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희 번역본- 『 알퀘이드 루트 』 www.wraiths.net (출처는 이곳으로 하시면 됩니다.) 번역하신분 : 오프닝,프롤로그 -ameba0 알퀘이드 루트 - 2M 에필로그(진,굿 엔딩) - 2M 月姬 Opening 부문 By ameba0 -------------------------------------------------------------------------------- 문득, 눈이 떠졌다. 어두운 밤. 집안엔 아무도 없어. 혼자서는 무서우니까 모두를 만나고 싶어서 정원으로 나갔다. 저택의 뜰은 정말로 넓어 그 끝은 깊고 깊은 숲속에 둘러 쌓여있다. 숲의 나무들은 검고, 검은 거대한 커탠같았다. 그것은 마치 어딘가의 극장같았다. 사아~ 거리며 나무의 커튼이 열리며, 곧바로 연극이 시작될것 같아 두근두근 거렸다. 멀리서 여러개의 소리가 들렸다. 검은 나무의 커텐 깊이. 숲속의 모두가 떠들고 있다. 열매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 참지못하고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말로 어둡다. 숲은 깊었고 어떠한 빛도 닿지 않는다. 단지 추울뿐이다. 눈속 깊숙히 저며드는 추운 겨울.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듯한 기분이 들어 좀더 깊이 들어간다. 나무의 베일을 헤쳐지나간 뒤. 숲의 공터에는 모두가 모여 기다리고 있다. 모두 다른 모양으로. 모두 흩어져있는 팔과 다리. 일면 무언가가 되어가는 숲의 공터. -------모르겠어. 모든것을 분해해버리기 위해 낯선사람이 와. -------잘 모르겠어. 그래도 누군가가 내앞에 와서 대신 잘려줬어. -------나는 어린아이라서 잘 모르겠어. 자갈과 따뜻한것이 얼굴에 튀었다. 붉은. 토마토처럼 붉은물. 분해되어 버린 사람. 그 어머니라는 사람은 그후 내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어도. 단지 추웠고. 의미도 없이 울고 있었었다. 눈에 따스한 비경이 물결쳤다. 안구의 속으로 스며들어 온다. 그래도 전혀 신경쓰이지 않아. 밤하늘에는, 단지 혼자만의 달이 있으니까. 정말 신기하지. 어째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었던 거지. ------- 얼마나, 차가운------나쁜, 꿈. 아아-------눈치채지 못했었다. 오늘밤은 이렇게나 달이, 아름다-----------------------운걸 -------------------------------------------------------------------------------- 프롤로그 부문 By ameba0 정신이 들자 병원침대위였다. 커튼이 흔들흔들 흔들리고 있다. 밖의 날씨는 매우 좋고, 따스한 바람이, 여름의 끝을 알려주고 있다. [처음겠습니다. 토노 시키군, 회복을 촉하해요.] 처음본 아저씨는 그렇게 악수를 요구해왔다. 상냥한 얼굴과 사각의 안경이 매우 잘어울렸다. 청결한 하얀옷도 그 아저씨에게 매우 잘어울렸다. [시키군. 선생님이 말한걸 기억해?] [....아니요. 저는 어째서 병원에 있는거지요?] [기억나지 않나보군. 자네가 도로를 건널때 자통차에 치여버렸다네. 가슴에는 유리파편이 꼽혀있었고, 도저히 살아날것 같아 보이지 않았었어.] 하얀옷의 아저씨는 즐거운듯한 얼굴을 하고, 무언가, 의사선생님 같은것을 말한다. --------------문득. 기분이, 나빠졌다. [.....잠이 오네요. 자도 될까요?] [아아, 그렇게 하세요. 지금은 무리하지 말고, 몸을 회복하는것이 좋으니.] 의사선생님은 계속해서 웃고있다. 분명히 말해, 별로 보고싶지는 않다. [선생님, 질문하나 해도 될까요?] [무언가, 시키군] [어쩨서 그렇게 몸에 낙서 같은걸 하고 있는거죠? 이 방도 군데군데 금이 가있고 지금이라도 부서질것 같아 보이는데.] 의사선생님은 일순간 웃는 얼굴이 무너졌다가, 곧장 즐거워보이는 웃는얼굴로 돌아와 서는, 조금씩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역시 뇌에 이상이 있는것 같군. 신경외과의 도츠가선생에게 통보를 해주세요. 그리고 안구에도 손상이 있을지 모릅니다. 오후에는 눈검사를 다시 하도록 하도록] 의사선생님은 나에게 들리지 않게, 남몰래 간호원에게 말을 건냈다. [이상한걸... 모두 몸에 낙서가 되있어.] 검고, 곳곳으로 퍼진 선이 병원안을 달리고 있다.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보는것만으로도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 [이건 뭐야...] 침대에도 그런 낙서가 있다. 손가락으로 만져보면, 손끝이 완전히 밀려들어간다. [---아] 가는것으로 만지면 더 깊이 들어갈것 같아서, 선반위에 있는 과도로 낙서위를 긁어 보 았다. 어떠한 힘도 주지 않았는데도, 나이프는 끝까지 침대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재미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낙서를 따라 나이프를 당겼다. 쿵 무거운 소리를 내며, 침대는 깔끔하게 조각나 버렸다. [꺄아아아아아!] 옆침대의 여자가 비명을 질렸다. 간호사들이 달려와서 과도를 빼앗아가버렸다. [어떻게 침대를 조각조각낸거지, 시키군] 의사선생님은 침대를 조각낸 이유가 아니라, 그 방법을 묻고 있었다. [그 선을 따라 그리니 잘려버렸어요. 어째서 이병원은 금투성이인거죠?] [적당히 해주지 않겟나 시키군. 그런선따위는 없단말일세. 그리고 어떻게 침대를 조각으로 만든거지. 화 안낼테니까 가르쳐주지 않겠나.] [-------그러니까 그 선을 따라 잘랐을 뿐이라구요.] [......알겠다. 그 이야기는 내일 하도록 하지.] 의사선생님이 가버렸다. 결국 그누구도 내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 낙서를 따라 나이프로 자르는것, 그것이 어째서 그렇게 깔끔하게 잘렸는지. 힘같은건 없었는데. 종이를 가위로 자르는것처럼, 간단히 잘려져 버렸었다. 침대도, 의자도, 책상도, 벽도, 평상도. .....허용될리는 없겠지만, 아마, 반드시, 인간도. 그 낙서들은 다른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것같다. 어째서인지 나에게만 보이는 검은선. 그것이 어째서 있는지, 아이인 자신도 모르게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넝마조각 같은것이다. 수술을 할때 절개부를 봉합했던 그무렵같이, 굉장히 물러지고 있는것 같다고 생각한 다. 왜냐하면, 그렇게라도 되지 않으면 아이의 힘으로 벽이 잘려질리가 없으니까. -----아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 세상은 이렇게도 넝마조각같았어도, 굉장히 무너지기 쉬운곳이었다는것을. 다른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아. 그래서 괜찮아. 그래도 나에게는 보이는걸. 무서워서, 무서워서, 걸어갈수 없어. 마치, 나만 이상하게 되어버린것 같아. 그래서일까. 그로부터 2주가 지났어도, 아무도 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그로부터 2주가 지났어도, 아무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로부터 2주가 지났어도. 주욱, 나만이 넝마조각같은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병원에는 있고싶지않아. 잔뜩 낙서된 곳에서 더이상 있고싶지 않아. 그래서 여기서 도망가서, 누구도 없는 먼 장소로 가버리고 싶다. 그러나 가슴의 상처가 아파서, 조금도 달릴수 없었다. 조심해서. 마을밖의 들판에 도착하자 더이상은 움직일수가 없었다. [.....헉] 가슴이 아파서, 굉장히 슬퍼서, 땅을 보고 있었다. 헉, 헉. 누구도 없다. 여름의 끝에서, 풀숲의 바다속에서. 이대로, 사라져 버릴것 같았다. 그러나, 그전에. [당신, 그런곳에 앉아있어면 위험해요]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 ['에'가 아니라구요. 당신, 그냥 산뜻한것이 좋아서 풀숲속에 앉아있는걸로 보이지는 않네요. 조심하라구요, 하마터면 발로차 하늘로 날아갔을지도 모른니까.] 기분나쁜듯한 여자는 나를 가르켰다. 뭔가, 약간 머리쪽으로 왔다. 나는 반에서도 앞에서 네번째 앉기 때문에 그렇게 앉은키가 낮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다. [결과적으로 누구한테?] [바보, 그런건 정해져있잖아. 여기에 있는것은 나와 당신뿐이니까, 나이외의 나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는거야?] 여자는 팔짱을 끼고, 자신감 넘치는 듯이 말했다. [뭐, 여기서 만난것도 무언가 인연이 있는것 같고, 조금 상대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 을래? 난 아오사키 아오코라고 하는데, 넌?] 마치 쭈욱 알고 있었던 친구 같은기분으로 여자는 손을 뻗쳐왔다.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햇기에, 나는 토노시키라고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여자의 차가 운 손바닦을 잡았다. 그여자와의 수다는, 굉장히 즐거웠다. 이 사람은 나의 이야기를 [아이니까]라는 이유로 무시하지 않았다. 한사람의 친구로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다. 나의 집에 관한것을. 역사가 있는 오래된 가문이라서, 굉장히 행동거지에 대해 시끄러 워서, 아버지가 엄격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아키하라고 부르는 여동생이 있고, 굉장히 점잖아서, 언제나 나의 뒤를 따라왔었다는 것. 넓은 집이었기 때문에, 숲처럼 넓어서, 언제나 아키하랑 함께 친구들과 놀았다고. ----뜨겁게 마음이 들뜬것 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아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미안해 시키. 나, 볼일이 있어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해야겠네.] 여자는 일어섰다. ......다시 혼자가 되는가라고 생각하니, 침울해졌다. [그럼 내일 또봐, 여기서 기다릴테니. 너도 이젠 병원으로 달아가서, 약이랑 의사선생 님의 말을 지켜야되.] [아----] 여자는, 마치 앞으로 그렇게 될것이라고 확신하고, 그렇게 떠나갔다. [....내일, 다시] 다시내일, 오늘같은 이야기를 한다. 재미있어. 사고로 부터 눈을 뜨고나서. 처음으로 인간다운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오후가되면 들판에 가는것이 일상이 되었다. 여자는 아오코라고 부를때 마다. 자신의 이름을 불리는게 싫다고 했다. 고민한 끝에, 뭔가 위대한 사람같아 보이니까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선생님은 뭐든지 열심히 들어주었고, 나의 고민을 한마디로 정리해주었다. 사고때문에 어두워진 나는, 조금씩, 선생님덕분에 좀더 자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나 두려웠던 낙서에 대한것도, 선생님과 이야기하니 별로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 다. 그러니까, 어디의 누군지는 몰라도, 혹시 선생님은 진짜로 학교의 선생님일지도 모른 다. 그래도, 그런것은 어떻게되도 좋다고 생각한다. 선생님과 있으면 즐거우니까. 중요한것은, 바로 그런 단순한 것인거야. [저, 선생님. 저, 이런걸 할수 있어요.] 약간 놀래키고 싶어서, 병원으로 부터 가지고 나온 과도를 사용해, 들판에 살아있는 나무를 잘랐다. 그 낙서같은 선을 따라서, 끝까지 깨끗하게 잘랐다. [굉장하지요. 낙서가 보이는곳이라면, 어디라도 절단해 날수 있겠네요. 이러한 것은 누구도 할수 없어요.] [시키-------!!] 팍,하고 뺨을 얻어 맞았다. [선....생님?] [------넌 지금, 굉장히 경소한 행동을 한거야.] 선생님은 굉장히 진지한 눈을 하고 바라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어도. 나는, 지금 자신이 한일이, 해서는 안될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엄숙해진 선생님의 얼굴과, 얻어맞은 뺨의 고통에. 굉장히, 굉장히 슬픈기분이 들었다. [.....잘못, 했어요.] 정신이 들자, 눈물이 흘렀다. [-----------시키] 살짝, 돌아오는 감각. [-----사과할 필요는 없어. 분명히 시키는 화날만한 일을 한것이지만, 그것은 결코 시키가 나빠서 그런건 아니니 까.] 선생님은 주저앉으면서 나를 안아주었다. [그래도 시키. 지금 누군가가 너를 꾸짖지 않으면, 분명 돌이킬수 없게 되버릴꺼야. 그래서 내가 한거야. 그대신, 시키는 나를 미워해도 좋아.] [.....우웅. 선생님을, 미워하는건 아니예요.] [-------그래. 정말로, 다행이야. .......내가 너를 만난것은 하나의 인연인가 보구 나.] 선생님은 그러고는, 내가 보고있는 낙서에 대해 들었다. 이눈에 보이는 검은 선에 관한 이야기하자, 선생님은 한층더 강하게,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시키, 네가 보고 있는것은 원래는 보이지 않는 것이야. [물건]에게는, 무너지기 쉬운 각각의 장소가 있어. 언젠가 무너져 버릴 우리들은, 옛 날부터 완전하지 않았어. 너의 눈에는, 바로 그 [물건]의 미로.... 다시 말해 미래의 끝을 보고 있는거겠지.] [.....미래를.....본다고, 요?] [그래요. 죽음이 보이고 있는거야. -----그것 이상의 것은 몰라도 되. 혹시 네가 자연스럽게 알게되는 시기가 오게되면, 필연으로 알게되는 것일까나.] [.....선생님. 무슨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에에, 알게되면 안되요. 단지 알고 있어줬으면 하는 하나는, 결코 그선을 장난으로 자르는 일은 없도록 해야한다는거야. -------너의 눈에는, [물건]의 생명을 가볍게 여겨버리게 할수 있을테니까.] [응. 선생님이 그렇게 말한다면 안할께. 그리고, 웬지 모르게 가슴이 아파요. .....잘못했어요 선생님. 더는, 두번다시 이런일을 하지 않을꺼니까.] [.....다행이야. 시키, 지금을 기분을 절대 잊어선 안되. 그렇게만 한다면, 너는 반드 시 행복하게 될테니까.] 그러고는, 선생님은 나에게서 떨어졌다. [그래도 선생님. 그 낙서가 보이니 불안한걸요. 그러니까 그 선을 따라 그리는것만으로도 잘려 버리는거죠? 그렇다면, 내주변에는 언 제나 갈기갈기 영겨져도 이상하지 않은거죠?] [그렇네. 그 문제는 내가 어떻게든 해결하지. -------어떻게 보면, 내가 이곳에 온 이 유일수도 있이니] 하아, 라고 한숨을 쉬고나서, 선생님은 빙긋이 웃음지었다. [시키, 내일은 너에게 굉장히 큰 선물을 줄께요. 내가 너를 이전의, 평범한 생활로 돌 아가게 해줄테니.] 다음날. 선생님과 만난지 어느덧 7일째 된 들판에서, 선생님은 커다란 가방을 한손에 들고 왔 다. [안녕. 이것을 쓰고 있으면 아마 그 낙서들은 보이지 않게 될꺼야.] 선생님이 준것은 안경이었다. [난, 눈이 나쁘지 않은걸요.] [괜찮으니 쓰세요. 특별히 나쁜게 들어있는건 아니니까.] 선생님은 강하게 안경을 나에게 씌워주었다. 그때------ [우와아! 굉장해, 굉장해요 선생님! 낙서가 조금도 보이지 않아요!] [당연하지. 특별히 자매가 일하는 마안살에 전해서 만든 아오사키 아오코의 최상품이 니까. 결점같은건 그냥두지 않으니까 말이야, 시키] [응, 소중히 보관할께요! 그래도, 선생님 정말 대단해요! 그렇게나 싫었던 선들이 모두 사라지다니, 무언가 마법같아요, 이건!] [그거야 당연한거지. 왜냐하면 난, 마법을 사용하는걸.] 득의양양한 웃음을 한체, 선생님은 가방을 땅에 내려 놓았다. [그래도, 시키. 그 선은 사라진게 아니야.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것 뿐. 그안경을 벗으면, 선은 다시 보이게되.] [-------그, 그런거야?] [에에. 그렇게 밖에는 할수가 없었던 거야. 시키, 넌 그 눈과 어떻게든 타협을 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니까.] [........싫어요. 이런 이상한 눈, 필요없어요. 다시 그 선을 자르게 되어버린다면, 선생님과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게 되는걸요.] [아아, 앞으로 두번다시 선을 드러나지 않게 하는건 아니야. 바보네, 그런 약속은 깨버려도 된다고.] [.....그런거예요? 하지만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에에, 해서는 안되는 것이지. 그래도 그것은 너만의 특수한 힘인거라고, 시키. 그러니까 그것을 사용하는것도 너의 자유인거야. 너이외의 누군가도, 시키를 제지하는 일따위는 없는걸. 너는 개인이 소유한 능력중에서도, 정말로 특이한 능력을 가져 버렸어. 그래도, 그것이 너에게 있는것은, 무언가 의미가 있는 것일거야. 신은 무엇하나 의미없는 힘을 나누어 주지 않아. 너의 미래에는 그 힘을 필요로 하는 시기가 있을꺼니, 그 직사의 눈이 있다고 말할수 있어. 그러니까, 시키의 전부를 부정하는것을 이제는 그만둬요.] 선생님은 주저앉아서, 나의 시선과 같은 높이를 맞추었다. [그래도 말이지, 그러니까 절대 잊어서는 안되. 시키, 너는 곧은 마음을 가져야해. 지금의 네가 있는 끝까지, 그 눈은 결코 잘못된 결과를 낳지 않을꺼야.] [성인이 되라거나, 하는 것을 말하는게 아니야. 너는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어른이 되는것이 좋아. 할수없다고 말하는것을 솔직히 받아들일수 있게 되는것이, '미안해요'라고 말하는 너 라면, 10년후에는 반드시 멋진 남자가 되어있을꺼야.] 그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일어서고는,가방에 손을 뻗었다. [아, 그래도 큰일이 아닌한 그 안경을 벗지 말아야해. 특별한 힘은 특별한 힘을 부르는 것이니까. 어떻게라도 자신의 손으로는 감당하지 못한다고 시키본인이 판단했을때 안경을 벗고, 역시 시키본인이 잘 생각해서 힘을 행사하세요. 그힘자체는 결코 나쁜것이 아니야. 결과를 좋은것으로 만드는가 나쁜것으로 만드는가 는, 어디까지나 시키군, 너의 판단에 달려있는거니까.] 가방이 쥐여 올라갔다. ---------선생님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선생님과 작별해야 한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무리예요 선생님. 나조차도 모르겠는걸요. 실제로는 선생님을 만날어요. .....안돼요. 선생님이 없다면, 이런 안경이 있다고 되는게 아니잖아요.....!] [시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 안되요. 자기자신도 모르게 한숨쉬면서, 묻고있는것 이 더 불쾌하게 하는걸.] 선생님은 8자 눈썹을 하고, 핑, 거리며 나의 빰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너 자신도 알고 있지? 너는 더이상 괜찮다는걸. 그렇다면 그런 재미없는 말을 해서, 겨우 강해진 자신을 버 리지 말아요.] 선생님은 돌아서서 등을 향했다. [그럼 작별이구나. 시키, 어떠한 사람이 라도 인생이라는 것은 함정투성이인 거야. 너는 사람보다 그것을 어떻게 할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좀더 반듯하게 사는거야.] 선생님은 가버렸다. 굉장히 슬펐었지만, 나는 선생님의 친구이니까,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응. 안녕, 선생님] [좋아, 작별인거야 시키. 그 의기로 언제까지나 건강하게 있는거야. 알겠지? 위험할땐 우선 침착하게, 그 뒤의 일을 생각해보는거야. 괜찮아, 너라면 혼자서라도 잘 해나갈수 있을꺼니까.] 선생님은 즐거운듯이 웃었다. 자아, 라고 바람이 불었다. 풀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선생님의 모습이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바이바이, 선생님] 말해도, 더이상 만날수 없어, 라고 실감했다. 남은것은 많은 이야기와, 이 신기한 안경뿐. 단지 7일뿐인 시간이었더라도, 무엇보다도 소중한걸 가르쳐 주었다. 멍하니 서있으니, 눈에 눈물이 났다. -------아아, 얼마나 바보 같은가. 나는 작별만을 말했다. 고맙다는 한마디의 말도, 그사람에게 전하지 못했다. 나의 퇴원은 그로부터 얼마 있지 않아서였다. 퇴원한 그뒤, 나는 토노가가 아닌, 친척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래도 괜찮아. 토노시키는 혼자서 잘해나갈 수 있으니까. 새로운 생활을, 새로운 가족과 보내게 되었다. 토노시키의 9살의 여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새로운 가을이 돌아오고, 나는 조금은, 어린이 된것같다고 생각했다----------- ===================================================================== *역자주 - 신경외과 도츠가 선생님 : 본문엔 뇌외과로 되어있습니다만, 국내에서는 뇌외과 가 따로 없고 신경외과에서 신경, 뇌에 관련된 수술을 담당하기에 신경외과로 번역했 습니다. 그리고 도츠가라는 이름은 대강 비슷한 발음이 나게 끼워 넣었습니다. 그외 일부 의역이 당당하게 끼여있습니다만,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데는 크게 문 제가 없습니다. 원문과 뜻이 다르다고 우기지 마시기를..... --------------------------------------------------------------------- 스토리 번역 부문 -알퀘이드 루트- By 2M 1. 반전충동(反轉衝動) I -가을. 여름의 그림자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 10월 중반의 한 목요일. 나 토노 시키는 8년 동안이나 떨어져 생활하고 있던 친가에 돌아가게 되었다. "시키, 빨리 준비해야지. 벌써 등교시간이 지났잖아." 부엌에서 케이코 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 지금 나가요-!" 큰 소리로 대답하고, 그때까지 내 방으로 사용했던 아리마 가의 방 하나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그럼 나 간다. 8년 동안 신세 많이 졌어." 짝짝, 하고 합장을 한 후. 가방 하나만을 들고 그 동안 정들었던 방을 뒤로 했다. 현관을 나서서 아리마 가를 돌아다 보았다. "시키" 현관입구까지 배웅하러 나온 케이코 씨는 쓸쓸해보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 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 "다녀올게요. 엄마도 건강하셔야 되요." 이젠 돌아올 리 없음에도 다녀올게요 라니, 왠지 우스웠다. 이제부터 앞으 로, 가족의 자격으로 이 집의 문지방을 넘는 일은 없을테니까. "지금까지 폐 많이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아빠한테도 고마웠다고 전해주세 요." 케이코 씨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8년간- 내 모친이기도 했던 이 사람은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슬픈 눈을 하 고 있다. 이 사람의 이런 얼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토노 씨 집에서의 생활은 많이 힘들겠지만, 잘 해야 해. 시키는 몸이 약하 니까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괜찮아요. 8년이나 지났는데 보통 사람만큼 건강해지지 않았으려구요. 이 래봬도 의외로 꽤 세다니까요, 내 몸." "응, 그렇구나. 하지만 토노 가 분들은 모두들 어딘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분들이시니까 시키가 압도당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돼서..." 케이코 씨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다. 오늘부터 내 가 살게 될 집은 대저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대착오적인 건물이다. 사는 집도 장난이 아닌데 가문도 대대로 내려오는 이름있는 가문에, 실제로 몇 개 회사의 주주도 겸하고 있는 것 같다. 참고 삼아 말하자면 8년 전에 장 남이었던 나 - 토노 시키를 친척인 아리마 가에 맡겼던, 나한테 있어서는 진짜 우리집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정한 일인걸요." 그래. 이미 정한 일이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지금까지 폐 많이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하고, 8년간 정들었던 아리마 가를 뒤로 했다. "-하아" 아리마 가를 떠나 평소에 다니던 통학로로 나오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8년 전. 정상이라면 즉사, 였을 중상에서 회복된 나는 본가인 토노 가문에서 분가한 아리마 가에 맡겨졌다. 나는 9살 때까지는 친부모인 토노 가의 저택에서 살 고 있었고 그 후 8년간 고교 2학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친척인 아리마 가에 서 살고 있다, 라는 소리가 된다. 반쯤은 양자를 들이는 형식으로 아리마 가에 맡겨진 후의 생활은, 그야말로 노멀 그 자체였다. 그때 - 헤어져 버렸던 선생님이 말했던 것 같은 특별한 사고 같은 것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나도 선생님이 주셨던 안경을 끼고 있는 한 "선"을 볼 일이 없다. 토노 시키의 생활은 정말로 평범하고, 지극 히 평온한 가운데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바로 어제. 지금까지 완전히 의절한 듯한 채 내버려두었던 나에게 [오늘까지 토노 저택으로 돌아와라] 라는 토노 가 당주에게서의 전언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하아-" 또 한숨이 나온다. 실은,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하기 이전부터 나는 토노 가 의 사람들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행의작법 같은 걸 따지는 귀찮은 저택 에서의 생활이 어린 마음에는 재미없고 짜증나는 것이었다고 여겨졌기 때문 일 것이다. 그래서 아리마 가문에 맡긴다, 라고 아버지가 말했을 때에는 아 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양자로 나섰다. 결과는 매우 좋았던 것 같다. 아리마 가 사람들과는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고 의모인 케이코 씨와도, 의부인 분신 씨와도 마치 부모자식처럼 지내 왔다. 애초부터 일반적인 다정한 가정을 그리워 했던 토노 시키는, 아리마 가에서 친자식처럼 지내왔다. 그러한 생활에 후회하는 마음 같은 건 전혀 들지 않 았다. ...단 하나. 1살 연하의 여동생을 토노 저택에 놓아두고 와버렸다, 라는 것 이외에는. "...아키하 녀석, 틀림없이 날 미워하고 있겠지." 랄까, 미움받는게 당연한 듯한 느낌이 든다. 저 말도 안 되게 넓은 저택에 외토리로 남겨져 완고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거다. 아키하가, 애저녁 에 집에서 도망나와 버린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에 대해서는 쉽 게 상상이 간다. "...하아" 한숨만 쉬고 있어도 소용이 없다. 뒷일은 될대로 되라지, 다. 오늘, 학교가 끝나면 8년 만에 친가로 돌아간다. 거기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하느 님만이 아는 사실이겠지. "그래. 게다가 지금은 좀 더 절박한 문제도 있고." 손목시계는 7시 45분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 학교는 8시 정각에 아침 HR 시 간이 시작하기 때문에 8시까지 교실에 도착하지 못하면 지각이 확정되어 버 린다. 가방을 안고 학교까지 뛰기로 했다. "하아, 하아, 하아-" 도착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약 십 분. 육상부에서 스카웃 해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의 타임을 기록하며 뒷문에서 교정으로 들어선다. "...그래. 뒷문으로 들어오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인가." 위치적으로 아리마 가와 토노 가는 학교를 사이에 두고 정반대의 장소에 있 다. 아리마 가는 학교의 뒤쪽에, 토노 저택은 학교의 정문 쪽에. 자연히 내 일부터의 등교길은 뒷문 쪽이 아닌 정문 쪽이 될 것이다. "이곳의 조용한 분위기, 꽤 좋아했었는데 말야." 왠지 우리 학교 뒷문은 인기가 없어서 이용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10명 안팎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학교 뒤뜰은 아침 저녁 상관없이 조용하고 인기척도 없는 장소가 되어있다. 깡, 깡깡, 까앙 ...그래서일까. 새 지저귀는 소리에 뒤섞여 망치 두드리는 소리까지 확실히 들리는 것은. "망치 두드리는 소린가 - 아, 에...?" 까앙, 까, 까앙, 까깡 어중간하게 리드미컬한 망치 소리가 들린다. 방향으로 미루어 운동장 쪽인 것 같다. "......" 뭐지. HR까지 앞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디 들를만한 시간은 안 되지만 왠지 신경이 쓰인다. 여기서는- ※여기서는- 이후에는 선택입니다. -------------------------------------------------------------------------------- HP 시간까지 앞으로 수 분. 지금은 교실로 직행해야만 해 - 선택 평소보다 몇 분이나 여유있게 교실에 도착했다. "-후우." 가벼운 심호흡을 하고 창가에 있는 내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안녕, 토노 군." 라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목소리로 누군가가 인사를 했다. "-에?" 어리둥절해 하면서 몸을 돌렸다. "토노 군, 아까 선생님이 찾으셨어. 집 문제로 뭔가 할 말이 있으시다는 것 같던데." "...흐응. 집 문제라면 이사 가는 것 때문이려나." ...주소이전 수속은 어제 모두 끝마쳤을테지만, 뭔가 아직 남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 - " 같은 반 여학생은 다시 돌아가지 않고 물끄럼히 내 얼굴을 바라본다. "아, 에, 그...안녕, 유미즈카." "응. 안녕, 토노 군. 내 이름 기억하고 있었구나." 휴우, 하고 숨을 내쉬며 그녀 - 유미즈카 사츠키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같은 반 친구들 이름 정도는 외우고 있어. 저, 그, 유미즈카랑은 별로 많 이 이야기해 본 적은 없지만." "그건 그래, 응. 그래서말야 나, 토노 군한테 말 거는게 좀 불안했었어." 라고 말하며 유미즈카는 다시 웃었다. 왠지 상당히 기뻐하는 듯한, 그런 태 도를 취하고 있다. "......" 무슨 다른 용건이 있는지, 유미즈카는 물끄럼히 날 바라보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유미즈카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다. 2학년이 되어 같은 반 이 됐을 뿐, 지금까지 스쳐지나가며 몇 마디 나눈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유미즈카 사츠키는 우리 반에서도 중심적인 학생이었다. 같은 반 남학 생들 거의 대부분은 유미즈카의 열성적인 팬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여학생 들 사이에서도 안 좋은 소문 같은 것도 떠돌고 있지 않는 등 전형적인 아이 돌이다. 자연히 유미즈카의 주변에는 항상 인파가 몰리고, 따라서 별로 사교성이 없 는 나하고는 정반대의 학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유미즈카 사츠키]라는 이름을 기억하고는 있어도 유미즈카가 [토노 시키]라는 같은 반 학생의 이 름을 기억할 리가 만무하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성가신 우연 같은게 작용하 는 모양이다. "토노 군. 저기, 뭣 좀 물어봐도 돼?" "하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상관없어." "응...저기...복잡하게 해서 미안. 저기 말야, 방금 이사 간다고 말했잖아 ...토노 군, 다른 동네로 이사가는 거야...?" 말하기 힘들다는 듯 유미즈카는 말끝을 흐린다. 겹쳐 모은 두 손도, 머뭇머 뭇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성급한 이야기 같지만 혹시 전학이라든지, 가는 거야?" "아아, 아냐아냐. 주소만 바뀌고 학교는 바뀌지 않아. 이사 가는 곳도 이 동네 안인데다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고." "그래 - 다행이다." 후우, 하고 유미즈카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 이상하다. 어째서 유미즈카가 내가 이사 간다는 사실 하나에 대해 이런 반 응을 보이는 거지...? "하지만 토노 군. 집이 바뀌게 된다는 건, 혹시 아리마 씨 네 집에서 나가 게 된 거야?" "응. 그 동안의 추억은 아쉽긴 하지만 언제까지나 신세만 지고 있을 수도 없고 -" ...어라? 어째서 유미즈카가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는 거지? 토노 시키가 아리마 씨 네 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이 학교에서는 그 녀석 말고 아무도 모르고 있 다고 생각했었는데 - "이야아, 토노!" 갑자기 교실 문 쪽에서 주변 사람들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한 큰 목 소리가 들려왔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만, 중학교 때부터의 친구였 던 그녀석이 온 모양이다. "여어, 유미즈카 잖아. 별일이네, 너랑 토노가 이야기 하고 있을 줄은." "...안녕, 이누이 군."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한 유미즈카는 그대로 고개를 푹 떨궜다. 뭐...이누이 가 정면으로 말을 걸었을 때 정상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타입이 아니로군, 유미즈카는. "건 그렇고, 아침나절부터 여자나 꼬시고 있다니 무슨 바람이 부셨나? 토 노 너 이자식, 여자한테 관심 없었던게 아니란 말야?" 아리히코는 큰 목소리로 웃기지도 않는 발언을 해댄다. "야, 그 무슨 섭섭한 소리야. 난 지극히 평범한, 여자에 대한 관심도 가지 고 있는 남자라고." "아, 그래그래. 거참 잘됐군! 뭐, 요즘은 정상적인 성취향보다 변태적인 성 취향 쪽이 여자들한테 더 잘 통해들어가지만 말야. 그게 통해도 그 다음 번 까지 이어지지 않는게 문제지만!" 아하하하하, 라고 이른아침부터 어딘지 모자란 듯할 정도로 밝은 웃음소리 가 교실 안에 울려퍼진다. ...하아.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왜 난 이런 녀석과 친구가 된 걸까. 오렌지 색으로 물든 머리카락, 귀에는 피어스, 때와 장소에 사람도 가리지 않는 굉장한 싸움실력에 척 봐도 알 수 있는 더러운 성격과 반사회적인 복 장. 진학교인 우리 학교에서 홀로 돌출되어 있는 자유로운 성격의 무법자. 그것이 이 사나이, 이누이 아리히코 군인 것이다. "거참, 이른아침부터 시끄러운 놈이로구만 네놈은. 이쪽은 여러 가지로 일 이 복잡하게 돼서 기분이 좀 꿀꿀하니까, 오늘 하루 동안은 옆에 얼씬도 하 지 말라구." 벌레라도 쫓듯 손을 내저으며 아리히코를 쫓아보낸다. "기분이 꿀꿀하다니, 뭐야 토노. 그 날이야?" "-아니, 말을 잘못했군.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앞으로 영원히 내 옆에 얼씬 도 하지 말아줘. 네놈이랑 같이 있으면 덤탱이로 우울한 일이 늘어날 것만 같아." 아리히코를 무시한 채 내 자리로 이동한다.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하아, 하고 몸을 쭉 폈다. "야, 토노. 그렇게 사람 무시하는게 아냐. 자기도 모르는 새에 남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게 된다고." "헤에~그런 말 처음 듣는데. 그럼 말야, 상처 입힌다던가 같은 거 말고 당 장에 즉사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어? 가르쳐만 주면 그 보답으 로 그 자리에서 당장 시험해 볼테니까." "...너무하는구만 토노. 왠지 평소보다 날카로운 거 같은데, 오늘 아침은?" "기분 드럽다고 말했지. 다른 놈들한테는 몰라도, 너한테 만큼은 친절하게 대할 여유 같은 건 없어." "...하아. 왜 그럴까나~토노는 왜 나한테만 그렇게 쌀쌀맞은 걸까나. 다른 놈들한테는 성인군자 같은 녀석이...불공평해." "뭐야, 잘 알고 있네 아리히코. 이 세상에 공평한 일 같은 건 없어." "...역시 토노는 나한테만 차갑게 대해." 과장섞인 한 숨을 쉬는 아리히코. 그다지 나로서도 아리히코를 차갑게 대하 는 것도 아니고, 그 뭐랄까...요컨대 이 녀석하고는 대체로 이런 관계가 되 어있다는 거다. "근데, 아리히코. 평소라면 2교시 가까이 돼서야 출석하러 나오는 야행성 인간인 네녀석이 HR 시간에 얼굴을 내비치다니, 너야말로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좀, 아니 엄청 수상해." "아하하, 나도 그 생각 했지. 어쩌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등교시간 지키면 서까지 올 곳이 아니야, 학교란 데는." "...네놈 취미 같은 건 안 물어봤으니까 그건 패스. 내가 듣고 싶은 건 네 가 이렇게 일찍 일어난 이유 뿐이니까." "아침 일찍 일어난 이유...? 그렇군. 요즘은 보통 난리도 아니라서 밤에 놀 러 나갈 수가 없잖아? 그런 이유로, 필연적으로 밤중에는 반드시 자버리게 된다는 말씀. 토노도 알텐데? 최근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연쇄살인사건 이야 기." "- 그렇군.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도 있었던가." 아리히코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 냈다. 조금은 반성. 요 2, 3일 동안 토노 가에 돌아가느냐 돌아가지 않느냐로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간의 뉴스 따위에는 전혀 신경쓸 수가 없었다. "뭐였더라, 엄청 저속한 문구였는데. 연속엽기살인사건, 이었던가?" "그 뿐만이 아냐. 피해자는 모두 젊은 여자 뿐인데다 이틀 전에는 8명 째 피해자가 나왔어. 또 피해자 전원이 - 뭐였더라?" 응? 하고 머리를 갸우뚱 거리는 아리히코. "......" 이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아아, 생각났어! 피해자 전원이 토막난 채 시체의 산을 만들고 있었다나 뭐라더나!" "...아냐, 이누이 군. 살해당한 사람들은 모두 몸속의 피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지?" "아아, 그랬지 참. 현대의 흡혈귀라도 나타난거 아냐, 그 사건?" "흐응. 자세히도 아네, 유미즈카?" "그렇지는 않아. 이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이잖아. 뉴스를 보다보면 싫어도 기억하게 될 걸." ...그랬구나. 분명히 옆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틈엔가 이쪽 동네로 사건이 옮겨와 있었다. "-거시기 뭐...그렇다는 거야, 토노. 아무리 이몸이라고 해도 밤중에 살인 범이 활보하고 있는데 놀러 나다니지는 않지. 그런 고로 요즘은 아침 7시에 번쩍 하고 눈에 떠진다는 소리야." "...뭐야, 그런 이유였냐. 너무 솔직히 말해서 재미 없잖아." "뭐야, 매정한 녀석 같으니. 근데 거시기, 또 아침부터 빈혈로 픽 쓰러지지 는 않았냐? "아니, 오늘 아침은 아직은 괜찮아.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말야, 그렇게 아무 때나 빈혈을 일으키면 몸이 남아나질 않아." "아아, 그야 당연하지. 토노가 괜찮다고 말할 정도면 뭐, 괜찮겠지만 말 야." (딩~~동~~댕~~동~~) 아침의 잡담시간을 끝내게 하려는 듯, 예비종이 울렸다. "자, 수업 시작한다구. 빨리 네 자리로 돌아가." 알았다고 대답을 하며 아리히코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럼 있다 봐, 토노 군." "아 - 응, 유미즈카도. 같이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탁탁탁, 가벼운 발걸음으로 유미즈카도 자리에 돌아갔다. 2교시 수업이 끝났다. 담임이기도 한 수학 교사는, "토노, 서류에 누락된 부분이 잇다니까 사무실로 좀 와라." 라고 교실을 나가면서 말했다. 금방 끝날 것 같으니 3교시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사무실에 다녀오자. 사무 실은 1층에 있다. 3층에 있는 2학년 교실에서 좀 떨어져 있긴 하지만 뛰어 가면 3교시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 돌아올 수 있을 거다. - 달린다. - 달린다. - 팟 - ......!!?? 쿵, 하는 충격을 받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머리를 어딘가에 부딪힌 듯, 눈앞이 캄캄하고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아야야야" ...바로 앞에서 소리가 들린다. 들어본 적 없는 여자 목소리다. 아무래도 전속력으로 누군가와 정면충돌 해버린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아직 충분히 주변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부딪친 사람한테 사과했다. "예, 전 괜찮지만...그쪽분이야말로 어디, 다치지 않으셨어요?" 정중한 말투 속에는 날 비난하는 듯한 뉘앙스는 섞어있지 않았다. 지금 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대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아 - 응, 저도 괜찮은 것 같은데요." 어질어질하는 머리를 가누며 일어났다. 그러자 겨우 주변 사물이 제대로 보 이지 시작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이마에 혹이 났는데요." "에-?" 손으로 만지자 따끔, 하고 아픔이 밀려온다. 이 사람이 말한 대로, 꽤 큰 혹이 머리에 난 모양이다. "죄송해요. 제가 멍하니 서 있는 바람에 부딪히게 해버려서...이마, 많이 아프시죠?"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여학생은 내 얼굴을 바라본다. 정중한 말투 에서 1학년인가 하고 생각했었지만, 리본의 색으로 미루어 이 사람은 3학년 - 즉, 선배다. "아뇨 - 괜찮아요. 잘못한 건 제쪽인데요. 저야말로 선배님에게 달려들어서 정말 죄송해요." 꾸벅 머리를 숙였다.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앞으로는 복도에서 뛰면 안 되요. 저처럼 멍하 니 운동장 쪽을 바라본다든지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예,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근데 선배님 쪽은 저기, 어디 다치지 않으셨 어요?" "예, 덕분에 뒤로 넘어진 것 뿐이에요. 토노 군, 저를 피하려고 하다 벽에 부딪치셨으니까요." "-그런가. 어쩐지, 왜 이리 눈앞에 별이 반짝이나 했지." ...는 그렇다치고, 저 속력으로 벽에 머리를 박고 나서 겨우 혹 하나 생겼 다는 건 오히려 행운아닌가.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선배님도 복도에서 멍하니 가만히 서 계시면 위험해요." "예. 앞으로 조심할게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선배. "......" 뭐랄까, 상당히 솔직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다. "...에, 저기, 그, 그럼 저는 이만."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면서 사무실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안경을 쓴 상급 생은 물끄럼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 아참, 그러고 보니 이 선배는 누구지? 부딪치고 나서 잠시 혼란스럽기는 했 지만, 냉정을 되찾고 나니 상당한 미인이다. 이 정도의 미인이라면 남학생 들 사이에서 "3학년에 안경을 쓴 모습이 잘 어울리는 미인이 있다"라는 소 문이 떠돌았을텐데. "저기, 저, 이만 갈게요. 선배님도 교실에 돌아가시는 편이 좋을 것 같은 데요. 아, 만약 어딘가 아프신 곳이라도 있으시면 저희 교실로 와주세요. 2학년 3반의 토노라고 합니다. 그, 저기, 상처를 입힌 책임 정도는 져드릴 테니까." 예, 하고 그녀는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연상이지만, 왠지 후배를 대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럼,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점심시간 때 교실로 찾아갈게요. 하지만 시 키 군,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복도에서 뛰면 안 돼요."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선배님도 복도에서 멍하니 서계시거나 하면 안 되 요." 그렇게 대답하고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어라, 잠깐. 시키 군이라, 난 내 이름까지 가르쳐 준 적 없는데. 게다가 - 아까, 이 선 배는 내 이름을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지 않았던가...? "...어라? 나, 선배님이랑 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가?" 선배는 에에?! 라며 조금 놀란다는 듯이 얼굴빛을 흐렸다. "너무해요! 토노 군, 나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거죠!" "-?" 기억하지 못한다니, 아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나 되는 미인 이랑 무슨 일이 있었다면 잊어버리는 쪽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 "...에, 저기, 그러니까..." 선배는 원망스럽다는 듯 시선을 아래로 떨군다. 그 눈동자, 확실히 기억이 나는...듯...한. ...그러고 보니 한 두 번 정도, 어딘가에서 서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 던가? "-시엘 선배, 였던가?" 조심조심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예. 기억해 줘서 다행이에요. 토노 군, 멍하니 있어서 혹시 잊어버린게 아 닌가 했는데." ...멍하니 있으려고는 안 했지만, 사실이 잊어버리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점심시간에 다시 만나죠." 시엘 선배는 다시 한 번 꾸벅 하고 인사를 한다. 그것을 아무 생각없이 바 라보면서, 어딘가 딱 들어 맞는 구석이 없는 기분으로 복도를 나섰다. -------------------------------------------------------------------------------- 점심시간이 됐다. 자아, 어디서 점심을 먹을까? -복도로 나가서 생각한다, 선택- 점심시간 때의 복도는 왠지 복잡하다. 이제부터 학교 식당으로 가려고 하는 학생들과 도시락을 한 손에 들고 마음에 드는 장소로 향하는 학생들. 그런 사람들의 흐름에 섞여 식당에 갈까 구내매점으로 향할까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고민해 본다. "......" 왠지, 나도 참 할일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곳에서 우물쭈물할 시간이 있다면 아리히코가 있는 학교 식당에 가는 편이 차라리 나을 거다. 식당 자리는 거의 대부분 남아있지 않았다. 교실에서 멍청하게 시간을 끌고 있었던 탓에 식당 자리는 거의 전멸상태가 되어있었다. "-빈자리 같은 건 없, 나" 혼잡한 학교 식당을 바라본다. 이 시간에 자리가 비어있을 리는 없겟지만 그래도 일단 테이블의 상태를 확 인했다. "...아" 놀랐다, 기 보다는 감격했다. 마치 보란듯이 두 자리도 아니고 그것도 세, 네 자리씩이나 자리가 비어있는 테이블이 있다. 거기 앉아있는 학생은 2명. 그 중에 한 명이 자리를 찾아 두리번 두리번 거리고 있는 날 발견한 모양이 다. "야아, 토노!" 라며 손을 힘껏 흔들고 있는 학생은 머리를 오렌지빛으로 염색한 같은 반 학생이다. "......" ...머리가 아프군. 하지만 달리 비어있는 자리도 없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손을 흔들고 있는 친구의 테이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테이블에는 아리히코와, 의외의 사람이 동석하고 있었다. "어라, 시엘 선배님" "어머, 토노 군이잖아?" 둘이 서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여어, 토노 - 엥, 뭐야. 선배, 토노를 알아요?" "예. 오늘도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복도에서 쾅~하고 부딪혔었죠, 토노 군?" "아...예, 그땐 실례 많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머리를 숙인다. "아, 아니에요. 저야말로 멍하니 서있는 바람에...죄송했어요. 토노 군, 성 실한 사람이시네요." "성실이라...그렇지는 않은데..." 선배의 웃음띤 얼굴에, 만족스럽다는 듯한 빛이 감돈다. ...뭐랄까, 역시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선배다. "하지만 의외네요. 토노 군, 이누이 군이랑 서로 아는 사이였어요? 혹시 같 은 반이신 거에요?" "Ok! 나와 토노는 서로 아는 사이라면 서로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고 1학 년 때부터 한 반인데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중학교 때부터의 뗄레야 뗄 수 없는 질긴 인연의 제일 친한 친구라구요, 우리는!" 쾅 하고 테이블을 내리치며 힘있게 역설하는 제일 친한 친구...뭐랄까나, 평소 이상으로 기합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이려나. "자, 여기 앉으라구 친구! 계속 그렇게 벙~하게 서있으면 모처럼만에 시킨 우동이 다 식어버린다구. 빨랑 앉아서 사양말고 어떻게 선배랑 알게 됐는지 에 대해서 나한테 좀 가르쳐 줄래?" 아리히코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힘껏 등을 쳐댄다. "......" 아리히코가 상상하는 것 같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달리 비어있는 자리도 없 다. 소란스러워질 것을 각오하고 아리히코의 옆에 앉았다. 아리히코는 시엘 선배와 꽤 친한 사이인 모양이다. 아직 몇 번 밖에 만난 적 없는 나와는 달리 편한 말투로 선배와 이야기하고 있다. "근데 선배, 아까 토노랑 부닥쳤다고 했었는데 뭔 일 있었시요?" "예. 쉬는 시간에 토노 군이랑 부딪쳐 버렸어요. 전 다친 데는 없었지만 토 노 군은 머리를 부딪쳐 버려서..." "흐응...토노가 그런 바보짓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는데. 이자식, 벙~하 니 하고 있는 것 같아도, 실은 엄청 착실한 놈이에요. 남한테 폐 끼치는 걸 싫어한다고나 할까." "아, 무슨 말인지 대충은 알겠어요. 부딪쳤을 때도 제 걱정만 해주셨고, 아까 전에도 사과하셨었고요." "그렇죠? 이자식은 그런 녀석이니까 그런 바보짓은 안 한다니까...아, 설마 또 빈혈이라도 일어킨 거 아냐, 너?" 아리히코는 진심으로 내 몸을 걱정하고 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이사 가는 거 수속 때문에 말야 사무실까지 뛰 어갔었거든. 그 순간 콰쾅~하고 선배랑 부딪쳐버린 거지." "-그렇군. 뭐, 이래저래 네녀석이 부주의했기 때문이란 소린가. 저 유명한 토노 군도 이사 때문에 마음이 심란했던 게로군." 납득했다는 듯 아리히코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 "토노 군, 전학가요!?" 라고, 선배가 엉뚱한 말을 꺼냈다. "선배님, 저 전학같은 거 안 가요. 그냥 오늘부터 사는 곳이 바뀌니까, 그 주소지 변경 때문에 서류를 작성한 거 뿐이니까." "에...? 그렇담, 설마 자취를 하게 됐다는 거에요?" "그것도 아니에요. 저희 집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니까. 언덕 꼭대기 쯤에 있는 곳인데, 그렇게 실감은 나지 않지만요." "...하아. 그거 설마, 토노 저택을 말씀하시는 거에요?" 선배는 설마 설마 하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동네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언 덕 위에 있는 토노 양관은 왠지 특별한 장소로 비춰지기 때문일 거다. 나도 요 8년 동안 돌아가지 않았지만, 기억 속에 있는 토노 저택의 모습은 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뭐, 그렇다는 거죠. 저도 장소가 틀린게 아닌가 하고 생각은 하지만, 뭐 이왕 이사 가게 됐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흐응~보아하니 별로 이사 가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네?" "글쎄...솔직히 좋지도 싫지도 않다, 라고나 할까. 나도 잘 모르겠어." "뭐, 자기 집이라도는 해도 8년 만이잖아? 긴장하는 것도 당연할 만 하군. 며칠 동안은 남의 집 같은 생각이 들 거야." "...글쎄...아직 안 가봐서 잘 모르겠어. 뭐, 나한텐 너네 집이라는 피난장 소가 있으니까 그나마 좀 기분이 낫지만 말야." "윽. 너 말야,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거, 하나도 안 반가워. 토노 네놈의 얼빠진 성격은 그럭저럭 마음에 들긴 한데 지나치게 남 신경쓰는 그놈의 성격은 증말 마음에 안 든단 말야, 옛날부터 !" 쾅, 하고 테이블을 치는 아리히코. "......" 뭐랄까, 사실 아리히코의 말 대로다. 나에게 반론의 여지는 없다. "이누이 군, 토노 군 말인데요, 그렇게 자주 이누이 군 네 집에 자러 와요 ?" "그리요. 토노 저 자식은 부모님 걱정만 해서, 방학 때 쯤만 될라치면 집에 있기 거북하다면서 도망쳐 온다구요. 이노무 자슥, 맡겨졌다느니 어떻다느 니 하면서 아리마 가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다구. 그래서 24시간 오픈되어 있는 우리 집에 굴러들어온다는 말씀. 이자식, 외모가 받쳐주니까 누나 마 음에도 쏙 들어버려서 말야 뻔뻔하게 남의 집에 올 때 아무 것도 안 사가 지고 자러온단 말야!" 절대로 용서못해, 라고 이야기하듯 아리히코의 불끈 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맡겨졌다는 건, 토노 군을 말하는 거에요?" "앗-" 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아리히코. "...미안. 아무데서나 말할 일이 아니었는데." "아냐, 됐어. 그렇게 안 좋은 일도 아니고 말야." 아리히코의 얼굴을 보지 않고 우동을 먹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래. 뭐, 그렇구만. 그런 일로 뭐라고 하면 천벌을 받는다, 라는 건가." 나름대로 납득하는 아리히코. 아리히코 녀석만이 가진 이런 특이한 낙관적 인 성격은 정말로 부럽기까지 하다. "토노 군. 저기, 전에 살던 가족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거에요...?"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이자식, 아리마 씨네 아저씨아줌마랑은 아무 문 제도 없었으니까. 아, 아리마라고 한 쪽이 이녀석을 맡아준 집안 사람들이 긴 한데, 이게 끝내주게 좋은 사람들이라서 말에요, 내가 보기엔 엄청 행복 한 가정이었다니까. 그런데도 이자식, 양자가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거 절하고 방학 때만 되면 우리 집에 도망쳐 온 거라구. 거참, 너 대체 뭐가 불만이야?" "불만 같은게 있을 리가 있냐. 너무 친절하게 잘 대해주시니까 더 이상 부 담 드리기 싫었을 뿐이라니까." 선배는 어깨를 움츠린 채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 집 사정을 함부로 들어버린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괜찮아요, 선배. 재미없는 이야기만 해서 미안." "에, 그렇지 않아요. 저야말로 이상한 걸 물어봐서, 정말로 죄송해요." 선배는 억지로 밝은 척을 하려 한다. ...중학교 때부터 친구 사이였던 아리히코라면 몰라도, 선배를 상대로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실례되는 일일 뿐이겠지. 실제로 선배는 왠지 모르게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다. "선배, 저기요-" "저기, 밥 다 먹었으니까 먼저 실례할게요. 정말 죄송하게 됐어요." 선배는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는 나와 아리히코 두 사람만 남았다. "...미안. 모처럼 둘이서 식사하고 있었는데 망해해 버려서." "신경 쓰지마. 이번엔 내가 부주의했으니까 할 수 없지. 오히려 선배한테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홀짝홀짝 우동 국물을 마시는 아리히코. 선배랑 이야기하고 있었던 탓에 벌 써 차갑게 식어있는 것 같다. "뭐, 타이밍 상으로도 마침 잘됐지 뭐. 토노한테 몰래 할 이야기도 있었고, 선배가 먼저 돌아가 준게 오히려 행운이지." "뭐야, 갑자기 심각하게 되어가지고서는. 말해두는데, 나 돈 없어. 오늘부 터 나, 거지소년으로 살기로 했으니까." "-그런 게 아니라니까. 내가 듣고 싶은 건 말야, 토노는 실제론 어떤가 하 는 거라구." "어떤가, 라니 뭐가?" "그러니까. 너, 초등학교 때부터 아리마 가에 맡겨졌지? 무슨 이유가 있었 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렇게 8년이나 지났다구. 왜 이제와서야 의절한 자식 을 불러들이냐 하는 거 말야, 네 아버지가 말야." ...그런가. 아리히코는 아리히코 나름대로 토노 시키를 걱정해 주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그러니까 별로 의절한게 아니래두 그러네. 어쩌다가 저택에서 쫓겨 나게 된 거 뿐이니까 아리히코가 걱정하는 정도의 그런 건 아냐." "저기 말야, 토노 군. 어쩌다가 어린애를 집에서 쫓아내는 집이 있다면 말 이지, 그건 이미 비극이 아니라 개그라구. 오우, 잇츠 파티 조크~~하지만 넘넘 썰렁해서 웃는 사람, 없음." 아리히코는 일부러 크게 양손을 벌렸다가 어깨를 움츠린다. "...뭐, 그럴지도. 확실히 어쩌다가 집에서 쫓겨났다고 하면 그거야 웃음거 리밖에 되지 않돃지." "그렇지? 보너스로 두 번 다시 집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라는 결정타까지 붙어서 말야. 세상사람들은 그런 걸 가리켜서 의절했다고 하는 거야. 지금 까지 못 물어보고 있었는데 말야, 너 왜 의절당한 거냐?" "......" ......글쎄. 그건 오히려 내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뭐, 말하기 싫으면 됐어." 아리히코는 양손으로 그릇을 들고 벌써 차가워진 우동 국물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은 짧다. 아리히코의 우동 먹는 속도를 보면서 나도 마 찬가지 속도로 우동을 먹기 시작琴다. -------------------------------------------------------------------------------- 하루 수업이 모두 끝나고 방과후가 되었다. 곧장 저택으로 돌아갈 마음도 들지 않아 멍하니 창밖에 보이는 교정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교실은 저녁 노을로 오렌지 빛깔로 물들어가고 있다. 붉은 수채물감으로 젖어든 듯한 색 을 띠고 있어 눈이 아플 정도이다. ......주황색은 별로다. 눈 안쪽까지 물들어버릴 것 같아 구역질이 난다. 아무래도 난 피를 연상시키는 대상에 약한 체질인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피에 약한 체질이 되어버렸다, 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지도 모 른다. 8년 전, 토노 시키는 죽을 뻔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끔찍한 대형사고로 우연히 그 사고를 당한 나는 가슴에 상처를 입고 말았으며 며칠 동안 생사의 갈림길을 헤맸다. 보통이라면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 를 입었던 것 같지만 의사가 솜씨 좋게 처치한 덕분인지 어쨌는지 기적적으 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사자인 나 자신은 그때의 상처가 지나칠 정도 로 심각했었기에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8년 전, 어렸을 적. 나는 갑자기 가슴 한복판을 쿵, 라고 꿰뚫려 그대로 의 식을 잃었다. 그 후에는 그저 괴롭고 추웠다는 것 밖엔 기억이 없고, 정신 이 들었을 때 난 이미 병원의 침대 위에 있었다. 사고 당시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도 가슴에는 그때의 상 처가 선명히 남아있다. 아무래도 유리 파편이 몸을 관통했던 듯, 가슴 한복 판과 등에는 불에 데인 것 같은 상처가 있다. ...정말이지, 나 자신도 용케 살아남았구나 하고 스스로를 칭찬해 주고 싶 다. 그 후 나는 빈번히 빈혈과 비슷한 증상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아무 때 나 픽 하고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려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폐를 끼쳤다. 아버지가 토노 가의 일원으로서 부적합하다며 나를 분가 쪽 사람에게 맡긴 것은 그것이 이유일지도 모른다. "...가슴의 상처, 인가." 교복으로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 가슴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상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그 사고 후에 예의 "선"이 보이는 체질이 되어버렸다. 지 금은 선생님이 주신 안경 덕분에 잊고 있었지만 선생님과 만나지 못했다면 벌써 예전에 미쳐버렸을 것이다. 케이코 씨 - 지금까지 모친이었던 사람은 나와 헤어질 때 토노 저택은 [보 통]이 아니라고 말했다. "...별 일은 아닐 거야. 나야말로 [보통]이 아니니까." 비스듬하게 걸쳐 있는 안경을 고쳐 쓰고, 가방을 손에 든다. 언제나 교실에 남아있을 수는 없으니까. 자, 그럼 - (이제 그만 각오하고 저택으로 돌아가자. - 선택) 할 일도 없고 해서 일찍 학교를 뒤로 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정문에서 하교하는 것도 입학식 이후 처음이다. "이제부터는 여기서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이 통학로가 된다는 건가..." 정문을 나서 주택가로 통하는 교차로로 나선다. 여기서 도심으로 갈 것인지 저택이 있는 주택가로 향할 것인지가 갈리는데 - "어머, 토노 군이네?" 우연히, 유미즈카와 만났다. "어라, 유미즈카잖아?" 유미즈카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처럼, 나도 유미즈카에 시선을 집중 했다. "에, 그러니까, 유미즈카? 내 얼굴에 뭐 묻은 거라도 있어?" "아니, 왜 토노 군이 여기 있나 해서. 토노 군 네 집, 반대쪽 방향이잖아?" "아......뭐, 어제까진 그랬지만 오늘부터는 아냐. 이제부터는 저쪽 주택가 안쪽에 있는 언덕 위의 집에 살게 됐으니까." "아, 아침에 말한 그거 말이구나." 알았다는 듯 두 손을 마주치며 납득하는 유미즈카...뭐, 갖가지 미사여구를 빼더라도 저 행동은 귀여워 보인다. "...그런 거지. 유미즈카도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굳이 숨길 필요는 없겠 네. 나 말야, 아리마 가에 맡겨졌었다가 오늘부로 본가에 돌아가게 됐어." "본가라면, 그...토노 씨네 저택에?" "응. 나랑은 잘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구나. 토노 군은 사실은 언덕 위의 왕자님이었구나? 나랑 이누이 군 밖에 모르는 비밀이었는데, 이럼 금방 다른 애들한테도 알려질지도 모르겠 는데?" 후후, 하고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유미즈카는 멀리 시선을 옮겼다. 하늘 저 편. 멀리 언덕 위에 있는, 토노 저택을 보려는 듯이. "하지만 괜찮을까? 자기 집이라고는 해도, 벌써 8년이나 떨어져 생활했잖 아. 그, 걱정스럽다든지 불안하다든지 생각 안해?" "그거야, 실제론 불안하긴 해. 원래 난 저 저택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지금 은 다른 사람 집 같은 느낌도 들고 말야. 하지만 그래도 - " ...여동생인 아키하를 혼자 내버려둔 채 나 혼자만 편하게 살아갈 수는 없 어. 아무리 불안해도, 나는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 "-역시 자기 집이니까겠지. 그곳에 돌아가는게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해." "...그래...아, 갑자기 불러세워서 미안해. 토노 군, 다른 일 있지 않았어 ?" "아니, 별로 다른 일 같은 건 없어. 그냥 천천히 산책이나 하다가 돌아갈까 하려던 참이었으니까." "아 - 그렇, 구나." 왠지 유미즈카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없다. "...유미즈카? 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 말을 건다. 그래도 유미즈카는 좀처럼 얼굴을 들지 않고 계속 아래만 바라 본다. "........."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없고 해서, 나도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본다. - 잠시 후, "저, 저기!" "응, 뭐야?" "저기, 그러니까 말야, 우리 집이랑 토노 군 네 집이랑 언덕에 도착할 때까 지는 같은 방향...인데...말야..." "그렇구나. 그럼 중간에까지 같이 갈까?" "-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유미즈카. 그대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으, 응 - 그래. 돌아가는 길이 같으니까 중간에까지 같이 가도 이상할 거 없는 거네!" 라고 상당히 들뜬 소리로 말하고는 내 옆에 선다. "마침 잘 됐어. 나, 이 부근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말인데 유미즈카가 안내해 주지 않을래?" "응. 그럼 이쪽 길로 가자. 언덕길까지 가는 샛길이 있어." - 유미즈카와 이야기하면서 하교길을 걷는다. 유미즈카와의 이야기는 이렇다 할 특징은 없으면서도 정답고도 즐거웠다. 유미즈카 사츠키는 매우 따뜻한 분위기를 갖고 있어 함께 있는 것만으로 안 심이 되는 타입인 것 같다. "-후후" 이야기 도중,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유미즈카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 갑자기? 나 뭔가 이상한 거라도 말했어?" "으응. 그냥, 나랑 토노 군이 내일부터 같은 통학로를 다니게 된다고 생각 하니까 말야." 정말로 기쁜 듯, 유미즈카는 웃었다. 그 웃음에는 꾸민 듯한 구석은 없었고 보고 있는 나까지도 즐거워진다. ...그, 지금까지 미처 못 알아차리고 있었지만. 외모와 행동이랄까 그런 것 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고 따지기 이전에, 유미즈카 사츠키는 귀엽다고 생각 한다. 전부터 같은 반 남학생들이 유미즈카 사츠키에게 열을 올리고 있었던 이유가, 조금이지만 이해가 간다. 이야기가 도중에 끊어졌다. 유미즈카의 웃음띤 얼굴에 넋이 나가버린 나와 유미즈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저녁 노을이 비추는 주택가를 걸어간다. 갑자기 - "저기. 중학교 2학년 때 겨울방학, 생각나?" 그렇게 유미즈카는 중얼거렸다. "-?" 머리를 갸우뚱 거린다. 중학교 2학년 때 겨울방학이라고 하면 아리마 가에 있지 않으려고 일부러 보충수업을 받거나 해서 학교에 남아있었을 적이다. 일단은 생각이야 나지만, 어째서 그런 걸 물어오는지에 대한 이유는 잘 모 르겠다. "역시나~토노 군에 대한 거니까, 절대로 생각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는 유미즈카. "봐봐, 우리 중학교에 말야 체육창고가 두 개 있었지? 하나는 큰 운동부가 쓰는 새 창고, 또 하나는 배드민턴 부라든지 작은 운동부가 쓰는 낡은 창 고. 근데 그 낡은 창고가 문제였어. 언제나 자물쇠가 말썽이어서 안 열리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으니까." 낡은 창고...체육관 뒤에 잇던 콘크리트 제의 작은 건물...? "아아, 그 창고 말야? 어쩌다 학생 하나가 안에 갇혀버려서 사용하지 않게 됐다는." "그래 그거. 그 학생이 당시의 배드민턴 부의 2학년이었던" "-아아" 그래,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다. 그건 새해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는, 추운 겨울 날의 일이었다. 새해가 되 고 아리마 가에 있기가 거북해진 나는 일부러 보충수업을 받거나 학교에 남 으려고 일부러 학교 심부름을 하거나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저녁 5시까지 다. 주위도 어두워지고 학교에 있던 교사들도 집에 돌아가 나 역시 교실에 서 내몰려졌다. 한 겨울. 저녁 5시 쯤 되면 주변은 정말로 어두워진다. 그 날은 분명히 눈이 내린다는 예보가 있던 날로, 다른 날에 비해 한층 추웠 다. 그런 탓에 오늘만큼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하던 순간, 교사 뒤 쪽의 구 창고에서 쾅쾅 하는 소리가 들려와 무슨 일인가 하고 보러 간 적이 있었다. - 안에 누구 있어요? 그렇게 물어보니 창고 안에서 몇 명인가 되는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부 활동의 뒷정리를 하고 있던 중에 바람이 때문에 추워져서 문을 닫았 더니 다시 열 수가 없게 돼서 벌써 2시간 째 안에 갇혀 있다, 라고 했다. 어떤 수를 써봐도 문은 열리지 않은 듯, 될 수 있으면 선생님을 불러와 도 와달라고 했다. ...하지만 교사들은 모두 돌아가버렸고, 바로 전화를 건다 해도 한 시간은 이 상태로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날은 정말로 추웠다. 눈이 내리지 않는 것 이 이상할 정도로 추운 날씨에 체육복을 입고 있는 채로 두 시간이나 창고 에 갇혀 있던 안에 있는 아이들에게 한 시간 씩이나 더 기다리게 하는 것은 너무도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잠시 망설인 후 주변을 둘러보고는 주위에 아 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경을 벗고 창고 문에 보이는 [선]을 잘랐다. 그렇게 문은 열리고 안에 있던 다섯 명 정도의, 눈이 빨갛게 될 때까지 울 고 있던 여학생들이 뛰쳐나왔던 적이 있었지 -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군. 하지만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알았어? 뭐였더라, 갇혀 있던 배드민턴 부의 주장이 '부의 존속이 달린 문제이 이 일은 비밀로 해주세요'라면서 나한테 협박까지 해왔을 정도였는데." "정말, 토노 군은 안에 누가 갇혀 있었는지 하나도 흥미가 없었구나? 나 말 야, 그때 배드민턴 부의 부원이었다구." 비꼬는 듯한 유미즈카의 목소리. 에 - 결국, 그렇다는 건. "-나,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창고 안에 갇혀있었던 것 뿐이었지만 그땐 춥고 어둡고, 엄청 불안했었어. 이대로 이 안에서 얼어 죽는게 아닌가 - 하고 모두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배도 꼬르륵 꼬 르륵 거리면서 고팠었고, 정말로 쓰러지기 직전이었어." "하아. 그거 참 힘들었겠구나."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아 무덤덤한 대답을 해버렸다. 유미즈카는 신경 쓰지 않고 옛날에 있었던 일을 선명히 떠올려가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모두 떨고 있을 때, 토노 군이 와줬던 거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감 없는 구석이 없는 목소리로 '안에 누구 있어요?' 라고. 보고도 모르 냐며 주장이 화냈던 거, 생각 나지?" "응, 그건 생각나. 쾅 하고 문에다 배트를 집어던졌던 거 말이지? 그땐 깜 짝 놀랐었어." 그래 그거, 라는 듯 유미즈카는 웃었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모두 돌아갔다고 듣고서, 우린 정말로 절망하고 있었 어. 겨우 1분도 견디지 못할 정도인데 혹시나 내일까지 여기서 갇혀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우리가 모든 걸 포기하고 있을 때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며 토노 군은 이렇게 말했지. '비밀로 해주면 못 열 어줄 것도 없어', 라고." "아아. 거기서 또 한 번 쾅 하는 소리가 났었지 아마? '그렇게 간단히 열 수 있으면 이런 고생도 안 해!' 라고. 엄청 험악했었지." "아하하...응. 주장은 우리가 갇히게 된 데에 책임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조금도 여유가 없었어. 그치만 그러고 나서 금방 문이 열렸던 거야. 모두 주장이 던진 배트 덕분이라며 기뻐서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난 문 옆에서 멍 하니 서 있는 토노 군을 쭉 보고 있었어." 유미즈카는 따뜻한 시선을 보내온다. ...하지만 그런 눈으로 바라봐도 곤란하다. 그런 것 쯤, 나한텐 별 일 아닌 일이기 때문에 그다지 감사받을 정도의 일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때 말야, 나 많이 울었어. 눈이 팅팅 부어서 완전 엉망진창. 그런 날 보 고 토노 군이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잘 모르겠는데. 뭐라고 말했어?" 정말로 생각나지 않기 때문에 남일 말하듯 물어본다. 