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테의 연가 - 이문열 저 *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작가 소개 머리말 1. 어떤 비오는 날 2. 쓸쓸한 여름 3. 타오르는 계절 4. 오르페의 章 작가 소개 - 저자 이문열은 새삼 소개할 필요가 없는 한국문학의 거봉이다. - 1948년 경북 영양 출생.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수학. - <나자레를 아십니까>로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 1982년 <금시조>로 '동인 문학상' 수상. - 1987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이상 문학상' 수상 - 1992년 <시인과 도둑> <시인>으로 현대문학상 수상. - <금시조> <영웅시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시인> <황제를 위하여> <삼국지> <변경> 등 주옥 같은 작품들이 많다. 머리말 연재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 작품에서처럼 가슴 설레었던 적도 드물다. 그러나 연재를 마친 지금 또한 이 작품처럼 처참한 기분을 주는 것도 일찍이 없었다. 연재를 시작하기에 앞서 가슴이 설레었던 것은, 내가 이 작품에 쓰기 위해 많은 메모들을 준비해 두었다는 것, 이야기도 거의 지금의 형태로 구체화되어 있었으며, 또 분명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처럼 거칠고 선정적(煽情的)인 문화형태 속에서는 희귀한 예가 될 것이라는 확신 따위에서였다. 그러나 이야기를 써 나가면서 나는 차츰 헤어날 길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 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성 문제에 관한 노트들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실제로 이 시대의 젊은 여성의 느낌을 통해 여과된 것이 아니어서, 그대로 헤쳐 놓기에는 확신이 서지 않았고, 또 구상했던 줄거리도 사랑과 성(性)을 혼동하는 이 시대의 관행이 하도 널리 퍼져 있어, 소설에 필요한 최소한의 리얼리티조차 위험한 까닭이었다. 거기다가 써 놓고 보니 희귀하리라고 생각한 이야기는, 그것이 새롭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도 낡았기 때문에 희귀한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실로 지금의 이 처참한 기분은 거기서 오는 어떤 실패의 예감 때문이리라. 하지만 내게도 위로는 있다. 그래도 나는 저급한 독자에게 아첨하기 위해 내 최초의 의도를 굽힌 적은 없으며, 이 소설에 점점이 박혀 있는 단상들 가운데는 진지하고 성실한 사색의 결과도 적잖이 들어 있다. 따라서 이 글을 하나의 감미로운 사랑 이야기로 읽으려 들땐 다소간 실망도 있겠지만, 젊은 여성이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로 쓴다면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글이 될 것임을 스스로 자부한다. 특히 매일매일 무슨 폭력처럼 자행되는 반(反)도덕의 선전과 지성이나 문화의 탈을 쓴 채 갖가지 형태의 성적(性的) 부패를 부추기는 주장들이 이처럼 무성한 시대의 억균제(抑菌劑)로는. -1983년 5월- -새로운 판에 부쳐- 독자의 사랑을 받을수록 부끄러워지는 책이 있는데, 내게 있어서는 '레테의 戀歌'가 바로 그러하다. 글을 쓰던 당시의 특별했던 내 분주함과 그에 따른 작품상의 여러 불만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가의 손을 떠난 책은 이미 그 스스로가 생명을 가지고 독자에게는 또 그 자신의 해석권이 있다. 책이 나간 지 벌써 10여 년, '레테의 戀歌'는 독자의 선택을 받아 40쇄가 지난 지금도 아직 초판 때와 큰 차이 없는 생명력을 보이고 있따. 이렇게 된 이상은 어쩔 수가 없다. 내 문학에 깊은 상처를 내는 날카로운 칼날이 된다 할지라도(실제로도 그런 용도로 많이 이용되었다) 나는 드디어 마음대로 이 책을 버릴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틈나는대로 부끄러운 부분을 손질을 해 저서 목록에 정착시키는 일 뿐이다. 따라서 새로운 판을 짜기에 앞서 마땅히 내용의 개보(改補)가 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새로운 부끄러움을 더한다. 너그러운 양해가 있으시기를. -1991년 1월 15일 李 文 烈 -'레테의 戀歌' 둥지版에 부쳐- '레테의 戀歌'는 한때 내 작품 목록에서 빼버릴까 했을 정도로 불만스러워 했던 작품이다. 주로 그것을 쓸 당시의 고단함 때문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독자의 호응을 받아 수십판을 거듭하면서 거꾸로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그 인정에 논리까지 갖추게 되었다. 산업사회가 진행되고 여성의 사회 참여가 늘어가는 한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될 사랑의 한 형태를 포착하였다는 것과 거기서 전개되는 여성론이 나름의 깊이와 진지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세월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았나 싶다. 사회 형태가 바뀌고 새로운 性 관행이 자리잡지 않는 한 여전히 유효한 작품이라 생각해 둥지社의 重刊에 동의하고 그동안 미진하게 여겨왔던 부분을 손질해 다시 독자 앞에 내보낸다. -1994년 5월 李 文 烈 1. 어떤 비오는 날 나는 내일이면 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 그 남자는 건강하고 쾌활하고, 아마는 성실하다.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의 이름은 앞으로의 내 삶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자에게 있어서 결혼은 하나의 레테(망각의 江)다. 우리는 그 강물을 마심으로써 강 이편의 사랑을 잊고, 강 건너의 새로운 사랑을 맞아야 한다.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오직 그 새로운 사랑만으로 남은 삶을, 그 꿈과 기억들을 채워 가야 한다. 나는 지금 그 강가에서 나를 건네줄 사공을 기다리고 있다. 내 귓전에는 느릿느릿 저어오는 그의 노(櫓)소리가 들린다. 나는 가리라, 앞서의 수많은 여인들이 희망과 기쁨으로 또는 탄식과 눈물 속에 건너간 이 뱃길을 가리라, 강 이편의 그 무엇에도 연연함이 없이. 그리하여...... 나는 이제 그 홀가분한 출발을 위해 지난 세월과 마주하고 섰다. 내가 새삼 이 낡은 일기장을 펴드는 것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미혼 시절을 향한 결별의 허심한 목례, 또는 여기에 담겨진 기억들을 망각의 불 속으로 던져버리기 위한 마지막 작별의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은 현란한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윽고는 똑같은 빛깔로만 떠오르게 될 시간들이여. 한때는 내 삶에 버금가는 소중함이었지만 이제는 끝모를 침묵과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야 할 기억들이여. 기쁠 수도 슬플 수도 없는 노래여. 3월 17일 금요일. 알 수 없는 일도 있다. 서른일곱의 남자가-- 반드시 지긋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세상 일에 어느 정도는 시달렸을 나이이며, 십년을 넘게 살아온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을 거느린 한 집안의 가장(家長)이고, 또 자기의 세계에서는 나름대로의 위치와 명성도 누리고 있는 남자가- 화창한 봄날 한낮에, 어둑한 찻집 구석에 앉아 삶의 쓸쓸함을, 모든 예술적인 성취의 덧없음을 움울한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다. "기대라는가 희망이란 말들과의 까닭 모를 혼동 때문에 환상을 품는다는 것은 종종 낙관적인 삶의 태도로 오인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그거야말로 오히려 철저하게 비관적인 태도가 아닐까요? 무엇이든 아름답고 완전한 것, 가장 귀하고 값진 것은 현실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이 우리가 환상에 매달리는 중요한 이유일테니까요." 오랜만의 인사 끝에 내가 농담처럼 아직도 환상만들기 작업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쓸쓸한 웃음과 함께 그렇게 대답했다. 환상만들기란, 몇 년 전 그와 같은 학교에 근무할 무렵 그가 이따금씩 자신의 삶을 표현하던 방식이었다. 그 밖에는 그에 관해 얼른 기억나는 게 없어 그 말을 꺼냈던 것인데, 그가 그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하자 나는 약간 뜻밖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서로 내왕은 없었지만, 신문의 문화면이나 TV미술관 같은데서 그가 거두고 있는 거의 눈부시다고 해도 좋을 만한 성공을 이따금씩 보아 온 터라, 그 자신도 당연히 그만큼 달라졌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루하루가 할 일 많은 공휴일처럼 되었다는 것뿐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뒤이어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솔직히 그것이 갑작스레 유명해진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교묘하게 감추어진 거드름이나 아닌가 의심했었다. 지금 있는 곳으로 직장을 옮긴 뒤, 나는 그와 비슷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예술가라고 싸잡아 불리는 이들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따라서 나는 그들의 행동거지나 말투에 익숙한 편인데도-- 그에게서는 끝내 위장된 거드름이나 그들의 한 특징인 감정의 과장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더구나 내가 그를 만나게 된 것은 공식적인 인터뷰가 아니라 순전히 우연이었다. 작가 L씨에게 원고를 받으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맥이 빠져 들어간 찻집이었으니까. "예전에 알던 사람들, 특히 무명과 빈곤에 시달리던 시절을 가까이서 보아 온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곤혹입니다. 내 이름은 과연 매스컴의 총애를 받는 편이고, 그리도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는 팔립니다. 성급한 사람들은 내가 한 일이 시간의 파괴력을 견뎌 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게 우리 삶의 본질과 무슨 상관입니까? 그게 내게 무얼 줄 수 있다는 겁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일정한 물음을-- 아니 물음이라기보다는 자기들의 억측을 확인하려 듭니다. 보람이라든가 성취 같은 어마어마한 말로...... 가볍게 스쳐 갈 사이라면 그들의 기대에 알맞게 대답해 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갈채에 고양되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일 수도 있고, 그들이 던져 준 푼돈을 감격스레 헤어 보일 수도 있어요. 세상의 속물들과는 다르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일 수도 있고, 동료들을 예술하는 천민(賤民)으로 몰아붙여 홀로 고귀한 척 고개를 쳐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그렇게 스쳐 갈 사이가 아니라면 문제는 다릅니다. 곤혹이지요. 번번이 거의 속수무책으로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로 지금의 이 선생처럼." 그리고 한동안 처량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예술의 허망됨과 무력함을 얘기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기의 작품을 보는 데 엄격한 사람은 더러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 자체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옹호하는 태도였고, 심하게는 신앙처럼 경건하게 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까지 지켜 주지 않았다. "예술을 통한 구원이란 우리가 믿기 위해 지어낸 여러 가지 미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神)이 있어서가 아니라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믿는 것처럼. 거룩한 환상이죠. 지금 내가 힘들여 하고 있는 것은 그 환상의 지속이지만, 그것조차 점점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오전에 처리해야 할 다른 일이 갑자기 생각나 서둘러 자리를 뜰 때까지 한 시간 가까이나 그와 자리를 마주하고 있었던 것은 왠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그의 그 같은 술회 때문이었다. 햇볕이 쏟아지는 거리로 나온 뒤에도 이상하게 귓전을 맴도는 음울한 어조하며. 참으로 정체모를 사람. 3월 20일 월요일 어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대학동창 숙희가 시집을 갔다. 학교 때는 입버릇처럼 상류사회에 진출하겠다더니 어찌된 셈인지 남편은 동갑내기인 대학원 학생이었다. 특히 친하게 지내던 우리 다섯 가운데서 예식장에 나온 것은 나와 영진이 둘 뿐이었다. 경애는 해산한 지 일주일이 안됐고, 명자는 남편을 따라 외국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탓이었다. 식이 끝난 뒤 영진이와 차 한잔을 하고 헤어졌는데, 그애의 농담이 마음에 걸려 어젯밤 잠을 설치고 말았다. "얘, 너 정말 시집 안 갈 거니? 못 갈 거니?" 얄미운 계집애, 입으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결혼한 걸 후회한다면서 기회만 있으면 '우리 상호 씨' 자랑을 못해 안달이다. 그래, 질펀하게 퍼질러 앉았건 말건 행복하게만 살아라. 그런데 오늘 하필 걸려든 일이 노처녀 타령이다. 제목이야 그럴싸하게 '커리어 우먼이 늘어간다' 어쩌고 하는 특집이지만, 그게 바로 노처녀 타령이 아니고 뭐람. 다행히 '여자 나이 스물여덟 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따위의 너절한 앙케트를 돌리는 것은 면했으나 대학교수를 만나 사회학적인 분석을 듣는다 한들 노처녀 타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나 아닐까. 까닭 모를 이 불쾌함-- 나도 어느새 그런 나이가 되었는가. 3월 22일 수요일. '독신여성이 늘어가는 현상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결혼이란 제도의 본질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하는 게 좋다. 결혼이란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오래된 사회제도의 하나로서, 난혼(亂婚) 또는 모계사회나 집단혼(集團婚)을 인정하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기는 하나, 결혼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는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그릇 믿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오랜 역사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 쓰는 결혼이란, 좁은 뜻에서의 일부일처혼(婚)으로 한정하기도 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결혼은 대략 다섯 가지 측면을 가진 제도로 보인다. 흔히 알고 있는대로 성(性)과 종족보존 외에 경제적 협력과 정서 및 보험의 기능이 그 다섯 가지 측면의 내용이다. 먼저 성(性)의 제도로서의 결혼은 그 성이 일반적으로 금지된 상태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성에 대한 사회의 일반적인 금지에서 유보된 부분, 더욱 적극적으로 보면 성에 대한 금지를 합법화하는 것이 바로 결혼이라고 보아도 좋다. 아주 특수한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배우자간의 성행위는 모든 제약에서 자유롭다. 그 다음은 종족보존의 면은 일부일처혼의 경우에는 특히 남성의 후계자 확정을 휘한 제도로 파악하는 편이 보다 정확하다. 사람의 일 가운데서 가장 괴로운 것 중의 하나는 일생을 피땀 흘려 이룩한 것들, 이를테면 재산이나 권세나 명예 같은 것을 죽음과 함께 내놓고 떠나야 하는 일이다. 따라서 태어난 자식이 자신의 혈통임을 쉽게 인지(認知)할 수 있는 제도를 고안함으로써, 그 자식과 자신간의 동일시(同一視)를 통하여 그 쓰라림에서 벗어나려 한 것인데, 그것이 바로 일부일처제의 결혼이다. 세 번째로 결혼은 경제적인 협력을 위한 제도이다. 일반적으로 남자의 노동력은 일차적인 생산 및 전투에 유리한 반면 여자와 노동력은 관리나 가공(加工)같은 이차적인 생산과 봉사 및 접대에 유리하다. 결혼은 그렇듯 서로 다른 특질을 가진 남녀의 노동력을 결합하여 보다 효율적인 생활을 도모하는 제도의 하나이다. 네 번째로 결혼은 정서의 제도이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위로와 격려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이성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격려이다. 결혼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삶의 비참과 고독을 이겨내기 위한 상설(常說)의 상담역, 위로역, 격려역을 갖게 만들어 주는 제도이다. 마지막으로 결혼은 가장 오래된 보험제도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의 일생에는 반드시 남의 도움에 의지해 넘겨야 할 고비가 있게 마련이다. 질병이라든가 재난 같은 개별적인 것은 물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노쇠같은 것이 바로 그 고비이다. 거기에 대한 일차의 인적(人的) 보험은 부모형제다. 하지만 통상 부모는 자신보다 일찍 죽어 보험능력을 상실하고, 형제자매도 언젠가는 헤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자신의 노쇠에 대한 보험은 결국 배후자와 직계비속(直系卑屬)이 맡게 된다. 결혼은 우리에게 바로 그 배우자와 직계비속을 갖게 해주는 제도이다......' 그 동안 취재한 것을 정리해 본 것인데, 오늘은 이쯤에서 그쳐야겠다. 벌써 한 시, 나머지는 내일 정리하면 되겠지. 3월 23일 목요일. 오늘은 하루종일 사내(社內)에서 취재한 것만 정리했다. 어제에 이어 옮겨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그런데 현대로 접어들면서 결혼제도의 그 같은 기능들은 차츰 빛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먼저 성을 위한 제도로서의 결혼은 그 방면의 욕구 충족이 손쉬워지면서 필요의 절실함이 많이 줄었다. 아직도 성은 그 대부분이 금지상태에 놓여 있지만, 그 금지를 실효있게 만드는 책벌(責罰)은 우리 시대에 들어와 더욱 노골적이 된 성의 상업화와 산업사회의 익명성(匿名性)으로 거의 불가능해졌다. 성의 상업화는, 오늘날의 미혼 남성들을 결혼이란 거추장스런 의식을 치르지 않고도, 거리에 넘치는 인스턴트 식품을 구입하듯 몇 푼의 돈으로 간편하게 성(性)을 구입할 수 있게 해 준다. 또 도회의 익명성은 미혼여성들로 하여금 지난 시대의 여자들이 입었던 불리(不利)를 거의 두려워할 필요 없이 자신의 성을 즐길 수 있도록 해준다. 하려고만 들면 도심에 나가 이름을 숨긴 채 가장 멋진 남자를 골라 하룻밤을 새우고 빈 콜라깡통 버리듯 다시는 만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경제적인 협력제도로서의 결혼도 이 시대에 들어와서는 눈에 띄게 그 의의를 잃어 가고 있다. 남자의 경우 옛날에는 여자의 봉사에만 의지해야 했던 대부분을 이제는 여자의 도움 없이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세탁기, 냉장고, 전기밥솥, 재봉틀 같은 기계며, 어디서든 쉽게 살 수 있는 기성복, 인스턴트 식품, 또 세탁소, 여관, 식당 같은 서비스업의 발달이 그 원인이다. 여자의 경우도 이제는 더 이상 남자의 생산력에만 의지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됐다. 일차산업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듦에 따라 근육의 힘과 거친 용기에 있어서 남성보다 불리한 여성들에게도 알맞은 일자리가 늘어났고, 특히 고급한 학력을 가진 여성의 경우에는 남자에 지지 않는 보수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구태여 결혼이란 제도를 통하지 않고도 필요한 봉사나 스스로의 생활을 남녀가 각기 해결할 수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살게 된 것이다. 정서적인 제도로서의 결혼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그 의미를 점점 잃어 가고 있다. 삶의 외로움이나 고통은 별로 줄어든 바 없지만, 그것들을 잊게 해주거나 우리의 감정을 마비시켜 주는 장치와 고안(考案)의 발달로 이제는 반드시 그 역할을 결혼에서만 기대할 필요가 없어졌다. 예술의 대중화-- 값싸고 질 좋은 전자기기의 발달은 비싼 자리값을 물고 오페라하우스나 음악당을 찾지 않아도 유럽의 명문 오페라단이 공연하는 '나비 부인'이나 로열발레단 '백조의 호수'를 볼 수 있고, 필하모니의 연주로 배토벤이나 차리코프스키의 교향곡을 들을 수 있게 한다. 스포츠의 프로화-- 이제는 야구는 물론 권투, 레슬링, 축구, 테니스 따위 스포츠의 대부분이 직업적인 곡예에 가까워져, 그것을 하는 사람의 심신단련이나 인격도야를 위해서보다는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 거기다가 그 밖에 새로이 고안된 각종의 위락(慰樂)장치까지 가세하여 고개만 돌리면 우리의 눈과 귀와 코와 혀를 사로잡고, 때에 따라서는 사고(思考)까지 마비시킬 준비를 갖추고 있다. 결혼을 통한 종족보존 또는 후계자 확정에 의한 삶의 연장도 개인주의의 발달로 점차 설득력을 잃고 있다. 오늘날 아무도 자신의 삶과 자식의 삶을 동일시하는 사람은 없으며, 죽은 뒤 자기의 피붙이가 대를 잇는다 해서 그것이 자기 삶의 연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개인적인 성취에 삶을 걸기 때문에, 이제 그런 이유로 미혼의 남녀에게 결혼을 권유하려 드는 것은 낡은 미신의 권유와 다름없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험적인 제도로서의 결혼도 이 시대에 와서는 역시 예전의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 보다 확실하고 경제적으로 정비된 현대의 각종 보험과 발달된 사회보장제도를 두고,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인간의 애정과 선의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결혼은 보험으로서는 가장 낡고 인기 없는 품목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 같은 다섯 가지 측면의 변화에서 보편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비정상적인 만혼(晩婚), 또는 독신과 이혼율의 증가이다. 그런데 이혼율의 증가는 당면한 논의와 무관함으로, 그걸 빼면 결국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비정상적인 만혼 또는 독신의 증가 원인을 일반론에 따라 추적해 본 셈이 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 쪽이 주된 논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그쪽이 비교적 우리의 경험에 새로운 현상으로 비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에서 독신여성이 늘고 있는 것을 앞서와 같은 일반론으로만 처리할 수는 없다. 그것이 사회의식의 표면에 떠올라 우리의 주의를 끌게 된 데는 그런 일반론에 가세하여 일을 한층 심각하게 만든 다른 특수하고 구체적인 원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남녀의 연령별 분포다. 어찌된 셈인지-- 아마는 기성세대의 남아선호사상도 한 몫을 했을 테지만-- 이 나라의 통계는 혼인적령기의 남자가 여자에 비해 현저하게 부족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좀 과장적인 것은 삼할에 가까운 부족률을 보이고, 그보다는 덜한 통계라 해도 남자 쪽의 부족에 우려를 보이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 다음에 지적될 수 있는 것은 갑작스런 교육량의 증대에서 비롯된 결혼적령기의 변화다. 고등교육이 일반화되면서 이 나라에서 제대로 구실을 할 만큼 교육을 받는 데 통상으로 16년이 걸린다. 거기다가 남자들은 병역의무가 더해져 그들의 사회진출은 빨라야 스물 예닐곱이 된다. 그러나 중산층 이하의 출신인 경우에는 그들이 새로운 가정을 꾸밀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을 갖추기 위해 다시 몇 년이 더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나라의 부모들은 대개 자신의 경제적인 여력을 교육비로 다 써버려, 교육이 끝난 자식은 도울래야 도울 수 없는 형편이 돼버리기 십상인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남자들은 대학교육만으로 부모에게 감사하고, 나머지는 온전히 자기 힘으로 시작해야 되는 까닭에 그들의 결혼은 일쑤 서른을 넘기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에 있다. 그럭저럭 결혼준비를 끝낸 남자들이 자신의 신부감을 그들의 연령층에서 구하지 않고 훨씬 어린 층에서 구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신혼부부간의 연령 차이가 전에 비해 늘어나고 있는 것이 그 한 예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 그들의 연령층인 20대 후반의 여성들이 노처녀란 이름으로 체증을 이루게 된다. 물론 세월이 지나가면 나름의 균형을 회복하여 절로 해결될 일시적인 현상이지만, 어쨌든 그것이 최근 들어 유난히 눈에 띄는 독신여성 증가의 한 원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 다음에 또 들 수 있는 것은 근년에 두드러진 여성의 사회진출이다. 고급한 교육을 받은 여성의 태반은 결혼 때까지 직장을 가지게 되는데, 자기가 맡은 일이 마음에 들 경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혼기를 놓치고 만다. 취직을 않고 자기 분야에서 독자적인 성취를 이룩한 경우에도 결과는 비슷하다. 그런데 남자는 혼기가 엄격하지 않고, 또 넘겼다 해도 회복이 가능하지만 여자의 경우는 종종 치명적이 된다. 이 나라의 여자들은 아직도 연하(年下)의 남자와 결혼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의 문제와 무관하지는 않은 것으로 독신여성, 정확히 말해 노처녀가 증가하는 또 하나의 원인은 여자의 선택 범위가 남자보다 좁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남자는 상대가 마음에 들면 학력이나 나이, 재산, 신분 등에 크게 구애되지 않지만, 여자에게는 그런 것들이 하나같이 큰 문제가 된다. 특히 학력의 경우가 그러해서 이 나라에서는 아직 고등교육을 받은 여자가 그 이하의 학력을 가진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정상적인 결혼으로 보아 주지 않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남자보다 선택의 범위가 좁다 보니 자연 여자 쪽이 잔류자가 많아지게 마련이다. 남자에 대한 여자들의 인내심이 줄어든 것도 이혼율의 증가뿐만 아니라 독신여성 증가의 한 원인이 된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주부로서의 희생과 봉사가 이제는 예속이나 굴종으로 이해되며, 또는 당연하게 인정되어 왔던 남성의 일반적인 우위가 이제는 독선이나 횡포로 느껴지게 된 것이다. 지난날에는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포기되었던 여성의 여러 권익도 현대교육에 힘입어 차츰 그 회복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런 현대여성의 눈에는 아직도 보수적인 요소를 청산하지 못한 이 나라 청년들이 종종 이기적이고 독선적으로 비쳐 결혼을 망설이게 하는 이유가 된다......' 이것이 그동안의 취재를 대강 정리해 본 내용이다. 얼핏 보아 모두 맞는 것 같으면서도 또한 하나도 맞지 않는 기분이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3월 24일 금요일. 아침에 그를 만났다. 예상대로 어제의 기사가 죽어 있으니 좀더 보충하라는 핀잔 비슷한 데스크의 주문을 듣고 약간 기분이 상해 잡지사를 나오는데 그와 마주쳤다. 빗물에 젖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여긴 웬일이세요?" 하고 묻자 그가 까닭없이 겸연쩍은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2층 화랑에......" 알고 보니 거기서 무슨 전시회가 있는 모양이었다. 몇 년 전, 그러니까 그의 무명 시절에 꼭 한번 그의 작품을 구경한 것 외에는 직접 본 적이 없는 나는 문득 궁금한 마음이 일었다. "모레부터요. 그때 와요."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이제 당분간 자주 보게 되어 기쁘군." 언뜻 들으면 의례적인 말에 지나지 않았지만 왠지 나도 반가운 기분이었다. 참 이상도 하지. 바로 그 오 분 전에 기사를 반환당해 기분이 상해 있던 나였는데. '살아 있는 기사'란 말 때문에 오후에는 지현 언니를 찾아갔다. 대학교 선배로 서른다섯인데도 아직 홀로 살고 있는 언니였다. 집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조마조마해서 아파트의 초인종을 눌렀는데 그녀는 있었다. 그것도 낯선 남자와 함께. 전에 본 적이 있는 얼굴은 아니였다. 나와 정면으로 맞대기를 꺼리는 듯 황급히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지현 언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영악한 남자." 나를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무심코 내뱉은 듯한 그 목소리에는 원망보다는 비애가 서려 있었다. 좋지 않을 때에 왔구나, 싶으면서도 이왕 찾은 김이라 그녀의 독신생활에 대해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너는 아직도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이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니?" 그리고 이어, "그렇게 믿고 있다면 나는 아무것도 할말이 없다. 물론 요근래까지도 나는 그런 물음에 대해 답변을 준비해 두고 있었지. 이를테면 참다운 인생을 향유하기 위해서라든가 자기 성취 따위...... 하지만 이젠 진력이 난 거짓말처럼 느껴질 뿐이다. 어쩌다 보니, 그저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라고 말하는 그녀는 전에 없이 늙고 원기 없어 보였다. 망연한 그녀의 눈길을 따라 아파트 마당을 내려다보니 회색 승용차 한 대가 빗속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저 남자, 내가 부르면 언제든 충실하게 달려오지. 교양도 있고 예의도 바르고, 어쩌면 진실로 나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고, 오히려 가끔씩은 무언가 내게 도움이 되려고 애쓰기도 하지. 하지만 나는 알아. 저런 남자는 언제나 충실하게 부름에 응하는 것처럼 때가 오면 또한 언제나 충실하게 돌아가지. 자기의 세계로, 조그만 이름과 지위와-- 그 가족들에게로. 정말로 멋진 남자가 저 나이가 되도록 자유롭게 홀로 남겨지는 법은 없으니까. 요즘 나는 이따금씩 꿈을 꿔. 며칠 만에 내 집을 찾아 밤을 새우고 떠난 그가 그 저녁에도, 그를 위해 찬거리를 사러 시장엘 가고, 그리고 저녁이 되면 오붓한 식탁을 차려 놓고 그를 기다리는 꿈을. 때로는 실제로 그렇게 해 보기도 하지. 하지만 그건 꿈만으로 있을 때보다 더 비참했어. 자신의 예정에 없는 날이면, 이 방을 나갈 때까지 꼭 삼십 분에 한번씩은 시계를 쳐다보니까." 그러고 보니 그녀의 어조에는 약간 술기운이 배어 있었다. 비 탓일까. 언제나 냉정하고 자신에 차 있던 그녀의 또 다른 일면을 본 느낌이었다. 공연히 나까지 축축하게 젖어드는 기분이 싫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아직도 비가 추적거리는 아파트를 나서면서 문득 오 년 전갓 귀국했을 때의 그녀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콧머리가 시큰했다. 동문(同門)들의 환영식인가 뭔가가 있어 재학 중인 우리 몇도 참가 했는데, 그때 그녀는 마치 우아한 여왕 같았다. 나이는 이미 서른이었는데도 모습은 우리보다 더 앳되어 보였고, 그런 그녀의 머리 위에는 외국서 받아 왔다는 무슨 학위가 후광처럼 어려 있는 것 같았다. 이어 대학에서의 인기 있던 강의, 몇 개의 사회활동에서 보여 준 그녀의 반짝이는 역할들, 매스컴과의 재치 넘치는 대담. 그 뒤 그녀가 연출한 그런 삶의 외형은 우리에게 어떤 새롭고 강렬한 빛처럼 눈부셨다. 그러던 그녀가 겨우 오 년도 안돼 이런 넋두리 같은 충고를 하다니. "우리가 새로움으로 경탄하며 받아들인 현대교육은 머리가 터지도록 지식을 다져놓을 수는 있어도 우리 삶에 필요한 참다운 지혜를 길러 주지 못한 것 같애. 많은 사람들이 해 온 게 가장 현명한 것이라는 그 초보적인 진리조차 일러주는 데 소홀했지. 우리가 그 교육을 통해 기껏 키운 것이랬자 잡다한 지식과 절제를 모르는 욕망 뿐이야.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능률적인 개인-- 그것이 공리주의가 설득력을 잃은 뒤의 서구(西歐)가 전염병처럼 우리에게 옮겨 준 새로운 인간형이었지. 그들에겐 나름의 배경이나 동기가 있겠지만, 또 그것이 진실로 우리의 존재가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길일지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땅에서는 아니야. 이 나라 사람들의 박래품 선호경향(選好傾向)과 내 학위의 희소가치만 믿고 돌아온 게 잘못이었어. 아니, 그걸 깨달은 뒤에도 얼른 떠나지 못한 게...... 스물일곱이랬지? 방심하고 있어도 좋을 나이인 것 같지만은 않은 것 같애. 많은 사람이 하는 때에 해야 할 일을 치러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 그녀가 그렇게 말하면서 눈시울을 붉힐 때에야 장식장의 술병이 마개가 열린 채 반나마 비어 있는 것이 보였지만, 단순히 취한 여자의 말로만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솔직히 그 아파트단지를 빠져 나올 때의 내 기분은 그녀의 외로움에 대한 연민보다는 오히려 그 천박한 패배에 대한 분노로 착잡했다. 3월 27일 월요일. 며칠 개었더니 오후부터 다시 비가 쏟아졌다. 봄비답지 않게 굵은 빗줄기였다. 지현 언니를 만난 뒤로도 몇 군데-- 주로 독신인 여류명사--를 더 둘러보았지만, 흔해빠진 독신녀의 주장밖에는 별로 신통한 게 없어 아직도 그 기사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숙제삼아 안고 나올 때였다. 잠시 뜸하던 비가 다시 쏟아지는 바람에 현관에서머뭇거리는데 누가 가볍게 어깨를 쳤다. 그였다. "아직도 한남동입니까? 그렇다면 내가 바래다 드리지요." 그는 용케도 우리 집 방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차가 한남동으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불쑥 말했다. "이런 날은 그대로 돌아가는 법이 아니지. 함께 내립시다. 좋은 포도주를 내는 술집이 하나 있어요." 오후 내내 씨알도 잘 먹히지 않는 독신 여류 명사들의 얘기를 정리하느라고 시달린 탓인지, 술도 잘하지 못하면서 좋은 포도주란 말에 유난스레 마음이 끌렸다. 비록 서로 안 지는 여러 해 되어도 그가 나를 거리낌없이 술집으로 청할 수 있을 만큼 친하지는 않다는 것도 그 순간에는 이상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좋은 포도주였다. 술집이 겉보기에는 허술해도 술은 모두 외제였고 안주도 거기에 걸맞는 것들이었다. 나중에 들은 것이지만, 주인남자가 미군 PX에 관계하고 있어 어떻게 술을 내오는 모양으로 단골들은 거의 원하는대로 각국의 술을 마실 수 있는 집이었다. 빈자리를 찾아 앉으면서야 비로소 나는 두 가지로 묘한 느낌이 들었다. 하나는 그와 둘이서 술집을 드나드는 것이 처음인데도 이미 함께 여러 번 와 본 것처럼 익숙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금도 내게 부담이 되지 않는 점이었다. 내가 그런 느낌을 말했을 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산 싸구려 기성화가 십 년을 신어 온 것처럼 발에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거기다가 이 선생은 내가 고달프고 외롭던 시절의 동료가 아니오?" 그 말을 들으니 문득 같은 학교에 근무할 때 보아 온 그의 말버릇이 떠올랐다. 그에게는 심각하게 말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처리하는 버릇이 있다. 언젠가 학교 앞 다방에서 젊은 교원 둘이 신(神)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다가 곁에서 말없이 커피만 훌쩍거리는 그에게 자문을 구한 적이 있었다. "아직도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나......?" 그게 그의 덤덤한 대답이었다. 그때 젊은 교원들이 무색해져 입을 다물던 게 퍽 재미있었다. '환상만들기'란 얘기도 그와 비슷한 자리였다고 생각한다. 역시 딱지가 좀 덜 떨어진 듯한 젊은 교원 둘이 이 사회의 여러 가치에 상대적인 등위를 매길 수 있느냐, 있다면 그 절대적인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따위로 한참 떠들썩하다가 역시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가치니 추구니 하는 게 환상만드는 작업 아뇨? 사는 게 모두......" 그는 그때도 그렇게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그런 태도는 끝내 그를 외톨이로 떠돌다가 그 학교를 떠나게 만든 원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계속하여 그 같은 말투가 우리들의 대화까지 무미건조하게 만들까 걱정했으나 지나친 기우였다. 그를 어눌한 사람으로 본 내가 잘못인지 아니면 근년 매스컴의 총아가 되면서 받던 단련 덕분인지,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뜻밖에도 그는 재치있는 담화가였다. 특히 내가 작성 중인 기사에 대한 그의 의견은 내가 허비한 오후를 벌충하고도 남았다. "어떤 일에는 알맹이가 되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그 둘을 모두 보아야 하지만, 그것이 무분별하게 나열돼 있으면 종종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수가 있어요. 또 어떤 일에는 일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원인과 그런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원인으로 추정되는 요소가 있습니다. 이것들도 명확히 구분해서 처리하지 않으면 그 일에 대한 논의는 다 맞으면서도 하나도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자의에 의한 것과 타의에 의한 것도 처음부터 구분해 주는 것이 어떤 일의 인과관계를 명료하게 추적하는 데는 꼭 필요합니다. 그 교수님의 분석은 자못 정연하고 광범위하지만 그런 면에서 약간의 소홀함이 있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회현상을 해명하는 데 관점도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결혼에는 그 교수님이 말한 여러 측면이 있지요. 그러나 문제가 독신여성이 늘어가고 있다는 점이면, 그것이 사회학자의 객관적인 눈으로보다는 그 연령층의 눈으로 보아져야 합니다. 더구나 이 글은 논문이 아니라 바로 결혼문제를 앞두고 있는 젊은 여성들을 위한 유익한 읽을 거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많아야 스물 예닐곱의 젊은 여자가 과연 종족보존의 제도나 경제적 협력의 제도, 또는 보험적인 제도로서의 결혼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할까요? 당장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기껏 성(性)의 제도와 정서의 제도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글에는 그 부분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없어요." 그렇게 내가 정리한 허술한 점을 지적한 그는 이어 매우 중요한 충고를 덧붙였다. "거기다가 그 논의에는 도덕적인 배려가 빠져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근대까지 여러 사회의 도덕과 윤리는 성에 대해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해 왔습니다. 그 한 예로 하나의 문명이 쇠퇴하고 새로운 문명이 대두될 때 가장 먼저 강화되는 것은 성 도덕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자취를 남긴 문명치고 그 초기에 엄격한 성 도덕률을 보이지 않는 경우는 거의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정도지요. 그런데 한 예외가 우리 시대의 문명입니다. 물론 현대를 지난 문명의 말기적인 현상으로 파악한다면 문제는 다르겠지만, 확실히 우리 시대를 한 문명의 말기로 보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는 보기 드물게 성을 도덕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데 성공한 셈이지요. 조금 전 그 교수님의 논의 가운데 성의 상업화란 말이 있었는데, 그것도 도덕의 문제와 분리해서는 생각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도덕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여자들은 직업으로 몸을 내놓을 수 있고, 그리고 남자들은 자위행위를 할 때만큼의 도덕적 갈등도 없이 그것을 한 상품으로 구입할 수 있습니다. 또 산업 사회의 익명성을 지적하셨는데 그 또한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익명성의 획득이 손쉽고, 성의 향유로 인한 불리(不利)를 근심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가슴속에 강한 도덕률이 살아 있으면 아무도 그 같은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 기사가 살아있는 유익한 내용을 가지려면 반드시 그 부분에 대한 보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치 사무실에 나란히 앉아 동료 직원과 일 얘기를 상의하는 느낌이었다. 문득 내 일에 대해 너무 오래 얘기한 게 미안해져 포도주를 석 잔이나 마셨더니 '디너 와인'인데도 머리가 얼얼했다. 3월 31일 금요일. 여기저기 귀동냥을 더하고 내 생각도 보태어 그럭저럭 맡은 원고를 넘겼다. 이제부터 남은 열흘은 작가들 닦달이다. H씨, L씨, K씨-- 하필이면 이번 호에는 악명 높은 작가가 셋이나 내 담당이다. 4월 3일 목요일. 작가 H씨가 잠적, L씨는 계속 거절에 K씨는 우리끼리의 데드라인까지인 열흘을 더 달라고 사정이다. "빌어먹을, 나도 할 짓이 없으면 작가나 될까 보다" 하는 미스터 권의 농담이 반드시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4월 6일 목요일. 이 나라 작가에게는 세월이 가도 낫지 않는 소아병(小兒病)이 하나 있다. 오늘 끝내 집필을 거절한 L씨가 그 한 예이다. 그들은 여성지나 주간지에 글을 쓰면 그날로 자신의 작가적인 생명이 끝나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문학은 대중으로부터 멀면 멀수록 좋으며, 인기작가란 시간과의 싸움에서 완전히 무장 해제되어버린 자라고 단정한다. 물론 그들이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된 데는 다분히 수긍이 가는 점도 있다. 우리도 이 나라의 진지한 작가가 그렇고 그런 인기인들이나 궁상맞은 이야기로 체험수기에 당선된 아줌마 또는 국적불명의 요리를 하루에 하나씩 만들어 내는 '원장님'들 틈에 끼여 있는 것을 보면 미안하다. 거리에 나앉아 십 년째 똑같은 상품을 팔고 있는 얼치기 철학자나 밑도끝도 없는, 그리고 문학적 연마와는 거의 무관한 신상 체험담으로 느닷없이 작가행세를 하게 된 이, 또는 보이라면 속옷까지 벗고 나설 경박한 소설노동자와 그의 이름이 나란히 실려 있는 걸 보면 안쓰럽고, 여성지에 실렸다는 이유만으로 상당한 작품인데도 평단의 외면을 당하는 것을 보면 죄스럽기까지 하다. 거기다가 수준 낮은 독자들로부터 그의 글이 지루하다느니 빼라느니 하는 평이나 주문을 듣기라도 하면 어떤 때는 그를 끌어들인 것이 진심으로 후회스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이 잡지는 매월 십만 부 이상이 나가고, 적어도 그 다섯 배의 이 나라 주부와 미혼여성이 읽는다. 모두 다음 세대를 가르칠 어머니들이거나 조만간에 그런 어머니가 될 이들이다. 그런데 그것이 대중 상대의 상업지라는 이유만으로 이 나라의 지성이 한결같이 외면해야 하는가. 언젠가 소비와 사치만을 조장하는 원색광고와 연예인들의 신변잡기, 또는 주부 취향에 맞는 고만고만한 말장난이나 염치없는 소설노동자의 섹스물(物)만으로 아까운 인력과 종이를 낭비해야 하는가. 직업근성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지만 어디에 쓰든 자기 문학의 품위를 지켜 나가는 초연하고 당당한 작가를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4월 12일 수요일이든가? 아니면 목요일? 이 나라 작가에게는 또 병이 있다. 바로 전에 말한 L씨와 정반대의 경우다. 오늘 K씨가 이번 회분(回分) 1백 매를 가져왔는데, 이런 일에는 엔간히 단련된 나도 원고를 읽다가 낯을 붉혔을 정도였다. 한 마디로 말해 그 1백 매의 내용이란 게 모두 어거지로 만난 젊은 남녀가 호텔에 들어갔다 나오는 데까지의 얘기였고, 그 중의 삼분의 이는 벗은 채였다. 이상도 하지, 남녀가 벗고 어울리는 얘기라면 독자들도 어느 정도 식상(食傷)한 걸로 알고 있고, 더구나 우리 쪽에서는 그런 걸 주문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작가들은 여성지나 신문연재를 맡기만 하면, 여자부터 벗기고 봐야 한다는 강박관념에라도 짓눌려 있는 것 같다. 물론 사랑이란 주제는 세계문학의 절반 이상이 거기에 바쳐지고 있고, 성애(性愛)도 사랑의 일부인 이상 반드시 소설에서 기피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포르노 찍듯 해 온 것은 지난 70년대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지금 쯤은 엄숙주의로의 회귀도 기대해 볼 만하건만, 적어도 이쪽 방면에서는 도무지 기미가 안 보인다. 이만 정도에서 멈추지 않으면 나중에는 작가 자신도 난감한 처지에 빠지지 않을까. 뻔한 것을 새롭게 얘기해야 되면 자꾸 기괴함이나 의외성(意外性)에 의지해야 되고, 그러다 보면 사디즘, 마조히즘으로 가다가 근친상간, 수간(獸姦)으로까지 넘어가서...... 그 다음은 참으로 난감할 게다. 병이다. 참으로 이해 안 가는 병이다. 4월 15일 토요일. 그와 함께 점심을 했다. 얼마 전 전시회가 끝난 뒤 30호 정도의 소품 하나를 얻은 게 있는데, 뜻밖이라 고맙단 말도 제대로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던 차에 그의 전화가 와서 내가 청한 식사였다. 무슨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찻집까지 꼭 세 시간을 함께 있다가 헤어졌다. 그것도 그 세 시간이 삼 분 정도로밖에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무엇엔가에 흠뻑 빠져.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우리 말에는 '그'는 아무에게나 쓸 수 있는 삼인칭 대명사에 자나지 않는데, 내 일기에서는 용하게도 그 한 사람을 특정하는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이런 엉뚱한 전용(轉用)이 왜 일어났을까. 4월 17일 월요일 불쾌한 날. 대학동창 황(黃)이 제대를 하고 왔기에 맥주로 축하를 해주었다. 지금이니까 담담하게 얘기할 수 있지만 한때는 제법 가슴 설레던 사이였다. 몇 번인가 이런 저런 모임의 파트너가 돼 준 적도 있고 데이트 비슷한 걸 해 본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황의 성격이 너무 소심하고 자존심이 강해 적극적이지 못했고, 나 또한 뒤따라가면 잡을 만큼 그 친구를 좋아한 것도 아니어서 졸업으로 흐지부지 헤어지고 말았다. 그 뒤 교편을 잡고 있을 때 그가 대학원으로 진학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연락 없이 지냈는데, 사 년 만에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었다. 처음 수화기를 통해 황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가벼운 흥분과 설렘을 느꼈다. 이어 나를 찾기 위해 다섯 군데나 수소문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야릇한 기대에까지 부풀었다. 교편을 잡고 있을 때와 이 직장에서 각각 한 번씩 공연히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제풀에 지쳐 물러선 작자들을 빼고 나면 참으로 오랜만에 나를 찾은 남자인 셈이다. 거기다가 세월 덕택에 오래 전의 일들이 제법 감미롭게 윤색되어 떠올라 나는 약속시간보다 십 분이나 빨리 만날 장소로 달려갔다. 그런데 막상 마주앉고 보니 황은 내가 만나고 싶어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의 깔끔하고 섬세한 수재(秀才)를 그대로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그는 너무 변해 있었다. 천박하게 불어난 몸집이며 쉬임없이 살피는 듯한 눈길,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해 보이기도 하고 비굴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실없는 빙들거림-- 그러나 정말로 나를 실망시킨 것은 그 다음 술기운이 돌면서부터였다. 남자들의 성장이란 기껏 그런 것일까. 자랑한다는 게 딱지를 뗐느니 어쨌느니 하며 군대에서 동정(童貞)을 잃은 걸 킬킬거렸고, 포부라는 게 대기업에 취직해 어물쩡 결혼이나 하겠다는 식이었다. 그런 얘기들이 진솔함으로 재미있게 받아들여지던 시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 지난 사 년 간의 사회생활에서 단련된 터라 남자들의 외설스러움이나 뻔뻔함이 새삼 역겨울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막상 황에게서 그런 것들을 보게 되자 나는 참을 수 없었다. 결국 그 술자리는 맥주 한 박스를 비울 수 있다는 황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다섯 병이 채 비기도 전에 어색하게 끝나고 말았다. 화장실을 다녀온 황이 먼저 앉아 있던 맞은편 자리를 두고 내 곁으로 옮겨 온 것이 내 인내심의 한계가 되었다. 취한 것을 과장하며 은근히 내게 기대 오자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된 나는 자신도 놀랄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황을 쏘아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 너 술이 많이 약해졌구나. 앞으로 너하고 술 마실 때는 꼭 우리 그이와 함께 와야겠다." 계산을 하고 나오다 보니 황은 그때까지도 자리에 앉은 채 멍한 눈으로 나를 쫓고 있었다. 4월 21일 금요일. 오늘로 이번 주에만 두 번째 그를 만났다. 화요일날 의례적으로 온 그의 전화에 대뜸 "술 한잔 사주세요." 한 게 발단이 되어 이틀 걸러 한 번씩 만난 셈이다. 아마도 그 철 없는 동창생이 준 충격 탓이었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푸근하고 유쾌함을 주는 만남이었다. 저녁 아홉 시쯤에 집에 돌아온 내가 얼마나 기분이 좋아 보였던지 엄마까지 이렇게 물었을 정도였다. "너 웬일이냐? 근래에 처음 보는 환한 얼굴이구나." "민 선생님과 저녁을 함께 했어요. 왜 접때 그림 준 그분 있죠?" 무심코 그렇게 대답을 해 놓고 나는 그만 아차했다. 저번 그 소품을 얻어 오며 그의 얘기를 했을 때 언뜻 엄마의 얼굴을 스치던 우려의 그늘이 한결 짙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의 얘기를 좀 해야겠다. 오늘에야 나는 그가 생각보다는 나와 무관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와 함께 앉아 있으면 이상하게도 오래 전부터 함께 지내 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도.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부임했던 J여중에서였다. 그는 나보다 일 년 쯤 먼저 그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솔직한 말로 처음 한동안은 그리 인상이 좋지 못했다. 어떤 직장에서건 하나쯤은 눈에 띄게 마련인, 까닭 없이 궁색하고 음울해 보이는 구성원의 역할을 그 학교에서는 그가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행과는 동떨어진 후줄근한 차림에 빗질도 않는 머리며 사철 그의 소매를 떠나지 않는 더러운 토시 때문에 아직 삼십대 초반이면서도 나이는 사십이 넘어 보였다. 별볼일 없는 미술교사에 교원자격 검정 출신이고, 그나마 호봉은 나 빼고는 그 학교에서 제일 낮았다. 거기다가 결혼은 남달리 빨라 큰아이가 벌써 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을 정도였으니, 나 같은 햇내기 여고사에게는 처음부터 관심 밖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맨 처음 그런 그의 인상이 달라지게 만든 것은 그해 봄에 있었던 교원들간의 야유회였다. 그날 교외로 나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우연히 그가 나오지 않은 걸 두고 두 교원이 주고받는 말을 듣게 되었다. "민 상이 안 보이네" 언제나 백화점에서 갓 나온 고급상품 같은 젊은 교원이 차 안을 휘둘러 본 뒤 그렇게 말했다. 민상의 '상'은 민 선생의 '선생' 대신 저희끼리 낮추어 부르는 호칭인 모양이었다. 그러자 자기가 나온 대학이 이 나라 제일임을 언제나 자랑하는 다른 미술교사가 멋진 웨이브를 넣은 장발을 쓸어올리며 받았다. "또 처바르고 앉았겠지. 흥, 주제에 꿈은 커 가지고......." "하긴 사는 꼴 보면...... 단칸방에 다섯 식구를 풀어놓은 게 영락없이 돼지우리야." "밤낮없이 틈만 나면 물감을 사다 헝겊에 처바르고 쥐꼬리만한 선생 월급 남아날 게 뭐람. 길바닥에 나앉지 않은 것도 다행이다." "김 선생도 입이 험해. 위대한 예술가가 탄생하려면 다 그런 고난을 겪는 거야." "위대한 예술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쟁쟁한 선배들도 아직 차례가 오지 않는데, 제 같은 게 넘보긴 어딜 넘봐." "국전(國展)이 전분가? 그에게는 나름의 세계가 있을 테지. 그건 그렇고, 자넨 명색이 같은 그림을 하면서 그 사람 말이면 왜 그렇게 쌍지팡이를 짚고 나서나?" "능청 떨고 있네.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지만 그 눈길 좀 봐. 한껏 겸손한 척 내리깔면서도 사람을 사람같이 보지 않는 그 오만한 눈길 말이야. 자네도 밥맛 떨어진다구 해 놓구선." "사실 그건 그래. 아침에 한번 그와 마주치기만 하면 왠지 하루종일 불쾌하단 말이야. 뭐랄까 누군가가 등뒤에서 끊임없이 경멸과 야유를 퍼붓는 기분이야." 그러다가 뒷자리에서 내가 듣고 있는 걸 알자 겸연쩍은 듯 화제를 바꾸었다. 나도 못 들은 척 짐짓 눈길을 창 밖으로 돌렸지만, 내게는 오히려 그 이야기가 묘하게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부터는 왠지 그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그때 내 나이 스물셋이었다거나, 그 무렵만 해도 시(詩)라는 것에 은근한 야심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얼른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할 만큼 절실한 것은 아니어서 다시 새로운 계기가 올 때까지 그와의 관계는 여전히 소원한 동료교원일 뿐이었다. 그와 좀더 가까워진 두 번째의 계기는 그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네 시간째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들어가는데 화단 앞에서 조는 듯이 서 있는 그를 만났다. 한 그루 한창 피어오르는 모란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 눈길이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나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한동안을 꼼짝 않고 꽃만을 둘러보다가 나를 보고 드러나리 만큼 얼굴을 붉히더니 앞뒤 없이 불쑥 물었다. "이 선생은 한 송이의 꽃이 몇 번 핀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너무 갑작스러워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는 나를 대신해 대답했다. "수없이 피지요. 꽃은 순간순간 새롭게 피어나는 겁니다......" 평소의 인상에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 그 말마저도 얼른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휘적휘적 교무실 안으로 들어가 버린 뒤에야 겨우 그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그의 그림을 궁금하게 여긴 것은 그 다음부터였을 것이다. 주제넘게도 나는 그 몇 마디 말이 그의 그림이 도달한 수준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단정한 탓이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여름방학을 하루 앞두고 대청소가 실시되던 날 나는 의도적으로 미술실에 가 보았다. 아무리 굳게 닫혀 있는 미술실이라지만 그날만은 함께 대청소에 들어간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하든 그 복도에는 나 말고도 그의 그림이 궁금한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런 사태를 예견이나 한 듯 줄잡아 스무 점은 됨직한 그림들을 단단히 덮어 싸매 놓고 있었다. 다만 아직 물감이 마르지 않은 탓인지 유채 한 점이 벽에 기대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1백 호 가까운성자(聖者) 수난상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그림의 내용이 뜻밖인 모양이었다. 나도 그랬다. 통틀어서 성화(聖畵)라고 불리는 그런 종류의 그림은 서양에서도 이미 맥이 끊긴 지난 시대의 것으로 알고 있었고, 더구나 이 땅에서도 그림공부를 하는 사람이 습작의 주제로 쓰는 것은 한번도 본 일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어, 저건 이발소 그림이잖아." 흔히 시골 이발소 같은 데에 걸려 있는 조악한 복사판 성화 자체를 두고 말했다면 크게 틀린 것이지만, 그 복사판의 원본을 두고 말했다면 그것들이 바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걸작들이란 점에서 약간은 맞게 본 셈이었다. 진부하고 엉뚱하기까지 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보고 있는 사이에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그림이었다. 둔중하면서도 엄숙한 빛을 내는 어떤 고전적인 품격 탓이었다. 한 뛰어난 화가가, 세월이 쉬 망그러뜨릴 수 없는 훌륭한 예술가가 이제 막 태어나고 있다-- 좀 당돌하지만 나는 그때 느닷없이 그런 확신에 빠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림에는 거의 까막눈과 다름없는 내가 그런 확신에 빠지게 된 것은 아마도 그만큼 그의 선과 색이 학교의 미술책이나 근대 화가들의 화집을 통해 내 눈에 익은 탓이었다. 평소 익살로 한 몫을 보던 그 사회 선생도 "이발소 그림......" 하는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그 그림을 두고 농지거리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잠시 자리를 비웠던 그가 어디선가 황급히 돌아와 그 한 점마저 성난 기색으로 거두어버리는 바람에 우리는 머쓱해져 미술실을 물러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그 다음 기억은 지금 돌이켜보아도 좀 쑥스럽다. 역시 그해 가을의 일이었다. 방과 후에 운동장 청소를 감독하다가 담 곁에 지천으로 핀 코스모스들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내 몸을 쓸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코스모스 잎을 흔들고 있는 산들바람인가 싶었으나, 바람이 멎은 뒤에도 그런 느낌이 여전해 돌아보니 여남은 발자국 뒤에 그가 서 있었다. 꼼짝 않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뭘 하시는 거예요?" 나는 약간 앙칼진 음성으로 그를 다그쳤다. 남자가 젊은 여자의 몸을 샅샅이 훑어볼 때의 그 호색적인 눈길을 연상한 탓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와 눈길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금세 그에게 적의로 대한 것이 후회스러워졌다. 그의 눈빛, 그것은 그 여름 화단의 모란 앞에서 본 적이 있는 바로 그 사심 없는 몰두의 눈길이었다. 그런데 더욱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은 내 앙칼진 말에 정신이 돌아온 듯한 그의 대답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는 까닭 없이 허둥대며 그렇게 대답하더니 이내 앞뒤 없이 덧붙였다. "고맙습니다." 실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그에게 감사를 받아야 할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이 선생님이 거기 그렇게 서 계시는 게......" "네?" "아름다움이란 그 존재만으로 하나의 커다란 베풂이죠. 꽃은 우리를 위해서 피지 않았고, 또 꽃에게는 그 자신의 생리, 그 자신의 꿈이 따로 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언제든 그 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거기 피어 있어다는 것만으로......" 그리고 여전히 취한 듯한 눈길로 다시 한번 나를 찬찬히 살피더니 문득 돌아서서 가버렸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교묘한 찬사나 단수 높은 접근으로 의심할 수도 있지만, 솔직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다음날이었다. 첫 수업을 마치고 들어오는데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구석진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쭈뼛쭈뼛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두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허둥거리며 불쑥 말했다. "이 선생님, 부탁이 있는데...... 모델 한번 서 주시지 않겠습니까?" 조금도 남을 의식치 않는 큰 목소리여서, 그걸 들은 곁자리의 남 선생들이 일제히 킬킬거렸다. "이거 웬일이야? 민 선생이 다 남에게 말을 걸고......" "이 선생님도 영광이네. 잘하면 모나리자보다 더 유명해지겠어." 그것만 해도 화나는 일인데 누군가가 한술 더 떴다. "잠자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요. 잘만 되면 이 선생의 늘씬한 몸매를 가만히 앉아서 감상할 수 있을 테니......" 거기서 나는 그만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모델이란 말이 누드란 말과 일쑤 혼동되는 우리의 선입견에다 동료교원들의 킬킬거림이 그의 눈치 없는 부탁을 더욱 혐오스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린 탓이었다. "이봐요. 민 선생님. 저도 민 선생님과 똑같이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이에요. 어떻게그런 걸 제게 부탁할 수 있어요?" "뭘, 모델이 어째서...... 방과 후에 하루 삼십 분 정도라도...... 원하시면 사례도 충분히 하겠습니다." 나의 매몰찬 거절에 당황은 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그렇게 어물거렸다. 앞뒤를 전혀 살피지 않는 열심이었다. 그게 더욱 그를 희극적으로 만들어 다시 옆자리의 동료교원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그러나 거기에 자극돼 까닭 없이 화가 치민 나는 한층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딴 데 가서 알아보세요. 저는 민 선생님 같은 분하고는 더 이상 말도 나누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무참하게 붉어지는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매섭게 쏘아본 뒤 소리가 나도록 교재를 책상 위에 팽개치고 떠들썩한 교무실을 나와 버렸다. 나중에 좀 심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무슨 불쾌하고 끈끈한 액체처럼 귀에 늘어붙은 동료교원들의 농담 때문에 나는 그 뒤 오래도록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해 말 그가 학교를 그만둘 무렵에서야 간단한 화해를 했다. "그때 일, 아무래도 억울해요. 나는 그저 좋은 인물화 한 점이 필요했을 뿐인데...... 하지만 이제 머지않아 헤어지게 됐으 웬만하면 노여움을 푸시오." 어느 날인가 제법 어둑해서야 퇴근하는 내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그가 한 말이었다. 그때는 어지간히 화도 가라앉은데다, 이미 그 학기로 그가 학교를 그만둔다는 소문이 퍼져 있던 때라 나는 선선히 그의 화해를 받아들였다. "벌써 잊을 걸요. 오히려 그때 제가 너무 무례하게 굴었다면 죄송해요." 그리고 자청해서 차 한잔까지 함께 마셨던 기억이 난다. 