전연 소리도 내지 않기 때 문에 어디 있는 지 알아차릴 수 없을 때도 있었어. 아이들이 이렇게 소리도 내 지않고 노는 것은 본 적이 없어. 기운은 좋은 데다가 족제비처럼 뛰어 돌아다니 는데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거든. 나한테도 아무 말도 안해. 그래도 재미있었어.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한창 놀고 있는 도중에 이따금식 멈춰서 서 둘이서 나란히 나를 빤히 바라보기도 하더군. 상당히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을 거야. 숲 속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어. 순간 두 아이는 얼굴을 마주하더니 곧장 달려가기 시작했어. 나는 '내일 또 놀자'하고 소 릴 쳤지만 돌아보지도 않는 거야. 길 쪽으로 토닥토닥 발걸음 소리가 났을 뿐ㄴ 이었어. 집에 돌아와 보니 아직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더군. 좀 있다가 어머니가 돌아 왔는데 나는 거기 갔던 일이나, 거기서 한 일을 일체 말하지 않았지. 왜 그랬느 냐구-글세 말하자면 비밀이랍시고 그런 거지. 이튿날도 어머니는 점심을 들고 들일하는 사람들한테로 나갔어. 나는 혼자 남 게 되자 또 그곳으로 가서 어제 놀던 동무들과 어울렸어. 남매는 어제와 다름없 이 서먹서먹해 하고 있었어. 적어도 처음에는 말이야. 내가 오는 것이 기쁜지 어 떤지 그런 건 모르지만 어쨌든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 나와 있었어. 나를 기 다리듯이 말야. 우리는 또 놀았어. 말없이 뛰어 돌아 다니는 동안에 땀이 흠뻑 났지.-나도 큰소리를 내거나 외치진 않았어. 평상시 같으면 물론 소리치고 놀았 겠지만 도무지 소릴 내지 않는단 말이야. 이젠 벌써 오래전부터 사귄 친구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날은 저편 숲 공지까지 가봤지. 그러자 덮쳐들 듯한 낭떠러지 에 달라붙은 조그만 집이 보였어. 회색으로 된 좀 허술하고 음침한 집이었는데, 어쨌든 거기까지 가 보진 않았어. 집에 와보니 이미 어머니는 돌아와 있는데 어디 가 있었느냐고 자꾸만 묻질 않겠어? 나는 잠깐 숲에 가 있었다고 대답해줬지. 그러고 나서부터 매일 거기에 가게 됐지. 집에선 다들 들일에 바빠서 나를 내 버려두었으니까 간단히 나올수 있었던 거야. 두 아이는 좀더 가까운 데까지 나 를 맞으로 나왔고 나를 봐도 이젠 서먹서먹해 하는 일은 없게 됐어. 나는 개들이 살고 있는 곳이 어떻게 생긴 곳인지 무척 보고 싶었어. 그런데 그다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눈치야. 늘 노는 장소에서 노는 것이 좋았던 모양이 야.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서 그 집쪽으로 가 봤지- 두 아이는 좀 떨어 져 따라왔어.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집이었지만 주위엔 공터도 밭도 없었어. 언덕 비탈에도 아무것도 심지 않고 전연 손질이라곤 돼 있지 않아 살풍경하기 짝이 없었어. 문이 활짝 열려 있기에 두 아이가 따라왔을 대뜸 해서 안으로 들어가 봤지. 안은 어두컴컴하고 곰팡내가 났어. 여자가 하나 본체 만체하며 나오더니 무척 험악한 눈초리로 말도 없이 빤히 나를 노려보는 거야. 어쩐지 험상궂어 보 이는 거야. 머리카락이 두세 갈래 늘어 보이는 아무머니였어. 그런데 사실상 그 여자가 어떻든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어. 이 아이들의 어머니구나, 하고 생 각했을 뿐이야. 그래서 나는 방안을 두루 둘러보기 시작했지. '얘는 어떻게 온 거냐?' 하고 아이들의 어머니가 물었어. 그러자 아이들은 걱정스럽게 '숲에서 같 이 노는 얘야'하고 대답했어. 여인은 미심스러운 듯 나를 흘금흘금 ㅎ어보았지만 이젠 좀 부드러워진 것 같았어- 그러찮으면 내가 그 여자한테 어느 정도 낯이 익은 탓이니도 모르지. 이 여자는 그 게집애가 큰 눈을 하고 나무 사이에서 처 음으러 뛰어 나왔을 때와 퍽 흡사하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어. 집안의 어두컴컴한 것에 익숙해지기까지는 한참이나 걸렸어. 어쩐셈인지 모르 지만- 어딘지 모르게 달라보였어. 우리네 집과 별로 다를 것이 없지만은 - 그런 데도 어쩐지 느낌이 달라. 집이란 각각 다 냄새가 있는 법이지만 이집은 섬뜩하 고 휑한 게 답답했어. 곰팡내와 오한이 뒤섞인 것 같단 말이야. 낭떠러지가 바로 옆에 있는 탓이겠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 근처를 기웃거려 봤지. 저쪽 구석에 커다란 칼이 숨겨져 걸려 있더군. 양쪽으로 칼날이 난 폭이 넓고 반듯하게 생긴 놈인데 마리아님과 예수님의 그림이 붙어 있더군. 그밖에도 이상한 기호 같은 것이며 뭘 써 넣은 것들이 가득했어. 이런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좀더 자세히 보려고 앞으로 배기게 됐거든. 만지자 깊은 한숨과 누군가가 흐느껴 우 는 소리가 들리질 않겠어... 나는 주위를 둘러 보았지 -그리곤 아이들한테로 가서 '울고 있는게 누구야?'하 고 물어봤어. '울고 있어? 아무도 울고 있진 않은데'하고 아주머니가 말했어. 그리곤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눈빛이 달라졌어. '이리 와요!'라고 말하곤 내 손을 꽉 쥐고 아까 있던 곳으로 데리고 갔어. 그리곤 전과 같이 칼을 만지게 했어. 그러자 또 다시 깊은 한숨과 누군가의 흐느겨 우는 소리가 들렸단 말이야. 더 구나 무척 똑독히 말이야. '칼이야, 칼 속에서야'하고 여인은 외치고 나를 확 잡아당겼어. 그리곤 손을 놓고 획 돌아서 화덕가로 가서 아까까지 요리하고 있던 냄비 속 을 휘저었어. 조금 지나자 이번에는 험악해 보이는 입을 손으로 씻으면서 '넌 뉘집 애냐?'하 고 묻는 거야. 난 보오라의 크리스토펠 아들이라고 대답했지. 아버진 그런 이름 이었거든. '그래'하고 여인은 말했어. 두 아이는 마치 못 박힌 듯이 선 채로 겁에 질린 듯한 험한 눈길로 빤히 날 바라보고 있는 거야. 여인은 한참 일을 하다가 끝나자 의자를 끌어당겨 나를 무릎에 앉혀 주었어. 그리곤 내 머리카락을 약간 매만지면서 '응, 그래'하고 말하곤 한참동안 나를 말 없이 빤히 바라다보고 있더니 이윽고 '너의 집까지 데리고 가는 게 제일 났겠구 나'하고 말을 덧붙였어. 그래서 여인은 떠날 차비를 차리기 시작했어. 다른 치마로 갈아입고, 본 적이 없는 듯한 머리수건을 썼어. 그리고선 함께 떠났지. 숲 속까지 오자 여인은 '너희들이 노는 곳이 여기냐?'하고 물었어. 그밖에도 걸으면서 두세 마디 내게 말을 걸어주기도 하고 내가무서워하는 것을 알자 내 손을 잡아 주기도 했어. 나는 전혀 내막을 알수 없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집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자 어머니가 기절할 듯 놀라면 현관으로 나왔어. 얼 굴을 보니 그때것 본 일이 없었을 만큼 새파랗지 않겠어. 어머니는 '우리 애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손을 놓아, 어서 손을 놓아! 부정한 년 같으니라구!'하고 큰소리로 외치질 않겠어. 영인은 곧 손을 놓았으나 얼굴이 일그러져 쫓기는 짐 승 같았어. '우리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집에 와 있기에...' '이 아이를 속여 가지고 너의 더러운 집에 꾀어 간 거지!' 어머니가 이렇게 외치자 여인은, '아니예요, 아니예요. 자기 혼자 온 거예요. 그래요, 그래서 애가 컬 옆에 와서 손을 대자 속에서 한숨과 울음소리가 들린 거에요'라고 말했어. 어머니는 겁에 질려 걱정스러운 듯 나를 보았어. 무척 흥분한 눈초리였어. 여 자는 말하는 거야. '그 말이 뭘 뜻하는 것인지 알겠죠? 네, 당신은.' '아아니... 모르겠는데.' '그런 인간은 언젠가 망나니의 칼을 맞아 죽는다는 거예요.' 그러자 어머니는 숨막힐 듯이 외치더니 나를 들여다보았어. 죽은 사람 같은 흙빛 얼굴을 하고 입술에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면서 말도 못하는 거야. '분명히 가르쳐 주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했더니 반대로 성을 내는군. 자아, 당 신의 더럽혀진 자식이요. 우리가 말하는 건 마침내 그때가 닥쳐오기까지는 듣지 않는 편이 오히려 나을 뻔했군요. 당신깬 아무래도 그편이 니을 뻔했어요.' 이렇게 말하곤 여인은 획 돌아서더니 터벅터벅 걸어가 버렸다. 어머니는 벌벌 떨면서 나를 꽉 껴안고는 키스를 해줬어 -하지만 눈동자가 굳 어져 어딜 보고 있는 지 알 수 없었어. 잠시 후 나를 집으로 데료다 놓곤 곧장 밖으로 뛰어 나갔어. 내다보니 밭 가운데를 뛰어 돌아다니면서 뭔가 큰소리로 떠들어대고 있는 거야. 이윽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허전하게 말없이 돌아왔어. 두분이 밭가를 걸어오 던 모습을 나는 지금것 기억하고 있지. 둘 다 내게는 입을 열지 않았어. 어머니는 화덕가에서 무슨 일을 시작하고, 아 버지는 여느때와 달리 앉지 않고 그처를 서성거리고 있었어. 야윈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굳어져 움직이지도 않는 거야. 언젠가 한 번은 어머니가 밖으로 물을 길러 나간 사이에 아버지가 나를 붙들고 겁에 질린 눈초리로 무엇을 찾으려는 듯이 내 눈 속을 들여다보았어. 그리곤 얼둘을 돌려 버리는 거야. 어머니와 아버 니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어. 한참 니자서 이번엔 아버지가 밖으로 나갔어. 하지 만 뭘 하는 것도 아니고 언덕 위를 마냥 돌아다니는가 하면 멍하니 서서 먼 곳 을 바라보거나 하고 있을 뿐이었어. 그때부터는 줄곧 음울하고 숨막힐 것 같은 나날이었지. 낮엔 집 근처를 혼자 서 어정거리면서 지냈지만 거의 방임된 채로였지.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모두가 전과 다름없이 햇빛이 쬐어 좋은 날씨인데도 어전지 느낌이 달랐어. 놀려고 해 도 전연 재미가 없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 옆에 왔다가 말없이 가 버려. 마치 남과 같았어. 오직 매일밤 나늘 재울 때 어머니는 나를 숨을 쉬지 못할 만큼 꽉 껴안는 거야.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이렇게 모조리 다 음울하게 변해 버린 것인가, 나로 선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 즐거운 일이 있어도 전과는 달랐어. 집 전체가 황폐 해져 정적이 서리고 마치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사는 것 같았지. 다만 때때로 양친은 내가 나가 있는 것을 말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길 했어 -나는 자신이 무 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다만 무슨 끔찍스러운 짓을 해서 그 때문에 양친 이 나를 보길 괴로워한다는 것만은 알았어. 그래서 나도 될 수 있느 ㄴ대로 틀 어박혀 제 일만 하려고 생각했어. 양친도 그래 주길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어머니는 볼이 홀쭉해져 버렸어. 아무것도 목에 넘어가질 않는 판이었거든. 매 일 아침 눈은 울어서 부어 있고.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조그만 돌을 주 워 가지고 소 외양간 뒤에 나혼자서 살집을 짓기 시작했던 거야. 어는 날 마침내 어머니가 나를 불렀어. 가 보니 아버지도 있었어. 내가 오자 어머니는 내 손을 이끌고 숲속으로 들어갔어. 아버지는 그냥 배웅을 하고 있었 지. 어머니는 내가 늘 갔던 그 길을 가는 거야. 그것을 깨닫자 나는 그제서야 비 로소 두려운 생각이 들더군. 하지만 무엇하나 할 것없이 모조리 불안해졌을 때 였으니까 지금까지 보다 더 흉한 일은 설마 일어나지 않겠지, 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어. 그래서 잠자코 따라갔지. 나는 그저 어머니에게 달라붙어서 돌아니 나 무 뿌리가 굴러 다니는 길을 실수없이 걷는 일에만 열중했어. 어머니에게 괴로 움을 끼치지 않으려고 말이야. 어머니의 얼굴은 말할 수 없이 야위어 버려서 아 는 사람도 좀처럼 알아보기 힘들 만큼 돼 있었거든. 이윽고 목적한 장소에 당도해서 그 집 쪽으로 언덕을 올라갈 때 어머니는 덜 덜 떨고 있었지. 어머니가 너무 기진하지 않도록 하려고 나는 어머니 손을 힘껏 쥐어 주었지. 이날은 아이들과 여인 이외에 남자가 한 사람 있었어. 거칠어 보이는 덩치가 큰 사니아로 두텁고 주름투성이인 입술을 불쑥 내밀고 있더군. 얼굴엔 커다란 흉터가 가득하고 눈이 움푹 패인 야만적이고 영맹스러워 보이는 사나이였어. 눈 은 샛노랗고 혈관이 수없이 서려 있었어. 이만큼 소름 끼치게 하는 얼굴은 아직 본 일이 없었지. 아무도 인사를 안해. 여인은 화덕가에 앉아서 불티를 반짝반짝 날리면서 불을 휘젓고 있엇어. 사나이는 처음에 우리 쪽을 곁눈질로 슬쩍 보더니 그대로 외면 을 해 버렸어. 어머니는 문에 들어서서 머리를 숙인 낮은 자세를 하곤 무엇을 간청하기 시작 했어 -내용은 나에 대한 일이엇지. 그런 줄은 알았지만 그밖에는 어머니가 어쩔 심산인지 잘 알 수가 없었어. 어머니는 당신네들이 해줄 생각만 있다면 어떤 방 법이 있을 게 틀림없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 보는 거야. 그런데 아무도 대답을 안해 줘. 어머니가 서 있는 모습은 너무나 가엾고 참담했으니까 이 같청에 대해서 '안 된다'고 대답할 놈은 설마 없을 거리고 생각했을 정도야. 그런데 놈들은 돌아다 보지고 않는 거야. 마치 우리네가 그곳에 없는 것처럼 무시해 버리는 거야. 어머 니만이 줄곧 계속해서 지껄이고 있었어. 점점 강력하게 호소하는 듯한 투로 말 이야. 이젠 희망을 앓은 듯한 윤기없는 둔탁한 목소리였어. 보기에도 딱했어. 어 머니는 눈물이 그득히 괸 눈으로 이건 내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라고 말했어. 이윽고 마지막엔 그저 서서 울고 있을 뿐이었어 -하지만 그것 역시 아무런 효 험이 없는 것 같았어. 방 안의 분위기가 너무 음침해서 나는 그저 어쩔 줄을 몰랐지. 그래서 구석에 달라붙어 웅크리고 있는 아이들 쪽으로 갔어. 우리들은 겁에 질려서 서먹서먹해 하면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너무 피곤해서 서 있을 수가 없어 벽 쪽에 놓 인 벤치에 걸터앉았지. 모두들 침묵한 채로 한참 동안 시간이 흘렀어. 소름이 끼 치는 것 같은 시간이었어. 느닷없이 사나이의 목소리가 울렸어. 나는 뛰쳐 일어 났지. 사나이는 우리쪽을 보고 있었는데 나를 불렀던 거야. '따라와라'하고 사나 이가 말하기에 나는 떨면서 쭈볏쭈뼛 앞으로 나갔어. 사나이가 밖으로 나오자 이젠 따라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어. 어머니도 함께 따라왔지. 여인은 돌아다 2 보면서 '쳇'하고 혀를 차더니 어머니한테 침을 뱉고 대들었어. 사나이하고 나는 단 둘이서 단단하게 밟혀 굳은 오솔길을 내려갔지. 길은 집 가 까이 있는 자작나무 숲으로 통해 있더군. 이 사나이와 함께걷는 것은 이상한 기 분이 들어 나는 사나이에게서 약간 떨어져서 걸었지. 그런데 이렇게 걷게 되어 우리들은 서로 다소간 친해진 것 같았어. 숲 한가운데에 샘이 있었어 -아마 이 집에서 쓰는 샘물이었겠지. 쪽박이 놓여 있었으니까. 사나이는 물가에 무릎을 꿇 고 그 깨끗한 물을 손에 가득 펐어. 그리곤 '마셔라'하고 말하는 거야. 내게 무슨 나쁜 짓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건 금세 알수 있었어. 나는 아무 말없이 시키는 대로 했지. 전혀 무섭지 않았어. 이 사니이를 그렇게 가까이서 보 면 필경 오싹 소름이 끼쳤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어. 반대로 전보다 부드럽고 훨씬 보통 사람과 비슷하게 보였어. 핏발 선 음울한 눈초리로 응시당했을 때, 이사람은 분명히 행복하지 못하구나 하고 느낀 것을 지금껏 기 억하고 있어. 나는 같은 일을 세 번 되풀이 당했어.그리고 사나이는 '그래, 나았 다. 내손으로 물을 마셨으니까. 이젠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하고 말하면서 머 리를 약간 어루만져 주었다. 사나이가 일어서자 우리는 먼저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지. 햇님은 볕을 내려쬐고 자작나무 숲 속에선 새가 삐이삐이 지저귀고 나뭇잎이며 나무 껍질에 서 향긋한 냄새가 풍겼어. 어머니가 위쪽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가 손을 맞잡고 걸어오는 걸 보곤 기쁨으로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어. 그리곤 나를 끌어안고 키스를 해줬어. 어머니는 망나니에게, '신의 은헤가 베풀어지기를'하고 말했지만 상대는 다만 잠자코 외면을 해 버렸 어. 그래서 나하고 어머니는 기쁨에 넘쳐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야." "허 -그것 참."이야기가 끝나자 모두들 감탄했다. "그게 정말, 그런 것이로군." "정말 마성의 물건엔 이상한 힘이 있어.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걸." "거기에 또 좋은 점도 있는 모양이지?" "어쨌든 엄청난 힘이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자유자재니 말이야. 그러찮 은가?" "정말 그래." "그야말로 기적이지." "응, 하지만 유익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지?" "내가 생각건대 너의 어머니가 망나니 마누라한테 큰소리로 야단을 쳤잖았나. 그것을 사과한 것이 아닌가."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사과늘 하는 것은 아니었어." "흥" 둘어앉은 사람들은 약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쭉 한 잔 들이키고 입을 씻었 다. "그야 망나니도 선인일 수 있지. 망나니가 병자나 가난뱅이를 구원했다는 이야 기도 있어. 의사가 포기해 버려서 어쩔 도리가 없게 된 인간을 구원했다는 이야 기도 말이야." "그래. 그런 데다 망나나라 해도 역시 괴로운 인간사도 있을 거구. 사실상 자 기의 일을 하는 것이 무척 고통스러울 거야. 후다닥 해 치우기에 앞서 늘 죄인 에게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야." "그렇고 말고. 자기 손으로 처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대에게 무슨 원한이 있 는 것도 아니고 당하는 쪽과 무척 사이가 좋을 수도 있어. 난 본 일이 있는 걸." "사이 좋게 말이지? 응, 난 언젠 가 집행하는 측과 당하는 쪽이 어깨둥무를 하 고 오는 것을 본 일이 있지!" "설마!" "정말이야. 둘 다 걸을 수 없을 만큼 술을 마셨더군. 지나칠 정도로 마셔서 처 형장까지 오는 데도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취한건 어느편이 어느 정도라고 말할 순 없지만 어쨌든 망니니쪽이 더 들이켰던 모양이야. 그래서 머리를 쳐내릴 땐 얏! 하는 구령을 내질었어." 모두들 킬킬거리며 웃어대곤 또 한바탕 마셨다. "그래, 그러고 보니 자네도 처형장에서 당할 뻔했군. 응, 바로 그거야. 우리들 누구든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 못해." "그건 그래." "그런데 그 사나이에겐 그만큼 힘이 있었던 거야. 자네가 이야기한 것은 그야 말로 기적 같은 거야. 만약 그 나리가 무죄방면을 해주지 않았으면 자네는 지금 쯤 이 근처를 어정대고 있진 못할 걸." "정말이야. 그치들은 기적을 행하거든. 난 그렇게 생각해. 이 방면에 있어선 성 자들보자도 나아." "뭐라구? 어쨌든 기적을 행하는데 있어선 뭐니뭐니해도 성자나 성모님이 제 일이야!"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님이야. 우리들의 죄를 일체 사하여주신 분이야!" "아아, 좋아. 이 멍청아 . 그런 다른 이야기야. 우리가 이야기 하고 있는 건 나 리님들에 대한 거야, 알겠어?" "응, 나리님들은 힘이 있어. 나쁜 일에 걸려 있는 편엔 그 힘이 있어.틀림없는 거야." "그런데 그 힘은 어디서 얻어 오는건가. 악마한테서겠지. 그렇겠지. 그러니까 인간들이 정신없이 감겨드는 거야. 이 세상에서 인간이 무엇에 가장 매혹되느냐 하면 악마한테서야. 신께서 말씀하신 것이나 교회의 의식 같은 것보다도 훨씬 신기하니까." "그런데 이 영감은 구원받았단 말이야." "그래, 어쨌든 이 영감은 말이지." "그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인지 몰라." "그렇지. 상당히 무리지. 이 영감은 말하자면 악한 편의 힘에 붙들려 있었던 셈이니까. 이 이야기를 결정짓는 것은 악한 쪽 마음대로 되는 거니까 말이야." "엄청난 일이로군. 모두가 악마가 하는 일이란 말인가!" "응?" "이 영감의 어머님이 '신의 은혜를'하고 말한니까 망나니가 외면을 해버렸다는 말은 너도 들었지." "쳇..." "자. 이쯤에서 한 잔 들어보는 게 어떨까? 상서롭지도 못한 이야긴 적당히 해 두게나!" "그래그래, 맥주나 가져와!- 맥주를 말이다. 그 중에서도 독한 놈을 말이다." "술통에서 직접 말이야. 아니안돼... 도둑놈 손가락이 매달린 술은 말고... 이집 은 도둑놈 손가락이 담겨 있다는 게 정말인가?" 여급은 파랗게 질려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뭘, 시내에 쫙 퍼진 소문인 걸. 그거 뭐 괜찮아. 가져와! 독하기만 하다면 결 국 마찬가지야!- 나리를 본따서 얏!하고 말이지." "네가 얏! 하는 것은 제법 그럴 듯한데. 그런 데다가 녹초가 되도록 마시는 목 구멍이 없다면 더욱 좋은 일이겠다." "눈이 초롱초롱하는 동안에 부지런히 마셔둘 일이지." "이놈은 악마가 손수 만든 거야. 맛을 보면 알지." "아니야, 여긴 완전히 악마의 집이야. 하지만 맥주는 제일 좋은 걸 마실 수 있 거든." 그들은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짚으면서 꿀꺽꿀꺽 마셨다. 구두 수선공 영감이 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또 처형이 있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나?" "으응..." "있을지도 몰라..." "어쩐지 얄궂군. 나리가 떠날 차비를 차리고 잇으니. 새빨간 외출복을 갈아입 고 계시잖은가?" "그래 ... 하지만 " "그래. 북을 치며 지나가면 들려 올텐데." "이쯤에서 한 잔 들게나. 영감! 말뚝 모양은로 멍하나 앉아 있지만 말구." 그들은 마셨다. 젊은 남자가 두세 명의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자아, 누님들께서 들어오신다." "다 그런 거야. 나리가 계신 곳엔 한 패거리들이 모여들게 마련이거든." "불을 켜라. 따라온 누님이 보이지 않잖나.어이 형님." "허어- 신수 좋군 그래. 다녀 나온 곳은 역시 잠자린가?" "보시는 봐와 같죠." "이쪽 나리 옆에 앉지 않겠어?" "싫어? 나리를 너무 잘 알고 있단 말인가." "어이 누님들. 처형장에 가 봤나. 거기 매달려 있는 사나이 어젯밤에 옷을 도 둑맞아 지금은 실오라가 하나 걸치지 않았지. 신이 만드신 걸작이 송두리째 드 러나 구경거리가 되고 있거든- 응? 그런 것은 이제 신물이 나도록 구경하고 있 다구? 그야 그렇겠지만,하지만 이 좋은 풍경을 구경하라고 여자들은 무리를 지 어 오늘 아침부터 거기로 슬슬 순례하고 있거든. 교수형을 당할 정도가 되는 녀 석의 물건은 그래도 특별히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거든- 뭘 싱글거리고 자빠졌어? 나리께 실례되는 짓을 하지 않는게 좋을 걸." "너희들이 형틀 위에서 나리에게 매를 맞은 일은 없나?" "있어요. 늘 그렇죠. 대개 수갑이 채워진 채로 말이죠, 그저 장갑낀 셈 치니까 요." "몰자 않아 너희들, 나리한테 태형을 당하고 시가지에서 쫓겨난다. 그때 구멍 을 성하게 가지고 싶거든 엉덩이에 돛을 달고 달아나지 않으면 안될 걸." 여자들 둥의 하나가 남자들 쪽을 건너다 보았다. "웬만큼 해두라고요. 가죽 벗기는 백정마냥 그러지들 말고. 인제 슬슬 마누라 한테로 돌아가지. 당신 여편네 역시 우리네한테 지지 않을 만큼 하고 있다는 걸 알아둬. 어젯밤에도 한몫 돈벌일 하려고 집에 왔었는 걸. 집에선 서비스가 무척 나쁘다잖아." "돼먹잖은 소리 작작해. 그걸로 뭘 가르쳐 줬다고 한다면 터무리 없는 말못이 지. 나 역시 여편네가 뭘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다 알고 있어. 못된 것, 산 채로 가죽을 벗겨 버릴 테다." "그러면 무슨 수가 난답니까?" "당장 때려 죽여 버릴 테다." "그렇게 된다면 더욱 좋아할 일이지. 진자 악마와 하고 싶은 짓을 다할 수 있 잖아." 사나이는 입 속으로 뭐라고 ㅌ덜거렸다. 둘렁앉은 사람들은 킬킬거리며 그를 비ㅇ었다. "뭘 여자는 벌을 받지 않도록 되어 있는 거야.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말이 야." "무슨 소릴. 여자들 역시 우리네 남자들이나 마찬가지로 화형을 당하고, 물에 내동댕이쳐지고, 목을 졸리고 할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그렇고 말고, 나리가 여자들을 가엾게 여기거나 할 턱이 없지." "그 말이 옳아." "여자를 처치하기 좋아하는 망나니는 본 일이 없잖은가." "그래, 그런 것도 있을 거야." "교활한 놈들보단 기분이 좋을 테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리들이 좋아하는지 어떤지는 아무튼 확실치 않아. 언제나 좋아하진 않는 모양이야. 여자를 끝내 처치하지 못한 나리를 나는 한 번 본 일이 있어." "허어, 그래?" "응, 말하자면 적임자가 아니었던 셈이지. 처형장에 나가서 그 여자한테 반해 버리고 말았으니까." "허어." "그래서?" "나리가 그 여자를 좋아하게 됐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어. 멍하니 서서 여 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 도끼를 휘두르려 하여도 힘이 나질 않아. 여자도 보건대 이만저만한 미인이 아녔어.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검은 머리 를 하고 눈은 겁에 질린 유순한 빛으로 짐승 눈처럼 메말라 있었지. 그렇지, 그 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보이는 듯해. 어쨋든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만큼 예쁜 얼 굴이었어. 그 여자의 신분은 아무도 몰랐어. 바로 얼마 전에 도시에서 흘러 온 타향인이었으니까. 나리 역시 한 번도 본 일이 없었을 거야. 나리가 완전히 그 여자한테 반해 버린 것은 무리가 아니었지. 나리는 새파래져서 손이 ㅣ덜덜 떨 리고 있었어. '나로선 도조히 감당 못하겠어'하고 나리는 말했거든. 큰소릴 내서 말했으니까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도 잘 들릴 정도였어." "그래... 정말인가." "그야말로 진기한 일이었어. 나리의 눈빛으로 보아 그 여자가 좋아졌다는 것을 아라게 되자 구경꾼들한테 흥미가 생겼지. 그래서 수군수군 이야기가 시작된 것 인데 모두 나리를 가엾어 하는 건 틀림없었지." "응, 그 기분은 알겠어." "그럴 거야. 그래서 나리는 한참 동안을 그대로 서 있다가 이윽고 도끼에서 손 을 떼고 뚜벅뚜벅 걸어가 여자한테 손을 내밀었어. 그러자 여자도 눈에 눈물이 괴었어. 여자도 애정이란 놈한테 붙잡힌 모양이지. 나리가 그렇게까지 하셨으니 까, 그것도 무리는 아니지. 장소가 장소인만큼 그런데다 상대가 지금부터 자기 목을 자르려고 하는 그 나리이고 보니 말이야." "그렇고 말고." "그래서 다음엔 어떻게 되었어?" "그래서 나리는 재판관과 일행이 있는 패들 앞에 나가서 그 여자를 아내로 맞 고 싶다고 간청을 했거든 -패장들 전부가 원하면 당신네들도 알다시피 특별히 용서해도 괜찮도록 돼 있거든. 그래서 모두들 여자를 용서해도 좋다고 말하기 시작했어. 여러 사람과 패판관도 이 처형장에서까지 일어난 사랑의 기이한 힘을 보는 것은 무척 보람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한 거지. 울고 있는 사람도 많았어. 거 기서 이야기는 결정됐어. 목사님이 식을 올려 주어 둘은 부부가 된 거지. 그런데 여자도 낙인이 찍혔어. 규칙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도리없지. 교수대 는 교수대로 구실이 있었다는 거지. 그런데 매달리는 것만은 어쨌든 지금 말한 대로 면한게 된 셈이거든." "진기한 이야기로군." "정말 참." "그뒤에 어떻게 되었어?" "행복하게 되었지. 집은 망나니 집이지만 어쨌든 지내는 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이었지. 마을 사람들도 보고 그렇게들 말했어. 이런 망나니는 지금껏 하나도 없었다고 수근거렸지. 이 색정적 연애사건으로 나리는 완전히 달라졌던 모양이거든. 전엔 결코 그런 사나이가 아니었지만 온갖 미천한 인간이 출입하고 있던 지난 날과 비교하면 집안 형편까지 상당히 달라졌거든. 여자가 애를 뱄을 때 나는 부부가 함께 있는 것을 여러번이나 본 일이 있지만 보통 사이 좋은 부 부와 조금도 다를 게 없더군. 여자는 역시 아름다웠어. 망나니 마누라까지 천한 인간의 표시인 머리수건도 쓰고 있고 이마엔 보기도 싫은 낙인이 찍혀 있긴 해 도 말이지. 다시 한 번 말해 두지만 아무튼 그 여잔 좋은 여자였어. 마침내 아이를 낳을 때가 되자 다른 가정과 마찬가지로 산파를 부르기로 했 지. 보통 인간이나 다름없이 역시 아이가 생기는 것이 기뻣던 것이지. 아무튼 그 런 이야기 였어. 그런데 와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우리 맞은편에 살던 산파에게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와 달라고 부탁했어. 낳을 때 위험한 일이라도 있으면 야단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지. 그런데 그 산파는 가 고 싶지 않다는 거야. 물론 다른 산파도 마찬가지였어. 아무튼 세상의 수치라는 수치는 온통 혼자 뒤집어쓰고 있는 듯한 패장들의 일이고 보면 어쩌는 도리가 없었지." "하지만 내 생각엔 산파가 거절한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배반된다고 생각 하는데." "하지만 부정을 타는 일도 있고 말이지. 그러찮은가? 그런 데다가 그 일이 끝 나면 곧 다음엔 신분이 높은 여자의 아이를 받으러 가는 일도 있을 것 아닌가!" "응, 과연 그래." "드디어 낳을 때 남편은 무슨 일로 집을 나가고 없었어. 그만큼 갑자기 산기가 일어난 거지. 그래서 여자는 혼자서 누워 있게 된 거야. 이것이 마침 좋지 못한 일이엇어. 그 대목의 사정은 아무도 잘 모르지만 어쨌든 뒤에 재판 때 여자는 아이를 졸라 죽였다고 말했단 말이야." "허어, 그 여자가 말이지." "어째서 또 그런 짓을 했을까?" "응,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는가봐. 아이가 태어나서 간신히 아이를 만질 수 잇 을 만큼 힘이 나자 여자는 갓난애 얼굴에 묻은 피를 씻어주었어. 그러자 이마에 타고난 낙인이 있어. 더구나 그것이 교수대 모양을 하고 있더라잖아. 여자가 낙 인을 찍힌 바로 그 때 어린애가 생긴 거거든. 여자는 정말 그 괴로움 때문에 어 떻게 견뎌낼 수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그 아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지 않는 편 이 낫다고 여자는 말한 모양이야. 아이는 이미 낙인이 찍혀 있고 자기는 그 애 가 불쌍해 못견디겠더라고. 어쨌든 하는 이야기도 갈팡질팡이었던 모양이야. 불 쌍하게도 악한 짓을 하도록 태어났던 거지. 그게 틀림없어." "불쌍한 여자로군, 정말로." "정말 그렇군." "그렇지. 그래서 이번엔 그 여자가 생매장을 당하게 됐어. 끔찍한 죄를 저질러 그 벌책을 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거지. 남편이 또 다시 직접 삽을 잡게 됐거 든. 나도 가 봤지만 남편이야말로 이만저만한 고통이 아니었겠지. 여편네가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으니 이젠 사랑스러울 것도 없으련만, 그러나 역시 사랑하고 있었던 거야.그게 분명해. 남편은 삽으로 흙을 퍼부을 때마다 여편네의 깨끗한 몸이 점점 작게 되어 가는 것을 눈을 꿈적거리면서 보고 있었어. 이윽고 얼굴에 흙을 퍼붓지 않을 수 없게 되니까 남편은 그만 얼굴을 돌려 버리고 말았어. 아 니, 정말 이만저만한 고통이 아니었어. 하지만 그렇게 제재하도록 돼 있는 이상 은 어쩔 수 없는 일이거든. 풍문을 들으면 남편은 밤중에 가서 만약 여자가 살아있으면 파내려고 했다느 니 하는 말이 있는데 이건 그저 풍문에 지나지 않는 거지, 그렇게 되지 않는다 는 것쯤은 남편도 알고 있었을 테니까. 뒷일을 말하면 그 나리는 그 뒤 곧 그 지방에서 모습을 감춰 버렸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르지. "응, 그것 참, 둘 다 정말 불쌍한 꼴을 당했군." "하지만 말이야, 어차피 잘 돼 나가진 않을 거고 어린에도 부모와 마찬가지로 더러운 몸이 된다는 것을 좀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았을텐데." "그렇지, 아이한테 낙인이 있었다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것 없는 걸세!" "그렇고 말고, 그놈은 뭣에든 따라다니거든." "그렇지, 그놈에게서 도망칠 도리는 없거든. 절대로." "그러면 결국 그 나리는 그 여자의 처형자가 된 셈이군." "그렇지." "허어, 결국 그렇게 되도록 마련돼 있었던 거군." 문 밖에서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리고 한 사나이가 들어왔다. 그는 손목이 없 는 한쪽 팔을 흔들어 올리면서 어둠 속으로 따라온 남자를 향해 외쳤다. "거짓말 말아, 이 얼간이 농부 녀석아! 네가 직접 세봐. 그럼 알잖아. 개새끼!" "뭐라구, 네 주사위엔 납이 들었다. 이 도둑놈아!" "바보 새끼! 그러냐 요케?" "거짓말, 거짓말이야"하고 손이 없는 사나이한테 달라붙어 있던 나이 어린 소 년이 대답했다. "정말잉다. 이 새끼 도둑질을 하려고 한펀인 체하면서 속임수를 쓰고 있어. 뭐 야, 손 없는 왼팔잡이 새끼! 카르타고 뭐고 틀어쥐지도 못하는 주제에! 표를 해 뒀지. 그렇지, 그러찮다면 네가 슬그며니 이기는 일 따위가 있을 턱이 없어!" "야, 웬만큼 해둬라, 얼간이 농사꾼 새끼야!" 손이 없는 사나이는 테이블 앞에 걸터앉아 주위를 훔쳐보다가 망나니를 알아보곤 얼굴을 움찔했다. 야윈 얼굴로 볼은 홀쭉하게 페어 눈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엇다. 소년은 벤치에 걸터앉아 남 자한테로 다가갔다. "야아, 거기 문 쪽에 있는 게 라세 아닌가!" "저 나리 옆에 앉는 것이 무서운가, 라세." "쳇, 바보 소리 말아!" 그는 천천히 형리 쪽으로 걸어가 저쪽 테이블 끝에 앉았다. 소년이 뒤따랐다. "그 근처가 알맞은 장소야. 악당아!" 농부가 외쳤다. "그래, 그래. 그 다음엔 교수대로 가는 거지. 라세, 그밖에 너한테 빼앗길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 "병신 새끼. 좀더 쓸 만한 말을 못하겠나. 나를 잡을 교수대가 있으면 가져와 라!" "헤헤-." "너, 잘 지껄인다..." 그는 어깨를 추석거리곤 몸을 숙였다. "비르다!"하고 그는 여급에게 말했다. 여자는 서둘러 술을 가져왓다. 따라온 소 년은 그가 숨을 돌리는 동안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한 번 마시게 해 주었다. "속임수를 썼다구 지랄했지!.." 그는 출입구 가까이 앉아 있는 농부 쪽으로 천천히 얼굴을 돌렸다. "뻔하잖아!" "너 따위 너절한 농부꾼의 돈을 따먹는데 나라는 사람이 속임수까지 쓰지 않 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니? 네 돈은 말이다, 그 더러운 바지 냄새 때문에 참을 수 가 없어서 내 지갑 족으로 굴러 온단 말이다." "돼먹잖은 주둥이 작작 놀려!" 농부가 적당한 욕설을 선뜻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모두들 킬킬거리며 웃었다. "정말이야. 수형자 라세마년 카르타에 표를 한다든지 주사위에 납을 넣는다든 지 데데한 짓은 하지 않아도 되거든." "그렇고 말고. 놈의 솜씨란 건 보통이 아니니까. 그놈한테 걸리면 너 따위는 쪽도 못 쓸 걸, 그렇지? 농사꾼." "아아냐, 그놈의 방법도 다른 놈들과 마찬가지야. 역시 도둑놈의 수법이지. 어 이 라세. 모두들 너를 노리고 벼르고 있는데 적당히 그렇게 도망치진 못할 걸." "응, 뭘 언제가지나 투덜투덜하고 있는 거야. 