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와 빨간모자 - 김 동 선 제1장 불길한 예감 그날 아침, 김호장(金昊將)은 대단히 심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진 것을 직감했다. 기상 점검 때 간수들이 총을 메고 나타났고, 태도가 매우 거칠었는데, 점검이 끝난 뒤에도 죄 수들에게 점검 자세로 앉아 있으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 다. 그리고 점검 직후에 실시되는 세면도 금지됐다. 세면이 금지되자 각 방마다 죄수들이 약간 술렁거렸다. 그러자 총을 멘 간수들이 눈알을 부라리며 다시 나타나 “ 어떤 새끼들이냐? 까부는 새끼들은 죽인다!”라고 소리질렀 고, 이 서슬에 죄수들은 즉시 얌전해졌다. 그들은 간수들이 설칠 때에는 무엇보다도 우선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죽는 시늉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때 걸렸다간 몰매를 맞든지 흑방(黑房)에 끌려가기 때문이었 다. 특히 그들은 흑방에 끌려가는 것을 가장 두려워 했다. 손 을 허리 뒤로하고 수갑을 찬채 캄캄한 땅바닥 방에 갇히는 것은 반죽음 당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흑방에 끌려가면 수갑을 뒤로 찬채 밥도 개처럼 입으로 핥아 먹어야 하고 잠도 수갑을 뒤로 찬채 땅바닥에서 자야되는 것이다. 건강 을 유지하기 어려운 감옥살이에서 이런 징벌을 당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것이기 때문에 죄수들은 흑방에 끌려가는 것을 가장 두려워 했다. 간수들이 한바탕 설치고 지나가자 감방 안은 이 돌발사 태를 놓고 조심스럽게 의견이 분분해졌다. " 오늘은 새벽부터 마개비(교도관)들이 왜 저렇게 날뛰 지?” “사형 집행이라도 있는 건가!” “지난 번 사형 집행 때는 조용했잖아?” “그럼 뭘까?” “탈옥인가?” “맞다. 탈옥인 모양이다. 어젯밤에 누가 탈옥한 모양이다! ” 그들은 이 사태가 탈옥 때문이라는 데에 의견이 모아지 자 더욱 몸을 사렸다. 만일 탈옥사건이 발생했다면 간수들 은 그 화풀이로 그들을 더욱 거칠게 다룰 것이 뻔했기 때 문이었다. 그러나 대구 형무소 제일의 범털 김호장은 이 사태 앞에 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는 이 새벽에 왠지 기분이 언짢았다. 13세때 가출하여 부산 남포동 뒷골목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위기에 대한 예감이 뛰어 났는데, 그의 예민한 감각이 미구에 그에게 몰아닥칠 어떤 위험을 포착한 것이 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표면상으로는 그가 위기를 느낄 조짐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간수들이 총을 메고 설친다 해도 두려워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상 직후 부터의 언짢 은 기분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막연히 이런 생각만 했다. <이건 정말 이상하다. 오늘은 묘하게 기분이 안 좋은데 …. 마개비들이 날뛰는 걸 봐서는 필경 무슨 일이 일어날 모양이로군. 허나 무슨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아침 식사가 끝난 뒤에는 사태가 더욱 심각하게 전개됐다. 죄수들에게는 다시 점검 자세로 앉아 있으라는 명령이 내 려졌고, 곧 이어 출정(出廷)이 중지됐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뿐만 아니라 면회도 금지됐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운동도 실시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죄수들의 이동이 전면적으로 금 지된 것이다. 형무소 내에서 이런 조치가 내려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초비상 사태였다.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죄수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점 검 자세로 똑바로 앉아 있었다. 간수들의 태도로 보아서는 죄수들이 조금만 동요해도 즉시 총을 발사할 태세였으므로 그들은 더욱 몸을 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태가 이쯤되자 김호장도 통뼈가 될 수 없었다. 그도 다 른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점검 자세로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자세로 앉아 있는 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하는 일이었으므로 그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 고 있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김호장은 간수들로 부터 특별 대우를 받는 인물이었다. 법보다는 주먹이 가깝다고 간수들도 명성 이 자자한 김호장의 주먹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은연중 특혜를 베풀고 있었다. 이를테면 새벽점검 이 끝나면 그의 감방 문 열쇠를 따 주기 때문에 그는 감방 안에서 나와 사방(舍房)복도에서 가벼운 운동을 할 수 있 었고, 또 죄수는 어느 누구도 독보(獨步)가 금지되어 있었 지만 김호장은 그가 원할 때 언제든지 감방에서 나와 이 사방 저 사방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반말을 쓰는 간수는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이런 특혜는 혹시 그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었다가는 그가 출감 후 어떤 보복을 할 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베풀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그에 대한 간수들의 태도가 싹 달라졌다. 새벽 기상 직후부터 그에 대한 배려가 없어졌고, 출근하면 그에게 문안 인사부터 오는 담당도 문안인사는 커녕 그를 외면해 버렸다. 그뿐만 아니었다. 아침식사 직후에 담당을 통해 사태의 진상을 알아보려고 그가 배식구로 고개를 내밀고 담당을 불렀을 때 담당은 그를 보고 큰일이라도 날듯이 허겁지겁 손짓으로 그에게 고개를 들여넣으라고 종용했다. 그는 담당 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이,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하고 물었는데, 김호장의 이런 태도에 담당은 사색 이 되며 “고개를 빨리 집어 넣으시소! 빨리요! 큰일 납니 데이!”라고 소리질렀다. 그는 떱떨했지만 마지 못해 고개 를 집어넣었는데, 담당은 재빨리 뛰어와 그의 감방 배식구 문을 잠가버렸다. 그리고 담당은 “하여튼 지금은 조용히 있는 게 좋심니더!”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김호장은 감방 동료 앞에서 이런 일을 당하자 체면이 말 이 아니었다. 그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했지 만 사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으므로 꾹 참았 다. 그러나 그는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이 씨팔 놈들이 환장했나, 어디 두고 보자!”라는 말을 내뱉었다. 담당은 줄곧 총을 메고 근무했고, 교대하러 오는 땜통(본 무담당 보조 교도관)들도 총을 메고 나타났다. 그들의 얼굴 근육은 한결같이 팽팽하게 굳어 있었다. 죄수들은 가끔 문 틈으로 바깥 동정을 살피며 사태의 진상이 알려지기만 초 조하게 기다렸다. 이날 점심 배식 직전에는 밑도 끝도 없이 전쟁이 터졌다 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러나 이 말은 최초의 발설자 입에서 나온 얘기가 옆방 으로 통방(죄수들이 옆방과 얘기를 나누는 것)되면서 변질 된 것이었다. 최초의 발설자는 옆 방에 ‘전쟁이 터진 게 아니냐?’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통방되면서 ‘전쟁이 터 진 모양이다’라고 전해졌고 나중에는 ‘전쟁이 터졌다’ 라는 말로 변해버렸다. 김호장의 방에도 이 소문이 즉시 전해졌다. 옆 방에서 조 심스럽게 “호장이 형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 김호장 이 변소에 들어갔는데 옆 방 변소에서 대구 가닥지(본바닥 놈이라는 뜻) 김차곤(金次坤)이 목소리를 죽이며 “형님인 교?”하고 물었다. 김호장도 조심스럽게 “왜 그러냐?”라 고 물었다. 그러자 김차곤은 숨 넘어가는 소리로 “소문 들 었읍니껴? 전쟁이 터졌답니더”라고 말했다. 그 말에 김호장의 눈이 번쩍 빛났다. “전쟁?” “예” “확실하냐?” “보면 모르겠습니껴? 전쟁말고 무슨 일로 이렇게 살벌하 겠습니껴?” 김호장은 잠자코 있었다. 출정과 면회가 금지됐다는 것이 알려졌을 때 막연히 바깥 세상에서 커다란 사건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고 얼핏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전쟁이라 니…. 김호장은 쓴 입맛을 다셨다. 김차곤이 다시 숨 넘어가는 소리로 “큰 일 아닙니껴? 우짤까요, 우리는?”하고 물었는데 김 호장은 그 말에는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전쟁이 터졌다면 이거야말로 재수에 옴이 붙은 일이나닐 수 없었다. 철장에 갇혀 있는 몸이 무얼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김호장은 철장 너머로 보이는 5월의 푸른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김차곤이 다시 말했다. “형님, 어떻게 되겠읍니껴?” 김호장이 이 말에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너야 한 달만 지나면 나가는데 뭐가 걱정이냐. 걱정은 내가 좀 걱정이다. 난 석달을 기다려야 하니…” 그 말 끝에 김호장은 차분하게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소문 듣고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다. 전쟁이 터 진 게 분명한 것 같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상하단 말이 야. 마개비들이 전쟁이 터진 걸 왜 숨기고 있지? 사태가 안 좋아서 그러나?… 그래도 그렇지. 숨길 필요는 없지 않은 가?” 이것은 김차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문이 그럴듯했지만 그 자신은 그걸 전혀 믿고 싶지 않았 기 때문에 스스로 의문을 제기해 본 것이었다. 김차곤은 아무 말 없었다. 그도 멍하니 푸른 하늘만 쳐다 보기만 했다. 김호장도 한동안 말없이 하늘만 쳐다보다가 “어쨌든 곧 알려지겠지. 들어가 봐라”하고 말했다. 김차 곤은 “예, 하여튼 이따 다시 뵙시다”라고 말하고서 들 어갔다. 김호장은 창 밖으로 침을 탁 뱉은 뒤 뺑끼통(변기)에 오 줌을 갈기며 혼자 중얼거렸다. “어쩐지 새벽부터 기분이 안 좋더니 좃같은 소문을 듣게 되는군. 그나 저나 전쟁이 터졌다면 큰 일 아닌가? 씨팔, 빨갱이들이 쳐들어온 건가, 이쪽에서 쳐들어간 건가?” 그리고 그는 그의 장대한 물건에서 오줌방울을 툭툭 떨 고 감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서자 사기꾼 변일남(邊一男)과 쓰리꾼 윤상호(尹 相鎬)가 통방 내용을 들었는지 겁먹은 눈망울로 그를 쳐다 보았다. 그는 사기꾼과 쓰리꾼은 천성적으로 경멸하고 있었 으므로 매몰차게 한마디 던졌다. “전쟁이 터졌단다. 만일 후퇴한다면 네놈들은 꼼짝없이 총살당할 것이다. 어디가 고와 네놈들까지 데리고 후퇴하겠 느냐?” 수금 받으러 갔다가 여고생 혼자 집을 보고 있는 것을 보고 강간하여 징역을 살고 있는 한전 수금원 정영국(鄭榮 國)이 말을 걸려고 했지만 김호장은 그를 무섭게 노려본 뒤 “너도 마찬가지야! 너는 강간범이기 때문에 00도 짤릴 것 이다.”라고 쏘아댔다. 오후 내내 대구 형무소는 마치 한밤중 처럼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형무소라는 곳이 사람들을 집단으로 수용하고 있는 곳이 니까 평상시에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끊일 새가 없는 곳 인데 이 날만은 낮 동안에도 웅성거림이 전혀 없었다. 이것 은 무엇보다도 공포감 때문이었다. 외부와의 소통이 완전히 차단된 채, 그리고 감방 안에 꼼짝없이 갇힌 상태에서 전쟁 이 터졌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죄수들은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간수들의 서슬이 시퍼렇게 되어 있 었으니 감히 찍소리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겁먹은 눈망울만 굴리며 전쟁 뒷 소식이 들어오기를 초조 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간수들은 여전히 총을 메고 감방안을 감시했고, 보안과장 이 각 사방을 두번 순시했다. 그런데, 이 사태 앞에서 김호장은 묘하게 나른한 회상에 젖 어들고 있었다. 성장한 이후, 아니 철이 들 무렵부터 거의 한 번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김 호장이었지만 김차곤으로부터 전쟁이 터졌다는 말을 들은 직후부터 그는 마치 꿈 속에 빨려들어가듯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열 한 살 때 전쟁을 만났었다. 열 두 살때 그는 가 족과 함께 평양에서 부산까지 피난 내려왔다. 이것은 1·4 후퇴 때의 일이다. 피난민 대열에 끼어 그의 가족은 부산까 지 걸었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길을 굶주림과 추위 에 떨며 한없이 걸었던 일을 그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 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전쟁이란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하다. 어휴, 그때 정말 혼났었지. 춥고 배고프고 무섭고 그리고 다리가 얼마나 아 팠던가. 발이 통통 부었었지. 젠장 그런 전쟁이 또 일어나 다니…. 나같은 놈들이 또 수없이 생기겠군> 그의 가족은 부산에 도착하여서도 1년여 동안은 무지무 지하게 고생했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김호장도 깡통 을 차고 구걸을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피난생활 1년여만에 그의 부친이 돈을 벌어오기 시작해서 그는 깡통을 버리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김 호장은 이 시기를 회상하며 그때는 대단히 행복했었다라고 얼핏 생각했다. 부친이 돈을 많이 벌어왔고 낯선 타향 땅이 었지만 항구 도시 부산이 마음에 들어 모든것이 매우 만족 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로 어느날 저녁때 그의 부모들은 이삿짐을 꾸리기 시작 했고, 이삿짐이 꾸려진 즉시 그의 가족은 차를 타고 어디론 가 매우 먼 시골로 이사를 했다. 김호장은 이삿짐을 꾸릴 때 그의 모친이 계속 흐느꼈고, 차를 타고 가면서도 눈물을 멈추지 않았으므로 부친에게 매우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고 만 짐작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이 도착한 곳은 전남 곡성이었다. 그런데 김호장 가족의 이 이주 경로는 김호장 연대기에 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가 훗날 폭력 세계의 전 국적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은 부산과 광주에 연고가 있었기 때문인데 광주와 연고가 생긴 것은 그의 가 족이 전남 곡성에 정착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김호장의 부친은 전남 곡성에서 새 터전을 잡았 는데, 그러나 마침 살만한 시기가 됐을 때 그의 부친은 읍 내 다방 마담과 배가 맞아 가족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전쟁의 참화 속에서 간신히 살아 남았던 그 의 가족은 하루 아침에 또 거지신세가 되어버렸다. 그의 모친은 3형제의 연명을 위해 남의 집 허드렛일과 바느질로 먹을 것을 구해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먹을 것은 언제나 부족하여 그들 3형제는 허기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소년 김호장의 가슴 속에 뜨거운 증오심과 반항심이 끓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그는 부친을 증오했고, 그의 가난을 증오했다. 그의 모친은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자 였기 때문에 눈물로 밤을 세웠고, 남의 집 허드렛일로 간신 히 연명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동네에서는 가장 천대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소년 김호장은 이 모든것이 싫었다. 모친이 밤마다 눈물 을 흘리는 것도 보기 싫었고, 더욱이 모친이 동네에서 천대 받는 꼴을 보는 것은 죽는것 만큼 싫었다. 그래서 그는 어 느날 새벽에 집을 빠져 나와 곧장 부산까지 가버렸다. 그리 고 그 가출은 그의 인생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남한 땅에서 그래도 가장 친숙한 도시 부산 거리에 나타 난 김호장은 남포동 뒷골목에서 구두닦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시기의 남포동 뒷골목에서의 구두닦이 생활이야 말로 철저한 적자생존의 세계였다. 전쟁의 여파로 부산은 온통 난장판이었고 질서가 전혀 없었던 시기였다. 권력과 금력이 있던지 아니면 주먹이라도 강해야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부산이었다. 부산 천지가 이런 판에 하물며 남포동 뒷 골목 세계는 어떠했겠는가. 김호장은 당장 구두통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고, 하루벌이를 지키기 위해서도 싸워야 했 다. 이미 증오와 반항심으로 가득차 있었던 그의 심성은 적 자생존의 세계에서는 커다란 무기였다. 그는 어떠한 도전에 도 굽히지 않고 싸웠다. 소년 김호장이 어떻게나 끈질기고 악착같았던지 싸움을 걸어온 패거리들은 혀를 내두르기 시 작했다. 그는 몰매를 맞고 졸도 직후에도 굽히지 않고 또 싸웠다. 이빨이 깨진 일도 있었고 각목으로 뒷통수를 얻어 맞아 머리가 깨진 일도 있었지만 그는 굴복한 일이 없었다. 이런 싸움 끝에 그는 열다섯 살 때 최초로 소년원에 수감 됐다. 어쨌든 훗날 그가 폭력세계의 전국적 인물이 될 수 있었 던 자질은 이미 이 시기에 닦아진 것이었다. 뒷골목의 왕자 가 될 수 있는 강인한 근성과 배짱, 싸움기술, 그리고 기민 한 상황판단력등은 이 시기에 길러졌던 것이다. 그는 이 시 기에 의리도 배웠다. 그런데 그가 부산 남포동에서 차근차근 기반을 닦아갈 무렵 그의 모친이 그를 찾아왔다. 그의 모친은 수소문 끝에 소문을 듣고 아들을 찾아온 것인데, 이것은 그가 가출한지 꼭 4년째 되던 해였다. 김호장은 그때 모친의 권유에 못이겨 모친과 함께 전남 곡성으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갔을 때 곡성에서의 그의 가 족 형편은 좀 풀려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모친의 권유 로 광주의 모 야간학교에 적을 두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였다. 그의 모친은 자신의 세 아들 중 김호장에 대해 가장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형편 속에서 도 공부를 시키기 위해 그를 광주에 내보냈는데, 그러나 그 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광주의 폭력세계였다. 이것은 약간 우연스런 일이었다. 김호장이 학교에 편입한 날 그는 당장 텃세의 도전을 받았다. 이 학교에 다니고 있 던 광주 학동파 핵심 멤버 째보 윤상태(尹相泰)가 김호장을 건드렸다. 하지만 김호장은 이미 항구도시 부산 남포동 뒷 골목에서 잔뼈가 굵은 경력의 소유자가 아닌가. 김호장의 동작이 워낙 민첩했고 또한 주먹이 무쇠여서 남포동 뒷골 목에서도 맛장으로는 김호장을 당해낼 자가 없다는 평판이 서 있었는데 대갈보는 이것을 모르고 그를 건드렸다. 대갈보가 김호장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대갈보는 김호장의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 져 입에서 거품을 뿜어냈다. 다음날 학동파 두목 이종구(李鐘九)가 졸개 다섯명을 데 리고 학교앞 골목에서 김호장을 기다렸다. 물론 이 대결도 김호장의 승리였다. 학동파 패거리들이 그를 포위하자 김호 장은 비호처럼 몸을 날려 먼저 두목을 때려 눕히고 졸개들 을 난타했다. 이것은 실로 전광석화처럼 벌어진 일이었다. 이날 학동파 두목은 김호장에게 무릎을 끓고 빌었다. 김호장은 이렇게 혜성처럼 광주 폭력세계에 데뷔했다. 그 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고, 그가 성년이 됐을 때는 광주 일대에서는 그와 대적할 세력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보스가 됐다. 김호장의 활동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그가 남포동 패거 리들과 줄곧 연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고, 서울 대구 등지 에도 원정을 자주 다녔다는 점일것이다. 남포동은 그의 고 향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그는 광주를 훌쩍 떠나 남포동 에서 놀다오곤 했다. 그의 똘만이들은 상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여 그에게 바쳤다. 김호장은 노름판을 붙이고 뒤를 봐주는 대가로 돈 을 받기도 했고 어떤 때는 해결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 러한 동안에 그는 폭력사범으로 형무소에 두 번 다녀왔다. 그는 대구에 원정왔다가 노름판에서 상대방이 속임수를 쓰자 칼로 그 녀석의 손을 찔러버렸는데, 이 사건이 재수없 게 확대돼 체포당했다. 다른 폭력전과자가 그런 사건을 저 질렀다면 최하 징역 3년을 선고 받았겠지만, 그는 겨우 징 역 1년을 선고 받았다. 그의 똘만이들이 판사를 매수했던 것이다. 선고하던 날 날 판사가 징역 1년에 처한다고 했을 때 그는 방청석의 똘만이들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그렇지 만 그는 형무소에 돌아와서 관구부장에게는 이렇게 능청을 떨었다. “창피해서 말도 못하겠소. 김호장이에게 겨우 징역 1년이 라니 출감하면 놀림받게 생겼소. 1년짜리 양갈보 징역 살고 나가면 누가 알아 주겠소?” 관구부장은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웃으면서 “이제 별이 몇개지?”라고 물었는데, 그는 퉁명스럽게 “별이 세개면 뭐하겠소? 양갈보 별도 별이오?”라고 대꾸했다. 별이란 형무소 은어인데 전과 1회에 별이 하나씩 붙는다. 그러니까 김호장의 별이 세개라는 것은 전과 3범이라는 의 미이다. 한 번 과거라는 늪 속에 빠져들어간 김호장은 그 과거의 늪 속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다. 원래 감방이라는 곳이 상상력만 키우는 곳이지만, 이날 김호장의 과거에 대한 회 상은 좀 유별났다. 오후 내내 그는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눈을 감고 있었고, 취침시간이 되어 자리에 누웠을 때도 그 런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약간 울적했고, 착잡했다. 그는 1·4후퇴 때 눈이 덮인 벌판을 추위에 떨며 끝없이 걸었던 일을 수없이 생각했다. 그리고 부산에 도착하여 당 장 굶주렸음에도 불구하고 바닷가에서 아련한 수평선을 넋 이 빠지도록 쳐다보았던 일도 생각했다. 난생 처음 보았던 그 바다는 소년 김호장에게 가장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리 고 그 바다에 혼을 빼앗겼을 때만해도 그는 티없는 소년이 었다. 부산 천지가 아귀다툼으로 뒤범벅이었지만 그는 소년 의 마음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김호장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했다. <전쟁만 안 났더라도 나는 괜찮은 놈이 됐을 거야. 머리 도 좋았고 공부도 꽤 잘했으니까…. 그렇지만 꼰대가 더 문 제였지. 꼰대만 도망가지 않았더라도 어떻게 됐을지 모르 지. 허나 꼰대가 도망간 것도 전쟁과 관련이 있군. 부산에 서 쭉 살았어야 했는데….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야밤에 짐을 싸들고 곡성까지 왔담? 꼰대가 도둑질하다가 들켰나? 그랬을 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당시에 도둑질하지 않는 놈이 어디 있겠나?> 그리고 그는 또 생각했다. <전쟁이 또 났다니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건가? 빌어먹을 세상이로군. 우리같은 놈들에겐 전쟁이 터져도 상관없지만 …. 아니지, 어떻게 될지 모르지. 그러나 저러나 뭘 확실히 알아야 앞으로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나!> 그는 지난 9개월 동안 출감 이후의 계획을 다 짜놓았다. 그는 우선 조직을 정비하여 좀 굵직한 일만 손대기로 마음 먹었었다. 그리고 하찮은 노름판에서 실수하여 감방살이하 는 일 따위는 아예 안하기로 결심하기도 했다. 조직만 튼튼하면 일거리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 폭력세계 였으므로 그는 줄곧 조직의 구성 문제만 골똘히 연구했다. 그는 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해 하나 하나씩 세밀하게 분석 하여 같이 일할만한 놈들의 이름은 머리속에 깊이 새겨두 기도 했다. 그런데 전쟁이 또 일어났다니…. 김호장은 이런 저런 생각에 파묻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하품을 한 번 한 뒤 막 잠이 들 무렵 배식구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고, 그를 낮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호장이 형님 주무시는교?” 그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를 부른 사람은 땜통 이홍식(李洪植)이었다. 대구에서 건달 물을 좀 먹다가 간수 가 된 이홍식은 김호장을 흠모하고 있었는데, 이런 관계로 그는 김호장이 바깥에 보내는 비둘기(감옥에서 밖으로 몰래 보내는 편지의 은어)를 도맡아 해주고 있었다. 김호장은 이홍식을 보자마자 잽싸게 배식구 앞까지 기어 갔다. 김호장이 먼저 말했다. “너 잘 왔다. 오늘 밤 여기 근무냐?” 이홍식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예, 당분간 형님얼굴 자주 뵙게 됐십니더. 밤마다 이곳 근무로 배정됐십니더” 김호장은 잘 됐다는 말도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후퇴냐 전진이냐?” 이홍식은 말 뜻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껌벅거렸다. 김 호장이 다시 말했다. “전쟁이 터졌다며? 너도 숨길래!” 그러자 이홍식이 “예?”하고 반문했다. 그의 표정은 김 호장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눈치가 빠 른 김호장은 이홍식이 이렇게 나오자 잠시 이홍식의 눈 속 을 들여다보며 이홍식의 진심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홍식 도 김호장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말을 꺼냈다. “전쟁이라니요? 무슨 말입니껴?” 그리고서 그는 “아!”하고 내뱉더니 “아니, 형님은 아 직도 모르고 있는교?”라고 말했다. 김호장이 잠자코 있자 이홍식이 말을 이었다. “지금 난리났는 기라. 군인들이 중앙청을 점령해 버렸고 장관들도 다 잡혔다 캅니더. 이 곳도 군인들이 점령했십니 더. 지금 계엄령이 선포됐십니더.” 이번엔 김호장이 이홍식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즉시 반문했다. “그럼 뭐야? 전쟁이 아니란 말이냐?” 이홍식이 대답했다. “혁명이라 카는데…. 아직 나도 잘 모르겠십니더.” “혁명?” “예” 김호장은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혁명이란 게 뭔가?” 이홍식이 다시 말했다. “하여튼 군인들이 중앙청을 점령해 버렸으니 군인 세상 이 됐다 캅니더. 혁명군이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것을 만들 었고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데빡입니더. 지금 시내에도 완 전무장한 군인들이 쫙 깔려있십니더” 김호장은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전쟁이 터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홍식은 여기에서 한마디 말을 더 꺼냈다. “그란디 형님. 매우 불길한 얘기들이 떠돌고 있십니더. 오늘 전국에서 일제히 후리가리(일제검거)가 시작됐다 캅니 더. 대구 시내도 지금 무시무시합니더. 조금만 수상해도 군 인들이 막 잡아들입니더” 후리가리란 소리에 김호장이 긴장했다. 남포동 시절에 후 리가리에 걸려 그도 소년원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는 즉 시 이홍식에게 되물었다. “후리가리라니? 어떤 후리가리냐?” 이홍식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이번 후리가리는 뒷골목 어깨들을 소탕하는 것으로 주먹 좀 쓴 다는 사람은 다 잡아들인다는 것이었고, 사상적으로 의심받 는 사람들도 잡혀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홍식은 깡 패라는 용어는 쓰지 않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후리 가리는 깡패 소탕이었다. 김호장은 이홍식의 설명을 듣고 의아해 하며 되물었다. “아니, 군인들이 무슨 원수가 졌다고 우리 건달들을 잡아 들인다는 거냐? 그거 정말이냐?” 그러나 이홍식은 후리가리가 확실하다는 말만 되풀이했 다. 그리고 이홍식은 이렇게 덧붙였다. “소문 들으니 경찰서도 마비됐다 카고 판·검사들도 다 도망갔다 캅니더. 우리 소장실에도 군인들이 잔뜩 와 있십 니더. 아무래도 분위기가 보통이 아닙니더. 형님도 당분간 은 조심하시소. 오늘 출정이 없었지요? 판·검사들이 다 도 망갔으니 어떻게 재판을 하겠십니껴? 바깥 분위기도 살벌 하고 여기도 살벌하니 하여튼 형님도 당분간 조심하시소.” 이홍식이 쏟아놓은 이런 소식에 김호장의 머리는 극도로 혼란해졌다. 무엇보다도 그는 혁명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군인들이 중앙청을 점령하고 장관들도 체포했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판·검사들도 도망갔다 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판국인지 그는 알 수 없 었던 것이다. 김호장은 한참만에 넋두리처럼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로구나. 씨팔 될대로 돼라지. 몇 바퀴 돌고 나면 도로 제자리로 돌아올 게 아닌 가?” 이홍식은 김호장과 얘기하면서 시종 주위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그는 이전답지 않게 좌우를 자주 돌아보았고 초조해 했다. 이를 눈치 챈 김호장은 이홍식에게 근무 위치 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김호장이 그렇게 말하자 이홍식은 약간 안도의 표정이 되며 “형님 푹 주무시소. 내일 쯤에는 더 확실한 얘기들을 가지고 올 수 있을 낍니더. 그럼 갑니다”라고 말하고 배식 구 문을 슬그머니 닫았다. 김호장은 이날 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잠을 못 이루어 몸을 뒤척일 때마다 이런 푸념을 중얼거렸다. “씨팔, 새벽부터 기분이 안 좋더니만 하루종일 좃같은 소 식만 들어오는군” 그러나 김호장은 다음날 부터는 더 불길하고 더 엄청난 얘기들이 쏟아져 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기야 이날만 해도 5·16혁명군이 거사준비단계에서 부터 소위 깡패들을 철저하게 소탕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김호장이 사태의 심각성을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 만 이날 새벽에 기상하자마자 그가 대단히 언짢은 기분에 사로잡힌 것은 분명히 장차 그에게 닥치는 어떤 위험을 예 감한 것이었다. 제2장 일제검거 태풍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이란 원래 정변에 민감하다. 어떤 편이냐 하면 그들은 정치적 변화를 매우 좋아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범뿐만이 아니라 좀도둑들도 마찬가지이다. 정 치적 변화가 오면 특사니 감형이니 해서 감옥에서 풀려날 기회가 많기 때문인데, 김호장의 경우는 좀 달랐다. 그는 혁명 소식보다 후리가리 소문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래서 그는 다음날 아침 김차곤과 통방하면서 후리가리 소식부터 전했다. 김호장이 김차곤을 변소로 불러내 내놓은 첫 말은 이러 했다. "야, 차곤아 후리가리가 시작됐단다." 통방이라는 것은 서로 마주보며 애기하는 것도 아니고 둘 다 허공을 보면서 말소리만 주고 받는 것이기 때문에 밑도 끝도 없는 이런 애기를 상대가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래서 김차곤은 즉시 "형님, 무신 말인교?"라고 반문했다. 이때서야 김호장은 전날 새벽에 전쟁이 터진 것이 아니고 혁명이 일어났으며 군인들이 중앙청을 점령했고 장관들도 다 체포됐다는 애기를 털어 놓았다. 그 애기에 김차곤이 쾌 재를 부르짖었다. "히야, 그거 기똥찬 소식입니더. 군인들이 싹 쓸어 버렸 다 이거지요? 히야." 김차곤은 흥분해서 말을 잇지 못했는데, 김호장이 "야, 임마. 좋아하지마! 그 군인들이 건달들을 다 잡아들이고 있 다는 거야."라고 말하자 김차곤은 "뭐라고예?"하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때부터 김호장이 차근차근 설명하자 김차곤 은 당장 풀이 죽어 버렸다. 그때 깨진 거울 조각으로 복도의 동정을 살피고 있던 쓰 리꾼 윤상호가 담당이 오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으므로 그 들은 곧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들의 통방을 시발점으로 혁명 소식은 삽시간에 형무소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감방 분위기가 전날과는 판이하 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간수들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지만, 감방 안의 분위기는 은연중에 들뜨 기 시작한 것이다. 징역 1년짜리도 미구에 있을지도 모르는 특사를 기대했 고, 장기수들은 더 큰 기대감에 벅차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호장과 김차곤만은 이날 하루를 또 착잡하고 초조하게 보냈다. 밤이 되자 이홍식은 더 구체적인 애기들을 가지고 나타 났다. 애기를 전하는 이홍식의 표정마저 심각하게 굳어 있 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후리가리가 확실합니더. 내가 아는 애들도 다 잡혀갔어 요. 집에서 낮잠 자다가 잡혀간 놈도 있고 당구장에서 잡혀 간 놈도 있고, 하여간 주먹 좀 쓴다는 애들은 다 잡혀갔십 니더. 세상이 완전히 뒤집혔다고 생각하시소. 혁명이란 게 무시무시합니더." 김호장이 탁월한 보스라는 것은 이럴 때 잘 나타난다. 그 는 냉정하게 필요한 질문을 한마디씩 던졌다. "잡혀간 곳이 어디라는 말은 못 들었냐?" "특무대라는 말도 있고 헌병대라는 말도 있십니더” “계엄령이 선포됐다고 했지?” “예” “잡혀간 놈들이 전부 건달뿐이냐? 다른 우범자 단속도 같이 하고 있는게 아냐?” “아닙니더. 순전히 건달들만 잡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 더” 그 말에 김호장이 좀 짜증스럽게 말했다. “같습니다여, 뭐여? 확실하게 말해봐. 순전히 건달들만 잡아들이고 있는 거여?” 이홍식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확실합니다. 그러나 사상이 불순한 사람들도 잡아가고 있다 카는데 그건 잘 모르겠십니더” “뭐? 사상이 불순한 사람들과 건달들만 잡아들이고 있 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알 수 없군. 뭐가 어떻게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김호장은 혀를 한 번 찬 뒤 다시 말했다. “후리가리에 건달들을 다 잡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생전 처음 듣는 얘기다. 그러나 저러나 잡혀간 놈들은 반 죽었겠 군. 계엄령이 선포된데다가 특무대에 잡혀갔다면 뻔할 뻔 짜다. 재수없으면 그 녀석들 군사재판 받게된다… 더 재수 없으면 총살 당하는 놈도 있겠군…” 김호장은 6·25를 체험했으므로 계엄령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 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당장 동료들의 안부를 걱정 하기 시작했다. 전국적인 후리가리라면 필경 그의 동료들도 다 붙잡혀 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김호장은 왈칵 짜증이 났다. 그는 이홍식을 똑바로 쳐다 보다가 거칠게 내뱉었다. “근데 도대체 군인들이 왜 건달들을 잡아들이고 있는 거 냐? 그 얘기는 없냐?” 그러나 이것을 이홍식이 알 턱이 없었다. 이홍식은 묵묵 부답이었다. 김호장도 이홍식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으므 로 잠자코 있었다. 이홍식은 좌우를 한번 살핀 뒤 김호장에게 담배를 내밀 었다. 형무소 전체가 초비상사태에 돌입되어 있었지만 그는 김호장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위험을 감수하고 담 배를 내민 것이다. 김호장은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고 이 홍식이 성냥을 그어 그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이홍 식은 김호장이 안심하고 담배를 피울 수 있도록 좌우를 살 피기 시작했다.그리고 자신도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 다. 불시에 순시자가 나타났을 경우 김호장 방에서만 담배 냄새가 난다면 들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일부러 복 도 가득히 담배 연기가 퍼지도록 내뿜고 있었다. 김호장은 담배 한 대를 담숨에 피워 버렸다. 감방 안에서 는 담배 연기가 흩어지지 않게 피우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 는 마음놓고 피워댔다. 그는 이홍식이 그를 돕기 위해 복도 가득히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을 흘낏 보았기 때문 이었다. 김호장은 심기가 매우 착잡했으므로 담배를 다 피운 뒤 에는 곧 자리에 누웠다. 이홍식은 복도의 담배 연기가 다 사라질 때까지 김호장의 감방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김호장 에게 “형님 잘 주무십시오”라고 인사한 뒤 근무 위치로 돌아갔다. 이날 밤도 김호장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홍식이 전해 준 소식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또 후리가리가 헛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당장 동료들과 똘만이들의 안부 가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보통 후리가리라면 콧방귀를 뀌어 버릴 그였지만 계엄령 하에서 혁명군에 의한 후리가리였기 때문에 그도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날 밤 그가 이 사태에 대해서 밤새도록 분석한 결론은 좀 낙관적인 것이었다. 아무리 서슬이 시퍼런 혁명 군의 후리가리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화가 미치지 않을 것 이며, 또 후리가리라는 것이 원래 제한된 기간에 집중적으 로 실시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출감할 때쯤 되면 이미 태풍이 지나간 뒤일 것이라는 판단을 근거 로 그는 낙관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는 또 이 후리가리에 걸린 녀석들은 좀 호되게 고생을 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그 녀석들의 운명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시기에 감옥에 들어앉아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행운 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는 쓰디 쓰게 웃었다. 그렇지만 사태는 그의 판단과 같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 았다. 5·16 혁명군은 거사 단계에서 이미 깡패 소탕을 그들의 중요한 정책의 하나로 택하고 쿠데타에 성공하자마자 그 작 업에 착수했다. 이것은 5월16일과 17일 양일간에 혁명군이 전국에서 총 1천5백46명의 폭력배를 검거하여 전원 입건 조치했고, 5월18일에도 서울에서만 깡패 54명을 검거하여 27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이홍식이 김호장에게 전해준 소식은 바로 이 첫 일제검 거 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치 안국은 5월19일에 전국에서 또 강패 713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고, 혁명정권은 이 깡패 소탕을 대외에 선전하는 행 사까지 마련했다. 5월21일에 혁명군은 일제 검거 때 체포된 거물 깡패 이 정재를 비롯하여 두목급 깡패 2백여명을 서울 덕수궁 앞에 서 시내 중심가까지 행진시켰다. 이것은 단순한 행진이 아 니었다. 일반 시민들도 익히 그 명성을 알고 있는 이 두목 급 깡패 2백여명의 가슴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고 행렬 맨 앞에는 ‘천하의 이정재’가 대오에서 5미터쯤 앞서 걷 고 있었다. 그리고 행렬 선두는 ‘나는 강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기가 죽어있었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자도 있 었다. 이 행렬은 착검을 한 혁명군이 인도했다. 이 행사는 신문 사회면에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 됐다. 신문에 실린 사진에는 맨 앞에서 걷고 있는 이정재가 클로즈업돼 있었다. 자유당 정권때 권력과 결탁하여 맹수보 다 더 사납게 날뛰었던 이정재의 몰골이 초라하기 짝이 없 었기 때문에 이 기사는 시중에 대단한 화제가 됐다. 이 신 문기사를 보고 누군가의 입에서 이런 얘기가 튀어나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 이정재가, 그 천하의 이정재가 이제 도살장에 끌려 가는 똥개의 신세가 됐군. 쯧쯧” 그런데 혁명정권의 깡패 소탕작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 았다. 인권유린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고, 속시원하게 잘 했다는 칭찬을 받기도 한 깡패들의 그 행진이 있은 다음 다음날 혁명군의 한신 내무부장관은 깡패 소탕에 관한 특별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회견에서 한신장관은“깡패들은 군 법회의에서 엄격히 처리하고 형을 마치고난 뒤에는 근로 정신을 취득케 하기 위해 탄광으로 보내겠다"고 밝히고, 이 어 “아직도 두목급은 지하에 숨어 있는데 그들이 국내에 있는 한 곧 잡히게 될 것이다”고 말함으로써 혁명정부가 깡패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리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 명했다. 혁명정권은 실제로 깡패소탕을 지속적이고도 강력하게 실천했는데,한신 내무장관의 기자회견 이후의 깡패소탕 관 계사항을 간단히 일지로 엮으면 다음과 같다. 5월 27일; 서울 각 경찰서 깡패를 3등급으로 분류. A급은 군재회부, B급은 건설사업에 동원, C급은 훈계방면키로 결 정. 8월 17일; 혁명재판소 5호법정에서 이정재 사형 언도. 8월 21일; 이정재 부하 김복록등 64명 또 검거. 9월 28일; 이정재 사형 확정 10월 8일; 국가재건 최고회의에서 폭력배 근절 6개항 지 침 결정. 이 지침 내용은 ①수사기관은 폭력도배의 피해자 가 빠짐없이 고소 고발토록 국민을 계몽할 것 ②경찰은 야 간에 우범자 순찰을 강화하고 특히 공휴일에 공원 유원지 등 경비에 각별히 유의하라 ③폭력행위 우범자 명단을 작 성하여 동태를 사찰하고 책임 관할구역을 정하라 ④폭력행 위자의 성분을 심사,경미한 폭력 협박행위도 가차없이 엄단 하라 ⑤구속기소 원칙으로 상습·집단·악질등은 최고형에 처한다.(10년도 내릴 수 있다) ⑥검찰은 사법경찰관 수사지 휘권 강화하라. 10월13일; 혁명정부, 폭행사범은 모조리 구속방침 다시 천명. 혁명이 일어난지 3일 후부터 면회가 재개됐고 법원 기능이 회복되면서 출정도 재개됐다. 살벌했던 간수들의 태도도 누 그러졌고 형무소 전체 분위기는 원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김호장만은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더 초조해졌고 불길한 예감속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홍식은 깡패 소탕에 관한 기사가 보도될 때마다 그 신 문지 조각을 가져와 김호장에게 보여주었다. 그래서 김호장 은 사태의 진상과 흐름을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 김호장은 이정재를 비롯한 두목급 깡패 2백여명을 혁명군이 개 끌고 다니듯 서울 시내를 끌고다닌 기사도 읽었고, 한신 내무장 관의 기자회견 기사도 읽었다. 그리고 이 기사들을 읽은 뒤 부터 김호장은 극도의 공포감과 절망감에 사로 잡히기 시 작했다. 혁명군이 건재하는 한 이제 그가 안주할 곳은 한국 땅 어느곳에도 없다는 사실이 확실해졌고, 또 혁명군이 당 장에 그의 감방에도 들이닥쳐 그를 끌고 갈 것 같은 생각 이 들기도 해 그는 전전긍긍했다. 김호장의 하루 일과는 초조와 불안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후리가리에 걸려든 건달들이 형무소로 넘어오면서부터는 더 겁나는 얘기들이 떠돌았다. 혁명군에게 건달들이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몸이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 으며 병신이 된 자도 많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리고 검거돼 구속된 자가 하도 많아서 형무소는 그들을 강당에 집단으 로 수용했다는 얘기도 들어왔다. 이럴 즈음 김호장과 절친했던 대구 수성파 두목 김성태가 형무소로 넘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듣고 김호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김성태를 직접 만나보기로 결심했다. 김호장은 김성태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 해 담당을 통해 관구부장 면담 신청을 해놓았다. 이민구 관 구부장은 경상도 합천 출생으로 요령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사세가 불리하면 언제라도 냉정하게 등을 돌려 버리 지만, 또한 이익이 생길 일에는 위험을 감수하고 해내는 위인이었으므로 김호장은 이민구 부장을 붙잡고 늘어지기 로 마음먹었다. 이 면담은 당일 오후에 바로 이루어졌다 이민구 부장은 관구실에서 김호장을 불러 냈다. 김호장은 관구실로 들어설 때 마치 화가 잔뜩 나 그 화가 곧 폭발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관구부장은 김호장의 눈치를 살핀 뒤 곧 주눅이 들었다. 김호장 같은 무뢰한들이란 화가 치밀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에 그는 우선 우호적인 웃음으로 김호장을 대했다. 그는 마 흔살이었으므로 김호장에게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부 장이 먼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야? 뭐 화나는 일이라도 있냐?” 김호장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꺼냈다. “나, 청이 하나 있어서 왔수다” 관구부장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선뜻 그 요 구가 뭐냐고 물었을 때 김호장 입에서 곤란한 요구가 나오 면 처리하기가 난처해지기 때문이었다. 부장의 통박을 김호 장이 모르는 바 아니었으므로 그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다 시 말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오. 이번 한 번 봐주소. 세상이 거꾸로 뒤집혔지만 자꾸 돌다보면 언젠가 도로 그 세상이 되는 거요. 날 괄시하지 마이소.” 관구부장은 김호장에게 아부하는 웃음을 보였다. 법은 멀 고 주먹은 가까운 것이다. 혁명군이 깡패들을 철저하게 소 탕하고 있지만 김호장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다는 것은 뒷 끝이 안 좋다. 관구부장은 김호장에게 은근한 어조로 말했 다. “내가 뭘 괄시한다고 그런 섭섭한 말을 하냐? 청이란 뭐 냐?” 김호장은 즉시 강당에 한 번 가야겠다고 말했다. 관구부 장이 해 주기로 한다면 가능한 일이었으나 그는 한번 튕 겼다. “그건 곤란한데. 혁명 전에야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지금 은 분위기가 달라졌단 말이야. 그러나 강당은 왜 가려고 그 래?” 김호장은 김성태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 러나 그의 날카로운 눈알은 관구부장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관구부장은 김성태의 이름이 나오자 거북살스런 표 정이 돼 버렸다. 대구 토박이 건달 김성태의 이름은 그도 익히 알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그는 더 이상 회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알았어. 내가 주선해 보지. 그러나 시간이 필요해. 기회 가 오면 내가 만나게 해줄테니 염려마.” 김호장은 즉시 고맙다는 말을 했다. “고맙수다. 난 한 번 신세진 건 안 잊는 놈이요. 가능한 한 빨리 주선해주소.” 이것으로 면담은 끝났다. 그런데 김호장이 김성태를 만난 것은 거의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음날 형무소에서는 강당 청소 계획이 세워졌 고, 이 청소 책임자가 이민구부장이었다. 이민구 부장은 자 기 관할 사동에서 청소 요원을 차출할 때 김호장을 불러냈 다. 김호장은 청소요원들과 함께 강당으로 갔다. 강당에는 후리가리에 걸려든 건달들과 정치범들이 득실거렸다. 김호 장은 부장이 눈짓으로 김성태를 찾아보라고 하자 재빨리 수감자들 틈 사이로 들어갔다. 김성태는 강당 가운데쯤에 누워 있었다. 김성태는 타박상 을 입어 얼굴 몰골이 형편없었고 몸을 가누지 못했다. 김호 장이 그의 곁에 다가가 앉자 김성태는 깜짝 놀라며 일어나 앉으려고 했다. 김호장은 그를 그냥 누워 있게하고 위로의 말부터 꺼냈다. “소식은 다 들었다.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얘기하 자. 몸은 어떻냐?” 그러나 김성태는 넋나간 사람처럼 말을 하지 못했다. 김 호장은 김성태의 손을 꼭 쥐어주며 다시 말했다. “마음 굳게 먹어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이니까. 그래 언제 달린거야?” 김성태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는 차근차근 말했다. “말도 말아. 혁명이 터진 날 밤에 집에서 자고 있다가 달 렸다. 이건 뭐 개패듯 패더군. 조사고 나발이고 없이 다짜 고짜 패기 시작하는데, 난 다구리도 많이 당해봤지만 이렇 게 맞아보기는 생전 처음인기라” 김호장은 좌우를 한 번 살핀 뒤 다시 물었다. “잡혀 간 곳이 특무대냐?” 김성태는 맞은 곳에 통증이 오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대 답했다. “그건 모른다. 눈을 가린채 잡혀 갔으니까 어딘지 모르겠 는기라. 허나 우린 인제 끝난 것은 분명하다. 난 아마 군사 재판에 넘겨질 것 같아 앞이 캄캄하다” 김호장은 여기에서 말문이 막혔다. 이런 세상이 오리라고 는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었다. 그들은 경찰을 우 습게 알고 있었다. 더욱이 4·19이후에는 경찰 기능이 위축 돼 있어서 세상이 모두 그들의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 아침 에 이렇게 변하다니… 김성태가 다시 말했다. “니가 부럽다. 이렇게 감옥에 앉아 안전하게 지내고 있으 니. 그러나 너도 밖에 나가면 당할지도 몰라. 언제 나가냐? ” 김호장은 두달반 남았다고 힘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정말 어떻게 대책을 세워야 할지 갈피 를 잡을 수 없었다. 김호장은 다시 한숨을 쉰 뒤 말했다. “씨팔 요새 꿈자리가 사나와 잠도 제대로 못 잔다. 내무 장관이 말하기를 아직도 두목급 깡패는 지하에 숨어 있는 데 국내에 있는 한 꼭 잡고 말겠다는 거야. 이건 공갈 같지 않단 말이야. 그리고 이정재 소식 들었냐?” 김성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심리적으로 절망 상태 에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몰라도 우선은 김호 장의 처지가 부러웠다. 그리고 두달반이후에라면 상황이 변 할지도 알수 없다고 생각하고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여튼 니가 부럽다. 밖에 있었다면 나보다 곱절을 더 당했을 것 아닌가?” 김호장은 이말에 대꾸를 하기 싫었지만 위로 삼아 한마 디 했다. “아직은 나도 알 수 없다. 재수없게 밖에서 뭐가 터지면 나야 도망갈 수도 없는 몸이니 당장 끌어갈 것 아닌가” 김호장은 이 말을 끝으로 김성태에게 마음이나 굳게 먹 어라고 다시 위로한 뒤 일어섰다. 그는 김성태를 강당에 놓 아 두고 걸어 나올 때 비장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혁명 소식이 전해진 뒤 한 달쯤 됐을때 김차곤은 만기로 출감했다. 김차곤이 김호장 옆방에서 만기방으로 넘어갈때 둘은 작별의 악수를 했다. 김차곤은 출감의 기쁨으로 들떠 있었지만 김호장 앞에서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김차곤은 떠날 때 김호장이 출감하는 날 형무소 앞으로 마중나오겠 다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이 김차곤이 출감한지 보름도 안돼 다시 붙잡혀 형무소로 넘어왔다. 또 시작된 후리가리에 걸려든 것이다. 그는 김호장 사동 앞의 미결사에 수용됐다. 김차곤이 수감된 날은 하루 종일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김호장은 오전엔 낮잠을 한숨 잤고, 오후에는 울적한 심사 에 빠져 감방 안을 서성거렸다. 비가 오면 운동도 시키지 않기 때문에 더욱 답답한 것이 감옥 생활이다. 이전 같으면 담당에게 문을 따게해 복도에서 노닥거렸겠지만, 혁명이후 에는 그 자신이 스스로 근신하고 있었다. 그는 감방안을 서 성거리며 변소 창을 통해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는 바깥 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미결사 쪽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호장이 형님! 호장이 형님!” 그는 재빨리 변소로 들어가 큰 소리로 응답했다. “누구냐?” 김차곤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소리질렀다. “차곤입니더. 나도 달렸습니다. 좃나게 맞아 가지고 죽을 지경입니더!" 김호장은 섬뜩한 기분이 되었다. 이게 정말 김차곤의 목 소리인가, 하고 그는 그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분명히 김차곤의 목소리가 빗소리 속으로 다시 처량하게 울려퍼졌 다. “형님도 나갈 생각 마이소. 세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더. 지금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고 있십니더. 이제 우리는 끝 장났십니더!” 김호장은 말문이 막히고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 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에 그는 그의 신상에 몰아닥칠 위 험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것은 말하자면 영감 같은 것이었 다. 감옥 생활을 하고 나간 김차곤이 다시 붙잡혀 올 정도라 면 그의 신병은 어쩌면 출감하는 날 형무소에서 혁명군에 게 바로 인계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든 것이다. “나 는 독안에 든 쥐가 됐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김차곤에게 소리질렀다. “차곤아! 걸을 수는 있냐?” 김차곤은 걸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김호장도 다시 소리 질렀다. “걸을 수 있다면 내일 식당 패통때 식당에서 만나 얘기 하자” 김차곤은 울먹이는 소리로 응답했다. “예. 그럼 내일 만납시더. 지금은 죽겠습니더” 김호장은 입술을 깨물며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쳐다 보았다. 비는 여전히 주룩주룩 내렸고, 빗방울이 그의 얼굴 위로 튀었다. 그는 미결사 왼쪽으로 높게 쳐진 형무소 담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때 그에게는 형무소에 수 감된 이후 처음으로 탈옥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 솟구쳤다. <이제 확실해졌다. 나는 독 안에 든 쥐로구나. 그러나 이 대로 죽을 수는 없잖은가. 탈옥을 해 버려? 그러면 평생을 숨어 살아야 하겠지…>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김호장이 이 순간에 자신이 독 안에 든 쥐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 그는 아마 커다란 화를 당했을 것이 다. 혁명 직후 관계 수사기관에서는 그의 소재와 그의 출감 날짜가 확인되어 있었고, 출감하는 날 체포하라는 지시가 관할 경찰서에 내려와 있었다. 김차곤이 다시 붙잡혀 오지 않았다면 김 호장은 아마 방심한채 출감날짜를 맞이했을 것이다. 다음날 식당에서 김호장은 김차곤을 만났다. 김차곤의 몰 골은 눈뜨고 볼 수 없었다. 면상에도 타박상을 입어 멍이 시퍼렇게 들어 있었고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김차곤은 친구집에 숨어 있다가 잡혔다고 말했다. 그러나 후리가리에 걸린 게 아니라 1년전 형무소에 들어오기 전에 김차곤도 가담한 모종 테러사건 관계자들이 체포돼 김차곤 의 이름을 불었기 때문에 체포된 것이었다. 그 사건은 미궁 에 빠져있다가 최근에 들통났다고 했다. 그는 경찰서에서 조사 받았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경찰서도 혁명군이 지휘 하고 있다고 했다. 김호장은 김차곤을 위로했다. “맞은 건 잊어 버려라. 화병이 생기면 큰 일이다. 설마 죽기야 하겠느냐” 김차곤은 침울하게 말했다. “씨팔 한 10년 또 징역살게 될지 모르겠십니더. 바깥 공 기는 으스스합니더. 이정재는 사형당할 끼라고 합디다. 우 린 끝났어요. 그러나 형님은 어떻게 할랍니껴? 나가 보았자 캄캄합니더. 발 붙일 곳이 없어요” 김호장은 잠자코 있었다. 그는 이미 출소하는 날 체포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할말이 없었다. 김차곤이 다 시 말했다. “형님, 추가 뜰 것 있으면 추가 뜨고 여기서 한1년 더 있 으소. 나가 보았자 정말 캄캄합니더” 추가란 수감자들의 범죄사실이 또 드러나 형기가 늘어나 는 것을 말한다. 김호장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결심을 굳혀 놓았으 므로 언급을 회피했다. 그는 김 차곤에게 밥이나 먹자하고 말 한 후 숟갈을 들었다. 그도 추가 뜨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김 차곤의 말대로 적당히 죄를 하나 자백해 민간 재판에서 한 1년 정도 징역을 다시 추가로 받고 형무소에 남아 있는 것 이 이 상황에서는 가장 현명한 처신이라고 그 자신도 생각 했었다. 그러나 그는 사내였다. 추가를 뜬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날 밤 그는 감옥에 더 이상 있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출감하 는 날까지 관망하다가 사태가 여의치 않으면 출감 직전에 탈옥해 버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결심을 김 차곤에게 발설하지 않았다. 이런 일일수록 그야말로 비 밀리에 추진해야 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김차곤은 식당에서 헤어질 때 김호장에게 추가를 떠서 감옥에 남아 있으라고 또 권했다. 김 호장은 심각한 표정만 짓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김호장은 만기 출감 1개월을 앞두고 자신이 세운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탈옥이 아니었 다. 김호장은 모든 상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형무소 담장 안에서는 체포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었다. 혁명군이 그를 제물로 삼기로 했다면 이미 오래 전에 그를 감방안에 서 끌어냈을 것이라고 그는 분석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출 감하는 날 형무소 문을 막 벗어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고 판단했다. 그의 계획은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짜여졌다. 우선 그는 이홍식에게 비둘기를 띄워 현금 30만환을 마련했다. 이홍식은 김호장의 편지를 휴대하고 김호장의 둘도 없는 의리 친구 하승일에게서 돈을 받아왔다. 하승일은 남포동 시 절 김호장의 친구로 자수성가하여 부산에서 술집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김호장과는 계속 교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승일은 김호장의 편지를 읽고 돈과 함께 간단한 답장까지 썼다.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제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 다. 공기가 매우 탁하다. 너의 출감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 게 걱정된다. 출감하더라도 당분간 숨어 살아야 할 것 같 다. 너의 출감날 내가 꼭 가겠다. 승일.> 김호장은 하승일의 편지를 읽고 즉시 답장을 써서 이 홍 식에게 주었다. 그는 이 편지를 대구 시내에서 부쳐달라고 부탁했다. 김호장은 이렇게 간단히 썼다. <돈은 잘 받았다. 나중에 만나면 얘기 하겠지만 내가 시 킨대로 하거라. 내가 출감하는 날 너는 절대로 부산에서 뜨 지 말아라. 이건 꼭 지켜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형무소 앞에 나타나지 마라. 모든게 고맙다. 곧 만나게 될 것이다. 호장.> 돈을 마련한 뒤부터 김호장은 갑자기 암치질이 도졌다며 의무실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치질에 걸린 사람 처럼 걸음도 제대로 못 걸었다. 그는 매일 의무실에 다녔는 데, 의무실에서는 이렇게 큰소리로 떠들었다. “아이고매. 똥구멍이 찢어질 것 같네. 걸음도 못 걷겠고 똥도 못 싸겠고… 뭐 좋은 약 없소?” 형무소 의무실이란 그렇고 그런 곳이다. 죄수 똥구멍을 들 여다 보자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 호장은 의무과장 앞에서는 죽는 시늉을 했다. 그는 의무과장에게 암치질임을 강조했고 좋은 약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의무실을 왕래할 때 누가 보든지 치질로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게끔 걸었다. 한 열흘 의무실을 출입한 뒤 그는 한결 좋아졌다며 약을 끊었다. 그러나 출감 열흘을 앞두고 그는 다시 치질이 도졌다며 의무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나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고 걸음도 천천히 걸 었다. 의무과 담당은 김호장에게 좋은 약을 구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치질이 있으며 치질이란 고약한 병이 라는 말까지 했다. 김호장은 만사가 귀찮은 표정만 짓고 있 었다. 김 호장이 치질로 고생한다는 소문은 형무소 전체로 퍼 졌다. 보안과장도 순시 중에 김호장 방을 들여다 보며 그의 치질을 걱정해 주었다. “이 사람아, 신체는 건강한 사람이 똥구멍은 왜 그 모양 인가? 어때? 못 참겠어?” 김 호장은 능청을 떨었다. “말도 마십시오. 똥도 못 누겠고 걸음도 못 걷겠소. 출감 하면 수술부터 해야 될 것 같아요” 보안과장은 김호장에게 의무실에서 열심히 치료하라는 말을 남기고 그의 방문 앞에서 떠났다. 그러나 보안과장 이 떠나자마자 김호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김호장은 자신이 치질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안과 장 귀에 들어간 것이 확인되자 자신의 계획 중 1단계는 성 공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김호장은 만기방으로 옮겨질때 까지도 의무실 출입을 계속했다. 그리고 만기방으로 옮겨지 기 직전에는 치질 대신 설사병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감옥 생활에 몸이 완전히 곯았어. 설사가 줄줄 나오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의무과 담당은 그에게 설사약을 주고 기록에 옮겼다. 김 호장은 감방 안에서도 설사병이 난 것처럼 행동했다. 점검 중에도 그는 뺑끼통 위에 올라앉아 점검자에게 죽을 지경 이라고 호소했다. 그의 설사 소식도 형무서 전체에 퍼졌다. 그러나 그는 밥은 한 그릇씩 전부 먹어치웠다. 그리고서 또 뺑기통 위에 부리나케 올라탔다.그는 뺑기통 위에서 끙끙 앓았다. 제3장 도피자와 청학동 음녀 드디어 김호장의 출감 전날이 되었다. 김호장체포지시를 받은 관할 경찰서 형사는 보안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러나 그 형사도 능청을 떨었다. 보안과장이 전화를 받자 형 사는 이렇게 물었다. “거기 김호장이라고 있었지요? 오늘 출소했소?” 보안과장이 눈치를 채지 못하고 대꾸했다. “아니지요. 김호장은 내일 출소하지요” “아 그렇던가요? 김호장이 요즘 어땠어요?” 보안과장은 자신이 아는대로 말했다. “그 친구 요즘 치질로 호되게 고생하고 있소. 게다가 지 금은 설사병까지 생겨 꼴이 말이 아니오” 형사는 이 말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 그래요? 그 녀석 안됐군. 출소 첫날 밤에 계집 배위 에도 못 올라가겠군. 아무튼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내일 출소자가 많습니까?” “아니지요. 호장이까지 다섯명뿐입니다” “출소 시간은 몇 시입니까?” 보안과장은 정확한 시간을 알려줬다. 형사는 고맙다는 말 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보안과장은 전화를 끊은 뒤에야 형 사의 의도를 알아챘다. <이 녀석 꼼짝없이 달리게 생겼군. 치질에 설사까지 앓 고 있으니 제 놈이 아무리 비호 같다 할지라도 어떻게 도 망갈 수 있겠어?> 전화를 건 형사는 김호장 체포에 동행하기로 되어 있는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호장이란 놈 신세가 가련하군. 치질에 설사병까지 앓고 있대. 우린 긴장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런 몸으로 어떻게 튀겠어?” 동료 형사도 그 말에 맞장구쳤지만 이렇게 토를 달았다. “그래도 권총을 휴대하고 갑시다. 워낙 포악한 놈이니까 ” 김호장은 출소하는 날 새벽에 기상하자마자 만반의 준비 를 다시 점검했다. 현금은 전날 팬티에 주머니를 달아 그 속에 집어넣었다. 다시 체포되느냐, 무사히 도망갈 수 있느 냐는 형무소 문을 막 벗어나는 순간의 1~2초에 달려 있다 고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아무도 모르게 가벼운 체조 도 해보았다. 그는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고 뛰려고 미리 운동화도 마련해 두었다. 드디어 그의 감방 문이 열렸고, 그는 출소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그는 형무소에 수감될 때 영치된 그의 옷과 구두 가 나오자 구두를 신는 척하다가 팽개쳤다. 그는 직원에게 씩 웃으며 “이걸 신고 빵간에 왔으니 버리고 간다”라고 말했다. 그리고서 그는 사물 보따리에서 운동화를 꺼내 신 었다. 그는 운동화 끈을 꽉 죄어 묶으며 마음 속으로 “운 동화야 나 좀 도와다오”라고 말했다. 김호장은 출소 수속을 다 마친 뒤 느닷없이 또 설사를 호소했다. 그의 설사병은 이미 유명해져 있었으므로 담당은 그를 즉시 변소로 인도했다. 그는 변소 밖에 있는 담당이 들으라고 일부러 끙끙 앓았다. 그는 10여분 동안 변소에 앉 아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출소 대기실에 돌아와서는 설사 때문에 기운이 다 빠졌으니 좀 쉬었다가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거 의 자유인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아무도 그를 강제로 형무소 밖으로 내보내려하지 않았다. 그는 끈질기게 앉아 있었다. 형무소 직원들이 이제 김호장이 나갈 때가 되었지 않나, 하 고 생각했을때 그는 다시 설사를 호소했다. 그의 연기는 훌 륭했으므로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변소 로 안내됐다. 다른 출소자들이 형무소 문을 다 빠져나왔는데도 김호장 이 나타나지 않자 형사 하나가 정문 초소에서 보안과에 전 화를 했다. 형사는 보안과 직원으로부터 김호장이 설사때문 에 두번이나 변소에 가 있는 참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 말 을 듣고 형사는 전화를 끊으며 동료 형사에게 “이 녀석 이질에 걸렸나봐. 지금 설사 때문에 두번째 변소에 가 있는 중이라 카네”라고 말하고 의미 있게 웃었다. 그들은 김호 장을 체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하고 담배 한 대씩을 피웠다. 그들은 긴장이 완전히 풀렸고, 무료하기까 지 했다. 그들은 정문 옆에 딸린 샛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변소에서 나온 김호장은 간수들에 인도되어 약간 절룩거 리는 걸음으로 형무소 정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나왔다. 중 간쯤에서 김호장은 간수 둘에게 농담처럼 말을 걸었다. “형씨들 내 소원이 하나 있소. 난 이번에 저 정문으로 나 가고 싶소. 정문을 열어 줄 수 없소?” 간수들은 이 말을 듣고 동시에 김호장을 쳐다보았는데 김호장의 눈에는 무서운 살기가 번뜩였다. 간수 둘은 서로 마주보며 서로의 의사를 표정으로 타진 했다. 그들의 표정은 고 까짓것, 그런 소원쯤 못들어 주겠 느냐, 하는 것으로 변했다. 김호장은 재빨리 그들의 표정을 읽고 다시 말했다. “아따, 이번에는 정문으로 나가보겠구나. 대장부 사내가 샛문으로 출입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지…” 간수 둘은 서로의 의사가 통했으므로 말없이 정문 쪽으 로 다가갔다. 김호장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짖었다. <일이 훨씬 쉽게 풀리는군. 정문만 열려라. 그러면 나는 총알처럼 튀어나갈 것이다. 곰들아 나를 잡기는 틀렸다> 간수들이 망설임 없이 정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순간 김호장은 사물보따리를 슬그머니 발 밑에 떨어뜨린 뒤 정 말 총알처럼 형무소 밖으로 튀어나갔다. 범죄세계에서 곰이라는 은어로 통하는 형사들은 김호장 이 한 20여미터쯤 내달린 뒤에야 사태를 깨달았다. 그들은 허겁지겁 김호장의 뒤를 쫓다가 권총을 빼어 발사하기 시 작했다. 그러나 김호장은 몸이 날래기로 소문난 사내였다. 한창 팔팔한 스물 네 살의 김호장은 야생마처럼 형무소 농장을 지나 야산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정문을 열어 준 형무소 간수 둘은 이 광경을 보고 질겁을 했다. 설사병으로 기운이 다빠진 줄 알았던 김호장이, 더욱이 치질로 고생하고 있다던 김호장이 육상선수보다도 더 빠르 게 튀는 것을 보자 간수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그들 은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입을 떡 벌리고 김호장이 사 라진 야산 쪽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 눈에는 형사 들이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이 사건은 대구 형무소에서 두고 두고 화제가 됐다. 그리 고 김호장이 출감 한 달 전부터 치질과 설사를 호소한 것 은 순전히 계략이었다는 말이 떠돌았다. 정문을 열어 준 간 수 둘은 아무 하자가 없었으므로 문책을 당하지 않았다. 김차곤은 이 소식을 듣고 “역시 호장이 형님이구나!”라 고 말한 뒤 이렇게 말을 이었다. “강철 같은 몸을 가진 형님이 치질과 설사를 한다고 했 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한기라. 호장이 형님은 앞으로도 절 대로 안잡힐끼다” 그날 오전에 김호장은 전국에 수배됐다. 특히 김호장을 놓친 두형사는 이를 갈았다. 두 형사는 상사로부터 호되게 당했으므로 더욱 화가 치밀었다. 경찰에서는 김호장이 연고 지인 광주로 갈 것으로 판단하고 두형사를 광주로 급파했 다. 김호장은 줄기차게 달렸다. 비상망이 펼쳐지기 전에 그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 있어야만 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으 므로 김호장은 쉬지 않고 달렸다. 그런데 김호장은 대구 남쪽 숲이 울창한 산에 도착해서 야 자신이 총에 맞은 것을 깨달았다. 총알은 무릎 바로 아 래 종아리를 꿰뚫었는데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다. 그는 옷을 찢어 지혈을 하고 주위에서 쑥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뜯어낸 쑥을 돌로 찧어 상처난 곳에 발랐다. 그리고 그는 또 곧바로 걷기 시작했다. 그는 산길을 따라 남쪽을 향해 걸었다. 김호장은 낮에는 산속 나무 숲에 몸을 숨기고 잠을 잔 뒤 해질 무렵부터 국도연변의 논길을 따라 부산 쪽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그는 주로 해질 무렵에 마을에 들어가 구멍 가게에서 과자를 사서 배를 채웠다. 그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다가 결국 곪기 시작했다. 화 농되면서 그의 상처는 쑤셨고, 잘 걸을 수 없었다. 닷새동 안 산 속에서 자고 먹는 것도 시원치 않자 그는 지치기 시 작했다. 엿새째 되던 날 그는 비를 만났다. 8월 하순의 비여서 빗 줄기가 굵었고, 억셌다. 그는 큰 나무 밑에 웅크리고 앉아 비를 피했다. 그렇지만 그의 옷은 곧 젖어 버렸고, 그는 오 한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빗속을 그냥 걷기 시작했다. 비 를 맞으며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걷는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논길을 계속 걸었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벌판을 지났을 때 그는 마을을 발견 했다. 멀리 제법 큰 마을의 윤곽이 보였는데, 높다란 교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했다. <오늘은 저 마을에서 자자. 저 예배당 건물이 좋겠군. 1 ·4후퇴 때도 예배당 건물에서 잔 적이 있었지. 예배당이란 밤에는 빈 집이 되지. 예배당에는 안 다녀봤지만 나도 그 정도는 안다구.> 그는 마을 옆 야산에 올라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비는 계속해서 뿌렸고 그의 강철 같은 몸도 다시 오들오들 떨리 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밤이 깊어질 때까지 끈질기게 기 다렸다. 비에 흠뻑 젖은 자기 꼴을 마을 사람들이 발견하면 난처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밤이 깊어졌을 때 그는 마을로 내려가 교회 건물로 조심스 럽게 다가갔다. 교회 건물은 텅 비어 있었다. 교회 건물 옆 에 딸린 집에는 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도둑고양이 처럼 살금살금 교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교인들이 예배 볼 때 앉는 의자는 긴 나무 의자였다. 그 는 의자위에서 자기로 마음 먹고 우선 비에 흠뻑 젖은 옷 을 벗어 빗물을 짜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옷을 입고 의자 에 누웠다. 그러나 총에 맞은 다리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 고, 한기가 엄습했으므로 그는 쉽사리 잠을 잘 수 없었다. 한참을 누웠다가 그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의자에서 일어나 교회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설교단 뒤쪽벽에 휘장이 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 휘장을 떼어 덮기로 결심했다. 그는 일어서서 설교단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설교단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마치 감전된 것처럼 우뚝 서 버렸 다. 이 순간 그는 난생 처음 벌받는 것을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있다면 곤란한 일이다. 저 휘장을 뜯어 몸에 감고 잔다면 한결 낫겠는데… 그러나 하나님이 노해 벼락이라도 떨어뜨리면 나무아미타불 아닌가.> 그러나 그는 악당이었고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올 정도 로 배짱이 두둑한 사내였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가 휘장을 확 낚아챘다. 그리고 망설임없이 의자쪽으로 돌아와 그걸 덮고 누웠다. 김호장은 새벽에 인기척을 느끼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교회 안은 불이 켜져 있었고 그의 앞에는 초로의 신사가 서 있었다. 김호장은 바짝 긴장하며 그 신사를 노려보았다. 그 신사가 먼저 입을 열었는데 얼굴 표정이 매우 부드러웠 다. “난 이 교회 목사요. 나를 경계하지 마시오” 김호장은 경계심을 풀지 않고 그 신사를 계속 노려보았 다. 그 신사가 다시 말했다. “나를 두려워 하지 마시오. 내가 돕겠소. 지난 밤 같이 비오는 밤엔 아무리 젊은 사람이라도 이런 곳에서 잠을 자 면 건강을 헤치게 됩니다. 몸은 괜찮소?” 김호장은 난감했다. 교회에 몰래 잠입해 성스런 휘장을 뜯어내 덮고 잔 처사를 목사가 꾸짖기는 커녕 부드러운 태 도로 건강 걱정까지 해주니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휘장을 슬그머니 옆으로 비켜놓으며 목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목사는 걸레조각처럼 구겨진 휘장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그는 목사라고 밝힌 이 사람을 때려 눕히고 도망가는 것 이 상책이라는 판단이 번뜩 들었지만, 목사의 부드럽고 진 실한 표정 때문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반응이 없자 목사가 다시 말했다.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이대로 나가도 좋소. 나는 밀고 같은 짓 따위는 하지 않는 사람이오” 김호장은 더듬 더듬 입을 열었다. “나에게 밥 한 그릇만 주시오” 목사는 고개를 끄떡거렸다. 목사는 김호장의 행색을 보고 쫓기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당장 알 수 있었다. 목사는 김호장을 데리고 교회 밖으로 나갔다. 바깥은 동 이 트기 시작해 밝아지고 있었다. 그들은 마당을 거쳐 교회 에 딸린 목사의 거처로 들어갔다. 걸을 때 김호장이 절룩거 리자 목사는 김호장의 다리를 유심히 보았다. 목사는 혼자 기거하고 있었다. 목사에게는 원래 부인이 있었으나 2년전 에 상처를 했고, 지금은 교회 별채에서 혼자 기거하고 있었 다. 김호장은 별채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알자 일단 안심했다. 그러나 그가 경계심을 완전히 푼 것은 아니었다. 남포동 시 절부터 그는 이 방면에는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발등이 찍히는 것은 언제나 믿는 도끼에 의해서라는 것을 그는 신 념으로 삼고 있었다. 목사는 부엌에서 주섬주섬 먹을 것을 가져왔다. “찬도 없고 식은 밥뿐이지만 많이 드시오. 물은 지금 끓 이고 있소” 김호장은 아무 대꾸 없이 숟갈을 들고 밥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밥 한그릇이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질 것 같자 목사는 다시 부엌에 들어가 밥을 더 가져왔다. 김호장은 그 것도 거침없이 먹어치웠다. 목사는 김호장이 밥을 먹는 모 양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김호장은 밥그릇을 다 비운 뒤 목사가 가져온 더운물도 한 대접 다 마셨다. 목사는 그 모양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배를 채우자 김호장은 비로소 살아날 것 같은 기분이 되 었다. 그러나 그는 방심하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밥을 먹 는 동안에는 모든 것을 다 잊고 있었지만 밥을 다 먹고 나 자 이제부터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 는 목사를 처치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밥을 다 먹고나자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그는 난감했다. 어 떻게 해야 될 것인가? 목사라는 이 사람을 믿어도 좋을 것 인가? 믿었다가 내가 떠난 뒤 수상한 놈이 다녀갔다고 신 고하는 날에는 끝장이 아닌가? 김호장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목사는 김호장의 바지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지가 짙은 색이었 지만 출혈이 심해 피범벅이 되어 있어서 쉽게 목사의 눈에 띄었다. 목사는 김호장이 다리를 저는 것은 다리에 상처가 났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벽장에서 구 급약품을 꺼내 김호장에게 내밀었다. “상처를 치료하시오. 심한 것 같은데 곪은 곳에 바르는 약도 있소” 김호장은 다시 목사를 한번 쳐다본 뒤 아무 말 없이 약통 을 열고 약을 꺼내 치료하기 시작했다. 상처를 치료하면서도 김호장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 었다. 목사는 김호장의 심리를 휜히 알고 있었다. 목사는 자신 의 가슴 속을 열어 젖히고 속 마음을 보여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답답했다. 그는 김호장을 두려워 하지 않았지만, 김 호장이 자기를 믿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목사는 김호 장이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 다. “행선지가 어디인지는 모르나 내가 데려다 주겠소. 나와 동행한다면 안심하고 갈 수 있을 것이오” 김호장은 상처를 치료하다 말고 목사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는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 되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다 있나? 나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내가 도피자라는 것을 눈치 채고도 나를 돕겠다니… 그는 목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목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김호장은 아 무 말 못하고 잠자코 있었다. 목사와 동행한다면 그는 안전 하게 단숨에 부산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목사의 의도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목사의 표정 어디에도 의심할 만한 구석이 없다는 것 을 발견하고 목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부산까지 가야 합니다. 부산까지도 같이 가 주실 수 있습니까?” 목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날 믿어 보시오. 길 잃은 양을 돕는 것이 내 직업이오. 우선 옷부터 갈아 입읍시다. 체격이 나와 비슷하니 내 옷이 맞을 것이오. 옷만 바꿔 입으면 누가 보아도 선량한 청년으 로 볼 것이오” 이렇게 말한 뒤 목사는 옷장에서 옷을 골라 김호장에게 내밀었다. 그는 서슴지 않고 그 옷을 받아 자기 옷과 바꿔 입었다. 그러자 그의 행색은 단번에 달라졌다. 목사는 매우 세심하고 노련했다. 김호장의 옷만 갈아 입 힌 것이 아니라 면도로 수염을 깎게 하고 세수도 시켰다. 그리고 김호장에게 성경과 찬송가를 들게 하고 자신도 똑 같이 성경과 찬송가를 들었다. 이렇게 되자 김호장은 누가 보아도 교인이었다. 목사는 시계를 들여다 본 뒤 “밀양으로 가는 첫 차가 곧 지나갈 것이오. 그 차를 타고 일단 밀양으로 나갑시다” 라고 말했다. 이곳은 밀양군내 운천이라는 곳이었다. 줄곧 산길과 논 사이로만 걸어온 김호장은 자신이 어느지점까지 와 있는지 전혀 모르다가 목사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자기가 어디 까지 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걸어서 간다면 부산까지는 아직도 까마득했지만, 차를 타고 무사히 갈수만 있다면 오 전 중에 그는 하승일이 있는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목사는 자기 방문에 오후에 돌아오겠다는 쪽지를 붙여 놓은 뒤 김호장을 데리고 곧장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김 호장은 걸으면서 팬티 속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들은 버스를 타고 밀양까지 갈 때까지 한마디도 나누 지 않았다. 목사는 자기가 김호장에게 뭘 물어본다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으므로 아무 말 안했고, 김호장은 목사 의 호의가 하도 어리둥절했으므로 잠자코 있었다. 밀양에 도착하여 그들은 기차역으로 향했다. 목사는 기차 역으로 가는 도중 웃으면서 김호장에게 성경을 손에 들고 가는 자세에 대해서 충고했다. “성경은 나처럼 이렇게 드시오. 그래야만 자연스럽습니다 ” 김호장은 계면쩍게 웃었다. 목사와의 대면 이후 처음 웃 는 웃음이었다. 도대체 책이라고는 손에 들고 다녀본 적이 없는 김호장이었기 때문에 그가 성경을 손에 들고 가는 모 양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눈치가 빨랐으므로 재빨리 성경을 목사와 똑같은 자세로 들었다. 그러니까 한결 자연스럽게 보였다. 기차역에서 목사가 기차표를 사려는 것을 말리고 김호장 이 표를 샀다. 표를 산 뒤 그들은 대합실 구석에 서 있었 다.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 들을 유심히 보지 않았다. 곧 기차가 도착하여 그들은 개찰구를 통해 플랫폼으로 나갔다. 기차 속에서도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 사는 성경을 펴서 읽고 있었고, 김호장도 슬그머니 성경을 펴서 그것을 읽는 척했다. 부산진 역에 도착하여 기차에서 내렸을 때 목사는 김호 장을 한 손으로 부축하기 시작했다. 김호장도 눈치를 채고 목사의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부산진 역 플랫폼은 사람들 이 많이 붐볐으므로 그들의 행색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역광장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역 광 장을 빠져나왔을 때야 비로소 김호장은 목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역 광장이란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 는 곳이기 때문에 그들은 잠자코 더 걸었다. 역 광장을 벗어났을 때 김호장은 목사와 작별하기로 마 음 먹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목사를 바라보았다. 목사도 걸음을 멈췄다. 김호장은 목사에게 절부터 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만 지었다. 김호장이 다시 말했다. “이곳에서 부터는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 목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호장이 다시 말했다. “전 장래를 기약할 수 없는 몸입니다. 언제 찾아뵙겠다고 약속할 수도 없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간다면 언젠가 한번 은 목사님을 찾아뵙겠습니다” 목사는 인자하게 웃으며 김호장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했 다. 김호장은 이때 웬지 마음이 울컥해졌다. 그는 입술을 한번 깨문 뒤 목사에게 다시 말했다. “전 대구형무소에서 1년 살다 나온 흉악한 깡패입니다. 출감하는 날 또 체포하려고 해 도망쳤습니다. 상처는 그때 총을 맞은 것입니다. 아마 엿새 전에 전국에 수배됐을 것입 니다.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과 찬송가를 목사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목사는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계속 들고 가시오. 안전한 곳에 도착할때가지 그 걸 들고 가면 도움이 될 것이오” 김호장은 엉거주춤한채 성경을 들고 서 있었고, 목사가 작별 인사를 꺼냈다. “그럼 난 가보겠소.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잘 치료하시오 ” 김호장은 목사에게 공손히 절을 했다. 그리고 목사가 돌 아서서 광장을 거쳐 대합실로 들어갈 때까지 목사의 뒷모 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호장은 부산에 도착한 당일로 하승일이 마련해 둔 은 신처로 잠입해 버렸다. 그곳은 영도의 청학동에 있는 하승 일의 친척 할머니 집이었다. 청학동이란 곳은 자유당 시절 부터 밀수촌으로 유명한 동네다. 이것은 이곳 주민들이 밀수를 직접 한다는 의미가 아니 고, 일본에서 남해안에 침투되는 밀수품의 거의 대부분이 이 청학동과 그 이웃의 동삼동에 은닉되어 있다가 부산 시 내로 빠져 나오기 때문에 나온 말인데, 그시절 세관 통계에 의하면 남해안에 침투되는 밀수품의 70~80%는 부산지방에 집중되었고, 또 그 반 이상은 청학동·동삼동·아치섬 등의 해안으로 몰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곳 주민들 중에는 밀수에 직접 개입된 전문적인 밀수꾼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밀수꾼들의 부탁을 받고 밀 수품을 은닉해주거나 운반해줌으로써 생계를 유지하고 있 었다. 그래서 세관과 경찰에서는 청학동과 동삼동 주민들을 일 단 밀수 우범자로 간주할 정도였고, 이렇게 되니까 이곳 주 민들도 관에 대해서는 매우 비협조적이었고, 적대적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시하기도 했다. 어쨌든 청학동과 동삼동 주민들은 일종의 치외법권지대 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주민들의 관에 대한 성향을 나타내 는 일화가 지금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5·16 이전 이야기이지만, 어떤 세관원이 박아아라는 밀 수꾼을 찾아 청학동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 세관원은 주 민 어느 누구와도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는 것이다. 도시 누 구에게 말을 붙이면 즉시 눈치를 채고 외면해 버렸기 때문 에 말 한마디 붙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길에 아무도 없을 때 국민학교 어린이가 지나가기에 보니까 명 찰에 써진 성씨가 박가여서 세관원은 어린이를 붙잡고 이 렇게 물었다. “니 아부지가 박 아무개냐?” 그러나 어린이는 퉁명스럽게 “아닙니다. 우리 아부지는 김씹니더”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었다. 세관원은 어이가 없어 어린이의 명찰에 써진 박 이라는 글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임마, 니 명찰에 박가라고 되어 있는데 무슨 말이야!” 그러나 어린이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이건 딴 애 옷을 얻어 입은 겁니더” 세관원은 더 이상 말을 못하고 허공을 쳐다보며 헛웃음 을 웃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청학동에서 이 정도는 약과로 통하고 있다. 어떤 세관원은 청학동에 들어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물으니까 영장 가지고 왔느냐며 눈을 부라리더라는 것이었 다. “영장 가 왔는교? 재판소 영장 말입니더” 하여튼 청학동 주민들은 이렇게 관리냄새를 맡는 데에 귀신이었고, 상대가 관리로 보이면 즉시 경계심을 품고 적 대감을 서슴없이 나타내는 것으로 유명한데, 하승일은 바로 이 점을 계산하고 김호장을 청학동 그의 친척 할머니 집에 숨겨 놓은 것이다. 비록 5·16이 터져 밀수도 서리를 맞아 청학동 주민들은 크게 타격을 받고 몸조심하고 있었지만 관에 대한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고 있었다. 주민들은 이 변혁을 환영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고약한 태풍이 빨리 지 나가기를 바라는 어부들처럼 조용하게 시국을 관망하고 있 었다. 어쨌든 동네 분위기가 이 정도라면 도피자들이 숨기에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곳이다. 아무리 감쪽같이 숨어 살아도 이웃 주민들 눈에 수상하게 보여 신고된다면 체포된다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을 하승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김호장이 출감 직전에 보낸 편지를 받아 본 이후 김 호장의 은신처로 청학동을 점찍어 두고 있다가 그가 부산 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그를 그곳으로 인도했다. 하승일의 친척 할머니는 늦게 난 딸 하나를 두고 있는 외로운 노파였는데, 딸은 공장에 취직하여 공장 기숙사에서 기숙하고 있었으므로 집에는 휴일에만 다녀갔다. 그리고 이 집에는 방세칸이 있었는데, 원래 방 둘은 세를 두고 있었지만 하승일이 김호장을 위해 세든사람 하나는 내보냈고 김호장이 그방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집 문간방에 세를 얻어 살고 있는 사람은 혼자사는 여자였다. 김호장의 은신생활 초기는 매우 순조로왔다. 그는 할머니 의 조카 행세를 했고, 누가 물으면 부산에는 취직차 온 것 으로 말하기로 했다. 그의 상처는 쉽게 아물었고, 건강도 완전한 몸으로 회복되어 갔다. 이 은신생활은 무료함을 이겨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 는데, 체포되면 인생 자체가 끝장이었으므로 김호장은 잘 참아냈다. 그는 무엇보다도 바깥출입을 철저하게 삼가하고,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하승일도 이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으므로 김호장을 밖으로 끌어내지 않았다. 그대신 그는 소형 라디오 한대를 김호장에게 갖다 주어 무료함을 이겨내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경찰 수사망도 어수룩하지는 않았다. 광주에 급파 된 형사들은 김호장의 연고선을 은밀하게 더듬은 뒤 그가 광주에는 출현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곧장 부산 으로 달려왔다. 이것은 김호장이 청학동에 숨은 지 한달쯤 됐을 때였다. 하루는 하승일이 새벽에 낚시꾼 행색으로 김호장을 찾아 와 이 사실을 알려줬다. 용의주도한 하승일은 형사들의 미 행을 따돌리기 위해 새벽에 낚시가는 것처럼 가장하고 청 학동으로 달려온 것이다. 낚시꾼 차림으로 나타난 하승일을 보고 김호장이 의아해 하고 있을 때 하승일이 먼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곰들이 드디어 부산에 나타났다. 어제 나에게 찾아왔더 라” 김호장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른 소식은 없고?” 하승일은 묵묵히 있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우쨌든 더욱 조심해야겠다. 잡히면 끝장이니까” 김호장은 이 말에 빙긋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현상금이야 걸리지 않았겠지. 내가 살인범은 아니니까” “그래도 넌 두목 아이가? 조심하래이. 당분간 난 여기 오 지 않겠다. 곰들이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꽤 끈질기게 물어 보더라. 우쨌든 당분간 꼼짝말고 방안에만 있거라” 김호장은 이 말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소리없이 웃었다. 그러나 하승일은 김호장의 장래가 걱정스러웠으므로 따라 웃지 않고 한마디 더했다. “장차 문제가 심각하다. 혁명군의 서슬이 지금도 시퍼렇 다. 시내에는 지금도 무장한 군인들이 쫙 깔려 있다. 그라 고 행색이 조금만 수상해도 즉시 불심검문을 하고 있는기 라. 우쨌든 조심하재이. 밖에 나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 고…” 그러나 김호장은 태연하게 응수했다. “내가 누군데? 증명 보자는 놈 있으면 당장 때려눕히고 튈낀데… 그러나 저러나 이 생활을 언제까지 계속 해야 되 나… 씨팔, 일본으로 밀항해 버려?” 이 말에 하승일은 잠자코 있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것도 한 방법이지. 그러나 지금은 밀항도 어렵다. 우 선 참고 지내보자. 참고 있으면 뭔가 수가 생기겠지” 이 직후 그들은 담배만 계속 태우다가 어쨌든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헤어졌다. 이날 이후 김호장은 실제로 더 각별하게 조심했다. 낮에 도 대문에는 언제나 빗장을 걸어두었고 여차하면 튈 구멍 까지 생각해 둔 것이다. 그의 방에 달린 창문은 뒷집 마당 쪽을 향해 있었는데 그는 대문밖이 수상하면 창문을 통해 뒷집 마당으로 넘어가 뒷골목으로 도망가기로 작정했다. 그 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방안에 운동화를 놓아두 고 있었다. 그리고 이 도피로를 착상한 뒤부터 그는 대문밖 에서 인기척이 들리면 튈 준비부터 갖추곤 했다. 하승일도 위험을 알린 날 새벽에 김호장과의 약속대로 청학동 방문을 삼가했다. 냄새를 잘 맡는 형사들이 하승일 의 태도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하면 미행할 것이 뻔했기 때 문에 그들은 당분간 만나지 않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철저하게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은 엉 뚱한 곳에서 터져 버렸다. 김호장의 옆 방에 세든 여자는 서른 두살 먹은 이혼녀인 데, 남편이 외항선 선원으로 배를 타고 있는 동안 외간 남 자와 정을 통하다가 들통이 나 이혼당한 여자였다. 그 여자는 밀수품 행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청학동 여 자들은 밀수품을 치마속에 감춰서 시내까지 운반해 주는 역할을 많이 맡고 있었는데, 이 여자는 그런 밀수품 운반책 이 아니었고, 밀수품을 직접 떼어 단골들에게 넘기는 중간 상이었다. 그러나 5·16이 터지고 밀수도 서리를 맞게 되자 이 여 자의 일거리도 점차 줄어들었다. 김호장이 이 집에 숨어들 기 전만 해도 이 여자는 거의 매일 출타했는데, 밀수품을 쉽게 구할 수 없게 되자 바깥 출입이 적어졌다. 김호장에게 변이 생긴 것은 바로 이 여자 때문이었다. 그 러나 밀수품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이 여자의 색정이 화근이었다. 옛날 책에는 천성적으로 음탕한 여자들은 담 너머로 외 간남자들에게 추파를 던지고 달밤에 꽃밭으로 남자를 유혹 하여 스스로 치마를 걷어올리는 계집이라고 표현하고 있 는데 이 여자는 바로 그런 부류였다. 어디서나 괜찮은 사내 를 볼때는 은근한 시선을 보내고 괜히 잘 웃으며 남자들과 얘기할때 몸을 꼬는 버릇이 있는 여자라면 짐작할만 할 것 이다. 외항선 선원인 이 여자의 남편은 결혼 직후 첫 출항 때 부터 그 마누라를 믿지 못하여 항해중에 심사가 매우 불편 했었다. 중매로 결혼하여 살을 맞대고 자면서부터 마누라의 색욕이 유별나게 강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보통 아녀자라면 남편의 요구가 있을 때 반응을 보이지만 이 여 자는 신혼 직후 부끄러움이 조금 없어질 무렵부터 막무가 내였다. 행위가 한 번 끝난 뒤에도 은근한 교태를 부리며 남편품 속에 파고 들었고, 어떤 날은 남편이 퇴근하여 그냥 자려고 해도 기어이 남편을 자극시켜 만족을 채우곤 했다. 이때만 해도 남편도 여색에 탐닉할 시기였으므로 아내의 교태와 왕성한 색욕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환락가의 뭇 탕녀들과 놀아본 경험이 있는 이 외 항선 선원은 아내의 색욕이 보통을 넘는다는 것은 알고 있 었다. 그래서 그는 혼자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내 마누라가 보통 색골이 아니다. 물론 나도 색을 좋아 하니까 잘 만났지만, 그러나 문제가 많은기라. 나는 집을 장기간 비울 때가 많은 외항선 선원이 아닌가. 내가 집에 없을 때 마누라는 혼자 우째 잘낀고…> 그런데 이 생각을 자기 혼자만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 니었다. 결혼 후 첫 출항 전날 밤에 혼자 있게 되는 아내를 위해 밤새도록, 그야말로 아내가 녹초가 되도록 농탕질을 한 뒤 남편은 아내에게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니 앞으로 우째 지낼래. 아무래도 그게 걱정인기라” 그는 음모가 수북이 덮여 있는 아내의 치골을 꼬집었기 때문에 아내는 남편의 말이 무슨 의미라는 것을 금방 알아 챘다. 그런데 남편이 그 말을 던진 것은 분명히 경고의 성 격을 띤 말이었는데 여자는 호 호 웃으며 이렇게 말을 받 았다. “나도 쪼매 걱정돼니더. 당신 없인 하루도 잠을 못 잘 것 같십니더.” 그렇게 말한 뒤 여자는 또 남편 품 속으로 파고 들었다. 남편은 아내가 잠에 곯아떨어졌을 때 혼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 한숨은 다음날부터 시작된 항애 중에도 줄곧 계 속되었다. 그는 갑판 위에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그의 결 혼이 불행하게 끝날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런데 이 예감은 적중했다. 물론 그가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 아내의 색욕의 강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분에 사로잡혔던 것이지만, 그 예감대로 여자는 그가 떠 난지 일주일만에 이미 다른 사내와 배가 맞기 시작했다. 이 여자의 상대는 그들 부부가 세들어 살고 있는 집 주인이었 다. 마흔 살 먹은 이 사내는 오입쟁이로 소문나 있었는데, 이 소문난 오입쟁이가 색욕이 줄줄 흐르는 여자를 몰라볼 리 없었다. 그는 그들 부부가 이사들어온 날 여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당장에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었다.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자의 은은한 눈초리와 미소가 그의 애간장을 녹였고, 특히 마당을 거닐을 때 치마자락에 드러나는 잘룩 한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 곡선은 그를 미칠 지경으로 만들 었다. 주인 사내는 그들 신혼 부부가 이사들어온 날 밤 잠들기 전에 이미 야들야들한 그 여자를 건드려보기로 작심했다. <저 새댁은 보통 색골이 아닐 끼다. 온몸에서 색정이 줄 줄 흐르고 있으니 한번 안고 딩굴어보면 얼마나 기똥차겠 노. 눈웃음 살살 치지, 걸을 때 흔들러대는 엉덩이는 또 얼 마나 기똥차더냐. 두고 보자. 기다려보면 기회가 오겠지. 저 런 여자란 서방질을 절대 싫어할 여자가 아이다. 아니, 먼 저 꼬리칠지도 모른다. 여자 문제에 도사인 내 눈이 틀릴 리 없는 기라. 기회가 와봐라. 당장에 넘어뜨리고 말테니까. 그리고 내가 한 번 눌러주면 저년도 사족을 못 쓰겠지.> 그렇지만 교태가 잘잘 흐르는 여자는 외간 남자에 눈돌 릴 틈이 없는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닌가. 주인 사내는 마당에서 여자와 마주칠 때마다 침만 흘렸지 어찌 해볼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인 사내는 매일 매일 안달이 나서 못 견딜 정도였다. 특히 아침에 여자가 수돗가에서 엉덩이를 쳐들고 세수를 할 때는 그 도발적인 뒷모습에 눈 앞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그런데 그 여자도 예사스런 여자가 아닌 것이 주인 사내 가 탐욕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서도 눈이 마주치면 전혀 수줍어하지 않고 은근한 미 소를 짓곤 했다. 그럴 때마다 주인 사내는 "아이고, 미치겠 구마! 저 눈웃음 봐라. 조걸 그냥 당장에 넘어뜨리고 싶다" 라고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다가 어느날 밤 주인 사내는 잠 들기 전에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불 꺼진 신혼부부 방에서 야릇한 소리가 나고 있는 것을 들었다. 눈치 빠른 주인 사내는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곧 깨달았다. 강아지가 앓고 있는 것 같은 그 소 리는 방사 중에 여자가 절정에 다다르기 전에 내지르는 교 성이 분명했던 것이다. 주인 사내는 살금살금 신혼부부 방으로 다가가 방안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의 짐작대로 신혼부부는 밤일에 한참 열 중하고 있었다. 남녀의 맨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헉헉 대는 남편의 가파른 동작 속에서 여자가 숨 넘어가는 소리 로 "아이 좋아! 아이 좋아!"하는 간드러지는 교성을 거침없 이 내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 사내는 방안을 엿보기 위해 고개를 들고 창을 넘어 다 보았지만 커틴 때문에 방안의 장면은 엿볼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쪼그리고 앉아 방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남편의 동작은 박력이 있었다. 여자 배 위에서 남편이 움 직이고 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철벅거렸고, 무아의 지경에 이른듯한 여자는 계속 "아이 좋아!"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 다. 주인 사내는 그 소리를 들으며 "역시 기똥차게 색을 잘 쓰느 여자다!"라고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윽고 여자가 비명지르듯 커다란 교성을 지른 뒤 남편 의 동작이 정지됐다. 주인 사내는 재빨리 안방 쪽으로 도망 갔다. 극도로 흥분된 그는 잠자는 마누라를 깨워 방사를 치 른 뒤 잠을 잤다. 그러나 마누라와 방사 중에도 그는 줄곧 새댁을 생각하고 있었다. 주인 사내는 그날 이후 더 안달이 났다. 귀에서는 그 여 자의 간드러지던 교성이 계속 울렸고 눈을 감고 있으면 그 여자의 얼굴이 슬그머니 망막에 어른거리곤 했다. 그런데 의외로 기회가 빨리 왔다. 남편이 외항선을 타고 멀리 떠나버렸고, 여자는 혼자 잠을 자게 된 것이다. 그리 고 그를 더욱 미칠 지경으로 만든 것은 남편이 원행을 떠 나자마자 그를 대하는 그 여자의 태도가 심상치 않아진 것 이다. 이걸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 여자는 주인사내와 마주 칠 때마다 몸가짐을 도사리는 것이 아니라 배시시 웃으며 몸을 얄궂게 꼬아댔다. 이것은 분명히 여자가 그를 유혹하 는 태도였고, 이걸 그가 놓칠 리 없었다. 남편이 떠난지 일주일쯤 됐을 때 주인 사내가 드디어 행 동을 개시했다. 기회를 엿보고 이떤 주인사내는 아침에 여 자가 수돗가에서 세수를 시작하자 슬그머니 다가갔다. 그의 마누라는 부엌 일을 하고 있었다. 주인 사내는 여자 곁으로 다가가 위로 쳐들린 탐스런 여자의 탐스런 엉덩이를 쳐다 보며 군침을 삼켰다. 여자는 주인 사내가 음탕한 시선으로 자신의 몸매를 감상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세수에 열 중하고 있었다. 이윽고 여자가 세수를 끝내고 일어섰는데, 주인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놀라지 않고 베시시 웃었다. 그 기회를 놓치 지 않고 주인 사내는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 잠잘 때 방문 걸지 마시오. 내가 가겠소." 주인 사내는 눈웃음 치며 "새댁은 정말 미인이오."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여자는 그 말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주인 사내를 한번 쳐다본 뒤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수건으 로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주인 사내는 더 이상의 말이 필 요 없다고 판단했으므로 뒤돌아서서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 다. 그는 화장실 앞에서 뒤돌아보았는데, 여자는 천연스럽 게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었다. 주인 사내는 그 모양을 보고 속으로 "됐다!"라고 쾌재를 부르짖었다. 그날 밤 주인 사내는 마누라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방에서 살금살금 기어 나와여자 방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밀어보았다. 그의 예상 대로 방문은 잠 겨 있지 않았다. 그는 고양이처럼 방안으로 기어들어간 뒤 옷부터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여자 곁에 누웠다. 주인 사내는 여자의 몸을 살살 더듬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엔 여자가 자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내 여자가 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대뜸 여자의 팬티를 벗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자는 팬티가 잘 벗겨지도고 엉 덩이를 들어주더니 팬티가 다 벗겨지자마자 주인 사내를 와락 껴안았다. 여자의 몸은 이미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있 었기 때문에 주인 사내는 거침없이 여자 배위로 올라갔다. 여자의 대담한 태도에 약간 놀란 주인 사내는 허겁지겁 일을 끝냈다. 그리고 여자 배 위에서 내려오려고 몸을 움직 이자 여자가 두 발로 그의 몸을 꼬으며 못 내려가도록 했 다. 그러자 주인 사내는 씩 웃으며 "알았다. 한번 더 해주 지."라고 말한 뒤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번째부터 여자는 간드러진 교성을 질러대며 주인 사내 를 더욱 황홀하게 만들었다. 주인 사내는 한순간 안방의 마 누라가 눈치챌까보아 걱정스러웠으나 삼수갑산을 가도 좋 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온갖 기량을 다 발휘해 여자를 녹초 로 만들었다. 이날 밤 그들은 삼합을 즐겼다. 여자는 사내를 더 붙잡아 두려 했지만 사내는 마누라가 깰까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그는 제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여자에게 “당신은 이 세 상에서 제일 가는 여자인기라. 이 다음부터는 밖에서 만납 시더.”라고 말했고, 여자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좋 아요. 오늘 밤 참 좋았어예. 앞으로 자주 만납시더.”라고 말했다. 만일 이들이 밖에서만 밀회를 즐겼다면 쉽게 들통이 나 지 않았겠지만, 사내가 어느날 밤 술에 취해 들어와 여자 방에 기어들어갔다가 제 마누라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 마누라는 원래 성깔이 보통이 아니었는데, 두 남녀가 발가벗고 그 짓을 하고 있는장면을 목격하고는 분을 못 참 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빨래 방망이를 휘둘러 댔다. 그 러자 동네 사람들이 구경 나왔다. 당황한 주인 사내는 마누 라를 껴안고 입을 틀어막았으며 그 사이에 여자는 밖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그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주인 마누 라가 남편과 그 여자를 간통죄로 고소한 것이다. 두 남녀는 경찰에 붙잡혀갔고 소문은 퍼질대로 퍼졌다. 나중에 주인 마누라가 고소를 취하해 둘은 다 석방됐지만 결국 외항선 선원도 귀국하자마자 아내의 부정을 알게 되었다. 그는 소 문을 듣고 망설임없이 이혼 수속을 밟았다. 이혼당한 후 그 여자는 밀수품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하 고 있었는데, 이곳저곳을 굴러다니가다 결국 밀수품 집합지 인 청학동에 발을 붙이고 살게 된 것이다. 이 동안에도 그 여자의 남자편력은 중단되지 않았다. 얼굴이 반반하고, 몸매도 풍만했으며, 더욱이 몸전체에서 야릇한 색정까지 풍기고 있었으므로 그 여자 주변에는 남 자들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마치 화사한 꽃봉오리에 벌들이 모여드는 것과 비슷했다고 할까… 하여튼 그 여자는 자신 의 주변에 맴도는 남자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내만 골라 상대할 정도였다. 또한 그 여자는 한 남자에 집착하는 성격 이 아니었으므로 새로운 남자가 나타나면 즉시 바꿔치웠다. 이와 같은 여자가 김호장을 탐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 한 일일 것이다. 젊고 떡 벌어진 어깨며 튼튼한 근육이 어 느 모로 보나 남자로서는 훌륭했으므로 그 여자는 김호장 을 처음 본 순간부터 유심히 관찰했었다. 그리고 바로 이 관심이 문제의 출발이었다. 여자는 법망을 피해 밀수품을 행상하며 살고 있었으므로 눈치가 빨랐다. 그래서 주인 할머니에게서 김호장이 조카이 며 부산에는 취직차 왔다는 말을 들었지만 한 열흘 후에는 그 말이 거짓임을 눈치채 버렸다. 어느날 밤 여자는 잠자리에서 무심코 옆 방의 김호장을 떠올리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저 총각은 필경 무근 곡절이 있는 사람 같다. 눈빛도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고, 무언가 조심스런 태도다. 그리고 바깥 출입도 안하고 있다. 취직차 부산에 왔다면 매일 나가 야 될 게 아닌가. 필경 무슨 곡절이 있는 사람이야. 뭘까? 수배된 밀수꾼인가?> 김호장의 정체에 대해 한번 의심이 들자 다음날부터 여 자는 그를 더욱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했다. 여자에게는 화끈한 놈팽이 가 하나 있었으므로 색욕에 굶주리지도 않았었고, 또 자신 도 범죄세계의 일원이었으므로 김호장의 정체를 캐내고 싶 은 의사도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의 놈팽이가 서울에 일자리가 생겨 여자 곁을 훌쩍 떠나 버리자 김호장에 대한 여자의 태도가 변하 기 시작했다. 남자가 그립게 되자 김호장에게 추파를 보내 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김호장에게서는 아무 반응이 없 었다. 은근한 미소를 보내도 무뚝뚝했고, 교태를 부려도 반 응이 없었다. 김호장은 여자가 꼬리를 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 니었다. 김호장도 그 나이에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 장 아닌가. 그리고 그도 사나이였기 때문에 그 여자를 넘어 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좁은 집에 서 잘룩한 허리와 터질듯이 풍만한 엉덩이를 가진 여자와 마주친다는 것만으로도 자극은 충분한 것이었다. 더욱이 여 자가 은근한 추파를 던지고 있었으니 충동을 억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충동이 일어날 때마 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아서라. 참자. 언제까지 숨어 살아야 할지 모를 판국에 간신히 얻은 은신처에서 계집과 놀아나다가는 신세 조진다. 참는게 약이다. 꾹 참자.> 언젠가 하승일이 놀러왔다가 옆 방 여자가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김호장에게 농잠조로 “야, 너 몸이 근질근질 할 낀데 저 여자 한번 눌러주지. 허리와 엉 덩판을 보니까 색께나 쓰겠다. 어때?”라고 말한 적이 있었 다. 이때도 김호장은 단호하게 이런 말을 했었다.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마라. 지금과 같은 처지에선 계집에 게 눈 팔다가 큰일난다. 설사 여자가 발가벗고 내 방에 기 어들어온다 해도 난 손 안댄다. 내가 지금 계집에게 눈 팔 게 생겼냐? 농담이라도 앞으로 그런 소린 꺼내지도 말아. 앞날을 생각하면 심사가 괴롭기 짝이 없다.” 하승일이 김호장을 좋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 었다. 남포동 시절에 같이 어울려 다닐 때부터 김호장은 매 사에 앞뒤가 분명했었다. 친구로서 해야 될 일이라면 물 불 을 가리지 않았고, 해서 안 될 일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 도 버티는 게 김호장이었다. 하승일은 자신의 농담으로 김호장의 표정이 너무 굳어지 자 “농담도 몬하나? 그건 농담이다. 자, 자, 우리 다른 얘 기하자”며 화제를 돌려버렸다. 아무튼 김호장의 반응이 있기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 내던 여자는 차츰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놈팽이가 서울로 떠나 버렸으니 여자는 아랫도리가 허전하여 마음의 안정도 잃었다. 여자는 잠을 자려고 누었다가도 옆 방에 싱싱하고 건장한 총각이 혼자 자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허리 아래로 부터 퍼져나가는 관능의 물결에 몸이 화끈 달아올랐고, 이 런 밤이면 잠도 완전히 설쳤다. 그러다가 어느날 밤 이 여자는 드디어 결심했다. <내 저 놈을 정복하리라. 목석이 아닌 이상 제 놈이 마 다 하겠는가. 어디 두고 보자.> 다음날 아침 여자는 세수를 마친 뒤 화장부터 곱게 하고 준비 태세를 갖췄다. 그리고 여자는 방안에 틀어박혀 주인 할머니가 출타하기만 기다렸다. 할머니는 김호장이 온 뒤로 그에게 집을 맡기고 이웃에 자주 놀러 갔다. 여자는 그걸 알고 있었으므로 할머니가 집을 비우고 김호장과 단둘이 있게 되기를 기다린 것이다. 드디어 할머니는 이웃에 놀러갔고, 집에는 싱싱한 총각과 색욕에 굶주린 여자만 남게 되었다. 여자는 이 때를 기다렸 으므로 망설이지 않았다. 할머니가 나가고 김호장이 대문에 빗장을 건 뒤 마당 한가운데서 먼 하늘을 보고 있을 때 곧 바로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김호장이 망연자실 먼 하늘을 보고 있을 때 여자의 방문 이 스르르 열렸다. 김호장은 방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여자는 문을 열고 방안에 그대로 앉아 잠시 김호장 을 의미있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총각 뭐 하노?” 김호장은 거의 방심 상태에 있었으므로 이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러자 여자는 호호 웃어대며 말 했다. “놀라긴 뭘 그렇게 놀라는교?” 김호장은 계면쩍게 피식 웃으며 방안에 앉아 있는 여자 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앉은 자세 가 매우 도발적이었다. 여자는 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한 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으므로 들려 있는 스카트 자락 밑으로 여자의 하얗고 통통한 허벅지가 드러나 있었다. 김 호장은 여자의 허벅지가 눈에 들어오자 얼른 시선을 돌리 며 “왜 불렀습니까.”하고 말했다. 그러자 여자는 또 호호 웃으며 말했다. “총각은 심심하지도 않나? 허구헌 날 방안에만 있고…” 김호장은 이 말에 약간 당황했으나 적절한 대답을 찾아 냈다. “실업자가 방안에만 있어야지 어디를 나갑니까? 소식이 올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지요” “소식은 곧 오는교?” “곧 오겠지요” 김호장은 여자의 눈길을 피한다는 것은 의심을 살 우려 가 있다고 생각하고 시선을 다시 여자 쪽으로 돌렸다. 그러 자 여자는 기다렸다는듯이 기지개를 켰는데, 이때 스커트 자락이 더 올라갔다. 그리고 이 순간 김호장은 아찔해졌다. 여자는 스커트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김 호장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는 심호 흡을 하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 년이 보통 계집이 아니로구나. 대낮에 사내 앞에서 가랭이를 보여주다니. 그러나 어림 없다.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두고 보아라.> 여자는 기지개를 켠 뒤 다시 말했다. “아이 심심해. 총각 우리 화투 치지 않을래?” 김호장은 이미 이 자리를 피하기로 결심하고 있었기 때 문에 여자를 외면하며 퉁명스럽게 “난 화투도 못 칩니다.”라고 내뱉고 뚜벅두벅 걸어 제방 으로 가 버렸다. 사내가 이렇게 냉담하게 나오자 여자는 화가 머리 끝가 지 치밀었다. <허우대는 멀쩡한 녀석이 고잔가. 왜 저 모양이야. 흥! 제 놈 아니면 사내가 없나. 그러나, 아이 분해! 저런 멍청한 새끼에게…아이 분해!> 여자는 김호장에게 무시 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방안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여자는 치밀어 오르는 화 때문에 씩 씩거리며 마당을 노려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방안을 서성거리다가 화장대 앞에 주저 앉아 얼굴을 매만 지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여자의 눈은 독기를 품고 있었 고 얼굴 근육은 화를 못 참아 팽팽하게 굳어 있었다. 김호장은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벌렁 누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도 평정을 잃고 있었다. 얼 핏 보였던 여자의 통통한 허벅지 아래 쪽의 은밀한 부분이 망막에 계속 어른댔기 때문이었다. <저 년은 요망스런 계집이다. 앞으로 더욱 조심해야겠다. 그러나 저러나 저렇게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계집은 첨 봤 는걸. 대낮에 지 그곳을 남자에게 보여주는 년이 어디 있 나.> 이 동안 여자는 옷을 갈아 입고 있었다. 스커트를 벗어던 지고 거울 앞에 선 여자는 그대로 알몸이었다. 그러니까 김 호장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여자는 거울에 자신의 풍만 한 알몸을 비춰보다가 팬티부터 차례로 입기 시작한 뒤, 옷 을 다 입자 곧바로 마당으로 나와 김호장 방을 한번 노려 보았다. 그리고 대문밖으로 사라졌다. 김호장은 여자가 경찰서에 신고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고 마치 악몽에 시달리는 것처럼 뇌리에 어른거리는 여자의 허연 허벅지와 그 은밀한 부분의 자극적인 모양을 지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핏 잠에 빠져 들었는데 용케 형사들이 대문 밖에서 주소를 확인하고 있을 때 잠에서 깨어났다. 천만 다 행으로 여자는 형사를 직접 인도한 것이 아니라 전화로 수 상한 자가 숨어있는 주소만 댔으므로 김호장은 위기를 모 면할 수 있었다. 형사들은 주소만 가지고 청학동에 나타났는데, 고급주택 가라면 몰라도 이런곳은 주소 가지고도 집 찾기가 어려운 곳이다. 그들은 어렵게 김호장이 숨어있는 집앞까지 당도해 주소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김호장은 선잠 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깨어난 김호장은 목이 말라 방문을 열고 마당으 로 나오다가 대문 밖에서 인기척이 있는 것을 느끼고 바짝 긴장했다. 그는 대문 밖에서 낮은 소리로 "이 집이 분명하 지?"하는 소리와 "맞아, 이 집이야."라는 대꾸를 들었다. 그 소리를 듣고 김호장은 슬금슬금 뒷걸음으로 다시 방 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형사들이 대문을 두드리며 "실례합 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방문 고리를 걸어놓고 재빨리 뒷집 마당으로 통하는 창문을 소라나지 않게 열어정혔다. 그때 형사들이 대문을 밀어젖히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 들의 동작은 민첩했다. 한 명은 여자 방문을 열어젖혔고 또 한 명은 김호장 방문 앞에 섰다. 바로 그 순간 김호장은 비 호처럼 창을 넘어 뒷집 마당으로 뛰어내렸고, 이어 살금살 금 대문 쪽으로 달려가 뒷골목으로 튀어 버렸다. 형사들은 김호장의 방문이 안 열리자 권총을 빼들고 엄 포를 놓았다. "좋은 말 할 때 나온나. 넌 포위됐다. 안 나오면 쏜다!" 그러나 그 순간에 김호장은 이미 청학동 골목 깊숙이 사 라진 뒤였다. 제4장 미남 소매치기 부산 청학동에서 어처구니없는 일로 형사들에게 쫓겨난 김호장의 도피행각은 수사당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경로를 밟고 있었다. 수사당국은 김호장이 서울로 튈 것이라고 판단하고 서울 로 형사들을 급파하여 서울의 연고선을 수색하고 있었지만 이 시기에 김호장은 서해에 떠 있는 한 고깃배 위에 있었 다. 청학동에서 쫓겨난 김호장은 즉시 이 사실을 전화로 하 승일에게 알렸다. 그는 청학동 대로변의 한 다방에 들어가 카운터 전화를 사용했으므로 구체적인 얘기를 할 수 없었 다. 하승일이 전화통에 나오자 그는 짧게 말했다. “곰들이 왔다. 난 떠난다. 너도 당분간 피하는 게 좋겠지 ” 이 말을 듣고 하승일은 다급하게 만나자는 말부터 했다. 그러나 김호장은 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는 하승일 주변 에서 경찰이 냄새를 맡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하승일 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는 하승일의 말은 듣지도 않고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 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부두로 나가 제주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제주도에는 별명이 왕털이라는 김호장의 친구가 있었는 데, 이 왕털도 남포동 시절의 동료여서 김호장 주변인물 중 에서는 별로 노출되지 않은 사내였다. 김호장은 왕털이 무위도식하는 건달이 아니라 줄곧 선원 생활을 했으므로 폭력배 소탕작전에 걸려들지 않았을 것이 라고 판단하고 그를 찾아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김호장이 잘못 안 사실이었다. 왕털은 남 포동 시절 이후에 줄곧 선원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제주에 는 그의 똘만이들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또한 4· 19이후 혼란기를 맞아서는 왕털도 선원생활을 청산하고 똘 만이들이 쌓아놓은 아성에서 두목 노릇을 하며 은밀히 밀 수에도 손을 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5·16이 터졌을 때 왕털도 즉각 체포되어 군사재 판에 회부되었고,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복 역 중이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김호장은 제주도에서 한 1년 정도 숨어살다가 세상이 조용해지면 육지에 나오리라고 마음먹 고 제주로 가는 배에 올라탔었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별로 착잡한 기분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왕털의 집에 도착해보니 왕털도 이미 잡혀가 버 렸고, 왕털 노모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김호장 은 왕털의 노모로부터 얘기를 들었을 때 눈앞이 캄캄해지 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 은신처를 찾는다는 것이 난감한 일 이 됐기 때문이었다 김호장이 서울로 가기로 작정한 것은 이날 밤 왕털 노모 의 배려로 왕털 집에서 하룻밤 신세질 때 결심했다. 그는 밤새도록 궁리한 끝에 갈 곳은 서울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 이다. 그러나 이것은 막연한 계획이었다. 서울에 친구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이라고 무사할리는 없었기 때문 에 서울에 간다 해도 은신처가 곧 구해지리라는 보장은 전 혀 없었다. 그러나 김호장의 입장에서는 서울로 가는 길 이외에 다 른 방도가 없었다. 사람 눈에 잘 띄는 시골 구석을 돌아다 닌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서울에 잠입하여 숨을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 한 일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김호장이 만일 정상적인 교통편을 이용 하여 서울로 향했다면, 그는 아마도 서울역에서 체포당했을 지도 모른다. 이때는 후리가리가 다시 시작돼 서울역 주변에는 형사들 이 진을 치고 있었고, 또한 대구형무소 정문에서 김호장을 놓친 형사들은 그가 부산 청학동에서 튀었다는 정보를 받 고 서울역에 잠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호장이 제주항에서 서해로 고기잡이 나갔다가 인천에 기항하는 고깃배를 탄 것도 정상적인 교통편을 이용했을 때 닥칠지 모를 위험을 고려했기 때문인데, 아무튼 이 고깃 배를 탄 덕분에 인천에서 그는 뜻하지 않은 인물을 만나 도움을 받게 된다. 김호장이 부두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인천역 앞에 내렸을 때, 귀공자차럼 생긴 웬 사내가 지나가다가 버스에서 내리 는 김호장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김호장은 이 사내를 보 지 못했기 때문에 버스에서 내린 뒤 역 대합실 쪽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내는 뭔가 확인하려는듯 돌아서서 김호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김호장은 이때까지도 웬 사내가 자기를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다만 역 광장과 대합실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살 피는데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자기 옆에서 자기 얼굴을 요모조모 살피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모 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내는 김호장이 대합실 쪽으로 가기 위해 막 길을 걸으려고 할 때 그에게 말을 붙였다. “실례합니다” 김호장은 이 소리에 흠칫 놀랐다. 그리고 여차하면 한방 먹이고 튈 작정으로 바짝 긴장하며 이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 사내는 씩 웃으며 김호장에게 절을 꾸벅했다. “호장이 형님이시죠? 절 몰라보겠습니까?” 