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5 지은이: 이문열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 제1장 부르는 소리 사랑이 깊으면 얼마나 깊어, 여섯 자 이 내 몸이 헤어나지 못하나,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 달 밝은 밤에는 임 보러 간다, 엥헤이 엥헤이 엥헤이 엥헤이... 주방 쪽에서 미스터 리의 라디오가 그 무렵 들어 자주 들리는 민요조의 유행가를 낮게 흥 얼 거리고 있었다. 밖은 아침부터 궂은비였다. 원래가 사람이 북적거릴 까닭이 없는 변두리인 데다 날까지 궂어서인지 다방 안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점심나절부터 어항 곁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뭉그적거리다가 방금 온 석간을 맞바꿔가며 읽고 있는 동네의 중년 실업자 둘과 30분 전쯤 들어온 뒤 턱없이 심각한 얼굴로 한구석에 앉아 담배만 빨아대고 있는 청년 하나가 손님의 전부였다.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야? 통 그눔의 속을 알 수가 있어야지..." 공무원을 하다가 5·16 뒤 쫓겨났다던가 하는 쪽이 마침내 읽을 건 다 읽었다는 듯 신문 을 소리내게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별로 목소리를 높인 것 같지 않은데도 다방 안이 조용해서인지 대여섯 발자국 넘게 떨어져 있는 카운터에까지 말소리가 들려왔다. 카운터에 기대 창틀을 타고 내리는 빗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영희가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눈 길을 보냈다. "뭘?" 나이에 비해 이른 성싶은 돋보기를 코에 걸친 채 신문을 보고 있던 상대가 그 전직 공무 원의 불만에 찬 얼굴을 느슨한 안경알 위쪽의 맨눈으로 멀거니 살피며 물었다. "박정희 말이야. 떠먹듯이 군으로 돌아가겠다고 해놓고 또 딴소리야? 뭐 군정을 4년 간 연장하겠다구? 국민 투표에 부치겠다구?" 전직 공무원이 탁자 위에 놓인 신문의 머릿기사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좀더 높였다. 신문 을 천천히 내려놓은 상대가 별감동 없이 받았다. "정치란 게 그렇고 그런 거지 뭐. 한 번 잡은 걸 쉽게 내놓을 수 있겠어? 어제 젊은 장교 들이 떼거리를 지어 최고회의 건물 앞에서 데모를 했단 소리를 듣고부터 내 알아봤지." "그렇지만 이게 무슨 수작이야? 지가 내건 조건을 민간 정치가들이 모두 수락해주지 않았 느냐 말이야? 그 사람들 모아놓고 울먹이며 군사 혁명의 실패를 제 입으로 자인하지 않느냐 구? 제법 김종필이까지 해외로 내쫓고... 그런데 겨우 스무 날도 안 돼 이래두 되는 거야? 까짓 동원된 신출내기 장교 몇십 명을 핑계로 삼천만 앞에서 한 그 엄숙한 선서를 손바닥 뒤집듯 해두 되는 거냐구?" "그 사람대로 사정이 생겼겠지. 나는 되레 그 민정이양 약속이 너무 그림 같아 미덥지 않 더라." 거기까지 듣고 있던 영희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또 정치가 슬금슬금 거리 로 흘러나오고 있구나. 한동안 반공·재건·증산 따위 군사 정부가 쏟아낸 구호만이 요란하 던 거리로― 잘 정리된 것은 아니었으나 영희의 느낌은 대강 그랬다. 거기다가 출입구 쪽에 어른거리는 사람 그림자가 우산을 접거나 빗물을 터느라 머뭇거리는 손님같아 더는 그 둘의 대화에 마음을 쓸 여유도 없었다. "어서 오세요." 문이 열리는가 싶자 카운터 김양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뽐내는 듯 입구 쪽을 향해 소리쳤 다. 참으로 맹랑한 계집아이였다. 영희도 레지로 나서기 전에 카운터에 서너 달 앉아 있어본 적이 있었지만 드나드는 손님에게 영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마담에게 핀잔깨나 들었었다. "얘, 너 그렇게 꾸욱 다물고 있어 입에 냄새 안 나니? 냄새 안 나?" 그런데 김양은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나왔다면서도 벌써 레지로 두 달이나 일 한 영희보다 더 익숙하게 손님을 대했다. 인사말뿐만 아니라 짓궂은 손님들의 외설스런 농 담까지도 상글거림을 잃지 않고 받아넘기는 것이었다. 영희가 잠깐 김양에게 주의를 쏟는 사이 새로 들어온 손님은 구석진 자리의 청년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미군용 바바리 코트에 찢어져 나무로 된 살이 비어져나온 종이 우산을 들 고 있었으나 먼저 와 있는 청년보다 학생 티가 훨씬 드러나 보였다. 보리차 컵을 들고 따라간 영희는 그들에게 차 주문을 받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주문을 받 는다기보다는 강요에 가까운 그 일이 영 몸에 익지않아 눈총을 주는 마담만 없으면 손님 쪽 에서 말 그대로 주문해주기를 기다리는 그녀였다. 더구나 그날은 상대가 같은 또래의 학생 들이라 더욱 마음내키지 않았다. 그들이 커피를 주문한 것은 한동안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수군거린 뒤였다. 그러나 커 피를 날라주는 동안 들은 두어 마디 말로는 영희는 그들이 무얼 의논하고 있는지를 알아차 릴 수 있었다. "그냥 봐넘길 수 없어..." "...연락해." 애들이 또 거리로 뛰쳐나갈 궁리를 하는구나-영희는 조금 전 어항 곁의 어른들이 떠드는 걸 들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감동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둘 다 대학 상급반쯤으로 보 여 자신과 비슷한 나이 같은데도 이상하게 그들이 어려 보였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고, 전화를 받는 김양의 간들어진 목소리가 영희의 주의를 다시 끌 었다. 상대가 뜻밖으로 덤덤한지 한껏 밝게 지었던 미소를 어색하게 풀며 김양이 영희쪽으 로 소리를 쳤다. "손언니, 전화." 영희가 아무렇게나 댄 손영숙이란 이름을 진짜로 알고 하는 소리였다. "누군데?" 영희는 그렇게 묻다가 문득 짐작가는 데가 있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카운터 쪽으로 다 가갔다. "남자예요, 목소리가 부드럽고 차암 좋은데요." 김양의 그런 설명이 아니라고 창현임에 틀림없었다. 도대체 자신이 그 다방에 나가는 걸 알고 전화를 걸 만한 남자는 그밖에 없었다. "나야, 무슨 일이야?" 수화기를 받아 영희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빤히 올려다보며 귀를 기울이는 김양이 느 껴지자 왠지 짜증이 났다. "근처에 와 있어. 잠깐 다녀가지 않을래?" 창현이 언제나와 같이 축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다시 까닭 모르게 짜증을 더해 영희 는 본의 아니게 쌀쌀맞은 목소리를 냈다. "근무중인 거 알잖아? 저녁에 얘기해." 그러자 창현이 징징 울며 보채듯 받았다. "일이 있어. 잠깐만 왔다 가. 거기서 멀지 않는 곳이야. 사거리 약국 옆 케키(케이크)점..." "알았어." 영희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몇 달의 경험으로 미 루어 돈 문제인 듯했다. 가진 돈이 이백 원은 되었으나 그걸로는 모자랄 것 같아 아니꼬워 도 김양에게 손을 안 내밀 수가 없었다. "난 몰라요. 마담 아줌마한테는 언니가 말하세요." 김양은 그렇게 꼬리를 빼면서도 별로 망설임 없이 삼백 원을 카운터 금고에서 꺼내주었 다. 가불로는 좀 많은 금액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처리할 힘이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영희는 마침 배달에서 돌아온 한양에게 다방을 맡기고 빗속을 종종걸음 쳐 사거리 양과자 점으로 갔다. 창현은 한구석 탁자에 색소폰 케이스를 얹어놓고 맥없이 앉아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까 맣게 기른 콧수염이 대비가 되어 집 안에서 대할 때보다 한층 더 그를 병자처럼 보이게 했 다. 그런 그의 언제나 물기 어린 듯 보이는 눈길과 마주치자 영희의 짜증은 이내 스러지고 대 신 거의 습관적인 연민이 솟아올랐다. '내가 보살피고 돌보아주어야 할 가엾은 남자...' 영희는 모성애와도 같은 앞 뒤 없는 보호 본능까지 느끼며 창현 곁에 앉았다. 보는 사람 이 없다면 쓸어안고 쓰다듬어주고 싶을 만큼 창백하고 지치고 힘없어 보였다. "점심은 먹었어?" 어느새 목소리까지 자상한 어머니같이 되어 영희가 묻자 창현이 고갯짓을 곁들여 대답했 다. "그래. 차려놓은 것 조금..." "찌개 데워서?" "아니 연탄불도 꺼지고 밥맛도 없고..." "뭐야? 불이 또 꺼졌어? 내가 아침에 갈아넣고 왔는데." "몸이 오슬오슬해 불문을 열어두었다가-깜박 잊었어. 방이 너무 뜨거워 보니까 불이 벌써 꺼져있데..." "그래, 다시 피워놓구 왔어?" "밖은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어디서 어떻게 피워?" "그럼 주인집 아줌마한테라두 부탁하구 와야지..." 써늘한 방으로 밤늦게 돌아갈 일이 속상해 자신도 모르게 나무라는 말투가 되었던 영희는 거기서 다시 말투를 바꾸었다. 말못할 우울과 피로로 금세 처져내릴 듯한 창현의 표정이 다 시 좀 전의 연민을 되살려준 까닭이었다. "알았어. 그건 내가 돌아가 피우지. 근데 무슨 일이야?" "이게 말썽이야. 오늘 처음 나가는 업손데..." 창현이 길고 흰 손가락으로 색소폰 케이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제 케이스째 떨어뜨린 적이 있는데 소리가 이상해. 어쨌든 악기점에 들러봐야겠어." "그럼 돈이 필요하겠네. 얼마면 되겠어?" "우선 한 천 원은 가지고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창현은 지나가는 말처럼 그렇게 대꾸했다. 그 천 원이 두 사람의 반달 생활비에 가깝다는 게 영희를 일순 암담하게 했다. 그가 벌어온다지만 그 돈은 언제나 그 자신을 치장하기에도 모자랐다.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뜨내기 악사일수록 차림이 깔끔해야 된다는 그의 주 장에 따라 업소가 바뀔 때마다 새로 맞추는 양복이나 구두에다 새물만 가시면 입기를 꺼리 는 와이셔츠와 고급 넥타이 핀, 커프스 버튼 같은 걸로 대표되는 자질구레한 사치 때문이었 다. 지난달도 창현은 한 스무 날 가까이 밤일을 나갔지만 영희가 가불해 준 돈조차 돌려주지 못했다. 그 바람에 그 달은 아직 영희의 월급날이 열흘 넘게 남았는데도 월급은 오늘의 삼 백 원을 더하면 벌써 반 이상을 앞당겨 쓰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영희는 차마 마음속의 암담함을 창현에게 드러낼 수 없었다. 오히려 알 수 없는 안쓰러움까지 느끼며 돈을 적게 가불해온 것을 변명하듯 말했다. "어쩌나? 돈 문제인 것 같아 가불을 좀 해오기는 했어도 오백 원밖에 안 되는데... 그저께 이백 원 가져간 것 좀 안 남았어?" "없어. 카사블랑카 지배인하고 저녁 먹었다구 그랬잖아." 창현은 그렇게 말해놓고 비로소 자기가 요구한 게 그리 적지 않은 돈이라는 걸 알아차렸 다는 듯 덧붙였다. "걱정 마. 이 돈 곧 갚아줄게. 카사블랑카, 꽤 괜찮은 업소야. 손님도 태반은 미국 사람들 이구. 거기 뿌리만 내리면 너도 그까짓 다방 안 나가도 될 거야." 별로 미덥지는 않았으나 말만이라도 영희에게는 감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자신과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음을 확인한 감격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영희는 다시 한번 다방으로 달 려가 한양과 김양의 개인 돈을 빌려서까지 천 원을 채워주었다. 그러나 뜻을 이룬 어린애처 럼 밝은 표정으로 양과점을 나서는 그의 조각한 듯 잘생긴 얼굴과 균형잡힌 몸매를 훔쳐보 면서 불현 듯 느끼게 된 이질감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저 남자가 과연 내 사람일까? 정말로 저 사람과 남은 일생을 같이 살게 될까...’ 창현과 헤어져 다방으로 돌아오니 퇴근 때가 가까워서인지 손님이 좀 늘어 있었다. 그새 돌아와 있던 마담이 영희를 보고 대뜸 짜증부터 냈다. "얘, 너는 어딜 그리 쏘다녀? 다방은 비워놓고... 내가 없으면 너희들이라도 좀 지키고 앉 았어야 할 거 아냐?" 그리고는 영희의 등을 떼밀 듯 커피잔을 들려 왁자하게 떠들고 있는 가까운 시장의 장사 꾼들 자리로 몰아넣었다. "손님들에게 좀 붙임성 있게 대해. 너두 차 좀 얻어먹고... 레지들이란 게 꼭 꿔다놓은 보 릿자루 같은 것들이니 매상이 오를게 뭐야?" 마담이 여러 사람 듣는 데서 그렇게 몰아대는 데 영희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지만 한 짓이 있어 억지로 참았다. 그러나 손버릇 나쁘고 입이 험한 장사꾼들 사이에 끼어 앉아 마음에도 없는 애교까지 떨 기분은 아니어서 차만 내려놓고 카운터 쪽으로 돌아와 버렸다. 마담이 그런 영희를 가볍게 흘기며 소리나게 혀를 찼다. 그게 맞대놓고 몰아세울 때보다 훨씬 심하게 속을 건드렸으나 영희는 다시 한번 이를 사려물고 참았다. '달이 차면 딴 다방을 알아봐야겠다. 두 달이면 옮겨볼 때도 됐지...' 영희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짐짓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주방 곁 화장실로 갔다. 거기서 별뜻 없이 거울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수돗물을 소리나게 틀어 손도 씻고 하다 보니 속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런데 영희가 화장실을 나와 다시 카운터 쪽으로 가려 할 때였다. 영희는 문득 무슨 불 길한 빛 같은 게 쏘아져오는 것 같은 느낌에 걸음을 멈추고 카운터 쪽을 살폈다. 거기서는 방금 들어온 듯싶은 군인 한 사람이 마담과 김양을 상대로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어딘가 낯익다 싶어 자세히 그 옆모습을 훔쳐보니 아, 그것은 바로 오빠 명훈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어디 있는지 빤히 알면서도, 그리고 그렇게 보고 싶어했으면서도 끝내 찾아볼 용기가 안 나 면회 한번 가보지 못한... '오빠!' 영희는 하마터면 그렇게 소리 높여 명훈을 부를 뻔했다. 아니 마음속은 벌써 목청이 터지 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몸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며 화장실 안쪽으로 한 발이나 물러 났다. 큰 괴로움이나 죄의식 없이 한 단계씩 치러온 자신의 전락이 갑자기 끔찍하게 느껴지 며 3년만에 혈육을 만난 반가움이나 감격을 한순간에 지워버린 것이다. 거기다가 몸이 입게 될지도 모르는 위해도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두려움으로 영 희를 떨게 했다. 오빠의 느닷없는 격정이나 어떤 특정한 쪽으로의 터무니없는 결벽을 잘 알 고 있는 그녀에게는 명훈의 그러한 출현이 심상찮음을 넘어 위기감으로까지 느껴졌다. 지난 3년의 행적에다 창현과의 동거 생활까지 샅샅이 조사한 뒤 권총 같은 것이라도 숨기고 함께 죽자고 온 것 같은 예감마저 드는 것이었다. 거기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처럼 다급해진 명희는 새삼 낯설어 보이는 화장실 안을 휘 둘러보았다. 출입문말고 벽면이 터져 있는 곳은 두군데였다. 하나는 주방과 통하는 베니어판 쪽문이고, 다른 하나는 뒷골목으로 난 키높이의 옆으로 길쭉한 창문이었다. 주방쪽으로 가봤자 카운터 앞을 지나지 않고는 밖으로 나갈 길이 없음을 아는 영희는 창 문 쪽을 탈출구로 삼기로 하였다. 나무 창틀은 빽빽했지만 못질까지 되어 있지는 않았다. 영 희는 바지를 입고 있던 걸 다행으로 여기며 소변기를 발판 삼아 창틀로 올라갔다. 거기 더 께 앉았던 먼지가 손바닥과 옷에 묻어났지만 그런 데 마음쓸 겨를이 없었다. 어렵게 골목길 위로 뛰어내린 영희는 다방 뒤편을 돌아 시장 쪽으로 빠졌다. 저녁때가 다 되어서인지 아직 빗발이 질금거리는데도 시장 안은 제법 북적대고 있었다. '어디로 갈까...' 갑자기 막막해진 영희는 질퍽이는 장바닥을 조심성 없이 걸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처음 에는 거기서 멀지 않은 셋방을 떠올렸으나 어쩌면 오빠가 이미 그곳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근처의 식당이나 제과점도 기다리던 오빠가 저녁이나 때 우려고 찾아들지 몰랐고 다른 다방에 숨어도 반드시 안전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영희에 게 퍼뜩 떠오른 곳이 시장 입구 쪽의 미장원이었다. 자신이 있는 다방과 좀 가깝다는 것이 불안했지만 거기는 오빠가 못 올 듯 싶었다. "아유, 깜짝이야. 웬일이세요?" 힘껏 문을 열어제친 영희가 뛰듯이 미장원으로 들어가자 대기용 나무 의자에 앉아 만화책 을 뒤적이고 있던 미용사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전에 두어 번 와본 적이 있어 낯익은 아가 씨였다. "으응, 고데 좀 할까 싶어서." 비로소 좀 여유를 찾은 영희가 미용 의자에 털썩 올라앉으며 별일 없다는 듯 말했다. 날 이 궂어서인지 저녁때라서인지 손님은 영희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은 다방문 안 열었어요? 어디 갔다 오시기에 이 먼지, 아유, 머리도 감아야겠어요. 비 맞으셨조? 이대루는 냄새 나서 안 돼요." 미용사가 그렇게 수다를 섞어 떠들었다. 자신이 다방 레지라는 걸 그 미용사가 알고 있다 는 데 심사가 틀어진 영희가 상대방이 멋쩍을 만큼 차게 말했다. "아침에 감은 머리야. 비 맞은 거나 말리고 시키는 대로 고데나 해줘요." 미용사도 그제서야 영희의 뒤틀린 심사를 알아챈 듯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제 할 일 로 돌아갔다. 영희가 더욱 굳은 표정과 침묵으로 그녀의 입을 막아 잠시 후 미장원 안은 고 데 가위가 찰칵거리는 소리와 미용사의 슬리퍼 끄는 소리가 간간이 들릴 뿐, 사람 없는 점 포처럼 조용해졌다. 그 고요함에 조금씩 평온을 되찾은 영희는 자신도 모르게 씁쓸한 회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영희가 경리로 일하던 대흥기계를 나오게 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하나 는 시간이 흐를수록 거침없이 드러나는 홍사장의 욕심이었다. 비록 그것이 스스로를 위한 불결한 욕심이 아니라 아들 정섭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제 갓 스물로 접어든 영희에게 짐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속내를 잘 아는 영희로서는 그 가게가 보기보다는 실속 있고 거래 단위가 큰 업체임을 인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앞으로의 전망도 좋았고 홍사장이 품고 있는 야심도 만만치 않 았다. 그러나 당장은 청계천가의 꾀죄죄한 고물상일 뿐이었다. 그런 가게의 맏며느리로서 그 때까지만 해도 허황스럽게만 보이는 그들 부자의 야망을 뒷바라지하며 일생을 보낼 결심을 하기에는 갓 스물인 영희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거기다가 아직 아무런 증상을 보이지 않지만, 흉측한 상처와도 같은 박원장과의 과거가 선뜻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어버지로부터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어떤 때 는 가슴 뭉클할 정도로 다가오는 정섭의 수줍고도 순진한 애정이나 벌써 시아버지나 된 듯 자상스런 눈길로 보살펴주는 홍사장의 피붙이 같은 정을 느낄 때마다 그 상처는 무슨 날카 로운 쇠꼬챙이처럼 영희의 가슴속을 후벼대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너무도 나를 몰라. 지난 몇 달 오직 학교와 이 가게를 위해서만 힘을 쏟아온 나를 한껏 잘 보아준 까닭일 테지만, 이건 잘못되었어. 그들이 정말로 내가 어떤 계집아이라 는 걸 알면 펄쩍 뛰며 돌아설걸. 그들이 순진한 만큼이나...' 어쩌면 그 같은 혼잣말은 그 때까지만 해도 영희의 심성이 뒷날처럼 그렇게 심하게 일그 러지지는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들 부자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게 단순히 내면적인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적극적인 죄악이란 느낌이 들면서 그곳의 생활은 점점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그 밖에 그네들 남매에게 공통된 독특한 의식 형태도 영희가 대흥기계를 떠나게 된 또 다 른 이유가 되었다. 영희, 명훈에게뿐만 아니라 인철과 옥경에게까지 공통된 의식 중의 하나 는 일종의 영락 의식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의 신분 상승 욕구는 언제나 과장과 미화로 실 제보다 훨씬 엄청나진 과거를 향한 회복의지로 나타났는데, 종종 그 회복의지는 상승 욕구 보다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데가 있지만 특히 60년대에는 사람들의 신분 상승 욕구가 교육열로 한창 불을 뿜던 시기였다. 아직은 경제력 그 자체를 신분 상승의 바탕으로 인정할 만큼 산 업화되지 못한 사회 의식의 한 반영으로 그 불꽃의 절정은 대학에서 타올랐다. 학문의 본질 과는 거의 무관한, 의식이 물화되어가는 중간 과정으로서의 특이한 '마니아'였다고도 할 수 있다. 회복 의지란 외양을 띠고는 있어도 실제로는 상승 욕구에 지나지 않는 점에서 명훈과 마 찬가지로 영희도 그런 진학열에서 예외일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 또한 대학 진학 을 신분 상승 또는 과거 회복의 마지막 단계로 단정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그 이상의 의미 를 부여하기까지 했다. 박원장으로부터 크게 상처입은 과거를 치료할 영약 또는 자신의 모 든 인간적인 약점과 실수에 대한 면죄부로서의 의미였다. 어쩌면 집을 떠날 때 인철에게 말 한 성공이란 것도 실은 대학 진학이란 말을 추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었 다. 따라서 입시철이 되자 영희는 전에 없는 열성과 집중으로 그 준비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그녀의 능력과 희망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그녀가 평소 우러렀던 명문의 여자 대학은 말할 것도 없고, 2차로 지원한 사립 대학에서까지 영희는 보기 좋게 낙방하고 말았다. 오빠 명훈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남은 길은 돈보따리를 싸들고 정원 미달인 삼류 대학을 찾는 것뿐이었다. 그때껏 거짓말같이 잊고 있었던 돈 문제가 영희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시험만 합격하면 등록금은 어디서 절로 나올 것 같았으나 이제 돈만이 진학을 결정하는 요 소가 되자 갑자기 모든 게 막연해졌다. 대학 진학에 관한 한 홍사장 부자는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정섭은 기회 있을 때마다 영희 의 턱없는 꿈을 비웃었고, 홍사장은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기색을 지어보이기까지 했다. 어떤 때는 단순한 못마땅함 이상의 싸늘한 적의를 느낄 때마저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등록금을 도움받는 것은 상상조차 안 되는 일이었다. 거기서 영희의 두 번째 전락은 그녀 스스로에 의해 결행되었다. 대학 입시 앞뒤로 관계가 좀 서먹해지기는 했어도 영희는 여전히 대흥기계의 수금 관계 일을 맡아하고 있었는데, 그 게 탈이었다. 그해 3월말의 어느 날 제법 큰 거래처에서 삼만 원을 수금해오던 영희는 그 돈이 바로 최근에 보아둔 어떤 삼류 대학의 등록금 액수라는 데 갑작스런 유혹을 느꼈다. 언제든 성공해서 갚으면 되지 않은가... 거기다가 어렵게 유혹과 싸우며 돌아간 가게에 그 돈을 바로 받아 챙길 홍사장이 없는 걸 보자 영희는 마침내 더 버텨내지 못했다. 정섭이 또 무슨 기곈가에 열중해 가게 모퉁이에 앉아 있었으나 영희가 그 돈을 훔쳐 떠나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철렁한 일은 제법 쪽지까지 써서 장부 사이에 끼워두고 나오던 그녀가 종로로 건너가는 다 리에서 홍사장과 마주치게 되었을 때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결행에 들어간 때라 영희는 그녀 특유의 뱃심으로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홍사장을 따돌려 버렸다. 그 길로 모니카네 집으로 달려가 숨은 영희는 거기서 한 보름 행복한 꿈에 취해 보냈다. 공부에 있어서는 영희보다 나을 것 없는 처지인 모니카가 때마침 그녀 어머니가 경영하는 요정의 단골 손님을 통해 제법 명문 소리를 듣는 여자 대학에 보결 입학 운동을 한다는 말 을 듣고 거기 편승하기로 한 것이다. 보결 입학이라고 해서 돈을 더 내라는 것도 아니어서 영희에게는 그 행운이 꿈만 같았다. 그러나 행운은 진정한 것이 못되었고, 대학은 영희와 인연이 없었다. 돈을 건네주고 보름, 입학식 날이 되어도 그 학교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이상하게 여긴 모니카의 어머니가 학교로 달려가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약은 고양이 밤눈 어둡다고 내가 그 꼴이 났구나. 분명히 그 대학 교무과장 주임교수 하 며 내 앞에서 한상 잘 받고 갔는데, 정작 찾아가보니 전혀 낯선 사람들이지 않겠니? 내 참, 기가 막혀서... 어쨌든 모니카 이 기집애, 너 대학은 끝났는 줄 알아. 밤낮 공부는 않고 발발 거리며 싸다니더니-결국 뒷구멍 파다가 이런 꼴을 당한 거야. 정식으로 합격해 들어간 대학 이라면 내가 왜 그 사기꾼들에게 등록금 보따리를 앵겼겠니? 정말 분해서... 이젠 대학 같은 거 꿈도 꾸지 말고 몇 해 처박혀 있다가 시집이나 가." 모니카의 어머니는 모니카를 상대로 그렇게 푸념 섞어 나무랐으나 영희는 그게 꼭 자신에 게 내려진 비정한 선고처럼 들렸다. 그리고 비로소 운명이 예비하고 있는 자신의 앞날에 대 한 불길한 예감으로 섬뜩해져 몸을 떨었다. 그 뒤 일 년 남짓 영희에게는 하루하루가 악전고투와 같은 나날이었다. 급사 겸 경리로 여섯 달 근무했지만 겨우 석 달치 월급밖에 못 주고 망해버린 무역회사, 일본에서도 도입한 기술이라며 떠들썩하게 시작했으나 미처 영희가 그 기술을 다 배우기도 전에 문을 닫은 신 발공장, 생계비도 안 되는 봉급과 화학 약품의 독한 냄새 때문에 두 달도 안 돼 그만둬버린 나염공장, 식모 겸 점원으로 몇 달 지내다 그만둔 약방-그렇게 거칠고 고단한 삶을 채워 가 는 동안에 소녀 시절의 꿈은 모두 흩어지고 성공은 생존과 동의어로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 시절의 삶은 건강하고 정직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소공녀 의식 또는 영락 의식이 한 울타리가 되어 떠돌이 젊은 여자를 노리는 여러 유혹들로부터 그녀를 보호 해 주었다. 그 기간 동안 급할 때는 상당한 도움을 줄 수도 있는 모니카네 집을 굳이 멀리 한 것도 그런 의식에서 우러난 경계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생활의 고단함과 외로움에 지친 영희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한 것 은 바로 전해 여름이었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아직 자신이 무언가 고귀한 걸 추구하고 있 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던 영희는 어느 날 느닷없는 충격으로 그 착각에서 깨어났다. 그녀 를 오갈 데 없는 고아로 단정한 약사 선생님이 아이가 둘씩이나 딸린 홀아비를 중매하겠다 고 나선 게 그 발단이었다. 제법 집칸이나 지키고 사는 홀아비와의 결혼에 은근히 마음이 흔들려 선을 보고 돌아오면 서 영희는 문득 자신에게 그렇게 괴로운 나날은 참아가며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이 이미 없어 졌음을 깨달았다. 그때 영희가 들은 게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였다. 어렸을 적 무언가 어머니가 화낼 일을 저질러놓고 매가 무서워 어둡도록 골목길을 서성이고 있으면 어김없이 찾아 나와 부르던 그 따뜻한 목소리. 그리고 갑자기 앞 뒤 없는 설움이 북받쳐 훌쩍이고 다가가면 서걱이는 치마 폭으로 온몸을 감싸주며 할머니가 얼렀다. "아이구, 누가 우리 5대 만에 얻은 귀한 딸을 울렸노? 가자, 이 할미하고 가면 아무도 널 못 건든다. 에엣, 못된 것..." 그래서 못 이기는 채 따라 들어가면 어머니는 하얗게 눈을 흘기면서도 끝내 매는 대지 못 했다. 그 할머니는 이미 10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영희는 그녀가 밀양집 밖 골목께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듯한 환상까지 보았다. 아니, 이번에는 어머니가 머리칼을 자르는 게 아니라 머리 가죽을 벗긴다 해도 기꺼이 머리를 내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라도 다시 가족의 한 사람이 되어 그들과 함께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돌아간 밀양에서 영희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쓸쓸하고도 종잡을 수 없는 그들의 후문뿐이었다. "느그 어무이는 니 달라빼고도 한 대여섯 달은 좋게 있다 돌아왔제, 암매. 그라고 아아들 은 고아원에 옇디(넣더니) 식모살이를 나섰제. 여다 있을 때만 해도 우리집은 가끔씩 들따 (들여다)보디 재작년말인가 부산으로 간다 카미 가더라. 아아들은 그대로 고아원에 남아 있 었는 갑더만 가아들도 요새는 간 안보인다 카네. 병우 말로는 옥경이가 전학 갔뿌따는 기라. 인철이는 중학교에 댕겨 병우가 잘 모르지만은 그 아도 잘 안비데(보이데). 암매 둘 다 너그 어무이가 델꼬 갔는 갑더라..." 옛날 집에 갔다가 못 찾고 할 수 없이 영남여객댁에 들렀을 때 아주머니가 별감동 없는 목소리로 일러준 말이다. 어머니가 도시를 옮길 때의 습성을 잘 알고 있는 영희는 그 말을 듣자 암담해졌다. 도시를 옮길 때 어머니는 전에 살던 도시의 누구에게도 자기들이 사는 곳을 일러주는 법 이 없었다. 그리고 새 도시에 가서는 될 수 있는 한 눈에 띄지 않게 사람들 속에 숨어버리 는 것이었다. 영희는 경찰도 다시 그들의 소재를 파악하는데 일 년이 걸릴 만큼 깊이 숨어 버린 어머니를 찾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게 더 손쉽고 빠를 것 같아 맥없이 서울로 돌아왔다. 영희의 또 한 단계 전락은 그렇게 돌아온 서울에서 이루어졌다. 이제는 정말로 혼자가 되 었다― 갑작스레 그런 기분에 빠진 영희는 저항감은커녕 오히려 어떤 귀향 의식 같은 것까 지 느끼며 거의 일 년 만에 모니카네 집을 찾아갔다. 모니카는 그 사이 많이 변해있었다. 쌍꺼풀 수술을 하고 인조 속눈썹을 달고 내의 맘보 바지를 입은 모습도 그랬지만, 다방과 술집과 음악실과 이따금씩 카바레로까지 이어지는 그 녀의 행동 반경은 갈 데까지 다 간 논다니의 그것이었다. 물론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속없이 영희는 반기는 것이나 습관처럼 명훈을 추억하며 눈물을 질금거리는 것 따위였다. "니네 오빠, 어쩜 그리두 무정하니? 사람 가슴에 못을 막 박구... 작년에 면회 갔을 때 어 쨌는지 아니? 면회를 갔는데 글세, 면회실까지 나왔다가 날 알아보자 그대로 돌아서서 가버 리지 않겠니? 하두 슬퍼 펑펑 울고 있자니까 생전 첨 보는 하사관 하나가 술을 다 사주며 위로해주더라..." 그런 원망과 함께였는데, 그러다가 미처 그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그 무렵 사귀고 있는 놈팽이 얘기로 킬킬대는 것 또한 그녀의 변하지 못한 부분 중 하나였다. 변한 점에 있어서는 모니카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 년 만에 그 녀는 나이보다 훨씬 늙고 원기 없어 보였다. 색시를 여남은 명씩이나 데리고 하던 요정도 그만둔 듯했고, 막연히 느껴지던 분방한 분위기도 지워지고 없었다. 나중에야 그게 자유당 시절의 고급 공무원이었던 모니카의 의붓아버지가 몰락함에 따른 변화란 걸 알았지만, 영희 는 그 때문에 한동안 모니카의 집이 서먹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모니카의 어머니에게도 변하지 않은 부분은 있었다. 그 하나는 영희에 대한 무턱 댄 관대함이었다. 딸애의 단짝이라서 그런지, 여러 해 시대의 타락한 딸들을 밑천 삼아 영업 을 해오는 동안에 몸에 밴 습성때문인지, 그녀에게는 세상의 어머니들이 영희 같은 떠돌이 여자애에게 흔히 갖게 되는 악의나 편견이 전혀 없었다. 언제나 무덤덤하게 영희를 맞아주 었고, 때로 넌지시 훈계를 끼워넣기는 해도 그게 영희에게 부담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 다음 그녀에게서 변하지 않은 점은 화류계 쪽과의 관계였다. 요정은 걷어치웠지만 대 신 그녀 자신의 월급 마담으로 어딘가를 나가는 눈치였고, 그 방면의 사람들과 왕래도 여전 히 잦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영희는 거의 두 달이나 그 동안의 저임과 피로에 지친 몸을 그 집에서 쉴 수 있었으며, 마침내는 일자리까지도 그전과는 성질을 달리하는 다방으로 바 꾸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영희 자신마저 알 수 없는 것은 새로운 일자리로 다방을 결정하던 때의 심리상태 였다. 60년대초만 해도 다방은 뒷날과 달리 매음과는 거의 무관한 업종이었으나 그렇다고 여느 스물한 살짜리 여자가 아무런 주저 없이 선택할 일자리 또한 아니었다. 때로 로맨스의 형태 를 갖추거나 또는 아주 예외적이기는 해도 손님과 다방 종업원 사이의 매음에 유사한 거리 는 그때도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영희는 아무런 예비 행동이나 거부감 없 이 다방을 새 일터로 받아들였다. 비록 시작은 경리였지만 그게 레지에 이르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충분한 예측이 있으면서도. 그러나 이해하려고만 들면 반드시 이해하지 못한 것도 없는 것이 그러한 영희의 선택이 다. 그때는 아직 산업화다운 산업화가 진행되지 못하였고, 사회의 경제적 수준은 먹여만 준 다는 것도 큰 시혜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기업 윤리도 노동자의 권리도 양쪽 모두 의식 표면에 떠오르지 못한 그러한 시절의 미숙련 여성 노동자인 영희가 겪었을 저임과 피 로는 오늘날의 상상으로는 다 그려내지 못할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또한 영희의 그 같은 선택을 거든 것은 고통에 지기 쉬운 육체였다. 두 달 가까 이 쉰 뒤 다시 일을 해야 할 필요에 몰렸을 때 영희는 먼저 그때껏 해온 종류의 노동을 떠 올렸다. 그럴 때 그 저임과 피로의 기억에 몸서리치며 거부를 나타낸 것이 바로 그녀의 육 체였다. 그리고 거기에 이제는 온전히 홀로 되었다는 느낌과 모니카의 어머니 주위에서 보 게 되는 나쁜 본보기가 가세하자 영희는 별주저 없이 다방으로 나갈 수 있었다. 어쩌면 영희는 그때 이미 자본주의 시장 원리의 한 중요한 항목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곧 일신 전속적인 어떤 가치의 상품화가 가격 시장에서의 비교 우위 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 특히 정조나 명예는 노동보다 훨씬 비싼 값에 팔린다는 것을. 어쨌든 영희는 모니카의 어머니에게 부탁해 다방의 경리로서 출발했고― 그로부터 여섯 달, 출발 때의 미필적 고의는 드디어 현실로 나타나 이제 한 신출내기 레지로 나앉게 된 것 이었다. 영희가 다방으로 전화를 건 것은 비 오는 저녁나절의 때아닌 고데가 끝나고도 한참 뒤였 다. 아무래도 불안해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그래도 직장이라고 그럴 수가 없어 영희 는 우선 전화로 사정을 알아보았다. "어디야? 빨리 와. 오빠는 벌써 갔어. 정말이야. 외출 나온 길이라 귀대해야 된댔어. 쪽지 하나 남기고 그냥 갔으니까 안심하고 와도 돼." 전화를 받은 마담이 짜증을 감추고 그렇게 알려주었다. 날이 궃다고는 해도 다방으로서는 바쁠 시간이었다. 영희는 잠깐 마담이 오빠와 짜고 자신을 꾀어들이려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꾸고 다방으로 돌아갔다. 자신이 온 걸 빤히 알면서도 화장실 유리 창문을 타넘어 가면서까지 피한 누이동생을 눌러앉아 기다릴 만큼 눈치 없는 오빠는 아니었다. 영희에게 삼 년 만에 만난 오빠를 그렇게 피해야 되는 네 심경 알 만은 하다마는 그래도 섭섭하구 나. 긴말은 않겠다. 나는 5월이면 제대고, 제대하면 돌내골로 돌아갈 작정이다. 어머니도 이미 지난 겨울부터 옥경이와 함께 돌내골에 돌아가 계시고 철이도 곧 부를 작 정인가 보더라. 내가 내려가면 너 빼놓고 우리 식구가 다 모이는 셈이 된다. 이제 와서 하필 그곳이냐고 말하겠지만 돌내골에는 네가 알지 못하는 좋은 일이 있다. 큰 산소 옆 산비탈에 한 3만 평 개간할 만한 땅이 있는데, 허가가 쉬울 뿐만 아니라 개간 보조 금까지 나오는 모양이다. 생각해봐라. 아무리 개간지라지만 밭이 3만 평이다. 옛날 살림과는 못 견준다 해도 이제 우리 식구 사는 걱정은 안 해도 될 듯싶다. 어떠냐? 이쯤에서 집으로 돌아가 헝클어진 제 삶을 한번 정리해보지 않겠니? 객지에서의 천덕꾸러기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내 귀여운 여 동생으로 돌아오지 않겠니? 내 생각에 이게 네게는 마지막 기회일 듯하다. 부디 깊이 생각 해서 현명한 결정을 보도록 해라. 할말은 태산 같지만 귀대 시간이 바빠 이만 쓴다. 1963년 3월 16일 아직도 널 사랑하는 오빠가 추신: 네가 언제 이 다방에 돌아와 내 편지를 보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돌아갈 생각이 들 거든 되도록 빨리 돌아가도록 해라. 돌내골에서 너를 만나게 되기를 간절히 빈다. 오빠 명훈이 남긴 것은 쪽지라기보단 제법 긴 편지에 가까웠다. 읽기를 마친 영희는 콧마 루가 시큰하며 눈물이 솟았다. 오빠는 휘갈겨 써놓았지만 거기에는 영희가 체념 속에 포기 한 모든 그리운 것이 다 들어 있었다. 가족, 가정, 혈육의 정, 희망, 미래― 한동안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만 여겨왔던 그 모든 것들... '돌아간다. 그래, 돌아가자.' 영희는 뿌옇게 흐려오는 눈앞을 헤젓듯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속으로 그렇게 소리쳤 다. 감정에 약하면서도 결단에는 주저 없는 그녀의 성격대로였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은 진 심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일을 마치고 자취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영희의 결정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 했다. 연탄이 꺼져 싸늘한 방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는 순간 눈에 들어온 방안의 광경이 저 녁 내내 까맣게 잊고 있던 창현을 상기시킨 것이었다. 방안에 퍼진, 사람이 방금 빠져나간 듯한 이부자리, 그 한구석의 상보가 반쯤은 흘러내린 밥상, 트렁크로도 쓸 수 있는 알루미늄 옷상자, 벽에 걸린 창현의 양복들― 그중에서도 특히 눈을 찌르는 것은 최근에 맞춘 휠끼 (필크) 정장 위에 덮인 횃댓보였다. 흰 옥양목 바탕 천에 아치 모양의 'Sweet Home' 이라 는 글자와 다시 그 아래 원앙 한 쌍이 조잡하게 수놓여진 그 옷덮개를 보면서 영희는 비로 소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섬뜩하게 깨달았다. 오빠의 편지가 준 감동으로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녀는 벌써 몇 달 전부터 창현과 사실상의 새 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혼방에나 거는 그 횃댓보까지 걸어두고... 영희가 창현을 만난 것은 모니카네 집을 나와 처음 얻은 양수동 산꼭대기의 셋집에서 였 다. 다방 경리로 취직은 해도 보증금이 없는 영희는 어쩔 수 없이 비싼 월셋방을 얻게 되었 다. 영희 같은 사람들이 노려 지은 듯, 닭장처럼 작은 방만 다닥다닥 붙여놓은 한 일자 블록 집이었는데, 창현은 바로 그 집 영희의 옆방에 몇 달 먼저 세들어 살고 있었다. 처음 창현을 보게 되었을 때 영희는 솔직히 다른 어떤 감정보다 기이하다는 느낌을 더 많 이 받았다. 유행 따라 멋을 내 지은 남색 정장에 붉은 넥타이를 맨 그가 색소폰 케이스를 들고 닭장 같은 그 집에서 나오는게 너무도 어울리지 않은 까닭이었다. 거기다가 귀공자처 럼 흰 피부와 검고 숱 많은 고수머리, 그리고 영희가 좋아하는 섬세하면서도 음영 짙은 얼 굴은 언뜻 스쳐본 영희에게 헛것을 본 것이나 아닌가 하는 느낌까지 주었다. 그러나 창현은 틀림없이 현실의 사람이었고 또 그 집의 거주인이었다. 그것도 고등학교 악대부에서 익힌 색소폰 하나만 달랑 들고 서울로 올라와 그 집에서 가장 자주 곤궁에 떨어 지는 거주인이었다. 아직은 뒷날처럼 그의 잘생긴 얼굴을 비싸게 사주는 여자들에게 기생할 줄도 몰랐고, 다니는 밤업소에서는 그리 아낌받는 처지가 못 돼 자주 일자리를 잃게 되는 까닭이었다. 아주 나이가 들 때까지 영희가 버리지 못했던 취향 중의 하나로 일종의 미색가적인 취향 이 있다. 가만히 따져보면 지난날 영희가 박원장에게 그렇게 쉽게 허물어진 까닭도 그런 미 색 취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불 같은 분노와 원한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의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그리움 비슷하게 박원장을 추억하게 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의 흰 이마와 짙은 눈썹이며 깎은 듯이 오똑하던 콧날 따위였다. 그런데 그 미색 취향이 처음 적극적으로 나타난 게 바로 창현과의 관계였다. 지난 일 년 의 고단한 나날 가운데도 또래의 공원들이나 조급한 신분 상승의 욕구를 약점으로 노리는 간부 또는 사용자의 유혹은 더러 있었다. 그러나 박원장에게 받은 상처 탓인지 스스로도 신 통할 만큼 냉담하게 그들을 외면해왔는데, 창현을 만나서는 갑자기 그런 절제력이 허물어져 버린 것이었다. 임금은 낮아도 건전한 일자리를 마다하고 다방으로 나설 때의 흐트러진 심리 상태나 스물 한 살로 접어들면서 한창 피어나는 몸도 영희가 앞 뒤 없이 창현에게로 다가가게 한 원인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아무래도 영희의 소공녀 의식에 꼭 맞아떨어지는 그의 귀족적인 용모라는 편이 옳을 듯하다. 우연을 가장해 가벼운 수인사를 나눈 뒤부터 영희는 대담하게 창현에게 다가갔다. 붙어 있을 때보다는 꺼져 있을 때가 더 많은 창현의 연탄불을 제 것처럼 보아주고 자주 거르는 끼니를 보살펴주는 것을 시작으로 그들의 관계는 급속히 진전되었다. 그러다가 창현이 지독 한 감기에 걸린 것을 계기로 드디어 둘은 한 방을 쓰다시피 하는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어 찌 보면 그 일 역시 또 한 단계의 전락일 수도 있었지만, 영희에게는 조금도 그런 느낌이 없었다. 창현과 함께 살게 되자 그에 대한 새롭고도 끈끈한 애집의 동기들은 오히려 추가되었다. 그 첫째는 타고난 듯한 창현의 성적인 기교였다. 겨우 동갑내기인 스물하나인데도, 그리고 그 방면의 경험도 특히 많은 것 같지도 않은데, 창현은 어떻게 하면 여자의 몸을 즐겁게 해 주는지를 잘 알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추상적인 부분이 남아 있던 영희의 성은 창현을 만나 완전히 구체화되었 으며, 영희는 비로소 자신이 한 온전한 여자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다음으로 영희를 창현에게 한층 더 얽매이게 한 것은 끊임없는 영희의 모성적인 보호 본능을 일깨우는 그의 무력과 무능이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혼자서 2년이나 객지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창현의 몸과 마음은 허약하고 여렸다. 젊은이다운 이상이나 패 기는커녕 살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악착스러움도 없어 어떤 때는 보름씩이나 색소폰을 불어 준 밤업소에서 돈 한푼 받지 못하고 쫓겨나기도 했다. 만약 자신이 버린다면 그는 며칠 안 돼 굶어죽거나 얼어죽을 것이라는 게 그 무렵 영희가 창현에게 갖고 있는 단정이었고, 그 때문에 영희는 더욱 창현에게 집착하게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경리로 출발한 영희가 겨우 두 달 만에 레지로 나서게 된 것도 창현과 무관 하지 않았다. 혼자라면 경리의 월급으로도 견딜 만했지만 둘의 생활에서는 더 많은 돈이 필 요했다. 무엇보다, 함께 세들어 사는 사람들이 빈정대는 눈길로 자기들을 보는 그 닭장 같은 월셋방이 싫었고, 가불에 가불을 거듭해도 언제나 허덕여야 하는 생활이 견딜 수 없었다. 그 리하여 모니카네 어머니에게서 끌끌 혀차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다방 레지로 옮겨앉고 말았 다. 적잖은 선금을 받아 불광동 산꼭대기일망정 아담한 셋방을 얻고 나니 한동안은 세상이 온 통 영희에게 미소를 보내는 듯했다. 둘이 함께 걸으면 젊은 여자들은 어김없이 부러운 곁눈 질을 보내는 창현과 떳떳하게 한방을 쓰며 신혼 부부 흉내를 낼 수 있게 된 게 그랬고, 나 아진 수입으로 전보다 훨씬 윤기 있게 꾸려갈 수 있는 살이가 그랬다. 창현이 이런 저런 핑 계로 일을 나가지 않고 아예 더부살이로 나와도 밤업소에 그를 뺏기는 시간이 없어진다는 것만으로 오히려 기뻐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는 가지 못할 행복이었다. 먼저 그런 생활을 즐기기만 할 수 없게 한 것 은 두 달도 안 돼 다시 영희를 괴롭히기 시작한 수입과 지출의 불균형이었다. 레지의 월급 이 많다고는 해도 그것이 당시의 여공이나 식모보다는 낫다는 뜻이지, 두 사람이 흥청거릴 정도는 전혀 아니었다. 함께 살면서 더욱 뚜렷해지는 창현의 여러 결함들도 영희가 그를 마냥 사랑과 이해로만 보게 놓아두지는 않았다. 하루종일 찻잔을 나르느라 발이 퉁퉁 부어 돌아온 사람에게 재떨 이까지 비우게 하는 그 지독한 게으름에다, 그러면서도 얼굴 가꾸기에는 여자인 영희보다 한술 더 떠, 먹기도 어려운 달걀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다시피 하는 것이며 그 염치없는 사치-정장만 하더라도 값비싼 넥타이핀에 커프스 버튼까지 갖춰야만 입을 수 있는 걸로 아 는 창현이었다. 그런데도 무엇이건 뜻대로 안 될 때 그가 짓는 특유의 미간 가득한 주름과 안쓰런 한숨은 영희의 여린 부분을 건드려 모성적인 보호 본능으로 그의 그 같은 결함을 깜 박 잊게 만들기 일쑤였다. 어렵더라도 그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어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 지 반짝반짝하게 다듬어진 그와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걸을 때 또래의 젊은 여자들이 자신에 게 보내는 부러움과 시기의 눈길에서 오는 묘한 만족감이 없었더라면 영희는 진작에 창현과 싸움을 벌여도 몇 번은 대판 벌였을 것이다. 거기다가 어쩔 수 없이 자신도 일을 나가게 된 뒤부터는 눈에 띄는 창현의 신경질... '돌아간다고? 집으로, 가족들에게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내가, 창현씨를 두고, 좀 힘들 어지기는 했지만, 아직은 쉽게 내던져버릴 수 없는 이 생활을 버리고...' 창현을 떠올린 영희는 다방에서와는 달리 그런 괴로운 물음에 빠졌다. 자신도 모르게 한 숨이 나오며, 천천히 거부의 감정이 일기 시작했다. 그만둔다고 생각하자 창현도, 그와의 생 활도 원래보다 몇 배나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과장되기 시작했다. '그래, 돌아갈 수는 없어. 미덥지는 못하지만 나는 이미 한 남자를 선택하고 그와 살고 있 어. 족두리는 안 썼어도 결혼은 한 거야. 어머니가 말했지. 여자는 시집을 가면 죽어서도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이제 내게 가족은 창현씨고, 내 집은 그가 있는 곳이며, 고향도 그의 고향이 곧 내 고향이야. 굳이 돌아가야 한다면 그건 돌내골이 아니고, 수원 어느 동넨 가 있다는 그 싸전이야.' 이윽고 영희는 무거운 도리질까지 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창현에 대한 집착이 다방에서 의 그 감동에 찬 결심을 녹여버린 것이었다. 한 번 결정한 것은 좀체 뒤집는 법이 없는 그 녀의 고집 센 성격으로 보아서는 제법 예외적인 번복이었다. 마음이 그렇게 정해지자 영희는 쓸데없는 감상을 털어내듯 소리내어 세수를 하고 이부자 리에 들었다. 창현은 일을 나갔으니 새벽이 되어야 돌아올 것이었다. 그런 날이면 아침 출근 전에 벌이게 되는 다급한 정사가 감미로운 기대로 잠깐 영희의 몸을 달아오르게 하다가 이 내 혼곤한 잠으로 이끌어갔다. 영희가 다시 할머니의 부름 소리를 들은 것은 그렇게 하여 어슴푸레 잠에 빠져들고 있을 때였다. "영희야-" 할머니가 꼭 방 윗목에 서서 부르는 것 같은 소리에 영희는 윗몸까지 벌떡 일으키며 사방을 돌아보았다. 그게 환청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아차린 뒤에도 이상하고 가슴 깊이 여운을 남 기는 목소리였다. 그 바람에 영희는 전에 없었던 새로운 계획까지 세워 자신의 결심을 한번 더 다지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맞아. 언제까지고 이런 식으로 지낼 순 없는 거야. 새벽에 창현씨가 돌아오면 수원 집으 로 한번 찾아가자고 해야지. 시부모 될 분들께 인사를 드려놓는 거야. 가능하면 조촐하게라 도 식을 올려달라고 그래봐야겠어. 정히 안 되면 창현씨를 졸라 혼인 신고라도 해둬야지.' 그런데 새벽에 돌아온 창현의 반응은 뜻밖이다 싶을 만큼 냉담하고 단호했다. "안 돼,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 어쩌겠다는 거야? 결혼 말도 꺼내기 전에 머리채를 잡혀 끌려나구 말걸." 그리고 혼인 신고 얘기를 꺼냈을 때는 전에 없이 발칵 성까지 냈다. "무슨 소리야? 나는 이제 겨우 스물 둘이라구. 계집 자식을 거느릴 힘도 없을 뿐만 아니 라 생각두 없어. 이렇게 사는 게 그리 마음에 걸린다면 집어치우면 되잖아? 집어치워 버리 자구!" 그런 그의 두 눈에는 작고 힘없는 짐승이라도 막바지에 몰렸을 때는 띠게 마련인 표독스 런 빛 같은 게 쏟아져 나왔다. 영희가 다시 한번 할머니의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은 그 의논이 결국 심한 말다툼으로 끝 나버린 그 아침의 출근길이었다. 쓰라린 배신의 예감에 불안하고 울적해져 아침 한술 못 뜨 고 질척한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는데 할머니가 어제보다 훨씬 구체적인 목소리로 불렀다. "영희야, 돌아가자. 나쁜 애들하고 그만 놀구... 저런 울었구나. 옷도 다 버리고, 에미는 걱 정 마라. 이 할미가 있잖니? 아무리 못된 것이라두 이 할미가 있는 한 널 마구잡이로 야단 치지는 못해..." 제2장 집으로 떠나는 사람의 설렘과 들뜸 탓이었을까, 전날 밤 늦게 잠이 들었건만 철이 눈을 뜬 것은 새벽 네시 반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귓전에 통금 해제 사이렌 소리가 남아 있는 게 어쩌면 그 소리에 깨어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방안에 불이 밝혀져 있는 게 이상스러워 주위를 둘러보니 실장인 성춘이 형이 담요를 뒤 집어쓰고 공부를 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입학 시험에 1등을 해서 장학금을 타거나 육 군 사관학교같이 먹고 입는 걸 대주는 대학교가 아니면 진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3학년 들 어서는 거의 밤샘을 하다시피 공부에 빠져 있는 그였다. "벌써 일어났어? 그렇게 일찍 떠나야 돼?" 철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를 들었는지 성춘이 형이 보던 책을 덮으며 물었다. 평소와는 달 리 따스한 정이 밴 목소리였다. 떠난다는 것, 이제 더는 함께 있지 않게 된다는 것이 그처럼 차갑고 매서운 성격에도 어떤 영향을 미친 듯했다. 평소에는 그가 눈살만 조금 찌푸려도 가 슴이 얼어붙는 듯한 두려움을 느끼는 철이었다. "기차는 여섯시지만 한군데 들를 데가 있어나서요..." 성춘이 형에게 나무라는 기색이 전혀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철은 절로 변명조가 되어 말 끝을 흐렸다. 그가 읽던 책을 가만히 덮고 철이 쪽을 보았다. 그 또한 무엇을 살피거나 노려 보는 것과는 전혀 무관했지만, 철은 공연히 허둥대며 담요를 개고 옷을 걸쳤다. "들은 얘기다만 정말로 네가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고향에는 중학교도 없다며? 이제 몇 달만 더 고생하면 졸업인데..." 성춘이 형이 다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팽팽한 긴장으로 오직 자 신만을 살펴보며 지내는 듯한 그에게서 그런 말을 듣다 철은 갑작스레 가슴 찌릿한 감동을 느꼈다. 형이라고는 불러도 언제나 가혹한 체벌자 또는 작은 폭군으로만 느껴온 그라 자신 에게 보내준 그 사소한 관심이 더욱 감동적이었는지도 몰랐다. "가까운 데 어디 중학이 있을 겁니다. 안 되면 명양이나 안광같이 가까운 읍으로 나가는 수도 있구요." 철이 그렇게 대답하며 전날 밤 챙겨둔 책가방을 집어드는데 조금 전 까지도 코를 골던 정 현이 녀석이 부신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으으, 철이 너 벌써 가는 거야?" 잠 많기로 이름난 녀석이 그 정도의 수런거림에 눈을 뜬 걸로 보아 녀석도 철이와의 이별 을 위해 엊저녁 다짐과 긴장 속이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학년은 같아도 나이는 한 살 많 은 고아로 철이와는 비교적 잘 지낸 사이였다. "그냥 자. 학교 가서 졸다 혼나지 말구." 철이 그 말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원장 아버님께 인사드리기 전에 수원이 형부터 보구 와." 성춘이 형이 다시 책을 펴며 지나가는 소리로 말했다. 얼핏 보기에는 그 말로 인사까지 때워버리려 하는 태도였다. "어어, 철아... 같이 가." 정현이가 허둥지둥 옷을 꿰며 아직도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철을 잡았다. "그냥 자라니까... 어쨌든 수원이 형부터 보구 올게." 철은 그렇게 말하며 방을 나왔다. '바들로매실,' 그 방에서 지낼 때는 무심히 읽고 지나치 던 팻말이 갑자기 무슨 심각한 뜻이라도 담긴 말처럼 철의 두 눈을 찔러왔다. 손바닥만한 베니어판에 검은 칠을 하고 그 위에 흰 페인트로 글씨를 쓴 팻말로 나무 문틀 안팎에 하나 씩 막혀 있는 것이었다. 이제 이 문을 드나드는 것도 마지막이구나-철은 문득 집으로 돌아 간다는 설렘과 들뜸으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별의 비감에 사로잡혀 나오려던 방안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성춘이 형과 정현이말고도 그 방안에 누워 있던 다른 네 명의 아이들이 그제서야 철의 눈에 들어왔다. 중학교 1학년 아이 하나와 국민학교 5학년, 3학년, 2학년 셋 인데, 모두 군용 담요를 둘둘 말고 한잠에 빠져 있었다. 함께 지낼 때는 협조 관계보다 경쟁관계에 더 잘 빼지고, 호감보단 적으로 보게 되는 일 이 잦았던 그 아이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서 영원히 떠나간다고 생각하자 해방감보다는 이탈감이나 고립감이 먼저 일었다. 떠나는 날 새벽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과 형제였다는 것이 실감으로 닿아온 셈이었다. 불현듯한 정으로 넋잃은 듯 방안을 둘러보던 철은 성춘이 형과 정현의 의아롭게 여기는 눈길을 받고서야 복도로 나왔다. 30촉짜리 백열등 두어 개가 희미하게 빛나는 복도 양쪽에 는 예수의 열두 제자 이름이 아까와 같은 팻말에 얹힌 채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베드로실' '요한실' '마태실' '누가실'... 