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10 제3부 떠도는 자들의 노래 지은이:이문열 출판사:문학과지성사 제 12 장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수업이 있는 날 오전이어서 그런지 도서관은 한산했다. 인철은 다분히 조작된 열정으로 빠져들었던 책에서 눈길을 떼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오월의 신록이 교정을 덮고 있 었다. 오늘 강의는 뭐였더라-인철은 약간은 쓸쓸한 기분으로 그 시각 자신이 들어가 있어야 할 강의실을 떠올려보았다. 화요일 오전이면 '언어학 개론' 세 시간 연강이었다. 그러자 이번 에는 불안과 울적함이 그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인문계 신입생의 첫 학기는 개론의 홍수에 빠져 흘러가게 마련이었다. 인철이 따야 할 학 점의 태반도 이런저런 개론에 할애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애써 들어온 대학을 따분하 다 못해 불만스럽게 만든 것이 바로 그 개론이었다. 제도 교육에서 벗어나 지내는 동안의 남독은, 특히 지난 3년의 체계 없는 책읽기와 그것 에 바탕한 나름의 사유는 인철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한 절름발이 인문 지식인으로 만 들어놓았다. 체계와 정확성을 요구하는 과학을 경원하는 만큼이나 산만함과 모호함을 추상 화로 얼버무릴 수 있는 문학에의 지나친 기울어짐이 만들어낸 특성이었다. 따라서 어떤 개 론은 그 동안 형성된 자기류의 고집과 선입견 때문에 동의보다는 불만이 더 많았고, 어떤 개론은 그 과학적 지향 때문에 수용 자체가 힘들었다. 철학 개론과 문학 개론이 전자의 예 라면 언어학 개론은 후자의 예였다. 언어학 개론이 그 과학 지향성으로 인철을 질리게 한 것은 특히 그 앞머리에서 다루어지 는 음운론 때문이었을 것이다. 임용준 교수는 철저한 언어학자답게 총론의 문학적 취사는 단 한 시간으로 뛰어넘고 바로 음운론으로 들어갔는데, 인철의 혼란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ㄱ의 발음이 영어 알파벳 대,소문자로 예닐곱이나 표기될 만큼 많다는 따위 구체적인 지식 도 그랬거니와 그 분석의 세밀함과 정확성도 수지와 도식에 버금가는 무게로 머릿속을 짓눌 러왔다. 그래도 처음 얼마간 인철은 힘들게 자신을 그 새로운 지식에 적응시키려고 애썼다. 힘들 게 들어온 대학이고 거의 여지없이 선택한 전공이었다. 그런데 그 전공에는 언어학이 필수 이고, 이 대학은 오히려 언어학쪽의 비교 우위로 타대학 국문과와 변별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면서 인철의 인내는 끝나고 말았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과 함께 그 강의실이 지겨운 것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오래 혼자 읽고 익히는 과정에서 생 긴 특이한 지식 수용 방식도 인철을 강의실에서 멀어지게 했다. 이를테면 음성보다는 문자 가 훨찐 명확하고 효율적으로 수용되며, 집단 속에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 지적 흡수력 이 몇 배나 커지는 것 따위가 그랬다. 따라서 5월에 접어들면서부터 인철은 강의실보다 도서관에 앉아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 다. 모든 개론은 거기서 학점을 취득할 정도로 교재를 읽어치우고 나머지는 새로운 지적 탐 사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역시 개론 수준이었지만 비교적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난점에서 벗 어나는 분야들이었다. 정치학, 사회학, 논리학, 미학 따위가 그랬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은근한 불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결국 이 대학에서도 하나의 국외자 혹은 나그네로 주변을 맴돌다 떠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이인철씨, 역시 여기 계셨네요." 인철이 이제는 불안을 넘어 울적함까지 느끼며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나 직이 말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만했다. 무슨 일인가로 입학과 동시에 휴학 했다가 그해 다시 복학했다는 같은 과 여학생이었다. 인철이 그 여학생을 처음 본 것은 한 달 전에 송추에서 가졌던 학년 야유회 때였다. 신입 생 환영회 때 보지 못한 여학생이 둘이나 더 있어 궁금히 여기는데, 그런 데 밝은 삼수생이 설명해주었다. "저쪽에 나이들어 보이는 애 있지? 쟤는 작년 학번이라더라. 보기에는 뭔가 사연이 있을 성싶지? 입학만 하고 휴학을 했다나.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새침데기는 우리하고 동긴데 신 입생 환영회 때 나오지 않은 모양이야." 신입생 환영회 때 인철은 솔직히 여학생들에게 실망했다. 이제는 몽롱해진 명혜의 환상뿐, 소년 시절이 삭막하게 지나가게 된 것은 자신이 또래 집단으로부터 소외된 탓으로 여겨온 인철은 그 방면으로도 대학에 적지 않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제야말로 신분에 주눅들어 하지 않고 사귈 수 있는 여자애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기분으로 여학생들을 둘러보았으나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단발머리 서넛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날 새롭게 나타난 둘은 그런 단발머리들과는 사뭇 달랐다. 하나는 차림부터가 '여왕'이라는 이미지를 단번에 떠올리게 할 만큼 화사하고 우아한 데다 얼굴조차 눈에 띄 게 예뻤다. 앉는 것도 자연스럽게 그네들 가운데가 되어 언제나 좌우에 한둘을 거느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에 비해 다른 하나는 차분한 성숙미로 나머지와 확연히 구분되었 다. 기껏해야 한 해 빠른데, 몇 살이나 터울지는 언니 혹은 정 많은 조교처럼 한 발 물러서 서 나머지를 돌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에도 둘 사이에는 묘한 대비를 느낄 수 있었다. '여왕'은 사람을 압 도하듯 똑바로 마주보거나 아예 보지 않고 다른 곳을 응시했다. 내가 선택한 사람 외에는 관심 없어, 라고 말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그에 비해 '언니'는 사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은 없었지만 끊임없이 살피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마치 야유회에 나온 모두를 보살피러 나온 듯,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은 모두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인철에게 더 강렬한 호기심을 일으킨 것은 당연히 여왕 쪽이었다. 인철은 처음 그녀와 눈 길이 마주쳤을 때 그 옛날의 분홍 무지개를 떠올릴 만큼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아름 다움이 주는 감동이었다. 하지만 작긴 해도 특별한 접촉이 있었던 것은 언니 쪽이었다. 그날 도 은근한 취기로 일찍 취해 계곡 바위를 베고 잠든 인철이 해질녘 눈을 떴을 때 머리 밑에 는 손수건으로 묶은 베개가 고여져 있었다. "시골에서 들었는데 바위를 베고 자면 입이 삐뚤어진데요." 인철이 일어나자 언니가 자 연스럽게 풀단에서 손수건을 풀면서 말했다. 하지만 인철은 한동안 그런 그녀의 친절이 특 별히 자신만을 향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끊임없이 살피는 눈길은 모두를 향한 것이라고 본 까닭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인철은 유난스레 자신에게로 모아지는 듯한 그녀의 눈길을 느끼 기 시작했다. 절반밖에 들어가지 않는 강의실이지만 거기서 이따금씩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돌아보면 어김없이 그녀의 가벼운 눈웃음과 마주쳤다. 도서관에서도 그랬다. 한참 책에 열중해 있다가도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주위를 살피면 멀지 않은 곳 에서 가만히 눈을 내리까는 그녀를 찾아볼 수 있었다. 어쩌면 그날도 인철의 책읽기를 중단시킨 것은 그런 느닷없는 자기 성찰이 아니라 언제부 터인가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눈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인철에게는 그 같은 그 녀의 살핌이 썩 불쾌한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흥미를 일으키지도 못했다. "역시, 라고 하시는 것은 제가 여기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는 뜻같은데요?" 인철 이 추궁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렇게 받자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강의 시간에 들어오지 않은 걸 보고 짐작했어요. 왜 강의를 듣지 않으시죠?" "제게는 듣는 것이 읽는 것보다 영 비효율적이어서요." 인철은 그렇게 얼버무렸다. 그녀는 아직 인 철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보다 큰 이유를 밝힐 만큼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 는 그것마저도 오랫동안 인철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던 사람처럼 알아맞혔다. "실은 강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거죠? 나는 그런 걸 배우러 여기 오지 않았다는 기분..."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무슨 부끄러운 일을 들킨 사람처럼 인철이 조금 당황하며 물었다. "저도 작년에는 그랬으니까요. 비록 한 달밖에 강의를 듣지는 않았지만..." "그래요?" "해마다 많은 신입생들에게 일어나는 일이에요. 흔히 국문과라면 대개는 문학을 연상하며 지원하죠. 그런데 유난히 어학 쪽을 강조하는 이 학교에 들어오면 모두가 얼마간은 황당한 기분이 되는가 봐요." "나는 나만 그런 줄 알고... 오늘 한결 위로가 되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첫 학기부 터 강의를 빠지고 도서관에서 제 좋아하는 책이나 읽는 간 큰 신입생은 흔치 않을걸요. 그 런데 '철학 개론'은 또 왜 안 들으시죠?" 다시 그녀가 인철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음을 드 러내는 물음이었다. 거듭 자신이 관찰되고 있음을 느끼자 인철의 기분은 까닭 모르게 서먹 해졌다. "그야 뭐, 교재로 학점만 따면 되니까..."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요. 김교수님은 벌써 여섯 시간째 플라톤만 강의하고 있어요. 선배들 말을 들어보니까 이번 학기는 플라톤으로 끝장을 볼 모양인데요." 인철이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프로타고라스까지의 교재를 따라가는 지리한 그리스 철학사였다. 그 런데 듣기를 그만둔 때부터 강의 내용이 바뀌어버린 모양이었다. 조금은 당황할 만한 일이 었다. 그녀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그 교수님 철학 개론이 언제나 그렇대요. 통상 그리스 철학사로 끝장을 보게 되는데, 그 것도 강의 시간의 태반은 그해 선택된 한 사람에게만 할애된대요. 작년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였다지, 아마." 그래놓고 그녀는 마치 지나가는 길이었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손짓하는 쪽을 보 니 저만치 마주 손을 들어 답을 하는 남학생이 보였다. 그게 모처럼 열리려던 인철의 마음 을 다시 닫아걸게 만들었다. 그럼, 그렇지. 너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특히 모든 남자를 관리 해야 하는 여자야... 그런데 그날 오후에 인철은 다시 한번 그녀와 어울리게 되었다. 뒷날 생각해보니 그녀의 고의적인 유도였던 듯도 하지만 계기는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웠다. 4시쯤인가 교양 선택으로 듣는 프랑스어가 끝나고 강의실을 나오는데 그녀가 뒤따라와 불러세웠다. "인철씨, 이제부터 뭐 하실 거예요? 다시 도서관?" "여섯시까지만 시간을 죽이다가 집으로 돌아가야죠. 그때는 애들이 다 돌아오니까." 그게 사실은 그 무렵 인철의 일과였다. 그가 가정교사로 입주한 집은 국민학교 6학년과 중학교 3학년 남매가 있었는데 7시까지는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12시까지 실제적인 공부가 되든 말든 그 두 아이를 잡고 씨름하는 게 숙식 외에 잡비로 한 달에 오천 원을 받는 가정교사에게 요구되는 봉사였다. "그 시간 제게 좀 빌려주실 수 없으세요? 대신 한턱 단단히 낼게요." "시간을 어떻게 빌 려드리면 됩니까? 무슨 일인데요?" "실은..." 인철이 그녀에게서 어색해하는 표정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 었다. 그녀는 이내 평소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하여 스스럼없이 말했다. "저하고 문병 좀 가자구요." "문병? 누구 문병을?" "제 아버지요." 그 말에 인철은 갑자기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인철은 사람을 만나는 데 도회적으 로 세련되어 있지 못했다. 남자가 여자의 부모를 만난다는 것은 구혼의 의사를 표시할 때 뿐으로 알고 있었다. "제가 정숙씨 아, 아버님을?" "너무 이상하게 생각할 건 없어요. 아버지가 신장염으로 입원하셨는데 이제 많이 나아지 자 심심하신가 봐요. 제 남자 친구를 보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아무래도 마땅한 사람 이 없어서." 남자 친구란 말도 듣기는 들어왔지만 인철의 감정에는 낯선 것이었다. 그에게 이성간의 우정이란 연애의 전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마땅히 데려갈 사람이 없다는 게 그녀의 예사 아닌 호의 표시로 들리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럿 있다는 것 전제로 하는 말 같아 서 인철의 결벽을 건드렸다. "나 같은 떠돌이 지각생말고 좋은 친구들 많이 있잖소?" 인철이 갑자기 퉁명스러워져 그 렇게 말하자 그녀도 정색을 했다. "실은 그애들 중에 하나를 데려갈까 했는데... 일류 고등학교를 나온 모범생들 말예요. 아 무래도 아버님이 지루해하실 것 같아서..." 하지만 뒷날까지도 인철은 그날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 병실까지 따라갔는지 명확히 설명 할 수가 없었다. 틀림없이 어떤 끌림은 있었지만 뒷날의 감정과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 다. 살이가 넉넉한지 그녀의 아버지는 큰 병실을 혼자 쓰고 있었다. 환자복은 입고 있어도 병 자 같지 않게 건장해 뵈는 중년이었는데 더 인상적인 것은 몸에 밴 듯한 서구적 교양이었 다. 인철이 어색해할 틈도 없이 자연스럽게 대화로 끌어들이는 품이 꼭 서구 소설 속의 기 품 있는 노신사 같았다. 특히 그가 인철을 마음 편하게 해준 것은 전혀 성을 의식하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딸의 이성 친구에게 가지는 아버지로서의 의구 혹은 속된 관심은 전혀 드러내지 않고 그저 한 인 간으로서의 성숙만을 저울질하고 있는 듯한 게 인철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그날 인철은 쉽 게 자신의 신산스런 삶을 그들 부녀에게 드러내보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런 화술에 말 려든 까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잘 관리된다 해도 그런 만남은 시간이 길어지면 결국은 지루하거나 어색해 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는 그것조차도 알아서 조정했다. 한 삼십 분이나 얘기 를 나눴을까, 갑자기 그가 딸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이제는 쉬고 싶다. 혼자 있게 해주겠니?"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천원짜리 몇 장을 세지 않고 집어주며 말했다. "가다가 저 친구하고 저녁이나 먹어라. 퇴원한 뒤에 다시 한 번 보자." 그런데 그 무렵부 터 인철에게 주의를 끈 것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입원중이라 하더라도 그 나이의 병자에 게 당연히 있어야 할 가정적인 보살핌이 없다는 점이었다. 병실 어디에도 주부가 붙어 있 거나 들락거리며 보살피는 흔적은 없고 딸과의 대화에서도 집안일이나 아내의 안부를 묻는 말이 없었다. "그건 어머니가 아버지의 사업을 대신 도맡아 하고 계신 때문이에요." 병원을 나오면서 인철이 그런 의문을 표시하자 그녀는 간단하게 잘라 말했다. "그래도 다른 가족은 있지 않겠어요? 정숙씨말고는 누구도 드나드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인철이 그렇게 덧붙이자 그녀의 얼굴이 평소 같지 않게 어두워졌다. "없어요. 이 아버지에겐." "이 아버지?" 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인철을 빠안히 쳐다보며 물었다. "인철씨, 오늘 저녁 꼭 일곱시까지 집으루 돌아가야 해요?" "그건 아니지만... 중학교 3학 년 아이 중간고사가 그저께 끝났으니까요. 그래도 사모님께 여쭤봐야겠는데요." 인철이 얼떨떨해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왠지 간절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서 전화해봐요." "왜죠?" "아버지한테 받은 것두 있구, 오늘 제가 한턱 낼게요." 그리고 아직 해가 지기도 전에 그 녀가 인철을 데려간 곳은 경양식을 겸하는 비어홀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사치한 실내 장식에 서먹해 있는 인철을 대신해 그녀는 간단한 식사 주문 을 했다. 인철로서는 먹어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이어 그녀는 그 무렵 들어 조금씩 대중 화되고는 있어도 인철에게는 역시 엄청나게 사치한 것으로 여겨지는 생맥주를 시켰다. "인철씨, 도스토예프스키 좋아하세요?" 첫 잔을 받아든 그녀가 한 모금 꼴깍 들이켜더니 인철을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숭배합니다." 갑작스런 물음이긴 하지만 인철은 머뭇거리지 않고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밝혔다. 그러자 그녀가 무슨 뜻인지 모를 고개짓을 한동안 까닥이더니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전 그의 문학을 깊이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 꼭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뭡니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방식. 거기서는 낯선 사람들이 아무런 필연성없이 만났는데도 허 심탄회하게 자신을 털어놓고 있어요. 건드리고 싶지 않은 영혼의 상처나 들키고 싶지 않은 끔찍한 치부를 처음 만난 사람에게 거침없이 드러내는 거죠. 심지어는 자신의 딸이 몸을 판 얘기까지도..." "그건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정제되지 못한 측면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던데요. 우 연성의 남발이니, 작위적 설정이니 해서..." 하지만 저는 그게 우연성의 남발도 아니고 작위적 설정도 아닌 것같이 느껴져요. 오히려 실제의 인간 관계와 많이 닮았다는 느낌까지 드는데요. 인철씨는 그런 기분 안 드세요? 이 따금씩 그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더 진솔하게 자신의 상처와 치부를 드러내보일 수 있 다는 기분..." "글쎄요..."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그러면 상대도 허심하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그리하 여 황량한 벌판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마리 상처받은 짐승처럼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게 되 는 광경... 진실되면서 아름답지 않아요?" 그래놓고는 술잔을 쳐들며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들어요. 듣자니 과 상견례 때는 술로 꽤나 악명을 높이셨다던데." 그 말에 인철은 무슨 암시에 걸린 사람처럼 자신 앞에 있는 생맥주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러나 가슴은 갑작스런 감동으로 쿵쿵거리며 뛰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대학에 왔구나... 나는 지금껏 한 번도 너처럼 말할 수 있는 또래의 여자 아이와 만난 적이 없다...' "우리도 그들처럼 될 수 없을까?" "벌써 어느 정도는 그렇게 된 것 같은데요. 나는 오늘 영문도 모르고 정숙씨 아버님을 만 났소. 집이나 가족들로부터 소외된, 아마도 정숙씨의 상처 같은... 하지만 그 상처를 핥아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소." 술보다는 돌연스럽게 벌어진 특이한 상황에 취해 인철이 그렇게 받았다. 갑자기 그녀의 눈이 반짝하더니 쏘아붙이듯 말했다. "야, 이인철. 너는 누구에게나 그런 촌티 나는 어른 흉내를 내니? 뭐뭐 했소, 뭐뭐 한 거 요... 무슨 말투가 그래? 꼭 시골 아저씨들 같잖아. 그러지 말고 우리말부터 트자. 그래야 허 심이고 탄회고 뭐가 되지." 여느 때 같았으면 인철은 아마도 그녀의 그런 당돌함을 용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 나 한 번 마음이 열린 뒤라서 그런지 그날은 별로 거슬리지 않았다. "좋지. 환갑 전이면 다 갑장이지 뭐. 그래, 들고 있기 무거운데 콱 놓아버려. 말 놓으라 구." 인철이 조금 과장된 기분으로 그렇게 말하자 그녀가 다시 잔을 들어 남은 것을 다 마시더 니 그새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좋아. 그럼 시작하지. 너 좀 전에 그 아버지가 내 상처일지도 모른다구 했지? 맞아, 그런 적은 있었어. 그러나 지금은 아냐." "그런데 왜 우리 아버지가 아니고 '이' 아버지나 '그' 아버지냐?" "난 아버지가 둘이거 든. 내가 본 그 아버지하고 대전에 있는, 아빠라구 부르는 아버지 말이야." "너를 다른 아이들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이게 한 이유가 그거였어?" "하지만 칙칙한 상 상은 하지 마. 비극은 있어도 불륜은 없어. 그 비극 얘기를 해줄까?" "네가 나를 여기 데려 온 것이 그것 때문 아니었어?" "하긴... 그래 내 얘기할게. 나는 작년 이맘때까지 세상에서 아빠 엄마만큼 금슬 좋고 행복 한 부부는 이 세상에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또 아빠만큼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도 이 세상에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작년 4월에 네가 본 그 아버지가 나타났어. 전 부터 내 주위를 맴돌다가 내가 대학에 입학한 걸 보고 나타난 거야. 나는 처음 그 아버지를 믿을 수가 없었어. 아니, 세상에 도대체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고 믿었지." "도대체 무 슨 일인데?" "이야기는 다시 그 숱한 고약한 통속극의 배경이 되는 6,25로 돌아가. 한 쌍의 축복받은 연인이 있었지. 둘 다 유복한 집에서 자라 좋은 교육을 받은 선남선녀였대. 별어려움 없이 양가의 동의를 얻어 약혼을 하고 결혼 날짜를 잡았어. 그런데 결혼을 며칠 앞두고 6,25가 터 진 거야. 남자는 골수 우익인 집안의 명을 받들어 전선으로 가면서 가장 친한 친구에게 약 혼녀를 부탁했대. 그 친구는 처음에는 공연한 부탁으로 들었대. 왜냐하면 남자의 집도 여자 의 집도 모두 번듯해 자신이 그녀를 돌볼 일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래. 하지만 전쟁 앞에 그런 게 무슨 소용이야? 오히려 방금 북한군이 물밀듯이 쳐내려오는데 자식을 전쟁터로 몰 아넣은 집이니 오죽하겠어? 어쨌든 밀고 밀리고 하는 통에 두 집이 다 결딴나고 1,4 후퇴 무렵에는 정말로 약혼녀 하나만 의지가지없이 남게 되고 말았대. 그것도 임신으로 배를 채 독같이 해가지고." "말이 씨가 된 모양이네." 어쩌면 다음 전개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그 때문에 오히려 커지는 야릇한 궁금함을 인철은 그렇게 나타냈다. 그녀가 잠깐 말을 멈추고 인철을 뜻 없이 바라보 다 다시 이었다. "그런 셈이야. 마침 서울에 있던 친구는 그런 약혼녀를 부축해 피난길에 올랐지. 약혼녀는 어렵게 오른 남행열차 지붕에서 진통을 시작했고, 그 친구는 손수 그 아이를 받았어. 딸이었 는데, 그게 바로 나래. 그 친구는 난산으로 늘어진 친구의 약혼녀와 갓난 핏덩이를 무사히 보호해 부산으로 내려갔고..." "그분이 바로 대전에 계신다는 네 아빠겠구나." "그래, 우리 아빠야. 아빠는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줄곧 우리 모녀를 돌봐주었대. 그런데 전선에서 나쁜 소식이 왔어. 장교로 현지 임관된 그 아버지가 전투 중에 실종된 거야. 휴전 되기 얼마 전이었다나봐. 그리고 휴전이 되어 포로 교환이 있어도 돌아오지 않았어." "그 래서 네 어머니와 아빠란 사람이 결혼하게 되었구나." 거기까지만 해도 인철은 특별히 비 극적이란 느낌을 받지 못했다. 흔한 얘기로 떠돌아 다니는 6,25 후일담 중에 하나를 듣고 있다는 기분에 건성으로 얘기를 끌어가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조금 뒤틀린 미소와 함께 얘기를 이어갔다. "이제는 그 비극적인 약혼자 얘기를 해야겠지? 그는 동부전선의 어느 치열한 고지 쟁탈전 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대. 곧 북한군에 넘겨졌는데 장교 신분이 불리할까봐 사병 때의 군번을 대고 이름 한자를 바꾼게 혼선을 일으켰다나. 어쨌든 포로 교환에서 밀리고 밀리다 가 어떻게 분류되었는지 시베리아로 끌려가게 되었대. 그리고 거기서 몇 해를 고생하다가 가까스로 일본으로 탈출했는데 그게 58년도래. 그는 되도록 빨리 이 나라로 돌아오려고 애 를 썼지만 그때만 해도 그게 쉽지 않았다더군. 그러다가 이듬해 어떤 사람으로부터 약혼녀 가 다른 사람과 결혼해 산다는 말을 듣고 거기 주저앉고 말았다는 거야." "이제 비극다운 서사 구조로 발전하는군. 우리나라에는 언제 돌아오신거야?" "한일 회담으로 국교가 열리 고도 몇 해 지나서래. 일본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한 경험과 그 동안 악착스레 모은 돈을 고스란히 싸들고 돌아온 그는 작은 건설 회사를 차려 키워가는 한편, 옛 약혼녀와 딸을 찾 기 시작했어. 그런데 찾고 보니 옛 약혼녀는 한때 가장 친했던 친구와 결혼해 살고 있고 딸 은 그들의 아이가 되어 세상 모르고 행복하게 자라고 있는 거야." "완전히 '이녹 아든'이 군." "그래도 한국판은 끝이 좀 달라. 그는 조용히 사라졌지만 딸까지 끝내 잊지 못했어. 딸에 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기다리다가 딸이 대학에 들어간 걸 보고서야 그 앞에 나타났지. 그게 바로 작년 4월이야. 그런데 그는 대학 입학과 성년식을 동일하게 보고 딸 앞에 나타났 지만 딸은 그렇지가 못했어. 생각해봐. 부모의 기대에 취해 학교와 집만을 오가며 열 아홉이 된 대학 일년생에게 갑자기 나타난 친아버지란 게 어떤 의미를 가질지를." 그리고 그녀는 아직도 남은 아픔이 있는지 이맛살을 살포시 찌푸렸다. 그때 식사가 날라져왔다. 정숙이 시 킨 '비후까스'였다. 종업원이 음식을 차리는 동안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끊고 있던 그 녀가 잠시 화제를 바꾸었다. "나는 왠지 먹을 생각이 안 나네. 생맥주나 한잔 더 시킬까봐. 너는?" 그녀의 그 같은 물 음에 인철도 특별히 꾸민다는 기분 없이 대답했다. "나도 식사는 별로야. 네 얘기도 입맛을 돋워주는 건 못 되지만 이 요리도 별로 좋지 않 은 기억이 있어서. 하지만 안주로 하기는 괜찮겠지. 이걸 안주 삼아 생맥주나 몇 잔 더 하지 뭐. 나는 아예 두 잔 더 시켜." "하긴 라수콜리니코프와 멜라마리도프도 처음 만날 때 어느 한쪽인가 취해 있었지 아마. 이봐요 여기-" 그녀는 그렇게 다시 술을 정해놓고야 이전의 화제로 돌아갔다.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지? 그래, 맞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친아버지란 존재가 열아홉 소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였지. 사람들은 흔히 핏줄의 정이란 걸 앞세울 테지만 내겐 그 렇지가 못했어. 무언가 불결하고 칙칙한 내막이 감춰져 있을 것 같고, 그 불결함과 칙칙함은 이내 내 삶에도 옮아올 것 같은 불안이 일었어." "그 아버지가 그간의 경위를 다 말해주었을 거 아냐? 내가 듣기에는 어느 분을 탓할 수도 없을 것 같은데." "물론 말해주었지. 하지만 나는 그렇지가 못했어. 나를 괴롭힌 것은 엄마와 아빠가 결혼한 연도야. 호적상 그들이 결혼한 것은 51년으로 되어 있었거든. 나중에 알고 보니 전쟁이 끝난 뒤에 호적을 정리하면서 나를 위해 혼인 신고를 소급해 한 거라더군. 실제 결혼은 휴전 이 듬해래. 동생의 나이로 보아도 그쯤 될 거야. 내 손아래 동생과 나는 다섯 살 터울이거든. 그렇지만 그걸 믿는다 쳐도 그들의 부정이나 배신에 대한 의심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어. 그 들을 용서할 수 있나 없나를 놓고 많이 고민했지. 휴전 이듬해라 해도 최종 포로 교환은 이 루어지지 않았던 때였으니까." "하지만 두 분을 실종으로 통보받고 있었잖아? 내가 알기로 전쟁 실종은 법률적으로도 다 른 실종에 비해 신고 기간이 짧은 것 같던데." "이건 법률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엄마 아빠라고 믿고 사랑해 온 사람들의 품성 문제야. 아니, 인간성의 깊이 모를 심연과도 연관되지. 나는 그때까지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 란, 특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란 한 번 맺어지면 죽음밖에 풀 수 없는 것으로 알았거든. 사랑 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뿐이고, 성은 그 사랑과 따로 떼어낼 수 없는 것으로 단단히 믿고 있었거든." 그녀가 성이란 말을 거침없이 말하는 것에 인철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되바라 짐이나 타락의 어두운 여운을 동반한 것이 아니라 지성과 성숙을 암시하는 신선한 충격이었 다. "그럼 이제는 그런 걸 믿지 않아?" "믿지 않아. 그래야 엄마 아빠를 용서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용서한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야. 판단 유보라 할까. 나는 어른들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그들의 진실이 따로 있을 거라고 가정하고 열아홉의 나이 뒤로 숨어버렸지. 그리도 다시 엄마 아빠의 사랑 스런 딸로 돌아가는 데 꼭 여섯 달이 걸렸어." "그게 일 년 휴학의 사유였어? 그런데 그 아버지는 어떻게 정리했지?" "처음에는 정액 몇 방울의 의미로 축소하려 했지. 엄마 아빠와 화해를 하게 되면서 다시는 안 만날 생각까 지 했어. 하지만 잘 안 되더라. 이상한 끌림 같은 게 있어. 그 정액이 실은 내 생명의 근원 이며 거기에 실려 전해진 유전자가 나를 결정하고 있다는 따위 생물학적 지식과도 무관한... 그래서 계속 만나다 보니 이번에는 타성이란 게 생기더라. 이제는 그냥 또 하나의 아버지 야. 엄마 아빠 외에 감춰진 후견인인 동시에 후한 용돈 공급원이기도 하고." 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한 정액이란 말이 다시 인철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하 지만 그 또한 부정적인 의미의 충격은 아니었다. 그날 인철이 그야말로 허심탄회해져 가문 의 역사와 아버지와 자신의 어둡고 괴로웠던 지난날을 그녀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런 충격에 대한 인철 나름의 반응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녀의 얘기가 끝나고 차례가 된 인철이 아버지를 얼치기 혁명가로 한껏 희화화하 고 있을 때였다. 무슨 큰 장식처럼 카운터 곁에 놓여져 있는 일제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가락이 이상하게 인철의 가슴을 후벼왔다. 얘기를 멈추고 화면을 보니 멕시코풍의 차양 넓 은 모자를 쓰고 판초를 두른 세 사람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모두 콧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들이었다. 아직 국산이 제대로 생산되지 않던 시절이라 텔레비전이 귀했을 뿐만 아니라 그 방영 시 간이 대개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간과 겹쳐 있어 인철은 텔레비전과 친숙하지 않았다. 무슨 특별한 시합이나 큰 사건이 있을 때 그걸 비치한 다방 같은 데서 어쩌다 보게 되는 정도였 다. 그런데 그날은 거기서 흘러나오는 장중하면서도 구성진 가락이 하던 얘기조차 멈추고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하게 만들었다. 가사를 원어로 부르고 있어 그 내용을 알 길은 없었지 만 인철은 그게 만가같은 게 아닐까 짐작했다. "저 사람들 좋아해?" 갑자기 말을 멈춘 인철이 텔레비전 화면에 눈길을 주고 있음을 알아차린 그녀가 힐끗 뒤 를 돌아본 다음에 물었다. 인철이 멋쩍게 대답했다. "아니, 모르는 사람들이야. 너는 누군지 알아?" "나도 잘은 몰라. 요즘 미국에서 인기있는 그룹이래. 모두 멕시칸인데 마흔이 넘었대나 봐." "저 노래는?" "저게 그들의 히트곡이라면 아마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일 거야. 하지만 나도 잘은 몰라."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아주 시적인 제목이지?" 그런데 그때부터 무언가 인철의 가슴 깊은 곳을 쿡쿡 찔러오는 아픔이 있었다. 노래는 곧 끝나고 화면은 다시 남진과 나훈아의 지어낸 미소로 가득 차 둘은 하던 얘기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인철의 열정은 갑자기 사그라들어 대화의 주도권은 이내 그녀에게로 넘겨졌다. 그날 인철은 합쳐서 일곱 잔, 그녀는 석 잔의 생맥주를 마시고 열시 가까워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의 열정은 까닭 모르게 사그라들고 말았지만 꽤나 풋풋하고 감동적인 밤이 었다. "지금 입주해 있는 동네가 어디야?" 계산을 치르고 비어홀을 나오면서 그녀가 물었다. "성북동." "그럼 나하고 반대쪽에 가깝네, 나는 필동인데." "그래도 바래다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바래다주어도 될까?" "그러다 가정교사 쫓겨나는 것 아냐?" 그녀는 그러면서도 인철이 바래다주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가 기거하는 곳은 가톨릭 재단이 운영하는 여학생 기숙사였다. 부모가 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여서 그런 혜택을 받는 듯하지만 주거 환경으로 미루어봐서는 부모의 재력도 어느 정도는 뒷받침되어야 입사할 수 있는 기숙사 같았다. "실은 열시까지가 귀가 시간인데 좀 늦었어. 이만 돌아가." 그녀는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집 앞에서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며 그렇게 말했다. 얼결에 그 손을 마주잡은 인철은 하마 터면 두 팔을 부르르 떨 뻔했었다. 이상하리만치 차게 느껴지는 그녀의 손에는 강한 전류와 도 같은 흐름이 뻗어오는 것 같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의 손은 태어나 처음 잡아보는 여자의 손이었다. 인철의 그 같은 반응은 아무런 생각 없이 손을 내민 그녀에게도 전해졌음이 분명했다. 서 둘러 손을 빼는 인철을 보고 웃으려던 그녀가 갑자기 정색을 말했다. "비어홀에서 말이야... 그 아버지 얘기할 때 내가 믿지 않게 됐다고 한 거 있지? 실은 말 이야, 아직도 믿고 싶어." 그리고는 얼른 돌아서서 철제 대문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그게 뭐였더라? 갑자기 오르는 술로 얼얼해진 채 인철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뿐이라는 것... 까지가 겨우 떠올랐다. 그러자 야릇한 열기가 인철의 온몸을 사르듯 감고 지나갔다. 어쩌면 나는 지금 사랑을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 다시 인철의 가슴 깊은 곳을 찔러오는 아픔이 있었다. 비어홀에서보다 훨 씬 날카롭고 강한 아픔이었다. 인철은 가만히 가슴을 움켜잡으면서도 그게 어디서 온 것인 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가정교사로 있는 집으로 접어드는 호젓한 골목 어귀에 이르러 서야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락과 함께 오랜 세월 저편에 머물러 있는 명혜의 얼굴을 아련히 떠올렸다. 그런데 인철이 가정교사로 입주해 있는 집에 돌아오니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11 시가 넘은 데다 술기운이 있어 식모가 열어주는 대로 제 방으로 돌아가 자려는데 문밖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자요?" 주인집 사모님이었다. 그때까지도 명혜의 환상에 젖어 옷도 입은 채로 이부자리에 기대앉 아 있던 인철이 놀라 문을 열었다. "아뇨, 아직." "그럼 안방으로 좀 건너오지 않겠어요? 실은 바깥양반이 초저녁부터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목소리가 무거워 인철은 까닭 모르게 불길한 예감으로 몸을 일으켰다. 밤이 늦었는데도 주인 아저씨는 정장에 가까운 옷차림이었다. 그게 다시 무슨 심각한 사 태를 암시해 인철은 절로 움츠러들었다. 잠옷 차림이 아닌 그와 정식으로 대면하기는 입주 날 이후 처음이었다. "거기 앉지. 여보, 차라도 한잔 내와요." 공손하기는 해도 목소리 역시 무겁게 가라앉은 듯 느껴졌다. 인철이 쭈뼛거리며 윗목에 앉 자 그가 헛기침과 함께 허두를 떼었다. "이거, 참. 어디서부터 얘기 하나... 그래, 학생 전에 무슨 일 있었어?" "네?" "말하자면 사상 운동 같은 거. 좌익..." 그 순간 인철은 가슴이 섬뜩했다. 하지만 거의 본능적으로 강한 부인의 뜻을 드러냈다. "아뇨. 그런데 그걸 왜 물으십니까?" "실은 말일세. 오늘 경찰이 회사엘 다녀갔네. 자네의 최근 동향을 묻는데 특히 사상 쪽을 꼬치꼬치 캐묻는 거야.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집사람한테도 다녀간 모양이더군. 묻는 것이 비슷했다는 거야." 그는 인철이 정확히 그 부서와 직위를 모르는 고위직 공무원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늘 자신의 직장을 회사라 불렀다. 인철은 그의 말을 듣자 온몸에서 맥이 쭈욱 빠졌다. 드디어 내게도 왔구나... "아아, 그거요-" 인철은 짐짓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길게 끌었다. 그러나 주인 아저씨의 쏘 아보듯 살피는 눈길이 얼른 뒤를 이었다. "아마 아버지 때문일 겁니다. 실은 아버지가 6,25 때 행방 불명이 되셔서."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 방면에서 일하지 않지만 나도 조금은 알지. 단순히 아버지가 행불이라는 이유만 으로 이제 겨우 대학 일학년인 아들이 정기적인 동향 파악이 필요한 요시찰인이 되지는 않 아." 주인이 다분히 의심쩍다는 눈으로 인철을 살피며 그렇게 받았다. 뒷날에는 그 정도만 들 어도 인철은 일어나 짐을 쌌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처음 당하는 일이라 강하게 반발했다. "그렇다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은 아버님은 월북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너무 억울합니다. 그때 저는 겨우 세 살이었고 아버님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 저를 단지 그 아버지의 아들이란 이유만으로 이렇게 타고난 죄인 취급해도 되는 겁니까?" "나도 그건 불합리하다고 봐. 틀림없이 연좌제란 적대 세력에 대한 효율적인 통제 수단이 되지 못 하는 왕조 시대의 유물이야. 하지만 이해하려 들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 "도대체 그걸 어떻게 이해한단 말입니까?" "내가 보기엔 자네 아버지는 아직 간첩 활동이 가능한 나이야. 만약에 그가 남파된다면 어디를 가장 먼저 찾겠나? 아무리 당에서 금지한다 해도 가족을 찾아보는 게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정이라구. 거기다가 드물게는 바로 가족이나 친지들에게서 활동 근거를 마련하기도 하지. 잘 알다시피 남복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방첩 활동은 체제 수호의 제일선이야. 그들이 학생이나 가족들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는 것은 자네들을 의심해서가 아 니라 바로 효율적인 방첩 활동을 위해서야." "거창 양민 학살의 전술적 배경과 비슷한 논리군요. 고기가 놀 물을 없애버린다... 하지만 그 상대방이 당하는 고통과 피해는 생각해보지 않으셨습니까? 당장도 보십시오. 지난 두 달 저는 꽤나 성실한 가정교사였고, 우리 관계도 단순한 고용, 피고용을 넘어서는 우호적인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경찰이 휘젓고 간 다음은 달라지겠지요. 왠지 제가 수상쩍고 데리 고 있기가 찜찜하실 겁니다. 저는 처음 당하는 일이지만 형님이 이런 일로 직장을 그만두거 나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는 일은 여러 번 보았으니까요." 그러자 주인 아저씨가 하기 거묵 한 그 말을 잘 꺼내주었다는 듯 받았다. "실은 내가 학생을 부른 게 바로 그 때문이야. 학생의 고충은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내 집 에 데리고 있기는 곤란해졌어. 대단치는 않아도 나라일을 보고 있는 자리라... 학생을 내보내 야 하는 내 고충도 이해해 주기를 바라네. 달리 가정교사 자리를 찾아보게. 되도록이면 개인 사업을 하거나 문화 관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면 경찰이 와도 나처럼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걸세." 그로부터 십여 년 뒤 이 땅에서 연좌제가 폐지될 때까지 인철이 가지게 되는 모든 직장, 머무르게 되는 모든 곳에서 두 달마다 한 번은 되풀이되는 경찰의 방문은 그렇게 시작되었 다. 새로 시작한 대학 생활에 취해 인철이 잊고 있었던 것은 명혜만이 아니었다. 어둡고, 되 살리고 싶지 않은 것이긴 하지만 그 또한 잊고 있었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였다. 제 13 장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내가 공연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버스에서 내리면서도 명훈은 속으로 그런 자문을 되뇌었다. 서울 인근이라고는 하지만 면 단위로 내려가면 지역의 규모나 풍경은 아직 전국이 모두 비슷했다. 버스 정류장을 중심으 로 (실은 버스 정류장이 그 때문에 그곳에 자리잡게 된 것일 테지만) 면사무소와 지서, 농협 이 몰려 있고 그 사이로 고향에서는 장터 거리라고 불리는 시골 상가가 들어서 있었다. 명훈이 찾고 있는 국민학교는 면 소재지에서 한 3백 미터 떨어진 들 끄트머리에 있었다. 학년마다 너더댓 학급은 있을 성싶은 꽤 큰 국민학교였다. 담장은 측백나무 수벽으로 되어 있었는데 뒤틀린 측백나무 죽기가 제법 팔뚝만한 게 결코 짧지 않은 그 학교의 연조를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정말 내가 올 곳에 왔는가...' 정문 대신 선 두 그루의 아름드리 버드나무 사이를 지나면서 명훈은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물었다. 이제 가까웠다고 생각할수록 자신이 없어지는 발길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경진을 찾 아도 되는가... 명훈이 숨어 있던 절을 떠나 청화사를 찾아간 것은 배석구와 만난 지 일주일 뒤쯤이었다. 그 전날 명훈의 방을 들른 해원이 귀띔처럼 말했다. "아무래도 지서에서 일간 누가 올라올 모양이던데-차라리 청화사로 옮기는 게 어떻습니 까?" 그가 시키는 대로 며칠 전 장날 읍내로 내려가 공무원 시험 준비서 몇 권을 사다놓은 뒤 라 명훈은 그 제의가 좀 뜻밖이었다. "저 책 가지구 안 되겠어요? 다짜고짜로 수갑 채우지 않는 한 피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 텐데. 주민등록증을 보고 간다 해도 신원 조회까지는 한참 걸리니까 눈치 봐서 그때 옮기지 요, 뭐." "그건 그렇지만 이왕에 법현 스님을 안다면 여기서 궁상 떨 거 머 있어요?" "여기가 안 전하지 못하다면 거기도 마찬가지 아뇨?" "그건 다르죠. 우선 거긴 세상에서 한참 떨어져 있어 쉽게 수색에 들어가지 못하고-관할 서와 협정 같은 것두 있어서..." "협정이라뇨?" "거기 있는 분들 모두 왕년에 한가락 하던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경찰과는 서로 알아서 기는 사이라, 경찰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지만 그쪽도 수배자를 숨겨 자기들한테 해 롭게 하지는 않지요." "그럼 더욱 내가 가서는 안 될 것 같은데요. 뭐 대단히 혐의는 아니지만." "법현 스님이 마음먹으면 다르죠. 살인, 간첩질 안 했으면 몇 달 쉬기는 불편하지 않을 겁니다. 어쨌든 나 같으면 벌써 그리로 옮았습니다. 그런 말을 듣자 명훈도 마음이 흔들렸다. 해원에게서 청화사로 가는 길을 자세히 들은 뒤 에 다음날로 길을 떠났다. 청화사는 양산박이란 별명만큼이나 깊고 험한 산속에 있었다. 문경에 내려서도 세 시간이 넘도록 타고 걷기를 한 뒤에야 겨우 찾아들 수 있었다. 배석구는 마침 경내에 있었다. 명훈 이 배석구의 법명을 대고 찾자 금세 나타난 그가 명훈을 지객실 대산 사찰 뒤의 나무 그늘 로 끌었다. "결국 왔구나. 거기서 무슨 일 있었어?" 승복을 입은 사람 같지 않은 말투로 그렇게 묻는 그의 표정에는 착잡해하는 데가 있었다. "제가 잘못... 찾아왔습니까?" 그가 반겨줄 줄만 알았던 명훈은 갑자기 머쓱해져 그렇게 말을 더듬었다. "그게 아니고, 그저 너와 나의 인연이란 것에 대해서 잠깐 생각했다. 저번에 이리루 오라 고 하기는 했지만- 네가 또 무슨 인연에 이끌려 나를 찾아왔는가 하고." 그때는 제법 스님 같은 데가 있었다. 그제서야 명훈은 조금 마음을 놓았다. "일간 지서의 임검 같은 게 있다길래, 귀찮아서. 해원 스님도 권하구요." "저번에 그것까 지는 묻지 않았다만... 그래, 무슨 일이냐? 기소 중지라도 돼?"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당 분간은 경찰과 만나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여론 조사소 할 때 몇 가지 찜찜한 일이 있 어서요." "정말 그 정도야? 더 큰 건 없어?" "형님, 저 잘 알지 않습니까? 이래봬도 아직 호적은 깨끗해요." 그러자 배석구의 얼굴이 좀 밝아졌다. 다시 스님 같은 말투가 되어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기야...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든 부처님의 자비가 못 이를 곳이 어디 있겠느냐. 더구나 그것도 인연이라고 그 끈 따라온 것을..." 그리고 방장실로 가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라. 곧 돌아오마." 배석구는 얼마 뒤에 상좌승인 듯한 젊은 스님과 함께 돌아왔다. 상좌승이 명훈을 경내 후 미진 곳에 있는 객방으로 안내해 그날부터 명훈의 청화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명훈의 짐작과는 달리 청화사는 겉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절이었다. 머리 허연 노승이나 엄숙한 참선 같은 것은 없었지만 아침 예불에서 저녁 공양까지 다른 절과 별다름 없이 진행 되었다. 그런데 며칠 있으면서 보니 차츰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첫째는 사흘도 안 돼 알아볼 만큼 명확히 구분된 스님들간의 역할 분담이었다. 스님들은 크게 두 부류가 있었는데, 흔히 말하는 이판과 사판이 아니라 속판과 승판이라 할 만했다. 절을 절답게 만드는 역할을 맡은 스님들은 언제나 일정했다. 그들 대여섯이 예불과 독경을 하고 가물에 콩 나듯 찾아드는 신자들을 맡는 반면 나머지는 모두 하루종일 무얼 하는지 모 를 스님들이었다. 그들은 공양 때만 함께 모일 뿐 불사에 끼어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음으로 이상한 것은 사찰의 규모에 비해 신도 수나 관광객이 너무 적은 일이었다. 찾아 들기 어려워서였겠지만 명훈이 그곳에 머무르는 두 달 동안 신도들이 시주를 바치러 오는 일은 거의 없었고, 관광객도 근처 명사에 올랐다가 길을 잘못 들어 찾아온 등산객 몇이 고 작이었다. 거기다가 보통 절에는 흔히 있게 마련인 칠성각이나 산신각을 찾는 무속인도 그 곳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다. 그 다음은 유달리 빈번한 객승들의 출입이었다. 신도와 관광객이 적은 만큼이나 객승들이 많았는데, 대개는 그야말로 운수로 떠돌다가 찾아든 것이 아니라 무언가 일이 있어 오는 스 님들 같았다. 그리고 떠날 때는 대개 불사에 관여 않는 스님들 몇과 동반하게 마련이었다. 수입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절의 살림이 풍족해 뵈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이미 말한 대로 시주하는 신도도 많지 않고 관광객도 없는 데다 특별히 수입이 될 만한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건만 절살림에는 전혀 군색함이 내비치지 않았다. 명훈에게 숙식비조의 시주를 요구 하지 않는 것도 반드시 배석구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그 밖에 이상한 것들은 배석구를 통해 알게 된 것들로, 몇 가지는 명훈의 추측과 맞아떨 어졌다. 이를테면 술 같은 것은 남의 눈데 띄지 말라는 주의가 있기는 했지만 스님들도 거 의 원하는 대로 마실 수 있었다. 가끔씩 사찰 주위에서 보게 되는 스님들의 체력 단련도 불 교 무술의 한 갈래이기보다는 실전용 같았다. 거기다가 명훈에게 더욱 좋은 것은 그들의 대인 관계였다. 나이든 몇몇끼리는 은밀한 수 군거림이 있는 눈치였지만, 일반적인 인간 관계는 최소한의 표면적인 예의뿐 누구도 상대방 에 대해서 깊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명훈도 자신에게 허락된 평온과 휴식에 만족할 뿐 절 안의 일을 깊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달포가 지나간 어느 날이었다. 전날 어떤 객승이 찾아와 명훈이 속판이라 이름붙 인 스님들을 태반이나 데려가는 바람에 경내가 유난히 조용했다. 명훈이 슬슬 무료해지기 시작하는 시간을 죽이려고 객방에 굴러다니는 철 지난 대중 잡지를 뒤적이고 있는데 배석구 가 굳은 얼굴로 찾아왔다. "뭘 해?" "아, 네. 심심해서요." 명훈이 뒤적이고 있던 잡지를 들어보이며 대답했다. "그래애?..." 배석구가 그렇게 말꼬리를 끌다가 갑자기 마음을 정한 사람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너 일 있으면 한번 우리 따라가볼 테냐?" "무슨 일인데요?" 그러자 배석구는 더 주고받고 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말했다. "짐작은 했겠지만 사찰 분규 대리전이다. 동도사라고 제법 먹을 게 있는 사찰이 있는데 비리로 쫓겨난 전주지가 힘으로 탈환을 시도하는 모양이아.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해온 것은 현주지 쪽이고. 그런데 난감한 것은 우리 식구들이 모두 나가 있다는 점이다. 너 알다시피 어제 모두 강원도로 떠나고 여기 남은 사람은 나까지 다섯뿐이다. 부산 쪽에서 좀 동원해올 수 있지만 전주지측도 만만찮은 모양이다. 신도 포함해서 백여 명은 몰고 올 거라는데- 어 때? 한 번 가보겠어?" 명훈은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무렵 명훈은 갑자기 머리 가 텅 비어버린 사람처럼 아무 생각 없이 날을 보내고 있었고 배석구는 또 그런 제안이 낯 설게 들릴 만큼 명훈을 정중하게 대해왔다. "실은 네가 왔을 때 이번에는 악연으로 나와 얽히지 않기를 바랐다. 그냥 네가 원하는 만 큼 푹 쉬고 가게 해주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마음내키지 않으면 그만둬라." 그런데 오히려 배석구의 그런 말이 명훈을 자극했다. 명훈은 그때껏 죽 같이 해온 일을 다시 하는 기분 으로 배석구를 따라나섰다. 그날 저녁 명훈은 배석구네 패거리 넷과 함께 분규룰 앞둔 사찰로 이동했다. 대도시에 가 까운 꽤 큰 절로 산문 앞에 음식점과 기념품 가게가 줄지어 들어설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래도 주변에는 나름의 현대적 사하촌이 형성되어 있을 만큼은 되었다. 절의 생리에 밝지 못 한 명훈이 보기에도 걸린 이권이 많아 보였다. 명훈은 부산에서 동원되어온 다른 여남은 명의 건달들과 함께 어쩌다 그 절에 묵게 된 등 산객으로 가장해 객방에 들었다. 배석구네 패거리는 다른 연줄로 동원돼온 비슷한 승려들과 함께 원래 그 절에 있던 현 주지파의 승려들 속에 끼어들었다. 듣기로는 다음날 동원될 지 지파 신도들 사이에도 주먹들이 끼어들 모양이었다. 이튿날 양편의 충돌은 꽤나 치열했다. 속세 같은 피투성이 칼부림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 런저런 흉기가 동원되고 각목이 튀는 대규모의 패싸움이었다. 하지만 방어 태세가 잘돼 있 는 현 주지측의 일방적인 승리로 그 사찰 분규는 끝이 났다. 워낙 현 주지측이 우세해 명훈 은 세력을 과시하는 역할 정도로 구경만 했다. 그런데 청화사로 돌아온 그 다음날 새벽이었다. 일이 잘 처리됐다고 자축의 술까지 마시 고 잠든 명훈의 방에 배석구가 새벽같이 찾아왔다. 그의 얼굴은 전날 밤과 달리 어둡기 그 지없었다. "일이 고약하게 됐다. 전주지측의 그 살짝곰보 있지? 그날 등산 도끼 들고 설치던 그 도 중놈 말이야. 그 자식이 기어이 뒈져버렸다는군." 누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명훈은 정신이 확 돌아오는 것 같았다. 가만히 머릿속을 가다듬 어보니 그게 누군인지 알 것 같았다. 전주지와 여남은 명의 그 문중 사제들을 호위해 앞장 서 뛰어든 자였다. "그런데 그 자식을 가꾸목으로 재운 게 누구지?" 배석구가 아무래도 궁금하다는 듯 앞서와 다른 어조로 물었다. 명훈은 아직도 휑한 머리 로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다. "여기 계신 분은 아니었고- 맞아요, 부산 쪽에서 왔다는 친구들 중 하나 같습니다. 아마 신도를 가장한 친구들 중에서 염색한 야전 잠바를 걸치고 있던 사람 같은데요..." 그러자 배석구가 걸치고 있던 승복이 무색하게 왕년의 가락을 내비치며 말했다. "그럼 부산서 끌어모아온 신마이(신참)들 중에 하난 모양이군. 새끼들, 이런 일에는 신마 이들 쓰지 말라고 내 그만큼 일렀는데..." "그런데 정말 죽었어요? 내 보기에는 엄살 떠는 것 같았는데. 피도 별로 흘리지 않았다구 요." "너 그 동안 이 바닥 떠나 있었다더니 그 말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구나. 머리는 말야, 피 를 많이 흘리는 게 더 안전한 거야. 겁나는 게 바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뇌진탕이라구. 보나마나 천방지축 가꾸목을 휘둘러 급소를 친 거라구. 엄살떠는 것처럼 기절했을 때 이미 그 친군 간 거야. 그걸 병원에 데려갈 생각은 않고 더 밟아놔? 불새 그 새끼 애들 데리고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지명 스님은 없었어요. 진작에 그쪽 오야붕하고 담판에 들어갔다구요." "담판을 하려면 애들 단속부터 해놓고 봤어야지. 주먹을 써야만 밥값이 나오는 줄 아는 천둥벌거숭이들을 떼루 모아놓고 저희끼리 돌아앉아 쑥덕대면 어떡해?" "그래두 올 때는 멀쩡했는데... 그 살 짝곰보 스님 우리하고 화해술까지 마셨다구요." "어제 새벽에 인사불성이 돼 김천으로 실 려갔다더군. 그리구 조금 전에 숨진 거야. 이제 개값 톡톡히 물게 됐어." 그러다가 배석구는 문득 자신이 걸치고 있는 승복을 의식했는지 비로소 스님다운 감회를 한마디 덧붙였다. "가련한 중생이 고해는 힘 안 들이고 건넌 셈이 됐다만 끼친 업은 또 어찌할꼬..." "그래,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명훈이 걱정이 되어 물었다. 구경하는 셈 치고 따라가 난투극에 끼여 들지는 않았지만 공 범의 범위를 확대하면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 것 같았다. 상대방은 틀림없이 그를 현재의 주 지 쪽 사람으로 보았을 것이고, 이쪽은 이쪽대로 그를 잠정적인 우군으로 믿고 있었을 것이 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찰 분규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쯤은 여기 경찰서도 다 알아. 하지만 이번은 그 냥 넘어가기 어렵게 됐어. 사람이 죽고, 그것도 외부 폭력 세력이 개입했다는 기사가 나갔으 니 전처럼 적당히 봐줄 수는 없을 거야. 어쨌든 너는 여기 더 있기 어렵게 됐어. 경찰은 안 면 때문에 우리에게 덤비기 어려우면 바로 일당 받고 동원된 송사리들을 덮칠 게고, 그러면 너도 달려가게 될 거야." "전 정말 구경만 했는데요..." "너 기소 중지 건은 어쩔래? 그러지 말고 얽혀들기 전에 튀어. 서울로 가. 도치 주소는 줄 테니 거기 가서 길을 찾아봐." 배석구는 그러면서 미리 준비해온 듯한 편지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미아리 쪽에서 꽤 큰 잡화점을 하고 있어. 하지만 가끔은 주먹 쪽으로도 기웃거리는 모 양이더라. 손씻었다지만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야. 거기 가봐. 걔가 널 못 봐주면 연결이라 두 시켜줄 거야. 기소 중지되어도 드러내놓고 일자리 구할 수 없는 처지에 별수 있어? 그런 데서라도 밥벌이할 자리를 찾아봐야지. 지금 바로 내려가." 하지만 서울역에 내리자 명훈은 갑자기 경진을 떠올렸다. 지난 3년 실패를 거듭하면서 애써 잊은 그녀였다. 그녀가 자신의 불행에 얽혀드는 게 싫어 되도록 기억조차 떠올리지 않고 지내왔는데 막상 서울역에 내리자 맨 먼저 그녀가 떠오른 것이었다. '쓸데없는 짓. 새삼 만나서 무얼 해? 이제 3년이나 지났으니 저도 철이 들고 어쩌면 나 를 잊어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으로 그녀의 영상을 다시 지워버리려고 애썼으나 한편으로는 다른 내면의 목소 리도 있었다. '어차피 나는 그녀에게서 쉽게 지워질 존재는 아니다. 우리가 다시 만나지 않게 된다 하 더라도 그 까닭 정도는 그녀에게 일러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결국 두번째 목소리 에 지고 만 명훈은 먼저 경진의 집부터 찾게 되었다. 하지만 경진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 다. 새벽차에서 내려 마포로 간 명훈은 저만치 경진의 집 대문이 보이는 대폿집에서 오전 내내 기다렸으나 경진이 드나드는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명훈이 줄곧 경진네의 대문께만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본 주인 아주머니가 뜻밖에 도 귀중한 정보를 일러주었다. "누굴 기다리슈? 보아하니 저기 철대문집 사람을 보러 온 모양인데." 처음 명훈은 당황 했으니 가만히 생각하니 그때까지 그녀를 이용할 생각을 못 한 게 오히려 미련스럽게 느껴 졌다. "아주머니 여기서 장사하신 지 오래됩니까?" "한 십 년 되나..." "그럼 동네일 웬만하면 잘 아시겠네요." "이 근처라면 좀 알지. 저 철대문집 누굴 만나려고 하는데?" "실은 저 집 셋째딸을 만났 으면 하는데 어째 통 보이지 않는군요. 요즘은 직장에 안 나갑니까?" "아, 경진이 처녀? 전에 무슨 회사 다니던 건 벌써 그만뒀지. 지금은 소학교 선생이 되어 나가 있어." "국민학교 선생님이라구요? 걘 사범학교를 안 나왔는데..." "작년에 교원 양성손가 뭔가를 마쳐 선생 자격을 땄다지 아마. 지금 덕손가 팔당인가 서울 근처 어디 소학교에 있다는 말 을 들었어. 토요일에나 가끔씩 집에 들르는 모양이더라구." "그게 어딘지 알 수 없을까요?" "그 처녀 연애한단 소리는 못 들었고... 왜 그러슈? 남의 처녀 있는 곳 수소문해 뭘 하려 고?" "뭘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전해줄 말이 좀 있어서요." "그럼 저 집에 가서 물어보면 될 거 아뇨? 아니면 부모님들에게 좀 전해 달라고 부탁하든지." 대폿집 아주머니가 갑자기 삐딱하게 나왔다. 명훈의 태도가 어딘지 수상스럽게 여겨진 듯 했다. 그런 아주머니들에게 익숙한 명훈은 손쉽고도 그럴듯한 거짓말을 짜냈다. "실은 제 친구가 경진씨 애인이었는데 아시는지 몰라도 경진씨 집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연애가 깨지고 말았죠. 그 친구 몇 해 실의에 빠져 헤매다가 이번에 외항선을 타고 나갔어 요. 