김호장은 이 사내의 낯이 설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기 억은 전혀 나지 않아 경계어린 눈초리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사내가 신분을 밝혔다. "2년 전에 광주형무소에서 형님과 같은 방에 있었는데, 이석배라고…” 사내가 이렇게 말하자 김호장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 사 내는 소매치기 기술로는 대한민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라고 자랑하던 쓰리꾼이었는데 김호장이 모종 사건 에 연루되어 광주형무소에 잠시 수감됐을 때 두어 달 같은 방에서 지냈던 녀석이었다. 김호장은 기억이 나자 입을 열었다. “니가 인천에 웬 일이냐?” 그러자 이석배는 “형님이야 말로 인천엔 어떻게 오셨습 니까?”라고 말한 뒤, 좌우를 한 번 살피고는 “이곳은 안 좋습니다. 저하고 잠시 저쪽으로 갑시다”라고 말했다. 김호장은 낯선 곳에서 아는 녀석을 만났기 때문에 반가 왔지만, 이석배가 쓰리꾼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좀 망설여졌다. 이걸 눈치챘는지 이석배가 다시 말했다. “형님 소식은 알고 있어요. 대구형무소 얘기도 들었어요. 지금 쫓기고 있지요? 제가 도울테니 저하고 같이 가십시다 ” 이때까지도 김호장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좌우를 살피는 척하면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이석배 가 약간 겁나는 얘기를 했다. “지금 서울로 가시려는 겁니까? 하지만 지금 역 대합실 에는 곰들이 있어요. 제가 안전한 곳으로 모시고 갈테니 어 서 이곳을 피합시다.” 김호장은 이석배의 표정에서 진실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래서 그는 일단 이석배를 믿어보기로 작정했다. 어차피 갈 곳은 없었으니까…. 이석배는 지나가는 택시를 세우더니 김호장을 태우고 주 택가 쪽으로 갔다. 그리고 택시 속에서 이석배는 엉뚱하게 날씨와 쌀 농사 얘기만 했는데, 김호장은 그의 의도를 알고 있었으므로 잠자코 미소만 짓고 있었다. 이윽고 주택가 어느 적산집 앞에 이르자 이석배는 택시 를 멈추게 했다. 그리고 택시에서 내린 뒤에야 이 석배는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안심하십시오. 형님이 서울 누구를 찾아가는지는 몰라도 여기가 더 안전할 겁니다. 여긴 제 하숙집이에요. 하숙집에서는 나를 장사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지요” 이석배는 말을 마치자마자 김호장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 어섰다. 김호장은 하도 의외의 일이라 매우 어리둥절했지만, 묵묵 히 이석배를 따라 들어갔다. 이석배의 방은 매우 훌륭했다. 4평 정도되는 다다미방이었 는데, 도배도 깨끗했고 벽에는 고급 신사복이 서너 벌 걸려 있었으며, 한쪽 구석에 개어져 있는 침구도 깨끗했다. 김호장은 그동안 온갖 잡놈들과 어울리며 안가본 곳이 별로 없었지만 쓰리꾼의 방에는 처음 들어와 봤기 때문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방안을 둘러보며 이석배와 마주 앉았 다. 이석배는 그에게 담배를 권한 뒤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혁명 직후에 서울에서 숙소를 이곳으로 옮겨 버렸습니 다. 같이 일하던 녀석들과도 헤어졌지요. 세상이 이렇게 무 시무시할 때는 혼자 행동하는 것이 상책이거든요. 이 집에 서는 나를 건어물 중개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했지요. 며칠씩 집을 비울때가 많으니까 적당히 핑계댔는 데, 이 집에서는 그걸 믿는 눈치에요. 겉으로 보기에는 제 가 워낙 멀쩡하니깐… 그러나 저러나 형님은 그동안 어떻 게 지냈습니까? 지난번 대구형무소에서 나온 친구로부터 형님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형님이 꾀병을 앓았다던데 정말 입니까?” 김호장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석배는 잠시 김호장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다시 열었는데, 의미가 매우 단도직 입적인 것이었다. “형님이 서울 누구에게 가는지 몰라도 안가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형님을 숨겨줄만한 사람이라면 경찰에서도 훤히 알고 있을 거에요. 형님도 아시겠지만 이젠 전하고는 완전 히 다릅니다. 동네 사람들도 조금만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제깍 코를 풀어버리니까 배겨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드리 는 말씀인데 제가 형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여기만큼 안전 한 곳은 없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김호장은 이 말에 구미가 당겼다. 이석배의 방에 숨어 있 다면 이건 정말 감쪽같은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경찰 이 전국의 수사력을 총동원한다해도 이석배의 방에 숨어있 는 그를 찾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호장은 쓰리꾼의 신세를 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해도 천하의 김호장이 쓰리꾼 밥을 얻어먹고 살 수 있느냐,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던 것 이다. 이러한 기질은 그의 천성이었다. 그는 감옥에서도 쓰리꾼 이나 날치기를 가장 싫어했었다. 그는 남자가 남의 호주머 니를 몰래 뒤지며 산다는 것은 가장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감방에서 쓰리꾼이나 날치기는 그로부터 심한 경 멸을 당했었는데, 이석배만은 생김생김이 귀여워 다른 쓰리 꾼들보다는 덜 구박 받았었다. 그러나 이석배도 쓰리꾼인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쓰리꾼에 대한 모멸감 때문에 김호장은 이 석배의 제안 을 받고도 한참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무겁 게 입을 열었다. “너 요즘도 일을 하고 있냐?” “예.” “주로 어디서 하고 있냐?” “인천 시내에서만 하고 있어요. 혁명 이후부터는 공기가 워낙 탁해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지요. 왕건지가 많은 경부 선을 탄다는 것은 단번에 잡힐 것 같아 엄두도 못낼 형편 입니다. 그렇다고 경인선을 타고 다니며 일한다는 것도 위 험하긴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궁리한 끝에 인천 시내에서만 일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시장 바닥이나 극장 같은 곳도 곰들이 많으니까 그런 곳도 피하 고 있습니다. 저는 낮에 고급 귀금속상과 은행 주변의 다방 이나 호탤 커피솝으로 돌아다니며 돈 냄새 많이 나는 신사 나 아줌마들을 점 찍은 뒤 슬슬 뒤쫓아가 기회가 생기면 한탕 헤치웁니다. 헛탕 치면 다시 다방으로 돌아가고요. 하 루에 보통 다방 열 대여섯 곳을 돌아다니고 있지요. 제가 돈 냄새 맡는 것은 귀신이니까 제가 점찍으면 틀림없어요. 그러나 점 찍은 먹이가 버스를 안 타든지 사람 많이 붐비 는 곳으로 가지 않으면 헛탕 치고 말지요. 이런 생활을 하 다 보니까 인천 시내에서 저를 단골로 모시는 다방이 열 곳도 넘습니다." 김호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매일 같은 다방을 돌아다닌다면 다방 마담이나 레지들 이 너를 의심할텐데. 어때, 의심하는 년들은 없더냐?" 이석배는 그 물음에 씩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절대 의심하지 않습니다. 제가 워낙 멀쩡하게 생겼으니 까요. 또 의심받지 않기 위해 저는 다방에 들어갈 때 신문 을 들고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는 척 합니다. 레 지들 중에서 저에 대해 긍금해 하는 눈치를 보이기도 합니 다만 그건 의심이 아닙니다. 매일 나타나 차를 팔아주니까 이제 단골 대접을 받고 있지요. 형님 말씀처럼 제가 겉 보 기에는 멀쩡하니까 저에게 색쓰는 레지들도 있어요." 김호장은 이석배의 말이 끝나자마자 또 질문을 던졌다. "그럼 밤엔 어떻게 지내냐? 곧바로 이 하숙집으로 들어 오냐?" 김호장의 질문에 이석배는 멋적게 웃으며 대답했다. "형님, 저와 같은 사원 생활은 뻔하지 않습니까. 매일 매 일이 불안한데 하숙집에 곧장 들어와 어떻게 지낼 수 있어 요. 공기가 탁하지만 밤엔 밤대로 돌아다니지요. 바에 가서 바걸들과 술 마시든지 갈보집에 가든지 합니다. 극장에는 프로만 바뀌면 찾아가고요." 김호장은 이석배의 생활을 대충 파악했다고 생각했는지 한동안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너, 고아출신이었지. 이 험한 세상에서 먹고 살자면 할 수 없겠지. 니가 회사에 취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건 그렇고, 어쨌든 우선 한 며칠 동안만 니 신세 좀 지자” 이석배는 이 말을 듣고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석배는 원래 전쟁고아였다. 전쟁직후부터 서울의 어떤 고아원에서 줄곧 지내다가 열세살때 무작정 뛰쳐나왔다. 그 는 어린 나이였지만 천성이 분방하여 고아원에서 갇혀 사 는 것보다 깡통을 차고 동냥질을 하더라도 바깥에서 자유 롭게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만한 나이에 독립된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고아원 을 뛰쳐나오자마자 당장 배가 고팠다. 이석배는 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시장 바닥을 누비 며 때로는 얻어먹고 때로는 훔치기도 하며 하루하루를 보 냈는데, 어느날 동대문 시장에서 소매치기 조직에 걸려들었 다. 이석배는 비록 고아였지만 용모가 준수했으므로 그곳 소 매치기 두목 눈에 들었던 것이다. 두목은 이석배에게 소매치기 기본기술부터 하나하나씩 가 르치기 시작했다. 맨먼저 예리한 면도날로 신사들의 속호주 머니 따는 법을 반복적으로 연습시켰는데, 이석배는 영리했 으므로 쉽게 익혀나갔다. 그 다음은 어깨에 카메라를 멘 사람이 차에 오를때 카메 라를 따는 법, 기차 속에서 가방 바꿔치는 법, 그리고 열쇠 따기 기술까지 배우기 시작했는데, 배우기 시작한지 1년도 안돼 이석배는 1급 기술자가 되었다. 이석배가 천부적인 소매치기라는 점은 그의 안목에서 더 욱 잘 나타난다. 3년동안 소매치기 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했 을 무렵부터 그는 물건을 찾아내는 천재가 되었다. 서울역 광장에서 기차를 타려는 사람이 가방을 들고 걸어오는 자 세만 보아도 그는 가방 내용물을 정확하게 알아맞쳤다. 그리고 그는 또 하나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용모가 빼어났다는 점이었다. 청년이 되자 그의 용모 는 그야말로 귀공자처럼 변했다. 서글서글한 눈매며 깨끗한 피부, 그리고 단정한 콧대와 남자치고는 예쁜 입술이 잘 조 화되어 누가 보아도 그는 부잣집 귀공자였다. 게다가 키도 늘씬하고, 미소는 부드러웠다. 이런 용모는 소매치기로서는 최고의 장점이었다. 고급 신 사복을 입은 부잣집 귀공자가 남의 호주머니를 슬쩍 뒤지 거나 가방을 바꿔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으므로 작 업 중에 그는 의심받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는 이 장점을 살리기 위해 학식은 없었지만 언동을 귀공자처럼 행하는 수련도 익혔으므로 이 귀공자 행세는 감쪽 같았다. 차에 올라타면 그는 당장에 귀공자로 인식되었고 기술은 뛰어났으므로 소매치기에 실수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원숭 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듯이 그도 한 번 법망에 걸 려들었다. 이것은 실수라기보다는 사실 불운 때문이었는데, 결국 이일로 그는 광주형무소에서 김호장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그 실수는 가방 바꿔치기 작업이었다. 4년전 서울역에서 패거리들과 대상을 물색하던 중 그는 한 중년신사가 가방 을 들고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 가방속에 거금이 들어 있 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중년 신사의 표정과 걸음걸이, 그리고 가방을 들고 있 는 자세를 일별한 순간 그는 그 가방속에는 상당액의 현금 이 들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그 가방속에는 현금 3천만환이 들어 있었다. 이석배는 이 왕건지를 발견한 순간 눈짓으로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4명의 바람잡이들은 즉시 그 중년 신사의 앞 뒤로 자연스럽게 포진하며 매표구로 향했다. 매 표구에서 그 신사는 광주행 표를 샀고, 그들도 같은 표를 샀다. 그래서 그 신사의 좌석은 사실상 그들 소매치기 일당 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가 되었다. 그들의 가방 바꿔치기 수법은 이런식으로 진행된다. 역 광장에서 먹이가 발견되면 표를 살때부터 앞 뒤로 포진하 여 먹이와 같은 좌석에 앉을 수 있도록 조치하고, 그 다음 은 미리 준비한 커다란 여행용 가방에서 먹이가 들고 있는 가방과 가장 유사한 것을 꺼내 이석배가 들고 기차에 오른 다. 그리고 점찍어 둔 먹이를 찾아내 그 먹이가 선반위에 올 려 놓은 가방 바로 옆에 자연스럽게 미리 준비한 가방을 붙여 놓고 좌석에 앉는다. 이때 바람잡이들도 각기 제 자리 를 찾아 앉는 것은 물론인데, 일꾼인 이석배는 언제나 먹이 바로 뒷 좌석에 앉는다. 이 다음 단계부터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먹이가 잠이 들었을 때인데, 이 경우는 매우 간단 하게 해치운다. 기차가 멈췄다가 막 출발하려고 할때 이석 배는 재빨리 먹이의 가방을 들고 승강구로 뛰어가 기차에 서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바람잡이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좌석 에 그대로 앉아 있다. 이것은 혹시 잠이 들어있는 줄 알았 던 먹이가 낌새를 알아채고 이석배를 쫓아가려고 할때 자 리에서 일어나 일부러 먹이와 부딪치기 위한 작전인 것이 다. 이석배가 먹이의 가방을 들고 기차에서 뛰어내리는데에 필요한 시간은 단 몇초이므로 바람잡이들이 먹이를 한 순 간만이라도 방해 한다면 이석배는 무사히 일을 해치울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먹이는 발을 동동 구르지만 기차 가 속력을 내고 있으니 어찌할 방도가 없고, 바람잡이들은 점잖게 이걸 구경하다가 다음 역에서 내려 약속된 장소에 서 이석배와 만난다. 또 한가지 방법은 먹이가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을 때 해치우는 수법이다. 먹이가 잠을 잘 기색을 보이지 않으면 서로 신호를 보낸 뒤 행동을 개시한다. 먼저 이석배가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 에서 자기가방을 내린뒤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그리고 가 방을 다시 올려 놓고 책을 읽는 척한다. 이때 바람잡이들은 먹이를 관찰하고 있다가 먹이가 방심하게 되면 이석배에게 신호를 보낸다. 이 신호를 받으면 이석배는 책을 덮고 일어나 자연스럽 게 먹이의 가방을 내려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이때 만일 먹이가 이석배가 내린 가방이 자기 가방이라는 사실 을 알아채고 항의하면 공손하게 사과하며 그 가방을 다시 올려놓고 자기 가방을 내리면 말썽이 없는 것이고, 만일 시 비가 붙으면 바람잡이들이 이석배 편을 든다. “여보시오. 조용히 합시다. 이 기차 당신이 전세냈소? 사 람이 실수도 하는 법인데 그까짓것 가지고 뭘 시끄럽게 구 시오. 조용히 합시다” 바람잡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이석배의 편을 들면 먹이는 할말이 없게 된다. 그런데 먹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앉아 있으면 작 업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이석배는 열쇠전문가이므로 핀 하나로 먹이의 가방을 열고 현금을 챙겨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가방을 열쇠로 다시 잠그고 열쇠 구멍속에 이쑤시 개를 집어 넣어 버리는데, 이렇게 되면 열쇠로는 가방을 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을 끝낸 뒤에는 점잖 게 앉아 있다가 기차가 역에 도착하면 유유히 가방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승강구 쪽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때 만일 먹이가 이석배를 의심하여 가방을 열어보려고 해도 때가 늦어 버린 뒤이다. 이쑤시개가 열쇠구멍 속에 박 혀 있으니 열쇠가 들어가지 않고, 이쑤시개는 가방을 흔들 어도 구멍에서 빠지지않으니 어찌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의심되는 자는 사라져 버렸고, 가방은 열어볼 수도 없는 마 당에 기차가 출발하게 되니 먹이는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이석배 일행이 서울역에서 먹이를 발견하고 광주 행 열차에 올라탄 날은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다. 그 중년 신사는 이석배 일행이 자연스럽게 포진하여 좌 석에 앉았는데도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경계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경계심을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그는 가끔 이석배 일행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기차가 신 나게 달리자 등받이에 고개를 받치고 선반 위의 자기 가방 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태가 이러하니 이 석배는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이 동안 기차는 대전을 지 났고 이리를 거쳐 정읍까지 지나쳤다. 이석배 일행은 안달이 났다. 신사의 태도로 보아서는 그 가방속에는 거금이 들어 있는 게 분명했는데, 도무지 기회 를 잡을 수 없으니 안달이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 가 기차는 종착역에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그런데 기차가 송정리에 도착할 무렵 그 신사의 눈이 스 르르 감겨졌다. 그리고 이 찬스를 그들이 놓칠 리 없었다. 신사가 눈을 감자 이 석배와 마주 앉은 바람잡이가 즉시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기차가 광주에 곧 도착할 시간이었 으므로 이석배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가방을 통째로 들고 튀는 길 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차가 송정리에 도착한 뒤 다시 막 출발하려는 순간에 이석배는 슬그머니 일어나 신사의 가방을 선반에서 내려 승강구 쪽으로 걸어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에 신사가 눈을 떴고, 가방이 없어진 것을 안 것이다. 신사는 가방이 없어진 것을 알자 일어서서 승강 구 쪽을 향하여 대뜸 고함부터 질렀다. “저 놈 잡아라. 도둑놈이다!” 일이 안되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듯이 이 날은 바로 그런 경우였다. 광주경찰서에 소속되어 서울과 광주를 정기적으로 왕래하는 열차 공안 형사가 바로 이 순 간에 승강구쪽 화장실에서 나와 객차 안으로 들어오고 있 었던 것이다. 형사는 “도둑놈 잡아라!”는 고함소리를 듣고 무턱대고 이석배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열차 속은 대소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석배는 실수로 남의 가방을 들고 나 가려 했다고 우겼지만 그 형사에게는 그 말이 통하지 않았 다. 그리고 그들 패거리들은 형사가 나타났음을 알자 이석 배를 거들지도 않았다. 이것은 어차피 물은 엎질러졌으니 잡혀가도 혼자 잡혀가라는 태도였다. 이렇게 되어 이석배는 최초로 현장에서 체포되는 신세가 됐다. 그런데 이석배가 광주경찰서에 연행됐을 때 만일 끈질기 게 오리발을 내밀었다면 풀려났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그는 전과가 없었고 외모가 귀공자 다웠으므로 오리발이 통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추가루 물을 코에 집어넣는 고문을 이겨내는 인내심이 없어 자백하고 말았다. 형사들은 이석배가 계속 실수로 남의 가방을 들고 나가 려했다고 우겨대자 긴기민가하다가 시험삼아 이석배를 칠 성판(물고문대) 위에 올려 놓았다. 먼저 짬뽕을 하나 시켜 국수만 건져 먹게 한 뒤 그를 칠 성판 위에 눕혔다. 그리고 움직일 수 없도록 손발을 꽁공 묶어 놓고 고춧가루가 뻘겋게 떠 있는 짬뽕 국물을 이석배 콧구멍 속에 쏟아넣었다. 이석배는 고춧가루 국물이 콧구멍 속으로 들어오자 당장 에 숨이 막히고 콧구멍과 목이 화끈거려 1분도 못 참고 “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라고 소리질러 버렸다. 그러나 형 사들은 짬봉 국물을 그의 콧구멍 속에 다 쏟아넣은 후에야 이석배를 칠성판에서 내려줬다. 이렇게 되어 이석배는 광주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바 로 이시기에 김호장과 인연이 생겼던 것이다. 이석배는 광주형무소에 넘겨진 날 곧바로 김호장 방에 수용됐다. 그런데 인연이란 묘한 것이, 다른 쓰리꾼들 같으 면 김호장에게 호되게 당했을 것인데 이석배만은 당하지 않았다. 감방 안에 호랑이처럼 버티고 앉아 있던 김호장은 신참 이석배가 들어오자 죄명부터 물었다. “넌 무슨 죄를 짓고 들어왔냐?” 이석배는 경찰서에서부터 혼이 나가 있었으므로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방을 슬쩍하다가 잡혔어요” 김호장은 이 말을 듣고 상을 약간 찡그렸다. 그리고 다시 추궁했다 “너도 사원(쓰리꾼)이냐?” 이석배는 겁먹은 소리로 가늘게 대답했다. “예.” “경력이 몇년이냐?” “5년 됐습니다” “부모는 있냐?” “없어요.” “그럼 고아란 말이지?” “예. 6·25때 다 죽었어요” 김호장은 여전히 상을 찡그리며 이석배를 노려보다가 내 뱉듯이 다시 말했다. “자식, 모지방은 그럴듯한데 사원이라 이거지?” 그리고 그는 이석배에게 편하게 앉으라고 권했다. 이석배가 김호장으로부터 이날 받은 대우는 그야말로 예 외였다. 그리고 그 뒤에도 김호장은 이석배를 심하게 다루 지 않았다. 이석배의 용모가 준수하고 어딘가 귀태가 있었 기 때문에 가끔 “모지방은 근사하게 생긴 녀석이 어쩌자 고 쓰리꾼 노릇을 하고 있냐?”라고 놀리긴 했지만 주먹 세례를 퍼부은 일은 없었다. 이석배도 수감된 다음날 김호장의 명성을 알게 되었다. 주먹에 관한한 김호장과 대적할 사람이 없다는 것과 광주 건달 중에서도 왕초급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감방생활을 함께 하면서 이석배는 김호장을 대단 한 인물로 평가하게 되었다. 주먹에 관한 명성뿐만 아니라 김호장의 대범한 성격과 남자다운 기개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이석배는 은근히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 인천역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이석배가 즉시 김호 장을 돕겠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이 흠모의 정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김호장이 이석배의 도움을 받게 된 것은 의미가 단순하지 않은 일이었다. 상황이야 어떻든 이석배와 어울림으로써 그는 점점 더 범 죄세계에 깊숙이 빠져들게 된 것이다. 김호장은 그동안 주먹을 밑천으로 살아왔지만 자신이 범죄 자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소위 주먹세 계에서 노는 폭력배란 사회규범상 분명히 범죄자이지만 김 호장은 자신을 범죄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성장과정이 줄곧 법망에 걸릴 위험 속에서 살아왔고, 세번이나 감옥생활을 했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쉽 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김호장의 특이한 점은 그 자신이 범죄세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극도로 경멸하는 범죄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의 기준을 그는 어디까지나 사내다움에 두고 있었다. 그는 형무소 생활 중에서 쓰리꾼과 날치기를 매우 경멸 했다는 얘기는 앞에서 했다. 이석배만은 예외였지만 실제로 쓰리꾼이나 날치기치고 김호장에게 욕을 먹지 않은 녀석은 거의 없었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이렇게 꾸짖은 것이다. “비겁한 녀석! 사내라면 은행을 털든지 부잣집 안방을 노 릴 것이지 치사하게 남의 호주머니나 슬쩍 뒤지다가 들어 왔냐? 못난 새끼! 그렇게 살려거든 뒈져버려라! 좆달린 놈 이 비겁하게 살바에야 뒈지는 게 났다” 그리고 그는 주먹을 한대 먹이든지 발로 걷어차곤 했었 다. 그는 쓰리꾼이나 날치기뿐만 아니라 좀도둑 같은 파렴치 범들도 경멸했다. 요컨대 그는 사내로 태어났다면 도둑질을 하더라도 남자답게 해야 된다는 주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은 이석배를 만날때까지도 변하지 않 고 있었다. 그런데 현역 쓰리꾼인 이석배의 도움을 받게 되 었으니 심사가 편할리 없었던 것이다. 김호장은 다급한 처지에서 이석배의 하숙방에 눌러 앉았 지만 ‘치사한 쓰리꾼’의 신세를 지게 됐다는 생각 때문 에 속이 뒤틀려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천하의 김호장이 쓰리꾼 밥을 얻어먹게 되다니, 이건 비맞은 생쥐 꼴보다 더 형편없이 됐구나. 하지만 잡히면 골 로 가고, 당장 갈 곳은 없으니…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라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모양이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은 전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비참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서해 바다를 떠돌다가 육지에 상륙했을 때만 해도 그는 절 망하고 있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이석배를 만나 인천역에도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기가 꺾여 버렸던 것이다. 그렇 지만 그는 불굴의 사내였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끝에 그 는 자신이 취할 행동을 결정했다 <쓰리꾼 신세를 지고 살 수는 없지.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내 신념을 바꿀 수는 없잖은가. 내일 당장 떠나자. 내가 쓰 리꾼 신세를 지고 살았다는 것이 알려지면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하다. 나에게 당했던 놈들이 얼마나 웃어대겠는가!.> 그런데 다음날 아침 조반을 먹고 난뒤 이석배가 먼저 정 중하게 김호장의 장래 문제를 꺼냈다. “형님, 한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어젯밤 못 주무시 는 것 같아 저도 여러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이석배는 말을 잠시 중단했는데, 김호장은 묵묵히 이석배의 눈을 쏘아보고만 있었다. 이석배가 다시 말을 이었다. “형님이 저와 함께 지내는 것을 꺼려하시는 것 같아 생 각해본 것인데요, 형님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숨어살 수 있습니다. 저처럼 인천이나 서울에 하숙집을 하나 구하면 그야말로 감쪽같이 숨어 살 수 있지요” 김호장은 이석배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으므로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석배는 김호장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말을 곧 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살려면 돈이 충분해야 됩니다. 하숙집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저처럼 그럴듯한 직업을 대고 나다녀야 되거든요. 어떻습니까, 형님. 제가 돈을 버는 방법 을 알고 있는데 저와 동업하지 않겠습니까?” 김호장은 이석배의 의도가 뭔지 몰라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을 그어대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가 그는 담배에 불 을 붙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뭔데? 뭘 동업하자는 거냐?” 김호장이 관심을 보이자 이석배는 즉시 말을 받았다. “그건 노름판을 터는 것이지요. 인천에도 가끔 큰 노름판 이 벌어지고 있지만 서울에는 큰 노름판이 더 많습니다. 판 돈이 보통 천만환짜리도 많습니다. 돈 많은 놈들이 유한마 담들을 끼고 하는 노름판도 있고, 큰 돈이 왔다갔다하는 진 짜 노름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털면 그냥 공짭니다. 노름하다 털린 놈들이 경찰에 어떻게 신고하겠습니까? 그 리고 그런 돈은 털어먹어도 괜찮은 돈 아닙니까. 어차피 노 름판에 낀 놈들도 남의 돈 먹으려는 심사가 분명하니까 형 님과 함께 그 돈을 털어먹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건 한탕 하면 서너 달은 진창나게 놀고 지낼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 까? 형님은 숨어살 자금도 마련되고…” 김호장은 이석배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이미 결심을 굳 히고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숨어살 수 있는 자금이 생긴 다는 점에 구미가 당겼던 것이다. 그러나 김호장은 즉시 확 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후 김호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노름판을 털자 이거지? 그러면 분명히 강도가 되는 것 인데. 그러나 노름판을 털면 신고도 되지 않고, 어차피 그 돈은 누가 먹어도 상관없다 이거지? 그렇다면 넌 네가 하 고 있는 일은 어떻게 할래?” “저도 생활을 바꾸겠습니다. 배운게 그것뿐이라 할 수 없 이 하고 있지만 요즘은 흥미가 나지 않아요. 뭔가 좀 신나 는 일을 하고 싶은데 저 혼자 노름판을 털어먹을 수는 없 고… 마침 형님을 만나게 되니 그 생각이 난겁니다. 형님과 함께 하면 노름판을 얼마든지 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때서야 김호장은 손을 내밀어 이석배의 손을 잡았다. “해보자. 넌 영리하니까 잘 될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파 리 목숨이니까 살아보는 데까지 살아보자. 우리가 자수하여 감방에 기어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회사에 취 직을 하겠냐, 아니면 장사를 하겠냐? 한번 해보자. 우리 둘 만으로는 좀 어렵겠지만 계획을 한 번 세워 보아라. 근데 노름판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알 수는 있냐?” 이석배는 김호장이 쉽게 응낙하자 감격하여 이렇게 대꾸 했다. “그건 염려마십시오. 돈 있는 곳 냄새맡는 데는 제가 귀 신입니다. 우선 인천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름판부터 한번 털어보지요” 김호장은 담배를 깊이 빨아대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의 눈빛은 강렬한 투지로 불타고 있었다. 제5장 밤을 누비는 귀공자들 이석배는 자신의 최근 생활 중에서 김호장에게 한가지 숨긴 게 있었다. 그것은 여자 문제였는데, 노름판에 대한 정보도 한 번 정분을 나누었던 여자로부터 얻어들은 것이 었다. 그는 인천으로 혼자 숨어들어와 살게 되면서 안전한 도 피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외톨이가 됐기 때문에 엄청난 외로움과 무료함에 시달려야 했다. 체포되면 끝장이 라는 위기감 때문에 그 외로움과 무료함을 견뎌낼 수 있었 지만, 도피생활이 차츰 안정되어가자 그는 무엇보다도 무료 함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도 낮에는 이 다방 저 다방으로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아다녔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해만 떨어지면 밀물처럼 엄습해오는 외로움 때문에 나날이 고통스러웠다. 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밤마다 술집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혼자 자유롭게 살아본 경험이 없었고, 또한 범죄자였 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어 있어서 술집 여자들과 호탕하게 놀지도 못했다. 그는 혼자 술을 홀짝홀짝 마시다 가 창녀집으로 가든지 하숙집으로 터벅 터벅 걸어가곤 했 다. 이석배의 두목은 부하들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통제했었 다. 특히 여자 사귀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두목은 가끔 이렇게 말했다. "여자 사귀는 놈은 발각되면 바로 죽여버린다. 여자란 요 물이어서 누가 여자를 사귀게 되면 우리 비밀이 들통나게 된다. 좌우지간 어떤 놈이건 한 여자를 두 번 만난 사실이 발각되는 날에는 골로 갈줄 알아라!" 두목의 그 명령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두 가 잘 지켰다. 그래서 그 명령은 조직의 철칙이 되었다. 두 목은 그 대가로 가끔 부하들을 창녀집으로 데리고 갔다. 두목의 명령을 잘 지켰던 이석배는 그 나이 때까지 창녀 이외에는 상대해본 여자가 없었다. 사춘기도 되기 전에 소 매치기 조직에 걸려들었기 때문에 동정도 창녀집에서 잃었 고, 청년이 된 이후에도 창녀 이외에는 품에 안아본 여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석배의 그 외롭고 무료한 생활이 여자 때문에 변화가 왔다. 그가 출입하는 단골 다방에서 미남인 그에게 눈독을 들이는 여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중에서 이석배를 가장 탐낸 여자는 중앙동 모나코 다방의 얼굴 마담이었다. 그 마담은 서울 출신으로 처녀시절부터 레지 생활을 한 여자였다. 일찍 결혼했지만 남편이 돈벌이도 제대로 못하는 데다 의처증이 있어 걸핏하면 매질을 했기 때문에 야밤 도 주한 후 서울의 다방을 전전하며 레지 생활을 했다. 그러나 남편이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5.16 이전 에 인천으로 도망와 다방 마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마담은 나이가 서른이 안 넘었지만 사춘기 때부터 분 방한 생활을 한 탓으로 30대로 보였다. 그리고 얼굴 마담답 게 요염한 자태도 있었고, 특히 웃을 때는 음탕하게 보일 정도로 끼가 엿보이는 여자였다. 생활 터전을 인천으로 옮긴 마담은 셋방을 얻어 살고 있 었는데, 사귀는 남자는 없었다. 인천에 온 뒤에도 다방에 출입하는 손님들 중에서 추근거리는 남자가 많았지만 마담 은 그런 유혹에 절대 넘어가지 않았다. 다방의 단골 손님들 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간 망신을 당하고 일자리를 잃을 위 험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서울 에 있을 때 단골 손님의 유혹에 두 번 넘어간 일이 있었는 데, 그때마다 그 작자들이 소문을 내는 통에 망신을 당하고 다방을 옮겨야 했었다. 그래도 첫번째는 소문날 것 같아 마담이 미리 다방을 옮 겨버렸지만 두번째 상대했던 단골은 마담과 잤던 사실을 온 동네에 소문을 내 망신을 크게 당했다. 다방 주변의 건 달이었던 그 작자는 마담의 신체 비밀까지 소문냈었다. 그 녀는 다른 여자들보다 음모가 남달리 많은 편인데 그 작자 는 마담이 만나주지 않자 다방에 패거리를 끌고와 다른 손님들도 다 들리도록 큰 소리로 이렇게 떠들어댔다. "내가 저 마담과 같이 잤는데 말이야, 저 마담 그곳에는 옹달샘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숲이 울창하다. 그 숲이 엄 청나게 울창해서 옹달샘을 찾으려면 한참 헤매야 된다." 그 소리를 듣고 손님들은 히죽히죽 웃었고, 어떤 손님은 차값 계산할 때 능글맞게 웃으며 "그곳에 숲이 정말 많소?" 라고 묻기도 했다. 마담은 그날 당장 그 다방을 그만두어야 했는데, 단골들 과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겠다는 결심 도 그날 밤에 했었다. 어쨌든 얼굴마담은 그 이후로는 단골 손님의 유혹에 절대 넘어가지 않았고 오직 뜨내기만 상대 했다. 그 얼굴 마담은 인천으로 옮긴 이후부터는 이석배처럼 외로움을 탔다. 사귀는 남자가 없었으므로 일이 끝나면 곧 장 셋방으로 가야 했고, 가끔 혼자 극장에 가기도 했다. 그녀는 결혼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밤에는 남자가 무척 그 리웠다. 그 마담이 이석배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미남인 데다가 어쩐지 외롭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뜨내기로 보였던 이석배가 매일 다방에 나타나자 차츰 관심이 깊어졌다. 그 리고 그가 보름 정도 연속적으로 다방에 얼굴을 나타내자 마담은 카운터에 앉아 이석배 쪽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뭐 하는 총각일까? 매일 혼자 오고 있는데.....대학생은 아니고 장사하는 사람 같지도 않고. 뭐하는 남잘까? 미남인 데 사귀는 여자도 없는 것 같고..... 어쨌든 외로운 남자라는 것은 분명할 꺼야.> 이와 같은 관심 끝에 어느날 마담은 이석배에게 말을 붙 였다. 그가 차값을 계산할 때 마담은 호감어린 표정으로 이 렇게 말했다. "직장이 이 부근인가봐요?" 이석배는 마담을 쳐다본 뒤 "아닙니다. 이 부근에 수금할 일이 있어서 매일 옵니다."라고 둘러댔다. 그 말에 마담은 "아, 그렇군요. 저는 직장이 이 부근이신 줄 알았어요."라고 말하며 요염하게 웃었다. 그러나 이석배는 마담이 더 이상 말 붙일 틈을 주지 않고 서둘러 다방을 나갔다. 마담은 그 의 등에 대고 "또 오세요."라고 말한 뒤 뒷 모습도 자세히 살폈다. 그날 이후 마담은 이석배가 나타나면 정감어린 미소를 보냈고, 그가 차값을 계산할 때 는 으례 "오늘 일 잘 보셨 어요?"라고 관심을 나타냈다. 이석배는 마담이 자신에게 호 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 방면엔 숙맥 이었기 때문에 "예, 잘 돼니다."라는 대꾸 이외에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했다. 이석배의 반응이 없자 목 마른 사람이 먼저 우물을 판다 는 속담처럼 마담이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어느날 이석배 가 오후 늦게 그 다방에 들어가자 마담이 직접 차 주문을 받은 뒤 손수 차를 들고 와 그의 앞에 앉았다. 다방에는 손 님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이석배 앞 자리에 앉으며 그와 눈이 마주치자 요염하게 웃으며 " 오늘 수금은 잘 됐어요? "라고 물었다. 이석배는 마담을 쳐다보며 "예, 잘 됐습니다 "라고 대꾸했다. 그러자 마담은 더 요염하게 웃으며 "왜 맨날 혼자 오세요? 애인과도 같이 오시지 않고."라고 말했 다. 이석배는 뭐라고 대답할까 잠시 망서리다가 멋적게 웃 으며 "애인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마담은 장난끼 어린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 같애요. 정밀 애인이 없어요? 보통 미남이 아니 신데 그 말 누가 믿겠어요?" 이석배는 자신도 모르게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입니다. 서울에서 이곳으로 직장을 옮긴지가 얼마 안돼 친구도 없어요." 이석배 말을 듣고 마담의 눈빛이 빛났다. 그녀는 잠시 이 석배를 똑바로 쳐다본 뒤 말했다. "서울에서 오셨어요? 나도 서울에서 왔는데, 언제 오셨어 요?" 이때 이석배의 얼굴에는 한순간 경계의 빛이 스쳤다. 그 는 얘기가 더 깊어지면 곤란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 러나 마담은 바로 화제를 바꿨다. "서울에서 혼자 와서 지내신다면 얼마나 외로우실까. 나 도 서울에서 온 뒤로 정말 외롭게 지내고 있기 때문에 객 지에서 혼자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지 잘 알아요..... 참, 우리 오늘 밤 영화보러 안 갈래요?" 이석배는 잠시 망서린 뒤 그 정도는 괜찮다고 판단하고 "좋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마담 얼굴은 금새 밝아졌다. 그 녀는 조심스럽게 카운터 쪽을 돌아본 뒤 목소리를 낯추며 말했다. "인천 극장이 어디 있는지는 아시지요?" 이석배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담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이따 8시에 극장 앞에서 만나요. 내가 조금 늦더라 도 기다려주세요. 틀림없이 갈테까." 말을 마치고 마담은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 터로 돌아갔다. 기분이 싱숭생숭해진 이석배는 신문을 보는 척하며 잠시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차값을 계산할때 마 담은 요염하게 웃으며 약속을 지키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 석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담은 20분 늦게 나타났다. 다방에서 입고 있었던 한복 대신 양장을 입고 나타났는데, 첫눈에도 육감적으로 보였 다. 그녀는 먼 발치에서 이석배를 발견하고 걸음을 빨리하 더니 그와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었다. 그녀는 이석배 앞에 다가와 "정리 때문에 좀 늦었어요. 자, 들어갑시다."라고 말 한 뒤 매표구로 가서 표를 샀다. 그녀는 표를 끊은 뒤 이석 배를 앞세우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극장 안에는 관객이 별로 없었다. 마담은 이석배를 구석 진 자리로 데리고 갔다. 그들이 앉자마자 영화가 시작됐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된지 10여분 지났을 때 마담의 손이 슬그머니 다가와 이석배의 손을 잡았다. 이석배는 잠자코 있었다. 마담은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에 힘을 주었 다. 그도 힘을 주었다. 그러자 마담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 다보며 웃었다. 이석배도 따라 웃었다. 그들은 다시 영화를 감상하기 시작했는데, 마담은 그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허벅지 위에 놓았다. 그때부터 이석 배는 신경이 쓰여 영화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더우기 잠시후부터 마담의 손이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숨결도 약간 가파졌기 때문에 그는 마담을 와락 껴안고 싶은 충동을 느 꼈다. 그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충동 때문에 몸을 자주 뒤척였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마담은 그의 손을 놓았다. 그 리고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생긋 웃었고 이석배도 웃 었다. 그들은 관객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극장 앞에서 마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석배에게 말했다. "인천에서 하숙하고 있어요?" 이석배는 "예."하고 대답했고, 마담은 곧바로 "어느 동네 에요?"라고 물었다. 경계심이 강한 이석배는 잠시 머뭇거리 다가 "제물포 고등학교 옆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담은 이석배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나하고 정반대 쪽에 사시네요. 어쩐담. 나 좀 데려다 주 면 좋겠는데. 여기서 10여분 걸으면 되거든요." 이석배는 시계를 보았다. 통금 시간까지는 한 시간 남았 으므로 시간은 충분했다. 그는마담을 쳐다보며 흔쾌하게 말 했다. "가십시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마담은 그 말을 듣고 "고마워요. 이쪽으로 가면 돼요."라 고 말한 뒤 먼저 걷기 시작했다. 마담의 걸음걸이는 느긋했다. 그녀는 마치 연인과 데이트 하는 것처럼 천천히 걸었다. 이석배도 바쁠 게 없었으므로 그녀 옆에 붙어 천천히 걸었다. 마담은 영화 애기를 했지만 이석배 귀에는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 앞에 여관 간판이 보였을 때 마담은 이석배가 그곳 으로 끌고 들어가기를 바라는 눈치를 보였다. 이석배는 마담이 뭘 원하고 있는지 간파하고 있었으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여관을 그냥 지나쳤다. 마담은 실망하는 표정을 보였으나 이석배는 그 표정을 보지 못했 다. 그 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그런데 그들이 모퉁 이를 돌았을 때 큰 저택이 보이자 마담은 그 저택을 가리 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집이 인천에서 손꼽이는 부자 집이래요. 첩도 너댓명 이고 노름도 잘 하고 하여튼 인천에서 유명한 한량이 사는 집이래요." 이석배가 그 집을 쳐다보자 마담이 말을 이었다. "저 사람 패거리는 매주 토요일이면 큰 노름판을 벌인데 요." 이석배가 관심있는 어투로 물었다. "요즘도요? 공기가 안 좋아 노름하기 어려울 건데?" 마담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비밀리에 하는 거죠. 아무도 몰라요. 사실은 우리 다방 주인 아줌마가 저 사람 첩이어서 나도 알게 된 거에요." 이석배가 다시 물었다. "노름은 어디서 하지요?" 마담은 그 물음에 고개를 흔들었다. "비밀리에 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아마도 첩 집에서 하겠지요. 노름은 마작이라는 것 같았어요." 그 애기를 나누는 사이에 이석배는 줄곧 그 저택을 쳐다 보며 걸었다. 저택 앞을 지나자 그들은 다시 말없이 걸었 다. 그리고 다시 모퉁이를 돌자 여관이 또 나타났다. 마담 은 그곳에 여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여관이 보이자 걸음을 더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여관 입구 앞에 도착하자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석배 앞에 서 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우리 저 여관에서 자요." 그리고 그녀는 이석배의 대답을 듣지 않고 그의 손을 끌 고 앞장 서서 여관으로 들어갔다. 이석배는 싫지 않았으므 로 잠자코 그녀를 따라갔다. 마담은 여관비를 낸 뒤 이석배 손을 잡고 룸으로 들어갔다. 룸에 들어서자마자 마담은 이석배를 와락 껴안으며 자신 의 입을 내밀었다. 이석배도 참을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마 담의 혀를 힘껏 빨아대기 시작했다. 키스가 끝나자 마담은 이석배를 요염하게 쳐다본 뒤 그의 상의부터 벗기기 시작 했다. 둘 다 발가벗고 이불 속에 들어가자 마담은 이석배의 애 무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이석배에게 달려 들었다. 그의 입에 깊은 키스를 한 뒤 그녀의 입은 그의 온 몸을 더듬기 시작했고, 종내는 삽입도 그녀가 주도했다. 그 런 뒤 그녀는 곧바로 신음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인천 에 온 뒤로 마땅한 상대를 찾지 못해 굶주렸던 마담의 색 욕이 봇물 터지듯 터진 것이다. 그녀는 능동적이었으며 그 방면에 사실상 쑥맥인 이석배를 시종 리드했다. 이윽고 격정적인 몸부림과 함께 절정을 넘긴 마담은 몸이 축 늘 어지며 눈을 감았다. 땀 벅벅이 된 이석배도 마담 옆으로 누웠다. 가픈 숨결이 가라앉자 마담은 옆으로 몸을 돌려 이석배 를 쳐다보았다. 이석배도 그녀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마 담은 요염하게 웃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 일은 절대 비밀을 지켜야 돼요. 그리고 앞으로 자 주 만나요. 우린 서로 다 외로우니까 부담 없이 만나면 좋 잖아요." 이석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담은 그에게 또 가볍게 키 스했다. 그런데 이 직후부터 마담은 경계심 강한 이석배를 매우 난처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서 너무 꼬치꼬치 묻 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직장이 뭐 하는 회사인지, 사무 실 위치며 규모까지 묻자 이석배는 적당히 둘러대다가 소 변을 핑계삼아 일단 마담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화 장실에서 궁리한 끝에 그는 마담의 입을 막는 수밖에 없다 고 판단하고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즉시 마담 배 위로 올라 갔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를 껴안으며 다리 를 벌렸다. 이때부터 이석배는 마담이 지쳐 그를 밀어낼 때 까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자마자 곧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석배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녀들만 상 대해왔던 그로서는 마담의 유혹이 감미롭고 신선하게 느껴 져 기분이 들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차츰 안정을 되 찾자 그는 마담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마담 이 자신에 대해서 너무 꼬치꼬치 케물었기 때문이었다. 그 는 두목이 왜 여자를 두 번 이상 못 만나게 했는지 그 이 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잠 들기 전에 마담을 더 이상 만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새 벽에 마담이 깨기 전에 여관을 나가기로 작정했다. 다음날 새벽에 이석배가 잠에서 깼을 때 마담은 자고 있 었다. 이불을 걷어차버렸기 때문에 마담의 벌거벗은 몸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수북이 덮여 있는 치골의 음모와 하 얗고 풍만한 허벅지가 이석배의 눈을 자극했지만 그는 침 을 한번 삼킨 뒤 옷을 조심스럽게 입고 도둑 고양이처럼 살그머니 방을 빠져나왔다. 이석배는 여관을 나와 골목길을 터벅 터벅 걸었다. 그는 노름 좋아한다는 갑부 저택 앞에 다다르자 잠시 걸음을 멈 췄다. 그리고 그 저택을 한참 쳐다보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씨팔! 이 주인 놈은 무슨 팔자를 타고나와 첩도 몇 명 씩 거느리고 노름으로 세월 보내며 살고 있을까. 난 기껏 남의 호주머니 뒤지며 살고 있기 때문에 굴러들어온 여자 도 버리고 도망가고 있는데...이건 정말 불공평하다. 가만 있자. 이 집주인이 벌이고 있는 그 노름판을 털어먹을 방법 이 없을까? 만일 그것만 털어먹을 수 있다면 큰 돈이 생 길 건데..... 이거야 말로 왕건지고, 털어먹어도 절대 뒷탈이 없는 돈이 아닌가!> 이석배는 저택을 요모 저모 살피며 다시 생각을 이어나 갔다. <털어먹을 방법이 있을 거야. 우선 노름판이 어디서 열 리고 있는지 알아내자. 방법은 그때부터 연구해도 늦지 않 을 것이다. 이 집주인 놈을 미행해보면 노름 장소를 알게 되겠지.> 이석배는 저택을 다시 한번 쳐다본 뒤 슬슬 걷기 시작했 다. 그날 이후부터 이석배의 생활에는 큰 변화가 왔다. 한가 지는 그 저택 주인이 벌이고 있는 노름판을 혼자 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그는 무모하게도 그 노름판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알아내려고 움직인 것이 다. 그는 그 저택 주인을 끈질기게 미행하여 결국 노름판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알아냈다. 그리고 이석배는 노름판을 찾아내려고 움직이고 있는 동 안에도 마담과 벌였던 그 끈끈했던 정사를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밤마다 불현듯 떠오르는 마담의 발가벗은 육체 생각 때문에 끙긍 앓다가 다른 다방 레지를 자신이 스스로 유혹 해보기로 작심했다. 이석배가 첫번째로 선택한 여자는 시청 옆에 있는 다방 레지였다. 그녀는 갓 스무살 정도였는데, 이석배가 나타나 면 눈웃음을 살살 웃으며 그에게 꼬리를 흔드는 레지였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통성명은 했기 때문에 사실 이석배 가 약간 적극적인 말을 던지면 성사되게 되어 있었다. 이석 배는 그 레지를 유혹하기 위해 일부러 다방이 가장 한가한 시간을 골라 그곳에 갔다. 그리고 그 레지에게 미끼를 던졌 다. 모나코 다방 마담이 그에게 했던 그대로 였다. "미스 김, 오늘 밤 시간 있으면 영화나 보러갈까?" 이석배를 영화배우 신성일에 버금가는 미남으로 생각하 고 있던 미스 김은 이 데이트 신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그날밤 인천 극장 앞에서 만났다. 이석배는 표를 산 뒤 미스 김을 데리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자 이석배는 마담이 그랬던 것처럼 슬그머니 미스 김 손을 잡았다. 미스 김은 그 손을 뿌리치 지 않았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는 미스 김 손을 놓지 않 았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에서 나온 이석배는 미스 김의 집을 물어본 뒤 바래다주겠다며 함께 걸었다. 미스 김이 사는 곳 은 그의 하숙집과 같은 방향이었다. 그는 영화 애기를 하며 슬슬 걷다가 여관 앞에 다다르자 재빨리 미스 김의 팔을 끼고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미스 김은 "왜 이러세요?"하며 저항하는 척했지만 그 몸짓은 형식적이었다. 이석배에게 끌 려 여관 문안으로 들어서자 미스 김은 얌전해졌다. 이석배 는 그녀를 룸으로 데리고 들어가자마자 옷을 벗겼다. 그리 고 풋과일 같이 싱싱하고 탄력있는 그녀의 나체를 안으며 그는 "연애가 이렇게 쉬운 것인 줄 몰랐다."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미스 김도 정사가 끝나자마자 마치 부부 인연이 라도 맺은 것처럼 그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고 했다. 이석 배는 애무 공세로 미스 김의 입을 막은 뒤 그녀가 잠이 들 자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여자들이 나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고 하기 때문에 골 치아프구나. 그러나 상관 없지. 어떤 여자든 한 번 이상 안 만나면 되니까. 밖에 나가면 널려있는 게 여자 아닌가!> 어쨌든 그는 한 여자와 깊이 사귈 수 없었으므로 미스 김 이후로도 한 번 잠을 같이 잔 여자와는 다시 만나지 않 았다. 그러나 그는 레지를 유혹하는 일보다 사실 노름판을 털어야겠다는 집념이 더 강했다. 여자를 유혹하는 것은 어 디까지나 소일거리였고 그의 본업은 방법이야 어찌됐건 돈 버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더우기 큰 돈이 있는 곳을 안 이상 그것을 단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이 석배는 우연히 김호장을 만나게 돼 노름판을 털자고 제의 했던 것이다. 모나코 다방 마담으로부터 노름 애기를 들은 뒤 이석배 는 추적 끝에 그 저택 주인은 인천 알부자 허정수(許正洙) 이고, 허정수를 미행하여 태화정(太花亭)이라는 요정의 마 담 집에서 노름판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냈다. 태 화정은 인천 제일의 요정인데 마담은 허정수의 세번째 첩 이었다. 허정수는 마작광인데다가 투기를 좋아해 토요일이 면 태화정 마담 집에서 친구들과 돈내기 마작을 두고, 가끔 은 교제를 위해 그 마담집에 서울의 유력인사나 인천 세도 가들을 초대해 마작판을 벌이고 있었다. 이석배는 그 마담 집에 출입하는 인사들의 신원은 알아낼 수 없었으나 분명 히 노름판이 벌어지고 있는 사실은 확인했었다. 이석배는 김호장이 노름판을 털자는 자신의 제의를 받아 들이자 자신이 알고 있는 위와 같은 정보를 김호장에게 모 두 말했다. 김호장은 그 애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그럼 사전 정찰을 한번 해보고 날을 택해 노름판을 덥 치자. 그러나 우린 둘밖에 안되므로 무기가 필요하다. 거기 에 열 놈이 노름을 하고 있다 해도 나 혼자 처치할 수 있 지만 소란이 알어나면 곤란하니까 초장에 무기로 위협하여 꼼짝 못하게 만들어야 된다. 우선 식칼과 빨래 방망이를 구 해오라. 그리고 복면용 마스크와 모자도 필요하고 솜뭉치와 노끈도 구해오라." 이석배는 그 지시를 받고 "솜뭉치와 노끈은 어디에 쓰시 려고 그럽니까?"라고 물었는데, 김호장은 피식 웃은 이렇게 대답했다. "솜뭉치는 노름꾼들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이다. 판돈을 턴 뒤 안전하게 튈려면 노름꾼 들 입을 솜으로 틀어막고 손발을 묶어놓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튀자마자 고함이라도 질러대면 낭패를 당할 수있다. 그리고 넌 칼을 들어야 되는 데 절대 찔러서는 안된다. 칼에 찔려 누가 죽기라도 한다면 낭패다. 반항하는 놈은 나에 맡겨라." 그날 낮에 이석배는 김호장이 구해오도록 지시한 물건들 을 사왔다. 김호장은 그 물건들을 점검한뒤 이렇게 말했다. "됐다. 그럼 오늘밤에는 그 요정 마담집 쪽으로 가서 정 찰을 해보자." 그날밤 그들은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태화정 요정 마담 집으로 향했다. 태화정 마담 집은 송월동에 있었다. 이석배 하숙집으로부 터는 걸어서 10분 정도밖에 안 걸릴 정도로 가까웠으므로 그들은 그곳까지 걸었다. 이석배는 마담 집이 있는 골목 입 구에 도착하자 호주머니에서 약도를 꺼내 살펴본 뒤 김호 장에게 "태화정 요정 마담 집은 이 골목 안에 있습니다."라 고 말했다. 김호장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고는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서성거리며 골목 안쪽과 입구 좌우를 살피기 시작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퇴로는 좋구나. 그럼 이제 그 집 앞까지 가보자."라고 말했다. 이석배는 "예. 가시지요."라고 말한 뒤 앞장 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 는 골목 끝 지점에 있는 어느 적산집 앞에 도착하자 뒤를 돌아보며 김호장에게 "바로 이집입니다."라고 소근거렸다. 마담 집의 담장은 벽돌 담이었는데, 담 위에 철조망이 없 어 넘어가기에는 쉽게 보였다.김호장은 담장을 요리 조리 살펴본 뒤 이석배에게 "너 여기 와서 잠시 엎드려 보아라. 담 넘어로 집 안도 보아두어야겠다."라고 말했다. 이석배는 즉시 김호장 앞에 엎드렸다.김호장은 그의 등을 밟고 일어 서서 담장 안을 재빨리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집 안에 개 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이석배 등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골목 입구로 다시 나왔다. 골목 입구에서 김호장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입에 문 뒤 좌우를 살피며 이석배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토요일인 모레는 노름판이 벌어 지는 날이지? 털어먹는 거야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 라고 생각되는데, 그러나 상대가 있으므로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우선, 우리가 저 집으로 들어가는 시간은 밤 10 시로 정한다. 늦어도 한 시간 이내에 일을 끝내고 나와야 된다. 너무 늦게 나오면 돌아가는 길에 방밤대원들을 만날 위험이 있다. 저 집에서 노름 판돈을 턴 뒤 탈 없이 여기까 지만 나오면 성공한 거나 다름 없다. 여기서부터 너의 하숙 집까지는 대로로 걸으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자, 여기서 너의 하숙집까지 그렇게 한 번 걸어보자" 그들은 대로를 따라 이석배 하숙집 쪽으로 걷기 시작했 다. 그들은 다음 토요일 밤 9시 30분에 가방 하나를 들고 태 화정 마담집으로 향했다. 마침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 으므로 남의 집에 몰래 침입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날이었다. 그들은 마담집에 도착하여 한동안 집안 동정을 살폈는데 분명히 사내들의 목소리가 집밖까지 들려왔다. 김호장은 골목 어귀를 한번 살핀 다음 잽싸게 담을 넘었 고, 이석배도 곧 뒤를 따랐다. 그들은 정원의 나무 밑에 납 짝 엎드려 가방에서 복면용 마스크를 꺼내 얼굴 아래부분 을 가렸고 모자도 꺼내 썼다. 그다음 그들은 몽둥이와 대검 도 꺼내 하나씩 들고 부엌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부엌 문을 열고 소리없이 집안으로 들어섰다. 집안에 들어서자 마작 두는 소리가 들려왔으므로 그들은 바짝 긴장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김호장은 조용하게 일을 치를 계획이었다. 만일 반항하는 자가 있다면 겁만 주기로 작정하고 있었는 데, 그들이 방안으로 불쑥 들어서자 사정이 달라져버렸다. 방안에는 남자 다섯명과 여자 두명이 있었다. 남자들은 돈푼이나 만지는 작자들이었으므로 신수들이 훤했고, 여자 들도 윤기가 도는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난데없이 복면한 사내 두명이 방안으로 침입하자 깜짝 놀란 뒤 겁을 집어 먹고 벽쪽으로 슬슬 물러나 앉으며 벌벌 떨기 시작했 다. 그러나 어깨가 떡 벌어지고 체격이 당당한 40대 남자 한 명이 태연하게 그들을 노려보며 그들의 손에 들고 있는 무 기를 살피고 있었다. 이 남자는 10여척의 어선을 가진 선주 로 유도가 5단이었다. 그는 침입자들의 행색을 보고 냉소를 머금었다. 몽둥이를 들고 있는 놈은 민첩하게 보였으나, 대검을 들고 있는 놈은 키만 컸지 별 특색이 없는 체구였으므로 그는 속으로 코웃 음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침입자들이 별것 아니라고 판 단하고 자리에서 슬슬 일어나 대적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 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오산이었다. 제아무리 유도로 단련 된 몸이라 할지라도 싸움의 천재 김호장을 이길 수는 없었 다. 김호장은 상대의 눈빛에서 반항할 기미를 읽고 그가 자 리에서 일어서자마자 몽둥이를 번개처럼 휘둘러 그를 단번 에 쓰러뜨렸다. 그리고 그 선주가 쓰러지자마자 발로 그의 의 면상을 힘껏 내려찍어버렸다. 그러자 유도 5단인 그 선 주는 꽥 소리 한번 못 지르고 기절하고 말았다. 반항하는 자를 가볍게 처치하고 난 김호장은 노름꾼들을 향해 침착하게 명령했다. “점잖게 일을 치를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너희들은 혼 좀 나봐야 될 것 같다. 죽이지는 않을테니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대로 해야 된다. 모두 그 자리에서 옷을 모두 벗어 라. 제일 늦는 놈은 골통을 까버릴테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내들은 옷을 재빨리 벗기 시작했다. 그러나 계집들은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김호장은 이 순 간 어쩔까 망설이다가 계집들에게도 무섭게 쏘아댔다.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빨리 옷을 벗어! 빤스까지 다 벗 지 않으면 몽둥이가 너희들 골통을 향해 날아갈 것이다!” 김호장의 눈에는 살기가 등등했으므로 계집들도 주저없 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들이 팬티까지 다 벗자 김호장은 그들에게 벽을 향해 돌아 서있으라고 명령한 다음 이석배 에게 눈짓으로 묶으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이석배는 재빨리 가방에서 노끈을 꺼내 방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부터 차례 로 묶기 시작했다. 사내들을 다 묶고 계집 차례가 되자 이석배는 뒤를 돌아 김호장을 한번 흘낏 본 뒤 계집들의 알몸을 훑어보기 시작 했다. 서른 다섯이 넘게 보이는 계집은 허리는 잘룩한데 엉덩 이가 비정상적으로 커서 균형이 잡히지 않았으나 매우 관 능적인 몸매였고, 그보다 젊은 계집은 허리 곡선도 예쁘고 엉덩이도 탄력있게 부풀어 있어서 이석배의 군침을 돌게 만들었다. 그 계집은 키도 크고 살결도 윤기가 있었으므로 이석배는 당장 계집을 쓰러뜨리고 올라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석배는 침을 삼킨 뒤 엉덩이가 큰 계집의 손을 묶으면 서 입을 열었다. “누가 이 집 주인이냐?” 계집들은 그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잠시 버텼는데 이윽 고 체념한듯한 목소리로 한 계집이 "제가 깁니다.”라고 대 답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엉덩이가 비정상적으로 큰 계집이었다. “그럼 니가 태화정 마담이로군. 그렇지?” “예.” “근데 넌 엉덩이가 왜 그렇게 크냐? 엉덩이를 많이 돌려 대서 그러냐? 대답해봐. 내 말이 맞지? ” “…………” 이석배는 마담에게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시선을 탐스런 알몸을 가진 계집에게 돌리며 말을 붙였다. “넌 누구야?” 이 말에 마담이 대신 대답했다. “그 앤 제 동생이에요.” 이석배는 이 말에 낄길거리며 웃었다. “흐흐, 저년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 하고 있네. 너하고 살결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고 엉덩이 크기도 완전 히 다른데 어떻게 동생이 될 수 있니? 솔직하게 말해. 넌 누구야?” 계집은 그 말에 얼굴을 돌리며 이석배를 앙칼지게 쏘아 봤다. 그 계집은 유한마담으로 상당한 빽줄이 있었기 때문 에 태도가 만만하지 않았다. 계집은 옷을 벗은 게 분해 줄 곧 어디 네놈들이 안 잡히나 두고 보자, 라고 생각하고 있 었고, 이석배가 희롱하자 얼굴을 보아두려고 쏘아봤던 것이 다. 그러나 이석배는 짓궂은 녀석이었다. 계집이 앙칼지게 나오자 그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요것 정말 탐나는데. 형님 시간도 많으니 이 계집과 한 번 놀고 갑시다. 노름판에 끼어 앉아 있는 년이라면 손대도 뒷탈 없을 거요. 형님 생각 없우?” 김호장은 이석배가 노는 모양을 그냥 지켜보고 있다가 여기에서 제지했다. “빨리 손을 묶고 솜뭉치를 아가리에 쳐넣어라. 그리고 솜 뭉치를 못 뱉어내도록 아가리도 노끈으로 묶어버려라.” 이석배는 김호장의 말이 떨어지자 아쉬운듯 그 계집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탁 탁 두드리고 난 뒤 가방 속에서 솜뭉치를 꺼내 노름꾼들과 계집들 입에 쳐넣었다. 이석배가 일을 끝내자 김호장은 다시 눈으로 돈을 챙기 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석배는 부리나케 방바닥에 깔린 판 돈과 벗어 놓은 옷들의 호주머니 속은 물론이고 계집들의 핸드백까지 뒤져 돈을 몽땅 가방 속에 집어 넣었다. 계산이 빠른 이석배는 가방속에 집어 넣은 돈이 6백만환이 넘는다 고 생각됐으므로 심히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돈보다 알몸으로 묶여 있는 계집들 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원래 마음만 먹으면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돈을 만들 수 있는 손재주를 가지고 있었으 므로 돈에 대한 욕심은 강하지 않았다. 그래서 만일 그 자리에서 김호장이 돈과 계집중 어느 것 을 선택하겠냐고 물었다면 그는 주저없이 계집 쪽을 택했 을 것이다. 전쟁 고아로서 온갖 천대와 수모 속에서 자라오 다가 범죄세계에 뛰어든 그는 풍족하게 살고 있는 유한마 담의 풍만한 나체를 보자 이상하리만치 강렬한 성욕을 느 꼈던 것이다. 특히 그는 엉덩이가 비정상적으로 큰 태화정 마담보다 젊은 계집의 나체에 군침을 흘렸다. 늘씬한 키 아 래로 뻗어내려간 잘룩한 허리 곡선과 적당하게 살찐 엉덩 이가 그의 시선을 자꾸 끌어당겼다. 김호장도 오랜만에 대하는 계집들의 나체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무르익을대로 익은 계집 두 명이 홀 랑 벗고 서 있는 모양을 보는 것은 매우 자극적이었다. 태화정 마담은 엉덩이가 남다르게 컸지만 허리가 잘룩했 으므로 그런대로 관능적이었고, 그 옆의 계집은 살결도 윤 기가 있고 균형잡힌 몸매여서 탐스럽기 짝이 없었다. 게다 가 계집이 앙칼지게 나오자 김호장도 불쑥 그 계집을 짓밟 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자제력이 뛰어 난 사내였다. 그리고 도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난생 처음 으로 남의 돈을 강탈하고 있는 판국이었으니 사실 헛눈 팔 여유도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이 방면에는 초범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이석배가 돈을 다 챙기자마자 먼저 방에서 나가라는 눈짓 을 했다. 이석배는 그 신호를 받고 아쉬운듯 계집들의 엉덩 이에 다시 시선을 한번 던진 뒤 슬그머니 방에서 빠져나갔 다. 이석배가 나간 뒤 김호장은 노름꾼들을 향해 낮고 강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 놈들이 상습도박꾼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다. 원래 노름판 판돈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다. 따서 가져가든 이 렇게 가져가든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장땡인 거야. 너희들 은 상습 도박꾼들이니까 그 정도야 알고 있겠지. 그러니 원 망하지는 마라. 그리고 네놈들 옷은 우리가 경찰서 마당에 던져놓겠다. 옷을 찾으려거든 내일 경찰서에 가 보아라. 그 리고 경찰서에 가는 김에 노름하다가 판돈을 다 털렸다고 신고도 하고. 그리고 너, 나이 어린 년 잘 들어라. 오늘은 우리가 곱게 물러가지만 빠른 시일내로 너의 집도 방문하 겠다. 그때 다시 만나게 되면 너를 주물러주겠다. 아마, 너 도 재미있어 할 거야. 흐흐.” 그러나 이 말은 그들을 겁주기 위한 말에 불과했다. 그는 노름꾼들의 옷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방에서 나오자마자 그 것을 정원 구석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집을 빠져나와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석배와 함께 대로를 가로질러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태화정 마담 집의 노름판을 턴 돈은 7백 2십만원 이었다. 당시 독방 하숙비는 아무리 고급이라도 2만원 정도 였으므로 김호장의 은신 자금은 쓰고도 남을 정도로 확보 된 셈이었다. 김호장은 그날밤 바로 그 돈을 이석배와 분배했다. 그는 똑같이 분배하려 했지만 이석배는 "형님이 두목이니까 형 님 몫이 많아야지요."라며 한사코 균등 분배를 반대했다. 김호장은 이석배 의사를 받아들여 그 돈을 6대 4로 분배한 뒤 이렇게 말했다. "내 몫이 더 많아야 된다는 니 주장을 일단 받아들이지 만 단서가 있다. 그건 내가 두목이어서 몫이 더 많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이 자리에서 강조하지만 우리 사이에 두목은 없다. 다만 우리는 앞으로 같이 행동 해야 되니까 공금이 필요할 것인데 그 공금조로 더 받아두 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두목이라는 말은 절대 쓰지 말아 라. 앞으론 나를 그냥 형님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부 르면 된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이석배는 김호장의 표정이 단호했으므로 자세까지 가다 듬으며 "예. 잘 알겠습니다. 앞으론 주의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날 밤 그들은 분배를 끝낸 뒤 은신처를 서울로 옮기는 문제에 대해서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 문제에 대한 김호장 의 기본 입장은 서울에서는 하숙방을 따로따로 구하는 것 이었다. 며칠 같이 지내며 이석배가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 고 있었지만 쓰리꾼인 그와 한 하숙방에서 침식을 같이 하 며 지낸다는 것이 어쩐지 꺼림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석배는 둘이 각기 하숙방을 구하는 것에 대해서 완강하 게 반대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형님 우리가 하숙집에 숨는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 이 아닙니다. 하숙집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 뒤가 문젭니다. 하숙집에서 절대 의심받아서는 안되거든 요. 하숙집에는 다른 하숙생도 많은데 그들은 새로 들어온 하숙생에 대해서 당연히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주인도 새로 들어온 하숙생에 대해서는 뭔가 알려고 하고요. 그리 고 하숙 들어간 사람도 그들에게 자신의 직업과 고향등에 대해서 반드시 소개해야 돼니다. 그런데 만일 하숙집에서 형님을 누가 의심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형님 은 그들을 잘 속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만에 하나라 도 실패한다면 바로 끝장이지요. 때가 때인지라 의심받으면 굳바로 골로 갑니다. 요샌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즉각 신고 한다니까요. 그래서 제 생각엔 형님은 당분간 저와 함께 하 숙하시는 것이 안전합니다. 저는 원래 남 속이는 데에 이골 이 나 있고 또 하숙집에서 어떻게 하면 의심받지 않고 지 낼 수있는 지에 대해서도 인천에서의 경험 덕분에 잘 알 고 있습니다." 이석배는 김호장이 자신의 애기를 진지하게 경청하자 신 이 난듯 이렇게 말을 이었다. "형님. 그런데 혼자 하숙하게 되면 다른 문제가 또 있습 니다. 이건 진짜 경험에서 나오는 애긴데요, 제가 인천에 혼자 온 뒤로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일은 시간 보내는 일 이었습니다. 그건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제 자신도 표현할 수 없어요. 식구들과 같이 지낼 때는 하 루 해가 긴 줄을 전혀 몰랐었습니다. 그러나 그 애들과 헤 어지고 인천에 혼자 온 뒤로는 하루가 그렇게 길 수가 없 었어요. 그래도 낮에는 이 다방 저 다방 돌아다니니까 시간 가는 줄도 잘 모르고 심심하지도 않는데 밤만 되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하숙집에 돌아와도 할일이 없고 밤마다 갈 보집에 갈 수도 없고 말입니다. 이건 경험해보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엔 형님과 제가 같이 하숙을 하게 되면 그런 문제도 해결될 수 있습니다. 전 형님을 우연히 만난 이후부터 정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전 서울 토박이 나 다름 없습니다. 형님에겐 서울이 객지이고요. 제가 형님 을 잘 모시면 공기가 좋아질 때까지 형님이 숨어사시는 데 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김호장은 여기서 이석배의 말을 가로막았다. "알았다. 더 이상 애기 안 들어도 된다. 결론은 서울에 가서 같이 하숙하는 거다. 난 그 방면에 대해선 잘 모르니 너만 믿겠다. 그럼 이제 자볼까." 이석배는 김호장의 말을 듣고 넙죽 절을 하며 이렇게 말 했다. "형님,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혠 평생 안 잊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재빨리 일어나 잠자리를 했다. 그들은 나란 히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러나 김호장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인천에서 뜻 하지않게 이석배를 만나게 돼 새로운 은신생활에 대한 희 망을 갖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편하게 된 것은 아 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궁여지책으로 노름판을 털었지 만 그것도 결국은 강도짓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개운치 않 았다. 그렇지만 그는 스스로를 위안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 였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냥꾼들에게 쫓기고 있는 늑대 신세인 내가 무엇을 가 리겠나. 어떤 일이 있어도 안 잡혀야지..... 좌우지간 돈이 생겼으므로 우선 한숨 돌리게 됐다. 서울에 가서 하숙 정하 게 되면 승일이에게 연락이나 해주자. 무척 궁금해 하고 있 겠지.> 김호장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석배가 "형님 안 주무십니까?"라고 말하며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그도 고개 를 돌려 이석배를 보았다. 이석배가 입을 열었다. "형님, 전 아무래도 하늘이 도와 형님을 만나게 된 것 같 았요. 형님을 만난 이후부터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하루 하 루 지내는 게 항상 불안했는데, 그 불안감도 없어지고 포근 함을 느끼고 있어요. 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은 처음입니다. " 김호장은 고아로 자라난 이석배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 었다. 그래서 그는 한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아주며 "석배야, 이제 우린 가는 데까지 함께 가보자., 나도 너와 이렇게 만 난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어려워하지 말고 친 형이라고 생각하거라."라고 말했다. 이석배는 울먹이는 음성으로 "예."하고 대답했다. 그들은 그 뒷 말을 잇지 않았 다. 그들은 얼마 안 지나 잠이 들었는데 그때까지 서로 잡 고 있던 손을 놓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이석배는 아침 밥상을 내놓은 뒤 주인아주 머니에게 자신이 서울로 이사간다는 사실을 알렸다. 물론 그는 거래에 문제가 생겨 급히 서울로 옮기게 됐다고 거짓 말했고, 뒷날 그 하숙집이 다시 그들의 은신처가 될지도 모 른다고 생각했으므로 주인아주머니에게 사례비도 주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매우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인천에 다시 오게 되면 꼭 찾아달라고 했다. 하숙집에서 나온 그들은 백화점에 가서 김호장의 외모를 가꿀 옷들을 샀다. 신사복은 서울에서 맞춰 입기로 하고 우 선 점퍼와 바지를 사 입었다. 그리고 구두와 고급시계도 샀 으며 여행용 가방도 마련했다. 그런 뒤에 그들은 이발소에 가서 이발도 말끔히 했다. 새 옷을 입고 이발까지 끝내 자 김호장의 외모는 완전히 바뀌었다. 누가 보아도 그는 먹 고 살기가 풍족한 선량한 시민으로 보였다. 이발소 앞에서 이석배는 김호장을 살펴본 뒤웃으며 농담까지 했다. "형님, 이제 여자들이 줄줄 따르겠습니다." 김호장도 그 농담이 싫지 않았다.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 했다." "여자들이 줄줄 따르면 오히려 골치만 아파진다. 어제 밤 의 그 젊은 년 같으면 몰라도...고건 괜찮더만." 그 말에 이석배 눈이 빛났다. 그는 침을 한번 삼키며 이 렇게 말했다. "아, 형님도 그 년을 못 잊는 모양이군요. 전 지금도 그 년 알몸이 눈앞에서 삼삼합니다. 노름판에 앉아 있는 걸 보 면 그년 구멍도 갈보나 다름 없을 건데, 그렇지만 그년 벗 겨놓으니까 정말 기똥 찹디다. 잘 익은 복숭아처럼 탐스럽 던데 그냥 놓아두고 나오자니 발걸음이 안 떨어집디다." 김호장은 그 말에 "허,허"웃고는 이석배에게 밥 먹자는 시늉을 했다. 이석배는 그때서야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핀 뒤 그를 길 건너편에 있는 중국음식점으로 안내했다. 식당에 들어가서 주문을 한 뒤 이석배는 목소리를 낮추 며 김호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점심 먹고난 뒤 하숙집으로 가서 짐을 가지고 바로 서 울로 가야 되겠어요. 그리고 서울 갈 때는 택시를 대절해야 돼니다. 버스나 기차는 불심검문이 많아 위험하니깐요. 서 울에 도착하면 바로 하숙집을 구해야 되는데 이왕이면 부 자 동네에서 구하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저희들 입장에선 하숙생이 적고 전화가 있는 집이 좋겠습니다. 전화가 있어 야 급할 때 도움이 되니까요. 이런 조건을 갗춘 하숙집 구 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복덕방에서 다 해결해주니 까요." 김호장은 이석배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그 문제는 니가 알아서 해결하라. 나는 하숙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모 르니까 나와는 상의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 이석배는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한 뒤 잠시 망서리다가 다시 조 심스런 태도로 입을 열었다. "형님, 그러나 이 애긴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저희들이 서 울 생활을 하게되면 꼭 지켜야 할 게 있습니다. 첫째는 절 대로 버스나 전차를 타면 안 됩니다. 버스나 전차 속에는 항상 곰들이 있습니다. 특히 저는 이전 제 식구들이나 다른 패거리를 만날 위험이 많습니다. 또 제 얼굴을 알고 있는 밀대도 많고요. 하여튼 제가 그 새끼들 눈에 띄는 것은 안 좋습니다. 또 버스나 전차 속에서 형님 얼굴을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안 좋습니다. 형님이 서울에 계신 것이 금방 소문나니까요. 그래서 서울 시내를 돌아다닐 때에는 반드시 택시를 타야 됩니다. 그리고 하숙집에서는 우리를 돈 많은 사람으로 알게 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돈 씀씀이도 좋아야 하고 의복도 말쑥해야 합니다. 특히 옷이 중요하니까 형님 은 서울 가서 신사복 맞출 때 한 벌만 맞추지 말고 여러 벌 맞추십시오. 의복이 깨끗하고 돈 씀씀이가 좋으면 어디 가나 의심 안받고 오히려 대접 잘 받습니다. 하여튼 어디 가나 사람들이 저희들을 돈 많은 귀공자로 대접하게 되면 은신 생활은 확실하게 성공할 수 있습니다." 김호장은 이석배 애기를 다듣고 난 뒤 빙긋이 웃으며 이 렇게 말했다. "넌 참 연구도 많이 했다. 언제 그런 걸 다 연구했냐? 하 여튼 서울 생활은 너만 믿겠다." 이석배는 칭찬을 듣자 기분이 좋아 "형님이 믿어주시면 영광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날 해질 무렵에 그들은 서울 신당동 고급 주택가에서 하숙방을 구했다. 전화도 있고 하숙생도 적어 그들이 원했 던 조건을 두루 갖춘 집이었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되어 불과 보름 전만 해도 앞날이 캄캄했던 김호장은 서울에 안 전한 은신처를 구하게 되었다. 김호장의 서울 은신생활 초기는 이석배의 구상대로 진행 됐다. 그들은 정오 경에 하숙집에서 나와 설렁탕이나 짜장면을 사먹은 뒤 주로 명동의 다방에서 소일했다. 말하자면 이석 배의 인천 생활 그대로였다. 다만 먹이를 쫓아다니지 않았 을 뿐이었다. 그리고 해가떨어지면 술집에 가든지 극장에 가기도 했다. 김호장은 아무 말없이 이석배가 안내하느대로 따라다녔는데, 그 생활이 일주일 정도 계속되자 이석배에게 문제를 제기했다. 시내에서 술까지 마시고 하숙집으로 돌아 온 뒤 김호장은 이석배에게 이렇게 말했다. "석배야, 내 말 좀 들어보아라. 나의 서울 생활이 일주일 쯤 됐는데, 이건 문제가 너무 많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면 이 생활은 의미가 없다. 이렇게 지낼 바에야 산에 들어 가 토굴을 파고 사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걸 어떻게 바꿔보자." 이석배는 아이디어가 없었으므로 김호장에게 "어떻게 바 꾸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김호장은 곧바로 "그건 운동이야. 운동이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지 지루 하지 않을 거야. 난 이미 결심했다. 차 타고 지나다니면서 보았는데 을지로 5가에 보디빌딩도장이 있더라. 역도와 아 령등으로 육체미를 가꾸는 곳인데 그 운동도 괜찮다. 난 오 후에 거기 나가 운동이나 하겠다. 넌 운동이 싫으면 저녁 때 명동에서 나와 만나든지 하자."라고 말했다. 이석배는 운동을 싫어했으므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곤혹스 런 표정을 지으며 "형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 제가 따라 다녀야 되는데, 전 운동은 싫어하거든요. 그러면 이렇게 할 까요? 낮에 하숙집을 나간 뒤 형님은 운동하시고 저는 저 대로 돌아다니다가 저녁때 만나는 걸로요."라고 대답했다. 김호장은 그의 제의를 즉시 받아들였다. 이렇게 되어 다음날부터는 그들 샐활이 약간 달라졌다. 김호장은 오후에 운동을 했고,이석배는 명동의 이 다방 저 다방을 돌아다니며 마담이나 레지들과 수작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저녁 때가 되면 둘이 다시 만나 저녁밥을 사먹었고, 그 뒤에는 술을 마시든지 극장에 가든지 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김호장은 하루 하루 지날수록 여유를 찾기 시작했으며, 태도도 차츰 대담해졌다. 그에게서는 어 디를 보나 도피자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김호장은 서울 은신생활이 안정되자 하숙집에서 부산의 하승일에게 시외 전화를 걸어그 사실을 알렸다. 하승일은 그의 전화를 받고 무척 반가워했으며 당장 서울에 올라와 그를 만나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김호장은 그들이 만나는 문제는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당분간은 참자 는 말로 하승일의 서울행을 만류했다. 하여튼 김호장은 서울 생활이 안정되어갈수록 왕년의 가 락이 서서히 나왔다. 그는 무교동에 있는 황금마차라는 바 를 단골로 만들어 밤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기 시작했는데, 바걸들은 김호장이 돈을 잘 뿌렸기 때문에 "오빠,오빠"하 며 그를 극진히 모셨다. 이런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그는 황금마차의 바걸 춘심이와 하룻밤을 잠으로써 대구형무소 에서 나온 이후 최초로 여체를 밤새도록 매만졌다. 청학동 에서 옆방 여자가 스카트를 들어올리며 자신의 은밀한 부 분까지 노출시켰을 때도 꾹 참았고, 인천에서 노름판을 털 때 발가벗긴 두 계집의 탐스럽고 풍만한 나체를 그대로 보 기만 했던 김호장은 어느날 밤 춘심이를 유혹하는 데 성공 했다. 춘심이는 황금마차에서 제일 예쁜 바걸이었는데, 아무에 게나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 여자라는 소문이 있었다. 춘 심이는 말이 별로 없고 천박하지 않는 인상이어서 김호장 의 관심을 끌었다. 춘심이도 그에게 호감을 가져 오빠라고 부르며 따랐다. 그러나 김호장이 어찌 해보려고 해도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김호장이 권하는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더니 취해 버렸고, 술에 취한 그녀 귀에 대고 김호장이 "우리 같이 호탤에 가자. 여관이 아니라 호탤이 다."라고 소근대자 그녀는 "오 케이. 오빤 마음에 드니까 따 라간다."라고 그의 유혹을 받아들였다. 춘심이는 바걸 중에서는 독특한 여자였다. 김호장을 따라 호탤 룸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약간 취해 있었는데도 그에게 술을 시켜라는 주문부터 했다. 춘심이를 빨리 안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김호장은 "취했는데 무슨 술을 더 마실려고 그러냐. 빨리 자자."고 말해보았지만, 그녀는 막무 가내로 술을 더 달라고 했다. 김호장은 할 수 없이 술을 시 켰는데, 춘심이는 술을 마시면서 애교있게 "안 취한 상태에 서 옷을 벗을 수 없잖아!"라고 말했다. 김호장은 서두르지 않기로 작정하고 춘심이에게 술을 계 속 따라주었다. 그러다가 춘심이가 술 마시는 모양이 귀여 워 빙긋이 웃었더니 그녀는 "웃긴 왜 웃어? 울어도 시워찮 은데, 웃긴 왜 웃어?"라고 소리지른 뒤 훌쩍 훌쩍 울기 시 작했다. 김호장은 낭패감에 사로잡혀 춘심이를 달래기에 바빴다. 그녀는 아무 말없이 계속 울어댔다. 그러나 대성통곡이 아 니라 잔잔한 울음이었다. 김호장은 화도 낼 수 없어 담배만 피워댔다. 춘심이는 술기운에서 조금 깨어난 뒤에야 울음을 그쳤다. 그녀는 눈물을 닦은 뒤 "오빠, 미안해. 난 술 취하면 이래." 라고 말한 뒤 웃었다. 속으로 화가 잔뜩 나 있었던 김호장 은 춘심이가 웃자 비로소 화가 풀렸다. 춘심이는 부끄러움도 많이 탔다. 울음을 그친 뒤에 김호 장이 침대로 올라가며 "이제 자자."라고 말하자 춘심이는 옷을 입은 채로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왔고, 직접 룸 라이 트를 끄고 옷을 벗은 뒤 침대 위로 올라왔다. 김호장은 춘 심이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어 그녀가 침대로 올라오자 마자 덥석 안았다. 김호장은 다음날 아침 호탤에서 나오기 전에 춘심이에게 호주머니에 들어 있던 돈을 전부 주어 버렸다. 그리고 춘심 이와 몇 차례 호텔을 드나들다가 그녀의 노모가 폐결핵에 걸렸기 때문에 바걸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약값에 보태 써 라며 수중에 있던 돈을 전부 주었다. 이렇게 되어 빈털털이가 된 날, 김호장은 이석배에게 다 시 한탕 하자고 제의했다. “돈이 떨어졌다. 한탕 할 곳을 빨리 물색해 보아라.” 이석배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속생각을 털어놓았다. “형님은 자선사업가가 되었소? 나도 춘심이의 처지가 딱 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우선 우리부터 살고 보아야 될게 아 니오?” 김호장은 기분이 껄끄러워 잠자코 있다가 내뱉듯이 말했 다. “어차피 그 돈은 우리 돈이 아니니까 나누어 쓴다고 나 쁠 게 없지. 우리야 한탕 하면 되지만 춘심이가 언제 돈을 벌어 지 에미 병을 고치겠냐? 그건 신경 쓰지 말고 빨리 한탕 할 곳이나 물색해봐. 너 가지고 있는 돈에서 나 좀 꾸 어주고.” 김호장은 엄연히 이석배의 두목이었으므로 이석배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이석배가 노름판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는 동안 김호장은 남대문 시장에서 남포동 시절 단짝 억만이 를 우연히 만났다. 억만이는 머리가 둔해 우직스러웠지만 의리가 강하고 또 힘이 황소만큼 세서 김호장이 가장 좋아했던 친구였다. 원 래 이들은 맞수였는데 영도다리 아래에서 3일간 맞짱을 붙 어도 승부가 나지 않자 악수를 한 뒤 친구가 되었었다. 억만이는 의리가 강했다. 의리가 얼마나 강했냐 하면 김 호장이 소년원에 수감되자 그와 같이 지내기 위해 경찰이 보는 앞에서 지나가는 행인을 때린 녀석이었다. 그러나 김 호장이 부산을 떠난 뒤 억만이도 서울로 왔으므로 서로 소 식을 모르고 지내고 있었다. 억만이는 힘은 그 누구보다 셌 지만 우직했으므로 서울에 온 뒤로는 철공소에 취직하여 밥벌이를 하고 있었다. 하여튼 이들은 남대문시장에서 우연 스럽게 상봉했는데, 억만이는 이날부터 곧바로 김호장의 노 름판털이 조직원이 되었다. 그리고 억만이가 가담함으로써 이들은 더 전문적이고, 구색을 갖춘 노름판털이 조직이 되 었다. 김호장이 억만이를 가담시킨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인천의 태화정 마담 집을 털때 노름꾼 하나가 덤벼든 것은 그들의 위세가 빈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노 름판을 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대가 저항할 수 없도 록 위세가 있어야 되고, 또 조용하게 일을 치러야 되는데 태화정 마담 집에서는 세력이 빈약하게 보여 그렇게 되지 못했었다. 물론 노름꾼들이 다 덤벼든다 해도 김호장 혼자 다 처치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는 것보다 노름꾼들이 겁을 먹고 순순히 응하는 게 더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래서 김호 장은 태화정 마담 집을 턴 뒤에는 사람이 한명 더 필요하 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남대문시장에 모의 권총을 한자루 사러 갔다가 억만이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억만이는 그가 물색하던 동지에 딱 적합한 사내였다. 무엇보다도 억만이는 체격이 우람하고, 인상도 험상궂었으며 또한 힘이 장사였으 므로 김호장에게 꼭 필요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김호장은 다방에서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다가 단도직 입적으로 그를 끌어 들였다. “너 시시하게 철공소 일하지 말고 나와 손잡자. 벌이가 괜찮은 일이 있으니까.” 억만이는 그게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고 쾌히 응했다. “니가 하는 일이면 뭐든지 다 하겠다. 예전엔 너 따라 소 년원까지 갔었지.” “맞아. 넌 의리가 강했지. 이번 일은 좀 위험스럽지만 나 만 믿어봐. 실수는 없을 테니까.” “맞아. 넌 예전에도 머리가 좋았어.” “하여튼 이렇게 만나게 됐으니 반갑다. 정말 보고 싶었 다.” “맞아. 나도 보고 싶었어.” 김호장은 억만이의 동의를 얻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석배의 영리함과 억만이의 힘이 결합되면 꽤 근사한 조 직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억만이의 가담 이후 그들은 더 전문적이고 더 능 숙한 도박장 털이꾼이 되었다. 김호장은 거추장스럽게 몽둥 이를 들고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호주머니에 잭 나이프만 넣고 다녔고, 이석배는 모 의권총을 들었다. 그러나 노름꾼들은 이들이 가진 무기보다 억만이의 우람한 체구에 더 압도당했다. 만약 그들이 복면 을 하지 않았다면 노름꾼들은 억만이의 험상궂은 인상만 보아도 질려버렸을 것이다. 이석배는 호텔과 깨끗한 여관에 일부러 투숙하여 종업원 들을 매수해 놓았다. 말하자면 호텔과 여관 종업원들이 그 들의 정보원이 된 것이다. 서울에서 억만이와 함께 최초로 일을 치른 것도 호텔 종 업원으로부터 얻은 정보 덕이었다. 당시 아리랑호텔은 서울에서 고급으로 손꼽히는 호텔이 었는데, 이 호텔에서는 서울 토박이 한량들이 모여 섯다판 을 벌이는 일이 많았다. 이 얘기를 얻어 듣고 이석배는 호 텔에 투숙한 뒤 룸보이를 매수했다. 그는 조심성이 많았으 므로 룸 보이에게 냉큼 말을 꺼내지 않고 차근차근 접근했 다. 첫날엔 팁을 두둑이 주었고, 그 다음엔 더 많은 팁을 던 져주고 밖에서 한 번 만나자고 제의했다. 룸 보이는 이석배 가 나타나면 돈이 생겼으므로 쾌히 응했고, 나이가 같은 또 래였으므로 쉽게 어울렸다. 이석배는 룸 보이가 밖에 나온 날 술을 산 뒤 용돈으로 쓰라고 돈 봉투하나를 그의 호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그리 고 며칠 있다가 다시 호텔에 투숙하여 룸 보이를 불렀다. 룸 보이는 월급보다 많은 돈을 받은 일이 있었으므로 이석 배에게 굽신거렸다. 이석배는 룸 보이에게 한가한 시간에 그들 아지트 다방 으로 놀러오라고 말하고 장난기 어린 윙크를 했다. 룸 보이 는 또 돈이 생길 것 같자 입이 벌어졌다. 이석배는 이 표정 을 보고 더이상 끌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고, 룸 보이가 다시 찾아오자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털어놓았다. “그 호텔에서 가끔 섯다판이 벌어진다는데?” 룸 보이는 아는 사실을 곧장 말했다. “그러믄요. 가끔이 아니라 자주 벌어지지요.” “주로 어떤 사람들이야?” “돈이 많은 사람들 같아요.” “판이 큰가?” “그건 잘 모르지요. 노름할 땐 못들어오게 하니깐요.” 이석배는 여기에서 돈 뭉치를 꺼내 룸보이에게 던졌다. “난 기관원은 아냐. 그 노름판에 끼고 싶어서 그러는데 나에게 알려줄 수 없어?” 룸 보이는 돈 뭉치와 이석배를 번갈아 쳐다보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석배는 이때 미끼를 던졌다. “그걸 정확하게 알려주면 이 돈보다 더 많은 돈이 자네 에게 돌아가. 어때? 할만 하잖아?” 룸 보이는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처지에 서는 돈을 마다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김호장은 억만이를 끌어들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날마 다 황금마차에서 노닥거리며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 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을 때 드디어 전화가 왔다. 룸 보이는 이석배에게 전화로 “308호실에서 지금 시작 했습니다.”라고 간략하게 제보했다. 김호장 일행은 이 전화를 받고 즉시 아리랑호텔 307호실 에 투숙했다. 호텔 층계에서 이석배는 룸 보이와 마주쳤으 나 서로 모르는 척했다. 그들은 밤10시를 행동 개시 시간으로 정했다. 노름꾼들은 도어 록을 잠그고 섯다판을 벌일 것이므로 문을 따는 일은 이석배가 맡았다. 밤10시가 되자 그들은 307호실에서 나와 308호실 앞에 섰다. 김호장과 억만이는 복면 두건을 꺼내 썼고, 이석배는 핀을 열쇠 구멍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는 핀을 집어넣 고 한번 손을 움직인 뒤 문을 확 열어 젖혔다. 그순간, 억 만이와 김호장이 룸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섯다에 몰두하고 있던 노름꾼들은 이 느닷없는 기습에 놀라 입을 쩍 벌리고 그들을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노름꾼들을 향해 잭 나이프를 든 김호장이 일갈했다. “모두 일어서서 두손을 들고 저쪽 벽에 붙어 서라! 이쪽 은 보지 말고 얼굴을 벽에 대고 서야 돼. 만일 움직이면 숨 통을 끊어버릴테니까!” 김호장의 음성이 무겁고 날카로왔으므로 그들은 겁에 질 린채 슬금슬금 일어서서 지시에 따랐다. 그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나이는 마흔전후였다. 그들이 벽에 붙어서자 분담된 역할이 시작됐다. 이석배는 먼저 판돈을 가방에 쓸어 넣은 뒤 그들의 호주머니를 뒤지 기 시작했고, 억만이는 노끈으로 그들을 엮기 시작했다. 억 만이는 처음 해보는 일이라 좀 서툴렀다. 그는 노끈으로 묶 다가 잘 안되면 발로 상대를 걷어차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 런데 맨 나중 녀석을 묶다가 억만이가 “이 녀석은 어디서 많이 본 녀석인데, 어디서 봤을까?”하고 중얼거렸다. 김호 장도 처음부터 그 사내가 안면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는 데 억만이의 말을 듣자 비로소 생각이 났다. 그 사내는 유 명한 배우 김 ××이었던 것이다. 김호장은 기억이 되살아 나자 억만이에게 “그 자식은 배우 김 ××이다. 내가 좋아 했던 녀석이지.”라고 말했는데, 억만이는 이때서야 “맞아! 이 자식은 배우야. 어디서 많이 봤다고 생각했었지.”라고 말하고서는 그 배우의 코를 잡아 비틀었다. 그리고는 배우 에게 “너 돈 많이 벌었다는 소문이 있더니 노름을 하는구 나. 아서, 앞으로 하지마. 노름으로 패가망신했다는 말 못 들었냐.”라고 말하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억만이가 그들을 다 묶고 난 뒤 그들은 담배 한대씩을 피우고 소리없이 룸에서 빠져나갔다. 어쨌든 김호장 일당은 10여개월 동안 근 20회 가까이 노 름판을 털었지만 신고된 것은 한건도 없었다. 그들은 노름 판에서 턴 돈으로 유흥가를 누볐고, 바걸들은 그들을 장안 최고의 멋쟁이들이라고 평가했다. 이 무렵 황금마차의 춘심이는 김호장이 대준 돈으로 명 동에 조그마한 옷가게를 열고 바걸 생활을 청산했다. 옷가 게를 연 뒤부터 춘심이는 김호장에게 같이 살자고 졸라댔 지만, 그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허 허, 하고 웃어 넘겼다. 살벌했던 세상이 조금 느슨해졌지만 그는 아직도 수배자였 고, 또 돈버는 일이 강도짓이었으므로 아무하고나 동거할 수 없는 처지였었다. 이석배는 김호장에게 숨어 사는 처지에서 한 계집에게 정을 너무 깊이 주지 말라고 말끝마다 충고했고, 김호장도 그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춘심이가 옷가게를 개업한 뒤부 터는 차츰차츰 멀리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해 도 남녀란 살을 자주 섞다 보면 정분이 깊어지는 것이어서 김호장도 그런 이유 때문에 춘심이를 쉽게 버리지 못했다. 김호장은 무료하다든지 여체가 그리워지면 춘심이를 여관 으로 불러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춘심이는 기다렸다는듯 이 뛰어와 그의 품에 안겼다. 이런 일이 되풀이 된 끝에 김호장은 드디어 춘심이와 헤 어지기로 결심했다. 춘심이에게 연락하지 않으면 그 자체가 곧 이별이었지만, 그는 춘심이 문제를 그렇게 매듭짓고 싶 지 않았다. 김호장은 춘심이를 만날 때는 언제나 여관으로 직접 불 러냈지만, 헤어지기로 결심한 날은 무교동 어느 다방으로 나오도록 했다. 다방에 나타난 춘심이는 의아한 표정부터 지었다. 춘심이 는 의자에 앉자마자 “오빠, 웬 일이우? 다방에서 만나 뭐 하시려고…”라며 눈을 곱게 흘겼다. 김호장은 퉁명스럽게 “우리 인천 송도나 놀러 가서 싱싱한 생선회나 배가 터지 도록 먹어보자.”라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춘심이는 “정말?”하며 놀란 표정을 지으며 따라 일어섰다. 김호장은 송도에서 약속대로 춘심이에게 생선회를 푸짐 하게 사주었다. 춘심이는 “아이 맛있어!”하며 매우 맛있 게 먹었고, 김호장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며 문득 춘심 이에게서 애틋한 감정을 느꼈다. 그들은 식당에서 나와 바닷가를 거닐었다. 춘심이는 아무 눈치도 못채고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김호장은 평소보다 더 과묵해졌다. 김호장은 수평선을 바라보기 좋은 장소를 골라 자신이 먼저 앉으며 춘심이에게도 앉도록 했다. 춘심이는 그의 곁 에 바짝 붙어 앉았다. 김호장은 잠시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춘심이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춘심아, 오늘 이후는 너를 볼 수 없을 것 같다. 이유는 묻지 말아. 그런 사정이 생겼다.” 춘심이는 그 말에 별로 놀라워 하지 않았다. 김호장에게 같이 살자고 졸라댔지만 반응이 없었으므로 춘심이는 그가 언젠가 자신의 곁을 떠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춘심이는 말없이 수평선을 바라보기만 했다. 김호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싫어서 떠나는 건 아니니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 아라. 너는 착해서 좋은 남자를 만나 잘 살게 될 것이다.” 춘심이는 그 말에도 묵묵히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빠는 제 은인이에요. 오빠 뜻에 따르겠어요. 저는 오 빠를 잊지 못할 거예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춘심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 기 시작했다. 김호장은 춘심이의 등을 가볍게 어루만지다가 춘심이가 울음을 그치자 “이제 서울로 돌아가자.”며 자리 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졌다. 김호장은 인천에 서 일이 있다며 춘심이를 먼저 버스에 태웠다. 김호장은 버 스가 출발할때 춘심이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것을 보 았다. 그 일이 있은 직후 부산 가닥지 황종태가 서울로 김호장 을 찾아왔다. 황종태는 장정 대여섯 명이 덤벼들어도 발만 가지고 번개처럼 모두 처치해버리는 발 쓰는 기술의 천재 였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김호장은 그동안 서울에서 하승일을 몇 차례 만났었다. 그들 사이는 숨기는 게 없었고, 또 그는 하승일 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청학동에서 탈출한 이후에 겪 었던 일을 하승일에게 다 애기 해주었다. 하승일이 그의 행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승일은 그 비밀을 부산 가닥지인 황종태에게 털 어놓고 말았다. 그 이유는 황종태가 평소 김호장을 매우 좋 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무슨 이유인지 그가 오래 전 부터 김호장을 간절하게 찾고 있었기 때문에 김호장에 대 한 얘기를 해주고 만 것이다. 물론 둘이서만 술마시는 자리 에서 그 얘기가 나왔다. 황종태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눈빛 이 빛났고, 바로 다음날 김호장을 만나기 위해 서울행 기 차를 탄 것이다. 제6장 고독한 청년과 연상 연인 발쓰는 기술이 주특기인 황종태는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그의 싸움기술과 성격 그리고 폭력배가 된 배경이나 주먹 세계에서 명성을 얻은 이후의 행태 등은 여느 폭력배와는 별다른 데가 많다. 황종태는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이전부터 동네 애들과 별 로 어울리지 않았다. 애들이 골목에 모여 놀고 있어도 황종 태는 나가지 않고 방안에서 혼자 놀았는데, 외로움을 안고 태어났다고 해석될 수 있는 그러한 성격은 성장하면서 더 욱 굳어졌다. 삯바느질로 황종태를 키운 그의 모친은 아들의 성격이 그렇게 된 것은 가정환경 탓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매우 안 타까워했다. 황종태는 그의 부친 모습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어렸 을 때를 회상하면 부친이 집에 별로 없었다는 사실 이외에 는 기억나는 게 없었다. 그의 부친은 장기 출타가 잦았는 데, 어느날 이후 부터는 집에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바람 처럼 홀연히, 그것도 황종태가 잠이 든 이후인 야밤에 집에 왔다가 하루 이틀 집에 묵은 뒤 또 바람처럼 사라졌었다. 그럴 때도 그는 부친이 집에 언제 돌아왔고 언제 떠났는지 를 알 수 없었다. 황종태는 6·25가 터진 직후에 집에 찾아온 삼촌으로부 터 그의 부친이 월북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이 얘기를 듣기 이전에 눈치가 빠른 황종태는 부친 신상에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학교에 서 돌아왔을 때 가금 경찰서에서 온 것 같은 사람들이 그 의 모친을 다그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 그 의 모친은 대단히 당황해 했다. 그런데 6·25가 터져 세상이 온통 난리 법석인데도 그의 모친은 오히려 차분해지면서 뭔가 기다리는 듯한 태도였다. 이 무렵 그의 삼촌이 집으로 찾아와 그를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학교 교정으로 데리고 갔다. 삼촌은 등나무 그늘 밑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그에게도 앉도록 했다. 그리고 그 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종태야, 니 아부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재?”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그의 삼촌은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니 어무니가 말안한 줄 알고 있다. 니 아부지는 아마 이 북에 있을 끼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내가 한 얘긴 아무한테도 해선 안된데이” 황종태는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가슴이 설레이는 듯한 기 분에 사로잡혔다. <아부지가 살아 있구나. 그라믄 다시 만날 수 있는 긴 가> 그 얘기를 끝으로 그의 삼촌은 말없이 하늘만 쳐다보았 다. 황종태도 삼촌처럼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매미 울음소 리가 귀에 더욱 크게 울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삼촌은 자리 에서 일어서기 전에 그에게 부친 얘기에 대해 절대 입을 다물어라고 말하곤 그의 손을 잡고 교정에서 나왔다. 교문 앞에서 헤어지기 전에 삼촌은 근엄한 표정까지 지으며 또 "아까 내가 한 애긴 절대로 누구한테 하지마래이."라고 말 했다. 소년 황종태는 집에 돌아올 때 가슴이 벅찬 느낌도 받았 고, 웬지 두려워지기도 했다. 황종태는 그날 이후 전쟁의 난리법석속에서도 차분하고 도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듯한 모친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무니는 아부지를 기다리고 있다. 인민군들이 부산까 지 쳐들어오면 아부지가 집에 오는 모양이다> 그러나 얼마 안지나 인민군은 패퇴해버렸고, 부산은 피난 민들로 더욱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의 모친은 뭔가 기다리 는 듯한 태도에서 곧바로 침통하고도 낙담해 하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황종태는 국민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수재 말을 들었다.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모친은 공부 잘하는 아들에게 칭찬 한마디 없었다. 6학년 때 그는 모친에게 그 1등 성적표를 내밀지도 않았다. 그런데 휴전 황종태가 부산의 명문 B중학교에 합격했을 때 그의 모친은 별로 기뻐하지 않고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 얼거렸다. “공부 잘하믄 뭐하노? 출세길이 막혔는기라” 황종태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직 후 합격소식을 듣고 집에 찾아온 삼촌이 그에게 이렇게 말 했을 때 그는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종태야, 내 말 잘 들으래이. 중학교 합격을 정말 축하한 다. 나는 니가 자랑스럽다. 그러나 넌 앞으로 기술을 배워 야 한다. 기술만 있으면 어떤 세상이 와도 살 수 있는 기 라. 중학교 졸업하믄 공업학교나 상업학교에 가거래이. 디 시 말하지만 나는 니가 자랑스럽다. 니 아부지도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는 기라. 그러나 영웅은 때를 만나야 하는데 니 아부지도 너도 때를 못 만난기라. …니가 아깝다만 할 수 없는 기라. 이제부턴 기술배울 생각만 하거래이” 황종태의 부친은 일제때부터 남로당 비밀 당원이었다. 집 을 장기간 비우는 출타가 잦았던 것은 그 활동 때문이었다. 바람처럼 집에 나타났다가 하루 이틀 머문 뒤 연기처럼 사 라졌으니 황종태는 부친 모습을 잘 기억해낼 수 없었던 것 이다. 황종태 부친은 해방 이듬해 말에 이북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소식이 끊겼다. 국민학교 때 수재 말을 들었던 황종태는 중학교에 입학 한 후부터 공부와 담을 쌓았다. 그리고 그의 성격에서 반항 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무에게나 잘 대들어 몹시 두들겨 맞기도 했다. 그러다가 중학교 1학년 말쯤에 거칠게 학생을 다루기로 유명했던 담임선생에게 호되게 구 타당한 일이 있었는데 이 사건이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았다. 황종태는 담임선생에게 매를 맞으면서 이렇게 결심했다. “선생이 나를 패는 것은 월사금을 제때에 낸 일이 없었 기 때문인기라. 두고 보자. 복수하고 말끼다!” 사실 그 복수심은 얼토당토 않은 것이었지만, 그 무렵 이 후부터는 그러한 복수심이 바로 황종태가 살아나가는 데에 있어서 활력소 역할을 했다. 담임선생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황종태는 당수를 배우 기 시작했다. 공부는 팽개쳤기 때문에 그는 오로지 운동에 만 정열을 쏟았다. 황종태는 당수를 배우면서 발의 파괴력이 주먹보다 월등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주먹 크기나 힘이 남보다는 뒤떨어진다는 것도 알게 되어 그는 주로 발 쓰는 기술 연마에 주력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쯤부터 황종태의 발쓰는 기술은 상 당한 수준에 올랐다. 몸이 날렵했으므로 황종태는 발을 마 치 손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알게 되었다. 그의 재빠른 발길질은 상대방의 면상을 정확하게 가격했으므로 발길질 한방에 벌렁 넘어지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황종태는 삼촌 뜻에 따라 B공업고등학 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그의 발쓰는 기술에 대 한 소문은 부산의 고등학생들 중 주먹깨나 쓰는 녀석들에 게 점차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이라는 것은 원래 퍼져나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 는 것이다. 황종태에 대한 소문도 그랬다. “○○공고에 발 잘쓰는 놈이 한 놈 있다카는데 그 발에 한 방 얻어맞으면 누구나 케오당한다더라”라는 소문이 퍼 진 뒤 곧바로 이런 말도 떠돌았다. “황종태라카는 놈은 발로 턱만 골라 찬다는데 그 발길질 에 맞으면 기절 안 하는 놈이 없단다. 그 발길질에 뒤로 벌 렁 넘어져 입에 거품 뿜으며 기절 한 놈이 한두명이 아니 란다” “황종태가 세 명을 상대했다카는데 세명 다 한방씩 걷어 차인 뒤 뻗어버렸단다” 이 소문들은 헛소문이 아니었다. 황종태 이웃학교 주먹패 세명이 그 소문을 확인하려고 도전했다가 비호처럼 날랜 황종태의 발길질에 얻어맞고 뻗어버렸다. 황종태의 발쓰는 기술은 당수의 원리를 이용해 그 자신 이 독특하게 개발해낸 것이었다. 주먹이란 얼굴 정면에서 날아오는 것이지만 발은 밑에서 위로 올라오기 때문에 황 종태가 상대의 턱을 향해 발을 뻗어차면 대개가 막아내지 못하고 당했다. 그리고 두명이 앞뒤에서 공격해 올때도 그 는 몸놀림이 빨라 앞엣 놈을 처치한 뒤 곧바로 뒤엣 놈까 지 발로 걷어차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나이를 먹 을수록 그의 키는 늘씬해졌고, 다리 길이도 같은 키를 가진 다른 사람보다 길었다. 아무튼 그가 장성한 뒤 발을 사용하 여 상대를 제압할 때의 모습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 면처럼 멋이 있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특이한 점은 황종태는 천성이 고독 을 즐기는 스타일이어서 폭력서클의 두목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부하를 두려고도 하지 않았고 남의 밑에 들어 가지도 않았다. 하늘을 외롭게 날아다니는 독수리처럼 그는 언제나 외톨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 부산의 폭력조직들이 황종태를 스 카우트하려고 손을 뻗쳤지만 그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난 싫소!” 황종태가 굳은 표정으로 그렇게 내뱉으면 어느 조직도 더 이상 말을 못붙였다. 부산 폭력조직들은 황종태의 향방 에 촉각을 곤두세웠으나 그의 성격이 외톨이이기를 좋아해 서 어느 조직에도 가담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 이후 부터는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스스로 외톨이의 길을 걷고 있었던 황종태는 남포동 칠 성파와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칠성파 두목 이덕구는 사람 됨됨이가 호탕하고 사교술이 좋아 황종태에게 거부감 을 주지 않았다. 훗날 경찰 리스트에 황종태는 칠성파 일원으로 올라 있 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그는 칠성파와 우호적 관계를 맺 고 있었을 뿐이었지 그 조직원은 아니었다. 황종태가 칠성파와 지속적인 우호관계를 맺게 된 배경에 는 김호장의 존재가 주요 역할을 했다. 칠성파 두목 이덕구도 김호장의 남포동 시절에 한패였다. 이덕구가 세살 아래였으므로 서로 장성한 후에는 김호장이 ‘형님’이 되었다. 이덕구는 김호장이 부산에 나타나면 깍 듯이 모셨는데, 황종태를 김호장에게 소개시킨 사람은 바로 이덕구였다. 김호장이 부산에 놀러왔을 때 이덕구는 무심코 황종태 애 기를 이렇게 꺼냈었다. “형님 부산 바닥에 희한한 녀석이 한 놈 나타났는기라예. 발을 귀신처럼 쓰는 놈인데, 말도 없고 어느 패에도 끼어들 려하지 않는기라. 형님이 한 번 만나 보이소. 알아두면 쓸 모가 있을끼요” 김호장은 그 말에 즉시 호기심을 나타냈다. “발을 잘 써? 발 잘쓰는 놈은 무서운데. 한번 만나게 해 줄 수 있겠냐?” 이렇게 되어 바로 그날 밤에 김호장은 황종태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술자리는 이덕구가 주선했는데, 황종태도 김 호장의 명성을 알고 있었으므로 별다른 거부감 없이 응했 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란 묘한 것이어서 외톨이 황 종태가 술이 몇잔 돌고 난뒤 대뜸 이렇게 제안했다. “호장이 형님! 건방지다고 말씀 마시고 지 청을 들어 주 이소. 형님이 마음에 딱 듭니더. 앞으로 이 황종태를 동생 처럼 아껴주시면 평생 형님으로 모시겠십니더” 황종태의 제안에 이덕구가 더 놀라워했다. 이덕구는 김호 장의 반응과 황종태의 표정을 번갈아 살피고 있었는데, 황종태가 김호장 앞에 무릎을 꿇 고 다시 말했다. “전 외로운 놈입니더. 제가 왜 외로운지는 차츰 말씸 드 리겠십니더만 우선 지를 동생으로 받아들여 주이소” 탁월한 두목인 김호장은 능란하게 황종태를 대했다. “외롭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 우리 외로운 사람끼리 잘 지내보자!” 김호장은 이렇게 간략하게 말한 뒤 황종태에게 술잔을 권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이덕구는 ‘영웅은 영웅 을 알아본다 카던데 황종태도 호장이 형을 바로 알아보는 구나!’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덕구는 그 뜻있는 자리를 빛나게 하기 위해 그들을 해 운대 관광호텔 나이트클럽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술자리가 끝난 직후에 김호장은 황종태의 발쓰는 기술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그들이 취해서 나이트클럽에서 나오려고 했을 때 술마시 러 온 한패거리와 시비가 붙었다. 그들은 사복을 입었지만 특수부대 요원들인지 대단히 건방지게 놀았다. 처음엔 사소 한 시비였으나 황종태가 “이 새끼들 죽고 싶어 환장했나! ”라고 고함지르자 그들은 단번에 열을 받고 그에게 달려 들었다. 황종태는 여유만만하게 그들을 나이트클럽 밖으로 유인했다. 김호장은 얼핏 그들이 다섯명 정도라고 생각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러나 게임은 싱겁게 끝났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황종태 의 오른 발이 쭉 뻗어 올랐고, 그 발길질은 정확하게 맨앞 에 서 있는 자의 턱을 강타했다. 그 일격을 맞은 자는 뒤로 벌렁 넘어졌다. 실로 전광석화처럼 빠른 동작이었다. 그리 고 나머지 군인들이 덤벼들기도 전에 황종태의 발놀림은 연속 동작으로 이어졌다. 왼쪽 발이 뻗어오르며 그의 오른 쪽에 서 있는 자의 면상을 강타했고, 왼 발이 땅에 내려온 순간 또 오른 발이 뻗어올랐다. 그의 몸놀림은 지극히 유연 했고, 발놀림은 번개 같았다. 좌우지간 그에게 덤벼들었던 여섯명 모두 순식간에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중엔 혼절한 자들도 잇었다. 실로 눈 깜짝 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전광석화처럼 재빠른 솜씨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김호장은 입을 쩍 벌리며 감탄 했다. 그러나 사태가 심각한 것을 깨닫고 이덕구에게 “빨 리 피하자! 종태는 내가 책임지마!”라고 외친, 날랜 동작으 로 황종태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종태야 튀자. 저 녀석들은 군인들이다. 귀찮은 일이 생 길지 모르니 빨리 피하자!” 황종태는 김호장의 말에 순순히 응했다. 그들 세명은 재빠 른 동작으로 그 자리를 떠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김호장 은 안전할만한 곳까지 황종태와 함께 달려가며 속으로 “ 이 녀석은 정말 대단한 놈이다! 발놀림이 그렇게 부드럽고 힘이 있는 건 처음 보았다. 발 쓰는 기술로는 대한민국에서 최고가 분명하다!”고 감탄했다. 그들은 현장을 멀리 벗어난 뒤 택시를 타고 시내로 돌아 왔다. 택시 속에서 김호장이 황종태에게 "아까 참 멋 있었 어. 발 솜씨 정말 좋더라."라고 칭찬하자 황종태는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부끄러워했다. 그 첫 해후 이후부터 김호장은 황종태를 각별하게 아꼈 다. 김호장은 부산에 가게되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황 종태를 반드시 만나고 돌아왔다. 황종태도 김호장을 대단히 좋아했다. 성장할 때까지 아무 에게서도 사랑을 받지 못했던 황종태는 김호장에게서 형제 애를 느끼면서 그 자신의 굳게 잠겨 있었던 마음의 창을 김호장에게는 활짝 열었던 것이다. 경찰 리스트에 칠성파 조직원으로 올라 있었던 황종태는 그의 독특한 여성취향 때문에 5·16의 깡패소탕작전 때 위 기를 모면했다. 그는 5·16직전에 알게된 여자와 부산을 떠 나 서울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후리가리에 걸 려들지 않았던 것이다. 황종태는 사춘기 때 성문제에 있어서는 일종의 결벽증을 가졌었다. 순수를 지향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 나이 때 흔히 버릇이 되기 쉬운 수음도 하지 않아 몽정을 하기 일 쑤였다. 운동으로 단련된 건강한 신체는 무의식 속에서 이 성을 갈구했지만 그는 잘 참아냈다. 황종태는 중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공부와 담을 쌓았지만, 책을 가까이 하는 버릇은 버리지 않았다. 천성이 외로운 사 내여서 운동하는 시간이 끝나면 혼자 공상을 한다든지 책 을 읽었다. 그의 독서란 고작 소설류를 읽는 것이었지만, 무술을 익히는 자가 독서취미를 가졌다는 것도 특이한 일 일 것이다. 황종태는 줄곧 독서를 했으므로 상상력이 풍부했다. 말이 없고, 남과 별로 어울리려하지 않는 청소년이 소설을 많이 읽었다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황종태도 꿈속에 그리 는 여자가 있었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 시기에 그 는 관능적인 여자보다 청순한 여성을 더 좋아했다. 그런데, 일종의 결벽증을 가졌던 황종태는 이덕구의 꼬임 에 빠져 사창가에서 동정을 잃었는데, 이때의 일도 그의 성 격이 잘 드러난다. 그날, 황종태는 술에 만취 상태였으므로 어떻게 해서 사 창가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날 밤 그는 동정을 잃었고, 난생 처음 여체 를 안아보았다는 사실이다. 황종태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여자가 발가벗은채 로 옆에서 자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않았다. 그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우째 된 일인고? 이 여자는 뭐꼬?” 그는 자고 있는 여자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여자는 밉상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대단히 추한 인상이었다. 이불이 걷혀 있어서 여자의 아랫도리가 드러나 있었는데, 황종태는 그 순간 왈칵 역겨움을 느꼈다. 황종태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는 데, 창녀가 눈을 떴다. 창녀는 반말을 사용했다. “애송이, 잘 잤나?” 황종태는 여자를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창녀는 황종태 쪽 으로 돌아 누우며 “니 숫총각이라고 떠들어댄 것 기억나 나? 그게 정말이가?”하며 비웃듯 웃었다. 황종태는 비로소 사태를 깨닫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갈보하고 잤구나! 우째 된 일인고? 내가 갈보하고 한 게 확실하재?> 이때 창녀가 다시 말했다. “옆방에 어젯밤 너하고 같이 온 사람 있다. 니도 칠성파 가?” 황종태는 그 말에 비로소 간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순간 그는 화가 치밀어 올라 뒤로 벌렁 누어 씩씩거렸다. 그는 이덕구에게 화를 낸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 대한 혐 오감 때문에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화를 삭이며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아무리 취했다 케도 어젯밤엔 미쳤는기라. 이 꼴이 뭐꼬!” 황종태는 눈을 감았다. 이때 창녀가 손으로 그의 사타구 니를 더듬으며 놀림조로 “애송아, 너 정말 숫총각이었나? ”하고 말했는데, 황종태는 그 말을 듣고 화를 더 이상 참 지 못했다. 그는 창녀의 손을 뿌리치며 벌떡 일어나 옷을 걸치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가 구두를 신을 때 옆방 문이 열리며 이덕구가 모습을 나타냈다. “벌써 갈라고 그라나?” 황종태는 그말에 퉁명스럽게 “지 먼저 갑니데이”하며 이덕구 쪽을 쳐다보았다. 이덕구는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 었고, 그 옆에는 발가벗은 창녀가 손으로 턱을 받치고 엎드 린채로 황종태를 쳐다보고 있었다. 창녀는 엉덩이를 약간 들썩거리며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황종태는 얼른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지 먼저 갑니데이!”하고 대 문을 잽싸게 빠져 나왔다. 황종태는 그 일로 이덕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는 창녀집에는 두번다시 안간다는 결심을 굳게 했다. 그후 황종태는 이덕구의 소개로 해운대 P호텔 나이트클 럽 뒤를 봐주게 됐다. 말하자면 폭력세계에 데뷔한 것이다. 발을 귀신처럼 놀리는 황종태가 그 나이트클럽 뒤를 봐 주면서 귀찮게 구는 건달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그는 사장 으로부터 매달 사례를 받았다. 그래서 용돈도 풍족해졌고, 멋진 신사복을 입었으므로 황종태의 모습은 이전과는 완전 히 달라졌다. 황종태가 얼핏 보기에도 멋있는 청년 모습으로 바뀐 뒤 그의 주변에는 즉시 여자들이 맴돌기 시작했다. 특히 나이 트클럽 댄서들이 그에게 군침을 흘렸다. 환락가의 세계에서 는 돈과 권력 아니면 폭력이 최고 가치였으므로 황종태는 어느날 갑자기 그 세계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황종태는 시비 걸어오는 패들과 몇차례 대결을 벌였었다. 한번은 나이트클럽 실내에서 세 명을 단숨에 꺾었고, 서너번은 나이트클럽 밖에서 일을 벌 였다. 결과는 언제나 황종태의 승리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 았던 댄서들은 모두 감탄했다. 그리고 그뒤 은근히 추파를 보냈다. 사창가에서 동정을 잃은 뒤에 여자와 자본 일이 없었던 황종태는 그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던 서울 출신의 한 댄서 의 유혹에 넘어갔다. 황종태에게 접근할 기회를 노리던 그 댄서는 어느날 나 이트클럽 일이 끝날 쯤부터 은근한 추파를 던지며 세련된 서울 말씨로 “오늘 더 멋있어요. 우리 집에 놀러가서 한잔 해요”하며 황종태에게 매달렸다. 황종태는 난생 처음 대하 는 서울 아가씨의 매력에 끌려 못이긴 척하며 따라 나섰다. 그날밤, 황종태는 관능에 눈이 떴다. 벌거벗은 여자의 나 체에서 느끼는 강렬한 충동과 교접의 황홀함이 그의 넋을 사로잡기 시작한 것이다. 황종태는 거의 날마다 그 댄서 집 에 갔다. 그러나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철새처 럼 떠돌아다니는 그 댄서가 서너달후 훌쩍 어디론가 사라 져버렸기 때문이다. 황종태는 그 댄서가 떠난뒤 한동안 허전함을 달랠 수 없 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는 나이트클럽에는 바람난 여자들 이 득실거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사실을 안 이후 바로 춤을 배웠다. 외로운 독수리가 먹이 사냥을 위해 하늘을 날기 시작한 것이다. 황종태의 춤은 맵시가 있었다. 키가 늘씬했고 그의 신체 는 운동으로 단련됐으므로 폼이 좋았다. 그래서 그가 춤을 추기 시작하면 곧바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특히 바람 끼 있는 여자들은 황종태가 춤을 추기 시작하면 황홀한 눈 으로 쳐다보았고, 그와 춤을 추게 되면 사족을 못 쓸 정도 로 반해버렸다. 황종태의 여자 사냥은 은밀했으므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 했다. 그는 자신이 뒤를 봐주고 있던 나이트클럽에서는 한 번도 춤을 추지 않았고, 김호장이 부산에 나타나도 여자 얘 기는 한마디도 안했다. 그리고 그는 여자 보는 안목이 까다 로워 아무 여자나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뚱뚱한 여자들은 쳐다보지도 안했고, 뭔가 여유가 없는 여자들에게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싱싱하고 여유만만한 여자를 발견하면, 하 늘을 날던 독수리가 먹이를 향해 쏜살같이 내려오듯 그는 춤을 무기로 접근했다. 그리고 그 접근은 어김없이 성공했 다. 그와 춤을 추게 되면 대개의 여자들은 “총각, 춤 참 잘춘데이. 오늘 시간있나?”하며 먼저 유혹해왔다. 황종태 는 그때부터는 피동적으로 움직였다. “시간 많십니더”라 고 대답하면 모든 문제를 여자들이 다 해결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앞장 서서 그를 호탤이나 여관으로 끌고 갔고, 비 용도 여자들이 다 댔다. 그리고 여자들이 먼저 그를 유혹했 으므로 룸에서도 여자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옷도 여자들 이 먼저 벗었고, 애무도 여자들이 먼저 시작했다. 그는 여 자들이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슬며 시 그녀들을 눕힌 뒤 배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가 동작 을 개시하면 대개의 여자들은 곧바로 그를 와락 껴안으며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질러댔다. 황종태는 갓 스무살이었으므로 그가 상대하는 여자들은 거의가 그의 연상이었다. 그래서 얼핏 보면 그는 욕정에 굶 주린 여자들의 성 노리개처럼 보였으나 그 자신만은 한번 도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스 스로의 취향에 맞는 여자를 선택했고, 또한 여자 사냥이 그의 유일한 취미였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날 황종태는 나이클럽에서 마땅한 상대를 찾지 못해 알고 지내던 댄서와 춤을 추고 있었는데, 춤이 끝나자마자 웨이터가 그에게 와서 눈짓으로 한 테이블을 가리키며 "저 쪽 사모님들이 오시랍니더."라고 말했다. 웨이터가 가리킨 쪽은 세명의 중년 부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이었다. 그는 나이트클럽에 도착하여 홀 안을 둘러보았을 때 이미 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들도 보았 었다. 