라세는 도망치는 데는 이골이 나 있는 걸." "뭘 , 그런 틀림없이..." "나는 놈들이 내 손가락을 헤치우던 때 일을 기억하고 있데만. 아마 대충 이 또래쯤 됐을 때였지."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옆에 있는 소년을 가리켰다. "그러데 손가락을 널빤지에 대고 못질을 하고 지랄했지. 나는 앉아서 그놈이 못박히는 것을 보면서 큰소리로 웃어 줬지. 그러자 놈들은 '어때 네, 도둑놈 손 가락은 이 꼴이 됐단 말이다'하고 놀리고 자빠졌잖아. 하지만 나는 그저 웃어버 리고 '이 정도의 일쯤은 아무것도 아냐. 상대가 라세님이라면 걱정할 건 없지'하 고 말해 줬어! 그래서 그 말대로 해 왔단 말이야!" 그는 눈을 몇 번 크게 꿈적걸렸다. 그럴 때마다 얼굴이 움찔거리면서 일그러 ㅈ다.그리고는 술을 더 마시기 위해서 잘라진 손목으로 소년을 꾹꾹 찔렀다. 소 년은 놀라서 컵을 집어들었다. 소년은 조그많고, 똘똘해 보이는 얼굴로 눈을 깜 빡거리면서 주위의 사건을 열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허허- 하지만 손가락을 자르기 시작했을 때는 좀 기분이 달랐을 걸!" "쓸데없는 소릴, 까짓것쯤이야 뭐..." 그는 소매로 입에 묻은 맥주를 닦았다. 테이블 저쪽 끝에 있던 늙은이가 몸을 앞으로 내밀고 흥분으로 숨을 허덕이면 서 소곤거렸다. "저놈이 만다라게(독이 있는 식물로서 인체이 모양을 하고, 뽑으면 외친다는 미신이 있다.: 역주)를 갖고 있는 걸 아나?" "아아, 그 따위 것은 어쨌든 상관없어."하고 라세는 큰소리로 똑똑히 말했다. "별로 그것 때문에 무슨 위험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데다가 내겐 이 아이가 있어. 무척 머리가 좋은 놈이거든." "응, 그렇게 보이는군." 소년은 칭찬을 받고 기분이 좋아져서 눈을 깜빡였다. "이 얘는 네 자식이냐, 라세?" "잘은 몰라, 하지만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상당히 나를 닮은 것 같으니 말이지." "그러면 너도 잘 모르겠단 말이지." "그렇지. 어쨌든 갈보가 얘 어미거든. 그런데 어미는 매질만 하고 밥을 안 주 니까 도망쳐 나와서 나한테 있는 거지. 나는 세상살이를 하는 데 필요한 것을 어느 정도 해줄 생각이지. 놈은 열성있는 학생이야. 이런 좋은 아이는 너희들도 구경한 적이 없을 거야- 그렇지? 나는 너의 아버지지? 요케." "헤헤, 어느 편이든 마찬가지죠." 소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네 말 그대로!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치우자. 하지만 내 편에선 기분이 좋거든. 어떠냐. 요케?" "좋아요!" 소년은 또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런 코흘리게 꼬마 하나쯤 가지곤 너도 감당하기 어려울 걸. 네가 그 렇게 말해도 속진 않아." "응, 그래서?" "그럴 거야..." "그렇고 말고. 그런 아귀 따위보다 더 나은 힘한테 도움을 받도록 하지 않으면 안될 거야." "어떤 힘인데?" "모르겠어." "아아 그 이야기야... 왜 쓸데없는 소릴 지껄이는 거야?" 한참 동인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들은 컵을 만지고 움직이고 했다. "하지만 너 만다라게를 갖고 있다는 게 사실 아닌가?" "뭐야, 쓸데없이..." "너같은 사내가 어떻게 그것을 땅에서 뽑을 수 있었겠나 말이야." 날카로운 시선이 어둠 속을 뚫고 야윈 얼굴이 긴장했다. "필요하다고 생각만 한다면 라세는 더 기묘한 방법을 찾아내거든."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을 처형장에서 뽑아낸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거든. 더구나 손이 없는데 그걸 해치우자니 더욱 어렵지." "그렇고 말고. 거기에다 떠드는 소리가 들리면 죽은 넋의 먹이가 된다니까." 그들은 라세 쪽을 훔쳐보았다. 그는 머리를 홱 감싸더니 두세 번 몸서리를 쳤 다. "아니 뭐 이것저것 여러 가지 것을 가지고 하니까, 정말. 응 라세, 너는 이미 오래 전에 악마에게 혼을 팔아 버렸다." "물론이지." "그럴 거야. 말할 것도 없지." "알았나!" "그러데 밤중에 유령한테 목을 졸리거나 하잖나?" "뭘... 악마랑 사이가 좋아진 다음엔 그런 일은 없어. 갓난아이처럼 콜콜 잘 수 있는 거야." "그 코고는 소리 문제 없나. 라세!" "헤헤 - 군소리가 너무 많구나! 그렇다면 너는 변변치도 못한 손발을 내려뜨 리고 대낮부터 이 세상을 기웃거리고 돌아다닐 게 없을 것 아닌가." "나리의 요리 솜씨로 보면 어쩐지 나리는 네가 악마의 것이 아니라 자기의 먹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던데." 그들은 자기들의 농담이 그럴 듯하게 느껴져 한바탕 웃어댔다. "그게 어쨌단 말이야. 어이!" "틀리단 말인가!" "너도 보통 망나니의 먹이처럼 취급을 받았겠지. 응, 그러잖아?" "그것이 어쨌다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이 라세님을 해치우신 못 한다." 그는 재빨리 움직이는 눈으로 일동을 흘겨대면서 소리쳤다. "뭐야 자식! 보통 일이 아니란 말이다. 잘 들어 둬라." "그러냐? 하지만 어쨌든 놈들은 덤벼들긴 하잖았나 말이야?" "놈들에겐 내게서 어는 것 하나도 뺏을 힘이 없었던 거다!"그는 큰소리로 외 치고 일어섰다. "거짓말 아니다. 지금이라도 그렇다! 나를 멋대로 요리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 고 생각하나? 너희들은 알고 있을 텐데!"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일은 거창해졌군!" "이 눈알이 새까만 동안은 절대 그렇다.내 소유물은 어느 누구한테도 뺏기지 않는다! 내 유산은 이 아이한테 주는 거다." "뭐라구? 남에게 줄 유산이 있어? 어이 라세! 어이 들었나?" "있구 말구! 너희들 중의 어떤 놈보다도 넉넉히 말이다! 애한테는 만다라게고 지옥이고 모두 다 주는 거다!" "그러면 만다라게도 가지고 있단 말이지?" "그렇다. 믿어도 좋아! 너 보고 싶으냐?"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이 품 속에 지니고 다녀. 사람 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 이놈만 있으면 웬만한 도둑질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거든. 호주머니는 비어 있어도 뭣 이든 수중에 굴러 들어오거든. 뭣이든지!" 그들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몸서리를 치면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손에 넣었어. 이 자식아! 처형장에서?" "다른 곳에 있는 줄알아? 교수대 바로 말이지. 송장이 바람에 불려 철썩 떨어 지면 흙에 묻히지. 바로 거기란 말이야!" "너는 거기까지 갔었구나! 한밤중이었겠지!" "몰론 갔지! 잠자리 속에서 여편네랑 기도나 하는 짓 따위와는 좀 다르다! 너 희들 따위가 감히 할 만한 일이 아니지." "어림도 없는 소리." "한숨 소리며 우짖는 소리 따위로 등덜미가 오싹해지지..." "누구의?" "죽은 사람이지. 그 정도로 알아두면 돼! 찾는 동안에 그놈들이 덤벼들거든! 정말이다. 힘껏 놈들을 때려 눕히지 않으면 안돼. 그러고 나면 이번엔 울부짖고 소리치고 야단이거든. 마치 우리 속에 가둔 미치광이들을 조용하게 하려고 망나 니 조수가 매질할 때하고 비슷하지. 말하자면 저승의 울부짖는 소리, 외치는 소 리지. 난 그때 미쳐버리는 게 아닌가 했지. 도저히 놈들을 물리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비켜, 비켜라'하고 흉악한 유령들한테 성을 냈지. '비켜서라, 괴물들아! 나는 죽은 사람이 아니야. 살아있는 인간이다. 그러니까 그게 필요한 거다'하고 말이야. 그래서 마침내 놈들을 웬만큼 물리칠 수가 잇었던 거야. 바로 그때 그놈 이 발견했거든. 살인자 페테르, 그밖에 몇 명이 매달린 교수대 바로 밑이었지. 그래서 잘라진 한쪽 팔목으로 둘레의 흙을 치웠어. 그래 놓고 나는 엎드려서 이 빨로 물어당게 뽑아냈단 말이다." "거짓말 말아! 네가 직접 말이야?" "정말이고 말고! 내 자신이 직접 했단 말이다. 직접 하지 못하고 그럼 개 따위 를 쓴단 말이야!" 그의 눈은 이상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땅 속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어. 여러 번이나 말이야. 등덜미가 얼어붙는 듯한 소리였어-하지만 내 귀엔 그런 소리 따윈 들어오지 않아. 간덩이 가 작은 놈들과는 달라서 말이지 - 어쨌든 나는 항복하지는 않는 거야-그래서 몇 번이나 힘을 주어 뿌리를 잡아 당겼지-송장이다. 피다, 썩은 것하며 별별 냄 새가 다 났지-아래쪽에선 중얼거리고 울부짖고 야단이지-하지만 나는 귀에 뚜껑 을 해서 틀어막거나 하진 않았어, 이 나리 양반은 말씀이야. 계속해서 쑥쑥 잡아 당겼지-못 견디게 그놈이 탐이 났으니까 말이야!" 그는 피로한 듯하면서도 흥분하고 있었다. 그에 압도되어 청중은 뒤로 물러났 다. "그놈을 땅에서 뽑아낸 순간 주위에서 우당탕 퉁탕하는 소리가 났어. 번갯불이 번쩍이고 땅이 흘들렸어-지옥이 입을 벌리고 땅 속에서 피와 해골이 솟구쳐 나 왔어-얼마나 무서운 일인가-어둠이 찢기고 불길이 세계에 흘러 나왓어-얼마나 무서운 일인가-얼마나 끔찍스럽게 외치는 소린가-있는 온갖 것이 불탔지-마치 이 세상에서 지옥이 폭동하기 시작한 것 같아!-나는 '자아,뽑았다, 뽑았어'하고 외쳐줬지!" 그는 일어서서 손목 잘린 두 팔을 머리 위에서 흔들어 댔다. 흉측한 불구의 유령과도 같았다. 미치광이 같은 빛을 띤 눈은 당장이라도 파열할 듯하고 목소 리는 인간의 음색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나는 재산을 갖고 있다! 남에게 줄 유산이 있단 말이다! 이건 악마랑 내기를 해도 틀림없단 말이다." 형리는 잠자코 움직이지 않는 둔중한 자세로 앉은 채 언제까지나 어둠을 바라 보고 있었다. 사람들 여럿이 들어왔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이야기 소리, 웃음소리, 컵을 맞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천장의 장식 전등은 천천히 돌아가면서 푸른 자주 와 녹색이 어린 빛을 흐리멍덩하게 내던지고 있었다. 홀 가운데에서는 댄스를 하는 몇 쌍이 바닥 위를 미끄럽게 스쳐가고 음악이 나직이 흐르고 있었다. 댄스는 테이블 사이의 통로까지 번져 가서 이윽고 홀 전체에 퍼졌다. 밝은 옷 차림을 한 여자들은 눈을 반쯤 감고 남자들한테 몸을 기대고, 음악은 재즈 리듬 을 울리고 있었다. 통통하게 살찐 한 미녀가 미끄러지듯 지나쳐 가면서 상대의 어깨너머로 돌아 다보았다. "어마, 형리가 와 있네요."그녀는 속삭였다. "희한하잖아요?" 빛은 사람들 머리 위에서 움직이고 테이블은 죽은 사람 얼굴처럼 파랗게 빛났 다. 보이들은 땀을 흘리면서 소란과 외치는 소리 사이를 뛰어 돌아다니고 샴페 인 마개가 장식을 한 뚱뚱한 신사가 나와 공손히 경례를 했다. "오늘 저녁 저희들의 죄석에 형리님이 나와 주셔서 큰 영광입니다."하고 그는 손을 비비면서 말하고, 찌르는 듯한 조그만 눈에 끼운 코걸이 안경을 밀어 내렸 다. 댄스가 끝났다. 손을 잡았던 사람들은 흩어져 얼글을 부드럽게 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형리가 와 있는 걸 알고 있니?" "몰라요, 그런 남자가 여기 와 있다니요!" "있어. 저기 앉아 있지 않아." "네에-. 희한한데요." 씩씩한 어린에 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형리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 우선 '차려'자세를 취하고, 이어 한 팔을 공중으로 반듯이 치켜 올리고 'Heil'하고 외쳤 다. 그 모습은 한순간 화석이 된 듯 굳어 있었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를 하고 다시 한 번 양쪽 발꿈치를 착 붙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주위는 이야기 소리와 웃음 소리로 떠들썩했다. 넝마를 걸친 사나이가 들어와 테이블마다 야윈 손을 내밀곤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돌아다니다가 곧 쫓겨났다. 매춘부들은 테이블에서 컵을 핥으면서 지껄이고 있었다. "저 붉은 옷을 입은 건 무척 두드러지잖아,응?" "그래. 무척 두드러지는데." "지독한 난폭자처럼 보이는군." "정말 여잘 홀리는 사내로군." "어림도 없는 소릴. 당신 좀 이상해. 그러나 정말 색다른 사내야." "어째서 줄곧 이마에 손을 댄 채로 앉아 있을까 몰라." "그런 걸 내가 알 게 뭐야." "희한한 사람이야." "망나니를 손님으로 받으면 어떨 것 같아?" "정말 악취인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어." 음악이 다시 시작되었다. 악단이 교대하여 감상적인 곡조를 연주하고 있었다. 춤추는 패들이 몇 쌍 흔들리는 푸른 불빛 속에 미끄러져 나갔다. 가느다란 팔은 어께에 걸쳐진 채 반쯤 조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내일은 무슨 별다른 일이라도 있어?' "모르겠어. 하지만 사람이 숱하게 죽어 나갈 모양이야. 기분 좋아." "그래, 괜찮은 이야기야. 세상엔 쓸어 내버릴 정도로 인간이 숱하니까. 더구나 똑똑한 사람이 말이지. 어쨌든 살아남는 건 제일 나은 놈이거든. 말 안해도 뻔한 거지." "그래요." 중년의 군인이 혀를 차면서 확실히 뻐기는 걸음걸이로 형리의 테이블 옆을 지 나갔다. "훌륭한 일이로군요, 질서가 잡혀 간다는 것은. 형리님. 민주은 예의 바르게 행 동하기를 배우지 않으면 안되지요." "어이, 이건 뭐야. 스트레이트를 주문했는데. 이건 반은 물이 아닌가. 뭘하고 있는 거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응, 죄송합니다도 좋지만 무척 성의 있는 서비스로구나. 진저리 나도록 기다 리게 해놓고 겨우 이거야?" "게다가 마개까지 따 버렸잖아?" "바꿔 와. 우리 스트레이트 밖엔 안 마셔." 돈 많은 뚱뚱보 부인이 세면소에서 돌아와 몸을 흔들면서 지나갔다. 형리를 알아보고 그녀는 손뼉을 쳤다. "어마, 여보세요. 형리님이 여기 있잖아! 참 헤르베르트한테 알려줘야겠군." 그녀는 다가가서 형리의 팔에 다정스럽게 손을 얹엇다. "우리 아들은 당신하고 알고 지내려고 애쓰고 있어요. 그 애는 굉장한 유혈예 찬가거든요. 그 녀석은." 그녀는 몸을 일으켜 어머니답게 주위를 둘러보면서 가족을 찾았다. 음악은 감상적으로 흘러 미끄러져, 움직이고 있는 가냘픈 여자들의 몸뚱이를 어루만졌다. 너절한 차림이 조그만 아이가 출입구로 살그머니 들어와 테이블에 서 테이블로 돌아다니면서 너덜너덜한 옷 앞자락을 열어제치고는 벌거버은 아랫 도리를 보이고 있다가 보이한테 붙잡혀 등덜미를 끌려 밖으로 내쫓겼다. "아니, 여보세요. 반댑니다! 폭력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 힘의 최고 발현입니 다. 육체적인 힘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힘까지로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분명해진 사실입니다. 우리들과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 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바로 이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그 잘못을 때닫게 하는 것 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도 반드시 똑같은 사고방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당신 들도 이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아아, 정말 그 말씀대롭니다." "확실히 우리들도 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같이 우리들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현대 이 역병이 다가올 세대 사이에 퍼져나가는 것을 허용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당신 들께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렇지요. 우리들은 자기의 책임을 자각하고 있으 니까요." "그럼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말씀이죠, 당신들께서 아직도 과거의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는 모양은 그야말로 웃음을 금할 수없다는 느낌이 없지 않아요. 우리들과 다른 세계관이 존재힌다는 것은, 절대로 잇을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아시고 계실 줄로 생각해 요. 구식 사고방식은 아시다시피 이미 종말을 고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와 같이 말입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당신이 생각하시는 바를 한층 더 잘 알겠습니다. 정말 그 말씀대로 단연 그렇습니다. " "그렇소. 종래의 습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우리들이 전혀 새로 운 사물을 보는 방법은 생겨나기 시작하는 셈이지요. 다소 곤란이 있는 것ㅇㄴ 맨처음뿐입니다. 본래 극히 간단한 사고방식이니까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당신들께서는 우리들 쪽에서하고 있는 순종하지 않는 자에 대한 규정된 태형 을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이만큼 배울 점이 많은 정경도 따로 없을 것 같아요.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인간이 다시 드높은 인생을 향해 고양되고, 다시 귀한 것 으로 개조됨을 느낄 수 있게 되지요." '허어. 꼭 구경을 시켜주셨으면 합니다." "시간만 들이면 80세 노인을 개조하는 데 성공한 예도 있습니다." "아니, 전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대중 사이에 참된 확신을 전달기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해 본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우리들은 다른 데서 유례를 볼 수 없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는 것입니다. 이 점은 보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우리들은 다가올 모든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바야흐로 모든 인간의 존재 방식과 지구상에 있어서 인간의 앞날에 발전을 결정하는 시대입니다." "그렇죠. 옳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음엔 계급입니다. 이미 계급이란 건 존재하지 않죠. 실로 이거야말 로 최근의 사건에서 가장 위대한, 주목할 만한 점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우 리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갖는 사람들과, 현재 수용되어 우리들과같은 사고방식 을 교육받고 잇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반드시 그것을 배워 익히고 잇는 것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사람들은 여기서 샴페인,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고 있듯이 단 한 잔의 맥주를 마시고 있어요. 부르주아도, 노동자도, 다소 지위가 높은 사람도 섞여 있습니다만, 모두 평등합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들과 똑같이 말입니다. 밖에 있는 사람도 우리들과 같은 사고방식 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 "하하하" "당신들께선 끝내 집중되어 일체화한 하나의 민족이라는 유례없는 멋진 광경 을 눈앞에 두고 있는 셈입니다. -갈팡대던 사람들도 금시 이 전열에 참가해 오 지요, 이 점에 있어선 아무런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그래도 아직껏 끈덕지게 거 부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강압으로 굴복시킵니다. 사람들이 수용소 앞에 떼를 지어 모여서, 안에서 들려오는 개심한 사람들의 절규를 확신하면서 기다리고 있 다는 것입니다." '그건 참 감동적인 이야긴데요. 놀라운 정신이군요!" "그렇고 말고요! 이런 일은 일찍이 세싱에 없었던 일이지요. 이것은 만인일치 의 종교적 귀의 라는 성격을 가진 것입니다.개심자의 절규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차렷'자세를 하고 있는 사람이 많을 정도입니다. 그 숨은 장소에서 자기들의 민 족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만큼 존경심을 지니고 잇는 셈입니 다. 정말 감동적인 광경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시로 우리 민족에게만 한한 것으로서 우리는 지구상의 다른 어떠한 민족과도 다릅니다. 완 전히 질이 다르지요." "옳은 말씀. 그리고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위한 신을 반드시 가져야만 합니다. 그것도 지금 당장입니다. 저급한 다른 민족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그런 신을 우 리 민족이 숭배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극히 종교적이죠. 그 러나 한가지,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신을 요구한다. 만국 공통의 신이라는 관 념은 우리들의 사고방식 전반에 대한 공공연한 모욕으로서, 현재 모든 범죄에 대해 적용되고 있는 방법에 위해 처벌을 당하게 되겠지요." 지저분한 사나이가 컴컴한 어둠 속을 어슬렁거리면서 엷은 웃음을 띠곤 구걸 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테이블을 탁 쳐 술이 켜 밖으로 찔끔찔 끔 튀었다. 방 저편 구석에 몇 사람이 테이블 하나를 들러싸고 앉아 있었다. "뭘하고 있는 거야! 맥주하고 소시지를 주문했는 데 가져온 건 샴페인이야. 어 쩌자구 얼빠진 짓을 하는거야. 그 근처의 돼지 같은 부자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아니, 죄송합니다. 손님께선 상류계급에 계신 분들로 생각했기에..." "이 개새끼. 이 다음엔 잘 봐둬! 그러찮으면 두 눈깔 사이를 한 대 갈겨 줄 테 다. 눈알이 번쩍해서 잘 보이도록 말이야." 한 병정이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들어와 형리 옆에 ㅌ썩 걸터앉더니 떠들썩 하게 이야기를 건넸다. "어쩌자구 멍청스런 꼴을 하고 있는 거냐?,,,, 어째서 또 연록색 옷을 입지 않 는 건가, 응?... 이걸 봐, 이걸!.. " "쉿.." 누군가가 옆에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형리님이라는 걸 모르나..." "뭐라구? 알고 있어. 하지만 아무래도 우스워서 보고 있을 수가 없는 걸!.. 형 리님이라구? 헤헤에. 그렇다면 통하는 줄 아냐? 소용없어. 기관총이 아니면 안 돼. 거기에다 수류탄이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도구가 있지만 그런 건 이미 아 실 테지! 너한텐 그런 일이 불가능할 거야. 보면 알지." "병신 소리 말아. 잘한다 말이야 -너 따위보다는. 웬만큼 껍적거려둬라. 응, 얼 간아. 나리하고 너는 같은 구멍에 든 담비야. 응, 그렇지." "응, 하지만 나리는 기관총을 사용하는편이 낫다고 하는 거야!... 희한한 신식 도구야, 알고 있겠지... 어쨌든 녹색 옷을 입잖으면 안돼, 알았지? 영감!" "어이, 좀 웬만큼 떠벌여 두지, 응. 젊은 친구! 너하거 내 나이 차이로 봐서 어느 쪽이 전쟁을 더 겪었겠나, 말할 것도 없잖아. 네가 말하는 걸 들으면 빤히 알고 있어." "하지만 나도 멀지 않아 겪게 돼. 그건 악마한테 내기를 걸어도 괜찮아. 그때 가선 눈에 뜨끔한 꼴을 보여주겠어!" "그렇지. 나나 다른 젊은이들도 말이지. 도구를 쓰는 방법은 젊은 사람들이 알 고 있거든. 정말이야! 거기에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도 그렇지!" "좋다구, 젊은치야!" "응, 훌륭한 젊은이야. 하지만 오늘밤엔 저 젊은 머리에 좀 지나치게 맥주가 들어간 모양이야. 아니 이 나라에 이런 젊은이가 있다는 것은 실로 신통한 일이 야! 늙은이는 감격하거든..." "어이, 망령 들었어, 노인들... 당신네들은 이제 아무것도 몰라... 자아, 형리님 건배! 당신이 마음에 들었어! -왜 안 마시는 거야? 이건 유감 천만인데. 걱정 거 리라도 있나?" 구석 테이블에서 폭소가 터져 손님도 보이도 모두 돌아보았다. 젊은 여자 하 나가 허리가 휘청하도록 웃고 있었다. "우리가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명백합니다. 전쟁은 건강 바로 그것 입니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 민족은 병든 민족이지." "옳은 말이요. 평화는 젖먹이 어린애난 병자를 위해 있는 것이지. 그런 패들은 평화를 필요로 하겠지만, 성숙하고 건강한 인간은 다릅니다!" "한창인 사나이에게 있어서 참호만큼 기분 좋게 지낼 수 있는 장소는 없소. 평 소에도 집안에 살 것이 아니라 참호에 살아야 할 것이요. 집에 사는 것은 국민 을 허약하게 할 뿐이야." "그렇지. 전쟁에 의한 철의 세례는 반드시 없어서는 안될 것으로,건강한 국민 이면 전쟁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것은 그저 기껏해야 십년이지. 그 이상 길 어지면 타락이 시작되지-설령 국민이 건강한 경우에도 말이야." "그렇지요. 전쟁을 종결시키는 자는 바로 배반자야." "그렇고 말고!" "배반자는 해치워 버리지 않으면 안돼! 배반자을 해치워라," "죽여 버려라!" "그렇지. 설령 배반자가 이겼을 경우도 그래. 자칫하면 평화가 가지는 온갖 위 협 속에 내동댕이치게 될테니까. 전쟁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지만, 평화 시대의 국민은 온갖 미지의 위험에 위협을 당하고 잇는 것이 지." "그렇지, 그래." "그렇지. 그와 같은 좋지 못한 허약성을 내버리지 않으면 안돼. 아이들도 전쟁 을 위해 교육시켜야 돼. 걷는 연습을 할 경우엔 군대식으로 하지 않으면 안돼, 결코 어머니가 하는 식으로 해서는 안되는 거야."\ "그렇지. 자연 그렇게 될 거야. 우리들이 직접 아이들의 손을 이끌어 주는 거 야. 결코 무책임한 부모들한테 맡겨 둘 일이 아니야." "당연한 일이야." "이렇게 함으로써 미래는 우선 안심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 그래!" "전쟁 이야기를 하고 계신 모양인데"하고,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ㄷ. 얼굴이 총탄으로 일그러져 하반부만 남고, 다른 부분은 표면이 붉고 비늘처럼 되어 있 었다. 그는 비척비척하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는 기쁩니다.저 오랜 명예에 빛나는 싸움터로 우리 민족이 다시 한 번 출동 할 날을 맞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근대 과학의 혜택으로 그에 참가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나온 책을 남이 읽어 들려준 바에 따르면 영혼으로 가까이 내다보이는, 그러니까 가능한 데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학자는 생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과 제일선에서 뵙 게 될 것입니다 -확실한 눈을 가지고요. 아무튼 전우 여러분, 난 정신만은 확고 히 가지고 있으니까요." "멋지다,멋져!" "정말 얼마나 큰 보람이냐!" "희한한 일이야!" "위대한 시대에만 인간은 이와 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옛날부터 전해 오고 있듯이 전쟁은 사람의 이마에 고결한 표적을 새 겨 놓은 것이지. 보시는 바와 같이!" "정말 희한해!" "얼마나 잘난 민족인가! 실로 불패의 민족이 아닌가! 만약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민족이 있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절멸시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야, 그것이야말로 그 민족을 위하는 거야.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가기보다는 절멸시키는 것이 훨씬 행복한 것이다." "말할 것도 없는 일이야." "세계는 우리들의 의도를 이해만 한다면 그날부터 우리들에게 감사할 것이요." "인류가 스스로 구축해 올린 것을 얼마쯤 지난 뒤에 파괴하는 것은 정말 필요 한 일이요. 그것을 하지 않으면 참된 씩씩한 정신이 메마르게 되는 것이요. 그러 므로 파괴는 단순하고 또 타성적인 건설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요.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보람찬 시대가 되는 것이요! 어느 시대에나 세계를 점차로 조금씩 개선 해 나가려는 끈기 있는 일꾼 개미는 나오는 것이니까. 우리는 그 점에 불안을 느낄 필요는 조금도 없소. 그러나 인간의 조그만 완구의 세계를 단번에 말살하 여 근본부터 뜯어 고치는 것을 가능케 할 만한 대담한 정신은 우리들이 그에 상 응하게 될 때에만 나타나는 것이요." "우리 민족은 철두철미 건강한 민족이요! 그렇기 때문에 이 민족은 다른 민족 이 압제라고 부르는 그것을 사랑할 것을 공공연히 선언하는 도덕적 용기를 갖추 고 있는 것이요. 이것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자는 타락하고 약체화한 인종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강인한 민족은 모두 자진해서 태형을 당하기를 즐기고, 그것을 유쾌한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요." "그렇고 말고. 우리 세대의 젊은이를 보는 것만큼 우리들의 정신을 드높이는 것은 없어! 우리들은 청년 위에 그것을 구축하는 것이다. 감상을 버린 용기있는 현대의 청년 위에! 청년들은 도처에서 우리들 편에. 다시 말하자면 힘을 가진 자 편에 들어 있어! 이 젊은 영웅들은..." "그렇지. 그들이 자진해서 가져야 할 용기를 가져 주면 되는 거야." "누가 뭐라고 했나?... 그러찮으면 잘못 들은 걸까." 출입구 가까이에서 동요가 일어나 사람들은 수군거리면서 일어서 공중을 향해 손을 벋쳤다. 모든 시선이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떠들썩한 소리가 실내에 퍼져 나갔다. "암살자 만세! 암살자 만세!" 인상은 나쁘지 않으나 지극히 평범한 얼굴에 몸집이 좋은 두 젊은 사람이, 만 세를 부르고 서 있는 줄 사이를 걸어나와 은근한 미소를 띠면서 좌우를 향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보냈다. 방 안의 모든 사람이 기립하고 있었다. 댄스 음악은 멎고 악단이 찬미가를 연주하고 모두가 일어선 채로 이것을 들었다. 그러는 동 안 세 명의 보이가 발걸음소리도 없이 새로 온 손님에게로 달려갔다. 나중에 나 온 술집 주인은 허둥대다가 맥주 컵과 포도주 병을 올려놓은 테이블을 귀부인 서넛이 앉은 쪽에 뒤집어 엎었다. 당황한 주인의 변명을, 여자들은 나지막하나 힘이 맺힌 목소리로 반격했지만, 그는 그것을 흘려 들으면서 다시 달려갔다. 어 디나 할 것 없이 만원이었으나 슬슬 집어치우고 돌아가는 몇 사람이 자리를 비 워, 문제의 두 젊은 사람은 그 테이블을 점령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어딜 가든 금방 알아보걱든, 난처하게." "정말 그래"하고 상대바은 대답하며 담배 연기를 휙 뿜어 내고는 테이블 밑에 발릉 뻗쳐 주문한 것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건 좀 귀찮게 될 것 같은 걸." "그래, 살인자가 되면, 이렇게 귀찮은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우리도 그 사나 일 쏘거나 하진 않았을 텐데. 그런 데다 그놈 역시 그다지 나쁜 인간도 아니었 던 모양이니 말이야." "그렇지만 그 풍채만 보더라도 그놈이 우리편이 아니었던 것은 명백해." "그건 그래. 그건 너무 지나쳤지." 흑인 악단이 다시 재즈를 시작했다. 야윈 여자가 어린애을 숄에 둘둘 말아 방 안을 가로지르려고 했으나,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해 이윽고 그녀는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오늘밤에 시체를 운반하나?" "시체를 운반해?" "그렇지. 새로운 세계관에 반역한 놈들을 산더미처럼 교회 묘지에서 웅덩이 쪽 으로 옮기는 거야. 놈들에겐 그 편이 나을 테니까." "허어...." "뭐야, 하기 싫단 말인가?" "그건 몰라... 그런데 그건 어떠한 사상인데?" "사상이라구? 우리들의 행동의 기초가 되는 사상이지. 알겠어. 전우!" "으응.... 하자만 놈들은 우리들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죽어 있지 않았나?" "그게 어쨌다는 거야!" "아니, 좀 가혹한 짓이라고 생각되는데." "무슨 소릴! 하기 싫은가! 반대할 셈인가!" "반대라구? 나는 다만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가혹한 짓? 너는 내심으로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니, 아니, 그게 아냐." "잘 들어! 너는 내심으로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똑똑히 내뱉어." "내가 뭘 생각하구 있냐구?... 무슨 오해를 그렇게 하는 거야." "너는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할 셈이냐! 쓸데없는 개인적 의견을 늘어놓으려 는 거냐! 이 새끼 봐라." "내버려 둬 줘, 잔소리 말구!" "안돼. 그렇게 간단히 방면해 줄 줄 알아!" "괜찮잖아. 이 악당아!" "어이 여러분, 이놈이 우리들을 뭣이라고 불렀는지 들었죠!" "돼먹잖은 자식 봐라! 거역할 셈인가! 탈주병이 되려는 거지!..." "거역하고 있는 건 아니잖나!" "탈주병을 상대로 말다툼 따윈 집어치워 버려! 말할 필요없어." 총소리가 울리고 둔탁한 소리가 털썩하고 들려 왔다. "시체를 치워라!" "괜찮아, 버려둬. 아무한테도 방해는 안돼." 재즈는 변함없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목이 가냘픈 젊은 여자가 휙 돌아 다 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녀는 물었다. "누가 총에 맞았겠지." "아아, 그래요." 구석 쪽 테이블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내가 일어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뭣인지 알겠나? 곳곳에서 자자하게 소문이 퍼지고 있지만." "몰라" "그 근처의 코흐리게 꼬마가 상상하고 있는 것과는 전연 다르단 말이야." "뭐야 뭐?" "에..." 사나이는 담배를 빙빙 돌리고 옆 사람한테 담뱃불을 얻어 먼저 피우던 꽁초를 탁 뱉아냈다. "이윽고 때가 되면 우리들도 방아쇠를 당기게 된단 말이야. 놈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쳐 준 것이 우리들이었느냐, 아니었느냐 하는 건 신에게 물으면 알겠지만. 아무튼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지만." "이 시대에 세상에 어느 놈이나 이 방법을 배우고 싶어하니까." "그렇지 그야." "웬만큼 인간을 깨끗이 쓸어낼 수 있담년 좋을 텐데. 이건 필요한 일일지도 모 르지." "응, 나도 구석지의 한쯤이라면 기꺼이 쓸어내 주겠어." 젊은 여인이 들어와 형리 옆에 나란히 소리도 없이 앉았다. 그녀는 보기에 거 지 같앗으나 머리에 감은 숄을 풀자 그 얼굴은 이상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형리의 손 위에 손을 올려 놓자 그는 여자 편을 향해 고쳐 앉았다.