그럼에도, 유미즈카는 기쁜 듯 웃으며 나를 봤다. "그게 말야, 내 머리 위에 가만히 손을 얹으면서 '빨리 집에 가서 찌개(오 조오니)라도먹어' 랬어. 나, 엄청 추운 듯이 몸을 떨고 있었는가 싶어서 부 끄러워졌었어." "........." 으음, 하고 눈썹을 찌푸린다. 내가 한 일이지만, 말의 의미를 모르겠다. "분명히 토노 군은 찌개를 먹으면 몸이 따뜻해 질 거야, 라고 말하고 싶었 던 걸 거야." "...그런가. 정월이 지난 다음이었으니까." ...그건 확실히 나 밖에 말할 것 같지 않은 중간이 생략된 대사다. 이렇게 듣고 보니 좀 더 괜찮은 대사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들 정도다. "나 말야, 그때 생각했어. 학교엔 의지가 될만한 사람은 많이 있지만 만일 의 경우에 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토노 군 같은 사람이다, 라고." "설마. 그거 너무 추켜세우는 거 아냐? 봐봐,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본 사람을 부모라고 생각하는 거랑 마찬가지. 어쩌다 내가 유미즈카를 도와 줬을 뿐인 거 아냐." "그렇지 않아...! 나, 그때부터 토노 군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당연한 듯 도 와줄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그렇게 유미즈카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유미즈카, 그건 과대평가 하는 거야. 난 그렇게 의지가 되는 녀석이 아니 라구." "괜찮아. 내가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그렇게 믿게끔 해줘." 정면에서 바라보며 그렇게 단언해 버리면, 나로서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반론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 "-뭐, 그건 유미즈카 마음이지만." "그치? 그러니까 또 내가 위험한 일에 빠지게 되면 그때도 날 도와줘야 해 ?" 유미즈카는 웃음 띤 얼굴로 내게 말을 한다. ...그건 솔직히 곤란하다. 난 유미즈카가 생각하는 것만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런 녀석이 아냐. 그런 녀석은 아니지만...이렇게 환한 얼굴로 바라 봐주는데도 그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는, 결코 하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범위에서라면 힘을 보태줄게." "응. 고마워, 토노 군. 좀 늦긴 했어도 그때 토노 군이 해줬던 말, 기뻤어 ." 라고 하며 유미즈카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에 따라 내 발걸음도 멈춘다. "나, 토노 군이랑 이렇게 이야기하고 그럼 좋겠다고 쭉 생각해 왔어." 그건 어딘가, 깊이 생각하고 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저녁 노을의 붉은 빛 때문인지 유미즈카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무슨 소리야. 이야기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잖아." "안돼. 토노 군 한테는 이누이 군이 있으니까. 게다가 난 토노 군처럼은 안 된단 말야." 몹시 조심스럽게 대답을 하고 유미즈카는 나에게서 멀어진다. "그럼, 우리 집은 이쪽이니까. 내일 학교에서 또 만나." 바이바이 하고 웃음 띤 얼굴로 손을 흔드는 유미즈카는 다른 쪽 길로 걸어 갔다. -------------------------------------------------------------------------------- 평소와는 다른 하교길을 걷는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거치며 차츰 토노 저 택에 가까이 다가간다. 주변 풍경은 본 적 없는 풍경은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8년 전 - 9살 때까지 토노 저택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저택으로 돌아가 는 길은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분이 좀 복잡하다. 이 길은 그리우면서 또한 신선하기도 하다. 아까까 지 토노 가에 돌아가는 것에 그다지 기분이 썩 내키지 않았음에도, 지금은 그렇게까지 싫지는 않은 느낌이다. ...토노 시키가 9살 때까지 살았던 집. 거기 있는 것은 일본이라는 나라에 는 어울리지 않는 서양식의 저택으로, 지금은 여동생인 아키하가 남아있다. 나를 싫어했던 부친 - 토노 가의 당주인 토노 신구는 어제 타계했다 한다. 모친은 아키하가 태어났을 때 병으로 돌아가셨으니까 토노 가 사람은 나와 여동생인 아키하 두 사람만 남게 되어버렸다. 원래라면 장남인 나 - 토노 시키가 토노 가의 대를 잇게 되겠지만, 나에게 그럴 권리는 없다. 토노 가 의 대를 잇게 된다, 라는 것은 엄격하고도 철저한 교육을 받게 된다는 뜻이 다. 그것이 싫어서 자유롭게 살면서 부친에게서 몇 번이나 잔소리를 들었는 지 셀 수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사고에 휘말려 병약한 몸이 되어버 렸고 부친은 이 때 나를 저버렸다. 부친 왈, [아무리 장남이라 해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놈을 후계자로 삼을 수는 없다] 라나 뭐라나. 아주 공교롭게도 부친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회복해 버리기는 했지만 그 땐 이미 토노 가의 후계자는 여동생인 아키하로 결정되어 있었다. 그때까지 토노 가의 딸에 상응하는 엄격한 분위기에서 길 러진 아키하는, 아키하가 후계자로 결정된 그 순간부터 보다 엄격한 분위기 에서 생활하게 된 듯 하다. 옛날에 - 사고에 휘말릴 때까지는 함께 저택의 정원에서 놀고 그랬던 아키하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아리마 가에 맡겨졌던 당초, 아키하는 몇 번인가 나를 찾아 아리마 가에 온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운 나쁘게도 나는 매일 같이 병원에 다니고 있어 우 리는 서로 만날 수 없었고 아키하가 기숙사제의 명문 여학교에 진학하게 되 면서 부터는 거의 연락도 닿지 않았다. 나는 아키하와는 다른, 본가에서 떨 어져 나온 인간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유로 충만한 생활을 지내고 있다. 고등학교도 어디까지나 평균적인 학교로, 최근 8년 동안 여동생과의 접점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부친이 죽고, 나는 저택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정확히 말해서 이제 와서 토노 가의 돌아갈 마음 따위는 전 혀 없었다. 다만 토노 저택에는 아키하가 있다. 어렸을 때. 아키하는 얌전하고 언제나 무엇인가를 겁내는 듯 소심한 태도를 취했으며, 가벼운 발소리를 내며 항상 내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검고 긴 머리와 호화로 운 양복 때문인지, 아키하는 정말로 프랑스 인형처럼 예쁜 소녀였다. 저 드 넓은 저택에서 아버지를 잃고 혼자서 생활하고 있을 아키하가 걱정이 됐고 그리고 무엇보다 - 모든 책임을 아키하에게 떠맡긴 채 멋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죄책감도 들었다. 이번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저택으로 돌아가게 된 데에는, 그러한 아키하에 대한 사죄의 의미도 있었는지 모른다. 토노 저택은 불필요할 정도로 크다. 철책으로 둘러싸인 넓은 저택 부지는 이상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이를테면 운동장이 딸린 초등학교 정도 크 기의 건물이 통째로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니까. 나무로 둘러 싸인 정원은 이미 정원이라기 보다 숲에 가깝다. 그 숲의 중심에 저택이 있 고, 그 뒤로도 몇 채인가의 저택이 있다. 어렸을 때에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었지만 8년 쯤을 일반 가정에서 지내온 나에게 있어서 이 거대한 저택 은 이미 "범죄"를 연상시키게 한다. 문에는 열쇠가 채워져 있지 않다. 문을 밀어젖히고 저택 현관으로 향했다. 저택의 현관은 답답한 인상을 주었으며 찾아오는 자들을 위압적으로 대하고 있다. 쇠붙이로 만들어진 여닫이식 문 옆에는, 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초 인종이 붙어있었다. "...좋아." 긴장감을 억누르고 초인종을 누른다. 딩동. 뭐랄까, 그렇게 친숙한 소리는 아니다. 짓누르는 듯한 정적이 수 초 동안 계속된 후. 문 저편에서 허둥대 는 듯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철컹, 하고 문이 열린다. 열려진 문 틈으로 보이는 것은 언젠가의 기억이 있는 로비와 하녀복을 입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다행이에요. 좀 늦으셔서 길을 헤매고 있지나 않으신지 하고 걱정하고 있 었습니다. 해가 진 뒤에도 도착하지 않으시면 이쪽에서 마중을 나가려고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하녀복 같은 시대착오적인 의복을 입고 있는 소녀는 싱긋 하고 웃어보인다. "아, 아니 - 그건, 그러니까." 나는 눈앞의 소녀의,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인 모습에 할 말을 잃고 제대로 된 말을 입에 담을 수 조차 없는 지경이었다. 할 말을 잃고 허둥대는 내 말투를 이상하게 여겼던지, 소녀는 살짝 머리를 갸웃거렸다. "시키님, 이시죠?" "에 - 응. 님...이란 말은, 거시기, 안 붙여도 되지만." "맞으시죠? 정말, 너무 겁주지 마세요. 저, 또 틀린게 아닌가 하고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다구요." 소녀는 어머니가 아이를 꾸짖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럼에도 얼굴은 가 볍게 미소짓고 있었고 소녀는 계속 따뜻한 분위기를 잃지 않는다. ...기모노에 하녀복. 손님을 맞으러 나와서는 날 부를 때 "님" 자를 붙여서 부른다. 그렇다면 이 소녀는 - "에, 저기...그 - 실례지만, 혹시 이곳의 가정부신지?" 내 질문에 소녀는 가벼운 미소로 대답한다. "자, 피곤하셨죠? 사양말고 어서 안으로 드세요. 거실에서 아키하 님도 기 다리고 계시니까요." 소녀는 로비를 가로질러 거실로 향한다. 그리고 무엇인가 생각이 났다는 듯 몸을 돌리더니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띄우고 정중히 인사 한다. "어서 오세요, 시키 님. 모쪼록 오늘부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소녀의 인사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듯 했다. 그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쭈뼛거리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소녀의 안내로 거실로 이동했다. - 거실은 처음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8년 전의 거실풍경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요 8년 동안 내장을 바꾸기라도 한 것인지. 어쨌든 남의 집에 들어온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 다. 두리번거리며 거실의 모습을 둘러보고 있자니 하녀복을 입은 예의 가정 부가 꾸벅 하고 고개를 숙인다. "시키 님을 모셔왔습니다." "수고했어. 주방에 돌아가도록 해, 코하쿠." "예." 가정부는 코하쿠, 라는 이름인 것 같다. 코하쿠 씨는 내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거실을 나섰다. 거실에 남겨진 것은 나와 - 본 적이 없는 두 명의 소 녀 뿐이었다. "오랜만이군요, 오빠." 검고 긴 머리의 소녀는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나에게 말을 걸 어왔다...솔직히 말해서 사고는 완전히 정지해 버렸다. 머리 속은 새하얗게 물들었고 적당한 인사도 찾지 못한 채 그저 아무 의미도 없는 대답을 중얼 거리는 정도 밖에 할 수 없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8년 만에 만난 아키하는, 내 기억에 있 던 아키하가 아닌, 그야말로 양가집 규수로 탈바꿈해 있었으니까. "오빠?" 검은 머리의 소녀는 머리를 살짝 갸웃거린다. "아 - 아니," 타이밍을 놓친 어이없는 대답 밖에 말할 수 없다. 나는 눈 앞의 소녀를 아 키하로 인식하려고 두뇌를 풀 가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키하는 벌써 나를 자신의 오빠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기분이 안 좋아보이네요. 잠깐 쉬게 해드릴까요?" 아키하는 나를 힐끗 쳐다보고 있다...왠지, 엄청 기분 나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인가? "...아니,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 그저 아키하가 너무 많이 변해버 려서 깜짝 놀랐을 뿐이야." "8년이나 지났으니 변하는 건 당연하죠. 그렇지 않아도 우리들, 성장기였으 니까요. 그럼 언제까지고 옛날 모습 그대로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시던 거에요, 오빠?" ...뭐라고 해야 할지. 아키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어쩐지 아픈 곳을 콕 콕 찌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아키하는 많이 변했어. 옛날보다 한층 더 미인이 됐는걸." 입발린 소리가 아닌,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 그러자 "예. 하지만 오빠는 옛날과 별로 달라지지 않으셨군요." 눈을 감은 채 아키하는 쌀쌀맞게 잘라말했다. "........." ...뭐, 나름대로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역시 아키하는 나를 좋게는 생각하 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괜찮으시다면 이야기를 마저 하도록 할까요. 오빠, 자세한 사정은 아직 듣 지 못하셨죠?" "자세하고 뭐고 간에, 갑자기 저택으로 돌아와, 라고 밖에는 듣지 못했는 걸. 아버지가 죽었다는 건 신문에서 봐서 알고 있었지만." ...일류 기업의 톱의 자리에 있는 인물이 죽으면 그 사실은 경제신문 같은 데에 기사로 실리게 된다. 토노 신구의 부고는 그의 장례식이 끝난 후에 신 문지면을 통해 자식인 토노 시기에게 알려졌다. 친척들이 알려주지 않았어 도, 의절당한 자식은 한 부에 백 엔 하는 신문지상에서 부친의 사망소식을 알 수 있었다. 비꼬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참 편한 세상이 됐다. "...드릴 말씀이 없군요. 아버님의 부고를 오빠께 전해드리지 못했던 것은 제 불찰이었어요." 아키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괜찮아. 어차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한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을 리도 없었고. 그렇게 마음에 두지 않아도 돼, 아키하." "...죄송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네요." 아키하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따위 것은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다. 장례식이라는 건 고인에 대한 감정을 땅 속에 묻을 수 없는 사람들이 그 감 정을 깨끗이 털어버리기 위해 행하는 의식이다. 먼 옛날에 그러한 감정의 연이 끊어져버린 나와 죽은 아버지 같은 경우, 장례식은 필요치 않다. "오빠를 여기로 불러들인 건 제 의향이에요. 언제까지나 토노 가의 장남이 아리마 가에 맡겨진 상태여서는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겠어요? 아버님이 돌 아가진 이상, 토노 가의 혈육은 저와 오빠 뿐이에요. 아버님이 어떤 생각으 로 오빠를 아리마 가에 맡기셨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런 아버님도 이미 타계하신 몸. 그러니 더 이상 아리마 가에서 오빠를 맡아 기르고 있을 필요 가 없게 되어 여기로 돌아오게끔 한 거에요."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 이야기를 친척 놈들이 잘도 납득했구만. 날 아리마 가에 양자로 넘기라고 지껄여댔던 놈들, 분명히 친척들 아니었었나 ?" "그렇죠. 하지만 지금 토노 가의 당주는 저에요. 친척 분들의 진언은 모두 각하했어요. 앞으로 오빠가 여기서 살아주셨으면 하는데요, 하지만 이곳에 는 이곳의 규율이 있어요. 지금까지 해왔던 것 같은 예의 없는 행동은 가급 적 피해주시면 감사드리겠어요." "하하, 그건 무리야 아키하. 이제 와서 내가 어른들 말씀 잘 듣는 착한 어 린이가 될 리가 없고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도 없어." "가능한 범위 안에서 만이라도 상관없으니까 노력해 주세요. 아니면 - 제가 할 수 있었는데 오빠는 할 수 없다, 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거에요?" 아키하는 차가운 시선으로 힐끗 이쪽을 바라본다. 뭐랄까...말없이, 8년 동 안이나 이곳을 떠나 있었던 나에 대한 한을 분출시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Ok, 알았어. 어떻게든 노력해 볼게." 아키하는 빤히, 날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으로 쳐다본다. "굳히 노력하실 필요는 없어요. 결과만 좋으면 그걸로 족하죠." 다소곳한 자세로, 아키하는 인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단어를 반복해서 내뱉고 있다.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하죠. 현재, 토노 가에는 오빠와 저 이외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아요. 번거로운 건 싫어서 다들 돌아가게 했어요." "에? 자, 잠깐만 아키하. 다들 돌아가게 했다니 무슨 소리야 - " "오빠도 친척 분들과 저택 안에서 만나게 되는 건 기분 나쁘시죠? 사용인들 도 대부분 해고해 버렸지만 나와 오빠의 수발을 들 사람은 남겨뒀으니까 문 제는 없어요." "문제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키하. 그렇게 멋대로 일을 처리하면 친 척회의에서 가만히 안 있을 거 아냐!" "더 이상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마세요. 오빠도 저택이 사람으로 넘쳐나는 것 보다 저희들만 있는 편이 나으시잖아요?" ...우. 뭐, 그거야 그렇기는 하지만. "하지만 이제 겨우 당주가 됐을 뿐인 아키하가, 그러니까, 폭군 같이 그런 제멋대로 행동을 보이면 친척 놈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텐데? 아버지도 친 척들의 의견은 거스르지 않았었잖아." "그래요. 그러니까 아버님은 오빠를 아리마 가에 맡기신 거에요. 하지만 전 어렸을 때부터 그 사람들이 너무 싫었어요. 이 이상 그 사람들에 대한 소릴 듣는 건 사양하고 싶군요." "사양이라니, 아키하 - " "아아 증말, 됐으니까 내 걱정 따윈 하지 마! 오빠는 이제부터의 자기 생활 이나 신경 쓰라구. 여러 가지로 힘들 거라는게 불 보듯 뻔하니까 말야." 아키하는 내게서 조금 시선을 돌리고는 기분 나쁘다는 듯 말했다. "그럼, 앞으로 잘 모르는 게 있거나 하면 이 애한테 물어봐. - 히스이" 아키하는 옆에 서 있던 소녀에게 눈짓을 한다. 히스이라는 이름의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꾸벅 인사를 했다. "이 아이는 히스이. 앞으로 오빠의 시중을 들게 될텐데, 괜찮으시겠어요?" - 에? "자, 잠깐...시중이라니, 그러니까, 거시기"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하인, 이라는 거죠." 아키하는 극히 당연한 사실이라도 말하는 듯 똑똑히 잘라 말했다. ...말도 안 돼. 저택에 어울리는 메이드 복을 차려 입은 소녀는 아키하와 마찬가지로,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서 있다. " - 자, 잠깐만. 내가 꼬맹이도 아니고, 시중 드는 사람 같은 건 없어도 돼. 내가 할 일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식사 준비와 의복의 세탁도, 말씀이세요?" 윽. 아키하의 지적은 매우 날카롭다. "좌우간 이 저택에 돌아오신 이상 제 지시에 따르셔야 해요. 아리마 가에서 는 어떻게 지내고 계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부터 오빠는 토노 가에서 살게 되실 거니까요. 그에 상응하는 대우는 당연히 받아들이셔야죠." "으..." 말 없이 히스이에게 시선을 던진다. 히스이는 여전히 무표정琴으며 그저 인 형처럼 나를 마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히스이, 오빠를 방으로 안내해 드려." "예, 아가씨." 히스이는 마치 그림자라도 되는 듯 아무 기척도 없이 내게 걸어온다. "그럼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시키 님." 히스이는 로비로 향한다. "...하아" 한숨을 몰아쉬면서 나도 로비로 걸어나섰다. -------------------------------------------------------------------------------- 로비로 나섰다. 이 저택은 로비를 중심으로 하여 동관과 서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로비가 새의 몸통, 동과 서의 관이 새의 날개처럼 사선으로 뻗어있어 한쪽 날개 - 즉 - 한 쪽의 관의 규모는 작은 병원 정도 된다. 저택을 지을 때 좌우대칭이 되도록 만들어서 동관도 서관도, 서로 방의 배치가 같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시키 님이 머무실 방은 이쪽입니다." 히스이는 계단을 오른다. 아무래도 토노 시키의 방은 2층에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사용인들의 방은 1층 서관에 있었으니까 히스이와 코하쿠 씨의 방은 1층에 있을 것이다. 밖은 이미 해가 지고 있다. 전등 불빛이 어렴풋이 비치고 있는 기나긴 복도 를 메이드 복을 입은 소녀가 말 없이 걸어간다. "...왠지 동화 속 나라 같네." 무심코 마음 속에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시키 님,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요?" 제자리에 우뚝 서서 이쪽으로 몸을 돌리는 히스이. "아니, 그냥 혼잣말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 히스이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잠시 후 '그럼...' 하며 다시 걷기 시작 했다. "........." 할 말을 잃다, 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일까. 히스이가 안내해 준 방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일개 고교생이 사용하게 될 방 같아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내 방이라고?" "예. 혹 마음에 드시지 않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다른 방을 준비해 드리겠습 니다만." "아니, 불만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러니까 - " 조금, 아니 이거 너무 사치스러운 거 아냐? "시키 님?" " - 됐어, 아무 것도 아냐. 그럼 감사히 쓰도록 할게." "예. 시키 님의 방은 8년 전부터 손을 대고 있지 않으므로 그렇게 불편하신 점은 없으실 겁니다." " - ?" 히스이의 말투가 약간 이상하다. 히스이 말 대로라면 마치 이 방이 내가 쓰 던 방이었던 것 같잖아. "...저기 말야, 혹시 전에 쓰던 내 방이 이 방이었어?" "그렇게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아닙니까?" 히스이는 고개를 갸웃 거린다. ...안심이군. 이 소녀에게도 나름대로의 감정표현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야. "...뭐, 듣고 보니 그럴 지도 모르겠네. 약간은 기억도 나는 것 같고, 아마 내 방이 맞을 거야." 친근감은 거의 들지 않았어도 8년간이나 떨어져 있다 보면 그렇게 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뭔가 좀 어색한 걸.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손바닥 만한 방에 서 지냈으니까 말야, 뭐랄까...고급 호텔에 묵게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시키 님의 기분은 잘 알겠으나 모쪼록 익숙해 지도록 노력해 주십시오. 시 키 님은 오늘부터 토노 가의 장남이시니까요." "알았어.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비웃음 사지 않을 정도로는 노력해 볼게." 테이블 위에 배낭을 올려놓고 몸을 쭉 편다. - 여러 가지로 골치아프게 될 것 같지만, 아무래도 오늘부터 적응하도록 노 력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시키 님이 가져오신 짐은 모두 가져왔습니다만, 뭔가 부족한 물건이라도 있으신지요?" " -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왜 그런 걸 물어봐?" "...아뇨, 짐이 너무 적은 것 같아서...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준비해 놓 겠사오니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그래...아니, 어쨌든 부족한 건 없어. 원래가 짐이 적어서 말야. 내 물 건이라고 해봤자 거기 있는 배낭이랑 이 안경이랑..." 배낭 속에 들어있는 교과서라든지, 누구 건지도 모르는 흰색 리본이라든지 그 정도다. "좌우지간, 내가 가져온 짐에 대해 신경쓰지 않아도 돼. 이렇게 훌륭한 방 에 묵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잘 알겠습니다. 그럼 한 시간 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한 시간 후라면, 혹시 저녁?" "예. 그때까지 모쪼록 마음 편히 지내주십시오." 히스이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말한다. 하지만...마음 편히 지내라고는 해도 이 방에서 어떻게 마음 편히 지내고 있으면 되는 거지? 시계는 저녁 여섯시를 가리키고 있다. 평소라면 거실에서 TV라도 보고 있을 시간이겠지만 이 저택에 TV 같은게 있는지 없는지도 솔직히 의심스럽다. "히스이. 이런 걸 물어봐서 좀 미안한데 말야, 이 저택 안에 TV 있어?" "TV...말씀이십니까?" 히스이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진다. 뭐랄까...내가 물어보기는 했어도 참 머 리가 아파지는 골치 아픈 질문이다. 이렇게 호화로운 저택에 TV가 있느니 없느니 같은 걸 물어보는 것 자체가 어딘가 핀트가 어긋난 듯한 느낌이다. 히스이는 보기 드물게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거실에는 없습니다. 저택에 체류하시던 분들은 TV를 사용하셨습니다만 저택을 나가실 때 짐을 모두 가지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저택 안에는 남아있 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잠깐. 체류라니...누가 얼마만큼 머물러 있었던 거지?" "토노 가의 분가에 해당하는 쿠가 미네 님의 장남 가족분들, 토자키 님의 삼녀와 그 약혼자 분, 키시마 님의 장남이 체류하셨습니다. 기간은 3년 정 도입니다." "...3년, 인가. 히스이, 그런 건 체류라고 하지 않고 거주라고 하는 거 아 냐?" 히스이는 답하지 않는다. 거주하고 있던 놈들이 어떤 인간들이었건 간에 사 용인의 입장에서는 실례되는 말은 할 수 없는 모양이다. 뭐, 좌우지간 체류 하고 있던 친척 쪽 놈들은 자기들 짐을 갖고 돌아가게 된 것 같다. 그렇다 는 말은, 저 현대적인 문화 자체를 속물 취급하며 혐오스러워 했던 아버지 가 TV 같은 걸 봤을 리도 없을테고 아버지 곁에서 8년 동안이나 길러졌던 아키하도 마찬가지일 테니... " - 뭐, TV가 없다고 해서 죽는다든지 하는 건 아니니까." 히스이는 아무 말도 않는다. 사용인의 귀감이랄까, 히스이는 물어보는 말 에 대한 대답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당연히 나 역시도 맥이 풀 린다. 어떻게 해서든 이 무표정한 얼굴을 웃게 해보려고도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아참참, 그러고 보니 분명히 1층 서관 쪽 쯤에 창고가 있었지? 심심하면 거기서 놀든가 하지 뭐." 히스이는 아무 말도 없다. 그저 방 입구에 우두커니 선 채로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 - 히스이?" 히스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갑자기 똑바로 내 쪽을 바라 본다. "언니 방에라면 있을 것 같습니다." "하아?" 아니 지금, 대체 무슨 말 하는 건지? "...에, 그러니까...있다니, 뭐가?" "그러니까 TV 말씀입니다. 예전에 언니 방에서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히스이는 마치 몇 년이나 전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듯 말했다. "잠깐만. 언니라면, 혹시 코하쿠 씨 말야?" "예. 현재, 이 저택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저와 언니 둘 뿐입니다." ...듣고 보니 꼭 닮았다. 코하쿠 씨는 생긋생긋 웃고 있고 히스이는 무표정 하게 있으니까 왠지 모르게 자매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었다. "그렇구나. 코하쿠 씨라면 확실히 버라이어티 방송 같은 걸 볼 것 같은 타 입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TV 좀 보여줘] 라면서 코하쿠 씨의 방에 놀러 가는 것도 왠지 찜짐하다. "미안. 이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해줘. 이제부터 여기서 살게 됐으니까, 저택 의 룰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고 말야." 게다가 TV 같은 걸 보다가 아키하한테 들키게라도 된다면 무슨 잔소리를 들 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일단은 토노 가의 사람 답게, 근면한 학생이 되 도록 하자. "그럼 저녁 먹을 때까지 내 방에 있을테니까 시간이 되면 부르러 좀 와 줘. 히스이도 다른 할 일이 있을테지?" 히스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을 돌린다. 끼이이...하고 조용히 방 문이 열리고 히스이는 방에서 나섰다. 저녁은 아키하와 함께 먹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히스이와 코하쿠는 우리 등 뒤에 서서 식사보조를 할 뿐 함께 저녁을 먹지는 않았다. 나는 넷 이서 함께 저녁을 먹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긴장감이 넘쳐 흐르는 저녁 식사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 다. 아참, 그리고 토노 시키는 테이블 매너라는 걸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아니 일단 단편적으로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생초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이 란 모름지기 사용하지 않는 기억을 뇌 한구석 쯤에 철저히 처박아 두기 마 련이다. 내 일거수 일투족에 따라 맞은 편에 앉아있는 아키하의 눈썹이 차 츰 치켜 올라가는 모습에 상당한 긴장감과 스릴이 느껴진다. 솔직히, 이런 일이 매일매일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정말 착잡해 진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아직 밤 8시를 조금 넘겼 을 무렵. 자기에는 아직 이르고...어떻게 할까? <2. 방에서 얌전히 있도록 하자 - 선택> "응 - " 저녁 식사로 딱딱하게 뭉친 어깨를 푼다. 힘껏 기지개를 켜고 그 상태로 침 대 위에 쓰러져 버렸다. "거 참...저녁 먹는 게 이렇게 중노동일 줄이야..." 아니, 나이프나 포크를 쓰는 법이 어려웠던 거라기 보다는 아키하의 따가운 시선이 괴로웠던 것 뿐이지만. (똑똑) "시키 님, 안에 계시는지요?" 노크 소리와 함께 히스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 들어와도 돼." "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히스이가 방 안에 들어왔다. "침대정리를 하러왔습니다. 몇 분 정도 시간이 소요될 것이오니 잠시 동안 거실에 가 계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 난 별로 괜찮은데. 방 구석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난 신 경 쓰지 말고 일해."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 방 한구석으로 이동한다. "........." 히스이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은 얼굴로, 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한 채 묵묵히 침대정리를 시작했다. " - 히스이" "예. 무슨 일이십니까, 시키 님." "아, 침대정리 하면서 들어도 되는데. 일일이 자세를 고쳐잡을 필요는 없으 니까 말야." "........." 히스이는 답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히스이는 철저하게 사용인으로서의 교육 을 받아왔던 것 같다. "부탁이니까 일 하면서 말해. 왠지 방해하는 것 같아서 할 말이 없어지니 까 말야." " - 시키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상 잠시 실례를 범하도록 하겠습니다." 히스이는 담담하게 침대정리를 다시 시작한다. "에, 그러니까...여기 통금이 7시 라던데, 정말이야?" "에 - 아, 예. 정확히는 7시에 정문을 잠그고 8시에 저택의 출입구를 모두 잠그도록 되어있습니다. 오후 10시를 넘은 시간에는 저택 내의 이동도 할 수 없도록 되어있는 것이 규칙입니다." "저택 안도 다닐 수 없다고? ...뭐, 불만 같은 건 없지만...너무 엄격한 거 아냐? 나도 아키하도 이제 다 큰 어른이니까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 "...예. 하오나 시키 님, 규칙이므로 이것만은 부디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최근 밤중에 일어나는 소동에 대해서 시키 님께서도 잘 알고 있으시겠지요 ?" ...아아, 아리히코가 말했던 예의 흡혈귀 소동인가. 확실히, 이 동네에서 연속살인이 일어나고 있는 이상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만... "뭔가, 달리 하시고 싶은 질문은 없으십니까?" 히스이는 시트를 다 펴고 나서 내 쪽으로 몸을 향했다. "아, 에, 글쎄 - " 하고 싶은 질문은 많이 있지만 일단 히스이와 코하쿠 씨에 대해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렇게 상관없는 이야기 같지만, 물어봐도 돼?" "예, 말씀하십시오." "히스이랑 코하쿠가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 알고 싶은데, 말해줄 수 있겠어?" "제가 시키 님의 수발을 들고 언니인 코하쿠는 아키하 아가씨를 돕도록 되 어있습니다. 두 분께서 저택을 비우실 때에는 저택의 관리를 위임받고 있습 니다만." "수발을 든다...라...역시 그렇군." 어깨가 축 처진다. 아키하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난 어디까지나 평범한 고교생이다. 같은 연배의 소녀에게 수발을 받는다든지 하는 취미는 현재로서는 있을 리 없다. "...시키 님의 수발을 든다, 는 건 내 전용 사용인이란 소리야?" "예. 무엇이든 분부만 내리십시오." "...뭐, 잘 알았어. 아키하가 말하는 걸 보면 널 해고하려고 하지는 않은 것 같고 하니까 얌전히 신세 좀 지긴 하겠는데 - " "뭔가, 특별히 주문하실 것이라도?" "특별이고 뭐고 간에 말야, 그냥 그 시키 '님' 자 좀 빼줄 수 없어? 솔직히 말해서 가만히 듣고 있으면 등골이 싸늘해진다구." "하오나, 시키 님께서는 저의 주인님이십니다." "그러니까 그게 싫다잖아. 난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구. 이 제와서 내 나이 또래 여자애가 '님' 자 붙이면서 이리저리 따라붙는 생활 같은 거 딱 질색이야." 하아, 히스이는 아무 의미 없는 대답을 한다. "날 부를 땐 시키까지만 말해. 그 대신에 나도 히스이라고 불러줄테니까. 그거랑, 서로 간에 격식 같은 것도 차리지 말자구. 좀 더 가볍게, 기분 좋 게 가잔 말야." 히스이는 여전히 무표정하면서도, 뭔가 곤란하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하오나, 당신은 저의 고용주이십니다." "내가 고용한게 아니잖아. 히스이는 내가 못하는 것도 척척 해내니까, 히스 이야말로 대단한 거야." 하아, 히스이는 다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대답을 한다. 아무래도 하루아침 에 히스이를 납득시키는 건 무리인 듯 하다. " - 어쨌든 간에 그렇게 알아두도록 하고, 나한테 너무 격식 차리고 그러 지는 마. 언니인 코하쿠 씨한테도 그렇게 전해줬으면 고맙겠어." "예. 시키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히스이는 무표정하게 머리를 숙인다. ...이거야 원, 하나도 못 알아듣고 있잖아!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오늘 밤은 이만 안녕히 주무시길..." 히스이는 꾸벅 이사를 한 후 도어 노브에 손을 대려 했다. - 아차, 하나 까먹고 안 물어본 게 있다. "아, 잠깐만." 서둘러 문 쪽으로 가서 마악 방을 나서려 하는 히스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 다. 순간 - 히스이의 손이 엄청난 기세로 내 손을 뿌리쳤다. 히스이와 내 손이 서로 마주치며 짝 소리를 냈고 히스이는 도망치듯 뒤로 후퇴한다. "에 - " 너무나도 순간적인 일이라 그런 말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히스이는 무표정 한 채로, 하지만 마치 싫어하는 사람을 쳐다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으로 나 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 "그러니까, 음, 저기 - 나 말야...뭔가 하면 안 될 짓 해버린 거야?" "아..." "...드릴 말씀이...없습니다..."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히스이의 목소리. "...남이 제 몸을 만지는 것에 아직 익숙해 있지 않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 십시오." 히스이의 어깨는 가볍게 떨리고 있다. 왠지 말도 안 되게 엄청 나쁜 짓을 저질러 버린 것만 같다. "아 - 응, 미안해." 반사적으로 사과했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히스이가 가엾게 느껴졌고, 꾸벅 하고 머리를 숙였다. " - " 히스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감정이 느껴지지 않던 시선이 따뜻 하게 바뀐 듯 했다. " - 시키 님께서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건 제 쪽이니까 요." "아니, 뭐...그야 그렇긴 하지만, 뭐랄까..." 머리를 긁적 거린다. 히스이는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잠깐 동안 눈 을 내리뜬다. "저...무슨 용건이신지요, 시키 님." 참, 그랬지. 방을 나서려는 히스이를 불러세운 건 물어보고 싶은 일이 있어 서이기 때문이다. "아니, 아키하는 뭐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녀석, 기숙사 제 학교에 다니 고 있던 거 아니었어?" "시키 님, 그건 중학교 때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아키하 님은 올해부터 특례 로 자택에서 등교할 수 있도록 허가받으셨습니다." "...아, 그, 결국 이 집에서 학교에 간단 소리야?" "예. 하오나 오늘 처럼 오후 무렵에 돌아오시는 건 극히 드문 일입니다. 아 키하 님께서는 저녁 시간까지 수업이 있으시므로 항상 7시 조금 못 되어서 저택에 돌아오십니다." "수업이라 - 뭐하는데?" "오늘은 목요일이므로 바이올린 연습이셨습니다." " - 에" "평일에는 저녁 식사 때까지는 돌아오시므로 아키하 님께 하시고 싶은 말씀 이 계시다면 저녁 식사 후에 언니에게 분부해 주십시오." 말을 마친 후 아키하는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바이올린, 연습..." 뭐야 그게. 부잣집 따님도 아니고, 어째서 그런 귀찮은 일을 - "...아차, 부잣집 따님이었지...아키하 녀석." 그래...그러고 보니 토노 시키의 여동생은 토노 아키하라는, 순도 100% 부 잣집 따님이었지 참... 내 기억 속의 아키하는 어른스럽고, 언제나 불안한 눈동자로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한 살 연하의 여동생이었다. 어렸을 적의 아키하는 언제나 말이 없었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정도로 기가 약해 언제 나 아버지였던 토노 신구에게 야단맞지나 않을까 하고 오들오들 떨고 있던 선이 가는 소녀였었는데... " - 그렇겠지. 8년 이나 지났으니 사람도 변하는 법이겠지." 내가 8년 동안에 걸쳐 지금의 토노 시키가 된 것처럼, 아키하 역시 요 8년 동안에 걸쳐 지금의 토노 아키하가 되었던 것이다. 8년이란 시간은 길다. 지금까지의 인생의 절반. 그것도,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려 하던 가장 중요한 시기에 나는 이 저택에 없었다. "...미안해, 아키하." 그 8년 동안 함께 있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심결에, 그러한 사죄의 말을 되뇌이고 있다. 방에 홀로 남겨진 나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8년 만에 돌아온 집. 8년 만에 만난 육친. 왠지 다른 사람 집에 온 것 같은 기분. "...하아...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나." 혼잣말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대로 꿈 속에 빠져들었다. 우웅 - 파도 소리 같은, 무엇인가의 소리가 들린다. 우웅 - - 무언가가 울부짖는다. 들개 치고는 톤이 가늘고 높다. 우웅 - - 고막을 울린다. 달을 향해 울고 있는 건가. 우웅 - - 기분 나쁜 냄새. 이 짐승의 포효소리는 두통을 일으킨다. 우웅 - - 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우웅 - 우웅 - 우웅 -------- "...아악, 시끄러!" 눈을 떴다. 창 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계는 이제 막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대체 지금 뭐하는자는 짓거리야? "젠장, 이래선 잠도 제대로 못 자겠잖아!" 개 짖는 소리는 저택 담장 근처에서 들려온다. 이대로는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렇게 시끄러워서는 아키하나 코하쿠 씨도 잠도 못 자고 신 경쓰여 하고 있을 거다. 저택에 있는 남자라고는 나 하나 뿐이고 하니, 일 단은 어떤 일인지 상태를 보러 나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저택 오른편, 인가?" 커튼을 젖히고 밖의 상황을 확인했다. 그리고...방 밖에 서 있는 커다란 나 무. 그 가지 위에 한 마리의 푸른 까마귀가 앉아있었다. 한밤 중. 검게 밖에 보이지 않을 까마귀는 확실히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 푸른 까마귀 같은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데굴. 의지가 없는, 마치 기계의 렌즈 같은 느낌의 까마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 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까악.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하듯 울음소리를 낸 뒤 까마귀는 날갯짓 소리도 없이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방금, 뭐였지?" ...조금 등골이 오싹해 진다. 개 짖는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우웅 - 우웅 - 우웅 - "........." 왠지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 시끄럽다기 보다, 가만히 듣고 있는 것만으로 심장박동이 갑자기 격해지게 하는 것 같은 생리적인 혐오감에 가깝다. "시끄럽-다니까-!" 잠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우웅 - 울음소리는 밤 하늘에 울려퍼진다. 소리는 틀림없이 저택 오른편에서 들리 고 있다. "........." 왠지 목이 칼칼하다. 저택을 감싸는 높은 담벼락이 끝없이 이어진 밤 길. 목을 가다듬으면서 개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소리가 들리는 장소에 도착했다. "...어라?" 우웅 - 울음소리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 개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 사람 그림자 뿐이다. 홀로 어둠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있는 것처럼 서있는 가로등의 불빛 아래, 검은 코트의 사나이가 서 있다. 울음소리는, 그 남자의 곁에서 들리고 있다. 그러나 개 의 모습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코트의 사나이는 상당한 장신이다. 단단해 보이는 체격의 그 사나이는 이쪽 을 등진 채 우두커니 서 있다. " - " 목이, 칼칼하다. 우웅 하는 개 울음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밤 공기가 피부 를 촉촉히 적신다. 뭐가 어떻게 된 것도 아닌데...마치 바닷속 깊은 곳에 있는 것처럼, 호흡도 움직임도 굉장히 괴롭게 느껴진다 - 까악. 머리 위에서 소리가 났다. 무엇인가 날갯짓하며 날아오는 소리와 함께 푸른 까마귀가 남자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까마귀는 순식간에 그 모 습을 감추었다. "...에?" 내가 헛것을 본 건가. 까마귀는 검은 코트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 - " 검은 코트가 내쪽을 향해 몸을 돌린다. 흰 가로등 빛 아래, 사람 그림자는 그야말로 그림자 그 자체였다. 검은 덩어리. 그 속에, 흉기 같은 이성을 지 닌 두 눈 만이 번뜩이고 있다 - "...아" 숨을 쉴 수가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남자의 눈은 내가 전혀 보이지 않 는 것 같았다. "여기엔, 없었나" 검은 코트가 사라져 간다. 사람 그림자가 완전히 내 눈 앞에서 사라지자 겨 우 원래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됐다. "하아 - 하아, 아" 후우 하고 숨을 돌린다. 정신을 차렸을 땐 개 짖는 소리는 그쳐있었다. 방으로 돌아왔다. 아키하가 일어난 기척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개 짖는 소리 를 참아낼 수 없었던 것은 나 뿐인 것 같다. " - 크" 뭐야. 아직도 머리가 아프다. "어라...왜 내가 떨고 있는 거지...?" 가만히 보니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온몸이 부들부들 약하게 떨리고 있고 등줄기도 매우 차갑다. 예를 들자면...그래, 척추 대신에 얼음 기둥을 대신 박아넣은 것 같은 기분. " - " 갑자기 현기증이 들었다. 예의 빈혈인가...의식이 지면에 잠겨가는 듯한 감 각. 그런 도중, 기분 나쁜 것을 보고야 말았다. "이럴 - " 안경을 끼고 있음에도 그 [선]이 보인다. "윽..." 요즘 들어 거의 보고 있지 않아서였는지 반동이 크다. 기분 나쁘다. 빈혈에 의한 현기증과 [선]이 뒤섞여, 금방이라도 위 속에 든 것들을 토해내고 싶 은 기분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잘, 모르겠다. 다만, 눈을 뜨고 있으면 저 낙서자국이 시야 속으로 파고 들 어와 버린다. - 악몽이야 어떻게 어떻게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래...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부정하기에는 그것이 가장 효과가 빠른 방법이다. 몸 도 생각한 것처럼 움직여주질 않는다. 이대로, 마치 시체처럼...침대 위에 쓰러져 쥐죽은 듯 조용히 잠들면 되는 거야 - <1. 반전충동 I - 끝> -------------------------------------------------------------------------------- 2. 반전충동 II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사물의 부서지기 쉬운 부분이라 고. 그것은 인간으로 치자면 급소, 를 말하는 것일까. 그것을 칼로 그으면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사물을 절단할 수 있는 선. 쇳덩이 같은 단단한 물체라 할지라도, 저 선은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이를 절단해 버린다. "다시 말하자면, 시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부서진다] 라는 운명을 내포하고 있는 거야. 형태를 가진 이상, 이것만큼은 피할 수 없는 조건 같은 거니까 말야."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어렸을 적. 겨우 그 의미를 이해하고 몸서리 쳐질 정도로 무서워졌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결국, 세계가 누더기처럼 되 어있어서 언제 부서져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지면에도 낙 서자국이 이리저리 그어져 있다면, 그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지면이 갈라져 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다. - 그 의미를 알아차렸을 때, 선생님께서 안경을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 렸다. 항상 이런 선을 보고 있게 된다면 절대로라고 까지는 할 수 없을지라도 도 저히 살아있을 수 없을 것 같다. 사물의 부서지기 쉬운 부분. 그런게 보여 도 득이 되는 건 그 무엇 하나 없으니까 - " -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직 익숙지 않은 목소리가 들린다. "아침입니다.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시키 님." ...그러니까, 시키 '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시키 '님' 자를 붙여서 불 리면 소름이 돋는다고 어제 그렇게 단단히 일러두었건만 - 눈을 떴다. 히스이는 침대에서 좀 떨어져 있는 곳에 서서 마치 석고상이라 도 세워놓은 것처럼 꼿꼿이 자리에 서 있다. "........." 여기, 어디였더라?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시키 님." 메이드 복을 입은 소녀가 허리 숙여 인사를 한다. "...아아, 그랬지...나, 우리 집에 돌아왔었지 참..."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찬찬히 둘러본다. 그 순간 - 지끈지끈 관자놀이가 아파온다. "어라 - " "안경, 말씀이신지요?" 히스이는 정중한 태도로 안경을 건네준다. " - 후우" ...한숨이 나왔다. 어젯밤 - 자기 전에, 안경을 쓰고 있었음에도 [선]이 보 였던 것 같긴 하지만 아무래도 기분 탓이었던 모양이다. "읏..." 아직 익숙지 않은 방에서 잠들었던 때문인지 머리 속에 마치 안개라도 낀 것처럼 멍한 기분이다. "시키 님...?" 히스이가 말을 건다. 머리를 좌우로 크게 흔들어 아직 잠에서 덜 깬 머리를 각성시켰다. "안녕, 히스이. 깨워줘서 고마워."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키 님을 깨워드리는 것은 저의 책무 이니까요." 히스이는 담담하게, 실로 무표정한 얼굴로 회답琴다. ...좀 패널티를 주고 봐도 히스이는 정말 예쁘게 생겼다. 그런 애가 깨워주 는 건 솔직히 정말로 기쁜 일이라고는 해도 히스이에게 이렇게도 감정이 드 러나있지 않은 이상, 그렇게 기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깝다...히스이 가 코하쿠 씨의 딱 50% 만큼만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면 깜짝 놀랄 정도로 귀여울 것 같은데... " - 무슨 일이시온지?" 내 시선을 알아챈 듯, 히스이는 똑바로 나를 마주 바라본다.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일어나고 나서 곧바로 히스이 얼굴을 보고, 여기가 토노 저택이구나 하고 실감하고 있었던 것 뿐이야"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 양손을 뻗어 크게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곧 내가 어 느샌가 잠옷으로 갈아입혀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 거시기, 확실히 어제는... "얼라리? 나, 어제 교복 입은 채로 잤던 것 같은데." "예. 그대로 잠이 드시면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쳐드릴 것 같아 언니가 시키 님의 옷을 갈아입히고 침대에 눕혀드린 것입니다." 히스이는 마치 당연한 걸 말하고 있다는 듯 사정을 설명했다. 아 그래. 옷 을 갈아입혀줬단 말이지. 확실히 교복을 입은 채로 자버렸다면 감기 걸렸을 지도 므르는 일이니까. 과연 메이드, 빈틈이 없구마...엑, 자, 잠깐...! "뭐시기 - " 잽싸게 바지와 팬티를 확인한다. 바지춤에는 땟국물 하나 묻지 않은 새 잠 옷바지가 입혀져 있었고 팬티도 마찬가지로 새 팬티가 입혀져 있었다. "드, 대, 드악"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라고 내뱉을 뻔한 걸 겨우 목구멍 안으로 집어삼 켰다. 어쨌든 침착하게 생각해 보자. 에...잘못한 건 일단은 내쪽이다. 거 기에 옷을 갈아입혀준 건 히스이가 아니라 언니인 코하쿠 씨. 그렇다면 히 스이한테 따지고 드는 건 잘못이 아닐까. " - 히스이" "예, 무슨 일이시온지..." "앞으로는 그런 쓸데없는 일은 안 해줘도 돼. 꼭 필요할 때만 깨워주지 않 을래? 옷 갈아입는 것 쯤은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까...스스로 하고 싶 어서 그래." 얼굴이 시뻘개지면서 열심히 설득을 하자 히스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 덕인다. "학교 교복은 그쪽에 개어두었습니다. 옷을 다 갈아입으시는 대로 거실로 내려와 주십시오." "........." 젠장...방심했어! 어젯밤, 교복을 입은 채 침대에 쓰러져 자버린 것도 부주 의한 일이었지만 옷을 갈아입힐 때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것도 무 신경하기 짝이없다. "보통은 잠을 깼겠지만...나, 엄청 피곤해 있었나 보네..." 혼자서 때늦은 탄식만 늘어놓고 있어도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다시 어떻게 고칠 수 없다. 언제까지고 바보 같이 혼잣말만 중얼거리지 말고 빨리 옷 갈 아입고 아침 먹으러 가자. 학교 교복은 말끔하게 개어져 있었고 셔츠에는 다리미질까지 되어있다. 소매에 팔을 걸치자 왠지 새 옷을 입는 것 같은 상 쾌한 기분이 든다. "......뭐, 맨몸 정도는 보여줘도 괜찮을지도, 응" 괜찮기는 괜찮겠지만, 저 방실방실 웃고 있는 코하쿠 씨가 옷을 갈아입혔 다, 라고 하는 사실엔 아무래도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그런데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음에도 무엇이 그렇게 기쁜지 씨익 하고 웃고 있다. 괜찮을까나, 토노 시키...야 이노무자식아, 이럼 여기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 괜히 불안해지잖아... 거실에는 아키하와 코하쿠 씨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키하의 교복은 아사가 미 여학원이라고 하는 유명한 여학교의 것이다. 아키하와 코하쿠 씨는 벌써 아침식사를 끝마쳤는지, 우아하게 홍차 같은 것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 <3. 두 사람 모두에게 인사한다 - 선택> "아키하, 코하쿠 씨, 안녕?" "아...안녕히 주무셨어요, 시키 씨?" 코하쿠 씨는 흰 에이프런에 어울리는, 더 이상 이에 어울릴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미소를 띠고 내 인사를 받았다. 아키하는 나를 슬쩍 쳐다보더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침엔 꽤 늦게 일어나시는군요, 오빠." 라며, 아주 기분이 나쁘다는 듯한 기색을 드러낸다. "늦게라니...이제 막 7시 좀 넘었을 뿐이잖아. 여기서 우리 학교까지 걸어 서 30분 정도 걸리니까, 오늘은 비교적 빨리 일어난 편이라구." "그 말은 10분 안에 아침식사를 끝내야 한다는 뜻이로군요? 배 곯은 강아지 꼴은 보기 싫으니까 아침식사는 느긋하게 드시도록 하세요." " - " 아키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속에는 역시 가시가 돋아 있다. "강아지 꼴은 보기 싫으니까...라니, 아키하 - " 그 순간 머리 속을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개 이야기를 듣고 보니 어젯 밤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저기 말야, 어젯밤에 있었던 일 말인데 여기 매일밤마다 그래?" " - 예?" 내 질문에 아키하는 고개를 갸웃한다. 아무래도 내가 하는 질문의 의도가 아키하한테 하나도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말야. 개 짖는 소리 때문에 시끄러웠었잖아. 아키하도 그것 땜에 잠 못 잤을텐데?" " - 오빠? 그거,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이냐니,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랬잖아. 밤 11시 쯤에 들개가 계속 짖어대고 있었잖아." 아키하와 코하쿠 시는 얼굴을 서로 마주보더니 둘이 함께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 듯 물끄러미 바라본다...멀쩡한 사람을 사☆코 비스무리한 것쯤으로 여기는 듯한 태도, 좀 거북하군. "됐어, 아키하한테는 안 물어볼래. 코하쿠 씨, 어젯밤에 시끄러워서 잠 못 잤었죠?" " - 아, 음...글쎄요? 확실히 어젯밤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긴 했지만...한 밤중에 저택을 돌며 발견한 건 시키 씨가 교복을 입은 채로 침대 위에서 주 무시고 계시던 것 정도인걸요." "...아아, 그거요...앞으로는, 에, 조심하겠습니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코하쿠?" "아뇨, 아무 일도 아니었어요~. 그냥 시키 씨의 잠버릇이 좋지 못했던 것 뿐이니까요." 코하쿠 씨는 미소 지은 얼굴로 아키하의 질문을 슬쩍 받아넘긴다. 그러고 보니 코하쿠 시는 날 시키 '씨'라고 부르고 있다. 어젯밤에 코하쿠 씨한테 전해달랬던 말을 히스이가 확실히 전해준 듯 하다. "...정말로 두 사람 다 몰랐단 말야? 어젯밤에, 30분 쯤 밖에서 들개가 짖 어대고 있었는데. 멍멍멍멍멍멍 하고, 거 얼마나 시끄러웠는데." "하하앙~그건 멍멍패닉이라는 거에요." ...코하쿠 씨, 왠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뭐,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그쯤 되려나." "흐~~응~~난 그런 기억은 없는데. 코하쿠도 기억 안 나지?" "글쎄요~시키 씨한테는 참 안 됐지만 어젯밤엔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안 일어 났던 걸로 알고 있어요." "거봐. 그럼 남은 케이스를 생각해 보면 오빠가 개한테 쫓기는 꿈이라도 꾼 게 아닐까, 하는 정도인가요? ".........윽" 거야 확실히, 꿈 아니었어? 라고 하면 꿈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말야... " - 오빠는 아직 저택에 익숙지 않기 때문에 그런 좋지 못한 꿈을 꾸는 걸 거에요. 그래, 오늘밤에도 들개가 또 짖어대고 그러면 무지무지 사나운 문 지기 개라도 기르도록 할까요?" 라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보이는 아키하. "전 이만 시간이 다 됐으니 먼저 실례할게요. 오빠, 등교할 때 개한테 물리 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하세요." 아키하는 그렇게 말하고는 거실을 뒤로 했다. 아키하를 현관까지 배웅할 셈 인지 코하쿠 씨도 거실을 나섰다. "........." 자, 그럼 슬슬 결론을 내도 좋을 타이밍이로군. 어젯밤부터 지금까지의 일 의 경과를 떠올려 보면 깊이 생각할 것까지도 없는 일이겠지만...아무래도 나는 아키하에게 엄청나게 미움받고 있는 것 같다. -------------------------------------------------------------------------------- 코하쿠 씨가 준비해준 아침을 먹은 후 로비로 나섰다. 로비에는 히스이가 내 가방을 들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시키 님, 학교 가실 시간은 충분하신지요?" "아아. 여기서 학교까지 뛰어서 20분 정도 밖에 안 걸리니까. 지금이 7시 반 쯤 됐으니까 돌아서 가도 충분히 도착할 수 있어." 내 설명에 만족했는지 히스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바깥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에 - 아, 응, 고마워." 내 전용 사용인이라...역시 멋적다니까... "아, 시키 씨! 잠깐만요!" 급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코하쿠 씨가 2층에서 내려왔다. "........." 히스이는 코하쿠 씨가 내려오자 살짝 옆으로 비켜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 는다. "어라, 코하쿠 씨는 아키하랑 같이 갔던 거 아니에요?" "아키하 아가씨는 학교까지 차를 타고 가시니까요. 오늘 아침엔 시키 씨께 전해드릴 물건도 있고 해서 저택에 남게 됐어요." "전해드릴 물건? 나한테?" "예. 어젯밤에 아리마 가 분들께서 화물을 보내셨어요." 코하쿠는 빙긋이 미소를 띄운다. "에에 - ? 잠깐, 나 내 짐은 모두 가지고 왔다구. 애시당초 아리마 가에 있 었을 때 사용하던 물건은 아리마 가 거니까, 내 물건이라 치면 지금 입고 있는 옷 정도가 전부인데..." "그러세요? 이게 전해받은 화물인데요..." 코하쿠 씨는 길이 20cm 쯤 되는 작은 나무상자를 나에게 건넸다. 중량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 - 코하쿠 씨, 나 이런 거 본 적 없는데?" "아, 그게...시키 씨 아버님의 유품이라고 하시던데요. 시키 씨에게 물려달 라는 유언이 있었다고..." "...아버지가 나한테?" ...실감이 안 나는 소리로군. 8년 전, 나를 이 저택에서 내쫓듯이 내몰아버 린 아버지가 어째서 나에게 유품 같은 걸 남긴 거지? "...뭐, 아무렴 어때. 코하쿠 씨, 이거 내 방에다 좀 놓아주지 않을래요?" " - " 코하쿠 씨는 관심있어하는 눈초리로 물끄러미 나무상자를 보고 있다. 아무 리 봐도 장난감을 갖고 싶어하는 아이 같은 느낌이다. "끙........." 아니, 아이 그 자체로구만. "그렇군...코하쿠 씨는 안에 든게 뭔지 신경쓰이나보네요?" "아뇨, 그런 건 아니구...그냥 좀 뭐가 들었을까~~? 하고..." ...그러니까 신경쓰인다는 소리 아냐. "그럼 열어보죠. 하나, 둘~~" 스윽 하는 건조한 소리를 내며 나무상자가 열린다. 안에는 - 10cm 쯤 되는, 가는 쇠막대가 들어있었다. "...쇠막대...잖아." 아무런 장식도 되어있지 않은, 그간의 손때가 묻어있는 쇠막대. 이런 고물 딱지를 유품이랍시고 나한테 줬다는 건,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마음에 들지 않아했는지를 표현한 거나 마찬가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 아니에요, 시키 씨. 이거 과도인데요?" 코하쿠 씨는 철심을 상자 속에서 끄집어낸다. "봐요, 잭나이프 같은 것도 있잖아요. 그거랑 같은 종류 같은데요. 어디... 하나, 둘..."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쇠막대 속에서 길이 10cm 정도 되는 칼날이 튀어나 온다. 과연, 이건 확실히 나이프다. "꽤 오래돼 보이지만, 튼튼하게 잘 만들어져 있어요. 뒤쪽에 연도가 새겨져 있네요?" 코하쿠 씨는 칼날을 안으로 밀어넣고는 나이프를 내게 건넨다. 확실히 손잡 이 아래쪽 부분에 숫자가 새겨져 있다. 시치(七)라는 한자와, 그 뒤에 새겨 져 있는 요루(夜)라는 한자. "언니, 이건 연호가 아니야. 나나츠요루라고 새겨져 있는 것 뿐이라구." "?!"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거기에는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던 히 스이가 내 뒤에서 나이프를 쳐다보고 있었다. "까, 깜짝 놀랐잖아...히스이. 그렇게 뒤에서 쳐다보지 않아도 보고 싶다고 말만 하면 보여줬을텐데 말야." "아 - " 히스이의 뺨이 살짝 붉게 물든다. "시, 실례했습니다. 저 - 손에 들고 계신 단도가 너무나 예뻐서 그만..." "예쁘다고? 이게 예쁘단 말이지...아무리 봐도 골동품으로 밖에 안 보이는 데 말야." " - 그렇지 않습니다. 훌륭한 날형을 하고 있는, 유서 깊은 칼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 난 아무리 봐도 그냥 잡동사니 같은 걸로 밖에 안 보이는데..." 히스이가 너무도 강하게 단언하는 탓에 나도 그런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게 됐다. 음...뭐, 이것도 나름대로 유품으로서는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 다. "나나츠요루...그 과도의 이름인가보죠?" "그럴지도. 나이프 따위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지 만." 뭐, 어쨌든 오래된 물건이라는 건 확실하다. "뭐, 남이 준 물건은 일단 받아두고 보는게 내 신조니까." 날을 접고 바지 주머니 속에 나이프를 넣었다. "시키 님. 학교 가실 시간은 충분하신지요...?" "아차! 빨리 안 가면 지각할지도...그럼 코하쿠 씨, 전해줘서 고마워요." 코하쿠 씨는 웃으며 알았다는 듯 손을 흔든다. 현관을 나서 정원을 가로지른다. 저택 문을 나섰을 때, 무슨 일인이 주변이 소란스럽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무슨 일이지? 저택 오른편에 무슨 일 났나?" "그것이...오늘 아침 저택 동편의 노면에서 혈흔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 - 혈흔...? 그거, 핏자국을 말하는 거야?" "예. 저택 담장에도 핏자국이 묻어있었습니다. 시키 님께서 아직 주무시고 계시는 동안, 경찰 관계자 분들께서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믈으러 찾아오셨습니다만." "...설마, 사람이 죽었다든지...?" "아뇨, 발견된 것은 핏자국 뿐이라고 합니다." " - " 저택의 동편 - 거기는 어젯밤에 검은 코트의 사나이가 서 있던 장소다. 혈흔...핏자국. 혈흔...붉은 자국. 그러고 보니 분명히...뭔가, 붉은 빛을 본 것 같긴 한데... "시키 님?" "에...?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불길한 이미지를 떨쳐버린다. "그럼 다녀올게. 배웅해 줘서 고마워, 히스이."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아무쪼록 몸조심 하시길." 정중히 인사를 하는 히스이. 뭘 몸조심 하라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도 내 신변을 걱정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응, 생큐. 히스이도 몸조심 하고 있어." 호의에는 호의로 답하는 것이 당연지사. 히스이에게 힘껏 손을 흔들고 나서 저택 문을 뒤로 했다. -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길을 걷는다. 지금까지는 아리마 가에서 학교를 다 녔기 때문에 지금 가는 길을 따라 등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단순 히 다니던 길이 바뀌었을 뿐이었음에도 마치 전학을 온 것 같은 신선한 기 분이 느껴진다. " - 우리 학교 애들, 별로 없네..." 이 주변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우리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별로 없는 모양 이다. 아침 7시 반. 빠른 발걸음으로 길을 지나는 학생 차림의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중심가는 통근 행렬로 혼잡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양복 차림의 회사원들이 '오늘도 열심히!' 라는 듯 전투준비를 하고 있는 광경. 아니, 평소와 다름 없이 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최근 며칠 동안 거리의 분위기는 조 금 무거워졌다. 아마 예의 무차별 연속 살인마의 영향 때문일 거다. 요 며 칠간은 저녁만 되면 거리에 사람이 없어 매우 한산했었다. " - 놀러다니는 것도 적당적당히 해야지, 아리히코." 거리 분위기하고는 상관없이 이리저리 쏘다니는 친구놈의 얼굴이 떠오른다. 뭐, 여기서 중얼거려봤자 그놈한테 들릴리도 없겠지만. 거리 곳곳에 교복 차림의 사람들이 떼지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문이 닫힐 때까지는 앞으로 10분 남짓. 지각하지 않도록 아스팔트 노면을 달렸다. - 도착. 저택에서 도보로 30분, 아니 20분 정도 걸렸을까. 중간에 몇 번인가 뛰어서 왔었으니까 느긋하게 도착하려면 7시 조금 넘어서 저택을 나설 필요가 있을 것 같다. HP이 시작하기 수 분 전의 교실은 떠드는 소리로 정신이 없다. 담임이 오기 전까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급우들은 무질서하게 교실 곳곳을 이리 저리 왔다갔다 하며, 단 몇 분 동안이지만 마치 축제와 같은 소란스러움을 연출해내고 있다. 그 무리 사이를 걸어 창가에 있는 내 자리에 도착했다. 그때 - "이야아아아아, 뭐하다 이제오냐, 토노." 단 한 사람, 이런 아침 교실의 정경에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 실실 입가에 웃음을 띠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 "아, 좋은 아침, 토노 군." -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인물과 함께 말이다. "어째서 선배가 우리 교실에 있는 거지?" 멍하니, 마치 도깨비라고 보고 있다는 듯 시엘 선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 다. "어머, 그렇게 이상한 일이에요? 저는 그냥 토노 군이 교실에 있는지 없는 지 궁금해서 잠깐 들러본 건데요..." "이상한 일이고 뭐고...보통, 상급생이 하급생이 있는 반에 찾아오는 일은 없다구요.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 위치가 너무 떨어져 있 기도 하고." 선배는 내 말을 이해했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 점은 괜찮아요. 저 이래봬도 달리기는 자신있으니까요. 아래층 에 있는 저희 교실까지 가는데 1분도 안 걸린다구요." 선배는 헛기침까지 해가며 역설한다. "........." 아무래도, 시엘 선배한테 일반적인 상식이라는 걸 말해줘봤자 거의 소용이 없는 것 같다. "거참 잔말이 많구만, 토노. 선배가 지 좋아서 온건데 아무렴 어떠냐?" 아리히코는 남의 책상 위에 턱 하니 허리를 걸치고는 선배와 즐겁게 이야기 를 나누고 있다. "...그거야 상관없지만...HP 시작할 때까지 앞으로 2분 밖에 안 남았으니까 빨리 자기 교실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요, 선배." 왠지 갑자기 피곤한 기분이 들어 한숨을 섞어쉬며 자리에 앉았다. "...이누이 군. 아무래도 아무래도 토노 군,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것 같네 요." "아아...아마 이사간 곳에서의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게 아닌지 모르겠네. 토노는 평소에는 이것저것 그렇게 신경쓰는 타입은 아니긴 하지만, 뭔가 잘 안 풀리는 일이 있으면 갑자기 날뛰는 버릇 이 있으니까 말야." "...정말이에요? 토노 군, 별로 화난 것 같지는 않아보이는데." "...아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구요. 