철은 거기서 새어나오는 곤하게 코고는 소리를 들 으며 복도 끝에 있는 층계로 갔다. 그 시각 틀림없이 예배실에 있을 수원이 형을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수원이 형은 그 고아원의 특이한 식구였다. 그는 고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직원도 아니 었다. 그는 원래 넉넉한 상회의 아들로 그 재주 때문에 일찍부터 읍내에 잘 알려진 사람이 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이 나라 제일이라는 중학교에 합격해 서울로 올라간 그는 다시 우수한 성적으로 같은 계열의 고등학교에 진학해 여러 사람의 기대와 선망을 샀다. 그런데 대학 진학을 앞두고 뜻밖의 선택을 했다. 당연히 서울대로 진학해 법관이나 의사 가 될 줄로 알았는데 갑자기 신학대학교를 지원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원 래 교회와 신앙에 그렇게 적대적인 사람은 아니었으나 아들의 그 같은 선택에는 낙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달래도 끝내 아들이 생각을 바꾸지 않자 기대는 실망과 분노로 변해 의 절을 선언하고 말았다. 수원이 형이 그 고아원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바로 그 말썽 많은 신학대학교 진학 때문 이었다. 그가 부모에게 버림받자 소문을 들은 읍내 교회가 그 뒤를 보살펴주게 되었는데, 여 러 장로 중에 가장 재력 있는 장로인 고아원 원장이 사실상 그를 떠맡았다. 인철이 그 고아 원에 맡겨지기 서너 해 전의 일이었다. 그 뒤 그는 방학이 되면 자기 집 대신 그 고아원에 돌아와 직원도 아니고 원생도 아닌 어 정쩡한 신분으로 머물다 갔다. 그러다가 대학교 삼학년 때 폐결핵을 얻어 고아원으로 돌아 오게 되었는데 그 어떤 이유에선지 병이 거의 나은 것같이 보이는데도 그때까지 신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때 인철이 들은 얘기와 나중에 알게 된 것들을 종합해보면 그는 아마도 실천실학 쪽으 로 기울어져 있었고, 특히 가가와 도요히코에 깊이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인철에게는 그가 며칠씩 그때만 해도 여기저기 소집단으로 남아있던 나환자촌이나 흔히 '걸버시마(거지 마 을)'라 부르던 빈민촌에 함께 어울려 지내는 걸 인상 깊게 바라본 기억이 있다. 듣기로 그가 폐결핵에 걸린 것은 신학생 시절의 지나친 독서와 고행에 가까운 조의조식 때문이었다고 한 다. 뒷날 그런 수원이 형은 인철의 출세작에서 한 강렬한 개성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날 수원이 형이 인철의 가장 중요한 작별의 대상이 된 것은 그런 추상적인 감동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인철이 그 고아원에 머무르는 동안 베풀어준 따뜻한 보살핌의 눈길이 누구보다도 그와의 이별을 의미 있게 만들었다. 인철이 바깥에 있을 때부터 그에게 특이한 감정을 품었던 것처럼 수원이 형도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수용된 인철에게 별난 보호 의식을 품었음에 분명했다. 그때의 고아원은 전후 의 살벌한 사회 분위기가 반영된 혹독한 내부의 위계나 규율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인철에 게는 그 적응이 쉽지 않았다. 형제라고 부르기는 해도 형이기보다는 일쑤 작은 폭군 혹은 착취자로 군림하던 손위 아이들, 턱없이 엄한 규칙들과 과다한 작업량, 그러면서도 언제나 허기를 못 벗게 하는 급식과 얼어죽는 걸 겨우 면할 정도의 난방이 원생들에게 보장되는 전 부였다. 그리하여 인철이 이제는 더 못 견디겠다, 싶을 때면 어김없이 그가 나타나 그 가장 힘든 고비를 넘기게 해주었다. 인철이 또래보다 더 많은 책을 읽게 된 것도 실은 수원이 형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가 여 기저기 편지를 내고 몇 날 며칠 읍내를 돌아 얻어온 책들로 작은 도서관을 마련하고 인철에 게 그 관리를 맡김으로써 인철은 시도 때도 없이 불려나가야 하는 잡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 을 뿐만 아니라 눈치보지 않고 책을 읽을 기회까지 잡을 수 있었다. 그 방법은 알 수 없지 만 인철이 원생들끼리의 무자비한 위계질서에서 다소 예외적인 위치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것도 틀림없이 그가 나이든 형들을 설득해준 덕분이었다. "뒷날 우레처럼 떨쳐 울릴 사람은 먼저 구름처럼 떠돌지 않으면 안 된다. 네 전기의 무대 가 바뀌는 걸 너무 겁내지 마라." 인철이 막상 학교를 그만두려니 겁나 집으로 돌아갈까말까를 두고 망설이며 물었을 때도 그는 그렇게 격려해주었는데 그 말은 뒷날 성년이 되어서도 인철이 즐겨 자신을 격려하는 말이 되었다. 수원이 형은 짐작대로 썰렁한 예배실 바닥에 엎드려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철은 짐짓 발 소리를 크게 해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기도에 열중해 있어 못 들었는지 철이 다 시 가벼운 헛기침을 두어 번 했을 때야 구개를 들고 돌아보았다. "철이냐? 이제 가려구?" 그가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어떤 종교적인 감동에 젖어 있었던지 그런 그의 두 볼에는 눈물 자국이 번들거렸다. "네에, 그 동안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철은 저도 몰리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맙기는... 어쨌든 잘 가라. 어디를 가든 하느님을 잊지 말고." "네에..." "물론 나도 네가 진심으로 하느님을 믿고 있지 않다는 건 안다. 그렇지만 또한 네가 간절 히 믿고 싶어하는 것도 알고 있다. 특히 그 마음을 잃지 마라." "알겠습니다." "신을 믿고 싶어한다는 것은 신이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고, 신이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세계와 인생에 어떤 목적과 질서가 있어주기를 바란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세계와 인생에 어떤 목적과 질서가 있어주기를 바란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너 또한 거기에 맞춰 선량하고 겸손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뜻이기도 하다." "잘 기억하겠습니다." "부디 쉽게 하느님을 체념하지 마라. 이 말만 기억해주면 그 동안 너에게 쏟았던 내 작은 정성은 충분히 보람을 거둔 셈이 된다. 그럼 그만 가 봐라. 나는 좀더 드려야 할 기도가 있 어서..." 그는 아직도 기도중의 열정에서 깨나지 않았는지 그렇게 내쏟듯 말해 놓고는 다시 마룻바 닥에 엎드렸다. 무슨 심각한 의식 같은 것까지 상상하며 찾아간 철에게는 너무도 싱거운 이 별이었다. 비록 그가 한 말들은 중학교 3학년에게는 좀 무거운 의미에 찬 것이었으나, 그와 의 오랜 언어 훈련으로 철에게는 그리 대단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보다는 좀더 의미심장한 작별의 발과 감동적인 몸짓을 기대한 철이로서는 은근히 섭섭하기까지 한 그의 태도였다. "안녕히 계세요. 그럼..." 철은 이내 기도에 빠져든 수원이 형의 등줄기에 나지막하게 작별인사를 던지고 예배실을 나왔다. 복도에 내려오니 성춘이 형과 정현이 외에 경렬이가 더 나와 있었다. 경렬이는 베드 로실에 있는 같은 반 아이로 그 고아원 안에서는 철이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수 원이 형 때문에 감정이 시들해진 탓인지 그가 그렇게 깨어나준 게 특별히 고맙지도, 어쩌면 두 번 다시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를 그와의 이별이 전날 밤의 상상에서처럼 슬프지도 않았 다. 그들의 목소리 죽인 배웅을 받으며 원장 사택으로 가니 원장은 읍내 교회에 새벽기도 인 도를 가고 없었다. 원장은 뒷날 고아의 수습이 전 같지 못하고 외국의 구호 물자와 원조마 저 현저히 줄어들자 재빨리 고아원을 유치원으로 개조해 팔아넘기고 미국으로 이주해버린 직업적인 사회사업가였다. 그런 만큼 고아들과 살가운 접촉은 없었으나 오랫동안 아버지라 불러온 까닭인지 인철은 그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떠나는 게 적이 섭섭했다. 작은 아버지라고 불리는 총무 선생이 불편한 다리를 이끌며 나와 원장을 대신했다. "형님은 네가 어디를 가든지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수원이 형과는 달리, 교회에 나가기를 싫어하던 철을 나쁘게만 이해하고 있는 원장다운 작별 인사였다. 총무는 거기에다 자신의 충고를 덧붙였다. "나도 네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사람은 어디를 가든 모여 살게 마련이다. 그럴 때 겉 돌지 말고 제 할 일을 남에게 미루지 말아라. 네가 조금만 더 여기 있다면 그 점만은 확실 하게 고쳐주었을 텐데..." 그 동안 그렇게도 철을 괴롭혀온 그의 악의가 가장 온건하게 표현된 말이었다. 그러나 그 게 마지막 이별이라 생각하니 그를 향해 음험하게 타오르는 원한의 불꽃마저도 스러지는 것 같았다. 철은 아무런 반발 없이 꾸벅 머리까지 속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제서야 총무 선생도 잊고 있었던 일을 생각해낸 듯 뒤늦은 사과의 뜻을 보냈다. "그 동안... 내가 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백 명 가까운 아이들을... 바깥 세상의 죄악으로 으로부터 지키려 하다 보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어쨌든 이제 헤어지는 마당이니 모두 잊 자. 그럼 잘 가거라." 언제나 단단한 회초리를 들고 매서운 눈초리로 구석구석을 살피며 새벽부터 한밤까지 고 아원을 돌던 그 비뚤어진 독신자. 전쟁중에 다친 오른쪽 무릎 때문에 특이하게 들이던 그의 나무 게다짝 끄는 소리만 들려도 고아들은 오금이 얼어붙었다. 그의 짐작할 수 없는 희로, 아이들의 사소한 잘못과는 현저하게 군형이 깨진 그 가혹한 체벌, 인철도 그의 회초리에 한 번 종아리가 찢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날의 가해가 더는 증오스럽지 않은 것처럼 갑작스런 호의도 특별히 감동스럽 지 않았다. 철은 마땅히 치러야 할 절차를 치르는 기분으로 그와 작별하고 정확히 이 년 반 전 옥경과 함께 걸어들어갔던 고아원 정문을 이번에는 홀로 걸어나왔다. 밖은 안개가 자욱한 5월 초순의 새벽이었다. 철은 인적 없는 들판 사이로 난 길을 서둘러 걸었다. 이어 나타난, 이제 막 깨나기 시작한 마을의 골목길을 지나 강둑 위에 오른 뒤에야 철은 비로소 자신이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거기에 오르기만 하면 습 관처럼 건너보던 강 저쪽 명혜네 집은 강심에서 피어오르는 자욱한 안개 때문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애틋한 추억의 장소에서 치러야 할 이별의 의식이 은연중에 그를 몰아댄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 년 반이나 몸담았고 뒷날까지도 그의 정신에 몇 가지 깊은 자국을 남긴 그 고아원과의 이별에 그토록 훌훌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런 까닭에서였으리라. 안개와, 그로 인해 더욱4 늦게 걷혀지는 듯한 새벽 어스름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건 만, 철은 한동안 둑길 위에 멈춰 서서 강 건너를 바라보았다. 선명한 기억은 짙은 안개와 새 벽 어스름을 젖히고 실제보다 더욱 뚜렷하게 명혜네 집을 철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회색 담 위로 연기 꼬리처럼 휘감겨 올라간, 끝만 솟아있는 향나무에 어울리지 않게 큰 히말라야시 더와 몇 그루 감나무의 윗부분이 보이고, 그 뒤로 그저 거무스레하게만 느껴지던 마름모꼴 생철로 이은 지붕이 저녁 햇살에 곧잘 빨갛게 빛나던 이층 창틀과 함께 아련히 떠올랐다. 사실 그 집과의 이별은 그 며칠 철의 상상 속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 연출된 것이었다. 그 집 자체보다는 명혜때문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이 난 순간 철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명혜였다. 고아원에서 지내는 동안 철은 그애가 밀양에 돌아와 있는 방학때만 되면 혹시라도 그애와 마주치게 될 까봐 거리에 나가는 것조차 피했다. 자신의 초라하고 처량한 몰골을 보이게 될까 두려워서 였다. 딱 한번 고아원 농장에서 다른 아이들과 당근을 뽑다가 근처 포도원에서 오빠와 함께 나오는 그애와 마주칠 뻔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먼저 본 철이 뽑아놓은 당근 더미 뒤로 숨 어버렸다... 어쩌면 두 번이나 시도된 가출도 명혜에 대한 철의 감정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명혜의 도시에 참담하게 전락한 자신을 그냥 두어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쓰라린 실패에도 불구하고 거듭 철에게 가출을 시도하게 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따라서 철의 그 같은 의식적인 경원은 그전부터도 조금씩 추상화돼가던 명혜를 더욱 급속 히 추상화시켜, 그 무렵은 이미 그애에게 피와 살이 있는가조차 애매해져 있었다. 거기다가 고아들과 함께 먹고 자고 하면서도 그들 집단의 문화에는 적응하지 못해 끝내 외톨로 겉돌 다가 고아원을 떠나야 했던 철이, 그곳의 괴로운 생활을 잊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읽었던 소 설과 그렇게 자주 빠져들었던 망상도 명혜를 추상화하는 데는 한몫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곳을 떠나게 되자 이제야말로 영영 그애와는 못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으 로 철은 갑작스레 괴로워졌다. 그리고 그 괴로움은 곧 흔치 않은 용기로까지 변해 마침내 철에게 그대로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하게 했다. 마음만 먹었다면 더 빠를 수도 있었던 출발의 날짜를 굳이 일요일인 그날로 미룬 것도 실 은 그 다짐에 힘입은 바 컸다. 어쩌면 그애가 집으로 돌아와 있어 무언가 인상 깊은 이별의 의식을 치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장한 것은 혼자만의 용기와 다짐이었을 뿐 현 실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상상 속에는 그렇게 수월했던 전날 밤의 그애네 집 방문은 진땀나는 망설임 끝에 포기되고, 이별의 의식은 그 아침으로 미뤄지고 만 것이었다. '정말로 명혜는 집으로 돌아와 있을까. 있다 해도 전처럼 단둘이서만 만나볼 수 있을까.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오리라는 약속과 언제까지고 잊지 않고 기다려주리라는 다짐을 주고받 을 수가 있을까...' 철은 간밤 이미 남의 집을 찾기에는 늦어버린 시간이란 걸 깨달은 뒤에도 괴롭게 거듭했 던 혼자만의 중얼거림을 다시 되뇌었다. 그래도 그 아침의 기대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잠들 었으나 막상 그 아침이 되어 생각하니 일은 한층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당일로 돌내 골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아침 여섯시 기차를 타야 하고, 여섯시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늦어 도 다섯시 반 출발의 역전행 버스를 타야 했다. 그렇다면 명혜네 집을 찾는 것은 다섯시 반 전이 되는데, 그때는 아직 집 안의 누구도 깨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불가능할 때 더욱 치열해지는 것도 인간의 열정이 가득 한 특성일까, 분명히 간밤 보다 더욱 가망 없어졌음을 깨달았으면서도 철은 한층 집요하게 명혜와의 이별에 매달렸다. 그것 없이는 밀양을 떠날 수 없는 무슨 신성한 의식 같은 느낌이 들며, 전의와도 흡사한 결행의 각오가 다져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걸음을 떼어놓을 무렵에는 죽음을 앞둔 불치병의 환자가 흔히 시도하게 된다는 '신과의 거래'나 다름없는 중얼거림까지 덧붙이고 있 었다. '주여, 만약 여러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당신이 정말로 계신다면 이제야말로 제게 증명해 보이실 때입니다. 그애를 깨우소서. 그리고 이게 우리들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다 짐할 수 있게 해주소서. 당신의 섭리는 그리하여 제게 뚜렷해질 것입니다...' 뒷날의 언어로 정리하면 대략 그렇게 될 내용이었다. 이제 보면 과장스러울 수도 있겠지 만 사랑, 특히 열여섯 소년의 첫사랑은 그 순수만으로도 죽음의 무게에 견줄 수 있을 것이 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란 히브리인들의 구절도 그 조숙했던 성문화의 순수성을 경구 화한 것은 아닐는지. 그 거래의 효험은 이내 나타났다. 갑자기 짙은 안개 둑길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소리 가 들렸다. 그곳이 바로 몇 년 전 어느 눈 오던 밤의 기적 같은 만남이 이루어진 곳이라는 걸 퍼뜩 떠올린 철은 부르르 몸까지 떨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이 틀림없이 명혜일 것이라 는 단정에 이어 두 사람을 굳게 묶고 있는 섭리의 끈을 확인한 감격이 갑작스레 그의 두 다 리를 마비시킨 것이었다. 이윽고 발자국이 주위의 형체를 알아볼 만한 거리로 다가왔다. 안개를 헤치듯 희뜩희뜩 다가온 것은 새벽잠에서 섭리에 이끌려 나온 명혜가 아니라 아침 산책을 나온 동네의 늙은 이였다. 철은 눈물이 핑 돌 만큼 서운했지만 신과의 거래가 준 효험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 서운함이 오히려 그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막연하기 그지없었던 희망- 명혜를 한번 보았으면 하는-을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바꾸어놓은 까닭이었다. '나의 베키오 다리...' 뱃다리거리에 이른 철이 다시 그렇게 중얼거린 것도 그런 확신에서였다. 음울한 세월과의 싸움에서 가장 유효했던 무기인 마구잡이 독서는 벌써 철에게 단테와 베아트리체와 베키오 다리를 알게 해주었다. 철은 이제 자신이 올라선 다리도 명혜가 나타남으로써 그들의 베키 오가 될 줄 굳게 믿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니었다. 긴 다리를 다 지나도록 두어 번의 환청 뿐, 철이 마주친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그 바람에 다리를 다 건너설 무렵에는 안개보다 눈에 괸 눈물 때문에 발 길이 비척거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철은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명혜네 집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 사이에도 몇 번의 환청은 있었으나 결국 명혜는 나타나지 않은 채 그애네 집이 먼저 다가왔다. 고아원에서 지 내는 동안 그 곁을 지나는 것조차 꺼려 퍽 오래간만이었으나 안개 속에 희뜩희뜩 보이는 겉 모습은 별로 변함이 없었다. 철은 샛골목으로 들어가 문을 두드리기에 앞서 먼저 정원부터 둘러보았다. 키보다 훨씬 높은 담이 둘러쳐져 있었으나 그 위로 비죽이 솟은 정원수 끝만으로도 담 안의 풍경이 보이 는 듯 머릿속에 떠올라왔다. 손바닥만한 연못을 둘씩이나 끼고 있던 작은 동산. 그애네 아버 지가 몹시 아끼던 뒤틀린 등걸의 향나무, 감꽃을 따기도 하고 그네를 묶기도 했던 큰 단감 나무 두 그루, 그리고 거기서 군데군데 벌건 흙이 보이던 여남은 평의 잔디밭을 건너면 여 름철 그토록 시원한 그늘을 주던 키높은 히말라야시더가 위풍 좋게 서 있고, 그 곁 창고- 그곳에 쌓인 잡동사니를 뒤지다 보면 무언가 하나는 쓸 만한 어린 날의 놀잇감이 나왔다... 그런 것들에 이어 그곳에서의 갖가지 추억들이 여름날의 궂은비처럼 철의 가슴을 후줄근 히 적셔왔다. 철은 자신이 왜 거기 왔는지도 잠시 잊고 정원 쪽의 철대문에 붙어서서 이제 는 까마득한 옛날같이만 느껴지는 그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에 잠겼다. 바깥에서는 단순해서 지루하거나 거칠어서 마음이 안 내켰지만 그 작은 천국에서는 거짓말같이 즐겁고 신나던 그 온갖 놀이들, 언제나 명혜에게 지기만 하는 철에게 항의하던 병우의 심술난 목소리, 그리고 영롱한 구슬들을 자갈밭에 흩뿌리는 듯한 명혜의 웃음 소리... 그 동안 철이 그토록 철저하 게 자신의 영락한 모습을 명혜에게 보이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럼으로써 자신이 언제까지고 행복했던 시절의 어린 왕자로 기억되기를 바라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발소리도 못 들었는데 갑자기 철대문의 빗장을 뽑는 귀에 거 슬리는 소리가 철을 후줄근한 감상에서 끌어냈다. 화들짝 놀란 철은 철대문에서 한 발이나 물러섰다. 이제야말로 명혜로구나- 깜박 잊고 있던 확신이 되살아나며 철은 그런 단정으로 가슴까지 두근거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니었다. 철대문을 열어제친 것은 실망스럽게도 그 애네 아버지였다. "어, 니 철이 아이가? 우야, 니가 여다 웬일고? 새북(새벽)같이..." 명혜 아버지가 젊을 때는 안경을 끼고 지내다가 나이들어 벗게 된 사람 특유의 우묵한 눈 길에 놀라움을 담아 물었다. 철은 잠시 당황했으나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대답했다. "이제 여기를 떠나게 되어...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떠나다이, 어디서 어딜..." 그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어머니한테요. 고아원을 떠나..." "엉이? 그럼 니가 안죽(아직) 그 고아원에 있었더란 말가? 작년에 너 그 어무이하고 옥경 이하고 같이 떠난 기 아이고?" "네에, 학교 때문에- 고향엔 중학교가 없어서..." 그러자 갑자기 그의 얼굴이 굳어지며 잠시 말이 없었다. 성이 났다기보단 무언가를 후회 하고 있는 눈치였다. "니가- 안죽 그 고아원에 있었더란 말이제? 일 년이 넘도록 호븐차(혼자)..." 이윽고 아저씨가 그렇게 더듬거리더니 다시 숨김 없는 사죄의 어조로 이었다. "내가 무심했데이. 암것도 아인 일 가지고- 어린게 일 년이나 호븐차 고생하고 있는데 한 번 딜따(들여다)보지도 안 했으이... 동영이가 이 일을 알문 얼매나 섭섭하겠노? 자, 들어가 자." "저는 여섯시 기차를 타야 합니다. 오늘 중으로 돌내골에 돌아가려면..." 마음 같아서는 앞장서서 집 안으로 달려가보고 싶었지만 느닷없는 쑥스러움으로 철은 그 렇게 사양했다. 흘끗 손목시계를 본 명혜 아버지가 철의 옷자락을 끌 듯 말했다. "그라믄 요 앞에서 다앗시 반 버스를 타믄 안되나? 보자, 인자 다앗시 십분이니께는- 시 간은 있다. 너한테 아무것도 해준 거는 없다마는 아주무이는 보고 가야 안되겠나? 마침 부 산 아이들도 와 있고- 아죽 깼는지는 몰따마는..." 부산 아이들, 하는 소리가 벼락치듯 귓전을 울리며 망설이던 철을 대문 안으로 끌어들였 다. '명혜가 돌아와 있다...' "그래, 너그 고향은 우예 된 기고? 그기 무신 얘기고? 거다서 뭔 수가 났다 카드나?" 앞서가던 명혜 아버지가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직 귓전이 웅웅거리는 대로 철은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영락이 끝났음을 명백히 해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명혜에게 직접 말할 기회가 없으면 그를 통해 간접으로라도 알려야 할. "어머님이 그 동안 고향에서 우리 땅을 많아 찾았다고 합니다. 밭만 해도 한 3만 평 된다 던데요." "뭐시라? 너한테 아직 그마이 큰 땅이 남았드란 말가? 니 밭 3만 평, 그기 얼마나 큰 긴 지 아나?" "3백 마지기라데요. 위토라서 남아 있던 거라던가..." 철은 그 땅이 이제부터 개간해야 될 야산이란 걸 빤히 알면서도 그렇게 능청을 떨었다. 명혜 아버지는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까지 갸웃거리며 말했다. "암매(아마) 니가 뭘 잘못 안 기겠제. 글치만 우예튼 반갑다. 못됐다카는 거보다야 잘돼 간다는 기 낫제. 그라고 보이 너그 큰생이(형) 제대도 다돼가제 암매." "네. 다음달이에요. 그리고 누나도 돌아온댔어요. 돌내골 옛날 집도 찾게 된다던가..." 철은 그가 잘 믿어주지 않는 데 다급해져 그런 자신없는 추측까지 덧붙였다. 따로 만나 얘기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명혜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 동안의 나는 다만 미운 오리 새 끼였고, 이제 곧 백조가 되어 날게 되리라는 걸. 아니, 나는 저주받은 왕자였으나 이제 그 저주가 풀려 나의 영지로 돌아간다는 걸. 그러나 명혜 아버지는 기껏해야 되찾은 밭이 조금 있다는 정도로밖에는 더 알아주지 않는 눈치였다. 이렇다 할 대꾸 없이 정원 층계를 내려가더니 방 쪽에 대고 덤덤하게 소리쳤다. "봐라, 자나? 일랐으믄 여 쫌 나온나. 철이가 왔다." "무신 일인교?" 명혜 어머니가 아직 잠에서 덜 깬 얼굴로 방문을 열고 내다보다가 철을 알아보고 놀란 얼 굴로 물었다. "엉야? 이기 누고? 철이 아이가? 첫새북에 어디서 오는 길이고?" "어디서는 어디라? 안죽꺼정 고아원에 있었다 안카나? 인자 저그 집으로 간다고 인사하로 왔다." 명혜 아버지가 왠지 비난 섞인 어조로 그렇게 철을 대신했다. 그제서야 그녀도 놀라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애매한 미소로 옷깃을 여미며 방을 나왔다. "우야꼬? 니가 여직껏 거기 있었다꼬? 글타 카믄 어째 글케 안 빗노(보였노)? 나는 니가 벌씨로 어디 갔뿐 줄 안알았나?" 그런 그녀의 변명 섞인 말을 명혜 아버지가 다시 퉁을 놓듯 받았다. "그래, 내가 함 알아보라 안카더나? 그런데 뭐시라? 벌씨로 모두 싸말아갔뿐 기라꼬?" "아이고, 야도 인자 보이 참 모사운(무서운) 아데이. 암만 우리가 해준 기 없다 캐도 그길 이(그토록) 여기 있으면서 우예 코빼기도 함 안 비겠노?" 명혜 어머니가 남편의 은근한 비난을 그렇게 철에게로 슬쩍 떠넘겼다. 제 처량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요. 특히 명혜에게-철은 하마터면 그런 대답을 입 밖 에 낼 뻔했다. 하지만 또 다른 종류의 조숙은 그런 대답이 어른들을 기분좋게 해주지 못한 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쓸데없는 정직을 가로막았다. "공연히 걱정을 끼쳐드릴까봐요." 잠깐 동안의 궁리 끝에 그렇게 대답하자 명혜 어머니가 얼른 그 말을 받았다. "걱정은 무신... 우쨌든 니가 우예 됐는지 알아야 할 거 아이가? 니 호븐차 거다 남아 있 는 줄 진작 알았으믄 우리가 무신 수를 내도 내보제. 니를 집에 데불꼬 있는동 우째든동..." 명혜 어머니는 자신이 정 없는 여자여서 철이 고아원에 남아 있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한 게 아님을 그렇게 강조해놓고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혹, 니 먹은 맘이 있어 일부러 코끗데기(코빼기)도 안 빈(보인) 거는 아이가? 우리가 이 마이 살미(살면서) 느그 식구들이 산지사방 흩어져 떠댕기는 거 몬 본 척했다꼬..." "아녜요. 그건 정말 아닙니다." 그런 철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어머니는 자기들을 그곳으로 불러놓고 일 연도 안 돼 못 본 체한 영남여객들을 은근히 원망하는 눈치도 있었지만, 철은 한번도 자기들의 불행에 그 집의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주 뒷날까지도 철은 그들 내외를 언제나 감 사와 그리움으로 떠올렸는데, 그것은 명혜와는 거의 무관한 진정에서 우러난 느낌이었다. 철이 진심으로 말하고 있음을 이내 알아차린 명혜 어머니가 갑자기 자신에 차 이번에는 남편 쪽을 힐끔힐끔 보아가며 말했다. "글체, 나도 니가 글케 속이 까꾸질랑한 아아는 아인(아닌) 줄 알았다. 가난 구제는 나라 도 몬 한다꼬, 우리따나는 한다꼬 했는 기라. 그건 글코- 그래 우예 이래 갑작스럽게 떠나 게 됐노? 그라고 잡으로 간다이 어디 말이고?" 그 다음부터는 그런 작별에 흔히 있는 순서였다. 명혜 어머니의 여자다운 캐묻기에 철의 좀 부풀린 대답이 있고, 다시 그녀가 행운을 빌어주고, 철이 마지막 감사와 인사말을 하고... 그러나 그렇게도 마음 죄며 기다리는 명혜네 남매와의 작별은 끝내 포함되지 않았다. "그럼 잘 가거래이. 공부 잘하고 훌륭한 사람 돼야 한데이..." 이윽고 명혜 어머니가 무슨 잔인한 선고처럼 그렇게 말했다. 마지막까지 기대를 걸었던 명혜 아버지도 '부산 아이들' 일은 까맣게 잊었는지 음울한 작별 인사 한마디만 보탤 뿐이었 다. "꼭 성공해야 한데이. 너그 아부지를 보나따나..." 그렇게 되면 그냥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갑자기 콧마루가 시큰하며 눈앞이 뿌옇 게 흐려졌다. 그 얼마 전까지의 흔들림 없던 확신이 여지없이 무너져내린 까닭이었다. 결국 은 그애를 만나지 못하고 떠나게 되는구나. 어쩌면 이것이 그애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이 별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럼, 안녕히들 계세요." 철은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서둘러 그 한마디를 그들 내외에게 던진 뒤 꾸벅 절을 하고 허둥지둥 돌아섰다. 솟는 눈물 때문에 정원으로 올라가는 돌층계가 제대로 안 보일 지경이 었다. 용케 넘어지지 않고 정원을 지났지만 철문을 나와 그 집을 벗어나자 그때껏 소리없이 솟 던 눈물은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이 되어 터져나왔다. 철은 그 집 담벽에 기대서서 한동안을 제법 흐느끼며 울었다. 자칫 지나치게 느껴질지도 모를 그 울음에 대해서는 뒷날 그의 어떤 자전적인 글에 짤막하게 풀이되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때의 내 울음은 첫사랑과의 허망하기 그지없는 그 이별이 준 슬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토록 격렬한 울음의 형태를 띠게 된 데는 그전 몇 년 의 쓰라린 자기 절제에 대한 반작용이 더 큰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순수했기에 더욱 애틋 했던 그 숱한 그리움과 기다림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애가 돌아오는 방학이 되면 나는 그 야말로 초인적인 인내로 그애와 만나는 걸 피했다. 그렇다고 우리 집과 그애네 집의 인연이 아주 끊어진 건 아니어서, 핑계를 대면 얼마든지 그 집을 드나들 수 있고 그애와도 만날 수 있었지만, 정말이지 나는 그애에게만은 멸시당하고 천대받는 고아원 아이로서의 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대신 언젠가 내 처참한 영락이 끝났을 때 그애가 마지막으로 본 나보 다 훨씬 빛나고 멋진 모습으로 그애 앞에 나타나 그 쓰라린 자기 절제의 세월을 한꺼번에 앙갚음하려 했던 것인데- 그 찬란한 날은 기약 없이 미뤄지고, 그렇게 다시 나타나리란 다 짐조차 주지 못한채 그애에게서 멀리 떠나게 된 것이었다. 거기다가 그 순간 나를 사로잡은 불길한 예감도 그때의 내 감정을 과장하는 데 한몫을 거 들었다. 내가 품고 있는 사랑은 어쩌면 이 땅 위에서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게 운명지어져 잇는지도 모른다는 갑작스런 예감이 내 슬픔의 분출을 더욱 걷잡을 수 없게 한 것임에 틀림 없었다...》 철이 어느 정도 진정을 되찾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야아, 니 와 그라노? 무신 일로 새북부터 그리 슬피 우노?" 철이 정신없이 울고 있는데 누군가 와서 들을 쓸며 물었다. 그제서야 황급히 눈물을 씻고 보니 마침 그 앞의 둑길을 지나가다 멈춰선 듯한 어떤 아주머니였다. "아녜요. 아무것도... 그냥 가세요." 당황이 까닭 모를 분노가 되어 철의 말투를 방금 흐느끼던 아이답지 않게 차분하고 야멸 차게 만들었다. 그런 철의 눈길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 아주머니가 어딘가 찔끔한 표정으 로 한마디 어물거리고 지나갔다. "글타믄 몰따마는... 우짰든 집으로 가그라. 길가서 다 큰 학생이..." 하지만 아주머니의 참견은 어떤 진정제보다도 효과적이었다. 그녀가 그새 많이 걷힌 안개 속으로 멀어져가는 걸 보며 비로소 자신의 때아닌 늑장이며 놓쳐서는 않 될 다섯시 반 역전 행 버스 따위를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대로 떠날 수는 없었다. 뜻깊은 이별의 의식이 없다면 무언가 그애와 이어진 기념품이라도 갖고 싶었다. 철은 문득 조국의 흙 한줌을 일생 지니고 다녔다는 쇼팽 을 떠올리며 자신도 그 정원의 흙 한줌을 떠갈까 생각했다. 그애의 숨결과 발길이 닿았을 그 흙을. 그러나 남의 흉내를 낸다는 것과 담을 그릇이 마땅찮다는 것 때문에 머뭇거리는데 문득 철의 눈에 들어온 게 철문에서 멀지 않은 연못이었다. 몇 년 전인가 처음 그 연못을 만들었 을 때 철은 명혜와 병우를 데리고 하루종일 남천강 자갈밭을 헤매며 깨끗하고 예쁜 조약돌 을 주워 나른 적이 있었다. 철은 대단한 물건이라도 훔치는 사람처럼 가슴을 두근거리며 연못으로 다가가 손에 잡히 는 대로 조약돌 하나를 건졌다. 반은 하얀 차돌이고 반은 검은 화강암으로 된 탁구공만한 조약돌이었다. 철은 그게 바로 명혜가 주워온 것이기를 빌며 물기도 닦지 않고 주머니에 넣 었다. 그를 그렇게 몰아댄 허전함과 서운함이 반쯤은 가시는 듯했다. 철문께로 나온 철은 거기에 놓여 책가방을 집어들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 집을 둘러보 았다. 그런데 철의 눈길이 이층 창틀에 이르렀을 때였다. 아직은 흐릿하게 끼어 있는 안개를 헤치듯 열린 창문 안쪽으로부터 눈부시게 쏟아져 나오는 게 있었다. 4년 전 이른봄의 그것 처럼 분홍빛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무지개로 기억되기는 마찬가지인 어떤 빛다발이었다. 틀 림없이 명혜였다. 신은 철이 건 흥정에 다는 아니지만 일부를 들어주신 셈이다... 하지만 아주 뒷날까지도 추억하기에 화나는 일은 그 다음에 있었다. 명혜가 진작부터 자 신을 내다보고 있었음을 안 순간 철을 사로잡은 감정은 엉뚱하게도 몸둘 곳을 모르는 수치 감이었다. 그 동안 자기가 한 짓이 모두 유치하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행동으로만 떠오르며, 그걸 고스란히 명혜에게 보인 게 한스러울 만큼 부끄러웠다. 원래 철의 다양한 상상 속의 대비에는 그런 종류의 작별에 대한 것도 있었다. 쓸쓸히 웃 으며 손을 흔든다. 언제까지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그러나 엉망으로 구겨진 철의 감정에 그게 떠오를 리 없었다. 부끄러움으로 굳어 있는 것도 잠시, 철은 가방을 옆구리에 끼기 바 쁘게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냅다 뛰었다... 철이 이별의 감상에서 벗어나 자신이 돌아가는 집과 새롭게 시작될 생활에 생각이 미친 것은 기차가 대구역에 이른 뒤였다. 중앙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영천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 리면서 철은 그 동안 돌아간다는 사실에만 들떠 세심하게 읽지 않은 어머니의 편지를 꺼냈 다. 철이 보아라 총무 선생님이 알린 네 소식 듣고 어미는 정말 놀랐다. 네가 가면 어딜 간다고 그렇게 경 망하게 나섰느냐? 나는 그래도 너를 믿고 남겨 두고 왔는데 어찌 이리도 사람을 실망시키느 냐? 어쨌든 네가 그토록 있기 싫은 고아원이니,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너라. 학교가 걱정이다 만 이제 곧 네 형이 제대해 오면 무슨 구처가 날 듯도 싶다. 여기는 모든 게 잘돼간다. 정부 시책이라 그런지 개간 허가도 쉽게 나왔고 보조비도 적잖이 나올 것 같으니 네 형만 오면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다. 또 지난 겨울에 저희끼리 싸우다가 튀어나온 논마지기(글쎄 10 년이나 제 땅처럼 부쳐먹었다는구나)도 찾아 판 게 있어 양식도 그럭저럭 돌아간다. 사람 사는 게 먹는 걸로만 된다면 너를 불러도 벌써 불렀을 게다. 네가 돌아오는 게 잘된 일이고 못된 일이고는 하느님께 맡기기로 하고, 너는 이 편지 받 는 즉시로 오도록 해라. 못된 아이들 꾐에 빠져 오입갔다가(가출했다가) 신세 망한 얘기 듣 지도 못했느냐? 큰일난다. 그러니 행여라도 엉뚱한 마음 먹지 말고 어서 돌아오너라. 차비로 쓸 돈 약간 보낸다. 박장로님께 고맙단 말 전해주고, 영남여객댁 작별 인사 잊지 마라. 사람 은 떠난 뒤끝이 마뜩해야 한다. 주후 1963년 4월 어미 씀 결국 철이 예정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그 얼마 전에 있었던 두 번째의 가출 기도 때문이었다. 같은 원생 하나와 쇠전거리 주막집 외아들인 동급생 하나, 그리고 철이 셋 이서 계획한 가출이 실패해 역전에서 붙들려 돌아오자 총무가 어머니에게 편지를 내고 거기 놀란 어머니가 철을 집으로 불러들이게 된 것이었다. 철은 약간 부끄러운 마음으로 그 가출 사건을 떠올리다가 이내 편지의 다른 부분, 곧 돌 내골에서의 생활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3만 평의 땅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명혜 아버 지의 말로 짐작해서는 아주 넓은 땅인 듯했다. 그런데 이제 개간 허가가 났다니 멀지 않아 그만한 땅이 생길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곧 부자가 된다. 토지의 생산성에 대해서 아는 바 없는 철은 그런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어머니가 말끝마다 들먹이는 학교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 문제는 이미 가출을 결 심할 때 나름대로는 충분히 생각된 것이었다. 낯선 서울로 가서 고학도 할 작정이었는데, 멀 지 않아 부자가 되면 걱정할 게 뭐냐. 기껏해야 한 해 늦으면 되고, 안 되면 독학으로 검정 고시를 치지 뭐- 그렇게 마음을 먹자 어느새 굶주림과 추위와 억압으로만 추상화 돼가는 고아원 생활에서 벗어나게 된 게 기쁘기만 했다. 거기다가 뭐니뭐니 해도 철은 아직 만으로는 열다섯도 차지 않은 소년이었고, 늦긴 해도 계절은 봄이었다. 돌아가는 곳은 다름아닌 집이었으며, 거기에는 또 오래 헤어져 지낸 어머 니와 형과 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바람에 영천으로 가는 기차에 오를 무렵부터 철은 온전히 희망으로만 차 있는 미래로 떠나가는 작은 여행자로 차츰 변해가고 있었다. 가끔씩 은 명혜 생각으로 가슴 저려하기도 했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던가. 기차가 고향집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철의 마음도 거 기 있는 그리운 가족들과 새롭게 펼쳐질 날들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안광역 에 내렸을 때는 음울한 이별의 감상에서 깨끗이 벗어나 있었다. 그 새벽 밀양 거리를 뒤덮 고 있던 안개는 그대로 기억에 낀 세월의 이끼가 되어 그곳에서의 일들을 아득한 과거처럼 떠오르게 했고 2층 창틀에서 마지막 본 명혜의 모습도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그것처 럼 아스라할 뿐이었다. 대신 출발의 길 위에서라면 으레 느끼게 되는 설렘과 들뜸이 그의 정서를 이끌기 시작했다. 통일역은 3년 전 옥경이와 왔을 때나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돌내골로 가는 막차도 그때 처럼 네시 반 출발이었다. 철은 자신이 늦지 않게 도착한 데 안도하며 기차칸에서 부실하게 때운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철이 영희를 만난 것은 그래서 들어간 식당 안이었 다. 열려있는 식당문을 들어서는데 어떤 젊은 여자가 문 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런 소읍에서 흔치 않은 도회적인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맥없어 보이는 게 눈길을 끌어 흘깃 그녀의 옆얼굴을 훔쳐보던 철은 자신도 모르게 아, 하고 가벼운 탄성 을 내질렀다. 바로 누나였다. 3년 전보다는 많이 어른스러워지고 분위기도 훨씬 차분해진 듯 하지만 틀림없이 영희 누나였다. "누나, 누나-" 철이 그렇게 소리치며 다가가자 비로소 오랍동생을 알아본 영희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철아, 철아아-" 영희도 감격하기는 철과 마찬가지였다. 다만 철의 감격은 영영 못 만날 줄 알았다가 다시 만나게 된데 대한 기쁨 쪽으로 기울어진 감정이었으나, 그녀의 것은 그런 형태로 철과 다시 만날 수밖에 없게 된 데서 비롯된 회한이나 슬픔 쪽으로 더 많이 기울어진 것이었다. 철을 껴안은 그녀는 3년 전 그 기약 없는 이별의 마당에서조차 보이지 않은 눈물을 줄줄이 쏟았 다. 먼저 와 있던 손님들이 이상한 듯 바라보는 게 소년다운 수치감을 건드렸으나, 그보다 더한 벅찬 감동에 철이도 스스럼없이 몸을 맡겼다. "그래, 누나도 돌아가는 거야?" 이윽고 먼저 냉정을 되찾은 철이 영희의 품을 벗어나며 물었다. "응, 오빠가 찾아와서 하두 권하길래..." "누나, 잘 생각했어. 이제는 정말 헤어지지 말고 함께 살아, 우리. 그런데 형은 언제 온댔 어?" 철이 어른스레 말했다. 그러나 대답하는 영희의 어조는 왠지 좀 전보다 한층 맥없고 쓸쓸 하게 들렸다. "다음달, 하지만 정말루 모든 게 오빠 말대룰지..." "잘될 거야. 모든 게 잘될 거 같애." 철은 누나에게라기보다 스스로를 격려하듯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의 3년이 어떤 것이었는 지에 대해서까지는 아직 배려가 가지 않았다. 제3장 흙 노래 기차가 안광역에 이를 무렵에서야 간밤의 과음으로 뒤틀리던 명훈의 속은 조금씩 가라앉 기 시작했다. 그런 속을 달래기 위해 해장술을 안 걸친 것은 역시 잘한 일 같았다. 장한 결 심으로 돌아가는 고향길이라 처음부터 술냄새를 풍겨서는 안 되었다. 신시장의 '할매국시집' 에서 속을 풀면 돌내골에 이를 때쯤은 술기운과 함께 미련 어린 상념도 깨끗이 씻겨질 것이 었다. 안광역은 3년 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건물도 광장도 그대로인데 무엇 때문일까 싶 어 주위를 둘러보던 명훈은 이내 그 까닭을 알아차렸다. 무엇보다도 명훈의 눈에 낯선 자극 을 주는 것은 역사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듯한 구호판과 플래카드였다. 전에는 '멸공 통일' '북진 통일' 같은 크지 않은 구호판이 두엇 걸려 있었을 뿐인 역사 전면에는 '반공'과 '재건'이란 대문짝만 구호판 외에도 '증산만이 살 길이다. 증산하여 애국하자!' '의심나면 다 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란 커다란 현수막이 벽면의 태반을 뒤덮고 있었다. 그러고 부니 역 구내뿐만 아니라 광장도 꽤나 달라져 있었다. 역 구내는 여객의 왕래나 승하차를 위한 최소한의 공간을 빼고는 모두 밭으로 일구어 무언가를 뿌려놓고 있었고, 광 장도 양 모퉁이를 큼직하게 잘라내 무얼 심었는지 제법 싹이 파릇파릇 돋아 있었다. 농사로 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혁명 정부의 식량 증산 의지만은 제대로 강조되어 있는 듯했다. 그 전해 유휴지 활용이란 명목으로 연병장 모퉁이와 내무반 주변에까지 콩과 메밀을 뿌려 본 적이 있어, 안광역의 그 같은 변화도 실효가 의심스런 군대식 발상임을 명훈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새 자신의 입장이 달라져서인지 이제는 반감보다는 알지 못할 든든함 이 느껴졌다. 그가 돌아가려는 흙에 대한 정부의 호감과 지원 의지를 거기서 본듯한 느낌이 었다. 안광 거리도 역전 주변과 같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관공서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번듯 한 건물에는 붉고 검은 글씨의 '반공'과 '재건'에 관련된 구호들이 입간판이나 현수막으로 늘 어져 있고 공터는 예외 없이 일구어져 무언가는 뿌려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할매국시집만은 3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전인 명훈이 그곳에 살 때와 마찬가지 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왼손 엄지의 한 마디가 날아간 할머니도 세월과는 무관한 사람인 듯 그대로였고, 반죽에 콩가루를 많이 넣은 발이 고운 칼국수나 곁들여내는 좁쌀 섞인 밥덩 이도 예전 맛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할머니, 오광씨나 잇뽕 형, 요즘도 여기 더러 와요?" 어쩌면 자신을 기억해줄지도 모른다 싶어 은근히 기다렸으나 끝내 알아보지 못하는 데 가 벼운 실망을 느끼며 명훈이 그 할머니에게 물었다. 이미 점심 식사 시간으로는 늦어 손님이 라고는 명훈밖에 없어서인지 돌아앉아 국수를 밀고 있던 할머니가 힐끔 명훈을 돌아보며 덤 덤하게 대답했다. "오광이는 아직도 더러 오제. 잇뽕이라- 아 그 몽땅하고 소가지 못된 놈아 말이제? 고노 마는 한 이태 안 비디 요 얼마 전에 함 왔다 갔지싶다. 들으이 국토개발단인가 재건단인가 에 뿌뜰래갔다 카기도 하고 어디 멀리로 튀뿌랬다 돌아왔다 카기도 하고..." 그러다가 비로소 명훈이 낯익다 싶던지 알은체를 했다. "그래고 보이 많이 본 얼굴이쎄. 여러 해 안 비던데 군대 갔던가 베? 어여튼동 잘했다고 마." 명훈이 입은 제대복을 보고 하는 소리였다. 그나마도 자신을 알아봐주는 게 반가워 명훈 이 그리 긴하지도 않은 물음으로 받았다. "잘했다니요? 뭘?" "말도 마라. 5,16 나고는 어옛는동 아나?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쌈패 비식(비슷)한 거는 야 지미리(모조리) 씰어(쓸어)갔다. 니 아매 통일역 있는 데서 놀았제?" "놀긴요? 벌써 5년 전에 서울로 갔는데..." "아하, 그렇나? 우예튼 오광이도 옛날 오광이 아이따. 뭣 때무인동 한 일 년 징역 갔다 와 요새는 조용히 살제. 어덴가 다방 하나 채리가지고..." 그 얘기를 듣자 명훈은 문득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으로 그들의 전성기를 떠 올렸다. 그 리고 잇뽕 형이 없어졌다 싶어서인지, 옛날에는 감히 얼굴을 맞대기조차 힘들었던 오광이라 도 한번 만나보고 싶어졌다. "그 다방 혹시 어디 있는지 아세요?" "몰라, 삼거리 쪽이라 카던데..." "다방 이름은요?" 명훈은 거기까지 묻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이제 모든 걸 다 씻고 흙으로, '상록수'의 꿈으로 돌아가는 마당에 어두운 과거를 되씹어 무엇 하랴-그런 생각이 그의 감상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통일역으로 가보니 돌내골이 종점인 막차는 그전처럼 4시 반 출발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아무거나 그 부근을 지나는 버스를 타고 가서 일, 이십 리 걷더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부대에서 들고 온 더블백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새 생활에 필요하지 싶어 이 것저것 훌쳐 넣은 미제 공구와 닭털 침낭, 행정반에서 빼돌린 백지 따위로 완전 군장 무게 보다 훨씬 더한 더블백이었다. 제대 전날 밤 사단 밖 술집으로 옮길 때 위병을 서던 후배 녀석이 난처함을 숨기지 않던... 그 바람에 한 시간 반을 기다리더라도 돌내골에 바로 가 닿 는 버스를 기다리기로 한 명훈은 시간도 때우고 세상 소식도 알 겸해서 신문 한 장을 샀다. '대통령 10월 8일, 국회의원 11월 22일- 선거 기일 내정.' 일면 머릿기사에 그런 제목이 보였다. 박정희 의장이 군복을 벗고 대통령에 출마한다는 얘기는 전에도 있었으나, 군에 있을 때는 남의 일처럼만 들리더니 제대목을 입고 보니 느낌 이 전혀 달랐다. 다시 대통령 선가와 정치가 실감나는 신분으로 되돌아온 셈이었다. 명훈을 그 기사를 꼼꼼히 읽어가기 전에 우선 눈에 들어오는 큰 활자의 제목부터 읽었다. '제야 세력에 저열한 음해 공작- 범국민당 운동 계기.' '정부서 부패 조성- 현직 고관 관여 공공연히 돈 뿌려.' '야측 비난은 머불성설-간접적으로 도운 것뿐-이후락 공보실장.' '민우당 발기 선언- 이범석, 이윤영 고문, 안상호씨는 위원장에.' '2백 12명을 선정- 범국민당 추가 발기인 발표.' 대강 그런 기사들이 눈에 띄었다. 다 아는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는 뉴스들이었다. 제대복 을 입은 지는 그날로 사흘째였지만, 아직 정신은 민간인으로 온전히 목귀하지 못한 탓인 듯 했다. 이제 신문 정도는 읽을 수 있을 만큼 는 한문 실력에 스스로 대견스러워하며 명훈은 머릿 기사부터 본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정부 고위 소식통은 내각이 마련한 민정 이양 스케줄은 10월8일에 대통령 선거, 11월 22 일에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12일 전했다. 김현철 내각 수반도 대체 로 이를 시인했으나 그것은 최고회의와 내각이 검토중에 있어 아직도 날짜가 확정되지는 않 았다고 말했다." 명훈은 꽤나 진지하게 읽어나갔지만 왠지 그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특별히 이해하기 어려운 데가 있어서가 아니라 거기서 말하는 게 바로 우리의 현실, 우리의 정치라 고는 실감이 나지 않은 까닭이었다. 명훈은 처음 그게 아직도 만간화되지 못한 자신의 의식 때문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공부하듯 억지로 읽어나가다 보니 차츰 그게 무엇 때문인지 깨 달아졌다. 정치면을 장식하고 있는 인물들이 한결같이 3년 전 자신이 입대할 때에는 전혀 몰랐거나, 알았더라도 정치와는 거의 무관하게 기억하고 있던 사람인 까닭이었다. 김현철 내각 수반도 그렇지만 이후락 공보실장, 이형근 낙위(노르웨이) 대사, 김재춘 중앙 정보부장 등이 그랬다. 그들이 대강 그날의 1면 기사에 떠오른 인물이었는데, 따지고 보면 방송이나 소문만으로도 꽤나 귀에 익은 이름들이건만 영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억지로 정치면을 다 훑은 명훈은 그 동안의 지루함을 보상받으려는 듯 읽기 쉽고 재미난 사회면으로 건너갔다. 제일 보충역으로 편입된 병역 미필자에게 사회 진출의 길이 마련됐다는 톱기사에 이어 한동안 시끄러웠던 증권 파동 관련 기사가 둘이나 있었다. 치안 국의 총경 하나가 공금으로 증권 놀음을 하다가 수백만 원을 날리고 구속됐다는 것과 증권 파동의 주범으로 지목된 유원식이란 사람이 공소 사실을 일부 부인한 내용의 기사였다. 병 역 미필자도 아니고, 증권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별로 없는 명훈에게 실감 안 나기는 정치 면의 기사들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다가 명훈에게 비로소 실감 있게 와 닿은 게 최인규 전내무장관의 미망인이 브라질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는 기사였다. 6월말이나 7월말 떠나게 되어 있는 1백 세대 이민단으로 수속중이라는 내용을 읽으면서 명훈을 야릇한 허망감을 느꼈다. 3년 전 4월 모든 악의 화신 처럼 규탄받던 사람은 그 사이 처형되고 그의 미망인과 유자녀는 낯선 땅으로 이민을 떠난 다는 게 명훈의 감상을 자극한 까닭이었다. "이게 누구로? 명훈이 아이가?" 누군가 어깨를 짚으며 큰 소리로 떠드는 바람에 명훈은 방금 군인이 낀 강도단 기사로 보 내던 눈길을 들어 그를 보았다. 항렬로는 할아버지 뻘 되는 상호란 일가 한 사람이 불그스 레 술이 오른 얼굴로 명훈을 내려 보고 있었다. 촌수로는 열두 촌이 넘어도 명훈네에게는 가장 가까운 집안이 되는 일가였다. "아, 찬내 할배, 안녕하셨어요?" 명훈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갑게 인사했다. 이제부터 함께 살게 될 사람이라 그런지 전 보다 몇 배나 가깝게 느껴졌다. "인제 제대했구나. 니가 돌아온다는 소리는 들었다. 금호 아지매 인제는 잊어뿌랬다. 혼자 서 애쓰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모든 게 잘돼가는 줄 알았는데..." "물론 개간 허가사 나겠제. 글치만 곧 쉽지는 않을 께따. 한 이태 산대백이(등성이)마다 얼마나 뱃기(벗겨)놨는지... 그러이 아무리 나라라 캐도 그 많은 보조 어예 척척 내놓겠노? 아지매가 안달복달 쫓아댕기(다녀서) 되기는 될 모양이더라마는. 요새는 신청 내도 허가가 많이 까다로바졌다 카드라..." 찬내 할배가 그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명훈의 팔을 끌었다. "우리 여다서 이럴 게 아이라 어디 가 술 한잔 하미 얘기하자. 니도 인제 제대를 했으이 아아가 아이지러. 차 시간도 안직은 한 시간 너미(넘게) 남았고..." 되도록 술기운 있는 얼굴로는 돌내골로 들어가고 싶지 않던 명훈이었으나 그가 그렇게 잡 아끄니 마다할 수 없었다. 찬내 할배는 명훈보다 예닐곱 살 위로 농고까지 졸업해 돌내골에 남은 사람 중에는 인텔 리에 속했다. 거기다기 윗대인 속실 어근도 동배의 다른 어른분내와는 달리 농사일을 손수 할 수 있던 분이라 토지 개혁의 피해가 다른 집안보다는 적었기에 물려받은 살림도 알찬 편 이었다. 입대 전 명훈이 돌내골에 갔을 때만 해도 제법 마을 유지 소리를 닫던 과묵한 사람 이었는데,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지 게게 풀리고 말이 많아진 게 반드시 낮술 탓만은 아닌 듯했다. "그래, 참 용타. 니가 어예 다 돌내골로 돌아올 생각을 했더노? 나는 니가 서울서 대학까 지 댕긴다 카길래 거다서 바로 성공할 줄 알았디." 대폿집에 자리를 잡고 앉기 바쁘게 찬내 할배가 그렇게 물었다. 여러번 곱씹어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라 어딘가 자신의 귀향을 못마땅히 여기는 듯한 그의 말투에 특히 마음이 흔들 릴 것은 없었으나, 자신을 기다리는 게 달콤한 '상록수'의 꿈만은 아니라는 걸 깨우쳐주는 것 같아 명훈은 갑작스런 불안이 일었다. 그 때문에 잠깐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에 그가 다 시 지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거기서는 어예 볼 수 없드나? 모도 길만 있으믄 서울로 못 올라가 애가 타는데 니는 우예 젊은 기 다부(도로) 이다(여기) 내리올 생각이 들더노?" "월급쟁이 해봐야 우슨 끝이 있겠어요? 그러잖아도 이모부가 일자리를 마련해주겠다 했지 만 집어치웠습니다." 그가 자신을 한심하게 보는 것 같아 우선 기부터 좀 눌러놓을 양으로 명훈이 그렇게 대답 했다. 그러나 그는 네가 뭐라 해도 다 안다는 표정으로 말을 받을 뿐이었다. "느그 이모부가? 그 사람 뭐 하는데?" "육군 대령으로 작년에 예편했어요. 지금 국민재건운동본부서 일하는데 그곳 서열로 두셋 째를 다툴 겁니다." 명훈이 거기까지 섞어 그렇게 이모부를 소개했으나 그는 별로 믿어주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 사람 이름이 뭔데?" "백경빈이라구요. 김종필, 김형욱이 같은 사람들하고 육사 동길걸요. 혁명 주체 세력이 고..." "그런 이름은 첨 들어보는데... 그래고 그마이 신(센) 사람이 우예 재건본부 같은 구석배기 로 쫓기갔을꼬?" "가만있으면 별을 달아준다는데도 생각이 있어 군복을 벗은 사람입니다. 박정희 의장도 곧 군복 벗을 거란 말이 있잖습니까? 그리고 국민운동본부도 그리 구석진 곳은 아닙니다. 남산에 있는 본부 건물에 제가 가봤는데요- 어마어마했어요. 결코 쫓겨간 게 아닙니다. 이 모님 말로는 조달청장 물망에까지 올랐더라던가..." 