- 이 여자는 이 시간 동안에 그가 시선을 보낸 단 한 사람의 인간이엇다. 이 여자에 대한 것은 다시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음악이 바뀌고 홀 반대쪽 끝에 자리잡은 우아한 악단이 고전 멜로디의 감상적 탱고를 연주하고 있었다. 홀에는 가랑앉은 차분한 기분이 넘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한 신사가 화장실에 가게 되었다. 돌아올 때 그는 흑인들이 무대 뒤 테이블에서 샌드위치를 서둘러 목구멍에 밀어 넣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이, 돼지들아. 주제넘은 짓 아닌가! 백인들 사이에서 음식을 먹다니." 그들은 깜작 놀라 돌아다 보았다. 가까이 있던 하나가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 어나면서 말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뭐라고 했느냐구? 너희들이 여기서 음식을 먹는 건 분수를 모르는 주제 넘은 짓이라고 말했다. 더러운 원숭이들!" 그 흑인은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났다. 눈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으나 먼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오, 여러분!"하고 성난 신사는 사람들을 큰소리로 불러댔다. 군중은 달려와 서 신사와 흑인들의 주위를 들러쌌다. "여러분, 이런 일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정말 괘씸해! 이 원숭이들이 우리 백 인과 동석해서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왁자지껄하게 소란이 일어났다. "뻔뻔스럽기 짝이 없군! 괘심하다! 여길 원숭이 울안으로 생각하는 거냐! 원숭 이 울안으로 보는 거냐." "우리들도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먹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하고 한 흑인이 말했다. "그렇지만, 인간 나라가 있는 곳에서 할 일이 아니란 말이다. 개새끼" "먹다니! 너희들은 음악을 들려 주기 위해 여기 있는 거야. 먹기 위해서가 아 니다." "너희들의 음식이 우리들의 마음에 들어 우리들을 위해 연주할 수 있다는 건, 너희들에게 더 이상 없는 영예란 말이다. 하지만 얌전히 예의 바르게 하고 있어 야 하는 거다.그렇찮으면 린치를 가해 준다..알았나." "다시 제자릴 갓!" "어이! 뭘 꾸물꾸물하고 있는 거냐!" 그러나 흑인들은 명령에 복종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여러분, 이것은 소극적 저항으로써 가장 악랄한 것입니다."하고 귀족적인 얼 굴을 한 당당해 보이는 신사가 말했다. "어이! 우물쭈물하면서 어쩌자는 거냐!" "헤라! -스테이지로 올라갓!" "우린 배가 고프다구요! 연주를 하자면 우선 먹지 않으면 안돼요!" "배가 고프다구요! 연주를 하자면 우선 먹지 않으면 안돼요!" "배가 고프다구? 개새끼, 무슨 말대꾸냐!" "그래요. 우리들도 먹지 않은면 안돼요. 음식을 먹을 권리도 있는 거구요." 괄괄한 덩치 큰 사나이가 이렇게 말하면서 위협적으로 눈알을 부라렸다. "권리라구? 너희들에게 무슨 권리가 있어! 건방지게!" "있구 말구요!" 그 흑인은 대답하고 앞으로 나왔다. "개새끼 백인한테 그 말대꾸가 도대체 뭐야! 이 돼먹지 못한 새끼가!" 이렇게 외치며 그는 흑인의 얼굴을 정통으로 갈겼다. 흑인은 몸을 핵 숙였다. 그리고는 짐승처럼 몸소리를 치는가 하더니, 이번에는 전광처럼 뛰쳐 나가 상대에게 철권을 한 대 먹였다. 백인은 벌렁 나뒹굴어 나무 토막처럼 뻗어 버렸다. 주변에 벌집을 쑤신 듯한 큰 소동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거기로 몰려 닥쳐 홀 은 살벌하고 험악한 흥분에 휩싸였다. 흑인들은 삽시간에 물러서서 한 덩어리가 되어 낮은 자세로 격투할 태세를 취했다. 그는 인간 정글 속에서 출현한 낯선 괴수와 같은 모습을 한 충혈된 눈으로 흰 이를 들어내고 있었다. 총소리가 한 방 울려 퍼졌다. 그러자 무리 속에 한 사람이 피에 물들어 신음 소리를 내면서 백인들 속으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빼려 눕혔다. 다른 흑인들도 왁자지껄 이 에 뒤따랐으나 금세 피스톨로 제지당했다. 흑인들은 피에 젖어 의자와 테이블 뒤로 몸을 숨겼다. "연주할 생각이 나지. 어때!" 금발을 한 멋진 신사가 이렇게 말하고는 브로닝 총구를 그들이 숨은 장소로 돌렸다. "하긴 뭘 해!" 흑인들은 울부짖었다. "다른 악단이 있잖아?" 누군가가 큰소리로 말하고 사람들을 약간 무마하려고 했다. "또 하나 있잖으냐 말이야?" "센티멘틀한 농담 따위는 지옥행이다. 이놈들한테 시키는 거야. 자아 원숭이들 아. 위로 올라가!" 흑인들은 숨은 곳에서 쫓겨났다. 금세 전보다 치열한 난투가 시작되어 실내는 광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여러 가지 도구가 살인용 탄환이 되어 공중을 날았다. 그 젊은이는 의자 위에 꼿곳이 서서 뭐라고 떠들고 있었다. 흑인들은 홀 안으로 쫓겨 돌아다녔다. "어이, 무슨 짓을 하는 거요! 우리들 역시 문명의 ..." "뭐라구! 다시 한 번 지껄이면 갈겨 버릴 테다!" "문명이라?그게 뭐야." 덩치 큰 흑인 -맨 처음에 철권을 휘두른 남자로 보이는- 이 광포전사처럼 돌 진하여 통로에 있는 온갖 것을 걷어차 쓰러뜨리고 좌우로 치명적인 넉아웃을 먹 이면서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누군가 겨눈 한 방에 쓰러ㅈ다. 그는 가슴을 움켜 쥐면서 입가에 멍청스럽고 공허한 냉소를 띠고는 털썩 쓰러ㅈ다. 남은 흑인들은 분산된 힘을 집중시켜 의자를 무기로 상대의 머리를 부수며 날뛰었다. 그들은 격분하여 완전히 맹목으로 싸웠다. 그 눈의 흰자위는 증오로 번들번들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드디어 그들도 쓰러졌다. "물어 뜯고 자빠졌어. 이 불쌍한 새끼가!" 제복을 입은 군인이, 거의 죽어가면서 쓰러져 아지고 다리를 물고 늘어져 있 는 흑인을 향해 외쳤다. 그리고는 총부리를 아래로 돌리고 한 방 쏘았다. 흑인들 은 원시림 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몸에 소름이 끼치는 과상한 울부짖음 소리를 냈다. 그러나 백인들도 지지 않고 자기들의 무기만으로 이에 대항하는 데 성공 했다. 여러 개의 피스톨은 기관총처럼 울려 퍼지고 홀은 사납게 미쳐 돌아가는 난투장으로 변했다. 두 젊은 암살자는 싸움에 가담하지 않고 그저 말없이 앉아 재미있는 듯이 바 라보고 잇었다. 자기들의 몫은 이미 다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남은 흑인들은 드디어 방 한구석으로 쫓겨 포위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이 미 저항할 힘을 잃고 시키는 대로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꼴을 봐라."백인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대로 올라섯!" 흑인들은 무대로 쫓겨 올라가 억지로 악기를 들었다. 턱시도 차림의 건장한 신사가 흑인 바로 맞은편에 의자를 놓고 앉아 그들 쪽 으로 피스톨 총구를 돌려대고 소리쳤다. "연주하지 않는 놈은 한 방이다." 흑인들은 연주했다. 눈에 핏발을 세우고 손과 얼굴을 피로물들인체. 미친 듯이 연주했다. 일찍이 들은 적도 없는 미친 듯이 어지러운 음악이었다. 전율을 느끼 게하는 듯한 정글ㄹ 울부짖음, 해가 진 뒤 원시림에서 만인부족이 모일 때 울리 는 북소리와도 같은 음악이엇다.거인 같은 흑인이 맨 앞줄에 버티고 서서 이를 악물고 미친 듯이 북을 두들겼다. 크게 째진 머리의 상처에선 피가 목줄기를 타 고 흘러내려 갈기갈기 찢어진 셔츠는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커다란 주먹으로 마구 두들겼다. 다른 악기도 이와 한데 녹아들어 분간해 들을 수 없는 한 덩어리의 절규를 이루었다. "멋있다. 멋있어!" 백인들은 음악을 따라 춤추고 뛰고 했다. 큰 홀 전체가 춤추고 있었다.부글부 글 들끓고 있는 마법사의 큰 냄비라고나 할까. 사람들의 얼굴은 좀 전에 있었던 난투와 홀의 열기로 붉게 상기되어 땀에 젖은 진한 냄새가 충만하고 있었다. 테 이블 사이에서 목구멍으로 그르륵그르륵 소리를 내고 있는 빈사상태의 중상자는 재즈를 추고 있는 남녀의 발길에 걷어채었다. 둥근 전등은 천장에서 빙글빙글 돌고 악취를 풍기는 발효물들을 갖가지 빛으로 어루만졌다. 여자들은 정욕으로 상기된 얼굴로 피투성이의 커다란 흑인 위에 열띤 시선을 던지로 다리를 상대의 다리 사이에 집어 넣었다.남자들은 여자의 시선과 연기를 뿜는 또 하나의 음경 처럼 그들의 등덜미에 흔들거리고 있는, 아직 뜨거운 피스톨 때문에 흥분하여 활발히 여자의 아랫배에 달라 붙었다. 다른 유례가 없는 한 덩어리의 활력이엇 다. 난투 때 칼라를 찢긴 한 신사가 흥분하여 새빨간 얼굴로 저쪽 형리 가까이 있 는 테이블에 뛰어올라 손에 든 브로닝을 공중에 흔들어댔다. "전우 제군! 승리는 우리들의 것이다. 우리들에게 덤벼들어 어쩌자는 거냐! 질 서! 규율! 이 말을 가지고 우리는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이 말 위에 우리는 세계 에 우리의 지고권을 세우는 것이다." 그는 적당히 몸을 흔들면서 이렇게 외쳤다. 그의 주위에는 말을 들으려고 사 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우리들이 다른 온갖 인종에 대한 우리 인종의 우월성을 입증한 이 자 랑스런 날에, 우리는 최고의 인생을 누리는 대표자를 우리들 사이에서 발견하는 행복과 기쁨을 가지고 있다! 지금 우리들의 자리에 형님이 계시다. 이 분을 이곳 에 맞이하게 된 것을 우리는 자랑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설령 우리가 이것을 미리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 사실은 실로 우리들이 위대한 시대에 살 고 있다는 것을, 파렴치와 연약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바야흐로 인류에게 새 로운 아침이 밝으려고 하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분의 힘에 넘치 는 모습을 보면 우리들에겐 자신과 용기가 만만해진다. 이 모습이야말로 우리들 을 이끄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이 쫓으려고 하는 바로 유일한 그것이다! 우리들은 경례합니다! 오오, 우리의 지도자여! 세계에 있어서 가장 신성하고 또 최고 가치를 갖는 것이며, 인류 역사에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도입하는데 성 스러운 상징을 지니는 우리 지도자여! 피는 인간의 빛깔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자신이 당신께서 대답하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우리들이 당신께 '하일(만세) 하 일'을 외칠 때 당신께선 우리들을 신뢰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테이블에서 뛰어내려 새빨간 얼굴로 숨을 헉헉 몰아쉬면서 충성의 맹세 를 바친 인물한테로 걸어갔다. 형리는 머리를 들지 않고 그를 보앗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지도 않는가 하면 대답도 하지 않앗다. 불처럼 흥분한 신사는 이것을 보고 약간 당황하여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망설 이는 것 같았다. "하일(만세!)" 그는 팔을 공중으로 올리고 다소 주저하는 듯하면서 외쳤다. 주위 사람들은 그에 따랐다. 형리는 말없이 그들을 보앗다. "그런데... 그런데 당신께선 형리님이 아니십니까?" 하고 누군가가 의아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러자 당사자인 그는 이마에 댄 손을 떼었다. 거기엔 망나니의 도장이 뚜렷 이 불로 지져져 있었다. 금세 환희로 떠들썩한 소리가 사람들 사이에 퍼ㅈ다. "아니, 바로 내가 그 망나니요!"하고 그는 말하고 일어섰다.핏빛 옷을 입은 이 덩치 큰 사나이는 보기에도 무서웠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해졌다. 지금껏 울부짖고 왁자지껄하던 큰 홀은 잠잠히 가라앉아 그의 호흡 소리를 알아들을 만 하게 되었다. "천지가 열린 이래 나는 줄곧 이 일을 해 왔지만 아직도 쉽사리 끝날 것 같지 않아. 몇천 년의 세월이 흐르고, 사람은 나타나선 밤속으로 사라져 가는 데 나만 은 그냥 남아 피로 더럽혀져 뒤를 전송하고 있지. 나만은 나이를 먹지 않도록 돼 있으니까. 나는 인간이 지나간 길을 정성을 들여 걸어가는 것이다. 인간이 지 나간 길이라면 아무리 구석진 길이라도 내가 화형틀을 세우고, 피로 적시고 하 지 않은 길은 거의 없는 것이다. 나는 최초의 시발부터 당신네들을 따라 걷고 있다. 당신네들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줄곧 따라 걸을 것이다. 당신네들이 처음 으로 하늘을 우러러 신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당신네들 형제 중의 하나를 베어 희생시킨 것이다. 그 사나이의 심장을 빼내어 불 속에 던졌을 때, 나무가 활활 소리를 내며 당신네들의 얼굴 위에 불꼿이 춤추고 있던 것을 기억 하고 있다. 그뒤로 나는 숱한 인간을 희생시켰다. 신이니 악마니 천국이니 지옥 이니 하는 것 때문에 죄가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모두를 해치웠지. 이미 헤아릴 수 없는 수효지. 지상에서 근절된 민족이 있는가 하면 황페헤 버린 나라도 있다. 모두 당신네들에게 부탁받고 한 일로서 몇 세대가 지나가도 나는 무덤 옆에 있 을 뿐이야. 한 가지 일이 끝나, 아직 피가 방울져 떨어지는 칼을 짚고 한참 쉬고 있노라면 어느덧 다음 세대가 젊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부르러 온다. 인간의 태형을 쳐서 피로 변화시키고 인간들의 불안한 소란을 영원히 정지시켜 주곤 했 던 것이다. 예언자나 구세주에겐 하형틀을 세워 주었다. 인간의 일생을 밤과 어 둠 속에 가라앉혀 주었다. 모두 당신네들을 위해 해준 일이다. 나는 또 불리웠기 때문에 온 것이다. 나는 지상을 바라본다. -지상은 미친 듯 이 뜨겁게 불타고 있다. 이것은 마성의 것이 융성하는 시대다! 망나니의 시대인 것이다! 태앙은 숨막힐 듯한 구름 속에 숨어 있다. 그 젖은 덩어리는 핏덩이 같은 기 분 나쁜 빛을 뿜고 있다. 사람에게 혐오를 사고두려움을 주며 나는 발을 돌아다 니면서 내 곡식을 베어 들인다.죄의 낙인이 내 이마에 불로 지져져 있다. 나는 죄인, 영원히 풀리지 않는 형벌에 처해진 죄인이다. 이것도 당신네들을 위해서 다. 나는 당신네들에게 매어 일하도록 판견을 받고 있다. 그래서 충실히 일하고 있는 것이다. 몇천 년 동안의 피가 내게는 물들어 있다. 내 혼은 피범벅이 되어 있어. 이것도 당신네들을 위해서야. 인간의 덤불에서 괴로운 울부짖음이 들려와도 나는 눈이 가리워져 볼 수가 없어. 나는 ㅂ칵 화가 나서 뭣이든 닥치는 대로 때려 눕혀버린다. -그것도 당신들이 그래 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라고 소리치기 때문이아. 나는 당신네들의 피로소경이 되어 있다. 당신네들 속에 갇힌 소경이야. 당신네들은 감옥. 나는 거기 갇혀 도망쳐 나갈 수가 없는 것이야. 형리숙사의 그을음 낀 창으로 바라보면 밤의 목장은 말할 수없이 고요하고 꽃 에도 나무에도 크나큰 불가사의의 평화가 있다.- 그와 같은 시각에 내 운명을 생각하면 나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아진다. 만약 이 여자가 내 옆에 있어 주지 않 았다면 나는 이미 쓰러져 버렸을 거야." 그는 거지 같은 옷차림을 한 그 가난한 여자 쪽을 바라보았다. 둘은 눈이 마 주쳤다. "나는 도망쳐 나간다. 그처럼 아름다운 이 지상을 보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 야. 그런데 이 여자는 그대로 주위가 어두워질 때까지 밖을 내다보고 있는 거야. 이 여자도, 나나 마찬가지로 우리들 공동주택의 수인이야. 그러나 지상의 아름 다음을 바라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는 거야. 이 여자는 형리숙사를 마치 보통 인간의 주택처럼 깨끗이 기분 좋게 해준다. 내 식탁엔 휜 보자기를 씌워 준다. 나는 이 여자가 누군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 부드럽게 대해 준다. 캄캄해지면 이 여자는 내 이마를 만지면서 망나니의 낙인이 없어졌다고 말해 준다. 이 여자는 다른 여자와는 달라. 내게 애정을 가질 수가 있는 거야. 나는 남에게 이 여자가 누구냐고 물어본 일이 있지만 아무도 몰라. 이 여자가 내게 부드럽게 해주고, 내 집일을 돌봐주는 것은 뭔가 내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지 않을까? 내 집은 형리숙사다! 나는 그것이 다른 것이기를 바라진 않아. 만약 변한다면 나는 다만 지금보다 훨씬 더 지독한 번민을 할 뿐일 것이다. 내 팔 안에서 이 여자가 잠들면 나는 일어나 이불을 덮어부고 옷을 입는다.- 여자가 잠을 개지 않도록 조용히. 그리고 밤일을 하러 살그머니 집을 나간다.-하 늘은 무슨 일을 꾸며 위협하고 있는 듯 땅위에 쳐져 덮여 있다.-여자가 눈을 뜨 지 않는 편이 낫다. 이제부터 견뎌내지 않으면 안될 내 일을 착수하는 데는 나 혼다가 되는 것이 좋다. 하지만 내가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것을 여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허리를 굽히고 돌아오는 나를 맞아 줄 것을 나도 알고 있는 거야. 어째서 나는 온갖 것을 다 짊어지지 않으면 안되는가! 어째서 내게 온갖 것을 뒤집어 씌우는 것인가! 죄와 번뇌의 전부-당신네들이 저지른 일체다! 당신네들 이 흘린 피가 내 전신에서 울부짖는다. 나는 그 때문에 한시도 편안한 기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것은 어찌된 셈인가! 죄 지은 자의 저주, 죄 없는 자의 탄 식 -저주를 받은 나의 혼은 어째서 이렇게 일체의 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지 않 으면 안되는가! 사형을 당하는 자의 운며은 결국 내게 덮어 씌워지게 마련이야 -그 패들이 불 쌍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지껄이는 것을 들어 줄 생각은 없지만, 그 지껄인 말이 내 속에 들어와 자리잡아 버린다. 몇천 년 동안의 소리가 내 속에 서 떠들어대고 있어. 이미 아무도 기억하자 못하는 소리. 죽은 주제에 내 속에서 만은 살아있어. 당신네들의 피 냄새로 나는 구토증을 재촉당한다.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죄의식으로 짓눌려 으스러져 버릴 것만 같단 말이야. 나는 당신네들의 운명을 짊어지고 가지 않으면 안돼. 당신네들은 벌써옛날에 일을 마치고 무덤 속에서 쉬고 있는데 나는 당신들의 기을 싫증도 못내고 따라 가지 않으면 안돼. 나를 숨겨 버릴 만큼 깊은 무덤을 누가 팔 수가 있겠는가! 내가 평온해질 수 있는 무덤을! 내 어깨에서 저주의 무거운 짐을 내려 놓고 내게 죽음의 안식을 줄 수 있는 일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하지 못해! 내가 짊어지고 있는 것은 다른 아무도 지고 걸어갈 수는 없는거야! 아직 신이 한 분 계셨을 때의 일이야. 나는 사정을 신에게 털어 놓으려고떠났 던 일이 있어. 그런데 어떠한 대답을 들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그런 것을 말해 본것도 자기야말로 구세주라고 말하 던 한 사나이를 감시했던 때문이지. 그 사나이는 당신네들 대신 고통을 당하고 죽음으로써 당신네들을 구원하려고 생각했던 것으로, 내짐도 벗겨 줄 심산이었 어, 그러나 나에겐 그 사나이가 어쩔 심산인지 잘 알 수 없었어. 웬만한 보통 남 자만한 힘도 갖지 못한 것 같은 연약한 사나이로 보였으니까. 나도 마침내 웃지 않을 수 없었을 정도야. 사나이는 자기를 메시아라 불러 지상의 평화에 대해 설 교하고 그 일로 말미암아 사형을 받게 되엇던 거야. 그 사나이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사람들은 위해 고토을 받고 죽을 것 을 알고 있었어. 자기의 어렸을 적 일을 많이 이야기해 들려줬지만 이런 친구는 누구나 마찬가지인 거야. 갈릴리라 하는 나라의 이야기로서 그것이 무척 훌륭하 니 뭐니 하지만 -이것도 이 친구가 언제나 말하는 것이지만 봄이면 산엔 백합이 가득 핀다. 그 꽃 한가운데 서서 밝은 들판을 내다보았을 때,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느니 뭐니 말해. 한참 들으면 그 사나이가 가여운 미치 광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어. 어쨌든 자기가 인간에게 무엇을 설교하면 좋은 가, 자기가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가 금세 알았던 모양이야. 말하자면 '지상 에 평화를'하는 그것을, 나는 그 사나이에게 세상 사람이 평화를 얻기 위해 어 째서 너는 죽지 않으면 안되는냐고 물어보았어. 그러자 대답은 이래 -그렇게 되 도록 결정되어 있다. 신비스러운 맹약이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고해진 것이라고 말하는 거야. 그 아버지라는 것이 하느님을 가리키는 것인 모양이야. 순진한 아 들처럼 믿고 있는 거야. 그런데 드디어 때가 닥쳐오니, 그 사나이도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괴로워하 고 떨기 시작했어. 이젠 무슨 일에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어. 나는 잠자코 있었지. 그 사나이는 혼자서 탄식하고 슬퍼하면서 때때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 어. 어렷을 적 향리며 밭 가운데 백합꽃을 다시 한 번 보았으면 하는 것 같았어. 사나이의 고통은 점점 심해져서 마친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어. '죽음을 앞에하고 제 영혼은 쓸쓸해졌습니다. 아버님 만약 하실 수 있으면 이 잔을 저에 게서 멀리해 주십시오'하고 말하는 거야. 시간이 닥쳐와서 나는 이 사나이를 끌 고 갔어. 사나이는 거의 십자가를 질 힘고 없어 허리를 굽히고 비틀거렸어.너무 불쌍해 져서 약간 도와주었어. 늘 인간들을 위해 짊어진 짐과 비교하면 십자가는 조금 도 무거운 것이 아냐. 십자가 위에 사나이을 눕히고 못을 박기 전에 나는 용서를 빌었어. 그런 과습 으로 되어 있는 것이니까. 어찌된 셈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 사나이를 죽이는 것 이 괴로웠어. 사나이는 부드럽고 불안스런 눈으로 나를 보았어. 그건 죄인의 눈 이 아니라 가엾고 불행한 인간의 눈이었어.'용서하고 말고, 형제여.'하고 그 사나 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해 줬어. 가까이 있던 한 사람은 그 사나이가 그렇게 말 했을 때, 내 이마의 낙인이 사라졌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나는 믿지 않아. 그 사나이가 어재서 나를 형제라고 불렀는 지 나로서는 모르겠어.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것만으로 나는 자기형제를 십자가에 매단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거야. 이 일은 내가 손을 댄 누구위 경우보다도 괴로웠어. 이런 일을 해내려면 언젠가 한 번은 자기의 희생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만 -자세히는 모르나 이 사나이는 내가 손을 댄 어떤 희생자와도 비슷한 점이 없었던 것 같아. 나는 잘 기억하고 있어! 온갖 소리, 흐른 모든 피, 그것은 모두 내몸 속에 담 겨져 있는 거야. 당신네들이 벌써 오랜 옛날에 잊어버린 일이야! 그 전에 나는 감옥 뜰에서 그 남자를 태형에 처하는 역할을 담당했어. 그렇게 해 두지 않으면 죽지 않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야. 이런 일이 하도 많아서 나는 이제 지쳐 염증이 났어. 그러니까 십자가를 세우는 일도 간신히 했던 거야. 그런데 이윽고 십자가가 서자, 보고 있는 자들은 모두 기뻐했어. 그사나이가 마침내 매달린 것을 보고 이 무리는 소리를 치며 기뻐하는 거야. 이 사나이를 십자가에 매달았을 때만큼 기뻐하는 것을 나는 지금껏 본적이 한 번도 없어. 더 욱이 이 사나이가 자기야말로 구세주인 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고 말하여 모든 사람들은 이 가여운 사나이을 경멸하고 비웃고 무척 못된 짓을 했던 거야. 위쪽 을 향해 침을 뱉는가 하면 사나이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조소하기도 하고 그 런데 사나이는 자기가 인간들에게 구원을 베풀고 잇는 동안 그 인간들을 보지 않아도 좋다는 듯이 눈을 감고 있었어. 아마 이 사나이는 이렇게까지 당하면서 도 자기는 인간들의 왕으로서 신의 피를 받은 자라고 믿으려고 했던 모양이야. 그 무리가 만들어 준 가시관에 피투성이가 된 머리 위에 비스듬히 이상한 모양 으로 얹혀 있었어. 나는 숨이 막혀 얼굴을 돌려 버리고 말았어. 그런데 사나이가 숨을 거두기 전에 지상이 갑자기 캄캄해졌어.그러자 사나이 가 십자기 위에서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 들렸어.'신이시여, 신이시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말하는 거야.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게 됐어. 그로 부터 얼마 안 가서 사나이는 죽었어. 그 편이 나았겠지. 우리들은 서둘러 사나이 를 내려놓았어. 안식일이 시작되려고 해서 그날 종일 매달아 둘 수는 없었어. 모두들 안식일 준비를 하러 떠나 버려 그곳이 텅 비어 버리자 나는 처형장에 주저앉았지. 그곳은 늘 그렇지만 주위는 송장과 오물 낸새가 풍기고 있었는데. 그대로 나는 밤 늦게까지 별을 쳐다보고 앉아 있었지. 그때였어. 한 번 하느님께 이야기하러 가 보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나는 지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갔지. 하늘에선 적어도 질식할 지경이거나 속이 메스껍거나 그런 일은 없어. 나는 자꾸만 올라갔지. 얼마나 오랫동안 갔는지 몰 라. 아무튼 하느님이란 지독하게 먼 곳에 살고 있거든. 마침내 나는 하느님을 발견했어. 하늘의 큰 방에서 근엄하게 옥죄에 앉아 있 어. 나는 앞으로 나아가 파묻은 도끼를 옥좌에 기대 놓고 '저는 이제 일에 지쳤 습니다. 이마큼 오랫동안 해 왔으면 그럭저럭 그만두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 까? 이제 이쯤 해뒀으면 좋겠습니다.'하고 말했어. 그런데 하느님은 돌처럼 꿈쩍 도 하지 않고, 엉뚱한 곳을 보고 있을 쁜이었어.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말해 봤어. '들어 주십이오! 이제 망나니 일은 이쯤으로 충분합니다. 이제 저는 견딜 수 없습니다. 피니 공포니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일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정말 견 딜 수 없습니다. 어쩌시려고 이런 짓을 하시는 지 그걸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성실하게 근무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했습니다. 이제 이상은 못하겠습니다. 이 일만을 이제 더 이상 계속해 나갈 수 없습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제발 들어 주 시길 바랍니다.'하고 말이야.그런데 하느님은 내가 있는 쪽을 돌아봐 주지도 않 아. 초승달 모양을 한 눈으로 멍하니 방안을 바라보고 계실 뿐이었어. 마치 사막 을 바라보듯이. 나는 무서워졌어. 완전히 실망했어. 그래서 무의식중에 발칵 화 를 내서 큰소리로 '오늘 저는 당신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어요.'하고 말해 줬지. 그래도 하느님은 낯빛 한 달라지지않아. 여전히 굳어진 무표정한 얼굴이 야. 돌을 새겨 만들어 놓은 석상 같았지. 그추위와 정적 속에 서 있자 영겹의 바람이 얼음처럼 몸 속을 불어 지나가는 것을 느꼈어.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거야. 나는 또 다시 도기를 들고 아까온 길을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야. 그 사나이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았지. 그 사나이도 역시 인간 이야. 그렇기 때문에 그 패들이 친구들을 늘 다루듯이 그 사나이을 다루었다 해 도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어. 그 패들은 친구들 중의 하나를 십자가에 달아맨 겻일 뿐. 평상시와 다를 것 없는 일이지. 돌아오는 도중에 말할 수 없이 울화가 치밀어 속이 울렁거리면서 오한이 오싹오싹 끼치더군. 그 사난이는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숨을 거두고 편안해 있었어. 그러 나 나는 저주받은 영혼. 지금가지와 마찬가지로 이제부텨도 영원히 뒤쫓겨 갈 몸이야. 나는 다만 다시 한 번 고난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만 이 자상으로 되 돌려 보내진 거야. 나를 구원해줄 자는 아무도 없는 거야. 그 사나이가 구세주니 뭐니, 그런 건 터무니없는 말이지. 그런 사나이한테 어 떻게 그같은 일이 가능하겠어. 그 사나이의 손은 아이들 같은 손이었어. 가냘픈 뼈 사이에 못을 박는 일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어. 거기 매달려서 과연 지탱될 까 어떨까 보려고 옆구리를 찔러 봤더니 이미 죽어 있었어. 보통 인간보다 훨씬 빨랐지. 이렇게 허약한 인간에게 무슨 일이 가능하겠어! 당신네들을 구원한다는 따위 의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어! 더구나 내 짐을 내려놓아 주는 일 따위가 ! 그게 인 간을 위한 그리스도래서야 말이 되나! 그 이후로 나는 잘 알게 된 거야! 당신네 들한테 봉사하는 것이 어째서 내가 아니면 안되는 것인가, 어째서 당신네들이 나를 부르러 오는가 하는 것을! 나야말로 당신네들의 그리스도인 것이다. 이마에 망나니의 낙인은 찍혀 있을 망정. 당신네들을 위해 이 세상에 보내진 그리스도다! 지상엔 싸움, 사람에겐 악의! 당신네들은 하느님을 화석이 되게 해 버렸다. 이미 오래 전부터 죽어 있다. 그 러나 나는, 당신네들의 그리스도인 나는 살아있는 것이다. 나는 신의 힘 있는 의 지, 신의 아들이다. 하느님이 아직 살아 있고, 힘이 있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알고 있었을 때 나는 당신네들과 함께 신이 낳고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하 는님은 이 세상을 어떻게 처리할 작정이었던가. 지금 하느님은 옥좌 위에서 문 둥이처럼 흐늘흐늘 일그러져 버렸다. 영겁의 저주하는 바람이 그 재를 하늘의 사막으로 불어대어 흩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인 나는 살아 있다. 당신네들이 살기 위해서다. 나는 나의 투쟁의 길을 간다. 세계를 뛰어 돌 아다닌다. 그리하여 매일 핏속에서 당신네들에게 구원을 베풀고 잇는 것이다ㅓ -더구나 이 나만은 당신네들이 십자가에 매달 수는 없는 것이다. 나도 제물로서 죽고 싶은 거야, -저 가여운 형제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못바 혀져 커다란 연민, 깊은 어둠 속에서 숨을 거두고 싶은 거야. 그러나 그것이 언 제까지나 닥쳐오지 않을 것임은 나도 잘 알어. 당신네들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한, 이 일을 언제까지나 계속하지 않으면 나 의 십자가가 세워지는 일은 결코 없어. 내가 마지막으로 일을 끝내고 이 세상에 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져도 나는 안식의 집 속에서 쫓겨 떠돌아다니지 않으면 안돼. 그때 나는 당신네들을 위해 해준 일을 회상하고 고뇌와 회한으로 괴로움 을 겪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일이 끝나 이제 이 이상 더 빛을 긁어 모 으지 않아도 ㄱ찮도록 됐으면 싶어. 내가 고대하고 있는 것은 당신네들이 지상에서 씨도 없이 멸망해 버려 마침내 나마저 팔을 쉬어도 괜찮게끔 되는 날이다. 나를 부르는 목쉰 소리도 사라져, 나 는 혼자서 주위를 둘러보곤 일이 전부 끝났을을 깨닫는 그런 날이야. 그렇게 되면 나는 영겁의 어둠 속으로 나갈거다. 피로 더럽혀진 도끼를 여기 살아있던 종족의 기념으로 황폐한 지상에 내던져 버리고 나가는 것이다." 험한 불꽃을 담은 눈초리로 그는 옆에 앉아 있던 거지 같은 여자가 침착한 밝 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 얼굴은 이상한 괴로움에 가득 차 보이면서도 행복 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죠! 당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허리를 굽 히고 돌아오는 것을 저는 바깥 자작나무 숲 속에서 가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제 무릎에 머리를 올려 놓으면 어루만져 드리겠어요 열에 뜬 당신의 이마에 키스하 고, 손에 묻은 피를 씻어 드리겠어요. 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아실 거예요!" 그는 편안하고 쓸쓸한 미소를 띠고 그녀을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서 둔중한 북소리가 들렸다. -그는 잠잠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허리띠를 꽉 틀어쥐고는 살갖에 쌀쌀한, 젖은 새벽의 희미 한 빛 속으로 나갔다. 작품해설 신이 화석화한 뒤의 인류사와 그 주재자 이 작품은 좀 특이한 독법을 필요로 한다. 사실적인 묘사의 목로주점과 구체 적인 인물들의 잡담으로 시작되는 도입부에서 작품의 통시성이나 추상성을 짐작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형리와 그의 칼을 둘러싼 미신적이면서도 신비한 속설들 과 거기 연관된 상당히 밀도있는 개인체험의 진술에서도 마찬가지다. 세상 어딘 가 있을 법한 목로주점에서 역시 있을 법한 사람들이 나누는 잡담처럼 들릴 뿐 이다. 그러다가 형리의 기이한 사랑전설과 외팔이 라세 일행이 나타나면서 독자는 비로소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게 된다. 여사형수의 생사를 형리에게 맡 긴다든가. 전설적인 만다라게를 실제로 캔다든가 하는데서 짙어지는 중세적 분 위기 때문이다. 분명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기는 해도 어딘가 환상적인 요소거 섞여들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공간과 인물들의 추상성과 통시성이 제대로 드러나는 것은 아무래도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창녀와 암살자들과 '하일'을 외치고 폭력을 예찬하는 신사 들이 등장한 뒤가 된다. 목로주점은 현실의 장소라기보다는 통시적 공간이며 인 물들로 구체적이라기보다는 인류사의 전개에서 폭력과 관련된 추상적인 인물이 다. 그리하여 암살자들의 어이없는 살인에다 종족주의적 폭력을 암시하는 듯한 흑인들과의 소동에 이르면 비로소 이 작품의 공간과 인물이 종말론적인 혼란을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 조작의 산물임을 알게 된다. 물론 이같은 이해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단련된 독 자가 아니면 대부분이 대화로 연결되는 전반부의 지루한 전개방식이나 필연성이 얼른 짐작 안되는 인물들의 계속적인 등장에 지쳐버릴 수도 있다. 그런 독자를 위해 이 작품에 맞는 독법을 제안한다. 먼저 초반부를 지루해질 때까지만 읽다가 바로 후반부인 형리의 독백으로 가 기를 바란다. 