그러면서 내게 전하라는 말이 있어서." 대폿집 아주머니는 이내 감동한 눈길이 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먼. 하긴 몇 해 전인가 저 집이 경진이 처녀 때문에 떠들썩한 적이 있 었지. 얌전한 저 집 바깥양반이 경진이 처녀 머리를 깎아놓겠다고 펄펄 뛴 적이 있었는데... 그게 그땐가..." 그렇게 기억을 더듬다가 큰 인심이나 쓰듯 말했다. "어쨌든 총각 인상을 보니 그리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내 알아봐주지. 저 아래 편물점 아가씨가 잘 알 거야. 둘이 비슷한 또래구 왕래도 잦은 거 같으니까. 기다리슈." 그런데 막 상 경진이 근무하는 국민학교를 알아내고 보니 다시 망설임이 일었다. 전에는 대단찮게 본 국민학교 교원이라는 신분이 갑자기 아득히 우러러보이고 그만큼이나 자신의 영락은 처참하게 느껴졌다. 제 한 몸 건사하기 힘든 빈털터리 건달에다 언제든 전과자로 바뀔 수 있는 기소 중지자... 그런 자신으로부터 경진은 아주 멀리 떠난 사람 같았다. 하지만 더 강 하게 명훈을 몰아댄 것은 그럴수록 커지는 그리움이었다. 그녀가 손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는 생각이 들자, 주관적인 감정으로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신분으로도 이제 다시 만 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명훈은 미친 듯이 경진이 보고 싶었다. 청화사를 떠나 서울 로 향할 때까지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감정의 변화였다. '정히 그렇다면 먼빛으로라도 한 번만 보고 오자. 그게 혼자만의 쓸쓸한 이별의 의식이 되더라도 그녀의 모습을 한 번 더 내 눈에 담아보고 싶구나.' 명훈은 마침내 그렇게 중얼 거리며 양평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고 말았다. 그 학교도 전국적으로 공통된 교실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지 운동장은 야외 수업을 받는 코흘리개들로 소란스러웠다. 교정 한켠에 줄지 어선 플라타너스 그늘에 아예 칠판을 내다걸고 수업을 받는 반도 있었고 운동장을 나누어 체육이나 무용 지도를 받는 반도 여럿이었다. 거기다가 창문을 열어놓고 음악 수업을 받는 반의 풍금 소리와 아이들의 제창 소리, 일찍부터 학교에 나와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는 오 후반 아이들의 웃음 소리도 소란을 보탰다. '너는 어디 있느냐. 어디서 너를 찾지...' 교정 모통이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자리를 잡은 명훈은 갑자기 망연해져 중얼거렸다. 경진을 만나려면 교무실로 가야겠지만 갑자기 그게 싫고 두려워진 까닭이었다. 그곳에 있는 경진의 동료 교사들이 단번에 자신의 영락을 꿰뚫어볼 것 같아서였다. '차라리 이쯤에서 돌아설까...' 망연히 교정을 바라보던 명훈에게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명훈 이 앉아 있는 운동장 모퉁이에서 대각선으로 맞은편이 되는 곳에서 명훈의 눈을 찔러오듯 시선을 끄는 사람의 뒷모습이 하나 있었다. 그해의 신입생인 듯한 조무래기들에게 행진을 가르치는 여교사였다. 하얀 반팔 셔츠에 역 시 흰 체육복 바지를 입고 차양이 넓은 운동모를 쓴 채 호루라기를 불며 뒷걸음치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눈에 익은 듯 느껴졌다. 그녀는 이제 막 어머니의 품에 벗어난 그 꼬맹이들을 데리고 이미 다른 반이 쓰고 있는 부분을 피해 가장자리로만 운동장을 한바퀴 돌 생각인 듯했다. 그녀가 호루라기를 두 번 짧게 불고 손짓을 하며 아이들은 제비같이 입을 벌려 '셋, 넷' 하고 소리치며 따라왔다. 그녀가 다가올수록 명훈의 가슴은 세차게 뛰었다. 못 본 지 오래고 그것도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지만 틀림없이 경진이었다. 그녀는 용케도 뒤 한번 돌아봄 없이 뒷걸음질로만 아이들을 이끌었다. 그게 명훈을 방심 시켜 제법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도 명훈은 온몸을 드러내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 다. 그러다가 그녀가 갑자기 무엇에 끌린 듯 뒤를 돌아볼 때에야 명훈은 황급하게 느티나무 등걸 뒤로 몸을 감추었다. 명훈은 그때 진심으로 그녀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그 느티나무를 지나쳐가주기를 빌었 다. 그런데 갑자기 호루라기 소리가 뚝 그치고 제비떼 같은 아이들의 응답도 그쳤다. 이어 다급하게 뛰어오는 가벼운 운동화 발소리가 나더니 온통 반가움으로만 찬 목소리가 귓전으 로 파고들었다. "명훈씨죠? 명훈씨 맞죠?" 그러나 명훈에게는 그 목소리가 그대로 온몸을 얼어붙게 하는 것 같았다. 대답은커녕 손 가락 하나 까닥 못 하고 굳어 있는데 어느새 느티나무 뒤를 돌아온 경진의 눈동자가 빠안히 명훈을 올려보고 있었다. "역시 찾아오셨군요. 가만있어봐요." 경진은 그렇게 말해놓고 손목을 젖혀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이마가 살풋 찌푸려지더 니 이내 마음을 정한 듯 짧게 말했다. "여기 일 분만 그대로 계세요. 금방 돌아올게요."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돌아가 상냥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여러분, 오늘 연습은 끝났어요. 모두 교실로 돌아가 옷 갈아입고 선생님을 기다리세요." "예!" 코흘리개들은 일제히 그렇게 대답하고 흩어지더니 다투어 교실 쪽으로 달려갔다. 그 아이 들만큼이나 급한 종종걸음으로 되돌아온 경진이 명훈의 옷자락을 끌 듯 하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저와 함께 가요." "음, 나는, 나는 말이야..." 그제서야 겨우 말문이 열린 명훈은 그렇게 우물거리며 거부의 뜻을 나타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경진은 그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두르기만 했다. "교무주임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종례 끝내는 데 십 분이면 돼요. 그때까지만 저희 교실 밖에서 기다려주세요." "그, 그럼 여기서 기다릴게." 명훈이 얼른 그렇게 받았다. 만약 그날 명훈이 그 느티나무 아래 혼자 남겨졌다면 그대로 돌아서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경진은 그걸 알아본 듯했다. 갑자기 그녀의 눈에서 반짝하고 불꽃 같은 게 이는가 싶더니 강한 도리질과 함께 말했다. "안 돼요! 지금부터는 제가 보이는 곳에 있어야 해요. 함께 가요." 그리고는 정말로 명훈 의 옷자락을 잡았다. 명훈도 그때부터는 거역 못 할 힘에 이끌려 그녀의 명령에 조종되는 인형처럼 그녀를 따랐다. 자신의 말대로 경진은 실제 십 분 안에 교무주임에게 조퇴 허가를 받아내고 담임하고 있 던 일학년의 종례를 끝냈다. 교무주임의 어리둥절해 하는 눈길도, 평소보다 이십 분은 빨리 집에 돌아가게 된 아이들의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빛도 전혀 의식되지 않는 듯했다. 대신 명훈의 움직임에만 모든 주의를 집중해 명훈이 발걸음 한 번만 크게 떼어놓아도 화들짝 놀 라며 따라붙곤 했다. 명훈이 그런 최면과도 같은 상태에서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경진의 자취방에 이르러서였다. "인사드리세요. 저의 주인집 아주머니예요." 시골집치고는 비교적 깨끗한 ㄷ자 기와집으로 명훈을 안내한 경진은 마당에서 나물을 다 듬고 있던 중년 여자를 소개시키고 다시 명훈을 그녀에게 소개했다. "제 약혼자예요. 오늘 여기서 묵고 내일 토요일날 저희 집으로 함께 갈 거예요." 그 말투 가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명훈까지도 쑥스러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한번 그녀의 방안으로 들어가자 그로부터 해질녘까지는 광기 어린 신문과 추궁의 연속이었다. "어찌 그러실 수 있어요?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거예요? 그 동안 어디 계셨어요? 무얼 하셨어요?" 그렇게 시작한 그녀의 물음은 점심 식사조차 잊은 듯 되풀이 이어졌다. 그러나 명훈의 변 명은 어느 것도 용인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원망과 분노를 키우는 것 같았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유행가 가사가 무언지 아세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따위 너 절한 변명이에요.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난관을 극복하고 가는 거지, 왜 헤어져요? 그건 비열한 속임수거나 잘돼야 허약한 패배주의를 분식하는 싸구려 감상이라 구요. 사랑으로 이겨내지 못할 게 무어 있어요?" 그렇게 몰아대다가 제 감정을 못 이겨 줄줄이 눈물을 쏟았다. 그 눈물을 멈추게 하는 길 은 조건 없는 승복밖에 없었다. 그녀가 겨우 진정된 것은 해가 뉘엿할 무렵이 되어서였다. 그제서야 점심조차 잊고 몰아 댄 것이 미안했는지 울음으로 푸석해진 얼굴을 찬물로 가라앉힌 뒤 명훈을 면 소재지에서 하나뿐인 정육 식당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여러 해를 함께 산 아내처럼 자상하게 시중들었다. "아무리 약혼자라고 소개는 했지만 잘 방은 역시 따로 구하는 게 좋지 않을까? 명색이 선 생님인데 혹 나쁜 소문이라도 나면..."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한층 더 차분해진 그녀를 보고 명훈이 말했다. 그런데 그게 다시 강박관념과도 같은 불안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강경해졌다. "안 돼요, 그건. 내일 저녁 함께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한 발자국도 떨어질 생각 마세 요." 그리고는 다시 옷깃을 잡듯 하며 명훈을 자신의 셋방으로 이끌었다. 그럴 때 경진의 눈길 에는 어떤 광기까지 번득이는 것 같았다. 그녀와의 만남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르게 진행 되고 있어도 전혀 거부할 수 없게 하는 광기였다. 그 광기는 한 이불 아래 나란히 눕게 되면서 다소 사그라지는 듯했다. 그걸 느낀 명훈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와 함께 집으로 간다고 했는데 그건 왜지?" "아버지 어머니께 결혼 승낙을 받는 거예요. 이젠 저도 결혼할 나이가 됐어요." "그건 안 돼!" 거기서는 명훈도 강경해질 수밖에 없었다. "왜 안 되죠? 무엇 때문에요?" "내겐 그럴 자격이 없어. 나는 경진과 결혼을 하러 온 게 아니라 작별하러 온 거야. 이제 는 널 풀어줄 때가 된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자격이 없다니, 결혼에 무슨 자격이 있어요?" 경진이도 차츰 강 경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낮의 광기가 되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제법 명훈의 말 에 귀도 기울이고 이치를 따져 설득하려는 태도까지 있었다. "최소한 배우자 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을 자격..." 명훈이 그렇게 대답하다 손 가락으로 가만히 명훈의 입술을 눌러 말을 중단시키고 말했다. "또 그 얘기 하시려구요. 나는 너를 먹여살릴 수 없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백수건달이 다." 그러는 말투가 다소 억지는 있어도 차분하게 따져보자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럴수 록 성급하고 거칠어지는 것은 명훈의 반응이었다. "그 정도가 아니야. 지금 당장 공갈, 폭력 혐의로 수배중인 기소 중지자야. 잘돼야 도시 빈민에 편입돼 가망 없는 인생을 끌어가야 하고, 재수 없으면 감옥이나 들락거리다가 끝장 을 보고 말 거란 말이야. 그게 어떤 건지 알기나 알아?" "그게 어떤 건지 잘 알지는 못하 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요. 결혼은 상대방이 있는 행위라는 거 말예요. 혼자서 결정할 수 없 는 일이라구요." "최소한의 자격에조차 미달되는 경우에는 혼자의 일이 될 수도 있어. 더구나 참으로 상대 방을 사랑한다면." "그런 게 어딨어요?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더욱 그쪽의 의견을 존중해줘야 하잖 아요?" "사람이 모두 성숙되고 언제나 냉정한 이성으로 사는 건 아냐. 남녀의 일은 더욱 그래." "그럼 제가 아직 철이 덜 들고, 그래서 감정적으로 이 일을 처리하고 있다는 거예요?" 거 기서 경진의 목소리도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엔 그래." "그래서 모든 결정은 더 철이 들고 이성적인 명훈씨에게 맡겨야 한다는 거예요? 둘의 결 혼인데두?" "그게 내가 참되게 널 사랑하는 방법이야." 명훈은 내친김이라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대꾸했다. 갑자기 경진의 말투가 심하게 뒤틀 렸다. "이봐요, 명훈씨. 서른을 넘겼으니 나이를 앞세울 만도 하지만 이쪽도 세상 물정은 알 만 한 스물여섯의 여자랍니다. 삶에서 물질적 조건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도 잘 아는 직업 여성이구요." "그러니 어렸을 적의 환상과 성급한 판단에 더 이상 매달려 있지 말란 말야." "하지만 그 때문에 그 여성은 더 빨리 철이 들어 나름대로 대비했다면요? 그래서 일찍부터 직장에 나 가 돈을 벌고, 마침내는 상대방의 벌이가 없더라도 일생을 꾸려갈 수 있는 일자리까지 확 보했다면요? 그래서 상대방이 성급하게 절망하지 않고 진정으로 가치 있다고 믿는 일에 자 신을 몰두할 수 있게 한다면요?" 그러면서 명훈을 바라보는 경진의 두 눈에는 금방 흘러내릴 듯 눈물이 고였다. 그걸 본 명훈은 하마터면 감동할 뻔했다. 하지만 마지막 말에 담긴 의미가 오래 잊고 지냈던 명훈의 상처를 파헤쳤다. '너는 아직도 내 시를 기억하고 있구나. 설익은 감상과 과장으로 시 비슷하지만 시는 아 닌 내 넋두리를. 그것도 이미 3년째 단 한 줄도 떠올려본 적이 없는 그 허망된 말놀음을. 만약 그게 너를 지금까지 내게 붙잡아둔 그 무엇이었다면- 그건 아니야. 더욱 너는 내게서 떠나야 해... 나도 속이지 못하는 그걸로 너를 계속 속일 수는 없어...' 그러자 그 아픔은 마 음에도 없는 악의가 되어 쏟아졌다. "진정으로 가치 있다고 믿는 것- 내겐 그런 게 아무것도 없어. 그저 이 한 몸 먹고 입는 일이 막막할 뿐야. 네 말은 내가 너의 기둥서방으로 살아도 좋다는 뜻이지만, 그리고 국민학 교 선생님의 기둥서방이 갈보의 기둥서방보다야 훨씬 품위가 있겠지만, 그건 안 되겠어. 때 로는 정직한 비참이 훨씬 편할 수도 있지." 그때 흑, 하는 소리와 함께 경진이 울음을 터뜨렸다. 참고 참은 울음인 듯했다. "제 말을, 제 진실을 그렇게밖에 이해하지 못하시겠어요..." 경진은 그러면서 명훈의 가슴 을 주먹으로 콩콩 두드리다가 다시 한동안을 섧디섧게 울었다. 그리고 다시 목멘 소리로 덧붙였다. "제가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 아세요? 얼마나 외롭고 슬펐는지..." 그쯤 되자 명훈의 가슴속에 부글거리던 악의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경진이 다시 발작 적인 흐느낌과 함께 명훈의 가슴을 콩콩 쥐어박자 자신도 모르게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이건 견딜 수 없구나...' 명훈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쓸어안고 그녀의 젖은 눈가를 입술로 닦아주며 달래지 않을 수 없었다. "알지, 알구말구. 실은 나도 너만큼 힘들고 가슴 아파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그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자 근원적인 부분까지 양보하고 말았다. "그래, 미안하다. 내가 잘못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속절없는 열패감으로 비뚤어진지도 몰 라." 경진은 명훈의 그같이 완전한 항복을 받고서도 한참이나 더 울먹이다 울음을 그쳤다. 그 때 지서의 통금 사이렌이 울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그대로 입구 주무실 거예요?" 눈물을 훔친 경진의 아무 스스럼없이 겉옷을 벗어 개면서 명훈을 나무라듯 말했다. 그녀 의 말투가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명훈은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으응, 벗구 자야지. 그래, 그만 자자구." 그러면서 속옷 바람으로 다시 누웠다. 불을 끈 경진은 오래 함께 산 사람처럼 명훈 곁에 누웠다. 그게 자연스럽게 명훈의 욕망을 자극해 자신도 모르게 경진을 끌어안게 했다. 그녀 를 보내야 한다. 또는 떠나야 한다는 장한 결의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명훈의 가슴속에 꿈 틀대던 욕망이었다. 헤어져 보낸 동안 성숙한 정신만큼이나 그녀의 몸과 욕망도 성숙해 있었다. 이게 그때의 그 아이인가 싶을 정도로 경진은 당당하고도 적극적으로 명훈을 받아들였다. 옛날의 그 다 분히 충동적이고, 그래서 억지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성합과는 달리 뜨겁게 매달려오고 신음 조차 감추려 들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남은 결벽대로라면 명훈은 그런 경진의 대담함과 적극성을 의심쩍 게 보거나 못마땅해해야 옳았다. 하지만 그날은 왠지 그녀의 성숙을 확인하는 것처럼 대견 스러울 뿐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성합은 진정한 의미로는 첫 번째임에도 불구하고 풍성 하기 그지없는 것이 되었다. 다음날 경진이 그토록 쉽게 전날의 불안을 털어버릴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몇 번이나 되풀이된 성합 덕분이었을 것이다. "푹 쉬고 계세요. 오늘은 토요일이라 열두시 반이면 돌아와요. 한시 버스로 나가 점심은 서울에서 먹어요." 늦잠에서 깨어나 다급히 출근하면서 경진은 그렇게 말했다. 전날 명훈이 잠시하고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하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명훈도 처음에는 그 같은 그녀의 암시에 걸려 별생각 없이 모자란 잠을 채웠다. 하지만 열시쯤 되어 다시 눈을 뜨자 독한 술에서 깨어나듯 그런 암시에서 놀라 깨어났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나는 아직 너와 함께할 수 없어.' 명훈은 급히 옷을 걸치고 종이와 볼펜을 찾아보았다. 마침 그녀의 앉은뱅이책상에는 양면괘지와 볼펜이 가지런히 갖춰져 있 었다. 명훈은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양면괘지 맨 윗장에다 급히 휘갈겼다. <경진에게. 헤어져 슬퍼하면서 사느니보단 마주보며 우는 별이 되자- 이건 네가 즐겨 부 르는 고운 노래지만, 살 만한 삶은 아니다. 떠나야겠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잊어달라고 강 요하지는 않으마. 오히려 기다려주기를 간청하며 떠난다. 되도록이면 빨리 돌아오마. 미안하 다. 명훈.> 그리고 정말로 큰 죄나 지은 사람처럼 발소리까지 죽여가며 경진의 방을 나왔다. 학교를 멀찌감치 돌아 국도로 나간 뒤- 때마침 지나가는 서울행 버스에 쫓기듯 몸을 실었다. 제 14 장 황금알을 찾아서 새로운 도시의 건설에는 여러 가지 원칙과 조건들이 필요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종합적인 정책이어야 하며 그에 따른 법제적 지원과 재원 확보가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중 산층뿐 아니라 민간 기업의 참여가 있어야 하고 그 경우 개발 이득이 보장되어야 한다. 60년대말의 광주대단지 개발은 겉으로 보아서는 그런 원칙과 조건들이 구비되어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 내막은 당시의 일반적인 정책들과 마찬가지로 졸속과 미비를 벗어나지 못 한 것이었다. 계획은 다분히 구호적이고 법제적 지원과 재원 확보도 지극히 형식적이었다. 특히 개발비는 장기의 저리 금융이어야 하고 충분한 경제적 뒷받침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 고 그 부분은 거의 고려되어 있지 않았다. 거기다가 단순한 주거 도시로서가 아니라 복합적인 위성 도시로 계획되었으면서도 거기 따른 건설의 순서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었다. 철거민의 강제 입주는 철저하고 정교한 계 획이 있어야 하고 주민의 자발적인 기구가 먼저 설립되어야 한다. 교통, 통신, 용수 등 도시 기능에 필요한 사회 간접 자본이 갖춰져야 하며 주택보다는 상업 및 공업 시설이 먼저 갖춰 져야 한다. 그런데도 수목이 무성한 구릉 지대를 벌겋게 밀어놓은 곳에 철거민부터 먼저 실 려와 부려져 있는 것이 69년 여름의 광주대단지였다. 하지만 서울의 팽창과 더불어 부동산 가격의 급등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그 개발 이익이 좋은 투기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정작 그 신도시의 주민이 될 사람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미비와 졸속이 오히려 투기꾼들에게는 한 기회를 주었다. 개발 이익이 실현될 때까지 기다 릴 수 없는 궁박한 철거민들의 기대 이익을 헐값으로 사들이는 길이었다. 다만 그때만 해도 뒤에 보게 될 것처럼 전국민의 투기꾼화는 일어나지 않아 아직 그들은 소수의 눈 밝은 사람 들에 지나지 않았다. 영희가 택시에서 내렸을 때 단대리는 벌써 외지에서 온 그런 사람들로 적잖이 붐비고 있 었다. 벌써 조금씩 비만의 기미를 드러내는 몸 때문에 유달리 더위를 타는 영희에게 벌건 황토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는 마치 뜨거운 모닥불 곁에 다가선 듯한 느낌을 주었다. 영 희는 파라솔을 펴기에 앞서 수건으로 이마의 땀부터 훔쳤다. 영희가 단골로 드나드는 복덕방은 그곳에서 몇 발짝 되지 않았다. 겨우 거적을 면한 가건 물에 턱없이 크고 화려한 간판이 새삼 영희에게 쓴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검붉은 바탕에 ' 황금부동산'이란 금빛 글씨가 유혹적이기보다는 위압적이었다. 영희가 문을 대신한 발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 아저씨는 보이지 않고 낯선 젊은 이 둘이 나무 탁자에 불량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어서 옵쇼오." 그 중에 하나가 습관적으로 그렇게 소리쳐놓고 영희를 훑어보다가 갑자기 어조를 바꾸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슈?" 영희가 손님으로는 너무 젊어 보였는지 당연히 보여야 할 공손함이 전혀 없었다. 아마도 찻값 수금 온 다방 아가씨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영희는 그런 그들의 느물거리는 듯한 눈길이 불쾌하였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고 되물었다. "주인 아저씨는 어디 갔어요?" "볼일 보러 갔시다. 그런데 무슨 일이슈?" 그때까지 앉아 있던 조금 나이든 쪽이 다시 몸을 일으키며 이번에는 좀 업자답게 물었다. "며칠 전에 물건 부탁해둔 게 있어서요." 영희가 군말 달지 않고 간단하게 대답해주었다. 그제서야 그들도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걸 느꼈는지 태도가 달라졌다. "물건...이라니요? 어떤 물건을 부탁하셨는데?" 대략 영희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나이든 쪽이 제법 복덕방 주인 티를 내며 물었다. 보 다 어린 쪽도 처음의 불손한 태도가 새삼 미안하다는 듯 뒤늦게 두 손을 모으며 일어났다. 그런 그들의 태도로 보아 그냥 복덕방에 놀러 온 건달들은 아닌 듯했다. 그것도 복덕방 주 인으로부터 적잖은 닦달과 단련을 받은 눈치들이었다. "무딱지하고 딱지 중에 조건 좋은 것 나온 것 없나 해서..." "무딱지는 거의 추첨이 끝나 가는 판이라 물건으로 나올 게 없을걸요." 나이든 쪽아 다시 업자로서 알은체를 했다. 무딱 지는 대개 철로변의 무허가 건물을 철거할 때 발행한, 결정된 지번이 없는 토지 분양증을 말한다. 나중에 추첨으로 지번을 얻게 되는데, 운 좋은 경우에는 대로변이 걸려 분양가의 몇십 배가 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무딱지를 거래하는 손님은 이미 그 방면에서 아마추어 가 아니라는 뜻이 되기도 했다. "유보지 관계도 좀 알아봐주시기로 되어 있어요." 영희가 다시 일격을 가하듯 덧붙였다. 유보지는 신도시의 중심 상가나 간선도로의 교차 지점, 또는 38미터 대로변 같은 데의 요지로 서울시가 당장은 분양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는 땅을 말한다. 나중에 차례로 입찰을 부칠 예정으로 되어 있는데, 그 땅값이 일반 대지와 비 교되지 않을 만큼 비쌀 것은 뻔했다. 일반 대지가 평당 2천 원 내외에 거래되는 것에 비해 유보지는 최저 3만 원이 예상되고 있었다. 거기다가 유보지의 또 다른 특징은 분할 단위가 크다는 것이었다. 한 필지가 최하 80평은 넘어 적어도 3백만 원은 가지고 있어야 손을 대볼 수 있는 게 유보지였다. 아직 입찰은 시작되지 않았으나 그 유보지를 알아본다는 것은 영희 가 그 만큼 큰손이라는 암시이기도 했다. 그 말의 효과는 나이든 쪽에서 먼저 나타났다. 그 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렇다면 사장님께서 돌아와봐야겠는데요. 저희들은 아직 이 바닥에 경험이 적어서... 우 선 앉으시죠. 사모님, 여기 앉아서 기다리십쇼." 그러면서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내어주고 어린 쪽을 향해 냅다 소리쳤다. "뭐 해? 선풍기라두 켜지 않구. 사모님이 더워하시잖아." "아, 네, 네."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셈인 어린 쪽이 사무실 구석에서 선풍기를 꺼내 영희를 향하게 하 고 스위치를 틀었다. 후텁지근하던 사무실이 한결 견딜 만해졌다. 하지만 더운 날씨 탓인지 그들의 긴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영희가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오래지 않아 나이 어린 쪽이 먼지 나는 길가를 내다보다 갑작스레 감회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 "세상 차암 많이 변했다. 천지 개벽이 따로 있나..." 이제 스물두엇이나 되었을까, 게바가 지처럼 덮어쓴 여드름 하며 사람 몸통 하나가 넉넉히 들어갈 만큼 넓은 바짓가랑이에 손바 닥만큼 넓은 가죽 혁대가 건달 티를 줄줄 흘리고는 있어도 어딘가 순박한 데가 있어 뵈는 얼굴이었다. 그곳 부동산에 대해 몇 마디 주워들은 대로 더듬거리다가 영희가 자신보다 더 훤하게 그곳 형편을 꿰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입을 다문 나이든 쪽도 어색한 침묵이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그 말을 받았다. "뭐가? 임마." "옛날 우리 단대리가 오늘날 이 모양으로 될지 누가 알았겠수?" "아, 참. 너 여기 출신이 라 했지? 여기 옛날에는 어땠는데?" 그러자 나이 어린 쪽은 더욱 감개 어린 눈빛으로 햇 볕이, 8월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도로 쪽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5년 전 내 중학 졸업할 때만 해도 여긴 밀림이었다고요, 밀림." "짜샤, 여기가 아프리카 냐? 밀림이 있게." 나이든 쪽이 그건 못 참겠다는 듯 그렇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나이 어린 쪽은 정말로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형, 정말이라니까. 저기 보이는 저 언덕빼기 있죠? 나중에 시청이 들어선다던가, 하는 데 말요, 저긴 나뭇가지에서 나뭇가지로 옮겨갈 수 있을 정도였다니까요. 그래서 소 먹이러 오 면 새끼줄로 이 나무 저 나무 얽어놓고 타잔놀이를 했지. 지금은 골재 채취로 여기저기 파 뒤집고 빨래다 오물이다 더렵혀져서 그렇지 단대천, 대원천도 그림 같았수." "그때 시골치 고 그림 같지 않은 곳 어딨겠어? 하지만 짜샤, 공갈치지 마. 그래도 여긴 서울에 가까워서 그때두 발랑 까진 곳이었을 거라구."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거리야 가까운지 몰라도 길이 어땠는지 아세요? 큰길이란 게 저 기 갈마치고개를 넘어 광주로 가는 길과 수진리고개를 넘어 복정리, 문정동을 거쳐 천호동 에 이르는 외통수였수. 서울 다녀오는 게 거의 하루 일이었으니까, 실제로는 대전만큼이나 멀었다구요." "마, 차로 가면 사대문 안까지도 한 시간이 안 걸리는데, 어째서 하루 길이야? 여긴 버스 도 안 다녔냐?" "버스야 다녔죠. 그러나 그게 하루 두세 번이 고작이었다구요. 그것두 텅텅 비어 다녔는 데..." "짜샤, 그 많은 여기 사람들 다 어디 가고?" "지금 원주민 행세하는 사람들 따지고 보면 대개 이 근래 신도시 개발한다는 말 듣고 흘 러든 사람들이라니까. 그때는 산비탈 양지바른 곳에, 그것도 큰길 따라 여기 몇 집 저기 몇 집이 고작이었다구요." "이렇게 사방이 넓은 들인데?" "햐, 정말 모르시네. 지금은 도자(불도저)로 여기저기 깎고 파뒤집어 놓아서 그렇지 그때 는 밀림이었다니까, 밀림. 개골짝에 손바닥만한 논뙈기를 빼면 밭농사가 전부인 산골짜기에 어떻게 사람이 그리 많이 살 수 있겠어요?" 그러자 나이든 쪽이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리고 정색을 했다. 자신의 식견을 드러내보일 기회를 잡았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하기야 그러고 보니 들은 말이 생각나는군. 처음 서울시가 신도시 개발을 계획할 때 여 기저기 후보지를 물색했다는 거야. 그러나 고양, 의정부 쪽은 휴전선이 가까워 안 되고, 하 남, 안양 쪽은 농경지 훼손이 심해 제외됐다더군. 그랬다면 네 말이 맞겠지. 사람이 적게 살 고 농경지도 좁은 언덕빼기 잡목숲이 제격이었을 거야. 게다가 여기저기 개울이 있어 물 문 제도 걱정 없을 테고..." 그렇게 아는 척을 하고 있는데 누가 발을 걷고 들어섰다. 복덕방 주인 아저씨였다. "더운데 사무실에 틀어박혀 무슨 잡담들이 그리 많어? 할 일 없으면 사무실 앞에 물이라 두 좀 뿌리지 않구." 그렇게 핀잔을 주며 들어서던 그는 영희를 보자 반색을 했다. "아이구, 영동 사모님이 연락도 없이 오셨구먼. 오신 지 오래되셨습니까?" "접때 오늘 온 다구 하지 않았어요? 이제 한 삼십 분 돼요." 영희는 그렇게 대답해놓고 공연히 분위기가 딱딱해지는 것 같아 웃음기를 띠며 물었다. "요즘 많이 바쁘신가 보죠? 재미 좋으세요?" "이걸 식소사번이라구 하나? 생기는 거 없이 바쁘기만 합니다. 이제 여기 장사도 옛날 같 잖아요." 복덕방 주인이 갑자기 어두운 얼굴로 영희의 말을 받았다. 업자들이 흔히 그러듯 한번 해 보는 소리는 아닌 듯했다. 영희가 부동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참이기는 하지만 아직 색시로 있던 백운장에서였 다. 어느 날인가 거나하게 취한 기자 몇이 둘러앉은 술상에 끼게 되었는데, 그게 한 계기가 되었다. "새끼, 그거 아무리 군발이 출신이지만 더럽게 무식하데. 뭐, 여의도를 창조한다고? 지가 하느님이야, 뭐야? 창조하긴 뭘 창조해?" 그 중에 성말라 보이는 안경잽이가 그렇게 빈정거릴 때만 해도 영희는 심드렁히 듣고만 있었다. 기자와 세무서 직원과 학교 선생이 모인 술자리는 술값 낼 사람이 없어 색시가 술 값은 문다는 당시의 농담대로, 초저녁 기자들만의 술자리는 그리 반갑지가 않았다. 그른데 그 말을 받는 주먹코 기자의 태도가 안경잽이와 너무 달라 영희의 관심을 끌었다. "어이, 이기자. 어휘 선택 약간 잘못된 거 가지고 너무 그렇게 막말하지 마. 김시장, 그 사 람 그래도 오늘 우리한테 큰 인심 쓴 거야. 공연히 우릴 헬리콥터에 태운 게 아니라구." " 기껏해야 군발이식으루 폼 한번 잡은 거겠지. 여의도든 강남이든 지들 X꼴리는 대루 개발 하면 되는 거지, 구태여 우릴 끌고 가 일일이 손가락질하며 떠먹이듯 할 건 뭐야?" "그게 바루 김시장의 깊은 뜻이라구. 그것도 모르구 밴장(빈정)거리기만 하니 기자 십 년에 전세 방도 못 면하지." "깊은 뜻 좋아하네. 어디에 무슨 다리가 들어서고, 어디가 무슨 부지란 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거야 도시 계획안 한 장이면 되지." "이기자, 정말 기자 생활 십 년 한 거 맞아? 아니, 경제부처 출입한 적 있단 말 정말이 야?" 주먹코 기자는 이제 한심하다는 표정을 넘어 약간의 감탕까지 섞인 표정으로 그렇게 되물 었다. 듣고 있는 나머지 셋도 어느 정도 주먹코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빙글거리며 안경잽이 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안경잽이는 뻣뻣하게 맞섰다. "사쓰말이(경찰 출입) 끝내고 얼마 안 돼 상공부 두어 해 나갔지. 그런데 그게 어때서?" "아무래도 바로 말해줘야겠군. 경제 개발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필연적인 것이 땅값 변동이 지. 땅은 그 생산력으로서가 아니라 지가 급등으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는 거란 말이야. 그런데 김시장은 그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어디 있는지를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우리에게 알려준 거라구." 영희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란 말이 무엇보다도 강렬한 인상으로 머릿속에 새겨졌다. 색 시로서는 술상머리에 앉기가 조금씩 민망스러워질 무렵이어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 다. 하지만 상대인 안경잽이는 끄떡도 않았다. "으흥, 그 얘기? 로스톤가 뭔가 하는 양키 허풍쟁이가 말한 도약 이론을 정말로 믿으란 거야? 그래서 우리 경제가 정말 도약 단계에 이른 것을 믿고 땅장사라도 벌이란 말이야?" "어쨌든, 이봐. 늙어 집 한 칸이라도 장만하려면 내 말대루 해. 당장 사글셋방으로 옮기고 전세금 빼 오늘 김시장이 손가락질한 근처 아무데나 땅마지기 사놓으라구. 정 모자라면 처 갓집 잡히고 은행빚이라두 얻어. 지금은 논밭이구 진뻘이지만 나중에는 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거야." 그들의 입씨름은 그뒤로도 한동안 더 이어졌지만 그날 영희의 머릿속에 남은 오직 한마 디, 이제 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쪽으로 눈떠 살 피기 시작한 영희에게 땅의 그럼 용도 변화는 먼저 복덕방을 통해 나타났다. 토박이 늙은이 들의 소일거리였던 그 일은 이제 젊은이들도 부끄러움 없이 끼여드는 전문 직종으로 변해갔 고, 취급의 대상도 크게 바뀌었다. 그때까지도 영희의 스승 노릇을 하고 있는 정사장은 오히 려 예외적인 생존자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그곳 '황금부동산'의 사장도 살아남은 점에서 정사장 못지않은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다. 그런데 불과 보름 사이에 머리보다는 어깨가 더 쓸모 있어 보이는 두 젊은이를 다 끌어들여 야 한 것으로 보다 그도 그곳 나름의 또 다른 변화를 강요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들으니 이곳 땅장사 재미는 이제부터라고 하던데. 제 눈에도 이 몇 달에 천막 부동산만 해도 배는 는 것 같은데요." 영희가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그렇게 말하자 복덕방 주인은 더욱 정색을 하고 받았다. "그건 구경꾼들 얘기고 우리 같은 토박이들에게는 바고 그게 탈이죠. 나도 이 바닥에서는 어지간히 날고 긴다는 말을 듣는 편이지만 요즘 들어오는 전문꾼들에게는 못 당하겠어요. 가만히 앉아서 찾아오는 사람 짝지워주는 장사는 점점 옛날얘기가 돼가고 있다 이겁니다. 발 넓고 지역 사정에 밝다는 것만으로는 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구요." "그게 어떤 사람 들인데요? 우리 홍사장님 같으신 분이 쩔쩔매는 걸 보니 꾼은 꾼인 모양이군요." "알고 보니 여기 새로 들어온 복덕방 대부분은 전에 서울서 이 비슷한 장사로 한번 재미 를 본 적이 있는 치들입디다. 거 왜, 상계동이나 봉천동, 난곡동 같은 데서..." "아, 그 달동 네들." "그게 바로 이 광주대단지의 원형이란 거 아닙니까? 철거민 집단 이주지로서. 그런데 그 때도 토지 분양을 놓고 온갖 야료가 있었던 모양이고, 이 사람들은 모두 거기서 짭짤한 재 미를 본 사람들이라 하더라구요. 말하자면 실전 경험을 쌓고 들어온 사람들이죠. 그러니 지 역 출신 텃세 하나 가지고 버텨오던 내가 무슨 수로 당해내겠습니까?" 얘기가 그쯤 흐르고 보니 그 같은 부동산 시장의 판도 변화에 대한 영희의 관심 방향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변화는 영희가 추구하는 것과 실제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 그 밤 술자리 이래로 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영희의 믿음은 여전히 변함 이 없었다. 그러나 그 봄부터 실제 땅에 손대기 시작하면서 영희는 이내 모든 땅이 황금알 을 낳아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시아버지를 설득해 끌어댄 돈과 자신이 마련 한 자금으로 영희가 처음 손댄 곳은 여의도였다. 정사장의 권유로 도시 계획상 상가가 들어 설 곳이라는 땅콩밭 한 뙈기를 샀지만 영희가 생각하는 장사로는 막차였다. 그곳 땅값은 단 기간 급등이 한차례 끝나 빨리 자본을 회전시켜야 하는 영희로서는 언제 올지 모르는 다음 상승을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서 두 달 만에 손해 겨우 면하고 손을 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사장이 다시 권한 곳이 그곳 광주대단지였다. "무슨 종합 도시다, 위선 도시다 어쩌고 떠들어대지만 서울시 속셈은 뻔해. 결국은 골치 아픈 철거민 처리가 우선이지. 전시 행정의 번지르르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아. 상계동, 봉 천동 재판일 거라구. 하지만 투자 대상으로는 당분간 거기 이상 없을 거야. 규모가 커서 입 맛대로 손댈 수 있거든. 작은 것으로는 딱지 장사도 괜찮을 거고, 크게는 몇천만 원 단위 노 른자위 유보지도 노려볼 만해. 나도 여의도에 찔러넣은 것 빠지면 그리로 갈 거야. 그러니 그쪽으로 가보라구. 우선 딱지나 사모으면서 살펴봐. 거래선 잘 잡고..." 영희는 그 말에 광 주대단지로 오게 되었지만 솔직히 처음에는 뭐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선이주 후건설이라는 유례없는 도시 건설 방식에 따라 산등성이를 불도저로 밀어놓은 허허 벌판에 철거민들의 천막만 빽빽히 들어선 그곳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그려보기는 어려 웠다. 그러나 두어 번 드나들면서 느껴지는 변화는 경험이 적은 영희에게도 무언가 희미한 낌새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서서히 그쪽으로 몰려들고 있는 외지의 자본이었다. 지난 6월 영희가 처음 단대리를 찾았을 때만 해도 복덕방은 발 넓고 눈치 빠른 토박이들 위주로 몇 군데 안 됐다. 그러나 그 다음에 왔을 때는 비록 천막 사무실이지만 서울식의 거 창한 간판을 단 부동산이 배는 늘어 있었다. 그 다음에는 다시 그 배가 되는 것 같았고 네 번째가 되는 이번에는 복덕방 골목을 이룰 만큼 큰길을 따라 빽빽히 들어서 있었다. 영희는 그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자신을 가졌다. 파리가 몰리는 곳에는 썩은 생 선이 있다. 거기다가 나는 저 사람들보다 먼저 왔다. 이번에는 막차가 아닐 것이다. 이 거리 가 온통 파리떼로 웅웅거릴 때 나는 뜬다... 그래서 지난번 세번째로 왔을 때 영희는 '황금부동산'의 홍사장을 거래선으로 잡고 무딱 지 여섯 장을 과감하게 사들였다. 현지의 땅값은 대지도 아직 2천 원이 안 되는데 평당 2천 원 가까운 돈을 쳐주고 아직 지번조차 결정되지 않은 토지 분양증을 사들인 것이었다. 홍 사장을 거래선으로 잡은 것은 그때만 해도 그의 사무실이 그 지역에서는 가장 뿌리 깊어 보인 까닭이었다. 그런데 이제 홍사장의 푸념을 들으면서 영희는 문득 자신이 고른 거래선 에 의심이 들었다. "아무렴...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뭘 알겠어요? 그래도 여기서 나고 자란 홍사장님이 여기 물건에 제일 밝지..." 영희는 되도록 자신의 가슴속에 이는 의심을 드러내지 않고 그렇게 부동산 시장의 변화 내용을 추적해 들어갔다. 홍사장은 영희의 속셈도 모르고 자신에게 불리한 실토를 푸념 삼 아 계속했다. "그게 그렇지 않다니까요. 우선 요즘 주로 거래되는 물건은 이 지역 사람들의 것이 아닙 니다. 지역 사람들 물건은 단위가 큰 반면에 많은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 기대 이 익은 크지 못합니다. 손 큰 실수요자나 어지간한 전문가가 아니면 잘 손대지 않아요. 대신 딱지는 특히 무딱지는 평균적인 땅값 상승 외에도 추첨에 따른 부가 이익의 폭이 커요. 이 를테면 추첨으로 16미처 대로변이나 도로 교차점에 있는 지번이 걸리면 그것만으로 다른 땅 보다 몇 배 장사가 되니까요. 자연 거래는 그런 물건을 위주로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들은 모두 철거민들 거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 물건을 사들이는 데는 나나 외지에서 들어온 아이 들이나 마찬가집니다. 신용이나 안면 같은 게 따로 힘을 쓰지 못하고 마구잡이 도떼기시장 같이 된다 이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한번 이런 장사를 해본 패들이 훨씬 많은 수단을 가지 고 있죠. 사는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딱지를 사러 오는 현지인은 없어요. 따라서 내가 토박 인지 아닌지 알 길도 없거니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겁니다. 그들은 좋은 물건 많이 가진 사람한테서 원하는 것만 사면 되니까." "그렇다고 홍사장님이 특별히 불리해진 건 아니잖아요?" "아니죠. 나는 여기 앉아 나오 는 물건이나 기다리고 있지만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구요. 별로 팔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술잔깨나 먹고 꼬드기기도 하고 어떤 때는 팔지 않겠다는 사 람에게서 강제로 뺏다시피 하기도 해요. 또 천막촌 통반장을 매수해서 건당 얼마씩 쥐어주 고 거둬들이기도 하고... 그러니 나 같은 것한테 나올 물건이 있을 리 없죠." "그럼 아까 저 젊은 분들이 물건이 없다고 한건 그 뜻인가요." "거의 그런 셈이죠. 그래서 나도 수단 좀 부려보겠다고 젊은 사람들을 데려다놨는데 영 성과가 없어요. 오토바이 끌고 다니며 구석 구석 뒤지기도 하고 저녁마다 뚝방 포장마차에 나가 작업한다고 해보지만... 거기다가 딱짓 값이 뛰는 것도 문제라구요. 무딱지 처음에 2만 원 하던 게 벌써 3만 원이 넘었다구요. 4 만 원이라도 물건만 나오면 마구 사들이는 치들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2만 5천 원선이 넘으면 벌써 사들이기 겁나요. 거기다 내 구전 붙이면 사는 사람 쪽에서 3만 원 가 까이 되는데, 아무리 오르는 땅값이라지만 보름 사이에 5할이나 튀겨져도 되는 겁니까? 그 래서 망설이다 보면 그치들이 넙죽 받아가는 식이에요." 이 영감은 틀렸다, 그기까지 듣자 영희는 결론처럼 속으로 말했다. 영감, 보름에 5할이 아 니라 두 배도 오를 수 있고 세 배도 오를 수 있기 때문에 땅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비유 하기도 하는 거야. 그 땅을 요구할 수 있는 딱짓값이 가파르게 오르는 것은 당신 같은 사람 들이 걱정할 일이 아니라 기뻐할 일이야... 그렇지만 영희는 그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그렇다면 헛걸음이겠네요. 나는 딱지 나온 거 있으면 더 거둬두려고 이는데... 정말 한 장 두 없으세요." "지금 작업하구 있는 건 몇 장 있지만 값이 자신없어서..." "얼마나 달라구 그러는데요?" "3만 원은 줘야겠다고 버티는 친구들인데 것두 돈 들고 가면 딴소리할지 몰라요. 그때가 좋았지. 2만 원에두 거둬달라고 사정하던 때가." "값은 너무 걱정 마세요. 오르면 그만한 까닭이 있지 않겠어요?" 까닭은 무슨 까닭. 다 그 야바위꾼들의 장난 때문이지. 즈들이 꾀고 어르느라 든 경비 전부 딱짓값에 얹으니 그 모양이 난 거란 말이오. 그렇잖으면 땅은 매양 그 땅인데 두 달 만에 곱쟁이로 뛸 수 있 소?" '영감, 그것도 틀렸어. 땅값은 그 자체의 값으로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의 관 계로 결정된다고 들었어. 그리고 서로 관계하고 있는 땅의 값은 언제나 동일해지려는 경향 이 있다더군. 그것도 그들 중에 가장 높은 값으로. 이 대단지의 어느 한 부분이 올라가면 나 머지 다른 부분도 따라 오르게 되어 있는 거야. 그들이 그렇게 올렸다면 이곳의 땅값이 언 젠가는 그 이상으로 오른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거야. 물론 거기에도 한계는 있겠지. 소외 막차라는 것 말야. 그러나 아직은 아닌걸. 내가 보기에 지금은 아직 초장이야.' 그러나 이 번에도 영희는 여전히 내색 없이 말했다. "그러니까 투자라고 하지 않고 투기라고 하지 않아요? 앉아서 큰돈 버는 데 위험도 각오 해야죠. 좋아요. 그 3만 원짜리 둘 다 맡아주세요. 구전으로 1할을 얹어드리죠." "전에 여섯 장이나 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비싸게 또?" "대신 단위가 적잖아요? 단위가. 다 합쳐야 기껏 20만 원인데 뭘 그러세요? 걱정 마시고 3만 원짜리는 나오면 무조건 거둬두세 요. 몇 장이 되든 내가 다 사드릴 테니." 그러자 홍사장은 좀 질린 표정이 되었다. 조금 있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일깨워주듯 말했다. "철거민 딱지는 원칙으로 전매 금지인 거 아시죠? 거기다가 아직 정부 분양가가 확정되지 도 않았고..." '영감, 것두 걱정 말아요. 내 정사장한테서 다 알아보고 왔다니까요.' "전에 봉천동이나 난곡동에서도 딱지는 전매 금지였지만 결국은 그대로 안 됐어요. 솔직히 무허가 판잣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땅을 준들 무슨 돈으로 집을 짓겠어요. 아무리 내 집에 포한이 진 사람들 이라 하더라도 실제 집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절반이 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여기는 더 나빠요. 봉천동이나 난곡동만 해도 서울이 가까워 벌이를 할 수 있었지만 여기는 그것 도 어렵잖아요. 집만 가지고 살 수 있어요. 정부가 그들에게 장기 저리로 빌려줄 돈을 넉 넉히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결국은 모두 팔고 떠날 거예요. 여기서 집을 짓고 도시를 일굴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라구요. 최종적인 수요자는 철거민보다는 조금 나 을지 모르지만 겨우 아등바등 살아가는 서울 변두리의 서민들일 거라구요. 여기로 옮겨올 철거민이 30만이랬나요. 그 중에 그런 사람들이 3할만 섞여봐요. 10만이에요. 아무리 정부라 해도 그들의 한맺힌 내집 마련의 꿈을 함부로 무시할 수 있겠어요. 거기 편 승하면 얼마든지 보호받을 수 있어요. 서울시가 나중에 발표한다는 분양가도 그래요. 돈이 모자라는 서울시로서야 한 푼이라도 올려받고 싶겠죠. 하지만 쉽지 않을걸요. 서울시가 이 부지를 원주민들에게서 얼마에 매입했고 얼마에 수용했는지 모두가 다 알아요. 열 배 스무 배까지는 몰라도 백 배 이백 배는 안 되겠죠. 그것도 수십만 서민들을 상대로. 잘해야 지금 시세 정도밖에 매길 수 없을 거예요. 그 이상 하면 일난다구요." 하지만 영희는 이번에도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때대로 무슨 수가 나겠죠. 정히 재수 없으면 손해볼 수도 있는 거구... 어쨌든 되는 대루 모아주세요. 그때 시세가 올라 있으면 3만 원에 얼만큼은 귀가 달려도 좋아요."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황금알을 찾아서 이곳에 왔다. 나는 되도록이면 많은 황금알을 모아 나를 짓밟고 욕보인 세상에 앙갚음을 하려 한다. 혜라의 말투로 좀더 점잖게 표현한다면, 일찍이 내가 세상을 해석한 게 마침내는 틀린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려 한다. 그런데 이 거래선은 내게 넉넉한 황금알을 모아줄 것 같지 않다... '황금부동산'을 나온 영희가 다시 찾아간 복덕방은 '현대개발'이란 독특한 상호를 가진 곳이었다. 다 같이 가건물이지만 정면은 알루미늄 새시를 써서 유리를 박아놓고 간판에는 '내 집 마련과 재산 증식의 꿈은 현대개발에서!'란 구호까지 써넣은 게 벌써 주위의 다른 복덕방들과는 인상을 달리했다. 사무실 앞에 석 대나 줄지어 서 있는 오토바이며 수시로 들 락거리는 선글라스 낀 청년들도 기동력과 활기를 과장하고 있었다. 사람을 맞는 태도도 달 랐다. "아이구, 어서 오십쇼." 영희가 들어서자 한 해사하고 붙임성 있어 뵈는 젊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머리까지 숙였다. 영희가 젊은 여자란 걸 두고 엉뚱한 추측이나 고객이 아닌 방문객으로 의심하는 눈 치는 전혀 없었다. 사무실 구석에서 무언가를 키들거리고 있던 젊은이들도 입을 다물고 자 세를 바로 했다. 험한 인상들과는 전혀 다른 정중함이었다. "많이 더우시죠? 우선 이것부터 한 병 드세요." 영희를 맞아들인 젊은이는 공손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얼음물에 담가 둔 박카스를 내밀었 다. 당시로는 아주 귀하고도 효험 좋은 피로 회복제로 여겨지던 음료였다. 영희는 그 지나친 친절에 잠시 망설이다가 공연히 쭈뼛거리는 듯한 인상을 주기 싫어 받아 마셨다. 젊은이는 영희가 그 박카스를 다 마시기를 기다린 뒤에야 용건을 물었다. "사모님, 그런데 어떻게 오셨죠?" "네, 땅 좀 알아보려구요. 딱지도 나온 게 있으면 좀 거두고..." 영희는 기세 싸움이라도 하듯 애써 당당함을 가장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거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말투였 으나 그 젊은이는 전혀 개의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잘 오셨습니다. 솔직히 말해 근처에서는 저희만큼 다양하게 물건을 갖추고 있 는 업소도 드물죠. 그런데, 여기는 처음이십니까?" "아뇨, 봄부터 다녔어요. 투자 좀 할까 해서..." 영희가 다시 자신의 이력을 과장하듯 그렇게 대답했다. "그럼 단골이 있으시겠네." "몇 군데 있긴 한데 영 시원치 않아서... 안목이 없는 데다 간까지 작아 어떻게 부동산을 하려는지 몰라..." 영희는 그렇게 말끝을 흐려놓고 한 번 더 상대의 기를 꺾으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사장님은 안 계세요?" "아, 네. 사장님은 방금 다른 손님과 나가셨습니다. 하지만 제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발로 뛰는 일은 제가 동생들 데리고 도맡아 하고 있죠. 여기 제 명함이 있습니다." 젊은이가 그 러면서 명함을 내밀었다. 이름 앞에 있는 개발부장이란 직함이 왠지 속으로 쓴웃음을 짓 게 했다. 그때 구석에 있던 젊은이들 주의 하나가 그런 영희의 속을 들여다본 듯이 영희가 상대하 고 있는 젊은이에게 다가와 두 손을 모았다. "탄리 쪽으로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부장님." 여간 공손한 말씨가 아니었다. 거기에 걸맞게 받는 사람의 말투는 사뭇 고압적이었다. "작업 확실하게 해. 어영부영하지 말고... 특히 인상 관리 잘하고." "알겠슴다, 부장님." 튀어나온 광대뼈와 각진 턱이 어우러져 만든 험한 인상과는 달리 젊은이는 허리까지 거의 직각이 되도록 굽혔다. 영희는 그런 그들을 보면서 다시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강한 확신 같은 걸 느꼈다. 너희들이 누군지 알 듯하다. 아마도 형님이란 말이 부장님으로 바뀌었 겠지.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너희들이 꼬여드는 것만 보아도 여기에 황금알이 있다는 것쯤은 믿을 수 있겠다. 영희는 그날따라 도통한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길 건너 맞은편에 비록 가건물이지만 비어홀이 새로 생긴 게 눈에 들어왔다. 단대천 둑을 따라 포장마차가 들어날 때만 해도 영희는 심드렁하게 보았다. 없는 사람들끼 리 뜯어먹고 사는 방법이다. 그러나 비어홀이라면 달랐다. 여자가 얼마나 있고 어떤 형태로 서비스하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상대는 철거민이 아니다. 방금 죽치고 앉았던 주먹들처럼 앞 으로 더 많은 여자들이 이리로 꼬여들겠지. 돈이 풍기는 독특한 향기에 이끌려. 여기에 황금 알이 있다... 그날 영희가 그곳에서 3만 5천 원에 딱지 두 장을 사고 4만 원을 한도로 열 장을 더 주문 하게 된 것은 아마도 그런 확신에서였을 것이다. 개발부장이란 친구도 영희의 그런 거침없 는 거래 솜씨에 야간 질린 표정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희의 태도 어딘가에 남아 있는 과거를 내매 맡은 듯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무래도 내가 큰손 만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누 님." 그러면서 은근히 감겨드는 태도였다. "제겐 동생이 여럿 있어요. 사모님이라 부르는 게 맘내키지 않는다면 그냥 영동 아줌마라 고 불러주세요." 영희는 그렇게 새침을 떨고 일어났지만 적어도 그의 기를 꺾어놨다는 점에서는 유쾌한 기 분도 없지 않았다. 곱상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그 개발부장이란 젊은이의 뒷골목 이력은 화 려할 것 같았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아 영희가 집에 도착한 것은 해가 뉘엿할 무렵이었다. 저녁 준비에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건만 일찍 들에서 돌아온 시어머니가 입을 한 발이나 빼물고 있었다. "잘한다. 늙은 애미 에미는 땡볕에서 등골이 휘어지는데 젊은것들은 코빼기도 뵈지 않으 니... 억만이는 요즘 어디 가 자빠져 있다든? 그리고 넌 또 참도 안 내오고 어딜 갔다 왔 냐?" "아침에 말씀드렸잖아요? 병원에 좀 다녀온다고..." "아 참, 그래. 어떻든? 의사가 뭐래?" 시어머니가 금세 안색이 변해 다급하게 물었다. 영희는 이때라 생각했다. "임신이래요. 석 달째라더군요." 사실 영희가 임신을 안 것은 벌써 보름이 넘었다. 창현의 배신 이후 험한 세월을 살아오 는 동안 그녀에게 임신은 재앙에 다름아니었다. 수술에 따르는 고통이나 비용도 그러하려니 와 무엇보다도 또 자궁을 긁어 내다가는 그대로 돌계집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 가 그녀를 괴롭혔다. 따라서 그걸 피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거기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는 데, 보름 전부터 그녀가 느끼는 모든 조짐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임신을 확신시키는 것들이 었다. 처음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 그것도 걱정하지 않고 낳을 수 있는 아기를 가졌음 을 알았을 때 그녀는 적잖이 감격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반격을 시도하면서 다져온 그녀 의 매서운 결의는 그 감격조차도 자신이 설정한 목표 안에서 통제할 수 있게 했다. 가장 필 요할 때, 가장 효과적일 때 이 카드를 쓰겠다- 그녀는 그런 속셈으로 억만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뭐? 그게 정말이야?" 자식 잡아먹는 법이 없다고 시어머니 금세 눈길이 달라져 그렇게 물었다. 영희는 짐짓 피 곤한 기색까지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네, 틀림없대요. 나도 긴가민가했는데..." "잘됐다. 늬 시아버님이 기뻐하시겠다. 이제부터는 몸 조심해라." 그 다음부터는 집안이 두루춘풍이었다. 남편과 며느리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언가 심 상찮은 일에 대한 의심도 며느리가 오후 내내 집을 배운 것에 대한 불만도 모두 잊은 시어 머니가 앞장서 집안의 불길이 될 만한 일은 모두 잡아나갔다. 그 바람에 저물 무렵에야 술 에 취해 돌아온 억만의 흉까지 모두 묻혀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영희가 마음놓고 황금알을 찾아나서기 위해 은밀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날 저녁 영희는 여기저기 주워모은 비닐 조각으로 사랑방에서 홀로 노끈 을 꼬고 있는 시아버지를 찾아가 그 동안에 모든 여덟 장의 토지 분양증을 내놓았다. 억만 은 초저녁부터 곯아떨어지고 시어머니는 이웃 나들이를 나간 뒤였다. "아버님, 이거 잘 치워두세요." 영희가 그러면서 토지분양증에 내밀자 시아버지가 물었다. "으응, 그게 뭐냐?" "토지분양증이에요." "토지분양증? 등기권리증이 아니고?" "곧 등기권리증이나 마찬가지가 될 거예요. 추첨만 있으면 지번과 지목이 생길 테니까요." "추첨이라니?" "제비뽑기 말이에요." "제비뽑기라고? 그럼 땅을 제비뽑기해서 주는 데가 있다는 거냐?" "서울시가요, 무허가 판잣집 사람들을 광주 골짜기로 옮기면서 나눠준 거예요. 잘 갈무리 해두세요." "가만있자. 그럼 너 땅장사한다면서 사들이 게 이거냐?" 그제서야 시아버지가 의심쩍은 눈길로 영희를 보며 물었다. 영희는 길게 설명하기가 귀찮 아졌다. 평소에 쌓아둔 신임에 의지해 애교로 넘기기로 했다. "아버님, 저번 여의도 장사 보셨죠? 한 달 만에 2할 장사가 됐잖아요? 이번에는 그 정도 가 아니에요.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몇 배가 될지 모르는 장사라구요. 그러니 아무에게 말 하지 마시고 깊이 감춰 두세요. 특히 억만씨는 눈치도 못 채게 하셔야 해요." 실은 저번 여의도 장사 때 2할이라는 것도 영희가 생돈을 물어 만든 명목상의 차액일 뿐 이었다. 그러나 평생의 농사꾼에다 며느리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시아버지는 얼마 전 눈앞 에서 실현될 급속하고도 엄청난 이익에 금세 의심을 풀었다. "알았다. 니가 하는 일이니 믿어보마. 하지만 무리는 하지 마. 우리 그런 돈 아니라도 사 리는 걱정 없다. 억만이 저놈 정신만 차리면 열 부자 안 부럽지. 말죽거리 배밭만 도지 놔도 너희들 양식 걱정은 없을 게다." 그러면서 꼼꼼하게 장수를 헤아린 뒤 토지분양증을 문서 넣어두는 궤짝 깊숙이 감추었다. 그때는 한 순박한 농사꾼이라기보다는 조심성 있는 물주에 가까운 태도였다. 그 조심성과 엄밀함은 영희가 지금 운용하고 있는 자금이 바닥나면 필요한 만큼의 자본을 구해줄 것이었 다. 제 15 장 변경의 아이들 "개강이 늦어지니 오히려 좋네 뭐. 아니면 이럴 때 이렇게 한가하게 경복궁을 산책할 수 있겠어? 까짓 거, 겨울 방학 좀 밀리면 어때." 앞서가던 정숙이 싱글거리며 인철을 돌아보고 말했다. 평일이라도 늦은 오후여서인지 경 복궁 안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더위도 한풀 꺾여 고궁을 어정거리기에는 꼭 알맞은 날씨였다. 풀어진 구두끈을 고쳐 매느라고 몇 발 뒤져 있던 인철은 그런 정숙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구?" "삼선 개헌도 괜찮은 일 같단 말야. 그 덕분에 개강이 늦춰져 우리한테 이렇게 느긋이 함 께 있을 시간이 생겼으니까." 정숙이 여전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받았다. 하지만 인철은 전처럼 그런 그녀에게 맞장구쳐줄 기분이 아니었다. 처음 공화당이 대통령직 삼선 허용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내고 거기에 대한 반대 열기 가 강의실을 달구어갈 때만 해도 인철은 그런 논의에 초연할 수 있었다. 2학기가 시작되도 마침내 아이들이 교문을 박차고 뛰어나가기 시작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일이 아니다, 그 어떤 논리의 매개도 없이 인철은 그렇게 단언하였다. 하지만 냉정히 분석하면 인철의 의식 내면을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정치적 현안에 대한 그런 초연함은 일종의 둔감 혹은 무관심 같은 것으로서 그의 의식이 성 장한 과정이나 배경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특히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원죄 의식과 많은 시간을 또래 혹은 집단으로부터 격리되어 보 낸 데서 온 주관화의 경향은 나이에 걸맞지 않는 그런 초연함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남한에서 살아가야 하는 공산주의자의 아들들이 앞선 세대의 선택에 대해 느끼는 것은 기 묘한 복합 심리다. 하나는 핏줄로 강요받는 계승의 소명감이고, 다른 하나는 전후의 엄혹한 반공 이데올로기와 연좌제로 대표되는 여러 가치 박탈의 체험이 길러가는 원죄 의식이다. 그들은 그 두 가지 상반된 심리의 충동 속에 자라가지만 필경에는 어느 한쪽으로 자신의 의 식을 정리할 수밖에 없다. 그들 중에는 엄혹한 반공 이데올로기의 홍수를 거슬러 용케 계승의 소명감을 길러간 사람 도 없지는 않다. 그들은 은밀하게 대항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으면서 혹은 어렵게 앞선 세대 의 길을 더듬어가면서 그 확대 계승을 꿈꾼다. 