명훈이 그렇게 마음먹고 과장하자 그도 비로소 믿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명훈의 결정 에 대한 태도만은 쉽게 바꾸려 들지 않았다. "글타 카믄- 니 참 잘못했다. 어쨌든 거다서 비비작거리야제. 더구나 너어 이모부가 취직 까지 씨게줄라 캤다며? 그만한 사람이 말해주믄 그게 어디 여사(예사) 자리겠나?" 그가 이번에는 화제를 바꿔 그렇게 말했다. 명훈이 드디어 이상한 오기 같은 걸 느끼며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찬내 할배네 전답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밭 3만 평이라면 적은 땅이 아닙니다. 시시 한 월급쟁이로는 평생 그런 땅 못 장만할걸요." "크읏, 밭 3만 평이라꼬? 그기 어딨는데?"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자신에 찬 그가 일부러 지어낸 느긋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모르십니까? 아까 노리골 큰산소 밑에 있는 우리 산 개간 허가났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허가사 나겠제. 글치만 3만 평은 아일 꺼로. 내 보기에는 7정이나 될라... 거기다가 개간 그거 곧 쉬운 줄 아나? 보조비 보조비 캐쌌지 마는 평당 3원이라. 첨에는 어예 그거 가지고 반줄랴(적당히 줄여 맞춰) 될 거라. 글타코 너한테 모자랬는 걸 채울 만한 돈이 있는 것 같 지도 않고, 니가 가서 벗어부치고 땅을 뒤질(뒤집을) 힘이 있는 것도 아이고..." 찬내 할배는 심술궂다 싶을 만큼 명훈이 별로 계산 안 한 개간의 어려움들을 늘어놓았다. 꼭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명훈의 기분을 잡쳐놓기에는 넉넉했다. 명훈이 애써 짜 증을 감추고 말했다. "그거야 뭐 돈이 모자라면 자투리땅을 팔아도 되고... 저도 이왕 돌아온 이상 한 사람의 농부로 일할 작정입니다. 젊고 힘있는데 야산 일구는 거 뭐 어렵겠습니까? 그쯤은 각오하고 왔습니다." "짜투리땅이라꼬? 금호 아지매가 두 번 세 번 샅샅이 훑듯 했는데 또 팔 게 남았을라? 그 리고 있다 캐도 이 불같은 보릿고개에 누가 산단 말고? 야가 객지에 나가 있디 촌 형편에 영 까맣구나. 일 그거 아무나 막 할 수 있는 줄 아나? 미군 부대 보일라맨 하는 거하고는 다르다이. 대학 댕기는 거하고도... 오뉴월 땡볕에 산전 한 평만 뒤배(뒤집어)봐라. 목궁게(목 구멍에) 대통 소리 날 게따." 그리고 마침 날라져온 대포 사발을 달게 비우더니 김치 조각도 안 집고 다시 이었다. "니 딴에는 옹골차게 맘먹고 시작하는데 내가 이카이(이런 소리를 하니) 섭섭할 께다마는 원래 옳은 소리가 듣기 싫은 법이라, 그래도 이왕 말을 냈으니 마자 하자. 다 니를 위해 하 는 소리라. 니가 누고? 우리 큰집 맏이, 사파 종손이따. 13대믄, 6대만 돼도 종손, 7대만 돼 도 종손 캐쌌는 쌍놈들한테 대믄(견주면) 종손이라도 대종손이제. 그런 너 지하 돼가지고 어 예 큰집 잘되는 거 배아파하겠노? 니가 하도 일을 만만하게 보는 거 같아 미리 해주는 얘기 이께는 섭섭케 생각지는 마라. 거기다가 개간을 다했다 캐도 진짜배기 어려운 거는 그때부 터라." "아니, 개간을 해 밭이 됐는데 왜요? 여기 마지기로 치면 2백 마지기나 되는 밭인데요?" 찬내 할배의 말에 깃들인 진정에 약간 감동된 데다 그가 지적한 어려움이 또 새로운 것이 라 명훈이 이번에는 별 반감 없이 물었다. "밭도 밭 나름이제. 야산 뒤배논 거 밭이라 부를라 카믄 10년은 등뼈가 꾸부러지도록 일 해야 된다. 곡식이란 거 씨값(씨앗)의 쉰 배는 돼야 하는데 한 개 여(넣어) 한 개 나오기 바 쁜 기 개간지라. 담배가 기중 낫지만 담배가 바로 골병초라는 거 세상이 다 아는 일이고... 아이, 개간지가 바로 거름밭이라 캐도 마찬가지따. 농사 그거 아무나 막 지으이 니도 달가 (덤벼)들믄 곧 될 거 같제? 열심히만 하믄 등 따시고 배부릴 거 같고... 글치만 택도 없는 소 리 마라. 농사, 그래 쉬운 거랬으믄 우리 돌내골이 왜 그렇게 됐겠노? 토지 개혁, 토지 개혁 팽계 대쌌지만, 그래도 집집이 문전 옥답으로 몇십 마지기는 다 안 남았더나? 그기 왜 십년 도 안돼 남의 손에 넘어갔는지 아나? 아아들 학비, 학비 카지마는 학교 안 씨겐(시킨) 집은 또 왜 그래 쪼무래(쪼그라) 들었노? 전부 일 때문이라. 장죽 물고 뒷짐 지고 구경만 하던 농사, 세월만 바뀐다고 저절로 지에(지어)지나? 생각하믄 오늘 시방까지 그눔의 땅만 믿고 대가리 처박고 촌구석에서 썩은 우리 매이(따위)만 숙맥이제..." 거기까지 듣고 나자 명훈은 비로소 찬내 할배가 자신의 일이 꼬여 속이 뒤틀려 있음을 알 았다. 전 같잖은 낮술이나 수다만으로 진작에 알아봤어야 했는데 명훈이 너무 제 생각에만 젖어 못 알아본 것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찬내 할배, 오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명훈이 가벼운 미소까지 지으며 그렇게 조심스럽게 묻자, 그도 제김에 격해 애매한 명훈 을 몰아댄게 겸연쩍어진 모양이었다. 어설픈 웃음을 흘리더니, 명훈이 밀어준 대폿잔을 사양 도 없이 받아 비웠다. 역시 안주도 집지 않고, 입가만 한복 소매로 쓰윽 닦은 그가 금세 자 조적으로 변한 목소리로 말했다. "개간이라 카믄 벌써 한 꼬사리(골탕)먹은 게 나따. 군대 갔다 와 한 10년 배우도 못한 농 사짓는다꼬 엎드리 있다가 땅만 반으로 줄이놓고 보이 나도 간이 달데. 때마침 혁명 정부서 산전 개간 보조해준다 카길래 나도 신청 안했드나? 거 왜 절골 잔솔밭 16정 말이따. 보조가 있기는 했지만 태부족이라 여기저기 돈 끌어대 한 4만 평 뱃겨(벗겨)놓고 나이 새부자 났다 꼬 난리더라. 그 기분에 부품해서(부풀어서) 지난 겨울 몇 달 술잔도 좋게 마시고 댕겼제. 꿈도 오만가지랬다. 내가 그래도 명색 농고 출신 아이가? 빨간 지붕한 싸이로 (목초 저장 고) 여기저기 세우고 하얀 나무 울타리 둘러 목장 맹그는 꿈이며, 거기다 사과나무 심어 국 광·홍옥이 주렁주렁 달랬는(열리는) 꿈이며, 바다 같은 뽕밭 꿈이며... 그 꿈 쫓아댕긴다고 헛돈도 좀 썼제. 혁명 정부가 중농적으로 나갈 께라 카이 그 보조 얻어 어예 해볼라꼬 군이 다 도다 쫓아댕긴 게제, 후우- 그런데 지금 우예 됐는지 아나?" "대단한 일 하셨군요. 그래, 어떻게 됐습니까?" "그 개간지 , 하마 반은 산으로 다부(되)돌아갔지 싶다. 니 알다시피 그 산골엔 언(어느) 놈이 뭘 믿고 드가 농사질라 카겠노? 안 돼도 일 년 양식을 대조야(줘야) 하는데, 4만 평 농 사지을라 카믄 한 집에 만 평씩 매낀다 캐도 넉 집은 드가야 한다. 그런데 내가 무신 수로 넉 집 양식 대가며 몰아열(넣을) 수 있겠노? 겨우 보리쌀 서너 가마이(가마니)씩 조(줘)가지 고 두 집 보내놓으이 뻔하다. 기중 땅 좋고 벤벤한 데만 골래 한 5천 평씩 차고 앉고 그 나 머지는 말캉 황이라. 내 한 3천 평 꼬치(고추) 모라꼬 뭣 같은거 꼽아논 거하고..." "그래도 대단한 일이죠. 곧 들어갈 사람들이 더 생길 겁니다. 아직은 모자라는 게 땅 아닙 니까?" 그의 말이 하두 뒤틀려 있어 명훈이 위로하듯 말했다. 그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바로 자 신도 머잖아 겪게 될 어려움이란 걸 얼른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그의 표정은 암담했다. "답답은 소리 마라. 내 오늘 읍에 왜 나왔는지 아나? 새들 논 서 마니기 빚에 넘가(넘겨) 줄라꼬 대서하러 나온 게라. 개간 때부터 이때꺼정 일은 일대로 못 하고 돈만 씨고 댕겼으 이- 그 빚이 몰래(볼려) 생때같은 논 서 마지기 물 건너간 게라. 아배(아버지)한테 물리받은 논 열두 마지기 인제 닷 마지기가 됐제. 우리 아배 배곯고 담배 끊어가미 물리준 걸..." 찬내 할배는 보는 사람만 없다면 금세 눈물이라도 훔칠 것처럼 목소리를 떨었다. 그러나 다시 마신 두 사발의 막걸리 덕분인지 이내 원기를 되찾아 허세 섞인 웃음을 풀풀 날렸다. "내가 낮술에 취하는가 베, 백지로(괜히) 한창 기고만장해 돌아오는 니보고... 아이다. 내 말은 그저 지내 듣거라. 너어 개간지는 우리하고 다르다. 길가에 붙어 있고 마을에서 멀잖 고, 또 2만 평이이께는 사람대기도 홀가분코... 함 잘해봐라. 내매로(나처럼) 사업하드끼 하지 말고, 불뚝농군(농투성이)이 돼서 파는 기라. 골데기(골짜기로)로 들어가 보믄 작년 한 해에 벌씨로 꼬치(고추)를 몇천 근씩 딴 개간지도 많다 카드라." 그러나 명훈은 그때서야 비로소 밝지 않은 자신의 앞날이 예감되며 마음이 어두워졌다. 명훈이 새삼스레 전날 밤에 만난 이모부를 떠올린 것은 아마도 찬내 할배가 일깨워준 어두 운 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찬내 할배가 버스에 앉기 바쁘게 졸기 시작하는 바람에 그의 넋두리로부터 놓여난 명훈은 후회 비슷한 심경으로 전날 밤 이모부와 나눈 얘기를 되씹어보 았다. 이모부가 최고회의 위원이 되었다는 소문을 명훈이 들은 것은 작년초 겨울의 임시 휴가 때였다. 거사에 일찍부터 꽤 깊이 관여한 걸로 짐작되던 이모부는 어찌 된 셈인지 혁명이 성공하고도 한 반년이나 그 계급 그 직책에 있는 것 같더니 새해 들어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그리로 옮겨앉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뒤 외출 때 들어보니 이모부는 이미 예편을 하고 난 뒤였다. "가만있으면 별도 달게 될 텐데, 거름 지고 장에 따라가기지, 자기가 바깥 세상 일을 뭘 안다고... 너희 이모부 군복 벗은 거 아무래도 잘못된 거 같지 않아?" 이모는 입으로는 걱정을 해도 표정은 별로 그렇지가 않았다. 옛날의 방 세 칸짜리 한 일 자 집에서 성북동 풍치 좋은 언덕의 스무 칸은 됨직한 디귿자 한옥으로 바뀐 것부터가 그런 걱정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 뒤 이모부는 명훈으로는 공무원인지 아닌지조차 잘 구별이 안 되는 이런저런 단체의 꽤 높은 자리를 돌다가 명훈이 제대할 무렵에는 재건운동본부의 국장인가 뭔가로 있었다. 하지만 명훈이 돌내골로 내려오기 전에 이모님댁을 들른 것은 그런 이모부의 위세에 무슨 기대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때 이미 명훈은 '상록수'의 꿈에 깊이 젖어 있어 다른 어떤 길 에도 곁눈을 팔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명훈을 굳이 붙들어 이모부를 만나게 한 것은 이모 쪽이었다. "얘, 개간 그거는 뭔지 잘 모르지만 시골 생활 뻔한 거다. 결국은 농사아니고 뭐겠니? 그 래도 명색 대학물까지 먹은 제가 잘될 거 같애? 그러지 말고 네 이모부 한번 만나봐라. 네 보기에는 대단찮겠지만 그 양반 요즘 힘깨나 쓴다. 네가 여기 남을 생각이 있다면 그리 흉 하잖은 취직자리 정도는 만들어낼 거야. 언니를 생각해서 그래. 몸에 익지도 않은 농사짓는 다고 또 고생할 거 생각하니... 전에는 우리 살림도 두서가 없어 남 돌아볼 틈이 없었지만 이만큼이라두 되고 보니 안 되겠어. 언니는 그래두 나한텐 이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야." 그러나 명훈이 그날 그 집에 묵은 것은 취직하고는 전혀 무관했다. 이미 돌내골로 출발하 기에는 마땅치 못한 시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옛날 피난 시절 얼렁뚱땅하던 그 백대위 가 그 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이모부는 자정이 다되어 술이 얼큰해 돌아 왔다. 출퇴근만 시켜주는지는 몰라도 운전사 딸린 자가용에서 내려 집 안으로 들어오는 걸 음걸이부터가 그지없었다. "여보, 당신만 기분내고 다니지 말고 얘 일자리 하나 마련해봐요. 거왜, 요새 끗발 날리는 친구들 많잖수." 이모가 밥상머리에 않으며 전에 없는 애교까지 섞어 말했다. "너, 벌써 제대했어? 그럼 한번 알아봐야지." 이모부는 그렇게 거드름 섞어 받았으나 무언가 탐탁잖은 기색이 안뜻 미간을 스쳐가는 것 같았다. 시작 때와는 달리 몇 술 안 뜨고 수저를 놓는 동작에도 그런 느낌이 짙게 들었다. "그런데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지? 쌔끼들, 이번 설거 공약에는 연좌제 폐지도 내걸 자는 수작들이 있는 모양이지만, 큰 동서 일도 꽤나 걸리적거리고..." 이모부가 그렇게 아버지 얘기까지 꺼내는 걸 보고 비로소 명훈은 속을 털어놓았다. 명훈 이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이란 말을 하자 이모부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그래, 그거 장한 생각을 했군. 정부도 앞으로는 농촌을 중심으로 정책을 펴나갈 거니까. 아주 희망 있는 길을 잡은 셈이야." 그걸 이모가 호되게 몰아세웠다. "여보. 당신 그걸 말이라구 해요? 얘더러 촌구석에 처박혀 농사나 짓고 살라는 얘기예요? 대학까지 다닌 애를. 차라리 해줄 힘이 없다면 그렇다고 말하세요. 아니면 해주기 싫다고 터 놓고 말하거나." "온 그 사람 성미하고는... 누가 해주기 싫댔나?" 속을 너무 쉽게 들킨 데 당황했는지 이모부가 너털웃음으로 그렇게 눙친 뒤 다시 명훈을 돌아보았다. "하기야 네 이모 말도 일리가 있다. 아무리 희망 있는 일이라도 몸에 맞지 않으면 곤란하 지. 정말 시골 가서 개간할 자신있어?" "자신있습니다." 명훈이 흔들림 없이 말하자 이모부는 한층 더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명훈이 자신의 속마 음을 알고 틀어져 짐짓 뻗대는 걸로 여긴 것 같았다. "그게 기분대로 되는 건 아니지. 더구나 너는 대학도 마쳐야 하잖아?" "대학 같은 건 벌써 포기했습니다. 제 주제에 대학은 무슨... 가서 제 힘으로 한번 살아보 겠습니다." 명훈은 별로 먹은 마음 없이 대답했으나 이모부는 그럴수록 따라오며 잡듯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해보자. 정부 부서 알맞은 곳에 촉탁으로 말해줄 테니까 거기서 대 학이나 마치는 게 어때? 학교 마치면 정식으로 자리잡기로 하고 굳이 대학 생각이 없다면 월급이 좀 나은 회사 같은 데 말해 줄 수도 있어. 이제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면 대한민국에 서 기업하는 놈치고 우리 눈치 안 보고는 안 될걸..." 마치 자신이 아직도 최고회의의 실력 있는 위원이거나 내각의 각료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 다. 솔직히 그때 명훈은 새삼스런 유혹을 느꼈다. 서울에 남아서도 장래가 보장된다면 남아 보고 싶은 충동도 일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힘으로 그를 끄는 것은 이미 이런저런 갈등 을 겪고 내려진 결정- '상록수'의 꿈이었다. 아니, 그 이상의 넓고 기름진 대지의 꿈이었다. 어쩌면 단 한 번의 자기 투척으로 영락할 대로 영락한 일가의 옛 영광을 일시에 되찾게 될 지도 모르는 그 꿈 때문에 명훈은 서울의 유혹을 떨쳐버리듯 단호하게 말했다. "역시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제... 그 얘기는 그만 하시죠. 저는 그저 인사차 들렀을 뿐입니다." 그날따라 차 안에는 돌내골 사람이 별로 안 보였다. 지난번 귀향 때만 해도 여남은 명은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는데, 그날은 겨우 서넛에 그것도 인사를 나눌 만큼은 안 되는 타성들 이 전부였다. 찬내 할배가 가벼운 코까지 고는 걸 보고 명훈은 그때껏 접어 주머니에 꽂아 두었던 신문을 꺼내 폈다. 버스는 어느새 안광읍을 벗어나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을 끼고 난 길을 달리고 있었다. 미국 학계를 시찰하고 돌아온 학자의 귀국담, 한창 인기 절정인 영화 배우 엄앵란이 출연 한 '성난 코스모스'의 짤막한 영화평과 여배우 도금봉이 '부부'란 영화에서 발가벗었다는 가 십성 기사, 그리고 유럽으로 순회 공연을 떠나는 고전 무용단의 소개 같은 것이었다. 혁명이 란 이름이 붙은 변화를 두 번씩이나 겪어도 신문의 기사들이 별로 낯설지 않은 게 까닭 모 르게 반가웠다. 하지만 국제 정치와 경제면에 이르니 다시 낯선 소식이 많았다. 민권 법안을 놓고 다투는 미 의회와 케네디 대통령의 새 민권 법안을 제출하려는 소식을 얽어놓은 국제면의 머릿기사 는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지만 에버스란 흑인 인권 지도자가 암살된 것이나 분규에 관 한 기사는 영 낯설었다. 경제 문제도 그랬다. '보리흉작' '식량 부족, 미 잉여 농산물 도입 교섭' 따위는 귀에 익은 소리였고 '일본에서 대만미 5만톤 도입' '수출 보너스로 원당 외환 추가' '외환 프리미엄 돌연 껑충'따위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5.16 전보다 소비자 물가 지수가 25.8%나 상승했다는 소식 같은 것도 신문 에서 그리 자주 본 듯한 기억은 없었다. 전국 고교 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을 머릿기사로 삼은 체육면을 마지막으로 읽은 명훈이 짐짓 아껴두었던 특집면을 펴든 것은 버스가 임안에 이르렀을 때였다. 장이 서는 면 소재지이면서 다른 군으로 길이 갈라지는 작은 교통 중심지 이기도 한 곳이라 버스는 한 10분쯤 쉬어가는 게 통례였다. 마구 마셔댄 막걸리 때문에 요의라도 느낀 것인지 그때껏 코를 풀풀거리며 자던 찬내 할 배가 부스스 일어나 차를 내려갔다. 명훈을 영 낯선 사람처럼 힐끔 보고는 그냥 일어서는 게 아직 술이 덜 깬 것 같았다. 다시 대포라도 한잔 더 걸치는지 그렇게 차에서 내린 찬내 할배가 한동안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명훈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특집면의 읽을거리에만 정신을 팔 수 있었다. 아무 래도 읽기 좋은 것은 비화 종류였다. 그 무렵은 민비 최후의 진상에 대한 어떤 일본인의 수 기가 연재되고 있어 명훈은 그것부터 읽었다. 제목보다는 지루한 기사였다. 그 다음 읽을거리는 월트 디즈니의 근황에 관한 것이었다. 얼마 안 있어 그의 만화 미키 마우스를 연재하기로 돼 있어서인지, 신문은 그의 인기를 과장하면서 인류에게 희망의 입김 을 불어넣는 위대한 예술가로까지 추켜세웠다. 찬내 할배가 돌아온 것은 차장이 짜증난 목소리로 '돌내골 출발'을 네댓 번이나 외친 뒤였 다. 짐작대로 그는 몇 잔 더 걸쳤는지 게게 풀린 눈으로 돌아왔지만 차에서 내려갈 때보다 는 훨씬 원기차 보였다. 그러나 명훈에게는 그 원기차 보이는 게 더욱 씁쓸하게 느껴지며 애써 좋게만 보려 했던 자신의 앞날에 새삼스런 불안을 일으켰다. 몇 년 뒤 자신도 그와 같 은 모습이 되어 다시 쫓기듯 고향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이었다. 안광에서와는 달리 찬내 할배는 다시 오른 술기운을 이번에는 낙관적인 전망으로만 풀려 들었다. 자신의 개간지 위쪽으로 꽤 수량이 많은 계곡이 있어 거기에 못을 막으면 한 2만 평은 놓 게 논이 되리라는 것에서 양잠이 수익이 좋으니 나머지는 뽕밭을 만들리라는 것 따위였다. 그리고 명훈의 개간지는 위치가 좋으니, 명훈은 자신보다 젊고 배운 게 많으니, 하다가 돌연 지방에서 신망을 얻으면 다른 꿈을 꾸어볼 수도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떠들기도 했다. 만약 명훈이 먼저 그 말부터 들었다면 그 뒤에서 실패의 예감에 안간힘을 다해 처항하는 그를 볼 뿐이었다. 명훈의 대답이 시답잖차 찬내 할배는 재 하나를 넘기도 전에 졸음에서라기보다는 술기운 에 진 낮잠 속으로 곯아떨어졌다. 명훈은 조금 반듯한 바위만 있으면 어김없이 희고 붉은 페인트로 '반공'과 '재건'을 칠갑해놓은 산길 좌우를 흔들리는 차창을 통해 멍하니 보고 있다 가 다시 신문을 펼쳤다. 꼭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라기보단 울적한 상념에 빠지는 게 싫어 서였다. 이제 그 신문에서 명훈의 눈길이 안 간 곳은 특집면의 박스 기사 하나 뿐이었다. '꼬리무 는 쟁의의 집점'이란 제목이며 '노동자 임금 백서'란 부제가 공연히 신산스런 살이의 어두운 일면만을 헤집어보이고 있는 것 같아 짐짓 뛰어넘은 부분이었다. "...지난 2월 미왕산업의 근로자가 파업했고, 4월에 금성사가 파업했다. 5월에 강원도의 8 군 산하 청부업 회사, 6월 들어 풍한방직의 쟁의 제기를 필두로 광산 노조, 전력 노조, 해상 노조, 금속 노조, 화학 노조, 운수 노조, 금융 노조원들이 기업체별로 쟁의 발생을 보고했고, 동양미싱, 동아금속, 고려석면, 삼화제분, 전북자동차, 근신산업 등 사기업체가 쟁의를 일으 키고 있다. 모두가 지금 임금으로는 살 수 없으니 최저 생활을 보장해 달라는 게 그 주목적 이다..." 거기까지는 어떻게 정신을 모아 읽었으나 그 다음부터 잔글씨는 영 눈에 들어오지 않고, 굵은 활자로 된 중간 제목들만 희뜩희뜩 뜻으로 머릿속에 와 닿았다. '하루벌이 평균 보리쌀 두 되.' '못 살겠다 부득이한 폭발.' '열 시간 석탄 캐야 겨우 백 원 남짓.' '슬픈 여공 3만- 하루 67원 꼴.' '월 평균 6천 원 사업체는 엉망.' '하루벌이 30원 그 이름은 여차장.' '부두도 1백 원 꼴- 그나마 철 따라 달라.' 하지만 그렇게 읽어가는 동안에 오히려 마음은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이모부 같은 배경이 있어 부당하게 압력을 넣어주지 않는 한 명훈이 가서 일해야 할 곳은 바로 그런 노 동 현장이었다. 광산, 부두, 공장, 그 어느 곳도 농사보다 덜 고되어 보이지는 않는데도 임금이 그 정도라 면, 그래도 꿈이 있는 흙 쪽을 택한 게 잘한 일 같았다. 그래, 정직하게 살며 꿈을 가꾸자. 가능하면 내 시도- 상두 녀석이 갑자기 안으로 뛰어든 것은 명훈이 제법 그렇게 자신의 축 처진 감정을 추스르고 있을 때였다. "아이구, 이거 명훈이 형님 아이껴?" 누군가 갑자기 정수리 위에서 소리쳐대는 바람에 명훈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어보니 게바 가지같이 여드름이 충충 난 얼굴에 안 어울리는 선글라스를 코에 걸친 채 엎어질 듯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낯익다 싶기는 해도 누군지는 얼른 생각이 안 나 말없이 살피는데 그 쪽에서 먼저 안경을 벗으며 다시 소리를 질러댔다. "지(저)라요. 상두씨더. 형님 온다 카는 소리 듣고 하, 얼마나 기다랬는지..." 그제서야 명훈도 그를 알아보았다. 항렬로는 아저씨뻘이지만 나이가 세 살 어려 오히려 명훈을 형님이라 부르는 집안 아이였다. "아니, 네가 여길 어떻게..." 명훈은 그렇게 묻다 말고 새삼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버스는 어느 새 진안에 도착해 있 었다. 돌내골과 마찬가지로 면 소재지에 지나지 않지만 안광, 청성, 명양, 영덕, 네 군으로 가는 길이 모인 곳이라 어지간한 읍보다도 더 큰 장이 서는 거리였다. "그양 심심해서 여다 아아들 좀 만날라꼬요." 상두는 공연히 가슴을 젖히며 젠체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보니 녀석의 차림도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미 한물간 맘보 바지에 얼룽덜룽한 점퍼가 영락없이 서울역의 똘마니 같은 모습이었다. 3년전 귀향했을 때는 비록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해 말썽꾼이간 해도 차림만은 수더분한 시골 젊은이였던 게 퍼뜩 떠올랐다. 이 철없는 녀석이 그새 갈 데까지 가버렸구나... 명훈은 약간 어이없는 눈길로 그를 보다 가 문득 자책 비슷한 걸 느꼈다. 어쩐지 자신이 그에게 나쁜 본보기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 었다. 명훈이 그렇게 느끼게 된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입대 전 고향에 들러 보름 놀고 간 때였다. 하루는 또래 서넛과 개울에서 천렵을 하고 있는데 상두 녀석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명양읍에서 노는 주먹 대여석이 장터에 왔는데 술에 취해 아무에게나 주먹질을 한다는 소식 이었다. 그 말을 듣자 한 며칠 자취를 감추었던 명훈의 호전성과 가학 심리가 한꺼번에 되 살아났다. 마침 당수 초단을 따서 몸은 한껏 공격욕에 빠져 있고, 직장과 경애를 잃은 뒤라 마음도 대상 모를 파괴의 열정으로 들끓고 있었으나 오랜만의 귀향이 준 그윽한 감동과 정 서가 그것들을 누르고 있었는데 그 재수 없는 시골 주먹들이 뜻밖에 기회를 만들어준 셈이 었다. 거기다가 함께 자란 옛 친구들에게 자신의 주먹 솜씨를 한번 보여주고 싶다는, 스물둘 그 나이만 해도 별로 죄될 게 없는 과시욕까지 고개를 들어 명훈은 들고 있던 반두를 내던 지고 장터로 갔다. 명훈이 장터에 갔을 때는 이른바 '명양 깡패'라는 다섯 녀석 모두가 술이 꼭지까지 돌아 있었다. 골짝 농군들을 눈에 띄는 대로 잡아 선매를 때리고 그 지경이 되도록 술을 뺏아 먹 어도 말리는 순경하나 제대로 없는 게 자유당 말기의 돌내골 같은 시골 장터였다. 명훈은 뒤따라온 또래들에게 그들이 빠져나갈 길목만 막게 하고 혼자서 그 다섯에게 다가 갔다. 술이 취하지 않았다 해도 그때의 명훈에게는 그리 겁나는 상대가 아니었다. 기껏했자 역기나 들고 샌드백이나 두들겨 익힌 촌구석의 마구잡이 주먹들인 데다, 당시만 해도 칼 같 은 흉기는커녕 돌조차 집어드는 법이 없는 시골 싸움판의 천진성이 명훈을 자신 있게 한 것 이었다. 과연 결과는 명훈이 자신한 대로 되었다. 둘을 빼면 몸조차 가눌 수 없이 취한 그들 다섯 은 명훈의 온갖 화려한 싸움 기술만 고향 사람들에게 선뵈게 하고 장터 바닥에 허옇게 널브 러져버렸다. 그런데- 그때 가장 신나하며 떠들고 다니던 게 바로 그 상두 녀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녀석은 고향 사람들 중 유일한 예외로 뒷골목 시절의 명훈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이듬해 이른봄 바람이 나서 서울로 올라온 녀석은 어떻게 알았는지 명훈이 잡고 있는 뒷골목으로 찾아와 깡철이를 초주검시켜 내쫓은 직후의 위세 좋은 명훈을 한나절 따라 다녔던 것이다. 명훈의 강요에 못이겨 그날 밤 안광해 기차를 타긴 했지만 명훈을 보는 눈길이 어찌 그리 황홀해 뵈던지... "야, 일마들아 너 쫌 일나라보자." 명훈이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옆자리로 간 상두가 거기 않은 두 젊은이에게 까 닭 없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한눈에 산골짜기의 순진한 농사꾼임을 알아볼 수 있는 그 들이 한마디 대꾸조차 못하고 일어났다. 상두가 그 빈 좌석을 가리키며 좀 전과는 딴사람같 이 달라진 목소리로 명훈에게 권했다. "형님, 절루 가시더, 그릴 말씀도 있고..." "남의 자리를 그렇게 뺏으면 되나? 얘기야 돌내골 가서 하면 되는 거고." 명훈이 자신도 모르게 나무라는 투가 되어 말했다. 녀석의 얼굴에 일순 이게 아닌데, 하는 것같이 당황한 빛이 스치더니 이내 넉살스레 받았다. "아, 절마들요? 괜찮니더. 먼저 알아보고 자리를 내놔야 할 놈아들이." 그러더니 그 둘에게 얼러대듯 물었다. "일마들아, 너 뭔 유감있나? 내하고 형님하고 여다 앉아 얘지 쫌 하믄 안 되겠나? 내한테 는 하늘 같은 형님이다." "아이, 아이다. 우리가 뭐라 카드나? 좋은 대로 하라모." 둘은 펄쩍 뛰듯 그렇게 말해놓고 비실비실 버스 뒤편 쪽으로 물러났다. 상두 녀석의 그 어쭙잖은 위세가 문득 희미한 향수 같은 걸 일으키다가 이내 재빠른 계산으로 변했다. '어쩌 면 앞으로의 이곳 생활에서 이런 녀석을 활용하는 것도 유리할지 모르겠다...' 원래 상두 녀석이 나타나기 직전에 언뜻 명훈의 상념에 떠오른 것은 시였다. 행운에 가까 울 만큼 편한 보직으로 지난 3년의 병영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꽤 많은 진전을 보였 다. 그리고 귀향을 결정할 때 앞날의 설계도 한 모퉁이에는 어느 날 자신이 한 뛰어난 전원 시인으로 혜성같이 문단에 등장하는 것도 들어 있었다. 그 시집 제목은 '흙 노래'- 그러나 기차칸 내내 그를 괴롭힌 숙취에다 갑작스런 찬내 할 배의 출현 따위로 그때껏 잊고 있다가 상두 녀석이 차에 오를 무렵하여 겨우 떠올랐던 것이 다. 만약 녀석이 그렇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돌내골까지의 나머지 길은 그 '흙 노래'의 첫 편을 엮는데 바쳐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든 녀석 때문에 거 기 바쳐질 시간은 영뚱하게도 그 근처 읍면의 시덥잖은 주먹 세계 판도를 듣는 데 다 쓰이 고 말았다. "하이고, 형님 참 잘 왔니더, 인제 돌내골 아아들도 기 좀 피고 살 게라. 그간 여예됐는지 아니껴? 군사 혁명 나고 한 이 년 조용하디(더니), 어느새 실실 꺼저리(허섭쓰레기) 주먹들 이 생기(겨) 사람 괄세(괄시)를 하는데- 마음은 뻔해도 주먹이 없으이, 차암 우리 돌내골 아 아들 복장 터지는 꼴 많이 봤니더. 명양읍에는요- 장땡이란 눔이 있는데, 이기 제법 노는 게라요. 대처에서 한가락 하다 온 눔 같디더. 여기 진안에도 한 눔 왔디더, 여기 토백이는 맞는데 어디서 더러븐 걸 배아온 게라요. 주먹은 별기 아인데- 칼이고 도끼고 마구 휘두르 이... 뭐가 무서버 피하는 게 아이라 더러버 피하는 거라 안 카디껴? 조금 전에도 내캉 대포 한잔 했니더마는... 그래고, 긴바위 쪽에도 한 눔 왔는데, 글마 지는 점잖이 있어도 그 밑에 서 배운 놈아들이 얼매나 못됐게 나쌌는지... 뭐 대구서 야하라(합기도) 사범질 하다 왔다 카 든강, 다 풍떠는 거겠지마는..." 제4장 향토 "자, 이제 장작 재는 일은 제가 혼자 맡아라. 나는 면사무소에 좀 올라 가봐야겠다." 힘찬 도끼질로 마지막 적송 토막을 시원스레 쪼개붙인 형이 장작 더미에 도끼 자루를 기 대놓으며 말했다. 눈치볼 것 없이 쪼개기 놓은 생솔만 골라 베어온 까닭에 익숙하지 못한 도끼질에도 장작들은 땔감으로 쓰기에 아까울 만큼 미끈하게 쪼개져 있었다. "그러죠, 걱정말고 다녀오세요." 철은 그렇게 대답하며 흘끗 안방 쪽을 살폈다. 빨리 말려 때기 위해서는 장작을 우물 정 자로 쌓아야 하는데, 쌓을 게 소 등에 실어도 세바리는 넘는 양이라 도움이 필요한 까닭이 었다. 옥경은 학교에 가고 어머니는 새벽같이 문중 아주머니들과 산나물을 뜯으러 가 도와 줄 사람은 안방의 누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철은 한번 말을 붙여보지도 않고 누나 영희의 도움을 단념했다. 도끼질이 멎자 이 내 마당까지 새어나오는 라디오 소리 때문이었다. 보나마나 영희는 노랫가락보다 잡음이 더 많은 그 라디오에 취해 흥얼거리며 드러누워 있을 것이었다. 그런 누나를 건드렸다가 어떤 심술을 부리고 나올지 몰라 철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혼자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한참 나무에 물이 오르는 철이라 형이 잘게 쪼갠다고 쪼갰는데도 장작들은 보기보다 묵직 했다. 철은 그 장작들을 한아름씩 안아 바람맞이 마당가로 나르고 우물 정자로 얼기설기 쌓 기 시작했다. 밝은 햇살 때문인지 장작의 목질부가 눈부실 만큼 희게 느껴졌다. "반만 그렇게 쌓고 나머지는 그냥 재둬." 철이 키만한 높이로 장작 한 더미를 다 쌓았을 무렵 땀을 씻고 나들이 옷으로 갈아입은 형이 건넌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그러다가 이내 누나에게 생각이 미쳤는지 못마땅한 눈길로 안방 쪽을 보며 소리쳤다. "영희 안에 있어? 뭐 해?" "무슨 일이야? 오빠." 형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커서인지 누나가 금세 방문을 열고 내다보며 물었다. 철의 짐 작대로 라디오 가락에 빠져 누워 있기라도 했던지 머리칼이며 옷매무시가 한결같이 부스스 했다. "부엌일 끝났거든 철이 좀 거들어줘라. 저 혼자서는 언제 끝날지 몰라." 형이 평소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돌아가 달래듯 말했다. 누나가 돌아온 뒤로 형은 되도록 모든 걸 누나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고, 꼭 시켜야 할 일이 있으면 구슬리거나 달래는 방식을 썼다. 어머니도 겉으로는 형과 비슷했지만, 그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 같은 인내를 바탕한 불안한 양보일 뿐이었다. "아이, 오빠두 참, 난 또 뭐라구. 날더러 이 땡볕에 나가 일하란 말이야? 담박 새까맣게 그을고 말 텐데. 손은 또 어떡하고? 설거지만 해도 꼭 식모 손같이 거칠어져 속상해 죽겠단 말야." 형이 부드럽게 나오자 누나는 금세 불평조가 되어 받았다. 마치 내가 이렇게 집에 와 있어 주는 것만도 크게 인심쓴 거야, 하는 투의. 일순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스쳤으나 형은 이내 너털웃음으로 그걸 지웠다. "기집애두. 넌 건강미란 것두 몰라? 병자같이 하얀 것보다는 알맞게 그을은 얼굴이 나는 훨씬 예뻐 보이더라. 잔소리 말고 철이 좀 거들어 줘. 나는 오늘 면에 가봐야 돼. 군에서 측 량해간 거 어찌 됐는지 알아봐야 한다구." 형은 그래놓고 굳이 강요하지는 않겠다는 듯 사립문을 나갔다. "알았어. 갔다와." 누나가 무엇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는지 선선한 대답으로 형을 보냈다. 돌내골로 돌아올 때에는 철이도 형도 이미 개간 허가가 나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러 나 돌아와서 보니 정식으로 개간허가가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면 직원들 에게서 들은 가능성을 허가로 여겨 그리 전한 것일 뿐이었다. 산을 파뒤집으려면 군청의 정식 허가가 필요했고, 그 허가는 꽤나 까다로운 서류와 여러 가지 절차를 거쳐야 했다. 형은 제대하고 돌아오기 바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서류를 갖 추고 절차를 밟았다. 면의 무슨 주사, 군청의 무슨 계장 하며 사람도 여럿 다녀갔고, 개중에 더러는 술잔까지 얻어마시고 가는 눈치였다. 형은 그런 여러 절차 중에서 측량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측량이 있던 날 어머니는 동 네의 씨암탉을 구해 점심상을 차리고, 형은 일부러 장터까지 나가 귀한 맥주를 다섯 병이나 사왔다. 군에서 나온 계장과 측량 기사를 대접하기 위함이었다. 짐작이기는 하지만 군 직원 에게는 따로이 돈봉투까지 찔러넣은 것 같았다. 그날 늦게 측량 기사들과 군 직원을 배웅하고 거나해져 돌아온 형은 전에 없이 자신에 차 서 말했다. "결국 9정보를 따냈지. 소금 먹은 놈이 물켠다고, 경사가 20돈지 30돈지 어떤 놈이 와서 분도기로 재본대? 이제 다 끝났어." 그런데 측량이 끝나고도 보름이 넘도록 허가 통지서가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애써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형은 적잖이 초조해하는 것 같았다. 방금도 대단찮은 일처럼 말하기는 했어도 집에서 지그시 기다리지 못하고 면사무소까지 가서 알아보려는 게 그 때문인 듯해 철이도 덩달아 초조해졌다. '혹시 개간 허가가 영영 나오지 않는 게 아닐까. 결국 우리 식구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져 도시로 내던져지게 되지는 않을까...' 철은 서둘러 사립문을 나서는 형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그런 불안에 빠졌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속이 풀어진 영희가 철의 생각을 장작 쌓는 일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 사이 장작 더미에서 장작 한아름을 안고와 철이 재어둔 장작 곁에 우르르 쏟으면서 쾌활하게 말했다. "나도 이거 쌓을 수 있어. 6.25 나고 여기 왔을 때 기억이 있다구. 오빠가 까치 둥우리만 하게 깨놓은 장작을 할머니하고 이렇게 쌓았지. 벌써 그게 십 년도 넘네..." 둘이서 쌓아 그런지 장작 모두를 우물 정자로 얼기설기 쌓았지만 일은 생각 밖으로 빨리 끝났다. 두 시간도 안 돼 양지바르고 바람맞이인 마당 반쪽이 온통 흰 장작 더미로 쌓이고 집 안 전체에 은은한 송진 냄새가 풍겼다. 일을 시작할 때와는 달리 누나는 또 무엇 때문인가로 심사가 틀어져 신경질을 내고 있었 다. 소리내어 불평하고 있는 것은 다른 데 원인이 있어 보였다. 철의 짐작으로는 그 얼마 전 재궁막 쪽을 한번 거들떠보지도 않고 언덕길을 내려간 우체부 때문인 듯했다. 전 같으면 그 를 불러세우고 자신에게 온 편지가 있나 없나 물었을 텐데 장작을 쌓는 데 정신이 팔려 그 를 놓쳐버린 게 공연히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나 요 앞 개울에 나가 손 씻고 올게." 철은 그런 누나와 부딪치는 게 싫어 그렇게 한마디 던지고는 사립문을 나갔다. 나이보다 는 훨씬 세상일에 밝은 철은 누나가 기다리는 게 남자의 편지라는 걸 알고 있었을 뿐만 아 니라, 그런 일에는 자신같이 대여섯이나 손아래인 남동생이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는 것까 지 알고 있었다. 개울로 간 철이 손바닥이 아릴 만큼 조약돌로 비벼 송진 얼룩을 깨끗이 씻어내고 돌아왔 을 때는 누나의 속도 좀 풀어진 듯했다. 그러나 마루 기둥에 기대 무슨 노랜가를 흥얼거리 다가 철을 맞은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왜 이렇게 늦었어? 점심 안 먹을 꺼야?" 그리고 뒤이어 내온 점심상도 아직 다는 풀리지 않은 속을 그대로 드러내보이고 있었다. 아침에 먹다 남은 식은 밥덩이가 몇 개 얹혀진 밥양푼을 그대로 상에 얹고 김치도 보시기 째, 된장도 냄비째 상 위에 올려 놓았다. 어머니가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을 마구잡이 상차 림이었다. 밥은 겨우 쌀이 섞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보리밥이었고, 김치는 버리기 직전의 군내 나는 김장 김치에 된장은 식어 사람의 식욕을 돋우는 데라고는 전혀 없었다. 상을 내 온 그녀 자신도 몇 술 뜨다 말 정도였다. 그러나 고아원의 거친 음식에 단련된 철은 달게 자기 몫을 비웠다. "두들 가려구? 또 책 빌려오려구?" 점심을 먹은 철이 헝겊 보자기에 책들을 주섬주섬 싸는 걸 보고 누나가 물었다. 지난 주 일가들 집을 돌아 빌려온 책들이었다. 아직 개간이 시작되지 않아 철에게는 할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오전처럼 형을 거들어 땔나무를 장만하는 일을 빼면 하루 한 번 개울가 우물로 가서 식구들이 먹을 물을 물지개로 져나르는 게 철이 해야 할 일의 전부였다. 그 나머지 시간에 대해 어머니와 형은 철에게 공부를 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열여섯의 소년에게 학업이 이어지리라는 뚜렷한 희망도 없고 아무런 강제도 없이 혼자서 학교에서나 할 공부를 이어가라는 것은 좀 무리였다. 더구나 철은 바로 그 공부 때문에 이 년이나 지긋 지긋한 고아원 생활을 하다가 이제 막 벗어난 다음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성적도 우수했 고, 앎에 대한 욕심도 적은 편은 아니었으나 당장 교과서에 매달리라고 요구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돌내골로 돌아온 처음 한동안 철은 알 수 없는 피로감에 차 일이 없을 때는 몸도 마음도 한없이 풀어놓고 잠자듯 쉬었다. 그러다가 형이 제대해 돌아온 뒤에는 그 화려한 꿈에 영향 을 받아 또한 황홀한 공상에 빠져들었다. 드넓은 초원과 목장, 풍차와 성같이 솟은 대저택- 그리하여 어떤 때는 백마에 높이 오른 영주가 되어 명혜를 찾아가는 꿈을 꾸기도 했다. 책 과 배움은 그리 소용에 닿지 않을 듯한 환상적인 미래였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공상으로만 채워나가기에 그의 의식은 너무 부대끼고 닳아 있었다. 형 의 억지로 끼워맞춘 신념과 과장된 전망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앞날의 진상이 가늠되면서 그는 어떤 면에서는 형보다 먼저 현실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결국 자신과 가족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눈부신 성취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최 소한의 조건을 확보하는 것에 자나지 않으며, 설령 형이 그려보이는 청사진이 그대로 실현 된다 해도 자신의 삶은 여전히 자신의 문제로 남아 있으리라는 것이 먼저 철에게 자각되었 다. 그리고 이어 그런 자각은 자신 앞에 놓인 삶을 실체보다 더 아득하게 만들었으며, 마침 내는 견디기 힘든 무게로 열여섯의 의식을 짓눌러왔다. 《그때 형이 그리고 있던 삶의 양식은 본질적으로 근육과 땀의 바탕한 것이었다. 그에게 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 시가 있었지만, 그것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지배하고 있지는 못했다. 내 열여섯의 눈에는 그의 시는 기껏해야 노동이 일궈놓은 삶의 정신적인 보완물 내 지 장식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비쳤다. 나는 진작부터 형이 선택한 삶의 양식을 끝내 따르지는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 는 아직 노동의 진정한 의미도 이해하지 못했고, 육체는 오랜 결핍에 시달린 뒤끝이라 정신 적인 것에 대한 갈망도 그리 절실하지 않을 때였지만, 어쨌든 돌내골에서의 날들은 어디까 지나 한시적이며 내 스스로를 위해서는 다른 양식의 삶이 준비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손 보다는 머리, 몸보다는 정신에 의지한 어떤 삶. 어찌 보면 그런 나의 예감은 그 시대의 가치관에 저항 없이 함몰된 탓으로 돌릴 수도 있 을 것이다. 그때도 이미 일하는 기쁨이니 노동의 신성함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이 사회의 의 식 표면을 건성으로 떠다니고 있기는 했어도 자라는 내가 더 자주 확인할 수 있던 것은 노 동을 천시하는 경향이었다. 일부는 피로 전해오고 일부는 어머니의 끊임없는 상기에 의해 주입된 어설픈 선비 사상도 노동에는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다. 농본 사회에 기초하고 있어 주경야독이란 선비의 이념태 가 있기는 해도 그것은 노동의 가치를 높이 쳐서라기보다는 다수의 농민 계층을 격려하기 위한 전시대의 고안이라는 편이 옳았다. 내가 그때껏 알게 모르게 길러온 성향과 정신적인 기호도 전통적 의미의 노동에 바탕한 삶을 나의 것으로 선택하는 데는 유리하지 못했다. 나는 어느새 물질적인 결함과 육체가 겪 는 곤궁을, 그리고 현실의 쓰라림과 외로움을 마구잡이 책읽기와 공상으로 잊는 시기를 지 나 말의 비실제적인 효용에 맛들인 단계까지 이르러 있었다. 따라서 그 귀향 초기의 들뜸과 알 수 없는 피로감에서 놓여나자마자 나는 다시 이미 왠지 결정된 듯 느껴지는 그 삶의 양식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막연하나마 감미로운 기대 와 함께였으나 그것이 구체화된 오늘날에 와서 보면 지겹고 혐오스럽기까지 한 삶의 양식,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말하거나 쓰고, 사랑이나 미움에 휩쓸리고, 열정도 없이 가치 판단에 관여하고, 그러다가 끊임없이 시비에 휘말리는... 아아, 이제는 회한마저 느껴지는 이 선택... 물론 그때에도 효율적이고 요령 있는 준비 방법은 따로 있었다. 재빨리 학과 공부로 돌아 가고, 체계와 일관성에 더 중요성을 두어 내 정신을 길러갔더라면 다 같이 정신에 의지하고 살더라도 이 터무니없이 과장되어 있기만 한 삶과는 다른 길로 접어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도 그랬듯 그때도 나는 그 뻔한 방법을 두고 터무니없이 돌게 되는 길로 천 연스레 접어들었다. 제도가 정해둔 교육 과정은 제쳐놓고, 아무런 방향도 없고 목적도 가지 지 않은 읽기 위한 읽기로 빠져 들어간 것이었다. 하기야 어떻게 보면 그때로서는 그것이 피할 길 없는 타협일 수도 있었다. 정신적인 삶이란 결국 책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 과 그러나 제도가 정한 교육 과정을 거치기 위해 겪어야 했던 혹독한 체험간의. 책은 읽되, 그리고 결국은 거치지 않을 수 없다 하더라도, 당분간은 제도 교육의 과정에서 자유롭고 싶 다는.》 뒷날 철은 어디선가 그때의 자신을 그렇게 스스로 분석한 적이 있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의 일이지만 비교적 온당한 분석이다. 그 당시 철의 중요한 서고는 언덕 위 문중 마을의 사랑방이었다. 유서 깊은 동족 부락의 특징 중의 하나는 살이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교육열인데, 그것은 철의 문중도 예외가 아니 었다. 언덕 위의 고가를 지키는 집에는 대개 한두 명의 대학생이 있었고, 그 밖의 일가들에 게도 고졸의 애매한 학력으로 도회로도 진입하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오지도 못한 고급 건달 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때까지만 해도 오십여호는 넘게 남아 있던 문중 일가의 사랑방을 돌 면 읽을 거리는 얼마든지 빌려올 수 있었다. '청춘''아리랑'같은 대중 잡지에서 '백년한''청춘 을 불사르고'같은 당시의 인기있던 수필류, '만가''인간의 조건'같은 일본 소설에 문고판 세계 명작들이 주종을 이루었지만, 때로는 근엄한 장정본의 '죄와 벌'이며 사르트르와 카뮈의 신 판 번역들도 있었다. "얘, '만가' 그건 줄거리는 재밋어도 너무 지루하더라. '외로운 사람들'이란 그 쬐끄만 책도 그렇고, 무슨 스키 무슨 코프 하는 길다란 이름들 나오는 책도 못 읽겠어. 도대체 이름들이 헷갈려 줄거리가 나가야지. 얘 있잖아? 달 지난 거라도 좋으니 '청춘'이나 '로맨스' 어디서 구할 수 없어? 양동댁, 그 집에 한번 가 봐. 거기 여자애들이 많으니 어쩜 그런 책도 있을 거야." 이윽고 지난번에 일가들에게 빌려온 책을 모두 챙겨 집을 나서는 철에게 영희가 그런 주 문을 했다. 철은 어찌 됐든 누나가 장작 쌓기를 거들어준 게 고마워 선선히 대답했다. "알았어. 거기 아니라도 그런 책 더러 봤어. 오히려 양동댁에는 없는 것 같던데. 거 뭐야, '여원'같은 잡지뿐이었어. 그런 것도 빌려다 줘?" "그건 딱딱하던데... 하지만 좋아. 그것도 가져와." 영희가 다시 마룻바닥에 벌렁 드러누우며 그렇게 받았다. 아직 5월 초순인데도 한낮이라 그런지 햇볕이 제법 따가웠다. 철은 예닐곱 권의 책이 싸 인 보퉁이를 어깨에 걸치고 마을 사람들이 신작로라 부르는 큰길을 따라 문중 마을 쪽으로 향했다. 문중 마을은 재궁막에서 십리에 조금 못 미치는 면 소재지 뒤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원이 정확히 무언지는 모르지만 돌내골 사람들이 대개 두들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짐작에 는 언덕바지란 뜻의 고어거나 사투리인 듯했다. 두들로 오르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장터를 지나 면사무소 뒷길로 해서 계곡 안쪽으 로 드는 좀 넓은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냇가를 따라 올라가다가 바로 언덕을 끼고 오르는 샛길이었다. 철은 장터 거리를 지나는 게 싫어 냇가를 따라 올라갔다. 그때까지는 철이 아직 명확하게 구분할 줄 모르고 있었지만 두들은 대략 세 부분으로 나 누어져 있었다. 고향이라고 말할 때는 돌내골 전체를 떠올리기보다는 두들만을 떠올릴 때가 많은 철에게는 차라리 고향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그 세 부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언덕 위 고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 진 것이었다. 큰 종가와 작은 종가, 그리고 바로 그 지하들에게는 사파 종가로 높임을 받기 도 하는 큰집들이 풍수의 이치에 따라 자리잡고, 그 사이사이를 한때 형세가 좋았던 집안들 이 들어섰는데, 작게는 서른 칸 남짓에서 크게는 여든 칸까지의 입 구자 골기와 집들은 비 록 세월의 침식을 당해도 한때 은성했던 일문의 영화를 드러내보이기에는 넉넉했다. 철이뿐 만 아니라 같은 조상의 피를 나눈 모든 일가들에게 고향의 핵심이 될 만한 곳이었다. 그 다음 부분은 언덕 발치 작은 계곡 쪽으로 나직나직 엎드려 있는 초가집들이었다. 대개 한 일자로 지어진 홑집이고 손바닥 같은 채마밭을 끼고 있는데, 그 집들에는 하나같이 타성 바지들만 살았다. 얼핏 보아서는 고향과 무관한 듯도 하지만 따져보면 그 또한 첫째 부분에 못지않게 중요한 고향의 일부를 이루었다. 어느 집 무종, 어느 집 드난살이, 어느 집 마름 같은 그 집의 옛 주인들이야말로 언덕 위 문중의 옛 영화를 그들의 고단했던 일생으로 증언 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마지막 그 두 부분을 연결하듯 흩어져 있는 특징 없는  자 혹은  자의 기와집들과 초가 집들이었다. 일가이기는 하지만 지난 영광과는 좀 먼 지하들이 대부분 그 집의 주인들이었 는데, 그 때문인지 몰락의 음울함도 그 비장미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철이 접어든 길은 바로 언덕 위의 고가들에 이르는 오솔길이었다. 그 오솔길 은 내쪽 언덕에 우거진 아름드리 적송과 참나무붙이의 고목들 사이에 나 있었다. 마을이 가 까운 탓에 너무 심하게 낙엽을 긁어가버려서인지 풍화된 화강암의 언덕은 잿빛으로 황폐해 있었고, 나무들도 줄기의 높이나 등걸의 굵기에 비해 수세는 그리 좋지 못했다. 아직 5월 초 순이라 참나무붙이의 잎새가 제대로 피어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오솔길을 오르던 철은 언덕을 거의 다 올라서야 자신이 공연히 서두른다 는 느낌과 함께 잠깐 숨을 돌리고 싶어졌다. 따가운 햇살 아래 십리 가까이나 걸어온 데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가파른 언덕 길을 한참이나 뛰듯이 올라와 이마에도 땀이 솟고 있었다. 철은 한 군데 소나무 그늘을 골라 부스러져내리는 청석 위에 앉았다. 그래도 잎이 다투어 피어나는 계절이라 그런지 고목들의 수세가 좋지 못하다고는 해도 가만히 앉아서 살피니 그 런대로 시원스런 느낌이 들었다. 무정한 갈퀴질로부터 간신히 뿌리를 지키고 있는 언덕바지 의 잡초들이며 바위의 이끼들도 여기저기서 파릇이 새싹을 피워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앉아 있기 한 오 분이나 되었을까. 별뜻 없이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 철의 눈길이 문득 한곳에 머물렀다. 개울가를 따라 난 길에서 올려보면 정면이 되지만, 앉아 있는 철에게는 비스듬하게 보이는 언덕 위의 청석 한 모퉁이였다. 두레상 정도의 편편한 바위면 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글씨 주변에 새파란 이끼가 돋아 있어 처음에는 이끼 그 늘인가 싶었으나 자세히 보니 무언가 꽤나 깊이 새겨진 듯했다. 세심대- 철이 돌연한 호기심으로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 청석면에 는 사람 머리보다 더 큰 글씨로 그 석 자가 씌여 있었다. 파인 획에도 이끼가 덮인 걸로 보 아 꽤나 오래 전에 새겨진 글씨였다. '마음을 씻는다...' 그럭저럭 뜻은 끼워맞출 수 있게 된 철은 홀로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야릇한 충격을 느꼈다. 아마도 그것은 철의 언어 경험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동사와 명사의 이상한 배열 탓이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동작인 '씻는다'와 추상명사인 '마음'의 연결- 뒷날에는 그 자신 도 일상적인 대화와 다름없는 그 같은 언어의 배열을 활용하게 되었지만 그때에는 그의 신 기할 만큼 충격이었다. 그 새로운 언어 경험은 철로 하여금 이번에는 의식적인 탐색의 눈길을 사방으로 보내게 했다. 주의를 기울여 찾아보니 그런 글씨는 한 군데 더 있었다. 세심대라고 씌여진 곳으로부 터 동쪽으로 한참을 더 간 곳의 청석면에 다시 무언가가 새겨져 있는 게 보였다. 하마터면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하며 가보니 거기에는 좀 전의 크기와 비슷한 글자로 낙기대 석 자가 씌어져 있었다. '기'자 때문에 조금 미덥지는 못했지만 이번에도 그럭저럭 뜻은 알 수 있었다. 철이 알고 있는 글자는 기자뿐이었으나 조금 전의 언어 경험이 기자도 틀림없이 배고픔을 나타낼 거라 는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낳게 한 것이었다. '즐긴다'와 '배고픔'은 일상의 언어 경험에서는 '씻는다'는 구체적인 행위와 마음이라는 추상명사만큼이나 무관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자는 기와 뜻이 같거나 비슷할 것 같았다. '배고픔을 즐긴다.' 철은 거의 확신에 차서 그렇게 뜻을 새겨보았다. 그러나 그 뜻이 주는 감동은 전만 못했 다. 그 구절이 뜻하는 바는 이미 전과 같은 언어 자체의 문제를 넘어 철이 아직은 잘 이해 할 수 없는 어떤 정신적인 세계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이 함부로 읽은 책들 중에는 틀림없이 안분지족이나 안빈낙도에 해당되는 구절이 있었으나 철의 의식에 흔적을 남길 만 큼 이해되고 있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러한 정신세계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해도 '즐긴다'와 '배고픔'이란 일견 무관해 뵈는 두 말의 억지스런 결합이 이번에도 철에게 한 충격으로 기능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전 과는 달리 철이 그날 따라 강당 안을 한참이나 서성인 게 바로 그 증거였다. 문중 사람들이 흔히 강당이라고 부르는 그 건물은 누가 보아도 언덕의 중심이라고 여겨질 만한 전망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정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림집도 아닌, 넓은 대청과 그 대청 좌우에 큰 방 둘만 딸린 단순한 구조의 덩그렇게 높기만 한 집, 문중의 주구도 주 인일 수 없으면서 문중 모두가 주인인 집, 그래서 언덕 위의 어떤 고가보다 더 낡고 헐어 있는 집- 돌내골로 돌아온 뒤 철은 여러 번 그 건물 앞을 지나다녔으나 대개는 그런 막연 한 느낌으로만 지나치곤 했다. 문화재로서의 흥미를 끌기에는 그때껏 보아온 것들에 비해 규모도 작고 양식의 특징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개인적인 관심을 가질 만큼 특별한 인연이 나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우연히 보게 된 암벽의 두 곳 지명이 전에 없는 흥미로 철의 발길 을 강당 마당으로 끌어들였다. 지나치면서 얼핏 본 것들이지만, 그 처마와 벽에도 여러 개의 현관과 편액들이 걸려 있다는 게 새삼 기억난 까닭이었다. 허물어진 돌계단을 올라가 뒤틀려 벌어진 대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강당은 언제나처럼 비 어 있었다. 마당 군데군데 마른 줄기 밑에서 피어나는 잡초만이 오래 손본 사람이 없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철은 그런 것들에 별감흥 없이 먼저 현판부터 쳐다보았다. 석천서당. 그게 강당이 라 불리는 그 건물의 정식 명칭인 듯했다. 철이 가지고 있는 서당의 개념과는 영 맞아떨어 지지 않는 명칭이었다. 석천이란 고유명사도 너무 평범해 은근히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돌내 골이란 마을 이름을 한문으로 바꿔둔 것에 불과해 세심대나 낙기대에서 받은 감동을 비웃는 듯했다. 신발을 신은 채 먼지 앉은 마루 위로 올라간 철은 이어 자신없는 대로 사방 벽면에 잇대 듯 결려 있는 현판들을 훑어나갔다. 유감스럽게도 이번에는 철의 보잘것없은 한문 지식이 새로운 감동의 기회를 막아버렸다. 철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해서로 된 창건기와 중수기 정도였는데, 그것도 제목과 강희 광서 같은 중국의 연호 정도였다. 철은 약간 맥이 빠지는 기분으로 서당 마루에서 걸어나왔다. 그리 뚜렷한 것은 아니었지 만, 그 서당은 어딘가 '마음'을 '씻고' '배고픔'을 '즐기는' 어떤 알 듯 말 듯한 세계로의 단서 가 있을 것 같은 곳이었으나 당시의 그로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었다. 다만 때묻고 여 기저기 떨어져나간 회벽의 낙서에서 속절없는 세월의 자취만을 까닭 모를 비감으로 읽었을 뿐이었다. '대지를 밟고 힘있게 일어서라!'는 웅변조의 훈계에서 '케쎄라, 쎄라'라는 양곡 가 사까지의. 대문께를 나설 때 잠시나마 다시 한번 철의 눈길을 끈 게 있기는 했다. 대문간 곁의 헛간 에 쌓여 있는 목판 더미였다. 비바람에 뒤틀여 비죽이 열려 있는 헛간문 사이로 두텁게 먼 지를 덮어쓴 채 천장까지 재어져 있는 목판 더미는 틀림없이 철이 탐색을 시작한 어떤 새로 운 세계와 연관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의 하나를 조심스레 빼내봐도 좌우가 뒤바뀐 한문 자획의 혼란스러움뿐 그의 기대를 채워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철은 이따금씩 그날을 회상하며 자신의 기억을 의심쩍어하곤 했다. 