토노는 말입니다~~평상시에 어른스 러운 만큼 이해할 수 없다든지 하는 일을 만나면 벌컥 뒤집어지는 녀석이니 까 말이에요." "...하아...벌컥, 이라구요..." "...음, 음. 한 번 맛이 가면 눈에 뵈는게 없어지는 놈이니까, 선배도 이자 식을 믿으면 안 된다구." ...아리히코와 시엘 선배는 남들이 못 알아들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남의 뒷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봐들...남의 뒷이야기 같은 건 복도에서 하지 않을래? 남 책상 옆에 서서 그렇게 소근소근 대봤자 전부 다 들리니까 아무 의미도 없다구..." "뭣이?! 다 들었단 말야, 토노!?" 화들짝 놀란듯한 표정을 짓는 아리히코. 이렇게까지 원맨쇼를 해버리면 화 낼 마음도 없어져 버린다. 선배를 보니 대체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 가 장난인지 급히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다. 아마도 선배는, 진심 으로 내 뒷이야기를 하려던 것일지도... "너무해, 토노! 나랑 선배의 러브러브한 비밀 이야기를 몰래 훔쳐듣다니, 너 이자식 이상한 취미를 가졌구만!" 이상한 효과음까지 내며 아리히코는 나를 손가락질한다. " - 아리히코. 너, 나랑 싸우고 싶은 거야?" 아니, 제발 싸움 좀 걸어봐라. 지금이라면 무엇이든 다 받아줄테니까. 아리히코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럴 리가 있냐. 나랑 토노는 친구사이잖아. 난 부모랑은 치고박고 싸울 수는 있어도 친구랑은 절대 싸우지 않는다는데 신조라서 말야. 사나이답게 살아간다 이거야, 기본적으로는." ...거참 대단하군. 사나이답다는 말은 곧 부모에게 손을 대도 된다는 뜻이 엇구만...적어도 아리히코의 내면세계에서는. "과연 - 썩어비틀어져 있군, 네놈의 신조는." "하하하하하! 뭐야...힘없이 축 늘어져 있더니만, 속은 아직도 평소 그대로 의 토노였잖아! 거참, 괜히 걱정했네!" 내 등을 세게 후려치는 아리히코. "...아리히코. 너 지금 날 걱정해준 거냐?" "바보냐? 그런 건 묻는게 아니지! 이런 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게 미덕이란 말야!" 또 다시 내 등짝을 후려친다...지금까지 꽤 오랫동안 사귀어왔지만, 이놈 성격만큼은 아직도 파악이 안 된다... "그래, 새 집 생활은 어때? 보아하니, 꽤나 스트레스 좀 받고 있는 것 같은 데." "글쎄올시다. 일단 어제는 기분 나쁜 꿈까지 꾸고 집안 사람들한테는 이상 한 눈으로 쳐다보여지기까지 했지만 말야." " - 흠. 그래, 거참 큰일이로군." 아리히코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댄다. "........."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있을 줄로만 알았던 선배는 나와 아리히코의 웃기 지도 않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 "토노 군은 역시 이누이 군이랑 사이가 좋네요." "어디 아파요, 선배? 이걸 보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그 안경, 도수 가 안 맞는 거 아닌지 몰라." "그렇지 않아요. 토노 군은 이누이 군이랑 같이 있으면 긴장이 많이 풀어지 시잖아요. 거기에 엄청 무방비상태...이누이 군을 많이 믿고 계시는군요." 선배는 기쁜 듯한 웃음을 지었다. "?" 아리히코와 얼굴을 마주보며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부러워요. 그렇게 상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해줄 수 있는 친 구가 있다는 건..." 감탄하는 표정을 짓는 선배. "그랬던가?" "그랬던가?" 아리히코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동시에 눈썹을 일그러뜨린다. "그래요. 이누이 군과 토노 군은 서로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아, 하지만 그걸 알았을 땐 모든 것이 다 끝나있을지도 모르죠...그래, 그렇담 차라리 토노 군이랑 이누이 군은 지금 이대로인 상태가 괜찮을지도. 응, 엄 청 절묘한 밸런스에요." "뭐...절묘하다면 절묘한 사이지, 나하고 이녀석하고의 관계는..." 동감이야, 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리히코. 이런 상황에서만큼은 서로간의 호흡이 척척 맞는다. "아, 그만 가봐야 할 시간이네요. 그럼 저 이만 돌아가볼게요...아참, 토노 군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 " - 아뇨. 새로 이사간 집에는 TV가 없어서...아침 뉴스 같은 건 볼 수조차 없어요." "그러세요. 그럼 솔직하게 물어보도록 하죠. 오늘 아침 뉴스에 큰 저택이 찍혔었는데요, 그거 혹시 토노 군네 집이에요?" " - 에?" 오늘 아침 뉴스? 그러고 보니 경찰이 사정정취를 위해 집으로 찾아왔다고 히스이가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응, 그건 틀림없이 우리 집일 거에요. 오늘 아침, 경찰이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러 왔었다던가 그렇게 들었으니까." " - 그러세요. 토노 군, 너무 늦게까지 밖에서 놀면 안 돼요." 선배는 빠른 몸놀림으로 교실을 나선다. 그 뒷모습을, 아리히코와 나는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 " - 토노." "뭐야. 또 이상한 거 물어보려면 아예 물어보지를 마." "그런 게 아냐. 엄청 궁금한게 있는데, 네놈 어느 틈에 선배가 너 만나러 찾아올 정도로 선배랑 사이가 좋아진 거냐?" 아리히코는 두 눈을 부릅뜨고 날 쳐다본다.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건 최근의 일이 고, 오늘도 그냥 어쩌다가 찾아온 거 아냐? 게다가 그러는 네놈이 더 친한 척 했었잖아." "그렇지도 않아. 난 일주일이나 걸려서 겨우 이름을 외우게 된 정도라구." "헤에, 별일이네? 하루 안에 안 넘어오는 여자는 귀찮아서 상대도 안 한다 는게 네놈의 주의 아니었냐?" "다른 여자는 그럴지 몰라도, 선배는 별개야. 남한텐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실은 나 말야 - " "안경 쓴 모습이 잘 어울리는 상급생 타입이 좋다, 라는 거지?" 허를 찔린 듯 아리히코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오른다. "어떻게 아셨소, 친구?" "알다마다, 우리는 친구니까 말야. 성격도 비슷하고 뭣보다 취미가 서로 통 해있잖아." "그렇군, 그렇군! 토노도 선배의 매력을 이해한다는 건가 - 자, 잠깐." "아아, 우린 취미도 서로 비슷하잖아? 그러니까 좋아하는 여자 타입도 같지 않겠어?" 아리히코는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자기 자리로 향한다. "짧은 우정이었군, 토노." "아아, 그래." 한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 아리히코를 배웅한다. 그와 거의 동시에 담임이 교실로 들어섰다. --------------------------------------------------------------------------------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됐다. 아리히코는 한 발 앞서 식당으로 향 했다. 자, 그럼 어디서 점심을 먹을까? <1. 교실에서 때우자 - 선택> 학교식당에서 빵을 사서 교실에서 천천히 점심을 때우기로 했다. 교실에 남 아있는 건 몇 명 안 되는 남학생들과 친구들끼리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여 학생들 뿐이다. "...어라?" 지금 막 알아차렸다. 여학생 중에 제일 눈에 띄는 존재인 유미즈카 사츠키 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결석, 했나?" 급우 중 한 명이 학교에 빠진 걸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알게되다니, 나도 참 정신없는 녀석이다. 5교시 째. 고문(古文) 수업에 따른 잠의 유혹에 빠져들면서 창 밖으로 시선 을 돌린다. 그때 - 교실 베란다에, 까마귀가 앉아있었다. " - " 어젯밤에 봤던 푸른 까마귀가 아니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검은 까마 귀다. 까마귀는 날개색과 같은 검은 두 눈으로 창 너머에 있는 교실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확실히, 까마귀가 앉아있다는 사실 자체는 특이한 일이긴 하지만 그다지 이렇다할만한 특이점은 없었다. "아 - " 그것은 갑작스럽게 찾아들었다. 시야가 점점 희뿌옇게 변하더니 평형감각마 저 사라져 간다. " - " 시야가 크게 흔들린다. 뒤통수 쪽에 무엇인가가 꽉 차는 듯한 느낌이 들더 니 의식이 점점 아득해져 간다. "...제길" 이 감각을 나는 알고 있다. 돌발적인 현기증은 빈혈의 전조다. 뇌 혈관에 차 있던 혈액이 검은 덩어리가 되어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내면서 눈에 보 이는 것들을 새카맣게 물들게 한다. 예를 들자면 뇌에서 안구 방향으로 어 둠이 밀려드는 것 같은 감각. - 젠장...수업 중에 쓰러진 적, 거의, 없었는데 - 검게 변한 시야 속에서, 책상을 더듬어 잡고 거기에 기대어 본다. 그것도 곧 소용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 다음엔 단지, 바닥에 쓰러져 버릴 뿐 - "선생님, 잠깐만요." - 그때, 누군가 난폭하게 내 등을 후려친다. "토노 자식, 상태가 안 좋아보여서 보건실에다 좀 데려다주려고 하는데요." " - 아리히코" 어느 틈엔가 아리히코가 옆에 서 있었다. "토노, 정말로 어디 아픈 거냐?" 교단에서 교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뇨, 아직은 괜찮 - " "아~~아파서 못 참겠다는데요. 차라리 조퇴시키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아리히코는 큰 목소리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그래? 이누이가 그렇게 말한다면 틀림없겠지. 선생님도 토노의 몸상태에 대한 이야기는 쿠니후지 선생님한테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 토노, 상태가 좋지 않으면 보건실에서 쉬거나 조퇴해도 된다." ...거참, 사람이 좋은거야 뭐야. 고전을 가르치는 교사는 아리히코의 말을 전면적으로 믿고 있는 모양이다. "봐봐, 가도 된대잖아. 그렇게 죽을 상을 하고 앉아가지고선, 아프다고 느 꼈을 때 빨랑 아프다고 말 안 하면 어떻게 아냐?" 아리히코는 기분 나쁘다는 듯 내 등을 툭 친다. "...그럼 조퇴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고전 교사는 허락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미안해, 아리히코. 쓸데없이 걱정하게 만들어서." "무슨 소리야. 중학교 때부터 이어진 인연이잖냐. 네가 빈혈로 쓰러질 것 같다는 건 금방 알 수가 있다구." 아리히코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고맙다는 인사를 윙크로 대신하고 아직 제대로 가누기 힘든 몸을 이끌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 학교를 나섰다. 원래는 보건실에서 누워있는 편이 좋겠지만, 지금 시간에 보건실에서 누워있어봤자 일어날 시간 쯤 되면 벌써 방과후가 되어있을 거 다. 그렇다면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저택으로 돌아가 쉬는 편이 낫다고 판 단했던 것이다. "...후우...이제 좀 괜찮아졌네."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는 동안 기분도 차츰 나아졌다. 정말이지, 내 몸이지 만 가끔 가다가 힘들 때가 있다니까. 8년 전. 자칫 잘못했으면 죽을 뻔 했던 중상에서 회복한 대신에인지 그때부 터 토노 시키는 만성적인 빈혈을 일으키는 체질이 되었다. 병원에서 퇴원했 던 당시엔 하루에 한 번 꼴로 빈혈로 쓰러졌었고 현기증을 일으키는 건 거 의 일상다반사 같은 일이었다. 그 당시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몸도 성장할 만큼 성장한 덕분에 돌발적인 현기증과 빈혈은 자주 일어나지 않게 됐다. 하지만 가끔씩 무엇인가의 반작용처럼 현기증을 일으키고 그대로 의 식을 잃게 되는 일만큼은 계속되었다. 오늘은 아리히코가 도중에 말을 걸어줘서 살았지만, 여느때였더라면 그대로 지면에 쓰러져버릴 뻔 한 상황이었다. " - 하아"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신선한 공기를 폐로 주입시킨다. 그러고는 머리 속에 가라앉은 피의 흐름을 억지로 참아내며 학교를 뒤로 했다. 큰길가로 나섰다. 이곳을 지나 주택가로 들어서면 토노 저택까지는 일직선 이다. " - 으" ...안돼.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닌 모양이다. 뺨에 손을 대어보니 평소보다 더 뜨겁다. "........." 이대로 무리하다가 길가에 쓰러져 버리면 죽도 밥도 안 돼. " - 정말로 어쩔 수가 없군..." 나 자신에게 어이없어 하면서 가드 레일에 몸을 기댄다. 기분이 괜찮아질 때까지 좀 쉬다 가자.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멍청하게 큰길가 쪽을 쳐다봤다. 평일 오후를 이제 막 지났을 무렵임에도 대로변은 지나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걸어가 는 많은 수의 사람들. 이름도 주소도 모르는 그들은 바로 옆을 지나치는 다 른 누군가에게 시선 한 번 주는 법 없이 앞으로 앞으로 계속 걸어나간다. 같은 장소에 이만큼이나 되는 많은 수의 사람이 있음에도 그 누구도 바라보 는 방향은 한 방향이다. 자신이 자신의 주인공이라는 듯, 그들은 그들이 주인공인 하루하루를 보내 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하루하루는 대개는 다른 누군가와 어울리는 법 없 이 자기 혼자만의 하루로 끝내버린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 - 고독, 매우 고 독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약한 열 때문인지 감상적인 생각을 해버렸다. " - 가자" 기분도 꽤 괜찮아졌고 여기 이러고 앉아있어도 아무 의미도 없는 일 밖에 생각하지 않게 되고. 빨리 저택에 돌아가려고 가드 레일에서 몸을 일으켰 다. - 그녀를 보게 될 때까지는. 무심코,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 틈 사이로 시선을 던졌을 뿐인데 시 야가 얼어붙어 버렸다. - 두근 금발 머리와 붉은 눈동자. 흰, 그녀의 이미지를 상징이라도 하는 것 같은 흰 복장. - 두근 맥박이 빨라진다. 정맥과 동맥이 활성화한다. 신경은 차츰 파열되어가고 척 추가 목 뒤쪽에서 뽑혀져 나올 것만 같을 정도로 몸 속이 격렬하게 요동친 다. - 두근 인파 속을 걷고 있는 여성은, 그저 아름다웠다. " - " 멀어져 갔던 현기증이 다시 찾아든다. 몸이 기우뚱 하며 의식이 멀어진다. - 두근 숨을 쉴 수가 없어. 손끝은 떨리고 피가 돌지 않아. 온 몸 구석구석이 떨리 고 얼어죽을 것만 같아. - 두근 심장이 '어서 빨리, 빨리!' 라고 명령한다. "아 - 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목구멍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온다. - 생각을 못하겠어. 그 어떤 단어 하나조차 내 뇌는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 두, 근 그렇게 되풀이 되어지는 단어는 단 하나. 그녀를. 저 여자를. 나는, 이대로 - "헉-, 헉-, 헉-" 토할 것 같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숨쉬기가 괴롭다. 어떻게 하면 원래대로 숨을 쉴 수 있는지를 생각해낼 수가 없다. "헉-, 헉-, 헉-" 목 안쪽이 뜨거워. 눈알이 터질 것만 같아.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어. 몸은 이렇게 추운데도 - 이렇게나 땀을 흘리고 있어. "하아 - 하아 - 하아 - " ...쫓아가야 해. 저 여자를 쫓아가야 해. 쫓아가서, 뒤쫓아가서, 말을 걸 자. 얼어붙은 발걸음을 떼어, 짐승처럼 거친 숨소리를 내며, 흰옷의 그녀를 뒤 쫓았다. "하아 - 하아 - 하아 - " 그녀는 천천히 걷고 있다. 내가 미행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하 - 아" 지금 위치라면 뛰어가서 말을 걸 수 있다. 이야기를 걸고 이름을 묻자. "하 - 하하, 하" - 이름을 묻는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난 그런 걸 하고 싶은게 아냐. 나 스스로가 잘 알고 있어. 잘 알고 있을텐데도...잘 모르겠어. 나는 다른 게 하고 싶은 것 같은데. 아무리 해도 그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말로 표현이 안 돼. 머리 속에 먹구름 같은 것이 끼어있다. " - " 목 안쪽이 뜨거워. 아까부터 전혀 숨을 쉴 수가 없어. 하지만 그게 어쨌다 고. 그건 당연한 거잖아? 저런 여자를 눈앞에서 보고 있어. 흥분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실례되는 일 아냐? 그 자리에 불러세우고 이름을 물어봐? 흥, 애들 같은 짓은 그만해. 잘 모르겠지만. 내가 해야하는 일은, 그 단 한 가 지 밖에 없을 거야.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넣고 걷는다. 손 끝에 차가운 쇳조각이 느껴진다. "크 - 크" 이런 행운이! 도구는 모두 갖춰져 있어. 여자는 걸어가고 있어. 충분히 거 리를 두자.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변 놈들한테 수상하게 여겨지지 않도록. 나와 저 여자는 생판 남남이야. 그러니까 가능한 자연스럽게 저 여자의 뒤 를 밟지 않으면 안 돼. ...여자가 맨션 안으로 들어간다. 아직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상황 을 지켜본다. 여자는 엘리베이터에 타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엘리베이터는 6층에서 멈췄다. 1층에 있는 공용 우편함을 찾아본다. 6층 사는 사람의 우 편함은 5개. 그 중 하나에 손을 대보고 그 냄새를 맡아본다. 틀림없어. 6층 3호실이, 그녀가 사는 집이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6층 버튼을 눌렀다. 두근거린다. 엘리베이터라는 협소한 밀실 안에서 주머니 속의 나이프를 꼭 쥐었다. 바로 근처에 그 여자가 있다. 조금만 더 있으면 그 여자를 .... 할 수 있어. 아아...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쾌감이 - 온몸이, 절정 을 맞은 생식기라도 된 듯한 기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6층 복도에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상황이 갈 수록 좋아지는군. 빨리 - 빨리, 하고 싶어. - 3호실 앞에 다다랐다. 초인종을 누르려다가 참았다. 안경은 방해만 돼. 이런 걸 끼고 있으면 될 일도 안 될 걸. - 약속해, 시키. 절대로 경솔하게 사물을 보면 안 돼 - "........." 아득한 옛날에 그렇게 말했던 여자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름도 얼 굴도 기억할 수 없다. 천천히 안경을 벗었다. 검은 선이...보인다. 그 뿐만이 아냐. 내 두 눈까지 어떻게 되어버린 것일 까. 시야에는 저 기분나쁜 선 뿐만 아니라 검은 구멍 같은 무수한 [점]들이 보이고 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나는 어째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걸까. 토노 시키는 - 방금의 그 여자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모르겠어. 잘 알지 못하는 채 초인종을 눌렀다. "예 - " 문 너머에서 소리가 난 후 문이 살짝 열린다. 순간 - 그 찰나의 순간을 놓 치지 않고 집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에 - " 여자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아니, 높아지려 했다. 여자의 목소리가 높아질 일 따위는 영원히 일어나지 않아. 그 전에, 나는 그녀를 토막내고 있었으니 까.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순간.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여자의 몸을 이 리저리 달리고 있는 선을 나이프로 그었다. 찌르고, 베고, 긋고, 내지르고, 조각조각 절단내고. 더 이상 손댈 곳이 없어질 때까지 [죽였다]. 여자의 몸에 있는 도합 17개의 검은 선. 머리, 후두부, 오른쪽 눈에서 입술 까지, 오른팔 상완, 오른팔 하완, 오른손 약지, 왼팔 팔꿈치, 왼손 엄지, 중지, 왼쪽 유방, 늑골부분에서 심장까지, 위에서 복부까지 2개 부분, 왼쪽 엉덩이살 부분, 왼쪽 허벅지, 왼쪽 정강이, 왼쪽 발가락 모두. 마치 서로 엇갈리듯, 1초도 걸리지 않고. 실로 순간 남김없이. 그녀를 17개의 고깃조각으로 [해체]했다. " - 에?" 정말 한심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내 목구멍에서 나온 소리라는 것에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시 현기증이 일어난다. 눈 앞에는 토막나 산산이 흩어져 있는 여자의 몸이. 플로어링 처리가 된 바 닥에는 양동이의 물을 갖다 뿌리기라도 한 듯 벌건 피가 곳곳에 퍼지고 있 다. 숨 막힐 것 같은 피 냄새. 절단면은 아주 깨끗했고 내장도 비어져 나와 있지 않다. 그저 붉은 빛만이 지면을 침식해 들어가고 있다. 이상하군. 집 안에는 아무 것도 없고, 다만 여러 토막이 나머린 여자의 수 족과 나 혼자 만이 멍하니 서 있다. " - 무슨, 짓을 - " 플로어링 되어있는 바닥에 퍼져가는 붉은 피바다. 내 손에는 그 흉기로 쓰 였던 나이프가 쥐어져 있다. "죽었 - 어" 당연하지. 이꼴이 되고서도 살아있으면 그게 인간이냐? "어째 - 서?" 어째서고 뭐고도 아니다. 기껏해야 지금, 내 손으로. 토노 시키의 손으로 간단히, 일순간에, 본 적도 없는 여자를 토막내 버린 거 아냐. "내가 - 죽였어?" 그래, 틀림없이. 그럼 아니란 말인가. 내게는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아냐, 내가 안 죽였을 거야. 하지만 이유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 다. 그러니까 아냐, 내가 안 죽였을 거야. - 플로어링 된 바닥에 붉은 피가 퍼져나간다. 이곳저곳 아무렇게나. 발밑에 붉은 피가 밀려든다. ".........아" 뒤늦게 발을 치워보지만 이미 늦었다. 여자의 붉은 피는 콜타르처럼 끈적끈 적하게, 발과 바닥 사이에 실을 드리운다. " - " 아아...붉은, 피, 다 내가 산산조각 토막을 내버려서 지금도 질질 아무렇게나 흘러내리고 있는 기분 나쁜 색. " - 내가, 안 그랬어." 그래, 내가 안 죽였을 거야. 아냐. 아냐. 틀림없이 아닐 거야, 절대로 아니 야. 이건. 이건, 이건, 이건, 이건, 이건이건이건이건 - <1. 이건 틀림없이 악몽일 거야 - 선택> ...이건, 악몽이야.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피냄새 만이 끔찍할 정도로 리얼 한 거지. "...아, 냐" 그래.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아냐. 하지만. 내가 죽였다는 사실이 잘못됐다는 건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이지 않았다 는 사실이 잘못됐다는 건가. "...하지만, 이유가, 없어" 아니, 이유라면 확실히 있다. 그녀를 봤을 때, 어느 한 가지 생각 밖에 할 수 없었으니까. "나는 - " 그래, 나는 - 토노 시키는 저 여자를 죽이고 싶다, 고. 그것이, 그때의 내 의지였을 거다. 다만 머리 속이 뒤죽박죽 되어 있어서, 그 이미지를 억지로 말로써 표현하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 - 야" 피 냄새 때문에 토할 것 같다. "아 - 윽" 위 속의 내용물이 뒤집혀 올라온다. "아 - 아" 안구에 붉은 빛이 스며든다. 현기증이 일어나고, 그대로, 붉은 피바다에 몸이 무너진다. "아 - 윽........!" 위액이 역류한다. 위 속의 내용물을 남김없이 토해냈다. 음식도, 위액도, 울면서 모두 토해냈다. 위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을 없었던 일로, 원래의 일상으로 되돌리려는 것처럼 내 육체는 구토를 강제한다. 꿀 - 럭 아파. 내장이 타는 듯이 아파. 눈물은 멈추지 않고, 몸은 티끌처럼 지면에 무너져 간다. 넓게 펼쳐진 붉은 웅덩이에 무릎이 잠긴다. 철퍽 하고 몸이 붉게 물든다. 아프고 붉게 물들고,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아 - 아.........!"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슬펐다. 아니, 그 건 아냐. 인형이라도 조각내듯 간단히, 아무 의미도 없이 용서없이 죽여버 렸다는 사실이 슬펐다. - 잘 모르겠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왜 아무 이유도 없이 죽인 거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 " - 거짓말이야" 아예 현실감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언제나처럼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 는 동안에 꾸고 있는 꿈일 거야 - " - 거짓말이야" 대체, 어떻게 나이프 한 자루로 사람을 저지경으로까지 토막을 낼 수 있단 말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을 토막내는 일은 톱을 사용해도 만 하 루가 걸리는 중노동이라고. 그러니까 이런 나이프 한 자루로 저런 짓은 불 가능해. 저 [선] 역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내가 멋대로 상상하 고 있을 뿐인, 망상이야 - " - 거짓말이야" 꿀 - 럭 위액에 입술을 타고 흘러내린다. 입술을 포함해서 턱 아래쪽은 위액으로 범 벅이 되어있다. 위액에는 주홍빛이 섞여있다. 토해낼 것도 없는 주제에 위 가 마구 위액을 쏟아내는바람에 목 안에 상처가 나 피라도 나고 있는 건가. "아...파 - " 아파. 그러니까 분명히. 이건 꿈 같은게 아니라 나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어. " - 전부, 거짓말이야" 그래, 사실은 이해하고 있어. 욕정을 품었어. 그 여성을 보고 흥분했어. 토 막낼 때에는 마치 사정이라도 할 것 같이 자극적이었어. 내 눈도 그렇지. 저 [선]이 종이를 자르듯 사물을 절단해 버리는 [선]이었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토노 시키는 방금 전처럼 사람도 간단히 조각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을텐데. 나는 그런 사실을 생각조차 하 지 않은 채 그저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 내가, 간단히 그 무엇인가를 죽여버릴 수 있는 위험한 인간이라면. 나는 내 눈을 박살내 버리든지, 그 누구하고도 만나지 않는 생활을 했어야 하는데도. "...죄송해요, 선생님" - 정말 미안해요. 그런 간단한 일조차 토노 시키는 지키지 못했어 "나 - 미쳤, 나?" 모르겠다. 방금 전까지 끓어오르던 충동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도 않지만. 그때는, 참는다든지 견뎌낸다든지 그런 종류의 의사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참아, 라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이 여자를 죽일거야" 그런 걸 당연한 듯이 생각하고 실행해 버렸다. 그렇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나는 틀림없이 미쳤다. 아마도 8년 전. 사망이 확실시된 사고에서 기적적으 로 되살아난 그 순간부터 - -------------------------------------------------------------------------------- ...어디선가 빗소리가 들린다. 쏴아 하고 쏟아지는 빗줄기. " - " 정신이 몽롱해진다. 숨을 쉬면 목이 아프다. "아야........." 목소리가 커진다. " - 시키 님?" 갑자기 바로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 방이네" 어느 틈엔가 내 방에 드러누워 있다. "일어나셨습니까, 시키 님." "히스이...?" "예. 몸은 좀 어떠신지요?" ".........?" 히스이가 이상한 소리를 묻는다. 몸은 좀 어떻느냐니, 별로 아픈 데는 없는 데 - "어째서 - " 그래, 어째서. 어째서 내가 이런 곳에서 자고 있는 거지 - "나 - 사람을, 죽였 - " 죽였는데, 라고 말하려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것만은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이성이 나를 가로막고 있다. "히스이, 나 - 어째서 여기에" "...생각나지 않으시온지요? 학교측으로부터 시키 님께서 조퇴했다는 연락 가 있었습니다. 하오나 저녁이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셔서 언니가 찾으러 나가보니, 공원에서 주무시고 계셨다고 하더군요." " - 공원이라면 - 요 앞 공원?" "예. 언니가 시키 님을 발견했을 때 시키 님께서는 공원 벤치에서 주무시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 후 시키 님 스스로 저택까지 걸어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럴 리가. 그런 거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시키 님의 기억이 온전치 못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만은 아닐 겁니다. 언 니가 시키 님을 저택에 모시고 들어왔을 때의 시키 님의 모습은, 외람된 말 씀이오나 넋이 나간 듯 보였습니다." "........." ...전혀 기억이 안 나. 하지만 히스이의 말에 의심의 여지는 없다. "...아아, 벌써 9시 잖아...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예. 저택에 돌아오신 시키 님께서 하신 말씀은 '잘래' 라는 한 마디였습니 다. 언니는 의사 선생님을 부르려 했사오나 시키 님께서는 '항상 있는 일이 니까' 라고..." " - 그래...확실히 빈혈로 쓰러지는 건 항상 있는 일이긴 하지만 - " ...이번엔 사정이 달라. 난 사람을 죽여버렸으니까 - 에, 어라? "히스이. 내 모습이 어땠어?" " - 하?" "그러니까 옷 말야. 내 교복, 그러니까, 피로 - " 질척질척하게 더럽혀져 있었어. "시키 님의 교복이라면 상당히 더러워져 있었기에 세탁해 두었습니다만." "세탁했다니 - 그런 피범벅이 된 옷을...!?" "...분명히 진흙투성이였긴 했사오나 혈액 같은 것은 조금도 묻어있지 않았 습니다." "에...? 하지만 그렇게나 - " 피바다 속에 쓰러져 다리도, 팔도,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는데...? "시키 님, 무슨 안 좋은 꿈이라고 꾸신 것이 아니신지요? 좀 전까지 심하게 가위눌리시는 듯 하셨었고 지금도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히스이는 내 얼굴을 응시한다. "꿈이라니, 그게?" 꿈이었단 말야? 그 감각이. 그 피 냄새가. 그 악몽처럼 새하얗던 흰 여자 가. "아니 - 그래, 그건 악몽이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 그래. 그건 악몽이었어.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렸을 적에 선생님과 했던 약속마저 깨뜨려가면서 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아아 - 이제 좀 정신이 드네." "예. 시키 님의 기분이 괜찮아지셨다면 저녁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녁, 인가" ...꿈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아직 꿈속에서의 핏빛과 피냄새가 뇌리를 떠나 지 않는다. " - 아니, 됐어. 오늘 밤은 이대로 그냥 잘게. 그것보다 히스이." "예. 무슨 일이십니까, 시키 님." "저기, 말야. 나, 저녁 때 쯤 돌아온 거 같은데 그때 아키하가 뭐라고 말했 어?" "아키하 님은 그 시간에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었습니다. 2시간 전 쯤 저 택에 돌아오신 후 언니가 아키하 님께 시키 님의 용태를 전해드렸습니다 만..." 무슨 문제라도? 라는 눈초리로 말없이 나를 대한다. "아니, 별일 아냐. 그냥 저택에 와서 아직 이틀 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부터 문제 일으키면 어쩌나 싶어서..." "...분명히 아키하 님께서는 심기가 편치 않으신 듯 보였으나 그 때문에 시 키 님을 탓하고 계시는 것 같지는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히스이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무슨 불편하신 일이 계시거든 불러주십시오." "응, 고마워 - 아차, 하나 잊어버릴 뻔 했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시키 님?" "밖에 비 내리는 모양인데...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어?" "시키 님께서 돌아오시기 전부터 입니다. 언니가 시키 님을 발견했을 때 시 키 님께서는 비에 흠뻑 젖어 계셨습니다." "........." 그런가...그런 것조차 기억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빈혈이 꽤나 심했던 모 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리하지 말고 학교에서 쉴 것 그랬다. "잘 자. 오늘은 정말 미안했어. 코하쿠 씨한테도 고맙다고 이야기 해 줘."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 - 꿈, 인가"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 꿈의 내용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것이 꿈 이었다는 실감조차... 밖에서 비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가 아직 조금 아프다. 문득 내 가슴을 내려다 본다. 8년 전에 입은 오래된 상처는 아직도 불에 데인 자국처럼 선 명히 남아있다. "아 - " 테이블 위에는 아버지의 유품인 나이프가 놓여있다. 그, 흰옷 입은 여성을 17토막으로 해체했던 낡은 칼이. " - " ...그건 꿈이야. 꿈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란 말야. 자기 자신에게 그런 거짓말을 거듭해가며 잠을 청했다. ...어렸을 적. 자기 자신도 속이지 못할 거짓말은 아예 하지를 말라고 누군 가가 말했던 것 같은데... <2. 반전충동 II - 끝> -------------------------------------------------------------------------------- 3. 검은 짐승 I -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이 되어있었다. 비는 이미 그친 듯, 쏴아 하고 내리던 빗줄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구름이라도 끼어있는 듯 창너머로 비 추는 아침햇살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하 - 암" 긴 하품을 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어젯밤에는 깊이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려고 할 때마다 그 광경이 머리 속에서 다시 떠올라 도로 눈을 뜨게 되는, 그것이 계속 반복됐기 때문이다. "...새빨간 바닥과 흩어진 손발, 인가..." 이성과 기억은 이럴 땐 참 불편하다. 잊고 싶은 것만 다시 기억하게끔 만드 니까. "그냥 꿈이었는데 - 언제까지 뭘 그렇게 겁내고만 있는 거야..." ...그래, 단순한 꿈이니까. 빨리, 한시라도 빨리 잊어버리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시계는 아침 6시를 막 지나고 있다. 이렇게 아침 일찍 부터 대체 누구지? " - 실례하겠습니다...시키 - 님. 일어나 계셨습니까?" "응. 어제 저녁부터 자서 아침 일찍 일어난 거 같아. 근데, 히스이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이렇게 아침 일찍 무슨 일이라도 있어?" "........." 히스이는 아무 말도 없다. 잘 보니 히스이의 손에는 우리 학교 교복이 들려 있다. "아아...갈아입을 옷을 가져온 거구나?" "...예.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보기 흉한 모습을 보여드리게 되어..." "?" 히스이는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체 뭐가 보기 흉한 모습이라는 건 지 나로선 하나도 모르겠는데.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마워. 옷은 그쪽에 놓아둬. 금 방 갈아입고 갈테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히스이.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소리없이 걸어나서는 히스이. 그때 갑자기 히스이가 몸을 돌린다. "시키 님...저, 시간이 있으시다면 목욕 준비도 해놓겠습니다만." "...목욕이라니, 아침부터?" "예. 시키 님의 몸은 매우 더럽혀져 있습니다. 학교에 가시기 전에 몸을 깨 끗이 씻으시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옵니다만..." 히스이는 평소대로 무표정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듣고 보니 몸이 좀 더럽군. 어젯밤, 빈혈로 공원에 쓰러져 있었던 것 같으니까 그도 당연하 다면 당연할 지도. " - 그럼, 미안하지만 준비 좀 해줄래? 이 시간이면 학교 갈 시간도 충분할 테니까." "잘 알겠습니다. 그럼 20분 정도 지난 후 욕탕에 들어가 주십시오." 히스이는 교복을 놓아두고는 방에서 나갔다. 시각은 아직 아침 6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20분 간 그저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욕조에 들어가 온몸을 물 속에 잠기게 하니, 조금이지만 기분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차가운 물에 머리를 적시면서 깊은 심호흡을 한다. 하지만...기분 나쁜 꿈이었어. 그렇게 예쁜,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여자 를 살해하는 꿈을 꾸다니...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닐까. 익숙지 않은 저택에서의 생활로 머리가 이상해졌다...겨우 하루 지내고 나 서 그런 꿈을 꿀 정도라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생각만으 해도 아찔하다. "...하아. 정말 마음 단단히 좀 먹어야겠는데" 다시 한 번 차가운 물 속에 몸을 뉘어 기분을 개운하게 한 후 몸을 씻는다. "아야..." 타올이 목에 닿았을 뿐인데 찌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뭐야, 이게" 거울로 내 목 주위를 본다...왜지...? 목은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마치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구토를 해댄듯이. 방으로 돌아와 교복으로 갈아입는다. 이제 겨우 7시를 조금 지난 시각. 목 욕으로 개운해진 몸을 가누며 가방을 들고 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자 그때 마침 거실을 나서려던 코하쿠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시키 씨. 오늘은 빨리 일어나셨네요?" 코하쿠 씨는 미소 지은 얼굴로 인사를 한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산뜻해 보이시는데요? 혹시 목욕이라도 하시고 나오신 거에요?" "응, 방금 전에 들어갔다 나왔어. 그건 그렇고 대단한데, 코하쿠 씨? 그런 거 어떻게 알았어?" "아하, 이런 건 딱 보면 알 수 있지요. 시키 씨 머리가 아직 다 안 말랐으 니까요. 목욕하신 시키 씨 모습, 꽤 귀여운데요?" 생긋 하고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이는 코하쿠 씨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그, 뭐랄까, 어색하고 부끄럽고... "잠깐만 기다려주실래요? 아침식사, 지금부터 준비할테니까요." "에 - ?" ...아침, 식사. 아, 그, 다시 말해 뭔가를 먹겠다는 소린가... 평범한 표현으로 '핏빛'이 떠오른다. 지금은 그다지 식욕이 없다. "어제랑 마찬가지로 아침식사는 양식으로 하시겠어요, 시키 씨?" " - 아아, 응. 기본적으로는 아무 거나 상관없어. 그래, 아침식사...목욕하 느라 너무 기분이 좋아서 잠깐 까먹고 있었어." "그러셨어요? 시키 씨는 어젯밤에도 식사 안 하셨으니까 배 고파서 일어나 신게 아닐까 하고 히스이랑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하하, 아쉽지만 땡. 어렸을 때부터 별로 많이 먹는 편이 아니라서 말야, 한 두 끼 정도 거르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구." "하하아~ 그러고 보니 시키 씨 몸엔 군살 하나 안 잡혀 있네요? 설마 채식 주의자세요?" "글쎄, 어떨까? 코하쿠 씨 말을 듣고 보니 아리마 가에서는 야채만 먹고 살 았던 것 같기도 하고." ...뭐, 그건 퇴원 후의 식생활에 대한 의사의 지시로 그랬던 거지만... "특별히 싫어하시는 음식은 없으시다는 거네요? 그럼 안심하고 식사를 만들 수 있겠네요. 자, 금방 만들어 올테니까 거실에서 기다려 주세요." 코하쿠 씨는 바쁜 듯 거실로 발길을 돌렸다. - 하지만, 지금은 그다지 식욕이 없었다. "아, 괜찮아요 코하쿠 씨. 오늘은 식욕이 없으니까 그냥 이대로 학교에 갈 게. 아키하 한테도 그렇게 말해줄래요?"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현관으로 향한다. 그러나 갑자기 누군가 내 팔을 잡 았다. "시키 씨!" " - 에?" ...말도 안 돼. 코하쿠 씨가 화를 내다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시키 씨, 아침에 거울도 안 보셨어요!?" "...아, 아니, 거울이라면 목욕탕에서 봤는데..." "거짓말 마세요. 자신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셨다면 그런 말씀은 하실 수 없으셨을 거에요!" 코하쿠 씨는 정말로 화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목욕탕에서 본 내 얼굴은 온통 파란 바탕에 흙빛으로 물들어 있었던 것 같기도... "괜찮다니까. 내가 원래 핏기가 없어서 남들보다 안색이 안 좋게 보일 뿐이 야." "안돼요. 아침밥을 안 먹으면 키가 안 큰단 말이에요! 식욕이 없으시면 죽 이라도 쑤어드릴테니까 빨리 식당으로 오세요" 코하쿠 씨는 내 팔을 잡은 채 억지로 거실 쪽으로 이끈다. ...할 수 없군. 정말 내키지는 않지만 일단은 코하쿠 씨의 호의를 받아들이 도록 하자...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빠. 몸 상태는 좀 나아시졌나요?" 아키하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아침인사를 한다. 어제와 같은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은 일단 내 몸을 걱정해 주고 있기 때문이리라. "응, 잘 잤어? 몸은, 뭐...그럭저럭 괜찮아졌어." 아침인사를 하고 식당으로 향한다. "아, 시키 씨는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다 만들면 불러드릴테니까." 코하쿠 씨는 혼자 식당 안으로 사라진다. 거실에는 나와 힘없어 보이는 아 키하, 그리고 벽 쪽에 무표정하게 서 있는 히스이 3명 뿐이다. "........." ...왠지 서먹서먹하군. "오빠, 어젯밤 일 말씀인데요. 정말로 공원에서 쓰러져 계셨나요?" "그런 것 같아. 나도 그렇게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코하쿠 씨랑 히스이가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로 그랬지 않았을까?" "정말이지...다른 사람 말하듯 말씀하지 마세요. 오빠는 몸이 약하시니까 위험한 상황이다 싶으면 저택에 연락하시라구요. 곧장 배웅하러 사람을 보 낼테니까." "...저기 말야.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런 거 안 해줘도 돼. 아무리 기분이 안 좋아도 나 혼자서 돌아올 수 있으니까." "그럼 오빠는 아직 초등학생이네요. 어제는 혼자서 돌아오지 못하셨잖아요 ?" " - 윽" 분하지만, 아키하가 말한 대로다. "...어제는 특별. 그런 일은 거의 안 일어나니까. 난 만성적인 빈혈증이 있 는 것 뿐이지 아주 몸이 약한 건 아니니까. 일일이 아키하가 걱정 안 해줘 도 돼. 어젯밤은 단순히 좀, 뭐랄까...치명적으로 타이밍이 안 좋았던 것 뿐이야." "치명적이라니, 바보 같은 소리 좀 그만하세요! 저택에 이제 막 돌아왔을 뿐인데 오빠가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전 어쩌면 좋단 말이에요...!" 아키하는 정말로 화내고 있다. "정말, 오빠는 너무 경솔해. 좀 더 자기 몸에 신경 쓰라구요." "그런 소리 해도 말야...그렇다고 나, 너무 무리하는 것도 아니라구. 부 활 동도 안 하고 있고 의사가 말하는 건 모두 지키고 있고. 그래...이 이상 몸 에 신경 쓰라는 건, 어딘가의 요양소 같은 데라도 들어가라는 소리잖아?" "예.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드리고 싶네요." 화난 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아키하는 말도 안 되게 끔직한 소리를 한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는지 아키하는 속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우아하게 홍차 를 마시기 시작했다. 히스이는 아까부터 계속 벽쪽에서, 마치 석고상처럼 꼿꼿이 서 있을 뿐이다. "........." 뭐랄까, 이야기하기가 힘든 분위기로군. 식사가 다 만들어질 때까지 좀 시 간이 걸리는 것 같으니, 일단은 - <3. 저택에 대해 이야기한다 - 선택> "아참, 아키하. 우리 저택 말야, 지금은 어떻게 되어있어?" "어떻게 되어있느냐니, 무슨 의미시죠? 그, 소유권 문제라면 어차피 제가 상속받는 형태로 되어있는데요." "아니, 그런 거 말고. 지금 저택에 있는 사람은 나랑 아키하, 코하쿠 씨랑 히스이 뿐이잖아? 사용하고 있는 방이라든지, 그런 건 어떻게 되어있나 해 서." "어떻게 되어있고 아니고, 저희들이 쓰는 방 이외에는 원칙적으로 문을 잠 가놓고 있어요. 오빠 방은 서관 2층 안쪽, 제 방은 동관 2층 안쪽이죠. 히 스이의 방은 서관 2층의 계단 옆에 있고 코하쿠의 방은 서관 1층 계단 옆에 있어요. 아버님이 쓰시던 방은 코하쿠가 쓰는 방 옆방인데, 일단 여기는 문 을 잠가두지 않고 있어요." 참고로 거실은 로비에서 로비에서 바로 오른쪽으로 꺾어진 곳에 있다. 아키 하가 말하는 식으로 설명하면 동관 1층 로비 옆, 이랄까. "이 거실의 옆에 있는 유희실과 객실은 잠겨져 있지만 오빠가 친구분들을 데려오시면 열어 드리도록 할게요. 창고는, 저기...안 좋은 소문이 돌아서 지금은 출입금지 상태로 해두었어요." "그렇군. OK, 고마워." 그, 출입금지 상태의 창고는 왠지 이야기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아 좀 이상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뭐 어쨌든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니 까. "시키 씨~~식사하세요~~" 식당 쪽에서 코하쿠 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럼, 밥 좀 먹고 오지." "오빠. 그런 천박한 말투는 쓰지 마세요." 아키하의 시선이 날카로워진다. "뭐야, 평소의 아키하로 돌아와버렸잖아...날 걱정해주던 때의 아키하가 좀 더 얌전하고 좋았는데..." "저, 오빠 걱정 같은 거 한 적 없어요." 아키하는 토라진 듯 얼굴을 돌린다. 그것을 미소지은 얼굴로 바라보면서 식 당으로 몸을 옮겼다. 히스이가 배웅하러 밖으로 나온다.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히스이는 평소대로의 인삿말을 말한 뒤 내쪽으로 시선을 고정한다. "시키 님, 어제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요?" "어젯밤엔 별로 아무 일도 없었어. 학교에서 기분이 좀 안 좋아져서 조퇴하 고,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 - " - 돌아오는 길에? "공원에서 쓰러졌을 뿐이야. 뭐...확실히 아키하가 말한 대로 경솔하기는 했지...응. 앞으로 조심하도록 할게." "탓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 아침의 시키 님께서는 심하게 무리를 하시고 계시는 듯 보여서...부디 몸조심 해 주십시오." 히스이는 꾸벅 인사를 한 후 문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 -------------------------------------------------------------------------------- 학교가 가까워짐에 따라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점 때문인지 대부분의 학생들은 웃는 얼굴로 길을 걷고 있다. 이 교차로를 빠져나가면 정문까지는 금방이다. 지금 시각은 아직 7시 반 정 도. 오늘은 여유롭게 등교할 수 있을 것 같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어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이 도로 저편으로 학 교의 담장이 보인다. 통학로이기 때문에 도로에는 가드 레일이 설치되어 있 어 지금도 학생들이 앞다투어 교문으로 뛰어가고 있다. 이 시간, 맞은편 도 로에는 우리 학교 학생 밖에 없다. 아니, 없을 터였다. 하지만 차들이 바삐 도로를 달리고 있는 가운데, 흰 그림자를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거기엔 그녀가 있었다. 어깨까지 드리워진 금발에 흰 옷. 가늘고 긴 눈썹과 붉은 눈동자. 단 한 번 밖에 본 적은 없지만 내가 다른 사람과 착각했을 리 가 없다. " - " 하지만 그럴 리가 없을텐데. 왜냐하면 그녀는 어제 내 손에 의해 토막나 살 해당했기 때문이니까. " 무 - " 아니, 그것도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그건 꿈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고 히 스이가 말해줬 - " - " 말해준 적이, 없다. 그건 나 자신이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건 꿈 같은게 아닌 진짜 일어났던 이야기.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왜 그녀가 저런 곳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있단 말인가 - ?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뀐다. 주변을 지나던 학생들은 맞은편으로 향한다. 그 안에 나 혼자만이 홀로 얼이 빠진 듯 우두커니 서 있다. 그녀는 가드 레일 에 몸을 기댄 채 발을 흔들고 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표정에 지루한 기색은 없다. - 누굴 기다리고 있는 거지? 마치 연인과 만날 약속이라도 하고 나온 것처럼 그녀는 침착하지 못한 태도 를 보여주고 있다. - 안 좋은 예감이 든다. "아 - " 흰 옷의 여자가 날 본다. 아마 그건 그저 우연. 저 여자는 단순히 '그녀'를 닮은 다른 사람이고, 분명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음에 틀림이 없어. 그 렇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이야 말로 악몽이겠지. 왜냐하면 그녀는 내 손으 로 철저하게 토막내 살해했으니까 - 하지만 여자는 날 향해 웃고 있다. '이제 왔어?' 라며 자신을 죽인 상대를 발견해 내고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만족한 듯이 - 여자는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며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가드 레일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람결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이쪽으로 다가온다. " - 오지, 마" 악몽이야. 신호가 빨간불로 바뀐다. " - 오지, 말라니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차들이 지나치는 도로를 일직선으로 횡단한다. 겨우 수 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다. "...오지 말라고 말했잖아 - !!!" 소리를 질러봐도 눈앞의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대로 나는 나 자신이 뭐 라고 하는지도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흰 옷의 여자에게서 도망쳤다. 달렸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주변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길 가는 사람 들 사이를 헤쳐나가며 아스팔트 위를 전력질주 했다. "헉, 헉, 헉, 헉 - !" 호흡이 거칠어지고 심장이 쿵쾅쿵쾅하고 비명을 지른다. 그래도 달렸다. 달 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다. 뒤를 돌아본다. 흰 옷의 여자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다. 틀림없이 날 쫓고 있어. 내가 죽인 여자가 나를 쫓고 있다 구. 달리는 이유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헉, 헉, 허억 - !" 터져 버릴 것만 같은 심장을 무시하고 계속 달린다. 내 등 뒤에는 그 여자 가 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망치고 있는 나를 쫓아온다. "헉, 헉, 헉, 헉 - !" 숨이 턱에 차오른다. 두 팔이 무겁게 느껴진다. 발에는 이미 감각이 없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있는 힘을 다해 달리고 있는데, 어째서 걷고 있는 상대를 떨쳐낼 수가 없는 거야 - ! "헉, 헉, 헉, 헉 - " 숨이 차다. 벌써 몇 킬로미터나 전력으로 달린 걸까. 그래도 뒤에는 여전히 그 여자가 걸어오고 있다. 자연스럽게, 마치 산책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발걸음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내 뒤를 따라온다. "...헉, 헉, 헉, 허허, 하하하하" 웃을 일이 아님에도, 웃으며 게속 달려나간다. "하하, 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그래도 달렸고, 더 이상 달리면 죽을 것 같다고 몸 구석구석이 외치고 있었음에도 게속 달렷다. 달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저 여자가 나를 따라잡으면 난 틀림없이 죽을 거야.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을 하느냐며 스스로 망상을 날려버리려 해도 그것이 일시적인 현실도피라는 건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유도 근거도 증거도 없다. 그저 진실로서, 토노 시키는 저 여자에게 따라잡히면 살해당한다는 것을 이 해하고 있다 - "앗 - " 지면에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진다. 발이 엉켜서가 아니라 더 이상 한발자국 도 몸이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앞으로 넘어진 거다. "큭 - 하, 아" 쓰러진 채 있는 힘을 다해 벽 근처로 기어간다. " - " 벽에 손을 짚고 어떻게든 일어서 보려고 하지만 일어서지지 않았다. 일어서 는 순간 무릎에 힘이 풀러 털썩 하고 엉덩방아를 찧는다. 그대로 몸도 더 이상 움직여지지 않는다. "하아 - 하아, 하아 - " 고개를 들고 숨을 내쉰다. - 힘들어. 산소가 너무나도 부족하다. 덕분에 머리가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뒤죽박죽.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왜, 어째서, 어째서 내 손으로 죽인 여자가 살아있는 거야. 틀림 없이 완벽하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종적인 형태로 나는 그 여 자를 죽였다. 하지만 왜, 그 여자는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저렇게도 즐거운 듯이 미소지을 수 있는 거지 - ? "...틀림없이, 죽였을텐데" - 그래. 틀림없이 죽였을텐데, 틀림없이 죽였을텐데, 틀림없이 죽였 을텐 데, 틀 림없 이 죽 였을 텐데,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 !? "어머, 술래잡기 벌써 끝이야?" 가벼운 발걸음으로 뒷골목 쪽을 향해 걷던 여자는 아쉬운 듯 어깨를 늘어뜨 린다. "안녕. 어제는 참 신세 많이 졌어." 여자는 얼굴에 빙긋 하고 웃음을 짓고는 발자국 소리를 내며 뒷골목 안으로 들어온다. - 도망가야 돼. 그렇게 생각하고 그녀를 피하려고 하다가 쿵 하고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부 딪혔다. "술래잡기는 이제 끝이지? 여기 막다른 골목이잖아. 참고로 사람도 안 지나 다니는 것 같으니까 달리 방해받을 염려도 없고 말야." 어지간히 즐거운 모양인지 여자는 아직도 웃고 있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다. 뒷골목에 사람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내 가 저지른 바보짓에 화가 날 정도다. 이런 곳으로 도망쳐 들어오다니 - 내 입으로 '제발 죽여주세요' 하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오래 걸렸지. 그때부터 18시간, 겨우 표적을 잡았으니까." 여자는 뒷골목 안으로 한걸음 더 들어온다. "너, 너 - " "왜?" "너는, 틀림없이 - " "응. 어제 너한테 죽은 여자야. 기억해 줘서 고마워." "말도 - " 말도 안 돼, 그런 바보 같은 이야기가...! "웃기지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리가 없단 말야!"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잖아? 단순히 되살아났을 뿐이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그 여자는 또 한 걸음 내딛는다. 여자와의 거리 는 점점 좁혀져 들어온다. "...되살...아났다고?" 멍하니 여자의 말을 되읊는다. 되살아났다는 소리는, 토막이 난 다음 의사 에게 수술이라도 받고 회복했다는 소린가...? " -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그렇게 온몸이 토막난 상태로 되살아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 !" "응. 하지만 나, 사람이 아닌걸." " - 하?" 여자가 말한 의미가 너무나 간단했던 나머지 오히려 해석할 수가 없다. 나는 인간이 아냐. 확실히, 눈 앞의 여자는 그렇게 잘라 말했다. "...인간이, 아니라고...?" "뭐야, 당연한 걸 갖고 왜 그래. 온몸이 토막난 채로 혼자서 재생할 수 있 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 - "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그건 인간이랑 비슷하게 생긴, 완전히 다른 괴물이야.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아무리 숨이 끊어졌다 할지라도. 산산조각이 나도 금방 원래대로 돌아와 움직이기 시작하는,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 "거짓말 - " 그것이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여자의 정체인 듯 싶다. 웃으려 목소리를 내 보려고 해도 목이 말라 웃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게, 뭐야" 웃으라고 한 이야기치고는 너무 말도 안 돼. 오히려 웃으라고 한 이야기라 고는 할 수 없는 소재가 갖추어져 있다. 왜냐하면 분명히. 이 여자가 인간 이 아니라면, 죽였어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이치에 맞을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 머리 속이 차츰 정리되어 간다. 어쨌든 잘 봐. 그 후에 여러 가지를 생각해야만 하는 상황이야, 이건. "...인간이 아니라고 말했겠다. 그럼 대체 넌 뭐야." "나? 난 흡혈귀라고 불리고 있는데. 너희식으로 말하면 인간의 피를 빨고 살아가는 괴물 쯤 되려나?" ...다행이군. 뭐가 다행이냐 하면, 흡혈귀라는 단어는 나름대로 이해하기 쉬운 단어였으니까. "그래, 흡혈귀로군 - " 여자는 만족한 듯 웃음을 지어보인다. 무슨 이런 바보 같은 대답이 다 있 지? 흡혈귀는 낮 동안에는 밖을 돌아다닐 수 없다는 것이 통설이잖은가. 뭐 지금은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그래, 그 괴물이 나한테는 무슨 볼일이 있는 거지?" 왠지 여자는 깜짝 놀란 듯 몸을 움츠러뜨린다. 그리고,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에 양손을 가슴에 대고는 뭔가 불만에 찬 시선으로 나를 쏘아본다. "너, 어제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잊어버린 거야? 넌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나를 마주친 바로 그 순간에 토막내 죽여버렸잖아. 그런 주제에 무슨 볼일이냐라니...평소에도 자주 그러나보지?" 화내고 있다 라기 보다는 어이없어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나도 그런 기분이 든다. 내가 죽였던 여자가 '잘도 날 죽였겠다?' 하고 원망 섞 인 말을 하고 있으니까. "잠깐, 듣고 있는 거야? 살인광." "...아아, 듣고 있어. 내가 얼마나 지지리 복도 없는지 지금 뼈저리게 실감 하고 있는 중이거든. 미안하지만 좀 조용히 있어줄래?" - 정말, 뭐 이렇게 운이 없는 거지. 이유도 없이 갑자기 죽이고 싶어진 여 자가 있어서 하고 싶은 대로 몸을 맡긴 채 그 여자를 죽여버렸다. 그 후의 기억이 너무나 애매해서 그건 꿈이었나보다 하고 안심하고 있던 찰나에 그 건 역시 진짜 있었던 일이라니. 게다가 실은 내가 죽인 상대가 인간이 아니 었다고 하고. " - 하, 하하" 결국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비관적인 것만은 아냐. 왜냐하 면 살해한 상대가 되살아났으니까 난 아무도 죽이지 않은 셈이 된 게 아냐. 그야 [죽였다] 라고 하는 행위는 남아있게 되지만 어쨌든 그녀는 온전히 살 아있다. - 그것만은. 솔직히, 다행스런 일인 것 같다 - -------------------------------------------------------------------------------- 아아...그렇다면 어쨌든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는 셈이군. 토노 시키는 지금 까지와 마찬가지의 스쿨 라이프를 보낼 수 있게 되는 거다. 뭐...그 대신에 말도 안 되게 황당한 녀석한테 이렇게 라이브로 쫓기고 있는 거지만, 살인 자 인생을 살게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오~케이~, 이제 좀 낫군. 말하고 싶은게 있으면 말해. 무슨 말이든지 마음껏 하라구." "뭐, 말하고 싶은 건 엄청 많이 있지만 말야...너, 좀 이상한 녀석이네?" "태도를 바꿨을 뿐이야. 이래봬도 비정상적인 일에는 나름대로 내성이 붙어 있거든." 뭐, 이런 케이스에는 적용되지 않지만. "흐응..." 여자는 힐끔힐끔 쳐다본다. 그 시선에는 적의가 묻어있지 않다. ...이상한데...'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틀림없이 이 세계의 공통된 법칙 이라고 생각했었는데...그렇게 치면 이 여자는 날 죽이려고 하고있어야 정 상일텐데 - " - 사람을 뭘 그렇게 쳐다보고 그래. 너, 나한테 복수하러 온 거잖아. 그 럼 - " "응, 확실히 받은 만큼 되돌려 주는게 정상이긴 하지. 그게 소원이라면 바 라는 대로 죽여주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패스할래. 그런 거, 효율이 안 좋 으니까." 여자는 바로 정면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다. "저기, 반성하고는 있어?" " - 에?" 일순, 깜짝 놀랐다. 눈 앞의 상대가, 뭐랄까 - 전혀 상황에 맞지 않는 소리 를 내뱉었으니까. "날 죽인 걸 반성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있잖아. 만약 네가 반성하는 구석이 있으면 용서해 줄까 하고 말야. 너, 인간치고는 거짓말이 서툰 편에 속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반성이라니 - 내가?" "응. 네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해주면 난 그걸로 됐어." - 믿을 수가 없어. 뭐가 믿을 수가 없느냐 하면, 그건...자신을 죽인 상대 를 용서하느니 용서하지 않느니를 떠나, 그 - 눈 앞의 상대의 목소리가 너 무도 따뜻하게 들렸다는 사실이... "뭐야. 사람이 진지하게 물어보고 있으면 제대로 답해주는게 예의 아냐? 자 아, 빨리 빨리 대답해. 네가 반성하고 있는지 하지 않는지, 똑똑히 하란 말 야." 여자는 몹시 화를 낸다. - 반성하고 있느냐고? 그런 거, 일일이 물어보지 않아도 - "...물론 후회하고 있어. 이유야 어쨌든 난, 사람을 죽여버렸으니까." 봐주는 것 없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나 자신을 위해서 죽여버렸어. "...남을 죽인 사실도 후회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난 너한테 손을 댔어. 그 러니까 - " ...아아, 살아돌아왔으니 더 이상 문제될 건 없어, 라는 건 거짓말이야. 토 노 시키는 눈 앞의 여성을 죽였다. 그것은 궁극적인 약탈이랄지, 그 이상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 넌, 나한테 복수해도 괜찮아 - 이렇게 나한테 복수하러 온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어." ...고개를 숙인 채. 남에게 고백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되뇌었다. " - 그렇구나. 응, 너 괜찮은 사람이네." 여자는, 웃는다. 자신을 흡혈귀라고 소개한 주제에 너무도 솔직하게,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얼굴로. "결정했어. 역시 넌 날 좀 도와줘야겠어." "에 - ?" 도와달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이봐. 무슨 소리야, 도와달라니." "간단해. 이 마을에 뿌리내리고 있는 흡혈귀를 처단하는 일을 좀 도와줬으 면 해." " - ?" ...점점 더 알 수가 없어지네. "흡혈귀를 처단한다니, 그치만 너 - " "아아, 그런 거 아냐. 확실히 나도 흡혈귀이긴 하지만 이 마을에 붙어살고 있는 흡혈귀는 완전히 다른 녀석들이야. 너, 이 마을에 살고 있지? 그럼 최 근 일어나고 있는 살인사건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텐데?" "아아, 벌써 몇 명인가 살해당했다는 사건 말이지...에, 자, 잠깐"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 무차별 연속 살인사건의 희생자들은 그 모두 가 몸 안의 피가 전부 빨려져 나갔다 라고 했던가 어쨌던가. "설마, 그게 - " "설마고 뭐고 간에, 뉴스에서도 '흡혈귀의 소행이다'라고 떠들어대고 있잖 아. 웃기는 이야기 아냐? 범인이 누군지 잘 알고 있으면서 아무도 흡혈귀 퇴치를 하려고 하지 않고 있는걸. 그러니까 내가 그 사람들 대신에 퇴치해 줄 수 밖에 없는 거지." "아니, 하지만 - 흡혈귀 같은 건 존재하지 않잖아." "..." 여자는 기분 나쁘다는 듯 눈썹을 찌푸린다. 아차...깜빡했다...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것은 스스로를 흡혈귀라고 소개한 정체불명의 존재였다는 것을. " - 잘은, 모르겠지만. 요컨대 넌 이 동네에서 사람을 죽여대는 흡혈귀를 퇴치하겠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렇긴 하지만 말야, 그 전에 무슨 이유에선지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살 인귀한테 습격당해서 순식간에 살해당해 버렸지. 응, 정말 장난 아니었어. 완벽하게 허점을 찔려서 반격할 틈도 없이 17개로 절단당했으니까." "으 - " 그런가. 그 살인귀란 다시 말해 나를 가리키고 있는 건가... "그래. 나 말야, 이렇게 복원될 때까지는 정말로 널 죽이려고 했었어. 그런 굴욕을 받아본 적도 처음이었고 완전히 복원해 내는 데만 8할 이상의 힘을 소비해 버렸으니까 말야." "하지만 다른 거 다 집어치우고라도 정말로 엄청 끔찍하게 아팠어. 너무 아 파서 정신을 잃을 뻔도 했었지만 아무래도 통증이 심하다 보니 제정신으로 돌아오더라구. 그런 걸 하룻밤 동안에 반복체험한 내 기분을, 넌 알겠어?" "........." 몰라...아니, 알고 싶지도 않아. "그래서 말야, 정말로 죽일 듯한 마음으로 널 찾아다녔어. 원래 목적이었던 흡혈귀에 대한 일 같은 건 내팽개칠 정도로, 정말 그거 하나에 열중하고 있 었지. 그래서 네가 어느 학교의 학생이라는 걸 알았고 그런 이유로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까지 죽이고 싶었으면서 넌 왜 날 용서해 주겠다 는 거야?" " - 글쎄, 간단히 말하자면 시간이 지나는 동안 냉정해 졌다고나 할까. 나 도 힘을 너무 많이 소비했고, 일단은 널 죽이기 보다 보디가드로 삼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지." "...잠깐만. 너말야, 지금 뭔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한 거 같은데?" "에? 내가 그런 말 했었나?" "지금 날 보디가드로 삼는다고, 했잖아." "당연한 거 가지고 왜 이래? 난 널 용서해 주긴 했지만 그건 나 개인의 감 정을 정리한 것 뿐인걸. 네가 저지른 [살해]라는 행위 그 자체는 역시 기분 이 아니라 행위로 보상할 수밖에 없는 거 아냐?" " - 아니, 그, '할 수밖에 없는 거 아냐?' 라고 말해도 말이지" "뭐야, 솔직한 건지 심술맞은 건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네. 다시 말하겠 는데, 넌 날 죽였어.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한 번 죽고 나서 다시 소생 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힘을 소비하게 돼. 뭐, 단순히 살해당했을 뿐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네 방식은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절단방식에 상처 부위가 서로 붙지 않아서 몸을 다시 만들 수밖에 없었단 말야. 그 결 과, 난 되살아나는데 거의 대부분의 힘을 써버렸다는 소리가 되지만 - " 여자는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열을 내고 있다...라기 보다는, 지금까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의 분노 를 다시 떠올려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약해져있다구! 이틀만 지나면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 전에 [적]에게 습격당하면 위험하잖아. 그러니까 그 동 안에 네가 내 보디가드를 좀 해줬으면 해." "아니, 그, '해줬으면 해' 라니 - 너, 그렇게 멋대로 결정지어 버리면 어떻 게 하라는 거야?" "뭐야. 너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까 그 정도 쯤은 해야 당연한 거 아냐? 그 렇지 않음, 역시 반성 같은 건 하지 않는다는 소리야?" 여자는 똑바로 나를 쳐다본다. ".........으" 비겁해! 반성이고 뭐고 그 이전에,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건 비겁해. 자신 을 흡혈귀라고 소개한 주제에 그런 순수한 눈으로 쳐다보는 건 반칙 아냐? - "나는, 그러니까 - " 대답하기가 곤란해, 일단 시선을 돌려본다. "...어라?" ...뭐지. 건물과 건물의 접점면에 뭔가 이상한 것이 있다. "잠깐. 저거, 뭐야?" 일어서서 걷는다. 뒷골목의 중간쯤까지 걸어가서야 겨우 건물과 건물의 접 점면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기 있던 것은 푸른 새였다. 정확히 말하면 까마귀, 라고 해야 되겠지. ...푸른, 까마귀. 그건 이틀 전 한밤중에 봤던 불길한 까마귀가 아니었던가 - " - 곤란하게 됐군" 여자가 말을 내뱉는다. 까마귀는 물끄러미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다. "거봐. 네가 계속 우물쭈물하고 있으니까 벌써 발견돼 버렸잖아." 여자는 뒷골목의 입구쪽을 보고 있다. "발견되다니, 뭐가?" 뒷골목의 입구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리고 - " - !" 무의식 중에 한 걸음 뒤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어느 틈엔가, 뒷골목의 입구 인 좁은 골목에 한 마리의 개가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일그러진 듯한 모양 의 강인한 사지와 앞으로 쭉 뻗어있는 철골 같은 머리. 