그러나 인철처럼 주변에서 이렇다 할 대항 이데올로기를 제공받지 못하고 폭력적인 반공 이데올로기에 노출된 채 의식의 눈을 뜨고 걸 음마를 시작한 세대에게는 원죄 의식이 더 크게 자리잡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가 연좌 제로 되풀이 아버지 세대의 책임이 강조되게 되면 그 의식은 거의 본능적인 수준으로 자라 가게 마련이었다. 핏줄은 책임도 잇는다. 아버지 세대의 실패는 그 핏줄은 이은 내게도 책임이 있다. 나는 정치, 특히 이데올로기의 측면에는 생래적으로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이다. 그것을 따지고 다 투는 일은 그들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거나 싸운 이의 후예인 흠 없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렇게 한 발 물러서 있다가 정의나 공동선 따위 이데올로기보다 상위임을 주장하 는 가치의 강요가 있게 되면 이번에는 교묘하면서도 비약된 현실론 뒤로 숨어버리는 것이었 다. 그래, 너희들이 옳고 그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끼여들어서는 안 된다. 어떤 종류의 주장이고 무엇을 위한 운동이든 내가 끼여드는 날로 그것은 용공 조작의 무서운 칼날 아래 놓이게 된다. 반공이 국시가 되는 이런 사회에서는 너희들을 위해서도 나 는 끼여들어서는 안 된다... 의식의 주관화는 인철의 지성이 형성된 특수한 환경과 관련이 있다. 오랜 기간 또래 집단 과 사회에서 분리되어 스스로를 길러오는 동안에 외부의 사물은 관념화와 추상화 경향을 띠 어갔다. 그래서 그 대상이 외부적인 것이든 무엇이든 그의 자아 속으로 들어와 주관적으로 한번 정리되지 않으면 아무런 현실감도 구체적인 의미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인 철의 자아는 한창 대학이 준 혼란과 갈등에 빠져 있었다. <<그런 과목이 가능한지 모르지만 대학의 첫 학기에는 가치학 강의가 반드시 있었으면 좋겠다. 가치학의 내용은 세상의 여러 가치에 대한 인식과 측정과 선택의 방법을 지도하는 것이다. 인문과학 일반의 중요한 내용은 가치 판단에 기초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현실의 삶 에서 구체적으로 기능하고 존재하는 가치들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오늘날의 입시 교육은 대학에 갈 때까지 모든 가치 판단을 유보하도록 가르친다. 아이들은 가치에 대한 막연한 동 경만 품은 채 치열한 입시 경쟁에 자신을 맡긴다. 그리하여 어렵사리 진학한 그들에게 공통된 기대 중의 하나는 대학에만 가면 그 동안 미 루어두었던 가치 판단이 일거에 자명해지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가보면 선택의 대상만 턱없이 넓어졌을 뿐 가치를 어떻게 측정하고 선택해야 할지는 더욱 막막해진다. 교수들은 저마다 자신이 선택한 가치의 전도사가 되어 그것이 지상임을 선전할 뿐 가치들 상호간의 관계에 대해 말해주는 이는 적고 선택 주체의 개성에 대한 배려는 더욱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스스로 가치관을 정립하고 거기 따라 가치를 선택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부인할 수 없다. 그 과정의 혼란과 방황은 '의미 있는 소모'로 승인되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적절 한 지도와 안내 없는 방황은, 특히 삶 전체와 연관을 가진 가치를 선택하는 과정에서의 방 황은 종종 젊은 열정과 재능을 지나치게 소모시켜 삶 자체를 황폐케 한다...>> 뒷날 인철 은 어떤 대학 신문에 보낸 기고문에서 그런 견해를 말한 적이 있다. 아마도 의식의 지나친 주관화로 자신이 치러야 했던 세월과 열정의 낭비를 추체험한 결과일 것이다. 그때 그의 의식은 무엇이든 내면에서 해결되지 못하면 외부로는 한 발도 나올 수 없는 극단 한 주관화에 빠져 있었다. 동일시도 자기 투척도 먼저 그 대상의 세밀하면서도 엄중한 주관 화를 거친 뒤에야 가능했다. 그런 면에서 당시의 사회적 현안에 대한 인철의 냉담은 오히려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우선 그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가치 선택과 관련된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였고, 그 다음은 하루하루 힘겹게 이어가야 하는 삶이 있었다. 삼선 개헌이 궁극적으로는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 할지라도 시급하게 처리해야 될 주관화의 대상으로는 뒤로 밀릴 수밖 에 없었다. 그런데 며칠 전 그런 인철의 두터운 무관심 혹은 둔감의 벽을 뚫은 사건이 하나 일어났 다. 예고되지 않은 개강 연기라 지방에서 이미 귀경한 학생들은 물론 서울에 집이 있는 학 생들마저 마땅히 시간을 죽일 곳이 없으면 학교에서 어정거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날 인 철도 그랬다. 도서관에서 점차 진지함도 열정도 시들어가는 책읽기보다 정숙과의 잡담으로 더 많이 시간을 보내다가 교정으로 나와보니 학교 담장 밖 대로가 묘하게 수런거렸다. 처음 인철은 어떤 단과 대학에서 삼선 개헌 반대 데모 단독 출정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그 정보가 새어나가 경찰이 교문 밖에 깔렸는 줄 알았는데 나가서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다. 무언가 중요한 행렬이 지나가는지 경찰과 사복 형사팀이 먼저 도로변을 정비하고 있는 중이 었다. 이미 구경을 시작한 셈이라 인철은 별흥미도 없이 교문께에 붙어서는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다렸다. 한 십 분쯤 뒤에 먼저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고위층의 경호 행렬이었다. 헤드라이트를 켠 경찰 오토바이가 횡대로 맞추어 천천히 지나가고, 이어 역시 비상등을 켠 경호차들이 도로 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어 어느 것이 고위 인사가 탄 차인 줄은 알 수 없었으나 검은 외제 승용차들이 몇 대 줄지어 나타났다. 그런데 그때였다. 맨 앞 승용차 왼편 타이어에서 몇 미 터 떨어진 길가에 무언가가 풀썩 떨어졌다. 허옇게 가루 같은 것이 날리는 것으로 보다 인철은 그게 무슨 가루 봉지 같은 것으로 알 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반토막쯤 되는 질 나쁜 시멘트 벽돌이었다. 형편없는 강도 때문에 아스팔트에 떨어지면서 부스러져 부연 먼지를 낸 것이었다. 그때 지나간 고위 인사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 벽돌 토막을 위협적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아스팔트도 견뎌내지 못해 부스러지는 그 강도도 그렇거니와 고위층의 승용차 근 처에도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근처에 공사장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런 게 있었 다면 누구든 그 벽돌은 공사중의 실수로 굴러떨어진 것으로 짐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떨어지자 일변한 거리의 분위기였다. 짧은 호각 소리와 함께 근처에 깔려 있던 사복 몇이 벽돌이 날아온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 사이에도 자동차의 행렬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도로를 통과했는데 그뒤가 묘했다. 사복들이 학교 담장으로 뛰 어올라 혐의자를 찾다가 포기하고 내려올 무렵 멀찍이서 행렬을 뒤따라오던 검은색 코티나 한 대가 길가에 멈춰섰다. 사복들에게 무언가 보고받고 사라진 것뿐이었지만 그 동안에도 도로 양편은 얼어붙은 듯 굳어 있었다. 인철의 착각인지는 몰라도 그 갑작스런 행차를 구경 하고 섰던 행인들은 물론 인철처럼 보고 있던 몇몇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마치 정지하고 있던 영화 화면이 다시 돌아가듯 거리는 다시 예전의 움직임을 회복해 얼핏 그 작은 사건은 그대로 일상 속에 묻혀버리는 듯했다. 인철도 조금 전의 야릇한 긴장과 경직을 오히려 까닭 몰라하면서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시간쯤이나 지났을까. 갑작스런 바깥의 소란이 조용한 도서관 안을 휘저어놓았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하고 또 이례적인 것이라 공부를 하던 학생들을 평소의 습 관된 조심성을 잃고 우르르 창가로 몰려갔다. 벌써 교정 안은 공수부대의 얼룩무늬 군복으 로 가득 차 있었다. 교문 밖 대로변에는 그들이 타고 온 트럭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군인들 은 학교를 봉쇄하고 먼저 교내에 있던 여학생들을 모조리 내쫓았다. 남녀를 구분해줄 줄 알았다는 점에서는 뒷날보다 훨씬 신사적인 셈이었지만 그런 면에서 는 60년대말의 여대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 대부분은 겁먹은 비둘기떼모양 군인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종종걸음 쳐 학교를 빠져나갔다. 하기는 80년대에 가서야 선뵐 처절한 공방의 조짐은 이미 그때도 보여지고 있었다. 아주 드물게 군인들의 명령을 무시하거나 항 의하는 여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녀들은 곧 가차없는 대가를 받았다. 군인들은 그런 그녀들에 게 듣기 민망한 욕설을 퍼부으며 준비해 온 몽둥이를 위협적으로 휘둘렀고, 더러는 머리채 를 잡아끌기도 했다. 그런 한편 군인들은 학교 안에 있는 남학생들은 모조리 한군데로 집결시켰다. 모두 이백 명 남짓이었는데 인철도 그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세 시간, 인철은 난생처음으로 폭 력이란 게 어떤 것인지를 충분히 맛보았다. "새끼들, 휴교라면 휴굔 줄 알지, 왜 강의도 없는데 학교에 나와 지랄들이야, 지랄들은. 오 열 횡대로 정렬!" 얼룩무늬 전투복에 진압봉을 든 대위 하나가 표독스레 소리쳤다. 그 때는 일학년들이라도 교련 맛을 한 학기 본 터라 그런 그의 군대식 구령이 자연스럽게 먹혀들었다. 거기다가 거 의 비슷한 숫자의 공수부대원들이 붙어서서 몽둥이로 마구 후려쳐대니 교련 분열식 때보다 몇 배나 더 정제된 대열이 갖춰졌다. "어떤 놈이야? 각하 자동차에 벽돌 던진 놈, 솔직히 나와! 학생 신분이라 솔직히 자수하면 특별히 관대하게 봐주겠어!" 대위는 그렇게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자수나 밀고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 만 그것은 그 뒤 세 시간이나 계속된 가혹 행위의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뒷날 군대를 경험한 뒤에야 인철은 그날 당한 일이 과잉 충성이란 군대식 고질과 시범 케 이스란 나쁜 관행이 어우러진 폭력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각하에게 감히 '불경한 놈들 에게 한번 본때'를 봬줌으로써 각하에 대한 자기들의 충성을 드러냄과 아울러 다른 대학생 들에게 경고를 주려 했음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기실 그것이 얼마만한 불충이며, 역효과를 낸 경고인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 의 과잉 충성은 20년 뒤 광주에서 그들이 충성하고자 한 정권의 목을 겨누는 칼이 되었으 며, 그런 방식의 경고는 수많은 80년대 운동권의 원로들이 그 이력의 첫발을 내디딘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철판 같은 인철의 둔감과 관심을 뚫은 것도 그런 불합리한 폭력이었다. 거기다가 전날 다시 인철이 그 같은 주변의 소란에 마냥 초연할 수만은 없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학에 와서 얻은 유일한 친구인 삼수생 노광석의 연행이 그랬다. 제대병인 한형 과 함께 '노틀 삼총사'를 이루며 술만 마셔대는 것 같던 그가 어느새 무슨 일에 가담했는 지 알 수 없었지만 하숙집에서 소속 불명의 사람들에게 끌려간 일이었다. 어쩌면 이 사태는 강 건너의 불이 아닐지도 모른다- 노광석이 연행되었음을 알게 된 순 간 인철은 무슨 대단한 깨달음처럼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불어 사는 우리'라는 개념 까지는 아니더라도 의식의 철저한 고립에서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데모를 철이 덜 든 아이들의 위험한 장난 정도로만 보고 있는 정숙의 말투에 전처럼 자신있게 동조 할 수가 없었다. "왜 그래? 시인, 무슨 고민 있어?" 정숙이 비로소 인철의 기분을 감지한 듯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인철이 심각해지면서 곧 잘 시인이라고 장난스럽게 불러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그날은 별효과를 내지 못했다. 인철 은 왠지 또래들이 열중하는 일에 초연한 척함으로써 자신의 성숙을 과장하고 싶지는 않았 다. "실은- 노광석을 생각하고 있어. 참, 걔 어제 끌려간 거 알아?" "그 사람이? 데모에도 잘 안 끼여드는 그 모주꾼이 뭘 했기에?" "그건 나도 잘 몰라. 하여튼 끌려갔는데- 왠지 그게 남의 일 같지 않아." "어두운 열정의 전염인가. 인철씨에게도 그런 데가 있었어?" "어두운 열정이라니? 그리고 내가 어째서?" "사람의 열정에는 두 가지가 있대. 하나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부 정적이고 파괴적인 방향이래. 그들 스스로는 부정과 파괴 뒤에 긍정과 창조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부정과 파괴라는 거야. 그런데 인철씨의 피에는 아버지 세대의 과도한 발산으로 부정과 파괴의 에너지가 더 남아 있지 않다며?" "아하, 그거..." 거기서 인철은 잠시 평소의 담소적인 분위기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변해 웃음 기를 거두고 말했다. "그렇지만 한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는 피 같은 게 결정하는 관념이 아니라 피부에 닿아오 는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어제 그제까지 이마를 맞대고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 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다든가 하는 거 말이야." 그래도 그녀는 인철의 분위기로 쉽게 끌려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심각해지는 것 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 같은 게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늘 우리 시인이 왜 이래? 노광석씨 그제 잠쯤 고주망태가 되어 사고쳤을 수도 있는 일 이잖아? 일반 형사범으로 연행되었을 수도 있다구." "그게 아니니까 그렇지.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들으니까, 사복 둘이 연행해갔는데 까닭을 묻자 '사상범이오!' 하더라는 거야." "무슨 사상범이 대학교 일학년짜리가 있어? 더구나 그 사람 혈관에서 모든 피를 빼내고 알코올만 채워 다니고 싶다고 말한 모주꾼 아냐?"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냐. 인신의 구속이란 언제나 심각한 문제라구." "그 럼 뭐, 그 사람이 용삼풍이나 위스키 신부라도 된다는 거야?" 용삼풍은 그 무렵 상용했던 무협 영화에 나오는 무림 고수로 '눈 위를 걸어도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고 할 정도의 무예를 지녔으면서도 술로 자신의 위장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또 위스키 신부는 그들이 같이 읽은 어떤 미국 소설에 나오는 인물로 늘 위스키에 취해 있 으면서도 남미의 반체제 운동을 이끄는 신부였다. 그들을 끌어들인 걸로 보아 정숙은 여전 히 노광석의 연행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인철은 은근히 짜중이 일 었으나 그 때문에 그녀와의 만남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자란 뒤 현실감이 있는 여자와의 접촉은 처음이라 그런지 인철은 그녀에게 꽤나 열중해 있었다. 그게 갑자기 그와 그녀 사이 에 가로놓인 느낌의 차이에 한 절충을 생각해내게 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어때?" 인철이 불쑥 그렇게 묻자 그걸 자기들만의 달콤한 분위기롤 돌아가자는 제안쯤으로 여긴 정숙이 살포시 웃으며 대답했다. "나야 우리 시인의 요청은 언제나 최우선으로 고려하지. 그런데 뭘 하려구?" "그럼 나하고 같이 가줄래?" "어딜?" "여기서 가까운 신문사. 거기 가서 한 사람을 만나면 광석에 대해서 알 수 있을지도 몰 라." "그게 누군데?" "형님 친군데, 사회부 기자야. 경찰 출입을 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출입처가 바뀌었어도 내가 알고 싶은 것 정도는 알아줄 수 있을 거야. 시간이 있어 술이라도 한잔 사주면 더 고 맙고..." 그러면서 인철은 5년 전에 본 황석현을 떠올렸다. 스스로를 '변경의 낭인'이라고 하며 짓 던, 자조적이어서 오히려 강렬한 이끌림을 느끼게 하던 그의 일그러진 미소를. "어쩌면 초연하게 보아넘기려고 해도 묘하게 사람의 온몸을 스멀거리게 하는 이 사태에 대해 정확한 해석을 들을 수 있을는지도 몰라." "피이, 기자가? 기자 상대를 주로 하는 공무원인 우리 고종오빠 말로는 기자 그 사람들 정말 큰일낼 사람들이라 그러던데? 가장 진보적인 것 같으면서도 실은 가장 보수적이고, 가 장 넓게 사회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사장 심한 편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기 자들이래." "기자에게 많이 시달린 공무원의 험구겠지.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이 사람은 아니야. 4,19로부터 6,3사태까지 학생 운동의 주도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이야. 어쩔래? 같이 갈 거야, 안 갈 거야?" 그러자 정숙도 조금 솔깃해지는지 더는 딴청을 부리지 않았다. "접때 인철씨가 생판 처음 보는 우리 아버지 문병을 함께 가주었으니까 빚은 갚아야겠지. 상당히 존경하는 투사 같은데- 좋아, 한번 가보지 뭐." 그러면서 인철을 따라주었다. 둘은 경복궁을 나와 세종로에 있는 신문사로 향했다. 걷기에는 너무 먼 길이라며 정숙이 택시를 타기를 원했지만 인철이 고집을 부려 걷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신문사 앞에 이르자 인철은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형님의 친구라지만 어렸을 적부터 집을 드나들어 알고 지 낸 사이가 아니어서 자신을 알아봐줄지조차 걱정이 되었다. 5년 전인가, 어느 여름 오후 거 의 스쳐가듯 본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믿는 것은 다만 두 달 전에 만난 형의 자신에 찬 당부뿐이었다. "무슨 어려운 일이 있거든 황형을 찾아가봐라. 너 알지? 황형, 전에 개간지에 찾아왔던 황 석현이 말이야. 거 왜, 변경의 낭인... 지금은 대동일보 기자로 있다. 길을 도느라 좀 늦기는 했지만 거기서는 인정을 받는 모양이더라. 기자로 들어간 지 몇 해 안 되는데 벌써 경찰청 출입을 하고 있더구나. 전에 만났을 때 술 한잔 참하게 사더라. 급할 때는 네게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게다." 거기다가 인철을 더 주눅들게 한 것은 신문사 수위의 고압적인 태도였다. "으응, 황기자 그 친구 아직 안 들어왔을걸..." 인철이 황석현의 이름을 대자 새카만 후배 말하듯, 하고는 인철과의 관계와 용건을 진땀 이 날 만큼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러다가 인철의 학생증까지 보고서야 선심쓰듯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보자, 지금이 네시 반이라... 늦어도 한 30분 안에는 들어오겠네." 인철은 신문사란 곳이 그렇게 위압적이고 관료적인 냄새가 나는 기관이라고는 생각지 못 했다. 형 명훈을 통해 지국의 무보수 기자만 본 탓이겠지만 인철에게 인상지어진 신문사는 다분히 희극적이면서도 사기성 짙은 인적 결합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그 수위가 보 여준 것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힘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었다. 그 바람에 황석현을 만나는 게 더욱 자신없어진 인철은 거기서 그만 돌아갈까 싶은 생각 이 들었다. 그러나 정숙의 오기가 그걸 막았다. "아저씨, 그럼 30분 동안 여기 서서 기다리란 말예요?" 처음부터 그런 수위의 태도를 못 마땅해하던 정숙이 뾰족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올라가봤자 마땅히 기다릴 만한 곳이 없으니 그렇지." 수위가 그렇게 퉁명스레 받았다. 그러자 그녀가 먼저 그 수위의 말투를 걸고 들었다. "아저씨는 싸라기 밥만 드셨어요? 말이 왜 그래요? 아저씨 자식들도 아닌데 처음부터 반 말이네. 신문사 수위가 그리 대단해요?" "어, 이 아가씨 봐라. 어른한테 무슨 말버릇이 그래?" 수위고 지지 않고 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정숙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정말 이 아저씨 안 되겠네. 그리도 반말이야. 이 신문사 근무 수칙은 아무에게나 반말짓 거리 턱턱 하는 건가." 그때 마침 황석현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둘 사이에는 제법 심한 말싸움이 벌어졌을 것이 다. 이내 눈길이 험해진 수위가 맞받아치려다가 인철과 정숙 뒤에서 무얼 봤는지 갑자기 목 소리가 누그러졌다. "어, 마침 들어오는구먼. 황기자. 여기 황기자 찾아온 학생들이 있는데..." 인철이 퍼뜩 돌아보니 옷차림과 혈색 외에는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는 황석현이 무슨 수첩 같은 것을 끼고 정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그도 인철은 조금은 알아본 듯 걸음을 멈추 고 기억을 더듬었다. "가만있자, 이게 누구더라..." "저 인철입니다, 형님. 이명훈이..." "아, 그래. 명훈이 동생. 벌써 어른이 다됐네. 그래, 갑자기 웬일이냐?" 그제서야 인철을 정확히 기억해낸 황석현은 5년 만에 보는 친구의 동생을 대하는 사람 같 지 않게 친숙한 어조로 물었다. "형님이 틈나면 한번 찾아뵈라고 해서요. 말씀드릴 것도 있고..." "그래? 알았다. 그럼 요 뒤 '향수'다방에서 기다려라. 신문사 건물을 돌면 바로 간판이 보일 게다. 내 이것 좀 써 넘기고 곧 갈게." 어린 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강렬한 인상이 어떤 끌림으로 자라간 것일까, 인철도 오 래 왕래하던 사람을 대하듯 그 말을 받았다. "그러죠. '향수'로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마침 과친구도 있고 하니 천천히 일보고 나오십 시오." 황석현은 한 시간 가까이나 뒤에 다방으로 나왔다. 그의 늑장이 마음에 없는 만남 때문일 지도 모른다는 지레 짐작으로 다시 풀이 죽어 있던 인철은 그가 늦게라도 나와준 게 감격스 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그의 사과는 인철의 지레 짐작 과는 달리 정중했다. "이거 늦어서 미안하구나. 사안이 좀 미묘한 게 돼놔서..." "아닙니다. 바쁘신데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 제가 오히려 죄송합니다." 인철이 공연히 송구한 마음이 들어 그렇게 받자 석현이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물었 다. "그런데 아까 내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했지? 무슨 일이냐? "인철은 석현이 바로 용건을 물어준 게 오히려 고마웠다. 드디어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 게 된 까닭이었다. "실은 제 친구 하나가 연행돼가서요. 하숙집에서 사복 형사들에게 끌려갔다는데 어느 서 에 있는지, 무슨 혐의를 받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형님이 어떻게 알아봐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그 친구 데모 주동자냐?" 황석현이 가볍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자신의 경력과는 달리 데모 주동자들에 대해 호감이 가는 눈치가 전혀 아니었다. "그렇지도 않은데 끌려가서 더 궁금합니다. 그저 술꾼일 뿐이라구요." "그건 모르지. 요즘은 어째 아이들이 점점 영악해져가는 느낌이다. 우리 때는 1학년을 데모에 앞세우는 법이 없었어. 적어도 학생 데모에서는 주동자와 고학년 핵심들이 앞섰지. 그런데 요즘은 달라. 주동자와 핵심 세력은 뒤에 숨고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이나 단순한 가담자들만 앞세우고 있어. 전략이라고는 하지만... 왠지 씁쓸하네. 학생 데모가 그 순진성 을 잃고 닳고 닳은 어른들의 못된 전략만 배우는 것 같아서..." "단언하지만 그 친구는 그런 음모가도 못 됩니다. 며칠 전 데모 때도 나와 막걸리나 마시 며 구경만 했단 말입니다." "이름이 뭐냐? 어쨌든 알아는 보지." "노광석입니다. 올해 입학했구요. 형님 후배도 되는 셈이니 한번 알아봐주십시오." 그러자 황석현은 수첩을 꺼내 그 이름을 적으며 물었다. "그런데 걔는 가족도 없냐? 어째서 네가 나섰지?" "시골에 있어오. 그것도 아주 늙은 할아버지, 할머니뿐입니다. 이제 제가 알아보고 연락해 줘야 합니다." 인철은 광석의 아버지가 6,25 직후의 예비 검속에 걸려 마구잡이 처형 대 목숨을 잃은 좌 익이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가 인철과 마음을 터놓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 데는 그런 아버지 세대의 동지 의식이 은연중에 작용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석현은 자신없다 는 투로 말했다. "그런 아이라면 하긴 좀 이상하네. 그렇지만 잘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요즘은 정식 영 장 없는 임의 동행이 많아 공식 라인으로는 체크가 안 되는 경우가 있어." 그때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정숙이 끼여들었다. "별로 관심이 없으신 거 같네요. 우린 말씀만 드리면 한달음에 달려가서 알아봐주실 분인 줄 알았는데." 인철은 정숙의 그런 당돌함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황석현은 별다른 내색 없이 반문 했다. "어째서?" "선배님도 왕년의 투사셨다면서요." "제가 형한테 듣기로는..." 인철은 정숙의 정보원이 자신임을 황급하게 고백했다. 인철의 그런 쪽으로 유달리 예민하 게 발달한 감각은 그런 전력이 현재의 황석현에게는 상처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걱정한 때 문이었다. 형 명훈은 그가 대우 좋은 일간지에 자리잡은 것을 타협이나 전향쯤으로 해석하 는 눈치였다. "여학생이라 이 말을 이해할지 모르지만- 호된 졸병 시절을 보낸 고참이 반드시 좋은 고 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한때 데모 주동자였다고 해서 모든 데모에 동정적이 되리라는 것은 너무 단순한 추리 같은데." 황석현은 여전히 별내색 없이 그렇게 답했지만 내심으로는 그때 이미 동요를 느끼고 있었 음에 틀림없었다. 용건이나 듣고 일어설 것 같던 자세가 갑자기 이건 좀 얘기해볼 일이보구 나, 하는 듯한 눌러앉음의 자세로 변한 느낌이었다. 의도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숙이 그런 그의 속을 한 번 더 건드렸다. "그런 걸 사상적으로 말하면 청산주의라고 하나요?" "인철과 동기라면 신입생일 텐데 이 아가씨가 별용어를 다 아네. 그래도 변절이나 전향이 라고 말하지 않으니 고맙군." 그렇게 대답하는 황석현의 얼굴에는 내심의 동요를 억지로 숨기려는 기색이 뚜렷했다. "쟤가 원래 저래요. 물에 빠져도 입은 동동 뜰 애라니까요." 인철이 다시 끼여들어 그런 농담으로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어보려 했다. 정숙도 그제서야 자신이 좀 지나쳤다고 생각했던지 살포시 웃으며 애교를 떨었다. "실은 저도 인철이처럼 초월파예요. 무슨 악의가 있어 한 말이 아니니까 너무 껴듣지 마 세요." "초월파?" "데모에 초연하다는 뜻이예요. 간겅너파라고 하기도 하죠." 그러자 황석현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발동된 자의식을 다 씻어낸 그 런 미소는 아니었다. "이 후배 아가씨 재미있네." 그렇게 농담처럼 받아들여놓고는 시계를 보더니 이내 마음을 정한 듯 말했다. "모처럼 나를 찾아왔으니 저녁이나 먹고 가라. 그러잖아도 명훈이 말을 듣고 널 한번 찾 아볼까 하던 참이었다. 후배 아가씨도 다른 일 없으면 함께 가고." 인철에 대한 호의를 앞세우고는 있어도 그보다는 갑자기 무언가 할말이 생긴 사람 같았 다. 저녁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그가 그렇게 나오자 인철은 은근히 반가웠다. 처음 그를 만 나려고 마음먹었을 때 내심의 기대 중에 하나는 점점 강하게 자신의 의식을 건드려오는 삼 선 개헌에 관한 온당한 해석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기회가 자연스럽게 주어진 셈이었다. 인철의 짐작대로 황석현은 먹는 일보다는 길게 이야기할 자리를 찾고 있었음에 분명했다. 다방을 나와 무교동 쪽으로 방향을 잡던 그가 갑자기 청진동 쪽으로 발길을 돌리며 말했다. "밥보다는 막거리나 한잔 하며 얘기나 좀 하는 게 어떠냐? 원리는 낙지볶음으로 저녁이나 먹을까 했는데 너희들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청진동으로 가서 전라도식 막걸리나 한 상 받 자." "전라도식 막걸리가 어떤 건데요?" 그때까지 말없이 따라오고 있던 정숙이 호기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선술집보다는 좀 비싸지만 막걸리 한 되를 사면 열두 가지 안주가 따라나오는 집이 있 다. 그것도 아주 정성들이고 맛깔스런 음식들이 안주로 나오는데, 사람들은 그걸 전라도식이 라고 그러더구나. 내가 가려는 집은 그 중에서도 어떤 유명한 월북 시인의 아내인가 애인이 었다던가 하는 여자가 경영하는 집이다." 월북한 시인이 아내란 말이 인철을 턱없이 감동시켰다. 그런 점에서는 정숙도 크게 다르 지 않은 듯했다. 벌써 기대된다는 듯 말했다. "말하자면 사상과 문학을 분위기 삼아 취해가는 곳이로군요." "아니, 그냥 주막이야. 값에 비해 술과 안주가 좀 풍성하고 맛날 뿐이지. 너무 기대하지 마라." 황석현은 그런 그들의 감동에 일침을 주고 앞장을 섰다. 그 '주막'은 그때만 해도 청진동 일대에 흔하게 남아 있던 구식 한옥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근처의 요정들과 달리 박리다매 를 위주로 하는 집이어서 그런지 관리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기와는 비가 새지 않을 까 싶을 정도로 오래 손본 흔적이 없고 나무 기둥들도 표면은 풍우에 허옇게 삭아 있었다. 회 벽은 때묻고 그들은 데다 군데군데 거뭇한 흙벽을 드러내고 있는 게 북적대는 사람이 아니 면 영락없는 폐가였다. "우리가 일찍 와서 그런지 거적 신세는 면하게 되었구나. 들어가자." 황석현이 ㄷ자집 구석진 방으로 인철과 정숙을 안내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차일 친 마 당에는 멍석이 깔려 있었다. 손님이 넘칠 때는 거기에도 앉히는 모양이었다. 오래잖아 중년 안주인이 나와 황석현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그렇게 들어서 그런지 말투에 는 제법 교양미가 풍겼으나, 시인의 아내나 애인으로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었다. "30년대 모더니스트 시인의 애인치고는 영 아닌데요. 소박데기 아내였다면 모를까." 정숙이 제대로 청소되지 않은 방바닥을 손으로 더듬어 먼지 없는 곳을 골라 앉으며 소감 을 말했다. 그러나 황석현을 애초부터 그런 안주인에게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듯했다. "애인은 무슨... 장해야 술상 끄트머리에서 먼발치로 몇 번 올려보았겠지. 나이로도 이십 년 이상 층이 지는데." 그렇게 받으면서 수로가 기본 안주에다 특별히 물고기 한 접시를 주문했다. 방안에 놓여 있는 술상은 사과 상자를 겨우 면한 판자 평상 같은 것이었는데, 거친 대패질로 우툴두툴한 표면 여기저기 음식 찌꺼기들이 까맣게 껴 있었다. 인철을 따라 시장통 순대국집까지 드나든 적은 있지만 유복한 환경에서 마뜩하게 자라온 정숙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불결함이었으리라. 그러나 인철은 그게 차라리 편안했다. 나중 에 다른 아주머니가 그 위에 흰 모조지를 깔자 오히려 서먹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황석현의 말대로 술과 안주는 일품이었다. 막걸리도 쌀로 빚은 밀주까지는 못 됐지만 일 쑤 카바이드 찌꺼기가 거멓게 가라앉은 그 무렵의 조악한 시중 유통품은 아니었고, 안주는 기분 안주만 해도 인철 같은 가난한 신출내기 술꾼들에게는 호화판이라 할 만했다. 황석현은 처음 한동안 인철을 상대로 명훈과의 이런저런 회고담에 곁들여 의례적인 것들 을 물었다. 나머지 가족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 동안 인철은 어떻게 지냈는가 따위였다. 그 러다가 막걸리 두 주전자를 비워갈 무렵 불쑥 내비친 감회가 인철에게 그날 밤이 쉬 잊을 수 없는 밤이 되게 했다. "실은 말이다. 오늘 청에 나갔다가 데모 진압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서 몇 군데를 들러보 는데 세상 참 많이 달라졌더구나. 병아리 같은 대학생 몇을 잡아놓고 흉악범이나 간첩 다루 듯 하는 데 감회가 묘했다. 이게 바로 변경의 아이들이 당하는 수난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며 다시 한번 우리 행복했던 때를 돌아보게 됐어..." "우리 행복했던 때라니요?" 주는 대로 받아마셔 숫기가 살아난 인철이 주저없이 물었다. "너희들 말마따나 나도 데모꾼이었지. 하지만 4,19의 후광이 남아 있을 때만 해도 데모에 는 언제나 축제의 일면이 있었다. 특히 나처럼 6,25 때 전사한 국군 장교의 동생이고 자유 민주가 구호인 데모꾼은 주모자로 몰려 연행되어도 그렇게 마구잡이로 다루지는 않았어. 그 런데 이제는 아니야. 단순한 반공이 아니라 체제 방어의 논리로 때려잡는데, 김가가 말한 변 경의 비극이 이제 드디어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구나 싶더군." "김가라면, 그 김시형씨..." "너도 알고 있구나. 한때는 너의 형과 꿀꿀이죽 동기였다. 네가 기억할지 모르지만 네 형 이 미군 부대 보일러맨으로 일할 때... 하지만 아니야. 지금은 엄연한 하버드 피에이치디야. 다음 학기쯤에는 귀국해 강단에 서겠지." 그때 다시 정숙이 끼여들었다. 잘 못 마시는 막걸리를 석 잔이나 비워낸 탓인지 볼이 발 그레했다. "그런데 변경이 무슨 뜻이에요? 국어 사전적인 의미는 알지만 뭔가 다르게 쓰이는 듯해서 요. 선배님도 한 때 변경의 낭인을 자처하셨다면서요?" "변경의 낭인? 푸웃. 하하하하..."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황석현이 그새 들어찬 옆 술상의 사람들이 쳐다볼 만큼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다가 인철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것도 너냐? 이 아가씨에게 말해준 게. 정말로 네가 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네, 하지만 실은 저도 변경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우리가 처해진 정치적, 사 회적 상황을 말하는 것 같은데 이따금씩 홀로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그게 어떤 건지 쉽게 짐 작이 가지 않는군요." 그러자 황석현의 얼굴에 묘한 감회 같은 것이 떠올랐다. "실은 그 개념을 처음 창안한 것은 너희만한 나이 때의 나였다.. 그러나 그걸 세밀하게 갈 고 닦은 것은 김가야. 녀석은 박사가 된 지금도 그 개념을 활용하고 있어." "어떤 건데요?" "그건 먼저 제국의 개념을 정의하고 나서야 설명할 수 있지. 너희 세대에서 제국을 말하 는 애들도 있니?" "제국주의의 제국 말입니까? 잘은 모르지만 별루 없는 것 같은데요. 그거 사회주의 쪽의 개념 아녜요?" "19세기 후반 이후 독점자본주의의 정치적, 경제적 구조에 대응하는 개념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고자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에서 레닌에 이르기까지 가장 정밀한 제국주 의 이론은 그쪽에서 나왔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제국은 그보다는 좀 느슨하고 통시 대적인 개념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 정치적, 경제적 지배권을 원래의 국경을 넘어 다른 민 족 혹은 다른 국가의 영토로 확장시키려는 국가 정도가 될 거야. 그래야만 얼치기 역사주의 가 개입할 수 있으니까." 황석현은 그렇게 말해놓고 옛날 생각이 나는지 잠시 회고적인 표정으로 담배를 빨았다. 그러다가 잔이 넘치게 인철에게 한잔을 권하고서야 갑작스레 지난 열정을 회복한 사람처럼 말했다. "제국의 특성은 여러 가지 측면으로 말해질 수 있지만 변경의 개념과 연관된 것은 시장 경제에 적용되는 일물일가의 원칙에 착안해 찾아낸 특성이다. 곧 관리 가능한 지역 안에서 는 한 제국만 존재하려는 경향이 그렇다. 여기서 관리 가능한 범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기본적으로는 거리의 문제지만 실제로는 중앙에서 파견되는 주력 부대가 보급선을 유지한 채 도달할 수 있는 시간에 비례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보병이 주력이 부대가 기병 으로 바뀌면 그 판도는 훨씬 넓어지지만 역시 날짜로 계산해보면 비슷하다." 자신도 모르게 그 얘기에 빨려들어가던 인철이 거기서 불쑥 물었다. "알렉산더의 제국이나 몽골 제국은 좀 다를 것 같은데요." "병참선을 아주 협의로 해석하 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세계 제국의 병참선에는 식민이나 체계적인 현지 수탈도 포함되 어야 한다. 병참선이 본국과 직접 이어지지 않은 진격이라면 하필 알렉산더와 칭기즈 칸의 군대뿐이겠어? 그 이전에도 그런 예는 많지. 이를테면 고대 이집트 같은 나라- 그들은 틀 림없이 자신의 영토와 민족을 넘어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성과도 상당했 지만 이집트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에서 세계 제국의 성립을 인정하기를 꺼려. 바로 병참선 이 이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식민이나 그에 준하는 현지 조달 체계를 갖추지 못해서였을 거야. 마구잡이 약탈은 세계 제국의 병참 개념에는 들어갈 수 없으니까. 하지만 알렉산더나 칭기즈 칸의 군대에는 병참선이 이어지지 않았더라도 식민이나 그에 준하는 관리가 있었다 고 봐야 돼. 물론 그래도 지나치게 확대된 판도를 감당하지 못해 이내 여러 개의 관리 가 능한 권역으로 분열되고 말지만..." "그래서 언제나 제국주의란 말과 식민주의란 말이 나란 히 붙어 다니는군요."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정숙이 고개를 까닥이며 끼어들었다. 평소의 드러내는 정치적 무관심과는 달리 인철보다 더 빨리 분위기에 동화된 느낌이었다. 눈길에도 그녀 특유의 호기심을 내비치는 반짝임이 엿보였다. "때로는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지. 그런데-" 황석현은 그렇게 말해놓고 목마른 사람처럼 자신의 술잔을 비웠다. 술잔을 다시 채우면서 보니 그의 표정에도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흥분과 고양의 기운이 내비쳤다. 십 년 저쪽 인 철 또래 때부터 갈고 닦아온 개념을 두 사람뿐이지만 충실하기 그지없는 청중을 상대로 토 로하면서 과장된 감상인지, 아니면 여러 굴곡을 거쳐 제도권 언론에 몸을 담고는 있어도 안 주하기에는 아직 이른 서른두 살의 나이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문제는 우리 시대의 제국이 둘이라는 거야. 현대 과학 문명의 진보는, 특히 교통과 통신 의 발달은, 세계를 하나의 관리 가능한 권역으로 만들었어. 병참을 아주 협의로 해석해도 한 달이면 세계 어느 곳에든 주력부대를 파견할 수 있지. 그런데도 오늘날의 세계는 아메리카 와 소비에트라는 두 개의 제국이 반분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이 땅은 대립하는 그 두 제국 이 가장 첨예하게 마주치고 있는 변경이 되어 있어. 곧 북은 소비에트 제국의 변경이고 남 은 아메리카 제국의 변경이란 말이야. 따라서 우리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 하고 합당한 목표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변경에 대한 인식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해." "소비 에트 제국이라구요? 미 제국주의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반감까지는 못 돼도 무언가 얼른 받아들일 수 없는 구석이 있어 인철이 그렇게 우물거렸다. "이제 와서는 모택동도 그런 용어를 쓰고 있지만 우리가 어렵게 변경 개념을 짜맞춰갈 때 만 해도 그런 것은 없었어. 워낙 제국주의론이 그쪽에 독점되어 있고 그것은 또 자본과 밀 접한 이론이라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에 제국이란 말을 갖다붙일 엄두들이 안 났겠지. 실 은 내가 처음 변경이란 말을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내가 염두에 둔 것은 아메리카 제국뿐 이었어. 정확히 말하면 주변이란 말에 더 가까웠을 거야. '핵심'에 대비된 용어로서의 '주 변'말이야. 하지만 그걸로는 우리 상황을 다 설명할 수 없었어. 단순히 제국의 변경이라면 우리 선택은 훨씬 간단하고 명료해. 말하자면 현재의 부조리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제국화 또는 '핵심화'와 '이탈' 둥 중에 하나가 되겠지. 즉 빨리 제국에 동화하여 세계적인 착취 구조의 핵심에 끼여드는 길과 제국과는 무관한 독자의 발전을 모색하는 것 말이야. 그 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가 못해." "어째서 그렇습니까?" "또 다른 제국의 경계선이 우리와 닿아 있기 때문이지. 그것도 아메리카 제국이 가장 경 계하는 소비에트란 대항 제국이. 이 경우 이탈은 단순한 이탈이 아니라 다른 제국으로의 편 입이란 형태로 변질될 가능성이 훨씬 높아. 만약 우리가 속한 권역이 하나의 제국뿐이고 이 탈도 말 그대로의 제국의 판도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으로 끝난다면 제국은 그 이탈에 좀 관 대할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강력한 대항 제국이 있고, 그 이탈이 대항 제국으로의 편입으 로 이어진다면 엄격할 수밖에 없어. 자신에게서 하나가 덜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항 제국에 하나를 더 보태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둘을 덜어내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야. 대항 제국 에 둘을 보태거나... 바로 쿠바에서 미국이 쓰라리게 경험한 거고 지금은 월남에서 어렵게 막고 있는 상황이야." "그렇지만 미국의 대항 세력이라고 해서 소련을 제국으로 규정하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닐 까요?" 인철이 아무래도 소비에트 제국이란 말이 억지스럽게 느껴져 물었다. "처음부터 그런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제국주의론이야말로 마르크시즘이 소련을 위해 고안한 가장 교묘한 프로파간다야. 주도적으로 제국을 정의하고 규정함으로써 앞으로 세워질 자신들의 제국을 성공적으로 은폐했지. 나도 그 프로파간다에 넘어가 너처럼 소련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간과했던 거고... 하지만 현란한 논리나 용어의 수식을 털어버리면, 다시 말해 국어 사전적인 용어로 돌아가면 사회주의 소비에트의 제국적 특성은 금세 드러나, 바 르샤바에서 부다페스트에서 붉은 군대가 수행했던 역할이 그걸 잘 보여주자. 김가는 아마도 진작부터 그런 점에 착안하고 있었던 것 같아. 나도 처음에는 그런 김가에게 저항해보려고 했지만 마침내 두 개의 제국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어. 거기다가 '동로마 제국의 유산' 은 그 두 제국의 역사적 배경까지 확언하게 해주는 느낌이었어." "동로마 제국의 유산이 뭔가요?" 이번에는 정숙이 끼어들었다. 인철도 '동로마 제국의 유산'이란 말그대로는 황석현의 결론 과 얼른 연결이 되지 않아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미국에 간 김가가 몇 년 전에 열심히 권하기에 힘들여 원서로 읽은 토인비의 논문이야. 동서 냉전의 근원을 천오백 년 전에 있었던 동-서 로마의 분열에서 찾고 있는 낡은 역사주 의의 한 결정이라고 할까... 5세기경 로마가 동서로 분열될 때 실은 통일 로마가 가지고 있 던 이질성도 두 로마에 골고루 분배되었다는 거야. 곧 민족적으로 서로마는 게르만족이 주 도하고 동로마는 정통을 잇게 되는 것은 슬라브족이 되며, 종교적으로 서로마는 가톨릭을, 동로마는 그리스 정교를 채택해 가톨릭의 수장은 로마 법왕이 되고, 그리스 정교의 수장은 콘스타티노플 함락 이후 제정 러시아의 차르에게 돌아가는 식이야. 그래서 소련은 결국 동 로마 제국의 현대적 변형이라는 게 내 시원찮은 영어 실력으로 읽은 그 논의의 골자였어." "낡은 역사주의란 게 어떤 건지 모르지만 듣고 보니 그럴듯한데요." "기회 있으면 너도 한번 읽어봐라. 내가 잘못 이해한 게 있으면 일러주고- 어쨌든 우리가 처한 게 단순히 제국의 핵심에서 떨어진 '주변'이 아니라 두 제국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 는 변경이란 것을 인식한다면 우리의 선택은 한층 어려워지지. 그리고 그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좀 낡았더라도 역사주의밖에 없을 거야. 다시 말해 우리 민족이 현재의 이 부조리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지난 시대와 같은 처지였던 다른 민족의 예에서 찾아보는 수밖에 없을 거란 얘기야." "거창한 세계 제국사 통론이 되겠네요." "세계 제국사 통론? 그렇지 이름을 붙이자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황석현은 그렇게 말해놓고 이제 완연히 취해가는 목소리로 치열했던 한때의 기억들을 더 듬었다. "강력한 제국의 흥망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주변 혹은 변경의 핵심화란 공식으로 진행되 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비교적 요연하게 되어 있는 서구 제국의 변천사는 특히 그런 공 식을 잘 입증하는 예가 될 거다. 아테네가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제국적 권역의 핵심이었을 때 마케도니아는 한 주변에 가까웠다. 아테네의 관점에서 보면 왕정 마케도니아는 그들이 같은 헬레네스라는 것을 인정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야만적이었을 거야. 하지만 필립 왕 때에 절정을 보이는 헬라화 곧 핵심화 노력은 마침내 알렉산더에 이르는 제국의 핵심을 마 케도니아로 옮겨놓는다. 이러한 제국의 변천은 로마와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제국 사이에도 반복된다. 알렉산더가 살아 있을 때는 물론 사후 그의 제국이 분열된 뒤의 얼마간도 로마는 헬레니즘 제국의 한 주변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로마가 기울인 헬라화의 노력은 곧 로마를 제국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한다. 로마가 자신감을 얻게 된 뒤에도 로마 문화의 근처에 깊이 깔려 있는 것은 그리스 콤플렉스고, 그것은 이 두 제국 사이의 승계에도 '주변의 핵심화'란 공식을 적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게르만족의 야만성은 시저의 <갈리아 전기>에 잘 나타나 있다. 전공을 내세우기 위한 과 장도 있겠지만, 시저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끄는 군단의 몇십 배가 되 는 만족을 사냥하거나 도살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흘러내리는 장발에 버터를 발라 시야 를 확보하고 벌거숭이로 내닫는 게르만의 전사는 로마의 중장보병에 비하면 한 마리 표한한 짐승처럼 비쳤을 것이다. 하지만 곧 저항을 멈추고 로마화를 시작함으로써 그들은 제국의 핵심으로 접근한다. 용병이든 토병이든 로마의 숨통을 끊는 것도 게르만족이고 신성 로마 제국으로 그 승계를 자처하는 것도 게르만족이다..." 완연히 취한 어조인데도 황석현의 말은 준비된 강연처럼 정연하였다. 듣고 있는 것이 겨 우 대학 신입생 둘임에도 그 같은 열변을 토해낼 수 있는 게 그가 정말 취했다는 것 알 수 있는 유일한 징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두 청중 역시 취해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인철과 정숙은 자신들이 황석현 같은 논객에게 대등한 취급을 받고 있다는 느낌에 우쭐해 있을 뿐이었다. "제가 읽은 어떤 책은 로마가 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던데요. 말하자면 로마는 망한 것이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지고, 신성 로마 제국은 다시 그것을 해체한 보나파르 트 가의 프랑스 제국으로 이어지며, 프랑스 제국은 짧은 번성 뒤에 로마의 황홀을 대영 제 국으로 넘겼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로마의 법통은 마침내 아메리 카 제국으로 넘어갔다는 겁니다." 인철이 그렇게 끼여든 것은 단순한 청중을 넘어 자신도 한 논객으로 끼여들고 싶은 충동 에서였다. 인철 나름으로는 제법 용기를 내어 반론을 펴본 것이지만 황석현은 유연하게 받 아넘겼다. "서로마 제국의 법통이겠지. 하지만 그렇게 설명한다 해도 제국의 승계 방식이 '주변의 핵심화'란 내 공식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내 거친 공식을 증명하려는 것은 한 제국에서 다른 제국, 혹은 한 문명에서 다른 문명으로의 전이가 그야말로 평지 돌출한 이질간에 이 루어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전문명, 전제국과 무관한 문명 혹은 제국이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이 의도적인 핵심화 노력을 통해 승계하거나 대체하게 되지. 세 계 제국의 역사를 멸망과 창설의 되풀이로 보건, 네가 말한 것처럼 민적을 달리한 승계로 보건 말이야. 그리고 거기서 지금 주변에 속해 있는, 그것도 두 제국의 변경이 마주친 곳에 살고 있는 우리의 선택에 한 참고를 삼으려는 거야." 황석현은 그래놓고 다시 자신의 논리를 이어갔다. "주변이 빨리 제국에 동화하여 핵심에 끼여드는 형태는, 그리하여 마침내는 새로운 제국 으로 자라간 예는 현대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아메리카 제국과의 관계만 본다면 그 대표작인 성공 사례는 일본이 될 것이다. 서구 열강의 관리 능력이 처음 동북아에까지 미쳤 을 때 일본은 다른 동북아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한 주변 혹은 변경이었다. 하지만 그 들은 이웃 나라들과는 달리 재빠른 동화와 그뒤의 집요한 핵심화 노력으로 이제는 은쟁반과 금스푼으로 차려진 아메리카 제국의 식탁 한 모퉁이에 끼여 앉았다. 박정희 정권이 말하는 선진화, 공업화한 것도 다른 말로 바꾸면 궁극적으로는 아메리카화란 말이 될 것이다. 우리 나름의 제국화, 핵심화 노력이고, 어설픈 역사주의로 추출된 내 공식이 맞다면 상당한 성공 을 거둘지도 모른다." 인철은 거기서 비로소 형을 통해 한 자유주의자로만 인상지어져 있는 황석현의 변절을 어 렴풋이 예감했다. 한때 급진적인 민족주의 운동에 깊숙이 참여했던 그가 유력한 보수 일간 지의 기자로 눌러앉은 자신을 어떻게 다독일 수 있었는지도, 빈정거리는 투가 섞여 있기는 했지만 어쩌면 그는 마지막으로 덧붙인 예측이 맞기를 진심으로 빌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런 예감과 짐작에다 술기운에 충동된 오기로 인철이 물었다. "이 또 어설픈 역사주의일지 모릅니다만 반대의 성공 사례도 그리 드물지는 않을 것 같은 데요. 이를테면 사라센 문명 같은 것- 서구 문명과는 이질적이고 거의 독자적인 상장을 했 지만 한때 세계를 반분하지 않았습니까? 이탈과 자립은 독자성과 창조성의 바탕이 될 수도 있고, 그래서 그 성취는 더욱 값지고 빛난 것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사라센 문명은 틀 림없이 사구와 이질적인 데가 있고 그 출현도 돌연스러워 보이는 데가 있다. 하지만 그것 이 서구와 온전히 절연되고 있고 그래서 독자적인 것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단견이다. 그 둘을 가장 뚜렷하게 변별시켜주는 종교만 해도 그렇다. 서구의 헤브라이즘이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갈고 닦은 신앙 체계라면 이슬람은 이스마일의 자손들이 발전시킨 신앙 체계이 다. 이스라엘과 이스마일의 아버지가 공히 아브라함인 것같이 그들의 신앙은 특별히 사이가 나빴을 뿐, 같은 부모에게서 갈라져나온 형제다. 그들 문화도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메소 포타미아나 이집트쯤에서는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서구 제국의 관리가 불가능한 권역에 서 자라난 동부 이복이거나 동모 이부의 형제 문화야. 거기다가 변변한 자식도 없이 시들 어갔고... 내가 말한 이탈이나 자립의 예로는 부족해." 황석현은 일단 그렇게 반박해 인철의 입을 막아놓고 자신의 견해를 펼쳐나갔다. 그쪽 역시 나름으로는 오랜 천착이 있었던 듯했 다. "내가 이탈과 자립의 사례로 주목한 것은 유대사이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여섯 개 의 강력한 문명, 혹은 제국과 싸워 살아남은 민족이라고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세계제국사 를 논하면서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인 문명과 제국은 흥했고 가혹했던 것들은 망했다고 단언 하기도 한다. 그들은 기독교를 만들어 여러 세계 제국에 통합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고, 어 떤 때는 그 시대의 제국에 재빠른 동화와 핵심화의 노력도 했다. 하지만 한번도 제국의 핵 심이 되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그 어떤 제국에도 패배한 것이 없다. 수많은 강력한 제국이 그들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언제나 그들은 그들로 남았다. 흥하고 만하고 사라져간 것들은 그 제국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천 년 동안이나 나라도 없이 떠돌지 않았습니까? 얼마 전 <영광의 탈 출>이란 영화는 감동 깊게 보았습니다만 제 느낌에는 아직도 아스라엘이란 나라가 억지스 런 허구 같습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슈펭글러는 유대인을 무시했고, 토인비는 유대사를 '화석의 역사'로 규 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해석도 있다. 곧 그들은 한번도 국가와 교회와 법률 없 이 산 적이 없다는 주장이다. 다만 그들이 거기에 깃들여 산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들을 휴대하고 떠다녔을 뿐이다." "국가와 교회를 휴대하고 다녔다구요?" "그들은 율법 두루말이 속에 신뿐만이 아니라 국가와 교회와 법을 함께 담고 다녔다. 그 게 그들에게 적대적이었던 여러 세계 제국의 잿더미속에서 그들이 되살아날 수 있었던 비결 이고 소멸된 지 2천 년 만에 그들의 국가가 부활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로마는 그 들을 멸망시켰다고 믿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이야말로 두루말이 속의 국가로 후기로마와 뒤이은 중세에 지배와 맞먹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그 길을 우리가 선택하기 위해서 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그 하나는 유대사가 한 민족사의 성공 사례가 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율법 두루말이 속에 국가까지 담을 수 있는 종교적 천재성이 있어야 한 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 두 가지 전제는 모두 성립하기 어려울 것 같다. 특이하고 인상 적이기는 하지만 유대사를 성공적인 민족사라고 결론짓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이고, 또 우리 에게는 국가까지 담아낼 수 잇는 율법 두루마리가 없다." 황석현의 유대사 이해는 특별했 지만 어딘가 인철에게는 석연찮은 데가 있었다. 자신의 패배주의를 분석하기 위한 혐의도 짙었다. "그렇지만 다른 방식의 이탈도 있을 텐데요. 이를테면 스웨덴이나 스위스 같은 길..." "그것은 오늘날 두 제국의 변경에 처한 나라들이 할 수 잇는 선택의 한 방식이라기보다는 지난 시대의 역사와 연관된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현상일 뿐이야. 특히 '스웨디시 모델'에 대 해서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지만 현재 두 제국의 변경이 첨예하게 맞닿아 있 는 한반도에서는 아이들의 개꿈이다." "형님은 자신있게 아메리카 제국에서의 이탈이 곧 소비에트 제국에의 편입이라고 단정하 셨지만 쿠바의 성취나 월남의 지향도 반드시 형님의 단정과 같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특히 쿠바를 단순한 사회주의 위성 국가로 보기에는 좀 지나치지 않을까요?" "너도 '체 게바라' 의 환상에 빠져 있냐? 하지만 두고 봐라. 쿠바와 성공은 한번 있는 요행수가 되고 말 거다. 아메리카 제국은 두 번째, 세 번째의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또 월남이 성공한다 해도 월남이나 쿠바의 선택이 우리가 본받을 만한 성공 사례가 된다 는 보장은 없다. 민족의 통일 혹은 세계 최강의 제국과 싸워 이겼다는 정치적 허영은 충족 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 국가나 민족 단위의 종합적인 복리 증진에는, 특히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는 무관한 성공일지도 모른다." "그럼 우리의 길은 제국 화, 핵심화밖에 없다는 것이 되고- 그것은 결국 박정희 정권이 말하는 공업화, 선진화와 맞 아떨어지는데... 혹시 그거 정당성도 정통성도 없는 군사 정권이 보상의 목적으로 내세우는 경제 우선 이데올로기의 변형 아닐까요? 모르긴 해도 요즘 데모하는 애들에게는 패배주의로 비판받기 십상이겠는데요." 그때까지 황석현의 거창한 논리에 취해 듣고만 있던 정숙도 제법 뾰족한 목소리로 끼여들 었다. 무엇 때문인지 완연히 취해 건들거리던 황석현이 잠깐 긴장의 눈빛을 드러냈다. 그러 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취한 사람 특유의 허허거림으로 받았다. "어용 이데올로기? 패배주의? 하긴 나도 한때 김가를 그렇게 몰아붙인적이 있지. 그게 변 경 지식인의 고뇌라는 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더 늙고 지쳐야 했다. 무슨 대단한 운동가가 아니더라도 너희 나이쯤이면 반발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잊지 마라. 우리가 살 고 있는 이땅은 어쩔 수 없는 변경이고, 헤롯이 아무리 학정을 한다 해도 로마에 충성하는 한, 로마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많은 군병을 보낼 것이다. 반공을 국시로 삼는 한, 군사 정 권이 우리 모두의 껍질을 벗긴다 해도 아메리카 제국은 그들을 지지할 수밖에 없어. 특히 멀지도 않은 곳에 소비에트 제국의 변경이 잇닿아 있는 이 땅에서는." 제16장 또 다른 세상 끝 "윤도중씨요? 저희 사장님인데요." 명훈이 도치의 이름을 대자 이제 갓 스물을 넘겼을까말까 한 점원이 그렇게 대답해놓고는 가게 안을 향해 소리쳤다. "사모님, 손님 찾아오셨는데요." 그러자 어두운 가게 안쪽에서 아이를 업은 부인네 하나가 천천히 걸어나오면 퉁명스레 말 했다. "손님이라면 김군이 받지, 왜 날 불러?" 도치라면 여드름 충충 나 고등학교 시절의 얼굴이 더 익숙하게 떠오르는 명훈에게 그녀는 너무 늙어 보였다. 거기다가 시마지 천으로 만든 값싼 띠로 아이를 업고 있는 폼도 그때까 지 품어온 상상과는 너무 달랐다. 아마도 그들 부부의 둘째아이쯤 되는, 업혀 있는 아기도 여기저기 물것에 물린 붉은 흉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정성스런 보살핌으로 자라고 있는 아이 같지는 않았다. "가게 손님이 아니구요, 사장님을 찾으시기에..." 