형리의 독백도 지루할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지루함을 참아야 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감히 보장한다. 그리하여 거기서 얻은 심각한 감동으로 다 시 읽다가 만 부분으로 돌아간다면 지루함이나 혼란스러움없이 이 작품을 완독 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땅과 자신의 몸을 적시는 처형의 피에 지친 나머지 먼 하늘나라로 찾아간 형리는 이미 화석이 되어버린 신을 보고 절망해 돌아왔다고 말한다. 그 러나 내게는 그 형리야말로 인간의 변덕스런 욕망과 폭력성이 충실히 투영된 살 아있는 신같이 보인다. 많은 현대인들에게 신은 자신들이 슬퍼하고 고통받고 피 흘리는 동안에는 무력하면서도 형의 집행에는 어김없는 비정한 형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지은이 라게르크비스트는 195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웨덴의 시인이자 소 설가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고민의 문학'으로 스웨덴 문학을 이끌어 온 그의 이력은 자전적 소설 '진실의 나그네가 되어' 에 잘 드러나 있다. 철도역장의 아 들로 태어나 종교적 분위기가 강하게 흐르는 유년기를 보낸 그는 성장하면서 점 차 종교의 굴레에서 벗아난 강인한 인간 정신을 믿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두 차 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자리한 악마적 성향을 목도한 그 는 마침내 이같은 불행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데 일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이 격렬한 대결을 펼치면서 북유럽 최고의 양심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형리'는 시대의 고민과 문제를 상징적으로 그려낸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면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바라바'는 예수대신 십자가에서 풀려난 악당의 이후 생활을 그린 소설이다. 라 게르크비스크는 이밖에도 소설 '무녀' 아하스베루스의 죽음'과 시집 '마음의 노래' 화톳불 밑에서' '어둠 속의 승리' '인간을 살게 하라'등 무수한 작품들을 남겼다. 나생문 아꾸다가와 류노스께 지음 진웅기 옮김 어느 날 해질 무렵이었다. 하인배로 보이는 한 사나이가 라쇼몬(일본 헤이안 시대의 서울인 교토 스자꾸오지의 남쪽 정문으로, 북쪽 끝에 있는 스자꾸몬과 대하고 있다: 역주) 아래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문간에는 이 사나익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여기저기 단청이 벗겨진 커다란 원기둥에 귀뚜라미 한 마리가 앉아 있을 뿐이었다. 라쇼몬이 스자꾸오지 에 있는 이상, 이 사나이말고도 이찌메 가사(상류사회의 여인들이 쓰는, 옻칠을 하고 가운데가 불룩한 왕골로 만든 삿갓: 역주) 차림을 한 사람이 두세 명은 더 있을 법하다. 그런데 이 사나이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2,3년 동안 교토에는 지진이며 폭풍이며 큰 불, 기근 같은 재화가 잇 따라 일어났다. 그래서 거리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했다. 옛 기록(소재는 '곤자꾸 모노가따리'에서 나왔는데 이 부분은 '호조끼'에 보인다: 역주)에 의하면 불상이나 불구를 쪼개서, 붉은 칠이나 금은박이 붙은 채 길가에 내다 땔감으로 팔았다는 것이다. 온 장안이 이 모양이니 라쇼몬의 수리 따위는 누구 하나 돌볼 사람이 잇을 턱이 없었다. 그러자 그 황폐한 틈으 타서 여우난 너구리가 와서 살고 도둑이 숨어 살았다. 마침내는 연고자가 없는 시체를 이 문에다 갖다버리 는 관습마저 생기게 되엇다. 그래서 해만 지면 무서워서 아무도 이 문 가까이에 발걸음을 하지 않게된 것이다. 그 대신 또 어디서 왔는지 까마귀떼가 수없이 모여 들었다. 낮에 보면 많은 까마귀들이 원을 그리며 용마루 끝 왕기와 둘레를 울면서 맴돌고 있었다. 더욱 이 지붕 위의 하늘이 저녁놀에 벌겋게 탈 때면 그것들이 깨를 뿌린 것처럼 또렷 하게 보였다.. 물론 까마귀는 다락 위에 버린 시체를 쪼으러 오는 것이다. 그러 나 오늘은 시간이 좀 늦은 탓인지 까마귀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여 기저기 무너져가고, 그래서 무너진 틈새로 풀이 길게 자란 돌층계 위에 점점이 희게 말라붙은 까마귀똥이 보인다. 하인은 일곱 단 돌층계의 제일 윗단에, 색바 랜 남색 웃옷의 뒤쪽을 축켜 올리고 걸터앉아 오른 쪽 볼에 생긴 커다란 여드름 을 만지작거리며 멀거니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까 '사나이가 비를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사나이 는 비가 그쳐도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 평소 같으면 물론 주인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 주인으로부터는 4, 5일 전에 해고되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당시 교토의 시가는 말할 수 없이 황폐했다. 지금 이 하인이 여러 해 섬기고 있 던 주인으로부터 해고된 것도 실은 이 황폐한 세태의 작은 여파에 지나지 않는 다. 그러므로 '사나이가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하기보다 '비에 갇 힌 사나이가 갈 곳이 없어서 앉아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게다가 그날의 하늘 모양도 이 헤이안조에 사는 사나이의 센티멘틀리즘에 적잖이 영향을 주었 다. 신시 후반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아직도 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하인은 무엇보다도 당분간 어떻게 지낼 것이가하고 -말하자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을 더듬으면서 아까부 터 스자꾸오지에 내리는 빗소리를 망연히 듣고 있었다. 비느 ㄴ라쇼몬을 에워싸고 멀리서부터 '좌악'소리를 몰고 온다. 저녁 어스름으 로 하늘이 차차 낮아셔서, 바라보면 지붕은 뾰족하게 내민 처마 끝에 무겁고 어 두운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든 해 보기 위해서 수단을 가릴 겨를이 없 다. 그것을 가리다낙 굶어서 담 밑에나 길바닥에 쓰러져 죽을 뿐이다.ㅏ 그러면 이 문 위로 실려와서 개처럼 버려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가리지 않는다면 -하인 의 생각은 같은 길을 수없이 맴돌던 끝에 마침내 이 대목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않는다면'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결국 '않는다면'이었다. 하인은 수단을 가 리지 않겠다는 것을 긍정하면서도 이 '않는다면'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그 뒤에 올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긍정할 용기를 내지 못하 고 있는 것이다. 하인은 재채기를 크게 하고 귀찮다는 듯이 일어섰다. 날이 어두워지면 기온이 내려가는 교토는 벌써 화로가 그리울 정도로 추웠다. 바람이 문설주와 문설주 사이를 저녁 어둠과 함께 사정없이 불어댔다. 단청의 기둥에 앉아 있던 귀뚜라 미도 어느새 어디론가 가버렸다. 하인은 목을 움츠리면서 누런 땀받이 위에 겹쳐 입은 남빛 웃옷의 깃을 추켜 올리고 문간을 둘러보았다. 비바람이 들이칠 염려가 없고, 사람들 눈에도 띄지 않는, 하룻밤 편하게 잘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쨌든 거기서 밤을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다행히 문 위 다락으로 오르는, 폭이 넓은, 역시 단청을 한 사다리가 눈에 띄었다. 위에 사람이 있다면 어차피 죽은 사람뿐일 것이다. 하 인은 허리에 찬 허름한 칼이 칼집에서 빠져나오지 않게 조십하면서 짚신을 신은 발을 그 사다리 맨 아랫단에 올려놓았다. 그로부터 몇 분 뒤였다. 라쇼몬의 다락으로 오르는 폭넓은 사닥다리 중간에 한 사나이가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이며 위의 동정을 엿보고 있었 다. 다락 위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희미하게 그 사나이의 오른 쪽 볼을 비치고 잇었다. 짧은 수염 속에 벌겋게 고름이 잡힌 여드름이 있다. 하인은 처음 이 위 에 있는 자는 죽은 사람뿐이라고 넘겨짚고 있었다. 그런데 사닥다리를 두세 계 단 오르자 위에서 누군가 불을 밝히고 있으며 더구나 그 불이 이리저리 움직이 고 있는 것 같아ㅆ. 흐릿한 누런 불빛이 구석마다 거미줄이 쳐진 지붕 밑을 흔 들리며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오는 밤에 라쇼몬 위에서 불을 밝히고 있 다면 그것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하인은 도마뱀처럼 소리를 죽여가며 가까스로 가파른 사닥다리를 맨 윗단까지 기듯이 올라갔다. 그리고 몸을 최대한 납작 붙인 채 목은 될 수록 앞으로 내밀 고 두려움에 떨면서 다락 위를 들여다보았다. 다락 위는 소문에 듣던 대로 시체 몇 구가 아루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데 불빛 이 미치는 범위가 생각보다 좁기 때문에 그 수는 알수가 없었다. 다만 희미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중에는 벌거벗은 시체와 옷을 입은 시체가 있다는 점이다 물 론 거기에는 여자와 남자가 뒤섞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체들은 모두 그것들 이 지난날 살아있는 사람이엇다는 사실조차 의심스러울 만큼 흙으로 빚은 인형 같이 입을 벌리거나 팔을 축 늘어뜨린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어깨나 가슴 같은 좀 높은 부분이 희미한 불빛을 받아 낮은 부분의 그늘을 더욱 어둡게 하면 서 영원한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인은 그 시체들에게 풍기는 썩은 냄새에 얼른 코를 가렸다. 그러나 다음 순 간 그의 손은 벌써 코를 가리는 것을 잊고 있었다. 어떤 강한 호기심이 이 사나 이의 후각을 전부 앗아가버렸기 때문이다. 하인의 눈은 그때야 비로소 시체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람을 본 것이 다. 검은 자줏빛 옷을 입은, 몸집이 작고 마른, 머리가 하얀 원숭이 같은 노파였 다. 그 노파는 오른손에 관솔불을 들고 그 시체 중의 한 얼굴을 살피듯이 바라 보고 었었다. 머리가 긴 것으로 보아 아마 여인의 시체이리라. 하인은 60퍼센트의 두려움과 40퍼센트의 호기심에 이끌려 한동안은 숨쉬는 것 도 잊고 었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노파는 솔가지 를 마루 틈새에 꽂고 그때까지 들여다 보고 있던 시체의 머리에 두 손을 대고는 마치 어미 원숭이가 새끼의 이를 잡아주듯이 그 긴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뽑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손만 대면 뽑혀나오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한 올씩 뽑힐 때마다 하인의 마음 속에서는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 졌다. 그와 함께 이 노파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이 조금씩 싹터 갔다. -아니 이 노파에 대해서라고 하면 모순이 있을지 모른다. 차라리 모든 악에 대한 반감이 매순간 강도를 더해간 것이다. 이때 누군가가 이 하인에게 아까 문아래서 생각 하던 굶어 죽느냐 도둑질을 하느냐 하는 문제를 새로 끄집어 낸다면 아마 하인 은 아무 미련도 없이 굶어 죽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사나이의 악에 대한 증오는 노파가 마루에 꽂아 놓은 관솔불처럼 기세 좋게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인은 물론 노파가 왜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는지 알 수가 없었다. 따라 서 그것을 선악의 어느 쪽으로 해석해야 할지 합리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 러나 사나이로서는 이 비오는 밤에 이 라쇼몬위에서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는다 는 것만으로도 이미 용서할 수 없는 악이었다. 물론 사나이는 방금 자기가 도둑 이 되려던 심산이었다는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사나이는 두 발로 사다리를 차며 비호같이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 고는 가죽도 입히지 않은 칼 자루를 손으로 잡고 성큼성큼 노파 앞으로 다가갔 다. 노파가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노파가 힐끗 사나이를 보자 마치 석궁에 퉁긴 돌처럼 벌떡 일어섰다. "요게 어디로 달아나!" 하인은 당황해 달아나다가 시체에 걸려 넘어지 노파를 막아서며 이렇게 외쳤 다. 노파는 그래도 하인을 밀어제치려고 한동안 말없이 싸웠다. 그러나 승패는 처음부터 뻔한 일이다. 하인은 마침내 노파의 팔을 비틀어 억지로 그 자리에 너 멍뜨렸다. 닯다리같이 뼈와 가죽뿐인 팔이었다. "뭘 하고 있었어? 말해봐. 말 안하면 이거다." 하인은 노파를 밀어 넘어뜨리고는 칼을 쑥 뽑더니 하얀 강철빛을 그 눈앞에 들이댔다. 그래도 노파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두 손을 부들부들 떨고 어깨숨을 쉬면서,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눈을 크게 뜨고 벙어리같이 고집스럽게 입을 다 물고 있었다. 이것을 보자 하인은 비로소 이 노파의 생사가 오로지 자기 의사에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의식했다. 그리고 이 의식은 지금까지 강하게 불 타고 있던 중 오심을 어느새 식혀버렸다. 뒤에 남은 것은 다만 어떤 일을 하고 그것이 원만히 성취되었을 때의 편안한 자긍심과 만족감뿐이었다. 그래서 하인 은 노파를 내려다보며 조금 누그러진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게비이시 청(교토 시내의 범죄인의 검찰과 재판을 행하던 관청: 역주)의 관리도 아무것도 아니다. 방금 이 문 아래로 지나가던 나그네란 말이야. 그러니 너를 잡아가고 자시고 할 이유도 없다. 다만 이 밤중에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 었는지 그것을 나에게 말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자 노파는 뜨고 있던 눈을 더욱 크게 뜨더니 뚫어지게 하인의 얼굴을 바 라보았다. 그리고는 주름으로 거의 코에 붙은 것 같은 입술은 무엇을 먹는 것처 럼 움직였다. 가는 목에 뾰족한 울대머리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때 그 목에 서 까마귀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헐떡이며 하인의 귀에 들려왓다. "이 머리카락을 뽑아서 말이야. 이 머리카락을 뽑아서 말이야. 가발을 만들려 고 한 것이다." 하인은 노파의 대답이 뜻밖에도 평범한 데 실망했다. 그 실망과 동시에 아까 느꼈던 중오심이 차가운 모멸과 함께 마음 속에 되살아났다. 그러자 그 기색이 노파에게도 전해졌는지 노파는 한쪽 손에 아직도 시체 머리에서 뽑은 긴 머리카 락을 쥔 채 두꺼비가 중얼걸는 것 같은 소리로 우물거리며 이런 말을 이었다. "몰론 말이지,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은 좋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 만 여기 있는 시체들은 모두 그만한 것은 당해도 싼 인간들이야. 방금 내가 머 리카락을 뽑은 계집으로 말하자면, 뱀을 네 치쯤으로 토막내 말린 것을 마른 생 선이라고 하면서 다데와끼(동궁을 지키던 무사들: 역주)의 진으로 팔러 다닌 거 야. 염병에 걸려 죽지 않았다면 지금도 팔고 다니겠지. 그것도 말이다, 이 여자 가 파는 마른 생선은 맛이 좋다고 갈 때마다 다데와끼들이 찬거리로 사갔다더 군. 나는 이 여자가 한 일을 나쁜 일로는 생각지 않는단 말이야. 이 노릇도 안 하면 굶어 죽게 생겼으니 어쩌란 말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러는 것을 이 여 자도 잘 알 테니 아마 내가 하는 짓을 너그럽게 보아줄 거야," 노파는 대강 이런 뜻의 말을 했다. 하인은 칼을 칼집에 꽂고 그 칼자루를 왼손으로 누르며 냉연하게 이 말을 듣 고 있었다. 물론 오른손으로는 볼에 벌겋게 고름잡힌 커다란 여드름을 만지작거 리면서 듣고 잇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있은 동안에 하인의 마음에는 차차 어떤 용기가 솟아났다. 그것은 아까 문 아래 있을 때는 없었던 용기였다. 그리고 또 아까 문 위로 올라와 이 노파를 붙잡았을 때의 용기와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가는 용기였다. 이제 하인은 굶어 죽느냐, 도둑질을 하느냐 하고 망설이기는커녕 굶어 죽는다는 따위는 거의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먼 의식 밖 으로 밀려나 있었다. "정말 그래?" 노파의 말이 끝나자 하인은 비웃는 것처럼 다그쳐 물었다. 그리고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서더니 갑자기 오른손을 여드름에서 때어 노파의 목덜미를 잡고는 물어뜯을 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내가 네 껍질을 벗겨가도 날 원망하지 않겠지. 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판이란 말이야." 하인은 재빨리 노파의 옷을 벗겼다. 그리고는 다리에 매달리는 노파를 거칠게 시체 위로 걷어차버렸다. 사닥다리까지는 불과 다섯 걸음밖에 되지 않는다. 하인 을 빼앗은 검은 자줏빛 옷을 옆구리에 끼고 번개같이 가파른 사닥다리를 밟고 바닥으로 뛰어버렸다. 한동안 죽은 것같이 넘어져 있던 노파가 시체 속에서 그 알몸을 일으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서였다. 노파는 중얼거리는 것 타기도 하고 신음하는 것 같기도 한 소리를 내며 아직도 타고 있는 불빛에 의지해 사다리 입구까지 기어 갔다. 그리고 거기서 짧은 백발을 거꾸로 세우면서 다락 아래를 살폈다. 밖에는 다만 칠흑 같은 밤이 있을 뿐이다. 하인이 어디고 갔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작품해설 인간성의 어두운 심연을 보는 차가운 눈길 '나생문'은 작가의 처녀작이고 분량도 짧지만 요절한 천재의 번득이는 재기를 잘 느낄수 있는 가작이다. 이 작품이 다루는 상황은 단순하고 그 전개는 단조로 울 만큼 간명하다. 곧 어는 좀도둑이 시체에서 머리칼을 뽑는 노파를 덮쳐 그녀 의 옷을 강탈해 간다는 게 줄거리의 전부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작가가 택한 이야기의 방식 때문일 터이다. 겉으로는 흔히 말하기 라고 하는 방식을 쓰 고 있지만 실제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는 데 쓰이고 있는 것은 보여주기란 방식 이라는 편이 옳다. 어지러운 시대와 음산한 배경, 그리고 힘없는 인물들과 그들 이 빚어내는 비참의 한 단면을 차분하고 냉정하게 그림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삶의 어두운 진상에 접근케 한다. 작가아 이 작품에서 우리에게 상기시키려는 것은 많건 적건 서로를 헤쳐가면 서 살기 마련인 우리 삶의 비정한 연쇄로 이해되고 있다. 살았을 때 뱀고기를 생선이라 속여 판 여인의 시체에서 머리칼을 뽑아내 가발로 팔려고 한 노파와 남의 시체를 훼손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그 노파의 옷을 강탈해 가는 좀도 둑이 만드는 연쇄가 그러하다. 죽은 여인에게서 뱀고기를 속아 산 사람들이라 해서 남을 헤친적이 없다는 보장은 없고 좀도둑도 나생문 밖에서 다시 더 힘있 는 강도에게 그가 가진 것을 빼앗기게 될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내게는 왠지 사람의 정의 혹은 선의지에 보내는 작가의 차가운 눈길 이 더 인상깊게 남아있다. 그 좀도둑이 처음 시체의 머리칼을 뽑는 노파를 보고 느낀 분노는 틀림없이 정의감 혹은 선의지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자신의 범죄를 합리화하는 구실로 바뀌고 만다. 작가가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데는 그 밝으나 차가운 눈길도 한몫 했으리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은이 아꾸다가와 류스께에 대해서는 앞서 한 번 얘기한 적이 있어 되풀이는 피한다. 가정을 가진 남자 V. S. 프리체트 지음 최진영 옮김 오후 늦은 시간이 되자 그녀는 그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념해 분홍색 드레 스를 벗어버리고 청바지에 작업복 상의를 걸친 후 일을 시작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아, 윌리암이 결국 왔구나. 윌리암은 처자가 있는 사람 이라 그들의 관계는 언제나 우발적으로밖에 이어질 수 없었다. 그녀는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으며 또 그가 없는 동안 혼자 상념에 잠기 는데 이상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하품을 하며 문 쪽으로 갔다. 그녀는 문고리를 벗기며 아무도 없는 집안에 대고 "아버지 괜찮아요. 제가 문을 열게요." 하고 소리쳤다. 윌리암이 이런 소리를 지르라고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혼자 사는 여자 이기 때문에 혹시 낯선 사람이밖에 있으면 집안에 그녀를 보호해 줄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베레니스의 목소리는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왜냐하면 윌리암의 그런 경고는 그의 독점욕을 보여주는 어처구니 없는 태고라고 생각했다. 퀘이커교의 가정에서 자라난 그녀는 거짓말을 한다든지 거 짓 행동을 한다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그에게 문을 열어주고 그가 기혼 남자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그녀는 윌리암이라 부르지 않고 "어서 오세요, 코크씨"하고 인사했다. 그는 금방 죄의식이 잘 나타나는 그늘이 서린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이 점이 그들의 애정에 더욱 진한 맛을 더해준다고 그녀는 느꼈다. 그러나 지금 문을 열고 보니 윌리암이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희망과 아이러 니를 품고 있던 그녀의 하품은 일시에 사라졌다. 문을 꽉 메우고 서 있는 사람은 그녀보다 키가 크고, 몸집이 유난히 큰 여자 였다. 분홍새가 저지 상의에 초록색 스커트를 입은 비만한 여자였다. 저지 상의 는 목이 깊이 패어 느슨했고 얼굴과몸이 너무 커서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여자는 푸른 눈을 뜨고도 자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누구기죠?" 그 여자는 정신을 차리며 베레니스의 벗은 발을 믿기 어렵다는 듯이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집에 있을 때는 맨발로 있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여기가 포스터양의 장소인가요?" 베레니스는 '장소'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네, 포스터양의 자택입니다. 그리 고 제가 그 사람입니다." "아. 네." 그 여자는 어린애 같은 티를 얼른 벗어버리고 간사스러워졌다. "대학에서 주소를 받았어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죠? 좀 수리할 게 있 어서 왔어요." "수리라뇨? 전 보석류를 만드는 사람이지 수리는 안합니다." "대학에서 그러는데 댁에서 저의 남편의 플루트를 수리중이라고 하던데요. 저 는 코크 부인이에요." 베레니스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녀의 손목에서 힘이 푹 빠지고, 손이 문고리에 힘없이 내려앉았다. 그녀의 몸안에서 얼음장같이 찬 공기가 피어오르더니 얼굴은 불을 끼얹는 듯이 뜨거워 졌다. 그녀의 머릿속에슨 왁자지껄한 말소리가 가득 차왔다. '아이구 맙소사.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윌리암, 당신이 얘기를 했나요? 이젠 어쩌자는 거죠? 어떡해야 하는 거죠?' "코크씨라고요? 플루트요?" "네, 플로랜스 코크예요" 그 여자는 간사스러움이 싹 가시면서 힘있게 말했다. "아, 그러세요. 코크 부인이시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제가 인사를 못해서 미안 합니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는데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같습니다. 윌리암의 아니 코크씨의 플루트라구요. 맞았어요. 이제 기억이 나네요. 코크씨는 어떻게 지내세 요? 대학에는 몇 달을 안 나오시길래 오래 뵙지를 못했어요. 댁에선 보셨겠지요. 내 정신 좀 봐. 물론 보셨겠지요. 휴일은 즐겁게 지내셨나요? 아이들도 재미있어 했겠지요? 우편으로 보내드리려고 했는 데 주소를 몰라서 못보냈어요. 어서 이 리로 들어오세요." "이리로요?" 코크 부인은 그녀의 작업실인 현관방으로 들어갔다. 베레니스의 작업용 전등 밑에 보이는 코크 부인은 몸집이 더 커 보였고 임신한 것같이 보이 가도 했다. 부인이 서 있는 모습은 온 방을 가득히 채우는 듯했다. 부인은 선 채 그 방안의 모든 것을 일일이 다들, 벽에 걸린 커다란 디자인들, 말아놓은 종이 뭉치들, 종이와 편지와 바느질감들이 널려있는 소파, 그리고 의자에 걸쳐있는 방 금 벗어 놓은 베레니스의 분홍색 드레스 등. 부인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방안 의 공기를 모두 들이마시는 듯했다. 그러나 베레니스는 이러한 무질서에 대해 긍지를 느꼈고 이러한 무질서가 그 녀의 재능과 독립심과 자기의 생활을 자기 힘으로 이끌어가는 한 여자를 상징한 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맨발로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평정을 되찾게 해주었다.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코크씨가 학교에서 부인 얘기를 많이 하셨어 요. 대학에선 우리 모두가 가족처럼 지내거든요. 좀 앉으세요. 드레스를 딴데로 옮기지요. 마침 드레스에 손질을 하던 중이었어요." 그러나 코크 부인은 앉지 않고 작업용 벤치 쪽으로 덥썩 걸어가더니 벽에 기 대어놓은 코크씨의 플루트를 마치 무기를 집어들 듯 번쩍 들어올렸다. 베레니스는 부인이 술에 취했다고 생각하고 재빨리 "네, 바로 오늘 아침에 손 을 보고 있던 중이었어요. 전 그런 플루트를 본 적이 없어요, 정말 아름다운 은 장식이예요. 제가 알기로는 아주 오래된 독일제이고 코크씨 아버님한테 연주용 으로 들어온 거라고 하시대요. 아버님이 유명한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셨다구요. 베이루트나 베를린이란던가요. 영국에서는 저런 은장식을 볼수 없어요. 살펴보니 까 어디서 떨어졌더니 누가 한 대 친 것 같아요. 코크씨 말씀이 자기도 코벤트 가든인가 어느 오케스트라에서 직접 연주를 하셨다고요." 그녀는 코크 부인니 플루트를 공중에다 휭 돌리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렇죠. 누가 한 대 친 거죠. 정말이예요. 내가 그것을 그이한테 던ㅈ으니까 요." 부인은 팔을 내리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베레니스에개ㅔ 달려들었다. "자, 그이는 어디 있죠?" "누가요?" 베레니스는 겁에 질렸다. "나의 남편 말이에요!" 코크 부인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서 슬쩍 넘기려고 하지 말아요. 오케스트라에서 연 주를 했가구. 흥 그이가 그런 소리 합디까? 당신하고 그이하고 무슨 짓을 하는 지 다 알고 있어요. 매주 목요일이면 그이가 여길 오는 것도 알고 있구요. 오늘 도 벌써2시 반부터 여기 와 있었어요. 이 집을 오랫동안 감시를 시켜왔거든요." 부인은 베레니스의 침실문 쪽으로 몸을 홱 돌리며 "저 안에 뭐가 있죠?" 하고 소리를 지르며 그 문 쪽으로 다가갔다. 베레니스는 되도록 침착한 목소리로 말 했다. "코크 부인, 그렇게 소리를 지르지 마세요. 저는 댁의 남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도데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침실문을 가로막았다. "제발 언성을 높이지 마세요. 여긴 우리 아버지의 방이에요." 베레니스는 부인 의 언동에 화가 치밀어서 "아버지는 아주 늙으신데다 몸이 편치 않으세요. 지금 주무시고 계세요." "이 방에서요?" "네." "그럼 다른 방들은 어때요? 이층엔 누가 살고 있죠?" "다른 방은 없어요. 저는 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거든요. 이층에는 사람들이 새 로 이사를 왔어요." 베레니스는 진실한 여자였기 때문에 자기가 그런 엄청난 거짓말을 한데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엇다. 코크 부인은 좀 가라앉았는지 베레니스의 드레스가 놓 여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 드레스 좀." 하고 베레니스는 드레스를 끌어냈다. 부인은 목소리를 낮추며 눈에 눈물이 글썽해 가지고 "여기서 그짓을 안하면 딴 데서 하겠군요."하고 말했다. "전 댁의 남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요. 다른 교수들과 같이 학교에서만 뵙지 요. 플루트를 이리 주시면 싸드릴게요. 그리고 돌아가주세요." "날 속이려구 하지 말아요. 난 다 알고 있으니까. 당신은 젊으니까 뭐든지 맘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코크 부인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핸드백 속을 뒤적거렸다. 베레니스에게는 윌리암의 매력 중의 하나가 그들의 만남이 항상 예측할 수 없 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연애는 게임과 같았고 그녀는 무엇보다도 깜짝 놀라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같이 있지 않을 때도 그녀에게는 게임이 계속되어 갔다. 그녀는 혼자서 그와 그의 가족들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고 상상하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오래된 시간 속에서처럼 같이 붙어있을 것이고, 교외의 그의 집 정원 에 둘어앉아 있거나 자동차 옆에 서 있을지도 몰랐다. 그들은 모두 햇빛이 밝은 곳에 있었다. 그러나 윌리암은 점잖고 바쁜 사람이어서 언제나 그들과 한두 발 떨어져 있을 것이었다. "부인이 아름다우신가요?" 그녀는 언젠가 위리암과 같이 침대에 누워있을 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위리암은 언제나처럼 신중하게 한참 시간을 끌더니 "대단히 아름다워"하고 말 했었다. 그의 대답은 그녀로 하여금 자기가 뛰어나게 아름답다고 느끼게 하였다. 그녀 는 그의 아내가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미인이라고 상상하고 몹시 만 나고싶어졌다. 그의 아내를 상상하면 할수록 그리고 여성다운 감정이나 기분으 로 서로 부담없이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녀를 만나고 싶어졌다.. 왜 냐하면 베레니스는 홀로 독립해 사는 여성이었기 때문에 모두에 대한 강한 의리 를 느끼고 있었다. 지난 여름에 윌리암의 가족이 휴가를 떠났을 때 그녀는 그들이 함깨 있는 모 습을 그려보았다. 다른 많은 가족들과 같이 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한 그 들이 보이고, 낮이건 밤이건 런던시의 수천피트 상공에는 결혼한 사람들이 몰려 가는 모습이 보이고, 그리고 해변가의 모래 위를 뛰노는 윌리암의 아이들의 다 리를 연상하고, 등을 태우려고 돌아눕는 그의 아내의 모습과 책임감에 가득 차 있는 그를 그려보았다. 베레니스는 많은 친구들과 자주 나들이를 했지만 그들의 대부분이 결혼한 사람들이엇다. 그녀는 쫓기면서도 만족해 있는 그들의 표정과 피곤해 보이는 남편들의 얼굴, 그리고 발랄한 부인들의 날카로운 표정들을 바라 보기가 즐거웠다. 기혼자들 사이에서 그녀는 자기의 독신생활을 더욱 깊이 느꼈 다. 그녀는 그들의 다정한 대화나 다투는 소리를 귀기울여 들었고 그녀에게 달 려오는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놀았다. 그녀는 그녀에게 접근해오는 남자들이 싫 었다. 항상 자기들 얘기만 늘어놓으면서 어처구니 없는 자만심으로 그녀의 독신 생활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달려드는 그들이 싫었다. 여러 가족들과 어울릴 때면 그녀는 자신이 이상하고도 필요한 존재, 하나의 필요한 비밀인 것처럼 느껴졌다. 윌리암이 그의 아내가 아름답다고 말하엿을 때 그녀는 자신이 너무 아름답다고 느껴져서 마치 뼈가 녹아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진짜 플로렌스가 이렇게 그녀 앞에 앉아 가방을 뒤지고 있는 것 이다. 마치 부풀어오른 풍선같이 비대한 여자가 처음에는 어린애같이 나중에는 고함을 질러대면서 그녀를 힐난했다. 베레니스의 플로렌스에 대한 꿈은 순식간 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 진짜 플로렌스는 정말 같지 않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리고 그녀의 눈앞에서 윌리암도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천하고 음흉스럽게 보였고, 그의 신중함은 능청스럽게 그리고 아내에 대한 칭찬은 일부 러 계산된 행동처럼 보였다. 그는 아내보다 키가 작았고, 그의 얼굴은 이젠 복종 하는 개의 얼굴처럼 보였고, 아내를 고분고분 따라가는 그의 발걸음이 눈에 선 히 보였다. 그녀는 비록 거짓말을 하면서 신나는 흥분을 느꼈지만 이 부인이 자기로 하여 금 거짓말을 하게 강요했다는 사실이 싫었고 자기사 부인처럼 보기흉한 모습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플로렌스를 아름답다고 한다면 자신은 추녀임에 틀 림없었다. 추녀일 뿐만 아니라 가련하고 불쌍한 여자였다. 베레니스는 부인이 가방에서 편지를 한 장 꺼내는 것을 주의깊게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이 목걸이는 뭐죠?"하고 부인이 화를 터뜨리며 물었다. "이 목걸이가 뭔데요?" "읽어보시구려. 당신이 쓴 것이니까." 베레니스는 놀라서 웃음을 지엇다. 이제는 자신을 더 변호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주 용의주도하고 까다롭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끼고 있었다. 