삶을 환상만들기라고 표현한 것도 그 다방이었거나 아니면 그 뒤에 한두 번 동료교원들과 어울렸던 자리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겨울방학과 함께 그는 사표를 내고 그 학교를 떠났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송별회랍시고 모인 어떤 술집에서 취한 그가 처량하게 불러대던 노래 뿐이다. "언젠가는 떠나야 할 그날이-- 빨리 왔을 뿐이네......" 그가 어디로 무얼 하러 가는지는 아무도 몰랐고, 나 자신도 그 이듬해 봄에는 그 학교를 떠나고 말았다. 사립학교의 과중한 수업량과 잡무에 시달리고, 단조로운 나날에 싫증을 느끼고 있던 나를 잠시 이 잡지의 주간을 맡으셨던 옛 은사 한 분이 상당한 대우로 불러 주신 덕분이었다. 그런데 잡지사로 옮긴 그해 말에 나는 그의 화려한 등단을 보았다. 어떤 민전(民展)의 대상(大賞)을 출발로 이어 국전(國展), 그리고 이듬해는 파리의 어느 권위 있는 화랑에서 초대전을 갖게 되는 식의 눈부신 성공이었다. 매스컴은 그 어느 때보다 호들갑을 떨었고, 그는 단 몇 년 동안에 무명에서 중견으로 뛰어올랐다. 우리 잡지에 그에 관한 기사가 실릴 때마다 나는 문득문득 함께 근무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가끔씩은-- 특히 그를 가리켜 고전적인 품격을 성취한 작가, 어쩌고 하는 미술평론가들의 글을 대할 때가 그러한데-- 그를 만나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그가 얻은 명성이나 예술적 성취에 대한 새삼스런 흠모와 경탄에서가 아니라, 내가 일찍부터 그를 알아보았다는, 좀 주제넘은 자부 때문이었다. 어쨌든 꽤 깊이 알고 있다고 믿고 그의 신산스럽던 삶이 어떤 형태로 바뀌었는가도 궁금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가 몇 번인가 우리 잡지사에 들른 적까지 있었음에도 끝내 만나지지 않다가 지난 달에야 겨우, 그것도 순전히 우연으로 만나게 된 것이었다. 4월 23일 일요일. 유행(流行)은 하나의 강요 또는 폭력이다. 어렸을 적에 나는 '몸뻬'를 병적이리만치 싫어했다. 그 몸뻬를 입은 여자들이 한결같이 가난하고 어려운 부인들, 즉 행상이나 질퍽한 시장바닥에 난전을 펴고 있는 아주머니들이란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미의식(美意識)이 완전히 결여된 실용(實用)에 대한 반감이었다. 언젠가 국민학교 저학년이었던 때, 크게 집수리를 한 적이 있는데, 엄마가 몸뻬를 입고 있다고 하루종일 따라다니며 울어 말린 적이 있다. "얘도 별나기는...... 이게 얼마나 편한데." 하시면서 결국 엄마는 몸뻬를 벗고 치마로 갈아입지 않을 수가 없을 만큼 지독하게 졸라댔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 그 몸뻬를 맞추었다. 디스코 바지-- 솔직히 말해 그걸 입어 몸뻬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는 몸매를 가진 이 나라의 여성이 얼마나 될까. 4월 25일 화요일. 며칠 조용해서 미뤄 뒀던 책이나 좀 읽을까 했는데 황의 전화질로 기분이 잡쳐버렸다. 사과와 함께 한 번만 더 만나 달라기에 참고 나가 준 게 화근이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전보다 훨씬 더 심각한 작태였다. 마치 삼 년 전에 약혼이라도 해 놓고 떠난 남자의 말투였다. 그것도 어조에는 어딘가 너도 어차피 노처녀가 돼 가고 있지 않느냐, 따지고 보면 나만한 사람도 없다, 그러니 더 뻗대지 말고 그만 나로 낙찰을 보아라-- 하는 투까지 들어 있다. 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거며 다음 학기부터는 모교에서 강의를 얻게 되리라는 따위의 저번과는 전혀 다른 은근한 자기과시와 함께. 듣다 보니 황에게 그토록 만만하게 보인 것이 분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헤어지면서 이번이야말로 마지막이라는 뜻을 분명히 밝혔지만, 황은 그마저도 제대로 받아들이는 눈치가 아니였다. 끝내 귀찮게 굴면 극약을 쓰는 수밖에 없지. 단 한번의 투약으로 그의 멍청함이 확 나아버릴. 4월 28일 금요일. 결국 극약을 쓰고 말았다. 황이 귀찮게 다시 만나 달라고 졸라대기에 그와 함께 황을 만나러 갔다. 황에게는 그가 '우리 그이'가 된 셈이다. 그는 처음 그런 역할을 떨떠름하게 여기는 눈치였지만 내 사정을 호소하자 술자리에 함께 앉아 주는 것만을 허락했다. 예상대로 황의 얼굴은 참담했다. 그러나 황도 그를 알아보고, 그 이름에 위압이라도 된 탓인지 특별히 유치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짐짓 지난 주에 만났던 이야기를 꺼내 그와 재미있게 주고받는 우리 곁에서 용케도 삼십 분이나 참고 앉았다가 문득 바쁜 약속을 잊고 있었다는 듯이나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래도 예의는 지킨답시고. "두 분 즐겁게 시간 보내십시오." 하며 깍듯이 머리까지 숙여 보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치미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며 자리를 뜨는 황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의 내 느낌이었다. 분명 내가 원하던 결과였지만,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는 황의 단호함을 확인하자마자 까닭 없이 가슴이 철렁하며 희미한 후회 같은 것이 마음속에 있었다. 과장스레 가까움을 표시하는 내 어조나 몸짓에도 불구하고, 그 또한 그런 내 속마음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따라가요. 지나친 것 같소. 내 보기엔 좀 철이 없어도 좋은 청년 같은데." 그가 따르던 잔을 멈추고 담담하게 권했다. 조금도 사심 없는 표정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내게는 자극적이었다. "싫어요, 저런 사람. 선생님과 함께 있는 게 훨씬 즐거워요." 나는 전에 없이 응석까지 부리며 머리가 얼얼할 때까지 잔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무얼 생각하는지 헤어질 때까지 내내 말이 없었다. 집에 돌아오자 나도 갑자기 그처럼 나이를 먹은 기분이었다. 이 처량한 기분, 까닭을 모르겠어. 4월 30일 일요일. "저번에 느낀 것인데, 이 선생은 경계해야 할 직업상의 함정이 있습니다. 만약 거기 빠져 들면 이 선생 자신이 바로 지난달에 특집으로 다룬 문제의 독신여성이 되고 말 겁니다." 오늘 시내의 찻집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가 조용히 얘기를 꺼냈다. "직업상으로 사람을 대하는 안목과 이 선생이 사적으로 대하는 사람, 특히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의 안목은 별개로 해야 할 겁니다. 일반적으로 신문이나 잡지사처럼 활발하게 외부와 접촉하는 직장의 여자에게 독신이나 만혼의 경향이 있는 것은 바로 그 같은 안목의 혼란에서 빚어지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직업상 접하는 사람은 어떤 의미로든 뉴스로서의 가치가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나름대로의 성취에 이른 사람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공무원이면 책임있는 발언을 할 수 있는 부서의 장(長)이나 개인의 특출한 재능으로 이미 자기 세계에서 어떤 평판을 얻은 사람입니다. 예술가나 학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집니다. 그녀들이 만나는 예술가는 대부분 이 나라의 중견이고, 설령 정상(頂上)들과 만나도 대등한 입장에서 인터뷰나 취재를 하게 되며, 학자의 경우도 그 비슷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만약 배우자나 사적인 친구를 선택하는 데도 여전히 그 같은 안목을 적용시킨다면 열에 아홉 그녀들은 실망을 하게 될 겁니다. 상대가 공무원이라면 대개 그녀들과 같은 또래인 서른 미만인 남자는 운이 좋아 고시를 합격했더라도 구석진 자리의 계장이나 말단 법관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작가라면 이제 겨우 등단했을까말까한 신인일 것이고, 학자라면 대학의 전임강사가 되어 있기도 힘들 것입니다. 직업상으로 만났던 사람들을 보면 눈과 똑같은 눈으로 그런 상대를 보게 되면 잘해야 아직 어리다는 느낌이 들고 심하게는 한심하게까지 보이게 되는 법이죠. 그게 이 선생과 같은 직장여성이 경계해야 할 함정입니다." 아마도 그는 황의 일이 몹시 마음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보다 그 말의 내용이 섬뜩했다. 언제나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아도, 어떤 일에 대해 말할 때에 보면 거기에는 사물의 핵심을 건드리는 무엇이 있다. 이따금씩 동료들이 나름대로는 상당한 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적이 있는데,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이해가 간다. 나도 과연 그런 직업병적인 안목에 빠진 것일까? ---하지만 안심하세요. 적어도 황의 일만은 그런 까닭에서가 아니랍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결혼이나 황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젊음이 이렇게 황폐해진 것은, 특히 사랑이란 말이 남녀간의 일로서는 입에 담기조차 쑥스러워져버린 것은.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내 지난날에는 오늘날의 황폐를 예감케 하는 기억은 없다. 누구나 그랬을 법하게 국민학교 때 짝꿍을 좋아하다가 졸업으로 흐지부지 헤어지고, 중학교 때는 미남 국어선생을 남몰래 흠모하다가 그가 결혼해 버리자 조금 철이 들고, 그래서 그 어느 편도 특별히 내게만 뒷날에 영향을 주는 비련이나 상처가 될 수는 없는 일들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도 특별난 것은 없다. 성적에 악착을 떨었다는 것과 책을 좀 좋아했다는 것이 좀 별나다면 별났겠지만, 그런 점에서라면 나보다 훨씬 별난 아아들도 많았다. 그때 몇몇 까까머리가 나타났지만 어떤 애는 턱없이 심각해서 싫었고 어떤 애는 너무 단순하고 동물적이어서 싫어 흐지부지되고, 나는 언제나 제자리에 들어와 있었다.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우리 집. 미워해 본 적은 없지만 남들처럼 간절하게 그리워해 본 적도 없는 어머니 아버지, 간신히 내 몫이 된 골방을 겨우 면한 내 방, 그럭저럭 십 등 안쪽을 도는 성적, 몇 권의 교양서적...... 그렇다고 내게 무슨 자폐증상 같은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마음 맞는 친구가 오면 거절한 적도 없고, 이따금씩은 찾아다니기도 했으니까. 어울려 등산을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연소자 관람불가를 상영하는 극장에 용감하게 숨어들기도 했다. 대학시절은 어땠는가? 솔직히 말해 처음 얼마간 나는 들떠 있었다. 남들이 선망하는 명문의 배지를 달고 난 안도라기보다는, 정해진 성장의 마지막 과정에 무사히 들어섰다는 데서 오는 방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들 못지않게 미팅도 나갔고, 음악실이나 다방이니 하는 극장도 부지런히 다녔다. 그러나 삼학년 때 보니 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황은 오히려 그때 만난 사람이었다. 도서목록 안내나 하고 최근에 읽은 책 합평회나 하고, 어쩌다 데이트를 해도 저물기 전에는 정확히 헤어지는, 그리고 그뿐이었다. 대학생활이 끝나고 다시 만나고 싶은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어 지금의 나-- 도대체 무엇이 빠졌을까. 무엇이 빠져 이런 내가 되어버렸을까. 5월1일 월요일. 오늘 넘긴 원고 가운데 재미있는 것이 있기에 발췌해 둔다. 이 달의 특집 '성개방의 윤리'에서 내 몫에 주어진 앙케이트의 일부이다. ---성개방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영리한 호색한(好色漢)이 지어낸 말일 것입니다. 여자들이 근대적인 도덕감에 묶여 있으면, 그가 아무리 공을 들여도 특별히 육욕에 약한 여자거나 직업적인 여자, 또는 다른 이유로 몸을 허락할 수밖에 없는 저급의 여자들밖에 농락할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성개방의 논리를 그럴듯하게 얽어 현대와 함께 일기 시작하는 여성해방운동과 연결시켜 놓으니 이건 뭐 만포장이죠. 똑똑한 여자, 배운 여자, 상류층, 지식층, 할 것 없이 입맛대로 골라잡을 수 있게 된 거죠.-- S대 4년 M군 2. 인간도 동물의 하나라는 점에서 본성에 맞는 주장이겠죠. 그러나 문명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잘 이해가 안 가요. 진보 또는 발전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대개 동물적인 상태에서 멀어져 간다는 뜻이죠. 인간이 문명을 이룩하게 된 몇 가지 요소, 즉 직립보행이나 불과 도구의 사용, 언어의 발명 등은 모두 다른 동물에게 그런 것이 없다는 데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개방이란 우리가 힘들여 버리고 온 동물로의 길을 그 방면에서만은 되돌리려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주장을 가장 완벽하게 실천하고 있는 것은 동물이니까요. 물론 이런 말을 하는 나도 그런 동물적인 충동에 들뜬 때가 있고, 가끔씩은 그 상태를 황홀하게 망상하기도 합니다. 진심으로 원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주장을 이용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성(性)의 문제뿐만 아니라도 우리는 가끔씩 이성적으로 정비된 현대 사회의 여러 규칙들과 상반된 충동에 젖을 때가 있습니다. 미운 사람은 내 손으로 때려죽이고 싶을 때도 있고, 탐나는 것은 힘으로라고 빼앗고 싶습니다. 그런 충동 역시 우리 본성의 일부라고 보면, 그것을 이 시대의 억압에서 풀어 주는 운동은 어떻겠습니까? 살인 자유화운동, 구타 자유화운동, 절도 자유화운동, 일 안해도 먹을 수 있기 운동-- 하필 성개방 뿐만이 아니겠죠. 혹 내가 예로 든 그런 운동과 성개방 운동 사이에는 그 부작용의 질과 양에 차이가 있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얼른 보기에는 살인과 구타와 절도와 무위도식이 횡행하는 사회와, 성적(性的)으로 자유로운 사회와는 천양지차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본질을 살피면 비슷하죠. 모두가 살인자, 깡패, 도둑이 되어 있으면 그 세상이 편리할 것이고, 모두가 이성과 절제 속에 살려 들면 앞서 예로 든 세상은 그대로 생지옥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모두가 동물적인 육욕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성개방의 주장보다 더 훌륭한 주장은 없을 것이지만, 도덕적으로 정숙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같은 원리로 이루어진 사회는 앞서 예로 든 사회 못지 않게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배우자의 방탕에 상심한 남편이나 아내가 자살을 한다면 그것은 간접적인 살인이고, 그런 풍조에 따라 성병이 만연한다면 그건 폭력과 다를 바 없는 상해를 신체에 가져온 셈이 되며, 성적인 이유로 이떤 사람이 이쪽 상대에게서 얻은 것을 저쪽 상대에게 가져다 주게 되면 간접적인 절도가 될 테니까요.-- G무역 기획과 B씨 3. 그런 주장의 이론적 기초가 옳으냐 그르냐는 한마디로 말할 수 없겠지만 제가 의심하고 싶은 것은 그 주장이 사회 표면에 공공연히 떠오르게 된 동기입니다. 겉보기에는 우리 사회의 인식도 상당히 서구화 내지 현대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이 사회 남성들의 내심을 깊이 지배하고 있는 것은 보수주의입니다. 특히 성도덕에 관한 한 남성의 보수주의는 예상 밖으로 엄격하죠. 예를 들어 내게는 대학 이상의 학력을 가진 친한 친구가 여섯 명쯤 됩니다. 그들 중에는 여자에 대해 상당한 수완가도 있어 어떤 친구는 숫처녀의 상장인 피가 묻은 손수건이나 침대 시트 조각을 몇 장씩이고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막힌 일은 그들 중 아무도 첫날밤에 자기 아내가 숫처녀가 아닌 것을 알고도 진심으로 용서할 자신이 있다고 말한 친구는 없습니다. 물론 내가 특별히 보수적인 집안을 조사대상으로 삼는지도 모르고, 그들도 입으로 말한 것과 달리 구체적인 경우를 당하면 어떻게 대처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성에 대해서는 보수주의가 남자들의 내심을 배하는 한 중요한 경향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게 옳고 그르고는 따지지 않고 말이죠. 그런데 이 나라 여성들의 경우에는 그런 상대방의 남성들의 기호를 만족시켜 주기가 어렵게 됐습니다. 예를 들어 성의 대상으로 취급될 수 있는 남자를 하나의 폭탄으로 비유한다면, 지난 시대의 여성들의 규방에 갇혀서 몇 개의 우연한 폭탄만 피하면 되었는 데 비해, 개방된 이 시대의 여성들은 거의 탄우(彈雨) 속을 뚫고 지나야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학교에서, 동네에서, 직장에서, 때로는 호젓한 산길이나 어두운 골목길에서까지 여성은 하루에도 수십 개의 폭탄 사이를 피해 가야 하는 셈이죠. 따라서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남자들의 보수주의가 약화되는 속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성적인 체험을 가지게 됩니다. 성개방에 대한 주장은-- 바로 그런 남성들의 보수주의와 여성의 현실 사이에 있는 갭을 단시일 내에 메워버리려는 운동이 아닐까요? 특히 그 때문에 삶에 치명적인 위해를 입게 된 여성측의 그 만회를 위한...... 하기야 이 밖에도 다른 중요한 원인들이 많이 있겠지만, 남녀간의 묵시적인 합의에 따라 내심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그 주장이 여성해방운동의 한 내용으로 사회의식의 표면에 떠오르는 것을 보고 추측해 본 제 사견(私見)입니다.-- H여고 교사 K씨 내가 특히 이 세 가지 대답을 기록하는 것은 그들이 한결같이 현대적인 교육과정을 마친 서른 살 미만의 지식층이란 점이다. 까닭 없이 불쾌하면서도 한편으로 수긍이 가는, 남성들의 이 놀라운 보수적 경향, 거기에 비하면 여성측의 응대는 때로 반짝이기는 해도 너무 상식적이었다. 특히 진기한 것은 별로 정신적인 바탕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저(低)교육층의 여성들에게서 긍정적인 대답을 하는 율이 높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Y공단 같은 데서는 미혼 여성의 86%가 성개방을 지지했는데, 이유는 대개가 저급한 잡지에서 여러 번 보아 온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 때문이었다. 5월 2일 화요일. 이번 호는 비교적 수월하게 넘어갔다. 숙제와도 같은 작가 L씨의 글도 받아 냈고, 맡은 기사도 힘들이지 않고 주간님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바람에 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 버렸다. 내가 유일하게 봄을 느낀 기억이라면 취재차 찾아갔던 E여대의 캠퍼스에서 어느새 지고 있는 벚꽃을 발견하고 까닭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 당황했던 정도랄까? 아침에 문득 그것이 떠오르자 이번에는 그 일이 다시 쓸쓸해져 하루를 온통 서성이며 보내고 말았다. 며칠 조용한 기간을 이용해 늦은대로 짧은 봄나들이 여행이나 할 수 있었으면. 5월 6일 토요일. 아침에 그에게서 느닷없이 전화가 왔다. 내일 일요일을 이용해서 이틀짜리 짧은 여행이나 할 양으로 출근할까말까 망설이다가 겨우 출근했을 때였다. "이때쯤 한가한 날이 며칠 있다고 했는데, 오늘 어떻소? 이번 호는 마감했소?" 며칠 만인데도 언제나 함께 있던 사람의 말투 같다. 그런데 자신도 놀란 것은 내 대답이었다. "그래요. 그래서 오늘내일 어디 좀 다녀올까 해요." 남자에게는 되도록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 여자들의 몸에 밴 근성 중의 하나이다. 진실을 말해도 되도록 완곡하게, '네'는 '글쎄요?' '글쎄요'는 '아니오'라는 식으로. 그런데 나는 단번에 유혹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내 진실을 말해 주고 말았다. 그런데 놀라움을 지나 화가 날 지경이 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잘 됐소. 오늘 수원 쪽으로 가 보지 않겠소? 택시로 가면 왕복에 두어 시간, 거기서 서너 시간 함께 지내도 해지기 전에는 돌아올 수 있어요." 라는 그의 말에 나는자신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좋아요. 대신 봄 구경을 시켜 주셔야 해요. 나도 모르는 새 봄이 다 가버렸잖아요?" 목소리가 들떠 보였는지 곁자리에 앉은 미스터 박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힐끗 쳐다보았다. 그 바람에 정신이 돌아온 나는 그제서야 그 경박한 대답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참 이상한 일이다. 다시 만나게 된 뒤부터 나는 단 한번도 그의 제안을 거절한 적이 없다. 어떤 때는 퇴근 뒤에 동료들간의 모임이 있을 때도 급한 약속 핑계를 대고 그를 만나러 간 적도 있었다. 기껏해야 차 한잔 마시거나 가볍게 술 한잔 나누며 환담이나 하는 만남을......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도무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는 그의 전화만 받으면 반드시 그의 말대로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빠지고 만다.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 어쩌다 그의 목소리가 한두 시간 나를 따라다닐 때는 있지만, 대개는 회사에서 퇴근했을 때와 다름이 없는 담담한 심정으로 잠들게 되는데도.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 몇 날이고 까맣게 그를 잊고 지내는데도. 출발이야 어쨌건 묘한 감동의 하루였다. 얼굴만 내민 뒤 편집부를 나와 약속장소로 가니 그가 드물게 정장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고급 건달에서 삼십대 후반의 말쑥한 신사로 변해 있는 것이었다. 차편도 택시라고 말했지만, 어디서 빌렸는지 운전사가 딸린 고급 승용차였다. "오늘 웬일이세요?" 궁금한 내가 시내를 벗어나면서 물었다. 그가 쓸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내 삶이 성공적으로 보여야 하는 날이오." "수원은 무엇 때문에 가세요?" "아버지와 아들을 만나러. 하지만 잠깐이면 되오. 나머지는 이 선생에게 봄을 보여 드리겠소. 그곳이라면 아직 봄이 남아 있는 곳을 나는 알고 있소." "아버지와 아들? 그 사람들이 왜 수원에 있어요? 자택이 서울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 "가 보면 알게 되오." 그런데 차가 선 곳은 가정집이 아니라 변두리에 있는 작은 소학교 같은 건물 앞이었다. '샛별 보육원(保育院)' 그 간판을 보자마자 나는 그의 어두운 과거로 통하는 길목에 들어선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익숙하게 안내하는 그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밝았다. "여기가 내 집이오." 그리고 성큼성큼 문 안으로 들어서는 그는 정말 오래 떠나 있던 옛집에 돌아온 사람 같았다. "스데빤(스테파노)이구나. 기다렸다." 우리가 몇 발 옮기기도 전에 입구 쪽의 건물에서 사십대의 사내 하나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미리 연락된 일인 모양이었다. "요한 형님이시군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맞잡은 그는 이어 차 쪽을 가리켰다. "트렁크에 아이들 먹을 것을 좀 넣어 왔습니다. 날이 따뜻하니 상하기 전에 옮기세요." 그리고 넓은 마당 구석의 놀이터에 몰려 있는 아이들에게 눈길을 팔고 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잠깐 여기서 구경이나 하고 있어요. 십 분이면 될 거요." 그곳은 말하자면 고아원이었다. 그런 곳이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직접 와 보기는 처음이어서 나도 상당한 호기심이 있었다. 그러나 놀고 있는 아이들과 교사(校舍)처럼 들어선 두 동(棟)의 건물 어디에서도 소설 같은 데서 읽던 배고픔이나 추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좀 허름한 유치원 같다고나 할까. 내가 그런 것을 둘러보기 시작한 지 오 분쯤이나 되었을까 싶을 때, 키 큰 고등학생 하나가 다가오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들어오시라고 합니다." "아버님......?" 하다 말고 나는 곧 그고등학생의 안내에 따라 그가 사라진 가운데동의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의 과거로 한발자국 더 깊이 들어선다는 생각에 최소한의망설임조차 보이지 않고 따라 나선 것이었다. 그는 원장실이란 패가 붙은 방의 소파에 낯선 오십대 중반의 남자와 함께 앉아 있다가 들어서는 나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차나 한잔 하고 가자고...... 참 인사드리시지요. 저를 길러 주신 아버님이십니다." 그리고 황급히 몸을 일으키는 그 남자에게도 나를 소개했다. "아버님, 이쪽은 제가 말씀드린 이 선생입니다." "잘 왔소. 손님은 그냥 보낼 수 없어 제가 모셔 오게 했소." 그 남자도 엉거주춤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오십대라고는 하지만 그의 아버지로는 아무래도 젊어 보였다. 뒤이어 그는 나를 인도한 고등학생과 미리 거기에 와 있던 중학생 하나를 아들로 소개했다. 그 애들은 또 그의 아들로는 너무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사정은 짐작이 갔다. "어려운 일을 하고 계십니다." 나는 자리가 어색해지는 것을 피하려고 그의 아버지라는 남자에게 한마디 해주었다. 책에서 읽은 고아원 원장의 두 가지 유형-- 위선적인 모리배거나 거룩한 봉사자--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얼굴로 원장은 말했다. "이젠 그저 관리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회단체와 정부 보조에다 스테빤 같은 아이들이 더러 있어 나는 경리나 보아 주면 되니까......" 그러면서 원장은 두 양아들을 위해 그가 내놓은 것임에 분명한 흰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몇 마디 의례적인 말로 우리의 대화는 곧 끝났지만, 거기서 나는 그의 또 다른 일면을 보았다. 원장에게 입상(入賞) 경력이며 개인전 같은 것을 얘기하는 그의 표정에는 자기의 일에 대한 확신과 자랑이 이전에 없이 과장되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십 분쯤 뒤 그 보육원을 빠져 나오자마자 그는 이내 우울하고 축 처진 표정으로 돌아갔다. 내게 가장 익숙한 표정이었다. "이제 갑시다. 봄을 보여 드리겠소." 그는 이렇게 말하며 운전석 곁에 앉아 스스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차가 선 것은 거기서 오 리도 안되는 조그만 야산자락이었다. 운전사를 기다리게 한 뒤 그가 야트막한 산비탈로 접어들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야 되오. 신이 불편하지나 않을는지 모르겠소." 그는 가겠느냐를 묻지도 않고, 나도 그런 걸 생각할 틈도 없이 그를 따랐다. 그 산 중턱쯤 두 개의 능선이 계곡을 이루기 시작하는 곳에 이를 때까지도 그는 별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곳에 이르러서야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요. 이 무덤 가에서 기다리시오." "어딜 기시게요? 저는 가면 안돼요?" "비탈이 가파라요. 그 신으로는 어려울 거요." 계곡을 내려다보니 높이야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말로 가파랐다. 거기다가 키 작은 관목들이 얽혀 스커트 차림으로는 내려가기 어려웠다. 그 사이 그는 그런 관목 줄기에 매달려 비탈 아래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몇 분 뒤였다. 놀라웁게도 그가 한아름 꺾어온 것은 이미 다 져버린 줄 알았던 진달래였다. 그는 그 중에서도 한 뭉치를 내게 내밀며 말했다. "이만하면 봄을 구경한 게 될는지 모르겠소." "여기 진달래가 남아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죠?" 나는 감사도 잊고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이곳은 부근에서 가장 늦게까지 겨울이 머무는 곳이오. 그렇다면 봄도 늦지 않았소?" 그리고 남은 꽃을 내가 기다리고 있던 작은 무덤가에 놓더니 무엇을 억누르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가엾은 누이의 무덤이오. 함께 묵념이라도 올려 주겠소?"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말에 나는 앞뒤 없이 눈물이 솟았다. 어떻게 그토록 빠른 감정 전달이 일어났는지 나중에 생각해도 이해가 안될 지경이었다. 오히려 덤덤한 것은 그였다. 한동안 지그시 감고 있다 눈을 뜬 그는 진달래 꽃잎을 하나씩 따서 무덤 위에 뿌리며 남의 일처럼 지난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폐렴에 걸려 열한 살에 죽은 내 누이요. 하늘 아래 남아 있던 한점 혈육...... 저 고아원에서 자랄 때 우리는 곧잘 이 산에 올라왔소. 특히 이맘때면 그때만 해도 지천으로 덮여 있던 진달래 때문에 여기서 한나절씩 보내곤 했소. 항상 배가 고팠던 우리는 입술이 보라색이 될 때까지 진달래 꽃잎을 따먹었던 것이오. 나중에 누이가 죽고, 국유림인 이곳에 내다버리듯 파묻었을 때도 나는 처음 이 진달래 때문에 약간 안심이 되었소. 봄철만이라도 배고프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지. 그러나 차츰 자라면서, 다음에 어른이 되면 반드시 무덤부터 옮겨 주리라 결심하였소. 고아원의 내 창틀에서 보면 이곳에 가장 늦게까지 눈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오. 때로는 삼월 중순인데도 이 발밑 계곡만은 어쩌다 떨어뜨리는 솜뭉치처럼 하얗게 눈이 남아 있었소. 그러면 내 자신도 별로 따뜻하지 않은 방에 있었지만 이곳에서 추위에서 떨고 있을 누이가 가여워 남몰래 눈물짓곤 했소. 고등학교 시절, 손끝이 얼어 오는 듯 차가운 방에서도 내가 몇 시간씩이고 석고 데생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누이 덕분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소. 그래서 사 년 전 처음으로 내게 그럴 여유가 생기자마자 나는 곧장 이곳으로 달려왔소. 누이의 무덤을 좀더 따뜻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서였소. 그때도 아마 이맘때였을 거요. 그런데 이장(移葬)을 하러 왔던 인부 가운데 하나가 계곡에 내려가더니 진달래를 한아름 안고왔소. 겨울이 늦은 것만큼 봄도 늦게 남아 있었던 거요...... 그날 나는 결국 데려간 인부로 봉분만 하고 서울로 돌아왔소." 그곳을 내려온 뒤 우리는 거의 세 시간 동안이나 부근의 명승을 둘러보았지만, 왠지 그의 얘기를 들을 때 느껴지던 서늘한 감동은 끝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차가 서울 시내로 접어들기 시작한 뒤에야 나는 비로소 그가 보여 준 것이 봄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떠나갈 줄 모르는 겨울이란 것 알았다. 외부의 겨울은 그가 함께 근무하던 그 학교를 떠나던 때에 이미 끝났는데도. 그래서 집까지 차로 바래다 준 그가 잊고 내린 진달래 꽃다발을 차창 밖으로 내주며, "봄을 보여 주었는데 어째 고맙다는 말도 없어요? 내가 봄을 잘못 보여 줬나?" 하며빙긋 웃을 때 나는 정색을 하고 대답해 주었다. "그래요. 내가 본 것은 늦도록 남아 있는 겨울 뿐이었어요." 5월 7일 일요일. 그런데 이상하다. 그가 왜 나를 그런 곳에 데려갔을까. 5월 11일 목요일. "글쎄, 나도 잘 모르겠소. 아는 사람에게 차를 빌려 막 수원으로 떠나려는데 문득 이 선생이 생각난 거요. 내가 부탁하면 들어줄 것 같은 예감과 함께." 저녁에 그를 만나자마자 궁금해서 묻는 나에게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고 싶어진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고 다그치자, 그는 약간 정색을 하면서 대답했다. "어쩌면 그것이 마지막 방문이 될지 모른다는 예감 때문데 내가 약간 감상적이 된지도 모르겠소. 사실 나는 그곳을 그만 찾고 싶소. 그 고아원도, 무덤도, 그들의 기억이 지나치게 내 삶을 간섭하는 것 같은 기분이오. 이 선생 표현을 빌리면 이제 나도 춥고 긴 겨울을 그만 보내고 싶은 거요." 5월 15일 월요일. 미스터 박과 한바탕 싸웠다. 발단은 편집회의 때 박이 한 말이었다. "다음호 특집은 이게 어떨까요? '처자 있는 남자와의 사랑'-- 요즈음 노처녀들간에는 꽤 심각한 문제가 되어 있는가 보던데요. 4월호의 '커리어 우먼이 늘어간다'와 짝을 이룰 수도 있고......" 그리고 의미있는 눈길로 나를 보았던 것이다. 그게 어찌나 불쾌했던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자리가 전 편집부원이 모인 공석이라 끝날 때까지 참았다. 회의가 끝난 뒤 구내다방으로 박을 불러 다그쳤더니 내 예감이 옳았다. 박은 내가 그와 함께 있는 걸 두어 번 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제서야 내가 그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그의 눈길에 빈정거림과 같은 것이 떠오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처음 한동안 나는 어떻게든 박을 이해시키려고 애썼다. 필요하면 그와 나의 오랜 인연-- 학교에서 함께 교편을 잡던 시절까지를 얘기해 줄 작정이었다. 하지만 박은 그런 내 말에 귀기울이려 않고, 엉뚱한 충고만 늘어놨다. "아까 말한 그 특집, 부제는 이렇게 정했어요. <그 앞에선 행복, 돌아서면 불행>이라고 이 기자(記者), 남의 얘기로 듣지 말아요. 몇 년 한솥밥 먹은 정리로 하는 얘기예요." 거기서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말았다. 해명 대신 우리 관계 옹호로 말이 빗나가고, 사생활의 침해가 내세워지고, 나중에는 건방진 사람까지 갔다가, 작년 그가 추근대던 무렵을 들먹여 그의 비위를 한껏 긁어 놓고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생각하면 겨우 두 달 사이에 열 번 가까이나 그와 나는 아무런 명분 없이 만나고 있다. 그것이 이른바 연애가 아닌 것은 나도 그도 명백하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남녀간의 우정? 그러나 나이도 처지도 전혀 좋아하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모든 약속에 우선하여 두 달에 열 번이나 그 작가를 만날만큼 나는 열렬한 미술애호가가 못된다. 기자와 취재원? 마찬가지다. 미술은 내 파트가 아니고, 설령 내 파트라 하더라도 그는 계속적으로 접촉해야 될 성질의 취재원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내게 무엇인가? 그 때문에 불리(不利)를 입었다면 입었다고 할 수 있는 지금에도 조금도 원망스럽거나 귀찮게는 떠오르지 않는 그의 얼굴은 무엇이란 말인가. 5월 18일 목요일. 아무래도 그와 만나는 일은 다시 검토해 보아야겠다. 아침에 출근하니 낯선 잡지 한 권이 책상 위에 놓여 있길래(아마도 미스터 박의 짓 같다) 무심코 폈다가 갑작스레 그의 가정을 엿보게 되었다. 화보(畵報)로 꾸민 것인데 첫 페이지는 정석대로 그가 아틀리에서 작업하는 모습이었다. 사진기자의 주문에 충실하게 취한 포즈가 왠지 나에게는 낯설었다. 그 다음은 가족사진이었는데 제법 어우러진 정원에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국민학교 사오 학년쯤으로 보이는 두 아들이었다. 같이 근무할 때 동료교사로부터 들은 왠지 돼지우리 같은 방만이 강하게 남아 있는 내게는 그 주거공간이 왠지 그에게 어색해 보였다. 그 다음은 흔한 상록수에 물을 주고 있는 그. 그런데 마지막 사진에서 나는 참으로 알 수 없으면서도 세찬 충격을 받았다. 그와 그의 아내가 다정한 미소로 마주보고 있는 사진이었다. 먼저 내 눈길을 끈 것은 좀 크게 나온 바람에 자세히 얼굴을 뜯어볼 수 있게 된 그의 아내였다. 역시 찌든 아낙네로만 연상해 온 나에게 화사하게 웃는 미인형의 해맑은 얼굴은 뜻밖이다 못해 희미한 적의까지 일으켰다. 거기다가 마주앉은 그의 얼굴. 그것은 선량하고 애정에 찬 남편의 모습이었다. 무언가 속고 있었다는 기분을 넘어 나를 농락하기 위한 음흉한 술책을 사전에 알아낸 것 같을 정도였다. 그러나 더욱 놀란 것은 어쩌면 당연히 짐작했어야 할 그의 가정생활에 내가 그토록 큰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무슨 일이 있니? 안색이 좋지 않구나." 그런 고참언니의 말을 듣고 화장실에 가 보니 내가 보기에도 얼굴이 핼쓱해져 있었다. 나는 곧 평온을 가장하며 나머지 시간을 메웠지만, 나중에는 또 애써 평온을 가장해야 하는 내 자신에게 까닭 없이 화가 났다. 그렇다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적어도 그는 내가 무심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어서 빨리 명분을 결정짓지 않으면 안될 사람, 또는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 5월 20일 토요일. 기간으로 봐서는 그의 전화가 올 때가 지났는데 오늘도 아무 연락이 없다. 내가 이제부터는 구체적인 용건이 없는 한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을 그가 알기라도 했다는 것인지. 5월 22일 월요일. 어쨌든 해냈다. 오전에 만나자는 그의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전과 달리 차분하게 되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그러자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말했다. "아 알겠소. 바쁘신 모양이니 이만 끊어요." 역시 차분한 목소리였다. 통상으로 그의 목소리는 과장하는 투거나 당황을 감추느라 억눌린 것이어서인지 그 차분함에 나는 왠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어쨌든 잘했다. 나는 행여라도 그와의 일이 귀찮게 꼬리를 가질까 봐 걱정했었다. 이제 나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5월 23일 화요일. 이게 제자리인가. 이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 내가 있던 곳인가. 5월 25일 요일 생각 안 남.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전에는 무슨 일이든 혼자 했지만 요즈음은 언제나 누가 곁에 있다 취재를 갈 때에도 동료 중에 누군가와 함께이고, 책상에 앉아 원고를 쓸 때에도 누가 곁에 없으면 마음이 안 잡힌다. 근무가 끝난 뒤에도 누구와 차라도 한잔 하고 헤어져야 마음이 놓이고, 집에 가서도 내 방에 가기 싫어 안방에서 밤이 깊도록 머뭇거린다. 그를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한 탓인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다. 아무리 정직하게 말해도 그 일은 한번도 고통이었던 적이 없고, 불필요한 시간에 그의 얼굴을 떠올려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무엇인가? 무엇이 원래의 자리인가. 5월 31일 또 한달이 간다. 5월치 달력을 찢으면서, 새삼 내가 삶을 낭비하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불안에 젖는다. 요즈음 나를 인도하는 별은 무엇인가? 일에 대한 열정인가? 아니면 내면적으로 숨겨진 예술에 관한 야심?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사랑, 종교적 경건?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내겐 해당이 없다. 물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재미난 적도 있었다. 아이를 가르친다는, 결과가 거의 무형(無形)한 직종에서, 잘됐건 못됐건 매달 한 건의, 겉보기에는 호화롭고 그럴듯한 잡지를 만드는 직장으로 옮기고 나서의 처음 얼마간은 나는 정말로 이 일에 몰두했었다. 내가 쓴 글이 처음 활자로 되어 나올 때의 그 기묘한 감격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도 몇 달이었다. 전해의 그달치가 가장 좋은 참고가 되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계절 기사, 신체의 다른 부위는 다 없어지고, 목청만 살아남아 있는 듯한 가수며, 엉덩이와 유방만 살아 있는 듯한 여배우 찾아다니기, 잡지의 호화스러움에 대한 사죄이기나 하듯 매달 한둘쯤은 제법 의분(義憤)에 찬 목소리로 끼워 놓게 마련인 밑바닥 삶, 또는 소외도니 계층의 신산스러운 주인공을 만들어 내기, 각종의 작가와 벌여야 하는 원고 얻기 씨름, 그렇고 그런 주문에 따라 일년치 스케줄이 미리 잡혀버린 명사(名士)가정 탐방, 비슷한 종류의 일본잡지 그 전달치를 순서까지 그대로 따르기 일쑤인 뻔한 기획, 먹는 거, 마시는 것에 바르고 씻는 것만이 판을 치는 광고의 배열-- 나는 차츰 그런 것들이 짜증스러워지고 불만스럽고, 그러다가 진열장에 세워 둔 책을 보고, 뭐 저런 요란한 책이 있어, 해 놓고 보면 그게 바로 우리 책인 경우까지 있을 정도다. 일은 그저 하나의 방편, 그게 결혼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중대한 삶의 전환이든 그때가 올 때까지 잠시 내 삶을 의탁하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우리 집이 내게 생활비 보조를 받아야 할 만큼 가난하지는 않지만 유학을 가거나 꽃꽂이를 하고 피아노나 치며 빈둥거릴 만큼 부유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예술에 관한 내면적인 야심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사실 내게도 감추어진 꿈이 있었다. 대학시절 내내 나를 사로잡았던 시(詩)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한번도 그걸 밖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것은 주변의 나와 같은 꿈을 가진 이들의 한심스런 작태였다. 주로 남학생들이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이 한 세대에 하나쯤 나는 천재로 착각하는 과대망상증 환자였다. 그래서 그들은 시보다도 시인(詩人)이란 말에 붙은 사이비적 요소-- 위대한 시인들에게서 이따금씩보이는 광기, 성적(性的) 부패, 생활의 방기 따위, 탐미적이고 퇴폐적이라고 싸잡아 불려지는 것들--에 매혹되어 있었고 때로는 직접 실습까지 했다. 모두는 아니지만 여학생들도 그런 남학생들과 죽이 맞아 돌아가는 것 또한 적어도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문학적 소질의 일부로 알고 있었으며, 엘리엇의 시 한 구절을 분석하기보다는 하룻밤 음주난무(飮酒亂舞)가 그녀들의 시에 더 유익하다고 믿고 있었다. 반드시 정당한 태도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내가 그때 내 꿈을 드러내 놓고 추구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그런 문학주변의 부정적인 요소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시는 여전히 감추어진 꿈으로 남아 있었다. 교편을 잡게 되면서 나는 한때 시에 본격적으로 몰두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순수한 열정을 잃어버린 뒤였다. 몇 번 시인의 문턱을 넘보다가 좌절당하자 그만 발끈하는 자존심에 시를 팽개치고 말았다. 그러다가 잡지로 옮기면서 나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꿈에 불을 지폈다. 잡지라는 것이 문학에 한 발 다가선 어떤 것으로 오인되었고, 덩달아 나도 오랜 꿈에 한 발 접근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가까워진 것은 이번에도 시 그 자체가 아니라 역시 그 주변의 선뜻 마음 내키지 않는 분위기였다. 우선 놀란 것은 그 우러러보이던 시인이 너무 흔하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사내(社內)에도 둘이나 있고 전국적으로 수천 명이 된다는 사실을 나는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었다. 동서고금 통틀어 내가 기억하는 시인이 오백 명도 안되는데 어떻게 이 시대 이 나라에 수천의 시인이 떼를 지어 나타날 수 있는가. 그 다음 요령부득인 작품에 해설은 또 왜 그리 장황한지 저마다 제 팔 흔드는 식의 난장판에 나는 현기가 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이래저래 심드렁해져 버린데다 재능에 대한 자신마저 잃은 나는 이윽고 이따금씩 쑤시는 상처와 같은 정도로밖에는 시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사랑, 종교적 경건, 그 밖에 어떤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 것도 나의 열정에 불을 지필 것은 없고, 이제는 외로움조차도 진실하지 못하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 내 지난 삶의 자취 가운데 어떤 것이 오늘날의 이같은 모습으로 나를 이끌어 와버린 것이다. 6월 2일 금요일. 선을 보았다. 사촌언니가 중매를 선 셈인데 형부와 한 직장에 있는 사람이다. 서른셋, 예수와 동갑이라고 농담했지만, 아무래도 지나친 나이다. 외모는 보통, 직급도 보통, 교양 예절 공히 보통, 그리고 한 시간도 못 되는 사이에 처음 만난 여자에게서 이런 판정을 받았으니 여자 다루는 솜씨도 아마 보통일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보통이 특징인 사람이었다. 그 남자와 결혼하면 어김없이 몇 년 내로 나 또한 보통의 주부가 되고 보통의 자식을 얻고 보통의 가정을 꾸미게 될 것이다. 물론 평범하다는 게 반드시 나쁠 건 없다. 아니, 오히려 별난 것을 귀하게 여기는 버릇이 오히려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일생을 함께 할 배우자로서는 평범이란 특징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평균으로 셈하면 결국 보통이 되고 말더라도 좀 들쭉날쭉하기를 바라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다시 말해, 어떤 점에서는 평균에서 좀 뒤지더라도 어떤 점에서는 뛰어난 편이 낫다. 그래야만 내가 설 자리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의 부족은 내가 메우고, 그의 우수함에는 의지도 하고...... 내가 생각하기에 결혼은 어떤 삶에 대한 다른 삶의 개입이다. 따라서 그 결합은 어슷어슷한 두 개의 원이 만나는 것보다는 들쭉날쭉한 두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것이 더 단단할 것이다. 나의 단점과 그의 장점이 맞물리고 그의 결핍과 나의 풍요가 맞물리고, 또 그의 능력과 나의 무능이 맞물리고...... 특히 아무런 사랑과 믿음이 축적 없이 중매란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결혼일수록. 애초에 맞선 자리에 앉게 된 것부터가 형부의 강요에 가까운 권유에서였듯, 별 뜻도 없는 말들을 나누면서도 한 시간 가까이나 함께 앉아 있었던 것은 순전히 까닭 모를 안달을 부리며 커피 숍 저쪽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촌언니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미스터 평범씨. 당신은 분명 좋은 사람 같지만, 짝은 다른 데 있는 것 같아요. 기분 상하지 않길 빌어요. 6월 3일 토요일. --그리스에서 벌써 기원 4세기 경에 책방이 있어 책의 거래가 활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책의 거래는 상업성과 무관한 것으로 여겨 왔고, 또 대부분의 시대에는 그래 온 것 같다. 오늘날 가장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도 책을 드러내 놓고 선뜻 '상품'이라고 말하기를 꺼린다. 이미 노골적이고 천박한 상품이 되어 시장 바닥을 뒹군 지 오래 되었건만 아직도 책이 그런 종류의 권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땅에도 빨리 포르노 문화(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가 정립되어야겠다. 그래야만 탈을 쓴 포르노 문화가 건전하고 교양의 이름으로 버젓하게 설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 달의 소위 여성종합교양지 세 권의 특집 제목, '죄없는 탈선'(즉 미화된 간통담) '남성의 성(性) 해부'(성기 단면도 및 국부명칭 포함) '매력 있는 여자란?'(즉 섹시해 보이는 법. 침대 위에서의 기교 포함) --이 땅에도 빨리 포르노 문화가 정립되어야겠다. 그것이 공공연하게 문화의 다양성 가운데 공인된 곳에서는 대중의 일부만 수요자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금지된 곳에서는 완곡한 표현과 비틀린 형태(예컨대 충격사건 심층 취재)로 대중일반의 호기심을 점증시켜, 마침내는 대중 전체를 그 수요자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어떤 남성의 솔직한 고백. '엠마누엘' 정도의 포르노 영화라면 몇 편 정도는 거듭 볼 수 있지만, 천박하고 노골적인 포르노 영화는 단 두 편도 거듭 보지 못할 겁니다. 구역질이 나고, 때로는 그들이 내 동료인간이라는 게 비참하게 느껴져요. 아마도 그런 것의 단골이 있다면 그건 분명 정신병리학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일 거요. 이것이 이번 호 이 나라의 여성종합교양지 세 권을 놓고, 내가 떠올려 본 역설적인 단상(斷想)들이다. 물론 그 세 권 가운데는 내가 거들어 만든 잡지도 끼여 있다. 그렇다면 그걸 만들어 낸 또는 만드는데 힘을 합한 나는 무엇인가. 우리의 오랜 대답-- '수요가 있으니 공급했을 뿐이다.' 또는, '당신이 지적한 것은 오직 대중잡지의 역기능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기능만을 위해서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벌충하고도 남을 계도적 기능이나 정보전달 기능이 있음을 믿는다.'--만으로 충분히 나를 변명할 수 있다는 것일까. 6월 4일 일요일. 늦잠에서 깨어나 세수를 하고 나오는데 신문을 보고 계시던 아버지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얘, 너도 결혼상담소를 이용해 보는 것이 어떻겠니?" 그리고 내미는 신문을 보니 '결혼상담소를 이용하는 남녀가 많아졌다'라는 제목 곁에 '특히 고학력층(高學歷層)이 많다'라는 부제가 눈에 띈다. '중매 과정의 부실(不實)배제, 컴퓨터 이용 객관성 높이기도'라는 부제도. 그러나 나는 짐짓 못 본 체하며 심술궂게 물었다. "아, 그 광고란의 땐, 땐, 땐 옆에 결혼상담이라고 나는 광고 말예요? 어디, 일류대 출신, 호남(豪男), 자산 억대, 일생을 함께 할 진실녀(眞實女) 원(願)이라고 쓰인 곳이라도 있어요?" 땐, 땐, 땐이란 댄스교습 광고인데, 유독 땐자만 4호 활자로 뽑아 동그라미까지 쳐 놓은 바람에 눈에 띄도록 해 놓은 걸 말한다. 아버지의 얼굴이 일순간 흐려지더니 다시 냉담하게 말했다. "그건 옛날 이야기라는구나. 요즈음은 꽤 성실하고 믿을 만한 기업이 되었다고 들었어." "그럼 젊은 '뚜'들이 모여 기업을 차렸군요. 젊은 복덕방 영감들이 무슨 개발이니 하는 회사를 차리듯 말예요." "그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니? 사회적인 신뢰도와 지명도가 있는 사람들이 운영하고 고객도 자기의 배우자를 찾겠다는 것이 어쩌면 합리적일 것도 같구나." "말하자면 공신력 있는 백화점의 진열장에서 여러 종류의 상품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을 정찰(正札)로 산다는 말씀이세요?" "음, 꼭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설령 그런들 그게 뭐가 나쁘겠니?" "아버지는 제가 곱게 몸단장 하고, 우리 집 재산증명서니 대학 졸업장 따위와 함께 가격표를 목에 걸고 백화점 진열장에서 서 있는 꼴을 상상해 보셨어요?" "그건......" "상대를 고르기 위해서는 저도 그렇게 서 있어야 해요. 하지만 결혼은 충동구매의 여지가 많은 물건 고르기는 아니잖아요?" 내가 끝내 그렇게 나오자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러나 사촌언니의 중매로 본 맞선이 내게는 통산 일곱 번째라는 사실이 꽤나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마음에 걸리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일곱 번이나 맞선을 보아도 마음이 끌리는 남자가 없었다거나 내 나이가 스물일곱도 반을 넘고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이런 일들이 전에 없이 마음 깊이 여운을 남긴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버지 염려 마세요. 설마하니 제가 시집도 못 가고 늙어 죽을까봐요? 스물일곱, 요즘 세상에는 그렇게 많은 나이가 아니에요. 때가 되면 다 알아서 할게요." 그렇게 위로하고 아버지 곁은 물러났지만 이번 일요일은 이미 반 넘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오후 쯤엔 아무나 불러내 좋은 영화나 한 편 보려고 했는데. 오후에 손(孫) 언니를 찾게 된 것도 어쩌면 아침의 그 일 탓이 아닌지 모르겠다. 손 언니는 나보다 두 살 위인 직장동료다. 한동네에 살면서도 무덤덤한 사이로 서로 집을 찾는 것은 일년에 한두 번도 안되는데, 오늘따라 그 언니를 찾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스물아홉이란 그녀의 나이가 가지는 무게 탓이리라. 마침 그녀는 집에 있었다. 아니, 애초부터 그녀가 일요일은 대개 집을 지킨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재작년부터 그녀는 한 주제로 열심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작년에 왔을 때는 제3세계 문학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무속(巫俗)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무속연구-- 동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라는 작은 책자를 덮어 놓고 차를 끓여 오는 그녀에게 내가 물었다. "제3세계는 어떻게 했수?" "그건 너무 무겁더라. 여자에게는 맞지 않아. 어떤 강요 비슷한 것도 느껴지고...... 진작에 그만뒀다." "제3세계를 좋아하는 애인과 헤어지라가도 한 거 아녜요?" "이 기자(記者)도 나이를 한 살 더 먹더니 뻔뻔스러워지는 모양이야. 그럼 내가 이번에는 무속연구가와 연애라도 하고 있단 말이니?" "그럼 무슨 학문적인 열정이라도 솟았다는 거유?" "그래. 왜, 그래서는 안되니? 너는 내가 사회학과 출신이라는 걸 몰라?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다음 학기라도 등록을 하려고 그런다. 왜?" "야, 이거 잘하면 저명한 여류 사회학자 하나가 또 나오게 생겼군요." 나도 그녀 자신도 그녀의 독서가 학문적인 성취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걸 서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거리낌없이 그런 농담을 주고 받았다.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우리가 전자오락실에서 벽돌깨기를 하듯, 또는 심심풀이로 잡지의 퀴즈문제에 열중하듯, 그녀는 딱딱한 책만 골라 읽는 것이나 아닌지. "그렇잖아도 어제 오빠로부터 좀 혹독한 소리를 들었어." 내가 얘기를 꺼내기 바쁘게 그녀가 그렇게 받았다. 그의 오빠는 저널과 강단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자칭 잡문가(雜文家)이다. "무슨 얘기를요?" "글쎄, 나더러 기성품과 인스턴트 문화의 부작용이라는구나." "어쩌다가 그렇게 몰리셨어요." "자기가 권하는 사람을 내가 싫다고 했더니 대뜸 나온 타박이다." "어떤 사람인데요?" "동갑내기인 털털이 예비교수야. 이제 겨우 전강(專講) 대우는 된 모양인데, 아직도 하숙집 신세란다. 연말 쯤에나 방 두 개 전세 얻을 돈이 모일 거래." 그 말을 듣자 대충 사정이 짐작되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언뜻 마음 속으로 가늠해 보고 있는데, 그녀가 분한 듯 계속했다. "싫다고 했더니 대뜸 기성품과 인스턴트 식품 얘기가 나왔어. 요새 젊은 여자들이 그 같은 문화에 중독되어 구제불능이라나. 도무지 무엇을 어렵게 이루어 나가는 과정의 보람같은 것을 알지 못한대. 그래서 결혼의 배우자도 기성품이나 인스턴트 식품 같은 사람을 원한다나. 즉, 집과 가재용구가 갖추어져 있고 심지어는 실내장식까지 완비되어, 이루는 과정은 생략되고 바로 누리는 과정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거지. 삶을 오로지 누림으로만 파악하려는 허영덩어리들이라는 거야." "딴은 그런 점이 없지 않군요." "그럼, 너는 이 나이에 단칸방에서 시작하라는 거니? 서른이나 된 여자가 열여덟, 열아홉에 결혼한 옛날의 새색시들처럼 솥 하나에 이불 한 채부터 시작해야 된단 말이냐? 너라면 그렇게 하겠니?" "대학의 전임강사 대우라 하셨잖아요? 아무려면 그렇기야 하겠어요?" "뭐가 달라? 시골에는 결혼과 함께 부양해야 할 늙으신 부모와 어린 동생이 셋씩이나 있는데, 또 설령 그 한 몸이라고 해도 두 칸 전세방으로 시작하는 것이 사회가 전반적으로 가난하던 지난 시대의 단칸 사글세방과 크게 다른 줄 아니? 너는 그게 자신 있어?"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 자신도 그녀의 편이 돼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가닥 자성(自省)의 빛이 어른거리기는 해도 내 마음속의 궁극적인 대답은 그녀 쪽에 가까웠다. "오빠는 스스로 진보적인 지식인이라고 자칭하지만, 그가 이해하고 있는 현대란 것은 기껏 자신의 좁은 안목을 통한 것뿐이지. 우리는 지난 시대의 사람들보다 십 년 가까운 성장의 세월을 더 가졌던 셈이야. 그 성장의 세월 가운데에는 그가 말하는 '어려운 이룸의 과정'도 포함돼 있다고 봐야 해. 그런데 왜 그걸 무시하지? 어째서 누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사회변화의 한 부작용으로만 생각되어야 하는 거야?" 그녀는 아마도 오빠에게 미처 다 못한 말을 내게 퍼붓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녀의 넋두리에 어떤 분노를 보기보다는 나와 바탕을 같이하는 우리 시대 미혼여성들의 고민 하나를 본 느낌이었다. 6월 15일 목요일. 비, 아침부터 종일 비. 까닭 없이 처량해지는 이 기분.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 6월 16일 금요일. 또 비. 이번 달에 떠맡은 일은 취재구상조차 떠오르지 않고, 오후에는 불쾌한 일만. 나와 황에게 함께 동창이 되는 광일 기획의 윤이 광고 문제로 우리 사(社)에 들렀다가 구내다방에서 불러 갔더니 하는 말. "너 황을 건드려도 몹시 심하게 건드렸던 모양이더라. 형편없는 여자와 약혼을 했는데 홧김이라는 게 친구들의 통설이야. 그런데 너 민 화백과 정말로 그렇고 그런 사이니?" 경박한 사람. 거기다 민 선생님 얘기까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던 황에 대한 아쉬움은 불쾌감으로 변하고, 나중에는 그 말을 전해 주는 윤까지 밉살스러워졌다. 그 바람에 나는 앞뒤도 생각하지 않고 찻잔을 놓으며 악의 섞어 대답했다. "그런가 봐. 나는 아마도 유부남 체질인 모양이지? 대학에 다닐 때도 거 왜 문학개론 C교수님하고 좋아 지낸다고 너희 남학생들끼리 수군대지 않았니? 빙충맞은 너희들보다는 그 편이 훨씬 마음에 드는 걸 어떻게 해." 그래 놓고 편집실에 돌아와 앉으니, 왠지 눈물이 솟았다. 정말 그라도 곁에 있다면 쓰러져 안겨 실컷 울고 싶었다. 정말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가 도대체 어떻게 그토록 뚜렷하게 내 마음속을 읽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애초부터 내가 스스로 걱정하던 것만큼 그에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렇게도 가깝고 마음 편히 얘기를 나누던 사이로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는 내 주위에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벌써 한 달째나. 6월 19일 월요일 사흘 만에 다시 비. 도시를 자욱이 적시며 내리는 이슬비, 사람도 도시도 한결 나지막해져서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만 같다. 며칠 전의 일이 무슨 징조이기나 하듯이 뜻밖의 장소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어쩌면 뒷날 필요할지도 몰라 그 상세한 전말을 적어 둔다. 오후 늦게 까닭 없이 축 처지고 우울해 있는 내게 숙희의 전화가 왔다. "얘, 우리 상호 씨 오늘 생일이다. 저녁 사겠다는데 나오지 않을래? 경애 부부에게 전화를 했는데 애기가 아직 백일을 못 넘어 곤란하대." 말투가 꼭, 너라도 와서 우리 행복한 걸 보아 주지 않으면 정말 섭섭할 거야, 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축 처지고 우울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가기는 싫던 나는 기꺼이 그 초대를 받아들였다. 결혼과 직장이 우리를 다소 멀어지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때는 얼마나 다정한 사이였던가. 그애의 남편도 이미 그들의 연애시절부터 익히 아는 사이다. 거기다가 그애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벌써 몇 달이 된다. 그러나 호화로운 레스토랑에서 그들과 마주앉은 지 십 분도 안돼 나는 곧 자리에 나온 것을 후회했다. 여자에게 결혼이 사랑의 무덤이라고 한 말은 어디까지가 맞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정의 무덤인 것은 확실하다. 이따금씩 반짝이는 그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더 자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나를 그들의 행복의 장식으로 삼으려던, 그러나 악의 없고 거의 무의식적인 의도 뿐이었다. 그들의 호의를 그렇게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포함하여 여자의 덕목(德目)에는 우정이 포함되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이 결코 남자들의 독선 탓만은 아니었다...... 그런 심경이어서 그런지 식후에 마신 포도주 한잔이 그날따라 몹시 취해 왔다. "여기까지는 식사고, 진짜로 한잔 하십시다. 취하셔도 이 사람과 내가 안방까지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얘, 그렇게 해. 엄마한테는 내가 전화해 줄게." 라며 함께 가기를 권하는 그들 부부에게 구태여 없는 일까지 핑계를 대고 홀로가 된 내가, 집 대신 어느 조그만 카페로 들어간 것은 아마도 그 술기운 때문이었다. 카페라고는 하지만 술보다는 커피가 더 유명한 그 집에서 진한 커피라도 한잔 마셔 취기를 씻어 내려고 들어간 것이었는데, 막상 시끌벅적한 실내로 들어서고 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혼자라는 것이 약간 마음에 걸리기는 해도 문득 술 생각이 난 것이었다. 그런데 다가오는 종업원을 보며 적당한 술 이름을 생각해 내려고 애쓸 때였다. 스탠드 구석에 눈에 익은 뒷모습 하나가 덩그런 의자에 올라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종업원과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고 하는 것으로 혼자임에 분명한 그였다. 그를 알아본 순간 나는 알 수 없이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꼭 그런 곳에 마치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나 그가 홀로 앉아 있다니-- 어쩌면 이것은 영원히 풀려 나오지 못할 악연의 한 모습을 내가 보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불안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나는 곧 울컥 치미는 설움과도 같은 반가움에 빠지고, 이어 까닭 모를 기쁨과 즐거움의 애상을 느꼈다. "저 손님, 오신 지 오래돼요?" 마침 곁으로 온 종업원에게 나는 주문 대신 그것부터 물었다. "한 시간은 좀 넘었을 겁니다. 저녁 술 손님으로는 처음이었으니까요." "같이 온 분이나 기다리는 분도 없구? "네, 줄창 홀로 마셨어요. 왜, 아는 분이세요?" 나 어린 종업원은 살피는 눈길로 나를 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럼 저분과 같은 술을 주세요. 그리고 제가 여기서 기다린다는 말씀도 해주시고." 나는 거의 생각할 틈도 없이 종업원에게 그렇게 부탁했다. 잠시 후 종업원의 귓속말을 들은 그도 내 쪽을 돌아보았다. 꽤 먼 거리였지만 그 역시 흠칫하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어 그가 약간 흐트러진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목소리는 전혀 취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여긴 웬일이십니까?" "민 선생님을 만나러 왔어요." 나는 응석이라도 부리듯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무언가를 경계하는 듯한 태도를 풀지 않으며 단정하게 말했다. "누가 여기 있다고 일러줍디까?" "제가 알고 찾아온 거예요." "옳아, 그럼 여기서 누구와 만나려다 바람이다도 맞은 게로군. 그렇지 않아요?" "어쨌든 앉으세요. 그건 기다려 보면 알 거 아녜요?" "대타(大打)라...... 하기야 그리 불쾌한 대타는 아니군. 그러나 저번같이 황 아무개와 만나는 일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정말로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까요." 내가 '정말로'에 힘주어 그렇게 말하자 그제서야 다시 한번 주위를 휘둘러본 그가 전에 하던 것처럼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유난히 멀찍한 느낌이 드는 자세였다. "아직도 홀로 마셔 대세요? 아니면 무슨 일이 있으세요?" 오히려 내가 약간 앞으로 몸을 숙이며 물었다. 제법 술꾼들이 몰릴 시각이라 그 소음 때문에 고함쳐 말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멀찍한 자세를 바꾸려 들지 않았다. "남자들이 언제나 떼를 지어 마시는 건 아닙니다. 또 무슨 일이 있어야 홀로 마시는 것도 아니고, 일종의 습관이죠. 