점원이 하던 일을 멈추고 변명처럼 말했다.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찌뿌드드한 표정인 게 손님을 반기는 눈치는 전혀 없었다. "애 아버지를 찾아오셨다구요? 어떻게 되시는데..." "아, 친구 됩니다. 오랜만에 한번 만나볼까 하고."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드러나게 긴장과 의심의 기색이 떠올랐다. "지금 일 나가고 없는데요..." 그렇게 말끝을 흐리는 것이 왠지 남편과 명훈을 만나게 해주고 싶지 않아하는 느낌을 주 었다. 그걸 알아본 명훈은 새삼 당황스런 기분이 되었다. 배석구가 도치의 주소를 일러줄 때 만 해도 명훈은 온통 반가운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생각해보니 도치는 이미 십 년 저쪽 사람이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그 세월이 바꾸어놓았을 여러 가지를 헤아려보지 않고 그를 찾은 자신이 문뜩 어설프게 느껴졌 다. "멀리 나갔습니까?" "네, 도매상에 물건 받으러 갔어요.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바로 내쫓는 거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언제 돌아올 것인가를 물어보려던 명훈은 그런 그 녀의 말에 입을 다물고 돌아섰다. 그제서야 그녀도 좀 심했다 싶었던지 뒤따라오듯 하며 다 시 물었다. "그래도 저 누구시라고 전해드릴까요?" "이명훈이라고 옛날 친구가 왔다 갔다고 전해주십시오." 명훈은 되도록이면 상한 기분을 드러내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렇게 대답하고 가게를 나왔다. 도로변에서 보면 겨우 구멍가게나 면한 듯한 잡화점이었지만 들어와서 보니 기차 안처럼 속이 깊어 물건이 많고 따라서 실속도 있어 뵈는 상점이었다. 그런데 가게를 나온 명훈이 거기 몇 발 떨어지지 않은 골목 모퉁이를 돌아설 때였다. 저 만치서 누군가 낯익은 사람이 자전거 짐칸에 까마득하게 물건을 싣고 기우뚱거리며 오고 있 었다. 몸이 불고 나이가 들어 보이기는 했지만 틀림없이 도치였다. 그도 이내 명훈을 알아본 눈치였다. 둘이 마주칠 무렵 해서 어렵게 자전거를 세운 그가 먼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이게 누구야? 천하의 간다 아냐?" "도치, 오랜만이다." 조금 전 그의 아내에게서 느낀 서운함이 아직 남아 있어서인지 명훈의 목소리가 절로 굳 어졌다. 그러나 도치는 기대한 이상으로 반가움을 드러냈다. "햐, 여기서 너를 만나다니. 참 보고 싶었는데. 그래 여기는 웬일이냐?" "실은 널 찾아왔 는데..." "그래? 그럼 가게에서 기다리지 않고." 그러다가 문뜩 생각난 게 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또 밥쟁이 짓이구나. 그 여자, 그거 정말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고..." 도치도 아내의 퉁명스런 손님맞이를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네 마누라였구나. 뭐 무던해 뵈던데..." "응, 사는 일에는 그런 셈이지. 하지만 친구들이라면 공연히 심통을 부려." "그럴 까닭이 있겠지." "하긴 세상이 달라졌어. 옛날 야쿠자 시절의 의리 하나만으로는 살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 단 말이야. 그 이리 앞세우고 찾아오는 녀석들치고 사는 데 도움되는 녀석은 드물지. 몇 번 당하다 보니 그 미욱한 여편네가 옛날 친구라면 지레 겁을 먹고..." 그 말을 듣자 명훈은 조금 막막해졌다. 배석구가 준 주소대로 남아 있는 녀석이라고는 도치뿐이었는데 말을 들어 보니 그는 이미 옛날의 도치가 아니었다. 의리에 죽고 사는 주먹이 아니라 계집 자식 거느 리고 살이에 찌들어가는 가장일 뿐이었다. "알뜰한 여자인 모양이네. 장가 자 든 거야. 돌개 형님 말씀으로 네가 맘 잡고 잘 산다더 니 다 마누라 덕이었구먼, 잘됐어." 명훈은 그렇게 말하면서 돌아서려 했다. 아직도 건달 시절의 눈치는 남았는지 작별의 말 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명훈의 속마음을 읽은 도치가 갑자기 손을 내밀어 명훈의 팔을 잡 았다. "아하, 돌개 형님을 만났구나. 그런데 간다, 너 지금 어딜 가려는 거야?" "이제 가봐야지. 네 얼굴도 보았고 하니..." "그게 무슨 소리야? 십 년 만에 만나 술 한잔 안 하고 헤어진다는 거야?" "됐어. 너도 바쁘고, 나도 가봐야 할 데가 있어." "안 돼, 짜샤. 너 우리 마누라한테 단단히 삐친 모양인데 사내 새끼가 그러는 게 아니다. 제깟 게 뭐래도 가장은 나야. 잔소리 말고 따라와." 그리고 그때부터 옛날보다 더한 호기로 나왔다. 끌다시피 명훈을 데리고 가게로 돌아간 도치는 자전거를 세우기 바쁘게 소리부터 질렀다. "이봐, 뭐 하는 거야? 시아주버님이 오셨는데. 빨리 나와 인사드려!" 하나뿐이지만 점원 에게도 거드름 섞인 고용주 티를 냈다. "어이, 김군. 여기 물건 좀 부려. 오늘 떼온 건데, 풀어서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구!" 도치 가 워낙 기세 좋게 나오자 그의 아내도 좀 전과 달라졌다. 억지로 짓는 것이기는 하지만 미소도 보이고, 더듬더듬 사죄도 했다. 그걸 본 도치가 더욱 기세를 올렸다. "이봐. 내 이 친구하고 좀 나갔다 올게. 당신 솜씨에 점심상이라도 제대로 차리겠어? 길 건너 송정옥에 있을 테니 급한 일 있으면 그리로 연락하고." 짐작으로는 평소와 다른 허세 인 듯했지만 그 바람에 그의 아내는 더욱 저지할 엄두를 못 내는 것 같았다. 제법 웃음까지 지으며 그들을 전송했다. "재작년에 돌개 형님 만났을 때 너를 가장 궁금해하시더니 기어이 만났구아. 그래, 형님은 아직도 중 노릇이냐?" 송정옥에서 대낮부터 수육과 소주를 시켜놓고 마주앉자 도치가 먼저 그렇게 물었다. 그도 배석구에게는 아직까지 경의를 품고 있는 듯했다. "노릇이 아니라 거의 스님이 되었어. 좀 특별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지." "특별한 일?" "세상에는 주먹이 쓰이지 않는 구석이 없는 모양이더라. 형님은 거기서도 필요한 사람 같 더라구." "나도 말을 들었지만 거 참 묘한 이치네." "세상에 묘한 일이 어디 그뿐이냐? 나는 네가 맘 잡고 장사나 하고 있다는 게 도통 미덥 지 않았다." "아, 그거?" 도치가 그래놓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름대로는 감회가 깊은 듯했다. "그때 참 세상 막막하더구나. 하늘 같은 오야붕들이 '나는 깡패입니다'란 팻말을 목에 걸 고 백주 대낮에 줄줄이 엮여 거리를 끌려다닐 때 발단에 끌려갔지. 국토개발단 너 그거 알 아? 하기야 알 턱이 없지. 너는 그때 처억 대학생이 되어 그것도 의거 부상 학생이 되어 있 었으니까. 어쨌든 거기서 짐승 같은 3년을 보내고 돌아오니까 다시 뒷골목은 쳐다보기도 싫 더라. 그래서 죽은 셈 치고 뒤늦게 장사를 배웠지. 스물다섯에야 삼촌 잡화점에 점원으로 들 어간 거야. 그리고 이제 6년짼가. 기를 쓰고 하니까 그럭저럭 먹고 살 만은 해지네. 마누라 는 점원 시절에 만났는데 그때는 무던한 또순이였어. 악착같이 모은 돈도 좀 있고... 가게 차 릴 때도 보탬이 되었지. 그래서 이제 겨우 내 점포라고 하나 가지기는 했는데 앞으로는 어 떨지 몰라. 거기다가 옛날 친구들이 찾아오면 뒤돌아보기도 싫던 그 바닥이 슬슬 그리워지 고... 마누라가 특히 옛날 친구들에게 박정한 것도 따지고 보면 실은 다 까닭이 있지." 도치 의 얘기를 요약하면 대강 그랬다. 명훈도 거기 맞춰 자신의 십 년을 짧게 요약했다. 그러니 지금 수배를 받고 있다는 것만은 감추었다. 이어 이야기는 두 사람이 함께 아는 옛 날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친구들을 만났을 때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시작은 이정재, 임화수 같은 거물들이었다. 한 때는 신비감조차 품고 우러르던 그들은 귀동냥한 얘기로 곁에서 직접 본 것처럼 떠벌리는 재미 때문이었으리라. 다음은 그 아래 서열로 성공한 중간 보스들을 별것 아닌 걸로 깎아내 리는 차례였다. "유지광이 말야, 너도 그때 봤지? 대한민국 주먹은 저 혼자인 것처럼 떠드는데 실제로는 우리 돌개 형님만큼이나 됐어? 제대로 주먹이 있었나 꼬봉이 있었나? 세다면 대학물 먹어 생긴 구찌빤찌 정도일까. 어쩌다 이정재 사돈이 되어 떼어준 아이들 몇 데리고 잠시 논 거 가지고..." 그런 식으로 가다가 마침내 같이 어울려 다니던 패거리로 돌아갔다. 명훈은 그 시절 언제 나 상대하기에 힘겹던 깡철을 떠올리고 그의 소식을 물었다. "깡철이 그 새끼, 아마 젊어서는 못 나올걸. 이번에는 사람을 하나 아주 보내버렸다니까." "사람을 죽였어? 어쩌다가?" "그 새끼 두번째 빵 갔다 와서 한동안은 잘 나갔지. 사실 내가 그 바닥 떠난 거 말이야, 국토개발단에 끌려가 본 쓴맛도 있지만 그보다는 달라진 풍토 때문인지도 몰라. 우리 때도 전쟁 나면(패싸움이 붙으면) 무기를 썼지. 하지만 고작해야 진줄(자전거 체인)이나 가꾸목 (각목)이고 칼이라도 과도나 식도같이 급할 때 있는 대로 들고 나갔을 뿐이잖아? 물론 그때 도 깡철이나 아이구찌 같은 놈이 있었지. 하지만 그런 칼잽이들 주먹축에 제대로 넣어주기 나 했어? 그런데 말이야, 요즘은 그게 아니더라고. 웃통 벗고 서로 마주보며 하는 주먹질은 아예 없어. 독한 것들은 사시미칼도 무디다고 시퍼렇게 날을 세워 품고 다닌다니까. 그것도 우리 때처럼 겁주는 게 목적이 아니라 정말로 푹푹 쑤셔대는 거야. 그런데 너 깡철이 그 새 끼 독한 거 잘 알지? 그때도 수틀리면 면도칼로 북북 그어대던 거. 그런 새끼한테는 요즘 같은 바닥이 오히려 놀기 좋은 판이 된 거야. 한때는 아이구찌, 호다이에다 새로 키운 독종 몇 데리고 깡다구 하나로 제법 종로통 한 모퉁이를 떼먹었다니까. 그러다가 똑같은 독종 패 거리를 만나 칼부림 끝에 그 꼴 난 거야. 구형을 무기까지 먹었대지, 아마." 그 말을 들은 명훈은 깡철이와의 마지막 날을 떠올리며 가슴이 서늘해졌다. 모니카 때문에 잠시 방심한 그를 기습과도 같은 공격으로 잠재우기는 했지만 언제나 마음속에서는 그와 다시 만나게 되 는 날이 불안으로 남아 있었다. "그럼 아이구찌와 호다이도 함께 달려간 거야?" "아이구찌는 종범으로 6년인가 받았지만 호다이는 빠졌어. 그 새끼 원래 겉폼이나 잡았지, 순 바람잡이 아냐? 그 싸움에서도 뒤로 뱅뱅 돌다가 운 좋게 걸려들지 않았는데, 그래도 요 새는 그 찌꺼기로 사는 모양이더라. 저처럼 빠진 조무래기를 몇 모아 깡철이, 아이구찌 이름 팔며 그 바닥에 붙어 있어." '그런데 왜 돌개 형님은 깡철이 얘기를 해주지 않았을까.' 명훈은 도치의 얘기를 들으면 서 그런 의문이 들었다. 다시 서울로 올라올 작정을 하면서 몇 번이나 넌지시 그의 소식을 물었으나 배석구는 모른다고 잡아뗐다. 도치가 훤히 꿰고 있는 일을 그가 모를 수는 없었다. '한때의 형, 아우 하던 의리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을 만큼 깡철이가 변해버렸기 때문일 까.' 하지만 그렇다면 호다이에 관한 정보가 이상했다. "호다이 걔는 알 수가 없더라. 손을 씻었다며 큰 비어홀에서 영업부장을 보고 있는데, 하 는 짓은 또 그게 아냐. 웨이터들을 똘마니 부리듯 하는 게 직장이라기보다는 옛날 그 바닥 행세 그대로더라구. 홀에 나오는 계집애들 다루는 것도 그렇고..." 배석구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명훈이 그런 배석구의 말을 떠올리고 도치에 게 물었다. "돌개 형님 말로는 호다이도 손씻고 무슨 비어홀에서 영업부장인가 뭘 하고 있다던데. 그 럼 형님이 잘못 안 거야?" "아, 그게 바로 그거야. 호다이 그 새끼가 하는 짓이 바로 요즘 개판난 주먹 세계를 보여 주는 거라구. 예전에는 업소 돈을 뜯어도 품위가 있었는데, 이젠 그게 아니라니까. 그럴듯한 이름으로 취직해 개처럼 빌붙어 먹는다구. 찍자 붙는 뜨내기 건달들 날려주는 것 정도가 아 니라 펨프(뚜쟁이)노릇도 마다 않는다니까. 모르기는 하지만 갈보 제조 공장도 돌릴걸. 공급 도 하구." "깡철이 소식도 전혀 모르고 계시던데?" "하, 그거..." 도치가 그래놓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모르는 게 아니라 말하고 싶지 않으실 거야." "왜?" "나도 들었는데 재작년에 된통 당하셨다더군. 깡철이 그 새끼 한창 잘 나갈 때 돌개 형님 이 그 새끼 잘 나간다는 말을 듣고 가라 사무실을 찾아갔는데 그 새끼가 뻣뻣하게 대한 모 양이야. 아무리 중옷 걸쳤지만 돌개 형님이 그런 꼴을 보고 참을 사람이야? 홧김에 책상을 둘러엎었더니 형님 목에 사시미칼을 들이대고 뭐랬는지 알아? 형, 땡초면 땡초답게 절간이 나 지키고 계실 일이지 한물간 똥차 가지고 잘 나가는 백차 앞가로막지 마슈, 괜히 얘들 앞 에서 개피 보지 말구, 했다는 거야." 그제서야 명훈은 배석구가 애써 깡철이를 입에 올리지 않으려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너는 손씻었다면서 어째 현역보다 그 바닥 소식에 훤하냐? 혹시 가게 그거 가라로 세워 놓고 뒤로는 아직도 끈이 닿아 있는 거 아냐?" "그건 아니고... 너 알다시피 머리에 쇠똥도 벗어지기 전에 똘마니 노릇부터 시작해 손씻 을 때까지 십 년 아니냐? 말하자면 뒷골목은 내게 경상도 어디에 있다는 네 고향 같은 곳이 야. 그 고향이 쉽게 잊혀지냐? 그렇다 보니 자연 그 바닥 소식도 조금씩 듣게 되는 거지." 도치는 그렇게 대답해놓고 조금 괴로운 듯 이었다. "실은 유혹도 많아. 호다이 그 새끼만 해도 몇 번이나 내게 가게 때려 치우고 저하고 동 업해 비어홀이나 하나 열자는 거야. 구멍가게 장사란 게 기껏 나하고 마누라 인건비 따먹는 거거든. 우리 부부 3년째 새벽부터 통금 때까지 뼈빠지게 일해 번 게 겨우 그 가게 전셋돈 맞춘 거야. 그런데 물장사는 그게 아닌 모양이야. 특히 비어홀이란 거, 자란 하면 몇 해 안 에 쇼부난다더군. 호다이가 거느린 아이들 쓰면 뒷돈 뜯길 것두 없구." "그럼 그렇게 해보 지 그래?" "한때 나도 마음이 흔들려 그 바닥을 다시 들여다본 적이 있지. 하지만 이미 말했듯 역시 아니더라. 아직은 한 과도기지만 곧 그 바닥은 깡철이나 아이구찌 같은 놈들의 세상이 될 거야. 피도 눈물도 없이 표독하고 잔인한 게 가장 큰 힘이 되는... 우리 같은 구식 주먹들에 게는 이미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아냐." 그런 도치는 다시 소심한 구멍가게 주인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어 작게 벌어도 처자 먹여 살리며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젊은 가장의 소박한 희망을 털어놓고 난 뒤에야 비로소 물 었다. "그런데 너는 지금 뭐 하냐? 날 찾아온 이유가 배석구 형님을 만났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차마 말 못 했는데 실은 당분간 몸 숨기고 밥이나 얻어먹을 곳을 찾고 있다. 지방 주재 기자, 여론 조사원 모두 사실이지만 일이 꼬였어. 대단한 건수는 아니라도 지금 수배받고 있 는 중이야. 어디 적당한 데 없어?" 그러자 명훈을 쳐다보는 도치의 눈길에 긴장한 빛이 어렸다. "너 알다시피 구멍가게 주인한테 무슨 힘이 있겠어? 기껏해야 점원 자리나 알아보는 건데 네 나이에 점원 노릇은 못 할 테고... 그런데, 넌 참 알 수 없는 놈이다." "왜?" "너는 우리 중에 유일하게 대학물까지 먹은 놈 아냐? 또 의거 부상 학생이고 한때는 농촌 운동으로 상록수상까지 받았다며? 문중이라고 했나? 고향에는 수백 년 유서 깊은 가문도 있고... 그런데 왜 그리 안 풀리냐?" 그 말에 명훈도 갑자기 울적한 기분이 되었다. 도치가 묻고 있는 것은 그 자신도 품고 있 는 의문이었다. 그 어느 것도 진정성을 가진 경력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자신은 언제나 최선 을 다해 보다 나은 것을 얻고자 노력해왔다. 그러나 새로 시작하는 자의 불 같은 열정에서 깨어나 돌아보면 언제나 그렇게도 애써 벗어나고자 했던 그 밑바닥을 뒹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하게 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절망은 앞뒤 없는 위악의 충동으로 바뀌어 삶의 위상을 한층 더 격하시키고 마는 것이었다. 명훈도 그런 불행의 원인으로 구조라는 것에 혐의를 걸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연좌 제로 자신의 신분 상승을 제약하고 있는 구조, 일쑤 농촌의 피폐와 이농을 그 기틀로 삼는 산업화라는 구조, 넉넉한 자본이나 특수한 기술이 없으면 필경은 도시 빈민으로 낙착을 볼 수밖에 없는 개도국 도시화 구조... 하지만 그때조차도 개인적인 특수한 불행이나 자신의 실 수를 온전히 부인할 수 없는 게 그의 가슴 깊이 숨겨진 아픔이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뭔가 이놈의 사회 구조에 원인이 있다는 기분이 들다가도 다시 돌아 보면 모든 게 내 무능이나 실수 같아." 명훈은 진심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놓고 보니 시답잖게 비우던 낮술이 갑자기 달아졌 다. 그러나 오래 감상에 빠져 있을 여유는 없었다. "매번 수렁에 처박힐 때마다 느끼는 건데 아직 더 떨어져야 할 밑바닥이 있다는 기분이 야. 그게 어딘지 모르지만 나는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바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상승 이 시작될 거라고. 그런데 이젠 거진 다 내려간 것 같애. 이 이상 더 어떻게 내려가겠어? 그 래서 부탁하는 건데... 뭐든 좀 알아봐줘. 쫓기는 내 신분이 노출되지 않고 밥이나 먹을 수 있으면 돼." "거참 알아듣기 힘드는 얘기네. 어쨌든 네게 말했다시피 내가 알아봐 줄 수 있는 것은 6 년 전 에 내가 출발했던 점원 자리뿐인데... 아무래도 그건 안 될 것 같애. 네가 하겠다고 나 서도 받아줄 사람이 잘 없을걸. 받아들여준다 해도 신원을 따질 테고. 점원이란 많건 적건 돈을 만지게 되니까 말야. 그냥 우리집에 있겠다면 몇 달 밥은 먹여줄 수 있지만..." 도치는 그렇게 자신없어했다. 그것도 옛날 건달 시절 허풍부터 치고 보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었다. 명훈이 마음에도 없는 호다이를 찾게 된 것은 아마도 도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 없어해서가 아니라 삶의 더 밑바닥은 도치 쪽보다 호다이 쪽에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갑자 기 그런 결정을 내리게 했다.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점원 노릇을 견뎌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게 진정한 밑바닥이 아 니기 때문에 내게 합당하지 않을 거야. 그건 평범한 사람들도 흔히 출발하는 바닥이니까. 그 래, 맞아, 내가 찾아가볼 쪽은 호다이일지도 몰라. 그런데 그 친구, 아까 뭐라구 했지? 갈보 공장을 돌리고 공급도 한다구? 그건 또 뭐야?" "기억 나? '밤의 대통령 알카포네'? 그 새끼 교과서처럼 그 책을 들고 다니더니 그 흉 내 하나는 제대로 내는 셈이지. 가출한 시골 계집애들 잡아 똥치 만들어 팔아먹는 거." 그 러자 명훈도 그 싸구려 책이 기억났다. 백인 처녀들을 납치해 창녀를 만드는 데 가장 효 과적인 방법은 며칠을 가둬둔 채 흑인들을 번갈아 들여보내 윤간시키는 것이었다던가 하는 따위 뒷골목에 몸을 담고 있을 때조차도 읽기 끔찍하던 구절이. 그러자 한동안 잠잠하던 자 학과 위악의 충동이 다시 명훈을 사로잡았다. "그래, 맞아. 그게 진정한 밑바닥이야. 인간이 내려간다 해도 그 이하로 어떻게 내려가겠 어? 호다이 그 친구 있는 곳이 어디지? 역시 그리로 가봐야겠어." 그 같은 명훈의 돌변에 도치가 아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 정말이야? 그렇게 되고 만 거야..." "내 별명이 왜 '간다'냐? 고물 잭나이프 한 자루 들고 너희들 속으로 뛰어들던 거 벌써 잊어버렸어? 마음먹으면 그 독종 깡철이도 잠재울 수 있던 거 말이야. 그 동안 되도록 그 세상과 멀게 살아보려 했는데 역시 안 되는군. 아무래도 내가 시작할 밑바닥은 그쪽이야. 거 기서 다시 시작해봐야겠다. 이것저것 피하고 폼나는 데서 시작해봤지만 되는 게 없었어. 이 번에는 철저하게 밑바닥에서 시작해볼 거야." "그런 게 어딨어? 그러지 말고 밑바닥이라면 차라리 리어카 장사부터 시작해보지 그래. 아니, 전자 제품 월부 판매 같은 건 어때? 요즘 그것두 잘하면 재미있는 모양이던데. 남보기 험하지 않구..." "바로 그런 허영 때문에 십 년이 지나도 이 모양 이꼴이지. 잡을 폼 다 잡고 뭘 해보려니 아무것도 안 되는 거야. 잔소리 말고 호다이 있는 곳이나 알려줘. 나같이 재수없는 놈 뒤 봐 준다고 골치 안 아프려거든." 명훈은 그렇게 잘라 말하고 거취에 대한 의논을 끝냈다. 못 본 지는 도치나 호다이나 다 같이 8년이 넘지만 정은 둘을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거칠기는 해도 순박한 도치와는 단순 한 '식구'들끼리의 의리를 넘어 형제와 같은 정이 있었다. 그러나 겉멋만 부리고 조금이라도 힘들고 위험한 일이 있으면 몸을 사리는 호다이에게는 그때도 별로 정을 느끼지 못했다. 오 히려 명훈은 그를 경멸하고 그는 두려움을 품고 빌붙는 사이라는 편이 옳았다. 그런데도 한 번 발동한 자학과 위악의 충동은 자신이 찾아갈 곳이 호다이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이끈 것 이었다. 그래도 못마땅해하는 도치를 달래 호다이가 나가는 업소를 알아낸 명훈이 그곳에 이른 것 은 오후 5시를 좀 넘긴 때였다. 생각보다는 규모가 엄청난 비어홀이었는데 초가을이라 해가 남아서인지 아직 영업은 시작되지 않은 듯 홀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흰 와이셔츠에 검은 나 비넥타이를 맨 젊은이 둘이 테이블보를 만지고 있다가 들어서는 명훈을 보고 소리쳤다. "어서 옵쇼!" 그리고 작은 여행 가방을 든 후줄그레한 차림 때문인지 잠시 명훈을 살피다가 그 중의 하 나가 물었다. "맥주 하시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보니 명훈도 시원한 맥주 생각이 났다. 도치와 걸친 소주 몇 잔이 낮술의 특징적인 효과를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 히야시 잘된 것으로 두어 병 내와." "몇 번 테이블로 하시겠습니까?" 그게 단골로 다니는 아가씨가 있느냐는 물음이라는 것쯤은 명훈도 알고 있었다. "그런 거 없어. 나 여기 처음이니까. 저쪽 구석진 자리로 하지." 명훈은 그렇게 대답하고 홀 안쪽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거긴 아직 치워지지 않았는데요." 이번에는 나이든 쪽이 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청소를 하지 않았다지만 더 손볼 것 없이 깨끗한 테이블이었다. 명훈의 느낌으로는 그 밖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게 굳이 그 자리를 고집하게 했다. "여기가 좋아. 몇 잔 하고 갈 거니까, 이리루 술 가져와." 명훈은 그렇게 말한 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그 자리로 가서 않았다. 두 웨이 터는 저희끼리 뭔가 알 수 없는 눈짓을 주고받다가 그럼 좋을 대로, 하는 듯이 명훈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원래 명훈은 거기서 맥주를 마시다가 호다이가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만날 생각이었다. 그 런데 그 비어홀에 들어설 때부터 묘하게 신경을 건드려오는 분위기가 있었다. "아가씨는 좀 기다리세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서..." 술과 안주와 맥주를 날라준 웨이터가 습관적으로 한곳을 바라보다 얼른 시선을 바꾸었다. 홀 뒤편 종업원 숙소나 탈의실로 쓰기 위한 칸막이를 쳐둔 곳이었다. 아무리 맥주철은 지났 다지만 통상으로 5시면 영업을 시작할 때인데도 그 넓은 홀에 나이 어린 웨이터 둘만 있다 는 게 우선 이상했다. 거기다가 자리에 앉고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그 칸막이 저편에서 심상찮은 소음이 들려오 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그 안에서 누군가 고함치는 소리, 무언가 부딪는 소리, 그리고 여자 들의 짧은 비명과 흐느낌 같은 것들이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명훈이 거기 앉는 것을 꺼린 것은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영업부장은 아직 나오지 않았어?" 혼자 몇 잔을 비운 명훈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손은 여전히 테이블을 만지고 있으면서도 귀는 줄곧 구석진 칸막이방 쪽으로 모으고 있는 듯하던 웨이터 중에 하나가 움찔하며 대답 했다. "부장님은 일이 있어서... 그런데 부장님 찾아오셨습니까?" "그래, 너희 부장 유상규 맞 지?" "네. 그런데 어떻게 되는 사이인지?" "옛날에 한솥밥 먹던 식구야. 요새도 별명을 호다이로 쓰나?" "아뇨. 그런 별명은 처음 들어보는데요. 그냥 영업부장님으로 통하세요." 웨이터가 그렇게 대답해놓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저어... 부장님 만나실 일... 급하십니까?" "꼭 그런 건 없지만 빨리 만나고 싶은걸. 어떻게 연락해볼 데라도 없나?" 그러자 다시 마주본 둘은 무언가 눈길로 상의하는 듯하다가 그 중에 하나가 일어섰다. "실은 안에 계신데요. 아무도 들이지 말라시기에... 누구시라고 전해드리면 되겠습니까?" "간다라구 해. 천하의 간다." "간다?" "그게 내 옛날 별명이지. 오래되었지만 말야." 솔직히 명훈은 호다이가 자신의 별명을 기억해줄지조차 의심스러웠지만 짐짓 여유를 보였 다. 어쨌거나 만나기만 하면 자신을 알아보기는 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호다이가 무 슨 허풍을 어떻게 떨어두었는지 명훈이 그렇게 나오자 웨이터는 더욱 공손해졌다. 호다이를 찾으러 간 웨이터는 카운터나 주방 쪽이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기미가 느 껴지는 칸막이방 쪽으로 갔다. 명훈이 들은 이상한 소음은 그가 방문을 열고 들오서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 대신 이번에는 굵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몇 마디 희미하게 들려왔다. "뭐야? 간다가 왔다구?" 이윽고 칸막이방 문이 열리며 날카롭고 차갑게 들리도록 꾸민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이어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검은 정장으로 날렵하게 차려입은 호다이였다. 웃옷 왼쪽 윗주 머니에 흰 수건까지 꽂을 정도로 갖춰 입었는데 비해 혁대를 꿰며 나오는 게 뭔가 잘 맞지 않았다. "맞구나. 이명훈, 이사범이군." 호다이가 제법 반색을 하는 걸 보고 명훈은 은근히 불안하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명 훈의 별명과 본명뿐만 아니라 배석구만 쓰던 사범이란 호칭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명훈이 당수 승단 대회에서 3단을 땄을 때부터 배석구는 누구 앞에서 세력을 과시하고 싶거나 명훈 을 추켜세울 때 가끔씩 그런 호칭을 썼다. 당수 도장 사범을 동생으로 거느리고 있다는 과 시, 혹은 내가 네 값을 알고 있다는 인정의 뜻이었을 것이다. "그래, 나야, 오랜만이다." 명훈도 되도록이면 위축되지 않으려고 애쓰며 담담하게 받았다. 그때 칸막이방 안에서 누 군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밖을 훔쳐보았다. 그 인기척을 느꼈는지 호다이가 돌아보며 차 갑게 말했다. "뭐 해? 장사들 안 할 거야? 빨리 제자리로 돌아들 가!" 그러자 그 방안에서 쥐어짜인 듯 후줄근해진 남녀가 하나둘 빠져나왔다. 모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웨이터와 여급들 같았다. 남자들은 머리를 푹 숙이고 재빨 리 지나갔지만 여자들은 아직도 겁먹은 눈길로 호다이를 힐끔거리는 게 그 방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바쁜 모양이군. 재미는 어때?" 한껏 위엄을 부리고 서서 지나가는 종업원들을 노려보고 있는 호다이에게 명훈이 지나가 듯 물었다. 그제서야 호다이가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않으며 꾸미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도 마라. 이 장사, 이거 어디 신경쓰여 해먹겠어? 하루라도 빨리 손털어야지..." "내가 보기엔 신수가 훤한데 뭘 그래? 게다가 꽃밭이고." "꽃밭? 꽃도 꽃 나름이지, X도 X같잖은 년들이..." 거기서 육두문자를 내쏟을 듯하던 호다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의젓한 표정으로 돌 아가 꾸며낸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단다, 넌 어떻게 된 놈이냐? 한번 이 바닥 뜨고는 소리 소문 없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어? 보자, 이게 몇 년 만이야?" 예전에는 명훈이라면 공연히 겁을 먹고 쭈뼛거리던 호다이였다. 그러나 명훈의 행색에서 무얼 읽었는지 이제는 꽤나 자신만만해했다. "너 깡철이 따라나가고 난 뒤에는 못 봤으니까 거진 9년이지." "깡철이 따라나가긴... 그 쌔끼가 하두 졸라 함께 다녀준 거지. 어쨌든 그 동안 어디서 뭘 했어?"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했지." 명훈은 그렇게 대답해놓고 짐짓 긴 한숨을 지었다. 진심으로 한탄해서가 아니라 말에 무 게를 싣기 위해 과장된 한숨이었다. 호다이가 한층 살피는 눈길이 되어 말했다. "우리는 네가 대학 나와 착실한 월급쟁이라도 된 줄 알았는데 뭐가 잘 안 풀린 모양이 네." "맞아.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구, 내겐 역시 이 바닥이 제격인 모양이야. 나 지금 수배받고 있는 중이다. 이번에 달려가면 최소한 대여섯 바퀴는 착실하게 돌아야 나올 거야." 명훈은 선수라도 치는 기분으로 자신의 처지를 과장해 털어놓았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호다이가 허세를 조금 풀며 물었다. "왜, 뭘 했는데?" "기자 노릇하다 수틀려 한 놈 보낸 데다, 돌개 형님 만나 한 건 더 추가했다. 이번에는 아 예 밥숟갈 놓은 모양이야." "돌개 형님 만나? 그 형님 절에 있잖아?" "수배도 피할 겸 깊은 산중에서 수양인아 좀 할까 하고 찾아들어간 절에서 돌개 형님을 만난 거야. 양산박을 차리고 있어 한동안 의지해볼까 했는데- 사찰 분규 껀수 하나 몰고 와 도와달라는데 어쩌냐? 뺏긴 절 되찾아준 건 좋았는데 땡초 한 놈이 영 가버린 거야. 신문에 서 봤지? 태고사 분규... 그래서 끈 떨어진 조롱박 신세가 됐다." 명훈은 과장의 혐의를 주 지 않기 위해 애써 담담하게 얘기했다. 약게 굴어 전과 한 번 없는 호다이라지만 그 바닥에 굴러먹은 햇수가 있어 어설픈 과장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우려가 있었다. 놀라는 표정을 짓 고는 있어도 호다이는 아직 명훈을 살피고 있는 눈치였다.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돌개 형님은 모르실 텐데..." "얌마, 세월 지났다고 이 바닥 의리 어디 가냐? 네 소식뿐만 아니라 깡철이, 아이구찌 얘 기도 다 들었다. 이 바닥 예전 같지 않게 변한 것도 말이야." "그래 많이 변했지. 좋던 옛날 다 갔어. 주먹이 국회의원도 나오고 내무부 장관설까지 나 돌던 시절은 말이야. 이제는 아주 돈만 아는 아싸리판이 됐어. 몇 푼 거두지도 못하는 나와 바리 하나 두고 사시미를 뜨는 살벌한 판이." 거기서 호다이도 잠시 감회 어린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내 스스로를 추스른 듯 냉정한 목소리로 돌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나 같은 놈은 속 편하기도 해. 모든 게 이해 관계로 풀리니까 오히 려 간단해지더군. 옛날같이 가오 때문에 뻔히 깨지게 되어 있는 싸움 하지 않아도 되고 밤 낮없이 묶여 굽신거릴 필요도 없고... 힘이 달리면 적게 먹으면 되는 거야." "그래서 영업부장이로군. 그래도 들으니 재미본다던데. 깔치장사, 그거 요즘 신종 사업이 냐? 너만 하는 거야?" "어디서 들었어? 사업은 무슨..." 호다이가 어울리지 않게 멈칫거리다가 다시 냉정을 회복했다. "돈 될 만한 곳을 쑤시다 보니까... 공업화가 뭐고 선진화가 뭔지 모르지만 요즘 X장사 불 나. 찾는 놈은 많은데 내줄 X이 있어야지. 옛날같은 구식 X도가로는 반도 못 대. 이게 공업 화, 산업화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현상이라면 나중 정말로 산업화된 뒤에는 X달린 것은 모두 나서 손님 받아야 할 판이라니까. 양코배기, 쪽발이 섞어... 그러다 보니 이 바닥도 사업 다 각화라 할까, 나 같은 조무래기들은 더러 그 장사에 손대. 옛날에도 뚜쟁이들 상납을 받았다 는 점에서는 원래 이 바닥과 무관한 장사는 아니지만..." "제조 공급까지 말이냐?" "제조랄 것도 없어. 당장이라도 서울역에 나가봐. 경상도에서, 전라도에서 후보들이 줄줄 이 내리지. 걔들 가는 길 뻔해. 걔들이 시골서 막연히 꿈꾸고 온 서울 취직 자리 거기서 거 기라구. 식모, 공순이, 식당 종업원, 다방 레지, 그 다음은 매미집 아니면 종삼이나 오팔팔이 지. 그 길고 힘든 과정 생략하고 바로 모양새 있는 돈벌이도 되는 비어홀 여급으로 앉히는 건데- 힘들어." 호다이는 그래놓고 비로소 술 한잔을 비우더니 주위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새 날이 저물 어 비어홀 안에는 제법 손님들이 들어차 있었다. "야, 우리 자리 옮기자. 명색 영업부장이라 여기 앉아 손님하고 술 마시고 있기가 좀 그렇 네." 호다이가 명훈을 안내해 간 곳은 조금 전의 그 칸막이방이었다. 그 방은 넓은 건물 이층 을 다 쓰는 그 비어홀 입구의 반대쪽에 있었는데, 제법 여남은 평은 됨직한 다용도실이었다. 아가씨들이 테이블에 손님이 들 때까지 기다리는 데도 쓰고 화장을 고치거나 옷을 갈아입는 데도 쓰지만 한구석에는 사무에 쓰는 책상과 서류함도 놓여 있어 관리실도 겸하는 듯했다. "여기 술하고 안주 좀 가져와. 나 이사범과 얘기할 게 좀 있어." 뒤따라온 웨이터에게 대기용 소파 사이에 놓인 테이블을 가리키며 호다이가 말했다. 그런 데 그때 명훈의 눈에 소파 뒤 구석진 벽면에 기대 앉아 있는 아가씨가 들어왔다. 옷의 실밥 이 튿어지고 머리가 헝클어진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넋나간 사람 같았다. 명훈에게 할말이 긴요해서인지, 아니면 그 칸막이방의 조명이 홀보다 어두워서인지 호다 이는 그 아가씨를 얼른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뒤 얘기를 계속하려다 가 비로소 등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는지 힐끗 돌아보았다. "야, 너 여기서 뭘 하는 거야?" "?" 아가씨가 초점 없는 눈길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게 정말 번개 X하는 꼴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나가 장사해야할 거 아냐? 장사." 그제서야 움찔하며 몸을 일으킨 아가씨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이 꼴루 테이블에 나가라구요?" 일어선 걸 보니 정말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옷차림과 머리칼뿐만 아니라 드러난 팔다리와 어깨 어름에 난 붉은 맷자국도 술상머리에 나앉기에는 무리였다. 처음 호다이를 만났을 때 그가 왜 혁대를 고쳐 매고 있었는지를 알 만했다. "그럼 이 썅년아, 옷이라두 갈아입어. 이게 뻗대는 걸 보니 아직 정신이 덜 들었나본데, 기다려봐. 곧 명자 그년두 잡혀올 거야. 네년들이 튀어봤자 벼룩이지... 누구 돈을 먹고 그냥 튀려는 거야?" 벌떡 일어선 호다이가 금세 달려가 따귀라도 후릴 듯하다가 다시 주저앉으며 그런 으름장 으로 대신했다. 그 아가씨가 휘청거리며 방을 나갈 무렵 해서 술과 안주가 날라져왔다. 무엇 때문인지 벌컥벌컥 잔을 비우던 호다이가 생각보다 빨리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직은 깡철이와 아이구찌 이름 팔며 버티고 있지만 못 해먹을 노릇이야. 부릴 만한 칼 잽이가 없으니 독종을 만나면 얼마씩 떼줘 달래는 수박에 없다구. 거기다가 병신 같은 것들 이라두 똘마니라구 밥은 먹여줘야 하니..." 그게 그가 당면한 고민의 내용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명훈에게 더 이상의 탐색을 끝내고 그렇게 쉽게 속사정을 털어놓는 것으로 보아 처지가 적잖이 다급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미 처 호다이가 명훈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기도 전에 먼저 명훈이 거기서 본 것은 일생 그가 보아온 것 중에서 가장 참혹한 세상 끝이었다. 호다이가 한껏 분위기를 잡고 무슨 이야긴가를 꺼내려는데 갑자기 건물 다른 쪽 출구로 이어진 문이 거칠게 열리며 두 청년이 한 아가씨를 끌고 들어왔다. 청년들은 둘 다 우락부 락한 생김에 짧게 깎은 머리가 한 눈에 뒷골목의 똘마니 같았다. 끌려온 아가씨는 심하게 반항한 흔적은 남아 있었으나 이제는 체념 생태인 듯했다. 몸을 두 청년의 팔에 맡긴 채 아 예 눈을 감고 있었다. "어디서 잡아왔어?" "모래내에서요. 꼴에 신접살림이랍시고 차려 깨가 쏟아지던데요." 그러자 호다이가 잠시 명훈 쪽을 건너다보며 무언가를 헤아리는 것같더니 벌떡 몸을 일으키며 표독하게 소리쳤다. "문 잠가! 그리고 그 썅년, 벗겨! 홀라당!" 제 17 장 두번째의 장미 "3학년 발레 전공이라구요?" 강의 시간표를 확인하며 조교가 물었다. 인철을 알지 못하는 그녀에게 특별한 뜻이 있는 반문일 리 없었으나 그때부터 인철의 감정은 차게 가라앉기 시작하고 있었다. 댁은 이제 겨 우 1학년인데 왜 3학년 여학생을 찾으시죠, 하는 물음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 네. 친척인데 찾아볼 일이 있어서..." 인철은 그렇게 변명처럼 말해놓고 저도 몰래 얼굴을 붉혔다. "지금 실기 시간인데요. 세시까지. 그뒤로 강의는 없구요." 조교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명 혜의 시간표를 읽어주었다. 그렇데도 인철에게는 왠지 빈정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래도 네가 원하는 대로는 안 될걸, 하는. "고맙습니다. 그런데 실기실은 어딥니까?" 인철이 까닭 모를 굴욕감을 억누르며 다시 물었다. "이 건물 뒤편에 있어요. 그렇지만 실기도 수업입니다. 함부로 들어가지 못해요. 꼭 만나 시려면 수업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세요." 실은 당연한 주의인데도 그 말 또한 인철에게는 빈정거림처럼 들렸다. 인철은 공연히 기 분이 상해 조교실을 나왔다. 실기실이 있는 건물은 교정의 조경 잘 된 숲에 가려져 있었다. 오래되지 않은 대학이지만 여학교답게 조경에 힘쓴 탓인지 한창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들이 꽤나 보기에 좋았다. '여기서 돌아서버릴까?' 앞으로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보다는 점점 자신없어지는 일의 결말이 갑자기 인철에게 그런 마음이 들게 했다. 대학 축제에서의 파트너 문제를 먼저 꺼낸 것은 정숙이었다. 원래 그런 일에 관심 없는 인철은 그저 아이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구나, 하는 기분으로 축제 기간의 첫날을 보냈다. 그 런데 저녁에 따로 만난 정숙이 무언가를 살피는 듯한 눈길로 물었다. "넌 캠프파이어 있는 밤에 데려올 파트너 구해놨어?" "글쎄- 그런 데 꼭 참석해야 하나? 인철이 그렇게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그녀는 더욱 진지해졌다. "대학에서의 첫 번째 축젠데 구경은 해야지." "그럼 둘이 같이 가자." "우리는 같은 관데." "같은 과가 어때서?" "그걸 근친상간이라구 하는 거야. 세상에 같은 과 같은 학년끼리 학교 축제에 파트너 하 는 법이 어딨어?" 그런데 그때 퍼뜩 떠오른 게 명혜였다. 맞아, 네가 있었지. 미루어왔지만 이제 너를 찾아 봐야겠다... 대학에 온 뒤로도 인철의 의식에서 명혜가 떠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막상 찾아보려 고 하면 마땅한 구실이 생각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그런 머뭇거림에는 인철의 늦은 진학으 로 벌어진 학년 차도 한몫을 했다. 길을 돌고 돌아 인철이 겨우 신입생인 데 비해 그녀는 이미 3학년이었다. "그럼 명혜한테 부탁해보지 뭐." "인철은 이제 비로소 명혜를 찾아볼 합당한 구실을 얻었다는 기분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명혜는 정숙도 잘 알고 있었다. 인철의 과장과 미화에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인철만큼이나 그녀를 보고 싶어했는데 그날은 달랐다. 그때껏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묘한 표정이 되어 혼 잣말처럼 말했다. "결국 그렇게 되는구나..." 그런데 그 순간 낭패한 기분이 든 것은 인철이었다. 정숙의 그런 표정을 보면서 갑자기 자신이 지켜야 하지만 지킬 가망이 별로 없는 약속에 빠져들고 만 느낌이 들었다. 여러 말 과 오래 갈고 닦은 관념으로 미화하고 생명을 불어넣었지만 기실 명혜는 한 추상에 지나지 않았다. 못본 지 8년이 넘고 더구나 자신에 대한 감정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추상. 사물을 관념화해 인식하고 이해하는 인철의 성향은 사람을 대할 때도 그대로 나타났다. 인철은 뒷날까지도 어렸을 적부터 실체와의 대면을 통해 친화를 길러온 친구나 핏줄로 이어 진 가족들 외에 관념화를 통하지 않고 사람을 받아들여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준 인상이나 그에 관한 단편적인 지식들로 짜맞춰진 관념과 그 사람이 맞지않음을 알게 되면 자신의 독단이나 무책임한 가정을 반성하기보다는 그와의 교류를 그만두는 것으로 끝을 보 기 일쑤였다. 인철의 그러한 성향은 이미 말했듯 명혜를 향한 사랑을 길러가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을 것 이다. 실체와의 대면 없이 정신으로만 키워가는 사랑은 관념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대 상이 겨우 자기 형성의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한 어린 소녀였을 경우, 그가 길러가는 관념 과 자라나는 그녀의 실체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열여덟 살의 단테가 베키오 다리에서 만났던 베아트리체는 그때 단테의 머릿속에 있는 베 아트리체와는 이미 많이 달랐을 것이다. 아홉 살의 미숙한 눈에 비친 환상을 바탕으로 한 감상적인 영혼이 키운 황홀한 관념을 그대로 체현해낼 수 있는 여자는 없다. 더욱이 청년 단테의 머릿속에 있는 베아트리체와 평범한 주부가 되어 피렌체 거리를 살다 간 베아트리체 는 어쩌면 전혀 무관한 사람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아트리체가 늙은 단테에게까지 '구원의 여인'으로 살아남을 수 있 었던 비결은 그녀의 요절에 있지 않나 싶다. 유별나게 이른 죽음으로 현실을 벗어남으로써 그녀는 단테가 형성한 관념을 손상하지 않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또한 유별나게 오래 소외 와 유적을 겪어야 했던 단테의 삶은 더욱 소중하게 그 관념을 갈고 닦게 해 마침내는 한 이데아로까지 승화시켰다. 감히 단테와 비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철이 명혜를 관념화하는 과정은 그와 비슷한 데가 있다. 이제 8년 만에 현실의 명혜와 만나려 하는 인철의 설렘도 베키오 다리를 서성이던 단 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설렘의 내용은 아무래도 같을 수 없었다. 좀 외곬의 열정이기는 해도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구김 없는 성장기를 보낸 청년 단테가 품고 있었던 베아트리체의 환상에는 삶의 어두운 잔상이 그리 깊이 반영되어 있을 성싶지 않다. 거기에 비해 일찍부터 가치 박탈과 소외를 경험하며 자라온 인철에게는 달랐다. 인철 은 어릴 적의 감상으로 과장하고 미화한 환상을 바탕으로 명혜를 관념화해가면서도 그게 그 녀에게서 그대로 체현되고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늙도록 살아 있는 알리사 에게 진저리를 쳤던 지드처럼 자신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도 함께 키워가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지난 몇 년동안만 해도 그가 현실의 명혜와 대면할 수 있는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도 끝내 그녀 앞에 나설 수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관념 속의 그녀와 현실 의 자신 사이에 가로놓여진,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거리 때문이었다. 용케 마음을 다잡고 다 가들었다가도 어느 순간이 되면 갑자기 그녀가 아득하게 올려다뵈는 만큼이나 자신이 초라 하게 느껴져 돌아서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해 어느 정도 열패 의식에서 놓여난 뒤까지 그녀에게 다가가기를 망설 이게 된 까닭에는 마침내 진상과 대면하게 되는 자의 불안 같은 것도 있었다. 꿈은 꿈이었 을 뿐이고 어쩌면 나는 전혀 낯선 사람과 만나게 될지 모른다- 의식 표면에 떠오르지는 않 았지만 틀림없이 그런 두려움도 그녀와의 만남을 미루게 된 원인이 되었다. 청년 단테의 설 렘 속에는 없었을지도 모르는 두려움이었다. 이미 수업이 시작되어선지 실기실 부근에는 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인철은 마냥 서서 기 다릴 수도 없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마침 멀지 않은 은행나무 그늘엔 빈 벤치가 하나 눈에 띄었다. 인철은 그곳에 앉아 주머니에 들어 있는 삼중당 문고나 읽으며 수업이 끝나기를 기 다리기로 했다. 그 무렵 인철은 중국 고전에 재미를 붙여 먼저 국역판으로 읽어나가는 중이었다. 그날 인 철의 주머니에 꽂혀 있는 것도 1백여 편으로 축약해둔 <당음>이었다. 그러나 기다림의 성 질 탓인지 빈 벤치에 앉아 책을 펴도 마음은 별로 나지 않았다. 인철은 책을 덮고 다시 대기실을 바라보았다. 마침 자신이 앉아 있는 벤치 가까이에 있던 은행나무 쪽으로 난 창문이 있어 실기실의 수업 장면이 희미한 실루엣처럼 들어왔다. 추측 처럼 단순한 기본 동작 습득이라기보다는 어떤 작품의 총연습인지 여러 학생들이 차례로 나 와 맡은 역을 풀어보는 듯했다. 그걸 본 인철은 별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틀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리고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도 잊고 얼굴을 창 가까이 댔다. 그러자 좀 전보다 확 실하게 실기실 안이 들여다보였다. 실기실 안에는 몸에 착 달라붙는 연습복을 입은 학생들이 그들 나름의 위치에 서서 방금 듀엣을 추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혜를 찾던 인철의 눈길도 절로 그 두 사람 에게로 쏠렸다. 남학생이 없던 당시의 관행대로 여학생이면서도 남자 무용수 역할을 맡은 듯한 키 큰 여학생의 얼굴을 스쳐 상대인 여학생에게로 눈길이 옮겨지는 순간 인철은 자신 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실기복 때문에 과장된 성숙한 몸매가 서먹한 느낌을 주었지만 틀 림없이 명혜였다. 방금 대역에게 살포시 안겼다가 발끝걸음으로 사르르 물러난 명혜는 빠르지만 무언가 절 망적인 기분이 들게 하는 동작으로 주위를 돌았다. 느린 동작으로 그녀의 대역이 움직이고 다시 한편으로 대기중이던 몇 명의 학생들이 들어가 춤은 곧 군무로 변했다. 명혜도 빠르게 움직이는 수십 명의 학생들 속에 파묻혀버렸으나 인철은 쉽게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인철은 문득 어렸을 적 학예회를 떠올렸다. 그때도 명혜는 곧잘 무대 위에 올라 춤을 추 었고 인철은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금 인철이 느끼는 아름다움에 는 그때와는 다른 전율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명혜의 성숙한 몸매와 거기에 착 달라붙은 연습복에서 은연중에 풍기는 관능미였다. "이봐요. 거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인철이 방심한 눈길로 명혜를 쫓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뾰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퍼뜩 정신을 차려 돌아보니 조금 전 조교실에서 보았던 그 조교였다. 지도 교수에게 무슨 급한 서류라도 전할 일이 있어 실기실로 가는 중인 듯했다. "아, 네. 그냥..." 인철이 화끈거리는 얼굴로 그렇게 우물거리지 그녀가 한층 뾰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기도 수업이라고 했잖아요? 훔쳐보는 게 아녜요." 그리고는 종종걸음 쳐 실기실로 들 어가버렸다. 어떻게 보면 그 일은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고, 더구나 명혜와는 무관한 일이 었다. 그러나 인철은 바로 명혜에게 무안을 당한 듯 얼굴이 화끈거리고 낭패한 기분이 들었 다. 벤치로 돌아온 인철은 무너지듯 앉았다. 한동안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느닷없는 결론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냥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직도 아니구나. 너는 너무 먼 곳에 있어...' 인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벤치에서 일어나 넋 나간 사람처럼 교정을 빠져나왔다. 아직은 손상당하지 않은 환상을 무슨 소중하면서도 부스러지기 쉬운 물건처럼 안고. 하지만 현실의 명혜가 보여준 낯선 관능미는 인철의 관념 속에 자리잡고 있는 명혜를 그때 이미 한 구체적 인 불안으로 위협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명혜의 학교를 나온 인철은 버스로 몇 정거장이 되는지 모를 길을 터덜거리며 걸었다. 자 신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걷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아주 충격적이거나 벅찬 일을 당할 때마다 빠져들게 되는 의식의 마비였다. 아주 뒷날까지도 인철은 종종 그런 마비에 빠 졌는데, 특히 사랑에서 비롯된 충격이나 감격과 부딪칠 때가 그랬다. '하지만 알아다오. 나는 오늘 두 번째의 장미를 들고 너를 찾았다는 걸...' 안개 자우룩한 새벽길을 혼자 걷는 듯한 그의 의식을 떠돌고 있는 것은 다만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러다가 인철이 퍼뜩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갑자기 포도를 쓸고 지나간 한 줄기 거센 바람 때문이었다. 그게 포도 위에 널려 있던 철 이른 낙엽을 날리고 그 낙엽 중에 하나가 눈을 찔러와 넋 나간 사람처럼 걷고 있던 그를 비척이게 했다. 겨우 몸을 가누고 주위를 돌 아보니 안암 로터리 부근이었다. 꽤 먼 거리를 걸은 셈이었다. '자, 이제 어디로 가나...'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온 인철은 길 잃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얼른 떠오른 것은 가정교 사로 입주하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골방에서 쉬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 만 인철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침에 나올 때 가르치는 아이들의 어머니에게 축제를 핑계 로 늦거나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란 얘기를 하고 양해까지 받은 터였다. '용기네 아이들에게나 가볼까...' 인철은 다시 그렇게 생각해보았으나 그것도 안 될 일이었다. 전날 저년 용기에게서 만나 자는 전화가 왔을 때 역시 축제를 핑계로 날을 미룬 것이 떠올랐다. 그렇게 되면 갈 곳은 한군데뿐이었다. '그래, 학교로 가서 아이들의 축제나 구경하자. 아니면 한형이나 노가를 만나 막걸리나 퍼 마시는 거지 뭐.' 인철은 마침내 그렇게 마음을 장하고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서 혜화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 다. 한형은 이제 유별난 사이가 되어버린 제대병을 가리키는 말이고, 노가는 한 열흘 수사 기관에서 고생하고 돌아온 뒤로 묘한 동지애 같은 것까지는 드러내는 삼수생 노광석에게 인 철이 붙인 호칭이었다. 인철이 학교로 돌아가니 교정 안은 제법 축제의 분위기로 흥청거렸다. 그러나 한형이나 조가는 물론 낯익은 급우들조차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자신만 빼고 모두 한곳으로 몰려 가버린 듯해 울컥 외로움이 치솟았다. 명혜를 만나러 갔다가 빠져들게 된 감정의 과장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탓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공연히 외로워져 교정을 돌던 인철은 그 한구석에 자리잡은 일일 주막으로 들어갔다. 학 생들이 무슨 모금인가 취지를 알리는 현수막이 천막 입구에 요란스레 걸려 있었으나 인철은 살펴보지 않았다. 그저 진심으로 목이 말라 대포 한잔을 청해 마시려 하는데 누군가 어깨를 쳤다. "참새 방앗간이지, 어디 갔나 했더니 역시 여기 있었군." 돌아보니 한형이었다. 어디서 마셨는지 벌써 얼굴이 벌갰다. 언제 만나도 따뜻한 느낌을 주고 그래서 또한 언제나 반가운 사람이지만 그날처럼 그가 인철에게 반가웠던 일도 드물었 을 것이다. 인철은 투정이라도 부리는 기분이 되어 말했다. "나 혼자 쏙 빼놓고 모두 어딜 갔습니까? 역시 나는 축제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모양이 죠?" "무슨 소리야? 이형이야말로 혼자 빠져나가 어딜 갔다 왔소?" 한형이 그렇게 너스레를 떨더니 이내 생각난 듯 물었다. "아 참, 베아트리체를 모시러 갔다면서? 정숙이한테 들었지. 그래 모셔오기는 모셔온 거 야?" "그렇다면 여기서 이렇게 고배를 들고 있겠습니까?" "고배라, 고배... 그럼 지금 이형이 마시는 게 쓰디쓴 잔이란 말이지?" 한형이 그러면서 한바탕 폭소를 터뜨린 뒤 맞은편에 앉았다. 인철은 별로 웃을 기분이 아 니어서 받아놓은 잔을 말없이 비웠다. "모두 어딜 갔습니까?" 인철은 안주도 집지 않고 입가를 씻으며 그렇게 묻자 한형이 비로소 웃음기를 거두었다. "말이 쉬워 파트너지. 바알간 불범 같은 신입생들이 어디 가서 짝을 구해? 그래도 기는 죽기 싫어 저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정신이 없는 게지. 그건 그렇고 주모! 여기 막걸 리 한 대포씩 더 내오쇼." "또 드시게요? 아무리 돈 받고 하는 장사라지만 이거 이래도 되는가 모르겠네." 일일 주모가 된 여학생이 두 되들이 양은 주전자를 힘겹게 들고 와 둘의 잔을 채워주며 한형에게 알은체를 했다. 그걸로 미루어 한형은 이미 여러 차례 그 주막을 들락거린 듯했다. "아예 가망 없는 축이나 나 같은 늙다리는 대폿집이나 들락거리며 애꿎은 막걸리나 퍼대 는 거지. 그래도 오늘밤이 대학 축제의 하이라이트라니 그게 어떤 건지 궁금은 하고..." "아까 정숙이 보았다고 하셨지요? 걘 뭘 하고 있습니까?" "묵은둥이(복학생)에 반반한 꼴값은 하드만. 일찌감치 근사함 놈씨 하나 달고 와 학교 안 내한답시고 여기저기 휩쓸고 다니던데. 지금은 학원 다방쯤에 앉아 노닥거리며 캠프파이어 나 기다리고 있을걸." 한형은 그렇게 대답해놓고 슬쩍 인철의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웃음기를 거두고 물었다. "그런데 이형은 어떻게 된 거요? 지난 한 학기 단짝으로 어울려 다니길래 나는 정숙이하 고 잘돼가는 줄 알았는데." 이미 예고되어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정숙이 남자 파트너를 데리고 왔다는 말을 듣는 순 간 인철은 묘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한형이 눈치를 살피는 게 또한 묘하게 자존심을 자 극해 인철은 애써 담담하게 받았다. "에이, 잘돼가기는 뭘 잘돼가요? 그럼 형은 우리가 근친상간이라도 하는 줄 알았어요?" "근친상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같은 과 동급생끼리 연애하는 건 근친상간이나 같은 거라구요. 우린 그저 친구일 뿐입니 다. 술집 여자들 말마따나 인생의 대꾸보꾸를 많이 겪다 보니 서로 할 얘기가 많아진 친구 말입니다." "키야- 인생의 대꾸보꾸라... 이형이야 고생깨나 한 줄 알았지만 정숙이 걔가 무슨..."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그런 겁니다. 더 이상은 사생활 침해가 되고." 인철은 정숙의 일이라면 영혼의 맡바닥까지 다 알고 있다는 투로 말함으로써 조금씩 쓰려 오기 시작하는 자존심을 달래려 했다. 그런데도 눈치 없는 한형은 오히려 더 강한 궁금증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더욱... 어디 그런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예사 사이야?" "그래서 친구죠. 진정한..." "그거 영 헷갈리네. 솔직히 나는 남녀간의 우정이란 걸 믿지 않아. 그건 어떤 과도기에 붙 인 이름이라고." "그거야말로 바로 형이 늙다리라는 증거죠." 인철은 농담처럼 그렇게 한형의 입을 막았지만 그때 이미 그의 마음속은 바닥부터 알지 못할 동요에 휩쓸리고 있었다. 축제의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장작은 네모지게 쌓아 불쏘시개 대신 기름을 끼얹어 붙인 듯한 불은 이제 장작으로 옮아 붙어 탁탁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똥을 튀기며 어둠 속에 타오르는 모닥불은 한층 기세를 올렸다. 그런 모닥불을 둘러싼 백여 명의 남녀를 솜씨 좋게 이끌고 있는 것은 그런 진행을 직업으 로 삼고 있는 듯한 20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가슴에 통기타를 매단 채 성능 좋은 마이크로 젊음, 지성, 낭만, 열정 따위의 낱말을 천박하지 않게 연결해 참여자들을 거부감 없이 복종 시키고 있었다. 그는 즉석에서 만들어낸 두 명의 보조수를 시켜 포크 댄스의 기본 동작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참가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젊고 몸의 유연성과 적응성이 높아 그런지 춤은 금세 어우러졌 다. 어깨를 겯고 좌우로 원무를 돌다가 어깨를 풀고 둘씩 마주보며 왈츠 비슷한 춤을 추는 데, 곁에서 구경하기에는 그날 즉석에서 배워 춤을 추는 사람들 같지 않게 그럴듯한 춤판이 었다. 서투름이나 실수조차도 깔깔거림 속에 일부러 그러는 장난 같기만 했다. 인철은 모닥불에서 좀 떨어진 나무 그늘에서 그들의 춤을 보고 있었다. 자신도 그들 속에 섞일 수 있었고, 섞였다면 그들과 다름없는 흥겨울 수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웃고 즐기는 그 들이 처음부터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 같았다.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것은 너희들이구나...' 춤은 다시 원무가 되어 떠들썩하게 돌아가는 춤판을 보며 인철은 까닭 모를 비감에 젖어 중얼거렸다. 먼길을 돌긴 해도 다시 또래 집단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그것 도 아닌 듯했다. 나는 영원히 또래 집단을 잃어버렸다. 홀로 따로 떨어져 떠돌게 되어 있는 게 내 운명인지도 모른다- 한형과 마신 술이 그의 감정을 턱없이 과장해서였는지 모르지만 그런 섬뜩한 단정까지 내려질 정도였다. "나는 여럿의 흥겨운 잔치를 보면 언제나 '토니오 크뢰거'를 떠올리게 되데. 그리고 그가 말한 '길을 잃은 속인'이란 개념이 무슨 운명의 이름처럼 절절하게 가슴에 닿아와. 저기 섞 여들고 싶지만 왠지 내게는 영영 불가능할 것 같고... 이형은 어때?" 담배를 비딱하게 물고 인철과 함께 춤판을 내려보고 있던 한형이 불쑥 그렇게 말했다. 그 또한 과장되어 있는 감 정에서 우러난 단정인지 모르지만 그 말을 듣자 인철은 비로소 그가 누구인지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이가 스물다섯씩이나 되고 군대를, 그것도 월남을 다녀왔으며 세상의 어두운 밑바닥은 다 헤매어본 듯한 그였다. 그러나 원고지를 끼고 문학과 인생을 말할 때는 그 어떤 문학 소 년보다 더한 순진성과 감상을 보여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이제 스스로를 실토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길을 잃은 속인... "방금 제가 속으로 중얼거린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토니오 크뢰거'의 중얼거림 이었습니다. 언제나 즐거운 것은 너희들이구나- 하는..." "그랬어? 그렇다면 이형은 생각보다 영악한 사람이네. 통 내색을 않더니 역시 길 잃은 속 인이었어?" 한형이 그렇게 벙글거리다가 담뱃불이 끼워진 손가락으로 한군데를 가리키며 비틀린 웃음 을 지어보였다. "그렇다면 저쪽은 잉게 부르크만과 한스고..."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줄곧 찾아도 보이지 않던 정숙이 거기 있었다. 춤은 이제 다시 원무로 돌아가 그녀의 파트너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얼른 알 수는 없었으나 멀쓱한 두 남 학생 사이에 끼여 한껏 밝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슨 감정의 과장이었을까. 웃으며 춤추는 정숙을 보자 인철의 기분은 일시에 바뀌었다. 아니야. 나는 그런 따위 운명 같은 건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나는 저들과 함께 저들 속에 있을 거야... 인철은 기분뿐만 아니라 실제로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 어났다. 