인간과는 완전히 다 른, '먹이를 사냥한다' 라는 것만을 추구하는 그 볼륨. 거기에 언어에 의한 위협 같은 건 필요치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수렵] 동물을 보는 것만으로 긴장해 버리니까. 같은 생물로서, 절망적일 정도로까지 뛰어 난 운동능력을 가진 자에 대한 경외심을 담아. "...검은, 개...?" - 꿈틀 하고 몸이 떨린다. 이쪽을 보고 있는 저 검은 개는 야생견이라고 말 할 만한 크기가 아니다. 쉐퍼드나 도베르만 정도의 크기쯤 되는 검은 개는, 그저 거기에 서있다는 것만으로 이쪽을 위압하고 있었다.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가치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검은 개를 쳐다보 고 있다. 그때. 갑자기 검은 개가 뛰어올랐다. 아니, 달려왔다. 다만 그 스피드가 너무도 빠른 나머지 뛰어오른 것으로 밖에 인식할 수 없었다. " - 에?"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검은 개는 그 예비동작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 의 스피드로 내 목덜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 보고 있는데. 검은 덩어리가 달려드는 것이 다 보이는데도 나는 피하지도, 피하려는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무거운 충격이 전신을 달린다. "큭 - !" 갑자기 몸이 옆으로 밀쳐졌다. 검은 개에 물어뜯긴 충격이 아냐. 내 몸은 검은 개에게 목을 물어 뜯기기 전에, 갑자기 어떤 여자에게 밀쳐진 것 같 다. 그, 마치 공이라도 던지는 듯한 간단한 동작으로 여자는 나를 한 손으로 받 쳐들고 벽쪽으로 날려버렸다. "윽 - !"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자식! 너,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됐으니까 앞에 봐!" 여자가 외친다. 앞을 보니 - 나라고 하는 표적을 잃은 검은 개가 그대로 벽 까지 도약하고 있었다. 검은 개는 마치 도마뱀이라도 되는 것처럼 벽에 찰 싹 달라붙어니 또 다시 뛰어오른다. 벽에서 내 쪽을 향해 반사해 들어온다. 검은 개의 궤적은 마치 검은 번개 같다. " - !" 너무나 빠른 스피드에 반응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 검은 개는 이빨과 타액 으로 범벅이 된 입을 쩍 벌리고 이번에야말로 내 목덜미를 물어뜯는 - "큭...!"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목에 검은 개의 이빨이 파고든다. 하지만 그 순 간.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검은 개의 이빨은 내 목덜미에서 멀어져 갔 다. "에 - ?" - 이럴, 수가. 검은 개는 울부짖으며 수직으로 튀어오른다. 아무 것도 없음 에도, 혼자서 하늘 높이 춤추며 날아가 버린다. 그대로 - 몇 미터나 되는 공중으로 내던져진 검은 개는 애처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그대로 콘크리트 위에 낙하했다. 아니, 정확히는. 콘크리트 위에 격렬하게 내동댕이 쳐졌다. " - 지금, 뭐였어" " - 정말...또 쓸데없이 힘을 써버렸잖아." 여자는 조용히 검은 개 쪽으로 다가선다. 검은 개는 콘크리트 위에 사지를 뻗고 납작하게 드러누워 있다. " - 어처구니 없는 잡종 사역마로군...요컨대 정찰역이었을까나?" 검은 개는 그대로 콜타르 같은 검은 액체가 되어 콘크리트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녹았나...아니, 이건 설마 융합한 건가. - 설마...이런 곳에 혼돈이 있 을 리 없어." 후우 하고, 여자는 깊은 숨을 내쉬고는 내쪽으로 다가온다. "흐응~~ 어쨌든 상처는 없는 것 같고...문제는 없겠군." ...여자는 뭐라고 중얼대고 있다. 나는 - 이제야 겨우 내 목덜미에 파고들 었던 개의 이빨의 감촉에 새삼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어이 - 지금, 뭐였어" "적 흡혈귀의 사역마야. 네가 빨랑빨랑 똑바로 안하니까 발견당해 버렸잖 아." "발견당했다니 - 에, 그러니까...아까 네가 말했던 적 흡혈귀한테 말야... ?" "응. 좀 위험하게 됐어. 이렇게 되면 정말로 네가 보디가드를 해주지 않으 면 안 될 것 같은걸." 거침없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이 여자는 웃는 얼굴로 말한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 바보야! 방금 봤잖아, 내가 뭘 할 수 있다 는 거야! 나 같은 사람보다 너 혼자서 행동하는 편이 훨씬 낫잖아...!" "그렇지도 않아. 왜냐하면 지금 널 지키려고 힘을 사용하는 바람에 정말로 아무 것도 안 남아버렸으니까." "무슨 - " 뭐야, 그게. 뭐, 눈 깜짝할 사이에 도와줘서 일단 목숨은 건지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 "...무리야. 무리라구, 나한텐 저런 걸 물리칠 힘은 없어. 미안하게 됐지만 보디가드 같은 건 못하겠어." " - 거짓말. 넌 날 죽였어. 그런 네가 어째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야?" "죽였다니, 그건 - " 나로서도,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몰랐던 때의 이야기잖아. " - 안돼. 어쨌든 무리야. 난 보통의 인간이라구. 널 도와줄 수가 없어." "...흐응. 그럼 내가 잠들어 있을 동안만이라도 주변을 살펴줘. 그 정도라 면 문제 없겠지?" "그건 - " 여자는 뚫어지게 나를 쳐다본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왠지 약해진다구. 나는 - <1. ...협력, 한다 - 선택> "나는 - " ...못해, 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어. 왜냐하면, 난 이 여자를 죽였으니 까. 그 때문에 이 여자는 약해져 있고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고 있는 거야. - 책임은, 틀림없이 나에게 있어. 게다가 정말로 펗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이 여자는 그리 나쁜 녀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저기, 어떻게 됐어? 역시 인간인 네가 흡혈귀인 나에게 협력할 수는 없는 거야?" " - 뭐, 그건 당연한 대답이지만" " - " 아아, 그러니까 그런 눈은 하지 말라니까...왠지, 죄책감이 느껴지고 거절 할 수 없게 되어버리잖아.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까. 여기까지 와서 모르는 척 하는 것도 양심 상 찜찜하고." - 아아, 정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나... "...그러니까 괜찮아. 그 정도 쯤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상 대는 이 동네에서 무차별 연속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있는 놈이니까. 이 마 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적어도 아무 도움이라도 주지 않으면 천벌 받 을 것 같은데?" "에 - ? 그럼 - " "보디가드는 거절하지만, 대신 보초 정도는 서주겠다는 소리."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내가 얼마나 바보인지 정말로 뼈저리게 실감했다. 아니, 뼈저리게 실감, 하긴 했지만 - " - " 그, 그 여자의. 진심으로 놀라는 듯한 얼굴을 보니, 뭐랄까 - "와아, 정말로 해주는 거야!? 나, 정말로 흡혈귀 맞지!?" "...저기 너 말야. 그렇게나 사람을 협박해 놓고서, 이제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응, 그건 그렇지만 - " " - 뭐, 아무렴 어때! 협력해 준댔으니까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겠네?" ...정말로 기쁜 듯한 표정을 짓고, 여자는 벽에서 엉덩방아를 찧고 있는 나 에게 다가왔다. "그럼 이걸로 계약은 성립." 여자는 웅크리고 앉아있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다. "이제 겨우 자기소개 할 수 있게 됐네? 나는 알퀘이드 - 응, 이름이 좀 기 니까 알퀘이드라고 불러도 돼. 신소(眞祖)라고 구분되는 흡혈귀인데, 넌 뭐 하는 사람이야?" 지금까지 겪어본 적도 없는 자기소개를 받고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의 의미를 지닌 한숨이랄까, 결국 이 엉터리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는 증거일지도... "토노 시키. 불행하게도 평범한 학생이야...아까도 말했지만, 정말로 아무 도움도 안 될테니까..." 여자 - 알퀘이드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킨다. 그녀는 빤히 내 얼굴을 쳐다 본 후 다시 한 번 악수를 청해왔다. "그럼 잘 부탁해, 시키. 날 죽인 책임, 확실히 받아갈테니까 말야." 빙긋 웃으며 왼손을 내미는 알퀘이드. "...하아" ...이 세상엔 여러 가지 책임이 있다고 들었지만 살해한 상대를 도와야 하 는 책임을 지게 된 사람은 아마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을까. "...젠장, 진짜 미치겠네." 하지만, 달리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은가. 마지못해 하면서도 왼손을 내밀며, 나는 자신을 흡혈귀라고 소개한 흰 옷의 여자와 악수를 했다. -------------------------------------------------------------------------------- "응, 꽤 괜찮은 방이네. 이 정도면 하룻밤 정도 지내도 괜찮겠는걸." 즐거운 듯 호텔 방을 둘러보는 알퀘이드. " - "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내 방은 이미 들켜버렸으니까, 오늘은 여기 숨어있자. 아, 돈이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 돈 좀 가지고 있으니까 비용은 내가 낼게."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알퀘이드는 창가의 커튼을 친다. 그리고 방의 전기도 꺼버려 방은 한밤중처럼 어두워졌다. 한숨이 묻어나온다. "...알퀘이드. 너,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무슨 생각이라니, 뭐 여러 가지 생각하고 있는데 왜?" "아니, 그런게 아니라 내 말은 - " 어째서 호텔의, 더군다나 싸구려 호텔도 아닌 이런 고급 호텔의 최상층 전 부를 빌려버리느냔 말이다. "........." 그렇게 말하려다 참았다. 지금의 내 역할은 이, 자칭 [흡혈귀]의 보초를 서 는 것 뿐이니까. 필요없는 질문은 삼가도록 하자. " - 아냐, 아무 것도. 니 맘대로 해." "시키 너 참 이상하다? 갑자기 화냈다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예측을 못하겠 는걸?" 뭐가 그리 즐거운지 빙그레 웃음을 띤 얼굴로 알퀘이드는 침대 위에 눕는 다. "해 질 때까지 잘 거야. 시키도 좀 쉬는 편이 좋을걸. 흡혈귀는 낮에는 활 동 못하니까 밤에만 본격적으로 보초 서주면 되고." "...너 말야. 지금, 자기 자신의 존재를 전면부정하는 발언을 했다는 거, 알고나 있냐?" "난 괜찮아. - 아, 슬슬 한계가 된 거 같은데...그럼 잘 자, 시키. 해가 지 면 깨워줘야 해?" "야, 야!" " - " 알퀘이드는 전지가 떨어진 기계처럼, 말릴 틈도 없이 금방 잠이 들어버렸 다. "하 - " 거 참 너무 무방비 하구만. "...이거 도망가도 상관없다는 뜻 아냐...?" 어차피 처음부터 억지로 끌려온 거나 마찬가지니 지금이라면 쉽게 도망갈 수 있어...게다가 지금은 그런 충동은 안 일어나지만. "나 - 적어도 한 번은, 널 죽인 적이 있는데" 그럼에도, 이 여자는 어째서 갑자기 잠들어 버리는 거냔 말이다... "........." 침대 위에서 잠이 든 알퀘이드의 얼굴을 바라본다. 탐스러운 가슴이 상하로 오르내리고 있는 걸 보면 호흡은 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반면 몸은 미동조 차 하지 않는다. 알퀘이드의 주변 공기만이 멈춰져 있는 것 같은, 보고 있 는 나마저도 멈춰버릴 것 같은 고요함. - 너무도 편히 잠들어 있다. 이제 막 알게 됐을 뿐인 나를 변함없이 믿어주 고 있는 것 같은 무방비한 모습. " - 이녀석, 바보로구만." ...그래, 좀 걱정스러울 정도로 바보 같다. 어쨌든 여기가 기점이다. 내가 - 토노 시키가 몸을 빼낼 수 있는 최후의 라 인인 지도 모른다. 나는 - <2. ...그래도, 알퀘이드를 내버려 둘 수는 없어 - 선택> "...약속, 했으니까..." 아무리 상대가 어떤 괴물이라 할지라도, 스스로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깨뜨려서는 안 된다. ...알퀘이드는 잠들어 있다. 그 안색은 하얘서, 어딘지 모르게 아픈 사람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알퀘이드는 자신이 약해져 있다고 말했다. 방금 전 에도 한계라고 말했으니, 사실은 자신이 잠든 다음 내가 어떻게 나올 것인 지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방은 조용하다. 호텔 최상층인 11층에는 다른 손님은 묵고 있지 않다. 이 플로어 전부를 알퀘이드가 빌려버린 때문이다. 방에는 알퀘이드가 숨을 쉬 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 알퀘이드는, 정말 악몽 을 꾸는 것처럼 예쁘다.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찰랑거릴 듯한 금빛 머리카 락. 유연한 바디 라인에, 먹으로 그려넣은 듯한 검고 긴 속눈썹. 세세한 부 분에 이르까지 이렇게까지 완벽한 조형을 하고 있는 육체를, 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마 평생 동안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 - " 흡혈귀인지 인간이 아닌지 같은 건 어쨌든 간에 알퀘이드는 여자다. 그런 알퀘이드가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잠들어버릴 정도로 약해져 있고 그 책임이 나한테 있다고 한다면.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겠지." ...어렸을 적에 배웠던 사실이, 지금도 머리 속에 떠오른다. 선생님이 말씀하셨지. 내 눈은 특별한 것이기에, 다른 특별한 것들을 불러 들이게 된다고. 그렇다면 적당히 각오를 해두자. 어쨌든 오늘밤 정도는 나 나름대로 알퀘이드를 지켜줘야만 하니까 - - 희다. 눈이 번쩍 뜨일 것 같이 희다. 그 색은 그리운 옛 기억을 불러일으 킨다. 여름의, 어느 더운 날. 푸른 하늘과 커다란 뭉게구름. 따가운 햇살이 내비치는 풍경과 정신이 아득 히 멀어지는 듯 느끼게 하는 매미 소리. 매미 소리. 매앰 맴맴 매앰 맴맴 매앰 맴맴 공터에는 매미의 허물이. 태양은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공터는 이글이글 타들어 간다. 한여름의 어느 더운 날. 마치 세계가 프라이팬이 된 것 같아. 애앵 앵앵 애앵 앵앵 애앵 앵앵 아키하가 울고 있다. 얌전하고, 언제나 내 뒤를 따라다녔던 아키하가 눈물 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다. 아키하의 바로 근처에 한 아이가 쓰러져 있다.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있는, 나와 동년배 쯤 되는 아이의 시체가 있다. 매미의 허물. 내 두 손은 쓰러져 있는 아이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나. "시키 - !" 어른들이 달려온다. 쓰러진 아이는 죽어있는 채. 어른들은 외친다. 네가 그 아이를 죽였느냐고 외치고 있다 - - 그런, 꿈 속에서 조차 잊고 있던 꿈을. 다시 떠올려낸 듯한 느낌이 들었 다. "시키. 이제 일어나야지. 벌써 해가 졌다구." 내 몸이 흔들거린다.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와 어깨에 닿은 차가운 손의 감촉. " - 응" " - 어라?" 눈 앞에는 알퀘이드가 서 있다. 알퀘이드는 이미 깨어있었고 창 밖엔 어둠 이 드리워져 있다. 시계를 보니 벌써 밤 8시를 지나고 있었다. " - 에?" "에, 라니? 해가 지면 깨워달라고 말했는데 시키까지 자고 있으면 어떡해?" "...아, 미안. 좀 정신이 없었어." ...나 자신이 언제 잠이 들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틀림없이 잠들어 있 던 알퀘이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대로 나까지 잠이 들어버린 것이 리라. "정말...이럼 호위실격이야? 둘 다 자고 있다가 갑자기 적한테 습격이라도 당했으면 나도 시키도 벌써 죽어있었을지도 모르는데." " -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말했잖아. 게다가 해 떠있을 땐 안전하다고 말한 건 너였잖아." "반드시 라고는 말할 수 없어. 아침에처럼 사역마가 습격해 들어온 일도 있 고 하니까 말야." 알퀘이드는 화를 낸다. 뭐...그도 당연한 일인가. 보초를 서기로 했던 내가 알퀘이드와 마찬가지로 잠이 들어버렸으니 말이다. "게다가 말야, 난 흡혈귀라구, 시키. 그런데도 왜 위험한지 안 위험한지도 안 생각하고 잠이 들 수 있는 걸까나? 뭐, 나도 무턱대고 무서운 존재로 내 비춰지는 건 싫긴 하지만, 좀 긴장해서라도 못 자고 있다든지 그런 반응 좀 보이면 안 돼?" " - " 아까 했던 말 취소. 알퀘이드는 보초역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은 것 때문이 아닌, 단지 내가 자고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몸도 그럭저럭 움직일 수 있게 돼서 눈 좀 떠보려 하니까 시키까지 헬렐레 하고 자고 있잖아. 너무 무방비하니까 나, 흡혈종으로서 위엄이 없는 건 아 닐까 하고 정말로 불안했었다구." "........." 뭐, 위엄이야 거의 없다고 보는데. "무방비한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나도 과거 한 번은 널 죽였던 사람이라 구.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잖아." "아 - " 알퀘이드는 이제야 겨우 생각이 난 듯, 놀란 토끼눈이 된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 글쎄 뭐랄까...아무래도 뒷골목 쪽에서 시키랑 말 하고 있는 동안에 시키를 완전히 믿어버리게 된 것 같은데." "........." ...뭐, 나쁜 뜻은 없겠지. "오~케이~, 그렇게 믿어주고 있다면 그 나름대로 노력은 해야겠지. 그래, 이제부터 계속 보초를 서고 있으면 되는 거야?" "응. 일단 아침 해가 뜰 때까지는. 난 방에서 안 나갈 거니까 시키는 누군 가가 이 플로어에 들어오는지 좀 봐줘." ...좀 봐달라니, 아침처럼 검은 개 같은게 덤벼들면 봐주고 뭐고도 없을텐 데. "...하아" 한숨이 나온다. 역시, 이건 나한텐 너무 힘든 역할이야. "...좀 물어보겠는데, 아침에 습격했던 검은 개 말야, 네 적이 파견한 녀석 이었어?" "파견했다기 보다, 마을을 감시하는 게 놈의 역할이었을 거야. 녀석의 순회 루트에서 나랑 시키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우리가 있 다는 게 들켜버렸던 것 같아." "들켜버렸다니, 네 적한테?" "응. 몸 상태가 완전했다면 오히려 수고를 덜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로선 습격당하면 오히려 소멸당할지도 몰라. 어쨌든 힘을 되찾을 때까지 이렇게 몸을 숨기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지." ...알퀘이드의 적, 이라는 놈은 거리를 소란스럽게 하고 있는 연속살인범 - 다시 말해 흡혈귀다. "...알퀘이드. 나,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데 질문에 대답 좀 해줄 래?" "말할 수 있는 것까지는 상관은 없는데...왜 그래 갑자기. 태도가 변했네?" " - 아아, 중요한 걸 아직 하나도 듣지 못했으니까 말야. 저기, 결국에 말 야...네 목적이 대체 뭐야?" "나 말야? 난 흡혈귀를 쫓고 있을 뿐이야. 흡혈귀를 죽이는게 내 역할이니 까." "어, 확실히 그건 아까도 들었어. 하지만 알퀘이드, 너도 흡혈귀잖아?" "뭐야, 시키는 아직 날 믿지 못하는 거야?" "기분 나쁠 정도로 믿고 있으니까 안심해.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게 아 니라, 어째서 흡혈귀인 네가 흡혈귀를 죽이느니 하는 위험한 소리를 하느냔 말야." "어머, 시키는 동족끼리 서로 죽이는게 싫은가보네?" ...싫고 좋고 간에, 상대를 죽이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확 실히 흡혈귀가 흡혈귀를 죽인다라고 하는 건 어딘가 매치가 안 되는 이야긴 데. "아니, 왠지 상상이 안 돼서. 흡혈귀들은 인간의 피를 빨잖아? 그럼 죽이는 대상은 인간이지 같은 흡혈귀들이 아니잖아." "피를 빠는 거랑 살인을 하려는 거랑은 달라. 뭐, 하지만 대충 시키가 뭘 말하고 싶어하는지는 알겠어. 같은 종족끼리 서로 돕고 살아가야 한다는 거 지? 하지만 흡혈귀는 서로 동류이면서도 각각이 서로 다른 생명종 같은 거 야. 그러니까 인간과도 같은 동료 의식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지." "...? 그럼 그, 네가 쫓고 있다는 흡혈귀는 너랑 뭔가 다르다는 거야?" "그래. 내가 쫓고 있는 놈은 인간 흡혈귀니까 인간들의 전승에 남아있는 것 과 거의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돼. 인간의 피를 빨고, 그렇게 피를 빨린 사람을 사자(死者)로서 사역해 세력을 불려 나가고 - 내가 쫓고 있는 녀석은 그런 흡혈귀야. 이 마을에 숨어있는 놈은, 그런 옛 타입의 흡 혈귀란 거지." - 그런 흡혈귀라니, 흡혈귀한테도 종류가 있는 건가. "...설마해서 물어보는 건데...그녀석을 해치울테니까 나더러 보디가드가 돼라고 말한 거였냐?" " - 응,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어. 하지만 시키랑 말하고 있는 동안에 마음 이 변했지. 나 말야, 시키. 틀림없이 네가 교회에서 파견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었어. 그렇담 적이 어딨는지 벌써 파악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한 껏 기대하고 있었는데 웬걸, 시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보통 사람이 었어. 적의 관의 위치는 고사하고, 흡혈귀에 대해서도 하나도 모르고." "...응, 애초에 그 녀석들이 이런 극동의 무신론자들의 나라에 엑소시스트 를 파견할 리가 없는걸. 내가 좀 생각이 얕았던 모양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알퀘이드. 말의 핀트가 어긋나 버리는 바람에 난 완전 히 새된 기분이다. "알퀘이드, 무슨 말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 "아, 잠깐만...에, 그러니까...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알퀘이드는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흘린다...이녀석, 아무래도 남하고 자주 이야기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됐으니까, 지금의 상황을 한 마디로 표현해봐. 나도 잘 이해는 안 되지만, 나름대로 이야기를 정리해 볼테니까." "그래? 고마워, 시키." "인사는 그만하고, 이야기 계속 해." 알퀘이드는 고개를 알았다는 듯 끄덕인다. "다시 말해서, 이 마을에 있는 흡혈귀는 옛 타입의 흡혈귀야. 스스로는 성 주로서 군림하고 부하로 삼은 사자들을 거리로 내보내 조금씩 세력을 확장 해 가는 타입. 인간의 피를 빨고, 그렇게 피를 빨린 인간을 자신과 같은 흡 혈귀로 만들어버리는 보편적인 흡혈종이야. 아직까지는 분신과도 같은 사자 들의 수가 적으니까 그 능력은 보잘 것 없겠지만 희생자가 늘면 늘수록 본 체인 흡혈귀의 힘도 강해져. 그 전에 본체를 없애버리기만 하면 되는데 난 아직 적의 침상을 찾아내지를 못했거든. 이번엔 어지간히 교묘하게 감춰뒀 는지, 녀석의 기백조차 느낄 수 없었어." "그래도 어딨는지 알아내지만 하면 간단히 제거할 수 있어. 하지만 단서가 될만한게 하나도 없는 상태라서 어쩔 수 없이 낮에도 거리를 돌아다니며 조 사하고 있는 건데...글쎄 말야, 갑자기 지나가던 살인귀한테 습격당해서 이 제는 일시적이라고는 해도 [적] 흡혈귀보다 능력이 떨어지게 돼버렸지." 냉랭한 시선으로 나를 쏘아보는 알퀘이드. 아마 '지나가던 살인귀' = 나더 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겠지. "...과연, 어쨌든 무슨 소린지 알겠어. 말하자면 이 거리에 질 나쁜 괴물이 둥지를 틀고 있어서 알퀘이드는 그걸 퇴치하러 왔다, 라는 거지? 하지만 그 녀석이 어디있는지 모르니까 그걸 찾고 있는 도중에, 저기 - 나한테 살해당 하는 바람에 지금은 몸이 약해져 있어서 힘을 회복할 때까지 피해있는 거다 ...라는 거야?"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그럴 거야." " - 그럼 다음, 원래 하고 싶었던 질문. 알퀘이드는 자기가 흡혈귀라고 아 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나한텐 아직 느낌이 안 와...뭐, 확실히 넌 인간은 아냐. 그 정도는 알겠는데, 그렇다고 흡혈귀라는 소리를 들어도 뭐랄까, 실 감이 안 난단 말야." "그러고 보니 그렇네. 시키가 알고 있는 흡혈귀 상은 나하고는 좀 다르니까 말야." "그래. 난 흡혈귀라는게 정말로 있는지 없는지보다, 그 흡혈귀가 이런 녀석 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단 말야. 그래,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다르다는 거 야?" 알퀘이드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글쎄, 어느 정도까지는 가르쳐 주는 편이 좋을지도." "알았어. 그럼 1교시 수업은 흡혈귀(1)에 대해 배워보자." "...그거야 니 마음대로 하든지...근데 그 (1)은 또 뭐야..." "시키는 완전 초보니까 기본적인 지식부터 가르쳐주지 않으면 안 되잖아? 그러니까 일단 초보적인 것부터 가르쳐주겠다는 거야." " - 뭐, 어떻게 하든 상관없지만...어쨌든 짧게 좀 부탁해." "에, 그러니까...노력은 할게." 알퀘이드는 정말로 이야기를 한다, 라는 상황에 익숙지 않은 모양이다. 뭐, 시간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어쨌든 불만 사항은 패스하고 알퀘이드의 이야 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 "일반적으로는 흡혈귀라 불리고 있어도, 우린 크게 두 종류로 나뉘어져. 태 어날 때부터 흡혈귀였던 종과 흡혈귀가 된 종. 전자를 신소(眞祖), 후자를 시토(死徒)라고 부르지. 너희들이 흡혈귀라고 부르는 쪽은 시토야. 인간의 피를 빨고 이를 자신의 노예로 삼고, 그리고 태양 빛에 약하며 세례의식 앞 에 패퇴하는. 우리들의 적도 시토로 구별되는 흡혈귀야." 어느 틈엔가 "내 적"에서 "우리들의 적"이 됐다. 뭐...지금 상황에서는 별 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흐응. 그 시토라는 놈들은 처음부터 흡혈귀가 아니었다고 말했는데, 그 게 무슨 소리야? "시토는 원래는 인간이었던 자들이야. 마술의 힘을 이용해서 불로가 된 자 들이나 신소에게 피를 빨려 그 노예가 된 자들이 있어. 어느 쪽이건 간에, 흡혈귀가 된 자들은 불완전하지만 어쨌든 불로불사의 육체를 손에 넣을 수 가 있지." "........." 처음부터 흡혈귀였던 것과 인간이었지만 흡혈귀가 된 것이 있다, 라는 이야 기인가...뭐랄까...이 이야기 속에는 무엇인가 말도 안 되는 모순점이랄까, 구조적으로 커다란 결함이 있는 것 같다. "저기 말야, 시키. 시키는 흡혈귀에 얽힌 이야기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어?" "글쎄...그냥 평범한 이미지 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처녀의 피를 빨아먹는 다든지, 노려보는 것만으로 상대를 못 움직이게 해버린다든지, 안개로 변하 고 늑대로 변하고 한다든지 하는 게 뭐...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들인데?" "응. 대체로는 다 맞았어. 처녀의 피를 빨아먹는 건, 아직 다른 인간과 체 액을 교환하지 못한 순수한 세포와 혈액이 열등화 되어가는 자신의 유전자 를 보충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 중에 가장 괜찮은 방법이니까. 시토 - 이 차적으로 흡혈귀가 된 흡혈종은 불완전한 불로불사라 할 수 있지. 확실히 불로를 얻어냈기에 늙어서 죽는 일은 없어. 하지만 그 만큼의 에너지를 언 제나 보충해 주고 있지 않으면 결국엔 죽게 되지. 그 어떤 생물이라도 영양 을 보충해 주지 않으면 활동할 수 없게 되지? 그것과 같아. 다만 흡혈종은 영양만 계속 보충해 주는 한 수명을 갖지 않는다, 라는 것 뿐이야." "시토에 해당하는 흡혈귀들은 말야, 스스로가 살아가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피를 빠는 거야. 원래는 인간이었으니까 불로불사의 육체를 가지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지. 그들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유전자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그릇...흡혈종이 되면서부터 급속도로 열등화 하게 되지. 그렇기에 그 것을 보충해 주려고 다른 사람의 혈액을 빨고 그 유전정보를 흡수해서 자신 의 육체를 고정해 나가. 흡혈귀에게 있어서 피를 빤다는 행위는 식사가 아 닌, 존재를 위한 필요최저한의 행위인 거야." "........." 어렵군. 거기에 길기까지...내가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는지 안 하고 있는 지에 상관없이 알퀘이드는 계속 이야기를 해나간다. "그럼, 다음. 노려보는 것만으로 상대를 옭아맨다, 라는 건 일종의 마안이 라고 할 수 있어. 눈은 언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표적인 마술회로이기 에 마안을 가진 흡혈종은 많아. 우리가 가진 건 보통은 매혹의 마안이지. 우리가 본 상대를 매혹시키는게 아니라 우리들의 눈을 쳐다본 상대를 매혹 시키는 거야. 강력한 흡혈귀의 마안은 안구에서 상대의 뇌에 직접 자신의 의지를 심어넣어 상대의 사고를 완전히 장악하지만, 시토의 마안은 그 정도 의 힘을 갖고 있지 않아." "안개가 되거나 하는 건 사전에 분신 같은 걸 만들어내서 거기에 의식을 옮 기게 되는 경우야. 볼 일이 끝나면 분신체를 조종하는 마력을 컷 해버리니 까 자동적으로 티끌로 되돌아가 버리는 거지. 늑대 - 다른 동물로 변화하는 능력 같은 건 파손된 육체를 사역마로서 보충한 결과라고 할 수 있어. 오랜 세월을 살아온 흡혈귀일수록, 통상의 생명력으로는 자신의 파손된 육체를 제대로 보수할 수가 없어. 인간은 동물 중에서는 기초능력이 떨어지는 생물 에 속하니까 육체를 보수하기 위해서는 인간보다 우수한 종에 속하는 야생 의 짐승을 흡수하는 쪽이 보다 나은 효율을 기대할 수 있지. 자신의 육체를 짐승으로 보충하고 있는 흡혈귀는 필요한 때에는 그 짐승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사역마로서 쓰고 있어." "음...예전에 들었던 이야기인데, 자신의 몸 속을 모두 사역마로 채워넣은 천년 클래스의 흡혈귀가 있다는 것 같아. 그 녀석이 몸 속에 내포하고 있는 짐승의 수는 육백 육십 육 마리였다던가..." " - " 알퀘이드의 이야기는 좀 아스트랄로 새나간 듯 싶다. 솔직히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세계의 이야기가 아냐... "뭐, 대충 이 정도일까나? 대충 개요만 따와서 설명했는데, 이제 흡혈귀가 어떤 건지 알겠어?" "단어 상의 의미만으로는 대충." 아니 그보다, 알퀘이드가 흡혈귀라는 사실이 아까보다 더 가슴에 와 닿지 않게 된 듯한 기분이... "자, 그럼 다음은 내 차례야. 사실은 나도 시키한테 중요한 걸 묻고 싶었는 데 지금까지 까먹고 있었거든." "? 뭐야, 나한테 묻고 싶은 건 아무 것도 없을텐데? 난 흡혈귀도 아니고 그 냥 평범한 학생이니까 말야." "흐응~~그럼 시키한테 질문. 너, 어떻게 날 죽였어?" "하아?" "그러니까 어떤 방법을 썼냐고 묻는 거야. 룬이나 카발라 같은 비술에는 항 체내성이 되어있으니까 나한테 안 들을테고, 항체내성이 되어있지 않은 것 -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마술이라고 하면 이 나라의 고신도(古神道)랑 남미의 비보(秘寶) 정도 뿐인데." "...아냐, 그 정도로 저 지경으로까지 날 '죽여'놨을 수는 없어. 대답해, 시키. 너, 무슨 연대물의 비보로 날 저 지경으로까지 재기불능으로 만든거 야?" "연대물의 비보...가 대체 뭐야?" "역사와 상념을 축적한 촉매 말야! 이 나라에도 신기(神器) 같은 게 있지? 보통은 법장(法杖)이나 검, 보석이나 가면을 사용하는 대 자연용 개념무장 을 말하는 거지만 - 봐봐, 시키. 너 정말로 그쪽 방면의 사람이 아냐?" "그쪽 방면이고 뭐고, 난 그냥 평범한 학생이라니까. 그쪽으로 아는 건 아 무 것도 없다구." "거짓말. 마술사도 아닌 인간이 나에게 상처입힐 수는 없어...시키, 나한테 숨기고 있는 거 있지?" 알퀘이드는 성난 고양이처럼 날 노려본다. 하지만...그런 눈으로 쳐다봐도 나한텐 숨기고 있는 일 같은 건 - 아아, 있지 참. "사실은 하나 있기는 한데...관계가 있을지 모르겠네." 알퀘이드는 아직도 날 노려보고 있다. 아무래도...이대로 아무 말 없이 잠 자코 있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 말할게...뭐라고 말하면 좋으려나...나 말야, 사물을 자를 수 있는 선이 보여." "에?" 멍한 표정이 되는 알퀘이드. 그렇겠지...이런 이야기, 보통은 아무도 안 믿 어주니까. "...무슨 의미야?" 하지만 알퀘이드는 진지한 눈빛으로 되묻는다. 과연 보통이 아니구만. 좋은 의미로 내 기대를 배신해 주다니. "그러니까 나 말야, 사물을 자를 수 있는 선이 보여. 생물이라든지 지면이 라든지, 어쨌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거라면 모두. 검은 선 같은 건데, 거 기에 칼 같은 걸 갖다대면 해당하는 사물이 깨끗하게 절단된다든지...이거, 의미가 있으려나? 쇠를 나이프로 자를 수 있는 건 편리한 일이지만 별로 마 음대로 자를 수 있는 것도 아냐. 선이 보이는 곳 밖에 자를 수 없는데다 널 절단할 때에도 - 저기, 나이프라면 여자 피부 정도는 자를 수 있겠지?" " - " 알퀘이드의 눈빛이 진지하게 - 딱 한 번 나한테 보여줬던 저 살기어린 눈빛 이 되어간다. 힐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 호흡을 멈추게 할 것 같은 시 선. " - 그래. 직사의 마안 같은 건 동화 속 이야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있기는 있는 모양이네. 너 같은 돌연변이 괴물이." "그 - 그게 무슨 소리야? 나한텐 흡혈귀니 괴물이니 하는 소릴 들어야 하는 이유가 없다구!" "괴물은 괴물이지. [사물의 죽음을 보는] 마안은, 우리들 중에서조차 보유 하고 있는 자가 없을 정도니까." "...? 사물의, 죽음을 본다...?" 알퀘이드는 마치 적을 대하고 있는 듯 눈을 치켜뜬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시키. 네 눈은 말야, 틀림없이 회선이 열려져 있을 거야. 그 눈,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 "아니, 이렇게 된 건 꽤 옛날 일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이랬던 건 아냐." "...흐응...그럼 예전에 한 번 죽어본 경험이 있지?" "무슨 - " 확실히, 8년 전에 죽을 뻔한 사고를 당하기는 했지만. "역시. 잠재적인 능력도 있었겠지만, 그게 계기가 됐군...직사(直死)의 마 안, 이라...그거라면 확실히 날 죽일 수가 있어."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나서 알퀘이드는 눈빛을 달리했다. "알퀘이드...너, 이 선이 뭔지 아는 거야?" "너 정도는 아니지만, 지식은 가지고 있어. 네가 보고 있는 건 만물의 결 과, 사물을 쉽게 죽일 수 있는 부분이야.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모 든 존재의 사기(死期)...'죽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지." " - " ...생각났다. 확실히 그 때. 이 안경을 나한테 주셨던 선생님도, 알퀘이드 와 같은 사실을 가르쳐주셨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알퀘이드의 말과 는 미묘하게 다르다. 내가 보고 있는 건 단순한 선이며 그런, 죽음과 같은 거창한 것들이 아냐. "무슨 소리야. 나한테 보이는 선들은 말야, 그냥 저기 자를 수 있겠다 싶은 그런거 아냐?" "그러니까 그 선이 '죽음'이라는 거야. 알겠어, 시키? 형체를 가진 모든 사 물에는 그 끝맺음이 있어. 그것이 언제가 될 지는 개별적으로 차이가 있지 만, 어쨌든 최후라는 건 있는 거야. 죽음은 찾아드는 것이 아닌, 탄생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내포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발현하게 되는 거지. 그것이 원인과 결과. 인과율이라는 말, 들어본 적 있지?" "발생한 이상, 모든 사물에는 끝맺음이 있어. 그 끝맺음은 처음부터 '언제 가 될지' 결정되어 있지. 그것이 사물의 [사기]라는 거야. 그래서, 처음부 터 그런게 있기 때문에 [사기] 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기능과 회선에 맞는 뇌수, 안구가 있다면 그것을 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냐." "그것이 네가 보고 있는 [선]의 정체야. 어디까지나 개념상의 지식일 뿐이 지만 굳이 너희들 식의 이론으로 설명하자면 분자와 분자의 결합이 좀 더 약한 부분, 쯤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 또는 그 개체의 사인(死因)을 발현시 키는, 유전자에 준비되어진 붕괴의 스위치라든지." "아, 하지만 그럼 좀 안 맞는 부분이...응, 나한텐 안 보이니까 단언할 수 는 없지만 시키한테 보이는 건 [선] 뿐만이 아니지? [선]보다는 [점]이라고 생각하는데." " - 아" 그래. 처음 알퀘이드를 봤을 때. 내가 내가 아니었던 것 같았던 그 때. 안 경을 벗은 나의 눈에는 언제나 봐 왔던 낙서들과 - 낙서자국이 흘러나오는 원인인 것 같은 검은 점 들이 보였다. "...그래. 그 때 뿐이었지만 - 틀림없이 검은 점들이 보였어. 네 몸에도 몇 군데 있었고...검은 점은 점과 점을 서로 잇는 듯 흐르고 있었어." 예를 들면, 마치 혈관 같은... "...생각대로네. [사물을 죽이기 쉬운 선]과 [그 죽음] 인가...그런 상태로 용케 지금까지 살아왔군. 시키 너, 꽤나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 네." 알퀘이드는 담담히 말한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나름대로 파 악은 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그 무엇 하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 - 뭐야 그게. 그런 게 있을 리도 없고 정말로 보일 리도 없잖아...!" "넌 보이는게 아냐. 생물은 보통, 머리를 잘리면 죽지. 이건 절단했기 때문 에 정지했다 라고 설명할 수 있어. 거꾸로 말하면 머리가 절단되지 않는 생 물은 죽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 아, 이건 나에 해당하는 경우니까 예외라고 생각해줘." "근데 네 경우에는 그 원인을 무시할 수가 있어. 그 어떤 외적요인을 무효 화시키는 상대를 만나도 어쨌든 죽이지. 죽인 상대는 그 후에 '죽은' 상태 가 될 거야. 절단했으니까 정지했다라는게 아니라, 네 경우에는 사물을 정 지시키고 그 결과로서 대상이 절단된다는 소리지." "거봐. 이게 괴물이 아니고 뭐라는 거야? 단순히 사물을 자를 수 있는 선이 라고는 말해도, 네 두 눈은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그 어떤 초상현상 보유자 보다도 특이해. 너는 말이지, 시키. 그 어떤 사물이라도 죽여버리는, 사신 같은 눈을 가지고 있으니까." " - " 할 말이 없다. 알퀘이드가 말한 대로, 내 눈이 그런 걸 볼 수 있다면. 내가 보고 있는 저 검은 선들은 세상 만물의 사기 그 자체였다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내 주위는. 이다지도, 죽음으로 충만해 있었단 말인가. "...그럼 뭐야. 네 말대로라면 나, 널 죽일 수 있다는 소리가 되잖아."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시험해 볼까?" 알퀘이드는 창가의 커튼을 열어젖힌다. 전기가 들어와 있지 않은 방 안. 창 너머의 달빛만이 약하게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자, 괜찮으니까 어디 한 번 죽이려고 해봐. 아, 설마 그 안경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거야?" " - 괜찮겠어?" 물론, 그냥 보기만 할 생각으로 안경을 벗었다. 그와 동시에 방 전체에 걸 쳐 검은 선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창 밖에 떠 있는 하얀 달. 낮에는 강한 햇빛 때문에 보기 힘들었지만 미약한 달빛 속에서 [선]은 빛나기까지 해 보 인다. 그 안에서. 알퀘이드의 몸에 있는 [선]은 너무도 가늘어서 의식을 집중하지 않으면 보 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 - " "...시키한테 당하지만 않았어도 틀림없이 완전히 보이지 않았겠지만 지금 은 아마 좀 보일 거야. 나 말야, 밤에는 [사기]가 없지만 낮 동안에는 조금 생겨버리거든. 시키가 날 죽일 수 있었던 건 낮이었기 때문이었지만 그 후 에 소생을 위해 힘을 써버린 탓에 지금은 밤에도 [사기]가 생겨버리지. - 말하자면 불로불사의 몸이 아니게 됐다는 소리지만...시키, 내 몸의 선을 자를 수 있겠어?" " - " ...글쎄. 확실히 선이 있으니까 자를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때처럼 깨끗하게, 1초도 걸리지 않고 절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힘들 거야. 선이 보이다가 안 보이다가 하니까 알퀘이드가 잠들어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해." "그렇지? 그게 너의 최대의 결점이야. 아무리 [죽음]이 보인다고는 해도 그 [선]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시키 자신의 능력이 반드시 필요해. 아무리 내가 약해져 있다고는 해도 시키한테 사로잡힐 만큼 운동신경이 저하되어있지는 않아." ...그런가. 듣고 보니 난 재빠르게 움직이는 동물을 잡을 수가 없다. 잡을 수 없다는 말은 결국 몸에 닿지 않는다는 의미. 즉, 이런 [선]이 보인다 해 도 움직이는 사물을 죽일 수는 없다는 소린가. " - 윽" 지끈하고 두통이 밀려든다. [선]을 보고 있으면 두통이 일어나는 건 어렸을 적하고 똑같다. 안경을 쓰고 시계를 원래대로 돌려놓는다. "........." 알퀘이드는 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뭐야. 아직 또 뭐가 남았어?" "아니, 그런게 아니라. 시키는 그 안경을 쓰고 있으면 [선]이 안 보여?" "뭐, 그렇긴 한데. 옛날에 내 눈이 이렇게 됐을 때 만났던 사람한테 받은 거야. 지금은 렌즈 밖에 쓰고 있지 않지만 이것 덕분에 그럭저럭 보통의 생 활을 살아갈 수 있었지." "그렇구나. 그래, 아무리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언제나 죽음에 직면해 있으면 발광하던가, 아니면 눈을 으깨버릴 수 밖에 없을테니까." 그렇게 말을 하며, 알퀘이드는 내 곁으로 다가선다. "잠깐, 그거 보여줘." " - 싫어. 이건 나한테 소중한 물건이니까 안돼." "망가뜨리겠다는 소리가 아냐. 진짜로 보기만 할테니까 좀 보여주라." 알퀘이드는 힘으로라도 빼앗으려는 듯 조금씩 조금씩 내게로 다가선다. 여기서는 - <1. ...할 수 없지. 조금만이야? - 선택> 알퀘이드는 포기하지 않은 것 같다. "...알았어. 다 보면 빨리 돌려줘." 안경을 건넨다. 알퀘이드는 뚫어질 듯이 안경을 바라보더니 무서운 눈빛이 되어서는 나를 노려본다. "시키. 이거 만든 사람, 이 마을에 있어?" "글쎄? 아마도 없을걸. 벌써 8년이나 된 일인데다 겨우 1주일 정도만 이 동 네에 있엇던 것 같으니까." " - 그래. 다행이군, 귀찮은 상대가 늘지 않아서...뭐, 하긴 상대가 블루라 면 일단 후퇴하는게 무난하긴 하겠지만." 알퀘이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버린다. "알퀘이드. 너, 선생님 - 아니아니, 그 안경을 만든 사람을 알아?" "...어. 현존하는 4명의 마법사 중 한 명이지. 그 안경도 정말, 말도 안 되 는 엄청난 물건이야. 내 힘으로는 거의 망가뜨릴 수 없을 정도야." 알퀘이드는 점점 더 진지한 얼굴이 되어간다. "...너, 이거 망가뜨리려고 했었던 거냐...?" " - 에? 내, 내가 그런 소리 했었나?" "...역시 망가뜨리려고 했었던 거구만..." 알퀘이드에게 건네줬던 안경을 도로 빼앗아온다. "거참...이 안경이 없으면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다고 말한 건 너잖아. 아 니면 나더러 그렇게 되라는 거야, 뭐야?" "별로 그러려던 건 아니고...그냥, 시키가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는게 싫어 서..." " - 너 말야..." ...정말이지, 이녀석 사고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누가 제발 나한테 좀 가르쳐 줘... "확실히 선생님과의 추억도 소중하긴 하지만, 지금은 그 이상으로 이게 없 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어. 하루 웬종일 선이 보이게 되면 미쳐버리기 전에 두통으로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으니까." "흐응~~[죽음]을 보고 있으면 뇌에 부담이 가해지는 모양이네...응, 시키 눈에는 뭔가 원인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이 정도까지야. 기회가 있으면 좀 더 자세하게 가르쳐줄게." "됐시다. 안 됐지만 길게 이야기하는 건 체질에 안 맞아서 말야." "그렇구나. 난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하는게 좋은데." 알퀘이드는 천진 난만하게 웃는다. 마치 정말로, 그저 이야기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즐겁다는 듯이. -------------------------------------------------------------------------------- 밤이 깊어간다. 알퀘이드는 침대에 걸터앉아있고 나도 마찬가지로 침대 위 에서 멍하니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전 4시를 조금 넘긴 시각. 해가 뜰 때까지 앞으로 1시간 쯤 남았다. "앞으로 1시간, 인가" 아직까지 이렇다 할 이상도 없었고 알퀘이드 본인은 긴장하고 있는 기색도 내지 않는다. 어쨌든 주위는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 밤은 이대로 날이 밝는 것이 아닌가 하는 확신까지 들었다. "저기, 시키" 알퀘이드가 벌써 몇 번 씩이나 나를 부른다. "뭐야. 나 너랑 더 이상 이야기할 게 없는데." "그래? 모처럼 물어보는데 아쉽지도 않아?" "...야, 아까부터 너랑 몇 시간 동안이나 의미도 없는 이야기 나누고 있는 줄 알아? 6시간이야, 6시간. 나한텐 보초 서는 것보다 너 상대해 주고 있는 게 더 피곤하다구." 알퀘이드의 시선이 불만에 가득 찬다. - 그랬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요 6시간 동안 알퀘이드는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어대고 있었다. 몸이 약해져 있으면 그냥 자면 그만인 것을 '이야기하는 게 즐거우니까' 라는 핑계를 대면서, 결국 이렇게 둘이 서로 마주 대하고 있는 꼴이다. "...하아" 이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로선 정말 모르겠다. - 꾸르르르륵 덤으로 배까지 고파졌다. 생각해 보니 어제 아침식사를 먹은 이후 거의 만 하루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상태이다. "배 고프면 뭐 좀 먹을래? 모처럼 괜찮은 호텔에서 묵게 됐으니까 룸 서비 스를 쓰면 되는데." "됐시다. 배가 부르면 긴장감이 없어져 버리니까. 그것보다, 그러는 너야말 로 뭔가 좀 먹는게 낫지 않아? 약해져 있다는 주제에 잠도 안 자고 있고, 하다못해 식사라도 좀 하라구." "시키가 안 먹으면 나도 안 먹을래. 보통의 식사도 나름대로 의미는 있지만 혼자서 먹으면 심심하단 말야." "보통의 식사라니, 식사에 보통이고 특별이고가 어디 있 - " ...아참, 그랬었지...알퀘이드는 흡혈귀다. 그렇다면 이녀석한테 있어서 인 간의 피를 빠는 일 역시 [식사]가 된다는 소린가. " - 을라나, 너한텐...흡혈귀니까 말야. 피 이외에는 거의 입에도 대지 않 겠군."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알퀘이드는 흡혈귀다. 알퀘이드는, 흡혈귀는 살아가기 위해 인간의 피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 알 퀘이드는 지금까지 누구의 피를 빨고 몇 명이나 되는 인간을 죽여온 거지? " - " 힐끗 알퀘이드의 얼굴을 쳐다본다. 상상이 안 되는군...알퀘이드 역시 흡혈 귀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인지 난 이녀석이 사람의 피를 빨고 있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 시선이 마주치자 당황스럽게 눈길을 돌린다. 알퀘이드는 물끄러미 내 얼굴 을 바라보더니 곧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신경 쓰여?" "뭐, 뭐가" "내가 얼마만큼의 사람들의 피를 빨았는지 말야." "으 - " ...내 생각이 완전히 들통나 버렸다. 알퀘이드의 미소에 여유가 가득차 있 는 것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 - 그 이상으로 알퀘이드가 지금까지 얼마만큼의 인간을 죽여왔는지 마음에 걸린다. "...그야 당연하지. 난 너랑 서로 협력하고 있는 사이야. 그럼 그런 것 정 도는 알아둬야 언제 네가 마음이 달라져서 덮쳐오게 될지, 예측할 수 있을 거 아냐." 그런 상황은 정말로 곤란하다. 알퀘이드는 '그렇군~~' 하며 납득한다. "그럼 문제. 난 지금까지 몇 명의 피를 빨아왔을까요?" 가벼운 몸동작으로 침대에서 일어서서 창가 쪽으로 걸어가는 알퀘이드. "몇 명이라니, 그건 - " 알퀘이드는 빙글빙글 웃으며 침묵을 지키고 있는 나를 유쾌한 듯 바라본다. 제길...이건 명백한 도전이야. 좋아, 그럼 대답해 주지. 그래 - 틀림없이 "그럼 백 단위, 정도 될까나?" "아쉽게도 정답이 아니군요." "그럼 천 단위." "예~~그것도 정답이 아니네요." 알퀘이드는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계속 웃고만 있다. 왠지...엄청 원통한데 이거... "젠장...그, 그럼 그럴 리는 없겠지만...설마 십 단위야?" "그것도 땡. 뭐야, 십 단위다 백 단위다 천 단위다, 시키는 날 그런 식으로 생각했단 거네? 너무해, 내가 그렇게 사리판단도 못하는 줄 알아?" "그럼 아냐? 흡혈귀한테는 그런 거 없잖아. 인간도 살아있는 것만으로 배가 고프다구. 너희들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피를 빨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럼 그 게 그거지." "그래. 그건 그렇긴 하지만..." "나 동물이나 사람의 피 같은 거, 지금까지 8백년 동안 한 번도 입에 댄 적 없어. 평범한 인간을 죽여본 적도 전혀 없고." - 에? "잠깐 - 너, 그게 정말이야?" "응. 왜냐하면 나, 피를 빠는게 무서운걸." - 하아? 피를 빠는게 무섭다? "거짓말이지? 피를 빠는게 무섭다니 - 너 흡혈귀잖아, 근데 왜?" "...나, 틀림없이 겁쟁이일 거야. 그러니까 언제까지고 흡혈종으로서 제구 실도 못하고." 창 너머로 밤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알퀘이드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알 퀘이드는 고개를 들어 계속 하늘을 바라본다. 하얀 뒷모습은 흐릿했고, 마 치 환영처럼 희미하다. "...그래, 그렇구나..." 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왠지...기쁘다. 안도하는 건 당 연해.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상대가 그런 흉악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았 으니까. 어쨌든 알퀘이드의 말대로라면 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살해당하지 는 않겠지. 그러니까 안전해. 안전...하긴 하지만 난 그런 것하고는 좀 다 른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 완전히 돌았군. 알퀘이드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그런 웃기지도 않는 짓을 하다니. "아 - "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시키? 왜 그래, 그렇게 이마에 땀까지 흘리고." "아니, 머리가 좀 아파서 - " 알퀘이드에게 그렇게 대답하는 도중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알퀘이드 등 뒤의 창. 그 유리 너머, 아직 어둠에 잠겨있는 거리 한복판에. 푸른 까마귀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녀석은 - " 얼빠진 듯 창너머를 쳐다볼 수밖에 없다. 알퀘이드도 창가 쪽으로 시선을 향한다. "...네로?" [과연...겨우 찾았군, 신소의 공주여] 어디선가. 그런 뜻의 의사가 방 안에 흘러들었다. 알퀘이드의 눈에 적의의 빛이 감돈다. 창 밖의 까마귀는 까악 하고 목청껏 운다. [이걸로 끝이다. 지금 곧, 그쪽으로 가지] 푸른 까마귀는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그리고는 그저 밤의 어둠과 하얀 달 만이 남았다. - 그 순간 쿵 하는 무거운 소리와 함께 방 전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아니, 좀 더 정확 하게 말하자면. 지금의 진동은 호텔 전체를 흔들고 있었다. "뭐야 - !?" 침대에서 뛰듯이 일어난다. 알퀘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분하다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을 뿐이다. "알퀘이드, 방금 - " " - " 알퀘이드는 대답하지 않는다. "...뭐라고 말 좀 해봐. 방금 거, 지진 같은 거 아니지?" - 예를 들면, 그래...호텔 로비에 커다란 덤프트럭이 전속력으로 돌진해 들 어온 것 같은, 그런 충격이었다. "...알퀘이드!" 알퀘이드는 답하지 않는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아래층에서부터 소리가 들리고 있다. 알퀘이드는 심각한 얼굴이 된다. 알퀘이드는 '지금의 나한텐 아무런 힘도 없어' 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기에, 아무 말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인가. " - " 그저 시간만이 흘러간다. 2분. 방금 전의 충격에서 2분 정도 지났을 뿐임에 도 호텔은 너무도 조용하다. 알퀘이드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다. 입술을 꼭 깨물고 무엇인가를 견뎌 내는 듯이. 가만히 보니 알퀘이드의 입술에서 한 줄기 붉은 피가 천천히 흘 러내리고 있었다. " - 알퀘이드 - " 불안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분하기 때문인가. 알퀘이드는 스스로가 스스 로를 품기라도 하듯 무엇인가를 견뎌내는 눈치다. 알퀘이드는 이 방에서 나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 해 여기에 있는가. <1. - 내가, 밖이 어떤지를 보러 가야 해 - 선택> " - 좋아" 내가 해야할 일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들고 방 문까지 걸어간다. " - 시키?" "밖에 좀 보고 올게. 내가 돌아올 때까지 방에서 나가지 마." 뭔가 말하려는 듯한 알퀘이드의 시선을 뿌리치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에 사람의 기척은 없다. 방 안에서는 들리지 않았었지만, 복도는 여럿 이 떠드는 소리로 제법 소란스러웠다. 이 플로어가 소란스럽다, 는 이야기 는 아니다. 소리는 발 밑에서 들려왔다. 아래층은 굉장히 소란스러웠고, 대 충 몇 사람 쯤 됨직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아마 방금 전의 진동으로 자고 있던 손님들이 일어나서 호텔 측에 항의라도 하고 있는 거겠지. "...이상은, 없으려나" 복도를 걷는다. 아래층에서 들리는 웅성이는 소리는 마치 파도소리에 닮아 있다. 소란스러운데도 - 지독할 정도의 고독함마저 느끼게 하는, 한산한 소 음. " - !?" 나이프를 쥔 손끝이 얼어붙는다. 머리 뒤쪽으로 싸늘한 한기가 돈다. 무 엇인가, 관자놀이 근처에. 안구의 안쪽에서 통증이 밀려드는 듯. 이를 참아내며 일렁이는 복도를 걷는다. -------------------------------------------------------------------------------- " - " 아파. 눈이, 아파. 머리가 무거워지고 그대로 쓰러져 버릴 것만 같은 부유 감. 그래, 알고 있어. 이건 틀림없이 빈혈로 쓰러지기 직전의 감각이야. "하아 - 아" 아파. 아프기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안경을 벗었다. 엘리베이터가 보인다. 긴 복도다. 여기서 엘리베이터까지 약 10미터 이상은 남아있는 것 같다. - 그때 딩동, 하는 벨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는 11층에 멈춰섰다. " - " 엘리베이터 문에 [선]이 보인다. 아니, 그건. 너무나 농밀(濃密)해서 완전 히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문이 열린다. 좁은, 철 상자가 열린다. 상자의 안에는. 사람의 육체가. 엘리베이터라는 철로 된 상자. 인간의 붉은 살점이 압축되어 가득 채워져 있다. 그 안에 두 마리의 검은 개가 무엇인가를 게걸스럽게 뜯어먹고 있다. " - !?" 호흡이 멈췄다. 뇌가 사고활동을 거부하듯 폐도 그 활동을 거부했다. 숨을 쉴 수가 없어.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시계가 붉게 변해간다. 무엇인가 터져 나오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에서 피가 넘쳐나온다. 피와, 사람과, 팔과, 다리와, 뼈와, 뇌와, 손가락 과, 내장의 바다 속에. 두 마리의 검은 개들 만이 유일한 살아있는 생명이 었다. " - " 이성이, 이 광경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복도 끝, 엘리베이터 안에 서는 두 마리의 검은 개들이 인간의 육체를 탐하고 있다. 가만히 귀를 기울 여보니 아직 아래층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 잘 들어보니. 우적우적 대며 고기를 씹어먹는 소리, 살려달라는 비명소리, 더 이상 사람의 언어라고는 할 수 없는 인간의 단말마. 어떻게 이런 일이...보이지도 않는데 내 눈에는. 몇 십 마리나 되는 짐승들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고 있는 호텔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복도를 도 망쳐 달리는 남자. 하지만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는 표범의 발톱이 남자의 코에서 후두부까지를 마치 젤리처럼 갈라놓는다. 방에 틀어박힌 채 목놓아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소녀. 하지만 객실 문은 사자에게 있어서 마치 종잇 장과도 같았고, 그리고 몇 초도 걸리지 않고 소녀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모 습으로 변해버린다. 저기 복도 끝 엘리베이터로 몰려드는 사람들. 하지만 엘리베이터 안에는 몇 십 마리나 되는 검은 개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어 엘 리베이터가 열리는 바로 그 순간 전원의 머리가 잘려나가 버린다. 어쨌든 어느 누구 한 사람의 예외는 없다. 내 발 밑의, 호텔이라는 거대한 상자 속. 그곳이,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는 지옥의 풍경이었다. "웁 - " 토할 것 같다. 하지만 토하면 안 돼. 그렇게 되면 - 나도 저 붉은 바다와 한 덩어리가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하 - 아. 하. 아. 하," 멈추어 있는 호흡을 재개한다. 이를 서로 꾹 악물었다 엘리베이터 안의 개들이 나의 존재를 알아차린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더 이상 아래층에서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하" 그 말은. 더 이상 살아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인가. 크르르르르르르르... 두 마리의 검은 개가 달리기 시작한다. 당연히 최후의 사냥감인 나를 향해 서. "하 - 아" 검은 개가 달려오고 있다. 그 몸에는 무수한 선이, 그 이마에는 죽음의 점 이 보인다. - 그럼에도. 마비되어버린 머리는 내 몸에 싸우라고도 도망치라고도 지시를 내리지 못하 고 있었다. 한 마리의 검은 개가 뛰어오른다. 검은 개들의 스피드는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십 미터 정도의 복도 쯤, 거의 2초도 걸리지 않았다. 검은 개가 아 가리를 벌린다. 내가 가진 나이프보다 몇 배나 더 날카로운 이빨이 톱날처 럼 늘어서 있는 아가리가, 정확히 내 목덜미를 향해 달려든다. 확실히, 그 리고 신속하게. 검은 개들이 덮쳐온다고 인식한 순간. 검은 개의 이빨이 내 목에 파고들었다. 토노 시키는 죽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이 정도로는 죽을 리도 없고, 죽을 수도 없어. 난 사람이 죽는 것 정도에는 망설이지 않아. - 여름의, 어느 더운 날. 오래 전, 혹은 8년도 더 된 옛날. 난 이보다 더 끔찍한 광경을 직접 목도하고 있지 않았던가 - 푹. 목덜미를 물고 있는 검은 개의 이마에 나이프를 찔러넣었다. 검은 개가 내 머리를 물고는, 그대로 머리를 물어뜯으려 하기 바로 직전의 순간 팔이 움 직였다. 나로서도 정신이 없다. 마치 사물을 자르는 기능 밖에 없는 기계와 도 같이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바로 앞의 개의 미간에 나이프를 찔러넣는 다. 거기가 첫 번째 개의 [점]이었으니까. 보통, 뇌가 파손되더라도 전신의 근 육들은 뇌가 내린 명령을 실행하려고 한다. 아무리 뇌가 꿰뚫렸다 한들 검 은 개의 아가리는 내 머리를 물어뜯어버리겠지. 아아, 뭐 - 그, 보통이라면. 하지만 검은 개는 [죽음]에 이르렀다. 죽음은 정지다. 검은 개는 내게 죽임을 당한 시점에서 모든 효력을 잃고 말 았다. 첫 번째 개가 지면에 뒹군다. 이와 교대라도 하듯 - 두 번째 개가 이번엔 내 얼굴을 향해 달려든다. " - " 쩍 벌린 아가리 안에 나이프를 찔러넣는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행동이었 다. 이 녀석의 [점]은 얼굴이 아닌 가슴에 있다. 아가리를 찔렸다 한들 즉 시 죽음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나이프는 검은 개의 아가리에서 후두부까지 관통했다. 자연히 나이프를 쥔 손은 검은 개의 아가리 안에 들어가 있다. " - 아" 검은 개는 아직 살아있다. 턱이 닫힌다. 나이프를 쥐고 있는 손과 팔 사이 의, 연골이라고 하는 부드러운 조인트 부분이 그대로 잘려나가려 하는 순간 이다. 그 통증으로 겨우, 사고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 - 아 - !" - 이게 뭐야! 어째서 - 어째서 내가 개의 아가리에 나이프를 찔러넣어서는 자신의 팔을 뜯어먹히게 하려는 거냐고! "이 - 이...!" 어떻게 어떻게 팔을 빼내 보려고 한다. 개의 이빨은 팔을 물고 늘어지고 있 어서 아마도 빠질 것 같지 않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 검은 개는 머리를 꿰뚫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에너지가 충만해 있었다. 나한테 입에서 머리까지 꿰뚫린 주제에. 검은 개는 몸을 흔들어 내 위로 덮쳐올라온다. "큭...!" 쿵 하고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래도 팔은 빠지지 않는다. 검은 개는 나 이프에 꿰뚫린 채 더욱 더 턱에 힘을 준다. "~~~~~~~~~~~!" 파, 팔이 끊어질 것 같아 - ! 말도 안 돼, 개라는 동물은 이런 상태에서 먹 이를 물고 늘어지는 생물이 아닐텐데...! "윽, 이, 이자식이...!" 미끈한 감촉. 자세히 보니 검은 개의 입가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다. 나이프로 머리를 꿰뚫린 검은 개의 피인가. 아니면 개에게 뜯어먹히려 하는 내 팔에서 흐르는 피인가. - 솔직히 그런 것 따위, 아픔보다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저리 - 가" 검은 개에서 도망치려고도 해봤지만 검은 개는 내 팔을 꽉 물고 있다. 도망 칠 방법이 없어. 도망칠 수 없어. 도망치고 싶으면 - 이녀석을 [죽일 수] 밖에 없어. " - 윽...!" 하지만, 어떻게? 한쪽 팔은 뜯어먹히려 하고 있고 나이프 역시 그쪽 팔에 쥐어져 있다. 나는 검은 개에게 밀려 넘어져 있고 만약 이대로 팔을 뺄 수 있게 된다 쳐도 다음 순간 마찬가지로 자유의 몸이 된 검은 개의 이빨이 내 머리를 부순다 - "하 - 아" - 괜찮아, 진정해 시키. 우선 자세히 보고 그 다음 일을 생각하자. 그런 가 르침을 지금까지 쭉 지켜왔잖아. 그럼 - 어떻게든 될 거야. 자세히 보니, 검은 개의 뒤통수 쪽에 꽤 많은 수 의 [선]이 보인다. 검은 [점]은 이녀석의 가슴에 있다. 살아남기 위한 방법 은 너무도 심플하다. 하지만 그걸 실행하기에는 조금 망설임이 있었다. 아 무리 흉폭해도, 아무리 악한 생물일지라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가쁜 숨 을 내몰아쉬며 살아있는 동물을 죽인다는 것은 - 절대로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로서는 힘든 일이다. "큭 - !" 팔에 가해지는 힘이 한층 더 강해진다. 이대로라면 한쪽 팔이 뜯겨져 나갈 텐데도. 아무래도 나는 그런 잔혹한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 붉은 핏방울이 얼굴에 떨어진다. 붉은 피가 이마에서 눈 속으로 흘러들어온 다. - 안구의 안쪽에 붉은 빛의 어둠이 퍼져간다. "빨갛 - " 의식이, 멀어진다. ...하지만 나는, 살아있는 생물을 죽일 수 없다. - 같잖은 위선. 그런 네놈은 그런 개뼉다귀 따위보다 더 큰 동물을 죽였었 잖아. ...아아, 그랬었지. 하지만 그 때와는 달라. 알퀘이드를 죽였을 때의 토노 시키는 제정신이 아니었어. 좀 전에 검은 개를 죽였을 때 역시 내 의사와는 아무런 관계 없이 이루어진 일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나 자신의 의사를 확 실히 가지고 있어. 선생님이 말씀하셨잖아, 시키. 이 힘은 다른 사람도 아 닌, 토노 시키 자신의 의사로 행사하라고 말야.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으로 있는 한, 절대로 생명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돼. - 그것도 위선. 왜냐하면, 넌 아주 오래 전에 - "아 - " ...그건 어렸을 적에 꿨던 악몽. - 야, 뭘 망설이는 거야. ...그건 더운, 여름날에 일어난 일이었다. - 죽이지 않았으면 내가 죽었을테고. 눈 앞에는 피로 얼룩진 소년의 그림 자. - 넌 이미 ...내 손에는 뜨겁디 뜨거운 붉은 피가. - 한 번, 사람을 죽인 적이 있잖아 - !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찔렀다. 팔을 빼는게 아니라 더욱 검은 개의 머리를 찔러댔다. 형용할 수 없는 신음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온다. 검은 개가 우는 소리겠지. 입 안에 팔이 들어가 있어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하는 주제에 울고 있다. 분명히 그 만큼 아프다는 거겠지. 상관없어. 물려있는 팔 째로 나이프를 더 깊숙히 찔 렀다. 소리 없이 나이프의 날이 검은 개의 후두부에서 튀어나온다. 마치 뿔이 난 개 같다. 두개골을 깨고 가죽을 손쉽게 절단하고. 피와 뇌수를 산산이 흩뿌 리며 나이프는 완전히 검은 개의 후두부에서 튀어나온다. 참고로, 나이프를 쥐고 있던 토노 시키의 팔도 머리를 완전히 박살내며 그 뒤를 따랐다. "하 - 하, 아" 하지만 검은 개는 아직 살아있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하나 뿐이다. 다른 쪽 팔을 뻗는다. 피범벅이 된 손가락에서 나이프를 떼어내 자유롭게 움직이 는 팔로 나이프를 고쳐잡는다. 그대로 검은 개의 가슴에 난 [점]을 찔렀다. "하 - 아" 검은 개는 그대로 죽었다. 턱을 죄고 있던 힘도 사라져 팔은 싱겁게 쑥 빠 져나온다. "뭐야 - 하나도 안 먹혔잖아." 피투성이가 된 팔을 본다. 확실히 이빨 모양의 상처는 남아있지만 살점은 거의 뜯겨나가있지 않다. 이 피는 머리를 꿰뚫린 검은 개의 것이겠군. 개에 게 물린 통증은 매우 사소한 것으로, 내가 느낀 공포가 아픔을 몇 배로 부 풀려 느끼게 했던 것 뿐이다. "하 - 아" 지면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본다. 머리가, 아파. 세계는 완전 누더기 상태였고 여기저기에 검은 죽음의 점들 도 보이고 있다. 몸은 벌써 차갑게 식어있음에도, 단지 이성만이 열병으로 신음하고 있다. " - 크" 바로 곁에 있는 두 마리 검은 개의 시체. 한쪽 팔은 피로 범벅이 되어있고 다른 한쪽 팔에는 붉은 나이프가 쥐어져 있다. 참고로 바닥 아래쪽 층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사람들의 시체가 있다. " - 하, 하하, 하하하" 웃을 수밖에 없어. 왜냐하면, 이건 현실이 아니니까. 이런게 현실일 리가 없어. 난 언제부터 눈 뜬 채로 악몽을 볼 수 있게 되어버린 거지 - ? 딩동. "에 - ?" 전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밝은 벨소리가 들린다. "제길, 뭐야 이 두통은 - " 날카로운 물건으로 여기저기 찔려대는 듯한 두통을 견뎌내며 자리에서 일어 선다. "엘리...베이터...?" 방금 전의 소리는 또 다른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소리인 것 같다. 문이 열린다. 그 안에는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두통이 한층 더 심해진다. "저놈은 - " 그래, 본 적이 있어. 아마도 나는 저 남자를 본 적이 있을 거야. " - "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이쪽으로 향한다. "너 이자식 - !" 나이프를 거머쥐고 남자를 노려본다. " - " 하지만 남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걷기만 한다. 나 같은 건 완전히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 거리가 좁혀진다. 거의 - 약 1미터 정도 떨어진 곳까지 다가와서야 남자는 겨우 내 존재를 알아차린 것 같다. 핏발이 선 눈. 인간의 눈이라고는 생각 할 수조차 없는 남자의 눈을 본 순간, 내 몸의 자유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 다. "몰살시킨 줄 알았더니 아직 남아있었나." 남자는 복도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두 마리의 검은 개의 시체를 쳐다 본다. "쓰레기 같은 놈들. 고깃덩이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내 육체에 머 물 자격은 없다." 남자는 불쾌한 듯 중얼거리며 한 손을 들어올린다. 코드가 마치 망토처럼 펼쳐 올라간다. - 무너지고 있어. 검은 개들은 마치 무엇인가 녹아내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액체가 되어 남자 의 코트 속으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아 - "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남자의 코트 아랫부분은 칠흑같이 검었고 대 강의 윤곽 밖에 잡히지 않았다. 거기 있는 것은 다만 검은 어둠이었다. "제기 - " 위험해. 이유야 어찌됐든 이놈은 너무 위험해 - 본능이 그런 위험신호를 울 대고 있음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조차 없다. 검은 코트가 다가온다. " - !" 이대로 여기 있으면 안 돼. 아까부터 계속되고 있는 두통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지면서 여긴 위험하다고 계속 외쳐대고 있다. 어떠한 수단, 어 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빨리 여길 벗어나지 않으면 다 죽은 목숨이라고. - 하지만, 이미 늦었다. 눈 앞에는 남자가 있다. 그 눈동자는 날 바라보고 있지 않다. "삼켜버려" 코트의 한쪽 팔이 위로 올라간다. 그 아래의, 혼돈과도 같은 어둠. 거기서 뭔가 거대한 물체가 나타났다. 날카로운 바람 가르는 소리가 울린다. 남자의 코트 밑에서 나타난 '그것'은 인간을 한입에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은 악어의 입이었다. "아 - " 죽어. 휴지 구기듯 한 방에 찌부러질거야. 그렇게 확신한 바로 그 순간, 누 군가의 손이 내 몸을 뒤쪽으로 잡아끌었다. " - !?" 이럴, 수가. 악어의 턱은 내가 아닌, 내 몸을 잡아끈 알퀘이드의 배를 덮쳤 들었다. "윽 - !" 알퀘이드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알퀘이드는 악어 아가리에 완전히 물려버리기 바로 직전 뒤쪽으로 몸을 빼냈다. "........." 남자는 말없이 알퀘이드를 응시한다. 시뻘건 피로 흥건히 젖어든 배를 부여 잡고, 알퀘이드는 괴로워하며 증오에 찬 시선으로 남자를 노려본다. " - 웃기지도 않는군. 