소주병이나 사서 집안에서 찔끔찔끔 마시던 것이 돈푼 생기자 양줏집으로 옮겨진 것 뿐입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잖아요? 원하시기만 하면 유쾌한 술동무는 얼마든지 있으실 텐데." 그 말과 함께 조금씩 취기가 살아나는 모양이었다. 그때껏 단정하던 그의 말씨가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유쾌한 술동무라-- 도대체 누가 그 사람들이란 말이오? 겉으로는 진정으로 서로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속은 시기와 악의로 바글거리는 이른바 동료 화가들? 예술적인 성취보다는 내 갑작스런 성공의 비결이나 유명해지는 요령에 더 관심이 많은 그 얼치기 후배들? 저마다 미술계의 대부(代父)임을 내세우며 자기 아니면 내가 없었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매스컴 문화의 실력자들? 아니면 어쩌다 신통잖은 자신의 미술이론에 비슷하게 맞아떨어지는 작품에 터무니없이 큰 박수와 갈채를 보내 놓고 자신이야말로 이 나라 미술의 참다운 스승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그 평론가들? 새로 늘어난 사람이라면 겨우 그들 뿐인데 그들이 그렇게 유쾌한 술동무일 것 같소? 그보다 차라리 타이틀(수상경력) 붙은 내 작품 하나쯤 몇 손 건너 어이없이 비싼 값으로 사가지고 그게골동적 가치를 가질 때나 기다리는 엉터리애호가들이나 돈으로 환심을 산 여급과 마시는 편이 낫지." 그러다가 종업원이 그가 마시다 남긴 듯 싶은 위스키병을 날라 오자 퍼뜩 정신이 돌아오는지 다시 예절 바른 어조로 돌아갔다. "어, 미안합니다. 사실 저는 좀 마셨습니다." 테이블에 얹힌 술병을 가늠해 보니 이미 반 넘게 비워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과음보다 이상하게 우리들의 대화가 어긋나는 것 같은 조바심에 서둘러 말머리를 바꾸었다. "왜 그동안 통 소식이 없으셨어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좀-- 바빴습니다. 욕심이 과했는지 모르지만......" 제법 원망기 서린 물음이었지만 그의 대답은 여전히 기대하는 만큼의 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시치미를 뗀 채 더욱 원망 섞어 말했다. "전화라두 주시지 않구......" "전화?" 거기서 그는 한동안 나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술기운이 가신 찌르는 듯한 눈길이었다. "이건 내 짐작이지만, 이 선생은 내 전화를 반가워하시지 않았을텐데......" "아녜요. 잘못 짚으신 거예요. 적어도 다섯 번쯤은 반갑게 받았을 거예요." 나는 고개까지 저으며 강하게 부인했다. 고백하지만, 그때 나는 방금 마신 위스키 한잔으로 순간적인 감정의 과장에 빠졌거나, 아니면 나도 알지 못하는 어떤 유혹의 영(靈)에 홀렸던 것 같다. 불과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에조차도 그 같은 내 감정상태의 원인을 전혀 종잡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도 그런 내 태도가 뜻밖인 모양이었다. 짧은 시간 희미한 감동 같은 것이 그의 표정에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처음부터 줄곧 그를 나에게서 멀찍이 떼어놓은 경계로 굳어지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 선생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주어 부인하시는지는 몰라도 아마 제 느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어렵게 삶을 헤쳐 온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눈치-- 좋게 말해서 사람에 대한 직감이 빠르고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그건 제가 더 만나 보았자 별볼일 없는 여자라는 뜻이겠죠." 나는 그 말이 어떤 뜻을 품고 있는가를 헤아려 볼 생각도 없이 그렇게 응석처럼 말했다. 단 한마디의 통화로 내 속마음을 정확히 읽어버린 그의 직감에 대한 반발이거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초저녁부터 나를 사로잡은 어떤 유혹의 영에 홀렸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자 다시 한번 그의 태도가 흔들렸지만, 이내 약간 엄격한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 "아이들은 장난이지만 개구리는 죽을 지경이란 말이오. 아시겠소?" "누가 아이고 누가 개구리란 말예요? 모든 걸 꼭 그렇게만 보아야 해요?" 드디어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든 나는 그렇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의 지나친 침착이 밉살스럽게 느껴짐과 함께 알지 못할 패배의 예감이 나를 초조하게 만든 것 같았다. 갑자기 날카로워진 내 목소리에 그는 흠칫했다. 그리고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전과 달리 멍청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혼자 왔소?" "그래요." "나를 만나러?" "그렇다니까요."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소?" "아는 길이 있으니까 왔죠. 하지만 이젠 가겠어요. 그리 반가운 사람은 못 되는 모양이니까." 나는 우연이란 것을 밝히는 대신 핸드백을 챙기며 일어날 준비를 했다. 어쩌면 오늘 저녁 그를 만난 뒤의 행동 가운데서 가장 이성적인 행동이었다. 이제서야 희미하게나마 내가 지나친 감정의 유혹에 빠져 들고 있다는 자각이 일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나를 붙들었다. "잠깐만 앉았다 가시오. 그토록 알고 싶은 것이라면 알고 가야 하지 않겠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얼음이 얼마 남지 않은 잔에 위스키를 반이나 채웠다. 그 대수롭지 않은 말이 느닷없이 세찬 충격으로 나를 제자리에 주저앉게 했다. 줄곧 말을 물어 온 것은 그였지만,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묻고 있었던 것은 나라는 사실을 그가 일깨워 준 때문이었다. "진상을 알고 나면 이 선생은 아무것도 자존심이 상하거나 초조하게 여길 필요가 없소. 남는 것은 처량한 나 뿐......" 그렇게 덧붙이며 단숨에 잔을 비운 그는 이내 지난날의 허심탄회한 목소리도 돌아갔다. "사람에게는 종종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 지나고 나면 가장 소중하고 그립게 되는 법이오. 그때에 만났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요. 그런데 내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은 바로 그 학교에 재직하던 2년이었소. 어떤 싸움이건 마지막 단계가 가장 치열한 법이지만, 그때야말로 내가 빈곤과 무명을 그리고 그 외로움과 쓰라림을 적으로 마지막 사투를 벌이고 있었던 거요. 이 선생은 바로 그 비참과 희극을 아주 가까이서 본 사람이오. 그것도 당시의 내 직감이 틀림없다면 상당한 동정과 이해로. 따라서 이 봄 다시 이 선생을 만났을 때 나는 정말로 사심 없이 반가웠소. 그리고 그 뒤의 두어 달도 이 선생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오래 헤어져 있던 누이를 다시 만난 것 같은 즐거움과 포근함이었소. 내가 가엾은 누이의 무덤에 이 선생을 데리고 간 것도 어쩌면 살아 있는 이 선생으로 쓰라린 누이의 추억과 대치하려던 것이나 아니었는지 모르겠소. 아직도 내 삶을 짓누르고 있는 그 기나긴 겨울의 추억에서 벗어날 마음을 먹게 된 것도. 그런데 거기를 다녀온 뒤부터 나는 이따금씩 엉뚱한 망상에 잠기곤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쳐 놀랐소. 이 선생을 한 여성으로 보며 품게 된 망상이오. 아마도 황량하기 짝이 없게 지나가버린 내 젊음에 대한 어떤 보상심리에서 충동된 것일 거요. 가만히 돌이켜보면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여자가 나타날 때마다 반드시 내게는 그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결함들이 있었소. 소년시절에는 내가 의지할 데 없는 고아라는 것이었고, 짧은 대학시절에 만났던 여자는 빈곤과 무명으로 잃고 말았소. 더 큰 결함-- 아이들과 아내가 있는 거요. 하기야 위대한 예술가들 가운데는 자신의 예술적인 재능을 무슨 권리인 양 내세우며 이혼과 결혼을 되풀이한 예가 있소. 그러나 그것은 바다 저쪽의 얘기요. 이 나라에서는 그런 도덕성을 좀 완화시켜 주어도 될 유행가 가수나 영화배우까지도 스캔들로 인기의 수명을 다하는 게 대부분이오. 거기다가 예술가들 자신도 거의 예술자체와 마찬가지로 도덕률의 파괴를 두려워하고 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선생을 상대로 엉뚱한 몽상에 잠기기 시작한 것이오...... 그 몽상을 깨워 준 것이 바로 마지막 전화를 통해 들은 이 선생의 목소리였소. '무슨 일이세요? 라는 그 짧은, 별로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목소리는 그대로 한덩어리의 얼음을 내 심장에 문지르는 것 같았소. 수화기를 놓고 한동안은 수많은 높고 날카로운 메아리처럼 내 귀를 가득 채우는 젊은 여자의 비정한 깔깔거림에 정신이 멍할 정도였소. 그러나 곧 정신을 수습한 나는 비극보다 더 참담한 희극에서 나를 구해 준 이 선생에게 감사하며 나의 그 겨울로 돌아갔소. 보기에는 춥고 쓸쓸하지만, 내게는 익숙한 서른일곱의 나이와 밉지도 곱지도 않은, 가구나 화구(畵具)같은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어느새 단순한 노동으로 전락해 가고 있는 그림으로." 거기서 그는 물도 타지 않은 위스키를 반잔이나 들이킨 뒤 한층 낮고 음울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게-- 이 선생이 알고 싶어한 전부요. 무엇에 충격을 받아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왜 이 일에 터무니없는 무게를 담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전화를 않은 것이 이 선생이 안달할 만큼 자존심을 건들 까닭은 없소. 있다면 내 비참과 희극이 있을 뿐......" 분명 그의 말은 감동적이고 연민을 자아내는 것이었지만 솔직히 그때 나를 사로잡은 느낌은 어떤 섬뜩함 뿐이었다. 그의 말을 통해 몇번이고 거듭 확인하는 날카로운 직감이 그 가장 큰 원인이었다. 내가 조금 전까지도 그토록 알고 싶어했던 것은 이제 완연해진 그의 취기와 마찬가지로 그저 난감한 어떤 사실로 나를 어쩔 줄 모르게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났다. 남은 술을 깡그리 잔에 부어 털어넣듯 마셔버린 그가 술탓인지 아니면 남모를 흥분 탓인지 부끄럼 타는 소년처럼 붉어진 얼굴로 재빨리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 비참과 희극이 보상받을 차례요. 이 선생은 다시 살아온 내 누이요. 나는 오래 모르고 지냈던 오래비고, 아시겠소?" 그러더니 몸을 일으켜 미처 그 말뜻을 다 새겨듣지 못해 어리둥절해 있는 내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쥐고 이마에 아무렇게나 입을 맞춘 뒤 휘적휘적 술집을 나가버렸다. 내가 다시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온 것은 그가 완전히 술집을 나간 뒤였다. 그런 나를 맨 처음 사로잡은 느낌은 이상하게도 앞뒤 없는 서운함과 아쉬움이었다. 만약 그가 그때껏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더라면 열에 아홉 나는 그에게 항의했을 것이다. "왜 두 사람의 일을 혼자서 마음대로 결정 짓고 정의하세요?" 하지만 결국 잘된 일이었다. 좀 구식이기는 하지만 그와 내가 부담없이 만날 수 있는 관계로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그 사이 굵어진 빗발 속을 헤치며 돌아오면서도 마음은 갠 하늘처럼 홀가분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느닷없이 결정해 버린 우리들의 관계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 언젠가 이 일기가 남의 손에 떨어져도 크게 두렵지 않아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이 저녁의 일들을 낱낱이 적을 수 있는 것도. 2. 쓸쓸한 여름 특별히 성(性)의 도덕성이라는 것은 없다고 주장될 수도 있다. 물론 우리는 성의 도덕성을 논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도덕성이란 주로 소유주나 노동의 분배, 남성의 힘 따위와 연관된 것이고, 우리의 성생활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자동차를 몰 때와 마찬가지로, 성적(性的) 경험은 우리를 특정한 도덕적 상황에 빠지기 쉽게 만든다. 운전사로서 우리는 복수와 흥분의 어린애 같은 욕망을 경계해야만 한다(마찬가지로 연인으로서 우리는 잔인함과 배반을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적 경험이 그런 특별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차를 냉정히 몬다. 왜냐하면 차를 타기 전의 우리는 죽고 사는 데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 옳지 않음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간음의 유혹을 거부하려 한다. 왜냐하면 배반당하는 사람이 성적 동반자이건 또는 정치적인 동업자이건 간에 그들의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 나쁘다는 걸 믿기 때문이다. 연인으로서 그리고 운전자로서 우리는 보편적인 도덕의 원리들을 특수한 경우에 적용하여 구성해 둔 규칙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게다가 성을 체험하는 데 해가 되는 미신들을 생각해 본다면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지는 것과는 다른 도덕적 관심으로부터 연인으로서의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특별히 성의 도덕성이라는 것은 없으며, 어떤 것도 꾸며 내어져서는 안된다...... 6월 24일 토요일. 공연히 바빴던 일주일이었다. 오늘 그의 전화를 받고서야 벌써 토요일이 된 걸 알고 내가 골몰했던 일이 무엇이었던가를 되돌아보았지만 일상(日常)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일들 뿐이었다. 시간이 이렇게 지나가버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문득 미래의 어떤 순간이 두려워졌다. 이렇게 순간순간은 대단히 중요하고 다급하게 여겨져 골몰했지만, 지나고 보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일상들에 파묻혀 있다가--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았을 때, 머리가 하얀 노파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다. 그때 과연 나는 삶을 낭비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어쩌면 소시민(小市民) 사회의 교의(敎義)에 너무 깊이 젖어들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과의 차이에 너무 소홀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가령 일이라고 할지라도 오늘날은 쓰레기장의 인부가 쓰레기를 태우는 일과 학자의 연구나 예술가의 창조, 대통령의 서명이 모두가 똑같이 소중하다는 결론에 아무런 의심없이 동의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교의는 모두의 삶을 똑같이 귀중한 것으로 긍정해 주는 고마운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가치와 가치 사이에 상대적 차이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왜소한 삶에 안주하도록 설교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혹 그런 교의는 현대의 산업사회가 자기보존을 위해 만들어 낸 미신은 아닐까? 그 자체 수만 개의 부품이 필요한 복잡한 기계같이 되어버린 사회가 자신의 원활한 가동을 위하여, 한귀퉁이에 박혀 있는 나사못이나 윤활유나 도색용(桃色用)의 페인트까지도 엔진이나 프레임과 똑같이 필요한 것이라고 떠벌려 대는 것이나 아닐까? 사실은 수 천만 개의 나사못이나 수백 드럼의 윤활유보다는 엔진이나 프레임이 훨씬 중요하다는 걸 속으로는 당연히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리하여 얼마 안되는 기관부(機關部)와 같은 계층을 위해 수천 수만의 사람이 나사나 윤활유 같은 존재로 그들 삶을 낭비해 주기를 은근히 권유하는 것이나 아닐까. 6월 27일 화요일. 지난 토요일에 미리 해 둔 약속이 있어 그를 만나지 못했기에 오늘 만났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고 쾌활했으며, 나 역시도 편안하고 유쾌했다. 옛 친구들처럼 같이 근무했던 학교 시절을 회상하고, 또 순진한 아이들처럼 새로운 삶의 형태를 꿈꾸어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날이 저물어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우리 집 앞에서 헤어졌다. 함께 서점에 들렀을 때 그가 골라 준 몇 권의 책을 들고 대문을 들어서는 나에게 엄마가 핀잔처럼 말했다. "너 또 민 선생이라는 사람과 만났구나." 그러나 나는 조금도 스스럼없이 농담으로 받았다. "엄마가 그런 오빠를 낳아 주셨더라면 이렇게 저물지 않아도 집에 들어왔죠." "뭐? 오빠?" 엄마는 한심하다는 듯 눈을 흘겼지만 말투는 한결 풀어지는 기색이었다. "그럼 뭐 제 애인이나 되는 줄 알았어요?" "우리가 여학교 다니던 시절에 그런 게 유행했지. S언니네 의(義)오빠니...... 그런데 요새도 그런 게 있니?" "이제 제가 유행시킬 작정이에요." "잘하면 늙수그레한 아들 하나 두겠구나. 나도 한번 보자꾸나." 엄마는 농담처럼 그렇게 말했지만, 끝엣말에는 어딘가 계산적인 데가 있었다. 그게 약간 마음에 걸렸으나 이미 내친 김이었다. "좋아요. 뭐 데려오라면 겁날 줄 알구." 그런데 엄마는 잽싸게 그런 내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그렇잖아도 궁금한데 잘됐다. 가까운 날 집에서 한 끼 대접하자. 술을 그렇게 좋아한다니 좋은 술도 준비해 놓으마." "그러죠. 다음 일요일 점심쯤이 어때요? 이왕 보려면 빨리 보지 뭐." 나는 아차, 하면서도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다. 우리 식구들 사이에 끼여 앉은 그의 모습은 아무리 상상해 봐도 어색하다. 그가 내 얘기를 들으면 화를 내지나 않을지...... 6월 29일 목요일. "아, 좋아요. 나도 한번 구경해 보고 싶은 가정 가운데 하나였소. 일부러라도 구실을 만들어 가 보고 싶었는데, 청해 주니 오히려 고맙군." 예상 밖으로 내가 조심스레 엄마의 얘기를 꺼내자 그가 선뜻 그렇게 대답했다.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정말로 그가 그렇게까지도 우리 식구를 당연하게 만나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과 함께 뒤늦게 멍청한 오라비 하나를 얻은 것으로 그와 나 사이가 단순화되고 규정된다는 게 견딜 수 없게 싫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그렇게 자신 있어요?" 나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가 어느 정도로라도 거부해 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천하의 이 민 아무개가 자신 없을 게 뭐가 있소? 이왕이면 두 분 다 통하는 분들이면 좋겠소." "정말...... 대담하시군요." 나는 갑작스런 짜증을 느끼며 쏘아 주듯 말했다. 자칫하면 대담이라는 말 대신에 뻔뻔이라는 말을 썼을 만큼 까닭 모르게 치솟는 짜증이었다. 그제서야 그도 무언가 이상한 걸 느낀 모양이었다. 잠시 찻잔을 멀거니 쳐다보며 생각하더니 이내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직감적으로 그가 내 마음을 읽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자 오히려 갑작스레 당황스러워진 것은 내 쪽이었다. "진작 말하려고 했는데......" 이윽고 그가 무거운 어조로 그렇게 입을 열었을 때 나는 치솟던 짜증 만큼이나 움츠러들며 물었다. "뭔데요?" "말이야. 이건 좀 갑작스러울 테지만-- 앞으로는 높임말을 쓰지 않겠어. 세상에 십 년 가까이나 나이가 많은 오라비가 새파란 누이에게 꼬박꼬박 예, 예, 하는 것은 맞지 않아. 그렇지?" "아, 네, 그래요." 나는 전혀 뜻밖이라 얼결에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덮어씌우듯 덧붙였다. "어머님 일은 언제든 좋아. 그리고...... 이걸 교활이라고 생각하면 할 수 없지만, 그렇게 뵈어 두는 편이 네게도 좋을 거야." "네, 그래요. 그렇게 하죠." 나는 비로소 무언가 그의 기분을 건드렸다는 걸 느끼고 그렇게 말을 맺었다. 그 뒤 나는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지만 왠지 그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무엇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까. 6월 30일 금요일. 감정의 헝클어짐이 있을 때에 특효약은 실제적인 일이다. 사실 이 며칠 내가 매달려 온 것은 제법 의식 있는 작업에 속한다. 주간님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도 드디어 시퍼런 '의식(意識)의 보도(寶刀)를 빼들어 시대의 병든 정신'을 해부해 보려고 시도한 것인데-- 이번에는 이 시대의 독서를 병들게 하는 요인들의 분석이다. 내가 맡은 부분은 독자의 의식으로, 나는 미신이란 용어로 그 요인들을 나름대로 추적 분석해 보았다. '무엇이든 타자(他者)로부터의 신호에 의지해 판단하도록 길들여져 있는 시대의 독자들에게는 대략 네 가지의 미신이 책의 선택을 좌우한다. 그 첫째로는 광고에 의한 미신이다. 오늘날 모든 판매 경쟁에서 위력을 떨치고 있는 광고는 책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책 그 자체가 언어를 원료로 한 상품이므로 책의 광고는 단순한 광고 이상 샘플을 추출해 직접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능까지를 겸한다. 거기다가 그 반복의 효과는 매체가 가진 어떤 힘과 더불어 폭력적으로 독자를 충동한다. 따라서 독자는 저절로 광고의 반복이 많은 책을 좋은 책으로 오인하게 되는데 그것이 이른바 광고에 의한 미신이다. 하지만 광고에 의한 미신은 그 위력이 폭력적이었던 만큼 자기 방어에는 무력하다. 어느 정도의 비평적인 안목만 지니고 있는 독자라면 쉽게 그 미신에서 깨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광고가 요란스레 추천한 책을 사 봄으로써 대개는 그것이 터무니없이 과장되었으며, 그저 상업적인 선전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사는 독자가 두 번째로 빠지기 쉬운 미신 가운데 하나는 일반의 평판에 의한 미신이다. '책이 재미있더라.' 라든가, '요즘 가장 많이 읽힌다.' 또는 'A도 B도 C도 그 책을 가지고 있어.' 라는 말을 듣는 책에 대해 종종 독자는 구매충동을 느낀다. 그런데 이 미신은 광고만은 못한 효과일지는 모르지만, 또한 광고보다는 깨뜨리기 어려운 미신이라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사람들은 다수 편에 서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들어 와서 그 책을 읽은 뒤 자신의 느낌을 말하는 데 정직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웬만하면 그도 같이 "그래, 재밌더군." 이라는 평판을 보내고 약간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음, 괜찮았어." 정도로 우물쭈물 다수의 의견과 타협해 버린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 일반의 평판이라는 것이 대개는 통속적이고 피상적인 견해에서 출발했다는 데서 그렇게 지속력을 가진 미신은 못 된다. 조금만 고급한 독자라면 그런 대중의 평판이 항상 옳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되고, 때에 따라서는 대중 자신도 유행이라는 변덕에 따라 자신의 부당한 과대평가를 철회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독자가 책을 선택할 때 빠지기 쉬운 미신은 매스컴에 의한 미신이다. 산업사회에서 매스컴의 위력을 새삼 말할 필요는 없지만, 정치 경제면이 어느 정도 불신을 사고 있는 데 비해 문화면에 대한 신뢰는 아직도 거의 맹목적인 데가 있다. 종종 매스컴의 문화부문에서 화제가 되는 책이 베스트셀러와 일치하는 것이 그 한 좋은 예다. 하지만 매스킴이 가지는 문화의 시각과 독자의 시각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산만한 대중의 견해를 공적(公的)으로 전화(轉化)시키기도 하지만-- 매스컴은 대체로 자신들의 특성, 다시 말해 센세이셔널리즘, 진기성(珍奇性), 문제성 따위의 추구에 더욱 충실하다. 순수학문적 관심은 그것이 매스컴의 특성과 선택관계에 빠질 때는 무시되기 일쑤인 것이다. 그런데 이 미신의 특징은 그 영향력이 넓게 미칠 뿐만 아니라 지속적이라는 데 있다. 이 나라에서는 문화면에서까지 "신문에 났더라." 라든가, "방송에 보도되었다." 라는 말이 종종 공적(公的)인 권위와 혼동된다. 매스컴의 관심과 자신의 독서 목적이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는 독자라도 그 영향력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며, 심할 때는 매스컴의 오류나 편견까지도 그대로 수용하는 상태까지 벌어진다. 따라서 한번 빠진 미신에서 깨어나기는 힘이 들고, 처음부터 그런 것들에 초연할 수 있는 독자는 더욱 적어진다. 그저 한 가지 다행으로 여길 수 있는게 있다면, 매스컴의 문화면에 영향받는다는 자체가 이미 상당한 정도의 지적 수준을 전제하고 있어, 그 미신에 빠지는 계층도 전체 독자로 보면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정도일까. 마지막으로 또 하나 지적할 미신은 평론에 의한 미신이다. 물론 평론은 객관적인 공정성을 염두에 두고 있고, 대개의 평론가는 자신의 지식과 논리를 동원해 그 획득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저널리즘인 평론은 종종 주관적인 공정에 그치고, 나쁜 경우에는 자신의 예술적 편견이나 독단의 나열에 그쳐버리는 수가 있다. 그리고 이 경우 독자는 평론이라는 그전문적 지식의 주관적인 오류에서 거의 무방비한 상태가 되고 만다. 일반적으로 우월하거나 적어도 동등한 정도의 전문 지식이 필요한데 평범한 독자의 경우에는 거의 그런 자격을 얻지 못한다. 따라서 한번 그릇된 평론에 의해 얻어진 미신은 그것이 또 다른 보다 우월한 지성에 의해 공적(公的)으로 부인되기 전에는 지속되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일평생을 헤어나지 못하는 수도 있다. 다만 이 경우에도 문제의 심각성을 덜어 주는 것은 평론에 의한 미신에 빠져 들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독자의 제한된 부분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것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고 들어 종합한 내용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열거된 것은 외부로부터 온 미신들 뿐이다. 오늘날의 이상한 독서경향을 좀더 정확하게 분석해 보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를 보충해야 할 것이다. 1. 독자의 주관적인 미신이 개재된 것은 없는가? 예:어떤 책은 무조건 좋고 어떤 책은 무조건 나쁘다는 따위. 2. 사회적인 상황과의 관계. 어떤 심리에서 어떤 책의 수요가 생기는가? 어떤 상황과의 연관으로 독자가 그런 책들을 수요하게 되었는가? 7월 2일 일요일. 오늘에야 나는 지금껏 '원인 모를'이나 또는 '까닭 없이'라고만 표현해 온 그의 매력 가운데 하나를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 같다. 그것은 그의 소녀다움이다. 그의 나이와 이름이 가지는 어떤 무게가 눌려 정확하게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를 만날 때마다 느껴 오던 유쾌함과 푸근함이 원인 가운데는 분명 그 소년다움도 있었을 것이다. 한참을 얘기에 열중하다 보면 나이도 잊고 성별(性別)도 잊고, 어렸을 적의 소꼽친구를 만난 것처럼 착각되곤 하던 것도. 오늘도 그랬다. 대담한 승낙과는 달리 점심을 함께 하러 우리 집에 초대되어 온 그는 현관 입구부터 수줍음을 타기 시작하더니 방안에 들어앉고부터는 그대로 덩치 큰 소학생 같았다. 아버지나 엄마의 대단찮은 질문에도 말을 더듬었고, 작은 자신의 실수에도 민망하리만치 얼굴을 붉혔다. 나중에 술이 좀 오르자 그런 증세는 없어졌지만, 이번에도 또 그 반대로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무엇 때문인지 식사는 제쳐 두고 급하게 잔만 비우던 그는 낮술이 벌겋게 오르기 무섭게 대담한 소년처럼 굴기 시작했다. 그런 것들은 좀 숨기거나 달리 말해 주었으면 싶은 것도 누가 묻기만 하면 스스럼없이 대답했고, 자기 또한 예절을 갖춘 성인이면 물어서는 안 될 것들까지도 이것저것 아버지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가 낮술에 턱없이 취해 걸음까지 흔들거리며 돌아간 뒤 나는 속으로 은근히 난처했다. 손댈 수 없을 만큼 어질러 놓은 방을 치우기 위해 문을 연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식구들의 의견은 나와 전혀 달랐다. "그 사람 꽤 멋쟁인데." "정말 오빠였으면 좋겠어." 내 은근한 걱정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동생과 중학교에 다니는 여동생은 그렇게 말했고 아버지도 "그 사람이 왜 우리 집에 와 점심을 먹게 되었는지 지금도 영문을 모르겠지만 때묻지 않은 사람 같다. 세상 살기는 좀 힘들어 보여도 그만한 재주가 있다니 큰 문제는 없겠고......" 하며 그렇게 언짢아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러나 가장 안심이 된 것은 엄마였다. "나는 네가 민 선생님, 민 선생님 하길래 마흔은 넘은 중년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만나 보니 영 딴판이구나. 이제 갓 서른된 청년 같다." 예전에는 그가 나이에 비해 늙어 보였던 만큼이나 지금은 오히려 나이보다 젊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엄마가 그를 그토록 젊게 보는 것은 분명 호의의 표시였다. 나이 든 여자가 남자를 제 나이보다 젊게 보아 준다는 것은 그만큼 좋게 보아 준다는 것과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마 사실인 것이다. 엄마의 다음 말도 그랬다. "이건 어미의 직감이지만, 어떤 형태로든 그 사람이 네 삶에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구나. 이젠 마음 놓고 그 사람의 그림을 좋아해도 될 것 같다." 엄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가 가져온 그림을 전에 없이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로 거실 벽 가운데에 걸었다. 이제니까 말하지만, 그림에 관한 한 엄마는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다. 미술대학에 진학하던 해 전쟁이 터져, 외가가 결단나는 바람에 몇 년 고생하다 통역관이던 아버지와 결혼하는 것으로 끝장을 보고 말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때 엄마가 미술대학을 선택했었다는 사실 자체이다. 만약 내가 그림에 대해 본능적인 이해와 애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런 어머니의 피에서 온 것일 게다. 엄마와 결혼한 뒤 곧 군(軍)과 연관을 끊고 지금껏 어떤 개인회사의 상담(相談)을 맡아 평범한 생활인으로 지내오신 아버지 탓인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한 번도 그림에 대해 내놓고 말하는 적이 없었으나 젊은 날 한번 품었던 꿈에 대한 애틋한 향수와 동경은 은연 중에 우리에게 전해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에 대해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않았음을 그녀의 마지막 말로 짐작이 되었다. "문득 아깝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독신이기만 해도......" 그 말에 진심이 전혀 담기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내게는 이렇게만 들렸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처자 있는 남자다. 혹시라도 주의해라......" 내 방으로 돌아온 뒤 나는 잠시 동안 그가 오늘 우리 집에 와서 한 행동을 곰곰히 되새겨 보았다. 내 보기에는 실수 같거나 멍청해 보여 가슴 조이던 행동들이 뜻밖으로 손쉽게 우리 식구들의 호감을 산 것을 알자, 문득 그것이 일련의 계획된 연기(演技)가 아닌가 의심이 든 탓이었다. 하지만 그 행동의 하나하나, 뒤통수를 긁적이던 모습이나 웃는 눈가의 잔주름까지 떠올려 보아도 그것이 미리 계산되고 계획된 행동의 결과라는 혐의는 찾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그런 행동들을 떼어놓고 보면 내게 그리 낯선 것도 아니어서 더욱 계획적으로 볼 수는 없었다. 예컨대 신이 나면, 국민학교 때 구슬치기에서 한번 몹시 딴 것을 꼭 그때처럼 즐겁게 떠들거나 또는 지금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아도 어린 마음에는 상처가 될 법도 한 어른들의 거친 욕설을 꼭 그때처럼 분해하다가도, 갑자기 그런 자신이 어색해져 어쩔 줄 몰라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그에게서 언제나 열등감과 우월감이 극단으로 만나고 있었으며, 조로(早老)와 미숙이 묘하게 얽혀 있었다. 그리하여 나 자신도 이따금씩은 그의 불 같은 정신력에 그림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가도, 이내 그처럼 철없고, 멍청한 사람에게서 어떻게 그런 그림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으로 급전하게 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우리 가족들의 경계심을 그토록 쉽게 풀어버릴 수 있었을까? 잘해야 소년다움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의 특성은 오히려 믿음직스러움이나 성실감 같은 것과는 상반되는 요소까지 있는데도 말이다. 7월 3일 월요일. "그토록 당황할 걸 왜 그렇게 쉽게 응하셨어요?" 아침에 그의 전화가 왔길래 나는 대뜸 그것부터 물었다. "이 선생 때문이지." "제가 어쨌게요?" "처음에는 이 선생이 나를 시험해 보는 줄 알았지. 그런데 막상 가 보니 그게 아니었어. 이 선생도 허둥대는 것 같더군. 그게 나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지. 술이 없었으면 정말 혼났을 거요." "오히려 그 편이 훨씬 성공적인 걸요. 모두들 선생님을 덩치 큰 소학생 정도로 여기거든요. 혹 일부러 꾸며 그렇게 한 건 아니겠죠?" "그게 성공적인가? 내가 그렇게 낭패하는 꼴을 식구들에게 보여 주는 게 나를 청한 목적이었나?" 거기서 그의 목소리가 묘하게 비틀어졌다. 그러자 나는 더욱 심숙궂게 말해 주었다. "어쨌든 잘하셨어요. 잘하면 우리 식구들이 나보다 더 선생님을 좋아하겠어요." "그렇다면 대단하군. 헛고생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그는 그렇게 말한 뒤, 갑자기 비아냥거리듯 물었다. "그래, 무사히 면허장은 받았어?" "면허장이라니오?" "합법적으로 나를 만날 수 있는 면허장 말이오." 그 말을 듣자 찔끔하기보다는 퍼뜩 처음 집에 가자고 했던 날 그가 기분 상해 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가족들에게 보이려는 것이 그럼으로써 나와의 관계를 안심시키려는 것이라고 추측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전화로 길게 얘기할 성질도 아니어서 가볍게 농담으로 받아 주었다. "그래요, 중기(重機) 면허는 못 되어도 승용차 면허쯤은 되죠." "그럼 집으로 전화를 할 수도 있겠군."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우리 집 전화번호를 적은 뒤에 만나자는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 때문에 일찍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는 아홉 시가 넘도록 전화가 없다. '......우리 시대의 독자가 가지는 주관적인 미신도 앞서 말한 그 '타자(打者)로부터의 신호'와 무관하지 않다. 그 가운데서도특징적인 것은 엄숙주의의 포기이다. 엄숙주의란 우리 삶에서 한 번쯤은 거쳐 갈 단계인데도 이제는 세대에 관계없이 그 모습을 찾아볼 길이 없다. 여러 가지 원인도 있겠지만, 그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는 비디오 매체의 저질한 프로가 끼친 영향으로 여겨진다. 그 관능적이고 선정적인 문화형태가 이 시대를 대표하는 것이고, 엄숙주의 또는 경건주의는 한물간 것이라고 속단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책의 선택에도 영향을 주어 관능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의 수요를 창출하는 것으로 보면 크게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보편적인 추세에 대한 반동적인 흐름도 있다. 의식있는 독자의 일부는 이 시대에 생산된 문화에 실망한 나머지 책에 대한 기대도 포기해 버린다. 대부분이 고급한 독자인 그들은 오직 전 시대에서 넘어온 고전과 전문서적에만 지식과 교양을 의존함으로써, 이 시대의 문학적 저술을 대중에게만 맡겨버린다. 그리하여 고급한 독자가 줄어듦으로써, 사실은 무분별한 대중의 인기에 의지해서는 안될 작가들까지도 대중에게 의지하게 만들어버린다. 자기 편을 외면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혐오하는 쪽을 돕게 된 셈이다.....' 7월 5일 수요일. "전(前) 주간님의 말씀에 이 기자는 재학시절에 시를 공부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기사는 순논문식(論文式)이군. 어쨌든 재미있는 얘기이니, 계속 미신(迷信)이란 개념으로 작가 쪽도 알아보시오. 독자가 소비자라면 작가는 생산자에 해당하니까, 소비자에 대한 분석이 있었으면 생산자에 대한 분석도 있어야 되지 않겠소? 마침 8월은 바캉스 계절이니 책에 대한 이야기가 적절한 특집이 될 거요. 이 달은 이미 틀렸으니 한 열흘 더 가지고 작품 하나 만들어 봐요." 이미 이 달치로는 틀렸지만 그동안 대강 얽은 독자의 의식분석을 보였더니 주간님이 하시는 말씀이었다. 그 바람에 오늘은 작가들을 찾아다니느라고 하루종일 시내를 돌아다녔다. 여섯 시쯤 돌아오니 그의 전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집 부근의 그 술집이었다. 가볍게 한잔을 들면서 왠지 부어 있는 듯한 그의 기분을 풀어 주고 헤어졌다. 지난 넉 달 동안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의 기분을 풀어주는 데는 추켜세우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 누구든 칭찬해서 싫어할 사람이야 없겠지만, 그에게는 특히 신통하게 듣는 치료법이다. "사실 나는 요즈음 대작을 구상하고 있어. 등단하던 무렵의 그림이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대표작처럼 따라다니는게 무척 괴로워. 모든 예술에서 다 그렇겠지만 화가가 가장 바라는 것은 항상 가장 최근의 작품이 가장 낫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지, 그런데 나는 아직도 몇 년 전의 작품들에 둘러싸여 있단 말이야. 그걸 어떻게든 벗어나야겠어." 마지막에 완전히 기분이 풀린 그는 우리 집에 갔던 일로 틀어져 있었다는 것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 제법 우쭐해 하면서 그런 얘기까지 했다. 좀체 없는 일이었다. 하기야 그러고 보니 내가 오늘처럼 맞대 놓고 그의 그림을 추켜준 일도 처음이기는 하다. 그만큼 그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내가 노력했다는 증거인 셈이다. 7월 7일 금요일. 양력 칠석날. 오늘 엄마의 성화로 생각지도 않은 직녀(織女)가 되었다. 회사 옆 다방까지 사람을 데리와서 극성을 떠는 바람에 부근의 조용한 경양식점을 골라 선을 보게 된 것이다. 견우 씨-- 이건 중매를 한 이모가 붙여 준 이름이다--는 선이 마음 내키지 않은 데 비하면 여러 가지로 괜찮은 편이었다. 직업은 인천에 있는 어떤 대학교 선생, 그것도 서른하나란 나이에 비해서는 빠른 편인 조교수였다. 그러나 책벌레의 인상이 없는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삼 년 개인기업체에서 일한 덕분인 모양이었다. 전공은 전자공학, 그런대로 자기 전공을 밝힌 뒤에 이런 말을 덧붙일 정도의 유머감각은 있었다. "하지만 제 꿈은 시인이 되는 겁니다. 만편(萬篇)만 차면 등단할 작정이죠. 지금 2천 3백 21편째를 쓰고 있습니다." 가족상황도 괜찮은 편이었다. 장남이긴 하지만 부모 스스로 모시기를 원하지 않고 또 살림도 넉넉해 부양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이모에게 들은 말이지만 그 앞으로 떼어 둔 재산도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용모는 평범한 남편감으로는 좀 어떨까 싶을 정도로 잘생긴 편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 탤런트 같은 용모와 너무 빈틈없는 행동같은 것일까. 헤어질 때, "앞으로 직장으로 전화드려도 되겠습니까?" 하고 묻길래 생각없이, "전화번호를 아세요?" 했더니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거야 서점에만 가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기야 누구든 그 정도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왠지 그게 지나치게 빈틈없는 것으로 느껴져 마음에 거슬렸다. 하지만 어차피 누군가와 할 결혼이라면, 그에게도 기회를 줄 수밖에. 마음속으로 세 번을 작정하고 다시 만나 줄 것을 약속했다. 7월 10일 월요일. 오전에 그를 만났기에 선본 얘기를 했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지만, 담배를 끼우고 있는 손끝이 가볍게 떨리고 있음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괜찮은 사람 같은데. 이번에는 놓치지 말고 잘해 봐." 한참 뒤에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도 전에 느껴지지 않던 쓸쓸함이 밴 듯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그에게서 묘한 쾌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가 몇 번이고 화제를 바꾸려는 것을 묵살한 채 나는 견우 씨의 얘기를 시시콜콜 다 늘어놓은 뒤에야 화제를 바꾸었다. 헤어질 때 유난히 처져 보이던 그의 어깨도 마찬가지로 재미있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혼자 생각하니 갑자기 내가 무슨 대단한 요부처럼 느껴지며 자신이 두렵게 느껴졌다. 그와 견우 씨, 둘 중에 하나는 내가 놀리고 있다. 어느 쪽일까. 7월 11일 화요일. 벌써 여름이 뜨겁다. 어차피 이런 저런 핑계로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버릴 테지만, 오늘 휴가 순서 추첨이 있었다. 나는 8월 셋째 주 후반이다. 여름으로 봐서는 한풀 꺾인 뒤가 되는 셈이다. "이 기자, 내가 바꿔 줄까?" 다음 주 전반에 걸린 손 언니가 내가 실망하는 얼굴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다음 주 초라면 너무 이르다. 각 나흘씩 겨우 일년에 두 번 있는 휴가를 그렇게 다급하게 써버릴 필요는 없지. 7월 13일 목요일. 이 남자, 상당히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취미가 있는 모양이다. 오늘 견우 씨를 만났다. 전화고 뭐고 똑바로 편집실로 뛰어들어와 팔을 끼고 나서지 않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당당하게 나를 데리고 나갔다. 좋고 나쁘고 따질 새도 없이 얼결에 끌려 나간 나는 시내의 어떤 커피 솝에 마주앉고서야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항의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하지만 반드시 기분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견우 씨는 능청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갑자기 제 시(詩)를 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그리고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하고 있는데, 정말로 들고 있던 가방에서 여섯 권이나 되는 대학 노트를 꺼냈다. 아주 낡은 것도 있고 비교적 새 것도 있었다. "2천 3백 21편의 일부입니다. 펴 보세요. 이것부터 이해를 받아야 우리 일을 더 진전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그의 목소리는 이번에는 진지했다. 그 진지함은 마지못해 펴 든 그 노트에서도 느껴졌다. 도무지 남의 시를 베낀다 해도 어려울 만큼 많은 양의 시들이었다. 처음에는 어이없던 나도 차츰 그의 진지함에 빠져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내용이란 게 비록 시라고 부르기에는 좀 민망한 데가 있긴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나는 꼭 무슨 도깨비에게 홀려 갔다온 기분이었다. 7월 15일 토요일. 우리 시대의 문학적 생산을 병들게 하는 요소로서 작가가 빠져 있는 미신은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 평론가이신 K, M 두 선생님의 말씀을 정리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잡은 넓은 의미의 책은 특히 소설로만 한정되어버린 감이 있지만, 저번 '독자의 미신'과 짝을 이루는 것이므로 여기에 옮긴다. '근년 들어 자주 논의되고 있는 소설문학의 침체 또는 부진의 원인으로 생각되는 작가의 미신은 대강 다섯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상황에 대한 미신으로 이것은 특히 70년대 말에서 80년 초에 이르는 정치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사실 우리 시대의 상황이 문학활동에 아무런 불편을 주지 않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다. 그러나 어떠한 체제도 자기에게 정면으로 도전해 오는 문학에게 관대한 적이 없었다는 일반적인 원칙을 상기하면 그 어려움은 정도의 차이일 뿐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결론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 상황이 문학에 요구하고 있는 것은 자기보존에 필요한 한계의 준수이지 문학 자체의 질식은 아니다. 그런데 문학 쪽의 상황에 대한 인식은 터무니없이 과장되어 거의 미신에 가깝다. 예를 들면 상황은 한 가지만 금지하고 있는데도 문학은 세 가지 네 가지 하지 말라고 해석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미신의 결과 문학은 두 가지 형태로 상황에 대처한다. 그 하나는 저항의 뜻을 포함, 상황에 대한 확대해석으로 위축되어 문학적 생산을 포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확대해석에 순종하여 문학에서 사회적인 관심을 숫제 없애 버리는 것이다. 뒤의 경우 얼핏 보기에는 포기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게 함으로써 문학의 영역을 기껏 신변잡담이나 사랑얘기 따위 관능주의의 좁은 마당으로 한정하게 되어 결국은 포기와 다를 바 없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물론 이 나라의 모든 작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 대한 미신'이 근년에 논의되는 침체 또은 부진과 무관하지 않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다음 이 나라 작가들이 가진 미신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주제에 관한 미신이다. 앞서 말한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서, 특히 70년대의 문학을 통한 의식화 작업의 유물로 보여진다. 사실 주제란 소설의 요소 중에 하나로서 기껏해야 소설창작의 삼분의 일의 무게를 가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의 의식있는 문학은 주제가 바로 그 우열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종종 소설은 작가의 언어적인 연마와 구성상의 기교나 문장력 따위와는 무관하게 무엇을 얘기했는가로만 우열이 결정되곤 했다. 그런데 주제에 대한 그 같은 미신은 필연적으로 소재(素材)주의를 부른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또한 필연적으로 혼동이 일어나, 예컨대 소매치기, 창녀, 펨프 등의 소위 소외된 계층의 얘기는 곧바로 사회비판이란 주제로 연결되고, 또 사회비판이란 주제는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연결된다. 그리하여 소외된 계층의 얘기는 무조건 치열한 작가의식의 산물이라는 오해가 독자들에게까지 퍼지게 되는 것이다. 방금의 문학침체란 말을 뒤집어 놓은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른바 '거친 문학'의 번성이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세 번째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사실주의의 미신이다. 이 나라의 현대문학은 거의 그 출발점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때그때마다 목적적으로 해석된 사실주의가 주류를 이루어 왔다. 그리하여 리얼리티란 말은 지금 대부분의 작가들에게는 거의 미신이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지켜야 할 철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컨대 낭만주의나 고전주의, 또는 교훈적이나 설명적이란 말은 작가를 비난하거나 비아냥거릴 때에만 쓰이는 것이 그 가장 극명한 예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만능 지고(至高)의 사실주의도 이 땅에서는 너무 오래 울궈 먹어 맛과 약효가 함께 다해 가는 만병통치약처럼 돼 가고 있다. 이 또한 이 나라의 재능 있는 작가들을 곤혹시키고, 모색의 괴로운 여정 속에 침묵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것이다. 네 번째는 토속주의(土俗主義)의 미신이다. 진작부터 우리 문학에는 민족주의 또는 문학적 국수주의와 혼동된 토속주의의 뿌리가 있었다. 그런데 금년 들어 제3세계의 문학이 세계 문단에 대두되면서(그것은 특히 노벨상 같은 것으로 재어진다) 그 토속주의는 은연 중에 우리 문학의 가능성과 혼동될 정도로 세력을 얻고 있다. 하지만 제3세계의 문학이 보여주는 토속은 이미 세계화된 토속이다. 한 민족이 사용하는 언어와 의식 형태 사이의 밀접한 관련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대개 그들이 표현수단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구미(歐美)의 언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그들의 토속은 처음부터 세계어로 번역된 토속인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토속은 종종 번역 가능한 의식(意識)이 아니라 그 난삽하고 조야한 껍질이다. 예를 들면, 원시종족주의적 의식(儀式), 민족문화의 정통적인 흐름으로 선뜻 승인하기 힘든 천민집단의 기예(技藝) 따위에 의지하는 일종의 소재주의(素材主義)나, 교통과 대중 매체의 발달로 이제는 이 나라에서조차 사어(死語)가 된 방언(方言)의 남용 따위가 그것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토인들의 춤이나 인디언의 축제는 관광객의 호기심은 자극할 수 있어도 세계무대를 감탄시킬 만한 무용예술은 아니다. 그리고 방언도 우리가 이미 한국어라는 방언을 쓰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런데도 우리 것이니까 무조건 세계적일 수 있다는 문학적 쇼비니슴이나 분위기를 돕기 위한 소도구(小道具)로서가 아니라 방언(方言) 그 자체로 한몫을 보려는 듯한 인상을 주는 글들이 종종 우리 문학에 나타난다. 바로 토속주의 미신이 낳은 전형적인 오해의 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이 나라의 작가의 미신 가운데 하나는 반대중(反大衆)의 미신이다. 예술성이란 말과 대중성이란 말은 언제나 반대어(反對語)로만 파악되며, 대중적인 인기를 획득하는 것은 예술적 성취를 포기한 뒤에만 가능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소월(素月)을 어릿광대로 여기고 춘원(春園)을 동네북으로 만드는 데 가장 공이 큰 미신이다. 그들이 근거하고 있는 바는 대개 살아 있을 때는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어 외롭고 고달펐으나 죽은 뒤에 그 진가를 인정받는 천재(天才)들이다. 하지만 그러한 천재들은 예로 들기엔 많아도, 세계 문학 전체를 놓고 볼 때는 역시 예외에 지나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대부분의 문호(文豪)들은 그 당대에 예술적인 성취와 대중의 사랑을 함께 획득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더욱 딱한 것은 그들 소수의 예외적인 천재에 의지하는 사람일수록 그런 천재들과는 무관한 경우가 더 많은 점이다. 그들의 재능이 너무 탁월하여 우매한 대중이 알아보지 못하거나, 혹은 예견력과 직관, 감수성 따위가 시대를 앞질러 가버린 천재는 한 세대에 한둘을 넘지 않는다. 훨씬 양보해도 우리 시대 이 땅에서 갑자기 수십 명씩 무더기로 나온다면 그것은 아마 한국 문학사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사의 한 이변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반대중(反大衆) 미신은 거의 우리 시대 모든 작가를 사로잡고 있다. 그 때문에 어쩌다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된 작가는 까닭 없는 죄의식과 불안에 빠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예술적인 성취를 단념하게까지 된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그야말로 탈속을 위한 탈속으로 치달아, 나중에 자신도 모르는 세계로 사라지고 만다. 인기 작가란 말은 순수문단에서는 일쑤 욕설과 비슷하게 쓰이고 베스트셀러란 말은 통속물이란 말과 구별할 수 없게 된 것도 그 같은 미신의 뚜렷한 예인 것이다......' 여기까지 정리해 보니 내가 보기에도 너무 엄청나다. 우리 잡지에는 아무래도 벅찰 것 같은 내용이다. 7월 18일 화요일. 그가 내일 이 도시를 떠난다. 그렇다고 뭐 영원히 떠난다든가 하는 따위 대단한 것은 아니고, 이 도시의 소음과 매연과 그리고 이 계절의 더위를 피해 동해안의 어떤 바닷가로 떠날 뿐이다. 그곳 해변가에 멋진 산장을 가진 어떤 부자가 그의 작업을 위해 그 산장을 빌려 준 모양이었다. 자신은 사업 때문에 이 여름엔 갈 기회가 없고, 대학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세 자녀들은 연수니 친지방문이니 해서 방학을 해외여행으로 보내게 된 탓에 비게 된 산장이었다. 그는 한두 달 정도 머물 것을 계획하여 몹시 즐거워했지만 나는 그가 즐거워하는 모습이 까닭 없이 쓸쓸했다. 우리들의 사이는 그가 공공연히 우리 집과 직장에 전화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것으로 규정되어 있고, 만남이랬자 기껏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 식사를 하거나 가벼운 술잔을 나눌 뿐이다. 가끔씩은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대여섯 시간씩 그와 함께 보내는 수도 있지만, 그것도 언제나 그는 탁자 건너 맞은편이다. 거기다가 그를 못 보는 것도 기껏해야 두 달이고, 또 그가 전혀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술잔을 부딪치며 농담삼아, "짧지만, 긴 이별을 위해." 할 때는 그 이별이란 말이 턱없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약간 술이 오른 그가, "작품도 작품이지만 조용히 생각해 볼 것도 있고......" 했을 때는 왠지 그것이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 가슴까지 섬뜩했다. 7월 21일 금요일 이상한 날. 오늘도 또 이상한 감정에 빠졌다. 전화를 해 내가 자리에 있는 것을 확인한 견우 씨가 바람같이 편집실에 나타났을 때였다. 나는 왠지 마음내키지 않음과 함께 문득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싫은데다, 은연 중에 나이가 가르쳐 준 타산에 이끌리어 수선스런 견우 씨를 따라 나서기는 해도 기분은 영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견우 씨는 막무가내였다. "도대체 어딜 가자는 거예요?" 그러는 내 말에 분명 가시가 돋혀 있었는데도, 그는 눈치 없이 자기 흥에만 들떠 있었다. "집 구경 하나 합시다." "집?" "글쎄, 따라와 봐요. 이래봬도 신사요. 실례는 않겠습니다." 그러더니 나를 데려간 곳은 불광동의 어떤 주택가였다. "저 집 어때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제법 멋을 부려 지은 이층집이었다. 멋을 부렸다는 것은 주재료인 붉은 벽돌 외에는 모두 자연석을 사용한 듯한 주택양식 때문이었다. 뜰도 제법 있어 보였는데 더 마음에 드는 것은 담장 위로 솟는 정원수들이었다. "한번 들어가 구경합시다." "왜요?" "글쎄, 따라만 와요." 내가 그 집을 좋게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듯 그는 더욱 자신있게 앞장을 섰다. 그의 뜻이 짐작 가지 않은 바는 아니었으나, 이왕 내친 김이라 이미 벨을 누르고 있는 그를 따라 들어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연락이 되어 있는지 집구경을 하러 왔다는 그의 말에 사십대의 안주인은 선선히 문을 열었다. 어딘지 그 집에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는 훨씬 멋스러운 집이었다. 정원은 오십 평 정도도 안됐지만 숲을 연상시켰고, 집의 장식이나 목재도 한결같이 고급재료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주인 아주머니가 지나치게 견우 씨에게 굽실대는 것이었다. 정원수에 널어놓았던 빨래를 황급히 걷어내는 것이며, 칠이 벗어진 마룻바닥을 급히 칠해 놓겠다고 약속하는 폼이, 내가 추측했던 것처럼 집을 사고 팔려는 사람들 사이의 태도는 아니었다. 그런 내 의문은 곧 풀어졌다. 집구경이 끝나 갈 무렵 그 아주머니가 견우 씨에게 물어 온 것이었다. "집은...... 언제까지 비워야 되죠?" "집요?" 견우 씨가 그렇게 대답하며 나를 보고 찡긋 웃더니, 농담처럼 말했다. "이분에게 물어 보세요." "어머, 제가 왜요?" 놀라 그렇게 반문해 놓고 난 뒤, 나는 비로소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결혼신청과 아울러 날짜까지 묻는 셈이었다. "아가씨, 언제까지면 되우?" 아무것도 모르는 아주머니가 다시 내게 대답을 재촉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모든 것이 견우 씨의 번득이는 재치로 볼 수도 있지만, 솔적히 나는 감탄스럽기보다는 불쾌했다. 그 바람에 견우 씨의 속셈을 알면서도 짐짓 통명스레 대답해 주었다. "저는 우연히 집구경을 왔을 뿐이에요. 집주인과 의논하세요." 그러자 견우 씨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저는 오늘 날을 받아 가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모르시겠습니까?" "뭘요?" "어머님을 찾아가 뵈었더니 희원 씨에게 물어 보라더군요." 그제서야 나는 아는체 했다. "그런 거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 생각해 보세요." "저는 옷 한 벌을 맞추어도 하루는 생각해야 돼요." 그리고 앞장서서 그 집을 나와버렸다. 견우 씨도 내가 자신의 말을 충분히 알아듣고 한 대답임을 알자 더는 조르지 않고 따라 나왔다. "집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부근의 다방에 마주앉은 뒤, 그가 약간 기죽은 얼굴로 그렇게 물어왔다. "좋은 집이더군요." 그 기죽은 얼굴 만큼 마음이 누그러진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 놓고 보니, 그의 재력(財力)에 대한 나의 거의 본능적인 궁금함이 일었다. "아버지가 대단한 재산가이신 모양이죠? 설마 하니 말단 대학교 교수의 월급으로 이 호화주택을 사지는 못했을 거고......" "아버지가요?" 그가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실은 집에서 하고 있는 슈퍼마켓도 제가 차려 준 겁니다." 그러면서 그가 털어놓는 얘기는 자못 감동적이었다. 무슨 입지전(立志傳)에서처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부터는 스스로 개척해 온 삶이었다. "그럼 돈은 언제 버셨어요?" "대학교를 졸업하자 꼭 삼 년을 기약하고 취직을 했지요. 어떤 이름있는 회사의 기획실이었는데, 곧 돈을 만지는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를 기회로 삼았죠. 대부분의 기업이 그렇지만 어음이다, 결제일이다 하면 대개 돈이 들어오는 날과 쓰이는 날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한 스무 날 정도는 몇 백만 원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나는 그 스무 날을 이용할 궁리를 한 끝에 증권회사에 들어간 친구와 손을 잡았지요. 그때가 5,6년 전 한창 증권이 재미있을 때였습니다. 제가 몇 개월 집중적으로 연구한 증권 지식과 그 친구가 제공한 정보를 종합하니 정말 거짓말처럼 돈이 불더군요. 한 보름 만에 내가 임시 변통해 넣은 돈이 배가 되어 나올 때도 있었죠. 그렇게 일년쯤 하니까 이제는 공금을 변통해 쓸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다시 그 돈을 일년쯤 더 굴렸습니다. 집 한 채 살 말한 돈이 되더군요. 그런데 부동산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증권회사에 다니던 그 친구와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강남에 함께 부동산 소개소를 차렸죠. 장담은 못해도 우리가 당시 가장 젊은 소개업자였을 겁니다. 한 일년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그게 77년도였죠. 하지만 나는 그 일년으로 손을 씻었습니다. 이상적(異狀的)이란 오래가는 법이 아니란 이유에다 그럭저럭 대학원을 마쳤다는 것도 계기가 됐지요. 같이 하던 친구는 한창 재미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었지만 나는 지금 이 학교에 내가 벌던 돈의 십분의 일도 안되는 봉급을 받고 출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학장으로 계시는 은사님의 특별 배려로. 그동안 번 것을 모두 합쳐 보니 시골 가족을 위해 목 좋은 자리에 슈퍼마켓 하나를 차려 주고도 이 집이 남더군요......" 대개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런 견우 씨가 비상하게 느껴지기보다는 이번에도 역시 섬뜩할 뿐이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나도 따로이 알아봤다. 마침 그 대학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물어 봤더니 모든 것이 그가 말한 이상이었다. 서른하나에 조교수라는 게 이상해서 그랬는데 이공계통에는 더러 있다는구나. 더구나 그는 실력도 대단해서 학생들 사이에 인기도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재산까지 그 정도로 모았다니......" 집에 돌아와 그 얘기를 했더니 좀체 다른 사람 칭찬을 않는 아버지가 그렇게 참견했다. "그게 이상하단 말이에요. 모든 게 너무 빨라요. 그 중에 어떤 것은 분명 정당하지 못하게 얻은 것일 거예요. 어쩌면 세 가지 모두......"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내 방으로 돌아왔지만, 문득 며칠 전에 본 시가 잔뜩 적힌 낡은 대학노트가 떠오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 정말로 괜찮은 남자가 아닌지 몰라......" 7월 26일 수요일 정말 푹푹 찌는 날씨. 여름이 유난히 일찍부터 극성을 떤다. 내일부터 다음 일요일까지 나흘 간의 휴가를 떠나는 미스터 권이 부럽다. 정말 어디 골 깊은 물 맑은 산속에서 한 며칠 지내고 오면 싶지만 나는 아직도 한 달 가까이 있어야 차례가 온다. 이번 일요일에는 인천이라도 다녀와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문득 동해안 쪽으로 가 있는 그가 떠올랐다. 못 본 지 일주일밖에 안되지만 꽤 오래인 것 같다. 인천쯤 가지 않고...... 그러자 비로소 나는 그가 가는 곳을 정확하게 일러주지 않았음을 상기했다. 결국 그는 내가 손 닿지 않는 곳에 가 있는 셈이다. 왜 그랬을까? 7월 27일 목요일. '관성(冠省). 이곳은 생각보다 좋은 곳이오. 송림 사이에서 언제든 눈만 돌리면 동해의 짙푸름을 대하오. 가까운 곳에는 근년에 개발된 해수욕장도 있고, 또 천렵이나 담수욕이 가능한 내(川)도 있어 한여름을 나기에는 썩 좋은 곳이오. 이제는 헛된 정념도 가라앉고 차분히 작품할 수 있게 됐지만, 홀로 누리기가 아까워 문득 군(君)에게 글을 내게 되었소. 휴가를 맡거든 이곳으로 오시오. 친구들도 좋고 친척도 좋지만, 그새 일이 잘 진척되어 송윤식 교수와 함께라면 더욱 반갑겠소 민.' 어제의 내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이런 그의 편지가 회사로 날아 들었다. 그런데 반가운 가운데도 이상한 것은 송윤식이란 이름이었다. 