그들은 모두 사십대 중년 부인들이었는데, 행세께나 하는 마나님 같은 인상들이었다. 그 중 두 명은 미모도 없 었고, 뚱뚱했지만 한 명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젊은 시절 에 미인이라는 평판을 들었음직한 그 여자는 귀부인다운 기품도 있었고 살도 알맞게 쩌 있었다. 그러나 그 여자들은 모두 사십대였으므로 황종태의 관심을 끌지 못했었다. 웨이터의 전갈을 받고 황종태는 약간 망서렸으나 이내 일어나 그 테이블로 갔다. 부인네들은 그를 반갑게 맞이했 다. 그 중 미모의 부인이 리더인듯 황종태에게 "춤을 너무 잘 추셔서 초대했어예."라고 말하며 자기 옆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황종태는 주저하지 않고 그 부인 옆 자리에 앉았 다. 미모의 부인은 뭔가 탐색하려는 듯 황종태를 자주 쳐다 보았다. 그리고 그가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표정을 지으 며 그에게 술을 권했다. 그후 황종태는 세 명의 부인과 차례로 춤을 추었다. 그는 사실 그 미모의 부인 이외의 여자들과는 춤도 추고 싶지 않았지만 좌석의 분위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춤을 추었다. 그중 한 여자는 똥배까지 나와 황종태와 부루스를 출 때 그 똥배가 황종태의 배를 압박했다. 황종태는 당장에 그 뚱 보를 밀어버리고 싶었지만 그 여자는 기분이 좋아 실실 웃 어댔다. 그 미모의 부인과는 맨 마지막에 추었다. 황종태는 그 여 자와 플로어에 나가자마자 기량을 발휘해 그 여자를 황홀 하게 만들었다. 그 부인의 춤 실력은 뛰어나지 않았으나 황 종태가 능숙하게 이끌자 넋이 빠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탱고가 끝나고 부르스가 시작되자 부인은 황종태 품에 바짝 안겼다. 그리고 선율이 흐름에 따라 그들의 몸은 점점 밀착되어갔다. 황종태는 부인의 얼굴에서 뜨거운 열기 가 뿜어나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몸을 더욱 더 밀착시켰 다. 그는 부인이 침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다는 것을 간 파하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대개 이때쯤이면 룸으로 올 라가든지 아니면 어디 다른 호탤로 가자는 말을 했었다. 황 종태는 부인의 몸을 더 끌어당겼다. 그러자 부인은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총각, 오늘 시간 있나?" 황종태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시간은 많십니더. 와예?" 부인은 황종태 옆구리를 꼬집으며 말했다. "알면서 물어보재? 나 미칠 지경이다. 총각, 보래이. 지금 저쪽 룸으로 올라가는 층계 입구에 가서 쪼매만 기다리고 있거라. 내 곧 갈께" 황종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 친구분들은 우짜고예?" 부인은 생긋 웃으며 "그건 걱정 마라. 우린 다 이해한다. 자, 지금 가 있거래이. 내 곧 갈께"라고 말하며 황종태 품 에서 벗어났다. 황종태는 층계 쪽으로 가서 부인을 기다렸다. 부인은 즉 시 나타났고, 그들은 룸으로 올라갔다. 룸에 들어서자마자 부인은 즉시 옷을 벗어던지고 침대 위로 올라가 벌렁 누웠 다. 황종태도 옷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부인 은 즉시 그를 껴안으며 혀를 그의 입 속에 밀어넣었다. 그 는 그녀의 혀를 힘껏 빨아준 뒤 그녀를 똑바로 눕히고 그 녀 몸 위로 올라갔다. 부인은 오래동안 남자에 굶주린 여자였다. 그녀는 격렬했 고, 욕정이 쉽게 식지 않았다. 황종태는 부인의 요구대로 움직였다. 부인은 절정을 세 번 넘긴 뒤에야 황종태를 놓아 주었다. 그 여자는 일이 끝나자 시계를 들여다본 뒤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황종태도 옷을 입었다. 부인은 옷을 다 입 은 뒤 화장대 앞에서 멀굴을 매만지며 황종태에게 말했다. "총각, 연락처 있나?"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황종태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와예?" 부인은 거울 속으로 황종태를 쳐다보며 말했다. "총각을 또 만나고 싶다." 황종태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므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부인은 핸드백에서 돈 뭉치를 꺼낸 뒤 일어서서 황 종태 앞으로 다가왔다. 이때 황종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부인은 그 표정을 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용돈으로 써." 하며 그 돈을 내밀었다. 그러자 황종태는 "필요 없십니더. 지 먼저 나갑니더."라고 말하며 일어섰다. 그는 민망해 하 는 부인을 놓아두고 먼저 룸에서 나왔다. 이런 점이 황종태의 특성이었다. 그는 그 자신의 모든 욕 구불만을 여색 탐닉으로 발산하고 있었지만 어떤 규범 같 은 것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절대 여자를 속이지 않았고 지저분하게 놀지도 않았다. 그리고 여자는 언제나 그 자신 이 선택했다. 하여튼 황종태가 여색 탐닉에 이골이 나 있을 무렵 5· 16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일 없이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면 황종태도 체포당하지 않을리 없었다. 그런데, 마 치 수호신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보낸듯 5·16 바로 전전 날 황종태는 여자 사냥을 나갔다가 그 자신이 홀딱 반해버 린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손경자로 서른이 갓 넘은 전쟁 미망인 이었다. 남포동에서 꽤 크고 고급스런 양품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손경자도 가끔 남자 사냥을 다니는 여자였다. 황종태는 해운대관광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손경자를 발견 했다. 그는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손경자를 본 순간 전 기에 감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손경자는 키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았으며, 살도 알맞게 쪄 있었다. 그리고 이 목구비가 수려해 어디에 가도 미인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 는 용모였고, 태도는 여유만만했다. 황종태는 손경자를 관 찰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혼자 온 걸 보믄 보통이 아닐 끼라. 좀 두고보자. 우째 노는지 알아야 실패가 없는기라” 황종태는 손경자를 관찰하며 침을 삼켰다. 이윽고 황종태가 먼저 움직였다. 그는 손경자가 앉아 있 는 테이블 앞을 한번 지나치며 그녀를 흘낏 쳐다보았다. 그 때 손경자도 웬 늘씬한 녀석이 나타났으므로 그를 쳐다보 았기 때문에 눈이 마주쳤다. 황종태는 그냥 지나쳤다. 그리 고 몇걸을 걸은 뒤 뒤를 돌아보았는데, 손경자의 눈길은 그 를 쫓고 있었다. 황종태는 손경자가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 는 것을 알고 속으로 “됐다!”고 생각했다. 10 여분후 황 종태는 손경자에게 다가가 춤을 청했고, 그녀도 쾌히 응했 다. 황종태는 춤을 추기 위해 손경자를 안는 순간 관능의 물결이 온 몸에 퍼지는 것을 느꼈다. 손경자의 춤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들의 춤은 플로 어를 압도했다. 한 곡이 끝났을때 그들은 손경자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손경자가 미소를 머금으며 황종태에게 술을 권했다. 황종태는 기꺼이 받아 마셨다. 그 이후부터는 손경자가 황종태를 이끌었다. 그들은 춤을 출수록 서로의 몸이 더 밀착됐고, 손경자의 몸은 뜨겁게 달 아올랐다. 그들은 더 이상 꾸물거릴 필요가 없었으므로 호 텔 룸으로 올라갔다. 룸에 들어서자마자 이미 달아오른 손경자가 황종태를 끌 어안으며 입을 내밀었고, 그녀의 능숙한 키스는 곧바로 황 종태를 흥분시켰다. 이윽고 황종태가 손경자의 옷을 벗기려했을 때, 손경자는 그의 손을 가볍게 막으며 스스로 옷을 벗기 시작했고, 황종 태도 옷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그들은 알몸인채로 다시 껴 안고 키스를 했다. 급해질대로 급해진 황종태는 그녀를 덥석 들어안고 침대 로 갔다. 그리고 곧바로 손경자 몸 위로 올라가려하자 그녀 는 미소를 지으며 은근한 말투로 “서두르지 마. 불부터 꺼 줘”하고 말했다. 황종태는 그 말을 묵살하려다가 불을 끄 기 위해 일어섰다. 황종태가 일어서자 손경자는 달아오른 눈빛으로 그의 알몸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는데, 그 순간 그 녀는 침을 한번 삼켰다. 황종태는 알몸으로 스위치가 있는 벽까지 걸어간 뒤 불을 끄기 전에 고개를 돌려 손경자를 쳐다보았다. 손경자는 매끈한 알몸을 드러낸 채 매우 만족 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황종태의 시선은 그녀의 배 꼽 아래 쪽에 잠시 멈췄다. 하얀 살결 위에 검은 털이 수북 이 쌓인 그 부분은 그를 강렬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는 침을 삼키며 "히야, 몸도 예쁘구나. 살결도 기똥찬 기라!” 하고 속으로 감탄했다. 황종태가 불을 끄고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자 손경자가 그 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입을 찾아 깊은 키스를 시작했 다. 키스를 하며 황종태는 그녀의 몸위로 올라갔다. 손경자 는 그의 몸을 받아들이면서 바로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 다. 그리고 그의 몸놀림이 빨라지자 그 신음소리는 더욱 커 지기 시작했다. 황종태는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면서 “이런 기 궁합이라는 긴가. 이 여잔 나와 모든 게 딱 맞구나!”라 고 생각했다. 손경자는 온몸을 황종태에게 바짝 매달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이윽고 큰 신음소리를 터뜨렸다. 그리고 그 큰 신음소리는 황종태의 몸놀림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황종태가 손경자의 몸에서 내려와 벌렁 눕자, 그녀는 그 를 향해 돌아누웠다. 그리고 손으로 그의 몸을 부드럽게 어 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무 말없이 한동안 그렇게 누 워 있었다. 그 침묵끝에 손경자가 입을 열었다. 손경자는 그의 연상이었으므로 살을 맞댄 뒤부터는 바로 반말을 사 용했다. “총각은 춤쟁이가?” 황종태는 빙긋이 웃으며 "춤쟁이는 아닙니더."라고 대꾸 했다. 그러자 손경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나도 춤쟁이는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러나 춤은 정말 잘 추더라." 황종태는 잠자코 있었다. 손졍자도 한참동안 아무 말 없 이 가만히 있다가 은근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총각 나하고 내일 서울 안갈래?” 황종태도 입을 열었다. “서울은 와요?” “그냥 놀러가는 기라. 시간 있나?” “시간은 많십니더” “그럼 서울에 놀러가자. 내가 다 준비해놓을테니까 내일 부산진 역으로 나온나. 넌 그냥 나오기만 하면 된다. 어때, 갈 수 있나?" 황종태는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가 “좋십니더”라고 대 꾸하며 그녀를 다시 끌어안았다. 손경자도 기다렸다는듯이 그에게 몸을 맡겼다. 황종태는 다시 그녀 위로 올라갔다. 그들은 밤11시에 호텔에서 나왔다. 호텔 정문에서 택시를 기다리며 손경자가 다짐했다. “내일 시간 어기지 마래이” 황종태는 수줍게 대답했다. “알았십니더. 걱정 말고 퍼뜩 가이소” 그때 택시가 나타났고 손경자가 먼저 탔다. 손경자는 택 시가 떠날 때 손을 흔들며 그에게 잘 가라고 했다. 다음날, 부산진역 대합실에 나타난 손경자는 작은 여행용 가방을 들고 있었다. 멋있는 원피스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손경자가 대합실에 들어서자 뭇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보았 다. 황종태는 서울행이 처음이었으므로 약간 주눅이 들어있 었는데, 손경자의 모습을 보자 기가 더 꺾였다. 서로의 신 분 차이가 하늘과 땅 사이만큼 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 다. 손경자는 황종태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황종태는 수 줍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손경자가 그의 손을 잡으 며 소근거리듯 말했다. “들어가자. 표는 이미 끊어놓았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제부턴 나를 누님이라고 불러야 된대이” 황종태는 멋적게 웃으며 손경자가 이끄는대로 따라갔다. 그들이 탄 열차는 특급이었고, 좌석은 중간쯤이었다. 손 경자는 좌석을 찾은 뒤 자신이 창가에 앉고 그 옆에 황종 태를 앉혔다. 열차가 출발하자 손경자는 피곤하다며 바로 자는 척했다. 황종태는 서울 가는 기차를 처음 탔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 이 설레였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서울 구경 간다는게 희한한 일이다. 우째 이런 일 이 다 생기노. 그것도 기똥찬 여자와 함께 서울 구경을 하 게 됐으니. 이건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인기라…. 그 란데, 이 여자는 뭐하는 여자일꼬? 바람 든 여자는 분명한 데, 남편은 있나 없나?...그러나 그런건 내가 알 바 아이 다.> 손경자는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할 때까지 황종태를 매우 사무적으로 대했다. 군것질 할 것도 사주었고, 점심도 함께 먹었지만 가끔 눈이 마주치면 은근한 미소만 지었을 뿐 말 이 별로 없었다. 황종태도 말이 없었기 때문에 얼핏보면 그 들은 동행자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서울에 도착하여 호텔에 짐을 풀고 난 뒤부터 손 경자의 태도가 변했다. 룸에 들어서자마자 손경자는 가방을 내려놓고 황종태에게 다가와 그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 “오늘 지루했지? 우리 명동으로 가서 구경도 하고 저녁 도 먹자” 손경자는 속삭이듯 그렇게 말하고 황종태를 가볍게 애무 했다. 황종태는 손경자의 애무에 바로 달아올라 그녀를 꽉 껴안았는데, 그녀는 “참아, 이따 시간 많잖아”하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또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 을 이끌고 룸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명동에서 불고기를 푸짐하게 먹은 뒤, 잠시 명동 거 리를 거닐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그날밤 손경자는 마치 벼르고 별렀던 일을 하는 것처럼 능동적인 자세로 황종태를 리드하며 오로지 그 행위에만 열중했다. 룸에 들어가자마자 손경자는 황종태에게 “나부 터 씻고 나올께. 너도 씻을 준비하고 있어”한 뒤 옷을 훌 훌 벗어던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황종태는 의자에 앉아 손 경자가 벗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터질듯이 팽팽한 엉덩이가 매우 육감적이라고 생각했다. 손경자는 목욕을 금세 끝내고 수건으로 아랫도리를 감은 채 나왔다. 황종태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으므로 옷장 앞 으로 다가가 옷을 벗어 걸고, 욕실로 들어갔다. 황종태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룸의 불은 꺼져 있었다. 그 가 멈칫하자 침대에서 손경자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껐어. 빨리 이리와” 황종태는 더듬더듬 침대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이불을 들 치고 손경자 옆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미 불덩어리처럼 뜨거워진 손경자의 몸이 그를 꽉 껴안았다. 욕실에서부터 흥분상태에 있었던 황종태는 서슴없이 손경자를 바로 눕혔 다. 손경자는 황종태의 몸을 받아들이자마자 감미로운 신음 소리를 내며 줄기차게 그에게 매달렸다. 황종태도 그녀에게 결코 뒤지지 않았다. 한차례 파도가 밀려온 뒤 또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그들의 정욕은 꺼 질줄 몰랐다. 이윽고 통금시간이 됐을 무렵 손경자가 신음을 토해낸 뒤 황종태를 가볍게 밀어냈다. 만족을 채웠다는 표시였다. 황종태는 그때서야 손경자 몸위에서 내려와 벌렁 누었는데, 그의 몸에는 땀이 물씬 젖어있었다. 가픈 숨결이 가라앉은 뒤 손경자가 황종태쪽으로 돌아 누으며 말했다. “너는 남자 중의 남자다…. 난 너를 놓치지 않을거야” 손경자는 그렇게 말한 뒤 황종태에게 가벼운 키스를 했 다. 그리고 잠시후 손경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니가 뭐하는 사람인지 알아야겠어. 말해줄 수 있지? ” 황종태는 잠자코 있었다.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난처했기 때문이었다. 황종태의 반응이 없자 손경자가 다시 입을 열 었다. “난 혼자 사는 여자야. 남포동에서 양품점을 하고 있어. …니가 너에 대해서 말해주면 나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얘 기해 줄께” 황종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나이트클럽 일을 봐주고 있어요” 손경자가 그 말에 급하게 물었다. “그럼 웨이터가?” “웨이터는 아닙니더. 나이트클럽에서 깡패들이 못 까불게 해주는 일을 하고 있어예” 손경자는 잠시 놀란 기색을 보이며 급하게 또 물었다. “그럼, 너도 깡패가?” “깡패는 아닙니더” “그럼 니가 어떻게 깡패를 막아주나?” 황종태는 멋적은 소리로 대꾸했다. “그정도 실력은 있어예. 대여섯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문제 없어요” 손경자는 궁금한듯 몸을 일으켜 세운 뒤 황종태 얼굴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니가 그런 기술이 있나? 정말로 대여섯 명이 달려들어 도 해볼 수 있나?” 황종태는 짧게 “예”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손경자는 감 탄하는 어투로 “야, 너 굉장한 애로구나! 그래서 힘이 그 렇게 쎄니?”하고서 호호하며 웃었다. 그리고 한손으로 황 종태의 몸을 어루만지게 시작했다. 그러면서 연신 “와, 와 ”한 뒤 “야. 니 몸 되게 깡깡하대이. 운동을 많이 해서 근육이 발달한 거가? 그라고 그 힘도 그래서 쎈 모양이구 나”라고 말했다. 황종태는 빙긋이 웃기만 했다. 손경자는 그의 몸을 한참동안 어루만진 뒤 자신을 소개 했다. “니가 여러가지로 마음에 딱 든다. 그럼 나에 대해서 말 해줄께. 너도 알지 모르겠지만 난 남포동 파리양품점 주인 이야. 부산에서는 알아준대이. 내가 나중에 전화번호랑 알 으켜주께. 너도 니 연락처를 나에게 알려주어야 해” 손경자는 그 말을 끝내고 황종태를 다시 애무하기 시작 했다. 황종태는 그 호텔에서 두번째 묵은 날 5·16 총소리를 들었다. 손경자와 술까지 마신뒤 지칠 줄 모르는 육체의 향 연을 막 끝냈을 때였다. 어디선가 “땅! 땅!”하는 총소리가 울린 뒤 그 총소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 울려왔다. 황종태가 먼저 놀라 “이기 무슨 소린교? 총소리 맞지 예?”하고 말하자 손경자도 사색이 되며 “맞다. 총소리다. 도대체 무신 일이고?”하며 맞장구쳤다. 총소리는 계속 울렸고, 그들은 불안때문에 잠을 못 이루 다가 새벽에야 잠에 떨어졌다. 그들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세상이 군인들 세상으로 바뀐 뒤였다. 거리는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무장을 하 고 삼엄한 경비를 하고 있었고, 정규방송을 중단한 방송에 서는 혁명공약이 반복되어 낭독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도 사태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쿠데타에 대한 두 사람의 반응은 매우 대조적이 었다. 대대적인 깡패소탕 작전이 개시되기 시작했다는 사실 을 모르는 황종태는 뭔가 신나는 일을 만난 것 같았고, 바 람둥이 아녀자에 불과한 손경자는 대단히 초조한 기색이 역연했다. 아침 식사 후에 황종태는 가끔 커튼을 살며시 열어제치 고 거리에 늘어선 무장군인들을 구경했지만, 손경자는 뭔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손경자는 부산 가게 로 전화를 걸어 서울에서 하루 더 묵고 가겠다는 연락을 했다. 손경자가 쿠데타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이유 가 있었다. 그녀는 자유당 말기부터 시작돼 4·19후 사회혼 란상을 틈타 부산 지역에서 극심하게 횡행하던 밀수에 연 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손경자 자신이 직접 밀 수에 손댄 것은 아니었고, 그녀의 정부가 부산에서 손가락 으로 꼽히는 밀수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양품점은 주로 밀수품을 팔아 재미를 보고 있었다. 손경자의 정부 박철수는 충청도 건달패 출신으로 마흔이 갓 넘은 사내였다. 그는 6·25때 부산으로 피난온 뒤 그대 로 눌러 앉아 장사를 하다가 자유당말 때부터 밀수에 손을 대기 시작해 상당한 재력을 쌓았다. 박철수는 허우대는 꽤 큰 사내였지만, 애첩 손경자의 색 욕은 당해내지 못했다. 그는 밤일 대신 손경자의 물욕을 채 워주면서 그녀를 첩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손경자에게 집도 사주었고, 조그마한 가게에 불과했던 그녀의 양품점을 크게 확장시켜주었다. 손경자가 황종태에게 자신은 혼자사는 여자라고 소개한 것은 자기는 박철수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손경자는 가 끔 나이트클럽을 출입하며 남자사냥을 즐겼던 것이다. 손경자는 박철수의 지원 없이도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 었으나 그녀는 색욕만큼 물욕도 강해 재력이 좋은 박철수 와의 관계를 끊지 않고 있었다. 손경자가 세상이 바뀌자 불안해진 것은 박철수 때문이었 다. 그녀는 쿠데타 소식을 듣고 박철수의 장래를 걱정했다. 손경자는 황종태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박철수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시간 에는 이미 박철수가 부산을 떠난 뒤였고, 그의 사무실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날밤 황종태도 나이트클럽에 전화를 걸었다. 사장에게 하루 더 쉬겠다고 말하려 했는데, 전화를 받은 지배인이 뜻 밖의 소식을 전했다. “종태야, 당분간 여기 나타나지 마래이. 형사들이 너를 찾으러 왔는데, 이따 또 올끼다내 말이 무신 뜻인지 알겠 재?” 황종태는 그 말에 놀라 “와요? 내가 무신 죄를 지었노? ”라고 소리질렀는데, 지배인은 목소리를 낮추며 이렇게 말 했다. “내 말 잘들어. 공기가 안 좋아. 이럴 땐 도망가는 게 상 책이야. 붙잡히는 날에는 골로 가는 줄 알고 잘 처신하래이 ”하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지배인은 후리가리 소식을 전해 준 것이었다. 전화통을 내려놓은 황종태는 난감해졌다. 당장 오고 갈 데가 없어진 신세가 됐기 때문이었다. 황종태를 지켜보고 있었던 손경자가 그에게 무슨 일이냐 고 물었다. 황종태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러자 손경자 는 즉시 “쓸데 없는 걱정 하지 마래이! 이 누님이 있는데 무신 걱정을 한단 말이고? 내가 숨겨줄 테니까 그 일은 잊 어뿌려라!”하고 말했다. 그들은 다음날 부산으로 내려갔고, 황종태는 손경자 신세 를 지게 됐다. 손경자 정부 박철수는 어디론가 피신해 버렸 기 때문에 그녀 집에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철수는 밀수꾼답게 모든 일을 은밀하게 처리했으므로 그의 주변에서도 손경자가 그의 애첩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 점은 손경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녀도 원래 비밀이 많은 여자였다. 이성관계뿐만 아니라 살 아가는 방식 자체가 비밀투성이었다. 그러한 점 때문에 손 경자는 집에 식모도 두지 않았다. 또 박철수의 굴레에서 벗 어나 자유롭게 살기 위해 집에 전화도 가설하지 않고 지냈 다. 박철수가 자신의 편리를 위해 전화를 놓으려 했지만 그 녀는 한사코 그걸 반대했다. 황종태는 박철수가 안심하고 부산에 다시 나타난 이듬해 초까지 손경자 집에 숨어 있었다. 그는 낮에는 손경자가 빌 려다주는 소설들을 읽었고, 밤에는 손경자와 육체의 향연을 벌였다. 그들은 지칠줄 몰랐다. 밤마다 새롭고 밤마다 즐거 웠다. 손경자는 황종태와의 정사가 끝나면 그를 어루만지며 "넌 남자 중의 남자다."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그녀는 실제 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상대했던 어떤 남자들보다도 황종태가 그녀를 만족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황종태 에 대한 감정은 하루하루 지나면서 차츰 변화가 왔다. 단순 한 육욕의 상대로 시작됐던 황종태와의 관계가 슬며시 연 인 관계로 발전된 것이다. 그녀는 황종태를 사랑하게 되었 고, 황종태도 그녀를 사랑했다. 한편, 5.16으로 손경자의 양품점도 서리를 맞았다. 그녀는 장사가 잘 안됐기 때문에 가끔 가게 문도 안 열고 집에서 황종태와 노닥거렸다. 그리고 이런 날은 둘 다 아예 발가벗 고 지냈다. 박철수가 부산에 다시 나타난 것은 5·16을 일으킨 군부 세력이 쿠데타 명분으로 내세운‘구악청소'의 1단계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밀수 근절도 그 구악 청소작 업의 일환이었는데, 부산의 밀수왕으로 통했던 한필국은 시 범케이스에 걸려 혁명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62년 4월 에 교수형을 당했다. 한필국은 우리나라에서 밀수죄로 사형 받은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박철수는 한필국이 사 형 당한 뒤 부산에 나타났다. 박철수가 부산에 나타난 뒤 황종태는 손경자의 배려로 하숙을 하게 됐다. 그때부터 그들은 주로 여관에서 만났고, 어떤날은 손경자가 그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말하자면 그 시점부터 그들 관계는 동거상태에서 은밀한 밀회관계로 변 한 것이다. 손경자는 어느날 그녀의 집으로 황종태를 불러들여 대낮 정사를 끝낸 뒤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제 경기가 슬슬 풀리기 시작했다” 황종태는 그녀가 밀수품을 못 팔기 때문에 불경기라고 넋두리하는 것을 자주 들었기 때문에 무심코 반문했다. “우째 경기가 살아나는교? 밀수품이 안들어온다 카는데 ” 그러자 손경자는 베시시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밀수를 어떻게 막노? 모두가 도둑놈들인데‥ 밀수 안 하믄 제놈들도 못 산다!…소문 들으니 총칼 들고 혁명 한 놈들도 모두 도둑놈들이라 카더라. 돈도 잘 받아먹고 또 돈 먹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카더라. 그라니 밀수품이 안 들 어오겠나? 사형 당한 한필국만 억울한 기라!” 베갯머리 송사라는 말이 있듯이 남녀란 이불을 같이 덮 고 자는 일이 많아지면 비밀스런 얘기도 털어놓게 마련이 어서 그날 손경자는 부산의 밀수세계에 대해서 그녀가 알 고 있었던 사실들을 황종태에게 얘기해주었는데, 그 얘기 내용은 모두 그녀의 정부 박철수가 그녀에게 해주었던 것 이었다. 그 얘기의 골자는 밀수품이 외항선으로 들어오는 것도 많지만, 진짜 큰 것은 자유당말부터는 대개 밀수특공대들이 특수 제조된 쾌속정으로 야밤에 일본 대마도에서 부산해안 까지 쏜살같이 실어온다는 것, 해상 운반책이 실어온 밀수 품은 태종대 등의 해안에서 육상운반책에 넘겨져 부산 시 내로 들어온다는 내용이었다. 황종태는 그 얘기를 듣고 눈이 빛나며 그녀에게 물었다. “경기가 살아난 것은 밀수품이 그렇게 들어오고 있다는 기요?” 손경자는 여기서 꼬리를 슬그머니 감췄다. “나도 잘은 모른다.… 하고 있는 긴지, 안하고 있는 긴지 …그러나 밀수품은 분명히 들어오고 있는 기라” 황종태는 손경자의 말에는 관심이 없어졌고 곧바로 생각 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 무렵 황종태는 5·16 이후 손경자 치마폭 속에서 살 아가는 무위도식 생활에 진저리를 느끼면서 답답함을 참아 내는 데에 거의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세상이 다시 느 슨해지기 시작했지만 다시 활동할 처지는 아니어서 그는 무력증에 빠지기도 했다. 그의 유일한 낙은 손경자의 육체 뿐이었다. 그런데, 손경자로부터 밀수세계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난 이후부터 그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깊은 생각에 자주 잠겼는데 어느날 부터는 태종대로 낚시를 다니기 시 작했다. 그것도 밤낚시를 주로 다녔는데, 태종대 해안가에 텐트를 치고 며칠씩 자기도 했다. 그러다가 또 어느날 부터 는 태종대 발길을 끊고 하승일을 찾아가 끈질기게 김호장 의 근황을 알려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하승일이 결국 김호장이 서울에서 도박판을 털고 있다는 사실을 얘기해주 자, 황종태는 바로 다음날 서울행 기차를 탔던 것이다. 황종태가 서울역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는 서울역에서 택시를 타고 무교동으로 가서 황금마차를 찾아 낸 뒤 부근 식당에서 저녁을 사먹었다. 그리고 곧장 황금마 차로 가서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김호장이 오기를 기다렸 다. 김호장은 밤 9시쯤 거구의 사나이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황종태는 김호장이 드디어 나 타나자 반가워 자리에서 벌 떡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그냥 뚜벅뚜벅 김호장 앞으로 걸 어가 “형님 접니더. 황종탭니더”하고 인사했다. 김호장은 황종태를 본 순간 깜짝 놀라며 “니가 여긴 웬 일이냐? 너 서울에 있었냐?”고 말한 뒤 그의 손을 잡고 한쪽 테이블 로 갔다. 그 자리는 항상 김호장이 앉는 자리였다. 억만이가 그 뒤를 슬슬 따라와 앉았다. 김호장은 두 사람 을 서로 소개시킨뒤 술을 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김호장은 황종태에게 “너 서울 있었냐?”고 다시 물었다. 황종태는 “아닙니더. 부산에 있었십니더. 형님 보고 싶었습니더”하 고 말했다. 그때 바걸들이 술을 들고와 그들 옆에 한명씩 앉았다. 그 러자 김호장이 넉살을 떨었다. “애들아, 여긴 부산의 내 거래처 직원이다. 그러나 나를 좋아해 나를 형님이라고 부른다” 그러자 바걸들은 황종태를 쳐다보며 “어머 핸섬이셔!”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 말을 받아 김호장이 또 넉살을 떨었다. “종태야 너 객고를 풀어야 할 게 아니냐. 이중에서 니 마 음에 드는 애 데리고 오늘밤 오입 한번 해라” 황종태는 김호장의 넉살에도 웃지 않고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아닙니더. 전 오늘 형님하고 잘랍니더. 형님하고 할 얘 기가 많십니더” 황종태 태도가 예사롭지 않자 김호장은 더 이상 넉살을 떨지 않고 술만 마셨다. 그리고 술자리를 서둘러 끝냈다. 술집에서 나온 김호장은 황금마차 앞에서 억만이를 보내 고 황종태만 데리고 호텔로 갔다. 호텔로 걸어가면서 그들 은 아무말도 나누지 않았다. 룸에 들어가면서 김호장은 룸보이에게 위스키를 시켰다. 그리고 룸에 들어가 테이블에 마주앉자 김호장은 비로소 황종태에게 미소를 보이며 근황을 물었다. “승일이가 서울 올라올 때마다 니 소식을 물어보았었지. 그러나 니 소식은 전혀 모르더라. 이렇게 나를 찾아온 걸 보면 보면 후리가리 때 달려가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황종태는 손경자 얘기를 하기가 쑥스러워 “운좋게 피했 십니더. 나중에 자세하게 말씸드리겠십니더.”라고 대꾸했 다. 그때 룸 보이가 술을 가져왔다. 김호장은 묵묵히 황종 태 잔에 먼저 술을 따른 뒤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그 가 술잔을 들자 황종태도 자신의 잔을 들었다. 김호장은 황 종태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딛치며 "좌우지간 군발이들한테 안 당했으니 다행이다. 그런 의미에서 축배를 들자."라고 말하고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황종태도 "형님, 반갑십니 더."라고 말하며 김호장처럼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건배가 끝난 뒤 이번엔 황종태가 빈 술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술 을 따르고 난 뒤 황종태가 김호장을 쳐다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형님, 제 애기 들으시고 승일이 형에게 화내지 마십시 오. 서울 오기 전에 승일이 형 만났십니더. 한 번만 만난 게 아이고 여러 번 만났십니더." 김호장은 씩 웃으며 말했다. "나도 짐작했다. 내 연락처와 내가 황금마차에 자주 간다 는 걸 아는 사람은 승일이밖에 없기 때문에 니가 황금마차 에 나타났을 때 난 이미 니기 승일이에게서 내 애기를 들 은 모양이구나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저러나 우리가 이렇 게 만나게 된 건 잘된 일 아니냐? 그거 가지고 내가 왜 승 일에게 화내겠냐. 그런 걱정 말고 술이나 마시자." 황종태는 긴장된 표정으로 김호장의 애기를 들은 뒤 조 심스런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형님, 도박장 털고 있다는 게 맞십니껴?" 황종태 말이 끝나자마자 김호장의 얼굴이 즉시 일그러졌 다. 그는 술잔을 단숨에 또 들이킨 뒤 황종태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 애기도 승일이가 하더냐?" 황종태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화 내시지 마시라는 말씸을 먼저 드렸십니더. 제 가 승일이 형에게 형님이 뭐하고 계시는지 알려달라고 졸 라댔십니더. 승일이 형도 처음엔 형님이 서울에 계신다는 말도 안 했십니더. 제가 승일이 형을 매일 칭아다니며 형님 을 꼭 만나야 된다고 졸라대니까 그때서야 형님 애기를 해 주었십니더. 승일이 형 입이 가볍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디까지나 저를 믿으니까 그 애기까지 한 것입니다. 승일 이 형은 이렇게 말했십니더. 형님이 저를 각별히 좋아하시 니까 나중에 오해는 안 하실 거라고예. 오해도 하지 마시고 화도 내시지 마십시오. " 김호장은 화가 쉽게 가라않지 않는듯 아무 대꾸없이 잠 자코 술만 마셨다. 그러나 황종태가 표정을 잠시 살피다가 "전 중대한 용건이 있어서 형님을 찾아왔십니더."라고 말하 자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뚱명스럽 게 물었다. "그게 뭔데?" 황종태는 입술을 한 번 깨문 뒤 대답했다. "형님, 이왕이면 도박판보다 더 큰 것을 텁시더!" 김호장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황종태의 진의가 무엇 인지 탐색하려는듯 그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약간 냉소적으 로 말했다. "도박판보다 더 큰 것이라니? 은행을 털자는 거냐?" 황종태는 그 말에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은행이라니요? 지가 그렇게 어리석게 보이는교? 은행은 절대 아닙니더. 그러나 은행을 터는 것만큼 큰 돈이 생기고 도박판처럼 털어묵어도 배탈이 전혀 안나는 물건이 있십니 더. 털린 놈들이 절대로 신고도 못하는 물건입니더.” 김호장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더 날카롭게 빛났다. 김호 장이 천천이 입을 뗐다. “그게 뭐냐?” 황종태는 약간 상기되며 말했다. “밀수품입니더! 지가 면밀하게 조사를 다 해 놓았십니더. 밤에 부산 태종대 바닷가에 며칠만 잠복하고 있으믄 틀림 없이 털어먹을 밀수품이 나타납니더. 지가 실제로 이 눈으 로 똑똑히 보고 왔십니더!” 이때부터 김호장의 표정에서 화가 나 있는 흔적은 삽시 간에 없어졌다. 그리고 호기심어린 표정을 지으며 황종태의 얘기에 관심을 나타냈다. "밀수품이 들어오는 걸 니 눈으로 직접 보았다는 거야?" "예! 지 눈으로 똑똑히 보았십니더." "그래? 그럼 자세하게 애기해봐!" 황종태는 김호장이 관심을 나타내자 신이 난듯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약간 흥분된 어조로 애기를 꺼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지는 부산에서 태어나고서도 부산 해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밀수에 대해서 이제야 알았습니 다. 태종대 쪽으로 밀수품이 들어온다는 애기를 우연히 듣 고 지는 낚시꾼 차림으로 밤마다 태종대로 나가 바닷가를 지켜보았십니더. 그렇게 보름쯤 태종대 바닷가를 지켰는데 어느날 드디어 그 광경을 목격했십니더. 새벽 2시경인데 바 다 저편에서 소리없이 다가오던 배에서 손전등 신호가 보 이자 바닷가에 숨어 있던 전마선 한 척이 불빛 신호를 보 낸 배 쪽으로 쏜살같이 나갑디다. 그런 뒤에 두 배가 바다 위에서 바로 접선한 뒤 곧바로 전마선은 다시 해안으로 돌 아왔는데 자세히 보니까 전마선 타고 있던 놈들이 짐보따 리를 들고 내려와 어둠속으로 사라졌십니더. 나중에 알아보 니까 밀수품은 그렇게 야밤에만 바닷가에서 인계된다는 겁 니더. 형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씸은 그 밀수품을 털어먹 자 이겁니더! 그건 털어먹어도 털린 놈들이 신고도 몬 합니 더. 그러니 얼마나 기똥찹니껴." 김호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니가 본 게 특공대 밀수라는 거냐? 나도 얼핏 그 애긴 들은 적이 있다." "예. 맞십니더. 그게 바로 특공대 밀숩니더. 특공대가 일 본 대마도에서 야밤에 쾌속정으로 실어온 밀수품이 부산 부근 해안으로 그렇게 들어와 시내로 흘러들어가는 겁니 더." "그 밀수꾼들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냐?" "그라믄요. 그걸 털어먹을 생각을 했는데 왜 안 알아보았 십니껴? 그 특공대 밀수는 이렇게 되어 있십니더. 쾌속정을 타고 대마도에서 밀수품을 가져오는 놈들은 해상책이라고 합니더. 그라고 야밤에 해안에서 그 밀수품을 인계받는 놈 들은 육상책이라 캅니더. 쾌속정으로 밀수품을 실어온 놈들 은 해안에서 육상책에게 물건을 넘겨준 뒤 곧 사라져버립 니더. 그러니까 문제는 그 육상책입니더. 육상책은 주먹께 나 쓰는 놈들이 맡고 그 밑에 졸개가 대엿 명이 붙는다 캅 니더. 그러니 별 문제 없지요. 형님과 지가 손 잡으면 그 깐 놈들 어디 상대가 되겠십니껴." "그 놈들이 무기는 안 가지고 있을까? 목숨 걸고 밀수하 는 놈들인데 권총 같은거 안 가지고 있을까?" "지 생각은 그놈들도 주먹패 아닌교? 무기를 가지고 있 다면 칼 정도 아니겠는교?" "니가 본 바로는 대여섯 명이었다 이거지?" "예." "그러면 해볼만한데. 그러나 너와 나만으로는 안될 거다. 그놈들을 해치우는 거야 너 혼자나 나 혼자라도 가능하지 만 그런 일은 둘만으론 안 된다. 도박장 터는 것도 둘만으 론 곤란하더라. 그러나 사람은 있으니까 그 문젠 걱정 없 고..." 김호장은 여기서 말을 멈추고 잠시 뜸을 들인 뒤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니까 군발이 세상이 계속되는 동안에 는 밀수품이나 털어먹으면서 살아볼까?" 이 말에 황종태가 맞장구쳤다. "형님, 앞으로도 한참동안 우리는 세상에 몬 나갑니더. 지는 예, 정말 답답해 죽을 지경입니더. 형님, 이제 부산으 로 내려가 좋은 세상 올 때까지 밀수품이나 털어먹으며 사 십시더. 도박판 터는 것보다 그게 형님 체질에 맞다고 생각 됩니더! 밀수품 운반 육상책이 아무리 주먹이 세다해도 형 님과 지가 손잡으면 우리를 당해낼 수 없십니더. 그라고 밀 수품을 터는 건 사실 공짜나 다름없십니더. 아까도 말심 드 렸지만 털어묵어도 신고할 리도 없는 기라예. 형님, 도박판 터는 것 때려치우고 밀수품을 털어묵읍시다!” 김호장은 황종태가 열을 올리며 얘기를 끝내자 바로 찬 성의 뜻을 이렇게 표시했다. “아까 술집에서 만났던 억만이란 친구도 끌어들이자. 그 친구는 생긴 것처럼 힘이 장사다. 아마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리고 턴 밀수품이 아무리 무거워도 거뜬히 짊어질 수 있 을 거다. 그리고 또 한 명이 있다. 주먹도 없고 힘도 없는 놈이지만 의리상 내가 챙겨야 한다. 내가 그놈 신세를 단단 히 졌다. 내일 보면 알게 될 거다. 그 녀석은 영리하니까 그런대로 쓸모는 있을 것이다.” 황종태는 쾌재를 부르짖었다. “좋십니더! 이제 모든 걸 형님이 결정하십시오. 지는 말 입니더, 형님이 틀림없이 찬성할 거라고 생각하고 서울로 올라왔십니더. 도박판 터는 건 형님에게 어울리지 않다는 건 형님도 잘 아실 거라고 생각했십니더. 제 말이 맞지요? 우쨌든 오늘 기분 되게 좋십니더.지에게 술 한 잔 주십시 오.” 황종태의 말이 끝나자 김호장이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황종태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니 말대로 우리가 힘을 합치면 밀수품 털어먹는 건 식은 죽 먹기 같은데, 그러나 턴 물건은 어떻 게 처분하냐? 무턱대고 국제시장에 내다 팔 수는 없잖은가. 밀수품 처분 문제는 어떻게 되나? 그게 문제 아냐?” 황종태는 그 말에 자신있게 대답했다. “형님, 그래도 전 치밀한 놈입니더. 무턱대고 형님 찾아 왔겠는교? 그 루트도 있십니더. 그건 염려 마이소” 황종태는 강탈한 밀수품 처분 문제는 깊게 생각하지 않 았고, 다만 손경자를 믿고 있었다. 그는 손경자가 양품점을 하면서 주로 밀수품을 팔아 재미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분 문제에 있어서는 막연히 손경자만 믿 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김호장에게 손경자 애기는 꺼내지 않았다. 김호장은 황종태가 밀수품 처분 문제도 호언장담하자 "좋다! 이제 부산에 가서 밀수품이나 털어먹자. 자, 다시 건 배 한번 하자!"라고 말했다. 그들은 술잔을 높이 들어 부딪친 뒤 둘 다 똑같이 단숨 에 들이켰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제7장 암호 '오징어장사' 황종태가 영도 태종대 바닷가에서 낙시꾼으로 가장하여 잠복한 끝에 목격했던 밀수현장은 부산 밀수세계의 전형적 인 행태였다. 칠흑같은 암흑의 바다 저편에서 소리없이 나타난 배는 밀수꾼의 해상운반책이 타고 있던 쾌속정이고 전마선에는 육상운반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암호에 의해 해안에 가 까운 바다 위에서 접선하여 쾌속정에 타고 있는 특공대가 밀수품을 전마선에 타고 있는 육상운반책에 넘겨준다. 이것 을 밀수세계에서는 일본어인 오키도리라고 부른다. 이러한 밀수그룹의 조직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어 아무리 유능한 세관원이나 정보원도 그 유형이나 짐작할뿐 그 조직의 실체는 전혀 파악하지 못할 정도이다. 그래서 이 러한 밀수 조직과 밤낮으로 싸우는 세관원들은 이구동성으 로“밀수조직은 공산당과 조직과 비슷하다. 현장에서 운반 책을 붙잡아 족쳐도 하주를 비롯한 상부 조직을 알아낼 수 없다."고 말한다. 밀수 조직의 실체는 세관원들의 지적처럼 지하운동을 하 는 공산당처럼 점조직으로 이뤄져 있다. 밀수 조직은 사방 에 흩어진 여러 점의 은밀한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다. 물론 조직의 중심은 하주이다. 이 큰 점을 중심으로 해 상 운송을 맡는 해상책이 있고, 해상책이 일본 대마도에서 쾌속정에 싣고 온 밀수품의 양륙 운반을 맡는 육상책이 있 다. 그리고 '책' 밑에는 각각의 그룹이 또 있다. 그러나 이 점과 점 사이의 맥락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세 관에서 해상책을 잡아도 육상책과 하주를 알아낼 수 없고, 육상책을 덮쳐 체포해도 해상책과 하주를 알 수 없다. 그 점조직의 전모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하주뿐인 것이다. 그러나 하주는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세관 이나 수사기관에서 아무리 용을 써도 하주를 찾아내지 못 한다. 세관원들이 부산 해안에 잠복하고 있다가 밀수품이 양륙되는 현장을 덥쳐 육상책을 체포해도 그 심문은 대체 로 이런 식으로 끝난다. "하주는 누구야?" "남포동에 사는 안씨라는 것밖에 모릅니더." "이름도 모른다는 거야?" "정말입니더. 이름은 모릅니더." "연락은 어떻게 하는 거야?" "밤에 우리 집 마당으로 쪽지가 날아옵니다." "그럼 어디서 만나는 거야?" "국제시장 안에 있는 k다방에서 만납니더." 그 말을 믿고 육상책을 데리고 국제시장 안에 있는 k다 방에 진을 치고 있어 보았자 하주는 나타나지 않는다. 화가 치밀어오른 세관원들이 육상책에게 "어떻게 된 거야?"라고 추궁해보았자 대답은 뻔하다. "지는 그 이상은 아무것도 모릅니더." 밀수세계에서는 전설적인 인물로 통하는 한필국은 하주 였는데, 그의 쾌속정은 시속 20노트였고, 세관 감시선의 속 력은 14노트였다. 그의 쾌속정은 밀수품을 싣고 대마도와 부산 근해를 여유만만하게 드나들며 그의 재산을 엄청나게 불렸다. 부패가 극심했던 자유당 말기에는 밀수로 쌓은 재 력도 권력과 선이 닿았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한필국은 검 찰을 상대 할 때도 낮에는‘영감’밤에는‘형님' 할 정도로 세도가 당당했다고 한다. 한필국은 세상이 바뀔지도 모르고 그 세도 믿고 까불다 가 정체가 드러난 통에 5·16 군사쿠데타 명분인‘구악 청 소'에 걸려 교수형을 당한 것이다. 밀수조직의 조직폭력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조직폭력은 보스 밑에 중간보스가 있고 그 중간 보스들이 졸개를 거느 리고 있지만, 밀수조직은 하주와 해상책, 육상책간의 계약 관계이며 계약은 일본말로 히도고카이(한번 항해한다는 뜻) 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주와 해상책 그리고 하주와 육 상책은 그때 그때의 일거리에 따라 이합집산하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밀수 조직은 밀수 계획되면 하주를 정점으로 조 직이 형성되었다가 그 밀수가 끝나면 헤어지는 것이다. 이 조직의 정점은 앞서 말한대로 하주인데, 하주가 여러 명인 경우도 가끔 있다. 말하자면 밀수에 공동투자한 경우이다. 밀수조직은 히도고카이를 위한 계약관계이므로 밀수를 계획한 하주는 우선 해상책과 육상책을 물색하는 일부터 착수한다. 그리고 해상책과 육상책만 구하면 그룹은 저절로 형성된다. 육상책이나 해상책을 할만한 인물은 그만한 역량 이 있기 때문이다. 해상그룹은 소위‘특공대'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구성은 3명이 보통이다. 만일 5명으로 구성돼 있다면 하주가 동승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원래 T/O는 선장 1명, 기관장 1명, 사무장 1명인데, 이 3명은 외항선에 꼭 있어야 할 사람들이 다. 이 해상특공대의 책(대장)은 사무장이다. 선장과 기관장 은 배를 움직이는 선박요원이다. 그러나 사무장은 하주의 지령을 받아 밀수품을 조달하고또는 거래선으로부터 밀수 품의 인수를 맡는다. 해상그룹은 고정된 그룹을 갖고 있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주가 선박을 따로 준비하고 선장과 기관장은 임시 로 고용하기도 하는데 이들을 통솔하고 감시하기 위해 심 복을 사무장으로 승선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해상그룹이 고 정멤버로 짜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때 하주는 돈만 대주고, 해상그룹은 지정된 장소까지 밀수품을 운반해 주는 것으로 계약관계가 끝난다. 해상그룹과는 달리 육상그룹은 깡패들이 맡는다. 조직의 생리를 비롯한 모든 것이 여느 깡패조직과 다를 바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돈을 받고 밀수품을 바다에서 육 지로 양륙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주와 계약이 성 립되면 그룹의 보스가 바로 육상책이 된다. 이 그룹은 5, 6 명의 고정된 패거리를 이루고 있지만, 밀수품의 분량이 많 을 때는 임시로 사람을 사기도 했다. 이 그룹의 임무는 황 종태가 목격했듯이 지정된 지점 앞바다에 온 밀수 쾌속정 에서 밀수품을 넘겨받아서 양륙하고 은닉장소까지 운반하 는 일이다. 계약에 따라서는 밀수품의 처분까지 대행해 주 는 경우도 가끔 있다. 육상그룹과 하주와의 관계는 하주와 해상그룹만큼 긴밀 하지는 않다. 그들은 하주와 청부 관계이기 때문에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자기 비용으로 일을 하고, 일이 성공해야 보수 를 받는다. 이에 반해 해상그룹과 하주는 고용관계와 비슷 해서 모든 비용을 하주가 대주고 일의 성패와 관계없이 보 수를 받는다. 점과 점으로 이루어진 밀수조직의 생리는 철저하게 서로 불신하는 게 특성이다. 육상그룹이 밀수품을 가로채고 달아 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하주는 가능한 한 모든 조치를 사전에 다 취해 놓는다. 하주는 배가 들어올 때까지는 양륙 장소를 육상책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 배가 들어오는 밤 에야 반감금상태로 현장에 동행하는 것이다. 육상그룹과 해상그룹의 사전 연락도 없다. 바다에서 맞부 딪쳤을 때에 암호만으로 서로 알아보는 것이다. 해상그룹도 어느 지점에 배를 댈지는 사전에 모른다. 배를 바다에 띄운 뒤에야 사무장에게서 듣게 되는 것이다. 돈과 얽혀 있고, 철저한 상호 불신때문에 점조직에 의해서만이 움직이는 밀 수조직은 그 특성 때문에 전모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밀수특공대가 일제 밀수 상품을 조달하는 곳은 대마도의 이즈하라항이다. 이곳에는 한국 밀수꾼 상대의 무역회사들 이 버젓이 일.한 무역이라는 의미의 닛칸보에키라는 간판까 지 걸고 장사를 했다. 이즈하라 무역상들 대부분은 한국출 신 교포들이었는데, 밀수꾼들에게 물품을 조달해주고 신용 있는 밀수꾼들에게는 외상도 주었다고 한다. 대마도 앞바다에서 부산 앞바다까지는 20노트짜리 쾌속 정으로 1시간30분 거리. 그래서 쾌속정의 속력이 밀수특공 대의 생명이었다. 세관감시선의 속력이 14노트 정도였을 때 밀수왕 한필국의 쾌속정은 20노트였었다. 그래서 한필국의 쾌속정은 세관감시선을 조롱하며 부산과 대마도 사이를 유 유하게 떠돌던 것이다.. 그러나 5·16군사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세관도 20노트 속력을 가진 감시선을 마련했다. 그러자 밀수꾼들은 다시 30노트 쾌속정을 만들어 세관 감시선을 따돌렸다. 그래서 세관 주변에서는 밀수꾼들이 쾌속정에 그라망 전투기 엔진 을 달았다는 소문이 떠돌았으나 이것은 그라머린이라는 미 제 엔진이 와전돼 그렇게 소문난 것이었다. 쾌속정에 그라머린 엔진이 장착되기 시작한 것은 자유당 말기때부터였다. 사라호 태풍이 남해안을 휩쓴 뒤 미국원조 당국은 어선 피해 복구를 위해 그라머린 엔진 수십기를 원 조했었다. 속칭 브이에이트(V­8)라는 V자형 배치의 8기통 엔진인 그라머린은 7~8천달러짜리여서 어민들에게는 그림 의 떡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흐지부지 처분되었던 그라 머린은 나중에 밀수꾼 쾌속정에 자리를 잡았고, 이것이 와 전돼 쾌속정은 그라망 전투기 엔진을 달아 빠르기가 비행 기 같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쾌속정에는 그라머린 이외에도 콘치레터라는 8기통 엔진 도 사용됐다. 트럭터 같은 특수차량용 엔진인데 이것은 밀 수세계에서 탱크엔진으로 통했다. 속도 싸움인 밀수세계에서 고성능 엔진만 있으면 쾌속정 은 얼마든지 만들어진다. 4~5톤짜리 어선에 엔진만 갈아붙 이면 쾌속정이 되는 것이다. 이런 엔진에 머플러를 장치해 서 폭음을 줄이면 금상첨화격이었다. 어선에 특수엔진을 장착한 쾌속정은 부산항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그냥 어선이다. 그러나 이 쾌속정은 평화선을 넘 으면서 무역선으로 둔갑한다. 특공대는 까다로운 입출항에 필요한 복잡한 서류를 모두 위조해 갖추고 있다. 출항허가 서, 출입국허가증, 거기에다가 커스텀 클리어런스(통관서 류), 매니패스트도 위조해 갖추고 처음으로 항해하는 사무 장은 선원수첩까지 위조해서 가지고 간다. 이 서류들은 국내용이 아니고 이즈하라 입항 때 일본 세 관에 보이기 위한 것인데, 위조가 정교하지 않지만 일본세 관원들은 거의 모두 통과시켜 준다. 일본 세관원들은 서류 도 들여다보고 뱃속도 뒤져보나 형식뿐이다. 이즈하라에 도착한 특공대는 품목명세를 무역회사에 넘 겨 물품을 조달한다. 이 기간은 대개 3~5일, 그러나 이즈하 라에 물건이 없을 경우에는 오사카에 주문해서 조달한다. 이렇게 되면 체류기간 만기인 14일을 채울 때도 있다. 특공대와 하주는 대체로 국제전화를 이용하여 암호를 교 신한다. 이를테면 “나흘째 어머니 병환이 몹시 위중하십니 다”라는 특공대 전갈에 하주가 “그래? 맏형님이 23일 비 행기로 갈테니 그때까지 병간호 잘하게”라고 말하면 이 말속에 암호가 들어있다. 이 전화 속내용은 이렇게 풀이된 다. “화물 조달이 덜돼서 나흘쯤 출항이 늦어지겠습니다” “그러면 23일 밤 A코스로 오라” 이와 같은 전화는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직접 오지는 않 는다. 대마도에서 오사카로, 오사카에서는 마산으로, 마산에 서 다시 부산으로 연락되는 것이다. 밀수품 조달이 끝나면 부산으로 돌아오는 D데이가 결정 된다. D데이는 기상조건과 하주 의사에 따라 결정된다. 그 날 밤 물결이라도 인다면 안성맞춤, 비바람에 묶여 세관감 시선이 꼼짝을 못하는 날이 바다에 익숙한 특공대원들에게 는 항해가 편한 날이다. 이 때문에 현해탄의 물귀신이 돼 버린 특공대원이 많다는 얘기도 있다. 특공대원들이 이즈하라에서 돌아오는 코스도 하주 의사 에 달려 있다. 하주는 특공대가 대마도로 떠날 때 대개 A,B,C 세개쯤의 코스를 선택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에 특공 대는 D데이날 배를 어디에 댈지 모른다. 이즈하라항 어귀부터 따지면 특공대코스는 다음 셋을 생 각할 수 있다. 첫 코스는 대마도의 남쪽과 북쪽 두섬중 남도 동쪽 해안 (우리나라와 반대편임)에 있는 이즈하라를 나와 섬을 끼고 북상, 북도의 북단을 돌아 미시마의 등대 앞으로 나오고, 두번째는 남도를 도는 코스, 세번째는 두 섬 사이의 만리키 세도 해협으로 나오는 코스. 첫번째 코스는 부산을 버리고 울산·포항까지 올라가는 경우이고, 두번째 코스는 남쪽으로 크게 우회해서 여수로 가는 코스. 그러나 이두 코스는 40마일에 뻗친 대마도를 끼 고 돌기 때문에 부산까지 최단 거리인 만리키세도 해협이 애용된다. 특공대의 이즈하라 출항시간은 대개 일본 세관의 종무시 간 직전인 오후 5시로 잡는다. 특공대는 만리키세도까지 나와 우리나라 세관감시선의 동태를 살피며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린다. 서쪽 수평선으로 해가 떨어지고, 바다가 칠흑같은 암흑에 잠기면 그들의 H 아워가 다가오는 시간이다. 특공대는 마지막으로 ‘이상 없 다’는 판단을 내리면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쾌속정을 몰아 새카만 해상을 1시간반 동안 치닫는다. 평화선을 넘어선 특공대의 쾌속정은 멀리 보이기 시작하 는 우리나라 등댓불을 목표로 삼는다. 첫째는 해운대의 항 공표지등, 다음은 오륙도·태종대 등대, 세째는 홍도 등대. 불빛을 목표로 되도록 육상책이 기다리는 해안으로 방향을 꺾어 그들 용어로 기리코미(육탄돌입이라는 일본어)한다. 그리고 이 순간이 특공대 D데이 H아워의 클라이맥스다. 감 시선과 맞부딪칠 위험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이 위험한 고비에 대비하기 위해 어느 특공대나 지키는 불문율 4개가 있다. 이것은 모두 감시선이 들이닥칠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첫째, 감시선에 붙잡힐 위험이 있으면 만사 제치고 선원 수첩등 서류를 모두 버려라. 둘째, 밀수품을 바닷속에 던져라.(선원수첩등 서류와 밀수 품을 없애면 붙잡혀도 증거부족으로 사건이 안된다) 세째, 여의치 않으면 배를 육지에 노리아케(랜딩, 배째 육 지에 오른다는 일본어)하고 달아나라. 넷째, 배를 버리고 헤엄쳐서 달아나라. 밀수세계에서는 물건을 뺏기더라도 사람은 달아나야 한 다는 철칙이 있다. 손해는 다음판에 한꺼번에 만회할 수 있 기 때문이다. 통계에 의하면 특공대가 검거되는 경우는 20~30%에 불 과했다고 되어 있다. 특공대는 대개 관록있는 밀수전과자· 전직 특수기관원·전직 특수부대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 었기 때문에 세관 감시선이 아무리 용을 써보았자 검거율 이 미미했었다. 그리고 붙잡혀도 특공대는 4가지 불문율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어서 사건이 안되는 경우도 많았다. 특공대 쾌속정의 오키도리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진짜 외항선원이 가져오는 밀수품을 외해에서 입항 전에 빼돌리는 것인데, 이 경우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부두 를 향해 항진하는 외항선 옆을 전마선이 스쳐지나가면서 밀수품을 넘겨받기 때문에 UDT요원에 버금가는 숙련된 기 술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외항선원의 해상책 이고 전만선에 탄 자들은 육상그룹이다. 다른 하나는 특공대가 실어온 물건을 육상책이 넘겨받는 것인데, 이 작업은 아래와 같이 전개된다. D데이 저녁이면 하주와 접촉한 오키도리패의 보스는 패 거리를 몽땅 소집한다. 물론 패거리들은 무슨 일을 어디서 하게 되는지 모른다. 기밀을 지키기 위해 반감금 상태에서 공술 대접이나 받으며 일할 시간을 기다린다. 그들이 기다리는 쾌속정이 들어오는 시간은 통행금지시 간 전후, 그러나 통금 직전에 밀수품을 넘겨받아 그 길로 은닉 장소까지 옮길 수 있는 게 최상이다. 이윽고 때가 되 면 오키도리패는 현장으로 이동하는데, 보스 이외에는 가봐 야만 현장을 알게 된다. 특공대가 기리코미하여 오키도리패와 접선하는 장소는 몇가지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첫째는 무엇보다도 뱃길이 험하고, 낙동강 어귀처럼 물이 얕거나 아치섬 앞처럼 암초가 많아서 세관감시선이 꼼짝할 수 없는 곳이라야 한다. 둘째는 마을이 가까운 곳. 바다에서뿐만 아니라 육지에서 도 밀수품은 신속하게 운반되어야 하기 때문에 은닉장소가 되는 마을이 가까워야 한다. 마을까지 자동차 길이 통해 있 다면 금상첨화다. 오키도리한 밀수품은 순식간에 마을 어느 집에 숨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을 갖춘 장소로는 영도에서는 태종대 등대 밑 동삼동·청학동·아치섬 해양대학 앞등이고, 그 동쪽으로는 오륙도 앞 신선대와 해운대 기장, 서쪽으로는 송도 동물검 역소 앞 등이다. 그리고 감천 하단 부근의 낙동강 어귀도 밀수꾼들이 애용하는 곳이다. 따지고 보면 부산 인근 해안 전부가 밀수 우범지역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떤 밀수꾼은 부 산 시내 자갈치 시장에 배를 맞바로 대려다가 실패한 경우 도 있었다. 이런 지역 현장에 오키도리패가 도착하면 그들이 말하는 ‘계엄령’이 펼쳐진다. 부근 일대를 정찰하고, 거추장스런 고깃배 따위를 쫓아내는 것이 계엄령이다. 양륙장소가 마을 가까운 곳이면 밤일지라도 바다에는 주 낙을 하는 어부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 틈에는 낙싯줄을 드 리운 세관원도 끼어들 수도 있다. 세관원이 잠복하고 있는 지 여부를 살피고 작업의 장애물을 없애기 위해 그들은 ‘ 계엄령’을 펼치는 것이다. 만일 어부들이 있다면 돌을 던지거나 해서 쫓아버리고, 어부들 가운데에 세관원이 끼어있다면 즉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렇게 해서 장애물이 없이지면 바다는 몽땅 오키도 리패가 장악하게 된다. 그들은 즉시 전마선을 타고 약속한 해상에 나가 특공대를 맞는다. 쾌속정은 밀수품을 갑판 위에 싣고 오기 때문에 하역은 단 몇 분동안에 끝나고, 전마선은 곧장 해안으로 돌아온다. 오키도리패의 임무는 이것으로 일단 끝난다. 하주는 대개 현장에서 물건과 맞 바꾸어 품삯을 치른다. 품삯은 밀수품 의 6~7퍼센트가 오키도리패에게 건네진다. 그러나 특별한 계약이 성립될 때는 오키도리패가 운반도 맡는다. 또 처분까지 맡는 경우도 있다. 밀수품의 처분까지 맡는 오키도리패는 그 방면에 전문성까지 갖춘 상습 오키 도리패이다. 운반까지 해주면 품삯은 2배 정도 더 받고, 처 분까지 일괄작업을 맡을 경우에는 15퍼센트로 올라간다. 잠 깐의 일치고는 수입이 짭짤하지만, 오키도리패는 이런 일을 자주 맡는 것도 아니고, 잘해야 한달에 서너번 정도라는게 그 세계의 정설이다. 부산 밀수세계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밀수촌과 그곳에 사 는 사람들의 행태도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다. 세관 통계에 의하면 남해안 밀수의 70~80퍼센트는 부산 지방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 밀수품의 반 이상이 청학동, 그 이웃의 동삼동, 아치섬 해안에 몰린다. 청학동은 김호장 이 대구형무소에서 출소한 뒤 하승일의 배려로 숨어 있었 던 동네다. 밀수품이 집중적으로 몰리다 보니 그 지역 바닷가는 주 민들이 밀수촌을 이루어 대마도 특공은 물론 밀수품의 오 키도리·은닉·육상운반 등을 생업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 주민들은 외부세계에 대해서 조개껍질을 쓴 것처럼 문을 굳게 닫고 폐쇄적으로 살았다. 그리고 만일 강제로 그 껍질 을 벗기려 할때는 무섭게 반발했다. 세관원이 뭇매를 맞는 경우는 예사였고, 숫제 그런 동네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시 기도 있었다. 이 지역에도 경찰 초소가 있었으나 밀수 방지에는 속수 무책. 주민들은 해녀들에게 받는 방세의 다섯배 열배를 초 소순경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밤에 초소를 향해 돌 팔매질을 하기도 했다. 세관에서 아치섬에 특별초소를 두었을 때는 주민들이 식수 를 주지 않아 매일 감시선이 식수를 실어 날라야 했다. 밀수촌 성립 요건의 첫째는 그 지리적 위치이다. 영도 동 쪽 해안에 있는 청학동은 부산 외항의 검역착지를 마주보 고 있는 바닷가. 외항선은 바로 그 앞 5백미터 앞바다에 머 물러 검역을 받고서야 입항할 수 있다. 그때까지는 세관원 도 그 배에 오를 수 없다. 이틈을 타서 청학동 주민들은 선 원들이 가져온 밀수품을 오키도리한다. 5·16이후 밀수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이후의 경찰 통계에 의하면 이 지역 소유 전마선은 1백여척 가까이 됐다는데, 이 전마선이 오키도리에 이용된 것이다. 부산항구의 가장 끝쪽에 있는 동삼동은 그 앞의 아치섬 과 함께 특공 쾌속정이 배를 몰래대기에 가장 알맞은 곳이 다. 동삼동 주민 중에는 특공 쾌속정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 도 있었다. 이들은 하주와 계약에 의해 대마도를 왕래하며 밀수품을 실어 날랐다. 세관에서는 밀수촌 주민들을 거의 모두 밀수 우범자로 분류했다. 마을 장정들은 오키도리를 하고 아낙네들은 은닉 과 부산시내까지 운반을 맡는것으로 보고 있었다. 이 지역 해녀들은 외항선 밀수품 경우에 오키도리에 끼어들기도 했 다. 밀수촌의 밀수 관련자들 집에는 밀수품 은닉을 위해 비 밀실을 갖추고 있었다. 자유당 말기와 5·16쿠데타가 일어 나기 직전의 밀수 전성기에는 집집마다 비밀실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비밀실 구조는 지하실 따위가 많았고, 장롱밑의 온돌을 뜯어 갱을 막아 비밀실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롱밑 의 온돌 갱은 교묘해서 잘 적발되지 않았다. 밀수촌에 은닉되는 것은 육상운반을 위한 중간 과정이다. 은닉된 밀수품은 몇 시간후에 곧장 부산시내로 흘러들어갔 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많은 밀수품은 양륙되자마자 곧바 로 부산 시내까지 운반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그래서 이런 의문이 제기된다. "통금시간 직전 직후에 육지에 양륙된 밀수품이 어떻게 통금시간중에 부산 시내로 들어갈 수 있었는가? 힘깨나 쓰 는 기관원이 뒤를 봐주지 않고 그게 가능하겠는가?" 아뭏든 밀수촌의 생리는 거칠고, 외부세계의 도전에는 일 치단결해서 대항하는데, 심지어 개까지 한몫했다는 다음과 같은 애기도 전해지고 있다. 부산 세관의 이00씨는 62년 말에 시계를 밀수입한 외항 선원을 적발했다. 밀수가 들통나자 그 선원은 통사정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폐병 3기인데 약값을 마련하려고 범행했 으니 한번만 봐달라며, 정 못봐주겠으면 집에 가서 약이라 도 가지고 구속되어야 겠다는 것이었다. 선원을 딱하게 생 각한 이씨는 동료 3명과 함께 선원을 따라 청학동에 있는 선원의 집으로 직행했다. 집에 도착한 선원이 약을 챙기라고 하자 집안은 약과 함 께 옷을 꾸린다며 법석을 떨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밀수촌 주민들이 선원의 집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틈에 선원은 후닥닥 집을 빠져나가 뒷골목으로 도망쳤다. 세관원들은 즉 시 그 선원을 뒤쫓아 가려고 했는데, 느닷없이 셰퍼드 한마 리가 나타나 그들 앞에서 으르렁거렸다. 세관원들이 그 셰 퍼드 때문에 우물쭈물하는 동안 그 선원은 꼬리를 감춰버 렸다. 세관원 한 명은 셰퍼드에 물려 치료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씨는 개와는 인연이 많아 자유당 말기에도 비슷한 일 을 당했다. 이씨가 지휘하는 수사팀이 밀수품 은닉 장소를 덮쳤다. 밀수품이 은닉된 집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그집 대문을 박차고 들어서자 뜰에 있던 개 한마리가 당장 덤벼들었다. 개는 앞장 선 이씨의 왼쪽 팔꿈치를 물고 늘어 졌다. 다급해진 이씨는 정신없이 권총을 개의 머리에 난사 했다. 이런 난리통에 밀수꾼은 도망쳐 버렸고, 겨우 밀수품 만 적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씨는 진단서를 첨부하여 개를 죽인 것은 정당방위였다는 해명서를 경찰에 제출했다 고 한다. 외항선의 밀수도 만만치 않아 60년대초 전체 적발 밀수 의 30퍼센트 정도가 외항선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나타나 있다. 물론 세관의 외항선 검색도 철저했다. 사전에 정보가 입 수되면 배의 청사진까지 펼쳐들고 검색했다. 또 세관의 서 치 때는 웃기는 일도 많이 벌어진다. 어떤 선원은 입항때 엷은 나일론 제품 여자 팬티 스무벌을 끼어 입고, 그 위에 낙타 내의 두벌, 스웨터 세벌, 언더 셔츠 두벌을 걸치고 데 트론 코트를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고급 모자를 쓰고 있 었고, 주머니에는 일제 우데나 크림 열두갑을 넣고 들어오 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선원의 경우는 그래도 순진한 보따리 장수이다. 외항선이 한척 입항하면 외제상품이 쏟아져 들어오기 때 문에 세관원들의 검색이 끝난 뒤에는 외항선은 곧바로 도 떼기 시장으로 변했다. 밀수품 중간 상인들이 몰려와 이방 저방 기웃거리며“팔 물건 없는교? 물건 파이소?”하며 늘 어붙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내 백화점과 양품점도 아연 활 기를 띠었다고 한다. 외항선 선원들이 가지고 들어온 물건 이 곧바로 백화점과 양품점으로 흘러들어 갔기 때문이다. 밀수꾼과의 뒷거래에 관해서도 별의별 얘기가 다 있다. 밀수 전담형사가 알고보니 육상책이었고, 세관 감시선이 오 키도리했다는 얘기도 떠돈다. 어떤 특공대 쾌속정은 군용부 두로 들어왔는데, 세관에서 덮치자 헌병대가 나타나 자기들 이 체포했다며 그들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더라는 것, 그 래서 세관에서 따라 붙으니까 보초가 총을 겨눴기 때문에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도 있다. 아무튼 부산의 밀수와 연관된 사람들은 야행성 동물처럼 그 행동 양태가 음습한 게 특징이다. 밀수 계획 자체가 음 모이고, 그 실행은 생명을 걸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들키면 인생 자체가 끝장일 수도 있다. 그리고 세관이 밀수꾼들과 벌이는 한판 승부는 군대의 작전과 다름 없다. 무기를 휴대 하고 기습하지 않으면 작전에 실패한다. 또한 특공대는 세 관의 기습에 대비하여 세관보다 더 치밀한 계획하에 움직 인다. 세관에서는 부산 해안가에서 밀수꾼 잡는 일을 그 특 수성 때문에 '남해작전'이라고 불렀다. 김호장 일당이 밀수품을 털어먹기로 작당했다는 것은 음 모와 기습과 야합이 특성인 그 밀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된다는 속담 은 제쳐두고라도 그들은 밀수품 털이에 만족할 수 없는 조 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부산의 어느 육상책도 배짱이나 싸움기술에서 김호장을 능가할 자가 없었고, 패거리로 말하 더라도 김호장 일당에 버금가는 그룹이 없었다. 잽싼 발차 기로 단숨에 대여섯 명을 처치하는 능력을 가진 황종태와 억만이의 황소같은 힘, 그리고 그 대장 김호장의 영민한 두 뇌와 싸움기술이 합쳐져 한 패거리가 되었으니 그 조직은 말 그대로 천하무적이었던 것이다. 김호장이 느닷없이 나타난 황종태로부터 밀수품 털이 제 의를 받고 선뜻 응한 것은 황종태 말대로 그들이 합치면 당할 자가 없다는 자신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구형무소에 서 출감한 이래 그는 1년여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마 침내는 마치 야행성 동물처럼 밤에만 활동하는 도박장 털 이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 생활 자체에 지겨움을 느 끼고 있었던 것이다. 도박장 털이라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 면 남의 집 담장을 넘어들어가야 되는 도둑이었으므로 그 의 성격이나 체질에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군사정부의 깡 패소탕에 걸려들면 끝장이라는 절박감 때문에 숨어 사는 방책으로 도박장을 털고는 있었지만 그는 그 일 자체를 사 나이가 할 일은 못된다고 항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참에 황종태가 나타나 부산 해안가로 들어오는 밀수품을 털어먹 자고 제의했을 때 그는 마음속으로 "바로 이거다!"라고 생 각했었다. 해변에서 밀수꾼들과 한판 붙어 밀수품을 강탈하 는 일은 도박장 털이보다 무엇보다도 스케일이 크다고 생 각됐기 때문에 그의 성미에 맞는 일이라고 느껴졌던 것이 다. 물론 황종태 말처럼 그들이 합치면 주먹패 출신 밀수꾼 열댓 명이 밀수품을 옮기고 있다 하더라도 문제가 될 수 없다는 판단도 황종태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도록 작용했 다. 김호장은 황종태가 서울로 찾아왔던 날 밤에 잠이 들기 전에 혼자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부터 내가 살아가는 무대가 부산 해안가로 바뀌는 구나. 어차피 이판사판 인생이니 어디 가서 산들 못 살겠는 가. 남자로 태어났으니 종태 말처럼 털어 먹어도 큰 것 털 어먹으면서 살자. 어찌보면 그게 더 쉬운 일인지 모르겠다. 야밤에 바닷가에서 털어먹는 일이라면 주택이나 호텔에서 의 노름판 터는 일보다 쉬울지 모른다. 종태와 억만이만 있 다면 열 명이 아니라 스무 명도 문제없다. 해안에 잠복하고 있다가 번개처럼 덮쳐 제압해버리면 밀수품 강탈이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누가 우리를 당해낼 수 있단 말인가. 밀수꾼들이 고용한 주먹패란 보지 않아도 뻔하다. 밀수품 터는 일이 남의 집 담장을 넘어가 도박판을 터는 것보다 훨씬 스릴 있는 일이다. 자, 이제 다시 부산으로 가자!> 다음날 아침, 김호장은 억만이에게 연락을 취해 이석배를 데리고 그들의 제2 아지트인 창경원으로 나오도록 했다. 물 론 황종태도 그 자리에 끼었다. 그들은 일부러 동물원 구경나온 사람들처럼 행세하다가 한적한 벤치를 찾아 앉았다. 처음엔 4명이 모두 벤치에 앉 았으나 잠시후 김호장이 주위를 한번 살핀 뒤 일어서서 세 명앞에 서서 그들을 쳐다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억만이와 석배 잘 들어라. 여기 부산에서 올라온 종태가 좋은 일거리를 가지고 왔다. 우린 이제부터 활동무대를 부 산으로 옮길 생각이다. 물론 찬성하는 사람만 같이 간다. 우선 그것부터 물어보아야겠다. 나와 함께라면 부산에 가서 어떤 일이건 할 생각이 있는지 그것부터 알아야겠다. 모두 할 생각 있나?" 억만이가 먼저 대꾸했다. "난 두목이 가겠다면 지옥에라도 따라가겠다!" 이어 이석배가 말했다. "저도 어디든 형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이 미 그런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호장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린 이제 황동무대를 부산으로 옮겨 해안으로 들어오 는 밀수품을 터는 일을 하게 된다. 여기 황종태가 그 일에 대한 사전 조사를 다 해놓았다. 우린 종태가 하자는대로 하 기만 하면 된다. 어젯밤 종태 애기를 듣고 곰곰히 생각해보 았는데, 부산 일거리는 주먹구구식으로는 안될 일이다. 치 밀한 작전도 필요하고 준비해야 할 물건도 많다. 그리고 이 일은 보안을 잘 지켜야 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인데 앞으로 우리끼리는 부산 일을 암호로 불러야 한다. 우리끼리 애기 할 때도 이건 지켜야 한다. 그 암호는 오징어장사다." 김호장은 이어서 그 '오징어장사'에 대한 얘기를 구체적 으로 꺼냈다. 물론 황종태로부터 들었던 애기를 간략하게 설명햇다. 억만이와 이석배는 그 애기를 들으며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억만이는 모의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 체도 잊고 이렇게 소리질렀다. "히야!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도 벌어지고 있는가? 쾌속정 으로 밀수품을 싣고와서 팔아먹는 놈들이 있다는 건 정말 처음 듣는 애긴데.... 좌우지간 그걸 털어먹으면 기똥차겠 다!" 머리가 잘 도는 이석배는 그들의 샐활과 직결되는 질문 을 던졌다. “형님, 그렇다면 우리들 하숙집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서울에 있으면서 부산에 잠시 내려가 일을 보는 것입니까? ” 김호장이 대답했다. “오징어장사는 도박판 터는 것과는 다르다. 우린 아무래 도 아지트를 부산으로 옮겨야 겠다. 각자 하숙집도 부산에 서 구하고, 어찌 생각하면 집 한채쯤은 전세라도 내야 할 것 같다. 밀수품을 털었다고 해서 바로 처분될 수는 없을 것이니까 전세낸 집 숨겨놓았다가 처분해야 될 것이다. 그 리고 그 아지트에는 한 사람만 있어야 한다. 한곳에 같이 살다가 일이 잘못 풀리면 모두 당할 위험이 있으니까 우린 일이 끝나면 일단 모두 헤어져서 살아야 한다. 부산 시내 아지트는 별도로 구하면 될 것이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낸다. 이제 슬슬 이곳을 빠져나간 뒤 남대문시장으로 가 자. 오징어장사는 주먹만 가지고는 안되니까 필요한 물건을 준비해야 된다. 우린 낚시꾼 행세를 해야 되니까 탠트도 사 야 되고 하여튼 사야 할 물건이 많다." 창경원에서 나온 그들은 즉시 남대문시장으로 향했다. 거 기서 그들은 밀수품털이에 필수적인 물건들을 구입했다. 그 들이 구입한 물품명세는 낚시꾼 용품인 텐트·낚시도구· 군용 닭털침낭·취사도구등이었다. 황종태는 다음날 아침 부산으로 내려갔고, 김호장 일행은 서울 생활 청산을 위해 3일후에야 부산으로 내려갔다. 서울을 떠날 때 김호장은 춘심이를 한번 만나고 싶었으 나 꾹 참았다. 김호장은 기차가 서울역을 출발할 때부터 약간 설레는 기분을 느꼈다. 대구형무소를 출감한 직후 부산에 잠입한 이래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돌고 돌아 다시 부산에 가 게 됐다는 사실도 감회를 느끼게 하는 일이었고, 밀수품털 이라는 새로운 계획도 갇혀 있던 그를 광야로 내보내는듯 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설렘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일종의 그 부픈 꿈은 부산에 도착한 날 밤 에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그들은 부산에 도착한 뒤 곧바로 태종대로 나가 황종태 가 지정한 자리에 텐트를 쳤다. 그곳은 태종대와 고갈산 사 이에 잘룩하게 들어간 자갈마당 서쪽 끝 지점이었다. 끊임 없이 밀려오는 바닷물에 씻기고 바람에 닳아 반짝반짝 윤 이 나는 차돌멩이들이 깔려 있는 자갈마당은 태종대에서는 유일하게 벼랑이 아닌 곳이었다. 황종태는 앞장 서서 그곳에 도착하자 먼 바다 쪽을 손으 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곳에서 지가 밀수 꾼들이 전마선을 타고 저 바다로 나가 쾌속정에서 밀수품 을 받아 싣고 들어오는 장면을 목격했십니더. 캄캄한 밤에 말입니더." 김호장은 미소를 지으며 그 말을 받았다. "대단하다. 밤에 혼자 이곳에 숨어서 밀수꾼들의 동태를 목격했다 이거지? 무섭지도 않더냐?" 황종태는 씩 웃으며 대꾸했다. "와 안 무서웠겠는교? 해변의 밤은 정말 무섭십니더! 해 수욕장의 밤과는 차원이 다릅니더. 파도 넘치는 바다를 보 고 있노라면 갑짜기 소름이 끼칩니더. 그러나 참았지요. 지 는 귀신은 없다고 생각하니까 무서운 건 사람인데 사람은 안 무섭십니더." 김호장은 억만이 쪽을 쳐다보며 "넌 어때? 혼자 여기서 밤을 보낼 수 있겠어?"라고 물었는데, 억만이는 손까지 내 저으며 "난 천금을 준다 해도 못 하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 말을 받아 김호장은 "사실 나는 억 만금을 준다 해도 혼자는 여기서 밤을 못 보내겠다."고 말 하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김호장은 웃음을 멈춘 뒤 번뜩 이 런 생각을 했다. <종태에게 무슨 곡절이 있구나. 아무리 겁이 없다 해도 하루도 아니고 보름 동안이나 이곳에서 혼자 밤을 보내며 밀수꾼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필경 곡절이 있다. 아마 큰 돈이 절실하게 필요하니까 이곳 에서 그 무서움을 참고 견뎌낸 거야! 뭘까? 같이 지내다 보 면 차츰 알게 되겠지. 그러나 끝내 그 말은 안 할지도 모른 다. 워낙 입이 무거운 놈이니까> 그들은 자갈마당 서쪽 숲가에 텐트를 치고 난 뒤 출렁이 는 바닷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면서 유쾌한 기분에 사로잡 혔다. 억만이는 낚시 도구를 꺼내 고기를 잡아 저녁 요리를 하겠다며 바다에 낚싯줄을 던져댔고, 이석배도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황종태는 바다 쪽을 바라보며 뭔가 골 돌한 생각에 잠겨 있었고, 김호장은 아무런 감정을 표출하 지 않고 바닷가를 거닐기만 했다. 그는 가끔 황종태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그들은 밥을 해먹었고, 밤 날씨가 쌀 쌀해지자 텐트 속에 들어가 통금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때부터 그들은 전투를 개시하는 군인들처럼 긴장했다. 황 종태가 얘기한 것처럼 어둠 저편 바다 위에서 불빛이 나타 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그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밤 12시가 지나도록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고, 새벽 2시가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그들은 소변 누러 갈 때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이윽고 새벽 2시쯤 됐을 때 황종태가 무겁게 입을 열었 다. “형님, 오늘은 틀렵십니더. 특공대 쾌속정이 나타날 시간 이 이미 지났십니더” 그 말에 김호장은 아무 대꾸도 안하고 검은 바다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사방은 파도가 출렁이는 소리만 울려퍼지 고 있었고,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침묵 끝에 김호장이 “모 두들 긴장해서 술 생각나겠지. 한잔식 마시고 오늘은 이만 자자”하고 말했는데, 그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김 호장이 말하자마자 이석배가 잽싸게 가방에서 소주와 안주 를 꺼내 텐트 밖으로 나와 앉은 김호장 앞에 내놓았다. 나 머지 두 사람도 텐트에서 어슬렁 기어 나와 김호장 앞에 앉았다. 김호장이 그들에게 한잔씩 따라주었는데, 모두가 잠자코 술만 마셨다. 이때 그들 생각은 각각이었다. 이석배는 “이건 황당한 일이다. 밀수꾼이 언제 나타난단 말인가”하고 그 일 자체 에 회의를 품었다. 억만이는 “밀수꾼이 나타나기만 하면 당장 때려눕힐 건데…”하는 생각만 했다. 황종태는 길목만 지키고 있으면 밀수꾼이 틀림없이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김호장 생각은 단순하지 않았다. 서울역을 출발할 때 느꼈던 설렘은 싹 가신지 오래였고, 야밤에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밀수꾼 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자니까 어쩐 지 망망대해를 떠도는 조각배를 타고 있는 듯한 기분에 사 로잡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술을 몇잔 마신뒤 마침내 착잡한 기분에 빠져들기 시작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되나? 이 태종대 바닷가가 밀수꾼 통로라 하지만 여기에 나타나는 밀수꾼들을 우리가 덮친다는 것은 봉사가 문고리 잡는 거나 마찬가지로 요행수다. 잘하면 내 일 바로 나타날수도 있겠지만 한달 두달이 지나도 헛탕만 칠수도 있는 일이다. 이 넓은 남해안에서 밀수꾼들이 이곳 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재수 없으면 1년 내내 지켜보았자 헛수고로 끝날지 모를 일이다.> 김호장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내가 어찌 이 일이 봉사 문고리 잡는 격이라는 것을 생 각 못하고 종태 제안을 덥썩 받아들였을까. 이건 정말 어리 석은 일이다. 그러나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는 싫다. 칼을 빼들었으니까 찔러는 봐야겠는데… 좌우지간 일단 부산에 왔으니까 부산에서 뭉기며 살자. 무슨 묘안이 나오겠지> 김호장의 기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황종태가 입을 열었다. “형님 낙심하지 마이소. 우째 첫 술에 배부를 수 있겠는 교? 밀수꾼들은 틀림없이 나타날 낍니더. 우린 인내심이 필 요합니더. 재수 좋으면 금괴 보따리를 털수도 있십니더. 두 고보이소. 밀수꾼들이 틀림없이 나타날 낍니더. 자, 한 잔 받으시고 힘 내이소” 김호장은 황종태의 잔을 받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대꾸했다. “우리 팔자가 무슨 상팔자라고 오늘 당장 밀수꾼이 걸려 들겠냐. 낙심 같은 건 안한다. 끈질기게 한 번 지켜보자” 김호장은 황종태에게 말은 그렇게 했으나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술이 어지간히 됐을 때 그들은 텐트속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러나 그들중 어느 누구도 쉽게 잠들지 못했 다. 귓전을 때리는 철썩거리는 파도소리 때문에 그들 각자 는 그들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그들이 잠에서 깼을 때는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야유회 나갔다가도 비를 맞으면 을씨년스 러운 법인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들 기분은 매우 언짢았 다. 잠시후 빗발이 더욱 굵어지며 바람까지 세차게 불기 시 작했다. 그들은 텐트 속에서 파도물결이 사나워지는 바다를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이윽고 억만이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아침을 지어 먹어야 할 게 아닌가?” 그는 김호장을 쳐다보았는데, 김호장은 아무 반응 없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석배가 라이터를 켜 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김호장은 담배 한모금 빤뒤 천천히 입을 열었 다. “자, 모두 나를 좀 봐라. 할 얘기가 있다. 억만아, 아침 은 늦게 먹어도 괜찮다.” 김호장은 세 명의 얼굴을 차례로 쳐다본 뒤 말을 이었다. “어젯밤 파도소리 때문에 잠을 좀 설쳤다. 파도소리를 들 으며 잘려니까 여러 생각이 자꾸 나더라. 사실 철석거리는 파도소리 때문이 아니라 그 여러 생각들 때문에 잠을 설쳤 겠지. 좌우간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또 담배를 몇모금 빨아댄 뒤 말을 계속했다. “밀수품 털어먹는 오징어 장사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생 각을 했다. 얼핏 생각해보면 여기 지키고 있으면서 밀수꾼 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처 럼 보이는데, 그러나 한번 해보자. 지형으로 보아 여긴 밀 수꾼들이 좋아할 곳이 틀림없다. 이 태종대를 둘러싸고 있 는 벼랑 밑 어딘가에 쾌속정과 접선할 전마선이 숨어 있기 도 좋고 육상패들이 쾌속정에서 밀수품을 넘겨받아 태종대 숲속으로 들어가면 종적을 찾기도 어렵게 되어 있다. 그래 서 나는 이곳에 밀수꾼들이 틀림없이 나타날 거라고 확신 한다. 그러나 그놈들이 언제 나타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 다. 다만 그때까지 우린 끈질기게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잘 참아야겠다. 이건 작전도 필요없다. 사냥꾼도 길목 지키 고 있다가 큰 짐승 잡으니까,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 그러 나 오늘 밤은 좀 쉬자. 승일이도 만나 부산 사정 얘기도 좀 듣고 오랜만에 부산에 온 회포도 좀 풀자. 그리고 내일부터 여기에 다시 진을 치고 느긋하게 기다려보자.” 회포를 풀자는 얘기에 억만이가 제일 좋아했다. 침울해 있던 억만이는 활짝 웃으며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역시 대장은 대장답다. 나도 그 생각이 간절했다. 부산 진역에서 이곳으로 직행했을 때 정말 섭섭했다. 난 부산에 7년만에 다시 왔는데 그 첫날밤을 이 해안가 탠트 속에서 보냈으니 말이 되는가! 물론 우리 사정이 단체로 여관에 들 어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섭섭한 마음 금할 수 없었다.” 억만이뿐만 아니라 이석배도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무런 말도 안했지만 억만이 말에 동의했기 때문에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황종태는 웃지도 않았고 아무 의사 도 나타내지 안했다. 그러나 김호장이 그에게 "종태 넌 어 떻게 생각하나?"라고 묻자, 그는 "좋십니더"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아침밥은 부산 시내에서 사먹기로 작정하고 텐트 를 걷었다. 탠트를 걷고 낚시 도구를 챙긴 뒤 그들은 자갈 마당을 떠났다. 그들이 자갈마당에서 떠날 때의 모습은 틀 림없는 낚시꾼이었다. 김호장 일당이 부산 시내에서 하승일을 만나 회포를 푼 뒤 다시 태종대에 진을 치기 시작한지 열 사흘째 되던 날 은 오후부터 비바람이 몰아쳤다. 파도 물결은 점점 거칠고 높아져 그 파도가 육지로 넘어와 그들의 탠트를 금방 덮칠 것 같았다. 빗줄기도 점점 굵어졌고, 바다 물결은 더욱 사 나워졌다. 그래서 바다 위에 떠 있던 전마선들은 어느새 다 없어졌고, 먼 바다 저쪽에 떠 있는 꽤 큰 화물선도 위태롭 게 보일 정도였다. 그날 하늘이 새까맣게 변하며 비바람이 막 몰아치기 시 작했을 때 김호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라는 유행가 가사가 있지.... 아 마 오늘도 공치는 날인 것 같다.” 그러자 황종태가 김호장 쪽을 돌아보며 즉시 진지하게 말했다. “아닙니더. 밀수꾼들은 오늘 같은 날을 노린다는 얘기를 들었십니더. 비바람이 몰아치면 세관 감시선이 활동을 안한 답니더. 풍랑이 심해지면 세관 감시선이 맨먼저 항구로 돌 아간다는 애기가 있십니더. 그 말이 일리가 있지 않는교? 바다가 저렇게 험한데 세관 감시선이 아까운 목숨 걸고 바 다 위를 감시하려고 돌아다니겠십니껴? 그래서 지 생각엔 오늘 밤이 가장 기대됩니더. 두고 보이소. 오늘은 오징어 장사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더!” 김호장은 황종태 애기를 듣고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밀수꾼들은 지 목숨을 안 아까워 하나? 이런 날에 배를 몰다가는 바다에 빠져 물귀신 될 건데 배를 몰겠나? ” "바로 그겁니더. 밀수꾼들이 어떤 놈들인교? 목숨 걸고 돈 벌려고 밀수하는 놈들 아닙니껴? 그리고 날씨 좋은 날 밀수하믄 세관 감시선이 길목을 지키고 있는 건 뻔하지 않 겠는교? 그래서 이런 날이 바로 밀수꾼들이 노리는 날이라 는 애기가 있십니더." "글쎄. 니 말 들어보면 일리가 있다만....그래도 그렇지. 저 렇게 험한 바다 위로 배를 몰고 가는 것은 자살 행위 같은 데 말이야." 황종태는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있는 투로 다시 말 했다. “그래서 밀수특공대 아닌교. 이런 날 세관감시선은 잽싸 게 항구로 돌아가지만, 밀수 특공대는 때를 만났다고 생각 한다 이겁니더. 두고 보이소. 지 예감에는 오늘 밤엔 틀림 없이 일이 벌어질 것 같십니더.” 김호장은 황종태를 한 번 흘낏 쳐다본 뒤 입을 다물고 먼 바다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으로는 황종 태의 말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 기색이었는데, 그것은 억만 이나 이석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황종태의 눈빛만은 평소 보다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윽고 밤이 되었는데, 비 바람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 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파도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퍼 졌고, 바다 위에는 아무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날씨 좋은 날에는 먼 바다에 떠 있는 배들의 불빛이 보였는데 그날의 바다 저편은 캄캄한 암흑뿐이었다. 밤 11시가 됐을 때부터 그들은 평소처럼 비상태세에 들 어갔다. 인기척이 나는지 신경을 쓰며 그들은 검은 바다를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풍랑 때문에 바다 위에는 전 마선 한 척 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밤 12시가 막 지났을 때 드디어 밀수꾼들의 접선 신호로 보이는 불빛이 짧게 번쩍 했다. 그 불빛은 왼쪽 방 향을 살피던 이석배가 발견했다. 이석배는 불빛을 보자마자 감격에 겨워 “형님! 불빛이 보였습니다”하고 낮게 속삭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힘 이 있었다. 이석배가 다시 말했다. “왼쪽입니다. 저 벼랑바위라는 곳의 밑에서 분명히 플래 시 터지는 불빛이 한 번 보였습니다!” 김호장을 비롯한 모두는 이석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 개를 돌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번엔 먼바다 쪽에서 불빛 이 또 한번 깜박했다. 그 불빛을 보고 황종태가 다급한 목 소리로 말했다. “형님, 드디어 밀수꾼들의 배가 왔십니더. 바다 위에서 번쩍했던 불빛은 틀림없이 쾌속정에서 보낸 신홉니다. 그리 고 벼랑바위 밑에서 나온 불빛은 육상운반책이 보낸 신홉 니다. 이제 곧 벼랑바위 밑에서 전마선이 쾌속정 쪽으로 나 갈 겁니더. 이제 살글살금 저쪽으로 옮겨야겠습니다. 틀림 없이 망을 보는 놈이 숨어 있을 거니까 소리 내지 않고 조 심조심 접근해야 돼니더.” 김호장은 벼랑바위 쪽을 잠시 노려보다가 낮게 말했다. “알았다. 저쪽으로 가자!” 김호장이 낮은 포복 자세로 움직이자 모두 포복 자세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비바람속을 납짝 엎드려 소리나지 않게 왼쪽 방 향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잠시후 황종태가 김호장 귀에 속삭였다. "형님, 이제부터 지가 앞장 서겠십니더. 저 벼랑바위까지 가는 지형은 지가 잘 알고 있십니더. 저곳에 접근해 망 보 고 있는 놈만 찾아내 소리없이 처치해버리면 그 뒤부턴 아 무 문제 없을 낍니더." 그들이 바닷가를 끼고 20여미터쯤 기어갔을 때 전마선 한척이 바다 쪽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배를 발견 하자 땅바닥에 더욱 납짝 엎드렸다. 그 전마선을 보고 황종 태가 김호장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형님, 맞지요?” 그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고, 김호장도 득의의 미소 를 지으며 황종태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맞다.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그들은 다시 살금살금 기어서 바닷가의 둥그런 바위들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전마선 동태를 잠시동안 감시했 다. 그들이 전마선을 보고 있는 동안 먼바다 쪽에서 배 한 척이 소리없이 나타났다. 황종태가 그걸 보고 다시 말했다. “쾌속정입니더. 조금 있으믄 전마선에 탄 놈들이 쾌속정 에 올라가 밀수품을 옮겨 실을 겁니더” 김호장도 눈앞에 전개되는 모든 것이 신기했으므로 감탄 조로 대꾸했다. “죄다 니 얘기대로 돼가는구나. 이제 어떻게 해야 되나?" 황종태가 대꾸했다. "전마선이 나간 쪽으로 가서 망보는 놈을 빨리 처치해야 돼니더." "그럼 빨리 그쪽으로 가자." 그들은 다시 낮은 포복 자세로 기어서 움직였는데, 곧바 로 인기척을 느끼고 모두 납짝 엎드렸다. 밀수꾼 육상그룹 의 망보고 있던 던 놈이 기침을 했던 것이다. 그 기침 소리를 듣고 김호장이 황종태에게 속삭였다. “저 놈부터 처치해야 되겠지. 저놈은 내가 맡겠다” 김호장은 마치 먹이에 접근하는 표범처럼 날래면서도 소 리없이 인기척이 난 곳으로 접근해갔다. 그리고 번개처럼 튀어 일어나 망보고 있는 놈을 덮친 뒤 주먹으로 얼굴을 두 번 내려쳤다. 망보던 놈은 김호장이 턱의 급소를 가격했 으므로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김호장은 망보던 놈이 기절한 것을 확인하고 뒤를 향해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제 전마선은 그들의 밥이었다. 그들은 다시 엎드려 전 마선이 나간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 때문에 바다 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쾌속정은 물 론이고 전마선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비를 흠뻑 맞고 있 었지만 긴장 때문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 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전마선 형체가 나타났다. 그들은 더 욱 긴장하며 전마선이 나타난 쪽을 노려보았다. 전마선은 풍랑도 아랑곳하지 않고 빠른 속력으로 육지로 다가왔다. 그리고 배 대기에 좋은 바위 틈으로 접근했다. 밀수꾼들은 익숙한 솜씨로 전마선을 뭍에 접안시켰다. 그러자 배위에 타고 있던 놈들이 짐보따리를 하나씩 지고 배에서 내렸다. 김호장 일당은 숨을 죽이고 그 밀수꾼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밀수꾼들은 짐이 무거운지 운신을 제대로 못하는 기색이었다. 밀수꾼들이 끙끙대며 그들 앞으로 다가왔을 때 황종태가 김호장에게 신호를 보낸 뒤 먼저 용수철처럼 튀 어나갔다. 그리고 그는 앞쪽의 두놈을 양발차기로 단숨에 쓰러뜨렸다. 그의 발솜씨는 때를 만난듯 잽쌌다. 먼저 오른 발로 왼쪽 놈 턱을 걷어찬 뒤 중심이 다시 잡히자 왼 발로 오른쪽 놈 턱을 걷어찬 것이다. 전광석화같은 발놀림에 두 놈은 벌렁 나자빠진 뒤 일어나지 못했다. 황종태는 그놈들 의 턱의 급소를 정확하게 걷어찼던 것이다. 김호장은 그 뒤쪽 두 놈에게 주먹 한방씩 먹여 쓰러뜨렸 다. 나머지 한놈은 억만이가 멱살을 움켜잡은 뒤 박치기로 받아버렸다. 다섯 놈은 방어할 틈도 없이 당했기 때문에 나 중에 정신을 차린 뒤에도 어떻게 당했는지를 알지 못했다. 다섯명이 쓰러진 뒤 억만이와 이석배가 노끈으로 밀수꾼 들의 손과 발을 묶었고, 그 일이 끝나자 그들은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텐트가 있는 쪽으로 튀었다. 텐트가 있는 곳으로 도착한 뒤 그들은 또 잽싼 동작으로 텐트를 걷어냈다. 그리고 짐보따리와 텐트를 짊어지고 숲울 헤치며 산등성이를 넘었다. 그들은 땀을 뻘뻘 흘렸는데, 산 등성이를 넘은 뒤에야 그들은 짐을 내려 놓고 잠시 쉬었다. 그리고 김호장의 지시로 그들은 그곳에 탠트를 쳤다. 그들은 숲속에 탠트를 친 뒤에야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김호장을 중심으로 둘러 앉아 모두 담배를 꺼내 물었으나 비에 젖어 피울 수 없었다. 그들은 한동안 그저 멍하니 앉 아 있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그들은 할말을 찾지 못했다. 성사될 것 같지 않던 일이 성공했으므로 그들 모 두는 감격스러웠던 것이다. 침묵 끝에 이윽고 대장 김호장이 한마디 했다. “수고들 했다. 밀수품 털어먹는 오징어 장사는 봉사가 문 고리 잡는 격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성과가 빨랐다. 처 분은 종태가 맡기로 했으니까 내일 이 짐을 부산으로 빼낸 뒤 우리는 일단 흩어지자, 그리고 이걸 처분한 돈이 들어오 면 계획대로 하숙도 정하고 셋집도 구해보자. 그리고 내일 을 위해서 잠시 눈을 붙이는 게 좋을 게다. 석배가 누울 자 리를 만들어 봐라” 이석배는 가방속에서 침낭을 꺼냈다. 그들은 옷을 벗어 빗물을 짜낸 뒤 다시 그걸 입었고, 침낭을 하나씩 받아 지 퍼를 열고 그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새벽에 그들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비기 개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탠트를 걷지 않았다. 탠트 속에서 탈취했던 밀수품 괘짝을 헤체하여 배낭 속에 옮겨 넣는 작업을 했다. 밀수품은 화장품과 의류 등이었다. 그들의 배낭만으로는 탈 취한 밀수품을 한번에 옮길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두 사람 씩 짝을 지어 세 번에 걸쳐 교대로 아지트로 운반했다. 아지트로 밀수품을 옮겨놓은 뒤 그들은 하루종일 잠을 잤다. 그리고 저녁때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한 뒤 신사복을 말쑥하게 입고 시내로 나가 첫 거사 성공을 위한 축배를 들었다. 제8장 애첩의 본능 손경자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사람 밀수품을 종태가 털었나?> 한번 꼬리를 물기 시작한 그녀의 의문은 시간이 지날수 록 눈덩이처럼 커졌다. 그녀는 몸을 서너 번 뒤척이다가 엎 드려 턱을 괴고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며칠전 정부 박철수가 술에 만취돼 집에 예고없이 나타 났었다. 그가 예고없이 술에 만취돼 나타난 것도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박철수는 5·16이 터지자 어디론가 도망갔다가 부산에 다시 나타난 이후부터는 손경자 앞에서 매우 당당했다. 그 이유는 손경자와의 잠자리가 두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손 경자도 그 점은 인정했다. 박철수가 부산에 나타나 손경자 집에서 처음 잤던 날 정사가 끝난 뒤 그녀는 베시시 웃으 며 농담까지 했었다. “도망다니면서 보약만 묵었는교? 와 이리 힘이 좋아졌는 교?” 그 말에 박철수는 능글맞게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흐흐, 괜찮더냐? 물론, 괜찮았겠지. 그게 다 너를 위해 서 내가 노력한 결과이다. 그동안 나는 설악산에 숨어 있으 면서 뱀도 먹고 산삼도 먹었다. 오직 너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면서 말이야. ” 그러나 그가 설악산에 숨어 있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물론 그는 부산에 다시 나타나기 직전에 손경자를 의식하 고 보약은 사먹었다. 박철수는 음흉하게 웃으며 손경자의 터질듯이 풍만한 엉 덩이를 다시 쓰다듬기 시작했다. 손경자는 뱀 먹었다는 말 에 “뱀을 먹었어예? 아이 징그럽다. 저리 가이소.”하고 눈을 흘겼다. 그러자 박철수는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말 했다. “뱀만이 아니다. 너를 다시 만나면 널 죽여주려고 온갖 것 다 먹었다. 자, 봐라 또 일어선다” 그는 곧바로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거기에 대면서“어 때? 또 생각 안나나?”하고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색욕이 왕성한 손경자였지만 박철수가 그렇게 나오자 눈을 흘기며 “그만 자이소. 그 나이에 밝혀보았자 몸에 해롭십니더.” 라고 빈정댔는데, 박철수는 마치 능력 과시라도 하기 위해 서였던지 손경자가 말리는 것을 무릅쓰고 기어이 그녀를 눕혔다. 박철수는 자기 마누라를 나무토막 같은 여자라고 생각하 고 있었다. 그녀는 결혼한 이후 잠자리에서 즐거워하는 교 성을 질러댄 적도 없었고 요분질도 할 줄 몰랐다. 그래서 박철수는 돈을 좀 만지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외도가 잦았 는데, 그래도 그녀는 불만이 별로 없었다. 아무튼 박철수 는 나무토막 같은 마누라를 데리고 살고 있었기 때문에 손 경자를 애첩으로 만들어 놓은 뒤부터는 여자 생각이 나면 그녀 집에 나타났다. 그리고 오직 그 일 때문에 찾아왔으므 로 술은 마시지 않고 왔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밤늦게 나타난 박철수는 술에 만 취된 상태였고, 몸도 가누지 못했다. 그리고 했던 말을 또 하고, 했던 말을 또 되풀이 했는데 얘기 골자는 “그 새끼 들을 죽여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박철수가 계속 횡성수설 하자 손경자는 신경질적으로“여보! 당신이 죽이겠다는 사 람은 도대체 누구인교? ”하고 소리질렀다. 그러자 박철수 는 그녀를 잠시 노려보다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이렇게 말 했다. “그 새끼들, 내 물건을 털어먹은 놈들! 그 새끼들을 내 가 반드시 잡아 죽인다. 두고 보아라. 이 박철수는 그렇게 당하고 그냥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다” 박철수는 자세한 설명 없이 "죽이겠다"는 말을 되풀이하 다가 잠에 곯아 떨어져버렸다. 손경자는 박철수가 잠이 들자 혼자 생각했다. <이번에 들여오던 밀수품이 털린 모양이구나. 그게 얼마 치나 될꼬? 저 빈틈없는 사람이 우째 실수를 했노? 또 그 걸 털어묵은 놈들은 도대체 어떤 놈들이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더니 그놈들도 정말 대단한 놈들이구나.> 손경자는 박철수가 그놈들을 잡아 죽이겠다는 말에는 신 경을 쓰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 말을 그렇게 했겠지만, 그 녀는 박철수가 밀수품을 털어먹은 놈들을 잡을 수 있으리 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철두철미하게 비밀을 지키며 움직 이는 밀수세계에서 밀수품을 강탈한 자들을 찾아낸다는 것 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녀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박철수가 코를 골자 그에게 등을 돌리고 누워 잠 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조반상 앞에 마주 앉은 손경자는 넌지시 전 날 밤 얘기를 꺼냈다. “당신, 어젯밤 한 얘기 기억나는교?” 박철수는 그 물음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는 뚱한 표정 으로 국물을 떠먹기만 했다. 손경자가 다시 말했다. “당신, 어젯밤에 그러던데… 밀수품 털린 게 사실인교?” 박철수는 그 말을 듣고 버럭 화를 내며 “입닥쳐! 그 생 각만 하면 이가 갈리니까. 그 새끼들은 제명에 못 살끼다. 내가 기어이 잡아 죽여버릴테니까!”하고 내뱉었다. 손경자는 잠시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아양떠는 음성으로 “얘기좀 해주이소. 궁금해 죽겠는기라”하고 말했다. 박철 수는 손경자의 교태에 넘어가지 않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가 재차 아양을 떨며 얘기해달라고 하자 박철수는 “ 넌 알필요 없어!”하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침밥을 먹은 뒤 박철수가 대문을 나설 때 손경자는 속 으로 “흥! 나한테 화내 보았자 좋을리 없다. 종로에서 뺨 맞고 어디서 화낸다카더니 그 꼴이구나!”라고 속으로 중얼 거리며 그의 등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그날 양품점에 나갔다가 바로 황종태 전화를 받 았다. 손경자는 황종태가 아무 얘기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가 다시 나타났으므로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하도 반가 워 “니 종태구나! 어디 갔다 이제 왔노?”라는 말부터 했 다. 그러나 황종태는 차분하게 “누님, 할 얘기가 있는 기 라. 시간 좀 내주이소”했다. 손경자는 “지금 안 바쁘다. 이 근방 다방으로 온나”하고 말했는데, 황종태는 매우 신 중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누님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서 말은 못하고 어디 좀 갔다 왔어예. 그 얘긴 나중에 하겠십니더. 그러나 급한 일 이 있으니 좀 만나야겠어예” 손경자는“무슨 일이고? 답답하다. 전화로 애기할 수 없 나?”했다. 그러나 황종태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나중에 자세히 얘기할 낍니다. 지도 누님 되게 보고 싶 었어예? 지 생각에는 양품점 부근보다 어디 조용한데서 잠 시 만나면 좋겠십니더.” 손경자는 황종태에게 다급한 일이 생겼다고 판단하고 그 들이 밀회때 자주 이용했던 광복동 입구의 모란 다방을 만 날 장소로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황종태는 다방에 먼저 와 앉아 있었다. 그는 맨 구석에 앉아 있다가 손경자가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짓을 했다. 손경자는 황종태 모습을 본 순간 “종태한테 무슨일 이 있었던 게 분명하구나”라고 생각하며 그의 앞에 앉았 다. 황종태는 웃지도 안했다. 그전엔 밀회 때 만나면 먼저 수 줍게 웃는 게 특징이었다. 손경자는 그 웃음을 좋아했으므 로 자리에 앉자마자“니 우째 오늘은 웃지도 않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황종태는 엷게 웃었다. 그러나 커피를 시켜 다 마실 때까지도 황종태는 용건을 말하지 않았다. 답답해 진 손경자가 다그쳤다. “니 할 얘기 있다며? 뭐꼬?” 황종태는 묵묵히 탁자를 내려다 보고 있다가 담배를 꺼 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여 한 모금 빤 뒤 입을 열었다. “누님, 누님이 나좀 도와 주이소. 좀 어려운 일이지 싶지 만 누님은 할수 있을 끼라 생각하고 부탁합니더.” 손경자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망설이다가 “내가 도울수 있는 일이라면 뭘 못 도와 주겠노. 어서 말이나 해라. 답답 해 죽겠는기라.”하며 황종태에게 애정에 찬 눈빛을 보냈 다. 그 눈빛을 한동안 바라보던 황종태는 다짐하려는 듯 다 시 말했다. “누님을 내가 좋아하는 거 누님도 알고 있는교?” 손경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흘낏 한번 본 뒤 맣했 다. “나는 너 없으믄 몬 산다고 했던 말 잊어묵었나. 너 없 는 동안 정말로 너를 보고 싶었대이.” 황종태는 안심이 된듯한 표정이 되며 입을 열었다. “처분할 물건이 생겼십니더. 누님이 처분해주고 반만 나 에게 주이소. 반은 누님 몫입니더.” 손경자 눈이 커졌다. “그게 뭔데?” 황종태는 잠시 또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상당히 많십니더. 일제 물건들인데 가격은 누님이 알아 서 처분해 주이소. 그라고 그 이상은 안 물었으면 좋겠십니 더…” 손경자는 황종태의 표정을 잠시 살피며 생각했다. <야가 어디서 난 물건이기에 묻지도 말라고 하노? 어디 서 도둑질 한 물건이나. 아니야, 종태는 도둑질 같은 건 안 할 아이야. 그러믄, 뭐꼬?… 하여간 곡절이 있는 물건은 분 명하다. …어떻게 하지? 일제 물건이라면 없어서 못 파니까 우쨌든 처분해주자. 절반은 내 몫이라는데, 몬 한다고 할 이유가 없다!> 손경자는 생각을 가다듬고 환하게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가 걱정이어서 그렇게 심각하노? 그런 건 일도 아이 다. 누님이 책임지고 팔아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래이.” 말을 끝낸 손경자는 손목시계를 한 번 들여다 본 뒤 말 을 이었다. “벌써 열한시다. 우리 그 얘긴 그만하고 오랜만인데 어디 가서 점심 맛있게 먹자. …어때, 해운대로 갈까.?” 황종태도 그 제안이 싫지 않았다. 하승일이 임시로 만들 어준 아지트에서 김호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늦을지 도 모른다는 말을 해놓았으므로 그는 손경자를 따라 나섰 다. 그들은 다방에서 나와 바로 택시를 잡아 탔다. 손경자와 황종태는 택시 뒷좌석에 앉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 로의 몸을 밀착시켰다. 손경자는 비록 택시 뒷 좌석이긴 했 으나 오랜만에 황종태의 허벅지가 자신의 허벅지와 맞닿자 즉시 관능의 물결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 바짝 황종태 쪽으로 몸을 붙였다. 황종태도 다방을 나설 때부터 손경자가 자신을 호텔로 데리고 갈 것이라는 것을 짐작했으므로 택시에 올라타자마 자 손경자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택시가 출발한 뒤 그들은 운전수가 눈치 못채게 신경을 쓰며 서로를 조심스럽게 애무했다. 황종태의 손은 손경자의 허벅지를 더듬다가 원피스를 들치고 들어갔고, 손경자는 도 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표시로 한숨을 가볍게 한 번 쉰 뒤 황종태 바지 앞자크를 끌어내렸다. 택시 운전수는 백미러를 통해 두남녀의 행동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택시가 가는 쪽보다 백미러를 들여다 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다가 그 는 여자의 머리가 남자의 무릎 사이로 파묻이자 “히야! 이게 무신 일 이고?”하고 소리를 지를뻔 했다. 그러다가 그는 앞에서 달려오던 차와 피하기 위해 백미러에서 시선을 땠는데, 그가 다시 백미러를 들여다 봤 을 때도 여자는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연하가 분명한 사내는 등을 뒤로 젖힌채 눈을 감고 있었다. 흥분한 택시 운전수는 속으로 중얼거렸 다. “히야, 오늘 내 나고 처음으로 기똥찬 장면을 보고 있대이. …와, 저여 자 간 크구나. 젊은 놈팽이 데리고 놀면 저렇게 미치나? 가만 있자,…보 래이 저 년놈 나이 차이가 열살은 되겠재? …히야, 저년 괜찮은데, 저 사 내 아이 복도 많다! 나한텐 저런 가시나 안 걸리나!” 해운대에 도착하여 그들이 차를 세우고 내렸을 때 운전수는 음흉한 웃 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즐거운 시간 보내시소”했다. 그리고 운전수는 뜨거운 눈으로 손경자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그걸 보고 황종태는 즉시 눈이 매서워졌는데, 손경자가 옆구리를 찔렀으므로 참았다. 택시가 그들 앞을 떠나자 손경자는 “저 새끼가 다 본 모양이야”하며 재미있다는듯이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황종태 팔장을 낀 뒤 “밥은 나 중에 먹어도 되재? 어떻노, 저 호텔에 들어가 좀 쉬자”고 말했다. 황종태는 손경자의 몸에서 교태를 물씬 느꼈고, 반대할 이유가 없었으 므로 손경자가 끄는대로 따라갔다. 그들은 룸에 들어서자마자 지남철에 쇠붙이가 붙듯이 찰싹 껴안고 키 스를 하며 손으로는 서로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키스가 끝난 뒤 손경자는 불같이 뜨거운 눈으로 황종태를 쳐다보며 “ 옷은 내가 벗겨줄께”한 뒤 그의 몸에서 옷을 하나씩 벗겨냈다. 그리고 난 뒤 자신도 원피스를 벗은 뒤 팬티마저 벗어던졌다. 알몸이 된 손경자는, 그러나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는 황종태에게 입을 내밀며 키스부터 요구했다. 황종태는 한손으로 손경자의 잘룩한 허리를 껴안고, 다른 손으로는 그 녀의 풍만한 엉덩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윽고 손경자는 가픈 숨을 몰아쉬며 은근한 목소리로 “날 안고 침대 로 가줘”했고, 황종태는 기다렸다는듯이 그녀를 덥석 들어 안고 침대로 갔다. 침대에 눕혀진 손경자는 황종태를 받아들일 자세를 취했다. 눈을 감으 며, 두손으로는 황종태의 목을 껴안고, 다리는 이미 벌리고 있었다. 황종태는 거침없이 그녀 위로 올라가 키스를 하며 힘을 주었다. 손경 자는 곧이어 “음!”하는 소리를 낸 뒤 감미로운 신음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손경자는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간드 러지는 교성이 끊임없이 터져나왔고, 황종태는 그 교성을 음미하며 동작 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한 라운드가 끝난 뒤 그들은 침대에 벌렁 누웠다. 그들은 아무 말없이 그 자세로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손경자였다. 그녀는 황종태 쪽으로 돌아 누운뒤 입을 열었다. “…종태야, 난 너를 사랑하고 있어. 니가 없는 동안 난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깊이 깨달았다” 그 말에 황종태도 돌아 누우며 한쪽 손으로 머리를 받친뒤 손경자를 내려다 보았다. 손경자가 다시 말했다. “우리 어디 먼데로 도망가서 같이 살까?” 황종태는 물끄러미 손경자를 내려다 보며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 듬었다. 손경자가 물었다. “싫나? 나하고 같이 사는거 싫나?” 황종태는 고개를 가로저은뒤 말했다. “나도 누님을 사랑해. 그러나 어디가서 살아야 할지는 생각좀 해봐야 겠어. 우선 돈도 필요하고…” 그러자 손경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돈은 걱정 마래이. 내한테 우리 먹고 살만큼은 있다” 황종태도 말했다. “그건 누님 돈이야. 나에게도 돈이 있어야 해!” 손경자는 그 말을 듣고 한손으로 황종태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니 말 내가 이해 몬하는거 아이다. 부산만 떠나면 우린 같이 행복하 게 살 수 있을끼다. …시간 두고 연구해보자” 황종태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손경자는 황종태를 눕히고 자신이 그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손경자의 애무는 매우 정성스러웠다. 색욕을 채우려는 듯한 태도는 전 혀 보이지 않았고, 마치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황종태의 몸에 그녀의 사 랑의 감정을 쏟아냈다. 황종태 몸이 뜨거워지자 손경자는 장난끼어린 표정을 지으며 그의 몸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황종태 는 눈을 감았다. 그날 밤에 김호장 일당이 털었던 밀수품은 명세서와 함께 손경자 집 창고로 옮겨졌다. 김호장과 억만이는 리어카꾼으로 가장했기 때문에 손 경자는 그들이 모두 한패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이 손경자에게 넘겨준 밀수품은 시계·선글라스·화장품이 각 한 괘짝씩이었다. 여기까지 기억을 더듬던 손경자는 창고에 숨겨진 밀수품이 박철수가 탈 취당했던 물건인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떤 물건을 어디서 어떻게 뺏겼다는 얘기는 안하고 화만 냈으니 알 수가 없구나. …그라고, 종태가 털었을 리도 없다. 밀수품 운반하는 놈들 은 주먹깨나 쓰는 녀석들이라는데 종태 혼자서 어떻게 털어묵노. 종태는 원래 외톨박이 아이가.> 결론을 그렇게 낸 뒤에 손경자는 한 생각때문에 흠칫 놀랐다. <만에 하나라도 저물건이 그 물건이라면… 큰 일이다!> 손경자는 박철수의 사람 됨됨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일 창고의 물건 주인이 박철수라면 예삿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흠칫 놀 랐다. 충청도 건달패 출신인 박철수가 부산 바닥에서 십여년 굴러 먹은 끝에 밀수품 하주로 자리 잡았다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는 부산 건달 패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재력을 바탕으로 권력기관과도 선을 대고 있었다. 그러나 손경자는 박철수의 그와 같은 세력보다 그의 성격 을 더 두려워했다. 손경자는 박철수가 자신을 탐내며 접근해 올때만 해도 그를 돈많은 한 량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오판이었다. 어느날 손경자 양품점 앞을 지나던 박철수는 흘낏 그녀를 본순간 발길 을 돌려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물건을 고르는 척 하면서 손경자를 계속 훔쳐보았는데, 이미 넋이 빠진 상태였다. 그날 박철수는 일제 고급 넥타이 세개를 사들고 나갔는데, 다음날부터 그녀를 품에 안기까지 보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양품점에 나타났다. 눈치가 빠른 손경자는 사십줄에 들어선 그 놈팽이가 왜 날마다 가게에 와서 물건을 사가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물건을 팔 욕심으로 박 철수가 몇번 나타났을때 베시시 웃으며 “어머 또 오셨어요?”하고 인 사를 했고, 박철수는 인사를 받던 날 다방에 가서 커피나 한잔 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손경자는 가볍게 거절했다. “시간이 없는데요” 말은 거절했지만 표정은 박철수를 유혹하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머 금고 살짝 눈웃음까지 지었던 것이다. 박철수는 애간장이 탔지만 다음날 또 나타나 물건을 산 뒤 “오늘도 시간 없소?”했다. 이성관계에 있어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손경자는 박철수의 데이트 신청 에 응할 타이밍을 재고 있다가 결국 못이긴 척하며 그를 따라나섰다. 박철수는 쇠뿔은 단김에 빼려고 손경자를 데리고 송도로 나가 생선회 를 사준 뒤 그날밤 목적을 달성하고 말았다. 물론 그의 돈냄새를 맡은 손경자가 의도적으로 넘어가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 호텔에서 일이 끝났을 때 손경자는 박철수가 남자로서는 시원찮다는 것을 깨닫고 대단히 실망했다. <흥! 허우대는 멀쩡한 사람이 겨우 요정도야> 그러나 박철수가 남자 구실을 못한 것이 아니라, 손경자의 색욕이 절 륜했기 때문에 일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박철수는 그날 손경자 가 자기에 대해 실망했다는 것을 개닫지 못했다. 그는 그나이 또래에서 는 그 문제에서 뒤처지는 남자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손경자는 박철수에 대해서 만족못했지만, 박철수는 손경자에게 홀딱 넘 어갔다. <요거 참 사람 애간장 녹이는 가시나구나. 어떻게 할까. 내 것으로 만 들려면 돈을 써야겠지> 박철수는 정사가 끝난 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그녀가 미망인이라 는 사실을 알고 즉시 그녀를 애첩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일이 그렇게 되어 손경자는 박철수가 사준 집에서 그의 애첩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손경자는 오직 박철수의 재 력이 탐나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박철수는 손경자를 애첩으로 만든 뒤부터 그녀를 대하는 태도 가 까다로워졌다. 본처 단속하듯 손경자를 가둬 놓으려 했던 것이다. 양 품점 문도 닫게 하려고 했지만, 손경자가 워낙 앙탈을 부리니까 가게를 확장시켜 주면서 무마했다. 그러나 그는 손경자의 색욕이 남다르다는 것 을 알게 됐으므로 그녀의 행동거지는 철저하게 체크했다. 손경자도 박철수가 그렇게 나오자 지능적으로 대처해 나갔는데 결국 은 사단이 나고 말았다. 손경자 가게 건너편에 신장개업한 양과점 주인은 서 른살이 넘은 노총각이었는데, 그 사내 또한 손경자를 처음 본 순간 홀딱 반해버렸다. 그 사내는 촌스럽게 연애편지를 써댔고, 손경자가 반응을 안 보이자 어느 날은 그녀가 가게문을 닫고 퇴근할 때 뒤를 따르기 시 작했다. 그는 손경자 뒤를 따르며 기회를 엿보다가 그 녀 앞을 가로 막고 시간을 잠깐만 내달라고 졸라댔다. 분방한 손경자는 그 사내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녀는 사내와 함께 부근 다방으로 들어갔는데, 공교롭게도 거기에 박철수가 누군가와 같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박철수는 손경자가 웬 사내와 함께 다방으로 들어서 자 들고 있던 신문으로 재빨리 얼굴부터 가렸다. 그리 고 그들이 눈치 못 채게 두 사람이 수작하는 것을 살 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손경자는 그 사내가 무슨 말을 하면 호호하고 웃기도 하며 천부적인 교태를 부 렸다. 손경자는 그 사내에 대해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 기 때문에 틈을 보고 있다가 바쁜 일이 있다며 다방에 서 나와 곧장 집으로 돌아왔는데, 박철수가 곧바로 벌 겋게 상기된 얼굴로 집에 나타났다. 그는 방안에 들어 서자마자 손경자를 조지기 시작했다. “이 갈보 같은 년! 내가 다 알고 왔다. 그 놈팽이는 양품점 건너편에 새로 개업한 양과점 주인이지? 너 그 새끼와 몇번 붙었냐?” 손경자는 어처구니가 없어“무슨 말씸을 그렇게 하 는교?”하고 맞받았는데, 그 순간 박철수의 주먹이 그 녀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녀는 눈에서 불이 번쩍하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박철수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분을 참지 못 하겠는 듯 방바닥에 주저앉은 손경자를 발로 짓이기며 "이년아! 사실대로 불지 않으면 죽이고 말겠다. 그 놈 과 몇 번 붙었냐?"고 욱박질렀다. 그러자 손경자도“니 가 내 서방이가? 와 남의 사생활을 간섭하노!”하고 소리질러댔다. 그 말을 듣고 박철수는 능글맞게 웃어 대며 말했다. “남의 사생활? 웃기지 말아 이년아! 나는 엄연히 니 서방이야. 집도 사주고 생활비도 주고 있으니 니 서방이 아니고 뭐냐? 내가 자선사업가인줄 알았더냐? 이 천하의 색골년아, 그 놈하고 몇번 붙었냐? 안 불 래? 불도록 만들어줄까?” 속사포를 쏘듯 그렇게 내뱉은 박철수는 또다시 손경 자를 발로 마구 짓밟았다. 초저녁에 시작한 그 주먹질은 밤늦도록 계속됐는데, 손경자는 두번이나 까무라쳤다가 깨어났고, 나중엔 주 먹을 맞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공포에 질린 손경자는 “제발 살려주이소”하고 빌었 는데, 그것도 소용없었다. 박철수는 잔인한 미소를 지 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살려줘? 야 이년아, 너 같은 년을 살려줘? 너를 죽여 바다에 던져 버릴 거야. 그리 고 그놈도 죽일 것이다”고 말한 뒤 또 주먹질을 했 다. 손경자는 너무 많이 맞아 이틀동안 운신을 못했다.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뼈마디 가 쑤셔댔다. 그녀는 얼굴에서 멍이 빠질 때까지 바깥 출입을 전혀 못했다. 물론 가게에도 나갈 수 없었다. 그런데 손경자는 몸이 쾌유돼 가게에 나갔다가 더 겁나는 얘기를 들었다. 양과점 주인이 밤길에 괴한들 에게 몰매를 맞고 병원에 입원했는데, 상당히위독하다 는 것이었다. 손경자는 그게 누구짓인지 짐작했으므로 그 애기를 듣는 순간 새파랗게 질렸다. “아이 무시버라. 그 새끼 정말로 독종중의 독종이구 나! 세상 천지에 남자가 널려 있는데 하필이면 우째 그런 놈이 나에게 걸렸는고!” 손경자는 박철수의 성난 모습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 다. 그 양과점 주인은 나중에 회복됐지만, 반병신이 되 었다. 그는 병원에서 퇴원한 뒤 가게를 처분하고 어디 론가 사라져버렸다. 그 사건 이후 손경자의 뇌리 속에는 박철수에 대한 공포가 깊이 자리잡았다. 한동안은 박철수가 찾아와 잠자리를 같이 해도 몸이 달아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손경자가 그렇게 무서워하는 박철수를 곁에 두고도 가끔 남자 사냥을 다녔던 것은 그럴만한 틈새가 있었 기 때문이었다. 박철수는 마작광이어서 어디서 마작판을 벌이면 사 나흘씩 연락이 되지 않았다. 손경자는 그런 때를 이용 해 가끔 카바레나 나이트클럽으로 놀러다녔던 것이다. 손경자는 박철수가 두려워 한 남자와 두번은 만나지 않았는데, 황종태와의 경우는 예외였다. 그녀는 황종태 와 몸을 섞은 뒤 남성으로서의 황종태에게 홀딱 빠지 고 말았었다. 한 번 정사를 나눈 뒤 그냥 헤어지기는 너무나 아쉬었고, 그렇다고 부산 바닥에서 그를 또 만 난다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크다고 판단했으므로 그녀는 과감하게 그를 데리고 서울로 갔었다. 공교롭게도 그 밀월여행 때 5.16이 터져 박철수는 부산을 떠나 어디 론가 도피해버렸으므로 그녀는 마음 놓고 황종태와 놀 아날 수 있었다. 결국 그 인연 때문에 비록 손경자가 연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 떨어져서는 살 수 없을 정 도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말있다. 밀수품을 털린 박철수는 손경자의 예상대로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그는 우선 부산 시내 밀수품 유통 통로에 비상망을 쳐놓았다. 밀수꾼들이 들여온 물건은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유통되는데, 장물이 유통될 때는 반드시 흔적이 나타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 었기 때문에 덫을 쳐놓았던 것이다. “거래를 하지 않았던 놈들이 물건을 가지고 나타나면 바로 연락해달라.” 박철수는 요소요소의 비상망에 그렇게 말해 놓았다. 그리고 그는 거래하던 육상책과 관계를 끊고 새 인 물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태종대에서 밀수품을 양륙하 다가 당했던 패거리들은 한결같이 “무신 영문인지 도 무지 모르겠십니더. 비바람이 몰아쳐 앞이 잘 안 보인 데다가 그놈들이 번개처럼 급습했기 때문에 얼굴은 커 녕 몇명이었는지도 모르겠십니더!”라고 말했다. 그들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들은 상처를 많이 입지도 않았다. 황종태에게 턱을 발로 채인 두 놈은 왼쪽과 오른쪽에 각기 시커먼 멍이 들어 있었고, 김호 장에게 당한 놈들도 턱을 맞았지만 상처는 왼쪽이었 다. 억만이에게 박치기당한 놈은 이마에 뿔이 솟아 있 었다. 박철수는 그 상처를 살펴본 뒤 “그 놈들은 대단한 놈들이다. 군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놈들인가? 명색이 주먹으로 먹고 사는 작자들이 그놈들에게한방씩 맞고 뻗어버리다니 도대체 상상이 안되는 일이구나. 좌우지 간 물건을 강탈해 갈 때 몽둥이나 다른 무기를 사용하 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보통놈들이 아닌 것도 확실하고. 그러나 두고보자. 이 박철수 물건 털어 먹고 온전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놈들을 기 어코 잡고 말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박철수는 교분을 맺고 있던 경찰서 강력계 형사를 통해 부산시내 주먹패들의 리스트를 입수했다. 그는 리스트를 들여다보며 명성보다 싸움기술이 뛰어난 놈 들을 골라냈다. 그 명단을 가지고 그는 주먹패들을 차 례로 만나기 시작했다. 손경자는 황종태가 맡겨놓은 물건에 대한 예감이 안 좋았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처분했다. 손경자가 주도면밀하게 처리했으므로 그 밀수품은 박철수의 비 상망에 노출되지 않았다. 그녀는 처분대금 중 절반은 챙기고 나머지는 황종태에게 넘겨주었다. 돈을 넘겨주던 날 그들은 부산 시내 호텔에서 은밀 하게 만났다. 손경자는 꼼꼼하게 적은 계산서와 함께 돈을 황종태에게 건네 주었는데, 그는 돈은 세보지도 않고 호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걸 보고 손경자는 “ 맞나 안맞나 세봐라.”하고 눈을 흘겼는데 황종태는 “맞겠지예.”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한 뒤 의자에서 일 어나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황종태의 의도를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도 일어서서 그와 마주섰다. 색 정어린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황종태를 쳐다보며 먼저 말했다. "우리 그냥 헤어질 수 없지?" 황종태는 빙긋이 웃으며 그녀를 포옹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바짝 매달리며 그에게 입을 내밀었다. 황종태는 그녀가 밀어넣은 혀를 힘껏 빤 뒤 그녀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열정적인 하오의 정사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겼다. 그들이 룸에서 나오기 직전 손경자는 흐트러진 머리 와 화장을 매만지며 황종태에게 넌지시 말했다. “종태야, 니 정말로 나에게 그 물건 어디서 났는지 말 안해줄래?” 황종태는 거울속의 손경자 모습을 지켜보며 “나중 에 얘기해 줄끼요. 이제 고만 물어보이소."라고 대꾸했 다. 손경자는 황종태의 얼굴을 흘낏 쳐다본 뒤“알았 다. 알았어. 이제 안 물어볼께”라고 말했지만, 황종태 의 표정에서 그 물건에 곡절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달래는 목소리로 그에게 다시 “혹시 너 나쁜 짓 하고 있는 거 아이가?”하고 물었 다. 그말에 황종태는 “어떤기 나쁜 짓이라는 말인교? ”하고 화를 냈다. 그러자 손경자는 일어서서 황종태 의 손을 잡으며 “알았어. 화내지 마, 이젠 정말 안물 어볼께”라고 말하며 그를 가볍게 껴안았다. 거금을 거머쥔 김호장 일당은 부산 시내에 완벽한 아지트를 구축했다. 초량동에 아담한 적산집을 전세내 김호장의 거처로 삼았고, 나머지는 하숙을 구했다. 그들은 전세집을 구할 때 포위당하거나 기습당할 때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통로가 있는 집을 구했다. 그 집에 가재도구며 침구까지 갖췄을 때 이석배가 김호장에게 농담을 던졌다. “형님, 이제 장가 가실 준비는 다 됐습니다. 부산에 서 색시 하나 구해 식까지 올립시다” 김호장은 그말에 빙긋이 웃기만 했는데, 그의 뇌리 속에는 갑자기 춘심이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때 그는 무심코 이런 생각을 했다. “어떤 색시가 나같은 악당과 같이 살수 있겠나. 혹 시 모르겠다. 춘심이라면 모든 걸 이해해 주고 정성을 바치겠지” 아지트가 마련된 뒤 김호장은 그날 밤 아지트에서 술판을 벌엿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부하들에게 행동 지침을 엄격하게 시달했다. “남의 것 털어먹는 우리 생활은 서울과 비슷하나 크 게 다른 점이 있다. 도박판을 털던 일은 현금을 털었 으므로 현장에서 붙잡히지 않으면 꼬리가 드러나지 않 지만, 밀수품은 처분해야 현금이 되므로 꼬리를 감추 는 게 대단히 어렵다. 처분하려는 밀수품을 수사기관 이나 세관에서 냄새 맡으면 곧바로 추적당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추적이 시작되면 어느날 한꺼번에 모두 당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일할 때 말 고는 우린 같이 어울려 지내는 게 안좋다. 억만이는 부산에 친구들이 있을테니까 그쪽으로 붙어 지내라. 종태는 부산 토박이이니까 요령껏 지내도록 하고, 석 배는 어떻게 할까? …넌 냄새를 잘 맡으니까 국제시장 이나 그런데 돌아다니며 정보를 입수해 보아라. ” 남포동 뒷골목의 하승일 술집은 장사가 잘 돼 날로 번창했다. 바걸 여섯명을 고용한 하승일은 술집 주인 으로 만족하게 살 수 있었지만, 김호장과의 의리 때문 에 그들과 은연중에 한패가 되었다. 그의 임무는 연락 책이었다. 암호로 이뤄지는 그들 사이의 모든 연락은 하승일 술집을 통하기로 그 자리에서 결정됐다. 누구 든 연락할 일이 생기면 하승일 술집으로 가서 칵테일 한잔 마신 뒤 암호를 남겨놓기로 했다. 김호장 일당의 밀수품털이 조직은 꼬리를 안잡히려 고 마치 비밀결사처럼 철저한 행동지침 아래 활동했지 만, 그들이 계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단서가 박철 수에게는 곧바로 포착되었다. 김호장의 조직관리나 계획등은 완벽했지만 미처 깨 닫지 못한 실수 하나가 그렇게 만들었다. 부산 밀수세 계에서 해안으로 양륙되던 밀수품이 일년에 두세번 정 도 털렸다면 그 일 자체가 소문없이 묻혔을 것이다. 이쪽 오키도리패가 저쪽 것을 털어먹고, 저쪽 오키도 리패가 이쪽 것을 털어먹는 일은 가끔 일어나는 일이 었다. 