혼돈이라고 이름붙여진 흡혈종이, 이런 무가치한 게 임 같은 걸 걸어올 줄이야. 무슨 지독한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아, 네 로 카오스." "동감이다. 나도 신소의 생존자를 손에 넣는다는, 그런 무모하기 짝이 없는 축제의 집행자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 나에게 있어서도, 이건 악 몽이야." 네로, 라는 남자는 조용히 팔을 내린다. 코트는 원래대로 돌아갔고 악어의 아가리도 코트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남자는 알퀘이드만을 바라본다. 알퀘이드에 가려져 그 뒤에서 나이프를 꼬 나쥐고 서 있는 내 모습 같은 건 전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이. "그런데, 이건 어떻게 된 일이지? 내 앞 대의 집행자는 네놈한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고 하던데 그것 참 이상한 일이로군. 지금 네놈의 존재규모는 너무나도 취약하기 짝이 없어. 일개 망자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그 쇠퇴한 모습 - 내가 오기 전에 교회 놈들에게 습격이라도 당했나, 알퀘이드 브륀스타 드." "........." 알퀘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남자는 감정이 메말라버린 듯한 눈으로 알퀘이드를 응시한다. "...이해를 할 수가 없군. 네놈에게 해를 입힐 수 있을 정도의 개념무장은 극히 제한되어 있을 터. 그러한 것들을 보유하고 있는 건 교회의 놈들 뿐이 지. 허나 이런 극동의 땅덩이에 매장기관 놈들이 파견되었으리라고는 생각 할 수가 없는데"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휙 하고 등을 돌린다. "허나, 이유야 어찌됐든 내게 있어서는 천재일우의 기회다. 네놈이 그렇게 까지 약해지게 된 시비는 가리지 않겠다. 승기가 있을 때 그 머리를 가져갈 뿐." "윽...!" 나이프를 고쳐잡고 남자의 공격에 대비한다. 그러나 - 그 머리를 가져가겠다고 말했으면서 남자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한다. 남 자는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유유히 엘리베이터에 탄 채 그대로 우리가 서 있는 복도에서 퇴장해 버렸다. " - 얼라?" 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네로 카오스란 남자에 대해서도, 날 덮친 두 마리의 개에 대해서도, 이 호텔을 덮친 악몽같은 현실도! "시 - 키" 알퀘이드가 내 몸에 기대어온다. "아 - " 상처가 깊다. 배의 상처의 출혈은 이미 멎었지만 알퀘이드의 표정은 고통으 로 일그러져 있다. 그건 겨우 몇 초 전 - 저 사나이에게서 날 감싸려다가 입은 상처였다. "너 - 왜" "...응, 좀 방심했나봐. 저 정도라면 시키를 구하고 나도 가볍게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 과연...시키한테 입은 상처,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던 모양이야." 알퀘이드는 고통으로 일으러진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어보인다. "바 - " - 보고 있을 수가 없어. 그런 - 나를 감싸려다 입은 상처에, 거기다 그 원 인마저 나한테 있는데 - 그런 바보 같은 웃음을 지어보이면 어떻게 하라고. 알퀘이드는 내게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으려 한다. "...자, 잠깐...어째서 눈을 감는 거야, 이 바보야! 정신차려! 너, 밤에는 안 죽는 흡혈귀잖아...!" "...그렇긴 하지만 말야...나, 아무래도 한계인 것 같아..." "무슨 - " "미안한데, 집까지 좀 데려다줄래?" 내 몸에 알퀘이드의 체중이 실린다. " - 자, 잠깐...그런 - " 멋대로 죽어버리면, 나는 - "야 - !"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알퀘이드를 소리쳐 부른다. 그때. "...쿨 - " 너무도 행복한듯이 느껴지는 숨소리가 들려온다. "........." ...하아...괜히 걱정했네. 알퀘이드는 아무래도 그냥 잠이 든 모양이다. "...집까지 데려다달라고? 또 제멋대로 그딴 소리나 하고 - " 정말로 멋대로 내뱉은 소리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어쩔 수가 없다. 게다 가 더 이상 호텔에 있으면 뭔가 엄청나게 안 좋은 사태에 휘말릴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큭" 두통은 멈추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도 좀 쉬지 않으면 곤란한 지경에 처해 질 것 같다. "...알퀘이드 네 집이라 - 아아, 거기군." 한 번 밖에 가본 적은 없지만 장소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래 머물러 있어 봤자다. 나는 알퀘이드를 끌어안고 서둘러 호텔을 빠져나 섰다. 거리는 조금 밝아져 있다. 운 좋게도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시각 이라 알퀘이드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 그래서였군." 거기까지 와서야 겨우 네로 카오스가 자리를 뜬 이유를 알게 됐다. 거리엔 희미하게 새벽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벌써 날이 밝은 듯 하다 - <3. 검은 짐승 I - 끝> -------------------------------------------------------------------------------- <4. 검은 짐승 II> 알퀘이드 네 집은 흡혈귀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내장을 하고 있었다. 그땐 알퀘이드를 죽이는 일이 정신이 팔려 집안이 어떻게 생겼는지까지 미처 파 악하지 못했었지만 이렇게 보니 정말 평범한 일반인 분위기의 방이다. "...신문도 매일 읽고 있는 것 같고...이자식, 대체 뭐야...?" 중얼거리면서 알퀘이드를 침대 위에 눕혔다. "하 - 아" 바닥에 앉아 크게 심호흡을 한다. 이제 막 6시가 되려는 참이다. 밖은 제법 밝아져 있었지만 하늘은 잔뜩 구름이 끼어있다. "...아참. 커튼 쳐놔야지." 피로에 지친 몸을 재촉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 안의 커튼을 모두 치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털썩 - 앉으려고 하자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바람 에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 - 어라. 나도 꽤 피곤한 모양인데." 나로서도 한심스럽긴 하지만 몸을 제대로 일으켜 세울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엔 알퀘이드랑 쭉 이야기하고 있었는데다가 제대로 된 식사를 하루 이상이나 하지 않고 있다. 거기에 - 안경을 끼고 있어도 두통이 사라 지지 않고 있는데다 머리 속마저 아까부터 마치 이곳저곳 삽으로 파내고 있 는 듯한 상황이었다. "...알퀘이드...다친 거, 괜찮으려나..." 출혈도 멈췄고 수십 조각으로 토막나도 멋대로 되살아나버리는 녀석이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지도 모르지만... "...어째서, 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서 피로에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 같은데도. 지금은 나 자신보다 알퀘이드의 용태가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 [ - 이번 충돌사고는 피해자인 다카다 요이치 씨의 오토바이 브레이크 페달 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을 일으켜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 상황에서 급한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일으킨 사고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부상자는 2명, 다 행히 사망자는 없었습니다]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하지만 별다른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남자의 목소리에 잠을 깼다. "응 - 잠들었었나...?"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바닥에 누워있는 상태였고 몸에는 시트가 덮혀있었 다. 정오를 조금 지난 시각. 침대 위에 알퀘이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그저 켜져만 있을 뿐인 TV에서 계속 재미없는 뉴스만 흘 러나오고 있었다. "...어디 간 거야, 알퀘이드..." 부엌에서 인기척이 났다. "바보같이...그 꼴로 어딜 돌아다니는 거야." 시트를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빨리 부엌에 가서 알퀘이드의 상처를 확인해야만 해. [다음 뉴스입니다. 오늘 새벽, 미나미 야시로기 시에 있는 호텔에서 대규모 의 행방불명자가 생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 - " 발걸음이 우뚝 멈추어선다. 시선이 TV 브라운관에 비친 뉴스 캐스터에 집중 된다. [호텔에 묵고 있던 103명의 행방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경찰 은, 호텔 내부 곳곳에서 혈흔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특정 범죄에 관련된 사건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무슨 - 소리하는 거야. 혈흔이라니, 그건 - 혈흔이라고 부를만한 게 아니 라구" 뉴스 캐스터는 담담히 보도내용을 읽어내려간다. 화면은 새벽녘까지 내가 머물러 있던 호텔의 모습과 행방불명 되었다고 여겨지는 103명의 숙박객들 의 이름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나와 알퀘이드의 이름은 - 당연하다는 듯이 나오지 않는다. [또 호텔 내부에서는 야생동물의 털이 대량으로 검출되었다고 합니다. 개와 늑대, 곰 종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털이 검출되었다는 점에서 경찰 은 숙박객 행방불명 사건과 관계된 인물에 의해 놓여진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는 수십 종류의 동물의 털이 검출되었으며, 또 한 현장과 아무 연관성도 없어보이는 상어의 이빨 흔적까지 검출 - ] TV의 스위치를 껐다. " - " 백 명. 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 시간, 겨우 30분이라는 시간 동안 일방 적으로 살해당했단 말인가. 혈흔 - ? 행방불명 - ?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 왜, 똑바로 이야기하지 않는 거야. 다 알고 있으면서. 저 호텔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뭐가 뭔지 알 수도 없는 짐승들한 테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잡아먹혔다는 사실을. "큭 - " 토할 것 같았지만 참았다. 어젯밤 일을 일일이 떠올려가며 토하는 짓 따위, 난 못해. 그렇게 남을 동정해봤자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저 호텔에 있었던 사람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나에게 있어 사건의 원흉을 증오하는 것 이외 에는 용납되지 않아. 백 명이야. 백 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 원형조차 남기 지 못하고 단지 피 튀긴 흔적만을 남겨놓고 살해당했어. 검은 코트의 사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놈이 이 사건의 원흉이라는 건 분명해. - 마음이, 아직 마비되어 있는 건가. 공포나 혐오감보다, 증오심이 앞서 있다. 아니면 - 내 가슴 속에서 소용돌 이치고 있는 감정마저도 공포의 한 종류인 것인가. "이런 - 빌어먹을" 빠득 하고 이 갈리는 소리가 난다. 분한 건지 두려운 건지, 그렇지 않으면 기분 더럽고 불쾌한 건지. 나는 저 검은 코트의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엇인가를 때려 부숴버리고 싶을 정도로 초조한 마음이 든다 - "일어났어, 시키?" 알퀘이드가 부엌에서 고개를 내민다. " - 아" "왜?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하고 있어?" 알퀘이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말을 건다. "........." 방금 전까지 복받쳐오르던 기분은 알퀘이드의 말 한 마디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알퀘이드 - 저기, 다친덴 어때?" "응, 일단은 괜찮은 것 같아." 알퀘이드는 여유 넘치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알퀘이드는 왠지 예전 모습으 로 돌아간 것 같았고 어떻게 보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나보다 더 활기가 넘치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 " 적어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무사해서 다행이야. "...응?" 어라, 잠깐. 알퀘이드는 인간이 아니었지, 참. 그런 대전제를 까먹고 있었다니, 주변 사 람들 말대로 토노 시키는 정말 너무 멍해서 탈이로구만. "...그래도 뭐...어쨌든 다행이야. 알퀘이드가 많이 안 다쳐서." "헤에? 왜 그래 시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날 괴물취급 했으면서." "바보야, 얼마 전까지가 아니라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거 랑 그거랑은 별개 문제고...날 살려줬으니 감사인사 정도는 해야지." "에? 살려줬다니, 내가 시키를?" 알퀘이드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무래도 알퀘이드 본 인은 날 살려줬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응, 네가 날 살려줬어. 그러니까...좀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살려줘서 고마워. 네가 뒤에서 잡아당겨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나도 103명의 명단 속에 들어가 있었을 거야." "고맙다니 - 그런 생각 안 해도 되는데...시키가 네로하고 만나게 된 원인 은 나한테 있으니까 시키한테 고맙다는 인사 들을 처지가 아닌걸." "그건 그렇지만, 날 살려준 건 사실이잖아. 알퀘이드가 날 살려줬으니까 그 점에 대해서 만큼은 정말로 감사하고 있어." " - 그치만, 시키가 내 보초역을 맡지만 않았어도 그런 꼴은 안 당했을 거 야. 시키의 생활에 불편을 끼친 건 나라구. 그러니까 시키가 날 미워했으면 미워했지 감사 인사 같은 건 안 해도 되는 거 아냐?" "...그야 뭐...확실히 그 일에 대해서는 운이 좀 없었다고 생각해. 하지만 말야, 난 내가 한 행동은 결국엔 나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한참 옛날에 그런 사실을 내게 가르쳐 준 사람이 있었지. 주변상황 이 어떻든, 스스로의 의사로 행한 일은 스스로가 끝장을 보라고 말야. 당연 한 소리지만, 나도 그 생각에는 찬성이야." 그러니까 알퀘이드를 미워한다든가 하는 기분은 안 들어. 그냥 뭐, 왠지 재 수 없는 사건에 휘말려 버렸다고나 할까...그런 느낌 정도. " - 그래...듣고 보니, 보디가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원인은 시키가 날 죽였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럼 시키를 이런 일에 끌어들인 거에 대해 미 안하다고 할 필요는 없다는 거네?" "바로 그거야. 자업자득이란 거지, 지금의 나는..." "자업자득이라~~응, 시키는 여러 가지 의미로 운이 참 안 좋아. 사람을 죽 였어도 나 말고 다른 애를 죽였더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텐데." "...어이..." 어쩌면 알퀘이드 이외의 다른 누군가를 죽였을지도 몰라, 라는 가정은 성립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그대로 상대의 뒤를 쫓아 그 상 대를 살해한 케이스는, 현 상황에 있어서 알퀘이드 하나 밖에 없으니까 말 이다. ...아니, 알퀘이드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싶군. " - 아" "왜? 뭐 잊어버린 물건이라도 있어?" "아니, 그런게 아니라...지금까지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말야, 내가 왜 널 죽이려고 했을까?" 알퀘이드는 얼굴을 찡그리고 날 바라본다. 뭐...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 랄까. 자신을 살해한 본인이 자신을 왜 죽였는지 도무지 종잡을 줄 모르고 있으니까. "이유 같은 건 없는 거 아닐까? 시키, 뼈속부터 살인귀니까 말야." " - 에?" 어, 어이어이...지금, 이 여자가, 나한테,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인 거야 - ? "날 덮쳤을 때만 해도 굉장히 익숙해 보였는걸. 벨을 누르고, 문이 열리는 바로 그 순간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어 대고는 뭐라고 말할 틈도 안 주고 안 으로 밀어닥쳤어. 내가 놀라고 있는 동안 첫 방으로 확실하게 생명활동을 정지시키고, 그 다음엔 썩둑썩둑 사방팔방 잘라버리고 - 응, 정말이지 완벽 한 습격이었어. 얼마만큼 완벽했느냐 하면...응, 그 때의 시키 모습을 그대 로 그림 속에 담아넣어두면 세상에 둘도 없을 정도의 예술품이 되었을 지도 모를 정도로 완벽했었어." "그래 - " "하지만, 초절기교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살인기술을 갖고 있었다 해도 이 번엔 상대를 잘못 만났어. 시키가 지금까지 몇 명이나 죽였는지는 모르겠지 만, 그 사냥감으로 날 고른 시점에서 이미 상황은 디 엔드였던 거 아닐까?" "어, 그래" "[어, 그래]라니...뭐야! 아까부터 무서운 얼굴 해가지고. 말하고 싶은게 있으면 말하면 되잖아? 나랑 시키 사이에, 이제와서 숨길게 뭐가 있다고 그 래?" - 아아, 듣고 보니 그럴지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퀘이드에게 잠깐 보자는 듯 손짓을 한다. "뭐야? 비밀이야기 같은 거야?"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알퀘이드가 가까이 다가선다. 알퀘이드의 한쪽 귀에 입을 갖다대고는, 말하고 싶은 내용을 확실히 전해줬다. "...어이, 알퀘이드." "응, 왜 그래?" 하나 둘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 이 바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바보야~~, 바보~~, 보오~~, 오~~......... 방 전체에 메아리가 울려퍼진다. 사정없이, 그것도 풀 파워로 내지를 수 있 는 최대한의 음량을 알퀘이드의 고막에 쏟아부었다. "아...우..." 알퀘이드는 귀를 꼭 막는다. "뭐하는 거야, 정말!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시키!" "지금 화를 낼 사람이 누군데! 뭐 또 이상한 소리하나 싶어서 보니, 너... 그랬던 거였군!" "에 - ? 그랬던 거라니, 뭐가...?" "네놈이 날 사이코 살인귀로 믿어버리고서는 저런 괴물 상대로 보디가드를 하라느니 보초를 서라느니 한 거 말야! 거참...무슨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는 거야. 나에 대해 뭔 소리 하는가 싶었는데 결국은 그런 거였단 말이구 만. 잘 들어. 말 나온 김에 말해두는데, 난 살인귀도, 그렇다고 살인광도 아냐. 사람을, 사람을 죽여본 건 너 때가 처음이었단 말야."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알퀘이드. 제길...내 발언이 어지간히도 의외 였던 눈치잖아... " - 거짓말. 그렇게 익숙한 솜씨로, 그 때가 처음이었다는 거야 시키...!?" "...그렇다니까. 확실히 나, 이런 이상한 눈을 달고는 있지만 그래도 나,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구. 이 [선]을 써서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 "그치만 - 그럼 어째서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날 죽인 거야?" "그걸 나도 잘 모르겠다니까. 길 가다가 알퀘이드를 본 바로 그 순간, 왠지 엄청 신경이 쓰여서 - 정신이 들고 보니, 내가 널 토막낸 후였어 - " 이 방에서.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 - 그래..." ...아아, 그래. 난 알퀘이드한테 화낼 자격이 없어. 아무리 상대가 살아있 고,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야. 난 실제로 알퀘이드를 내 손으로 죽였었으니까. "뭐야, 왜 또 갑자기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그래 라니...뭐가 그래야, 시키?" "...그러니까, 미안, 하다고...말하지, 않으면..." 난 - 이 얼마나 중요한 사실을 내 편한대로 잊어버리고 있었단 말인가. " - 미안. 미안해, 알퀘이드. 토노 시키는, 여기서 널 죽였어. 나, 다른 것 보다 그 일을 가장 먼저 사과했어야 하는데 - " ...정말로, 정신이 나갔어. 알퀘이드가 날 살인귀라고 착각하는 것도 당연 하지. 하지만 나 자신 스스로도 그 때의 충동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렇다면, 혹시... 토노 시키는, 정말로 살인귀일지도 몰라 - . " - 죽인 건 사실이야. 그러니까 - 나, 죄도 벌도 받지 않으면 안 돼. 이런 살인자가, 다른 사람들이 생활하는 사회를 어지럽히면, 안 되잖아." - 이제와서 그런 중요한 사실을 알아차리다니, 너무 비겁해. 아무리 알퀘이 드가 인간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이라 해도 - 토노 시키는 아무런 이유도 없 이 사람을 죽인 인간이니까. " - 그래. 정말로 시키는, 시키 본인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거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다시 말하면 즐겁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는 거지? 응...확실히 살인귀들 중 에서는 밥먹듯이 살인을 저지르는 녀석도 있지만 시키는 평상시에는 평범한 사람이지?" "...응. 일단은, 그런 거 같은데." "아니, 시키는 정말로 평범해. 그래, 죽이고 싶어진 건 나 뿐이었어?" "...응. 알퀘이드 말고는 그런 기분이 든 적이 없어." "뭐~~야, 그럼 문제될 거 없잖아. 시키는 살인귀가 아냐." 너무도 담담하게, 알퀘이드는 툭 내뱉듯이 잘라말했다. "그리고 아무 벌도 안 받아도 돼, 시키. 어쩌다가 한 번 시키가 죽이고 싶 어진 상대가 나였고 공교롭게도 시키한테는 거의 에술에 가까울 정도의 살 인기술이 갖추어져 있었지. 하지만 운 좋게도 내가 흡혈귀였던 관계로, 결 국엔 아무도 안 죽었잖아? 그러니까 시키가 그런 걱정할 필요는 없는 거야. 인간들의 사회 도덕 같은 것도 마음에 두지 않아도 돼." "...알아. 그래도 난 살인을 저질러 버렸어. 그러니까 그런 위험한 인간은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런게 무슨 상관이야? 지금 전 세계에서 시키를 탓할 수 있는 건 피해자 인 나랑 당사자인 시키 본인 뿐이잖아." " - 그건 그렇지만...널 죽였다고 하는 사실만큼은 절대로 변하지가 않잖 아." 그래. 벌은 받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죄만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 "그건 당연하지. 나도 아직 원한이 좀 남아있고 하니까, 그렇게 간단히 잊 어버리면 곤란해. 하지만 말야, 시키. 너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앞 으로도 계속 후회하면서 살아간다면 문제될 건 없는 거 아냐?" - 하지만, 그건 궤변이야. "시키. 사람들 중에는 말야, 아무리 세상을 미워한다 손 치더라도 악마에게 혼을 팔지 않는 사람이 정말로 있어. 예를 들면...흡혈귀한테 미안합니다, 하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든가 말야. 그러니까 괜찮아. 누가 뭐 라고 말하든, 시키 본인이 그렇지 않다고 잘라말하든 - 시키는, 아직 그쪽 세계에 있을 수 있어." "무슨 - " ...할 말이 없다. 잘도 - 자신을 죽인 상대한테 웃는 얼굴로 이런 대사를 말하는군. "알...퀘이드 - " "봐봐, 그런 것보다 우리들한텐 좀 더 골치아픈 문제가 있잖아. 시키도 일 어났고 하니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은데 - " 라고 말하는 순간, 알퀘이드의 몸은 바닥에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알퀘이드 - !?" 쓰러진 알퀘이드 곁으로 달려갔다. 알퀘이드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했고 괴 로운 듯 거친 숨을 내몰아쉬고 있었다. "...이런, 역시 아직은 무리인 것 같아." 알퀘이드를 잘 보니 흰 양복의 복부 언저리가 점점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너, 그 상처 - " "아, 이거? 시키한테 당한 후유증이 좀 심해서인지, 상처의 복원이 안 되고 있어. 일단 상처부위를 막아두긴 했는데 별로 효과는 없는 것 같아." 알퀘이드는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미미하게 괴로움 이 묻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겨우 눈치챘다. "막아두다니, 뭘로 막은 거야 알퀘이드...!" "아, 그러니까...그거." 알퀘이드는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작은 물건을 가리켰다. 갈색의. 언뜻 도너츠나 바움쿠헨(독일 과자)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그냥 검 테이프였다. " - 바, 바보냐 너! 검 테이프로 상처부위를 싸매는 놈이 어디있다고...!" "...뭐야. 너무 바보바보라고 부르지 말라구. 왠지 정말로 내가 바보가 아 닐까 하는 생각이 들잖아." "시끄러, 됐으니까 다친 데 좀 보여줘...!" 알퀘이드의 옷에 손을 갖다댄다. 그 순간 알퀘이드는 데굴데굴 바닥을 굴러 저만치로 도망가 버렸다. "장난치지말고, 상처가 벌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이런 것 쯤 가만히 내버려둬도...시키야말로 바보 같은 짓은 그만 해. 소녀의 옷을 벗기려고 하다니...네로보다 더 저질이야." " - 이봐요. 난 당신을 사람으로 보지 않으니까 남자 여자 구분 안 한다구. 자자, 됐으니까 얌전히 좀 있어. 날 감싸다 입은 상처 땜에 죽어버리면 난 평생 너한테 빚을 지고 살아야 되잖아...!" 알퀘이드는 불만에 찬 시선으로 날 노려보더니 데굴데굴 굴러 이번엔 내 쪽 으로 다가온다. "........." 알퀘이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마음엔 안 들어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다친 데를 봐도 된다는 이야기 같다. 옷을 걷어올리자 알퀘이드의 복부가 드러난다. 알퀘이드의 배는 검 테이프 가 둘둘 말려 붙여져 있다. 장난 아니게 난잡한 솜씨로 붙여진 검 테이프 사이사이로 희미하게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 - " 할 말이 없군...아니아니, 화가 나려고 한다. 옷을 원래대로 바로 입게하고 알퀘이드를 끌어안는다. "잠까 - 뭐하는 거야, 시키!" "침대에 눕히려고 그래. 병원에 데려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잖아?" 그 상태로 가능한 천천히 침대 위에 눕힌다. "잘 들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마. 아까처럼 이곳저곳 기 신기신 싸돌아다니면 무슨 일이 생겨도 절대로 너같은 거 나몰라라 해버릴 테니까 각오해." 방 안을 둘러본다. 생각대로 구급약 세트라든지 응급처치를 할만한 물건은 없어보인다. "알퀘이드, 너 돈 좀 있다고 했었지?" "에 - ? 으, 응. 돈 문제는 걱정 없는데, 그게 왜?" "내놔. 응급처치에 필요한 물건 좀 사가지고 올테니까...너한테 들을지 어 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친 사람한테 필요한 응급처치 정도는 해둬 야 하니까." "그거야 상관없지만, 헛수고하게 될 지도 모르잖아?" " - 그래도 할 거야. 이대로 내버려 둘 것 같냐?" "...알았어. 나도 몸의 구조 같은 건 시키 같은 인간이랑 마찬가지니까 나 름대로 의미는 있을지도 모르겠네." "알았으니까 돈 줘. 넌 닥치고 누워나 있어. 아, 근데 자면 안 돼. 누워있 어도 깨어있으라구." "끙...시키, 그거 너무 말도 안 되는 주문 아냐?" "말도 안 되는 주문 같아도 해야 돼. 잠을 자면 몸의 기능이 떨어진다고 들 은 적이 있어. 상처를 제대로 막아놓지 않은 상태에서 자게 되면 몸의 저항 력이 떨어져 버려서 상처가 덧날 수도 있으니까. 잠을 자면 피로나 회복되 지 상처나 병까지 낫게 해주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어쨌든 간에 응급처 치를 할 때까지는 잠들지 않도록 해." " - 헤에. 응, 그럼 그렇게 할게 시키." 알퀘이드는 기쁜 듯 웃는다...역시 알퀘이드의 사고회로는 이해할 수가 없 다니까... "...어이. 거기서 왜 웃음이 나오는 건데?" "그치만, 시키가 있어 든든한걸." " - " 말없이 손을 내민다. 알퀘이드는 스커트에서 지갑을 꺼내들고는 그대로 내 게 그것을 건넨다. " - 다녀올게." 알퀘이드를 뒤로 한 채,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서려다가 부엌에 있는 물건에 시선이 닿았다. " - 밥이잖아." 테이블 위에는 거시기, 식사라기 보다는 밥, 밥이라기 보다는 식료품, 이라 는 표현에 딱 어울리는 [음식물이라 추정되는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알퀘 이드가 부엌에 있었던 것은, 요컨대 이것 때문이었군. ".........바보" 알퀘이드는 보통의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게 누구를 위해 준비된 것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제길 - 대체 저녀석 뭐야..." 정말, 짜증나. 너무나도 짜증이 난 나머지 한시라도 빨리 응급처치를 할 수 있을만한 물건을 사오려고 방을 뛰쳐나섰다. -------------------------------------------------------------------------------- 하지만 응급처치라고 해도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상처부위를 막는 가제 라든지, 그것을 덮을 때 필요한 붕대 및 진통제 정도 뿐이다. 그래도 아주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아무리 사소한 물건이라도 그거라도 있으면 이미 제 로라고는 할 수 없어. 그렇게 믿고 머리 속에 떠오르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 로 사들였다. "자, 잠깐. 거기, 간지러" "........." 알퀘이드가 하는 말을 무시하며 가능한 조심스럽게 가제를 갖다댄다. 알퀘 이드의 배에 난 상처는 그렇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알퀘이드 왈, '겉 보기에는 대충 다 나았어' 란다. 하지만 악어에 물린 자국은 도합 4군데나 골프 홀 정도 크기의 검은 구멍이 뚫려있다. 이렇게까지 큰 상처에는 도리 어 역효과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병균에 의한 2차재해(이런 걸 2차재해라 고 불러야 하나?)의 위험도 있고 하니 일단 소독약을 발라뒀다. 그 후 상처 부위에 가제를 붙이고 꼼꼼하게 붕대를 감았다. "아하하하, 자, 잠깐만 기다리라니까...시키, 많이 해본 솜씬데~~" 알퀘이드는 밝게 웃고 있다. "........." 그런 알퀘이드를 무시하며 핀으로 붕대를 고정한다. 상처부위를 꽉 동여매 면 지혈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므로 붕대를 묶는 손에 힘을 더했다. " - 아야. 뭐야...방금 건 감점이야, 시키." "........." 후우.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 같군. " - 자, 일단 비슷하게 해본다고 하긴 했는데 어때. 움직일 수 있겠어, 알 퀘이드?" "응, 움직이는데 별로 불편하진 않은 것 같아. 뭐,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 니까 그렇게 만족스럽게는 움직일 수 없지만 말야." "그래? 뭐, 그건 네가 어떻게든 알아서 잘 해봐. 난 자르는게 전문이지 병 낫게 하는 건 소질이 없어서 말야." 침대에 누은 알퀘이드에서 떨어져 한쪽 벽에 기대어 앉는다. "이젠 자도 돼. 자면서 힘을 좀 회복하면 그 정도 상처는 금방 나을 수 있 지? 옆에 있어줄테니까 좀 자두라구." "아니, 잠을 자도 힘은 거의 회복되지 않아. 시키도 말했잖아? 수면으로 회 복되는 건 피로 뿐이라고. 내 경우에 힘은, 그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회복이 되지. 내일 쯤 되면 일단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까지는 회 복될 걸?" " - 알았으니까 잠이나 좀 자. 너 보면 말야, 말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힘 들어 보인다구." "그치만...모처럼 시키가 일어나있잖아. 자면 왠지 아까운 기분이 들 것 같 아서 말야." 알퀘이드는 침대에 누운 채로 상반신만 일으켜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 다. " - 거참." 할 수 없지. 나도 물어봐야 할 일도 있고, 잠깐 알퀘이드의 말상대나 하고 있을까. "알퀘이드. 어제 호텔에서 있었던 일, 물어봐도 돼?" "...그래. 역시 그 이야기 나올 줄 알았어." "아아. 묻고 싶은 건 하나야. 어젯밤의 그놈 - 넌 그놈을 네로라고 했었는 데, 그놈 대체 뭐하는 놈이야? 나 지금 진지하게 물어보고 있는 거니까, 뭐 몸에서 악어를 꺼내는 마술사라느니 하는 웃기지도 않는 소리는 꺼내지도 마." "그런 거 말할 것 같아? 시키도 알고 있겠지만, 그녀석도 흡혈귀야. 우리들 사이에서는 네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변종 흡혈귀...사실대로 말하면 이렇게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아냐." "........." 역시 그놈은 흡혈귀였던 건가. 하지만,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알퀘이드가 흡혈귀로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녀석도 흡혈귀 라는 이미지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 "거시기, 그 네로란 녀석은 대체 어떤 녀석이야? 알퀘이드랑 서로 아는 사 이인 것 같은데." "설마. 나, 흡혈귀 중에서 아는 녀석은 없어. '서로 아는 사이'란 건 말야 그 다음 순간에 어느 한쪽을 죽이게 되는 상황을 의미해. 서로 얼굴을 마주 대했으면서 헤어지는, 그런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야." "하지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었잖아." "이야기 좀 했다고 서로 아는 사이라니,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네로는 이쪽에선 꽤 유명한 흡혈귀이고, 나도 저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으니까 자기소개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 뿐이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특이한 능력을 보유한 흡혈귀일수록 이름이 널리 알려 지게 되는 건 당연한 사실이잖아? 네로는 말야, 그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존재야. 고참 흡혈귀 중 하나이면서도, 성도 영지도 갖지 않은 채 이곳저곳 을 떠돌아다니는 변종. 왜인지는 몰라도 교회 녀석들한테서는 카오스라는 또 하나의 이름까지 붙여진 것 같고." "...카 오 스? 그게 뭐야?" "혼돈이란 뜻이야. 뒤죽박죽 섞여있다는 소리지. 원시 지구처럼 여러 가지 물체가 섞여들어가 있어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라는 의미일지도 모 르겠네, 어젯밤 일을 생각해 보면 말야."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다...?" "뭐야. 시키도 봤잖아, 그 녀석의 몸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전에도 말했 었지만, 오랫동안 산 흡혈귀일수록 자신의 육체가 파손되면 점점 이를 수복 하기 힘들어지지. 벌써 몇백 년 동안이나 존재해 왔던 그릇을 수복하기 위 해서는 인간 정도의 생명력으로는 레벨이 턱없이 부족하지. 그러니까 생명 체로서 보다 우수한 소재를 가진 맹수나 마수를 흡수해서 자신의 육체로 변 환하는 거야. 네로는 흡혈귀 중에서도 최고참 흡혈귀에 속하니까 자기 몸 대신에 집어넣은 짐승의 숫자가 말도 안 될 정도로 많을거야." "말도 안 될 정도로 많을 거라니 - 저 검은 개 같은 것도 네로란 놈의 육체 의 일부란 말야?" "그래. 하지만 인간이란 그릇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스스로의 육체로 제어할 수 있는 건 겨우 30마리 정도일 거야. 마수나 환수로 구분된 환상종을 흡수 했으면 한 마리 이상은 용량이 견뎌내질 못하지. 그걸 감안해 보면 네로의 사역마들은 아마 현존하는 생물들로 구성되었을 거야...응, 그 점은 다행일 지도..." ...마지막에 한 소리는 잘 이해가 안 가지만, 어쨌든 저 검은 개 같은게 30 마리 씩이나 있단 소린가... "...아니, 잠깐. 호텔에서 날뛰고 있었던 건 검은 개 뿐만이 아니었어. 사 자라든지 표범 같은 것도 있었을걸?" "그렇겠지....같은 종류의 짐승들이라면 30마리 정도 통괄하는 건 문제도 아니겠지만, 서로 다른 종류의 짐승들을 몸 속에서 통괄하고 있다는 건 아 마 네로의 의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걸 의미하겠지. 뭐...그 정도 씩이나 되는 의사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야생동물만 몸 속에 심어놓고 있다는 건 좀 말이 안 되려나? 네로라면 좀 더 상위 클래스의 마수를 속박 할 정도의 의사력은 있을 것 같은데 - " 알퀘이드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으려나. 어쨌든 네로의 무장은 20마리에서 30마리 정 도의 사역마라는 건 알았고...덤으로 네로란 별명이 붙은 유래도 어느 정도 는 알았겠다." "에...? 그놈, 본명이 네로 아니었어?" "응. 오랫동안 살아온 시토들은 대부분 인간이었을 때의 이름을 쓰지 않아. 그렇다고는 해도 스스로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없고 보통은 교회측에서 멋 대로 명칭을 갖다붙이지. 그것도 새로운 특색이 판명된 시점에서 붙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개중에는 주문 같이 긴 이름을 가진 녀석도 있어." "...뭐, 처음에 녀석한테 네로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건 그만큼 교회측에 게서 미움을 사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호텔 같은 한정된 사냥터에서 겨우 인간 백 명 정도 사냥하는데 사자 한 마리면 충분하고도 남잖아? 그런데도 몸 안에 있는 모든 짐승을 해방해서는 일부러 그런 방법까지 써가면서 식사 를 하는...쓸데없는 짓도 정도껏 해야지." "........." ...네로라는 흡혈귀 속에 있는 30여 마리의 짐승들. 겨우 그 정도 숫자가, 그것도 30분이 채 못 되는 시간 동안 호텔 안에서 패닉 상태에 빠져있던 백 여명의 사람들을 남김없이 먹어치웠단 말인가. " - 말도 안 돼. 그거, 완전히 괴물이란 소리 아냐." "그래. 네로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상대야. 가능한 만나고 싶지 않은 부류에 속하지. 하지만 무엇보다 최악인 점은 놈에게 우 리가 어디있는지를 들켜버렸단 사실이야.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이곳은 틀 림없이 네로의 사역마들에게 감시당하고 있을 거야." "뭐 - " "당연한 걸 갖고 뭘 그래? 아까는 해가 떴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지만 오 늘 밤엔 그런 것도 기대할 수 없어. 이쪽의 위치가 알려진 이상, 오전 0시 라는 최고의 타이밍에 우리들을 죽이러 찾아올 거야." "죽이러 찾아온다니, 오늘밤에...?" "응. 네로 자신이 그렇게 말했었잖아." - 그게, 무슨 소리야. 녀석이 - 저 검은 코트의 사내가 오늘밤 습격해 온다 는 말야? " -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도망치자고 말하는게 일단은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는 건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알퀘이드는 지금 다친 몸이야. 설사 도망친다 하더라도 저런 괴물을 상대로 무사히 도망칠 수 있으리라는 보장 도 없어. 아니, 알퀘이드가 아닌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여기 있으 면 - 알퀘이드에 관련돼 있으면 틀림없이 녀석과 만나게 돼. 녀석은, 위험해. 솔직히 말해서 정상이 아냐. 몸 속에 수많은 동물들이 우 글댄다든지 하는 사실 이전에, 그 녀석의 눈은 완전히 기계 그 자체였어. 감정이라는 건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저 이미 정해져버린 일만을 당연한 듯 처리하는, 진짜 살인귀의 눈이었어. 무슨 일이 있어도 관계되어 서는 안 되는 상대라는 건, 한 번 죽을 뻔 했던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 어. " -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퀘이드를 버려두고 혼자서만 도망칠 수 있을까? 알퀘이드가 인간이 아닌 그 무엇이든지 간에, 날 감싸다가 다친 상처 때문 에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게 된 녀석에게 '그럼 열심히 해봐' 같은 소리나 내뱉고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 "알퀘이드, 나 - " "하지만 안심이야. 시키라면 네로 같은 건 상대도 안 되잖아? 넌 상대가 무 엇이든지 간에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니까." " - 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당연한 듯이, 알퀘이드는 말했다. "자, 잠까 - 너, 지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무슨 소리냐니, 나랑 같이 싸워줄 거지, 시키?" 알퀘이드는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날 완전히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는 듯한 눈빛으로. 하지만 이건 장난이 아니라구. 나는 - <1. 될 수 있으면 거절, 하고 싶긴 하지만... - 선택> -------------------------------------------------------------------------------- - 거절하자. 거절해야만 해.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런 녀석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그런 상대가 아니니까. " - 알퀘이드. 미안한데, 나 - " 내버려 두는 거야? 나 때문에. 토노 시키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이 여자를. " - 나 - " 도망치는 거야? 그렇게나 - 많았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살육한 괴물한테서. 못 본 척 도망치는 거야? 혼자만 살아 남겠다고 아무 양심의 가책도 없이 도망치는 거야? " - " 나한테만 보이는 죽음의 선. 이 힘은, 이것이 필요한 순간이 언젠가 올 것 이기에 존재하는 거라고 소중한 사람한테 그렇게 들었는데도 - ? " - 시키?" "...아아, 알았어. 이제와서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짓 따위 할 수 있 을 리가 없잖아."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고 크게 한숨을 몰아쉰다. 마침내 각오를 굳혔다. "좋아 - 도와줄게, 알퀘이드. 그게 저 호텔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인 내 의무인 것 같으니까." "그럼 된 거네. 괜찮아. 시키 실력이라면 틀림없이 눈 깜짝할 새에 간단하 게 해치워버릴 수 있을테니까." 알퀘이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엄청나게 위험천만한 소리를 해댄 다. 뭐...일이 잘 풀리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문제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로군. 호텔에서는 놈의 눈빛을 본 것만으로 꼼짝도 할 수 없었으니까 녀석의 눈을 피하며 뒤쪽으로 접근해 들어가 어떻 게든 쫓아내 버리는게 고작일 거 같은데." "아아, 그거 말야? 그건 시키의 의사가 약해서 그래. 네로의 마안은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정면에서 놈의 눈을 본 다해도 그런 마안 쯤 얼마든지 맞받아칠 수 있을 거야." "........." 알퀘이드는 별 일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지만, 역시 좀 불안해. "...아니, 경험해보지도 않은 일 가지고 대충 어림짐작으로 말하지 좀 마. 아무래도 말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뒤쪽에서 접근해 들어가서 놈의 손발에 나 있는 [선]을 자를게. 그러면 일단은 놈의 자유를 빼앗을 수 있으 니까 - " " - 시키. 그럼 넌 죽어." "에 - ?" "'문제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시키는 이렇게 말했지만, 그건 틀린 말이 야.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죽일 것인가'라고 해야 옳은 말이 되겠지." " - 그야 - 그렇지만." "시키. 시키는 이제부터 흡혈귀라는 괴물을 상대하게 될 거야. 그렇다면 오 늘 밤 만이라도 인간들의 도덕관념은 버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막상 일을 처리해야 할 때 생각대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게 될 뿐이 니까." " - 그쯤은 나도 알아. 상대가 괴물이니까 나도 도우려고 하는 거라구." "아니, 시키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 손발을 자른다고? 애저녁에 그만 두 지 그래, 그딴 자살행위. 손발을 자를 시간이 있거든 먼저 숨통부터 끊어놓 으라구.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치더라도, 시키 너만은 그럴 수 있어. 알겠어 ? 무슨 일이 있어도 네로한테 반격의 찬스를 주지 마. 가뜩이나 공격능력의 차가 장난이 아닌데 첫 방까지 빗나가버리면 시키가 네로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안 남게 되어버리니까 말야." 알퀘이드의 눈빛이 내게 긍정을 강요한다. 확실히 - 알퀘이드의 말 대로, 우선 손발을 자르느라고 시간을 끌고 있는 동안에 내 머리는 악어 아가리 속에 삼켜져 있을지도 모르는 밀이야 - "시키. 네로는 한밤중이 되면 쳐들어 올 거야. 그때 우리들 - 아니, 나랑 시키 둘이서 놈을 확실하게 [죽여]놓는 거야.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가 아 냐. 어떻게 [죽일 것]인가, 그것만 생각해." 알퀘이드는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날 똑바로 쳐다본다. 알퀘이드는 - 정말로 화내고 있다. 내가, 토노 시키가 아직도 약해빠진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 에 대해. " - 알았어. 더 이상 망설이지 않을게. 일격에 놈의 [죽음의 점]을 끊겠어. 그러면 되는 거지, 알퀘이드?" "........." 알퀘이드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단 은 납득하고 있는 눈치다. " - 근데, 어디서 기다리려고? 이 맨션에서 기다리면 또 호텔 때처럼 상관 없는 사람들까지 살해당할 거라구. 장소를 바꾸는 편이 좋지 않을까?" " - 그렇네. 공원 근처가 좋겠어. 한밤중이 되면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을테 고 - 어쩌다 거길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고 쳐도 그건 순전히 그 사람한테 운이 없었던 걸로 치면 되고." 그렇게 말하고 알퀘이드는 빙글 등을 돌린다. "뭐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해.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다소 무리가 있 는 일이라도 해볼테니까." "...무리야. 결국, 시키는 한 번도 [죽인다]는 단어를 말하지 않았어. 이대 로라면 최후의 순간에 시키는 틀림없이 망설이게 될 거야. 그리고 눈 깜짝 할 순간에 죽게 될 거고." " -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상대는 백 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물어죽인 괴 물이라구. 그런 녀석을 죽이는 걸 망설인다니...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 " - " 알퀘이드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 - 시키를 매료시키면 네로를 확실히 해치울 수 있을텐데. 어째서일까나.. 처음으로 그러고 싶어졌는데, 또 처음으로 그러기 싫어졌어. 왠지, 엄청 모 순된 것 같은데..." ...뭐가 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던 알퀘이드가 이쪽으로 몸 을 돌린다. "시키를 믿을게. 둘이서 네로를 물리쳐 버리자." 알퀘이드의 표정에 웃음이 떠오른다. 그건, 매우 불안해 보이는 듯한 웃음이었다. 계획 자체는 지극히 심플하다. 한밤중이 되기 조금 전에 알퀘이드가 먼저 집을 빠져나가 공원으로 향한다. 네로의 사역마 - 알퀘이드의 말로는 푸른 까마귀라던 - 가 알퀘이드를 따라 붙을테니까 시간이 좀 지난 후 나도 방을 나서 공원으로 간다. 그 다음엔 알퀘이드가 잘 보이는 나무그늘 같은 데에 숨어들어가서 네로가 오는 걸 기다리고 있다가, 알퀘이드가 네로를 유인하고 있는 틈에 뒤쪽에서 부터 네로에게 다가가서 네로의 [죽음의 점]을 절단해 버리기만 하면 되는 거다 - . - 공원 한가운데에 알퀘이드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멍하니 서있다. 나 는 알퀘이드에서 약 20미터 정도 떨어진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 공원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현재 시각은 오전 0시 10분 전. 알퀘이드는 살짝 고개를 들고 머리 위에 떠 있는 푸른 달만을 바라본다. "........." 나이프를 세게 쥔다. 네로는 반드시 올 거라고 알퀘이드가 말했다. 난 알퀘 이드에게 다가서는 네로의 등 뒤로 돌아가 가능한 발소리를 내지 않고 접근 해 단숨에 놈의 [선]을 잘라야만 한다. "하 - 아" 심호흡을 해본다. 몸은, 뭐 그럭저럭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다만 나이프를 쥐고 있는 손 만큼은 마치 내 몸이 아닌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 - " 나, 긴장하는 건가...네로라는 흡혈귀가 나타난다는 사실에. 그 괴물과 다 시 만나야만 한다는 사실에. " - " 아니면. 이제부터 네로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에. "하 - 아" 호흡이 빨라진다. 심장이, 마치 내 몸이 아닌 다른 부위인 양 쿵쾅대며 빠 르게 방망이질 치고 있다. "진정해, 시키 - 아직 오지도 않았잖아" 그래, 아직 표적은 나타나지도 않았어. 이런 상태로, 정작 네로가 나타났을 때 몸이 제대로 움직여질지가 불안하기만 하다. "알퀘이드...넌 안 무서운 거야...?" 그저 무언가에 홀린 듯 달을 바라보고 있는 흰 여자를 본다. 알퀘이드에게 불안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달을 바라다보고 있는 얼굴이 지상으로 그 시선을 되돌림과 동시에. "기다리게 했군, 신소의 공주." 낮은 톤의, 녹슨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 - !" 알퀘이드의 시선이 움직인 이유는 그 때문인가. 알퀘이드에게서 5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 나한테서는 10미터도 넘게 떨어진 그 장소에, 검은 코트의 남 자가 망령처럼 모습을 드러내 있었다 - "응. 기다린지 좀 됐지, 네로 카오스. 아니면 포아블로 로와인이라고 불러 줄까? 그렇게 부르는 쪽이 좀 더 품위있고 좋아보이는데, 나한텐 말야." 알퀘이드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온다. " - 설마...내가 아직 인간의 몸으로 있었던 시절의 이름을 듣게 되리라고 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과연 우리들의 처형역(處刑役) 답군. 현존하는 시토 27조의 경력 쯤은 이미 꿰어보고 있다는 뜻인가." 네로의 대답도 모두 다 들린다. " - 하" 숨소리가 커진다. 알퀘이드가 네로의 주의를 끌고 있어. 기회는 지금 뿐이 야. 나 스스로가 안경을 벗었다. " 윽 - " 나이프를 쥔 오른손을 가슴팍에 갖다댄다. 흰 흉기. 이제, 이걸로. 나는, 저 식인괴물을 [해체]할 - <2. ...아니, 아직 일러. - 선택> ...아니, 아직 일러. 네로는 이제 막 왔을 뿐이야. 조금만 더 - 알퀘이드에 게 집중해주지 않으면 기습이 성공할 리가 없어. "잘못 말한 것 같은데, 네로. 현존하는 시토는 27조가 아니라 28 아니었어? 너희는 [뱀]을 동포로서 인정하지 않는 거야?" "물론이지. 놈의 사상은 우리와는 너무도 달라. 놈은 흡혈종이라는 의미를 갖지 아니한 흡혈종이다. 따라서 많은 시토들은 녀석을 동포로서 인정하지 않지." " - 단, 나는 놈과 오랜 친구사이이기도 하지. 다른 시토들보다는 녀석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려고 하지만 말야." "...그래. 생각해 보니 너도 [뱀]과 마찬가지로 다른 흡혈종과는 사뭇 분위 기가 다르지. 이단끼리 취미가 맞기라도 했단 거야?" "설마...이단은 고립되어 있기에 이단이라고 불린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다고 해서 이단끼리 서로 이해해 주는 그런 관계는 아니지." "그래? 날 쫓아 이런 곳까지 따라왔다는 점에 있어서, 너희들은 서로 닮은 꼴인 것 같은데." "웃기는 소리.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완전히 미친 것 같군. 현존하는 시토를 처형해야 하는 네놈이, 왜 이토록 집요하게 아카샤의 뱀을 쫓지? 신소의 공 주가 고집해야 할만큼의 독은 [뱀]에게는 없어." ...네로의 목소리가 조금 커진다. 알퀘이드의 도발이 효과를 발휘하기라도 한 건지, 네로는 뚫어져라 자신의 적인 알퀘이드만을 바라본다. - 어떻게 할까? <1. 네로에게 달려든다. - 선택> 네로는 알퀘이드 밖에 보고 있지 않다. 찬스는 지금 뿐. 나이프를 고쳐쥐고 몸을 숙인다. 그리고 단숨에, 네로를 향해 뛰쳐나갔다. 네로는 모든 신경을 알퀘이드에 집중하고 있다. 아무 상관없는 나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네로 는 오로지 앞만을 보고 있다. 뒤에서 달려오는 나에게, 불과 몇 초도 걸리 지 않는 시간 동안 해체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너무도 무방비한 네로의 등. - 할 수 있어. 직감. 틀림없이 죽일 수 있어. " - " 달려든다. 네로의 등은, 몇 발자국만 더 가면 나이프로 닿을 수 있을만한 거리에 있다. 등. 무방비한 등. 틀림없어, 내가 있는 줄 모르는 거야. " - " 앞으로 한 발자국. 그걸로 끝. " - 에?" 발걸음이 멈춰섰다. 뭐야. 이 녀석 대체 뭐야 - !? "없어 - " 없어. 없어, 없어, 없어없어없어없어없다구...! 죽음의 [선]이 한 줄도 없다구! 말도 안 돼...그런 [생명]이 있을 리가 - - 꿍 두통이 일어난다. 나이프를 쥐고 있는 손이 떨린다.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 통증이 있은 후. 네로의 등에, 단 하나 검은 [점]이 보였다. " - !" - 저거야. 저게 녀석의 급소, 죽음에 이르기 쉬운 부분임에 틀림이 없어. 선이 아니라 점이라는 것에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 저기를 나이프로 찌른다! 한 걸음, 내딛는다. 오른손의 나이프가 네로의 [점]에 파고든다. " - 에?" 그 직전. 네로의 등에 있던 점이 급속히 퍼져나가기 시작琴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뷃, 아홉, 열, 열하나 - 여든, 백, 이백, 삼백, 사백 - ! " - !?" ...뭔가, 달라. 이건 놈의 [죽음]이 아닐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건 좀 더 이질적인 것들의 집합체다. 이녀석은 - 이녀석의 몸은, 대체 뭐가 어떻게 - " - 시키!" ...알퀘이드의 목소리. 아아, 망설일 틈이 없어. 네로의 등은 벌써 눈 앞에 와 있잖아. 어쨌든 어느 것이든 상관없으니까 이 [점]을 찔러버리면 그만이 야. " - 받아라!" 소리를 내지르며 나이프를 뽑아든다. 하지만 그 직전에. 네로의 등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른다. 마치 검은 바닷속 에서 기어나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네로의 등에서 한 마리의 검은 개가 모습 을 드러냈다. " - !?" 검은 개는 마치 미사일처럼 뛰쳐나왔다. " - !" 검은 개의 몸에 난 [선]을 나이프로 절단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에 불과했다. 잘려나간 건 검은 개의 양 다리 뿐. 검은 개는 돌진을 멈 추지 않는다. "크헉 - " 검은 개는 머리로 내 배를 향해 이마를 부닥쳐 들어왔다. " - 큭!" 엄청난 힘. 가볍게 몇 미터 이상이나 날아가 지면에 나동그라졌다. 검은 개 는 그대로 내 목덜미에 어금니를 박아넣으려 한다. "하...아 - !" 개의 왼쪽 배에 나이프를 찔러넣는다. [죽음의 점]은 마치 공기처럼 부드럽 게 나이프를 검은 개의 몸 안으로 받아들인다. 검은 개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 순간 - 검은 개의 몸은 검은 액체가 되어 내 몸에 쏟아져 내린다. " - !?" 몸이 검은 액체로 뒤덮혀 도로 일어날 수가 없어. "이 - 자식" 안 떨어져. 마치 지면에 딱 붙어버린 것 처럼 움직일 수가 없어. " - 흠.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보군." 네로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면에 딱 붙어버린 채 네로와 알퀘이드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네놈의 사역마인가. 하지만 안 됐군. 내 영역 안에 들어온 것들은 비록 내 가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내 안의 어느 하나에 발견되어 이에 요격당하지. 나한테 기습은 통하지 않아." "...그런 것 같군. 나 이외에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았으면서 등 뒤의 위 험에 반응할 수 있을 줄은. 그것이 '무리의 힘'이라는 거야, 네로 카오스?" 알퀘이드는 눈을 조금 가늘게 뜨더니 천천히 네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 - 재밌군. 공상구현화도 할 수 없는 쇠퇴한 네놈이, 감히 내게 싸움을 걸 어오겠다고?" "그런 거 필요없어. 겨우 시토 하나 상대하는데 세계와 동화해 봤자 뭐해? 너 정도는 - 이 손톱만 있으면 충분해, 네로 카오스." 까마귀 울음소리 같은, 짧은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 - 웃기는...참으로 어리석구나, 알퀘이드 브륀스타드 - !" 네로의 한쪽 팔이 올라간다. 코트가 마치 망토처럼 펄럭이며 그 안에서 무 수한 생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쿵쿵쿵. 굉음을 울리며, 총알 같은 스피드로 알퀘이드를 향해 세 마리의 짐승이 달 린다. 검은 개, 같은게 아냐. 세 마리 모두 본체인 네로 자신보다 거대한, 악마같이 흉악한 실루엣의 표범들이었다. " - " 알퀘이드는 움직이지 않는다. 세 마리 표범이 지면을 박차자 벽돌 바닥에 금이 간다. 도망치려는 알퀘이드보다 표범들 쪽이 몇 배나 빠르다. - 세 마리의 맹수가 알퀘이드에게 덤벼든다. 그리고 간단히 끝났다. 눈 깜 짝할 사이. 세 마리의 표범은 모조리 두 동강이 난 채 지면에 나뒹군다. " - 뭐, 뭐야?" 네로의 목소리가 들린다. 알퀘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대로 네로 본체를 향해 단숨에 덮쳐 들어간다. " - !" 네로의 몸에서 짐승이 나온다. 사자는 네로에게서 나온 바로 그 순간 알퀘이드에 머리를 잡혀 동체에서 뽑 혀져 버렸다. 표범은 알퀘이드를 향해 달려든 순간 양 미간 사이를 주먹으로 꿰뚫려 절명 했다. 호랑이는 찰흙놀이 하는 것처럼 동체 그 자체가 갈갈이 찢겨 나갔다. 그 뒤를 따른 것들 역시 모두 같은 운명을 맞았다. 하늘을 나는 독수리도,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거대한 회색 곰도. 지면을 헤 엄쳐 다니던 상어도. 정말 믿을 수 없는 크기의, 파워샤벨 같이 거대한 코 끼리도. 결국엔 알퀘이드를 저지하지도 못하고 그 짧은 순간에 검은 점액으 로 돌아가 버렸다. " - !" 네로가 도망친다. 알퀘이드가 손톱을 휘두른다. - 무엇인가 잘라지는 소리와 함께. 네로의 몸은 목덜미에서 둘로 분리됐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괴롭게 울부짖어대며 알퀘이드에게서 튀어나가듯 물러서는 네로. 네로의 몸 은 머리에서 허리에 걸쳐 반 이상이 없어져 있었다. 털썩. 알퀘이드 옆으로 방금 찢겨져 나간 네로의 반 몸뚱이가 떨어진다. " - " 싸움이 안 되잖아...알퀘이드 자식, 뭐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벅차'냐. 네로의 몸에서 나온 짐승들은 결코 약한 녀석들이 아냐. 사자도 호랑이도, 단 한 마리로 자동차를 순식간에 고철덩이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 을 가진 동물이란 말야. 게다가 회색곰 같은 경우에는, 전차조차 뒤집어서 고철덩이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르는 [폭력]의 덩어리인데. 그런 맹수들이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한 채 알퀘이드 단 한 명한테 찢겨져 나가고, 게다가 네로 본인마저 완전히 빈사상태에 이르렀다. "하 - " 왠지 새된 느낌이군. 이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내가 없었던 편이 더 나을 뻔 했잖아 - "크헉...아, 아아아, 아...!" 네로는 알퀘이드에게서 도망치려는 듯 물러서고 있다. 피로한 탓인지, 알퀘 이드는 뛰지 않고 천천히 네로에 다가선다. "하아 - 하아 - 하아" 거친 호흡소리가 들린다. 알퀘이드의 호흡소리다. "하아 - 하아 - 하아" 어떻게, 된 거야. 몸의 반이 뜯겨나간 네로보다 더, 알퀘이드의 호흡이 고 통으로 가득 차 있다. " - 설마. 그렇게까지 쇠퇴해 있으면서 그런 전투능력을...과연 신소들이 준비한 처형인...가라사대, 흰 흡혈공주에게는 섣불리 다가서지 마라 - 인 가. 아무래도 동포들의 충고가 옳았던 것 같군." 네로의 목소리에는 한점 어두운 기색도 나타나 있지 않다. - 왠지. 엄청나게, 절망적인 예감이 든다. "하아 - 하, 아" 호흡을 가다듬으며 알퀘이드는 천천히 네로 쪽으로 다가선다. "허나 나 역시, 처음부터 열이나 스무 정도의 '나'로 네놈을 해치울 수 있 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 " - 센 척은 그만두시지. 네가 사역하는 사역마들이 아무리 덮쳐와도 날 죽 일 수도 없고, 그 몸뚱이도 이미 잘려나갔어. 무슨 짓을 해도 너한테 승기 같은 건 없어." "흥 - 내 사역마들은 한 마리도 남김없이 죽어버렸지만...하나, 네놈이 잘 못 생각하고 있는게 있는 것 같군." " - ?" "나는 사역마 같은 걸 가지고 있지도 않고 사역 같은 것도 하지 않아. 지금 널 상대한 건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지...파손된 육체를 다른 생물을 이용해 보충하는 따위의 짓을 하는 다른 잡종들과 동일시하면 곤란하지...본래의 네놈이엇다면 한 눈에 눈치챘을 것을...그 금색의 마안으로 똑똑히 잘 보아 두라구. 보이지? 내 몸 속에 내포해 있는, 육백 육십 육 소(素)의 '짐승'들 의 혼돈이 - " 시계 저편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다. "아 - " 알퀘이드의 등 뒤. 좀 전에 알퀘이드에게 뜯겨 나가 지면에 썩은 나무토막 처럼 나동그라져 있던 네로의 반 몸뚱이가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알퀘이드를 향해 마치 뱀처럼 머리를 세우더니 - . "알퀘이드, 뒤를 봐 - !" "시키 - ?" 알퀘이드가 뒤를 향해 몸을 돌린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지면에 드러누운 네로의 반신은 무수한 뱀으로 변해 알퀘이드를 등 뒤에서부터 덮쳤다. "이런 - " 알퀘이드는 뱀들에 이리저리 얽혔고 뱀들은 그대로 원래의 검은 탁류로 돌 아갔다. 지금의 내 꼴처럼, 정확히는 내 몇백 배나 되는 질량에 짓눌린 상 태로 알퀘이드는 지면에 단단히 고정되어 버렸다. "이, 이건 - 이럴 수가...!?" 검은 점액에 짓눌린 채로 알퀘이드는 어떻게든 도망쳐 보려고 몸부림을 친 다. "소용없는 짓이야. 그게 어떠한 것인지, 네놈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테지, 신소의 공주." "윽.........!" 알퀘이드의 얼굴이 고통과 - 경악으로 얼룩진다. 네로는 반이 잘려나간 채 그저 소리높여 외치듯 말을 시작한다. " - 사려 깊은 자들은 짐승의 숫자를 세어보라. 그것은 인간을 나타내는 숫 자, 즉 666 일지니 - 크크...내 체내의 혼돈은 마음에 드셨는가, 알퀘이드 브륀스타드?" "너...제정신이야!? 인간의 몸에...인간의 형태 같은 협소하고 밀폐되어있 는 공간에 삼백 이상이나 되는 숫자의 인자를 압축해서 내포시켜두다니, 이 건 완전히 - " "그래. 이건 원초의 바다와 마찬가지지. 나는 말야, 다른 동물들을 내 육체 에 심은 게 아냐. [동물]이라는 인자를 육체화 해서 혼탁시키고 있을 뿐이 다." "내게 사역마 같은 건 없어. 내게 있는 건 육백 육십 육 마리의 짐승들 - 그와 동등한 숫자의 생명들이다. 내 몸을 반토막을 내도, 내 머리를 박살내 버린다 해도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이야. 나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666. 나를 멸할 생각이라면 단 한 순간에 육백 육십 육 개의 생명을 멸하지 않으면 안 되지." "...말도 안 돼...카오스...혼돈이란, 그런 의미...!?" "물론이다. - 따라서 내 분신들은 그 존재가 일정치 않지. 내 영지이기도 한 이 육체에서 외계로 해방되었을 때 처음으로 어떠한 [종]으로서의 형태 를 갖는다. 애초에 형태를 갖지 않은 것들이야. 외부에서 죽어버렸다 해도, 내 안으로 돌아오면 다시금 혼돈의 일부로서 소생하지...다만, 외계로 나설 때에 어떤 형태가 될 지는 나 자신도 예측할 수가 없어. 이 복잡한 계통수 를 파악하고 조작하는 것이, 내 영원의 명제인 셈이지." 반쪽 밖에 안 남은 흡혈귀는 자랑이라도 하듯 들릴락 말락하게 웃는다. "그런 건 불가능해...! 혼을 - 아무런 착색도 하지 않은 존재개념 같은 걸 내포하면 너 자신의 몸도 사라져 버린다구...!" "그래. 따라서 여기에 있는 건 개인이 아니지. 이미 네로라는 인격은 존재 하지 않아. 우리는 개체가 아닌 무한의 군체에 가깝지...그래...그렇게 된 생명에 존재의 의의는 없어. 영구기관이라고도 불리는 생명종이라면 이미 심해에 서식하고 있지. 이 육신도 어느 순간엔가 그들처럼 지성을 잃고 단 순한 [표본]이 되어버리겠지." "허나, 멋지다고 생각지 않나. 내 안에는 [무엇이 될 지 알 수 없는 것]들 이 소용돌이 치고 있어. 그건 원초의 이 세계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작은 세계야. 어떤 생물이 태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혼돈의 공간. 현존하는 이 별의 계통수와 마찬가지면서, 동시에 극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 혼돈 의 어둠.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나는 내가 사라지기 전에 알고 싶어." "그렇기에 교회 놈들은 나에게 이런 이름을 붙였지. - 네로 카오스. 몸 속 에 육백 육십 육 마리의 짐승을 무장하고 이미 흡혈귀가 아닌 혼돈의 공간 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금기를 저지른 이단자라고 말야." " - !" 알퀘이드의 목소리가 파묻혀 버렸다. 검은 액체가 꿈틀대고 있다. 알퀘이드 의 얼굴도, 이제 거의 반 정도 밖에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 . "...이상이다. 아무리 네놈이라 해도, 그 우리에서 빠져나오는 건 불가능하 지. 내 분신 중 오백을 결속해서 만들어낸 '창세의 땅'. 아무리 네놈이 만 전을 기했다고 그걸 파괴할 수는 없어. - 대륙 하나를 파괴하는 거나 마찬 가지니까 말야." 반쪽 밖에 남지 않은 네로는 천천히 알퀘이드 쪽으로 다가선다. "네놈이 나타나고 나서 몇 명의 동포가 죽고, 몇 명의 선배들이 네놈을 없 애려다 그 반대의 운명을 맞닥뜨렸는지... -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야. 지금까지 아무도 이루지 못했던 위업을, 이 네로 카오스가 이루어냈다." " - 네로. 너, 이 고유결계를 누구한테 - " "알고 있을텐데. 네놈의 원수인 '뱀'이, 스스로 자청해서 내게 가르쳐준 거 야. 그렇다고는 해도 이번 대의 놈에게서 배운 건 아니야. 파리에서 놈이 네놈한테 죽기 전에, 내게 이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지를 가르쳐 줬지." " - " 알퀘이드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다시 보니 이미 입까지 검은 점액으로 뒤덮여 있다. "하지만 '뱀'도 가엾은 녀석이군. 흡혈종이 되기 전에는 교회의 사제였던 녀석이 네놈 같은 사신한테 걸려서는 제대로 살지도 못하다니 말야. 놈이 살아있었다면, 내 몸 속의 혼돈도 지금쯤엔 어느 법칙성을 띠고 있었을텐데 말이지...그 정도로 마도의 소질을 갖고 있으면서 제대로 발휘해 보지고 못 하고 죽임을 당하다니...틀림없이 분통하겠지." "'뱀'하고는 친구 사이였다. 왜 네놈이 녀석만을 그토록 집요하게 적대시하 고 있는지에 대해 묻고 싶은게 산더미 같지만 - 이미 말해봤자 소용없게 된 것 같군." 검은 점액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알퀘이드의 몸 전체를 속박해 가고 있 다. 저기 쓰러져 있는 건 더 이상 알퀘이드라는 여성의 육체가 아닌, 아무 런 형태도 없는 진흙덩어리에 불과했다. " - 이대로 내 한 사람이 되어줘야겠어, 알퀘이드 브륀스타드. 네놈 정도의 의식을 집어삼키려면 상당한 고통이 뒤따르겠지만 그때 나는 최고위의 흡혈 종이 되어있겠지. 다소의 고통 쯤 오히려 탄생을 위한 선물 쯤으로 받아들 이지. 그렇게 되면 - 저 재수없는 매장기관의 녀석들 쯤 아무 두려울 것도 없게 돼. 곰팡내 나는 교회 따위, 그에 관련된 자 모두를 근절시켜 주지." 알퀘이드의 얼굴이 가라앉는다. 방금 전까지 가까스로 확인할 수 있었던 알 퀘이드의 바디 라인도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 이대로.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알퀘이드는 저 검은 액체 속으로 집어삼켜지 게 된단 말인가 - "이 - 자식...!" 내 몸을 덮고 있는 액체를 [본다]. 검은 죽음의 선이 틀림없이 존재했다. "크윽 - !" 머리 속을 휘젓는 아픔을 참아내며 나이프를 휘두른다. 검은 액체의 선을 자르자 그대로 보통의 액체처럼 되어버렸다. "좋았어...!" 거친 호흡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 도와줘야 해. 저 괴물한테서 알퀘이드를 도와줘야 해. 하지만 대체 어떤 수로? 난 네로한테 다가설 수조차 없어. 알퀘이드 역시 - 저 정도로 대단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음에도 결국엔 네로를 몰아붙이지 못 했다. 그렇다면 내가 네로와 맞서 싸운다 해도 순식간에 살해당해 버리는게 뻔한 결말이 아닌가. 검은 개 한 마리를 죽일 때조차 필사적이었던 나한테 그보다 더한 짐승인 사자와 표범을 상대하라고 하면 1초도 못 버텼을 것이 다. 게다가. 놈의 등에서 봤던 몇백 개나 되는 죽음의 [점]. 네로와 알퀘이 드의 이야기는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요컨대 저 짐승 한 마리 한 마리가 녀석 그 자체라는 소리겠지. 그러니까. 