그것이 나도 한참이나 기억을 더듬은 뒤에야 생각해 낸 견우 씨의 본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는 한번도 이야기해 준 일이 없는 그 이름을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설령 한번쯤 내가 무심코 말한 적이 있다 해도 나도 거의 잊어버린 그 이름을 그가 어떻게 이토록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자 그 의문은 곧 풀렸다. "어쩌면 송 교수의 이름은 나 때문에 알게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부탁을 했지. 이번에는 웬만한 것 같은데도 네가 탐탁하게 여기는 눈치는 아니어서." 내가 그 일을 말했더니 엄마가 약간 머뭇거리며 대답한 말이었다. 갑작스런 일이라 엄마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내가 어리둥절해 물었다. "무얼요?" "송 교수와의 일이 잘되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지. 너는 민 선생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잘 듣지 않니?" "엄마두 참, 어떻게 그런 일을 그분에게 부탁할 수 있어요?" 거기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처음 선본 얘기를 할 때 쓸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던 그가 얼마 안돼 뒤집듯 견우 씨를 두둔하고 나서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가 마음속에서 치렀을 곤혹과 갈등도 짐작이 갔다. 이제니까 나도 고백하지만, 그동안 오라버니의 따뜻한 정으로 나를 만나는 것을 떳떳하게 만들려고 애쓰기는 해도, 그의 내면에서는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내게도 은밀한 기쁨이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뒤이은 엄마의 날카로운 반격은 이내 나를 그런 앞뒤 없는 흥분에서 깨어나게 했다. "너 정말 이상하구나. 민 선생님을 오라버니 같다구 하구선. 그래 오라버니가 누이 좋은 데 시집가는데 돕지 못할 게 뭐냐? "그게 아니에요. 하지만......" 결국 그렇게 얼버무리고 슬그머니 내 방으로 후퇴하고 말았지만, 까닭 모르게 가슴 아파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담담한 편지를 쓸 수 있기까지 그는 얼마나 어려운 자기와의 싸움을 겪었을까. 미안해요. 나도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7월 29일 토요일. 그 덕분에 난생 처음 신기한 구경을 했다. 그 덕분이라고 말한 것은 그에게 느끼는 미안함 때문에 그의 일에 내가 유별난 관심과 성의를 보이게 되었다는 뜻이다. 세 시쯤 퇴근하려는데 미술을 담당하는 심 기자가 나를 붙들었다. "언니, 오늘 저녁 맛있는 거 사 줄께, 저하고 같이 가요." "어딜?" 평소에도 가깝게 지내는 후배인데다 특별한 약속도 없어 웬만하면 그녀의 청을 들어줄 마음으로 나는 그렇게 말했다. "신예(新銳) 삼인(三人)의 행위작업이 있어요." "그렇다면 전위작가들이겠구나." "네, 세검정 골짜기에서 오후 다섯 시부터 열두 시까진데, 혼자 가기가 좀 뭣해서......" 평소 현대 미술에 해프닝이니, 이벤트니, 퍼포먼스니 하는 게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한번도 본 적이 없어 궁금하던 터였다. 그러나 밤 열두 시까지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선뜻 따라갈 마음이 내킨 것은 분명 그것이 그의 분야에 속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목적한 장소에 가 보니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개울가의 공지에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카메라를 든 기자들도 대여섯 눈에 띄었지만, 대개는 그 방면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학생들로 보였다. 무엇인가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그들과 조금 떨어져 있을 때를 이용하여 나는 솔직히 퍼포먼스의 정의를 물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아마 이런 건가 봐요. 즉 외계로부터 밀폐된 상황에서 완결된 작품을 만든 뒤에 내어놓는 종래의 관습적인 작업 방법에서 탈피하여, 관객과 행위자가 동일한 행동 무대에서 실수, 우연 등의 개입을 거부하지 않고 공동으로 어떤 완결에 이르는 것 정도가 될까요?" 그게 심 기자의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구태여 미술의 일부라고 할 수도 없지 않아?" "그래요. 미술뿐만 아니라 연극, 무용 쪽에서도 가능하죠." 그런 말을 주고받고 있는데 갑자기 여러 개의 장난감 호각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보니 오늘 행위작업을 벌이기로 되어 있는 세 명의 젊은 화가가 깃이 달린 장난감 호각을 시끄럽게 불어 대고 있었다. 시각을 알리는 신호인 모양이다. 이어 셋은 각기 준비된 구조물 앞으로 갔다. 그 중에 하나는 껍질을 완전히 벗긴 지름 20센티 정도의 통나무였다. 그 앞에는 토끼, 톱, 끌, 망치 등의 도구와 페인트, 색종이, 풀통 따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두 사람만 나오시오." 갑자기 그쪽을 맡은 삼십대 후반의 깡마른 사내가 구경꾼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구경꾼들이 쭈뼛거리며 얼른 나서지 않자 그가 지정했다. "이씨 성 쓰는 분 중에 점심에 국수를 드신 분." 그러자 구경꾼 가운데 하나가 빙글거리며 나섰다. 이어 다시 이번에는 전과 판이한 어조로 그 화가가 명령했다. "거기 실실 쪼개고 섰는 너 안경 낀 새끼." 그리고 지적당한 사람이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머금은 채 나오자 그 두 사람에게 정중하게 제안했다. "우리 이 통나무와 이 도구들로 멋진 작품 하나 만듭시다. 색종이를 오려 붙이든 페인트를 칠하든 끌로 후비건 그건 마음대로요." 이 말에 두 사람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하나는 페인트통을 들고 하나는 색종이와 풀을 집어 들었다. 그걸 보고 화가 자신은 망치와 끌을 들었다. 곧 기묘한 작업이 시작됐다. 하나는 페인트로 나선형의 무늬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색종이를 찢어 여기저기 붙였다. 화가는 끌과 망치로 홈을 파기도 하고 여러 가지 무늬도 새겨 넣었다. 순식간에 통나무는 페인트와 색종이로 뒤덮여 성한 곳은 끌로 쪼아 대고 있는 부분 뿐이었다. 그러나 곧 작업장소가 바뀌면서 화가는 일껏 칠해 놓은 페인트와 붙여 둔 색종이를 끌로 긁어 내고, 다른 두 사람은 화가가 끌로 새겨 놓은 부분에도 페인트와 색종이로 떡칠을 했다. 그런 작업이 한 시간쯤 지루하게 반복된 뒤였다. 갑자기 일손을 멈춘 화가가 구경꾼들을 돌아보고 물었다. "자, 이제 이게 뭣 좀 된 것 같습니까?" "글쎄요, 뭐가 뭔지......" 입을 다물고 있던 관객 사이에서 누군가 그렇게 정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화가는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욕설을 내뱉더니 한 길쯤 되는 통나무 기둥을 흔들어 땅에서 빼냈다. 이어 톱으로 네 토막을 낸 다음, 땀을 뻘뻘 흘리며 도끼로 쪼개 버렸다. 그리고 거기서 생겨난 굵은 장작들을 한군데에 쌓더니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페인트와 화학풀로 붙인 색종이 탓인지, 아니면 달리 나무에 어떤 처리를 해둔 것인지 그 장작더미는 별다른 쏘시개도 없는데 쉽게 불타올랐다. 그러나 오후 여섯 시라고 해도 아직 뜨거운 여름 낮인데도 그 화가는 온몸이 땀으로 번질거리면서 그 불가에 앉은 채 중얼거렸다. "작품이 안되면 장작이라도 되어 열이라도 내야지. 땀을 말리실 분은 이 불가에서 말리시오......" 시계를 보니 꼭 한 시간 반에 걸친 작업이었다. 프로그램을 보니 '프랜 A-- 부질없음의 정의(定義)'라고 되어 있었다. 두 번째는 비디오가 동원된 작업이었다. 행위자가 비디오를 근처에 표시해 둔 풀밭 위에 놓고 스위치를 틀자 화면에는 바로 그 장면이 나왔다. 그 화면 속의 풀밭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 뒤 그런 방식의 작업은 장소를 달리해서 몇 번 거듭됐다. '플랜B-- 허위(虛僞)의 핵심' 심 기자의 말에 따르면 그건 이벤트 형식이라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짧은 팬터마임에 가까운 것이었다. 한식 가옥의 문살 같은 각목으로 촘촘히 사방이 막힌 공간에 들어간 행위자는 한동안 우리 안의 짐승처럼 그걸 부수려는 시늉을 하다가 문득 관객들에게 눈을 내밀었다. 한동안 보고 있던 관객들은 이것저것 그에게 디밀기 시작했다. 담배, 과자봉지, 껌, 노트, 붓...... 그러나 행위자의 표정은 점점 절망적이 되더니 이윽고는 주는대로 받아 바닥에다 팽개치고는 다시 간절하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관객 가운데 하나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첫번째 작업에서 쓰던 도구함으로 가서 톱을 가져왔다. 그제서야 우리 안의 행위자는 고마운 표정으로 그걸 보더니 우리를 썰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가운데로 썰어서 바로 우리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꼭대기부터 우리의 살들을 한치 한치 썰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지루한 작업이 되었지만, 점차 우리가 낮아짐과 함께 우리 주위에 동그렇게 쌓이는 성냥곽 같은 나무토막들이 퍽 인상적이었다. 이윽고 우리가 무릎까지 왔을 때는 아홉 시에 가까웠고 날은 완전히 저문 뒤였다. 그 다음의 작업들은 대개 불과 어둠이 관련된 것들이었다. 빛이 차단된 종이 상자에 전구를 넣고 참여자의 뜻에 따른 무늬로 구멍을 뚫는 작업에 실루엣 조각이 두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흔히 해프닝으로 알려져 있는 행위작업이 연출되었다. 물가의 공터에 지금 5미터 정도의 원을 그리고, 거기에 따라 그날 작업에서 생긴 여러 가지 쓰레기들을 늘어놓은 뒤, 석유를 붓고 불을 지르는 것으로 그 작업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세 명의 행위자만이 원을 그리고 타오르는 불 속으로 들락거리며 여러 가지 동작을 보였으나, 차츰 관객들도 참가하여 대여섯의 불놀이 같은 것으로 되었다. 그러다가 세 명의 행위가가 벌거벗고 불꽃의 원 속에 뛰어드는 것을 절정으로 그 행위작업은 끝났다. 술판이라도 벌이려는 것인지 모닥불 가에서 미리 준비해 온 음식을 돌리고 술병을 따는 그들과 헤어져서 시내로 들어오니 이미 열두 시가 넘어 있었다. "어땠어요?" 헤어지기 전에 심 기자가 물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예술적인 감동이라기보다는 그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어른들의 유희에서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일상으로 두껍게 가려져 있는 우리 삶의 참담함을 언뜻 본 느낌이었다. "실험정신의 소중함은 더할 나위 없는 것이지만, 단순히 새로움의 추구가 범용한 재능은 은페하는 수단이거나 예술을 천민(賤民)들의 자기 선전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은 견딜 수 없소. 다시 말해 피카소의 화집 후반부에 있는 추상화는 이해가 되지만, 데생 공부도 제대로 한 것 같지 않는 새파란 애숭이들이 개발새발 그려 대는 비구상은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는 거요. 또 사방이 막힌 아틀레와 좁은 캔버스에 지쳐 행위로 뛰쳐나온 중견은 이해가 되지만, 시작부터 거리에다 난전을 펴고 나서는 이른바 현대미술을 대하면 나는 아무래도 고급한 협잡의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소." 전위(前衛)에 대해서는 엄격한 편인 그가 언젠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지만, 나는 어쩐지 그런 냉혹한 의심보다는 오늘 저녁 같은 작업이 필요했던 그들과 그들의 삶(또는 우리의 삶도 된다)에 형언할 수 없는 연민을 느꼈다. 삶은 부질없구나. 부질없고 또한 쓸쓸하구나. 7월 30일 일요일. 이 남자, 견우 씨가 또 사람을 놀라게 한다. 아침부터 찾아와 교회에 가자고 성화다. "가 보려무나. 너도 전에는 성당에 나간 적이 있지 않니?" 사위 편드는 장모 같은 엄마의 권유에 발끈해 끝내 거절하고 말았지만, 이건 또 견우 씨의 새로운 모습이다. "네 이모 말이 이 사람 독실한 신자래.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권찰인가 집사인가라던데. 요새 젊은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술 담배도 안할 테고, 한번 따라가 보지 그랬니? 그 사람의 주위를 살펴 볼 기회도 되고......" 그가 머쓱해져 돌아가버린 뒤 어머니가 다시 나무라듯 말했다. 이 남자, 도대체 어떻게 된 남자야. 사회적 지위에, 학문에, 사업수단에, 시에, 이제는 종교적 성스러움까지 더하려고 한다. 어떻게 해서 한 사람에게 그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그 모든 게 거의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데 혼란이 온다. 말은 않아도 엄마 역시 나 같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뒷조사를 하는 눈치다. 며칠 전에는 그의 호적등본까지 내게 보여 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 견우 씨 정말 비상한 남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내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는 것은 정말 속된 말로 '복을 까부는 짓'일까. '보내신 글 잘 받았어요. 그곳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요. 좋은 작품 이루기를 빌어요. 휴가 말씀하셨지만 아직은 스무 날이나 남은 걸요. 거기다가 마음 맞는 친구도 문제구요. 견우 씨 말씀을 하셨지만 오히려 그 사람 일은 민 선생님께 의논드리고 싶네요. 어제야 엄마에게 선생님 얘기를 들었어요. 그 부탁 불쾌하지나 않으셨는지 두려워요. 제가 엄마에게 화를 내었다면 이해하실는지요......' 저녁을 먹은 뒤 문득 그에게 답장을 내고 싶어 이렇게 쓰다가 그만 두었다. 나는 열여섯의 소녀가 아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요즈음의 내 감정은 턱없이 과장되어 있다. 8월 3일 수요일. 오후에는 비가 질금거려 사내(社內)에서 책이나 읽었다. 어디서 편집부로 부쳐 온 것인지 짤막한 서평(書評)과 함께 다음 호(號) 신간 소개란에 싣기로 된 책이다. 저자의 서문이나 책 뒤의 해설을 참조해서 어물쩍 처리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내용이 재미있을 것 같아 읽어보기로 했다. 한참 읽다가 보니 진작에 알아 두었으면 좋았을 구절 하나가 눈에 띄였다. 쇼펜하우어의 것인데, 언젠가의 특집 '독신여성이 늘어간다'에 엉뚱스런 대책으로 써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재미있어 옮겨 본다. '......유럽에 널리 퍼진 결혼법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것으로 여긴다. 출발부터가 잘못되어 있다. 일부일처제가 규칙인 우리 세계에 있어 결혼이란 한 사람의 권리를 반으로 줄이고 의무를 두 배로 하는 것을 뜻한다. 법이 여성에게 남성과 똑같은 권리를 주었다면 법은 또한 남성만한 지성도 여성에게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인즉 법이 여성에게 자연이 준 것 이상으로 영예와 특권을 줌에 따라 이러한 특권을 진정으로 써 보려는 여성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일부일처제의 제도와 그에 따르는 결혼법은 여성을 남성과 완전히 똑같이 여김으로써 그녀에게 비자연적인 특권의 위치를 부여하는 셈이 된 것이다. 이를 보고 영악하고 신중한 남성들은 종종 그와 같이 큰 희생을 치르고 또 그와 같이 불공평한 협정을 묵인하기에 조심을 한다. 결과적으로 일부다처제 나라에서는 모든 여인이 부양되는 반면 일부일처제의 나라에서는 결혼한 여인의 숫자만큼밖에 부양할 수 없다. 그리하여 머무를 곳 없거나 부양해 주는 곳 없는 많은 여성들이 생겨나며, 상류사회에서 그들은 쓸데없는 노처녀로 무위도식하고, 하류사회에서는 몸에 맞지도 않은 힘든 일에 종사하거나 또는 기쁨과 명예가 다 없어진 생애를 지내는 매춘부가 되는 것이다...... 런던에만도 8만 명의 창녀가 있다. 그들은 모두 일부일처제가 못쓰게 만들어버린 여인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의 생은 끔찍한 것으로 한결같이 일부일처제의 제단에 바쳐진 인간 희생물이다...... 따라서 일부다처제는 일반적으로 볼 때 여성들에게도 진정한 이익이 된다. 그리고 또 다른 면으로 볼 때, 예컨대 아내가 만성적인 병을 앓거나 불임증이거나 너무 늙어버렸거나 할 때 새로운 아내를 더 맞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 오늘날 꽤 많은 사람들이 모르몬 교도로 개종하는 동기는 일부일처제라는 비자연적인 제도에 반항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8월 5일 토요일. 요즘 이상한 일이 하나 있다. 다름아닌 미스터 박의 일인데 저번 민 선생의 일로 대판 싸운 뒤로 거의 냉전 상태에 빠져 있던 그가 언제부터인가 드러나게 화해를 청해 오고 있다. 다른 속셈이 있는가 싶었지만,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나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아무런 요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저번의 일은 자신의 오해였다는 것을 밝힐 의도뿐인 것 같다. 무슨 일이 이 독단적이고 고집 센 남자를 그렇게 설득한 것일까? 이 남자가 무얼 알게 된 걸까? 하지만 그 같은 변화가 그리 기분 나쁜 것만은 아니다. 8월 6일 일요일. 의식의 단절이 일어나는 시간을 한 세대라고 부른다면, 예전에는 한 세대가 30년이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사회의 변화속도와 함께 점점 줄어들어 요즈음은 5년도 안되는 것 같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만도 세대차를 느끼는 게 10년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오늘 몇 가지 캠핑용구를 빌려 간 사촌동생 희숙이가 그랬다. 그애는 지금 스물둘인 대학 삼년생인데, 천연스레 남자와 함께 떠난다고 하길래 물었다. "몇 쌍이야?" "쌍은 무슨 쌍, 우리 둘만이지 뭐." "뭐? 그럼 약혼이라두 했니?" "언니두 참 할멈 같은 소리 하구 있네. 꼭 약혼을 해야 함께 캠핑을 가는 거유?" "그러다 무슨 일이라두 있으면 어쩌려구 그래?" "무슨 일?" 그러더니 그 애는 놀리듯 되물었다. "언니는 아직두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옷을 벗어 주는 일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구 생각해?" 그 말이 하도 자연스러워 오히려 멍청해진 것은 나였다. 그런 내게 그애가 핀잔처럼 덧붙였다. "가장 보수적인 외형을 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진보적인 것이 관료이고, 가장 진보적인 외형을 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보수적인 것이 기자라더니, 정말 그런가 봐."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관료는 강력한 통제력을 가진 상부층이 있지만 기자는 그게 없어 설령 상부가 진보적이 되더라도 관료사회와 같은 파급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결국은 개개인의 진보적 성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그건 또 비판정신이란 직업적 강박관념에 방해당하죠. 왜냐하면 비판이란 대개 기존관념에 근거하고, 따라서 또한 보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하기야 이건 잡지기자보다는 신문기자에 더 잘 적용되는 말이지만......" 그 신랄한 일격을 당하고 보니 그 애의 캠핑에 대해 해주고 싶던 경고는 쑥 들어가고 말았다. 겨우 내가 덧붙일 수 있었던 것은 경쾌한 걸음으로 집을 나서는 그 애에게 거의 속수무책인 심경으로 던진 인사말 뿐이었다. "잘 다녀오너라. 조심하고." 8월 8일 화요일 아스팔트에 구두창이 쩍쩍 달라붙는 더위. 닦달 덕분인지 다음 호 일에 여유가 생겨 이번 주부터는 편집부에서 두 사람씩 휴가를 떠나기로 되었다. 덕분에 내 휴가는 앞당겨져 다음 주가 되었다. 나와 함께 출발하게 되는 심 기자는 따로 계획이 없는지 나보고 함께 보내자고 조른다. 홍도 쯤이라도 갔다오자는 얘기였다. 나도 별다른 계획이 없어 일단은 동의해 놓았지만, 갑자기 그가 궁금했다. 가서는 안될 것 같다는 내 예감에도 불구하고. 8월 10일 목요일. 견우 씨가 점점 무서워진다. 어떻게 알았는지 내 휴가날짜를 알아 거기에 맞추어 휴가계획을 짜 나타났다. 3박 4일 제주도 여행이었다. "무얼 믿고 이런 계획을 짰죠?" 놀랍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내가 멍하니 쳐다보다 그렇게 묻자, 견우 씨는 더욱 당당하게 대답했다. "안되면 약혼여행으로 하죠. 아직까지 한 주일 남았으니 약혼식을 올릴 여유는 충분합니다." 도대체 이 남자의 이런 자신만만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 다른 세상 일에서 보여 준 그 민첩함과 명석함으로 보아 어느 정도는 내 마음도 읽고 있으리라 믿어지는데, 그렇다면 내 행동 어디엔가 그런 자신을 심어 줄 만한 데가 있었다는 것일까? 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살이의 전문가가 그동안 획득해 준 여러 전리품에 마음이 끌리기라도 했다는 것일까? 아니면 내게서 느끼는 어떤 불안 때문에 내가 정신을 못 차리도록 일을 서두르는 데 지나지 않은 것일까? 그 어느 쪽이라도 불쾌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거나 최소한 매몰찬 거절이라도 하지 못하고, 부드러운 얼굴로 엉거주춤 앉아 있는 나도 또 어떻게 된 것일까? 8월 11일 금요일. 불쾌, 불쾌, 인간의 약삭빠름과 비열함이 주는 불쾌감. 오늘 점심식사 뒤에 우연히 미스터 박과 커피 한잔을 함께 들게 되었을 때였다. 미스터 박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물었다. "요즘 송 선배와 잘 되어 가십니까?" "송 선배가 누구예요?" 너무 갑작스런 물음이라 그렇게 반문해 놓고서야 그가 견우 씨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긴장이 되었다.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송윤식 교수 말입니다. 곧 약혼 발표가 있는 줄 아는데." 그러잖아도 누군가 편집부 안에 견우 씨의 눈과 귀가 있다는 의심이 들던 터였다. 그런데 이제 미스터 박이 스스로 밝히고 나선 셈이었다. 무슨 대단한 단서라도 잡은 탐정 모양으로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 담담하게 물었다. "그 사람 어떻게 알죠?" 마치 내가 미스터 박의 추측을 시인하기라도 하는 듯한 투였다. "제 학교 선뱁니다. 대단한 사람이죠." 그러자 이제는 털어놓아도 되겠지, 하는 표정으로 미스터 박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어쩐지 직장 안의 일을 잘 알더라니...... 그래서 아는대로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쳤군요." "염려 마십시오. 적어도 이 기자에게 해로운 말은 한마디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열심인 걸 보면 모르십니까? 저도 정말 놀랬어요." "건 또 왜요?" "그 정도 되는 분이 왜 그리 결혼이 늦은지 아십니까? 재벌이나 장관 딸 아니면 결혼 안 한다고 버티던 분입니다. 그런데 이(李) 기자를 한번 보고는 딴사람처럼 열심이에요." "도대체 그 사람 어떤 사람이에요?" 그쯤에서 나는 슬슬 내가 궁금한 방향으로 질문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정말 몰라서 물으십니까?" "비상한 줄은 알지만......" "대단한 분이죠.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라도 그 선배한테 걸리면 배겨나지 못했죠. 그렇지만 선배들 잘 모시고 후배 일이라면 제 일처럼 돌봐 주었어요. 그분 한참 벌이가 좋을 때는 후배들 중 등록금을 얻어 쓴 친구도 여럿 될 걸요." "그런 분이 공부는 또 언제 했어요." "그게 우리도 늘 감탄하는 점입니다. 대학원 때도 사업 일이 바빠 나가는 둥 마는 둥 했거든요. 그런데도 과정이 끝나기 무섭게 지금 그 대학에서 전임강사로 모셔 가더군요. 그리고 삼 년 만에 조교수라는 식이에요. 그 대학에 다니는 후배들한테 들은 얘긴데, 거기서도 실력파라는 겁니다." "아직 많지 않은 나이에 그 모든 것을 얻으려면 어딘가 지독히 운이 좋았거나......" "둘 다죠. 그 중에도 특히 대단한 사람이라고 보는 쪽이 옳을 겁니다." "사람 다루는 수완도 보통이 아니겠군요?" "물론이죠. 그가 한번 마음먹으면 누구든 그의 편이 되지 않고는 못 배길겁니다." "그렇다면 내게는 어째서 그런 게 보이지 않죠?" 솔직히 그때 내게 어떤 특별한 저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몇가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기는 해도 오히려 나는 미스터 박의 말에 은근히 감탄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물음에 대한 박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한동안 홀로 허허거리더니 공연히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게 바로 송 선배의 대단함입니다. 상대방이 모르게 손을 쓰는 것......" 그러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웃음을 거두었다. "약혼은 언제입니까?" "내주쯤 될 거예요. 그런데 그건 왜 묻죠?" 나는 직감적으로 무엇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짐짓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박은 안심했다는 듯 다시 허허거리며 말했다. "그럼 한 가지만 알려 드리죠. 요즘 민 화백 전혀 소식 없죠?" "바쁘신가 봐요." "그게 아닐 겁니다. 그 선배가 손을 쓴 거예요. 아마 그는 이 기자가 결혼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영영."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내가 말해 주었으니까요. 물론 그 선배가 물어서였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했다는 거예요?" 거기서 나도 모르게 내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나의 그 같은 반응이 그 때문에 견우 씨에게 불리한 점수를 얻게 된 것에 대한 불안으로 지레짐작한 박은 안심시키듯 대답해 주었다. "걱정 마십시오. 주위의 남자를 하도 묻길래 건전한 것으로 대답해 주었습니다. 내 알기로는 그밖에 없는데, 그것도 예전에 같은 직장에 근무하던 인연으로 가끔씩 커피나 마실 정도라고." "그런데도 그 사람이 민 화백을 찾아갔어요?" "아무려면......" "실은 이 기자와 선을 본 다음날입니다. 그 선배가 시내의 다방에 불러내더군요. 그리고 제게 말했습니다. 선을 보았는데 이 기자가 마음에 든다. 어떻게든 일이 되도록 해야겠는데, 우선 그 첫 단계로 주위의 남자부터 모핑 업(소탕)해야겠다. 그리고 아는대로 대라고 다그치더군요. 내가 알기로 민 화백밖에는 반복으로 만나는 사람이 없기에 이미 말한 것처럼 알려 주었지요. 그런데 건전하다는 제 말에 그 선배가 대답하더군요. 부부 외에 건전한 남녀관계란 없다. 오히려 그럴수록 일찍 쓸어버려야 한다 라고......" 하지만 그 이상 내게는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스터 박에게 마음속의 동요를 눈치채이지 않게 자리를 뜨는 것만도 내 절제와 극기의 최대치였다. 아아, 그것이었구나, 처음 그가 이 도시를 떠난다고 말할 때 까닭 없이 나를 불안하게 했던 것은 그 천박하고 염치없는 오해에 그는 얼마나 참담한 기분이었을까. 그러면서도 내게는 말 한마디 없이 웃으며 떠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힘든 자기 절제가 필요했던 것일까. 안녕, 견우 씨. 당신을 비열한 사람이라고까지 욕할 수 없을지 몰라도 이것만은 확실해요. 당신이 황금 궁전을 가진 왕자님이라 해도, 나는 그 안주인이 되는 걸 사양하겠어요. 그곳에서 하루도 안돼 숨이 막혀 죽고 말 거예요. 그리고 엄마, 이젠 엄마와 나 사이에도 비밀이 생기게 되었군요. 그런 남자에게 동조한 엄마를 이제 나는 믿을 수가 없게 됐어요. 8월 13일 일요일. 지난 이틀 동안 열심히 구상한 각본대로 훌륭한 연출을 했다. 언제나처럼 자신만만하게 나타난 견우 씨를 굳이 술집으로 끌고 가서, 독한 위스키를 시켜 놓고 한껏 쓸쓸한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고백할 게 있어요...... 사실 제게는 남자가 있어요. 한 사 년쯤 되었는데, 불행히도 결혼을 할 수 없는 상태예요(술 한 모금). 마침 송 선생님을 만났기에 어떻게든 그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 출발하려고 해 봤죠. 그분도 다행히 제 뜻을 짐작하고 동의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안되겠어요. 모든 건 마음뿐, 사람과 사람의 정이 그렇지 못하더군요. 그분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못 본 지 한 달도 안됐는데......(한숨). 이렇게 뵙고 싶어 견딜 수 없어요. 휴가를 맡는대로 그분에게 갈 거예요(다시 술 한 모금). 사람에겐 다 운명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에요. 악연도 운명은 운명이죠......(다시 한숨) 용서하세요.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한 달이 넘도록 끌어 온 것, 이런 절 이해하시겠어요?(카운터를 향해) 이봐요. 웨이터, 여기 한 잔 더 줘요......" 견우 씨는 역시 현명한 사람이라 단념도 빨랐다. 한동안 꼼짝 않고 나를 살피더니 조용히 일어날 채비를 하며 세상살이의 전문가답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오히려 제가 소란을 떨어 죄송합니다. 그리고 방금 들은 말은 안 들은 걸로 할테니 염려 마십시오." 빤히 알면서도 민 선생님에 관한 얘기를 끝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어쩌면 이 남자는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는 내 삶에서도 두번 다시 만나기 힘든 능력있고 패기에 찬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가 내게 보여 준 여러 가지 행동들은 약간 치졸하기는 해도, 그 능력과 패기의 연장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아무리 좋게 보아도 그 끝이 낙관적일 수는 없는 감정의 유희에 빠져 너무 성급하게 한 사람을 판단한 게 아닐까? 내 건강한 삶을 위해 한동안은 더 겪어 보고 살핀 뒤에 판단하는 게 온당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언제나 한 발 늦는 것이 법과 이성이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범인은 달아나고 감정은 제멋대로 일을 처리한 뒤인 것이다. 8월 14일 월요일. 내일이 광복절인 덕분에 우리 조는 휴가가 엿새로 된 셈이다. 오늘 휴가를 보낼 곳으로 동해안을 전격적으로 결정했다. 그를 만나야겠다는 앞뒤 없는 다급함에다, 견우 씨와의 일로 휴유증이 남아서는 안된다는 계산이 겹친 결정이었다. 즉 심 기자와 함께 감으로써, 있을지도 모르는 아름답지 못한 추측에 말려드는 것을 피하는 한편, 그가 있는 산장으로 간다는 걸 미스터 박이 알게 함으로써 견우 씨의 엉뚱한 미련을 막아버리자는 의도였다. 심 기자도 기꺼이 찬성했다. 그래서 갑자기 외가가 동해안으로 바뀐 심 기자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니, 전에 없이 집안에 찬 기운이 돌고 있었다. 이모가 와 있는 것으로 보아 묻지 않아도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나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 내 방으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란히 거실에 앉아 있던 이모가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손님이 있는 모양이다만, 알 건 알아야겠다. 도무지 어떻게 된 거냐?" "뭘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신 못 차리던 송 교수가 갑자기 이번 혼사 문제는 없던 걸로 하자는구나. 무슨 일이냐?" "그야 뭐, 내가 장관 딸도 아니고 재벌 딸도 아니니까 실망했겠죠." "그 사람 욕심이 많은 줄은 안다. 하지만 너에 관한 건 처음부터 다 알고 시작했어. 내가 있는대로 말해 주었단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 하나면 된다고 사흘돌이로 전화였는데......" "그럼 나보다 훨씬 예쁘고 재주있는 아가씨를 찾은 모양이죠." "그게 아니었다. 말은 달라도 분명 네게 원인이 있다는 투였어. 거기다-- 너도 별로 놀라지 않는구나." "그럼 제가 맞선에 퇴짜맞고 울고불고 해야 되겠어요?" 그래 놓고는 내 방으로 올라와버렸지만 그런 이모 곁에서 말없이 나를 살피고 있는 엄마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아니나다를까, 심 기자가 뒤따라온 엄마에게 난데없이 동해안의 외가 얘기로 한참을 떠들고 돌아간 뒤 엄마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몹시 화가 났을 때 그 화를 억누르고 말하는 그녀의 특유의 목소리였다. "지금껏 이런 일로 따져 본 적은 없지만, 이번에는 나도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말해 다오. 도대체 왜 그 사람이 싫으냐?" 내막을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내 쪽에서 일을 틀어버렸다는 것쯤은 직감으로 알아차린 것 같다. 오랜 세월의 경험으로 엄마가 그렇게 나오면 더 버텨도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는 나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사람은 나와 결혼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위나 재산처럼 획득하고 소유하려는 것 뿐이에요. 그 사람은 결코 누구도 진실되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겨우 한 달 남짓 사이에, 그것도 잘해야 네댓 번 만나 놓고 어떻게 잘 알게 되었니?" "엄마는 그의 남달리 빠른 출세나 돈벌이에서 번득이는 타산을 보지 못하셨어요? 그의 모든 것이 인간적인 성실과 근면에서만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세요?"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장점이 되어도 흠이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너는 그 나이가 되어서도 결혼이라는 걸 달콤한 연애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만 적어도 타산과 타산이 만나 이뤄지는 거래는 아닐 거예요." "타산이라구?" "그래요. 그 사람은 아마도 자기가 이룰 것들에 어울리는 장식을 찾고 있고-- 제가 별 호감 없으면서 그와 거듭 만난 것도 퍼질러 앉기에는 괜찮은 마당 같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죠." "정말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그래, 그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니?" "이런 내 생각을 말해 주었을 뿐이에요." 그러나 엄마는 속지 않았다. "거짓말, 그 사람은 일이 될성부른데도 말 몇 마디에 호락호락 물러설 것 같지는 않았어. 바로 말해라." "그 말 뿐이에요." 그렇게 우기다간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 정에 호소해 보기로 했다. 엄마의 두 손을 꼭 잡고 상심한 표정을 과장하는 방식이었다. 철이 든 후에 몇 년에 한 번 정도 써 보았는데, 번번히 효과를 보았다는 기억이 저절로 떠오른 것이었다. "엄마, 엄마는 정말로 내가 장난으로 이런다고 생각하세요? 속으로는 비참한 기분이란 걸 그렇게도 모르세요?" 그렇게 말해 놓고 나니 정말로 원인 모를 설움 같은 것이 마음속에 희미하게 일어났다. 엄마도 갑작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도 즐겁지 않다는 걸 알아줘요." "제 눈 제가 찔러 우는데도 눈물 닦으며 달래 주랴?" "그러지 마세요, 이번 일은 잘된 거예요. 그 사람은 어쨌든 저와는 맞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럼 네 변덕에 맞는 사람은 어디 있니?" 입으로는 여전히 그렇게 말해도 엄마의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엄마가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이어 갔다. "걱정 마세요. 제가 언제 엄마 속 썩인 적 있어요? 공부하라고 하면 밤잠 안 자고 공부했고, 좋은 학교 가라고 하면 대충은 그대로 하지 않았어요? 두고 보세요. 정말로 좋은 사람 구해 올게요." 그렇게 한동안 더 달랜 뒤에야 엄마는 누그러져 내 방을 나갔다. 마음도 울적하니 심 기자의 외가가 있는 동해안 쪽으로 며칠 다녀오겠다는 내 청도 반승낙을 한 채 하지만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8월 19일 토요일. 어디서부터 지난 사흘을 얘기해야 될지 모르겠다. 이런 저런 일로 출발이 지연되어 16일 아침에야 차에 오른 심 기자와 나는 동해안에서 사흘을 보내고 네 시간쯤 전에 이 도시로 돌아왔다. 즐거웠는지 괴로웠는지 슬펐는지 기뻤는지 아직도 잘 가름이 가지 않는 사흘이다. 그러나 앞으로 내 삶에 있어서는 틀림없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될 예감이 들어 기억이 닿는 한 상세히 적어 두려 한다. 여행처럼 이해 못할 신비도 없다. 모든 여행을 우리는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떠나지만, 대개의 경우 그 목적은 길에 오르기 무섭게 여행 자체의 특별한 파토스에 밀려 원래의 의미를 잃고 만다. 낯선 곳으로의 길 위에선 외로움은 물론 슬픔조차 감미롭고, 두려움과 근심도 상쾌하게...... 바로 내가 그랬다. 간밤을 무겁고 어둡게 한 갖가지 상념들은 고속버스 위에 오르자마자 내 머리속을 떠났고, 포항까지의 여섯 시간을 나는 줄곧 알 수 없는 즐거움과 기대로 웃고 떠들었다. 멀리 보이는 일반도로변의 미루나무 가로수가 새로웠고, 축 늘어진 듯 비어 있는 한여름의 들판을 지나는 것도 사진에서 본 남불(南佛)의 전원지대나 지나는 것처럼 묘한 흥취를 자아냈다. 그동안 내가 그를 생각한 것은 거짓 없이 꼭 한번, 심 기자의 이런 악의 없는 핀잔을 들은 뒤였다. "정말 되게 좋아하시네. 언니, 정말 그분에게 흠뻑 빠지신 거 아녜요." 그러다가 포항에서 차를 갈아타면서 나는 차츰 그를 만나러 간다는 데에 야릇한 설렘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말한 해수욕장까지는 버스는 시간마다 있는데도 기분을 핑계로 만오천 원이나 하는 택시를 대절하자고 우긴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편지에는 가깝다고 했지만, 그의 산장이 있는 마을은 해수욕장에서 한 십 분 되는 거리였다. 도착한 것이 한창 뜨거운 낮 세 시경이라 우선 바닷물에 몸부터 식히고 해거름이 되거든 그곳을 찾자는 심 기자를 달래 가까스로 그 마을에 도착한 나는 처음 약간 실망이 되었다. 산장이란 말을 잘 몰라 '서울사람집'이라고 물은 뒤에야 마을사람들이 가리켜 준 곳은 마을에서 좀 벗어나 바닷가 야산 중턱의 평범한 단층 슬래브 집이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같은 데서 나오는 멋진 방갈로를 연상했던지 심 기자도 약간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점점 그 집에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실망은 줄어들었다. 멀리서는 집 둘레에 몇 그루 서 있는 것처럼 보이던 해송이 가까이서 보니 제법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고, 뜰은 울퉁불퉁한 바위를 그대로 두어 자연의 운치를 보존하고 있었다. 집도 외양을 화려하게 짖지 않았을 뿐, 전망 좋은 바다 쪽은 벽의 절벽을 넘는 창을 내어 최소한의 멋을 부리고 있었다. 혹시 하는 불안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다행히도 그는 있었다. 몇 번 소리치지 않아 문을 열고 나온 그의 얼굴은 방금 잠에서 깨어난 듯했다. 가벼운 낮잠이 아니라 간밤의 부족한 잠을 벌충했던 모양으로, 그렇게 부승부승한 얼굴은 서울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겠어요?" 얼른 정신이 들지 않는지 한동안 멍청하게 우리를 보고만 있던 그는 미술담당인 탓에 몇 번 안면이 있는 심 기자가 그렇게 인사를 한 뒤에야 까닭 없이 허둥대며 우리를 맞아들였다. 집 안은 타는 듯한 바깥과는 달리 시원했다. 간간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과 냉장고에서 꺼내 온 찬 음료로 어느 정도 땀이 식었을 무렵 그가 비로소 정색을 하며 물었다. "웬일이오? 연락도 없이......" "휴가가 한 주일 당겨졌어요." "나는 송 교수와 함께 올 줄 알았는데." 그런 그의 표정은 전혀 속마음을 읽기 어려운 애매한 것이었다. 나도 순간적으로 담담함을 가장하며 거짓말을 했다. "그는 바쁘대요." "대강 날은 잡았소?" "아직요. 좀더 겪어 보구요." 그때 심기자가 우리의 그런 엉뚱한 대화를 중단시켰다. "왜, 제가 와서 반갑지 않으세요? 저는 요 아래 민박을 정할 걸 그랬나 봐요." "아니, 아니. 그건 아니고 환영이오, 환영. 자, 이리 오시오. 쓰실 방을 보여 드리지." 거기서 그는 평소의 소탈한 웃음을 되찾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거실 오른편의 방문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이 집은 거실만 쓸모 없이 크고 방은 둘 뿐이오. 하나는 내가 쓰고 있으니, 불편하더라도 이 방을 둘이서 쓰시오. 침대는 하나 뿐이지만 벽장을 열면 두꺼운 스펀지 요가 몇 개 있을 거요." 양탄자가 깔린 넓고 깨끗한 방이었다. 침대 곁에 붙은 옷장에다 몇 가지 옷을 챙겨 넣으면서 나는 그 집주인의 기묘한 일면을 다시 한번 느꼈다. 가구 역시 집처럼 겉은 허술했지만 목재의 이상한 향기로 보아 상당한 고급임에 틀림없었다. 자신의 부를 드러내지 않아야 할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아니면 집주인의 특별한 성격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괴상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우리가 짐을 다 풀었을 무렵 다시 나타난 그는 마치 야영 나온 걸 스카우트 대장처럼 계속하여 샤워실, 주방, 화장실 등을 안내했다. 그런 뒤 그가 화실로 쓰고 있는 방을 궁금해 하는 심 기자의 말을 무시한 채 우리를 쫓아내며 말했다. "여긴 동해안이라 오후 여섯 시만 되면 바다에 들어갈 수 없어요. 해수욕을 하려면 지금 가야 한 시간 남짓이오. 빨리 다녀와요." 나는 별로 물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심 기자가 서둘러 나서는 바람에 함께 그곳을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우리의 등뒤에다 그가 다시 덧붙였다. "돌아올 때 시장을 좀 봐오시오. 마을 입구 선창에 가면 갓 잡아 온 생선을 파는 데가 있어요. 양념과 채소는 주방에 많이 있으니까 걱정할 것 없고." 그런데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해수욕장에 이르렀을 때였다. 심 기자가 느닷없이 탈의실 대신 비치 파라솔 아래 자리잡으며 말했다. "한 시간 가지고는 공연히 벗고 입기만 귀찮아요. 여기서 콜라나 한 병 마시고 돌아가요." "그런 걸 뭣 때문에 나서기는 나서니?" 내가 어이없이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짓궂은 눈길로 웃으며 대답했다. "왜 따라 나서길 나서요? 나는 두 분께서 정담이라도 나누시라고 자리를 피해 준 것 뿐인데, 눈치 없이 따라 나서 놓군......" "뭐?" 나는 그렇게 되물으며 웃으려다가 일부러 정색을 하면서 말해 주었다. "제발 부탁이야. 여기 있는 동안 그런 과잉 친절로 사람 어색하게 하지 마라." "아이 칙칙해." "글쎄. 나와 그분을 그렇게 보지 말래두 몇 번이나 말해야 되겠어?" "내가 칙칙하다고 말한 건요, 두 분의 관계 자체가 아니라, 너무들 노회하게 감추는 거예요." 심 기자는 아무래도 내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믿음의 근거라도 대듯 덧붙이는 것이었다. "오누이 같은 사이에 일년에 한 번 있는 휴가를 몽땅 바친다는 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나는 처음부터 좋은 들러리를 서 줄 생각이었는데, 너무 그러지 말아요." 하지만 그런 그녀도, 저녁식사 후 한동안 우리와 일상적인 얘기만 나누던 그가 가벼운 밤인사와 함께 열 시도 되기 전에 자기 화실로 가버리자 좀 이상한 모양이었다. "이건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네. 나까지 멍청해지는 거 아냐?" 인근의 불량배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그의 위협에 덧문까지 꼭꼭 잠그면서 그녀가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여행이 피로했던지 그녀는 전축의 판 하나가 끝나기도 전에 잠이 들었고, 나도 뒤따라 곧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심 기자가 여는 창문 소리에 눈을 떴다. 그녀는 어느새 간편한 차림으로 바꾸어 입고 있었다. 세수를 하러 나가는데 그의 방문에 흰 켄트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다. '깨우지 마시오. 식사 뒤에 해수욕장으로 가 계시면 일어나는대로 가겠소' 매직으로 쓴 그의 필적이었다. 그걸 본 심 기자는 또 툴툴거렸다. "아이, 재미 없어. 이건 뭐 무료민박이잖아. '화단(畵壇)의 기린아와 아름답고 지적인 여 기자의 로맨스' 같은 거나 하나 줍는 줄 알았더니." 그리고 토스트와 우유로 아침을 때운 뒤 해수욕장에 가서도 계속 그 소리였다. 듣고 보니 나도 내가 왜 그곳에 왔는지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 그곳으로 목적지를 정할 때의 그 많은 이유나 그를 만나면 하려고 별렀던 그 수많은 얘기들은 단 하나도 떠오르는 것 없이 그의 담담함만 섭섭해질 뿐이었다. "서울로 돌아갈래?" 새파래진 입술로 물이 찬 것을 불평하며 두 번째 사장으로 올라오는 심 기자에게 내가 그렇게 물은 것도 아마 그런 느낌에서 오는 어떤 무료함이나 공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뜻밖인지 놀라 물었다. "저 혼자 돌아가라구요?" "아니, 함께 가." 그러자 그녀는 더욱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저 갑자기 생각이 변했을 뿐이야." "뭣 땜에요?" "거기서 생각할 때는 여기가 즐거울 것 같았어. 민 선생님의 살가운 말씀 몇 마디만으로 충분히 올 가치가 있다고 믿었지. 그런데 와 놓고 보니 서로 부담만 되는 것 같애. 나도 할 얘기가 참 많았는데 갑자기 그만 없어졌어." 나는 거의 진심으로 말했다. 그녀도 그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어른스럽게 말했다. "그럼 더욱 가서는 안돼요. 뭔지는 모르지만 언니가 듣고 싶은 말이나, 하려고 했던 말이 모두 중요한 것일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이왕 온 것 날짜는 채우고 가요." "무모한 짓이야." "아니에요. 자, 물에나 들어가요. 이렇게 우두커니 앉았으니 더 처량한 생각이 들죠." 그리고 그녀는 억지로 나를 물 속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굳이 고집 부릴 이유도 없이 물 속으로 들어갔다. 찬 바닷물이 공연히 신경에 거슬렸다. 그가 나타난 것은 내가 우겨 산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해수욕장의 간이음식점에서 가볍게 점심을 때운 뒤였다. 날이 점점 뜨거워지면서 바닷물도 견딜 만해 튜브로 바다 위를 떠돌고 있는데 심 기자가 급하게 헤엄쳐 매달리더니 한 곳을 가리켰다. "언니, 저기--."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위험 표시인 부표 밖에 자그만한 목선 하나가 보였다. 낚싯대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은 틀림없이 그였다. 팔이 긴 무명옷에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우리를 찾고 있나 봐요. 저기서 두리번거린 지 한참 돼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는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 외쳤다. "민 선생님. 여기예요." 그러자 그도 우리를 보았는지 말없이 오라는 손짓만 해 보였다. "아무리 바빠도 천리길을 온 손님인데 그냥 버려둘 수 있어야지. 오늘, 내일은 쉬기로 했소. 낚시나 갑시다." 배에 오르는 우리에게 손을 빌려 주며 그가 말했다. 전날과는 달리 정감이 밴 목소리였다. 조그만한 발동선은 우리가 오르자 통통거리며 한 십 분쯤 대해로 나가 작은 돌섬 근처에 멈추었다. 그는 준비해 온 낚싯대를 하나씩 우리에게 나누어 주며 사용법을 일러주었다. 원체 조작이 간단한데다가 갯지렁이를 낚시에 끼우는 일은 배를 부리는 소년이 대신 해주어 우리는 거의 초보자의 불편을 느끼지 않고 낚시를 즐길 수 있었다. 도다리라고 불리는 가자미 같은 고기 외에는 하나도 이름을 알 수 없는 못생긴 고기들이었지만, 우리가 심심하지 않을 만큼은 걸려주었다. 그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후를 보내고, 입욕이 금지되는 여섯 시 무렵이 되었을 때는 여러 종류의 고기로 제법 아이스박스가 그득하였다. "저녁에는 소주 파티나 벌입시다. 횟감으로 장만하면 좋은 안주가 될 거요." 그가 원래의 자리에다 우리를 내려 주며 그렇게 말했다. 그 즐거웠던 오후 때문에 오전의 무료하고 공허한 느낌에서 완전히 벗어난 나는 은근한 기대로 밤을 기다렸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를 찾은 일은 하나의 결말에 이르리라는 불안과도 흡사한 기대였다. 그러나 그런 내 기대는 밤이 오고 제법 술이 올라와도 빗나가기만 했다. 그는 전처럼 유쾌하고 재치있는 담화가로 돌아갔지만, 그 내용은 어디까지나 사교적이고 의례적인 범위를 넘지 않았다. 그것도 주로 심 기자를 상대로 한. 그러다 보니 한번 이야기가 사적(私的)이고 진지한 분위기로 돌아갔지만 결국은 미술담당 기자와 화가의 대담같이 되어버렸다. "무엇 때문에 그림을 택하시게 되었어요?" 무슨 얘기 끝엔가 심 기자가 그렇게 묻자 그는 사람 좋아 뵈는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그런 질문에는 내게 두 가지 대답이 준비돼 있소. 하나는 공적인 기록에 남을 인터뷰 때의 대답이고 하나는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한 사적 토로요. 어느 쪽을 원하시오?" "지금은 휴가 중이에요. 녹음기도 없고 적고 있지도 않으니까 물론 사적인 토로지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잠깐 어색한 듯 머뭇거리더니 웃음을 거두고 대답했다. "실은 그것이 요즈음의 내게는 가장 무거운 고민거리요. 그 말을 바꾸면 회화의 목적, 의의, 가치 또는 작가의식까지 포괄하여 묻는 것이 될 거요.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답도 수십 가지로 나와 있소. 다시 말해서 갖가지 이론서의 앞부분은 언제나 그 문제에 할애되어 있는 거요. 하지만 개인적인 진실을 묻는다면 나도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소. 나는 능동적으로 화가가 '된'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되어져 버린' 것이기 때문이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언제 이 길을 내 삶의 목표로 택했는지 기억할 수가 없소. 다만 어느 날엔가 문득 보니 내가 '되어져' 가고 있었소. 성공하지도 못할 도망을 시도했다가 공연히 정규의 수업과정만 망쳐버리고 뒤늦게야 다시 이 길로 끌려 오고 만 거요." "그럼 결국 이렇게 태어나셨다는 말씀인가요?" "그런 것 같지는 않소. 가만히 돌이켜보면, '피나는'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엄격한 자기 수업의 시기가 소년기의 끝부분에서 청년기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어요. 태어난다는 것은 천부적인 재능을 말하는 것일 터인데,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내가 불리한 편이었던 거나 아닌지 모르겠소." "그럼, 무엇 때문에 그처럼 고된 수업을 하셨어요?" "글쎄, 바로 그걸 모르겠단 말이오. 물론 그때 그때 피상적인 이유들은 있었을 것이오. 예컨대 어느 위대한 화가에게서 받은 감명이라든가, 명성이라는 정신적 허영 같은 것...... 그러나...... 진정으로 '그것을 위하여'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오." "이건 정말 처음 듣는 얘기예요. 그럼 민 선생님은 작가의식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으세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작가의식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대개 미술하는 행위의 동기 또는 창작의 원동력과 결부시켜 생각해요. 물론 그 경우에 역시 모른다는 것뿐이오. 내게 있어서 미술하는 어떤 본능적인 것, 굳이 이름 붙이라면 기괴한 리비도의 일부 같은 것이오. 그것은 결코 이성적일 수 없고, 따라서 논리적인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하오. 오히려 내게도 정의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반의식이오. 예술에의 본능적인 충동, 그 기괴한 리비도의 광기를 억제하는 반의식인 거요." "구체적으로 어떤 거예요?" "죄의식과 부끄러움-- 내가 쓰잘데없는 일에 나의 삶과 동료들이 생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죄의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끄럼이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림을 선생님께서 처음 시작한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수천 년 그런 예술 양식이 승인되고 유지되어 왔잖아요? 그런데 선생님 같은 분이 그런 생각을 하시다니......" "물론 편의적인 해결로는 그런 말이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과거가 그랬다 해도 가치 승인의 문제는 언제나 각자 앞에 새로운 것이오......" 나는 그런 그의 진실을 알고 있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그에게로 끊임없이 끌어당기고 있는 힘 가운데는 바로 그런 진실 때문에 끝내는 허망이고 비극일 수밖에 없으리라는 자각 때문에 더욱 짙어지는 주제넘은 연민. 그러나 그런 진실은 내가 천리길을 달려와 그에게서 찾고자 하는 진실이 아니었다. 내가 찾고 있는 진실은 이 땅의 유한과 함께하고 우리의 피와 살에 잇닿은 진실이다. 그 바람에, 한번 터져 나오자 끊임없이 계속되는 그런 종류에 앞뒤 없는 짜증이 난 나는 끝내 선하품과 함께 몸을 일으켜 그들의 대화를 훼방놓고 말았다. "아이, 졸려. 그럼 그만 자요. 아니면 두 분만 더 얘기하시든지." 셋째날. 간밤에 과음을 한 탓인지 그는 또 늦잠이었다. 조금씩은 속이 쓰려 야채와 남은 생선으로 해장국 비슷한 걸 끓여 먹고 바다에 나가는 대신 해송 그늘에 자리를 잡고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몸이 개운치 못해 바닷물에 들어갈 생각이 없어진데다, 그가 일어나면 해장국이라도 데워 주려는 생각에서였다. "언니 애인, 정말 괜찮은데." 나무 그늘에 비치 가운을 깔고 자리를 잡기 바쁘게 심이 그렇게 말했다. "또 그놈의 애인이니?" "그럼 아니란 말이우?" 그러다가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긴 그래. 아무리 내가 있다지만 어찌 그렇게 철저할 수 있어?" "이젠 뭐 좀 아는구나." "그렇지만 왜 애인삼지 않아요? 정말 괜찮은데." "뭐가 그리 괜찮니? 서른일곱씩이나 먹어 가지고 다 늙어가는 남자를......" "아냐, 젊어요. 서울 거리에 그 쌔고 쌘 이십대 애늙은이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거기다 기혼자를......" "그게 무슨 상관이우? 좋으면 됐지." "심 기자,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래요, 참 언니두...... 내 얘기 하나 할게요. 우리 모교의 학생과 장인 H여사 있죠?" 그 여자라면 나도 알고 있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아 온 재원이었지만, 얼마 전에 작고한 전직장관 K모와 내연 관계로만 일생을 보낸 여자였다. 그것도 첩까지 따로 있는 내연관계여서 젊었을 때는 화제나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나 끝까지 꿋꿋하게 배겨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분이 최근 동창회에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아세요? 자기는 자기의 삶에 후회가 없다고 했어요. 그 말썽 많았던 사랑까지도 말이에요. 그리고 다시 태어나도 그런 남자를 만나면 또 그렇게 사랑하리라고 했어요. 그것도 공적인 자리에서." "그럴 나이도 아닌데 노망한 모양이구나."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얘기를 들어 보고는 우리 모두 수긍을 했어요" "그게 무슨 얘긴데?" "자신의 법적 지위야 어떠하건 결국 가장 사랑받은 것은 자신이었다는 거예요. 죽은 그분은 자기 집에서 가장 오래 지냈고 임종도 거기서였다는군요. 남녀 사이에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인데 자신은 그걸 믿기 때문에 후회 없다는 주장이었어요." "참 용한 주장도 있구나." "그러지 말고 솔직해 보세요." "하지만 이쪽은 장관도 박사도 아니다." 나는 그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 짐짓 그렇게 말해 보았다. "결국 그에 못지않는 예술가예요. 잘은 모르지만 그에게서 광기와도 흡사한 치열함과 번득임이 있어요. 거기다가 어떤 순수함-- 아니 그 이상 도저히 때묻을 수 없음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요." "너야말로 정말 하룻밤새 반해도 단단히 반했구나." "하두 답답해서 그래요. 내 눈앞에는 이미 명백한데......" 그러나 우리의 대화는 갑자기 거기서 끊어졌다. 그가 일어나 창문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우리의 대화를 듣지나 않았을까 싶어 얼른 창문과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으나 다행히 그런 염려는 않아도 좋을 만한 거리였다. 전날의 약속에 충실하게 그날도 그는 온통 우리를 위해 하루를 바쳤다. 오전에는 그곳에서 오 리쯤 떨어진 내수면에서 그물로 은어를 잡았고 오후에는 다시 배와 머구리라고 불리는 잠수부 한 사람을 빌려 해삼과 전복 약간, 그리고 새끼 문어 한 마리를 건져올렸다. 그러나 재미있어 하는 심 기자와는 달리, 무언가 해야 할 일을 아직 전혀 손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까닭 없이 다급해 있던 내게는 그 오후에 대해 그 밖에 특히 기록할 만한 이렇다 할 기억이 없다. 밤이 와도 전날과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내일부터는 또다시 끼니 때마다 해수욕장까지 내려가 간이식당 신세를 지거나 구차하게 자취를 해야 하는 신세군. 해장국 얻어 먹을 수 있을 때 술이나 한번 더 마셔 두어야지." 그가 그렇게 제안한 술자리는 거의 열한 시가 넘도록 지루하게-- 적어도 내게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열심히 지껄이던 심 기자도 그날은 드디어 나의 기분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거실에 있는 벽시계가 열한 시를 알리기 무섭게 서둘러 몇 잔을 비우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언니, 나 취했나 봐. 일찍 가 잘게." 그렇게 말하면서 방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비틀거림에는 어딘가 과장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럼, 희원이도 들어가 자지." 둘이 남게 되자 갑자기 술에서 깬 듯한 그가 덤덤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된 나는 소리치듯 그를 제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거의 앞뒤 없이 재빠르게 말했다. "나 송(宋) 그 사람하고 결혼 안해요." "그래? 그건 왜?" 그가 흠짓하며 물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놀란 것 같은 눈치는 아니었다. "그 사람의 말을 통 않길래 짐작은 했지. 그런데 왜?" "몰라서 물으세요?" "모르겠군. 요즘 세상에 흔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는데......" "비겁해요." 나는 갑자기 그런 그가 밉살스러워져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렇게도 제가 부담스러우세요? 그렇게 아무데로나 치워버리고 싶으세요?"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그 사람은 여러 모로 유능한 사람이었어." "남의 뒷조사나 하고, 선생님을 찾아가 그렇게 뻔뻔스런 수작을 해두요?" "그건 지혜와 용기일 수도 있어. 혹은 솔직함일 수도." 그는 약간 난처해 하면서 그렇게 얼버무렸다. 그러나 나는 그게 더욱 화가 났다. "비겁해요. 그런데도 그렇게 부담스런 나를 무엇 때문에 자꾸 만나시죠?" "그걸 새삼 말해야 하나?" "누이같이 여기신다는 거죠?" "그래, 희원이는 내 누이동생이야." "하지만 실은 저를 안고 싶으시죠?" "아니야. 잘못 봤어." 거기서 갑자기 그의 어조가 강해졌다. 나를 쳐다보는 두 눈도 이상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반응이 섬뜩했지만 이왕 내친 김이었다. "위선이에요. 좀 솔직해 보세요. 저도 탐이 나고, 지켜야 할 것은 많고-- 그래서 어정쩡하게 타협한 것이 선생님의 누이죠?" "말을 함부로 하는군." 그러나 그런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미 분노가 아니라 고통이었다. 그 고통의 변형된 신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도 뭐도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제가 거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선생님의 뒤틀리고 비꼬인 이기(利己) 뿐이에요." 나는 상처받은 짐승의 심장에 마지막 창날을 찔러 넣는 사냥꾼처럼 그 말까지 다 뱉은 후에야 입을 다물고 그를 살폈다. 어느새 완전히 술기운이 가신 그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푸른 기운까지 도는 듯했다. 금세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 같은 그 표정에 나는 비로소 은근히 겁이 났다. 그러나 그는 생각보다 쉽게 진정됐다. "이기라구......"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는 조용히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더니 말없이 화실로 쓰는 자기 방의 문을 열었다. 어지러운 방안에는 대여섯 폭의 크고 작은 그림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걸 봐라. 지난 석 달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나는 여기 매달렸다. 왜 그런지 아니?" 나는 이상한 감동에 사로잡혀 그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내 눈에도 전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작품들이었다. 대담하고 강렬한 선과 색이 고전적인 전통을 중시하는 그의 세계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그림들이 나를 파리로 불러 주기를 바라고 있다. 전번처럼 후진국의 작가에게 베푸는 은전의 의미가 포함되지 않은 전시회를 통해 당당한 부름을 받고 싶다." "......" "그러나 이것은 내 예술적인 야심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다만 이곳을 떠나고 싶다. 이 땅에서는 비극적인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는 불행한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뿐이다. 정말 비겁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비극적인 결말에 대한 두려움은 반드시 나를 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내가 아니면 충분히 그 결말을 피해 갈 수 있는 상대방을 위해서다. 따라서 비겁일지언정 이기는 아니야......" 그러더니 갑자기 나를 한번 꼭 안아 주며 달래듯 말했다. "알겠니? 그러니 너도 멀리 달아나거라. 될 수 있으면 멀리. 이번에 내가 네게 편지를 낸 것은 실수였다. 나는 그 사람이 하도 치밀하고 대담하길래 반드시 너를 사로잡을 줄 알았지.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보고 싶다는 뜻이었는데...... 하지만 이것도 마지막으로는 나쁘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이제 멀리 달아나거라. 될 수 있는대로 멀리." 그런데 정말로 이상한 것은 나였다. 마음속으로는 수많은 말들이 부글거리고 있음에도, 나는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내 방으로 돌아가 또한 그의 지시대로 곧 잠이 들고 만 것이었다. 이튿날 우리가 눈을 뜨니 그의 방에는 이런 말이 쓰여진 켄트지가 붙어 있었다. '깨우지 마시오. 그리고, 잘들 가시오. 덕분에 즐거웠소.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납시다.' 8월 31일 목요일. 벌써 여름이 다해 간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보낸 열흘이다. 