그 뒤 십 년도 안 돼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자까지 붙게 된 그 서당이 그때는 어찌 그리 황폐하게 버려져 있었으며, 명색 문중이 있으면서 파조인 청계공 이하 네 분 불 천위의 문집 목판은 또 어찌 그리 허술하게 보관되었던 것인지. 하지만 60년대 초반, 문중 모두가 하루하루의 살이에 힘겹던 그때는 틀림없이 그랬다. 무슨 강한 암시처럼 철을 이끌었던 낯선 세계로의 호기심을 서당문을 나서며 이내 힘을 잃어갔다. 서당 발치의 언덕 중턱에 있는 도곡댁의 용마루가 문득 동장 일을 보고 있는 아 저씨뻘 일가를 떠올리게 하고, 이러 읽을거리 많은 그 아저씨의 사랑방이 자기가 왜 두들로 올라왔는가를 깨우쳐준 까닭이었다. "철이 왔나?" 갑자기 바빠진 철이 뛰듯이 비탈길을 내려가 도곡댁 사립문을 밀자 마침 산나물 말린 걸 거두고 있던 도곡 할머니가 무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자상스럽지는 않아도 마음으로는 문중 의 누구보다 철이네를 생각하는 할머니였다. 촌수도 열두 촌으로 두들에서는 가장 가까운 집안 중의 하나라는 걸 철은 들어 알고 있었다. "밤골 아제 계세요?" 집 안이 조용한 걸로 보아 없는 줄 알면서도 철이 짐짓 그렇게 물었다. "아이, 상구(내내) 있다가 방금 면에 볼일 있다 카미 나갔다. 와?" "신문 좀 보구, 책 좀 빌려가려구요." "또? 저번에도 몇 권 안 가지구 갔디나? 며칠 안 되는 거 같은데..." "그건 다 읽구 가져왔어요. 여깄어요." 철이 보자기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보이며 허락을 구하는 법도 없이 사랑방 문을 열었다. "뭐든지 흐틀지 말고 조심하거래이. 면 서류 같은 거도 있고 하이..." 도곡 할머니가 철의 등뒤에 대고 그리 요긴한 것 같지도 않은 당부를 했다. "네." 철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밤골 아재는 조금 전까지 습자를 하다 갔는지 방안에는 먹내음이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방 한켠에는 아직 먹물이 마르지 않은 벼루와 글씨 연습을 한 신문지 뭉치가 흩어져 있었 다. 밤골 아재의 서가는 두 칸 장방 윗목에 있었는데, 비록 대패질 안 한 송판으로 짠 것이기 는 해도 한 벽을 꽉 메우는 크기였다. 시골에는 흔치 않은 크기의 서가였다. 그러나 이미 서 너 번이나 뒤져본 철은 그 내용이 대단한 게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동장을 하다 보니 받 게 되는 이런저런 정부 간행물들, 매달 빠짐없이 모으는『새농민』과 농기구 회사나 종자 회사가 간행한 여러 가지 팸플랫, 중고등학교 시절의 헌 교과서며 어쩌다 한 권씩 사본 대 중 잡지들 같은 것에다 원예 작물 참고서 따위가 서가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어, 철이 찾는 읽을거리는 몇 권 되지 않았다. 철이 두들로 올라올 때마다 그 사랑방을 찾는 이유는 오히려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무 엇보다도 꼼꼼한 밤골 아재가 배달된 것이면 어김없이 모아두는 두 개의 신문철이었다. 하 나는 동장에게는 으레 오게 되어 있는 서울신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안광에서 특별히 우편 으로 부쳐오는 동아일보였다. 또래의 아이들보다 세상 돌아가는 데 남달리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었으나, 철은 두들에 올라가기만 하면 공식처럼 그곳을 들러 맨 먼저 밀린 신문부터 읽었다. 살던 도회와 또래들 로부터 떨어져 홀로 시골에 처박히게 되었다는 데서 온 고립감이 열여섯 소년에게는 좀 엉 뚱한 그런 열심히 나타난 것인지도 몰랐다. 철이 기억하는 한 신문으로 보는 세상은 언제나 위기의 연속이었다. 한문이 비교적 적게 섞인 신문의 사회면을 더듬더듬 읽기 시작한 국민학교 상급반 때부터만 헤아려봐도, 6학년 때 4.19가 있었고, 그 이듬해 5.16이, 이어 끊임없이 반혁명 음모의 적발이 있었다. 특히 반 혁명 음모는 그 대부분이 혁명 주체 세력간의 주도권 다툼에서 빚어진 조작극이란 걸 철은 뒤에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매번 끔찍하게만 들렸다. 철이 한꺼번에 모아 읽고 있는 그 일주일의 신문도 그런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내 정치는 민정 이양을 앞두고 있을 대통령 선거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박정희 의장이 출 마를 선언했고 '5월 동지회'란 게 구성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공약대로 민정 이양을 촉구하 는 대규모 옥외 집회가 열리고 박의장 출마를 반대하는 성명이 나왔다. 경제도 조용한 것 같지는 않았다. 쌀값은 가마당 3천 원을 웃돌고 잡곡이며 두부, 콩나물값까지도 덩달아 치솟 았다. 사회는 유괴와 자살과 살인으로 시끄러웠으며, '쇼'업계는 모두 문닫기 직전이었다. 세계도 여기저기서 시끄러웠다. 카스트로는 자기를 반대하는 고위 성직자를 암살하려 했 고, 인도네시아는 독립했으나 수카르노는 적자투성이 섬을 떠맡았을 뿐이며 미국 의회는 행 정부의 달 정복 계획에 재동을 걸고 나섰고, 중공 화물선 약진호는 제주 부근에서 침몰하였 다. 배후의 숨은 의미보다는 사실의 기억 쪽에 치중해 읽어나가는 철에게는 그 모든 일이 하나같이 크고 놀라운 사건으로만 비쳤다. 신문의 센세이셔널리즘에 둔감해지기 위해서는 철이도 대부분 동시대 사람들처럼 중년에 이르기를 기다려야 했다. 철은 그렇게 두 종류의 신문을 꼼꼼히 훑은 뒤에야 밤골 아제의 서가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이나 뒤져 일을 만한 것은 뽑아낸 뒤라 선뜻 손이 가는 책은 별로 없었다. 거의 동방 격으로 쓰여 장서라기보다는 동네 여기저기를 굴러다니는 잡동사니 책들을 다 끌어모 은 것에 가까워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철은 한참을 뒤적이다가 『낙조의 노 래』란 역사소설 한 권과 대여섯 달 지난 『사상계』를 골랐다. 『사상계』는 자신이 읽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책에 대한 도회지 지식인들의 높은 평가를 기억해서였다. 철이 그때껏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최고의 지식인은 고아원의 수원이 형이었는데, 그는 성경 이외에 는 그 어떤 책도 외면하면서 『사상계』만은 이따금씩 구입하곤 했다. 도곡댁을 나온 철은 언덕 위 문중에 속하는 참봉댁을 들렀다. 집안은 달리하고 있었지만 크게는 한 문중인 데다, 대학물을 먹은 조항이 둘이나 있어 철이로서는 빼놓을 수 없는 집 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책 빌리기가 전만 같지 못했다. 철의 출입이 두 번 세 번 거듭되자 귀찮아졌는지 그 집 할아버지가 난데없이 이런 저런 잔소리를 늘어놓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철은 책장에 잘 간수된 장정본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허드레 책꽂이에서 닥치는 대로 문고 판 두 권만 뽑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여름 밤의 꿈』과 『골짜기』였다. 참봉댁을 나와 돌담길 한 모퉁이를 돌아서면 철이네의 옛집이 있었다. 형 명훈이 그 장손 이 되는 사파조 정제 할아버지가 지으신 뒤 위로 11대가 이어 살았다는 육십 칸 고가였다. 아련한 유년의 추억이 떠도는 집. 철이 그 집을 떠난 것은 만 다섯 살을 채우기도 전이었지 만 철은 그 집 안 구석구석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다양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마루 난간 앞의 오래 묵은 향나무 때문에 항시 어둡고 습기차게 느껴지던 서실, 물이 고여 있을 때보 다는 말라 있을 때가 더 많던 연못과 그 한 끝에 무리져 그늘을 드리우고 있던 해당화 덤 불, 고가와 비슷하게 나이를 먹은 마당 북쪽 끄트머리의 두 그루 은행나무- 그런 것들은 퇴 락한 ㅁ자 본채와 함께 잃어버린 낙원의 한 원형을 이루었다. 돌내골로 돌아와서야 그게 그 리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못한 옛 거처였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뿌리 없이 떠돌던 유년 시절 철의 인격 형성은 실제 이상으로 과장된 그 기억에 의지한 바 많았다. 아무리 비 천하고 고단한 처지에 떨어져도 자신은 잠시 거기에 와 있을 뿐이며, 이윽고 돌아가게 될 곳은 따로 있다는 믿음은 특히 그 기억 때문이었다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돌내골로 돌아온 뒤 철은 오래 품어온 환상이 무참히 깨어지는 게 싫어서라도 되 도록 옛집 앞을 지나는 걸 피했다. 게다가 형편이 좋은 새 주인의 보수로 축대에 양회가 발 라지고 깎아낸 기둥에 니스가 번쩍이는 몸체는 서먹함을 넘어 동일성까지도 의심이 갔다. 철의 그런 감동은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참봉댁을 나선 철은 옛집 쪽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언덕 위쪽으로 향했다. 언덕 위쪽으로 는 그 골방을 뒤지기만 하면 읽을 만한 책이 나올 수 있는 집이 네댓은 더 있었다. 무턱대 고 옛집에서 멀어진 철은 이집저집으로 갈라지는 세 갈래 돌담길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추 고 한동안을 망설이다가 양동댁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철이 망설인 것은 그 집에 남자 어 른은 없고 여자들만 있어서였다. 증조 항렬이 되는 양동 어른은 일찍 돌아가시고 할아버지 뻘인 그 외아들은 공무원으로 멀리 나가 있어 집안에는 양동 할머니와 아래로 줄줄이 셋이 나 되는 딸만 남아 있었다. 몇 해 전에 여고를 졸업하고 마땅한 혼처를 기다리는 명완이 아 지매와 그해 여고를 졸업한 경완 아지매, 그리고 가까운 진안중학교에 통학을 하고 있는 또 래의 형완이 그 딸들이었다. 비록 한 문중이라고는 하지만 또래의 여자애와 스물, 스물셋의 젊은 처녀들이 모여 있는 집은 거북스런 집이기도 했다. 그러나 철에게는 다행이『여원』을 빌린다는 구실이 있었다. 더구나 명완 아지매와 누나는 여러 해 떨어져 있는 바람에 남달리 친할 틈은 없었어도 국민 학교를 한 반에서 다닌적이 있는 같은 또래였다. 고맙게도 양동댁 모녀는 철이 어색하거나 쭈뻣거리지 않아도 될 만큼 반겨주었다. "아이고, 이게 누군로? 철이 아이라? 어서 온나." 씨앗으로 쓸 것인 듯 강낭콩을 고르다가 앞치마를 털고 일어나는 양동 할매나 대청마루에 서 들고 있던 수틀을 내려놓으며 살포시 웃어주는 명완 아지매가 모두 자신을 기다리고 있 던 사람들같이만 느껴졌다. "니 전번에도 두들 왔다 가더라마는 우리집은 지나가데. 그래, 오늘은 웬일인고?" 무언가 부엌일을 거들다 나온 듯한 경완 아지매가 놀리듯 그렇게 물어오지 않았더라면 준 비해간 핑계조차 댈 필요가 없었을 뻔 했다. "누나가... 책을 좀 빌려오라구 해서요." 철은 영완이 집 안에 없는 걸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며 그렇게 우물거렸다. 이번에는 명완 아지매가 철의 방문을 더욱 자연스럽게 해주었다. "일가끼리 일이 있다꼬 오고 없으믄 안 오나? 그리고 영희 그 기집아는 뭐 한다노? 어예 한번 코빼기도 안 비치고 집 안에만 처박혀 있는지 모리겠다. 너어 집에 뭐 디기 좋은 일 있나?" "아뇨, 그냥..." "좀 놀러 오라캐라. 책도 지가 와서 빌려가고." "그러죠." 그 때 경완 아지매가 한층 더 장난기 머금은 소리로 끼어들었다. "어예튼 들어온나. 책이랬자 몇 권 되도 않는다마는 그거도 방에 있고― 또 니 얘기도 좀 듣자. 너 서울 대구 어디어디 안 가본 데가 없다미. 촌놈이 니맨치로 직접 가서는 못 본다 캐도 귀동냥이사 안 될라." 그러면서 흘끗 양동 할매를 훔쳐보는 게 딴 뜻도 있는 듯했다. 객지 바람을 쏘이고 싶어 하는 걸 할머니가 막기 때문일 거란 짐작이 들었다. 그렇지만 들어가 앉고 보니 역시 거북한 게 젊은 여자들의 방이였다. 일가 아주머니, 네댓 살 많은 누나뻘, 그런저런 구실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성의 거북함을 떨치지 못한 것 또한 열여섯의 소년에게는 지나친 조숙이었을까. 쉴새없이 얘기를 시키는 그녀들 자매와 저녁을 먹고 가라는 양동 할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래잖아 철은 그녀들의 빈약한 책꽂이에서 책 두 권을 뽑아 일어났다. 시멘트 포대 종이로 표지를 싸고 읽어 새것처럼 보이는 그 전달치 『여원』과 『김약국의 딸들』이란 소설이었다. 양동댁을 나왔을 때는 제법 해가 뉘엿했지만, 철은 언덕을 내려가지 않고 다시 한 집을 더 들렀다. 책보다는 사람 때문에 빠뜨릴 수가 없는 집이 도산댁이었다. 도산댁은 아슬아슬하게 언덕 위로 편입되어 있는 마흔 칸 남짓의 고가였는데, 그 퇴락함 은 언덕 위의 고가들 중에서도 유별났다. 행랑채는 기울어 중문을 드나들기 위태로울 지경 이었고,  자 몸채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기울어져 있었다. 군데군데 회벽이 떨어져 벌건 흙 벽이 드러나 있고, 지붕에는 잡초가 무성한 게 도무지 사람이 살고 있는 집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 집에도 사람은 살고 있었다. 택호를 남긴 도산 어른 내외는 해방 전에 모두 돌 아가시고, 그 아랫대도 6·25에 휩쓸려 죽거나 월북해 오랫동안 비어 있던 집이었으나 그 두어 해 전부터 홀로 남겨져 고모 손에서 자란 손주가 한 작가 지망생이 되어 폐허가 된 옛 집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 구체적인 계획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철이었지만 작가 지망생 혹은 문학 청년이란 말은 비상한 호기심을 일으켰다. 따라서 우연한 기회에 그의 얘 기를 들은 철은 책을 빌리러 두들로 올라오게 되면서 곧잘 그 집부터 먼저 들렀다. 철에게는 열댓 촌 아저씨뻘이 되는 그 작가 지망생은 가난과 신병 때문에 괴팍스럽고 신 경질적이 되어 있었지만 철의 출입을 굳이 마다하지는 않았다. 모르긴 하지만, 유폐된 것 같 은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는 무엇보다도 우선 외로웠을 것이다. 게다가 철의, 나이에 비해서 는 만만찮은 그 방면의 독서량도 어느 정도는 집주인의 관심을 끌었음에 틀림없다. 작가 지 망생이란 거창한 이름은 끝내 작가는 되지 못하고 스물몇의 나이로 죽은 고등학교 중퇴의 독학자이고 보면, 당시의 철을 그저 아이 취급만 한 만큼 대단한 지성은 못 되었을 것이다. "기섭 형님 계세요?" 엄연히 숙항인데도 형님이라공 부르며 철이 중문을 들어서자 카악, 하고 가래 뱉는 소리 가 대답을 대신했다. 부엌이면서 침실이고 침실이면서 작업실이가도 한 안채 큰방 쪽이었다. 철이 이미 어둑해오는 방문을 열자 작가 지망생은 그때껏 쓴 것인 듯 한 뭉치의 원고지를 두 손으로 느슨히 잡고 방바닥에 두드려 모서리를 맞추고 있는 중이었다. 철의 말소리를 듣 고 서둘러 쓰기를 마친 것 같았다. "왔나?" 그가 별감정 없는 목소리로 알은체를 했다. 철은 책보따리에서 지난 번에 빌린 두툼한 『전쟁과 평화』축약판을 꺼내 그가 책상으로 쓰는 두레상 곁의 함부로 쌓아둔 책더미 위에 다 가만히 놓았다. "책 잘봤습니다." "그래, 참말로 다 봤단 말이제?" 그가 선뜻 못 믿겠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철을 쳐다보는 눈길에 반짝, 하고 타오르는 적의 같은 게 언뜻 느껴졌다. "네." "그래믄 함 얘기해봐라. 아이, 줄거리사 대강 알 수도 있제. 그래지 말고, 맞다. 인물 하나 를 골래 얘기해봐라. 나타샤, 그 여자 어떻드노?" "지저분하던데요. 안드레이 공작하고 약혼해놓고 딴 남자하고 놀아나고, 그러다 공작이 돌 아오자 울고불고하더니 다시 또 딴 남자하고 결혼하고..." 철이 느낀 대로 숨김없이 말했다. 그러자 그 가망 없는 작가 지망생은 철의 독해력에서 무슨 대단한 파탄이라도 찾아낸 듯 열여섯 소년의 결벽을 비웃었다. "지저분하다- 전편을 통틀어 가장 청순한 나타샤가 지저분하다..." 하지만 철은 굳이 제 고집을 세워 그의 기분을 상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잘못 읽은지도 모르죠. 저도 책 뒤 해설에서 나타샤를 청순하다고 표현한 걸 읽기 는 했어요." 그렇게 물러서놓고, 진작부터 노리던 책 한 권을 집었다. '이방인'과 '좁은 문'을 합본한 것 이었다. "오늘 이거 가져가도 좋아요?" 지난번에는 가져가고 싶었으나 그가 읽고 있는 중이라 말을 못 꺼냈지만 왠지 이번에는 꼭 가져가고 싶었다. 그가 한층 뚜렷하게 비웃음을 드러내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거는 아이들이 읽을 책이 아니라꼬." "뒤에 있는 좁은 문은 벌써 읽었는걸요." "뭐라꼬? 언제?" "국민학교 5학년 때요." 철이 그렇게 대답하자 그는 갑자기 중대한 모욕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발칵 화를 냈다. "햐, 욜마 요거, 참말로 못됐데이. 머리에 소똥도 안 벗어진 게..." "네?" "니 일마, 인제는 이꾸저꾸 책 읽지 마라. 잘못하믄 큰일낸데이. 그래 읽으믄 일마, 그건 책이 아니라 독이따, 독." 철은 그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그날은 물론 뒷날까지도 잘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남독 을 나무랐다고 보기에는 그의 말에 조금도 애정이 서려있지 않았고, 지나친 조숙을 경계한 것이라 보기에도 너무 감정적이었다. 어쨌든 철은 끝내 그에게서는 책을 빌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의 일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아무래도 두들을 내려 와 집으로 돌아갈 때 우연히 마주치게 된 광경이었다. 작가 지망생과의 뜻 아니한 시비로 원하는 책도 빌리지 못하고 늦어져 어둑한 언덕길을 내려오던 철은 한군데 이상한 노랫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살펴보니 언덕 중턱의 문중 마을에 속하는 집인 지 그 발치 골짜기 쪽의 타성바지 집들 가운데 하나인지 얼른 분간이 안 가는 작은 초가에 서 나는 소리였다. 철은 무엇에 이끌리듯 그 초가집 쪽으로 가보았다. 아직 물것들이 나오지 않은 철이라 그 런지 초가의 사랑방은 문이 반쯤 열린 채였는데, 벌써 남폿불을 밝혀놓아 참들이지 않고 안 을 살필 수 있었다. "...애애부모여 생아구로삿다. 욕보지덕인댄 호천망극이로다." 철이 방문 가까이 다가갔을 즈음 노랫소리 같이 들리던 그 가락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이어 무슨 웅얼거림 같은 소리가 나더니 다시 같은 목소리가 이번에는 철이도 알아들을 수 있게 읊어나갔다. "슬프고 슬프도다, 어버이시여.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 애쓰고 힘드셨네. 그 은혜 갚으려 해도 넓은 하늘 같아 끝이 없구나." 짐작건대 앞에 왼 구절의 풀이인 듯했다. 철은 비로소 그게 강을 외는 소리란 걸 알아차리고 한층 호기심에 차서 안을 들여다보았 다. 방금 시원스레 외기를 마친 것은 스무 살쯤 되는 한복 차림의 총각이었다. 생김이 낯선 것으로 보아 문중의 사람은 아닌 듯했다. 그 곁에는 그보다 몇 살씩 어려 보이는 소년 둘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책은 덮어 둔 채 무릎을 꿇고 있는 게 차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역 시 둘 다 일가는 아니었다. 그들 맞은 편으로는 한 늙은이가 철을 등지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사극에서 보듯 정자 관도 쓰지 않았고 긴 담뱃대도 없었으나 한눈에 훈장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다 찌그러진 초가 사랑에 학동이라고는 셋뿐이었지만 어쨌거나 그곳은 서당이었다. 철에게는 아직도 고향 한 모퉁이에 그런 곳이 남아 있다는 게 낮에 세심대내 낙기대를 보 았을 때보다 오히려 더 충격적이었다. 이미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 줄만 알았던 낡 은 제도가 이렇게 살아 있다. 그 옛터인 석천서당은 저렇게 낡고 허물어진 채 버려져 있는 데, 그 제도의 가장 큰 수혜자들이었던 언덕 위 문중의 아이들은 신식 학문을 배우기 위해 모두 도회로 흩어지고 없는데, 여기 이 언덕 발치의 찌그러진 초가에서 오직 그 제도의 억 압과 착취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던 타성바지 아이들에 의해... 《비록 소년다운 치기와 감상 때문에 과장된 것이기는 했지만 나는 거기서 우리 일문의 몰락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알았다는 기분이었다. 문화이건 제도이건 지켜야 할 자들이 지 켜주지 않으면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다. 어떠한 문명도 내부로부터의 붕괴가 없는 한 와전 한 절멸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몰락은 외부의 압력보다는 내부적인 붕괴에 더 큰 원인 이 있었다- 그때 나는 성급하게도 그 비슷한 결론까지 내렸다. 그러자 세심대의 세계, 낙기 대의 세계, 그리고 석천서당과 언덕 위 고가들의 세계가 갑작스레 찬연한 의미의 빛을 띠고 내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이미 사라져버렸기에, 애착과 미련을 지닌 증인이 아무도 남아있 지 않기에 더 자유로워진 상상이었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그 자유로움이란 기실 처음부터 편향성이 예정된 것이었다. 나중 그 세계의 탐색에 나서면서 내가 부딪쳐야 했던 가장 흔해빠진 논리는 그 세계에 대한 부장 과 비하의 논리였고, 그 바람에 내 상상의 자유로움이란 바로 그러한 논리들로부터의 자유 로움과 종종 동일시되어 의고적 또는 상고적인 방향으로 자리잡아 갔다. 그리하여 그 세계 에 대한 부정과 비하의 논리는 전통 사회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이간을 노리는 일본이나 서구 식민주의의 부추김에 놀아난 사유의 파행, 또는 능욕을 당해놓고도 화간이었다고 주장 하는 어떤 종류의 비뚤어진 자존심으로 의심되었으며, 탐색이란 것도 객관적인 비교 분석이 라기보다는 사라진 아름다움, 잃어버린 가치의 주관적인 추구 쪽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어떤 이는 고향과 옛것들을 되돌아보는 나의 그런, 요즈음엔 흔지 않은 관점과 입지에 대 해 아버지 콤플렉스와 연결시켜 해석하려 든다. 그러나 그 콤플렉스란 게 그렇게 무소부재 하고 위력적인 것은 못 된다. 솔직히 고백하고 또 분명하게 단언하거니와, 아버지는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해서만은 무관하다. 굳이 그 부분을 해석하려면 다른 쪽에 문의해보기를 권하 겠다. 예컨대 내 기질이나 성향 또는 어떤 정신적 유전 인자 쪽에.》 그날과 관련지어 철은 뒷날 위와 같은 술회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말한 탐색 은 훨씬 뒤에야 시작된다. 그날 밤 늦은 밥상머리에서 철이 그 서당에 대해 깊은 흥미를 내 비치자 어머니는 한마디로 잘라서 말했다. "서당은 무슨 놈의 서당. 아이고, 신촌 양반, 그 글도 글이라꼬. 옛날 어른분네들 한창 글 할 때는 뒷글(어깨너머로 배운 글, 귀동냥해 배운 글)도 못 되디, 어예다 보이 혼자 남아가 주고는... 몰라, 상놈들 천자문이나 깨우쳐주고, 잡곡말이나 받는강." 주로 훈장 노릇을 하는 집안 변변찮은 할아버지뻘 일가를 폄하려는 말이었지만, 철의 터 무니없는 환상에 찬물을 끼얹는 데는 꽤나 효과적이었다. 게다가 그뒤 여러 해 이어지는 철 의 분주함과 고단함도 당장 그러한 탐색으로 들어갈 만한 여유는 주지 않았다. 제5장 기다리는 마음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영희가 물 묻은 손을 털 며 부엌문을 나서니 그새 낯익은 타성바지 우체부 아저씨가 자전거 뒤에 벌써 훌쭉해진 우 편낭을 싣고 재궁막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제 편지 있어요?" 두근거리는 가슴에 영희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우체부가 무표정한 얼굴을 들 고 영희를 건너다보며 웅얼거렸다. "글세, 누구 껀지는 몰따마는 있기는 있다. 편지 한 통하고 신문하고 고지선동 뭔동 하 고..." 그 말에 영희는 사립께까지 달려나가 우체부가 내주는 우편물들을 받았다. 편지 한 통과 얼마 전부터 오빠가 받아보기 시작한 날짜 지난 신문, 그리고 누런 봉투 뒷면에 명양군수의 직인이 찍힌 행정 우편물 하나였다. 영희는 고맙다는 말도 잊고 먼저 편지 봉투부터 살폈다. 창현이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였지만 실망스럽게도 겉봉의 글씨부터가 아니었다. 한눈에 여자의 글씨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단정하면서도 깨알 같은 글씨였다. 얼른 봉투를 뒤집어 발신인 주소를 살피던 영희는 또 한 번 실망했다. 서울 마포구로 시 작되어서는 군대에 가 있는 창현의 편지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영희는 행여나 하는 기분으로 발신인의 이름까지 단숨에 읽어나갔다. 아현동 산 몇 번지에 사는 안경진이 란 여자였다. 영희는 그제서야 수신인 쪽을 살펴보았다. 오빠 명훈에게 온 편지였다. '안경진이라, 누굴까? 한번도 오빠에게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 영희는 불쑥 이는 궁금증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느새 큰길로 되돌아나가 자전거에 다 리를 걸치는 우체부의 뒷모습을 아무런 뜻 없는 눈길로 뒤따랐다. 자전거에 오른 우체부는 잠깐 사이에 내리막길 굽이를 돌아 모습을 감췄다. 설거지를 하다 물 묻은 손도 제대로 닦지 않고 나온 바람에 잉크로 쓴 주소 글씨가 번지 는 줄도 모르고 영희는 한동안 멍하니 사립께에 서 있었다. 잠시 그녀가 안경진이란 여자를 궁금히 여긴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궁금함은 그녀가 사로잡혀 있는 기다림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게 못 되었다. 절실한 기다림과 거듭된 실망이 어울려 자아낸 망연함으로 설명하는 게 차라리 그런 영희의 심리에 더 잘 들어맞는 말이었다. "벌써 두 달이 다돼가는구나. 남들은 훈련소에서도 편지를 잘만 보내던데. 어찌 된 셈일 까, 혹시 내 주소를 잊어버린 게 아닐까." 이윽고 영희는 그렇게 힘없이 중얼거리며 마루로 가 걸터앉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은 있을 성싶지 않았다. 주소를 적어준 것만도 몇 번인가. 더구나 헤어지기 전날 밤 은 몇 번이고 창현이 자신의 주소를 외고 있나를 확인까지 하지 않았던가. "야가 여다 앉아 뭐 하노? 설거지는 다 했나?" 언제 두들에서 돌아왔는지 어머니가 사립을 들어서면서 하는 말에 영희가 퍼뜩 정신이 들 어 고개를 돌렸다. 아직 정식으로 개간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그냥 집에 있기 답답하다면서 아침같이 집안 마실을 나갔던 어머니였다. 마을에는 모두 농사일에 바쁜 사람들뿐이라 말상대가 되어줄 아낙도 없었지만, 설령 있다 해도 어머니는 되도록 상것들과 '입 섞어 수작하는' 걸 피하려 들었다. 헤어져 보낸 그 삼 년, 아주 어려웠을 적에는 어머니가 남의 집 식모살이까지 했다는 걸 들어 알고 있는 영희 에게는 그런 어머니의 갑작스런 양반행세가 억지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그날도 어머니는 가 까운 이웃을 두고 굳이 십릿길이나 되는 문중 마을로 올라간 것이었다. 따라서 빨라도 점심 나절은 돼야 돌아올 줄 알고 늑장을 부리던 영희에게는 길을 되짚어온 듯이나 돌아온 어머 니가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엉이, 그게 뭐로? 편지 아이라? 누구한테 온 거로?" 갑작스레 빈틈을 찔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당황한 영희가 미처 대답을 못하고 있는 사이에 편지를 본 어머니가 다시 물어왔다. 어머니의 말투가 그리 가시 돋친 것 같지 않은 데 안도 하며 영희가 얼른 대답했다. "오빠한테 온 거예요. 예쁜 아가씨 글씬데요." "뭐라꼬? 기집아한테서 온 거라꼬? 가한테 뭔 기집아가 있다꼬. 어디보자." 어머니가 목소리는 다소 엄해도 그리 기분 나쁜 일은 아니라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영희는 오빠한테 온 건데, 하면서도 쓸데없는 시비가 싫어 편지를 넘겼다. 어머니도 다 큰 자식에게 온 편지를 뜯어볼 만큼 몰상식하지는 않았다. 흘긋 봉투를 훑어보고 난 뒤 혀를 끌끌 차기는 했지만 여전히 성내는 기색은 없이 말했다. "글씨사 참하다마는 누구 집 기집안동 망했다. 사나한테 편지질이나 하고..." 그 같은 어머니의 반응에 언뜻 그 편지가 창현에게서 온 것이 아닌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어머니는 반드시 펄펄 뛰며 뜯어봐야겠다고 나섰을 것이고, 또 그리 되면 한바탕 큰 분란이 일어났을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날은 별스러운 데가 있었다. 뒤이어 부엌을 둘러본 어머니는 아직 설거지도 끝나지 않았음을 알았건만 여느 때같이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았다. "그새 뭐 했노? 어서 설거지 끝내고 쫌 들어온나 보자." 그러면서 방안으로 들어가는 게 밖에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던 듯했다. 뜻밖이다 싶을 만큼 어머니가 관대해진 까닭은 곧 밝혀졌다. 그때까지도 부엌 바닥에 펼 쳐져 있던 밥상만 치우고 방으로 들어가자 어머니가 아주 긴한 얘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 로 말했다. "니 인숙이 아나? 알제, 왜 니 여다서 국민학교 댕길 때 같이 안댕겼나? 와석댁 둘째딸 말이라." "걔가 왜요?" 영희가 좀 어리둥절해하며 반문했다. 인숙이란 동창은 그 동안 잊지 않아서가 아니가 돌내 골로 돌아와서 들은 요란한 소문 때문에 그 이름을 알게 된 아이였다. "가가 날 잡았단다. 음력 오월 스무닷새라등강." "그렇게 빨리요? 어디로 시집가는데요?" 이번에는 영희도 좀 뜻밖이란 느낌으로 그렇게 반문했다. 서로가 빤한 바닥에서 그토록 자주 남의 입 끝에 오르내린 과거가 있는 여자애가 갑자기 시집을 가게 되었다니 호기심이 아니 일 수가 없었다. "아 하나 딸린 홀아비라. 국민학교 선생인데 혼수고 뭐고 필요없이 싸말아간다고 나선 모 양이라." "잘됐네요." "잘됐제. 잘됐고말고. 거참, 옛말 한마디 그른 게 없다 카디 참말이라. 짚신도 다 짝이 있 다꼬... 우리끼리 하는 소리지만 가가 어옛노? 기집 자식 있는 담배 기사하고 배가 맞아 한 이태를 같이 살다시피 안했나? 억대구 센 기사댁이 알라 업고 찾아가 깔쥐뜯고(할퀴며 쥐어 뜯고) 그 난리 안 쳤으면 안죽도 남의 첩질 하고 있었을 아라 카이." "..." "걷기 더 희한한 일도 있제. 데리고 갈라 카는 쪽도 대강 그 소문을 듣고 아는 눈치라 안 카나? 가을까지 기다리지 않고 일찍일찍 싸말아가는 것도 그 때무이라는 게라. 세상에 별싱 미(성미)도 다 있제. 암만 홀아비라 카지마는. 아이, 암만 인숙이 가 얼굴이 반반하다 카지마 는..." 어머니는 연신 감탄을 섞어가며 영희가 묻지도 않은 남의 혼인 얘기에 열을 올렸다. 영희 는 멋모르고 한참 듣다 보니 어렴풋이나마 어머니의 저의가 짐작되었다. 어머니는 단순히 남의 집 과거 있는 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먹은 맘이 있어 영희가 들으라는 듯 시시콜콜히 그 일을 되뇌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불쾌해진 영희가 앞서와 달리 퉁명 스레 받았다. "어머니두 참, 그럴 수도 있는 일이죠, 뭐. 어디 과거 있는 여자는 사람 아닌가요? 좋으면 데려가 사는 거지." 그러자 어머니의 눈길이 드러나게 실쭉해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뭣 때문인가 억지로 속을 눌러 참는 눈치더니 문득 설득조가 되어 말했다. "야가 뭐라 카노? 여자라는 거는 시집가기 전에는 뒤든 정조가 목숨이라. 하마 몸을 배린 (버린) 처자가 어예 온전한 처자로? 옛날 같으믄 목을 매거나 칼을 물고 엎어질 일이라." "..." "그러이 생각해 봤는데 니 말이따. 안죽 여다사 아는 사람이 없다마는 소문나는 거는 시 간 문제라. 박원장 일도 글코. 다방 레지질 한 것도 글코..." '결국 그거로구나. 이 악귀 같은 여자가 그 얘기를 꺼내려고 그렇게 신이 나서 달려왔구 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영희는 앞 뒤 없이 화부터 났다. 어머니의 다음 말을 들어보려 고도 않고 소리부터 질렀다. "겨우 그 얘길 꺼내려고 그리 신이 나 달려오셨어요? 웬일로 며칠 살만한가 싶더니 이제 한 건 단단히 잡으셨군요. 그래요. 저는 어머니 말마따나 버린 계집애예요. 벌써 여러 남자 가 내 몸을 거쳐갔다구요. 인숙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나을 게 없는 년이라구요. 그래서 어쨌 다는 거예요?" "아이, 야가, 야가..." "아무리 그래도 그러시는 게 아니라구요. 짐승도 새끼가 상처를 입으면 핥아준대요. 그런 데 명색 어머니가 돼서 이게 뭐예요? 이제 겨우 딱지가 앉을 만한 상처 그렇게 헤집어놔야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이년아, 악바리(아가리)닥쳐라. 삼 이웃 사 이웃 다 듣는다. 그게 뭐 장한 일이라꼬. 잘하 면 신작로 바닥에 나가 고래고래 욀따(외치겠구나)." 드디어 어머니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화가 나면 분별이 없기는 그즈음의 어머니도 영희에 지지 않았다. "그래도 이년, 나는 니 같은 것도 자식이라꼬 조용히 의논이라도 해볼라 캤디. 에미 속을 몰라도 어예 그래 모르노. 새끼 잡아먹는 범도 있더나?" 성나 퍼부어대는 말이기는 해도 그 끝에는 어딘가 진정이 스며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제서야 영희는 얘기도 다 들어보지 않고 퍼부어댄게 슬몃 후회되었으나 갑자기 고분고분해 질 마음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의논은 무슨..." "오이야, 이년아. 나는 니 에미가 아이고 원수따. 그리도 나는 어예튼동 지 허물 묻고 감 촤 인제부터라도 결말부부로 일부종사하미 사는 거 볼라 캤디. 학벌 가문 따질 것 없이 심 성만 착하믄 어예 혼인말 한번 여볼라 캤디." "어디 그건 얼빠진 홀아비가 하나 더 있었나 보죠." "저런 저 악바리 놀리는 거 봐라. 저걸 어예 자식이라꼬..." "걱정 마세요. 나도 벌써 다 정해논 사람이 있다구요." "그래, 니 잘났다. 하기사 그 길을 돌아댕겼으이 열 서방인들 없겠나?" 그렇게 모녀의 언성이 한층 놓아가고 있을 때 명훈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들었다. 멀리서 무슨 소문을 듣고 달려온 듯했다. "우체부가 뭐 갔다 준 거 없어?" 명훈은 모녀간의 다툼 따위는 알지도 못한다는 듯 영희에게 급하게 물었다. "뭘?" 영희가 얼른 감정 전환이 안 돼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명훈은 그 퉁명스러움도 느끼지 못 한 사람처럼 묻기만을 되풀이했다. "군에서 온 서류 말야. 강체부가 안 갖다 줬어?" "뭔데? 뭐가 왔다꼬 이 수선이로?" 그 사이 애써 감정을 추스른 어머니가 궁금한 듯 끼여들었다. 명훈이 기다렸다는 듯 흥분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도 개간 허가 통지서가 나왔을 거예요. 군에서 온 공문이라면 틀림없이 그걸 거예 요." 그 말을 듣고서야 영희는 비로소 자신이 집안일에 너무 무심했던 데 대한 부끄러움이 일 었다. 측량이 끝나고도 한 달이나 허가 통지서가 오지 않아 어머니와 오빠 모두 애를 태우 는 눈치들이었는데 이제 그게 온 모양이었다. "오빠, 이것 말이야? 난 그게 바로 그건지 몰랐네." 영희가 신문, 편지와 함께 마루 한구석에 놓아두었던 누런 봉투를 꺼내 겸연쩍은 얼굴로 명훈에게 내밀었다. 명훈이 빼앗듯이 받아 봉투를 찢었다. "맞아! 이거야. 어머니, 이제 개간을 시작해도 됩니다. 내일부터 시작이라구요. 이러구 있 을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일꾼부터 모아야겠어요. 당수 배우는 애들이 있다지만 걔들만 가 지고는 안 돼요. 어머니도 좀 구해보세요. 영희 너두 마음 단단히 먹어. 내일부터 시작이야. 이제부터는 쓸데없는 데 신경쓸 겨를이 없다구. 개간 인부들이 수십 명씩 떼지어 몰려들어 와봐. 그 뒤치다꺼리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을 거야. 애들은 어디 갔어? 철이하고 옥경이. 걔들에게도 각오를 시켜야지, 이게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야. 모두 힘을 함쳐야 돼. 식구들끼리 마음 맞춰 해내지 못하면 모든 게 끝장이라구!" 봉투 안에 든 걸 읽고 난 명훈은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그렇게 떠들어댔다. 얼른 듣 기에는 혼자 신이 나 하는 소리 같지만 가만히 듣고 보니 조금 전에 있었던 모녀간의 불화 를 그도 다 알고 있었던 듯했다. 특히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영희와 어머니 둘을 향해 다짐 하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런 명훈의 불같은 열기는 금세 어머니에게도 옮아붙었다. 언제 영희와 그토록 미움 가 득 찬 악담을 주고받았냐는 듯 환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글코말고. 암, 그래야지. 이기 몇 년 만에 온 호긴데. 인제 모도 떨져 뿌리고 일라서는 게 라. 지성이면 감천이라꼬, 사람이 마음먹고 해서 안될 께 어딨겠노? 아 어른 할 거 없이 식 구대로 함 해보자믄." 그리고는 영희를 한번 흘겨보는 법도 없이 툭툭 털고 일어났다. "나는 먼저 원동이네 집부터 가볼란다. 그 집에 장골이만도 너이가 되이 둘은 개간하로 나로라 캐야제. 개골에 귀머거리네 아들도 요새 논다 카드라. 오입이사 자주 댕겼지마는 원 래는 상농군이라. 그거말고도 정 있게 지낸 하배들 집은 다 돌아봐야 될따. 저가 우리 일 가 주고 품값 외상 따질라. 개간비(보조금) 나오믄 한푼 안 띠먹고 다 갚을 께라 카믄 끽소리 못하고 나와줄 께따." "저도 상두 녀석 찾으러 가봐야겠어요. 아무래도 촌놈들 후리는 데는 그 녀석을 못 당한 다니까요." 명훈이도 그러면서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명훈이 사립을 나간 뒤에야 영희는 비로소 안경진이란 아가씨의 편지가 생각났으나 그걸 오빠에게 전하지 못한 게 크게 잘못됐다는 기분은 아니었다. '그건 저녁에 전해주면 되지 뭐. 감춰뒀다가 오빠에게 한턱 울궈먹은 뒤에 내줘야지.' 오히려 그런 장난기까지 일었다. 오빠와 어머니의 들뜬 기분이 영희에게도 옮은 것이었다. 영희는 조금 전의 그 격럴했던 어머니와의 말다툼까지도 깨끗이 잊고 부엌으로 들어가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남은 설거지를 마쳤다. 그렇지만 설거지가 끝나고 무료한 시간 속에 홀로 남겨지자 영희는 다시 자신만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서울에서의 날들이 떠오르고 창현의 깎은 듯한 얼굴이 머릿속 가득히 되살아났 다. 특히 이제는 꿈만 같은 그와의 마지막 며칠은 생각만 해도 온몸이 짜릿해오는, 그리움 그 자체였다. "영장이 나왔어. 다음달 초순이 입영 날짜야." 입영 통지서를 가지고 오던 날 창현은 금세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그렇게 말 했다. 그리고 푸른 기 도는 이마에 애처로운 느낌이 들 만큼 깊은 주름을 지으며 나직이 중 얼거렸다. "이제 생활이 무엇인지, 사랑한다는 게 어떤 건지를 겨우 알 만하니까 말야. 유가 내게 무 엇이며 나는 또 유의 무엇인지를 깨달을 만하니까..." 그때 영희는 입영 통지서가 갖는 의미보다도 창현의 괴로워하는 표정이 더 견딜 수 없었 다. 그 바람에 영희는 이별의 슬픔이나 이별 뒤에 헤쳐가야 할 외롭고 고통스런 삶에 대해 서는 생각해볼 틈도 없이 창현을 위로하기에 바빴다. 거기다가 그날 창현의 한마디 한마디 는 또 어찌 그리 미덥고 정겹던지. "실은 말이야, 유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 결혼 승낙을 받으러 집에 갔었어. 언제까지 고 우리 이러고 살 수는 없잖아? 가을쯤에는 어떻게 식이라도 올리고 혼인 신고라도 해야 지. 어쩌면 곧 우리들의 2세가 생겨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부모님도 대충은 동의하셨어. 그런데 이게 뭐야? 난데없이 이런 게 나왔잖아. 벌써 한 달 전에 동에서 갖다놓은 거래. 전 에 앓은 TB(폐결핵) 때문에 현역에서는 빠진 걸루 알았는데..." 그럴 때 창현이 발음하는 유는 영어의 애매한 2인칭이 아니라 당신이란 말 중에서도 가장 다정한 말 같았다. 그로부터 열흘, 창현이 표현한 슬픔과 고통은 회상하기에도 가슴 뭉클할 정도였다. "삼 년... 유 없는 삼 년을 어떻게 보내지. 사람을 짐승같이 보는 그 딴 데서... 차라리 일 찌감치 지뢰 같은 거나 밟고 콱 죽어버렸으면..." 훌쩍이며 그렇게 말하다가 돌연 격렬하게 내뱉기도 했다. "아냐, 안 가겠어. 못 가. 차라리 기피하고 말 거야. 평생 밤무대의 악사 노릇이나 하고 떠 돌면 될 거 아냐? 박쥐처럼 밤에만 나가 돌아다니는데 어느 놈이 타치할 거야? 유만 있으 면 돼. 남자의 야망이 뭐야? 출세가 뭐야? 그딴 것 없어도 돼. 기피자가 반드시 불행해지란 법도 없어. 유와 지낼 수만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구!" 자신이 창현에게 그토록 대단한 존재였다는 게 뿌듯한 기쁨을 넘어 어떤 주체할 수 없는 감동으로 영희의 눈에서도 눈물을 끌어냈다. 그렇게도 애태웠으나 한번도 시원스레 확인되 지 않던 창현의 사랑이 한 순간에 모두 확인되는 듯했다. 창현이 병역을 기피하겠다고 떠들 때마다 영희가 질겁을 하며 말리고 다독이게 된 것도 그런 확인이 준 여유였을 것이다. "유, 어린애처럼 그렇게 떼쓰지 마. 우리의 앞날을 위해서도 차라리 잘 된 거야. 어차피 대 한민국 남자라면 한 번은 거쳐야 할 게 군대 아냐? 그러지 말고 갔다 와. 내 기다릴게. 그리 서 삼년 뒤에 다시 시작하는 거야. 떳떳하게 부부로서 말야. 실은 나도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지겹던 참이었어." 그런 영희의 말에 발끈하며 내비치던 창현의 의심도 또 다른 애정의 표현으로만 보였다. "기다린다구?이제 겨우 스물둘의 젊은 여자가, 서울같이 이 험한 도시에서 몸뚱이 하나 갖구? 그래 어떻게 기다릴 거야? 다방 레지 하면서? 아니면 이제 와서 남의 집 부엌데기라 두 될래? 그 사이 지분댈 놈씨들은 또 어쩌구?" 전 같으면 싸움이 벌어져도 대판 벌어질 수리였지만 영희는 그저 웃음으로만 받았다. "유, 그렇게 날 못 믿어? 내가 삼년을 못 참고 고무신 바꿔 신을 여자 같애? 믿어줘, 믿 어. 믿어달라구." 그러다가 창현이 턱없이 독기까지 뿜어가며 계속해 의심하는 말을 늘어놓자 퍼뜩 생각해 낸 게 오빠 명훈의 쪽지와 돌내골이었다. "유가 군대 가면 나도 유 없는 서울엔 있지 않을 거야. 고향집으로 가서 조용히 삼년을 기다릴게. 전에 말했지? 우리 오빠 찾아온 거? 어쩌면 유가 제대해 나올 때쯤 난 3백 마지 기나 되는 대지주의 여동생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 유의 부모님도 그때는 무턱대고 우리 결 혼 반대하지 못할걸." 얼른 떠오르는 대로 그렇게 말해놓고 나니 돌내골로 내려가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결 심했던 일 같은 기분이었다. 창현도 영희가 돌내골로 내려가겠다고 하자 조금 마음을 놓겠 다는 눈치였다. 그 뒤 남은 며칠은 의심 대신 변치 말란 다짐으로 채워졌다. "꼭 기다려. 삼년이라지만 생각보다 짧을 수도 있어. 첫 휴가 때쯤 약혼식 올려두고 마지 막 휴가 때쯤 결혼식 올리면 실제 기다릴 시간은 훨씬 짧아질 거야. 논산 가기 전에 집에 가서 그렇게 결정을 보아두자구." 집결지로 떠나기 전날 창현은 먼저 그런 제안까지 했다. 그런데- 정신없이 창현과의 마지막 날들을 떠올리던 영희는 갑자기 섬뜩한 기억하나로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 여자는 왜 그렇게 차고 표독스런 느낌으로만 떠오를까... 마침내 창현이 집결지로 떠나게 된 날이었다. 영희는 창현을 따라 그의 본적지이자 가족 들이 산다는 수원으로 갔다. 입대를 바래준다는 일 외에 미래의 시부모 될 사람들을 미리 봐둔다는 목적도 있었다. 창현의 집은 시가지에 있는 한옥 뒤채였다. 방 둘을 쓰고는 있어도 분명 셋방 같았는데, 시아버지 될 사람은 없고 왠지 칙칙하고 음험한 인상을 주는 창현의 어머니 뿐이었다. 창현이 영희에게 한 말은 전혀 허풍은 아닌 듯 창현의 어머니는 대체로 창현이 하지는 대 로 들어주었다. 겨울쯤 첫 휴가를 오면 약혼식을 올리자. 이왕 결혼할 거면 제대하기 전에 식을 올리는 것도 괜찮지- 그러나 그녀의 말투나 눈길은 아무래도 앞날의 며느리를 대하는 시어머니의 그것이 아니었다. 왠지 부탁받은 대로 성의 없이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보인 것은 그 열흘 창현과 쓰다 남은 사글세 보즘금을 다 털다 시피 해 마련해간 예물을 내놓았을 때 한 번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맏아들이라던데 그 결혼 문제를 꼭 남의 얘기 듣듯 했었다. 아니, 뭐든지 다 허락은 하면서도 어딘가 싸늘하게 비웃는 것 같은 눈치였어...' 그전의 감정이 거의 황홀감 비슷한 그리움이어서였던지 한번 어두운 쪽으로 생각이 미치 자, 그날 창현의 어머니가 보여준 태도는 그 당시보다 더 불길한 예감을 강요하며 영희의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저 그뿐, 더 이상 구체적인 의심으로는 번지지 않 았다. '천성이 그런 사람이겠지 뭐. 사람이 매몰차고 비뚤어진... 그래도 우리 결혼은 반대하지 않았잖아.' 영희는 그렇게 스스로를 이해시키며 서둘러 회상을 건너뛰었다. 창현과의 마지막 포옹, 눈 물 속에 멀어져가던 뒷모습, 아직도 귓가를 떠도는 창현의 물기 머금은 듯한 음성, 잘 있어. 곧 편지할게... 그러자 영희는 문득 조금 전과는 전혀 성질이 다른 걱정에 빠져들었다. 의도적인 배신 쪽 으로는 전혀 의심이 일지 않은, 연인으로서는 아직 행복한 걱정이었다. '그런데 두 달이 다되도록 편지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혹시 창현씨에게 무슨 사고라 도 난 게 아닐까. 원래 몸도 약한 사람이었는데- 제 앞가림도 잘 못 하고. 틀림없어. 무슨 사고가 난 거야. 내게 글을 쓰려 해도 쓸 수 없는... 하지만 탈영은 하지 말아야 할 텐데. 그 참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나 보고 싶다고 덜컥 탈영이라도 하면...' 제6장 친화 "이랴, 낄낄, 이랴..." 형이 소를 모는 소리가 억지로 익힌 구령소리처럼 들렸다. 그러고 보니 쟁기를 몰고 오는 모습도 들판에서 흔히 보는 농부들의 쟁기질과 많이 달랐다. 개량 쟁기라 구식 쟁기처럼 매 달릴 필요가 없다 쳐도, 몸을 뒤로 젖히고 한 손으로만 손잡이를 쥐고 따라가는 형의 모습 에는 어딘가 자신의 능숙함을 과장하는 듯한 데가 있었다. 하지만 인철에게는 그런 형의 모습이 어색하거나 우스꽝스럽게 비치기는커녕 한없이 미덥 기만 했다. 형의 그런 자세야말로 그가 개간에 대해 가진 자신과 집착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과연 그의 발밑에는 보름 전까지만 해도 잡초와 야생의 관목들로 뒤덮인 산등성이에 지나지 않았던 곳이 제법 밭의 모습을 갖춘 채 벌건 맨 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침부터 형이 타준 밭이랑을 따라가며 콩을 묻던 어머니는 그새 보이지 않았다. 식구들 과 밥을 부쳐먹는 일꾼을 합쳐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의 점심 때문에 집으로 돌어간 듯했다. 부엌 살림을 누나에게 거의 맡기고 있지만, 보리쌀을 곱삶은 것이나 다름없는 밥도 그렇거 니와 재료도 양념도 신통찮은 것으로 그 밥을 밀어넣을 반찬을 장만한다는 것은 누나에겐 애초부터 무리였다. "밥이 이게 뭐로? 이게 보리밥 퍼준(퍼지게 한) 거라? 볼쌀(보리쌀)이 펄펄 난다, 펄펄 날 아." "아이고, 이게 반찬이라? 이거사 대국년도 못 먹을 따. 니 혼차 다 먹어라." 몇 번 누나에게 부엌일을 맡기고 개간지에 붙어 있다가 낭패를 본 어머니는 그렇게 누나 를 야단치기에도 지쳤는지 끼니때가 되면 아예 밭일을 포기하고 부엌으로 돌아가는 것이었 다. "야야, 여다 물 좀 다고." 철이 다시 형 쪽으로 눈길을 주고 있는 사이에 누군가 그렇게 소리쳤다. 습관적으로 물주 전자를 들고 일어나며 소리나는 쪽을 보니 이제 한창 피어나는 철쭉 들걸 하나를 파넘긴 먹 보네 아들이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원래는 형제가 나란히 와서 일했지만, 장가든 형은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고, 아우만 나오고 있었다. 그 형은 철이네 개간지의 간조(일당)가 미 덥지 않다면서 사흘마다 꼬박꼬박 현금 간조를 주는 다른 개간지에서 일한다는 소문이었다. 철이 주전자를 건네주자 먹보네 아들은 한 손으로 주전자 뚜껑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주전자를 기울여 목구멍으로 들이붓듯 물을 마셔댔다. 그 곁에는 개간을 위해 특별하게 벼 린 괭이가 눕혀져 있었다. 보통의 괭이보다 볼이 넓은 데다 도끼처럼 날을 세워 웬만한 나 무 뿌리는 한 괭이질로 잘려나가게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그런 괭이로 하루에 50평이 넘는 야산을 벗겨냈고, 운좋게 잡목이 없는 등성이를 만나면 백 평을 넘기는 수도 있었다. 인철도 처음에는 일종의 공명심에서 그런 그들 틈에 섞여본 적이 있었다. 하루종일 뛰어 다녀도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는 잔심부름보다 평수로 하루의 작업량이 뚜렷이 드러나는 그 쪽 일이 훨씬 마음에 든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게 터무니없는 짓이라는 것은 사흘도 안 돼 드러났다. 하느라고 해도 하루 열다섯 평을 채우지 못하면서 손바닥은 물집으로 덮였고 다 리에는 가래톳이 섰다. 고아원에서의 공동 작업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중노동이기 때문이 었다. "철이 거 있나? 자 가지고 여 쫌 온나 보자." 철이 먹보네 아들에게서 주전자를 받아 뚜껑을 헹구고 있는데 다시 저쪽 솔무더기 쪽에서 일하고 있던 용식이가 불렀다. 구동 영감네 막내로 그 어머니가 옛날 형의 유모였기 때문에 철이도 그를 형이라 부르고 있었다. 철이 주전자를 다복솔 그늘에 놓고 여섯 자짜리 자와 서른 자짜리 줄자를 챙기고 있는데, 저희끼리 큰 소리로 주고 받는 소리가 들려싿. "용식이 니 어디 갈라꼬?" "오늘이 장 아이가? 장에 쫌 가볼라꼬." "빈(돈 업는) 아가 장에 가보이 뭐 하노? 간조라도 나왔으믄 모르까..." "다, 일이 있다. 오늘 또 할 마이(만큼) 했고. 나는 새북부터 안나왔나." "몇 평이나 했는데?" "재봐야겠지마는 한 쉰 평은 될 꺼로." "뭐라? 니 임마 새북에 와가주고 사태(눈사태)난 데 긁었구나. 안직 점심때도 안 됐는데 어예 50평이나 파 뒤뱃노(뒤집었노)?" "저누묵 새끼 말하는 거 함 봐라. 그라이 내가 새북부터 왔다 안카드나?" 그렇게 떠들던 용식이 혀은 철이 다가가자 먹보네 아들을 두고 돌아 섰다. "조-기 조 돌무더기 있는 데부터 오늘 개간한 기다. 내 딴에는 네모 반뜩하게 만든다고 만든 게따마는 함 재보래."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전날 개간한 곳과는 뚜렷이 구별이 가게 직사각형으로 일구어진 비탈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로가 36자 남짓에 세로가 50자 남짓이었다. 양쪽 다 한 뼘 정도 밖에 여유가 없을 정도로 정확히 들어맞는게 먼저 나름대로 야산을 재 표를 해놓고 일을 시 작한 것 같았다. "50평 되겠네요. 50평으로 전표에 적어놓을게요. 전표 받아가시려면 형님이 올 때까지 기 다리구요." 가로가 서른 여섯 자로 되어 있는 바람에 계산이 간단해 철이 만년필을 드는 법도 없이 그렇게 말하자 용식이 형이 강경하게 말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 니 계산 단디(단단히) 해보고 하는 소리가?" 아마도 철이 봐주려고 자신이 말하는 대로 인정해주는 줄 알고 하는 소리였다. 철은 철대 로 영문을 몰라 물었다. "왜 36자, 50자 아니에요?" "그거사 맞지마는 계산을 해봐야제, 계산을." "36자에 50자면 50평이란 건 금방 나오지 않아요? 한 평이 서른여섯 제곱자니까." "듣고 보이 글네(그렇네). 그노마 머리 한번 참..." 철이 자기를 봐준 게 아니라는 게 썩 안심된다는 표정으로 용식이 형이 그렇게 말하며 괭 이와 도끼를 챙기기 시작했다. "형님 밭 갈고 나오거든 니가 그래라. 나는 볼일 쪼매 있어 일찍 내리갔다고." 어머니가 개간지 밑 집터에 와서 점심이 다된 것을 알린 것은 그로부터 한 반시간 되었 다. "야들아, 점심 먹고 하그라이, 밥 다됐다이-" "으응, 그래? 벌써 시간이 러렇게 되었나? 알았다. 이 골(이랑)마저 갈고 아이들 데리고 내려가마. 먼저 내려가거라." 형이 여전히 쟁기를 따라가며 말했다. 구릿빛으로 붉게 탄 형으 팔뚝에 번들거리는 땀이 다시 철에게 알지 못할 안도감을 주었다. 물지게에 달린 빈 물동이를 덜그럭거리며 산을 내왔던 국수 그릇을 나무 함지에 챙겼다. 어른의 한 아름이 넘는 소나무 그늘이 시원스럽기 그지없었다. 3백 년 전 거기다 큰 산소를 쓸 때 심었다는 적송이었다. 철은 잠시 그 그늘에서 땀을 식히며 새삼스런 눈길로 큰산소를 살펴 보았다. 3백 평이 넘 는 묘역에 여느 무덤의 네댓 배는 됨직한 큰 무덤 한 위와 그보다 좀 작은 무덤 두 위가 세 모꼴로 서 있었다. 파조가 되는 12대 조상과 배위 두 분이었다. 그러나 무덤의 크기에 비해 그 흔한 상석이며 비석 하나 없고 축대조차 흙으로 쌓여져 잔디를 입힌 게 다른 산소와 다 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그때야 재물이 있고 세력도 있을 때제. 까짓 것 비석, 상석 아이라 망부석인들 왜 못 세 웠겠노? 글치만 여기에 산소터를 잡아준 지관이 비석은커녕 돌미(돌멩이) 하나 못 놓게 한 게라. 왜 그랬는동 아나? 지관이 이 산소터를 보러 오다가 죽은 학 한 마리를 주웠는데, 그 걸 여다 던져놨디 얼마후에 땅기운을 받아 살아났다는 게라. 그래서 땅기운을 누르면 안 된 다꼬 돌미 하나 못 놓게 한 게라..." 어머니는 그렇게 설명했지만 이미 과학과 합리에 깊이 물들어 있는 철에게는 왠지 그게 지어낸 구실같이만 들렸다. 하지만 어쨌든 그 큰 산소 때문에 그 산은 팔리지 못했고 이제 는 2만 평의 개간지로 아득한 후손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된 것으로 보아 명당은 명당인 셈이었다. 그 큰산소 곁으로 난 국도를 건너 옛 재궁막인 그들 일가의 거처로 들어서자 마당에서부 터 벌써 어머니가 누나를 소리 높여 나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저눔의 뚝손. 어예 챗물(챗국물)하나 제대로 못 메우노? 물외(오이)를 썰었다 카 는 게 똑(꼭) 손가락만하다, 손가락. 거다기 사까리(가카린)는 또 왜 타노? 검검찝찌므리한 게 대국년도 못 먹을따..." 그 소리를 듣자 철의 마음은 금세 어두워졌다. 다시 모인 가족들의, 하나뿐이지만 깊이 모 를 큰 상처를 확인하게 되는 암울함 때문이었다. 철이 안광역에서 처음 누나를 만났을 때부터 섬뜩하게 의식 밑바닥을 스쳐가던 우려대로 어머니와 누나의 화해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 사나흘쯤의 불안한 평화가 유지된 뒤 그 불행한 모녀의 마지막이기에 더욱 가열한 불화는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 론 양쪽의 노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누나는 모든 것이 불편하고 부족한 시골 생활 에 자신을 적응시키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눈치였도,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돌아온 탕아'에 대한 관대함을 최대한으로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들이 헤어져 있는 3년 동안에 한층 깊어진 감정의 골은 그 정도로 메워질 성질 이 아니었다. 몇 번의 작은 충돌에 이어 불안한 소강 상태가 한 달을 넘기기 바쁘게 양쪽의 인내심은 다하고 마음속에서만 이글거리던 갈등은 거침없이 그 불꽃을 밖으로 피워올렸다. 