또 밀수품 운반 책임을 맡은 오키도리패가 슬쩍 먹어치우고 누군가에게 당했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경 우도 가끔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건은 대개 소문없이 묻히고 마는 게 밀수세계의 속성이었다. 그런데, 김호장 일당은 무모하게도 두달동안 밀수품 을 세번 털었기 때문에 결국 박철수에게 꼬리를 보이 고 말았다. 김호장 일당은 암초가 많아 세관 감시선도 드나들기 를 꺼리는 청학동 앞바다에서 그들로서는 세번째 작전 에 성공했고, 손경자가 그 물건을 처분해주겠다고 약 속해 의기양양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청학동 앞바다를 통해 양륙되던 밀수품이 정 체불명의 괴한들에게 털렸다는 소문이 밀수세계에 은 밀하게 퍼지기 시작했고, 이 소문이 박철수 귀에도 들 어간 것이다. 박철수의 졸개가 그 소문을 듣고 즉시 보고했다. “오늘 국제시장에 갔다가 들었는데예, 열흘 전쯤 청 학동 앞바다로 들어오던 물건이 또 털렸다 캅니더.” 박철수는 “그래?”하고 반응했지만, 내심으로는 뭔 가 잡힐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무척 반가웠다. 그는 잠 시 생각에 잠겼다가 신중한 어조로 졸개에게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졸개는 더 이상의 사실은 아무것도 몰랐으므로 자신 없는 투로 대답했다.다. "국제시장에서 장사하는 엄씨를 아시지예?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그 엄씨에게서 그 소문을 들었십 니더." 박철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는 졸개와 더 이상 애기해보았자 소득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알았다! 그 소문을 너에게 말했던 엄씨를 내가 만 나봐야겠다. 자, 국제시장으로 가보자." 박철수는 당장에 졸개를 앞세우고 국제시장으로 갔 다. 소문 발설자라는 엄씨는 밀수품 중개상이었는데, 박 철수와도 거래한 적이 있었다. 박철수는 그의 가게로 찾아가 할 애기가 있다며 그를 부근 다방으로 데리고 갔다. 별명이 꾀돌이인 엄씨는 박철수와 나이가 비슷해서 둘 사이는 첫 대면이래 반말을 사용했었다. 다방에서 서로 마주앉자마자 박철수는 소문의 진상을 물었다. 그러나 엄씨는 당장에 딴전을 피웠다. “그 얘기? 나도 사실은 자세하게 몰라. 그러나 그 런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애” 엄씨가 꾀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박철수는 커피 한 잔으로는 그의 입을 열게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엄형, 날 좀 도와줘. 내가 술 한잔 근사하게 살께. 오늘밤 우리 해운각에서 기분 한번 내볼까?” 엄씨는 해운각이라는 술집 이름이 튀어나오자 금새 입이 벌어졌다. 해운각은 당대 부산에서 제일 가는 요 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엄씨는 마지 못해 응하 는 듯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저녁에 일이 있긴 있는데.... 그러나 뭐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취소하고 해운각 술 한 번 마셔보지." 박철수와 엄씨는 저녁 때 해운각에서 만나기로 약속 하고 다방에서 나와 헤어졌다. 사무실에 돌아온 박철수는 해운각 마담에게 전화를 걸어 밤에 자신이 데리고 가는 손님에게 최대의 서비 스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일에 이골이 나 있는 마담은 아양을 떨며 기생들에게 특명을 내려놓겠다고 약속했다. 박철수는 일부러 약속 시간보다 빨리 해운각에 도착 하여 마담에게 다시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 직후 엄씨 가 나타났는데, 마담과 기생들은 호들갑을 떨며 엄씨 를 박철수가 와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마담과 기생들 이 교태를 부리며 안내하자 엄씨는 기분이 좋아 입이 저절로 찢어졌다. 술상이 나온 뒤 마담과 기생들의 엄씨 홀리기 작전 이 개시되자 일이 의외로 쉽게 풀렸다. 엄씨는 기분이 한껏 좋아지자 박철수가 묻기도 전에 이렇게 호언장담했다. “그 사건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그날 당했던 놈들 을 모두 내가 만나게 해주겠네! 당했던 놈들에게 애기 를 직접 들어보게. 이건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인데 그 사건에 대해서 되게 알고 싶어 하니까 특별히 배려하 는 거야. 물론 비밀은 지켜질 수 있겠지? 나도 그렇게 판단되니까 만나는 것을 주선하는 것일세." 박철수는 의젓한 자세로 그 말을 받았다. “고맙네. 나는 두목이건 졸개건 한 놈만 만나면 족 하네. 자, 이제 술이나 즐겁게 마시세.” 그들은 기생들을 끼고 진탕나게 놀기 시작했다. 그 러나 엄씨는 즐거웠지만 박철수의 속마음은 편하지 않 았다. 태종대에서 밀수품을 강탈당했던 일이 새삼스럽 게 자꾸 떠올라 화가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박철수는 엄씨에게 향응을 제공함으로서 청 학동 앞바다를 통해 밀수품을 들여오다가 김호장 일당 에게 몽땅 털린 오키도리패 두목을 다음날 국제시장 안에 있는 다방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 사내는 낯짝은 멍청하게 생겼지만, 어깨가 떡 벌 어져 힘깨나 쓰게 보였다. 밀수세계에서는 자신에 대 한 소개 따위가 필요없었으므로 엄씨가 “서로 인사하 시지”하자 둘은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 박철수는 그 사내의 턱에 시퍼렇게 멍이 든 것을 발견 하고 “옳지 그놈들이 또 했구나!”하고 속으로 쾌재 를 부르짖었다. 자리에 앉은 뒤 엄씨가 그 사내에게 “애기해봐”했고, 그 사내는 기다렸다는듯이 얘기를 꺼냈다. 그 사내는 이렇게 말했다. “자세하게 얘기해드릴 게 없십니더. 달밤도 아니어서 사방이 캄캄했고, 느닷없이 당한 일이라 뭐가 뭔지 지 금도 알 수 없십니더. 퍽! 소리가 난 뒤 내 앞에 가던 놈이 쓸어졌고 곧 이어 나도 한방 맞고 기절했십니더. 내 생전에 그렇게 잽싼 놈들은 처음 봤어예. 이건 솔 직한 얘깁니더. 그놈들은 정말 귀신 같았십니더. 우리 가 깨어난 뒤 보니까 그놈들은 이미 아무 흔적도 남기 지 않고 사라져삐렸고, 물건도 없어졌십니더." 박철수가 차분하게 물었다. “그놈들은 전부 몇명이었소?” “우리들 중에서 세명이었다고 말하는 놈이 있고 네 명이었다고 말하는 놈도 있어서 그것도 확실하지 않십 니더. 좌우지간 번개보다 빠르게 우리를 덮쳤기 때문 에 우리는 손 쓸 틈도 없었십니더. 솔직히 말해서 어 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그놈들이 굉장하다는 생각도 듭니더.” “혹시 몽둥이나 다른 무기는 들지 않았던가요?” “우리들이 맞았던 곳의 상처를 볼 때 그 놈들은 몽 둥이 같은 건 사용하지 않았십니더.” 박철수는 더 이상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의 생각은 확실하게 가닥이 잡혔다. 그의 밀수품을 털어먹은 놈들이 부산 해안가에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 다는 사실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는 담배를 피워물며 이렇게 생각했다. <부산 해변 일대에서 이전엔 없었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전에도 가끔 밀수품을 털어먹는 놈들이 있었 지만, 그 짓만 전문적으로 하는 패거리는 없었다. 하여 간 그 놈들은 밀수품만 전문적으로 노리는 놈들이다. …그러나 어림도 없다. 내가 그것을 간파한 이상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다. 두고 보아라. 내 손에 그놈들은 죽든지 병신이 되고 말 것이다.> 그날 이후 박철수의 움직임은 더 분주해졌다. 박철수가 강력계 형사로부터 넘겨받았던 부산의 폭 력배 리스트는 그에게 별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 시점 은 5·16이 터지고 1년여가 지났지만, 폭력계가 아직 도 자라목처럼 움츠러들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눈에 띄는 인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거물급은 5·16 직후 후리가리에 걸려 잡혀갔거나 피신중이었다. 그리 고 그 리스트는 5·16 훨씬 이전에 작성된 것이어서 주먹세계에서 막 솟아오르는 신예들의 이름은 거의 누 락되어 있었다. 박철수는 리스트상의 인물 몇몇을 만나고 난 뒤 그 작업을 포기하고 새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 방법이란 직접 수소문하는 것이었다. 집요하게 쓸만한 인물을 구하던 박철수에게 드디어 좋은 소식이 날아왔다. 그 희소식이란 자유당말기에 부산진역을 무대로 활 동했던 역전파 두목 오두복이 군에서 제대하고 돌아왔 다는 것이다. 오두복은 군생활중 상관을 폭행해 육군 형무소에서 징역을 산뒤 제대했다. 성품이 난폭하고 방자해 그가 군에 입대하기 전에는 부산에서도 꽤 명 성이 있었던 주먹패였다. 박철수 졸개는 오두복이 부산에 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박철수에게 보고했다. “사장님, 옛날 얘기지만 오두복이라고 기억하십니 까. 부산진 역전파 두목이었는데…” 박철수는 기억을 더듬었다. 밀수 하주가 내로라 하 는 주먹패를 모를리 없었다. 박철수는 졸개에게 물었 다. “오두복? 기억나는데… 참, 그놈은 요새 어떻게 됐 나?” 졸개가 대꾸했다. “군에 들어갔다가 육군형무소에서 3년 징역을 살고 제대했답니더.” “그자가 부산에 나타났나?” “예.” 박철수는 그순간 이미 오두복을 포섭하기로 결심했 다. 오두복의 별명은 고릴라였다. 팔이 다른 사람들보다 엄청나게 길었고, 얼굴 생김도 고릴라와 닮았기 때문 에 어릴 때부터 그런 별명이 붙었다. 그는 육군형무소 에서 3년 징역을 살고 부산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앞날 이 암담한 상태에 있었다. 그의 조직인 역전파는 그가 입대하자마자 와해돼 버렸고, 또 5·16 깡패소탕 여파 로 조직 재건은 꿈도 못 꿀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전파 두목 시절에 그는 모자를 즐겨 쓰고 다녔는데, 부산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 모자는 빨간 색이었다. 그는 옛 졸개 신세를 지며 하 루 하루를 답답하게 보내고 있었다. 오두복이 유흥가에 몇번 출입한 뒤 그가 부산에 나 타났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그 소문이 박철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됐던 것이다. 오두복을 포섭하기로 작정한 박철수는 졸개를 은밀 하게 그에게 보냈다. 그는 졸개에게 이렇게만 말하도 록 지시했다. "다른 말은 할 것 없고, 이 말만 해. 우리 오야지가 돈이 많은 분인데 꼭 만나고 싶어합니더라고 말이야." 졸개는 오두복을 찾아가 그렇게 전했다. 오두복은 입대 전에도 돈 많은 사람들의 해결사 제의를 서너번 받았던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완력으로 분쟁을 해결 해주면 용돈도 푸짐하게 생겼었다. 궁한 처지에 있었던 그는 박철수의 졸개가 찾아와 "우리 오야지가 돈이 많은 분인데 꼭 만나고 싶어합니 다."라고 전하자 그 말을 해결사 제의로 짐작하고 대뜸 받아들였다. 오두복을 만나고 돌아온 졸개로부터 보고를 받은 박 철수는 대단히 만족해 했다. 그는 즉시 메모지에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적은 뒤 졸개에게 주면서 말했다. "넌 이걸 전해주면서 이 말을 꼭 해라. 우리 오야지 는 시간 안 지키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라고 말이 야. 그런 녀석들은 처음부터 훈련을 잘 시켜놓아야 한 다." 졸개는 큰 소리로 "예, 꼭 그렇게 전하겠십니더!"라 고 대답한 뒤 사무실에서 나갔다. 다음날 박철수는 초량동의 한적한 다방에서 오두복 을 만났다. 시간을 잘 지키라는 전갈을 받았기 때문에 오두복은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다방에 나타났다. 물 론 빨간모자를 쓰고 있었고, 박철수와 마주 앉아서도 그는 모자를 벗지 않았다. 박철수는 오두복의 그런 태 도를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놈은 소문대로 진짜 무뢰한이구나. 그러나 내가 계획하고 있는 일에는 이런 놈이 적임자일지도 모른 다. 부려먹는데 애를 먹을지 모르지만 일만 잘 처리하 면 되니까 예의 없이 굴어도 참을 수밖에 없겠지.>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박철수가 먼저 말을 꺼냈 다. “난 박철수라는 사람이오.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 만 알고 있으면 될 것 같고…. 오형은 군에서 영창 살 았다는데 고생이 참 많았겠소.” 오두복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뭐 고생이랄 게 있겠는교. 처음에는 어떻게나 뺑뺑 이 돌리던지 정신이 돌 지경이었지만, 자주 맞다 보니 까 견딜만 합디더.” 박철수는 오두복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이는 것을 보 고 ‘육군형무소가 지독하긴 지독한 모양이구나’하고 생각했다. 박철수도 육군형무소의 험악한 분위기에 대 한 얘기를 들은 바 있었기 때문에 그곳이 얼마나 지 독한 곳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오두복이 3년간 그곳에서 수형 생활을 했다면 독종 중의 독종이 됐을 거라고 짐작하고 이렇게 물었다. “육군형무소가 소문대로 지독한 모양이지요? 그러 나 저러나 잘 견디셨소. …오형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 만 오형이 군에 있는 동안 세상이 참 많이 변했소. 군 인들이 정권을 잡는 통에 세상이 살벌해졌지요. 오형 도 부산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고생깨나 했을지도 모릅 니다. 나도 한동안 숨어 살았소. 아무튼 이젠 옛날과는 다릅니다. 물론 혁명초기보다는 느슨해졌지만 예전 같 이 되려면 좀더 기다려야 될 겁니다. 오형이야 그때쯤 되면 할 일이 많아질 것인데… 그러나 저러나 오형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소?” 오두복은 여전히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감옥살이도 했는디 어디서든 못살겠는교. 지금은 옛날에 데리고 있던 알라 신세지며 뭘 할까 궁리중입 니더.” 박철수는 마치 그의 맏형이나 되는듯한 표정을 지으 며 이렇게 물었다. ”한다면 무슨 일을 할 생각이오. 내가 도울 수 있 다면 돕고 싶은데...” 박철수가 던진 미끼에 오두복은 쉽게 걸려들지 않았 다. 그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내사 못 살 거 없지요. 하루 세끼 정도는 얼마든 지 먹을 수 있십니더. 지금이야 세끼 밥만 묵고 살아 도 천국에 온 기분입니더.” 박철수는 이 대목에서 평소 하던 수법을 꺼냈다. 그 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원래 다방에서 사업 얘기 한다는 건 시시한 기라! 우리 오늘 저녁 약주나 한 잔 하면서 얘기합시다. 오 형의 귀향을 축하하는 자리를 내가 만들어 보겠소.” 하루 하루를 지루하게 보내고 있었던 오두복은 박철 수가 술을 사겠다고 하자 그 무뚝뚝하던 표정이 금새 풀렸다. 그는 박철수를 쳐다보며 마음대로 결정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박철수는 즉각 눈치를 채고 말했다. “오늘 저녁 6시에 이곳에서 다시 만납시다. 누가 끼면 곤란하니까 우리 둘이 만나서 내 단골 술집 해운 각으로 갑시다." 오두복의 얼굴은 그 말을 듣고 당장 생기가 돌았다. 그도 해운각이 부산 최고 요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오두복의 표정 변화를 간파한 박철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음흉하게 웃으며 한술 더 뜨는 말을 했다. “오형, 오늘밤 연애 한번 하소.” 이말에 오두복의 얼굴에서 미소가 번졌다. 그걸 보 고 박철수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오늘 밤 기대하소."라 는 말을 던졌다. 박철수는 다방에서 나와 오두복과 헤어질 때 그가 모자를 벗지 않은채로 인사를 하자 뒤돌아서서 걸으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저 오두복이라는 놈은 예의라는 건 전혀 모르는 놈이구나. 애비도 없이 제멋대로 자란 놈이겠지. 그러 나 어쨌든 쓸만한 놈이야. 오늘밤에 술 마시면서 더 탐색해 보면 확실하게 알게 되겠지.> 박철수는 저녁 때 오두복을 만나 해운각으로 데리고 갔는데, 거기서는 더 기가 찼다. 오두복은 술상 앞에서 도 모자를 벗지 않았던 것이다. 보다못한 기생이 얘교 를 떨며 “모자 벗으세요.”하고 말했는데, 오두복은 기생을 한번 쏘아보았을뿐 모자를 벗지 않았다. 박철수는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 몹시 불쾌했지만 꾹 참았다. 오두복은 박철수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자를 벗을 생각도 안하고 박철수가 따라주는 술을 냉큼냉큼 받아 마셨다. 박철수는 오두복을 심복 부하로 만들기 위해 꾹 참 으며 술자리를 능수능란하게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그 는 오두복 옆에 앉은 기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 너 오늘 니 손님 잘모셔! 잘 모시라는 뜻 알지? 지금 이 순간부터 내일 아침에 이 손님이 놓아줄 때까 지 모셔야 된다는 뜻이야, 알겠나?” 기생은 단골의 명령이었으므로 “좋아요!”하고 대 답했고, 오두복은 옆에 앉은 기생의 얼굴을 흘낏 한번 쳐다보았다. 오두복은 살살 눈웃음치는 기생이 마음에 들었고, 술판이 끝나면 끼고 잘수 있게 되었으므로 기분이 좋 아졌다. 그는 박철수가 따라주는 술을 덥석덥석 받아 마셨다. 박철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오두복에게 말했 다. “오형! 참, 오형이 뭐야, 야 두복아! 너 나하고 스무 살은 차이날 거야. 이 잔 받아마시고 오늘부터 나를 형님이라고 불러라.” 오두복은 그 말에 서슴없이 대꾸했다. “좋십니더! 형님이라고 부르겠십니더. …그런데, 형 님요 오늘밤 이 가시나내가 데리고 자도 괜찮은교?” 박철수는 오두복이 자신이 던진 미끼에 걸려들었다 고 생각하고 호탕한 척 웃어댄 뒤 경상도 사투리로 응 수했다. “허! 허! 허! 동생이 뭐라카노? 저 가시나들은 내가 시키는대로 한다카이! 오늘밤에 데리고 자고, 내일도 데리고 자고 싶으면 데리고 자라!” 오두복은 그 말을 받아 “형님, 오늘 기분 최고로 좋십니더! 형님이 최곱니더”라고 말했다. 박철수는 자신이 의도했던대로 진행되자 유쾌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날밤 술판이 끝난 뒤 박철수는 오두복에게 호텔을 잡아주었고, 기생은 마담의 묵인하에 영업이 끝난 뒤 오두복이게 갔다. 호탤 앞에서 헤어질 때박철수는 돈 봉투를 오두복의 호주머니에 집어넣어 주었다. 오두복 은 이게 웬떡이냐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오두복은 부산에 돌아온 뒤 졸개와 사창가에서 하룻 밤 자보았지만, 호텔에서 예쁜 기생을 끼고 자게 된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그날 밤은 꿈만 같았다. 오두복과 헤어진 뒤 박철수의 발걸음은 저절로 손경 자 집으로 향했다. 잠을 자다가 느닷없이 박철수가 나타나 잠에서 깨어 난 손경자는 별로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그러나 박 철수는 화를 내지 않았다. 손경자는 퉁명스럽게 “우 째 이렇게 취했는교?”하고 말했는데, 박철수의 대답 은 이러했다. “그놈들은 이제 죽었다. 내 작전은 이제 시작된다! ” 손경자는 박철수의 상의를 벗겨 옷걸이에 걸며 “그 놈들이란 게 도대체 누군교?”하고 물었다. 그러나 박 철수는 아무 반응 없이 바지마저 벗어 손경자에게 건 낸 뒤 “넌 몰라도 돼!”하며 이부자리 위에 벌렁 누 었다. 손경자는 그의 머리맡에 다가가 앉았다. 박철수가 내뱉은 작전이라는 것에 대해 물어보았자 말 안해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놈들을 붙잡을 수 있나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박철수는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린 뒤 한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만지며 말했다. “내가 누구냐? 내가 덫을 쳐놓으면 그놈들이 걸려들 게 되어 있는 거야. 이제 부터 나는 그 덫을 쳐놓을 수 있게 됐단 말이야.” 박철수는 말을 끝내자마자 손경자를 끌어 당겼다. 그녀는 전혀 기분이 나지 않았으므로 “아이, 술냄새! ”하고 투정을 부렸지만, 박철수는 손경자를 끌어당 겨 옆으로 누인 뒤 팬티를 벗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완강하게 거부는 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보, 당신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오늘은 그냥 자요.” 하고 말했다. 그러나 박철수의 손은 이미 그녀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손경자는 그순간 박철수의 기분을 맞춰주어야 그 작 전이라는 것에 대해서 알아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녀는 의도적으로 박철수의 품속으로 파고 들 었다. 박철수는 손경자가 품속으로 파고들자 그녀의 엉덩 이를 쓰다듬다가 한 번 찰삭 때리며 말했다. “요 색골, 너는 색골 중의 색골이야! 그래서 니 생 각만 하면 내가 미친다. …그렇지? 너도 니가 색골이 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그러자 손경자는 호호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원래 남자들이란 섹스 문제에 대해 여자들이 거짓말 로라도 추켜올려주면 좋아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박철 수는 달랐다. 특히 손경자와 그 행위를 할 때는 아무 리 몸 보신을 했다 해도 열등감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박철수로서는 그녀가 그렇게 추켜세워 주어도 넘어가 지 않았다. 그는 즉시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흥, 요게 말도 잘 지어낸다. 내가 언제 너를 그렇 게 만들어냈냐? 넌 타고 날 때부터 색골이야! 내가 니 말에 속을 줄 알았냐? 어림도 없는 수작하지마라. 내 가 없는 동안 넌 바람깨나 피웠을 것인데, 그러나 그 건 문제 삼지 않겠다. 왜냐? 그건 증거를 잡을 수 없 기 때문이야. 그래서 내가 부산에 없었던 동안에 있었 던 문제는 불문에 붙이겠다. 그러나 이제부턴 바람피 우다가 나에게 걸리는 날에는 어떻게 된다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겠지?" 손경자는 그말에 가슴 속이 뜨끔했지만 태연하게 받 아넘겼다. "무신 말씸을 그렇게 하시는교? 빨리 안아 주이 소." 그녀는 박철수의 입을 막기 위해 남자의 애간장을 녹이는 천부적인 교태를 부리며 그를 꼭 껴안았다. 박 철수는 잠시 그녀의 애무 공세를 받다가 그녀를 슬그 머니 눕혔다. 박철수는 원래 술에 취하면 성행위가 잘 안되는 사 내였다. 손경자는 그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속으로 는 또 "제대로 못할 주제에!"라고 중얼거리며박철수에 게 몸을 맡겼다. 그렇지만 그녀는 박철수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해야 그 작전 얘기를 들을 수 있다고 판단했 기 때문에 일부러 몸이 달아오른 태도를 보였다. 박철 수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응! 응!”하는 교성을 질러 댔고, 몸을 박철수에게 더욱 밀착시키며 요분질을 시 작했다. 박철수는 손경자가 일부러 숨넘어가는 반응을 보이 자 그것에 속아 용케 버텨나가다가 막판에는 힘이 빠 지고 말았다. 이전 같았으면 이럴 땐 손경자가 앙탈을 부렸지만 그날은 달랐다. 힘이 빠진 박철수가 손경자 몸 위에서 내려와 벌렁 눕자 그녀는 “여보,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이에요. 낙 심하지 마세요”하고 그를 위로했다. 손경자는 박철수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그의 기분을 달랬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뭔가 골똘히 생각하 는 표정이었다. 손경자는 마치 어머니가 애 달래듯 박 철수의 몸을 쓰다듬으며 “여보, 낙심하지 마세요. 내 일 아침에 다시 해요. 술 안마시면 당신 잘 하잖아요. ”라고 말한 뒤 그의 볼에 키스를 해주었다. 박철수는 그녀 쪽으로 돌아누우며 “오늘은 이렇게 그냥 자자.”하며 그녀의 알몸을 껴안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손경자가 말했다. “당신이 복수할려는 계획이 잘 되고 있는교?” 박철수는 그녀의 엉덩이를 어루만질뿐 대답이 없었 다. 손경자는 박철수의 입을 열게 할 수 없다고 판단 했지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복수는 무서워요. 조심하세요.” 박철수는 아무 대꾸 안하다가 손동작이 멈춰진 뒤 잠이 들었다. 손경자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똑바로 누웠다. 박 철수는 곧 코를 골기 시작했지만, 손경자는 갑짜기 엄 습하기 시작한 불안감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황종태는 그동안 세차례에 걸쳐 물건을 처분해 달라 고 했다. 손경자는 황종태가 화를 낼 것 같아 어디서 난 물건이냐고 묻지 않고 즉시 즉시 처분해주었다. 그 물건의 출처가 의심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그 물건을 처분하면 대여섯 달 장사한 것보다 더 벌었으므로 그 녀는 은근히 황종태가 또 가져오기를 기대하기도 했 다. 손경자는 황종태에게 세번째 물건 대금을 건내줄 때는 그의 반응을 떠보려고 “조심하래이!”하고 말해 보았었다. 그러나 황종태는 퉁명스럽게“조심은 뭘 조 심하라는교? 그런 말씸하시는 누님이나 조심하이소. ”하고 대꾸했었다. 황종태가 가져오는 물건의 출처가 의심스러웠으므로 손경자의 머리 속은 그 문제에 대한 궁리 때문에 날이 갈수록 복잡해졌고, 또한 가슴 속 한 구석에 자리 잡 기 시작한 불안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혼자 누워 잠 자려고 할 때 그 생각 이 떠오르면 온갖 상념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종태는 그 물건을 도대체 어디서 가져오고 있을 까? 모두 일제 상품이니까 밀수품이 분명한데 그 주인 은 누구일까? 종태가 특공대 밀수에 끼어들었는가?>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 추리는 사리가 맞지 않았다. <만일 종태가 특공대 밀수의 운반책이라면 그 물건 처분을 나에게 부탁할 리 없다. 밀수품 처분은 하주가 직접 하는 게 상식 아닌가. 그러면 도대체 뭘꼬? 종태 가 돈이 있는 누군가와 손잡고 직접 밀수를 하고 있 나? 밀수품 처분 경험이 없으니까 그 처분은 나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일까? 맞아. 그게 맞는 해석일지 모 르겠다!> 그렇지만 그럴듯하게 보였던 그 추리도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곧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황종 태에게는 밀수에 손댈 만큼의 돈이 없다는 것을 그녀 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태가 밀수꾼은 아니야. 누군가와 동업하려면 종 태도 돈이 있어야 되는데 종태에겐 그만한 돈이 없어! 또 나이도 어리고 패거리도 없는 게 분명한데 누가 종 태와 밀 수 동업을 하겠나? 이렇게 생각해 보아도 아 니고 저렇게 생각해 보아도 아니고 그러면 도대체 그 물건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그 물건이 밀수품인 것은 분명한데....> 손경자는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종태 친척 중에서 누가 밀수에 손대기 시작했나? 아직 아무것도 잘 모르니까 종태에게 운반도 맡기고 처분도 맡기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손경자는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명쾌한 결론 을 얻을 수 없었다. 오직 그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록 골치만 아플 뿐이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생각하 다 보면 박철수가 태종대에서 털렸던 밀수품과 황종태 와도 어떤관련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곤 했 다. 황종태가 최초로 물건 처분을 부탁했던 시점이 공 교롭게도 박철수의 밀수품이 털린 시점과 비슷했기 때 문이었다. 좌우지간 그녀는 황종태의 물건을 처분해줌 으로써 횡재를 하고 있었지만 불쑥불쑥 떠오르는 의문 과 불안 때문에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그날 밤도 잠들기 전에 그녀 머리 속을 지배한 것은 오직 그 생각뿐이었는데 , 박철수가 나타나 방안으로 들어서면서느닷없이 “그놈들은 이제 죽었다. 내 작전 은 이제 시작된다”고 내뱉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 는 박철수의 계획을 알아내려고 온갖 교태를 부려보았 던 것이다. 손경자는 박철수가 내뱉었던 말과 황종태가 하고 있 는 일과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 았지만, 막연한 불안감에 빠질뿐 아무런 결론도 못내 리고 잠이들었다. 손경자는 다음날 아침에 박철수에게 더욱 예뻐보이 려고 노력했다. 그녀는가능하면 그가 전날밤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그녀를 다시 껴안도록 유도해 보았다. 일부러 교태도 부려보고 눈치 못채게 도발적 자세를 취해 보았지만 박철수는 아무 반응 없이“시간없다. 밥 빨리 달라.”는 말만했다. 그는 밥상이 나오자 국물을 조금 떠먹고는 서둘러 옷 을 입고 그녀 집을 나갔다. 대문 앞까지 따라나갔던 손경자는 그가 멀리 사라지 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다. 저 사람의 복수 계획이 착 착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데, 만에 하나 그게 종태와 관련이 있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걸 우째야 좋 겠노?" 제9장 빨간모자의 출생비밀 기습의 명수통했던 왕년의 부산진 역전파 두목 오두복 의 고향은 울산 태화강 하류의 한적한 어촌이었다. 그 의 부친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기도 했고, 약간의 땅뙈기를 일구어 식량을 조달하는 어부겸 농부였다. 가정 형편은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빈곤에 시달리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순박했고, 모친 또한 양순해 서 집안 분위기는 언제나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 평화로운 가정에 오두복이 태어나면서 풍 파가 일기 시작했다. 오두복의 출생비밀이 그렇게 만 든 것이다. 오두복이 태어나기 이태전쯤 그 동네에 청년 한명이 나타났다. 고향이 강원도라고 밝힌 그 청년은 머슴이 건 선원이건 아무 일이나 잘한다며 일자리를 구했는 데, 큰 고깃배를 가지고 있었던 그 어촌의 유지 손씨 집에서 그를 고용했다. 그 청년을 동네에서는 누군가가 부르기 쉽게 그냥 강원도라고 불렀는데, 나중엔 강원도가 그의 이름이 돼 버렸다. 강원도는 얼굴은 원숭이처럼 생겼지만 체 격이 좋아 일을 잘했으므로 동네 사람들은 그를 싫어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면“강원도가 일하 러 간다.”고 말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강원 도 얼굴은 보면 볼수록 원숭이와 똑같이 생겼다.”는 말이 곧 뒤따랐다. 강원도는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경상도 울산까지 왔 는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도 그 점 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강원도는 일할 때 이외에는 잠을 자는 게 습관이어 서 곧 잠보라는 별명도 붙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사귀려 하지 않았고, 고깃배 선원일을 열심히 했다. 그 리고 일이 끝나면 잠을 잤다. 어디서든 잠을 잤다. 그런데 오두복이 태어나면서 그 평화로운 어촌이 약 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오두복이 태어나자마자 동네 아낙네들 입에서“오서방 아들이 강원도와 너무 닮았 다. 원숭이 처럼 생긴 그 얼굴이 어쩌면 그렇게 닮았 노!”라고 수근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두복의 백일이 지나고 이목구비가 자리잡혀 갔을 때쯤에는 누군가의 입에서“혹시 오서방 아들은 강원 도의 아들이 아닐까?"라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그 말 은 곧 동네에 퍼지면서 아낙네들끼리 모이면 그게 주 된 화제가 되었다. "우째 그렇게 닮았노?" "씨가 같은 가?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닮을 수 없 는 기라." "그러면 우째 그런 일이 벌어졌겠노? 오서방댁이야 말 살림밖에 모르는 여잔데..." "그러나 그건 알 수 없다. 남녀의 일이란 하느님과 당사자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넘어갈 수도 있데이." "호호, 경험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러나 그 말은 맞는 것 같애. 남녀의 그 관계는 당사자 이외에는 아 무도 모르는 경우가 많을 거야. 그러나 오서방댁처럼 저런 아이를 낳으면 들통나고 말지." 동네 아낙네들 사이에서 좋지 않은 애기들이 떠돌기 전에 이미 오두복의 모친은 아들을 낳은 뒤부터 집에 서 두문불출했다. 그리고 오서방은 어디서 무슨 소문 을 들었는지 마실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아들 얼굴 을 요리 살펴보고 조리 살펴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다. 동네 아낙네들이 오서방 아들 얼굴 모양에 대해서 더 수근댈쯤 강원도가 어느날 마을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오두복 모친이 강원도에게 겁탈당했다 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러나 그 소문은 추측으로 하는 말이었다. 당사자 강원도는 아무에게도 비밀을 털어놓지 않고 야밤에 도 주해버렸고, 오두복 모친은 그 문제에 대해 일절 함구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소문의 진실 여부는 오직 오두 복 모친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오두복 모친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아들의 모습이 강 원도와 너무 닮아가자 안절부절 못했다. 텃밭에 나가 밭일하다가 강원도에게 겁탈 한번 당한 일이 자신을 지옥같은 궁지로 몰아넣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 이었다. 원숭이 처럼 생긴 강원도에게 보리밭에서 일 하다가 꼼짝 못하고 겁탈당했을 때 그녀는 약간 분하 기는 했지만, 일이 그렇게 꼬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 었다. 그녀는 강원도를 쏙 빼닮은 오두복을 낳은 뒤 한숨만 쉬며 살다가 강원도가 마을에서 사라졌다는 얘 기를 들었던 날 자신의 앞날도 결심했다. 그것은 자신 도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오랜 망서림 끝에 그녀도 결국 남편 몰래 오두복을 데리고 정든 고향을 떠났다. 그녀가 정착한 곳은 부산 이었다. 오두복은 철이 들 무렵부터 그의 모친에게 아버지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다. “어무이, 아부지는 어디 있노?” 그의 모친은 아들의 그 물음에 항상 “나중에 얘기 해 줄끼다.”라는 말만 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니 아부지는 너와 똑 닮았다. 아마 지금은 강원도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말도 했다. 오두복은 국민학교에 입학한 직후부터 같은 반 애들 이 고릴라라고 놀려댔다. 다른 애들보다 기형적으로 긴 팔이며, 얼굴 생김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었는데, 그는 그 별명을 듣는 게 너무 싫어 별명을 부른 애들 과 매번 싸움질을 했다. 어린 오두복은 학교에서 그 일로 싸우고 집에 돌아 오면 몰래 거울을 들여다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오두복의 모친은 행상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기 때문에 아들 공부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오두복 도 천성적으로 공부하는 게 싫었으므로 학교에서는 이 미 문제아로 낙인 찍혀 있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오두복은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2 학년때 퇴학 당했다. 성격이 포악해서 한번 싸웠다하 면 상대가 항복할때까지 끝장을 봤는데, 결국 그 싸움 질 때문에 퇴학 처분을 당한 것이다. 중학교에서 퇴학당한 오두복은 동네 불량배들과 어 울려 지냈다. 그는 말석에서 심부름이나 해주며 불량 배들을 따라다녔는데, 곧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웃 동네 불량배들과 시비가 붙어 단체 싸움이 벌 어졌을때 오두복의 잠재력이 나타났다. 그는 겁이 없 었고, 포악해서 맞고 쓰러진 상대도 면상이 짓이겨질 정도로 밟아댔다. 그리고 남보다 긴 팔도 싸움에서는 절대로 유리했기 때문에 그는 금방 두각을 나타낸 것 이다. 한번 두각을 나타낸 오두복은 날로 급성장하여 스무 살이 되기 직전에는 부산진 역전파 두목이 되었다. 성장과정에서 나타나듯이 오두복에게는 사춘기시절 부터 사회규범 따위가 안중에 없었다. 비록 퇴학을 당 했지만, 중학교에 다니는 동안에 그가 가장 싫어했던 말은 도덕이나 윤리 같은 단어였다. 그는“도덕이 무 신 소용있는가, 그게 밥먹여주나?”라는 의문을 가지 기도 했었다. 또한 오두복은 누가 자기를 고릴라라고 놀리면 사생 결단으로 대들었듯이 자신의 용모에 굉장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 열등감이 그의 성격을 포악하 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성격을 잘아는 애들은 그를 매우 두려워했다. "오두복을 건드리면 뒷끝이 안 좋다. 그놈처럼 악질 은 없을 끼다." 이것이 오두복에 대한 평이었다. 그런데, 오두복은 얼굴 생김뿐만 아니라 이성문제에 있어서도 부전자전이라 할 정도로 닮은데가 있었다. 오두복이 열일곱 살 때였을 것이다. 무더위가 기승 을 부리던 어느 여름 밤에 그는 잠을 못이루어 골목으 로 나왔다. 그때 어느 집에선가 목욕하는 물소리가 났 으므로 그는 그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긴팔을 이용해 담 넘어로 집안을 들여다 보았는데, 젊은 여자가 수돗 가에서 목욕하는 게 보였다. 발가벗은 그 여자는 몸을 씻은 뒤 엉덩이를 쳐들고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그 순간 오두복은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아찔한 기분 에 사로잡혔다. 그는 여자의 뒤쪽에 있었으므로 쳐들 린 그 여자의 엉덩이는 그를 극도로 자극시켰다. 그는 숨을 죽이고 엿보다가 골목 좌우를 살핀 뒤 담 위로 슬쩍 넘어들어갔다. 고양이처럼 소리없이 담을 넘었으 므로 여자는 아무것도 눈치 못채고 엉덩이를 쳐든 채 머리에 물을 끼얹고 있었다. 오두복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어쩔줄 모르다가 여 자가 방안으로 들어가자 자신도 모르게 그 여자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그 여자를 덮쳤다. 30대 중반쯤 되는 그 여자는 전혀 저항을 하지 않았으므로 오두복은 겁탈에 쉽게 성공했다. 어둠 속에서 오두복이 그 여자를 껴안고 넘어뜨렸을 때 여자는 짧게 “누군지는 알고 해야 될게 아닌교?” 라는 말을 했는데, 오두복은 정신이 없어 아무 대꾸도 못했다. 오두복은 그야말로 번개로 콩을 볶아먹듯 허겁지겁 일을 끝냈다. 그리고 일을 끝내자마자 재빨리 여자의 방에서 나와 다시 담을 넘어 밖으로 나왔다. 그가 여 자의 방에서 나올 때 여자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누워 있었다. 골목으로 나온 오두복은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 다. 무엇보다도 여자와의 첫 교접이 너무나도 쉽게 성 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황홀했던 쾌감도 그 의 영혼까지 흔들어 놓아 그의 가슴은 부풀대로 부풀 었다. 그는 흥분 때문에 집으로 바로 들어갈 수 없었 다. 그는 골목 안을 서성거리다가 대로변으로 나갔다. 통금 시간이 넘었으므로 대로에는 인적이 끊겨 있었 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힌 뒤 다시 골 목으로 들어갔다. 그는 여자가 있는 집을 잠시 쳐다본 뒤 집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밤 오두복은 또 담을 넘어 그 여자를 찾아갔 다.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담을 넘은 뒤 그 여자의 방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잠시 망설인 뒤 그 여자가 자고 있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전날 처럼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일이 끝나고 오두복이 막 일어서려고 했을 때 그 여자는 오두복의 손을 꽉 붙들며 이렇게 말했 다. "총각, 내일부턴 안된데이! 집 주인들도 돌아오고 아 마 내일은 내 남편도 돌아올 끼다. 오늘로 끝이니까 그리 아소!" 여자는 그렇게 말한 뒤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오두 복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여자의 방에서 물러나왔다. 그 여자는 그 집에서 셋방을 얻어 살고 있었다. 오 두복이 겁탈했던 날 그 여자가 수돗가에서 발가벗고 목욕했던 것은 집주인 내외가 휴가차 시골에 갔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은 출장중이었다. 오두복은 다음날 대낮부터 그 여자 집에 사람들이 많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담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두복은 그날 이후 그 여자를 겁탈할 때 그 녀가 "누구인지는 알고나 하자." 고 내뱉었던 말에 대 해서 대단한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누구인지는 알고 하자는 얘기가 무슨 뜻인가? 누구인지 알아내 경찰에 고발하려고 그랬나? 그러나 그 여자는 반항을 하지 않 고 오히려 즐기는 것 같았으므로 그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말의 뜻을 해석할 수 없었다. 겁탈로 시작된 오두복의 여자 관계는 그 뒤로도 거 의가 겁탈로 이어ㅈ다.겁이 없는 사내니까 길에서 눈 에 드는 여자를 발견하면 뒤따라가 집을 알아놓은 뒤 밤에 담을 넘어가는 것이 그의 버릇이 된 것이다. 물 론 담을 넘어간 뒤에도 여자 방으로 침입하는 것이 불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되돌아나왔다. 오두복의 싸움 장기는 기습이었다. 동네 불량배에 불과했던 오두복이 부산진역을 장악한 것도 기습에 의 해서였다. 당시 부산진 역전파 두목은 짱구라는 별명의 양기태 였다. 그는 합기도 3단에 실전 경험도 많이 쌓아 부산 주먹세계에서 명성이 자자했었다.이름깨나 알려져 있 는 깡패들도 알고보면 속빈 강정이 많은 법인데, 양기 태는 누구와 대적해도 쉽게 지지 않을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명실공히 두목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그 양 기태를 오두복이 기습으로 꺾은 것이다. 동네 불량배로 부질없는 시비나 일삼고, 가끔 밤에 담 넘어 들어가 혼자 잠자고 있는 여자를 겁탈하며 지 냈던 오두복의 세력은 점차 확장됐다. 주먹세계란 이 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새로운 일거리를 찾지 않으면 조직 자체가 붕괴되고 만다. 세력이 어느정도 커지면 수입원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오두복의 세력이 그만큼 성장했을 때 그의 졸개 한 명이 어느날 이런 제안을 했다. “형님요, 부산진 역전파 짱구만 박살내면 돈도 많이 생기는데 짱구를 이길 수 있겠는교?” 오두복은 짱구 소문을 익히 듣고 있었으므로 내심 두려웠으나 졸개들에게 큰 소리쳤다. “짱구 같은 건 문제없다. 내가 어떻게 이기나 두고 봐라!” 다음날부터 오두복은 졸개 댓명을 데리고 부산진역 주변을 맴돌았다. 말하자면 양기태와의 일전을 위한 사전 정찰이었는데, 그는 주로 짱구의 동태를 세심하 게 살폈다. 사나흘 동안 역 주변을 정찰하며 짱구의 동태 파악 을 끝낸 오두복은 동네로 돌아와 졸개를 모아놓고 이 렇게 호언장담했다. “내일 짱구와 한판 붙겠다. 시간은 밤이다. 만일을 위해 너희들은 몽둥이를 들고 따라오라.” 졸개들은 오두복의 작전을 알 수 없었으므로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오두복은 졸개 중에서 쓸만한 놈 일곱명을 데리고 부산진 역으로 갔다. 졸개들은 빨래방망이만한 몽둥이를 옷속에 숨기고 그를 따라갔다. 오두복은 짱구가 몇시쯤 어느 길을 통해 집으로 돌 아가는지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역쪽으로 가지 않고 역 전 건너편 골목 어귀에 진을 쳤다. 졸개들은 오두복의 지시대로 띄엄띄엄 서서 역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대합실 앞 쪽에 짱구 모습이 보이자 오두복 은 졸개들에게 눈짓으로 따라오도록 명령한 뒤 앞장서 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골목 안으로 들어간 뒤 두 갈래 길이 나오자 오두복 은 그 자리에 서서 졸개들에게 지시했다. “짱구는 틀림없이 이 길을 거쳐 집으로 간다. 짱구 가 이곳에 나타나면 내가 그 새끼 멱살을 잡고 번개처 럼 박치기 할테니까 너희들은 그 순간 몽둥이로 그 새 끼를 사정없이 갈겨라!” 오두복은 일전태세를 갖추고 골목 가운데에 서 있었 고 졸개들은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짱구는 기습을 노리고 있는 패들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방심한채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오두복은 짱 구가 그의 앞을 지나려 할 때 그 긴팔을 내뻗어 짱구 의 멱살을 거머쥐었고, 그와 동시에 박치기로 짱구를 받았다. 그 순간 졸개들의 몽둥이가 짱구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오두복은 짱구를 넘어뜨린 뒤 그의 배위로 올라타고 앉아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졸개들은 발길질로 짱구 를 짓밟았다. 오두복은 짱구의 목을 조르며 낮고 매섭게 말했다. “짱구야, 넌 이 순간부터 역전을 떠나라. 그렇지 않 으면 니가 잠잘 때 너의 방에 기어들어가 목을 졸라 죽여버릴 끼다!” 기습 공격을 받아 인사불성이 된 짱구는 아무 대꾸 도 못했다. 오두복은 짱구의 목에서 손을 떼면서 다시 말했다. “난 두번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넌 내일부터 부산 진 역에 나타나지 말아. 말을 안들으믄 쥐도 새도 모 르게 죽여버리겠다!” 오두복은 짱구의 배위에 걸터 앉아 “알았나!?”하 는 소리를 연방 내질렀는데, 이윽고 짱구의 입에서 “ 알았십니더”하는 대답이 나왔다. 그러자 오두복은 일어서서 졸개들에게 “됐다. 이제 돌아가자.”한 뒤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기습 테러를 당한 짱구는 분을 삭일 수 없었지만, 역전을 떠나지 않으면 잠잘 때 찾아와 목졸라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이 귓속에 쟁쟁 울려 슬그머니 겁이 났다. 밤새 잠을 설친 짱구는 다 음날 아침 직속 부하 두명을 집으로 불러들여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 집에 돌아오다 습격을 당했다. 어떤 놈들인 지 도무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 난 상처가 아물 때까 지 집에서 당분간 쉬겠다.” 짱구는 협박을 당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졸개들 은 그 놈들을 붙잡아 한판 붙자고 흥분했지만 짱구는 묵묵히 있었다. 겁을 집어먹은 짱구는 역전으로 나가기 싫었지만, 나흘 후에는 다시 역전으로 나갔다. 그리고 귀가 길에 는 졸개들을 대동했다. 그날밤 문을 꼭꼭 잠그고 약간 불안에 떨었지만 아무 일 없었다. 그래서 짱구는 다음 날도 또 역전으로 나갔다. 그날밤도 경계했지만 아무 일 없었기 때문에 짱구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놈들은 어떤 놈들일까? 역전에 나가보아도 아무 일 없는데… 그냥 협박한번 해본기가? 그러나 기분은 안좋다.> 짱구는 오두복의 졸개 한명이 매일 자신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다음날 짱구는 또 역전으로 나갔고, 경계심이 약 간 풀린채 귀가했다. 그리고 긴장으로 연일 잠을 설 쳤으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짱구는 처음엔 꿈속에서 일이 벌어진 줄 알았다. 깊 은 잠 속에 빠져 있었는데 자신의 배위를 무거운 것이 짓누르는 것 같아 깜짝 놀라 깼다. 그리고 그 순간 자 신의 목에 칼끝이 닿아 있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짱 구는 “아뿔싸! 그놈이 왔구나!”하고 생각했지만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짱구의 배 위에 올라타고 있는 사내가 날카로운 목 소리로 말했다. “넌 내가 시키는대로 하지 않았다. 넌 오늘 죽어야 된다. 정말 죽고 싶어서 내 말을 안 들었겠지?” 그 말소리와 함께 칼끝이 목줄을 파고 들어오려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합기도 3단 실력은 무용지 물이 되었다. 공포에 질린 짱구는“오늘 내가 죽는기 가?”라고 생각하며 자포자기 심정에 빠지기 시작했 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은 짱구는 자신도 모르게 힘 없이 말했다. “잘못했십니더. 살려주이소! 정말 잘못했십니더!” 배위에 올라타고 있던 사내가 다시 명령조로 말했 다. “내일 니 부하들에게 내가 시킨대로 말하면 살려주 겠다. 너뿐만 아니라 니 졸개들도 내일 당장 역전을 떠나야 된다. 졸개들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겠나? 만 일 이 명령을 어기면 어느날 밤에 이 칼이 네 목에 박 힐 끼다. 내 말이 무신 뜻인지 알겠지?” 짱구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십니더. 시키는대로 하겠십니더.” 짱구의 항복을 받아낸 오두복은 다시 말했다. "넌 한 번 약속을 안 지켰으니까 믿을 놈이 못된다. 지금부터 눈을 감아라. 그리고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 써라. 내가 방을 나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 칼이 즉시 니 가슴에 꽂힐 것이다. 알았나?" 짱구는 다시 힘없이 대답했다. "잘 알겠십니더." 오두복이 짱구의 배 위에서 내려오자마자 짱구는 이 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썼다. 오두복은 잠시 짱구의 동 태를 주시하다가 마치 연기처럼 소리없이 짱구의 방에 서 빠져나왔다. 다음날 짱구는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그의 졸개들 도 역전에서 사라졌다.말하자면 다음날부터 오두복이 부산진역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짱구는 부산진역 주변에 얼씬도 못하다가 자유당 말 기에 밀수특공대 해상책으로 쾌속정을 탔다는데, 풍랑 을 만나 현해탄의 고기밥이 되고 말았다. 오두복이 역전파 두목이 된 직후에 그의 모친은 시 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그는 모친의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한 때부터 역전에 나가지 않고 병간호만 했다. 죽을 날이 가까워졌다고 깨달은 오두복의 모친은 어 느날 머리맡에 앉아 있던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두복아, 아무래도 난 곧 죽을 것 같다. …내 말을 유언이라고 생각하고 들어라. 니가 태어난 곳은 울산 장생포다. 뺀들말이라는 어촌인디, 살기 좋았던 곳이 다. …내가 죽으면 나를 그곳에 묻어래이. 바다가 보이 는 쪽이 좋겠다. 내가 몸만 성하면 내가 직접 가서 내 가 묻히고 싶은 곳을 알으켜 주겠다만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니가 알아서 골라라." 그의 모친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오두복 도 소리없이 울기 시작했다. 그의 모친이 말을 이었다. “나는 죽기 전에 태화강에 다시 꼭 가보고 싶었는 데 못 가 보고 죽게 됐구나. 태화강은 참 좋았데이. 강 물도 맑았고, 밀물 때는 바다 고기들이 강물로 많이 올라왔단다. 강물을 따라 올라가면 하얀 모래도 많았 고 대나무 숲도 있었다. 너도 그곳에 한번 꼭 가보아 라. 경치가 참 아름다웠는 기라. 니 고향 뺀들말도 좋 은 곳이다.” 오두복은 고향 얘기를 처음 들었기 때문에 눈이 커 지며 물었다. “어무이, 그라믄 부산이 내 고향이 아이고 울산이 고향인교?” 그의 모친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오두복이 또 물었 다. “그라믄 우째 부산에 와서 살게 되었는교?” 오두복 모친은 그 물음에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앗다. 그녀는 눈을 감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 다. “내 팔자 때문인기라. …내 팔자가 기구해 그렇게 됐다. …난 니 아부지 이름도 모른다. 강원도 사람이라 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동네 사람들은 그 사람 을 강원도라고 불렀다. 넌 니 아부지를 만날 수 없다 는 것만 알고 살아라.” 오두복이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더 크게 물었다. “어무이, 난 어무이 말을 이해 못하겠다. 왜 아부지 이름도 모르는교?” 그의 모친은 또 눈을 감았고, 그때 문득 오두복 머 리 속에 한 여자 모습이 떠올랐다. 열일곱살 때 겁탈 했던 여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여자는 오두복이 넘어뜨리자 “누군지는 알고 해야 될 거 아 이오?”했었다. 오두복은 그 여자가 했던 말을 떠올리 고 “어무이도 그렇게 되어 나를 뱄단 말인가”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서는 차마 물어볼 수 가 없었다. 창녀 집에 가든지 아니면 겁탈로 여자의 육체를 알 게 되었던 오두복은 수없이 상대했던 여자 중에서도 유독 그 여자만은 쉽게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 여자 가 수돗가에서 목욕하던 모습도 가끔 눈앞에서 삼삼했 고, 또 저항하지 않았던 그 여자의 태도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여자는 누군지는 알고 하자며 순순히 응했었다. 오두복은 그 여자의 몸도 뜨겁게 달아올랐었다고 기억 했다. 오두복은 단순히 호기심에서 그 여자가 목욕하 는 모습을 훔쳐볼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가 발 가벗고 머리를 감고 있었기 때문에 위 아래로 움직이 는 그 여자의 커다란 엉덩이가 그를 자극시켜 엉겹결 에 일을 저질렀다. 그리고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일이 끝나자마자 도망쳐 나왔지만, 오두복은 그 다음날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또 그 여자의 방에 또 기어들어 갔던 것이다. 그 다음날 부터는 그 여자의 남편이 출 장에서 돌아와 있었기 때문에 담을 넘고 싶은 생각은 꿀떡 같았지만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얼마 후 그 여자는 어디론가 이사가 버렸다. 오두복은 모친의 아리송한 말 때문에 머리가 극도로 혼란해졌고, 한편으로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모친이 자신의 부친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은 자신의 출생배경 에도 어떤 곡절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 기 때문이었다. 오두복은 참담한 기분속 에 빠지며 이런 생각을 했 다. <남자와 여자가 그렇게 해서도 아이를 배나? 그렇 다면 나에게 겁탈당했던 여자들 중에서도 내 아이를 낳은 여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남자와 여자 관계란 참으로 복잡하구나! 만일 내 아이가 이미 태어났다면 그 놈 신세도 나처럼 되는 게 아닌가?" 오두복은 자신이 겁탈했던 여자들을 한 사람씩 떠올 리며 잠시 기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오두복의 모친은 그 다음날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 는 유언에 따라 그의 모친을 장생포 해안 언덕에 묻었 다. 장례를 치를때 졸개들 이외에는 어른들이 없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호기심어린 표정을 지으며 구경 나왔다. 모친을 잃은 뒤 오두복에게는 두 가지 변화가 왔다. 장례를 치를 때까지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던 오두복은 모친 무덤곁을 떠나며 겁탈은 절대로 안하겠 다는 다짐을 마음 속으로 굳게 했다. <그기 그렇게 나쁜 짓인줄을 몰랐는 기라. 만일 그 런 일로 여자가 내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나를 찾을 수 있겠나. 그러면 나같은 아버지 없는 아이가 또 생 긴다.> 천애고아 신세가 됐기 때문에 처량한 감정 속에 빠 진 오두복은 여자를 절대로 겁탈 안하기로 굳게 결심 했다. <나같이 아버지 없는 놈이 또 생기면 곤란하다. 이 제 그짓은 안한다!> 그 이후부터 오두복은 여자 생각이 나면 사창가로 갔다. 오두복의 두번째 변화는 자신의 용모에 대해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오두복은 중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이래 모자를 써본 적이 없었는데, 모친의 장례 이후부터 원숭이처럼 생 긴 얼굴을 감추기 위해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어느날 오두복은 졸개 한명이 운동모를 쓰고 있는 걸 보고 “야, 그 모자 나도 한번 써보자”며 뺏어 써 보았다. 그러자 졸개들은 이구동성으로 “우와, 멋있 다. 앞으로 모자를 항상 쓰이소!”했다. 오두복은 그 소리를 듣고 즉시 대합실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서서 모자를 쓴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는 거울 앞에서 정면에서 보기도 해보고 옆으로도 서 본 뒤 모 자를 쓰고 다니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뒤 졸개들에게 “정말 괘안나?”하고 물었다. 졸개들은 오두복의 원 숭이처럼 생긴 얼굴이 모자를 썼다고 해서 크게 달라 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멋있십니더! 당장 그 모자를 쓰고 다니시소.”했다. 오두복은 그 말에 기분이 좋아 “정말이가?”하면서 활짝 웃었다. 그 이후부터 오두복은 잠잘 때 이외에는 항상 모자 를 쓰고 다녔다. 그는 밥먹을 때도 모자를 벗지 않았 다. 오두복은 병역기피자단속 불심검문에 걸려 강제 입 영당할 때까지는 모자 색깔에 관심이 없었다. 상점 앞 을 지날 때 새로 나온 모자가 보이면 곧바로 사서 쓰 는 게 그의 취미가 되었다. 입영할 때까지 그의 방에 는 모자가 스무개도 넘게 있었다. 외출할 때 그는 이 모자 저 모자를 한번씩 써 보고 난 뒤 그날 마음에 드 는 것을 골라 썼다. 출생이래 운이라곤 없었던 오두복에게도 군에 입대 한 후에 행운의 여신이 한번 찾아왔다. 그것은 그를 못살게 구는 상급자를 두들겨패고 탈영을 하다가 붙잡 혀 재판을 받을 때였다. 신병으로 전방부대에 배치된 오두복은 악질로 소문 난 내무반장을 만났다. 키가 작고 뚱뚱해 땅딸보라는 별명을 가진 내무반장은 오두복이 전입돼 신고할 때부 터 그의 가장 아픈 상처를 건드렸다. 내무반장은 오두 복이 신고를 마치자 대뜸 이렇게 놀려댔다. “우리 부대에 원숭이가 한마리 왔구나! 너, 어디서 왔어? 서울 창경원에서 왔나?” 내무반장은 오두복에게 “차렷!”하고 명령한 뒤 그 의 앞 뒤로 맴돌며 계속 씨부렁거렸다. “히야, 정말 원숭이를 닮았구나. 팔도 길고 얼굴 생 김도 그렇고…. 이 새끼 조상은 원숭이가 틀림없다… 니 어머니가 원숭이와 붙었나?” 오두복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화가 치솟아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그러자 내무반장은 그를 노려본 뒤 큰 소리로 다시 말했다. “이 새끼 좀 보게. 원숭이는 똥구멍이 빨갛다는 얘 기는 들었어도 얼굴이 빨갛다는 얘기는 못들었다. … 그래, 내 말에 비윗장이 상했다 이거지? 그렇다면 이 제부터 본관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겠다. 너는 맛좀 한 번 봐야 정신 차릴 놈이다." 내무반장은 험악한 얼굴로 오두복에게 명령을 내렷 다. "지금부터 땅에 머리를 쳐박고 원산폭격을 실시한다. 실시!” 오두복은 땅에 머리를 쳐박는 원산폭격이라는 기합 을 당하며 그 순간에 이미 내무반장을 작살내기로 결 심했다. <내가 저 새끼를 오늘 당장 죽이고 탈영할 끼다.!> 그러나 오두복은 기합이 끝날 쯤에는 그 생각을 바 꿨다. 부대 인근 지리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내무반 장을 작살내고 탈영해보았자 붙잡힐 게 뻔하다고 판단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삭이며 이렇게 생각했다. <좀 더 두고 보자. 이 부근 지리를 우선 알아야 된 다. 내가 지리만 알게 되면 내무반장 저 새끼는 골로 간다. 죽이지는 않겠지만 내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보 여주고 나는 탈영하겠다. 저 새끼가 이 오두복이 누구 인지 모르고 까불었겠지. 그러나 두고 보아라. 내가 누 구인지 그 맛을 곧 보여줄 테니까.> 오두복은 내무반장에게 복수를 한 뒤 탈영하기로 결 심했으므로 마음이 담담해졌다. 그는 내무반장에게 아 부를 하지 않았으므로 걸핏하면 기합을 당했다. 그리 고 내무반장은 그를 오이병이라고 부르지 않고 어디서 든 큰 소리로 "원숭아!"라고 불렀다. 그때마다 오두복 은 마음 속으로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래. 나는 원숭이다. 그러나 넌 원숭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곧 알게 될 것이다!> 오두복이 복수 계획을 짜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 치채지 못한 내무반장은 계속해서 오두복의 심기를 건 드렸다. 말끝마다 원숭이라는 말을 붙였고, 걸핏하면 기합을 주었다. 신고를 했던 날로부터 나흘 후 오두복은 남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알아냈다. 철조망을 넘어 남쪽으로 가는 길을 알아낸 오두복은 일과가 끝나기를 기다렸 다. 드디어 일과시간이 끝나고 휴식 시간이 되었다. 마 음의 준비를 끝낸 오두복은 혼자 앉아 있는 내무반장 에게 다가가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내무반장님, 제 빤스 속에 달아놓은 주머니 속에 돈이 좀 있어요. 여기서 드리면 남들이 볼테니까 이따 점호시간 전에 어디 조용한 곳에서 뵙고 싶습니다. 취 사장 뒤가 어떨까요?” 내무반장은 돈이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 커지며 은 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을 주겠다고? 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임마, 진작 그랬으면 기합을 안 주었지.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았다. 그래, 이따 점호 직전에 취사장 뒤에서 만나 자.” 취사장 뒤쪽에는 철조망이 있었고, 철조망을 넘으면 야산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곧장 도망가 면 남쪽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점호 직전에 오두복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취사장 뒤쪽으로 먼저 갔다. 거기에는 오두복이 낮에 숨겨 놓 은 몽둥이가 한개 놓여 있었다. 그는 몽둥이를 들어 몸 뒤에 감췄다. 곧이어 내무반장이 휘파람을 불며 나타났다. 그는 오두복이 돈을 주겠다고 했으므로 기분이 좋았던 것이 다. 내무반장은 오두복이 서 있는 걸 보고 “원숭이 냐?”하며 다가왔다. 오두복은 “예!”하고 대답한 뒤, 그가 접근하자 당장 몽둥이를 쳐들고 낮고 매서운 목 소리로 말했다. “내무반장 각하! 이 몽둥이로 한방 갈기면 니 골통이 깨지면서 넌 곧바로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게 될 것이 다. 까불면 죽여버릴 것이니까 내 말 잘 들어! ” 오두복의 태도에 내무반장은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 보았다. 오두복이 다시 명령했다. “자, 지금부터 명령한다. 그 자리에 빨리 꿇어 앉어! 꾸물거리면 골통을 깔테니까!” 내무반장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너 왜 그러냐?” 고 묻고는 비실비실 꿇어 앉았다. 오두복은 몽둥이로 내무반장을 위협하며 수건으로 그의 입에 재갈을 물렸 다. 그리고 두손까지 묶은 뒤 내무반장을 사정없이 패 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무반장의 약을 올리기 위해 주먹으로 그 의 면상을 갈겨댔다. 그리고 그가 쓰러지자 군화발로 짓이기 시작했다. 오두복의 복수극은 잔인했다. 내무반장은 오두복이 군화발로 짓이기자 곧 기절해버렸는데, 그가 기절한 뒤에도 오두복은 또다시 몽둥이로 내무반장을 사정없 이 두둘겨패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는 살기가 등등했 고, 만일 몽둥이질이 더 계속되었다면 내무반장은 생 명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두복은 점호 시간을 넘 기면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내무반장을 한 참 패다가 몽둥이를 내던졌다. 그리고 곧장 철조망을 넘어 산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러나 오두복의 탈영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전 방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체포되었다. 그리고 헌병대로 넘겨진 뒤 재판을 받게 됐다. 오두복에게 행운의 여신이 찾아온 것은 바로 이때였 다. 그는 부대에서 10여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는 산길 을 이용해 남쪽으로 무사히 내려왔지만 배가 고파 음 식물을 구하려고 마을로 내려왔다가 그를 수상하게 여 긴 주민의 신고로 체포되었다. 그는 이미 탈영병으로 수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헌병들에게 체포된 순간 신분 이 바로 드러났다. 그는 허기로 힘이 빠져 있었으므로 저항할 엄두도 못 냈고, 그의 손에 수갑이 채워졌을 때는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절망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의 사건을 담당한 군 검찰관은 그와 동향인 울산 출신이 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행운이었다. 군 검찰관은 오두복의 헌병대 조서기록을 들여다본 뒤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등병 주제에 내무반장을 폭행하고 탈영을 했군. …왜 그랬지?” 헌병대에서 수사받을 때 죽지 않을만큼 얻어맞은 오 두복은 검찰관 앞에서는 주눅까지 들려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는 검찰관의 질문에 풀이 죽은 목소리 로 간신히 대답했다. “지를 원숭이라꼬 자꾸 놀려대서 그랬십니더.” 그 말에 검찰관은 오두복을 한 번 쳐다본 뒤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내무반장 말이 틀린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그는 오두복에게 곧바로 “고향은 어디야?” 하고 물었다. 이때 오두복은 잠시 망설였다. 부산이라 고 대답해야 할지 울산이라고 해야 옳을지 생각하다가 그는 그의 모친이 임종 전에 알려준대로“울산입니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검찰관의 표정이 당장에 우 호적으로 바뀌었다. 그는 관심있는 태도로 오두복을 잠시 쳐다본 뒤 다시 물었다. “고향이 울산이라고? …울산 어디야?” 오두복은 그의 모친에게서 들었던대로 장생포의 뺀 들말이라고 대답했다. 검찰관은 오두복의 대답을 듣고 그의 조서기록을 잠 시 더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며 장 난끼 어린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원숭이라고 놀려대는 말이 그렇게 싫었더냐?" 오두복은 아무 대답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검찰관 이 다시 말했다. "원숭이처럼 생겼다고 놀림을 받았다해서 상급자를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두둘겨 패면 어떻게 되는 줄 몰 랐나? 전쟁 중이었다면 넌 총살이야. 그것도 체포되자 마자 즉결처분됐을 것이다." 오두복이 아무 말 못하자 검찰관이 다시 물었다. "원숭이라는 놀림이 왜 싫었나?” 오두복은 힘없이 대답했다. “그 말은 지가 가장 싫어합니더. 국민학교 때부터 그렇게 놀리는 놈은 가만 두지 않았십니더. 중학교 땐 그렇게 놀리는 놈을 팼다고 퇴학 당했십니더. 지는 원 숭이 같다는 말만 들으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됩 니더.” 오두복은 검찰관이 전시때라면 총살을 당했을 것이 라고 말했기 때문에 자포자기 심정이 되었다. 그는 고 개를 떨군채 마음 속으로 "나도 사형 당하는 게 아닌 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검찰관이 약간 다정한 음성으로“오두복!”하고 불렀다. 그가 고개를 들자 검찰관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넌 운이 좋은 놈이다. 나도 고향이 울산이다. 내가 고향놈 하나 못 봐주겠나. 걱정하지 마라. 니 문제는 내가 요령껏 처리 할 끼다. 그리고 내가 너와 고향이 같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된다. 알겠나?” 오두복은 그때서야 고개를 들고 검찰관을 쳐다보았 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살려만 주시면 그 은혜는 평생 안 잊겠십니더!" 그 시절의 군대는 빽만 있으면 안되는 게 없었다. 6 ·25전쟁때부터 빽없는 졸병은 총맞고 죽으면서 “빽! ”했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군 검찰관은 재판때 심문하면서 오두복을 은근히 옹 호했다. 그러나 구형 때는 오두복의 범죄행위를 준엄 하게 꾸짖은 뒤 맨 마지막에 가서는“정상을 참작하여 3년 징역에 처한다.”고 끝맺었다. 결국 그 검찰관의 구형이 최종 형량이 되어 오두복 은 항소심에서도 3년 징역 선고를 받고 육군형무소로 넘어갔다. 육군형무소는 멀쩡한 군인도 정신이 돌게 만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오두복은 지옥같은 수형 생 활을 하면서 입대 전보다 더 독종이 되었다. 그리고 3 년 수형생활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온 즉시 박철수에 게 포섭되었다. 박철수가 부산 최고의 요정 해운각에 서 술도 사주고 오입도 시켜줌으로서 그는 박철수가 던진 미끼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해운각에서 술을 마신 이후 박철수는 오두복과 빈번 하게 만났다. 그러나 노련한 박철수는 용건을 쉽게 꺼 내지 않았다. 오두복에 대해서 이리저리 관찰한 끝에 그는 결론을 내렸다. <오두복이라는 놈은 두뇌 구조가 단순하다. 그리고 현재는 돈이 생길 구멍이 없다. 돈벌 일이라면 뭐든지 할 놈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두뇌 구조가 단순하기 때문에 심복으로 만들어 놓기만 하면 어떤 일을 시켜 도 잘 해낼 것이다.> 박철수는 용의주도했으므로 이전에 밀수품 운반책과 접선할 때처럼 오두복을 사무실에서는 만나지 않았고, 만나자는 연락도 그 자신이 직접 했다. 그런 탐색 끝 에 박철수는 오두복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두복아. 너 돈이 필요하지? 돈 버는 일을 맡길테니 까 싸움 잘하는 놈 열 명만 모아라. 열 명 정도 모아 지면 내가 일거리를 줄테니까” 오두복은 관심 있는 태도로 곧바로 물었다. “무신 일인교? 열 명 정도는 쉽게 모을 수 있지만 무신 일인지 알아야 될게 아닌교?” 박철수는 패거리가 규합되면 얘기해 주겠다며 더 이 상은 말하지 않았다. 오두복은 돈이 생기는 일이기 때문에 곧바로 싸움패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왕 년의 역전파 졸개들을 찾아 다섯 명을 확보한 뒤 그들 을 통해 열명을 규합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박철수 의 연락을 받고 그를 만났을 때 그 사실을 보고했다. "형님이 말씸하신대로 싸움깨나 하는 놈 열 명을 모 았십니다. 이제 무신 일인지 말씸해 주이소." 박철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이렇게 말했다. “내 제안이 싫으믄 안해도 좋다. 난 일본에서 물건 을 가져오고 있는데 그 일을 도와달라는 것이다” 오두복의 눈이 커졌다. “그라믄 형님은 밀수를 하고 있는교?” 박철수는 빙그레 웃으며 여유있는 태도로 대꾸했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나는 밀수를 하고 있 는 게 아니라 무역을 하고 있다. 몰래 가져오고 있지 만 나도 돈 주고 물건 사오고 돈 받고 그 물건을 팔고 있으니까 내가 하는 일도 무역이다. 너는 그 문제에 대해선 신경쓸 것 없다." 오두복은 박철수의 감언이설에 넘어갈 정도로 멍청 하지는 않았으므로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힘있게 "잘 알겠십니다!"라고대답했다. 이렇게 되어 밀수 하주 박철수와 오두복의 거래는 일단 성립됐다. 그러나 그 거래는 오두복이 예상했던 것과는 판이했 다. 오두복은 박철수가 자신을 밀수품 운반책으로 기 용하기 위해 포섭했다고 생각했으나 박철수의 제의는 약간 엉뚱한 것이었다. 박철수는 은밀한 어조로 이렇 게 말했다. "앞으로 넌 내가 시키는대로만 해라. 우선 내가 자금 을 댈테니까 니 부하들을 잘 단속하여 언제든지 내가 비상을 걸면 집합할 수 있도록 조치 해 놓아라. 내가 대주는 돈으로 부하들을 특별히 잘 관리해야 한다. 그 리고 부하들에게 휴대하기 편리한 몽둥이를 준비하도 록 지시해 놓아라." 박철수는 말을 마치며 돈 봉투를 내밀었다. 오두복 은 박철수의 제의가 의아스러웠으나 돈 봉투부터 챙겨 넣고 질문했다. "형님, 그라믄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이 무엇인교? 밀 수품 운반하는 일이 아닌교?" 박철수는 오두복의 눈을 잠시 쏘아본 뒤 말했다. "밀수라는 말은 앞으로 내 앞에서 쓰지 마라.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알려고 하지 말고 부하들에게도 될수록 말을 적게 해야 된다. 이 일이란 원래 그렇게 하는 거 다. 우리 세계에서는 질문이란 것은 없다. 군대처럼 오 직 명령에 따르는 것이 이 세계에서 밥 먹고 살 수 있 는 길이다. 내 말 알아 듣겠나?" 얼음처럼 차가운 박철수의 어조에 눌려 오두복은 "잘 알겠십니더."라고 대답하며 박철수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려깔았다. 그 모양을 보고 박철수가 다짐하듯 물었다. "니 부하들은 정말 쓸만하냐? 니 상대가 될 놈들은 상당한 놈들이다. 수는 많지 않지만 싸움 기술은 특출 하다. 내 짐작으론 군 특수부대 출신이든지 그렇지 않 으면 무술을 상당히 익힌 놈들이다. 그래서 기습으로 번개처럼 제압하지 않으면 오히려 당할 위험이 있다. 넌 기습의 명수라니까 잘 할 수 있겠지. 몽둥이를 준 비하라는 것도 기습을 위해서다. 초전박살이 아니면 승산이 없다는 각오로 일해라. 그리고 일이란 주먹구 구식으로 해선 성공할 수 없다. 니 부하들은 보나마나 아직 오합지졸일텐데, 오합지졸 가지고는 승산이 없다. 몽둥이를 즉시 구해 훈련을 시켜라. 인적이 드문 해안 가에 가서 매일 기습 훈련을 해라. 니 부하들을 관리 하는 문제에 관한한 나는 너에게 모든것을 맡기겠지만 가끔 그 훈련 모습을 보러 가겠다. 훈련 장소와 시간 을 알려 주면 난 멀리서 구경만 하고 돌아오겠다. 니 졸개들에게 내 얼굴을 알릴 필요는 없으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오두복은 박철수의 충실한 부하가 되었으므로 공손 하게 "네!"하고 대답했다. 박철수와 헤어진 뒤 오두복은 즉시 목공소로 찾아가 몽둥이를 주문했다. 그는 목공소 주인에게 단단한 참 나무로 빨래 방망이보다 약간 긴 몽둥이 열 개를 만들 어달라고 부탁했다. 목공소 주인은 오두복의 행색을 잠시 살핀 뒤 그가 불량배임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두말없이 주문을 받아들였다. 오두복은 몽둥이가 제작된 날 오후부터 부하들을 이 끌고 인적이 드문 낙동강 하류 쪽 해안으로 나가 기습 훈련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박철수 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박철수는 오두복에게 "좋 아. 계속해서 훈련을 열심히 하고 있거라."라는 지시만 했다. 오두복은 훈련이라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 만 박철수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랐다. 훈련이 시작된지 열흘 쯤 됐을 때 박철수는 오두복 을 불러 돈 봉투를 주었는데, 훈련에 대한 조언도 잊 지 않았다. "훈련을 열심히 하고 있더군. 먼 발치에서 두 번 구 경했지.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더라. 한 장소에서 매일 그런 훈련을 하면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 다. 누군가가 이상한 놈들이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고 경찰에 신고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절대로 한 장소에서 두 번 이상은 하지 마라." 오두복은 박철수가 질문 따위는 하지 말라고 지시했 으나 궁굼증을 못 이겨 한 마디 물었다. "우리는 언제 일을 시작하는교?" 박철수는 그 질문을 받고 눈을 지긋이 감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뜬 뒤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매우 궁굼하겠지. 그러나 그 궁굼증은 곧 풀린다. 그리고 막상 일을 시작하게 되면 매우 싱 겁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면 그때 나하고 다시 애기하자. 그리고 일을 시작하기 직전엔 내가 자세한 작전 지시를 내릴 것이다. 우선 중요한 건 훈련이다. 알겠나?" 오두복은 "예!"하고 대답한 뒤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고, 그 둘은 그 직후 곧 헤어졌다. 박철수는 사실 일석이조를 노리고 오두복을 끌어들 였다. 첫째 목적은 밀수품을 또 강탈 당하지 않기 위 해서였다. 오두복 패거리의 임무는 밀수품 양륙 현장 에 잠복하여 박철수의 밀수품이 안전하게 은닉 장소로 옮겨질 때까지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일 밀수 품이 강탈 당할 때는 잠복하고 있는 오두복 패거리가 기습으로 강탈자들을 제압하고 밀수품을 되찾는 것이 첫째 목적이었다. 박철수는 태종대에서 밀수품을 털렸을 때만 해도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복수하고 말겠다는 집념에 불탔었 다. 그리고 그 목적으로 오두복에게 접근했었다. 그러 나 비상망을 총 동원하여 탐문해보아도 그 밀수품을 강탈한 자들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들이 부산 해안가에서 계속 활동하고 있다는 징후는 가끔 나타났 는데 도무지 정체는 파악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박철수는 복수보다 우선 밀수품 보호에 치중 하기로 마음먹었다. 밀수품을 또 털린다면 재산 손실 이 엄청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서 복 수의 집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잠을 자다가 도 밀수품을 털렸던 일을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져 잠 을 이루지 못했다. 박철수는 밀수품이 양륙되는 현장에 오두복 패거리 를 잠복시켜 놓으면 그 정체불명의 밀수품 강탈자들이 언젠가 걸려들지 모른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 가능 성은 그 자신도 매우 희박하다고 생각했으나 만일 그 들이 걸려들기만 한다면 오두복을 끌어들인 것은 일석 이조 효과를 얻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박철수가 오두복에게 철저한 훈련을 지시한 것은 복 수에 성공할 것 같은 예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그놈들이 내가 파놓은 함정에 빠질 것 같 은 예감이 든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기습의 명수인 오두복은 실수 없이 해낼 것이다. 그리고 그놈들은 병 신이 되든지 골로 가겠지.> 박철수는 날이 갈수록 복수에 성공할 것 같은 자신 의 예감을 믿기 시작했다. 제10장 일확천금의 횡재 김호장 일당은 세번째 '오징어장사'에서 대단한 수확을 올렸다. 장소는 영도의 동삼동 앞 바다에 있는 아치섬이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아치섬 앞 바다는 암초가 많아 세관 감시선이 활동을 제대 로 못해 밀수꾼들이 애용하는 루트였다. 김호장은 밀수품 강탈에 두번 성공한 직후에 효과적인 전략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밀수품 강탈 이 도박장을 털어먹는 것보다 스릴도 있고 그의 개성에도 맞는 일이었지만, 밀수 루트가 될만한 곳에 탠트를 치고 낚시꾼으로 가장한채 아무 정 보없이 밀수꾼들이 나타나는 것을 무작정 기다리 는 것에 그 자신도 지쳐버렸다. 밀수정보만 입수 할 수 있다면 밀수품 강탈이야말로 식은죽 먹기 처럼 쉬운 일이었지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세관 도 입수하기 어려운 밀수정보를 그들이 알아낸다 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들 이 밀수품 강탈에 두 번 성공했다는 것도 사실은 봉사가 문고리를 잡은 격에 불과했던 것이다. 김호장이 밀수품을 강탈하는 방법을 개선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을 무렵 그는 우연히 하승일로부터 아치섬 해안도 밀수 루트라는 얘기 를 들었다. 하루는 하승일의 술집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그가 이런말을 한 것이다. “내가 예전에 들었던 얘기인데 아치섬으로도 밀수품이 많이 들어온다 카더라. 거긴 낚시꾼들이 나 가는 섬 아이가. 그란데 그 섬의 남쪽은 암초 가 많아 세관 감시선도 안가는 곳이라는 거야. 그 래서 그곳을 밀수꾼들이 좋아한다 카데.” 김호장은 하승일의 말을 듣고 이렇게 대꾸했다. “사실 부산 해안의 으슥한 곳은 모두 밀수 우 범지역이겠지. 밀수꾼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일하는 놈들이 아니잖아. 내가 밀수한다 해도 세관원들에 게 안 붙잡힐 장소부터 찾은 뒤에 일을 시작하겠 다. 그리고 쾌속정으로 싣고온 밀수품을 양륙시킨 뒤 재빨리 은닉할 수 있는 곳이라면 밀수 루트로 최고겠지."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김호장에게 좋은 생각이 하나 번뜩 떠올랐다. <우리가 일을 멍청하게 하고 있다. 밤 낚시꾼으로 가장하여 밤에만 현장 으로 나가는 게 어떨까? 만일 헛탕치면 새벽에 철수하고 다시 밤에 나간다면 현장에서 텐트치고 밀수꾼들이 나타나기를 무작정 안 기다려도 되잖 은가. 맞다. 그 방법이 최선이다.> 김호장은 그 방법을 하승일에게 말해준 뒤 이 렇게 말했다. "그런데 아치섬도 밀수꾼들이 좋아한다 이거 지? 낚시꾼들도 많이 가고? 그러나 거기서 밤낚 시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겠지. 무서울 테니까. 좋 다. 다음번은 그곳이다! 밤낚시꾼으로 가장하여 저녁 무렵에 아치섬으로 건너갔다가 헛탕치면 새 벽에 돌아오는 거야." 하승일은 김호장의 아이디어에 즉시 찬성했다. “진작 그렇게 했어야지. 바닷가에서 텐트치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흘이나 보름 이상 지낸다 는 것이 얼마나 지루했겠노? 사실 나도 너희들이 일을 그렇게 하는 걸 보고 딱하게 생각했었다. 아 치섬에서 그렇게 한 번 해보아라. 밤낚시꾼으로 가장하여 저녁 무렵에 섬으로 건너가면 기분도 괘안ㅋ다." 아치섬은 영도 동삼동 앞바다에 조그마한 산처 럼 떠 있는 섬이다. 해발 141미터에 평지는 없고 동삼동 쪽을 제외한 섬의 대부분은 온통 깍아지 른듯한 벼랑으로 둘러쌓여 있다. 그러나 바닷물이 철석거리는 벼랑 밑 부분도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닳아진 둥그런 모양의 커다란 바위들이 깔려 있기 때문에 전마선 정도의 배는 어렵지 않 게 접안시킬 수 있다. 이런 입지 조건 때문에 자 유당 말기의 밀수 전성시대에는 밀수꾼들이 가장 애용했던 밀수 루트 중의 하나로 꼽혔었다.물론 세관에서도 그 정보를 알고 그 섬에 감시 초소도 세운 적도 있었지만 밀수를 막지는 못했다. 하승일로부터 아치섬 애기를 듣고 김호장은 그 다음날 황종태를 데리고 사전 정찰을 위해 아치 섬으로 나가보았다. 동삼동 해안에서 배를 세내 아치섬으로 건너간 뒤 오솔길을 따라 섬 꼭대기 로 올라갔다.김호장은 섬 꼭대기에서 섬 아래쪽을 쭉 둘러본 뒤 담배를 한 대 꺼내 물고 동남쪽으 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망망대해를 바라보기 시 작했다. 김호장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 는 황종태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그가 입을 열기 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호장은 담배를 한 대 다 피운 뒤에야 황종태 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종태야 다음번에 털 곳은 여긴데 방법은 바꾸 겠다. 저녁 무렵에 밤낚시꾼으로 가장하여 이곳으 로 온 뒤 헛탕치면 새벽에는 시내로 돌아가자. 여 기 와서 직접 보니까 다른 곳보다 우리에게 유리 하다. 저녁 무렵에 밤낚시꾼으로 가장하고 오기에 도 좋고 밀수품을 턴 뒤에 시내로 빼돌리기에도 좋겠다. 물건을 턴 뒤에 산기슭에 숨어 있다가 새 벽에 동삼동 저쪽 해안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 서면 우리는 평범한 밤낚시꾼으로 보일 것이다." 황종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라믄 탠트는 안 칠 생각인교?" 김호장은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해안에서 탠트 치고 밀수꾼들이 나타나는 것을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너무 지루하고 체력 소모가 많다. 둘째는 물건을 뺏긴 놈들이 그 뒤에 탐문했을 때 우리가 노출될 위험이 많다. 우리가 장기간 탠트 치고 지내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된다. 밀수꾼들이 물건을 털 린 뒤에 수소문한다면 우리가 탠트치고 지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의심 받을 게 뻔하다. 물론 수소문해도 우리의 신분을 알 수 없겠지만 좌우지간 단서를 남겨놓는 건 좋 지 않다. 그래서 다음번부터는 방법을 바꿀 생각 이다. 밤낚시꾼으로 가장하여 밤에만 현장으로 가 고 새벽에는 철수하는 것이다. 물론 밤을 지내려 면 탠트는 쳐야겠지. 어때, 니 생각은 어떻나?" 황종태는 즉시 김호장의 말에 찬성했다. "그기 좋겠십니더. 사실 해변에서 탠트 치고 무 작정 기다리는 건 문제가 많았지예. 지는 형님 생각에 무조건 찬성 입니더!" 다음날부터 그들은 김호장의 생각대로 방법을 바꿔 행동을 개시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아치섬으 로 넘어가기 위해 그들은 오후 6시에 부산진역 광장에서 만났다. 네명 모두 밤낙시꾼 차림이었 다. 그들은 택시를 타고 동삼동에서 내려 배를 빌 렸는데, 아무도 그들을 수상하게 보지 않았다. 그 들은 배를 타고 아치섬으로 건너간 뒤 태종대가 바라보이는 쪽에서 일단 낚시질을 시작했다. 그곳 은 배 대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해가 떨아진 뒤에는 낚시대를 거두어들이고 그들이 낚시했던 곳에서 더 동쪽으로 옮겨 바위 틈에 잠복했다. 첫날엔 헛탕을 쳤다. 그러나 밀수꾼들이 나타날 시간이 지났을 무렵부터 탠트를 치고 술을 마셨 으므로 그들은 헛탕을 쳤어도 유쾌하기만 했다. 그들은 술에 취해 떠들다가 잠을 잤고, 다음날 새 벽엔 신선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밥을 해먹었다. 밥을 지을 때 억만이가 이런 말을 했다. "대장, 이번엔 소풍온 기분이다. 매일 일을 이렇 게 하면 헛탕을 쳐도 맥이 안 풀리겠다. 내일 새 벽에는 낚시로 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먹자." 김호장도 기분이 좋아 "그래, 내일 새벽에는 정 말 낚시를 하자. 물론 고기가 잡히면 매운탕 끓여 먹어야지. 좌우지간 오늘 아침엔 기분이 상쾌하 다."라고 말한 뒤 환하게 웃었다. 밤을 징르 도 다. ㅎㅇ동를 " 의 행색이 드러 날 위험이 많을 것이다.는 것을 그래서 다음번부 터는 방법을 바꿀 생각이다. 자은주위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그때까지 황종태 는 김호장의 생각을 모르고 있었다. 섬을 둘러본 뒤 김호장이 활종태에게 말했다. “종태야, 다음번엔 여기서 털자, 섬을 둘러보 니까 다른곳보다 우리에게 유리하다. 저녁 무렵에 낙시꾼으로 가장하여 오기도 좋고, 물건을 턴뒤에 시내로 빼돌리기도 좋겠다. 배로 저쪽 해안으로 도망쳐 해안으로 오르면 우린 평범한 밤 낚시꾼 으로 보인다.” 황종태는 “그자는 텐트는 안치는 겁니껴”라 고 물었다. 김호장은 자세하게 설명했다. “해안에서 텐트치고 밀수꾼들을 기다리는 것 은 두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너무지루하고 체 력소모가 많다. 두번째는 물건을 뺏긴 놈들이 그 뒤에 탐문했을때 우리가 노출될 위험이 있다. 그 래서 다음번부터는 방법을 바꾸자. 밤낚시꾼으로 가장하여 밤에만 현장으로 간다. 물론 텐트도 가 지고 가야지. 헛탕치면 텐트치고 잔뒤 새벽에 시 내로 돌아가자. 그리고 밤에 다시 만나 현장으로 가는 거다.” 황종태는 김호장의 생각에 찬성했다. “그기 좋겠십니더. 해변에서 텐트치고 무작정 기다리는게 문제가 많았지요.” 다음날부터 그들은 행동을 개시했다. 어두워지 기 전에 아치섬으로 넘어가야 했으므로 오후 6시 에 부산진역에서 만났다. 네변 모두 낚시꾼 차짐 이었다. 그들은 택시를 타고 동삼동에서 내려 곧 배를 빌렸다. 아무도 그들의 행색을 수상하게 보 지 않았다. 그들은 배를타고 아치섬으로 건너가 일단 낚시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해가 떨어져 어 둠이 깔릴 무렵에는 낚시대를 거두어들이고 미리 점찍어둔 장소로가 밀수꾼들이 나타나기를 기다 렸다. 첫날엔 헛탕을 쳤다. 그러나 텐트치고 술을 마 셨으므로 유쾌하기만 했다. 그들은 술에 취해 떠 들다가 잠이 들었고, 다음날 새벽엔 신선한 바닷 바람을 맞으며 밥을 해먹었다. 밥을 지을때 억만 이가 이런말을 했다. “대장, 이번엔 소풍온 기분이다. 매일 일을 이렇게 하면 헛탕을 쳐도 괜찮겠다. 내일 새벽에 는 낚시로 고기를 낚아 매운탕을 끓여먹자.” 김호장도 기분이 좋아 “그래, 내일 새벽에는 정말 낚시를 해보자”고 대꾸한뒤 환하게 웃었다. 그들은 다음날에도 저녁 무렵에 아치섬으로 건 너가 초저녁에는 낚시질을 한 뒤 밤 10시경부터 는 낚시대를 거두어들이고 바위틈으로 숨어들어 갔다. 그리고 새벽 2시까지 바위틈에 엎드려 밀수 꾼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바다위에는 전마 선 한 척 안 보였다. 그들은 헛탕을 쳤지만 헛탕 에도 이골이 나 있었으므로 탠트를 친 뒤 술을 마시다가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 다시 바다에 낚시대를 던져 고기 를 낚기 시작했다. 낚시 솜씨는 역시 억만이를 따 를 자가 없었다. 그들은 거의 억만이가 잡은 고기 로 매운탕을 끓여먹은 뒤 아치섬에서 빠져나왔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뒤 그들이 다시 아치섬 으로 들어갔을 때부터바다의 풍랑이 심해지기 시 작했다. 그 풍랑을 보고 황종태가 김호장에게 말 했다. “오늘은 한 건 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더. 저 풍랑을 보이소. 밀수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조건이 저 정도의 풍랑 아닌교?" 김호장도 이제 그 방면의 문외한이 아니어서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든다만, 그러나 저 풍랑 속 에서 전마선이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까?” 그러자 황종태가 자신 있는 투로 말했다. “밀수꾼들에게 특공대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기 아닐 겁니더. 대마도에서 밀수품을 날아오는 놈들에게 특공대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바다 풍 랑이 오히려 저렇게 심할 때 목숨 걸고 쾌속정을 몰고 오기 때문일 겁니더. 두고 보이소. 오늘은 분명히 한 건 할 것 같으니까..." 그들은 풍랑이 심했으므로 낚시를 하지 않고 초저녁부터 해안의 바위틈에 납작 엎드려 먼 바 다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밤이 깊어 져 밀수꾼들이 나타날만한 시간이 되자 황종태와 이석배는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구입한 군용 망원 경을 꺼내 그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의 벼랑 밑과 전방의 바다 위 동태까지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이윽고 자정 무렵 쯤 되었을 때 황종태와 이석 배가 동시에 긴장된 목소리로 김호장에게 말했다. “밀수꾼들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저 먼바다에 서 불빛이 한 번 번쩍했습니다." 그들은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 먼바 다를 살폈는데 잠시후 황종태가 “잘못 봤나?” 라고 중얼거렸다. 황종태와 이석배는 먼바다를 계 속 살폈지만 더 이상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황종 태가 망원경에서 눈을 떼며 이석배에게 “아까 분명히 불빛이 번쩍 했었재?”하고 물었는데 이 석배는 먼 바다를 계속 살피며 “나도 틀림없이 봤는데, 이상합니다”라고 대꾸했다. 그때, 김호장 이 그들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너희들 말이 맞다. 저 왼쪽 벼랑 밑에서 전마 선 한척이 바다로 나가고 있다.” 그들 모두는 김호장이 손으로 가리키는 왼쪽으 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 있 었으므로 풍랑이 심한 바다 위로 전마선 한척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전마선이 곡예를 하 듯 풍랑을 헤치며 먼바다 쪽으로 나가고 있는 것 을 보고 김호장이 다시 말했다. “저 놈들은 정말 로 목숨을 걸고 있군. 저러다가 풍랑에 배가 뒤집 히면 그대로 끝장인데 말이야. 좌우지간 지독한 놈들이다! 그걸 털어먹는 우리도 천당 가기는 틀 렸고…” 먹이를 발견하면 즉시 공격 준비태세에 들어가 는 외로운 독수리 황종태는 그 말을 듣고 씩 웃 으며 말했다. “형님, 언제 우리가 천당갈 생각했는교? 어차 피 지옥행 급행열차를 예약해 놓은 신세들이니까 저 놈들 목숨잃는 것까지 걱정해줄 필요는 없을 껍니더. 자, 슬슬 움직여 봅시데이.” 황종태는 말을 끝내고 먼저 몸을 일으켜 전마 선이 나갔던 벼랑 밑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김호장에게 낮게 속삭였다. "저 큰 바위 위 쪽을 보이소. 망보고 있는 놈이 두 명이 분명히 보입니더. 우선 저놈들부터 퍼뜩 처치해삐립시다!" 그들은 황종태를 선두로 망보고 있는 두놈 쪽 으로 살살 다가갔다.그리고 그놈들을 가볍게 처치 하고 건마선이 육지로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광경은 참으로 아슬아슬 했다. 전마 선은 풍랑에 금방 뒤집힐 것 같았지만 곡예하듯 풍랑의 요동을 잘헤치며 육지로 서서히 다가왔다. 이윽고 건마선이 바위 틈새로 들어와 접안에 성공하자 배 위에서 장정들이 뛰어내렸다. 그리고 전마선 위에서 넘겨주는 괘짝을 받아 육지로 내 려놓기 시작했다. 쾌속정에서 넘겨받아온 밀수품 양륙이 끝나자 그들은 망보고 있던 놈들이 이미 당한 줄도 모르 고 그들 좌우를 향해 낮게 소리질렀다. "뭐하고 있노? 시간 없다. 퍼뜩 나온나!" 그들은 두어번 더 소리지른 뒤 밀수품 괘짝을 한개씩 짊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 황종태가 먼저 튀어나가 번개처럼 빠른 발놀림으가볍게 두 놈을 처치해버렸고, 나머지 세놈도 김호장과 억만 이에 의해 주먹 한방씩 맞고 쓸어진 뒤 기절해 버렸다. 김호장 일당은 익숙한 솜씨로 쓸어진 놈들을 묶어놓고 괘짝을 들었다. 그런데 맨먼저 괘짝을 들었던 억만이가 낭패어린 목소리로 “어라! 대 장, 괘짝이 너무 가볍다. 아무것도 안 들어있는 게 아냐?”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황종태도 재빨리 다른 괘짝을 들 었는데, 그도 “히야, 이런 일도 있나, 왜 이렇게 가볍노!”하고 소리질렀다. 나머지 괘짝은 김호장 이 직접 들었는데 그의 입에서도 “이것도 가볍 네!”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현장에서 더 지체할 수 없었으므로 괘 짝 다섯 개를 들고 반대편 해안 쪽으로 넘어가기 위해 섬 꼭대기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타 고 왔던 배는 그쪽 벼랑 밑에 숨겨져 있었다. 김호장은 오솔길을 타고 산으로 올라가면서 괘 짝 속에 마약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얼핏 생 각했다. 밀수꾼들이 풍랑이 심한 날 암초가 많은 아치섬 앞바다를 밀수 루트로 선택했다면 그 물 건은 보통 밀수품이 아닐 가능성이 많은데다가, 또 괘짝이 가볍기 때문에 김호장은 그 속의 밀수 품이 마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괘짝 속에 들어 있는 건 마약일지도 모르 겠다. 어쨌든 풍랑이 이렇게 심한 날 이곳으로 들 어오는 물건은 보통 물건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마약 밀수가 가장 큰 돈벌이라니까 괘짝이 이렇 게 가벼운 걸 보면 이건 마약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섬 꼭대기까지 올라가지 않고 도중의 으슥한 곳에서 짐을 내려 놓았다. 통금헤제 시간 까지 그곳에서 기다릴 셈이었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김호장은 괘짝을 해체하라 고 지시했다. 그는 밀수품을 탈취하면 새벽까지 섬에 그대로 숨어있다가 통금제 직후에 슴겨놓은 배를 타고 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육지로 상륙 한 뒤 괘짝을 해체하여 물건을 배낭에 옮겨 시내 로 나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괘짝 속의 물건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그 자리에서 바로 해 체 지시를 내렸다. 김호장이 괘짝 해체 지시를 내리자 나머지 세 사람은 즉시 그곳에서 괘짝을 풀어헤치기 시작했 다. 손이 빠른 이석배가 괘짝 한개를 먼저 풀어헤 쳤을 때 여성용 나일론 팬티가 무더기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억만이가 “재수없게 가시나들 빤스 만 들어있는 것 아냐!”라고 말해서 그들 모두 피 식웃었다. 여성용 고급 팬티를 모두 꺼내자 그 다음엔 티 셔츠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모두 실망감 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이석배가 갑자기 “이게 뭐야?”하며 네모난 물건을 들어보인 뒤, 모두가 그걸 쳐다보자 흥분된 목소리로 낮게 소리질렀다. “이건 금굅니다! 금괴가 틀림없습니다!” 이석배는 재빨리 괘짝 속에서 나머지 쇠붙이를 모두 꺼냈다. 이석배는 쇠붙이를 다 꺼낸 뒤 김호 장을 쳐다보며 더 흥분된 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금괴가 틀림없습니다. 모두 수무갭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괘짝 속에도 수무개씩 들어있을 것이니까 모두 백갭니다!” 이석배 말대로 나머지 괘짝 속에도 여성용 팬 티, 브라우스, 스카프 등 밑에 금괴가 수무개씩 들어 있었다. 그걸 확인한 뒤 이석배가 여전히 흥 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우린 드디어 한몫 잡았습니다! 이건 엄 청난 횡잽니다!” 그말을 듣고 모두의 눈빛이 빛났고, 기쁨과 함 께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김호장이 잠시후 지 시를 내렸다. “모두 흥분하지 말고 냉정해야 된다. 우선 이 곳을 안전하게 빠져나가야 하고 처분도 안전하게 잘 돼야 이 금괘가 우리 것이 될 수 있다. 자, 모 두 진정하고 금괘를 베낭 속에 먼저 집어 넣은 뒤 빤스와 브라우스 등으로 적당히 덮어라. 다른 물건은 다 가지고 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아무 곳에나 버리지 말고 땅 속에 묻어버려라.” 그 쇠붙이는 금괴가 분명했다. 통금이 해제되자 마자 그들은 낚시꾼 행색으로 배를 타고 동삼동 동쪽 해안으로 나온 뒤 숲 속에 숨어 있다가 첫 시내버스를 탔다. 그리고 초량동 아지트에 도착하 자마자 억만이가 베낭을 풀어 쇠붙이 한개를 꺼 내 들었는데 그것은 전등불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금덩어리가 분명했다. 그것이 금괴라는 것이 확인되자 그들은 황급하 게 베낭에서 금괴덩이를 모두 꺼내 방바닥에 차 곡차곡 쌓았다. 금붙이를 많이 다뤄본 이석배가 그중 하나를 들어보며 무게를 가늠하더니 자신있 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한개가 1킬로그람 정도 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모두 1백킬로그람입니다. 요즘 금값은 한 돈에 칠백원이 훨씬 넘으니까 어림잡아도 2천만 원 정도는 되겠습니다!" 소매치기 출신인 이석배가 자신있게 말했으므 로 모두 그 말을 믿었고, 김호장을 비롯한 세 명 의 얼굴은 금새 환하게 빛났다. 김호장이 대장답 게 이렇게 말했다. “이석배 말이라면 틀림없을 것이다. 우린 황금 백킬로그람을 얻었다. 이제 금괴를 벽장에 넣어두 고 축배나 들자!” 억만이가 황종태와 금괴를 벽장에 넣는 동안 이석배가 베낭에서 술과 안주를 꺼내 술상을 차 렸다. 술상을 놓고 모두 둘러앉자 이석배가 김호장의 술잔에 술을 따랐고, 김호장이 억만이부터 한잔씩 따라주었다. 그리고 김호장이 술잔을 들며 “자, 수고들 했다. 우선 축배를 들자.”고 말하자 나머 지 세 명도 술잔을 높히 들었다. 그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서로 술잔을 부딪친 뒤 모두 단숨에 들이 켰다. 술이 몇 순배 돌았을 때 이석배가 황종태의 눈 치를 슬쩍 살핀 뒤 조심스런 표정으로 김호장에 게 말했다. “형님, 저 금괴를 어떻게 처분하시겠습니까?” 김호장은 그르 흘낏 쳐다본 뒤 퉁명스럽게 대 꾸했다. “왜? 이전처럼 처분하면 되잖아?” 그러자 이석배는 황종태를 다시 슬쩍 쳐다본 뒤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금괴는 다른 밀수품과 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물건 처분 대 금 중 절반만 우리 몫이었는데, 금괴를 우리가 직 접 처분하면 우리 몫이 훨씬 많아질 수 있습니다. 금괴라면 제가 처분할 수 있습니다. 서울에 귀금 속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장물애비가 있는데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저하고 오랫동안 거래했거든 요. 어떻습니까? 찬성하신다면 제가 직접 처분해 보겠습니다.” 이석배는 말을 마치고 다시 황종태를 쳐다보았 는데, 그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김호장 은 이석배와 황종태를 번갈아 쳐다본 뒤 입을 열 었다. “글쎄, 니 생각도 일리가 있다만, 종태 생각은 어떻나?” 황종태는 무뚝뚝하게 “형님이 결정하이소, 전 아무렇게 해도 상관 없십니더”라고 대꾸했다. 김호장은 약간 난처한듯 술을 한 잔 들이킨 뒤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는 담배 연기를 내뿜 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결론지었다. “금괴도 종태에게 맡기자. 우리 물건을 처분해 준 그 거래선도 우리의 동업자다. 종태야, 그 거 래선이 금괴도 처분할 수 있겠지?” 황종태는 약간 난감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때까지도 김호장에게 손경자와의 관계를 털어 놓지 않고 있었다. 손경자와 관계를 밝힌다는 것 이 워낙 미묘해서 그는 두목인 김호장에게도 그 녀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김호장도 황종태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털어온 밀수품을 처분해주는 사람의 정체에 대해 서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석배가 금괴 처분문 제를 제기하자 황종태의 기분은 당장에 떨떠름해 졌다. 황종태가 아무 대꾸를 안하자 김호장은 그 가 이석배의 말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다고 짐작 하고 “깊이 생각할 것 없다. 그 거래선은 우리 동업자니까 금괴도 그쪽에 맡기는 거다. 자, 술 한잔씩 더들고 이게 잠이나 자자.”라고 말하고 황종태에게 술을 권했다. 그들은 대장의 지시가 떨어지자 술상을 치운 뒤 자리를 깔고 누웠다. 그리고 억만이부터 코를 골며 깊은 잠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종태만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그동안 털어온 밀수품을 처분해준 손경자와의 관 계를 숨기고 있었던 것에 대해 갈등을 느껴본 적 이 없었지만 아치섬 해안에서 털어온 밀수품이 금괴인데다가 이석배가 처분문제를 제기하자 손 경자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사실이 새삼 꺼림 직해져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황종태는 이렇게 생각했다. <언젠가 호장이 형에게 경자 누님 존재가 알려 지겠지. 그렇게 되면 금괴처분대금 문제로 오해받 을 수도 있는 기라. 우짤까? 경자 누님 얘기를 털 어놓을까… 아니야, 아직 그럴 수 없어. 그라믄 금괴 처분은 이석배에게 맡기자고 할까?> 모두 잠에 골아떨어져 코고는 소리가 요란했는 데, 황종태가 몇번 몸을 뒤척이자 김호장이 그를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종태야.” 황종태는 깜짝 놀라 “형님, 안주무셨는교?”하 며 일어났다. 김호장도 일어나 앉으며 “왜 잠을 안자나? 잠 안오면 나하고 바람이 쐬러 나가자 "고 말했다. 김호장은 황종태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일어서 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 황종태도 일어나 옷을 입 었다. 그들은 집밖으로 나와 골목을 빠져나왔다. 김호 장은 대로에 나오자 “대신공원에나 가자.”며 지 나가는 택시를 세웠다. 대신공원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린 뒤 김호장은 앞장 서서 부산항이 내려다 보이는 쪽으로 가서 자리 를 잡고 앉았다. 황종태도 그 옆에 앉았다. 잠시후 김호장이 입을 열었다. “종태야, 왜 잠을 못잤나?” 황종태는 묵묵히 있다가 손경자 얘기를 꺼냈다. 그는 무엇이나 장황한 설명을 하지 않는 성격이 었으므로 손경자 얘기도 간략하게 말했다. “지가 형님 찾으러 서울에 처음 갔을 때 지는 운 좋게 후리가리를 피했고, 그 얘긴 나중에 말씀 드린다고 했던 거 기억나는교?” 김호장은 잠시 생각을 더듬는 표정을 짓더니 황종태를 보며 말했다. “음, 그거, 기억난다. 그런데 세삼스럽게 그 애 긴 왜 꺼내냐?” 황종태도 김호장을 보며 말했다. “후리가리를 운 좋게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어 떤 여자 때문이였십니더. 5·16이 터지기 직전에 그 여자를 알게 돼 5·16 때는 그 여자와 함께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후리가리에 안 걸렸던 겁 니더.” 김호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흠, 넌 운이 정말 좋았구나. 그 여자는 뭐 하 는 여자냐?” “혼자 사는 여자라카는데, 지도 현재까지 정확 하게는 잘 모르고 있십니더. 그러나 그 여자 도움 으로 한동안 숨어 살 수 잇었고, 밀수정보도 그 여자를 통해서 알았십니더. 그라고…” 김호장은 당장 눈치를 채고 말했다. “그 여자가 밀수품을 처분해주고 있나?” 황종태는 "맞십니더."라고 대답한 뒤 민망한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여자를 지는 누님이라고 부르는데, 양품점 을 하고 있십니더. 그래서 밀수품을 잘 처분해주 고 있는 겁니더.” 김호장은 황종태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리고 이렇게 물었다. “너는 그 여자를 누님이라고 부르지만, 애인 관계구나. 그래서 석배가 금괴 처분을 다른 곳에 맡기자고 말하자마자 생각이 복잡해졌고잠도 못 잘 정도로 고민했구나.” 황종태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지는 그 누님을 좋아합니더. 그라고 누님도 지를 좋아하고 있십니더.” 김호장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알았다. 그 문젠 신경쓰지마라. 그 여자 아니 었다면 우리 사업이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내 생 각엔 밀수품을 터는 건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데 무리 없이 처분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잘못 처리하면 당장에 들통날 수 있는 일이다. 아까 내 가 말했듯이 그 여자도 우리 동업자야. 금괴를 처 분하면 그 여자는 상당한 횡재를 하겠지만, 그건 그 여자의 운이다. 니가 어려울 때 너를 도왔으니 그런 횡재를 얻을만한 것 같다…. 그러나 저러나 5·16 직전에 만나 너를 도와주었다면 그 여자가 너에게 꽤 빠져있는 모양이지? 니가 누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너보다 연상인데?” 황종태는 쑥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가 좋답니다. 나이는 지보다 열살 더 많십 니더.” “너도 싫어하지 않은 걸 보면 꽤 미인인 모양 이구나?” “그저 밉지 않게 생겼십니더. 그러나 지도 만 나자마자 홀딱 반했십니더” “혼자 산다고 했지?” “예, 전쟁 미망인입니더.” “그거 괜찮군. 아뭏든 금괴 처분은 그 여자에 게 맡기겠다. 그리고 그 여자와 너와의 관계는 나 만 알고 있겠다.” “죄송합니더. 진즉 말씸드렸어야 했는데.” “괜찮다. 살다 보면 횡재도 하는 거다. 니 누 님이 횡재하면 너도 좋은 거 아니냐?” 황종태는 잠시 머뭇거린 뒤 대답했다. “그기 꺼림직합니더. 누님은 지보고 같이 살자 고 합니더.” 김호장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놀라는 투로 “ 같이 살자고 해?” 그럼 너와 서로 사랑하는 사 이인가?”하고 물었다. 황종태는 고개를 숙이며 낮은 소리로 “그렇게 됐십니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김호장은 황종태의 등을 어루만지며 “알 겠다. 난 니가 잠을 못 이루는 것 같아 무슨 큰 고민이 있는줄 알았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연애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나. 아무 신경쓰지 말 아”라고 말했다. 그 말에 황종태는 고개를 들고 김호장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형님이 이해해 주시니까 정말 고맙십니더.” 김호장은 그의 등을 한번 두드려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고맙긴, 좌우지간 너는 이제부터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 신경쓰지마라.” 잠시 후 김호장은 고개를 돌려 시내 저편의 바 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두에는 크고 작은 배 들이 떠 있었고, 먼 바다로 출항하는 배도 보였 다. 그 배들을 보고 있는 순간 김호장의 뇌리 속 에는 문득 춘심이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잠시 춘심이 생각에 잠겼다. <바다를 내려다 보니까 춘심이 생각이 나는구 나. 우린 영화 장면처럼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이 별 얘기를 했었지. 춘심인 많이 울었고… 서울에 가면 춘심이를 한번 만나볼까?> 한동안 말없이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던 김호장 은 황종태에게 "이제 돌아갈까?"라고 말하며 일어 섰다. 황종태의 걸음걸이는 대신공원으로 올 때와는 다르게 가벼웠다. 손경자는 황종태가 금괴를 처분해달라고 했을 때 대단한 횡재인데도 불구하고 별로 즐거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빛이 일 순 스쳐 지나갔다. 그걸 보고 황종태가 “처분이 어렵노?”하고 묻자 손경자는 “처분이야 할 수 있지…”라고 대꾸한 뒤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날밤 그녀는 황종태로부터 금괴를 인수받았 다. 그런데 그로부터 보름 정도 지난 후 금괴 처분 대금을 받기 위해 황종태가 시내 호텔 룸에서 손 경자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의 태도는 이전과 완 전히 달랐다. 얼굴 표정과 태도에서 무엇인가 단 단히 결심한듯한 분위기가 풍겼다. 손경자는 황종태와 테이블에 마주앉아 돈가방 을 그의 앞으로 밀어놓은 뒤 이렇게 말했다. “종태야, 화내지 말고 듣거래이, 이제 난 니가 뭐하고 있는지 알아야 겠다. 너 밀수특공대 일을 하고 있지?” 황종태는 손경자가 워낙 근엄하고 어른스런 태 도를 보이자 아무 대꾸 못하고 잠자코 있었다. 손 경자가 화난 목소리로 다그쳤다. “와 대답이 없노? 말 해보래이! 넌 밀수특공대 재?” 황종태는 난감한 표정이 되며 담배를 꺼내 물 었다. 손경자가 다시 말했다. “딴 생각하지 말고 내 말 듣거래이.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재? 그래서 난 니가 위험한 일을 하는 건 원치 않는다. 밀수특공대는 생명을 걸고 하는 일이야. 그걸 하다가 바다에 빠 져 죽었다는 얘기 많이 들었단 말이야…. 난 불안 해 죽겠다. 제발 말 좀 해보래이! 정말 밀수특공 대가?” 황종태는 담배를 거칠게 빨아댄 뒤 손경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누님, 난 밀수특공대는 아이다! 알았나?… 이 제 그만 물어보소.” 손경자는 황종태의 말에 기가 찬듯 혀를 찬 뒤 “내가 어린앤 줄 아나? 그럼 그 물건들은 어디 서 났노? 전부 일제뿐인데, 그리고 금괴는 또 뭐 꼬?” 황종태도 단호하게 말했다. “좌우지간 나는 특공대가 절대 아니요!” 그러자 손경자는 “그럼 밀수꾼들을 덮쳐 강탈 해온 거가?”하고 소리질렀다. 손경자는 그 말을 무심코 내뱉었지만 말을 마차지마자 속으로 “맞 다! 종태는 밀수품을 털고 있구나”라고 생각했 다. 황종태는 아무말도 대꾸 못했다. 손경자는 그의 표정을 보고 “내말이 맞재!”하고 소리질렀다. 황종태는 담배를 거칠게 빨아대다가 재털이에 비 벼끈 뒤 무겁게 입을 열었다. “누님,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소. 내가 하고 있 는 일은 나혼자 하는 일이 아니니까 그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는 기라. 누님이 그렇게 추측한다 면 그것으로 얘길 끝냈으면 좋겠다. 말 몬하는 나 도 괴롭다.” 손경자는 더 이상 황종태를 다그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었다. 손경자는 갑자기 두려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박 철수가 털린 밀수품도 황종태와 관련이 있는 것 이 분명했고, 또 박철수가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대상도 황종태인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었다. 손 경자는 그 사실을 얘기하려다가 너무 미묘한 문 제여서 더 생각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달 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 다 알았다. 너하고 할 얘기가 있다만 오늘 은 그만 헤어지자. 그러나 모레 다시 만나 니 문 제를 같이 의논해 보자.” 손경자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황종태는 손경자 와 그냥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지만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손경자가 앞장서서 도어로 갔고 황종태 가 그뒤를 따랐다. 손경자는 도어 앞에서 돌아선 뒤 황종태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그녀 앞에 서자 가볍게 그를 안았다. 손경자는 황종태를 포옹하며 “그냥 헤어질 순 없잖아.”하며 그의 얼굴을 향해 입을 내밀었다. 황종태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하자마자 거칠게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곤 그녀를 번쩍 들어 침대 쪽으로 갔다. 그러나 손경자는 이전과 달랐다. 그녀는 황종태 품에서 발버둥치며 “와 이라노! 오늘은 싫다. 몬 놓나!”하고 앙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종태는 막무가내였다. 그녀를 침대에 ㄴ힌 뒤 스커트를 걷어올리고 그녀의 팬티를 벗 겨냈다. 손경자는 “싫다! 싫다!”하며 계속 발버 둥쳤다. 그러나 그녀는 황종태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황종태는 바지를 다 벗지도 않고 그녀 배 위로 올라탔다. 바로 그때 손경자의 두손이 그의 사타구니 쪽으로 움직이면서 그의 00를 꽉 움켜 잡으며 “안된다카면 안되는 줄 알아라! 이게 뭐 꼬?”했다. 황종태는 “놓아라. 뿌라지겠다”고 엄살을 부렸다. 손경자는 손에 더 힘을 주었고 황 종태는 “아프다. 퍼뜩 몬 놓겠나!”하고 소리질 렀다. 화가 나 있었던 손경자의 얼굴은 황종태의 그 모습을 보며 베시시 웃었다. 그리고 장난끼를 보이며 그의 무섭게 팽창한 00를 쥐어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황종태는 “정말 아프다카이! 누 님, 한번 봐주이소.”하고 사정했다. 그러자 손경 자는 미소를 머금으며 “내가 언제나 오케이 하 는 여자로 알았재? 그러나 나도 고집이 있대이. 안한다 카면 안한다.”했다. 황종태도 어린애처럼 보챘다. “누님, 나 급하다. 손 놓으소.” “몬 놓겠다.” “정말 몬 놓겠나?” “정말이다!” 손경자가 손에 다시 힘을 주자 황종태는 “아 야!”라고 소리지른 뒤“정말 뿌라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손경자는 깔깔대고 웃었다. 그러 나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색정이 흐르고 있었다. 손경자는 재미있는듯 황종태의 00를 계속 움켜쥐 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황종태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봐라, 니 바지도 다 안 벗었재? 그라믄 안된 다. 니만 만족채우고 끝낼려는 것 아이가? 그라지 말고 우리 같이 샤워를 하고 재미있게 하자. 오랜 만에 만나 이게 무신 꼴이고!” 손경자가 다시 재촉하듯 말했다. “빨리 일어서라!” 황종태는 그말에 웃음을 머금으며 “그걸 잡고 있는 손을 놓아야재 일어설 거 아니요?”했다. 그 러나 손경자는 그의 00를 바로 놓지 않았다. 그녀 는 색정이 흐르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약속해라 놓자마자 넣는 건 아이재?” 황종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황종태의 사 타구니 쪽에서 손을 빼내며 그를 밀쳐냈다. 손경자는 일어서더니 옷을 훌훌 벗어던지기 시 작했다. 그 모양을 지켜보며 황종태는 자신의 사 타구니를 움켜쥐고 “와, 난 이게 뿌라지는줄 알 았다!”고 능청을 부렸다. 손경자는 그 소리를 듣 고 “엄살떨지 마라. 뿌라질 정도로 안 잡았다. 내가 그 소중한 걸 와 뿌라뜨리겠노!”하며 눈을 곱게 흘겼다. 그녀는 곧바로 황종태의 손을 잡고 “가자, 빨리 샤워부터 하자.”며 욕실로 그를 끌 고 들어갔다. 손경자는 애정이 듬북 담긴 태도로 황종태의 몸을 조심스럽게 씻겨주었다. 그러자 황종태도 그 녀의 몸을 씻겨주었다 그는 손경자의 잘룩한 허 리와 풍만한 엉덩이를 씻길 때 “난 누님 엉덩이 만 보믄 미치겠다.”고 말했다. 손경자는 그말을 듣고 “겨우 엉덩이 뿐이가?”하고 말을 받았는 데, 황종태는 “아이다. 얼굴도 이쁘고 젓가슴도 좋지만 허리와 엉덩이가 특히 마음에 든다는 얘 기다.”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말을 듣고 손경자 는 자랑이라도 하려는듯 뒤로 돌아 그에게 엉덩 이를 내밀었다. 황종태는 그 터질듯하면서도 탐스 런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찰싹 소리나게 때린 뒤 그녀를 등 뒤에서 껴안았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 를 돌리며 그에게 입을 내밀었다. 황종태는 그녀 의 입에 키스를 하며 그녀 몸에 자신의 몸을 밀 착시켰다. 다시 불끈 일어선 그의 00는 그녀의 풍 만한 엉덩이를 찔러댔다. 손경자는 그 자극을 받 고 숨결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돌아서서 황종태 품에 안겼다. 그들은 욕실에서 정신없 이 서로의 몸을 애무했다. 황종태는 그녀의 부드 러운 혀를 빨아댔고, 손경자의 한손은 그의 00를 잡았다. 그러나 조금전 앙탈할 때와는 달랐다. 그 녀는 그의 00를 꽉 쥐었으나, 그러나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그녀의 욕정을 표현한 것이었다. 숨결이 빨라진 손경자가 황종태 귀에 대고 속 삭였다. "나를 안고 빨리 침대로 가줘." 황종태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를 번쩍 들고 욕실에서 나와 침대로 향했다. 그들의 욕정은 여늬때처럼 쉽게 사그라지지 않 았다. 그들 성행위의 주도권은 언제나 손경자가 쥐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만족의 표시로 그를 밀 쳐냈을 때에야 그들의 몸은 서로 떨어졌다. 푹풍이 밀어닥치듯 거센 욕정의 파도가 잠잠해 지자 그들은 눈을 감고 아무말없이 침대에 누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침묵은 그들 사이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황종태는 손경자와의 관계가 어쩐지 불행으로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말이 없었다. 그는 손경자를 알게 된 이후 어느 여자에게도 흥 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그는 손경자의 매력 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손경자도 자 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사랑이 불안하게 느껴 지기 시작한 것이다. <금괴를 팔아달라고 부탁한 기 잘못이다. 누님 은 이제 나를 본격적으로 의심하고 있다. 누님도 불안하겠지. 누님에게 사실대로 다 얘기 해버릴 까?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기라. 아니, 말 안해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어디 도망가서 살자고 하는 건 그걸 알기 때문에 그런 거다. 그러나 지금 도 망갈 수는 없잖는가.> 손경자는 황종태가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있다 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돼 착잡했기 때문에 말이 없었다. 욕정의 불이 꺼지자 그녀는 당장 황종태 의 장래가 걱정스러워졌다. 그녀의 뇌리 속에는 여러 상념이 복잡하게 얼키기 시작했다. <밀수품을 강탈하는 것도 강도짓 아이가. 종태 가 우째 그런 일을 하게 됐노? 그런 일 계속하다 가 언젠가는 붙잡혀 감옥에 가겠지. 그라고 박철 수도 문제인 기라. 태종대 사건도 분명히 종태 짓 이다. 우짤꼬. 박철수가 알게 되면 살인 날 것인 데. 그 지독한 사람이 지금도 복수하려고 벼르고 있는게 분명한 기라… 종태에게 말해줄까? 아이 다. 그게 문제가 아이다. 종태를 그짓에서 발을 빼게 해야 되는 기라. 그러자면 나와 둘이 머리로 도망가서 살수밖에 없는 기라. 그러나 종태가 내 말 듣겠나? 고집이 황소 같은데.> 손경자는 눈을 뜨고 옆으로 누으며 황종태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심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종태야” “와요?” “니, 정말 나를 좋아하나?” 황종태는 눈을 감은채 대꾸했다. “와? 새삼스럽게 그걸 묻는교?” “너와 다짐할 일이 있어서 그렇다. 솔직하게 대답해야 된대이. 넌내 몸만 탐내는 건 아니재?” 황종태는 그 말에 눈을 뜨며 그녀 쪽으로 돌아 누었다. 그리고 그는 진지하게 “누님이 그렇게 말하믄 섭섭하다. 난 정말로 누님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손경자는 다짐하듯 그에게 말했다. “섭섭하게 생각마라. 나도 니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지만 그건 문제가 안되재?” 황종태는 대답없이 그렇다는 동의의 표정을 지 었다. 손경자가 말을 이었다. “그라믄… 우리 어디 멀리 도망가서 살자. 전 에도 내가 말했었지? 우리 둘이 잘 살수 있을 만 큼의 돈은 내게 있다.” 그 말에 황종태는 다시 눈을 감으며 벌렁누었 다. 손경자는 황종태의 성격을 잘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쉽게 결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 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졸라대지 않았 다. 그녀는 사랑의 손길로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당장 결심하자는 얘기는 아이다. 난 정 말 너하고 어디 멀리 가서 행복하게 살고 싶으니 까 깊이 생각해보래이.” 황종태는 그 말에도 대꾸가 없었다. 김호장은 황종태가 가져온 금괴 처분대금을 배 분한 뒤 부하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우린 당분간 흩어지자. 금괴 털린 놈들이 부 산 시내에 비상망을 쳐놓았을 것이다. 큰돈 생겼 다고 유흥가에서 돈을 함부로 뿌리지도 말라. 큰 일 저질렀을 땐 꼬리를 재빨리 감춰야 한다. 좌우 지간 우린 일단 헤어지면 한 달 후에나 만나야겠 다. 그동안은 각자 알아서 행동하자. 그러나 하승 일의 가게에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해라. 암호를 지키면 된다. 부산을 떠나게 되면 그 사실도 알려 라. 연락이 없을 땐 사고가 생긴 것으로 알고 우 리대로 대처하겠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제 곧 가 을이 된다. 그리고 곧 겨울이 되니까 그 대비책도 세워야겠다. 겨울에 바닷가에서 일을 치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으니까 겨울이 되기 전에 일을 바짝 더 해야 될 것 같다.” 김호장은 잠시 말을 멈춘 뒤 세명에게 차례차 례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먼저 억만이에게 물었 다. "억만이는 어떻게 할래?" 억만이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집에 가야지. 집에서 궁금해 할 거야. 오늘밤 야간열차를 타고라도 서울에 가서 푹 쉬었다가 한달 후에 올께." 김호장은 황종태를 놓아두고 눈짓으로 이석배 에게 물었다. 그는 이석배도 서울로 올라갈 것이 라고 짐작했지만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저는 부산에 남아 있겠습니다. 인천에 한 번 가보고 싶기도 하지만 그건 차근차근 생각해보겠 습니다." 김호장이 다시 물었다. "인천에는 왜 가려고?" 그러자 이석배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냥 한 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가보았자 하루 이 틀 머물다가 곧 부산으로 오겠습니다." 김호장은 이석배가 여자 때문에 인천에 갈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빙긋이 웃으 며 다시 말했다. "부산에 와서는 뭐 하고 지낼래?" 이석배도 미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재미있기로는 인천보다 부산이 더 났습니다. 부산 아가씨들이 서울 사람을 되게 좋아합니다. 국제시장에 있는 다방이나 슬슬 돌아다니며 기회 가 생기면 아가씨들과 연애도 해보고...뭐 그렇게 지내지요.그러나 서울에는 안 가겠습니다." 김호장은 고개를 끄덕인 뒤 황종태를 쳐다보며 물었다. "종태 넌 부산에 있겠지?" 황종태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어디 갈 데가 있어야 가지요. 하숙집에서 소설 이나 읽고 진짜 낚시질이나 다니며 보내겠습니 다." 김호장은 황종태의 말을 듣고 난 뒤 담배를 입 에 물었다. 그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자 억만이 가 한마디 했다. "대장은 어디 안 가나?" 김호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억만이를 쳐다 보며 말했다. "광주로 가서 부모님을 찾아 뵙고 싶지만 아직 빠른 것 같고....그래서 생각중인데 아마 서울에는 한 번 갈지 모르겠다." 이석배는 그 말을 듣고 김호장이 춘심이를 잊 지 못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김호장은 담배를 다 피운 뒤 세명의 얼굴울 번 갈아 쳐다본 뒤 말했다. "종태는 남아 있고 억만이와 석배는 가보아라." 두목의 지시였으므로 억만이와 이석배는 바로 일어나 아지트에서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김호장 은 황종태에게 말했다. "넌 나하고 오늘 승일이 집에서 한잔 하자. 할 애기도 있으니까." 김호장은 황종태가 밀수품을 처분해주고 있는 여자에 대해 고백한 이후부터 그 여자의 정체에 대해 의문이 많았지만, 금괴 처분 대금이 돌아온 이후에 황종태와 그 점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려 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날 두 사람을 먼저 보내놓고 황종태를 끌고 하승일의 술집으로 갔다. 하승일은 손님 접대에 분주했으므로 그들은 구 석진 테이블로 찾아가 마주앉은 뒤 양주 한병을 시켰다. 김호장은 웨이터에게 바걸들은 부르기 전 엔 보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양주와 안주가 나오자 황종태는 두목에 대한 예절을 갖추며 김호장의 술잔에 술을 따랐고, 술 병을 건네받은 김호장도 묵묵히 황종태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김호장이 술잔을 들어올리며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둘만이 술을 마시는 건 오 랜만인 것 같다. 자, 먼저 건배부터 하자." 황종태도 술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형님이 부산에 오신 이후엔 처음인 것 같십니 더. 오늘 기분이 좋십니더." 그들은 술잔을 부딪친 뒤 단숨에 술을 들이켰 다. 그들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술만 마셨다. 