그 녀는 한 번도 애인에게 편지를 쓴 적이 없엇으며 편지를 보내는 것은 자신의 일 부를 주는 것과 같이 거의 음탕한 행위라고 생각해 왔었다. 코크 부인이 편지를 건네주었을 때 그녀는 남의 편지를 읽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두 손가 락으로 편지를 받아 발신인이 누군가 하고 뒤집어 보았다. "이건 제 글씨가 아닌데요." 편지의 글씨체는 크고 넓었으나 그녀의 글씨체는 작고 긁적거리는 체였다. "바니는 누구고, 로지는 누구에요?" 코크 부인은 편지를 홱 채가더니 큰소리로 일기 시작했다. 부인의 목소리 때 문에 편지의 말들이 우스꽝스럽게 들렸다. "저는 그 목걸이가 정말 갖고 싶어요. 그 여자에게 빨리 서두르라고 해주세요. 다음에 오실 때는 꼭 가지고 오세요. 그리고, 플루트를 잊지 마세요. 로지." "바니가 누구냐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코크 부인이 말했다. "잘 알면서 왜 그래요. 바니는 내 남편 이름이란 말이에요." 베레니스는 고개를 돌려 벽에 꽂아놓은 조그마한 포스터를 가리켰다. 이 포스 터에는 현대적 귀금속 장식품을 파는 유명한 고급 상점에서 열린 전시회에 그녀 가 출품했던 목걸이 하나와 브로치 세 개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 포스터의 밑쪽에 멋있게 찍혀진 '베레니스이 창작품'이란 사인이 있었다. 베레니스는 이 사인을 마치 시 한 줄을 외듯이 큰소리로 읽었다. "제 이름이 베레니스예요."하고 말했다. 이렇게 진실을 애기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 순간 갑자기 윌리암이 그녀의아파트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으며, 그녀의 애인도 아니고, 그 우스꽝스런 플루트를 거기서 불어본 적도 없고, 사실상 윌리암은 대학에서 가장 재미없는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질투심 때문에 이렇게 추해진 이 여 자와 자기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크 부인은 아직도 믿지 않고 있었으나 포스터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점점 절 망의 빛을 띠기 시작했다. "이걸 그이의 포켓 속에서 발견했어요."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니까요." 베레니스는 그 깊은 골짜기 너머로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승리를 하였을 때는 관대해야 된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그 편지를 다시 한 번 보여주세요." 하고 말했다. 코크 부인은 편지를 건네주었고 베레니스는 편지를 읽으면서 플루트란 말에 의심이 나기 시작했다. 편지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리더니 그녀는 편지를 얼른 돌려주었다. "도데체 누가 학교에서 제 주소를 드렸지요? 교수의 주소는 절대 알려주지 않 도록 규칙으로 정해져 있는 데요. 그리고 전화번호도요." "그 여자애 말이에요."하고 말했다. "어떤 여자애요? 문의처에 있는 애 말인가요?" "그 애가 웬 사람을 하나 데리고 왔어요." "그게 누구였어요?" "전 모르겠어요. 이름이 W자로 시작한 것 같은데." "훨러라구요? 훨러씨는 남자예요." "아니요, 남자가 아니었어요. 젊은 여자인데 W자가 들어 있었는데 -오라, 글 로윗쯔였어요." "아니요.글로윗쯔예요." 코크 부인은 당황하여 베레니스를 두려워 하는 것 같 았다. "글로잇쯔." 베레니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로지 글로윗쯔군요. 그 런데 그 여자는 젊은 여자가 아니예요." "전 잘못 보았어요. 그 여자 이름이 로지예요?" 베레니스는 온몸이 차디차지면서 현기증이 났다. 그녀와 코크 부인 사이의 골 짜기가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렇군요."베레니스는 편지와 종이들을 밀어내면서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구 토증이 날 것 같았다. "이 편지를 그 여자한테 보여주셨나요?" "아니요."코크 부인은 다시 당당한 태도를 취하며 대답했다. "그 여자가 당신이 플루트를 수리하고 있다고 알려줍디다." '이젠 가보시지요.'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부인이 속으신 거에요. 엉뚱한 사람을 힐난하신 거예요. 저는 댁의 남편 이름 이 윌리암인 줄만 알고 있어요. 한 번도 자기 이름이 바니라고 말한 적이 없어 요. 학교에서도 모두 윌리암이라고 부르지요. 로지 글로윗쯔기 이 편지를 쓴 겁 니다." 베레니스는 플루트를 가져오라는 대목을 보며 갑자기 이 부인의 편이 되어 고 함을 지르며 분노를 터뜨리고 싶었다. 그녀는 부인의 무릎 위에 놓인 플루트를 집어들어 벽에 내동댕이쳐서 산산조각을 내고 싶었다. "포스트양. 미안해요."코크 부인이 뻣뻣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에 서린 눈물과 얼굴의 땀도 다 말라 있었다. "포스터야의 말을 믿겠어요. 제가 너무 근심을 하다가 그렇게 됐어요. 이해해 주세요." 베레니스이 아름다움이 서서히 가시고 말았다. 그녀의 애인들 중 한두 명의 행동은 언제나 자기만족에 차 있는 것 같았으나 윌리암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같이 누워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고 행위가 끝나면 곧 일 어나서 마치 자기의 과거를 더듬어 보듯 멀거니 정원을 내다보았다. 그런 때면 그는 나이보다 늙어 보였다. 그리고 나서는 아무 말고 없이 옷을 입기 시작했다. 셔츠 밖으로 머리를 내밀든지 바지에 한 다리를 넣기 만 하면 마치 깜빡 잊었다 생각난다는 듯이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방에 가서 플루트를 집어들고 정 원으로 나가 의자에 앉아 플루트를 불었다. 그렇게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어떻 게나 우스웠던지 베레니스는 그를 만화로 그린 적이 있었다. 그이 긴 입술이 플 루트의 입에 덮여 있고, 슬프고 음란한 가늘고 높은 음이 마치 연기처럼 피어올 라 나무 속으로 흩어져 올라가노라면 그는 눈을 내리깔고 열심히 불고 있었다. 때로는 그녀는 웃었고, 때로는 미소를 지었고, 때로는 감동을 느꼈고, 때로는 호 가 나고 혼란을 느끼기도 하였다. 한 가지 자랑스러운 만족감은 이층의 사람들 이 불평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그녀는 이 부인과 일체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 고 싶었다. '남자들이란 참 이상하지요! 그분은 집에서도 정원에 뛰쳐나가 저 우스운 플루 트를 부는가요?' 그리고 다시 그녀는 분노를 느꼈다. '그분이 로지 글로윗쯔 집에 간다니! 그리고 런던의 반쯤 되는 집집마다 다니 면서 그런 짓을 하다니!' 그러나 베레니스는 이런 말들을 물론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코크 부인을 승리 감과 동정심에 가득 차서 바라보았다. 그녀는 로지 글로윗쯔의 목을 부러뜨리고 싶었고 코크 부인이 다시 기뻐하도록 무슨 회유적인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우둔한 부인이 용서를 비는 바람에 모든 것이 틀리고 말았다. "정말 미안해요. 상점에서 당신 작품을 보았을 때 정말 만나고 싶었어요. 사실 은 그래서 찾아온 거에요. 남편이 당신 얘기를 자주 했거든요." 여하튼 그녀도 거짓말은 할 수 있었다. 내가 만약 모든 것을 털어놓았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부인을 가도록 해야겠다. 베레니스는 구슬과 보 석과 수정조각들이 가득 차 있는 벤치의 서랍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것들을 한 줌 쥐어 코크 부인의 무릎에다 쏟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은제품만 만드시나요?" 코크 부인이 눈을 닦으며 물었다. "네. 지금도 하나 만들고 있는 중이에요." 코크 부인의 짓누르는 듯한 모습 때문에 베레니스는 얼떨결에 회유적인 거짓 말을 하고 말았다. "선물이에요. 사실은 학교에서 우리 모두가 로지 글로윗쯔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어요. 또 결혼을 한다구 해서요. 아마 그 편지가 그 내용일 거예요. 코크씨가 모든 것을 해나가고 있으니까요. 코크씨는 참 인자하고 사려깊은 분이에여." 베레니스는 자기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말한 거짓말 도 상당한 것이었지만 이 거짓말은 새로 발견된 어떤 진리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바니가 돈을 걷고 잇다는 말이세요?" "네." 플로렌스 코크한테서 커다란 웃음이 터져나왔다. "흥, 관대하시군! 다른 사람들의 돈을 다 걷고. 그이는 지난 30년 동안 가족들 에게 단 한 푼도 안썼어요. 그런데 당신네들은 그 두 번 씩이나 결혼하는 여자 한테 그걸 다 준다는 거에요? 결혼선물을 두 번씩이나 준다구요." 코크 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아직도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참 바보들이군요. 어떤 여자들은 그렇게 뻔뻔스럽게 굴어도 아무도 뭐하고 안 하더군요.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요. 하지만 바니하고는 그럴 수가 없어요." 부 인은 자랑스럽게 마치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이는 말이 별로 없어요. 하지만 내 바니는 아주 속이 깊지요." "차 한 잔 드시겠어요?" 베레니스는 부인이 거절하고 가주기를 바라면서 공손 히 물었다. "그이는 말이 별로 없어요. 하지만 내 바니는 아주 속이 깊지요." "차 한 잔 드시겠어요?" 베레니스는 부인이 거절하고 가주기를 바라면서 공손 히 물었다. 그러나 부인은 아주 편안한 어조로 "네. 그러지요. 오늘 이렇게 만나 러 와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부인은 닫혀진 문을 힐끔보며 "아버님은 어떠신지? 차를 드시고 싶지 않으시겠어요?"하고 물었다. 코크 부인은 아주 정신이 맑아진 것 같았고 베레니스는 반대로 멍하니 취한 듯하기도 하고 졸리는 듯도 했다. "가서 보겠어요." 부엌으로 가서 정신을 가다듬은 그녀는 웃으려고 애를 쓰며 돌아왔다. "조용히 오후의 산보를 하러 나가셨나봐요." "그런 연세의 노인들은 늘 지켜봐야 해요." 그들은 앉아서 얘기를 나누었다. "글로윗쯔 부인이 또 결혼을 하다니!"하고 말을 하면서 코크부인은 무심히 "그 런데 '플루트를 가져오세요'란 말은 왜 했는지 모르겠어요."하고 덧붙였다. "그건 대하교 파티에서 코크씨가 플루트를 붙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군요. 하지만 결혼식에 연주한다는 것은 좀 염치없는 짓 같아요. 다른 사 람들은 우리 바니가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지 모르지만 그이는 좀 염치가 없어요." 그들은 차를 마셨고 코크 부인은 떠나려고 일어섰다. 베레니스의 얼굴에 크게 키스를 해주며 코크 부인은 "글로윗쯔 부인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당신도 차례가 올 거니까요." 하고 말했 다. 베레니스는 문을 잠그고 침실로 돌아와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웠다. 그리고 생 각했다. 결혼한 사람들이란 얼마나 끔찍한가. 남들 앞에서 다 드러내놓고 아무에 게나 아무것에나 추태를 부리고, 언제나 자신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남들이 거짓 말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녀는 일어나서 정원 나무 밑에 있는 빈 의자를 처음에는 쓰라린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의자를 향해 크게 웃고 나서 그녀의 정직한 몸에서 모든 거짓말을 씻어내기 위해 목욕을 하러 갔다. 목욕을 마친 후에 그녀는 브류스터 부부에게 전화를 했다. 그들은 놀러오라고 하였다. 그녀는 우월감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어려움을 잘 이겨나가는 브류스터 부부를 매우 좋아했다. 그 집에 간 그녀는 미친 듯이 지껄여댔다. 그 집 아이들 이 이상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돌아간 후 브류스터 부인이 말했다. "베레니스가 점점 이상해져 가고 있어요. 결혼을 해야겠어요. 그리고 머리채를 그렇게 흔들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머리를 울리면 오히려 더 나아 보일 텐데 밀 이에요." 작품해설 결혼제도를 보는 이중적 시각 '가정을 가진 남자'는 쓸쓸한 사랑얘기로 분류될 수도 있다. 틀림없이 베레니 스와 윌리암 같은 관계는 현대에서는 드물지 않은 사랑의 양태 중의 하나가 되 고, 군데군데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구절들도 절실한 공감을 자아냈다. 그러나 다 읽고 난 뒤 우리 머리속에 보다 강한 인상으로 남는 것은 파탄난 사 랑이 아니라 결혼제도를 바라보는 작가의 냉철한 눈길이다. 결혼제도는 인류가 유별난 번성의 문으로 들어설 수 있게 한 열쇠중에 하나였 지만 또한 끝내 잊지 못할 자연에의 향수에는 괴로운 족쇄였다. 그래서 대부분 제도로서는 따르면서도 그에 대한 찬반의 논의 는 진작부터 팽팽하게 맞서왔고 키에르케고르 같은 철학자는 딜레마적 경구를 남기기도 했다. 사랑, 성, 가족제도와 관련해 결혼을 보는 작가의 눈길은 아마도 키에르케로르 와 같이 차가운 이중부정의 논리에서 출발하는 듯하다. 얼핏 보면 이 작품은 결 혼이 강요하는 위선과 기만을 겨낭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베 레니스의 독신주의자에도 결코 호의나 동정을 보내고 있지 않다. 결혼이 위선과 기만으로만 자유로울 수 있는 행복의 의제라면 독신주의에도 결코 호의나 동정 을 보내고 있지 않다. 결혼이 위선과 기만으로만 자유로울 수 있는 행복의 의제 라면 독신주의는 허세와 과장으로 분석된 고독과 비참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은 성년이 되면 그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우 리 삶은 결국 딜레마에 빠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작품은 단순한 사랑 얘기로서 보다는 성의 제도화와 관련돤 삶의 어두운 진상을 아이러니로 드러내 보인 것이 라 할 수 있다. 지은이 V. S. 프리체트는 장편보다 단편으로 더 많이 알려진 영국의 현대작가 다, 기지와 유머가 넘쳐 흐르면서도 그뒤에 숨어있는 비극의 표정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낼 줄 아는 재능으로 소설가 유도라 웰티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그는 주간 지 'New Statesman'의 서평란을 담당하고 후에 편집자으로 재직하는 등 저널리 스트로도 활동했다. 장편소설 '밸링클씨' 평론집 '살아있는 소설' 등을 남겼으며 자신의 삶을 기록한 '자서전- 전반생'도 있다. 비(Rain) 서머셋 모음 지음 장경렬 옮김 취침시간이 가까워졌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벌써 육지가 눈앞에 펼쳐질 것 이다. 맥페일 박사는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나서, 난간에 기대서서 하늘을 보면 서 남십자성을 찾았다. 전선에서의 2년, 그리고 전상의 치유를 위해 뜻밖에 많은 시일을 보낸 뒤라 적어도 1년은 조용히 아피아에서 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뻤다. 그리고 여행 을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몸이 좋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몇몇 승객이 내일 파고파고에서 닻을 내린다고하여 그날 밤은 조촐한 무도회가 있었다. 그래 서 그의 귀에는 아직도 자동 피아노의 거친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 내 갑판은 조용해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내가 긴 의자에 앉아 데이빗슨 내 외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어정어정 그쪽으로 가까이 갔다. 불빛 아래 앉아서 모자를 벗은 그의 머리는 심한 빨강머리로서, 더욱이 정 수리가 동그랗게 벗어져 있고 붉은 주근깨가 있는 피부에도 마찬가지로 붉은 털 이 있었다. 그는 30세의 마른 몸집, 날카로운 얼굴, 빈틈없고 얼마간 현학적인 사람이었다. 굉장히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서 스코틀랜드 사투리로 말을 했다. 맥페일 내외와 선교사인 데이빗슨 내외 사이에는 특별히 취미가 같다든가 하 는 이유가 아니라, 그저 가까운 거리가 그렇게 만든 이른바 뱃친구의 친밀감이 생겼던 것이다. 그들을 잇는 가장 큰 유대는, 진종일 끽연실에 틀어박혀서 포우 커놀이나 브리지를 하며 술로 세월보내는 패거리에 대하여, 그들이 한결같이 못 마땅해 하는 일이었다. 맥페일 부인으로서는 이 배 안에서 자기들 내외만이 데 이빗슨 내외가 기꺼이 사귀고자 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자, 적이 자랑스 럽기까지 하였다. 다소 수줍어하는 구석은 있었지만 물론 바보는 아닌 의사마저 도, 반은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경의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묘하게 까 다로운 성미였기 때문에, 그는 밤에 선실에 들어가면 무슨 트집을 잡아보기도 하는 것이엇다. "데이빗슨 부인이, 만일 우리들이 없었다면 이번 여행이 어땠을까하고 생각하 기만 해도 가슴이 섬뜩해진다고 말하더군요." 가발을 곱게 빗질하면서 맥페일 부 인이 말했다. "이 배안에서 사귀고 싶은 사람은 우리들 둘뿐이라고 말예요." "선교사가 그렇게 점잔을 뺄 만큼 대단한 존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 "점잔빼는 게 아녜요. 부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저는 잘 알아요, 하기야, 저런 끽연실의 우락부락한 패거리와 같이 지내지 않을 수 없다면, 데이빗슨 내 외라도 유쾌한 일은 아닐 거예요." "어머, 제가 이미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종교에 관해서만은 농담을 하시지 말라고요. 저, 여보, 난 당신 같은 그런 기질이 제일 싫어요. 당신이라는 사람은 절대로 남의 좋은 점을 보지 않거든요." 그는 엷은 푸른 눈으로 아내를 슬쩍 노려보았으나 대답은 하지 않앗다. 오랜 결혼 생활의 경험에서, 그는 아내가 최후의 말까지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평 화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보다 먼저 옷을 갈아입자, 위층 침대에 들어가 책을 읽으면서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이튿날 아침, 갑판에 나가보니까 육지가 바로 눈앞에 가까이 있었다. 그는 무 엇에 주린 듯한 눈으로 육지를 바라보았다. 은빛의 좁은 모래사장이 길게 뻗어 나가고, 그뒤는 바로 언덕에 이어져서 산은 꼭대기까지 울창한 나무들로 덮여 있었다. 푸른 잎에 덮인 야자나무가 거의 물결치는 곳까지 늘어서 있고 그 사이 에 사모아 원주민들의 초가집들이 보였고 여기저기 작은 교회가 점점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데이빗슨 부인이 다가와서 나란히 옆에 섰다. 검은 옷을 입고 목 에다가 목걸리이를 걸었는데, 거기에는 작은 십자가가 매달려 있었다. 자그마한 여자인데 암갈색의 머리를 매우 정성들여 땋았고, 테없는 코안경 뒤에서는 볼록 한 푸른 눈이 빛나고 있었다. 양처럼 긴 얼굴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조금도 바 보스럽지는 않고 오히려 상당히 민첩한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마치 새처럼 잽 싸게 움직이고 있었다. 맨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높고 금속성인 그리고 조금도 억양이 없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듣는 사람의 귀에는 그 지독한 단조로움이 마 치 자동공기 착암기의 소음처럼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그런 목소리였다. "이제 댁에라도 돌아가시는 것 같겠습니다." 의사 맥페일은 그의 엷고 묘한 웃 음을 띠면서 말했다. "아녜요, 저희들의 섬은 달라요. 아시다시피 더 낮은 산호초인 걸요. 이곳은 다 화산도이죠. 아지도 가려면 열흘이나 걸려요." "그렇지만, 이 근처라면, 본국에선 이웃마을 정도라고 할 수 있겠죠." 의사는 익살스럽게 말했다. "어머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건 과장된 거에요. 그러나 이 남양에 오니까 벌 써 거리라는 것에 대한 감각이 전혀 달라지는군요. 그런 점에서는 말씀하시는 대로지만요." 의사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곳에 머물게 되지 않는 게 정말 다행이에요." 그녀는 말을 이었다. "듣 기에 굉장히 전도하기 힘든 곳이라고 하더군요. 기선의 내왕이 주민들을 불안하 게 하지요. 더구나 해군기지가 있어요. 그것도 원주민에게는 좋지 않아요. 하긴 상인들이 한둘 있긴 하지만 예의바르게 행동해 달라고 우리가 일러두고,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더 있지 못하도록 조처를 하기 때문 에 그들이 서둘러 떠나버린다는 식이지요." 안경을 코에다 얹고 그녀는 차가운 태도로 푸른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만은 선교사들도 어떻게 손을 써 볼 도리가 없지요. 정말 우리들이 이곳 에 안 보내진 것을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는지." 데이빗슨이 맡은 구역은 사모아 북쪽에 있는 한 무리의 섬으로 되어 있었다. 굉장히 멀리 띄엄띄엄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따금 그는 카누를 타고 순회하 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럴 때는 언제나 아내가 분부에 남아서 전도를 대신 맡게 되어 있었다. 이 여자가 일을 한다면 얼마나 속시원하게 처리할 것인가를 생각 하니까, 맥페일은 좀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원주민의 놀라운 나쁜 풍습 에 대하여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듯한 목소리로, 그러나 뚜렷하게 과장된 두려움 을 나타내면서 이야기했다. 그녀의 섬세한 감각은 독특한 것이었다. 그들이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안되었을 무렵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저, 말예요, 우리들이 그 섬에 처음으로 왔을 때의 결혼 관습으로 말하면, 정 말 깜짝 놀랄 만한 것이어서 도저히 당신에게 이야기도 할 수 없는 것이에요. 그러나 부인에게 말씀드려 놓을 테니까 다음에 부인한테서 들으세요." 이윽고 그는 아내가 데이비슨 부인과 갑판용 의자를 바싹 붙여놓고 거의 두 시간 정도나 정신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운동을 하느라고 그녀들 곁을 오갈 때마다, 그는 먼 산의 물소리라도 듣는 것처럼 흥분으로 떨리는 데이빗슨 부인의 속삭임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벌어진 입과 핏기 잃은 얼궁에 의 하여 그녀가 놀랄 만한 경험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밤 선실로 돌 아와서 그녀는 이야기의 자초지종을 숨을 주기면서 그에게 말해준 것이었ㄷ. 그리하여 이튿날 아침, 데이비슨 부인은 의기양양하게 외쳤던 것이다. "정말 지독한 이야기지요? 이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어요? 저 자신의 입 으로는 도저히 말씀드릴 수 없었던 것을 알게 되었을 거예요. 아무리 당신이 의 사 선생님이라고는 하지만요." 그렇게 말하고 데이빗슨 부인은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예기 했던 효과를 확인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극적인 열의로 가득 차 있었다. "저희들이 처음 왔을 때에는 정말 한심스러웠어요. 곧이 듣지 않으실지 모르지 만 어떤 마을에 가도 단 한 명의 숫처녀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녀는 '숫'이라는 말이 엄밀하게 전문적인 용어인 듯 사용했다. "그래서 저는 주인과 의논한 끝에 무엇보다도 우선 저 댄스를 금지해야 된다 고 결심했습니다. 아무튼 그들로 말하면 그저 댄스 미치광이였기 때문이지요." "나도 젊었을 적에는 댄스를 별로 싫어하지 않았는데요." 의사 맥페일은 말했 다.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젯밤 부인께 한 번 추어보지 않겠느냐고 말 씀하시는 걸 들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부인과 춘다면야 조금도 흉이 될게 없겠 지요. 그렇지만 부인께서 싫다고 말씀하셨을 때 전 사실은 마음이 놓였어요. 그 같은 경우에서는 우리는 우리들대로 따로 얌전하게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어 요." "어떤 경우를 말하시는 겁니까?" 데이빗슨 부인은 코안경 너머로 그를 슬쩍 바라보았으나 그의 말에는 입을 다 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야 백인끼리라면 별문제이겠지만."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주인 말 에 동감이예요. 적어도 남편이 옆에 서 있으면서 자기의 아내가 남의 가슴에 안 겨 있는 것을 예사로 보는 사람의 그 심리를 아무래도 알 수 없다는 거예요. 그 래서 저는 결혼 이후에 댄스 같은 것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어요. 그러나 원주 민들의 댄스는 전연 다른 문제예요. 댄스 그 자체가 비도덕적일 뿐말 아니라 분 명하게 부도덕한 면으로 이끌어 가는 거예요. 그러나 저희들이 결국은 이 댄스 를 없애버릴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얼마나 신에게 감사드리고 있는지 몰라요. 거 짓말이 아녜요. 벌써 8년 동안이나 저희들 지방에서는 댄스 같은 걸 하는 사람 이 없어요." 그런데 마침 그때 배가 항구 입구에 들어섰다. 그리고 맥페일 부인이 끼어들 었다. 배는 급히 방향을 바꾸어서 조용히 항구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능히 함대 하나가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육지에 둘러싸인 커다란 항만으로서, 주위에는 높 고 험준한 푸른 산이 이어져 있었다. 항구 가까운 곳에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산 들바람을 받으면서 총독 관사가 정원에 둘러싸요 있었었다. 깃대에는 성조기가 나른하게 축 처져 있었다. 그들은 두서너 채의 산뜻한 방갈로와 테니스 코트를 바라보면서 지나가 이윽고 창고가 줄지어 선 부두에 이르렀다. 선복에서 2, 3백 야드 떨어져 정박하고 있는 한 척의 스쿠너를 가리키면서 데이빗슨 부인은 자기 들은 저것을 타고 아피아로 간다고 말했다. 섬 각지에서 몰려온 원주민들이 많 이 모여서 기분좋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중에는 호기심 때문에 나온 자도 있 었으나 그렇지 않은 자는 지금부터 시드니로 떠날 호기심 때문에 나온 자도 있 었으나 그렇지 않은 자는 지금부터 시드니로 떠날 여행자들과 교환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파인애플, 커다란 바나나송이, 타파옷감, 조개껍질과 상아 이 빨을 꿰맨 목걸이, 카바 술잔, 전투용 카누의 모형 따위를 들고 있는 것이었다. 수염을 깨끗이 깎고 멋을 부린 미국 해군들이 명랑한 표정을 짓고 그들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관리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자기들의 군중을 바라보고 있엇다. 맥페일 의사는 대부분의 어린애나 소년들이 열대지방이 피부병에 걸려서 문둥병 의 브스럼처럼 문드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심하게 부은 팔을 하고 있거나 매우 보기 흉하게 부어오른 다리를 질질 끌며 걷고 있는 상피병 환자를 처음 보았을 때에 과연 그는 직업적인 눈을 번쩍였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라바라바'를 입 고 있었다. "매우 좋지 않은 복장이라고 생각해요." 데이빗슨 부인이 말했다. "법률로라도 금지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인은 말씀하고 있어요. 허리께에 겨우 체면치레 정도로 붉은 무명을 감았을 뿐이예요. 저래가지고야 어떻게 품행이 방정해질 수 있을까요, 안 그래요?" "그러나 이 기후에는 저것이 안성마춤이겠지요." 의사는 머리의 땀을 닦으면서 말했다. 그들이 상류했을 무렵은 아직 이른 시각이었지만 그래도 벌써 못견딜 정도의 더위였다. 사방이 산에 완전히 둘러싸여 파고파고에는 바람다운 바람이 불어오 지 않는 것이다. "저희들의 섬에서는," 데이빗슨 부인은 여전히 높은 목소리로 계속 이야기했 다. "조 라바라바라는 것을 거의 없애버리고 말았어요. 아직 노인들 사이에는 다 소 걸치고 있는 자도 있지만 다만 그 정도 뿐이에요. 여자는 이미 모두 내려닫 이 옷을 입으면 남자도 셔츠와 바지를 입게 되었어요. 아직 저희가 섬으로 간 초기의 일이었는데, 주인이 보고서에 이런 것을 쓴 일이 있었답니다. '이들 섬들 의 주민은 10세 이상의 소년이 모조리 바지를 입게 될 때까지는 완전한 기독교 화를 바랄 수 없음'이라고 말이에요." 그러나 데이빗슨 부인은 항구의 하늘을 뒤덮고 흘러가는 시커먼 비구름을 아 까부터 두서너 번 그새 같은 눈동자를 들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사작하였다. "어디서 비를 피하는 게 좋겠어요."그녀는 말했다. 그들이 군중과 함께 양철로 지은 커다란 헛간으로 뛰어 들어가자마자 비는 억 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행중 그는 맥페일 내외에 대하여 시종 정중하게 대했으나 결코 마나님처럼 상냥한 면은 보이지 않고 대개는 독서를 하면서 기산 을 보내고 있었다. 굉장히 입이 무겁고 무뚝뚜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 정도여서, 그의 정중함도 단지 자기가 기독교인이라는 의무감에서 그렇게 할 뿐, 태생은 비타협적이고 오히려 꽤 까다로운 사람으로까지 생각되었다. 보기에도 별난 데 가 있었다. 빼빼 말라서 키만 크고 게다가 기다란 팔다리를 마치 느슨하게 붙여 놓은 것 같았다. 움푹한 볼, 우스울 정도로 툭 불거진 광대뼈하며, 어딘가 시체 를 대하는 듯한 차가운 느낌을 주어서 그의 두껍고 육감적인 입술을 보면 도리 어 뜻밖일 정도였다. 텁수룩하게 자란 머리에다가 검고 커다란 깊숙한 눈이 슬 픈 빛을 띠고 있었다. 묵직하고 긴 손가락을 가진, 모양이 아름다운 손은 그의 힘찬 성격을 생각하게 했다.그러나 그를 보고 맨먼저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에 억눌린 불길같은 인상이었다. 그것은 매우 강한 인상일 뿐만 아니라 무언가 막 연한 불안감마저 느끼게 했다. 어쨌든 친밀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한 그가 반갑지 않은 뉴스를 가지고 온 것이다. 홍역이 발생했다는 것이 다. 그것은 섬이 카나카인 사이에서는 무서운 때로는 죽음까지 부르는 병인 것 이다. 더군다나 그들을 태우고 가는 스쿠너 선원들 중 한 사람이 걸렸다고 한다. 환자는 곧 상륙시켜서 검역소의 병원에 입원시켰으나 아피아로부터의 전보는 그 밖의 선원들 중에 감염자가 없다는 것이 완전히 확실해질 때까지는 스쿠너의 입 항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최소한 열흘은 이곳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죠." "그러나 아피아에서는 내가 빨리 오기를 고대하고 있을 텐데." 맥페일 의사는 말했다. "그런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하기야 이 이상 배에서 환자가 생기지 않 으면 백인 선객만 태우고 스쿠너를 출항시킬 수 있겠지요. 그러나 모든 원주민 들의 왕래는 석 달동안 엄격히 금지되지요." "이곳에 호텔은 있을까요?" 맥페일 부인이 물었다. 데이빗슨은 작은 목소리로 킬킬 웃었다. "그것이 없답니다." "어머, 그럼 어떻게 하지요?" "총독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왔어요. 이 해안가에 상인의 집이 있는 데 셋방이 있다고 해요.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말예요. 아무튼 비가 그치거든 곧 그곳으로 가보지요. 그리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거죠. 좋고 나쁜 것 따위는 문제가 아니죠. 여하간 침대가 있고 지붕이 있다면 고맙다고 생각지 않 으면 안되겠지요." 그러나 비가 그칠 조짐은 없었다. 드디어 그들은 우산을 받고 방수 코트을 입고 떠났다. 거리라고 이름붙일 만한 것은 없고 다만 관청 건물들이 한데 모여 있고 상점이 한두 채, 그리고 뒷길에 야자와 바나나 나무에 둘러싸인 원주민들 의 집이 두서너 채 서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찾는 집은 부두에서 도보로 5분쯤 걸리는 곳에 있었다. 목조 이층집으로 층마다 넓은 베란다가 달려 있고 지붕은 물결진 양 철비붕이었다. 집주인은 호온이라고 하는 트기였는데 원주민인 아내 주위를 갈색 얼굴의 아이들이 삥 둘러싸고 있었으며, 1층에는 상점을 열어 통조 림이며 무명 옷감 따위를 팔고 있엇다. 안내된 맥페일 내외의 방에는 가구 따위 는 거의 아무것도 없고 보잘 것 없는 낡은 침대 하나와 찢어진 모기장, 찌그러 진 의자, 세면대, 겨우 그것뿐이었다. 그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둘러 보았다. 빗줄기는 계속해서 퍼붓고 있었다. "당장 필요한 것만 꺼내 놓기로 하겠어요." 맥페일 부인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여행용 가방을 열고 있는데 데이빗슨 부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정말 활달하고 원기왕성한 여자였다. 불유쾌한 환경도 그녀에게는 별로 문제되 지않는 모양이었다. "제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겠어요? 바늘과 실을 가져와요. 빨리 모기장을 꿰 매 놓지 않으면 안돼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밤엔 한잠도 잘 수가 없어요." "그렇게 대단합니까?" 의사 맥페일이 물었다. "지금이 심할 때 아니겠어요. 아피아에서 총독관사의 연희에 초대라도 받아보 세요. 저희들 여자는 모두 배갯잇을 받는답니다. 결국 그것으로 저 -아래쪽을 온 통 감싸지 않으면 안돼요." "아아,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비가 좀 그쳐주지 않을는지." 하고 맥페일 부인이 말했다."햇볕이라도 난다면 어떻게 지낼 만하게 해볼엄두라고 나겠는데 말예요." "오, 만일 그런 것을 기다린다면 그야말로 쓸데없는 기다림일 거요. 파고파고 는 태평양에서도 가장 비가 많은 곳이에요. 저 산이나 만이 모두 물을 끌어들이 는데다가 일년 중에서도 이때가 장마철로 되어 있으니가요." 그녀는 방 양편에 넋나간 사람모양 맥풀려 서 있는 맥페일과 그 부인을 번갈 아 보았다. 