아머니는 누나의 행동거지, 말솜씨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구석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그 같은 간섭을 못 참아하기는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대수롭지 않은 것을 빌미로 하루에도 몇 번씩의 작은 충돌이 있었고, 그것들은 또 이틀을 넘기지 않 고 제삼자의 개입이 필요할 만큼의 큰 충돌로 변했다. 이제는 어느 한 편의 결정적인 우위 가 없는, 말 그대로의 큰 충돌로 변했다. 누나는 참다참다 폭발했다는 투의 마구잡이 고함으 로 저항했고, 어머니는 이미 스물둘이나 되는 딸아게 매질이란 어림없는 시도로 나가기를 서슴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날의 충돌은 그 이상으로 확대되지 않았다. 멀지 않아 형과 일꾼들이 몰려들 것이란 게 누나와 어머니 양쪽 모두를 자제하게 만든 듯했다. 상을 차리던 누나는 어머니에 게 대드는 대신 마침 들어오는 철에게 말했다. "얘, 너 마침 잘 왔다. 샘에 가서 시원한 물 좀 길어와라. 물독 물은 미지근해진 데다가 얼마 안 남았어." 철은 그 부탁이 싫었다. 샘이 제법 멀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는 오전 내내 개간지에서 이 리 뛰고 저리 뛰어 지친 몸이었다. 그러나 그 거부가 일으킬지도 모르는 누나와의 충돌이 싫어 들고 온 함짐나 내려놓고 그애로 돌아섰다. 어머니가 그런 철의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대뜸 누나를 타박하고 나섰다. "물 좀 아끼(아껴) 써라. 샘에서 퍼오는 물이라꼬 그리 마구잡이로 써대믄 저 어린기 어예 감당하노? 아침에도 세 번이나 져주고 가더라마는 벌씨로 다 썼나? 미지근하기는 두멍(부뚜 막에 묻어놓은 물독)에 있는 물이 왜 미지근해지노? 세수도 빨래도 집 안에서 그걸로 해대 이 벌써 물이 다 떨어진 게제." 그런 어머니를 철이 오히려 말렸다. "괜찮아요. 제가 잠깐 샘에 가서 한 지게 져올게요. 형님도 밭을 갈고 내려우시면 시원한 물을 찾으실 거예요." 샘은 재궁막에서 언덕 하나 아래에 있었다. 그 언덕을 끼고 작은 개울물들이 흐르고 그 개울을 따라가다 보면 거의 개울과 같은 높이에서 샘이 솟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가까운 동 네 사람들이 축대를 쌓아 공동 우물처럼 쓰고 있었다. 언덕을 내려갈 때만 해도 억지로 떼밀려온 듯한 불쾌감이 조금 남아 있었으나 개울에 이 르자 철의 기분은 이내 상쾌해졌다. 맑은 개울물이 주는 시원한 느낌에다 방금까지 웅덩이 가에 떼지어 나와 놀다가 발소리에 놀라 바위틈에 숨는 피라미떼가 산뜻한 흥미를 일으킨 까닭이었다. 농사철이라 잡는 사람이 없어 흔해진 것 같았다. 언제 노는 날 한번 반두질을 하리라 마음먹으며 철은 피라미떼가 숨는 바위틈을 눈여겨보아 두었다. 샘가에는 철이보다 먼저 와 물을 긷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가까운 마을에 사는 같은 또 래의 소녀였다. 철이 일부러 가만가만 다가간 게 아닌데도 바가지로 물동이에 물을 퍼담는 소리 때문인지 소녀는 철이 오고 있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역시 점심에 마실 물을 따로 길 어가는지 정성들여 한 바가지 한 바가지 퍼담다가 철이 물지게에서 물동이를 떼놓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는 것이었다. 제법 눈에 익은, 밉지도 곱지도 않은 시골 소녀의 얼굴이었지만, 갑자기 바알갛게 붉어오는 볼이 무심코 다가간 철을 당황하게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소녀 쪽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당황스러운지 허둥지둥 물동이를 채우더니 똬리도 반듯하게 놓지 못하고 물동이를 머리에 이었다. 똬리를 정수리에 얹을 때, 숱 많고 검은 머리를 잘 갈라 탄 가리마가 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철은 별뜻도 없이 그 소녀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고동색 치마에 미 색 저고리를 입은 소녀의 뒷모습은 마주볼 때보다 훨씬 성숙해 보였다. 물동이 전을 타고 흘려내리는 물을 물동이 바닥 어름에서 가만가만 손으로 훔쳐 뿌리며 가는 게 적어도 자신 보다 열살은 더 많은 새댁 같았다. 물동이를 인 까닭에 발 밑을 살필 수 없어서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발걸음도 까닭 없이 낯을 붉힐 때와는 달리 어른스럽기 그지없었다. 철은 소녀가 언덕 굽이를 돌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녀가 안 보이게 된 뒤에야 비로 소 물을 긷기 시작했다. 샘이라도 개울과 물길이 이어져 있어서인지 눈치레뿐인 물고기 잔 챙이들이 한떼 샘가에 오글거리다가 철이 바가지를 담그자 놀라 흩어졌다. 철은 그 잔챙이 들을 피해 샘물을 양동이에 펴담았다. 그런데 몇 번 바가지질을 하기도 전에 철의 가슴을 쿡 찔러오는 게 있었다. 움찔해 손길 을 멈춘 철은 이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냈다. 눈앞 가득히 떠오르는 명혜의 얼굴로 보아, 그녀를 향한 때아닌 그리움 때문임에 틀림없었다. 비가 와서 개간 일을 쉬는 날 재궁막 마 루에 무료하게 앉아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을 때나 두들마(언덕마을)에서 빌려온 소설을 읽고 그 애잔한 사랑 얘기에 늦도록 잠 못 이루게 되는 때, 또는 애틋한 꿈 때문에 일찍 깨어나게 된 새벽 어스름 속에서 철은 이따금 명혜를 향한 그리움에 시달리곤 했다. 그러나 햇볕 쨍쨍한 대낮에, 그것도 실없이 고단한 개간 인부들의 뒤치다꺼리 중의 짧은 쉴 참에 명혜를 떠올려본 적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조금 전 물을 길어간 소녀가 어떤 자극이 된 까닭인 듯했다. 철은 그 속절없는 그리움에 시달리는 게 싫어, 무엇을 떨쳐버리듯 세차게 머리를 흔들고는다시 바가지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내 두 양동이에 철이 지고 갈 만한 물이 찼다. 양동이를 가로지른 막대에 물지게의 쇠고리를 건 철은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지고 일 어서기에는 무겁지 않은 짐이었으나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늘 겪는 어려움에 다시 빠져들 었다. 양동이를 절반 남짓밖에 채우지 않았는데도 걷는 반동에 출렁거려 물이 넘치는 것이 었다. 철이 집안에서 쓸 물을 도맡아 길어오기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이 다돼가건만 물지게 는 영 몸에 익어주지 않았다. 그 바람에 철이 재궁막에 이르렀을 때 양동이의 물은 절반도 안 남고 두 발은 함빡 젖어 있었다. "아이고, 저 무지게(물지게) 솜씨 보이 물 잘 길어 먹겠다. 그래도 물져날랐다고 이마에 땀 좀 보래이..." 철이 헉헉거리며 물지게를 벗는데 누군가 큰 소리로 그렇게 놀렸다. 돌아보니 그새 형과 함께 돌아와 밥상을 받고 있던 일꾼들 중의 하나였다. 딴 곳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긴 해 도 원래가 농사꾼이라 그들 눈에는 철의 서투근 물지게질이 우스갯거리로만 보이는 모양이 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화나기도 해서 철이 그들을 쏘아보는데 형이 느긋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애먹는구나. 어서 와라. 밥이나 먹자." 그런 형의 말투에는 철을 대견스럽게 여기는 빛이 뚜렷했다. 하지만 그날은 아무래도 좀 별난 날이었다. 점심을 먹는 일꾼들이 잠깐씩 눈을 붙이는 사이, 철도 안방 문턱에 다리를 걸고 방바닥에 등을 붙인 채 느긋이 쉬고 있는데 설거지를 하던 누나가 물묻은 손으로 쭈뼛 쭈뼛 다가와 말했다. "철이 너 오후에 개간지에 안 가면 안 돼?" "내가 밭을 마저 갈려면 걔가 있어야 하는데... 왜 그래?" 일꾼들과 함께 마루에 누워 있던 형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철을 대신해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가 마당 구석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어머니 쪽을 힐끔 곁눈질하면서 목소리를 죽여 대답했다. "불쏘시개가 없어서 그래. 오빠가 해준 장작 아직 덜 말랐거든." "왜, 내가 장작해올 때 마른 소깝(솔잎이 붙은 잔가지)도 한 바리 해다 주지 않았어? 그거 벌써 다 땐 거야?" "장작이 젖어 있어서... 통 불이 붙어줘야지. 그래서 많이 썼는가 봐. 오빠, 어떻게 안 될 까?" 누나가 다시 힐끔 어머니 쪽을 훔쳐보며 사정하듯 말했다. 형이 잠깐 이맛살을 찌푸리다 가 이내 선선히 받았다. "할 수 없지. 소를 빌려놨으니 밭은 안 갈 수 없고- 그래 평수 재를 일은 모조리 저녁때 로 미루지 뭐. 철이 너, 물이나 떠놓고 어디 가서 불쏘시개 할 마른 소깝 좀 주워와라." 하지만 철에게는 어림없는 주문이었다. 가까운 산에 가서 다복솔을 잘라오는 식의 나무는 형이 제대해오기 전에 몇 번 해온 적이 있지만, 마른 솔잎 가지라면 달랐다. 청솔가지를 쳐 서 말리는 게 아니라 이미 말라 있는 걸 짐으로 해오려면 먼 산의 산판을 찾아가는 수밨에 없는데 아직 길조차 익지 않은 철이게는 거의 불가능했다. "형 내가 어디가서 그런 나무를 해요? 길도 모르는데 혼자서..." 철이 암담해서 그렇게 받자, 형도 금세 그 말을 알아들었다. 다시 한번 이맛살을 찌푸리다 가 별수없다는 듯 말했다. "그것도 그렇구나, 안 되겠다. 철이 네가 남아 평수 재주고 전표 끊어 줘라. 내가 소를 몰 고 가서 마른 소깝 한 바리 해오지. 저번에 보니 진삿골에 산판이 있는 것 같던데..." 그때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못 들은 척하고 있었지만 실은 그들 삼남매가 하는 말을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안 된다. 얼매를 주고 빌린 손데... 장골이(장정) 두 품을 물어주고 빌린 소로 이 농철에 소깝하러 간다꼬? 밭 골 안 타믄 콩은 어예 심꼬?" 어머니는 그렇게 형을 가로막고 다시 누나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글케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 카이. 때기 쉽다꼬 마른 소깝만 툭툭 뿌르자(부러뜨려) 때 이 한 바리 아이라 백 바리를 해놓은들 어예 견디겠노? 내 하마 밥했는데도 장 끓일 숯불 안 남는 것 보고 이래 될 줄 알았제. 불살개(불쏘시개)는 니가 알아 해라. 니가 히피(헤프 게) 때 이래 됐으이 니말고 누가 책임지겠노? 옛날매로(처럼) 무종(물 져나르는 종), 나무종 따로 있는 것도 아이고... 니사 손가락을 빼 때든동 말든동 내사 몰따(모르겠다). 소는 안 된 다." 그 말에 형의 얼굴이 어둡게 굳어졌다. 누나의 눈길이 실쭉해지며 치미를 화를 참느라 목 덜미께가 벌개지는 게 눈에 들어오고, 그런 누나를 차갑게 쏘아보며 덤비기만 하면 물어뜯 을 듯 이를 악문 어머니가 철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그래서 뒷일이야 어찌 됐건 두말없 이 지게를 지고 나서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는데 문득 기대하지 못한 쪽에서 해결의 실마리 가 나왔다. "에헤이, 이 집이 왜 이레 붕성(떠들썩)하노? 보자, 명훈이 개간 잘되나?" 누군가 지게 작대기를 끌며 마당으로 들어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철이 돌아보니 마을에 사는 진규 아버지였다. 옛날 그 아랫들 이백 마지기가 무두 철이네 것이었을 때 그들의 마 름일을 맡아보았다는 사람의 아들로, 이미 주종 관계는 해방 전에 재궁막을 드나들며 이것 저것 걱정을 해주는 중년의 농부였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어디 팔아먹고 찌그렁한 재궁막에 식구대로 모이(모여서), 문전 옥 답 천석지기는 다 어예고(어디다 없애고) 조상 밋등(묘등) 까뒤밴다꼬-" 그렇게 주절거릴 때는 빈정대는 것같이 들리기도 하지만 도울 일이 있으면 몸 아끼지 않 고 나서는 그러 어머니도 형도 그가 오는 걸 별로 싫어하지 않았다. 특히 형은 그의 수십 년 농사 경력을 존중해 어머니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깍듯한 존대로 대했다. 그날도 그랬다. 형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환히 웃으면서 그를 맞았다. "진규 아버님, 웬일이십니까? 대낮에 빈 지게를 지시고-" "웬일은?인제 초벌매기(첫 논매기)가 끝났으이 실실 풀이나 비야제. 농사꾼 재산 거름밖에 더 있나? 세상에 돈 들고 땅 망훗는(망치는) 게 비료라." "그럼 잘됐습니다. 저와 같이 가시죠. 아 참, 집에 기르마 있어요?" "같이 가다이 어딜? 그래고 소 질매는 또 왜?" "마른 소깝을 좀 주워와야겠어요. 불쏘시개가 없어서. 풀 베러 가시면 어차피 산으로 가실 거 아녜요? 소를 몰고 가서 아예 한 바리 해다 놓으려구요." 그러자 진구 아버지가 순한 소울음 소리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허. 뭐시라? 농사꾼이 우뉴월에 나무하러 산에 간다꼬? 씨갑(씨앗) 묻을라꼬 밭 갈던 소까지 데리고- 현동이 죽고, 처음 들어보는 소릴세." 현동이는 철이도 그새 들어서 아는 그 고장의 이름난 게으름뱅이였다. 밥 차려 먹는 게 귀찮아 마누라 친정 갔다 오는 이틀을 생쌀만 씹고 누워 지냈다는 전설적인. 화를 누르고 있던 어머니가 것보라는 듯 다시 나섰다. "봐라. 남이 다 안웃나? 안 된다. 오늘 이 콩 다 묻어야 된다. 불살개(불쏘시개)사 히피(헤 프게) 땐 사람이 어예 구처하지 뭐. 소는 밭을 갈고-" "어머니두 참-" 형이 민망한 듯 혀를 찼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 서 있던 누나가 거칠게 돌아서서 부엌 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내막을 대강 알아차린 진규 아버지가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보자- 그리믄 철이 니가 내 따라온나. 요 앞산에 보이 언 놈이 생솔을 잡아갔는지 끝다 리가 바싹 마른 게 있더라. 그것만 좌(주워) 모아도 한참은 뗄 테이니께는, 명훈이 소 데리 고 산에 가는 거는 다음에 날 잡아 가기로 하고-" 철을 빼놓고는 이쪽저쪽 큰 불만이 없는 해결이었다. 아니, 철이도 그걸로 집안의 불화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진규 아버지에게 고마워해야 할 해결이었다. 철은 그 일로 시비가 길어지는 게 싫어서 얼른 지게를 찾아 졌다. 어른들의 지게라 아직 덜 자란 철이 지기에는 너무 헐렁했다. 진규 아버지가 그걸 눈여겨보아두었다가 재궁막을 빠져나가기 바쁘게 지게 멜빵끈을 줄여주었다. 그러자 지게 다리가 좀 긴 듯해도 지게 등판 만은 철의 등허리에 잘 달라붙었다. 6월도 중순이라 빈 지게로도 산을 오르기에는 몹시 더웠다. 신중턱을 오르기도 전에 땀을 씻어대는 철을 보고 진규 아버지가 놀렸다. "아이고, 빈 지게에 산 입새부터 저 땀 좀 봐라. 큰 나무 하겠다." 산은 한동안 개간지나 다름없이 다복솔과 키 작은 잡목 등걸만 뒤덮인 야산이었다. 그러 나 능선을 하나 넘자 차츰 산다운 산이 되기 시작했다. 듬성듬성하기는 해도 제법 하늘 높 이 쭉쭉 뻗은 소나무가 서 있었고 잡목도 두어길이 넘는 참나무와 오리나무로 제법 빽빽했 다. 군데군데 흐드러지게 핀 철쭉 떨기들이 보이고 어디서 풍기는지 모를 들꽃 향기와 풀냄 새가 콧속을 상큼하게 쏘아왔다. "좀 쉬어가요." 그 산 중턱에서 철은 갑자기 이제는 아득한 옛날같이만 느껴지는 학교 시절의 소풍 때를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사실 도회에서 자라난 철에게는 그런 꽃, 그런 냄새란 소풍 때나 이따금씩 보고 맡을 수 있었을 뿐인 것들이기도 했다. 진규 아버지는 그때 딴생각을 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러자." 별로 빈정거리는 기색 없이 그렇게 대답해놓고 작은 참나무 그늘에 지게를 벗는 철에게 앞 뒤 없이 불쑥 물었다. "니는 학교를 그래 중도 재패(작파)해 어예노? 이래 고마 농군이 되고 말 작정가?" 그 또한 윗대에 얽힌 은정 때문일까.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가족들이 다시 만나 살게 된 기쁨과 고아원 생활에서의 해방감, 그리고 일가 재건의 꿈에 부풀어 있던 철에게는 학업의 중단이 아직 상처는 아니었다. "다시 가세 될 거예요. 개간만 끝나면 형님께서 어떻게 알아봐 주신댔어요." 별로 우울한 기분 없이 그렇게 대꾸해 놓고 이내 가까운 산비탈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싸리나무 떨기와 아직 연둣빛인 잎이 너풀거리는 떡갈 등걸, 그리고 한창 뻗기 사작하는 속 새풀 줄기가 어울려 한 덩어리 작은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그 그늘에서 무언가 잿빛 나는 것이 반짝 나타났다가 없어진 것 같아 눈길이 끌렸다. 말로만 들었던 그 산토끼일까. 철은 무엇이 거기서 움직였다는 데 야릇한 흥분을 느끼며 시력을 모아 그 부근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진규 아버지가 무어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지 만 그런 철에게는 다만 멀리서 들려오는 의미 없는 웅얼거림 같은 것일 뿐이었다. 정말로 무언가가 거기 있었다. 산토끼가 아니라 회색의 작은 병아리 같기도 하고 통통한 멧새 같기 도 한 게 서너 마리 싸리 줄기 뒤를 빠르게 스쳐 짙은 속새풀 속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무 슨 환영 처럼 재빨리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철은 틀림없이 보았다. 철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그 작은 수풀로 달려갔다. 그리고 두발로 싸리 떨기와 억새풀숲을 이리저리 헤치며 방금 본 것들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 작은 수풀에서 날아간 것이나 기어나간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가까운 곳에는 그것들이 달리 몸을 숨길 만한 풀포기 하나 변변한 게 없는데도 철이 방금 본 그 새새끼들 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뭣이고? 뭐꼬?" 놀란 진규 아버지가 따라와 철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철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기보 단 혼잣말에 가깝게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틀림없이 여기서 봤는데. 한 마리도 아니고." "뭘 봤는데? 뭐가 있드노?" "작은 병아리 같기도 하고. 무슨 새 같기도 하고. 회색빛 나는게." 그제서야 진규 아버지가 알겠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하. 니가 꽁(꿩)병아리를 봤구나. 지금이 그 철이제. 글치만 그게 안직 여다 있을 택이 있나? 그게 얼마나 재바르다(날쌔다)꼬. 하마 저마이(저만큼)는 갔을 게다." 그러면서 십여 미터는 떨어진 다른 풀숲을 가리켰다. 그러나 철은 아무래도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수풀을 헤치는 발끝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무것도 못 봤는데." "아아가 어리숙하기는. 니 꽁병아리가 얼마나 영물인지 아나? 어예다가 사람 발에 밟해도 (밟혀도) 짹소리 안 재고 죽는 게 꽁병아리라. 그래야 열 마리고 스무 마리고 곁에 있던 한 배내기 꽁병아리들이 안 들키거등. 고마 가자. 백지로 헛일하지 말고. 오뉴월 해가 길다 카 지마는 일부러 산에서 삐칠(늑장부릴) 택은 없는 게라." 진규 아버지가 그 말과 함께 지게 곁으로 돌아가 지게 멜빵에 오른쪽 어께를 끼웠다. 철 은 미련으로 한참이나 더 그 풀숲을 뒤져분 뒤에야 돌아와 지게를 맸다. 그러나 까닭 모를 흥분과 감동은 그뒤로도 한참이나 더 지속되었다. 《그 귀향이 내게 준 값진 체험 중의 하나는 자연과의 친화였다. 말할 것도 없이 그전에 도 자연은 내게서 그리 멀지 않았다. 기억에서조차 희미하지만 유년의 첫머리를 보낸 안광 읍의 산과 들이 그러하고, 뒤이은 서울에서의 2년 남짓도 오늘날처럼 자연과 그리 동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오염의 징후는 보이고 있어도 안암천에는 아직 송사리에 살고 있었으 며, 조금만 상류로 올라가면 제법 천렵을 즐기고 있는 어른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그때 막 교양과정부가 들어서고 있던 고대 부근의 야산도 인공보다는 자연이 더 많은 내 유년의 놀 이터 중의 하나였다. 유년의 끄트머리를 보낸 밀양은 더욱 그러했다. 남천강, 무봉산, 마음산, 사포, 진늪, 선불- 지금 와서 가만히 추억해보면, 내게 깊은 인상을 님긴 것은 그곳의 인공적인 구조물보다 자 연이다. 하지만 그때의 자연은 어디까지나 도회적인 삶에 곁들여진 자연이었다. 우리 가족의 생계 는 다만 거리와 시장에서 구해졌고 하루의 태반을 보내는 학교와 내 의식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놀이터는 역시 도회에 속했다. 다시 말해, 나는 어디까지나 도회의 아이로서 자랐 으며 자연은 그 자체로서보다는 뒷날처럼 철저하게는 진행되지 못한 도시화의 한 예외로 내 의식과 관계를 맺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귀향으로 모든 게 달라졌다. 가족의 생계- 우리의 먹을 것, 입을 것, 살 집, 땔 감을 모두 그것에 의지하게 되어 자연의 의미도 바뀌었다.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이고 어른들 에게는 휴식이나 감상의 대상일 뿐인 도회에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된 것이었다. 실제적인 일터, 또는 우리도 그 일부를 이루는 유기적인 공간이라는 느낌이 그랬 다. 짐작건대 그러한 변화는 아마도 자연과 나를 매개하는 것이 달라진 까닭일 것이다. 노동 이 둘 사이를 연결하게 되면서 자연은 놀이나 휴식의 대상일 때와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 다. 가치 창조에의 기대나 동류 의식의 배양, 또는 공동체에의 기여 따위에 착안한 예찬론자 들에게 죄스럽게도, 노동, 특히 육체적 노동이 우리에게 가지는 일차적인 의미는 고통이다. 나는 손이 흰 서생들에 의해 목청 높게 불려지는 노동의 찬가를 물질적인 생산에 참가하지 않으면서도 그 소비는 함께해야 하는 무리의 노동하는 이들에 대한 아첨이거나 그들로 하여 금 노동의 고통을 잊고 계속적인 생산에 종사하도록 하려는 음험한 부추김으로 의심한다. 그때만 해도 많은 것이 사람의 근육에만 맡겨져 있던 60년대의 여름쯤, 한껏 욕심을 낸 풀 짐을 지고 산비탈을 내려오는 농군들에게 노동의 즐거움이나 값짐을 노래로 들려주려 한다 면, 그 농군은 분노로 지게 작대기부터 휘두르고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그런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런 노래가 멀리서 불려지거나 고통 스런 노동의 순간이 끝난 뒤에 들리게 되는 까닭인 듯싶다. 거기다가 노동의 불가피함은 은 연중에 노동하는 이들에게 그런 노려와의 타협을 유도한다. 어차피 치러야 할 고통이라면 그것이 의미 있고 값진 것이기를 바라 때로는 자진하여 그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되는 것이나 아닐는지. 하지만 노동이 자연을 향한 것일 때 그 불가피함은 또 다른 반응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자연과의 친화 내지는 일체감이다. 먼저 투쟁이고 극복의 대상이었던 자연은 차츰 친화의 대상으로 바뀌어가고, 이윽고는 노동도 노동하는 주체도 자연의 하나로 녹아들게 되는 것으 로 어떻게 보면 그것이야말로 참다운 의식의 승화일지도 모르겠다. 불행히도 흙과 자연을 대상으로 한 내 노동의 세월은 길지 않아, 나는 끝내 그것들과의 일체감까지는 느껴보지 못 했다. 그러나 자연과의 친화라면 그 무렵의 두어 해로 나는 충분한 경험을 한 것이라고 단 언할 수 있다. 괴롭고 때로는 증오스럽기까지 하던 노동이 조금씩 숙달의 과정으로 접어들고, 얼마 동안 일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것이 내 삶의 피할 수 없는 과정이란 깨달음이 생기면서, 자연은 도회의 아이로서는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친밀감으로 내게 다가왔다. 몸에 붙지 않는 나 뭇짐에 짓눌려 오르내리는 산등성이나 숨까지 턱턱 막혀오는 칠팔월 조밭도 더는 싸워 이겨 야 할 적이 아니었고, 흙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신비- 그 발아와 성장과 결실도 유년 시절의 도회적인 호기심과는 다른 흥미와 경탄을 자아냈다. 도회의 친구들이나 놀이 기구를 대신해 나무와 수풀이 다가왔으며, 한 순간의 심심풀이나 수렵 본능과는 무관하게 내와 물고기가 느껴졌다. 아주 오래 뒤, 드디어 건강을 생각할 나이 가 된 나는 도회의 친구들과 정기적인 산행을 시도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첫날 운동량 이니 무엇이나 해서 되도록 무럽게 한 배낭을 지고 산을 오르다가, 오솔길 곁에 때마침 연 두색 잎이 싱그럽게 피어나고 있던 떡갈나무 등걸 때문에 결국 중턱에서 그 이상의 등산을 포기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옛날의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연성 없는, 그리고 생 산과는 전혀 무관한 그 호사스런 노동에 대한 자괴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새삼스럽게 되 살아난 옛날의 감정에 그같이 도회적인 자연과의 친화 방식이 너무도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벌고 쓰는 것이 온전히 도회적인 방식과 제도에 의지하게 된 뒤에도 내가 흙과 생산에 대 한 부질없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또한 그 옛날 경험했던 자연과의 친화와 무관하 지 않은 듯하다. 그 앞뒤의 오랜 도시 생활에 견주어보면 터무니없을 만큼 짧은 세월이지만, 그래도 내 존재의 출발이 그 자연에서 비롯됨을 일생 잊지 않게 해주기에는 충분한 세월이 었다. 나는 사물에 대한 수리적 분석이나 구체적인 해석에는 늘 불안을 느낀다. 그 대신 보편적 인 원리나 본질론으로 우물우물 넘어가기를 잘하는데, 그 또한 그때 길러진 이른바 전원적 인 사고 형태의 한 약점일는지도 모른다.》 훗날 철은 그 시절에 대해 그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날 진규 아버지와 함께 산으로 가 서 보낸 한나절도 그 같은 친화의 한 단계일 것이다. 진규 아버지가 말한 끝다리 나무는 산등성이를 둘이나 넘은 뒤의 계곡에 있었다. 남은 밑 둥치가 아직 하얀 게 줄기를 잘라낸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지만, 초여름이어서인지 솔잎은 발갛게 말라 있었다. "니는 여다서 소깝단 묶고 있거라. 내 조쪽 개골(골짜기 바닥)에서 얼른 풀 한 짐 비(베 어)오꾸마. 낫질할 때 손 조심하고." 진규 아버지가 그 말을 남기고 한창 숲이 우거진 계곡 쪽으로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이나 더 나무 그늘에서 땀을 식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소나무 끝다리에 낫질을 시작하면서 철은 문득 톱을 가져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쳐내야 할 나뭇가지가 굵은 데다 바짝 말라 있어 서 투른 낫질로는 영 잘라지지가 않았다. 네 번 다섯 번 낫질 해 한 가지를 잘라 놓고 보면 그 사리 마른 솔잎은 다 떨어져 앙상한 삭정이만 남고 마는 것이었다. 누나가 원한 게 불쏘시개라 철은 당황이 되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나중에 어떻게 솔잎 을 따로 긁어모을 궁리를 해보기로 하고 낫질을 계속했다. 그럭저럭 소나무 끝다리를 다 쳐내리자 다시 새로운 낭패가 철을 기다렸다. 나뭇가지가 함부로 뻗은 채 말라 그대로는 지게에 몇 개 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단을 지어 얹으려고 보니 이번에는 단 지을 새끼를 가져오지 않아 난감했다. 지게에 달린 지게 꼬리로만 어떻게 한 짐 묶어보려던 철은 마침내 단념하고 주위를 살폈 다. 그 사이 칡넝쿨의 효용을 배워 그걸 한번 써볼 작정이었다. 칡넝쿨은 멀지 않은 데 있었 지만, 새끼 대신 쓸 수 있는 묵은 줄기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쉬운 대로 햇순 줄기를 잘라 갔다가 그게 나뭇단을 단단하게 묶기에는 너무 약해 몇 번 실패를 거듭한 뒤에야 철은 새끼 대신 쓸 수 있는 묵은 줄기 서너 발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진규 아버지가 참나무붙이의 새순과 속새풀같이 섬유질이 많은 풀로 한 짐 해 지고 다시 철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것은 해가 제법 서편 산기슭으로 뉘엿해진 뒤였다. 까치 둥우리 같은 삭정이를 서너 단 묶어 지게에 얹은 철이 다시 바닥에 떨어진 솔잎을 두 손으로 긁어 모으고 있는데 진규 아버지가 멀지 않은 곳에 목발을 내려놓으며 놀리기부터 먼저 했다. "아이고, 그것도 나무라꼬 했나? 몽침(목침)이만한 맨달이(삭정이)단 서너 개 가주고 갈라 꼬 오뉴월 산길을 십리나 왔단 말이제." 그러더니 철에게서 낫을 뺏어들고 그때껏 애써 묶은 솔가지단을 툭툭 쳐 흩어버렸다. "뭘하시는 겁니까?" 철이 놀라 그렇게 묻자 진규 아버지가 문득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왕 지게를 지게 됐으믄 일을 똑바로 배아야제. 일로 온나. 자, 봐라." 그리고 솔가지단을 새로 묶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제멋대로 뻗은 잔가지에 툭툭 가볍게 낫질해 차곡차곡 잰 뒤 무릎으로 누르니 놀랍게도 솔가지가 납작하게 내려앉아 철이 묶은 석 단이 한 단으로 줄어들었다. 진규 아버지는 철이 낫으로 쳐내다 만 소나무 끝다리에서 잔가지를 깨끗이 쳐내 그런 솔가지단을 석단이나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남은 줄기도 서너 토막으로 지어 철의 지겟가지에 깔더니 그 위에 솔가지단 넷 을 얹고 지게 꼬리로 단단히 묶었다. "자 인제 함 져봐라." 짐이 다 지워진 지게에서 지게 작대기를 빼내고 한 손으로 무게를 가늠해본 진규 아버지 가 다시 지게 작대기로 지게를 받치며 철에게 말했다. 철은 고마움보다는 갑자기 거만해진 듯한 그의 말투에 희미한 반감까지 느끼며 지게 밑으 로 들어갔다. 지게 작대기를 빼내자 등받이가 예사 아닌 무게로 짓눌러왔다. 그러나 철은 알 수 없는 오기 같은 걸 느끼며 힘을 다해 일어났다. 지게 작대기 덕분에 간신히 꼬꾸라지는 것은 면했지만 산길을 내려가기에는 아무래도 무리한 짐이었다. "안 되겠어요. 너무 무거운데요." 무엇이 세차게 내리누르는 것 같아 휘청하다가 다시 무릎을 꿇게 된 철이 지게 작대기로 지게를 받치며 말했다. 굵은 소나무 줄기 세 토막을 들어내면 그럭저럭 견뎌낼 만한 짐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미처 그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진규 아버지가 턱없이 엄격해진 얼굴로 말했다. "무신 소리, 여기 너어 또래 아아들 반 짐밖에 안 된다. 이왕 지게를 등에 댔으믄 남우(남 의) 반 짐은 져야제. 지게꾼은 한번 일라서믄 가는 게라. 그냥 지고 따라온나." 그리고 성큼성큼 자기 지게로 가더니 풀짐을 지고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등성이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같은 그의 돌변에 철은 다시 오기가 솟았다. 이를 악물고 지게를 진 뒤 그의 뒤를 따라 산등성이로 오르기 시작했다. 방금 짐을 지기 시작한 데다 오기도 한몫 을 단단히 해, 진규 아버지가 첫 번째 지게를 내린 능선까지는 어떻게 갈 수가 있었다. 그러 나 그때도 이미 지게 멜빵이 어깻살을 파고드는 듯했다. "산길은 말이따, 좀 두르는(둘러 가는) 것 같아도 대백이(능선)를 타고 내리는 게 잴 가깝 고 편하제. 산길에는 대백이밖에 딴 수 없는 게라." 먼저 가서 풀짐을 내려놓고 기다리던 진규 아버지가 헐떡이며 지게를 내려놓는 철을 거들 떠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무슨 속셈이 있는 말 같았지만 오기가 나 있는 철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진 규 아버지는 그런 철의 기색에는 아랑곳없이 곰방대를 몇 모금 빨더니 아직도 숨결조차 고 르지 못한 철에게는 상의 한마디 없이 지게를 졌다. "보자, 이래다가 잘못하믄 말 저물라. 날래 내려가야 될따. 이제 여기서 일(일어)나믄 집까 지 가는 게라." 갑자기 사람을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 철은 이제 단순한 오기 이상으로 화까지 났다. 그러나 아직 그의 진정한 의도가 짐작되지 않아 무어라 대꾸할 말을 못 찾고 있는 사 이에 풀짐을 진 진규 아버지는 성큼성큼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그러보 보니 해도 벌써 서쪽 산등성이에 걸려 있어 철도 할 수 없이 지게를 졌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이 지게는 누가 커다란 납덩이라도 갖다 얹은 듯 배는 무거워져 있었다. 자꾸 멀어지는 진규 아버지가 이상하게 철을 다급하게 해, 철은 기를 쓰고 일어났지만 이번에는 어깨가 아파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지게 멜빵이 어껫살을 파 고드는 듯한 느낌을 넘어 견디기 어려운 고통으로 후벼오는 것이었다. 발걸음도 조금 전 악을 쓰며 산등성이를 기어오르느라 너무 많이 힘을 뺀 탓인지 처음 같 지가 않았다. 이상하게 후들거리는 다리로 능선을 내리자니 금세 앞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 았다. 두어 달 새 적잖이 지게질을 해보았지만 그런 지게질은 또 처음이었다. 그 바람에 철은 첫 번째 산봉우리를 삼분의 일도 내려가지 못하고 지게를 벗지 않을 수 없었다. 약간 비탈이 덜한 곳이다 지게를 받쳐 세우고 보니 능선을 따라 내려가던 진규 아 버지는 어느새 두 번째 봉우리를 넘고 있었다 그 봉우리만 넘으면 철의 시야에서 아주 사리 질 판이었다. "진규 어버님, 같이 가요!" 철은 차오르는 숨을 간신히 고르며 진규 아버지 쪽을 향해 소리쳤다. 처음 와보는 산길이 라 갑자기 홀로 내려갈 일이 걱정스러워진 까닭이었다. 그러나 풀짐 뒤의 진규 아버지는 인 철의 외침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느릿느릿 봉우리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다급해진 철은 제대호 쉬지도 못하고 다시 지게를 졌다. 그러나 다급한 것은 마음뿐, 이번 에는 전보다 더 짧은 거리에서 지게를 내려놓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나뭇짐이 시간시간 그렇게 무거워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못해 으스스할 지경이었다. 철이 다섯 번이나 쉬어 두 번째 봉우리를 올랐을 때는 해가 완전히 져버린 뒤였다. 겨우 지게를 내려놓고 땀에 젖는 이마를 씻으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저녁 연기가 솟고 있는 마을 이 아득히 내려다보였다. 아직 꽤 먼 거리였다. 철은 진규 아버지를 찾아보았다. 구불구불한 능선길 어디에도 진규아버지의 풀짐은 보이 지 않았다. 무정하게도 혼자 내려가버린 듯했다. 어차피 스스로 길을 찾아 내려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가야 할 길이 몇 배 나 아득해 보였다. 거기다가 시간을 가늠해보기 위해 돌아본 서쪽 산등성이 위에는 벌써 새 빨간 노을이 걸리고, 그 골짜기로는 저녁 이내가 슬금슬금 끼어오는 것이 멀지 않아 어둠이 밀려올 듯했다. 전쟁과 도벌로 큰 짐승(호랑이)은 없어졌다고 하지만, 도회에서 자란 철에게 는 산속에서의 어둠이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철은 짐을 줄여서러도 빨리 내려가볼까 생각 했으나 이상한 오기 같은 게 다시 솟아 그대로 졌다. 진규 어버지의 속셈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짐을 줄여서 내려가면 틀림없이 비웃을 것 같았다. 그가 단단히 묶어준 짐을 풀었다가 다시 묶는다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그 다음부터 능선을 다 내려가 마을로 접어드는 샛길에 이를 때까지, 철에게는 그야말로 참담한 고투의 시간이었다. 잘돼야 오리 남짓한 산길을 철은 꼭 열한 번이나 쉬었다. 갈수록 쉬는 시간이 길어져 철이 마침내 산자락을 벗어났을 때는 날이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그 동안에 철이 겪은 심경의 변화였다. 어둑어둑해오는 산길을, 좀 과정하면 여남은 발자국마다 한 번씩 쉬어가며 내려우는 동안 철은 야속함과 원 망, 분노, 슬픔, 외로움, 체념 따위 우리 감정의 모든 어두운 형태를 골고루 맛보았다. 그러 다가 그것들은 차츰 절망적인 용기로 바뀌었고, 마침내는 그 자신에게도 뚜렷하지 않은 대 상을 향한 전의 또는 호승심 같은 것으로 변했다. 하지만 산을 벗어나 마을의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오솔길에 지게 목발을 내려놓을 때의 심경은 또 달랐다. 호승심이 완전한 승리감으로 바뀌는 순간의 희열도 잠시, 철은 곧 가슴이 철렁하는 존재론적 인식에 이르렀다. 《어른들이 무책임하게 지어 어린 우리에게 퍼뜨린 미신-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주장이 가장 철저하게 들부수어진 것은 그때였을 거요. 문득 그것은 승리나 극복 이 아니라 다만 자연이 우리 존재에게 지키도록 요구한 원칙을 내가 겨우 이행한 것일 뿐이 라는 느낌이 든 것이오. 특별히 혐오해야 할 것도 없고,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이 될 수도 없 는 존재론적 원칙 같은 거 말이오. 좀 허풍이 될는지 모르지만, 노동으로 매개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보다 승화되기 위해 겪어야 할 통과 의례란 바로 그런 게 아닌지 모르겠소. ..》 문학 청년 때의 어떤 술자리에서 철은 그 나름의 경험을 그렇게 떠벌린 적이 있다. 꽃이 피고 새가 운다든가, 산이 높고 물이 맑다든가 따위의 이유만으로 돌아가 자연과 하나되기 를 꿈꾸는 얼치기 시인르 빈정대는 뜻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자신의 진실이 담긴 말이기 도 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오래오래 그날을 기억하게 만든 것은 진규 아버지였다. 철이 완전 히 산그늘을 벗어나 마을로 접어드는 호밀밭 머리에 지게를 내려놓았을 때였다. 이제는 땀 이 나지도 않는 이마를 습관적으로 씻으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한길이나 자란 호밀밭 이랑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불켜진 창이 빨갛게 보일 만큼 저문 뒤라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뒤이어 철의 눈에 들어온 집채 같은 풀짐이 그가 누군지 금세 알 수 있게 해주었 다. 진규 아버지였다. "철이 인자 오나? 애먹었제?" 그가 왠지 축축하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철에게 물었다. 결국 그가 혼자 가버리지는 않았 다는 게 슬몃 감동으로 가슴을 건드렸으나 갑자기 뒤살아나는 원망과 분노에 철은 얼른 대 답을 못 했다. "짐 보이 내 해놓은 대로 같다마는, 오다가 나무 매삘지는(내다버리지는) 안 했나?" "나무를 왜 버려요? 솔가지 하나 안 흘렸어요." 그제서야 말문이 열린 철이 감정 섞인 말로 쏘아붙였다. 진규 아버지가 잠시 순한 소울음 소리 같은 웃음을 흘리더니 여전히 축축이 젖은 목소리로 철을 달랬다. "첨에는 여다서 기다리는 것보다 올라가서 대신 져줄까도 생각해봤는제. 글치만 그거는 니 짐이라. 결국은 니가 져야 할 꺼라꼬. 하마 너어가 여다서 땅파먹고 살라꼬 마음먹었다믄 안지고는 못 배기는 짐이라." 그래놓고 소리나게 코를 푼 진규 아버지가 돌에 곰방대를 털며 말했다. "어너 어부지 동영씨 나도 안다. 일정 때 빼고는 먼빛으로밖에는 못 보기는 해도... 한 때 는 깍듯이 도련님이라꼬 모셔야 됐지만 나이는 내캉 비식(비슷)했제. 참 자알 생겼디(더니). 한번은 무슨 방학 때라. 아매 한 유월쯤 됐는데 조쪽 신작로 끄트머리 조밭을 매다보이 어 그 아부지가 호말을 타고 지나가더라. 우리 매이(같은 것)하고는 영 별종 같은 게 부럽기도 하고 신세 한탄도 나데. 어예 저 사람은 부잣집에 나가지고 손에 흙 한번 안 묻히고도 저래 신선같이 사노 싶어. 아이, 어쩌믄 그게 젊은 내한테 쪼매 한이 되기도 했는 모양이라. 해방 되고 좌, 우 갈리 싸울 때 나도 좀 뿔또그레(불그레)해가주고 전농이다, 민청이다 기웃거려 본 적이 있제. 매타작도 좀 당하고- 그런데 내가 왜 그 짓을 치앗뿐지(지워버린지) 아나? 그 길을 쪼매 알아보이 그 꼭대기에 또 너 아부지 동영씨가 안있나? 우리 같은 없는 사람들 세상 맨들라꼬 하는 운동인 줄 알았는데 거다가도(거기도) 대가리는 모도 배운 사람들이라. 다사(모두야) 아니지만 배운 사람이 곧 있는 집 자슥이고- 그걸 보이 말캉 헛거지 싶더라. 백성에서 인민 된다꼬 뭔 큰수 날 거 같지도 않고 힘있고 똑똑은(한) 사람한테 동무라 부른 다꼬 참말로 그 사람들 동무 될 것 같지도 않더라. 백지로 이쪽저쪽 똑똑은 사람한테 홀래 (홀리어 또는 몰리어) 댕기다가 징역 가고 맞아죽는 거는 우리뿐이지 싶더라. 그래 치앗뿌랬 제." 거기서 얘기를 중단한 진규 아버지는 빈 곰방대를 빨아 재가 다 털렸는지를 확인한 뒤 곰 방대를 저고리 주머니에 끼워넣으며 일어났다. 느닷없이 그가 아버지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본능적으로 긴장했던 철은 그의 얘기가 길어지면서 차츰 알지 못할 감동에 젖어들었다. 고 향에 돌아와서 이따금씩 아버지를 턱없이 추켜세우는 얘기를 들을 때가 있었지만 그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었다. 그 바람에 대꾸 없이 듣고만 있는 철을 어떻게 보았는지 천천히 다가 온 진규 아버지가 조용히 물었다. "암 말도 안 하는 걸 보이 아직도 골이 났는가 베. 그치만 내가 이마이(이만큼) 안기다렸 나?" "아니, 아닙니다." 속이 다 풀린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남겨운 듯한 그의 얘기를 마저 듣기 위해 철이 얼른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나 더 듣고 싶은 게 아버지 얘긴지 그이 속셈인지는 철에게도 뚜렷하 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와서야 겨우 얼굴을 알아볼 만한 어둠 속에서 철의 나뭇짐을 찬찬히 살펴본 진규 아버지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하던 말을 이었다. "내가 아직 덜 큰 니한테, 왜 이런 얘기를 하는고 하이, 뭐 내 눈 밝다는 말이 아이라 전 장 뒤 얘기를 하고 싶어서라. 내가 뿔또그레했다가 치앗뿐 얘기는 어예다 흘러간 게고- 어 예튼, 그뒤로 한참 서로 찌지고 볶아쌌디 전장이 나데. 그리고 너어 집이 풍비박산나고 동영 씨도 결국 그리 되고 마는 걸 봤제. 너어 아부지 이북 넘어가 얼마나 높으게 됐는지 몰래도, 그게 잘된 거는 절대로 아이라. 부모 처자 다 매삘고 거다 가 잘돼보이 그기 얼매겠노? 전 장 끝나고 너어 할매 너어 어무이 여게 내려와 한 이태 고생하는 거 보고 나는 또 이런 생 각을 했디라. 옳지, 인자 너어가 몇 대나 손에 흙 안 묻히고 한 값을 무는 갑다라꼬. 그런데 얼마 뒤에 들으리 너어가 대처에 나가 자리잡았다 카데. 명훈이는 대학까지 가고- 나는 여 기서 뼈빠지게 일해도 아들 하나 고등학교도 못씨기(시키)는데 말이라. 글치만 인자 너어가 또 여다 내리온 걸 보이 암만캐도 드때 너어 할매 어매가 다 못 문 그 값 물로(물러) 온 갑 다. 참말로 화천댁 손자가 소부질(쟁기질)하고 나무하러 댕길 줄 누가 말았겠노? 그것도 산 소등 까뒤밴 생땅에 농사질라꼬. 글치만 물 꺼는 물어야제." "..." "진정이라. 나는 왠동 너거 집이 다시 일날라 카믄 뭘 더 당해야 할 같은 기분이라. 다시 말하믄 고생이 지독하믄 지독할수록 너가 빨이 일날(일어날) 같은 기분이다 이 말이라. 마음 같아서는 내 소 끌고 와 개간지도 갈아주고 싶제. 명훈이 그 어문(서투른) 소부질 가주고는 종일 걸리도 안 되지만 내 같은 농군한테는 까짓 것 반나절 일이라. 글치만 왠동 그래믄 그 만큼 너어가 더 늦게 일날 같애 못 본 척해온 게라. 아까도 말했지만 니 짐도 글타. 여기서 해빠지도록 기다리고 앉았지 말고 되올라가 니 짐 받아 졌으믄 그새 열 번은 왔다갔다했을 게라. 글치만 그거는 니가 져야 할짐이라. 그걸 니가 져야만 너어 고생이 빨리 끝날 같다 이 말이다. 내 뜻 알겠나? 그게 아이믄 윗대 정을 생각해서라도 내가 어예 이래 못 본 척할 수 있겠노?" 철은 이번에는 또 다른 감동으로 말문이 막혔다. 평소 그처럼 어눌하고 무심해 보이던 진 규 아버지가 그런 말주변과 속깊은 헤아림이 있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자 인제 가제이. 너무 저물었다. 너어 집에서 걱정할라." 진규 아버지가 다시 소리나게 코를 풀더니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풀짐 쪽으로 갔다. 철도 말없이 지게 멜빵 속으로 어깨를 밀어넣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경험은 그뒤에 한 번 더 있었다. 철이 일어나보니 그것에 지게 목 발을 내릴 때만 해도 천근 무게로 내리누르던 것 같던 나뭇짐이 이상하리만치 가뿐했다. 뿐 만이 아니었다. 그전과는 달리 집까지의 길도 철은 한번도 쉬지 않고 갈 수가 있었다. 진규 아버지가 말한 '져야 할 짐'이나 '물어야 할 값'은 아직 철의 가슴에 그리 절실하게 닿아오지 않은 때인 만큼, 그의 얘기가 준 감동 이상의 그 무엇이 힘이 되어준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어쩌면 그날의 철에게는 진규 아버지도 자연의 일부였고, 그래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자연 의 친화력이 한 감동의 형태로 철에게 힘을 빌려준 것은 아니었을는지. 제7장 개척의 날들 "기마세." "얍." "하나." "얍." 명훈의 구령에 따라 여남은 명의 청년들이 주먹을 내지르며 기합 소리를 냈다. 먼저 시작 한 아홉은 지난 장에 도복을 갖춰 제법 무도인 같은 외양을 하고 있었으나 새로 시작한 예 닐곱은 아직 작업복 차림 그대로였다. 여섯 명이 빠졌나? 아니 일곱? 명훈은 구령을 넣으면 서도 눈으로 그들의 머릿수를 헤아렸다. 당수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역시 잘한 일 같았다. 개간지 1정보를 떼내 판 돈 9천원은 이미 지난번 간조(일당 지급)로 거덜나고 없었다. 그게 벌써 보름 전, 개간 인부는 나날이 줄어들어 이제는 당수를 배우는 청년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개간이 끝나고도 한참은 더 있어야 나올 보조금이 아니면 품삯을 치를 힘이 전혀 없는 명훈에게는 그들이라도 남아주는 게 여간 생광스런 도움이 아닐 수 없었다. 돈이 아쉬운 사람들, 특히 그곳에서의 벌이로 여름 양식에 보태어야할 어른들은 진작부터 명훈의 개간을 못 미더워했다. 빤한 바닥이라 명훈이 맨주먹이나 다름없이 개간을 시작했다 는걸 잘 아는 까닭이었다. 그들은 어머니나 명훈의 간청에다 옛날 정분을 못이겨 얼마간은 나와주었으나 날품삯이 밀리기 시작하자 하나 둘 지급 형편이 나은 딴 개간지로 빠져나가버 렸다. "하단 방어." "얍!" "하나." "얍!" "둘." 명훈은 다시 구령을 넣다 말고 산소 도래솔께로 흘끗 눈길을 보냈다. 날마다 그 무렵이면 산소 앞 공터로 몰려드는 조무래기들이나, 지게를 세워놓고 구경하는 동네 영감들이 그것이 아닌 사람 그림자가 얼씬 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훈의 눈길에 찔끔한 듯 그 그림자는 굵은 도래솔 위로 몸을 감추었다.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어딘가 눈에 익은 데가 있었다. 명훈은 계속해 구령을 넣으면서도 이따금씩 그쪽을 곁눈질했다. 그 그림자가 너무도 황급 히 소나무 뒤로 몸을 감춘 게 묘하게 마음에 걸린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한 번 얼씬하고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누굴까?' 명훈은 갑자기 그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형사일까?' 명훈은 오래된 저주를 떠올리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쪽으로 발달한 그의 본능적 감각은 이내 강한 의문을 표시했다. '아니, 그럴 리는 없어. 이미 다 걷어치우고 산골에 들어와 땅이나 파겠다는데 새삼스럽게. 더구나 혁명 정부는 연좌제를 풀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모든 게 빤한 이 바닥까지 미행이나 감시를 붙일 리는 없지.' 그렇게 되자 명훈은 궁금함을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상두." 명훈이 녀석을 부르자 맨 앞줄에서 누구보다 열심히던 녀석이 기세좋게 대답하며 달려나 왔다. 녀석은 수련생들 중에서 유일한 청띠였다. 도회지에서 몇 달 도장을 나간 적이 있는 경력 을 명훈이 인정해주어 조교 삼아 쓰고 있는 것이었다. "너 구령 좀 붙여라. 태극 초단 3회." 명훈은 그렇게 시켜놓고 산소 앞 공터를 벗어났다. 명훈이 다가오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른지 도래솔 뒤의 사람은 그대로 움직임이 없었다. 가 까이 가면서 보니 소나무를 등지고 앉은 듯했다. 소나무 등걸 곁으로 비죽이 나온 흙 묻은 농구화로 미루어 명훈의 짐작이 옳았다. 적어도 형사는 아니었다. 나무 뒤의 사람은 명훈이 나무를 돌아 그 앞에 갈 때까지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무 언가 제 생각에 골몰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인지도 몰랐다. 그가 임하 마을에 사는 성규라는 젊은이임을 알자 명훈은 이내 모든 걸 짐작했다. 그 또 한 당수를 배우며 명훈의 개간지에서 일했는데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은 게 품삯을 그날그 날 셈해주는 개간지로 옮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당수는 배우고 싶어 빨리 일을 마치고 거기까지는 왔으나 명훈을 볼 낯이 없어 그 러고 앉았는 것임이 분명했다. "야, 성규." 명훈은 되도록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해 그를 불렀다. 얼굴에서 손을 뗀 그가 놀랍고도 부 끄러워하는 눈길로 명훈을 올려보았다. 명훈이 이번에는 사범답게 목소리를 약간 엄하게 했 다. "임마, 왔으면 저기 가서 수련을 해야지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낯이 없어서." 그제서야 그렇게 우물거린 녀석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며 기어드는 목소리로 이었다. "아베어메 때문에. 올해 보리 농사를 접어(망쳐)가지고 여름 양식이나 보태야 한다고요." 아마도 다른 개간지에 일하러 나가는 걸 변명하는 듯했다. 명훈은 약간 과장 섞인 발길질 로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 산소 앞 공터로 몰아내며 소리쳤다. "에라이 못난 자식, 헛소리 말고 빨리 가." 그 작은 소동에 마침 태극 초단형을 마치고 자세를 가다듬던 수련생들이 돌아보며 키들거 렸다. 성규도 열없는 웃음으로 자연스럽게 그들 뒤에 붙어섰다. 그러나 다시 수련생들 앞으 로 가 구령을 붙이는 명훈을 보는 그의 눈시울이 불그레한 게 꼭 노을 탓만은 아닌 듯했다. 그날도 수련은 평소 때처럼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 었다. 도회지에서는 혁명 정부에 의한 깡패 소탕 때문에 주먹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었지 만 시골에는 아직 대단했다. 하루종일 뙤약볕 아래서 중노동을 한 뒤끝인데도 수련생들은 더없이 열심이었다. 그리고 그런 열기는 다시 가르치는 명훈에게로 환류되어 그 또한 중노 동의 피로와 가슴속의 마뜩찮은 속셈까지도 깨끗이 잊고 열심히 가르쳤다. "모두 들어라. 보름 뒷면 우리가 수련을 시작한 지 두 달이 된다. 첫 심사를 할 것이니 각 기 거기 대비해 연습하도록. 이번 심사는 여기서 하지만 다음 심사는 안광지부로 나가 공인 을 받을 작정이다. 그렇게 되면 수련은 여기서 해도 한국태권도협회가 인정하는 급수를 받 게 된다. 우리끼리 모여서 하는 장난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특별히 해 두는 소 리다." 명훈은 공인 문제가 다소 자신없는 대로 그런 약속과 함께 그날의 수련을 끝냈다. 같은 형만을 반복하는 데 수련생들이 지루해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에 서둘러 알린 것이었 다. 심사가 있다는 말에 들떴는지 해산 구령이 있자 수련생들은 여느 때보다 더 떠들썩하게 돌아갈 채비들을 했다. 땀에 젖은 도복을 싸고, 떨그럭거리는 도시락통을 괭이 자루에 끼워 어깨에 메고 하면서도 전에 없이 활기차게 히히덕거렸다. 그러나 명훈은 이제 정말 하루 일 이 끝났다 싶자 갑자기 온몸이 젖은 솜처럼 무거워져 그대로 산소 앞 공터에 퍼질러앉았다. 보는 눈만 없다면 그냥 늘어져 눕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은 집을 지을 흙벽돌을 찍 느라고 나무 그늘에 한번 제대로 앉아보지 못한 탓이었다. "형님, 안 내려갈랍니껴?" "사범님, 우리 먼저 갑니데이." "내일 또 보입시더." 그런 인사와 함께 수련생들이 하나둘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전성으로 그런 그들의 인 사를 받으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퍼질러앉았던 명훈은 마지막 수련생이 떠나자 마침 내 산소 발치에 벌렁 드러누웠다. 동편 도래솔 가지 개에 한쪽이 약간 이지러진 달이 걸려 있는 게 비로소 보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로 힘겨웠던 두 달이었다. 개간 허가와 식량 확보 문제가 해결되 자 품삯 문제가 머리를 들었고 한 팔을 잘라내는 심경으로 개간지 일 정보를 팔아 그럭저럭 착수는 할 수 있었으나 아직도 남은 길은 멀었다. 하지만 보람도 있었다. 다복솔과 떨기나무와 억새풀로 황량하던 2만 4천 평은 벌써 태반 이 벗겨졌다. 그 중에도 어떤 곳은 그새 뿌린 씨앗이 돋아 그 푸른 이랑으로 제법 밭 모양 을 갖추어갔다. 그해는 이미 농사철을 넘겨 메밀이나 몇천 평 더 뿌리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명훈의 머릿속에는 그 땅에 대한 설계가 끝나 있었다. 곡물을 생산할 땅 3천 평과 산밑 경 사가 심한 곳에 조성할 계단식 과수원 5천 평을 뺀 나머지 땅은 초지를 만들 작정이었다. 결국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은 서부 영화에 나오는 목장에 가까운 셈인데 그때만 해도 그 실현을 믿고 있던 명훈은 틈나는 대로 목축 관계의 책까지 들쳐보았다. 집 마련에도 상당한 진척이 있었다. 개간지로 보아서는 거의 한가운데가 되는 곳에 백 평 남짓의 집터가 닦여졌고, 흙벽돌도 벌써 5백장 넘게 찍혀 마르고 있는 중이었다. 기껏해다 토담집이나 크게 다를 바 없는 흙벽돌집이 될 것이지만 명훈의 머릿속에서는 벌써 그 어떤 성채보다 당당하고 운치 있게 세워져 있었다. 생각이 '지금, 여기'에서 앞날로 뻗어가자 갑작스런 감동 같은 것이 지쳐 늘어진 명훈의 원기를 돋워주었다. 좀 거창스럽지만, 이름하면 생산과 창조의 감동쯤 될 것이었다. 전쟁 직후 돌내골에서의 철없던 시절 두어 해를 빼면 명훈의 삶은 생산이나 창조란 개념 과는 멀었다. 