김 호장은 그 여자 애기를 어떻게 꺼내는 게 좋을지 궁리 중이었고, 황종태는 김호장의 표정이 여느때 와는 다르게 약간 심각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아 무 말 없이 술만 마셨다. 술잔이 몇 순배 돈 뒤 김호장이 황종태를 쳐다 보며 말을 꺼냈다. “그 양품점 한다는 여자가 수완이 대단한 모 양이야. 금괴도 말썽없이 처리한 걸 보면 말야.… 그런데, 물건이 어디서 났냐고 묻지는 않던?” 황종태의 얼굴은 당장에 침통해졌다. 그는 잠시 후 힘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와 안 묻겠는교? 특공대 일을 하고 있냐고 따지는데 복잡했십니더.” “그래서 뭐라고 했냐?” “자세한 건 묻지 말라고 했십니더.” “그럼 눈치는 챘겠군” “아마 그런 건 같십디더” 김호장은 눈을 감고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걱정했던 일이 사실로 확인됐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그들 이외에 어느 누구도 알아서는 안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 자체가 보안 유지가 안되면 언제 박살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황종태 의 여자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눈치챈 것이다. 김호장은 가볍게 한숨을 한 번 쉰 뒤 술을 들이 켰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종태야, 어떻게 하면 좋겠나? 너도 알다시피 우리 일은 우리만 알아야 되는데… 그 여자를 믿 을 수 있나?” 황종태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점에 대해서는 걱정 마이소. 믿을 수 있을 정도가 아닙니더” “어떤 이유로?” 황종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지가 말씸드렸지예.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십 니더. 그 여잔 지 없인 몬 살겠다 캅니더!” 김호장은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 다. “좋아! 사랑한다면 믿을 수 있지. 그러나 여자 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는 말이 있지 않나?” 황종태는 김호장의 마음을 잘 읽고 있었다. <형님은 일이 들통났을 경우를 생각하고 있 다. 우리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비밀을 지킬 수 있지만 경자 누님이 그럴 수 있겠느냐고 형님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내도 모른다. 어 떻게 할까. 거래선을 바꾸자고 할까. 그러나 새 거래선을 어디서 구한단 말이고. 또 그 거래선을 어떻게 믿을 수 있노?> 김호장은 황종태의 표정을 잠시 살피가다가 엉 뚱한 제안을 했다. “종태야, 그 여자와 우선 동거라도 할 수 없 나? 그 여잔 혼자 산다며?” 황종태는 김호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단호하게 말했다. “안됩니더. 그건 안됩니더. 비밀 유지를 위해 서라면 다른 거래선을 한번 찾아 봅시더.” 김호장이 물었다. “동거는 왜 안돼?” “그런 사정이 있십니더” 김호장은 잠시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결론 처럼 이렇게 말했다. “알았다. 그럼 이렇게라도 해줘. 너와 그 여자 가 지금까지 서로 어떻게 연락을 취했는지 몰라 도 이제부턴 그 여자가 니 연락처를 알아서는 안 된다. 그 여자를 만날 때는 언제나 니가 연락해 라. 그리고 그 여자를 만나러 갈 때는 여기에 암 호를 남겨 놓아라. 그 여자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 여잔 보나마나 이런 일엔 훈련이 안돼 있을거 니까 안심이 안된다. 그리고 그 여자와 만난 뒤 헤어진 직후에도 여기에 암호로 알려라. 그래야만 우리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다.” 황종태는 두말없이 “알았십니더.”하고 대답했 다. 김호장은 황종태의 대답을 듣고난 뒤부터는 손경자 애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들은 양주 한 병을 다 비운 뒤 하승일 술집에서 나와 부산 호탤 나이트클럽으로 갔고, 그 자리엔 하승일도 합류했다. 김호장과 하승일 은 농담을 주고 받으며 유쾌하게 술을 마셨지만 황종 태는 평소처럼 말이 없었다. 제11장 과거가 있는 여자 본명이 박명자인 춘심이는 서울 토박이다. 전기 기술자인 그녀의 부친은 한국전력의 전신인 경성 전기회사화 직원이었다. 정치문제에는 관심이 전 혀 없었던 그는 한국전쟁 때 피난을 가지않고 서 울에 남아 있었다. 그는 해방 직후 한반도가 남북 으로 갈라지고 우익과 좌익이 싸울 때도 그런 문 제에 대해서 누구와 대화를 나눠보지 않을 정도 로 정치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천성이 순박하고 예절이 발라 동네 어른들은 그 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정치가 어떻게 돌아는지에 대해서 워낙 무감각했으므로 인민군이 서울로 진격해올 때도 피난갈 생각도 안했다. 삼선동에 살고 있던 그는 전쟁 중에 가족 먹여살릴 걱정뿐이었다. 그러나 북쪽에서 보기에는 그는 유용한 인물이었다. 인민 군이 서울을 점령한지 한달쯤 됐을 때 어느날 낯 선 사람들이 그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 낯선 사람 들과 함께 나간 뒤부터 그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 다. 춘심이의 모친은 남편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백 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녔지만 아무 소식도 얻어듣 지 못하자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 직후 인민군 이 서울에서 퇴각했는데, 동네 사람들은 그때부터 춘심이 부친이 납북됐다고 판단했다. 동네 사람들 이 춘심이 모친에게 "명자 애비는 전기기술자이 기 때문에 북에서 데려간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춘심이 모친은 절망감 때문에 혼절하고 말았다. 춘심이 모친은 생활력이 강한 여자여서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삼선동 집을 팔아 동대문 시장에 서 포목 장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벌이도 괜찮아 춘심이 남매는 학교 다니는데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춘심이가 고등학교 졸업반 때 춘심이 모친은 폐병에 걸렸고, 그때부터 그녀 집의 가세 는 급격히 기울어졌다. 병 치료비 때문에 가게부 터 처분했고, 돈이 떨어져 치료비는 말할 것도 없 고 생계 자체가 막연해지자 춘심이는 학교를 졸 업한 뒤 모친과 상의도 하지 않고 바걸이 되었다. 물론 그의 모친이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었으므로 춘심이 모친은 남 몰래 눈물을 흘릴 때가 많았다. 김호장의 도움으로 춘심이 모친의 병이 완치됐 고, 춘심이가 바걸 생활에서도 벗어났으므로 김호 장은 그 모녀에게는 구세주나 다름 없었다. 춘심 이는 바걸 생활을 청산하고 양품점을 개업하기 직전에 모친에게 김호장에 대해서 애기했다. 춘심 이 모친은 그 애기를 듣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정말 고마운 분이구나! 요즘같은 세상에 그런 분이 어디 있겠니?" 그리고 곧 이어 의미있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넌 그분과 결혼하기로 약속했니?" 춘심이는 그 질문에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거짓말했다. "어디 멀리 떠났어요. 언제 돌아오실지 알 수 없어요." 그때는 김호장이 작별을 위해 그녀를 인천으로 데리고 가기 훨씬 전이었다. 그러나 춘심이는 김 호장이 그녀 곁을 떠나리라고 예감하고 있었으므 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춘심이 모친은 그 말을 듣고 대단히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녀는 춘심이가 그 고마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을 느끼고 다시는 화제에 올리지 않았다. 춘심이가 모친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 뒤 김호 장은 정말로 그녀 곁을 떠났고, 춘심이는 그때부 터 나날을 우울하게 보냈다. 그런데 어느날 춘심이 모친은 아침 밥상에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명자야, 그 고마운 분이 다시 나타날 것 같다. 내가 어제밤 그런 꿈을 꾸었다." 춘심이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녀도 사 실 김호장이 그녀 곁을 떠났지만 언젠가는 다시 그녀를 찾아올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춘 심이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자 그녀 모친도 더 이상 그 애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열 을 후 춘심이는 가게에서 김호장의 전화를 받았 다. 김호장은 황종태와 술을 마신 다음날 곧바로 서울행 기차를 탔다. 부산을 당분간 떠나 있기로 마음 먹었을 때 갑자기 춘심이를 한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는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 도착한 김호장은 당시에 는 최고급이었던 반도호텔에 투숙했다. 그는 여장 을 푼 뒤 곧바로 춘심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호 장이 “여보세요”하자, 춘심이는 금새 목소리를 알아듣고 “어머, 오빠 아니야!”하고 반갑게 소 리질렀다. 김호장은 춘심이의 목소리를 듣고 내심 반가웠 으나 차분하게 “그래, 오빠다. 잘 살고 있었나? ”하고 물었다. 그러자 춘심이는 “응, 잘 살고 있어. 오빠, 어디야? 서울이야? 서울이라면 지금 당장 나갈께.”했다. 김호장은 춘심이를 저녁 식 사 때나 만나려 했으나 그녀가 보채자 “지금 나 올 수 있나?”하고 물었다. 그러자 춘심이는 야간 들뜬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얼마든지 나갈 수 있어! 일보는 애도 두었단 말이야. 그 애가 없더라도 문닫고 나갈 건데 뭐. 지금 어디야? 빨리 말해줘.” 춘심이가 그렇게 나오자 김호장은 내심으로 기 뻤다. 그는 호텔 룸 남버를 알려줬다. 춘심이는 호텔 이름을 듣고 더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바로 옆이잖아. 지금 바로 달려갈께. 전 화 끊자마자 바로 달려갈 거야.” 그러나 춘심이는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김호장 이 웬일일까 하고 궁굼해하며 다시 전화를 걸려 했을 때 녹크 소리가 났다. 김호장이 도어를 열자 춘심이가 방긋 웃으며 서 있었다. 그는 “금방 온다더니 왜 이렇게 늦었 나? 어서 들어와”라고 말하면서 그녀가 들어오 기 편하도록 비켜섰다. 춘심이는 룸으로 들어오며 “예뻐보일려고 미장원에 다녀왔어”하며 수줍게 웃었다. 그들은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춘심이는 김호장 을 다시 만난 기쁨을 감추지 않았고, 김호장은 그 저 빙긋이 웃으며 춘심이를 쳐다보기만 했다. 김 호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많이 변한 것 같구나.… 여유가 있어 보여 좋 다.” 사실 춘심이의 변화는 김호장이 놀랄 정도였다. 화류계 여자였다는 흔적은 싹 가셔 있었고, 김호 장의 지적처럼 춘심이는 여유와 함께 포근한 인 상을 풍기고 있었다. 춘심이는 누가 보아도 양가 집 규수라고 생각될 정도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춘심이가 웃으며 말했다. “모든게 잘되고 있어. 장사도 그럭저럭 잘 돼 고 있고, 엄마 병도 이제 완전히 치료됐어. 오빠 정말 고마워.” “가게도 잘돼고 있단 말이지?” “응.” “니가 장사 수완이 좋은 모양이구나.” “모르겠어. 한번 왔던 손님은 단골이 돼.” “그거 듣던중 반가운 소리다. 이제 시집만 가 면 되겠다.” 그말에 춘심이는 눈을 곱게 흘기며 “난 시집 안갈꺼야”했는데, 그 어조 속에는 단호함이 스며 있었다. 김호장이 그 말을 듣고 “처녀귀신 되려 고 시집 안 가겠다는 거냐?”라고 놀리듯 말하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춘심이는 웃지 않았 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김호장은 춘심이가 뭘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별을 위해 둘이서 인천 송도 바닷 가에 갔었을 때 김호장은 춘심이가 자신을 은인 으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었다. 물론 그도 춘심이를 화류계 여자로만 생각하고 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몇번 같이 잠을 자면서 춘 심이의 마음이 무척 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무엇인가 끌리는 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춘 심이와의 관계를 쉽게 끊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춘심이를 인천까지 데리고 가서 이별 의 얘기를 했었다. 그날, 그는 춘심이로부터 사랑 의 고백을 들었었고, 그 자신 또한 그날부터 춘심 이에 대해 애틋한 연민의 정같은 것을 느끼기 시 작했었다. 어쨌든 그들은 영영 이별하게 될지도 모를 순 간을 거쳐 다시 만났으므로 그 만남 자체가 이미 새로움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김호장은 남산 기슭에 있는 장안 최 고의 레스토랑으로 춘심이를 데리고 갔다. 그도 그곳엔 가본 적이 없었고 오직 소문으로만 알고 있던 레스토랑이었다. 김호장은 레스토랑에서 무엇이든지 최고로만 주문했다. 그는 메뉴판을 춘심이에게 넘겨주며 이 렇게 말했다. “오늘은 무엇이든지 최고로만 먹는다. 자 최고 급 메뉴를 골라봐” 그러나 춘심이가 좀 주저 하는 태도를 보이자 그 자신이 직접 최고급 요리 를 주문했다. 그리고 웨이터에게 “프랑스 포도주 있나? 있으면 최고급으로 한병 가져와”라고 말 했다. 포도주가 나오자 김호장은 춘심이에게 한잔 따 라준 뒤 웃으며 말했다. “최고급 프랑스 포도주니까 한방울도 남기지 말고 마셔야 된다. 이런 술은 구경도 하기 어려운 술이야. 알겠지? 한방울도 남겨서는 안된다.” 물론 그 말은 춘심이를 즐겁게 하기 위한 농담 이었다. 춘심이는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김호장이 자신의 잔을 춘심이 쪽으로 들 어올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다시 만나게 된 것을 위해 축배를 들자. ” 춘심이도 술잔을 들어올렸고, 그들은 활짝 웃으 며 술잔을 부딪쳤다. 김호장은 단숨에 한잔을 마셨으나 춘심이는 한모금 마신 뒤 “오빠, 오늘 모든 게 꿈만 같애”라고 말했다. 춘심이는 김호장을 다시 만난 기쁨에 들떠 요 리에 별로 손대지 않았다. 김호장이 그걸 보고 “ 왜 맛이 없나?”하고 묻자 춘심이는 수줍은 표정 으로 “천천히 먹을께.”라고만 대답했다. 이전 같았으면 김호장이 당장 “내가 웬일이냐. 식욕이 그렇게 왕성한 애가 천천히 먹겠다니!”라고 놀렸 겠지만, 그러나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는 점잖게 “그래? 그럼 천천히 먹어.”라고만 말 했다. 춘심이를 대하는 김호장의 태도도 많이 변해 있었다. 춘심이가 술을 한모금이상 입에 대지 않 았는데도 더 권하지도 않았고, 말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화제가 별로 없었다. 김호장은 자신에 관한 얘기를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처지였고, 춘심 이는 자신의 근황에 대해서 모두 얘기했으므로 화제가 없었던 것이다. 춘심이는 김호장에게 어디 서 무얼하고 지냈느냐는 말을 한마디도 묻지 않 았다. 춘심이는 김호장의 생활이 예전과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얼핏보기에 김호장 은 당당했지만 주변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었고, 항상 무엇인가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춘심이는 간파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 다. <오빠는 변하지 않았어. 이전에도 당당함 속에 뭔가 초초한 빛이 있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야. 무엇엔가 쫓기고 있는 듯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 어.> 그러나 춘심이는 이전에도 그점에 대해서는 김 호장에게 한마디도 묻지 않았었다. 물론 황금마차 의 주인이나 종업원 어느 누구도 김호장의 그런 태도를 눈치채지 못했었지만 춘심이는 그와 각별 한 관계였기 때문에 쉽게 간파했던 것이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그들은 서둘러 레스토랑을 나왔다. 김호장이 먼저“답답하다 나갈까?”라고 말을 꺼냈고, 춘심이도 기다렸다는 듯이 "응, 차라 리 산보라도 하는 게 좋겠어."라고 대꾸했다. 김호장은 춘심이를 위해 그곳을 찾았지만, 레스 토랑에 들어가자마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춘심이도 마찬가지였다. 장안에서 행세께나 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레스토랑이어서 호기심이 동 했지만 막상 앉아 있자니까 바늘방석에 앉아 있 는 기분이었던 것은 둘다 마찬가지였다. 김호장은 레스토랑을 나오면서 춘심이에게 “ 제기랄, 소문만 그럴듯 했지 맛은 하나도 없는 집 이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들은 남산에서 내려와 충무로를 거닐었다. 그 리고 명동으로 빠져 찻집에서 차 한잔씩 마셨다. 차를 마신 뒤 춘심이는 부근에 있는 자신의 가게 에 잠시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춘심이를 기다리는 동안 김호장은 춘심이와 함 께 자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강요할 수는 없 다고 생각했다. 과거야 어쨌든 이제 착실한 생활 인이 되어 있는 처녀에게 집에 들어가지 마라고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찻집에 돌아온 춘심이 입에서 호텔에서 자겠다는 얘기가 먼저 나왔다. 그녀는 진지한 태 도로 이렇게 말했다. “오빠, 나 오늘 오빠 옆에서 자고싶어.” 김호장은 약간 당황했지만, 그게 싫지않아 “집 에 안들어가도 괜찮나?”라고 물었다. 춘심이는 약간 부끄러운 태도로 말했다. “가게에 있는 애를 집으로 보냈어. 친구집에 일이 있어 친구집에서 잔다고 전하라고 했어. 그 러니깐 집에선 걱정 안할테니까 그건 염려마.” 김호장은 그말에 빙그레 웃었다. 그리곤 “그 럼, 나가볼까.”라고 말하며 먼저 일어섰다. 그들은 명동을 잠시 거닐다가 소공동 쪽으로 건너갔다. 길을 건너자 인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 자 춘심이가 먼저 김호장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김호장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잠시 걷다가 앞쪽에 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그들은 호탤에 거의 다 도착해 있었으므로 거리에서 포옹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호탤 룸에 들어가자마자 김호장은 춘심 이를 끌어당겨 힘껏 껴안았다. 춘심이도 그의 넓 은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가 잠시 후에 얼굴을 들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김호장은 그녀의 입 술에 키스를 했고, 그녀도 열정적으로 그 키스를 받아들였다. 오랜 키스가 끝난 뒤에 김호장이 그녀 귀에대 고 속삭였다. "널 보고 싶었다. 너는 나를 원망했겠지." 춘심이는 그 말에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난 오빠를 원망하지는 안했어. 어쩐지 오빠가 나를 찾아올 것 같은 느낌도 있었고.....그리고 오 빤 내 은인인데 어떻게 원망해. 나도 오빠가 정말 보고 싶었어." 춘심이는 그렇게 말하며 김호장을 쳐다보았는 데,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김호장 은 그녀의 등을 어루만져주며 "미안하다."라고 말 했다. 그날밤 김호장은 그의 넓은 가슴 속에 춘심이 를 꼭 껴안고 잠을잤다. 잠들기 직전에 춘심이는 이렇게 말했다. “오빠와 헤어진 뒤 나는 평생 아무 남자도 받 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했었어” 김호장은 아무 대꾸없이 춘심이의 등을 어루만 지며 춘심이의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김호장은 춘심이와 함께 목욕을 끝내고 침대 위에 올라갔을 때만 해도 그녀가 이전과 다르게 약간 수동적이라고 느꼈었다. 그러나 그가 애무를 시작하자 그녀의 몸은 곧바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행위가 시작되자 그녀는 이전보다 더욱 더 그에 게 매달리며 격정을 폭발시켰다. 그때 김호장은 춘심이가 자신과 헤어진 뒤 다른 남자와 육체관 계를 맺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는 춘심이가 지친 목소리로 "오빠, 이제 고만..."이 라고 말할 때까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김호장은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다가 그녀를 다 시 한 번 힘껏 껴안아준 뒤 "이제 자자."라고 말 했는데, 그땐 이미 춘심이는 잠이 들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김호 장은 춘심이의 더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춘심 이가 숟갈을 들기 전에 짧게 기도를 했던 것이다. 그 모양을 보고 김호장의 눈이 커지며 춘심이에 게 물었다. “아니, 너 지금 기도한 거냐?” 춘심이는“응.”하고 대답하며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어젠 못 봤어? 어제 저녁 먹을 때도 기 도했었는데.”라고 말했다. 김호장은 더 놀란 표 정으로 “어제도 기도를 했단 말이지? 그런데 왜 내가 못 봤을까?”라고 말했다. 춘심이는 대수롭 지 않다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내 기도는 짧으니까 못 볼 수도 있지. 오빠가 다른 데 보고 있었다면 못 봤을거야. 나도 기도가 끝났을 때 오 빠가 아무 말 안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 봤으 면 틀림없이 무슨 말이 있었을텐데…” 김호장은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너 교회 나가냐?” 춘심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하고 대답했 다. “언제부터?” “오빠와 헤어진 직후부터.” 김호장은 더이상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는 춘심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렇게 생각했다. <춘심인 내가 헤어지자고 한 말에 깊은 상처를 받았었구나. 그래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거겠지 …>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해석이 아니었다. 물론 춘심이는 김호장이 인천 송도에 데리고 가서 영영 만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을 때 북 받치는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렸었다. 그때 그녀 가 고백했듯이 그녀는 김호장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호장의 도움으로 화류계를 벗어 난 이후부터 김호장에게 같이 살자고 졸라댄 것 은 그렇게 되리라고 기대하고 했던 말은 아니었 다. 가사 형편으로 화류계에 몸을 담으므로써 그 녀는 자신이 더러운 시궁창에 빠졌고, 그것은 여 자에게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그래서 김호장이 그녀 곁을 떠났을 때 그녀는 쉽게 체념할 수 있었다. 김호장의 추측처럼 그 문 제로 상처를 받지는 않았던 것이다. 김호장은 숟갈질을 몇번 하다가 춘심이를 쳐다 보며 “너, 참 많이 변했구나”라고 말했다. 그 말에 춘심이는 대꾸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러나 춘심이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오빠, 내가 변한게 아니야. 난 원래의 나로 돌 아가고 있는 중이야. 오빤 황금마차의 춘심이만 떠올리고 있겠지만, 난 학교 다닐 때 착한 학생이 었다우. 선생님들로부터 칭찬도 많이 들었고, 공 부도 잘하는 편이었어.> 김호장은 춘심이의 변화에 충격을 받았는지 다 시 물었다. “교회는 니 스스스로 찾아갔나?” 춘심이는 그 질문이 나올줄 알았다는 표정이 되며 대답했다. “오빤, 내가 교회 나가는 게 신기한 모양이지? 그러나 난 원래 교회와 인연이 있었어. 내가 다녔 던 ××여고는 기독교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야. 그때 성경공부도 했었지. 그러나 내 스스로 교회 를 찾아간 건 아니고 동창 친구가 졸라대 한번 따라갔다가 신자가 됐어.” 춘심이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오빠와 헤어진 뒤에 마음이 참 허전했는데 교회에 나가니까 위안도 되고 해서 좋더라. 그래 서 신자가 된 거지.” 그때 김호장이 뇌리 속에는 까맣게 잊고 있었 던 한 사람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사람은 그가 대구형무소 앞에서 형사들에게 쫓겨 부산으 로 도망칠 때 그를 부산진역까지 데려다 주었던 목사였다. 그 목사의 얼굴이 떠오른 뒤 김호장은 묵묵히 밥만 먹었다. 춘심이는 그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 각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아무 말 안했다. 이윽고 식사가 끝났을 때 김호장이 입을 열었 다. “너 나하고 여행갈 수 있나?” 춘심이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며 “언제?”하 고 물었다. 김호장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오늘 당장이라도 가고 싶지만, 너도 서울을 떠나자면 오늘 당장은 안되겠지.” 그러나 춘심이는 “오빠가 원한다면 오늘 당장 에라도 갈 수 있어. 어딘데?”하고 말했다. 그러 나 김호장은 춘심이를 배려하고 있었다. “어제 외박하고 오늘 또 없어지면 너의 집에 서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그러니까 오늘은 집에 들어가서 자고, 여행 허가를 받아와. 그래가지고 내일 떠나자.” 춘심이는 당장에라도 떠나고 싶었는지 시큰둥 하게 “알았어.”라고 대답한 뒤 “어디에 가는거 야?”라고 다시 물었다. 김호장은 “밀양”이라고 짧게 대답한 뒤 이렇 게 말을 이었다. “우선 밀양에 갔다가 경주에도 가보고 철이 지났지만 해운대도 가보자. 니가 서울을 오래 비 울 수 없을 거니까 사나흘 정도 잡으면 되겠지.” 춘심이는 그 말에 기분이 좋아서 어쩔줄 몰라 하다가 “오빠, 밀양에도 뭐 유명한게 있어?”라 고 물었다. 김호장은 계산서를 손에 들며 “거 기선 어떤 사람만 잠시 만나기만 하면 된다. 내가 신세진 사람인데 니가 나 대신 만나 뭘 좀 전해 줘.”라고 대꾸했다. 김호장은 호텔 로비에서 춘심이와 헤어졌다. 서 울에서 할 일이 없었지만 그는 약속이 있다며 다 음날 아침에 호텔에서 만나 서울역으로 가자고 말했다. 춘심이는 기쁨에 넘친 얼굴로 고개를 끄 덕였다. 김호장은 룸에서 하루종일 잤다. 저녁때 일어나 그는 남대문 시장으로 나가 고급 서류가방 한개 를 샀다. 그는 그걸 들고 남대문 시장 안에 있는 순대국집에서 저녁을 사먹은 뒤 무교동 황금마차 로 갔다. 그가 나타나자 주인과 그의 얼굴을 아는 바걸 들이 호들갑을 떨며 반갑게 맞이했다. 주인은 그 에게 “사업이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너무 오랜만 입니다.”라며 반갑게 인사했고, 바걸들은 “얼굴 잊겠네!”하며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는 오랜만에 기분 한 번 낼 생각으로 바걸들 과 술판을 벌였다. 바걸들은 그의 팁이 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극진히 모셨다. 그는 상당히 취해 호텔로 돌아왔다. 그는 침대 위에 벌 렁 누워 춘심이를 잠시 생각하다가 혼자 중얼거 렸다. “정말 많이 변했어! 춘심이가 교회에 나가리라 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나. 그러나 저러나 그 애 가 마음 잡고 교회에 나가는 건 잘 된 거지.” 그는 그가 새롭게 발견한 춘심이의 여유있는 모습과 여러가지 귀여운 표정들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잠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다음날 춘심이가 여행가방을 들고 나타난 모습 을 보고 김호장은 대단히 만족해 했다. 그녀가 입 고 있는 물방울무늬 원피스도 잘 어울렸고, 여유 있는 태도며 밝은 얼굴빛도 그의 마음에 쏙 들었 던 것이다. 그는 춘심이의 위 아래를 한번 훑어본 뒤 “너, 참 멋있다.”고 말했는데, 춘심이는 그 칭찬에 약간 부끄러워했다. 그들은 서둘러 호텔을 나와 서울역으로 가서 부산행 특급열차를 탔다. 김호장은 열차가 출발했을 때부터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열차가 수원역 에서 잠시 멈춘 뒤 막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어 떤 결심을 굳힌듯 춘심이를 돌아보며 “춘심아.” 하고 조용하게 불렀다. 춘심이가 그를 쳐다보자 그가 얘기를 꺼냈다. “넌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알고 있나?” 영리한 춘심이는 김호장이 그 말을 하자 당장 에 그가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 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녀는 “오빤, 사업하고 있 다고 했잖아.”라고 받아넘기며 웃었는데, 그 웃 음 속엔 사업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 다는 의미가 숨어 있었다. 김호장도 춘심이의 웃 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 웃음은 “ 오빤 사업하는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었 던 것이다. 김호장은 춘심이의 손을 살며시 쥐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내 얘길 듣고 놀라지 마라.” 김호장은 자신은 거물깡패로 5·16 군사정권의 수배를 받고 있다는 것, 5·16 당시에는 대구형무 소에 있었는데 출감때 형사들이 자신을 체포하려 고 형무소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 그는 그 포위망을 뚫고 도망쳐 현재까지 도피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등을 간략하게 얘기했다. 그 얘기를 듣 고도 춘심이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 는 그녀의 직감이 맞아떨어진 것에 대해 내심으 로 신통해 했다. <오빤 어쩐지 수상했어. 눈빛에 언제나 뭔가 경계하고 있었거든. 알고 보니 그랬구나. 도망다 니고 있는 몸이니까 눈빛이 그랬던 거야. 그리고 두목도 맞는 말이야. 깡패짓을 해도 졸개노릇은 안할 사람이야.> 김호장이 말을 이었다. “밀양에 가는 건 내가 대구형무소 앞에서 도 망쳐 야산으로만 부산까지 도망치던 도중에 신세 를 졌던 사람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야. 그 사람 의 도움이 없었다면 난 체포됐을지도 몰라.” 춘심이는 김호장의 얘기가 재미있는듯 눈이 동 그래지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 직업이 뭔줄 알아? 목사야. 난 그 사 람에게 신세졌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니 가 교회에 나간다는 말을 듣고 그 사람 생각이 난 거야. 그 사람은 밀양 부근 시골교회 목산데, 나에게 음식도 주고 옷도 갈아입힌 뒤 나를 부산 진역까지 데려다 주었어. 나에게 성경책을 주며 신도처럼 가장시켜서 말이야. 부산진역에서 헤어 질 때 난 그 목사에게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약 속했었다.” 춘심이가 궁금한듯 물었다. “그 목사님은 오빠가 수배받고 있는 사람이라 는 것을 알았을까?” “알았겠지. 나는 다리에 총을 맞아 피를 흘렸 었고 야산에서만 대여섯밤을 잤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경찰에 곧 신고될만큼 몰골이 형편 없었 으니까.” “오빠가 먼저 도와달라고 했어?” “아니야. 그 목사님이 스스로 나를 도왔어. 부 산진역까지 나를 무사히 데려다 주었을 때 나는 도피자라는 사실을 얘기했었지. 목사님은 이미 짐 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전혀 놀라지 않더라. ” 춘심이는 감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었구나! 오빠도 대단하고 그 목사님도 정 말 훌륭하다. 오빤 그 은혜를 정말 갚아야겠다.” 김호장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너 아니었다면 난 그 목사님의 은혜를 잊을 뻔 했다. 니가 기도를 하고 교회에 나간다고 했을 때 갑자기 그 목사님 얼굴이 떠올랐던 거야. 그래 서 너에게 여행가자고 했던거지.” 김호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춘심이가 물었다. “근데, 왜 나하고 같이 가서 목사님을 만나려 고 해? 나를 소개시켜 주려고?” 김호장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개는 무슨 소개야! 어제 말했잖아. 나 대신 니가 그 목사님을 만나 뭘 좀 전해달라고 했던 말 잊어먹었나?” 춘심이는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게 뭔데?” 김호장은 잠시 말을 끊은 뒤 내뱉듯 말했다. “돈이야. 백만원.” 춘심이는 깜짝 놀라며“백만원?"하더니 김호장 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1962년의 1백만원은 상당한 거금이었으므로 김호장이 은혜 입은 대가 로 그 목사에게 백만원을 주겠다는 말에 춘심이 가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김호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왜 놀라나? 은인에게 그 정도 보답도 못하 나? 내 생각엔 사실 백만원도 적다. 만일 그때 그 목사님의 도움을 받지 못해 붙잡혔다면 나는 골 로 갔을 거야. 군인들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병신 이 됐을지도 모르고 현재는 감옥에 갇혀 있을 거 야.” 춘심이는 그 말이 맞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빠, 한가지 물어봐도 돼?” 김호장은 뭐냐는 표정을 지었고, 춘심이가 말을 이었다. “오빤 돈이 어디서 생겨? 지금도 도피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김호장은 그 물음을 묵살하려는 듯 “나 정도 되면 돈 생기는 방법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고 말한 뒤 춘심이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춘심이 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진지하게 다시 물었 다. “난 그게 궁금해. 오빤 돈을 잘 쓰잖아? 그 돈 다 어디서 생겨? 옛날 부하들이 갖다 바치는 거 야?” 김호장은 춘심이의 시선을 피한채로 “그래 니 말이 맞다. 부하들이 갖다 받치기도 하고, 오징어 장사 해서 벌기도 하고....좌우지간 이래저래 쓸만 큼은 생긴다.”고 말했다. 춘심이의 질문은 계속됐다. “오징어장사? 그건 농담이겠지. 오빠에게서 생 선 비린내가 안 나는데? 좋아. 그럼, 오빠에게 한 가지만 더 묻겠어. 왜 목사님을 오빠가 직접 만나 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려는 거야?” 그 말에 김호장은 춘심이를 다시 쳐다보며 말 했다. “아직 때가 안됐기 때문이야. 그 목사님 생각 이 났을 때 그때 입었던 은혜에 보답해야겠다고 결심했는데, 내가 그 목사님을 직접 만나는 건 아 직 일러. 인연이 닿으면 먼 훗날에는 만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은혜는 일단 지금 갚아야겠어.” 춘심이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녀는 차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 뒤 뭔가 깊은 생각에 잠 겼다. 춘심이는 화류계에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5·16 으로 주먹깨나 쓴다는 깡패들이 무참하게 당했다 는 것을 누구 못지 않게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살벌한 분위기는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잘알고 있었다. 춘심이는 김호장을 알게 된 이후 그가 예사롭 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막 상 그의 얘기를 듣고 보니 마치 소설 속의 주인 공을 만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약간 흥분 됐다. 그녀는 차창 밖을 한없이 내다보다가 고개 를 돌려 김호장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그 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빠 얘긴 소설 같애.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 어. 숨어 사니까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김호장은 그 말에 춘심이를 쳐다보며 “고생은 무슨고생! 6·25때 겪었던 것에 비하면 아무 고생 도 아니다. 그땐 정말 고생했었지.”라고 말하며 빙긋이 웃었다. 김호장은 밀양 역에서 내린 뒤 한동안 기억을 더듬다가 목사가 있는 곳이 운천이라는 것을 생 각해냈다. 그들은 택시를 왕복으로 대절해 운천으 로 향했다. 김호장은 교회에서 좀 떨어진 곳에 택시를 세 우게 한 뒤 춘심이와 같이 내렸다. 그리고 서류가 방을 춘심이에게 전하면서 말했다. “내가 시킨대로 말하면 돼. 만일 안 받으면 가 방을 놓고 그냥 뛰쳐나와라. 난 이곳에서 기다리 고 있을테니까.” 춘심이는 가방을 받아 들고 “염려마, 꼭 전해 드리고 올테니까.”라고 말한 뒤 뒤돌아서서 교회 쪽으로 걸어갔다. 목사는 목사관 방문을 열어놓은채 신도인듯한 부인네 두명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문 앞에 서 춘심이가 “실례합니다.”하자 목사는 “뉘시 오?”하고 물었다. 춘심이는 그 남자가 목사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목사님이십니까”라고 물 었다. 목사는 “그렇소, 나를 찾아오셨소?”라고 말하며 춘심이의 행색을 살폈다. 춘심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목사님을 뵈려고 왔어요."라고 대답 했다. 그러자 부인네 둘은 일어서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목사와 단둘이 앉자 춘심이는 목사에게 조심스 럽게 말을 꺼냈다. “저는 서울에 살고 있습니다. 심부름으로 목사 님을 찾아뵙습니다. 작년 8월경에 허락도 없이 교 회안에서 잠을 잤던 청년을 기억하시는지요? 목 사님께서 부산까지 동행하셨다는 얘기도 들었습 니다.” 목사는 춘심이의 얘기를 듣고 그녀의 행색을 다시 살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 있었소이다만. 그 ㅊ년과 아는 사 이오?” 춘심이는 김호장이 시킨대로 말했다. “전 그분의 심부름을 왔어요. 그분은 그때 목 사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 굉장히 고맙게 생 각하며 목사님을 잊지 못하고 계세요. 그분은 목 사님을 직접 찾아뵙는 게 도리라는 것을 알고 있 지만, 그런 형편이 못돼 저를 심부름 보냈어요. 이걸 전해 주시라고요.” 춘심이는 가방을 목사 쪽으로 내밀었다. 목사는 춘심이와 가방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게 뭡니 까?”라고 물었다. 춘심이는 즉시 말을 이었다. “헌금입니다. 저는 이 가방 속에 얼마가 들어 있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이 교회 신자는 아니지 만 그때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헌금을 전해주 시라고 했어요.” 김호장은 춘심이에게 “이 돈을 목사님께 전해 드리라.”고 했지만 그녀는 돈이라는 말을 헌금으 로 바꿔 사용했다. 목사는 춘심이 말을 듣고 잠시 눈을 감고 생각 에 잠겼다. 그리고 눈을 뜬 뒤 춘심이에게 질문했 다. “그 청년, 신자는 아니지요?” “예.” “그땐 쫓기는 몸 같던데 지금은 괜찮소?” 춘심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거짓말로 대답했 다. “지금은 괜찮아요.” 목사는 다시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이렇게 말 했다. “이렇게 하십시다. 이 가방을 도로 가져가시 고, 괜찮다면 그 청년보고 한번 들려달라고 해주 시오. 내 생각엔 그 청년이 직접 가지고 와야 헌 금을 받을 수 있겠소.” 춘심이도 꺽이지 않고 말했다. “저는 이 헌금을 꼭 전하고 오라는 심부름으 로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분은 목사님을 나중에 찾아뵙겠다고 했어요.” “그 청년 연락처를 아십니까?” 춘심이는 내심으로 당황했으나 김호장이 시킨 대로 대답했다. “저에게 연락하시면 되지만, 아마 당분간은 서 울을 떠나 지방에 계실 거라고 했어요.” 춘심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사는 다시 눈 을 감았고, 춘심이는 진지한 자세로 목사의 승낙 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김호장은 춘심이가 바로 돌아오지 앉자 초조해 졌다. 그는 택시에서 나와 교회가 보이는 쪽으로 걸어가 서성거리며 시계를 자주 들여다보며 이렇 게 생각했다. <목사가 돈을 안 받을려고 하는 모양이군. 춘 심이를 보낸 게 잘못됐나?… 차라리 가방 속에 돈과 함께 편지를 넣어 방문 앞에 놓고 가버리는 게 낳을뻔 했나? 춘심이가 왜 이렇게 안 나와?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나! 그렇지는 않겠지. 심부 름 온 여자에게 설교하는 목사가 있을 리는 없어. 그러나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 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뭘 어떻게 한다는 걸 전혀 모 르는 놈이잖아! 하여간 답답해 죽겠군.> 시간이 자꾸 흘러 김호장이 안달이 날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야 춘심이와 목사가 집에서 나왔다. 김호장은 나무 뒤에 몸을 숨기며 그쪽을 보았다. 그는 춘심이가 가방을 들고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성공했구나.”라고 생각했다. 춘심이는 집 앞에서 목사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는데, 목사는 배웅을 하려는듯 춘심이를 따라오 려 했다. 춘심이는 목사가 더 이상 못 따라오도록 말리는 듯 목사에게 자꾸 절을 했다. 이윽고 목사 는 춘심이가 한사코 만류하자 그 자리에서 작별 인사를 받는듯 했다. 김호장은 재빨리 택시에 탄 뒤 시동을 걸게 했 다. 그리고 춘심이가 돌아와 택시를 타자마자 그 는 운전수에게 “갑시다!”하고 소리질렀다. 택시에 오른 춘심이는 매우 의기양양한 표정이 었다. 택시가 출발하자 그녀는 김호장 귀에 대고 소근거렸다. “성공했어. 목사님이 안 받으시려고 해서 혼났 어.” 김호장은 빙긋이 웃으며 춘심이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수고했다. 넌 장사 수완도 좋고 심부름도 잘 하는 여자구나.” 택시가 달리기 시작하자 춘심이는 다시 김호장 귀에 대고 말했다. “오빠는 은인 이름도 모르 고 있지? 내가 저 목사님 성함을 알고 왔어.” 그러자 김호장은 춘심이를 놀리는 투로 대꾸했 다. “너나 기억하고 있어라. 난 머리가 나쁘니까 니가 알으켜줘도 곧 잊어버릴거야.” 그러나 춘심이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쪽지를 김호장에게 내밀었다. 거기엔 목사의 자필로 한광 석(韓光錫)이라는 이름과 함께 주소가 써 있었다. 춘심이는 김호장이 쪽지를 들여다 보자 “한광석 목사님이시니까 잘 기억해 두세요.”라고 말했다. 김호장은 쪽지를 접어 상의 안 호주머니에 넣 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춘심이는 김호장이 어떤 감회에 젖어 있다는 것 을 느끼고 말없이 차창 밖만 내다보았다. 그들은 안동에 도착한 뒤 버스를 타고 경주로 갔다. 경주에서 그들은 불국사를 구경한 뒤 여관 에서 하룻밤 잤다. 그리고 다은날 새벽에는 석굴 암 관광을 했다. 춘심이는 가정 형편 때문에 고등 하교 다닐 때 수학여행을 못했다며 경주 관광을 매우 즐거워 했다. 그들은 석굴암 관광을 마치고 여관으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곧장 부산으로 향했다. 김호장은 춘 심이를 해운대 최고급 호탤로 데리고 갔다. 해운 대에서 그들은 이틀을 보냈다. 해운대에서의 마지막 날 점심 때 김호장은 하 승일을 불러내 같이 식사를 했다. 하승일은 김호장이 춘심이를 소개를 하자 어리 둥절한 눈치였다. 그는 춘심이가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를 뜨자 김호장에게 재빨리 물었다. “누구고? 니 색시깜이가?” 김호장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그러나 내가 지금 장 가갈 수 있는 처지냐?” 하승일은 그 말에 놀라는 투로 물었다. “언제부터 안 여자냐?" 김호장은 귀찮은 표정으로 “뭘 자꾸 물어보 나? 내가 좋아하니까 여기까지 데리고 와 너에게 소개까지 한 거 아냐? 이제 더이상 묻지 마!”하 고 하승일의 입을 막았다. 춘심이가 돌아와 자리에 앉자 하승일은 의미있 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참 미인이십니더.” 김호장은 웃음을 참으며 하승일을 노려보았다. 그날밤 김호장의 품에 안겨 잠들기 전에 춘심 이는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한 것 같애. 오빠는 참 좋은 사람같은데 왜 숨어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김호장은 아무 대꾸 없었다. 춘심이는 한참 있 다가 “오빠, 잠들었어?”하고 물었다. 그말에 김 호장은 “아니”하며 춘심이의 등을 어루만졌다. 춘심이가 다시 말했다. “오빠에게 아직 말 못한 게 하나 있어.” “뭔데?” “내 이름이야. 오빠도 알겠지만 춘심이라는 이 름은 내 본명이 아냐.” 김호장은 별로 놀라지 않으며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춘심이는 고개를 들며 어리광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왜 묻지 않았어?”… 왜 물어보지 않았 는지 알고 싶어. 어차피 헤어질 여자라고 생각하 고 묻지 않았지?” 춘심이는 그렇게 말한 뒤 김호장을 꼬집었다. 김호장은 엄살떠는 투로“아야!”하고 소리지른 뒤 춘심이에게 말했다. “내가 실수했구나. 그러나 원래 난 조금 무심 한 놈이잖아. 말해봐. 본명이 뭐지?” 춘심이는 토라진듯 김호장을 밀어내며 “몰라. 안 가르켜 줄래.”했다. 김호장은 품에서 벗어난 춘심이를 다시 끌어안으며 “화내지 말고 말해봐.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니가 본명을 말 해도 난 계속 너를 춘심이라고 부를것 같다.”라 고 말했다. 춘심이는 알아맞춰 보라며 그의 가슴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호장은 알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니가 밤새도록 써도 난 모를것 같다.” 그때서야 춘심이는 “내 이름은 박명자야. 밝을 명 아들자, 알았어?”하며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 었다. 김호장은 “박명자씨!”하고 부른 뒤 한손으로 그녀의 통통한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키 스를 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새벽에 일어나 바닷가를 산책했다. 손을 잡고 걷는 그들의 모습은 여느 신 혼부부처럼 다정하게 보였다. 박명자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마냥 행복한 표정 이었다. 그녀는 바다 쪽을 한참 쳐다보다가 김호 장에게 말했다. “오빠, 바다가 이렇게 좋은줄 몰랐어.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넘실대는 저 파도며, 갈매기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여!” 김호장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 는 사실 새벽의 그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보면서 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 평화롭고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밤만 되면 음모와 비밀이 엉키며 살벌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 수없 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그리고 그 음모와 비밀의 현장이 바로 그 자신의 일터였기 때문에 평화로운 바다풍경을 바 라보면서도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김호장은 행복스런 표정에 잠겨 있는 춘심이를 잠시 쳐다보다가 전혀 어색하지 않게 “명자야.” 라고 불렀다. 박명자는 그 부름에 웃음을 머금으며 “응?” 하고 대답했다. 그는 그 표정이 예쁘다고 생각하 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이 그렇게 좋나?” “정말 좋아! 이런 곳에서 평생 살고 싶은 정도 야.” “그럼 가끔 부산에 내려와. 내가 연락하면 이 곳에 와서 며칠 묵다가 올라가거라.” “정말?” “정말이다.” 박명자는 그의 품에 뛰어들어 안기고 싶을 정 도로 좋아했다. 김호장은 그녀의 손을 잡고 호탤 로 돌아갔다. 그들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부산진역으로 나갔 다. 역 플랫폼에서 김호장이 “내 연락처는 아직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다. 내가 자주 연락할테니까 그리 알아라”고 말했을 때 박명자는 약간 섭섭 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알았어”라고 대답했다. 김호장은 박명자를 배웅하고 아지트로 돌아갔 다. 제12장 보복의 덫 11월로 들어서자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김호장 일당은 일주일째 영도의 아치섬이 마주 보이는 해안을 지켰지만 연속 헛탕만 치고 돌아 왔다. 아직 영하의 날씨는 아니었지만, 바닷바람 이 제법 거칠어져 그들 모두 몸이 저절로 움추러 들었다. 일주일째 헛탕을 친 뒤 다시 현장으로 가기 위 해 부산진역 광장에서 만나 택시를 기다리고 있 었을 때 김호장은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오징어장사는 여름에는 할만한데 겨울에 는 곤란하겠어. 추울 때 바닷가는 더 춥지 않나. 물론 밀수꾼들은 그점을 이용해 겨울을 찬스로 생각하겠지. 그러나 우린 목숨 걸고 하는 사업이 아니니까 이번에 왕건지가 걸리면 겨울엔 푹 쉬 든지 하자.” 김호장은 겨울의 길목인 11월의 바닷가에서 일 주일째 밤을 보내면서 겨울엔 쉬어야겠다는 생각 을 굳히고 있었다. 물론 부산지방은 겨울에도 봄 날씨처럼 포근할 때가 많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즈음 그는 부쩍 상념이 많아져 일에 대한 의욕이 이전 같지 않아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김호장의 심경에 변화가 온 것은 박명자 때문 이었다. 박명자와 다시 상봉한 이후 그의 가슴 속 에는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자리잡고 앉 게 되었다. 그는 혼자 있을 때 그녀와 함께 목사 를 찾아갔던 일과 경주와 해운대에서 보냈던 3일 간의 즐거운 추억을 자주 떠올렸다. 심지어 바닷 가에서 밀수꾼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칠흑처 럼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도 박명자의 얼굴이 그의 망막 속에서 어른거렸다. 그리고 박 명자의 놀라운 변화와 그 변화 속에서 희망에 차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은 그의 추억 더듬기를 더 욱 감미롭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박명 자의 얼굴이 떠오르면 이렇게 생각했다. <명자는 좋은 여자야. 그리고 그 애가 변한 것 이 아니라 원래 바탕이 좋은 여자였던 거야. 내가 그걸 몰랐던 거지.> 김호장은 가끔 박명자와 같이 사는 문제를 생 각할 때가 많아졌는데, 그럴땐 고민에 빠지고 말 았다. 그는 밀수품을 털어먹으며 일생을 보낼 수 없 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군사정권에 쫓기는 몸이 되어 하는 수 없이 밀수품을 털어먹고 있었 지만 그 일 자체가 그의 성미에 맞는 것은 아니 었다. 그는 가끔 이렇게 생각했다. <밀수품을 털어먹는 건 사내 장부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특공대 노릇하는 게 낫 잖은가. 그거나 이거나 피장파장이지만 사내 장부 라면 밀수품 털어먹는 일보다 특공대 노릇 하는 게 더 떳떳할지 몰라…> 그러나 그 생각도 결국은 맥이 풀리는 일이었 다. 도피자의 입장에서 이것 저것 따진다는 것 자 체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김호장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서라. 따질 것 없다. 갈 데까지 가보자. 지 금 내 처지에서 최선의 선택은 체포되지 않는 것 이다. 체포되는 날에는 골로 갈 게 뻔하니까 이것 저것 따질 것 없다. 좌우지간 가는 데까지 가보 자.> 박명자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도 결론은 언제나 비슷하게 나왔는데, 결국은 그의 처지에선 한 여 자를 거느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 슴 속에서는 이미 박명자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그날 낚시꾼으로 가장하여 영도의 해안가로 향 하기 위해 부산진역 광장에서 만났을 때 황종태 는 처음으로 김호장이 평소와 좀 다르다고 느꼈 다. 언제 보아도 바위처럼 굳건하게 보였던 김호 장이 웬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황종태는 김호장에게 넌즈시 물었다. “형님, 오늘 기분 안 내키는교?" 그러자 김호장은 씩 웃으며 대꾸했다. “왜 그런 걸 물어보냐? 사람이 항상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 푼수로 보이는 것이다. ” 그러나 눈치빠른 황종태는 김호장이 능청을 떨 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김호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형님, 그라믄 오늘은 기분이 안 좋다는 얘기 아닌교? 지는 형님 말씸이 그렇게 해석되는데 지 말이 틀렸씹니껴?” 김호장은 황종태가 정곡을 찌르자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뒤 이렇게 대꾸했 다. “기분이 안 좋은 건 아니다. 그렇다고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고, 다만 오늘도 헛탕칠 것을 생각 하니 맥이 좀 풀린 것 뿐이다.” 그 말을 받아 황종태가 자신있게 말했다. “형님요. 지는 예감이 좀 발달돼 있씹니더. 오 늘은 틀림없이 걸릴 것 같십니더. 내기 할까요?” 김호장은 그를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 “내기까지 할게 뭐 있나. 밀수꾼들이 나타나면 좋은거지. 자, 저기 빈 택시가 온다. 빨리 저 택시 를 타고 가자.” 김호장은 택시를 세운 뒤 먼저 올라탔고, 나머 지 일행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현장에 도착한 즉시 익숙하게 밤낚시꾼 으로 위장했다. 그들은 베낭을 한곳에 풀어 놓고 바닷가에 띄엄 띄엄 앉아 낚시줄을 드리웠다. 서 로 아무 말 없이 낚시를 하다가 밤이 깊어지자 모두 낚시줄을 걷어올린 뒤 시야가 아치섬 오른 쪽 바다로 확 트인 곳에 자리잡고 엎드렸다. 그들 은 인기척에 신경쓰며 바다 쪽에서 불빛이 번쩍 이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밀수꾼들이 나타나는 것도 정해진 순서 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것을 잘 터득하고 있었다. 밀수품이 양륙되기 전에는 소위 밀수 세계에서 말하는 계엄령이 펼쳐진다. 해안의 인기척이 바로 그 계엄령인 것이다. 누가 있나 없나 살펴보기 위 해 육상패들이 해안을 정찰하고, 그들이 아무 이 상이 없다는 신호를 보낸 뒤에야 먼바다에서 불 빛이 번쩍한다. 육상패들이 보낸 '이상이 없다'는 신호에 대한 응답이 바로 그 불빛인 것이다. 그불 빛 신호가 오간 뒤에 해안에서 전마선이 나가고 밀수품 양륙이 시작된다. 물론 아치섬에서 금괴를 털었을 때처럼 그들이 인기척을 미처 못듣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날도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오른쪽에서 전마선 한척이 바다로 미끄러 져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처음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하늘이 먹구름으로 잔뜩 덮여있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는데 그들 모두 인기척을 못 느껴 먼바다에서 한순간 희미하게 빛났던 불 빛도 놓쳤다. 그 전마선이 바다로 나가고 있는 것을 이석배 가 맨먼저 발견했다. 그는 김호장에게 낮게 말했 다. “전마선 한척이 저쪽에서 나가고 있습니다!” 김호장은 물론이고 나머지 모두 이석배가 가리 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전마선 한척이 이 미 먼바다를 향해 미끄러지듯 나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게 보였다. 그 전마선을 바라보며 김호장은“뭘까?” 한 뒤, “불빛 신호가 없었잖아!”라고 중얼거렸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황종태가 김호장에게 말 했다. “계엄령도 없었고, 불빛 신호도 없었는데 전마 선이 나가는 게 이상합니더.” 김호장이 지시를 내렸다. “이 시간에 전마선이 먼바다로 나가는 건 틀 림없이 밀수꾼들의 배일 것이다. 우리가 쾌속정의 불빛을 못 보았을 수도 있다. 좀 지켜보다가 전마 선이 돌아올 때 저쪽으로 가보자. 밀수꾼 전마선 이라면 망보는 놈들이 있겠지.” 사방은 파도소리만 울려퍼지고 있었고 인기척 이라곤 전혀 없었다. 황종태가 바다를 계속 지켜보다가 김호장에게 속삭였다. “아치섬으로 가는 배도 아닌기라예. 분명히 먼 바다 쪽으로 가고 있씹니더.” 그들은 숨을 죽이고 전마선의 동태를 살폈다. 잠시후 전마선은 바다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전마선은 바다속으로 영영 사라진 것 같았 으나 30여분 후 쯤에유령처럼 그들 시야에 다시 나타났다. 전마선이 보이자 김호장이 지시를 내렸다. “가자. 밀수꾼 배가 틀림없다!” 그들은 전마선이 향하고 있는 해안으로 조심스 럽게 움직였다. 김호장을 선두로 망보고 있는 놈 을 찾기 위해 그들은 낮은 포복 자세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러나 인기척도 없었고 망보는 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전마선은 해안으로 점점 다가왔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전마선 동태 를 살폈다. 전마선은 태종대로 이어지는 벼랑이 시작되는 지점을 향해오고 있었다. 또 그 지점은 관목 숲이 있어 망보고 있는 놈이 어디에 숨어있 는지 알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 지형을 알고 있 는 황종태가 나직하게 말했다. “형님, 아무래도 저놈들이 괘짝을 들고 등성이 위로 오를 때까지 지켜봐야겠십니더. 망보고 있는 놈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수 없네예.” 김호장은 황종태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우린 더 지켜보고 있 다가 저놈들이 괘짝을 짊어지고 저 위쪽 평지로 올라섰을 때 덮치자.” 이윽고 전마선이 해안에 닿았고, 배 위에서 두 놈이 먼저 뛰어내렸다. 그리고 양륙 작업이 시작 되었다. 그런데도 망보는 놈은 나타나지 않았다. 황종태가 그걸 보고 말했다. “망보는 놈들이 없는 모양입니더! 저놈들은 저 지형을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합니더.” 김호장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밀수꾼들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망보는 놈이 없다는 건 상식에 어긋난다.” 황종태도 그 점이 이상스럽다고 생각했으나 다 시 한마디 했다. “한 번 덮쳐봅시더. 만일 밀수꾼이 아니라면 저놈들에겐 미안한 일이 되겠지만 일단 덮쳐봅시 더.” 전마선에는 여섯 명이 타고 있었고, 괘짝도 여 섯 개였다. 괘짝이 양륙되자 전마선에는 한놈도 남지 않고 모두 육지로 올라왔다. 그리고 괘짝 한 개씩을 짊어지고 평지가 있는 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김호장이 그걸 보고 “가자!”라고 했고, 그들 은 살금살금 기어 평지쪽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평지 쪽에 먼저 도착하여 납짝 업드렸다. 맨 먼저 평지 위로 올라온 놈은 숨을 헐떡거리며 괘 짝을 땅 위에 내려놓았다. 그 뒤를 이어 나머지 다섯 명도 곧바로 평지 위로 올라왔고, 그놈들도 괘짝을 땅에 내려놓고 숨을 헐떡거렸다. 여섯명이 평지 위로 다 올라온 것을 확인한 뒤 김호장이 낮게 명령했다. "덥치자!" 명령이 떨어지지마자 황종태가 용수철처럼 튀 어나가 멋진 발길질로번개처럼 두 놈을 처치했고, 나머지 네 명도 김호장과 억만이의 주먹을 얻어 맞고 쓸어졌다. 그들은 기절하지 않은 세 놈을 발 로 짓밟아 혼절시킨 뒤 억만이와 이석배가 그들 을 노끈으로 묶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김호장과 황종태가 동시 에 “억!”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그리고 곧바 로 억만이와 이석배도 등 뒤에서 날아온 몽둥이 를 얻어맞고 엎어져 버렸다. 관목 숲속에서 나타 나 그들을 공격한 패거리들은 모두 몽둥이를 들 고 있었는데, 일격에 쓰러진 네 명에게 그들은 개 패듯 몽둥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몽둥이질은 인정사정 없었다. 몽둥이질이 계 속되는 동안 두목인 듯한 자가 “골통은 까지마 라. 뒈지면 골치아프다!”고 한마디 했을 뿐이었 다. 싸움의 천재 김호장과 황종태도 그 몽둥이 기 습에는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고, 장사처럼 힘이 센 억만이도 그 몽둥이질에 시체처럼 축 늘어지 고 말았다. 두목인듯한 자는 네 명 모두 시체처럼 늘어지 자 “중지!”하고 짧게 명령했다. 그리고 몽둥이 질이 멈춰지자 그 스스로 피범벅이 되어 쓸어져 있는 네 명에게 다가가 차례로 자세히 살펴본 뒤 제각기 몽둥이를 들고 서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 했다. “이 새끼들은 아직 죽진 않았다. 저 묶인 놈들 풀어주고 깨워라. 그리고 궤짝을 짊어지고 빨리 튀자.” 그들의 동작은 기습할 때처럼 대단히 민첩했다. 잠시후 그들은 전마선에 탔던 패거리들과 함께 괘짝을 짊어지고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김호장은 동이 틀 무렵에야 어렴풋이 의식을 회복했다. 그는 오한을 느끼고 몸을 뒤척이려 했 지만 사지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온몸이 쑤 셔옴을 느낀 후에야 간밤의 일이 생각났다. 그는 눈을 뜬 뒤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서려 했 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자포자기 심정 이 되어 “이젠 꼼짝없이 죽었구나”라고 생각했 다.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주변 정황에 신경을 곤 두세웠으나 파도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 지 않았다. 잠시 후 김호장은 사태를 완전히 파악했다. 기 습당한 자리에서 쓰러진채 밤이 지나간 것을 안 것이다. 그는 고개를 간신히 돌린 뒤 부하들도 자 신처럼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는 “억만아”, “종태야”하고 불렀지만 그의 목 소리는 모기소리만 했다. 그는 안간힘을 써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헛일이었다. 그는 절망감에 사로 잡히기 시작했다. <큰일이구나.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당하다니. 저 애들은 왜 대답도 없나? 혹시 죽은 게 아닌 가?> 그때 억만이가 그를 불렀다. “대장! 대장!” 김호장이 반갑게 대답했다. “억만이구나! 괜찮나?” “죽을 지경이다. 몸이 전혀 움직여지지 않는 다.” “큰일이다. 종태와 석배가 걱정이구나.” 바로 그때 태종대 유원지 쪽에서 자동차가 내 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호장과 억만이는 말을 멈추고 그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들은 괜히 겁을 먹었으나 그 자동차 운전수는 행운의 여신 이 그들에게 보낸 사람이었다. 그 자동차는 택시였다. 해운대로 신혼여행왔던 부부가 동트는 새벽을 보기 위해 태종대 유원지 까지 타고왔던 택시였다. 젊은 택시 운전수는 신혼부부와 요금 시비를 했기 때문에 소변 마려운 것을 깜빡 잊었다가 김 호장 일당이 쓰러진 곳 바로 위 지점에 와서야 소변 눌 생각을 했다. 택시 운전수는 차를 세우고 바다를 향해 물건을 내놓고 오줌을 갈기다가 아 래쪽 평지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순간 그는 깜짝 놀라 오줌 싸는 것을 멈출 정 도였다. 그는 김호장 쪽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저기에 있는 게 사람들 아이가. 보자, 몇 명이 나? 네 사람이네. 뭐하고 있나? 이크! 죽은 사람 들 같은데 우째 저렇게 되었노? 일단 오줌이나 다 누고 가보자.> 택시 운전수는 김호장 쪽을 쳐다보며 다시 오 줌을 누은 뒤 도로 아래로 내려가 조심스럽게 그 들에게 접근해갔다. 택시 운전수는 김호장이 눈을 뜨고 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째 된 일인교? 쌈했는교?” 김호장은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하고 도움을 요 청했다. “우릴 도와 주시오. 도와주시면 그 은혜는 잊 지 않겠소.” 운전수는 성격이 급했다. 그는 김호장이 하는 말에는 관심이 없는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그 에게 다시 물었다. “지금 그런 게 문젠교? 우째 이렇게 맞았는 교? 네명 모두 피범벅이 됐는기라예!" 그는 잠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궁리하는 듯 하 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선 병원으로 옮겨야겠는데....우짜노? 나혼 자 되겠나? 이걸 우짜지? 옮기는 걸 도와줄 사람 도 없꼬. 우째야 좋겠노.” 그는 "우째야 좋겠노."소리를 연신 중얼거리며 뭔가 잠시 생각하는듯 했다. 그 모양을 보고 있던 김호장이 운전수에게 통 사정하듯 말했다. “지금 급히 내 친구에게 연락 좀 해주시오. 그 친구에게 연락만 되면 다 해결 될 거요.” 그러나 운전수는 혼자 또 중얼거렸다. “병원에 입원부터 해야 되겠는 기라! 맞아도 너무 맞았다. 뭘로 이렇게 맞았는교? 내 나고 이 런 건 처음 봤다.” 택시 운전수는 그들을 병원에 입원시킬 궁리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도 복잡한 일이 라고 생각한듯 김호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친구가 어디에 살고 있는교? 가깝다면 내 자 동차로 당장에 데려오겠소.” 김호장은 그 말에 안도의 숨을 쉬며 간신히 아 래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그의 손에는 천원 짜리 지폐 열댓장이 잡혀 나왔다. 운전수는 그 돈 을 보고 힐끗 쳐다보았지만 돈에는 관심이 없는 표정이었다.그는 신경질내는 투로 김호장에게 말 했다. “친구가 어디 사는교? 내 퍼뜩 데려올라니까. ” 김호장은 남포동의 하승일 가게 이름을 가르켜 주었다. 운전수는 김호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손에 들려있는 돈은 챙기지도 않고 도로 위로 뛰어갔 다. 그리고 잠시후 자동차 시동거는 소리가 나면 서 자동차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하승일은 가게에서 자고 있는 웨이터와 주방장 까지 데리고 나타났다. 운전수가 차 한대로는 부 족하다고 했기 때문에 택시 한대를 더 대절해 왔 다. 하승일은 운전수의 전갈을 듣고 사태를 간파했 으므로 김호장에게 아무말도 묻지 않았다. 그는 종업원들을 지휘하여 완전히 뻗어버린 네 명을 택시에 태웠다. 그리고 초량동 김호장 아지트로 그들을 옮겼다. 용의주도한 하승일은 김호장 아지트 앞에 차를 세우지 않았다. 골목 어귀에 택시를 세운 뒤 종업 원들에게 네 명을 차례로 옮기게 했다. 그동안 하 승일은 택시 운전수들에게 사례비를 주었다. 하승 일은 택시를 보내고 나서 아지트로 들어왔다. 동 이 튼 직후의 새벽이라 김호장 일행이 피범벅이 되어 그들 아지트로 옮겨지는 것을 목격한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하승일은 방안으로 들어와 송장처럼 누어있는 네 명을 보고 기가막힌 듯 혀를 찼다. 김호장과 억만이는 눈을 뜨고 있었으나 반송장이나 다름 없었고, 황종태와 이석배는 여전히 인사불성이었 다. 하승일은 그 모양을 보고 넉두리처럼 “우째 해야 좋겠노.”라고 중얼거렸다. 사람좋게 생긴 주방장은 잔뜩 걱정스런 표정으로 하승일에게“ 병원에 입원시켜야 되지 않겠는교? 잘못하면 큰 일 나겠십니더”했다. 그러나 하승일은 고개를 흔 들며 그걸 반대했다. "입원은 안된다.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 희들은 가게로 돌아가라." 그는 웨이터 한 명만 남도록 한 뒤 주방장을 비롯한 나머지 가게 종업원들은 가게로 돌려보냈 다. 그들을 보낸 뒤 하승일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김호장의 머리 맡에 앉았다. 김호장이 힘겹게 고 개를 움직여 그를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병원에 입원하지 않으면 안 될 상태 같다. 그 러나 너희들 입장으론 그럴 수도 없으니 우째야 좋겠노?” 김호장은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말했다. “입원은 절대로 안된다. 승일아, 사슴피가 이 럴 땐 최곤데, 구할 수 없겠지?” 하승일은 잠시 묵묵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사슴피?” “응, 살아있는 사슴을 구해 그 피를 마시면 다 른 약 필요없다. 이렇게 맞았을 땐 똥물도 약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만 사슴피가 확실한 약이다. 웅담도 좋고…” “사슴 피가 그렇게 좋은 약인가?” 김호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승일은 잠시 생 각에 잠겼다. 그의 표정으로는 묘안이 떠오른듯 했다. 하승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입원할 수 없으면 우선 한의사라도 퍼뜩 데 려와 진맥을 해봐야겠다. 사슴 구하는 문제는 내 가 연구해 볼께. 그럼 잠시 기다려라. 퍼뜩 한의사부터 데려와야겠다.” 뾰족한 간병 방법이 없었으므로 하승일은 남아 있는 웨이터에게 “잘 지키고 있거래이.”라고 말 한 뒤 잽싼 동작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는 한시간 반 정도 지난 뒤 노인 한 명과 함 께 나타났다. 노인은 첫눈에도 한의사로 보였다. 방에 들어선 노인은 네 명을 보자마자 기가 찬 듯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 명씩 진맥부터 시작했다. 네 명에 대한 진맥을 마친 뒤 노인은 하승일을 쳐다보며 말했다. “큰일이다. 특히 저쪽은 위험하다.” 노인이 눈짓으로 가리킨 쪽은 이석배였다. “이 세 명은 원래 강체인 기라. 그러나 지금의 맥은 모두 심상치 않다. 그란데 저쪽은 약질이어 서 어떤 약을 써도 어렵겠다.” 하승일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쪽 세명은 가능성이 있다는 얘긴교? 살려주시기만 하시면 사례는 얼마든지 하겠십니 더.” 노인은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 았다. 그는 생각을 정리한 뒤 이렇게 말했다. “내한테 웅담이 있는데 비싸다. 그러나 비싸더 라도 그걸 사야 된다. 지금으로선 웅담가루를 더 운 물에 타서 먹여보는 수밖에 없다. 그라고 그 뒤에 내가 지어준 약을 달여 먹여라. 구할 수만 있다면 이럴 땐 구렁이를 고와먹이면 좋은 약이 되는데, 구할 수 있겠노?” 하승일이 대답 대신 질문했다. “사슴피도 좋은 약이 되는교?” 노인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사슴을 어디서 구하겠노? 서울 창경원에서 잡아올래?”하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다. “구할수만 있다면 사슴녹혈이 참 좋다. 사슴 생피도 좋고… 그걸 구할 수 없을테니까 멧돼지 생피라도 구해 보아라. 노루도 좋고…” 하승일은 노인과 함께 다시 나갔다. 한시간 정도 지난 뒤 하승일은 노인이 지어준 약과 웅담을 들고 왔다. 그는 웅담가루를 더운 물 에 타서 네명에게 먹였다. 그때는 황종태도 눈을 뜨고 있었다. 이석배는 인사불성이었으므로 그의 입을 벌려 웅담가구를 탄 물을 조금씩 떨어뜨렸 다. 응급조치를 끝낸 하승일은 웨이터를 남겨두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이미 훔쳐서라도 사슴을 구 하기로 결심했으므로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조치 를 취하기 시작했다. 칠성파 두목 이덕구는 5·16직후의 후리가리에 걸려 형무소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부도목격이었 던 이만복은 운좋게 피했다가 다시 부산에 나타 났다. 하승일은 이만복에게 가끔 용돈도 주면서 그를 관리해오고 있었다. 이만복은 의리가 있고, 머리도 잘 돌아 하승일이 각별히 아끼는 후배였 다. 가게에 도착한 하승일은 맨먼저 웨이터들에게 이만복을 찾아오도록 했다. 남포동 바닥은 빤해서 이만복은 곧 나타났다. 하승일은 영업시간이 안 돼 텅 비어 있는 홀 구석으로 이만복을 데리고 가서 그에게 말했다. “만복아, 니가 날 도와줄 일이 생겼다.” 이만복은 시원스럽게 “말씀하이소, 뭐든지 돕 겠십니더.”라고 대답했다. 하승일은 김호장이 최근부터 부산에 와서 숨어 있었다는 것, 그런데 바로 전날밤 누군가에 의해 몰매를 맞고 사경을 헤해고 있다는 것, 김호장을 구할려면 사슴피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간략하게 했다. 그러자 이만복은 김호장이 몰매를 맞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듯 당장에“호장이 형이 몰매 를 맞다니요! 어떤 놈들한테 당했는교?”라며 분 을 삭이지 못했다. 하승일이 말을 이었다. “좌우지간 진상은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은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고 호장이를 살리는 게 더 급한 문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호장이를 살 리기 위해서는 사슴을 훔쳐서라도 그 피를 먹여 야 되는데, 나하고 같이 사슴 훔치러 가자는 거 다.” 사슴을 훔치러 가자는 말에 이만복의 눈이 커 졌다. 그는 그게 가능한 일이겠느냐는 표정을 지 으며 말했다. “사슴을 어디서 훔치는교? 있는 곳을 알기만 하면 얼마든지 훔쳐오지요. 있는 곳을 알고 있는 교?” 하승일은 이만복이 사슴 훔치는 일에 찬성하자 얼굴이 밝아지며 자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 했다. “내가 사슴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 부산 갑부 박용학 이름은 들었겠지? 박용학 별장이 다대포 해수욕장 옆에 있는데 근사하다. 바다가 쫙 펼쳐 진 곳에 있으니까 전망이 매우 좋은 곳이다. 그란 데 그 별장에 딸린 농장에 사슴이 있는 기라. 이 건 소문이 아니라 내 눈으로도 직접 보았던 거다. 몇 마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거기에 사슴이 틀림없이 있다!” 이만복은 주저없이 찬성했다. “훔치러 갑시더! 지는예 호장이형 살리는 일이 라면 지옥에라도 가겠십니더.” 이만복이 찬성하자 하승일이 다시 말했다. “그럼, 넌 사람 두명을 더 구해라. 우리 둘만 으로는 어렵다. 트럭과 운전수는 내가 구할테니 까. 믿을 수 있는 놈들로 구해야 되는기라. 사례 는 내가 톡톡히 할끼다.” 이만복은 "사례는 무신 사롑닙껴. 우선 호장이 형님부터 살려놓고 봅시더."라고 말한 뒤 사람을 구해오겠다며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이만복이 나간 뒤 하승일은 해운회사에 다니고 있는 조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조카가 나오 자 앞뒤 설명없이 명령조로 말했다. “너 일 끝나면 내 가게로 바로 오라. 너 군대 에서 운전병했다 캤는데 그 운전 실력 안 없어졌 겠지?” 조카가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무슨 일 때문 에 그걸 묻십니꺼”라고 질문을하자 하승일은 이 렇게 말했다. “좌우지간 저녁 7시까지 온나. 트럭 몰고 어디 다녀 올 때가 있으니까.” 조카는 “트럭 몰고 어딜 갑니껴?”라고 물었 지만, 하승일은 “그럴 일이 있다.”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승일은 조카가 자신을 대단히 무서워하므로 끽소리 못하다고 명령에 복종한다 는 것을 잘알고 있었다. 이만복이 졸개 두명과 함께 다시 나타나자 하 승일은 그에게 돈을 주면서 철조망 절단기, 마취 제, 쥐약, 마대, 면장갑, 노끈 등을 사오게 했다. 그리고 그는 화물회사로 가서 트럭 한대를 세냈 다. 그리고 가게로 돌아오는 길에 국제시장에 들 러 검은 물 들인 군복 네 벌을 샀다. 그는 가게로 돌아와 주방장에게 쇠고기 한 근 을 구어 개가 한 입에 삼킬 수 있을만하게 썰어 오도록 했다. 이만복 일행이 가게로 돌아오자 하승일은 그들 을 내실로 데리고 갔다. 그는 그들에게 짤막하게 작전 지시를 내렸다. “지난 여름 다대포 해수욕장에 놀러갔다가 박 용학 별장 옆 까지 가보았다. 거기엔 분명히 사슴 이 있다. 그리고 세퍼트와 경비원이 있다. 우리는 오늘 밤에 사슴을 구해 오지 않으면 안된다. 환자 들이 너무 중태다. 일은 이렇게 한다. 쥐약 탄 쇠 고기를 던져 세퍼트를 없앤다음 철조망을 뚫고 들어가 경비원을 해치우자. 경비원들이야 보나마 나 허깨비들일테니까 간단히 처리한 뒤 사슴 두 마리만 가지고 온다. 트럭은 농장에서 5백여미터 떨어진 곳에 세워두는 게 좋겠다. 질문 있으믄 하 라.” 이만복은 그 작전에 찬성한다는 뜻으로“알겠 십니더.”라고 말했고, 졸개들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은 하승일 조카가 가게에 나타나자 즉시 출발했다. 하승일은 조카에게 이렇게만 말했다. “우린 다대포에 가서 뭘 좀 실어와야 한다. 넌 내가 지시한 곳에서 차를 세우고 우리를 기다리 고 있거라.” 하승일 조카는 그를 무서워했으므로 아무 질문 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트럭회사까지 택시를 타고 간 뒤 거기 서부터는 트럭을 타고 다대포 쪽으로 향했다. 부산 갑부 박용학은 일제때 건어물 장사를 시 작하여 재력을 쌓은 뒤 한국전쟁 때 떼돈을 번 사람이었다. 난세를 만나 목숨을 잃는 자도 많지 만, 또 난세에 재미보는 놈도 있기 마련인데 박용 학은 바로 그 난세에 재미를 본 사람중의 하나였 다. 그는 전쟁이 터지자 건어물 장사를 떼려치우고 친척의 빽줄을 이용해 재빨리 군납업자로 변신했 다. 그는 요령이 좋아 돈이 벌리면 혼자 다 먹는 장사꾼이 아니었다. 그는 군납업에 뛰어든 뒤 거 래선에 적당히 떼어주면 더 많은 것이 돌아온다 는 것을 즉시 터득했다. 그 상술이 적중해 그는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엄청나게 돈을 모을 수 있 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는 군납업을 계속하 면서 선박회사를 차려 사업을 점차 확장해나갔다. 그가 갑부소리를 듣기 시작한 것은 선박회사를 차린 이후였다. 갑부가 된 박용학은 그의 신분에 걸맞게 다대 포 해안에 별장도 지었고 첩도 세 명이나 거느렸 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그는 몸보신에 각별 히 신경쓰기 시작했다. 한의사들은 녹용만이 그의 체질에 맞는 보약이라고 했고, 실제로 그는 녹용 을 먹으면 힘이 불끈 솟았다. 그의 첩들은 그가 녹용를 먹은 직후에 교접을 하면 녹아 떨어질 정 도로 좋아했다. 특히 그의 세 번째 첩 이애순은 색정이 유별나 게 강한 여자였다. 다방 얼굴마담 출신인 이애순 은 평상시에도 교태가 잘잘 흐르는 여자였는데, 어느 남자와 교접을 해도 한 번으로는 만족을 하 지 못했다.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타고 난 색녀 였기 때문에 이 남자 저 남자 품을 전전하다가 박용학을 만나게 되었다. 온갖 여자들과 상대해온 박용학은 여자 다루는 솜씨도 출중했는데, 서른 살이 안된 이애순을 만나 하룻밤 정분을 텄을 때 그는 속으로 탄복을 했다. <이 가시나는 보통이 넘는다. 남자 간장을 살 살 녹이는 재주도 있고, 색도 강하다. 좋아. 너도 오늘부터 내 첩이다. 우쨌든 여자는 교태가 있어 야 최곤데 요 가시나가 바로 그런 여자다. 다른 놈이 끼고 못자게 아예 내 첩으로 만들어버리 자.> 박용학은 그렇게 마음먹고 이애순을 당장에 세 번째 첩으로 만들었다. 이애순도 박용학이 갑부라 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그의 애첩이 되었다. 그러나 나이 차이는 어쩔 수 없었으므로 이애순은 박용학과의 잠자리 때 만족할 수 없었 다. 첩 생활 초기에는 그걸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 러나 본성을 속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박용학이 사준 집에서 첩 생활을 한달쯤 했을 때 이애순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박용학이 온갖 기교를 다 부린 뒤 젊은 이애순의 배 위에서 내려와 벌렁 눕자 그녀가 투정을 부린 것이다. "보소. 보약 좀 묵어야겠다. 나는 이제 시작할라 카는데 내려가뿌리면 되겠나?" 박용학은 그 말 한마디에 충격을 받았다. "니 아직 안 끝났나?" 이애순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정도로 우째 끝나겠는교?" 박용학은 이애순이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지르 며 절정을 넘겼기 때문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니 지금 뭐라 캤노? 아직 안 끝났다 캤나?" 그러나 박용학은 그 말을 내뱉고 난 뒤에야 이 애순의 말뜻을 깨달았다. <요게 보통 색골이 아니지. 그러니까 한 번으 론 만족할 수 없다는 뜻인 기라. 내 그걸 몰랐구 나.> 박용학은 다시 이애순을 껴안았다. 그녀는 기다 렸다는 듯이 그의 품에 바짝 안겼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능동적으로 체위도 바꾸어가며 박용학을 리드해 나갔다. 한 번 폭발한 이애순의 색정은 좀 체로 식지 않았다. 그녀가 절정을 넘긴 뒤 박용학 이 그녀 몸 위에서 내려와 벌렁 누워 자려고 하 면 그녀의 손이 슬그머니 그의 사타구니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애무가 다시 시작됐고, 그렇게 되면 박용학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요구 에 응했다. 그날 밤 박용학은 죽을 똥을 쌀 지경이었지만 이판사판 심정으로 불꽃처럼 타오르는 애첩의 색 정이 식을 때까지 용을 써가며 호흡을 맞추었다. 다음날 그는 너무 지쳐 정오가 다 되어서야 잠에 서 깨어났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허리가 끊 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으나 아무 내색도 하 지 않았다. 박용학의 여자 편력은 역술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재물을 많이 쌓은 박용학은 역술가들과 접촉이 많았는데, 역술가들이 그의 사주를 풀이할 때는 한결같이 큰 재산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 면서 여자도 열 명은 거느릴 것이라고 덧붙이곤 했다. 어떤 역술가는 이런 말도 했다. "영웅은 호색가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재산 가들이 운명적으로 타고난 호색가들이지요. 사주 에 나타나는 재물은 한편으론 거느리는 여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재산가들이 진짜 호색가들 입니다. 여자가 생기면 피히지 말고 거느리십시 오. 그래야만 팔자를 거역하지 않고 살게 되는 것 이고 재산도 보전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재산가들 의 정부인들은 독수공방할 때가 많은데 그것도 타고난 팔자니까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박용학은 역술가들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틀리 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자를 많이 거느리 라."는 말을 충실히 실행했다. 물론 그 자신도 타 고난 호색가였다. 아무튼 세 번째 첩 이애순에게 밤새도록 시달 렸던 날 이후부터 박용학은 몸보신에 좋다는 것 은 안 가리고 먹어댔다. 그는 "계집 하나 상대 못 해서야 어찌 장부라 할 수 있겠노?"라고 생각하 며 몸보신에 각별히 신경썼다. 그런데, 한의사들이 그의 체질을 진단하고 말한 것처럼 그에게는 녹용이 가장 잘 맞았다. 그가 녹 용을 달여 먹은 직후에 이애순을 찾아가면 그녀 는 그의 발기된 성기를 쳐다보며 만족스런 표정 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와! 보약 묵었는교? 힘이 넘쳐보이니까 보기에 도 좋십니더." 박용학도 이애순이 그렇게 말하면 기분이 좋아 그 짓이 더 잘 됐다. 박용학이 다대포 별장 옆에 농장을 만들어 사 슴을 사육하기 시작한 것은 자유당 정권 붕괴 직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진품 녹용 구하는 게 매우 어려운 때였는데, 평소 그와 주색잡기 친구 사이 였던 무역업자 이준구라는 자가 그에게 사슴을 직접 사육하라고 권했다. 박용학은 그말을 듣고 대뜸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라. 산사슴을 어 디서 구한단 말이고?”했는데, 이준구는 손가락으 로 동그라미를 그려보이며 “돈으로 안되는 일 있더나? 돈만 둬! 내가 얼마든지 구해 줄께.”라 고 말했다. 농담처럼 오고갔던 그 얘기가 발전돼 결국 박용 학은 사슴 두 마리를 구했다. 물론 암수 한쌍이었 는데, 그 사슴은 밀수꾼들이 일본에서 쾌속정으로 실어온 것이었다. 박용학은 수의사를 고용해 그 사슴 두 마리를 정성스럽게 키웠고, 그 사슴 한쌍 은 새끼를 잘 낳았다. 5·16이 터진 이듬해 봄부터 박용학의 별장에 는 서울에서 내려온 군부 실력자들이 은밀하게 다녀갔다. 박용학의 녹혈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군부실력자들은 돈도 좋아했지만, 그보다도 몸보 신에 명약인 녹혈을 마시게 하면 입이 찢어질 정 도로 더 좋아했다. 물론 박용학은 선이 닿는 실력 자를 만나면 “녹혈처럼 몸보신에 좋은 게 없십 니더. 우리 별장에 한번 오이소. 잘 대접해 드리 겠십니더.”라는 말을 던져 그들을 유혹했다. 녹 혈을 마시고 간 군부실력자들은 그뒤부터 박용학 의 확실한 후견인이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빽줄을 이용해 그는 군납업계의 실력자로 군림하 기 시작했다. 하승일은 박용학의 녹혈정치 소문을 들은 바 있었다. 그래서 그의 계산으로는 박용학이 사슴을 도둑맞아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 다. 경찰에 신고하면 신문에도 보도될 것이며, 그 렇게 되면 온갖 얘기들이 떠돌게 될 것이라는 사 실을 박용학이 모를 리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트럭이 다대동 주택가를 벗어나 인적이 없는 곳에 이르자 하승일은 차를 멈추게 했다. 그리고 그는 운전수인 조카에게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래이”라고 말한 뒤 이만복 패거리를 이끌고 박용학 별장으로 접근해갔다. 그는 도중에 이만복 을 안심시키기기 위해 “이 일은 절대로 뒷탈이 없을 끼다. 세상 분위기가 농장에서 사슴 키우는 일을 좋게 보아주지 않는 기라.”라고 말했다. 이 만복은 그 말에 “뒷탈이 나도 어쩌겠는교? 호장 이 형을 구해내는 게 중요합니더.”라고 대답했 다. 박용학의 별장은 다대포 해수욕장의 백사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구릉 위에 있었다. 별 장으로부터 백사장까지는 오솔길이 있었다. 사슴 농장은 별장 옆에 딸려 있었는데 별로 넓지 않았 다. 농장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농장 안 에는 사슴 우리와 경비원 숙소로 보이는 집이 있 었다. 그리고 별장과 농장 사이에는 사슴이 별장 정원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철망이 있 었다. 하승일은 별장으로부터 1백미터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별장을 살폈다. 이층 건물인 별장은 아 래층 한 곳에만 불이 켜져 있었고, 농장의 경비원 숙소로 보이는 집에도 불이 커져 있었다. 하승일은 마음이 조급했으므로 경비원들이 잠 들기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별장을 내려다 보다가 결심을 굳힌듯 손으로 이만복의 옆구리를 찌른 뒤 이렇게 말했다. “저 불이 꺼지고 모두 잠든 뒤에 일을 치른다 면 쉽겠지만 우린 그럴 여유가 없다. 빨리 해치우 지 않으면 호장이가 위험한 기라. 이렇게 하면 어 떻겠노? 저 농장 안에 개가 있다. 경비원들은 저 농장 안의 불이 켜진 집에 있을 낀데 많아야 두 놈일 끼다. 별장 안에는 나이 많은 식모가 한두 명 있을 끼고.... 좌우지간 문제는 개다. 개를 없애 기만 하면 일은 식은죽 먹기다. 자, 그라믄 이렇 게 하자. 우리는 일단 별장을 습격해 식모를 협박 하여 밖으로 조용하게 끌고 나와 개에게 쥐약 탄 쇠고기를 던지도록 하자. 여자가 던지면 개가 안 짖고 받아먹을 끼다. 쥐약탄 쇠고기를 먹으면 개 는 곧 죽는다. 죽기 전에 낑낑거리겠지. 그러나 그땐 힘이 빠져 있으므로 개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개가 낑낑대려고 할때 우린 경비원 숙소를 덮친다. 별장과 농장 사이의 문은 그냥 열릴 끼 다. 알겠나? 이건 정말 번개처럼 해야 된다.” 이만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꾸했다. “그렇게 합시더. 그란데 여자는 누가 끌고 나 갑니꺼?” 하승일이 다시 말했다. "여자는 내가 맡는다. 너희들은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신호를 보내면 농장으로 뛰어들어가 경비원들을 덮쳐라.” 그들은 그 자리에서 옷을 벗고 검은색으로 물 들인 군복을 입은 뒤얼굴에 복면을 하고 별장으 로 살금살금 접근해 갔다. 그리고 농장이 안보이 는 쪽 담을 넘어 별장으로 살그머니 들어갔다. 그 들은 잠시 집 안의 동태를 살피다가 부엌 쪽으로 다가가 불이 켜진 방을 덮쳤다. 그 방에는 50대 여자 한 명이 마른 빨래를 개 고 있었는데 복면을 한 그들이 칼을 들고 들어서 자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하승일이 그 여자에게 낮게 명령했다. “소리 지르든지 시키는대로 안하믄 죽는다! 알 았나?” 여자는 겁에 너무 질린듯 아무 대답도 못했다. 그러자 하승일이 칼을 여자의 가슴에 대자 여자 는 살려달라는 시늉으로 두손을 빌기 시작했다. 하승일은 잠시 뜸을 들인 다시 엄하게 말했다. “우리가 시키는대로 할래? 우리가 시키는대로 하면 절대로 죽이지는 않겠다. 그러나 말을 안 듣 는다든지 꾀를 부리면 이 칼이 니 가슴을 찌를 것이다.” 하승일의 협박에 여자는 새파랗게 질리며 고개 를 끄덕였다. 하승일은 신문지로 싼 쇠고기를 여자 앞에 던 진 뒤 다시 말했다. “이건 고기다. 아지매가 그걸 들고 나와 같이 농장으로 가서 개에게 던져주어라. 알았나? 개가 짖으면 바로 달래야 한다. 시키는대로 안하믄 이 칼이 가슴을 찌를 끼다.” 여자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하승일은 여자를 앞세우고 부엌문을 통해 밖으 로 나왔다. 그는 부엌 문 앞에서 여자를 세운 뒤 잠시 농장 쪽을 살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의 십 여보 앞 쪽에 농장 철망이 있었고, 개 두 마리는 농장 안의 경비원 숙소 앞에 있었다. 하승일은 여 자 등에 칼을 들이대고 바짝 붙으며 그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 철망까지 가서 고기를 개들에게 던져주어 라." 여자는 부들부들 떠는 걸음으로 철망까지 가서 신문지에 싼 고기를 꺼내 개들에게 던졌다. 개들 은 고기 냄새를 맡고 즉시 달려들어 덮석 물더니 집어 삼켰다. 개 두 마리는 다투듯 고기를 먹어치 웠다. 경비원들은 밖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개들은 고기를 다 먹은 뒤 금새 낑낑대기 시작 했다. 바로 그 순간 하승일이 부엌문 뒤에 숨어있 던 이만복에게 신호를 보냈다. 신호를 받은 이만 복은 졸개 두 명과 함께 날랜 동작으로 농장문을 밀치고 들어가 경비원 숙소 문을 박차고 들어갔 다. 30대의 경비원 두 명은 이만복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장기를 두고 있었던 그들은 복면을 한 이 만복 패거리가 문을 박차고 쳐들어오자 겁부터 먹고 두손으로 빌며 “살려주이소!” 소리를 연발 했다. 이만복은 눈짓으로 졸개들에게 그들을 묶으 라고 지시했다. 그러는 동안 하승일은 여자의 두 손을 묶어 경 비원 숙소로 데리고 왔다. 이만복 졸개 두 명은 경비원들과 식모의 발까지 꽁꽁 묶었다. 그리고 소리를 못 지르도록 입에 재갈을 물렸다. 기습 작전은 감쪽같이 성공했다. 경비원들과 식 모를 묶어 놓은 뒤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경비원 숙소 밖으로 나온 그들은 잠시 주위 동태를 살폈 다. 그들은 아무런 인기척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사슴 우리로 다가갔다. 그들은 사슴 우리의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 가 사슴 두 마리를 낚아채 마취시켰다. 마취재를 묻힌 솜뭉치를 코에 대자 사슴 두 마리는 곧바로 죽은듯이 힘이 빠졌다. 마취가 끝나자 하승일은 “자, 퍼뜩가자!”라고 말하며 일어섰는데,그때 이만복이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낮게 말했다. “형님, 이런 기회 또 있겠는교? 이왕이면 두세 마리 더 가져갑시더.” 하승일은 사슴이 열댓 마리는 된다고 생각했으 므로 이만복의 의견에 동의했다. “맞다. 이런 기회가 또 오지 않을 것이다. 사 슴 두 마리로 다친 사람들이 회복되리라는 보장 이 없으니 두 마리 더 가져가자." 그렇게 말한 뒤 하승일은 이만복 졸개들을 쳐 다보며 지시했다. "두 마리만 퍼뜩 더 마취시켜라!" 하승일은 그들이 사슴 두 마리를 잡아 마취를 끝내자 다시 말했다. "자, 됐다. 이제 퍼뜩 이곳을 빠져나가자." 그들은 마취된 사슴을 한 마리씩 짊어지고 옷 을 갈아입었던 곳으로 돌아왔다. 마대 두개도 거 기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사슴을 두 마리는 마대 에 담은 뒤 옷을 갈아입었다. 트럭이 김호장의 초량동 아지트로 돌아왔을 때 는 밤 10시가 조금 지난 뒤였다. 그들은 행길에 트럭을 세워놓고 우선 마대에 들어있는 사슴을 옮겨놓은 뒤 다시 마대를 가져와 두 마리마저 옮 겼다. 하승일 조카는 트럭에 사슴이 실렸을 때부 터 파랗게 질려 있었으나 하승일은 그를 돌려보 내며 이렇게 말했다. “너만 입다물믄 아무도 모른대이! 알겠나? 너 는 오늘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입 꽉 다물고 있어라. 그라믄 아무 일도 절대 안 생긴 다. 트럭은 갔다 주기만 하면 된다. 자, 퍼뜩 가거 라.” 하승일 조카는 겁먹은 눈망울로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카를 보내고 아지트로 돌 아온 하승일은 미리 준비해둔 톱으로 사슴 뿔을 잘라 녹혈을 채취했다. 그리고 그것을 즉시 네 명 에게 조금씩 먹였다. 네 명은 거의 다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하승일이 밤잠 안 자고 시간 시간마 다 그들 입에 녹혈을 넣어주었다. 이석배 이외의 세 명은 잘 받아 마셨다. 하승일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김호장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새벽녘에 김호장이 눈을 떴으나 힘 이 없었다. 그는 하승일과 눈이 마주치자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가게 안 가도 되나?” 하승일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가게 걱정은 하지 마라. 어떻노? 아까 니가 마신 게 사슴 녹혈이다.” 김호장은 그 말에 “어디서 구했나?”라고 물 었다. 하승일은 김호장의 원기가 약간 살아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김호장의 질문을 묵살하고 그에게 “도대체 어떤 놈들에게 당했나?”라고 물었다. 김호장은 금새 독기를 품으며 힘없이 말했다. “모르겠다. 종태가 퍽!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 을 지르며 쓰러질 때 나도 몽둥이 같은 것에 맞 았다. 그뒤 사정없이 두들겨패 나도 정신을 잃었 다. 아마 열 놈쯤 되는 것 같았다.” “그놈들 얼굴은 전혀 기억할 수 없나?” “어둠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그중 한 놈은 모자를 쓰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놈이 두목 인 것 같았는데 음성이 걸걸해 목소리를 들으면 기억날 것 같다.” 하승일은 답답한듯 잠시 가만있더니 한숨을 쉬 며 말했다. “그정도 가지고는 그놈들을 찾아낼 수 없겠다. ” 김호장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아마 그럴꺼야. 우린 완전히 당했어. 그러나 그 모자쓴 놈 음성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놈 은 분명히 이렇게 말했어. 골통은 까지마라, 병신 이 되어도 좋으니 반 죽이라고.” 하승일은 다시 잠자코 있다고 이렇게 말했다. “니가 기억하는 거나, 너희들이 당한 거를 종 합해서 생각해보믄 이건 복수극이다. 너희들에게 당했던 놈들이 복수를 한게 틀림없는 기라. 안그 라고 우째 이렇게 만들 수 있겠노? 니 이런 쌈 봤나? 이건 복수극이야. 틀림없어!” 김호장은 하승일의 말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감은채 이렇게 말했다. “니말이 맞다. 그러나 나도 복수한다. 그 모자 쓴놈을 기어코 붙잡아 죽일꺼야!” 하승일은 날이 밝자 이만복을 전라도 구례로 보냈다. 뱀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구렁이를 못 구하믄 독사라도 구해온나, 지리 산에는 폐병환자들이 뱀을 잡아 고와먹는다는 얘 기 들었다. 구례에 가보면 땅꾼이 있을지도 모른 다. 아뭏든 닥치는대로 구해온나.” 하승일은 녹혈을 다 채취해 네 명에게 먹인 뒤 사슴을 죽여 사슴피를 받아냈다. 그렇게 응급조치 를 취하자 이석배를 제외한 세 명의 안색이 조금 살아났다. 세 명의 용태가 좋아지자 하승일은 이만복 졸 개를 시켜 약국에서 소독재와 페니실린 연고를 사오게 했다. 하승일은 네 명의 옷을 전부 벗긴 뒤 상처난 곳을 치료해 주었다. 옷을 벗기자 네 명의 몸은 시퍼런 멍투성이었다. 그들은 추운 바 닷가를 걱정해 옷을 두껍게 입고 있었으므로 피 범벅이 된 곳은 손과 하반신이 대부분이었다. 하승일이 예상했던대로 박용학농장의 사슴 도 난사건은 경찰에 신고되지 않았다. 제13장 사랑과 육욕 손경자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별일도 다 있 다. 정말 징그러운 새끼다!”라고 내뱉자 점원 아 가씨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점원 아가씨가 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그녀는 전 화를 건 사람이 박철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녀는 손경자가 전화를 받은 뒤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주인 아주머니가 아저씨와 싸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손경자와 박철수가 부부는 아니 지만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점원 아가씨가 놀라는 눈치를 보이자 손경자는 “와 놀라노? 내가 그 사람을 징그러운 새끼라고 해서 놀랐나?”라고 말한 뒤 넉두리처럼 중얼거 렸다.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이젠 그 새끼가 정말 꼴도 보기 싫다!” 손경자는 화가 풀리지 않았다. 박철수는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전화를 걸어 경상도 사투리를 흉내내며 이렇게 말했다. “내다. 잘 있었나? 오늘은 내가 기분이 최고로 좋은 날인 기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기 분이 좋으니까 바로 니 생각이 나더라. 오늘 밤 너와 사랑 좀 해야 되겠으니까 목간 깨끗이 하고 기다리고 있거래이. 역시 넌 매력이 있는 여자야. 기분이 좋으니까 바로 니 생각이 나더란 말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노? 흐흐.” 손경자는 박철수가 했던 말을 되새긴 뒤 다시 혼자 중얼거렸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내는 우째 이렇노. 무신 놈의 팔자가 이리 기구하노!” 의자에 앉아 있던 손경자는 답답함을 못 참겠 다는듯 벌떡 일어서며 점원 아가씨에게 “나, 다 방에 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올꾸마.”라고 말한 뒤 가게를 나갔다. 가게 건너 편 이층에 있는 다방으로 들어간 손 경자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시켰다. 그리고 그녀 는 창 밖을 한없이 내다보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표정은 매우 울적하게 보였다. 경상남도 양산의 손꼽히는 부농의 딸로 태어난 손경자는 부산의 B여중을 중퇴했다. 5년제 중학 교의 4학년때 전쟁이 터져 일시 학업을 중단했는 데, 완고한 그녀의 부친은 그녀를 더 이상 부산으 로 내보낼 생각을 안했다. 전쟁이 터진 이듬해 봄 에 그녀는 학업을 계속하겠다고 졸라댔지만 그녀 부친은 한마디로 딱 잘라 거절했다. “이제 부산 가서 공부하는 건 안된다. 이제 더 이상 공부 안해도 시집 잘 갈 수 있는 기라. 지금 부산이 어떻게 됐는데 부산에 가겠다고 하노? 부 산은 이제 예전의 부산이 아이다. 전쟁통에 전국 팔도의 온갖 잡놈들이 다 모여 들어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기라! 그런 곳에 내 딸을 어떻게 보내 겠노?” 손경자는 부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엄하 기 짝이 없는 삼촌집에서 학교 다니는데 무슨 일 이 있겠느냐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부친에게 이렇게 말했다. “삼촌 집에서 학교에 가고, 학교 끝나면 바로 삼촌집으로 돌아오는데 무신 일이 있겠습니꺼?” 손경자의 부친은 그 말에 코웃음까지 치며 다 시 말했다. “야 좀 봐라. 니 나이가 몇 살이고? 아직 그렇 게 세상 물정 모르나? 팔도의 난다긴다카는 놈들 이 부산에 다 모여 있는데 얼굴 반반하게 생긴 너를 가만 놔둘 것 같나? 어림도 없는 소리 이제 하지 마라. 좌우지간 이젠 너를 부산으로 내보낼 수 없다. 이제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도 마래이. ” 손경자는 지지않고 한마디 더했다. “아부지, 지는 학생입니더. 학생에게 무신 일 이 있겠십니꺼?” 손경자 부친은 그 말에 헛웃음을 웃으며 이렇 게 대꾸했다. “학생? 가시나야 니 엉덩판을 한번 봐라. 넌 이제 학생이 아니라 처녀다! 예전 같으면 벌써 시 집갔다. 알겄냐? 잡놈들 눈에는 학생이고 뭐고 없 다. 좌우지간 이제부턴 시집갈 준비나 하고 있거 라.” 사실, 손경자는 공부 때문에 학업을 계속하겠다 고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천성이 분방한 손경자 는 시골에 처박혀 지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부친보다 더 엄한 삼촌 집에서 엄격한 통제를 받 으며 학교에 다녔지만 그녀는 그래도 부산이 그 리웠다. 그녀는 학업을 계속하겠다는 핑게로 부산 에 나가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부산에 남아 살겠 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부친의 완고한 고집을 꺽을 수 없었다. 남몰래 혼자 세웠던 계획이 좌절되자 그녀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무미건조한 시골 생활이 더욱 무료해졌고, 더욱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 무렵 손경자 집에는 귀한 손님이 찾아와 큰 잔치가 벌어졌다. 해군 소령이었던 그녀의 이모부 가 이모와 함께 찾아온 것이다. 그는 진해의 해군 사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하는 길이었다. 전쟁 중에 해군 소령이 제복을 입고 시골에 나 타난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온 동네가 떠들석 했다. 해군 장교의 얼굴을 한 번 보려고 일 없이 도 손경자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럴 처 지도 못되는 사람들은 담 넘어로 멋있게 보이는 해군 장교를 구경하려고도 했다. 해군 제복을 입은 이모부의 출현은 손경자 가 슴에도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무엇보다도 해군 제복을 입은 남자가 그렇게 멋있게 보일 수 없어 그녀 자신도 넋이 빠질 정도였다. 중학교 하급생 때 손경자는 해군제복을 입은 이모부를 본 일이 있었지만, 그 당시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그 때는 그저 멋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지만, 처녀가 된 시점에서 이모부를 다시 보자 이모가 부러워 질투심이 생길 정도였다. 손경자 이모부가 입고 있었던 해군제복은 그 당시 그녀가 동경하고 있었던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상징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꿈속에서도 갈망하던 바다처럼 넓고 자유로운 세계의 상징이 었고, 또한 그녀 몸 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던 남성에 대한 욕구의 표적이었던 것이다. 손경자는 이모부가 출현했던 날 밤에 잠을 이 룰수가 없었다. 온갖 상념이 봇물처럼 터졌던 것 이다. <이모는 얼마나 좋겠노. 저렇게 멋있는 해군장 교와 결혼한 이모가 부럽다. 이런 답답한 시골에 서 안 살아도 되고, 또 남편이 얼마나 자랑스럽겠 노.… 나도 해군장교와 결혼할 끼다. 그러나 해군 장교를 어디서 만날 수 있겠노? 이모집에 놀러가 볼까? 그래, 그게 좋은 생각이다. 이모집에 놀러 가믄 보이는 게 해군장교 아니겠나? 호랑이를 잡 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라는 속담은 바로 이런 때 써먹으라고 생긴 거구나. 맞아, 이모집에 자주 놀러가믄 방법이 있을 끼다. 눈 딱 감고 이모에게 중매도 부탁해보자.> 그런데, 그 결심이 실행에 옮겨져 손경자는 해 군장교와 결혼하게 되었고, 또한 그것이 그녀를 청상의 나이에 전쟁 미망인으로 만들어 파란만장 한 남성편력을 격게 했다. 이모 부부가 떠난 후 손경자는 부모 허락을 얻 어 진해의 이모집에 놀러갔다. 시골을 떠날 때 그 녀 가슴은 이미 부풀대로 부풀어 있었다. 진해에 도착한 손경자는 다음날부터 시내 구경 을 핑게로 혼자 외출하기 시작했다. 손경자를 귀 여워했던 이모는 “가시나가 간도 크다. 니가 언 제 진해에 와 봤다고 혼자 나다닐려고 그라나?” 하고서 따라 나서려 했지만, 손경자는 이렇게 말 했다. “이모, 내는 부산에서 학교 다녔다. 부산에 비 하면 진해는 꼬딱지만한데 와 혼자 구경 못하겠 노?” 결국 이모는 웃으며 손경자의 단독 외출을 허 락했다. 손경자는 나는듯한 기분으로 진해 거리를 돌아 디니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모집에 놀러간 게 아 니라 사실은 시골에서의 첫 탈출이었으므로 활기 에 넘쳐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생기가 돌았고, 자태는 발랄했다. 손경자가 진해 거리를 쏴다니기 시작한 날은 토요일이어서 그날 오후부터 거리에는 해군제복 을 입은 남자들로 가득찼다. 그 광경도 그녀를 흥 분시켰다. 거리에 넘쳐 흐르는 해군제복의 사나이 들을 보며 그녀는 “와, 많기도 하다. 저렇게 많 으믄 나한테 하나는 안 걸리겠나.”라고 생각했 다. 그러나 그녀 자신이 해군제복을 입은 사나이 들을 유혹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순진한 처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손경자가 꿈 속에서 그리던 남자가 기 다리고 있었다는듯이 느닷없이 그녀 앞에 나타났 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러니까 손경자가 진해 에 도착한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토요일 오후에 진해 거리를 정신없이 쏴다녔던 손경자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남자들의 시선이 자 신에게 쏠렸다는 것을 느꼈었다. 특히 군인들은 노골적인 시선을 보냈다. 이미 그 당시 손경자의 얼굴이나 자태는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 기 때문이었다. 손경자는 과일로 말하면 풋과일이 아니라 먹음직스럽게 익기 시작할 때와 비슷했다. 과일은 그때가 되면 그저 싱싱하고 탐스럽지만, 손경자는 싱싱했을뿐만 아니라 이미 요염한 자태 를 풍기고 있다. 손경자는 남자들의 노골적인 시선이 싫지 않았 다. 그리고 그녀도 괜찮게 보이는 남자와 눈이 마 주치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조반을 먹고 손경자는 이모에게 또 외출하겠다고 말했고, 이모는 반대하지 않았 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얼굴을 매만지고, 몸매도 비쳐본 뒤 이모집을 나섰다. 때는 바야흐로 봄기운이 돌기 시작할 무렵이었 다. 아직 벚꽃은 피지 않았지만, 바다 쪽에서 불 어오는 바람은 미구에 벚꽃을 활짝 피우고 말겠 다는듯 살랑거렸다. 손경자는 상쾌한 기분으로 그 바람을 맞으며 진해 중심가 쪽으로 걸어나갔다. 아침이었기 때문에 거리는 붐비지 않았고 전날처 럼 해군제복의 사나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거리가 한산한 것을 보고 일찍 나온 것을 후회했 다. 그녀는 이모집으로 돌아갔다가 정오경에 다시 나올까, 하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그녀 앞 쪽 백 여미터 전방에 해군제복을 입은 사나이가 한 명 나타났다. 그들은 마주보고 걸었으므로 점차 간격 이 좁혀졌다. 얼굴 생김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좁혀졌을 때 손경자는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저 해군 장교는 얼굴도 잘 생겼다! 키도 늘씬 하고, 정말 멋있는 해군 장교다!” 그 해군 장교는 손경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걸었고, 손경자도 그 시선을 바로 피하지는 않았 다. 그녀는 그 해군 장교가 자신을 넋나간 것처럼 쳐다보며 지나쳤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 는 바로 고개를 돌려 그 해군 장교의 뒷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대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 해군장교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뒤돌아서서 손경자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손경자 는 첫 네거리를 돌 때 흘낏 뒤돌아본 순간 그 해 군장교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해군 장교 가 자신을 뒤따라오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손경자는 자신이 한순간 관심을 가졌던 해군장 교가 자신의 뒤 쪽을 보며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몹씨 거북해졌다. 그녀는 그저 묵묵히 걸 었는데 다음 네거리 모퉁이를 돌고난 다음에야 그 해군장교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느 낌을 받았다. 그녀는 부산에서 학교다닐 때 그런 경험을 서너차례 당해보았기 때문에 해군장교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 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녀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럴 땐 우째야 좋겠노? 저 해군 장교는 분명 히 나를 따라오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좋겠노?> 손경자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답이 나오 지 않았다. 가슴은 계속 두근거렸고, 머리는 혼란 스러워졌다. 손경자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남자가 접근하려 고 할 때 기회를 주는 천부적인 재주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은 이때 나타났다. 그녀는 다음번 네거리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장 한적한 길을 택했다. 사람이 아무도 걸어오지 않는 길 쪽으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 손경자 뒤를 따르며 찬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해군 장교는 그녀가 한적한 길로 들어서자 재빨 리 그녀 앞을 가로막으며 서울말씨로 이렇게 말 했다. “실례합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그 해군은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는데, 손경 자 앞에서 몹씨 수줍어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하 고 약간 허둥댔다. 손경자는 그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는데, 그 눈이 요염했다. 해군장교가 다시 말했다. “저는 해군사관학교 교관 정문수 중윕니다. 실 례를 무릅쓰고…”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손경자가 미소를 지 으며 말했다. “어머, 우리 이모부도 해군사관학교 교관이신 데…” 이 말 한마디가 그들 사이의 어색함을 말끔히 없애버렸다. 정문수중위는 놀란 표정으로 “이모 부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가?”라고 물었고, 손 경자는 이모부 이름을 댔다. 그때부터 정중위의 수줍움이 없어졌다. 자신은 손경자 이모부를 존경 하고 있다느니, 길에서 존경하는 상관의 조카를 만난 것은 기막힌 인연이라느니 하면서 차 한 잔 마시며 얘기 좀 하자고 말했다. 손경자는 좋다고 응했고, 그들은 다방으로 가서 바로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다방에서 정문수 중위는 손경자가 거리 구경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안내를 자청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진해는 참 아름다운 곳 입니다.” 손경자가 그 제의를 거절할 리 없었다. 그들은 차를 마신 뒤 진해 명소 관광에 나섰고 정문수 중위가 점심도 샀다. 헤어질 때 손경자는 정문수 중위가 다음날 밤 에 다시 만나자고 했을 때 기꺼이 응했다. 바야흐 로 그들의 연애가 시작된 것이다. 정문수 중위는 그때까지 연애 경험이 없었던 남자였다. 그러나 길에서 손경자를 본 순간 그는 전기에 감전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손경자와 스 쳐 지나쳤을 때 그가 망서렸던 것은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저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대로 가면 저 여자를 영영 만날 수 없을 거다. 어떻게 할까. 어디에 살고 있는 처녀인지 알아야 그 다음 을 생각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선 따라가보자. 오늘은 저 처녀가 어디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도 사 알아야 된다.> 그렇게 결심하고 손경자는 뒤따랐던 정문수 중 위는 뜻밖의 성과를 얻어 다음날 손경자와 또 만 나기로 약속까지 했다. 첫눈에 손경자에게 반해버 린 정문수 중위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손경자의 모습이 뇌리 속에서 계속 어른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랑의 화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것이다. 그들의 연애는 급속도로 진행됐다. 그들은 날마 다 만났고, 정중위는 열정을 이기지 못해 만난지 3일째 되는 날 밤에 골목길에서 손경자를 왈칵 껴안아버렸다. 손경자도 그걸 뿌리치지 않았다. 그들은 행인이 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정열적인 포옹을 했다. 그날 손경자는 난생 처음으로 키스를 했다. 정 문수 중위가 포옹을 한 뒤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 술에 입을 갔다댔고, 잠시 후엔 그녀의 혀를 빨아 댔다. 그녀는 아무 저항 없이 정중위의 키스를 받 아들였다.그리고 그것이 이성과의 첫 키스였으므 로 그녀 자신도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키스가 끝 나고 정중위 품에서 벗어났을 때 그녀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날 밤 첫 키스 의 충격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감미롭던 그 키스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고, 정 중위의 늠름 한 모습이 망막에서 계속 어른거렸다. 그리고 또 한 잔잔한 관능의 물결이 그녀 몸 속으로 퍼지면 서 그녀의 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날 밤 그녀 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손경자는 열흘 뒤에 양산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진해에 쉽게 다시 올 수 없다는 것을 정중위에게 말했다. 정중위는 그 말을 듣고 토요일날 오후에 자신이 양산으로 그녀를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래 서 그들의 데이트는 양산에서 이어졌다. 정중위가 세번째 양산에 왔을 때 사건이 벌어 졌다. 야산의 진달래 꽃밭 속에서 그들은 그 시대 의 표현으로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 만 것이다. 긴 포옹 끝에 정중위는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그 녀에게 덤벼들었다. 그는 그녀를 껴안은채 “사랑 한다. 우리 결혼하자.”는 말을 되풀이하다가 그 녀를 눕이고 그녀의 팬티를 벗겨냈다. 얼떨결에 손경자는 아무 저항 없이 그를 받아들였고, 일이 끝났을 때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그러 나 슬퍼서 울었던 게 아니었다. 후회도 없었다. 정중위는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 며 결혼을 굳게 약속했다. "울지마. 결혼하면 되잖아. 정말 사랑스럽다." 정중위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다시 키스했 고, 그녀도 정열적으로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손경자는 그해 5월에 정문수 중위와 결혼했다. 손경자 이모부가 정중위의 인품과 장래를 보증했 으므로 그녀의 부모들이 서둘러 결혼이 급속도로 성사됐다. 그때는 전쟁 중이었으므로 그들은 진해 에서 거의 약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뒤 손경자의 이모부가 쓰고 있던 관사의 빈 방에 신방을 차렸 다. 신혼 생활을 시작한 손경자는 마치 꿈속에서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로 모든 것이 즐거웠다. 해군제복을 입고 양산의 시골집에 나타 났던 멋진 이모부를 보고 막연히 동경했던 해군 장교와의 결혼이 그렇게 빨리 실현된 것도 꿈만 같았고, 그리고 결혼하자마자 곧바로 육체의 쾌락 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하루하루가 마냥 즐거웠 다. 특히 신비스러운 그 쾌락을 체험했던 다음날 부터는 오후만 되면 신랑이 은근히 기다려지면서 그녀 몸 속 깊은 곳에서 관능의 물결이 출렁거리 며 온 몸으로 퍼져 나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우야꼬! 와 이렇노? 신랑도 없는데 와 이렇게 자꾸 그 생각만 나노? 참말로 별일이대이.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다 이렇나? 이모도 신혼 초에는 그랬는지 이모에게 한 번 물어 볼까?>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낯을 붉히며 이렇게 생 각했다. <내가 미쳤다. 이모에게 그런 걸 어떻게 물어 볼 수 있겠노? 그런 걸 물어 보면 이모가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우쨌든 남자와 여 자의 그 일은 정말 희한하다. 아마 세상에서 그렇 게 좋은 일은 또 없을 끼다. >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관능의 쾌락은 사실 손경 자의 신혼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 다. 양산의 야산에서 정문수 중위에게 얼떨결에 처녀성을 잃었을 때만 해도 그녀는 통증 이외에 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정중위가 양산으로 찾아와 그녀를 야산의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가더라도 거절하지 않고 따라갔다. 물론 그녀는 그가 어떻게 나올지 잘 알고 있었다. 정중위는 야산의 으슥한 곳에 도착하면 즉시 그 녀를 애무하며 그녀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 "우린 결혼하기로 약속했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손은 그녀 의 팬티를 벗기기 시작했다. 정중위가 그렇게 나 오면 그녀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안 들켜야 된다는 생 각뿐이었으므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신방을 차린 뒤에는 우선 그 행위의 분위기부터 달랐다. 정중위와 단둘이만 있 는 방에서 서로 발가벗고 그의 품에 안기자 행복 감과 더불어 야릇한 쾌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러 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온몸이 전율하는 쾌락의 극 치를 맛본 뒤부터 그녀는 자나깨나 그 생각뿐이 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관능에 눈을 뜨자마자 원 래 그녀 내부 깊숙이 숨어 있었던 이성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폭발돼 마치 활화산처럼 그 관능 이 시도 때도 없이 꿈틀거렸던 것이다. 정중위는 그녀가 육체의 쾌락을 알게 되자 그녀를 더욱 더 사랑해 주었다. 신방을 꾸민 다음날부터 그들 부부는 이모 부 부와 함께 식사했는데, 그녀 이모부는 사람과 담 소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저녁밥을 먹 고 난 뒤에는 언제나 정중위를 붙들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손경자도 막 살 림을 차렸을 때만 해도 그 자리에 끼어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있었지만, 성의 쾌락에 눈뜬 이후 부터는 정중위와 빨리 단둘이만 있고 싶어 안달 이 날 지경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하품도 해보고 정중위에게 빨리 일어서라고 눈짓도 해보았다. 그 러나 정중위는 그 눈짓을 못 본 척하고 이모부 얘기에 맞장구만 쳤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손 경자 이모가 눈치를 채고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 다. "여보, 당신은 신혼부부 심정도 모르는교? 얘기 그만하고 둘이 지내도록 놓아두소." 그리고 그녀는 손경자에게 "경자야 니 신랑 데 리고 퍼뜩 건너가거라."라고 말한 뒤 자신이 먼저 일어서서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민망해 하는 정중위 등을 밀어 방밖으로 나가게 했다. 이모에게 그렇게 밀려나온 손경자는 신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이부자리부터 깔았다. 정중위는 왜 그녀가 서두르는지를 알고 있었으므로 싱긋이 웃 으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잠시후 그들의 방에서 불이 꺼졌는데, 이모가 부엌에 갔다 오다가 그들 방의 불이 꺼진 것을 보고 의미 있게 웃었다. 그 리고 그녀도 방에 들어가자마자 교태가 흐르는 미소를 머금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저 애들은 벌써 자는 모양인데, 우리도 불 끄 고 잡시다." 그렇게 말한 뒤 그녀도 서둘러 이부자리를 깐 뒤 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남편 은 아내의 색정이 동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일어 서서 전등불을 끈 뒤 그녀 옆으로 다가가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는 이미 몸이 뜨거워져 있었으므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남편을 받아들였다. 그 다음날은 저녁 밥상을 물리자마자 이모부가 먼저 정중위에게 이렇게 말했다. "왜 이렇게 피곤하나. 정중위도 피곤할 테니 방 에 가서 쉬게." 정중위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손경자가 그의 손을 끌며 말했다. "이모부가 피곤하시다니까 퍼뜩 일어납시더." 정중위는 손경자에게 끌려 일어났고, 이모는 손 경자에게 빨리 데리고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렇게 되어 그들 부부는 그 날부터 밤 시간이 자유로워졌고, 꿀맛 같은 신혼 생활의 밤을 마음 껏 즐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부부의 그 달콤했던 신혼 생활은 그해 가을에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인천의 해군부 대로 전속갔던 정중위는 손경자가 뒤따라가기도 전에 전사하고 만것이다. 이모부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들은 손경자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 러졌다. 손경자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진해 생 활은 그렇게 가장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그후 손경자는 친정 집으로 돌아왔지만 눈물로 나날을 보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슬 픔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녀 부모들은 그녀 모습이 너무 측은하여 웃음을 잃고 말았다. 손경자가 부산으로 나온 것은 그 이듬해의 휴 전 직후였다. 그땐 그녀 이모부가 부산으로 전속돼 있었다. 그녀 모친은 부산 나들이 때 딸의 기분 전환을 위해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런데, 모친과 함께 부산에 나들이 나왔던 손 경자는 시골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침 이모부가 쓰고 있던 관사에는 빈방이 있어서 무작정 이모 집에 눌러 앉아 버린 것이다. 손경자가 그렇게 나 오자 그녀 부친도 더 이상 어떻게 하지 못하고 그녀의 행위를 용납했다. 이모 집에 눌러 앉은 손경자는 그때부터 부산 에서의 새생활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색의 결과가 양품점 개업이었다. 손 경자의 부모는 딸의 새 생활을 적극적으로 밀어 주었다. 손경자는 다방의 창가에 앉아 남포동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덧없이 흘러가 버린 자신의 지난 세월에 대한 깊은 회상에 잠겨 있었다. 남편과의 행복했던 순간들이며 그후 남포동에서 겪었던 일 들이 주마등처럼 그녀의 뇌리를 스쳐지나 갔다. 그녀가 새 삶을 개척한 남포동 거리는 이제 고 향처럼 친숙해졌다. 벌써 10년 가까이 그녀는 그 곳을 지키며 살았다. 그 동안 그녀는 물질적 고통 을 당해보지는 않았다. 전후의 폐허 속에서 모두 가 궁핍했지만 그녀의 수입은 그녀 혼자 먹고 살 기에는 충분했다. 그런데, 그 동안 손경자가 겪었던 고통은 언제 나 남자 문제 때문이었다. 남포동에 그녀가 나타 나자 남자들은 마치 화사한 꽃을 보고 날아드는 나비처럼 끊임없이 그녀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손경자는 첫 남편을 잃은 뒤 곧바로 바 람둥이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으므로 그 순정을 꽤 오래 간직했 다. 그녀는 남포동에서 새 삶을 시작한 뒤 한동안 은 일요일이면 진해로 가서 남편과의 행복했던 추억을 더듬으며 거리를 혼자 거닐다가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지만 손경자의 용모나 자태는 이미 향기롭 고 화사한 장미꽃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는데, 그 장미꽃을 꺾으려는 남자가 나타나지 않을 리 없 었다. 그 첫 번째 남자는 바람둥이 마도로스였다. 유부남이었던 그 마도로스는 키가 헌칠하고 매 우 잘 생긴 남자였다. 게다가 여자 낚는 재주가 비상해 총각 때부터 숱한 여자를 울렸던 바람둥 이였다. 그 바람둥이는 남포동 거리에서 손경자를 발견한 뒤 곧바로 침을 흘리며 총각 행세를 하며 그녀에게 접근했고, 수절하고 지내던 청상과부 손 경자는 결국 그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물론 손경자도 자신의 결혼 경력을 숨겼다. 그러나 여 자에 관한 한 도사였던 그 바람둥이는 감언이설 로 손경자를 꼬셔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난 뒤 그녀가 숫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 버 렸다. 그 사내의 능숙한 솜씨에 손경자는 자제를 잃고 마음껏 육욕을 발산해 버렸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여관에서 나오기 전에 그 바람둥 이는 손경자에게 이렇게 시비를 걸었다. "니 숫처녀가 아니던데. 나는 못 속인다. 솔직하 게 말해보래이. 내 말이 맞지?" 손경자는 그 사내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해 아 무 말도 못했다. 그러자 그 사내는 이렇게 말했 다. "사실 나도 마누라가 있는 몸이다. 니 남자 되 게 좋아하던데 우리 서로 즐기기 위해 계속 만나 자." 자존심이 상해 아무 말 못하고 있었던 손경자 는 그를 노려보며 화를 벌컥 냈다. "개새끼! 딴 데 가서 알아봐라. 넌 총각이라고 했지? 사기꾼 같은 새끼!" 손경자는 그렇게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여 관에서 혼자 나왔다. 마도로스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렇게 되어 그들의 관계는 싱겁게 끝나 버렸다. 두 번째 남자는 샌님처럼 생긴 고등고시 준비 생이었다. 그 사내도 손경자가 처녀인줄 알고 덤 비다가 그녀가 전쟁 미망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괴로워하면서 스스로 물러섰다. 