그리고는 시큰둥하게 입술을 오므렸다. 우선 이 두 사람부터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었다. 이렇게 무기력한 인간을 대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는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이것저것 척척 자기 마음대로 처리해 주고 싶은 충동에서 손이 근질근질했다. "자, 바늘가 실을 내놓으세요. 짐을 풀고 있는 동안에 내가 당신들의 모기장을 꿰매 드리겠어요. 그리고 맥페일 선생님, 부두에 가셔서 댁의 그 무거운 짐을 어 디 비가 뿌리지 않는 곳으로 옮기도록 해보세요. 상대는 토인이기 때문에 비에 흠뻑 젖건말건 그런 건 예사로 내버려둔답니다." 의사는 다시 방수 코트를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문 옆에 호온이 서서 그 들이 타고 온 배의 조타수와 또 한 사람, 배에서 몇 번 본 일이 있는 이등 선객 의 하나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조타수는 매우 지저분하고 주름살투성이인 작달 만한 남자였는데 그가 지나가자 고개를 약간 까닥했다. "선생, 홍역이라니 안됐군요."하고 그는 말했다. "머무를 곳은 그런대로 마련이 된 것 같군요." 의사 맥페일은 그가 지나치게 치근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나, 조심성 있 는 그는 함부로 화를 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요, 이 위층에 방을 얻었소." "이 미스 톰슨도 당신들과 함께 아피아로 가는 길이라고 하기에 이곳으로 데 리고 왔는데요." 조타수는 엄지 손가락으로 자기 옆에 서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나이는 스물 일곱살쯤일까 싶은데, 살이 찌고 품위는 없지만 예쁜 데가 있었다. 하얀 옷에 커 다란 휜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하얀 목양말에 싸인 굵직한 종아리가 반들반들한 키드 가죽의 희 장화 위에서 부풀어 있었다. 그녀는 맥페일을 보자 애교를 부리 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이 말예요. 저런 협소한 방을 하루에 1달러 반이나 내라고 하잖아요." 여자는 목쉰 소리로 말했다. "이봐, 조우, 내 친구니까 말야." 조타수가 말했다. "1달러 이상은 못내겠다고 하는데 말야, 그대로 받아줘." 상인은 살이 듬뿍 찐 상냥한 사나이였는데 조용히 웃고 있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한 번 어떻게 생각해 보지요, 스완씨. 아내와 한 번 의논해보고, 어차피 깎자는 거니까 깎아주긴 해야겠지." "그렇게 어물어물 넘기지 말아요." 미스 톰슨은 말했다."바로 이 자리에서 결 정하면 되잖아요. 방값은 하루 1달러로 하고 그 이상은 한 푼도 더 내지는 않을 테니까요." 의사 맥페일이 미소를 지었다. 여자가 흥정에 악착 같은 것에 타복한 것이다. 그는 언제든지 부르는 대로 단번에 돈을 치르고 만다. 그리고 값을 깎기보다는 바가지를 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사나이였다. 상인이 커다랗게 숨을 쉬고 나서 말했다. "좋아요. 스완씨 체면을 봐서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렇게 나와야지요." 미스 톰슨은 말했다."들어가서 술 한 잔 안 하겠어요? 스완씨, 그 손가방을 좀 들어다줘요. 그 속에 썩 좋은 호밀 위스키가 들어 있으 니까요. 선생도 같이 들어가지요." "나는 지금 짐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보러 가는 길이라서." 그는 빗속으로 뛰어나갔다. 비는 항구 쪽에서 억수같이 내리쏟아져 해안은 완 전히 파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라바라바말고는 실어라기 하나 걸치지 않 은 원주민들 두서넛이 커다란 우산을 들고 지나갔다. 몸을 꼿꼿이 세우고 천천 히 지나가면서 스칠 때는 일일이 미소를 던지고, 무슨 뜻인지도 모를 말로 인사 를 하고 지나간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저녁 식사가 막 시작되려는 참이어서 객실에는 벌써 식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방은 사람이 살기 위하여 만들어진 방이라기보다는 오 히려 격식을 갖추기 위한 것으로서 몹시 퀴퀴하고 음습한 공기가 방안 가득히 들어차 있었다. 주위의 벽에는 날염무늬의 풀러시 천으러 만든 가구 장식이 곱 게 둘려 있고 천장 한가운데는 파리를 막기 위하여 노란 투명종이로 싼 도금한 상들리에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데이빗슨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총독을 방문하러 갔어요." 데이빗슨 부인은 말했다."틀림없이 저녁 식사에 붙 들렸을 거예요." 자그마한 원주민 아가시가 햄버거 스테이크를 날라오고, 조금 뒤에 주인은 손님들이 만족해 하는 지 여부를 살피로 들어왔다. "호온씨, 동숙인이 한 분 생긴 것 같군요." 의사 맥페일이 말했다. "그녀는 방만 얻었을 뿐입니다." 주인이 대답했다."식사는 자기 스스로 할 모 양입니다." 그는 무언가 아첨이라도 하듯이 두 부인 쪽을 보았다. "손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아래층 방에다 정했습니다. 그녀는 결코 여러 분에게 성가시게 굴지는 않을 겁니다." "역시 그 배로 온 사람인가요?" 맥페일 부인이 물었다. "네, 저, 이등 선객입니다. 그녀도 아피아에 간다고 해요. 뭐, 출납계라든가 하 는 일자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대요." "오오, 그래요!" 주인이 나가고 나자 의사 맥페일이 말했다. "자기 방에서 혼자 식사를 한다는 건 별로 기분좋은 일은 아닐 텐데 말야." "그런데 이등 선객이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오히려 그편이 마음 편하겠어 요." 데이빗슨 부인이 대답했다. "그런데, 도대체 누굴까요?" "나는 마침 그 자리에 있었는데요. 그 조타수가 데리고 왔답니다. 확실히 톰슨 이라고 합디다." "그럼 엊저녁에 조타수와 춤추고 있던 그 여자가 아닐까요?" 데이빗슨 부인이 물었다. "네, 아마 그럴 거예요." 맥페일 부인이 말했다."난 그때부터 이 여자가 도대체 누굴까 하고 생각했어요. 저한테는 그녀가 행실의 별로 안 좋은 여자로 생각되 었는데." "어쨌든 제대로 돼먹은 여자는 아니예요." 데이빗슨 부인이 말했다. 이야기는 그대로 딴 화제로 옮겨져 버리고, 식사가 끝나자 그날 아침 일찍 일 아나 피로 때문에 각자 헤어져서 잠을 잤다. 눈을 떠보니까 하늘은 아직 어둡고 구름도 나직이 드리워져 있었으나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미국 인이 해안을 따라 닦아 놓은 큰 길을 거닐었다. 돌아와 보니까 데이빗슨이 막 도착해 있었다. "아무래도 두 주인은 있어야 될 것 같아." 하고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해보았으나 총독으로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는 거 야." "아무튼 주인은 빨리 일을 하러 돌아가고 싶어하니까 말예요."부인은 걱정스럽 게 그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고 말했다. "일년 동안이나 비워두었기 때문이죠." 그가 베란다를 왔닥갔다하면서 말했다. "전도에 관해서는 원주민 선교사에게 모두 맡기고 왔습니다만은 얼렁뚱따해 버 리지나 않을까 하고 그것이 걱정이 되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그야 모두들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물론 제가 그들을 헐뜯고 있는 건 아니고요. 모두 신을 두려워하는 열성적인 기독교인들인데 -그들의 신앙은 오히려 고국의 사이비 기 독교인 따위는 쥐구멍을 찾을 정도죠- 그렇지만 그들은 가엾을 만큼 정력이 부 족해요. 그들은 한 번 버티고 두 번까지는 버티지만 마지막까지 버티지를 못하 지요. 가령 당신이 전도를 원주민 선교사에게 맡겨두었다고 한다면 그가 아무리 믿을 만한 사람이로 보이더라도 얼마 안 가서 온갖 나쁜 폐단이 생기는 걸 알게 되지요." 데이빗슨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엇다. 키카 크고 깡마른 몸집, 그리고 혈색이 좋지 않은 얼굴에서 빛을 내는 커다란 눈으로 하여 그의 모습은 인상적 인 데가 있었다. 그의 열정적인 몸짓과 저력있는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에는 그의 성질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을 위하여 일이 주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행동을, 즉 각적인 행동을 취할 겁니다. 나무가 만약 썩었다면 잘라서 불 속에 던져넣어야 하나까요." 밤에 마지막 식사인 하이 티(빵이나 케이크 아닌 고기 요리를 곁들인 차: 역 주)가 끝나자 그들은 어색한 객실에 모여서, 여자들은 뜨개질을 시작하고 의사 맥페일은 파이프 담배를 피웠으며, 선교사는 그 섬에서의 일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무렵은 그들에게는 죄의식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하 고 그는 말했다. "십계명을 이것저것 어기면서도 그들은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 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내 사업의 가장 어려운 일이 바로 주 민들에게 죄의식이라는 것을 불어넣어 주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데이빗슨이 그의 아내를 만나기 전에 이미 5년 동안이나 소로몬 제도에서 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맥페일 내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부인은 중국에서 전도사 업을 하고 있었는데, 전도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휴가의 일부를 보내려고 와 있 었던 보스턴에서 두 사람이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 을 함과 동시에 이 제도에 책임을 맡아서 이후 줄돋 전도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 다. 그들이 데이빗슨과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의 하나는 이 사나이의 굉장히 끈질긴 용기였다. 그는 선교사 겸 의사로서 제도의 여러섬을 여기저기로 언제든지 불려 다니는 일이 많았다. 장마철의 거친 태평양은 포경선 으로도 결코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그는 흔히 카누로 초청을 받았는데 그런 경우에는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도 질병이나 사건이 일아났을 때면 절대로 주저하지 않았다. 밤새도록 필사적으로 배 밑바닥의 물을 퍼내면서 지새 운 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데이빗슨 부인도 이제 그가 행방불명이 된 것으러 단념했던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야 저로서도 가지 말아 달라고 애걸을 했을 때도 있었죠." 그녀는 말했다. "아니면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 주었으면 했지만, 그는 절대로 들 어주지 않았어요. 주인은 그야말로 옹고집이어서 한 번 마음을 결정하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아요." "내 스스로가 그런 일에 두려움을 갖고서야 어떻게 주민들에게 하나님을 신뢰 하라고 할 수 있겠소?" 하고 데이빗슨 은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두려워 않지, 절대로 않지. 그들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우선 나를 부르러 보내고 내가 사람으 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반드시 와주리라고 원주민들은 잘 알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명령이며 바다가 거칠 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지요." 의사 맥페일은 소심한 남자였다. 전선에서도 참호 위를 날아가는 포탄소리에 익숙해지지 않았으며, 전방처치소에서 수술을 하고 있는 때에는 떨리는 손을 진 정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앞이마에서 비지땀이 흘러 안경을 흐르게 하는 것이었 다. 선교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는 가겹게 치를 떠는 자신을 느꼈다. "나도 두려워해본 적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하고 그는 말했 다. 그러자 상대방이, "아니, 그것보다 나는 당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싶군 요."하고 응답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날 밤에 선교사의 생각은 그들 부부가 처음으로 섬에 왔을 때의 회상으로 되돌아갔다. "아내와 나는 얼굴을 마주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었습니다. 밤낮 쉬지 않고 애썼지만 조금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그때 만일 아내가 없었더라 면 도데체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요. 제가 힘을 잃고 절망할 때면 언제나 아내가 용기와 희망을 불어 넣어주었던 것입니다." 데이빗슨 부인은 눈을 내리깔고 손에 쥔 뜨개질감을 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야윈 볼에 붉은 빛이 약간 도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손끝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모르는 듯이 보였다. "도와주는 사람이라곤 누구 하나 없었어요. 오직 두 사람만이 우리이 동족들로 부터 몇 천 마일이나 멀리 떨어져서 암흑에 싸여 있었던 셈이지여. 제가 피로한 끝에 이젠 기력도 무엇도 다 잃어버렷을 때에는, 반드시 아내가 뜨개질하는 손 을 쉬고 성서를 가지고 와서 읽어주엇습니다. 마치 어린이의 눈꺼풀에 잠시 떨 어져 내리듯이 그것으로 하여 가까스로 제 마음에도 평화가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는 조용히 성서를 덮고 이렇게 말합니다.'그들 자신들이야 어떻든지 간에 우리는 그들을 반드시 구원해야지요' 그래서 저는 다시 주님을 믿는 굳은 마음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렇소, 하나님의 힘으로 그들을 구원하는 거요. 구원해 주지 않으면 안되는 거요.'하고 말입니다." 그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와서, 마치 그것이 설교대이기라도 한 듯이 앞에 우 뚝 섰다. "사실 그들은 천성적으로 타락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일러주어도 자 신들의 죄악을 모릅니다. 그들로서는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여기고 있는 것ㅇㄹ 죄악이라고 의식시켜 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간음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고 도둑질을 하는 것만이 아니고, 그들의 육체를 노출시키는 것과, 댄스를 하는 것 도,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도 모두 좌악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안 되었 습니다. 아가씨가 젓가슴을 드러낸다든지 사내가 바지를 입지 않는 것도 모두 죄라고 저는 가르쳤습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의사 맥페일은 놀라서 물었다. "벌금을 물게 했지요. 상식적인 일이지만, 자기의 해위가 죄악이라는 것을 깨 닫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범한 경우에 즉각 벌을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벌금, 댄스를 해도 벌금, 올바른 옷차림을 하지 않아 도 벌금, 이런 식으로 했습니다. 벌금액을 정한 표를 만들어 놓고 죄값을 일일이 돈이나 노동으로 지불하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가까스로 그들에게 죄을 알게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 "그런데 그들이 지불하지 않으려 하진 않았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선교사가 되물었다. "그이한테서 반항하다니, 그런 용기가 있는 자는 없어요." 하고 데이비슨 부인 은 말하고 나서 입술을 꼭 다물었다. 의사 맥페일은 불안스러운 눈으로 데이빗슨을 바라보았다. 그의 이야기는 적 지 않이 그를 놀라게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반대의사를 표하는 것도 주저되었 다. "최후의 수단으로서는, 교회 회원에서 추방시켜 버릴 수도 있지요." "그들이 그걸 두려워했을까요?" 데이빗슨은 약간 미소를 짓고 조용히 두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그러면 코프라를 팔 수도 없고요, 고기가 잡혔을 때도 그들은 자기 몫을 차 지할 수 없지요. 거의 굶어 죽는 거나 마찬가지로 물론 큰 타격이 되지요." "프레드 올슨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지요." 데이빗슨 부인이 말했다. 선교사는 불타는 듯한 눈길로 의사 맥페일을 응시하고 있엇다. "그렇지, 프레드 올슨은 오래 전부터 섬에 와 있던 네덜란드인 상인이었지요. 상인으로서는 꽤 돈도 모은 것 같았는데, 아무튼 그는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니까요. 코프라만 하더라도 원주민으로부터 마음내키는 대 로의 값을 치르고, 그것도 물품이나 위스키 따위로 치렀지요. 원주민 여자를 아 내로 삼고 있었는데 그녀에게 대하는 태도는 정말 한심했어요. 게다가 술고래였 지요. 나는 그에게 뉘우칠 기회를 한 번 주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는 나 를 비웃기까지 했습니다." 이 마지막 말을 할 때에 데이빗슨의 목소리는 나직하게 울려나왔다. 짓누르는 듯한 무거운 침욱이었다. "한 2년 지나서 그는 파산하고 말았어요. 25년이나 걸려서 모은 것이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그를 이긴 거지요. 마침내 그는 거지꼴을 하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시드니까지 돌아갈 뱃삯을 구걸하지 않을 수 없었 지요." "정말, 그 남자가 찾아왔을 때의 몰골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선교사의 아내가 말했다. "그는 살이 찌고 굵은 목소리를 가진 풍채 좋고 튼튼한 남자였는데 말예 요. 그땐 절반 정도로 오그라들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엇어요. 그는 마치 갑작스 레 늙은이가 된 것 같았어요." 데이빗슨은 바깥의 어둠에 마음을 빼앗긴 듯 그곳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비는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아래층에서 소리가 들려왓기 때문에 데이빗슨은 돌아서서 이상하다는 듯이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축음기 소리였는데, 크고 소란스러우며 목이라 도 죄는 것 같은, 싱코페이션이 많은 곡을 틀고 있었다. "저게 뭐요?" 그는 물었다. 데이빗슨 부인은 코안경을 단단히 고쳐 썼다. "이등객실 손님 하나가 방을 얻어 들었대요. 거기서 들려오는 것일 거예요." 그들이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까 이윽고 춤을 추고 잇는 소리가 들려왓 다. 음악이 그치니까 술병마개 따는 소리가 들려오고 활발한 아야기 소리가 들 려왔다. "저 여자가 배에서의 친구들과 송별회라도 시작하는 모양이군." 의사 맥페일이 말했다. "배가 열두 시에 떠난다고 했지요?" 데이빗슨은 아무 말고 하지 않고 자기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이제 일어나보려우?"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네, 좋아요." 그녀는 대답했다. "주무시기에는 아지기 이르지 않아요?" 의사가 말했다. "우리는 읽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어요." 하고 데이빗슨 부인이 설명햇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서를 한 장쌕 읽도록 작 정하고 있거든요. 그리고는 주석에 대하여 충분히 연구를 한 다음 둘이서 철저 하게 토론을 한답니다. 훌륭한 정신수양이 되지요." 두 쌍의 부부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남은 것은 맥페일 내외였는데, 두사 람은 2, 3분 동안 어느 쪽도 말을 하지 않았다. "트럼프나 가져올까?" 이내 의사가 입을 열었다. 맥페일 부인은 의아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데이빗슨 내외와의 이야기 가 무언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따위는 그만두는게 낫지 않겠어요. 언제 저 사람들이 들어올는지 모르잖아요'하고 말하고 싶지는 않 았다. 의사 맥페일은 트럼프를 가져왔다. 그가 혼자서 카드 점을 치고 있는 것을 그녀는 막연하게 죄악감 같은 걸 느끼면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는 여전히 소음이 계속되고 있었다. 다음 날은 날씨가 좋아졌다. 그래서 파고파고에서 이렇게 할 일 없는 나날을 두 주일이나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나까, 맥페일 내외는 되로록 조금이라도 시간 을 유효하게 보내려고 마음먹었다. 그들은 부두에 내려가서 짐 속에서 책을 몇 권 꺼내왔다. 의사는 해군병윈의 주임 군의관을 찾아가서 같이 병상을 돌아보았 다. 그들은 총독 관사에다 명함을 놓고 왔다. 도중에서 미스 톰슨을 만났다. 의 사가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니까 여자도 크고 힘찬 목소리로 "안녕하셨어요, 선 생님."하고 인사를 받았다. 그녀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굽이 높고 반짝반짝 빛나는 흰 장화, 그 위에서 비어져나와 있는 굵직한 다리, 그러한 것들이 이런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매우 색다르게 보였다. "별로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군요, 정말." 맥페일 부인이 말했다. "너무 친해 서 보기 싫군요." 그들이 돌아와 보니까 그녀는 베란다에서 상인의 검은 피부의 아이와 놀고 있 었다. "말이라도 좀 걸어주지." 의사 맥페일이 아내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녀는 여기서 혼자뿐인데, 상대를 안해 준다면 가엾지 않아." 맥페일 부인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그녀는 언제나 남편이 말하는 것은 무 엇이든지 하는 여자였다. "우리들은 한 집에 묵고 있군요." 하고 약간 쑥스럽게 말했다. "정말 따분하군요. 이런 손바닥만한 거리에 갇혀 있다니." 미스 톰슨이 대답했 다. "그렇지만 전 방을 얻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인 셈이죠. 토인집에 묵어야 했 다면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사람도 있긴 있대요. 왜 호텔도 하나쯤 없는지 모르겠어요." 그들은 두서너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미스 톰슨은 큰 목소리로 소다스럽게 이야기거리라면 얼마든지 있다는 식으로 나왔으나, 맥페일 부인은 이야기거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조금 있다가 할 수 없이 말했다. "그럼, 전 이층에 할 일이 좀 있어서." 밤에 그들이 하이 티를 마시고 있으니까 데이빗슨씨가 불쑥 나타나서 말했다. "저 아래층 여자가 선원을 둘씩이나 끌어들여서 같이 있군요. 그녀가 어떻게 하여 그들을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그런 것쯤 저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을 거예요." 데이빗슨 부인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하루를 넘긴 다음이라 모두 지쳐 있었다. "이 모양으로 두 주일이나 지나면 우리는 종래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어." 의사 맥페일이 말했다. "유일한 방법은 하루의 시작을 여러 가지 활동에 할당하는 것일텐데."하고 데 이빗슨 선교사가 대답했다. "우선 나 같으면 비가 내리건 개건간에, 이러이러한 시간은 공부, 이러이러한 시간은 운동 -장마철에 있어서는 비 같은 것에 구애를 받아서는 안 되니까요- 또 이러이러한 시간은 오락이라는 식으로 할당하겠어 요." 의사 맥페일은 의아스럽데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앗다. 데이빗슨의 일과 계 획은 그를 압박하는 무엇이 있었다. 그들은 또 햄버거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다. 요리사는 아마 이 요리 하나밖에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래층에서는 또 축음기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데이빗슨은 그것을 들었을 때 신경질적이 되었 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왓다. 톰슨의 손님들이 합 창하고 있는 것은 누구든지 잘 알고 있는 노래였는데, 이윽고 쉰 듯한 그녀의 큰 목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그들은 소리지르고 웃고 야단법석이었다. 이층의 네 사람은 이야기를 계속하려고 하면서도 자기들도 모르게 술잔 부딪치는 소리며 의자 삐걱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사람들이 더 불어난 것이 틀림 없었다. 미스 툼슨이 파티를 열고 있는 것이다. "정말 무엇 때문에 저런 사람들을 끌어들일까요?" 선교사와 남편 맥페일이 무 엇인가 의학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맥페일 부인이 불쑥 이런 말을 했다.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이것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때때로 데이빗슨의 얼굴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도, 그들이 과학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 도 마음은 계속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하 여 의사가 플랜더즈 전선에서의 체험을 약간 싱겁게 이야기하고 있을때에, 데이 빗슨은 갑자기 일어서서 무언가 큰소리로 외쳤다. "아니 웬일이세요. 알프레드?" 데이빗슨 부인이 불렀다. "틀림없다. 전혀 생각이 안 났었어. 그녀는 율레이에서 온 여자야." "설마." "저 여자는 호놀룰루에서 타고 온 거야. 절대로 틀림없어. 그리고 그녀는 이런 곳까지 와서 장사를 하려는 거야. 바로 여기서." 마지막 말은 화가 나서 내뱉었다. "율레이가 무엇이에요?" 맥페일 부인이 물었다. 그는 험악한 눈길을 그녀에게 돌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호놀룰루의 암입니다. 홍등가말입니다. 우리들 문명의 오점이었습니다." 율레이는 호놀룰루의 교외에 있었다. 항구 옆의 캄캄한 골목을 몇 군데 지나 서 아슬아슬한 다리를 건너면 바퀴자국이며 구멍투성이인 쓸쓸한 큰길로 빠지는 데 조금 가면 갑자기 환한 곳에 이르게 된다. 길 양쪽에 자동창 주차장이 있고, 밝고 저속하게 꾸며진 술집들이 늘어서 있다. 집집마다 일제히 자동 피아노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고 이발소도 담뱃집도 있다. 큰길에서 좌우로 좁은 골목을 들어가면 큰길이 율레이를 두 지역으로 나누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한복판이다. 조촐하게 녹색으로 깨끗이 칠한 방갈로가 몇 줄씩이나 이어져 있고, 그 사이를 넓고 곧은 골목이 뻗어 있다 .마치 전원도시와 같이 펼쳐 있다. 가지런히 늘어서 서 특별히 깨끗하게 정돈된 것이 오히려 일종의 냉소적인 공포감을 주었다. 엽 색행각이란 게 그렇게 질서있고 조직화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골목 에는 군데군데에 가로등도 서 있었으나 방갈로의 열려진 창문으로 흘러나오는 불빛이 없다면 오히려 어두운 거리였을 것이다. 남자들은 창가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하면서 지나가는 사내들을 별로 거들떠보지도 않는 여자들을 바라보면서 지나다녔다.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숱한 국적의 남자들이 있었다. 정 박중인 배의 선원, 포함에서 내린 술취한 사병, 섬에 주둔하는 연대에서 나온 백 인병사와 흑인병사 등 미군인도 있고 두서너 명씩 몰려 다니는 일본인도 있고 하와이인, 긴 옷을 입은 중국인, 우스운 모자를 쓴 필리핀 사람도 있엇다. 그들 은 모두 묵묵히 마치 무엇인가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욕정도 서글픈 것 이다. "그것은 태평양의 가장 소문난 치욕적인 망신거리였습니다. "데이빗슨은 격양 된 어조로 크게 말했다. "선교사들이 몇 해 전부터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 였는데도 이제야 가까스로 지방신문이 취급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경 찰은 손을 안댑니다.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악습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일정한 장소에 모아서 단속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시은 녀석들이 뒷구멍으로 돈을 얻어먹고 있는 겁니 다. 뇌물을 말입니다. 술집 주인들로부터, 깡패들로부터, 또한 그 여자들로부터도 돈을 얻어먹는 거지요. 그러나 끝내는 녀석들도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게 되 었답니다." "나도 호놀룰루에서 산 신문에서 그것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의사 맥페 일이 말햇다. "율레이는 우리들이 도착한 그날, 그 죄악과 치욕과 함께 없어지게 되었습니 다. 주민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저 여자가 누군지 왜 당장에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아무래도 알 수 없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기억이 나요."하고 맥페일 부인이 말했다. "저 여자는 배가 떠나기 겨우 조금 전에 올라탔어요. 그때도 퍽 아슬아슬한 짓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일이 기억나요." "그녀가 어떻게 여기 올 생각을 했을까!" 데이빗슨은 분개하면서 소리질렀다. "나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그는 문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떻게 하실려고요?" 맥페일이 물었다.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나는 단연코 그 짓을 못하게 하겠소. 나는 이 집이 그런... 그런...." 부인들의 귀를 거슬리지 않을 만한 말을 찾는 듯했다. 그의 눈은 빛을 내고 핏기없는 얼굴은 흥분 때문에 창백해져 있었다. "아래층에는 사내들이 서너 명이 나 있는 모양인데요." 의사가 말했다. "지금 당장 간다는 것은 좀 무모하지 않을 까요?" 선교사는 경멸하듯 그의 얼굴을 한 번 훑어보고 말없이 방을 나가버렸다. "당신은 그분을 잘 모르실 거예요. 일단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하면 일신상의 위험 따위로 그만둘 사람은 아니라는 걸 말예요." 하고 그의 아내가 말했다. 그래도 그녀는 걱정이 되는지, 두 주먹을 꽉 쥐고 불거진 광대뼈 언저리가 약 간 상기되면서 아래층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귀를 기울 였다. 그가 쿵쿵거리면서 나무 층계를 뛰어내려가서 문을 거칠게 여는 소리가 들렸다. 데이빗슨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무언가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 가 들렷다. 음악이 그쳤다. 축음기를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친 것 같았다. 그러자 다시 데이빗슨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며 이어서 미스 톰슨의 크고 날카로운 목소리와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크게 소리지 르고 있는 듯한 어수선한 소란이 있었다. 데이빗슨 부인은 약간 숨을 몰아쉬면 서 한층 더 단단히 두 주먹을 쥐었다. 의사 맥페일은 불안한 듯이 그녀와 그의 아내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내려가고 싶지 않았으나 그들은 자기가 내려가 보 기를 바라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다시 갑자기 싸움이라도 시작 된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왓다. 소리는 아까보다 더 뚜렷하게 들렸다. 데이빗슨이 방 밖으로 내 쫓겼는지도 모르겠다. 문이 닫혔다. 한순간 조용해 졌다고 생각되 자 이윽고 다시 층계를 올라오는 데이빗슨의 발소리가들려왔다. 그는 자기 방으 로 가버렸다. "잠깐 가보고 오겠어요." 데이빗슨 부인은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서 나갔다. "필요하시다면 절 불러주세요." 맥페일 부인은 말했다. 그러고 그녀가 나가버 리자, "다치지 않았다면 좋겠는데요."하고 중얼거렸다. "남의 일 따위야 어떻게 되건 내버려두면 될 텐데." 의사 맥페일이 말했다. 두 사람은 잠깐 묵묵히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보란 듯이 축음기 소리가 다시 울려퍼지는 것에 놀랐으며 목쉰 소리가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추잡한 가사를 큰 소리로 외쳐대고 있었다. 다음 날 데이빗슨 부인은 매우 피곤한 듯 창백해져 있었다. 머리가 아프다고 말했으나 마치 갑자기 나이를 먹고 말라비틀어진 것처럼 보였다. 남편은 밤새 한잠도 자지 못했다고 맥페일 부인에게 말했다. 