어떤 사물의 의미는 필요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명확해짐을 나는 믿는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여름이 쓸쓸했다는 것뿐. 3. 타오르는 계절 하도 많은 돌들로 우리의 발은 이렇게 상처가 났어요. 한 분만이 고쳐 줄 수 있죠. 그분과 함께 우리는 자기 나라로 가는 열쇠를 입에 물고, 어린이의 왕이 우리를 데려갈 때까지. 뛰어요, 노래하면서 '대추야자 싹트면 아름다운 시절. 추락하는 이는 모두 날개를 갖는다......' --잉게보르크 바흐만 '유희는 끝났다'에서 9월 2일 토요일 아직은 한낮이 찌는 더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오늘 그에게서 뜻밖의 편지가 왔다. 아무것도 정리하거나 규정하지 않은 채, 또 지난날을 되돌아보지도 않고 앞날에 대한 예측도 삼가면서, 거의 방심한 상태로 며칠을 보낸 내게는 글자 그대로 통렬한 충격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런 상태에서도 내심으로는 은근히 이 같은 뜻밖의 변화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편지가 더욱 충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이 편지를 받고 보니 혼란과 당혹으로 자극받아 일시에 들고일어서는 바람에 처음 한동안은 정신이 멍했다. 그래, 정말 이건 혼란과 당혹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어. 기쁨 하나만이라도 그것이 뜻밖이고 지나치면 혼란과 당혹 이상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거기에 똑같은 크기의 쓰라림과 감미로움, 승리감과 불쾌, 불길함과 기대가 뒤죽박죽 되어 있으니...... 우선은 그 편지를 여기에 옮기면서 다시 한번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차근차근 음미해 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더 이상 나를 속이고 당신을 속이는 것은 그만두겠소. 우리는 애초에 자유롭게 태어났고, 모든 것은 용서되어 있음을 믿고 싶소. 사랑하오. 진실로 당신을 사랑하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욱. -1980년 8월 25일, 민- 추신 : 오늘에야 이 편지를 띄울 결단을 내렸소. 이 결단을 내린 이상 이곳 생활은 무의미하오. 곧 당신이 있는 그 도시로 돌아갈 것이오. -1980년 8월 30일, 민- 재추신: 지금 우체국이 있는 면 소재지에 나와 있소. 짐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이 길로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다는 기분이 들어 다시 봉투를 갈고 몇 자 덧붙이오. -1980년 9월 1일, 민- 9월 6일 수요일. 나도 이제는 좀더 솔직해져야겠다. 일기라는 글의 형식이 은연 중에 남이 읽게 되리라는 가정 아래 쓰는 탓이겠지만, 지금까지(그를 만난 날부터)의 일기를 훑어보니 그에 관한 얘기의 너무도 많은 부분이 왜곡되거나 은폐되어 있다. 예를 들어, 그의 매력 같은 것은 의도적으로 무시되어 있고 부득이한 경우만 남의 입을 빌리거나 대수롭지 않은 듯이 묘사되어 있다. 세상 일에 닳고 닳은, 나이 든 여자의 소심함으로 보아 주기에는 너무도 영악스럽다. 그토록 내심을 드러내는 것이 싫다면 아예 이런 글을 쓰지 않거나, 아니면 차라리 자신의 정숙함과 도덕적임을 효과적으로 선전하는 게시판으로만 사용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정작하자. 정히 이 기록들이 뒷날의 내 삶에 위해(危害)를 가하게 될 우려가 있으면, 그때에 가서 태워버리더라도 우선은 정직하자. 최소한 나 자신에게만이라도, 그리하여 이미 다른 사람들의 충고나 중재의 여지가 없어진 그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만이라도 내 감정이 비뚤어지거나 뒤틀리는 일이 없게 하자. 이제까지 숨김없이 하는 말이지만, 내가 그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사 년 전의 그 학교시절이라는 편이 옳을 것 같다. 그때 내가 그에게 본 것은 그의 삶을 뒤덮고 있는 어둠에 가려진 어떤 결정이었다. 근거 없고 약간 엉뚱스럽기 해도, 나는 그때 다른 동료들이 한결같이 경멸하거나 비웃던 그의 빈곤과 무명에서, 그리고 얼른 이해할 수 없는 언행과 생활방식에서, 이른바 예술혼이라고 불리는 어떤 치열함이 내비치고 있음을 느꼈었다. 만약 자신의 표현대로 그 '마지막 싸움'에 몰두해 있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일체의 사물이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 연관되어서만 파악되지 않고, 나에게 어떤 예외적인 배려와 호의를 표명했더라면, 그때 우리는 이미 상당히 가까워졌을 것이다. 갓 대학을 졸업한 시인 지망의 젊은 여교사에게 흔히 발견될 수 있을 법한 지나친 예술 취향이나 순진한 호기심 탓으로 돌릴 수 없을 만큼 그의 어두운 열정이 뿜는 빛은 눈부신 데가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 말한대로, 자기 일에 골몰해 있는 그에게 당시의 나는 기껏해야 한번 그려 보고 싶은 대상물 정도였고, 그 나머지는 잠시 자기의 생활을 의탁한 직장의 어린 동료였을 뿐이었다. 나는 거기에 발끈하여 곧 그에 대한 호의와 관심을 철회해 버렸던 것인데, 거기 관한 것은 언젠가의 일기에서 이미 얘기한 바 있다. 그 뒤 형식적인 화해를 하고 우리는 각기 자기의 새로운 길을 떠났던 것이지만 그런 그의 인상은 생각보다 깊게 가슴에 남아 있었다. 다만 이 봄 다시 만날 때까지의 삼 년 간 그가 내 의식 표면으로 떠오른 적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에 관한 기억은 일종의 잠재의식으로 의식 깊이 가라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내 기억을 의식 표면으로 끌어올린 것은 그 뒤의 내 무미건조한 생활과 그의 예술적인 성공이었을 것이다. 내 무미건조한 생활이란 특히 삭막함 또는 거듭된 실패라고 말할 수 있는 이성교제와 연관이 있다. 쉽게 애착하고 쉽게 열광하지 못한다는 성격상의 결함이야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남자에 대해 지나친 욕심을 부리거나 까다롭게 군 적은 없는데도, 이상하리만치 나의 이성교제는 원만하지 못했다. 만약 그동안 단 석 달이라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게 해주는 남자가 하나만 있었더라면 그는 아마 영원히 내 잠재의식을 벗어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그의 예술적인 성공도 그렇다. 그 어느 때보다 유난스러웠던 매스컴의 갈채가 끊임없이 그의 존재를 상기시켰다는 점도 있지만, 사실 나는 그때마다 같이 감탄하기보다는 그런 그를 일찍부터 알아본 자신의 예견력 또는 통찰력에 스스로 만족하곤 했다. 그리고 허영심에 가까운 그 만족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의식의 밑바닥을 무슨 음울한 유령처럼 떠도는 그에 대한 묘한 애정을 길러 주었다. 그것도 무슨 권리와도 같은 애정을. 그 다음 지난날의 그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예감이다. 나는 지금 그와 첫 대면하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새로 오신 이희원 선생님이십니다......." 라는 교감선생님의 소개가 막 끝나던 순간 나는 교무실 한 모퉁이에서 심장을 깊숙이 찔러 오는 듯한 두 줄기 빛을 느꼈다. 사십 명이 넘는 교직원 틈에 끼여 있는 그의 두 눈에서 쏟아진 빛이었는데 놀란 내가 마주보았을 때는 어느새 자취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러나 그순간 나는 끔찍한 신탁(神託)과도 같은 예감에 젖어들었다. '저 빛과 내 삶은 반드시 어떤 연관을 가지리라.......' 결코 일이 이렇게 되어 지어낸 것은 아닌 생생한 내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일년 뒤 그와 아무런 일 없이 헤어질 때조차도 내가 담담하게 중얼거릴 수 있게 했다. '또 만나게 될 거야. 이대로 영영 헤어질 사람은 아닌걸.' 어쩌면 이 봄 다시 만난 뒤의 원인 모를 익숙함도 그런 기분의 연장일 수 있으리라. 그러나 사실 지금껏 말한 이런 것들만으로는 나이 들 만큼 든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할 만한 충분한 동기는 되지 못한다. 기혼이라는, 법과 윤리의 면에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남자를 맹목적인 성의 얽힘이나 자포자기적 타락, 또는 부득이한 현실적인 목적 없이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좀더 구체적이고 강렬한 이유들이 있어야 한다. 내가 다시 그를 만난 뒤에 새롭게 발견한 그의 미덕 가운데 몇몇은 이미 앞서 몇 군데서 말했다. 어떤 것은 슬쩍 지나가듯이, 어떤 것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또 어떤 것은 그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도움이 되는 형태로 표현된 것은 모두가 그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결함을 잊게 해주는 미덕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그에게로 끌어 가는 것은 이해와 소통이다. 그는 언젠가 말했다. "나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에 깊이 천착해 본 적은 없지만, 그가 남긴 짧은 한마디로 그 낙관주의의 한계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하오. 바로 '단자(單子)간에는 창(窓)이 없다.'는 말이오. 나는 그 단자가 우리 존재에 비유한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소. 그리하여 그것들의 조화에 대한 여러 가지 낙관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기서 우리 존재의 숙명-- 절대적 고독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느낌이오. 창이 없는 조화-- 서로 열려져 있지 않고 서로 통할 수 없는 단자간의 조화란 신을 위한 객관적인 조화 이상의 그 무엇이겠소? 알맹이의 주고받음이 없는 껍질만의 조화란 단자 쪽의 주관으로 보면 얼마나 철저한 외로움이겠소? 그런데도 그 비유는 우리 존재에 적절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소. 우리는 연인, 부부, 친구, 혈연 또는 이념의 동지 같은 이름으로 종종 두 개의 존재가 하나로 결합했다는 표현을 하고 있소. 하지만 결국 그것은 일시적인 착각이나 우리들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지어 낸 미신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되오. 우리가 그 어떤 이름으로든 다른 사람과 가장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다고 믿는 순간에조차도 존재의 창은 굳게 닫혀 있는 것이오. 우리는 언제나 혼자이며, 기껏 우리가 연출할 수 있는 것은 공허한 객관적 조화 뿐이오. 우리가 타고난 절대의 고독과는 거의 무관한...... 그리고-- 이런 면에서 라이프니츠의 그 말은 우주에 대한 낙관적인 이해를 요약한 것이라기보다 비극적인 우리 존재의 진실을 지적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오......" 그러나 그런 그의 비관적인 말과는 달리 내가 언제나 그에게서 기뻐하는 것은 거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이해와 따뜻한 소통이다. 나중에 돌아와서 생각하거나 글로 정리해 보면 상당히 어려운 내용의 이야기도 그의 입을 통해 들으면 거의 단 한번의 반문도 필요 없이 알아들을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그의 표정 하나, 조그만 억양의 변화에도 그의 마음속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는 그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는 말은 물론이고, 말 이외의 것으로 내 마음을 읽을 줄 아는 것은 그가 오히려 나를 넘어선다. 이미 이 일기에서도 몇 번인가 감탄한 적이 있지만 나에 관한 그 관찰력과 예견력은 너무도 정확한 것이어서 때로는 너무 쉽게 속마음을 읽혀 버린 것이 은근히 분할 때도 있다. "혹시 그거 자기 최면 같은 거 아니니? 이를테면 말이다. 사실은 별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모든 걸 이해했다고 믿는다거나...... 하는 것은 그의 예측이 틀렸음에도 그게 맞는 것처럼 느껴진다거나...... 하지만 그건 철부지 연애시절이나 있는 일인데, 그게 그 사람에 느껴지다니 이상하기는 이상하구나. 언젠가 내가 무심코 그 얘기를 했을 때 손 언니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지난날에도 여러 이름으로 그 못지않은 가까움을 느끼며 사귄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이 같은 경험은 처음이다. 또 지금은 내게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많은 가까운 사람들이 있지만 그와 함께일 때처럼 손쉬운 이해와 소통을 느낄 수는 없다. 더구나 그런 이해와 소통이 내가 홀로가 아니라는 느낌,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안도를 주는 경우는 더욱. 밤이 깊었다. 원래는 그에 대한 나의 감정분석을 이 밤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끝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내일도 해는 뜰 거니까 이만 자야겠다. 사실 오늘은 피로한 하루였다. 9월 7일 목요일. 그가 왔다. 지난 며칠의 혼란과 그 혼란을 잠재우기 위한 긴장이 어이없을 정도로 그의 나타남은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우선 첫 전화부터가 그랬다. "오늘 돌아왔소. 이리로 나오겠소?" 그렇게 묻는 그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떨리는 듯해도 어색하거나 움츠러든 억양은 없었다. 그 바람에 나는 조금도 부담을 느끼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야죠. 어디에요?" 전화기를 놓고 나는 그저께 그로부터 받은, 내게는 한 심각한 사건일 수도 있는 편지에 내가 의사표시를 대신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선 반가운 데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를 만나서도 그랬다. 그가 두 달이 가깝도록 이 도시를 떠나 있었다는 것이나 그 떠남에 관련된 성가시고 불쾌한 기억들은 꼭 거짓말처럼 내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바닷가에서의 사흘도 무슨 즐거운 야유회날로만 떠오르고, 그와 나 사이에 주고받은 말이나 그저께의 편지까지도 섬뜩하지만 이제는 그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은 옛일처럼 여겨졌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과 그가 돌아왔다는 데 대한 결과와 상관없이 무턱댄 기쁨이 그와 마주앉은 나를 지배하는 감정의 전부였다. 그도 대체로는 나와 비슷한 기분인 것 같았다. 처음 잠깐 굳어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의 얼굴은 곧 특유의 소년적인 얼굴로 환하게 펴지며 두 달 전으로 돌아갔다. 이야기도 그동안의 작품 성과에 관한 것, 자신의 예술론을 수정할 필요성, 프랑스 쪽과의 접촉과 그 밝은 전망 같은 것들이었고, 바닷가에서의 사흘은 즐거운 것만 몇 가지 골라서 회상했을 뿐이었다. 그런 저런 얘기를 듣고 있다가 지난 며칠의 혼란과 당혹이 은근히 분해진 내가, "뭐예요? 그 따위 여드름도 덜 벗어진 고등학생 같은 편지나 하고." 하며 핀잔 비슷하게 그 편지 얘기를 꺼내고, 그는 능청스레 웃을 뿐이었다. "아니면 그만이고, 들키면 장난이지 뭐." 하지만 그는 끝까지 이번에는 자신이 주도한 우리들 사이의 변화에 초연하지는 못했다. 집에 바쁜 일이 있어 한 시간쯤 있다가 일어서는 나를 따라 나오면서 그가 문득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몰라도 스스로를 믿고 출발해 보는 것이오. 하지만 한 가지-- 이성과 자제는 이제 나 홀로만의 몫이 아니오." 9월 8일 금요일. 그게 무슨 뜻일까? 우리는 무엇을 향해 출발한 것일까? 이성과 자제가 그만의 몫이 아니라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 무엇을 향해 출발한다는 것은 미래가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와의 일에 관한 한 미래를 넣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현재로만 있고 싶다. 미래는 또 그때의 현재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이성과 절제-- 이건 또 얼마나 낡고 낯선 말인가? 누구에게도 명백히 무모한 우리의 출발에 그 말이 무슨 소용에 닿는가? 그런 말을 새삼 상기시켜 모처럼의 의기를 소침하게 만들 필요는 어디에 있는가? 사랑(또는 성)을 자동차의 운전에 비유한 사라 러딕의 말은 옳다. 자동차에 오르기 전에 우리는 여러 법규들의 정당함이나 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번 운전석에 오르고 보면 우리는 어린애 같은 흥분과 쾌감에 모든 것을 종종 잊어버린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빠지기 전에 우리는 부도덕한 사랑의 위험을 잘 알고, 그로 인해 우리 삶에 가해질 위해를 피하려는 결의에 차 있다. 그러나 한번 사랑에 빠져버리면 우리는 이내 비정한 쾌감과 잔인한 이기에 휘몰려 그 모든 걸 잊게 되고 마는 것이다. 9월 9일 토요일. 칠팔월에 걸친 휴가로 밀렸던 일에서 한숨을 돌린 탓에 여럿이 구내 다실로 갔다가 우연히 미스터 박과 둘이 처지게 되었을 때였다. 박이 며칠 전부터 별러 왔다는 투로 이제는 약간 안된 기분이 드는 견우 씨 얘기를 꺼냈다. "송 선배하고의 일, 안되셨더군요." "그래요, 딱질 맞았어요." 그의 얘기라면 나타날 때의 요란스러움에 비해 뒤끝이 하도 조용해 나 쪽에서도 약간의 궁금함이 있었다. 물어도 좋을 판에 마침 박이 물어 와 주니 잘됐다는 기분으로 나는 그렇게 대답해 주었다. "짐작은 했지만...... 역시 민 화백?" "그런 셈이예요. 별거 별거 다 일러바쳤더군요." 나는 짐짓 그렇게 비아냥거려 보았다. 그러나 박은 전처럼 발끈하는 대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 선배 집요한데...... 한번 마음먹은 일은 좀체 단념하지 않는데......" "결벽이 심한 모양이죠, 뭐." "결벽이라구요? 모르긴 하지만 정말로 민 화백과 이 기자 사이에 무슨 깊은 관계가 있다 해도, 나에게 보인 그 선배의 열성으로 보아서는 그 일에 개의치 않고 자기 뜻을 이루려 들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나가떨어지다니?" "민 선생님과 내가 대단찮은 관계라는 건 어떻게 아세요? '처자 있는 남자와의 사랑'-- 뭐, 그런 걸 특집으로 하자며 우리를 빗대 말한 게 언젠데......" 나는 그가 이전의 칙칙한 의심을 푼 것이 반가우면서도 이상해서 물었다. "다 들은 데가 있죠. 그런데 정말 어떻게 하셨어요? 어떻게 그 빈틈없는 선배를 간단히 단념시켰죠?" "듣기는 뭘 들어요?" 나는 그렇게 묻다가 퍼뜩 심 기자를 떠올렸다. 그에 관한 박의 칙칙한 의심을 풀어 준 것은 감격하기 잘하는 그녀의 과장 탓임에 틀림없었다. "심 기자에게 들었군요?" "너무 야단치지 마세요. 무얼 좀 아는 눈치길래 다그쳤더니 그 바닷가 별장 얘기를 하더군요." "그럼 그 얘기도 알량한 선배한테 다 일러바쳤어요?" "그건 아닙니다. 이 기자의 진심을 알고 난 뒤에 말하려고......" "이젠 좀 철이 드시는군요." "그런데 하나 물읍시다. 왜 그 선배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죠? 내 생각엔 요즘 세상에 그만한 사람도 흔지 않은데......" 그런 미스터 박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도 더 이상은 농담으로 해서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정색을 했다. "미스터 박은 학자와 시인과 교수와 교회의 장로와 투기꾼의 혼합으로 된 인간을 상상할 수 있으세요?" "그렇게 나쁘게만 보시니까 그렇지, 그 중의 한 두개의 능란한 처세가란 설명만 붙이면 안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나는 오히려 그런 그 선배의 능력이 부러운데......" "그럼 조그만 허점도 없는 인간, 한번 마음먹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고야 마는 그런 사람과 일생을 함께 보낸다는 게 끔찍하다고 느껴지지 않으세요?" "마찬가집니다. 그것 역시 능력의 일부로 생각하면 안됩니까?" "그러니까 미스터 박이 제 마음에 들었다 안 들었다 하죠." 거기서 나는 목소리를 풀었다. 박도 남의 일에 열 올리기는 싱겁다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나이가 되어서도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다니 기특하고도 뜻밖입니다. 이해가 오락가락해요." 그러더니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덧붙였다. "하지만 이해하도록 해 보죠. 굳이 원하지 않으신다면, 송 선배에게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겠습니다." 근래 들어 드물게 마음에 드는 말을 해주는 박이었다. 그러나 끝내 석연치 못해 하는 그의 표정을 보자 나는 왠지 쓸쓸함과 함께 왈칵 두려움이 일었다. 이 아이들, 함께 놀던 이 아이들과는 어쩌다가 이렇게 멀어졌을까. 9월 12일 화요일 성(性)에 대한 공적(公的)인 해석과 그 시대의 관행 사이에는 언제나 약간의 편차가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성이란 것이 윤리나 도덕 같은 사회적 신념과 아무런 연관 없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시대에도 간통이나 근친상간의 금지 같은 기본적인 것은 관행으로 지켜졌으며, 반대로 법과 도덕이 정비된 아시아의 전통 사회에서도 현대의 서구사회와 다름없는 개방의 관행이 종종 확인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의 성에 대한 공적인 해석과 관행 사이는 어떤 것일까. 편차가 있다면 어느 정도이며 어떤 종류일까. 먼저 성에 대한 이 사회의 공적인 해석을 보면 그런 것이 없다고 할 만큼 다양하다. 물론 법은 간통 쌍벌과 족외혼(또는 동성동본 결혼 금지)에다 공연음란(公然淫亂) 등의 규정으로 성에 대해 엄격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배우자가 없는 사람도 상대방이 배우자가 있다는 이유로 간통죄의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을 엄격히 말하면 단순한 사통(私通)의 확대해석 또는 신분(身分-법적) 전가(轉稼)이며, 동성동본 결혼금지는 근친상간 금지의 지나친 확대해석이고, 공연음란을 비롯한 이른바 풍기사범에 관한 규정은 오늘날 젊은 세대의 관행 대부분을 단죄할 수 있는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거기다가 기성세대의 성에 대한 해석은 법보다 한층 완고하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대단찮은 스캔들로 저명한 정치가의 정치생명이 끝나고, 고위관료가 공직에서 추방되며 학자가 강단을 물러나야 한다. 어제까지 인기를 누리던 탤런트가 브라운관에서 사라지고, 가수는 은퇴를 강요당한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일에 대한 공적인 해석은 법과 기성세대에만 맡겨져 있지는 않다. 바로 그 법에 의지하고 기성세대에 의해 주도되어 있지만 대개는 그것들에 구속받지 않고 영향력에 있어서는 훨씬 큰 힘을 발휘하는 대중매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세 번째의 해석 주체는 법이나 기성세대와는 달리 지속적인 정견을 갖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것에 대한 투입과 산출 양끝에 대중이 있는 탓이겠지만, 대중매체의 성에 대한 해석은 이쪽 극단에서 저쪽 극단에까지 거리낌 없다. TV를 예로 들면, 이 드라마에서는 혼음과 다름없는 성 개방을 미화시키는가 하면 저 드라마에서는 느닷없이 현대판 춘향이가 나오고, 다시 특집물에서는 젊은이들의 무분별한 애정행각을 한탄한다. 신문이나 활자매체도 마찬가지다. 크게 믿을 만한 것 같지도 않은 설문 통계를 통해 어떤 날은 '미혼 남녀의 90%가 혼전 관계에 찬성, 여대생의 60%가 성경험 있어' 따위의 미신을 퍼뜨리다가, 또 어떤 날은 무슨 염불처럼 서구사회의 복고조(復古調)를 소개하면서 <이혼율 격감>이니 '다이애너비(妃)의 처녀성도 진찰(검사)' 따위를 들먹인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대중매체의 해석이 무정견(無定見)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향력이 상상 밖으로 크다는 데 있다. 법 규정이나 기성세대의 목소리는 특별하고 구체적인 경우가 아니면 대중의 귀에 닿지 않는다. 거기에 비해 대중매체의 해석은 거의 강요적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음으로써 은연 중에 우리의 판단을 지배한다. 그런데 그 판단의 준거가 다양하기 때문에 점차 종합하는 능력을 잃어 가는 대중은 편의주의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시대는 성에 대한 사회의 해석과 관행 사이에는 드물게 편차가 적은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해석들 가운데에는 분명 오늘날의 관행을 변명하고 옹호하는 것들도 있기 때문에. 그 밖에 성에 대한 사회의 공적인 해석 역할을 해주는 것으로는 각종의 책이 있지만, 그 역시도 오늘날은 대중매체의 역할을 보조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최종적인 판관이 되는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여서 그 다양한 해석 역시 허약한 우리의 편의주의적인 선택에 맡겨지거나 종종 대중매체에 선택이 위임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한 해석은 어떤 것일까.-- 오늘도 그와 탁자 하나 건너의 단정한 담화나 어깨와 어깨 사이가 한 뼘쯤 떨어진 정숙한 산보의 세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상도 해라. 그이 말마따나 우리는 이미 '로맨스로 발을 들여 놓았다.' 그런데도 성은 우리와는 무관한 하나의 추상이다. 그의 내면 세계는 짐작할 수 없더라도 이 이상한 묵계에 동의한 나는 무엇인가, 어쩌다가 내게는 성이 하나의 추상이 되었을까. 건강한 스물일곱의 여자가. 9월 19일 화요일. 며칠 좀 바빴다. 거기다가 전에는 일도 내 일기의 중요한 재료였다. 혐오이든 애착이든 내 시간과 열정의 태반을 앗아 가는 것이니까. 그런데 요즈음 들어서는 왠지 편집실 안에서의 일이건 밖에서의 일이건 일기장에 시시콜콜히 적어 둘 흥이 일지 않는다. 그와의 일 때문이겠지만-- 하긴 그것도 이상하다. 그 일 또한 매우 중요한 것 또는 내 삶에 직접적인 연관을 맺을 수 있는 심각한 알맹이는 쓸 수가 없다. 이제는 누가 이것을 훔쳐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들을 쓰려면 도무지 감정이 절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제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한 인간의 진실한 내면 표출로서의 일기가 아니고 한낱 문학작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 같다. 진짜 베르테르의 가슴속에 우리가 읽은 언어들이야 있었겠지만, 오늘날 번역되어 읽혀지고 있는 그 일기는 결코 베르테르가 직접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늘 있었던 재미있는 일 하나--. 저녁 나절 그가 '맥베스'를 보러 가자고 해서 일찍 잡지사를 나왔다. 원작을 현대식으로 각색한 것으로 공연은 일곱 시부터였다. 그를 만나니 다섯 시 반, 시간이 남았길래 간단히 저녁을 먹기로 하고 극장이 멀지 않은 남산 쪽으로 갔다. 바삐 뛰어다니느라 점심을 토스트 한 조각으로 때운 탓인지, 갑자기 기름진 중국요리 생각이 난 내 청에 그는 남산 중턱의 고급스러운 요리집으로 안내했다. 여러 가지로 보아 단골로 다니는 집은 아닌 듯했지만, 냉채와 상어지느러미는 내 입에 잘 맞았다. 그 바람에 간단히 하기로 한 식사는 한 시간을 넘게 끌어 극장에 도착했을 때는 정확히 일곱 시 오 분 전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표를 사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막은 이내 올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 하는 소리와 함께 그와 나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새파란 조명 아래 흰 두루마기 차림에 갓을 쓴 젊은이가 하나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작품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일종의 패러디물(物)이란 말은 듣고 있었지만 갓 쓴 젊은이는 아무래도 이상했다. 거기다가 곧 가야금 소리가 나며, 그 젊은이가 춤을 시작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가 겨우 무언가 잘못된 것을 알아차린 것은 학(鶴)으로 분장한 또 한 사람이 무대에 나타난 뒤였다. 학춤이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는 그대로였다. 그제서야 우리는 무대를 살펴보았다. 비로소 무대 귀퉁이에 늘어진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김 x x 박 x x 고전무용 발표회' 참으로 어이없는 노릇이었다. 두 사람 모두 눈 뻔히 뜨고 엉뚱한 입장권을 사서 들어온 것이었다. 공연장 밖에 붙어 있을 몇 개의 현수막과 수많은 포스터는 물론 방금도 손에 쥐고 있는 좌석권에 적어도 사호(四號)는 넘는 글씨로 인쇄된 공연의 제목조차 읽지 못하다니...... 시간에 쫓겼다는 변명도 있지만, 거기에는 확실히 섬뜩할 만큼 놀라운 그 무엇이 있었다. 그만큼 두 사람이 서로에게만 몰두했다든가 하는. 내가 그런 기분으로 다시 그를 바라보니 그도 왠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역시 늙고 닳아빠진 연인들이었다. 아니면 그 터무니없는 열중에 대한 자조(自嘲)였을까. 그가 푸웃 하며 실소를 터뜨리고 나도 어이없이 쿡쿡거림으로 그런 그의 웃음을 받았다. 그리고 점차 그 웃음은 야릇한 쾌감으로 자라가, 우리는 끝내 옆자리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공연 도중에 극장을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밖으로 나온 뒤 한참 동안 우리는 눈물마저 글썽일 만큼 웃었다. "바, 바보같이......" "멍청한 분......" "완전히 장식용의...... 눈이군......" "살가죽이 모자라 터진 게...... 눈은 아닐 덴데요......" 입으로 서로 그렇게 비난을 해도 내심으로는 일종의 확인에 지나지 않았다. 매표구에서 물어 본 뒤에야 안 일이지만 우리가 보려고 했던 '맥베스'는 이틀 뒤에야 첫 공연이 있을 예정일 뿐이었다. 우리가 공연장에 오기 전에 보거나 들은 것은 그 공연 예정일 뿐이었다. 그러나 끝내 그와 유쾌하게 헤어지지는 못했다. 한 십 분쯤 웃은 뒤 다시 굳어진 그는 헤어질 때까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입을 열지 않았고, 나도 이내 엄습해 오는 까닭 모를 공허감과 참담함에 그와 크게 다르지 못했다. 9월 20일 수요일. 어제의 일은 중대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의미를 분석해 보려고 하면 안개가 걷히듯 내 머리속은 텅 비고 만다. 더구나 그것을 정리하여 일기에 쓴다는 것은 지금의 나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제 더는 이렇게 애매한 상태로 그와의 일을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이렇게 쫓기면서도. 다만 지금 내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약간의 시간이 지나가, 한 발자국도 안되지만 되돌아볼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들이다. 얼마 전에 하다가 중단한 자기분석-- 어떻게 보면 대단할 것도 없는 인연에서 무엇이 나를 오늘날처럼 가깝게 그 곁으로 이끌었는가를 헤아려 보는 일이다. 그의 어두우면서도 치열한 열정, 깊이 모를 예술혼, 소년다움, 죄의식과 부끄러움, 따뜻한 이해와 손쉬운 소통, 불가사의한 예감 따위, 이미 말한 것들 외에 언제나 나를 이상한 감동에 젖게 하는 것은 그의 신산스러웠던 지난 삶이다. 물론 내가 아는 것이래야 기껏 그가 고아로서 어린 누이마저 잃은 뒤에는 혈혈단신으로 남의 손에 양육되었다는 것이고, 그도 지난 삶 가운데서 어두운 부분은 애써 말하기를 피하지만, 어쩌다 튀어나온 우연한 말 한다니, 표정 하나에서 두껍게 가려진 그 부분을 얼핏얼핏 훔쳐보게 될 때마다 나는 단순한 동정이나 연민으로 제쳐버릴 수 없는 서늘한 감동을 느끼곤 한다. 신산스럽기로야 짐작으로 하는 그의 지난 삶보다 훨씬 더 어둡고 괴로운 삶을 보낸 이들을 나는 여럿 알고 있다. 가까운 예로, 지난번 수기 모집 때에도 거의 상상이 닿지 않는 기구한 생애의 기록이 응모작의 상당한 부분이었지만, 얼필얼핏 훔쳐본 그의 과거에서만한 감동은 받지 못했다. 거기다가 나는 이미 지나간 남의 삶에 감동할 만큼 나이 어린 소녀는 아니다. 그 밖에 이와 관련된 그의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그의 주위를 안개처럼 자우룩히 감싸고 있는 허무와 절망의 분위기다. 허무와 절망-- 이따금씩 젊은 우리에게 무슨 아련한 향수 같은 느낌으로 떠오르는 말이긴 해도, 대체로는 얼마나 낡고 촌티 나는 말인가. 사실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했으면서도 현대가 묻기를 그만둔 다른 여러 가지 지난 시대의 의문들과 마찬가지로, 그 말은 이제 코미디언의 익살에나 쓰일 만큼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마치 잘 맞는 옷처럼 어울리고, 그 이상 야릇한 감동까지 준다. 그의 미학(美學)도 거기에 바탕하고 있지만 이상하게 위태롭지 않고, 삶에 대한 이해도 거기에 의지하고 있지만 뒤틀리거나 비꼬인 데는 보이지 않는다. 때로 나는 그가 예술가의 한 속성을 과장하여 연출해 보이고 있지 않은가 하는 혐의를 가지고 몇 개의 덫을 놓아 본다. 그러나 내가 치밀하게 계산한 덫을 그는 아무런 꾸밈이나 애씀 없이 빠져 나가 저만치서 나를 보고 있다. 한층 쓸쓸한 웃음으로. "나는 오히려 당신들이 이 절대적인 허무와 절망을 그토록 철저하게 벗어 던질 수 있다는 게 놀랍소." 라고 하는 듯이, 그 밖에 내가 또 종종 감탄하는 것은 그의 엄청난 독서량이다. 언제 그림을 그리고 언제 읽었는가가 의심될 만큼, 또는 내가 철학자나 작가와 얘기하고 있는지 화가와 얘기하고 있는지 분간하지 못할 만큼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이건 잡학(雜學)이오. 상세하게 쓰여진 문화사 몇 권에 인문과학 방면의 개론서 몇 권만 보태면 되는 거요. 예술하는 천민들의 허영과 콤플렉스가 읽기를 강요한." 언젠가 솔직한 내 감탄에 그는 그렇게 자신을 빈정거렸지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또 그의 매력이 될 수 있는 것은-- 아아, 그만둬야지. 내가 무슨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지금 와서 이따위의 분석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또 사랑이건 미움이건 한 사람에 대한 미묘한 감정을 어떻게 명쾌하게 분석하고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미 차에 올라버렸는 것을. 복수와 흥분의 어린애 같은 욕망에 빠져들고 있는 것을...... 9월 22일 금요일. 주로 육아. 아동 문제를 담당해 오던 최 언니가 갑자기 사표를 냈다. 결혼이 일주일 뒤란다. 남편 될 사람은 우리도 알 만한 방송국AD. 그러나 둘 사이가 그런 줄은 아무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최 언니보다 한 살 아래인 스물여덟이었으니까. 서로 이해할 만한 직장이니 결혼 뒤에도 근무하라고 주간님이 권했지만, 그녀는 기어이 사표를 냈다. "그래도 서른은 채우기 싫었던 모양이구나." 손 언니가 그렇게 농담으로 말했지만 나는 왠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가 편집부를 떠남으로써 전천후 기자라고 불리는 박명혜와 내가 나란히 노처녀 랭킹 2위를 마크하게 된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스물일곱도 석 달밖에 남지 않았다. 까닭 없이 그를 만나고 싶은 날. 9월 23일 토요일. 비, 가을을 짙게 하는 비. 가로수 잎새들은 누렇게 물들고, 질퍽하게 떨어져 포도를 뒹굴고, 밟히고. 그래, 먼저 그에게서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언제부터 물어 보리라 마음먹었지만 막상 만나기만 하면 깜박 잊어버리고 만 일이다. 바닷가에서 그렇게도 완강하던 그가 무슨 계기로 그 편지와 함께 이 도시로 돌아왔는가를. 그 중요한 것도 묻지 않고 그저 돌아온 것만 기뻐 맞아들인 내가 갑자기 못 미더워진다. 또 그가 말한 사랑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뜻을 가진 것인가도 물어 보아야지. 모든 것을 너무 그가 하는대로 버려 둔 데에도 후회가 된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그는 이번 주일 내내 전화가 없다. 9월 24일 일요일 음산한 날씨 이따금씩 비. 종일 누워서 보부아르의 '위기의 여자'를 읽었다. 이건 뭐 지성이고 철학이고 할 것 없는 중년여자의 넋두리 같다. '레 망다렝'이나 '제2의 성'에서 보여 준 보부아르의 불 같은 옛 면모는 간데없고 질투와 분노로 헝클어진 감정과 처연한 집착만이 보일 뿐이다. 스스로의 체험을 예술적인 여과 없이 쏟아 놓은 것 같다는 짐작으로 공연히 쓸쓸해졌다. 사르트르와 나란히 선 보부아르-- 그녀는 한때 우리에게 지성의 화신으로 비쳤었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지성이 별수없는 여인이 감정에 패배한 듯한 인상과 함께 정신적인 맺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늙은 보부아르를 위해 이 책이 그녀의 직접 체험과는 무관한 그녀의 순수한 창작이었기를 빌고 싶다. 그런데 이제 보니 이상한 게 하나 있다.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경위다. 사무실 책상 위에 얹혀 있길래 신간 안내를 부탁하기 위해 출판사에서 보내 온 것이겠거니 생각하고 보부아르의 이름에 끌리어 넣어 온 것인데 우연히 뒤의 발행일자를 보니 벌써 이 년이나 지난 책이었다. 누가 무엇 때문에 갖다 놓은 것일까. 9월 25일 월요일. 한동안 투기와 복부인으로 지상이 시끄럽더니 요즈음은 여대생 피살사건이 연일 매스컴에 요란하게 오르내린다. 문제가 된 투기사건은 그 대상 아파트가 소형이고 그것도 구매 능력이 없는 서민들 위한 임대용 아파트였다는 점에서 공분을 사게 된 것 같다. 남의 아픔은 아픔이 아닌 시대의 한 단면과 같은 느낌이 들어 분노보다는 쓸쓸함이 앞선다. 물론 지탄의 대상이 된 사람들 중에는 불행한 예외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알뜰한 주부가 몇 년 동안 아끼고 아껴 모은 얼마에다 친지들의 자금까지 끌여들여 마련한 몇 백만 원으로 효과적인 재산증식방법이라고 택한 첫번째 투자가 바로 문제의 아파트 투기사건에 관련되어, 재산증식은커녕 원금만 축나고 불명예와 지탄만 받게 된 경우가 바로 그렇다. 하지만 설령 그러한 경우라도 남의 아픔에 대한 고려보다 자기의 이익을 앞세운 데 대한 도덕적 비난을 면할 길은 없다. 하물며 처음부터 우세한 경쟁력을 무기로 삼아 다수 서민들의 이익을 가로채려던 경우에랴. 그것은 바로 추운 겨울에 집 없는 사람을 거리로 내모는 것과 마찬가지다. 얼핏 보기에는 무관한 것 같지만 여대생 피살사건도 그 배경으로 보면 앞서의 사건과 맥락이 이어진다. 지금까지의 보도를 종합해 보면 피해자는 상류사회에 속하는 집 고명딸이고 삶에서의 여러 가지 혜택을 누려 온 것 같다. 그 사건은 피해자에게는 동정을 금할 수 없는 끔찍한 불행이고, 가족과 친지들에게는 아직까지는 커다란 슬픔이겠지만-- 문제는 경찰이 추정하고 있는 사건의 방향이다. 갓 스물이 넘은 처녀의 수첩에서 나온 사십여 개의 남자 전화번호, 분방한 남성교제, 행락과도 흡사한 해외연수와의 관련-- 그녀에게 주어진 삶의 혜택이 그런 방향으로만 누려졌다고는 단정할 수 없어도 어딘가 칙칙한 인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차라리 사건은 우발적이고, 범인도 피해자와 같은 혜택받은 계층의 아들(현재는 남자라고 추정되고 있으므로)이 아니기를 빌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교육도 받았고 어느 정도의 의식수준도 기대되는 자라는 세대에서까지 부와 여유가 향락과 퇴폐로 이어지는 실례를 이 사건에서 다시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가장 예민하게 깨어 있어야 할 세대에서조차 기성세대에 못지 않은 도덕감의 마비를 확인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상 모든 시대에서 소위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개탄하여 마지않은 것들 중의 하나는 자기의 시대가 너무 물질적이고 타락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곧잘 그것을 근거로 인류의 역사는 머지않아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명하곤 했다. 그러나 어쨌든 역사는 계속되고 인류는 진보를 거듭해 왔다. 우리의 시대도 많은 개탄과 우려의 대상이 돼 오기는 했지만 아직 절망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방금도 수재민을 위한 성금이 연일 답지하고 있고, 더 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이 남을 위해 귀중한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일시적이거나 행사적인 몇푼의 희사금, 혹은 예외적인 선행 이상으로 남의 아픔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의식화가 필요하다.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개미는 길을 가다가 자기보다 야윈(배고픈) 동료를 만날 때 자기가 먹은 것을 토해 내어 동료를 먹인다고 한다. 무슨 도덕감에서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겠지만,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와 같이 본능에 가까운 의식이다. 나에게 사회의 평균치 이상 가는 혜택이 돌아왔을 때 그것이 혹시 다른 운수 나쁜 동료의 몫을 훔친 것이 아닌가를 먼저 의심해 보는 것, 재산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그것에 수반되는 것은 '누릴 권리'가 아니라 '바르게 써야 할 의무'라는 것을 당연하게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자신과는 무관한 것 같아도 고통받는 동료가 있으면 자기가 그 원인이 되지 않았는가를 먼저 의심해 보고 당연히 함께 나누어야 할 짐으로 여길 수 있는 사회 일반의 의식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남의 아픔이 곧 내 아픔이 될 때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살이의 여러 아픔은 그만큼 적어질 것이다. 가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적어지므로. 9월 27일 수요일. 그가 금방이라도 축축 늘어져버릴 것 같은 모습으로 찾아왔다. 얼굴도 눈에 띄게 수척했다. 그동안 병이라도 앓은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한 주일 꼬박 일을 했지. 열심히." 내 물음에 그렇게 대답한 그는 한동안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지쳐 있는 사람의 눈길이었다. 그 눈길을 받자마자 만나지 못한 그 며칠 동안 다소나마 버려 두었던 내 의혹과 긴장의 칼날은 금세 무디어지고 말았다. "무슨 일을 그렇게 몸을 상해 가며 하세요?" "그렇게 됐어. 어쩌면 금년에 파리에서도 제법 괜찮은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질 수 있게 될 것 같소. 일류는 못 되지만......" "까짓 좀 늦어지면 어때요? 몸부터 돌보셔야죠." 그러자 그의 눈이 번쩍 하고 빛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희원이는 그렇게 말해선 안돼." "제가 왜요?" "이건 나만을 위한 일이 아니오." "그럼 절 위해서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야릇한 전율을 느끼며 물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 대신 찻잔을 비우더니 일어서면서야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차차 알게 될 거야. 오늘은 이만 들어가겠소." 그리고 이렇다 저렇다 할 설명도 없이 구내다방을 나가버렸다. 꼭 예전에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때의 어느 날 같은 태도였다. 나는 그의 마지막 말이 남긴 까닭 없이 심각한 여운에 사로잡힌 채 거의 앉은 채로 그를 전송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나간 뒤에도 한동안을 얼른 풀리지 않는 그 말을 되새기며 멍하니 앉았다가 편집실로 돌아왔다. 참으로 이상한 날이다. 그 길로, 자리에 돌아오니 뜻밖의 편지가 한 장 와 있었다. 옛 은사이며 전 주간이시던 C 선생님의 편지였다. '희원 군 자네 소식은 가끔 만나는 주간님을 통해 잘 듣고 있네. 나도 여전하네. 갑자기 글을 내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고, 이번에 시 전문지 하나를 새로이 맡았기에 자네의 등단 의향을 물어 보고 싶어서인데, 이 땅의 모든 시전문지가 그렇듯 부수도 대단찮고 경영도 어려움이 있으나, 지령은 오래되고 그런대로 권위도 인정받은 <청구시론(靑丘時論)>일세. 지금껏 맡아 하던 J교수가 이번에 교환교수로 나가게 되어 돌아올 때까지만 맡아 달라는 걸 거절하지 못했네. 자네가 좋은 자질을 잡문으로 썩히고 있다는 생각으로 매양 안타깝게 여겨 오던 차에 마침 이 잡지를 맡고 보니 문득 생각이 나 청하네. 그동안 작품 된 것이 있거든 대여섯 편 골라 보내 주게. 물론 심사위원이야 따로 계시지만 자네 시도 이제 그들을 두려워할 정도는 아닐 것으로 믿는 바이네. 좋은 재능이라도 너무 오래 묵혀 두는 것이 좋지 않으니 이번에는 사양 말고 보내도록 하게. 한 훌륭한 시인을 기대하겠네. 이만, 총총.' 9월 28일 목요일. 지금까지 내게 일과 일이 아닌 것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왔다. 특히 살아오는 각 단계에서 보편적이고 의무의 성질을 띤 일(예를 들어 학교 시절이면 공부, 요즈음 같으면 직장에서의 일)과 개별적이고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는 사건(감정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다)들은 서로가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왔다. 좋게 말하면 어떤 종류의 성실성이나 자기를 절제하는 힘으로 추켜세울 수도 있고, 나쁘게 말하면 기계적이라거나 차고 메마른 성품이라고 욕할 수도 있는 특성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상하게 그것들이 뒤죽박죽이 되는 바람에 직장에서의 일을 망쳐버리고 말았다. 공연히 그저께 그가 한 말에 숨겨진 뜻을 살피기도 하고 C 선생의 편지에서 받은 묘한 자극에 들떠 옛날에 쓴 시들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깜박 인터뷰 약속을 잊고 만 것이었다. 꼬박 삼십 분이나 기다린 상대의 볼멘 독촉을 듣고서야 황급히 달려나갔지만, 다시 택시를 잡느라고 몇 분, 길이 막혀 십 몇 분, 한 뒤 한 시간 가까이나 늦어 약속장소에 도착해 보니 상대는 이미 떠난 뒤였다. 이곳으로 옮기고 햇수로 삼 년 만에 처음있는 일이다. 아무래도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일은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그의 일은 다시 그를 만나서 알아보지 않는 한 아무것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손 쳐도, C 선생님의 편지와 관련된 내 거취문제는 어느 정도 냉정한 정리와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사실 등단을 권하는 C 선생님의 태도나 내 능력에 대한 믿음에는 좀 엉뚱스러울 만큼 맹목적인 데가 있다. 그분이 나에 대해 안다고 해 봤자 내가 잠시 몸담았던 문예클럽의 지도교수였다는 것과 교양과정에서 문학개론을 한 학기 강의했다는 정도이고, 시도 기껏해야 교지와 학보에 두어 번 실렸던 어줍잖은 내 작품을 읽은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인지 나를 좋게 보아 학교 시절에도 얼굴만 마주치면 곁에 있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시공부를 계속할 것을 권했고, 교편을 잡고 있는 나를 지금의 직장으로 끌어낸 것도 그와 같은 극성의 일부였다. 물론 그 같은 그분의 정성은 예사롭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감격해도 좋을 스승의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강사 시절에는 정식으로 평론으로 등단하신 적도 있어 그분의 시에 대한 안목도 불신해야 할 이유는 없으며, 또 지금은 꽤 권위있는 시지(詩誌)의 주간을 맡고 있어 한 신인을 밀기에는 충분한 후광(後光)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선뜻 마음 내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분에게 아무런 사심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길을 통하는 것이 왠지 내 시와 삶을 한꺼번에 불결하게 만들어버릴 것 같은 예감은 무엇 때문일까. 그러나 그분의 권유를 떠나서 나의 시와 등단을 생각해 보자. 만약 내게 그만한 능력이 있고, 앞으로도 시인이란 이름을 유지할 만한 최소한의 보장만 있다면 이제는 한 번쯤 기성의 지면에다 이름을 얹고 싶은 것이 지금의 내 솔직한 심경이다. 속수무책으로 삶을 낭비하고 있는 듯한 이 기분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설익은 완전주의나 사춘기의 결벽 쯤은 깨끗이 청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그 이상 내 시가 끝내 한 지향, 한 과정에서 머물고 말지라도 오래 쫓아온 시인이란 그 이름만은 어떻게든 얻고 싶을 때까지 있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빈 이름에 갈급하게 되었는지. 그 이름이 가지는 어떤 사이비한 이득을 내가 이토록 탐내게 되었는지. 10월 1일 토요일. 혹 그가 아닐까. 내가 장식으로 어떤 이름을 갈구하게 된 것은 혹 그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그에 비해 아무리 작고 초라하더라도 나 역시 나름의 이름과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걸 공적으로 승인받고 싶어진 것이나 아닐까. 그리하여 내가 설령 무분별한 열정에 빠져 들게 되더라도 그것이 그의 명성과 예술세계에 대한 눈먼 추종이라는 오해에서 구원되기를 원하는 것일지도....... 오늘은 그의 전화를 받고, 또 그가 원하는대로 약속을 한 뒤, 갑작스레 무력한 기분에 빠진 내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10월 2일 일요일. 아홉 시, 마장동 시외버스 정류장, 신발은 운동화, 될 수 있는 한 짐은 없이-- 그것이 어제 그와 한 약속이었다. 간신히 시간에 맞게 대어 보니, 그는 이미 원주에서 아침 일찍 대절로 서울에 왔다가 돌아가는 택시 한 대를 잡아 놓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꼭 물어야 할 것을 벌써 한 달 가까이나 미뤄 온 거예요. 어제 아뭇소리 없이 따라나서겠다고 한 것도 바로 이걸 듣고 싶어서였어요." 차가 시내를 벗어나기 바쁘게 나는 서둘러 이야기를 꺼냈다. 마치 그렇게라도 해야만 까닭없이 손상된 것 같은 내 자존심이 회복될 것처럼, 또는 애초에 잘못된 그 여행이 정당함을 인정받게 되는 것처럼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강경했던지 말없이 차창 밖을 내다보며 담배를 태우고 있던 그는 잠시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따금씩 몹시 피로할 때마다 희미하게 눈가에 번져 있는 푸른 그늘이 오늘따라 더욱 짙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면도하고 씻었기는 해도 얼굴 역시 며칠 전보다 훨씬 혈색이 떨어져 어딘가 검푸른 기를 띠고 있었다. 어젯밤도 늦도록 일한 모양이구나-- 이런 짐작이 가자 나는 문득 내가 지나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며 처음 차에 오를 때부터 줄곧 나를 사로잡아 온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에게 조금만 양보했다는 기분이 들기만 하면 거의 병적으로 과장되어 나를 사로잡는 일종의 피해망상과도 같은 상념이었다. 그런 내 심중의 변화를 읽었는지, 아니면 자칫 어색해질 것 같은 자리를 마루리하기 위한 노력인지 그가 잠시 뜻 모를 미소로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이란 게 있는 법이오. 이 나들이가 그렇게 억울한지 안한지는 해질 무렵 쯤에 판단해도 늦진 않소." 그리고 이어 너무 가볍게 내 말을 받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듯 약간 진지해진 어조로 덧붙였다. "희원이가 묻고 싶은 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별난 나들이를 청할 때는 별난 이유가 있을 거요. 관찰자의 플래시가 너무 밝아 오히려 관찰할 대상의 반응을 자연상태에서 벗어나게 만든다면 그 관찰은 아무 소용 없는 게 아니겠소?" 그것은 조금 전의 내 태도를 반박하거나 나무란다기보다는 어딘가 호소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게 다시 내 팽팽한 긴장을 또 한 번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일단 그와 헤어지기만 하면 나는 거의 성공적으로 냉정한 나로 돌아온다. 좋게 그를 말하고 있을 때도 마음 전체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그에 대한 강한 부정이며, 이따금씩 그리워하는 마음이 들어도 그보다 더 격렬한 반발로 이내 지워지고 만다. 내가 한번도 자청하여 그를 만난 적이 없는 것, 이따금씩 일기에 그에 관한 호의적인 글을 써 놓을 때조차도 그것이 앞뒤 없는 격정에서라기보다는 어딘가 분해 하는 말투까지 섞인 분석이나 정리의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그 같은 부정과 반발의 심리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를 만나기만 하면 사정은 완전히 뒤집히고 만다. 우선 첫 접촉인 전화에서부터, 나는 한번도 거기에 실려 오는 그의 요청을 거절해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와 얼굴을 맞대고 앉으면 바로 그 십 분 전까지도 나를 사로잡고 있던 부정이나 반발의 심리는 깨끗이 잊혀지고, 대신 스스로의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무조건적인 긍정과 동조의 심리에 빠져 들어버린다. 그리하여 입으로는 그를 부인하고 그 의견을 비판하는 순간에조차도 마음속은 앞뒤 없는 반가움과 즐거움으로 가득찬 경우가 많다. 그에게서 풍기는 어떤 신비한 흡인력이라기보다는 날이 갈수록 자신도 점점 더 당황하게 되는 묘한 성격상의 모순이다. 아니면 끊임없이 그에게 가깝게 다가가고 싶다는 내 감추어진 욕망과 그럼에도 그래서는 안된다는 어떤 도덕적 자제 또는 이지적인 타산이 거의 꼭 같은 힘으로 내 본능 속에서 충돌하고 있는 결과일까? 그래서 어느 편이 유리한 상황에 떨어지기만 하면 내 기분도 극에서 극으로 표변하는 것일까. 어쨌든 오늘도 그랬다. 그 몇 마디를 고비로 우리의 나들이는 조금씩 지난날의 여러 만남처럼 즐거움과 감동으로 변해 갔다. 내가 그와 헤어져 있을 때 그토록 힘들여 기른 부정과 반발의 심리, 그리고 그 결과인 미묘한 긴장에서 벗어나자마자 눈부시게 맑고 푸른 근교의 가을 하늘이 두 눈 가득 들어오고, 이어 누렇게 변해 가는 들판이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을 주며 내 눈길을 끌었다. 서울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속도로를 버리고 옛 국도로 접어든 바람에 길 양편으로 줄지어 선 늙은 가로수들과 철 이른 낙엽들도 새삼스런 감탄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와 함께 차창 밖의 경치에 눈을 주고 있던 그가 혼잣말처럼 불쑥 말했다. "좀, 이상하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딘가 자조로 뒤틀린 듯한 그의 말투에 내가 무심코 되물었다. "이렇게 하늘이 맑고 고울 수 있다니...... 이 들판이 평안과 풍요로 보일 수도 있다니." "그게 가을 하늘과 가을 들판 아녜요?" "책이나 시에는 가끔 그렇게 쓰여지기도 하지. 그렇지만 스스로 실감하는 기회는 드물 거요." "전 언제나 그렇게 느껴 왔는데요." "그건 희원이가 언제나 세상의 양지바른 쪽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거요. 하지만 아름다움도 그것이 손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을 때는 쓸쓸함으로 느껴지는 수가 있고, 풍요와 평안도 그것이 내 것이 아닐때는 쓰라림이 되는 수도 있소. 물론 수많은 가치박탈의 체험으로 비뚤어진 성격에서나 발견될 수 있는 반응이지만......" "그럼 민 선생님은 그 비뚤어짐을 즐기려고 이렇게 나오셨어요?" 모처럼 밝아지려는 기분을 그가 다시 흐려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으로 나는 약간 쏘는 듯이 물었다. "아니, 그건 아니오. 다만 옛날의 여러 출발 때마다 보던 그 하늘과 같아 보이지 않아서 말이오." "그게 어떤 것들이었는데요?" "검은 하늘에서는 비나 눈발이 흩뿌리고, 그걸로 얼룩진 차창 밖으로는 뒤틀린 가로수들이 지나가고 젖은 들판이 기괴하게 솟고 내려앉고...... 아니면 찬바람에 쓸리는 나무들, 스산하게 날리는 잎새......" "아직도 그 끝나버린 겨울 얘기예요? 그건 이미 십 년 이상을 지난 일들 아니에요?" 까닭 없이 그런 그의 어두운 분위기에 말려들기 싫어 내가 다시 참견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신만의 기분에 깊이 빠져 든 뒤였다. "아무것도 끝나버린 것은 없소. 그 기억들 가운데 가까운 것은 채 오 년을 넘기지 못한 것도 있고...... 어쩌면 이 길도 그 같은 출발 가운데 하나인지도 모르겠소." "오늘 나들이가 즐거울 것이라고 먼저 암시한 건 누군데요? 그럼 이건 유쾌한 가을나들이가 아닌가요?" 마침내 참다 못한 내가 그의 말허리를 자르듯 쐐기를 박았다. 그제야 그도 자신이 지나치게 어두운 감정에 말려들고 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푸른기 돌던 얼굴에 한 줄기 홍조가 어리더니, 부끄러움을 얼버무릴 때 흔히 드러내는 과장된 쾌활로 말했다. "참, 그렇지. 바보는 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나도 생전에 철들기는 틀린 모양이오." "그럼, 즐거운 얘기 해요. 지금 어딜 가시려는 거죠?" "놀라운 신세계(新世界)." "그런데 왜 시작부터......?" "기억의 고집." 그렇게 대답을 하고서야 그는 차츰 원래의 표정을 회복했다. 그러나 그 뒤 완전히 유쾌한 놀이를 나온 아이처럼 되어버리자 나는 은근한 후회를 느꼈다. 그가 이런 유별난 나들이를 계획했을 때는 거기에 무슨 특별한 뜻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쩌면 조금 전의 그 어두운 기분이 그의 마음속에 내린 어떤 결단의 방향을 암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들며, 문득 성급하게 분위기를 바꿔버린 듯한 느낌이 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우리들 사이에는 지난 번 '맥베스'사건 때 잠깐 두 사람을 사로잡았던 미묘한 감정 외에는 무슨 대단한 결단이 필요할 만한 사건이 없었다는 것, 또 내 마음속에서는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를 만나면 이내 무력해지는 일종의 변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애써 오늘이 즐거운 날이 되는 쪽으로 분위기를 끌고 갔다. 그러다가 보니 차가 양평 부근에 왔을 때는 나 자신도 하나의 놀이하는 아이처럼 되어 있었다. "이쯤에서 내립시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한동안을 거의 창밖에 신경을 쓰지 않던 그가 양평을 지나 한 십 분쯤 되었을 때 불쑥 그렇게 말했다. 별 특징도 없는 시골 가로길이었다. 용문산 쯤에나 가려는가 생각하던 나는 그런 그의 제안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기서 왜요?" "인상파의 허구를 확인할 수 있소. 그들이 햇볕을 핑계로 얼마나 어거지를 썼는지, 자연에 기대 선과 주관적인 왜곡을 얼마나 거창하게 선전했는지......" 인상파의 색채는 그들의 주관적인 허구이다. 그걸 햇볕 아래의 가을들판에서 한번 보자.-- 이런 뜻이 되겠지만, 내게는 왠지 그 장소가 그와 무관한 것 같지 않았다. 특히 차에서 내리자마자 미리 계획해 놓기라도 한 듯 방향을 잡는 것이나, 사방을 둘러보는 그의 눈길에 희미한 감개의 빛이 어리는 것으로 보아 그런 내 짐작은 거의 틀림이 없을 것 같았다. "이건 아무래도 놀라운 세계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온 것 같은데요?" 나는 그런 의심을 장난스럽게 말해 보았다. 처음 내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그가 헉슬리의 책 제목을 댄 것에 빗대어 나도 프루스트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 말에 그의 미소가 알아보게 쓸쓸해지며 솔직히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과연 나는 이곳에서 시간을 잃어버린 적이 있소. 하지만 단순히 회고적인 기분으로 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선 것은 아니오." "그럼 뭐예요?" "예행연습, 또다시 잃어버릴 시간에 대한 준비요." "네?" "또다시 그런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은 예감에 미리 비슷한 옛길을 걸어 보는 것이오." 그쯤에서 그만 멈출까 하다가 내친 김이라 나는 궁금한 것을 묻고 말았다. "도대체 그 옛길이 어떤 것이었어요?" 그 물음에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한동안 그윽한 눈으로 나를 내려보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선생의 나이도 먹을 만큼은 먹었지만 아직 충분한 것 같지 않소. 사람의 과거라든가 추억이 가지는 독특한 빛과 아름다움에서 자유롭기에는 말이오. 시간은 분명 모든 사물에 파괴적으로 작용하지만, 때로는 그와 정반대로 그때에는 대단찮은 것들에게 추억이란 이름으로 하고 아름다운 빛을 선사하는 마력도 가지고 있소. 그리고 거기다가 본인의 감상적인 과장이나 윤색이 더해지기까지 하면 그런 추억은 자칫 사람을 홀리는 힘을 갖게 되기도 하오. 나는 희원이를 지나치게 내 과거 속에 불러들임으로써 그런 시간의 마력을 악용했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게 싫소." "전 이제 열여섯의 소녀가 아니에요." "쓸데없이 감격하거나 연민에 젖지 않을 자신이 있소?" "물론이죠." "우울해지거나 안 들은 부분까지 함부로 억측하지 않을 수도?"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그는 좀 망설이더니 전에 없는 감정을 뺀 목소리로 시작했다. 그 바람에 나는 한 번 그가 지나온 혹독한 겨울의 일부를 엿보게 되었다. "십칠팔 년 전 일이오. 이맘때쯤 해서 나는 이 길을 걸은 적이 있소. 그해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했소. 내가 자란 고아원은 고등학교를 마지막으로 떠나야 하는 곳이었지만 드물게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이 두 가지 있었소. 하나는 본당 신부님의 추천으로 신학교를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대학의 아주 장래성 있는 학과에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하여 독지가를 얻는 길이었소. 하지만 그때 이미 이 병이 깊어 있던 내가 선택한 곳은 엉뚱하게도 미술대학이었소. 생각해 보시오. 종교단체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경건하고 신앙적이지도 못하고, 길러 주면 크게 쓰일 것 같은 우수한 두뇌도 없는 고아가 택한 미술대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를. 그렇다고 그 방면에서나마 눈에 확 뜨일 만한 재능을 보여 준 적도 없는 나이고 보니 진학은 당연히 가망 없는 일이 되고 말았소. 하지만 나는 시작하는 자의 열정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닌 결과 간신히 등록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소. 까닭 없이 내게 기대를 걸던 고등학교 때의 은사 한 분과 원장아버지의 파격적인 후원 덕택이었소. 그러나 그 뒤의 두 달은 참으로 쓰라렸소.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아직 모든 것이 넉넉하지 못하던 시절이라 미술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도 별로 없었고, 나는 병만 얻어 그 고아원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소. 그 뒤 나는 다행히도 오래잖아 병줄에서 놓여났지만 다시는 서울로 돌아갈 기분은 나지 않았소. 구걸과도 다를 바 없는 그 혹독한 두 달이 그 오랜 추위와 결핍의 계속인 고아원 생활을 오히려 아늑하게 느끼게 한 탓이오. 나는 그곳에서 잡일을 도우며 세 끼 밥과 누울 방에 안주한 채 갑자기 막연해진 내 삶을 방기해 버렸던 것이오. 하지만 그런 생활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도 없었소. 지친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움츠러들대로 움츠러든 열정이-- 어떤 의미로는 천형(天刑)이라 불러도 좋을 선과 색에 대한 미혹이 되살아난 거요. 그리고 그것은 날이 갈수록 심해 가, 마침내 가을이 왔을 때는 어떤 극단적인 결정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게 되었소. 그런데 그 무렵에 듣게 된 것이 광산의 발파원 얘기였소. 