네로라는 흡혈귀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저 [점]을 가진 짐승들을 모두 죽 여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 "크 - "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아무리 그래도 - 인간인 이상, 저런 괴물을 앞에 두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빌어 - 먹을" 나는, 결국. 또 모두 다 죽게 내버려 두고는 나 혼자만 살려고 하고 있어 - " - 호오" 목소리가 들린다. 네로의, 기쁨을 억누른 듯한 목소리. 아니, 틀려. 놈의 소리가 아냐. 뭔가, 발소리 같은 게 들린다. "설 - 마" 소리는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고 있다. 하지만 확실히, 뛰는 듯한 가벼운 발 걸음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 알퀘이드가 말했다. 밤에 공원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 만약 이곳을 지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순전히 그 사람한테 운이 없는 거야, 라 고. 멀리, 작게 사람 그림자가 보인다. 나이는 나와 동년배 쯤으로 보이는, 본 적도 없는 소녀가. " - " 안돼. 뭐가 위험하냐고? 이런 곳에 오면, 그럼 - "도망쳐어어어어어어어어!" 외쳤다. 네로가, 내가 아직 여기 있다는 걸 눈치채든 덮치든 상관없이 외쳤다. 하지 만 통행인은 멈추지 않는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정말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 광장에 오려고 하고 있다. 검은 코트를 입은, 몸이 반토막 난 흡혈귀는 후우 하고 한숨을 몰아쉰다. "...몸이 뜯겨져 나갔어. 양분이 너무 부족해." 반쪽 밖에 안 남은 검은 코트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댄다. -------------------------------------------------------------------------------- "딱 좋은 타이밍에 영양분이 나타나줬군 그래." 네로의 몸에서 검은 짐승이 뛰쳐나간다. "그만 - !" 제지하는 목소리도 먹히지 않는다. 여기서 좀 떨어진 곳의 사람 그림자를 향해 검은 바람과도 같이 짐승이 달려간다. 실로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짧은 비명소리, 그리고 사람이 쓰 러지는 소리.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풍겨오는 피냄새. 검은 호랑이는 쓰러 진 사람을 물고 네로 곁으로 돌아왔다. 소녀의 얼굴자리엔 얼굴이 없었다. 호랑이 발톱에 의해 젤리처럼 얼굴이 통째로 도려내어진 것이다. - 너무 무자비해. 너무도 일방적인,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폭력. " 끄악 - !" 머리가, 아파. 목이 바싹 타들어간다. 의식이 한 곳으로 모아져, 더이상 눈 앞의 적 이외에는 보이지 않게 된다 - . 호랑이는 네로 본체로 뱀처럼 미끄 러지듯 되돌아간다. 그리고. 호랑이가 입으로 물어다 온 소녀의 시체는 놀 랍게도 그대로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하지만. - 우적. 으득. 쩍쩍. 모습이 보이지 않음에도 소리가 들린다. - 가각. 츄웁. 꿀꺽. 저기 서있는 네로라는 남자의 몸 속에서 소리가 들린다. 몸이 녹아내리고 뼈가 바수어지고, 천천히 인간을 씹어삼키는 소리가 나고 있어 - "너 - " 틀림없어. 놈은 몸 속에서 인간을 통째로 삼키고 있는 거야. 네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 그리고. 머리 속에서 무엇인가가 끊어지 는 듯한 소리가 난다. "너 이자식이 - !!!!"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 네로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 안구에 붉은 빛이 번진다. " - 삼켜버려" 네로의 몸에서 검은 표범이 뛰쳐나온다. 그 사나운 스피드는 검은 개의 몇 배에 달했다. " - " 하지만, 그런 거 알게 뭐야. 요는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것. 살아있는 것들 이라면, 내 적수가 될 수 없어. "저리 꺼져" 발걸음을 멈추고 발밑으로 나뒹구는 사체를 향해 말을 내뱉는다. 검은 표범 은 4 조각으로 나뉘어져 내 발밑에 굴러다니고 있다. " - 그렇군. 좀 전에 등 뒤에서 날 습격한게, 네놈이었나?" 검은 표범이 4 조각이 나서야 처음으로, 네로는 토노 시키라는 사람의 존재 를 알아차린 듯 하다. 감정 없는 시선이 나를 바라본다. 아아, 알퀘이드가 말한 대로야 - 망설이지만 않는다면, 이런 녀석이 쏘아본다 한들 그 무엇 하나 달라지는 건 없어. "...알퀘이드를 이리 내, 이 괴물아." " - " "이리 내놓으라고 말했어. 네놈 상대는 바로 나야. 그런 반쪽 밖에 안 남은 몸뚱이로는 겁이 나서 못 덤비겠는가보지?" " - " 무언. 아무 말도 없는 채 검은 코트 차림의 흡혈귀는 나와 알퀘이드를 번갈 아가며 쳐다본다. "네가, 날 상대하겠다고?" "그래. 그러니까 알퀘이드를 이리 돌려주고 빨랑 원래 몸으로 돌아가라고 하잖아." " - , -, - " 네로의 고개가 상하로 움직인다. 네로는 웃고 있, 는 것 같았다. "흥이 깨졌군. 책임을 져 주셔야겠는데, 인간." 네로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끝까지 알퀘이드를 사로잡고 있 는 자신의 몸의 반쪽을 그 상태로 내버려둔 채 나머지 반쪽 몸으로 상대하 려는 것 같다. "계약하지. 널 산 채로 조금씩, 고열로 녹이듯이 삼켜주겠다고 말야." 네로의 한쪽 밖에 안 남은 팔이 들어 올려진다. " - 그 열악한 사고회로. 내 상대를 하겠다는 너의 그 오만한 마음가짐은, 백번 죽어 마땅하다." 한 줄기 바람을 일으키며. 네로의 반쪽 몸뚱이에서 몇십 마리나 되는 짐승 들이 쏟아져 나왔다. " - " 네로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짐승의 수는 열 마리 스무 마리의 수준이 아니 었다. 그 어느 것 하나 별 것 아닌 짐승들 밖에 없었지만, 거의 백 마리 정 도나 되는 짐승들의 숫자에 한 명의 사람은 마치 몰려드는 수많은 개미떼 앞에 놓여진 각설탕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 - !?" 바로 앞에서 덮쳐오는 검은 개의 목덜미에 나이프를 꽂아넣는다. [죽음]이 갈라져버린 검은 개는 그대로 절명했다. 순간, 머리 위쪽에서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온다. 뼈가 깎여나가는 소리와 함께 관자놀이 쪽의 살점이 뼈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떨어져 나갔다. "윽 - !" 아파할 틈도 없다. 새의 날갯짓 소리와 동시에 좌우에서 몇 마리나 되는 검 은 개가 팔과 배를 물고 늘어졌다. "이, 자식, 들이 - !" 보이는 범위 안에서, 두 마리 개의 [죽음]을 꿰뚫는다. 하지만 전혀 타이밍 이 맞지 않는다. 한 마리를 죽이고 있을 동안에 열 마리가 넘는 짐승들이 내 몸을 쪼아 들어온다. "아 - 아" 안 보여. 아무 것도 안 보여. 눈 앞에 새카맣다. 눈이 안 좋아진게 아냐. 내 주변이 - 검은 짐승들로 새카맣게 뒤덮여 있었다. " - !!!!!" 이대론 안돼. 죽는다구. 앞으로 5초도 더 못 버티겠어. 발목이 물어뜯긴다. 피가 나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쓰러지면, 그걸로 끝장이야. 바닥 에 쓰러진 내 몸을, 이 녀석들은 걸신들린 듯이 우적우적 먹어치울게 틀림 없어. "싫 - " 싫어. 그건 아픈 것보다 더 무서워. - 눈 앞은 새카맣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움직일 수도 없어. 하지만 그 렇기에 필사적으로 생각해내야만 해. <2. 이렇게 된 이상 몸통을 박살내야 해. - 선택> " - " ...몸통을. 이놈들을 조종하고 있는 네로 본체를 어떻게 할 수만 있다면 알퀘이드 정도 는 어떻게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몰라 - "아아아아아아아아!" 아무렇게나 나이프를 휘둘러댄다. 이곳저곳이 빠져나간 듯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채찍질을 해가며 앞으로 내달렸다. 놈이 여유를 부리며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면. 이 앞에 반쪽 밖에 안 남은 몸을 이끌고 서 있는 이녀석 들의 보스가 있을 터 - " - !" 네로 - ! "소리 지르지 마라. 보기 흉하군." 검은 코트가 흔들린다. 거기서. 흰 뿔이, 나를 향해 똑바로 뻗어나왔다. "에 - ?" 사슴 뿔 같은 것이 내 배를 찌른다. 푹, 하고. 너무나도 날카로운 탓에, 그 다지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 - " 그대로 지면에 드러누워 버렸다. "난 상대가 인간이라서 봐주거나 하지는 않는 주의라서 말야. 안심해라, 세 포 하나 남겨두지 않을테니."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검은 돔이 내 몸을 뒤덮었다. "아 - " 검은 우산 같은 천장. 그것들은 모두 두 눈을 번쩍이고 있는 짐승들이다. 찌익. 피부가 찢긴다. - 죽어. 쩝쩝. 살점을 먹는다. - 죽어버려. 드득. 뼈를 갉는다. - 죽으라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려는 이성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필사적으로 두 팔로 얼굴을 감쌌다. 오른손으로 나이프를 꼭 쥔 채로. - 죽어. 우적우적, 먹힌다. 웃기지 - 이렇게나 많은 짐승한테 둘러싸이면 1분도 안 되어 뼛조각도 남겨지지 않고 잡아먹힐텐데, 이놈들은 내 몸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다. - 죽어. 피가, 너무 많이 흐른다. 몸 속, 피와, 이놈들의 침으로 범벅이다. 기분 - 더럽게, 나빠. - 죽어. 밖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온통 검어. - 죽어. 몇 십 개나 되는 눈동자가 말한다. 정말로 조금씩 조금씩 살점을 뜯어먹으 면서 말하고 있어. 이 녀석들은 말을 하지 않는 대신에, 빛나는 두 눈동자 만으로 그렇게 중얼대고 있어. - 죽어. 이제 그만 죽으라고. 검은 돔을 형성하는 짐승들이 모두 그런 단어를 합창 하고 있어. " - !" 비명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아무도 도와주러 오는 사람은 없어. - 죽을 거야. 나도, 방금 전의 누군지 모르는 여자애처럼 살아있는 채로 삼 켜질 거야. "아 - 아, 아" - 싫어. 그런 건 싫어. 살아있는 채로 죽기는 싫다구. 의식이 있는데도 뜯 어먹히는 건 싫다구. 이대로 죽기는 싫어. 무서워. 무섭다구. 너무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 - "죽을 - 거야" 그래, 죽을 거야. 도망칠 곳 따윈 아무 데도 없어. "이대로, 죽을, 거야" 금방이라도 갈기갈기 찢겨서 몇 십 마리나 되는 짐승들의 식사거리가 되려 하고 있어. 더 이상 할 일도 없기에. 붉게 물든 눈동자로, 그런 자신을 멍 하니 바라본다. "하. 하하하, 하."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감정이 복받쳐 밀려 올라온다. 난 내가 죽임을 당하는 이유도 모른다구. 그런데도 - 토노 시키는 죽어야 하는 것인가? "고집이 세군. 죽으면 편해질 수 있는 것을." 크, 크크, 크. 저 멀리서 녀석이 웃고 있어. 나를 느긋하게 탐하며 웃고 있어. 아아 - 온 몸이, 녹아내리고 있어. " - " ...너무해. 진짜 너무해. 이런 건 진짜 너무하다고. 상처가 아파. 상처가 아프다구. 너무 아파. 죽는 게 무서워. 죽는 게 무섭다구. 너무 무서워. 저 멀리서 녀석이 웃고 있어. 내가 죽어가는 꼴을 보며 웃고 있어. 잘 들어 보니. 아직, 놈의 몸 속에서 뼈를 으깨는 소리가 들려. 어제, 그만큼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어치운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지금, 아무 것도 모르는 사 람을 먹어치운 것으로도 모자라서. 녀석은, 지금 나까지 먹어치우려고 하고 있다구 - " 끄악 - " 발톱 같은 게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그 자리는 옛날에 큰 상처를 입었던 자리다. 너무도 아프고 무섭고, 때문에 죽이고 싶을 정도의 증오가 끓어오 르던 그 순간. - 8년 전의 - 그 여름날. 아아, 너무도 미웠어. 공포, 아픔...그런 기타 등등의 것들마저 느낄 수 없 었을 정도로. 그래. 난 그저 미웠을 뿐이야. 그럼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지. - 네가, 날, 죽이려 든다면. 전신은 벌써 마비되어 있다. 남아있는 건 아직 나이프를 놓고 있지 않은 오 른손의 감촉 뿐. 죽을 거야 - 죽을 거라고? 누가. 무엇에? "하하, 하 - "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아아, 확실히 그래. 절대로 도망갈 수 없어. 절대 로 안 놓쳐. 해야할 일은 단 하나 뿐이니까. 죽을 거야. 죽을 거야. 틀림없이 죽을 거야. 다른 그 무엇에게도 아닌, 다른 그 누구에게도 아닌. - 놈은, 나한테, 죽을 거야. --------------------------------------------------------------------------------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날카로운 기합소리 대신 얼빠진 듯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웃겨. 웃겨서 웃음이 멈추지 않아. 나를 둘러싸고 있던 짐승들이 차례대로 죽어나간다. 뇌수가 아파. 몸 속의 신경, 혈관, 세포, 혈액, 이 모든 것들이 이상해버렸어. - 검은 돔이 사라졌다. 내 몸을 파먹고 있던 잡종들 중 70마리 정도를 먼저 죽여버렸다. "뭐 - 야?" 네로의 목소리가 들린다. 자아 - 일어서지 않으면 이 이상 못 죽인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문제 없어. 다치지 않은 곳은 없지만 어쨌든 이 정도면 잠시 동안은 움직일 수 있겠군. "네놈 - 무슨 짓을" " - 아아, 네 마음은 잘 알았어 흡혈귀." 뇌수에 느껴지는 뜨거운 감촉. 비슷해 - 알퀘이드를 죽였을 때와 마찬가지 로, 제대로 숨조차 쉴 수가 없어. 미쳐버릴 것 같은 두통과 열에 뒤바뀌듯, 토할 것 같을 정도로, 세계에 죽음이 가득 차 있어 - . "날 죽이고 싶지? 이 괴물아." 그럼, 우린 닮은꼴 동지로군. "좋아. - 어디 한 판 붙어보자고, 네로 카오스...!" 그토록 뻣뻣하게 굳어있던 오른손에 자유롭게 움직인다. 나이프를 반대쪽 손으로 넘겨 단단히 고쳐쥔 후 네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네로의 몸에서 한층 커다란 짐승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야 알퀘이드한테 내보냈던 녀석들을 나한테도 내보내는 모양이다. " - " 하지만 녀석들도 그다지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아무리 거대하고 신속하고 광폭하더라도, 놈들은 기본적으로 직접 내 몸에 닿지 않으면 날 죽이지 못 해. 직접 내 몸에 닿으려고 하면. 내 몸에 닿으려고 하는 부분을 절단한다. 결국엔 검은 개도, 사자도, 호랑이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두 마리의 짐승이 쓰러지고 검은 물로 변한다. 네로까지는 - 아직 얼마만큼 의 거리가 남아있나. " - 이럴수가. 공주조차 소멸시키지 못했던 우리들이 - 남김없이, 무로 돌 아가고 있어..." 뭐라고, 말한다. " - 이해할 수가 없군. 네놈, 무슨 짓을..." 네로의 몸을 응시한다. 몇 십 개나 되는 무수한 점. 살아남고 싶으면 - 녀 석을 죽이고 싶으면, 저것들을 모조리 죽이지 않으면 안 돼. "........." 역시 그것까지는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 이대로는 끝이 없어. 검은 점액으 로 둘러싸인 알퀘이드. 죽임을 당한 수백에 달하는 사람들. 그리고 - 죽을 뻔했던 나. ".........!" 으득 하고 이를 악문다. 놈을 원망할 여유는 없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힘 에 부치니까 말야. 네로가 하는 말 따위에 장단 맞춰줄 여유는 없다구. - 아니, 그럴 여유가 있으면 1초라도 빨리 - " - 좋다. 너를 내 장해로서 인식하지." - 이 더러운 냄새 나는 괴물의 숨통을 끊는 편이 좀 더 낫겠지. 검은 코트가 크게 펄럭인다. 지저분한 짐승의 냄새. 위기감은, 지금까지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코트 속에서 왠지, 어렸을 적에 한 번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짐승들이 튀 어나온다. 이마에 뿔이 돋아나 있는 말과 날개가 달린 거대한 도마뱀. 저것 들은 확실히 귀찮은 존재였다. 그리 쉽게는 죽일 수 없어. [죽음에 이르기 쉬운 부분]마저 거의 없다. 그렇기에 - 더더욱 진지해진다. 죽인다는 말을 입에 담은 탓일까. 흐르는 피에 통증을 느낀다. 신경이 무뎌 진다. 몸 속의 것들이, 이런 장해를 배제하기 위해 서로 연결해 나간다. 뿔이 돋은 말은 뿔 째로 두 동강이를 내버렸다. 도마뱀 쪽은 등에서 오른쪽 아래 복부에 이르는 부위를 잘라내 버렸다. " - 이럴 리가..." 장해의 목소리가 들린다. 공교롭게도 나는, 이제 더 이상 정상적으로 시야 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건 오로지 검은 점과 선 뿐. "이놈 - 어째서 내가, 고작 인간 따위에게 혼신의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냐 - !" 반쪽 밖에 남지 않았던 네로의 몸이 완전한 인간의 형태로 돌아간다. 이제 야 겨우 알퀘이드를 사로잡고 있었던 나머지 반쪽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되 돌려놓은 것 같다. " - 죽이겠다. 내 안의 계통수에는 네놈들의 영역을 능가하는 생명이 있어 - " 네로의 두 팔이 스스로의 가슴을 잡아뜯는다. 마치 어둠을 가르듯. 네로는 자신의 가슴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가르고 있었다. 네로의 가슴에 뚫린 구멍 에서. 뭔가, 기괴한 것이 미끄러듯 흘러나온다 - 한 마리도 표현하자면 게처럼 생긴 거미 같다고나 할까. 크기에 있어서는 알퀘이드가 해치운 코끼리보다 좀 더 크다. " - " 시야가 빨갛게 물들어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기괴한 실루엣과 [죽음] 밖 에 보이지 않는다. 손끝이 차갑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다. 하 지만 - 아직 몸에서 비명이 들리지 않는다. 그런 여력이 있으면 1초라도 빨 리 놈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 등뼈가 아파. 몸이 떨려. 손끝이 얼어붙는 것 같아. 그럼에도, 뇌수만이 불 붙은 것처럼 뜨겁다. 거미인지 게인지 알 수 없는 짐승은 서서히 네로의 몸에서 미끄러지듯 밖으 로 빠져나오고 있다. 네로가 있는 곳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어. 네로에게 가 까이 다가서기 위해서는 이 생물들이 걸리적 거렸다. 남은 건 3마리. 네로 에게서 나온 방해꾼들을 모조리 죽여없앴다. " - 이럴 수가..." 네로는 현기증이라도 일으킨 듯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 - 나의 모든 살해방법이 죽임을 당하다니...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리가 없어...! 우리는 불사신이야. 내가 살아있는 한 죽어서도 혼돈이 되어 내게 다시 돌아오는 불사의 짐승들이 - 왜, 네놈에게 한 번 찔린 것만으로 태초의 무로 돌아가 버린단 말이냐 - !" 소리지르고 있는 적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선다. 네로는 뒤로 물러서려다 가 까스로 스스로의 움직임을 멈춘다. " - 이런 추태를..." 기계 같았던 눈에, 붉은 빛의 증오의 감정이 떠올랐다. 녀석의 마음을 이해 할 수가 있겠어. 아마 - 살인귀로서의 네로는 자기 자신한테 도망치라고 명령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흡혈귀로서의 네로는 스스로가 일개 인간 따위한테 패해 도망치는 걸 용납하지 못하고 있어. 이해하지 않아. 도망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아. 그렇기에 더 이상 후퇴하지도 못하고 있는 거야. 그 정신, 자신이 무력하다 는 걸 머리 속으로 깨우치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는 고집. 한 걸음 더 다가선다. 앞으로 조금만 내딛으면 나이프로 녀석의 몸을 가를 수 있는 지점에까지 왔다. " - 아냐, 이럴 리가 없어 - ! 내 이름은 네로. 죽지 않고 살아가는 흡혈종 중에서도 불사신이라 일컬어지는 혼돈이다! 그런 내가 이런 추태를 보일 줄 은...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 네로의 몸이 형태를 만들어간다. 지금까지 어둠 밖에 없었던 네로의 몸은 분명한 개체로서 육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내 몸은 불사신이야. 죽음 따윈, 아득한 옛날에 초월했다구 - !" 네로의 몸이 날아오른다. 짐승들을 불러내는 게 아냐. 네로는 남아있는 짐 승들을 극한까지 응축시켜 자기 자신을 최고의 짐승으로 만들어 내 숨통을 끊으려 하고 있었다. 그 스피드는 알퀘이드에 뒤지지 않는다. 내 머리를 그 자리에서 박살내려는듯 이쪽으로 팔을 뻗어온다. 뻗어오는 팔을 피하며 엇 갈리듯 녀석의 팔에 있는 [선]을 잘라냈다. 너무 빠른 스피드를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건지, 네로는 바로 멈추지 못 하고 저만큼 지나쳐 버린다. - 다시, 네로와 나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 현기증이 난다. 몸이 계속 떨리고 있어. " - 이게 뭐야" 잘려나간 팔을 보며, 네로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게 대체 뭐냔 말이다 - ! 어째서 - 어째서 잘려나간 부위가 재생하지 않 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딨어...! 저놈은 마술사도 아니고 매장자 도 아닌 주제에, 그냥 잘려나가기만 한 내가 어째서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되 느냔 말이냐 - !?" " - 바~보. 그런 웃기지도 않는 체면 따위에 일일이 신경 쓰고 있다간 죽는 다구, 네로 카오스." 네로의 곁에서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이놈 - !" 네로는 핏발 선 시선이, 곁에서 우아하게 서 있는 알퀘이드 쪽으로 향한다. - 아아, 그렇군. 네로가 몸을 원래대로 되돌린 시점에서 알퀘이드도 자유롭 게 되었단 건가. "아아, 나에 대해선 신경 않아도 돼. 넌 시키가 처리해 줄 거야. 지금의 시 키를 방해하면 나까지 죽을 수도 있으니까 말야." 킥킥대며 웃는 알퀘이드. "천천히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하니까 이런 꼴을 당하는 거야. 적은 한 방 에, 반격의 기회를 주지 않고 쓰러뜨려야 하잖아? 넌 말야, 그게 잘못됐다 구." " - 닥쳐. 난 틀리지 않았어. 지금 내게는 아직도 오백 육십이나 되는 생명 이 있다...기다려라...놈을 목졸라 죽여버린 다음 다시 한 번 네놈을 사로 잡아주지..." "그래? 기대는 하지 않을게." 알퀘이드는 네로 쪽으로 다가서지 않는다. 네로는 이제 나만을 쳐다보고 있 다. - 온다. 왼손을 오른손 곁에 두고 양손으로 나이프를 잡는다. 네로의 몸이 낮게 깔 린다. 저건 사냥감에게 덮쳐오를 때 하는 수렵동물의 예비동작. "아참. 하나 잊고 말 안 해둔게 있는데, 네로." 그 전에, 알퀘이드의 목소리가 바람결처럼 들려온다. "이제와서 좀 늦은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시키는 말야, 전에 한 번 날 죽 인 적이 있어." "뭐라고 - ?" 이번엔 정말로. 너무나 놀란 나머지, 네로는 자기 자신이 무얼 하는지 잊어 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스스로에 대해 잊어버린 네로의 생각이 마치 무슨 주문과도 같이 내 의식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 이건, 악몽인가...알퀘이드 브륀스타드를 죽여? 저 불사신이란 단어로도 표현해낼 수 없는 괴물을, 이 인간이 죽였단 말야? 아냐,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만약에. 가령,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 과연. 오만한 생각에 빠져있던 것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바로 그거야. 오만함에 빠져있던 건 네로 카오스, 너였던 것 같군." "크 - 흐흐, 하하하하하하하하!" 증오와 혼란의 속에서. 네로 카오스는 정말로 유쾌한 듯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움직이지 않는 표적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래...날 죽일 셈인가, 인간 - !" - 짐승이 울부짖는다. 한손으로, 내 심장을 꿰뚫을 듯 일직선으로 질주해 온다. 그 스피드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나를 죽이려는 마음으로 가득 찬 극히 아름다운 활동이었다. " - " 내뻗은 팔을 자른다. 네로의 몸에는 몇 백 개나 되는 [죽음의 점]이 존재한 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놈의 깊숙한 곳, 중심의 한가운데에 있는 [극점]이 확실히 보였다. - 몇 백의 생명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어. 내가 죽일 것은, 네로 카오스라는 [존재] 뿐이다. 그렇기에 네로를 죽이는 게 아냐. 이 사내가 내포했다는, 그 혼돈. 하나의 세계를 말살한다 - 정면으로 맞부닥친다. 가벼운 충격음이 들린다. - 나이프는 확실하게 놈의 한가운데를 관통한다. 흡혈귀는, 입가를 들어올리며 소리없이 미소를 지었다. "설마" 손끝에서부터 산산이 부서져 하나하나 무너져내리는 검고 검은 짐승의 몸. " - 네가, 내 죽음인가" 체온이 급속도로 떨어진다. 최후는 막을 내리듯 한 순간에 이루어졌다. 이 일격으로. 남은 오백 육십의 짐승과 함께, 네로 카오스는 사멸했다. "피곤해 - " 힘없이 지면에 주저앉는다. 엉덩방아를 찧고 그대로 쓰러지려는 몸을 두 손 으로 지탱한다. " - 추어" 춥다. 통증은 이미 마비되어 있어 오히려 좀 낫다. 몸 여기저기에는 개가 문 자국이나 새 부리에 쪼인 상처 같은 것들이 엄청나게 많이 나 있다. - 뭐, 틀림없이. 이대로 죽어버릴 것 같은데. " - " 크게 한숨을 내쉰다. 턱이 위쪽으로 들어올려지는 바람에 딱 하늘을 올려다 보기 좋은 포즈가 된다. " - 달" 밤하늘에는 아름다운 달이 떠 있었다. 왜일까...너무나 그리운 느낌. 이와 비슷한 광경을, 전에도 한 번인가 꿈에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시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살며시 다가오는 알퀘이드. "...이런, 바보...이 상처로 괜찮으면, 인간이 아니지..."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소리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다 행으로 생각하고 그냥 대답하지 말 걸 그랬다. "크 - 아" 의식이 없어진다. 그 순간. 알퀘이드에게 머리를 얻어맞고 원래대로 의식이 돌아와 버렸다. "...무슨, 짓이야..." "안돼. 그렇게 다쳐놓고 자버리면 틀림없이 생명활동이 정지해 버릴 거야. 자려면 상처부터 치료하고 나서 자라구." - 그런 당연한 소리를. 너무 당연한 소리를 들으니 화가 나려고 한다. "...알퀘이드. 전부터 생각했던 거, 말해도 될까?" "응, 뭔데?" " - 너무 무리한 걸 주문하지 마, 이 바보야." 쿵 소리를 내며 지면에 쓰러져 버렸다. - 의식이 멀어진다. 알퀘이드가 옆에서 뭐라고 뭐라고 떠들어대고는 있지만 더 이상 눈을 뜰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너무 - 추워. "자, 잠깐 시키. 정말로 죽는단 말야...!" ...그러니까 졸립다니까. 죽기 전에 자니까, 아침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 는 것처럼 일어날 수 있을 거야. "시키, 자면 안 돼 - ! 최소한 상처라도 치료하고 피를 보충해 두지 않으면 다시는 못 일어난단 말야...!" - 아아, 거참 시끄럽네. 난 잘 거니까 치료를 하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에, 내가 고쳐줘도 되는 거였어? 뭐야...그런 거라면 빨리 얘기하지 그랬 어." 밝은 톤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 다음 순간. 차가운, 지금의 내 몸보다 차가운 손가락이 마치 쓰다듬어주듯 내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을 받았다. "뭐, 다른 사람의 사역마를 받아들이는 건 싫긴 하지만...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어쩔 수 없지." ...무엇인가를 바르는 듯한 감촉. 뭐가 뭔진 잘 모르겠지만, 그저 너무도 마음이 편해 - "과연 원초의 바다라고 일컬어지는 흡혈귀야. 본체인 네로가 소멸했어도 사 역마들은 소생가능영역에 아직 남아있어...응, 이 정도라면 내가 조금만 잘 보살펴주면 어떻게 잘 될 지도. 일단 이쪽에 기생시켰다가 - 건강해지고나 서 다시 시키한테 옮기면 - " 내 몸에서 손끝이 멀어져간다. "이쯤일까나...어때? 방향성이 없는 생명의 종자니까, 이미 인간으로서 형 태를 취하고 있는 시키의 몸에 쉽게 기생해 들어가잖아? ...어라, 자네... 시키 - ?" - 그래, 나 잔다. "할 수 없지. 언덕 위에 있는 저택이 시키 네 집이지? 일단은 데려다 주고 오지 뭐." - 잠이 든 채, 그저 흰 달만을 바라본다. "...잘자, 시키. 그리고 고마워. 오늘 밤은 시키 덕분에 살았어." ...왠지 위엄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감사의 말. 그것을 마지막으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토노 시키의 의식은 이번에야말로 그 누구한테 도 방해받지 않은 채, 깊고 깊은 잠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4. 검은 짐승 II - 끝> -------------------------------------------------------------------------------- <5. 푸른 구적(咎跡)> 아침 햇살이 느껴진다. 두 눈을 감고 잠 속에 빠져 있어도 부드러운 아침 햇살은 혼탁한 의식을 깨우려 하고 있다. 의식이, 점차 되돌아온다 - . 조 용한 분위기. 공기는 상쾌했고 또한 부드럽다. 오늘 날씨는 아무래도, 지금 까지 겪어왔던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 같다. - 그럼 빨리 일어나서 학교 가야지 - 그래, 학교 가야지. 요 이틀간, 내가 학생이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 었을 정도로 정신없는 생활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말야 - "........." 눈을 떴다. 몸은 침대 위에 눕혀져 있고 침대 맡에는 안경이 놓여져 있다. 별 생각 없이 안경을 쓰고 시야를 정돈한다. 창 밖에서 밝은 아침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 - " 조용히 심호흡을 한다. 폐에 신선한 공기를 가득 채우니 가슴 속이 깨끗하 게 씻겨내려가는 것 같다. 시계 바늘은 똑딱똑딱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 고 창 밖으로 보이는 숲에서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러온다. 나는 부드러운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을 느끼고 있다. - 아아, 돌아왔어. 특별한 것 없는 아침인데도. 오늘은 왠지 - 이렇게나 성스러운 기분마저 드 는 것일까. " -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이야. 내가 살아있다든지, 아니면 저 검은 코트의 흡혈귀가 어 떻게 됐다든지 하는 그런 게 다행이란게 아니라. 내가 그런 세계에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다시 보통의 일상으로 돌아와 이렇게 행복한 아침을 만끽하 고 있다는 사실이. - 그때.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시키 님." "우와아아아악!" 반사적으로 상반신이 튀어오른다. 침대 발치에 조용한 자세로 서 있는 히스 이의 모습이 보였다. "히, 히히, 히스이 - " "...정말 죄송합니다. 시키 님께서 제가 와 있는 줄을 계속 알아차리지 못 하시기에 제가 먼저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 - 응, 아니, 별로, 미안해." 히스이는 공손한 자세로 꾸벅 인사를 한다. - 까, 깜짝이야...심장이 아직도 쿵쾅쿵쾅 방망이질 치고 있다. " - 어라? 아직 7시도 안 됐잖아, 히스이." "에. 평소 시키 님께서 일어나시던 시간보다는, 조금 이른 시간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 그럼 히스이는 뭐 하러 온 거야?" "시키 님을 깨워드리러 왔습니다. 아키하 님께서 최근 이틀 동안의 일에 대 해 드릴 말씀이 있으니까 억지로 깨워 일으켜서라도 시키 님을 모시고 오라 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 - 아" ...깜빡하고 있었어...그러고 보니 나, 토요일엔 학교를 빼먹고 그 다음날 인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알퀘이드랑 같이 있었잖아... "...저기, 아키하 지금 화났어...?" "글쎄요, 잘은 모르겠습니다마는...그건 시키 님 스스로가 직접 만나 확인 해 주시길 바랍니다." - 히스이의 목소리는 매우 차가웠다. "...잠깐. 그 전에 말야...어째서 내가 내 방에서 자고 있는 거지...?" "시키 님께서는 새벽 2시를 조금 지나 저택에 돌아오셨습니다. 현관에서 잠 들어계신 것을 언니가 발견하고 방까지 모셔오게 된 것입니다." "뭐라 - " ...벌려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대론 안 돼 - 이틀 씩이나 아무 연락 도 없이 지내고 있다가 하필이면 한밤중에 돌아와서는 현관문 앞에서 자고 있었다니...완전히 술취한 사람이잖아! " - 이자식이 - 사람을 무슨 고양이 취급하듯이 해가지고서는 - " 알퀘이드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지만...현관문까지 데리고 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일런지도 모른다. " - 알았어. 금방 내려갈테니까 아키하한테는 그러니까...최대한 조용히 잘 말해놓고 있어주면 좋겠는데..." " - 그건 안 됩니다." 히스이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설마...히스이도 나한테 화내고 있는 거 아닌지 몰라... " - " 으윽...산넘어 산이라더니...이 저택의 주인은 아키하인데, 그런 아키하가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나한테 아군이 될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소리 아 냐 이거... 뭐, 어쨌든 일어나기부터 하자. 이대로 계속 침대에 머물러만 있어봤자 일 이 풀리는 것도 아니고. "윽.........!" 아윽 - .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온몸이 삐걱거리며 그와 동시에 통증이 전신을 내달 린다. " - 어제의 - 상처인가" ...그렇군...내가 이렇게 무사히 살아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군...그렇게나 심한 상처를 입고 또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렸으면서, 이 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아침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도 부자연스 러워... "시키 님, 그건 - " ...별일도 다 있군. 히스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본다. "왜, 뭐 이상한 거라도 - " 내 몸을 본다. 그 순간 - "이, 이게 뭐야...!?" 잠옷에 붉은 얼룩 같은 것들이 나 있다. 물론 처음부터 잠옷의 디자인이 그 랬을 리가 없다. 아마 내 몸에서 난 피가 잠옷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리라. " - " 히스이는 터져 나오려는 말을 꾹 참고 있다. - 고마워. 덕분에 나도 냉철하 게 있을 수 있게 됐어. ...피가 나는 이유는 명백하다. 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 말할 수가 없으니까 일단은 어떻게든 거짓말이라도 해서 속여두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시키 님, 몸이 - " "...괜찮아. 아프진 않아. 봐봐, 어제 새벽에 돌아왔잖아? 사실은 싸움이 벌어져서 말야, 덕분에 그렇게 늦게 돌아오게 된 거였어. 이 상처들도 그때 생긴 거긴 하지만 그냥 살짝 긁힌 상처 같은 것들 뿐이니까 그렇게 놀라고 그러지는 않아도 돼." " - " 히스이의 눈은 '거짓말하지 마세요' 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히스이는 내 가 아무리 거짓말을 한다해도 이를 뭐라고 뭐라고 추궁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미안하지만, 일단은 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로 어떻게든 밀어붙 일 수밖에 없다. "아, 음...그러니까 아키하한테는 비밀로 해주지 않을래? 내가 싸웠다는 걸 알게 되기라도 하면 아키하, 엄청 화낼 것 같으니까." " - 예. 잘 알겠습니다. 아키하 님께는, 결코." 히스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고마워. 아참, 이왕 말나온 김에 부탁할게 있는데, 소독약 같은 거 있어? 여기저기 긁히고 까지고 그래서 간단히 응급처치라도 해두고 싶어서 말야." "아 - 예, 빨리 가져오겠습니다." "...?" 뭐지? 방금 히스이, 엄청 어색한 표정을 지은 것 같은데. 뭐 어쨌든, 구급 약을 가져다 준다니 고맙군. 약상자만 가져오면 혼자서 어떻게든 할 수 있 겠지. 별로 그렇게 아프다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출혈을 막을 수 있을만한 거라면 뭐든지 상관없어. "많이 기다리셨죠~~?"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히스이가 아니라 코하쿠 씨였다. 코하쿠 씨는 손에 빨간 십자 마크가 그려진 상자를 들고 있었다. "얼래, 코하쿠 씨 - ?" "예. 사정은 히스이한테서 다 들었어요. 시키 씨, 밖에서 싸우고 오셨다고 요?" "아...아니, 그런게 아니라 - " 그 이외에 설명할 길이 없다. "정말...싸움 같은 건 하면 안 돼요. 좀 심하게 장난치거나 하는 것까지는 괜찮아도 폭력은 절대로 안 돼요. 싸움을 건 사람도, 그렇게 해서 싸우게 된 사람도 결국엔 둘 다 서로 아프기만 하잖아요?" 때린 사람도 맞은 사람도 아프기만 할 뿐, 인가. 코하쿠 씨의 말은 그게 전 부였음에도 가슴 깊숙한 곳까지 와 닿는다. "...응. 그건, 그래. 싸우면 서로 아프기만 할 뿐이지..." "그쵸? 그런데도 그렇게 다쳐서 오시기나 하고...실망이에요. 아무리 사정 이 있었어도 그렇지 싸움 같은 걸 해버리면 시키 씨를 안 좋게 보게 되어 버리잖아요." 코하쿠 씨의 말이, 왠지 모르게 가슴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것 같 다. -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졌어...미안, 코하쿠 씨. 아무래도 나 - 코하쿠 씨한테 안 좋게 보일만한 짓을 수도 없이 저질러 버린 것 같아. " - 아아, 나도 마음 속 깊이 반성하고 있어. 두 번 다시는 그런 짓 안 할 게요." "예. 알아주셨으니 된 거에요. 그럼 상처가 어떤지 좀 봐야하니까, 옷을 좀 벗어주시겠어요?" " - 에?" 코하쿠 씨는 총총걸음으로 내 곁에 와 서더니 지금 입고 있는 셔츠를 꼭 붙 든다. 코하쿠 씨는 나더러 지금 누드가 되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자, 자, 자, 잠깐만!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니까, 그냥 그저 좀 까진 데 소독하는 것 뿐이라니까!" "무슨 말씀하시는 거에요. 까지고 긁힌 상처라고 하셨지만, 이건 그렇게 가 벼운 상처가 아니라구요." "아니, 그래도 괜찮다니까 그러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니까." "안 돼요. 등에도 이렇게 - " 등에 난 상처를 본 코하쿠 씨가 숨을 집어삼킨다. " - 심하네...시키 씨, 싸웠다는 상대가 혹시 도베르만이었어요?" "...응. 뭐...그거랑 비슷한 거랑..." " - " 코하쿠 씨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다. "후우...그럼 더더욱 시키 씨 혼자서만 하시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 자, 빨리 옷 벗으세요. 옷을 입은 채로는 제대로 치료도 할 수 없잖아요?" "아, 아니...그러니까 그런 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니까! 그렇게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닌데 다 벗을 필요가 어디있다고...!" " - 하하앙~~부끄러워 하시는 거죠, 시키 씨?" 코하쿠 씨는 방긋 하고 웃음을 머금고는 내가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고 입고 있는 잠옷을 벗기려 든다. "시키 씨 몸은 벌써 다 봤다구요. 그만하고 빨리 옷 벗으세요." "...벌써 다 봤다니...무슨 소리에요, 코하쿠 씨?" "전에 한 번 시키 씨 옷 갈아입혀드린 적이 있잖아요. 등에 어디 점이 나 있는지까지 다 알고 있다니까요." "어, 어버버, 버" "빨리, 시간 없어요. 이렇게 너무 시간 끌다가는 아키하 님한테 들킨단 말 이에요." - 윽...그렇게 말하면 난 어쩌라고...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코하쿠 씨 앞에 서 알몸이 되는 건 좀... "...할 수 없군요. 그럼 상반신까지만 제가 봐드리도록 할게요. 그 정도면 안 부끄러우시죠?" ...그래도 꽤나 부끄럽기는 하지만, 코하쿠 씨도 나름대로 최대한 양보한 거겠지. "...그, 그래. 그럼, 부탁드릴게요." 침대 곁에 걸터앉고 셔츠를 벗었다. 코하쿠 씨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팔과 어깨 뿐만 아니라 등에 난 상처까지 놓치지 않고 살핀다. 소독약이 상처에 스민다. 하지만 아무 때나 일어나는 빈혈이나 옛날에 입었 던 상처의 아픔에 비하면 이 정도 쯤 아무 것도 아니야. 소독약을 바를 때 마다 "와아~~잘 참으시네요~~" 라고 코하쿠 씨가 칭찬해 주니까 더 잘 참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이 부위엔 습포(濕布)를 붙여놓을게요. 혹시 떨어질 지도 모르니까 붕대로 감아놓도록 하죠." 멍이든 가슴팍에 습포를 대고 그 위에 다시 한 번 붕대를 감는다. "예, 이제 다 끝났어요. 양쪽 발에 난 상처 치료, 정말로 안 해도 괜찮으시 겠어요?" "응. 그 정도는 내가 할 게요...고마워요, 코하쿠 씨. 바쁜데 시간없게 해 서." "아뇨, 그런 건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럼 저 주방에 내려가 있을테니까 치료가 다 끝나시면 식당으로 오세요?" 코하쿠 씨가 문 방향으로 향한다. "아, 코하쿠 씨." "예?" "저기 - 미안해요. 코하쿠 씨 말대로 괜히 바보처럼 싸우고 그래서...맨날 걱정만 끼치고 좋은 일은 하나도 없고..." " - " 코하쿠 씨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기쁜 듯이 웃음을 터뜨 렸다. "예, 잘 알겠어요. 그럼 오늘 일은 봐드리도록 하죠 뭐." 정말로 기분 좋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 나서 코하쿠 씨는 조용히 방을 나섰 다. -------------------------------------------------------------------------------- - 자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이 문 너머에 아키하가 기다리고 있는 거실 이 있다. 그 어떤 사정이 있었다고는 해도 학교를 무단으로 결석하고 게다 가 이틀씩이나 집에 오지도 않은 사실 자체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는 - <1. 사정을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 적어도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하자 - 선택> "...그래. 그게 제일 낫겠지." 알퀘이드나 네로 같은 [인간이 아닌 것]에 대해 이야기해봤자 어차피 믿어 주지도 않을테니, 사실을 이야기할 수 없다면 적어도 솔직하게 사과라도 해 둬야겠지. " - 좋아, 들어가자." 크게 심호흡을 하고 거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아키하가 소파 에, 히스이가 벽 쪽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 -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빠?" 아키하는 '나, 지금 화났어요' 라는 듯한 시선으로 날 쏘아본다. "에, 아, 음...저기...잘 잤어, 아키하?" "인사는 그만하시고, 거기 좀 앉으세요. 오빠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요." " - " 아키하의 말 속에는 상대로 하여금 싫다좋다 말할 수 없게 만드는 박력이 숨어있다. 조용조용한 발걸음으로 다가가, 아키하 앞에 있는 소파에 얌전히 걸터앉았다. "오빠. 좀 성급한 말씀 같지만, 그제와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설명해 주 지 않으시겠어요?" " - 윽" '설명해 주지 않으시겠어요?' 라고 정중한 말투로 말하는 아키하였지만, 그 건 틀림없는 협박이다. 하지만 이 오라버니께서는 그 이야기에 대해 설명해 줄 수가 없단 말이다. "그 이야기에 대해서 말인데, 아키하." "예, 말씀해 보세요." "미안하지만, 사정은 설명할 수가 없어." 쨍그랑. 아키하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아니, 의도적으로 떨어뜨렸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아키하 님 - " "아아, 미안해 히스이. 빨리 좀 치워줄 수 있을까?" 히스이는 묵묵히 엎질러진 홍차와 산산조각이 난(엄청 고급스러워 보이는) 찻잔을 치운다. 그런 히스이를, 나는 아키하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엉거 주춤한 태도로 바라보고 있었다. 깨진 찻잔을 다 치우고 나서 히스이는 주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 - 그래서, 오빠?" "...왜?" "다시 한 번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아키하는 포기하지 않는다. 억지로라도 내 입에서 사정을 들으려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역시 그 일에 대해 말해줄 수는 없다. 나 자 신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아키하를 위해서도 가급적 그런 이야기는 해서 는 안 돼. "...안 돼. 몇 번을 물어봐도 말할 수 없는 건 말할 수 없는 거야. 아키하 한테 괜한 걱정하게 만든 점에 있어서는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건 말할 수 없는 거야." " -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말할 수 없다구요, 오빠?" "그래. 도중에 연락도 한 번 하지 않고 또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설명할 수 없는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요 이틀간, 나쁜 짓 같은 건 안 했다구...그게 잘못된 행위였다고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 그래.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던 이틀이었지만, 그건 - 올바른 행동이 었다고 믿고 싶어. 알퀘이드를 도와주기 위함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 보다 - 나는 저 식인괴물을 죽인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으니까. 적어도 더 이상 이 마을에서 피를 빨려 살해당하는 등의, 그런 희생자가 나오지 않 게 됐으니까 말야. " - 미안해, 아키하.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이 이상은 묻지 말아 줘." " - " 아키하는 물끄러미 내 눈을 쳐다본다. 잠시, 그런 답답한 시간이 흘러갔다. "...알겠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빠한테도 오빠 나름의 사정이란게 있 을 거고, 그런 걸 제가 일일이 간섭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미안.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 " - " "알겠어요. 이번 일에 대해서는 이 이상 묻지 않도록 하죠. 하지만 앞으로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오빠는 토노 가문의 장남이니까 좀 더 자신의 입장에 대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돼요." " - 윽. 뭐야, 그거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어차피 토노 가는 아키하가 물려받게 되어있으니까 내가 어디서 뭘 하든 상관없는 거 아냐? 가문의 앞 날을 생각한다면 토노 가문에 어울리는 데릴사위라도 들이면 되는 걸 가지 고..." " - " ......? 갑자기 아키하가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왜 그래? 어디 기분 안 좋은 데라도 있어, 아키하?" " -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제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있으면 자기 몸이나 잘 간수하시죠? 오빠는 만성 빈혈증 환자니까요." "...윽" ...확실히 나, 시도 때도 없이 빈혈로 픽픽 쓰러져 버리긴 하지만. "어쨌든, 혼자 너무 밖으로 나다니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거리 곳 곳에 난리도 아닌데. 오빠처럼 어디 나사 하나 풀린 것 같이 멍하니 서있는 사람은 '무차별 살인자님 저 좀 죽여주세요' 하고 말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 지니까요." "무차별 살인자라면 - 아아, 예의 연속살인 말야?" 확실히 9명 정도의 희생자가 생겼다는 연속살인사건. 모든 시체에서 혈액이 빨려져 나간 상태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현대의 흡혈귀 사건이 아닌가 하고 이야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 "아아, 그거라면 이젠 괜찮아. 그런 사건은 두 번 다시 안 일어날테니까." " - 하?" "흡혈귀 같은 건 없단 소리야. 그 범인은 벌써 잡혔는걸." "그래요...? 오빠는 어떻게 그런 걸 알고 계시는 거에요?" "뭐, 어쩌다가 보게 된 것 뿐이긴 해도...아마도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사건은 안 일어날 거야." ...그래...적어도 이 이상 네로한테 살해당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알퀘이 드와 함께 보낸 이틀 동안 너무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에 뭐가 올바른 행 위고 뭐가 잘못된 행위였는지 제대로 이야기할 수가 없어. 하지만 그 사실 만큼은 - 가슴을 쭉 펴고 잘됐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 "오빠 - ? 왜 그러세요, 갑자기 기분 좋은 표정이 되셔가지고." 아키하는 어딘가 좀 이상하다는 듯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 "별 일은 아냐. 그냥 이제 다 끝났구나, 하고 겨우 실감이 났을 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희색이 만연해진 얼굴로,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 다. 7시 반이 되었다. 아키하는 나보다 20분이나 먼저(그것도 차로!) 학교에 갔 다. 코하쿠 씨가 지어준 아침식사를 맛있게 먹고 나 역시 학교로 향했다. 히스이는 내 가방을 들고 문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럼 다녀올게. 바래다줘서 고마워, 히스이." 히스이는 아무 말도 없이 내게 가방을 건네준다. "시키 님, 오늘은 몇 시 쯤에 돌아오시는지요?" "나도 참 신용불량자 신세로구만. 걱정마.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 때까지는 돌아올테니까 말야." " - 잘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히스이는 공손히 인사를 한다. 히스이의 그런 인사에 조금 멋적어 하면서 저택의 문을 뒤로 했다. 교차로에는 우리 학교 학생들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때처럼 가드레일에 기 대어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 - 뭐, 당연할라나." 그녀석이랑 앞으로 만날 일은 없겠지. 애초에 그녀석의 목적은 흡혈귀를 퇴 치하는 일이었으니까 네로가 사라진 지금 이 마을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 조금, 가슴 속에 남아있는 것이 있다. 후회인지 미련인지, 하여간 그런 종류의 것이. 뭐, 이래저래 귀찮은 일만 만들어내는 녀석이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뭐, 함께 있어서 즐거웠다고 나 할까. "...쳇...나 바보 아냐...?" 한 번 죽을 뻔 했으면서 무슨 미련이 남는단 말야. 어젯밤의 상처 탓에 몸 이곳저곳이 쑤시고 결린다...네로의 짐승들의 먹잇감이 될 뻔 했던 그 때를 떠올려보자구. 토노 시키는, 두 번 다시 그런 꼴 당하지 싫단 말야. 학교 예비종 소리가 울려퍼진다. " - 아차차, 지각하겠어" 쓸데없는 잡념을 떨쳐버리고 정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교실 안으로 들어선다. HR 5분 전, 교실 안은 아직 시끌벅적하다. " - 후우" 한숨을 내쉬며 자기 자리로 향한다. 이 정도 시간에 도착할 줄 알았으면 별 로 뛰지 말걸 그랬다. "이야아아아, 땡땡이 마왕 아니신가?" "........." 등 뒤에서 귀에 익은, 하지만 별로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토노. 네놈이 학교 땡땡이 칠거라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 는데 말야. 그럼 안 되지...'오늘은 학교 땡땡이 치고 어디 놀러가겠습니 다' 하고 보고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엄청 기분 좋다는 듯한 표정의 아리히코가 쓸데없는 소리를 주절주절댄다. "...이봐. 내가 왜 학교를 쉬는 일 같은 거 가지고 일일이 네놈한테 보고하 지 않으면 안 되느냔 말야." "당연한 거 아냐? 토노가 학교에 안 온다는 건 선배도 우리 교실에 안 찾아 온다라는 뜻이고, 그러니까 사전에 손을 써두지 않으면 좀 그렇잖아." ...그러니까 대체 뭐가 '좀 그렇다'는 거야, 이자식... "하지만 말야...사실은 또 어떠려나? 네놈, 중학교 때부터 줄곧 빈혈끼가 있었으면서도 학교 만큼은 한 번도 빼먹은 적 없잖아. 뭐...등교하고 나서 바로 집에가 버린다든지 하는 반칙기는 몇 번인가 써먹었었지만 말이지." "그 때랑 비슷해. 교차로 근처까지는 어떻게 어떻게 왔었는데, 거기서 기분 이 좀 안 좋아져서 집에 돌아간 거라구." "흐~~응...유미즈카도 그렇고 네놈도 그렇고...최근 품행이 좀 방정치 못하 다고 생각하지는 않냐?" " - 뭐, 품행이 방정치 못하다는 건 부정하진 않겠는데...유미즈카한테 무 슨 일이라도 있어?" "응? 아아, 요즘 계속 결석. 유미즈카도 지금까지 쭉 우등생 자리에 있었으 니까 말야 슬슬 텐파이(마작용어. 패 하나만 더 있으면 나는 상황)였던 거 아냐? 하지만 후리텐(마작용어. 특수한 규칙 때문에 텐파이 후 원하던 패가 나왔음에도 나지 못하는 상황)이라서 나지 못하는 걸지도." "........." 아리히코의 비유법은 정말 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다. 그때 HR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어이쿠, 그럼 난 이만 실례. 토요일에 땡땡이친 것만큼 열심히 공부 잘 하 고 있으라구." 아리히코는 허겁지겁 교실을 빠져나간다. 아무래도, 오늘은 아리히코 놈이 학교를 땡땡이 칠 모양인 것 같다... 오전 수업 종료. 점심시간을 알리는 예비종 소리와 함께 교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감소해 버렸다. "...자아, 어떻게 할까나" 아리히코도 없으니, 오늘은 느긋하게 점심식사나 하도록 하지 뭐. "어머? 토노 군 혼자에요?" "그렇긴 한데 - 선배, 혹시 점심 먹으러 오신 거에요?" "예. 셋이서 함께 먹으려고 서둘러 찾아온 건데 - " ...아무런 예고도 없이, 선배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선배는 그 상태로 내쪽으로 바짝 다가선다. "아 - 서, 선배...?" 바로 앞에 선배의 몸이 있다. 하마터면 포옹할 뻔 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에. 이 정도로 가까이 있는데 심장이 터질듯 두근거리지 않는다면 그게 오 히려 더 이상한 거지. " - "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내 곁에 다가서서 - 이곳저곳 냄새를 맡고 있을 뿐이다. " - ??" ...선배, 지금 뭐하는 거지...선배는 그렇게 냄새를 맡다가 갑자기 내쪽에 서 떨어진다. "...저기요, 선배?" "토노 군, 무슨 일이 있었죠?" 선배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본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선배가 무슨 소리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무슨 일이라니...저기, 뭐가요?" "저도 잘 몰라요. 그러니까 여쭤보는 거잖아요." 눈을 위로 치켜 뜬 선배의 모습은, 어딘지 화가 나 있는 듯 보였다. "별로 - 난 평소 그대로인데. 뭐, 나 오늘 어디 좀 이상해 보여요?" "아뇨, 그게...저도 잘 모르겠어요. 무심코 그런 생각이 떠올라 버린 거니 까...기분 탓일른지도 모르죠." ".........?" 무슨 소린지 원. "자, 점심이나 먹죠. 토노 군, 오늘은 학교 식당에서 드실 거죠? 빨리 안 가면 자리가 하나도 안 남아버릴 지도 모른다구요." "아차, 그랬지. 그러는 선배도 오늘은 학교 식당에서 드실 거에요?" "예. 오늘은 맛있는게 먹고 싶어지는 날이니까요." 선배는 입가에 웃음을 띠며 내 손을 잡고 식당 쪽으로 걸어나섰다. 결국, 선배와 함께 했던 점심시간은 2주 후에 있을 체육제와 그 후에 있을 문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서 끝을 맺게 되었다...사실대로 말하자면, 체육제니 문화제니 하는 것들보다 [맛있는게 먹고 싶다] 라고 말했으면서 카레를 주문해버리는 선배 모습이 훨씬 더 인상에 강하게 남았다고나 할 까... -------------------------------------------------------------------------------- 오늘 하루 수업이 모두 끝나고 방과후가 되었다. 자아, 이제부터 어떻게 할 까 - <1. ...거리에 나가 찾아보자. - 선택> 아무런 목적도 없이 거리로 나섰다. 난 어째서 아무 의미도 없이 이런 곳을 걸어다니고 있는 걸까. " - 아" 잘못 봤겠지...그녀석이 아직 이 동네에 있을 리가 없을 뿐더러 내가 그녀 석한테 말을 걸어야 하는 이유도, 없어.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왜 그녀석을 떠올려버렸을까. 어째서 - 아무 의미도 없이, 혼자서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걸까. "...빨리 집에나 가봐야지." 몽롱한 기운을 떨쳐버리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있을 리 없는 알퀘이드의 그림자를 뒤로 했다. 언덕길을 올라 저택 주변을 걷는다. 잠시 후 저택 정문이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 히스이가 혼자서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 뭐하고 있는 거야, 히스이 녀석."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문으로 향했다. 히스이는 그런 나를 알아채고 꾸벅하 고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어서 오십시오, 시키 님." " - 아, 응 - 다녀왔어, 히스이." 생각지도 못했던 정중한 마중인사를 받고 어찌해야 할 줄 몰라하면서도 어 떻게 어떻게 대답을 한다. "저기 - 혹시나, 나 집에 오는 거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예. 주인이 오시는 것을 마중나가는 것은 사용인의 의무니까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는 듯 히스이는 눈썹 하나 까딱도 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한다. "아니, 저기 말야 히스이...마중 나와주는 건 솔직히 고맙긴 하지만 일부러 밖에서 기다리지는 않아도 돼. 난 언제 집에 돌아올지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냥 왔나보다 하고 할 때 한 번 씩 말 걸어주는 걸로 충분하니까 말야." " - " 히스이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진다...서, 설마...토요일에도 일요일에도, 히 스이는 이렇게 쭉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 히스이, 저기 말야 - "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부터는 로비에서 시키 님을 기다리도록 하겠습니 다." 꾸벅 하고 고개를 숙이며 히스이는 저택의 문을 열어젖힌다. 히스이는 문에 손을 대고 있는 채 나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다. ".........하아" 왠지 말을 걸 수 있을만한 분위기가 아닌 것 같군. 저택의 정문을 빠져나가 자 히스이는 다시 문을 닫고 현관까지 걸어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현관문을 열고는 나를 로비까지 안내했다. 방에 도착했다. 아키하는 과외수업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코하쿠 씨는 저녁 식사 준비를, 히스이는 저택의 청소를 하고 있다. " - 나 이거야 원, 할 일이 없네..." 아니, 일단은 공부라든지 복습이라든지 암기라든지 학생신분에 걸맞는 해야 할 일은 엄청 많지만. 왠지 뭐랄까, 아무 일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고나 할까. 알퀘이드의 얼굴이 눈 앞에 잠깐 스쳐지나간다. 좋은 일이 있을 때나 안 좋 은 일이 있을 때나, 어쨌든 정신없는 이틀간을 함께 보냈던 데에 대한 반동 인 건가...잠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가만히 있으면 조금은 마 음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휑뎅그렁한 식당에서 홀로 저녁 식사를 끝마친 다음 코하쿠 씨에게 다시 한 번 상처 부위를 치료받고나서 내 방으로 돌아왔다. 저녁 시간이 다 되도록 아키하는 돌아오지 않았다. 과외활동 시간이 제법 늦어지는 모양인지 외식 을 하고 집에 오는 모양이다. 시계 바늘은 밤 10시를 넘기고 있다. 좀 이른 시간이기는 하지만 몸도 피곤하고 그러니 오늘 밤은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하자 - ...확실히 몸은 피곤하다. 하지만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다. 몸 여기저기에 난 상처가 이리저리 쑤셔대는 통에 숙면을 취하려고 해도 의식이 어중간하 게 깨어있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침대 속에서 시계를 본다. 새벽 3시 - 벌써 5시간 가까이나 자다 깨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있다. "...젠장할, 잘 수가 없잖아" 자고 싶어도 잘 수 없는, 그런 상황은 거의 고문에 가깝다. 째깍, 째깍, 째 깍,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린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끼이, 째깍, 째깍, 째깍, 째깍 - "에 - ?" 방금, 시계 초침 소리 사이에 무슨 이상한 소리 같은게 들린 것 같은데. 문 이 열리는 소리 같긴 한데, 이런 시간에 누가 내 방으로 찾아온 거지? 또각, 또각, 또각. 아니, 틀림없어.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와서는 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거야. " - " 누굴까...이런 야심한 시각에 내 방에 찾아올 사람이라면, 그건 - <1. 알퀘이드일 지도 몰라. - 선택> "자자 - 일어나, 시키." 귓가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어젯밤 -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들려왔던, 잊을 수 없는 여자의 목소리가. "알...퀘이드 - ?" 침대에서 윗몸만을 일으켜 세우고 깜깜한 방 안을 둘러본다. "안녕. 괜찮아 보이니 안심이야." 알퀘이드가 그렇게 인사를 한다. "너, 안녕이라니 - " - 어째서, 이런 곳에 찾아온 거야... "이상해? 내가, 시키네 방에 찾아온게?" "이상하냐니, 그야 당연 - " - 하지도, 않을라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밤은 알퀘이드의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어디에 있든 그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시키야말로 어디 좀 이상한 거 아냐? 모처럼 내가 이렇게 찾아왔는데, 계 속 누워만 있을 거야?" "아아 - 그렇지, 잠깐 - 기다려" 침대에서 일어난다. 그 순간 -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 하더니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어, 어라 - ?" 뭔가 좀, 이상한데. 머리 뒤통수 쪽에 피가 고여 시야가 조금 흐릿하게 보 이는 것 같아. 왠지 - "진짜 증말...어쩔 수 없구나, 시키는." 알퀘이드가 곁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내 앞에 서서, 어쩐지, 붉은, 눈을. "그렇게 있음 아무 것도 못하잖아? 자아, 빨리 일어나서 그 손가락으로 날 만져봐." ...알퀘이드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 나, 대체 어떻게 된 거야...알퀘이드가 내 눈 앞에 있음에도, 시야가 알 퀘이드의 얼굴로 향하지 않는다. 뭔가 좀 이상해진 것 같아. 똑바로 알퀘이드의 얼굴을 보려고 하고 있음에도, 시야가 움직여주지를 않 아. 아름다운, 그리고 풍만해 보이는 듯한 가슴. 잘록한, 그리고 힘껏 껴안아보 고 싶어지게 만드는 허리. 붉은 빛이 감도는, 요염한 기운을 머금은 윤기 나는 입술. 상대가 여자라는 사실을 강하게 느끼게 하고, 나 자신이 남자라 는 사실을 강하게 인식시키게 하는 부분에 밖에 시선이 가지 않는다. "잠까 - " 의식이 뒤틀려간다. 뭔가 좀 - 이상해.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 속이 온통 새 하얀 물감으로 칠해진 것 같아. 마치 심장이 멎어버린 것 같아. " - 그렇구나...시키, 혼자선 움직이지 못하는구나." 알퀘이드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리고. 침대 위에 앉은 나를, 알퀘이 드는 두 팔을 벌려 감싸안듯 꼭 껴안는다. " - ?!" 쿵. 심장이 멈춰있음에도, 가슴 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동요한다. "시키 심장, 터질 것처럼 뛰고 있어..." 알퀘이드의 목소리가 고막 속으로 파고든다. 아니, 실제로 - 저 붉게 물든 입술이 내 귓불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다. "읏.........!" 그저, 저 붉은 입술에 귓불을 깨물렸을 뿐인데. 단지 그 뿐임에도. 마치 무 언가에 가슴을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온몸을 내달렸다. "알...퀘이드..." 내 품에 안겨있는 알퀘이드를 밀쳐내려고 팔을 움직여본다. 하지만 팔은 커 녕 손가락 하나조차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앗...윽 - "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그 사실을 안 순간 호흡이 더욱 빨라졌다. 왜 움직 여지지 않는 건지, 어떻게 하면 움직여질지 같은 건 생각할 수조차 없어. 그저 이 상황에서 손발이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내겐 너무도 흥 분이 되어 - 이성을, 급격히 발화시킨다. "흐~~응 - 그런 거였구나...시키, 너 나랑 하고 싶지?" 알퀘이드의 얼굴에 빙긋이 미소가 떠오른다. 목소리가, 귓가에서 목덜미 쪽 으로 옮겨간다. 희미한 숨결이 목언저리에 전해져 온다. 그녀가 할짝이며 내 몸을 핥고 있다. - 마치 내가 무슨 맛인지 알아보는 것처럼. ".........!" 쿵. 심장이, 터진다. 맥박치는 혈관과 하얗게 물들어버린 머릿속. 미끄러지듯 등을 스쳐지나가는 차가운 알퀘이드의 손. 내 가슴에 짓눌려진 그녀 가슴의 탄력. 목덜미에 전해져 오는 촉촉한 영도(零度)의 혀. 그 모든 것이 이성을, 모조리 없애간다. "...헛소리, 지껄이지마...어째서, 내가 - 너랑, 하고 싶어져야...하는 거 야..." "거짓말하지마, 시키. 벌써 이렇게 두근두근거리고 있잖아?" 알퀘이드의 숨결이 목덜미에서 가슴 쪽으로 옮겨 내려간다. 호흡이, 거칠 다 - 알퀘이드를 저리 떼어놓고 싶어. 하지만 그 이상으로, 알퀘이드와 이 대로 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 금빛 머리칼. 붉은 눈동자. 하얀 살결. 가는 손가락. 가녀린 팔. 그리고 -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육체. 그것들을 이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음미하고 싶다고 머리 한켠에서 그렇게 외쳐내고 있어. "큭........." 이게 뭐야. 이성은 아직 남아있을텐데도 - 마치 짐승과도 같은 흥분이 뇌 중추에 파고 들어간다 - . "하.........크윽......!" 두 팔에 힘이 넣는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아. 내 몸 전체가 알퀘이드의 호 흡을 느끼고 움직여지지 않고 있어. - 말도 안 돼. 눈에 보이는 것으로 속박당하는 이상으로. 알퀘이드의 숨결만으로 내 몸이 속박당해 있다는 사실이, 마치 사정해 버릴 것만 같은 흥분을 불러 일으키고 있어. " - 그만해...더 이상은, 안 된...다니까 - " "시키는 참 이상해. 마음 속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으면서도 몸은 다른 소 리를 내고 있는걸. 그리고 시키의...여기, 이렇게나 커다랗게 되어서는 -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데...?" 알퀘이드의 손이, 등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희고 가녀린 손가락이, 내 허 리춤으로 내려간다. 거기 있는 건, 이미 오래 전에 우뚝 솟아있던 또 다른 나 자신이었다. "그만 - " "핏줄이 터질 것 같이 괴롭지? 괜찮아, 참지 않아도 돼. 내가 편하게 해줄 게 - " 알퀘이드의 숨결이 발기한 생식기에 와 닿는다. 그리고 가녀린 손가락이 우 뚝 솟은 물건을 꼬옥 감싸쥔다. "크윽 - !" 겨우 그것만으로 몸이 튀어오르듯 들썩였다. 등이 활처럼 휘어 그대로 침대 에 쓰러져 버린다. "야, 너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침대에 드러누운 채, 있는 힘을 다해 겨우 목소리를 내본다. " - " 알퀘이드는 그런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 쓰러진 나를 내려다 본다. 그리고...알퀘이드는 조용히 입고 있던 흰 옷을 벗었다. 어딘지 모르 게 초점이 맞지 않는 시선으로, "맛있을 것 같은데, 시키" 그런 소름끼치는 소리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 - !"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기세로 온몸에 힘을 주어본다. 하지만 여 전히 내 몸은 손가락 하나조차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알퀘이드는 뽀얀 속살을 드러내며 힘없이 쓰러져 있는 내 위에 몸을 싣는다. 두근. 피가 내 몸을 타고 돈다. 마치 현기증이 일어날 때처럼, 사고가 명확 해져 있지 않은 상태. 하지만, 오늘밤 만큼은.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대단해 - 시키의 이거...이렇게 딱딱하고 뜨거울 줄은, 정말 몰랐어" ...알퀘이드의 손가락이 불끈 솟은 페니스를 이리 저리 만져댄다. 움켜쥐고 있다기 보다 손으로 만지고 있다라고나 할까...그러한 불분명한 감촉은 - 빨리, 빨리 하고 싶다는 욕구를 더욱 강하게 부채질한다. "보여 - ? 시키의 이거, 이렇게 흠뻑 젖어서는...마치 울고 있는 것 같아" 귀엽다는 듯 웃음을 띠고. 알퀘이드의 입술이 페니스에 입맞춤을 한다. " - !" 터져나올 것 같은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삼킨다. 