어쩌면 술도 인철 스스로의 가늠보다는 더 심하게 취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형, 어딜 가요?" 인철이 성큼성큼 춤판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고 한형이 의아스러운 눈길로 물었다. "저리로 가려구요. 함께 춤추려구요. 한스가 되어 내 잉게를 되찾아야지요." 인철은 그렇게 대답하고 방금 돌기를 멈춘 춤판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때마침 진행자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춤이란 게 그리 어렵지 않지요? 자, 그럼 이제 춤을 한 단계 높이겠 습니다. 이번 춤은 좀 전보다는 약간 복잡하지만 잘 보시고 한번 익혀두세요. 익혀두시면 다 른 곳에서도 요긴하게 쓰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두 보조수를 지명해 불러내 새로운 동작을 시범시켰다. 인철은 그 런 변화에 아랑곳없이 똑바로 정숙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다가가 손을 잡자 정숙이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이따금 정숙이 장난 삼아 손을 잡은 적은 있지만 인철이 정색 을 하고 손을 잡기는 처음이었다. "잠깐 나와볼래?" 인철이 별억양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정숙은 난처한 듯 왼쪽에 있는 남학생을 돌 아보았다. 단정한 얼굴에 말쑥한 신사복을 입고 있는 사립 명문대의 학생이었다. 그러자 인 철은 까닭 모를 호승심 같은 걸 느끼며 목소리를 한층 높였다. "잠깐이면 돼. 중요한 일이야." 그러자 정숙은 눈으로 양해를 구하듯 그 남학생을 한번 바라보고는 말없이 인철을 따랐 다. "어딜 가는 거야? 무슨 일이야.?" 캠프파이어에서 제법 떨어진 어둡고 호젓한 나무 그늘에 이르자 정숙이 걸음을 멈추고 차 갑게 물었다. 인철은 광기에라도 휩싸인 사람처럼 그런 정숙의 두 팔을 잡아당겨 껴안았다. 정숙이 가볍게 뿌리치지 않았다면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은 포옹이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무안을 당한 셈이지만 인철은 위축되지 않았다. 엉거주춤 그녀의 두 팔을 잡은 채 나 직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까닭은 나중에 듣고 우선 네 파트너 좀 보내고 오지 않을래?" 그러자 어둠 속이지만 정 숙의 눈길이 묘한 빛을 뿜었다. 인철은 그걸 갑작스럽고 강렬한 적의의 눈빛으로 해석해 일순 흠칫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뒷날 돌이켜보니 경계 어린 탐색의 눈빛이었다. "알았어. 여기서 기다려." 인철을 빤히 살피던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던지 한숨을 포옥 내쉬며 그렇게 말해놓고 인 철 곁을 떠났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녀의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있던 인철은 엄청난 일을 저질러버린 아이처럼 멍해져 있었다. 침착한 걸음으로 모닥불 곁으로 돌아간 정숙은 아직도 그 둘레에 남아 있는 파트너를 가 만히 불러냈다. 그리고 무언가 몇 마디 얘기하는가 싶더니 그와 함께 무리에서 아주 빠져나 왔다. 잠시 후 그녀와 그녀의 파트너는 아무 일 없었던 사람들처럼 얘기를 주고받으면 나란 히 교문 쪽으로 사라졌다. 인철은 어두운 나무 그늘에 서서 그런 정숙을 훔쳐보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되자 비로소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를 떠올리고 갑자기 황당한 기분이 되었다. 바보 같이... 아마 저 아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숙은 돌아왔다. 그들이 교문 쪽으로 나간 뒤 꽤 시간이 흘러 인철이 이제 단념 하고 자리를 뜨려 하는데 인철이 예상한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정숙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어딜 가려고... 해?" 그런 그녀의 긴장한 더듬거림이 인철에게는 매서운 추궁처럼 들렸다. 그녀는 아마도 길을 버리고 나무 그늘을 따라 그곳까지 왔다가 바로 인철 앞에 나타나지 않고 한동안 인철의 하 는 양을 엿보고 있었던 듯했다. 더듬거리기는 인철도 마찬가지였다. "아. 나는... 네가... 돌아오지 않을 줄 알고..." "돌아온다고 하지 않았어?" 그녀가 애써 지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반문해놓고 자꾸 굳어진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평소의 가벼운 목소리로 돌아가 물었다. "베키오 다리의 바람이 차던 모양이네. 그래, 네 베아트리체를 만나기는 만난 거야?" "그걸 만났다고 할 수 있나? 하여튼 보기는 보았어." "그럼, 또 그냥 훔쳐보고 돌아섰구나. 언젠가 부산에서 장미까지 들고 찾아갔다가 돌아섰 다더니. 그럼 이번 장미도 결국은 바쳐보지못한 거야?" "바쳐보지 못한 게 아니고 바치지 않은 거야." 준비하지 않았는데도 인철은 결연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조금은 그랬던 것 같 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썰렁한 바람이 불어가고 있었다. 어둠 속이 지만 정숙의 눈이 잠시 반짝했다. "왜?" "베아트리체는 어떤 불우한 시인의 고독과 광기가 빚어낸 한 관념에 지나지 않아. 단테의 베아트리체와 실제 피렌체 거리를 살다간 베아트리체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었을 거야." "어쭈, 제법 철든 소리를 하네. 그럼 명혜의 속된 모습을 훔쳐보기라도 한 거야?" "그건 아니고- 실은 그녀가 실기실에서 연습하는 것을 훔쳐보았는데... 얼굴은 금세 알아 보았지만 나머지는 모두가 낯설었어." "아 참, 무용 전공이라 했지. 하지만 네가 스스로 돌아설 상황 같지는 않은데. 전혀 낯선 세계에 속한 천사를 바라보는 눈부심 아니었어? 그래서 감히 장미를 내밀지 못하고 돌아선 거 아냐?" 정숙이 너무도 사태를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아 인철은 잠시 움찔했다. 그러나 작지만 또 다른 진실이 힘이 되었다 "전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다른 의미의 낯섦도 있었어." 인철이 그렇게 말하자 역시 어둠 속이지만 어딘가 정숙의 얼굴에서 환한 표정이 느껴졌 다. 목소리에도 평소의 장난기가 살아나는 듯했다. 그게 호된 추궁을 각오하고 움츠러들었던 인철을 자신있게 해 순발력으로 나타났다. "우선 이 장미부터 받아줘." "?" 인철이 빈손으로 무엇인가를 공손히 올려 바치는 시늉을 하자 정숙은 잠시 어리둥절한 눈 으로 인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우회적이면서도 교묘한 사랑의 고백을 알아치리고 긴 장한 목소리가 되었다. "그거 함부로 받을 수 없겠는데... 하지만 네가 명혜에게서 돌아선 이유는 들어두고 싶어. 그 다른 의미의 낯섦이란 게 뭐였지?" "꽉 끼는 연습복에 터질 듯이 담겨 있는 성숙한 여인의 몸 같은 거... 육감적이랄까, 관능 미랄까, 그게 너무 낯설었어." 인철이 좀 과장된 기분이 되어 말했다. 실은 그렇게 말하고 보니 낮에 본 명혜의 몸매가 그때보다 훨씬 섬뜩하게 떠올라왔다. 정숙이 자신의 긴장을 비꼼으로 바꾸어 드러냈다. "그거야말고 금상첨화 아냐? 휘황한 관념에다 무용으로 다듬어진 관능미까지 곁들였으 니." "아니, 섬뜩한 낯섦일 수도 있지. 내 관념 속에서 그녀는 전혀 몸이 없었거든. 아아, 저 몸 을 어쩌나? 저건 또 어떻게 사랑해야 하나... 하는 절망적인 기분까지 들더라구." "그래서 이 장미를 내게 바친다, 그건 좀 이상하네. 내 몸은 자신있다... 그런 말이야?" 정숙이 다시 정색을 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인철을 바라보는 정숙에게서 인철은 어 느 때보다 강한 탐색의 눈길을 느꼈다. 그게 다시 인철을 당황스럽게 했다.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몸과 마음을 아울러 사랑할 수 있는 것을 너일지도 모른다는 느낌 같은 거, 아니 그런 열망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우린 사랑을 염두에 두고 만나온 것 같지는 않은데. 네가 그랬고, 나도 전혀..." 정숙이 알게 된 뒤로 처음 들어보는 새침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그게 거부의 뜻으로 들리며 생각보다 큰 충격이 되어 인철의 정신을 헝클어놓았다. "그럼 이제부터 그런 걸 염두에 두어봐..." 자신도 모르게 간청하는 투가 되어 그렇게 말해놓고 뒤를 더 잇지 못했다. 정숙도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사이에도 멀리 모닥불가에서는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기타 소리에 맞추어 흥겨운 원무가 돌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의미 모를 한숨 소리와 함께 그녀가 손을 내밀려 담담히 말했다. "아까 그 장미, 이미 내. 우선 받아둘게. 하지만 난 아무런 준비가 없어. 당장 그게 그냥 시들어버리는 게 싫어 맡아두기는 해도 어쩌면 네게 되돌려주게 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 지?" 조건부지만 자신이 내민 장미를 현실로 받아주는 소녀가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감격이 었다. 그때는 원래 그 장미가 명혜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물론, 곧 있을 상실감 이나 후회 같은 것도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인철은 오직 감격에 취해 실제의 장미를 건넬 때보다 더한 정중함으로 마음의 장미 다발 을 정숙에게 바쳤다. 그것도 한 의식이고, 그래서 모든 의식이 가지는 무게 때문일까, 그 뒤 둘은 한동안 어둠 속에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이 나라 60년대말의 대학 신입생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돌연한 계기 때문에 연인으로서 첫 의식은 치른 셈이지만 그 다음은 별로 달 라진 게 없었다. 기껏 있다면 둘이서 축제 마당을 빠져나와 어디가 어딘지 모를 길을 늦도 록 걷다가 정숙의 기숙사 앞에서 헤어질 때 한 특화의 확인 정도였을까. "동물의 성애와 인간의 사랑이 다른 것은 상대의 특정이라더군. 이제 나 아닌 다른 남자 와는 아무렇게나 손 잡지 말아." 인철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그렇게 말하자 정숙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으응, 이 장미를 안고 있을 때까지는." 제 18 장 바람아, 불어라 경기도의 강경한 대응으로 철거민 이주가 중단된 뒤라 단지(광주대단지)는 조용했다. 여름 한철을 노려 허술하게 차일이나 치고 벌였던 장사가 그마저 없어 햇볕 아래 나앉았던 좌판 들도 슬슬 모습을 드러내는 겨울 추위 때문에 눈에 띄게 줄어 지난번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흥청대던 주변마저 한산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단대 지역 추첨장이 어디죠?" 차를 세운 택시 운전사가 낮부터 불콰하게 취한 중년을 잡고 물었다. 무슨 일에 기분이 상했는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받았다. "그냥 이길루 주욱 내려가보더라고. 가면 사람이 개떼처럼 몰린 데가 있을 텡께. 추첨장인 지 야바위장인지 하는 팻말도 박혔고오." 영희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11시 가까워 추첨을 시작한 지 한 시간은 지났을 것 같았다. 추첨에서 허탕 잡은 철거민인가. 산꼭대기도 길에서 멀리 떨어진 구석빼기에 땅을 배당받은 영희는 속으로 그런 추측을 해 보았다. 그러자 영희는 갑자기 급해졌다.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전매한 딱지의 임자도 벌써 추첨을 끝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까 닭이었다. 길을 알려준 중년의 말대로 추첨장은 따로 묻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곳에 있었다. 뒷날 성남시장이 들어선 언덕빼기에서 한 굽이도 들기 전에 벌겋게 산등성이를 밀어놓은 공터에 세워진 커다란 천막들이 보이고, 그 주위에 우글거리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안내판도 충분하게 서 있었다. 영희는 그 중에서 자신의 딱지가 속한 지구의 땅을 추첨하는 천막을 찾았다. 사방을 걷어 올린 천막 가운데는 추첨기가 놓여 있고 그 곁에는 경찰관 한 명과 서울시에서 나온 공무원 인 듯한 사람이 입회하고 있었다. 추첨기 앞으로 길게 줄지어선 사람들은 철거민들이었다. 딱지를 팔 때의 약속대로 전매인 을 위해 추첨을 나온 사람들도 있었으나, 아직은 원래의 권리자가 많은 듯했다. 어떤 땅을 배당받느냐에 따라 그들의 이해 관계는 크게 엇갈렸다. 다같이 스무 평이지만 소방도로 하나 제대로 못 낀 산꼭대기 대지와 20미터 이상의 도로나 유보지를 물고 있는 대 지는 때로 몇십 배의 차이가 났다. 그래선지 찬 날씨에 바깥이나 다름없는 추첨장은 사람들 의 열기로 후끈거렸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곳은 추첨받은 지번을 확인하는 게시판 앞이었다. 커다란 도시 계획도에 촘촘히 선이 그어지고 깨알 같은 글씨로 지번이 적혀 있는데, 추첨이 끝난 사람들은 대개 거기서 자기가 받은 지번이 어떤 땅인지는 확인했다. 그가 어떤 땅을 배당받았는지는 지번을 확인하는 순간의 표정으로 이내 알 수 있는 정도였다. 영희는 추첨기 앞에 늘어선 줄 속에서 자신에게 딱지를 판 박씨와 임씨를 찾아보았다. 임 씨는 이미 천막 안으로 들어서 있었고 박씨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추첨의 결과에 따른 이 해 관계를 떠나서인지 임씨의 표정은 다른 사람에 비해 평온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추운데 수고하시네요." 영희는 애써 지은 밝고 친절한 목소리로 임씨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행히도 임씨는 별감 정을 드러내지 않고 덤덤하게 받았다. "야. 인저다돼가유. 조금만 기다려유." "그런 저쪽 게시판 쪽에서 기다릴게요. 좀 수고해주세요." 영희는 되도록 그의 기분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게시판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추첨을 끝낸 임씨가 지번을 받은 쪽지를 가지고 게시판 밑으로 온 것은 십 분도 채 지나 지 않아서였다. 영희는 쪽지를 받아들고 게시판 밑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지번의 위치를 확 인하고도 자리를 뜨지 못하는 사람들과 새로 추첨을 끝내고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밀치듯 사람들 사이에 끼여든 영희는 자신의 지번을 찾아보았다. 익숙한 도시 계획도였지 만 워낙 잘게 잘라둔 땅이라 지번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뒷사람에게 재촉받고 떼밀리 면서 간신히 찾아보니 실망스럽게도 대로와는 먼 주택 지구에 소방도로를 서쪽으로 낀 땅이 었다. "워땠남유?" "주머니진 땅 막다른 골목이에요." 영희가 그렇게 말하자, 임씨는 그게 자신의 죄라도 되는 것처럼 변명했다. "내 재수가 본래 그래유. 죄송해유." 그런 임씨에게서 영희는 문득 도회의 하층민으로 편입되기 전의 선량한 농부를 보았다. 그날 영희가 추첨을 조건으로 남긴 잔금 외에 3천 원을 더 얹어준 것은 사람의 선량함이 주 는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마워유. 원래 잔금만 받아도 되는디- 잘한 것도 없이 이렇게 많은 공돈을 받아도 되는 지..." 임씨는 그러면서 몇 번이나 허리를 굽혀 고마움을 나타낸 뒤 돌아갔다. 하지만 도시로 흘 러든 모든 이농민이 임씨처럼 본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각박한 도회의 삶 에 시달리고 깎인 탓이겠지만 그보다는 심성이 황폐해진 사람들이 더 많았는데, 조금 뒤에 나타난 또 다른 원권리자 박씨가 그랬다. "아저씨, 너무 늦지 않겠어요?" 그 구역에 할당된 시간이 거의 다 지나도록 얼굴을 내밀지 않아 마음졸이던 영희가 늦게 서야 나타난 박씨에게 짜증을 감추고 그렇게 묻자, 벌써 한잔 걸친 듯한 그가 삐딱하게 받 았다. "니기미, 힘이 나야 길든 짧든 손금을 보지. 막말로 이눔의 땅이 안죽 내 끼라 카몬 새벽 밥 먹고 쪼차왔을 끼라꼬." "빨리 줄 서세요. 시간 넘기겠어요." 영희는 욕설 섞인 그의 대꾸에 은근히 속이 뒤틀렸으나 그를 이해하려고 애쓰며 그렇게 재촉했다. "걱정 마이소. 뽁아논 토깽이 달라빼는 거 봤습니까? 또 제비라 카는 기 빨리 뽑는 게 좋 다는 법도 없고오..."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어슬렁거리며 얼마 안 남은 줄 맨 뒤에 섰다. 영희를 약올리려고 작정하고 나선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영희는 그의 틀어진 심사를 받아낼 수 있 었다. 중간에 추첨기에 이상이 생겨 박씨는 거의 반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지번을 받아 나왔다. 그런데 정말로 분통터지는 일은 그 다음에 있었다. 박씨는 쪽지를 영희에게 넘겨주지 않고 자신이 확인하러 게시판 쪽으로 갔다. "그거 이리 내세요. 제가 찾아볼게요." 영희는 그와의 일이 좋은 말로 끝나기 어렵다는 걸 직감하면서도 애써 공손하게 말했다. 힐끗 영희를 돌아본 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아무리 팔아문 땅이라 카지만 너무 깝치지(재촉하지) 마소. 그기 우째 생기문(먹은) 땅인 지는 나도 함 보자꼬요." 그리고는 바로 사람들을 밀치고 게시판 앞으로 갔다. 잠시 후 다시 사람들을 밀치듯 빠져 나온 그의 손에는 지번이 적힌 쪽지가 보이지 않았다. "어땠어요? 그리고 서류는?" "새댁이, 우리 새로 얘기 한번 해야겠는데..." 영희의 물음에는 대답 않고 그가 엉뚱한 말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잔금은 여기 준비했어요." 영희가 이제 짜증을 숨기지 않고 핸드백을 열며 말했다. 잔금만 치르면 끝이라는 걸 강조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박씨는 끄떡도 않았다. "그게 아이라 카이. 새로 얘기해봐야겠다꼬. 그라이 따라오소." 그리고는 영희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앞장서 휘적휘적 걸어갔다. 영희가 터져나오는 욕 지기를 참으며 따라가니 그는 가까운 천막 술집으로 들어갔다. "얘기는 무슨 얘기예요? 어서 잔금 받고 서류나 내줘요." 뒤따라 들어간 영희가 5천 원이 든 봉투를 내밀며 차갑게 소리쳤다. 그러나 빈자리를 골 라 앉은 그는 태연스럽기만 했다. "글쎄, 그래 깝칠 일이 아이라 카이. 쪼매 기다리라꼬. 우선 놀랜 간부터 좀 달래고..." 그리고는 막걸리까지 청해 한 잔을 마신 뒤에야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젊은 새댁이, 우리 계약 파기하자꼬." "그게 무슨 소리예요. 계약금 중도금 다 치르고 이제 잔금 조금 남았는데... 추첨만 아니면 이 잔금도 남지 않았을 건데, 다된 계약 무르고 자시고 할 게 어딨어요?" 참치 못한 영희가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그런 영희에 비해 박씨는 갈수록 침착해졌다. "나도 왜정 때 중학물까지 먹은 사람이고오- 또 들은 말도 있다꼬. 계약에는 사정 변경의 원칙이란 게 있는 법이라. 중대한 사유가 발생하믄 계약을 무를 수도 있다 이 말이라꼬..." 느긋한 목소리에다 이제는 완연히 반말이 된 게 더욱 화가 나 영희가 그의 말을 잘랐다. "사정 변경이고 뭐고 듣고 싶지 않아요. 그건 유식한 아저씨나 알 일이고 나는 계약대로 할 테니 어서 서류나 주세요." "새댁이, 이 땅이 어떤 땅인 줄 아나?" 그는 일부러 부아라도 지르듯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영희에게 슬쩍 보인 뒤 다시 감추 며 말을 이었다. "16메타 도로하고 8메타 도로가 마주치는 모탱이라. 나중에 신도시 들어서믄 여다 구멍가 게만 열어도 열 식구는 배터지게 살 수 있을 거라꼬." "하지만 이미 파셨잖아요?" "그런데 그게 3만 원이라. 지금 당장 나가도 50만 원은 받을 수 있는 땅이 석 달 전에 단 돈 3만 원에 넘어갔다꼬. 이만한 사정 변경이면 법도 해약을 허락할 끼구마." 부동산 관계 의 법이라면 영희도 그 동안 귀동냥한 게 좀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민법의 일반 원 리는 아는 바가 없었다. 얼른 듣기에는 그럴싸해 자신있지는 않았지만 영희는 상식으로 버 텼다. "그럼 복덕방마다 해약 사태 나겠네. 땅값 올랐다고 해약될 계약 누가 하겠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이 아저씨가 정말..." "이거는 그양 땅값이 오른 게 아이라 내가 내 물건을 잘 모리고 판 거이 그카믄 안 되지. 바로 법에 말하는 중대한 사유에 속한다꼬." 박씨는 그렇게 버텼으나 곧 커다란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가 뒤이어 덧붙인 말이 그랬다. "글치만 나고 사람이라 법대로 하고 싶지는 않다꼬. 새댁도 3만 원이나 되는 돈을 석 달 씩 잠가놨으이...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 받은 돈 두 배로 5만 원 내주꾸마. 이 계약 없었던 걸로 해도고." 영희는 그 말을 듣고 더욱 자신을 얻었다. 우선 자신을 만만히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말 투부터 잡고 늘어졌다. "아저씨는 싸래기 밥만 먹고 사셨어요? 나이를 드셨으면 아저씨가 드셨지, 왜 사람에게 반말이에요?" 그래놓고 한풀 더 그의 기를 꺾어놓기 위해 옛날에도 별로 쓰지 않던 상말을 슬쩍 섞었 다. "썅, 내 참 더러워서... 이보다 더한 화류계 십 년에 술도 취하기 전에 다짜고짜로 말부터 놓고 덤비는 햇꼰대는 또 첨이네." 그러자 정말로 효과가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체하고는 있어도 박씨의 눈길에는 상대를 잘 못 보았다는 긴장 같은 게 비쳤다. "아, 아이. 내 말놓은 게 그마이 속상하다믄 올릴 끼요. 미안하구만. 새댁이, 나잇살 훌치 다 보이 버릇이 돼서..." 그래놓고 다시 법으로 얼러대려 했으나 이미 기세는 꺾여버린 뒤였다. 괴롭고 힘든 도시 살이에 시달리는 동안 심성이 황폐해지기는 했지만 그 또한 아직 악당까지는 되지 못한 이 농 출신임에 틀림없었다. 세상 궂은 일이라면, 특히 남자들이 자신을 내세우고 공연히 상대편을 겁주려는 허세에 관해서는 영희도 어지간히 아는 편이었다. 상대편이 말하는 내용이 무엇이든 그게 정말인지 아니면 한번 해보는 소리인지는 표정이나 눈빛만으로도 짐작이 갔다. 그런 영희의 관찰에 의하면 박씨는 그저 시비를 걸고 있을 뿐이지 정말로 땅을 무르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영희 가 당장 물러준다 해도 그에게는 5만 원을 내놓을 만한 여유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한동안 속셈을 따로 둔 실랑이를 계속하다가 박씨가 드디어 속셈을 드러냈다. "좋구마. 보이 새댁이 이 고생 저 고생 다 하다가 우째 싸게 집 한 칸 마련해 볼라꼬 딱 지를 산 게 홍재(횡재)를 만난 모양이네. 나도 그양은 물러설 수 없고... 마, 그라믄 이랍시 다. 만 원만 더 쳐주이서. 4만 원 쳐서 잔금하고 만 5천 원만 더 내놓으믄 내 서류 내놓고 가지. 팔자가 쪼막손이니 암만 큰 복이 와도 뭐 할 끼고? 다 운수 소관이지. 더 길게 말하지 말자꼬요." 이윽고 그는 제법 한숨까지 지어보이며 무슨 움직일 수 없는 결론처럼 그렇게 말했다. 영 희는 그 말에서도 허세와 과장의 냄새를 맡고는 있었지만 적어도 그가 빈손으로 물러날 사 람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침묵으로 한참 뜸을 들이다가 핸드백을 열 어 돈 만 원을 헤아렸다. "옛어요, 만 원. 이러면 제가 5천 원 더 쳐드린 거예요. 복덕방 어디를 물어봐도 이런 경 우는 없을 테니 알아서 하세요." "그거 가지고는 안 되지..." 박씨는 거기서 한 번 더 버텨보았으나 결국은 굴복했다. "그럼 경찰에 가요. 거기서 다시 법원으로 넘어가든지 어쩌든지 해보자구요." 영희가 그렇게 매몰차게 말하며 돈을 집어넣으려 하자 정말 무슨 큰 손해라도 보는 사람 처럼 찌푸린 얼굴로 서류를 내놓았다. 박씨와 헤어지기 바쁘게 영희는 게시판 앞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확인해 보니 그의 말대로 땅은 16미터 도로와 8미터 도로가 만나는 모퉁이에 있었다. 그것도 30미 터 대로에서 한 블록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박씨가 말한대로 50만 원까지는 몰라도 30만 원 정도라면 자신도 사둘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데 당첨되신 모양이군요." 영희가 흐뭇한 기분으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오는데 누군가 붙어서며 말을 걸었다. 돌아 보니 낯모르는 젊은이였다. "혹시 그 땅 파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러시다면 저희가 좋은 값으로 받지요." 그제서 야 영희는 그가 복덕방에 붙어사는 건달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게시판 주위에 는 현지 복덕방에서 나온 바람잡이들이 적잖이 섞여 있는 듯했다. 그만큼 자신의 상품이 수요가 많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일까, 영희는 그런 현상이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실제 시장에서 자신의 상품이 얼마만한 값으로 유통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값만 맞으면 넘길 수도 있지요. 복덕방에서 나오셨어요?" 영희가 그렇게 대꾸하자, 그가 반색을 했다. "제가 맞게 찍었군요. 그럼 함께 가 보실까요?" "도시 계획도 확인 안 하고?" "저 지도는 저희 사무실에도 있습니다. 거기 가서 조용히 알아보지요." 그 젊은이가 데려간 곳은 영희가 새로운 거래처로 잡은 곳에서 멀지 않은 부동산 사무실 이었다. 그 청년은 땅의 가치를 감정하고 거리에 결정권을 쥔 듯한 중늙은이에게 영희를 넘 기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건당 얼마의 구전을 얻어먹는 바람잡이 같았다. "보자- 이거 좋은 곳을 뽑았구만. 원건리자슈?" 중늙은이가 돋보기를 걸치고 서류와 도시 계획도를 번갈아보다가 영희를 돌아보며 물었 다. 영희가 망설이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무딱지로 산 거예요. 지금 팔면 얼마나 쳐주시겠어요?" "십만 원은 받을 수 있을 거 같은데- 그 이상은..." 영희는 그가 말하는 값이 하도 자신이 매긴 것과 멀어 은근히 부아가 치밀 지경이었다. "아저씨도 참 어지간하시네. 아무렴 그게 평당 5천 원만 가겠어요?" "보자, 아가씬지 아주머닌지 모르겠다만 요즘 땅값 알고 하는 소리요? 서울 남산 주변의 땅값도 겨우 평당 만 원 남짓인데 서울서 60리나 떨어진, 아직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이 허 허벌판에 5천 원이면 그것도 과하지. 그렇다고 노른자위 상가도 아닌데." "도시 계획도를 다시 한번 보세요. 그 위치면 노른자위 상가 부럽지 않다구요. 막말로 구 멍가게를 열어도 열 식구 살기에는 넉넉할 거예요." 영희는 박씨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써먹었다. 그러나 그 노련한 전문가는 별로 말려들지 않았다. "그거야 도시가 어울려봐야 아는 거고- 5년 후가 될지 10년 후가 될지..." 그러면서 슬금슬금 그 땅에 험구를 늘어놓았다. "또 도시가 어우러진다 해도 큰길이야 가깝지만 끼고 있는 동네가 두텁지 못해 제대로 상 가 구실을 할 수 있을는지도 의문이고." "하마 부풀어터진 서울, 이리루 안 오구 어쩌겠어요? 그리고 주택가는 없어도 대로변 상 가가 가까워 뭘 해도 될 땅으루 보이는데. 목만 좋으면 돌도 구워 판다는 말이 있잖아요?" 영희가 그렇게 받아치자 영감은 다른 쪽으로 흠을 뜯었다. "백번 양보해 그게 아주머니 말대로 된다고 해도 전매한 딱지라... 이번에는 서울 난곡동 이나 봉천동하고는 달리 엄하게 전매를 금지할 거란 말도 있고... 어쨌든 평당 5천 원 이상 으로 받기는 무리지." 그 위협도 영희에게는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영희는 살풋 웃음까지 지어보이며 영감의 말을 받았다. "이미 무딱지 거둬들일 때 그만 거 안 알아봤겠어요? 아무리 서울시고 나라가 하는 일이 라지만 하마 팔린 딱지가 얼만데. 옳든 그르든 제 돈 잃게 된 사람 백 명만 되어도 겁나는 거라구요. 그런데 서울에 비할 바는 못 돼도 집 한 채 값을 날리게 되는 사람이 수천 수만 이 되어봐요. 그 사람들을 누가 막겠어요? 그것도 딴에는 싸게 집 한 칸 장만한답시고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딱지를 산 실수요자가 태반일 텐데. 모르긴 해도 개발 끝나 토지 분양 할 때쯤이면 전매자가 십만은 넘어설 걸요." 그러자 영감은 다시 봐야겠다는 눈길로 한동안 영희를 살피다가 툭 터놓고 얘기하자는 투 로 나왔다. "보니 예사 아주머니가 아닌 듯한데 딱지 몇 장이나 가지고 계슈?" "한 스무 장 돼요. 그 중에 절반은 아직 무딱지고..." 영희도 숨김없이 대답해주었다. 영 감의 눈에 일순 경계의 빛까지 어리더니 이제는 업자간의 말투가 되어 말했다. "젊은 분이 대담하네. 하지만 말요. 생선은 머리부터 꼬리까지 다 먹으려 들면 안 돼요 부 동산도 생선과 같아서 진짜 꾼은 머리와 꼬리를 내주고 몸통만 먹지. 보니 그 무딱지 바가 지를 써도 5만 원은 넘지 않았을 텐데 세 배만 받고 우리에게 넘기쇼. 더도 덜도 말고 딱 15만 원 쳐드릴게." "그건 저더러 머리나 꼬리만 먹고 떨어질란 말 같은데요. 그럼 제가 더 기다려보죠. 안 되 면 나중에 거기 점포를 내는 것도 괜찮을 테고..." 영희는 그렇게 말하고 핸드백을 챙겨 일어났다. 영감도 그런 영희에게서 무엇을 읽었는지 굳이 잡으려 들지는 않았다. "이익이 많으며 위험도 크게 마련이라는 것이나 알아두슈. 언제든 넘길 생각이 있으면 여 기 기억해주고." 그때 다시 사무실 문이 열리고 다른 청년이 허름한 차림의 중년 남자 하나를 데리고 들어 왔다. 영희의 짐작으로는 추첨이 끝난 철거민 같았다. 영희가 복덕방을 나오면서 보니 자신 을 그리로 끌고 온 바람잡이도 그새 다른 추첨자를 하나 후려 데리고 오는 중이었다. '어쩌면 미친 바람일지도 모르지만 세차게만 불어라. 나는 이 바람의 한끝을 잡고 솟아 오르련다...' 영희는 갑자기 자신이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보는 듯한 기분이 되어 그렇게 중얼거렸 다. 그러고 보니 단지는 한산해 보여도 구석구석 투기의 바람은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가 령 방금 그녀가 지나고 있는 천막 술집 앞도 그랬다. 두 남자가 끌고 뿌리치며 실랑이를 벌 이고 있는데, 거기서도 느껴지는 것은 그 열기였다. "아, 그 딱지 팔아 좀 들어앉은 지번에 그럴듯한 집 한 채 지을 수 있으면 누이 좋고 매 부 좋은 거 아뇨? 그러지 말고 들어가서 한잔 하며 얘기해봅시다아..." 제 19 장 가족 "오빠, 여기야." 도시라 그런지 다방 안은 사람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인철이 갑자기 여러 사람 사람 앞에 서게 될 때의 낭패감에 빠져 어둠에 익지 않은 눈으로 다방 안을 돌아보고 있는데 한 쪽 구석에서 옥경이가 손을 들며 소리쳤다. 인철이 그쪽으로 가니 어머니도 벌써 와 있었다. 그들을 보며 인철은 문득 자신의 무심함 이 부끄러워졌다. 이르바이트를 핑계로 여름 방학 때 며칠 함께 묵은 뒤로 몇 달 만에 처음 보는 어머니요 누이동생이었다. 그 동안 옥경의 편지와 전화를 두어 번 받아 집 소식은 대 강 알고 있었으나 자신은 그들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는 편이 옳았다. "그간 별고 없으셨어요?" 인철의 목소리가 자책으로 자신도 모르게 떨렸다. 오직 자기만을 위한 열정으로 보낸 대 학에서의 첫해가 새삼 부끄럽게 돌아다보였다. "우리는 별고 없다. 니는 학교에 잘 댕기나?" 어머니는 여름이나 다름없이 어떤 결의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인철의 인사를 받았다. 인철 에게는 어머니가 덧붙인 물음이 왠지 추궁처럼 들렸다. 결과적으로는 술과 방황으로 저물어 가고 있는 한 해를. "네, 그럭저럭..." 인철이 그렇게 말끝을 흐리자 어머니가 문득 한숨을 내쉬며 남을 부분을 추측으로 이었 다. "하기사 지 벌어 해야 되는 대학 무슨 경황이 있겠노? 거다가 가정교사도 지대로 몬 하도 록 형사까지 따라댕기이... 졸업장이나 따면 장하지. 그래, 요새도 형사가 찾아오드나?" "새로 옮긴 집에는..." "찾아온다 캐도 너무 마음쓸 거 없다. 싫다 캐도 따라오는 개새끼매치로 여기고 니는 니 공부나 해라. 팔자려니 하고." 어머니는 그래놓고 잠시 말을 끊었다. 무언가 집안에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듯했다. 옥경 이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웬일이십니까? 옥경이까지 데리고... 집에 무슨 일이 있어요?" 인철이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울었다. 얘기를 꺼내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고 있던 어머니 가 차라리 잘 물어주었다는 듯 대답했다. "웬일이고 뭐고 우리는 다 때려치았다. 서울 와서 다시 시작해볼란다." "네?" "거다서는 인제 살길이 없다. 얼어붙은 천막에 엎들러 있어봤자 굶어 죽는 일밖에 안 남 아 옥경이하고 의논할 일이다." "하시던 일은 어쩌시고?" "버선 깁던 거 말이가? 지난 여름에 니 걱정할까봐 말 안 했지만 그 일은 그때 하마 파이 랬다. 옛정도 장삿속 앞에는 별수없는 갑드라. 원집사네 버선 대는 거 처음이사 개얀(괜찮) 았제. 글치만 우리 모녀 밤잠 안 자고 매달래 버선 깁는 거는 모르고 주는 돈 많은 것만 아 깝던지 자꾸 박해지디 그나마 일거리도 안 준다. 누구 딴사람 더 싸게 해주는 도꾸이(단골) 를 구한 모양이라. 휘유-" 어머니는 거기까지 말해놓고 숨이 가쁜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거다서 아예 살 궁리를 찾아볼라 캤제. 허드레 한복이나 헌 옷 고치는 일이라도 해볼까 캤는데, 니네없이 끼니를 놓고 있는 사람들뿐이이 고칠 헌 옷도 안 나오드라. 거다가 마침 옥경이도 취직하고..." "옥경이가 취직을 해요?" "그래. 구로공단에 있는 회산데 무슨 봉제품을 수출한다 카든강. 월급이사 몇 푼 안 되지 만 기숙사도 있고 밤에는 야학도 씨게준다 카드라." 하지만 인철은 그 구로공단에 관해 들은 말이 있었다. 60년대말의 저임금과 혹사에 대해. 많은 가출 소녀들이 거기서 출발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 "아는 회삽니까?" 공연히 먹먹해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인철이 물었다. 그래도 예외적인 곳은 있게 마련이 니까, 혹은 정말 그런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 인철의 솔직한 심경은 그 둘 중의 하나 였을 것이다. "아는 회사는 아이지만 들어보이 생판 낯선 곳도 아이라. 전에 우리 돈 맡겼던 회사에 있 던 사람이 거기 간부로 있고, 옥경이가 아는 아이들도 몇 거기서 일하는 갑드라. 건물도 번 듯하다 카데." 그 어느 것도 불행에 익숙한 사람의 비관을 달래주지 못했다. 하지만 당장 아무런 대안을 가지고 있지 못한 인철로서는 결론적인 말은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요?" "식모살이나 갈란다. 만날 식모살이라도 해야지, 식모라도 가야지 캐쌌디 인제 첨말로 가 게 됐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해놓고 한숨을 푹 쉬더니 황급히 그 한숨을 취소하듯 밝은 목소리로 보탰다. "글치만 3년 기한이따. 우리 모도 3년만 고생하고는 다시 모예 집을 일받자(일으크자). 그 때 되믄 니는 졸업하고 옥경이도 고등과는 마칠 께라. 너 형도 그때는 뭔 수가 안날라? 그 래고 이것 봐라." "?..." "이게 그때 우리집 지을 땅이라. 철도청에서 받은 전세 무딱지에 있는 돈 없는 돈 얹어 산 스무 평짜리 토지분양증이라. 장사할 좋은 땅은 못되도 내 집 한 칸 지어 사는 데는 흠 없는 대지라. 거기도 쪼매 있으믄 인구 수십만 되는 도시가 선다 카이 그때 차만(예쁜) 집 한 채 지어우리 모도 모예 살자." 그러면서 어머니가 내보이는 것은 무슨 증명서 같은 서류 몇 장이어다. 혼자 그윽이 보낼 수 있는 방 한 칸이 꿈인 그 무렵의 인철에게는 거기에 집 지을 땅이 화체되어 있다고는 믿 어지지 않는 몇 장의 종이쪽지였다. "그게 어디쯤인데요?" "지금은 야산 비탈이지만 나중에는 시내 중심 주택가가 될 께라 카드라. 내년이믄 택지 조성이 끝나고 정식으로 분양될 끼라든강. 저 내년에는 집도 지을 수 있고... 그때까지 돈이 나 쪼매 모아두믄 우리도 서울에서 멀잖은 곳에 집 한 채 생긴다." 집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머니는 사뭇 희망으로 밝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인철은 조금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만 이제 한 사람은 식모로, 한 사람은 여공으로 나서게 될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무력하게 보 고만 있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암담할 뿐이었다. "결국 이 길밖에 없었어요?" "이 길밖에 없다이? 그럼 다른 길이 어딨노?" "예를 들어 이모님과 의논해본다든가, 서울에서 출세한 일가들을 찾아가본다든가..." "나 도 그거 생각해봤디라. 글치만 다 지난 얘기따. 옛날에는 전쟁 잿더미에 올라앉아서도 옆에 서 죽는 소리 해싸믄 듣는 시늉은 했제. 그런데 요새는 어예 된 제 쪼매씩 먹고 살 만해지 이 인심은 더 모져지는 모양이라. 너 아부지 친구, 집안 피붙이뿐만 아이라 한배에 난 동 생도 내가 보태줄 처지 못 되믄 딜따 안 보는 세상이 됐다. 이게 돌내골 떠나 뼈아프게 새로 배운 요새 세상이따. 백지로 잘사는 사람들 찾아가 주는 거 없이 불편하게만 맨들 일 이 뭐 있노? 그러이 고마 오리끼리 어예 힘 모아 살아보는 게라." 어머니는 그렇게 말해놓 고 다시 인철을 위로하듯 말했다. "니도 글타. 우리 일 가지고 씰데없이 맘쓰지 말고 니 앞이나 잘 닦아라. 공부나 잘하고 빨리 취직할 궁리나 해라. 그게 참말로 이 에미를 돕는 길이고 옥경이를 생각하는 길이따. 허뿌 딴맘 먹고 택없는 짓할까봐 걱정이 돼 하는 소리라." "맞아, 오빠. 나도 이젠 어린아이가 아냐. 어디 가 있더라도 잘할게. 우리 걱정은 하지 마. 오빠 앞만 잘 헤쳐나가면 그걸로 내게는 힘이 될 거야. 우리나라에서 젤가는 대학교 학생을 오빠로 가졌다는 자랑만으로 내가 어려움을 견뎌내는 데는 큰 힘이 될 거라구." 옥경이도 어른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인철은 그 말에 더욱 상심이 되었다. 이제 너도 열아홉이구나. 그렇지만 알고 있느냐. 초기 산업화 단계에서 여공이란 게 어떤 존재인지. 공순이란 그 비칭이 이 사회의 어떤 선입견과 굳게 결합되어 있는지... 어머니도 그랬다. 전에도 어머니는 이따금씩 식모살이라도 나서야겠다는 말을 입에 올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특별한 결의를 강조한 비유였을 뿐, 지금처럼 남모르는 집 에 직업소개소를 통해서 가는 형태의 식모살이가 실행된 것은 한번도 없었다. 가사 노동대 리는 발전된 사회에서도 한 하급 기능으로 남겠지만, 이 사회에서는 아직 인격권과 관련된 천직입니다. 어머님께서 어릴 적에 보신, 한번도 같은 인간으로 믿어본 적이 없다는 종(노 비)의 의미를 다 털어내지 못한 천직이란 말입니다. 인철은 가정교사를 몇 집을 돌면서 거 기서 본 식모살이의 실태를 떠올리고 절로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아이고... 저게 저래 물러티져 어예노? 그래가지고 지난 3년 그 모진 객지살이는 어예 했 노?" 어머니가 인철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태연한 어조로 인철을 나무랐다. 하지만 억지로 과장 한 그 태연스러움이 오히려 인철의 비감을 고조시켰다. 인철은 세차게 코를 풀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누른 뒤 결의에 차 말했다. "아무래도 그리는 안 돼요. 삶의 어떤 부분은 한번 망가지면 회복할 수 없는 데가 있습니 다. 지금 어머니나 옥경이가 가려는 길이 바로 그렇습니다. 가난에서 헐벗고 굶주렸던 기억 은 옛말로 자랑 삼아 되뇔 수도 있지만, 어머니가 식모를 하고 옥경이가 여공이었다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감추어야 할 상처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옛날의 종과 같이 한번 떨어지 면 벗어나기 힘든 신분 같은 거란 말입니다." "자가 뭐라 카노? 저기 어예 대학물까지 먹은 신식 지식인이 할 소리고? 식모도 직업이고 여공도 직업이다. 요새 세상에 직업에 귀천이 어딨노? 니 신분이라 캤나? 그카믄 더하다. 그 신분이 귀하믄 귀했지 어예 감촤야 할 상처가 되노?" 어머니의 목소리에 갑자기 결기가 서렸다. 인철로서는 좀 뜻밖의 반응이었다. 종까지 들먹 이며 신분의 문제로 끌어가도 어머니는 오히려 더 완강해졌다. 인철은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어머니는 곧 그 까닭을 스스로 밝혔다. "너어 아부지 그 사상으로 감옥 들락거리며 천석 재산을 날렸지만 하마 서울에 있을 때부 터 좋은 꼴 못 봤다. 그때 6,25 나고 수원농대 학장했다는 거 너도 들었제? 얼른 들으믄 대 학 학장이라 카이 억시기 대단해 빌지 몰따마는 그게 아이라. 학생도 없고 교수도 없는 대 학 학장이 무신 학장고? 그양 학교지기제. 그게 다 빨갱이들이 너어 아부지가 서울서 차지 하고 있던 높은 자리에서 쫓아내는 핑계였을 뿌이라. 왜 그래 됐는동 아나? 바로 그 신분 때무이라. 지어(저희) 말로 출신 성분이라 카능 거 그게 바로 신분 아이고 뭐로? 그 세상에 서는 노동자 농민이 최고의 신분이라. 프로레탈리안가 뭔가 하는거 말따. 그 세상이사 다시 올지 안 올지 몰따마는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 캐도 그 신분이 욕될 거는 뭐 있노? 그래고 혹 아나? 세상이 또 어찌 돼 너어 아부지 돌아오믄 우리가 노동자 농민 다 겪은 게 자랑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 끝엣말에는 다분히 자조가 어려 있었지만 거기까지 듣고 나니 인철도 어머니의 결기를 이 해하는 것 같았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도록 한으로 곰삭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그 결정에 한몫을 했음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그 결정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건 그때의 문젭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 온전한 자본주의로도 이행하지 못했고, 이 상태 에서 지금 어머니나 옥경이가 하려는 일은 노동이 아니라 인격적인 예속과 경제적 착취의 딴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구요." 어쩌면 어머니가 알아듣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면서도 그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옥경 이가 받았다. "나도 오빠 말이 짐작은 가. 그렇지만 곧 온당한 대우를 받는 노동이 되고, 인정받는 신분 이 되겠지 뭐. 무턱대고 감정적으로만 나서지 마. 우리도 몇 날 몇 밤 한숨 끝에 내린 결정 이야. 현실적으로도 우리에게 그 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잖아?" "아냐. 내가 학교 그만두고 일하면 자신있어. 어머니는 더 이상 품위를 손상당하지 않아도 되고 너도 그 사이에 공부하 면 온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얻을 능력을 키울 수 있을 거야." "그건 소 잡는 데 쓰는 칼 닭 잡는 데 쓰는 격이야. 나 아직 많이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내게 주어진 운명 같은 것이 어렴풋이 느껴진는걸. 오빠를 희생시켜 빠져나가보았댔자 별로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느낌 말이야. 어머니도 그건 결코 바라시지 않을 거고... 그러니 오빠는 계속 오빠의 길이나 열심히 가. 그래서 무언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도 위로가 될 만한 일을 해줘. 그때 어머니가 손가방을 챙기고 일어서며 결론처럼 말했다. "그건 옥경이 말이 맞다. 여기서 이러니저러니 길게 말하지 말고 어디가서 저녁이라도 먹 자. 무심한 너 형하고 영희 그 미친년, 어디 가서 뭘 하는동 몰따마는 그래도 남은 가족은 다 만난 택 아이가?" 어머니는 그러면서 앞장서 다방을 나가더니 근처의 번듯한 불고깃집으로 남매를 데려갔 다. 불고기를 5인분이나 시키고 맥주까지 두 병 곁들일 때는 위세 좋은 마님 같은 데마저 있었다. 그러다가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 말없이 앉아 있는 인철에게 수저까지 들려주며 말 했다. "자아, 먹자. 오늘은 맛있게 먹고 우리 식구 어디 크다는 방 하나 얻어 모도 한 방에 자고 헤어지자." 어머니와의 오랜 교감으로 결정한 일이라 그런지 옥경이도 자리가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 에 젖어드는 것을 막으려고 애썼다. "맞아. 오늘은 우리 식구 맛난 거 즐겁게 먹고 밝은 얘기만 하는 거야. 그리고 내일부터는 제각기 선 자리에서 있는 힘을 다해보는 거지 뭐. 오빠, 기억나? 예전에 우리 고아원에 들어 가기 전날 밤. 그때는 참 많이 울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는 훨씬 낫잖아? 오빠는 어엿 한 대학생이고 나도 내 앞가림할 만한 나이는 되었어. 우리가 가는 곳이 그 비참한 고아원 도 아니고. 게다가 무엇보다도 만날 날짜를 받아놓은 이별 아냐? 오빠, 힘내." 그렇게 마치 손위누이처럼 인철을 위로했다. 그런 옥경의 철듦이 인철에게는 오히려 애처롭게 느껴졌지 만 우울한 감상에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아직 맛까지 느껴지지는 못해도 오랜만의 성찬으 로 속이 차오르면서 인철의 현실감 역시 조금씩 회복됐다. 설령 내가 지금 학교를 그만두고 일자리를 찾아나선다 해도 가족을 잘 부양할 수 있으리 라는 보장은 없다. 셋밖에 되지 않은 단출한 가족이지만 방 한 칸 얻을 돈까지 털어넣어 신 도시의 토지분양증을 사버린 빈털터리 일가가 아닌가. 당장 식구대로 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이 상황에서 출발해서는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조차 힘겨울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어 머니의 결정이 움직일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래, 네 취직이란 거 확정되기는 한 거냐?"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은 인철이 먼저 옥경에게 물었다. "으응, 실은 내일부터 출근이야." "회사는 확실한 데고?" "괜찮은 수출업체야. 봉제품 완구를 만드는데 생산이 달려 하루 삼 교대로 돌아가야 한 대." 그렇다면 외국 기업 하청이겠구나. 우리의 값싼 노임과 외국의 높은 임금 사이의 차액을 따먹는. 그 방면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지만 대학에서 귀동냥한 것만으로도 그 정도의 짐작 은 갔다. 그러나 차마 그 실상은 바로 말할 수 는 없었다. "그래, 월급은 얼마나 돼?" 그러자 옥경이 조금 머뭇거렸다. "아직은 기술이 없어 기숙사비에 집비 쬐끔 정도밖에 안 돼. 하지만 기술을 배운 뒤에는 하루 이백 원이 넘을 거래. 잔업 수당이 더 붙으믄 그 보다 많고..." 인철은 수출 전시란 이 름 아래 구로공단 여공들이 당하는 혹사에 관해서도 들은 게 있었다. 무리한 철야 작업으로 코피를 쏟고 쓰러지기도 한다는데, 그 대가는 자신이 가정교사로 입주해 숙식을 제공받고 도 타쓰는 잡비에 지나지 않는 게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잘돼야 한 달에 6천 원 남짓.." "하지만 금액으로만 따질 수 없을 거야. 우선 기숙사비가 엄청나게 싸. 거기다가 여러 가 지 후생 시설이 있어 절반은 저축할 수 있을 거래. 또 고등학교 과정도 거의 공짜로 배울 수 있는 야학도 있고." '그건 여공 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간 너희들에게 내민 그 회사의 청사진이겠지. 당장 일 손이 달린 그들이 너희 저임에 실린 잉여 가치를 긁어 내기 위해 과장스럽게 내보여주고는 있지만 언제 실현될지 모르는. 하지만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구나. 가여운 누이야' "어머니 는요?" 한동안 저도 몰래 우울한 상념에 젖어 있던 인철이 다시 어머니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도 갈 자리 벌써 정해놨다. 신당동에 있는 사장님댁인데 식모라 카지마는 밥하는 기집 아는 따로 있고 나는 그저 침모나 안잠자기쯤으로 알고 있다. 월급도 만 원 가까이 된다. 내 일 옥경이 회사에 들라보냈고(들여보내고) 해지기 전까지만 그 집에 가믄 된다." "아는 집 인가요?" "아이, 이번에는 신문 보고 내가 찾아갔디라. '식모 구함' 카는 쪼매는 (작은) 신문 광고 말이라. 니 말대로 식모살이가 생전 씻지 못할 욕은 아일지 모리지만 무신 자랑이 된다꼬 아는 집을 찾아가겠노?" 그 같은 구직 방식도 만만치 않은 어머니의 결심을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모든 것이 제법 오랜 기간을 두고 준비되었다는 게 인철에게 다소간 위로가 되었다. 그러 나 마음이 편해질 수 있는 자리는 결코 아니었다. "내가 주인 내외 만나봤는데 모두 점잖고 근본이 있는 사람들이더라. 거기다가 사람이 많 이 드나들지 않는 집이라 거다(그곳에) 한 3년 가마이(조용히) 처박혀 있으믄 그 집 사람들 말고는 내가 뭐 하는지 알 사람도 없다. 설령 니 말대로 식모살이가 평생 씻지 못할 욕이 된다 캐도 내만 입다물믄 알 사람이 없다 이 말이라. 그러이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라." 남 은 맥주를 말없이 찔끔거리는 인철에게 어머니가 다시 달래듯 말했다. 그리고 이어 사람이 달라진 듯 목소리를 바꾸었다. "아직 초저녁인데 식구대로 여관방에 들어가 궁상떨어봐야 뭐 하겠노? 우리 그래지 말고 활동 사진이나 한 편 보자. 생각해보이 니하고 활동 사진 같이 본 것도 오래됐다. 가마있자, 서울 극장은 단성사가 개안했는데(괜찮았는데) 그 단성사 아직도 있는지 몰따." "단성사야 아직 있지. 그런데 거기는 요새 주로 외국 영화만 하는 것 같은데. 엄마 외국 영화 볼 줄 알아?" 옥경이가 정말로 즐거운 얼굴로 그렇게 어머니의 말을 받았다. 그런면에서는 닮은 모녀였 다. "야가 날 어예 보노? 옛날 너이 아부지하고 나도 외국 영화 마이 봤다. 글치만 같은 값이 면 다홍치마라꼬. 이왕이면 국산 보자. 왜 머라카드라 글처러 <미워도 다시 한번>카는 영화 가 좋다 카든데 그거 어디하는 데 없는강 몰라." "그건 오래돼서 변두리 삼류 극장에서나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시면 서울을 다 뒤져야 할 판이고- 차라리 근처 개봉관으로 가지요. 거기 가면 뭔지는 모르지만 요즘 새로 만든 우 리 영화가 있을 겁니다." 인철도 마음을 돌려 그렇게 모녀의 의논에 끼여들었다. 그 바람에 그 뒤 몇 시간은 오랜 만에 하는 가족간의 즐거운 나들이처럼 되었다. 그들은 가까운 개봉관을 찾아가 내용도 잘 기억에 남지 않는 영화 한 편을 본 뒤 큰길가 제법 전듯한 여관에 들었다. 여관방에 들어서 도 한동안 그런 분위기는 계속됐다. "오랜만에 집 같은 집에서 식구가 함께 밤을 보내는구나. 긴 겨울밤 나는 데 야참이 없어 서 될라. 인철이 니 나가 찹쌀떡이든지 꾸운 고구마든지 쫌 사온나." 그런 어머니의 말에 옥경이 주문을 보탰다. "오빠, 사이다도 한 병 사와." 하지만 잠자리에 들 때쯤 하여 분위기는 다시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부자리를 펴 던 어머니의 한숨 섞인 한마디 때문이었다. "이불 한 장은 요로 쓰고 한 장은 덮어 우리 모도 한 이불에 자자. 인철이는 오른쪽에 눕 고 옥경이는 왼쪽에 눕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인철은 숙연한 감동 같은 것을 느꼈다. 추억해보면 그들 남매는 어린 시절 내내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그렇게 오른편 왼편에 누워 어머니의 몸까지 분할했다. 어머니의 오른쪽 팔과 젖가슴은 인철의 것이었고 왼쪽 팔과 젖가슴은 옥경의 것이었다. 어머니의 배도 한가운데로 경계선이 그어져 어느 쪽 이라도 침범하면 중대한 분쟁의 소지가 되었다. 그들 남매가 아버지가 없어 받은 유일한 혜택이 있다면 그렇게 오래 어머니의 몸을 누릴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다가 인철과 옥경이 고아원으로 보내지기 전날 밤을 마지막 으로 그런 잠자리는 다시 재연되지 않았다. 인철이 다시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열여섯이었고 옥경도 국민학교 6학년이었다. '그래, 바로 그때의 그 결심이시구나...' 어머니가 정한 이별의 의식을 보고 인철은 다시 한번 어머니의 굳은 결의를 확인했다. 그리고 순순히 따라 옷을 벗고 어머니 곁에 누웠다. 옥경이도 굳은 얼굴이 되어 어머니 왼 편에 누웠다. 누워보니 스물두 살의 나이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이래(이렇게) 따뜻한 방에 배부른 내 새끼들 양편에 끼고 누우이 아무 생각이 없구나. 너 어 아부지 떠난 뒤로 이보다 더 큰 거 바래지도 안했는데 그게 어예 이래 어렵노..." 어머니가 둘에게 팔베개를 내준 채 그렇게 한숨 섞어 말하다가 갑자기 한숨을 거두고 다 독이듯 말했다. "이제부터 아무 말 하지 말고 자자. 다시 이래 잘 수 있는 날 올 때까지 많이 고단할 테 이..." 그런 어머니의 말이 무슨 강력한 암시처럼 인철의 의식을 가라앉혔다. 아무 생각 없이 눈 을 감자 정말로 아슴아슴 잠이 왔다. 인철이 잠들기 전에 한 유일한 동작은 어머니의 팔이 저릴 것 같아 가만히 팔베개를 거둬낸 것이었다. 이튿날 그들 세 식구는 가까운 식당에서 국밥을 나눠 먹고 헤어졌다. 수중에 있던 마지막 돈이었던 듯 어머니가 인철과 옥경에게 천 원씩 나눠주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옆도 뒤도 돌따보지 말고 지 길(자기 길), 지 가는(자기가 가는) 게따. 나는 3 년 동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집 한 채 우부릴(얽을) 돈을 모우꾸마. 인철이는 어예튼 학교만 마쳐라. 그래고 옥경이는 내 이따가 따로 말하겠지마는 니 한 몸 잘 보징겨라(보살펴 지켜 라). 힘이 남으믄 공부도 좋지만 택도 없는 욕심부려 낭패보는 일 없도록 해라. 자, 인철이 는 학기말 시험이 얼매 안 남았다 카이 바로 학교로 가고." 인철도 무언가 말하려 했으니 갑자기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아무 말 도 생각나지 않았다. 바로 돌아서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겨우 옥경에게 한마디 했다. "나도 어머니와 같은 생각이다. 다만 한 가지만 네게 당부하자. 서로 연락이야 닿아야겠지 만 그래도 홀로 세상을 헤쳐가다 보면 무언가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자주 있을 게 다. 그때만이라도 결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어머니나 나를 기억하고 물어다오." 그런데 인 철에게는 아무래도 그날이 가족의 날인 듯했다. 어머니와 옥경을 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 로 등교한 인철은 다시 가족의 일과 관련된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마음에도 없는 첫 강의 를 때우고 나오는데 어딘가 낯익은 젊은 여자가 강의실 밖에서 기다리다가 머뭇거리며 다가 왔다. "저, 실례지만 이인철씨 아니예요?" "네에, 그렇습니다만..." 인철은 대답을 흐리면서 급하게 기억 속을 뒤져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누군지는 얼른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인철에 비해 그녀는 그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다음 강의 시간은 비어 있는 것 같던데,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그러는 그녀의 목소리는 기억이 잘 안 날 정도의 사람치고는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녀가 너무 젊어 또래로 보았는지 함께 나오던 급우들이 짓궂은 눈길로 둘을 훑어보며 지나갔다. 그게 불쾌하지는 않았으나 공연히 당황스러워진 인철이 다시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 "저 안경진이라구 해요? 혹시 형님에게서 들어보지 않으셨어요?" 그러자 인철은 아, 하는 기분이 되어 그녀를 알아보았다. 지난 개간 시절 초기 형이 한창 의욕에 차 써나가던 '농군일기' 갈피와 형의 지갑속에 끼여 있던 사진이 떠오르고, '잡념' 이란 제목의 수고 시집속에 되풀이 불려지던 그 이름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사진 속의 여 자는 아직 청순한 소녀에 가까웠고, 그 이름도 일쑤 변형되어 있어서 인상은 깊어도 현실 의 그녀와 얼른 연결이 지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알 것 같습니다. 참 궁금했는데, 이렇게 뵙게 되니 반갑습니다. 그럼 나가시지요." 그녀를 알아보자 인철도 오래 전부터 알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마음이 푸근해졌다. 형의 여자라 그런지 많아야 서너 살 위일 것 같은데도 갑자기 그녀가 한 세대는 빠른 어른처럼 느껴졌다. 거기다가 그녀가 은근히 걱정스럽던 형의 소식을 가지고 왔을 거란 기대 때문에 반갑기까지 했다. 어머니가 상심하실까봐 입 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전날 밤 내내 인철이 궁 금해한 것은 형이 빠져 있는 상황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 일년씩이나 내게도 어머니에게도 소식이 없는 것일까... "형님은 잘 계시겠지요?" 교정의 빈 벤치에 자리를 잡으면서 인철은 당연한 듯 그렇게 물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 이 묘했다. 조금 전까지도 맑고 환하던 얼굴이 한 순간에 어둡고 굳어지며 대답을 머뭇거렸 다. "그럼 인철씨도 형님의 소식을 모르고 계신다는 얘긴데... 언제 형님을 마지막으로 보셨 죠?" "벌써 일 년이 넘었습니다. 입시 마무리 준비를 위해 서울로 올라올 때 안광에서 본 게 마지막이니까요." "그럼 지난 5월까지는 잘 계셨다고 대답할 수 있겠네요. 저는 그때 뵙고 아직..." 그러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금세 울음이라도 쏟을 것 같은 그녀가 애처롭기 그지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급한 것은 궁금증이었다. "5월에요? 어디서요?" "양평에서요. 제가 근무하는 국민학교로 찾아오셨더군요." "그럼 그 동안 주욱 왕래가 있었던 게 아니고?" "아뇨, 편지가 끊어진 지 이 년 만에 불쑥 나타나셨어요." 경진은 그렇게 대답해놓고 이제는 내 차례라는 듯 묻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철씨네 집 어떻게 된 거예요? 가족들이란 게 서로 그렇게 소식을 모르고 몇 년 씩 지내기도 해요? 지금 집은 어디 있어요?" 그 물음을 받자 인철은 다시 가슴속에 음산한 비바람이 몰아쳤다. 우리에게 당신이 말하 는 집, 곧 가정은 없어졌습니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가 월북하던 날부터 우리에게 유기적 구 조로서의 집은 없어졌는지도 모르지요. 있었다면 그 구성원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말, 곧 가 족이 있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집은 언제나 구조로서는 불구였습니 다. 기본적으로는 아버지란 기둥이 없었고 그 나머지도 온전하지는 못했지요. 언제나 가족의 일부는 집을 나가 있었고 때로는 나 자신도 별두려움이나 죄책감 없이 벗어났으니까요. 그 런데도 이따금씩 우리가 집이란 이름으로 모이게 되는 것은 오직 그 집을 중심으로 한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가족이라는 관계 말입니다. 하지만 그걸 처음 만난 경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난감했다. "얼마 전까지는 광주대단지에 그 비슷한 것이 있었지만 현재로서는 없습니다." 인철이 그렇게 애매하게 대답하자 경진이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세상에 집이 없는 사람이 어딨어요? 자기 집은 아니라도 어딘가 가족들이 모여 사는 곳 이 있을 거 아녜요? 내가 말한 집은 바로 그 가족들이 모여 사는 곳이예요." "제가 말한 집도 그런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집이 없다는 겁니다. 형이 나가도 어머니 와 누이가 함께 사는 데가 있어 저는 그곳을 집이라고 불러왔는데 그마저 없어진 겁니다. 오늘 아침 어머니와 옥경이도 가기 다른 곳으로 헤어져 갔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가족 은 있어도 집은 없습니다. 