젊은 날을 광산에서 보냈다는 어떤 늙은이의 말에 따르면, 광산 막장에서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는 일이 있는데, 그 위험이 커 보수가 아주 높다는 거였소. 한 해만 무사히 넘기면 한밑천이 될 만큼. 어느 시절 얘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노인이 하도 장담하는 바람에 나도 그만 그 얘기를 믿고 말았소. 어떤 의미에서는 그만큼 나는 내부의 열정에 쫓기고 있었던 거요. 거기서 몇 달을 모험함으로써 가망 없어진 내 그림과 막연해진 삶을 한꺼번에 구하든가, 아니면 무너지는 갱 속에서 그 둘을 한꺼번에 포기하게 되든가 선택하리라는...... 그래서 다시 그 고아원을 떠나 이곳에 이른 게 이맘 때쯤이었소. 원주로 가는 버스를 타고 한나절을 털털거리다가 여기에 내렸던 것인데, 목적하는 탄광촌까지 갈 만한 여비가 있었다는 것은 기억나도, 하필이면 이곳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는지는 그 까닭을 잘 기억할 수가 없소. 어쩌면 다시는 이 산과 들을 볼 수 없게 되리라는 예감에서 새삼 솟게 된 애착이었거나, 한 번 더 내 삶에 대해 정리해 보고 나머지 길을 가겠다는 제법 어른스런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오. 지금 생각하면 모두가 다 부끄러우면서도 쓸쓸한 추억일 뿐이지만......" "그럼 왜 오늘은 하필 이곳을 택했어요?" 나는 그의 추억담이 감동스럽기보다는 까닭 없이 섬뜩해져서 물었다. 그때 그 길에는 죽음의 환상이 그와 함께 있었다는 데서 느껴진 본능적인 공포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대답만은 별로 망설이지 않았다. "만약 내가 희원이와 새로운 길을 떠난다면 주관적인 상황은 그때와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오." "그건 우리 사이의 발전이 삶과 죽음 같은 극단한 문제와 관련을 맺게 되리라는 뜻인가요?" 그러자 그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민망함과 쓸쓸함이 착잡히 얽힌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공허한 웃음과 함께 나무라 듯 말했다. "이 어린 것아, 너는 설마 우리가 축복의 꽃다발 속에 묻혀 행복으로 맺어지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그 갑작스런 어투의 변화 때문에 내가 잠깐 멍해져서 대답을 늦추고 있는 사이에 다시 덮어씌우듯 말했다. "사람의 사랑이 동물의 성애(性愛)와 구별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도덕성일 것이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것이 명한 금지 가운데 하나에 정면으로 도전하려 하고 있소. 이미 철없는 소년의 놀이일 수는 없단 말이오." 애써 잊고 있던 상처를 왁살스레 긁는 듯한 말이었다. 나는 그 갑작스런 아픔에 앞뒤 없이 분개하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바닷가에서는 왜 돌아오셨어요? 그렇게도 두려운 일을 왜 시작했어요?" 사실 나는 그 물음을 그런 식으로 내던지고 싶지는 않았다. 나를 향한 그의 진실을 확인한다는 감미로운 기대와 함께 다소곳이 묻고 싶었던 것이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자 한층 분한 기분이 들며 눈물까지 핑 돌았다. 그도 그 맹렬한 반응이 조금은 뜻밖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내 내 마음속을 읽었는지 좀전과는 달리 달래는 어조가 됐다. "마음을 상하게 하려는 뜻은 없었소. 그저 이런 날은 한번쯤 문제의 핵심과 대면해 보는 것도 뜻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는 한층 부드럽게 달랬다. "그 물음은 진작부터 각오했던 것이었소. 사실 이리로 나온 목적 중에는 거기에 성실하게 답해 주는 것도 끼여 있소. 하지만 갑자기 그런 식으로 물으니 대답하기가 좀 뭣해서...... 아직 생각이 정리 안 된 것도 있고...... 그러지 말고 우리 한동안만 그냥 걸읍시다. 낯선 곳을 걷다 보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수도 있소. 나 뿐만이 아니라 희원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도 도움이 될 거요." 그리고 입을 다무는 것이, 당분간은 네가 무어라 해도 입을 열지 않겠다는 투였다. 나는 여전히 기분이 풀리지 않았지만, 언뜻 그의 말도 옳은 듯이 들려 더 는 말을 하지 않고 그를 따라 걸었다. 몇 발 앞에 나타난 이정표를 보니 우리는 어느새 차에서 내려 3킬로미터나 걸은 셈이다. 이 오후를 어떻게 그려 두면 될까. 이제 겨우 대여섯 시간밖에 안되었는데도 벌써 한 세대 저쪽 편의 일처럼 아련하게 떠오르는 이 오후를. 벌써 기쁨과 슬픔의 빛깔을 벗고 몽롱한 그리움의 빛깔 속으로 몸을 숨기려 드는 이 오후를...... 오전 열한 시쯤 시작된 우리들의 말없는 걸음은 그 뒤 세시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나중에 더해 보니 겨우 삼십 리 남짓한 길이었지만, 거친 자갈로 덮힌 시골 도로에 익숙하지 못한 내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던 길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말대로 복잡한 도회지에서 매일 대하는 사물들에 갇혀 변화 없는 생각을 되풀이하는 것보다 그렇게 낯선 곳, 알지 못한 길 위에서의 생각이 무언가 지금 우리가 빠져 들고 있는 혼란과 미망에 한 줄기 신선한 빛이 될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그가 이내 골똘한 생각에 빠져 드는 것에 비해 내 머리속은 갈수록 산만해져 갈 뿐이었다. 운동화를 싣고 오라는 그의 말을 어기고 신고 나선 케미슈즈가 차츰 발을 죄어 오고, 장거리 도보여행에 훈련되지 않은 다리가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하자, 그나마 아른아른 잡힐 듯하던 생각의 갈피들마저 산산이 흩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다만 위로가 되는 것이 있었다면 내가 그와 둘이서 아무도 우리를 알아볼 수 없는 낯설고 호젓한 가로길을 걷고 있다는 데서 오는 묘한 즐거움과, 그 길이 끝나는 곳에서 정말로 놀라운 신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기대 정도였다. 그 바람에 나는 말없이 걷기 시작한 지 삼십 분도 안돼 그와의 대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언제나 건성이었다. 그 전 같으면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거나 그에게 충격을 줄 물음들도 그는 짤막짤막하게 남의 일처럼 말함으로써 내 흥을 죽였고, 재미있고 유쾌하게 받아들였을 농담도 정색으로 받아들이거나 무미건조한 대답으로 쓸데없이 길어지는 것을 피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난번 출발의 후일담을 묻는 내게 보여 준 그의 반응이었다. "그래, 그때 결국 광산으로 가서 발파원(發破員)인가 뭔가가 되셨어요?" 그 얘기라면 반드시 진지하게 대답하리라고 믿고 묻는 내 물음에 그는 첫 대답부터가 심드렁했다. "세상에 나쁜 일 빼놓고 한꺼번에 떼돈을 벌게 되는 그런 일이 어디 있겠소?" "그래도 생명을 걸잖아요?" "이미 그때는 그런 미련스런 방법이 남아 있지 않았소." "그럼 그대로 돌아 나오셨단 말이에요?" "그건 아냐. 그렇게 돌아서서 갈 데가 없었으니까." "그럼 무얼 하셨어요?" "서투른 광부노릇 좀 했지. 고흐를 생각하며." "몇 개월이나 있었어요." "한 서너 달쯤." "그 다음은 어디로 갔어요?" "깊은 산으로 들어갔지." "깊은 산? 거긴 왜요?" "광산에 있을 때 봄을 기다리는 친구 하나를 만난 덕분이오." "봄을 기다리는 친구요?" "앵속(罌粟) 밀경작이 전문인 친구였소. 마침 그 무렵 출감하여 봄이 올 때까지 그 광산에서 의지하고 있었소." "그럼 함께 아편을 몰래 재배하신 거예요?" "그런 셈이오."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 재미있겠어요. 그때 얘기 좀 해주세요." "한두 달짜리 밀림 속의 캠핑 같은 거였소. 인가에서 오십 리쯤 떨어진 산 계곡의." "들키지 않으셨어요? 언젠가 책에서 보니 양귀비꽃이 필 무렵에는 비행기로 밀경작을 단속한다던데." "먹물을 분무기에 넣어 꽃잎에 뿜더군. 비행기에서 보면 산불로 그을리다 만 등성이처럼 보인다는 게 그 사람 설명이었소." "아편 채취는 어떻게 해요?" "대나무 칼로 열매 같은 것에 홈을 내어 잔액을 모으는 것 같았소." "그걸 주사로 맞거나 먹어요?" "생아편이야. 가공해야 된다고 했소." "누구에게 팔았어요?" "형사 같군. 그러나 공소시효가 지나도 두 번은 지났으니 말해 주어도 되겠지만, 역시 그 친구가 처리해 난 몰라요." "그 돈을 둘이서 나누셨어요?" "아니 삼분의 일. 씨앗과 기술은 그 친구의 것이니까." "많은 돈이었어요? "다음 학기에 복교하여 꼭 새 학기를 견딜 만한 액수였소." "그 뒤는요?" "왜, 내 전기라도 쓰려는 거요?" 대개 그런 식이었다. 그 이야기의 내용으로 보나, 그 일이 그의 삶에 대해 지닐 만한 의미로 보나 그보다는 훨씬 감동적이고 생생하게 말해 줄 수 있는 추억들을 그는 그렇게 얼버무려버린 것이었다. 다른 얘기를 꺼내 보아도 반응은 그와 비숫했다. 그런데도 내가 섭섭한 기분이 들거나 제풀에 지쳐 그만 돌아가자고 조르지 않은 것은 말 없이 터덜거리며 걷는 그의 모습에서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하게 뿜어나오는 어떤 거역 못한 흡인력 때문이었다. 맑은 가을 햇살 아래서도 무슨 서기(瑞氣)처럼 또는 신비한 구름처럼 그의 약간 굽은 등허리와 완강한 어깨 어름을 떠돌고 있는 것은 우리 살이의 시들함과 고단함과 쓸쓸함이 엉겨 빚는 신산스러우면서도 감미로운 빛다발이었다. 아무리 차가운 눈길로 그를 살펴도 그것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는 혐의는 그 어느 구석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이상 내가 그런 그에게서 본 것은 얄팍한 저의나 치밀하게 계획된 연출의 낌새 대신 방심과도 같은 무의식과 대상을 알아볼 수 없는 도취 같은 것들 뿐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길은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 있는 종류는 못 되었다. 세 시간이 되자 발끝과 뒤꿈치가 쓰라리기 시작하고 다리도 천근의 무게로 내 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좀 쉬어 가요." 나는 마침내 어떤 조그만 개울에 놓인 일차선 정도의 폭을 가진 시멘트 다리 난간에 털썩 주저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신을 벗어 보니 어느새 뒤꿈치가 벗어져 있고, 발가락 끝도 발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몇 발자국 앞서 가던 그가 멀거니 그런 나를 보다가 문득 몽롱한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말했다. "발이 상했군. 그렇다면 개울가로 내려가 찬물에 좀 담그는 게 좋겠소." 그리고 가볍게 나를 부축하여 개울가로 데려갔다. 가을이라 해가 단 두 시경인데도 손을 넣어 보니 물은 이상스레 찼다. "양말을 벗고 한동안 푹 담가요. 한결 나을 거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도 신을 벗고 바지를 걷은 뒤 개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정감 어린 말이라 이제 말문이 열렸는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말은 그것으로 끝나고 이내 그는 마치 혼자인 것처럼 돌 틈을 헤어 다니는 피라미를 쫓는 일에 정신을 팔았다. 그러다가 물이 너무 차가워 오래 견디지 못하고 발을 빼낸 내가 그 발을 다 말리고 양말을 다시 신고 있을 무렵에야 내 곁으로 다가와 발을 닦으며 말했다. "배고프지 않으시오? 목도 마를 테지." 그 말을 듣고 나니 정말 그랬다. 아침을 설친데다 그동안 물 한 모금 마신 일이 없어 그 두 가지가 다 들어맞았다. "그래요." "조금만 더 가요. 저 굽이만 돌면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데가 있을 거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앞장을 섰다. 쉬고 나면 한결 나을 것 같았지만 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빤히 보이는 길이 천리길인 양 여겨지며 벗어진 뒤꿈치와 물집 잡힌 발끝이 이제는 뚜렷한 고통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괴롭게 했다. "꼭 무슨 행군훈련 같군요." 내가 약간 원망스런 기분이 되어 그렇게 물었다. "설마 의도적인 커리큘럼(敎科課程)은 아니겠지요? 고통연습 같은......" "아니, 그저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는 거였소." "그런데 선생님은 별로 무얼 생각하고 계신 것 같지도 않은데요?" "생각이란 언제나 순간적이오. 명상이라든가 묵상 또는 산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구체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니오. 많은 부분은 그저 좋은 생각을 얻어내기 위한 환경의 조성일 뿐 실제는 우리가 원했던 결론을 얻어내는 것은 결국 어떤 순간이오. 선(禪)의 경우도 화두(話頭)라는 게 있긴 하지만, 그 긴 시간은 대부분은 오히려 마음을 비우는 데 있다고 들었소." "하지만 나는 지금 발이 아프고 다리가 무겁고, 배는 고프고 목은 마르고-- 이런 생각들뿐인 걸요." "그것도 생각의 좋은 환경이 될 수 있지. 지금 같은 상황을 경험한 것이 몇 번이나 되오?" 그러고 보니 하나씩 따로 떼어서는 모두 경험해 본 적이 있는 고통들이지만 한꺼번에 그 네 가지를 겪어 본 일은 철이 들고는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도 끊임없이 상기되는 생각의 주제를 따로 가진 채는. 그러나 나는 대답 대신 그에게 물었다. "그럼 언제나 생각할 것이 있으면 이런 식으로 해요?" "중요한 결단이 필요할 때는 특별한 사고(思考) 환경을 만드는 수 가 있소." "이상한 습관이시군요." "왠지 그래야만 내가 내린 결론이 신뢰가 가는 탓이오." "그러나 그건 선생님의 방식이잖아요?" 거기서 나는 다시 길가의 자그만 시멘트 기둥에 걸터앉았다. 한우(韓牛) 사육 시범농가인가 뭔가가 쓰여진 기둥이었다. 내가 드러나게 걷는 것을 괴로워하자 그도 약간은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많이 괴롭소?" 그렇게 물은 그는 한동안 주위를 둘러보더니 어디선가 수종(樹種)을 알 수 없는 나무지팡이 하나를 주워 왔다. 나는 왠지 그보다는 그의 든든한 팔에 의지하고 싶었으나 내가 그 지팡이를 여러 가지 구실로 받지 않아도 끝내 팔은 내밀지 않았다. 그가 말한 마을에 도착하니 벌써 세 시가 넘어 있었다. 개울에서 그곳까지 오 리도 안되는 길을 한 시간 가까이나 걸린 셈이었다. 말은 안해도 그 마을 역시 그에게는 기억에 있는 모양이었다. 시외버스가 서는 바람에 커진 삼십 호 정도의 동네였는데, 허름한 식당이 하나 있었다. 중화요리와 한식을 겸하는 술집 겸 식당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벗어 던지기 힘든 짐이 무엇인지 아시오?" 음식이 되기를 기다리며 마주앉은 골방에서 그가 앞뒤 없이 그렇게 물었다. 무엇보다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는 편안함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던 나는 그 돌연한 물음이 얼른 이해되지 않아 되물었다. "그게 뭔데요?" "자기 스스로 진 짐이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남이 지운 짐은 부당하면 벗어 던져버릴 수가 있소. 그러나 스스로 원해서 진 짐은 설령 그것이 부당하더라도 던져버릴 수가 없는 법이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갑자기가 아니라-- 여기까지 걸어오는 도중에 생각한 것들 가운데 하나요." 그런 그의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엄숙한 빛까지 떠돌았다. 나는 직감으로 그 말이 우리와 깊이 연관된 말이란 걸 느꼈으나,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게 그토록 중요한 생각이었어요?" "그렇소. 나뿐만 아니라 두 사람 모두에게." "왜요?" "그건 말하지 않겠소. 어두운 진실이오." 그런 뒤 그는 몇 번이고 캐물어도 기어이 대답하지 않았다. 지저분한 한식보다야 낫겠지 싶어 시킨 우동은 그가 화제를 바꾸어 십칠판 년 전의 그 마을을 얘기할 무렵에서야 들어왔다. 예측한대로 몹시 허기져 있지 않고는 먹지 못할 정도의 음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달게 그릇을 비운 뒤 반주로 청한 고량주를 따랐다. 만족스럽고 평안하기 그지없는 자세였다. "꼭 이곳에 와서 값싼 우동을 먹고 고량주를 마시는 게 목적의 전부였던 사람 같군요." 그런 그의 만족과 평온이 왠지 못마땅해진 나는 우동 가락만 건져 간신히 허기를 면한 채 젓가락을 놓으며 그렇게 비아냥거려 주었다. "그래요. 나는 지금 몹시 편안하오." "엉뚱한 취미군요." "취미가 아니라 가난하게 자란 이들의 습성이오. 그들은 피로와 거친 음악과 값싼 옷을 입고 있을 때가 언제나 편안한 법이오." "어쩌면 벼락출세를 한 사람의 어줍잖은 회고 취미일지도 모르고......" "입이 맵군. 사실 나는 지난 몇 년 간 부의 단맛을 즐길 기회가 있었소. 하지만 그 단맛은 언제나 거북스런 단맛이었소." 그때 마침 안주로 청한 잡탕이 들어왔다. 그는 잠시 나와의 대화를 중단한 채 음식을 날라 온 아줌마에게 물었다. "양평으로 나가는 막차가 몇 십니까?" "여섯 시 십 분이에요." 아줌마가 그렇게 대답하자 그는 시계를 보았다. 두 시간 남짓 뒤였다. "나는 여기서 나가 다시 좀 걷다가 길가에서 버스를 타고 싶었는데......"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싫어요. 이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겠어요." 나는 걷는 괴로움보다도 돌아간다는 말에 다급함을 느끼며 그렇게 말했다. 너무도 이 하루를 그의 감상에만 맡기는 것 같은 불만과 함께, 아직 내가 묻고 싶던 말 그 어느것 하나 시원스레 해결을 보지 못했다는 게 떠오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몇 번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그럴 줄 알았소. 그럼 여기서 쉬면서 차를 기다려야겠군."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무렵부터 쏟아지기 시작하는 졸음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어제 늦도록 잠을 설쳤고, 또 오늘은 무리하게 먼 길을 길어 피곤한데다 빈속을 갑자기 기름진 음식으로 채워 졸음이 오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방금 제법 심각한 얘기를 나누었고, 또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끄집어내려고 어느 정도 긴장해 있는데 쏟아지는 졸음이라니. 그것도 후미진 산골 주막(우리가 들어간 집은 사실 식당이라기보다는 주막이라는 말이 훨씬 잘 맞다)에 남자(이럴 때에 우리의 본능적인 경계심은 비록 그일지라도 남자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와 단둘이 마주앉은 뒷방에서......" 그도 이내 내 졸음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민망하게 터져 나오는 하품과 내려덮인 눈꺼풀을 애써 억제하고 있는 나를 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졸리는 모양이군. 잠깐 눈을 붙이시오." 그리고 술잔과 안주를 넓은 상 한구석으로 몰며 한층 부드럽게 권했다. "앉은 채로라도 잠깐만 눈을 붙이면 한결 개운할 거요. 아직 이야기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 여기 엎드려 한숨 주무시오. 그동안 나는 남은 술이나 마시겠소." 그가 그렇게 말하지 나는 더 이상 잠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다행히 송판으로 막 짠 큰 상은 충분히 넓고 튼튼해 거기서 엎드려 한숨 눈 붙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죄송해요. 내가 잠든 동안 혼자 도망치시면 안돼요." 마침내 나는 수업시간에 조는 소학생처럼 두 팔을 얹고 거기에 얼굴을 묻으며 어리광을 부리듯 그렇게 말했다. 아아, 참으로 달콤하고 편안한 잠이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무슨 따뜻하고 환한 꿈조차 꾼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내가 다시 눈을 뜬 것은 문득 방안이 너무 조용한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정말로 방안에는 그가 없었다. 혹시 하는 기분으로 몸을 일으켜 바깥을 살펴보려는데 무엇이 등뒤로 툭하고 흘러 내렸다. 그의 헐렁한 웃옷이었다. 그제서야 열린 방문으로 내다보는 그는 탁자들이 몇 놓여 있는 바깥 홀에서 먼지 앉은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기보다는 조용한 방심으로 보였다. 술병이 비어 있는데도 얼굴은 별로 취한 것 같지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적어도 한 시간을 잔 것 같았다. "거기서 뭘 해요?" 그는 방을 나온 내가 신발을 꿰면서 그렇게 물었을 때야 그 고요한 방심상태에서 깨어났다. "음, 그냥 밖을 보고 있었소." "주인이 이상하게 생각하겠어요." "그렇소. 나갑시다." 그가 내 손에서 웃옷을 받아들며 그렇게 말했다. 처음 잠에서 깨어난 뒤의 내 기분은 낮에 그가 계획하던 대로 얼마쯤 더 걷다가 도중에 차를 만나 타고 싶었다. 그러나 발과 다리는 내 기분에 따라 주지 않았다. 쉬는 동안 부르트고 벗어진 곳이 오히려 악화되어 알아보게 절룩거리지 않고서는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자청한 일이라 참고 걸으려는데 그가 원인 모르게 환해진 얼굴로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지, 다음 버스로 양평으로 나갑시다. 거기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는 거요." "생각은 다 하셨어요?" "대강 몇 가지는 명백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소." 그러는데 저쯤에서 버스가 오는 것이 보였다. 우리의 대화가 다시 시작된 것은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였다. 일요일이라 좌석권을 구할 수가 없어 기차를 포기한 우리가 운좋게 서울로 돌아가는 빈 택시 하나를 만나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된 때였다. 어느새 저물어 오는 창밖을 내다보던 그가 앞뒤 없이 불쑥 물었다. "희원이는 사랑이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것으로 생각하나? 아니면 비도덕적으로 생각하나?" "둘 다겠죠." 그가 내 이름을 부르고 말을 낮추는 것이 전에 없이 가까운 느낌을 주는 것에 묘한 기쁨을 느끼며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것이오." "세상에는 부도덕하고 추악한 사랑도 많지 않아요?" "그건 사랑과 성을 혼동한 결과요. 물론 성은 사랑의 중요한 구성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는 할 수가 없지." 거기서 나는 당돌하게 물어보았다. "그럼 성은 본질적으로 도덕적인가요 비도덕적인가요?" "그거야말로 둘 다일 수 있지. 자기 정화나 창조의 성향 못지않게 부패와 탐닉의 성향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것도 사랑의 요소로 들어올 때는 대개 부도덕한 쪽으로 작용하는 것 같아. 우리가 추악한 사랑, 부도덕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대개 그것에 포함된 부도덕하고 추악한 성과 사랑 자체를 혼동한 경우일 거요." "반드시 그렇게만 잘라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조금만 떨어져서 바라보면 명백하오. 이를테면 금지된 사랑을 하더라도 거기에 추악한 성만 끼여들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 부도덕성을 비난하지 않지. 그러나 허락된 것이라도 거기에 추악한 성이 끼어들면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게 되는 법이다. 그렇지, 좋은 예가 있소. 조르주 상드의 경우 흔히 무세와의 사랑을 비난받고 리스트와의 사랑은 아름답다고 말하여지고 있어. 한 쪽은 성이 끼어든 대신 한 쪽은 끼어 있지 않은 거요." "그렇게 사랑과 성을 칼로 베듯 구분하는 것은 지난 세기의 이성론자(理性論者)들이 꾸며낸 주관적 환상이 아닐까요? 이미 시효가 지나버린 낡고 불합리한 설교가 아닐까요?" "내가 보기에는 사랑과 성을 동일한 것으로 혼동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불행한 미신인 것 같아. 프로이트 같은 사람의 과장과 번식기가 아닌데도 사철 성을 즐기는 인간의 호색(好色) 근성이 야합하여 만들어 낸 편의주의적 미신...... 아마도 그 강력한 미신에 대한 지성의 마지막 저항이 지드의 '좁은 문'일 거요." 그 말을 듣자 나는 문득 그가 한 세기를 눌러 산 기인(奇人) 또는 이제 막 지성(知性)의 걸음마를 시작하여 몇 권의 오래된 철학서적으로 무장하고 나선 열아홉의 소년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말은 기이하다거나 설익은 느낌보다는 강렬하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우리의 만남에서 이따금씩 보여 주던 그의 이해 못할 행동을 이해하게 될 통로 하나를 찾아낸 느낌이었다. 거기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그게 선생님이 말씀하신 사랑이에요?" "그렇소." "그러면 왜 그렇게 힘들여 도망치려 하세요?" "애초부터 우리는 도덕적일 수 없다는 단정 때문에." "다시 돌아온 것은요?" "내 비겁과 소심에 대한 모멸감, 희원에 대한 맹목적인 열정을 억제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 그리고-- 어쩌면 가장 큰 이유가 될는지 모르지만-- 무모한 애착, 이게 내 젊음에 주어진 마지막 축복일지 모른다는 데서 오는......" "근간에 또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뭐예요?" 나는 비정한 심문관처럼 계속하여 캐물었다. 그 뻔뻔스러움과도 다를 바 없는 용기와 자신은 어디서 생겨난 것이었는지. 될 수 있으면 담담하게 얘기하려고 애쓰던 그도 거기까지 몰리자 차츰 목소리에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실수하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하지만...... 또 똑같은 어리석음의 반복이었어. 그래서 다시 일로 도망칠 궁리를 해 보았지. 실제로 지난 열흘은 밤낮없이 맹렬히 일했소. 저 바닷가의 산장에서보다 더욱. 그런데 실패하고 말았어......" "도대체 뭣 땜에 그랬어요?" 그는 말을 듣는 순간 '맥베스' 공연을 보러 갔던 밤이 떠올랐지만 나는 여전히 시치미를 떼고 묻기만을 계속했다. 그도 내가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난번 연극 보러 갔을 때, 아마 희원에게도 그날 밤의 일이 예사롭지는 않았을 거야." "뭐 말이에요?" "그 앞뒤 없는 몰두. 만약 어느 한쪽만 상대에게 정신이 팔려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나도 그처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눈 뻔히 뜨고 그 많은 현수막과 포스터와 심지어는 매표구의 공연 안내까지 보지 못했던 거요." "그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어요?" "내가 바닷가에서 돌아올 때 자신에게 양보한 것은 로맨스까지였지. 다시 말해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로맨스와 추악한 성으로 오염된 스캔들과의 경계선을 내 마지막으로 로맨스와 퇴각선으로 결정한 거요. 또 처음 얼마간은 그것을 위해 자기 절제에도 자신이 있었지. 그런데 그날 밤으로 나는 자신을 잃어버렸어. 그전까지 열등감처럼 믿어 온 것 가운데 하나는 희원에게는 내가 별로 대단치 않은 존재라는 단정, 이를테면 희원이는 그저 장난으로 연못에 돌을 던지는 아이고 나는 거기서 맞아서 죽을 지경인 개구리 같은 처지일 거라는 추측이었지. 어쩌면 나는 소극적인 행동에 가두어 놓은 가장 큰 힘이기도 했는데, 그게 그날 밤 깨어져버린 거요. 그리하여 자기 절제에 대한 자신이 없어지자 나는 다시 가혹한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지. 내 마음속의 한 목소리로 속삭였어. '도망쳐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닥쳐올 고뇌와 번민으로부터 멀리.' 라고. 또 다른 목소리는 말했어. '싸워라, 지금까지 너는 언제나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쳤어. 이번만은 싸워 얻어라. 그것이 짐이면 벗어 던지고 벽이면 허물어버려라.' 라고 나는 물론 처음의 목소리에 충실하려고 했지. 그러나 이미 말한대로 안됐어. 그래서 이 길을 나서고 싶었던 거요. 벗어 던지고 허물어 버릴 결단을 얻고 싶었소." "그래 얻으셨어요?" "아니, 또다시 보름 전으로 후퇴했소. 벗어 던지고 허물기보다는 차라리 도망치는 쪽이 쉬울 것 같아......" 그러면서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표정이 얼마나 애처롭게 느껴지던지 내가 거의 무시되어 있는 그의 마지막 말에 내 마음속에 희미하게 일던 반감은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저두 스캔들은 싫어요." 나는 공연히 그를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되어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잠시 그의 눈길이 쏘듯 내 얼굴에 머물렀다. "이젠 희원이 차례야. 무엇 때문에 일을 여기까지 끌고 왔지? 어째서 내가 힘들여 도망치려 할 때마다 오히려 훼방을 놓았지?" "저두 선생님과 같은 사랑을 하고 싶어서요." 나는 앞뒤 재지 않고 나오는대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 놓고 보니 아무래도 너무 성의 없는 대답 같았다. 뒤이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내 진심의 일부를 그에게 내보이게 된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실은 아무것도 그렇게 까다롭고 심각게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저 선생님이 좋고 만나는 것이 즐겁다는 것뿐, 만약 어떤 일이 생긴다 해도 그건 그때 일이 아니겠어요?" "자기 앞의 삶이야." "그렇다고 모든 것이 자로 재듯 계획되고 예정되어 있어야 해요? 닥쳐올 고통이나 번민까지도 미리 헤아려 괴로워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자 그는 입을 다물며 다시 저물어 오는 창밖으로 눈길을 보냈다. 나도 차츰 무게를 더해 오는 그의 말들을 되새기느라 입을 다물어 잠시 차 안은 사려 깊은 운전사 아저씨가 나지막하게 틀어 놓은 카 스테레오의 바이올린 선율만 가득했다. 그 뒤 그는 곧 평온을 회복해 화제를 바꾸었지만, 두 사람 모두 마음속으로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탓인지 대화는 계속 겉돌기만 했다. 여기서 기록할 만한 것이라면 겨우 서울이 가까워지면서 내가 한 농담과 집 앞에서 헤어지면서 그 농담을 받던 그의 말 정도랄까. 우리들의 대화가 겉돌기 시작하자 드디어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 오는지 그는 덕소를 지나면서부터 조금씩 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쏟아지는 졸음 가운데서 어쩌다 고개가 내 쪽으로 떨구어지거나 차체가 쏠리는 바람에 자신의 몸이 내 몸에 닿기라도 하면 깜짝깜짝 놀라 눈을 뜨는 식이었다. 시골 주막에서의 달콤하고 평온한 잠을 생각하고 까닭 없이 미안해진 나는 그런 그의 머리를 가만히 당겨 내 어깨에 기대게 한 뒤 놀라 눈을 뜨는 그의 귀에 장난처럼 속삭여 주었다. "그냥 주무세요. 이건 추악한 성(性)이 아니에요." 그러자 더 이상 거부하지 않고 잠이 든 그는 우리 집 앞 골목길에 내려서야 그 말에 대답했다. 갑자기 두 손으로 내 머리를 감싸 쥐더니 양볼에 재빠르게 가벼운 입맞춤을 한 뒤 모험에 성공한 소년처럼 의기양양하게 말했던 것이다. "이것도 추악한 성은 아니오. 그럼 잘 있어요." 10월 3일 월요일. 연휴가 되어 하루종일 집에서 푹 쉬었다. 세상은 밝고 평화롭구나. 10월 9일 일요일. 어떤 특정한 인물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을 이토록 사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어떻게 직장에서의 일을 해치웠는지. 그리고 바깥 세상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주일이 지나갔다. 기억나는 것은 다만 몇 편의 옛날에 쓴 시들을 매만졌다는 것과 함께 어저께 그를 만난 것뿐. 그러나 앞의 일은 순수한 창착이 아니라 가필과 감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그리고 뒤의 일은 지난 주일의 일기처럼 별 대단치도 않은 일에 장황을 떨게 될까 여기에 쓸 수가 없다. 서른 살에 자기의 독신 아파트에서 의문의 소사체로 발견된 잉게보르크 바흐만은 노래했다. '추락하는 이는 이 날개를 가진다.......' 내가 요즈음 느끼는 것은 그 날개다. 솟아오르는 이의 그것보다 더 아름답고 황홀한 날개, 그러나 끝내는 삶의 진창에 부러진 채 처박힐 그 날개. 10월 12일 수요일 직장의 일에 너무 등한한 것 같아 나를 스스로 단속하기 위해 거기에 관해 일부러 일기에 쓴다. 우리 일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달 치의 특집기획기사다. 이번 호는 '고부-- 영원한 물과 기름 사인가?'이다. 내가 맡은 부분은 시어머니를 모시는 일에 대한 미혼 여성의 반응인데 조사 결과 장남은 장가 가기 힘든다는 항간의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앙케트와 직접 질문에 대한 대답의 80%가 시어머니를 모시는 일에 직접적인 거부반응으로 보이거나 핵가족제도의 장점을 들어 간접적인 거부를 표시하고 있었다. 원래의 편집 방침은 비록 이념적으로만이라도 지지 내지 긍정하는 쪽이 절반 가까이 될 걸로 보고 양쪽의 주장을 대비시켜 본다는 거였지만, 이건 뭐 너무도 상대가 되지 않는 게임이었다. 직접 간접으로 긍정을 표시한 쪽도 대개는 하나의 이상론이란 전제 아래서의 긍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시부모 모시기를 거부하는 쪽은, 배우면 배운 대로 무식하면 무식한대로, 또 잘났으면 잘난대로 못났으면 못난 대로 나름의 이론과 주장은 풍성한 데 비해 긍정하는 쪽은 이론과 주장까지도 빈약하고 초라했다. 대개는 효라든가 예 같은 전통적인 관념의 답습이고, 좀 현대적인 근거랬자 '자녀 교육상'이든가 '육아(출산, 질병 포함)에 대한 나이 든 시어머니의 지식과 경험' 또는 '서구식의 핵가족이 가지는 표면적인 문제점에 대한 대안으로서' 정도였다. 그 바람에 시어머니 모시기를 긍정하는 쪽의 논리적인 근거를 보강하는 역할을 내가 떠맡게 되어 오늘은 거꾸로 이미 남의 시어머니가 된 저명 여류들을 찾아다녔다. 철없는 미혼여성 쪽에서 논리적 근거를 구사는 것보다는 그런 여류들의 반이론을 한번 더 뒤집어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요즈음은 또 애 그리 젊은 며느리를 잘 이해하는 현대적인 시어머니가 많은지. 아무리 교양있고 서구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하지만, 어차피 전통적인 사회에서 살아온 만큼, 장남과 딴살림을 하게 된 데는 약간의 불만이나 서운함이 있음직도 한데도 한결같이 그 편이 오히려 편해서 자발적으로 살림을 내보냈다는 대답이었다. 거기다가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상당한 불화의 소문을 듣고 찾아갔는데도 완고한 구식 여자로 알려지면 누가 세금이라도 물릴까 봐 그러는지 자기를 마다고 살림을 나간 며느리들을 오히려 편들기조차 했다. 그런 면에서 이 문제는 끝나버린 것과 다름없었다. 파괴하려는 쪽의 주장이 턱없이 강경한 것 못지않게 지켜야 할 쪽의 포기는 어이없을 정도로 체념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맡은 일은 해야 할 입장이어서-- 라기보다는 일종의 반발로-- 유도심문하듯 이끌어 내 본 것이 다음과 같은 주장이었다. '계약은 이행되어야 한다. 계약은 이행되어야 한다(Pacta sunt sarvanda)라는 법 격언은 로바법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법에서도 공사를 불문하고 유지되어야 하는 기본 바탕이다. 그런데 부양의 측면에서 본다면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일종의 계약관계로 파악될 수 있다. 다만 그 개인이 흔히 보는 계약과 다른 것은 그것이 일정한 격식의 문건을 갖추지 않았고, 또 당사자간의 동의 내지 승인도 명시적이 아니라는 점뿐이다. 그렇다면 그런 계약은 어떤 이유에서 어떤 내용으로 언제 이루어졌는가? 그 계약이 필요한 이유는 자식과 부모 모두가 그 성장과 노쇠에서 갖는 인간으로서의 약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그저 불리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지나치게 긴 성장 기간을 가지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보다 몇 배의 몸집을 가진 소나 코끼리도 태어난 지 이 년 정도면 최소한 자신의 먹이를 구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는 데 비해 인간은 그 열 배는 자라야 먹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 또 인간의 신체가 갖는 특징은 지루할 만큼 긴 노년이다. 문명의 발달로 지난날의 천적들이 없어짐에 따라 자신의 먹이를 구할 수 없을 만큼 노쇠한 때로부터 생명이 끝날 때까지는 십 년 또는 그 이상의 긴 세월다. 노쇠로 방어력이 떨어져 다른 천적의 먹이가 되건, 자연적인 수명이 짧아서이건, 다른 동물들은 자신의 먹이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노쇠와 죽음 사이가 잘해야 일년인 데 비해 인간의 그같이 긴 노년은 역시 불리하기 짝이 없는 조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즉 비정상적으로 긴 유년과 노년 때문에,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계약이 자식과 부모간에 필요하게 된다. 부모가 자식의 긴 유년을 양육해 주는 데 대한 반대급부로 자식은 부모의 긴 노년을 봉양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우리가 계약당사자의 지위를 얻는 것은 어떤 특정한 부부의 몸을 빌려 태어나는 때이며, 부모의 청약은 양육을 시작한다는 행동으로 이루어지고, 우리의 낙약은 그 양육을 받아들임으로써 묵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부양청구권이 하나의 어엿한 청구권일 수 있는 것은 실로 그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부모의 양육 아래 성장한 자식이 그 부모의 노년을 모시지 않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계약을 무시한 것이 된다. 물론 이 주장에 대해서는 모시지 않아도 생계비는 지급한다는 편법이 생겨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계약위반의 책임은 여전히 면할 길이 없다. 그 생계비란 대개 자신들의 생활비에 비하면 훨씬 낮을 뿐만 아니라 애정이라는 중요한 부관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배푼 것은 대개 자신들이 누리는 것 이상이었고, 거기다가 그 어떤 것에도 견줄 바 없는 사랑이 더해져 있었다. 또 며느리는 시부모에게 양육받은 바 없으니 부양할 의무도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부모를 부양할 책임에서 면제된 것을 다른 여자를 맞아 살 오빠나 남동생에게 그 책임을 맡은 덕분이다. 대신 그 부분을 시부모에게 함으로써 일종의 상계가 이루어지도록 고안된 것이 이 나라의 관습법이므로, 그 상계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계약불이행일 수밖에 없다. 애정의 전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달리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우리의 사랑이 선택적으로 적용될 수도 있다. 특히 그 대상이 자신과 경쟁적인 것일 때는 오히려 질투라는 이름으로 가장 격력한 미움으로 그걸 대하기도 한다. 때로 지나치거나 엉뚱한 때도 있지만, 이 경우 그런 우리의 반응은 대개 용서받거나 최소한 이해는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해 주는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의 사랑은 거의 무조건적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남편의 친구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남편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며, 남편을 신임하는 직장의 상사를 고맙게 여기는 것도 그가 남편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의 여러 가지 사랑 중에서 가장 큰 사랑을 남편에게 베푼 그의 부모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정당하게는 이해될 수 없다. 만약 배은망덕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 10월 15일 토요일. 퇴근 후 어느 전망 좋은 찻집에서 보낸 그와의 두 시간. 그러나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10월 16일 일요일. 이런 그의 소년 같은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알까? 어제 헤어질때 그는 내게 조그만 책 한 권을 주었는데 오늘 무심코 넘기다 보니 빠알간 밑줄들이 그어져 있는 곳이 눈에 띄었다. 피히테의 책에서 인용된 구절인데, 좀 장황하지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여성은 자기 자신을 양도한다고 고백할 수 없고-- 그리고 이성적인 존재란 모든 것이 의식에서 일어나는 한에서만 존재하므로 여성은 그녀 자신의 충동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성적 충동에 자기 자신을 양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충동에 복종함으로써 자신을 양도할 수 있으므로, 이 충동은 남성을 만족시키려는 충동의 성격으로서 여성에게 나타난다. 이 행동으로 여성은, 다른 이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녀의 궁극적인 목적-- 이성의 위엄--을 버리지 않고서는 그녀 자신의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수단으로 되긴 하지만 그녀는 고귀하고 자연적인 충동--사랑--에 의해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위엄을 계속 갖고 있게 된다. 따라서 사랑이란 성적 충동이 여자에게 일어나는 행태이다. 그러나 사랑은 이상적 사고에서가 아니라 감정의 결과로서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단순한 성적 충동은 사랑이라고 불려질 수 없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인간성의 모든 고귀한 것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야비한 언어의 남용이 되고 만다. 실제로 내 생각엔 지금까지 이야기되어져 온 것 이외는 어떤 것도 사랑이라고 불려져선 안될 것 같다. 남성은 원래 사랑을 느끼지 않고 단지 성적 충동만을 느낀다. 그리고 남성에게 있어 사랑이란 원칙적이 아니라 '전달된' '파생된' 충동이다. 즉, 사랑스런 여성과의 접촉을 통해 발전되는 충동이란 이야기다. 게다가 그것은 여성에게서와는 아주 다른 형태를 띤다. 모든 자연적 충동 중 가장 고귀한 사랑은 단지 여성 속에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그리고 다른 많은 사회적 충동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단지 여성을 통해서만 인류의 보편적 소유물이 된다. 성적 충동은 여성에게서 이 사랑이라는 도덕적 형태를 부여받는다. 왜냐하면 그 원형태로서의 성적충동은 여성의 모든 도덕성을 없애 버리기 때문이다. 사랑은 자연과 이성이 가장 가깝게 화합한 점이다. 사랑은 자연이 이성과 연결되는 유일한 연결쇠인 곳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자연적인 모든 것 중에서 사랑이 가장 우수한 것이다. 도덕법은 다른 사람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사랑은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희생하기조차 하는 것이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타락하지 않은 여성에게 있어선 성적 충동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단지 사랑만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사랑은 남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여성의 자연적 충동이다. 그것은 확실히 시급하게 만족되기를 요구하는 충동이지만 만족은 그 여성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남성의 만족이고 여성에게는 감정적 만족만을 줄 뿐이다.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사랑이고 사랑받는 것이다. 단지 여성이 희생하고자 느끼는 그 충동으로 인해, 이성적이 되기 위해서 가져야만 하는 자유나 능동성의 성격을 받게 된다. 아마도 이야기를 꺼꾸로 하여, 남성에게 있어 여성의 요구를 만족시키려는 비슷한 충동이 있다고 하는 말에 부조리를 느끼지 못하는 남성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남성은 그러한 요구가 여자에게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고 그것의 도구로 자신이 사용된다면 그의 영혼은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치욕을 당했다고 느끼지 않는 적이 없으리라. 따라서, 성적 결합에 있어서의 여성 또한 어느 면으로든 남성의 대상으로서의 수단은 아니다. 그녀는 자기 감정을 만족시키려는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그녀는 단지 육체적 만족에 관한 한에서만 남성의 목적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 아직도 그런 구절에 감탄해 줄을 그어 가며 읽는 사람이 있다니, 그리고 그걸 남에게 권하려 들다니. 10월 19일 수요일. 엄마가 다시 그에 대한 의심을 시작한 것 같다. 저녁상 머리에서 조심스레 묻는 폼이 그걸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요즈음도 민 선생님과 자주 만나니?" "네." 쉬운대로 그렇게 대답했던 나는 이내 당황하여 정정했다. "아니, 일주일에 한 번쯤요." 그래 놓고 나니 더욱 당황스러웠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것이 자주 만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라면 그 사이는 절로 예사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나는 내 말을 지워버리기라도 하듯 재빨리 되물었다. "그런데, 왜 그래요? 보고 싶으세요?" "석 달이 가깝도록 통 전화가 없어서....... 그땐 이따금씩 집으로도 전화하지 않았니?" 그러는 엄마의 표정에는, 너와 농담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라는 말이 쓰여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 바람에 농담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던 내가 머쓱해져 있는데 다시 엄마는 살피는 눈길로 나를 보며 물었다. "정말로 그때 그 부탁이 그렇게 기분 상할 부탁이었니?" "그건 아닐 거예요. 별로 전화할 일이 없었겠죠. 뭐." "그래도 이상하다. 혹 너하고 무슨 일이 있었니?" "엄마도 참...... 별걸 다 의심하세요. 물이나 좀 주세요." 나는 그렇게 얼버무리며 수저를 놓고 일어섰지만, 까닭 없이 낯이 달아올라 스스로 민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엄마의 본능적인 예감은 무언가 우리 사이의 심상치 않은 변화를 느끼고 있다....... 10월 20일 운수 좋은 날 또는 불쾌한 날 다음 주일에 있을 여기자 세미나에 이번에는 내가 가게 되었다. 얼핏 들으면 세미나에 나가게 된 걸 무슨 행운처럼 말하는 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주관도 후원도 겉으로는 꽤 딱딱해 보이는 사회단체나 협회이고 일정도 그대로라면 빡빡한 편이긴 해도 우리 편집실에서는 재작년 그 모임이 처음 생긴 이래 위로휴가로 여겨질 만큼 갈 만한 출장이 되어 있었다. 우선 그 장소가 명승지이고, 숙식이 일류 관광호텔인데다 세미나 자체의 참석 여부에 대해서는 거의 통제가 없는 편이어서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 일주일 전부를 사적인 관광여행으로 돌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래 올해는 얼마 전에 결혼한 선배 차례였는데, 그녀가 사표를 낸 바람에 일찍 나에게 차례가 온 것이었다. 장소가 이미 두 번이나 수학여행을 가 본 적이 있는 속리산이어서 약간 서운했지만, 일주일이나 성가신 도회와 일에서 벗어나 단풍 속에서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역시 행운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일에 쫓김이 없이 옛시조들을 매만지기에는. 그런데 오후에 한동안 부드럽게 개선되었던 미스터 박과의 사이가 다시 악화되어버렸다. 발단은 퇴근길에 우연히 만나게 된 박이 지나가는 말로 물어 본 것이었다. "보부아르 잘 읽으셨어요?" "네?" "'위기의 여자' 가져가신 걸루 아는데." 그제서야 그 책을 읽던 날 느꼈던 의혹을 떠올렸다. 또 이 친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걸 묻는 박의 저의를 알 수 없어 되물었다. "별로였어요." "호오, 보부아르가 별로라...... 그건 어째서지요?" "남편을 빼앗긴 중년여자의 넋두리라는 게 우선 그리 매력적인 이야기일 수 없는데다, 어쩐지 보부아르의 숨은 상처를 내보이는 것 같아서." "보부아르의 숨은 상처라......?" "정신적인 결합의 허망함 같은 것, 아니 지성의 공허 같은 것. 물론 이것은 그 글이 많든 적든 보부아르의 체험에 의지했다고 가정할 때에 한에서지만......" "그래도 그 넋두리 자체에는 절실함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더욱 그녀의 지성이 감정에 패배한 것 같아 안쓰러웠어요. 또 버림받은 중년여자의 한과 눈물이 내게 그렇게 실감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항상 그녀의 안타고니스트를 될 가능성은 있지 않아요?" 박은 애써 표정 없는 얼굴로 이야기를 끌어 가고 있었지만, 나는 거기서 박의 저의를 모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그 책을 내 책상에 놓아둔 것은 바로 그 두 가지를 넌지시 경계하기 위해서였음이 분명하다. 하나는 정신적인 사랑의 허망함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한 중년여인에게 입힐 수 있는 불의의 타격-- 모두 민 선생님과 나를 겨냥하고 있을 것들이었다. 이제는 전과 같은 악의에서만 그러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박의 저의를 읽게 되자 나는 갑자기 앞뒤 없이 화가 났다. "박영목씨는 다 좋은데, 꼭 한 가지는 늘 잊어버리는군요." 마음속에 화를 감춘 내 빈정거림에 박이 알 수 없다는 듯한 눈길로 건네 보았다. "......?" "나는 이제 머지않아 스물여덟이 되는, 금년으로 육 년째 직장생활을 해 세상 일에는 어지간히 닳고 닳은 소위 노처녀라는 것 말예요." "그건 오히려 너무 잘 기억하는 편입니다." "그럼 민 선생님 일에 괜한 신경 쓰지 마세요. 좋은 동료가 할 수 있는 일로는 제게 너무 부담이 돼요." 그러자 박은 머쓱해 하는 대신 한결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모든 일은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영리한 여자의 매력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이 빠질 함정까지도 스스로 판다는 데 영리한 여자를 보는 우리 남자들의 불안이 있습니다. 남이 파놓은 함정에는 떨어져도 빠져 나올 수 있는 여자가 자신이 판 함정에서는 영영 나오지 못하는 수가 있거든요." 그런 박의 목소리가 얼마나 성실한지 나는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그 바람에, "절 그토록 높이 보아 주시니 눈물겹게 고맙군요." 하는 농담으로 그 일을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헤어지고 돌아서니 다시 화가 났다. 이봐요. 호의는 고맙지만 자기 앞에 놓인 삶이에요. 그쪽이나 신경 써서 만년 문청(문학청년)이나 면하세요. 10월 22일 토요일. 아무래도 이 가을을 내 생애의 수많은 가을 중에서 특히 기억될만 한 가을이 될 것 같다. 오늘 그를 만났기에 속리산에서 있을 세미나 얘기를 했더니 문득 그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말했다. "그것 참 잘됐군. 마침 구색을 갖추는 데 풍경화가 두어 점 필요하던 참이오. 나도 속리산 부근으로 가면 어떻겠소?" 그러잖아도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만 일주일씩이나 보내야 한다는 것은 좀 어떨까 생각하던 차에 그가 그렇게 물으니 뜻밖으로 기쁨은 컸다. 더군다나 그도 자기 할 일을 따로 가지고 오기 때문에 내 낮시간이 방해받을 염려도 없었다. 말은 않지만 요즈음 그가 무엇 때문인지 몹시 일에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만은 피부로 느끼고 있다. 아니, 그로 인해 방해가 되면 어때. 그와의 호젓한 여행이 된들 그게 어때...... 나는 거기서 까닭 없는 기대에 부풀어 오르며 우리가 묵게 될 호텔을 알려 주었다. 그가 언제 그곳에 오게 될는지는 모르지만 프런트에 알아보면 내 거처는 금세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10월 23일 일요일. 나는 이제 그를 설명하려 드는 부질없는 짓은 하지 않겠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를 나와 남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언어를 낭비하지 않겠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이 한마디면 그동안 내가 그를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했던 노력 또는 그에게 끌리는 나를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해명해 보려던 노력을 간단히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말 이상으로 그와 나를 더 잘 해명할 수 있는 어떤 말이 있을까. 이미 내 눈은 부시어 그의 영혼과 육체의 한 단면밖에 볼 수 없게 된 지금, 그외에 다른 것은 그것이 화려한 차장이든 족쇄이든 상처이든 조금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지금, 그는 어김없이 나를 사랑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나 또한 그를 기다리기 위해 지난 세월을 허송해 왔음을 의심 없이 믿고 싶은 지금...... --내일 떠날 간단한 짐을 꾸리면서 아직도 나에게 이만한 설렘과 뜨거움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10월 30일 일요일 겨울이 연상되는 흐린 날씨. 속리산에서 어제 돌아왔다. 지난 일주일은 끝이 약간 애매한 무슨 긴 꿈만 같고, 지금껏 구체적인 이 땅의 지명으로 알고 있었던 속리산은 이제 한 추상으로 변해 버렸다. 그가 그곳으로 온 것은 내가 도착한 다음날인 화요일이었다. 첫날 형식적인 회합이 끝나자 나와 한 방을 쓰게 된 Y사의 김형숙이란 기혼녀는 함께 법주사 경내나 돌아보자고 했지만 나는 네 시부터 숙소로 돌아와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러나 저물어도 그는 오지 않았다. 저녁을 먹은 뒤에도 몇몇 안면 있는 여기자들이 부근에 바람이라도 쐬고 오자는 권유를 일을 핑계로 뿌리치고 방안에서 그의 연락을 기다렸으나 끝내 연락이 없었다. 어쩌다 하루쯤은 늦을 수 있거니 생각은 해도 왠지 그가 오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가 몇 번인가 프런트에 전화를 해서 연락 온 것이 없는가를 묻는 걸 보고 김 여사가 말했다. "벌써 누가 오기로 돼 있수? 우리 애 아빠는 주말께나 내려와 함께 돌아가기로 했는데......" 그리고는 다시 넌지시 물었다. "여기까지 따라오는 것으로 흔한 연인 사이는 아닌 것 같구...... 약혼자유?" 그 물음을 받고서야 나는 비로소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뇨. 좀 아는 분인데 마침 이 부근에 일이 있어 오시는대로 연락 준다고 하셨거든요." 나는 그렇게 둘러댔지만 마음속으로는 떳떳하게 그의 이름을 댈 수 없는 일이 까닭 없이 서운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벌써 십 년째로 접어든다는 결혼생활로 그런 쪽에 호기심이 무디어진 탓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남의 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성격인지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내가 이 여가를 틈타 힘을 쏟아 보려는 시고(詩稿)들이나 곧 그곳에 나타날 그를 위해서는 좋은 동숙자(同宿者)를 만난 셈이었다. 그의 전화는 이튿날 세 시쯤에 왔다. 전날 내가 안달을 부린 탓에 프런트에서 특별히 회의장까지 전화를 연결해 준 것이었다. 종업원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수화기를 드니 그의 밝은 목소리가 내 귀에 하나 가득 들어왔다. "이제 도착했어. 어제는 일이 있어 어물거리다가 아침에야 겨우 출발할 수 있었소." 그 다음부터 금요일까지 내가 서울에서 상상한 것 못지않게 즐거운 관광여행이었다. 형식적인 세미나를 마치기 무섭게 절 경내를 뒤지거나 마차로 관광코스를 돌며 어디선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를 찾아내는 것은 보물 찾기와도 같은 즐거움이었다. 절 구경하는 척 단풍감상하는 척 그를 찾는 것인데도 한 시간이 안 걸려 찾아낸 적이 없는 만큼 두 시간을 넘어 본 적도 없었다. "이 그림 속에 희원이를 넣어 주지." 수요일 날인가, 우거진 단풍 사이에 파묻힌 어떤 암자를 그리던 날 한 시간 반이나 걸려 그를 찾아낸 내게 그가 붓을 멈추며 말했다. "이미 다되어 가는 그림에 내가 어떻게 들어가요?" 벌써 잔손질에 들어가고 있는 그림을 보고 내게 물었다. 그러나 그는 가는 붓에 검자주색을 묻히며 능청스레 대답했다. "그래도 명색이 이 나라의 화단에 이름을 건 사람이오. 그 정도도 못하면 프로가 아니지." 그리고 붓을 들어 짙은 단풍 사이로 검자주의 가는 그늘 하나를 넣었다. 입으로는 농담처럼 말해도 속으로는 그 그림 속에 내가 어떻게 나타날까를 은근히 호기심으로 바라보던 나는 그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제가 어딨어요?" 계속하여 여기저기 잔손질을 하고 있는 그에게 마침내 궁금해진 내가 물었다. "여기 있지 않소?" 그는 단풍잎새 사이의 검자주 그늘을 가리키며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모든 것은 단풍잎새에 가리어지고 블라우스 상의만 틈새로 약간 내비친 것이오." "그런 게 어딨어요?" 내가 그렇게 항의하자 그는 더욱 능청을 떨었다. "그래도 대단찮은 검정 블라우스에 제왕의 색깔인 자주까지 섞어 주었는데......" 해가 진 뒤부터 열 시쯤까지는 나의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그 편에서 내가 매만지고 있는 언어들을 곁에서 보살펴 주었다. 언젠가 나는 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왜 언어를 수단으로 선택하지 않고 색채와 선을 수단으로 선택하셨어요?" 직업상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과 친숙한 나에게도 그의 어휘력과 구사력은 그만큼 비범하게 보인 탓이었다. 그때 그는 대답했다. "각기 장단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선과 색 쪽이 언어에 비해 불완전한 것 같아서." "그게 무슨 말이세요?" "우선 양으로 보면 언어는 십만의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지만 색은 기껏해야 백을 넘기 어렵소. 또 질로 보더라도 언어는 겉과 안, 정신과 육체를 모두 그릴 수 있지만 색은 언제나 선택적이며 부분적이요. 예를 들면 언어는 미인의 피부와 함께 뼈와 내장, 머리속의 생각까지 함께 그릴 수 있지만 선과 색은 언제나 그 중의 하나만 골라야 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보다 완전한 수단을 택하는 게 유리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소. 불완전한 선과 색으로 그려야 하는 진실만도 끔찍한데, 그보다 완전한 수단을 택했으면 나는 아마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오. 그런 면에서 나는 언어를 자기 수단으로 선택한 사람들의 용기와 참을성에 언제나 감탄을 금하지 못하오." 그런 그이니만치 그 도움은 내게 매우 소중했다. 그가 찾아낸 어휘가 얼마나 영절스러운지, 또는 언어적인 율동에 관한 안목이 얼마나 섬세한지 나는 이따금 시까지 그에게서 배우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런데 이해 못할 것은 그의 태도였다. 내가 구하기만 하면 자문이나 충고에 인색하지는 않아도, 어딘가 그런 그의 어조에는 마지 못해 응하는 듯한 데가 있었고, 때로는 어떤 우려나 연민이 내가 느낄 정도로 드러나기까지 했다. 금요일의 일도 발단은 거기에 있었다. 날이 흐려 일찍 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대도회의 환락가를 연상케 하는 법주사 아래 마을의 한적한 경양식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전날처럼 내 시고들을 검토했다. 보통은 두세 시간 좋게 걸리는 일이 그날따라 한시간 남짓 되자 끝내버려, 우리는 그 자리에 눌러앉은 채 간단한 식사와 함께 술을 시작했다. 내일이면 우리의 즐거운 여행도 끝나는구나 싶어 약간씩 마음이 서운해지기 시작하던 터였다. "릴케가 로댕의 개인비서를 지낸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군요." 술 한 잔씩을 비운 뒤 그의 조언에 감사하는 뜻에서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내 정감 어린 목소리가 무색할 만큼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우연이었을 거요. 내가 알기로는 릴케는 몇 달도 안돼 로댕에게 쫓겨났소." 그러자 나는 그런 대꾸가 서운하기보다는 며칠 전부터 이따금씩 의문으로 떠오르던 그의 묘한 태도가 무엇 때문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런데 선생님은 제가 요즈음 하고 있는 일을 어딘가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그건 왜예요?" "못마땅한 게 아니라 우려요." "우려라구요? 어느 쪽이에요? 시 자체예요? 제가 시인이 된다는 것이예요?" "희원이가 시인이 되는 일." 그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나 서슴없이 대답했다. "재능 때문인가요?" "아니, 그렇지 않소. 나는 시를 잘 모르기는 하지만 이 며칠간 본 것만 해도 최소한 이 나라에서 시인이라고 불리는 수천 명에 끼여 부끄러울 게 없다는 것 정도는 된다고 확신하오." "그럼 열정이나 노력 같은 것 때문인가요?" "아니오, 나는 몇 번이고 맵시 있게 깎이고 다듬어진 희원의 언어들에 은근히 감탄했었소." "그럼 뭐예요?" "바로 그 시인이란 말이 암시하는 불긴한 운명-- 특히 여자에게 더욱 가혹한 삶을 요구하는 예술가란 운명......" "......" "이건 지극히 비예술적인 생각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 며칠 동안 줄곧 사포나 조르주 상드, 브론테 자매, 버지니아 울프 또는 황진이의 외롭고 쓰라리며 때로는 오욕스럽기까지 했던 삶을 생각하고 우울했었소." "반드시 그들의 삶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또 설령 그들이 그러했다 해도 똑같은 반복이 이 시대에까지 이어진다고......" "종교나 정치, 철학과 마찬가지로 언어를 수단으로 삼는 문학의 몇몇 행복한 경우를 제외하면 근대까지의 모든 예술은 대개가 천민 취급을 받아 왔소. 그리고 그런 현상은 특히 다른 사회권력과 야합이 어려운, 진정으로 자기 목적적인 예술에서 더욱 뚜렷하오. 쉬운 예로 음악을 들어봅시다. 오늘날의 우리는 모짜르트나 슈베르트 자장가를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여기고 있지만, 기실 그것은 약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의 편안한 궁정 생활로 곧잘 불면증의 경향을 나타내던 대공들의 수면제에 불과했소. 또 그처럼 대단해 보이던 요한 슈트라우스의 성공이나 그의 왈츠는 어떤 것인지 아시오? 왈츠는 반동정치의 폭정과 압제에 신음하는 오스트리아 국민의 의식마비제였고, 슈트라우스의 화려한 성공은 그 왈츠를 장려한 메테르니히가 자기의 풍성한 식탁에서 던져 준 한 도막의 고깃덩이에 불과했소. 변한 것이 있다면 고대의 리라나 하프나 피아노나 바이올린으로 바뀐 것과 노예들의 헐렁한 통옷이 궁정악단의 맵시 있는 연마복으로 바뀐 것뿐이오. 현대에 이르면 외견상으로는 일단 사정이 나아진 것처럼 보여지오. 그러나 자세히 따지고 보면 지난 시대보다 예술의 지위가 본질적으로 크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소. 천민의식에서 벗어난 것은 사회전반에 걸친 신분의 폐지로 천민집단이 없어진 덕분이지 예술 독자의 신분 상승은 아니며, 예술가의 사회적인 지위가 향상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실은 고등교육의 대중화에 따라 예술을 중요한 교양의 일부로 여기는 속물들이 늘어난 덕분일 뿐 본질적인 지위향상은 아니오. 오히려 세속적인 누림으로 보면 어떤 분야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는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대중예술이란 것이 있소. 