그런 나를 쳐다보며, 알퀘 이드는 즐겁다는 듯 눈매를 가늘게 뜬다. "진짜...정말 그렇게 나올래? 시키가 자꾸 그렇게 나올 거면 나도 좀 더 시 키 괴롭혀줄 거야" "무슨 - 너, 지금 무슨 짓으 - 응...!" 다시 한 번 목소리를 죽인다. 손끝으로 가볍게 터치한 것만으로도 곧 죽을 듯이 헐떡였던 민감한 신경 덩어리에. 알퀘이드의 혀가 닿는다. 마치 입안 에 가득 담기라도 하듯 미끄러져 들어간다. 뜨겁게 응고해서 바짝 말라버린 페니스에 물기라도 대려는 듯 알퀘이드의 타액이 선을 그리며 물건을 타고 내려온다. 금빛 머리칼에 가려 알퀘이드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죄책감같은 뭔가 꺼림직한 기분과 마치 온몸을 죄어드는 듯한 쾌감만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을 뿐. "큭 - !" 신음소리와 함께 페니스가 한층 더 불끈 솟아오른다. 극도의 흥분에 의해 분비된 액체가, 그로테스크한 페니스를 번들번들하게 빛이나는 추악한 고깃 덩어리로 바꾸어 놓는다. 그것을, 하얀 손가락이 움켜쥔다. 싸잡는다. 이를 상하로 움직여서 전립선을 자극한다. "하, 하아.........!" "후후...시키 목소리, 섹시한데? 나, 시키의 그런 점이 맛있을 것 같았어." 그 말과 동시에 알퀘이드의 입술이 페니스에서 떨어진다. 흰...마치 예술품 같은 아름다운 손가락이 고환에서 페니스 쪽으로 밀려 올라간다. "응 - 읏......!" 아래부터, 마치 짜내듯 압착한다. 알퀘이드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 무 언가, 몸 속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엇인가가 솟구쳐 오르려 한다. 그걸 필사적으로 참아낼 수밖에, 없어. 네 개의 가는 손가락이 마치 각각 독립된 생물들처럼 페니스를 괴롭히는 것 과 동시에. 엄지손가락은 다른 손가락들보다 한층 강하게 페니스의 끝부분 - 귀두와, 액체를 분비하고 있는 요도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닦아내듯 마 찰하고 있었다. "와아...이렇게나 젖었는데도 아직도 넘쳐나와...시키, 엄청 흥분했나봐?" "그 - 말도, 안 - 돼" "진짜...애써 시키가 하는 소리 다 들어주고 있으니까 이제 그만 자신한테 솔직해져 보는게 어때, 응?" " - !" 알퀘이드의 엄지손가락이 요도 입구를 좌우로 벌린다. 하반신에서 뇌수를 향해 달리는, 전류와 같은 찌릿한 아픔과 쾌감. "하, 아 - 하아 - 하, 아 - " 호흡이, 단편적으로 밖에 나오지 않아. 알퀘이드의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심장이 거친 호흡을 내보내고 있다. " - 응, 그럼 이쯤에서..." 정맥이 울퉁불퉁하게 솟아오른 생식기에서 손을 뗀 후 알퀘이드는 내 얼굴 을 쳐다본다. "어때? 기분 좋았지, 시키?" ".........."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이성은 그렇지 않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데, 몸은 알퀘이드의 말에 따르고 있다. 난 아직 내 이성을 차리고 있는데 - 몸 은 알퀘이드에게 좀 더 계속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어. "알 - 퀘이, 드 - 이제, 그만, 해" 최후의 의지를 짜내어 겨우 그러한 단어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를 비웃기 라도 하듯 알퀘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럼 시키 - 널, 정말로 사랑해 줄게" 페니스의 밑둥을 하얀 손가락이 힘껏 움켜쥔다. 세게 고정된 페니스는 손으 로 꼭 죄어 있었음에도 더없이 팽창하여 마치 도망이라도 가려는 듯 더욱 더 충혈되어 있다. 파열직전에, 가깝다. 그런 이형의 물체를 알퀘이드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마치 피리를 불듯 살짝 깨물었다. "큭 - !" 등뼈가 끊어질 것 같다. 감각이 극한까지 민감하게 되어버린 페니스에 알퀘 이드의 혀가 미끄러져 들어온다. 나체의 감각 - 쾌락이라는 신경 그 자체가 완전히 물어뜯겨 나가는 듯한 공격적인 감촉. 그것만으로도 의식이 저 멀리 떠나가 버릴 것만 같은데도 알퀘이드의 혀는 끊임없이 움직여댄다. 옆에서 페니스를 살짝 깨문 입술은 그대로 위로 위로 향해 움직인다. 귀두 가 사라진다. 귀두는 알퀘이드에 삼켜져 그녀의 입속 점액에 점점 침식당해 간다. ".........!" 그 감각. 여자의 입 속에 자기자신이 들어가다니, 믿을 수가 없어. 미지근 한 감촉. 타액에 흠뻑 적셔지는 질감. 그녀의 좁은 입 속에서 성난 모습으 로 터질 듯 솟아오르려는 페니스와 이를 억누르려는 알퀘이드의 혀의 움직 임 - . "응응...시키 거, 귀여워..." 알퀘이드는 페니스의 밑둥에 손가락을 갖다대었다. 우뚝 솟은 생식기가 솟 아나기 시작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누르면서 혀만으로 위에서 아래 - 끊임없 이 선액(腺液)을 흘려내고 있는 귀두 밑의 파인 곳까지 빠짐없이 핥는다. "하...응..." 쾌락이 엉겨붙은 듯한 뜨거운 숨결. 뿌리부분에서 귀두까지를 힘껏 훑어가 는 부드러운 혀의 감촉. "응......응, 음...아, 응 - " 알퀘이드의 숨결 하나하나는 그대로 쾌감이 되어 내 신경을 타고 몸 속을 흐른다. 멈출 듯, 하지만 계속 이어지는 혓놀림. 부드러운, 동시에 딱딱하 기도 한 혀가, 딱딱하게 굳은 페니스를 미끈미끈하게 휘감아든다. "응 - 하, 아......응......!" 점점 거칠어져가는 숨소리.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는 그녀의 호흡이 페니스 에 와 닿을 때마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감각이 꿈틀대며 솟아오른다. "아 - 알, 퀘이, 드 - "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 한다. 여기서 소리를 내면 그 순간 이성 이 육체에 패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 "응...시키, 뜨거워...봐...!" " - !!" 노골적으로 발기한 생식기를, 그녀의 흰 이가 잘근 물어버리자 - 이젠, 아 무래도 상관없게 되어, 버렸 - "하......크윽......윽" 알퀘이드의 타액에 젖어든다. 그렇게 생각한 것만으로, 저 뿌리 밑둥에서부 터 뜨거운 무엇인가가 뿜어져 나오려 한다. "하아...하아...하...아" 그것을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여기서 - 내 안의 것을 드러내보여서는, 절대 로 안 돼. 만약 그렇게 되면 - 틀림없이 나는, 이대로 알퀘이드를 - 츄웁, 츄즙, 츄츄읖 입 안의 점액과 페니스에서 분비한 선액이 서로 섞이는 소리. 더럽고, 음탕 하고, 더없이 - 원시적인 선정감(煽情感). "하 - 윽......!" 이를 악물고 참는다. 하지만 그런 행동에 의미는 없었다. 알퀘이드의 손가 락이 아래쪽에서부터 페니스를 강하게 쥔다. 지금까지와 같은, 마치 의사가 진찰할 때와 같은 섬세한 손놀림이 아냐. 오로지 힘에 의존해서, 아래에서 위로 슬라이드 시키고 있어. 그것이, 이성의 한계였다. "큭 - !" 꿈틀. 뜨거운 무엇인가가 페니스를 통과한다. 꿈틀 꿈틀. 강렬한 기세로 여자의 입 속에 쏟아져 들어간다. "하 - 아" 거칠 것 없는 쾌감이, 페니스에서 뇌수에 이르기까지 마치 마약처럼 이성을 머리 속에서 완전히 날려버린다 - ...알퀘이드의 애무가 끝났다. 그녀의 목이, 지금 막 페니스에서 토해낸 것 을 집어삼킨다. " - 아" 흰, 도자기와도 같은 청아한 그녀의 목. 아름다운 입술이 추한 생식기에서 떨어진다. 알퀘이드의 입과 내 페니스는 아직 음탕한 선을 그리고 서로 이 어져 있었다. 멍해진 표정. 금빛 머리칼을 찰랑이며 치켜뜬 눈으로 두 뺨을 상기시킨 채 알케이드는 나를 향해 빙긋 웃어보인다. "아 - " 이미 이성은 사라진지 오래다. 온몸이 벌써 움직이고 있다. 나는 거친 숨결 을 내뿜으며, 마치 짐승처럼, 알퀘이드의 육체를 잡아 넘어뜨렸다 - <5. 푸른 구적(咎跡) - 끝> -------------------------------------------------------------------------------- 6. 직사의 눈 I "잠깐 ------ !" 벌떡! 엄청난 기체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아 - 하아 - 하아. 호흡은 거칠었고, 아직도 알퀘이드 안에 있는 것 같은 감촉에 의식이 마비 되어 있다...아니, 잠깐 기다려봐, 시키. 냉정을 되찾아도 일단 손해는 없 을 것 같은데. 일단 -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내 방이지. OK, 이건 됐고. 다음 - 지금 난 침대 위에 있지. 좋아, 잘하고 있어. 그리고 - 지금은 아침이고 난 방금 전까지 알퀘이드와 섹스하고 있었어. 그 래, 그렇게 하면 돼 - 가 아니라, 아니라! 전혀, 눈꼽만큼도, 하나도, 엄청 나게 안 좋은 거잖아, 그거...! "하 - 하, 하, 하 - 아 - " 어떻게 어떻게 평정심을 되찾는다. 시트를 꼭 쥐고 있던 두 손은 땀으로 흠 뻑 젖어있었고, 정말로 방금전까지 알퀘이드를 안고 있었던 것처럼 후끈한 열기가 남아있다. ...하지만, 지금 건 틀림없는 꿈이야. 그게 꿈이라서 기뻐해야만 하는 일인 지, 아니면 땅을 치고 아쉬워해야 할 일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딱부러지게 그 어느 쪽이라고 판단을 내릴 수 없기는 하지만... " - 어째서 - " 그런 꿈을 꾼 거지...꿈에서까지 보일 정도로 녀석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의미인가...꿈에서까지 녀석을 안으려고 했을 정도로 그러니까 - 녀석을 원 했다는 소리인가... " - 으" 가만히 생각에 잠기니 지독하게도 리얼했던 알퀘이드의 피부의 감각이 되살 아난다.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팔을 끌어안 는 나. ...아아, 이건 틀림없이 현실이야. 알퀘이드의 피부는 이런 남자 피부와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달리, 아주 부드러웠고 따뜻했어. "그래...미쳐버릴 것 같을 정도로, 뜨거웠었고..." 머리 속으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거칠어진다. 뭐...좌우지간 어쨌 든 간에 끝내주게 기분 좋았던 건 사실이지만. 알퀘이드를 꿈 속에서 안았 다는, 단지 그 사실만으로도 녀석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음에 도 나는 꿈의 내용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정신없이 헬렐레 하고 있다니. "시키 님." "으아아아아아아악!" 마치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 마냥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아니, 정말로 도 망치려고 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트 째로 바닥에 굴러떨어지기만 했을 뿐이었다. "히, 히히, 히스이...!? 대, 대대대체 언제부터 거떢었어!?" "시키 님께서 일어나시기 전부터 있었습니다만."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는 히스이. 바닥에서 시트에 칭칭 감겨 있는 모습으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히스이의 얼굴을 올려다 본다. "...내가 일어나기 전, 부터..." - 라는 소리는, 설마...그렇고 그런 내용의 꿈을 꾸고 있을 때의 내 얼굴을 히스이가 보고 있었단 소린가 -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 얼굴이 확 하고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히스이는 여전히 무표정한 모습에, 아무 것도 먼저 말하려 하지 않는다. "저기...나 말야, 어디 좀 이상했어...?" "그건 제 입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송구스럽습니다." "아 - 으으..." ...역시, 엄청 장난아닌 꼬라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구만... "하오나, 시키 님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듣고 싶으시다면 가능한 자세히 설 명해 드리겠습니다만...?" "......됐어. 설명 안 해주셔도 돼요, 예......" 얼굴은 얼굴대로 씨뻘겋게 달아올라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 답했다. "저기 말야, 히스이 씨?" 헛기침으로 이 분위기를 받아넘긴다. [씨]라는 호칭이 붙어있는 건...동물 이 자신의 배때기를 드러내 보이는 거랑 같은 의미이다. "무슨 일이신지요, 시키 님." "저기, 옷 좀 갈아입게 밖에 좀 나가있지 않을래?" - 아니아니, 어쨌든 진짜 쪽 팔려 죽겠으니까 밖에 좀 나가있어줘...하지만 그렇게 말했음에도, 오늘의 히스이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시키 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것을 본 후 퇴실하도록 하겠습니다." "......!" 어, 어어어어어어이어이어이!! 어째서 내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가면서까 지 시트 같은 걸 몸에다 칭칭 감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게 다 아직까 지 빨딱 서 있는 허벅지 사이의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아냐! "아, 알았으니까 나가. 안 도와줘도 혼자서도 잘 일어날 수 있고, 다시 자 거나 그러지는 않을테니까. 히스이가 밖에 나가면 금방 옷 갈아입고 거실로 갈게." "시키 님 - 어디 부딪히셔서 못 일어나시는 겁니까...?" 히스이는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내쪽으로 다가온다. "아, 아니...그런 건 아냐. 섰을 만큼 섰어...가 아니라, 혼자서 설 수 있 으니까 걱정 안 해줘도 돼." 마치 무슨 달팽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트를 땅바닥에 질질 끌며 낮은 포복 자세로 히스이에게서 멀어진다. 침대를 바리케이트 삼아 히스이와 충분한 거리를 두었다. "...그럼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식당에서 아침 식사 준비를 하겠사오니 옷을 다 갈아입으시거든 내려와 주십시오." 내가 왜 이러는지 꽤 궁금했겠지만, 히스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 선다. " - 하아" 아아,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꿈 속의 내용도 놀랄만한 것이었지만, 그때 히스이가 옆에서 내 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심장에 안 좋 다. 이게 다, 그 알퀘이드 놈이 그런 짓을 했기 때문인 거 아냐... "그자식...사라진 다음에도 남한테 폐만 끼치고, 정말 - " 정말 - 뭐라고? 그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 나, 뭐라고 말하려고 했었지? 왠지 나 자신의 감정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 고 뭔가 속 시원히 뚫리지 않는 그런 이상한 느낌을 받으면서, 어쨌든 옷부 터 갈아입고 거실로 향하기로 했다. 충분히 기분을 추스린 다음 거실로 이동했다. 거실에는 예상했던 대로, 아 키하가 소파에 앉아 우아하게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빠? 오늘 아침은 제법 빨리 일어나셨네요." 내가 빨리 일어난게 그렇게도 기쁜 모양인지, 아키하는 미소 지은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아아, 잘 잤어? 오늘 아침엔 뭐...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말야." 그렇게 말하면서 - 알퀘이드의 부드러웠던 피부의 감촉을 또 다시 떠올려 버렸다. "읏 - " 이런...나로서도 어떻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오빠 - ?" 딸깍. "왜 그러세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셨는데, 열이라도 있으신 거에요?" " - !" 어느 틈엔가 바로 코 앞까지 다가온 아키하는 내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올 려다본다. 그러니까,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앵글은 거시기 - " - 하아, 정말로 열이 있으신 것 같네요. 코하쿠, 잠깐 이리와봐. 오빠가 몸이 좀 안 좋으신 것 같아." 아키하는 식당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코하쿠를 부른다. 주방에서는 코하쿠 씨가 내가 먹을 아침 식사를 한창 만들고 있는 동안일 것이다. "잠깐 - ! 그, 그냥 감기 좀 걸린 것 뿐이니까 그렇게 걱정 안 해줘도 돼!" "감기라면 더더욱 그냥 내버려둘 수 없어요. 아무리 별 것 아닌 병이라고 해도 오빠한테는 큰일이나 마찬가지잖아요. 면역이나 저항력이 다른 사람들 보다 낮으니까..." 아키하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의 손을 내 이마에 갖 다댄다.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하지만 화사한 손바닥의 감촉 - "!!!!!!!!!" 한계야... 나는 아키하의 손을 뿌리치고 로비 쪽으로 달아났다. 후다다다다다다다다다닥. "시키 님? 식사는 벌써 다 하신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 에, 저기...내 가방 어딨어?" "여기 있습니다만, 벌써 등교하시는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히스이의 손에 들려진 가방을 낚아채듯 빼앗는다. "그럼 다녀올게. 안 바래다줘도 돼!" "오빠, 아까부터 참 이상하시네요? 열이 있다는데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아아, 거참...아무 것도 아니라니까! 아무 것도 아니니까, 나 이대로 학교 갈게! 아침은 대충 알아서 먹을테니까 제발 좀 내버려둬!" "제발 좀 내버려두라니 - 잠깐만요, 오빠!?" 후다다다다다다다다다닥. "하아 - " 아무리 아키하라도, 여기까지 와버리면 쫓아올 생각일랑은 하지도 못하겠 지. 애들도 아니고, 등교하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들어놓지는 않을테니까 말야. " - 후우" 크게 한숨을 들이마시니 대충 마음이 가라앉는다. "......근데...왜 도망친 거지...?"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별로 나쁜 짓 같은 거 한 적도 없으니까 도망치듯 빠져나오지 나았어도 됐는데. " - 뭐야 이거. 무슨 바보짓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제와서 저택으로 도로 들어가 아침 식사를 한다는 건, 더 타이 밍 안 맞는 짓일 거고. " - 학교나 가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고 주택가로 이어진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 평소보다 30분은 빨리 학교에 도착했다. 정문에 학생들의 모습이 드문 것 으로 보아 이런 어중간한 시간에 등교한 건 나 혼자 뿐인 것 같다. 그라운 드에서는 체육계 특별활동부들이 아침훈련을 하고 있다. 지금은 어떤 부에 도 들어가 있지 않지만 솔직히 나 자신은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부류 에 포함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운동신경도 그럭저럭 있는 편이고 다른 사람 들이 보기에도 어느 정도 괜찮게 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라고 자부하고 있 다. 하지만 특별활동부에 가입할 수 없었다. 나는 만성적인 빈혈증 환자인 관계 로 툭하면 주변에 폐만 끼치고 - 거기에 운동을 자주 하면 안 된다고 의사 가 단단히 일러두기까지 했었다. 중학교 때부터 자기들의 특별활동부에 들 어와 달라는 이야기는 꽤 많이 있었다. 그걸 나하고는 맞지 않는다는 핑계 를 대며 거절한게 몇 번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렇게 거절할 때마다 무엇인가 -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거리 같은 것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건 결국. 뭘 어떻게 하든 저들 사이에는 끼어들 수 없다는, 무의식 속의 벽이었는지 도 모른다. "........." 에이, 이런 거 그만 생각하자. 이런 생각들이야말로 나하고는 맞지 않잖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감상적인 마음을 털어버리고 서둘러 교실로 향했다. "얼래 - " 내가 제일 먼저 온 줄 알았더니만, 교실에는 이미 몇 사람인가의 클래스메 이트가 도착해 있었다. "여어. 빨리 왔네, 토노." "안녕. 건 그렇고, 우리반에 의외로 할일 없는 녀석들이 꽤 많은 모양이구 만." "그럴 리가 있냐? 우린 이제 막 아침훈련이 끝났을 뿐이라고. 부활동도 안 하면서 이렇게 빨리 학교에 오는 건 당직교사들 밖에 더 있냐, 보통?" 그렇군, 듣고 보니 또 그렇네. 교실에 있는 녀석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내 자리에 가서 앉는다. HR 시간까지 앞으로 30분. 이렇게 교실에서 같은 반 녀석들이 조금씩 모여가는 걸 구경하고 앉아있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취향인 것 같다. 교실이 시끌벅적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인 것은 오전 7시 50분. " - 어라?" 복도에서 선배의 모습을 언뜻 본 것 같은 기분이... "또 1학년 복도에 오고 - 선배,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혹시 나한테 볼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 <2. 아니,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일지도 모르니까 교실에서 좀 지켜보고 있 어보자 - 선택> 복도에서 누구 찾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지, 선배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복도를 걸어다니고 있다. 냉철하게 관찰해 보니, 아무래도 우리 교실에 볼 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 "...여전히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대체 저런 데에서 뭐하고 있는 거야?" 의자에 앉아 선배의 행동을 관찰해 본다. 선배는 복도를 걷고 있는 학생들 을 물끄러미 쳐다본다거나 팔짱을 끼고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등의 행동을 하 고 있다. "뭐 떨어뜨린 물건이라도 있는 건가, 선배?" ...3학년인 선배가 2학년 복도에서 소지품을 떨어뜨렸다는 건 확실히 이상 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교내를 자유롭게 활보하는 선배라면 마냥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 - 어라? 갑자기 선배가 우리 교실로 들어온다. 선배는 빠른 발걸음으로 나 를 향해 다가온다. "토노 군!" "!"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선배. "왜, 왜 그러세요 선배님...저, 선배 마음에 안 드는 그런 이상한 짓 같은 거 한 적 없는데요...?" "변명해도 소용없어요. 그러니까 잠깐 이리로 좀 와보세요!" 선배는 내 팔을 세게 끌어당겨서는 억지로 복도에 끌고 나와 버렸다. "자, 잠깐만 선배...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뭐 찾고 계시던 거 아니었어요 !?" "됐으니까 거기서 좀 가만히 있어보세요!" "...끙" 선배의 기세에 눌려 자세를 똑바로 고쳐잡는다. 그러더니 선배는 어제와 마 찬가지로 코를 킁킁대며 내 냄새를 맡기 시작한다. "...저기, 선배...?" "토노 군, 어젠 잠 푹 주무셨어요?" "에?" 선배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질문을 해온다. 잠 푹 잘 잤냐니...그런 건 말할 것까지도 없지. 어젯밤에는 제대로 잠도 못 잤고, 무엇보다 - "윽..." 어젯밤의 기억을 똑똑히 떠올리는 바람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 나를, 선배는 올려다보는 각도로 빤~~~히 쳐다본다. "선배, 저기 - " "토노 군, 저질" "예?" 뭔가 불만이 가득 찬 눈초리를 하더니 선배는 종종걸음으로 이내 내 시야에 서 사라져 버렸다. 점심 시간이 되었을 무렵, 지금까지의 오늘 수업에 단 한 시간도 나오지 않 았던 사나이가 드디어 도착했다. "여어! 밥먹자고, 밥!"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기운이 넘쳐보이는 아리히코. "당연히 밥이야 먹긴 하겠지만...엄청 기분 좋아보이는데. 무슨 좋은 일이 라도 있었냐, 아리히코?" "물론. 좀전에 저~~기서 선배한테 점심 같이 좀 먹자고 물어봤다가 딱지맞 았다, 이거야." "........." 이상하군. 선배라면 시엘 선배를 가리키는 말일텐데, 이놈의 친구라는 녀석은 물어봤 다가 딱지받은 게 마냥 기분 좋기만 한가보다. "어이, 아리히코. 네놈 그런 취미였었냐?" "아니아니, 말을 끝까지 좀 들어보라니까. 그래서 말야, 선배한테 왜 안 되 느냐고 물어봤더니만 '토노 군이랑 같이 있기 싫어요' 라더라고! 우와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유쾌하지, 토노!" "........." 더더더 이상하군. 어째서, 난 이런 친구 같지도 않은 자식이랑 중학교 때부터 친구 사이였던 거지? "야아, 미움받을 짓 좀 했나보네 토노! 라이벌이 줄어서 기분 째지니까, 오 늘 점심밥은 이몸이 쏘지!" 내 등을 기분 좋은 듯 두들겨대는 아리히코. "...그래...선배, 아직 아침의 그 일로 화내고 있는 건가..." 왜 화를 내고 있는 건지에 대해서는 하나도 생각나는게 없지만, 그때의 선 배는 틀림없이 화를 내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야, 가자구 토노. 식당 좌석은 이용객의 반 밖에 없으니까 말야." 아리히코는 남의 팔을 억지로 질질 끌어당기고 있다. 아리히코와 나란히 자리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우리 학교 식당에는 TV가 설치되어 있어서 그날의 아침 뉴스 같은 것을 비디오로 녹화했다가 틀어주 는, 교육상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행위를 하고 있다. 어쨌든 지금 흘러나오는 뉴스는 편의점에서 술취한 손님이 점원을 살해했다 는 내용의, 앞으로 3일 정도는 편의점에 가기 싫어지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세상이 참 뒤숭숭하구만 그래.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살인마 에 술취한 놈은 사람이나 찌르고 앉았고...이래서야 안심하고 밖으로 놀러 다닐 수도 없잖아, 정말..." 아리히코는 의외로 진지하게 뉴스를 보고 있는 듯 하다. "...뭐, 확실히 뒤숭숭하긴 뒤숭숭하지만. 어쨌든 무차별연쇄 살인사건은 벌써 해결됐으니까 이젠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 아냐?" "그래? 연쇄살인마가 잡히기라도 했어?" "아니, 잡힌 건 아니지만..." - 적어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아. 그러니까 현대의 흡혈귀라든지 하는 속된 머릿기사 같은게 TV에 나올 일도 없고, 더 이상 아무 이유도 없이 살 해당하는 [누군가]가 나올 일도 없어. "어쨌든, 이제 더 이상 그런 말도 안 되는 사건은 안 일어날 거고 희생자도 나오지 않는다는 소리. 이 마을도 겨우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셈이지." "아니 - 희생자는 더 나올 것 같은데, 토노." " - 윽...어째서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거지, 아리히코." "거야, 봐봐. 오늘 아침에 10명 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지금 뉴스에 나 오고 있잖아." - 에? "에에? 저거 정말이야...? 저기, 평소에 다니던 영화관 뒷골목 아냐?" "자 - 잠깐만 잠깐만." 아리히코를 옆으로 밀어젖히며 TV를 본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어젯밤, 연쇄살인마에 의한 10번 째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내용의 뉴스가 흘 러나오고 있었다. "그런 - 말도 안 돼" 놈은. 네로는 틀림없이 죽었어. 그런데 어째서 - 몸 속의 혈액이 대량으로 빨려나간 시체 같은게 나오느냔 말야. "현대의 흡혈귀인가.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가 미인에 누님 타 입이라면 한 번 쯤 빨려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음." " - " 미인에 누님 타입이라면 빨려봐도 괜찮다, 라... 아리히코의 쓸데없는 헛소리는 확실히 - 뭐, 나름대로 정곡을 찌르는 말일 지도. " - 설마"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네로가 사라졌다고는 해도 흡혈귀는 아직 한 놈 더 남아있는 거 아냐, 시키 - ? -------------------------------------------------------------------------------- 수업이 끝나고 방과 후가 되었다. 아니, 어느 틈엔가 벌써 방과 후가 되어 있었다고 말하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머리 속에 안 좋은 생각들 만 가득 차 있던 상태에서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와 보니 내 주위에는 이미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 - 연쇄살인사건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라..." 그것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알퀘이드 본인 뿐일 것이다. 잘 모르겠어. 그런 사건은 이제, 토노 시키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구. 나는 네로와 승부를 낸 시점에서 이미 이쪽 세계로 돌아온 거나 마찬가지인 거야. 그렇다면 - 나 스스로의 의지로 그런 이상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려 한다는 건 솔직히 그게 미친 짓이지 달리 뭐라 할 수 있겠어. "더 이상 - 상관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런 사실 쯤, 입에 담을 것까지도 없이 이미 머리 속으로 다 이해하고 있 어. 그게 아마...마지막에서 2번째 쯤 되는 올바른 선택일 거야. 하지만 토 노 시키는 최후의 선택이 무엇인지 아주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어. - 시키, 그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 인생에는 수많은 함정들이 가득 차 있어. 넌 남들에게는 없는, 그런 함정들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더 욱 똑바로 살아가야 해 - " - " 그러니까, 보고도 못 본 척은 할 수 없단 말야.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 어. 이왕 얽혀버린 이상, 토노 시키는 이 귀찮은 사건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 학교를 나섰다. 일단 알퀘이드가 사는 맨션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알퀘이 드 네 집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지만, 그러나 알퀘이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뭐...녀석이 간단하게 잡힐 것 같지는 않았어. 시가지에 나가서 뭔가 손에 잡히는 대로 하나씩 찾아나갈 수밖에 없을 것 같군... 해가 저물고, 거리는 차츰 본격적으로 밤을 맞이하려 하고 있다. 마을 중심 가 주변으로 알퀘이드를 찾아 돌아다녀봤으나 아주 사소한 흔적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 - 제기랄. 없어도 될 때는 잘도 나타나더니만, 왜 이렇게 찾고 있을 땐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어떻게 할까. 이제 겨우 밤 시간에 접어들었을 뿐이고 하니, 여기서는 - <1. 무작정 알퀘이드를 찾아나선다. - 선택> - 이제 겨우 밤이 됐을 뿐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알퀘이드가 밖 으로 돌아다니는 시간은 한낮보다는 밤, 그것도 심야에 가까운 시간대라고 할 수 있겠지. "...역시 거리를 중심으로 찾아보는 편이 효율적일라나..."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흡혈귀 사건의 희생자 거의 대부분이 으슥하고 후미진 골목에서 발견되었다. 알퀘이드를 - 아니, 아직 계속되고 있는 흡혈 귀 살인의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거리를 이 잡듯이 샅샅이 뒤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 빌어먹을...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자신이 지금 어떤 기분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아무렇게나 욕 을 해대며 또 다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 - 하아" 가드 레일에 털썩 하고 몸을 기댄다. 알퀘이드를 찾기 시작한 지 수 시간. 무작정 찾아나서기 시작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알퀘이드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젠장할..." 너무도 억울했다. 시가지 한복판에서 아무런 목표도 없이 무작정 사람을 찾 아 나선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 도 아니고 알퀘이드 만큼은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마음 속으로 낙관 하고 있었는데. "어디 간 거야, 이자식..." ...어째서일까. 알퀘이드한테는 그냥 흡혈귀 살인에 대한 이야기만 물어보 려고 하는 것 뿐인데, 절대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 "에이씨, 끝 끝. 이제 그만 찾아볼래." 가드 레일에서 몸을 일으켜 걷기 시작한다. 시간도 대충 오전 0시 쯤 되어 가려 하고 있다. 이 이상 알퀘이드를 찾는 등의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을 시간은 없어. "........." 하지만 그래도...여기까지 왔는데 조금만 더...마지막으로 딱 한 곳만 더 찾아보러 갔다가 거기서도 알퀘이드를 못 찾으면 집으로 돌아가지 뭐. ...아무도 없는 공원. 지난 밤, 알퀘이드와 협력해서 네로라는 흡혈귀를 쓰 러뜨렸던 장소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계속 시내 중심가만 찾고 있었던 탓에 오늘밤엔 이 근처를 다녀본 적이 없다. "...뭐, 여긴 안 찾아봤지만..." 혼잣말을 중얼대며 공원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밤 12시. 당연한 소리이긴 하지만, 이 시간 쯤 되면 공원에는 아무도 찾아 오는 사람이 없다...공원에서도 알퀘이드를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에, 오히 려 속이 다 후련해질 정도다. "...그렇지...그렇게 보고 싶다고 바로 딱 나타나주는 게 아니지..." 양 어깨에 힘이 쭉 빠진다. "......뭐야...왜 그렇게 실망하는 거야..." 나도 잘 몰라. 그냥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 녀석의 미소지은 얼굴이라 든지 그런게 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아, 여떢었구나. 안녕, 시키?" ...그래...이렇게, 흡혈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 게 말을 걸어주는 알퀘이드의 얼굴을 - "아, 알퀘이드 - !?" 무심결에, 알퀘이드의 두 어깨를 꼭 잡았다. "에 - " 깜짝 하고 놀라는 알퀘이드. 손에 잡힌 알퀘이드의 어깨는 진짜 알퀘이드의 어깨였고, 그걸 확인한 순간 황급히 두 손을 어깨에서 떼어냈다. "너, 너너너, 어째서 - " 지금까지 쭉 찾아헤매고 있던 상대가 이렇게 눈 앞에 나타나줬음에도, 혼란 상태에 빠진 내 두뇌는 그런 말 밖에 뱉어내지 못했다. "어째서라니,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시키를 찾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이렇 게 만난 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에 - 날 찾아다녔다니, 어째서?" "어째서라니 - 별로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이유가 없다는 부분을 당당하게 딱 잘라 말하는 알퀘이드. "........." ...아차...알퀘이드 녀석, 하는게 완전 고양이 같은 녀석이었었지, 참... "...뭐, 마침 잘 됐어. 사실은 말야, 나도 알퀘이드를 만나고 싶었어. 이렇 게 만나서, 그러니까 - " 정말 반갑다고 말할 뻔 한 것을 서둘러 다시 목구멍 안쪽으로 집어삼킨다. " - 어쨌든, 심각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 여기서는 좀 힘들 것 같으니까 장 소를 바꾸고 싶은데, 괜찮겠어?" "나야 뭐 상관없지만 - 할 말이란게 뭔데?" "금방 알게 돼...조금만 더 안쪽으로 옮기자." 나는 알퀘이드를 데리고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알퀘이드는 무슨 일 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얌전히 내 뒤를 따라온다. "그래. 할 이야기라는게 뭐야, 시키?" "흡혈귀에 대해서. 너, 전에 말했었지? 거리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연쇄 살인사건은 흡혈귀의 소행이라고." 알퀘이드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오늘 아침 뉴스에서 새로운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소리 들었어? 어젯 밤에 연쇄살인마에게 피 한 방울 남김없이 빨린 채로 살해당했다던데." " - " ...알퀘이드의 눈동자가 날카로워진다. 왠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 같은 긴박감. "흥...그래서?" "그래서라니 - 너..." 꿀꺽 하고 마른 침을 삼킨다. 알퀘이드는 똑바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마치 - 내가 조금이라도 허튼 짓을 하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겠다는 듯한, 그런 시선으로. "이 -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알퀘이드? 네로는 죽었잖아. 그런데 어째서 아직 흡혈귀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 거냔 말야.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 사건...네가 - " "그럴 리가 없잖아? 그건 내가 아니라 다른 흡혈종이 한 짓이야." 팽팽했던 긴장감을 한 방에 날려버리며 알퀘이드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 로 대답을 한다. 하지만 난 아직도 납득이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흡혈종이 한 짓이라면...계속해서 흡혈귀들이 몰 려나온다는 소리야?" "설마...이번 연속살인사건은 처음부터 한 명의 흡혈종이 저지른 거야. 새 로운 흡혈종 같은 게 나타나지도 않을 뿐더러, 네로도 이 사건이랑은 아무 런 관계가 없어." - 에? 네로도 관계가 없다고...? "무슨 -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말했잖아? ...진짜 정말...시키는 말야 머리 참 좋을 것 같이 생겼으면서 어디 좀 모자란 데가 있는 것 같아. 들어봐. 확실히 네로는 흡혈종이긴 했 지만, 네로가 다른 사람 피를 빠는 거 봤어?" "다른 사람 피 빠는 거 봤냐니...그자식, 사람을 머리부터 으적으적 씹어먹 었 - 어라...아!" 그렇, 구나. 왜 미처 그런 단순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연쇄살인사건의 피해자들은 유체에서 피가 모조리 빨려나간 상태로 발견되 었다. 하지만 네로는 달라. 놈은 시체를 일체 남기지 않아. 피를 빨기는 커 녕 그 육체마저 집어삼켜 모든 흔적을 없애버리지. 실제로 호텔에서 놈에게 포식당한 사람들은 살인사건이 아닌, 행방불명자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 그건 확실히 거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랑은 다른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잠깐...그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살인사건은 대체 뭐야...대체 어떤 놈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단 말야?" "그러니까, 이 사건은 네로가 아닌 다른 흡혈종의 소행이라니까. 정확히 말 하면 그 흡혈종 때문에 내가 이 도시에 오게 된 거고, 네로는 그런 나를 쫓 아 이 도시에 오게 됐다는 상관관계가 성립이 되려나?" " - 뭐야...그, 그럼 네가 쫓고 있다는 적이란게 네로가 아니었어!?" "응. 나, 처음부터 내가 노리는 표적이 네로였다고는 한 마디도 한 적 없잖 아? 네로의 표적은 확실히 나긴 했지만, 내 표적은 네로가 아니라 이 마을 에서 연쇄살인마라고 불리고 있는 흡혈귀 하나 뿐이야...시키. 근데 혹시 말인데...설마 혼자서 엄청 착각하고 있었다든지?" "무슨 - " 너무나 놀란 나머지 숨이 턱 막힌다. 하지만 - 확실히 알퀘이드가 말한 대 로였다. 알퀘이드의 목적이 흡혈귀 사냥이라는 소리를 듣고, 난 혼자서 완 전히 넘겨짚어버리고는 '알퀘이드는 네로를 쓰러뜨리기 위해 여기 있는 거 구나' 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어 - "...그럼 뭐야? 그날 밤 네로랑 한 판 붙었던 거...사실은 아무 의미도 없 는 짓이었단 말야...!?" "그렇지는 않아. 시키는 날 대신해서 싸워줬잖아. 뭐, 애초에 시키가 날 죽 이지만 않았어도 나 대신에 네로랑 싸우게 되지는 않았겠지만 말야." " - " 눈 앞이 아찔해진다. "...그러니까, 네로는 흡혈귀 살인이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고...최근 1개월 동안 마을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녀석은 다른 흡혈귀다...이거야...?" "응, 정확해. 하지만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니까 시키는 가만히 있어 도 괜찮아. 그건 그렇고, 시키." 알퀘이드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싱글벙글 입가에 웃음을 띄우더니 멀뚱 히 서 있는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어젯밤엔 어땠어? 누가 나왔어?" "하?" 어젯밤이라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알퀘이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나, 알퀘이드가 하는 말을 멋대로 착각해서 는 하나부터 열까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얼간이 고등학생이다. 그 런 녀석이 지금 알퀘이드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리가 없잖아 - 가 아니라...어라? 알퀘이드 지금, 어젯밤에 누가 나왔냐고 물어본 건가 - ? "...알퀘이드. 어젯밤이, 뭐?" "어머? 이상하네...확실히 몽마를 보내놨었는데..." "...잠깐. 뭐야, 그 몽마란게?" "에~~음, 쉽게 설명하자면 해당하는 사람이 원하는 꿈을 보여주는 사역마를 뜻하지. 시키는 남자니까 서큐버스를 보내놨긴 했는데...좋은 꿈 꿨었지?" "오 - " 좋은 꿈 꿨었지, 라니...그 꿈은... 도저히 현실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리얼했던 꿈을 떠올리면서 얼굴이 확 하고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그, 그게 네놈 짓이었냐 - !" 알퀘이드가 싱글싱글 웃는다. - 젠장...가만히 있었으면 이런 이야기 같은 건 금방 끝나버렸을텐데, 스스 로 인정해 버리는 꼴이 되다니 - "아, 역시 갔었구나. 시키, 꿈에서 누가 나왔었어? 역시 여동생이 나온 거 야?" "아, 아, 아키하일 리가 있냐아아아아아아!! 너, 너, 나를 대체 무슨 놈이 라고 생각하는 거야! 친 여동생을 덮칠만큼 변태가 아니라구, 나는!" "흐~~응...여동생이 아니라...그럼 저택에 있던 메이드 아가씨?" 알퀘이드는 정말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래에서 나를 빤히 올려다 본 다. "윽 - " 그 모습은, 어젯밤 꿈에서 봤던 알퀘이드랑 닮았다. "무, 무슨 상관이야. 남이사..." 알퀘이드에게서 눈을 피하며 상대도 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알퀘이드는 계속 가르쳐 달라며 집요하게 질문공세를 펴온다. "좀 가르쳐 주라. 시키가 꿈에서 누굴 봤는지 정도는 가르쳐 줘도 되잖아?" 알퀘이드는 질문에 발동걸리기 시작한 어린아이처럼 계속 추궁한다. 아무리 시선을 옆으로 돌리려고 해도 금방 고개를 돌리는 쪽에 먼저 와서 서서는 말을 걸어댄다. ...엄청난 고문이군...이래선 완전히 어제의 재탕같잖아 이거...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감싼다. "시키야~~가만히 있지만 말고 가르쳐 주라~~" 그런 나를, 알퀘이드는 위로 치켜 뜬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 신이시여, 안 되겠슴다. 더 이상은, 한계임다. "...너" 머뭇머뭇 거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 에? 내가 뭘 어쨌다고?" "두 번 씩이나 말하게 하지 마. 그러니까 꿈에 네놈이 나왔단 말야!"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며 냅다 소리지른다. 알퀘이드의 두 눈이 휘둥그레 진다. "나라니, 내가...?" "그래. 정말 황당하게도 네놈이 나와버려서, 거시기 - " 아무래도 그 다음은 말할 수가 없다. "아 - " 알퀘이드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겨우 나를 향하던 시선을 다른 쪽으로 향했다. "........." "........."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어쩔 줄 모르고 있다.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 ...... ............ ........................ ................................. ..........................................어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억지로 헛기침 소리를 냈다. "도대체가 말야...몽마인지 뭔지, 왜 그런 짓이나 하고 그래? 혹시, 아직도 내가 널 죽인 거에 대해 원한이라도 품고 있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몽마를 보낸 건 네로를 쓰러뜨려준 데에 대한 보답이었 어. 시키한테 고마워하고 있으니까 이거 받고 기뻐하면 좋겠다 하고 말야." "보답이라니 - 그따위 보답은 안 해줘도 된다구. 무슨 그런 괴상한 짓이나 하고 말야...흡혈귀라는 녀석들은 대체 머리 속에서 무슨 생각들 하고 있는 거야?" 기가 막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걸 본 알퀘이드는 엄청 불만스 럽다는 듯이 점점 험상궂은 얼굴이 되어 나를 노려본다. "뭐야, 시키 정말 그러기야? 그래, 어차피 난 인간이 아니니까." 기분 나쁘다는 듯 몸을 홱 돌려버리더니 잰 걸음으로 걷기 시작하는 알퀘이 드. "잠깐, 야. 어디 가려고?" "시키랑 무슨 상관이야? 따라오지마." 정말로 화가 난 건지, 알퀘이드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만 가 버린다. "........." 저녀석, 대체 어딜 가려고 그러는 거지? "........." 말이 좀 심했으려나...결과나 수단은 좀 그랬다 쳐도, 알퀘이드는 선의를 가지고 나름대로 내게 보답을 하려고 했던 거니까 그 기분만큼은 기쁘게 받 아들여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뒤늦은 죄책감 같은 것이 든다. " - " 젠장할...어째서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게 되는 거지, 저놈의 알퀘이드란 녀석은......! "아~~거 정말 - 잠깐만 기다리라잖아!" 알퀘이드는 밤거리를 걸어간다. 오로지 앞 방향만 바라보고 있는, 금발 흩 날리는 흰 그림자. 그 모습은 처음 알퀘이드를 만났을 때의 이미지와 너무 나도 닮아있다. 아니, 어쩌면. 어둠이 내린 공원에서, 네로와 대치하고 있 었을 때의 알퀘이드 그 자체일 지도 모른다.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든다. "야, 알퀘이드." " - " 알퀘이드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계속 걷는다. "말 좀 들어라 야. 지금 뭐하고 있는지 정도는 가르쳐 줘도 되잖아?" " - " 알퀘이드는 이번에도 모른 척 계속 걷기만 할 뿐이다...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 버리는 것도 좀 그렇긴 하다. 나 스스로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 는 하지만, 어쨌든 잠자코 뒤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발걸음 소리만이 들리는, 무언의 산책이 계속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 .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 알퀘이드가 내 쪽을 향해 몸을 돌린다. "따라오지 마. 시키 같은 보통 사람이 뒤에 있으면,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몰 라서 그래?" " - 그러니까, 지금 뭐하고 있는지 가르쳐 주면 돌아가겠다니까 그러네." "...시키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내버려 두셔." 알퀘이드는 다시 가던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는 걸어나서기 시작했다. 이거 야 원...다시 무언의 배회가 시작될 모양이다. 큰길가에 다다랐을 무렵, 알퀘이드가 걸음을 멈춰세운다. " - 찾았어" "에......?" 알퀘이드의 목소리가, 마치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차갑게 느껴진 다. " - 아"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 너머로, 지금 알퀘이드가 얼마만큼이나 적의로 가득 차 있는지가 섬뜩할 정도로 잘 느껴진다. "알퀘이드 - 너, 뭘 - " '하려는 거야' 부분은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알퀘이드가 무엇을 하려는지 굳이 말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퀘이드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은 한점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는 [살의]임 에 틀림없었으니까. "야 - 너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 - " 알퀘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시선 너머에는 그저 양복 차림의 남자 한 명이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시키. 안경 벗고 저 사람 좀 봐봐." "저 사람이라면 - 저기 저 샐러리맨 말야?" "빨리.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싶으면 그런 질문은 나중에 해." " - 알았어. 별로 거리 한복판에서 보고 싶지는 않지만 - " 안경을 벗었다. "......큭" 관자놀이에 느껴지는 가벼운 두통. 그 아픔과 엇갈리듯 지면과 벽에 희미하 게 [선]이 보인다. "그럼 좀 물어보겠는데, 시키. 평상시에 [점]이 보이는 건 생물들 뿐이지?" "에 - ? 응,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건물 같은 거에는 선 밖에 안 보여." ...호텔에 있었을 때에는 보였지만, 그건 기절할 정도의 두통을 동반했던 결과였었고... "그치? 시키는 생물이니까, 광물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는 거야. 그러니까 광물의 죽음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과 같은 지향성을 갖기 위해 회선 을 연결해두지 않으면 안 돼. [보기] 위해서는 [이해] 하지 않으면 안 되니 까 말야. 그럼 또 묻겠는데...지금 시키가 보기에 저 사람은 어떤 느낌이 야?" " - ?" 평소랑 별로 다를 건 없을 것 같 - " - !?" 무심결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게 대체 뭐야...확실히, 그 어떤 인간이라 할지라도 [선]을 가지고 있기 는 하다. 하지만 그건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수이고 다른 의미로 생 각해 보면 마치 기하학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 저 건 대체 뭐야. 전신을 [선]이 내달리고 있다. [선]은 마치 정맥과 동맥같이 두드러져 보여, [선]으로 도배된 저 남자가 어떤 모습인지조차 보이지 않는 다. " - 큭" 토할 것 같다. 예의 검은 [선] - 낙서로 만들어진 사람의 형태 여기저기에 피를 흘려넣은 듯한 [검은 점]이 보여 - "시키한테는 어떻게 보여? 개인적으로는 평범한 사람으로 시키의 눈에 비춰 졌으면 하는데." " - " 알퀘이드의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억 누르는 것만으로 진땀을 흘리고 있으니. " - 그래. 아쉽게 됐어...시키는 저것들한테서도 죽음이 보이는 구나." "아아......왠지 보통, 이랑은 다르, 지만......선은, 보여......" "역시 - 시키는 사자(死者)마저 죽일 수 있는 거였어. 생명이 있고 없고는 상관없어. 움직이고 있는 것들, 파괴할 수 있는 것들이라면 예외없이 정지 시키는 - 뭐야, 진짜 괴물은 바로 너였잖아." "에 - " "지금 본 대로, 저건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야. 자기 자신의 죽음이라고 하는 부채(負債)를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먹음으로 해서 계속 속여넘기려는 흡혈귀니까." 알퀘이드는 걸음을 재촉한다. 똑바로,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남자를 향해. "야, 알퀘이드 - " "시키는 거기 있어." 남자는 알퀘이드의 존재를 눈치라도 챈 듯, 도망치듯 후미진 골목 쪽으로 달려 들어간다. 알퀘이드는 가볍게, 발걸음 소리조차 내지 않고 걷는다. 달 빛이 쏟아지는 아래, 알퀘이드의 몸은 골목 안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 두근. 심장 소리가 귓전에서 들려온다. 아직 밤도 그리 깊지 않은 시간. 시끌벅적 한 번화가 한복판에 서 있음에도, 나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들의 기척이 전 혀 느껴지지 않았다. - 두근. 안경 - 빨리 안경 써야지. 그러지 않으면, 기분 나쁜 걸 보게 된다구. 지금 까지 보고 있던 것들이 겨우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어둠을 보게 되어버린단 말야. - 두, 근. 하지만 몸이 안 움직여져. 누덕누덕 기워진 세계를 보고 있는 맨눈은, 마치 무엇인가에 매료된 것처럼 알퀘이드가 사라진 골목 방향을 멍하니 넘겨다 보고 있어. " - " 갑자기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사람의 기척도, 바람 소리도, 땅 냄새도.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 기이 절대영도의 달빛 아래. 저편 벽 너머에서 뭔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 고오 보일 리도 없고 소리 역시 들리지 않아. - 층, ? 하지만, 보였다. 죽음과 죽음이 충돌하는 소리가 내 눈에 확실히 보였다. "큭 - " 시야가 붉다. 어째서 - 내 눈엔 보이지 않아야 할 [죽음]이 보이는 거야. " - " 안경. 빨리 안경 안 쓰면,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아. 목구멍까지 밀 려올라온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면서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고쳐쓴다. 소리와 빛이 되돌아왔다. 정신을 바로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번화가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잡다 한 소리들과, 주위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 갖가지 물건들로 장식된 가게의 쇼윈도 불빛과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엔진 소리가 넘쳐흐른다. "하아 - 하아, 하아 - " 숨을 잘 쉴 수가 없다. 안경을 쓰고 있어도, 시야 한구석 어디쯤에 방금 전 까지 보이던 [죽음]이 남아있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 "알 - 퀘이드......?" 골목에서 모습을 드러낸 알퀘이드는, 나 이상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불안 한 걸음걸이를 하고 있었다. " - 시키......그래, 아직 거기 있었구나..." 거칠게 숨을 내몰아쉬며 알퀘이드는 천천히 내 옆을 지나쳐 간다. 희미하게 몸을 떨며, 마치 병자처럼 힘없는 모습으로 몸을 이끈다. - 솔직히 나도 아직 토기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괴로워하는 알퀘 이드를 앞에 두고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잠깐, 대체 어떻게 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 좀 피곤한 것 뿐이니까 상관하지마. - 시키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 는 일이니까." "이 바보야, 피곤하면 쉬어! 그렇게 다 죽어가는 얼굴로 괜찮다고 말하면 누가 믿어줄 것 같냐?" 아직 제대로 쉬어지지도 않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알퀘이드의 팔을 잡는다. "...뭐야. 그런 시키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나 하고." "난 그냥 빈혈일 뿐이야. 남 일 신경 쓰실 여유가 있으면 자기 몸이나 신경 쓰시지 그래." " - 됐어. 어차피 신경 써봤자 쓸데없으니까." 알퀘이드의 숨소리 정말로 금방이라도 끊어져 버릴 듯 약하다. "설마 - 너, 그때 그 상처 - " 아직 안 나았냐고는 물을 수 없었다. 그 상처는 날 감싸다 생긴 상처였으니 까. " - " 알퀘이드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건 부정이 아닌 긍정 의 의미다. "이 - 그런 몸으로 뭘 하겠다고 그래! 상처가 아물 때까지 가만히 있지 않 으면 안 되는 것도 몰라!?"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하나도 안 그렇잖아! 아무리 네가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대체 그런 몸으 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 " ......못 내버려 두겠어. 역시 난 이 사람 귀찮게 하는 녀석을 가만히 내버 려 둘 수가 없어. "가만 있지만 말고 대답해. 네가 대답할 때까지 네 곁에서 안 떠날테니까 말야......!" 알퀘이드의 두 어깨를 힘껏 잡는다. 알퀘이드는 고개 숙인 채, 살짝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진짜...너, 의외로 집요하네...? 알았어. 그럼 다른 데로 좀 가자." 알퀘이드는 내 팔을 뿌리치고는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 공원에 돌아왔다. 알퀘이드는 걷는 동안 체력이 회복되었는지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자, 그럼 시키가 해달라는 대로 무슨 질문이든지 다 대답해 줄게." 아까까지의 곧 죽을 것 같은 모습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지금의 알퀘이 드는 온몸에 기운이 넘쳐보인다. "...그럼 질문. 아까 그 녀석은 대체 뭐였어? 넌 그놈을 흡혈귀라고 했었는 데 그게 네 표적이란 거야?" "아니. 확실히 아까 그건 처형해야 할 대상이긴 하지만 그런 사자들을 먼지 로 되돌리는 것이 목적은 아니야. 그것들은 내 [적]의 노예였으니까 해치워 버린 것 뿐. 하지만 아무리 별볼일 없는 것들이라도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사람을 해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어버리니까." "...알퀘이드. 저기 말야,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해 주면 안 돼? 나, 아까첨 에 그 이상한 녀석이 인간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단 말야." "그래...시키한테는 정상적인 흡혈귀에 대해 이야기해준 적이 없으니까 말 야. 네로는 흡혈귀들 중에서도 지나치게 특이한 흡혈종이었으니까 설명할 필요가 없었지만." "......? 정상적인 흡혈귀란게 뭐야?" "그러니까 너희 인간들이 상상하고 있는 흡혈귀 말야. 불로불사에, 인간의 피를 빨고 그렇게 피를 빨린 사람도 흡혈귀로서 마음대로 부리며 햇빛 앞에 서 패퇴하는 극히 당연한 내용의 흡혈귀. 내 [적]은 말야, 그런 오래된 타 입의 흡혈귀야." "......에, 그러니까...결국 그 [적]이라는 녀석이 이 도시에서 연쇄살인 사건을 일으키고 있단 소리네?" "...글쎄?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그 피를 빨고 있는 건 아까 해치웠던 녀석 같은 [사자]들의 소행일 지도 몰라. 시키, 네로가 자신의 몸 속에 어마어마 한 수의 사역마를 장비하고 있던 거 생각나지?" " - 아아. 그걸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잊어버릴 수 있겠냐." "좀 전의 사자는 그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어. 알겠어? 흡혈귀에게 피 를 빨리고 그 피를 빨리는 순간에 흡혈귀에게서 피를 나눠받은 당사자는 죽 어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세에 남아있게 돼. 이를 사자라고 하는데, 흡혈귀들 의 일반적인 사역마로 부려지게 되지. 아, 시키한테는 좀비라고 설명하는 편이 좀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으려나? 그건 시체에 기생하는 아이티 흰 뱀을 일컫는 말이지만, 움직이는 시체로서의 좀비가 더 유명하지?" - 뭐, 그렇게 설명해 주니 정형화된 이미지가 확 떠오르는구만. "OK. 그러니까 아까 그 남자는 오래전에 흡혈귀에게 살해당했고 그 후에 좀 비화 되어 사역되고 있었다는 뜻이지?" 바로 그렇다는 듯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알퀘이드. " - 이해가 안 되는데. 흡혈귀들은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 걸까나. 스스로 가 죽인 인간을 - 죽여버린 인간을 말야, 또 다시 되살려서는 아무렇게나 부려먹기나 하고...악취미도 보통 악취미가 아니로군." "응. 흡혈귀가 악취미하다는 건 인정할게. 하지만 그건 사도들한테나 적용 되는 이야기지, 처음부터 흡혈종이었던 자들은 그런 짓은 거의 하지 않아." " - ?" 처음부터, 흡혈귀였던 자들......? " -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전에 말했었지, 흡혈귀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태어날 때부터 흡혈귀였던 종과 인간이었다가 흡혈귀가 된 흡혈귀...전에 들었을 때에는 그게 무슨 소린가 하고 궁금해 했었어. 왠지 이상한데, 하고 말야. 그럼 말야, 태어날 때부터 흡혈귀가 아니란 소리는 도대체 무슨 뜻이 야?" "무슨 뜻이고 뭐고 간에, 사도는 원래는 인간이었던 자들이야. 마술을 극한 까지 추구한 끝에 불로의 경지에 달한 자들과 신소에게 피를 빨려 그 노예 가 된 자들 등이 있어. 시키...시키는 좀 전에 스스로가 죽인 인간을 사역 하는게 악취미하다고 말했지만, 그것도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해. 개중에는 훨씬 이해할 수 없는 놀이를 고안하는 흡혈귀도 있으니까 말야." " - 놀이라니 - 뭐야 그게. 너희들은 인간을 재미로 죽이고 그 시체를 장난 감 다루듯 하고 있단 소리야......!?" "...부정은 하지 않겠어. 흡혈귀에게 있어 [오락]이란 호흡과도 같은 거야. 인간이라는 연환종임과 동시에 불완전하면서도 불로불사에 근접해 있는 그 들에게 있어 최대의 적은 '지루함'이었어. 애초에 우리들과는 달리 아무런 목적도 없는 주제에 [불로불사]가 된 그들은 불로불사가 된 바로 그 순간에 일체의 물욕이 사라져 버리게 돼. 그들의 목적 자체가 불로불사였으니까, 뭐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야." " - 심심하니까 놀고 싶다든지, 그런 웃기지도 않는 소리는 하지도 마. 도 대체가 말야, 나이도 안 먹고 죽지도 않으면 이미 그걸로 충분한 거 아냐? 그 밖에 뭐가 달리 필요하겠어." "그러니까 그걸로 충분한 상태가 되어버린 거야, 그들은. 하지만 그 상태로 서는 존재의 의미가 없지.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 정지해 버렸다고 인식 한 생명은 그 순간 자신이 존재하는 가치를 상실하게 돼. 불로불사라는 건 말야, 죽음의 다른 이름과도 같은 거야. 그러니까 그들은 차츰 마모(磨耗) 해 가면서 스스로 오락거리를 만들어냈어. 나는 살아있다, 우리들에게는 아 직 즐거움이 남아있다 라고 스스로를 변호하듯이 말야. 그것이 - 귀족의 발 단이야. 그들은 인간의 흉내를 내면서 자신들을 성주로 일컬으며 자신들의 세력을 넓혀나가는 게임을 시작했어.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이른바 사자의 왕국이지. 의외로 그 게임은 그들에게 있어 제법 자극적이었던 것 같아." ...알퀘이드는 마치 남 일을 말하듯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알퀘이드 역시 그들 중 한 명일텐데도, 어쩐지 알퀘이드는 그러한 취미를 갖고 있지 않은 듯한 눈치다. "자, 일단 이야기 순서를 좀 바꿔보자구. 사도는 처음엔 인간이었어. 마술 을 극한까지 추구하여 그 결과 흡혈귀가 된 희귀한 케이스도 있지만 대부분 은 피를 빨린 인간이 사도가 되지. 사도는 틀림없이 불로불사이긴 하지만, 그들은 영구기관이 아냐. 그렇기에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생명을 빼 앗지 않으면 불로불사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지. 내가 전에, 그들은 불완전 한 불로불사라고 말한 적 있지? 사도는 결국, 인간이라는 포식대상이 없으 면 [불로불사]로 있을 수 없는 존재야." "...잠깐. 그거 좀 이상한데? 네말대로라면 사도란 놈들은 불로불사를 유지 하기 위해 인간에게서 피를 빤다는 소리가 되는데, 그럼 그럴 때마다 새로 운 사도들을 만들어내게 되는 거 아냐?" "그렇긴 하지만, 여기부터가 좀 복잡해. 피를 빨린 인간은 죽게 되지. 하지 만 이때 사도가 자신들의 피를 그 시체에 남겨두게 되면 살해당한 인간은 완전한 죽음에는 이르지 않게 돼. 이 완전한 죽음에 이르지 않은 유체가 무 덤 속에서 수 년 간의 세월에 걸쳐 뇌가 부패하고 혼이 육체에 완전히 '고 정'된 상태가 되었을 때 식인귀(구울)가 되는 거야. 구울이 될 수 있는 건 백 명 중에 한 명 꼴이니까 피를 빨린 모든 인간들이 '남게 되는' 건 아닌 셈이지. 뭐...개중에는 태어났을 때부터 상위종으로 스텝 업 할 수 있는 자 격을 갖춘 인간이 있는데 그러한 인간들은 그 자리에서 신종 흡혈귀가 되기 도 하지만, 그런 건 정말로 드문 경우니까 논외로 하지. 그래, 구울이 된 자들은 시체였을 때 수 년에 걸쳐 부패해 버린 자신의 육체를 보충하기 위 해 다른 유체의 살점을 먹지. 그렇게 해서 부패해 버린 육체를 원상태로 되 돌리면 그제서야 겨우 좀비......살아있는 시체(리빙데드)의 대열에 낄 수 있게 되는 거야." " - 흐응...그럼 그 리빙데드란 것들이 아까 전의 [사자]란 소리로군." "그럴 리가...[사자]는 단순한 인형일 뿐이야. 리빙데드는 사자들보다는 현 격히 약하지만 온전히 자신의 의사와 혼을 소유한 채 활동하는 어엿한 흡혈 종인걸. 꼭두각시 시체에 지나지 않는 [사자]와는 레벨부터가 다르다구. 그 래, 리빙데드 상태에서 다시 수 년 간의 세월이 지나 인간으로서의 지식을 되찾은 자들이 흡혈귀, 뱀파이어라 불리는 자들이야. 이 상태까지 남을 수 있는 인간은 만 명 중에 한 명 정도. 방금 전에도 잠깐 말했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육체에 담긴 잠재능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남을 수 있는 확률은 높아 가. 이 뱀파이어들을 태어나게 한 일족의 우두머리 뱀파이어를 우리들은 사도라 불러." "...아무래도 이상한데. 그런 식의 게임으로는 괴물들이 계속 늘어갈 뿐이 잖아. 그렇다면 지금쯤 우리 주변은 흡혈귀들로 넘쳐나고 있단 소리가 되는 데." "그렇지도 않아. 사도는 말야, 언젠가는 자신이 낳은 뱀파이어들에게 죽게 돼. 왜, 말했었잖아? 그들은 인간들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 사도는 오락을 위해 자신이 피를 빤 인간에게 자신들의 피를 나누어주지. 피를 나눠받은 유체는 몇 만 분의 1 이라는 확률을 거쳐 뱀파이어로서 성장해서, 언젠가 자신을 있게 한 사도를 죽이고 스스로 새로운 사도가 되지. 기사가 무훈을 세워 군주가 되고 곧 왕을 몰아내는 것처럼 - 그들도 그러한 게임을 해나가 지 않으면 존재해 있을 수가 없어. 응...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지 않 으면 심심해서 죽어버린다더라. 악마적이지만 가벼운 존재...랄까나. 아무 리 불로불사라고 해도 존재의의가 없으면 공기랑 다를 바가 없지." 알퀘이드는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래. 그럼 아까 알퀘이드가, 그러니까...해치웠다던 사자란 것들은 사 도란 녀석들의 병사 같은 거란 소리야?" "병사라기 보다는 인형이랄까. 원래대로라면 피를 빨린 인간이 자력으로 흡 혈종으로서 소생하는 과정을 무시하고, 완전히 사도의 분신으로서 조종당하 는 자들을 사자라고 불러. 사자는 보스인 사도와 이어져 있어. 사자들 역시 자신들이 생존해 나가기 위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인간을 습격하 고 육체를 섭취하지. 하지만 그 반 이상은 자신들의 우두머리인 사도에게 보내지지. 이를테면 여왕벌을 모시는 일벌 같은 거랄까? 사자를 조종하는 사도는, 자신은 그저 관 속에서 잠들어 있는 것만으로 힘을 모을 수 있게 되는 거야. 내 [적]이 간단히 발견되지 않는 건 [적]이 많은 수의 사자를 부리고 있기 때문이야. 놈이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건 단 한 번 뿐. 그 후 에는 사자가 된 인간을 조종하고 자신은 잠들어 있는 채로 영지를 넓혀 나 가지. - 연쇄살인에 따른 유체가 몇 구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그것들은 위조 에 실패한 것들일 뿐이야. 사실, 이 거리에서 발생한 희생자 수는 백 명을 웃돌고 있어.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사라진 사람들의 일부분이 너희들이 놀라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희생자들이란 거지." " - !" 백 명 단위 - ? 그러니까, 흡혈귀에게 피를 빨려 죽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있단 말야? 게 다가 피를 빨린 인간 역시 흡혈귀와 마찬가지로 피를 빠는 괴물이 되어 좀 전처럼 태연하게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니 - "......이런, 빌어먹을" 3일전. 호텔에 묵고 있던 사람들이 그야말로 아무런 의미도 없이 몰살당해 버렸던 사실을, 떠올린다. 난 그 호텔에 있었지만 그 장면을 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언어적 표현으 로밖에 상상할 수가 없었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폭력이었는가가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다.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가 있는데 그놈이 차츰 자신의 영지를 넓혀나가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도 실감 이 나지 않는다. - 다만. 아무런 이유도, 그 어떤 예고도 없이...예를 들면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렇게 죽임을 당한다면 난 어떻게 되어버릴까. 상상하기도 싫었지만 아주 잠깐 동안. 