부모의 반대를 꺽 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사내가 내세운 핑계였다. 손경자는 바람둥이 마도로스에게는 일종의 사 기에 의해 계획적으로 유혹 당했고, 고등고시 준 비생은 결국 그녀 곁은 떠났지만 시종일관 진실 하게 그녀를 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별 이 후에도 그녀가 가끔 생각했던 남자는 그녀의 육 체를 능숙하게 다루었던 바람둥이 마도로스였다. 두 남자에게 쓰라린 아픔을 당한 뒤부터 손경 자의 남성관이 확 바뀌었다. 그녀는 나비가 날아 오기를 무작정 기다리는 장미꽃이기를 거부하고 그녀 스스로 먼저 남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황종태였다. 물론 황종태와 관계를 맺기 이전에도 그녀는 숱한 남성과 만났 다. 그러나 그 관계는 오직 육체의 쾌락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만남 자체가 찰나적이었다. 그녀는 어느 남자나 하룻밤 즐긴 뒤 미련 없이 뒤돌아 섰는데, 박철수는 재력을 미끼로 집요하게 덤벼들 었기 때문에 그의 애첩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녀는 박철수의 애첩이 되었 다고 해서 남성 편력을 중지하지는 않았다. 그녀 는 박철수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또한 박철수가 그녀의 색욕을 만족시켜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는 박철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철수 몰래 바람을 피울 때도 죄책감을 전혀 느 끼지 않았다. 그러다가 황종태를 만나게 되었는 데, 그때부터 그녀의 남성 편력에 변화가 왔다. 그녀는 황종태와 관계를 맺은 뒤부터는 어떤 남 자와도 만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방의 창가에서 물끄러미 거리를 내려다보며 상념에 잠겨 있던 손경자는 그 상념이 황종태로 이어지자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경자는 그 즈음 황종태 생각만 하면 머리가 복잡해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다. 황종태는 그녀의 첫 남편 이후 그녀를 가장 사 로잡고 있는 남자였다. 그가 비록 열 살의 연하였 지만 그녀는 의식적으로 그 나이 차이를 묵살하 면서 황종태와 행복하게 사는 꿈을 가꾸어 나갔 다. 손경자가 황종태 문제로 골치 아파하는 것은 그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아무도 모 르게 둘이 함께 부산을 떠나는 길밖에 없는데도 황종태가 그 문제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황종태와의 관계가 순탄하지 않을 것 같은 징후가 자꾸 나타나 그녀 의 심사를 편치 않게 만들었다. 손경자는 황종태가 범죄 조직과 손을 잡고 있 다는 느낌을 받은 후부터 자나깨나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금괴를 처분해 준 뒤에 황종태를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는데, 그날 그로 부터 이상한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 불 안해졌다. 금괴 처분 대금을 전해 준 날로부터 열흘쯤 지 났을 때 박철수가 마작판으로 가자 그녀는 황종 태를 불러내 해운대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냈었다. 그 날 밤 손경자는 황종태에게 둘이 함께 멀리 도망가서 같이 살자고 다시 졸라대지 않았다. 그 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손경자는 그 얘기 를 다시 꺼내는 것보다 황종태의 마음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 호텔 룸에서 나오기 직 전에 황종태가 뜻밖의 소리를 했다. 그는 심각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누님, 오해하지 말고 들으시소. 지는 오늘이 나 내일쯤 하숙집을 옮길 겁니다. 앞으로는 언제 나 지가 누님에게 연락하겠십니더. 절대 오해하지 마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누님이 이해해 주소.” 황종태는 김호장의 지시대로 하숙집을 옮긴 뒤 손경자에게는 그곳을 알려주지 않을 생각으로 그 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 대한 손경자의 반응 은 날카로웠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쌍심지를 치켜 올리며 황종태에게 따지는 투로 물었다. “지금 너 뭐라 캤노? 그 말 진심이가? 니 하 숙집을 내가 알믄 안되나? 와 안되노?” 황종태는 손경자의 반응이 의외로 날카롭게 나 오자 그녀를 달래기 위해 부드럽게 말했다. “누님, 지가 한 말을 오해하지 마소. 다만 그 럴 만한 일이 있으니까 누님의 양해를 구하는 겁 니더. 절대 오해는 하지 마이소.” 손경자는 잠시 황종태의 표정을 살피다가 문득 그가 수사당국의 수배를 받고 있구나, 라고 생각 하고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생각이 들자 그녀의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어떻게 해서 든지 그를 데리고 부산을 떠나야 둘 다 안전할 수 있다고 판단됐기 때문이었다. 손경자는 황종태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지금 내 심정이 어떤지 알고나 있나?” 황종태는 화가 나 있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 고 고개를 숙였다. 손경자는 다시 한숨을 쉰 뒤 심각한 어조로 말 했다. “난 요즘 몹시 불안하다. 니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믄 잠이 안 온다. 오늘은 더 이상 말 않겠다. 그러나 다음 번 만날 땐 부산을 떠나 는 문제에 대해 답변을 해 다오.” 황종태는 손경자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 다. “누님, 누님 생각을 지도 잘 알고 있십니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라고 아까 지가 한 말 에 대해서는 절대로 오해하지 마이소. 다른 뜻은 절대 없습니더!” 손경자는 그의 진지한 표정에 안심이 된 듯 다 시 부드럽게 말했다. “오해는 무슨 오해를 하 겠노? 니 마음을 내가 와 모르겠노? 그러나 너도 내 마음을 잘 알아야 된대이." 손경자는 그렇게 말한 뒤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드럽게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호텔에서 나왔는데, 황종태는 그 이후로 연락이 없었다. 물론 이전에도 열흘 이상 연락이 없어 그 녀가 그의 하숙집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었다. 그 럴 때 황종태는 대낮인데도 깊은 잠속에 빠져 있 었다. 손경자가 방안으로 들어가 그를 깨운 뒤 “ 어제밤에 뭐했길래 낮에 잠만 자고 있노?”라고 투정부리면 황종태는 부시시 일어나 앉아 아무말 없이 수줍은 표정만 지었다. 그리고 그녀가 같이 밖으로 나가자고 하면 어김없이 “오늘은 곤란합 니더.”라며 매우 난처해 했었다. 손경자는 황종태 하숙집으로 찾아가 그를 데리 고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때도 매우 답답해했었 는데, 연락 두절이 되어 그를 찾아갈 수 없게 되 자 답답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불안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다. 손경자는 황종태의 안부가 걱정될 때마다 이렇 게 생각했다. <종태에게 무신 일이 생겼노? 갈수록 태산이 다. 이제 종태 하숙집도 모르니 찾아가 볼 수도 없고....정말 불안하고 답답하다. 이걸 우째야 좋을 꼬?> 그렇게 불길한 생각이 들 때마다 손경자는 황 종태를 다시 만나면 부산을 떠나는 문제에 대해 서 결단을 내기로 수없이 다짐했다. 황종태를 집 요하게 설득하여 둘이 함께 부산을 떠나는 문제 에 대해 확답을 얻어내리라고 결심한 것이다. 손 경자는 그렇게 결심한 뒤 이런 생각도 했다. <그 방법밖에 없는 기라. 만일 종태가 말을 듣 지 않으면 나혼자라도 부산을 떠나 버릴까? 그러 나 종태 보고 싶어서 어떻게 사노?… 참말로 내 팔자는 기구하다. 우째 만나는 남자마다 이리 문 제가 많노?> 그렇게 심사가 괴로운 때에 박철수가 해도 떨 어지기 전에 전화를 걸어 목욕 깨끗이 하고 기다 리라고 했으니 손경자는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 을 수 없었다. 손경자는 울적한 심사 때문에 가게문을 일찍 닫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심사가 달래질 것 같지 않아 점원 먼저 보내 놓고 늦게까지 가게에 앉아 있었다. 박철수는 밤 10시가 조금 지나서 손경자 집에 나타났다. 그는 별로 취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도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손경자가 그의 상의를 받으려 할 때 그는 “오 늘 내 기분이 최고로 좋은 날이지만 술은 조금밖 에 안 마셨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라고 말하며 엉큼하게 웃었다. 손경자는 떨떠름하게 “무신 일 로 기분이 그렇게 좋은교? 내도 좀 압시더.”라고 대꾸했다. 그러자 박철수는 아랫목에 앉은 뒤 의 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박철수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하게 보 여준 날이다. 머리 좋기로는 제갈공명과 맞먹고 추진력은 박정희의장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 여주었다. 치밀한 작전이 기막히게 성공했다. 그 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나를 건드린 놈들에게는 내 가 기어코 복수하고 만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준 것이다. 돈도 벌고 복수에도 성공했으니 기분 이 얼마나 좋겠나. 자, 이제 이부자리를 깔아라. 기분이 좋으니까 바로 니 생각이 난 걸 보면 내 가 너에게 푹 빠져 있는 모양이지?” 손경자는 박철수가 복수에 성공했다는 말에 가 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종태가 당했나, 라 고 생각하며 박철수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능글 맞게 웃으며 눈짓으로 이부자리를 빨리 깔아라고 독촉했다. 손경자는 그 독촉을 묵살하며 일부러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말 좀 시원하게 하이소. 당신 머리 좋고 추진 력 좋은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교? 또 당 신 건드리면 혼난다는 것도 세상이 다 알고 있는 데.… 도대체 무슨 복수를 했다는 말인교?” 그러나 박철수는 비밀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생활 신조로 삼고 있는 사내였다. 밀수 하주가 입 이 가벼우면 하루아침에 신세 조진다는 것을 그 는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밀을 지키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복수의 성 공으로 그는 약간 흥분 상태였다. 손경자가 몹시 궁금해하자 그는 한마디 더 했다. “나는 복수를 위해 투자를 많이 했다. 성공 확 률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복수를 위해 계속 투자를 하면서 끈질기게 기다렸다.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 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늘이 도 운 건지 오늘 드디어 성공했다. 그것도 통쾌하게 성공했다. 아마 그들은 병신이 될지도 모른다. 그 러나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다. 왜냐하면 그놈들은 나에게 죄를 지어 그 죗값을 받았으니까. 내가 누 군데 감히 내 물건에 손을 대나? 좌우지간 통쾌 하게 복수를 했다. 그래서 내가 기분이 좋은 거 다. 알았나? 그럼 이제 이부자리를 깔아라.” 박철수가 말하는 동안 손경자의 얼굴에는 불안 과 공포의 빛이 계속 스쳤지만, 박철수는 약간 취 한 상태에다가 자신의 말에 스스로 도취되어 있 었으므로 그녀의 안색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손경자는 자신의 안색이 변했을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박철수가 말을 끝내자마자 일 어서서 이부자리를 깔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박 철수는 옷을 벗기 시작했고, 손경자는 전등을 껐 다. 손경자는 박철수가 껴안자 송충이가 몸이 닿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는 오직 황종태의 안부가 걱정됐으므로 박철수가 별 지랄을 다 해도 몸이 달아오르지 않았다. <종태가 처음에 가져온 물건은 분명히 이 새끼 거였어. 그렇다면 종태가 당했다는 얘기인 기라. 그러나 종태가 정말 당했을까? 발 하나로 네댓 명쯤은 문제없이 해치우는 실력이 있다 캤는데. 그러나 그런 실력이 있다 해도 당할 수는 있지. 이 새끼 태도로 보아서는 종태가 당한 게 틀림없 는 기라.… 우짜면 좋노? 종태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노?… 내가 잘못했다. 종태 하숙집을 기어코 알아 놓았어야 했는데....> 박철수의 몸 동작이 빨라지면서 숨이 가파졌다. 그러나 손경자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박 철수는 용을 쓰면서 “이년이 요즘 이상하다. 놈 팽이가 생겼나?”라고 생각했다. 그는 절정을 넘 긴 뒤 몸 동작을 멈추고 그녀 배 위에서 내려와 벌렁 누웠다. 그리고 그는 다시 생각했다. <이년이 분명히 이상하다. 색을 그렇게 좋아하 는 년이 가끔 반응이 없을 때가 있단 말이야. 그 렇다고 내 물건이 시원찮아진 것도 아닌데.... 맞 아, 이년에게 놈팽이가 생겼어. 어디 두고 보자. 붙잡히기만 하면 두 연놈의 가랭이를 찢어 버릴 테니까!> 박철수는 생각이 자꾸 그쪽으로 기울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누운 채로 “술 있나?”라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그녀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며 “안 주무 시는교?”라고 물었다. 그러자 박철수가 화난 목 소리로 다시 말했다. “술 있느냐고 물었잖아!” 손경자는 박철수의 성난 목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전등을 켰고, 그녀의 발가벗은 몸이 그대 로 드러났다. 손경자는 “술상 가져올께예.”하며 팬티만 걸치고 방밖으로 나갔다. 박철수는 그녀가 팬티를 입는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년의 저 탐스런 엉덩이와 잘록한 허리 곡 선을 보면 안 미칠 놈이 어디 있겠나? 그리고 저 년이 색 쓰는 걸 한 번 맛보면 더 미치지. 그러나 저 년은 아직 내 꺼다. 어느 놈이건 저 년을 건들 다가 나에게 들키면 골로 가야 된다.> 손경자는 술상을 이부자리 옆에 갖다 놓고 옷 을 입었다. 그리고 박철수와 마주 앉았다. 박철수 는 뚱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술만 들이켰다. 손경자는 그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채고 조심스럽게 앉아 있었다. 그러나 박철수는 손경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술을 마시면서 새벽에 있었던 일을 다시 되새기고 있었다. 박철수는 전날 자정 무렵부터 긴장 속에서 전 화통 앞에 앉아 있었다. 쾌속정으로 싣고 온 그의 밀수품이 새벽 1시에 양륙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오두복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새벽 2시경 오두복의 연락이 왔다. 그가 수화기를 들자 오두복은 그가 알려준 암호를 말 했다. “큰일 났십니더. 어머님이 몹시 아파 병원 응 급실에 가야 되겠십니더.” 오두복의 목소리는 마치 위급한 일이 생긴 것 처럼 허둥댔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 암호 는 밀수품이 양륙돼 은닉처로 안전하게 옮겨졌다 는 내용이었다. 박철수는 “ 그래? 그럼 빨리 병 원으로 모셔 가야지.”하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때 오두복이 한마디 더 했다. “사장님요. 아침 일찍 돈 좀 빌려주이소!” 박철수는 그 암호를 가르쳐 준 사실을 깜박 잊 고 있었다. 그래서 이 새끼가 무슨 돈을 빌려 달 라는 거야, 라고 생각하며 화를 내려는 순간 그 암호의 의미가 생각났다. 그것은 꿈속에서도 잊지 못했던 복수의 성공을 알리는 암호였다. 박철수는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쯤 빌려 달라는 거야?” “4천원만 빌려 주이소.” 그 암호의 의미는 오두복이 밀수품을 강탈하려 는 패거리 4명을 처치했다는 것이었다. 박철수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었지만 꾹 참고“그래, 알았 다. 아침 일찍 그 다방으로 나온나.”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전화를 받은 이후부터 박철수는 잠을 자지 못했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성공했기 때문에 그는 흥분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박철수는 복수를 위해 오두복 패거리를 끌어들 였지만 성공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하고 있 었다. 부산을 둘러싼 그 넓은 해안을 고려할 때 박철수의 계획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화 를 삭이지 못해 그와 같은 복수 계획을 세웠지만 화가 가라앉으면서부터 복수를 거의 단념했다. 그 대신 그는 오두복 패거리를 그의 밀수품 보호에 활용했다. 밀수품 탈취 사건이 자유당 시절에도 가끔 있었기 때문에 한번 당해 본 그는 안전장치 를 마련했던 것이다. 즉, 육상 패가 밀수품을 양 륙해 은닉 장소로 옮길 때까지 오두복 패거리는 비밀리에 경호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만에 하나라도 또 그자들이 나타나 밀수품을 강 탈하려 할 때는 비밀 경호를 맡은 오두복 패거리 에 의해 박살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박철수는 오두복에게 이렇게 지시해 놓았었다. “너는 니 졸개들을 데리고 내 물건이 배에서 양륙돼 내 아지트로 옮겨질 때까지 숨어서 그들 을 보호하라. 그러다가 만일 내 물건을 터는 놈들 이 나타나면 기습으로 제압하라. 그리고 이건 꼭 명심하라. 만일 내 물건을 터는 놈들의 동작이 대 단히 기민하면 내가 잡으려고 하는 놈들이 틀림 없다. 그런 놈들이 나타나면 안 죽을 정도까지 몽 둥이로 작살내라. 절대 죽여서는 안된다.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 된다. 그러면 복잡하게 꼬이니까 목숨이 간당간당할 정도로 몽둥이질을 해 놓아라. 알았나!” 그와 같은 지시를 해 놓고도 박철수는 전혀 기 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성공을 알리 는 암호가 왔던 것이다. 박철수는 뜬눈으로 밤을 세운 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오두복과 미리 만나기로 약속된 국제시장 옆 다방으로 갔다. 그들은 다방의 첫 손님이었다. 오두복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방에 들어선 뒤 오두복 을 발견한 박철수는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그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오두복에게 속삭이듯 물었 다. “그놈들이 틀림없나?” 오두복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틀림없을 낍니더. 네 놈인데 어두워서 잘 못 보았지만 몸놀림이 제법입디더. 전마선에서 물건 을 받아 짊어지고 오던 애들이 우리가 잠복하고 있던 곳에 도착하자마자 그놈들이 기습했는데 사 람 패는 기술이 대단합디더. 눈 깜짝 사이에 짐을 지고 왔던 애들이 다 당했십니더. 한 방씩 맞고 전부 뻗어버렸어예. 그놈들이 바로 형님이 찾고 있던 놈들이 틀림없는 것 같았어예.” 박철수는 그 말에 만족을 못했다. “확실하게 말해 봐! 틀림없는 것 같은 거야, 아니면 정말로 틀림없는 그놈들인 거야?” 그러나 오두복은 전혀 흥분하지 않고 느긋하게 대꾸했다. “관목 숲 속에 숨어 있던 우리는 그걸 보고 즉시 몽둥이로 기습해 그 놈들을 반 죽여 놓았으 므로 자백은 못 받았십니더. 그러나 그놈들이 틀 림없십니더. 배에서 물건을 가져왔던 여섯 명 중 네 명이 그놈들에게 턱을 얻어맞고 기절했십니더. 그놈들은 턱을 공격하는 놈들이라고 안캤는교?” 박철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얼굴이 환해지며 말했다. “그러면 틀림없다! 그놈들이 분명하다. 그래, 그놈들을 몽둥이로 반 죽여 놓았나?” 오두복은 여전히 느긋하게 대꾸했다. “아마, 그놈들은 병신들이 되고 말 낍니더. 몽 둥이로 그렇게 맞으면 살더라도 오래 못 삽니더. ” “그래, 네 명이라고 했지?” “네, 네 명이었십니더” 박철수는 그때서야 기쁨에 넘친 표정으로 “ 잘했다. 너는 확실하게 내가 믿을 수 있는 내 동 생이다”고 말한 뒤 다시 이렇게 물었다. “몽둥이질을 되게 한 모양인디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그 자리에서 직사한 놈이 생겼다면 문 제가 복잡해지는데…” 오두복은 여전히 덤덤하게 말했다. “그런 건 걱정 안해도 될 낍니더. 골통은 까지 안했으니까 현장에서 죽은 놈은 없십니더.” 박철수는 다시 환하게 웃으며 어깨를 한 번 펴 본 뒤 다시 말했다. “잘했다! 이제 십 년 넘은 체증이 가라앉는 것 같다. 자식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까 불다가 병신들이 되겠군. 그러나 저러나 그놈들은 하늘이 벌을 내린 거야. 부산 이 넓은 해안에서 왜 하필이면 내 물건 들어오는 곳을 또 지키고 있었냐 말이다. 이건 하늘이 벌을 내리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철수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오두복이 조심스런 태도로 그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리 일은 완전히 끝난 겁니껴?” 박철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끝나지 않았어. 요새 부산 해안은 이 전 같지 않다. 그놈들 말고도 도 다른 패가 있을 꺼야. 넌 앞으로도 내 물건 들어올 때마다 엄호를 해줘야겠어. 그런 일이야 간단한 일이지. 내가 날 짜와 장소만 알려주면 너희들은 하룻밤 수고만 해주면 되니까…” 오두복은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박철수로부 터 오는 돈이 끊기지 않는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 었다. 박철수는 오두복과 헤어진 뒤 밀수품을 은닉 처에서 시내로 옮긴 뒤 거래선에 넘겼다. 그리고 저녁에는 거래선과 해운각에서 술을 마신 뒤 곧 장 손경자 집으로 왔었다. 그러나 손경자는 그의 기대를 어긋나게 했다. 박철수는 술병이 비자 술상을 치우게 했다. 밤잠 을 못 잤기 때문에 갑자기 잠이 밀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손경자가 술상을 치울 때 “너 이년 두고 보자. 내가 니 뒷조사를 시작할 끼다.”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손경자는 불안감과 박철수의 코고는 소리 때문 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코고는 박철수가 더욱 징그럽게 느껴져 그로부터 떨어져 누웠다. 잠을 못 이루는 손경자는 생각할수록 박철수가 미웠다. 그가 부산에 다시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도 황종태와 떨어져 살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됐 더라면 황종태가 범죄 조직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녀는 박철수를 증오했다. <이 새끼가 정말 저주스럽다. 종태가 이 집에 서 같이 지내고 있었다면 아무 일없었을 것 아이 가. 이 새끼가 정말 원망스럽다. 어떻게 할까. 이 새끼를 밀고해 버릴까. 그러나 이 새낀 밀고해도 끄떡없을 놈이다. 워낙 주도면밀한 놈이니까 증거 를 안 남겨 놓았겠지. 지 말마따나 빽도 좋은 것 같고. 그럼 어떻게 하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방법밖에 없는 기라. 종태와 함께 서울 같은 곳으로 도망가서 사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그 러나 종태가 당했다믄 우째야 좋겠노?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어야 되니 정말 답답한 노 릇이다.> 손경자는 새벽에야 잠이 들었다. 아침에 그녀가 잠에서 깼을 때 박철수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박철수의 그런 태도는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손경자는 가게로 가기 전에 황종태의 전 하숙 집을 찾아갔다. 옮겼는지, 안 옮겼는지 확인도 해 보고 옮겼다면 혹시 그 집에서는 어디로 옮겼는 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서대신동의 황종태 하숙집은 이층집이었다. 황 종태의 방은 이층에 있었으므로 손경자는 대문을 두드리기 전에 황종태 방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 런 뒤에 그녀가 대문을 두드리자 식모가 문을 열 어 주었다. 식모는 그녀를 알아보고 반갑게 웃으 며 “종태 아저씨는 이사갔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손경자는 알고 있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어디로 이사간다는 말 안했나?” 식모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서울로 간다 캤어요” “서울로?” 식모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손경자는 더 이상 물어 볼 말이 없었기 때문에 발길을 돌렸다. 손경자는 식모가 “서울로 간다 캤어요.”했을 때 울컥 배신감을 느꼈다. 그럴 수가 있나, 종태 가 나에게 서울로 간다는 사실마저 숨길 수 있나, 라고 생각하며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 때문에 어 쩔 줄 몰랐다. 골목길을 벗어나는 손경자의 걸음걸이는 힘이 빠져 있었다. 그녀는 쓰러질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부터 그녀 의 눈에서 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믿었던 종태마저 나를 배신했구나. 종 태가 나를 배신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손경자는 눈물을 닦은 뒤 다시 걸었다. 그녀는 걸어서 남포동 가게로 갔다. 점원 아가씨는 그녀 얼굴을 보고 “무슨 일 있었어예?"라고 물었다. 그녀는 아무 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라고, 말한 뒤 의자에 털석 앉았다. 그녀는 힘이 쑥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은 마치 불꽃 이 튀어나올 것처럼 매서웠다. 오후부터 손경자는 냉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황 종태가 서울로 갈 리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었다. 그녀가 그렇게 판단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 도 황종태가 그녀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 신 때문이었다. 황종태와는 이미 부부 이상으로 서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손경자는 그가 그 렇게 박절하게 자신의 곁을 떠날 리 없다고 판단 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황종 태의 잠적에 대해 이렇게 결론지었다. <무슨 곡절이 있다. 아마도 수사기관에서 뒤를 쫓고 있으니까 하숙집에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종태는 틀림없이 부산에 있을 것이고 나에게 곧 연락이 올 끼다.> 그러나 황종태로부터는 날이 바뀌고 달이 바뀌 어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녀는 더욱 침울해졌 다. 제14장 살아남은 자들의 맹서 친구를 살려야겠다는 하승일의 기민한 대처와 헌신적인 정성이 아니었다면 김호장은 죽음의 문 턱을 넘어가 버릴 뻔했다. 하승일이 비록 강도 짓 으로 구했지만, 사경을 헤매는 순간에 먹인 녹혈 과 사슴 생피는 김호장을 위기에서 구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녹혈과 사슴 생피로 응급 조치를 끝낸 하승일 은 한의사 노인을 다시 모시고 왔다. 몽둥이 기습 을 받은 김호장이 아지트로 실려 온 뒤 이틀 밤 을 지낸 아침이었다. 하승일이 노인을 다시 찾아가 왕진을 부탁했을 때 노인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면서 아 무 반응이 없었다. 하승일이 간절한 표정으로 재 차 부탁하자 노인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면서 왕진에 응했고, 택시를 타고 김호장 아지트로 오 면서도 노인은 환자들의 용태에 대해서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하승일은 노인의 그런 태도가 못마땅해 마음속 으로 욕을 해댔다. <이놈의 영감탱이는 돈만 밝히는 의사가? 환자 를 치료하는 의사가 이럴 수 있노? 용하다니까 다시 찾아왔지만 꽉 밟아 버리고 싶다. 어디 두고 보자. 어떻게 하나 지켜보았다가 이 영감탱이를 혼내 주든지 골탕을 먹이고 말 끼다.> 노인은 아지트에 도착하자 김호장부터 차례로 안색을 살피며 진맥하기 시작했다. 노인은 한 사 람 한 사람 매우 신중하게 맥을 짚어 보았다. 그 리고 마지막으로 이석배의 손을 잡아 본 뒤 환자 들로부터 떨어져 앉았다. 마음이 조급해진 하승일 이 노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십니껴? 살아날 수 있겠십니껴?" 그러나 노인은 아무 반응이 없이 환자들의 얼 굴을 다시 차례로 쳐다보았다. 노인의 태도 때문 에 더욱 조급해진 하승일이 다시 "어떻십니껴?" 말씀 좀 해 주이소."라고 말하자 노인은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서며 하승일에게 따라오라는 눈짓 을 했다. 그들은 옆방으로 가서 마주앉았다. 노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 왔던 게 이틀 전이었지?" 하승일은 즉시 "맞십니더."라고 대답했다. 노인 은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뜸을 들인 뒤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사실대로 말하겠다. 지난번에 와서 저 천년들을 진맥했을 때 나는 네 명 다 소생 가능 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기라. 저렇게 맞아 가지고 는 천하 장사도 내장이 상해 비실비실 앓다가 죽 게 되는지 그렇지 않으믄 병신이 된다. 무신 말인 지 알겠노? 살아도 사람 구실을 못하는 기라. 그 란데 오늘 와 보니 달라졌다. 세 명은 소생 가능 성이 있는 기라. 웅담 말고 다른 거 먹인 거 또 있나?" 하승일은 사슴의 녹혈과 생피를 먹였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는 시치미를 뗐다. "지는 어른께서 주신 웅담 이외에는 먹인 게 없십니더. 왜 그란데 와 그걸 묻십니껴?" 노인은 하승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그치 듯 물었다. "그 말이 참말이가? 정말 웅담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안 먹였나? ...그라믄 이상한 일이다." 노인은 그렇게 말한 뒤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했다. 그리고 한참만에 말을 이었다. "오늘 진맥해 보니까 세 사람은 소생하겠다. 그 러나 한 사람은 전혀 가망이 없다." 하승일은 소생 가망성이 없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석배를 빼놓고는 녹혈과 사슴 생 피를 마신 뒤 그가 보기에도 모두 안색이 좋아졌 는데, 이석배에게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이석배 는 녹혈을 못 받아 마셔 입을 벌리고 한 방울씩 떨어뜨릴 정도였다. 그는 의식도 없었고, 죽은 듯 이 누워 숨만 깔딱깔딱 쉬고 있었다. 하승일이 잠자코 있자 노인이 다시 말ㅎ다. "이제 너는 내가 시킨 대로해라. 세 사람은 신 체가 워낙 강건하다. 장사 같은 사람들인 기라. 이제 그 세 사람은 장독을 빼고 원기를 돋우기만 하면 다시 건강한 사람처럼 활동할 수 있을 끼다. 그러나 장독을 빼는 게 문제다." 하승일은 초조한 마음으로 노인이 다시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노인은 마치 제자에게 강론하는 투로 말을 이었다. "지금도 그런 일이 많겠지만 옛날에는 남의 집 담 넘어가 여자를 겁탈하는 놈들이 많았다. 그리 고 그러다가 붙잡히는 놈들은 동네 청년들에게 죽도록 얻어 마졌던 기라. 그럴 때는 어떻게 때리 냐면 붙잡힌 놈을 덕석으로 똘똘 만 뒤 몽둥이질 을 해 댄 기라. 그게 덕석말이라는 기다. 덕석말 이를 당하믄 온 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내장도 상할 수 있다. 내장이 안 상해도 장독 때문에 골 병이 들어 오래 몬 사는 기라. 그렇게 장독이 들 었을 때 특효약으로 쓰인 것이 죽봉이다. 대나무 뿌리에 주먹만하게 혹처럼 달려 있는 게 죽봉이 라는 것인데, 아무 대나무나 다 죽봉이 붙어 있지 않아 귀한 물건이다. 그래서 구하기가 어렵다. 나 도 현재 가진 게 없고 부산 시내 한약방을 다 뒤 져도 몇 개 안 나올 끼다. 그라믄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 대구에 가면 한약재만 파는 약정 골목이 있다. 옛날부터 유명하다. 거기에 가서 약재상마 다 다 수소문해 보믄 살만큼은 구할 수 있을 끼 다. 거기서도 몬 구하믄 전라도 담양에 갈 수밖에 없다. 거긴 조선 팔도에서 대나무 밭이 가장 많은 곳이니까 담양에 가서 대나무 밭 주인들을 찾아 죽봉 사러 왔다 카믄 살 수 있을 끼다. 그라고 그렇게 해서 죽봉이 구해지믄 이렇게 하라. 술울 담아 마시기도 하지만 환자들 용태로 보아서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죽봉을 솥에 넣 고 푹 삶아라. 그래 가지고 그 죽봉 삶은 물을 환 자들에게 물처럼 마시게 하거라. 그리믄 장독이 빠진다. 그라고 원기도 회복 퍼뜩 회복해야 되는데, 개 고기가 원기 회복엔 참 좋다. 그러나 환자들이 고 기는 아직 못 먹을 꺼니까 개고기를 푹 삶아 그 진국을 먹여라. 그라믄 저 환자들의 원기가 곧 회 복될 끼다. 장독이 빠지고 원기가 회복되믄 내가 또 약을 지어 주겠다. 알았나? 당분간은 니가 죽 봉도 구하고 개고기를 삶아 먹이면 되는 기다." 노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승일이 즉시 물었다. "환자들에게 뱀은 안 좋십니껴?" 노인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와 안 좋겠노" 내가 첫 날 왔을 때 그 얘기했 을 낀데. 구렁이가 참 좋지만 그것도 지금은 구하 기 어려울 끼다. 구하기만 하믄 구렁이나 살모사 를 고와 먹이는 기 최고다. 그러나 구하기 어려우 니까 개고기를 삶아 먹이라는 거야. 이제 내 말 알아들었쟤? 원기가 회복되믄 나에게 다시 찾아 오는 거 잊지 마래이." 하승일은 절을 하면서 "고맙십니더."라는 말을 서너 차례 되풀이했다. 노인은 바로 일어서서 돌아갔다. 하승일은 노인 에게 사례비를 준 뒤 골목까지 따라나갔다. 골목 에서 노인은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처음 진맥했을 때는 분명히 네 명 다 위 험하다고 판단했던 기라. 그란데 세 명은 좋아졌 어. 아무것도 안 묵고는 좋아질 수 없는 긴데..." 노인은 그렇게 중얼거린 뒤 하승일을 쳐다보며 "니, 정말 아무것도 안 묵였나? 웅담가루만 먹고 저렇게 좋아질 수 없는 긴데..."라고 다시 물었다. 하승일은 표정까지 꾸미며 "와, 지가 거짓말 하겠 십니껴? 다른 거 먹였으면 먹였다고 말씀드리지 예..."라고 대꾸했다. 노인은 하승일이 그렇게 나오 자 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물론 기적이란 것도 있는 기라. 환자들을 치료 하다 보믄 기적적인 일을 가끔 겪게 되지. 사람 생명이란 게 허망하게 끝나기도 하지만 질길 때 는 엄청 질 긴 것이다." 그날 저녁 무렵 전라도 구례로 뱀을 사러 갔던 이만복이 쌀가마니 세 개에 구렁이를 비롯해 살 모사 독사 등을 가득 싣고 돌아왔다. 그는 졸개들 이 용달차에서 마당에 가마니 세 개를 다 옮겨 놓자 하승일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님, 이번에 구례에 가서 희한한 구경을 하고 왔십니더. 형님 말씸대로 구례에 가서 땅꾼을 찾 아 뱀을 구하는대로 다 사겠다고 했더니 지게꾼 과 가마니 서너 개를 구해오라 캅디더. 그래 지게 꾼을 데리고 갔더니 바로 산으로 올라가자고 합 디더. 그래서 그 땅꾼을 따라 산에 따라 갔더니 산비탈 양지 바른 곳에서 뭔가 열심히 찾십디더. 지가 땅꾼에게 뭘 찾느냐고 물었더니 뱀굴 표시 해 놓은 걸 찾는다 캅디더. 잠시 후 그 땅꾼은 말 뚝 하나를 뽑더니 여기를 파면 뱀이 수백 마리 나올 거라 캤십니더. 땅꾼과 지게꾼이 삽으로 그 곳을 파니까 정말 뱀들이 수백 마리가 엉켜 있는 기라예. 와, 그걸 본 순간 정말 징그럽십디더. 땅 꾼은 집게로 뱀을 들어 가머니에 담기 시작했는 데 끝이 없는 기라예, 땅꾼 설명에 의하면 뱀들은 그 굴 속에서 겨울잠을 자고 봄에 기어나온다 캅 디더. 좌우지간 엄청납디더. 구렁이는 땅꾼이 가 을에 잡아 놓고 보관하고 있던 걸 샀십니더. 구렁 이는 서른 두마리고, 뱀은 몇 마리인지 모르겠십 니더. 집게로 막 퍼 담았으니까예." 이만복의 얘기가 끝나자 하승일은 뱀이 가득 들어 있는 가마니를 쳐다보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뱀을 저렇게 많이 구해 오느라고 정말 수고했 다만, 저걸 어떻게 보관하노?" 이만복은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즉시 대꾸했다. "지가 땅꾼에게 다 물어 봤십니더. 땅을 깊게 판 뒤 그 속에 보관하면 제일 좋지만, 그럴 형편 이 안 되면 큰 장독 여러 개에 나누어서 보관하 라고 합디더. 장독이 얼지 않게 가마니로 싸면 끄 덕 없답니더. 장독 안에 뱀을 반만 채우면 뱀들이 위로 몬 올라오니까 장독 밖으로 몬 나온답니더." 하승일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린 뒤 즉 시 돈을 꺼내 이만복 졸개들에게 주면서 시장에 서 큰 장독 여섯 개와 마대 스무 장을 사 오게 했다. 이만복 졸개들이 장독을 사 오자 그들은 가마 니를 조심스럽게 연 뒤 장독 속에 뱀을 옮겨 넣 었다. 그리고 그 작업이 끝나자마자 마대로 장독 을 쌌다. 그날 밤부터 김호장 아지트의 부엌에서는 구렁 이부터 끊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하승일은 이만복을 다시 대구로 보냈는데, 그는 그날로 대구 약정 골목을 샅샅이 뒤져 죽봉을 50 여개 사 왔다. 뱀에 이어 죽봉도 삶아지기 시작하자 하승일은 긴장이 풀려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사건 발 생 이후 그는 한숨도 못 잤기 때문에 피곤과 함 께 잠이 몰려와 김호장 곁에 누워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난 하승일은 이석배 문제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사건 발생 이후 하승일 은 모든 문제에 대해 기민하게 대처해 왔지만 이 석배에 대해서는 그저 난감해 할 뿐 전혀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한의사 노인이 한 명 은 소생 가능성이 없다고 했을 때부터 그 자신도 이석배에 대해서는 포기한 상태였다. 김호장은 물론이고 황종태와 억만이는 뱀을 끓 인 진국을 잘 받아 마셨지만, 이석배는 간신히 숨 을 쉬고 있을 뿐 아무것도 못 받아 마셨다. 하승 일은 김호장에게 이석배 문제를 상의하고 싶은 생각이 가끔 들었으나 매 번 꾹 참았다. 그런 상태로 또 하루가 넘어갔는데, 이석배는 다음날 새벽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숨이 끊어 지고 말았다. 하승일은 이석배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김호장이 깨어나기 를 기다렸다. 얼마 후, 김호장이 눈을 떴을 때 하승일은 그의 머리맡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그의 이마를 한 번 만져 본 뒤 "호장아."라고 불렀다. 김호장이 고개를 움직여 쳐다보자 하승일이 다시 말했다. "좀 어떻노? 이제 기운이 좀 나나?" 김호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승일은 잠시 묵 묵히 있다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호장아, 놀래지 마래이. 아무래도 얘기를 해야 될 것 같아 말하는데.... 석배가 죽었다." 김호장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 근육이 약간 경련 되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떴는데, 그의 눈에는 살기가 번뜩거렸다. 그는 하승일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언제 죽었나?" 하승일은 비감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잠에서 깨어나 보니 이미 숨이 끊어져 있더라." 김호장은 그 말을 듣고 다시 눈을 감았는데, 얼 굴에는 침통한 빛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하승일 은 묵묵히 앉아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김호장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 없이 이를 악물고 있었다. 오랜 친구 사이인 하승일은 김호장의 그와 같은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김호장은 적개심으로 불 탈 때 언제나 그런 표정을 지었었다. 김호장이 이를 악 물고 눈빛이 사나워지면 누구든지 요절내고 말겠 다는 신호였고, 그 서릿발같은 표정에 질리지 않 는 자가 없었다. 하승일은 그 표정을 보고 김호장이 이석배를 죽인 자들에 대해 무서운 적개심을 품었다는 것 을 직감했다. 하승일은 김호장을 표정을 살피며 잠자코 있었다. 이윽고 김호장이 눈을 떴다. 하승일의 짐작대로 김호장의 눈은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김호장은 그런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 었다. "승일아, 석배는 일가 친척 하나 없는 고아다. 그러니까 나나 니가 석배의 형 노릇을 해야 된다. 지금까지 나는 석배를 그렇게 대해 왔다. ...내가 이렇게 운신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니가 나 대신 석배의 형 노릇 좀 해 다오. ...번거롭겠지만 석 배를 어디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어라. 내가 일 어서게 되면 나는 그때 찾아보겠다. ...석배는 불 쌍한 놈이었다. 불쌍하게 살다가 정말 불쌍하게 죽었구나!" 하승일은 김호장이 그 말을 끝내고 이를 다시 악무는 것을 보고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지 짐작했다. 평소 때의 김호장이라면 이를 부드 득 갈며 "석배를 죽인 그 새끼들을 기어코 붙잡 아 사지를 찢어 죽이고 말겠다.!"고 말했을 것이 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승일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김호장을 안심시 키는 말투로 말했다. "걱정 마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낙동강 쪽에 양지바르고 흐르는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산 등성이가 많다. 거기서 제일 좋은 곳을 찾아 석배 를 잘 묻어 줄 끼다." 이석배의 시체는 그날 저녁 무렵에 낙동강 변 의 야산에 묻혔다. 그러나 정상적인 장례를 거칠 수 없어 이석배의 시체는 암매장됐다. 하승일이 장의사를 찾아가 문의해 본 결과 장례에 따른 행 정 절차가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그중 가장 난처 한 것이 의사의 사망 진단서였다. 하승일은 정상 적인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장의사에 게 염만 제대로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또 트럭을 빌리고 운전하는 조카를 불러내 이만복 패거리와 함께 이석배 관을 싣고 낙동강 쪽으로 가서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그의 시체를 암매장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하승일은 이석배 무덤의 봉분은 격식대 로 만들었다. 인적이 없는 야산에서 그들은 일을 기민하게 처리하고 밤늦게 김호장 아지트로 돌아 왔다. 박철수가 새벽에 아무 말 없이 사라진 것에 대 해 손경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박철수 의 그러한 태도는 손경자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 름없었다. 손경자에게 놈팽이가 생겼다면 그 사실 을 기어코 밝혀 낸 뒤 손경자는 물론이고 놈팽이 까지 요절내고 말겠다는 단호한 결심이 그렇게 표출된 것이었다. 집요한 성격을 가진 박철수는 그날 아침부터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해장국 집에서 아침을 때 우고 사무실에 도착한 그는 시간을 재고 있다가 손경자 가게문이 열릴 때쯤 그곳으로 전화를 걸 었다. 당연히 손경자는 출근 전이었고, 점원 아가 씨 순자가 전화를 받았다. 박철수는 능글맞은 음 성으로 말했다. "아지매 출근했나?" 순자는 박철수의 음성을 금방 알아듣고 "안녕 하십니껴. 주인 아지매는 아직 안 나오셨십니더." 라고 대답했다. 박철수는 자신의 예상이 맞아떨어 지자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아지매가 아직 출근 안했다는 건 알고 있다. 난 너에게 용건이 있어서 전화 걸었다. 너 평소 몇 시에 퇴근하지?" 순자는 박철수가 자신에게 용건이 있다는 말에 어리둥절해 한동안 대답을 못했다. 그러자 박철수 는 일부러 약간 화난 투로 재촉했다. "내 말 못 알아들었나? 너 평소 몇 시에 퇴근 하느냐고 묻지 않았냐?" 순자는 그때서야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통 일곱 시쯤인데예, 그건 와 물으시는교?" 박철수의 말이 바로 이어졌다. "그러면 오늘 일곱 시 반에 광복동 입구에 있 는 갈매기 다방으로 나오라. 그 다방은 유명하니 까 너도 알겠지.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기로 하 고, 그럼 이따 보자. 그런데 너와 내가 만난다는 건 아지매에게 절대로 말해선 안된다. 우리끼리 만나는 걸 아지매가 알면 화낼 테니까 절대로 말 하지 말라. 알았지?" 순자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하자 박철수는 목 소리를 바꿔 다시 말했다. 그는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아무 것도 아니니까 깊이 생각할 것 없다. 아 지매에게 절대로 말해선 안된다는 것 하나만 지 켜! 그럼 이따 만나자." 순자는 박철수가 은근히 겁을 주자 모기 소리 처럼 힘 없이 "예, 알겠십니더."라고 대답했다. 여고를 갓 졸업한 순자는 이름처럼 대단히 순 진했고, 세상 물정도 잘 몰랐다. 남포동에서 10 년 동안 장사를 해 온 손경자는 점원은 영악한 애보다 순진한 애가 부려먹기 좋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다. 손경자는 순자와 대면했을 때 그녀의 순진함을 간파하고 점원으로 고용하는 데 주저하 지 않았다. 손경자는 비밀이 많은 여자였기 때문에 집에 식모도 두지 않았지만 , 비밀을 지키기 위해 점원 도 순진한 애들만 고용해 왔다. 물론 그녀의 비밀 은 거래 관계와 남자 문제였는데, 점원 없이는 가 게를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장사 초기 부터 점원은 고용했었다. 그러나 손경자는 무엇보 다도 순진한 아가씨를 우선적으로 고용하면서도 안전장치를 바로 만들었는데, 그것은 점원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었다. 손경자가 만든 점원의 근무 지침은 세 가지였 다. 첫째는 정직, 둘째는 근면, 그리고 셋째는 입 이 무거울 것이었다. 손경자는 부정직하고 게으른 점원은 하루도 그냥 놔두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 려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점원들에게 항상 입이 무거워야 된다는 점을 수시로 강조해 왔다. "입이 가볍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되면 그날로 끝장이다. 누가 우리 가게와 나에 대해서 물어 볼 때는 항상 잘 모른다고 대답하라. 어무니와 아버 지가 나에 대해서 물어 봐도 그렇게 대답해야 된 다." 물론 순자도 첫 출근 전에 그 근무 지침을 교 육받았다. 그리고 출근 이후 손경자가 가끔 근무 지침을 물어 보았기 때문에 순자는 교육이 잘 돼 있는 편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부모들이 가게 주 인이 어떤 여자냐고 물어보았을 때 "지는 잘 모 릅니더."라고 대답했었다. 그렇게 교육받은 순자는 박철수로부터 난데없 는 전화를 받고 심각한 갈등에 빠졌다. 박철수가 퇴근 후에 만나자는 것도 내키지 않았는데, 그 사 실을 주인 아줌마에게 비밀로 하자고 당부했기 때문에 몹시 고민스러웠던 것이다. 순자는 주인 아줌마가 전날 박철수의 전화를 받은 뒤 "꼴도 보기 싫은 징그러운 새끼!"라고 욕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욕을 듣고 순자는 박철수와 손경자의 관계가 나빠졌다고 생각했었 다. 그래서 순자는 박철수가 자신을 만나자고 하 는 것은 주인 아줌마와 관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순자의 갈등은 심각했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우짤꼬! 주인 아지매에 대해서 물어 볼 낀데... 아저씨가 주인 아저씨나 다름 없는 것 같아 아저 씨 말을 안 들을 수도 없꼬... 참말로 복잡한 일이 생겼다. 이걸 우째야 좋겠노? 아지매는 입이 가벼 우면 당장에 집에 보내 버린다 캤는데..." 손경자가 가게에 나타난 것은 순가가 그와 같 은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순자는 손경자의 모습을 보고 갈등이 더 커져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그녀는 손경자의 표독 스런 모습에 주눅까지 들었다. 가게에 오기 전에 황종태 하숙집에 찾아갔던 손경자는 그가 서울로 이사갔다는 말을 듣고 몹시 화가 치밀었는데, 가 게에 도착한 뒤에도 그 화가 풀리지 않았던 것이 다. 순자는 손경자의 화난 얼굴을 가끔 훔쳐보며 고민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손경자의 얼굴 근육이 팽팽할 정도로 화가 나 있는데다가 표독스럽게 느껴져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손경자의 표정은 오전 내내 바뀌지 않았다. 그 리고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고객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후에야 손경자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순자가 보기에는 기분 전환이 된 것 같지는 않았 다. 순자는 손경자의 그와 같은 태도 때문에 하루 종일 조심스럽게 일했다. 그리고 박철수의 전화 건에 대해서는 사실대로 보고할 엄두도 못 냈다. 순자는 전화 건에 대해서 주인 아줌마에게 숨겨 야겠다는 의지보다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 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결심을 못 하고 우왕좌왕하다가 퇴근 시간을 맞았다. 결국 순자는 박철수를 만나는 사실을 손경자에 게 숨기고 퇴근했다. 그러나 가슴이 두근거렸고, 발길을 집 쪽으로 돌려버리고 싶은 충동도 느꼈 다. 그녀는 길에서 한참 망설이다가 도살장에 끌 려가는 기분으로 갈매기 다방으로 향했다. 박철수는 약속 시간이 10분 지나서 나타났다. 그는 거드름을 피우며 다방 안으로 들어선 뒤 순 자를 발견하고 천천히 다가왔다. 순자가 일어서서 인사를 하자 박철수는 제스츄어로만 인사를 받으 며 말했다. "앉지 말고 따라온나. 어차피 저녁 묵을 시간이 니까 이 근방에서 저녁 사 먹고 와서 차는 그때 마시자." 박철수는 순자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앞장서서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순자는 그 뒤를 조심스럽 게 따라갔다. 박철수는 순자를 불고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 다. 그리고 식탁에 앉자마자 "너 이 집 불고기 한 번 묵어 봐라. 굉장히 맛있다."라고 말한 뒤 종업 원 아가씨를 불러 주문했다. 박철수는 순자를 자신의 스파이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나왔으므로 식사를 주문하고 나서 곧바 로 능숙하게 그녀를 요리해 나갔다. 자상한 듯 순 자의 부모와 순자가 다녔던 학교에 대해서 물어 보기도 하면서 순자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그리 고 식사가 나오자 "자, 묵자. 많이 묵어야 된다. 한참 때는 많이 묵어야 되는 거다."라며 순자를 살살 굴리기 시작했다. 밥 먹는 동안 박철수는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순자가 불고기를 매우 맛있게 먹는 걸 보고, 순자 집 형편이 평소 고기를 거의 먹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식사가 끝나자 박철수는 순자를 데리고 다시 갈매기 다방으로 갔다. 그는 커피가 나온 뒤에 본 론을 꺼냈다. 매우 고민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넌 아지매와 내가 어떤 사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을 거야. 사실 난 아지매를 무지무지하게 좋아 한다. 그런데 요사이 우리 사이가 좀 멀어졌다. 어른들의 사랑싸움에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어색하지만 그래도 니가 나를 좀 도와주어야 되 겠다." 순자는 말없이 박철수의 얘기를 듣기만 했다. 박철수는 여전히 고민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랑싸움이란 게 이렇게 유치하다. 어른인 내 가 철없는 너에게 속사정 털어놓으며 도움을 요 청하고 있으니 말야. 나를 돕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아지매가 가게에 나와 하루를 어떻게 보 내는지 나에게 얘기해 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야. 그렇게 나를 도와주면 나도 너를 도와주겠다. 자, 이건 내 성의 표시니까 받아 넣어라." 박철수는 미리 준비한 돈 봉투를 순자 앞에 내 놓았다. 순자의 얼굴이 매우 곤혹스런 표정으로 변해 갔다. 박철수는 그 표정을 살핀 뒤 말을 이 었다. "그 일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아지매가 하루를 보낸 뒤 기분 좋았다면 기분 좋았다고 말해 주고,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으면 안 좋았다고 말해 주 면 되는 거야. 자 누가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 니까 그 봉투부터 넣어 둬라. 니가 받는 월급의 다섯 배는 될 끼다. 나를 도와주는 대가로 내가 매 달 그 정도는 주겠다." 박철수가 던진 그 미끼에 결국 순자는 넘어가 고 말았다. 박철수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봉투를 들어 내밀자 순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받고 말 았다. 박철수는 마음속으로 순자를 스파이로 만드 는데 성공했다고 판단하고 환하게 웃었다. 박철수 는 그 자리에서 더 깊은 애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날은 그 정도 해 놓고 순자에게 일주일 후에 다시 전화하겠다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주일 후 그들은 같은 장소에서 두 번째로 만 났다. 박철수는 저녁을 사주지 않고 대신 봉투부 터 꺼냈다. "오늘은 내가 바빠 밥은 못 사 주겠다. 그러니 이 돈으로 너 혼자 맛있는 것 사 먹어라." 그렇게 말한 뒤 박철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 갔다. "아지매는 요즘 어떻나? 기분이 좋은 것 같더 나?" 순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요즘은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십니더. 아저씨 와 크게 싸웠어예?" 박철수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크게 싸우지는 안 했다. 그런데 아지매는 기분 이 어떻게 안 좋더냐?" "우울한 것 같십니더. 뭘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가 많십니더." "우울하고 뭘 생각하고 있을 때가 많다 이거 지? 또 뭐 없나?" "그라고 지가 보기에는 뭘 기다리시는 것 같십 니더." 순자의 말에 박철수의 눈이 빛났다. 그는 은근 한 어투로 순자에게 물었다. "뭘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뭘 기다릴까?" "그건 모르겠십니더." 박철수는 일부러 다방 안을 한 번 둘러본 뒤 지나가는 말투로 넌지시 본론을 꺼냈다. "참, 아지매에게 나 말고 다른 남자에게서 전화 왔던 일 있었나?" 박철수가 그 말을 던지자 순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저씨가 알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황종태의 전화를 직접 받아 본 일이 있었 다. 그리고 아줌마가 박철수 아저씨 이외의 남자 와도 만나고 있다는 걸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박 철수의 그 질문을 받자마자 그녀의 뇌리에는 아 줌마의 근무 지침이 스쳤다. 순자는 머뭇거리다가 잠시후 대답했다. "지는 잘 모르겠십니더." 박철수는 순자의 표정 변화를 읽고 손경자에게 남자로부터 전화가 온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러 나 순자를 다그치지 않았다. "잘 몰라? 왜 모르나? 조그마한 가게에서 하루 종일 같이 지내는데 아지매가 누구 만나러 나가 면 그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곧 알 수 있잖 아? 화장을 다시 한다든지 옷 맵시에 신경 쓰면 서 나가면 틀림없이 남자를 만나러 나가는 것 아 니냐?" 순자는 계속 잡아뗐다. "지는 그런 건 잘 모릅니더." 박철수는 순자 표정을 세밀히 살핀 뒤 말했다. "모른다 하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말이야, 앞 으로 아지매의 그런 점을 잘 관찰해 줘. 아지매가 외출하면 몇 시에 나가서 몇 시에 돌아왔다고 꼭 적어 놓아." 순자는 낭패스런 표정을 지으며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예."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박철수의 매수 작전에 걸려든 순자는 점차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어 갔다. 박철수의 요구는 점 점 더 집요하고 거칠어졌고, 순자는 자포자기 심 정에 빠졌다. <우째야 좋겠노? 이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 다 아이가. 양품점을 그만둘까?" 그러나 그녀는 박철수가 주는 돈 봉투에 걸려 들었으므로 그런 생각은 한순간뿐이었다. 박철수는 매일 아침 전화를 걸어 손경자의 동 태에 대해 체크하기 시작했고, 순자는 잘 모른다 는 말만 할 수 없어 차츰 주인 아줌마의 하루 일 과를 보고하게 됐다. 박철수를 만난지 보름만에 순자는 결국 그의 스파이가 되고 만 것이다. 박철수는 순자로부터 날마다 손경자가 계속 우 울하게 지내고 있으며 외출도 거의 안하고 있다 는 사실과 남자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는 한 통도 없다는 보고를 계속 받았다. 그는 순자로부터 알 아낸 손경자의 동태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분석한 뒤 이렇게 판단했다. <이상하다. 그년 행동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분 명히 놈팽이가 있을 건데, 남자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는 한통도 없다 이거지. 그리고 외출도 안하 고 우울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다.... 좌 우지간 뭔가 이상하다. 분명이 내가 냄새를 맡았 는데 그게 틀릴 리 없다. 그년이 기다리고 있는 게 뭘까?> 박철수는 그렇게 판단했던 날 밤 늦게 손경자 집을 불쑥 찾아갔다. 그러나 그날은 손경자에게서 이상한 점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잠자리에서도 그녀는 화끈했다. 그렇지만 박철수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그는 그 행위 때 손경자가 그녀 특유의 간드러지는 교성을 질러 대며 요분질을 해대자 그녀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용을 쓰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년이 요즘 놈팽이를 못 만난 모양이구나. 색을 오랫동안 굶었기 때문에 화끈하게 달아올랐 겠지. 지난번엔 하는 시늉만 했는데 오늘은 제대 로 하고 있군... 그러나 저러나 이년이 색을 쓰니 까 기분이 좋구나. 역시 이년은 그 방면에선 최고 급 계집이야.> 황종태는 원기가 회복되면서 손경자에게 너무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연 락을 못 하게 됐지만 그 사정을 모르는 손경자가 오해를 하고 자신으로부터 돌아설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생겼다. 황종태는 사고를 당함므로써 근 한 달여 동안 손경자에게 아무 연락도 못 했다. 해운대 관광호 텔에서 그녀와 하룻밤 지낸 이후 그는 하숙집을 옮겼다. 그리고 같이 부산을 떠나 버리자는 손경 자의 제안에 대한 결심을 하지 못해 전화 거는 걸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징어장사' 작전이 시작 되었던 것이다. 밀수품 털이 일이 시작되면 황종태는 손경자를 만날 수 없었다. 해변의 텐트 속에서 자는 잠이란 선잠에 불과했으므로 아침에 하숙집으로 돌아오 면 하루종일 자야 했다. 좌우지간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황종태는 근 20여 일 동안 손경자에게 아 무 연락 못하다가 몽둥이 기습을 당했던 것이다. 기력이 조금씩 회복되면서부터 황종태는 하루 에도 수십 번씩 "빨리 일어나 누님에게 전화해야 될 낀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거동에 불편이 없어져야 아지트 부근 다방으로 나가 전화할 수 도 있고, 또 몸이 완전히 회복되어야 손경자를 만 날 수 있으므로 그는 하루하루를 답답하게 보냈 다. 구렁이를 고와 만든 진국의 효험은 하승일이 놀랄 정도였다. 사고를 당했을 때는 이석배처럼 모두 죽어 나갈 것 같았던 세 명은 엿새만에 일 어나 앉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는 마당 으로 걸어나갈 수 있게 되었고, 열흘째 되는 날에 는 세 명 모두 마당에서 가벼운 맨손 체조를 할 정도였다. 다만 황종태만이 옆구리에 통증이 남아 있었다. 하승일은 세 명의 기력이 회복되자 한의사 노 인을 다시 모셔 왔다. 노인은 방에 들어서며 세 명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 라는 표정부터 지었다. 하승일이 그들에게 노인을 소개시켰다. "모두 인사해라. 이 의사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회복이 안됐을 끼다." 김호장이 먼저 일어서서 인사하려 했는데 노인 이 만류하며 그들 앞에 앉았다. 김호장이 대표로 인사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친구로부터 다 들었습니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노인은 무뚝뚝하게 "은혜는 무신 은혜!"라고 말 한 뒤 김호장부터 진맥하기 시작했다. 황종태 차 례 때 그가 옆구리에 통증이 있다고 하자 그를 눕게 한 뒤 통증이 있는 곳을 몇 번 눌러 보았다. 진맥을 끝낸 노인은 좌중을 둘러본 뒤 매우 밝 은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놀랍다. 이렇게 빨리 회복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는 기라. 이제 세 사람 모두 정상이다. 그라고 옆구리가 아픈 건 갈비뼈에 금이 갔기 때 문이다. 저절로 곧 붙게 될 것이니 걱정 안 해도 된다. 정말 건강한 신체들이다. 그러나 그 죽은 젊은이는 너무 허약했어...." 이석배 얘기가 나오자 모두 숙연해졌다. 노인은 그 분위기를 간파했는지 하승일을 쳐다보며 화제 를 돌렸다. "그란데, 이 사람들에게 뭘 먹였노?" 하승일은 사실대로 전라도 구례에서 구해 온 구렁이와 뱀을 고와 먹이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 러자 노인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잠시 끄덕인 뒤 말했다. "구렁이와 뱀의 효험이 이렇게 좋은 건 처음 봤다. 지금 상태로 보아선 내가 새로 약을 지어 줄 필요가 없겠다. 구렁이와 뱀을 계속 고와 먹이 고.... 참 죽봉도 구했나?" 하승일은 죽봉을 고와 물처럼 마시게 하고 있 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노인은 "그럼, 됐다. 좀 지 나면 장독도 다 빠질 기다."라고 말한 뒤 자리에 서 일어섰고, 그들 모두 따라 일어섰다. 노인은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며 고개를 또 연신 끄덕 였다. 그리고 그들이 방문 밖까지 따라 나서려 하 자 "나오지 마라. 됐다. 너희들은 아직도 환자다." 라고 말한 뒤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내가 한가지 말해 둘 게 있다. 너희들 앞으로 여자 조심하래이. 구렁이와 뱀을 이렇게 많이 묵 으면 정력이 좋아져 여자 없인 못 자게 된다. 혈 기 왕성한 젊은 사람들이 뱀을 묵으면 그게 곤란 한 문제인 기라. 그 힘 좋아졌다고 함부로 쓰지 말고 여자 조심하래이!" 노인의 말에 그들 모두 민망하게 웃었고, 노인 도 빙긋이 웃으며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부터 황종태는 손경자에게 전화를 걸 고 싶어 안달이 났다. 거동이 약간 불편했지만, 전화를 걸기 위해 집밖으로 나가 인근 다방까지 걷는데 지장이 없다고 판단됐기 때문에 손경자에 게 전화 걸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던 것이다. 그 는 참을 대로 참고 있다고 억만이가 화장실에 가 자 김호장에게 고백했다. "형님, 지는 지금 밖에 나가 전화 좀 걸고 오겠 십니더." 김호장은 황종태가 전화를 걸려고 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눈치를 채고 전화 거는 것에는 반대하 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단서를 붙였다. "그래 전화 걸어 봐라. 오랫동안 소식 없었으니 그쪽에서 궁금해하겠구나. 그러나 아직 만나서는 안된다. 그 몸으로 여자와 잔다는 건 아직 무리 다. 알겠나?" 황종태는 허가를 얻었기 때문에 얼굴이 환해지 며 "전화만 걸겠십니더"라고 말한 뒤 슬슬 밖으로 나갔다. 황종태는 집 밖 골목으로 나오자 가슴이 설레 었다. 5.16 직후 손경자 집에서 두문불출하고 숨 어 있었을 때 이후 열흘만에 거리 구경을 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가슴 이 설ㄹ던 것이 아니라 손경자와 통화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이 부풀기 시작한 것이 다. 그는 골목을 벗어나며 손경자가 그 동안 자신 이 전화도 안 걸었다고 화를 낼 것이라고 짐작했 지만,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곧바로 화가 풀리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골목을 벗어나자 길 건너편에 다방 간판이 보 였다. 그는 길을 건너 다방으로 들어가 카운터에 앉아 있는 마담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화기를 들 었다. 전화는 손경자가 직접 받았다. 황종태는 평소처 럼 손경자 목소리를 확인하고 "종탭니다."라고 말 했다. 손경자는 당장 숨넘어가는 소리로 소리질렀 다. "야야! 니 어데 갔었더노? 사람 그렇게 미치게 만들래? 지금 어데고?" 황종태는 그 목소리를 듣고 안심했다. 손경자가 비록 언성을 높이고 있었지만 무척 반가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낮은 소리 로 말했다. "그렇게 됐십니더. 전화도 못한 것에 대해서 오 해는 절대로 하지 마소. " "오해는 무신 오해를 한단 말이고? 너 지금 서 울에서 전화하나? 아니면 부산에 왔나?" "부산입니더" "서울 안 갔었나?" 황종태는 손경자가 자신의 이전 하숙집을 찾아 갔었구나, 라고 생각하고 해명했다. "이사할 때 하숙집에는 서울로 간다고 말해 놓 았십니더만, 서울에는 가지 않았고 부산에 있었어 예." "부산에 있었다고? 그라믄 와 전화도 안했나?" "금방 말씸드렸듯이 그런 사정이 있었십니더. 전화 몬 한 건 이해해 주소." "알았다. 그럼 지금 나올 수 있나?" 황종태는 당장 달려가 손경자를 만나고 싶었지 만 잠시 머뭇거린 뒤 이렇게 말했다. "누님, 지금 전화도 간신히 하는 겁니더. 아마 늦어도 열흘만 참으면 누님을 만날 수 있을 낍니 더. 그때까지 참아 주이소." 손경자 입에서 원망스러워 하는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열흘이나? 니 나 숨 넘어가는 걸 보고 싶어서 그라나? 부산이라며 와 몬 만나노? 거기 어디고? 음악소리 들리는 걸 보믄 다방 같은데, 거기 다방 아이가?" 황종태는 다방 마담의 눈치 때문에 전화를 더 이상 끌 수 없었다. 그는 전화를 끊기 위해 통사 정하는 어투로 말했다. "누님이 참아 주소. 지도 누님이 보고 싶어 죽 겠십니더. 그럼 전화 끊겠십니더." 손경자가 황급하게 말했다. "야야, 니 꼭 전화하래이!" 그들은 둘 다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순자는 손경자의 그 통화 내용을 다 듣고 있었 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전화통에서 울리는 음성으로 보아서는 상대가 남자라는 것은 짐작됐지만 둘이 애인 관계라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주인 아줌마가 동생 같은 연하의 남자와 연애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 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순자는 손경자가 환종태 와 통화하는 동안 주인 아줌마 친척 동생한테서 걸려 온 전화인 모양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다음날부터 김호장과 황종태는 마당에서 자신 들의 특기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옆구리에 통증이 남아 있는 황종태는 가볍게 발놀림 동작을 시험 해 보았고, 몸에 이상이 없는 김호장은 주먹을 휘 둘러보기도 했고, 신체의 유연성을 회복하기 위해 줄넘기도 했다. 억만이는 원래 싸움을 힘으로만 해내는 사내였기 때문에 그들의 운동 모습을 지 켜보기만 ㅎ다. 김호장의 몸놀림은 하루하루 달라 졌다. 그의 동작은 예전처럼 민첩해졌고, 엄청난 파괴력이 엿보일 정도로 몸 놀림에 힘이 넘쳐 흐 르기 시작했다. 그는 황종태가 발 운동을 하면 "옆구리는 어떻나?"하고 꼭 물어보았다. 그때마다 황종태는 옆구리를 움직여 보며 "많이 좋아지고 있십니더."라고 대답했는데, 황종태가 "이제 말짱 합니더."라고 대답한 날 김호장은 그에게 다가와 직접 그의 옆구리를 만져보았다. 김호장이 통증이 있었던 곳을 눌러 보아도 황종태가 괜찮다고 하 자 김호장은 그의 손을 잡고 악수하며 말했다. "됐다. 나는 니 옆구리가 정상이 되기를 기다려 왔다. 우린 이제 다시 활동할 수 있다." 김호장은 억만이에게 그날 저녁 식사는 특별하 게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하승일에게도 연 락하여 그 자리에 참석하도록 했다. 그들이 몽둥 이 기습을 당하지 20일이 되는 날이었다. 저녁 식사에는 하승일뿐만 아니라 이만복과 그 의 졸개들도 참석했다. 상이 다 차려져 모두 둘러 앉자 대장 김호장이 입을 열었다. "밥먹기 전에 한마디하겠다. 승일이가 모든 일 을 잘 처리해 줘 정말 고맙다. 우리는 죽을 고비 를 무사히 넘겨 완전히 회복됐지만, 석배는 죽고 말았다. 석배 장례를 제대로 못 치러 주어 마음이 아프다. 내일은 백화점에 나가 모두 검은 색 기성 복을 한 벌씩 사 입자. 검은 넥타이도 사고 꽃이 랑 술도 사자. 그리고 모레는 석배 무덤에 모두 같이 가서 명복을 빌고 오자." 김호장의 의견에 모두 찬성했고, 그들은 밥을 먹으면서 내내 이석배 얘기를 했다. 그 이틀 후, 이석배 무덤에 가기 위해 검은 색 양복을 입은 김호장 패거리가 아저트를 나서 골 목을 벗어나자 행인들이 모두 쳐다보았다. 건장한 청년들이 똑같이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시선을 끌었던 것이다. 김호장은 행인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서둘러 택시를 잡도록 했다. 그들은 택시 두 대를 왕복으로 대절해 낙동강 쪽으로 나가 야산 부근에서 내렸다. 택시 속에서 김호장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야산을 기어올라 가 이석배 무덤에 도착할 때까지도 역시 말이 없 었다. 여느 장례식에서 흔히 볼수 있는 것처럼 그 들의 표정은 모두 엄숙했다. 야산 중턱에 올랐을 때 새로 만든 봉분이 보였 다. 김호장은 눈짓으로 하승일에게 그게 이석배 무덤이냐고 물었고 하승일도 고개만 끄덕이며 맞 다고 응답했다. 무덤 앞에 도착하자 이만복 졸개들이 꽃과 음 식을 진열했다. 김호장은 봉분을 묵묵히 쳐다보기 만 했다. 이윽고 준비가 끝나자 그들은 일렬로 서 서 절을 했고, 김호장부터 술잔에 술을 딸아 무덤 위에 뿌렸다. 그 의식이 끝난 뒤 김호장이 한마디하기 위해 그들 앞으로 나갔다. 그는 비감 어린 표정으로 입 을 열었다. "나는 석배 무덤 앞에서 이 말을 하려고 그 동 안 말을 아껴왔다. 불쌍한 석배가 한 세상 살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여기 묻힌 걸 보니 정말 가슴이 찢어진다. 나는 석배에게 맹세하겠다. 석배를 죽 게 만든 그놈들을 내가 기어코 붙잡아 석배 원수 를 갚고 말겠다. 건달 세계란 조금만 수소문해보 면 금방 알게 된다. 나는 그 새끼들의 두목인듯한 놈의 걸걸한 음성밖에 기억 못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 놈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부산 바닥을 뒤져보면 정체가 드러날 것 이다. 좌우지간 나에게 붙잡이면 되로 받은 것을 말로 갚고 말겠다. 여기 누어 있는 석배란 놈은 참 불쌍하게 살았 다. 일찍이 고아가 돼 고아원에 갇혔다가 뛰쳐나 와 쓰리꾼 조직에 걸려들어 쓰리꾼이 되었던 놈 이다. 쓰리꾼이었지만 간사하지 않고 귀염성이 있 어 내가 특별히 좋아했었다. 내가 신세도 졌고, 같이 지내다 보니 친동생 같은 생각이 들었던 녀 석이었다. 그러나 결구 불쌍하게 이곳에 묻히고 말았다. 좌우지간 나는 그놈들을 기어코 붙잡아 석배의 원수를 갚고 말겠다. 자, 모두 다시 석배의 명복 을 빌자." 말을 마친 김호장의 눈빛은 매섭게 빛났다. 그 는 이를 악물고 서서히 돌아서서 일행과 함께 이 석배 무덤을 향해 묵념을 했다. 김호장의 성격을 잘 아는 하승일은 묵념을 하 면서 머지않아 부산에 피바람이 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날 부산으로 돌아온 뒤 그들은 아지트 부근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일단 해산했다. 해산 전 에 김호장은 이만복을 그들 조직에 가입시켰다. 김호장은 아지트에 혼자 남아 있다가 우체국으 로 가서 서울의 박명자에게 전화를 걸어 부산에 올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박명자는 곧바로 당일 야간 열차를 타겠다고 대답했다. 박명자와 전화 통화를 끝낸 김호장은 휘파람을 불며 하승일 가게로 나갔다. 제15장 관능의 밤과 고백의 밤 황종태 전화를 받고 해운대 관광호텔 커피숍에 서 만나기로 약속한 손경자는 수화기를 내려놓으 며 순자에게 말했다. "순자야, 나 지금 나가믄 몬 들어올지 모른다. 일곱 시까지 안 돌아오믄 장부 잘 정리하고 가게 문 닫아라. 알았쟤?" 손경자 지시를 받고 순자는 무심코 "어디 가시 는데예?"라고 물었다. 그 순간 손경자는 순자를 노려보며 따끔하게 쏘아 댔다. "너 금방 뭐라꼬 했노?" 어디 가시느냐고? 너 그 말버릇 언제 배웠노?... 내가 그런 건 묻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순자는 무심코 내뱉은 말 때문에 자신의 정체 가 드러날까 보아 당황했다. 그녀는 손경자의 시 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잘못했십니더. "라고 말했다. 손경자는 순자가 고개를 들자 한 번 더 노려본 뒤 "앞으로 그런 말버릇 또 쓰면 용서 안 할 끼 다. 나는 갈테니까 가게 잘 보고 있어."라고 말한 뒤 가게를 나섰다. 순자는 손경자가 전화 받을 때 상대가 얼마 전 에 전화 걸었던 그 동생인 듯한 남자라는 것을 눈치챘다. 만나는 사람이 동생이라 할지라도 손경 자가 전화를 받고 외출했다는 사실은 박철수에게 즉시 보고해야 될 사항이었으나 박철수는 전날 마작 판에 가면서 순자에게 전화를 걸어 며칠 후 에 한꺼번에 보고 받겠다고 했었다. 순자는 손경 자에게 꾸지람을 들었으므로 반발심이 생겨 박철 수에게 즉시 보고하고 싶으나 연락해 보았자 헛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 다. 그러나 그녀는 왠지 불안하여 가게문을 닫을 때까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손경자가 황종태 전화를 받고 나는 듯한 기분 으로 그를 해운대 관광호텔로 오라고 한 것은 박 철수가 마작 판에 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 었다. 손경자는 택시를 타고 가면서 황종태 문제로 지난 한 달여 동안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을 되새 겼다. 손경자는 황종태와 함께 부산을 몰래 떠나 서 울에서 살고 싶었지만, 그가 끝내 결심하지 못할 것 같아 타협안을 생각해 왔다. 그것은 그녀 먼저 서울로 떠난다는 계획이었다. 그녀는 꼴도 보기 싫은 박철수로부터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 기 때문에 황종태가 따라오지 않으면 자신이라도 먼저 가게를 처분하고 서울로 도망갈 결심을 굳 혔다. 송충이처럼 징그러운 박철수로부터 벗어나 면 자신이 언제라도 부산에 내려와 황종태를 자 유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고, 또 황종태를 서울로 자주 불러들이면서 종내는 그를 설득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손경자는 그 결심을 한 뒤 혼자라도 서울로 간 다는 생각을 진작 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나는 참 바보다. 똑똑한 척 하면서도 이럴 땐 바보란 말이야. 왜 내가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 까. 나 혼자라도 서울로 먼저 가면 얼마나 좋겠 노? 종태가 서울 오믄 마음대로 같이 지낼 수 있 고, 또 내가 부산에 내려와도 자유롭지 않겠나. 그 악마 같은 새끼 눈만 피할 수 있으면 부산에 도 내가 자주 올 수 있는 기라. 그라고 종태가 서 울에 자주 올라오다 보믄 눌러 앉을 수도 있겠지. 이게 참 좋은 방법인데, 왜 진작 그 생각이 떠오 르지 않았을까...그래, 나부터라도 서울로 먼저 가 자. 종태도 이 생각엔 반대하지 않을 끼다. 아무 리 생각해 보아도 종태가 반대할 이유는 없다.> 사실 황종태도 손경자를 다시 만나러 가면서 그녀의 제안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으므로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다. 손경자가 그 문제를 다 시 꺼낼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황종태가 여느 건달패와 다른 점은 아무 벌이 없이 무위도식하면서 손경자에게 붙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확고하다는 점이었다. 밀수품 털이 로 돈이 생기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돈벌이로 생각하지 않았다. 5.16이 터져 수배자 신세가 되 어 막판까지 몰렸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밀수품 을 털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생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 일에서 손을 씻을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손을 씻는다 는 것은 김호장과 의리를 끊는 일이었기 때문이 었다. 하여튼 이래저래 생각해 보아도 황종태에게는 뾰족한 결론이 나올 수 없었다. 그래서 황종태는 손경자가 또 그 문제를 제기하여 결심을 독촉한 다면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호텔 커피숍에는 손경자가 늦게 도착했다. 그녀 는 입구에서 구석진 곳에 앉아 있는 황종태를 발 견하고 활짝 웃었다. 그리고 맵씨있게 걸어 황종 태 앞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커피숍에 들어와 황종태 쪽으로 걸어가 앉을 때까지 커피숍의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그 녀를 뒤쫓았다. 그것을 의식한 손경자는 황종태를 다시 만난 기쁨 속에서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오랜만이다. 이게 얼마 만이고? 우리 이 렇게 살아도 되나?" 물론 손경자는 활짝 웃으며 그렇게 말했고, 황 종태도 빙긋이 웃었다. 손경자는 황종태와 다시 만나게 된 반가움을 감추지 않고 다시 말했다. "니 얼굴 억수로 좋아졌대이. 그 동안 뭘했기에 얼굴이 이렇게 좋아졌노? 나는 너한테서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걱정 되게 했대이. 그란데, 너는 누님을 그렇게 걱정시켜 놓고 얼굴만 좋아져 가 지고 나타나도 되나?" 황종태는 손경자가 자신의 얼굴이 좋아졌다는 말에 또 빙긋이 웃기만 했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누님이 나보고 얼굴 좋아졌다고 하는 걸 보믄 구렁이와 뱀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그러나 누 님은 내가 구렁이를 먹었다는 걸 알면 그걸 하자 고 해도 안하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 사실은 비 밀로 해야겠다.> 황종태가 말없이 웃기만 하자 손경자가 다시 말했다. "웃지만 말고 말 좀 해 보아라. 속이 타서 죽을 지경이다. 도대체 그 동안 뭐하고 지냈노? 안 좋 은 일이 있었던 것 아니쟤? 얼굴 보믄 좋은 일만 있었던 사람 같다. 그동안 뭐했노?" 황종태는 그때서야 한마디했다. "연락 못해 죄송합니더. 나도 그 동안 누님이 되게 보고싶었어예. 그 점만 알아주시고 그동안 뭘 했는지는 이제 묻지 마소." 그러자 손경자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것도 비밀이가?" "비밀은 아니지만 나중에 얘기하겠십니더." "참말로 비밀도 많은 남자다. 우째 그렇게 비밀 이 많노? 그란데 앞으로도 그랄래?" "뭘 예?" "또 아무 연락 없이 사라지겠느냐는 말이다." 황종태는 듣고 잠시 얼굴이 굳어졌다가 단호하 게 대답했다. "이제 그런 일은 없을 낍니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더. 그라고 이번 일은 불가피했으니까 더 묻지 마이소." 그러자 손경자가 본론을 꺼냈다. "종태야, 나는 그 동안 니 생각 많이 했다. 그리 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당 장 나하고 같이 서울로 갈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 같으니까 나 혼자 먼저 갈란다. 가게 정리가 끝나면 바로 서울로 갈란다. 그라믄 니가 서울로 자주 올라와 만날 수 있고, 나도 너를 보러 부산 에 자주 올께. 어떻노? 내 생각이 니 마음에 드 나?" 황종태는 손경자 말에 즉시 찬성했다. "누님 생각이 좋은 방법인 것 같십니더. 난 한 달에 열흘 정도는 쉬니까 그때 서울에 가면 좋겠 십니더." 황종태의 얼굴이 밝아지는 걸 보고 손경자는 안심이 됐으나, 그가 한 달에 열흘을 쉰다는 점에 대해서 곧바로 의문이 생겨 이렇게 물었다. "니가 하고 있는 일이 뭔데 한 달에 열흘은 쉴 수 있다 카노? 내가 알면 안 되나?" 황종태는 당장 손경자 말을 가로막았다. "누님, 그건 더 묻지 마소. 내가 한 달에 열흘 정도 서울에 올라가 있으믄 좋은 기 아닙니꺼. 누 님이 먼저 서울로 올라가소. 그럼 나도 곧 갈 수 있을 낍니더." 손경자도 그 문제를 더 따지지 않기로 마음먹 었다. 그녀는 황종태가 자신의 의견에 찬성하자 사람들이 안 보고 있다면 악수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황종태를 그 윽하게 쳐다보다가 호텔의 룸으로 올라가자는 눈 짓을 했다. 황종태는 손경자가 그의 앞자리에 앉았을 때부 터 아랬도리가 꿈틀거렸으나 그녀가 눈짓으로 룸 으로 올라가자는 신호를 보내자 즉시 응답하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 "지금 대낮인데 가게에 안 돌아가도 됩니껴?" 그 말에 손경자가 눈을 곱게 흘기며 말했다. "시시하게 그런 건 와 묻노? 우리가 만났던 게 한 달이 넘었는데 우째 여기서 얼굴만 보고 그 냥 헤어질 수 있겠노? 니는 아무 생가 없나? 딴 전 피우지 말고 퍼뜩 일어서서 따라온나." 말을 끝낸 손경자는 좌우를 한 번 살 핀 뒤 먼 저 일어섰고, 황종태도 뒤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손경자가 프론트에 가서 키를 받은 뒤 먼저 층계 를 걸어 올라갔다. 황종태는 주위를 살핀 뒤 그녀 뒤를 따라 올라갔다. 그는 층계를 올라가는 손경 자의 뒷 모습을 보자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 다. 그녀의 엉덩이가 층계를 올라가면서 평지에서 보다 더욱 흔들거리자 더욱 육감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침을 꿀떡 삼키며 그녀 뒤를 따 라 올라갔다. 그래서 룸 안으로 들어가 도어를 닫자마자 황 종태는 손경자를 낚아채듯 껴안았다. 그녀도 기다 렸다 듯이 그의 품에 안기며 "정말 보고 싶었대 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황종태에 게 입을 내밀었고, 그들은 도어에 기댄 채 깊은 키스를 했다. 키스를 하면서 황종태의 손은 그녀 의 엉덩이를 거칠게 더듬었다. 그들 모두는 급했지만 그러나 서두르지는 않았 다. 물론 황종태는 예비 절차 같은 건 다 생략하 려 했지만, 손경자는 길들인 강아지 다루듯 그를 얌전하게 만들었다. 황종태가 막무가내로 덤벼들 려 하자 손경자는 은근한 목소리로 그의 귀에 대 고 "샤워부터 하고..."라고 말하며 옷을 벗기 시작 했고, 황종태도 잠시 참을 수 밖에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옷을 벗었다. 옷을 벗자 황종태의 빳빳하게 발기된 성기가 드러났다. 손경자는 그걸 흘낏 쳐다본 뒤 황종태 에게 교태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급하기도 하다. 그 동안 우째 참았노!" 그러자 황종태는 어리광 섞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님, 나는 몬 참겠다." 그렇게 말한 뒤 황종태는 그녀를 덮치려 했다. 그러자 손경자는 그를 밀쳐내며 "와 이리 급하 노? 그러나 참아야 할 땐 참아야 한다."라고 말한 뒤 그의 손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갔다. 손경자는 색욕이 강했지만 성행위는 매우 여성 다운 게 특징이다. 부부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였 지만 황종태가 발기된 성기를 자랑스럽게 드러내 놓고 있을 때는 언제나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 했고, 음담패설도 전혀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나 손경자는 일단 침대에서 한 몸이 되었을 때는 남 자를 사로잡는 천부적인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다. 몸 동작은 거칠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었고, 절정의 쾌감은 숨김없이 표현한다. 그리 고 그녀의 몸은 틈 하나 없을 정도로 황종태의 몸에 밀착되며, 황종태의 몸놀림이 빨라지면 숨 넘어가는 신음 소리도 높아졌다. 손경자는 그날도 그랬다. 황종태의 발기된 성기 가 노출되자 그녀는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 했는 데, 황종태는 손경자의 그러한 점을 익히 알고 있 었기 때문에 샤워를 하면서도 일부터 총을 겨누 듯 발기된 성기를 자꾸 그녀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러자 손경자는 "목욕할 땐 좀 얌전히 있어라." 며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그러자 황종태는 엄 살로 "아야!"하고 소리지른 뒤 그녀를 덥석 껴안 았다. 손경자는 그의 애무를 받으면서 "자, 이제 샤워 끝났으니 수건으로 퍼뜩 닦고 나가자."라고 말하며 그의 몸을 밀쳐 냈다. 황종태는 그 말에 순순히 응했다. 그들은 수건으로 서둘러 몸을 닦 았고, 그것이 끝나자 손경자는 황종태 앞에 똑바 로 섰다. 그것은 자신을 빨리 안고 침대로 가라는 표시였다. 황종태는 몸을 닦고 있던 수건을 던진 뒤 그녀를 덥석 들어 안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키스를 한 뒤 욕실에서 나와 침대로 향했다. 황종태는 숨을 헐떡거리며 그녀를 침대에 눕혔 다. 그리고 "정말 미치겠십니더."라고 말하며 그녀 의 배 위로 올라갔다. 이미 몸이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손경자도 그에게 찰싹 매달리며 그녀 특유의 은근한 목소리로 "나도 마찬가지야."라고 말하며 그에게 입을 내밀었었고, 다리는 이미 벌 리고 있었다. 숨가픈 행위 끝에 이윽고 그들은 거의 동시에 절정을 넘겼다. 그러나 황종태는 그녀 배 위에서 내려오려 하지 않았다. 그는 손경자가 사랑스럽다 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녀도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그의 눈을 쳐다 보고 있었다. 황종태가 그렇게 내려다보기만 하면 서 그녀 배 위에서 내려오지 않자 손경자가 말했 다. "니 지금 뭐 하노?" 황종태는 그 물음에도 미소만 짓고 있다가 "누 님, 참 이쁘다."고 말했다. 그 말에 손경자는 눈을 곱게 흘기며 "니 뭐 하느냐고 물었는데 무신 뚱 딴지 같은 대답이고!"라고 말했다. 그러자 황종태 는 수줍게 웃으며 "누님, 나 지금 바로 또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손경자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황종태의 성기 는 사정을 끝내고도 발기된 채 계속 그녀의 몸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경자는 승낙의 표현으로 그를 다시 껴안으며 허리 아래 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낮 정사는 초겨울의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손경자는 수없이 절정을 넘은 뒤 축 늘어졌고, 황종태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그녀 배 위에서 내려와 벌렁 누웠다. 그들은 밀려 오는 나른한 피곤 때문에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누워 있었다. 한참 후 잠에 빠져들려 했던 황종태는 손경자 가 "지금 몇 시노?"하고 묻자 일어나 앉았다. 그 리고 시계를 본 뒤 "일곱 십니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곧바로 "누님, 지금 가셔야 되지 않십니 껴?"라고 물었다. 그 말에 손경자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가게엔 안 가도 된다. 나 오늘 여기서 너와 함 께 잘란다....이리 온나." 황종태가 그녀 곁에 바짝 붙어 눕자 그녀는 황 종태 쪽으로 돌아 누우며 한손으로 그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사랑이란 게 알고 보면 별 것 아니라는 생각 이 든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뭘 하고 있나 궁금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그러다가 이렇게 만나면 즐겁고, ...이런 게 사랑 아니겠나?...난 정말 서울 로 갈란다. 가게가 정리되는 대로 바로 갈 끼다. 넌 약속 대로 서울에 자주 와야 된대이." 황종태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하이소. 나도 생각이 있십니더. 지금 누 님에게 모든 걸 다 말 몬하는 사정은 누님이 이 해해 주소." 손경자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뜻으로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한 손으로 그의 얼굴을 다시 매만졌 다. 그리고 그녀는 약간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넌 내 남자다. 항시 느끼지만 너는 남자 중의 남자다. 나는 너 없으면 몬 산다. 그란 데, 너의 그 힘은 더 좋아진 게 확실한데,우째 그 렇게 되었노? 그 동안 뭐 특별한 것이라도 묵었 나?" 황종태는 그 질문에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 도 한의사 노인이 말했던 것처럼 며칠 전부터 밤 마다 손경자 육체가 그리워 잠을 설쳤었다. 뱀과 구렁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 정력이 더욱 좋아 졌다는 것을 그 자신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손경자 입을 막 으려고 그녀를 다시 껴안았다. 그녀도 그의 요구 를 또 받아들였다. 손경자는 박철수의 그물에서 탈출하기 위해 서 울로 도망간다는 결심을 굳히므로써 방심 상태에 빠져 다음날 오후까지 호텔에서 황종태와 함께 지냈다. 손경자는 박철수의 그물에서 탈출하기 위해 서울 로 도망간다는 결심을 굳히므로써 방심 상태에 빠져 다음날 오후까지 호텔에서 황종태와 함께 지냈다. 물론 황종태의 넘치는 정력에 밤새도록 시달려 녹초가 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방심 때문에 다음날 오전 중에 순자에게 전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실을 박철수가 알게 됐다. 전날 밤 마작 판에서 돈을 몽땅 잃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던 박철수는 아침 늦게 사무실에 나가자마자 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순자와 몇 마디 나눈 박철수는 순자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전화로 집요하게 추궁한 끝에 손 경자가 전날 오후에 외출한 뒤 가게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박철수의 추궁은 계속됐다. "아지매가 누구를 만나러 나간 것 같았냐?" 순자는 겁먹은 소리로 대답했다. "동생 같은 사람 같았어예." "어디서 만나는 것 같았냐?" "해운대 관광호텔인 것 같았어예." 박철수의 말이 잠시 중단됐다가 더 엄한 목소 리로 물었다. "동생이라는 것이 확실했냐?" "예." 순자는 전에도 그 사람의 전화가 왔었다는 말 은 하지 않았다. 박철수가 잔뜩 화난 목소리로 말 했다. "이 가시나야, 일하려면 똑똑하게 해! 동생과 해운대 관광호텔에서 왜 만나겠냐? 상대가 동생 라는 것이 확실해? 그리고 그들이 만나는 장소가 해운대 관광호텔도 틀림없어?" 순자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하고 대답 했다. 박철수는 그 대답을 듣고 "또 전화하겠다. 아지 매가 몇 시에 가게에 도착하는지 시간을 정확하 게 보아둬!"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 놓은 박철수는 드디어 손경자의 꼬리를 잡았다고 확신했다. 손경자가 만나는 사람 이 동생이라면 해운대 관광호텔에서 만날 리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박철수는 손경자가 가게에 나타나는 걸 확인하 기 위해 시간 시간마다 전화를 걸었으나 그녀는 점심 때가 지나도 가게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쯤에서 박철수는 질투심 때문에 거의 미칠 지경 이 되었다. <이년이 어떤 놈팽이와 되게 붙었다. 밤새도록 얼마나 자랄 발광을 했으면 지금까지도 가게에 안 나타난단 말이냐. 두고 보자. 두 연놈을 붙잡 아 놈팽이는 그것을 짤라 버리고 그년은 가랭이 를 찢어버리고 말테니까.... 손경자 이년이 환장했 지? 이 박철수의 애첩이면서 다른 놈팽이와 놀아 날 생각을 하다니! 어디 두고 보아라. 너와 그 놈 팽이에게 박철수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보여줄 테 니까!> 손경자는 황종태와 점심을 먹은 뒤 오후 3시가 지나서 가게로 돌아왔는데, 그 직후 박철수의 전 화를 받았다. 손경자가 직접 전화를 받자 박철수는 아무 내 색도 안하고 "잘 있었나?"라는 말만 한 뒤 나중에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박철수의 스파이인 순자는 박철수로부터 전화 가 수없이 걸려 왔었다는 얘기를 손경자에게 하 지 않았다. 박철수가 그렇게 지시해 놓았기 때문 이었다. 손경자와 전화 통화를 한 뒤 박철수는 오두복 에게 당장 연락하여 그를 사무실 부근 다방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오두복의 부하 중에서 영리한 놈을 차출해 손경자 뒤에 붙여 놓도록 지시했다. 박철수는 그 지시를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오늘부터 너는 비상 근무다. 너의 부하를 다 동원할 필요는 없고 너를 포함해서 다섯 명만 이 다방에서 노닥거리고 있다가 내가 비상을 걸면 즉시 출동하라." 박철수는 질투심 때문에 흥분해 있었으므로 말 에 두서가 없었다. 당연히 오두복은 박철수의 말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박철수에게 질문 했다. "무신 일인데예?" 박철수는 독살스런 어투로 내뱉었다. "가시나 한 년과 놈팽이 한 놈을 붙잡아 혼 좀 내줘야 겠다. 미행 결과가 보고돼 상황이 전개 되 면 즉시 그 두 연놈 납치 작전을 실시한다." 박철수는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장을 꺼내 오두 복에게 내밀었다. 하얀 종이 위에는 약도가 그려 져 있었다. 오두복이 그걸 들여다 본 뒤 고개를 쳐들자 박철수가 말했다. "너는 그 놈팽이를 붙잡아 약도에 표시된 곳 으로 데려와!" 일이 이렇게 진전됨으로서 당장 그날 밤에 사 태가 벌어졌다. 손경자는 해운대 관광호텔에서 나와 황종태와 점심을 먹을 때 그가 당분간 할 일이 없다는 것 을 알았다. 손경자는 황종태를 하숙집으로 보내 버리면 서로 연락이 불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분간 그를 남포동 부근 여관에 투숙시키키로 마음먹었다. 그 생각을 황종태에게 말하자 그도 쾌히 찬성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황종태를 여관에 투숙시킨 뒤 가게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들은 저녁에 다시 만나 저녁을 함께 먹기로 약속 했다. 박철수는 사무실에 남아 손경자 미행에 관한 첫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첫 보고가 바로 미 행 성공이었다. 손경자가 젊은 남자와 만나 식당 에서 밥을 먹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 왔던 것이다. 박철수는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오두복에게 전 화를 걸어 납치 작전을 바로 실시하라고 지시했 다. 손경자는 황종태와 저녁을 함께 먹고 다방에서 키피를 마신 뒤 여관까지 따라가지 않고 헤어졌 다. 그녀는 택시를 타고 집 앞에서 내리자마자 박 철수와 오두복의 졸개 두 명에게 납치됐다. 대문 앞에서 그녀는 박철수의 서슬 시퍼런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도망가려 했지만 오두복 졸개들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저항도 못하 고 꼼짝없이 차에 태워졌다. 황종태는 손경자와 헤어진 뒤 광복동으로 나갔 다. 심심할 때 소설 읽는 게 취미인 그는 책방에 서 소설 세 권을 샀다. 그는 소설을 산 뒤 광복동 거리를 슬슬 돌아다녔다. 오랜만에 보는 거리여서 그는 사람 구경을 하면서 한가하게 걸어 다녔다. 연말이 가까웠으므로 거리에는 인파가 많았다. 그 는 광복동 거리를 두 번 왔다갔다한 뒤 여관으로 가기 위해 광복동 번화가를 벗어났다. 그런데 으 슥한 길로 막 들어섰을 때 갑자기 건장한 청년 두 명이 그의 팔을 양쪽에서 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옆구리에 칼날 같은 쇠붙이가 닿았 다. 뜻밖의 사태에 바짝 긴장한 황종태가 좌우의 청년들을 돌아보자 낮으막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울려왔다. "소리지르면 칼이 니 옆구리를 파고 들어갈 것 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그냥 조용히 따라와!" 황종태가 칼로 협박하는 자를 쳐다보자 그 놈 은 씩 웃었다. 그러나 말이 웃음이었지 상대를 경 멸하는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그 놈은 빨간 모자 를 쓰고 있었는데, 눈매가 날카로웠다. 황종태는 붙잡힌 팔을 뿌리칠 기회를 잡기 위해 잠자코 있 었다. 그때 검은 찝차 한 대가 그들 옆으로 미끄 러지듯 다가왔다. 칼이 옆구리를 파고들 기세였으 므로 황종태는 꼼짝 못하고 찝차에 태워졌다. 황종태는 뒷좌석 가운데에 앉혀졌고, 좌우에 한 명씩 앉아 그의 팔을 끼고 있었다. 빨간 모자를 쓴 두목인 듯한 놈은 운전석 옆에 앉았다. 찝차는 바로 출발했고, 중심가를 벗어나자 서쪽 으로 향했다. 찝차가 중심가를 벗어났을 때 두목 인 듯한 자가 호주머니에서 명주실로 꼬아 만든 끈으로 황종태의 두 팔목을 묶었다. 팔목이 묶인 뒤 황종태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와 이러십니껴?" 그러자 모자 쓴 놈이 뒤를 돌아보며 또 씩 웃 었다. 그리고 그놈은 걸걸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 했다. "오늘 니 자지를 면도칼로 짤라삐릴라고 그란 다." 황종태는 그 놈의 음성을 다시 듣는 순간 속으 로 "이 새끼 음성은 호장이 형님이 말했던 그 음 성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그 놈의 목소리가 대 단히 걸걸했기 때문에 김호장이 강조했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황종태는 그 놈의 음성을 다시 듣기 위해 또 말을 걸었다. "와 내 자지를 짜르겠다는교? 농담이라도 그런 말씸 들으면 기분 좋을 사람 없을 낍니더." 그러자 모자 쓴 놈은 주머니에서 이발소 면도 칼을 꺼내 황종태의 코 밑에 대며 이렇게 말했다. "내 말이 농담이라꼬 들리나? 와 니 자지를 짜 르려고 하는지 말해줄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니 자지가 남의 구멍에 들어 갔기 때문이다. 내 말이 무신 뜻인지 알아듣겠나? 내 형님은 오늘 면도칼 로 니 자지를 짤라뿌려라고 했으니까 나는 그 명 령에 따를 뿐이다. 이제 설명이 충분히 됐나?" 그놈은 말을 마치고 기분 나쁘게 키득기득 웃 고 난 뒤 다시 말했다. "임마, 젊은 놈이 안됐다. 자지가 짤리면 넌 앞 으로 남자 구실을 못하게 될 끼다. 그라믄 가시나 들과 연애도 몬한다. 그 좋은 맛도 못 보게 될 끼 다. 흐,흐,흐. 임마, 너 자지 짤리게 되면 자살해뿌 려라. 가시나와 잠도 못 자면 무신 재미로 살겠 노? 나 같으면 자살하겠다. 흐흐흐." 황종태는 일부러 멍청하게 보이도록 다시 말했 다. "지는 지금 무슨 말씸을 하고 계신지 하나도 모르겠십니더! 와 내 자지를 짜르겠다는교?" 모자 쓴 놈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대꾸했 다. "모르겠다고? 너 임마 아까 저녁밥 같이 먹은 가시나 하고 몇번 했냐? 그래도 모르겠냐? 임마, 남의 구멍 좋아하다간 신세 조진다는 말 몬 들었 나? 너는 남의 구멍 좋아하다가 들켰기 때문에 자지가 짤리게 되는 거야. 이제 내 말을 알아듣겠 나? 우쨌든 넌 이제 신세 조졌다. 자지가 짤리면 고자가 되는 거니까 니 인생도 끝나는 거다. 그건 그렇고, 그란데 그 가시나 맛은 좋더냐? 그 가시 나를 내 형님이 좋아하는 모양이지만 그 점에 대 해서는 나도 알고 싶다. 어때 그 가시나 괘안더 냐?" 황종태는 그때서야 사태를 파악했다. 손경자와 의 관계 때문에 납치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황종태는 손경자의 안부가 걱정되어 그 놈에게 또 물었다. "그라믄 그 여자는 어떻게 됐십니껴?" 모자 쓴 놈은 그 질문에 큰 소리로 "어쭈!"한 뒤 크게 웃어댔다. 그리고 황종태를 돌아보며 말 했다. "와? 가시나가 걱정되나? 가시나는 지금 쯤 반 은 죽었을 끼다. 원래 구멍 헤픈 년들은 꼭 한 번 은 혼나게 되어 있다. 지금 쯤 우리 형님이 자근 자근 밟아 놓았을 끼다. 와? 가시나가 걱정되나? 임마, 그 걱정은 때려치우고 이제부터는 니 걱정 이나 해라. 자지가 짤려나갈 놈이 가시나 걱정은 와 하노?" 황종태는 모자를 쓰고 있는 놈과 몇 마디 나눈 끝에 그 놈이 바로 몽둥이 기습을 했던 패거리의 두목이라고 확신ㅎ다. <이 놈을 여기서 만나게 되었구나! 잘 됐다. 새 끼들! 지금 까불고 있지만 차에서 내린 뒤에 보 자. 내 팔목을 묶어 놓았다고 안심하는 모양이지 만 그렇게는 안 될 거다. 너희들은 지금 이 황종 태를 모르고 까불고 있는 기다! 차에서 내린 뒤에 보자.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모르지만 이 황 종태가 당하지는 않을 끼다!> 찝차는 낙동강의 구포다리에 이르자 다리를 건 너지 않고 제방 길을 타고 하류 쪽으로 내려갔다. 그 부근 일대는 인가가 없었기 때문에 찝차의 헤 드라리트 불빛 이외에는 아무 불빛도 없었다. 찝 차는 을숙도가 바라보이는 지점에서 멈췄다. 찝차 가 멈추자 모자 쓴 놈은 밖을 내다보더니 "여기 가 맞다."고 말한 뒤 차에서 먼저 내렸다. 황종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재빨리 좌우를 둘 러 보았는데,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그는 출렁거리는 강물 한가운데에 어렴풋이 육지가 떠 있는 것을 보고 그 섬이 을숙도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모자 쓴 놈이 "퍼뜩 가자!"라고 말한 뒤 앞 장서서 걷기 시작했고, 나머지 두 놈은 황종태의 팔을 끼고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인가가 없 고 어둠 속에서 출렁이는 강물 소리밖에 들리지 않아 교교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50여 미터쯤 강뚝을 따라 걷다가 갈대 숲 속으로 방향을 돌렸다. 강바람이 싸늘해 몸이 움츠려들 정도로 추웠지만, 황종태는 긴장하고 있 었기 때문에 추위를 전혀 못 느꼈다. 그들이 갈대 숲 속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자 앞 쪽에서 손전등이 켜졌다. 그리고 "두복이냐?"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모자 쓴 놈이 "예, 두 복입니더."라고 큰 소리로 대꾸했다. 황종태는 그 소리를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목소리가 걸걸한 이 새끼 이름은 두복이구나. 좋다. 니 이름을 알았으니 넌 이제 우리 손에 죽 었다. 성은 모르지만 두복이라는 니 이름만 알아 도 우리는 부산 시내를 샅샅이 뒤져 너를 기어코 찾아낼 수 있을 끼다. 좋다. 내가 니 이름을 외워 두겠다.> 오두복은 갈대 숲을 헤치며 황종태를 박철수가 있는 쪽으로 데려갔다. 두 놈이 여전히 황종태 양 쪽에서 팔을 끼고 있었으며, 오두복이 앞장서서 걸었다. 황종태는 손전등을 들고 있는 놈 가까이 가서야 손경자도 거기에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순간 그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 손전등을 들고 있는 놈은 황종태 쪽으로 불빛 을 비추고 있다가 거리가 좁혀지자 "그 놈은 거 기 세워라!"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이 떨어지자 팔을 끼고 있던 두 놈이 황종태를 세우고 그의 옆에 섰다. 오두복은 손전등을 들고 있는 박철수 앞에서 걸음을 멈춘 뒤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님이 납치하라고 했던 놈을 잡아 왔십니더. 이제 이 새끼를 어떻게 할까요? 자지부터 짜를까 요?" 박철수는 오두복의 보고를 받고 냉정한 어투로 대꾸했다. "수고했다. 우선 저놈 쌍판부터 보고 난 뒤 이 두 연놈을 조지자." 박철수가 그렇게 말하자 오두복은 황종태와 박철수 중간에서 약간 비켜선 뒤 황종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두복이 비켜서자 박철수는 손전등으로 황종 태 얼굴을 비췄다. 불빛을 받아 얼굴 윤곽이 드러 난 황종태의 표정은 험악했다. 그의 눈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으며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황종태는 이미 이 싸움은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손전등을 들고 있는 놈은 나이가 많아 보여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으며, 문 제는 모자를 쓰고 있는 놈과 그의 팔을 끼고 있 는 두 놈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손전등을 들고 있 는 놈 옆에 또 두 놈이 서 있었지만 황종태는 그 두 놈들의 체격이 작았기 때문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공격준비 자세로 발의 중심을 가다 듬고 있었다. 박철수는 손전등으로 황종태의 얼굴을 살핀 뒤 손경자에게 증오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저 새끼가 바로 너와 붙어먹은 그 놈이지?" 그러나 공포에 질려 있는 기색이 역력한 손경 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박철수가 다시 소 리질렀다. "야, 이년아. 똑바로 말해! 저 놈이 바로 너와 붙어먹은 놈이 맞지?" 그러자 손경자는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 순간 박철수의 주먹이 손경자에게 날아갔다. 그리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손경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 러졌다. 박철수는 쓰러진 손경자 옆으로 다가가 발로 짓이기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얏!" 하는 황종태의 기압 소리가 나면서 그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그리고 곧바 로 오두복이 하늘로 치솟는 듯한 황종태의 날렵 한 발에 얻어맞고 벌렁 나자빠졌다. 황종태가 천부적인 싸움꾼이라는 것은 이 장면 에서도 잘 드러났다. 그는 사랑하는 손경자를 짓 이기려는 박철수를 놓아두고 가장 위험스럽게 보 이는 오두복을 먼저 공격한 것이다. 땅바닥에 쓰 러진 오두복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황종태의 두 번째 공격 목표는 그의 팔을 끼고 있었던 두 놈이었다. 발 하나를 들어 오두복을 처 치한 황종태는 그 발이 땅에 내려오는 순간 뒤돌 아 서서 두 놈을 번개처럼 해치웠다. 박철수는 난데없는 사태에 당황해 도망도 가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황종태는 박철수 쪽으 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때서야 박철수는 호주머니 에서 뭘 꺼내려 했다. 그러나 황종태가 그걸 용납 할 리 없었다. 그의 발이 또 번개처럼 쭉 뻗으며 박철수의 턱을 강타했다. 손경자 옆에 서 있던 두 놈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도망치려 했지만 황종태는 재빨리 쫓아가 그놈들도 발길질로 간단 히 처치해 버렸다. 양 손목이 명주실 끈으로 묶여 있었지만 황종태의 동작은 전혀 지장을 받지 않 았다. 황종태는 납치자들을 실로 전광석화처럼 해치 운 뒤 손경자를 일으켜 세웠다. 손경자는 공포와 추위로 벌벌 떨고 있었다. 황종태가 손경자를 일 으켜 세우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님, 일어나소. 이제 아무 걱정 마이소. 우리 를 납치한 저놈들을 다 해치웠십니더!" 손경자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쓰러져 있는 놈들을 흘끔 쳐다본 뒤 다급한 목소리로 "종태야, 퍼뜩 도망가자."라고 말했다. 황종태도 그 말을 듣 고 "예, 퍼뜩 피합시더."라고 대답했는데, 그는 손 경자 손을 잡고 뛰려다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 쓰 러져 있는 박철수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발로 힘껏 밟아 버렸다. 그 발길질은 손경자를 주먹으 로 때린 것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는 또 오두복에 게 다가가서는 그의 허벅지를 구두 뒤꿈치로 서 너 번 짓이겼다. 그것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그들 의 추격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허벅지를 짓이겨 놓으면 근육이 풀릴 때까지는 제대로 걸을 수 없 는 것이다. 응징으로 박철수 얼굴을 사정없이 짓밟고, 오두 복의 허벅지를 짓이겨 추격 방지 조치까지 끝낸 황종태는 손경자 손을 잡고 갈대 숲을 헤치며 찝 차가 서 있는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황종태는 손경자와 함께 뛰어서 납치되었던 현 장을 벗어나자마자 그녀에게 자신의 팔목에 묶여 있는 끈을 풀게 했다. 손경자는 여전히 공포에 질 려 있었지만 황종태 손목에 묶여 있는 끈을 풀 때는 그가 대견스럽다는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종태야, 나 오늘 너를 다시 봤다. 어디서 그런 기술을 배웠노? 정말 대단하더라! 너의 그 기술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끈이 풀리자 다시 말을 이었다. "니가 팔목이 묶인 채로 잡혀 오는 걸 보고 우 린 죽었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그놈들은 지독한 놈들이대이. 우짤꼬, 앞으로 또 복수하려고 할 낀 데. 그게 걱정된다." 황종태는 그 말에 태연하게 대꾸했다. "누님, 이제 아무 걱정 마이소. 그놈들 정체를 알았으니 이제 그놈들이 당할 차롑니더. 내가 오 늘은 급해서 그 정도로 끝냈지만 앞으로 두고 보 이소. 그 놈들은 도저히 용서해줄 수 없는 놈들입 니더. 그놈들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불었으니까 앞으로 마땅한 댓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더." 황종태는 매서운 눈으로 납치 현장 쪽을 잠시 바라본 뒤 손경자를 한 손으로 껴안으며 "이제 갑시더."라고 말했다. 그들은 갈대 숲 속을 빠져나 와 부산 시내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로를 피해 걷다가 주택가가 보이자 그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주택가로 들어간 뒤 불 빛이 많이 보이는 쪽으로 갔다. 그리고 다방 간판 이 보이자 그곳으로 들어갔다. 다방에 들어가자마자 황종태는 손경자를 구석 진 곳에 앉아 있게 한 뒤 카운터 전화를 빌려 하 승일에게 긴급 상황을 알렸다. 물론 그들은 암호 로 얘기했다. 하승일이 전화를 받자 황종태가 "형님을 만나 야 할 일이 있십니더."라고 말했고, 하승일은 "급 한 일이냐?"라고만 물었다. 황종태는 매우 급한 일이라고 강조했는데, 하승일은 더 묻지 않고 이 렇게 말했다. "그곳으로 지금 출발하라. 나도 지금 출발할 테 니까." 그 곳이란 아지트였다. 황종태가 손경자와 함께 택시를 타고 아지트에 도착하자 하승일이 먼저 도착해 골목에서 기다리 고 있었다. 하승일은 황종태가 여자를 데리고 나 타나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황종태는 손경자 를 담벼락 옆에 서 있게 한 뒤 하승일에게 다가 갔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승일에게 황종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호장이 형 지금 어디 있는교?" 하승일은 손경자 쪽을 한 번 쳐다본 뒤 대답했 다. "부산에 있다. 무슨 일이냐?" 황종태는 하승일 곁으로 더 바짝 다가선 뒤 그 의 귀에 대고 말했다. "지가 아까 저녁 때 납치 당했다가 탈출했십니 더. 남포동 골목에서 여관으로 갈려고 할 때 두 놈이 칼로 지 옆구리에 대고 소리지르면 죽인다 고 해서 꼼짝 못했십니더. 바로 그때 찝차가 왔 고, 지는 그 찝차에 태워져 을숙도 근방의 갈대 숲으로 납치됐십니더. 그란데 그 놈들이 지 팔목 만 묶었기 때문에 발로 전부 처치해 삐리고 탈출 했십니더." 하승일이 긴장하며 물었다. "그놈들은 몇 명이었나?" 황종태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은 뒤 대답 했다. "운전수까지 합치면 여섯 명입니더." 하승일이 다시 물었다. "너를 납치한 이유가 뭐 같더냐?" 황종태는 그 질문에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 꾸했다. "그 놈들이 지를 납치한 이유는 나중에 말씸드 릴께예. 그란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십니 더. 그 놈들 중에 우리가 찾고 있었던 놈이 있었 십니더. 호장이 형이 목소리 걸걸한 놈을 잡아야 된다고 말한 걸 기억하시지예? 바로 그놈이 지를 칼로 납치했십니더. 그 놈 이름은 두복입니더." 하승일은 황종태 얘기를 듣고 난 뒤 손경자 쪽 을 턱으로 가리키며 낮게 물었다. "그라믄 저 여자는 뭐꼬?" 하승일의 그 질문에 황종태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지가 누님이라 부릅니더. 나중에 자세하게 말 씸드릴께예. 지금 호장이 형에게 연락할 수 있지 예?" 김호장은 박명자가 부산에 내려왔기 때문에 그 녀와 해운대의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하승일은 납치 사건 내막을 여자에 얽힌 문제 로 파악했으므로 서두르지 않고 향후 문제를 간 략하게 정리했다. "내 생각엔 오늘밤에 호장이를 부를 필요는 없 는 것 같다. 호장이는 내일 아침에 만나라. 그리 고, 너 어디서 잘래? 여기서 자겠다면 열쇠를 주 겠다." 황종태는 호텔보다 아지트에서 자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열쇠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그때서 야 손경자를 하승일에게 소개했다. 무뚝뚝한 황종 태는 하승일에게 손경자를 소개하며 "내 누님이 오."라는 말만 했고, 손경자에게는 하승일을 "내가 형님으로 모시는 분이오."라고만 소개했다. 손경 자와 하승일은 서로 목례로 인사만 하고 아무 말 도 나누지 않았다. 인사가 끝난 뒤 하승일은 가게로 돌아갔고, 황 종태는 손경자를 데리고 아지트로 들어갔다. 손경자는 황종태 뒤를 따라 아지트로 들어가며 매우 조심스럽게 집안을 살폈다. 그리고 황종태에 게 "여기가 어디고?"라고 물었다. 황종태는 그 질문을 받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곳에 대해 신경 쓰지 마이소. 여긴 지 형님 이 묵고 있는 집이니 안심하고 오늘 밤을 지낼 수 있을 끼요. 형님은 없다 카니 마음 푹 놓이소." 손경자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여전히 집안을 살피면서 황종태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황종태가 불을 켜자 방안 모습이 드러났다. 방 안은 누가 보아도 가정집 같이 안 보일 정도로 삭막했다. 장롱도 없었고, 화장대도 없었기 때문 이었다. 손경자는 방안을 살피다가 시계를 본 뒤 황종태에게 말했다. "종태야, 아직 시간이 충분하니까 우리 집에 퍼 뜩 갔다 오자." 황종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 다. "와요?" 손경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자세한 얘긴 나중에 해줄 끼다. 지금은 급하니 까 우선 우리집에 가서 중요한 건 다 가져와야 한다. 자, 지금 퍼뜩 나가자." 황종태는 그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 둘러 아지트를 나와 택시를 타고 손경자 집으로 갔다. 손경자는 저녁에 발생한 사건으로 박철수와는 끝났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박철 수가 틀림없이 자기를 또 붙잡으려 할 것이기 때 문에 집안에 있는 귀금속이며 사채를 준 장부 등 을 가져오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집에 도착한 손경자는 경황이 없었다. 벽장에서 여행용 가방을 두 개 꺼내 장롱과 서랍 장에서 몇 가지 문서와 귀금속 같은 것을 허겁지겁 꺼내 가방에 담은 뒤 옷장에서 입을 만 옷들을 골라 가방에 넣었다. 마치 누구에게 쫓기듯 가방 속에 물건을 쓸어 담은 뒤 그녀는 잠시 뭔가 생각하다 가 황종태에게 "이제 됐다. 퍼뜩 나가자!"라고 말 하고 앞장서서 방에서 나갔다. 그들은 택시를 타고 아지트로 돌아올 때 서로 아무 말도 안했다. 황종태는 평소처럼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손경자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 었다. 그녀는 머리가 아픈지 가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들은 아지트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아지트로 들어와 방에서 서로 마주 앉게 되자 손경자가 그들의 침묵을 깼다. 손경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황종태에게 이렇게 물었다. "종태야, 나는 지금 머리 속이 너무 복잡해 어 지럽다.... 나도 지금까지 너에게 숨기고 있었던 얘기를 털어놓을 테니까 너도 숨김없이 너에 대 해 솔직히 말해야 된다.... 너 밀수품 털고 있지?" 황종태가 머뭇거리자 손경자가 다시 말했다. "아무 문제 될 게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라. 나 는 아까 그 사건 때문에 앞으로 벌어질 일이 걱 정스러워 그걸 알고 싶다. 나를 잡아갔던 놈이 누 구인지 모르재? 그놈은 밀수꾼이다. 그놈의 밀수 품이 털렸던 일이 있었는데 나는 아무래도 너희 들이 털었다고 생각된다. 내 말이 맞재?" 황종태는 시무룩해지며 힘없이 대답했다. "누님 말이 맞십니더. 그란데 누님이 그 밀수꾼 을 어떻게 압니껴?" 손경자는 황종태 말을 무시하고 또 질문했다. "너 혹시 한 달 전에 밀수품 털다가 당하지 않 았나?" 황종태는 더 숨길 게 없었으므로 체념하듯 대 답했다. "그 말도 맞십니더. 기습을 당해 꼼짝 못하고 당했십니더. 몽둥이로 거의 죽을 정도로 맞았기 때문에 누님에게 연락 도 못했십니더. 다행히 치료는 됐지만 한 사람은 죽었십니더. 우린 그놈들에게 당한 뒤 바로 이 집 에서 한의사를 불러 치료를 받았십니더." 황종태의 말이 끝나자 손경자는 겁먹은 소리 로 말했다. "그놈들은 그렇게 무서운 놈들이다! 인정 사정 없다. 우짤꼬. 또 보복할 낀데.... 난 무서워 서울 몬 가겠다. 죽더라도 니 옆에서 죽을란다!" 손경자는 말을 끝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황 종태는 손경자가 자신들의 비밀을 죄다 알고 있 다는 사실에 당황했고, 또 그녀가 울기 시작하자 난감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누님이 우리 일을 우째 다 알고 있노?"라고 생각 했다. 잠시 후 그는 손경자를 달래기 위해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누님, 겁먹을 것 없십니더. 우린 방심했기 때문 에 당했지만 이젠 안 당합니더. 이제 그만 우시고 다른 얘기 좀 합시더." 그러나 손경자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엇보 다도 박철수에게 납치 당한 사건 때문에 황종태 와도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 각이 떠오르자 온갖 회한이 밀려와 슬픔이 북받 쳤던 것이다. 황종태는 손경자가 너무나 슬프 게 울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못했 다. 그는 손경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누님, 이 제 고만 우소."라고 말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 리고 그녀를 살며시 안아 주었다. 손경자는 그의 품에 안긴 뒤에도 한동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손경자는 그렇게 한없이 울다가 황종태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울음을 멈춘 뒤에 그녀는 이렇 게 말했다. "종태야. 나는 나쁜 여자대이. 너한테 숨긴 게 너무 많다. 이제 너에게 그 얘기를 다 하겠다." 황종태는 손경자가 그렇게 말해도 얼굴 표정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앉아 손경자를 쳐다보기만 했고, 손경자는 눈물을 닦은 뒤 천천 히 입을 열었는데, 그녀의 표정은 마치 고해 성사 하듯 진지했다. 손경자의 얘기는 슬픔으로 끝났던 자신의 결혼 생활부터 시작되었고, 그 이후의 남포동 생활과 박철수와의 관계도 숨김없이 모두 털어놓았다. 그 녀는 얘기를 하면서도 계속 눈물을 흘렸다. 황종 태는 손경자의 고백을 듣고도 전혀 흔들림이 없 었다. 그는 손경자의 얘기가 거의 끝날 단계에 이 르렀을 때 이렇게 말했다. "누님, 아무 걱정 마이소. 누님이 어떤 생활을 했든 누님에 대한 지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을 낍니더. 서울에도 가지 마이소. 부산에서 집을 얻 어 같이 삽시더. 지가 누님을 지키면 어떤 놈도 아무 짓 못합니다. 박철수라는 그 밀수꾼이 누님 을 그렇게 괴롭혔다면 지가 다시 더 혼내 줄 낍 니더. 그 새끼는 악마 같은 놈이니까 벌을 받게 될 낍니더." 황종태의 말에 손경자는 또 울음을 터뜨렸다. 황종태는 그녀를 다시 안아 주었다. 그녀는 몹시 지쳐 있었기 때문에 황종태의 품에 안긴 채 곧 잠이 들었다. 황종태는 이부자리를 깐 뒤 그녀를 눕히고 방밖으로 나갔다. 그는 마당으로 걸어나가 하늘을 쳐다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는 이를 한 번 악문 뒤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까 그 새끼를 더 밟아 버렸어야 했는데....그 러나 앞으로도 기회는 얼마든지 더 있다. 정체를 알았으니 그 새끼가 부산 바닥에서 못 살게 만들 끼다! 이제 우리가 서울에 가서 살 이유가 없다. 그 새끼를 부산에서 쫓아 버리면 누님과의 문제 중에서 하나는 해결되는 것이다. 호장이 형도 그 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끼다." 황종태는 그렇게 중얼거린 뒤 방으로 다시 들 어갔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손경자의 옆 으로 누워 그녀를 그의 넓은 가슴속에 꼭 껴안았 다. 제16장 완전 노출의 미끼 질투심 때문에 황종태와 손경자를 납치하여 무 자비하게 보복하려 했던 박철수가 황종태의 발 솜씨에 처참하게 당하고만 그 사건은 그 자체로 끝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그 사 건으로 김호장 측과 박철수 측이 서로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던 상대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는 점 이다. 그리고 쌍방이 상대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는 것은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숙명적 대결 상황 을 만들었다. 주먹 세계란 복수가 복수를 낳으며 서로 얽히면서 그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패권을 장악하게 마련인데, 5.16 이후 지하로 숨어들었던 주먹패들이 부산에서 맨 처음 꿈틀거린 것은 바 로 그 사건 때문이었다. 김호장은 박명자와 함께 해운대 관광호텔에서 단꿈을 꾸고 있다가 새벽에 하승일로부터 걸려 온 전화로 간밤에 황종태가 납치되었다가 극적으 로 탈출했다는 사실을 간단히 보고 받았다. 하승 일은 김호장이 박명자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해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아지트로 빨리 돌아와 종태 얘기를 직 접 들어보아라. 뭔가 중요한 얘기가 있는 것 같 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김호장은 박명자를 의식 하고 하승일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전 화를 끊기 전에 하승일도 아지트로 오라는 말만 했다. 김호장은 박명자와 서둘러 아침 식사를 끝내고 그녀를 룸에 남겨 놓고 아지트로 향했다. 박명자 는 김호장이 전화 받을 때 심상치 않은 통화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에 룸에 혼자 남게 된 것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다. 아지트에 도착한 김호장은 황종태의 소개로 손 경자와 인사를 한 뒤 먼저 와 있던 하승일과 황 종태를 데리고 옆방으로 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납치극이 손경자와 얽힌 단순한 사랑싸움으 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종태가 사건 전말을 보고하면서 그를 납치했던 오두복에 대해 얘기하 기 시작하자 김호장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앉자마자 황종태는 자 신이 납치 당했던 전말을 간략하게 보고한 뒤 김 호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란데 형님, 지를 납치했던 놈들이 우리를 몽 둥이로 기습했던 그 놈들입니더. 형님이 말씸했던 그 목소리가 걸걸했던 놈의 이름을 알았십니더. 지를 찝차에 태우고 갈 때 그 새끼 목소리가 걸 걸해 느낌이 이상했는데, 알고 보니 그 놈이 우리 를 몽둥이로 기습했던 놈이 틀림없십니더. 그 새 끼 성은 모르지만 그놈 이름은 두복입니더.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고예." 김호장의 눈이 커지며 물었다. "목소리가 걸걸하고, 빨간모자를 썼어?... 그렇다 면 틀림없다! 목소리가 걸걸했던 놈은 그때도 모 자를 쓰고 있었다. 그놈이 우리가 찾고 있는 놈이 틀림없는 것 같다." 김호장은 말을 끝내고 하승일을 쳐다보며 "두 복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나?"라고 물었다. 하승일은 그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하는 표정에 잠겼다가 이렇게 대꾸했다. "예전에 부산 역전파 두목이었던 놈의 이름이 오두복이었던 것 같은데.... 그놈은 오래 전에 입 대했기 때문에 부산에 없다. 그라고 군대에서 사 고를 내고 육군형무소에 들어간 얘기까진 들었 으나 그 다음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 오두복이 가 부산에 다시 나타나 활동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직 못 들었다. 내가 알아보지. 그놈이 부산에 나타났다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몽둥이로 너 희들을 기습했던 놈들의 두목이 정말 오두복일 까?" 황종태가 즉시 말했다. "맞십니더! 지가 납치되어 갈 때 그런 느낌이 왔었어예. 목소리가 걸걸해 지가 자꾸 말을 걸어 봤는데 목소리나 하는 태도로 보아 그 놈이 우리 를 몽둥이로 기습했던 놈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예. 그라고.... 더 확실한 것은 그놈이 밀수 꾼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더. 지 누님 을 납치한 놈은 밀수꾼 박철수라 카는데 박철수 물건이 털렸던 적이 있었다 캅니더. 아마 우리가 태종대에서 처음 털었던 물건이 그 박철수라는 놈의 물건이었던 것 같십니더. 그러니까 전후 사 정을 살펴보면 박철수가 우리에게 밀수품을 털린 뒤 오두복을 고용했던 것 같십니더." 김호장은 황종태 말이 끝나자 결론을 내렸다. "승일이 니가 오두복이라는 놈에 대해서 자세 하게 알아봐. 그놈 목소리가 걸걸한지도 알아보고 모자를 쓰고 다니는 습관이 있는지도 알아봐라. 그리고 부산에 나타난 뒤 뭘했는지 알아보면 윤 곽이 드러날 것이다. 지금까지 얘기를 종합해 보 면 오두복이가 우리를 기습했던 놈이 틀림없는 것 같은데, 확실하게 알아본 뒤에 대책을 세우자." 