하지만 그들의 의지하는 이른바 대중적인 인기란 것도 실은 황제조차 부러워했다는 옛 로마의 검투사들이 누렸던 인기와 크게 다를 바 없소......" "그럼 언젠가 선생님이 말한 그 부끄러움과 죄의식이란 것도 그런 것들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 "만약 우리가 사회로부터 받는 대우가 반드시 그 사회에 대한 우리의 기여도와 비례하는 것이라면, 확실히 관련이 있소." "그렇다면 그 고통스런 예술, 그 부끄러움과 죄의식의 작업을 선생님은 어째서 일생의 일로 택하셨어요?" "언젠가 이미 말하지 않았소? 나는 능동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파동적으로 '되어져버린 것'이라고" "그래도 그 '되어져버림'에는 반드시 거기에 이르는 이유가 있을 거 아녀요. 아무리 운명이라도 순수하게 피동적일 수는 없지 않겠어요?" "물론 내가 이 길로 들어선 자발적인 동기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나 그마저도 적극적인 의미를 가치추구가 아니라 소극적인 의미의 보상이오." "소극적인 보상......" "쉽게 말하자면 이 길을 걷는 것이 어떤 가치나 자기만족을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길을 걷지 않은 것보다는 덜 허망하고 괴롭기 때문이라는 뜻이오." 그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일순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아, 그 철저한 비관론, 만약 그가 감정의 과정이나 언어의 번롱을 일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길 끝에 엄연히 놓인 허무와 무의미를 냉정하게 응시하며 걷고 있는 그는 얼마나 철저한 고독의 화신일까. 그러면서도 보편의 삶과 보편의 원리들로 자신을 그토록 두껍게 감출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피나는 노려으로 얻어낸 위악(僞惡)의 결과일까. 그 바람에 잠시 대화는 멈춰지고, 나는 거의 마실 수 있는 양을 생각하지 않은 채 알코올 함량이 맥주의 세 배나 된다는 마주앙 잔을 거듭 들이켰다. 그도 한동안은 말없이 자신의 잔만 비워 댔다. 관광철이라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찬 술집 안은 왁자하게 주고받는 말소리와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한 대 피워도 되겠어요?" 내가 문득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집어 든 것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축축히 젖어 오는 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맥주 한 병이면 귀밑까지 빨개지는 내게 다섯 잔의 마주앙은 무리였던 탓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 이상하게 일그러진 웃음으로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흔히 영화 같은 데서 숙녀가 과장스레 보여 주는 재채기 같은 것은 나지 않았지만 한 모금으로 갑자기 취기가 두 배는 뛰어오른 듯했다. "무리하지 마라." 그런 내 상태를 알아차렸는지 그가 담배를 뺏어 부벼 끄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늘상 그가 주도하는 묘한 분위기 때문에 억제되어 못 한 말들이 과장되어 넋두리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내가 왜 갑자기 시인이 되고 싶어하는지 묻지 않으세요? 이미 포기하다시피 한 학생시절의 꿈이 어줍잖은 편지 한 장으로 이렇게 강렬하게 되살아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세요?" "그러고 보니 궁금하군." "모두가 선생님 때문이에요." "나 때문이라구?" "그래요. 나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싶은 거예요. 선생님도 자신의 이름과 예술을 이용해 이름 없는 처녀아이 하나를 후렸다는 의심은 받고 싶지 않으시죠? 나도 유명인사라면 사족을 못쓰는 얼빠진 여자아이로 오해받기는 싫어요." "시인의 이름을 그 방패막이로 쓴다? 어처구니없는 노릇이군. 시인 지망 이유 중에는 아주 희귀한 실례가 되겠소." 그는 될 수 있는대로 내 말을 농담으로 돌리려고 했지만, 그 표정 한 구석에는 은근한 노여움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친 김이었다. 나는 별로 거짓말하거나 과장하는 기분 없이 그렇게 떠들었다. 그러자 차츰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거두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취한 중에도 그의 표정에서 조금 전에 은근히 내비치던 노여움이 사라지고 어떤 감동이 서서히 피어 오르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이름과 세계를 가졌다는 뜻이에요. 모두가 공적으로 인정하는...... 그런데 선생님 옆에 나란히 서기 위해서 나는 그게 필요해요. 왜 안돼요? 안될 게 뭐 있어요? 프로이트라면 아주 자연스럽게 설명해 줄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일을 점점 더 극적으로 몰아간 것은 그가 조용히 술잔을 비우는 걸 따라 나도 한 잔을 더 마셔버린 일이었다. 그러잖아도 몸을 바로 하기 힘든 취기가 몇 분도 안되는 사이에 완전히 머리 꼭대기까지 닿고 귀에서는 무언가 끊임없이 윙윙거렸다. 그 마지막 잔을 말리려다 반쯤 남은 자기 잔을 엎지른 그는 한동안 말 없이 나를 건너다보더니 이윽고 정색을 하고 물었다.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희원의 사랑이란 어떤 내용이지?" 마른 섶에 불을 지르는 것과 다름없는 물음이었다. "살아 있는 것, 피와 살이 있는 것, 선생님의 것처럼 곰팡이 나는 책 속에서 나온 죽은 것이거나, 어두운 과거로 박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니에요." "그게 어떤 거지?" "이를테면, 오늘밤엔 선생님의 숙소로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따위의 사랑이죠. 하지만 선생님이 밑줄을 그어 놓으신 피히테도 승인한 성(性)이에요." 나는 무슨 뻔뻔스런 탕녀처럼 그렇게 말했다. 잠시 아연해 있던 그 표정이 복잡 미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 술집에서의 기억은 그뿐이다. 그가 무언가를 타이르듯 말하고, 반대로 나는 끊임없이 뻗댄 기억뿐, 그때 우리가 나눈 대화는 더 이상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술집을 나올 무렵 해서는 그 역시도 상당히 내 주장에 흔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꾸 술을 청해 탁자 위에 술병이 다섯 개나 쌓이던 게 기억나니까. 만약 우리가 거기에서 일어서기 직전 뜻밖에 나타난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 다음을 추측하는 것은 이틀이 지난 지금도 신선한 전율이다. 그런데 우기가 무언가 제법 의견이 일치하여 일어나려고 할 때 누군가가 우리 탁자 곁에 나타나 말했다. "이런 곳에 와 이 시각에 이런 술을 이만큼이나 마셔 대고 떠드는 걸 보니 함께 밤을 보낼 작정들은 아닌 것 같고--- 이 기자, 이제 그만 자러 가지 않겠어요?" 퍼뜩 정신을 가다듬어 올려보니 어느새 왔는지 함께 방을 쓰는 김 여사와 또 한 명 E지에 있는 여기자가 웃으며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스럽기보다는 왠지 이건 운명이구나, 하는 안도와 실망이 묘하게 섞인 기분을 느꼈다. 상당히 취해 나의 원인 모를 도발에 어느 정도 말려들고 있던 그도 문득 정신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애써 휘청거림을 감추고 서둘러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래요, 이 선생 이제 일어납시다. 동행이 있을 때 함께 돌아가는 게 좋겠소." 그리고 앞서 계산대 쪽으로 갔다. 그 돌연한 사태에 위축되긴 해도 내부에서는 여전히 무모하고 충동적인 열기로 남아 있던 내 취기 또한 일단 찬 가을바람이 부는 밤거리로 나오자 이성에게 고삐를 맡겼다. 타산이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처녀의 수치심과 나쁜 평판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맹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세차게 타오르던 그에 대한 열망을 억눌러버린 것이었다. "취한 숙녀를 맡아 걱정이었는데-- 두 분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숙소가 보이는 길 어귀에서 그렇게 말하며 자기 숙소로 돌아가는 그의 어조에는 애착이나 아쉬움의 여운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어이없던 것은 마지막 날인 어제였다. 열한 시쯤 형식적인 폐회가 있고, 전세버스로 돌아가든가 하루 더 남아 관광을 즐기든가를 선택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남는 쪽을 택했다. 술에서는 깨어났지만, 전날 밤의 그 이상한 치열함은 여전히 작은 불길로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아직도 그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그때 내 몸은 그를 받아들이기를 고집하고 있었다. 다만 이 고백을 덜 부끄럽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때 그를 원한 것은 천한 욕망이 아니라 일종의 사심 없는 소유욕 또는 간절히 필요한 확인행위 같은 것이었다는 정도일까. 그것도 밝은 햇살 아래서의. 그러나 숙소인 호텔로 찾아갔을 때 그는 없었다. "한 십 분쯤 전에 서울서 찾아온 손님 몇 분과 함께 나가셨습니다." 그게 프런트의 말이었다. 나는 로비에서 한 시간, 점심 먹으며 한 시간, 다시 다방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으나 그는 끝내 연락이 없었다. 그 지루한 기다림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작은 불길마저도 완전히 재가 되어 스러진 뒤에야 나는 서울행 버스의 매표구 앞에 줄을 섰다. 이것 또한 운명이로구나-- 이런 기분에 까닭 없이 쓸쓸해지며 시계를 보니 오후 두 시 사십오 분이었다. 참으로 허망한 이 놀이의 끝...... 10월 31일 월요일. 결국은 보냈다. 그동안의 매만진 열 편의 시를 C선생님의 잡지사가 아닌 다른 시 전문지로. 뒷날이야 어떠하건 등단만은 떳떳하고 싶다. 오늘로서 10월도 다 가지만 아직도 계절은 타오른다. 타오른다, 나도. 감미롭게 또는 허망하게. 4. 오르페의 장 11월 2일 수요일. "아무래도 그건 무슨 운명 같소." 오늘 돌아온 그에게 내가 약간 원망 어린 투로 속리산에서의 마지막날을 얘기를 하자 그가 어두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희원이가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틀림없이 그 호텔 안에 있었소. 바로 그 십 분 전까지만 해도 희원의 전화를 기다리며 내 방에 있다가 마침 커피 숍으로 불려 내려가 있었던 거요." 그렇다면 정말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럼 프런트에서 한 말은 뭐예요?" "그 사람들의 착오요. 더구나 나는 키를 맡기며 전화가 오거든 커피 숍으로 돌려 달라는 부탁까지 했소."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군요." "거기다가 더 기가 막히는 일은 그날 희원이가 나를 찾고 있는 동안은 내가 그 호텔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는 거요." "뭐라구요? 그럼 제가 로비에서 기다리는 때도 거기 있었단 말이에요?" "그렇소. 그때는 친구들과 식당 외식부에 있었지. 쓰린 속을 복국으로 달래고 있었단 말이오. 여전히 프런트에는 내가 그곳에 있다는 걸 일러 놓고." "그 다음은요?" "아무래도 속이 풀리지 않아 거기 눌러앉은 채 정종을 몇 잔 했었소. 그리고 돌아오니 꼭 십 분 전에 희원이의 마지막 전화가 왔더군." 앞뒤가 다 십분이란 시간이며, 번번이 반복되는 프런트의 착오가 꼭 누가 일부러 우리가 만나는 걸 훼방 놓고 있었던 것 같았다. 관광호텔 프런트의 실수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그를 윽박질러 보았다. "거짓말 마세요. 제가 달려들까 봐 일찌감치 피하시구선." 그러자 문득 나를 쏘아보는 그의 눈길에 전에 없던 이상한 열기가 비쳤다. "그날 내가 얼마나 열렬하게 기다렸는지 아시오? 전화만 연결되었으면 나는 틀림없이 내 방으로 희원일 불렀을 거요. 그리고 만약 희원이가 내 방으로 왔다면 나는 분명 앞뒤 없이 희원이를 안았을 거요." 목소리도 여자의 본능적인 경계심을 자극할 만큼 이상한 열정에 젖어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말은 대낮의 찻집에서 진지하게 받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 바람에 나는 가볍게 웃으며 되물었다. "어머, 선생님이 다 웬일이세요?" 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에 열중해 버린 뒤였다. 이야기의 무게를 줄이려는 나의 노력 따위는 아랑곳없이 그는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역시 그의 버릇 가운데 하나였다. "그 전날 밤, 나는 밤새도록 희원이를 보낸 것을 후회하며, 냉장고에 든 술이란 술은 모조리 비웠지. 그러고 나니 다음날은 속이 뒤집히는 듯 쓰리고 골치가 아팠소. 그리고 괴롭다 보니 더 한층 희원이가 곁에 있기를 바라게 되고...... 희원이가 묵고 있는 곳으로 전화를 내지 않은 것만도 내게는 거의 초인적인 절제였소." "그러실 것까지는 없었는데......" "나중에는 또 어쨌는지 아시오? 마지막 전화에서 돌아간다는 말을 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나는 어딘가 희원이가 나를 찾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방안에 있을 수가 없었소. 이번에는 정말로 단단히 프런트에 일러 두고 먼저 산을 뒤지기 시작했소. 둘이서 만난 곳을 모두 돌고 나니 날이 저물더군. 그래서 이번에는 부근의 술집이며 다방을 뒤지기 시작했소. 그것도 삼십 분마다 한 번씩 호텔에 전화를 걸어가며...... 이튿날 다시 찾아온 그 친구들은 오래된 원수처럼 보였고." 그제서야 다시 끼여들 틈을 찾은 나는 전처럼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친구분들이라면서요?" "친구는 무슨 친구...... 어쩌다 몇 번 술자리에 어울린 걸로 대단히 친한 채 떠벌리는 작자들이지. 어떻게 내가 거기 있는 건 알았는지." "그래도 저 때문에......" "아니, 나는 용서할 수 없소. 이건 도무지 보상받을 수 없는 피해야. 그날 밤 내가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소.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요." 그는 분개하기 시작했다. 생각할수록 화난다는 식으로 그들을 곱씹어가며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결국 나는 그의 곁자리로 가서 가만히 손을 잡으며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는 여기 있잖아요? 그 때문에 무엇이 특별하게 달라진 건 없잖아요?" 그러나 막상 그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그가 말한 운명이란 것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확실히 그와의 만남은 좋은 뜻으로건 나쁜 뜻으로건 운명이란 말을 자주 생각하게 만든다. 11월 5일 일요일. 가을도 깊어 이제는 초겨울의 날씨다. 잎 진 가로수의 앙상한 가지에 번쩍이는 무서리가 왠지 나를 쓸쓸하게 한다. 타오르는 계절의 광휘도 이제는 스러져버리고 말았는가. 그를 만났다. 갑자기 그가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나의 신선한 열정이 식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심경에 어떤 변화가 온 것일까. 11월 6일 월요일. '정신적인 순결이란 우리 시대에 널리 퍼져 있는 편의주의의 또 다른 산물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정신처럼 무방비한 것도 없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생각들을 무슨 수로 도덕적인 방향으로만 제어할 수 있단 말인가. 이웃 여인들을 음란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도 간음이라고 말한 성경의 구절을 엄밀하게 적용시킨다면 이 시대처럼 선정적이고 개방적인 문화형태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정신적 간음을 하며 지내는 셈이 된다. 다시 말하면 어두운 토굴 속에 격리되거나 백치와 같은 상태가 아니면 이미 정신적인 순결이란 있을 수가 없다. 혹 어떤 사람은 말할지 모른다. 순간적인 충동이나 얼핏 스쳐 가는 생각은 정신의 순결을 해할 수 없다고. 하나의 실천의지로 자란 것은 정신적인 순결을 해칠 수 있을 뿐, 순간적인 충동이나 스쳐 가는 생각은 능동적인 후회 또는 도덕적인 자제만으로도 해소되어버릴 수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조금더 엄밀하게 따져보면 이내 그 당착이 드러난다. 순결이란 말은 어떤 겪음 또는 당함이라는 말과 깊게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리고 또 그것은 필연적으로 일회성을 띠고 있어 치유나 회복이란 말과는 거리가 멀다. 쉬운 예로 육체의 순결을 생각해 보자. 그 상실은 어떤 일을 겪음 또는 당함이며, 치유와 회복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정신에 있어서만 치유와 회복을 인정하는 것은 어찌된 것인가. 아무리 그것이 순간적인 충동이건 스쳐 가는 생각이건 우리의 정신은 이미 오염을 겪지 않았던가. 만약 그것이 능동적인 후회나 도덕적인 절제로 치유 또는 회복된다면, 처녀막의 재생수술로 상실된 육체의 순결도 회복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보면 결국 엄격한 의미에서의 정신적인 순결이란 육체적인 순결에 비해 거의 그 보존의 가망이 없는데도 사람들이 굳이 거기에 의지하려 드는 것은, 어려움을 실천함으로써 덕성의 무게를 더하려는 의도보다는 하나의 편의주의처럼 보인다. 즉, 쉽사리 증명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정신에 의지함으로써 값싸게 내던져버린 육체의 순결을 보상하려는 의도로만 여겨지는 것이다. 물론 그런 편의주의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비자발적으로 육체적인 순결을 잃게 된 이들에게는 귀중한 위로와 격려의 역할을 한다. 정신적인 순결의 귀중함을 맨 처음 공적인 권위에 의지해 승인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성 아우그스티누스의 일부 저술도 실은 그러한 목적에서였다. 바꾸어 말하면, 고트족의 침입으로 능욕당한 로마의 처녀들이 육체적인 순결의 상실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 근엄한 성자(聖子)는 '신국'의 앞머리를 그처럼 장황한 논의로 장식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정신적인 순결에 의지하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5세기 초의 로마처녀들과는 상황을 달리한다. 거대하게 부풀어나고 복잡해진 사회구조로 전처럼 자상한 보호의 손길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못하고, 문화형태도 그 어느 때보다 거칠고 선정적이긴 하지만, 고트족(族)의 무자비한 폭행에 비교할 만한 예는 지극히 소수이다. 오히려 대다수는 값싼 쾌락적 욕구나, 경박한 호기심이나, 여자로서의 지나친 방심 또는 허술한 판단 따위로 거의 자발적에 가깝게 육체의 순결을 내던진 경우이다. 그리하여 좀더 가혹하게 말하면, 정신적인 순결이란 기껏 지난 타락이나 무분별에 대한 면죄부로 쓰이고, 때로는 추구할 쾌락에 신선감을 더해 주는 '비너스의 샘'(주:거기서 목욕을 하면 다시 순결을 회복한다는 신화 속의 샘)으로 악용되기까지 한다. 우리의 삶이 과거에 지배되어서는 안되며, 과거가 현재의 삶을 불리하게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연속적이고 성에 대한 기억은 다른 어떤 기억보다 고집스럽다. 손자까지 둔 칠순의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단 한번의 과거를 고백했다가 죽을 때까지 끝내 화해하지 못하고 외롭게 눈을 감았다가는 얘기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현대에 들어와 사회는 공공연히 배우자의 과거에 개의치 않을 것을 권유하지만, 그리고 겉으로는 모두들 거기 동의하는 체하지만, 적어도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나으리라는 것쯤은 쉽게 단정할 수 있다. 현재도 언젠가는 과거가 된다. 그리고 독신생활이나 여러 형태의 변종이 선을 보이기는 해도, 보편적인 결혼형태인 일부일처제가 가까운 날에 자취를 감추리라는 전망도 거의 없다. 거기다가 생각보다는 깊게 우리 마음속에 뿌리박고 있는 동양적인 윤리관을 상기하면 순결, 특히 육체의 순결은 아직도 우리 삶의 행, 불행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더욱 적극적으로 말하면, 정말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 한 지켜 두면 유리한 것이 우리의 육체적인 순결이다. 정신적인 순결이란 결코 면죄부(免罪符)가 될 수 없고 '비너스의 샘'으로 악용되어서는 더욱 안된다. 그 밖에 앞서와 같은 실제적인 이유 외에도, 우리가 정신적인 순결이란 말에 필요 이상 현혹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여럿 있지만,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 비논리성이다. 오늘날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물질적이고 육체적이면서도, 유독 순결만은 정신에 의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어떻게 한 편의주의 이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 같은 편의주의가 주장하는 사람의 이익 이외에 다른 무엇에 봉사할 수 있겠는가?' 혼전 순결에 관한 어떤 성직자의 의견을 간추려 본 글이다. 이달의 특집이 그것에 대한 것이어서 생각 없이 정리했는데 써 놓고 다시 읽어보니 까닭 없이 사람을 섬뜩하게 하는 글이다. 11월 10일 금요일. 사람의 심리는 정말 미묘한 데가 있다. 그가 나로부터 멀어져 가려는 노력을 보이기만 하면 나는 필요 이상 과장적인 기분으로 그를 붙잡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그가 내게 열정을 보이면 이번에는 왠지 두렵고 음울한 느낌에 젖어 한 발자국쯤 물러나게 된다. 요즈음 그는 전에 없이 열정적이다. 지금껏 종종 나를 불만스럽게 했던 근엄한 자기 절제 대신 알 수 없는 열정에 내몰리고 있는 듯해 내게 오히려 그것이 부담스러울 때까지 있다. 오늘도 그랬다. 연속 두 번째 돌아가자는 제의를 내 쪽에서 했다. 전에는 열에 아홉 그가 하던 제의였다. 만남의 양태도 그렇다. 요즘 같아서는 내가 손을 벌리기만 하면, 전에 거부했던 어떤 행동도 그가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그걸 느끼게 되니 이번에는 내 쪽에서 아무것도 원하고 싶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그에 대한 내 감정이 변한 것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런 그의 변화는 이따금씩 내게 끔찍한 기쁨이 될 때마저 있다. 여전히 그를 만나는 것이 즐겁고 그와 함께 있는 시간에 대한 기억의 비중도 그 나머지 모든 시간과 갈음할 수 있다. 그는 나의 사랑이고, 연민이고, 괴로운 운명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확실하게 얻었다는 믿음은 그 앞에서는 기쁨이지만 돌아서면 곧 우울이 된다. 그래, 우리는 결국 어디로 가는가? 이제 둘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논리로는 반드시 풀어 가지 못할 물음이 아닌데도, 거기에 대한 노력은 할 생각도 없이 막연히 자신에게 물으며 우울해 할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내 방에 홀로 돌아와 앉으면 알 수 없는 슬픔이 솟구쳐 때로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알 수 없는 일, 정말 알 수 없는 일. 11월 12일 일요일. 사랑은 반드시 고해사를 필요로 한다.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 뒤숭숭한 머리속이나 가라앉힐 겸해서 손 언니를 찾아간 것이 엉뚱하게도 그녀를 고해사로 만들어버린 결과가 되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간 뒤이긴 해도 아직 열한 시밖에 안 되었는데 나를 맞는 그녀의 태도가 이상했다. 눈가가 붉고 까닭없이 허둥대는 것이 분명 운 흔적이 있는 것이었다. 나를 맞는 그녀의 올케가 전에 없이 반가워하는 태도를 보인 것과 대조가 되는 그녀의 행동이었다. 방안에 들어가서도 급하게 치운 듯한 혼란의 흔적이 있어 내가 물었다. "언니, 웬일이야? 아침부터." 그러자 그녀도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가슴 깊이서 우러나는 듯한 한숨에 이어 흐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계집애 벌써 알아차렸구나. 하기야 철저하게 타락한 애가 숨겨봐야 뭘 하겠니?" 그러면서 다시 물기가 번지는 눈가를 손으로 가볍게 눌렀다. 그녀를 감정적인 일에는 비교적 대범한 쪽이라고 느껴 온 내게는 좀 뜻밖이었다. "철저하게 타락했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큰오빠의 말이야. 어젯밤 공장(잡지사) 친구들과 좀 마시고 열두 시가 넘어서 들어왔지. 왜 너보고도 함께 가자고 하지 않던? 작가 C 씨와 연출하는 Y 씨 팀 말이야. 제법 유쾌한 자리가 되어 그만 늦었는데-- 아침에 눈뜨기 바쁘게 큰오빠가 불호령을 내리더군. 철저하게 타락한 애라구. 거기다가 묵은 상처까지 건드리니 견딜 수가 있어야지." "묵은 상처요?" "큰오빠 친구야,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는데,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결혼해 버렸지. 그래도 계속해서 미친 듯이 좋아했어.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까지. 만약 그쪽에서 조금만 열정적으로 나왔다면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을 거야. 그러나 내가 오랜 친구의 여동생이라 정부로 삼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자신의 알량한 지위와 명예를 팽개치고 나를 신부로 맞아 갈 수도 없었지. 어느 날 홀연히 근엄한 신사가 되어 도덕과 절제의 미덕 속으로 비겁하게 도망쳐 버렸어." 그런 허심탄회한 술회가 바로 그녀를 내 고해사로 만들게 된 발단이었다. 한동안 위로라 할까, 그녀의 쓸쓸한 추억담에 대꾸하던 끝에 마음이 느슨해져버린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아직 누구에게도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이 없는 그의 얘기를 꺼내고 말았다. "놀랐어. 이 기자에게도 그런 일면이 있었다니, 나는 완연히 이성 쪽의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 이야기를 듣던 그녀가 갑자기 쓸쓸한 추억에서 깨어난 듯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잠깐 어떤 본능적인 경계심이 일었으나, 이미 내친 김이어서인지 나는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거의 남김없이 이야기해 버렸다. "자기에게 정직해. 끝까지 가 보는 거야, 이미 십 년 가까이나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내게 분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때 그가 한 번도 내게 선택의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야. 설령 결국은 후회하게 되더라도 그 기회조차 빼앗아버린 것이 분한 거야. 만약 민 화백의 사랑이 진실한 것이고 결의도 확고하다면 네가 망설일 것은 아무것도 없어. 갈 데까지 가 보는 거야. 문제가 생기면 그때 해결해도 늦지 않아." "인생은 아무 때나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너, 겁을 먹고 있구나.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것에......" "그것도 끝까지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반드시 그것들이 네 행위와 상반된다고 말할 수는 없어. 너와 그 사람 사이에 끼어들 문제라면 무엇보다도 그가 기혼자라는 것, 특히 그 아내의 존재 같은 것이겠지. 통속적으로 말하면 남의 가슴에 못박고-- 하는 것 말이야. 하지만 만약 그와 함께가 아니면 삶도 의미도 없어질 만큼 그에 대한 네 애정이 크고 진실한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질 수도 있어. 나는 교양학부에서 법학론을 들었는데, 정당방위의 예 중에 통나무 얘기가 있었지. 즉 배가 난파했을 때, 꼭 한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통나무에 두 사람이 헤엄쳐 간 경우야. 그때 둘 중에 하나가 자기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을 밀쳐 결국 그가 죽게 되더라도 그 행위는 정당방위가 된다는 거야. 입증이 곤란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누가 먼저 그 통나무를 잡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어." "하지만 그건 법률의 문제예요."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야." "그래도 법은 우리 경우를 단죄하고 있어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배가 난파된 것만큼 객관적으로 절실한 상황임을 증명할 수 없는 탓일 거야. 하지만 많은 나라들은 이미 간통을 처벌사유가 아니라 이혼사유로만 인정하고 있잖아?" 그러더니 그녀는 문득 쓸쓸한 웃음과 함께 어른스레 말했다. "하기야-- 내가 주관적인 논리로 이 기자에게 무얼 잘못 권하는지도 모르지. 얼마든지 그런 경우를 피해 갈 수 있는데도 그처럼 절실한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넣어 책임을 물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듣자 나도 갑자기 처참한 기분이 들며 더는 그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화제를 바꾸려고 해도, 한참 얘기를 하다 보면 다시 화제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는 앞으로 점점 더 비슷한 경우가 늘어날 거야. 옛날처럼 여성들이 집안에 남아 있지 않고 사회 일선으로 나오는 한...... 생각해 봐. 그것이 어떤 직장이건 직장여성이 대하는 남성 중에 기혼이 많은가 미혼이 많은가. 거기다가 종종 미혼보다 기혼 쪽이 지위와 경제적, 사회적 힘과 지식과 경험, 그리고 원숙미에서 우월하지. 미혼여성이 그들을 경원하게 되는 것은 기혼이라는 말 속에 포함된 여러 가지 도덕적 금지지만, 그것도 연애와 결혼의 분리라는 편리한 주장 때문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해. 왜냐하면 그런 금지를 어겼을 때 실질적인 제재가 오는 것은 결혼의 경우이지 연애는 아니거든. 오히려 예절바르고 즐길 능력을 갖춘 기혼자 쪽이 연인으로서는 더 나을지도 모르지. 내가 조금 전에 이 기자에게 갈데까지 가 보라고 한 말 뒤에는, 안되면 연애의 선에서 적당히 손 씻고 돌아설 수도 있지 않느냐는 계산도 숨어 있었을 거야. 이건 좀 다른 얘기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가끔씩 지금까지와는 같은 결혼형태는 앞으로의 사회와 맞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어쩌면 어느 사회학자의 주장처럼 평생 두 번을 기본으로 결혼형태가 실제로 행해질 것 같은 기분이야. 그 학자의 구상은 이랬어. 한 여자를 기준으로 보면 그녀의 첫번째 결혼은 20대 초반에 20년 연상의 남자와 해야 한다는 거야. 남자가 그 정도의 연령이면 삶을 즐길 경제적, 정신적인 여유나 학식, 교양, 원숙미는 물론 성적인 기교까지 젊은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기에 필요한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는 거야. 그렇게 한 이십 년을 살다가 남자는 모든 것을 젊은 아내에게 넘겨주고 죽거나 양로원으로 가고, 그 사이 중년이 된 여자는 이번에는 20년 연하인 남자와 결혼하지. 이때 여자는 처음 20년 연상의 남자가 그녀에게 해주었던 모든 것을 20년 연하의 남자에게 베푸는 거야. 그리고 다시 20년이 지나면 모든 것은 젊은 연하의 남편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양로원으로 가거나 죽는다는 게 대강의 구상이야. 지나치게 도식적이긴 하지만, 반드시 한 엉뚱한 사회학자의 몽상으로만 볼 수는 없는 그 무엇이 있어......" 그것이 다시 이부자리를 펴고 누우면서 하는 그녀의 말이었다. 그 말이 진정이라면 그녀야말로 지금껏 내가 알아 온 것과는 다른 면모를 수더분한 언행 속에 숨겨 온 셈이다. 11월 14일 월요일. 방금 눈발이라도 뿌릴 듯 쌀쌀하고 흐린 날씨. 요즈음 들어 만난 빈도로 보아서는 충분히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오늘도 연락이 없다. 내 마음속의 주저와 혼란이 그에게 전해진 것일까? 아니면 또 어디서 무슨 소년 같은 몰두와 괴로움에 빠져 있는 것일까? 11월 15일 화요일. 기어이 찔끔거리는 가을비, 그는 오늘도 소식이 없다. 11월 16일 수요일. 오늘 또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선을 보았다. 기어이 나를 스물여덟의 노처녀로 넘기지 않겠다는 것이 그녀의 결심인 듯했다. 하지만 어떡해요, 엄마. 이제 겨우 대여섯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그 남자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걸. 삼십 분 동안 내가 한 말은 겨우 묻는 말에 성의 없이 대답한 것 뿐인 걸. 다음에 한 번 더 만나자는 그 남자의 요청을 내가 거절하지 못한 것도 건너편 탁자에서 안절부절 못하면서 우리 쪽을 보고 있는 엄마 때문이었는 걸...... 11월 18일 금요일. 이제는 잡지 일도 진심으로 싫증이 난다. 내 운명이 부엌과 안방에 갇혀 늙을 수 없는 것이라면 좀더 뜻 깊고 영구적인 일자리를 갖고 싶다. 잡지를 만드는 일은(특히 이 나라의 여성잡지는) 대중용의 소모품 생산과 다를 바 없고, 그곳의 여 기자란 젊어 한때 스쳐 갈 일자리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 나이에 다시 새로운 변신이 가능할까? 그것도 상승 쪽으로-- 여전히 그의 소식은 없고. 11월 21일 월요일. 그는 이 도시에 없다. 오늘 큰맘 먹고 그의 집에 전화를 했더니 벌써 사흘째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의 아내인 성싶은 여자의 대답이었다. 화구도 가지고 나가지 않았고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고 대답하면서도, 그 목소리에는 조그마한 떨림이나 어둠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묘한 기분을 일으켰다. 애써 태연하게 직장과 이름을 밝히고 전화를 끝냈지만, 송수화기를 놓기 바쁘게 그의 일이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일일까? 정말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11월 23일 수요일. 오늘 심 기자에게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그가 파리의 어떤 권위있는 화랑에서 초대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와는 달리 그쪽에서는 화랑이 문학에 있어서의 좋은 출판 역할을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신문에서 더러 그와 비슷한 초대전 기사를 본 것 같아 내가 담담히 대꾸했다. "그건 더러 있는 일로 아는데......" 심 기자의 호들갑스런 어조에 대한 은근한 핀잔의 뜻이 감추어진 나의 대꾸였다. 그에게서 이미 몇 번인가 그런 가능성에 대해 들은터라 그 소식이 내게 더욱 당연하게 들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심 기자의 반응은 의외로 강했다. "언니, 도대체 몰라서 그러는 거유? 일부러 그래 보는 거유?" "뭘 말이니?" "언제 '르 아르'같은 갤러리에서 우리 작가가 개인전을 가진 적이 있었어요? 그것도 초대전 형식으로." "그가 전에 했다는 건 뭐냐?" "그건 출품이 거의 자유로운 아시아 작가 중심의 합동전이에요. 그가 몇 편 출품해 금상을 하나 타긴 했지만 세계 화단에서 볼 때는 대단찮은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럼 '르 아르'인가 뭔가 하는 정도의 화랑에서 초대전을 갖는 건 그가 처음이란 말이니?" "거의 그런 셈이에요. 지금 미술계에서는 굉장한 화제예요." "신문에서 자주 그 비슷한 경우를 본 것 같은데......" "제가 듣기로는 아니에요. 그곳에 눌러앉아 오랜 기간 노력한 끝에 엇비슷한 삼류화랑에 그림을 걸게 되었거나, 동양화가라는 어떤 특이함에 의지해 괜찮은 화랑 한구석을 차지한 일은 있어도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그쪽 평단의 호평이라는 것도 항상 '후진국의 작가치고는......' 하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게 보다 정확할 거예요." 그 방면에 대한 심 기자의 지식이 어느 정도 믿을 만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거의 한 해 동안이나 가까이서 보고 지낸 그에게서 일어났다는 게 내게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놀랍지 않으세요?" 신나게 떠드는 자신에 비해 내 대꾸가 너무 대담한 게 이상한지 심 기자가 문득 나를 살피며 물었다.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아." "예언자가 그 고향을 떠나서는 존경받지 않음이 없느리라-- 언니는 그분과 너무 가까운 곳에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하지만 그때 나는 이미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난 여름 바닷가 산장에서의 마지막날 밤 그가 한 말이 갑자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그림들이 나를 그곳으로 불러 주기를 바라고 있어...... 명백히 불행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이 사랑에서 도망치고 싶은 거야......" 그러자 그가 지금 이 도시에서 잠적한 것도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또 어딘가 낯선 곳에서 홀로 자기와 대면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나는 그런 생각에 잠겨, 무언가를 묻다가 대답이 없자 틀어진 심 기자가 이런 말을 남기며 자리를 뜰 때에야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역시 감격이 있긴 있군요."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때 그의 말이 분명 과장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겪은 바로는 그가 자신의 예술을 그런 사사로운 감정의 처리를 위해 이용할 사람 같지 않았고, 또 거기서 생산된 작품이 구미인의 높은 심미안을 만족시킬 수 있을 리도 없다. 거기다가 그 뒤 그는 솔직하게 내게 돌아오지 않았던가. 스캔들과 로맨스의 분기점까지란 단서를 달고, 방식도 지극히 구식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슴지 않고 사랑한다는 말을 쓰지 않았던가. 그런데 새삼 그를 괴롭히는 무엇이 있어 다시 스스로와 대면하러 떠났을까. 당연히 함께 기뻐해야 할 때에, 어째서 나에게 말 한마디 없이 홀연 자학과 같은 고독과 침묵 속으로 숨어버렸을까. 11월 25일 금요일. 멀리서도 내 마음을 읽고 있었다는 듯 오늘 그의 편지가 왔다. 남해안의 어떤 도시에서 왔는데, 단숨에 써내려간 듯 몹시 흘려 쓴 글씨였다. '희원' 오늘로써 닷새째 남쪽 바닷가를 따라 난 도로를 걷고 있소. 원래는 한 보름쯤 이렇게 걸으며 헝클어진 머리속을 정리했는데 이제 그만둬야 할까 보오. 나는 너무 오래 도회의 안락에 젖어 있었고, 더 이상은 젊음을 내세우기에도 쑥스러운 나이가 된 것이오. 이미 발은 하루 삼십 리를 걷기 힘들 만큼 부르트고, 이 나이에 이 여행이 어울리지 않는지 간첩신고로 조금 전의 일까지 두 번이나 여행가방을 털어 보여야 하는 봉변을 당했소. 아무래도 생각은 이쯤에서 정리해 보는 것이 옳은 일 같소. 언젠가 나는 스스로 지게 된 짐의 무게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자학과도 같은 이 길은 바로 그 짐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여정이오. 희원을 알게 된 뒤부터 점차 견딜 수 없는 무게로 나를 짓눌러 오는 그 짐, 그러나 스스로 원해서 졌기에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벗어 던질 수 없는 그 짐으로부터 벗어날 계기가 생겼기 때문이오. 며칠 전 파리로부터 한 장의 초청장이 바로 그 계기요. 나는 이번에 떠나면 어떤 형식으로든 적어도 삼 년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또 그 기간이면 충분히 내 삶의 한 전환을 계획해 볼 수도 있소. 다시 그 짐 얘기로 돌아가리다. 그동안 우리는 참으로 많은 얘기를 했지만 마음 잘 맞는 교활한 음모자들처럼 딱 두 가지만은 언제나 피해 왔소. 나의 가정과 희원의 미래였소. 그런데 이제 그것을 얘기할 때가 온 것 같소. 희원의 미래는 희원의 몫으로 남겨 둔다 하더라도 최소한 내 몫인 아내와 아이들의 얘기는 해야 할 때가 이른 것이오. 내가 아내를 만난 것은 미술대학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반은 실의에 차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때였소. 아내는 그 무렵 내가 몸을 의탁하고 있던 간판집 딸이었는데, 내가 그런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은 바로 그녀가 별로 배우지 못한 간판집 딸이란 것과 예술에 대한 본능적인 외경심뿐 내 그림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해와 애정이 없다는 점이었소. 나는 유식한 이들의 터무니없이 까다로운 주문이나 예술에 대한 천박한 이해와 애정이 얼마나 자주 좋은 예술가를 망쳤는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오. 거기다가 분명 길고 괴로울 것 같은 내 빈곤과 무명을 잘 견뎌낼 인종의 미덕은 끝내 그녀를 내 아내로 맞아들이게까지 설득했소. 나는 이전에 이미 도회의 이른바 교양 있고 많는 배움을 거친, 그러나 무명을 참는 데는 허약하고 빈곤에는 거의 공포까지 품는 속녀들에게 몇 번이나 시달려 본 적이 있기 때문이오. 과연 아내는 그런 기대를 조금도 저버리지 않았소. 자신은 이름없는 장인으로 늙어버렸지만, 사위의 재능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치 믿음을 가지고 있던 장인이 물려준 간판점과 약간의 재산을 가망 없는 습작으로 날려버는 그 칠 년 동안도, 생계라도 구한답시고 교원자격검정을 준비하던 그 혹독한 가난의 일년도, 그리고 겨우 잡은 교편을 이 년도 안돼 팽개치고, 다시 기약 없는 습작으로 뛰어들 때조차도, 그녀는 불평 한마디 없이 참아 주었소. 그것나 언제나 존경과 두려움을 잃지 않은 채 말이오. 오히려 결혼하고 오래잖아서부터 불만을 품기 시작한 것도 내 쪽이었소. 중졸의 학력이 주는 답답함,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본능적인 외경 이외에는 거의 무지나 다를 바 없는 예술에 대한 이해 같은 것들이었지만, 이미 그 모든 것을 각오하고 진 짐이라 그렇게 무거운 것은 아니었소. 그 다음은 아이들-- 이제 나는 이 세상에서 아내와 나밖에 모르는 비밀 하나를 털어놓아야겠소. 원래 아내는 건강한 몸으로 내게 왔소. 고의이든 아니든 부모의 버림을 받아 고아로서 혹독한 성장기를 보낸 사람에게는, 그리고 세계와 인생에 비관적인 견해를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출생을 비극의 시작으로 단정하는 경향이 있소. 나도 그 예에 따라, 진정으로 내 삶에 자신을 가지게 될 때까지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소. 그 바람에 아내는 몇 번인가 내키지 않는 인공유산을 했는데 그게 그만 잘못된 모양이오. 결혼한 지 오 년 만인가 점점 삭막해지는 가정을 위해 어렵게 아이를 가질 결심을 했을 때 아내의 몸은 이미 불임의 상태가 되어 있었소. 그래서 어떤 영아원에서 삼칠일도 안 지난 핏덩이를 데려다 기른 게 큰아이요. 그리고 터울에 맞추어 데려온 것이 둘째아이였소. 둘 다 아직 살기가 어려울 때 데려와 때로 그 아이들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괴로움을 겪게 될 때도 있었지만, 역시 스스로 진 짐이어서 한 번도 견디기 힘든 적이 없었소. 실제 나는 그 두 아이를 눈 한 번 부릅뜨지 않고 길렀었소...... 하지만 그 저주롭던 빈곤과 무명에서 벗어나기 사작하면서부터 그들에 대한 배덕(背德)이 내 마음속에 자라갔소. 이른바 이 나라 문화계의 명사가 되어가면서 속인들이 던져 준 푼돈으로 고상하고 세련되게 꾸며 줄 수 있는 아내의 몸과 어울리는 정신을 나는 원하게 되었고, 부황한 성공에 우쭐해져 이런 세상도 한번 살아 볼 만하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진실로 내 피를 받은 아이도 갖고 싶어졌소. 그림에 대한 맹목적인 열정에 억눌려 있던 천민 근성이 드디어 깨나기 시작한 것이오. 이따금씩 나는 악몽에서 깨어나듯 놀라 그런 자신을 반성해 보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들에 대한 배덕은 자라만 갔소. 그리하여 이제는 그 짐이 내가 스스로 원해서 진 짐이며, 내 힘으로는 결코 벗어 던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들은 더 견디기 힘든 짐으로 변해 버렸소. 그리고 그런 변화의 원인 가운데는 희원이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겠소. 내 비정을 탓하지 않는다면, 자칫 내게 유리한 입장을 허락하는 법률적인 상식도 내 배덕을 격려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임을 아울러 고백하오. 그런데 이제-- 내게는 그 배덕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오. 이미 말했듯이 나는 이번에 떠나면 적어도 삼 년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또 그 정도의 기간이면 마음먹기에 따라 그들을 한꺼번에 내 어깨에서 벗어 던져버릴 수도 있소. 아니,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이 같은 기회를 얻고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소. 하지만 실천의 결단은 쉽지 않소. 그 어떤 논리가 있어 스스로 선택해서 진 이 짐을 홀가분하게 벗어 던질 수 있도록 나를 설득할 수 있단 말이오? 무엇이 배은과 흡사한 내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단 말이오? 어둡고 답답한 방안에서 사유에 지쳐 이 길을 떠났던 것이지만, 닷새가 지나도록 아직 나는 어느 편으로든 위로와 격려가 될 만한 생각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소. 어차피 벗어 던질 수 없는 짐일 바에는, 차라리 지난날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질 수 있는 도덕적 열정과 예술에의 탐닉만이라도 회복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이쪽은 나의 일이오. 내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도 지금 내가 빠져 있는 이 격렬한 싸움에 응원을 요청하거나 위로와 격려를 받고자 하는 뜻은 전혀 없소. 다만 희원이가 혹시라도 지금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시간의 중요성을 모를 것 같은 우려에서이며, 그리하여 닥쳐올 오랜 이별이 우리가 다시 만나기 위한 세월의 제단에 바쳐야 할 한 희생이든, 아니면 우리의 지난날을 앞으로의 삶과 기억에서 지워 없애기 위한 길고 쓰라린 노력이 되든 그때의 희원이 겪게 될 당황과 혼란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서요. 언젠가 희원이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미래란 그저 유예된 현재이건, 달리 희원의 마음속에 그려진 어떤 것이 있건 반드시 지금 내가 빠져 있는 이 힘든 싸움을 참고로 삼아 주시오. 그럼 이만,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시오. 그래도 희원을 만난 것은 내 삶에 흔치 않은 축복 가운데 하나였음을 나는 믿소. - 1980년 11월 23일 민'- 편지를 다 읽은 뒤의 내 마음은 착잡하였다. 우선 충격이었던 것은 지난 봄 어떤 잡지의 화보에서 훔쳐보았던 그의 가정이 뜻밖으로 안고 있는 어두운 그늘이었다. 내게 언뜻 질투와도 흡사한 감정을 느끼게 했던 그 외형적인 평온과 화목 뒤에 숨어 있는 상처와도 같은 진실. 그 다음 나를 당황시킨 것은 그의 문면에 밴 심각함이었다. 도대체 그런 심각한 결단이 왜 필요한 것일까. 그것도 내가 그 중요한 원인이 된다니, 내가 언제 무엇을 그에게 원했단 말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혼란시킨 것은 그가 일깨워 준 미래라는 말이 주는 없던 충격이었다. 사실 나라고 해서 미래를 그저 유예된 현재라고만 안일하게 생각해 온 것은 아니지만 막상 그로부터 일깨움을 받자 까닭 없는 막막함이 일었다. 그 바람에 늦도록 잠을 설치면서도 더 이상은 쓸 만큼 정연하고 조리있게 떠오르는 생각이 없다. 밤 2시. 11월 25일 금요일. 결국 우리가 고안해 낸 가장 훌륭한 사랑의 귀결이란 결혼밖에 없는 것일까. 그가 빠져 있는 그 참담한 고심은 기껏 그 같은 통속적인 귀결로 우리를 이끌기 위한 준비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싫다. 그런 통속적인 귀결은 정말로 싫다. 사랑은 그저 사랑으로 있으면 안되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사회의 제도와 도덕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랑은 없는가. 11월 27일 일요일. 어째서 모든 사랑 이야기는 결혼 아니면 죽음과 이별로 끝나는 것일까. 어째서 모든 사랑은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해지는가. 아름답지 않으면 추악해지는가-- 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11월 30일 수요일. 친구여. 쓸쓸히 한가롭게 지내던 나는新春文藝에 당선되어 詩人이 되었다. 국제정세나 증권시세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전한 地位를 나는 얻었다. 티끌과 먼지 속에 앉고 누워서 쓰고 읽고 사랑하였으나 끝내 아무것도 버리지는 못했던 시절, 친구여 나는 말했다. 모든 女子의 몸을 거슬러 올라 물결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서 칡넝쿨 얽힌 언덕을 넘어 그리운 하늘가에 나는 간다고...... -서종택의 <흙이나 말리면서>에서 이 시인처럼 신춘문예는 아니지만, 오늘 내가 시를 보냈던 S지에서 연락이 왔다. 사진과 추천소감을 가지고 편집부로 한번 들러 달라는 내용이었다. 며칠째 혼란되고 음울한 기분으로 일찍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엄마가 내민 그 편지는 처음 그동안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이런 식으로 시인이 되어도 되는 것일까-- 솔직히 나는 그런 망연한 물음에 빠져 편지를 건네준 후 줄곧 걱정스런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길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참지 못한 그녀가 나직이 물어 왔을 때야 얼른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니?" "엄마, 나 이렇게 해도 되는 거예요?" 나는 무어라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해 그렇게 말하면서 편지를 내밀었다. "안될 일을 그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연락을 했겠니?" 조용히 읽고 난 엄마가 담담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나는 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럼 어떻게 써서 보냈니?" "C 선생님께서 권하길래 전에 써 두었던 걸 몇 편 손보아 보냈을 뿐이에요." "그럼 기쁘지 않단 말이니?" "부끄러워요. 두려워요......"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제서야 엄마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나는 기쁘다." "어째서요?" "네가 앞뒤 없이 기뻐하지 않는 걸 보고." "네?" "좋은 시인이 되거나, 적어도 다시는 쓰지 않게 되겠지." 그리고 한참 있다가 덧붙였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여자가 시사(試詞)에 찬란하면 창기(娼妓)의 본색에 가깝다는 말을 듣곤 했다. 하지만 엄마는 한때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다. 네가 시를 쓰려는 걸 이해야 못하겠니? 어쨌든 축하한다." 하지만 지금이 새벽 세 시인데도 나는 겨우 원고지 석 장의 등단소감을 쓰지 못했다. 그저 끊임없이 머리속을 맴도는 생각은 다만 내가 뜻으로 엄청난 일을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이제부터야말로 지난 불성실과 근거 없는 자만의 톡톡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는 것. 12월 1일 목요일. 그렇다, 나는 지금껏 너무도 터무니없는 일에 내 젊음과 재능을 낭비해 왔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밑바닥부터 겸손하게 성실하게 공부해 가고 싶다-- 열 번은 넘게 고쳐 쓴 등단소감과 사진을 S지에 보냈다. 12월 3일 토요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지금부터 준비를 해서 내년에 대학원으로 진학하면, 어차피 부엌과 안방의 사람, 남편과 아이들의 전유물로 나를 훈련시키지 못했을 바에야 내 삶을 그런 형태로 가꾸어 보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어쩌면 나도 이런 내 계획을 기뻐할지 모른다. 피차에 자기 일을 가지고 부담 없이 만나는 길도 있을 것이다. 그와 의논해 봐야겠다. 그런데-- 그는 도대체 어디서 무얼하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가. 12월 5일 월요일. 신문 문화면에 그에 관한 기사가 났다. 대개 심 기자가 한 말과 비슷한 내용에다 출국일자를 내년 정월 중순으로 밝히고 있었다. 이제 한 달 남짓한 셈이다. 그걸 읽자 이대로 영영 헤어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다급해지며 하루종일 안절부절 못했다. 그가 있던 곳을 알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달려가고픈 심경. 지금 어디 있어요?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든. 이대로 도망쳐서는 안돼요. 12월 6일 화요일. 건성이었지만 약속은 약속이라 얼마 전 본 김이라는 남자를 만났다. 몇 마디 하기도 전에 금년을 넘기지 않도록 하자는 말을 했다. 속으로는 어이가 없었지만, 말하는 품이 너무나 진지하고 성실해서 더 이상은 그런 사람에게 시간을 낭비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바람에 나는 솔직히 내 계획을 털어놓았다. "실은 내년에 대학원으로 진학을 할까 싶어요. 지금 준비 중이에요." 그러나 그는 별로 주저하지 않고 받았다. "잘됐군요. 고등교육을 받은 여자들이 결혼했다고 해서 가정에서 썩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죠. 그 점은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나는 그의 구혼에 대한 완곡한 거절의 뜻으로 진학문제를 꺼냈던 것인데, 그는 결혼의 조건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 바람에 나는 당황하여 대답했다. "그냥 놀이삼아 졸업장이나 따놓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가능하면 어떻게라도 대학에 남아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요." "더욱 좋지요. 앞으로의 사회는 아무리 부부라도 각기 자신의 일을 가지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겁니다. 저의 부모님들도 기꺼이 도와 주시리라 믿습니다."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김은 그렇게 한술 더 떴다. 오히려 잠시 말문이 막힌 것은 나였다. 그러나 이내 김의 가풍이 엄하다고 들은 것을 언뜻 떠올리고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시(詩)도 지킬 수 있는 한 지키고 싶어요. 아무리 너그러우신 부모라도 며느리가 시집 오자마자 시인입네 뭐네, 하며 집 밖을 쏘다니는 건 좋아하지 않으실 텐데요." "아니, 귀중한 재능입니다. 실은 저희 집에는 문과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요. 아버님은 반평생을 중고등학교 과학교사로 지내시다가 이제 겨우 교장이 되셨고, 형님은 의사, 나는 장사꾼, 아우는 공대생-- 이런 식이죠." 그런 김의 표정에는 조금도 과장을 하거나 꾸며 대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좀 답답하고 짜증스럽기는 해도 그리 화가 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래서 불필요한 설명을 하면서도 내 목소리는 조금도 굳어지지 않았다. "제 말뜻은...... 그게 아니라-- 혼자 그 모든 것을 해 보겠다는 뜻이에요. 이미 부엌과 안방으로 되돌아가기는 어려울 만큼 저는 오래 나돌아다닌 셈이죠. 그럴 바에야......" 하지만 그가 내 의도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내 말이 저기쯤 왔을 때 김이 빙긋이 웃으며 내 말허리를 잘랐다. "저도 말씀하시는 뜻을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결혼을 하신 뒤에도 충분히 그런 것들을 추구할 수 있으리란 뜻이죠." 그러니 그 정도로는 결혼을 거부당할 핑계는 안된다. 마음속에 감추고 있는 진정한 이유를 말해 다오 라는 투였다. 성실하고 진지한 어조 뒤에 숨은 뜻밖의 완강함이었다. 그 말에 갑자기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고 까닭 없이 위축감에 빠진 나는 거의 사정조로 말했다. "어쨌든 당분간은 결혼 같은 걸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여기 이렇게 나온 것도 집에서 걱정하는 걸 덜어 주기 위해서였어요. 이해해 주세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김도 그 일로는 더 추근대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이왕 시킨 차는 마시고 가야지요. 불가에서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옷깃 한번 스치는 것도 전생에 삼천 년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는 삼만 년의 인연 쯤은 될 걸요." 그렇게 말하면서 화제를 바꾼 김은 차를 다 마시고 헤어질 때쯤 이렇게 덧붙였다. "결국 이걸로 마지막이 되는 셈이지만-- 어쩐지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결코 그렇게 될 리는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상하게 가슴속에 여운을 남기는 말이었다. 12월 7일 목요일. 그가 왔다. 만나기만 하면 따져 보고 싶던 일들, 퍼붓고 싶던 비난-- 그런 것들이 초췌한 그의 모습을 대하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눈물이라도 쏟을 듯한 반가움만 남았다. 고뇌로 깊게 가라앉은 눈과 드러나게 적어진 말수가 내 그런 돌변을 한층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 바람에 나는 전에 없이 서둘러 찻집을 나오며 말했다. "가요. 남산 중턱에 좋은 술집을 하나 봐두었어요. 벽 한 면이 온통 유리로 되어 있어 서울의 야경이 꽤나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에요." 아마도 내가 앞장서서 술집으로 가자고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오늘은 별로 취하고 싶지 않아. 어디 좋은 음악이 있는 곳이 있으면 차나 한잔 더 들도록 해요." 그러다가 내가 시인으로 추천받았다는 것과 그 때문에 의논할 게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가벼운 식사와 음료를 마시면서도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라면 그리로 갑시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은 탓인지 다행히도 그 카페는 별로 붐비지 않았다. 그 덕분에 우리는 힘들이지 않고 전망이 좋은 곳에 반휘장을 드리워 만들어 놓은 특별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별로 기뻐해 주시지 않는군요. 제가 시인이 된 거."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말없이 벽유리 밖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내가 짐짓 야속하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 벽유리에서 눈을 뗀 그가 한동안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히려 안쓰럽게 생각해. 앞으로 어떻게 그 이름을 지키게 될지......" "또, 또...... 걱정마세요. 이제부터 정말로 시작할 거예요. 내가 얼마나 굉장한 계획을 세워 놓고 있는지 아세요?" "굉장한 계획?" "대학원으로 진학할 작정이에요. 좀 늦었지만 아직 불가능하지는 않아요. 석사과정이 끝나도 공부는 계속했으면 해요. 가급적이면 대학에서 어떻게 자리를 얻어서, 여기자, 그것도 시원찮은 잡지사의 여기자에 삶을 걸기에는 좀 뭣하지만 학문과 시라면 한번쯤 삶을 걸어 볼 만한 것도 같아요." "결혼은?" "그게 뭐 대수예요? 이미 삶을 건, 다른 것이 있는데......" 그러자 그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결국 결혼에 대치할 만한 일자리로 시와 학문을 찾아낸 셈이군." "왜, 그래서는 안되나요?" "나는 시도 학문도 잘은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이 무슨 감상적인 도피처나 사적(私的)인 방편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오. 또 그래서는 이룩될 수도 없고......" "왜, 제게는 학문과 예술에 대한 신선한 열정이 솟아나서는 안돼요?"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돌연스럽지 않소?" 그때 주문한 음식이 날라져 와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식사를 했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내가 씹고 있는 것이 어떤 종류인지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세찬 반발에 휘몰리고 있었다. 나도 그걸 알아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길밖에는 환하고 넓은 길이 없잖아요? 지금처럼 우리가 나란히 걸어갈 수 있는 길이......" "그래, 그것이 희원이 그동안 구상해 본 미래였소?" 그도 별로 식욕이 나지 않는지 야채 몇 점을 집는 둥 마는 둥하고 포크를 놓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요." 나도 냅킨으로 입을 닦으면서 도전적으로 말했다 "제 값을 치를 만큼 치르고 얻어낸 결론이에요." 그러자 갑자기 그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돼." "자기 앞의 삶이에요." "그래도 거기에는 내 그림자가 어른거려. 물론 희원은 스스로 확신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착각일 뿐이오. 그런 출발로는 아무 곳에도 이를 수 없어. 후회하게 돼." "물론 제 동기에 불순한 것이 있긴 해요. 하지만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거기서 나도 드디어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다른 어떤 길이 있어요? 선생님께 부인과 이혼하고 절 새로 맞아달라고 매달리기라도 하란 말이에요?" 내 갑작스런 격렬함에 그는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일순 안색까지 창백해지더니, 이내 자신을 억제하려는 듯 눈길을 유리벽 아래의 야경 쪽으로 돌렸다. 그러다가 몸을 일으켜 끝내 슬픔으로 변한 분노 때문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조용히 말했다. "역시 술을 마싶 않은 건 잘한 일 같소. 오늘은 이 정도로 헤어져요. 나도 아직 무엇 하나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상태요. 일간 다시 만나서 얘기합시다." "언제나 생각, 생각, 정리...... 도대체 선생님은 왜 그렇게 복잡해요? 안돼요, 이 얘기는 마치고 가요." 나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렇게 버티었지만, 결국은 그의 참을성 있는 설득으로 십 분도 안돼 그곳을 나왔다. "미안해요." 차가 우리 동네로 들어설 무렵에야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은 나는 비로소 창백하게 굳어 있는 그에게 짤막하게 사과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한동안 대답이 없던 그는 차가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에 멈추었을 때야 그 어느 때보다 쓸쓸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여 손을 내밀었다. "너무 방황하지 말아요. 