안광 역전이나 서울의 뒷골목 시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느 정도 정당한 노동을 팔아 살았다고 볼 수 있는 미군 부대 시절조차도 방금 돌내골에서 맛보고 있는 생산이나 창조의 감동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서비스도 틀림없이 생산이며, 그 임금은 재화의 창출로 불릴 수도 있겠지만, 일차적인 생산이 주는 감동의 생생함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그 때는 학업이란 상위 목표가 있어 노동도 생산도 그 원래의 의미대로 명훈의 가슴에 닿아오 지 못했기에 돌내골에서의 감동은 한층 생생하고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대로 조금만 더 버티자. 이 가을만 되면 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이 될 것이 다. 아버지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는다.' 명훈은 지친 스스로를 위로하듯 몸을 털고 일어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갑작스럽고도 맹 렬한 시장기가 그런 명훈의 발길을 재촉했다. 명훈이 재궁막으로 돌아오니 마루 기둥에 초롱불이 내걸린 집 안은 괴괴하기 그지없었다. 모두 어디를 나갔다 싶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초롱 그늘 나무 기둥 이쪽저쪽에 맥없이 기대 앉은 철이와 옥경이 보이고, 이어 방안에서는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그리고 부엌 그늘에서 는 영희가 무언가를 떨그럭거리며 씻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식구 모두가 있는 것임에 틀림 없었다. "큰오빠야? 엄마, 큰오빠 왔어." 먼저 명훈을 알아본 옥경이 그렇게 기쁜 소리를 내지르고 이어 철이가 갑자기 달라진 사 람처럼 환하게 웃으며 달겨왔다. "아이고, 니 오나, 이토록 저물가(저물어서) 오늘도 애먹었제?" 어머니도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오며 반갑게 명훈을 맞았다. 조금 전까지 어두운 방안에 서 한숨을 내쉬던 사람 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다만 표정 없는 얼굴로 부엌에서 나와 말없이 앞치마에 물 묻은 손을 닦는 영희만이 조금 전까지 계속된 집 안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또 어머니와 영희 사이에 한바탕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명훈의 몸이 천근의 무게로 내려앉았다. 갈수록 더 크게 입을 벌리는 듯한 집안의 상처가 묵직한 아픔으로 명훈 의 가슴을 짓눌렀다. "자아, 먹자. 모두 온나. 명훈이 니 허기 안 지드나?" 어머니가 애써 불편한 심기를 감추며 상보를 걷어젖혔다. 아이들도 그런 어머니를 돕는 길이 그뿐이라는 듯, 과장된 쾌활함으로 밥상머리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감정 전환이 빠르지 못한 영희는 그렇지가 못했다. 아이들이 보리밥에 꽂힌 감자를 빼내 떠들썩하게 크기를 재 가며 베어물 때까지도 부엌 문간에 뻣뻣하게 굳어 서 있었다. "니는 거다 삐덕하게 서서 뭐 하노? 어서 안 오고." 어머니가 다시 한번 속을 누르며 영희를 상머리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벌 써 찬바람이 스며 있었다. 그게 어머니의 마지막 인내라는 걸 알아차린 명훈이 얼른 어머니 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렸다. "어머니도 참, 제가 늦으면 애들하고 먼저 저녁을 드시지 않고, 저는 개간지에서 중참을 먹었잖습니까?" 그리고는 준비하지도 않은 물음을 덧붙였다. "그래, 메밀씨는 좀 구하셨어요?" 다행히도 어머니는 쉽게 그런 명훈에게 말려들어왔다. "에에, 고놈 원동이 참 갈바리(약삭빠른 구두쇠)라. 메밀을 한 섬이나 재놓고 겨우 한 말 내주는데 곧 숨넘어 안가나? 누가 띠(떼어)먹는다 카나 생다지로 뺏어가나. 경술년인가 그 흉년 때 저어가 식구대로 누구가미 죽 먹고 살았는데." 그렇게 대뜸 원동 영감에게 화를 돌렸다. 까마득한 옛적 명훈이 집에서 드난살이를 한 적 이 있는 까닭에 예순이 다되어도 택호로 불리지 못하는 영감이었다. 명훈은 어머니의 주의 를 다른 곳으로 돌린 데 만족하며 건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게 세상 인심 아니겠어요? 한 말이라도 빌려준댔으니 고맙죠, 뭐." 그리고 밥상머리의 분위기를 잡기 위해 과장된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야, 이거 장떡이구나. 맛있겠다. 어서 먹자." 하지만 그날 저녁의 밥상머리는 끝내 평온하게 마무리도지는 못했다. 영희가 부엌 어둠 속에서 꾸물거리며 나오지 않은 게 발단이었다. 명훈은 진작부터 그게 마음에 걸렸으마 억 지로 영희를 불러내려 하다가 어머니를 자극할까봐 못 본 척 밥그릇을 비우기 시작했다. 어 머니도 많이 참는 것 같았다. 한동안은 그런 명훈을 도와 무엇에 심사가 났는지 저녁도 안 먹고 뻗대는 영희를 애써 잊어주었다. "에익, 빌어먹을 년. 참고 먹을라 카이 밥이 어디 목궁게(목구멍)에 넘어가야제." 명훈이 밥그릇을 거지반 비워갈 무렵 마침내 인내가 다한 어머니가 숟가락을 소리나게 상 위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내 참 심장이 상해. 니 여 쫌 나온나 보자. 니가 도로새(도리어) 뭔 유세졌다고 입을 한 발이나 내밀고 뻗치노(뻗대노)? 이 빌어먹을 년아, 그래 하루종일 사람 허패(허파)를 뒤베 (뒤집어)놓고 그래도 유부족이라꼬 밥도 안 처묵나?" 어머니가 금세 일어나 영희의 머리채라도 휘어잡을 듯 목소리를 높이는 걸 보자 명훈도 절로 숟가락이 놓아졌다. 배고프던 참이라 속이 불편한 대로 달기 그지없던 밥맛이었으나 그 지경이 되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름대로 참는다고 참기는 영희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제 속을 못 이겨 저녁은 안 먹어도 어머니와 맞붙어 고된 하루 일에서 돌아온 명훈을 괴롭히는 것만은 피하려는 눈치였다. 영 희가 부엌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아무런 대꾸가 없는 데 더욱 못 참겠는지 어머니가 한 층 목소리를 높였다. "야, 이년아. 일로 나온나 보자. 니 잘한 게 뭐 있다꼬 그래 억대구(억대우) 쓰노? 참말로 간도 크제. 지가 어예 6백 원이나 가는 마산중앙 구리무를 떠억 받아가주고. 쌀이 두말이따, 쌀이 두 말." 거기까지만 들어도 모녀간의 불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짐작이 갔다. 통만 국산이고 알 맹이는 밀수품이라고 알려진 비싼 크림을 영희가 외상으로 받아 썼다가 들킨 것 같았다. 영 희가 여전히 대꾸를 않자 어머니는 화가 치솟다 못해 몸까지 가볍게 떨었다. "갑자기 소 죽은 영신을 덮어썼나? 입이 바소쿠리라도 할말 있으믄 해 봐라. 도대체 이 돌내골에서 누가 그런 걸 쓰드노? 아이고 내 복장이야. 저런 걸 어예 자식이라꼬." 그렇게 악을 쓰듯 퍼부어댔다. 영희도 그리 오래는 참아내지 못했다. 암담한 가운데서도 그런 영희가 용하다 싶을 즈음 드디어 영희의 독기어린 말대꾸가 시작되었다. "어머니, 이제 그만 하면 되잖았어요? 하루종일 그 일로 사람을 들볶아놓고 아직도 모자 라세요?" 목소리는 높지 않아도 도발적 빈정거림이 섞여 있어 어머니의 속을 뒤집기에는 넉넉했다. "저년 저거 째진 악바리(아가리)라꼬 말하는 거 봐라. 사람을 들볶는다꼬? 그기 어예 어바 이한데 할 소리고? 그래, 네가 가마이 있는데 니를 들볶드나?" "내가 나중에 벌어서 갚으면 되잖아요? 비누 토막 하나 제대로 없으니 얼굴이 조여 견딜 수 있어야지. 너무 그러지 말아요. 자식이라도 스물이 넘은 걸 아무 앞에서나 그저 이년 저 년." "뭐시라? 니 말 다 했나?" 드디어 그대로는 견딜 수 없이 된 어머니가 맨발로 우르르 달려가 부엌에 있는 영희를 끌 어냈다. 누구의 옷에선지 후드득 하고 실밥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놔요. 이거. 나오라면 나가지 뭐." 영희가 매달리는 아이 뿌리치듯 어머니를 뿌리치며 마당으로 나왔다. 어머니가 끌어내는 자세를 하고는 있어도 물리적으로 이미 영희가 우세한 게 한눈에 보였다. 그게 더욱 분통 터지는지 어머니는 완연히 악다구니로 나왔다. 암담함으로 몸과 마음이 함께 마비되어 그런 모녀간의 다툼을 멍하니 보고만 있던 명훈이 그녀들 사이로 끼어든 것은 어머니가 영희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려는 어림없는 시도를 시작 한 때였다. "시끄러워요!" 명훈은 모진 기합이라도 넣듯 그런 고함으로 모녀의 기를 죽인 뒤 먼저 영희부터 야단쳤 다. "이 기집애가 보자보자 하니까, 어서 어머니께 빌고 방구석에 들어 가지 못해? 엇다 대 구." 명훈만은 겁을 내는 영희가 찔끔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명훈이 자신을 편들어 나선 줄 로 오해한 어머니는 더욱 기가 살아 영희의 어깻죽지와 등짝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그만 하세요. 맨날 상것들, 상것들 하면서 그 상것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아 요?" 명훈이 그런 고함과 함께 어머니를 영희에게서 떼어놓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만으로 는 둘 모두 진정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거기다가 모녀의 그런 끝 모를 갈등이 못 견디게 지 겹기도 해 명훈은 갑자기 머리칼을 쥐어뜯는 시늉을 하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소리쳤다. "이래서야 사람이 일을 할 수가 있나? 몸이 고단하면 마음이라도 편해야지. 에익, 모든 것 다 집어쳐? 식구들끼리 이 모양인데 까짓 야산 까뒤집어봐야 뭘 해? 식구대로 흩어져 제 편한 대로 사는 게 낫지." 그렇게 소리치다 보니 정말로 고단하고 서글퍼져 절로 콧등이 시큰하고 목소리가 떨려왔 다. "난들 좋아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뒷골목에서 사람을 쳐도 이보다는 편하게 살 수 있 어. 서울역에서 지게를 져도 맘은 편할 거라구. 이쯤에서 끝장냅시다. 되지도 않을 일 헛고 생은 그만 하자구요. 나도 쇠로 만든 사람은 아니란 말입니다." 명훈은 차츰 넋두리조가 되어 이쪽저쪽에 번갈아 퍼부었다. 그런 명훈에게서 먼저 어떤 위기를 감지한 것은 어머니였다. "오이야, 나도 고마 다 귀찮다. 저 빌어먹을 거하고 얼굴 맞대고 하루하루 지나기도 언성 시럽다. 저거는 자식이 아이고 원수라 원수." 조금 전의 기세는 다 어디 갔는지 금세 푸념조가 되어 그 한마디를 해 놓고는 사립문을 나섰다. 성나 나가는 것 같아도 내심을 그들 모녀간의 충돌을 그쯤에서 끝내 더는 명훈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엄마, 어디 가?" 옥경이가 울먹이며 따라나서려 하자 매몰차게 떼어놓으며 하는 말도 옥경에게보다는 명훈 에게 하는 말에 가까웠다. "따라오기는 어딜 따라올라꼬? 매물(메밀) 심을 일꾼 놉하러 가느데 니가 따라와 뭐 할라 꼬?" 어머니가 나가자 집 안은 한동안 조용했다. 그 조용함을 깬게 영희의 훌쩍임이었다. 한숨 만 내쉬며 마당에 서 있던 명훈이 돌아보니 영희가 마루 끝에 걸터앉아 눈물을 씻고 있었 다. 명훈은 그런 영희가 가여우면서도 당장은 분이 안 풀려 말없이 노려보고만 있는데 영희 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오빠." "..." "나 서울로 보내줘. 정말 부탁이야. 더는 못 견디겠어." "뭐야?" "한 2천 원만 어디서 구해줘. 그럼 서울에서 어떻게 시작해볼 수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역시 나는 오는 게 아니었어. 봐, 아무 도움도 못 되고 불화만 일으키잖아. 나는 이미 이 곳에 맞지 않아." "이 기집애야, 누구는 맞아서 이 고생인 줄 아니?"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거친 어조가 되어 쏘아붙였다. 그쯤 해서 영희의 입을 막아버리자 는 위협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영희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빠가 보내주지 않으면 달아나구 말 거야. 이제 더는 못 견디겠어." "서울에 가면 누가 널 기다린다든? 기껏해야 또 다방..." 명훈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철이 듣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갑자기 잊 고 있었던 박원장과의 일이며 영희가 마지막으로 있던 다방이 떠올라 기분은 여지없이 뒤틀 리고 만 뒤었다. 명훈의 그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희는 제 할말을 계속했다. "가서 뭣을 하든 여길 떠날 수만 있었으면 좋겠어. 솔직히 여기서는 눈뜨는 순간부터가 고통이야.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그 하나하나가 모두 내게 고통스러운지 오빠는 모를 거야. 나는 이미 틀렸어." "도대체 너 왜 그러니? 그런 고생은 잠시라고 했잖아? 이제 곧 모든 게 좋아질 거라구." "아냐, 오히려 더 괴로운 것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그뒤의 막막한 앞날이야. 나는 벌써 알 겠어. 개간이 끝난다고 해도 풍차가 도는 목장 같은 건 없어. 그럭저럭 먹는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만 그것도 오빠가 지금에 못지않은 고생을 계속한다는 전제 아래서야." "먹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 떳떳하게 먹을 수 있는 것, 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 지 알아? 고생이라구? 너는 일을 고생으로밖에 볼 수 없니? 하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아. 나 는 일하러 여기 왔어. 농부가 되러 왔고, 농부의 일은 고생이 아니야." "어쩌면 오빠는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아냐. 이제 확실히 깨달아지는데, 나는 이미 시골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사람이 돼버렸어. 그래, 오빠는 그렇다 쳐도 나를 기다리는 건 뭐지? 몇 해 여기 엎드려 있다가 좋은 신랑감 만나 시치미 떼고 시집이나 가라고? 엄마나 오빠가 생각하는 좋은 신랑감이 뭐야? 설마 도회지의 월급쟁이나 사장을 구해 오겠다는 건 아니겠지? 기껏해야 땅마지기나 있고 맘씨 무던한 농사꾼 아냐?" "농사꾼이면 어때서?" "내가 말했잖아. 나는 이미 땅에는 쓸모 없는 사람이 돼버렸다구. 정말로 나는 자신없어. 농사일뿐만 아니야. 빨래하고 밥짓고 애 기르고. 그 어떤 농사꾼 아낙의 일도. 이 석 달로 나는 완전히 질려버렸어. 도회지에 나가 뭘 하고 살더라도 여기서는 더 이상 못 견디겠어." 그때 명훈을 격분하게 만든 것은 아마 '뭘 하고 살더라도'라는 말이 순간적으로 이끌어낸 연상이었을 것이다. 그래, 남의 첩이 되든 갈보 짓을 하든 말이지. 명훈은 하마터면 그렇게 소리칠 뻔했다. 그러나 철이와 옥경이 때문에 그렇게 소리치지 못하는 게 한층 더 큰 격분 을 자아내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영희의 따귀를 세게 후려쳤다. "뭐야? 이 기집애가." 따귀를 맞은 충격 때문인지 제 설움에 겨워선지 얼굴을 싸안고 마룻바닥에 엎드린 영희가 소리내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옥경이 울먹이며 달려와 주먹을 부르쥔 명훈의 팔에 매달렸다. "이 기집애가 보자보자 하니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썩어도 더럽게 썩어가지고. 끽소리 말고 방구석에 들어가 처박혀 있어. 다리몽뎅이를 부러뜨려놓기 전에." 명훈도 더는 영희에게 손찌검을 할 마음이 없어 그렇게 무섭게 얼러놓고 재궁막을 나왔 다. 길게 얘기하다가 영희가 억센 고집으로 덤비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정말로 무슨 일이 생 길지 모른다는 우려도 명훈을 집 밖으로 몰아낸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집을 나온 명훈은 이렇다 할 생각도 없이 개울가로 내려가는 길로 들어섰다. 그저 아득하 고 암담한 기분이 시원한 강바람을 그리워하게 만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둠 때문에 달빛이 저물 무렵 산소 앞 공터에서보다 한층 밝게 느껴졌다. 그 달빛에 의 지해 언덕길을 내려온 명훈은 곧 개울가로 나가는 논두렁으로 접어들었다. 벌써 밤이슬이 내렸는지 개울가에 이르기 전에 발등을 타고 내린 물기로 고무신 바닥이 미끈거렸다. '영희처럼 나도 다 때려치우고 서울로 올라갈까-' 개울물에 발을 적시면서 명훈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귀향한지 석 달이 가깝도록 해본 적이 없는 생각이었다. 잘 버텨나가고는 있어도 그 또한 어지간히 지쳐간다는 증거이 기도 했다. 잠시 서울에서 좋았던 날들이 은밀한 유혹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러나 명훈은 이내 몸서리치듯 가볍게 몸까지 떨며 그런 생각을 떨쳐 버렸다. 여기다, 여기 이 흙에 정면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명훈은 돌내골로 내려울 때의 그런 결의를 되뇌며 세차게 머리를 젓 고 땀에 절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멱이라도 감아 쓸데없는 생각을 씻어내려는 듯이. 살갗이 햇볕에 데어서인지 개울물이 이상하게 차가웠으나 소를 찾아 한동안 헤엄을 치고 나니 그럭저럭 견딜 만은 했다. 명훈은 비누와 수건을 준비해오지 않은 걸 뒤늦게 후회하면서 먼저 머리칼을 뻣뻣하게 만 들고 있는 소금기를 빨았다. 한동안 혀 끝에 닿는 물맛이 찝찔한 만큼 머리칼의 소금기는 잘 가시지가 않았다. 그래도 명훈은 참을성 있게 몇 번이고 되풀이 머리칼을 헹군 뒤에 몸 의 기름때와 소금기를 씻어내기 시작했다. 뒤집어쓴 먼지 때문인지 온몸에서 끈적끈적한 때 가 밀렸다. 명훈이 멱을 감는다기보다는 무슨 수행이라도 하듯 꼼꼼하게 몸의 때를 벗기고 개울가로 나왔을 때는 영희 때문에 어두웠던 마음까지도 개운해져 있었다. 명훈은 애써 그날의 저녁 의 일을 집집마다 흔히 있는 작은 다툼으로 돌리고, 다음날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옷을 걸 쳤다. '아무래도 흙벽돌 찍는 기계를 하나 구해야겠어. 나무로 짠 틀로는 하루 백 장도 못 찍을 뿐만 아니라 그전에 틀이 벌어져서.' 명훈은 나갈 때와 많이 달라진 기분이 되어 돌아왔지만 집 안의 분위기는 나갈 때와 조듬 도 달라져 있지 않았다. 밥상은 치워졌으나 영희는 마루 끝에서 쿨쩍이고 있고, 철이와 옥경 이는 좀 떨어진 곳에서 불안한 듯 쭈그리고 앉아 영희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때 나간 뒤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쿨쩍이는 영희를 보자, 명훈의 콧마루가 시큰해왔다. 그렇게 심하게 할 것까지는 없었는 데, 불쌍한 것- 명훈은 갑작스런 후회로 쭈뼛거리며 영희에게로 다가갔다. "아까는 내가 좀 심했다. 네가 하도 억지소리를 하는 바람에-" 명훈이 영희 곁 마루 끝에 걸터앉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영희는 계속해 쿨쩍이기만 할 뿐 대꾸가 없었다. "가을까지만 참아다오. 개간이 끝나고- 정부에서 보조금 나올 때까지만." "..." "팔아버린 1정과 내가 개간한 몫의 보조비는 남을 게다. 몇 뙈기 찾은 자투리땅도 가을에 는 어떻게 팔아볼 수 있을 거야." 명훈은 영희의 어깨까지 어루만져주며 그렇게 달랬다. 그래도 영희는 대꾸가 없었다. "물론 네가 생각하는 방식대로는 아니다. 무턱대고 돈만 쥐어주며 보낼 수는 없어. 그렇다 고 이제 새삼 학교를 보내주겠단 약속도 못 하겠고- 그러기에는 너도 늦지 않았니?"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그제서야 겨우 영희가 입을 떼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명훈의 얘기를 주의깊게 듣고 있었 던 것 같았다. 아직도 명훈의 말만은 믿어주는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명훈은 영 희가 대꾸했다는 그 자체가 반가워 미처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계획을 즉흥적으로 털어놓았 다. "도회지로 나가 미용 학원이나 편물 학원쯤을 다녀보는 게 어때?" "오빠는 내 나이가 얼만지 알아? 이제 와서 코흘리개 계집애들하고 고데 기술이나 배우란 거야?" "스물둘이 그리 많은 나이도 아냐. 거기다가 나이 찬 너를 언제까지 남의 집살이시킬 작 정두 아니고. 얼마간 기술이나 제대로 익히면 미장원이나 편물점을 차려줄게. 어차피 철이와 옥경이는 학교를 시켜야 하니까 도회지에 우리 근거지도 필요하고-" 말을 해나가다 보니 명훈도 자신이 마치 오해 전부터 그런 계획을 가다듬어온 듯 느껴졌 다. 갑자기 나이가 들어도 한참 든 여자처럼 영희가 빈정거림을 섞어 말했다. "오빠는 미장원이다, 편물점이다, 쉽게 말하지만 그러 하나 차리려면 얼마나 드는지 알 아?" "차리면 차렸지, 그게 뭐-" 명훈은 문득 자신이 3년 가까운 군대 생활로 도회지살이에 어두워졌음을 떠올리며 자신없 게 받았다. 영희가 어린아이 타이르듯 말했다. "미장원이라면 내 좀 아는데- 흑석동 같은 변두리에 차려도 오만 원은 더 들 거야. 오빠 저쪽 1정 떼어 팔 때 구천 원 받았지? 지금 남은 건 7정이고- 결국 우리 개간지를 다 팔아 야 겨우 서울 변두리에 미장원 하나 차린다구." "그거야 다르지. 1정은 그냥 산으로 팔았으니까 평당 삼 원이지개간해 밭으로 팔 때는 그 렇지 않아. 평당 십 원은 쉽게 받을 수 있을걸. 진규 아버지는 내년쯤이면 이십원도 받을 수 있을 거라던데. 우리 개간지는 큰 길을 끼고 있어서- 애들 학교시키는 데 꼭 필요하다면 까 짓 것 1정 더 떼어 팔 수도 있지 뭐. 실은 6정도 혼자서 농사짓기에는 너무 넓은 땅이야. 미 국식으로 트랙터라도 있으면 몰라도." 명훈은 그것 역시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을 마치 오래 전부터 생각해온 사람처럼 얘기했다. 얘기를 하다 보니 단순한 희망 사항이 아니라 정말로 가능하다는 믿음이 서 한층 기분이 밝아졌다. 영희도 거기까지 듣고 나니 기분이 좀 풀리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가을까지 어떻게 기다려? 하루하루가 정말로 지옥 같애. 오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없어지더라도 너무 욕하진 마." 그런 불평과 위협을 곁들이긴 해도 목소리에서 울음기는 깨끗이 가셔 있었다. 명훈이 그 런 영희를 나무라려는데 카악 가래 뱉는 소리와 함께 누가 사립문을 들어섰다. "명훈이 있나?" 희미한 달빛 아래 빈 지게를 껑충하게 지고 마당으로 들어선 사람은 진규 아버지였다. "아니, 진규 아버님. 이 밤중에 무슨 일이세요?" "자네 농사꾼하로 왔다며? 농사꾼이 밤낮이 따로 있나? 일할 수 있으믄 해야제. 달이 대 낮같이 밝은데, 가자. 지게 지고 따라온나." "그거야 도래솔 몇 대 잡아 하죠 뭘." 명훈은 낮 동안의 일에 지친 데다 멱까지 감고 온 다음이라 지게를 질 기분이 조금도 나 지 않았다. 은근히 진규 아버지의 극성이 귀찮아지기까지 해 그렇게 뒤로 빠졌다. 진규 아버 지가 그 특유의 소울음 같은 웃음을 흘리며 명훈을 몰아세웠다. "무신 소리. 그 꼴난 담집 하나 우부린다꼬 조상 묏등 도래솔에 손을 대?" "자손들 몸담을 집 짓는 데 어때요? 조상분들도 이해하실 겁니다." "씰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지게 지고 따라온나. 요짝 산 너머 내 맞춤한 대들봇감 하나 봐놨다. 문틀 할 나무도 필요하고 새까래도 있어야 되이, 집질 맘 있다믄 밤지게 면할 생각 은 매삘어라(내버려라). 마침 달도 밝고 또 나무 지고 돌아올 때는 남의 눈도 피할 마이 밤 도 이슥할 테이께는 지금이 똑 좋다. 자, 일나라. 퍼뜩." 진규 아버지는 그렇게 막무가내였다. 하지만 명훈은 도통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어떻게 든 그를 구슬려 앉히려다가 진규 아버지의 정색한 나무람을 듣고서야 지게를 지고 따라나섰 다. "허어, 참. 내가 내 집 짓자꼬 이래나? 나도 낼모래믄 나(나이)가 쉰이따. 아무리 몸에 익 은 지게질이라 캐도 오밤중에 생나무 잡으로 산에 가는 거는 안 할란다.고래등 같은 기와집 팔아먹고 10년 만에 화천댁 손자 집 세운다 카이 가마이 못 있어 이래 나온 게따." 그런 소리까지 듣고서는 그대로 배기려야 더 배길 수가 없었다. 집을 나설 때와는 달리, 밤의 산길에는 기대 못 한 감흥이 있었다. 다른 감각들이 제한되 기 때문인지, 한창 피아나는 떡갈잎과 싸리꽃 향내가 어울린 풀숲의 냄새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코끝을 자극했고 밤과 산속의 고요함에 산새들의 울음 소리는 형언 못 할 조화로 명 훈의 심금을 건드려왔다. 거기다가 달빛 아래 자우룩이 피어오르는 골안개- 뒷날 명훈의 전원시를 보면, 그때의 감흥이 제법 비슷하게 되살아난게 두엇 있는데 그만 큼 그 밤의 산길은 인상적이었다. 진규 아버지가 보아두었다는 대들봇감은 그낭 '산 너머'가 아니라 제법 큰 봉우리를 세 개 나 넘은 뒤의 깊은 산속이었다. 줄잡아 20리는 넘게 걸은 뒤에야 이른 그곳에는 빽빽한 소 나무숲이 아직 남아 있었는데 진규 아버지는 그 중에서도 굵기가 아름드리나 되고 키가 열 길은 넘어 보이는 적송 한 그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따. 밑둥거리(둥치) 한 여섯 자는 널(판자)를 켜 문틀에 쓰고, 우에(위의) 한 서른 자 는 대들보를 깎으믄 될 끼라." 아무리 달이 있다 해도 밤중의 솔숲 안인데 진규 아버지는 시렁에 얹힌 물건을 찾아내듯 그 소나무를 찾아냈다. 그런 것도 눈썰미라 할 수 있다면 실로 놀라운 눈썰미였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진 규 아버지의 힘이었다. 밑둥치는 명훈에게 지우고 자신은 대들봇감을 졌는데 그걸 지고 산 길을 내려오는 게 명훈에게는 거의 신기할 지경이었다. 평균 지름이 한 자에 길이 서른 자 가 넘는 한창 물오른 생솔둥치라 아무리 가볍게 쳐도 쌀 두 가마 무게는 되어 보였다. 게다 가 솔밭을 빠져나올 때가지는 그 대들봇감의 길이 때문에 줄곧 옆 걸음질로 걷다시피 하는 데도 거친 숨소리 한번 내지 않는 것이었다. 솔숲을 빠져나와 달빛 아래서 눈여겨보니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게 아니라 무슨 들리지 않는 리듬 같은 데 맞추어 건들건들 걷고 있 는 것 같아 보였다. 베잠방이 밀짚모자 자루 기인 괭이로 헝클어진 물길을 바로잡는 어진이 거룩한 모습. 눈부신 햇살보다 그이들로 하여 비 온 뒤 세상은 더한층 환해졌다. 언제나 명훈은 장마 뒤 논두렁에서 물꼬를 트고 있는 농부를 그렇게 과장과 혐의 짙은 목 소리로 노래한 적이 있는데 어쩌면 그때 머릿속을 채운 농부의 이미지는 사실 그날 밤 대들 봇감을 지고 산길을 내려가던 진규 아버지의 그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의 짐에는 절반 도 못 미치는 걸 지고 안간힘을 다해 따라가는 명훈의 눈에는 진규 아버지의 뒷모습이 '거 룩하다'는 표현이 조금도 지나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신비하게 비쳤기 때문이다. 명훈과 진규 아버지가 지고 온 통나무를 개간지 끝의, 남의 눈에 잘 띄지 않을 잡목숲에 갈무리하고 개간지를 내려올 때는 밤이 꽤 깊어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지쳐 어디든 드러눕 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는 명훈이 비틀거리며 걷는데 문득 앞서가던 진규 아버지가 개간지 한 모퉁이를 가리켰다. "저기 뭐시고? 이 밤중에 저 사람들이 저다서 뭐 하노?" 명훈이 겨우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니 낮에 흙벽돌을 찍던 곳이었다. 초승달빛 아래 서너 사람이 오락가락하는 게 가물가물 눈에 들어왔다. 처음 자신이 찍어놓은 흙벽돌을 누가 져내는 줄 알고 긴장해 그리고 가던 명훈은 곧 이상 한 감동에 사로잡혀 금세 쓰러질 것 같던 피로도 잊고 걸음을 빨리했다. 여름밤의 습기찬 공기를 타고 들려오는 깔깔거람이나 그림자 둘이 좀 작은 것으로 보아 동생들 같았기 때문 이었다. 정말로 그랬다. 명훈이 가까이 가서 보니 영희와 철이와 옥경이 벽돌을 찍느라고 한창이 었다.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목이 메어 더듬거리며 물었다. "너희들- 거기서 뭘 해? 이 밤중에-" "큰오빠, 우리 벌써 벽돌을 스물한 장이나 찍었다. 작은 오빠는 아까 흙 개다가 넘어져 옷 다 버리구-" 옥경이 헤헤거리며 다가와 수다를 떨었다. 그러나 명훈은 가슴이 먹먹해 잠시 말문이 열 리지 않았다. 한참이나 셋을 번갈아보다가 옥경을 덥석 안아올리면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그래, 해보자! 해서 안 될 게 무엇 있겠니-" 그때 마을 쪽 둔덕을 올라온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야들이 다 어디 갔노 했디, 여다 다 있었구나. 오밤중에 여다 모예 뭐 하노?" 습관적인 꾸중기가 섞여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한없이 밝고 맑았다. 제8장 다시 돋는 날개 "삐이이익, 삐이-" 언덕을 내려오는 낡은 자전거의 브레이크 소리에 영희는 몸을 일으켰다. 보리밥을 잦히는 중이어서 약한 불길이었지만 워낙 날씨가 더운 까닭인지 몸을 움직이자 가슴에 솟았던 땀이 젖무덤 사이로 골져 흘렀다. 부엌 봉창으로 내다보니 자전거를 타고 언덕길을 내려오는 사 람은 기다리고 있던 우체부가 아니었다. 삼베 바지에 러닝 셔츠를 걸친 농군으로, 장터에서 비료를 구해오는지 자전거 뒤에는 비료 두 포가 포개져 실려 있었다. "야가 어디 갔노? 밥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영희가 아직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는 농군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마당에서 그런 어머니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억지로 참기는 해도 짜증이 찐득히 밴 목소리였다. 반사적으로 움찔 한 영희가 부엌문 쪽으로 나가며 퉁명스레 받았다. "가긴 어딜 가요? 보리밥 뜸들이는 데 안 태우고 돼요?" 꼭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닌데 자신이 듣기에도 어머니보다 훨씬 거친 목소리였다. 아참, 되 도록 참기로 했지- 그런 생각이 퍼뜩 떠오른 것은 벌써 일이 글러버린 뒤였다. 어머니가 기 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저년이 저게 뭐라 카노? 콧구마리(콧구멍)가 막혔나. 밥 타는 냄새가 삼 이웃 사 이웃에 진동하도록 뭐하도 자빠졌다가..." '년'소리를 듣자 영희도 울컥 화가 났다. 돌아서서는 수없이 후회하고 다시는 안 그러리라 다짐하지만 막상 어머니의 이년, 저년 하는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만 들으면 당장은 눈앞에 불길부터 콱콱 이는 것이었다. "이년아, 밥 타는 냄새가 삼이웃에 나믄 옥황상제가 다 성낸다 카더라. 그래놓고도 무슨 심청(심술)이 나 말대척(말대꾸)이로? 말대척은..." 이미 시작됐으니 해보자는 듯 어머니가 부엌 안으로 들어서며 그렇게 퍼부어대자 영희는 저도 모르게 악을 썼다. "또 시작이에요? 억센 보리쌀 곱삶는 거, 안 태우고 밥하면 보리쌀이 펄펄 난다고 야단이 고, 좀 퍼지게 하려고 오래 불떼다 보면 이번에는 밥 태운다고 난리고. 도대체 어쩌라는 거 예요? 차라리 날 죽이세요. 들들 볶아 잡수시라구요!" 더운 날씨에 불이 있는 아궁이 앞에서 시달인 데다 우체부 때문에 틀어진 심사까지 거들 어 잠시 영희를 돌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영희의 반응이 너무 격렬해서인지 부엌으로 들어서던 어머니가 움찔했다. 그리고 영희의 눈길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황급히 눈길을 딴 곳으로 돌리며 욕설을 탄식으로 바꾸었다. "아이고, 저 누마리(눈알) 바라. 불이 철철 뜯는다(듣는다, 떨어진다). 어마이 아이라 우 어 마이라 캐도 만판(넉넉히) 자(잡아)먹을따. 아이고 저기 어예 내 속으로 난 자식이로?" 목소리뿐만 아니라 표정까지도 기가 한풀 꺾여 있었다. 그러나 이미 불질러진 영희의 속 은 숙여지지 않았다. "나도 정말 어머니의 딸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어요!" "오이야, 오이야. 나는 니 에미가 아이고 원수따 원수. 아이구 이 복장이야. 내가 전생에 뭔 죄를 져 저런 억대구(억대우) 같은 년을 딸이라꼬 놔가주고..."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어머니가 버티고 선 영희를 버려두고 아궁이로 다가들어 부지깽이 로 불붙은 나무토막들을 끌어냈다. 그런 그녀의 적삼 등허리가 땀으로 함빡 젖어 있었다. 이 어 완전히 드러나기 시작한 흰머리칼과 초로를 감출 길 없는 목덜미의 주름이 영희의 눈에 들어오면서 금세 터질 것 같던 영희의 가슴이 조금 진정되었다. 땀에 젖은 적삼 드허리도 새벽부터 오빠와 함께 개간지에 나가 뙤약볕도 마다 않고 씨앗 하나라도 더 묻으려고 아득 바득하는 그녀를 상기시켜 영희의 격렬한 반발을 그치게 했다. 그러나 성격상 갑작스런 화해로는 갈 수가 없어 우선 더 이상의 충돌이나 피하려고 부엌 을 나가는데 어머니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 가노?" "풋고추하고 오이 좀 따와야겠어요. 상추도 좀 뜯고..." "뭐시라? 오래비하고 일꾼들이 내리오는데 아직 챗물도 안 메워놨단 말이라? 잘한다." 영희가 둘러댄 말을 물고늘어지기는 해도 어머니 또한 영희가 자리를 떠주는 게 차라리 잘됐다는 표정이었다. 부엌을 나가 햇볕 아래 서자 뜨거운 난롯가에라도 간 듯 훅 하고 더위가 덮쳐왔다. 햇볕 그 자체보다는 하얗게 마른 마당 바닥이 내뿜는 복사열 때문이었다. 그 더위에다 눈까지 부셔 영희는 일순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으나, 조금이라도 빨리 부엌 에서 멀어지고 싶어 머뭇거림 없이 텃밭 쪽으로 갔다. 실은 고추나 오이는 필요없었다. 아침에 따놓은 것이 있어 상추나 몇 포기 뽑아가면 되었 지만 영희는 굳이 고추와 오이까지 따며 시간을 끌다가 오빠가 일꾼 둘과 재궁막으로 들어 서는 걸 보고서야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새 어머니는 반찬을 다 장만했는지 오이를 썰어 챗물을 메우고 있었다. 부뚜막에는 찐 고추를 무친 것과 열무나물을 된장에 버무린 것이 큰 대접에 담겨 있고, 밥 위에 찐 호박잎 도 쟁반에서 식고 있었다. "물외(오이)하고 꼬치는 쌨드라마는... 밥 퍼라. 상추는 내가 씨끄꾸마(씻으마)." 어머니가 퉁명스럽긴 해도 전의가 가신 목소리로 영희를 맞았다. 영희도 굳이 그런 어머 니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말없이 밥주걱을 찾아 들었다. 보리를 곱삶은 것이지만 다행히도 밥은 제대로 퍼져 있었다. 영희는 거기 섞인 깎은 감자 가 한곳에만 몰리지 않게 주의하며 밥을 펐다. 밥솥의 뜨거운 김과 아궁이에 남은 불기운이 더위를 보탰지만, 뙤약볕 아래의 텃밭 이랑에서는 한결 시원한 느낌이었다. 마루에다 두레상을 펴고 반찬을 나를 무렵 가까운 개울에서 손발을 씻은 명훈이 일꾼인 정군과 임씨를 데리고 들어왔다. 철이는 샘물을 길으러 갔는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오빠, 몹시 더웠지?" 명훈이 비척거리듯 들어오는 걸 보고 영희는 생각지도 않은 말을, 그녀로서는 스스로에게 도 뜻밖일 만큼 밝고 다정한 목소리로 건넸다. 땀에 절은 제대복 차림에 밀짚모자를 들고 들어서는 명훈의 그을고 꺼칠한 얼굴이 너무도 안쓰러웠던 까닭이었다. 서울에서의, 함께 거 리로 나설 때는 은근한 자랑이기도 했던 그 잘생기고 멋진 오빠는 간데없고, 지치고 초라한 햇내기 농부가 터덜거리며 걸어올 뿐이었다. "아이고, 정군하고 임씨 애먹었제?" 어머니는 명훈을 젖혀두고 정군과 임씨만을 반색하며 맞았다. 이웃군에서 온 일곱 일꾼 중에서 마지막 남은 둘이었다. 그것도 딴사람과 함께 품삯 지불이 나은 개간지로 옮아갔다 가 무엇인가 틀어져 되돌아온 것이지만 명훈네로 보면 고맙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애는 안 먹었지만 고생은 쪼매 했니더." 정군이 그렇게 받아놓고 자기가 한 우스갯소리에 스스로 만족한 듯 허허거렸다. 영희에게 는 별로 우습게 들리지 않았으나 먼저 어머니가 소리내어 웃고 이어 명훈도 억지 웃음을 지 으며 한마디 했다. "짜식, 싱겁긴... 그렇게 땀을 빼고도 농담할 기력이 남았어?" 핀잔 같지만 실은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한 소린데도 기가 난 정군이 다시 덜떨어진 우스개 로 이었다. "내 날 때 집에 소금이 떨어져 어매가 맹(맨)미역국을 먹어 그렇니더. 소금 있으믄 쫌 주 소. 인제라도 쳐서 덜 싱겁구로..." 하지만 어머니도 명훈도 대단한 우스개라도 들은 듯 소리내어 웃었다. 정군이 힐끗 보내 는 눈길을 받고 영희도 마지못해 눈웃음을 쳐주었다. 며칠 전 명훈이 한 말이 문득 떠오른 까닭이었다. "정군한테 잘해줘라. 그 순진해빠진 게 생각은 엉뚱해도... 어쩌겠니? 아니꼽지만 개간 끝 날 때까지만이라도 웬만하면 맘 상하게 하지 마라. 이젠 당수도 효력이 떨어졌는지 여기 일 꾼이라고는 대여섯이 고작이다. 빨리 개간을 마쳐야 검사를 신청하고, 검사가 끝나야 보조비 가 나오는데- 어쩌겠니? 그래도 하루같이 백 평씩 벗겨내는 녀석은 정군 밖에 없다." 처음 오빠에게 그런 당부를 들었을 때 영희는 솔직히 불쾌했다. 하지만 나날이 일꾼이 줄 어들어 개간 날짜가 길어지는 것은 영희가 보기에도 여간 기막힌 일이 아니었다. 말이 개간 이지 잡목 뿌리나 파내고 풀이나 파뒤집어놓는 것에 지나지 않아 비 몇 번만 만나면 개간지 는 쉽게 원래의 야산으로 돌아갔다. 날짜를 끌다가는 씨앗을 묻은 몇천 평을 뺀 나머지는 다시 한번 파뒤집어야 될 판이었다. 거기다가 적당할 때 웃음을 흘려주어 정군의 비위를 맞춰주는 일도 영희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서너 달밖에 안 됐지만 다방 레지 때 은연중에 익힌 남자 다루는 법의 일부 만이라도 오히려 정군이 너무 황송해 쩔쩔매게 만들 수 있었다. 좀 어색한 데가 있는 대로 정군의 끊임없는 우스개 덕분에 점심 식사는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끝이 났다. 어머니는 얼마 전 부엌에서의 충돌을 깨끗이 잊은 사람마냥 설거지까 지 이것저것 거들어주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오빠 명훈이 마루에 드러누워 잠시 눈을 붙이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은 다시 깨어난 명훈이 개간지로 올라간 지 5분도 안 돼 밝혀졌 다. 설거지를 마친 영희가 젖은 행주로 밥물이 흘러나와 허옇게 마른 솥전을 닦고 있는데 개 간지로 나갈 채비를 마친 어머니가 부엌을 들여다 보며 말했다. "펀펀히 뒤배져(드러누워) 낮잠이나 자지 말고 이불 호청 좀 뚜드려 놔라. 아침에 풀해놓 은 광목 홑이불 말이라." 새삼 점심 전의 감정이 되살아나는지 처음부터 악의가 뚝뚝 듣는 듯한 말투였다. 그런 어 머니의 악의가 화난다기보다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느껴져 얼떨떨해진 영희가 무심코 대답했 다. "다듬이질을 하라구요? 제가 어떻게..." "왜, 니는 못 하노? 손이 오그래(오그라) 붙었나? 곰배팔인가?" 어머니가 한층 악의의 강도를 높여 그렇게 쏘아붙였다. 그제서야 영희는 점심 전의 충돌 이 화해 없이 끝났다는 걸 상기했지만, 아직은 그때처럼 앞 뒤 없이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 저 정말로 다듬이질이 자신없어 사정 비슷이 말했다. "한번도 해보지 않아서... 통 자신이..." "저기 뭐라 카노? 그것도 말이라고 악바리 놀리나? 나이 스물둘씩이나 처먹은 게 다듬이 질도 못 한다이..." 어머니가 자신의 말을 채 다 듣지도 않고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그쯤 되자 영희도 드 디어 울컥 속이 받쳐왔다. "이불 호청 할 것도 아니고 그냥 홑이불로 덮을 건데 다듬이질은 뭣 땜에 해요? 별나게스 리..." 영희가 그렇게 퉁명스레 되쏘자 어머니가 대뜸 욕설로 나왔다. "저년 저거 악바리 놀리는 거 쫌 보래. 별나다꼬? 야 이년아, 니는 어디서 삐덕하게 풀만 한 홑이불 덮고 자는 거 봤노? 어느 쌍놈들이 그래드노? 시집가가주고 너어 시어마이한테 그 따우 소리 해봐라." 그 무렵 모녀간의 충돌이 대개 그랬듯이 그날의 충돌도 발단은 그토록 하찮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이 맞닥뜨렸을 때의 그 알 수 없는 분노와 미움의 상승 작용은 다른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쌍놈 쌍놈 하지만, 뭐 양반도 별거 없데요. 다 큰 딸을 그저 아무 앞에 서나 이년 저 년..." 영희가 그렇게 대들자 어머니는 입에 거품을 물었다. "아이구, 저 망할 년, 사람 어패(허파) 뒤배는 거 봐라. 점심 잘 먹고 일 나갈라 카는 사람 을... 홑이불 쫌 뚜드려노라 칸다꼬 어마이를 별나다 안 카나, 쌍년이라꼬 욕을 안 하나..." "제가 언제 쌍년이라고 했어요?" "그게 그 말이지 뭐로? 양반 별기 아이라믄 바로 쌍년이란 소리제..." "너무 별나게 몰아대니까 그렇죠. 사람을 들볶아도 견뎌내게 들볶아야지." 영희가 내친김에 거기까지 대꾸했을 때였다. "이년, 그 더러운 악바리 못 다물라?" 어머니가 이를 갈며 부엌으로 뛰어들어오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부엌 한켠으로 갔다. 마른 솔가지단을 재어놓은 곳이었다. 거기서 무언가를 휘감아쥔 어머니가 그걸로 영희를 후 려치며 소리쳤다. "참을라 참을라 캐도, 이년, 참을 수가 있어야지. 어디 다시 한번 말해 봐라. 뭐라? 별나다 꼬? 쌍년이라꼬? 이년아, 그게 어마이보고 할 소리가?" 방심하고 있다가 목덜미와 뺨에 예리한 아픔을 느끼며 어머니의 손을 보니 거기에는 칡넝 쿨이 쥐어져 있었다. 솔가지단을 묶었던 것인 듯했는데, 손가락만한 굵기가 채찍으로는 안성 맞춤이었다. "이거 정말 왜 이러세요!" 영희가 성난 외침과 함께 칡넝쿨을 뺏으려고 다가서는데 다시 왼편 어깻죽지와 젖가슴께 에 후비는 듯한 통증이 왔다. 어머니가 다시 칡넝쿨을 후린 것이었다. 그러나 칡넝쿨이 여러 갈래인 데다 어머니의 손길 또한 빠르지 못해 그 한 끄트머리는 어느새 영희의 손에 잡혀 있었다. "이년, 이 억대구 센 년." 어머니는 이미 한 끄트머리가 영희에게 잡힌 칡넝쿨을 휘둘러댔으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정말 이럴 거예요?" 영희가 그런 고함과 함께 칡넝쿨을 나꿔채자 어머니의 몸이 그대로 빨려오듯 쏠려와 영희 에게 부딪혔다. 그러자 어머니는 칡넝쿨을 놓고 이번에는 영희의 머리칼을 움키려 들었다.어 림없는 일이었다. 영희의 키는 어머니보다 한 뼘은 컸고 또 영희는 화가 나면 머리채를 휘 어잡는 어머니의 습성에 단련되어 있었다. 영희가 발돋움을 하고 머리를 젖혀 피하자 어머 니는 옷깃을 잡고 늘어졌다. "이년, 이 더러운 년, 니 죽고 내 죽자아-" 어머니가 이를 갈 듯 소릴 질렀다. 마디마디에 차가운 증오가 배어 있는 듯했다. 거기다가 '더러운 년'이라는 말에 감추어진 소름끼치는 악의는 영희에게 남은 마지막 한 가닥의 인내 마저 흐트러놓고 말았다. '역시 이 여잔 어머니도 뭣도 아니야. 어머니로서 딸의 잘못을 나무라는 게 아니라 그 상 처를 쑤셔 내가 아파하는 꼴을 즐기는 악귀야...' "놔요! 이거 못 놔요?" 영희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어머니의 손목을 비틀었다. "아이구, 이년이 인제는 에미 친다!"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악을 쓰면서도 어머니는 옷깃을 움킨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영희도 그 이상은 어쩌지 못해 둘은 한동안 영겨붙은 채 때아닌 팔힘 겨루기를 했다. "어머니, 누나, 왜 이래?" 갑자기 철의 놀란 외침이 마당 쪽에서 들렸다. 떨꺽, 하고 빈 지전자를 흙바닥에 놓는 소 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인부들이 마실 찬물을 뜨러 개울로 내려가던 길인 듯했다. 어머니의 악쓰는 소리가 그를 집안으로 불러들인 것 같았다. "놔요, 이거. 이것부터 놓고 얘기해요." 철이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어 어떻게 떼어보려 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더 완강히 영희 의 옷깃을 움켰다. "안 된다. 비켜라. 참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오늘은 지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결판을 낼 란다." 그래도 철은 한동안 둘 사이에 끼여 땀을 흘리며 이미 미움으로 제정신이 아닌 두 모녀를 떼어놓으려 했다. 모녀 중에서 철이 때문에 먼저 제정신이 든 것은 영희 쪽이었다. 영희는 철이누구보다도 그들 모녀의 불화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고심하는 것을 보면 어떤 때는 가슴이 찌릿해오기까지 했다. 어머니도 되 도록 철에게는 그네들의 불화를 감추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날은 어찌된 셈인지 철이 그같 이 애쓰는데도 영 들은 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철을 무슨 응원군 삼아 더욱 맹렬히 자신 의 눈먼 분노를 불태우는 것이었다. 철이 마침내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좋아요. 마음대로 해요. 나는 이 집을 나갈 테니까.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 요." 철이 갑자기 두 사람 사이를 빠져나가더니 번쩍이는 눈으로 그들 모녀를 쏘아보며 소리쳤 다. 그제서야 퍼뜩 정신이 든 사람처럼 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는 어머니의 손길에서 힘 이 풀렸다. 그리고 영희가 그틈을 타 옷깃을 빼내는 것도 느끼지 못한 듯 철에게 물었다. "아이, 니 그거 무신 소리고?" "여길 떠나겠단 말예요. 나도 이제 더는 이 꼴을 못 봐요." "아이, 글타꼬 머리에 소똥도 안 벗겨진 게 오입(가출)을 간다꼬?" 어머니의 말투는 나무람이었으나 눈길은 어느새 사정조로 변해 있었다. 고아원에서 가출 하다가 붙들려온 적이 있는 게, 영희가 보기에는 거저 한번 해보는 소리 같은 철의 위협을 그토록 위력적으로 만든 것 같았다. "나도 열여섯이에요. 얼마든지 홀로 살아갈 수 있어요." "자가, 자아가- 니 정말로 내 죽는 꼴 볼라카나..." 영희는 그런 모자의 말소리를 뒤로하고 부엌을 나왔다. 어머니는 조금 전의 일을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그런 영희를 힐끗 바라봤을 뿐, 정신은 온전히 철에게만 쏠려 있었다. '저게 사랑이야, 대수롭지 않은 위협에도 겁먹고 가슴졸이는... 아마도 나는 당장 칼을 빼 들고 죽겠다 해도 눈 한번 깜짝 않을걸. 아니 어서 죽으라고 오히려 부추길 거야.' 집 뒤를 돌아 무성한 오동나무 그늘 아래 퍼질러앉은 영희는 문득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 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터질 듯 가슴을 채우고 있던 격렬한 증오는 흔적도 없이 스 러지고 대신 막막한 슬픔이 흥건히 고여왔다. '그래, 그런 점에서도 나는 여기 머물러서는 안 될 사람이야. 내가 없는 우리 집안을 생각 해봐. 아나같이 서로 아끼고 걱정하고... 세상에서 가장 단란한 식구들이 되겠지. 가난도 노 동의 괴로움도 아무런 문제가 안 되는. 그런데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느닷없는 눈물까지 솟구쳤다. 어쩌면 그 눈물 속에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편지 때문에 갈수록 자라나는 창현에 대한 의심과 원망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희는 그 이상의 사색이나 반성의 사람은 못 되었다. 모처럼 그녀의 생각이 자신 의 내면을 향하게 되었지만, 냉철한 자기 분석이나 삼엄한 자기 개조의 결의에는 끝내 이르 지 못했다. 기껏해야 심하게 뒤틀려버린 자아의 언저리를 맴돌다가 다시 현상과 외관으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래 떠나야겠어. 더 늦기 전에, 나는 너무 오래 가망 없는 꿈에 매달려 있었어. 어머니의 딸로 돌아가고, 음전한 신부감이 되고, 마침내는 행복한 주부가 되어 세상의 많은 여자들과 비슷하게 늙어간다는... 벌써 옛날에 틀어져버린 그런 꿈에.' 이윽고 영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마등으로 들어서며 보니 짐작대로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순하면서도 영리한 철이 어머니를 달래 함께 개간지로 나간 것임에 분명했다. 어머니의 사랑을 인질로 삼아 위협도 하고 애원도 하고 굽히기도 하고 뻗대기도 하다가 마침내는 무조건 항복의 형식으로 어머니 를 안심시키고 흐뭇하게까지 만들어서. 그 같은 추측이 다시 감깐 쓸쓸함을 느끼게 했지만, 영희는 그런 감상에 오래 빠져 있지는 않았다. 이미 바깥에서 마음을 정하고 와서인지, 집 안에 사람이 없는 게 놓쳐 버릴 수 없는 기회 처럼 느껴지며 다급하게 영희를 내몬 까닭이었다. 부엌에서 서둘러 세수를 마친 영희는 마치 오래 전부터 계획해온 것처럼 옷가방을 챙겼 다. 가구가 별로 없어 그녀의 옷가지를 찾아내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희는 찾아낸 옷가지 중에서 입고 갈 흰 원피스 한 벌만 남기고 차곡차곡 손가방에 넣었 다. 돌내골로 올 때 들고 온 꽤 큰 손가방으로, 다방에 나가게 되면서 부쩍 는 옷은 낡은 것 을 추려내도 그 가방을 반 넘게 채웠다. 불과 몇십 분 전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 사이에도 영희의 머리는 눈부시게 회전해 서울 까지의 도정을 꽉 짜놓고 있었다. '어머니 몰래 크림값 갚으려고 오빠에게 얻어둔 이백원이 있지. 그걸로 우선 안광까지 나 가자. 낮 버스는 이미 나갔으나 방천까지 걸어나가야겠지만 어둡기 전에는 안광에 도착하겠 지. 그 다음은 실반지다. 안광에 전당포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금은방은 있을 거야. 한 돈쭝 이니까 서울까지는 여비는 되고 남을 게다. 일자리를 얻을 때까지 며칠은 견딜 수 있겠지.' 그리고 집을 나설 때쯤은 서울에 이른 뒤의 계획까지 한 끝에 이어졌다. '급하게 일자리를 얻으려면 다방밖에 없을 거야, 월급도 그만한 데로는. 은하다방에 재료 를 대주던 박씨 아저씨를 찾아가자. 여러 곳에 재료를 대니까 다방을 많이 알 거고, 다방을 많이 알다 보면 레지 자리 빈곳에 소개해줄 수도 있겠지. 그러면 눈 딱 감고 한 이 년만 고 생하는 거야. 거기서 먹고 자고 하면서 아껴 모으면 변두리에서 미장원 하나 차릴 수 있을 정도는 모을 수 있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던 서울이 문득 저만치 다가와 환하게 웃으 며 손짓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때껏 창현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한 것은 그가 입대했다는 걸 워낙 굳게 믿은 탓일 뿐이었다. 혹시라도 누가 돌아오는 사람이 없나 살펴본 영희는 아무런 미련없이 집을 나섰다. 그리 고 바로 국도로 들어서면 개간지에서 철이나 명훈이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재궁 막 아래의 비탈길을 따라 방천 쪽으로 향했다. 한창 햇볕이 뜨거운 7월의 오후였지만, 한동 안은 긴장 때문인지 옷이 든 손가방에 하이힐을 신고 비탈길을 걸어도 더위조차 느끼지 못 했다. 영희가 다시 국도로 올라간 것은 설령 누가 개간지에서 그쪽을 보다라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멀어진 뒤였다. 첫째 고비는 넘겼다 싶자 영희는 비로소 개간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두어 달 전 돌내골로 돌아올 때만 해도 시퍼렇던 산등성이는 그새 반 이상이 벗겨 져 벌건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개간된 곳과 아직은 야산으로 남아 있는 경계선 언저리에 예닐곱 명의 사람이 고물거리는 게 보였다. 그들 중에 철과 명훈도 섞여 있으리라 는 생각이 들자 영희는 비로소 한 줄기 둔중한 슬픔을 느꼈다. 어쨌든 그들은 이 세상에서 는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며 이제 그녀는 작별 인사조차 없이 그들로부터 떠나고 있 는 것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하지만 오빠, 너무 성내지 말아. 이게 식구들을 위해서도 나아. 오히려 나는 진작 떠났어 야 했어. 그리고 철아, 너도 잘 있어. 조금만 고생하면 널 데리러 올게. 난 알아. 아무리 땅 이 넓다 해도 개간지 농사로는 널 학교에는 못 보내. 네 학교는 어차피 내 몫이야.' 묵은 포플러 가로수 그늘에 잠시 멈춰서서 영희는 명훈과 철에게 못하고 떠난 작별의 말 을 되뇌었다. 콧등이 시큰하고 눈앞이 흐려왔으나, 돌아가고 싶은 마음까지는 일지 않았다. "이게 누구로? 영희 니, 곱게 채리입고 어디 나가노?" 갑자기 누군가 멀지 않은 곳에서 소리쳐 불었다. 영희가 화들짝 놀라 소리나는 곳을 보니 그때까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국도 곁 천둥지기 논에서 진규 아버지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김이라도 매는지 제법자란 벼 사이에 엎드려 있어 딴생각에 빠진 영희가 얼른 알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 녜, 진안에... 아니, 안광에 좀... 나갔다 오려구요." 영희가 당황해서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그렇게 둘러댔다. 자신의 차림이 거기서 20리 밖에 안 되는 진안에 가는 차림으로는 걸맞지 않음을 퍼뜩 깨달은 까닭이었다. 진규 아버지 가 의심쩍은 눈길로 그런 영희를 보며 고개를 기웃기웃했다. "어디 가까운 데 가는 사람 같지 않은데 겨우 안광 갔다 오는데 그 큰 가방이 왜 필요할 꼬..." "뭐 좀 사올 데 있어서요." 영희가 이번에는 좀 자신있게 대꾸했지만 진규 아버지는 영 의심이 풀리지 않는다는 눈치 였다. "글티라도 아침 버스나 낮 버스로 나가제. 둘 다 막바로 안광까지 가는 긴데. 해필 이 방 낮에, 십릿길이나 걸어..." "급한 일이 있어서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영희는 길게 얘기해 이로울 게 없다 싶어 서둘러 인사말을 던졌다. 그때까지도 의심 담긴 눈을 껌벅이고 섰던 진규 아버지도 그렇게 되자 할 수 없다는 듯 영희를 놓아주었다. "오이야. 잘 댕기오거래이." 그런 진규 아버지에게 더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영희는 한 번 뒤돌아보는 법도 없이 걸음을 재촉하다 굽이길을 돌 즈음 해서야 돌아보았다. 진규 아버지는 그대로 논바닥에 덮 드려 김을 매고 있었지만 영희는 왠지 그를 만난 게 거림칙했다. 영희가 방천에 이른 것은 오후 4시가 다돼갈 무렵이었다. 공연히 마음이 급해 원피스 등 허리에 땀이 축축할 만큼 빨리 걸었으나, 정류소를 겸한 가게에 이르니 안광으로 나가는 버 스는 금방 떠나고 없었다. 그게 무슨 불길한 징조 같아 한층 다급해진 영희가 가겟집 아주 머니에게 물었다. "다음 버스는 몇 시에 있어요?" "안광으로 막바로 가는 차는 막차뿐이라. 엿시 반에 있제. 글치만 진안 가서 갈아탈라 카 믄 닷시 오분 차도 있다." 채 마흔이 안 돼 보이는데도 말을 척척 놓으며 가겟집 아주머니가 버스 시간표를 일러주 었다. 그러다가 영희의 낭패한 얼굴을 힐끔 훔쳐보더니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덧붙이는 것 이었다. "급하믄 진안까지 걸어가는 수도 있제. 거다서는 안광 가는 차가 많으이께는. 아, 아이다. 거다까지 걸어가는 시간이 또 있으니 여다서 닷시 시오분 버스 타는 거하고 맹(같이, 혹은 모두) 한가질 게라." 영희는 가게 마루방에 걸터앉아 잠시 어찌할까를 생각해보았다. 이미 십릿길을 걸어온 다 음이라 그런지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는 듯한 신작로로 다시 나서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일 지 않았다. "아주머니, 여기 사이다 한 병 주세요." 몇십 분을 절약하자고 뙤약볕 아래 십리를 더 걷기보다는 그곳에서 막차를 기다리기로 작 정한 영희가 이윽고 자리값 삼아 그렇게 청했다. 마루 끝 양철 물통에 담긴 사이다 병이 몹 시 시원해 보인 것도 사실이었다. 