그는 밤새도록 매우 흥분되어 있었으며 다섯 시가 되자 일어나서 어디론가 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맥주잔이 그에게 날라와서 옷이 더럽혀지고 냄새도 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스 톰슨 이 야기를 할 때면 그녀의 눈은 차갑고 음산한 불꽃이 일었다. "그 여자는 데이빗슨을 모욕한 날을 뼈아프게 후회하게 될 거예요."하고 말했 다."데이빗슨은 놀랄 만큼 친절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고민을 가진 사람이면 누 구나 그를 찾아와서 위안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죄악에 대 해선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며 정의의 분노가 폭발했을 때는 정말 무서울 정도예 요." "그렇지만 어떻게 하시겠다고 해요?" 맥페일 부인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러나 저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저 여자를 위하여 두 둔해 주지는 않을 거예요." 맥페일 부인은 등골이 오싹했다. 이 자그마한 여자의 마치 승리에 도취한 듯 한 자신에 찬 태도에는 확실히 무언가 무서운 것이 있었다. 그날 아침, 그들은 외출을 하려고 나란히 계단을 내려왓다. 미스 톰슨의 방문이 열려 있고, 때묻은 실내의를 입고 식탁용 남비에서 무엇인가 요리를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 다. "안녕하셨어요?" 하고 그녀가 말을 붙였다."데이빗슨씨는 오늘 아침 좀 어떠세 요?" 그들은 멸시하듯, 마치 그런 여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가 갑자기 비웃기라도 하듯이 커다란 소리로 웃 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피가 얼굴로 확 몰리는 것을 느꼈다. 데이빗슨 부인은 홱 돌아섰다. "나한테 감히 말을 걸지 말아요." 그녀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욕할 테면 해보아요. 내가 당장 여기서 내쫓아버릴 테니까." "어머나, 제가 뭐 데이빗슨씨와 교제라도 하자고 그러던가요?" "모르는 척 하세요." 맥페일 부인이 서둘러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엿다. 그들은 그 여자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데까지 걸어갔다. "정말 뻔뻔스럽군.""데이빗슨 부인은 내뱉듯이 말했다. 화가 나서 가슴이 무너 져버리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부두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그녀를 또 다시 만났다. 한 껏 치장을 하고 있었다. 천하고 요란스러운 꽃을 단 크고 흰 모자부터가 사람을 놀리는 것 같았다. 옆을 지나갈 때에 그녀는 즐거운 듯 말을 건냈으나 그들의 얼굴이 갑자기 차가운 얼음 같은 표정이 되자 가까이 서 있던 두 사람의 미국인 선원이 씽긋 웃었다. 그들이 집에 들어서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몸치장이 엉망이 되겠군." 데이빗슨 부인이 심한 냉소를 띠면서 말했다. 점심을 반쯤 먹었을 무렵에 데이빗슨이 돌아왔다. 그는 비에 흠뻑 젖어 있었 으나 갈아입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우울한 듯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식사도 겨우 하는 시늉만 내고는 비스듬히 쏟아지는 빗발을 응시하고 있었다. 데이빗슨 부인 이 두 번이나 그녀와 마주쳤다는 이야기를 해도 그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 다. 다만, 점점 더 험악해진 표정만이 그가 듣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호온씨에게 말해서 이 집에서 내쫓아버리게 하면 어떨까요?" 데이빗슨 부인 이 말했다. "저런 여자한테 모욕을 받다니, 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달리 갈 테도 없지 않습니까?" 맥페일이 말했다. "그녀는 토인 집에 가 있으면 되지 않아요?" "그렇지만 이런 날씨라서 토인 집도 좀 견디기 힘들 거요." "나는 몇 년 동안이나 토인들의 오두막에서 살아본 일이 있어요."하고 데이빗 슨이 말했다. 원주민 소텨가 그들이 매일 과자 대신으로 먹는 바나나 튀김을 가져오자 데이 빗슨은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 "저, 미스 톰슨한테 가서 언제 만나는게 좋겠냐고 물어봐요." 소녀는 수줍은 듯이 끄덕이고는 나갔다. "그 여자를 만나서 어떻게 할 작정이예요. 알프레드?" 하고 그의 아내가 물었 다.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틀림없이 당신을 모욕 할 거예요." "모욕할 테면 해보라지. 침을 뱉는다 해도 좋아. 그 여자에게도 역시 불멸의 영혼은 있을 것이니 그것을 구원하기 위하여 나는 할 수 있는 한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돼." 데이빗슨 부인의 귀에는 아직도 그 창녀의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울리고 있었 다. "그렇지만 그 여자는 별 수 없을 거에요." "신의 은총을 받기에 그렇다는 말이오?" 그의 눈은 갑자기 빛을 내고 목소리 는 조용하고 부드러워졌다. "결코 그렇지 않아. 지옥의 밑바닥보다도 더 깊은 죄 가 있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손을 뻗치는 거라오." 소녀가 회답을 가지고 돌아왓다. "미스 톰슨이 안부를 전해 달라고 했어요. 데이빗슨씨께서 영업시간에만 오시 지 않는다면 자기는 언제든지 좋다고 했어요." 일도은 돌처럼 욱묵히 듣고 있었다. 의사 맥페일은 입가에까지 떠올라온 미소 를 황급히 지워버렸다. 그는 자기가 미스 톰슨의 두꺼운 낯짝에 오히려 재미있 어 하는 것을 알면 아내가 틀림없이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묵묵히 식사를 마쳤다. 그러자 여자들은 일어서서 각각 뜨개질을 시작 했으며, 맥페일 부인은 그 싸움이 시작돤 이래 몇 장인지도 모를 목도리를 또 한 장 짜고 있었고, 의사는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데이빗슨만은 의자에 기댄 채 말없이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어서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그가 문을 노크하자 "들어오세요." 하는 미스 톰슨의 도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한 시간 가량 여자 방에 있었다. 의사 맥페일은 가만히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경 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땅 위에 부슬부슬 내리는 저 영국의 비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무자비하고 무시무시했다. 거기에서 원시적인 자연력이 지니는 적의라 고 할 수 있는 것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내린다기 보다는 쏟아붓는 것이었다. 마치 하늘의 홍수처럼 미친 듯 줄기차게 양철비붕을 소란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무슨 광포한 감정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큰소리로 외치기라도 하지 않 으면 못견딜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그런가 하면 이번에는 뼈마디가 모두 녹아버 린 것처럼 갑자기 축 늘어져 맥이 풀린다. 그러곤 비참하고 우울해진다. 선교사가 돌아오자 맥페일은 고개를 돌렸다. 두 여자들도 얼굴을 들었다. "나는 모든 기회를 주었습니다. 회개하라고 타일럿지요. 그 여자는 정말 나쁜 여자더군." 잠깐 말을 끊었는데, 의사 맥페일은 선교사의 눈이 어두워지고 핏기없는 얼굴 이 딱딱하고 험악한 표정을 띠고 있음을 보았다. "이제 나는 주 예수께서 성전으로부터 고리대금 업자며 환금업자를 내ㅉ던 그 회초리를 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소." 그는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입을 꽉 다물고 검은 눈썹을 험악하게 찌푸리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이 세상의 끝까지 달아나더라도 나는 그녀를 붙들고 말겠어." 그러자 갑자기 그는 획 돌아서서 방에서 뛰어나갔다. 다시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죠?" 맥페일 부인이 물었다. "글세, 알수 없군요." 데이빗슨 부인은 코안경을 벗어서 닦았다. "그분이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고 계실 때 저는 질문을 하지 않기로 하고 있어 요."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그분이 정신적인 피로 때문에 스러지지 않을 까 걱정돼요. 그는 자기 몸을 아 낄 줄 모르는 이예요." 선교사의 최초의 활동의 결과를 의사 맥페일은 이 집의 트기 상인한테 듣고 알앗다. 의사가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안에서 부르더니 출입구 계단에 서서 이 야기 해주었다. 살이 찐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데이빗슨 목사님은 미스 톰슨에게 이곳의 방을 빌려주었다고 야단을 치시지 만, 저는 그 당시는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전혀 몰랐지요. 누가 방을 빌려 달라 고 말하면 나야 그저 방세 치를 돈이 있느냐는 거나 알려고 할 뿐이지요. 그런 데 저 여자는 일주일치를 선금으로 척 내놓았어요." 맥페일로서는 무언가 언질이라도 잡힐 만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뭐하고 하든 집은 당신의 것이야. 우리로서는 이렇게 숙박을 시켜중어서 정말로 고맙다고 생각할 뿐이지." 호온은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맥페일이 어느 정도까지 선교사 편인지 알 수 없었다. "선교사들은 모두 다 한패지요." 그는 주저하면서 말했다. "만을 그들 눈에 거 슬렸다가는 어떤 상인도 장사 걷어치우고 떠나는 게 차라리 낫지요." "그녀를 내쫓아버리라고 하던가요?" "아닙니다. 얌전하게만 있다면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저한 테는 부당하지 않게 하겠다고 했어요. 저는 그녀가 두 번 다시 손님을 끌어들이 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약속했습니다. 지금도 그녀에게 말해주고 오는 길입니다." "그녀가 뭐라고 해요?" "혼이 났습니다." 상인은 낡은 듀크바지를 입은 몸을 어색하게 움죽거렸다. 그도 미스 톰슨이 거센 손님인 것을 안 것이다. "아무레도 곧 나갈 겁니다. 손님을 받을 수 없게 되면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 지 않아요?" "그렇지만 토인들의 집이 아니곤 갈 데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그 여자가 선교사의 미음을 사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아무도 받아주지 않을 것입니 다." "아아,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봐야 소용이 없겠군." 그날 밤 모두가 객실에 앉아 있는데 데이빗슨이 그의 젊었던 학생시절의 이야 기를 꺼냈다. 학자금이 없어서 방학중에는 온갖 일을 하면서 학교를 마쳤다고 했다. 아래층은 조용했다. 미스 톰슨은 쓸쓸하게 작은 방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축음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외로움을 덜기 위하여 될 대로 되라는 식으 로 틀어본 것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노래하는 사람이 없어서 우울한 음조를 띠 고 있었다. 무언가 도움을 청하는 비명 같은 소리였다. 데이빗슨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마침 긴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므로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고 이야 기를 계속했다. 축음기는 계속 울리고 있엇다. 미스 톰슨은 계속해서 판을 갈았 다. 밤의 고요함이 그녀를 못견디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람 한점 없는 무더 운 밤이었다. 맥페일 내외는 자리에 들어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크게 뜨고 나란히 누워서 모기장 밖의 극성스러운 모기소리를 듣고 잇었다. "저게 뭘까요?" 드디어 맥페일 부인이 속삭였다. 그들은 널빤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 데이빗슨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 은 단조롭지만 진실하고 박력있게 계속되고 있었다. 소리를 내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미스 톰슨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2, 3일이 지났다. 이제는 길에서 마주치더라도 그녀는 그 조롱하는 듯한 정중 함이나 미소로 수작을 걸어오기를 그만두고, 짙은 화장을 한 얼굴에 노기를 띠 고 모른 척하면서, 험악한 얼굴을 하고 마치 그들을 보지 않는 것처럼 지나갔다. 집주인이 맥페일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어딘가 딴곳에 묵을 곳을 구해봤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밤이 되면 여러 가지의 곡들을 틀고 있었으나 이 젠 억지로 즐거운 듯이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 명백했다. '랙타임(흑인 음악처럼 싱코페이션이 많은 음악으로 재즈의 원형이라 할 수 있 음: 역주)'이 마치 절망의 '원스텝'이기라도 한 양, 목쉰 구슬픈 리듬을 울리고 있 었다. 일요일에도 그것을 시작하자 데이빗슨은 호온을 시켜서 오늘은 주님의 날 이니까 당장 그만두게 하라고 했다. 곡이 뚝 그치자 갑자기 온 집안이 잠잠해져 서 양철지붕을 때리는 쉴사이 없는 빗소리만이 귀에 들려왔다. "꽤 초조해진 것 같더군요." 이튿날 아침 상인이 맥페일에게 말했다. "결국 저 여자로서는 데이빗슨씨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통 모르기 때문에 아마 겁을 먹 고 있는 셈입니다요." 맥페일은 그날 아침 그녀의 모습을 슬쩍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녀의 오만한 표 정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 얼굴에는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한 표정이 있었 다. 트기인 주인은 그의 얼굴을 곁눈질해 보며 말했다. "데이빗슨씨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모르시겠지요?" "그래, 모르오." 호온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이상스러웠으나 그도 역시 이 선교사가 남모르는 무엇인가를 하고 잇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는 했다. 그것은 무언가 여 자 주위에 조심성 있게 계획적으로 그물을 쳐 놓고 모든 준비가 다 되고 나면 단번에 끈을 꽉 죄어버릴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가 날보고 그녀한테 가서 전하라고 했지요." 상인은 말했다. "그녀가 만을 그를 만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그렇다고 말만 해주면 곧 가겠노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뭐라고 합니까?" "아무 말고 안했습니다. 저는 그저 그가 전하라는 말만을 전하고 곧 나와버렸 지요. 저는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혼자 외톨이가 되어 그녀의 신경이 이상해진 걸거야." 의사는 말했다. "게다가 비가 이 모양이니... 이 비에는 누구라도 정신이 이상해지고 말거야." 그는 짜증을 내면서 말을 이었다. "도데체 이 지겨운 곳에선 비가 그치는 법이 없소?" "장마철이라서 계속될 겁니다. 아무튼 1년에 3백인치나 내리니까요. 아시겠지 만 이 만의 지형 때문이지요. 온 태평양의 비를 몰아오는 것 같지요." "망할 놈의 지형이로군." 의사는 말했다. 그는 모기한테 물린 자리를 긁었다. 그는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비가 그 치고 햇볕이 나면 마치 온실 속 같았다. 습하고 찌는 듯 무덥고 답답했다. 그래 서 모든 것들이 극렬한 고열 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럴 때면 쾌활하고 순진하다고 알려져 있는 원주민들도 문신을 하고 머리를 물들인 모습이 어딘지 흉악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맨발로 투덕투덕 뒤를 따라올 때면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게 된다. 당장에라도 왈칵 등 뒤로 달 려와서 어깻죽지에 긴 칼날이라도 내려ㄲ지 않을까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 들이 미간이 넓은 두 눈 배후에 어떤 무시무시한 생각을 숨겨 놓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흔히 신전의 벽화 따위에 남아있는 고대 이집트인의 얼굴과 어 딘지 모르게 닮은 데가 있었다. 그것은 무언가 헤아릴 수 없이 오래된 것이 주 는 공포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선교사는 집을 들락거리고 있엇다. 매우 바쁜 것 같았으나 맥페일내외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호온이 의사에게 말한 방에 의하면 매일처 럼 총독을 만난다는 것이며 한 번은 데이빗슨 자신도 총독에 관한 이야기를 한 일도 있다. "보기에는 결단력이 있을 것 같은ㄷ."하고 그는 말했다."역시 중요한 문제에 부딪치면 줏대가 없어요." "결국 당신이 바라는 대로 철저하게 안한단는 거겠지요" 의사는 슬쩍 농담을 걸어봤다. "저는 그가 정당하게 해주기를 바라는 거죠. 그것은 남의 설득을 받고서 비로 소 움직일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에 관해선 역시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이겠 지요." "그렇다면 가령 발에 회저가 생긴 사람이 있다고 할 때에 다리를 절단하자는 데 주저하는 사람을 보고 당신은 참을 수 있습니까?" "회저라고 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요." "그럼 죄악은?" 데이빗슨이 바삐 돌아다닌 효과는 이윽고 나타났다. 네 사람은 점심 식사를 막 끝내고 아직 여자들도 의사도 낮잠을 자러 가지 않았었다. 그것은 더위 때문 에 그들이 습관이 되다시피한 나태함이었는데. 데이빗슨만은 이 게으른 습관이 아무래도 못마땅했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미스 톰슨이 들어왔다. 그녀는 한순가 방안을 두리번거리고 있다가 곧 데이빗슨 에게로 다가갔다. "이 비열한 작자, 총독한테 가서 내 얘기를 뭐하고 지껄였나?" 그녀는 화가 나서 침을 튀기며 입을 놀렷다. 한순간 이야기가 끊어졌다. 이윽 고 선교사가 의자를 내놓으며 말했다. "미스 톰슨, 우선 앉아요. 다시 한 번 당신을 만나 이야기하려고 하던 참이요." "이 너절하고 쩨쩨한 족속." 그녀는 마치 둑이라도 터진 듯이 더럽고 무례한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데이 빗슨은 가만히 엄숙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엇다. "당신은 나에게 욕을 퍼붓고 있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미스톰슨." 그는 말했다. "그러나 제발 부인들이 같이 있다는 것만은 잊지 말아주기를 바라오." 그때 이미 그녀는 노여움으로 해서 눈믈이 쏟아지고 있었다. 가슴이 꽉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듯, 그녀의 얼굴은 붉고 부어오른 것처럼 보였다. "도데체 어떻게 된 겁니까?" 의사 맥페일이 물었다. "지금 막 어떤 녀석이 와서 다음 배로 곧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에요." 그러나 선교사의 눈에는 아무런 광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그저 무표정해 있었다. "그런 사정으로 해서는 총독이 당신의 체재를 허가하리라고는 바랄 수 없겠지 요." "당신이 한 짓 아니예요?"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내가 속을 줄 알고, 당신이 한 짓이야." "나는 당신을 속일 생각은 없소. 다만 나는 총독에게 자기 의무에 맞는 유일한 조치를 하라고 요구한 것에 지나지 않은 거요." "당신은 왜 나를 가만히 놓아두지 못해요? 난 당신한데 한 번도 누를 끼친 적 이 없어요." "누를 끼쳤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나는 조금도 화를 내지는 않아요." "이런 째째한 곳에 내가 언제까지나 있을 거 같아? 나는 그런 촌뜨기가 아니 야. 적어도 나는..." "그렇다면 불평할 것은 없을 텐데." 그는 대답했다. 그녀는 홧김에 무언가 뜻도 모를 말로 소리를 지른 다음 방을 뛰어나갔다. 잠 깐 동안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제 마음이 놓이는군. 총독도 결단을 내린 모양이야." 드디어 데이빗슨이 입 을 열었다. "그는 마음이 약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요. 그 여자는 기껏해야 두 주일만 여기 있을 뿐이고 아피아에만 가 버리면 영국의 관할이 되고 말며, 자기 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않느냐고 그는 말하더군요." 선교사는 위세좋게 일어서서 방안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당국자가 어떻게 하든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 한심하답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죄악은 이미 죄악이 아닌 것 같은 말을 하지요. 저런 여자는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미 치욕이며, 다른 섬으로 넘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죠. 결국 나는 따끔하게 한 마디 안할 수 없었지요." "그건 무슨 말씀이지요?" "우리들 선교활동이 워싱턴에 전연 영향력이 없는 건 아니지요. 그래서 나는 총독에게, 만일 이 섬에서의 그의 일 처리에 조금이라도 불평이나 비난이 있게 된다면, 결국 그에게 이로울 게 없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 "그녀는 언제 떠나야 하는 겁니까?" 조금 있다가 의사가 물엇다. "다음 화요일에 시드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가 닿을 겁니다. 그녀는 그 배에 태워지게 되겠지요." 그때까지는 닷새 남았다. 이튿날 의사가 병원에서 돌아와서 -맥페일은 별로 할 만한 일도 없고 하여 대개 오전중은 병원에서 보내고 있었는데, 위층으로 올 라가려 할 때 그 트기 주인이 그를 불러세웠다. "맥페일 선생님, 미안하지만, 미스 톰슨이 앓고 있습니다. 좀 보아주지 않겠습 니까?" "그렇게 하지요." 호온이 그녀의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여자는 힘없이 의장에 앉아서 책을 읽 는 것도 아니고 바느질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멍하니 앞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흰 드레스와 꽃을 단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분을 발랐는데도 누렇고 더러 운 피부가 보였고 눈은 흐리고 무거운 듯했다. "어디가 편찮으니 안됐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아녜요,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다만 당신을 조금 뵙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에요. 저는 프리ㅅ코행의 배로 떠나지 않으면 안돼요."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갑자기 그녀의 눈이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이 빛났다. 그리고 발작이라도 하듯이 두 손을 폈다가는 꽉 쥐었다. 상인은 문 앞에 서서 엿듣고 있었다. "그렇다더군요." 의사는 말햇다. 여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당장 프리스코에 간다면 저는 곤란해요. 어제는 총독을 만나러 갔었지만 만나 주지 않았어요. 비서라는 작자를 만났는데. 이 배를 타야지 달리 도리가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래도 저는 어떻게 하든지 총독을 만나려고, 오늘 아침도 그 사람 을 기다리고 있다가 외출하는 것을 붙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 사람은 사실은, 저하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그렇지만 나도 물러설 수는 없었어 요, 결국 그사람은 데이빗슨 목사가 승낙만 하면 자기로서는 시드니행의 다른 선편을 기다린다고 해서 별로 반대할 것은 없다고 했어요." 그녀는 말을 끊고 걱정스러운 듯이 의사 맥페일을 쳐다 보았다. "글세, 나로서는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잘 모르겠는데." 그는 말했다. "선생님, 제발 저를 위해서 그분에게 부탁을 해주시겠어요? 전 신에게 맹세하 겠어요. 다만 여기에 있는 것만 허락해주신다면 이제 절대로 아무런 짓도 안할 테니까요. 나기지 말라고 하시면 외출도 하지 않겠어요. 겨우 두 주일에 불과한 걸요." "아무튼 부탁은 해보지." "그 사람은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호온이 말했다. "화요일에는 당신 을 내쫓아버린다고하니까, 차라리 결심을 하는 편이 좋을 거요." "시드니에 가면 일자리를 얻는다고 말해 주세요. 물론 건전한 일이죠. 별로 무 리한 청도 아니잖아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겠소." "바로 오셔서 회답을 들려주세요. 부탁이에요. 어떻든 필요한 소식을 얻을 때 까지는 아무것도 결정을 내릴 수 없으니까요." 의사로서는 별로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를테면 그 다음 방법이지만 우선 간접적으로 힘을 써보기로 했다. 그는 아내한테 미스 톰슨의 이야기를 하 고 그녀더러 데이빗슨 부인에게 부탁해보라고 말했다. 선교사의 태도가 너무 독단적이라고 생각되었으며, 저 여자를 앞으로 두 주일 동안 파고파고에 두어둔 다고 해서 별로 해로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엇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교섭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 선교사는 곧장 그한테로 왔다. "아내한테서 들었는데, 톰슨이 무언가 당신에게 부탁을 했다지요?" 이렇듯 맞부딪쳐 이야기를 하게 되니까 의사 맥페일로서는 수줍음 잘 타는 사 람이 억지로 남 앞에 서게 된 것 같은 노여움마저 느꼈다. 그는 화가 나서 얼굴 이 붉어졌다. "난 저 여자가 시드니에 가건 샌프란시스코에 가건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 군요. 게다가 여자가 여기에 있는 동안은 얌전하게 있겠다고 약속을 하는데도, 괴로움을 주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선교사는 엄격한 눈초리로 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왜 저 여자는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것을 그토록 못마땅하히 여기지요?" "난 물어보지 않았소." 의사는 약간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게다가 남의 일인 데 뭐 그만둡시다." 이건 아무래도 요령있는 대답은 아니었다. "총독이 저 여자에게 이 섬을 떠나는 걸 선편으로 떠나도록 명령했어요. 그는 총독을로서의 의무를 다했을 따름입니다. 나는 더 이상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 겠어요.저 여자가 있다는 것은 이 섬으로서는 위험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너무 가혹하고 폭군적인 데가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두 부인은 약간 놀라서 의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싸움으로 번질염려는 없었 다. 선교사가 상냥스럽게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로서는 참으로 유감입니다. 사실 제 마음은 저 불행한 여자 때문에 피를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이요. 그러나 저는 다만 제 의무를 다하려고 할 뿐입니다." 의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다 잠시 비가 그쳐서 만 건너편의 숲 사이로 원주민 부락의 집들이 옹기종기 바라다 보였다. "마침 비기 그쳤으니 나가봐야겠군." 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의 뜻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서 제발 어짢게는 생각지 말아주십시오." 데 입빗슨은 우울한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나는 선생을 매우 존경하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오해를 하신다면 저는 정말 섭섭합니다." "나는 당신 자신이 그야말로 훌륭한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생각 쯤이야 태연하게 무시할 만큼 훌륭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고 의사는 응답했다. "나를 비꼬는군요." 데이빗슨은 빙긋 웃었다. 의사 맥페일은 아무런 뜻도 없이 불쾌한 말을 해버린 자신에게 매우 화가 나 서 계단을 내려갔다. 미스 톰슨은 문을 반쯤 열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말해보셨어요?" "네, 그러나 안됐지만 그렇게 할 수 없대요, 저 사람은." 어색해서 그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그는 그녀를 슬쩍 훔쳐보았다. 여자가 갑자기 흐느껴 울 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에 떨며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당황했으나 그때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아직 희망을 버릴 것까지는 없어요. 당신에게 대하는 모든 사람들의 행위가 정말 심하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내가 총독을 한 번 만나보기로 하지요." "지금 바로요?" 그는 끄덕였다. 여자의 얼굴은 갑자기 밝아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말씀만 해주신다면 총독도 허락해줄 겁니다. 전 여기에 있는 동안 눈에 거슬리는 것은 절대로 안할 거니까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총독한테 부탁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 의사 맥페일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미스 톰슨의 일이야 어떻게 되건 그로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 선교사가 그의 비의에 거슬렷다. 게다가 그것은 마음 속에 억재 되어 있던 울분이었다. 총독은 집에 있었다. 그는 뭄집이 크고 잘생긴 사람인데 해군이었고 칫솔 같 은 회색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얼룩 하나 없는 제복을 입고 있었다. "실은 우리와 같이 묵고 있는 어떤 여자 때문에 찾아뵈러 왔습니다만." 그는 말했다. "톰슨이라는 여자 말입니다." "그 여자 이야기라면 이제 들을 만큼 다 들은 것 같소." 총독은 미소를 지으면 서 말했다. "여하튼 다음 화요일에는 떠나도록 명령을 해놓았는데요, 그 이상은 저로서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한 번 양보를 해주셔서 저 야가자 샌프란시스코 발 다음 편으로 시드니로 갈 수 있을 때까지 이곳에 머무를 수 있도록 조처해 주실 수 없을 까 한는 것입니다. 물론 그녀의 몸가짐에 대해서는 제가 보장을 할 테니까요." 총독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그의 눈은 가늘어지고 심각해졌다. "정말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습니다만 맥페일 선생, 이미 명령을 내리고 말았기 때문에 그대로 할 수밖에 도리가 없겠습니다." 의사는 이것저것 사정을 말해 보았지만 이제 총독에게선 미소조차 사라지고 말앗다.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리며 언짢게 들어넘기고있었다. 맥페일은 자기가 아 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어떤 여자에게나 불편을 주는 것은 안됐지만, 어쨌든 다음 화요일에는 떠나지 않으면 안돼요, 다른 도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미안하지만, 저는 상급자에게갈면 몰라도, 관리로서의 제 행동을 남에게 설명 해야만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요." 맥페일은 그의 얼굴을 민첩하게 쳐다보았다. 언젠가 데이빗슨이 일종의 위협 적인 수단을 동원했었다고 넌지시 말하던 생각이 났는데, 총독의 태도에는 무언 가 난처해 하는 기색이 있다는 것을 그도 짐작할 수 있엇다. "데이빗슨이라는 사람은 정말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친구 요." 맥페일은 노기를 띠며 말했다. "실은, 우리끼리 이야깁니다만은, 저도 저 데이빗슨이라는 인간을 벼로 탐탁하 게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른대로 말하면, 저 사내가 저런 톰슨 같은 여자 를 많은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는 이런 원주민들 속에 둔다는 게 위험하다고 지 적한 것은 자기 권한에 속하는 일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일어섰다. 의사 맥페일도 따라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례해야겠습니다. 약속이 있군요. 부인에게 안부 전해 주십시오." 의사는 풀이 죽어 총독과 작별을 하고 나왔다. 