어쩌면 예전부터 없었는지 모르지요." "그럼 돌내골에서 제가 보았던 그 집은 뭐죠?" "그때 본 것은 몇 년 만의 축제처럼 헤어져 살던 가족들이 잠시 함께 모여 있는 상태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도 실제 우리집의 구성원, 곧 가족은 정상 상태의 절반밖에 거기 있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우리집은 벌써 없어졌는지도 모르지요." "집은 없고 가족만 있다는 말 같은데, 정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구조는 없고 관계만 남았다는 뜻이지요." "관계라는 게 구조의 중요한 내용 아닌가요? 가족이 있고 서로 연결만 되어 있다면 집도 있다고 보는데요. 비록 땅 위에 선 지붕 있고 기둥 있는 물리적 공간은 아니더라도... 좋아 요, 그럼 어머님은 어디 계세요?" 거기서 인철은 잠시 대답이 망설여졌다. 그녀가 가족의 치부를 들춰 보여줘도 좋을 사람 인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죄송스럽지만 저는 두 분의 관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그걸 알아야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한참을 망설인 인철이 솔직히 마음속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경진은 약간 당황하는 기색이 더니 이내 무엇을 결심한 사람처럼 다시 입술을 잘끈 깨물며 말했다. "당장은 그분이 어디 계신지 모르지만- 우린 결혼할 거예요." 그래놓고 다짐하듯 덧붙였다. "인철씨와 한 가족이 될 거예요." 제 20 장 어지럽고 사나운 꿈 "방우야이." 술에 절어도 낭창낭창한 목소리가 어두운 대문께에서 들려왔다. 대답이 늦으면 판자 대문 을 걷어차는 호통으로 변하리라는 걸 잘 아는 명훈은 먼저 길고 시원한 대답부터 내보냈다. "네에, 나갑니다아..." 툇마루의 마루쪽을 몇 개 걷어내고 연탄을 갈던 명훈이 집게를 놓고 달려나가 보니 짐작 대로 대지부동산의 장사장이었다. 그 동네가 서울시로 편입되기 전의 주먹거리 건달 출신으 로 명훈보다 서너 살 위밖에 안 되는데 언제나 반말을 해대는 친구였다. "어서 옵쇼오. 어느 방으로 모실까요?" 명훈이 정말로 주막집 방우처럼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그가 거드름 섞어 대답했다. "어 이사장이군. 방우는 어디 가고?" "초저녁부터 감기야 몸살이야 머리 싸매고 누웠는데 어쩝니까? 오는 손님은 받아야 하 고..." "그럼 특실 비었어? 모실 손님은 두 분밖에 안 되지만 워낙 귀한 손님들이라..." 장사장은 일부러 큰 소리로 그래놓고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가 벗겨진 중년과 장사 장 또래의 양복쟁이인데, 생김이나 차림이 장사장의 말처럼 귀해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드리지요. 어느 분 명이시라구... 차 있어도 비울 판인데 빈 방을 왜 안 내놓겠습니 까?" 명훈이 짐짓 과장스레 굽신거리며 그렇게 받자 장사장은 더욱 호기롭게 덧붙였다. "아직 계집애들 다 그대로 있지? 것두 특급으로다 셋 넣어줘야 돼. 특히 현양 빼지 말 구..." 그러는데 모니카가 구르듯 달려나와 장사장의 손을 잡았다. "아이구, 장사장님 오셨군요. 보자, 흠흠... 초저녁부터 벌써 한잔 걸치셨네. 오늘 무슨 좋 은 일 있으셨어요?" 명훈은 모니카의 그런 교태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었으나 입술이라두 부빌 듯 장사 장의 얼굴에 코를 들이대고 있는 모습이 유쾌할 리는 없었다. 억지스런 너털웃음으로 그녀를 떼놓으며 일렀다. "특실로 모셔. 귀한 손님을 모시고 오신 모양이야." 그제서야 모니카도 명훈을 의식한 듯 장사장이 데려온 손님들에게 깍듯이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어서 오세요. 천호옥 유마담이에요." 그러고는 안데 대고 소리쳤다. "얘들아, 뭐 하니? 손님 오셨다. 귀한 분들이니 특실로 모셔라아." 그러자 벌써부터 화장을 끝내고 기다리던 아가씨들이 내실 문을 열고 우르르 쏟아져나오 며 저마다 간드러진 소리로 반가움을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어머, 장사장님 오셨네." "오늘 이 집에 노나겠어. 장사장님 얼굴을 맨 먼저 봤으니..." "사장님들은 처음이신가 보네. 어서 오세요. 단골이 따로 있나? 이렇게 정들면 단골 되는 거지." 그러면서 세 사람을 끌 듯 특실로 데려갔다. 그런데 그 아가씨들 뒤로 열린 문에서 누군 가 머리를 내밀었다가 온 사람을 확인하고는 황급히 방안으로 움츠리는 아가씨가 있었다. 명훈은 그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으이고, 현양, 저년 저거, 꼴값 떤다고... 세상이 넓음에 비해 사람이 사람을 만나 어떤 의미로든 서로를 특화할 수 있는 공간은 지극히 좁다. 우리가 흔히 만남이라고 말하는 특화는 대부분의 경우 서로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기야 편지나 전화 같은 통신 수단은 직접적인 접 촉 없이도 사람의 만남을 이끌어내거나 지속시켜준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만남의 계기 혹은 보조 수단일 뿐, 그것만으로는 온전한 만남은 만들지는 못한다. 사람이 만날 수 있는 다른 사람은 무수히 많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할수록 그 가능성은 늘어난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 세상에서 만나 어떤 의미로든 특화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제한되어 있다. 오늘날 50억이 넘는 인류는 물리적으로는 거의 만날 수 있는 상태에 있지만 우리는 결국 많아야 몇천 명과의 만남으로 세상을 지나갈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만남의 어려움을 설명하기 위해 동양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인연이란 말을 찾아 냈다. 합리적으로는 아무래도 그 작은 확률의 필연성을 증명하기 어려워서였을 것이다. 만약 모니카와 명훈의 만남도 인연으로 설명한다면 그 인연은 특히 끈질긴 것이었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특히 명훈 쪽에서 보면 모니카와의 만남은 한 번도 의도한 적이 없었다. 만 남의 내용은 언제나 혐오 혹은 자기 모멸로 차 있었으며, 헤어질 때는 무슨 끔찍한 저주에 서 풀려나는 것처럼 홀가분했다. 그리고 그뒤로는 단 한 번도 그리움으로 지난 만남을 떠올 리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한 번 얽힌 인연은 끈질기게 이어지고 원하지 않은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그 되풀 이는 점점 더 깊게 서로의 삶에 개입하여 헤어나기 힘든 수렁처럼 끌어들였다. 이번에도 그랬다. 다시 서울 뒷골목의 밑바닥으로 스며들면서도 명훈은 한 번도 모니카를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호다이의 비어홀에서 식객 아닌 식객 노릇을 한 지 한 달도 안 돼 명훈은 다시 모니카와 만나게 되었다. 호다이를 찾아간 명훈은 자신없어하면서도 필 요하다면 칼잡이도 마다 않을 각오로 그가 정해주는 거처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한 동안을 이렇다 할 직책도 없이 그 비어홀에 빌붙어 지냈다. 왕년의 추억만으로 행짜를 부리는 골칫 덩어리 손님이나 이따금 붙는 뜨내기 주먹을 날려주는 정도를 밥값 삼아 하는데 어느 날 호 다이가 전화번호 하나를 주며 별난 일을 시켰다. "야, 이 번호로 계집애 둘만 급히 보내달라구 해, 모찌방(얼굴) 빤빤한시로도(신출내기)로 말야." 그리고는 방금 들어온 한떼의 손님들이 거들먹거리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홀 모퉁이의 칸막이방으로 급하게 들어갔다. 얼떨결에 전화번호를 받아든 명훈은 전화기 곁에 가서야 별 로 쓰라릴 것도 없는 기분으로 자신이 맡은 일을 알아차렸다. 이제 뚜쟁이 보조까지 하게 되는구나...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전화를 받은 상대였다. 이미 여러 번의 거래가 있었던 듯 비어홀 이 름과 주문 사항을 말하자 별말 없이 응해주었으나 그 목소리가 아무래도 귀에 익은 것이었 다. 당장 누구인지 떠오를 듯한데, 자신이 아는 여자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찾아보아도 주 인을 알 수가 없었다. 명훈은 호다이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조용한 주방 쪽으로 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것은 다른 여자였다. "네. '향'카펩니다." 예상 밖으로 젊고 또렷한 목소리를 듣자 명훈은 잠시 난감해졌다. 어쩌면 이 목소리를 자 신이 잘못 들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며 그냥 전화를 끊을까 하다가 내친김이라 더 듬거리며 용건을 말했다. "저... 좀 전에 전화한 사람인데... 그때 전화받은 사람 맞습니까?" "좀 전에 어디서 하셨는데요? 여긴 전화가 자주 걸려오는 데라서요." "비어홀 '물랑루즈'에서 전화했습니다. 아가씨들 둘 보내달라는..." "아, 그럼 마담 언니겠네요. 언니 찾으세요?" "계시면 좀 바꿔주십시오." 그러자 잠시 시끌시끌한 음악 소리가 들리더니 좀 전의 그 목소리가 다시 수화기를 통해 전해왔다. "저 '향' 카페 강마담인데 무슨 일이에요? 애들은 좀 전에 택시로 출발시켰는데..." 비음이 섞인 친친 감기는 듯한 소리. 취한 듯 졸린 듯한 여운이 있고... 누구더라... 명훈은 기억을 더듬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어... 강마담이라고 하셨습니까? 실례지만 호적에도 강씨인지?" "그건 왜 물으시죠?"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라서..." "댁은 누구시죠? 가만있지, 그러고 보니..." 그러다가 갑자기 말이 끊겼다. 명훈은 그 잠깐 동안의 침묵이 갑자기 불안해졌다. 아직 목 소리의 임자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왠지 묘한 악연의 예감 같은 것이 다가들며 그대로 전화 기를 놓고 싶은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그때 수화기에서 무엇이 터지듯 숨가쁘고 높은 목소 리가 쏟아져나왔다. "맞다, 맞아. 오빠, 아니 명훈씨 맞죠? 그쵸? 명훈씨이." 아아, 너였구나. 명훈은 묘하게 섬뜩한 가슴으로 수화기를 떨구었다. 너를 생각하지 못했 다... 명훈이 늘어뜨리고 있는 수화기에서는 무언가 빠르고 높은 중얼거림이 이어지고 있었 다. 명훈은 그대로 전화기를 내팽개치고 멀리 달아나버릴까 하다가 다시 귀에 갖다댔다. 거 기서는 이제 울먹임까지 섞인 모니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절 기억하고 계셨군요. 잊지 않으셨군요. 거기 어디세요? 왜 거기 있어요? 거기 가만히 계세요. 내 곧 달려갈게요. 금방요..." 그게 끈질긴 그들 둘의 악연이 다시 이어진 전말이었다. 그날 모니카는 정말로 30분도 안 돼 명훈이 있는 물랑루즈로 달려갔다. 그리고 눈물이 뒤범벅된 얼굴로 그를 끌고 자신의 집 으로 데려갔다. 명훈은 처음 그 목소리의 임자가 모니카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솔직히 피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이건 아니다. 더 계속되어서는 안 될 악연이다. 그런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전화가 끊어진 뒤 냉정을 되찾기 위해 담배 한 대를 태우면서 문득 생각을 바꾸었다. 이젠 올 때까 지 왔다. 여기보다 더 아래로 내려갈 바닥은 없다. 네가 여기에 있다면 너 또한 내가 딛고 일어서야 할 바닥의 일부다. 이제 더는 피하지 않으련다. 정면으로 이 어둡고 참혹한 삶의 밑바닥을 응시하겠다... 4년 전 모니카가 안광에서 사라진 후 명훈은 몇 번인가 어지러운 꿈속에서 그녀를 본 적 이 있었다. 그리고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그런 꿈의 상기 때문에 깨어난 뒤에도 당연히 그 녀의 앞길을 추측해볼 때가 있었다. 그녀가 나타나는 꿈처럼 그녀에 관한 명훈의 추측도 언 제나 음산하고 혐오스런 추상화로 끝났다. 황폐하고 손댈 수 없이 망가져버린 그녀의 영혼 이 곧 육체마저 흐물흐물 녹여 마침내는 구역질 나는 도회의 시궁창을 흘러내리는 것이었 다. 그런데 다시 만난 모니카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의 영혼은 거의 변함없는 그대로였지만 그 영혼이 육체를 어쩌지는 못한 듯했다. 이미 20대의 막바지를 가고 있고, 그것도 뒤의 10 년은 남자들에게 함부로 몸을 굴리고 술에 절어 보냈건만 그녀는 아직 젊고 아름다웠다. 학 대하듯 능욕하듯 사랑해온 터라 그 몸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벗는 명훈은 만나자마자 불현 듯한 욕정이 느껴질 정도였다. 실은 그녀도 영혼도 명훈의 단정과는 달리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건강은 지켜내 고 있었다. 경진의 암팡진 대응과 명훈의 비정한 동조로 참혹한 배신감마저 느끼며 돌아섰 을 그녀였는데도 그뒤의 전개는 명훈의 상상과 아주 멀었다. "그날은 저두 괴로웠어요. 칵 죽고 싶은 만큼. 하지만 한 일주일 취했다가 깨어나니 그래 두 죽이기는 싫은 몸이 있데요. 그래서 그냥 살았어요. 그전같이 하루하루만 생각하며..." 그게 명훈에게서 버림받은 직후의 심경을 나타내는 그녀의 말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명훈으 로서는 상상도 못한 정신적인 일면을 드러내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몇 날 지나니 다시 내가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들이 생기데요. 그 중에는 명훈씨 도 있었어요. 지금은 이렇게 헤어지게 되었지만 이게 끝은 아닐 거야, 하는 기분 말예요. 하 느님인지 부처님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끝장을 보게 하려고 명훈씨와 나를 만나게 하지는 않 았을 거야... 그러다가 다시 그 생각은 믿음으로 바뀌데요. 그래, 우린 잠시 헤어졌어. 또 만 날 거야. 반드시 만나게 될 거야. 접때는 내가 힘들어 찾아갔지만 이번에는 명훈씨가 날 찾 아올 거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기분도 들었어요. 설령 명훈씨가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나를 지금보다 더 험하게 굴릴 수는 없어. 명훈씨를 성나게 하는 짓은 되도록 하지 않으며 기다려보겠지만 돌아오지 않더라도 원망하지는 않겠어, 라는 기분 말이예요." 명훈은 그런 그녀의 뒤엣말이 영 곧이들리지 않아 불쑥 물어보았다. "그건 영 너답지 않은데. 기다림도 그렇지만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그를 위해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 같은 거..." 그러자 모니카는 잠깐 원망이 담긴 눈으로 흘겨보다가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명훈씨는 언제나 저를 혼이 없는 여자로 보고 계시지요? 그렇지만 혼이 없는 여자가 어 딨겠어요? 명훈씨의 마음 한구석에는 저를 끔찍이 싫어하고 몸서리쳐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 도 잘 알아요. 그렇지만 모욕당하고 학대를 받아도 함께 있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좋은 걸 어떡해요? 혼이 없어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뜨겁게 사랑하는 혼이 있어 그런 거 라구요." 명훈에게는 이게 정말 모니카가 하는 말일까 싶을 정도로 생소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지 난 4년의 세월이 무언가 그녀에게 변화를 주기는 준 듯했다. 하지만 아직도 감동할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네가 무슨 재주를 부리는가 보자는 심경 으로 빈정거리듯 물었다. "몸은 이놈 저놈에게 편리할 대로 굴리면서 혼으로만 하는 사랑이 있단 말이지? 그게 바 로 네 사랑이란 말이지?" "그래요. 그런 사랑도 있어요. 안 믿으시겠지만." 모니카는 그렇게 자신있게 대답해놓고 빠른 말소리로 이었다. "거기에 얼마만한 자신의 선택이나 책임져야 할 실수가 들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여 자들은 처음부터 몸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여자들이 있어요. 사랑을 알기도 전에 몸이 먼저 망가져버린 경우 말예요. 특히 몸의 순결이 사랑의 중요한 조건이 되는 사회에서는 그 여자 들의 사랑은 정신에 의지할 수박에 없어요. 아시겠어요?" 그러자 명훈은 비로소 가슴 찌르 르한 감동을 느꼈다. 처참했을 세월이 한 황폐한 영혼을 일깨우고 기르기도 하는구나. 그게 이제서야 찾아낸 너의 영혼이었느냐. 그게 내가 없는 것으로 단정한 네 영혼의 진상이냐. 그렇다면 사랑 못 할 영혼도 아니로구나... 그때 명훈이 그토록 쉽게 감동할 수 있었던 데는 어차피 화해하지 않을 수 없다는 현실적인 고려도 한몫을 했을지 모른다. 어쨌든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회복하는 데는 그리 오핸 시간이 걸리 지 않았다. 명훈이 자신의 비뚤어진 욕정과 그녀의 동물적인 본능이 어울린 것으로만 비하시켜 이해 했던 그들의 성애도 그날 밤을 기점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감정적인 화해가 이루 어지자마자 성급하고 거칠게 이루어진 정사 뒤에 모니카가 또 새로운 말을 했다. "이 말... 믿어주실지 몰라도 내가 세상에서 같이 잔 남자는 명훈씨 뿐이에요. 그래요... 어 쩌면 내 몸을 거쳐간 남자는 명훈씨의 추측보다 훨씬 더 많을지 몰라요. 그들 중에는 제법 내 몸을 뜨겁게 달구어준 남자도 있어요. 그렇지만 한번도 내가 그들과 사랑을 했다고 느껴 보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명훈씨는 아녔어요. 아무리 거칠고 성급하게 나를 다루어 내 몸으 로 봐서는 터무니없이 불만스렇게 끝나버려도 다른데서 경험한 어떤 황홀한 절정보다 더 큰 만족감과 평온함을 느끼게 해 주거든요. 전 그걸 사랑이라고 믿고 싶어요." 전에는 한사코 다른 남자들의 얘기를 숨기려던 그녀였다. 그리고 되도록 육체적인 일체감을 과장하여 그걸 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려고 애썼는데 그날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거기다가 그런 말까지 듣고 보니 명훈은 다시 새로운 눈으로 그녀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밀하게 계산되고 의 도된 것은 아니라 해도 이 또한 우리 악연의 수렁을 더 깊고 질척하게 만드는 그녀의 술수 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혹이 들면서도 만난 뒤 거의 처음으로 혐오감이나 모멸감 없이 혼 곤한 잠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날이 밝으면서 명훈의 옛 혐오감과 모멸감은 희미하게 되살아나기 시 작했다. 안광에서나 다름없이 어질러져 있는 모니카의 방안이나 화장이 지워져 제 나이를 드러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백치 같은 웃음과 함께 까마득히 잊고 있던 옛 기억들을 되살 린 탓이었을 것이다. 그때처럼 되도록 빨리 그녀 곁을 떠나고 싶다는 기분까지는 아니었으 나, 어쨌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옷을 걸치면서 명훈이 불쑥 물었다. "그런데 이 장사는 언제부터 시작했지?" "이 장사라니요? 카페?" "그게 아니고 색시장사 말이야." "색시장사요? 글쎄 그걸 색시장사라고 해야 하나..." "주문받고 색시 대주면 색시장사지, 그럼 어떤 게 색시장사야?" 명훈은 비로소 시빗거리를 찾은 사람마냥 추궁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명훈 을 멀거니 올려보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하긴 뭐, 그쪽에선 그리 알 수도 있겠네. 하지만 전 색시장사 한 적은 없어요. 쉬는 동생 들 일당으로 뛰는 거 연결시켜준 것뿐이라구요. 소개비 한푼 안 받구요." "그것 참 부처님 가운뎃토막 같은 소리네. 그럼 소개비도 없이 애들 보내주고 있단 말이 야?" "명훈씨, 다른 건 다 믿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돈에 악착스럽지 못하다는 건 알잖아요? 일이 이렇게 된 거라구요. 재작년부터 방석집에서도 자꾸 날 마담으로 밀어내고 나도 이제 는 색시 노릇이 피곤해져서 엄마하구 의논했죠. 내가 모아둔 거 쬐끔하구 엄마 대폿집 합쳐 서 깨끗한 카페나 하나 열자구요. 그게 명훈씨가 어제 전화한 그 업손데... 장사는 별루 시원 치 못하지만 그냥그냥 견딜 만은 해요. 그런데 한 가지 특별난 것은 거기 나오는 아이들이 에요. 나는 첨에 엄마가 주방을 맡고 나는 홀을 맡아 단출하게 카페를 꾸려가려 했는데, 술 집에서 안 동생들이 내가 개업했다니까 하나둘 몰려들더라구요. 왜, 색시 노릇이라도 일 년 열두 달 줄곧 할 수는 없잖아요? 월급 나가는 중간에 한두 달씩 쉬는 기간이 있는데 그런 애들이 찾아와 술도 한잔씩 하고 가고, 수다도 떨다 가도, 우리 손님 오면 합석도 해주고... 그러다 보니 우리집은 손님보다 아가씨들이 많은 형국이 왰어요. 그걸 아닌 이웃 업소에서 가끔씩 아가씨들 빌리러 오는데 노는 아이들 있으면 보내줬죠. 그게 전부예요." "전문 업소 에서 전화번호까지 가지고 주문하는 것 같던데." "아, 물랑루즈? 거기 영업부장하고 여기 드나드는 동생들 중 하나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라 단골로 부탁하는 편이예요. 하지만 가 서 물어보세요. 제가 돈을 받고 소개해주나, 어쩌나." "하지만 그때마다 어김없이 아가씨를 대주는 건 아무래도..." "쉬고 있는 애들 중에는 용 돈 궁해지면 일당으로 나가는 애들이 있어요. 그런 애들이 우리집에 많이 오니까 내가 연 결시켜준다는 것뿐이지, 전문적으로 색시장사 하는 건 아니라니까요." 모니카가 그렇게 변명처럼 말해놓고 갑자기 화제를 명훈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저야말로 묻고 싶어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왜 명훈 씨가 그 집에서 그런 전화를 하게 됐죠? 그 동안 어디서 무얼 하셨어요? 그리고 지금은 요?" 그것도 그녀의 변화라면 변화였다. 전에는 감히 명훈의 삶에 대해 묻는 법이 없었는 데 이변에는 바로 묻고드는 것이었다. "응, 그렇게 됐어. 거기 영업부장이라는 그 새끼, 너 몰라? 옛날에 호다이라는 별명으로 깡철이 꼬붕 노릇하던 얼치기야. 저로 봐서는 이 바닥에서 크게 출세한 거지. 내가 궁해 잠 시 뒤봐주고 있어." 묘하게 상해오는 자존심 때문에 명훈의 말투가 절로 저칠어졌다. 깡철이란 말에 표정이 살풋 어두워졌으나 이내 평온을 회복한 그녀가 말했다. "아, 그랬었구나. 어디서 듣던 목소리 같다 했더니..." "깡철이가 들어가기 전까지 따라다녔으니까 못 본 지 몇 년 되지 않을 텐데." 명훈이 더욱 뒤틀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깡철이란 이름을 입에 올리고 보니 옛날의 불쾌한 추억과 함께 그녀에게 품고 있던 혐오감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 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깡철이 그 사람도 못 본 지 하마 5년이 넘었어요. 물랑루즈 영업부장은 전화로만 거래했 구. 그건 그렇고... 명훈씨는 어쩌다 그렇게 되셨어요? 돌내골은 어쩌구요?" 그렇게 슬쩍 화제를 바꾸어버렸다. 전처럼 그녀가 안달을 하며 자신을 변명하거나 깡철이 를 과장되게 험구했다면 명훈의 혐오감은 보다 공격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가볍게 피해버리자 명훈은 더 꼬투리를 잡을 데가 없었다. 거기다가 그녀가 덧붙인 질문도 그 어떤 변명이나 부인보다 더 효과적으로 그 방면에 대한 명훈의 추궁을 봉쇄했다. "한마디로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거야. 내게 주어진 운명이 이뿐인 것 같애. 개간, 상록수의 꿈... 말짱 헛거야. 혼자 잘난 척 뛰어봤자 결국은 뒷골목의 시궁창에서 너하 고 어울리게 되어 있는 게 내 팔자란 말야." 명훈은 쓰라린 실패담을 되뇌기 싫어 그렇게 퉁명스레 잘랐다. 모니카의 눈이 반짝했다. 명훈이 경멸해 마지않던 그녀의 단순성이 순간적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럼 저와 다시 한번 시작해보시겠어요?" 그녀가 예전의 백치 같은 웃음을 흘리며 안겨들 듯 다가섰다. 그러나 명훈에게는 더 화를 낼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담배 한 대를 뽑아 불을 붙이며 덤덤하게 말했다. "네가 기다렸다는 것, 혹시 내가 이렇게 되어 널 찾아오는 게 아니었어?"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지난 세월 내내 제게 가장 막막했던 게 뭔지 아세요? 그건 명훈 씨의 눈이 언제나 나와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거예요. 나로서는 죽었다 깨나도 갈 수 없는 어떤 딴 세계를 바라보고 기회만 닿으면 그리로 떠나려는 거 말예요." 모니카가 그렇게 말할 때는 전에 느끼지 못했던 진한 연민이 가슴까지 적셔왔다. "잘됐군. 이젠 그럴 기력도 없어졌으니. 하지만 우리가 다시 뭘 어떻게 시작하지?" "그냥 둘이 사는 거예요, 거창한 욕심 없이. 그러나 남에게 구걸하거나 업신여김 당함 없 이." "겉으로는 어떻게 떠벌였는지 모르지만 솔직히 내가 내심으로 바란 것도 그 정도였어. 하 지만 쉽지 않더군." "명훈씨의 세계에선 그게 어려웠는지 몰라도 여기서는 그리 어렵지 않아요. 저하구 함께 다시 시작해요." "뭘 어떻게?" "우선 돈부터 좀 벌어요. 지금까지는 한번도 돈에 악착을 떨어본 적이 없지만 이젠 생각 이 달라지네요. 무엇보다도 자본주읜지 뭔지 어쨌든 이런 사회에서는 그게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잖아요? 전부터 엄마와 의논하던 게 있어요. 든든한 남자가 없어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명훈씨가 있다면 해볼 만해요." "그게 뭔데?" "색싯집요. 시골 방석집과 도회지 요정의 중간쯤 되는. 아슬아슬하게 서울시도 편입된 천 호동 변두리에 맞춤한 한옥 하나를 봐둔 게 있어요. ㄷ자 집인데 방이 열 개나 되고 여름에 는 안마당도 술청으로 쓸 수 있는 그런 집이에요." "그런 변두리에 방이 열 개나 되는 색싯집이 될까?" "그게 바로 엄마의 눈썰미라구요. 거기가 변두리지만 광주대단지에서 서울로 넘어오는 길 목이고 서울서 하남으로 빠지는 길목도 되는 것이에요. 잘 아시죠? 광주대단지가 어떤 곳이 지. 그리고 하남도 옛날 시골 면이 아니래요. 엄마 말로는 어쩌면 광주대단지보다 먼저 개발 될지 모른대요. 말하자면 둘 다 부동산 땜에 눈먼 뭉칫돈이 몰려다니는 곳이죠. 하지만 광주 대단지도 하남도 제대로 된 술집은 없고, 있다 쳐도 서울과는 기분이 다르잖아요? 특히 생 색내는 술자리로는... 그런데 엄마가 보아둔 집은 두 곳 모두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서울 기 분을 낼 수 있는 자리라는 거예요. 저도 가 보았는데 괜찮은 술집이 있다는 것만 알려지게 되면 양쪽에서 들며 날며 얼마든지 찾아올 만한 곳이더라구요." 말투로 보아 모녀는 꽤 구 체적으로 입지 조건을 살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괜찮은 술집이란 것은 어떻게 알리지?" 명훈은 그렇게 묻는 자신이 마음 한구석으로 한심하게 느껴지면서도 진지함을 잃지 않고 물었다. 힘을 얻은 모니카가 이제는 그녀 특유의 재재거리는 목소리가 되어 나름의 사업 계 획을 쏟아놓았다. "그건 자신있어요. 색싯집이란 건 색시로 결판나는 거 아녜요? 마침 절 따르는 동생들이 많이 있으니까 처음 몇 달은 서울 어느 요정 못지않게 쭉쭉 빠진 애들로 열 방 모두 넣어줄 수 있을 거예요. 시골 동장이나 복덕방 영감들 혼을 빼놓기에는 충분한 애들로 말예요. 그러 다가 자리 잡히면 그때는 걔들 좋을 대로 놓아주면 돼요. 그곳이 재미있으면 정식으로 월급 나오고 그렇잖음 제 갈 길 가게 하면 되는 거라구요. 아무리 요즘 애들이라지만 그 정도 의 리들은 있어요." 그러고 이제는 아무런 주정 없이 명훈을 붙들었다. "명훈씨, 어때요? 저하고 한번 시작해보지 않으실래요? 물랑루즈 뒤를 어떻게 봐주고 있 는지는 모르지만 거긴 이제 옛날 명훈씨가 알던 판이 아니라니까요. 자유당, 민주당하고 같 이 주먹판도 갔다던가요. 군사 정부란 게 워낙 깡패들을 키우지 않는 데다가 눈치보며 조금 씩 고개드는 판은 또 옛날하고는 딴판인 모양이더라구요. 그렇다고 이제 와서 명훈씨가 그 런 판에 칼잡이로 나설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 거긴 그만 잊어버리세요. 저하고 이 바닥에 서 다시 시작해봐요." 오래 술집에서 술집으로 돌면서 그녀도 주먹 세계를 제법 눈밝게 보고 있었다. 전 같으면 그게 오히려 명훈에게 짜증을 일으켰을 테지만 그 날은 오히려 그런 그녀의 눈뜸이 슬몃 감 탄스러웠다. 나도 호다이가 그래 오래 기댈 만한 녀석이 못 된다는 건 알고 있어. 그래 좋 아. 한번 그 길로 가보자. 거기는 또 뭐가 있는지... 명훈은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으나 그래도 남은 한 가닥 자존심으로 버텼다. "당장은 곤란해. 사내끼리의 약속이 있으니까. 하지만 생각은 해보지." 그런 말로 그녀의 집을 나왔으나 며칠 후 다시 들러서는 그대로 눌러앉고 말았다. 그리고 꼭 한 달 뒤에 개업한 것이 그 변두리 요정이었다. 연탄 갈기를 마친 명훈이 내실로 들어가 려는데 방안에서 모니카가 현양을 다그치고 있는 소리가 장지문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래, 이년아, 너 잘났다. 촌놈 가리고 칠푼이 팔푼이 따지면서 색시질은 언제 할래? 장 사장이 어때서? 내 보기엔 기마에(되잖은 선심)만 좋더라." "그 새끼, 변태예요. 사람을 밤새 초주검으로 만들어놓는다구요. 그것도 징그러운 짓만 골 라 하며. 하룻밤에 백만 원을 준다 해도 그런 새낀 싫어요." 현양이 조금도 숙이는 기색 없이 대꾸했다. 지난번 외박 때 뭔가 당해도 단단히 당한 모 양이었다. 모니카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으이구, 저 곤조통. 야, 너 여기 나온 지 몇 해째라 했지? 그런데 저런 촌놈 하나 못 다 뤄? 그리구 솔직히 말해 사내치고 변태 아닌 새끼가 어딨어? 니 마음에 안 들면 다 변태지. 그러지 말고 이 언니 한번 도와주라. 이왕 주는 거 활딱 벗고 주란 말야. 활딱 벗고 주는데 변태가 어딨어?" 거기까지 듣자 어지간한 명훈도 차마 내실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대로 발길을 돌려 주 방으로 갔다. 주방은 재래식 한옥의 부엌을 개조한 것이었다. 네 평 남짓한 흙봉당에 시멘트를 발라 반 은 살림집의 부엌으로 쓰고 반은 마루를 깔아 상을 차리거나 과일을 깎고 마른안주를 장만 하는 업소 주방으로 쓰고 있었다. 명훈이 문을 열자 식모와 조리사를 겸하고 있는 안성댁이 늦은 저녁을 먹고 있다가 서둘러 수저를 놓았다. "아주머니, 저녁 식사 다 하셨으면 술 한잔 주실래요?" 어차피 밤이 깊으면 이방 저방에서 얻어걸친 술로 얼큰해질 테지만 그날은 무엇이 감정을 건드렸는지 초저녁부터 술생각이 났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별수없이 안성댁은 작은 개다리소반에다 막걸리와 나물 안주 몇 접시를 받쳐 놓았다. 명훈은 되도록 섬세한 감정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애쓰며 대접으로 막걸리를 비웠다. 이상 하게 술이 잘 받아 금세 한 되들이 주전자가 바닥이 났다. 명훈이 내처 한잔 더 할까 망설 이는데 갑자기 바깥이 소란했다. "오늘은 어째 초저녁부터 취한 손님만 오누?" 안성댁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밖을 내다보는데 모니카의 호들갑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나가요. 기다리세요." 그런데 그 다음이 이상했다. 으레 이어져야 할 모니카의 코맹맹이 소리 대신 무언가 싸늘 한 거절의 말소리가 들리는가 했더니 다시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렸다. "이거 왜 이래요? 방이 찼다지 않았어요?" 명훈이 얼른 몸을 일으켜 나가보니 대문께에 주저앉아 있던 모니카가 일어서며 악을 쓰는 중이었다. 그런 그녀 앞으로 두 명의 젊은이가 건들거리며 들어서고 있었다. 명훈은 그들을 보자 절로 긴장했다. 알 만한 녀석들이었다. 개업날부터 업소 주변을 기웃거리며 시비를 걸 어오고 있는 근처의 건달들이었다. "왜 그러슈?" 명훈이 짐짓 그들을 모르는 척하며 마당으로 내려서자 힘을 얻은 모니카가 한층 소리를 높였다. "여보, 어서 파출소에 전화해요. 귀때기 새파란 것들이 초저녁부터 어디서 행패야? 지금이 자유당, 민주당 시절인 줄 알아?" "여보쇼. 그러지 마쇼. 우린 술 먹으러 온 손님들이란 말야. 술집에 술 먹으로 온 것도 행 팬가?" 둘 중에 조금 나이든 축이 제법 지긋한 목소리로 받았다. 명훈은 잠시 어떻게 대응할까 망설였다. 저번에 와서 술값 시비를 벌일 때도 이 촌놈들 때려잡아 한번 겁을 줘, 싶다가 무 언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일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더 살펴보기로 한 녀석들이었다. 하지 만 아무래도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때 모니카가 다시 악을 썼다. "방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사람을 쳐?" "치긴 어딜 쳐요? 길을 막으니까 비키라 그런 거지. 사람을 그렇게 차별 대우하는 거 아 뇨. 내 방문 한번 열어볼까? 정말로 방이 다 찼는지." 상대의 말투에는 이죽거리는 듯한 데마저 있었다. 그걸로 보아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온 것 임에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주먹만 믿고 마구잡이로 덤비는 시골 건달 같지는 않았다. 우선 이것들의 뒤부터 알아봐야겠구나, 명훈은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모니카를 달랬다. "어이, 그러지 말고 10호실 치워. 아무래도 뭔가 할 얘기가 있어 찾아 온 친구들 같은데." 그리고 짐짓 억양 없는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형씨들, 들어오슈. 한두 번도 아니고. 세번 네번 찾아올 땐 뭔가 볼일이 있으신 것 같은 데..." 그 말에 나이 적은 쪽이 움찔했다. 무언가 좀 뜻밖이라 놀라면서도 송구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짚여왔다. 이 녀석은 별로 도회지 때가 묻지 않은 시고 건달이구나... 그런데 나이든 쪽은 달랐다. "역시 사장님이셔. 이제 가 잡으셨구만. 어디 저 방이오?" 그렇게 명훈의 말을 받고 당연하다는 듯 10호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나이 적은 녀석에 게 명령조로 말했다. "쌔꺄, 빌빌거리지 말고 따라와. 너 술고프다며?" 방안에 자리를 잡고도 나이든 쪽은 제법 관록 있는 뒷골목 주먹 흉내를 냈다. 명훈이 술 상을 봐오라고 하자 위압적으로 덧붙였다. "맑은 술로 내오슈. 나 이래도 맑은 술 아니면 안 마시는 사람이오." 이 녀석은 어디서 어떻게 놀다가 온 녀석일까... 명훈은 그런 관찰의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녀석이 시키는 대로 맥주와 마른안주를 시켰다. 술상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녀석이 먼저 수인사를 청해왔다. "하상봉임다. 명동 신상사 밑에 있을 때는 '도로꼬'로 통했소. 별로 재주는 없고 도로꼬 면도날로 몇 놈 얼굴을 긁어줬더니 붙은 별명이오. 지금은 한 건 걸린 게 있어 집에 돌아 와 수양하는 중이오. 그리고 쟤는 날 따라다니는 동생이고오. 지 말로는 중곡농고에서 짱돌 이란 별명으로 날렸다던데, 어쨌든 깡다구 하나는 고재봉이 촛대뼈 까는 놈쯤으로 알아두 슈." 제딴은 한껏 거품을 피워 자기 소개를 한 셈이지만 명훈은 그때부터 조금씩 긴장을 풀었다. 물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주먹 세계는 그 세계대로 나름의 변치 않은 관행을 가 지고 있는 법이다. 명훈이 알고 있는 바로 첫 대면에서 있는 대로 자신을 떠벌리는 것은 관 록 있는 주먹의 행태가 아니었다. 대단찮은 사고치고 집에 와 숨어 있는 똘마니이기 십상이 구나... "나 이명훈이오. 아우님들보다는 몇 해 먼저 동대문 쪽에서 야쿠자 물이라도 얻어먹은 젓 은 있지만, 뭐 그리 내세울 만한 이력은 없고... 지금은 보다시피 이렇게 마누라 앞세워 술 장사나 하고 있소. 잘 부탁합니다. 아우님들." 명훈은 한껏 공손하면서도 아우님들이라는 호칭으로 슬며시 그들을 건드려보았다. 구식 오야붕들이 다른 가족의 꼬봉들에게 은근히 위압적이면서도 친근함을 주는 호칭으로 즐겨 쓰던 말이었다. 그러나 도로꼬는 알아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어라, 오늘 술 한잔 얻어먹으려다 늙다리 형님까지 얻게 됐네. 좋시다. 범절 봐서 형님 대접 해드리지." 비위 상하는 것을 억지로 참는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받았다. 그러나 명훈은 거기서 다시 상대의 정체를 읽었다. 계보도 없이 떠돌던 똘마니구나... 그날 그들이 내온 술상만 고분고분 마시고 일어섰어도 별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악만 남아 밑바닥을 뒹굴게 되었지만 주 먹질은 이미 서른이 넘은 명훈에게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도로꼬와 짱돌은 너무 어리고 눈치가 없었다. 명훈이 굽히고 드는 것을 약함으로만 이해하고 갈수록 요구가 커졌 다. 내온 술상이 다해도 일어날 생각을 않고 오히려 기세를 올렸다. "똥개도 텃세는 하는 법이랬잖소? 남의 동네 와서 장살 하려면 인사가 있어야지. 이러지 말고 제대로 한 상 내오슈. 색새들 인사도 좀 시키고." 그때 이미 명훈에게는 이것들이,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노회함일까, 울컥 속 이 치솟는 한편에서는 피할 수 없는 한판이라도 이쪽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냉정한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차피 주먹으로 다루어야 할 녀석들이라도 이대로 둘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모니카를 불렀다. "여기 소주하고 안주 좀 제대로 내와. 색시도 남은 애들이 있으면 두엇 들여보내고." 그리고 다시 술상이 나오자 대뜸 맥주컵에 철철 넘치도록 소주를 따랐다. 그제서야 도로 꼬의 취한 눈길에도 언뜻 경계의 빛이 어렸다. 잔은 호기롭게 받아도 한꺼번에 비우지 않고 찔끔거리는 게 제법 뒷골목에서 익힌 조심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짱돌이라는 젊은이는 명 훈의 바람대로 단숨에 주욱 들이켜는 호기를 보였다. "사장님도 한잔 드슈." 도로꼬가 못마땅한 듯 짱돌을 보다가 갑자기 명훈 앞에 놓인 맥주잔을 소주로 채웠다. 명 훈은 주방에서 마신 막걸리가 마음에 걸렸으나 기가 꺽이지 않으려고 반쯤을 단숨에 비웠 다. 스스로 알고 있는 주량에는 그 잔을 다 비워도 아직 여우가 있었다. 그러나 전보다 약해 졌다고는 해도 아직 30도가 넘는 소주를 한꺼번에 한 홉이나 털어넣어선지 취지가 생각보다 심하게 올랐다. 오래 끌어서는 안 되겠구나... 명훈은 갑자기 다급해져 원래의 계획보다 빨리 마무리에 들어갔다. "그런데 말이야, 아우님. 남의 동네에 와서 장사하려면 인사가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 동네가 아우님 건가? 아우님 나와바린가 이 말이야." "그렇다고 보는 게 피차 속 편할 거요." "그럼 인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햐, 사장님, 정말 장사 첨 하시나? 명동에서는 다달이 세금을 거뒀지만 여기 같은 변두리 에선 그것까지 바라지는 않겠시다. 술고픈 동생들 데리고 오면 술이나 한잔씩 참하게 내쇼." 눈을 깜빡이며 살피기는 해도 도로꼬는 명훈의 속셈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직 자신의 공갈이 제대로 먹혀들고 있는 줄만 알고 큰 인심이나 쓰듯 그렇게 말했다. 짱돌 은 한꺼번에 내리부은 두 홉의 소주가 점점 효력을 발하는지 몽롱한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 보고만 있었다. "이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똑똑히 들어. 야쿠자 물 제대로 먹으려면 먼저 의리라는 예 절부터 배우란 말야. 선배 대접하는... 너 신상사 밑에 있었다고 했지? 그게 정말이라면 당장 신상사에게 가서 동대분 '간다'가 누구인지 물어봐." 명훈이 가만히 도로꼬를 쏘아보며 어조를 바꾸어 말했다. "뭐야? 지금 누구한테 반말이슈?" 그제서야 심상찮은 기미를 느꼈는지 도로꼬가 경계 어린 눈길로 목청을 높여 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어딘가 한풀 꺾인 듯한 떨림이 있었다. "얌마, 니네 신상사가 여기 와도 내게 이리는 못 해. 이게 어디서 딱새 찍새로 놀다가 못 된 것만 구경하고 돌아와선..." 명훈은 짐짓 목소리를 낮추고 침착함과 무게로 도로꼬를 위압해갔다. 도로꼬는 맹탕으로 죽어주지는 않았다. "뭐야? 그럼 한번 해보자는 거야? 장사 다했다 이거지?" 그러면서 술상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모든 게 늦어 있었다. 그런 마구 잡이 싸움이라면 도로꼬는 원래 명훈의 적수가 못 되는 데다 짱돌이 취해 제대로 도와주지 못하니 결과는 뻔했다. 잠시 후 명훈은 흠씬 얻어맞은 개처럼 마당을 기는 녀석들을 발로 밟은 채 안채를 향해 소리쳤다. "파출소에 연락해. 이 새끼들, 무전 취식과 영업 방해로 집어넣어버려." 제 21 장 실재의 미로에서 그해 2학기에는 삼선 개헌 반대 데모로 개강 자체가 한 달 가량 미뤄진 데다 개강 뒤에도 다시 두 주일인가 휴교가 있어 규정된 수업일 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 부족을 메우기 위해 기말 시험이 12월 하순으로 밀리는 바람에 겨울 방학은 연말이 가까워서야 시작되었 다. 지방에서 올라온 아이들은 대개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고는 총총히 집으로 내려갔다. 그 러나 어머니와 옥경이가 일자리를 얻어 흩어짐으로써 도랑갈 집이 없어진 인철에게는 그대 로 길고 막막한 방학이 되고 말았다. 여름 방학과 달리 가정교사로 입주해 있는 집에 그대 로 눌러앉아 개학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가르치고 있던 아이들이 중학교 2학년과 고등학교 2학년으로 진학하게 돼 주인 내외는 그렇게 된 것을 오히려 반가워했다. 하지만 인철이 실제 아이들에게 쓰는 시간은 그 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들이 아들은 둘 다 2학년이라는 데서 온 부모들의 방심과 방학 이란 말이 아이들에게 주는 해방감이 그 주된 원인이었다. 인철이 아무리 다그쳐도 하루 세 시간 정도밖에는 아이들을 책상 앞에 잡아둘 수 없었다. 거기다가 아이들이 지방에 있는 친 지들에게 놀러라도 가게 되는 날이면 하루가 온전히 인철의 몫이 되었다. 인철이 쓰는 방은 아이들의 학습 환경을 고려해 본체에서 가장 멀고 호젓한 곳에 있었다. 인철은 중학생인 남자 아이와 그 방을 썼는데 막내라서 그런지 아이는 틈만 나면 안방으로 내려가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있거나 거실의 텔레비전 앞에 눌러붙었다. 따라서 그 조용 하고 아늑한 방은 인철 혼자 차지할 때가 많았다. 처음 며칠 인철은 갑작스레 찾아온 동면과도 같은 그런 나날이 막막했다. 어울려다니던 급우들은 대개 지방에서 유학 온 터라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바쁘게 서울을 떠났고 생부 때문에 며칠 더 머물던 정숙도 해를 넘기지 않고 대전으로 내려가버렸다. 고속 버스 정류장에서 정숙을 전송하고 돌아올 때는 낯선 도시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 때문에 눈시울이 화끈하기까지 했다. 하기는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도 하루를 보내기가 어렵지 않은 곳이 서울이었다. 인철은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었고 볼 만한 외화를 상영하는 극장들은 많았다. '세시봉'이나 '돌체 ' '디 쉐네' 같은 분위기 있는 음악실에서 몇 시간이고 죽칠 수도 있었다. 당시로는 대학 신 입생의 의무감 비슷한 감정으로 배웠던 당구나 바둑도 시간을 죽이는 데는 아주 효과적인 놀이였으며, 당구장과 기원도 골목마다 있었다. 하지만 그 모두가 적잖은 경비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우선 인철에게는 맞지 않았다. 식모 살이를 하는 어머니나 여공이 된 옥경이 번 돈으로 등록금을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 서 용돈 명목으로 받는 많지 않은 돈에서 등록금을 모아야 하는 인철에게는 다른 곳에 돈을 쓸 여유가 없었다. 거기다가 타고난 성향도 인철이 그 겨울 내내 방안에서 죽치는 데 한몫을 했다. 살아오는 동안 이곳저곳을 떠돌았고 나중에는 그것이 한 습성처럼 되기는 했지만 아마도 그가 타고난 성향은 외향적이기보다 내성적이며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이라는 편이 옳았다. 계기가 주어지 면 움직이고 사람이 다가들면 받아들였지만 그 스스로 그 계기를 만들고 사람을 찾아나서는 일은 원래가 그와는 맞지 않았다. 인철이 젊은 날에 쓴 일기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 <<고독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자주 나를 겁쟁이로 만들고 일쑤 무익한 인간 관계 속으로 몰아넣는가. 아무 취할 바 없는 범속한 정신에 호의를 구걸하고 천민들에게조차 무분별한 관용으로 다가가게 만든다. 정말이지 나는 너무 많은 인간들을 알고 있고, 이해가 아닌 야합 으로 그들의 정신과 만난다. 또 어차피 그들의 많고 적음은 나의 고독과는 무관함에도 끊임 없이 새로운 인간을 탐낸다. 우리들의 상상이나 추측을 털어버리고 그 자체를 냉정하게 살핀다면 죽음처럼 고독도 반 드시 고통스런 것일 수만은 없다. 해방이며 충일이며, 여러 가지 값진 정신 활동에 가장 유 용한 환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걸 고통으로 단정하고 겁내는 것은 순전히 상상과 추측에 바탕한 감정의 과장이나 왜곡 탓인 듯하다. 따지고 보면 얼마나 많은 위대한 영혼들이 그 고독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성숙시키고 인식과 통찰의 깊이를 더해갈 수 있었 던가.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고독의 효용은 아주 높다.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만이 사람을 냉철하게 알아볼 수 있고 정직하게 미워할 수 있으며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너는 지금 거리의 흥행사처럼 재주까지 피워가며 천민들과의 무분별한 관계를 확 대시켜가고 있다. 좀 낡긴 했지만 한번쯤은 저 광기 어린 철인의 충고를 되씹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고독한 자는 그와 만나는 자에게 너무 빨리 손을 내미는 일이 있다. 천민들에게는 손을 내밀지 말아라. 다만 앞발만 주어라. 더욱이 그 앞발에는 사나운 짐승의 발톱이 감추어져 있 어야 한다.">> 그게 그 무렵의 일기하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에 그 리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다. 거기다가 그해는 유별나게 새로운 사람들 을 많이 만난 해였다.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의 여러 해 품어왔던 또래 집단에 대한 동경 과 갈망이 이상한 들뜸으로 작용한 탓이었다. 따라서 그해 겨울의 긴 동면과도 같은 칩거는 어떻게 보면 인철이 오랜만에 경험하게 되 는 자신과의 대면일 수도 있었다. 그는 보름에 한 번 정도 서울로 올라오는 정숙과의 만남 을 빼고는 누구와의 교류도 없이 그 겨울을 보냈다. 그런데 그 예외적인 만남도 뒷날 정숙 이 비꼰 것처럼 인철이 '교양이란 이름의 우매한 강제 수양'을 그녀에게 강요하기 시작함 으로써 다감한 교류에서는 점차 벗어나고 있었다. 인철이 자신과 만나는 데는 대개 책이 중개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해 겨울의 책읽기가 처 음부터 그런 추상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 얼마간의 책읽기에는 현실적인 고려가 앞섰다. 제대로 대상을 파악하기도 전에 환멸부터 맛보게 됨으로써 일찌감 치 망쳐버린 필수 전공 학점을 보완해 등록금이라도 절약해보려는 의도가 그랬다. 인철은 이미 F학점으로 처리된 음운론에서부터 전공과의 친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모처럼 의 기특한 그 시도는 사흘도 안 돼 실패로 끝났다. 아직 그에게는 ㄱ 의 발음을 영어의 대, 소문자 K와 g, 그리고 KW, 기타 열 가지 종류로 표기하고 분류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 알 수가 없었고, 그런 연구에 가치를 부여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거기에 일생을 탕진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무슨 재앙이나 저주처럼 끔찍 했다. 인철은 다시 전공이 시작되면 맞딱뜨리게 될 의미론 쪽으로 접근해보았다. 이번에는 전보 다 나았다. 적어도 개설서 수준에서는 음운론보다 훨씬 공감대가 넓었고, 나아가 그것이 20 세기 들어 패잔의 기색을 드러내는 철학과 만날 가능성을 보여주었을 때는 은근한 반가움까 지 느꼈다. 그 무렵 갑작스런 번역 바람이 불어 비교적 많이 읽게 된 러셀이나 그에 의해 언급된 비 트겐슈타인의 어떤 구절 혹은 철학 개론에서 읽은 옥스퍼드 일상 언어학파의 주장들을 연상 시키는 그 현대적 전개 때문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공 준비로 소쉬르를 읽게 되면서 친화의 감정은 엷어져갔다. 돈을 주 고 산 새 책이라는 것 때문에 몸 못지않게 꼬이는 머릿속을 억지로 단속하며 며칠 읽어가다 가 오랜 독학의 폐습인 독단과 비약이 더는 그 책을 읽지 않아도 좋을 구실을 찾아주었다. 그것은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에서 플라톤적 이원론의 그림자를 발견한 데서 비롯됐다. 여기 플라톤의 이데아를 잘 가공해서 또 한판 멋지게 놀고 가는 친구가 있구나- 어쩌면 무지와 단순의 용감성이겠지만 인철은 읽기 시작한 지 닷새 만인가 소쉬르를 덮으면서 그렇게 자신 있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뒷날 돌이켜 생각해보면 인철이 그런 언어학의 중요 분과들과 끝내 친화할 수 없 었던 데는 말과 글에 대한 그의 독특한 이해 방식에 원인이 있지 않았던가 싶다. 잘 짜여진 교과 과정이나 엄격한 스승의 지도 없이 홀로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인철이 주로 의지 한 것은 문학이었다. 그의 말과 글을 키운 것도 문학이었고- 그래서 그에게 말과 글의 수용 과 이해는 문학적일 수밖에 없었다. 곧 그때의 인철에게 말과 글은 철저하게 해부하면 죽어버릴 수밖에 없는 생명체 혹은 한 번 해체하면 결코 그 원형을 되살릴 수 없는 어떤 구조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학문적인 소 양과 근대적 보편 교양을 단단히 혼동하고 있던 그에게는 언어학의 비교 분석적 방법론이 말과 글에 들이대는 적의의 메스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말과 글에 대한 그의 인식은 다분히 구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위대한 구조주의의 선구자를 첫 대면에 서 그토록 단호히 거부하게 된 것에서는 독학의 폐해로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묘한 아이 러니가 느껴진다. 인철이 그해 겨울 방학 동안에 마지막으로 시도한 전공과의 친화는 현대 문예 이론을 통 해서였다. 인철은 첫 학기 문학 개론을 배울 때 들은 젊은 강사의 강조에 때라 대뜸 신비평 으로 덤벼들었다. 신비평은 영미에서는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주류를 이룬 이론이었지만 그 때 우리의 대학 강단에서는 그야말로 새로운 이론에 속했다. 인철은 이미 번역돼 나온 르네 월렉과 오스틴 워렌이 함께 쓴 <문학의 이론>으로 그 방 면의 접근을 시도했다. 당연하게도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일관성도 없고 체계적이지도 못한 지식이 분석적인 방법에 일쑤 품게되는 경원이 이번에 는 거부감으로 작용하였다. 한 열흘 흠을 잡기 위한 통독을 하다가 랜섬의 이론을 요약한 곳에서 인철은 결정적인 구실을 찾아내었다. 순진한 감동으로 읊조렸던 영시의 명품들은 관 념시 혹은 즉물시란 죄목 아닌 죄목으로 평가절하하고, 케케묵은 존던을 17세기의 무덤에서 끌어내어 형이상이란 그들의 이상을 구현한 시인으로 추켜올리는 것을 보고 자신만만하게 그들의 이론을 거부할 수 있었다. 인철의 독서가 전공과의 친화를 포기한 것은 방학이 시작한 지 한 달 남짓 뒤였다. 방향 도 잘못 설정되고 설익은 주관과 학문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실패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 가 상당한 열정과 집중력을 가지고 책을 읽은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길을 잘못 들었구나. 잘못 찾아왔다...' 그 방면의 학자들의 보기에는 그런 성급한 실망이 한심스럽기조차 하겠지만 나름으로는 진지하게 한탄하며 신비평을 소개한 책들을 덮은 인철이 오랜만의 외출을 준비라고 있을 때 였다. 주인 아주머니가 기대하지 않은 잡비까지 가외로 집어주며 은근하게 말했다. "우리 선생님이 무슨 시험 준비하는가 보지? 법과도 아닌데 고등고시 준비라도 하는 거 야? 이거 책이나 사봐요." 그 바람에 막연하던 인철의 외출에는 예정에도 없던 서점이 곁들여지게 되었다. 한 달이나 방안에 틀어박혀 있어서인지 바깥의 추위는 뜻밖으로 매서웠다. 그 동안 두어 번의 외출이 있기는 했지만 모두가 집 근처의 다방에서 정숙을 만나 한두 시간 얘기를 나누 다 돌아왔을 뿐이어서 집 안네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거기다가 따져보니 계절도 가장 혹한 기였다. 두껍게 얼어붙은 한강이 정월말의 추위를 실감하게 했다. 처음 서강 쪽으로 나가 강둑이나 거닐며 머리를 식히려고 했던 인철은 그 추위에 쫓겨 시 내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러나 명동 입구에 내리고 보니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낯선 다 방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다가 문득 주인 아주머니가 한 말을 떠올리고 찾게 된 곳이 청계천 헌책방 골목이었다. 거품 섞인 것이기는 해도 풍요로운 8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 헌책방 골목은 시들어가게 되 지만 갓 70년대의 문턱을 넘던 그때만 해도 그곳은 아직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신학기를 앞두고 책을 팔 사람들과 사려는 사람들이 뒤섞여 골목은 겨울 거리답지 않게 북적거렸다. 인철은 꼭 어떤 책을 사겠다는 작정도 없이 그득 속에 끼어들어 청계천을 따라 흘렀다. 막연한 중에도 처음 인철이 눈여겨본 책들은 그 한 해 강의실을 떠돌아다니며 개론을 도 강한 다른 전공 쪽이었다. 심리학, 미학, 논리학, 정치학... 자기 전공 분야의 개론들보다 더 출석률 좋게 들은 그 개론들을 떠올리며 어느 쪽이 자신에게 더 재미있을까를 가늠하며 눈 에 띄는 그 분야의 헌 책들을 뒤적였다. 어쩌면 그때 이미 그는 자신의 전공을 포기하고 있 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세번째 책방에 들렀을 때인가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인철의 눈을 끄는 책이 있었 다. 대여섯 권짜리 전집을 노끈으로 묶어둔 것인데 책방에서 일해본 인철의 경험으로는 방 금 누군가 아쉬운 사람이 헐값으로 팔아넘기고 간 것인 듯했다. 아직 판매대 위로 옮겨지지 않고 계산대 앞에 무더기로 놓여진 게 그런 추측의 근거였다. 인철의 눈길을 끈 것은 아마도 맨 위에 있는 책의 제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존재와 시간>, 익히 알고 있는 제목인데도 실제 책의 표지에 큰 글씨로 도안되어 있으 니 영 낯선 책 같았다. 그 위에 보다 작은 글씨로 '하이데거 전집1'이란 글씨를 다시 보면서 인철은 비로소 아, 그 책, 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인철이 그 책을 사려고 마음먹은 것은 또 다른 연상 때문이었다. 이태 전에 죽은 시인 김수영을 추모하는 글 중에 본 구절이 그랬다. 60년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실존주의에 주눅들어하던 시인은 어느 날 받은 원고료를 몽땅 털어 하이데거 전집을 사고 두 달 만에 독파하여 그 주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던가... "이거 얼마죠?" 다른 손님과 한참 책값을 흥정중인 주인에게 인철이 그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주인이 힐 끔 인철과 그 책을 돌아보고 말했다. "잠시 기다려요. 여기 얘기부터 끝내놓고 봅시다." 그 말에 인철은 책을 묶은 노끈을 풀어 한때의 전문가로서 찬찬히 그 상품성을 살폈다. 책을 사놓고 전혀 읽지 않았거나 아주 깨끗하게 다루어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차례 로 살피다 보니 여지없는 흠이 하나 드러났다. 그 전집은 원래 총 일곱 권이었던 모양인데 다섯 권밖에 없었다. 가진 돈이 모자랄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큰 흠이었다. "그거 아직 내놓지도 않았는데 노끈을 풀면 어떡해?" 먼저 손님과 거래를 서둘러 끝낸 책방 주인이 인철에게 항의 비슷하게 말했다. 내용이 정 확히 파악되어 있지 않은 상품이 고객 손에 먼저 넘어가 있는 게 왠지 불만인 듯했다. "안을 좀 들여다보려구요. 이런 책은 중요한 대목 한 장만 찢겨나가도 못쓰게 되니까요." "새 책이나 다름없는 거야. 사서 모셔두었다가 이리루 가져온 거니까." 주인이 그러면서 책을 뺏어 그 중 한 권을 펼쳐보이며 말했다. "어려운 책은 제대로 읽은 사람이 주를 달아놓거나 표시를 해둔 게 도움이 되는 수도 있 어요." 인철은 그렇게 받아놓고 슬쩍 물었다. "얼마에 넘기시겠어요?" 파시겠어요, 라고 하지 않고 넘기시겠어요, 라고 함으로써 은연중에 옛 경력을 드러내보였 다. "보자, 3년 전에 권당 6백 원에 나온 거나 오륙 삼십하고, 인플레 생각 안 해도 천오백 원 은 받아야겠네." 주인이 책 뒤편을 뒤져 정가표를 확인하며 느릿느릿 대답했다. "에이, 아저씨두... 전집 책값을 정가대로 치는 법이 어딨어요? 그거 월부로 팔려고 뻥튀기 해 붙여논 값인데, 전집 책값 현금으로 사면 새것두 반값이란 말예요." 인철은 그래놓고 다시 한번 옛 경력을 드러내보였다. "게다가 이건 낙질이잖아요." "그런 소리 하지 마, 낙질도 낙질 나름이야. 이건 소설처럼 계속된 이야기가 아니라 중간 에 한두 권 빠져도 아무 상관 없다구. 또 기다려 채워넣을 수도 있고..." 주인은 애써 태평스런 어조로 말하면서도 살피는 눈길로 인철을 바라보았다. 뭔가 만만한 손님이 아니라는 걸 느낀 듯했다. "그러지 마시고 제게 넘기세요. 천 원 드릴게요. 솔직히 말해 이거 잘 해야 칠, 팔백 원에 받으신 거 아녜요?" "학생, 혹시 나까마(중간상) 아냐?" "그건 아니구요. 실은 제가 헌책방에서 일해봐서 잘 알아요." 그러자 주인은 비로소 마음속의 의문이 풀린다는 듯 제법 호인다운 웃음까지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랬군. 좋아.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 같은데 그렇게 넘기지. 하지만 많이 봐준 거야." 집으로 돌아온 인철은 그로부터 개학 때까지 달포 남짓을 하이데거에 빠져 지냈다. 어떻 게 보면 좀 엉뚱하고 돌연스러운 몰두였으나 우리 지성사에 대입시키면 꼭 그렇지만은 않 다. 그때 실존주의는 그 발상지인 서구 쪽으로 보면 이미 지는 해였다. 아직 사르트르가 남아 '펜을 검처럼 휘두르며' 좌충우돌 분투하고는 있어도 그의 실존은 다분히 희화적으로 묘사 되곤 했다. 대신 그보다 늦게 떠오른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해가 60년대 학생 운동을 중심으 로 그 한낮을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서구와 20년 이상의 문화적 시차가 있던 우리 지성계에서의 실존주의는 여 전히 타오르는 해였다. 어쩌면 멀지 않은 저녁노을의 예감이 이 땅에서는 더 휘황한 빛을 뿌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조리' '상황' '피투' '앙가주망' 따위의 낱말은 고급한 유행어 였고, '죽음에의 선구'는 잘못 이해되어 자살의 유혹이 되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실존주 의의 마지막이자 화려한 꽃이랄 수 있는 카뮈와 사르트르는 지성적이고자 하는 모든 젊은 이들의 필독서였으며, 그 선배인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는 아직 궁핍하던 60년대말에 이미 호화롭게 장정된 전집이 나올 정도로 남다른 대접을 받았다. 그로부터 십여 년 뒤 이 땅을 휩쓴 민중 이론은 비록 극단한 좌파로 끝장을 보았으되 본 질(혹은 출발)은 격세유전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변종이 아닌가 의심이 간다. 그 위력은 프 랑크프루트 학파에 미치지 못하지만 실존주의가 그 무렵 성장기에 있던 이 땅의 정신에 끼 친 영향은 컸다. 이 땅에서 자신의 정신을 길렀다는 점에서 인철도 일찍부터 그 영향 아래 있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어찌 된 셈인지 인철의 독서 목록은 열 일곱 이전의 것에도 이미 도스토예프스 키와 카뮈, 사르트르, 키에르케고르, 니체의 책들이 올라 있다. 