김호장은 말을 잠시 중단했다가 결연한 표정으 로 말을 이었다. "만일 오두복이가 우리를 기습했던 놈이 틀림 없다면 그놈은 이석배를 죽인 대가를 치러야 한 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박철수라는 밀수꾼을 잡아내는 것이다. 오두복은 하수인에 불과하다. 우리의 공격 목표는 밀수꾼 박철수다! 그러나 오 두복을 잡아야 그놈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것 이다." 황종태도 그말에 맞장구쳤다. "물론이지예. 그때 당했던 일을 생각하믄 피가 거꾸로 치솟을 때가 많십니더! 오두복과 그 밀수 꾼을 붙잡아 요절내삐립시더!" 사태를 파악한 김호장은 그 자리에서 즉시 대 응 조치를 취했다. 그는 안전을 위해 황종태에게 손경자와 함께 당분간 아지트에 기거하라고 지시 했고, 자신은 하숙을 구할 때까지 용두산 공원 아 래에 있는 부산호텔에 투숙하겠다고 결정했다. 그 리고 그는 박명자를 부산에 더 머물게 할 수 없 다고 판단하고 그날 서울로 돌려보냈다. 김호장이 부산호텔에 투숙한 직후에 하승일이 오두복에 대해 수집한 정보를 가지고 찾아왔다. 하승일은 테이블 의자에 앉자마자 메모지를 꺼 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부산진 역전파 두목이었던 놈의 이름은 틀림 없이 오두복이었다. 그라고 그놈이 너희들은 몽둥 이로 기습했던 놈이 틀림없다. 내가 알아보니까 모든 점이 다 들어맞는다. 우선 오두복이라는 놈 의 목소리는 걸걸하다는 것이 확인됐다. 그리고 그놈은 빨간모자를 즐겨 쓰는 취미를 가지고 있 다. 모자를 벗으면 얼굴이 원숭이처럼 생겼다는 데, 그걸 감추려고 군대에 입대하기 전부터 모자 를 쓰고 다녔다는 기라. 그라고 그놈의 특기는 기 습이다. 부산진 역전도 기습으로 장악했다는 거 야. 그놈의 성격은 포악하고 잔인하며 군에서도 상관을 몽둥이로 때려눕힌 뒤 탈영하다가 붙잡혀 육군형무소에 들어갔다가 제대했다 는 거야. 그리 고 이 점이 중요한데, 그놈이 부산에 돌아온 뒤 다시 옛 졸개들을 모았고, 그놈들이 몽둥이를 들 고 다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 거야. 어때? 이 정도면 오두복이라는 놈이 니가 찾고 있는 놈이 틀림없겠지?" 하승일의 얘기를 듣고 김호장이 말했다. "그렇다면 오두복이라는 놈이 바로 그놈이다. 우리가 몽둥이로 기습당할 때 그놈은 모자를 쓰 고 있었다. 어쨌든 그놈 이름이 오두복이라는 것 이 밝혀졌으니 이제 그 놈이 당할 차례다. 그러나 그놈도 만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납치 당했던 종 태가 그놈과 돈 많은 밀수꾼을 작살냈으니 그놈 들도 가만있을 리 없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우리가 우연스럽게 그놈들의 정체를 파악했듯이 그놈들도 종태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종태가 오두복을 비롯해 대여섯 명을 발로 번개 처럼 해치웠으니 그놈들도 이미 부산에서 발 잘 쓰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놈들 이 알아본다면 종태 이름이 알려지는 건 시간문 제다. 자, 이렇게 됐으니 그놈들과 한판 붙게 되 는 건 시간 문제다. 그리고 이 싸움은 숙명적이 다." 하승일도 김호장 생각에 동의했다. "맞다. 너희들도 물러설 수 없고 그놈들도 물러 서지 않을 것이니 필연적으로 한판 붙게 되어 있 다. 그라믄 나는 뭘 도와줘야겠노?" 김호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결론처럼 말했 다. "나와 종태, 그리고 억만이 셋만 있으면 한꺼번 에 열 댓명이 덤벼들어도 문제없다. 그러나 이런 싸움은 세력이 필요하다.... 세력 문제는 내가 해 결할 테니까 넌 애들을 풀어 오두복과 박철수의 동태를 알아 봐줘. 그놈들을 단칼에 꺾어 버릴 묘 안이 곧 생각날 꺼야." 황종태의 발에 얼굴이 짓밟힌 박철수는 코뼈가 부서졌다. 코피를 줄줄 흘렸고, 통증 때문에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두복은 허벅지 근육 통증 때문에 부축받지 않고는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 황종태의 번개 같은 발솜씨에 한방씩 얻어맞고 혼절했다가 깨어난 그들은 망연자실했다. 도대체 상상도 못했던 일일 벌어졌던 것이다. 그 와중에 서 오두복이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졸개들에 게 박철수를 업으라고 지시한 뒤 자신은 졸개 한 명의 부축을 받고 쩔룩거리며 찝차로 향했다. 그 리고 찝차를 부산대학병원으로 가게 해 박철수를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 박철수는 응급치료를 받고 응급실에서 밤을 세운 뒤 다음날 코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했다. 박철수는 낙동강 납치극 현장에서 혼절했다가 깨어난 직후부터 시종 말이 없었다. 응급실에서 밤을 세울 때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코 수술을 받고 병실에 돌아온 뒤에는 천정만 쳐다보고 있 었다. 그는 아무 말도 안했으나 눈에는 불같은 증 오심이 가득 차 있었다. 졸개 한 명만 데리고 박철수 곁에서 밤을 세운 오두복도 적개심 때문에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 는 납치당했던 놈이 자기를 공격하기 위해 몸을 약간 비틀면서 자신에게 발을 날리는 순간만 기 억했다. 그리고 육중한 발이 그의 턱을 걷어찬 뒤 그는 쓰러졌고 그 다음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 했다. 오두복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당한 것이 참 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우째 일어날 수 있노? 그 새끼가 재주가 아무리 비상하다 해도 다섯 명이 힘 한번 못 써 보고 당할 수 있는 기가? 그 놈은 귀신인 가. 귀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노? 참으로 기가 막히다. 오두복이가 이런 일 당한 게 알려지믄 부산 바닥에서 웃음거 리가 될 낀데, 참 어처구니가 없다. 그러나 나는 오두복이다. 그놈을 기어코 붙잡아 다리를 뿌라뜨 려버리겠다! 아니면 그 놈 집을 알아내 그놈이 자 고 있을 때 박살내 버리겠다.> 오두복은 박철수 옆에 앉아 계속 그 생각만 하 고 있었다. 그런데 천정을 보고 있던 박철수가 갑 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돌려 오두 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오두복의 턱을 유 심히 살폈다. 오두복의 턱은 황종태의 발에 걷어 차여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다. 박철수는 오두 복의 턱을 한참동안 살피다가 자신의 턱을 매만 졌다. 그러더니 "오두복!"하고 소리질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오두복이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박철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번 우리 물건 털어먹으려다가 당했던 놈 들 중에 발 쓰는 놈이 있었나?" 오두복은 영문을 몰라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박철수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당수하는 놈들이 상대를 발로도 공격하잖아. 그렇게 발 쓰는 놈이 있었냐, 없었냐?" 오두복이 싱겁게 대답했다. "그건 모릅니더, 억수로 캄캄해서 잘 안보였십 니더!" 박철수가 심문하듯 따지기 시작했다. "니 말로는 그 때 너희들에게 당했던 놈들은 병신이 안 되면 오래 못 살고 죽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말했지?" "그렇게 말했십니더." "그게 사실이야? 그놈들이 그 정도로 정말 몽 둥이로 맞었냐 말이야?" 오두복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와 그걸 묻십니껴?" 박철수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했다. "내 생각엔 니 말이 틀린 것 같아 그걸 묻고 있는 거다. 아니면 니가 나를 속였던지..." 오두복도 약간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무신 말씸을 그렇게 하시는교? 와 지가 형님을 속이겠십니껴. 그놈들이 그 자리에서 뒈질 까 보아 애들의 몽둥이질을 내가 중지시켰십니더. 그란디 그런 말씸 하시니까 정말 섭섭합니더!" 박철수는 쓴 입맛을 다신 뒤 말했다. "내 말 들어보아라. 멍이 들어 있는 니 턱과 내 턱을 보아라. 이게 발로 채인 자국이다. 그런데 내 물건이 처음 털렸을 때 당했던 애들의 턱에도 이렇게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우리가 납치했 던 그 놈은 분명히 발만 썼잖아. 니가 손목을 묶 어 놓았으니까 그놈이 발만 썼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 지금도 내 눈에는 선하다. 그놈이 발을 휙 휘두르니까 너도 한 방에 나가자빠졌고, 내 턱 에도 주먹이 아니라 발이 날아왔었다. 그러니까 얘기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니가 몽둥이로 반쯤 죽여놓았다는 놈들 중에는 분명히 발 잘 쓰는 놈 이 있었는데, 그놈이 어떻게 멀쩡하게 살아서 내 계집도 넘보고 나를 이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느냐 말이다!" 오두복의 뇌리 속에는 두 손목이 묶여 있었던 황종태가 비호처럼 빠른 동작으로 자신에게 일격 을 가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 장면을 상기해보 면 박철수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됐다. 그는 할 말이 없어 잠자코 있었고, 박철수가 말이 이었 다. "너는 발 잘 쓰는 다른 놈이 또 있을 수 있다 고 말하고 싶겠지? 그러나 천만에 말씸이다! 그놈 이 바로 그놈이다. 그런데 그놈이 어떻게 멀쩡하 게 다시 나타나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냐 말 이다. ...어쨌든 좋다. 그놈이 그놈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너는 오늘부터 당장 애들을 풀 어 부산 주먹패 중에서 싸울 때 발만 쓰는 놈을 빨리 알아내라. 그 정도 실력이면 소문이 안 났을 리 없다. 그 놈이 누구인지 알아야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나는 내 재산을 전부 털어서라도 그놈을 잡아 요절내고, 그 잡년을 잡아 가랭이를 찢어버리고 말겠다. 알겠나?" 오두복은 즉시 "예!"하고 대답한 뒤 일어서서 쩔룩거리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이틀 후에 오두복이 졸개 하나를 병 실로 데리고 와 박철수에게 소개시켰다. "이놈아 이름은 김길동입니더. 그래서 별명이 홍길동입니더. 이놈아가 발 잘쓰는 놈에 대해서 알아 왔으니 형님이 직접 물어 보이소." 김길동이라는 졸개는 박철수에게 꾸벅 절을 했 고, 박철수의 질문이 시작됐다. "그래, 니가 그 발 잘쓰는 놈에 대해서 알아봤 다고?" "예!" "어떻게 알아봤냐?" "금방 알아냈십니더." "그럼, 말해보아." "그놈 이름은 황종태라 카고요, 5.16 전에만 해 도 꽤 유명했다 캅니더." "그 새끼 이름이 황종태라고?" "예!" "그래, 알아 본 게 또 뭐 있어?" "5.16 전에는 해운대 관광호텔 나이트클럽 뒤를 봐주었다 캅니더. 황종태라는 놈은 발 한 번 들믄 대여섯 명도 번개처럼 처치해 버린다 캅니더." "또 뭐가 있어?" "그놈은 칠성파라는 말이 있십니더." "칠성파? 칠성파 두목은 이덕구였는데. 그놈은 지금도 아마 감옥에 있을 거다. 그럼 황종태라는 놈이 부두목이었나?" "아닙니더. 부두목 이름은 이만복입니더. 지금 은 이만복이가 두목 노릇을 하고 있십니더." "그 정도 실력인데 부두목도 아니었어? 좌우지 간 그리고 또 뭐가 있어? "또 ... 아, 그놈은 춤을 억수로 잘 춘다는 얘기 를 들었십니더." "춤을 잘 춘다고?" "예!" 박철수의 눈이 커졌다. 그는 황종태와 손경자가 춤추다가 배가 맞았다고 생각하고 이를 갈았다. 그는 "고년이 나 모르게 춤추러 다니다가 그놈과 눈이 맞아 놀아났구나."라고 중얼거린 뒤 다시 질 문했다. "또 뭐가 있어?" 김길동은 머뭇거리며 "그게 전붑니다."고 대답 했다. 그러자 박철수가 짜증을 내며 소리질렀다. "임마, 그게 어떻게 다냐? 그놈은 지금 어디서 뭘하고 있는 거야?" "아, 에. 그놈이 지금 뭘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없십니더. 지는 부산에서 발을 제일 잘 쓰 는 사람이 누구인지만 알아봤고, 그놈 이름이 황 종태라는 것을 알아냈십니더." "황종태라는 놈은 5.16 때 안 잡혀갔나?" "예. 5.16 때 안 잡혀 간 건 분명하답니더. 그 뒤 그놈을 부산에서 보았다는 사람이 있십니더." "지금 어디서 뭘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고?" "예, 계속 알아보겠십니더만, 그건 알아내지 못 했십니더." 박철수는 오두복에게 눈짓으로 질문이 끝났다 는 신호를 보냈다. 오두복이 김길동을 병실 밖으 로 내보내자 박철수가 말했다. "그놈이 틀림없다. 황종태라고 하는 바로 그놈 에게 우리가 당했다. 너는 당장 황종태와 친하게 지냈던 놈들에 대해서 알아보아라. 특히 칠성파 애들을 통해 알아보면 그놈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놈은 부산을 떠나지는 않았 을 것이다." 오두복은 박철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박철수가 그렇게 지시한 것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놈을 붙잡아 보복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오두복도 그 생각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 지였다. 그는 박철수의 코에 붙어 있는 반창고를 쳐다보며 "코는 어떻십니껴?"라고 물었다. 그러자 박철수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그는 오두복에게 화풀이했다. "임마, 그런건 묻지도 마! 죽을 지경이니까. 잘 생긴 내 코는 이제 엉망진창이 돼 버렸다. 이 원 수를 어떻게 갚아야 내 속이 풀리겠냐." 수술하기 위해 마취시켰던 박철수의 코는 마취 기운이 빠지면서 통증을 몰고 왔다. 그는 코가 아 려 올 때마다 이를 악물었고, 속으로는 복수를 다 짐했다. 코에 심한 통증이 있었지만, 박철수의 두뇌 회 전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통증에 시달리다가 갑 자기 "두복아!"라고 불렀다. 병상 옆에 앉아 있던 오두복이 깜짝 놀라 일어나자 그는 또 한가지를 지시했다. "너 말야, 졸개 두 명씩을 뽑아 그 개 같은 년 의 집과 남포동 양품점을 지키도록 해. 들키지 않 도록 조심하도록 당부하고. 만일 그년이 나타나면 붙잡아 즉결처분을 하라고 명령하라!" 오두복이 눈을 껌벅이며 "즉결처분이 무엇인 교?"라고 물었다. 그러자 박철수는 답답하다는 표 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 군대에서 형무소까지 갔다면서 즉결처분도 모르나? 전쟁 때 같았다면 상관을 때린 너도 즉 결처분 당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총살해 버리 는 것이 즉결처분이다. 그러니까 그년을 잡으면 잡은 즉시 마음대로 하라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그년을 삶아 먹든 구어 먹든 알아서 하라는 얘기 다. 밑구멍에 말뚝을 박아 버려야지 내 속이 시원 하겠는데, 만일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에 붙잡으 면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니 졸개들보고 마음대 로 처리하라고 해라! 그리고..." 박철수는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이었다. "그년은 영리하니까 이미 도망갔을 것이다. 그 러나 집이나 가게에 한 번은 나타날 것이니까 잘 감시하고 수시로 보고하도록 조치해!" 오두복은 "알았십니더."라고 대답한 뒤 졸개들 에게 명령하기 위해 절룩거리면서 병실문 쪽으로 걸어갔다. 박철수는 오두복이 절룩거리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돼 다시 "두복아!"라고 불렀다. 오두복이 뒤 돌아보자 그가 물었다. "너 왜 다리를 저냐?" 오두복이 계면쩍게 대답했다. "모르겠십니더. 그때 깨어나 보니 허벅지가 아 파 걸을 수 없을 지경이었십니더. 아마 그 새끼가 내 허벅지를 밟아 삐린 것 같은데, 허벅지에도 멍 이 시퍼렇게 들어있십니더." 박철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보아라 그놈은 보통 놈이 아니다. 그놈은 니가 주먹 깨나 쓰는 것으로 알고 추격을 피하기 위해 니 허벅지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허벅지를 밟았겠냐. 납치한 것에 대 한 화풀이였다면 아마 니 코도 내 코처럼 됐을 것이다. 아무튼 그 놈은 보통 놈이 아니다. 대비 를 잘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오두복은 손으로 자신의 코를 한 번 만져 본 뒤 절룩거리면서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 다음날부터 손경자 집과 양품점에 대한 동 태 보고가 계속 들어왔다. 그 보고에 의하면 손경 자의 집에는 출입자가 없었고, 밤에는 전등불도 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품점에는 손경자가 움직이는 흔적이 엿보였다. 오두복 졸개들의 감시가 시작되었던 날 에는 양품점 문이 열려 있었고 점원 아가씨 혼자 하루종일 양품점을 지켰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는 양품점 문이 열리지 않았고, 점원 아가씨도 나 타나지 않은 것이다. 손경자 집과 양품점에 대한 동태보고는 일주일 후 박철수가 퇴원할 때까지 똑같은 내용만 되풀 이 들어왔다. 퇴원하기 전날 박철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코 치료가 끝나지 않아 코 모양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고, 또한 황종태에게 손경자를 빼앗긴 것이 분해서 화를 삭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는 입원하면서부터 맹서했던 내용을 또다시 되새 겼다. <관상쟁이들 얘기로는 남자들은 코가 잘 생겨 야 된다고 하는데, 내 잘 생겼던 코는 이제 납작 코가 될지도 모른다. 천하의 박철수가 어쩌다가 이 꼴이 됐나. 내가 운이 없어서 밀수꾼이 되었지 나도 운만 만났다면 박정희처럼 혁명을 일으켜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던 사람이야. 지모가 없나 용기가 없나. 용기야 나를 따를 사람이 어디 있겠 나. 밀수를 아무나 할 수 있나. 용기 없으면 택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내 코가 이 지경이 된 것은 바로 그년 때문이다. 그년이 살살 색쓰는 바람에 홀딱 넘어가 이 꼴이 됐다. 천하의 색골, 손경자 이년아! 니가 앞으로 온전하게 살수 있을 것 같으 냐? 어림도 없다. 눈웃음 살살 치며 색쓰는 니 얼 굴을 인두로 뭉개 버릴 것이다. 그리고 니 밑구멍 에는 말뚝을 박아 니가 좋아하는 그 맛을 영원히 못 보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황종태라고 하는 놈! 너는 이제 내 손에 죽었다. 내 코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내 계집도 빼앗았으니 너는 그 벌을 곱으로 받아야 한다. 나는 너를 앉은뱅이로 만들 어 버리겠다. 그리고 니 코도 납작코로 만들 거 다. 나는 돈이 있다. 내가 돈을 뿌리면 부산에서 주먹 좀 쓴다는 놈들은 모두 내 밑으로 기어 들 어오게 되어 있다. 두고 보아라, 박철수가 누구인 지 너희들에게 꼭 보여주고 말겠다!> 병원에서 퇴원한 박철수는 그의 계획을 실천하 는 데에 있어서 조금도 꾸물거리지 않았다. 그는 오두복과 함께 즉시 광복동 골목에 새 사무실을 개설했다. 그는 부산 암흑세계를 장악하기 위해서 부산의 중심지인 광복동에 사무실부터 마련한 것 이다. 그의 사무실 앞에는 남포무역이라는 간판이 붙었다. 그러나 그 상호는 위장에 불과했다. 박철 수는 그 사무실에서 오두복을 지휘하며 폭력조직 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박철수는 어떤 면에서는 분석력이 뛰어난 사내 였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그 탁월한 분석력을 자 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박철수는 자신에게 뛰어난 분석력이 생긴 원인 을 두 가지로 해석하고 있었다. 첫째는 무엇보다 도 자신의 머리가 남보다 좋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좋은 머리를 바탕으로 중국의 삼국지를 열 번 읽었기 때문에 자신의 분석력이 발전했다는 것이 다. 마흔이 넘도록 독서나 책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온 박철수가 삼국지를 열 번이나 읽은 유래 는 이렇다. 소학교 때 그는 역사 선생을 가장 좋 아했는데, 그 선생이 삼국지 예찬론자였다. 그러 데 그 선생이 졸업 직전의 마지막 수업 시간에 또 삼국지를 예찬하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여러분, 이제 여러분들은 졸업하게 되면 상급 학교에 진학하든지 아니면 가사를 돕는다 든지 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 로 가든 여러분들의 앞날에는 꼭 영광만 있는 것 이 아닙니다. 험난한 세파라는 말이 있듯이 인생 길에는 비바람이 수없이 몰아칩니다. 그 험난한 인생 길을 헤쳐 나갈 수 지혜를 어디서 얻을 수 있느냐, 나는 이 자리에서 다시 여러분들에게 삼 국지를 열 번 이상 읽으라고 추천합니다. 옛말에 삼국지 열 번 읽은 놈과는 상대를 하지 마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왜 그러냐? 삼국지에는 인생과 나아가서는 사회와 국가를 움직이는 지혜가 무궁 무진하게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삼국 지를 열 번 이상 꼭 읽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 앞날에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박철수는 원래 학업에 뜻이 없는 학생이었으 나 그 역사 선생의 고별사를 감명 깊게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그후 삼국지를 열 번 읽었고, 전략이나 전술에 있어서는 누구에게 지지 않는다 고 자부하게 되었다. 5.16 이후부터 밀수꾼인 그 가 정계 진출 야심을 키우고 있었던 것도 사실은 삼국지를 열 번 읽었기 때문이었다. 영웅은 난세 에 나오며 또 난세야말로 남자들에게는 기회의 시대라는 것을 그는 삼국지를 통해 잘 알고 있었 던 것이다. 병실에 누어 있는 동안에도 박철수의 분석력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 결과 그는 두 가지 결론 을 얻어냈다. 첫째는 오두복과 그 졸개들 가지고는 부산 주 먹 세계를 장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두복 일 당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밀수품 양륙 장소에 매 복하고 있다가 만일 강탈하려는 자들이 나타나면 기습으로 그들을 제압하여 밀수품을 보호하는 용 도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두목 기질 이 있는 오두복 좌우에 당수나 유도로 단련된 놈 서너 명만 붙이면 막강한 주먹패가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박철수는 오두복만한 주먹패를 새로 구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판단하고 싸움 기술이 출중한 놈 서너 명을 구해 오두복 곁에 붙이기로 결심했다. 둘째는 황종태에 대한 분석이었다. 박철수는 황 종태가 그 일당의 두목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오두복이 몽둥이로 때려눕혔다는 네 명중 에 두목은 따로 있고 황종태는 그 일당 중의 한 명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다. 납치 장소에서 손전 등으로 황종태를 비춰 보았을 때 박철수는 황종 태에게서 두목다운 느낌을 전혀 받지 못 했었다. 큰 조직이건 작은 조직이건 두목들이란 대체로 두목다운 체취를 풍기게 마련인데 황종태에게서 는 그러한 풍모를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박철수 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 발 잘 쓰는 놈은 삼국지에 나오는 조자룡 같은 놈이다. 혼자 일당백으로 싸워 이길 수 있지 만 그 놈은 두목은 아니다. 그렇다면 오두복이 박 살냈다는 네 명 모두 각자 장기가 있고 두목은 따로 있을 것인데, 이게 바로 문제다. 그 정도 패 거리라면 천하무적이 아닐 수 없다. 오두복이 기 습으로 몽둥이 질을 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지 대낮에 맞붙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손목 이 묶인 놈 혼자서 우리 여섯 명을 번개처럼 처 치했으니 그 패거리 네 명이 달려들면 누가 이길 수 있겠나. 그러니까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 그 놈들이 아무리 막강하다 할지라도 이 박철수의 두뇌는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박철수는 김호장 일당을 막강하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그 대응 전략을 수립해 나갔다. 그의 기본 전략은 상대의 활동 무대를 알아낸 뒤 오두복으 로 하여금 기습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공격의 기본 틀은 잔인한 것이었다. 발 잘 쓰 는 황종태는 다시 그 발을 사용할 수 없도록 다 리 병신을 만들고, 그의 두목은 팔 병신으로 만든 다는 것이었다. 암흑가의 패권 다툼이나 적대 세력 사이의 복 수전도 국가와 국가가 충돌하는 전쟁과 비슷하다. 우월감과 지배욕 때문에 상대를 정복하려는 양상 도 비슷하고 자존심 때문에 벼랑 끝으로 몰릴 때 까지는 굴복하려 하지 않는 것도 비슷하다. 또한 공격과 방어의 원리나 상대방에 대한 정보 수집 도 전쟁처럼 전개된다. 물론 세력이 약한 자는 자 존심이나 체면 같은 건 생각 않고 오직 생존하기 위해서 강한 자에게 스스로 굴복하게 마련이다. 김호장은 황종태와 손경자가 납치되었던 사건 덕분에 꿈속에서도 복수를 맹서했던 몽둥이 부대 의 정체를 쉽게 알아냈다. 말하자면 안개 속에 가 려져 있었던 공격 목표를 찾아낸 것이다. 김호장의 자존심으로는 부하 이석배를 죽게 만 들고 자신을 비롯한 동료들을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만들었던 자들을 용서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일이 잘못돼 그 자신 이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공격 목표가 떠오르자 김호장도 상대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분석 결과 김호 장은 박철수와 오두복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황종태가 발놀림 한 방 으로 오두복을 기절시켰다던가, 더 나아가 오두복 의 졸개 대여섯 명까지도 번개처럼 해치웠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김호장은 이 대결에서의 핵심적인 문제는 세력이라고 보았는데, 그런 관점 에서 박철수나 오두복의 존재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김호장은 우선 박철수의 재력을 경계했다. 밀수꾼들이란 그들이 고용하는 해상책이나 육 상책이 깡패들이기 때문에 주먹세계와 항상 연계 되어 있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깡패들을 얼마 든지 동원할 수 있고, 또 휘하에 깡패조직을 거느 리기로 작정한다면 재력을 바탕으로 거대한 조직 도 형성할 수 있다. 물론 밀수꾼들이란 노출을 극도로 꺼려하기 때 문에 깡패들을 일이 있을 때만 잠시 고용한 뒤 곧 헤어지는 게 관행이었지만, 박철수는 이미 그 런 틀을 벗어난 인물이라는 점을 김호장은 간파 하고 있었다. 오두복이라는 자가 몽둥이로 그들을 기습한 뒤에도 황종태 납치에 또 앞장섰기 때문 에 박철수와 오두복은 단순히 밀수로 맺어진 사 이가 아니라는 것이 그 두 사건에서 증명되고 있 었던 것이다. 김호장이 박철수를 경계한 것은 바로 그 점이 었다. 밀수품을 털렸다고 오두복을 시켜 보복했던 자가 여자도 빼앗기고 그 여자 앞에서 무참하게 짓밟혔는데도 가만히 있을 리 없다고 김호장은 판단했다. <그 밀수꾼은 또 움직일 것이다. 돈만 뿌리면 건달들이야 똥파리처럼 모여드니까 그 새끼는 돈 을 뿌려 큰 세력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세력 을 바탕으로 또 보복 음모를 꾸미겠지. 이번에는 더 악랄하게 나올 거야.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방심했다 간 또 당한다. 그러나 내가 또 당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지. 천하의 김호장이 또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히려 이젠 그 새끼가 나에게 당해 야지....> 김호장은 그러한 상황 판단을 내린 뒤 첫 단계 조치로 이만복을 시켜 칠성파를 은밀하게 재건시 킬 계획을 세웠다. 김호장은 하승일을 통해 오두복의 정체를 알아 낸 뒤 칠성파 부두목 이만복을 투숙하고 있던 부 산호텔로 불러들였다. 이만복은 호텔 룸에서 김호 장과 단독 대좌를 하게 되자 마치 위관급 장교가 장군 앞에서 주눅이 드는 것처럼 경외심으로 굳 어졌다. 김호장이 테이블 의자를 가리키며 "앉아 라." 해도 그는 "괘안십니더."라며 부동자세로 서 있으려 고 했다. 김호장이 그가 자신을 어려워하 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니가 그렇게 서 있으 면 내가 불편하다. 너와 긴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어려워하지 말고 여기 앉아."라고 말하자 이만복 은 조심스럽게 김호장과 마주앉았다. 이만복이 앉자 김호장이 부드럽게 말했다. "니가 거느리고 있는 애들이 지금 몇이나 되 나?' 이만복이 즉시 대답했다. "다섯 명입니더. 덕구형 있을 때는 스물 일곱 명이었십니더만 5.16 이후 모두 흩어져 버려 현재 는 지까지 여섯 명 뿐입니더." 김호장이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물었다. "그 애들은 이전에 한 식구였던 애들이냐, 아니 면 새로 규합한 애들이냐?" "모두 이전 애들입니더." 김호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 었다. "그러면 말이야. 내일부터 당장 칠성파를 재건 한다. 이건 감옥에 있는 덕구와 상의할 필요는 없 다. 내가 나중에 양해를 구할 테니까 너는 앞으로 내 지시를 받고 움직여라. 그리고 칠성파 재건 계 획은 오직 너와 나만이 아는 비밀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승일이나 종태에게도 발설하지 말아라. 너도 알다시피 지금 세상 공기는 5.16 직후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우리는 아직 내놓고 활동할 수 는 없다. 그래서 칠성파 재건 작업은 극도로 비밀 리에 진행되어야 한다. 지금도 군인들이 총칼을 앞세우고 저희들 꼴리는 대로 하고 있으니까 우 리는 납짝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는데, 중대한 문 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칠성파를 재건하려는 거다. 그러니까 비밀을 잘 지켜라. 재건 자금은 내가 대 주겠다. 그리고 꼭 지켜야 할 사항은 칠성파 재건 이라는 말은 절대로 입밖에 내서는 안된다. 밀수 꾼들처럼 점조직으로 엮되 핵심 요원들은 니가 직접 관리하라. 그러나 유사시에는 모두 행동을 같이 해야 되니까 적당히 핑계를 대고 그 애들을 한 그룹으로 묶어라. 어차피 종태는 노출시켜야 되니까 나나 억만이 존재는 숨기고 종태를 돕는 일이라는 핑계를 대면 될 것이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이만복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생 기를 띠며 말했다. "분부하신 대로 하겠십니더. 우선 남포동 바닥 에서 제각기 놀고 있는 놈들 중에서 쓸 만한 놈 들을 끌어들이고 다른 동네 애들도 알아보겠십니 더." 김호장은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춘 뒤 뭔가 생각 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자유당 말기에 오두복이라고 하는 놈이 부산진 역을 잡고 있었다는데, 그 놈이 군대에 갔다가 다시 부산에 나타났다. 애들을 시 켜 오두복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보도록 해라. 잠 은 어디서 자고 낮에는 어디서 놀며 요즘 하는 일은 주로 무엇인지...그리고 오두복의 패거리가 있다면 모두 몇 명인지도 알아보아라. 그놈을 미 행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이만복은 또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오두복에 대해서는 지도 쪼매 알고 있십니더. 한참 활동할 때는 기습의 명수로 통했십니더. 잔 인하고 양아치처럼 놀았기 때문에 평은 안 좋았 십니더. 그라고 그 놈아는 고릴라처럼 생겨 별명 이 원숭이였십니더. 아마 5.16 훨씬 전에 군대에 갔을 낀데 부산에 다시 나타났다는 말은 몬 들었 십니더. 우쨌든 그 놈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아 곧 보고하겠십니더." 김호장은 이만복의 대답에 만족의 표시로 연신 고개를 끄덕인 뒤 이번엔 넌지시 물었다. "너 혹시 밀수하는 놈들과 손 잡고 일해 본 적 이 있었냐?" 이만복은 즉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없었십니더. 그런 기회가 전혀 없었십니더." 김호장은 "물론 기회가 없었겠지."라고 말한 뒤 또 한 가지를 주문했다. "부산에서 밀수하고 있는 놈 중에서 박철수라 고 하는 놈이 있다. 이름이 틀림없이 박철수다. 밀수에 손댄지 꽤 오래된 놈인 것 같은데, 이놈이 말하자면 그 오두복이라는 놈을 고용하고 있다. 국제시장에서 밀수품을 주로 팔고 있는 장사꾼 중에서는 그 놈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야. 선이 닿는다면 그 쪽에도 사람을 풀어 박철 수에 대해서도 조사해 줘. 그 놈이 어디 사는지, 그리고 주로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지 알게 되 면 좋겠다. 그 놈에 대해서 잡히는 게 있다면 그 때 일을 맡기겠다." 김호장은 여기서 담배 한대를 꺼내 입에 물었 다. 그는 이만복에게도 담배를 피워라고 권했지만 이만복은 "괘안십니더."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사 양했다. 김호장은 이만복이 자신을 어려워하기 때 문에 담배를 사양한다는 것을 알고 담배 한 개비 를 꺼내 자신이 직접 불을 붙인 뒤 그에게 주었 다. 이만복은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김호장은 담배 한 대를 다 피우는 동안 아무 말도 안했다. 그는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지 만 눈에는 독기가 담겨 있었다. 이윽고 그가 재떨 이에 담배를 비벼 끄자 이만복도 재빨리 담배를 껐는데, 김호장은 이만복이 고개를 들자 "만복아." 라고 조용하게 불렀다. 이만복이 "예."하고 힘있게 대답하자 김호장이 입을 열었다. "아까 그놈들, 박철수라고 하는 놈과 오두복이 라고 하는 놈이 틀림없이 몽둥이로 우리를 기습 했던 놈들이다. 하늘이 도와 우리는 우연한 일로 그놈들 이름을 쉽게 알아냈다. 이제 그놈들이 우 리들에게 당할 차례지. 이석배 원수를 갚아 줄 날 이 멀지 않았다." 김호장의 말에 이만복이 당장에 흥분하며 말했 다. "그래예? 그렇다면 그놈들을 당장에 붙잡아 쥑 여 삐려야지요! 알겠십니더. 그놈들에 대해서 샅 샅이 조사해 보고하겠습니다." 김호장은 이만복의 말에 "서두르지는 말아. 우 선 그놈들 동태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아마 그 놈들도 우리를 곧 알게 돼 행동에 들어갈지 모른 다."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일어선 것은 이만복이 물러가도 좋다는 의사표시였다. 눈치 빠른 이만복도 따라 일어서며 "형님이 분부하신 대로 내일부터 당장에 움직이 겠십니더. 잘 주무십시오."라고 말한 뒤 꾸벅 절을 했다. 김호장은 도어까지 그를 따라간 뒤 그가 문 을 열기 전에 돈 봉투를 그의 호주머니에 넣어 주며 말했다. "우선 이거 가지고 써 봐라. 그리고 필요할 땐 주저하지 말고 얘기하고 급할 땐 승일이 찾아가 면 된다. 내가 얘기해 놓겠다." 이만복은 "고맙십니더."라고 말한 뒤 다시 절을 꾸벅 하고 룸 밖으로 나갔다. 김호장이 이만복을 시켜 칠성파를 은밀하게 재 건하도록 지시한 것은 단순히 세력을 늘리기 위 한 것이 아니었고, 박철수와 오두복을 유인하기 위한 작전의 일부였다. 김호장은 박철수가 황종태의 정체를 쉽게 알아 낼 수 있지만, 그 다음 문제로 난감해 할 것이라 고 예측했다. 황종태의 이름을 알아낸다 해도 보 복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박철수가 백방으로 수 소문해 보아도 황종태가 어디 있는지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호장은 황종태를 노출시켜 박철수와 오두복을 유인하려고 칠성파 재건 계획을 세웠다. 칠성파를 은밀하게 재건시켜 놓은 뒤 밤마다 황 종태가 남포동에 나타나 칠성파와 어울린다면 그 소문이 박철수 귀에 들어갈 것으로 내다본 것이 다. 이 전략의 위험성은 오두복이 기습으로 나올 때 황종태가 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칠 성파를 은밀하게 재건시킬 계획을 세운 것은 그 기습으로부터 황종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황종태가 남포동에서 노닥거리는 시간에 칠성파 는 남포동 골목골목 을 지키고 있으면서 수상한 놈들이 떼를 지어 나타나는 것을 감시하고, 황종 태가 돌아갈 때는 그를 은밀하게 엄호한다면 오 두복의 기습 공격으로부터 황종태를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 김호장의 계산이었다. 물론 그 시간 에 김호장도 억만이와 함께 항상 황종태와 근거 리를 유지하면서 기습 공격에 대한 반격 태세를 갖춘다. 김호장은 그 작전이 실시되어도 일이 곧 벌어 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달이나 두 달 정도 지나면 박철수 쪽에서 황종태가 남포 동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 면 그들이 틀림없이 기습으로 공격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5.16 이전만 같았어도 황종태가 칠성파를 재건하여 그 두목이 됐다는 소문을 퍼 트리면 부산 주먹세계에 그 소문 이 곧바로 퍼지 는 것과 동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박철수 도 즉각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지만 때가 때인 지라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다음날부터 김호장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서울 에 있는 억만이에게 연락하여 부산으로 긴급히 돌아오도록 조치했고, 그 자신의 하숙집도 구했 다. 그 집은 이전에 황종태가 하숙했던 집이었다. 황종태가 그 집이 괜찮다며 약도를 그려 주어 찾 아갔더니 마침 빈방이 있었던 것이다. 그날로 김 호장은 아지트에 있던 자신의 짐을 하숙집으로 옮겼다. 그가 짐을 옮길 때 손경자는 "지 때문에 불편을 겪고, 우짜야 좋겠십니껴. 나중에 이 신세 진 빚 꼭 갚을 께예."라며 대단히 미안해했다. 김 호장은 손경자가 황종태의 애인이었으므로 정중 하면서도 친근하게 "미안한 생각은 절대 갖지 마 십시오."라고 말했다. 하숙을 정한 김호장은 당장 그날 밤부터 남포 동으로 나갔다. 그는 이만복을 데리고 그들의 아 지트로 삼을 다방을 물색하기 위해 남포동 골목 골목을 샅샅이 돌아다녔다. 김호장은 오두복 일당과 한판 붙게 되면 일대 일의 맞장이 아니라 패싸움이 될 공산이 크다고 보았기 때문에 적당한 공간과 인접해 있는 다방 을 찾았다. 좁은 공간에서는 황종태가 실력을 발 휘할 수 없기 때문에 다방 앞쪽이나 옆에 공간이 있는 장소를 물색했던 것이다. 그들은 마침내 남포동에서 광복동으로 넘어가 는 골목 끝에서 안성맞춤인 다방을 찾아냈다. 다 방 바로 옆에 호텔 주차장이 있어 패싸움에는 매 우 적당한 곳이었다. 그리고 후닥닥 해치우고 자 갈치 시장 쪽으로 도망가기에도 써 좋은 위치였 다. 다방 이름은 오륙도였는데, 실내는 크지도 않 고 작지도 않은 아담하고 평범한 다방이었다. 다 방 손님들도 나이 든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김 호장이 의도하는 바와 딱 맞아 떨어졌다. 젊은 애 들이 주로 노는 다방은 피아를 잘 구별할 수 없 기 때문에 다방 안에서도 급습을 당할 위험이 있 는데, 나이든 사람들이 주로 찾아 드는 다방은 그 런 위험이 없는 것이다. 김호장은 오륙도 다방에서 커피를 시켜 마신 뒤 이만복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말했다. "더 이 상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여기가 당분간 우리 아 지트다. 나는 매일 저녁 7시경에 억만이와 함께 이곳으로 올 테니까 너는 종태와 만나 이곳으로 오라. 우린 여기에서는 서로 아는 척해서는 안된 다. 그리고 추진하고 있는 일은 진행이 잘 되고 있나?". 이만복은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형님, 그 박철수라 카는 놈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입니더. 국제시장에 애들을 보내 알아보았지 만 박철수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 십니더. 지 생각에에는 이름을 여러 개 사용하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더. 밀수꾼들이 여러 가지 이 름을 사용하는 수법은 밀수꾼들의 기본이라 카는 데 이름이 열 개인 밀수꾼도 있다 캅니더. 아마 박철수도 몇몇에게만 박철수라는 이름을 쓰고 국 제시장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통할지 모르겠십니 더. 현재까지는 박철수라는 밀수꾼은 알아내지 몬 했지만 더 알아보겠십니더. 그라고 오두복 패거리 는 요즘 한 놈도 안 보인다 카는데 애들을 풀어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십니더. 오두복 의 패거리가 한 놈도 안 보인다 카는 것은 쪼매 이상합니더. 뭔가 냄새가 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박철수가 입원 중이라는 사실을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과묵한 황종태는 납치 현장에서 떠나기 직전에 박철수의 면상을 발로 짓밟아 버 렸다는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만 복의 보고를 받은 김호장은 그 문제에 대해 서두 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알았다. 차근차근 알아 보면 뭔가 잡히겠지."라는 반응만 보였다. 그들은 다방에서 나와 다방 주변을 살펴본 뒤 하승일 가게에서 술 한 잔 하고 헤어졌다.. 황종태가 밤에 오륙도 다방으로 나가는 일은 손경자의 제동에 걸려 지연됐다. 김호장의 지시를 받은 황종태가 전후 사정을 생략하고 손경자에게 매일 밤에 시내에 나갈 일이 있다고 하자 그녀는 펄쩍 뛰며 반대한 것이다. "밤에 나 혼자 여기 있으라꼬? 그건 말도 안된 다. 무서워 어떻게 혼자 있겠노?" 손경자는 납치 사건 이후 자다가도 놀라 깨어 나는 증상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황종태는 아 무 말 못하고 난감해 했다. 그는 할 수 없이 김호 장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는데, 이해심이 많은 김 호장은 굳이 고집하지 않고 타협안을 제시했다. 김호장도 여자 혼자 밤에 아지트에 남아 있는 것 은 무리라고 판단했으므로 그들에게 셋방을 구하 도록 한 것이다. 이 방법에는 손경자도 찬성하여 그들은 급히 셋방을 구하기 시작했다. 셋방은 손경자가 구했다. 동창생들에게 수소문 해 대신동에 있는 적산집 이층 방 두 개를 세냈 다. 손경자는 집주인에게 황종태를 동생이라고 소 개했다. 그들은 간단한 살림 도구를 장만해 셋방 으로 이사갔고, 아지트는 당분간 비워 두기로 했 다. 일이 이렇게 되어 황종태가 남포동에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과 박철수가 퇴원하여 광복동에 사무 실을 개설한 시점은 엇비슷했다. 그러나 김호장과 박철수 쌍방은 한동안 상대의 동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박철수는 워낙 은 밀하게 일을 진행시켰기 때문에 이만복의 정보망 에 걸려들지 않았고, 또 칠성파도 비밀리에 재건 되고 있었기 때문에 황종태가 남포동에 출현했다 는 사실이 박철수 정보망에 쉽게 노출되지 않았 던 것이다. 황종태가 남포동에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오륙 도 다방에서는 매일 밤이면 똑같은 장면이 벌어 졌다. 김호장과 억만이가 밤 7시가 지나 다방에 들어와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앉아 있으면 황종 태가 이만복을 데리고 들어와 김호장과 반대편 구석에 앉는다. 그리고 그들은 다방 안에서는 서 로 아는 척하지 않고 딴전 피웠다. 그들이 다방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동안 이만복 의 졸개들은 오륙도 다방을 중심으로 두 명씩 짝 을 지어 골목 요소 요소에 포진하고 있으면서 행 인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무 리를 지은 주먹패들이 나타나는 것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방 입구 쪽에는 칠성파 중에 서도 가장 건장하고 주먹깨나 쓸 줄 아는 네 명 이 각기 흩어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물론 이만복이 새로 규합하여 식구가 열 다섯 명 으로 늘어난 칠성파 전원은 각자 위치에서 언제 든지 휘두를 수 있는 각목을 입간판이나 업소 출 입구 등에 숨겨 놓고 있었다. 그리고 황종태가 남포동을 빠져나갈 때에도 칠 성파는 김호장의 작전 지침에 따라 행동했다. 황 종태와 이만복이 나란히 앞장서서 걷고, 그 뒤에 김호장과 억만이가 뒤따르면 칠성파 전원은 그들 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동시에 움직이는 것이었 다. 김호장은 황종태가 매일 같은 코스를 걷게 하 지는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도 한 곳에서 만 타지 않았다. 광복동 입구에서 택시를 탔다면 다음날에는 자갈치 시장 건너편에서 탔고, 그 다 음날에는 더 남쪽으로 내려가 택시를 탔다. 물론 칠성파들이 미리 택시 두 대를 잡아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황종태와 이만복이 앞차로 떠남 과 동시에 김호장과 억만이가 뒷차를 타고 그 뒤 를 따랐다. 김호장은 오두복의 기습이 남포동뿐만 아니라 황종태 셋방 부근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고 보았기 때문에 매일 그의 뒤를 따라가 그의 안전한 귀가를 확인했다. 그러다가 만일 그들이 타고 가는 택시를 미행하는 차가 발견되면 그들 은 남포동으로 되돌아오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 리고 황종태가 무사하게 귀가한 뒤에야 칠성파에 내려진 비상경계령도 해제되었다. 만일 남포동에 수상한 놈들이 나타난 것이 포 착되었을 때에는 결전장으로 두 곳이 선택되었다. 첫 번째 장소는 다방 입구 쪽 공터였다. 황종태 는 다방에서 나와 이곳에서 잠시 머뭇거리며 오 두복의 기습 공격을 유도하는데, 이때 칠성파는 다방 앞쪽을 중심으로 포진하고 있다가 오두복의 기습이 개시되어 김호장과 황종태가 반격할 때 오두복 일당을 포위하며 공격하게 된다. 두 번째 장소는 첫 번째 장소에서 오두복이 기 습하지 않을 때를 고려한 곳이다. 황종태는 남포 동에서 영도다리로 빠지는 골목으로 나가 대로변 에서 택시를 잡는 척하다가 재빨리 중앙로를 뛰 어건너 자갈치 시장 쪽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 곳 건물 사이 사이 에는 칠성파가 각목을 들고 매복해 있다가, 만일 오두복 일당이 황종태를 뒤 쫓아오면 일거에 반격하게 된다. 매일 반복되는 김호장의 이와 같은 유인 작전 에도 불구하고 오두복 패거리는 남포동에 나타나 지 않았다. 그리고 하승일과 이만복의 정보망에도 박철수와 오두복의 동태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김호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박철수와 오두복의 동태가 잡히지 않는 것은 그들의 음모 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김호장은 이렇게 생각했다. <태풍 전야는 원래 고요한 법이다. 그 쥐새끼 같은 박철수라고 하는 놈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하다. 밀수꾼이니까 원래 박쥐처럼 움직이 는 놈이겠지만 그놈의 동태가 잡히지 않는 것은 그놈이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기 때문이다. 더 기다려 보면 그놈들이 틀림없이 나타날 것이다.> 김호장은 인내심이 강했으므로 느긋한 자세로 하루 하루를 보냈다. 제17장 미행자의 유혹과 숙명적 선택 그 유인 작전이 시작된 지 보름쯤 됐을 때부터 수상한 사람 한 명이 남포동에 나타나 김호장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40대 중반 의 나이로 말끔하게 차려입은 신사였다. 그는 어 깨가 떡 벌어져 있었고, 눈매가 날카로워 예사 인 물이 아니라는 것을 풍기고 있었다. 그 신사는 오륙도에 처음 나타난 날에는 바바 리코트에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그는 다방으로 들어와 김호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앉았는데, 앉 자마자 신문을 펼쳐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가 마담을 불러 뭔가 물어 보는 것 같더니 다시 한참 동안 신문을 읽다가 다방을 나갔다. 다방 출입자들을 예의 감시하고 있었던 김호장 은 마담의 태도로 보아 그 신사가 오륙도의 단골 손님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날 그 신사는 다방 건너편 골목에 숨어 있다 가 김호장 일행이 다방을 나와 남포동 골목을 빠 져나갈 때 미행하여 그들이 택시를 타는 장면까 지 지켜보고 있었지만, 김호장은 물론이고 칠성파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날 그 신사는 점퍼 차림으로 오륙도에 다 시 나타났다. 그는 전날처럼 신문을 읽다가 나갔 는데, 김호장은 그가 카운터에서 찻값을 계산할 때에야 비로소 그 신사가 전날 바바리코트에 중 절모를 쓰고 다방에 왔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김호장은 그 신사 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오륙도를 나와 다방 앞에서 잠 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 김호장은 그 신사가 다방 건너편 골목 술집 입구에 서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 그 신사는 김호장이 쳐다보자 자연스럽게 몸을 돌리며 얼굴을 가렸는데, 김호장은 그 순간 그 신사의 수상한 행동을 놓치지 않았다. 김호장은 일부러 그 신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태도를 보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그 신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저 새끼가 아무래도 수상하다. 분명히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 어제는 중절모를 쓰고 다방에 왔 었지. 도대체 뭐 하는 놈이기에 우리를 감시하나? 저 새끼가 박철수인가?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만 일 박철수 배짱이 저렇게 좋다면 내가 무릎을 꿇 고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맹서 하겠다. 그럼 박철 수가 보낸 첩자일까?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좀 더 두고 보자. 모르는 척 하고 있으 면 정체가 밝혀지겠지.> 김호장은 택시를 타기 직전에 그 신사의 얼굴 을 행인들 틈 속에서 다시 발견했다. 김호장은 그 신사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김호장은 택시가 출발하자마자 억만이 귀에 대 고 "드디어 수상한 놈이 나타났다."라고 말했는데, 억만이는 "그래? 난 아무것도 못 보았는데."라고 대꾸했다. 김호장은 "좀 더 지켜보자."라는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택시를 타고 가면서 바 짝 긴장했지만, 그들을 미행하는 차는 보이지 않 았다. 다음날 남포동에는 초저녁부터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김호장의 지시로 칠성파에게 특급 비상 경계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김호장은 억만이를 대동하고 남포동에 나타나 골목골목을 살폈다. 그는 칠성파의 움직임에 만족 을 느끼고 오륙도 다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김호장은 흠칫 놀랐다. 중절모 를 쓴 그 신사가 전날 앉았던 자리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김호장은 속으로 "야, 배짱 한 번 좋은 새끼구나."라고 감탄하며 그가 노상 앉았던 구석의 자리로 갔다. 김호장과 억만이가 자리를 잡고 앉자 마담이 그들에게로 왔다. 그리고 차를 주문한 뒤 마담은 이렇게 말하며 쪽지를 내놓았다. "저기 모자 쓴 분이 전해 달라 캅디더." 김호장은 마담과 모자를 쓴 신사를 번갈아 쳐 다보았다. 그 신사는 계속 신문을 읽고 있었다. 김호장은 쪽지를 펴 보았다. 그 순간 그는 또 흠 칫 놀랐다. 쪽지에 자신의 이름이 써 있었기 때문 이었다. 쪽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김호장씨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오. 바 쁘시더라도 잠시 시간 좀 내어 얘기 좀 합시다.─ 배짱 좋기로 소문이 난 김호장도 이 사태 앞에 서는 아연했다. 그는 모자 쓴 신사 쪽을 쳐다보았 다. 신사는 태연하게 신문을 읽고 있었다. 긴장한 김호장은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벌떡 일어나 신사 쪽으로 걸어갔다. 그 신사는 김호장이 다가올 때 까지 계속 신문을 읽고 있었는데, 김호장이 그의 앞에서 "저를 찾으셨읍니까?"라고 말을 걸자 신문 을 탁자 위에 놓은 뒤 빙긋이 웃으며 그를 쳐다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키며 "여기 앉으시오."라고 말했다. 김호장이 조심스럽게 앉 자 신사가 입을 열었다. "김형은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김형을 잘 알고 있소. 김형이 남포동을 주름잡던 시절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햇수로는 꽤 오래된 일이오." 신사의 어투에는 이북 억양이 약간 들어 있었 다. 신사는 말을 잠시 멈추고 김호장의 얼굴을 뚫 어지게 쳐다보았다. 김호장은 그때 속으로 "이 새 낀 경찰이로구나."라고 생각하며 바짝 더 긴장했 다. 신사는 김호장의 생각을 간파했는지 이렇게 말을 이었다. "김형은 지금 나를 경계하고 있는데, 우선 그 경계심부터 푸시오. 김형 부하들이 이 다방 주위 에 쫙 깔려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소. 김형에 게 해가 될 일로 김형을 찾아오지는 않았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하시오." 신사는 김호장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잠시 중 단했고, 김호장은 잠자코 있었다. 신사가 다시 말 을 이었다. "용건을 말하겠소. 내 오야지가 김형을 만나고 싶어하니까 시간 좀 내 주시오. 김형 입장이 어떻 다는 것은 다 알고 있수다. 우린 김형의 능력과 조직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고 판단되어 김형과 손잡고 싶소. 내 오야지는 아마 사업 제의를 할 것이오." 김호장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는 신사의 여유 만만한 태도와 당돌함에 질려 있었다. 그리 고 신사의 제의를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을 깨닫고 힘없이 대답했다. "언제 어디서 만날까요?" 김호장의 대답에 신사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김형은 소문대로 화끈해서 좋소. 김형은 내가 아무리 설득해도 의심을 풀지 않을 것이니 까 만날 장소는 김형 부하들이 쫙 깔려 있는 이 다방 부근으로 합시다. 이 다방 옆의 호텔이 어떻 소? 시간은 김형이 정하시오." 김호장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밤 시 간에 만나는 게 좋겠다고 말했고, 신사는 그것을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좋소. 그럼 내일 밤 8시에 이 옆 호텔 로비에 서 만납시다." 말을 마친 신사는 신문을 접어들며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김호장을 내려다보며 " 그럼 먼저 가보겠소."라고 말한 뒤 뚜벅뚜벅 걸어서 카운터 로 갔다. 김호장은 그때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일부러 신사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신사는 찻값을 계산한 뒤 다방을 나갔고, 김호장은 천천 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김호장이 자리로 돌아와 앉자 억만이가 물었다. "그 사람 아는 사람이가?" 김호장은 "응, 조금."이라고만 대꾸하고 입을 다 물었다. 그는 황종태 쪽을 한 번 쳐다본 뒤 눈을 지긋이 감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김호장은 그 돌발 사태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그날 일정을 예정대로 진행시켰다. 그리고 황종태를 안전하게 귀가시킨 뒤 그는 혼 자 하승일을 찾아갔다. 손님 접대를 하고 있던 하승일은 가게로 혼자 들어오는 김호장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있다 고 직감했다. 그는 손님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진 자리로 김호장을 안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고?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김호장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응. 너와 상의할 일이 있다. 우선 맥주 좀 시켜 라." 하승일이 큰 소리로 맥주를 시키자 웨이터가 즉시 들고 왔다. 김호장은 하승일이 딸아준 술을 단숨에 들이킨 뒤 그 돌발 사태에 대해서 설명했 다. "사흘 전에 오륙도 다방에서 처음 보았던 놈인 데, 어제 그놈이 우리를 감시하며 미행하고 있다 는 것을 알았지. 그런데 그놈이 오늘 배짱 좋게 오륙도에 다시 나타나 나에게 얘기 좀 하자고 쪽 지를 보낸 거야. 쪽지에는 내 이름이 써 있고 말 이야." 하승일이 놀라며 물었다. "쪽지에 니 이름이 써 있었다고?" "글쎄, 내 얘기 좀 들어보아. 그래서 만나 보았 더니 그 작자는 나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거야..." 김호장은 그 신사가 했던 말과 인상 착의까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하승일은 그 얘기를 듣고서 즉시 해석을 내렸다 "그 중절모 쓴 놈은 과거에 경찰에 있었던 놈 이다. 지금도 경찰인지 모르지. 그리고 그 작자가 오야지라고 하는 놈도 같은 계통이고...그런데 왜 그놈들이 너와 손잡으려고 하는 거지? 왜 그럴 까?" 하승일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엔 그 놈들은 정보기관에 있는 놈들이 다. 그런데 너와 손잡으려는 이유는 모르겠다. 특 수 임무를 맡기려고 그럴까? 너를 체포하려는 것 이 아닌 것은 분명하고..." 하승일의 해석에 김호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 했다. "나를 체포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그렇게 나오 지 않겠지. 그런데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나 같은 놈과 손잡고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이냐? 그게 알 수 없는 일이야. 어떻게 하지?" 하승일이 침통하게 대꾸했다. "어떻게 하긴? 안 만날 수 없는 일이다. 안 만 나면 당장에 붙잡아 갈 낀데 안 만날 수 있나?" 김호장이 허탈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이거야말로 빼도 박도 못할 지경이군. 빼자니 당장에 우리를 소탕할 거고, 박자니 꺼림칙하고..." 하승일은 김호장에게 위로하는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이판 사판 아이가. 한 번 부딪쳐 봐라. 체포하려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니까 만나 보 아라. 또 무슨 일인지 몰라도 세상 공기 좋아질 때까진 그 새끼들과 손잡고 일하는 게 최선일지 도 모르니까 만나 보아라." 김호장은 맥주를 한 잔 더 들이킨 뒤 말했다. "그 새끼가 만복이 애들이 남포동에서 움직이 고 있는 것을 죄다 알고 있는 것을 보면 간단한 놈들은 아니야. 경찰은 아닌 것 같고 더 쌘 기관 에 있는 놈일지도 모르지. 좌우지간 좋다! 한번 부딪쳐 보자." 하승일도 맞장구쳤다. "그 방법 이외에는 없다. 수틀리면 그때 생각해 도 늦지 않으니까." 김호장은 하승일의 영업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술을 더 이상 시키지 않았다. 그는 나머지 술을 들이킨 뒤 하승일의 가게에서 나왔다. 김호장은 곧바로 아지트로 돌아갔는데, 그의 발 걸음은 보통 때보다 무거워 보였다. 다음날 김호장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를 내려놓고 오륙도 다방에서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8시 직전에 다방 바로 옆의 항도호텔 로 건너갔다. 그가 호텔로 들어간 직후 억만이, 황종태, 이만복은 호텔 입구를 지키기 시작했고, 칠성파는 호텔을 포위했다. 김호장이 호텔 로비로 들어가자 중절모 신사가 한쪽 구석에 서 있다가 그를 맞이했다. 그는 악수 를 청하며 김호장에게 말했다. "김형은 약속 시간도 잘 지키는군. 역시 김형 다워! 자, 우리 오야지가 룸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까 엘리베이터를 타자구." 중절모는 은근 슬쩍 김호장에게 반말을 쓰기 시작했다. 김호장은 그런 태도에 개의치 않고 묵 묵히 중절모를 따라갔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 고 꼭대기 층인 6층에서 내렸다. 중절모는 601호 실 앞에서 녹크를 했다. 잠시 후 도어가 열렸고 그 오야지인 듯한 사람이 그들에게 "들어오시오." 라고 말했다. 그는 키가 땅딸막하고 당차게 보였 다. 그러나 그는 옅은 색안경을 끼고 있었기 때문 에 눈 모양은 드러나지 않았다. 김호장은 그가 일 부러 색안경을 끼고 있다고 생각하며 룸 안으로 들어갔다. 룸은 특실인 듯 응접 소파가 있었다. 소파에 앉 기 전에 그들은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 인사 라는 것도 특이했다. 중절모가 김호장에게 그의 오야지를 가리키며 "우리 사장님이시니까 인사하 소."라고 말한 게 전부였다. 오야지는 명함도 내놓 지 않았고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김호장과 악수 를 한 뒤 오야지가 "자, 앉지."라며 먼저 앉았고 김호장은 그와 마주보고 앉았다. 중절모는 그의 오야지 옆에 앉았다. 오야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김형 얘기는 많이 들었지. 수배를 받고 있는 상태라는 것도 알고 있고. 요 근래에 남포동에서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지. 난 성 격이 급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는데, 우리가 김형을 보호해 줄 테니 우리와 손잡고 일 좀 해 보지." 김호장은 그 제의에 대해 능청으로 대응했다. "손잡고 할 일이 무슨 일인지 몰라 선뜻 대답 을 못하겠습니다." 김호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야지가 중절모를 쳐다보며 씩 웃었는데, 그 표정은 "요것 봐라!"라 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호장은 아무 내색 도 하지 않고 덤덤하게 그들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 사이에 중절모와 오야지는 눈으로 뭔가 교환 한 뒤 중절모가 입을 열었다. "김형에게 내가 구체적 얘기를 안했던 것 같구 먼. 우리가 손잡고 할 일이란...마, 쉽게 말하자면 밀수요. 김형은 마침 조직을 가지고 있으니까 우 리와 손잡고 물건 운반을 도맡아 달라는 거지. 물 론 보수는 충분히 줄 테니까 해 볼만한 일일 거 야." 김호장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대답 대 신 잠시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자 오야지가 말 했다. "요즘 부산지방 해안이 개판이 됐소. 이놈이 저 놈 물건 강탈해 가고, 저놈이 이놈 물건 강탈해 가는 것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지. 예전엔 없었 던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 큰 일이오. 세상이 각 박해지니까 밀수업계의 룰도 깨지고 있는 거요.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물색 중이었는데 마침 김 형을 여기 박전무가 남포동에서 알아보고 여기로 모셔 온 거야. 깊게 생각할 것 없이 우리와 손잡 고 일해 보지. 우리는 여러 기관에 친구들이 많기 때문에 김형 신상 문제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 어. 김형은 대마도에서 물건을 싣고 와 부산 해안 의 우리가 지정한 장소에 갔다 놓기만 하면 되는 거야. 조직을 가지고 있는 김형에게는 식은 죽 먹 기나 다름없는 일이지." 오야지라는 사람의 얘기는 김호장에게 밀수품 해상책과 육상책 모두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김호장은 대답을 더 이상 끌지 않았다. "일은 언제부터 시작합니까?" 중절모자가 대답했다. "보름 뒤엔 배를 타야지. 물론 김형이 직접 안 타도 되고..." 김호장은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가 대답했다. "오늘 제의하신 건 돌아가 상의한 뒤 연락하겠 습니다. 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니까 상의한 뒤에 야 확실한 약속을 할 수 있습니다." 김호장의 말에 오야지와 중절모는 다시 서로 쳐다본 뒤 오야지가 말했다. "물론 김형 식구들과 상의해 보시오. 그런 뒤 여기 박전무에게 연락하시지." 중절모가 그 말을 받았다. "김형도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이런 일이란 무엇보다도 비밀 유지가 잘 되어야 되는 거야. 그 래서 김형은 우리가 누구인지 관심을 가질 필요 도 없고, 또 관심 가져서도 안돼. 앞으로 김형과 우리 사이의 연락은 오륙도 다방 메모판을 이용 합시다. 그리고 돌아가 상의한 뒤 3일 이내로 연 락 주시오. 다방 메모판에 이렇게 써 놓으면 되는 거야. 내용은 연락 주십시오, 라고만 쓰고 메모 겉에는 박전무님께, 라고 써 놓으면 우리 제의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알겠소. 그렇게 해 놓으면 내가 다시 김형에게 메모를 남겨 놓겠소." 그들은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사용했고, 어투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위압적이어서 김호장은 밸이 몹시 꼴렸다. 그러나 그는 참을 수밖에 없었 으므로 꾹 참으며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으로 그들과의 면담은 끝났다. 김호장은 곧 그 룸에서 나왔는데, 그들은 룸 밖까지 배웅도 하 지 않았다. 그가 로비로 내려오자 억만이와 황종 태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그들은 곧 오륙도로 건너갔다. 김호장은 이날도 정체 불명의 사람들로부터 밀 수 제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 는 황종태를 귀가시킨 후 다시 하승일을 찾아갔 다. 김호장이 전날의 그 구석진 자리에 먼저 가 앉 아 있자 하승일이 손수 맥주를 들고 그에게로 왔 다. 그리고 앉자마자 물었다. "그 작자를 만나 봤나?" 김호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승일이 다시 물었 다. "어떻더노?" 김호장은 떫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밀수 제의야. 그리고 그놈들은 기관과 연결되 어 있는 게 분명해. 아니, 지금도 기관에 있는 것 같아. 내가 수배자라는 사실도 알고 있고, 자기들 과 손잡으면 내 신변을 보호해 주겠다는 거야." 그 말을 듣고 하승일은 "잘 됐네. 임도 보고 뽕 도 따게 생겼구나."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러나 김 호장은 웃지 않았다. 그는 잠시 뭔가 골똘히 생각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내 느낌으론 그 놈들과 한 번 인연을 맺었던 것 같아. 아마 내 느낌이 틀림없을 거야." 하승일이 약간 놀라는 투로 "언제?"라고 물었 다. 김호장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아치섬에서 털었던 그 금괴 말이야. 아무래도 그 놈들이 그 금괴 주인 같아." 하승일의 눈이 커졌다. "정말?...그 놈들이 낌새를 알고 있는 것 같더 나?" 김호장이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아니고, 그 놈들과 얘기하고 있을 때 그 놈들이 그 금괴 주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더란 말이야. 아마 내 느낌이 맞을지 몰라. 그 놈들이 하는 밀수 단위는 보통 밀수꾼들 것보다 클 거 아니냐. 그리고 그 놈들도 요즘 부산 해안 에서 밀수품 강탈 사건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와 손잡겠다는 거야. 그 러니까 내 추측이 맞을 거야. 아니면 그 놈들도 물건을 크게 털린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하승일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놈들이 그 금괴 주인이 맞는 것 같다. 너희들 말고 밀수품을 전문적으로 털고 있 는 패들은 없을 거니까. 좌우지간 그게 사실이라 면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앞으로 그놈들과 일하 다 보면 그 얘기도 나오겠지. 자, 그런 의미에서 한 잔 마셔라." 그들은 맥주 잔을 소리나게 부딪친 뒤 단숨에 들이켰다. 그 날밤 하승일 가게에서 아지트로 돌아갈 때 의 김호장 발걸음은 전날처럼 무겁게 보였다. 김호장은 다음날 일당들을 아지트에 모아 놓고 밀수품 운반 제의가 들어온 사실을 밝히고 찬반 의견을 물어 보았는데, 반대자는 한 사람도 없었 다. 그러나 그는 결심을 하지 못했다. 그는 선택 의 기로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작자들과 손 잡고 일한다면 적어도 신변 문제는 해결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유인 작전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유인 작전이 성공한다면 경우에 따 라서는 다시 뿔뿔이 흩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 작 자들과 손잡을 수 없는 것도 분명했다. 그래서 그 는 결론을 내리지 않고 일당들에게 "아직 시간 있으니 더 생각해 보자."라는 말만 했다. 김호장은 선택의 기로에서 혼자 고민을 하다가 이렇게 결론지었다. <일은 보름 뒤라니까 시 간은 있다. 유인 작전을 계속하면서 오두복이가 걸려들면 그 놈부터 박살내자. 여기서 물러설 수 는 없다. 그 뒤에는 그 작자들에게 맡기자. 일단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연락하고 유인작전은 계 속하자.> 김호장은 바로 회답하지 않고 시한 날짜까지 기다렸다가 오륙도 다방 메모판에 박전무 앞으로 '전화 주십시오'라는 메모를 남겼다. 박철수는 황종태를 기습으로 공격하는 것만으 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보복 대상은 황종태 만이 아니라 손경자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는 황종태를 납치한 뒤 고문을 해서라도 손경자의 거처를 알아내 그녀까지 납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두 사람을 납치하여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분풀 이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박철수는 광복동 골목에 사무실을 개설한 뒤 오두복의 조직부터 강화해 나갔다. 그는 오두복에 게 특히 유도 유단자들을 끌어들이라고 지시했다. 그 이유는 황종태를 납치하는 일이 용이하지 않 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오두복이 황종태를 납 치했을 때는 그가 방심 상태로 혼자 걷고 있을 때 칼로 위협하여 손쉽게 꼼짝못하도록 만들었지 만 이제 그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 던 것이다. 황종태가 방심하고 있지 않다면 오히 려 그의 발 쓰는 기술에 당할 위험이 있다고 보 았기 때문에 박철수는 유도 유단자 서너 명을 황 종태에게 일시에 달려들게 만들어 그를 단숨에 꺾어 납치할 작정이었다. 박철수의 지시를 받은 오두복은 졸개들을 풀어 부산 건달패 중에서 유도 유단자들이 있는지 알 아보기 시작했다. 또 오두복의 졸개 두 놈은 매일 남포동에 나가 황종태에 대한 탐문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만복의 칠성파 재건 작업이 워낙 은밀했고, 또 그는 칠성 파 기존 조직원들에게는 비상사태를 선언해 놓았 기 때문에 오두복의 졸개들은 칠성파의 동태를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졸개들은 오두 복에게 매일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보고만 했다. 박철수는 집요하고 인내심이 강했으므로 매일 아무 성과가 없다는 보고만 받고 있었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두복이 "오늘도 아무 낌 새가 없십니더."라고 보고하면 언제나 이렇게 대 꾸했다. "알았어. 그러나 더 기다려. 참고 기다리면 그 놈이 틀림없이 나타날 거야." 오두복도 황종태를 찾아내는 방법은 칠성파를 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 직하게 보일 정도로 박철수의 지시를 따랐다. 박철수가 오두복의 추천으로 유도 유단자 떡대 두 명을 수하로 만든 다음날 드디어 황종태가 남 포동에 출현했다는 보고가 날아 들어왔다. 박철수 는 밤늦게 집에서 오두복으로부터 전화로 그 내 용을 보고 받았다. 오두복은 흥분된 목소리로 이 렇게 말했다. "형님요, 접니더. 드디어 그 놈이 나타났십니 더!" 박철수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그것 보아라. 내가 뭐라 했나. 그 놈이 틀림없 이 나타날 거라고 말했었지? 그놈을 어디서 본 거야?" 오두복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남포동입니더! 그 놈이 칠성파 이만복이와 다 방에서 나와 같이 걷는 것을 지가 보낸 알라들이 직접 목격했십니더." 박철수는 추궁하는 어투로 말했다. "보기만 했다는 거냐? 뒤따라가지 않고?" 오두복은 박철수의 그 말에 힘없이 "와 아니라 요? 따라갔는데 놓쳤답니더."라고 대답했다. 박철수는 황종태가 남포동에 출현한 것이 목격 된 것만으로도 만족했으므로 화는 내지 않았다. 그는 당장 사무실로 나가 황종태를 목격한 오두 복의 졸개를 만나 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오두복 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어쨌든 큰 수확이다. 내일 아침 일찍 그 놈을 봤다는 애를 사무실로 데리고 오너라. 내가 직접 물어 볼 게 있으니까. 알았나?" 오두복은 "예, 알았십니더. 잘 주무시소."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오두복은 황종태를 목격한 졸개와 함께 박철수 사무실 앞에서 그가 출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철수는 사무실 앞에 도착해 그 졸개가 얼마 전 황종태 이름을 알아냈던 김길동임을 알 아보고 반색하며 "이제 보니 너였구나. 자, 들어가 자."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사무실 소파에 앉자마자 박철수가 김길동에게 말했다. "자, 어제 니가 보았던 것을 자세하게 말해 보 아라. 하나도 빼놓지 말고." 김길동은 "예!"하고 대답한 뒤 이렇게 말했다. "지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십니더. 지는 이전부터 칠성파 이만복의 얼굴을 알고 있었십니 더. 이만복은 5.16 이전에 두목 이덕구 밑에서 부 두목 노릇을 했던 놈입니더. 그란데, 그 이만복이 가 어젯밤에 남포동에 있는 오륙도 다방에서 나 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옆에 키가 늘씬하게 큰놈 이 있었십니더. 지는 그 놈들을 살살 따라가 보았 십니더. 그때 지 느낌으로는 그 키 큰놈이 황종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더. 그란 데, 그 두 놈은 남포동 골목을 빠져나가자마자 중 앙로에서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십니더. 그 때 부근에 마침 지와 알고 지내는 칠성파 한 명 이 보이길래 슬쩍 이렇게 물어보았십니더. 야, 저 만복이형과 같이 간 사람이 황종태라는 사람 아 이가 ? 그랬더니 그 칠성파는 고개를 끄덕인 뒤 엄지 손가락은 펴 보이며 저분은 대한민국에서 발 쓰는 기술이 최고인 분이라며 어깨를 으시댔 십니더. 지가 본 것은 이게 전부입니더." 박철수는 날카로운 눈으로 김길동을 쏘아보며 질문했다. "그 칠성파에게 다른 건 안 물어 봤나?" 김길동은 약간 당황해 하며 대답했다. "아닙니더. 황종태가 남포동에 자주 놀러 나오 는가 물어보았십니더. 그랬더니 그 놈 대답이 매 일 남포동에 나오면 얼굴을 볼 수 있다 캤십니 더." 박철수가 또 질문했다. "황종태라는 놈을 본 시간이 몇 시쯤이냐?" 김길동은 여기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는 황 종태를 목격했던 시간을 확인 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아마 아홉 시는 넘었을 낍니더." 박철수는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뒤 "수고했 다. 오늘도 지켜보아라. 오늘은 내가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 놈을 다시 보게 되면 즉시 이리로 뛰어와 보고하라."라고 말했다. 그날 밤 박철수는 오두복과 함께 곰탕을 사 먹 은 뒤 사무실에서 김길동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 었는데, 밤 10시 직전에 김길동이 헐레벌떡 뛰어 온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다. 그는 사무실 에 들어서며 큰 소리로 "또 봤십니더!"라고 말했 다. 박철수는 그에게 앉아서 차근차근 말하라고 지시했고, 김길동은 박철수 앞자리에 앉은 뒤 다 시 말했다. "어제와 똑같았십니더. 그 놈은 이만복이와 또 오륙도 다방에서 나왔십니더. 그라고 광복동으로 나와 요 건너편 큰길에서 택시를 탔십니더." 박철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했다. "이만복이라는 놈과 같이 택시를 탔나?" 김길동은 "예, 두 놈이 같이 탔십니더."라고 대 답했다. 그러자 박철수는 오두복을 쳐다보며 "그 두 놈이 왜 같이 택시를 탈까? 같은 동네에서 살 고 있나, 아니면 한 집에서 같이 살고 있나?"라고 물었다. 오두복은 박철수 물음에 "그걸 지가 우째 알겠십니꺼. 내일은 지가 직접 그 놈들 뒤를 따라 가 보겠십니더."라고 대꾸했다. 박철수는 그 말에 고개를 흔들며 "그건 필요 없는 일이다."고 말한 뒤 오두복에게 눈짓으로 김길동을 내보내라고 신 호했다. 오두복이 김길동에게 "그럼 넌 이제 가 보래이."라고 명령하자 김길동은 재빨리 일어나 절을 꾸벅 두 번 한 뒤 사무실을 나갔다. 박철수는 김길동이 사무실에서 나가자 오두복 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 이제 때가 됐다. 그 놈 둘이 한 동네 살건 한 방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자건 아무 상관없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으니까 바로 해치워 버리자." 오두복은 눈을 껌벅거리며 박철수의 말을 듣기 만 했다. 박철수는 구체적인 작전 지침을 내놓았 다. "그 놈을 납치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그 놈 혼자 행동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 일단 그 놈을 미행한 뒤 덮쳐라. 이번에 끌어들인 유도 하는 놈 두 명은 항상 니 옆에 거느리고 있다가 기회가 포착되면 번개처럼 덮쳐야 된다. 내가 찝 차를 내줄 테니까 그 놈이 택시를 타고 가면 끝 까지 따라가라. 그 놈이 사는 곳을 알아내면 일이 훨씬 쉬워진다. 그리고 니 졸개들을 시켜 내일 낮 에 을숙도로 들어가 천막을 쳐 놓도록 해라. 그 놈을 납치하면 거기서 조질란다. 그 놈을 조져 계 집 있는 곳을 알아내 그년까지 잡아와야 내 화병 이 가라앉겠다. 알았나?" 오두복은 박철수 계획에 바로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그 놈을 택시 탈 때 바로 덮쳐 삐리지요."라고 말했는데, 박철수는 그 말에 얼굴까지 찡그리며 면박했다. "어허! 사람 많은 데서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그렇지 않아도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 남포동과 광복동 일대는 인파로 가득 메워지고 있는데..." 박철수는 오두복 눈치를 잠시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물론 인파가 없어진 시간이면 니 생각도 가능 하다. 택시 타는 곳에 사람이 별로 없을 때는 덮 쳐도 상관없겠다. 어쨌든 내일이라도 틈이 보이면 바로 해치우자. 이런 일은 끌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알겠지? 지난번엔 그 놈 손만 묶었 기 때문에 우리가 당했다는 사실을 ...찝차에 태운 뒤에 바로 발까지 묶어 버려라. 그 놈도 만만치 않아 계집 있는 곳을 쉽게 불지 않을 것이다. 그 래서 그 놈을 을숙도로 끌고 가려는 거다. 거기서 밤새도록 고문하면 계집 있는 곳을 불고 말겠 지...." 오두복은 박철수가 황종태에게 당했던 일을 강 조하자 기분이 상해 퉁명스럽게 "와 우리가 또 당하겠는교? 그런 말씸은 하지도 마이소. 그 새끼 를 잡으면 지가 직접 다룰랍니더. 자지뿐만 아니 라 발목도 짤라 삐리지요!" 라고 말했다. 박철수는 오두복이 반발하는 기색을 보이자 태 도를 바꿔 달래는 투로 말했다. "니 기분을 내가 와 모르겠나. 그래도 이 형님 이 그 놈에게 더 당했다. 생각해 보아라. 넌 그 놈에게 한 방 걷어차였을 뿐이지만 나는 물건도 털렸고, 계집도 빼앗기고 , 그리고 그 잘 생겼던 내 코에 흉터까지 생겼다. 내가 이렇게 당했는데 도 넌 어찌 형님 심정을 이해 못해 주나? 그 놈 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놈도 붙잡아 내가 직접 조져야 내 화병이 치료될 것이다." 박철수가 달래도 오두복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 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퉁명스럽게 "황 종태를 붙잡으면 나머지 세 놈 잡는 건 식은 죽 먹기 아니겠는교? 고문을 해서 어디 사는 지 알 아내면 당장에 요절낼 수 있십니더. 이제 가십시 더."라고 말했다. 박철수는 오두복이 여전히 반발 기색을 보이자 입맛이 쓴지 입을 다시며 자리에 서 일어섰다. 그날 밤 박철수는 오두복을 달래기 위해 그를 데리고 해운각으로 가서 술을 사 먹인 뒤 오입까 지 시켜 주었다. 다음날부터 황종태 납치 계획은 오두복의 진두 지휘 아래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낮에 오두복의 졸개 두 명이 을숙도로 건너가 천막을 쳐 놓았고, 나룻배도 구해 구포다리 아래쪽에 메 두었다. 오두복은 유도 유단자 두 명을 양쪽에 거느리 고 남포동으로 출진했고, 그의 졸개들은 밀수품을 털던 김호장 등을 기습했을 때 사용했던 몽둥이 를 옷 속에 감추고 두세 명씩 짝을 지어 남포동 에 잠입했다. 오두복은 여전히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다. 오두복은 전날 황종태가 택시를 탔던 장소인 광복동 입구에 찝차를 대기시켜 놓고 오륙도 다 방에서 광복동으로 빠지는 골목 입구에서 황종태 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물론 유도 유단자 두 명 은 그의 옆에 붙어 있었고, 다른 졸개들은 오륙도 다방 부근에서부터 광복동 입구에 이르기까지 쫙 깔려 있었다. 크리스마스 직전이라 인파가 많아 그들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그들의 황종태 납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황종태가 오 륙도 다방에서 나와 광복동 쪽으로 가지 않고 자 갈치 시장 쪽으로 걸어가 중앙로에서 택시를 타 고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날 오두복은 황종태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상황이 끝나 버렸다. 황종태가 택시를 타는 곳이 일정하지 않아 세 번 연속으로 납치가 실패로 끝나자 오두복은 자 제력을 잃기 시작했다. 황종태를 또 놓치자 원숭 이처럼 생긴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숨 도 거칠어졌다. 그날 밤 오두복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것은 박철수의 지시를 거역하고, 황종태가 택시를 타기 직전에 그의 장기인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로 마 음먹은 것이다. 오두복 심성의 특성은 바로 그런 점이었다. 받 아 버려야 할 상대가 눈앞에서 어른거림에도 불 구하고 바로 받지 않고 참는다는 것은 그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황종태의 발놀림 한 방에 나가떨어졌던 오두복은 그를 꺾지 않고서는 자신 의 권위와 자존심을 지킬 수 없고, 나아가서는 부 하들도 거느릴 수 없게 된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철수로부터 황종태 납치 지시를 받았을 때부터 그의 마음속에서는 황종태 납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장소가 어디건 그를 박살내 버리는 것 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 이다. 사실 오두복은 주먹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자존심이 상할 만큼 누구에게 당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기습이었건, 또는 야밤에 칼을 들고 상대 방 집에 침입하여 굴복시켰건 간에 그는 언제나 승리자였다. 그러나 그 세계에서 쌓아 올렸던 그 의 권위와 명성은 황종태의 일격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질 위기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오두복은 주 먹 세계에서의 패배자는 어김없이 도태된다는 사 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박철수의 지시를 거역하기로 결심한 오두복은 인파가 끊어지기 시작한 남포동을 슬슬 거닐었다. 황종태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오륙도 다방을 중 심으로 지형 정찰을 한 것이다. 그는 오륙도 앞 공터는 퇴로가 없기 때문에 공격 장소로는 부적 당하다고 판단하고 장소가 어디든 황종태가 택시 를 타는 순간에 기습하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점심 때 오두복은 수하 졸개 전원을 왕 년에 자신의 활동 무대였던 부산진역 앞의 중국 집 사천 반점에 집합시켜 놓고 그 결심을 밝혔다. 이 회식 자리에는 새로 규합된 유도 유단자 두 명은 제외됐다. 오두복은 그들을 박철수의 직계 부하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두복의 졸개는 모두 열 다섯 명이었는데, 을 숙도에 나가 있는 두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 참석 했다. 오두복은 부하들에게 중국요리를 잔뜩 사주었 다. 고량주를 반주로 하여 중국요리를 배가 터지 도록 먹게 되자 졸개들은 모두 즐거워했다. 오두복은 좌중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다가 부하 들이 오랜만의 포식을 끝내자 " 애들아 지금부터 내 말 잘 듣거래이!"라고 소리지른 뒤 졸개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자 비장한 어조로 입을 열었 다. "모두들 많이 묵었재? 그럼 이제부터 내 생각 을 말하겠다. 다름 아니라 어젯밤 나는 중대한 결 심을 했다. 그 놈아 있재? 황종태라고 카는 놈! 그 놈을 오늘 밤 박살낼란다. 장소는 남포동이다. 이제 납치고 뭐고 그런 거 없다! 오늘밤에는 박살 내야지 내 직성이 풀리겠다. 너희들은 이렇게 하 라. 그놈이 오륙도 다방에서 나오면 내가 바짝 뒤 를 따르다가 그 놈이 택시를 타려는 순간에 내가 그놈 멱살을 잡겠다. 그때 너희들은 벌떼처럼 달 려들어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려쳐 뿌려라. 몽둥이 를 맞고 그 놈이 쓰러지면 너희들은 몽둥이로 그 놈 발목만 박살내 뿌려라. 나는 그 놈을 올라탄 뒤 그 놈 면상을 주먹으로 짓이겨 놓을 테니까. 어떻노 ? 내 생각 괘안치?" 오두복의 졸개들은 즉시 "좋십니다!"라고 소리 질렀다. 기분이 좋아진 오두복은 입이 헤 벌어지며 "그 라믄, 오늘 밤 일이 끝난 뒤 술 한 잔 마시기로 하고 그때까진 푹 쉬도록 하자." 고 말한 뒤 회식 을 끝냈다. 그날 밤 오두복은 졸개들을 남포동에 쫙 깔아 놓고 졸개 한 명을 데리고 오륙도 다방 공터 건 너편 골목 입구까지 진출했는데도 칠성파 어느 누구도 오두복의 음모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고 있었던 김호장도 오륙도 다방에 앉아 중절모 신사가 제의한 밀수품 운 반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전날 다방 메모판을 이용해 중절모 신사에게 제의를 받아들 이겠다고 통보했었다. 그 쪽지는 없어졌지만 회신 이 없었기 때문에 김호장은 오두복보다도 중절모 신사의 일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중절모 신사가 다방에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가 끔 출입구 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다방 안에는 손님이 열 명쯤 있었고, 마담은 카 운터에 한가롭게 앉아 손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 다. 김호장이 출입구 쪽을 보다가 마담을 쳐다보 았을 때 카운터의 전화 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마담은 "이만복씨 전ㅎ니더"라고 큰 소리로 말했 다. 이만복은 재빨리 카운터로 가서 전화를 받았 다. 전화를 받는 이만복의 얼굴이 금방 긴장됐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김호장에게 눈짓을 한 뒤 화장실로 갔다. 김호장은 다른 사람들이 눈치 못 채게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김호장이 화장실로 들어서자 이만복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놈들이 나타났십니더! 오두복이가 바로 요 앞까지 왔다가 저쪽 골목 입구에 서 있다 캅니 더." 김호장은 기다렸던 일이 닥쳐왔으므로 눈썹 하 나 까딱 않고 말했다. "드디어 그 놈이 걸려들었구나. 넌 나가서 내가 시킨 대로 지시해 놓고 오너라. 그리고 수시로 연 락하라고 말해 둬." 이만복은 "알았십니더."라고 대답한 뒤 먼저 화 장실에서 나갔다. 김호장의 지시는 남포동 건너편 자갈치 시장 쪽 건물 사이에 각목을 든 칠성파 열 명을 매복 시켜 놓으라는 것이었다. 김호장은 소변을 본 뒤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 리고 화장실에서 나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 는 자리에 앉으면서 억만이에게 낮으막하게 "그 놈이 나타났단다."라고 말했다. 억만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밤 몸 좀 풀겠구나."라고 말하며 씩 웃었다. 이만복이 다방에 돌아온 직후에 젊은 놈 하나 가 다방으로 들어와 누구를 찾는 척 하다가 곧 나갔다. 김호장은 오두복이 졸개를 보내 황종태가 있는지 여부를 살핀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 젊은 놈은 황종태의 얼굴을 알고 있는 김길동이었다. 그는 다방에서 나와 오두복에게 가서 보고했다. "황종태는 다방 안에 있십니더. 이만복이와 단 둘이 앉아 있으니까 지금 쳐들어가는 기 어떻겠 십니껴?" 그러나 오두복은 고개를 흔들었다. "임마, 지금 여덟 시 반밖에 안됐어. 넌 내가 하 라는 대로만 해! 다방 앞에 칠성파로 보이는 놈이 네 명이 있는 걸 못 보았나? 일은 그렇게 하는 기 아이다. 넌 지금 모두에게 일이 곧 시작될 거 라고 알려라." 김길동은 "예"라고 대답한 뒤 곧장 그 앞을 물 러났고, 오두복은 빨간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다시 오륙도 다방 쪽을 노려보았다. 9시가 넘자 이만복이 김호장 쪽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어떻게 할 것인지 묻고 있었다. 김호 장은 눈짓으로 화장실을 가리킨 뒤 먼저 일어섰 다. 화장실에서 김호장은 소변을 보는 척하면서 그 의 뒤에 서 있는 이만복에게 다시 지시했다. "될 수 있는 대로 시간을 끌자. 남포동 인파가 끊어질 때쯤이 좋으니까 다방 문 닫기 전까지 끄 는 게 좋겠다. 그러나 오두복이 못 참고 다방으로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넌 다시 나가서 다방 앞쪽 애들 숫자를 더 늘려 놓아라. 그리고 그 놈이 쳐 들어올 기미를 보이면 즉각 알려라고 말해 놓아. 그땐 우리가 먼저 다방을 나가 요 앞 공터에서 붙어 버리자. 종태에게도 그렇게 말해 놓아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오륙도 다방 주변에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칠성파나 오두복 패거 리 모두 눈빛이 사나웠고 혹시 행인들 틈에 적이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눈알 돌리 기에 바빴다. 그러나 행인들은 이와 같은 숨막히 는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고 크리스마스와 연말의 들뜬 기분에 사로잡혀 즐비한 상가의 윈도우를 기웃거리며 지나갔다. 이윽고 밤 10시쯤 되자 인파가 현저하게 줄어 들었고, 남포동 골목골목도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김호장은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10시 15분 이 되자 황종태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받 고 황종태와 이만복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호장 과 억만이도 곧장 일어서서 그들 뒤를 따라 다방 을 나갔다. 다방을 나온 황종태는 전방을 한 번 살핀 뒤 공터를 지나 자갈치 시장 쪽으로 꺾어 걷기 시작 했다. 그 뒤를 김호장과 억만이가 바짝 붙어 따랐 고, 칠성파는 행인처럼 가장하여 자연스럽게 그들 앞 뒤에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빨 간 모자를 쓴 오두복이 눈알을 번뜩이며 졸개들 과 함께 그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김호장은 서너 걸음 걸은 뒤 흘낏 뒤돌아본 순 간 행인들 속에서 빨간 모자를 발견했다. 그 순간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오두복의 시선에 꽂혔다. 김호장은 시선을 곧바로 돌리면서 "저 새끼다! 저 빨간 모자를 쓴 놈이 오두복이다!"라고 생각하며 긴장했다. 그는 다시 서너 걸음 걸은 뒤 또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 순간 그는 오두복의 걸음이 빨 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았을 뿐 태연했다. 오두복이 그의 함 정에 빠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황종태는 뒤 한 번 안 돌아보고 늠름하게 걷기 만 했다. 그는 대로변에 도착하면 김호장의 지시 대로 택시를 타는 척하다가 마치 도망가는 것처 럼 재빨리 뛰어서 자갈치 시장 쪽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이윽고 황종태와 이만복이 중알로의 인도에 도 착했는데, 그 순간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벌어졌 다. 그 두 명이 택시를 잡는 척하다가 차도로 뛰 어들어감과 동시에 오두복이 "저 새끼들 도망간 다!"라고 큰 소리로 외친 것이다. 이때부터 그 일 대는 당장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오두복과 그 졸 개들이 옷 속에 감추었었던 몽둥이를 뽑아 들고 행인들을 밀치며 우루루 황종태를 쫓아 중앙로를 건넜을 때, 자갈치 시장 쪽의 어둠 속에 숨어 있 었던 칠성파도 각목을 들고 뛰어나와 오두복 패 거리와 맞붙기 시작했다. 김호장은 어느새 그 아수라장 한복판에서 오두 복을 가로막고 있었다. 빨간 모자를 쓴 오두복은 황종태가 아닌 김호장이 그의 앞을 가로막자 당 장에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김호장은 가볍게 그 몽둥이를 피하며 발로 오두복의 손목을 걷어 찼다. 그 발길질에 오두복이 들고 있던 몽둥이는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몽둥이를 놓친 오두복의 얼굴에 일순 당황의 빛이 스쳤지만, 김호장이 " 원숭이 같이 생긴 놈아, 덤벼라!"라고 놀리자 그 의 얼굴은 금새 험악해졌다. 오두복은 김호장을 노려보며 그 걸걸한 목소리로 "이 새끼, 오늘 쥑 이 삐리겠다!"라고 중얼거린 뒤 긴팔로 그를 낚아 채려는 자세를 취했고, 김호장도 오두복을 쏘아보 며 반격할 태세를 갖췄다 김호장이 오두복을 상대하자 황종태와 억만이 는 오두복 졸개들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황종태는 오두복 주변의 몽둥이 부대를 잽싼 발놀림으로 한 명씩 처치해 나갔고, 억만이는 오두복 졸개로 부터 빼앗은 몽둥이를 사정없이 휘둘러 댔다. 그 래서 오두복은 점차 그의 졸개들로부터 고립되어 갔다. 김호장은 원래 두 가지 공격 기법을 가지고 있 는데, 상대에 따라 그 중 한 가지를 적절하게 사 용한다. 하나는 번개같은 선제 공격이고, 다른 하 나는 방어 자세에서의 역공이다. 선제 공격은 상 대가 강하다고 생각될 때 번개처럼 달려들어 상 대를 단숨에 꺾어 버리는 것이고, 역공은 상대가 약하게 보일 때 일부러 헛점을 보여주어 공격을 유도한 뒤 받아치는 것이다. 김호장이 오두복에게 선제 공격을 하지 않은 것은 그가 약하게 보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오두복을 당장에 요절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는 그동안 쌓였던 분이 풀릴 수 없었기 때문에 마치 고양이가 쥐를 다루 듯이 오두복을 놀리면서 서서히, 그러나 무참하게 박살낼 속셈이었던 것이다. 김호장은 오두복을 가로막고 있으면서 황종태 와 억만이의 눈부신 활약으로 오두복 졸개들이 금새 밀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원했던 대로 오두복은 꼼짝없이 그의 포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오두복은 그러한 사정을 전혀 모르고 오직 그의 앞에 나타난 정체 불명의 사내를 덮칠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김호장을 쏘아보며 몸을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긴 팔을 이용 하여 김호장의 멱살을 잡은 뒤 박치기 한 방으로 공격을 끝낼 속셈이었다. 그는 고릴라 같은 자세 로 김호장에게 슬슬 다가섰다. 그때 김호장은 일 부러 주먹을 내려뜨렸고, 그 순간 오두복의 오른 손이 내려치듯 쭉 뻗쳤다. 다른 상대 같았으면 그 공격은 거의 실수가 없었다. 그 손에 옷자락이라 도 잡히면 왼손이 멱살을 나꿔채고, 그와 동시에 오두복의 큰 머리통이 상대의 면상을 받아 버리 는 것이다. 그러나 오두복의 공격은 김호장이 날 쎄게 피하는 바람에 헛 손질이 되어 그의 몸은 중심을 잃고 비틀했다. 김호장은 그 순간은 놓치지 않았다. 그의 번개 처럼 빠른 주먹이 연타로 오두복의 얼굴을 강타 했다. 그리고 오두복이 휘청거리자 김호장의 주먹 은 다시 그의 양 옆구리와 복부를 강타했다. 그 주먹을 맞고 오두복은 " 윽!"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쓰러져 버렸다. 오두복이 쓰러지자 김호장은 그에게 다가가 멱 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오 두복을 세워 놓으며 다시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 렸다. 오두복은 그 주먹을 맞고 뒤로 벌렁 넘어졌 다. 다른 사람과의 격투였다면 김호장의 공격은 이 정도에서 끝난다. 그러나 이석배를 죽음으로 몰고 간 오두복에 대한 응징을 여기서 끝낼 수는 없었 다. 김호장은 쓰러져 있는 오두복에게 다가갔다. 오두복의 빨간 모자는 이미 날아가 없어져 원숭 이처럼 생긴 그의 얼굴이 흉하게 드러나 있었다. 김호장은 발로 짓밟을 자세를 취하며 오두복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흠칫 놀라며 동작을 멈췄다. 오두복이 입에서 게거품을 뿜어내며 사지를 벌벌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호장은 잠시 오두복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황종태와 억만이는 어둠 저쪽에서 퇴각하는 오두복 졸개들 을 몰아치고 있었고, 칠성파 애들도 모두 그쪽에 몰려 있는 것 같았다. 김호장은 다시 오두복을 내 려다보았다. 오두복은 여전히 사지를 벌벌 떨고 있었는데, 김호장은 그걸 보고 겁을 먹으며 속으 로 중얼거렸다. "이 새끼가 뒈지는 거 아냐!" 그때부터 김호장은 당황 때문에 침착성을 잃기 시작했다. 그는 어둠 저쪽에서 싸우고 있는 억만 이와 황종태를 부르다가 대답이 없자 안절부절못 했다. 그리고 사지를 떨고 있는 오두복을 내려다 보며 "안되겠다. 병원에 업고 가보자."라고 생각한 뒤 그를 어깨에 들쳐 맸다. 그리고 시청 쪽을 향 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 걸음도 뛰기 전에 김호장은 어깨에 들쳐 맨 오두복의 몸이 축 쳐지는 것을 느끼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이 새끼가 죽은 모양이다!"라고 생각하며 오두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오두복의 상의를 풀어헤친 뒤 그의 가슴 에 귀를 댔다. 오두복의 심장이 뛰고 있는지 알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곧 절망감에 사로 잡히고 말았다. 오두복의 심장은 이미 멎어 있었 던 것이다. 그는 힘없이 일어서며 "이 새끼가 죽 어 버렸다!"라고 중얼거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배짱의 사나이 김호장도 혼 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당황 속에서 주 위부터 살폈다. 다행히 행인들이 없었다. 그는 영 도 다리 쪽을 보았다. 그쪽에도 사람이 안 보였 다. 겨울의 찬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땀이 솟아 있었다. 좌우를 살피던 김호장은 오두복의 시체를 재빨 리 다시 들쳐 매고 영도 다리 쪽으로 뛰기 시작 했다. 그는 다리 중간에 이르자 앞 뒤를 살핀 뒤 오두복이 시체를 다리 밑으로 던져 버렸다. 김호장은 오두복의 시체가 첨벙! 하고 바닷물과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서야 제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출렁거리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 아, 내가 살인을 했구나!"라고 탄식했다. 오두복이 떨어진 시커먼 바다를 망연자실 내려 다보고 있던 김호장은 고개를 들며 천천히 발길 을 돌렸다.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어깨는 축 쳐져 있었다. 김호장이 영도 다리 끝 지점에 도착했을 때 아 수라장이 벌어졌던 쪽에서 경찰차 싸이렌이 요란 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재빨리 몸을 돌려 그 반대 방향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싸이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에야 뛰는 것을 멈 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싸 늘한 가로등뿐이었다. 그는 깊은 절망감 속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 었다. 제18장 도피자의 종착역 남포동 일대의 업소에는 중앙로에서 큰 패싸움 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고, 하승일도 그 소문을 알게 되었다. 그는 종업원으로부터 그 소문을 듣고 김호장과 오두복이 한판 붙었다고 직감했다. 그는 소문을 듣자마자 그의 가게에서 1 백여 미터도 안 떨어진 패싸움 현장으로 뛰어갔 다. 그러나 그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상황이 이 미 끝나 있었다. 싸움 흔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 았고, 경찰 차도 떠나고 없었다. 하승일은 현장에서 잠시 서성거리다가 가게로 돌아왔는데, 그 직후에 김호장으로부터 전화가 걸 려 왔다. 하승일이 수화기를 들고 "여보세요."하자 김호장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승일이구나. 아무 내색 말고 내 말을 그냥 듣 기만 해라. 너와 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빨리 와 줘야겠다." 하승일은 주위를 살핀 뒤 낮게 물었다. "무신 일이고? 거긴 어딘데?" 김호장은 역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만나서 얘기하자. 여긴 시청 건너편의 콜 럼비아라는 술집이다. 이 술집 너도 알고 있지?" 하승일은 김호장의 음성으로 보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고 직감하고 "알았다. 퍼 뜩 그리 갈 꾸마."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하승일이 맥줏집 콜럼비아에 도착하여 홀 안으 로 들어서자 안쪽 구석에 앉아 있던 김호장이 손 을 흔들었다. 하승일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 는 김호장에게 다가가 그의 앞자리에 앉으며 물 었다. "무신 일이고?" 김호장은 맥주 잔을 하승일에게 주며 말했다. "내가 니 가게로 가면 곤란한 일이 생길 것 같 아 이리 오라고 했다. 바쁜 시간일 텐데 미안하 다." 하승일은 김호장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신 일 있었나?" 김호장은 고개를 숙이며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내뱉듯 말했다. "내가 오늘 사람을 죽였다." 하승일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꼬? 누구를? 아까 한판 붙었다는 소문 들 었는데 거기서 그랬나?" 김호장은 고개만 끄덕거리다가 한숨을 쉰 뒤 말했다. "그렇게 싱겁게 죽는 놈 처음 보았다. 그 오두 복이라는 놈 말이야, 몇 방 맞더니 영원히 뻗어 버렸다. 덩치는 고릴라처럼 생겼던데 병아리보다 싱겁게 죽어 버렸어!" 하승일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놈이 죽었단 말 이가? 그럼 어떻게 했노?"라고 물었다. 김호장은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술잔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며 힘없이 말했다. "한 방 맞고 뒤로 벌렁 넘어져 사지를 벌벌 떨 기에 들쳐 매고 병원으로 뛰어가는데 그 놈 몸이 축 쳐지는 거야. 그래서 심장에 귀를 대 보았더니 숨이 끊어져 버렸어. 어찌 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 돼 영도다리 위에서 시체를 바다로 던져 버렸다." 그 말을 듣고 하승일도 한숨을 쉬었다. 사태가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그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김호장은 술잔을 들이킨 뒤 담배만 빨아 댔다. 하승일도 침묵을 지켰다. 담배를 다 피운 김호장 이 비장하게 말했다. "내일쯤 그 놈 시체가 바다 위로 떠오를 것이 다. 그러면 종태가 유력한 용의자가 되는 거야. 오두복 졸개들이 황종태만 알고 있기 때문이지. 칠성파도 모두 수배될 거고... 그래서 나는 이렇게 결심했다. 내일 아침 종태와 억만이를 피신시키고 칠성파 애들도 도망가게 만든 뒤 나는 오두복이 를 내가 죽였다고 신고하겠다." 여기서 하승일이 김호장의 말을 가로막았다. "자수할라꼬?" 김호장은 그 말에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수? 그건 절대 아니야! 자수하면 나는 교수 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렇게 죽을 수는 없지. 지금 급한 건 종태가 뒤집어쓸 누명을 벗겨 주는 것이고, 그 다음은 내 문제다." 하승일이 냉정을 되찾은 듯 차분하게 말했다. "자수는 생각도 하지 마라. 너는 정당방위를 했 지만 경찰이 그걸 인정할 리도 없으니까...이렇게 하자. 너는 당분간 어디 적당한 곳에 숨어 있거 라.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일본으로 가는 밀항선을 알아 볼 꾸마.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튀는 기 라! 그 다음 문제는 그 이후에 생각하고. 어떻노? 그라고 오두복이가 죽었다는 얘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 시체가 떠오를 확률이 높지만 먼바다 로 흘러갈 수도 있는 기라. 그렇게 되면 뒷처리가 한결 쉬어진다. 우쨌든 이제 너는 밀항선은 타야 될 형편이 되었다. 내가 너의 밀항 문제에 대해서 이전부터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 밀항선 타는 것 은 어렵지 않을 거야. 내일 아침에는 부산 시내가 당장 떠들썩해지고 경찰에도 비상이 걸리겠지. 그 러니까 넌 밀항선 타고 튀는 수밖에 없는 기라!" 하승일이 밀항 얘기를 꺼내자 김호장의 얼굴이 약간 환해졌다.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망가는 것이 그에게는 유일한 활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밀항? 그래, 그렇게 하자. 아마 지금 아지트에 서 억만이와 종태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나 는 그 애들을 내일 바로 도피시키겠다. 특히 종태 는 위험하다. 오두복 졸개들은 나와 억만이에 대 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종태에 대해서는 자 세하게 파악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놈들은 종태 가 오두복을 죽였다고 주장할 것이다. 자, 이제 일어서자. 너도 바쁜 시간이고 나도 빨리 아지트 에 가 보아야겠다." 그들은 곧바로 일어서서 콜럼비아 술집을 나왔 다. 술집 앞에서 하승일이 김호장을 위로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죽이고 싶어 죽인 건 아 니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내일 시체가 떠오르면 부산 시내가 떠들썩할 거야. 너희들과 오두복 패 가 한 판 되게 붙었다는 얘기도 신문에 크게 날 꺼고. 그러나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다. 일본으 로 튀어 삐리면 그만인 기라! 그라고 아까 내가 말했던 것 잊지마라. 오두복의 시체가 먼바다로 흘러가 버릴 수도 있으니까 오두복이 죽었다는 얘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 그건 시체가 떠오 른 뒤에 대처해도 되는 기라. 알았재?" 김호장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은 교 차로에서 헤어졌다. 김호장은 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건넜다. 하승일은 김호장의 힘없이 걷고 있 는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 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김호장이 하승일과 헤어져 아지트로 돌아왔을 때 억만이 등 세 명은 골목 입구에서 그를 초조 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사건 현장에서 뿔뿔이 흩 어져 아지트로 왔지만 김호장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좌불안석이었다. 무슨 변고라도 생 긴 것 겉아 그들은 걱정 때문에 아지트의 방에 앉아서 김호장을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 서 그들은 아지트에서 나와 골목 입구에서 서성 거리며 김호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호장이 버스에서 내려 터벅터벅 걸어 아지트 골목 입구에 이르렀을 때 황종태가 그를 먼저 보 고 "형님 온다!"라고 소리지르며 그에게 뛰어갔 고, 나머지 두 명도 그를 따랐다. 김호장은 반색 하며 맞이하는 그들에게 "다친 사람은 없지?"라고 묻고는 앞장서서 아지트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선 뒤 불을 켰을 때 세 명 모두 김호 장의 안색을 보고 약간 놀랐다. 그의 표정이 너무 침통했기 때문이었다. 김호장은 웃옷을 벗어 던진 뒤 힘없이 주저앉아 벽에 몸을 기댔다. 세 명 모 두 조심스럽게 그의 앞에 앉았다. 김호장이 그들 세 명 얼굴을 잠시 살핀 뒤 "다친 사람이 없어 다행이구나."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 말을 받아 황 종태가 "형님은 어디 있었십니껴?"라고 묻자 김호 장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리고 세 명의 얼 굴을 다시 차례로 쳐다본 뒤 이렇게 말했다. "내 말 듣고 놀라지 들 마라. 우리는 오늘 당장 헤어져야 한다. 싸움 장소가 남포동인데다가 너무 큰 패싸움이었기 때문에 내일이면 신문들이 요란 하게 떠들러 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앙에서 특 명이 내려오고 경찰에 비상이 걸릴 거야. 그리고 중앙의 특명을 받은 경찰이 집중 수사를 하게 되 면 우린 모두 체포된다. 그러니 우린 헤어질 수밖 에 없는 운명이다. 나는 오두복이 패와 한판 붙기 로 결심했을 때 이런 상황이 오리라고 이미 예상 했었다. 이것이 우리 운명이니까 지금부터 내 명 령에 따라라." 그는 말을 잠시 멈춘 뒤 이만복을 쳐다보며 이 렇게 말을 이었다. "만복아. 그 동안 고마웠다. 넌 지금 당장 떠나야 된다. 내일 아침이면 경찰이 당장 칠성파부터 집중 수사할 것이므로 시간이 없다. 너뿐만 아니라 니 식구들도 모두 잠수함을 타야 된다. 도피 자금은 내가 대주겠다. 좌우지간 잘 숨어야 한다. 내년에 민정 이양한다니까 그때 까지는 숨어 있어야 할 것이다." 김호장은 벗어 놓은 양복 호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이만복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이만복이 "지도 돈은 있십니더."라고 말하며 봉투를 받지 않으려 하자 김호장이 꾸중하듯 소리질렀다. "내 말 빨리 들어! 그 봉투 집어넣고 빨리 돌아 가서 니 식구들을 전부 피신시켜라! 니 식구들이 붙잡히지 않는 기간동안은 우리가 노출되지는 않 는다. 상황이 매우 급박하다. 자, 빨리 일어서서 돌아가!" 김호장의 추상같은 명령에 이만복은 돈 봉투를 집어 호주머니에 넣으며 일어섰다. 김호장도 따라 일어서며 그의 어깨를 만져 주며 부드럽게 말했 다. "또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동안 고마웠다. 자, 여기서 헤어지자." 김호장이 손을 내밀자 이만복은 두 손으로 그 의 악수를 받았다. 그리고 억만이와 황종태와도 차례로 악수한 뒤 방밖으로 나갔다. 황종태와 억 만이는 그를 대문까지 따라가 배웅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김호장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가 황종 태와 억만이가 방으로 들어와 그의 앞에 앉자 침 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하승일이 오두 복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나 발설하지 말라 고 했지만 그 얘기부터 꺼냈다. "너희들 지금부터 내 얘기 듣고 놀라지 마라. 오두복이가 죽었다. 주먹 몇 방 맞더니 그대로 뻗 어 버렸다. 한 방 맞고 뒤로 넘어지기에 일으켜 세운 뒤 다시 한 방 먹였더니 뒤로 벌렁 넘어지 더니 사지를 벌벌 떨더라. 그래 그놈이 죽을 것 같아 들쳐 매고 병원으로 뛰었지만 도중에 죽어 버렸다. 그래서 엉겁결에 영도다리 위에서 바다로 던져 버렸다." 그 얘기를 듣고 두 명 모두 금새 침통해지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호장이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이면 오두복의 시체가 떠오를 것이 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이제 우리는 헤어질 수 밖에 없다. 종태야, 너는 내일 새벽에 당장 부산 을 떠나라. 경찰은 너부터 수배할 거다. 억만이도 도망가야 되는 건 마찬가지다." 황종태가 다급한 목소리로 "형님은 우짤랍니 껴?"라고 묻자 김호장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마라. 오두복의 시체는 내일이 나 모레 발견될 거다. 나는 경찰에 오두복을 내가 죽였다고 신고하겠다." 그 말에 억만이가 깜짝 놀라며 "자수할 생각이 냐?"라고 소리질렀다. 김호장은 억만이를 한 번 쳐다본 뒤 단호하게 말했다. "자수는 절대 안한다. 너희들은 그 점만 알고 있으면 된다. 우린 어차피 헤어져야 할 운명이니 행동을 빨리 빨리 하자. 종태 너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부산을 떠나 당분간 꽁꽁 숨어 있거라. 억만이는 여기서 자고 내일 떠나면 되 고...자, 내가 몹시 피곤하니 떠날 사람은 빨리 떠 나 다오." 여기서 황종태가 울음을 터뜨렸고, 억만이도 울 기 시작했다. 그들이 울음을 터뜨리자 김호장은 벽에 등을 기대며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날 밤 그들의 이별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 다. 황종태가 돌아가지 않겠다고 막무가내로 버텼 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울다가 비장한 어 조로 "형님, 형님을 위해서라면 지 목숨도 받칠 수 있십니더. 지가 오두복을 죽였다 카믄 형님은 안전하지 않겠십니껴? 형님, 그렇게 해 주이소." 라고 말하며 또 울기 시작했다. 김호장은 그가 울 도록 내버려두었다가 시계를 본 뒤 앉은 자세를 고쳐 똑바로 앉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자, 그만 울고 내 이야기 들어라. 종태 니 심정 잘 알겠다. 그러나 니가 나를 진정으로 형님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된다. 이별주 한 잔 못하고 헤어지자니 섭섭하다만, 우린 빨리 헤어져야 한다." 김호장은 말을 잠시 중단하고 뭔가 골똘히 생 각하더니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너무 걱정하는 것 같아 내 계획을 말하겠다. 난 밀항선 타고 일본으로 튀겠다. 그래 서 일본으로 튀기 직전에 오두복을 내가 죽였다 고 신고하려는 것이다. 또 그것이 여러 모로 보아 현명하다. 그러나 너희들은 어차피 공범으로 몰리 게 돼 수배될 것이다. 그러니까 잘 숨어야 되는 것이다. 내가 붙잡히지 않으면 사건은 미궁에 빠 지게 될 것이고 세월이 조금 지나면 너희들은 안 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상당 기간동안은 잘 숨 어 지내야 한다." 억만이는 김호장이 말을 끝내자마자 근심 어린 표정이 확 풀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일본으로 밀항하는 방법이 있었구나! 그거 잘 생각했다. 역시 대장이다! 난 니가 자수하려는 줄 알고 되게 걱정했다. 니가 밀항선 타고 일본으로 튄다면 나는 이제 아무 걱정 안하겠다. 난 사실 니가 자수하려는 줄 알고 되게 걱정했다. 역시 대 장은 머리가 좋다!" 황종태도 얼굴이 풀리며 억만이 말에 맞장구쳤 다. "그 말씸 들으니 쪼매 안심됩니더. 밀항선 타는 건 어렵지 않십니더. 그러나 형님과 헤어져야 된 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픕니더!" 김호장은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으 며 말했다. "내가 별을 세 개 달았던 사람이어서 법을 쫌 알고 있는데, 공소시효라는 것이 있다. 어느 기간 이 지나면 죄가 없어지는 것이다. 일본으로 밀항 했다가 공소시효 지나면 돌아올 테니 그때 다시 만나자. 그리고 말야, 그 오두복이라는 놈은 사실 애매하게 죽었다. 내 공격 목표는 너를 납치했던 그 박철수라는 밀수꾼이었는데 말야. 오두복을 때 려눕혀 굴복시킨 뒤 그 밀수꾼 정체를 알아내려 고 했는데 말이야. 일리 이렇게 꼬이고 말았다. 그 새끼 정체를 알아내 요절내려고 했는데, 그러 나 이제 포기해야지. 그 밀수꾼 새끼가 운은 좋은 모양이야. 개 같은 새끼! 그러나 나는 언젠가 그 새끼를 찾아서 석배의 원수도 갚고 우리가 당한 것에 대해 몇 곱절로 응징하고 말겠다. 두고 보아 라. 그런 날이 꼭 올 것이니까!" 김호장의 눈은 무섭게 빛났고, 그의 비장한 어 조 때문에 좌중은 숙연해졌다. 그 침묵을 깨고 김 호장이 다시 말했다. "자, 시간 없다. 빨리 일어서서 돌아가거라." 억만이가 그 말을 받아 "종태야, 일어서자."라며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황종태는 마지못한 자세로 일어섰고, 김호장도 일어서서 아무 말 없이 앞장서서 방밖으로 나갔 다. 황종태와 억만이는 그의 뒤를 따랐다. 김호장 은 아지트를 나와 골목 어귀에서 황종태에게 손 을 내밀었다. "종태와, 잘 가라.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 니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마라." 황종태도 그의 손을 잡고 비감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 건강하십시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이별의 악수를 굳게 한 뒤 헤어졌다. 그러나 이별의 악수까지 하고 헤어졌던 황종태 는 다음날 새벽에 아지트에 다시 나타났다. 억만 이가 새벽 첫 차를 타고 서울로 가기 위해 아지 트를 나선 직후였다. 황종태는 방에 들어와 앉은 뒤 김호장에게 밀 항 자금에 보태 쓰라고 백만 원을 내놓았다. 그는 돈을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지는 돈이 없어도 되지만 형님은 남의 나라로 가서 살아야 되니까 돈이 필요할 낍니더. 이 돈 받아 주이소." 김호장은 그 돈을 사양하다가 결국은 받았다. 그가 돈을 받자 황종태는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 누님과 상의한 끝에 서울로 가기로 결 정했십니더. 누님은 원래 서울서 살기를 원했으므 로 오히려 좋아합디다. 자세한 얘긴 안하고 부산 을 퍼뜩 떠나야 할 일이 생겼다고 했더니 누님은 오늘 당장 떠나자고 합디다. 누님은 납치 당한 뒤 부터 잠을 못 잤십니더. 그렇게 돼서 오늘 당장 서울로 떠나게 되었십니더. 형님, 부디 몸 건강하 십시오. 그럼 지는 이만 물러가겠십니더." 김호장은 황종태를 골목 입구까지 배웅하며 이 렇게 말했다. "당분간 나를 잊어라. 그리고 잘 숨어야 된다. 경찰이란 급하면 아무나 진범으로 만들어 사건을 종결시키기도 한다. 서울에 간 뒤엔 부산에는 얼 씬도 하지 말아. 다행히 패싸움 목격자가 많을 것 이니 내가 오두복을 죽였다고 신고하면 그것으로 끝나겠지만, 그래도 넌 공범으로 몰릴 위험이 많 다. 그러니 두더지처럼 숨어 버려야 한다. 니 누 님이라는 여자가 너를 매우 좋아하니까 잘 도와 줄 것 같아 안심이 된다. 그리고 그 여자가 밀수 품을 처분하는 수완을 보면 생활력도 강한 여자 다. 나이 차이에 상관 말고 둘이 잘 살아 보아라." 그들은 다시 이별의 굳은 악수를 했고, 황종태 는 김호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택시를 타고 그곳 을 떠났다. 항종태는 택시 속에서 김호장이 안 보 일 때까지 뒤를 돌아다보며 힘을 내라는 뜻으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한편, 박철수는 전날 밤부터 심기가 몹시 불편 했다. 오두복으로부터 아무 연락도 없었기 때문이 었다. 그는 화가 치밀어 올라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밤늦게까지 사무실을 지키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일찍 사무실로 나가자 오 두복의 졸개 김길동이 사무실 앞에서 그를 기다 리고 있었다. 박철수는 김길동에게 반색하며 "어 쩐 일이냐?"고 묻고 그를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 갔다. 김길동은 초조한 기색이 역연했다. 그는 박 철수와 마주앉자 황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큰 일 났십니더! 어젯밤에 중앙로에서 그놈들 과 한판 되게 붙었는 기라예. 그란데 우리가 억수 로 깨졌십니더. 그라고 두복이 형은 지금까지 행 방불명입니더!" 박철수는 그 말에 "뭐라고? 어젯밤에 한 판 붙 었다고? 아니 내가 그렇게 신신 당부했는데 그놈 을 납치 안하고 붙어 버렸단 말이야!"라고 소리질 렀다. 김길동은 박철수가 화를 내자 주눅이 들어 아무 말 못하고 그의 눈치만 살폈다. 박철수는 화 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한참 동안 씩씩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화만 내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김길동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너, 두복이가 행방불명되었다고 말했지?" 김길동은 그 물음에 즉시 대답했다. "예. 지금까지 연락이 안됩니다." "어젯밤부터?" "예, 어젯밤엔 우리와 같이 있었십니더. 두복이 형이 기습을 직접 지휘했십니더. 그란데 한판 붙 은 뒤에 어디로 갔는지 연락이 안됩니다!" 박철수는 김길동을 뚫어지게 쳐다본 뒤 차분하 게 말을 이었다. "니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을 듣고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다. 흥분하지 말고 자초지종을 차분하게 얘기해 보아라." 김길동은 그 말을 듣고서야 긴장을 풀며 사건 경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지 느낌에 두복이 형이 그놈들에게 납치 된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왔십니더. 어제 낮에 두 복이 형은 우리를 부산진역 앞의 중국집에 집합 시킨 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으니 밤에 황종태 를 박살내겠다고 선언했십니더. 그란데 막상 붙고 보니 그렇게 안됐어예. 우린 황종태만 있는 줄 알 았지만 공격을 하자마자 싸움을 기가 막히게 잘 하는 놈 두 명이 더 나타났고, 칠성파들도 각목을 들고 자갈치 시장 쪽에 숨어 있다가 싸움이 시작 되자마자 우리에게 덤벼들었십니더. 지는 도망가 면서 보았는데 두복이 형은 그 쪽 두목인 듯한 놈과 대결하다가 그놈에게 한방 맞고 벌렁 넘어 지는 것을 보았십니더. 그 당시 두복이 형 주변에 는 우리편이 한 명도 없었십니더. 나에게도 칠성 파들이 각목을 휘두르며 덤벼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못 보고 도망했십니더. 그러니까 두복이 형 이 한 방 맞고 벌렁 넘어진 이후에는 어떻게 되 었는지 모릅니더. 지는 칠성파들의 공격을 피한 뒤 밤늦게 까지 두복이 형이 자는 곳에서 기다렸 지만 두복이 형이 안 나타나는 기라예! 그라고 새 벽에 또 가 보았는데 두복이 형이 없십니더. 그래 서 이곳으로 왔십니더. 지 생각엔 두복이 형은 틀 림없이 그놈들에게 납치됐십니더. 두복이 형과 맞 붙었던 놈은 황종태보다 더 날쌔고 힘이 좋게 보 였십니더. 그라고 그 놈에게 두복이 형이 한 방 맞고 벌렁 넘어지는 것까지 지가 목격했으니까 결과는 빤한 일 아닙니껴?" 그때부터 박철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 작했다. 그는 김길동이 말을 끝내자 한숨을 한 번 쉰 뒤 넋두리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큰일이다! 내가 이미 그쪽 패거리들은 싸움의 명수들이니까 기습이 아니면 승산이 없다고 강조 했는데 두복이가 내 말을 안 듣고 일을 저질렀구 나. 정말 큰일이다... 더욱이 두복이가 납치됐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박철수가 말을 끝내자 김길동이 한마디 더 했 다. "기습은 우리가 먼저 했십니더. 황종태를 몰래 뒤따라가다가 택시를 타려고 할 때 기습했는데, 그놈들은 우리가 기습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어예. 두복이 형이 덤벼들자마자 황종태는 중앙로로 뛰어들어갔고, 곧바로 두 놈이 나타났십 니다. 그 중 두목 같은 놈이 두복이 형 앞을 가로 막고 둘이 붙은 깁니더. 우리 쪽에 스파이가 있었 는지 그 놈들은 우리의 기습에 대비했던 게 분명 합니더." 박철수는 김길동의 말에 코웃음쳤다. "스파이가 있었다고? 임마, 그게 아니야! 그놈 들의 유인 작전에 두복이가 걸려들었다. 그래서 내가 유도 유단자를 붙여 준 게 아니냐. 그 애들 은 안 데리고 갔었지?" 그 말에 김길동은 힘없이 "예."하고 대답한 뒤 고개를 숙여 버렸다. 박철수는 사건 진상을 파 악하자마자 당장 자신의 신상 문제를 걱정했다. 그는 사무실에 앉아 있다간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고 판단했으므로 김길동을 데리고 황급하 게 사무실에서 나와 일단 부근 다방으로 피했다. 다방에서 그는 김길동에게 통사정하듯 이렇게 말 했다. "넌 말이야, 지금부터 오두복이가 어디 있는지 더 자세하게 알아보아라. 나는 이 다방에 앉아 있 을 테니까 오두복의 행방을 알게 되면 즉시 연락 해 줘. 그리고 혹시 내가 다른 곳으로 옮기더라도 이 다방으로 전화하면 연락이 될 것이니까 좌우 지간 두복이 행방을 빨리 알아내 가지고 연락해 라." 박철수는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김길동에 게 돈을 주었다. 김길동은 돈을 받은 즉시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부터 박철수에게 아 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도 위험을 느끼고 그 길로 피신해 버렸던 것이다. 교활한 박철수는 김길동이 나간 직후 마담에게 자신에게 전화가 걸려 오면 메모해 달라는 부탁 을 하고 다방에서 나와 국제시장 쪽으로 갔다. 그 는 그의 단골 다방으로도 들어가지 않고 평소에 한 번도 안 갔던 다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 곳 에서 김길동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목이 빠지도 록 기다렸다. 그는 수시로 광복동 다방으로 전화 해 보았지만 김길동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정오 경에 가판대에 나온 석간 신문은 간밤의 그 패싸움 사건이 사회면 톱기사였다. 검은 컷 바 탕에 백자로 커다랗게 써진 제목은 '부산의 조직 폭력배 다시 준동'이었고, 부제목은 '폭력배들 몽 둥이 들고 시내 중심가에서 패싸움 벌여'라고 되 어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신문사 사회부 기자가 그 패싸움을 직접 목격하여 톱기사 아래 에는 '목격기'까지 붙어 있었다. 국제시장 안의 다방에 앉아 있던 박철수는 신 문 팔이 소년이 다방으로 들어오자 재빨리 신문 을 사서 펼쳐 들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그 사건이 톱기사로 올라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혹시 신문에 그 사건이 나오지 않았나 하고 신문 을 샀는데, 신문을 넘기다가 사회면을 펼치는 순 간 그 사건이 톱으로 올라 있는 것을 보고 대경 실색하며 읽기 시작했다. 그는 정신없이 신문을 읽어 내려갔는데, 신문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이 떨 리기 시작했다. 그는 사건 목격기까지 읽고 난 뒤 신문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눈을 감고 생각에 잠 기기 시작했다. 그 목격기는 김길동이 얘기한 대로 써 있었다. 