때가 올 거요."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일까. 때가 온다고? 어떤 때가, 언제? 또...... 언제나 따뜻하던 그의 손이 오늘따라 섬뜩하리만치 차갑게 느껴진 것은 웬일일까. 12월 10일 토요일. 첫눈이 예보된 흐리고 쌀쌀한 날씨. 겨울에 접어들면서 첫눈이 오면 그와 함께 고궁을 거니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던가. 하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그에게도 연락은 없고. 12월 11일 일요일. 긴밤 자정이 넘어서부터 흩뿌린 눈발이 제법 지붕이며 정원수 가지에 남아 있다. 눈이 오면 좋아하는 건 아이들과 강아지 뿐이라지만, 상쾌한 건 역시 상쾌하다. 어찌된 셈인지 S지의 일이 온통 알려져 본의 아닌 자축연을 가지게 되었다. '만년 문청(文靑)'이란 별명에 어울리게 문단 소식에 밝은 미스터 박이 어떻게 알고 퍼뜨린 모양이었다.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몇몇에게 졸리다 못해 저녁이나 산다고 시작한 것이 결국은 도당(徒黨)-이건 미스터 권의 표현이다-남녀 7인의 흥건한 소주파티로 끝이 났다. 나쁘지 않구나, 이런 사이비한 시인의 기쁨도. 12월 13일 화요일. 결국 우리는 이렇게 끝나기 위해 만난 것일까. 그렇게도 자주 예감해 온 운명이란 것이 겨우 이런 어처구니없는 것이었을까? 어제 그를 만났다. 그는 눈 온 뒤의 포근한 고궁벤치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햇볕 아래서 보니 며칠 전보다 더욱 초췌하고 지쳐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두 눈만은 이상한 결의로 전에 없이 번쩍이는 것이 나를 까닭 없는 두려움에 젖게 했다. 그 바람에 나는 마음에 없는 농담으로 인사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소년 취향이시군요. 하필 이 추운 고궁이라니." 그러나 그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춥진 않을 거요.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는 달리 따뜻하고 아늑한 장소가 있을 성싶지도 않소." "햇볕이 그렇게도 중요하세요?" "어둠은 요기요. 그것은 언제나 밝은 사유와 논리를 방해하는 법이오. 우리의 감정을 과정하거나 왜곡시켜......" 그런 그는 내게 거의 낯선 사람처럼 보였다. 전에도 이따금씩 예사 아닌 사색의 깊이와 정연한 논리로 나를 감탄시킨 적은 있었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그의 어둡고 치열한 열정의 장식으로서였다. 그런데 이제 그는 메마른 가지 같은 모습으로 이성의 햇볕 아래 차갑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래, 웬일이세요?" 마침내 나도 미소를 거두고 그렇게 물었다. 그 순간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길이 망설임 같기도 하고 아쉬움 같기도 한 미묘한 그늘이 언뜻 비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그의 눈은 차가운 결의로 빛났다. "이제 대강 정리가 됐어요. 내가 갈 길을 알 것소." "어떻게요?" "나는 역시 이대로가 좋겠소. 지금과 아무런 변화 없이 그리고,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역시 지금으로 돌아오겠소." "그게 무슨 뜻이에요?" "결국 스스로가 진 짐을 벗을 길은 없었소. 내가 희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사이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치닫는 걸 막는 일뿐이오. 적당한 곳에서 멈출 줄 아는 것이 내가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오." "아직도 알아들을 수 없어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반드시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런 엄청난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 담담한 데서 받는 충격으로 일종의 방심 상태에 빠진 나는 마치 남의 일처럼 되물었다. 그러자 그가 대답 대신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연민과 애착이 착잡하게 얽힌 눈길이었다. 이윽고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도 어딘가 모르게 정감을 회복한 듯했다. "지난 몇 달간 마음 깊이 진행시켜 온 내 음모가 어떤 것인지 아시오? 바닷가 산장에서 돌아온 뒤부터 나의 그림은, 솔직히 말하면 희원에게서 달아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희원을 완전히 나의 것으로 얻기 위해서였소. 이렇게 쉽게 올 줄은 몰랐지만, 나는 이런 기회를 얻기만 하면 파리에서 자리를 잡게 되는 즉시로 아내에게 이혼을 요청할 생각이었소. 이 땅에서 내가 소유했던 모든 것을 그녀에게 줌으로써 내가 가진 가정이란 짐을 벗어 던질 작정이었소. 그런 다음 여건이 허락한다면 희원이를 그곳으로 부르는 것이오.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내가 돌아오겠지만, 그때는 이미 이혼에 따르는 비난의 여지가 없어질 만큼 오랜 세월이 지난 뒤가 되어 희원이를 맞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으리란 계산이었소. 얼핏 보아서는 제법 그럴듯한 계산이고, 실은 아직도 그런 망상을 하면 가슴이 설레는 미래요......" 지금까지 그가 언뜻언뜻 비춘 말과 며칠 전의 긴 편지로 미루어 생각해 보면 반드시 상상할 수 없었던 그의 내심은 아니었으나, 막상 그의 입을 통해 듣고 보니 내게는 그저 불의의 통렬한 일격으로만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그런 나를 아랑곳 않고 자신의 얘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나는 중요한 두 가지를 잊고 있었소. 그 하나는 나의 예술이오. 이 또한 비뚤어진 자의식의 일종인지 모르지만 나는 아무래도 예술을 예술답게 만드는 것들 중에는 도덕적인 요소도 포함되리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소. 물론 예술가들은 자유를 말하오. 그러나 가장 자유롭다고 볼 수 있는 추상예술에서조차도 그들의 자유란 기껏 어떤 특정한 양식이나 기성의 권위로부터 자유라는 뜻이지 예술의 보편원리로부터의 자유라는 뜻은 아니오. 그런데 나는 그 보편원리 가운데 하나가 도덕적인 요소라고 믿고 있소. 하기야 몇몇 천재들의 경우에는 예술적인 완성이란 지상의 명목 아래 도덕적인 요소를 희생시킨 경우가 있소. 영감이나 열정의 샘을 화려한 여성 편력에서 구한 것 따위가 그 한 예요. 사람들은 흔히 그 천재에 속아, 또는 그 천재의 권리로 그것을 묵인하는 경우는 있지만, 내가 그들에게 발견한 것은 보통 아닌 호색과 잔인한 배반의 연속, 그리고 세상을 향한 비열한 속임수와 자기 기만의 다를 바 없는 편의주의 뿐이였소. 그들 정도의 천재였다면, 정숙함과 경건 속에서도 얼마든지 위대한 예술을 창조할 수도 있었으리란 의심을 버릴 수가 없소. 더욱 교활하게는 거기서 오는 죄의식과 부끄러움까지도 예술적인 영감이나 열정의 원천으로 미화시키려 했던 거요. 그 다음 내가 또 잊고 있었던 것은 사랑 자체요. 누가 뭐래도 아직도 나는 사랑의 본질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향한 것이라고 믿고 있소. 그런데 방금과 같은 방식으로 희원을 내 삶에 끌어들이는 데는 전혀 희원 쪽의 행복은 고려되어 있지 않소. 희원은 아직 젊고, 갖가지 행복의 가능성은 여전히 손 닿는 곳에 머물러 있소. 바꾸어 말하면 시끄러운 세상의 비난과 몇 년인지 기한도 없는 기다림과, 또 그 뒤를 이을 더 긴 가책의 세월의 대가로 얻은 내가 과연 희원의 행복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오. 정직하게 말한다면 오히려 불행에 가깝게 보는 쪽이 더 많을 거요...... 그런데도 나는 무슨 큰 결단이라도 내린 것처럼 그 같은 일을 진행시켜 왔소. 그건 이미 사랑도 무엇도 아니었소. 아니, 사랑의 탈을 쓴 저열한 이기였을 따름이었소...... 지금의 이 결단은 바로 잊고 있었던 그 두 가지를 깨우침으로 얻게 된 결단이오. 역시 우리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소. 나는 이대로 떠나고, 희원도 나를 만나기 전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오. 그리하여…… 나의 기억에는 언제나 희원이 내 젊음에 내려진 마지막 축복으로 남아 있을 것처럼, 희원의 기억에도 나는 항상 부끄럼 없는 사랑으로 살아남고 싶소. 뒷날 다행히 내 그림이 고등학교 미술책에라도 실리게 되면, 희원은 그 그림을 가리키며 아들에게 떳떳하게 밝혀 줄 수 있어야 하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엄마를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그리고 지금도 살아 있다면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을 거라고......" 애써 억제하는 듯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떨리고 있었다. 그곳이 햇볕 밝은 한낮의 공원이란 것도 잊고 나 역시 이상한 감동으로 잠시 가슴이 찌르르 했다. 그러나 이내 나를 사로잡은 것은 원인 모를 분노였다. 나는 크게 소리라도 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하며 그에게 쏘아붙였다. "왜 모든 사랑은 결혼 아니면 죽음이나 이별로 끝나야 하죠? 제가 언제 그런 통속적인 결말을 강요했나요? 단 한 번이라도 결혼을 조른 적이 있나요?" "삶은 어차피 통속적이오. 아니면 희원일 정부(情婦)로라도 삼으란 말이오?" "그럼 결혼하지 않는 남녀의 사랑은 언제나 양쪽을 정부정부(情夫情婦)로 만들고 만단 말이에요?" "물론 간사한 말은 그런 경우에 여러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부르지. 구원의 연인, 예술적인 동반자, 창조와 열정의 원천, 영감 그 자체...... 그러나 나는 그 공허한 이름을 믿지 않소." "통속한 것은 삶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에요." "하기야 예외는 있겠지. 소설 같은 데-이를테면 '좁은 문'...... 하지만 사람은 반드시 늙게 마련이오. 늙은 알리사와 제롬을 상상해 본 적이 있소?" 처음 만났을 때의 담담함을 회복한 어조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것은 나였다. 우리가 주고받은 말이 가지는 그 엄청난 무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아무런 비장감이 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에 맹렬한 분노처럼 여겨졌던 것도 그저 약오른다는 상태에 불과했고, 그의 단호함도 웬일인지 재미있는 다음 장을 위해 짐짓 꾸며 낸 연극 같았다. 그 바람에 결국 우리들은, 이별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나도 마치 어떤 엄숙한 대역을 맡고 있을 뿐이라는 기분이었고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길고 단단한 결별의 악수를 나누면서도 내 마음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지난날에도 여러 번 해 온 것과 같은 연습에 지나지 않아. 아무 것도 끝난 건 없어. 끝날 수도 없고......" 12월 14일 수요일. 그래, 이건 정말로 아니야. 우리가 헤어진 것은 그의 독선적이고 까다롭기만 한 관념 속에서였을 뿐, 현실에서는 아니야. 우리는 이렇게 헤어져야 할 아무런 필연성도 이유도 없어. 오늘 종일 그의 전화가 없었던 것도 어제 우리가 만났기 때문이지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은 아니야. 그래, 모레나 글피쯤은 다시 그에게서 연락이 오겠지. 아니면 우리 편집실로 들어와 빙긋 웃으며 툭툭 어깨를 칠 거야. 정말로 어제의 일은 아이 같은 그가 꾸며 낸 턱없이 심각한 놀이에 지나지 않아...... 12월 15일 목요일. 오 년 전부터 서로 호감을 가지고 알아 왔으며 지난 일년은 거의 일주일에 두 번씩은 만나 왔던 남녀가, 아무 일 없었다 쳐도 사흘이나 한지붕 밑에서 밤을 샜고, 각기 집을 떠나 일주일이나 낯선 곳에서 함께 보낸 적도 있으며, 또 서로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은밀한 기억까지는 숨김없이 털어놓고 지내던 남녀가, 그런 추상적인 이유로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다니.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주장이 있어 그것들 중 어떤 것에 의지해도 쉽게 면책될 수 있는데, 구태여 지난 시대의 낡은 관념에 굴복해 명백히 서로가 필요하면서도 이렇게 헤어져야 하다니...... 아니야 그건 안돼. 내일 그를 만나겠어. 그를 만나서 소리치겠어. 당신이 말한 것이 진실이라면 당신은 지금 가장 잔인한 배반을 꿈꾸고 있다고. 12월 16일 금요일. 심 기자를 시켜 그의 집에 전화를 넣어 보았더니 벌써 여러 날째 일정치 않은 드나듦으로 취해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가 자주 간다는 한남동 술집에 갔다가 그는 만나지 못하고 엉뚱한 사람을 만나 엉뚱한 짓을 했다. "그분 며칠 전에 한 패거리를 몰고 와 심하게 마시고 갔죠. 기다려 보세요. 어쩌면 오실지도 모르겠어요. 요즘 부쩍 걸음이 잦으시니까......" 이런 주인마담의 말을 믿고 스탠드 구석에 앉아 기다리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며 반가운 듯 말을 걸었다. "다시 만날 것 같은 기분은 들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약간 귀찮은 기분으로 돌아보니 뜻밖에도 얼마 전에 선을 본 적이 있는 김이었다. 그 호인 같은 미소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그전 삼십 분을 포도주 한 잔으로 자루하게 기다린 탓인지 막상 대하고 보니 그리 싫은 얼굴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여긴 웬일이세요?"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술꾼이 술집에 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형이 여긴 웬일이지요?" 김은 대뜸 나를 이 형이라고 불렀다. 선보면서 한두 번 만난 인연으로 나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이 좀 지나친 것같이 생각되기는 해도 기분이 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왜 저는 술꾼같이 보이지 않으세요?" "그렇게는 도저히 안 보이고-- 누굴 기다리시는 겁니까?" 김은 그렇게 묻다가 다시 고개를 기웃거렸다. "이런 술집에 삼십 분씩이나 숙녀를 기다리게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김은 아마도 진작부터 나를 본 모양이군. 그제서야 나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약속을 하지는 않았어요." "이 집이 단골인 모양이군. 나도 바이어들과 일차는 대개 이 집에서 해 단골들은 거의 아는데......" "아마 모르실 거예요. 김 선생님 사업하고는 전혀 무관하니까." 그제서야 김이 지나치게 가까운 체하는 것이 신경에 거슬려 나는 약간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러나 김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허, 장사꾼이라고 막 무시하는군." 빙긋 웃으며 그렇게 말하더니 꾸벅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 "실은 저도 일행이 있어요...... 벗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리고 찾아가는 자리를 보니 외국인 하나와 두엇이 앉아 있었다. 오퍼상인가 뭔가 하는 김의 직업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구성이었다. 김이 다녀가고도 나는 거의 한 시간을 술집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끝내 오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아홉 시, 아무래도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었다. 별수없이 나는 메모 하나를 남긴 채 계산을 하고 그 집을 나왔다. 그런데 내가 차도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김이 허둥대며 술집을 나오더니 길 가는 사람들을 힐끔힐끔 돌아볼 만큼 큰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 형, 이 형" 나는 속으로 이거 잘못하면 엉뚱한 사람의 술주정을 받게 되겠구나 싶어 매몰차게 떼어버릴 생각으로 달려온 그를 차갑게 돌아보았다. "간신히 헤어났습니다. 이 형 어디 가서 나하고 딱 한잔만 합시다." "제가요?" 나는 어림없다는 투로 그렇게 반문했다. 그러나 김은 별로 취한 것 같지 않은데도 어거지를 썼다. "그렇습니다. 인연이 없어서 성사가 안되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오늘은 그런 일 떠나서 인간적으로 한잔 합시다." "인간적이라니오?" "거 몰라 물으십니까? 외국영화 같은 데서 말입니다. 생판 낯선 사람끼리 만나서도 흉금을 터놓고-- 헤어지면 또다시는 만나지 않고, 하는 거 말입니다." 별로 기교적 아니면서도 이상하게 가슴을 건드리는 데가 있는 말이었다. 어쩌면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에게 퍼부을 온갖 비난과 항의를 되새기고, 새롭게 전개될 그와의 미래에 대한 갖가지 상상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그 상대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는 내 허탈감이 대수롭지 않은 김의 말을 그렇게 듣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가 흉금을 터놓을 일이 있을까요?" "아마 있을 거요. 방금 이 형이 그렇게 열심히 기다린 사람의 얘기 같은 것도." 김은 내 목소리의 날카로움이 조금 덜해진 것은 자신을 얻었는지 한층 당연하게 나왔다, "많이 방문하는 바이어는 반드시 물건을 사 가게 돼죠. 장사꾼의 경험에서 얻은 지식입니다. 딱 한잔만 더 해요." 그러고 보니 그를 기다리는 동안에 혼자서 홀짝거린 술의 취기도 내게 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누구에게든 풀지 않고는 안될 응어리가 내 가슴에 남아 있었던 것일까. 결국 그 뒤로도 몇 번의 가벼운 입씨름 끝에 나는 그를 따라 가까운 OB베어로 들어가게 되었다. 차가운 바깥에 있다가 갑자기 따뜻한 실내로 들어가고, 게다가 다시 맥주 한잔을 곁들이자 그 다음 내 감정은 고삐 풀린 망아지였다. 나는 김이 한 남자이고 더군다나 나에게 청혼까지 했던 사람이란 걸 깨끗이 무시한 채 민 선생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이었다. 만약 그게 술 탓이었다면 결국 나는 그를 만나 술 하나는 참하게 배운 셈이다. "좌우간 그 사람 제법 괜찮은 것 같은데요." 술이 다 깬다는 얼굴로 내 얘기를 듣고 있던 김이 얘기가 끝나자 그렇게 대답했다. 이미 그에 대한 온갖 비난과 항의를 다 쏟아 낸 뒤라 어느 정도 마음은 풀렸지만 그래도 김이 그를 지지하고 나서니 나는 다시 부아가 치밀었다. "김 선생님은 좀더 솔직하고 용감한 줄 알았더니-- 그럼 그 비겁과 위선과 나약이 역겨웁지 않으세요? 이 철저한 이기(利己)가 잔안하게 여겨지지 않으세요?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같은 남자끼리라고 덮어 주는 건가요?" "그만 그만, 나는 그렇게 까다로운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자로서라기보다는 인간적으로 그 사람이 괜찮아 뵈는 겁니다." "또 인간적으로예요?" "좌우간 나는 그 친구 멋쟁이라는 기분입니다." "좌는 뭐고, 우는 뭐예요?" "그 사람은 딱지가 덜 떨어진 중학생으로 보아도 그렇고, 수양이 깊은 신사로 보아도 그렇다는 뜻입니다. 이런 각박한 세상에 그 나이가 되도록 그런 멍청한 믿음을 지닐 수 있다는 것도 어렵지만, 자기가 바로 지상인 이런 시대에 그런 지난 시대의 공적인 신조를 지키려 드는 용기와 절제도 쉽지 않은 일이지요." "용기와 절제라구요?" "내가 그 사람 처지에서 그 같은 결과를 내리려면 반드시 필요한 덕목일 겁니다." "남자들의 독선이에요. 위선과 다를 바 없는 지나찬 보호의식이고, 왜 여자도 하나의 어엿한 판단 주체라는 걸 무시하죠?" "그건 인정하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여자를 한 독립된 판단 주체로 인정하는 경우는 대개 그런 식으로 부추김으로써 여자가 자진하여 옷을 벗고 우리 침대 속으로 기어들도록 유도하려는 때죠. 즉 책임이라는 부담 없이 여자를 즐기고 싶을 때 우리는 가장 기꺼이 그녀가 독립된 판단 주체라는 걸 인정합니다." "왜 남자를 늑대라고 그러는지 알 만하군요." "물론 진심으로 여자를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믿는 신사들도 있죠.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한번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기사도란 건 뭐예요?" "그거야말로 전형적인 남자의 독선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여자에 대한 보호의식을 남자의 독선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더니 그는 문득 서운한 듯한 웃음과 함께 화제를 바꾸었다. "내가 워낙 재수가 없었군요." "네?" "그런 멋쟁이에게 홀려 있는 이 형을 상대로 눈치없이 구혼을 했으니......" "진학은 정말로 할 거예요." "어쨌든 그 사람 은근히 질투가 나는군요, 민 뭐라고 했죠? 언제 한 번 그의 그림을 봐야겠습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미술은 언제나 양이었지만......" 그때쯤 나도 어느 정도 진정되면서 김에게 너무 흉허물없이 털어 놓은 것이 조금씩 후회되었다. "별로 적지도 않은 나이에 이런 감정적인 유희에 빠져 있는 제가 경멸스럽지 않으세요?" "아니, 천만에. 이건 장사꾼의 직감이지만, 이 형에게도 분명 그 사람의 애정에 값할 만한 그 무엇이 있다고 봅니다. 더욱 장사꾼식으로 표현한다면 비싸더라도 사두면 이득이 될 법한 그 무엇이 말입니다. 세상에 백 원짜리를 천 원 주고 사는 바보는 흔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면서 구김없이 웃는 모습이 이상한 위로가 되며 갑작스레 날을 세우는 내 경계심을 무디게 했다. 그 바람에 자리는 생각보다 길어져 내가 집으로 돌아간 것은 열한 시가 넘어서였다. "남의 장모님, 여기 현품을 인도합니다. 술이 좀 묻기는 해도, 망가지거나 기스(흠)난 데는 없을 겁니다." 싫다는데도 꾸역꾸역 집까지 바래다 준 그는 엄마에게까지 그렇게 넉살을 떤 뒤에야 돌아갔다. 12월 17일 토요일. 어젯밤의 일을 엄마는 어떤 희망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 사람과는 결혼 않겠다더니......" 아침에 김의 얘기를 하면서 그렇게 핀잔은 주어도 별로 화를 내는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엄마, 그건 우연한 막간극이에요.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오직 민 선생님의 모습 뿐이에요. 오늘도 심 기자를 내세워 그가 있을 만한 곳을 세 군데나 수배해 보았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을 뿐이랍니다. 12월 19일 월요일. 벌써 연말, 거리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장식용 전구의 불빛으로 휘황하다. 이제 열흘 남짓이면 나는 스물여덟, 본격적인 노처녀의 대열에 끼여들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작년 이맘때보다 훨씬 나이에 비해 대범해진다. 안달을 부리는 건 오히려 주위의 사람들 뿐이다. 몇 군데 그와 연락을 닿을 만한 곳은 물론 그의 집에까지 내가 만나고 싶어한다는 게 전해지도록 손을 써 놓았는데도 그는 끝내 응답이 없다. 정말 이대로 우리는 헤어지고 마는 것일까. 이제야 조금씩 그가 한 말들이 실감이 난다. 12월 20일 화요일. 여전히 그에게서는 소식이 없고. 아아,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12월 22일 목요일. 이틀 뒤면 좋을 것을 앞당겨 오는 눈. 오늘로서 네 번째 신년 특대호를 마감했다. 이런 기분으로는 일이 된다는 것이 이상하다. 내일부터 연말까지는 사실상 연휴와 다름없다. 오전만 근무하고 돌아왔다. 사랑으로 빚어진 떡, 사랑으로 빚어진 술, 사랑으로 만들어진 안주, 사랑으로 만들어진 바람만 마시고 먹는 나라. 사랑으로 지어진 집, 사랑으로 서 있는 기둥, 사랑으로 자라는 풀 잎, 사랑으로 숨쉬는 먼지, 사랑으로 물들어진 종이, 그 위에 사랑의 글씨만 씌어진 나라, 사랑의 밥을 먹고, 사랑의 옷을 입고, 사랑 의 국물을 마시고, 기침도 사랑처럼 하는 그런 별나라, 언제나 바뀌지 않는 사랑의 눈빛과 가슴들이 공기처럼 흐르는, 사랑만 숨쉬는 내 누이의 꿈속의 유리알 같은, 그런 먼 나라 이 지상 늪에서 보면 언제나 저만큼 가물거리는, 꿈꾸는 내 누이의 꿈 속의 먼 나라, 머나 먼 저쪽의 불켜진 사랑의 나라 -李太洙의 '어떤 사랑나라'에서 12월 24일 토요일. 이렇게 철저하게 외로운 크리마스도 처음이다. 어제부터 으슬으슬 춥고 머리가 쑤시더니 오늘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이불을 펴고 눕게 되고 말았다. 감기약을 먹고 누웠지만 어쩐지 감기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다. 책에도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이 있다. 뜨거운 책은 사람의 격정을 충동하고 분방한 상상력과 실천의지를 자극하는 책이고, 차가운 책은 사람의 이성과 사색에 의지하게 하고 관조와 추찰의 분위기에 젖게 하는 책이다. 나는 내 마음이 격정적이고 헝클어져 있을 때면 언제나 차가운 책을 찾게 된다. 지금 내게 그 차가운 책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이틀 전부터 읽기 시작한 '아미엘의 일기'이다. 사실 이 미완성의 철인이 담담하게 적어 가고 있는 삶은 지금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내 독서의 목적이 새삼스런 지식의 흡수나 자기 성찰이 아니라 일종의 도피인 한 오히려 이 책은 내 목적이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아미엘의 삶은 청년기도 지나고 장년기도 지나 노년으로 접어들고 있다. 한 인간의 생애가 이렇게 간단히 읽혀져버린다는 것에 허무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또한 이렇게 다양한 모습과 색채로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놀라움이다. 그 소심과 우유부단과 여성적인 회의가 주는 애석함과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아미엘은 결과적으로 그 어떤 책에 못지않은 훌륭한 작품을 남긴 셈이다. 정관, 추찰과 자기침잠 속에서, 성자를 흉내내지도 않고 철인의 엄격함과 차가움을 과장하는 법도 없이, 한 범인으로 고독한 명상 속에 살다 간 그의 생애가 그대로 한 위대한 작품이 된 것이다. 풍부한 지식과 학문적인 역량을 이 몇 권의 일기 속에 방치해 버린 듯한 감은 있지만, 그 끊임없는 독서와 사색, 흔해빠진 상대적 진리에 대한 무관심과 독단에 대한 겸손을 탐구자로서의 한 생애를 드물게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새벽 한 시. 아픔은 사람을 감정적으로 만든다. 몸이 쑤시고 머리가 깨어지는 듯 아프면서 그를 다시 만날 때까지는 차갑게 깨어 있으려고 한 내 결심은 허사가 되어버렸다. 아무런 설명 없이 그가 보고 싶고, 그에게서 위로받고 싶다. 오후 한때 잠시 신열이 내린 사이. 12월 26일 월요일. 몸은 많이 나은 것 같지만 엄마의 성화로 결국 출근을 못했다. 나가 봐야 꼭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일이 궁금해 나가 보려 한 것인데 틀어져버린 것이었다. 열한 시쯤 심 기자에게 전화해 보았더니 역시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자신도 그가 출국하기 전에 만나 취재할 일이 있으니 찾는대로 연락해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는 도대체 어디를 떠돌고 있는지. '민 선생님. 제가 보낸 몇 갈래의 신호 중 한둘은 선생님께 도착했을 줄 믿어요. 그런데도 끝내 모습을 보이시지 않는 것은 의도적으로 저를 피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몇 자 올립니다. 한번 뵙고 싶어요. 새삼스런 항의나 비난이 이미 굳어진 선생님의 결의에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만, 우리들(함께 묶어 씀을 용서하세요)의 지난날을 이런 식으로 마무리 짓는 것은 정말 견딜 수 없을 만큼 싫군요. 이제는 오히려 제가 소리치고 싶어요. 돌을 던지는 아이들은 장난이지만 그 돌에 맞는 개구리는 죽을 지경이라구요. 선생님께서 지난 일년 동안 저를 상대로 그런 악동 같은 장난을 하신 게 아니라면, 그리고 조금이라도 제 상처받은 자존심에 연민을 품고 계신다면 연락 주세요. 집, 사무실 어디로든 좋아요. 총총. 희원.' 그에게 편지를 써 놓고 보니 문득 지금의 내게 가장 큰 상처를 알게 된 느낌이었다. 그를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 다시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그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도 없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 커다란 아픔이지만, 아직 그 아픔은 세월의 도움을 받아야만 내게 실감으로 닿아 올 추상일 뿐이다. 오히려 지금 내가 이토록 맹렬히 그로부터 치유받고자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얼핏 이해 안될 묘한 자존심이다. 그렇다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그와 나 사이는 한때의 바람에도 못미치는 감정일 수도 있다. 몇 번의 장난스런 포옹과 입맞춤들, 따뜻한 악수-- 이런 것들을 제하면 무성한 것은 말 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그는 틀림없이 목소리로만 내게 남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상태의 사랑이 가능할 수 있었던가를 따져 보면 나는 솔직히 참담함을 느낀다. 내 편에서 보면 나는 지금껏 한번도 의도적으로 일을 이렇게 이끌어 간 적은 없다. 오히려 내가 종종 느껴 온 충동은 어떤 저지르로 싶음, 즉 사회와의 관련이나 미래에 대한 고려 없이 무턱대고 앞으로만 가 보고 싶은 모험적인 충동이었다. 몇 번인가 나는 내 모든 것을 그에게 맡겼고, 그도 마음만 먹었으면 성적인 쾌락의 추구를 동반한 흔해빠진 형태의 스캔들로 우리의 관계를 전환시킬 수 있었다. 사랑이 지나간 시대의 플라토닉한 외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덕분이었다...... 처음 나는 그것을 나에 대한 그의 무한한 사랑으로 여기고, 한 고비를 넘길 때마다 그의 이성과 절제에 애정 어린 신뢰를 키워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완곡한 거절이었던 것 같은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해 나는 지금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거절당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다분히 자학적인 데가 있고, 그도 열에 아홉은 펄쩍 뒤며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미리 짜여진 각본처럼 그가 내게서 영영 사라지려고 하는 지금으로서는 그 이상 더 유리한 해석을 끌어낼 힘이 내게 없다. 나는 처음부터 일상에 권태를 느낀 예술가의 관념적인 연인 역만을 맡으면서도, 실제로 그와 사랑을 나누고 있다고 착각해 온 어수룩한 배우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리고 거기서 상처받은 자존심은, 차라리 끝갈 데까지 다 간 사랑으로부터 버림받은 쪽이 훨씬 행복한 사랑의 결말로 여기게끔까지 나를 참담한 기분 속에 밀어 넣고 있다. 12월 30일 금요일. 우리는 윤리(倫理)의 레테에서 흐느끼던 두 망령이어라. 아아, 에우리디케. 그때 그대는 뒤를 돌아보지 말았어야 했던 것을...... 오늘 퇴원했다. 몸이 완쾌돼어서가 아니라 급한 고비를 넘겼다는 뜻의 퇴원이었다. 의사는 적어도 열흘 정도 더 요양해야 한다고 했다. 신열이나 두통은 거의 없지만, 온몸의 힘줄이란 힘줄은 다 풀어져버린 것처럼 지금 들고 있는 볼펜도 천근의 무게, 머리가 터질 듯 쓸 말이 많은데 더는 써 내려갈 수가 없다. 12월 31일 토요일. 무리가 되겠지만 아직 기억이 생생하고, 그때의 감정이 실감 있게 느껴질 때 지난 27일 밤의 일을 기록해 두어야겠다. 어쩌면 일기는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므로. 그날(27일)몸이 개운하지 않은데 무리를 해 출근을 했다. 그리고 좀 일러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간밤에 쓴 편지를 다시 한번 훑어보고 있는데 심 기자가 나타났다. "언니, 이제 겨우 그분을 만날 길이 생겼어. 오늘 저녁 x x회관이래요." "x x회관? 거긴 왜?" "제게 정보를 준 사람에 따르면 그분은 어제도 세 시까지 퍼마셨으니 지금은 그 술집 부근의 여관방에서 쓰러져 잘 거래요." 그러더니 갑자기 얘기를 멈춘 그녀는 한동안 나를 살피다가 불쑥 물었다. "언니, 정말 무슨 일 있어?" "무슨 소리냐?" "왜 그렇게 안달을 하며 찾아요?" "몇 년 간이나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다. 멀리 떠난다는데 한번 만나 봐야 하지 않겠니?" 나는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지으며 그렇게 반문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얘기를 계속했다. "실은 민 화백 말예요. 동료들간에도 얘깃거리가 될 만큼 밤낮으로 술에 절어 지낸대요." "원래 대단한 술 아니냐?" "정도를 넘으니까 그렇죠. 아까 그분도 사흘 만에 민 화백에게서 벗어났는데, 아무래도 무슨 심각한 고민이 있대나 봐요. 집에도 벌써 보름이 넘도록 들어가는 둥 마는 둥이래요." 그런 심 기자의 어두운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듣자 나는 묘한 안도를 느꼈다. 그가 괴로워한다는 것이 내게 위로가 된 것은 아마도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슴 한구석에 썰렁한 바람이 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두 달도 아니고 여러 해 떠나 있게 되니 여러가지 복잡한 일이 있겠지." 나는 무심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럼 전시회만 마치고 귀국하는 거 아녜요? 그건 처음 듣는 소린데......" 심 기자가 대뜸 눈을 빛내며 그렇게 반문했다. 그제서야 나는 아차, 싶어 얼른 말을 바꾸었다. "내 추측이야. 어렵게 가게 된 곳인데 그렇게 금방 돌아오겠니?" 그러나 그 말이 빌미가 되어 나는 그 뒤 꼬박 십 분간이나 그녀에게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와의 관계에 대한 우호적인 물음과 함께. 그들이 만나기로 되어 있는 저녁 여섯 시까지는 시간이 많아 오후에는 심 기자와 함께 영화관엘 갔다. 몸이 으슬거려 집에 누웠다가 나오고 싶었으나, 다시 나오기 어렵게 될까 봐 무리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날 무렵부터 나는 조금씩 오한을 느꼈다. 처음에는 영화관의 히터가 이상이 생겼나 싶었지만 영화관을 나올 때쯤은 머리까지 어질거리는 것이 감기가 덧난 모양이었다. "언니 그만 돌아가지 그래요? 민 선생님한테는 제가 말씀드려 따로 시간을 얻어 놀게요. 입술이 새파랗게 떨고 있잖아요?" 같이 가벼운 저녁이라도 들려고 식당에 갔을 때, 심 기자가 불빛 아래 드러난 내 얼굴을 근심스레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녀의 말대로는 안될 것 같은 기분에 애써 괜찮다는 태도를 보이며 생각도 없이 만두국 몇 술을 뜨고 그대로 따라 나섰다. 일곱 시쯤 x x회관을 가니 그들은 이미 불고기를 안주로 왁자하게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여남은 명 정도의, 대개 젊은 화가들이었는데 더러는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그는 그 술자리의 주인공답게 긴 식탁 한가운데쯤에 몽롱한 눈길로 앉아 있었다. 이렇게 생각해서인지 술로 시커멓게 탄 얼굴은 꼭 파헤쳐 논 것처럼 황폐해 보였다. 이미 상당히 취해 있는 것 같았다. "아이구, 심 기자 아니시오? 여긴 웬일이오?" 그 중에 가죽 반코트를 입은 중년 신사가 심 기자를 보고 요란스레 아는 체를 했다. 그러자 좌중의 태반이 모두 한마디씩 인사를 건네왔다. "민 화백님이 술귀신이 되기 전에 먼저 취재를 좀 할 게 있어서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방안으로 들어서자 그들은 우리에게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들이 내주는 자리에 앉으면서 나는 비로소 그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저절로 목소리가 떨려 왔다. 그때였다. 우리가 처음 방문을 열 때부터 뚫어질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의 눈길에 이상한 빛이 번쩍였다. 반가움이나 기쁨 같은 감정의 표시라기보다는 순간적인 광기 같은 것이었다. 그러더니 전혀 주위의 눈길을 개의치 않고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오?" "저도 취재할 게 있어서요." 나는 억지로 미소를 띠며 그렇게 받았지만, 그의 굳어지는 얼굴에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쓸쓸함이 일었다. 불과 한 발자국 앞에 앉아 있는 그가 십 리나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이었다. 그때 누군가 떠들썩하게 말하며 우리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역시 민 형은 두루 행운이셔. 이 깊숙한 술자리까지 찾아 주는 미녀가 둘씩이나 있으니......" 나는 술생각이 난다기보다는 이상하게 얼어 오는 마음을 데우기 위해 그 잔을 받았다. 몸이 개운치 않아서인지 전에 없이 술맛이 썼다. 내가 어렵지 않게 소주잔을 비우자 이어 주위에서도 몇 잔이 더 날아왔다. 하지만 이미 술들이 올라 자기들끼리 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탓인지 생각보다 내게 신경을 쓰는 눈치들이 아니었다. "그래, 얘기할 게 뭐요?" 이윽고 그가 취한 사람 같지 않은 눈길로 심 기자에게 물었다. "우선 도불 뒤의 계획하구요......" 심 기자의 의미 담긴 눈길로 나를 힐끗 건네본 뒤 대답했다. "도불 뒤의 계획이라구?" 그가 냉소하는 건지 빈정거리는 건지 모를 투로 그 말을 받았다. "환쟁이가 그림 그리는 것밖에 뭐가 더 있겠소?" "그럼 그곳에 눌러앉아 그림 공부를 더 하실 건가요?" "이 나이에 무슨 공부를 더 하며, 더 한다고 별수가 있겠소?" 그렇게 되묻는 그는 이번에는 정말로 지치고 늙어 보였다. "말하자면 전시회가 끝나는대로 돌아오신다는 뜻이에요?" "그건 모르겠소. 하지만 그쪽 그림이 보고 싶으니 아무래도 시간은 좀 걸릴 것 같소." "그게 얼마쯤일 것 같아요?" "글쎄......" 그러면서 그는 나를 건네보았다. 퀭한 눈가에는 알지 못한 우울이 어려 있었다. 만약 그때 내 곁에 앉아 있던 젊은 화가가 그런 심 기자와 그의 대화를 훼방 놓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우울에 전염되어 훨씬 일찍 파탄을 드러내었을 것이다. "자, 술자리에서는 술이나 마시고 일 얘기는 다음에 하쇼. 민 형이 이 밤으로 떠나는 건 아니니까." 그 젊은 화가가 술잔을 쳐들며 큰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제각기의 화제에서 깨어나며 떠들썩하게 동조했다. "좋아요. 하지만 이 자리가 끝나면 민 선생님은 제 차지예요. 오늘 놓아 드리면 비행기 트랩에서나 취재를 해야 할 판이니까." 심 기자도 그런 자리의 분위기에 동조하면서 더는 묻기를 계속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방안은 곧 문자 그대로의 낭자한 술자리로 변해 버렸다. 나도 마실수록 편해지는 몸과 마음 때문에 독한 소주를 몇 잔이고 겁 없이 받아 마셨다. 마음이 편해 온다는 것은 취해 올수록 가슴 축축히 젖어 오는 슬픔과 참담함이 엷어지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용기가 솟는 일이었으며, 몸이 편해 온다는 것도 취할수록 며칠째 나를 사로 잡고 있던 오한과 두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이 선생, 너무 과하지 않겠소?" 마침내 그도 근심이 되는지, 애써 짓고 있던 무관심한 표정을 지우며 새로운 잔을 받는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내가 잔인한 복수의 쾌감까지를 맛보며 그런 그의 충고를 묵살한 지 한참 뒤에 다시 덧붙였다. "열 시요. 이제 일어서지 않으시겠소?" "싫어요." 그제서야 나는 냉담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생각보다 내 어조가 강했던지 심 기자가 힐끗 나를 살폈다. 그녀는 왠지 술잔을 받지 않고 두 잔으로 그때까지 끌어 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술자리가 흐드러진 노랫가락으로 넘어갈 때까지 거기에 앉아 있었다. 어떤 의도와 결의로 버티었다기보다는 몽롱한 방심상태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를 그런 방심상태에서 깨운 것은 언제부터인가 나와 그를 번갈아보며 핸드백을 만지작거리던 심 기자였다. "자, 저희들은 가 보겠어요. 약속대로 민 선생님은 제가 납치해 가요." 그녀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여럿에게 큰소리로 선언하듯 말했다. "무슨 소리야? 이제 시작인데......?" "눈알을 빼 가면 어떻게 해? 민 형은 두고 가쇼." 술 취한 사람들은 구구각색으로 반대를 했지만, 다행히도 그 자리에는 아직 정신이 맑은 사람이 몇 있었다. 그들은 내막은 몰라도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으리라 생각했던지 한편으로는 취한 동료들을 설득하고 한편으로는 거의 빼돌리다시피 하여 우리 셋을 그 자리에서 놓아주었다. 거의 기계적으로 따라 나온 나도 찬 거리에서 매서운 겨울바람을 쐬자 얼핏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를 찾았다는 안도감과 취기보다는 일종의 마비상태에서 잠시 접어 두었던 그와의 문제들이 무슨 오래된 기억처럼 하나 둘 머리에 떠올라 왔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도무지 이렇다 하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나는 그때 이미 신열로 들떠 있었던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마음속의 격정과 술로 감각이 마비돼 있는 상태에서도 이따금씩 어떤 불길한 예감처럼 희미하나 둔중한 아픔이 내 몸을 쓸고 지나가던 걸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언니 좀 부축해 줘요." 심 기자가 그렇게 말하며 나를 그에게 넘긴 것도 취기에서만은 결코 아닌 내 위태로운 비틀거림을 느낀 탓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별로 거부하지 않고 가볍게 나를 부축했다. 여러 벌의 두꺼운 겨울옷이 그의 살과 나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따뜻한 체온이 금세 내게 옮아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쨌든 이 남자가 다시는 나를 놓아 두고 떠나게 해서는 안돼. 언제나 한 발자국쯤 떨어져서 떠날 생각만 하고 있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돼-- 그런 생각이 들며 나는 곁에 심 기자가 있다는 것도 잊고, 거의 몸을 맡기다시피 그에게 기댔다. 그 바람에 결국 그가 오른팔을 내 허리께까지 둘러 엉거주춤 껴안은 꼴로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더욱 돌발적인 것은 심 기자의 행동이었다. 골목길을 빠져 나와 차도에 이르렀을 때, 그녀가 우리 둘을 향해 불쑥 말했다. "실은요. 제 취재는 끝났어요. 다만 언니에게 민 선생님을 넘기려고 거짓말한 거예요. 그럼 두 분 어디 가서 조용히 얘기 나누세요. 전 가 보겠어요." 그러고는 미처 우리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마침 달려온 빈 택시에 몸을 실었다. 심 기자가 돌아가버린 뒤 우리들은 한동안 인적이 드문 골목 어귀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내 마음속의 굳은 결의에도 불구하고 나도 당장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도 막연한 모양이었다. "벌써 열한 신데...... 희원이도-- 가 보아야 하지 않겠어?" 이윽고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싫어요." 나는 세차게 도리질까지 치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진심으로 뿜어져 나오는 내 강한 거부의 몸짓에 그는 흠짓했다. 그리고 다시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 저기 잠깐 들렀다 가지."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길가의 조그만 인삼찻집이었다. "술 마실 수 있는 곳으로 가요." "저기서도 마실 수 있을 거야." 정말로 그랬다. 찻집으로만 여겼는데 안으로 들어가자 두어 패의 손님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디 아픈 거 아냐?" 자리를 정해 마주앉자 그가 내 얼굴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근심스런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아픈 건 마음이에요."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일순 그의 얼굴에도 우중충한 그늘이 덮이었다. "몇 군데서 희원이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갈을 들었지. 아니 그보다 먼저 끊임없이 나를 부르고 있는 희원이의 목소리를 가슴속에서 들었어. 하마터면 몇 번인가 내 쪽에서 찾아 나설 뻔도 했지." "그런데 왜 그러지 않으셨어요?" "물론 이런 식의 정리가 구식이며 일방적이고 또 싱거울 만큼 관념적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 봐도 더 나은 대안이 없는 건 마찬가지야. 잘 끝난 셈이지. 그런데 새삼 만나 서로를 헝클어 놓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정말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래." 그때 주문한 술이 왔다. 독한 국산 양주와 구워서 찢은 오징어였다. 그가 자기 잔만 채우는 걸 보고 나도 도전적으로 소리쳤다. "저도 주세요." "안돼." 그는 성난 사람처럼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내가 손을 뻗어 술병을 쥐자 그것까지 뺏으려 들지는 않았다. 뺏고 뺏기는 일이 볼썽사납게 생각되었거나, 어쩌면 내 기세가 매서워 말리기를 단념한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사십 도로 표기된 그 술을 큰 유리잔에 반이나 부어 단숨에 들이켰다. 취하고 싶어서도 무엇을 시위하기 위해서도 아닌 어떤 실제적인 필요에서였다. 찬바람을 쐰 탓인지 다시 몸이 오싹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려 그대로 견디기 힘든 탓이었다. "괴롭소?" 한동안 그런 나를 말없이 바라보던 그가 취한 사람 같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연민과 곤혹이 한층 착잡하게 얽힌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럼 제가 누구처럼 그렇게 비정한 줄 아세요?" "비정이라고?" "그래요. 선생님은 지금 가지고 놀던 것을 제자리에 갖다 놓은 것만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시지요? 하지만 제가 기껏 가지고 놀다가 제자리에만 갖다 놓으면 되는 장난감밖에 안 돼요? 그게 비정이 아니에요?" "나는 한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소." 그는 여전히 침착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성급히 자기 잔을 움키는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러자 무슨 세찬 전류처럼 내 몸 구서구석을 들쑤시는 취기와 함께 나는 문득 맹목적인 복수의 쾌감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아니면 자신의 남다른 양식(良識)이나 고매한 인품을 세상 사람들에게 연출해 보이기 위한 소도구였나요?" "말이 지나쳐. 나는 내가 희원이를 위한 소도구가 되고 싶었을지언정 희원이를 내 소도구로 삼고 싶어한 적은 없소." "그렇다면 예술가의 정신적인 허영을 충족시킬 어떤 허상인가요? 관념이나 환상 밖으로 뛰어나가서는 결코 안되는 허상......" 그러다가 나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나는 쏘아보는 눈길에는 푸른 불꽃이라도 나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불길은 예상외로 재빨리 스러졌다. "희원은 지금 터무니없는 자기비하에 빠져 있어." "그건 맞아요. 처음부터 무엇이든 선생님이 정의하고 예정한대로 따르기만 해 온 제게 무슨 자존심이 남아 있겠어요?" "그건 이중으로 나를 괴롭히는 말이야. 그 결정들 중 어떤 것도 나를 위한 것은 없었소." "그래서 저만 이렇게 참담하게 남겨지는군요." "나는 희원이가 보다 냉철하고 논리적이라 생각했는데......" "사랑은 원래가 논리적이 아니에요."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둘은 경쟁이나 하듯이 말없이 잔을 비웠다. 점점 더해 가는 취기와 함께 내 시야에 떠오르는 그의 얼굴은 무슨 자우룩한 안개 같은 것에 싸여 있는 듯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그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 가자." "어디로요?" 어느새 x x회관에서와 같은 방심상태로 빠져 들던 나는 그런 그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어 물었다. "우리가 진작 갔어야 할 곳. 그것이 완성되어 의식인지 번민의 수렁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렇게 대답하더니 무슨 신들린 사람처럼 나는 휘몰아 택시에 태웠다. 운전기사에게 일러주는 목적지는 귀에 익은 어떤 고급스런 호텔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가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확실하게 깨달았지만, 이상하게도 놀랍거나 두렵지 않았다. 조금 전에 나를 사로잡았던 어린애 같은 복수의 쾌감이, 상대도 알 수 없고 방법도 모를 그 파괴와 유린의 충동이 다시 나를 앞뒤 없이 휘몰기 시작한 것이다. 도심을 약간 벗어난 그 호텔에 도착해서도 그는 여전히 신들린 사람 같았다. "신혼부부에게 추억이 될 만한 방을 주시오." 누구에게도 우리가 그렇게 보일 리 없건만, 그는 뻔뻔하리만치 당당하게 프런트에 대고 소리쳤다. 그리고 벨보이가 방을 나가기 무섭게 억센 포옹과 뜨겁고 긴 키스를 내게 퍼부었다. 금세라도 내 옷을 갈기갈기 찢고 침대에 쓰러뜨릴 듯한 기세였다. "너에게는 한 황홀한 상상이었을 테지만...... 내게는 고통과 다를 바 없는 욕망이었다. 내가-- 얼마나 열렬하게...... 너를 원했는지 알아? 몇 번이나 너의 흰 나체를 망상했는지, 그로 인해 얼마나 괴롭고 긴 싸움을 해 왔는지......" 그는 심한 열에 들뜬 사람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세찬 열기는 마치 놓쳐서는 안될 뱃전처럼 그의 가슴에 단단히 매달려 있는 내게도 옮아 왔다. 그러나 내게 전해 온 그 열기는 갑작스런 슬픔으로 변형되어 나는 울먹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이미 마음을 허락해 버린 뒤에 남은 육체란 것이 무슨 뜻이 있겠어요? 저는 이대로 끝나버리는 게 정말로 두려웠어요." 어쩌다 탈없이 남은 육체에 의지해 새로운 사랑을 찾는 것이 두려웠어요...... 그건 다시는 사랑하게 될 수 없으리라는 불안 같은 것이었어요. 아시겠어요? 다시는 사랑하게 될 수 없으리라는 불안......" 그것은 반드시 술로 과장되었다고만 단정할 수 없는 내 진심이었다. "알지, 알고말고......" 그는 그런 나를 더 힘주어 끌어안으며 이번에는 내 얼굴 전체에 분별없는 키스를 퍼부어 댔다. 그러다가 갑자기 포옹을 풀고 한구석에 있는 술이란 술은 모조리 탁자 위에 꺼내 놓았다. "이제 이 밤은 둘 모두에게 쉽게 잊을 수 없는 밤이 됐소. 우리끼리지만 간단한 의식을 치릅시다. 축배를 드는 거요." 그러고는 창문을 가린 두꺼운 커튼을 걷어젖히고 소파를 그 쪽으로 돌려놓았다. 저만치 잠든 서울 거리가 먼 밤항구처럼 내려보였다. 아름답기보다는 까닭 없이 내가 빠져 있는 슬픔의 정조를 더하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내 감정에 개입함이 없이 우선 딴 포도주를 잔에 철철 넘치도록 채운 뒤 내게 내밀며 느닷없이 물었다. "당신은 정말로 나로 인해 받게 될 세상의 비난에 초연할 수 있소?" 마치 엄숙한 사제와 같은 목소리였다. "필요하다면." "몇 년이고 기다려 줄 수 있소?" "진심으로 원하신다면." "사랑의 윤리가 모든 윤리에 우선한다는 것도 진정으로 믿으시오?" "네." 하지만 그때부터 내 정신은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술도 술이지만 그보다는 독감이 다 낫지 않은 몸으로 아침부터 무리를 해 온 탓이었으리라. 술은 오리려 그때까지 나를 지탱해 올 수 있게 한 힘의 일부였다. 그리하여 몸은 대답과 함께 그와 잔을 부딪치고 있어도 마음은 차츰 치매와도 같은 상태로 빠져 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였다. 나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비슷한 질문을 한없이 계속하던 그의 목소리에서 언제부터인가 차츰 격정과 활기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꿈결같이 몽롱한 기억이기는 하지만 분명 그것은 깨어남의 징후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이제는 웅웅거림으로밖에는 떠오르지 않는 말로 심각한 얼굴로 한동안 중얼거리더니 방을 나갔다. 내 이마에 키스를 하고 방을 나설 때까지 두 번이나 돌아보는 그를 보면서 아아, 이제는 정말 떠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은 들면서도 나는 가위눌린 사람처럼 소파에 앉은 채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가 아슴아슴 빠져 들고 있던 것은 잠인지 혼절인지 모를 아득한 어둠이었다...... 그 다음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떤 병원의 입원실이었다. 곁에는 엄마가 근심스레 내려다보고 있고. 다시 어둠. 신열에 들뜨고 온몸이 부스러지는 듯한 고통의 밤낮...... 어쩌다 이 지경이 되도록 무리를 하셨어요?...... 유럽에서는 독감으로 수십만 명이 죽은 적도 있답니다...... 이번 홍콩 D형 설건드렸다가 입원까지 한 사람 많아요...... 그러다가 사흘 만에 비로소 나는 어느 정도 맑은 정신으로 그 밤의 나머지를 엄마에게 들었다. "새벽 세 시쯤 민 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더구나. 완전히 혀가 비뚤어진 목소리였다. 네가 그 호텔에 홀로 취해 있는데 아무래도 불안하니 가 보라는 내용이었다. 급하게 달려와 보니 너는 소파에 앉은 채 정신을 잃고 있더구나. 몸이 펄펄 끓고 마구 헛소리를 해댔지. 바로 이리로 옮겼고......" 나무라는 것도 아니고, 다 이해한다는 표정도 아닌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였다. --이것이 그와 나의 마지막이다. 어쩌면 이 땅에서는 다시 못 만나게 될 우리들이. 1월 5일 요일 모름. 그는 떠났다. 서둘러. '출국 서양화가 민승우 씨 파리. '르 아르' 화랑에서 개인전 및 유럽화단을 돌보기 위해서 도불 오늘 아침 아직도 자리에 누운 채 신문을 뒤적이다 나는 우연히 그 단신을 찾아냈다. 병원에 있을 때 간호원으로부터 그가 남몰래 다녀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충격이 작은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그와 관련된 내 일기는 여기서 끝난다. 하지만 나는 그 뒤 그로부터 세 통의 편지를 받았다. 지금껏 읽어 온 내 일기를 하나의 이야기로 보고, 그 맺음을 대신하여 옮긴다. '희원에게 벌써 그곳을 떠난 지 열흘이 넘었다. 몸과 마음 모두 건강을 회복했는지 궁금하면서 불안하다. 나는 그동안 루브르 박물관에서만 지냈다. 거기서 전시된 세계적인 문화재란 한결같이 이 호전적인 민족이 식민 침략에서 얻어낸 전리품에 불과하다든가, 자국민의 경우 오만에 가까운 문화적인 우월감으로 거름이 엄격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든가 하는 따위의 비예술적인 무정을 단단히 하고 있어도, 시간이 흐를수록 위압감이 느껴지는 데는 어쩔 수 없다. 한두 사람의 천재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지난 전통의 무게와 두꺼운 층이 일으키는 외경심이다. 이제 며칠 뒤로 박두한 내 전시회가 진심으로 두려워진다. 하지만 지금 내가 편지를 내는 것은 그런 어줍잖은 이곳 생활을 알리기 위해서는 아니다. 아직은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는 우리들의 마지막 밤에 내가 취한 행동을 조금이라도 그대에게 해명하고 싶음과 아울러, 그날 밤 그대가 보여 준 그릇된 고정관념의 교정에 어떤 도움이 되고자 이 글을 쓴다. 내 삶은 출발부터가 성(性)에 대한 혐오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 남매의 출생 자체가 그러하다. 다시 말해 야합으로 생겨나고 그들 자신의 또 다른 쾌락의 추구를 위해 부모 양쪽으로부터 버림받았던 것이다. 그 다음 성에 대한 내 경원을 기른 것은 내 정신이 자라난 종교의 분위기였다. 어렸을 적 우리 고아원의 보모를 맡았던 수녀님들은 물론, 원장 아버지이며 다른 직원들에게 있어서도 성은 종종 죄악이었고, 그런 분위기를 우리가 아직 거기 대해 모르기 때문에 한층 더 선명한 관념으로 어린 가슴에 남게 되었다. 거기다가 다시 성에 대한 내 혐오를 더한 것은 자란 뒤 몇 년 간 체험한 밑바닥 삶에서 목도한 그 참상이었다. 거기서 내가 본 것은 생식과 출산이라는 신성한 목적에서 이탈한 성이 보여 줄 수 있는 한의 온갖 타락과 비참이었다. 그리하여 나중 나 자신이 한 성년이 된 뒤에도 그 세 가지 원인은 성을 엄격하게 보는 눈을 내게 남겨 주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어정쩡한 타협이 일어나고 또 어떤 부분은 진상을 알게 됨으로써 완화되었지만, 지나치게 선정적인 이 시대의 문화 형태는 끝내 나를 설득하지 못한 것이었다. 흔함과 속됨은 구별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흔하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의 에로틱한 사랑을 천박하고 속된 것으로 경멸해 왔으며, 더욱 자주는 사랑과 성을 혼동하는 이 시대의 사조 자체를 통탄해 왔다. 어느새 많은 세월이 허비되었고 그에 따른 여러가지 제약도 생겨났지만, 만약 내가 사랑에 빠지는 일이 있으면 그 사랑은 성의 침해와 오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것이기를 바랐다...... 얼핏 들으면 그 같은 내 바람은 어두운 과거 때문에 성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된 자의 이상심리거나 세상 일을 알 만큼 아는 삼십대 후반의 기혼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감상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록 신산스런 삶을 지나오긴 했지만 스스로를 이상심리에 빠졌다고는 생각지 않으며, 역시 과장의 버릇이 있기는 해도 스스로를 터무니없는 감상주의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오히려 내가 믿고 싶은 것은, 값싼 애정 영화나 주간지 또는 통속소설에서 흔히 보듯 틈만 나면 성적인 쾌락의 추구에만 여념이 없는 사람들 만큼이나, 그런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을 꿈구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매일매일 무슨 폭력처럼 자행되는 반도덕의 선전에 뜨거운 항변을 되풀이하고 있는 수많은 가슴들이 있으며, 특히 지식이나 문화의 탈을 쓴 채 갖가지 형태의 성적 타락을 부추기는 주장들에 분개하는 더 많은 경건한 정신들이 있음을 나는 믿는다. 그들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다만 이 시대의 주장과 선전들이 하도 요한하고 그럴듯해서 잠시 어리둥절해 있거나 자칫하면 뒤집어쓸 위선과 비겁 또는 낡음이라는 공격에 대해 효과적인 방어를 생각하느라 잠시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봄 내가 다시 그대를 만나게 되었을 때도 그러했다. 이 시대의 주장과 선전에 홀려 있는 이들에겐 고색창연한 예술가의 몽상으로만 들리겠지만, 우리의 만남이 사랑으로 변질될 징후를 보이면서부터 내가 그대를 상대로 꿈꾼 사랑은 그것을 통해 둘의 정신이 보다 높게 끌어올려지고, 우리 살이(生)가 진 온갖 고통스런 부하(負荷)는 그 무게가 줄어들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피로이며 소모이며 부패인 성, 거리마다 넘쳐흐르는 그 저급한 사랑의 육화는 처음부터 내 예정이 없었다. 하지만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직은 둘 모두에게 상처처럼 생생한 기억이지만, 우리는 뜻밖에도 세상의 미신에 깊이 젖어 있었고, 제 몫을 요구하는 육체의 소리도 그렇게 초연하지 못했다. 그 바람에 몇 발자국 가지도 못해 우리의 사랑은 이상하게 뒤틀리고 엉거주춤한 것이 돼버렸으며 경계했던 피로와 소모의 징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모든 우여곡절과 혼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결말을 맺은 지금 나는 오히려 애초에 내가 원했던 걸 얻은 기분이다. 나는 무엇이든 신중하고 도덕적인 고려가 승인한 것만 승인한다. 물론 이 같은 결말에 대한 희원이의 해석은 나와 크게 다름을 알고 있다. 마지막날 밤 그대가 한 말이 순간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대는 아직도 마음을 이미 허락한 뒤에 남은 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야말로 내가 이 글을 쓰는 또 다른 목적, 고쳐 주고 싶은 그대의 고정관념 가운데 하나이다. 비판 없이 받아들인 이 시대의 미신이다. 여기서 만약 내가 그대의 순결의 무결함을 말한다면 그대는 어김없이 정신적인 순결을 내세울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순결이란 육체의 순결을 이미 잃어버린 이의 위로로나 남겨 주어라. 그런 것은 원래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해도 그것이야말로 무의미하다. 우리가 그 뜻을 엄격하게 해석한다면 이 세상에서 누가 정신적인 순결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또 느슨하게 해석하고 편리하게 이용하려 들면 정신적으로는 순결하지 못할 이가 도대체 누구이겠는가. 그대는 결코 자신의 순결을 우연히 남겨진 무의미한 상태로 비하시켜서는 안된다. 그것은 그대의 사랑이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권리였으며, 오히려 내가 거기에 반해 그날 밤 그대의 몸을 탐했더라면, 나야말로 비열하고 파렴치한 배신을 한 셈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또 그대는 나의 이 같은 물러남을 거절 또는 버림과 같은 이름을 붙여 자존심의 문제와 관련 지어서도 안된다. 오히려 진정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쪽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대가 아닌 나이다. 만약 어떤 도둑이 있어 능동적인 회개로 훔치기를 포기하고 빈집을 나온 경우라면, 그 집에 경관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면 묘한 치욕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내게도 이 한번의 사랑, 아름답게 가꾸려던 오랜 결의 외에, 도덕과 관습의 압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나이라든가 신분이 있었다. 간단히 몇 자 적는다는 게 뜻밖에도 길어졌다. 부디 자중자애(自重自愛)하고 건강해라. 이만. 파리에서 민.' '희원에게. 오늘 전시회가 끝났다. 욕심을 부리자면 실패였다고 말할 수도 있고, 자만하려면 성공적이라고 떠벌릴 수도 있는 정도였다. 일간 그쪽에도 이곳 전시회 소식이 전해지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 소식이 어떤 식으로 전해지든 내가 이렇게 쓸쓸해 하고 있음까지는 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걸 위해 특히 그대에게 이 글을 쓴다. 총총. 민' '희원, 이제는 아득히 먼 그대에게. 며칠째 바르비종에 머물러 있다. 이곳에 온 뒤 처음으로 고향에 온 듯 한 푸근한 느낌을 맛보았다. 루부르, 몽마르트, 인상파전, 로댕관, 퐁피두관...... 그 어떤 회화(繪畵)의 성소(聖所)에서도 내가 느낀 것은 지나친 자양에서 오는 느끼함이나 무력감 또는 서글픔에 지나지 않았음을 상기하면 자못 귀한 푸근함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반가운 것은 그곳을 떠난 지 석 달이나 된 지금에야 마음 깊은 곳에서 나를 괴롭히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일이다. 오늘로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절차상의 일이 매듭되고, 거처할 집도 마련되었다는 연락을 방금 파리로부터 받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불현듯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도 이제 더는 나는 괴롭히지 못할 테지. 그대의 부름도 이제는 더 이상 나를 낯선 거리의 목로에서 곯아떨어지도록 만들지는 않을 테지. 그러면 이제야말로 안녕.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 내 영원히 간직할 아름다움의 추상. 바르비종에서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