더위에 맥이 빠져 귀떨어진 부채만 흔들거리며 마루 한 끝에 앉아 있던 가겟집 여자가 느 릿느릿 일어나 물통 속에 채워둔 사이다 병을 꺼냈다. 물에 불은 종이 상표가 떨어져 너덜 거리는 게 왠지 내용물까지 불결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고뿌(컵)가 어디 갔노? 뭐가 지자리에 있는 기 있어야제..." 물이 주르르 흐르는 사이다 병을 영희 앞에 가져다 놓으며 그렇게 중얼거리던 아주머니가 진열대 뒤에서 금간 유리컵 하나를 찾아 내밀었다. "처자(처녀)가 거기 헹가뿌고(헹구고) 따라 마시라. 날도 왜 이래 더운동..." 영희는 그녀가 내미는 대로 컵을 받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거기에 무얼 따라 마시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먼지야 헹구면 씻긴다 쳐도, 컵바닥에 말라붙은 누런 때는 수세미 없이는 벗겨질 것 같지 않았다. "됐어요. 그냥 마실래요. 따개나 주세요." 영희가 컵을 그대로 마룻바닥에 놓으며 그렇게 말하지 가겟집 여자의 눈길이 실쭉했다. 도회지 여자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이라도 품고 있는 듯했다. "보자- 아까 산판 사람들이 쓰고 어디 처박아 놨는지 모리겠다. 인주소(이리 주소). 내가 따줄 테이께는-" 여자가 그 말고 함께 사이다 병을 채가더니 별로 힘들이는 빛도 없이 이빨로 병마개를 때 주었다. 다방 냉장고에서 꺼낸 사이다 맛의 기억으로 한 모금을 마신 영희는 저도 몰래 눈살을 찌 푸렸다. 미적지근한 데다 역한 냄새까지 곁들어 그대로 삼키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왜, 병에 든 게 상키라도 했나?" 영희의 표정을 살피던 가겟집 여자가 여차하면 시비라도 붙을 듯 퉁명스레 물었다. 영희 가 사이다를 뱉으며 짜증 섞어 대꾸했다. "아니, 사이다 맛이 왜 이래요?" "왜 이렇다이?" "뭐 이런 사이다가 있어요?" 그러자 여자가 한번 물어보는 법도 없이 훌쩍 사이다 병을 채가더니 영희가 밀쳐둔 컵에 찔끔 따랐다. 병을 높게 들고 따라서인지 거품이 허옇게 이는 게 제법 시원해 보였다. 그걸 단숨에 비운 여자가 더욱 시비조로 말했다. "이 사이다가 어때서? 맛만 좋다. 달고 시원키만 하네." 그리고 영희가 무어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한층 악의 섞어 보탰다. " 사이다도 촌 사이다 대처 사이다 따로 있는 거는 아일 껜데, 아매 입이 촌입 대처 입 다른 같구마는." 그제서야 영희는 그 여자가 무엇에 원한을 품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여자는 도회지나 도회지 사람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확인 시켜주듯 여자가 한마디 보탰다. "하기사 그러이 모도 대처로, 대처로 캐쌌제. 촌에 사는 기 어데 인간가? 짐승이제. 콩밭 머리에서 김매는 사람한테는 꿀맛일 긴데 손 끝에 물 한번 안 묻히고 그늘에 앉은 대처 사 람한테는 한 모금 넘기기도 어려운 게 되이... 이눔의 세상, 이거, 참 어예 될라건 이래능강 몰라." 아마 평소의 영희 같았으면 노골적인 시비로밖에 들리지 않는 그녀의 대꾸를 그대로 참아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이미 집에서 어머니와 한바탕하고 나선 길이리 그런 지 부글거리는 속에도 불구하고 얼른 전의가 일지 않았다. 더운 날씨와 떳떳하지 못하게 떠 나는 길이란 것도 영희가 성깔대로 행동하는 걸 억눌러주었다. 가겟집 여자의 도회에 대한 그 맹렬한 원한의 구체적인 까닭은 곧 밝혀졌다. 억지로 속을 눌러참은 영희가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한 사이다 값을 치르고 있는데 삐걱거리는 자전거 소 리가 나며 누군가가 소리쳤다. "아지매, 여 소주 시(세) 병하고 까자(과자) 좀 주소." 잔돈을 받던 영희가 힐끗 돌아보니 짐 싣는 낡은 자전거에 나무 술통을 실은 스물대여섯 쯤의 청년이었다. 까맣게 그을은 피부가 땀에 젖어 반짝이는 게 영화에서 본 아프리카 흑인 을 연상시켰다. "아이, 소주는 왜? 이 방낮에..." "그럼 막걸리 갔다 논 거 있느껴?" "요새사 하루도 못 가 쉬뿌리이 어예 갖다 놓겠노? 글치만 도가에 가믄 될 껜데..." "하이고, 이 불볕에 십릿길을 가라꼬요? 고마 소주나 가주고 갈라이더." "그라믄, 일꾼들 줄 거 아이라? 일꾼들한테 독한 소주 믹에(먹여) 될라? 값도 글코..." "일꾼들이야 캐도 담뱃잎 따는 일이이께는... 소주가 원래 막걸리 진기만 뺀 거 아이껴? 한 고뿌씩 하고 찬물 마이 마시믄 맹(마찬가지로) 그게 그거지 뭐." "알았다, 고마. 도가까지 땀 뻘뻘 흘리미 갔다 오기 싫으믄 갔다 오기 싫다 캐라. 글치만, 이눔의 세상 너무 편한 거만 찾다가 뭔 일 나지 아매..." 그렇게 주고 받던 여자가 판자 진열대 위에서 소주병을 내리는데 그 청년이 빙글거리며 물었다. "아지매, 또 시비조로 나오는 걸 보이 영 속이 안 좋은가 베. 그래, 아재 소식은 있니껴?" 그러자 여자의 눈이 번쩍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몰라, 그 눔의 원수 같은 화상, 어디 가 혀나 빼물고 콱 자빠졌뿌래라!" "에이, 그래도 아재하고는 결발부부 아이껴? 할 소리, 안 할 소리 따로 있제. 그래, 아제가 이번에 가주간 돈은 얼매나 되니껴?" "농자금 나온 거 보고 읍내 상회에 외상 갚을라꼬 수금 쪼매 해놨디 싹 씰어갔뿌랬다. 참 말로 귀신은 다 뭐 하는 동, 그런 거 안 자(잡아) 먹꼬..." 여자가 그렇게 받다가 느닷없이 넋두리조가 되어 영희에게 물었다. "색시 보래, 참말로 대처에 뭐가 있노? 어예 번번이 죽구재비(죽을상)가 돼가주고 돌아오 민서도 돈만 손에 쥐믄 시도 때도 없이 달라빼는 게 거기고? 거다 가믄 뭐 용빼는 수가 있 나?" "네?" 영희는 너무 갑작스러운 데다 왠지 그녀 자신을 빈정대는 것같이 들려 얼른 대답하지 못 하고 잘 듣지 못한 것처럼 되물었다. "색시를 보이 대처 물이 푹 밴 사람 같아 묻는 말이라. 거다 가믄 열 도깨비가 있어 사람 혼을 아주 뺐뿌나? 금은보화가 동이째로 하늘에서 쏟아지나? 어예 한번 대처 맛을 들이믄 앞 뒤 물불 안 가리고 내졸기이(내빼니)..." "사람 사는 곳 어딘들 다르겠어요? 생각하고 보기 나름이죠, 뭘..." 대강의 사정이 짐작된 영희가 어른스레 대꾸했다. 그때 술병과 과자 봉지를 자전거 뒤에 단단히 묶은 청년이 자전거를 뒤돌려 세우며 한마디 불쑥 던졌다. "아지매, 이거 달아놓으소." "뭐라? 또 외상?" 여자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으나 청년은 느긋하기만 했다. "담배 농사 감장(담배 감정: 연초 수납) 안 하고 뭔 돈이 있니껴? 고래(그렇게) 아소." 그러면서 훌쩍 자전거에 올라탔다. 여자가 그런 등뒤에다 대고 악을 썼다. "먼 소리고? 불난 집에 캥이질(키질)하나? 다음 장에 물건 따올 돋도 없단 말이따. 장 전 에 쪼매라도 갚아야 된데이..." 드러나 그 청년이 아직 길모퉁이를 돌기도 전에 원망은 다시 그 자리에 없는 남편에게로 돌아갔다. "엥이, 그 빌어먹을 눔이 그 짓만 안 해도..." 이어 한동안이나 푸념 반 원망 반으로 누구에겐지 모를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아저씨는 뭐 하던 분이세요?" 영희가 별로 궁금할 게 없으면서도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녀가 측은했다기보다는 멍하니 버스를 기다리기가 지루해서란 편이 옳았다. 여자가 더 감출 것 없다는 듯 이것저것 묻지도 않은 것까지 털어놓았다. "본시는 솜씨 참한 대목이었제. 그런데 재작년 대구 무슨 공사에 갔다 오디 마 파이라. 촌 구석에 처박이 있을 게 아이라 사업을 해야 된다미 풍을 쳐놨디, 기어이 근근이 모아놓은 논 닷 마지기 달랑 팔아 나가데. 뭐 건축 사업이라나 대구에다 집을 지 팔믄 꼽쟁이 장사가 된다나... 한 댓 달 잘 나가데. 세상에, 거다서 여까지가 어디라고 하이야(택시) 가시끼리(대절)해가 주고 안오나... 그랬대 얼매 안 돼 빈손 탈탈 털고 죽구재비가 돼가주고 돌아온 게라. 뭐 사 기를 당했다 카등강, 하지만 어카믄 이 인근에서는 알아주이 사는 거사 뭐 어려울라 카미... 글치만 이미 혼이 떠도 한참 뜬 사람이라 겨우내 곰새끼같이 움쭉달싹 않고 방구석에 처 박혔디 봄 되자 털고 일어나 나가데. 사기꾼 붙들어 본전이라도 찾아야 된다꼬. 그것도 글타 싶어 있는 돈 없는 돈 긁어 여비하라고 넉넉히 조 보냈제. 그런데 아이라. 두 번 세 번 나가 도 번번이 빈 손으로 몸만 상해 돌아오는 게 이상해 알아봤디, 그런 사기꾼 같은 거는 초장 부터 없었던 게라. 그때 가주고 간 돈도 집 한채 안 지어보고 게와이(주머니)에 여 댕기며 다 썼뿌린 게라. 열 부자 안 부럽게 척척 말이라...” 영희가 그녀의 얘기에 빠져들지만 않았더라도 한번쯤은 그렇게 그곳에 앉아 있는 게 미련 스런 짓임을 깨달았을 것읻. 집에서 겨우 십릿길밖에 안 되는 곳에 두 시간 가까이나 퍼질 러앉았다가는 오빠에게 붙들릴 수도 있다는 걸. 그러나 영희가 겨우 그걸 떠올린 것은 돌내 골 쪽에서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달려오고 있는 오토바이를 본 뒤였다. 아직 사람은 알아볼 수 없었으나 영희는 왠지 불안해 하던 얘기를 멈추고 가게 부엌 뒤로 숨었다. 집작대로 오토바이는 가게 앞에 멈췄다. 그리고 잠시 가겟집 여자와 오토바이를 타고 온 사람의 두런거림이 들리더니 귀에 익은 목소리가 영희를 불렀다. "이리 나와. 영희 너 빨리 못 나오겠니?" 오빠 명훈의 억지로 분노를 누르고 있는 듯한 차고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영희는 어떻게 든 오빠를 설득해 그대로 떠날 작정으로 부엌에서 나갔다. 그러나 명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영희의 입은 갑자기 얼어붙었다. 거멓게 그을은 얼굴은 분노로 희어져 잿빛이었는데 그게 묘하게 섬뜩했다. 거기다가 자신을 쏘아보는 눈초리는 금세 불이라도 내뿜을 듯 이글거리는 게 도무지 무슨 말을 붙여볼 엄두가 나지 않게 했다. "오빠..." 겨우 그렇게 불러놓고 후들후들 떨고만 있는 영희에게 명훈이 무슨 매서운 다짐처럼 말했 다. "아무 소리 말고 여기 타. 아무 소리 말고..." 집까지 돌아가는 동안에도 명훈은 한마디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집 앞에서 영희를 내려 줄 때쯤 해서 겨우 몇 마디 내뱉었다. "안광까지 나가더라도 널 잡아올 생각이었지. 보내줄 때 가. 나도 끝까지 너를 여기 붙들 어놓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제9장 흰 남자 고무신 날이 희붐히 밝아오면서 열이 조금 내리고 온몸의 욱신거림도 차츰 잦아들었다. 그제서야 잠에 떨어진 명훈은 끝도 시작도 없고 줄거리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꿈속에서 남은 새벽 을 보내었다. 명훈이 다시 눈을 뜬 것은 이마를 짚어보는 어머니의 미지근한 손길과 걱정 어린 한숨 소 리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을 뜰 때의 느낌은 어릴적과는 달리, 짜증스러움이나 귀찮음에 더 가까웠다. 한때 그런 어머니의 손길과 한숨은 얼마나 풋풋한 사랑의 확인이며 진통과 진정 의 효과를 지닌 감동이었던가. "야야, 이래 한 될따. 가서 논산 할배를 델꼬 오든동, 아이믄 첫차로 진안이라도 나가 양 의사를 찾아보든동..." 명훈이 눈을 뜨는 걸 본 듯 어머니가 축축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어젯밤 늦게까지 머리맡에서 물수건을 갈아댄 데다 안방으로 건너가서도 잠을 설쳤는지 명훈을 내려다보는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그게 희미한 옛 기억 같은 감동을 일으켜 명훈의 짜증스러움을 흩었 다. "괜찮아요. 날이 밝으면 덜하겠죠. 대단찮은 몸살 가지고 뭘..." "아이따. 암만 캐도 끌테기(나무 그루터기)에 찔린 그 발이 걱정이라. 말(가래톳)이 벌겋게 섰다미? 파상풍인동 모르이 미련될 일이 아이라꼬." 명훈의 대수롭잖아하는 말투가 더 걱정스럽다는 어머니가 그런 엄청난 진단까지 했다. 그 바람에 다시 치미는 짜증을 억누르기 위해 명훈은 가만히 눈을 감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머니도 그제서야 명훈의 기분을 짐작한 것 같았다. "이거는 쎄울(고집부릴) 일이 아이라 카이. 니 몸이 어떤 몸인지나 아나? 니 하나 잘못되 믄 우리집은 고마 파이라. 저 어린 남매나 이 늙어가는 에미가 모도 니 하나 의지해 산다 꼬..." 그렇게 푸념하면서도 슬그머니 일어나 방을 나갔다. 오래잖아 부엌에서 솥뚜껑 여는 소리 가 들리는 게 그날은 손수 아침이라도 지으려는 듯했다. 평소 같으면 어머니의 나무람 섞인 목소리가 요란스레 영희를 깨우는 게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어머니가 나가고 다시 방안에 홀로 남게 되자마자 문득 명훈의 가슴을 적셔오는 감상이었다. '아아, 외롭구나. 나는 외롭구나...' 가슴 깊이서 우러나온 그런 느낌에 명훈은 콧머리까지 시큰해왔다. 실로 그 자신에게마저 신통하게 느껴질 만큼 오랫동안 잊고 지내온 감정이었다. 명훈은 군대 3년 동안 거의 외로움을 모르고 지냈다. 쫄병 시절에는 내무 생활의 고단함 때문에, 그리고 고참 시절에는 다시 나가서 부대껴야 할 바깥 사회에 대한 상상과 그 대응 방안의 모색에 몰두해 지냈고, 어머니의 편지로 돌내골 선산 발치의 개간 가능성을 알게 된 제대 무렵에는 그것을 위한 결의를 다지고 계획을 짜느라 달리 집념에 빠져들 틈이 없었다. 돌내골로 돌아와서도 외로움 같은 것은 명훈에게는 감정의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 한 달은 개간 허가의 성패에 매달려 정신없이 뛰어다녔고, 그 뒤 두 달 남짓은 맨주먹으로 해나가야 하는 개간 때문에 또한 그것 외의 딴 생각에 빠져들 겨를이 없었다. 거의 5년 만 에 온 가족이 한 곳에 모여 살게 된 것도 한동안은 명훈의 감정을 외로움과는 무관하게 만 들었다. 헤어져 그리워하며 살던 그 귀한 식구들을 자기 곁에 모아두고 돌보는 일은 짐스러 움이기보다는 차라리 감격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 외로움은 웬일일까. 무엇이 나를 외롭게 하는가.' 명훈은 자신의 그 같은 감정 변화를 어이없어하며 속으로 씁쓸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간 밤의 신열로 휑한 머리로는 좀체 그 외로움의 정체가 잡히지 않았다. 그간의 긴장과 피로로 언제든 눈만 감으면 이내 다시 올 것 같던 잠만 천리 만리 달아났을 뿐이었다. 실은 그 일이 아니라도 새삼 잠을 청하기에는 이미 글러 있었다. 감은 눈꺼풀 위로 쏟아 지는 아침 햇살 때문이었다. 장지문의 창호지에 걸러진 빛줄기건만 밤새 앓아 예민해진 명 훈의 감각에는 몇백 촉광의 백열구보다 더 자극적이었다. 명훈은 잠시 감아보았던 눈을 다시 떴다. 인철과 옥경은 물론 영희까지 일어난 기척이 없 는 걸로 보아 아직 이른 아침인 듯했다. 하지만 벌써 한 여름이라 해는 제법 높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명훈은 정체도 모르고 당장은 마땅한 해결책도 없는 질척한 감상에 젖어 있는 게 싫어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그 전날 하루 꼬박 누워 앓느라 가보지 못한 개간지도 적잖이 궁금했다. 몸은 생각보다는 가벼웠다. 역시 그 동안의 과로에서 온 몸살이란 스스로의 진단이 맞는 듯했다. 그러나 허벅지 안쪽이 뜨끔한 게 전날 저녁 벌겋게 성나 있던 가래톳이 아직 가라 앉지 않아서였다. 맨발로 개간지를 갈아엎다가 덜 캐낸 철쭉 뿌리에 발바닥이 찢긴 게 덧난 탓인데 다행히도 고름을 짜낸 발바닥은 밤새 많이 좋아져 조심해 디디면 걸을 만했다. 명훈은 천천히 바지를 꿰고 헌 남방 셔츠를 찾아 걸쳤다. 그저께 해질무렵 신열에 들떠 내려온 뒤로 못 가본 개간지도 궁금했지만 그보다는 그새 두셋으로 줄어든 인부들을 맞아 도닥여주는 일이 더 급했다. 어머니가 또 성화를 부리며 잡는 걸 피하기 위해 명훈은 가만히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갔 다. 마당에 쏟아지는 햇살이 아찔할 만큼 눈부셨다. 그러나 그보다 더 세게 눈을 찔러오는 것은 댓돌 위에 가지런히 얹혀 있는 하얀 남자 고무신이었다. 전날 자신이 누워 있는 사이 누군가 비누 묻힌 수세미로 마음먹고 씻은 듯한데, 짐작으로는 옥경이 솜씨 같았다. 마루 끝에 서서 그 고무신을 내려다보며 명훈은 다시 한번 야릇한 감정에 빠졌다. 신발이 깨끗해 기분이 좋다거나 그렇게 해둔 옥경이 기특하다는 따위, 그럴 때 흔히 느끼는 것과는 전혀 색다른 감정이었다. 무언가 두터운 무의식을 뚫고 그 아래 오래 갇혀 있던 어떤 의식 을 건드는 듯 이번에는 원인도 대상도 모를 슬픔과 그리움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명훈은 마루 위에 서서 멍하니 댓돌 위를 내려다보면서 그 갑작스럽고 낯선 감정의 원인 을 캐보았다. 그러나 역시 알 수 없기로는 조금 전 방안에서 느꼈던 외로움이나 마찬가지였 다. 다만 그런 종류의 감정은 모두가 현재의 자신에게는 경계해야 할 정신적인 사치라는 깨 달음만이 섬뜩하게 머릿속을 스쳐갈 뿐이었다. 이윽고 명훈은 그 모든 잡념을 털어버리려는 듯 가볍게 머리를 흔든 뒤 마루 끝에 앉아 조심스레 고무신에 발을 꿰었다. 그 전날 오후만 해도 벌겋게 부어 있던 왼발은 밤새 가라 앉아 신발을 꿰기에 그리 괴롭지는 않았다. 천천히 걸음을 떼어 개간지로 올라가던 명훈은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그때쯤이면 나와 있어야 할 인부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은 까닭이었다. 결국은 모두 떠나가고 말았는가... 첫 번째 간조 뒤 보름이 넘도록 개간 품삯을 주지 못하자 줄어들기 시작한 인부는 한 달 도 안 돼 의리로 나와주는 당수 수련생밖에 남지 않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도 언제까 지고 품삯도 받지 못하는 개간 일에 매달려주지는 않았다. 농가의 청년들은 제 농사와 품앗 이 때문에 당수 수련조차 제대로 받을 틈이 없었고 장터의 건달들은 일이 몸에 배지 않아 며칠에 한 번이 고작이었다. 그 바람에 한동안은 그래도 열 명은 채워주던 수련생들마저 하 나둘 줄어들어 그 무렵엔 인부가 서넛밖에 나와 주지 않았는데 이제 드디어 하나도 남지 않 게 된 모양이었다. 명훈은 암담하기 그지없는 심경으로 개간지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산밑으로 더 벗겨내야 할 땅은 3천 평이 넘었다. 혼자 붙어 개간을 끝내려면 한 달로도 모자랄 넓이였다. 날짜를 받아둔 건 아니지만 명훈에게는 개간이 빨리 끝나면 빨리 끝날수록 유리했다. 그래야 그만 큼 곤궁에서 벗어난다는 뜻도 되었다. 있는 힘 없는 힘을 모조리 짜내 개간에만 쏟아부어온 명훈네의 가계는 이제 끼니를 이어가는 것조차 힘겨울 만큼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 지만 개간까지 그렇게 막장으로 굴러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고 단정한 것은 명훈의 성급이었을 뿐, 아직은 나와준 인부가 있었다. 명훈이 무거운 발길을 끌며 개간 지 등성이로 올라가자 아래쪽에서는 안 보이는 서쪽 비탈에 두 사람이 붙어 열심히 괭이질 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명훈은 달려가 안아주기라도 하려는 듯 그들을 향해 걸음을 빨리 했다. 다가가면서 보니 아래쪽 잡목 들걸에 붙은 것은 정군이고 멀리 다복솔 그늘 쪽은 세 형이란 녀석 같았다. 명훈이 오는 기척을 들었던지 정군이 뒤바라진 떡갈나무 등걸과 씨름하던 손을 놓고 힐끔 돌아보았다. 여드름이 돋아 게바가지 같은 그의 얼굴이 그렇게 미덥고 정답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일찍 나왔구나. 애쓴다." 명훈이 마음속의 고마움을 그런 인사말로 나타냈다. 더 간곡하고 절실한 표현이 없는 게 아니었으나 워낙 배운 게 없고 속이 덜 찬 녀석이라 그 정도로 해둔 것이었다. 그런데도 녀 석은 대뜸 씨알도 먹지 않은 농담으로 받았다. "여름 아침 일곱시가 일찍이믄 다섯시부터 설치는 놈은 한밤중에 일난택 아이라? 그래, 형님은 아래윗대가리 다 성하시이껴?" 앞엣말은 자신이 다섯시부터 나와 일하고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알리는 것이고, 뒤엣말은 명훈이 병세가 좀 나아졌느냐는 물음인 셈인데, 어느 편도 썩 잘된 우스갯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녀석은 가장 절묘한 재치와 익살을 부렸다는 듯 혼자 만족해 낄낄거리는 것이었다. 명훈은 서너 살이나 어린 놈이 '아래윗대가리...' 하는 식의 버리장머리 없는 병문안을 하는 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런 걸따지기에는 너무도 고마운 데가 많은 녀석이었다. "간조도 못 받는 일 이렇게 알뜰살뜰 봐주는 사람이 있는데 무슨 염치로 앓아누울 수 있 겠어? 어쨌든 고맙다. 너라도 남아주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다." 명훈이 여전히 부드럽게 말을 받자 녀석은 더욱 기가 살아 떠들었다. "어디 이기 남의 일이껴? 거다가 간조사 언제 받아도 받을 꺼이께는 이기 바로 도랑 치고 까제 잡기제." 이번에는 제법 어리숙한 속까지 드러내보이는 우스갯소리였다.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은 영희를 두고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함께 일나온 고향 사람들이 모두 명훈네 개간지를 떠 나버린 뒤에도 혼자 남아 오히려 더 열성인 걸로 보아서는 영희에 대한 녀석의 짝사랑이 어 느 정도인지 알 만했다. 그렇지만 어차피 비극적으로 끝나게 되어 있는 짝사랑이었다. 영희 는 녀석이 조금만 이상한 눈치를 보여도 길길이 뛰며 화를 냈고 명훈도 그런 매제를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따라서 녀석이 드러내놓고 그 일을 입 끝에 올리자 불쾌한 느낌이 들 이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명훈은 이번에도 내색 않고 역시 같은 농담으로 얼버무렸다. "싱거운 녀석. 넌 임마 여기보다 염전에 가서 일해야 할 녀석이야." 그리고 돌아서는데 녀석이 또 무어라고 먹혀들지도 않는 우스갯소리를 씨부렁거려놓고 혼 자 허허거렸다. 일에 열심히기는 세형이 쪽이 훨씬 더했다. 언제부터 괭이질을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벌 써 러닝 셔츠가 함빡 젖어 있었다. 그새 파뒤집어 놓은 땅도 열 평은 넘어 보였다. 감골이란 골짜기에 사는 타성인데 당수를 배울 때도 누구보다 열심인 녀석이었다. 정군 때보다 더 감 동된 명훈은 자신이 온 줄도 모르고 일에 빠져 있는 세형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쳤다. "야, 너 무리하는 거 아냐?" "아, 예. 날 뜨겁기 전에 쪼매 해놓고 들일 나갈라꼬요." 명훈이 어깨를 치는 바람에 펄쩍 놀라며 돌아본 세형이 공연히 멋쩍어하는 웃음을 흘리며 말끝을 흐렸다. "들일?" "예. 아부지가 조밭 묵는다꼬 얼매나 사람을 뽂아치는지. 낮에는 거다라도 엎어져 눈가림 이라도 해야 될씨더." 그 말을 듣고 보니 녀석이 그처럼 열심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돈도 안 나오는 개간 일 그만두라는 아버지의 성화에 시달리다 못해 그런 궁리를 짜낸 듯했다. 명훈은 세형이 고맙 기보다는 그렇게라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게 느껴졌다. "너무 그럴 것 없어. 너희 집 일이 바쁘면 그것부터 하구 와. 개간은 이제 얼마 안 남아서 나 혼자도 마칠 수 있어. 안 되면 양쟁기로 확 갈아엎어버리지 뭐. 우선 검사나 넘겨놓고 차 차 밭을 만들어나가면 될 거야." 녀석을 끈끈한 의리로부터 놓아주기 위해 명훈은 거의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녀석이 더욱 멋쩍어하며 변명 비슷이 받았다. "그래도 내 모가치(몫)는 해놈씨더. 해거름 해 또 뒤 시간만 파뒤배믄 한 오십 평이사 안 채울리껴?" 개간지를 내려오는 길에 다시 괭이를 메고 올라오는 동네 청년 하나를 더 만났으나 집으 로 가는 명훈의 마음은 그리 밝아지지 못했다. 갑자기 신열이 훅 오르는 듯하며 몸까지 욱 신거려왔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어머니는 그새 마루에 밥상을 차려놓고 아이들을 깨우는 중 이었다. "야들아, 일나그라. 아무리 밤 짧은 여름이라 카지마는 어예 해가 살살이 퍼지도록 안 일 나노?" 그때 부엌에서 거칠게 솥뚜껑 여는 소리가 들리는 게 영희는 벌써 일어나 어머니와 한바 탕 한 듯했다. 명훈이 댓돌 위로 올라서자 비로소 명훈이 온 걸 안 어머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낯성을 내며 나무랐다. "아이, 야가 어딜 갔다오노? 그 성찮은 몸으로. 참말로 크일낼때이. 에미 애간장을 말쿨라 (말리려) 카나?" "개간지를 잠깐 둘러보고 왔어요." 명훈은 짧게 대답하고 상머리에 가 앉았다. 밥상에는 입맛을 잃은 명훈을 위해 어머니가 애쓴 흔적이 뚜렷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귀한 달걀을 입힌 파전이 놓였고 밥그릇도 명훈 의 것은 하이얀 쌀밥이었다. 그 밖에도 평소에는 먹어보지 힘든 반찬이 여럿 보였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명훈의 입맛을 되살려내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들어가 눕겠습니다." 명훈이 몇 술 뜨다 말고 몸을 일으키자 어머니가 다시 낯빛까지 변해가며 성화를 부렸다. "야가 참말로 왜 이래노? 아침부터 삼이웃 사이웃 돌미 들인 공도 몰라주고. 안 된다. 약 먹듯이라도 먹어야 된다. 병원을 가고 주사를 맞는 것도 그 뒤라..." 그러면서 명훈의 방까지 따라 들어왔다. 몸이 다시 욱신거려서인지 명훈에게는 성가시기 만 한 정성이었다. 어머니는 명훈이 자리에 누운 뒤에도 상머리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명 훈의 머리맡에 눌러앉아 푸념 반 걱정 반으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끝내 견디지 못한 명훈의 짜증 섞인 핀잔을 듣고서야 겨우 단념하고 방을 나갔다. "에이고, 저 염량 봐라. 아픈 오래비 믹일라꼬 있는 거 없는 거 찌지고 꿉고 해놨디, 지가 처억 차고 앉아... 당장 젓가락 못 치울라? 어예 찬장에라도 곱게 치아났다가 오래비 입맛 돌아오믄 한술이라도 믹이볼 생각은 안 하고." 방을 나간 어머니가 영희를 상대로 그렇게 화풀이를 하는 소리를 들으며 명훈은 무럽게 눈을 감았다. 오빠, 서울에서 손님이 왔어. 영희가 밖에서 알려왔다. 서울? 명훈은 어느새 자신과는 무 관하게만 느껴지는 그 도시의 이름을 되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문이 스르르 열리며 얼른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머리칼을 앞으로 늘어뜨린 여자가 살며시 들어왔다. 머리맡에 다소곳이 앉아 고개를 드는 걸 보니 뜻밖에도 경진이었다. 어, 경진이가 여기 웬일이야. 답 장을 주시지 않기에 찾아왔어요. 답장? 아, 그건... 너무하시잖아요. 아냐, 그건 말이야. 말씀 해보세요. 답장을 않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서. 왜요? 제가 싫으세요? 싫고 좋고가 아 니라... 우린 서로가 너무 맞지 않아서. 도대체가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어째 서요? 너는 내가 누군지 아니? 시인을 지망하는 문과 대학생? 논밭이 질펀한 시골 부자의 아들? 제대만 하고 나가면 바로 모든 게 풀려나가게 되어 있는... 아니야. 그건 함상병이 잘 못 알고 있는 나일 뿐이야. 군대식 허풍으로 둘러댄 나일 뿐이라구. 집에 금송아지 안 매어 둔 놈 아무도 없다는 식의 허풍일 말이야. 그럼 명훈씨는 어떤 분이세요? 아직은 돌보아야 할 어린 동생이 셋이나 되는 홀어머니의 맏아들일 뿐이야. 그것도 엉덩이 들이밀 집 한 칸 없는 빈털터리에 취직도 아무데나 할 수 없는 요시찰인이고. 그게 어때서요? 그렇다고 왜 저와 맞지 않죠? 맞지 않지. 우선 너의 집안. 삼대를 크게 망해보지도 않고 흥해본 적도 없 다는 집안의 딸이 대마다 흥망을 되풀이하며 살아온 우리를 어떻게 이해하겠어? 문중이 바 로 서울 변두리 동네에 있는 서울 토박이이고, 한 동네에서 국민학교부터 여고까지 마친 네 가 철들고는 한 도시에서 삼 년을 넘겨보지 못하고 떠돈 우리의 삶을 어떻게 짐작이나 하겠 어? 지금 내가 안간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 이 끔찍한 가난이 아니라도 우리는 애초부터 맞 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사랑도 할 수 없나요? 그야 할 수도 있지. 하지만 어차피 깨 어지게 되어 있는 사랑이야. 모든 사랑은 결혼하지 못하면 깨어진다는 건 이 나이가 되면 알지, 그런데도 뻔히 알면서 그런 불장난은 하고 싶지 않아. 결국은 절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군요. 아니야. 꼭 그렇지는 않아. 그보다는 너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어. 오히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멀지 않아 닥쳐오게 될 불행에서 너를 구해주고 싶었던 거야. 너에게 아무 말 않고 서울을 떠난 것, 그리고 네 편지가 왔을 때는 한없이 기뻐하면서도 끝내 답장은 내 지 않은 것, 그 어느 쪽도 쉽지는 않았다구. 그럼 그날 밤에는 왜 그랬어요? 아. 그건 그건...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잖아. 아무 일도 없었다구요? 그럼 이건 어쩌시겠어요? 갑자기 경진 이 품에서 갓난아기를 꺼내 명훈에게 내밀었다. 명훈씨 아이예요. 받으세요. 명훈은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아이를 받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 어. 이건 내 아이가 아니야. 역시 그렇군요. 이러실 줄 알았어요. 경진이 갑자기 눈물을 주르 르 흘리더니 아기를 안고 조용히 일어섰다. 가겠어요. 버리든 기르든 제 아이니까 제가 알아 서 할게요. 그러자 명훈은 또 다른 이유로 가슴이 서늘해왔다. 아냐, 그럴 수는 없어. 앉아. 다시 생각해보기로 해. 하지만 경진은 들은 척도 않고 방문을 열고 나갔다. 기다려. 그렇게 가선 안돼. 명훈이 그렇게 소리치며 그녀를 잡으려했다. 하지만 어찌 된 셈인지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아 팔 한 번 제대로 뻗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 경진은 마루를 가로질러 댓돌 아래로 내려섰다. 그리고 마당의 눈부신 햇살 속으로 녹아내리듯 사라져갔다. 아앗, 안 돼. 서. 잠깐만 기다려줘- 명훈은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보려고 버둥대다가 겨우 그 안타까운 꿈속에서 벗어났다. 그새 다시 잠이 든 모양인데 들창으로 드는 햇볕이 없는 걸로 보아 꽤나 잔 듯했다. 참으로 야릇한 꿈이었다. 터무니없는 내용이면서도 낮꿈치고는 너무나 생생해 모든 게 방 금 실제로 일어난 일 같았다. 그 바람에 명훈은 몽유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가 경진이 꿈속에서 사라져간 마당 쪽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거기 무엇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따가워지기 시작한 햇살이 피워내는 아지랑이가 그 너머로 보이는 것들의 형상을 가볍게 뒤틀어 잠에서 막 깨어난 명훈의 눈을 어지럽게할 뿐이었다. 그래도 명훈은 까닭 모를 미련으로 한동안이나 더 그런 마당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돌 담 저쪽이나 마당 한구석의 장작더미 뒤 같은 데서 머리를 풀어헤친 경진이 아기를 안은 채 울고 서 있을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명훈의 눈길 닿는 곳이 댓돌 위였다. 아침에 잠시 신고 나갔다 와서 군데군데 개간지의 붉은 흙이 묻어 있어도 아직은 눈부시게 흰 남자 고무신이 거기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명훈은 그걸 보자 무슨 섬뜩한 깨달음처럼 그 아침 자신을 사로잡았던 몇 가지 돌연하고 낯선 감상의 원인을 알아내었다. 안경진. 한때의 대수롭지 않은 인연으로 여기고 잊어버리려 했던 그녀가 그토록 가슴깊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명훈은 풀썩 주저앉듯 마루에 걸터앉아 그녀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 날을 떠올려보았다. 한여름의 뜨거운 바람이 훅훅 불어가는 마루 위에서 회상해보기에는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지난해 연말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금세라도 눈이 퍼부을 듯 하늘이 찌뿌둥했다. 오후 일과가 다해갈 무렵 명훈은 행정반 난롯가에 앉아 맑게 닦인 유리창 너머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이, 이병장. 뭘 해?" 갑자기 행정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명훈을 보고 소리쳤다. 명훈이 돌아보니 이른바 더블 백 동기인 인사과의 차병장이었다. 명훈과 같은 대학 재학중 입대해서 동기들 중에는 가장 가까이 지냈다. "응, 그냥..." 명훈이 그렇게 심드렁히 대답하자 차병장이 갑자기 무언가 종이 쪽지 두어 장을 흔들어보 이며 기세 좋게 말했다. "외출 준비해. 특박이야." "특박? 나 그런 거 신청한 적 없는데..." 조금은 뜻밖이라 명훈이 어리둥절해 받았다. 차병장이 연신 뜻 모를 웃음을 지으며 빈정 거리듯 말했다. "야. 제대 말년에 이거 무슨 궁상이냐? 나가자구. 사제 망년회야. 병기과 함상병 알지? 걔 가 깔치구 술이구 다 수배해논 모양이야." 그제서야 명훈은 대강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짐작이 갔다. 함상병은 집이 서울인 빵빵 군번(학보병)이었다. 입대는 명훈이나 차병장보다 일 년 이상 늦었지만 제대 날짜는 비슷해 서 그 무렵에는 아니꼬워하면서도 이따금씩 한자리에 끼워주곤 했는데, 그 함상병이 무슨 건수를 만들고 차병장은 거기 맞춰 외박증을 빼낸 모양이었다. 쫄병 때는 명훈도 외출, 외박을 누구 못지않게 밝혔다. 이모님네 집과 황의 자취방을 빼면 마땅히 들를 만한 곳도 없어 어떤 날은 하루종일 서울 거리를 일없이 떠돌다가 싸구려 여인 숙에서 밤을 새우고 귀대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고참들에게 시달리는 내무 생활보다는 그 편이 나았다. 그러나 입대한 뒤 이 년쯤을 전후해서 명훈은 차츰 그런 외출, 외박에 흥미를 잃어갔다. 그 사이 어지간히 고참이 되어 내무반도 특별히 견디기 함든 곳이 아니게 되었을 뿐만 아니 라 당장은 막막하기만 한 제대 후의 날들이 시시껄렁한 쫄병 시절의 즐거움들에 심드렁해지 게 만든 까닭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망년회란 말이 갑자기 그 원래의 뜻보다 훨씬 무겁게 다가오며 알 지 못할 유혹이 되었다. 벌써 한 해가 간다. 나도 이제 스물여섯이 되는가... 인사과 서무계인 차병장이 마음먹고 만들어낸 특박증이라 세 사람은 그럴 때 흔히 따르게 마련인 귀찮은 절차를 거침이 없이 부대 정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화전에서 버스에 올라 시내로 나오면서 들으니 함상병과 차병장의 계획은 뜻밖으로 진지했다. 함상병의 애인이 마 표에 사는데 그날 밤 부모가 집을 비우기로 되어 있어 거기서 멋진 신사 둘을 데리고 나오 면 그녀도 근사한 친구 둘을 불러놓겠다는 덤과 함께였다. 차병장은 정해진 날짜에 어김없이 외박을 나올 수 있기 위해 반드시 끼워야 될 사람이었 지만, 명훈이 그 '멋진 신사' 중에 끼게 된 것은 실로 행운이었다. 짐작과는 달리 그날 밤의 망년회는 모든 게 명훈의 기대를 크게 웃돌았다. 어쨌든 사내들을 집으로 끌어들이는 것으 로 미뤄 별볼일 없는 논다니겠거니 여겼던 함상병의 애인은 뜻밖이다 싶을 만큼 얌전한 아 가씨였고, 과년한 딸을 혼자 두고 집을 비운 걸로 보아 막 사는 사람들일 거라 추측한 그녀 의 부모도 반듯한 서울 토박이들이었다. 그녀는 함상병의 싸구려 애인이 아니라 제대만 하 면 결혼식을 올리게 되어 있는 약혼녀였으며, 그녀의 부모도 미래의 사위가 와주리라는 것 때문에 안심하고 집을 비운 듯했다. 그런데 정성들인 저녁을 대접받고 얼마 안 돼 작은 문제가 생겼다. 그날 밤 오기로 되어 있던 아가씨 중의 하나가 시간이 넘도록 오지 않는 것이었다. 함상병의 애인은 무슨 큰 죄 나 지은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어딘가로 전화도 내보고(그 집에는 전화까지 있었다!) 와 준 친구와 무언가 소곤소곤 의논도 하다가 갑자기 좋은 수가 있다는 듯 둘이서 함께 밖으로 나갔다. 한참 뒤에 그녀들은 아가씨 하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새 벌어진 술판으로 약간 술 기운이 올라 있던 명훈은 현관에서의 가벼운 실랑이 끝에 끌려오다시피 들어오는 그 아가씨 를 기대에 차서 바라보았다. 차병장이 먼저 온 아가씨에게 열을 올리는 눈치여서 자신의 짝 은 절로 새로온 그녀로 결정이 나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명훈의 눈에 비친 그녀는 처음부터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걸친, 그야말로 병아리에 우장을 씌운 것 같은 터무니없이 큰 털스웨터로부터 무릎이 툭 불거져나온 헌 바 지며 아직 여고생 같은 앳된 얼굴이 모두 그랬다. 어딘가 우아한 기품을 지닌 함상병의 애 인이나 오래 직장을 다녀 세련된 차병장의 짝에 견주면 급한 김에 이웃집 부엌데기를 빌려 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기는 그녀의 차림이 더 산뜻하고 생김이 더 매력적이었다 해도 그날 명훈에게는 큰 차 이가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그 무렵 명훈은 묘하게도 여자에 관해서는 달관 또는 도통했다 는 기분 같은 것이 있었다. 경애와 모니카란 상반된 개성의 여자들을 차례로 겪고 또 종류 는 다르지만 고통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했던 그 후유증에서 막 풀려난 다음이라 그랬을 것이 다. 명훈은 사랑의 감정적인 측면이라면 경애를 통해 속속들이 맛보았고 또 탕진했다고 단정 했다. 함께였을 때보다도 헤어지고 난 뒤에 더 뜨겁게 타오르던 그 집착과 열정, 그녀가 버 터워스 중령과 결혼해 미국으로 가버렸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도 열병과도 같은 그리움으로 지새야 했던 그 숱한 밤들- 그리하여 겨우 거기서 풀려나자 사랑은 혼자서 다해보았다는 듯한 감정의 과장이 일어난 것이었다. 육체와 연관된 사랑의 또 다른 측면은 모니카를 통해 모든 것을 다 알았다는 기분이었다. 일쑤 악연으로만 기억되는, 정신의 공백을 육체로 메운 듯한 그녀와의 기이한 사랑을 통해 명훈은 쾌락뿐만 아니라 환멸까지도 그 바닥까지 핥아보았다는 느낌이었다. 그 때문에 그 방향의 욕망에 대해서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심드렁해져 있었다. "안경진이라고 동네 후배예요. 잘 부탁해요." 쭈뼛거리는 그녀를 억지로 끌다시피 해서 상곁에다 앉힌 함상병의 애인이 그렇게 소개했 다. 셋 모두에게라기보다는 명훈을 향해 양해를 구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 바람에 별생각 없 던 명훈은 오히려 심기가 상했다. 비로소 그 자리의 성격이 구체적으로 인식되면서 갑자기 호승심 같은 게 인 탓이었다. 나중에는 선택의 기회도 없이 셋 중에서 가장 못한 여자를 떠 맡긴 함상병과 차병장에게 은근히 화가 날 정도였다. 망년회도 경진이 와서 오히려 어색하게 변해갔다. 남자들 쪽은 말할 것도 없고 여자들도 함상병의 애인과 먼저 온 미스 강이라는 아가씨는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그러나 무엇이든 차례가 경진에게만 돌아가면 금세 분위기는 묘하게 뒤틀렸다. 유행가로 한참 흥겹게 달아오 르는 판을 여고 음악 시간에 실기 시험치듯 부르는 「솔베이지 송」이 식혀버리고, 한두 잔 은 받아도 될 맥주를 기어이 입에도 안 대 권하는 사람을 머쓱하게 만드는 식이었다. 명훈도 그런 경진이 못마땅하기만 했다. 첫인상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 더욱 그랬는지 도 모를 일이었다. 무슨 달갑잖은 의무를 수행하는 기분으로 그녀와 한짝이 되어 제법 들큰 하게 무르익어가는 다른 두 쌍의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 애쓸 뿐이었다. 그러던 명훈이 조금씩 경진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꽤나 술들이 오른 뒤였다. 함상 병이 애인과 열렬한 키스신을 연출하고 차병장이 미스 강과 멋들어진 맘보춤을 추고 나자 차례는 명훈과 경진에게 돌아왔다. 명혼은 도대체 이 여자와 짝이 되어 할 수 있는 게 무엇 일까, 하는 기분으로 그때껏 거의 무시해온 경진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런데 경진의 뜻 아니 한 행동이 그런 명훈에게 작지만 무시 못 할 충격으로 다가왔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경진이 말끄러미 명훈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명훈과 눈길이 마주치자 얼굴이 새빨개져 고개 를 푹 수그리는 것이었다. 아미가 참 곱구나- 가늘어도 짙은 그녀의 눈썹과 물들인 듯 빨개져 오는 반듯한 이마를 보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명훈은 이어 자신의 눈동자에 묻어 있는 듯한 그녀의 눈길 을 떠올리고 다시 덧붙였다. 오랜만에 보는 맑은 눈이다... "야, 이병장 뭐 해? 니네 쌍은 맞선이라두 보구 있는 거야?" 취한 중에도 명훈과 경진 사이의 묘한 기류는 감지되었는지 차병장이 그렇게 소리쳤다. 퍼뜩 정신이 든 명훈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이나 과장된 목소리로 경진에게 물었 다. "자, 안경진 학생. 이제 우리는 뭘 할까? 어쨌든 공짜로 구경만 할 수는 없잖아?" 필요 이상으로 경진을 어린애 취급함으로써 마음속의 동요를 감추려함이었는데 말까지 쉽 게 놓아지는 것은 명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했다. 그런데 경진의 대답이 또 뜻밖이었 다. "집으로 보내주세요." 다소곳이 내리깔고 있던 눈길을 들어 명훈을 올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쟤가." "얘, 너 잘 놀다가 갑자기 왜 그래?" 나지막해도 또렷한 목소리여서인지 경진의 말을 알아들은 함상병의 애인과 미스 강이 한 꺼번에 경진을 몰아세웠다. 그러나 경진은 그녀들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명훈만을 빤 히 올려보며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집으로 보내주세요." 꼭 떼쓰는 아이 같은 표정이었는데 그게 경진의 인상을 새롭게 했다. 명훈은 자신도 모르 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좋아, 내가 바래다주지." 명훈이 방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아연해하는 눈길을 느낀 것은 경진이 이제 살았다는 표정으로 발딱 몸을 일으킨 다음이었다. 그제서야 문득 어색한 느낌이 든 명훈은 술기운이 가신 말투로 더듬거렸다. "차병장, 함상병. 아무래도- 난 가봐야 할 거 같아. 이모님댁에 들러봐야 될 일도 있고... 너희들끼리 놀다가 와." "어, 어. 저 쌔끼 봐. 너 정말 그럴 거야?" "이병장님, 이제 와서 왜 이러십니까? 부대서 나올 땐 이모님 같은 얘긴 전혀 안 하셨잖 아요?" 차병장과 함상병이 한꺼번에 항의하듯 그렇게 혀꼬부라진 소리들을 질러댔다. 그러나 여 자들은 달랐다. 경진이 간다면 명훈도 없어지는 게 홀가분하다는 듯 경진의 의사만 거듭 확 인할 뿐이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물어도 경진이 기어이 가겠다고 나서자 각기 제 짝을 달랬다. "정말로 볼일이 있다면 이명훈씨도 보내드리세요." "누가 알아요? 두 사람이 따루 말을 맞췄는지. 가겠다면 가게 두죠 뭘." 그러자 두 녀석에게도 그런 여자들의 기분이 전해졌는지 굳이 명훈을 잡지는 않았다. "아하, 그래? 역시 시인은 다르군. 하지만 너 임마, 부대에 가선 다 보고해야 돼. 저 순진 한 아가씨에게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이병장님, 잘 해보슈. 일 잘되면 이 중신애비 잊지 마시구..." 그러면서 어물쩍 놓아주었다. 두 녀석이 그렇게 몰아가는 바람에 명훈은 다시 한번 어색 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내친김이었다. 경진을 앞세우듯 하고 현관으로 가 군화를 찾아 신 었다. 그런데 군화끈을 꿰던 명훈의 눈에 들어온 경진의 신발이 다시 한번 묘한 충격을 주었다. 경진이 신고 있는 것은 걸치고 있는 스웨터만큼이나 어울리지 않게 큰 흰 남자 고무신이었 다. "언니들이 하두 재촉하는 바람에- 아빠 신발이에요." 명훈의 눈길이 자신의 신발에 머물러 있음을 안 경진이 변명처럼 그렇게 말하며 다시 얼 굴을 붉혔다. 알고 보니 꽤나 귀여운 얼굴이구나, 그때 명훈은 새삼스럽게 오르는 취기 속에 서 문 듯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집을 나와 둘이서만 어두운 골목길을 걷게 되자 경진은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이나 명 랑하고 구김살없이 굴었다. "증말루 시인이세요? 증말?" 명훈에게 매달리듯 다가오며 그렇게 묻다가 지은 시가 있으면 들려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 고, 듣기에 따라서는 심각한 고백이 될 수도 있는 말을 철부지처럼 털어놓기도 했다. "동네 언니들이라 따라오기는 했어두 전 그런 자리 증말 싫어요. 그 언니들도 평이 그리 좋은 사람들은 아니구요. 그렇지만 이병장님을 만나게 된 건 아주 기뻐요. 우리 다시 만나게 되나요? 그 언니들하고 같이 말구. 이렇게 밤늦게 말구요." 당돌함도 아니고 그렇다고 옛날 모니카에게서 느꼈던 백치 같음도 아니었다. 그런 경진에 게는 그저 한없이 맑고 얇은 유리 그릇을 만지는 듯한 아슬아슬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 밤 경진의 집에 이를 때까지 명훈이 그토록 정중하고 조심스러웠던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 었을 것이다. 하지만 명훈의 그 같은 자제도 끝까지 지켜지지는 못했다. 어느새 길이 다해 저만치 경진 의 집이 보이는 골목 어귀에 이르렀을 때였다. 경진이 갑자기 긴장한 표정이 되어 속살거리 듯 말했다. "자, 여기서 돌아가세요. 아버지가 이층에서 내려다보고 계실지 몰라요." 그녀 특유의 또렷한 말소리 때문에 충분히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으나 명훈은 짐짓 못 알아들은 척 경진 쪽으로 귀를 대었다. 그러자 그녀는 명훈의 귀에 바짝 입을 대고 같은 말 을 한 번 더 되풀이했다. 따뜻한 입김과 함께 그녀의 긴장하고 숨죽인 말소리가 명훈의 귓 속으로 흘러들었다. 아니, 그대로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는 편이 옳았다. "자아- 여기서어- 돌아가세요오. 아버지가아-" 경진의 말이 거기까지 되풀이되었을까, 명훈이 갑자기 얼굴을 돌려 속살거림에 열중해 있 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자기 입술을 갖다 댔다. 잘못 알아들은 척할 때부터 그런 계획이 있었던 것인지 갑작스런 충돌에 못 이긴 것인지는 명훈 자신에게조차 뚜렷하지 않았다. 그 기습적인 입맞춤에 그녀는 강한 전류에라도 닿은 사람처럼 움찔하더니, 한동안을 굳은 듯 서 있었다. 입은 입맞춤을 당하기 전의 상태로 오므린 채, 눈만 크게 뜨고 멍하니 명훈을 보며. 그런 그녀를 보자 명훈은 갑작스레 걱정이 일었다. 그녀의 다음 반응이 울며 물어내라 고 떼를 쓸 것 같아서였다. 짧은 시간 명훈의 머리는 그 수습을 위해 눈부시게 회전했다. 이 입맞춤에 심각한 의미를 주어서는 안 되겠다. 술기운과 장난기로 얼버무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윽고 그렇게 생각 을 정리한 명훈은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뭘 해? 이 꼬마 아가씨야. 이제 가봐야지, 아빠가 겁 안 나?" 술기운과 장난기를 한껏 과장한 목소리였다. 그제서야 경진은 꿈에서 깨난 사람처럼 주위 를 한번 휘둘러보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집 쪽으로 달려갔다. 가다가 흰 남자 고무신이 벗 겨지자 달리기를 하는 선머슴애 처럼 두 손에 한 짝씩 고무신을 움켜쥐고 뒤 한번 돌아보는 법 없이 멀지 않은 이층 양옥집으로 달려가더니 다급해게 대문을 두드려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야? 거기까지 회상한 명훈은 다시 냉담함을 회복해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날 밤의 일은 확실이 인상적이었고, 그 뒤 얼마간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에 대한 정보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명훈은 점점 자신이 없어졌 다. 몇 대째 그 동네에서 별기복 없이 살아온 서울 토박이 집안, 명문 여대에 지망했다가 떨 어진 일 이외에는 삶의 쓴맛을 전혀 보지 못한 철부지, 게다가 나이도 명훈보다 다섯 살이 나 아래였다. 어디로 봐도 결혼에는 이를 수 없는 상대였고, 따라서 그런 그녀와의 사랑은 새로운 상처를 예비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명훈에게도 새로운 상처란 두렵기 그지없 었지만, 순진한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것 또한 상상만으로도 괴로웠다. 그 바람에 명훈은 그 얼마 뒤 큰맘먹고 면회까지 온 그녀를 어린애 다루듯 해 돌려보냈고 두 번의 편지도 끝내 답장을 내지 않았다. 제대가 가까워오면서 되살아난 현실감도 명훈이 그 같은 자제력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제대하던 날 아침도 그랬다. 함상병이 넌지시 그녀를 상기시켰고 시간도 그녀를 만나보기에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명훈 은 그 여유를 그리 긴할 것도 없는 이모부를 찾아보는 것으로 때웠다. 어떻게 주소를 알았는지 두어 달 전 경진이 돌내골로 편지를 보내왔을 때도 명훈의 그 같 은 냉정은 유지될 수 있었다. 때마침 개간 허가가 떨어져 무언가를 새로이 시작하는 자의 열정이 명훈의 관심을 온통 개간에만 쏠리게 한 까닭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인가. 이 철부지가 무슨 일로 꿈속까지 찾아와 사람을 심란하게 하는가. 왜 이처럼 쓸데없는 감정의 낭비를 강요하는가- 명훈은 어쩌면 그 같은 변화가 자 신이 허물어져가는 조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암담해하며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았 다. 그러다가 문득 경진의 지난번 편지에 무슨 단서가 있을 것 같아 대수롭잖게 훑어보고 책상 서랍 속에 던져둔 그 편지를 찾아냈다. 이제는 제대를 하셨으니 이병장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게 됐네요. 그냥 아저씨라 부를게요. 아저씨. 아저씨는 정말 무정한 분이세요. 어쩜 그렇게 영영 서울을 떠나시면서 절 한번 찾 아주지도 않으셨어요? 물론 이제는 제가 아저씨께 아무것도 아닌 어린 계집애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그건 얼마나 괴로운 깨달음이었는지요. 어디서 무엇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지난 연말의 그 밤은 악몽 같기만 해요. 그 밤 이후 한동안 저는 막연히 그러보던 것이 너무 갑자기 그렇게 한꺼번에 와버린 것에 거의 정신을 잃을 만큼 취해 보냈지요. 그런데 깨어보니 저는 여전히 장난으로 입맞춤이나 당하는 어린애였을 뿐이었어요. 기억나세요? 제가 딴에는 큰맘먹고 아저씨를 면회 갔던 날. 그날 저는 조금이라도 더 어 른스러워 보일려고 난생 처음으로 파마에 화장까지 하고 갔어요. 그런데 어저씨는 아, 경진 학생 웬일이야, 하면서 줄곧 절 어린애 취급만 하셨지요. 하지만 전 그곳이 여러 사람이 있 는 면회실이라 그러시는 줄만 알았어요. 둘만이 대화할 수 있게 되면 달라질 줄 알고 편지 를 내보았죠. 이번에는 아예 대답조차 않으시더군요. 그리고는 제겐 말 한마디 없이 훌쩍 서 울을 떠나버리셨죠. 어쩌면 처음부터 뻔한 일을 제가 너무 미련을 부리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이대로는 끝낼 수가 없어요. 돌을 던지는 아이는 장난이라지만 맞는 개구리는 죽 을 지경이라구요. 제발 무러라고든지 말씀 좀 해주세요. 저는 아직도 아저씨의 마음속에 든 말은 한마디도 들어보지 못한 기분이에요. 진실이 아무리 잔인한 것일지라도 진실을 얘기해 주세요. 1963년 6월 3일 경진 드림 읽고 나니 새삼 가슴이 찡해오는 편지였다. 애틋한 호소와 상처입어 파들거리는 어린 처 녀의 자존심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런데도 그때는 어찌 그리 무감동하게 읽고 내던질 수 있었을까- 명훈은 후회와도 흡사한 감정으로 그 편지를 받던 날을 떠올리며 자신의 감정 분석에 들어 갔다. 그래, 먼저는 그날 받은 개간 허가 통지서로 자신이 들떠 있었던 게 그 원인이었다. 그 다음은? 그건 아마도 그 편지를 전해주던 영희의 태도였을 것있다. 경진과의 일을 속되게만 추측하고 모니카와 뒤섞여 놀리려 드는 게 까닭 모르게 심사를 건드렸었다. 게다가 경진은 그런 영희보다도 두 살이나 어리고. 대책 없이 바쁘고 고달펐던 지난 두 달도 그런 자신의 비정과 둔감을 연장시켰음에 틀림 이 없다. 하루의 노동에서 돌아와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지쳐빠진 몸을 방바닥에 뉘고 있으 면 이따금씩 경진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갈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명훈은 그게 무슨 새롭고 뜻 있는 환영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역시 이따금씩 떠오르곤 하는 경애나 모니 카의 얼굴처럼 아득한 과거의 환영으로만 여겼다. 그래, 늦었지만 이제라도 답장을 대자. 하기는 나이 스물이면 경진도 어린애는 아니다. 그 녀는 진실을 알 권리가 있고 나는 진실을 알려줄 의무가 있다. 비록 그게 처참한 진실일지 라도 말이다- 이윽고 명훈은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분명 신열은 아닌 어떤 뜨거운 기운이 명훈의 가슴을 후끈하게 했다. 제10장 한여름밤의 꿈 "누나, 여기." 철이 방안으로 들어오며 럭스 비누가 든 비눗갑을 영희에게 내밀었다. 영희가 그것을 받 아 어머니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갈무리했다. "누나 나 많이 새까매? 여기 애들하고 똑같애?" 거울을 보며 얼굴을 닦던 철이 영희에게 물었다. "그래, 많이 그을었어. 하지만 아직이야 촌놈들하고야 대려구. 헌데 건 왜 물어?" "그냥... 나두 촌놈 다된 것 같아서." 그러는 철의 목소리가 이상했던지 영희가 다가와 가만히 철을 살폈다. 철에게는 아직도 다정한 누이였다. "너 오늘 이상하다. 안 하던 비누 세수에 거울까지 붙들고 앉아... 무슨 일 있어?" 철의 얼굴에서 무얼 읽었는지 영희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일은 무슨 일. 말했잖아? 4H 경진 대회가 있다고. 내가 우리 동네 대표루 나가구." 철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그러나 영희는 여전히 의심쩍어하는 표 정을 지우지 않았다. "그건 나두 알아. 그래서 일찍 내려온 거 아냐? 하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너 연애 라두 시작했니? 오늘 거기 애인이라두 나와?" 그 말에 철은 갑자기 얼굴이 화끈해졌다. 하지만 그 때문에 목소리는 더 강경해졌다. "누나는 뭐든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어? 맨날 개간에만 붙들려 있는 놈 보구, 어째 갖 다 붙인다는 게 맨..." 상대가 어머니였으면 그 정도의 타박만 들어도 참고 있을 영희가 아니었다. 하지만 철에 게만은 영희도 한 팔 접어주었다. 같이 오래 고생한 동생일 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웬만큼 신경질을 부려도 참아주는 그 부드러운 성품을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아, 미안, 미안. 