몽둥이를 들고 있던 패들이 공격을 먼저 했지만 중앙로 복판에서 맨손으로 대항하는 네 명에게 곧 밀리기 시작했고, 곧바로 자갈치 시장 쪽에서 각목을 들고 나타난 패거리들에 의해 선제 공격 을 했던 패들이 무참하게 당한 뒤쫓기기 시작했 다는 것이었다. 그 목격기는 신문 기사답지 않게 맨손으로 대항하던 패거리 중에는 발솜씨가 귀신 같은 자가 있어서 몽둥이를 들고 공격했던 패거 리들이 맥을 못 추었다고 써 있었다. 그러나 신문 기사는 그 싸움이 칠성파와 연관 이 있는 것 같다는 경찰의 코멘트를 달았을 뿐 쌍방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지긋이 감고 생각을 가다듬던 박철수는 그 싸움에서 자신과 오두복이 완패 당했다는 것 을 자인했다. 신문 기사에 나타난 정황으로 볼 때 그가 납치 계획을 세웠듯이 그들도 유인 작전을 구사하고 있었으며, 오두복은 그 유인 작전의 함 정에 빠진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래서 두뇌 회 전이 빠른 박철수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거취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오두복은 납치 당했다. 그렇다면 이제 그놈들 은 나를 잡으려고 할 것이다. 아니 나를 잡기 위 해 오두복을 납치했을 것이다. 할 수 없다. 이제 부산을 떠나자. 그 귀신같은 놈들과 싸운다는 것 은 부질없는 짓이다. 손경자 그년 때문에 내가 이 성을 잃었지만 이제 정신 차릴 때이다. 밀수로 재 미를 볼만큼 보았으니까 이제 부산 생활을 청산 하고 서울로 올라가자. 박철수는 이제 영원히 대 한민국에서 사라진다. 나는 서울로 올라가서 색안 경도 벗고 머리 모양도 바꾸고 본명을 사용하면 서 살면 어느 누구도 내가 밀수꾼 박철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이제 박철수는 대한민국에서 사라지고 나는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어쨌든 이 세상에서는 돈이 최고니까 나는 밀수로 벌어들인 돈으로 감투도 살 수 있고, 근사한 사업도 할 수 있다. 부산은 이제 굿바이다!> 박철수는 결론을 그렇게 내린 순간 갑자기 밀 려오는 공포감 때문에 좌불안석이 되었다. 귀신같 은 그놈들이 오두복을 앞세우고 다방으로 쳐들어 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꾸물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다방을 나왔다. 그는 곧바로 서울로 튀 기로 작정하고 택시를 탔다. 그러나 그는 부산진 역으로 가지 않고 택시를 삼랑진까지 대절했다. 그는 부산진역도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삼 랑진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박철수는 삼랑진에 도착한 뒤에야 공포감에서 벗어났다. 한숨 돌린 박철수는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가기 전에 우체국으로 가서 마누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누라가 전화를 받자 그는 이렇 게 말했다. "내다. 당분간 어디 좀 갔다 오겠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혹시 누가 찾아와 나에 대해 물으면 아 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어디 갔느냐고 물으면 한 달 전에 고향에 간다고 나갔다는 말만 해라. 또 연락할 테니 그리 알고 집 잘 봐라." 그는 사태 추이를 지켜본 뒤 감쪽같이 집을 팔 고 이사할 생각이었으므로 마누라에게는 곧 서울 로 이사하게 된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한편, 하승일은 아침부터 친분이 두터운 형사를 통해 간밤의 패싸움에 대한 경찰의 수사 상황과 오두복의 변사체가 떠올랐는지 여부를 체크했다. 그가 탐지한 바에 의하면 경찰은 간밤의 패싸움 이 칠성파와 관련이 있다는 심증만 굳히고 있었 을 뿐 선제 공격을 했던 패거리들의 정체에 대해 서는 아무런 감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칠 성파가 모조리 종적을 감추어 버렸기 때문에 수 사는 오직 칠성파 검거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리 고 그날 오전까지 오두복의 변사체는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하승일은 경찰의 움직임을 탐색하다 가 석간 신문이 나오자 그걸 사 들고 김호장 아 지트로 향했다. 하승일이 아지트에 나타나자 김호장은 초췌한 모습으로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하승일은 김호장 이 대문을 걸자마자 그에게 "시체는 아직 안 떠 올랐다. 오늘만 넘어가면 기대해볼만 한데..."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호장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들어가서 얘기하자."라며 앞장서서 안방으 로 들어갔다. 안방으로 들어가 앉자마자 하승일은 김호장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니 얼굴을 보니 어젯밤에 잠을 전혀 못 잔 것 같구나. 그러나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다. 밀항선 타 삐리면 그만인 기라. 오두복이라는 놈도 맞아 죽을 짓을 했잖아. 그 새끼 일은 이제 잊어 삐리 라!" 김호장은 사실 한 숨도 자지 못 했기 때문에 얼굴이 몹시 초췌했다. 그는 하승일의 말에 아무 반응 없이 묵묵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러자 하승 일이 가판대에서 사서 들고 왔던 신문을 김호장 에게 내밀었다. 김호장은 그 신문 기사를 단숨에 읽고 난 뒤 하승일을 쳐다보며 말했다. "신문이 이렇게 떠들어댔으니 수사가 쎄지겠구 나. 그러나 경찰 마음대로는 안될 거야. 어젯밤 만복이를 바로 피신시켰고, 애들도 전부 도망갔을 거니까 경찰이 칠성파를 잡는데 시간이 많이 걸 릴 거야. 그리고 종태와 억만이도 서울로 보내 버 렸다. 이제 나만 밀항선 타면 끝나는 거지." 하승일은 김호장의 그와 같은 조치를 이미 짐 작하고 있었으므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뒤 진 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억만이와 종태에게 오두복이 죽었다는 얘기를 했나?" 김호장은 그 질문에 체념 어린 표정으로 대꾸 했다. "숨긴다는 게 뭐해서 억만이와 종태에게만 얘 기했다. 니 말대로 시체가 안 떠올라도 난 밀항선 타기로 결심했으니까 상관없지. 또 시체가 떠오르 면 종태가 누명 쓰게 될 것이니까 얘기 안 할 수 도 없는 문제야. 시체가 떠오르면 밀항선 타기 직 전에 경찰에 전화해서 내가 죽였다고 신고할란 다." 김호장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하승일은 오두 복이 죽은 문제에 대해서도 그가 숨기지 않으리 라고 예상했었다. 그는 김호장이 말을 끝내고 담 배를 물자 라이터로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 다. 그리고 그도 김호장처럼 아무 말없이 담배만 피워 댔다. 둘 다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을 때 김호장이 말문을 열었다. "밀항 문제는 쉽게 되겠나?" 하승일은 걱정하지 마라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 게 말했다. "빠르면 일주일 이내로 탈 수 있다. 밀항선 타 는 건 쉬운데 문제는 일본에서 어떻게 지내느냐 가 문제다. 그 문젠 오늘 밤 내 중학 동창을 만나 보면 결론이 나올 거야. 니가 어찌될지 몰라 오래 전에 지나가는 말로 부탁해 두었으니까 오늘밤 만나 보면 결과가 나올 거야.. 그건 그렇고 밀항 선 타기 전까지는 어떻게 지낼래? 여기에서 죽치 고 앉아 있을 수 없잖아? 내 생각엔 너도 서울로 가 있는 게 좋겠다. 그 아가씨와 같이 지내면 위 안도 될 거고..." 그 말에 김호장은 고개를 끄덕거린 뒤 일어서 서 벽장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그리고 하승일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이 안에 은행 통장과 도장이 있고 이 집 전세 계약서도 있다. 은행에서 돈을 찾아 밀항 경비에 쓰고 나머지는 일본 돈이나 딸러로 바꿔줘. 그리 고 전세 계약서도 니가 알아서 해결해 주라. 난 오늘 서울로 올라가겠다. 그러나 바로 내려올지 모르겠다. 서울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부산에서 기 다리는 게 낫겠어. 박명자를 데리고 해운대의 호 텔에서 머물면 그게 더 안전할 거야. 부산에 와 있는 게 너와 연락도 쉬울 거고. 좌우지간 오늘은 서울로 가겠다." 하승일은 김호장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는 일부 러 흔쾌하게 "그 생각이 좋겠다. 그라믄 퍼뜩 나 가서 밥 사 먹고 이발부터 하고 기차를 타거라. 검문이 심해질지 모르니까 용모부터 단정해야 되 겠다."라고 말한 뒤 먼저 일어섰다. 김호장은 하승일과 점심을 사 먹은 뒤 이발을 하고 기차를 탔다. 하승일은 역까지 그와 동행했 다. 서울에 도착하여 반도호텔에 투숙한 김호장은 그날 박명자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전화를 걸 어 당장 그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은 간절했지만 수화기를 드는 순간에는 자꾸 망설여졌기 때문이 었다. 그는 결국 박명자에게 전화를 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웠다가 밤늦게 황금마차로 가서 혼자 술을 마셨다. 그러나 황금마차에서 그는 이전처럼 회를 부리지 않았다. 그가 나타나자 바걸들이 몰 려와 아양을 떨었지만 그는 조용히 생각할 일이 있다며 그녀들을 뿌리치고 혼자 묵묵히 술을 마 시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그는 호텔로 돌아온 뒤 하승일과 통화했는데, 하승일은 짤막하게 이렇게 말했다. "잘 추진되고 있다. 그라고...." 하승일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오두복의 시체가 떠오르지 않았다는 얘기를 전했다.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확인해 보았는데 아직 안 떠올랐다. 알았재?" 김호장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알았다. 나는 빠르면 내일, 아니면 모레 부산에 가겠다.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 조심성이 많은 하승일은 김호장이 어느 호텔에 묵고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들은 그 대화만 나 누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끝낸 뒤 김호장은 침대에 벌렁 누웠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오두복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숭이처럼 생겼던 오 두복의 모습을 지우고 박명자를 떠올리려고 애썼 지만 허사였다. 그는 그날 밤도 거의 뜬눈으로 밤 을 세우다가 새벽에야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김호장은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끝내고 슬슬 걸어서 명동으로 나갔다. 그는 박명 자 가게 부근 다방으로 들어가 거기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지만 그는 본론만 간략하게 말했 다. "나 지금 너의 가게 바로 옆의 은성 다방에 와 있다. 지금 이리로 나올 수 있지?" 박명자는 그 말에 더 놀라는 기색을 보였지만, 그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알았어. 지금 갈께."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박명자는 곧 나타났다. 그녀는 다방으로 들어서 며 구석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김호장을 발견하 고 반갑게 웃었다. 그리고 사뿐사뿐 걸어서 그의 앞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오빠에게도 이런 면이 다 있었어? 아무 소식 없이 서울에 와서 이른 아침부터 가게 옆으로 찾 아오다니..." 그녀는 미소를 짖고 있었지만, 김호장의 표정 변화를 살피는 눈치였다. 김호장은 그녀에게 무뚝 뚝하게 "커피부터 마시고 그 다음에 얘기하자."라 고 말했다. 그때 레지가 왔고, 그들은 커피를 시 켰다. 레지가 돌아가자 박명자가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오빠, 무슨 일이야?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은..." 김호장은 담배를 꺼내 물고 박명자의 시선을 피하며 잠시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레지가 커피 를 갔다 놓고 돌아간 뒤에야 그는 박명자를 쳐다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나와 같이 부산에 갈 수 있나?" 박명자는 김호장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직감했다. 그녀는 김호장의 말에 서슴없이 동의했다. "나는 언제든지 갈 수 있어. 몇 시 차 타려고?" 김호장은 시계를 본 뒤 표정 없이 대꾸했다. "그럼 지금 준비해 가지고 이리로 와. 니가 돌 아와서 호텔에 들렸 다가 출발하면 특급을 탈 수 있겠다." 박명자는 꾸물거리지 않았다. 그의 말이 떨어지 자마자 "알았어. 바로 준비해 가지고 올께"라고 대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되어 그들은 그날 특급열차를 타고 부 산으로 내려왔다. 김호장은 기차 속에서 거의 말 이 없었고,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박명자도 그에게 말을 시키지 않았다. 부 산에 도착한 뒤 그들은 해운대 관광호텔에 투숙 했다. 호텔에 투숙한 뒤에도 김호장은 말이 별로 없 었다. 그러나 박명자는 그에게 왜 말이 없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뭔가 중대한 결심을 하 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 스스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호텔 식당에서 저 녁을 사 먹은 뒤 곧바로 룸으로 올라갔다. 룸으로 들어간 뒤 김호장은 어디엔가 짧게 통화했다. 박 명자는 그 통화 상대가 하승일이라는 그의 친구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호장은 그에게 룸남버 를 알려준 뒤 잠시 무슨 얘기를 들은 뒤 통화를 끝냈다. 통화를 끝낸 뒤 김호장은 의자에 앉아 담 배를 피워 물었다. 박명자는 그의 앞자리에 앉았 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답배만 피워 대다가 담배 를 재떨이에 비며 끈 뒤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심심하지? 우리 나이트클럽에나 놀러 가자. 전 에 너도 만났던 승일이도 오기로 했다." 박명자는 일부러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아이 좋아."라고 대꾸했고, 김호장은 바로 일어섰다. 나이트클럽에서도 김호장은 말없이 술만 마셨 다. 박명자는 가끔 그의 표정을 훔쳐보며 쇼만 구 경하는 척 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하승일이 나타났다. 그는 박명자에게 정중하게 인 사한 뒤 김호장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만 마셨다. 박명자는 그의 태도도 이전과 다르 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그녀는 그들만이 뭔가 할 얘기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피곤을 핑계 대며 이렇게 말했다. "오빠, 나 먼저 룸으로 올라가면 안돼? 갑자기 피곤해졌어." 김호장은 무뚝뚝하게 그렇게 하라고 대꾸했다. 박명자는 하승일에게 "즐겁게 노세요."라고 말하 며 자리에서 즉시 일어서서 룸으로 올라갔다. 박명자가 자리를 뜨자 하승일은 김호장 옆으로 붙어 앉아 이렇게 말했다. "오두복의 시체는 지금까지 안 떠올랐다. 이렇 다면 희망이 있는데 우짤래?" 김호장은 그 말에 냉담하게 대꾸했다. "그것과 상관없이 난 밀항선 탈란다. 이참에 어 디 먼 데로 떠나서 사는 게 좋을 것 같다. 밀항 문제는 잘 됐나?" 하승일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모레 출발하는 배가 있다. 오오사까로 가는 배 다. 니가 거처할 곳도 마련했다. 내 동창 삼촌이 오오사까에서 양말 공장을 하고 있는데 넌 그 공 장 직공으로 취직하는 기라. 공장에서 밥 먹고 자 게 되니까 밀입국자로 걸릴 위험도 없다. 그러나 내 생각엔 여기서 쪼매 더 기다려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 기라. 지금 경찰 수사는 전혀 진척이 없다. 칠성파가 전부 숨어 버렸기 때문에 오두복이 패가 공격했다는 사실도 아직 모르고 있는 기라. 만일 오두복의 시체가 떠오르지 않으 면 그 놈도 도피했다고 판단할 것 같은데...그렇게 되면 그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 꼴이 안 되겠나. 그라니까 쪼매 더 기다려 보고 결정해라." 그러나 김호장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아냐, 뜨는 게 좋겠어! 모레 출발하는 밀항선 을 타자." 하승일은 김호장의 완강하자 술잔을 들어 거칠 게 마신 뒤 그에게 잔을 권했다. 그는 술을 따르 며 "자 그럼 이별주나 마시자."라고 말했다. 그들은 말없이 술만 마셨는데, 한참 후 하승일 이 김호장에게 물엇다. "그라믄, 저 아가씨는 우짤래?" 김호장은 하승일을 쳐다보며 힘없이 대답했다. "지금 나에게는 그게 가장 큰 고민이다. 내가 일본에서 자리잡으면 건너오라고 하고 싶은데...그 리고 내가 그걸 원한다면 아마 건너올 거야. 그런 데 그 이후가 문제지. 낯설은 타국 땅에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지 그게 걱정된다." 하승일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단호하게 말했 다. "그건 걱정도 아이다! 데려가거라. 내가 다 해 줄 끼다. 우선 너부터 가고 그 다음은 저 아가씨 가 가면 되겠다. 그라믄 저 아가씨에게 말했나?" 김호장은 그 말에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아직 안했다. 내일 얘기하든지 아니면 나중에 연락하든지 할란다. 내가 만일 내일 말 안 하게 되면 영영 이별하게 될지도 모르지." 하승일은 김호장이 전에 없이 우울해 있다고 판단했으므로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들은 술만 계속 마시다가 나이트클럽 영업이 끝날 때 일어 섰다. 하승일은 택시를 타고 돌아갔고, 김호장은 룸으로 올라갔다. 박명자는 그때까지 안 자고 그 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룸 안으로 들어서며 "미안하다."라는 말 한마디만 하고 옷을 벗고 침 대 위로 올라갔다. 박명자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지만 김호장은 곧바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자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가 대단히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고 확신했다. <언제 보아도 당당했던 오빠가 너무나 달라졌 다. 풀이 죽은 것 같기도 하고 왠지 힘이 없어 보 인다. 도대체 오빠의 고민은 무엇일까? 나에게도 말못할 고민이니까 혼자 삭이고 있는 것이겠지. 내일 아침엔 물어 볼까? 그러나 아무 말 안하겠 지...> 그녀는 김호장의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의 곁에 누워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박명자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김 호장은 창가에 서서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 고 있었다. 담배를 몇 대나 피웠는지 방안에는 연 기가 자욱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곁 으로 다가갔다. 김호장은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 보며 다정하게 "응, 일어났구나."라고 말했다. 그 리고 그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그녀 도 그의 곁에서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그녀는 김 호장이 바다 저편의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호장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명자야, 나는 내일 밀항선 타고 일본에 간다. 이유는 묻지 말아. 그러나 나는 너에게 한 가지 묻겠다. 내가 일본에서 자리잡고 너보고 오라고 하면 올 수 있겠니?" 박명자는 대답 대신 먼저 그의 손부터 꼭 쥐었 다. 그리고 그에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갈 거야. 오빠가 오지 마라고 해도 가고 싶을 건데 오라고 하는데 왜 안 가겠어." 김호장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을 돌려 그녀를 껴안았고, 그녀도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 순간 이후부터 김호장의 기분은 상당히 전 환되었다. 그들은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오전 중 에는 마치 신혼부부처럼 택시를 대절해 부산 인 근을 관광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영화관에서 시간 을 보냈다. 저녁이 되자 김호장은 박명자를 송도로 데리고 가서 싱싱한 회를 안주 삼아 이별 주를 마셨다. 그리고 밤늦게 호텔로 돌아왔는데, 하승일이 전화했다는 메모가 있었다. 김호장은 박명자에게 샤워하라고 한 뒤 하승일 가게로 전화를 걸었다. 하승일은 전화를 받자마자 또 오두복 얘기부터 꺼냈다. "아직 안 떠올랐다. 이쯤 되면 먼바다로 흘러간 게 확실하다. 그래도 배를 탈래?" 김호장은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그래도 타겠다. 명자는 내일 아침 기차로 올라 간다. 배는 밤에 출발한다고 했지? 그럼 명자를 배웅하고 호텔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니가 이쪽으로 온나." 하승일은 매우 섭섭한 듯 김호장이 말을 끝내 자 한참 있다가 힘없이 "알았다."라고 대꾸했다. 하승일은 김호장이 다음날 밤에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도 날마다 오두복의 시체가 떠올랐는지에 대해서 계속 알아보았다. 그러나 오 두복의 시체는 한 달이 지나도 떠오르지 않았고, 부산 인근 해안에서는 다른 변사체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하승일은 김호장을 일본으로 보낸 것에 대해 매우 후회했다. 그가 밀항 주선을 서두 르지 않았다면 김호장의 마음이 변했을지도 모른 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튼 김호장은 파란만장한 도피 생활을 하다 가 1962년이 거의 저물어 갈 무렵에 고국을 등지 고 일본 밀항에 성공했다. 제19장 동면의 세월 박명자는 밀항에 성공한 김호장으로부터 석 달 후에야 최초로 전화를 받았다. 해운대 호텔에서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김호장이 당일 밤 밀항선을 탄다는 얘기를 했을 때부터 걱정이 태 산 같았던 박명자는 일본으로 건너간 김호장으로 부터 연락이 없자 나날이 불안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위안했고, 언젠가 그에게서 연락이 오리라는 확신 이 있었기 때문에 곧 불안에서 헤어났다. 불안에서 벗어난 박명자는 김호장과의 약속대로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 나 갔다. 가게를 동생에게 넘겨주기 위해 매일 동생 과 같이 출근하여 일을 가르쳤고, 일본어 학관에 나가 일어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 느 누구에게도 일본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 기는 하지 않았다. 보통 여자 같으면 밀항선을 타 고 훌쩍 떠나 버린 남자가 석 달 정도 소식이 없 다면 연락이 오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 나 박명자는 김호장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 문에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그 기대는 어긋 나지 않았다. 그러나 밀항 후 석 달만에 전화를 걸었던 김호 장은 그 첫 번째 통화에서 무뚝뚝하기 짝이 없었 다. 가게문을 닫을 무렵에 걸려 온 전화를 받기 위해 수화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여보세요."라고 울리는 목소리가 김호장의 음성임을 알아채고 즉 시 "오빠구나!" 라고 소리지르며 반가와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김호장은 평소보다 더 무뚝뚝하게 이렇게 말했다. "명자구나. 그 동안 전화 걸 형편이 안돼 연락 이 늦었다. 별 일 없지?" 박명자는 할 말이 많았으나 흥분된 목소리로 그 의 안부부터 물었다. "오빠는 어때? 거기 생활은 괜찮아?" 김호장은 잠시 머뭇거린 뒤 "응. 괜찮다."라고 짤 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 다. "내가 연락을 자주 못하더라도 내 걱정은 하지 마라. 지금은 전화를 자주 걸 형편이 못된다. 알 았지? 그럼, 또 연락할께. 전화 끊는다." 박명자는 전화가 끊기기 전에 한마디 더 하고 싶었으나 전화가 끊기는 소리가 울려 말을 못하 고 말았다. 그녀는 너무나 아쉬워 통화가 끊어진 뒤에도 한참 동안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그 러나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에야 김호장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렇게 생각했다. <오빠가 무사하구나! 그럼 됐지. 밀항선 타고 일본에 건너간 사람이 전화 거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꺼야.> 박명자는 그날 이후부터는 기분이 매우 호전되 었다. 그리고 일본에 건너갈 준비도 더 착실하게 해 나갔다. 두 번째 전화는 한 달 후에 왔다. 그땐 김호장도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박명자에게 이것저것 물 어 보았다. 그러나 자신의 얘기는 "잘 지내고 있 다."는 말 이외에는 별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 화를 끊을 때는 다정하게 "보고 싶다. 또 연락할 께."라고 말했다. 김호장은 그 이후에는 한 달을 넘기지 않고 전 화를 했다. 그러나 박명자를 언제 부르겠다는 말 은 하지 않았는데, 그녀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묻 지 않았다. 형편이 되면 즉시 부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밀항 준비만 열심히 해 나갔다. 그렇게 그 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됐을 때 그녀에게 희소식이 날아왔다. 김 호장이 해를 넘기기 전에 그녀를 부르겠다고 전 화를 했던 것이다. 그는 국제 전화였으므로 박명 자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렇게 말했다. "니 문제는 곧 승일이에게 부탁하겠다. 승일이 가 연락할 것이니까 그리 알고 있거라." 박명자는 그 말을 듣고 감격에 겨웠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알았어. 나도 준비는 하고 있었으니까 큰 문제 는 없을 거야 기다릴께." 그러나 그 이후부터 김호장의 전화가 뚝 끊겼다. 그리고 하승일로부터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더니 그해가 훌쩍 지나가 버렸고, 새봄이 되어도 김호 장으로부터는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다. 김호장으로부터 연락이 끊기자 박명자는 하루하 루를 불안 속에서 보냈다. 그녀는 당장 하승일을 만나 보고 싶었지만 그의 연락처를 모르고 있었 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게 김호장과 연 락이 끊긴 채 8개월이 지났을 때 하승일이 그녀 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걸려 온 시간은 점심 시간 직전이었다. 전화 벨이 울려 그녀가 수화기 를 들자 억센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튀어나왔다. "박명자씨 계시나요?" 박명자는 그 목소리가 하승일이라는 것을 직감 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심스럽게 "제가 박명잔데 요. 어디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하승일은 목 소리를 낮추며 "안녕하신교? 지는 호장이 친구 하승일입니더."라고 말했다. 박명자도 반갑게 인 사했다. "어머,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셨어요?" 그러자 하승일은 목소리를 더 낮추어 말했다. "옆에 누구 있십니껴?" 박명자는 아무도 없다고 대꾸했다. 하승일은 그 말을 듣고 본론을 꺼냈다. "지는 호장이 부탁을 받고 전화합니더. 호장이 가요, 지난 해 가을 에 일본 경찰한테 밀입국자로 체포돼 1월에 송환됐십니더. 그래가지고 재판을 받았는데, 어제 항소심이 끝났십니더. 지가 최선 을 다 했지만 전에 수배 받았던 죄목까지 겹쳐 3 년 징역을 선고 받았십니더. 1심 때는 4년이었지 만 지가 손을 써서 항소심에서는 1년이 깎였십니 더. 그란데, 호장이가 박명자씨에게 연락해 달라 는 얘기를 오늘에야 합디더. 지는 서로 편지 왕래 라도 있었는줄 알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랬십니더. 호장이를 오해하지는 마소. 저도 호 장이가 송환된 직후에 바로 연락 받은 게 아닙니 더. 호장이가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십니더. 말도 없어졌고, 심적으로 매우 침울하게 보입니더. 그 런 점 이해하시고 면회 한 번 오소. 오늘 얘기 들 어보니까 호장이가 가장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박명자씨입디더. 면회 오실 수 있지예?" 하승일이 전한 소식은 청천벽력 같은 것이었지 만 박명자는 침착하게 말했다. "일이 그렇게 됐어요? 알겠습니다. 오늘 밤 야 간 열차 타고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부산 형무소 로 가면 되나요?" 박명자의 말을 듣고 하승일은 약간 상기된 어조 로 말했다. "그라믄 이렇게 하십시더. 열차 시간이 정해지 면 지한테 전화 좀 주십시오. 지가 아침에 역으로 마중나가겠십니더. 역에서 지와 만나 가지고 같이 면회 가시는 게 좋겠십니더." 하승일은 자신의 가게 전화 번호를 불러 준 뒤 한마디 더 붙였다. "아까 말씸드렸지만 호장이가 많이 변했십니더. 내일 만나서 자세하게 말씸드릴께예. 그라믄 전화 끊겠십니더." 박명자는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한동안 얼이 빠 지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일이 그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김호장이 송환 되어 재판이 끝난 뒤에야 연락이 온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착잡한 심정으로 서울 역에 가서 그날 밤 야간 열차 기차표를 샀다. 그 리고 가게로 돌아와 하승일에게 전화를 걸어 부 산 도착 시간을 알려주었다. 그녀가 냉정을 되찾 은 것은 하승일과 통화를 끝낸 직후부터였다. 하 승일은 전화를 끊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 "마,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고 너무 걱정하지 마이소. 이국 땅에서 밀입국자 신분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것보다 호장이가 3년 징역을 살 고 나온 뒤 국내에서 사는 게 더 낫다고 생각됩 니더. 이게 바로 전화위복 아니겠십니껴?" 하승일은 박명자를 위로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말을 했지만 그녀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 리고 그녀는 김호장은 국내에 있었어도 체포되면 감옥에 갈 게 뻔했는데, 일본으로 밀항함으로써 혁명재판소에서 재판 받는 위기는 모면할 수 있 었다고 판단했다. <전화위복이 맞는 말이야. 국내에 있다가 잡혔 다면 징역 3년이 아니라 10년을 받았을지도 모르 지.> 박명자의 판단은 사실 정확한 것이었다. 5.16 군사정부는 1963년 10월 15일에 대통령선거를 실 시하고 민간 정부를 세웠다. 물론 군부 세력이 옷 만 민간복으로 갈아입고 정권을 다시 잡았지만, 민정 이양으로 인해 무시무시한 혁명재판은 없어 졌던 것이다. 김호장은 그해 10월초에 일본 경찰 에 체포된 뒤 오오무라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 가 대통령 선거가 끝 난 뒤인 다음해 1월에 송환 되었다. 그래서 그는 민간 재판에서 재판을 받았 다. 그는 대구 형무소 앞에서 형사를 때려눕히고 탈출했을 때부터 수배 죄목이었던 공무집행 방해 및 폭행죄와 출입국 관리법 위반으로 1심에서 4 년, 그리고 항소심에서는 1년이 깎여 3년 징역 선 고를 받았다. 만일 김호장이 밀항 전에 체포되었 더라면 다른 죄목까지 만들어져 그보다 훨씬 무 거운 형량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혁명재판 이란 멀쩡한 사람도 죄인으로 만드는 곳이었으니 까 김호장이 혁명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면 무 기징역을 선고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송환된 이후의 김 호장 태도이다. 하승일이 김호장의 송환을 알게 된 것은 그가 구속 수감된 직후였다. 김호장의 부 탁을 받은 부산 형무소 간수가 전화로 그 사실을 알려줬고, 하승일은 연락 받자마자 즉시 부산 형 무소로 면회 갔다. 그는 면회 가면서 김호장이 수 감된 이후에야 연락한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 했다. 그렇게 중대한 사실이 송환 즉시 연락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승일은 택시를 타고 가면서 시종 그 점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했다. <호장이가 와 이제야 연락했을까? 그 동안 연 락할 길이 없었나? 그렇지는 않을 낀데....군사 정 권도 이제 민간 정부로 바뀌었고, 호장이 정도라 면 어떤 상황에서도 나에게 연락할 수 있었을 낀 데. 와 그랬을까? 이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인 기라! 필경 무신 곡절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하승일은 부산 형무소 면회실에서 김호 장을 본 순간 사태를 직감할 수 있었다. 언뜻 보 기에도 침통하고 수척하게 야윈 김호장은 그를 보고도 반가워하지 않았으며 침울한 표정으로 "니가 온 걸 보면 연락 받은 모양이구나. 미안하 다."라는 말만 한마디하고 입을 다물었다. 김호장 의 그러한 태도를 보고 하승일이 답답하여 큰 소 리로 물었다. "와 이리 됐노?" 김호장은 그 질문에도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됐어. 미안해." 하승일이 다시 물었다. "넌 기소됐으니까 이곳에 수감되었재? 일본에 서 밀입국자로 걸렸나? 그라고 언제 송환되었 노?" 김호장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이렇게 말 했다. "너에게도 연락 안하려다가 했으니까 내가 이 곳에 있다는 것만 알고 있거라. 이제 재판 받고 푹 썩어 지내야지 별 수 있겠나. 좌우지간 미안하 다." 하승일은 그 말에 언성을 높였다. "내사 답답해 죽겠다! 속 시원하게 말 좀 해라. 뭘 알아야지 대책을 세울 수 있지 않겠나? 우째 서 이렇게 됐노?" 그러나 김호장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곧 면회 시간이 종료되었다. 면회실에서 나온 하승일은 곧바로 경찰서로 향 했다. 그는 친분이 두터운 형사를 찾아 김호장의 조서 기록 내용을 알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 형사 는 그날 밤 하승일의 업소로 찾아와 푸짐한 대접 을 받으며 김호장의 조서 내용을 알려줬다. 그 내 용에 의하면 김호장의 죄목은 간단했다. 김호장은 대구 형무소 앞에서 체포하러 온 형사들을 때려 눕힌 뒤 공무집행 방해와 폭행죄로 수배되었기 때문에 그 죄목은 자동적으로 따라붙었고, 거기에 출입국관리법 위반죄가 추가되어 있었다. 그러나 김호장이 형사들을 때려눕힌 것은 단순한 폭행이 아니라 소위 '공권력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기 때 문에 그가 가중 처벌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너무 나 명백한 일이었다. 하승일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손을 쓰지 않으면 김호장에게 대 단히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라고 판단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오두복의 시체는 영영 떠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은 중앙로에서 벌어졌 던 패싸움의 윤곽도 잡지 못하고 수사를 종결시 켰다는 점이다. 오두복의 졸개들도 밀수와 연관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건이 크게 보도되 자 모두 종적을 감추어 버렸고, 칠성파도 이만복 을 위시해 한 명도 체포되지 않았다. 5.16 직후의 무시무시했던 후리가리를 경험했던 그들은 모두 붙잡히면 끝장이라는 각오로 숨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오두복의 실종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더욱이 그는 고아였으므로 그를 챙기는 가족도 없었다. 이렇게 되어 김호장은 중 앙로 패싸움의 한쪽 편 두목이었다는 사실은 물 론이고 그의 살인까지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말 하자면 그가 자백하지 않는 한 오두복을 살해한 사건은 완전범죄로 굳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감옥에 들어가는 문은 하나이지만, 나가는 문은 열 개도 넘는다는 말이 있다. 약식 기소에 의한 벌금형, 기소유예, 선고유예, 집행유예 등에 다가 형이 확정된 뒤에도 형 집행정지, 감형, 보 석, 특사 등으로 감옥 문을 나올 수 있는데, 이러 한 석방에는 대체로 권력과 금력이 작용하기 때 문에 철창 안의 죄수들 사이에서는 "감옥으로 들 어오는 문은 하나이지만, 나가는 문은 열 두개다." 라는 말이 세상을 비꼬는 투로 회자되고 있는 것 이다. 사태를 파악한 하승일은 다음날 김호장을 면회 가서 변호사를 선임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호 장의 태도는 전날과 다름이 없었다. 침울한 기색 이 역력했고, 하승일이 묻는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기도 했다. 김호장은 변호사 선임 문제에 대해 서 반대하지 않았지만 흔쾌하게 받아들이는 태도 는 아니었다. 면회를 끝내고 돌아오면서 하승일은 이렇게 생각했다. <큰 일이다. 호장이가 와 저렇게 되었노? 무신 곡절이 있는 기가? 좌우지간 이해할 수 없다. 말 도 없어졌고, 그 자신 만만한 태도도 없어졌는 기 라! 할 수 없지. 우선 불부터 끄고 보자.> 그날부터 하승일의 활약이 시작되었다. 그의 목 표는 김호장을 석방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세도가도 그런 재주를 부릴 수 없다는 것쯤은 하 승일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노린 것은 김호장의 형량을 최대한도로 줄이는 것이었다. 하승일은 우선 부산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박찬 호(朴贊浩)변호사를 김호장의 변호인으로 선임했 다. 그리고 그는 암암리에 움직였다. 비밀스런 얘 기이지만 요소 요소에 돈도 뿌렸다. 박찬호 변호사는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출신으 로 해박한 지식과 고매한 인품을 겸비하고 있었 기 때문에 부산 지역에서는 대단히 존경받는 인 물이었다. 그는 불의와는 타협을 하지 않아 대쪽 같은 선비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또한 그는 예 리한 정치 분석력을 갖고 있어 시국 흐름을 잘 내다보았다. 5.16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그는 친 지들에게 "이제 이 땅의 민주주의는 죽었다. 두고 보아라. 박정희 소장은 반드시 독재자가 될 것이 다!"라고 예언했었다. 또 5.16 주도 세력이 인간개 조론을 명분으로 내걸고 이정재 등 거물 깡패들 을 붙잡아 서울 시내로 개 끌고 다니듯 가두 행 진시키자 그는 비록 사석이었지만 "이건 인권 유 린이다!"라고 개탄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훗날 박 정희 정권이 그의 예언대로 독재로 치닫자 그는 그 폭압성을 비판하며 시국사범 변론을 주로 맡 아 '인권변호사' 칭호를 얻었다. 5.16 쿠데타에 대해서 처음부터 냉소적으로 바라 보고 있 찬호 변호사는 하승일이 찾아가 김호장 사건을 설명하고 변론을 부탁하자 상당한 관심을 표명하며 쾌히 응했다. 그때 하승일은 김 호장의 여타 범죄 행각은 은폐시키고 그 사건을 설명한 뒤 이렇게 호소했다. "변호사님, 지 친구 호장이는 정말 죄가 없십니 더! 5.16 이전에 누구 좀 때린 것 때문에 감옥에 갔는데, 징역 살믄 그 죄는 끝나는 기 아닙니껴? 그란데 5.16이 터지고 3개월 후 호장이가 출감할 때 형사들이 형무소 정문을 지키며 또 잡으려 했 십니더. 이게 말이 됩니껴? 아무 죄도 없는 사람 을 또 잡으러 왔는데, 그라고 잡히면 골로 가는 기 뻔한데 누가 잡히려 하겠십니껴? 그래서 호장 이는 그 자리에서 형사들에게 한 방씩 먹이고 튀 어 버렸십니더. 그라고 그 뒤부터 내내 도피 생활 을 했십니더. 고생도 억수로 했십니더. 그러다가 부산에 와서 친구인 저의 도움을 받으며 숨어살 고 있었십니더. 그란데, 더 이상 숨어 살 수 없다 고 판단되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망간 겁 니다. 변호사님, 이게 무신 죄가 됩니껴? 엄밀하 게 말하면 정당방위 아닌교? 형사들이 영장도 없 이 체포하려고 했고, 또 잡히면 골로 가는 게 뻔 한데 도망 안 갈 사람이 있겠십니껴? 물론 형사 를 때린 건 잘못이지만 남자가 그 정도 기개는 있어야 되지 않겠는교? 지 친구 호장이는 정말 억울합니더! 변호사님, 호장이를 살려주십시오. 그 은혜는 죽을 때까지 안 잊겠십니더." 박찬호 변호사는 하승일의 열정적인 언변에 감 동을 받아 김호장을 돕기로 결심했다. 그는 하승 일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사건을 맡을 테니 걱정 마시오. 그리 고 그 피의자는 사정이 딱한 것 같으니 변호사 수임료는 안 받겠어. 그리고 친구를 위해서 이렇 게 정성을 쏟는 당신을 보니 내 기분이 좋소. 우 정이란 좋은 거요. 그 우정 변하지 마소." 하승일은 박찬호 변호사가 뜻밖에도 수임료를 안 받겠다고 말하자 감명을 받고 한동안 입을 열 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는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변호사님! 수임료는 내겠습니다! 지에게 그 정 도 돈은 있십니더. 변론만 잘 해주십시오. 친구를 위해 그 정도 돈도 안 쓴다면 친구가 아닙니다. 수임료를 받아 주십시오." 그러나 박변호사도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괘안타. 5.16이 일어나자마자 구악을 청소한다 고 깡패 소탕을 할 때 난 그걸 좋지 않게 본 사 람이야. 그와 같은 짓은 독재 국가에서나 하는 인권유린 행위야! 내게 생각이 있어서 수임료를 안 받겠으니 그리 알고 있게. 변론 걱정은 하지 말고." 하승일은 더 이상 우길 수 없어 존경 어린 시선 으로 박변호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고맙십니더. 그러나 그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 십니더. 지 친구 호장이도 의리가 있기 때문에 그 고마움을 잘 알 낍니더! 고맙십니더." 이렇게 되어 부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박찬호 변호사가 무료로 김호장 변론을 맡게 되었다. 그 리고 그 자체가 당장 부산 법조계에서 화제가 되 었고, 그 점도 결국 김호장 재판에 유리하게 작용 했다. 박찬호 변호사는 김호장 사건이 유죄 무죄를 따 질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법 률 구조 차원에서 그 사건을 맡았다. 그리고 그는 사건 수임 후부터 김호장에 떨어질 형량을 줄이 는 문제에 주력했다. 김호장의 재판이 열렸던 1964년의 봄은 때마침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들불처럼 번져 박정희정권 이 최초로 위기에 몰리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사 회적 분위기도 김호장에게 대단히 유리했다. 그리 고 박찬호 변호사는 그 사회적인 분위기를 십분 활용하여 변론 때 5.16 군사 정권을 비판했고, 특 히 인간 개조를 내세워 무자비하게 깡패소탕을 하면서 인권 유린을 자행한 군사 정권의 인권 탄 압 행위를 규탄했다. 그는 1심 변론 때 군사 정권 에 가장 비판적이었 동아일보를 들고 나와 그 신 문의 1면 칼럼 횡설수설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변론을 시작했다. 박찬호 변호사의 변론 모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동아일보는 작년 12월 11일에 발행된 것입 니다. 이 신문 1면에 매일 게재되는 횡설수설을 읽어보면 5.16 이후의 군정 2년 7개월을 이렇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아마 재판장님도 이 횡설수설 을 읽어보셨을 겁니다. 5.16으로 군정이 시작되면 서 군사 정권은 구악일소와 세대교차, 그리고 인 간개조를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칼럼은 군사정 권이 시도했던 그 세 가지 시정 목표의 결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 써 있는 그대로 한 번 읽어보겠습니 다. <.....먼저는 구악 일소에 대해서다. 그렇게도 발 설 직후엔 서슬이 퍼렇게 몰아대던 구악일소가 제대로 됐느냐 하고 따진다면 한마디로 해서 '아 니'다. 일소되기는커녕, 거기에 신악이라는 것이 생겨나서 구악에 가세를 하거나, 또 한 수를 더 떠서 활개를 쳐 왔다. 이 꼴을 보는 국민들은 구 악과 신악이란 것의 정의가 서로 뭣이 다르냐고 도의사전을 뒤져보기도 했다. 다음엔 세대교차에 대해서다. 이 말인즉 묵은 사 람, 때낀 사람, 늙은 사람들을 도거리로 배격하고 나서, 새 사람, 깨끗한 사람, 젊은 사람들이 들어 서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모 든 공직자들은 물론, 심지어 연부력강해지는 대학 교수들과 기술 부문의 사람들까지도 늙었다 해서 추방했다 간, 두 번 다시 되앉히는 등의 조삼(朝 三) 모사(暮四)하는 처사를 해 오지 않았는가. 끝으로 인간개조에 대해서다. 도대체 그 노력의 성과가 얼마만 했는진 모르겠으나 이것은 태무(殆 無)에 가깝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인 이 땅에서 도 대체 누가 누구를 개조하겠다는 것이냐는 비난과 항변의 화살을 빗발치듯 받던 인간개조론도 이젠 용의 대가리에 뱀 꼬랑지 격이 된 오늘이다.> 자, 여기까지만 인용하겠습니다. 재판장님! 여기 피고석에 서 있는 젊은이는 군정 2년 7개월 동안 그 인간개조론에 희생당했던 사람입니다. 형무소 생활을 마치고 출감하는 피고를 형사들이 형무소 앞에서 영장도 없이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인간 개조를 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말입니다. 그 러나 그 인간개조가 뭐였습니까? 잡아다가 몽둥 이로 패고 감옥에 보내는 것이 인간개조입니까? 피고는 5.16이 일어난 직후에 대구 형무소에서 몽 둥이를 맞고 반병신이 되어 들어오는 사람들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피고는 출감하자마 자 붙잡히면 끝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 니다. 그런데 이 피고가 출감하자 형사들이 권총 을 차고 형무소 앞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피고를 체포하려고 말입니다. 붙잡히면 끝장이라는 사실 을 잘 알고 있는 피고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좋 겠습니까? 재판장님, 이럴 땐 순순히 수갑을 차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생존을 위해 탈출해야 되겠 습니까? 피고는 탈출을 선택했습니다. 오직 살기 위해서 권총을 차고 체포하러 온 형사들을 주먹 으로 치고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장 장 1년 6개월 동안 도피 생활하다가 밀항선을 타 고 조국을 등졌습니다. 이 젊은이의 행위에 대해 서 누가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군사 정권을 비판하면서 시작된 박찬 호 변호사의 변론은 재판정을 압도했다. 판사들은 묵시적으로 박찬호 변호사의 변론에 동의하는 표 정이었고, 방청석은 그 변론에 압도되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하승일은 신이 나서 안달이 날 지 경이었지만 꾹 참고 변론을 경청했다. 그리고 변 론이 끝났을 때는 너무나 흥분돼 박수를 칠 뻔했 다. 그러나 피고 김호장만은 돌부처 같았다. 그 변론 이 끝날 때까지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서 있었고, 변론이 끝나고 간수들에게 끌려 퇴정할 때 하승일이 주먹을 쥐어 보이며 걱정하지 마라 는 신호를 보내도 별 표정이 없었다. 박찬호 변호사의 영향력과 하승일의 활약이 효 험을 발휘했는지 1심 재판에서는 김호장에게 징 역 4년이 선고됐고, 항소심에서는 징역 4년이 3년 으로 줄어들었다. 김호장은 대법원에 상고하는 것 을 포기해 결국 징역 3년이 최종 형량으로 확정 되었다. 송환된 직후부터 말이 없고 극도로 침울했던 김 호장의 태도는 재판이 끝날 때까지도 변하지 않 았다. 김호장의 그러한 태도를 보고 하승일이 내 심으로 가장 걱정했던 문제는 그가 혹시 오두복 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백할지도 모른다 는 것이었다. 하승일은 재판 기간 중 내내 그 염 려 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면회 가서는 김호장에게 종종 "마음 굳게 먹으래이. 모 든 건 다 지나간 문제니까 이젠 앞으로 살아가는 문제가 중요하대이!"라는 말을 했었다. 하승일이 그렇게 말해도 김호장은 별 반응 없이 그를 물끄 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하승일이 그 걱정에서 풀려난 것은 항소심이 끝 난 뒤였다. 재판이 끝난 다음날 면회 가자 김호장 은 상고를 포기하겠다고 밝힌 뒤 박명자에게 연 락해 달라는 부탁을 했던 것이다. 하승일은 그 부 탁을 받고 마음속으로 "이제 됐다!"라고 뇌까리며 이렇게 생각했다. <드디어 호장이가 옛날의 호장이로 돌아올 모 양이구나. 그 아가씨를 보고 싶다고 하는 건 변화 의 시작이다. 나는 정말 호장이가 자포자기 심정 으로 오두복을 죽였다고 자백할 것 같아 억수로 걱정했다. 이젠 됐다. 그 아가씨와는 서로 좋아하 는 사이 같으니까 아가씨가 면회 오면 잡념이 다 없어지겠지.> 이렇게 되어 하승일은 박명자에게 즉시 전화했 던 것이다. 김호장이 수감 된 뒤에 면회 온 사람은 하승일 뿐이었다. 김호장은 광주에 거주하고 있는 가족은 물론이고 옛 부하들에게도 전혀 연락을 하지 않 고 있었다. 하승일의 연락을 받은 박명자는 당일 야간 열차 를 타고 다음날 아침 7시 반에 부산진 역에 도착 했다. 그녀가 개찰구를 통과하자 하승일이 "안녕 하셨는교?"하며 그녀 앞에 나타났고, 그녀도 밝게 웃으며 "안녕하셨어요?"라고 인사했다. 하승일은 박명자의 구김살 없는 밝은 모습을 보고 김호장 이 여자를 잘 만났다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가십 시더."라고 말하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대합 실이 몹시 혼잡했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하승일은 역 광장으로 나왔을 때에 야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말했다. "면회가 시작되려면 아직 한 시간 남았십니더. 8시 반까지 형무소 앞으로 가면 되는데 그 동안 식사라도 하며 시간을 보냅시더. 아침 영업을 하 는 곳도 이 부근밖에 없으니까 우선 적당한 곳으 로 들어갑시더." 박명자는 밥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시간을 보낼 다른 방도가 없었으므로 하승일의 제의에 동의했다. "그렇게 하세요. 전 생각이 없지만 시간 보내려 면 그 방법밖에 없군요." 그들은 역 광장 옆의 해장국 전문 식당으로 들 어갔다. 식당에서 하승일이 주문을 한 뒤에 박명자가 조 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재판 뒷바라지에 고생 많으셨지요?" 그러자 하승일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닙니더. 그건 별일 아니었십니더. 문제는 호 장이의 심리 상탭니더. 전화로 말씸드렸지만, 뭘 물어 보아도 대답이 없을 때가 많고 송환된 이후 지금까지 웃는 것을 못 보았십니더. 이제 박명자 씨가 왔으니까 달라지겠지예." 박명자는 여전히 조심스런 태도로 그에게 물었 다. "어떻게 해서 잡혔대요?" 하승일은 그 질문에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대 꾸했다. "지도 모릅니더. 물어 보아도 대답을 안 하니까 알 수가 없지예. 송환되어 경찰서 유치장에 한 달 정도 있었던데 그때는 지에게 연락도 안했십니더. 얼마든지 연락이 가능한데 말입니더. 형무소로 넘 어간 뒤에야 지에게 연락했십디더. 이런 일이란 이전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더. 무신 심각한 고민이 있는 건지... 우쨌든 면회하실 때 위로 잘 해주이소. 지금 현재로선 호장이 마음을 풀어 줄 사람은 박명자씨밖에 없는 것 같십니더." 그 말을 듣고 박명자는 가슴이 덜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도 김호장의 그런 태도는 범 상하게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 문이었다. 그녀는 오빠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을 까, 라고 생각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해장국이 나왔고, 하승일은 "듭시더"라며 숟갈을 들었다. 그녀도 숟갈을 들었지만 마음이 전혀 내 키지 않았다. 그녀는 하승일을 위해 먹는 시늉만 했다. 식사가 끝난 뒤 그들은 택시를 타고 곧장 형무 소로 향했다. 그들은 택시 속에서는 운전수가 들 을까 보아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고, 8시 반이 조 금 지난 뒤에 형무소 앞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 리자 하승일은 박명자와 함께 면회 신청 창구로 가서 박명자 이름으로만 면회 신청을 했다. 그들 은 특별하게 나눌 얘기가 없었으므로 대기실 의 자에 앉아 호명하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이윽고 박명자 이름이 호명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하승 일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하승일은 "혼자 들어 가 시소. 지는 여기서 기다리겠십니더."라고 말했다. 박명자는 그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한 뒤 면 회실로 들어갔다. 박명자는 면회실로 들어선 순간 철망 건너편에 서 있는 김호장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는 김호 장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읽었다. 그녀는 "오빠!" 하며 철망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김호장은 입 술을 지긋이 한 번 깨문 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와 주어서 고맙다." 박명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오빠, 용기 잃지마! 3년은 아무것도 아니잖아." 김호장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시니컬한 미소를 지은 뒤 말했다. "너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와 달라고 했다. 우리 계획은 깨졌으니까 이제 나를 잊어라. 그리고 좋 은 사람 만나 빨리 시집이나 가거라. 이 말을 하 고 싶어서 너에게 연락한 거야." 박명자는 김호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호하 게 말했다. "그건 내 마음이야! 나는 오빠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어. 오빠가 싫다 해도 나는 계속 면회 올 거야!" 김호장은 박명자의 단호한 태도를 보고 잠시 눈 을 지긋이 감았다. 그리고 내뱉듯 말했다. "내 말 들어라.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너와 했 던 약속은 산산조각 이 났어. 이제 그 약속은 없 었던 걸로 하고 너는 니 갈 길을 가거라. 너를 한 번은 만나 이 얘기를 해야 될 것 같아 연락했던 거야. 내 심정 이해하고 내 말 들어!" 그러자 박명자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밖에 하승일씨도 와 있어. 오빠가 이전과 달라 졌다는 얘기도 들었어. 지금 내가 보기에도 오빠 모습은 예전과 달라. 그러나 오빠가 어떻게 변했 건 나는 기다릴 거야. 이렇게 된 건 오빠 잘못이 아니잖아. 오빠, 기죽지 말고 용기를 내!" 박명자가 말을 끝내자 김호장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박명자 가 애원하듯 다시 말했다. "오빠, 제발 용기를 잃지마! 오빠답지 않게 이 런 일 정도로 왜 힘이 없어? 용기를 내!" 그때 간수가 면회 시간이 다 됐다고 했다. 그러 자 김호장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 어 버렸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 렀는데, 간수는 박명자를 쳐다보며 매정하게 "시 간 지났소."하며 손짓으로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 다. 박명자는 다시 김호장에게 "오빠, 오늘은 이만 갈게."라고 말했고, 김호장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 만 한 번 끄덕인 뒤 뒤돌아 섰다. 박명자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면회실에서 나왔다. 박명자가 면회실에서 나오자 하승일이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어떻십디껴? 호장이가 이전과 분명히 달라졌 지예?" 박명자는 어두운 표정으로 힘없이 대답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요." 그러자 하승일은 혼잣말처럼 "우짤꼬. 그 놈아가 와 그리 됐노."라고 중얼거린 뒤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는 곧이어 박명자를 이렇게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이소. 이제 재판이 끝났으니 점차 나아질 낍니더. 그라고 박명자씨를 만날 생 각을 한 것 자체가 좋아질 징조니까 큰 걱정 안 해도 될 낍니더. 지도 좋은 방도를 연구해보겠습 니더. 자, 그라믄 이제 시내로 나갑시더." 그들은 면회 대기실에서 나와 아무 말 없이 버 스 정류장까지 걸었는데, 박명자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 하승일에게 이렇게 말했다. "호장이 오빠는 저보고 자신을 잊고 시집가라 는 말을 하기 위해 저를 부른 것 같았어요. 그러 나 저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어요. 제 결심은 확고해요. 전 오빠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그리고 앞으로 3년간 옥바라지는 제가 맡겠어요. 오늘은 서울로 바로 올라갔다가 모레 다시 내려 오겠어요. 그땐 부산에서 며칠 묵으면서 오빠를 날마다 만나고 싶어요." 하승일도 그 의견에 찬성했다. "가게 일에 지장이 없으시면 그 방법도 좋겠십 니더. 호장이는 상고를 포기했으니까 형이 확정되 면 바로 다른 곳으로 이감갈 겁니더." 그때 버스가 도착하여 그들은 차에 올라탔다. 하 승일은 박명자와 함께 역까지 나가 그녀를 배웅 했다. 박명자는 이틀 후에 부산에 다시 내려와 여관에 묵으면서 일주일간 날마다 김호장을 면회했다. 이 기간 동안에 김호장의 태도가 약간 변했다. 김호 장은 그녀가 부산에 다시 내려와 면회하자 의외 라는 반응을 보이며 자신을 잊고 시집가라는 말 을 또 되풀이했지만 박명자는 그 말에 개의치 않 고 여유 있게 받아넘겼다. 그녀는 애교 있는 미소 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시집가고 안 가고는 내 마음이야. 오빠에게 이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아무에게나 시집 안가! 물 론 오빠가 받아 주면 시집가겠어. 앞으로 3년간 오빠 뒷바라지는 내가 할거야. 이건 오빠에게 시 집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빠의 은혜를 갚기 위 해서야. 오빠만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야. 나 도 은혜에는 보답할 줄 아는 여자야. 오빠는 내가 면회 오더라도 부담 가질 필요가 없어. 난 내가 입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오는 거니까." 김호장은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기만 하고 아 무 말 안했지만 표정은 싫어하는 기색이 아니었 다. 그는 침묵을 지키다가 "가게는 어떻게 하고 또 왔니?"라고 화제를 돌렸다. 박명자는 그 말에 도 여유 있게 대꾸했다. "오빠는 그 문제도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그 정도 일 처리도 못할 줄 알아? 난 부산에서 일주 일간 머물다가 올라갈 거야. 날마다 면회 오고. 그리고 곧 이감갈 거라는데 그러면 그곳으로 또 면회 갈 거야. 오늘 영치금도 넣었어. 내의도 영 치시켰고. 필요한 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줘. 난 은혜를 갚을 좋은 기회를 만났으니까 내가 할 도리를 다 할 꺼야." 김호장은 박명자의 얘기를 듣고 어렴풋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표정에 박명자 의 말을 거부하겠다는 기색이 안 보였다는 점이 었다. 그는 이전과 다르게 말없이 박명자를 쳐다 보기만 했으나 그의 눈빛은 그녀가 귀엽다는 생 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 면회 이후 박명자는 김호장을 다섯 번 면회 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물론 그 기간 중에 두 번 은 하승일과 함께 면회했다. 하승일은 박명자와 함께 면회한 이후에는 큰 걱정을 덜었다는 반응 을 보였다. 두 번째 함께 면회하고 나오면서 그는 웃으며 박명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제 안심됩니다. 지는 호장이 때문에 정말 억 수로 걱정했십니더. 그러나 이제 희망이 보입니 더. 지가 혼자 면회할 때는 뭘 물러 보아도 대답 도 안하더니 이제 말도 쪼매 하고 얼굴도 전보다 는 밝아졌십니더." 박명자도 김호장이 처음과는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그의 말에 동감을 표시 했다. "뭔가 변화가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정성을 쏟으면 더 좋아지겠지요. 그런데 일본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오빠가 저렇게 됐을까요?" 하승일은 그 물음에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 는 김호장의 예전과 달라진 모습의 배경에는 일 본에서의 일보다 오두복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말을 얼버무렸다. "그건 도무지 알 수 없십니더. 일본에서 살겠다 는 계획이 무너졌다고 해서 저렇게 됐다고 해석 하기에는 앞뒤가 잘 안 맞고...좌우지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본인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까 도무지 알 수 없십니더. 그러나 이젠 신경 쓸 필요는 없 십니더. 호장이가 박명자씨를 만난 이후부터 분명 히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는 조짐을 보이고 있으 니까요. 우쨌든 애인이 좋긴 좋은 모양입니더." 박명자는 그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얼굴을 약 간 붉혔다. 김호장은 형이 확정되자마자 대전 형무소로 이 감됐다. 하승일은 그 사실을 알고 즉시 대전 형무 소로 면회 다녀온 뒤 박명자에게도 그의 이감을 알려 주었다. 그 연락을 받자마자 박명자도 즉시 대전으로 내려가 김호장을 면회했다. 그 면회 때 김호장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박명자가 면회 온 것에 대해서 흐뭇해하는 기색 이 역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면회 시간이 끝 날쯤에는 "명자야, 이제 면회 더 오지 말고 너의 일이나 열심히 해라. 그리고 시집도 빨리 가는 게 좋아."라고 말했지만, 그 어조는 매우 부드러웠다. 그리고 박명자가 그 말에 애교스럽게 웃으며 "난 오빠 아니면 어느 누구와도 결혼 안 할 거야."라 고 받아넘기자 김호장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면회 시간이 끝나고 박명자가 면회실에서 나오려 할 때 김호장은 그녀에게 "기차로 올라가니?"라고 묻고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심해서 가거 라."라고 말했다. 그녀도 "또 올께"라고 말한 뒤 면회실에서 나왔다. 김호장은 이감된 이후에도 가족이나 광주 쪽 친 구들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래서 그의 면 회 기록에는 박명자와 하승일의 이름만 계속해서 올랐다. 박명자의 김호장에 대한 옥바라지는 매우 헌신 적이었다. 영치금은 하승일이 넉넉하게 넣어 주었 지만 그녀도 면회 때는 어김없이 영치금을 넣고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면회 때까지는 틈만 생기 면 김호장에게 편지를 썼다. 김호장은 그녀에게 답장을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답장을 쓰지 못 한 것에 대해서 한 번은 이렇게 사과했다. "편지 잘 받아 보았다. 너 글 참 잘 쓰더라. 그 러나 난 원래 글을 못 쓰니까 편지 같은 건 쓰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편지를 써 본 일이 없는 사 람이니까 내 답장이 없더라도 오해는 하지 마라." 박명자도 답장을 기대하고 편지를 보낸 것은 아 니었으므로 "난 오빠가 내 편지를 읽어 주는 것 만도 고마워."라고 받아넘겼다. 아무튼 박명자의 헌신적인 정성 때문에 김호장 의 그녀에 대한 태도가 점차 달라졌고, 달이 서너 번 바뀐 뒤부터는 그녀의 면회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는 점차 더 끈끈해지기 시작했다. 박명자는 비가 오나 눈 이 오나 면회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김호장을 면 회했다. 김호장은 대전 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을 보낸 뒤 대구 형무소로 이감됐다. 대구 형무소 관계자들은 김호장이 이감 오자 4년 전 그가 출감할 때 형무 소 앞에서 형사들을 때려눕히고 도망갔던 일을 상기하고 긴장했지만, 김호장의 수형 태도가 예전 과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보고 모두 놀랬다. 예전의 그 맹수 같았던 그의 모습은 없어지고 모든 면에 서 모범수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간수들이 보기에는 김호장은 엄연한 범털이었지 만 그 자신은 그걸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수도하는 사람처럼 수형 생활을 했다. 돌부 처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동면하는 동물처럼 모 든 의식이 중지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루종 일 눈을 감고 지내다가 박명자의 편지를 받으면 그 편지를 읽고 또 읽는 것이 그의 유일한 활동 이었다. 예전처럼 누구를 때리거나 욕을 하는 일 도 없었다. 간수들은 그의 이감 초기에는 그의 돌 변한 태도를 보고 무슨 술책이 아닌가, 하고 의심 했지만 한 달쯤 지나자 모두 그 의심을 풀었다. 그리고 간수들끼리 모이면 그가 화제에 오를 때 가 많았다. "김호장이가 와 저리 됐노?" "붙잡혀 억수로 당했나?" "우쨌든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김호장이 저렇게 변하다니!" 그들은 나름대로 그의 돌변한 태도에 대해서 나 름대로 해석을 해 보았지만 어느 것도 사실과 맞 지 않았다. 그런데, 그 대구 형무소에서 출감 석 달을 앞두 고 김호장에게 뜻밖의 인물이 찾아왔다. 그날은 박명자가 면회 왔던 날이었다. 그녀가 아 침 일찍 면회를 끝내고 돌아간 후에 간수가 또 그를 데리러 왔다. 보안과장실에 누군가가 와 있 는데, 그가 김호장을 만나려 한다는 것이었다. 형 무소 안의 기결수들에게 이런 일이란 거의 없기 때문에 김호장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간수를 따라 갔다. 보안과장실로 들어서자 백발이 희끗희끗한 신사 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신사는 김호장이 들 어서자 의자에서 일어서며"오랜만이오."라고 말을 걸었다. 그러나 김호장은 그 신사를 전혀 기억할 수 없었으므로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 신사가 다시 말했다. "기억을 못하시구먼. 나는 밀양 운천의 한광석 목사요. 방금 요 앞에서 청년이 나에게 헌금 심부 름을 시켰던 박명자씨를 만나 얘기를 들었소. 마 침 보안과장님 뵐 일이 있어 들어왔다가 청년을 만나고 싶어 특별히 부탁해 본 거요.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소." 김호장은 한광석 목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 예. 몰라뵈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들은 보안과장 소파에 앉았다. 5.16 직후의 보 안과장은 전보 가고 새 보안과장이 와 있었지만 그도 김호장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 호장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는 두 사람이 인 사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다가 둘만이 얘기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었다. 보안과장이 나가자 한광석 목사는 "그때 헌금 받은 뒤 꼭 한 번 만나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 는데, 그 말을 듣고 김호장은 고개를 떨구며 "죄 송합니다. 저도 떳떳하게 한 번 찾아 뵙고 싶었는 데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한광 석 목사와 김호장은 잠시 그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잠자코 있었다. 김호장은 고개를 들지 못했고, 한 광석 목사는 측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 끝에 한광석 목사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청년과 나는 인연이 있는 것 같소. 이 대구 형무소 형목이 내 친구인데, 바쁜 일이 생겨 나에게 목회를 부탁했기 때문에 이곳에 오 게 되었다가 박명자씨를 만나게 되어 청년을 다 시 볼 수 있게 된 것이요. 이런 인연도 참 드물 것입니다. 아무튼 나도 이제부터 청년을 위 해 기 도 드리겠소." 한광석 목사의 말을 듣고 김호장은 고개를 들었 다. 그러나 그는 한목사에 대한 존경의 표정만 지 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광석 목사도 잠시 후 시계를 본 뒤 약속이 있다며 일어섰다. 한광석 목사는 그날 김호장에게 하느님을 믿으 라는 등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형무소 밖으로 나간 뒤 성경 한 권을 사서 김호장에게 영치시켜 주고 운천으로 돌아갔다. 김호장은 그 성경을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명자가 다시 면회 왔을 때 그는 한광석 목사와 그 성경 얘기부터 꺼냈다. "너 지난번에 왔을 때 요 앞에서 운천의 그 목 사를 만났다며?" 박명자는 그 말에 깝짝 놀라며 그에게 물었다. "오빠가 어떻게 알지?" 김호장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 목사님이 너에게서 얘기 듣고 알았다며 나 를 찾아왔어." 박명자는 더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목사님이 오빠를 면회 왔다고?" 김호장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보안과장실에서 나를 데리러 와서 가 보았더 니 그 목사님이 나를 불렀더라. 너에게서 내 얘기 를 듣고 나를 만나고 싶었대. 나는 그저 죄송하다 는 말만 했지." 박명자는 감탄하는 소리로 말했다. "그랬구나! 지난 번 면회 왔을 때 요 앞에서 목 사님을 만났잖아. 내가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드 렸더니 무슨 일로 왔냐고 물으시기에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말씀드렸지. 그랬더니 오빠를 특별 면회 하신 모양이구나." 박명자의 말이 끝나자 김호장이 다시 말했다. "특별 면회뿐만이 아니야. 돌아가실 때 나에게 성경을 넣어 주시고 가셨더라. 성경이 새것인 걸 보면 시내 서점에서 사서 넣어 주신 것 같아. 아 무튼 그 목사님으로부터 성경을 두 권째 받았으 니 이게 무슨 인연일까?" 박명자가 그 말에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오빠는 그 성경을 읽어야겠다." 그러자 김호장은 코웃음치며 말했다. "읽긴 뭘 읽어! 첫 번째 것은 청학동에서 도망 나오다가 잃어 버렸지만 이번 것은 간직했다가 출감하면 너에게 선물로 줄란다." 그 말을 듣고 박명자는 즐거운 표정으로 대꾸했 다. "그래도 좋아! 오빠가 주는 선물이라면 사양하 지 않고 받겠어." 그들은 이때만 해도 한광석 목사와 그후 다시 인연을 맺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김호장의 인생 행로는 이미 그 훨씬 이전부터 한 광석 목사와 다시 인연을 맺는 길로 향하고 있었 다. 김호장은 3년 복역을 마치고 1967년 봄에 만기 로 출감했다. 그가 출감하던 날에는 박명자는 물 론이고 결혼한 하승일이 그의 부인과 함께 형무 소 앞에서 밝은 세상으로 나오는 그를 맞이했다. 그들은 그 길로 부산 해운대로 가서 김호장의 출 감 환영회를 가졌다. 제20장 복수의 불꽃 다시 타오르다 해운대 관광호텔에 도착할 때까지도 김호장은 말이 거의 없었다. 그는 하승일이 농담을 하면 웃 기는 했지만, 그러나 웃음을 멈춘 뒤에는 곧바로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곤 했다. 그의 표 정을 놓치지 않은 하승일은 기회를 엿보다가 나 이트클럽에서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다. 그는 김호장과 단둘이 얘기를 하 기 위해 여자들은 먼저 룸으로 보내자고 제안했 다. "박명자씨는 피곤하실 텐데 룸에 먼저 올라가 쉬시지요." 그리고 그는 자신의 부인에게도 "당신도 먼저 쉬어라. 우린 쪼매 더 있다가 올라가겠다."라고 말 했다. 눈치 빠른 박명자는 즉시 "그렇게 하세요."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하승일 부인도 따라 일 어섰다. 하승일은 김호장과 둘만이 남자 그 에게 바짝 다가앉으며 물었다. "자, 이제 얘기 좀 해 다오. 일본에서 우째 체포되었노?" 묵묵히 술만 마시던 김호장은 그 질문에 하승일 을 잠시 쳐다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궁금했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게 다 오두 복 때문이었어!" 하승일이 즉시 반문했다. "오두복이라니? 무신 말이야? 그 놈 시체는 안 떠올랐다고 내가 알려 주었는데." 김호장은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넌 사람을 안 죽여 보아서 내 심정을 모를 거 다. 일본에 도착한 뒤 한 달 후엔가 너한테서 오 두복의 시체가 영영 안 떠오를 것 같다고 연락 받았을 거야. 그런데 묘하게 그때부터 그 놈 생각 이 자주 나는 거야. 특히 잠자기 전에는 어김없이 그 놈 얼굴이 떠오르는데 나중엔 미치겠더만. 그 래서 잠자기 전에 술을 마시는 버릇이 생겼다. 술 을 마시지 않고는 잠이 안 오는 거야. 좌우지간 잠자기 전에 술을 마셨더니 차츰 그 놈을 잊을 수 있었지. 그런데, 내가 혼자 외출했다가 골목에 서 일본 경찰과 딱 마주쳤을 때, 그 놈 생각이 딱 떠오른 거야! 그러니까 내 행동이 이상해졌지. 그 러자 일본 경찰이 즉시 불심 검문을 하더라. 증명 을 보자는 거야. 예전 같았으면 단번에 한 방 먹 이고 튀었겠지. 그런데 이상하게 내 몸과 주먹이 굳어져 버려 꼼짝못하고 체포되고 말았지. 한 방 먹이려고 했을 때 오두복이가 이 주먹 맞고 죽었 다는 생각이 번뜩 떠오름과 동시에 주먹이 말을 안 들은 거야! 그래서 체포되고 말았지." 하승일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 얘기를 듣고 난 뒤 다시 물었다. "그라믄 송환된 직후에 와 나에게 연락 안했 노? 경찰서 유치장에 한 달 정도 있으면서 와 연 락 안했노?" 김호장은 다시 술을 한 잔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연락이고 뭐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밤마다 또 그 오두복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정말 미 치겠더라. 그리고 주먹 하나 믿고 살아왔는데, 그 주먹을 이젠 쓸 수 없다고 생각하니 살맛도 안 나고 말이야." 하승일은 이해가 간다는 의미로 연신 고개를 끄 덕인 뒤 다시 말했다. "그라믄 이제 쪼매 괘안나?" 김호장은 한숨을 한 번 쉰 뒤 말했다. "세월이 약인지 이제 조금 괜찮다. 그러나 이제 주먹 휘두르며 살수는 없지." 하승일은 술을 한 잔 들이킨 뒤 김호장에게 잔 을 주며 물었다. "그라믄 앞으로 뭐 할 꺼고? 박명자씨와 결혼 은 퍼뜩 하는 기 좋겠고, 그 다음엔 뭐 할 꺼고?" 김호장은 다시 술을 한 잔 마신 뒤 하승일에게 잔을 건네며 말했다. "명자가 고생 많이 했지. 참 좋은 여자야. 결혼 해야 되겠지만 내가 벌이가 있어야 결혼 생활을 하지. 감옥에서 생각한 건데 명자와 어디 시골에 가서 과수원이나 하며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 이 했지. 너도 알지만 이북에서 우리 집은 과수원 을 했잖아. 나도 아버지처럼 과수원이나 하며 살 고 싶은데 말이야...." 하승일이 그 말을 받아 힘있게 말했다. "과수원을 하고 싶으면 해라. 돈은 걱정 마라. 석배가 나에게 가방을 맡겨 놓았었는데, 너 일본 으로 가고 한참 후에 그 사실을 알고 가방을 열 어 보았더니 예금통장과 도장이 있더라.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이 육백오십만 원이나 되더라. 그래 서 니가 감옥에서 나오면 주려고 내가 그걸 찾아 돈을 불렸지. 지금은 니 이름으로 천만 원이 넘는 돈이 예금되어 있다. 내일 그 통장을 줄 테니 그 돈 찾아서 니가 하고 싶은 과수원을 해 보아라." 김호장은 그 말을 듣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어 떤 감회가 찾아오는지 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 겨 있었다. 하승일이 그들 사이의 침묵을 깨고 다 시 말했다. "어차피 공중에 뜬 돈이니까 그 돈은 니 돈인 기라. 딴 생각하지 말고 그 돈으로 과수원이나 해 라. 명자씨와 결혼도 하고. 그 정도 돈이면 뭐든 지 할 수 있다." 김호장은 아무 대꾸 없이 그대로 있다가 눈을 뜨며 하승일에게 말했다. "그 동안 종태는 한 번도 연락 없었나?" 하승일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피신했으니 연락할 생 각도 몬 했겠지. 그라고 아까 오면서 얘기했지만 나도 가게를 옮겼기 때문에 연락하고 싶었어도 연락할 수 없었을 거야." 김호장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종태도 보고 싶고 억만이도 보고 싶다. 억만이 는 내가 집을 알고 있으니까 서울 올라가면 만날 수 있을 거야. 세월 참 빠르다. 우리가 헤어진지 벌써 4년이 넘었으니 말야." 하승일은 김호장의 기분이 약간 호전되었다고 판단하고 잔을 들며 말했다. "자, 건배나 다시 한 번 하고 룸으로 올라가자. 명자씨가 기다리겠다. 자, 출감을 진심으로 축하 한다." 김호장은 그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치며 "고 맙다."라고 말했다. 다음날 하승일은 예금통장과 도장을 김호장에게 넘겨주었다. 김호장은 해운대에서 하룻밤을 더 자고 박명자 와 함께 서울행 특급열차를 탔다. 그는 열차 속에 서 묵묵히 창밖만 내다보다가 기차가 안동을 막 지났을 때 박명자에게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명자야, 우리 어디 시골에 가서 과수원이나 하 면서 살면 어떻겠니?" 박명자는 그의 의견에 즉시 찬성했다. "오빠도 정말 시골에서 살고 싶어? 나도 사실 그 꿈을 꾸고 있었는데..." 김호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니 생각도 그렇다면 연구해 보자. 과수원 하나 살만큼의 돈은 있다. 서울 올라가면 어디 가서 살 건지 연구해 보자. 서울에서 나는 당분간 하숙하 며 그 문제를 연구할란다." 박명자는 김호장의 말이 사실상 두 사람의 결혼 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김호장을 그윽한 눈길 로 쳐다보며 한 손으로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박명자는 김호장의 출감 전부터 그의 장래를 걱 정하고 있었다. 그가 출감한 이후에 또 예전 사람 들과 어울려 지낸다면 장차 좋지 못한 일이 또 벌어진다는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둘이 함께 어디 먼 곳으로 가서 사는 게 가장 현명한 일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호장이 반대하면 그것이 성사될 수 없 다는 것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도 김호장의 입에서 먼저 시골 가서 살자는 말이 나왔기 때문에 그녀는 내심으로 감격했고, 가슴이 부풀기 시작했다. 그때 김호장이 다시 입을 열었 다. "기차가 방금 안동을 지나갔지?" 박명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호장이 그녀를 쳐 다보며 말했다. "이곳 저곳 생각할 것 없이 한광석 목사가 있 는 운천에 가서 살면 어떻겠냐?" 박명자는 그 말에 즉시 찬성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보다 한 목사님이 계신 곳이 좋겠네. 우리가 한 목사님과 아는 사이이니까 그곳 사람들도 우리를 경계하지 않고 믿겠지. 오빠 생각 잘 했다. 운천 이 정말 가장 적당한 곳인 것 같애.." 김호장은 박명자가 좋아하자 빙긋이 웃으며 말 했다. "너를 위해 그 생각을 했다. 우리가 거기에 가 서 살게 되면 넌 예수꾼이니까 한 목사 교회를 다녀라. 그분은 정말 존경스런 분이야." 박명자는 또 김호장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 다. "오빠는 어떻게 운천에 가서 살 생각을 했어?" 그 질문에 김호장은 그 특유의 퉁명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방금 기차가 안동을 막 지나갔을 때 얼핏 그 생각이 났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보다도 존경스런 분 옆에서 살면 좋겠지. 승일이가 있는 부산과도 가깝고. 승일이도 참 좋은 친구야. 좌우 지간 일단 운천으로 정해 놓고 더 연구해 보자." 김호장의 말에 박명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했다. 그녀는 김호장의 성격을 잘 알 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김호 장도 할 말 다 했다는 듯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서울에 도착한 뒤 김호장은 박명자의 의견을 쫓 아 명동과 가까운 회현동에서 하숙집을 구했다. 그는 당일로 이불과 일용 도구를 사 들고 새 하 숙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 날밤 감회에 젖어 잠을 쉽게 이루지 못 했다. 이불을 깔고 누워 잠을 청하려고 하자 밀려 오는 온갖 상념 때문에 잠을 쉽게 이룰 수 없었 던 것이다. 그는 비로소 그날 밤에야 자신이 밝은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했고, 도피 생활 때의 온갖 일들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특히 황종태의 모습이 그의 뇌리 속에서 자꾸 어 른거렸다. 황종태가 서울로 그를 찾아와 밀수품을 털자고 제의했을 때부터 시작하여 그 이후의 일 들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었고, 마지막 이별 때 그가 택시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던 모습 도 눈에 선했다. 물론 감옥 속에서도 그는 가끔 황종태를 생각하 곤 했었다. 그러나 황종태를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승일에게 고백했듯이 그는 그의 주먹을 맞고 죽어 버린 오두복의 악몽에 시달리 고 있었고, 그로 인해 그는 모든 것을 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밝은 세상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하숙집을 구해 혼자 누워 있자 갑자기 황종태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김호 장이 황종태를 아끼는 마음은 전혀 식지 않았던 것이다. 김호장은 황종태의 대범하고 깔끔한 품성과 과 묵한 태도도 좋아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외로움 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김호장은 황종태 에 대해서는 형제애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김호장은 잠들기 전에 다음날은 억만이 를 찾아보리라고 마음먹었다. 다음날 아침에 김호장은 아침밥을 먹고 난 뒤 왕십리에 있는 억만이 집을 찾아가기 위해 하숙 집을 나섰다. 골목을 벗어나 퇴계로로 들어섰을 때 그는 거리에 붙어 있는 현수막들을 보고 선거 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현수막과 벽에 붙어 있는 출마자들의 사진들을 본 순간 야 릇한 감회를 느꼈다. 그는 4.19 직후의 민의원 선 거를 본 이후 실로 오랜만에 선거 풍경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김호장은 곧바로 버스를 타지 않고 5월의 싱그 러운 아침 공기를 마시며 거리를 슬슬 거닐었다. 그러다가 선거 벽보 앞에서는 출마자들의 사진을 보기도 했다. 그는 선거 벽보를 읽고 그 선거가 국회의원 선거이며 선거일은 다음달 6월 10일이 라는 사실을 알았다. 김호장은 걸어서 명동을 지나 을지로 입구에서 버스를 탔다. 왕십리에서 내려 억만이 집에 찾아 가자 이른 아침이었지만 김호장의 예상과 달리 억만이는 집에 없었다. 다행히 그의 모친은 김호 장을 알아보고 매우 반가워하며 억만이가 중앙시 장에서 정육점을 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김호 장은 곧장 중앙시장 안에 있는 억만이의 정육점 으로 찾아갔다. 억만이는 가게 안으로 김호장이 들어오자 깜짝 놀라며 소리질렀다. "너 호장이 아니냐!" 김호장이 빙긋이 웃으며 손을 내밀자 억만이는 그의 손을 잡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언제 돌아왔나?" 김호장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지금 바쁜 시간이지?" 그러자 억만이가 눈치를 채고 말했다. "괜찮다. 아무리 바빠도 대장이 왔는데 그냥 보 낼 수 있나. 조금 기다려라. 아침이니깐 술을 마 실 수는 없으니 다방에라도 가서 얘기하자." 그리고 그는 가게 안에 딸려 있는 방 쪽을 향해 "여보! 빨리 나와 봐라."라고 소리질렀다. 그러자 방문이 열리며 젊은 여자가 나왔다. 억만이는 그 여자에게 "여보, 인사해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 구 호장이가 왔다."라고 말했다. 여자는 환하게 웃 으며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라고 공손 하게 인사했고, 김호장은 야간 어리둥절해 하며 그 인사를 받았다. 억만이는 소개가 끝나자 여자 에게 "나 좀 나갔다 올게 가게 잘 보고 있거라." 라고 말하며 김호장의 손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가게 밖으로 나온 뒤 김호장은 억만이에게 "언제 결혼했나?"라고 물었는데, 억만이는 씩 웃으며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그냥 같이 살고 있는 거 지. 그러나 저 여자는 내 마누라가 될 꺼다."라고 대꾸했다. 김호장은 그 말을 듣고 빙긋이 웃으며 "예쁘게 생겼다. 너와 잘 어울린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곧바로 시장 입구에 있는 다방으로 들어 갔다. 억만이는 다방 안에서 마주 앉자마자 근심 어린 표정으로 김호장에게 물었다. "니 걱정 많이 했다. 그런데 이렇게 돌아다녀도 괜찮나?" 김호장은 그 질문에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괜찮으니까 너를 찾아왔지. 이제 모든 게 깨끗 해졌으니까 자세한 건 묻지 말고 그 점만 알고 있거라." 단순한 억만이는 그 말에 탄복하는 어조로 말했 다. "역시 대장은 다르다! 자세한 걸 아는 건 나도 골치 아프다. 괜찮아졌다면 나도 이제 니 걱정 안 하겠다." 말을 마친 억만이가 환하게 웃으며 다시 재회의 반가움을 표시하자 김호장도 씩 웃었다. 그런데 레지가 탁자 위에 커피를 놓고 간 뒤 억 만이 입에서 먼저 황종태 얘기가 나왔다. "참 내가 종태를 두 번 보았다." 김호장의 눈이 커지며 즉시 물었다. "그래? 종태는 지금 뭐하니?" 억만이는 그 질문에 고개까지 흔들며 대답했다. "종태를 만난 게 아니고 버스 속에서 그냥 보 았던 거야. 버스 타고 종로를 지나가며 두 번이나 보았다. 첫 번째는 정류장에서 곧바로 내려 뛰어 가 보았더니 이미 어디로 가 버렸고, 두 번째는 종태가 택시 타는 것을 보았다. 그것도 버스 속에 서 보았지. 두 번 다 장소는 화신 백화점 부근이 었다." 김호장이 다시 물었다. "그게 언제야?" 억만이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이렇게 대꾸 했다. "첫 번째는 우리가 헤어지고 일년쯤 됐을 때였 고, 두 번째는 작년 겨울이었다." 김호장은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그 여자가 종로에서 양품점을 하고 있는 모양 이구나. 그렇다면 종태를 찾는 일이 어려운 일은 아니겠다. 한 번 찾아보자. 종로통을 훑어보면 그 여자를 찾을 수 있겠지. 종태는 그 여자와 지금도 살고 있을 거니까 그 여자만 찾아내면 종태를 만 날 수 있을 거다.> 김호장은 억만이에게 시골에서 과수원을 하겠다 는 자신의 계획은 말하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그 는 그 사실을 하승일 이외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억만이의 생활을 이것저것 물어 본 뒤 "갈 곳이 있으니까 다음에 만나자"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억만이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그래 곧 다시 마나 술 한 잔 하자."라며 따라 일어섰다. 다방 앞에서 헤어질 때 김호장은 다시 찾아오겠 다는 말을 남기고 억만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억 만이는 김호장이 약속을 잘 지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손을 잡으며 "정말 반갑다. 다음에 만나면 술 한 잔 꼭 하자."라고 말했다. 억만이와 헤어진 뒤 김호장은 할 일이 없었으므 로 그날 오후부터 종로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는 종로 3가에서부터 광화문까지 양품점마다 기 웃거리며 손경자를 찾고 다녔다. 그러나 허사였 다. 종로의 양쪽 대로변의 양품점을 다 살펴보았 지만 손경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 날은 종로통의 골목골목까지 누비고 다 녔지만 그것도 허사였다. 그러나 3일째 되던 날 김호장은 드디어 손경자를 찾아냈다. 손경자는 양 품점이 아니라 금은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 소는 화신 백화점에서 종로 3가 쪽으로 50여 미 터 떨어진 곳이었다. 그녀는 황종태가 처분해 달 라고 부탁했던 금괴 중 자신의 몫이었던 금괴 50 킬로그램을 활용하기 위해 금은방을 차렸던 것이 다. 그녀는 그 금괴를 친정집 벽장 속에 숨겨 놓 았었다. 김호장은 종로통의 양품점마다 기웃거리며 손경 자를 찾아보았지만 계속 허탕을 치자 거의 포기 상태였다. 그런데 종로 2가에 있는 그 금은방 앞 에서 언뜻 안을 들여다본 순간 손경자와 눈이 마 주쳤다. 그러나 손경자는 김호장을 알아보지 못했 다. 김호장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손님 인 줄 알고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했다. 김호장 은 조심스럽게 손경자에게 말을 붙였다. "혹시 부산에서 살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을 듣고 손경자는 당장에 경계의 빛을 띄 면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 녀도 김호장을 알아보고 소리지르듯 말했다. "이게 누굽니껴? 종태 형님 아닙니껴?" 김호장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종태도 잘 있고요?" 그 말에 손경자의 얼굴이 금새 어두워지며 힘없 는 소리로 되물었다. "종태 소식 정말 모릅니껴?" 김호장은 약간 의아하게 생각하며 대꾸했다. "종태 소식이라니요? 저는 종태 만나고 싶어 이 종로에 있는 양품점을 다 돌아다녔습니다. 혹 시 양품점을 하고 계실 것 같아서..." 그 말을 듣고 손경자는 당장에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김호장에게 "지금 바쁘지 않습니껴?"라고 물었고, 그가 안 바쁘다고 대답하자 "그럼 차 한 잔 합시더." 라고 말했다. 손경자는 가게를 점원에게 맡긴 뒤 김호장을 데 리고 부근의 다방으로 갔다. 김호장은 그녀를 따 라가며 그녀가 매우 수척해졌다고 생각했다. 다방에 들어가 둘이 마주앉자 손경자는 김호장 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종태 소식 정말 모릅니껴?" 김호장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예. 정말 모릅니다." 손경자는 그 대답을 듣고 김호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한숨을 쉰 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라믄 도대체 어디 갔단 말이고?" 손경자는 다시 한숨을 쉰 뒤 김호장을 쳐다보다 가 눈물을 주르륵 흘리기 시작했다. 김호장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그녀를 잠자코 지 켜보기만 했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 은 뒤 이렇게 말했다. "부산에 잠시 다녀오겠다며 나간 뒤 벌써 석 달째 소식이 없십니더. 종태를 찾으려고 몇 차례 부산에 가 보았지만 찾을 길이 없었어예." 손졍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흘렀고,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닦았다. 김호장은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 손경자는 한참 동안 울 다가 이렇게 말했다. "우린 서울에 올라와 아무 탈없이 잘 살었어예. 살림집은 명륜동에 차린 뒤 곧 이어 내가 충무로 에서 양품점도 개업해 사는 데 불편이 전혀 없었 는데, 재작년 봄에 종태에게 맡기려고 아까 그 금 은방을 차렸십니더. 종태는 그 동안 세공 기술을 배웠고예. 그란데 작년 초겨울에 종태가 누군가를 만나고 들어온 뒤부터 고민에 빠진 것 같았어예. 그래서 누구를 만났냐고 물어 보니까 옛날에 같 이 일했던 사람을 길에서 우연히 만나 술 한 잔 했다고만 대답했어요. 그 뒤로도 그 사람을 가끔 만나는 것 같아 도대체 누구냐고 따졌더니 그 사 람은 종태가 해운대 관광호텔 나이트클럽 뒤를 봐주고 있었을 때의 지배인이라 캤어예. 그때까지 도 나는 그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석 달 전에 그 사람을 만날 일이 있다며 부산에 내려간 뒤 소식이 없십니더. 일주일이 지나고 보 름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내가 부산에 내려가 해 운대 관광호텔에 가서 알아보았더니 그 사람은 오래 전에 지배인을 그만두었다 캅디더. 그 사람 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도 없고예. 이거 우째야 좋겠십니껴?" 김호장은 손경자를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몰 랐다. 그가 판단하기에는 황종태가 손경자에게 싫 증을 느껴 말없이 그녀 곁을 영원히 떠나 버렸던 지, 아니면 무슨 사고가 생긴 것이 분명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황종태는 손경자를 버리지 않았 다. 그녀는 김호장이 그렇게 상상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종태는 절대 나를 버리지 않았어예. 내가 종태 를 쏙 빼 닮은 사내아이를 낳은 뒤 종태는 억수 로 좋아했십니더. 얼라도 사랑하고 나도 더 아껴 주었어예." 김호장은 황종태의 아이가 있다는 말에 놀라 "아, 종태 아이가 있어요?"라고 물었고, 손경자는 "그렇십니더. 이제 세 살이고 사냅니더."라고 대답 했다. 김호장은 말문이 막혔다. 아이까지 생긴 마 당에 황종태가 실종 상태가 됐으니 손경자에 대 한 위로의 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황종태 소식을 알아보아야 한다는 생각 때 문에 마음이 급해져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 다. 그래서 그는 손경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나이트클럽 지배 인이 지금 뭐하고 있는지 곧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부산 쪽에 연락해 바로 알아 가지고 오겠습 니다." 손경자는 그 말에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좋아 하며 그에게 말했다. "그게 가능합니껴? 그럼 꼭 좀 알아봐 주이소. 제발 부탁합니더. 저는 종태 걱정 때문에 요즘 밤 잠도 안 와예." 김호장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염려 마십시 오."라고 말했다. 그들은 곧바로 일어서서 다방에서 나왔다. 손경 자의 금은방까지 걸을 때 그녀는 문득 생각이 났 는지 김호장에게 "아 참, 일본에 가시지 않았십니 껴?"라고 물었다. 김호장은 일본에서 돌아온지 얼 마 안된다고 둘러댔다. 그녀는 오두복 사건에 대 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김호장은 손경자와 헤어진 뒤 곧장 명동의 박명 자 가게로 가서 하승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통에 하승일이 나오자 김호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알아 줘야 할 일이 있다. 5.16 때 해운대 관광호텔 지배인이었던 놈이 지금은 뭐하고 있는 지 빨리 알아 줘." 하승일은 무슨 일로 그러냐고 물었다. 김호장은 손경자를 만났던 얘기와 함께 황종태가 그 나이 트클럽 지배인을 만나러 부산에 간 뒤 행방이 묘 연해졌다고 말했다. 하승일도 그 사실에 놀라며 "그래" 거기 명동이가? 퍼뜩 알아서 연락할 꺼니 까 거기서 기다리고 있거래이."라고 말했다. 김호장은 박명자 가게에 죽치고 앉아서 하승일 의 전화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박명자도 그 얘기 를 듣고 매우 안타까워하면서 전화에 신경을 쓰 고 있었다. 이윽고 한 시간도 안돼 하승일의 전화가 걸려 왔다. 그의 목소리가 심각했다. "그 지배인 이름은 장달호라고 카는데, 수상한 냄새가 나는 놈이야. 나이트클럽에서는 작년 봄에 그만뒀다는 거야. 그 뒤 밀수에 손대고 있다는 소 문이 있다는 기라. 아마, 그 소문이 확실할 끼다." 김호장이 급하게 반문했다. "밀수?" 하승일이 대답했다. "아마, 밀수 하주일 거야. 나이트클럽 그만 둔 뒤 별다른 사업은 안했는데 돈은 잘 썼단다. 그라 믄 하주 아이가? 너는 모르겠지만 부산에는 요즘 밀수 전성 시대가 다시 왔다." 김호장이 다시 물었다. "그 놈과 황종태가 왜 만났을까?" 하승일이 그 말에 헛웃음을 웃으며 대꾸했다. "허허, 뻔하지 않나? 그 놈이 밀수꾼이라면 종 태 실력을 잘 아니까 밀수품 운반 책으로 고용했 겠지." "그렇다면 종태는 왜 행방불명이냐?" 하승일은 뭘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을 않다가 한 참만에 이렇게 대답했다. "더 알아보아야겠지만 그 지배인이 밀수꾼이 틀림없다면 아마 종태가 해상 운반 책 아니면 육 상 운반 책으로 고용된 것 같다. 그리고 이것도 짐작인데, 종태가 행방불명된 게 확실하다면 그 일을 하다가 변을 당했다고 보아야겠지." 그 말에 김호장의 얼굴은 금새 굳어지며 날카롭 게 말했다. "알았다. 더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해 내가 오늘 밤 야간 열차 타고 부산에 내려가 보아야겠다. 내 일 만나자. 전화 끊는다." 김호장은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그를 지켜보고 있던 박명자를 쳐다보았는데, 그의 눈빛은 사납게 빛나고 있었다. 박명자는 그 눈빛을 본 순간 언제 나 사나이다운 기백에 차 있었던 예전의 김호장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오빠의 저 모습이 살아 있었구나!"라고 생각하며 반가워했지 만, 곧이어 불안감이 그녀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김호장은 그녀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아무 일도 아니야. 오늘 밤 부산에 갔다가 모레나 올라올께." 라고 말했다. 박명자는 그의 눈빛을 외면하며 힘 없이 "알았어. 잘 다녀와."라고 대꾸했다. 김호장은 손경자에게 전화로 부산에 내려간다는 사실을 알리고 박명자 가게에서 나왔다. 김호장은 다음날 부산에 도착한 뒤 하승일과 함 께 이틀만에 간신히 장달호라는 왕년의 그 나이 트클럽 지배인이 살고 있는 집을 알아냈다. 하승 일과 거래하고 있던 주류 도매업자를 중간에 넣 어 장달호가일했던 나이트클럽에 수소문한 끝에 장달호 집을 알고 있는 웨이터를 만날 수 있었고, 그 웨이터로부터 서면에 있는 장달호 집 약도를 얻어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웨이터로부터 장달호 가 최근에는 벌이도 없이 매일 술만 마시고 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알콜중독자라는 말을 듣고 있으며, 생활비는 그의 마누라가 행상으로 벌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김호장과 하승일은 장달호를 만나 보기 위해 다 음날 아침 일찍 고급 양주 한 병을 들고 그의 집 으로 찾아갔다. 알콜 중독자의 입을 열게 하는 방 법은 술이 최고라는 것을 그들은 익히 알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마흔이 갓 넘게 보 이는 장달호는 얼굴에 알콜 중독이라고 써 있을 정도로 술에 젖어 있었고, 고급 양주는 커다란 효 과를 나타냈다. 그들이 찾아가자 장달호는 대문을 열고 나오면 서 경계의 눈초리로 그들을 살폈는데, 하승일이 명함을 주고 "지는 종태 형입니더. 종태에 대해 뭐 좀 물어 볼 일이 있어 찾아왔십니더. 우선 선 물로 가져온 이 고급 양주부터 받으십시오"라고 말하며 술병을 꺼내자 장달호 얼굴에서 그 경계 의 빛이 당장에 사라졌다. 그는 서슴없이 술병을 받으며 "누추하지만 들어오소."라고 말한 뒤 앞장 서서 집안으로 그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장달호는 그들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 앉은 뒤 하승일에게 "종태 형님 된다고 했소?"라고 물었 다. 하승일은 그 질문을 받고 능청스럽게 대꾸했 다. "그렇십니더. 종태는 지 사촌 동생입니더. 그란 데 지난겨울 이후부터 소식이 통 없십니더. 그래 서 여기 저기 수소문해 보니 장사장님과 함께 일 했다는 소문이 들려서 이렇게 찾아왔십니더. 종태 와 언제까지 같이 일했십니껴?" 장달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하승일과 김호장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종태 소식은 나도 모릅니더. 서울에서 살고 있 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이상은 나도 모르겠소." 하승일은 장달호의 표정에서 그가 거짓말을 하 고 있다는 것을 읽었다. 그래서 그는 또 능청을 떨었다. "종태가 서울에서 살긴 살았지요. 그래서 장사 장님도 서울에서 종태를 만나게 되었지요. 사실 종태가 장사장님과 일하기 시작할 때 지를 찾아 와 의논했십니더. 그래서 지는 처음부터 종태가 장사장님과 무신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십 니더. 그 일 자체가 위험하니까 지는 말렸십니다 만 종태는 원래 고집이 강해 지 말을 안 들었십 니더. 종태는 일이 잘못돼도 지 일이니까 걱정하 지 말라며 돌아갔는데, 그 이후부터 소식이 없십 니더. 장사장님, 종태에 대해서 알고 계신 것이 있으면 솔직하게 얘기해 주십시오." 장달호는 하승일의 얘기를 들은 뒤 한동안 묵묵 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의 표정은 침통해졌고,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윽고 그는 무 슨 결심을 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아무 말없이 부 스스 일어섰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더니 물 컵 세 개 들고 들어왔다. 그는 그들이 들고 온 양주병을 따더니 술잔에 술을 딸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자 기 잔에 술을 가득 채운 뒤 두 사람 잔에도 술을 따랐다. 그리고 계면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술 마실 시간은 안됐지만 한 잔씩 하고 얘기합시다." 장달호는 그들에게 술을 권하지도 않고 자신부 터 단숨에 한 잔을 마셔 버렸다. 하승일은 그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김호장에게 눈짓을 보낸 뒤 술잔을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김호장도 반 모금 정도 마셨다. 장달호는 자기 잔에 술을 또 가득 따른 뒤 고개를 들었다. 독한 양주를 물 컵으로 한 잔 마셨으므로 그의 얼굴에는 당장에 주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두 사람 얼굴을 번갈아 살핀 뒤 두 번째 잔을 또 단숨에 들이켰다. 그는 알콜 중독자답게 독한 양주를 맛있게 마셨다. 그렇게 두 잔을 마신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 나는 이제 잃을 게 없으니까 사실대로 얘 기해 주겠소." 장달호는 잠시 뜸을 들인 뒤 힘없이 말했다. "종태는 죽었십니더." 그 순간 김호장과 하승일의 얼굴이 동시에 경직 됐다. 장달호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와 종태는 한 밑천 잡으려다가 나는 애써 모았던 재산을 몽땅 다 날렸고, 종태는 목숨을 잃 었는 기라!" 하승일이 다급하게 물었다. "우째 그렇게 됐십니껴?" 장달호는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그날은 폭풍이 불어 바다가 억수로 사나웠소. 종태는 그 사나운 물결을 헤치고 전마선 타고 물 건 인수하러 갔다가 배가 뒤집혀 물에 빠져 죽어 버렸습니다. 내가 그 장면을 직접 목격했으니까 이건 사실인 기라! 그러니 이제 종태를 잊어 뿌리 소. 그 뒤부터 나는 술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소." 그러자 김호장이 입을 열었다. "장소가 어디였습니까?" 장달호는 김호장을 흘낏 쳐다본 뒤 대꾸했다. "아치섬이라고 아는교? 그 아치섬 앞바다에서 종태는 죽었고, 나는 재산을 모두 잃었소." 그 말을 듣는 순간 김호장은 그 장면이 눈에 선 하게 들어왔다. 사나운 밤바다에서 전마선이 뒤집 혔다면 그 결과는 너무나 뻔했기 때문에 김호장 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김호장이 하승일에 게 일어서자는 눈짓을 보냈다. 알콜중독자와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 다. 하승일도 같은 생각이었으므로 그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바쁜 일이 있다고 핑계 대고 일어섰다. 장달호는 더 얘기 하자며 그들을 붙잡았지만 그 들은 그를 간신히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장달호 집밖으로 나온 뒤 하승일이 김호장에게 말했다. "종태 그 놈아도 이해할 수 없다. 그 여자와 편 하게 살면 될 낀데 와 그런 짓을 했노?" 김호장은 황종태를 잘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하 승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종태가 어리석어서 그 짓을 한 게 아닐 거야. 남자가 여자를 거느리려면 돈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 종태 신념이었다. 아마도 종태는 단순한 운 반 책이 아니라 동업자로 가담했을 거야. 서울 생 활이 답답한 판에 저 장달호라는 녀석이 유혹하 니까 넘어갔을 거야. 그 여자는 둘이 편하게 먹고 살만큼의 돈은 가지고 있지. 그러나 종태는 그게 싫었던 게 분명해. 언젠가 나에게 그 비슷한 얘기 를 했던 게 기억난다. 아무튼 안됐다. 종태 아이 를 낳은 그 여자도 불쌍하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냥 걷다가 택시를 탔다. 김호장은 어쩐지 부산을 빨리 떠나고 싶은 생각 이 들어 하승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부 산진 역으로 나가 서울행 기차를 탔다. 김호장은 기차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황종태 의 죽음을 손경자에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내 내 고민했다. 그러다가 그는 손경자에게는 그 사 실을 비밀에 붙이기로 마음먹었다. 김호장은 서울역에서 곧바로 손경자 가게로 향 했다. 그가 나타나자 손경자는 매우 반갑게 그를 맞이하며 "무슨 소식 좀 알았는교?"라고 물었다. 김호장은 태연하게 거짓말로 둘러댔다. "아직 아무 소식 못 들었습니다. 그러나 부산에 있는 친구들에게 그 나이트클럽 지배인을 찾아 달라고 단단히 부탁해 놓았으니까 곧 연락이 올 겁니다." 손경자는 실망스런 표정으로 힘없이 말했다. "그래예? 지 때문에 고생만 했십니더." 김호장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 말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 지배인만 찾아내면 종 태 소식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손경자는 김호장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그녀는 "고생하셨는데 제가 차라도 한 잔 대접하겠습니 다."라고 말한 뒤 다방에 가자고 했다. 김호장은 거절할 수 없어 그녀를 따라갔다. 손경자는 김호장이 처음 만났을 때보다 기분이 많이 좋아진 기색이었다. 그녀는 다방에서 황종태 가 보석 세공 기술을 배웠던 얘기부터 꺼냈는데, 그 얘기 도중에 갑자기 얼굴이 긴장되며 이렇게 말했다. "아참! 종태와 나를 납치했던 사람 기억하십니 껴?" 김호장은 오두복 얘기인가 싶어 가슴이 뜨끔했 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그녀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는데, 손경자가 말을 이었다. "밀수꾼 박철수 말입니더. 그 박철수가 공화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출마합디더. 알고 보니 본명은 임석호이고 지금은 대흥상사라는 큰 회사 의 사장입디더." 김호장은 손경자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이 해할 수 없었다. 그가 별 반응이 없자 손경자가 다시 설명했다. "어제 영등포에 볼 일 보러 갔다가 벽보에 붙 어 있는 그곳 출마자들의 사진 속에서 박철수를 봤어예. 벽보에 붙어 있는 사진 속에 낯이 익은 얼굴이 보여 자세히 보니까 공화당 공천으로 출 마한 임석호라는 사람이 바로 그 밀수꾼 박철수 였십니더. 세상에 이런 일도 있십니껴? 그걸 보니 참말로 기가 막힙디다! 천하의 사기꾼이고 악질 밀수꾼이 공화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출마한 다니 이게 말이 됩니껴?" 그때 김호장의 눈빛이 빛났는데, 그것은 박명자 가 보았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김호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손경자는 눈이 커지며 대답했다. "사실이지예! 사진이 틀림없이 그 박철수였십니 더. 박철수는 5.16 이후부터 자기 빽이 좋다고 자 랑을 많이 했는데, 그 빽으로 공천 받은 모양입니 더. 지 눈은 틀림없십니더. 박철수는 언제나 색안 경을 쓰고 다녔는데 그 사진의 얼굴에는 안경은 안 썼어예. 머리 모양도 바꿨고예. 그러나 박철수 가 대한민국 사람을 다 속일 수 있어도 나는 못 속입니더. 밀수꾼이 여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될 판이니 정말 기가 찹니더." 흥분한 손경자는 말을 끝내고도 계속 혀를 찼다. 그녀의 얘기를 듣고 얼굴이 극도로 굳어졌던 김 호장은 잠시후 무거운 어조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 벽보를 보았던 장소가 어디였습니까?" 손경자는 즉시 대답했다. "여기서 가자면 영등포 역을 지나서였십니더." 그러자 김호장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 밀수꾼 본명이 임석호라 했지요. 잘 알겠습 니다. 저도 영등포에 가서 그 놈 얼굴 좀 보아야 겠습니다." 손경자는 흔쾌하게 대답했다. "한 번 가보이소. 징그럽게 생긴 임석호가 박철 수 바로 그 놈입니더!" 그들은 그 얘기가 끝나자 일어서서 다방에서 나 왔다. 다방 앞에서 김호장은 손경자에게 또 연락 하겠다는 인사를 했다. 그녀는 간절한 표정을 지 으며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대이."라고 말했다. 손경자의 눈썰미는 날카로웠다. 그 임석호라는 사람은 박철수가 틀림없었다. 오두복이 김호장에 게 당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신변의 위협을 느 낀 박철수는 부산을 탈출한 직후부터 그 사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그는 서울로 이사했 고, 변장을 위해 쓰고 다녔던 색안경도 벗어 버렸 으며, 헤어스타일도 바꾸었다. 그리고 밀수로 모 은 재산을 토대로 대흥상사라는 택시 운수업을 시작했다. 물론 이때부터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본명인 임석호를 사용했다. 그리고 해군 소령으로 벼락 출세한 외육촌형 양태식에게 조석으로 문안 인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박철수는 양태식을 이용해 서울의 시내버스 영 업권도 따내 대흥상사의 사세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박철수의 과거 행적을 아는 사람은 아 무도 없었고, 그는 재력이 좋아지자 기고만장해졌 다. 그리고 남몰래 키우고 있었던 정계 진출 야심 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돈을 주고 H대학 야 간부에 편입한 뒤 졸업장도 받아 내 학력도 대졸 로 만들었고, 양태식을 통해 공화당 실력자들과 교분을 맺었다. 아무튼 박철수의 새로운 삶은 거 의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창창하게 보였던 그의 앞날에 인과응보 의 원리가 도사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손경 자의 눈썰미였다. 철처하게 위장 생활을 했던 박 철수는 모든 사람을 다 속일 수 있었지만, 수년간 잠자리를 같이 했던 애첩 손경자만은 속일 수 없 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일이 김호장 의 출감 직후에 벌어졌다. 원래 불같은 사나이였 던 김호장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범상 한 일이 아니었다. 김호장은 그날 바로 영등포로 나가 거리의 벽에 붙어 있는 선거 벽보에서 박철수 얼굴을 확인했 다. 그는 벽보에 붙어 있는 임석호라는 사람의 얼 굴을 찾아내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하숙집으로 돌 아갔다. 그런데 김호장은 그 뒤 사흘 동안 하숙집에서 두문불출했다. 하숙집에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 를 대고 그는 하루 종일 이불 속에서 지냈다. 그 러나 잠을 자는 것이 아니었고, 뭔가 골똘히 생각 하고 있었다. 사흘 동안 꼼짝 않고 뭔가 궁리하 던 김호장은 어떤 결론을 내린 표정으로 박명자 를 만나러 나갔다. 그는 박명자의 가게 근처 다방 에서 그녀를 불러냈다. 그리고 그녀가 다방에 나 타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 운천에서 가서 사는 문제를 서두르자. 살 집부터 마련하고 다른 문제는 닥치는 대로 해결 해 나가자. 내일이나 모레쯤 너 혼자 운천에 다녀 오거라. 나도 같이 가 보면 좋겠다만 우선 너부터 다녀오라. 니가 운천에 가면 한목사님이 여러 가 지로 도와주시겠지. 나는 오늘부터 서울 부근의 양계장에 가서 견학도 하고 과수원하는 문제도 연구해 볼란다." 박명자는 김호장과 같이 운천에 가고 싶었지만, 그의 태도가 워낙 진지하여 "알았어."라고 대답했 다. 이렇게 되어 그들이 운천에 가서 사는 문제가 급진전되었다. 박명자는 다음날 운천으로 내려가 한광석 목사 와 그곳에서 사는 문제를 상의했다. 박명자의 상 의를 받은 한광석 목사는 기꺼이 협조를 약속했 다. 김호장은 다음날부터 서울 근교의 양계장을 돌 아다녔다. 그리고 서점에서 양계와 과수원 관련 책들을 사서 밤에는 그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박명자 혼자 운천에 세 번 다녀온 뒤 김호장은 그녀와 함께 운천에 가서 아담한 함석집 한 채를 샀다. 집주인은 언제든지 비워 줄 수 있다고 했지 만, 김호장은 입주일을 6월초로 잡았다. 운천에 살림집을 장만한 직후에 김호장은 억만 이를 만나러 갔다. 그날은 억만이와 술 한 잔 마 시기 위해 일부러 해질 무렵에 찾아갔다. 그가 나 타나자 억만이는 입이 찢어질 정도로 웃으며 환 영했고, 여자에게 가게를 맡긴 뒤 김호장을 데리 고 나갔다. 그는 시장 안에 있는 대폿집으로 김호 장을 안내했다. 술 한잔씩 마신 뒤에 김호장이 무겁게 입을 열 었다. "종태가 죽었다." 억만이는 그 말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언제 죽었나?" 김호장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작년 겨울인 것 같다. 폭풍이 부는 날 아치섬 앞바다에서 죽었다는 거야. 예전에 알던 사람과 동업으로 밀수에 직접 손댔던 모양인데 전마선이 파도에 뒤집혀 죽었다." 억만이는 "저런!"하고서 계속 혀를 찼다. 그들은 묵묵히 술만 마셨고, 표정들은 침통했다. 그렇게 술만 마시다가 김호장이 다시 입을 열었 다. "너는 이제 착실한 생활인이 되어 있어 보기에 좋다. 그렇지만 니가 나를 한 번 도와 줄 일이 있 다. " 억만이는 그를 쳐다보며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 다. "말만 해라. 대장의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돕 겠다. 한 탕 하는 일이냐?" 김호장은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그건 아니야. 어떤 놈 손 좀 보아야겠는데, 니 힘이 필요하다." 그러자 억만이는 씩 웃으며 말했다. "한 명 손 보는데 내 힘이 필요하나? 그놈이 쎈 놈이냐?" 김호장은 술 한 잔 들이킨 뒤 말했다. "쎈 놈은 아니야. 시기는 다음 달 초쯤이다. 자 세한 건 나중에 얘기할게. 우선 그 정도만 알고 있어라." 억만이는 그런 일이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 므로 다시 황종태 얘기를 꺼냈다. "종태가 안됐다." 김호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의를 표시 한 뒤 말했다. "생각할 수록 안됐어. 우리가 아치섬에서 텐트 치고 자 보았기 때문인지 종태가 물에 빠져 죽는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잊으려 해도 안 잊어진다. 참 좋은 놈이었는데 말이야. 난 종태 여자에게는 아직 종태가 죽었다는 말을 못했다. 종태 아들까 지 낳았던데 말이야. 그 여자도 안됐어." 억만이는 김호장의 말에 다시 놀라는 표정을 지 으며 말했다. "그 여자가 종태 아들을 낳았나? 참말로 안됐 구나!" 그들은 다시 말 없이 술만 마셨다. 그 술집에서 나온 뒤 억만이는 이차를 가자고 우겼지만 김호 장은 사양하고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억만이의 협조 약속을 얻어낸 이후부터 김호장 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는 영등포 쪽으로 나가 박철수의 본명인 임석호의 사무실을 알아냈고, 그 뒤부터는 매일 임석호 사무실 주변을 배회했다. 그리고 거리의 벽에 붙어 있는 임석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곤 했다. 그리고 선거 유세가 시 작되자 김호장은 유세장을 따라다녔다. 이때까지 만 해도 그는 임석호에 대한 복수 방식을 결정짓 지 못하고 있었다. 유세장을 며칠 동안 따라다닌 뒤 김호장은 남대 문 시장으로 나갔다. 그는 시장에서 대바늘 한 통 과 모자 두 개, 그리고 식칼과 노끈 한 뭉치를 샀 다. 그 뒤 인사동으로 나가 벼루와 먹을 샀고, 하 숙집으로 들어오는 골목 입구의 약국에서는 드링 크 한 병을 샀다. 김호장은 하숙방에서 드링크를 마신 뒤 벼루를 꺼내 먹을 갈기 시작했다. 그는 먹물이 진한지 여 부를 시험해 본 뒤 드링크 병에 진한 먹물을 가 득 채웠다. 그리고 그 먹물이 든 드링크 병과 시 장에서 사 온 물건들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작업 을 끝냈다. 다음날 초저녁에 김호장은 택시를 타고 다시 영 등포로 나갔다. 그는 달리는 택시 속에서 운전수 와 밤 12시까지 대절하기로 흥정을 끝냈다. 그리 고 임석호 사무실 부근에 도착하자 그는 택시를 세우게 한 뒤 택시 속에서 임석호 사무실 출입자 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선거운동을 하고 돌아다 니던 임석호는 운동원들과 함께 밤 10시 반경에 사무실로 들어갔다가 10여분 후에 나왔다. 그의 옆에는 비서인 듯한 청년이 따르고 있었다. 임석 호는 그 청년과 함께 사무실 앞에 세워 둔 지프 에 올라탔고, 지프는 곧바로 출발했다. 그 즉시 김호장이 대절한 택시도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지 프를 뒤쫓기 시작했다. 지프는 한강 인도교를 건너 시내를 관통한 뒤 장충동 쪽으로 들어갔다. 김호장이 대절한 택시도 지프를 놓치지 않고 뒤쫓았다. 지프는 어느 고급 주택 앞에서 멈추었고, 임석호 혼자만 내렸다. 김 호장이 타고 있는 택시는 임석호 옆을 스치고 그 냥 지나가다가 50여 미터 쯤에서 멈추었다. 김호 장은 택시를 보내고 임석호 집 쪽으로 갔다. 임석 호는 이미 집안으로 들어가고 없었지만, 김호장은 그 집 앞에서 문패도 확인하고 집 주변을 돌며 집안 구조도 한참동안 살폈다. 그날 밤 임석호의 집을 알아내는데 성공한 김호 장은 다음날 이른 아침에 억만이를 찾아갔다. 그 는 억만이를 가게 밖으로 불러낸 뒤 담벼락 옆에 서 귓속말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와서 도와 달라고 말했던 일은 내일 밤에 한다. 괜찮겠나?" 억만이는 흔쾌하게 대답했다. "괜찮다. 어디서 만날까?" 김호장이 다시 말했다. "내일 밤 9시까지 내가 이곳으로 오겠다. 그 놈 이 사는 집은 여기서 멀지 않다. 그럼 난 돌아간 다. 내일 보자." 억만이는 김호장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그를 붙잡지 않았다. 다음날 김호장은 약속 시간에 정확히 가방을 들 고 나타났다. 그는 억만이 가게 앞에서 눈짓으로 떠나자는 신호를 보냈다. 억만이는 가벼운 옷차림 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신호를 받자 곧 장 가게를 나왔다. 김호장은 억만이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해 주 기 위해 그를 데리고 시장 입구에 있는 다방으로 들어갔다. 다방에 들어가서 레지에게 차를 주문한 뒤 김호장이 말했다. "오늘 밤 일은 밤을 꼬박 세워야 한다. 레지가 커피 갔다 놓고 가면 어떤 일인지 자세하게 설명 해 줄게." 억만이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잠시 후 레지가 커 피를 놓고 돌아가자 김호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밤의 일은 부산에서 4년 전에 있었던 일 의 끝맺음이다. 우리를 몽둥이로 기습하여 석배를 죽였고, 그 뒤 종태를 납치했던 패거리의 배후 인 물이었던 밀수꾼 박철수라는 놈을 찾아냈다. 기가 막히는 일은 그 악질 밀수꾼이 공화당 공천을 받 고 서울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오늘밤 그 새 끼를 조져 출마를 포기시키는 것이 내 계획이다." 억만이는 그 말을 듣고 입을 쩍 벌리며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그 새끼를 어떻게 찾아냈나? 좋다! 그 일이라 면 신이 난다. 그런데 그 정도로만 해서는 내 분 이 안 풀리겠는데..." 김호장이 즉시 보충 설명을 했다. "물론이다. 내가 어찌 그 정도만 생각했겠냐. 이 따 그 놈 집 담을 넘어 들어가서 그 놈의 이마에 '나는 밀수꾼'이라는 먹자를 뜰 생각이다. 바늘과 먹물은 준비되어 있다. 그래서 오늘밤 너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 놈을 묶어 놓고 먹자를 뜬 뒤 에 우리가 그 놈 집에서 나올 때는 그 놈을 기절 시켜 놓고 묶어 놓은 것을 풀어놓아야 한다. 그 놈은 빽이 좋은 놈이라니까 그 놈이 당했다는 사 실을 그 놈 혼자만 알아야 뒤탈이 없다. 그리고 그 놈이 이마의 먹자 때문에 스스로 출마 포기를 해야 일이 잘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 놓으면 그 놈은 평생 동안 이마를 가리고 살아야 한다." 억만이가 감탄하며 말했다. "역시 대장은 대장이다. 나 같으면 밤길에 한 방 먹이고 죽지 않을 만큼 밟아 줄 생각 정도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 지. 어쨌든 그 놈 잘 걸렸다." 그들은 다방 문을 닫을 때까지 그곳에서 노닥거 리다가 밤 11시 넘어 박철수 집에 도착했다. 그들 은 왕년에 노름판을 털 때처럼 박철수 집 주위를 살피다가 김호장이 먼저 억만이 도움을 받아 소 리 없이 담을 넘어 들어갔다. 그리고 억만이는 김 호장이 대문에 딸려 있는 샛문을 열어 주어 그곳 으로 들어갔다. 억만이가 들어오자 김호장은 그의 손을 끌고 정원 구석에 있는 나무 밑으로 가서 숨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집안 동정을 살폈다. 집안의 전등은 이층의 방 하나만 빼놓고 모두 꺼 져 있었다. 그들은 그 방의 불이 꺼질 때까지 끈기 있게 기 다렸다. 이윽고 30여분쯤 지나자 그 방의 불도 꺼 졌다. 그러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또 30여분 정도 지났을 때 김호장이 가방에서 모 자와 마스크를 꺼내 억만이에게 준 뒤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걸 써라. 그리고 이제 슬슬 움직여 보자." 김호장이 먼저 집 쪽으로 살금살금 기어갔고, 억 만이가 그 뒤를 따랐다. 김호장은 부엌 쪽으로 다 가가 문을 살그머니 밀어 보았다. 그리고 문이 열 리자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억만이도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박철수는 안방에서 코까지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그의 마누라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눈치 였다. 그들은 기어서 박철수 곁으로 다가가자마자 다방에서 짰던 계획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억만이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박철수 마누라를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김호장이 박철수 의 목에 칼을 들이댄 뒤 그를 깨웠다. 박철수가 눈을 뜨자 김호장이 날카롭게 말했다. "소리지르면 죽여 버리겠다!" 박철수는 자신의 목줄에 칼이 닿아 있는 것을 느끼고 벌벌 떨기 시작했다. 김호장은 그에게 겁 을 주기 위해 칼끝에 힘을 약간 주었다. 그러자 박철수가 "살려만 주십시오."라고 사정했다. 그 말 을 받아 김호장이 다시 말했다. "반항만 안 하면 살려 준다. 그러나 수틀리면 칼이 너의 목줄을 찔러 버릴 것이다." 박철수는 벌벌 떨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억만이가 그의 손과 발을 을 묶은 뒤 입에 재갈 을 물렸다. 그리고 그들은 박철수 마누라도 깨워 박철수처럼 손과 발을 묶고 입에 재갈을 물린 뒤 이불을 덮어씌웠다. 그 일이 끝나자 억만이가 박 철수의 배 위 에 올라탔다. 준비가 완료되자 김호장은 가방에서 바늘과 먹 물을 꺼내 박철수 이마에 큰 글씨로 먹자를 뜨기 시작했다. 박철수는 바늘이 찌를 때마다 발버둥쳤 으나 김호장이 "반항하면 아예 죽여 버린다!"고 협박하자 아픔을 견뎌 냈다. 김호장은 박철수 이 마에 바늘로 쿡쿡 찔러 '나는 밀수꾼"이라고 썼다. 바늘이 찌를 때마다 피가 흘러나왔지만 김호장은 침착하게 글씨를 써 나갔다. 이윽고 글씨가 다 써지자 김호장은 피를 닦아 낸 뒤 그 위에 먹물을 칠했다. 그리고 잠시후 수 건으로 박철수의 이마를 닦아 내자 '나는 밀수꾼' 이라는 글씨가 크게 나타났다. 작업을 끝낸 김호장은 박철수 귀에 대고 말했다. "인간의 탈을 쓴 짐승같은 놈아! 너는 부산에서 활동했던 밀수꾼 박철수다. 그리고 오두복을 고용 하여 우리를 공격했다. 그 대가로 오늘 너를 응징 한 것이다. 날이 새면 거울을 보고 니 이마에 무 슨 글씨가 써 있는가 보아라. 그리고 너는 모레까 지 출마 포기를 선언해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너의 과거를 폭로할 것이며, 그 뒤엔 정말로 너의 목줄에 칼을 꼽겠다!" 박철수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입에 재갈이 물려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뒤부터 통금 해제 시간까지 김호장은 묵묵히 앉아 있었고, 억만이는 그 옆에서 졸고 있었다. 이윽고 통금이 해제된 뒤 30여분이 지나자 김호 장은 억만이를 깨운 뒤 후속 조치를 취하기 시작 했다. 우선 주먹으로 박철수의 턱을 강타해 그를 혼절시킨 뒤 그의 손과 발에 묶여 있는 끈을 풀 어 주었다. 그리고 그를 그의 마누라 옆에 눕혔 다. 김호장은 잠시 동안 박철수를 살핀 뒤 억만이 에게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고양이처럼 날렵하고 소리 없이 박철수 집을 빠져나왔다. 김호장은 아무 말 없이 큰길까지 걸어나온 뒤 억만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억만아, 우리 여기서 헤어지자." 그 말을 듣고 억만이가 목이 멘 소리로 말했다. "넌 어디로 가는데? 앞으로 못 보게 되나?" 김호장은 약간 비장한 어조로 대꾸했다.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나게 되겠지만 이것이 영 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르겠다. 부디 잘 살아라." 김호장이 손을 내밀자 억만이는 그 손을 잡은 뒤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눈물 이 이슬처럼 고이기 시작했다. 김호장은 억만이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택시가 오자 억지로 그를 먼저 태워 보냈다. 억만이는 택시 속에서 그가 안 보일 때까지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김호장은 억만이가 탄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지 자 동이 터 오르는 새벽 하늘을 쳐다보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