미스 톰슨이 기다리고 있을 것 이라는 생각을 하자, 아무래도 자기 입으로 일이 글렀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는 뒷문으로 들어가서 무슨 숨길 일이라도 있는 듯이 몰래 계단을 올라갔다. 저녁 식사 때도 그는 언짢아서 입을 다물고 었었으나 선교사는 유쾌하고 활기 가 있었다. 의사 맥페일은 때때로 그의 시선이 의기양양해서 즐거운 듯 자기에 게 머무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그때 갑자가, 어쩌면 자기가 총독을 방문한 것과 일에 실패한 것을 데이빗슨이 알고 있지나 않을 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 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서 들은 것일까?? 이 사나이는 아무래도 무슨 불길한 마 력을 지니고 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베란다에 호온이 나타난 걸 보고 의사는 무슨 얘기라도 있는 걱처럼 일어서서 나갔다. "선생님께서 총독을 만나고 오셨는지 미스 톰슨이 알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상인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났소.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거야. 정말 안됐지만, 이 이상 나로서는 어떻 게 해볼 도리가 없소." "그가 그럴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사한테 거역할 수는 없으니까요." "무슨 이야깁니까?" 데이빗슨이 정답게 말을 붙이면서 그들에게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저, 아직 일줄일 동안은 아피아로 떠날 수가 없겠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참입니다." 상인이 술술 주워섬겼다. 상인은 가버리고 두사람은 다시 객실로 돌아왔다. 데이빗슨은 언제나 식사가 끝나면 한 시간 동안은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있었다.조금 있으니까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와요." 데이빗슨 부인은 높은 목소리로 응답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녀가 일어나서 열어 주었다. 그들은 미스 톰슨 이 서 있는 것을 보앗다. 이젠 길거리에서 그들을 조소했던 뻔뻔스러운 망나니 게집이 아니고, 기가 죽고 겁에 질린 여자였다. 언제나 정성스럽게 닿아올리던 머리도 수수하게 목덜미께에 흩어져 있었다. 침실용 슬퍼에다가 스커트와 블라 우스를 입고 있었다. 모두 때가 묻고 구겨져 있었다. 두 볼에 눈물을 줄줄 흘리 면서 그녀는 문 앞에 선 채 들어오려고 하지도 못했다. "무슨 일이지요?" 데이빗슨 부인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데이빗슨씨에게 말씀드릴 게 있는 데요." 그녀는 목 메인 소리로 말했다. 선교사는 일어나서 다가갔다. "자, 들어오시지요, 미스 톰슨." 그는 친절하게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그녀는 방으로 들어왔다. "저어, 전번에는 그런 말을 해서, 아니 모든 것이 제 실수입니다. 술을 좀 마셨 던 터라. 용서해주세요." "아니 괜찮습니다. 제 등허리는 욕바가지 한둘쯤 ㅈ어질 수 있을 정도로 넓으 니까요." 그녀는 애처로울 정도로 몸을 움츠리며 그에게 가까이 갔다. "당신은 내게 형벌을 준 거예요. 저는 완전히 손을 들었어요. 이젠 프리스코로 돌아가라고 하시지 않겠지요?" 그의 부드러운 태도는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목소리는 갑자기 거칠고 냉엄해졌다. "왜 그곳에 돌아가려 하지 않습니까?" 그녀는 그 앞에세 꺼질 듯한 몸짓을 취했다. "가족이 그것에 살 거에요. 이렇게 된 제 꼴을 보이기 싫습니다. 저는 다른 곳 이라면 어디든지 가겠어요." "방금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얼굴을 내밀어 그녀를 가만히 쏘아보았다. 그의 커다랗게 빛나는 눈이 마치 그녀의 영혼을 파고들려는 것 같았다. 갑자기 숨찬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감화원으로 가지." 그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발밑에 내던져서 그 의 두 다리를 꽉 껴안았다. "제발 그곳엔 돌려보내지 말아주세요. 신에게 맹세하고 착한 사람이 되겠어요. 이 짓은 깨끗이 그만두겠어요." 그녀는 이것저것 정신없이 호소를 쏟아놓았고 화장한 볼에는 눈물이 계속하여 흐러내렸다. 그는 여자 위로 몸을 굽혀 그녀의 얼굴을 들어올리고 자기를 똑바 로 보게 했다. "그 때문이오? 감화원 말입니까?" "저는 붙들리기 전에 달아나겠어요." 그녀는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순경한테 붙들리면 3년은 살아야 하니까요." 그는 붙들었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여자는 마룻바닥에 무너지듯 쓰러져서 비 통하게 흐느꼈다. 의사 맥페일이 일어나서 말했다. "그러니까 이것으로 사정은 완전히 바뀐 셈이지요. 지금 한 이야기를 듣고 차 마 여자를 돌려보낼 수 없겠지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지요. 다시 새로운 사 람이 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 사람에게 최대한 기회를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회개하겠다고 한다면 형벌을 받도록 해야지요." 그녀는 이 말을 잘못 알아듣고 얼굴을 들었다. 슬픔에 잠긴 두 눈에는 가냘픈 희망의 빛이 번뜩였다. "그럼, 용서해 주시는 거예요?" "아닙니다. 당신은 화요일에 ㅅ프란시스코로 떠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녀는 신음하듯이 공포에 질린 소리를 지르더니, 이번에는 거의 사람의 소리 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낮고 목쉰 비명을 지르면서, 머리를 마룻바닥에 마구 찧 고 있었다. 의사 맥페일이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를 일으켰다. "자, 정신차려요. 그래서는 안돼요. 당신 방으로 돌아가 누워 있어야 되겠소. 뭘 좀 갖다 주겠소." 그는 여자를 일으켜 세워 반은 끌고 반은 들어서 아래층으로 옮겼다. 그리고 도와주려고도 하지 않는 데이빗슨부인과 자기 아내에 대하여 심한 노여움을 느 꼈다. 집주인이 마침 층계참에서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손을 빌어서 여자를 겨 우 침대에다 눕혔다. 그녀는 신음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했다. 거의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피하주사를 하나 놓아주었다. 다시 위층으로 올라왔을 때 는 흥분해 있었고 녹초가 되어 있었다. "우선 누워 있게 했습니다." 두 여인과 데이빗슨은 그가 나갈 때와 같은 곳에 그대로 있었다. 그들은 그가 나간 뒤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데이빗슨이 말했다. 이상하고 냉정한 목소리였 다. "저 길 잃은 잠매를 위하여 당신도 함께 기도를 올려주십시오." 그는 선반에서 성서를 꺼내 저녁 식사를 마친 식탁 앞에 앉았다. 아직 치우지 도 않았기 때문에 그는 찻주전자를 옆으로 밀어놓았다. 낭랑하게 울리는 힘차고 굵은 목소리로, 그리스도가 간음 죄를 저지른 여자와 만나는 이야기가 씌어진 장을 읽어서 들려주었다. "자, 함께 꿇어앉아 주십시오. 저 사랑하는 자매 새디 톰슨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를 올립시다." 그는 길고 열렬한 기도를 시작했으며 죄 많은 여자에게 은총을 내려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구했다. 두 부인은 손으로 눈을 가리고 꿇어 앉았다. 갑자기 일을 당한 의사는 매우 어색하고 당하ㅗ했으나 역시 무릎을 꿇었다. 선교사의 기도는 야비스러울 만큼 웅변조의 것이었다. 그는 별나게 감동해 있는 듯, 기도를 올리 면서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밖에서는 비가 잠시도 그치지 않고, 마치 너무나 인간적이고 잔혹한 악의라도 품은 것처럼 사정없이 퍼붓고 있었다. 드디어 기도가 끝났다. 잠시 후 그는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다같이 주기도문을 외웁시다." 그들은 이것이 끝나자 그를 따라서 일어났다. 데이빗슨 부인의 얼굴은 핏기가 없고 평온해 보였다. 그녀는 이미 위안을 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은 것이었다. 그 러나 맥페일 내외는 갑자기 어색해져서 눈길을 어디에 보낼지 몰랐다. "아래층에 내려가서 어떤지 좀 보고 오지요." 맥페일 의사가 말했다. 그가 노크를 하자 호온이 문을 열었다. 미스 톰슨은 흔들의자에 앉아서 조용 히 흐느껴 울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있는 거요?" 맥페일이 소리쳤다. "누워 있으라고 하지 않았소?" "누워 있을 수가 없어요. 데이빗슨 씨를 만나고 싶어요." "이봐요, 당신이 그런다고 해서 뭐가 될 것 같아요. 결코 그를 움직일 수는 없 어요." "그 사람이 말했어요. 와 달라면 언제든지 와주겠다고요." 의사는 집주인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그럼, 당신이 가서 불러오도록 해줘요." 집주인이 올라간 동안 그는 그녀와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빗슨이 들어 왔다. "일부러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우울하게 올려다보면서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 나를 부르러 보내리라고 기다리고 있었소. 하나님은 꼭 나의 기도에 답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한순간 얼굴을 마주보았으나 여자는 곧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다른 곳에 눈을 주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저는 나쁜 여자였어요.. 회개하려고 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신 겁니다." 그는 두 사나이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녀와 둘이만 있게 해주시오. 그리고 제 아내에게 우리들의 기도는 응답을 받았다고 해주십시오." 그들은 방을 나와서 문을 닫았다. "아이구 참!" 집주인이 말했다. 그날 밤, 의사 맥페일은 늦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위층으로 올라오는 데이빗 슨의 발소리가 들렸을 때 시계를 보았다. 두 시였다. 그런 뒤에도 그는 바로 잠 자리에 들지 않은 모양인지 그들의 방을 갈라놓은 널빤지 칸막이를 통해서 그가 기도를 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내 의사는 지쳐서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그를 만났을 때 의사는 그의 모습에 놀랐다. 보통 때보다 한층 더 핏기를 잃고 피로해 보였으나 그의 눈은 강렬한 불꽃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마치 온몸이 넘쳐흐르는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곧 내려가서 새디를 한 번 보고 오지 않겠습니까?" 그는 말했다. "몸은 별로 나아진 건 없겠지만 그녀의 정신은 달라졌어요." 의사는 우울하고 신경질이 났다 "어젯밤은 늦게까지 같이 있더군요." 그는 말했다. "네, 내가 그녀 곁을 떠나면 견딜 수 없다 해서 말입니다." "퍽도 즐거워 보입니다. 당신은." 의사는 약간 비위가 거슬려서 말했다. 데이빗슨의 눈은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위대한 은총이 내린 것입니다. 어젯밤 저는 하나의 길 잃은 영혼을 주님의 품 으로 인도하는 특전을 부여받은 겁니다." 미스 톰슨은 다시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침대는 아직 일어난 그대로 있었 고 방은 어수선했다. 그녀는 귀찮은 듯 옷도 갈아입지 않고 때묻은 잠옷 차림이 었고 머리도 아무렇게나 묶은 채였다. 얼굴만은 물수건으로 약간 닦은 것 같았 는데, 울었기 때문인지 부어오르고 주름이 잡혀 있엇다. 타락한 여자의 모습이었 다. 의사가 들어가자 여자는 기운없이 얼굴을 들었다. 겁에 질리고 기진해 있었다. "데이빗슨씨는 어디 있지요?" 그녀는 물었다. "당신이 바란다면 당장이라도 오겠지요." 맥페일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당신이 좀 어떤가 보러 온 거요." "아, 괜찮은 것 같아요. 이제 그런 것쯤은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무엇 좀 먹었어요?" "주인이 커피를 가져다 주었어요." 그녀는 근심스러운 듯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분 곧 내려 오실까요? 그분이 같이 있어 주면 그다지 무섭지 않은 것 같아 요." "역시 화요일에 떠나는 겁니까?" "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해요. 빨리 와 달라고 말씀해주세요. 이제 선생님은 소용이 없어졌어요. 지금 나를 도울 수 있는 건 오직 그 분 뿐입니다." "좋아, 알았어요." 의사 맥페일은 말했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 선교사는 그의 시간의 대부분을 새디 톰슨과 같이 보냈 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식사 때 뿐이었다. 의사 맥페일은 그가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음을 알앗다. "그분은 쓰러지고 말 거예요." 데이빗슨 부인이 가엾다는 듯이 말했다. "조심 하지 않으면 몸을 망치고 말텐데도 자기 몸을 아끼려 하지 않아요." 그녀 자신도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도무지 잠을 자지 못한다고 맥페일 부인에게 말했다. 데이빗슨은 미스 톰슨의 방에서 위층으로 돌아와서도 완전히 피로하여 기진할 때까지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나서도 곁코 오래 잠자 지는 않았다. 하두 시간만 되면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해안을 따라 산보를 하 러 나갔다. 그는 이상한 꿈을 꾸기도 했다. "오늘 아침에도 저한테 얘기하는데 네브래스카의 산들이 꿈에 나타나더라는군 요."하고 데이빗슨 부인이 말했다. "그것 참 기이하군요." 의사 맥페일이 말했다 그는 미국을 황단하면서 기차 차창을 통해 그 산들을 바라본 기억이 떠올랐 다. 그것은 둥글고 완만한 모양으로 마치 평원에 두더지가 쌓아놓은 커다란 언 덕처럼 불쑥 솟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여자의 젖가슴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데이빗슨의 계속된 긴장은 그 자신도 견디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 종의 놀라운 희열에 힘을 얻고 있었다. 그는 저 가엾은 여자 마음 한구석에 깃 들어 숨겨져 있는 죄의 마지막 흔적까지 뿌리뽑아 버리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녀와 같이 성경을 읽고 그녀와 같이 기도를 올렸다.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는 말했다. "정말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밤처럼 어두웠던 그녀의 영혼이 지금은 마치 갓 내 린 눈처럼 순수하고깨끗하게 되었어요. 나는 교만해 하지 않으며 두려워하고 있 습니다. 지금까지의 일체의 죄에 대한 그녀의 회개는 실로 아름답습니다. 나는 옷자락을 스치기에도 부족한 인간입니다." "이제 당신은 저 여자를 샌프란시스코에 돌려보낼 생각은 않겠지요?" 의사가 말했다. "미국에서 3년 동안 감금생활을 하게 되는데, 나는 당신이 그것으로부터 그녀를 구제해 주신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어요." "아니 모르세요? 그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당신은 내가 그녀로 해서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나는 내 자신의 아내나 자매처럼 저 여자를 사랑하 고 있습니다. 그녀가 감금당하여 있는 동안 나는 저 여자와 같은 고통을 받을 겁니다."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요." 의사는 더 참을 수가 없어서 소리쳤다. "당신은 눈이 멀어서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죄를 지었으니까 고통 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무슨 괴로움을 당할지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굶주릴 것이며 고통을 받고 모욕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저 여자가 하나님에 대 한 속지로서 인간이 주는 형벌을 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겐 별로 주어지지 못하는 기회가 그녀에게 주어진 거 지요. 하나님은 정말 관대하고 자비로운 분입니다." 데이빗슨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고 있었다. 넘치는 열정 때문에 입술에서 튀 어나오는 말을 거의 또렷하게 발음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는 종일 그녀와 함께 기도하고 돌아와서도 또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그녀에 게 위대한 자비를 내리시도록 하는 모든 심혈을 기울이며 기도합니다. 나는 그 녀의 마음에 기꺼이 벌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열망을 불어넣어, 드디어 내가 용 서한다고해도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도록 해주고 싶습니다. 고통스러운 감금의 형벌이 자기를 위해 생명을 바친 성스러운 주님의 발밑에 바쳐지는 감사의 공물 이라고 그녀가 느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날짜가 지루하게 지나갔다. 온 집이 아래층의 불행하고 고민하는 여자에게 주 의를 기울이며 부자연스러운 흥분 상태 속에서 살고 있었다.마치 그녀는 피비린 내 나는 우상숭배의 잔인한 의식을 위해서 마련된 재물과도 같았다. 그녀는 무 서운 나머지 일종의 무감각 상태에 있었다. 조금이라도 데이빗슨의 모습이 보이 지 않으면 견뎌낼 수가 없엇다. 다만 그가 옆에 있을 때만 기력을 회복하고 있 었다. 그래서 노예처럼 완전히 그에게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많이 울기도 하고 성서를 읽기도 하며,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때로는 기진해서 무감각해 있기도 했다. 그녀는 실제로 시련이 닥쳐오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 로 그녀를 지금의 고토으로부터 구해주는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방법 인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죄와 함께 일체의 개인적 자만도 치워 버렸다. 볼품없는 실내옷차림을 하고 엉클어지고 어수선한 머리로 방안을 돌아 다녔다. 나흘동안이나 한 번도 잠옷을 벗은 적이 없었으며, 양말을 신지도 않았 다. 방은 지저분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그 동안에도 비는 잔인할 만큼 끈질기게 퍼붓고 있었다. 이젠 하늘의 물도 바닥이 난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도 여전히 세차고 줄기차게 미칠 듯이 함석지붕에 쏟아졌다. 모든 것이 습기에 차서 끈적 끈적했다. 벽에도 마루에 세워둔 장화에도 곰팡이가 생겨 있었다. 잠이 오지 않 는 밤 내내 모기떼가 성난 듯한 소리로 윙윙 거렸다. "단 하루만이라도 비가 좀 그쳐준다면 이렇게 기분이 언짢지는 않을 텐데." 의 사 맥페일이 말했다. 그들은 모두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가 시드니에서 들어오는 화요일을 기다리 고 있었다. 이런 긴장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의사 맥페일로서는 가엾다든가 하는 감정도, 빨리 이 불행한 여자가 떠나주었으면 하는 마음 앞에서는 이미 사 라져버리는 것이었다.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것이라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배가 떠나고 나면 좀더 자유롭게 숨을 쉴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새디 톰슨 은 총독청의 관리 하나가 배에까지 호송하도록 되어 있었다. 월요일 밤에 그 사 나이가 와서, 내일 아침 열한 시까지 준비를 해두도록 미스 톰슨에게 말했다. 데 이빗슨도 그 자리에 있었다. "모든 준비가 다 되도록 돕겠소. 나도 배에까지 배웅을 할 작정이요." 미스 톰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사 맥페일은 촛불을 불어서 끄고 조심스럽게 모기장을 들치고 들어가 자기 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끝이 나서 고맙군. 내일 이맘때는 이미 떠나고 없겠지." "데이빗슨 부인도 기뻐할 거에요. 그분이 쇠약해져서 형체만 남았다고 말하던 데." 맥페일 부인은 말했다. "그녀는 좀 다른 여자가 됐어요." "누가?" "새디말예요. 정말 이렇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어요. 마음이 겸허하게 돼요." 의사 맥페일은 대답하지 않앗다. 그는 이윽고 잠들어 버렸다. 무척 지쳐 있었 으므로 전에 없이 깊은 잠에 빠졌다. 아침, 누군가가 그의 팔에 손을 얹어서 잠이 깨었다. 놀라서 일어나 보니, 호 온이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집주인은 소리를 내지 말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입에 다 대고는 그를 오라고 손짓했다. 보통 때는 때묻은 듀크 바지를 입고 있는데 지금은 맨발에 토인의 라바라바만을 걸치고 있었다. 갑자기 야만인처럼 보였다. 맥페일은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그가 몸뚱이에 심한 문신을 한 것을 보았다. 그 는 의사에게 베란다 쪽으로 가자는 손짓을 했다. 의사는 자리에서 나와 집주인 을 따라갔다. "소리 내지 말아요."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 같이 좀 나가 주셔야 되겠 습니다. 코트를 입고 신을 신으세요.빨리요." 의사 맥페일의 머리에 퍼뜩 떠오른 것은 미스 톰슨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것 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의료 기구라도 가지고 갈까요?" "제발 좀 서둘러 주십시오." 의사 맥페일은 조용히 침실로 돌아가서 잠옷 위에 방수 코트를 입고 바닥에 고무를 댄 신을 신었다. 집주인가 같이 발소리를 죽이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큰길로 나가는 문이 열 려 있고, 원주민이 대여섯 명 서 있엇다. "도대체 무슨 일이요." 의사는 또 한 번 물었다. "저를 따라 오세요." 호온이 말했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의사도 따라나갔다.원주민들은 한데 몰려서 뒤에서 따라 왔다. 그들은 길을 가로질려 해안으로 나갔다. 의사는 바닷물이 와닿는 곳에 한 떼의 원주민들이 무엇을 둘러싸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2, 30야드 되는 그곳까지 급히 갔는데 의사가 오자 원주민들은 길을 비켰다. 집주인이 그를 앞 으로 밀어냈다. 그때 그는 반쯤 물에 잠기고 반은 물밖에 나온 채 누워 있는 데 이빗슨의 무서운 시체를 보았다. 의사 맥페일은 몸을 굽혀서 -그는 어떤 긴급한 경우에도 당황하는 사나이는 아니었다.- 시체를 뒤지어 보았다. 목이 귀에서 귀 까지 째어져 있었고 오른손에는 쓰여졌던 면도칼을 그대로 쥐고 있었다. "완전히 싸늘하군." 의사는 말했다. "죽은 지 꽤 시간이 지났어." "어떤 아이가 일하러 가다가 그가 거기 누워 있는 걸 보고 금방 내게 와서 알 려주었어요. 그가 스스로 그렇게 했을 까요?" "그렇겠지. 누가 경찰관을 불러와야 해." 호온이 그들의 말로 뭐라 얘길 하자 젊은이 두 사람이 떠났다. "그들이 올 때까지 이대로 놓아 두지 않으면 안돼요." 의사는 말했다. "저히 집으로 옮기는 건 절대 안돼요. 나는 결코 집안에 들이지 않겠소." "당국이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의사가 분명하게 말했다. "사실은 아마 시체 안치소로 옮길 거요." 그들은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집주인은 라바라바 옷 품에서 담배를 꺼내 맥페일에게 하나 권했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면서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 는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했을까요?" 호온이 말했다. 의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얼마 후에 해병의 지시로 원주민 순경들이 들 것을 가지고 왔는데, 바로 뒤따라 해군장교 둘과 군의관이 왔다. 그들은 모든 것을 사 무적으로 처리했다. "부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장교 한 사람이 물었다. "당신들이 왔으니 나는 집에 돌아가 옷을 좀 입어야겠소. 부인에게는 내가 소 식을 전하지요. 그러나 어떻게 좀 해놓고 나서가 아니면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네, 그게 옳을 겁니다." 군의관이 말했다. 의사 맥페일이 집에 돌아와 보니 아 내는 거의 옷을 다 갈아입고 있었다. "여보, 데이빗슨씨의 부인이 남편 때문에 야단이에요." 그가 모습을 나타내자 마자 그녀는 말했다. "어젯밤 내내 자리에 들지 않았데요. 부인은 두 시경에 남 편이 미스 톰슨 방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대로 밖으로 나가더라는군요. 그때부터 계속 돌아다녔다면 정말 죽기라도 하지 않았는지." 의사 맥페일은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고 데이빗슨 부인에게 전해 달라고 했 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했을까요?" 그녀는 겁에 질려서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그런데, 난 못해요." "그래도 전해줘야 해요."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나갔다. 그녀가 데이빗슨 부인 방에 들 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잠깐 멈추어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 수염을 깎고 세 수를 하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앉아서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 다. 드디어 아내가 왔다. "그에게 가보겠다고 해요." 그녀가 말했다. "시체 안치소에 옮겼을 테니까, 우리도 같이 가는 게 좋을 거야. 그녀는 어떻 게 하고 있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울지도 않고 다만 나뭇잎처럼 떨고 있어요." "그럼, 곧 가보는 게 좋겠지." 문을 두드리니까 데이빗슨 부인이 나왔다. 매우 창백해 있었으나 눈물은 흘리 지 않았다. 의사의 눈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그녀가 침착한 듯했다. 말 한 마 디 나누지 않고 그들은 묵묵히 큰길을 나왔다. 그들이 시체 안치소에 이르자 데 이빗슨 부인이 말했다. "저 혼자 들아가 그이를 보게 해줘요." 그들은 옆으로 비켜섰다. 원주민 한 사람이 문을 열어주고 그녀를 들이고는 문을 닫았다. 그들은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백인이 한두 사람이 와서 그들에 게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의사 맥페일은 이 참사에 대하여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드디어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데이빗슨 부인이 나 왔다.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이제 돌아가도 좋아요." 그녀는 말했다. 그 목소리는 딱딱하고 침착했다. 의사 맥페일은 그녀의 눈의 표정이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매우 굳어 있었다. 말 한 마디 없이 그들은 천천히 걸어갔다. 드디어 건너편에 그들의 집이 있는 한길로 구부러진 길을 돌았다. 그때 데이빗슨 부인이 놀라 가슴을 헐떡였다. 그들은 멈추어 섰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리가 그들의 귀에 울려왔다. 그렇게 오랫동안 조용해 있 던 그 축음기가 커다랗고 거친 소리로 렉타임을 울리고 있었다. "무엇일까요?" 겁에 질린 듯 맥페일 부인이 소리쳤다. "자, 갑시다." 데이빗슨 부인이 말했다. 그들은 현관의 계단을 올라가 홀로 들어갔다. 어떤 선원과 무엇인지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면서 미스 톰슨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변화가 그녀에게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어제까지의 겁먹은 노예는 아니었다. 모든 옷차림을 다 하고 있었다. 새하얀 드레스에 반짝반짝 빛나는 장화를 신었고 그 위로는 목양말을 신은 살 찐 다리가 불룩하게 삐져나와 있었다. 머리도 정성들여 빗어 올리고 천박한 꽃 을 단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얼굴에는 화장을 하고 눈썹은 굵고 진했으며 입술은 새빨갰다. 그녀는 꼿꼿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그대로의 거만하기 짝이 없는 형편없는 망나니 여자였다. 그들이 들어가자 그녀 는 갑자기 비웃기라도 하듯이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데이비슨 부인이 자기도 모르게 발길을 멈추었을 때 그녀는 입 가득히 침을 모아서 뱉었다. 데이 빗슨 부인은 겁게 질려 멈칫했으며 그녀의 두 볼에는 갑자기 붉은 반점이 떠올 랐다.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도망치듯 급히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의 사 맥페일은 화가 치밀어 여자를 밀어 붙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봐요, 의사 선생, 그 쓸데없는 짓 말아요. 아니, 남의 방에 들어와서 뭣하는 거에요?" "아니 무슨 소리요?" 그는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요?" 그녀는 계속 기세를 올렸다. 그리고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조롱과 멸시에 찬 증오를 띠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너희들 사내놈, 추악하고 더러운 돼지야! 모두 똑같은 놈들이지. 당신도 마찬 가지야! 돼지들!" 의사 맥페일은 놀라서 숨이 막히는 듯 했다. 그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작품해설 육신을 가진 존재의 슬픔 혹은 공허한 승리의 실상 '비'는 고전적 단편이론을 거의 완벽하게 집성한 것 같은 작품이다. 스토리와 구성은 재미에 필요한 모든 요소와 장치를 갖추고 있고 주제는 인간성의 가장 내밀하고 심각한 국면을 포함하고 있다. 사건이지만 20세기ㅏ가 생산한 단편 중 가장 뛰어난 열 편을 고르라면 나는 그 중에 하나로 이 작품을 넣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종교와 성본능의 갈등, 더욱 보편화시켜 말하면 선악의 투쟁을 다룬 것이며 결말은 분방한 본능의 승리, 혹은 경직된 선의 패배로 이해 되고 있다. '자기를 교화하려는 독선적인 선교사를 휘어잡아 굴복시킨 창녀의 이 야기로서 자연주의 문학의 일품이다. 종교와 성본능의 갈 등을 이보다 더 효과 있고 극적으로 그려낸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식의 해설이 그러하다. 그렇지만 내가 이 작품의 결말에서 읽은 것은 그런 승부의 향방이 아니라 육 체를 가진 인간의 슬픔이다. 선교사 데이빗슨은 독선적이고 경직된 성품이긴 하 지만 선을 향한 믿음과 의지에서는 거짓이 없었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것은 무 엇보다도 거짓이 있었다면 그는 비겁하게 자기변명을 시도하거나 상황에 몰려 자살하지 않을 수 없었더라도 보다 고통을 줄이려 했을 것이다. 내가 잘못 읽는 게 아니라면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에 충실하기 그지 없 었지만 삼손이 그러했고 다윗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약한 육체 때문에 패배한 사 람이었다. 하지만 또한 삼손과 다윗처럼 스스로 죽음을 택해 죄를 씻은 의인이 었다. 이를 인간의 숭부 개념으로 간단하게 재단할 수 있을까. 톰슨의 승리도 자연주의적인 진실로만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악마는 언제 나 승리한다. 그러나 바로 그 승리 때문에 악마는 언제나 악마로 남아있을 수밖 에 없다. 창녀 톰슨의 승리가 자연이 부연한 육체의 악마적인 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악마가 빌려준 간계에 의한 것인지는 명백하지 않지만 결과는 악마의 그 것과 마찬가지다. 그 승리 때문에 그녀는 계속해서 혐오스런 창녀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내가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들 두 사람이 대표하는 의지의 승패만은 아닌 듯하다. 그는 오히려 그런 싸움에서는 져도 이겨도 이 세상에서는 치욕과 비참 밖에 없는 우리 삶의 진상을 보여주는데 더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은이 모옴은 의과대학 재학시적 런던의 빈민굴을 무대로 한 소설 '램버스의 라이자'를 발표하며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자신이 거쳐온 소년시졸을 자양분으 로 해서 한 청년이 삶에 대한 유미적이며 불가지론적 인생관을 확립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소설 '인간의 굴레'와 화가 고갱의 전기에서 암시를 얻어 쓴 작품 '달과 6펜스'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91년이란 긴 생애를 거 치며 소설과 희곡 분야에서 무수한 역작들을 남긴 모옴의 작품 세계는 평이한 문체로 이야기를 호의롭게 전개하는 가운데 삶의 불가해성을 날카롭게 묘파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