대부분이 소설이거나 감상적 인 미문으로 중역된 서론들이었지만 나이와 썩 어울리는 목록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그 무 렵의 인철에게 마음놓고 책을 사볼 만한 여유가 없었음을 감안하면 그만큼 그들의 책이 흔 하게 이 사회에 돌아다녔다는 뜻이 되고, 더 근원적으로 살피면 그만큼 그들의 사상이 우리 사회를 풍미하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그렇지만 인철의 그 같은 경도가 오로지 당시의 지적 유행에 휩쓸린 탓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집을 나간 뒤, 어렵지만 자신의 돈으로 책을 살 수 있게 되었을 때도 그는 확고한 선 택으로 그 방향의 독서 목록을 불려갔었다. 그리하여 대학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 그들 네 사람의 책은 적어도 번역되어 있는 것이라면 대강은 훑게 되었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는 전집을 사두고 되풀이 읽어을 정도였다. 그걸로 보아 인철의 성향 혹은 기질에도 그들의 사상과 쉽게 동화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 음에 틀림이 없다. 거기다가 그들의 관심사가 인철이 처해 있는 구체적 상황, 특히 아버지 때문에 원죄처럼 져야 하는 정치적, 사회적 제약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에 쏠려 있는 점은 그를 그들 쪽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인류의 구원이나 존재의 확인 같은 문제는 궁극적이 되면 시간 혹은 죽음의 문제와 직면 하게 되고, 일쑤 그 해결은 어떤 초월적 존재나 질서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 초월적 존재나 질서의 상징은 또한 일쑤 주관적 관념론의 성향을 띤다. 이때 인간끼리의 관 계는 사소해지고 거기에 바탕한 역사적 인식이나 사회 제도는 큰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다. 곧 단숨에 현실의 쓰라린 상처들을 뛰어넘어 보다 크고 고상한 문제로 다가들게 되는 셈이다. 떠돌던 시절 인철이 도스토예프스키에 매혹된 것은 그 사상의 심오함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안고 있는 고민의 초월성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에도 현실의 고단한 삶은 나오지만 본격적 인 사실주의에서처럼 잔인한 까발림은 없다. 무언가 그만의 뭉툭한 선으로 덧칠해 구질구질 한 현실의 구체성을 감추고 삶의 비참과 희극은 오히려 독특한 신성을 내비친다. 인생과 세계에 대한 그의 해석은 또 얼마나 자주 인철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던가. '영 문 모르고 매를 맞는 아이'라는 말은 인철이 현실에서 겪고 있는 결핍과 가치 박탈의 체 험을 추상화시키고 결과적으로는 그 고통을 경감시켜주었다. '모든 것은 용서되어 있다'라는 개념도 인철에게는 뒷날까지도 남용되지 않는 자기 연민을 길러주어 비뚤어짐 없이 세계의 부조리와 대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니체의 경우 인철이 먼저 이끌린 것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통해 그 정신에 침전된 후 기 낭만주의적 발상과 어법이었다. 인철은 열여덟 살 때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로 니체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그 책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게 한 것은 거기서 갈 파되고 있는 초인 사상이 아니라 현란한 어휘들과 그것들이 어울려 폭포처럼 쏟아지던 경구 들이었다. 초극, 영원 회귀, 인간은 목적이 아니라 다리로다, 강물은 되풀이 그 원천으로 올 라가고, 너희도 이 같은 강물로 몇 번이고 그 원천으로 되올라간다... 뒷날 니체를 한 철학자로 읽어갈 때에도 인철이 반한 것은 광기에 가까운 그 주관성과 끝 내 논리만으로 일관할 수 없는 휘황한 관념이었다. 니체 옹호자들은 그의 역사성을 애써 주 장하고 그 철학의 사회 비판적 기능을 강조한다. 그러나 당대에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인 철의 설익은 정신에 닿아온 것은 한 불 같은 개성의 주관적 관념이었고, 그게 인철에게는 오히려 매혹적이었다. 역사성과 사회성에 바탕한 객관적 인식으로는 불리하게만 되어 있는 현실을 잊고 가장하면서도 고상한 추구에 동참할 수 있게 해준 까닭이었다. 그런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에 비해 사르트르는 인철에게 애증이 묘하게 교차된 복합 감 정으로 다가왔다. 인철이 사르트르를 처음 만난 것은 일종의 문화적 강요에 따른 것이었다. 열일곱 살 때인가, 그가 노벨 문학상을 거부함으로써 다시 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고 그 대 상작 <말>이 번역되어 불티나게 팔린 적이 있었다. 워낙 요란스러워 인철도 그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지만 절반도 읽지 못하고 욕지기가 나올 듯한 혐오감에 빠져 덮어야 했다. 아버지를 정액 몇 방울의 의미로만 언급하는 책의 앞머리부터가 아직은 아버지에 대해 우 호적인 환상을 품고 있던 인철에게 그릇된 선입견을 심어준 까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인철의 남독 시대가 시작되면서 사르트르와의 화해도 이루어졌다.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가는 동안에 다시 만나게 된 그의 소설들을 통해서였다. 인간이 내던 져진 상황을 상징하는 '벽'과 실전을 부여하는 계기로서의 '구토'를 제목으로 삼는 그의 소 설들은 미학적 성취와 상관없이 인철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렇지만 그 화해는 온전한 것이 못 되었다. 사르트르가 문학 밖의 한 정연한 논객으로 자신의 철학을 옹호할 때면 인철은 이내 서먹해졌고, 이른바 <제3의 길>로 좌충우돌, 현실 참여를 모색할 때는 진지한 어릿광대를 보는 처연함까지 품었다. 한번 그릇 심어진 선입견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렇게 추구되는 실존의 객관성과 사회성에 인철이 본능적인 거부감 을 느낀 탓이었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도 그 무렵에 읽었지만 솔직히 스무 살도 안 된 남독 자가 그의 '본래적 실존'을 다 이해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그가 비본래적 실족으로 규정한 미학적 혹은 윤리적 실존의 편린들에 더 이끌리지 않았던가 의심한다면 그 시절의 인철에게 지나친 모욕이 될까. 특히 그 괴팍한 철학자가 결혼과 관련해 남긴 일화와 경구들 이 그 철학의 '주체적 진리'나 '질적 변증법'보다 훨씬 더 강한 인상으로 남았음을 고백시 키고자 한다면. 하지만 그랬다고 해서 인철이 반드시 그들 네 사람만을 주목해 읽은 것은 아니고 그들의 교설에 정신을 통째로 내준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대학에 들어오기 전부터 인철은 그들 네 사람이 무언가 연관 있는 얘기를 하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가 반드시 거쳐가야 할 중요한 물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누구이며,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 가- 어쩌면 인철 자신도 이미 그런 물음에까지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기억을 돌이켜보면 10대 끝무렵에 한때 모든 게 시들해져서 일상적인 삶을 내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강하게 휘몰린 적이 있었다. 그때는 대학 진학을 통해 또래 집단으로 복귀하고 싶다는 욕구도 거기서 쌓은 지적 우위를 바탕으로 신분의 우위를 재탈환하려는 야망도 하찮 고 속되기 짝이 없고, 명혜를 중심으로 키워가던 미적 이데아마저 허망하게 느껴졌다. 그 전해 늦가을의 헤매임에도 그런 충동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철이 그런 충동 에 흔들릴 때마다 알맞춰 작동하는 묘한 현실 감각이 결정적인 일탈을 막아주었다. 어떤 물 음은 먼저 묻는 자의 자격을 묻는다. 그런데 나에게는 아직 그런 고상한 물음에 빠져들 자 격이 없다- 그렇게 자신을 단속하며 오히려 대입 준비에 또 하나의 의의를 보탰다. 나는 그 자격을 얻기 위해 대학으로 간다... 따라서 원하던 대학에 오자마자 인철의 내부에서 다시 그런 충동이 고개를 들었다. 그 한 예가 지난 일 년 이 강의실 저 강의실을 헤매며 몰두했 던 가치의 문제였다.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인가, 무엇을 선택해야 내 삶도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가. 아니면 최소한 낭비의 죄라도 면하게 해줄 것인가- 인철은 끊임없이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그 뒤에 숨은 물음은 내가 누구인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 가, 였다. 그러다가 주위에서 그런 문제에 대해 제법 논리적인 해답을 얻어낸 듯한 친구들이 늘어나 면서 인철은 은근한 다급함까지 느꼈다. 저 아이들이 또 나를 앞질러가는구나- 인철은 또래 들과의 심각한 술자리에서 가끔 그런 한탄을 했는데, 그때 그들 대부분이 차용하는 논리가 실존주의였다. 따라서 인철이 그날 하이데거 전집을 사게 된 것이나 그뒤 겨울 방학의 나머지 한 달 남 짓을 거기에 빠져 지내게 된 게 돌연스러울지는 몰라도 엉뚱한 짓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언제부터인가 정통의 강단 철학자로부터 문학의 비유나 상징의 옷을 벗어던진 실존을 명쾌한 논리로 듣고 싶은 충동을 느껴오고 있었다. 그런 만큼 <존재와 시간>으로 시작된 하이데거 이해는 처음 한동안 기대 이상으로 순조 로웠다. 낯선 용어들과의 번역의 난삽함이 곁들어져 갑자기 울창한 숲속에 빠져든 기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숲은 이미 지나간 사람이 많아 크고 작은 길들이 열려 있었다. 인철은 오랜만의 열정으로 그 숲으로 빠져들었고, 어떤 때 자신이 실망스러울 만큼 오래 헤매다가 빤하게 열린 길 하나를 찾게 되면 감격에 가까운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지난 한 달 전공과 의 친화에서 실패한 뒤라 거기서 온 허전함과 막막함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 다. <<현대가 비록 형이상학을 또다시 긍정하는 것을 진보인 줄 생각한다 하더라도 존재 문 제는 오늘날에 와서는 잊혀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존재에 관련된 거인 의 싸움'을 재연시키려는 노력은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제기 된 물음은 결코 임의의 물음이 아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물음에 대해 숨돌릴 틈도 없이 연구했지만 그 이래로 침묵하고 만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 책의 제1장 제1절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독일어를 잘못 이해했다기 보다는 국어적 표현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 그 문장들은 어지간한 독서량을 가지고 있는 인철에게도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 다. 거기다가 익숙하지 않은 전문 용어들은 때로 비의적인 느낌까지 들게 했다. "존재는 존재자가 유개념과 종개념에 따라 분철돼 있는 한에서 존재자의 최고의 영계를 한정하지 않는 것이다"라든가, "정의는 최근류의 종차에 의해 얻어진다" 따위의 문장이 그 랬다. "묻는 일에 있어서 물음을 받을 자에 의해, 그 묻는 일이 본질적으로 난처해할 수밖에 없 는 것은 존재 문제의 가장 고유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같은 문장같이 쉬운 낱말들로 되 어 있으면서도 의미가 애매한 문장도 있었다. 인철은 처음 한동안 그 책은 독일어를 제대로 공부해 원문으로 읽어야 할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나아가기를 머뭇거렸다. 하지만 막상 책을 덮으려 하면 세심 그런 방식으로 추구되는 존재의 본질이 결국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읽어나가 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상당히 자라 있던 지적 호승심도 그런 중도 포기를 허락하지 않았 다. 그때 인철이 활용한 것이 한문 고전을 익히면서 터득한 나름의 독해법이었다. 두어 해 전 대입 국어 과목 준비를 하다가 한시를 통해 한문 고전에 흥미를 느껴 인철은 홀로 <논어> 를 시작해보았다. 영어나 국어에서처럼 원문과 해석을 한줄 한줄 대조하며 읽어나가는 방식 인데, 그걸로는 진도가 느릴 뿐만 아니라 일관된 사상의 맥락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읽기를 뒷날로 미룰까 하다가 우선 내용만이라도 알아둔다는 기분으로 한글로 된 해석만을 골라 이틀 만에 읽어치웠다. 누가 물으면 내용이라도 대강 일러줄 수 있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 억지스런 통독이 뜻밖의 효과를 나타냈다. 글로 정연하게 요약할 수는 없어도 공자가 그 책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생각의 전모가 어렴풋하게나마 잡혀왔고, 그 사이 기 억에 새겨진 인상 깊은 구절들은 새로운 호기심으로 재독을 요구했다. 그래서 두번째는 인 상 깊은 구절들만 원문 대조로 읽게 되었는데, 그때는 제법 한문의 멋이랄 수 있는 함축과 비유의 묘미들까지 느껴졌다. 이어 세번째는 모든 문장을 원문과 대조하며 읽고 중요한 구 절은 외우는 단계로 발전했는데- 만약 입시 준비의 중압이 아니었더라면 그보다 훨씬 더 < 논어>에 정통하게 되었을 것이다. 인철은 그 방식대로 각주조차 들여다보는 법 없이 <존재와 시간>을 읽어나갔다. 어떤 때 는 한 절 거의를 줄거리와는 무관한 소설의 분위기 묘사를 읽어나가듯, 또는 무슨 현란한 관념들의 실루엣을 구경하는 기분으로 지나갈 때도 있었다. <논어> 때처럼 이해가 되고 인 상을 남긴 것들만의 의식의 바닥에 침전되어 그들 나름의 메커니즘으로 재구성되어 주기를 랄 뿐이었다. 예사 아닌 열정과 참을성으로 덤벼들었지만 두꺼운 4X6배판을 다 읽는 데는 꼬박 사흘이 걸렸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사흘째 새벽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인철이 느낀 것은 꼬 이고 뒤틀린 논리의 미로를 헤매다 겨우 빠져나온 듯한 안도뿐이었다. 휑한 머리로 핵심이 될 만한 개념들을 몇 개 떠올려보았지만 실존은 그 책을 읽기 전의 귀동냥과 나름의 짐작 때보다 오히려 더 막연했다. 인철에게 어떤 정신적인 강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적인 부분에서 더 왕성하게 작용 하는 호승심일 것이다. 그것은 때로 그만큼 더 참담한 열패감으로 급전하여 그를 의기소침 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근거도 없는 자신감으로 독학의 폐해를 기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든 바닥이 드러나보일 때까지 밀고 가는 집요함은 지식을 길러가는 데 흔치 않 은 장점이 되었다. 그때도 그랬다. 인철은 그런 결과에 개의하지 않고 다시 보름에 걸쳐 나머지 네 권을 읽 어나갔다. 전집은 마음먹고 꾸민 것인 듯 정식의 저술들뿐만 아니라 하이데거 말년의 강연 원고 같은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부분에 이르러서는 좀더 의미가 뚜렷해져왔지만 다 읽고 난 뒤의 결과는 첫권 <존재와 시간>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존재, 존재자, 현존재, 혹은 정재, 안전 존재, 세계 내존재, 공존재, 구조, 심문자, 본질, 그 리고 실존은 여전히 뒤엉킨 채였다. 머릿속에 남겨진 몇몇 인상적인 구절들도 그랬다. "신만 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라든가 "대지는 잘못 이용되었고 지구는 존재사적으로 길 잃은 별이다"같은 구절들도 무 앞에 선 개인의 형이상학적 불안과는 잘 연결되지 않았으며, 때로 그가 다른 곳에서 인용한 휠덜린의 시구 같은 것은 오히려 그것들과 충돌하는 느낌마저 주 었다. 천상의 신들이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인간들이 먼저 심연에 도달한다 그들은 전회한다 그러나 참된 것이 일어날 그 시간은 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철은 남은 방학 기간을 모두 바쳐 스스로도 무모하게 생각되는 그런 방식으로 거듭 읽어나갔고, 신학기 등록이 시작될 무렵에는 그럭저럭 세 번을 훑을 수 있었 다. <논어>때와 같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성과는 있었다. 비약과 억측이 섞인 대로 하이데거 가 말하는 실존의 전모가 어렴풋하게나마 잡혀왔다. 냉정히 보면 그때 인철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있지도 않았고 그 철학에 특별히 심취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만한 성과나마 이룰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짚어볼 필요가 있을 성싶다. 그뒤 20년쯤 뒤에 이 나라에는 좌파 이론서가 쏟아지듯 출 판된 적이 있다. 그 책들 중에는 우리 사회의 자정 작용으로 무의미해진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사후 검열로 출판이 금지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위험스러우면서도 그 위험성이 별로 논의 되지 않은 책이 한 권 있다. 바로 80년대 후반에 나온 <철학대사전>이란 책이다. 그 책은 사회주의 번성기에 소련과 동구의 석학들이 모여 철학을 사회주의 혹은 마르크스주의 관점 에서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기독교 신학에서 가르치는 비교 종교학 같은 것 으로, 거기서는 마르크시즘과 그 선구가 되는 철학 외에는 모두 비판적인 관점에서 서술되 고 있어 그 책에 의지해 철학 사상을 이해하려는 초심자는 은연중에 마르크스를 지향하게 된다. 뒷날 인철도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그 책을 한 권 샀는데, 우연한 기회에 실 존주의 항목을 살펴보다가 묘한 감회에 빠져들었다. 실존주의를 주관적 관념론으로 못박고 시작한 그 사전의 비판적 해설은 다른 어느 철학을 대할 때보다 격렬하고 공격적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실존 개념으로부터 출발함으로써 물질과 의식(주체와 객체)간의 인식 론적 구별을 거부한다. 실존주의자들에게 있어 철학의 근본 문제란 지금까지 철학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선입견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써 실존주의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펑가절하 하고, 특히 과학적 인식의 가치를 대폭 깎아내린다. 실존주의자들에게 객관적 실재란 과학적 인 방식으로는 인식 불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체험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실존주의자들 이 체험과 사유를 동렬에 놓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실존주의는 방법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체계에 있어서도 자신의 연구를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수행하여 처음부터 모든 합리적인 인식 방법과 결별한다. 비이성을 위해 이성을 평가절하하는 일은 실존주의에서 그 극단에 이른다.>> <<실존주의는 그 대변자들에 따라 여러 가지 상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용어, 사로 다른 서술 방식, 그리고 서로 다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실존주의의 다양한 변종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즉 그들 모두가 자신들이 주관 적으로 고착시켜버린 실존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 과학적 사유 즉 과학 일반에 대한 멸시와 평가절하, 불가지론, 철학 전통으로부터의 의식적인 절연, 불안이나 혐오와 같 이 일면 심리적으로 비정상적인 상태를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로서 집중적으로 다룬 점, 방 법상으로뿐만 아니라 체계적으로도 의도적인 비합리주의, 과학적 사유를 체험으로 대신한 점, 특히 중요한 것으로 그들의 절충주의, 마지막으로 인간을 사회로부터 분리시켜 추상적이 고 형이상학적, 비역사적으로 다룬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실존주의는 그 성격으로 볼 때 철두철미하게 염세적이고 허무적인 이론이다. 그것은 모든 집단적인 책임을 해제하 고 모든 이념을 파괴하며 객관적 척도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끼친다. 실존주의는 개 별적 존재이자 유적 존재인 인간에게는 본래부터 타자에 대한 의존이나 지향 혹은 그 밖 의 어떤 관계도, 특히 어떤 사회적 관계도 결여되어 있음을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실존주의가 인간의 본질로서 '실존' 내지는 '현존재'를 제시함으로써 보여주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여행기에 '부르주아적 인간'이 처한 희망 없는 현실인 것이다. 실존주의가 지닌 문제틀에 비추어볼 때 실존주의는 현대 부르주아 철학의 여타의 입장들과 거의 다를 바 없이 특정한 사회 역사적 상황에 놓인 부르주아적 인 간의 현존을 문제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실존주의에 의해 던져진 '영원한 물음들'이라 는 것도 제국주의 사회가 처한 위기 이데올로기적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인용이 좀 길 어졌지만 인철은 해석보다 훨씬 긴 그런 비판들에서 비로소 20년 전의 자신이 왜 기질적으 로 딱 맞지도 않는 실존주의에 그토록 많은 시간과 열정을 바쳤는지를 이해할 단서를 찾은 기분이었다. 거기서 이루어진 비판의 항목들 하나하나를 오히려 그 철학의 매력으로 느낄 정신들도 있다는 것을 그 사전의 편찬자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면, 오래잖아 자신들의 철학 이 받게 될 수모나 그 위에 세워진 체제의 허망한 붕괴를 뒤로 더 미룰 수 있었을는지도 모 른다. 제 22 장 또 다른 시작 "검사를 더 해봐야겠지만 이번엔 틀림없는 것 같군요. 축하드립니다." 의사가 청진기를 귀에서 뽑으며 영희를 보고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뜻의 미소를 지어보였 다. 그로서는 그럴 만도 했다. 지난 봄 영희의 임신은 불행히도 석 달 만에 자연 유산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때 그 뒤치 다꺼리를 맡아준 게 그 산부인과였다. 의사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영희는 자신이 다시 임신하지 못하게 될까봐 진심으로 걱정했다. "아유, 축하드려요, 아줌마. 정말 기쁘시겠어요." 사정을 아는 간호원도 영희를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영희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창현의 아이를 지운 이후 함부로 몸을 굴리던 시절의 후유증 탓인지 억만과는 처음부터 피 임을 하지 않았는데도 일 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다가 겨우 들어선 게 지난 봄의 그 임신이 었다. "정말이세요? 믿어두 될까요?" 영희가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한 채 다시 한번 물었다. 의사가 이번에는 조금 측은해하 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틀림없다니까. 태아가 정상인지는 더 조사해봐야겠지만..." 그제서야 영희는 비로소 그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처럼 서서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내 가 정말로 임신을 했다. 나도 이제 진짜로 아이를 나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자 무언가 밝고 따뜻한 빛 같은 것이 머릿속을 환히 비추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대 산 나머지 오관은 한동안 무엇에 마비된 것처럼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영희가 다시 밝은 의식을 되찾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멍한 기분으로 간호사에 이 끌려 이러저런 검사를 받고 기다리는데 의사가 이번에는 다소 위엄 섞인 어조로 말해주었 다. "석 달째요. 태아도 정상이고. 착상도 잘된 것 같고. 하지만 태반이 정상정인 사람보다 약 하니 조심해야 할 거요. 무슨 일 있으면 얼른 병원으로 달려오는 거 잊지 말고." 병원을 나온 영희는 택시부터 잡았다. 어서 빨리 시집으로 돌아가 임신 사실을 알려야 한 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황홀한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제야말로 나도 뿌리를 내리게 되는구나. 그런 감 격에 이어 누구에게 먼저 알릴까를 생각하다가 비로소 영희는 아직은 비참투성이인 현실로 끌려나왔다. 가장 먼저 알려야 할 사람으로 아이의 아버지인 억만을 떠올리자, 곧 치러야 할 한바탕의 악전고투가 뒤따라 상기된 까닭이었다. 지난번의 사고 뒤로 억만은 한동안 근신하는 척했다. 영희가 시키는 대로 시아버지를 도 와 들에 나가기도 하고 집 안에서도 이것저것 장남이자 작은 가장 노릇을 해냈다. 좋아하는 술도 끊고 담배마저 청자에서 파고다로 내릴 때는 영희까지 은근히 감탄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억만이 노리고 있던 것은 시아버지와 영희의 방심이었다. 그는 영희와 시아 버지를 등에 업고 하는 일을 모르는 척, 관심없는 척하고 있었지만 실은 모르지도 않았고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확실하게 알고 자신이 이용할 수 있을 때를 기다리고 있 었을 뿐이었다. 순간순간 자신을 다잡으며 세상과의 비정한 싸움을 벌이고는 있어도 영희는 원래 모진 성 격이 못 되었다. 매일 밤 한 이불 밑에서 몸을 맞대고 자는 남편이다 보니 차츰 그런 억만 이 안쓰럽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영희는 억만의 무르고 엉성한 측면만 보아온거나 다름없었다. 허름한 요정의 얼굴 마담으로 있는 영희에게 억만이 준 첫인상은 손님 중에서도 '봉'이 라고 불리는 전형이었다. 아무런 실속 없는 허세의 대가로 술값 바가지를 쓰고 제 살을 깎 으면서도 언제나 허허거리는 그를 보면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특히 그가 그렇게 흩뿌리 는 돈이 실은 범 같은 아버지를 속여 장사 밑천으로 끌어낸 것이며, 필경에는 호된 값을 치르게 될 거이라는 걸 알게 된 뒤로는 그가 딱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그도 전혀 계산이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봉으로 취급되건 바가 지를 썼건 그는 어쨌든 술집 거리에서 최고의 단골로 우대받았고, 원하는 것은 거의 모두 얻을 수 있었다. 달리 남에게 우대받기를 기대할 데가 별로 없는 그이고 보면 봉이 되고 바 가지를 쓰는 일이 실은 알맞은 값을 치르고 있는 셈이기도 했다. 영희가 그를 결혼 상대자로 점찍게 된 일도 그랬다. 뒷날 그는 영희의 남편으로 좀 고달 프긴 해도 긴 놀이판 같은 일생을 누리게 되는데, 그걸 행운으로 볼 수 있다면 그 행운도 바로 그런 첫인상에서 왔다. 영희는 영희대로 봉을 잡고 바가지를 씌운 것이었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당시의 그가 영희보다 나은 아내를 얻을 가망은 별로 없었다. 따라서 억만은 달리 말하면 자신의 추구에는 누구 못지않게 집요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그 대상이 저급한 쾌락이었고 추구 방법이 천박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영희 는 자신에게 유리한 면으로만 억만을 이해하고 있다가 처음으로 호된 값을 물게 되었다. 전해 가을 내내 한눈 파는 법 없이 집안일을 거들던 억만은 겨울 들어 농사일이 좀 한가 해지자 바깥 나들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과는 딴판으로 그 나들이는 건실하기 짝이 없었 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셔도 주머니에 있는 푼돈으로 감당할 수 있는 대폿집이었고, 어 쩌다 늦어도 통금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영희에게도 성실한 남편이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이 그렇게 묶여 살게 된 게 영희 때문이 라 할 수도 있었지만 드러내놓고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잠자리에서도 충실하 여 영희로서는 불편하고 불안했던 신혼 시절을 뒤늦게 되찾은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정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아버지가 말죽거리 배밭에 새로이 비닐하우스를 짓 기 시작하자 억만은 아무 불평 없이 그 유별나고 철이른 농사일로 돌아갔다. 한겨울인 데다 인색한 농부답게 꼭 필요한 자재만 사고 나머지는 몸으로 때우는 공사라 영희가 길에서 보 기에도 고생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번은 점심을 가지고 갔다가 바람받이 언덕에 서 시퍼렇게 언 얼굴로 비닐하우스 골조를 얽고 있는 억만을 보고 눈시울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스무 평짜리 비닐하우스 새 동을 다 얽은 날이었다. 여러 날에 걸친 고된 일 에 지친 탓인지 저녁에 돌아온 억만은 초저녁부터 허리가 아프다고 누워 끙끙댔다. 영희가 더운물을 대야에 담아와 찜질을 해주자 말없이 허리를 맡기고 엎드렸던 억만이 갑작스레 한 숨을 푹 내쉬었다. "왜 그래?" 영희가 공연히 죄지은 기분이 되어 조심스레 물었다. 억만이 재떨이를 끌어당겨 담배에 불을 붙이며 뜻 모를 말을 했다. "이거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몰라." "뭘 말야?" "꼰대 말야. 정말 당신 뜻대루 될까? 결국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중국 놈이 버는 거 아냐?" 그제서야 영희는 뜨끔해서 하던 찜질을 멈추었다. 억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뻔히 알면서 도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당신 지금 아버지를 말하는 거야? 그리구 곰은 뭐구 중국 놈은 또 뭐야?" "몰라서 물어? 아버지는 돈 대고 당신은 열심히 딱지 모으지만 그게 정말 우리 이 신세 면하게 해줄까 이 말이야." 이게 내가 알던 그 사람일까 싶게 자신과 시아버지가 하는 일을 훤히 꿰고 있는 말투였 다. 거기서 영희는 잠깐 경계심이 일었으나 여전히 내색 않고 말했다. "당신하고 도련님말고 아버님이 또 숨겨놓은 자식이라두 있어? 아버님이 벌면 그게 결국 은 우리 돈 되는 거 아냐?" "첫째로는 까짓 땅장사가 돈이 되느냐는 문제지만, 그게 잘돼 떼돈을 벌었다구 쳐도 그래. 쇠심줄 같은 꼰대가 그걸 우리보고 흥청망청하라구 내놓겠어? 기껏해야 우리에게 돌아오는 건 꼰대가 죽은 뒤일 텐데. 다 늦어 천금이 있으면 뭘 해? 그걸 생각하면 절로 맥이 빠진다 구." 거기까지 듣자 영희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어째 좀 철이 드는가 싶더니 으이구, 누가 엉망진창 강억만이 아니랄까봐. 결국 그 알량한 노력이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를 위한 거 란 말이지... 그러나 영희는 이번에도 내색하지 않았다. "억만씨, 몹시 힘드는가 보구나. 하긴 나도 당신 힘든 거 알아. 그렇지만 별수 있어? 참아 야지." 그렇게 콧소리로 달래놓고 슬쩍 속을 떠보았다. "왜, 뭐 생각하고 있는 거 있어?" 그러자 억만이 널름 걸려들었다. 몸을 뒤집어 간절한 눈으로 영희를 바라보며 제법 설득 조로 말했다. "정말 더는 못견디겠어. 그놈의 중학교에 갈 때부터 체질이 바뀐 거라구. 나는 노동일 할 체질이 아냐." "그래서?" "곧 봄이 와. 아버님께 말씀드려 장사 밑천 좀 얻어줘. 한 2백만. 이번에는 밭떼기를 좀 해볼까 해. 일찌감치..." "또 그놈의 잘난 장사? 아버님께 씨알이나 먹혀들 것 같애?" "돈은 당신이 관리하면 되잖아? 지방에 계약하러 갈 때는 당신이 따라가구... 이번에는 정 말 잘해볼게. 사나이 체면이 있지. 한 번 실패했다구 영원히 실패자로 낙인찍혀 평생 이렇게 빌빌대며 살아갈 수는 없잖아?" 또 그 얘기- 영희는 이제 알 것 다 알았다는 기분이 되어 목소리를 차게 했다. "억만씨, 우리 부부 맞지? 그럼 내 말 잘 들어줘. 어른이 된다는 것은 될 일과 안 될 일을 구별하고 큰 것과 작은 것을 구별할 줄 안다는 거야. 지금 아버님한테 그 말 한다구 될 것 같애? 공연히 나까지 의심받게 만들지 마. 나도 지금 힘들게 버텨가구 있다구. 그리고 설령 그게 된다 해도 아직은 아냐. 얻어도 너무 작다구. 좀더 기다려 큰 걸 얻어봐. 다시 실패를 하지 않게 큰 걸로 한몫 얻어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자구. 두 번 다시 아버님께 손벌리지 않아도 될 만큼 큼지막한 걸루 말야. 억만씨, 내 말 알아들을 수 있지?" 영희는 그러면서도 은근히 억만의 반발이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억만의 반응이 아주 뜻밖 이었다. "그건 알아. 하지만 너무 힘들어서... 그냥 해본 소리야." 억만은 그렇게 순순히 물러섰다. 틀림없이 별러서 꺼낸 말 같은데도 아무 뒤끝 없이 물러 나는 게 이상했으나 영희는 그것까지 추궁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지난 몇 달에 걸친 억만의 노력인 너무도 가상했다. 하지만 뒤끝이 영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억만은 그날 밤도 몇 번이나 속 깊은 곳에서 우 러나는 한숨으로 영희를 가슴 아프게 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는 그답지 않은 침묵에 빠져 들었다. 오래잖아 영희는 억만의 그 같은 한숨과 침묵이 자신에게 다해지는 말없는 억압이라는 것 을 느끼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그것들과 잘 배합된 일상 생활에서의 충실함은 영희를 한층 부담스럽게 했다. 한 달 남짓 그 부담을 견뎌내다 끝내 못 이긴 영희는 어느 날 밤 스스로 그 얘기를 다시 꺼냈다. "당신 아버님 거들어 일하기 많이 괴로워?" "아니, 괴롭다기보다 그저 막막해서..." 억만이 별로 기대하지 않는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영희는 그게 더 마음에 걸렸다. "막막하다니? 뭐가?" "나도 당신도 손발이 닳도록 애쓰고 있지만, 정말로 뭐가 될까 싶어서. 이대로 한세상 썩 는 게 겁나."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지금 모든 게 잘돼가고 있다고 보는데." "나는 그게 통 못 미더 워. 봐, 당신이나 나나 뼈빠지게 뛰고 있지만 우리 손에 들어와 있는 게 뭐 있어? 칼자루는 아버지 손에 있잖아? 그 꼰대 마음 변해 나 몰라라 하면 우리는 하루아침에 끈 떨어진 조 롱박 신세라구." 그런 억만의 표정에는 어떤 쓸쓸함까지 내비쳤다. 거기서 영희의 마음이 다시 약해지기 시 작했다. 하긴 그래. 모진 세상 모르고 자란 사람이... "부모 자식간에 칼자루는 뭐고, 끈 떨어진 조롱박은 또 뭐야? 너무 조급하게 그러지 마. 나도 다 생각이 있어." 영희가 자칫 곳을 털어놓을 뻔했다가 겨우 마음을 다잡아 그렇게 얼버무렸다. 그런데 그 런 영희의 억양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억만의 목소리가 갑자기 은근해졌다. "생각이 있다구? 하긴 천하의 수단꾼 이영희 아냐? 그래 뭔데?" 그런 점에서도 억만도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영희는 그제서야 아차, 싶어 얼른 말을 돌 렸다. "다른 건 아니고... 참고 기다리면 좋아질 거란 뜻이야.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도 있잖아?" 그러자 억만은 다시 막막하고 쓸쓸해하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몇 마디 신파조로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털어놓다가 슬쩍 엄포까지 곁들었다. "당신이 그러니까 견딜 수 있을 때까지는 견뎌보겠지만... 자신없어. 정 안 되면 선원증 사 서 외향선이라도 칼 거야. 엎어지든 자빠지든 나 혼자서 어떻게 해보겠어." 그 엄포도 영희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찔른 셈이었다. 따지고 보면 영희의 세상에 대한 받아치기 자세가 억만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었다. 억만이 시집, 시아버지와 영희를 연결해주 지 않게 되면 지금까지 구축해둔 것이 모두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안 돼... 그러자 억만에 대한 영희의 경계심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못 견디겠어? 그럼 좋아. 당신 나만 믿고 한2년만 참아줘. 그때는 아버님에게 손내밀지 않고도 무얼 해볼 수가 있을 거야." 영희는 급한 대로 그렇게 억만을 달랬다. 그래놓고 보니 어느 시기까지는 자신만의 비밀 로 해두려던 일은 이미 뚜껑을 따보인 셈이 되고 말았다. 억만이 눈빛까지 달라져 물었다. "당신을 믿고? 당신 뭐든지 생기면 그대로 아버지한테 꼬박꼬박 바치는 사람 아냐? 아버 지가 오리발 내밀면 당신도 나나 마찬가지 빈털터리야." "실은 말이야, 우리 몫을 따로 챙기고 있는 중이야. 아버님을 속이는 게 아니고- 내가 낸 이익 부분에서 미리 현물을 떼두는 거지." "현물을 어떻게?" "당신도 좀 아는 거 같으니까 말해두는데- 지금 하는 광주대단지 택지 분양 딱지 장사 아 주 괜찮을 거야. 위험한 게 없진 않지만 잘만 되면 열 배 장사도 넘어. 그래서 아버님 돈으 로 산 것은 두 배 장사가 될 만큼만 넣어드리고 나머지는 내가 따로 가지고 있어. 지금 여 섯 장이야. 개중에는 꽤 큰 사거리 모퉁이라 상가 따위는 저리 가라는 지번도 있어. 당장 내 다 팔아도 50만 원은 받을 수 있을 걸." 그렇게 말할 때 영희는 은근히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거기다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억만의 대꾸가 더욱 영희를 부추겼다. "세상에 그런 장사가 어딨어. 사기 당하고 있는 거 아냐?" "그건 안심해도 돼. 당신 광주대단지 안 가봤지? 거기 가면 복덕방이 수백 개야. 만약..." 영희가 공연히 달아올라 그때까지 한번도 털어놓지 않았던 광주대단지의 실태를 아는 대 로 일러주었다. 억만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영희가 한참을 떠들고 난 뒤에야 겨우 알아듣겠 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장된 미욱함이 영희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어 영희는 경대 서랍과 바닥사이의 공간에 깊이 감추어두었던 분양증을 꺼내보이기까지 했다. "역시 당신이야. 알았어. 그럼 얼마간 더 참지." 그제서야 억만은 어두운 표정을 풀며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그날밤 그들 부부는 그 어 느 신혼 부부보다 더 요란한 밤을 지샜다. 이튿날에야 겨우 평소의 경계심을 회복한 영희는 새삼스런 불안으로 주의 깊게 억만의 행 동을 살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억만에게는 이상한 낌새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충실하게 시아버지를 도우며 집안에만 박혀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영희가 한나절 집을 비운 사이에 억만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느 정 도 마음을 놓고 있던 영희는 처음 그런 억만에 대해서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아침까 지도 천연덕스럽게 시아버지를 따라 비닐하우스로 나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밤을 지새고 이튿날이 되어도 억만이 돌아오지 않자 영희는 비로소 짚여오는 일이 있었다. 영희는 얼른 장롱을 열어 서랍 바닥을 들쳐보았다. 다행히도 거기 숨겨둔 분양증 봉 투는 그대로 있었다. 경대 서랍 아래는 이미 억만에게 알려진 터라 영희는 분양증 봉투를 그리고 옮겨두었던 것이다. 영희는 봉투가 그대로 있어 일순 마음을 놓았다가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다. 얼른 보기에는 분양증이 그대로 있는 것 같았으나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 었다. 영희는 분양증들을 꺼내 하나하나 점검해보았다. 분양증 석 장이 없어지고 대신 그 비 슷한 두께의 신문지가 채워져 있었다. 그것도 석 장 중에 영희가 가장 아끼는 노른자위 비 전의 분양증이 들었다. 정황으로 봐서는 틀림없이 억만의 짓이건만 영희는 한동안 도무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 다. 억만이 그렇게도 철저하게 내심을 감출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도 믿을 수가 없었고, 서 류를 빼낸 뒤 신문지를 채워 부피를 원래처럼 만들어놓은 그 세밀함은 더욱 그랬다. 하지만 기실 영희는 그 뒤 일생 시달려야 할 억만의 여러 결함 중에 가장 특징적인 부분을 처음으 로 경험하고 있는 셈이었다. 억만이 다음날도 돌아오지 않자 아무것도 모르는 시집 식구들은 그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희는 드디어 확증을 잡은 기분이었다. 워낙 뜻밖이라 섬뜩한 중에도 그렇게 된 마 당에는 모든 게 억만의 짓이라는 걸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한번 찾아볼게요." 아침 상머리에서 시어머니가 영희를 힐끔거리며 걱정을 늘어놓자 영희가 그렇게 입을 막 았다. 그때까지도 억만은 자기 손안에 있다는 믿음에 빠져 있던 그녀는 나가기만 하면 금세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나가보니 그게 아니었다. 억만의 친구들을 아는 대로 만나보고 옛날의 단골 집도 다 찾아보았지만 억만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하루를 허탕치고 돌아오다가 기대 하지도 않았던 뺀질이 김사장에게서 하루 지난 후문을 들었을 뿐이었다. "거 참 이상하다. 억만이 걔 다시 장사 시작했다면서 어제 한잔 잘 사고 집에 들어갔는 데..." 그래서 전날 호기를 부린 술집까지는 찾아갔지만 거기서 다시 억만의 행적은 끊겨버렸다. 초저녁에 배추장수 대여섯을 끌고 들어와 한바탕 마시고 집으로 돌아간다며 혼자 나갔다는 게 영희가 마담으로부터 들은 전부였다. 집으로 돌아온 영희는 저녁도 먹지 않고 제 방에 틀어박혀 억만의 행방을 추리해보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에 대한 지식을 모두 끌어내 그가 갈 만한 곳을 추측해보았으나 낮에 이미 들른 곳을 빼고는 더 짚이는 데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별다른 현금 없이 집을 나갔 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면서 비로소 그가 찾아갔을 법한 곳을 짐작해냈다. 바로 정사장의 부 동산 사무실이었다. 만약 억만이 들고 나간 게 집문서나 땅문서였다면 그걸 잡히고 돈을 빌리기는 어렵지 않 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비록 노른자위 땅이라고 해도 일반인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신도시 의 택지분양증을 가지고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가치를 잘 아는 전문가에게나 넘길 수 있는데, 억만이 아는 방면의 전문가는 정사장뿐이었다. 이번에는 영희의 짐작이 맞았다. 다음날 일찍 사무실로 찾아가자 정사장은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말했다. "혼자 와서 눈을 내리깔고 죽는 소리 할 때 내 알아봤지. 결국 그랬었구먼... 그저께 낮에 왔었어. 아닌 밤에 홍두깨로 광주대단지 딱지 석 장을 내놓고 백만 원만 만들어달라는 거야. 나는 그런 물건 취급도 않지만 알아보니 그만 값은 나가는 물건이더만. 그래서 우선 50만 원 만들어 줬지. 꼭 내가 사겠다는 것은 아니고 맡아두는 셈 쳤지. 진마담 그거 만든다고 지 난 여름 아등바등 뛰어다는 거 내가 잘 알잖아? 욕심에 벌써 넘길 리는 없고... 무슨 사정이 있는 거 같아서 잔금은 일부러 미뤄둔 거야. 내일 오후에 받으러 오기로 돼 있어." 불행에 단련된 탓일까. 정사장으로부터 그 얘기를 듣는 영희는 맥이 쭈욱 빠지는 가운데도 한 가 닥 안도를 느꼈다. 이 인간이 그래도 막장까지 가자는 것은 아니었구나. 아직은 50만 원밖 에 저지르지 못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분노와 허탈감으로 멍하던 머릿속은 피해의 최소화 는 방향으로 급선회했다. 그런데 영희가 임신과 관련된 몸의 이상을 느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부글거리는 속을 진 정시키기 위해 냉수 한 잔을 청해 마시는데 갑자기 물컵에서 비릿한 쇳내음이 나며 구역질 이 났다. 영희는 입에 품은 물을 황급히 뱉어냈다. 그래도 속은 이내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원인 모를 오한까지 느껴졌다. 영희는 처음 그게 억만의 일 때문에 속이 뒤틀려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집으로 돌 아가는 길 내내 메슥거림과 오슬오슬함이 가시지 않자, 비로소 그쪽으로 의심이 갔다. 그러 잖아도 그 며칠 유달리 비위가 약해지고 몸이 나른해오는 걸 느껴오던 차였다. 생각이 그쪽으로 쏠리자, 억만의 일은 잠시 뒷전으로 밀렸다. 지난 봄 유산을 했을 때 영 희의 상심은 컸다. 뚜렷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 이미 영희는 억만을 대신할 수도 있는 어떤 존재에 대해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다시 그 기대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기대가 자신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가슴 벅찬 일이었다. 영희는 그날 산부인과를 찾을 때까지 억만의 일은 거의 잊은 채 임신일까 아닐까를 확인하는 데만 매달려 있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다? 이 인간을 만나게 되면 이번에는 어떻게 다뤄야 하나...' 영희는 택시를 정사장의 사무실로 돌리게 하고 생각을 다시 억만의 일 쪽으로 돌렸다. 냉정해지려 고 애써도 새삼 속이 끓어올랐다. '저번에는 현모양처 흉내를 내며 애원하고 설득했지. 역시 그 방법은 이런 인간에겐 맞 지 않아. 내가 하는 게 싸움이라면 어차피 그런 고상한 방법은 틀렸어. 이런 인간은 뒷골목 쓰레기나 진배없어. 그것들을 다루는 방법뿐이라구. 좋아, 네가 바란다며 그래주지...' 영희 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하지만 그 결론은 이미 어제 그제 나 있던 결론이었다. 뜻밖의 임신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던 생각을 되살린 것뿐이었다. 그 증거가 벌써부터 영희의 핸드백 속 에 들어 있는 미장원용 면도칼이었다. 억만의 겁 많고 무른 성격을 노린 그녀 나름의 처방 이었다. 하지만 그 면도칼로 바로 억만을 위협해야 할지 적당한 자해로 겁을 주어야 할지는 결정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억만을 공격하는 것은 억만이 반발할 경우 부부 관계를 치명적으 로 해칠 우려가 있었고, 자해는 전에 음독으로 한번 써먹은 적이 있어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영희가 다시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떠올린 것은 정사장 사무실에 이른 뒤였다. 정사장의 사무실에 앉아 기다렸다가는 억만이 먼저 자신을 보고 피할 염려가 있어 영희는 정사장의 사무실이 잘 보이는 맞은편 생과자점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자릿값으로 크림빵 두 개를 시켜 막 먹으려 하는데 다시 심한 구역질을 느꼈다. '이번에는 누구 것이든 피를 봐야 되겠어. 섬뜩해서라도 두번 다시 이런 짓을 할 엄두 가 나지 않게 만들어야지.' 마침 그렇게 결심을 굳히고 있던 터라 그 구역질로 자신이 임신했다는 걸 상기하자, 영희 는 갑자기 낭패한 기분이 들었다. 집을 나와 십 년 가까이나 삶의 밑바닥을 구르기는 했지 만 어렸을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태교의 중요성까지 잊지는 못할 까닭이었다. 어 머니가 나쁜 생각을 하면 뱃속의 아이도 나빠진다는데... 거기다가 무슨 짓을 했건 그 인간 은 바로 이 아이의 아버지가 아닌가... 영희는 거기서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임신을 앞세워 애원하고 매달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섬뜩한 추억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 옛날 창현에게서 맛본 쓰 라린 배신감이 되살아난 까닭이었다. 임신이란 남자를 잡아놓고 길들이는 데는 그리 유력한 무기가 못 되었다... '그래, 근거도 없는 환상으로 설건드려 이런 인간의 기를 살려둘 필요는 없어. 여지없이 짓밟아주지 않으면 반성할 줄 모르는 게 이런 쓰레기들의 특징이야. 어쩔 수 없어. 일생 이 런 낭패를 되풀이 당해가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이윽고 영희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 아먹고 거기에 맞는 계획을 짰다. 우선 이 인간이 나타나면 가까운 여인숙으로 끌고 가... 그 러자 오래 잠들어 있던 공격 충동이 묘한 쾌감까지 동반한 채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런 가 운데도 뱃속의 아이에게 어머니로서의 사과를 잊지 않았다. '얘야, 놀라지 말아라. 나는 지금 정말로 네 아버지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고 너에게 좋은 아버지를 선사하기 위해 어려운 싸움을 하는 거란다. 어쩌면 피를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피는 보다 나은 너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흘리는 값진 피란다.' 밖은 봄기운이 완연한 3월 하순의 늦은 오후였다. 가로수에 아직 잎은 피지 않았지만 푸른빛 도는 움은 겨울의 그것 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영희에게는 그런 봄기운도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억만은 약속된 시간보다 좀 일찍 나타났다. 바로 정사장의 사무실로 들어가지 않고 주변 을 돌며 한참을 살피다가 들어가는 게 다시 한번 영희가 그때껏 모르고 있었던 그의 세심함 을 드러냈다. 영희는 억만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생과자점을 나와 덮치듯 뒤따랐다. 들어가보니 정사장은 의자에 앉은 채 벙글거리고 있고 억만은 혼자 달아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안 되다니 무슨 소립니까? 오늘 잔금 주시기로 하시지 않았어요?" "글쎄 그럴 사정이 있다니깐." 정사장이 그러면서 사무실로 들어서는 영희를 보고 눈을 찡긋했다. 정사장의 눈길을 보고 억만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기습처럼 그에게 다가간 영 희는 양복 윗도리 자락 밑으로 손을 넣어 그의 혁대를 움켜잡았다. 색시 시절 배운 일종의 체포술이었다. 아무리 여자 손아귀라지만 일단 그렇게 혁대를 움켜잡히면 웬만한 술꾼은 뿌 리치고 달아날 길이 없었다. "억, 이게 누구야? 왜 이래?" 억만도 본능적으로 영희를 뿌리쳐보려 했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낮으면서 차가운 영희의 목소리가 그런 억만의 기세를 한 번 더 꺾어놓았다. "가만히 계세요. 남 보는데 창피당하지 않으려거든." "왜 이래? 이거 놔. 이거 놓고 말해도 될 거 아냐?" 그렇게 항의하고는 있어도 이미 뿌리치려는 시도는 않고 있었다. 정사장이 빙글거리며 억 만에게 말했다. "아무리 남자끼리의 약속이라지만 알고 찾아온 걸 어쩌나? 무슨 사정이 있었으면 임자에 게 얘기를 하고 가지고 나와야지. 늦었지만 지금이라두 솔직히 얘기하라구. 진마담이 말 못 알아들을 사람도 아니잖아?" "나가요. 우리 조용한 데 가서 얘기해요." 영희가 혁대를 잡은 손을 놓는 대신 억만의 윗도리 옆주머니에 깊숙이 찔러넣으며 말했 다. 그새 기성복을 새로 사입은 듯 번쩍이는 필크천의 새 양복이었다. 영희를 뿌리치기는 혁 대를 잡혔을 때보다 좀 쉬워졌지만 그러려면 양복 주머니가 꼴사납게 찢겨야 할 판이었다. "가긴 어딜 가? 여, 여기서 얘기해. 아니, 내가 바로 말하지. 사실은 말이야..." 억만은 이제 은근히 겁먹은 얼굴이 되어 더듬거렸다. 영희가 그런 그의 팔을 남은 손으로 잡으며 옆으로 끌었다. "여긴 남의 사무실이에요. 우선 나가자구요." "맞아. 다른 데 가서 조용히 얘기하라구. 부부 싸움이란 게 원래 칼로 물 베기 아냐?" 정사장이 여전히 벙글거리며 영희의 편을 들어주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말에 무슨 암시를 받았는지 억만도 그제서야 조금 여유를 찾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영희는 진작에 보아둔 근처의 여인숙으로 억만을 끌고 갔다. "아줌마, 계산은 나중에 할게요. 아무것도 필요없으니 우리 나올 때까지 신경쓰지 마세 요." 접수 창구 지키는 중년 여자에게 영희가 밝은 목소리로 그렇게 당부했다. 그러자 그녀가 영희와 억만을 번갈아 보더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빈방 호수를 일러주었다. "안에 들어가 있어요." 방문 앞에서 영희는 억만을 먼저 방안으로 밀어넣었다. 호젓한 방안에 둘만 남게 되었다 는 게 무슨 자신감을 주었던지 이제 억만은 아무런 망설임이나 뻗댐 없이 들어갔다. 영희는 신을 벗는 체하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지금까지 짜둔 시나리오를 다시 한번 점검했 다. 그리고 가만히 핸드백을 열어 면도칼을 꺼냈다. 필요할 때마다 요긴하게 써온 것이지만 접어두었던 날을 빼서 움켜잡고 보니 스스로도 섬뜩한 데가 있었다. 억만은 그 사이 생각을 바꾸어 어떻게 힘으로 뻗대보기로 작정한 듯했다. 두 다리를 쭉 뻗고 벽에 기대앉았는데 그 자세가 자못 거만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자세가 아직 무르익지 않은 전의를 자극해 영희는 다시 기습 같은 행동에 들어갔다. "야, 강억만! 너 이 새끼야!" 그런 외침과 함께 휘두른 영희의 면도칼이 스윽, 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억만의 앞 가슴을 비스듬히 갈라놓았다. 두꺼운 양복 깃과 안의 와이셔츠까지 갈라놓았지만 영희의 계 산대로 상처는 입지 않은 듯했다. "어, 어억!" 그런 억만의 비명은 놀람에서 나온 것일 뿐, 아픔에서 나온 것은 아닌 듯했다. 허옇게 질 린 얼굴로 몸을 일으키는 그의 표정 어디에도 고통의 빛은 없었다. 영희는 그런 억만의 목 에 면도칼을 겨누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야, 강억만. 너, 이러자고 나하고 결혼했니? 이렇게 너 죽고 나 죽이려구? 이 새꺄, 내가 조금만 손에 힘을 더 주었으면 넌 방바닥에 벌겋게 빨랫줄 널어놓고 골로 갔어." "이거, 왜, 왜 이래?" "몰라서 물어? 더러운 목숨, 그래도 어째 비비대고 살아보려는데 왜 그래? 왜, 자꾸 남의 숨통을 밟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구..." 억만은 손을 허우적거리면서도 감히 영희에게서 면도칼을 뺏을 생각은 못 했다. 어떨 때 는 비상하게 돌아가는 그의 잔머리도 그때는 정지 상태인 듯했다. "바로 대. 이게 무슨 수작이야? 돈은 어떡했어?" "그, 그건 여기 있어. 선원증이라두 사서... 외항선이라두 타려구..." 억만이 그러면서 바지 주머니에서 그의 버릇대로 다발째 함부로 구겨 넣고 있던 돈을 꺼냈 다. 5천원짜리 천원짜리가 뒤섞인 것인데, 아무리 많게 보아도 20만 원이 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영희가 돈 액수를 가늠하고 있는 사이에 한숨 돌렸는지 억만이 더듬더듬 변명을 이 어갔다. "정말로... 이대로는 견딜수 없었어... 한 몇 년... 바다에 나가 떠돌더라도 목돈을 잡아보고 싶었던 거야..." 몰론 뻔한 거짓말이었다. 지난 몇 년 아버지의 돈을 탕진하면서 몸에 밴 탐락에 눈이 뒤 집혔을 뿐 그런 장구한 계획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찢어진 입이라구 말은 그저 철철... 바다에 나갈 새끼가 어중이떠중이 끌어모아 물봉 노 릇부터 먼저 해?" "내가 무슨..." "뺀질이한테 다 들었어. 그래, 그렇게 도둑질해서라두 술 마시구 오입질하니 기분 째지 디?" 그로부터 한 5분 영희는 그런 빈정거림으로 가슴속의 화부터 먼저 풀었다. 그러다가 언제 부터인가 문득 억만의 목에 면도칼을 들이대고 있는 자신의 자세가 난감스럽게 느껴지기 시 작했다. 억만은 정말로 끝장을 내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든 길을 들여 내일부터 다시 여보, 당신 하며 살아야 할 사람이었다. 악에 받친 머리로는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속이 풀리자 비로소 화해와 설득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 난감함이 갑작스런 자포자기로 변했다. '정말 여기서 끝내버리고 말아?' 영희는 퍼뜩 그런 생각을 했다가 화들짝 놀라며 칼을 겨누었다. 억만은 여전히 영희에게 눌린 자세로 눈만 멀뚱거렸다. 그러면서도 무언가를 살피는 눈길에 새삼스런 역겨움을 느끼 면서 영희는 마지막까지 결정을 짓지 못했던 수습의 방식을 순간적으로 선택했다. '여기서 울며 매달리는 것은 너무 갑작스럽다. 어쩔 수 없구나...' 그런 결론이 드는 순간 이를 악물고 면도칼을 들어 왼쪽 팔뚝을 그었다. 싸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바리 코트 소매가 찢어지며 전류처럼 찌르르한 자극에 이어 날 카로운 아픔이 몸을 오그라들게 했다. 본능적으로 힘줄과 굵은 핏줄은 피했지만 상처가 깊 은지 이내 투두둑 피가 방바닥에 떨어졌다. 영희는 별로 과장하는 기분 없이 면도칼을 내던지고 푹석 주저앉으며 오른손으로 왼쪽 팔 뚝을 움켜잡았다. 그제서야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몸을 일으킨 억만이 영희에게 달려들어 부둥켜안았다. 영희가 그런 억만에게 역시 과장한다는 기분 없이 흐느끼며 소리쳤다. "억만씨, 나 좀 살게 해줘. 나 정말 살고 싶어." 그때서야 억만의 눈에도 눈물이 비쳤다. 그걸 보고 영희는 진심으로 간절하게 호소했다. "나는 지금 홀몸이 아냐. 이번에는 유산 걱정 안 해두 된대. 정말루 임신 3개월이라구. 더 구나 이 아이는 억만씨 아이야. 이 아이와 나, 다 같이 살 수 있게 해줘..." 제 23 장 반환점 "명훈씨, 이젠 일어나세요. 아이, 명훈씨이..." 모니카가 콧소리 섞어 그렇게 깨우는 바람에 명훈은 눈을 떴다. 그 무렵 들어 늘 그런 것 처럼 속은 쓰리고 머릿속은 옅은 안개가 낀 듯 흐렸다. 간밤 이방 저방을 돌며 한두 잔씩 얻어마신 술 탓이었다. 이렇게 흐물흐물 녹아버리고 마는가... 꼭히 슬픔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명훈은 그런 아침이면 가슴이 먹먹할 만큼 차오르는 희미한 회한 같은 게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는 모니카의 웃는 얼굴조차 흉측한 나찰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으응, 왜 그래?" 명훈이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모니카를 바라보았다. 명훈보다 더 늦잠을 자기 일쑤인 그 녀가 그날은 벌써 화장까지 마치고 있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환한 얼굴로 생글거리며 꽤 큰 보퉁이 하나를 내밀었다. "어서 일어나 세수하고 이 옷 갈아입으세요. 그 동안 내 맛있는 해장국 차려놓을게." "이게 뭔데?" "한복이예요. 다 큰 어른이 한복 한 벌 없어 되겠어요? 그래서 제가 한 벌 마련했어요. 두 루마기까지 제대로 갖춘다고 갖췄는데 칫수가 맞을지 몰라." 명훈으로서는 더욱 어리둥절해지는 말이었다. 추석, 설날 다 지나가고 4월도 중순인데 난 데없이 한복 타령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웬 한복은?" "그럴 일이 있어요. 어쨌든 어서 세수하고 갈아입기나 하세요. 아마 명훈씨는 한복 입으면 멋있을 거야." 