내가 또 우리 공자님 성질을 건드린 모양이네." 영희는 웃으면서 그렇게 얼버무려놓고 다시 한동안 인철을 살피다가 문득 애처로워하는 얼굴이 되었다. "너 그 대학생들 때문이구나.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일만 하는 게 갑자기 걱정이 된 거지? 이대로 농투성이가 될 것 같아 불안한 거지?" 이번에는 그게 비슷하게 맞아떨어진 추측이라 인철을 화나게 했다. 평소와 다르게 거친 목소리로 영희에게 쏘아붙였다. "것두 아냐. 내가 누나 같은 줄 알아? 농투성이든 뭐든 그게 운명이면 나는 조용히 받아 들일 거야. 꼴사납게 버둥거리지 않겠어." "뭐야? 내가 어째서? 게다가 꼭 애늙은이 같은 소리 하군..." 영희도 더는 오냐오냐 해줄 기분이 아닌지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때 마당에서 누가 찾는 소리가 들렸다. "인철이 있나? 뭐 하노? 안 갈 꺼가?" 철이 마당을 내다보니 함께 동네 대표로 출전하게 되어 있는 진규였다. 등에는 출품작인 개량 쟁기 재료들을 한참 지고 있었다. "응, 다됐어. 조금만 기다려. 내 곧 준비해 나갈게." 진규는 인철보다 네 살이나 위였다. 그러나 시골의 지게목발 친구는 도회지의 선후배와 달라 둘은 서로 말을 트고 지냈다. "그래, 글타 카믄 준비되는 대로 얼릉 뒤따라온나. 내 먼저 4H 회관에 가 기다리꾸마. 마 지막으로 선생님들한테 물어볼 것도 쫌 있고. 시간 많잖으이 빨리 온내이." 지게를 내리기가 귀찮았는지 진규가 그렇게 말하며 선 채로 돌아섰다. 그와 함께 자칫 다 툼으로 번질 뻔했던 남매간의 대화도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철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대 회에 필요한 준비물을 챙겨 진규를 뒤따랐다. 4H 회관은 말이 회관이지 실은 동방 한 칸을 임시로 빌려 쓰고 있었다. 인철이 그곳에 이르니 이미 대회장에 갈 사람들이 모두 동방 마당에 모여 인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농촌 봉사대로 온 여섯 명의 대학생들과 동장, 그리고 회장을 비롯한 4H 회원 둘과 진규였다. "이인철씨도 준비물은 저 리어카에 얹으쇼. 대표로 나갈 사람들이 이고 지고 하면 볼썽사 나워요." 농촌봉사대의 지도자 격인 안선생이 마당에 준비된 리어카를 가리키며 말했다. 군대를 다 녀와 나이가 많은 데다 벌써 열흘 가까운 봉사 활동으로 그을었을 법도 하건만 얼굴은 곁에 있는 진규보다 더 앳되고 희었다. 철이 늘상 보는 사람들과는 태어나기를 아예 다르게 태어 난 사람 같았다. 리어카에는 진규의 준비물들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인철은 그 위에다 자신의 준비물ㅇ르 보자기째 얹었다. 윤대목에게 부탁해 자르고 깎은 휴대용 의자 재료였다. 그때 누가 가볍게 철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인철씨 잘 부탁해요. 이건 명목상으로는 면 주최 동네 대항 경진 대회지만 실은 우리 봉 사대 소조들끼리 실적 경쟁이기두 해요. 기대하겠어요." 가볍게 스쳐간 손길인데도 인철은 어깨 어름이 불에 덴 듯 움찔했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 군지 알 만했다. 김선생이었다. 유일한 여성 대원인 그녀는 대학교 2학년이지만 나이는 스물하나로 그 봉사대에서는 가장 어렸다. 마을 사람들이 봉사대원들을 부르는 호칭대로 인철 역시 그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 기는 해도 내심은 영 그렇지가 못했다. 거기다가 해사한 얼굴이 어딘가 명혜를 연상시켜 철 은 일주일이 넘는 야학 기간 내내 한번도 그녀의 눈길을 정면으로 받아보지 못했다. "기, 기대하지... 마십쇼. 자신 어, 없습니다." 그날도 철은 감히 뒤돌아볼 엄두도 못 내고 그렇게 더듬거렸다. 그러나 손은 저도 몰래 주머니에 든 발표 요지 초안을 움켜쥐었다. 지난 며칠 그렇게도 열심히 그걸 고치고 다듬은 것은 어쩌면 그녀를 위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네잎달이 클로버는 우리의 표상 지 덕 노 체 네 향기를 가득 품고서 살기 좋은 우리 농촌 우리 힘으로 빛나는 흙의 문화 우리 손으로... 면장, 농협 조합장에 지서 주임까지 축사와 격려를 곁들인 지리한 식순은 4H 회가를 제창 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경진 대회는 그 다음이었다. 대회는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치르게 되어 있었다. 오전 두 시간은 주로 농기구 개량이나 노동 효율을 높이기 위한 발명과 고안 을 발표하는 데 할당되고 오후는 영농 발전을 위한 연구 개발 성과 발표에 할당됐다. 면 내의 동네 수는 서른이 훨씬 넘었지만 그날 대회에 참가한 동네는 그 절반도 되지 않 았다. 그것도 대부분은 곁들인 농산물 품평회에 작물만을 출품해 실제 경진 대회에 출전한 것은 봉사대가 나뉘어 들어간 여섯 동네뿐이라는 게 옳았다. 4H 클럽은 머리(Head), 가슴(Heart), 손(Hand), 건강(Health)의 알파벳 머릿글자를 따 이 름을 붙인 농촌 학습 조직이었다. 동지적인 조직일 것, 정치적으로는 중립일 것, 프로젝트별 로 학습할 것, 등의 원리로 미국에서 시작된 그 조직은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보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뒷받침으로 활성화된 것은 5·16뒤라 그곳 산골 동네들은 아직 경진 대회에 내보낼 만한 성과와 실적을 축적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인철의 동네도 진규와 인철이 대표로 나왔지만 출품한 작품들은 그들의 독창과는 멀었다. 진규의 개량 쟁기는 재래식 쟁기와 양쟁기라고 부르던 서양식 쟁기의 단점을 보완한 것이 었다. 재래식 쟁기는 계속 사람이 보습날을 들어주지 않으면 나중에는 소가 끌 수 없을 정 도로 땅속 깊이 박혀들었고, 양쟁기는 반대로 눌러주지 않으면 땅껍질만 긁어놓았다. 그래서 재래식 쟁기에 보조날을 달고 손잡이의 위치를 바꿔 양쪽의 단점을 보완했는데, 그 기본적 인 고안뿐만 아니라 발표 시나리오까지 대학생 봉사대가 마련해준 것이었다. 인철이 출품한 휴대용 의자도 진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농민들의 간단한 휴식을 위해 아무데나 앉을 수 있게 만든 외다리 의자인데 그 기본적인 고안과 발표 시나리오는 역시 대 학생 봉사대의 솜씨였다. 다른게 있다면 거기에 약간의 고안을 보태고 시나리오도 나름으로 바꾸었다는 것뿐이었다. 인철의 발표는 오전 순서의 두 번째였다. 철에게는 남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기질도 없었 도, 자란 환경도 그런 숫기를 기르는 데 그리 유리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미 말한 묘한 열정 이 대학생들에게서 받은 고안과 발표 시나리오를 나름으로 보완하게 해 약간의 자신을 주었 고, 앞선 발표자의 서투름과 실수가 그 자신을 더욱 키웠다. 특히 자신이 공들여 보완한 발 표 시나리오에는 거의 자부심에 가까운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우리 농촌의 노동 여건은 비효율과 불합리성에 지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 니다. 휴식이 노동의 생산성을 높인다는 것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고, 특히 노동과 노동 가운데에 있는 휴식은 게으름이거나 고의적인 기피로 여겨지는 현실입니다. 제가 발표하려 는 것은 그런 점에 착안하여 작업장에서의 중간 휴식을 용이하게 하고 아울러 작업에 필요 한 장비나 도구의 휴대에 편의를 주기 위한 고안입니다..." 철의 거의 초안을 보지 않고 그렇게 허두를 뗄 때부터 일반 참석자들 뿐만 아니라 심사위 원들까지 긴장하는 눈치를 보였다. 『새농민』에 실린 다른 연구 사례 발표에 쓰인 용어들 뿐만 아니라, 그 무렵 흔했던 여러 가지 계몽 책자를 최대한으로 활용해 인철이 재구성한 발표 시나리오의 어법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휴대용 의자는 제작이 간편하고, 단단한 재료를 써도 무게가 1킬로그램이 넘지 않습 니다. 따라서 여기 부착된 고무 벨트로 등에 부착시켜두면 아무런 부담이 뒤지 않을뿐더러 작업에도 거의 불편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농촌의 작업 환경은 어떻습니까? 논농사, 밭농사 모두 일하는 도중에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논둑이나 밭둑까지 나가 려고 하면 그 체력 소모는 얼마이며 시간의 허비는 또 얼마나 됩니까." 인철은 그렇게 말해놓고 윤대목에게 부탁해 세 부분으로 나눠 준비해 온 재료들을 그 자 리에서 간단히 조립했다. 거창한 서두에 비해 단순하기 그지없는 고안이었다. 한마디로 낚시 꾼 의자 같은 것인데 좀 다른 게 있다면 다리가 외다리여서 사람의 두 다리를 보태야만 의 자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인철은 거기에 약간의 고안을 더해 사용하지 않을 때는 다리를 접고 물통이나 담배쌈지 같은 간단한 휴대품을 걸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뒷날 돌이켜보니 아무래도 고안을 위한 고 안이라는 혐의가 짙은 출품이었다. 누가 농사일 도중의 짧은 휴식을 위해 가볍고 작다고는 하지만 없는 것 보다는 거추장스러울 것임에 분명한 의자를 하루종일 등에 붙이고 다니겠는 가. 그런데도 인철은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온갖 전문적인 용어와 화려한 수사법을 곁들인 시나리오로 그 효용과 필요성을 역설하고 제작법을 소개했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자신이 무언가 특볋나 고안을 했고 그것은 또 이제부터 자신이 몸담고 살려고 하는 농촌에 틀림없 이 유익하라는 믿음이 있었다. 최종적인 것은 아니지만 반응도 고무적이었다. 발표가 끝나자 대부분이 별로 학력이 높지 않은 지역 유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뿐만 아니라 철을 지도한 농촌봉사대 대학생들까지 왠지 아연해하는 눈빛이었다. 발표 후에 당연히 있게 마련인 다른 참가자들의 반론이나 질 문도 전혀 없었다. 짐작이지만, 인철이 이 책 저 책에서 마음먹고 찾아내 자신에게만 유리하 게 재구성한 용어와 논리에다 그때부터 이미 뚜렷한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 화려한 수사법의 구사가 그들을 압도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인철도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야릇한 흥분과 기대에 들떠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흥분과 기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올 때부터 끌려나오듯 쭈뻣거리더니 결국은 자신의 고안을 다 설명하지도 못하고 연단에서 내려가버린 다음 발표자를 보면서 철은 조금씩 불편 해지기 시작했다. 경쟁자가 줄어든 게 반갑기는커녕 자신이 뭔가 불공정한 짓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든 까닭이었다. 다음번도 다음번 발표자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제 몫을 다하고 내려가기는 했으나 그들의 자신없고 곤혹스러워하는 태도며 말이 막히면 무슨 구원이라도 청하듯 자신을 그 자리로 밀 어낸 대학생들을 쳐다보는 눈길이 그 실제의 고안자와 발표 초안이 누구의 것인지를 훤히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철은 이제 막연한 불편함을 넘어 어떤 삶의 비참함 과 희극성을 동시에 구경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저게 무지한 삶, 무력한 삶의 진정한 모습이 다... 같이 출연한 진규의 발표는 다섯 번째였다. 어찌 된 셈인지 진규는 연단에 오를 때부터 시뻘건 얼굴이더니 출품작 조립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보고 있기가 아슬아슬할 만큼 허둥대다가 어렵게 어렵게 발표를 끝내고 비척이며 연단을 내려왔다. 이 무슨 우스꽝스런 꼭두각시놀음이냐- 온몸으로 땀을 흘리며 제자리로 돌아와 앉는 진규를 보면서 인철은 속 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회 본부에서 나눠준 식권으로 점심을 마친 인철은 오후에도 대회장인 공회당으로 갔다. 참가자의 의무로 지정된 좌석을 지키려 간 것이지만 기분은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져버린 뒤였다. 거기다가 한번 마음이 틀어지자 오후에 벌어지는 농작물 재배 실적이나 성공 사례 발표란 것도 그 실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발표자들은 한결같이 한아름이나 되는 수박이나 주먹보다 더 큰 감자들만 가득히 담긴 광 주리, 벌써 이삭이 패기 시작한 벼 따위를 들고 나왔으나 그 진상은 뻔했다. 마을에서 가장 잘된 농작물, 혹은 어쩌다 남보다 훨씬 빠른 결실의 조짐을 보이는 벼를 베어 나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거기다가 대학생들이 급조해준 엉터리 재배 일지나 관찰 보고서를 바탕으로 역 시 급조된 작목반이 종자 개량이나 영농 발전의 성과를 자랑할 것이었다. 실제에서도 그랬다. 첫 번째 발표가 끝나기도 전에 철은 자신의 짐작이 크게 틀리지 않았 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국민학교를 겨우 나온 발표자가 유전학적인 관찰 내용을 떠듬거리 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그렇게 되자 철은 그 대회뿐만 아니라 공회당 안의 후텁지근함도 점점 못 견딜 것이 되어 갔다. 두 번째 사례 발표가 시작될 무렵 그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 거 리낌없이 공회당을 나와 근처의 느티나무 아래로 갔다. 얕은 둔덕인 데다 앞이 틔여 있어 유달리 시원한 나무 그늘이었다. 철은 거기서 무엇이 자신을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게 한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 만 오랜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왜 이런 꼭두각시놀음이 필요할까- 그렇게 생각의 실마리 를 풀어내는데 누군가가 끼어 들었다. "어머, 인철씨, 왜 여기 나와 계세요? 대회 참가지가..." 철이 자신만의 생각에서 얼른 깨어나며 돌아보니 어느새 뒤따라왔는지 김선생이 상글거리 며 다가왔다. 철은 습관적으로 움찔했지만 그녀가 전처럼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눈부시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녀가 속한 농촌봉사대에 대한 의혹과 불신이 철을 자신있게 만든 듯했다. 철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대회장 안이 너무 덥고- 또..." "또 뭐예요?" 김선생이 아직도 웃음기를 잃지 않은 채 물었다. 거기서 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까닭 모를 오기를 느끼며 속을 털어놓고 말았다. "이 행사가 갑자기 무의미하고... 공허하게 느껴져서요." "그래요? 뜻밖이네요. 왜 그렇죠?" 그녀가 웃음기를 거두며 인철을 쳐다보았다. 정색이랄 것까지는 없었으나 철을 멈칫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눈길이었다. 하지만 이왕 내친김이었다. 철은 움추러들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가 무슨 꼭두각시놀음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생각해보십시오. 진규나 저나 자신 이 고안하지도 않은 걸 제 것인 양 들고 미리 짜둔 시나리오대로 발표하고 있는 거 아닙니 까? 다른 동네도 그런 것 같고... 오후도 그래요. 저들이 가지고 온 저 큰 수박이나 굵은 감 자가 정말로 저들이 시험 재배해 길러낸 건 줄 아십니까? 저들이 발표하는 재배일지, 그게 정말로 그때그때의 기록인 걸구? 하지만 아닙니다. 틀림없이 우리와 비슷할 거예요." "저도 그런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 행사가 온전히 무의미하고 공허한 것이라고 단정 할 수 있을까요?" 그녀가 마침내 정색을 하고 반문했다. 평소의, 보다 높은 곳에서 무언가를 베풀고 있다는 듯한 태도가 아니라 대등한 대화자로서의 반문이었다. 그걸 느끼자 철은 무엇에 고무받은 사람처럼 더 대담해졌다. "최소한 여러 선생님들의 봉사 활동 실적을 눈에 드러나게 증명하는 길은 되겠죠." "인철씨 보기보다 많이 비뚤어졌네. 어떻게 그렇게만 볼 수 있어요? 이런 행사를 통해 4H 활동의 전개 방향과 발전 양식을 배울 수도 있는 거 아녜요? 지금은 시작 단계라 우리들의 도움을 받아 치르고 있지만 나중에는 실제로 여러분의 고안이나 연구 성과를 가지고 이런 대회의 내용이 채워질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녀가 제법 나무라듯 물었다. 그러나 인철의 치기에 가까운 오기는 이미 발동된 뒤였다. "카페에서 '우 나드로'를 소리 높여 외치는 청년이여. 네 손은 너무 희고 네 팔은 너무 가늘구나...” 인철은 짐짓 느긋한 목소리로 그렇게 읊조렸다. 얼마 전에 두들에서 빌려온 『한국 현대 시 전집』이란 두툼한 책에서 본 시구인데, 정확하게 암기된 것인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김선생이 무언가 알 듯 말 듯하면서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30년대 어떤 시 구절입니다. 내용이 기분 상하실지도 모르지만." "우 나로드, 우나로드- 그게 뭐드라..." "요즘 세계사 책에는 '브 나로드'라고 나올 겁니다. 뭐, 러시아말로 인민 속으로, 라는 뜻 이라던가요." 철은 또래들보다 세계사에 특히 밝은 편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도 시험 점수가 잘 나온 과목 중에 하나였지만, 목적 없는 책읽기에서도 소설 다음으로 많이 읽은 게 역사책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공이 이공계라 그런지 세계사에 그리 밝지 못했다. "듣고 보니 배운 것도 같은데. 그게 뭐였죠?" 그렇게 되자 대화의 주도권은 절로 인철에게 넘어왔다. "소련 볼셰비키 혁명 전에 있었던 농촌 계몽 운동 같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러시아에 있는 전통적인 농민 공동체를 활용해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로 이행하고 했다나 요. 그 운동에 투신했던 지식인들을 나르도니키라고 하죠. 그런데 내게 흥미있는 것은 그 운 동이 소련 혁명에 끼친 영향이 아니라 나르도니키의 참담한 결말입니다. 수천 명이나 무리 지어 농촌으로 뛰어들었지만 모두 관헌에 의해 체표되고 말았다는군요. 바로 그들이 계몽하 고자 했던 농민들의 고발과 신고로 말입니다." 아버지의 사상과 연관된 것이라 철이 각별한 주의로 기억한 부분이었다. 그 기억을 동원 할 수 있는 한의 어려운 용어로 꿰맞춰 그렇게 말해놓고 나니 스스로도 대견한 느낌이었다. 순진한 놀람과 호기심을 감추지 않고 그녀가 말했다. "농민들이 왜 그랬어요?" 그렇게 묻는 그녀는 철의 나이나 학력을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현실에 맞지 않는 이상에 절망했거나 화가 난 탓이겠죠." 철이 더욱 어른스런 말투로 그렇게 대답하자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혁명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4H 운동이란 게 원래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킬 것을 큰 원칙으로 하고 있잖아요? 게다가 지금 우리가 하는 게 뭐가 현실에 맞지 않는 이상이죠?" "이를테면 식생활 개선 같은 것만 해도 그래요. 밥을 빵으로 바꾸기만 하면 서양식의 발 전된 식생활이 되는 걸루 말씀하고 계시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니던데요. 맹물하고 먹는 빵 은 우리 밥과 아무 다를 바 없을 거예요. 빵보다 더 많은 우유와 고기가 곁들여져야 되는데 - 젖소도 없고 목축업도 발달하지 못한 나라에서 그 우유와 고기를 어디서 가져오죠? 영농 기계화도 그래요. 손바닥만한 다락논과 비탈밭 어디에다 트렉터나 콤바인을 들이대죠? 또 그런 기계들은 어디 있습니까?" 철은 자신이 느끼기에도 눈부신 순발력으로 그렇게 몰아댔다. 심심해서 읽은 『사상계』 가 좋은 밑천이 돼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래서 축산을 장려하고 있잖아요? 경지정리도 시작하고- 우리 실정에 맞는 농기계 공 장도 세운다고 하잖아요?" "그럼 그쪽이 먼저여야지요. 우유하고 고기가 넘치면 지금처럼 『리버티 뉴스』에다 그렇 게 요란 떨지 않고, 빵 굽는 기계 억지춘향이로 떠넘기지 않아도 사람들은 빵을 찾게 될 겁 니다. 또 경지 정리 잘되고 농기계 흔해지면 농민들도 절로 농사에 기계를 쓸 거라구요." 철은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고 받아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벌이는 운동이 꼭 실현 가능성 없는 이상은 아니잖아요-" 그녀가 그렇게 받고 무언가를 이어가려는데 공회당 쪽에서 큰 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 다. "김선생, 어이, 김선생-" 얘기에 열중에 있던 둘이 동시에 돌아보니 안선생이 손짓하며 부르다 못해 그리로 다가오 고 있었다. "김선생, 여기 나와서 뭐 해?" 저만치 다가온 안선생이 먼저 나무라듯 그녀에게 물어놓고 다시 철을 보고 깐깐한 목소리 로 말했다. "이인철씨도 돌아가요. 이제 곧 심사 결과 발표가 있어요." 그러자 김선생이 급히 몸을 일으키며 나지막하게 소곤거렸다. "우리 다음에 얘기하고 어서 들어가요." 그녀의 말투에는 철에게 이상한 기대를 걸게 하는 여운이 있었다. 그러나 진작부터 알려 져 있는 그들의 일정을 떠올리자 아쉽지만 그 기대를 거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의 경진 대회는 열흘을 기한으로 한 그 봉사 활동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행사였고, 대학생 농촌봉사 대는 내일로 마을에서 떠나게 되어 있었다. "인철씨, 정말로 수고했소. 잘했어. 실은 우리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역시 조금이라도 더 배운 사람이 달라." 시상식이 끝나고 마을로 돌아가면서 안선생이 흡족한 표정으로 철을 추켜세웠다. 그럴 만 도 했다. 철이 우수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진규도 장려상을 받아 사실상 그 대회에서는 철이네 동네가 우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또한 그 동네를 지도한 봉사대 소조의 우 승이기도 했다. "난 아까 인철씨 발표할 때 무슨 논문 읽는 줄 알았다니까. 인철씨, 정말 그 시나리오 누 가 썼소? 형님 되시는 분?" 박선생이라고 불리는 하급생 하나가 사뭇 감탄하는 어조로 인철에게 물었다. 다시 수줍어 진 철이 꼭 겸양을 부린다는 느낌 없이 받았다. "선생님들이 주신 원안을 제가 좀 고쳤을 뿐인에요. 단어 몇 개 바꾼것뿐인데." "아니던데. 중학교 중퇴한 사람 솜씨가 절대로 아니던데..." 박선생이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때껏 말없이 따라 오던 김선생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인철씨는 학력 그것만 가지구 말할 사람이 아니라구요. 아까는 내가 되레 강의를 들었다 니까요." 그 말에 철은 몸둘 곳 몰라하면서도 다시 한번 느티나무 아래서의 묘한 감정을 되살렸다. 그러나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안선생이 화제를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 숙소로 돌아가면 모두 씻고 철수 준비해. 오늘 저녁엔 마을 송별회가 있어 개인적인 시간이 안 날지도 몰라. 내일 아침 일곱시 첫 버스로 떠날 거야." "송별회?" 평소에도 술을 즐기는 대원 하나가 눈을 반짝하며 물었다. "그래. 마을 어른들이 수고했다고 차려주시는 거야. 아 참, 진규씨도 와요. 청년회에서도 몇 분 나오신다니까. 그리고-" 안선생이 뭣 때문인지 잠시 망설이는 눈치더니 인심쓰듯 덧붙였다. "인철씨도 오고. 아직 술이야 못 하겠지만 음식이라도 같이 들어요. 그래도 마을의 명예를 빛내준 사람인데..." 그러면서 힐끗 김선생을 살폈다. 그 눈길에서 인철은 문득 묘한 느낌을 받았다. 왠지 안선 생이 김선생 때문에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한 순간의 막연한 느낌이었을 뿐 그게 옳은지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때부터 마을로 돌아가 헤어질 때까지 안선생은 두 번 다시 그런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단정하고 예의바른 봉사대 리더로서 성공 적으로 끝난 봉사 활동의 마무리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철이 재궁막으로 돌아가니 어머니 홀로 마루 끝에 시름없이 앉았다가 긴 한숨과 함께 맞 았다. 또 누나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모두 어디 갔어요?" 철이 상장과 상품을 놓으며 묻자 어머니가 잘 물어주었다는 듯 울화를 터뜨렸다. "너어 형이사 한 평이라도 더 벳길라꼬(벗기려고) 일꾼들하고 개간지에 붙어 있제. 그래고 그 미친년은- 에익, 말할라 카이 또 속에 천불나네. 사람 속 오만가지로 다 뒤배놓고 물에 라도 빠져 죽는다 카미 불(우르르) 나갔뿌따. 옥경이는 그것도 핏줄이라꼬 울며 말린다꼬 따 라나서고..." 어머니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는지 철이 타온 상장과 상품조차 안중에 없었다. 철이 절로 맥이 빠져 힘없이 물어보았다. "또 왜 그러셨어요? 무슨 일이에요." "아이, 그년이 간이 배 밖에 나왔제. 식구대로 이불 하나 가주고 겨울 날 수는 없다 싶어 큰맘먹고 떠논 뽀뿌링(포플린) 열 마를 반이나 터억 끊어내 쪼가리보재기(조각보)도 못 맹 글게 빼밀어(함부로 가위질해)놨잖나? 그 뻐덕손 가주고 뭐라? 부라우스 만든다꼬? 참말로 어림서림이 없어도 유분수제- 그래고 이래 사는 년이 어예 철철이 새옷을 해입어야 되노? 염량이 뒤뚤패도(뒤뚫려도) 뒤뚤패도- 하도 복장이 터져 눈에 띄는 대로 훌뚜드려 팼디 저 화낙(성질, 혹은 화풀이)을 안부리나? 내 지한테 당부한데이, 인간 안 되는 거는 참말로 어 디 물에라도 빠져 죽었뿌라." 그냥 두면 그보다 더 심한 악담이 나올 것 같아 철이 말렸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맞지 않는 시골 생활 누나도 힘들 거예요. 웬만하면 눈감아주세요. 그러다가 또 집이라도 나가면..." 그러자 어머니가 앞 뒤 없이 철에게 화를 냈다. "저 물러터진 거 말하는 거 쫌 보래. 뭐시라? 언간하믄 눈감아주라꼬? 눈감아줄 일이래야 눈을 감아주든지 말든지 하제. 그래고 니는 정신 똑바로 차려래이. 그럿도 째진 입이라꼬 나 오는 대로 쳐주끼는 거 다 들어 주다가는 이눔의 집구석 기둥뿌리도 안 남는데이. 어마이도 잡아먹을라꼬 카는 게 장히 동생 오래비 생각할따. 그래고... 니는 도대체 사나가 그래 물러 터져 어예노? 영웅은 간흉계독을 다 품어야 영웅이 된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어머니의 주의를 자신에게로 돌린 것만도 일단은 성공이었다. "알았어요. 그런데 이것-" 철은 무조건 어머니의 말을 수긍해놓고 슬그머니 상품 꾸러미를 어머니에게 펼쳐보이며 말끝을 흐렸다. 어머니가 그제서야 그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밥그릇만한 앉은뱅이시계의 반 짝반짝하는 몸체가 얇은 표장지 밖으로 드러나보였다. "이거 시계 아이라? 웬 거로?" "상탔어요." "엉이? 상? 그래믄 니 오늘 일등했나? 거 뭐시라 사에치..." "4H 경진 대회요. 내 위에 특상이 하나 더 있기는 하지만 일등이나 마찬가지예요. 우수상 받았어요." "아이, 그 퍼석한 나무 쪼가리 몇 개 가지고?" 그러면서 앉은뱅이시계를 집어드는 어머니의 표정과 말투는 조금 전에 펄펄 뛰며 악담하 던 그 표정과 말투가 아니었다. 죄 없는 물욕과 언제봐도 기특한 아들에 대한 사랑이 그 불 같은 분노를 깨끗이 씻어낸 것이었다. "참 잘됐따. 집에 시계 하나가 없어 낮인동 밤인동 모리겠다- 그래고 옥경이 그 기집아 억시기 좋아할따. 인제는 시간 몰라 지각하지는 않을 테이."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녀를 사로잡는 또 다른 어두운 감회가 철을 난감하게 했다. 갑자기 어머니가 푸념조가 되어 말했다. "니는 뭘 해도 일등이따. 학교서도 일등, 밖에서도 일등. 그런데 이걸 어예노? 에미란 게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어 그런 니를 뿔뚝농군으로 맹글고 있으이. 생 아아(아이)를 잡아 들라 무식꾼을 맹글어가이. 이 죄를 어예 갚을로? 이 죄를 어예노?"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저 학교 그만둔 지 이제 겨우 석 달입니다. 까짓 거 내년에 가 면 되죠. 내년에 학교 가서도 일등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철은 어머니의 푸념이 비탄으로 번지는 걸 막기 위해 얼른 그렇게 말해놓고 다시 순간적 인 기치로 그녀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머니. 지금 곧 전 좀 부쳐주실 수 없어요? 파전 같은 거 맛있게." "적(전)을 꾸워달라꼬? 난데없이 파적은 왜?" "그래야 제 체면이 서요." 철은 일부러 답을 끌었다. "체면? 머리에 소똥도 안 벗어진 아아가 어디 체면 세울 일이 있노? 그것도 파적 꾸워주 고 채릴 체면이..." "실은 말이에요. 나를 지도해준 봉사대 대학생들이 내일 떠나는데 동네에서 송별회를 해 주는 모양입니다. 공짜로 좋은 시계 하나 생기게 해 주었으니 갚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요? 게다가 저도 초대해주었는데 빈손으로 그냥 갈 수 없어서." "그래믄 파적이 아이라 소고기 집산적이라도 꾸어야 될따마는. 글치마는- 당장 적(전)거 리를 어디서 구하노? 집에 밀가리도 없고 기름도 참기름 한 방울뿌인데..." 어머니가 무엇보다 중히 여기는 게 체면치레였다. 그것도 편애하는 아들의 체면이 걸리는 일이 되자 어머니의 주의는 금세 그리로 쏠렸다. 철의 간계 아닌 간계가 잘 맞아떨어진 셈 이었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바빠졌다. 평소에는 상것들이라 해서 발걸음도 않던 이웃을 돌아 밀가 루와 들기름을 빌려오고 텃밭에 나가 애호박과 풋고추를 따들였다. 그 바람에 전례로 보아 서는 한바탕 충돌이 남아도 큰 충동이 남아 있었던 영희와의 시비도 흐지부지 일단락이 지 어졌다. 해질 무렵 영희가 근처 개울에서 머리라도 감은 듯 멀쑥하게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벌써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장작불로 달궈놓고 전을 부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얼릉 저녁이나 해라. 완악시러븐 년." 힐끗 영희를 돌아보고 혀를 끌끌 차던 어머니는 그 한마디를 던지고 다시 전을 부치는 데 만 열중했다. 철이 여러 종류의 전이 가득 찬 소쿠리를 들고 동방에 이르렀을 때는 해가 진 뒤였다. 아 직 밖이 훤한데요 저녁들을 마쳤는지 벌써 송별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두 칸 장방인 원래의 동방과 4H 회관으로 빌려 쓰는 작은 방을 터서 열평 가까이 되는 넓은 방안에는 동기를 내 온 듯 같은 색깔과 크기의 호마이카상 셋이 잇대어 펼쳐지고 동장을 비롯한 동네 어른 몇과 청년회 간부들, 그리고 대학생 농촌 봉사대원들이 술잔을 돌리는 중이었다. "아이, 그양 오제, 멀 이런 걸... 그거도 이쿠로(이만큼이나) 마이." 말은 그래도 철이 건네는 소쿠리를 받는 청년회 회장의 표정이 그리 싫지 않은 표정이었 다. 그러고 보니 펼쳐진 안주가 그리 진진한 편은 못됐다. "암만캐도 두들 양반마(마을) 솜씨가 다르다 카이. 이거 한 쪼가리 먹어보래. 재료사 그게 그거따마는 입에 살살 녹는다." 접시에 갈라놓기 전에 먼저 한 조각을 떼어 먹어본 총대(입담배 마을 대표)가 그렇게 음 식 솜씨를 칭찬했다. 철은 어머니는 대신해 겸양을 보일까 하다가 그만두고 머뭇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먼저 와 대학생들 곁에 앉아 있던 진규가 인철을 끌었다. "인철씨, 왔구먼. 그런데 이거 술잔을 권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안선생이 그러면서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건너편에 앉은 동장을 쳐다보았다. 벌써 막걸리가 한잔 돌았는지 동장이 불그레한 얼굴로 호탕하게 말했다. "먼 소리껴? 음식 끝에 맘 상한다꼬. 어예 사람이 앉았는데 술잔이 없을 수가 있노? 촌에 서는 저만 나이믄 다 한잔씩 한다꼬. 거다가 저 집 술 내력이 어떤 내력인데. 자들 아부지 동영씨 술도 글치마는 또 명훈이 그 사람은 어떻다꼬. 자도 나중에는 아매 말술은 될 꺼로." 그 바람에 이래저래 거북하던 자리는 조금 편해지고 수줍음도 덜해져 철은 비로소 찬찬히 방안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봉사대원들 가운데 김선생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만나 얘기하자는 낮의 약속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를 다시 본다는 데 은근히 가슴 설데며 나온 철로서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김선생과 박선생은 저물기 전에 전통 동족 마을 구경해둔다고 나가 안 돌아왔소. 먼빛으 로 궁금히 여기면서도 아직 구경할 틈이 없었지. 왜 면 소재지 뒤에 있는 기와집들 말이오. 아 참, 인철씨도 거기 출신이던가?" 안선생이 무슨 눈치를 보았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김선생의 행방을 일러주었다. 그 러고 보니 박선생도 그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아니 라 잠시 늦어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녀가 간 곳이 바로 자신들의 고가가 있는 두 들이라는 게 철에게 적이 위안이 되었다. 김선생은 방안에 불이 켜진 뒤에야 두들에서 돌아왔다. 그 동안 사양하면서도 막걸리를 석 잔이나 얻어 마셔 머릿속이 얼얼해오던 철은 그녀가 들어오는 걸 보자 일시에 술기운이 가시는 기분이었다. 거기다가 그녀가 끼여앉은 게 바로 자신의 옆자리라 묘한 긴장까지 느 꼈다. "어머, 인철씨도 술 마시네." 자리에 앉은 그녀가 신기하다는 눈길로 철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하마 헌헌장부가 까짓 막걸리 몇 잔이사. 그런데 여선생은 어옐라이껴? 요새 대체에서는 여학생들도 곧잘 술을 먹는다 카더라마는." 동장이 철을 대신해 그렇게 받고는 두 되들이 막걸리 주전자를 들었다. "맥주면 좋을 씨더마는 촌에서 막걸이밖에 없니다. 한잔 받아볼라이껴?" "고맙지만 전 못 해요. 한 모금만 마셔도 머리부터 아파서." 김선생이 놀라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들어올 때부터 그녀를 살피던 눈치이던 안선생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른이 주시는 거니 한잔 받아두지. 자리가 자리 아뇨?" 그 말에 김선생이 마지못해 잔을 받았으나 잠시 입에 대는 시늉만 할 뿐 정말 한 모금도 마시지는 않았다. 시작은 점잖고 예절바른, 그래서 조용하고 약간은 굳어 있던 술자리였다. 마을 어른들과 대학생들은 나이차 때문에 풀어놓고 마실 형편이 아니었고, 청년회 간부들과 대학생들은 환 경과 학력의 차이로 공통의 화제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긴하지도 않은 얘기를 안 주 삼아 술들만 주고받았는데, 술이 좀 돌고 나니 분위기가 차츰 달라졌다. 술기운을 빌려 농부다운 어눌함을 벗은 마을 어른들이 나름대로 뭔가를 떠들기 시작했고, 청년회 간부들도 대학생들을 잡고 시골에 묻혀 사는 그들의 한이나 동경을 하소연의 형태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학생들도 할 일을 다 끝냈다는 데서 어떤 해방감을 느꼈는지 평소의 조심성과 공손함을 잃고 스스럼없이 그들과 어울렸다. 그렇게 되니 방안은 가까이 앉은 끼 리끼리의 얘기로 점점 떠들썩해졌고 오래잖아 노래판이라도 벌어질 기세였다. 하지만 철에게는 갈수록 거북해지는 자리였다. 아직 그들과 함께 취할 수 없는 나이도 아 니었거니와 그런 자리에 어울리는 얘깃거리도 없었다. 김선생이라면 낮의 일도 있고 해서 전혀 얘기가 안 될 것도 없었지만 그녀는 또 진작부터 여러 사람의 표적이 되어 철이 말을 붙일 틈이 없었다. 철이 그야말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킨 것은 자리에 앉은 지 한 시간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대학생 봉사대의 눈에 보이는 실적 역할은 이미 끝나 아무도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을 보고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자 무언가 김선생을 잡고 얘기에 열중해 있던 진규가 알은채를 했다. "왜 벌씨로 갈라꼬?" "인철씨, 일어나시게요?" 김선생도 잇달아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갑작스레 당황한 철이 애매하게 우물거렸다. "그냥 머리가 좀 아파서... 잠깐 밖에서 바람이나 좀 쐬려구요." 그런데 그때 얘기치 않은 일이 생겼다. 김선생이 바로 그거라는 듯한 표정으로 철을 따라 일어났다. "맞아요. 나도 시끄럽고 머리가 아파 바람이나 좀 쐬고 오려고 했는데... 잘됐어요. 같이 가요." 그녀가 금세 철의 팔이라도 낄 듯 따라나서자 철은 절로 허둥대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그냥... 아니, 좀..." 그때 뭔가 번쩍하며 철의 눈가를 스쳐가는 빛줄기 같은 게 있었다. 동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가 흘끗 쏘아보는 안선생의 눈길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게도 그 눈길이 인철을 허둥댐에서 끌어내었다. 누가 자신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는 게 특유의 묘한 오기를 불러일 으킨 탓이었다. 그래, 내가 이 여자와 둘이서 나간다고 안 될 게 뭔가. "저기 당나무 아래가 조용하고 시원합니다. 거기 잠시 앉았다 들어가죠." 마음을 다잡아먹은 철은 큰 소리로 그렇게 말해 방안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려는 곳까지 알리고 그녀를 동방에서 멀지 않은 당나무 언덕으로 안내해 갔다. 뿐만 아니라 둘만 있게 되자 먼저 말까지 걸었다. "참, 아까 저희 문중 마을에 들르셨다구요?" 그곳에 관한 거라면 다른 화재보다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린 유도였다. 김 선생은 안내받은 장소에 대한 감탄부터 쏟아놓았다. "정말 여기 좋은 곳이네요. 시원하고- 조용하고." 그러면서 축대에 자리까지 잡고 앉은 뒤에야 철의 물음을 받았다. "아, 그 언덕 마을요? 진작부터 궁금했는데 통 짬이 나야죠. 벼르고 벼르다가 오늘 저녁에 야 겨우 한바퀴 둘러보았어요." "어땠습니까?" "말로만 듣던 전설 속의 마을 같았어요. 그렇게 오래 된 기와집들이 여러 채 한꺼번에 몰 려 있는 것은 처음 보았거든요." 그렇게 철의 이야기 속으로 끌려들어오기는 해도 깊이 들어갈 마음은 없는 듯했다. 철이 은근히 조바심을 내며 그녀의 의식을 한 번 더 자기쪽으로 끌어당겼다. "거기 무슨 서당이라고 되어 있는 정자 같은 집 구경하셨습니까?" "녜. 석천서당이던가요? 경치는 좋은 데 자리잡고 있었지만 왠지 버려진 집 같던데요." "그 서당 바로 곁, 제사라고 하는 작은 기와집 건너에 있던 큰 집은요? 마당에 오래 된 향나무가 서 있던..." "아, 그 집. 기억나요. 물 마른 연못이 있고 사랑채가 따로 떨어져 있던 집- 이상한 당호 가 걸려 있고..." "따로 떨어져 있던 건 사랑채가 아니고 서실이라 부르는 건물입니다. 그런데 당호가 왜 이상했죠?" "해상고택이라고 되어 있는 걸루 기억되는데- 여기 무슨 바다가 있어요?" "아, 그런 말이죠-" 비로소 기히를 얻은 철은 그래놓고 한참 뜸을 들인 뒤에야 자신도 최근에 들어서 안 일을 당연한 상식인 양 말했다. "요새 사람들이 한자의 뜻을 너무 좁혀놔서 그렇습니다. 해자가 바다만을 뜻하는 건 아닙 니다. 그냥 물이라는 뜻으로 새기면 됩니다. 옛날 그 집 언덕 앞에 큰 소가 있었거든요. 지 금은 갈라져버린 두 갈래 강물이 그때는 그 한곳에서 합쳐져 뱃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크 고 깊은 소가 되었던 거죠.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런대로 볼 만했는데." "그래요? 요샌 좀 큰 웅덩이 정도밖에 안 되던데..." "변한 게 그뿐이겠습니까? 좀 전에 말씀하신 그 집의 마른 연못- 거기도 물이 그득하고 물가에는 해당화가 만발했습니다. 그것도 겨우 십여 년 전에." "옛날에 사신 마을이라지만 정말 자세히 기억하고 있네요." "그게 바로 저희 집이었거든요. 저도 아주 어렸을 적에는 그 해당화 그늘에서 뛰어놀았구 요." 거기서 느닷없는 감회로 철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위로 9대 이백 년을 살아온 집입니다." "그랬군요. 낡았지만 대단했어요. 요즘도 이처럼 산골인데- 그 옛날에... 그러고 보면 인철 씨네 꽤 명문 대가였던가 봐요." 김선생이 감탄과 함께 철의 가문에 흥미를 나타냈다. 역시 철이 은근히 유도해온 바였다. "뭐, 그렇지도 못합니다. 그저 상놈이나 면한 토반이죠. 다소 인상적인 입향담은 있지만." "그게 어떤 건데요?" "삼백여 년 전에 한 선비가 일곱 아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은거해 왔습이다. 그런데 이 선 비는 정신적으로는 중국과 직거래를 하고 있던 좀 별난 분이셨죠. 자신을 명나라의 신하로 보고 명나라가 망하자 나라가 망한 걸루 여겨 이곳을 수양산으로 삼은 거니까요. 거 왜 백 이 숙제의 수양산 아시죠?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사대주의라도 그보다 더한 사대주의가 없 을 테지만 그때는 꼭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병자호란의 치욕감이 남아서인지 적잖이 선비들이 그런 식으로 은거했는데 보통 그들을 숭정거사라고 부릅니다. 숭정은 명나라가 망 할 때 쓰고 있었던 연호구요..." 얘기가 그쯤에 이르자 다시 대화의 주도권은 철에게 온전히 넘어왔다. 김선생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는데 아마도 그녀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여서인 것 같았다. "결국 그분은 다시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여기서 돌아가셨지만 그 다음 대에 이르러 일문 은 크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분의 셋째아들이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른 것을 비롯해 아래위로 세 아들이 높은 벼슬에 오르고 초야에 남아 계셨던 분들도 모두 도산서원의 원장 격인 도유사를 맡아보실 정도의 학자로 자라나신 겁니다..." 그렇게 시작된 가문의 얘기는 곧 철의 직계로 이어지고 다시 대를 지나 이윽고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미화되고 과장된 아버지의 전설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듣고 있는 그녀였다. 짧게 잡아도 한 시간은 이어졌을 그 얘기를, 그녀는 별로 지루해하는 기색없 이 듣고 있었다. 나중의 짐작이었지만 그녀는 틀림없이 그런 얘기들이 낯선 환경에서 자란 여자임에 틀림 없었다. 거기다가 철의 턱없는 조숙과 마구잡이 책읽기로 기른 입담에 넘어가 자신도 모르 게 깊이 빠져든 듯했다. 그녀는 다시 반시간은 좋게 철이네 가족사를 까닭 모를 한숨과 함 께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집안이- 지금 어떻게..." "지금 이렇게, 라니? 우리가 어때서요?" 그녀도 마을 사람들을 통해 철이네의 어려움에 관해 들은 게 있는 듯했다. 하지만 정작 철이 그렇게 묻자 대답하기가 난처했는지 급히 말을 돌렸다. "아뇨. 그냥... 그런데 그 개간 잘 돼가요? 우리도 일손이 돌면 하루쯤 그곳에 가소 노력 봉사를 해드리려고 그랬는데." 철은 갑자기 어두운 현실로 되끌려온 게 싫었으나 과장된 어조로 받았다. "네. 아마 이달말이면 개간은 완료될 겁니다. 남은 것은 새 땅을 비옥하게 가꿔 농장다운 농장으로 만드는 일뿐이죠." 철은 그녀가 더 물어주면 형의 청사진을 빌려 또 한바탕의 화려한 꿈을 펼쳐보일 작정이 었다. 목장, 목초지, 알팔파, 레드 클로버, 싸일로, 엔시레지, 그리고 그림 같은 집과 발전용 풍차...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제게 그 개간지 좀 구경시켜주지 않으시겠어요? 먼빛으로는 봤지만 갑자기 궁금해지네. 자리두 배기구요." 그녀가 바지 엉덩이께를 가볍게 털며 철에게 말했다. 철로서는 좀 뜻밖이었지만 문제 없 는 요청이었다. 그때 이미 무엇엔가 한껏 고양되어 있던 철은 그녀와 둘이라면 개간지가 아 니라 십리 밖 산기슭에 있는 공동묘지라도 가줄 용의가 있었다. 더구나 으스름 달밤이기는 하지만 밤길을 걷기에는 어렵지 않을 만큼 밝았다. 당나무숲을 나와 동방 앞을 지나다 보니 아직도 술판이 한창이었다. 노래가 시작되었는지 청년회장의 득의해 부르는 최신 유행가가 길가까지 흘러나왔다. 철은 그들에게 붙들려 노래 판으로 끌려들어가는 걸 은근히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개간지 입구는 동방 앞에서 국도를 따라 이백 미터를 채 넘기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입구 에서 뭣 때문인가 잠시 망설이던 김선생이 철을 따라 개간지로 들어섰다. 개간지 한가운데 난 길로, 거기 다시 한 삼백 미터만 올라가면 한눈에 들어오는 산등성이에 이르게 되어 있 었다. 오르막이라고는 해도 어디든 자동차가 올라갈 수 있을 만큼 경사가 완만해 그 산등성이에 오르기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으스름한 달빛 아래 내려다보니 밭고랑 하나 없이 펼쳐진 이 만 평의 땅이 작은 바다처럼 보였다. 산 위쪽으로 2정보 정도는 아직 잡목만 베어낸 상태였 으나 낮처럼 파뒤집은 땅과 그렇지 않은 땅의 경계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 한가운데 웅장한 저택만 지어놓으면 서부 영화에서 본 어떤 농장에도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혹시라도 개간지의 초라한 현실이 그대로 드러날까 걱정했던 철에게는 그 같은 개간지의 변화가 으스름 달빛이 펼친 마술처럼 느껴졌다. 거기다가 한여름밤의 환상적이고 신비한 정 취가 키운 그의 열정은 이제 엉뚱함이나 조숙함을 넘어 되바라지게까지 느껴지는 희망을 품 게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철은 김선생을 손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아득한 존재로 여겨왔다. 그 러나 으스름 달빛에 취하고 들꽃 향기에 취하고 산새울음과 풀벌레 소리에 취해가는 동안, 어느새 자신도 그녀 못지않은 곳까지 솟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내가 이상으로 그리던 여자 와 단둘이서 이렇게 서 있다... 감정이 한번 그렇게 이상한 방향으로 자리잡자 거기 어울리는 억측과 과장이 뒤따랐다. 이 여자도 어쩌면 나를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낮에는 확실히 내 지식에 감탄하는 눈치 였고, 이 밤에도 처음부터 자진해서 나를 따라나오지 않았는가. 뿐만 아니라 이 외진 곳도 스스로 데려와 주기를 청했다. 이 여자는 틀림없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 "차암 좋네요. 앞날이 기대되요. 역시 유서 깊은 가문의 사람들은 다른가 봐요. 아무리 나 빠져도..." 철이 자신만의 열정에 차 갑자기 할말을 못 찾고 있는 동안 조용히 개간지를 둘러보던 김 선생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철에게는 그 말까지도 자신에게 유리하게만 들렸다. 봐라. 이 렇게 나에 대한 호감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다음 말이 예상 밖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발길을 돌리면서 명령조로 말했다. "잘 구경했어요. 그럼, 우리 이제 내려가요." 철은 그때 그녀에게 무슨 얘기를 할까를 막 생각해낸 참이었다. 얼마전에 지리하게 읽기 는 했지만 얘기는 대강 기억하고 있는 문고판 셰익스피어의 희곡『한여름밤의 꿈』이었다. 철은 그 중에서 요정들과 사랑의 미약 얘기를 꺼내 그녀의 진심을 확인하고 자신의 터질 듯 한 가슴도 고백할 기회를 만들어보려 했다. "네? 벌써요?" 그 소중한 기회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움찔하며 철이 반문했다. "그래요. 돌아가야죠. 밤도 늦은데."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쌀쌀해진 듯 느껴졌다. 그래도 철은 얼른 미련에서 깨나지 못한 채 사정하듯 말했다. "얘기라두 좀더..."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정말로 알아들을 만큼 차가워졌다. "인철씨 집안 얘긴 재밋게 들었어요. 이만했음 됐어요. 개간지도 잘 구경했구요. 이젠 돌 아갈 때에요." 그때 갑자기 들려온 외침이 아니었더라면 철은 벌써 거기서 참담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 그래도 진상을 알아보지 못한 철이 무아라고 그녀를 달래보려 하는데 어느새 다가왔는지 개 간지 중턱까지 올라온 그림자가 소리쳤다. "거기 김선생이야?" 약간 술기운이 배어 있기는 해도 틀림없이 안선생의 목소리였다. 철은 비로소 퍼뜩 정신 이 들었다. 이어 왠지 당황해하는 김선생의 대답을 받는 안선생의 말투는 그대로 철의 정수 리에 끼얹는 한 바가지의 얼음물 같았다. "김선생, 너 정신이 있는 애야? 없는 애야? 이 오밤중에 여기가 어디라구, 암말두 않구. 저게 정말..." 철이 없었다면 상소리도 마다 않을 듯했다. 그 말을 받는 김선생의 말투와 목소리도 지금 까지 철이 들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종철 오빠, 성났구나. 오빠, 성났어?" 매달리는 듯한 콧소리로 그렇게 말해놓고 힐끔 철을 돌아본 뒤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인철씨가 개간지 보여준다기에- 술자리에 돌아가기두 싫고. 오빠, 나 술자리 싫어하는 거 잘 알잖아?" 그새 다가온 안선생은 그래도 속이 풀리지 않는지 그녀를 잠시 노려보더니 이번에는 철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인철씨도 그래. 마을을 위해 봉사하러 온 사람을... 이렇게 호젓한 산등성이로 끌고 와, 그래, 어쩌겠다는 거야?" 하지만 철이 정말로 참담한 기분에 빠진 것은 그로부터 한 오 분쯤 지나서였다. 안선생의 기세에다 마뜩찮은 내심이 들킨 것 같은 황당함이 겹쳐 제대로 해명조차 하지 못하고 그들 과 헤어진 철은 자기만 아는 지름길로 개간지를 내려와 동방으로 갔다. 그런데 미처 동방에 이르기도 전에 그들이 국도를 따라 내려오며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과 부딪치기 싫어 길갓집 돌담 뒤로 몸을 숨긴 철은 본의 아니게 그들의 말을 엿듣게 되었다. "너무 화내지 마, 오빠. 아직 어린애잖아?" "열여섯이 어린애면 너는 할머니야? 그리구- 너 무식한 촌놈들이 얼마나 의뭉스러운지 알아?" "그래도 생판 무식꾼은 아니던데. 이야기를 시켜보니 제법 들을 만하더라구. 말만 들어서 는 박선생, 차선생보다 더 지성적이야." "야, 은영아. 이 기집애야. 제발 따라지 대학 티 좀 내지 마라. 지성적이라는 게 도대체 뭔 데? 잘 들어. 나는 이번이 세 번짼데- 봉사 활동 나가면 꼭 동네마다 그런 꼴같잖은 촌놈들 이 하나씩 있다는 거 너 모르지? 한글이나 겨우 깨치고는 되잖은 소설 나부랭이만 잔뜩 읽 어제쳐 입만 깐 녀석들 말이야. 그래놓고는 세상에서 유식한 건 저뿐인 줄 안다니까. 너, 그 런 녀석들 오냐오냐 받아주다간 그 녀석들이 네 배 위로 기오르는 꼴 보게 된다." 제11장 우기 오전나절 반짝 볕이 드는가 싶더니 오후가 되자 다시 지루한 늦장마가 계속되었다. 어머 니가 집을 비운 틈에 한숨 자두려고 잠을 청하던 영희는 결국 낮잠을 단념하고 짜증스레 일 어났다. 아침저녁으로 불을 지펴도 몸이 끈적끈적해오는 듯 눅눅한 공기와 연일 약을 뿌려 한 쓰레받기씩 쓸어내도 천장에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는 파리들의 극성 때문이었다. 개간이 끝난 것은 닷새 전이었다. 어쨌든 오빠 명훈은 야산에서 2만평이 넘는 밭을 일구 어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야산 등성이를 벌겋게 볏겨놓았다 해서 그들 일가에게 당장에 무슨 큰 변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일찍 개간된 땅에는 콩이나 조 같은 것이, 그리고 그뒤로 는 메밀이 뿌려졌지만 결과는 농사를 잘 모르는 영희의 눈에도 싹수가 노래 보였다. 잔디 같은 싹이 돋던 조는 장미에 아예 녹아버렸고, 콩은 씨 뿌린 지 두 달이 가까운데도 키가 한 뼘을 넘지 못했다. 메밀은 한창 싹이 돋아나고 있었지만 결과는 역시 뻔해 보였다. 거기다가 장마까지 겹쳐 진뻘밭이 된 개간지로 들어갈 수조차 없게 되자 이제 그들 일가 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하루빨리 군에서 검사 측량을 나와 또한 하루라도 빨리 개간 보조금을 타게 해주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8만 원 남짓인 그 보조금은 제대로 개간을 하려면 전액을 고스란히 부어놓어도 남을 게 별로 없었다. 그러나 개간지에서 일 정보를 야산인 채로 떼어 팔아 다른 사람에게 개간하게 함으로써 그 부분에 대한 보조금을 남길 수 있었고, 또 애초보터 벌겋게 사태가 져 있던 곳 을 명훈이 양쟁기로 갈아엎은 평수도 적지 않아 그 부분의 보조금도 그들 몫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그 밖에 야산을 판 돈과 그 동안 되찾은 뙈기 논을 판 것도 일꾼들 품삯으로 집어넣었으니, 이래저래 그들 일가가 그 개간 보조금에서 쓸 수 있는 돈은 3만 원이 넘었다. 어머니는 벌써 그 돈의 용처를 다 결정해놓고 있었다. 절반을 집을 '우부리는' 일과 인철 을 진학시키는 데 쓰고 절반은 내년 농비로 남긴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희에게는 또 달랐 다. 말은 않고 있어도 영희는 지난번 방천에서 잡혀올 때 오빠 명훈이 한 약속을 굳게 믿었 다. "보조금이 나오는 대로 널 우선해 보내주마. 그게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네가 서울에서 새로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될 만큼은 떼어내지. 그때까지만 참아다오. 너를 또다시 맨손으로 서울 거리에 내팽개칠 수는 없다." 그때 명훈은 그렇게 말했었다. 물론 영희도 인철에게 나날이 놈팽이 티가 배어가는 게 가 슴 아팠고, 비록 흙벽돌집이라도 철들어서는 처음 가져보게 되는 '우리집'의 의미도 감회 깊 은 것이었다. 개간지가 생산을 시작할 때 까지의 농비도 가족들에게는 생명선이나 다름없음 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렵의 영희는 그런 걸 따져 자신을 억제하고 양보할 수 있는 상태가 못 되었 다. 잠시 불안한 소강 상태에 빠져 있기는 해도 어머니는 이미 한지붕 아래 살 수 있는 사 람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점점 배신의 혐의가 짙어가는 창현은 미칠 듯한 그리움과 불 같은 미움으로 번갈아 그녀를 손짓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