모니카는 그러면서 눈까지 찡긋하고 방을 나갔다. 명훈은 천천히 일어나 이불을 개고 수 돗가로 나갔다. 밖은 맑고 따뜻한 봄날 아침이었다. 마당가의 굵은 등걸에 가지마다 흐드러 지게 피어 있는 목련이 눈부셨다. 대개는 정오가 가깝도록 늘어져 자게 마련인 아가씨들도 그날은 모두 일어났는지 아직은 몇이 수돗가에 남아 부산을 떨고 있었다. "웬일이냐? 너희들. 오늘 무슨 일 있어?" 양보해주는 세숫대야에 손을 담그면서 명훈이 아가씨들에게 물었다. 거기 있던 아가씨 중 에 가장 오래된 한양이 무언가 뜻있어 뵈는 눈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오늘 쉬는 날이잖아요? 날도 좋은 봄날이고... 그래서 창경원에나 가볼까 해서요. 영화도 한 편 보구..." 일요일도 아닌데 쉰다는 것도 그렇고, 또 한 달에 두 번씩이나 쉬는 날이 있어도 고작 낮 잠이나 화투놀이로 때우기 십상인 아가씨들이 그날 따라 모두 일찍 일어나 아침부터 수런거 리는 것도 여느 때와 달랐다. 자신만 빼놓고 무언가 공통의 정보를 가지고 거기에 따라 움 직이는 듯한 것도 이상했다. 무슨 일인가 있다. 모니카가 뭔가를 꾸민 거야. 찬물로 세수해 머리가 조금 맑아지자 명훈 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안으로 들어와 한복 모퉁이를 보자 그런 의심은 더 커졌다. 그 바람에 명훈은 한복을 입다 말고 모니카를 불렀다. "왜 그러세요? 한복 입기가 힘드세요?" 모니카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것두 그렇고 도대체 무슨 일이야? 한복 입고 어딜 가자는 거야?" "시골 사셨다면서 어릴 대 한복 입어보지 않으셨어요? 그렇담 대님하고 고름 매는 건 거 들어드릴게요." 그녀는 명훈의 물음은 깨끗이 무시하고 다가와 고름과 대님만 묶어주었다. 어디서 배웠는지 솜씨가 꽤 날렵했다. 명훈은 그런 그녀에게서 평소와는 전혀 다른 어떤 정숙함까지 느꼈다. 하지만 그게 더욱 궁금증을 키웠다. "무슨 일이냐니깐? 말해봐. 뭘 하려는 거야?" 조끼 위에 두루마기까지 걸친 그를 이모저모 뜯어보며 흡족해하는 그녀에게 명훈이 은근 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제서야 그녀도 웃음기를 거두며 대답했다. "실은 사진을 찍어둘까 해서요. 명훈씨하고 저 둘만의 사진..." "아니, 사진 한번 찍으려고 돈들여 한복까지 새로 맞춰?" "저두 괜찮은 걸루 한 벌 새루 했는걸요." "뭐? 아니, 무슨 사진이 그리 요란해? 둘이 그냥 입던 옷 입고 가서 찍으면 되는 거지."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녀는 뭔가를 말할 듯 할 듯하다가 말끝을 흐리고 재촉만 되풀이했다. "어쨌든 발리 아침 드세요. 어제 아줌마한테 부탁해 특별히 선지로 해장국을 끓여놨어요." 명훈은 그때부터 묘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더 묻지 않고 시키는 대로 따랐다. 이제 더 나빠질 것도 없다... 그런 일종의 방심 상태 탓이었다. 그런데 집을 나선 지 얼마 안 돼 다시 그런 예감을 자극하는 일이 있었다. 천호동 사거리에서 택시를 잡은 모니카가 댄 행선 지 때문이었다. "아저씨, 명동으로 가요. 명동 입구 쪽요." 그 말을 듣고 명훈이 물었다. "아니, 그럼 사진 찍으러 명동까지 간다는 거야?" "그래요. '웰컴사장'에 미리 말해놨어요. 명훈씨도 그 사진관 알죠? 서울서 젤루 유명 한 데." 신문뿐만 아니라 라디오에까지 광고를 내고 있어 몹시 귀에 익은 사진관 이름이었다. 이 건 예삿일이 아니다... 그제서야 명훈도 슬며시 긴장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둘만 찍는 사진이라두 그렇지. 그래 까짓 사진 한 장 찍으려고 택시 대절해 명동 까지 가? 동네 사진관에서 그냥 찍으면 되지." "까짓 사진 한 장이 아니라니까요. 시시한 동네 사진관에서는 찍을 수도 없다구요." "그래서 물었잖아? 도대체 무슨 사진이야? 무슨 사진이 이리 요란해?" "가보면 알아요. 운전사 아저씨도 듣고 있는데..." "거참, 미사일 기지라두 찍는 거야? 운전사 아저씨가 들으면 안 된다는 얘기는 또 뭐야?" "그런 게 있다니까요. 어쨌든 사진관에 가서 봐요." 모니카는 그래놓고 입을 꼭 다물었다. 그러다가 사진관 앞에 이르러서야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명훈씨, 제 부탁 하나 들어주세요. 여기서 시키는 대로 같이 사진 한 장만 찍어줘요." "그래서 왔잖아? 그런데 도대체 무슨 사진이야? 어디 쓰려고 그래?" "명훈씨는 사모관대하고 저는 원삼 족두리 갖춰찍는 사진이에요." 그 말을 듣자 명훈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럼 결혼 사진이잖아?" "바루 그래요." 모니카는 그래놓고 이번에는 애원하는 눈길이 되어 말했다. "저두 내후년이면 서른이에요. 결혼 사진 한 장 걸어둘 나이가 됐다구요. 명훈씨에게 진짜 루 저와 결혼해달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사진 한 장만 찍어줘요. 제 얼굴 더 망가지기 전 에..." "그 따위 사진이 무슨 소용이야..." 명훈이 벌컥 소리치다 모니카의 두 눈에 괴는 눈물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아득한 절망감과 함께 기생집을 드나들면서 알게 된 색시들의 관행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이든 마담이나 술집을 차린 색시 출신의 안주인들 방에 가면 유달리 강조되어 걸려 있는 사진이 바로 그녀들의 결혼 사진이었다. 나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 그녀들은 그 사진을 통해 그렇게 소리치고 있는 듯했다. "아녜요. 일생 좋은 위로가 될 거예요." 명훈은 새삼스런 눈길로 모니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니 언제나 그대로인 것 같던 그 녀의 변화가 느껴졌다. 안광에서만 해도 얄미울 정도로 팽팽하던 얼굴 구석에는 잔주름들이 희미한 그늘처럼 번져나오고 있었다. 뿌리깊은 혐오감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나게 되면 쉽게 욕정으로 어울릴 수 있게 하던 그 몸매의 선정적인 선들도 많이 이지러진 느낌이었다. 너와 이래저래 엃힌 지도 하마 십 년이 넘었나... "알았어. 우선 안으로 들어가." 명훈이 그러면서 앞장을 서자, 모니카는 갑자기 죄진 사람처럼 쭈뼛거리며 따라들어왔다. "오셨군요.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사진관으로 들어서자, 사진사라기보다는 경기 좋은 사업가 같은 느낌을 주는 40대 남자가 반갑게 맞았다. 미리 말은 맞춰두었는지 촬영실 한구석에는 결혼식장 같은 세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조잡하게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봉황을 늘어뜨린 배경 그림도 있고 화환 도 서 있었다. 그 중에서 다시 한번 명훈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은 양쪽으로 갈라 세워 놓은 커다란 명패였다. 거기에는 제법 잘 쓴 붓글씨로 '신랑 이명훈' '신분 유인순'이라 씌어져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시지요." 사진관 조수인 듯한 젊은이가 역시 준비되어 있던 사모관대를 내놓으며 말했다. 명훈은 모욕받고 있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거역 못 할 기분이 되어 그가 시키는 대로 두루마기 를 벗고 사모관대를 걸쳤다. 그 사이 모니카도 원삼을 걸치고 족두리를 썼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사진관 주인이 그런 말로 갑자기 어색해진 둘을 추켜세웠지만 분위기를 바꾸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명훈뿐만 아니라 모니카까지도 무언가 알 수 없는 긴장으로 잔뜩 굳어 있었다. 정작 사진을 찍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모관대를 걸친 채로 두장, 그 리고 새로 지은 한복 차림으로 두 장을 찍었는데 묘한 방심 상태에 빠져 있던 명훈에게는 모든 게 그저 한 순간처럼만 느껴졌다. "자, 다됐습니다. 이제 사흘 뒤에 찾으러 오시면 됩니다." 촬영이 끝난 뒤 주인이 하는 말도 꿈결에서처럼 아련히 귓가를 스쳐갈 뿐이었다. 그러다 가 명훈의 의식이 다시 또렷해지기 시작한 것은 사진관을 나온 뒤였다. "명훈씨, 정말로 고마워요. 이젠 바루 떠나가셔도 한이 없어..." 울먹임 섞인 모니카의 그 같은 말이 날카로운 송곳처럼 명훈의 의식을 찔러왔다. 방금 무 언가 큰일이 일어났다... 명훈은 그 사진의 의미를 축소시키려 애쓰면서도 한편으로는 까닭 모를 불안과 울적함으 로 사흘을 보냈다. 사진은 사진사가 약속한 날짜에 나왔다. 소풍날을 기다리는 국민학교 아이처럼 안달하며 기다리던 모니카는 그날 아침도 거리고 서울로 달려갔다가 해질 무렵 해서야 헤벌어진 입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은수공 액자에 사 진을 담아왔는데, 명훈이 보기에도 잘 나온 결혼 사진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안방 문갑 위에 놓여진 그 사진의 위력이었다. 없던 사진 한 장이 새 로 놓여진 것일 뿐이고, 그나마 그 사진의 내력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데도 그게 업 소 안팎에 미치는 영향은 뜻밖으로 컸다. 무엇보다도 많이 달라진 것은 모니카였다. 그 사진이 문갑 위에 놓여진 날부터 명훈을 대 하는 그녀의 자세는 민망할 정도로 달라졌다. 말은 깍듯한 존대로 바뀌었고, 태도는 공손하 기 그지없었다. 입의 혀 같다던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한다는 말은 바로 그녀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녀는 또 다른 사람의 무례나 무시도 용서하지 않았다. 명훈은 편하게 여기는 아가씨들 이 전처럼 버릇없는 말투를 쓰거나 말대꾸를 하면 그녀는 그 자리에서 정색을 하고 면박을 주었다. "얘는, 너 사장님께 말버릇이 그게 뭐니? 아무리 술주전자 운전사라지만 아래위도 몰라?" 이런저런 물품을 배달하러 온 아이 놈이 어쩌다 명훈에게 불퉁거려도 마찬가지였다. "너, 이분이 누군지 알아? 이 업소 사장님이셔. 너는 너네 사장님한테도 그렇게 버르장머 리가 없니?" 깜박 넘어가는 손님이라도 명훈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용서가 없었다. 전부터 하던 대로 명훈에게 방우, 방우 하면 반말이라도 할라치면 그녀는 드러나게 새치름해진 얼굴로 주의를 주었다. "아무리 농담이지만 방우 소리는 그만 하세요. 싸라기밥 잡순 소리도 마시구요. 그래도 명 색이 이 집 주인인데... 종업원이 열 명 넘는 업소의 사장님이라구요." 그녀가 그렇게 나서서 그런지 상대들도 별저항 없이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여주었다. 그래 서 은근히 감동하다 보면 그녀는 명훈보다 더 위세 좋게 안주인의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었 다. 그제서야 명훈은 그 사진을 찍던 날부터 줄곧 자신을 사로잡아온 까닭 모를 불안감과 울 적함의 진상을 알아차렸다. 이 여자가 바라는 것은 화류계의 여인들의 가여운 자위나 과시 가 아니다. 이 여자는 사진으로 내 일생의 배우자임을 은연중에 기정화하고 있다. 아니, 실 제로도 우리의 배우 관계를 이보다 더 효과적으로 증명해낼 근거가 어디 있는가, 생각이 거 기에 미치자 섬뜩한 기분까지 들었다. 거기다가 며칠 후에 찾아온 모니카의 어머니가 어엿한 장모 티를 내며 전에 없이 말투를 '하게'로 바꾸자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 그 충격은 오래 마비돼 있던 자의식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삶의 밑바닥으로 내던져졌다. 나는 그 비천함과 욕 됨과 나아가 악까지도 기꺼이 껴안았다. 서슴없이 이 진창을 뒹굴려 한다. 하지만 영원히 머 물기 위해 여기까지 내려오지는 않았다. 힘껏 차고 높이 치솟기 위해 바닥을 찾고 있었을 뿐이다...' 의식이란 한번 잠들었다 깨어나면 더 날카로워지는 법이다. 한번 자신을 되돌아보기 시작 하자 명훈도 막연하게 안주해온 지난 여섯 달의 삶이 끔찍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세상의 끝 을 보고 있구나... 하지만 당장 명훈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더구나 그 무렵 그들이 하는 술집의 경기는 예사 아닌 호황이었다. 벌써 지난 음력설 결산 때 모니카는 자 신에 차 말했다. '역시 엄마 눈이 대단해. 우리 잘하면 내년 이때쯤은 이 집을 사버릴 수도 있겠어.' 비록 서울이라기보다는 경기도 시골이라는 편이 옳은 위치지만 계절도 타지 않는 듯했다. 그때만 해도 춘궁기라고 해서 첫 농산물 수확이 있기 직전의 어려움은 농촌뿐만 아니라 도 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술집 같은 업소가 가장 심하게 춘궁기를 타는 편이었는데, 명 훈과 모니카가 하는 '천호옥'은 그런 것도 없었다. 모니카의 어머니가 본 대로 광주대단지와 하남 쪽의 부동산 열풍은 그만큼 뜨거웠다. '하는 수 없지. 이왕 여기까지 내려왔으니 여기서 한몫 잡아 다시 시작해보는 수밖에. 아 니, 어쩌면 나는 아직도 충분하게 영락하지 못했을지도 몰라. 더 가보자. 더 험한 진창에 나 를 굴려보자.' 그렇게 자신을 다잡으며 나날을 때워갔다. 명훈이 그렇게라도 자신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처음 그 장사를 시작할 때 모니카로부터 되풀이 받은 다짐 때문이었다. "야, 너 딴생각 마라. 나는 다만 너와 동업을 하고 있는 거야. 그것도 내가 필요할 때까지 만. 이대로 한평생 보낼 생각은 전혀 없어." 개업 전날 명훈이 그렇게 말했을 때 그녀는 가여울 만큼 순순히 그 뜻을 받아들여주었다. "네, 알아요. 저는 명훈씨가 지금 내 곁에 이렇게 머물러주는 것만 해도 고마워요. 언제든 원하실 때 떠나세요." 따라서 결혼 사진과 관련된 변화가 부담스럽기는 해도 당장 그곳을 박차고 떠날 만큼 절 박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나는 여기 이대로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진이 문갑 위에 놓인 지 보름쯤 되었을까. 어느 날 아침 화장을 하다 말고 그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모나카가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명훈씨, 왜 우리는 아이가 생기지 않죠? 이때쯤 애나 하나 처억 들어 앉으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우리 병원에 한번 가봐야 될까봐." "뭐?" 개놓은 이불에 비스듬히 기대 누웠던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지르며 몸을 일 으켰다. 그제서야 모니카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겁먹은 눈길로 황급히 말을 거두었다. "아니, 아녜요. 혼자서 해본 소리야." 그리고는 금세 흐느낌이라도 섞여들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꿈도 크지. 나 같은 년이... 감히..." 그 바람에 성을 더 내지는 못했지만 그때부터 명훈의 가슴에는 천근 바윗덩어리가 얹힌 기분이었다. '결국 이렇게 가는구나.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로구나...' 하지만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외침이 있었다. '아니야. 여기서 더 내려가서는 안 돼. 이제는 돌아설 때가 되었어. 이게 반환점이야. 지금 돌아서지 않으면 너는 영원히 돌아가지 못해. 애초에 네가 원했던 세계로의 재편입은 영영 글러버리고 말아.' 제 24 장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지난 주에 말야, 집에 갔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엄마하고." 정숙이 생각할수록 우습다는 듯 깔깔거리며 자신의 어깨로 가볍게 인철의 어깨를 밀었다. 교정 언덕의 신록 그늘이었다. 바닥의 잔디도 이제는 한여름의 푸르름을 거의 회복하고 있 었다. 건성으로 듣고 있던 인철이 기계적으로 되물었다. "응, 뭔데?" "고속버스를 타려고 터미널로 나오는데 말야, 갑자기 네 이야기가 시작되었어. 집 앞에서 택시를 기다릴 때부터였을 거야. 그런데 그게 고속버스에 어를 때까지 이어졌으니 결국은 한 시간 가까이를 줄곧 네 이야기만 한 셈이야." "내 얘기를? 뭐 너네 모녀간에 그리 오래 할 만한 얘기가 돼?" "세상 모르고 집 안에만 갇혀 사신 엄마한테는 신기하게 들릴 얘기도 많지. 네 고아원 얘 기나, 집 나가서 고생하며 만났던 사람들 얘기... 게다가 엄마가 재밌게 들어주는 바람에 나 도 그만 깜박한 거야. 그런데 마지막에 엄마가 뭐라신 줄 알아?" "뭐라 그러셨는데?" 인철은 여전히 딴생각에 빠져 건성으로 되물었다. 정숙이 다시 한번 까르륵 목웃음을 웃 고 인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시시콜콜 네 지난날을 알게 되었느냐는 거야. 아무리 동급생이라지만 남자 인 너를 그토록 자세히 알고 있는 게 문득 이상하게 느껴지셨나봐.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내 말문일 콱 막히데. 얼굴이 막 달아오르고... 그래서 어쨌는지 알아?" "?..." "때마침 내가 탈 서울행 버스가 오더라구. 그래서 대답 대신 버스가 왔어요, 하고 얼른 달 려가 차에 올랐지. 엄만 건망증이 심해. 다음에 집에 갈 때까지 그 물음을 계속 품고 있지 못하실 거야." 그래놓고 이번에는 허리까지 접으며 깔깔 웃었다. 그러나 인철은 왜 그 얘기가 그토록 우 스운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깔깔거리는 정숙을 어정쩡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정숙이 웃음을 멈추었다. "넌 우습지 않아? 그 난감한 순간에 맞추어 버스가 와준 거. 아슬아슬하게 말야..." 그러다가 인철의 표정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이 되어 따지듯 물었 다. "너 딴생각하고 있었구나. 뭐야? 남은 재미날 거라고 일껏 얘기하고 있는데." "아, 아냐. 나고 재미있었어..." 그제서야 당황한 인철은 얼른 기억을 더듬어 그녀의 말 중에서 재미의 요소를 찾아보았으 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너 요즘 무슨 일 있어? 아니, 지난 방학부터야. 사람이 변한 것 같애." 정숙이 정색을 하고 인철을 살피며 물었다. 인철은 까닭 모르게 궁지에 몰린 기분이 되어 황급하게 부인했다. "그렇지 않아. 아무 일도 없어. 그저 좀..." "그럼 네가 지난달에 준 도서 목록 아직 다 읽지 않았다구 그런 거야?" 정숙은 얼토당토않은 원인을 추측하고 차갑게 물었다. "그건 더욱 아니고..." 인철이 강하게 부인했으니 정숙은 믿지 않았다. 오히려 진작부터 별러왔다는 듯 갑자기 공격적인 어조가 되었다. "그러잖아도 그 얘기 좀 하려던 참이었어. 지난번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나 <고독한 군 중>은 읽기라도 좀 편했어. 하지만 이번의 <공화국>이나 <시학>, 그리고 헤로도토스의 < 역사>는 너무 심하지 않아? 그게 이제 국문과 2학년에 올라온 여자 아이가 한 달 안에 정 독하기에는 무리한 도서 목록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구?" 전 같으면 그런 항의를 순순히 받아들일 인철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날은 공연히 죄진 기분이 되어 물러났다. "그래? 마음에 안 들면 다음에 읽어. 나는 지난번엔 현대물이어서 이번엔 고전으로 돌아 간 것뿐인데." "게다가 난 너같이 전공에 쌍권총을 차고도 태연한 그런 취미는 없어. 과제물과 전공 준 비만 해도 바쁘다구. 재미두 차라리 그쪽이 더 있구." 그제서야 그녀가 들고 나온 문제의 심각성이 인철에게도 느껴져왔다. 이제 그녀가 따지고 있는 것은 자신의 말에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다는 따위 사소한 불평이 아니었다. 그들 관계 의 어떤 본질적인 부분과 연관된 문제였다. 지난 가을의 축제 이후 '허심탄회하게 가슴을 털어놓는 친구'로 설정되어 있던 그들의 관계는 크게 달라졌다. 조심스럽지만 상대에 대한 독점욕을 드러내고 성적인 접촉에 대한 상상도 품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로 이루어진 이전 관계가 워낙 견고해 쉽사리 여느 연인들 의 연애 감정으로는 전환되지 않았다. 우의과 성애 사이에 가로놓인 아득한 심연과도 같은 거리는 두 사람을 당황시키고 다급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면서도 만나게 되면 이전과 다름없이 다방이나 식당의 식탁을 마주하고 앉아 또한 전 과다름없는 관념과 추상을 주고받다가 다시 헤어질 뿐이었다. 어쩌다 정숙의 볼에 느닷없 는 입맞춤을 하는 적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럴 용기를 얻기 위해 쥐어짜느라 마음속에서 들인 힘 때문에, 그리고 그 기습과도 같은 접촉에 굳어버 린 상대방의 무반응 때문에, 그뒤는 오히려 더 어색해지기 일쑤였다. 여자조차도 관념화해 사랑하는 인철의 성향도 그들의 연애 감정을 발전시키는 데 장애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다시 명혜를 찾지 않음으로써 관념적인 사랑에서 벗어나고자 했 다. 그리고 정숙에게서 몸과 현실감을 지닌 사랑을 찾았다고 믿었지만 기실 그가 시작하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관념화였다.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정된 관념의 틀 속에 그녀를 집어넣으려고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인철이 정숙에게 자신의 기호와 기준에 따른 독서 목록을 강요하기 시작한 것도 어쩌면 그 관념화의 한 단계일지 모른다. 두 정신의 거리를 보다 가까이하기 위함이라는 구실로 정 숙의 합의를 이끌어내기는 했지만 목록의 선택권을 인철이 독점함으로써 실상은 일방적인 강요에 가까웠고, 그 효과도 연애 감정을 발전시키기보다는 정숙의 정신을 자신이 설정한 관념의 틀 속에 끼워넣는 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정숙이 거기에 정면으로 반발 하고 나선 셈이다. 다른 날 같으면 인철은 그런 정숙의 반발에 대해 분노하며 혹은 열정적으로 반응했을 것 이다. 그런데 그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다는 표시로 기껏 본격적인 논의를 뒷날로 미루자는 제안으로 나타났을 뿐이었다. "알았어. 하지만 그 얘긴 나중에 하면 안 될까? 그래, 우리 월요일쯤 다시 만나 얘기해." 인철이 그렇게 말하자 정숙의 표정이 다시 한번 변했다. 이번에 드러나는 것은 불안 섞인 궁금증이었다. "너 정말 무슨 일이 있는가 보네. 만날 때부터 안절부절못하더니, 무슨 일이야? 뭣 땜에 그래?" 정숙은 전혀 따지는 기색 없이 물었다. 정말로 인철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인철은 순간 바른 대로 일어줄까 싶었으나 묘한 쑥스러움이 앞서 그냥 둘러댔다. "으응, 좀 그런 일이 있어. 하지만 걱정할 일은 아냐. 나중에 말해줄게." "나중에 언제?" "다녀와서." 인철은 그러면서 시계를 보았다. 열한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딜 가는데? 내가 따라가면 안 돼?" "넌 보강 들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하지만 왠지 널 따라가고 싶은데. 그래두 돼?" "아냐. 안 돼. 나중에 보자." 인철은 펄쩍 뛰듯 일어났다. 그러자 정숙도 따라가기를 단념한 듯 말했다. "언제 끝나는데? 오늘 만날 수 있어? 그렇담 보강 끝나고 기다릴게. 엘리제에서." 하지만 인철은 왠지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오늘은 어려울 것 같은데. 시간 약속을 할 수가 없어. 우리 차라리 월요일날 보자. 내일 은 그냥 쉬고." 인철은 그러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숙도 의미 모를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정숙과 헤어진 인철은 미행을 꺼리는 사람처럼 몇 번이나 뒤를 확인하고서야 본관 건물로 들어섰다. 강의실만 있는 본관 이층은 토요일이어선지 전체가 텅 비어 있는 듯했다. 인철은 조용한 복도를 따라 건물 끝에 있는 216로 강의실로 갔다. 작년에 교양 철학을 들은 곳이었 다. 지정된 강의실이 가까워지자 안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렸고 인철의 등뒤로도 다른 발소리가 있었다. 돌아보니 안면은 있지만 인사가 없는 다른 과의 동급생 둘이 인철을 따라 오다가 눈짓으로 알은체를 했다. 그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 같아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제서야 인철은 한형을 먼저 만나 함께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다행히도 먼저 와 강의실 안에서 두런거리던 사람들 중에는 한형을 비롯한 같은 과의 친 구들도 있었다. 그들은 인철을 보자 저마다 소리를 질러 예사 아닌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인철은 그게 신입 회원에게 으레 베푸는 친절로 알았으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했다. 한형 이 조금 전까지 그들에게 읽어주다 덮은 것이 바로 전날 인철이 건네준 원고였기 때문이었 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방금 이형 작품을 읽어주고 있었소. 합평회 시간까지 좀 이 쑤셔 기다릴 수 없어서..." 한형이 그리 너스레를 떨어놓고 다시 웃음기를 거두며 덧붙였다. "어젯밤에 원고 다 읽고 어디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아침에도 이걸 가지고 '현대문학'으 로 뛰어가나, '창비'(창작과 비평)로 뛰어가나 했소." 그 말에 밴 진지함이 모두 강한 전류처럼 인철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직 그들 문학 지망생들의 언어적 관행에는 익숙지 못하지만 그게 대단한 평가라는 것 정도는 인철도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제대병인 동급생 환영회에서 우연히 죽이 맞아 함께 밤을 지낸 이후부터 2년 뒤 한쪽의 죽음으로 영원히 헤어질 때까지 두 사람은 동급생 중 누구보다 단짝으로 어울려다녔다. 과우들은 그런 그들의 어울림이 나이 때문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오래 학교와 또래 집단 을 떠나 있는 동안에 형성된 특유한 언행이 실제보다 나이들어 보이게 했는지 그들은 인철 을 제대병인 한형과 마찬가지로 열외에 두었다. 하지만 인철은 그 한형보다 세 살이나 어린 데 비해 그들과는 기껏해야 한두 살 많을 뿐이었다. 얼핏 보아서는 그들에게 공통된 신산스런 삶의 이력을 그 유별난 어울림의 원인으로 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이 명문고의 모범생 출신인 과우들과 달리 삶의 밑바닥을 헤매다 왔다는 데는 두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일치점이 있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이력도 그걸 받 아들이는 태도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아주 판이했다. 두 같이 더 내려갈 데가 없을 만큼 밑바닥을 경험해도 인철은 그걸 불행한 예외로 받아들 였지만 한형은 오히려 일상적인 현실로 여겼다. 따라서 그들이 파악한 삶의 어두운 진상도 그들의 의식에는 각기 다르게 작용했다. 인철에게는 그것이 어떻게든 극복되어야 비상한 상 황인 데 비해 한형에게는 그 자체로 냉정하게 탐구되어야 할 리얼리티였다. 술을 좋아하고 마셨다 하면 끝장을 보는 데서 나타나는 탐락적 기질도 둘을 남달리 가깝 게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또한 형성 과정이나 현실적인 효용에서는 의미를 달리했다. 인철은 대학에 와서도 초기 얼마간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영락 감이나 더 심하게는 유적감에 빠져 지냈다. 거기에 비해 한형에게 대학은 이전의 비참과 희 극으로부터의 운 좋은 이탈 혹은 상승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따라서 한쪽은 본질적 으로 망각과 마비를 위해 마시는 반면 다른 한쪽은 자족 혹은 유탕의 잔을 즐기고 있는 편 에 가까웠다. 외부의 자극을 수용하고 반응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두 사람은 아주 달랐다. 인철은 세계 와 인생을 강건하게 표현하기를 즐겼지만 한형은 예리하고 섬세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인철 의 감수성은 오히려 감상적이고 섬세한 편이었으며, 한형의 그것은 그와 달리 현실적이고 강건했다. 이 강의실 저 강의실을 기웃거리고 전공과는 무관한 지식에 탐욕을 부리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비슷한 경향을 보여주었지만 목적에서는 전혀 달랐다. 인철에게는 그게 괴로운 모색이거나 말 그대로의 방황이었다. 그러나 한형에게는 확고한 자신의 선택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강하게 얽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도저한 자존심일 것이 다. 뒷날까지도 그 원인이나 형성 시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인철에게는 일찍부터 비상하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예감 같은 게 있었다. 그게 삶의 굴곡을 거치면서 근거 없으면 서도 엄청난 자존심으로 발전했는데 한형에게도 그런 게 있었다. 비뚤어진 자의식의 일종이 겠지만 그런 것을 가진 사람은 아무런 표시가 없어도 서로를 알아본다.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불 같은 열정도 은연중에 그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이끌리게 했음 에 틀림이 없다. 미친 듯 마시고 떠돌고 읽고 사랑하는 형태로만 드러나고 있지만, 그리고 한쪽은 아직 그 방향을 찾지 못했고 한쪽은 이미 방향을 찾았지만, 한번 자신이 선택한 것 을 위해 내부로 응축시켜가고 있는 열정의 크기는 서로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뒷날 한형의 주검 위에 뿌려진 인철의 눈물은 무엇보다도 제대로 꽃피워 보지도 스러져간 그 열 정에 비쳐진 것이었다. 한형이 공연히 멋쩍어하는 웃음과 함께 인철에게 얇은 책자 하나를 내민 것은 한 주일 전 이었다. "이형, 이거 한번 읽어보쇼." 인철이 받아 표지를 살펴보니 교내 문예 서클에서 발간한 1백 쪽 내외의 조잡한 동인지였 다. 인철도 진작부터 그런 서클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한형이 관여하고 있다 는 게 약간은 뜻밖이었다. 더군다나 표지에 인쇄되어 있는 목차에는 한형의 이름도 나와 있 었다. "지난 봄혼데 단편 하나를 실은 게 있어, 진작 이형에게 읽히고 싶었지만 왠지 겁나서..." 언제나 말의 시작과 끝이 분명한 그답지 않게 들떠 있는 어조였다. 묘한 들뜸이 느껴지기는 인철도 마찬가지였다. 한형이 소설을 쓴다... 방금 그의 글의 활자화돼 있는 책을 손에 들고 있는데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인철이 느껴온 그의 도저한 자존심에 어울리지도 않 는 일이었거니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모임에 나가고 또 글까지 썼다는 게 어떤 배신감마저 느끼게 했다. "정말 뜻밖입니다. 한형이 소설을 쓰시다니. 그리고 이 서클에는 언제부터 나가셨어요?" "소설은 전부터 써 오던 거고, 문학회에는 지난 가을부터요. 술 퍼먹고 떠들어봐야 남는 것도 없고... 되거나 말거나 이제 한번 시작해볼까해서." 그런 한형의 말부터 다분히 변명조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떤 자부심 같은 것도 느껴졌다. 인철은 뒤로 미룰 것도 없이 그걸로 빈 강의실을 찾아 먼저 한형의 글부터 읽었다. '썩 은 내음'이란 제목의 단편으로 그로부터 십 년 뒤에야 우리 문단에서 유행하게 되는 분단 소설의 한 원형이었다. 여섯 살 난 아이의 눈으로 본 여순 반란 사건의 주변 이야기로 휴머 니티 쪽에 무게를 두어 이데올로기 시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 소설을 단숨에 읽고 난 인철은 두 가지 방향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하나는 활자의 마력이었다. 자신과 술을 마시며 떠들던 그의 말들 중에 어떤 것이 활자로 되어 있는 구절 을 보면서 인철은 전율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다. 말의 생명을 늘이고 크기를 키우는 데 활 자가 그토록 위력적임을 실감하기는 그게 처음이었다. 사람의 정신을 가장 잘 조리 있게 보 여주는 마술- 그날 이후 인철은 활자를 그렇게 정의했다. 다른 하나는 그 작품의 수준이었다. 인철의 소설에 대한 안목은 세계 명작으로만 단련되 어 있었다. 그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한 국 소설에 대해 은연중에 경멸을 품고 있다는 뜻이 기도 했다. 그런데 한형의 소설은 그런 인철을 비웃기라도 하듯 문장에서도 구성에서도 흠 잡을 데가 없었다. 한형의 소설이 준 충격 때문에 인철은 그 동인지의 나머지도 그 자리에서 내처 읽었다. 거기 실린 것은 시 열일곱 편과 단편 두 편, 평론 한 편이었다. 어떤 것은 인철의 건방진 선 입견대로 수준 미달이었고 어떤 것은 그저 참을 만한 정도였지만, 다 읽고 난 뒤 인철의 문 학에 대한 인식은 작은 혁명을 경험했다. 그들의 성취가 아니라 용감한 선택과 시도가 준 감동 때문이었다. '내가 허세로 자신의 소심과 불안을 위장한 채 공허한 관념 사이를 헤매는 사이에 여기 또 나를 앞질러가는 아이들이 있구나...' 입학초부터 인철은 그들이 토요일 오전 같은 때 빈 강의실에 모여 뭔가를 서로 읽고 떠들 썩하게 논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철은 자신있게 그들을 '예술하는 천민 지 망생' 혹은 '쉬파리떼의 유충'으로 단정하고 그 유치함과 설익음을 비웃었다. 특히 과우들 중에는 단지 그 모임에 나간다는 이유만으로 인철에게 멍청하고 덜떨어진 부류로 취급되는 축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마저도 다른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아이들은 적어도 자신의 존재를 표현할 양식을 가지고 있다. 그 동인지에서 받은 그런 느낌은 갑자기 인철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그 사실을 좀더 명확히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그 또한 또 다른 선입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빚어낸 갈등에서 온 다급함이었다. 그 바람에 인 철은 그 책을 다 읽자마자 빈 강의실을 빠져나와 한형을 찾았다. 한형은 그 사이 학교 앞 대폿집으로 자리를 옮겨 있었다. 인철이 그를 찾았을 때는 벌써 발갛게 술이 올라 불문과의 시인 지망생과 무언가를 떠들고 있다가 인철이 들어오는 걸 보 고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이형, 여기요, 여기." 마치 인철이 그리로 찾아올 줄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뿐만 아니라 술기운 탓인지 한형은 자신의 작품에도 종전과는 갈리 대담해져 있었다. 그는 인철이 자리를 잡고 앉기 바쁘게 스스럼없이 물었다. "그래, 어땠소? '썩은 냄새'그거. 소설 비슷하기는 했소?" 하지만 인철에게는 자신의 감 동을 전하는 일보다 거기까지 달려오게 한 궁금증을 푸는 일이 급했다. "네, 아주 좋았습니다. 체호프나 고리키를 연상시키지만 그들과는 다른 종류의 힘과 강렬 함을 느끼게 해주더군요." 그렇게 대강 얼버무려놓고 바로 자신이 품고 온 물음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한형. 소설을 쓰신 지 얼마나 되십니까?" "그게 소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내가 명색 소설이란 걸 만들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돼 요. 그 바람에 대학도 떨어지고 군대부터 먼저 다녀오게 되었으니까. 또 군대에 가서 월남을 지원한 것도 혹시 그놈의 소설쓰기에 도움이 될까 해서였으니까." 주전자를 들어 인철의 잔을 채우면서 한형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그동안 그렇게 많은 술 잔을 나누었으면서도 한번도 한 적이 없는 얘기였다. 인철은 왠지 또 한 번 배신당한 느낌 이었다. 나는 더불어 문학을 얘기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는 말이지... 그런 기분이 들자 이 상한 오기가 일었다. "그렇다면 일찌감치 자신의 길을 고르신 셈인데... 전 그게 늘 궁금합디다. 세상의 하고 많 은 길 중에 어떻게 한 길만을 자신이 평생 걸어 갈 길로 자신있게 결정할 수 있었는지 말입 니다. 그것도 아직 아린 나이에..." 딴에는 제법 공격의 가시를 박아넣은 질문이었는데 한형은 나무 쉽게 그걸 피해버렸다. "음, 뭐랄까, 지금 그게 왜 소설 쓰느냐? 혹은 왜 문학하느냐를 묻는 거라면 문학 개론에 여러 가지 말로 잘 설명되어 있을 거고- 내 개인적인 경험을 묻는다면 글쎄, 소설이란 게 있으니까 써보았다, 그 이상 할말이 없을 것 같소." "어떤 유명한 등산가가 왜 산에 오르냐는 질문을 받고 했다는 대답 같은 겁니까?" "그렇소. 세상의 어떤 가치를 선택한 사람에게도 두루 통용될 명답 같은데." 그 말을 듣자 인철은 왠지 자신이야말로 덜떨어진 놈으로 놀림을 당하고 있는 것 같은 기 분이 들었다. 그게 그의 오기를 더욱 공격적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가치는 등가겠군요. 새우젓 장수가 새우젓을 파는 거나 한형이 글 을 쓰는 것이 다를 바 무엇이겠습니까?" 당시의 인철로서는 다분히 모욕의 뜻을 담은 말이었다. 그의 고심, 그의 방황은 바로 세상 의 여러 가지 중에서 가장 완전하고 절대적이고 불변한 것을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거기에 외롭고 고단한 삶을 실어 부조리한 '지금' '여기'를 건너보려 했다. 따라서 가치들은 당연 히 서로 변별되고 상하로 값이 차이지는 어떤 것이었다. 별로 취한 것 같지 않은데도 그런 인철의 반문에 한형은 덤덤하기만 했다. "바로 그렇소. 모든 것은 용서되어 있소." "이건 구원되거나 승인받는 것 같은 소극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적극적인 선택의 문제라 구요." 그때까지도 인철은 한형이 자신이 제기한 문제를 잘못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했다. 그러나 한형은 처음부터 인철이 하는 말을 명확히 알아듣고 있었다. 인철이 거꾸로 모욕받 은 기분이 되어 매서운 반격을 준비하고 있는데, 한형이 잔을 놓으면서 진지하게 이어갔다. "아마도 이형은 세상의 가치 체계를 수직-상하 관계로 이루어진 통합체계로 이해하시는 듯한데... 그러나 나는 달리 보고 있어요. 세상의 보든 가치들은 수평 대등관계로 되어 있고 그 체계도 통합적이라기보다는 분화-병렬적이라고 믿고 싶소. 말하자면 모든 가치는 자기 목적성과 자기 충족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오." "그건 리즈맨의 '프래즈매틱 소사이어티'의 전제 논리 같은데요. 사회적 기능의 분화 정도 로 그 사회의 발전 정도를 가늠하는... 하지만 사회적 기능, 혹은 필요와 내가 말하는 가치의 문제는 다르다고 봅니다. 그 논리는 어쩌면 쓸데없이 많은 일을 벌여놓는 후기 자본주의 궂 은 일, 힘든 일에도 사람을 끌어쓰기 위한 장치나 프로파간다로 보이는데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표어로 대표되는." "나도 내가 선택한 것이 적대적이고 불변하며 최상위인 가치이기를 원하오. 그런데 이형 은 아직도 정말 그런 게 있다고 믿으시오? 거기다가 설령 그런 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세 계의 숨막힘을 생각해보셨소? 그 경우 우리가 선택할 것은 언제나 한 가지뿐이오. 무언지 모르지만 그 최상위에 있는 것 말이오. 그리고 그 나머지 하위 가치들은 선택하는 사람이 없어 사라지거나 굴욕감과 불만 속에 성의 없이 추구될 것이오." "그래도 그게 진실이라면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때로는 진실이라도 거역해야 하는 수가 있소. 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기 때문에 신이 있을 수도 있소." 한형은 그렇게 말해놓고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너털웃음으로 돌아갔다. 그는 다시 평소의 술친구가 되어 인철의 잔을 가득 채우며 무슨 선고처럼 말했다. "심각한 이야기도 정량이란 게 있소. 오늘 이 자리에서 정량은 다됐으니 다른 얘기나 합 시다. 그 문제는 다음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그러나 인철은 논리의 긴장에서 얼른 깨어나지 못했다. 이제 겨우 얘기를 시작했다는 기 분인데 한형이 화제를 졸리자 은근히 무시당한 기분까지 들었다. 주는 술잔을 비운 뒤에 인철은 다시 몇 번이나 원래의 화제로 돌아가보려고 시도했다. 그 러나 한형은 노련하게 말을 돌렸다. 그러다가 인철이 더 참을 수 없다는 기분이 되었을 때 에야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툭 던졌다. "그런데 말이오, 이형. 이형도 우리 문학회에 한번 나와보는 게 어때요? 그 동안 긴가민가 해서 망설였는데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이형 역시 우리 동네 사람 같애." 뒷날까지 인철 에게는 그 말이 왜 그렇게 충격적으로 들렸는지가 의문이었다. 뭔가 모욕당하는 것 같으면 서도 또한 한몫 하는 존재로 인정받은 기분이 그대로 한 전율이 되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 다. 그게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리게 했다. "잘못... 보셨을 겁니다. 저는 별로..." "아니, 그럴 리 없소. 이형의 발상법이나 어휘, 논리 구조는 문학적 단련을 받아도 아주 많이 받은 사람의 것이오. 가만히 돌이켜보시오. 정말 이형은 한번도 글쓰기를 일생의 할 일 로 염두에 두어본 적이 없소?" 무슨 암시에라도 걸린 듯 인철은 거기서 한동안 자신의 삶을 문학과 관련해 돌아보았다. 자신이 매우 열정적인 독자라는 것은 쉽게 인정이 되었다. 문학에 대해 남다른 가치를 부여 했음도 시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시인이나 작가가 되는 꿈을 꾸어본 적은 결코 없 었다. '그런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글씨기에 관심을 가져본 적도?" "물론 글을 잘 써보려고 노력한 적은 있습니다. 어느 해인가는 일기장 끝에 매일 하나씩 사물에 관한 소묘를 붙이기도 했지요. 잉크, 백묵, 물컵 따위 평범한 주변 사물로... 하지만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내각 학문을 하든 정치를 하든 종교를 하 든 내면에 심취한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비 혹은 도구로서의 문장을 수련했을 뿐입니다." "내가 느낀 게 바로 그거였군. 하지만 그것도 중요한 수련이오. 이제 그걸 문학의 장비로 활용해볼 생각은 없소?" "글쎄요..." 그러다가 인철은 불현듯 지난 삶에서 자신이 문학에 품어보았던 단상들을 기억해냈다. 어 쩌면 내가 말과 글의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언제나 한 부질없는 망상 혹은 불길한 예감 같은 것으로 머릿속을 잠시 스쳐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스쳐간 자 리에 남는 것은 삶이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는 논리들이었다. "그럼 이제 한번 해봅니다. 시도해봐야 될 때가 충분히 온 것 같소. 무언가를 써봐요. 다 음주 토요일에 합평회가 있는데 그때 봅시다." 한형은 한형대로 그 어떤 열정에 사로잡힌 것인지 막무가내로 그렇게 결론을 지었다. 그 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한형에 대한 인철의 감정이었다. 당황스럽고 난처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고마움이 앞섰다. 그날 집으로 돌아간 인철은 한형의 억지스런 권유를 무슨 뿌리칠 수 없는 강요로 여기며 난생 처음 문학적인 글쓰기로 한밤을 새웠다 처음 그가 생각한 장르는 그 양 때문에 손쉬우 리란 착각을 주는 시였다. 다음은 그 형식 때문에 초심자를 유혹하기 쉬운 수필. 그러나 그 가 일주일에 걸쳐 완성한 것은 결국 단편소설이었다. 인철이 60매 남짓한 그 소설의 마지막 퇴고를 끝낸 것은 그날 새벽이었다. 그 동안 인철 은 오직 그 소설만을 생각하며 밤낮을 보냈다. 그러나 그 새벽 그가 느낀 것은 자신이 결국 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만나고 있다는 어떤 섬뜩함이었다. 합평회는 예정보다 십여 분 늦게 시작되었다. 모임의 부회장인 불문과 3년생의 시를 시작 으로 기존 회원들의 시와 짧은 평론이 발표되고 마지막으로 신입 회원인 인철의 단편소설이 낭독되었다. 그러나 그날 인철에게는 자신의 작품이 읽힐 때까지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아 무 기억이 없다. 구체적인 예술 양식으로 형상화된 자신의 창조력과 상상력을 남으로부터 평가받는 일처럼 사람을 긴장시키고 흥분하게 만드는 일도 드물었다. 글쓰기가 바로 직업이 된 뒷날까지도 인철은 작품을 출판사나 잡지사로 넘긴 날은 그냥 넘기지 못했다. 어디 가서 고꾸라지도록 퍼마시거나 하다못해 노름판에라도 어울려야만 그 긴장과 흥분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 그 자리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평가받게 되는 자리였다. 한형의 분 에 넘치는 찬사에도 불구하고 인철에게는 거기 있던 여남은 명의 떠꺼머리 문학 지망생들이 그대로 그만한 수의 엄격한 판관들처럼 느껴졌다. 그 모임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난 배려인지 인철의 작품 발표는 앞서와는 달리 본인이 아 니라 한형의 대독으로 이루어졌다. 한형은 훌륭한 대독자였다. 이미 읽고 받은 감동이 있어 선지 한자 한자 또렷하게 강조되어야 할 부분과, 분위기만 살리면서 빠르게 스쳐가야 할 부 분을 잘 구분해 읽었다. 작품의 첫머리는 얼핏 보면 꽤나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 어도 실제로는 거의 관념적인 기차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거기에 역시 있을 법은 하지 만 우리 이웃에서는 쉬이 볼 수 없을 만큼 관념화된 전철수를 끌어내어 그와 어린 화자 사 이의 다분히 작위적인 우정으로 우리 삶의 진상에 대한 눈뜸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진상이란 기실 '인생은 나그네길...'이란 유행가 가사로 간단히 요약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게 불쑥 떠오르자 인철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회원들의 눈치를 살폈 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읽고 있는 한형은 물론,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듣고 있던 회원들에 게서도 그 진부한 관념에 대한 경멸의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중의 분석이지만 그것은 아마도 또 다른 의미의 당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인철의 문장 때 문이었을 것이다. 그 스스로 말했듯 인철은 어렸을 적부터 '도구 혹은 장비로서의 문장'이란 개념을 길러왔고, 그 습득에 남다른 관심과 노력을 바쳤다. 그래서 나름으로는 문장으로 의 미를 분석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직 의미와 양식에만 매달려 있는 회원들을 압도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소실이 사건과 이야기를 벗어나자 그런 문장력은 더욱 위력을 보였다. 그 보직 은 지극히 감상적이지만 한번 관념으로 자리잡으면 잘 골라진 어휘의 무게와 때로는 의도적 으로 음수율까지 활용한 그 배치가 특이한 유려함으로 그 관념을 감싸버렸다. 특히 음독으 로 듣게 될 때는 원래의 관념과 거의 단절된 또 다른 의미들이 무슨 자우룩한 안개처럼 의 식을 뒤덮어왔다. 나중 눈밝은 평자들은 인철의 문장에서 그런 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오히려 불철저함으로 폄하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적어도 그날의 합평회에서는 거기에 이의를 느낀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한형이 읽어나갈수록 쓴 인철보다 듣고 있는 회원들이 더 긴장하는 듯했기 때문이었 다. <<그 후 나는 여러곳을 떠돌아다니며 살게 운명지어져 있었다. 먼저 내 스스로 이어가야 할 학업이 나를 내 집과 어머니로부터 떠나 여러 낯선 도시를 떠돌게 하였으며, 이윽고 그 것이 한 습성이 되어 이미 그럴 필요가 없어진 때조차 내게 새로운 출발을 강요하였다. 어 떤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나를 휘몰아 이 세상에서는 만날 수 없는 영원한 어머니와 사랑과 친구를 그리워하게 하였으며, 결국은 도달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아득한 고향에 다스릴 길 없는 열렬한 향수를 품게 하는 것 같았다. 그 수많은 출발 전날 밤의 설렘, 알지 못하는 곳에 대한 동경과 기대, 출발 아침의 번득이 는 햇살, 정들었던 땅과 사람들에게 작별을 던지는 순간의 감미로운 슬픔, 괴로운지 즐거운 지 구별 못 할 떠나야 할 곳에서의 마지막 회상, 창가에서 멀어지는 거리에 던지는 허심한 결별의 눈인사, 새롭게 도착할 곳에서의 고생스럽고 힘들여 개척해가야 할, 그러나 자신있고 낙관적인 상상... 그리고 그런 출발의 길 위에 서면 나는 항상 그 작은 읍의 낡은 역사와 내 낡은 친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내게 역은 언제나 최초의 환영객이었고 또한 변함없는 마지막 전송자였다. 처음에는 내가 가는 도시마다 역이 있다는 사실에서 무슨 풀지 못할 상징이라도 찾은 기분이었다. 그 러나 더욱 많은 곳을 떠돌아 다니게 되면서 나는 한 도시에서의 점차 많은 역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윽고는 그 도시 전체가 역으로만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먼저 내가 졸업한 학교치고 그 졸업식장에서 역을 느껴보지 않은 곳은 하나도 없었다. 엄 숙하게 서 계시는 교장선생님의 머리에는 늘상 어릴 적 그 작은 역에서 본 역장의 제모가 얹혀 있는 것이었고, 도열해 있는 선생님조차도 그만한 수의 승무원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하는 둣했다. "여기는 XX역입니다. 앞으로도 유쾌한 여행이 되기를 빕니다." 그러면 내 주위에 있는 아이들의 표정에도 어느새 여객의 피로가 짙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비록 머무르는 순간의 길고 짧음은 있지만 가정이 그러하였고 직장이 그러하였 으며 사람이 머무르는 모든 곳이 그러하였다. 사람은 어느 곳에 가더라도 영원히 머무를 수 는 없으며 필경에는 떠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의미의 확대는 지구조차도 하나의 커다란 역으로 만들고 마는 것이었다. 나는 지구의 역장을 보지는 못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신성한 머리 위에다 역장의 제모를 얹는 것도 감히 할 수 없는 짓이다. 그러나 언제든 올려다보기만 하면 마침내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따로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저 푸른 하늘, 우리의 육신을 낳고 받아들이기는 하 지만 그 생명과 형태를 끝내 보존해주는 데는 늘 실패하고 마는 대지, 얼핏 보아 변치 않을 것처럼 보이면서도 끊임없이 내려앉고 솟는 산맥들, 항시 새롭게 흐르는 강과 그늘을 맞고 보내기를 되풀이하는 바다... 이 모든 것들은 광활한 우주 속의 한 역을 이루는 구성물들임 에 틀림이 없다. 그들은 어디서 오는지도 모를 무수한 생명들을 그 여객으로 받아들이고, 또 때가 오면 어딘지 모를 다음 역으로 떠나는 그들을 말없이 전송한다...>> 뒷날 인철은 스 물세 살의 감상이 빚어낸 그 현란하기만 하고 실질 없는 문장에 대해 늘 상반된 감정을 느 꼈다. 하나는 진부하고 뻔한 관념을 그만큼이나마 읽을거리로 엮을 수 있었던 데 대한 자 부이고, 다른 하나는 거기서 피를 짜듯 하는 쓰기의 절실함도 피부에 닿아오는 감동의 핍 진성도 느껴볼 수 없다는 점에서의 경계와 부끄러움이었다. 하지만 그 합평회에서의 느낌 은 달랐다. 본질이 무엇이건 내가 쓴 것이 저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그런 집착에서 오는 충격과도 같은 기쁨과 감격이 천천히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 한형이 읽기를 계속했다. 이야기의 기본 구조는 헤어지는 남녀의 독백이었다. 여자 쪽이 보여주는 생동감과 현실성이 남자 쪽의 관념적인 미문과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며 간신히 소설로서의 구조를 유지해가고 있었으나, 아직 거기까지는 자기 비판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 고 있었다. 하지만 뒤이은 남자의 독백에서 돌출하는 때이른 달관 혹은 난데없는 노성함이 다시 인철 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지상의 한 여객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남을 얘기하는 구절에 이 런 것이 있었다. <<당신들은 누구나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는가. 당신들은 틀림없이 그 아름다움이나 달 콤함, 헤어질 때의 고통과 슬픔이며 그 뒤의 그리움과 공허감을 미화하고 과장하려 들 테지 만 기실 그 일의 진상은 뜻밖으로 단순하고 명백하다. 그것은 당신이 이 힘들고 따분한 여 행중에 눈길을 끄는 한 소녀를 만났다는 것이며, 결국은 부정확하게 마련인 관찰에 이어 당 신이 던진 맹목적인 열정의 눈길에 그녀가 미소로 답했다는 것이며, 무료함을 달래자는 당 신의 용기를 다한 요청에 그녀가 다소곳이 응했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약간은 야릇한 열에 들뜬 당신들이 깜빡깜빡 자신을 잊어가며 주고받은, 그때로서는 세상과 맞바꿀 만한 기쁨이 고 몰입이었으나 본질적으로는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몇 개 유형의 행위들과 가끔은 정색 할 만하지만 대개는 무의미하거나 지리멸렬한 대화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설혹 당신들에게 공통된 추억과 꿈이 있었으며,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것들을 함께 우러렀고, 때로 그 이상 절대와 영원을 향한 동반을 다짐했더라도 이 심란한 여행에서 는 누군가 둘 중 하나는 도중에 내려야 하게 되어 있다. 우리의 대지는 너무나 많은 역이 있고 대개의 경우 우리의 행선지는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종 당신들은 만나기 전보다 훨씬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헤어져야 하며 불행히도 마땅한 새 상대를 구하지 못하면 나머지 여정은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이 되어버린다. 물론 헤어질 무렵에는 서로가 오래도록 기억해줄 것을 열렬히 희망하고 혹은 다시 만날 것을 굳게 다짐하지만 그 또한 온전히 허망 한 일이 되기 일쑤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너무도 기억해야 될 일이 많고, 한번 헤어진 이들이 다시 만나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넓은 까닭이다. 어쩌면 둘의 행선지가 여행이 끝나도록 같을 경우에도 결과의 허망에는 큰 차이가 없다. 서로가 미지이던 시기, 눈먼 열정의 한나절이 지나고 나면 마침내 당신들은 서로를 묶고 있 는 일상성과 권태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될 것을...>> 쓸 때에는 스스로도 감동 해가며 써나간 구절이었으나 다른 사람의 낭독을 통해 듣게 되자 비로소 그 같은 관찰의 근 거 없음이 갑작스런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한번도 여자를 안아본 적이 없는, 이제 겨우 스물세 살의 남자가 설파한 사랑의 본질이란 그야말로 얼마나 공허하고 추상적인 것일까- 거기서 인철은 다시 한번 회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리숙한 판관들은 무엇에 취했는 지 여전히 아무런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한형의 낭독은 계속되어 남자의 독백은 우정의 의미마저 우격다짐으로 지워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인철이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아무래도 이 세상의 미운과 원한을 풀 어가는 대목에서였을 것이다. <<일찍이 당신들의 몸과 마음을 그토록 세차게 떨게 한 미움이나 성냄도 결국은 우리 이 외롭고 짧은 여행중에 일어난 대단찮은 춘사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것은 열차에 오 르기 전 잘 닦아 신은 당신의 구두를 한 조심성 없는 사내가 밟고 지나간 것이며, 참지 못 한 당신의 항의가 그와의 언쟁을 낳게 한 것이며, 그 언쟁은 듣기 거북한 욕석로 변하고 그 이상 볼썽사나운 드잡이질로까지 번져... 그래서 공안원의 제지로 끝났건, 이웃의 만류로 참 았건, 또 당신들이 열쩍게 돌아섰건, 오징어포로 소주잔을 기울이며 화해했건, 그 일련의 돌 발사가 우리 이 여행에 무슨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만약 누군가가 당 신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이 있다면, 맹렬한 증오로 그와 그가 끼친 해악을 기억하고, 또 그 정당한 보복을 가슴 깊이 맹세한 적이 있다면 당신들은 다시 내 늙은 친구의 충고를 기억하 는 것이 좋다. "어린 놈아, 우리 삶의 열차는 종종 너무 혼잡하여 본의 아니게 남의 바를 밟게 되는 수 가 있단다. 네가 진심으로 착하고 슬기로워지기를 바란다면 그걸 잘 이해하고 너야말로 남 의 발을 밟지 않도록 주의해라. 여행중의 시비는 너 자신을 피로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이 웃까지 불편하게 만드는 법이란다." 그러하다. 한때 우리의 기쁨이며 보람이었던 모든 것들, 그토록 쉽게 우리를 감격시키고 앞뒤 없이 찬사와 경이를 찬탈해간 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매울 수 없는 슬픔이나 끝 모를 경멸의 원인이 된 모든 것들, 또 그렇게도 세찬 불길로 우리 영혼을 사르던 분노와 원 한도 본질에 있어서는 그러하다. 오, 모든 우발적이고 단순하고 사소한 것들...>> 스물세 살에 애증을 두루 초월해버린 이 관념적 허구에 대해서는 뒷날 톡톡히 벌을 받게 된다. 그 러나 그 합평회에서는 끝내 추궁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 이렇게 되고 만 것, 이것이야말로 필요 이상의 열기를 그 심장에 부여받 은 자, 쏘아댈 너무 많은 동경의 화살을 지닌 채 태어난 정신의 피할 수 없는 귀결이었다. 어떤 신이 있다면 지난날 내 내부에서 끊임없는 동경을 유발시키고 무분별한 행위를 충동질 하고, 온갖 격정, 온갖 광기로 나를 내몬 것은 바로 그 신의 목소리였음에 틀림이 없다. 생각하면 나는 아무 애착도 미련도 없이 너무 오래 이 황량한 역을 배회하였다. 자기가 창출한 여러 가치들을 이것저것 뒤적이기만 하고 끝내 선택하지 않는 자에 대한 대지의 불 쾌한 기억으로부터 진작 떠났어야 하는 것은 나였다. 지금 내 귀에는 새로운 출발을 재촉하 는 기적 소리가 들린다. 일찍이 어린 나의 새벽잠을 깨우고 성장한 나를 끊임없이 떠돌게 한 저 기적 소리. 그리고 지금은 더 머무를 곳도 떠날 곳도 없는 이 대지로부터 출발을 재 촉하는 저 기적 소리. 이제 날은 다 되었고, 나는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르는 존재의 다음 역 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리라. 그러면 이제야말로 안녕... 이 황량한 역이여.>> 한형이 그 렇게 읽기를 마쳤을 때 한동안 묘한 침묵에 빠져 있던 강의실은 곧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 박수가 의례적인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난 것임을 그들의 표정에서 확인하면 서 인철은 잠시 동안의 혼절과도 같은 의식의 마비를 경험했다. "우리는 방금 우리 중에 숨어 있던 한 새로운 재능을 발견했습니다. 국문과 이인철씨의 신규 가입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인철이 다시 의식을 되찾은 것은 회장이라는 평론 전공의 선배가 그렇게 서언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인철이 기억에 더 선명한 것은 그 자리의 누구도 일러준 적이 없는 만해의 시구절이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내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저만치 뒷걸음질쳐 사라졌습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