피를 빨려 마치 쓰레기처럼 아무렇게나 내버려져 있는 아키하의 모습을 상 상한다. "큭 - " 화가 나는 건 - 그런 최악의 사태가 금방이라도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이 마 을의 상황과, 여태껏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평화로움에 절은 나 자 신에 대해서다. ------------------------------- ------------------------------------------------ "그렇게 화낼 줄 알았어, 시키...내가 너한테 이걸 말하려고 하지 않았던 건 이런 행위가 포식당하는 쪽 - 시키 같은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일체 변명 도 허용되지 않는 [악] 그 자체이기 때문이야. 인간들 입장에서 흡혈귀의 그런 행위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테니까." "...그야 당연하지. 그딴 건 말도 안 돼. 아무리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람 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한테는 그때까지 살아온 과거라든지, 마찬가지로 앞 으로 살아갈 꿈같은 미래 같은 것들이 있다구. 나 역시 - 그렇게, 장난감 취급당하면서 죽긴 싫어. 너무 화나지 않아? 그런 거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래? 그렇게 죽기엔 - 너무 분하단 말야." - 그래. 네로에게 죽은 사람들 역시 공포와 혼란 속에서 죽어갔을 거야. 하 지만 그런 살육의 마지막에 남은 것은 그저 분통하기만 한,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슬픔이 아니었던가. 그날 밤, 공원에서. 그저 우연히 이 공원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던 이유만으 로 네로에게 죽임을 당한 소녀. 그 소녀는 자신이 죽을 거라는 사실조차 알 지 못한 채 절명했다. 무의미함. 갑작스럽게 끝나버린 시간. 아무도 곁에서 지켜봐주지 않는 죽음. 그런 불합리함 속에 그날 밤의 나는 무너져내렸다. 네로에 대한 공포심도 없어져 버린 채, 다만 그런 짓을 한 네로가 미웠다. "...그딴 거 인정 못 해. 아무리 어떤 이유 같은게 있다고 해도 그런 건 절 대로 인정할 수 없어." 이를 꾹 악문다. "시키, 거기에 이유 같은 건 없어. 그들에게 있어 이건 일종의 놀이 같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 그러니까 말도 안 된다고 하는 거잖아. 너희 흡혈귀들한테 있어서는 단 순한 놀이 같은 거에 지나지 않는다고......? 네로도, 다른 놈도 그렇고, 사람의 목숨을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사람의 목숨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니까 이런 게임을 고안해 낸 거 야. 나도 사도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도 없을 뿐더러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누구 잘못인지를 따지고 보면 잘못한 쪽은 힘 없는 사람들 쪽이 아 닐까? 결국은 죽임 당하는 쪽이 잘못한 거야. 스스로의 몸도 자기가 지키지 못하는 생명이 다른 대상에게 죽임 당하는 건 자연의 섭리잖아." "뭐라고 - " "하지만 시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이라는 생명종은 다른 어떠한 생 명종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 종으로서 남들보다 뒤떨어지는 부분 을 자신 이외의 것으로 커버한다, 어떤 의미로는 [최강]이라는 증거야. 아 마 세계라고 하는 최대의 생물을 죽여버릴 수 있는 건 인간이라는 종자 뿐 일걸. 그치만 인간은 종으로서는 극히 뛰어난 반면, 일개 생명체로서 생각 해 봤을 때는 너무도 약해. 자신들 이외의 대상물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살아나갈 수 없다, 그런 연약함은 절대적인 [악]이라고도 할 수 있어. 지성 의 유무의 차이, 살고 있는 생태환경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인간들은 다 른 무엇인가를 포식하면서 살아가는 생물이잖아? 그렇담 - 죽이는 쪽의 행 위는 언제나 정당하다고 할 수 있어. 혹 죄가 있다면, 그건 그러한 규칙 속 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너희 인간들에게 있겠 지." "그 - 그런 건 강한 놈들이 지껄여대는 핑계에 지나지 않잖아. 인간은 너희 흡혈귀들처럼 그렇게 강하지 않단 말야. 자기 몸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 니까 이렇게 무리를 지어 서로 도와가면서 살고 있는데 - 그런데 너희들 같 은 녀석들이 섞여들어와 버리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나도 잘 모르겠단 말 야 - !" "그래. 그게 인간들의 방위수단이지. 무리 안에 무엇인가 침입해 들어오면 자신들을 지켜낼 수 없으니까 인간 이상의 종이 자신들의 무리 안에 들어올 수 없도록 룰을 만들어냈어...그래, 시키가 말한 대로야. 때문에 원래대로 라면 이 도시와 같은 케이스는 일어나지 않아. 시키는 잘 모르고 있겠지만 인간이라는 종은 정말로 강한 생명종이야. 인간들은 자신들을 초월한 종에 대한 방위수단을 확실히 만들어냈어. 그게 올바르게 기능하고 있었다면 8년 전, 이 마을이 흡혈종의 서식지가 되지는 않았을텐데." "방위......수단?" "응. 흡혈귀들이 시체를 숨기거나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활동하고 다니는 건 말야 인간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아서가 아냐. 그들은 자 신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라는 존재를 은폐한 채 영지를 넓혀 나가지. 흡혈귀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거야. 공공연하게 활동 하고 다니면 방위수단이 가해져 오니까. 뭐, 이번처럼 [현대판 흡혈귀인가] 같은 뉴스 보도가 흘러나갔는데도 녀석들이 이곳에 오지 않는 건 이 나라가 무신론자들의 나라이기 때문이겠지만." ".........?" 알퀘이드가 하는 말은 너무나도 특수한 분야의 것들이기에 그다지 잘 파악 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안심해, 시키. 흡혈귀들의 천적은 이 나라에는 없는 모양이지만, 지금은 내가 이렇게 여기 서 있으니까 말야. 전에 말했었지? 내 목적은 흡 혈귀들을 퇴치하는 거라고." 방금 전까지 계속 되던 담담琴던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이, 알퀘이드는 갑자 기 내게 밝은 표정을 지어보인다. "아아, 들은 적 있어...근데, 알퀘이드도 흡혈귀잖아. 어째서 그, 인간 편 을 들어주는 건데?" "어머, 난 별로 인간 편을 들어준다든지 하는게 아닌데? 그냥 그것 말고 달 리 할 일이 없으니까 하고 있을 뿐이야." " - ?" 그것 말고 달리 할 일이 없다, 알퀘이드의 말을 점점 더 이해할 수가 없어 진다. "뭐, 그런 일을 하니까 사도들의 표적이 되어있는 거지만 날 쫓아왔던 네로 도 시키가 해치워줬잖아? 앞으로는 당초 예정대로 이 마을에 숨어있는 [적] 을 찾아내서 어떻게든 해치워 보일게. 그러니까 시키는 여태껏 살아왔던 평 범한 생활로 돌아가서 더 이상 나 같은 흡혈귀하고는 상관 안 하고 살아도 돼."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알퀘이드는 솔직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아아 - 응. 그거 잘 됐, 긴 한데 - " 하지만 - 너, 혼자서 괜찮겠어? 머리 속에 그런 내용의 말이 떠올라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내가 왜 이러지...? 알퀘이드 혼자서 위험한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그 사실에 마음 한구석에서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확실히 나 좀 이상해 진 것 같아. "........." "시키? 왜 그래,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심각한 표정 지을만도 하지. 이건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에 관한 문제니 까." "그러니까 신경 안 써도 괜찮다니까. 더 이상 희생자가 안 나오도록 2, 3일 안에 어떻게든 할테니 말야." 아아, 솔직히 나도 이런 일에 말려들기는 싫어. 하지만 - 그 대사는. 이 마을을 지키겠다는 그러한 대사는 알퀘이드가 아닌, 이 마을에 살고 있 는 내가 내 입으로 말해야만 하는 거 아냐? "...알퀘이드. 저기, 하나만 묻자. 네가 말한 그 [적]이라는 놈, 센 놈이 야?" "아까첨에 만난 사자보다는 레벨이 높겠지. 이번엔 아직 만난 적은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8년 동안이나 숨어있었으니까 제 5계급 정도는 됐지 않겠 나 싶은데." " - 아까 그 사도보다 레벨이 높다니, 너..." 그 사도를 혼자 상대하는 것만으로 그렇게 힘에 겨워 했으면서 뭘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고 있는 거야, 이 여자는. "제 5계급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혹시 그녀석, 네로보다 센 놈이야?" "그럴 리가...네로는 특별한 사도야. 네로 그 녀석은 내가 정상적인 상태일 때에도 완전히는 쓰러뜨릴 수 없는 최고순도의 흡혈종인걸. 그에 비한다면 야 내 적이라는 놈은 몇 단계 정도 레벨이 낮지." " - 하아...그래, 그럼 네가 놈한테 당할 일은 없겠네?" 어느 정도 마음이 놓여서인지 큰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내쉬어졌다.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 얼마 전까지의 나라면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르 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제 막 퇴원한 환자 같은 상태니까. [적] 쪽이 힘을 더 키우고 있을 가능성은 높아." "...퇴원환자라니...감기라도 걸렸어, 알퀘이드?" "응. 아무래도 시키한테 당한 후유증이 꽤나 오래 남아있는 모양이야. 이대 로라면 며칠 동안은 좀 힘들지도 모르겠어." " - 아" 그랬지 - 알퀘이드의 힘이 약해져 있는 건 다름 아닌 바로 내 책임이었지. 알퀘이드는 자신의 배에 가볍게 손을 얹는다. "평소 같았으면 금방 복원됐을 상처도 잘 안 낫고 말야. 겉은 대충 어떻게 나은 것 같은데 속은 아직도 상처 입은 그대로야." - 그 상처도. 날 감싸고 입은, 여분의 상처다. "으으 - " 할 말이 없다. 알퀘이드를 이런 지경에 빠뜨린 건 틀림없는 내 책임인 것이 다. 그럼에도. 어째서 알퀘이드는 원망 섞인 말 한 마디 하지 않은 채 나를 향 해 이런 무방비한 웃음을 지어보일 수가 있는 거지 - "...하지마. 최소한 다친 데가 다 나을 때까지 어디 가서 푹 쉬면 좀 어때? 이제 와서 하루 이틀 쉰다고 뭐 달라지는게 있는 것도 아닐테고. 그럼 - " "안돼. 네로가 왔기 때문에 [적] 역시 내가 여기 와 있다는 걸 벌써 눈치채 고 있을 거야. 만약 내가 여기서 쉬게 된다면 그건 곧 내 몸이 지금 약해져 있는 상태라는 걸 [적]에게 알려주는 꼴이 돼." "그래서 오늘밤 같은 짓을 계속하고 있었단 말야?" "응. [적]이 어디있는지 아직 모르는 이상, 놈에게 피를 보내는 사자들을 닥치는 대로 쳐부술 수밖에 없어. 피의 공급원이 끊기면 본체가 직접 피를 빨러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게 되니까." " - 알퀘이드. 그게 만약 내일이 되면 어쩔 건데. 그런 몸으론 오히려 [적] 에게 죽을지도 모른단 말야...! 그럼 - " 안돼, 하지마 라고 말하려다가 이내 생각을 고쳤다. 알퀘이드 말 대로 - 알퀘이드가 약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적]이 라는 녀석이 알퀘이드를 죽이러 올 지도 모르는 일이고. 무엇보다 나는 요 4일간의 경험으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알퀘이드는 스스로가 정한 일 을 중간에 포기해 버리는 그런 어중간한 녀석이 아니라는 사실을...가슴이 저릴 정도로. "큭 - " 알퀘이드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이대로 알퀘이드를 내버려두면 -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조차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버리겠지. 알퀘이드는 자신의 죽음을 보는 내가 화가 치밀어오를 정도로 조금도 두려워하고 있지 않아. " - 그" ...왜 웃고 있는 거지. 그렇게 웃고만 있지 않으면 - 알퀘이드가, 정말 좀 더 흡혈귀틱 했다면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텐데. "왜 그래, 시키? 몸이 좀 떨리는 거 같은데, 혹시 화장실 가고 싶어서 그 래?" " - 너란 녀석은, 어떻게 그렇게 - " 넌센스한데다, 긴장감마저 없는 거야. "...쉬......블" ...잃고 싶지 않아. 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다만 알퀘이 드와 보낸 이 4일간은 쉽게 잊혀지지 않아. 그렇기에 - 지금 여기서 알퀘이 드와 헤어져 내일 밤엔 [적]에게 죽을지도 몰라 몰라 몰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후회하기만 하는 건 - 정말, 너무도 괴로운 일 이야. "...제발 좀 봐주라...가만 있어도 두 눈이 터져버릴 것 같은데 마음까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아." 알퀘이드는 흡혈귀이고 난 더 이상 그런 트러블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 네로와의 일전을 떠올려본다. 겨우 그 일을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등줄기 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 정도로 죽기 일보 직전의 공포는 여전히 내게 남아 있다. 그거랑 마찬가지다. 틀림없이 이번에 상대하게 될 녀석도 보통이 아니야. 내가 상관할 필요는 전혀 없어. 알퀘이드가 어떻게 해보겠다고 했으니까 그 냥 알퀘이드한테 맡겨두기만 하면 돼. 그런데도,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으 면서도. ...그래도 난, 알퀘이드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어. " - 제기랄, 나 이거 돌아버리겠네!" 퍽 하고 지면을 박찼다. 그 어떤 핑계도, 그 어떤 이유도 받아들이지 못하 는 나 자신에 대해 너무도 화가 났다. "아, 응? 왜 그래 시키, 갑자기 왜 그렇게 화내는데?" "아아, 내 이 바보 같은 자식한테 더 이상 못 참겠으니까. 어째서 나란 놈 은 그런 꼴까지 당했으면서 이런 말이나 하려고 하고 있냔 말야!" 아 진짜, 말하고 나니까 더 어지러워지네. 이런 바보 같은 나 - 만약 거울 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깨뜨려버렸을 거다. "야, 정말 왜 그러는데 시키 - ? 어디 좀 이상해진 것 같아." "그래, 나 이상하다! 정상이었으면 이런 말, 도저히 입에도 담을 수 없었을 텐데 말이지......!" 나 자신이 너무 지긋지긋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쉰다. 받아들이기는 싫지만, 이미 결정됐어. 바로 지금, 나 자신의 입으로 인정해 버렸으니까. "아아 정말 뭐야, 하나도 모르겠잖아! 왜 그래 시키, 아까부터 이런 말 이 런 말이란 소리나 하고, 대체 뭐가 '이런 말'이란 거야!?" "이 바보야, 그것도 몰라!? 너 다친 거 다 나을 때까지 도와주겠다고, 그렇 게 말하고 싶은 거 아냐, 이놈의 토노 시키라는 바보자식이!" " - 에?" 알퀘이드는 멍하니 내 얼굴을 쳐다본다. 난 결국, 아니아니 겨우, 아니아니 아니 어쨌든 말하고 싶은 걸 모조리 쏟아낸 덕분에 기분이 이제야 겨우 좀 나아지는 기미를 보인다. "시키. 지금, 뭐라고 했어?" "........." 낮게 신음하는 나. "나, 지금 잘 못 들었어. 제발 부탁이니까 한 번만 더 말해줄래?" "............" 더 낮게 신음하는 나.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스스로의 감정을 말로써 내뱉은 바로 그 시점에서 - 더 이상 난 나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됐다. "빨리~~. 나, 지금 그 말 한 번 더 듣고 싶어." 은근히 졸라대는 알퀘이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바라보면서 될 수 있는 가장 못마땅한 듯한 소리를 내는 나. "...어쩔 수 없잖아. 알퀘이드 몸이 약해진 건 내 책임이고, 거리를 활보하 고 돌아다니는 괴물을 가만 내버려둘 수도 없고. 힘이 약해진 너 혼자서는 좀 무리일테니까 나라도 괜찮다면 도와줘 볼까, 하고 말해봤어." "시키 - !" 알퀘이드의 두 눈이 반짝 하고 빛난다. 그리고 그런 채로 기쁜 듯 내 손을 부여잡고 악수하듯 마구 손을 흔들어댄다. "...뭐, 내가 별 도움은 되지 못하겠지만 말야.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응......! 시키가 도와만 준다면 무서울 것 하나도 없으니까!" 알퀘이드는 자신의 손을 아직도 내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뭐랄까. 알퀘이드는 정말로 기뻐보였다. "근데,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건데? 아까처럼 또 거리에 나가서 사자를 찾아 돌아다닐 거야?" "응, 지금은 그 정도 밖에 방법이 없으니까. 아까 해치운 사자가 12번째였 으니까 사자들의 수도 이제 슬슬 바닥을 드러내보이고 있을 거야. 이 도시 에 있는 사자를 모조리 해치워버리면 보스격에 해당하는 흡혈귀가 직접 나 서지 않을 수 없게 될테니까 그렇게 될 때까지는 남아있는 사자들을 찾으려 는데." 그래도 괜찮아? 라는 듯한 알퀘이드의 시선에 내게로 와닿는다. "되고 안 되고 간에, 난 그냥 알퀘이드를 따라다닐 뿐인데 뭐. 알퀘이드가 뭐하고 싶다 그러면 나도 알아서 그 의견에 따를게. 그럼 - 다시 한 번 거 리로 가볼까?" "아, 오늘 밤은 이제 됐어. 보다 효율적으로 사자들을 조종하기 위해서는 말야 그 나름대로의 활동 루트를 정해놓고 하룻밤 동안에 많은 수의 사자를 동시에 활동시키지는 않을 거야. 그렇잖아도 가뜩이나 사자들의 수가 줄어 들고 있으니까 [적] 쪽도 함부로 사자들을 활동시키지는 않을테고." " - 그래?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적]이란 놈이 알퀘이드가 못 찾게 자기 사자들을 다른 데에다가 막 숨기려고 하지 않을까?" "기본적으로는 그렇겠지. 하지만 [적]이 흡혈귀인 이상, 어떻게든 다른 사 렘한테서 피와 정(精)을 빼앗지 않으면 스스로 존재해 나갈 수가 없어. 그 때문에 [적]은 내가 자신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최저한의 식 량을 얻기 위해 사자를 거리로 내보낼 수밖에 없다는 소리지." - 하아...그래, 그 '최저한의 사자'라는게 아까 그 남자였단 건가. "딩동~~정답. 그러니까 오늘 밤에는 더 이상 찾아헤맬 필요는 없을 거야." "...뭐, 난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왠지 좀 답답하다, 야." "응. 원래 흡혈귀 퇴치는 좀 귀찮은 일이야. 이 마을 어딘가에 숨어지내는 [적]의 관을 찾아내야 하니까 생각만큼 간단히 끝나는 일이 아니지." 알퀘이드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놓더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 선다. "알퀘이드......?"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자. 어차피 내일 또 만날 수 있을테니까 말야." 알퀘이드는 마치 춤추는 듯한 발놀림으로 내쪽을 향한 채로 점점 멀어져 간 다. "내일이라고 - 야, 잠깐 서 봐! 만날 장소도 안 정하고 가면 어떡해, 야!!" "여기서 만나지 뭐. 시간은 - 그래, 10시 쯤이 좋겠다." 웃음띤 얼굴로, 정말 제멋대로 약속을 정해버리는 알퀘이드. "좋은 꿈 꿔, 시키. 내일 여기서 만나는 거야!" 알퀘이드는 손을 흔들며 내게서 멀어져갔다. - 저택에 돌아왔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저택에서는 아무런 불빛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괜찮을, 라나" 저택 문을 살짝 밀어본다. 덜컹. 제법 튼튼해 보이는 자물쇠가 저택 문 안쪽에 채워져 있었다. " - 이 이거 참. 자를 수도 없고 어떡하지..." 잠깐 고민에 빠진다. 결국 자력으로 저택 문을 기어오르기로 했다. ...아...피곤해... 마치 물건 훔치러 들어온 도둑처럼 문을 기어올라 겨우 현관에 도착했다. 저택의 정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지만 현관 문은 잠겨져 있지 않았다. "...히스이, 나 올 줄 알고 열어놓고 있었구나." 감사의 한숨이 흘러나온다. 아키하나 코하쿠 씨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천천히 저택 안 으로 발을 옮겼다. " - 후우" 한숨을 쉬며 침대에 걸터앉는다. "........." 알퀘이드와 한 약속. 전생에 무슨 업보가 그리도 큰지, 또 다시 귀찮은 일 에 휘말려들어버린 토노 시키. " - 어쩔 수가 없잖아. 가만 내버려둘 수도 없었고." 어쩌면, 가만 내버려두기 싫었던 것일까. "그...뭐, 예쁘긴 하지만..." 나 자신의 기분조차 잘 모르겠다. 뭐가뭔지 갈피를 못잡는다라, 지금의 나 에 딱 어울리는 말이로군. 어쨌든 내일 또 알퀘이드를 도와주게 됐어. 지금은 쓸데없는 생각말고, 천 천히 푹 쉬면서 내일이나 준비하도록 하지 뭐 - <6. 직사의 눈 - 끝> -------------------------------------------------------------------------------- <7. 직사의 눈 Ⅱ> 어렸을 적, 저택은 거대한 놀이터였다. 울창한 숲속 같은 정원. 높다란 성 같은 집. 몇날 며칠이 걸려도 제대로 다 탐험할 수 없는 닫혀진 상자정원 같은 세계에서 우린 뛰놀았다. 매일매일이 즐거웠다. 이 다음에 자라 어른이 된다는 것도 몰랐었고 어째서 낮과 밤이 매일같이 반복되어지는지에 대해서도 조금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저 강 아지처럼 사방팔방 뛰어놀던 유년기. 우린 서로 마음이 잘 통했고 최고의 놀이친구였었다. 뒤를 돌아다 보면 항상 아키하가 있었고 손을 내밀면 부끄 러워하면서 다른 곳으로 숨어버린다. 응, 평소 때처럼 말야. 어렸을 적, 저택은 거대한 놀이터였다. 울창한 숲속 같은 정원. 높다란 성 같은 집. 몇날 며칠이 걸려도 제대로 다 탐험할 수 없는 상자정원의 닫혀진 세계에서 우리들은 뛰놀았다.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온다. 아침 햇살이 내 몸을 감싸고 있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잠에서 깨 어갔다. 그런 가운데. 왠지, 그리운 꿈을 꾼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눈을 뜬 바로 그 순간, 기분 나쁜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찌릿. 관자놀이에 총에 맞은 듯한 두통이 인다. "큭 - " 서둘러 머리맡에 놔뒀던 안경을 썼다. "하 - 아" 깊이 심호흡을 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뭐야 - 아침부터, 이렇게" 이렇게, 확실히 선이 보이다니. 건물이 가진 죽음의 선은 좀처럼 보기 힘들 다. 설사 보인다 하더라도 보통은 희미하게 보일 뿐이고 방금 전처럼 뚜렷 하게 선이 보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 게다가, 이번엔 [점]까지 함께 보였다. 두통도 왠지 전보다 더 격해진 것 같다. 선생님은 내 눈이 '좋지 못한 것들'을 불러들인다고 말씀하셨다. 알 퀘이드나 흡혈귀 같은 것들은 확실히 '좋지 못한 것들'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상승효과로서 내 두 눈에 깃든 힘도 동 시에 증대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 - 설마" 아마, 단순히 좀 피곤해서 그런 걸지도. "실례하겠습니다." 공손히 인사를 하며 히스이가 방 안으로 들어온다. "아, 잘 잤어 히스이?" "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시키 님." ...히스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 옷 갈아입는 준비를 한다. 하지만 히 스이의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날카롭게 곤두서 있는게 너무나도 잘 느껴졌 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다. 어젯밤, 밤 늦게까지 저택에 돌아오지 않았으 면서 어느 틈엔가 자기 방에 돌아와 곯아떨어져 있던 나에게 화가 나 있는 거겠지. "히스이, 어젠 말야, 저기..." "시키 님, 제게 변명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히스이는 내 말에 매몰차게 대답한 뒤 문까지 걸어가서는, "그럼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침식사를 준비하도록 언니에게 전하여 놓 겠사오니 속히 거실로 내려와 주십시오." "응, 알았어..." "그리고 시키 님. 어제, 시키 님께서 귀가하지 않으셨던 일에 대해 아키하 님께서 전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럼 속히 거실로 내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쌀쌀맞게 문을 닫고 나가버리는 히스이. "으으 - " ...뭐, 지금까지 했던 일에 비추어 극히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거실에는 아키하 밖에 없다. 주방에서는 코하쿠 씨의, 약간 박자가 어긋난 듯한 콧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 아키하는 날 보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홍차를 마시고 있 을 뿐이다. "아, 잘 잤어 아키하?" 될 수 있는 한 자연스럽게 인사를 해본다. 아키하는 두 어깨를 조금 움찔거 리며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내쪽으로 시선을 향한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빠. 어젠 꽤나 늦게 집에 돌아오신 것 같더군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아니고 말이지....그래봤자 겨우 새벽 1시 정도 됐잖아. 고등학교 다니는 건강한 남학생이라면 충분히 깨어있을 시간이라 구." "그러세요? 저도 자정이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자리 에 일어나 있어요. 집에는 잠자는 시간보다 일찍 돌아오지만요." "윽...아니, 그러니까 어젠 여러 가지로 좀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말야 집 에 올 수가 없었어. 그래도 일단은 돌아왔으니까, 그 - " "예, 한밤중에 오셔서는 오빠 방으로 들어가셨지요. 그것도 무단으로, 살금 살금 발소리도 내지 않고...정말, 뭔가 걱정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고 밖에 는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이로군요." "우읏......" 너무나도 차가운 아키하의 시선...이렇게 주의를 받는게 이번으로 두 번째 일이니까 냉철하게 판단해서 아키하, 정말로 화 나있는지도 모르겠는데... " - 오빠. 아리마 씨 댁에서는 어땠는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저택에서의 귀가시간은 오후 8시까지로 되어있어요.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 켜야 하는 규칙이에요. 그 이후 시간엔 저택 문을 잠가버릴테니 어젯밤처럼 몰래 담 넘어 들어오시는 짓은 다시는 하지 마세요." "으 - 너, 다 알고 있었어?" "...오빠...오빠께서 어제 하셨던 행동, 모두 감시카메라에 찍혀있었어요. 코하쿠가 재빨리 경보기를 껐기에 망정이니, 만약 오빠였는지 몰랐더라면 지금쯤 토노 시키는 유치장 안에 있었겠군요." "...그래. 그럼 코하쿠 씨한테 감사 인사라도 해줘야겠는데. 아, 아키하한 테도 정말 미안해. 어젠 아무 말도 안 하고 밖에 나가서 정말 미안했어." "...뭘 잘못했는지 아시면 그걸로 됐어요. 정말로 반성하고 계신다면 앞으 로 귀가시간을 제대로 지키도록 하세요. 지금까지 하셨던 일들은 너그럽게 용서해 드릴테니까요." "...그거에 대해서 말인데, 아키하." "무슨 일이시죠?" "...저기, 말하기 좀 뭣한데 말야. 나, 오늘 밤에도 밖에 좀 볼 일이 있거 든. 몇 시에 돌아오게 될 지 잘 모르겠지만, 절대로 나쁜 짓 같은 거 하는 거 아니니까 - " " - " 아키하의 시선이 너무 차가워... "코하쿠!" 갑자기 아키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코하 쿠 씨가 주방에서 거실로 달려온다. "예, 무슨 일이세요 아키하 님?" "학교에 가겠어요. 준비 좀 해줘요." "예에...하오나 시키 씨 아침 식사 준비가 아직 덜 됐는데요." "이런 사람한테 아침 식사 같은 거 안 해줘도 괜찮아요. 혼자서 알아서 다 할 수 있다니까요!" 아키하는 씩씩대며 로비로 나가버렸다. "하아...시키 씨, 그렇게 너무 아키하 님을 화나게 하면 못써요. 오빠시잖 아요, 아키하 님 생각도 좀 해주고 그러셔야죠." 그렇게 말하며, 코하쿠 씨는 아키하의 뒤를 따라나선다. 거실에는, 아직 따뜻하게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찻잔 하나만이 놓여있을 뿐. " - 뭐, 그럼 결국은" 홀로 외로이 거실에 남겨져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해 본다. "오늘은 아침밥 거르고 학교 가란 소리냐..." 응, 틀림없어. ...가다가 편의점에라도 들러서 빵이라도 사가지고 가야지... 4교시 수업은 현대 사회 시간이다. 점심시간 바로 전 시간이라 그런지 교실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들떠 있는 듯 하다. 오늘은 수요일이기 때문에 평 소보다 수업이 한 시간 일찍 끝난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서는 HR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데 1시간 동안에 걸쳐 문화제 때 뭘 할지를 결정하게 된다. 참고로 내일은 학교의 창립기념일 = 휴일인 관계로 요 4교시 수업만 끝나면 바로 휴일로 돌입하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다. 한 반 녀석들이 언제냐 언제냐 하면서 수업 종료를 알리는 벨 소리를 기다리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 한 일이다. " - 졸려죽겠네..." 터져 나오려는 하품을 애써 참는다. 수업에 그 어떤 변화도 없었고 마찬가 지로 시간 역시 아무런 이상 없이 흘러간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이상 한 사건들을 몸소 체험했으면서도 이렇게 한가로이 수업을 받고 있는 나 자 신이 오히려 더 이상한 녀석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학교가 끝나고 밤이 되 면 그때부터 다시 알퀘이드와 행동을 함께 하게 된다. 그 생각을 하면 이렇 게 유유자적하게 수업을 듣고 있을 여유도 솔직히 없는데. 창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본다. 토노 시키는 왠지 즐거워보이는 표정 으로 입가에는 헤벌래한 미소까지 짓고 있다. " - 읏" 입가가 움찔. 알퀘이드랑 밤거리를 돌아다니는게 그렇게 즐거울 리도 없을텐데, 난 지금 뭘 그렇게 두근거리며 기대하고 있는 거냐... "...알퀘이드..."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군. 창 너머로 보이는 운동장 뒤켠에 날 향해 손짓을 하며 웃고 있는 알퀘이드의 환상 같은게 보이다니. - 어라, 자자자잠깐...! "어, 어버, 어버버 - " 창 유리에 찰싹 달라붙어 운동장 뒤켠을 내려다 본다. 우리 교실에서는 운 동장 뒤쪽 구석 쯤에 살짝 밖에 보이지 않지만, 거기엔 틀림없이. 평소 다 니던 차림을 하고 학교에 온 알퀘이드가 있었다. "!!!!!" 서둘러 교실 안을 둘러본다. 다행히 - 우리 반 녀석들 중에 교실 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서 있는 정체불 명의 외국인의 존재를 알아차린 녀석은 없는 것 같다. "저자식, 대체 무슨 생각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뜻모를 소리를 중얼대는 나. 뭐...이렇게 중얼거리고 있 어 봤자 아마 아무 것도 해결되는 일은 없을테지만.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앞으로 약 20분. 어쩔테냐 시키, 저녀석을 가만히 내버려두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단 말이다......!? <1. 지금 바로 운동장으로 내려간다 - 선택> -------------------------------------------------------------------------------- - 그래. 재앙의 싹은 될 수 있는대로 빨리 뽑아내지 않으면 안 돼. 놈이 무 슨 꼴같지도 않은 말도 안 되는 트러블을 일으키기 전에 어서 빨리 운동장 에서 사람들 없는 곳으로 데리고 나가야만 해. "선생님, 빈혈기운이 있어서 보건실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손을 번쩍 치켜들고 얼렁뚱땅 현대사회 선생한테 허가를 받아낸 뒤 교실을 나는 듯이 뛰쳐나갔다. "아, 왔어? 그렇게 있는 힘 다해서 뛰어오고, 시키도 참 힘이 어디서 막 솟 아오르는가보네?" " - " ...벌려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알퀘이드는 정신없이 운동장을 달려온 날 보며 해맑은 표정으로 그러한 감상을 쏟아낸다. "생각보다는 좁네? 학교라고 해서, 난 또 엄청 큰 덴 줄 알았지 - 꺄악!" 알퀘이드의 팔을 힘껏 나꿔챈다. " - 너, 잠깐 좀 따라와봐." 그 상태로 마치 어디론가 도망이라도 치듯 알퀘이드를 끌어당기며 사람 눈 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있는 힘껏 내달렸다. "뭐야, 갑자기 이런 데로 끌고 들어와서 뭘 어쩌려고 그래? 여기 하나도 안 재밌단 말야." 알퀘이드는 이곳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 것 같지만, 원래 학교란 곳 은 그렇게 특별히 재미있는 건물은 아니다. " - 뭘 어쩌려고 그러냐고?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알퀘이드." 알퀘이드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날카로운 기세로 검지 손가락을 알퀘이 드의 눈 앞에 들이댄다. "에? 뭘 어쩌려고 그러냐니, 뭐가?" "대낮부터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기나 하고, 우리 학교엔 또 뭘 하러 왔냔 말야. 몸도 아직 성치 못한 녀석이 왜 그렇게 얌전하게 가만히 있지를 못하 냔 말야, 알퀘이드...!" "왜 그러냐니, 그치만 시키가 도와준댔으니까 낮 동안에 뭔가 단서라도 찾 아놓을까 해서 말야. 시키한테 쓸데없는 거 시킬 수는 없잖아, 해서 - " "쓸데없는 일까지 신경 안 쓰셔도 됨다! 도와주겠다고 내 입으로 말한 이상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함께 도와줄테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아 진짜, 그렇잖아도 가뜩이나 약해져 있는 녀석이 한낮부터 밖으로 돌아다니기나 하고...나 걱정하게 만드는게 그렇게도 재밌어, 알퀘이드?" "아 - 응, 미안..." "아니, 알면 됐어 - 어라, 알퀘이드?"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아니...응, 고마워." 두근.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알퀘이드가 이렇 게 솔직하게 사과해 올 줄이야 - 예상치 못한 반응이랄까, 저기, 그러니까 - 엄청, 귀여운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치만 시키도 못됐어. 쭉 운동장에서부터 바라보고 있었는데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있었잖아. 어디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될지 몰라서 그냥 시키가 있는 곳까지 뛰어올라갈까 하고 망설이고 있었다구." "뛰어올라와? 3층에 있는 우리 교실까지?" "응. 베란다 같은 것도 있고 발 디딜 곳도 마땅치 않은 것도 아니고, 뛰어 오르기 쉬운데 있잖아 시키네 교실." " - " 아까 했던 말 취소. 알퀘이드 이놈은, 여전히 너무 비상식적인 녀석이다. "...다행이군...그렇게 뛰어올라왔었다간 수업이고 뭐고 어떻게 됐을지 몰 랐을테니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알퀘이드가 운동장 뒤쪽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학생도 별로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창에서 운동장 뒤켠 쪽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교실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 - 그래서, 대체 우리 학교엔 뭘하러 온 거야? 아까 무슨 단서인지 뭔지를 찾는 중이라고 했잖아." "그냥 뭐, 이 근처에서 기백을 느껴서 말야. 그래서 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도중에 시키 냄새가 나서 여기가 시키가 다니는 학교였구나 하고 안 거야." "...하아. 그래서 아무 생각도 없이, 아무 볼일도 없는데 학교까지 찾아왔 단 말야?" 네가 개냐...내 인상이 구겨진다. "무슨 소리야. 나름대로 확증이 있으니까 찾아온 거라구. 다른 장소들에 비 해서 여긴 너무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사자의 기백이 없는걸. 그래서 뭐가 있나, 하고 한 번 가볼까 해서 온 거란 말야." "그래? 근데 사자의 기백이란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별로 상관없는 일 아니 야? 밤이 되면 학교엔 아무도 안 남으니까, 혹 사자들이 사냥감을 찾고 있 다치면 학교 같은 데가 아니라 거리 쪽으로 나갈테고 말야." "......뭐,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학교에 이상한 낌새 같은 건 없어. 사자들의 기백 같은 거, 난 잘은 모르 겠지만 말야...나, 이래봬도 죽음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구. 사자 가 주위를 어슬렁대고 있으면 안경을 쓰고 있어도 왠지 주변이 좀 이상하다 는 느낌이 들 거야." "알았어. 시키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니, 여기엔 별 이상은 없을지도 모르 겠어." "없을지도 모르겠어가 아니라 정말로 없다니까." 알퀘이드는 아직도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때 - 4교시 수업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 - 이런, 벌써 점심시간 된 거야?" 아무리 이곳 숲에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다고 해도 점심시간이 되면 주위를 지나다니는 학생들이 몇 있을지도 몰라. "어쨌든, 계속 여기 있으면 다른 학생들한테 들킬 거야. 약속은 잊지 않고 지킬테니까, 넌 빨리 집에 가서 좀 쉬고 있어. 당장 오늘 밤에 그 [적]이란 놈이랑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야." "흐응~~~. 왠지 날 여기서 쫓아내지 못해 안달하는 것 같은 눈친데, 시키." 알퀘이드는 엄청 불만스럽다는 듯한 눈초리로 날 쳐다본다. "아아, 아마 기분 탓일 거야. 틀림없이 기분 탓일테니까 빨리 밖으로 좀 나 가. 자꾸 이러면 점점 더 일이 복잡하게 꼬여버릴 것 같으니까." 알퀘이드를 재촉하며 그녀의 등을 떠미는 나. "............" 알퀘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마지막까지 뭔가 말할 게 있다는 듯한 시선을 흘리며 학교에서 멀어졌다. 알퀘이드가 학교 부지를 벗어나는 걸 지켜보고 나서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 아왔다. " - 응?" 뭐지? 누가 이쪽을 보고 있어. "선......배?" 틀림없어, 시엘 선배야. 근데 - 어째서 저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거지? 지금 날 바라보고 있는게 정말로 선배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시엘 선 배는 무서운 시선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 - 선배!" 선배를 부르며 그쪽으로 향한다. 선배는 우두커니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계속 이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하고 계시는 거에요?" "그러는 토노 군이야말로, 그런 데서 뭐하고 계셨던 거에요? 이제 막 점심 시간 시작됐는데 이런 곳에서...아아, 4교시 수업 빼먹으셨나보네요?" "그럴 리가...종치는 시간보다 조금 빨리 교실을 나선 것 뿐이라구요." 선배는 그저 한숨만 쉴 뿐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선배의 얼굴엔 미소 가 감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런 시간에 이런 곳에 있었던 날 좀 의심하 는 눈초리다. "그보다 선배, 점심 먹었어요? 아직 안 먹었으면 같이 안 먹을래요?" 라고 딴소리를 하며 대충 둘러대 본다. "죄송해요,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혹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그때 다시 말 씀하세요." 라고 한 뒤, 선배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선배? 왜 그래요, 힘이 없어 보이는데."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즐거운 일은 빨리 끝나버린다더니 정말로 그런 모양이네요 토노 군." 빙긋,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즐거워보이는 듯한 웃음을 짓고. 선배는 홀로 교사 안으로 사라져갔다. ...문화제 때 할 메뉴를 결정하려했던 HR 시간은, 예상 외의 난항을 거듭하 고 있었다. 갖가지 의견이 쏟아져 나왔고 교실 안의 모든 학생들의 의견이 서로 날카롭게 대립한 결과, 결국 결정은 다음 주에 내리기로 했다. HR이 끝나고 보니 시계는 벌써 오후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고 학생들 모두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교실을 빠져나간다. " - 그럼" 교실에 멍하니 앉아있어도 뭐 할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밤을 대비해서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 정말 오랜만에 딴 길로 새지 않고 곧장 저택으로 돌아왔다. 해도 아직 저물 지 않았고 아키하 역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설마 아키하, 아직도 아침일로 화내고 있을라나..." ...뭐, 이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아키하한테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도 없으니 당분간은 칠칠치 못한 오빠 = 미움받는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 시키 님." 저택에 들어가자마자 히스이가 공손한 태도로 내게 인사를 한다. "...응, 학교 다녀왔어 히스이. 현관까지 나와줘서 고마워." - 토노 본가에 돌아오고 겨우 1주일 정도 지났음에도, 역시 이런 상황에는 아직 익숙지 않다. "아 - 음, 아키하는 아직 집에 안 왔어?" "예. 오늘 밤은 여느 날과는 달리 특별히 늦게 돌아오시게 되므로 저녁식사 는 시키 님 혼자 드시고 계시게 하라는 분부말씀이 계셨습니다." ...역시 아직도 아침일로 화내고 있는 모양이군, 아키하... " - 하아" 두 어깨에 무거운 쇠뭉치라도 단 듯한 느낌과 함께 내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 순간 - "시키 님." 히스이는 살짝 로비를 둘러본 뒤 거듭 내게 말을 건다. "실례되는 말씀을 여쭙겠사오나, 시키 님께서는 오늘 밤에도 외출하실 예정 이시온지?" "에 - ?" 히스이는 감정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눈으로 똑바로 나를 쏘아본다. 어디까지나 사용인으로서, 내가 돌아올 시간을 알려고 그러는 거라 생각되 긴 하지만 히스이한테 말하게 된다는 건 곧 아키하한테도 그 사실이 알려지 게 된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는 - <1. 그래도 히스이한테는 솔직하게 이야기해놓자. - 선택> - 그래. 아무리 둘러대고 또 둘러대 봐도 저택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히 스이와 코하쿠 씨한테 언제까지고 덮어놓고 지낼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렇 다면 적어도 앞으로 며칠 동안은 밤에 집을 좀 비우게 된다고 정도는 말해 두도록 하자. "...응, 사실은 오늘부터 며칠 동안 밤에 집을 좀 비우게 됐어. 하지만 절 대로 안 좋은 짓이라던가 그런 거 하러 다니는게 아냐. 아키하한테는 계속 미움받돃지만, 이제와서 그만 둘 수도 없게 돼서..." 그래, 이 마을에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흡혈귀 때문에 몇 명이나 되는 사 람들이 희생당했다면. 그걸 알고 있는 이상 나 역시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구. " - 히스이한테도 좀 미안한 일이지만, 당분간은 못 본 척 해줬으면 고맙겠 어. 나갔다가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까 저택 현관문만 열어놓고 있어." "시키 님께서는 저희에게 그 이유를 말씀하실 수 없다, 는 말씀이시로군 요." "...응, 미안해 히스이. 바보 같은 놈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니까, 지금은 아 무 말도 묻지 말아줘. 아마 무슨 말을 해도 거짓말처럼 들릴테니까." "...아뇨. 시키 님께서는 제 주인님이십니다. 주인님을 어리석다며 업수이 여기는 사용인은 없습니다." 히스이는 무표정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말한다. 히스이의 그 말을 마지막으 로 둘 사이의 회화도 중단되어 난 내 방으로 돌아가려고 계단을 천천히 걸 어 올랐다. "잠깐 기다려주십시오......저기, 주제넘게 참견하는지도 모르겠사오나..." 히스이는 일단 말을 도중에 끊은 다음 두 손을 힘껏 꼭 쥐고는 내 쪽으로 시선을 향한다. "시키 님만 괜찮으시다면, 밤에 저택을 비우시는 것을 아키하 님께는 비밀 로 해드리겠습니다." "에? 그러니까, 그 - 서로 말을 맞추고 있자, 이거야?" " - 예. 저녁식사 후, 아키하 님께서는 거의 방에서 나오지 않으십니다. 취 침 전 저택 점검은 저와 언니가 하고 있으니 아키하 님께 보고할 때 거짓말 을 조금 보태면 시키 님께서 저택에 계시지 아니하다는 사실을 아키하 님께 서는 모르게 되실 것입니다." "야아, 그럼 고맙지. 정말 고맙...기는 한데 저기, 괜찮겠어? 아키하는 히 스이랑 코하쿠 씨의 고용주잖아." "저의 주인님은 시키 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 우우......왠지, 너무 기뻐...평소에는 [님]자 붙이지 말라고 그렇게 말 하고 다녔으면서 지금 같은 때에는 엄청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에게 일말의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이 들긴 하지만, 기쁜 건 기쁜 거 아냐. "응 - 고마워. 제발 그렇게 좀 해줘." "그럼 오늘밤부터는 뒷문을 이용해 주십시오. 저택 정문엔 자물쇠가 채워져 있습니다만 저택 뒤편의 사용인 전용문은 열쇠만 있으면 언제든지 들키지 않고 출입하실 수 있습니다." "헤에, 사용인 전용 출입구가 따로 있었구나. 어쩐지 히스이는 왜 현관문으 로 드나들지 않는 걸까 했었지." "아뇨, 그쪽 문을 이용하는 건 언니 혼자 뿐입니다. 열쇠는 언니가 가지고 있으므로, 나중에 시키 님께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말을 다 마치고 히스이는 꾸벅 인사를 하며 어디론가 가버린다. " - 나이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이야. 이제 앞으로, 아키하한 테 아무런 걱정도 끼치지 않게 하면서 동시에 알퀘이드와 했던 약속도 지킬 수 있게 됐어. -------------------------------------------------------------------------------- 저녁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시계바늘은 밤 10시 쯤을 가리키고 있 다. 내가 저녁을 먹고 있는 사이, 히스이는 내 방 테이블 위에 저택 뒷문 열쇠를 올려놓았다. "좋아 - 가자." 주머니 속에 나이프를 푹 찔러넣고 될 수 있는 대로 발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방을 빠져나왔다. 무차별 연쇄살인사건의 영향인지 아직 밤 10시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시간임 에도 공원에는 사람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아무도 없는 밤의 공원. 그곳에 흰 옷의 실루엣이 외로이 서 있었다. "시키!" 얼굴을 맞부딪히자마자 알퀘이드는 내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지금 몇 신지 알기나 해? 약속했던 시간보다 20분이나 늦게 왔잖아!" "........." 아무래도 알퀘이드는 정시에 제대로 맞춰 도착한 모양이다. "알았어, 미안하다구. 나도 집에서 열 시 쯤에 출발했긴 했는데 아키하한테 안 들키게 하려고 살금살금 빠져나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다음부터는 시 간 약속 잘 지킬테니까,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봐주라." " - 뭐야. 이제부터 한 판 붙으러 간다는 걸 시킨 아직 자각하지 못하고 있 는 모양이구나?" 알퀘이드가 투덜투덜 대고 있는 폼이,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인다. 설마 약속 시간보다 훨씬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거 아냐? "알퀘이드. 너, 몇 시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나 말야? 일어나고 나서 바로 공원에 왔으니까, 어디보자 - " 깊은 생각에 빠져드는 알퀘이드. " - 일곱 시부터 있었던가?" "일곱 시라니, 그럼 너 3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아니아니, 약속한 시간보다 3시간이나 일찍 나와서 뭘 어쩌겠단 거냐... "우, 나 좀 이상한 건가?" 스스로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는 모양인지, 알퀘이드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다. " - 뭐, 제 시간에 못 나온 나도 잘못했지만 너한테도 문제가 있었구만 그 래.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와서 네멋대로 기다리면 어쩌란 거야?" "끙 - 그거랑 그거랑은 아무 상관도 없잖아. 시키가 제 시간보다 늦게 도착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뭐, 그건 그렇지만...어쨌드은, 왜 3시간 씩이나 기다렸어? 그 시간이 면 집에 가 있었어도 됐을 것 아냐."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안다고 그래. 그냥 왠지 기분 좀 좋으니까 이대로 쭉 시키나 기다리고 있어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10시 가 되어있었다니까." "? 기분이 좋다니, 왜?"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고 했잖아...시키한테 한 번 죽어봐서 그런 걸까? 나, 몸 어딘가가 망가져서 아직도 안 나은 것 같아. 스스로도 좀 이상하다 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어디가 어떻게 이상하게 됐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단 말야." "......으" 그렇게 말하면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하냐고. 알퀘이드를 17 조각으로 해체했 으면서 몸에 좀 이상이 생긴 것 같아 라니, 그럼 난 무조건 엎드려서 잘못 했다고 싹싹 빌 수밖에 없는 거 아냐. " - 뭐, 아무렴 어때. 시간도 얼마 없고,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을 시간 없 으니까." 하아...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만약 다음에도 이렇게 늦게 나오고 그러면 그땐 직접 시키 네 집 으로 찾아갈 거니까 알아서 해. 약속 안 지킨 건 시키니까 그때 또 뭐라고 뭐라고 불평하면 안 돼?" "우왁 - 그건 안 돼! 약속은 제대로 잘 지키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오늘같 은 어쩔 수 없는 사태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그런 거라구. 시간 좀 늦 는 것 같은 건 그런 것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거잖아! 알았어? 무슨 일 있 어도 절대로 우리 집에는 오지마. 그렇잖아도 가뜩이나 아키하한테 오해받 고 있는 마당에 더 이상 사람 입장 난처하게 좀 하지 말라구." "흐응~~~......아키하라면, 시키하고는 하나도 안 닮은 그 여동생 말야?" "하나도 안 닮았다고...어쨌든, 응." "그렇구나. 시키는 그렇게 여동생이 무서워?" " - 시끄러. 아키하한테 괜한 걱정 끼치게 하고 싶지 않은 것 뿐이야...그 렇지 않아도 요즘 계속 그녀석 힘들게 하는 일만 하고 있는데, 더 이상 피 곤하게 할 수는 없는 거 아냐?" "흐응~~~. 시키, 여동생 엄청 아끼고 있나보네?" "전 기본적으론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해준답니다. 다만 최근에 들어 그 예외에 해당하는 사람이 한 명 생겨버렸지만." "아하하, 그거 나 말하는 거구나~~" "...거참 웃기는 놈일세. 나 지금 너 비꼰 거야. 잘났다고 칭찬한게 아니라 못났다고 욕한 거라구." "그런게 아니라...나, 시키의 예외에 해당한댔지? 나 그런 거 좋아해." 알퀘이드는 아직도 웃고 있다. 마치 아이들처럼 때묻지 않은, 해맑은 웃음. "........." 왠지, 그런 알퀘이드의 웃음을 계속 보고 있자니 보는 내가 오히려 질려버 릴 지경이다. " - 됐어, 아 정신없어. 이제 그만 흡혈귀나 찾으러 가자, 알퀘이드." "그러자. 시간상으로도 딱 적당한 타이밍이니까. 그럼 이제부터 거리를 좀 돌아다니려고 하는데 - 시키. 나 따라올 때 지금 네가 쓰고 있는 안경 좀 벗어줬으면 하는데, 괜찮겠어?" "안경을 벗으라고......왜?" "나 혼자선 찾기 좀 힘드니까 그래. 인간이랑 인간이 아닌 것들의 기운은 알겠는데 그 정도 가지고서는 언제까지고 본체에 해당하는 흡혈귀를 찾아낼 수가 없어.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기운 뿐이야. 하지만 시키는 그 두 눈을 통해 산 살마과 죽은 사람을 판명해 낼 수 있어. 그런 능력을 이용하지 않 는다는 건 좀 아깝지 않아?" " - " ...알퀘이드가 지금 하고 있는 말, 뭐...나름대로 납득이 가긴 해. 하지만 안경을 벗고 행동한다는 건 - "알고 있어. 요 며칠 동안, 시키 눈의 힘이 강해져 있다는 건 나도 충분히 느끼고 있으니까. 때문에 안경을 벗고 거리를 돌아다니면 시키 몸에 큰 부 담으로 작용하게 될 거야. 난 그걸 알고서 말한 거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결정권은 시키한테 있으니까 내 말에 강제력은 없지. 시키가 괜찮다고 생각 하면 안경을 벗고 따라와줘." ...안경을 벗고 거리를 걷는다...이 안경을 받고 나서 지금까지 8년 동안, 그런 행동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고작 안경을 벗고 사물을 보는 것만 으로도 두통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그런 상태로 거리를 돌아다니면 어떻게 될 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으면서도 이렇게 흡혈귀를 찾아 헤매고 있는 알퀘 이드와 마찬가지로, 토노 시키 역시 무엇인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될 바 에야 - "알퀘이드, 나 - " - 괜찮아, 겨우 두통 좀 나는 거 가지고 뭘 그래. 육체의 고통을 견디고 서 있는 알퀘이드에 비하면 그 정도는 커다란 문제는 되지 않을 거다. "그래, 안경 벗고 따라갈게. 사건 해결에 필요하다는데 못할 게 뭐 있어." " - 그래. 그럼 가자, 시키." 알퀘이드는 날 이끌고 걷기 시작한다. 난 안경을 벗고 알퀘이드의 뒤를 따 른다. ...알퀘이드의 뒤를 따라간다. 이런 낙서투성이 풍경 속을 걸어보는 것도 입원했을 때 이후로 참 오랜간만의 일이다. " - " 이상하게도 두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보기만 하는 정도로 두통이 나지는 않는 것 같다. 다만 건물에 난 희미한 선들이 아닌, 길을 걷는 사람들의 [ 선]을 볼 때마다 기분이 안 좋아진다. 에전엔 그저 쉽게 자를 수 있는 선이 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 선들이 사물의 [죽음]이란 사실 을 알고 있다. 때문에 혐오감이 인다. 전신이 낙서투성이인 사람들의 모습 이 기분 나쁘다는게 아냐. 이렇게나 - 인간이라는 생물은 이렇게나 죽기 쉬 운 생물이었나 하는 사실을 알아버린, 그저 구역질이 날 뿐. ...밤거리를 걷는다. 알퀘이드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하게 뭔가 목적이 라도 있는 듯 망설임 없이 계속 걷고 있다. 몇 시간에 걸쳐 거리 곳곳을 돌아다닌 후. 결국 단 한 개라도, 이상한 [죽음]을 내포한 인간은 찾아내지 못했다. "시키, 이제 안경 써도 돼. 아무래도 오늘밤엔 더 이상 돌아다녀봤어 헛수 고일 것 같아." 알퀘이드는 크게 한숨을 몰아쉰 후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안경을 썼다.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와줘서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한다. "오늘밤엔 헛수고일 것 같다니, 그렇게 쉽게 포기해도 되는 거야? 아직 한 번 밖에 안 돌아다녀 봤잖아." "아니, 한 번이면 충분해. 기운이란 건 말야 어느 정도는 해당하는 장소에 남아있게 돼. 오늘밤엔 그 어디에서도 사자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으니까 아마 활동하고 있는 사자는 없다고 봐도 되겠지...적도 대부분의 사자를 잃 고 경계하고 있을 거야. 정말, 뭘 그렇게 소심한 건지...틀림없이 오늘밤에 는 결판을 내러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숨바꼭질이나 계속하 고 싶어하는 것 같잖아." 알퀘이드는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깨문다. "기분 안 좋아보이는데, 알퀘이드." "당연하지. 모처럼 시키가 도와주러 나왔는데, 이럼 아무런 의미가 없잖 아." " - 뭐, 난 아무래도 상관없지만...그렇게 불만이면 다시 한 번 거리를 돌 아다녀봐도 괜찮아. 나도 이번엔 의식을 집중하고 찾아볼테니까, 혹시나 뭔 가 실마리 같은 거라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안돼. 더 이상 시키, 무리하게 할 수는 없어." "무리라니, 나 그렇게 무리하지 않고 있다구?" "하고 있잖아. 시키 본인은 아직 잘 모르고 있겠지만 더 이상 뇌를 혹사시 키면 폐인이 될 지도 모른단 말야." "......? 폐인이라니, 누가 말인데?" "시키 너 말야 너. 아참 - 그랬던가, 시키는 자기 눈이 어떤 원리로 작용하 고 있는지 모른다고 했었던가? 잘 들어. 시키는 생물의 죽음은 잘 보이고 광물의 죽음은 잘 안 보인다고 했었지? 그건 말야, 결국 시키 네 뇌의 회선 에 관한 문제인 거야. 사물의 죽음. 그 인과를 본다는 행위는, 사실은 보는게 아니라 읽는다는 행 위에 가까워. 모든 일, 모든 사물에는 그 근본이 되는 원인, 어떤 절대적인 무엇인가가 존재해. 에, 그러니까 - 독일의 어떤 철학자가 아카식레코드였 던가...로 이름 붙인 거랑 마찬가지야. 쉽게 말하자면 사상의 중심에는 [모 든 것을 기록한 것]이 존재한다는 소리지. 기록이라기 보다는 [존재하는] 것이기에 정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어. 그저 [존재]할 뿐. 그 자체에 의사는 없으며 방향성 역시 존재할 리 없지. 그저 아무렇게나 원인이 되는 것을 사방으로 흩뿌려놓을 뿐인 '근원의 소용 돌이' 라고 할 수 있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은 그 소용돌이에서 흘러 나와 파생되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된 거야. 나도 시키도, 흡혈종도 인 간도, 원래는 거기서부터 시작됐어...너무 복잡하게 사이가 멀어져버린 탓 에 원인이었던 태초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됐지만, 어쨌든 그러한 [근원]이 있다는 건 알겠지? 그치만 말야, 아무리 근원이 되는 것에서 멀어진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파생된 존재인 이상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가늘긴 하지만 그 둘 사이를 잇는 실은 틀림없이 존재해. 모든 것의 근원, 모든 것의 처음과 마지막을 기록한 레코드. 그것과 이어져 있는 것들은 만 물의 종착점을 [알 수 있게]끔 되지. 본디 뇌란 부분은 수신과 송신을 담당하는 기능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인 간은 모두 그 회선을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한정시켜 두고 있어. 하지만 개 중에는 잠재적으로 회선을 열 수 있게끔 된 인간이 있지. 아무런 마술회로 도 이용하지 않고 초월종도 아니면서 초상현상을 가능케하는 인간. 이런 인 간을 마술사들은 초능력자로 구분하고 있어. 인간이면서, 동시에 선천적인 어떤 마술회로와 동일시되는 돌연변이체. 예를 들면 - 아무런 신비도 배우 지 않았으면서 [사물의 죽음]을 보는 인간이라든지, 말야." " - " ...아니, 저기 말하기 좀 그런데 알퀘이드. 모처럼 장황하게 설명해 주셨지 만 아무래도 제 뇌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거 같은뎁쇼. "시키는 이해 못해도 돼. 말하고 싶었던 건 그저, 잘 보이지도 않는 걸 억 지로 보려고 보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였으니까. 아마 시키는 마음만 먹으 면 광물의 [죽음]을 확실히 볼 수도 있을걸. 하지만 그 때문의 시키의 뇌는 생물이라는 범주에서 광물의 범주로 회선을 열고 광물의 죽음을 인식하려 하게 될 거야. 그건 -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운동이지. 때문에 뇌에 과부 하가 걸려, 시키는 틀림없이 아무 쓸모도 없게 되어버릴걸." "아무 쓸모도 없게 된다니 - 그러니까, 내 눈이 죽음을 못 보게 된단 소리 야?" " - 설마 그럴리가. 저기 시키, 한계 이상으로 가동시켜버린 엔진이 과연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그야 고물상에나 가게 되겠지. 한 번이라도 망가져버린 엔진은 두 번 다시 쓸 수 없게 되어버리 - " 아, 그런 거였군. 즉 죽음을 볼 때 일어나는 두통은 스피드를 너무 올린 탓 에 비명을 질러대는 엔진이랑 마찬가지라는 거였나. " - " "이제 알았어? 그저 보기만 하는 것 가지고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테지만, 안 보이는 걸 억지로 보려는 짓만은 하지마. 뇌내 혈관이 파열해서, 다시는 정상으로 되돌릴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될테니까." ...할 말이 없다. 그런 엄청난 사실조차 모른 채, 난 지금까지 계속 살아왔 단 말야? "그 안경을 만들어준 마술사한테 정말 고마워해야 할 거야. 대부분의 초능 력자들은 자신의 힘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조차 모른 채 함부로 사용하다 결국 스스로 폐인이 되어버리지...뭐, 인간이면서 인간들의 사회 속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부적합자들이니까 차라리 페인이 되어버리는 편이 훨씬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 - " - 그게, 내가 여기 서 있는 이유일 거야. 널 예전의 평범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줄게.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이 안경을 만들어주셨다...너무나도 감사드 려야 할 게 많은 나머지, 가슴 속이 무엇인가에 막힌 듯 답답해 진다. 선생 님은 정말 여러 가지 의미로, 그때 지금의 토노 시키를 구해주셨던 거야 - "어, 어라 - ?" 뭔가 지끈하는 느낌. 통증이라기 보다 왠지 간질간질한 이상한 감촉. "시키?" "아니 - 뭐야, 이거." 실로 잠깐 동안 스쳐지나갔던 감촉은 가슴에서 느껴진 것 같다. "응 - ?" 무심코 목덜미 쪽을 통해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본다. - 미끈 뭔가. 가슴팍에 물감 같은 것이 묻어있다. "뭐지...좀, 젖었는데." 셔츠 안에서 손을 끄집어낸다. 펼친 손바닥에는. 새빨간 피가 흥건하게... "에 - " 지끈. 또 이상한 느낌이 든다. 그게 가슴에 난 흉터자국에서 느껴지는 것이 라는 걸 이해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키, 그거 - " "아아...이상한데...아프지도, 그렇다고 상처가 벌어진 것도 아닌데 - 가슴 에서 피가 나와" 매우 붉은. 맑고, 혼탁하지 않은, 내 시야를 앗아간 적색(赤色). "뭐, 아프진 않으니 일단은 괜찮으려나. 피도 별로 안 나는 것 같으니까 별 로 신경쓰지 않아도 - " 알퀘이드는 멍하니 내 손을 응시한다. 아니, 정확히는. 내 손에 흥건히 젖어든 붉은 피를 바라보고 있다. " - 알퀘이드?" " - " 알퀘이드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점차 호흡이 거칠어져 가고 있을 뿐. 마 치 어떤 괴로움을 견뎌내기라도 하듯, 호흡이 거칠어진다. "야, 알퀘이드......! 왜 그래, 또 상처난 데가 어떻게 된 거야...!?" 알퀘이드의 어깨를 잡는다. 그 순간 - 알퀘이드는, 내게서 도망이라도 치듯 내 손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 " - " 적의에 찬 시선. "......알...퀘이드?" "시 - 키?" 짧게. 적의가 배어있는 목소리가, 그렇게 대답했다. "나 - 그런 거, 안 생각해" ......? 알퀘이드는 어색하다는 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한다. "왜 그래, 너 어디 좀 이상한데. 너 몸, 아직도 회복 안 된 거 아냐?" "...응, 좀 너무 무리한 것 같아. 그러니까, 나 이제 그만 갈래." " - 아, 응. 어차피 오늘밤은 그만 끝내자고 말했었으니까." "...응. 잘가, 내일도 여기서 기다릴게." 알퀘이드는 똑바로 날 쳐다보지도 못한 채 빠른 걸음걸이로 시야에서 사라 져 갔다. -------------------------------------------------------------------------------- ...주택가 언덕을 지나올라 저택 외곽 부근에 다다랐다. 시계를 보니 오전 2시를 조금 넘긴 시각.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잠기운이 쏟아져 들어온다. "...알퀘이드, 저대로 괜찮을까나..." 알퀘이드와 헤어졌을 때의 그 모습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아무래도 상처가 아파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 "응?" 뭐지? 가로등 불빛이 채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 누군가 서 있는 것 같은 느 낌이... -두, 근 심장이 호흡을 멈추게 한다. 몸 속에 흐르는 피가 몇 배나 빨리 순환해 가 는 듯한 이 느낌 - 틀림없이 누군가 서 있어. 사람 그림자는 내쪽을 향해 점점 다가온다. 뚜벅, 뚜벅, 뚜벅. 메마른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두, 근 기분 나쁜 예감. 왠지 등줄기 위로 지네가 꿈틀거리며 지나다니고 있는 듯 한 오한이 인다. " - " 사람 그림자가, 바로 지척에까지 다가왔다. 그 순간 - 가로등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르며 깨졌다. 달도 구름 속으로 사라져 들어간다. 세계는 순식 간에 어둠 속에 잠겼다. "!" 두근...! 마치 죽음을 알리기라도 하듯,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친다. 몸이 저절로 뒤 쪽으로 껑충 물러선다. 어둠 속을 달리는 칼날.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가른 칼날이 안경을 스쳐지 나간다. 짤그랑 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경이 지면에 떨어졌다. "너 - !" 누구야! 라고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순간. 구름 사이로 잠깐 동안 달이 얼굴을 드러내보였고 동시에 내 앞에 있는 상대방 또한 그 모습을 드러냈 다. " - !?" 전신에 붕대가 감겨져 있는 사나이는, 한 손에 나이프를 쥐어들고 있다. 붕대 감긴 남자가 날 향해 덮쳐들어온다. 재빨리 나이프를 꺼내쥐고 상대편 남자가 든 나이프를 받아넘긴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르며 서로 맞부딪히 는 두 줄기 빛. " - !" 머리 속이 좀처럼 냉철함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공 격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두 자루의 나이프가 사방에 불꽃을 흩날린다. "큭 - " 머리 속이 아직도 냉정을 되찾지 못하고 있어. 그 원인은, 바로 내가 누군 가에게 공격당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키잉 - 날카롭게 파고드는 나이프를 거의 비슷한 각도로 휘둘러 상쇄한다. "어째서 - " 정말로 놀라운 것은. 이런 어둠 속에서 잠시 쉴 틈도 없이 나이프를 마구 휘둘러대는 상대를 맞 아 싸우고 있으면서도 그 모든 공격을 정확하게 막아내는 나 자신이었다. "몸이, 멋대로 - " 아냐, 그게 아냐. 안경이 벗겨진 이 어둠 속에서. 그저 맨눈에 보이는 선과 점들을 내 팔이 쫓아가고 있을 뿐. 보이는 게 그것 뿐이기에 그냥 아무렇게 나 그 선들을 따라 나이프를 휘둘러대고 있는 거다. 그 결과, 붕대 감은 남 자의 나이프가 제 멋대로 내가 휘두르는 나이프를 막아내고 있을 뿐이다. 즉. 내가 이 남자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남자가 내 공격을 막아내고 있단 거다. - 이길 수 있어......! 상대가 대체 어떤 녀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틀림없어. 지금은 내가 상대를 압도하고 있다구. 현재의 압도적으로 유리한 입장이, 온몸의 기운을 한껏 드높이고 있어. 이겨, 난 이 남자보다 강해. 이자식보다 강하다구. 날 죽이려고 했으니까 거꾸로 되갚아주려는 거 아냐 - ! 키잉, 키잉. 날카로운 쇳소리를 울려대며 남자를 저택 담벼락 쪽으로 밀어붙였다. " - !" 됐어. 이놈 가슴에 보이는 [선]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나이프를 박아넣는 다. - 그 순간. 피에 흠뻑 젖은 소년과 그저 울고만 있는 아키하의 얼굴이 보인 것 같은 - "!!!!!!" 정신이 들자마자 급히 나이프를 바깥쪽으로 물린다. - 나, 무슨 짓을 - 스스로,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어째서 - 머리. 머리가 아파. 발에 힘이 쭉 빠지면서 비틀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그 상태로. 위 속의 내용물을 모조리 토해냈다. 지끈. 가슴이, 간지러워. 머리가 아파. 가슴에 난 흉터가 뜨거워져. 눈알이 빠져버릴 것만 같아 - "하아 - 아, 아아 - !" 토악질이 멈춰지지 않아. 철퍽거리는 토사물이 아스팔트 위로 사방팔방 퍼 져간다. 그런 나를 향해. 붕대 감은 남자가 나이프를 꼬나들고 덮쳐온다. " - !" 쇳덩이끼리 부딪힌 듯한 충격. 남자의 나이프를 나이프로 막아낸다. 이번엔 정말로 내가 수세에 몰리고 있다. 적이 어딜 노리는지 알 수가 있어. 그렇 기에 다음 공격도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막아낼 수 있었다. 키잉 키잉 키잉. 몇 번씩이나 내 동체시력 가지고는 도저히 확인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빠르 게 날아드는 나이프를 막아낸다. 상대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이유는 간단 하다. 왜냐하면 남자가 노리고 들어오는 부분은 내 몸에 난 [선]이었으니 까. 때문에 상대가 어딜 노리고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고 그 [선]을 베이면 즉사하게 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기에 방어에 전념할 수밖에 없는 거 다. 아니, 잠깐... ...선을 - 노리고 있다고? " - 아" 아까랑 정반대잖아. 그렇다면. 이놈, 설마... - 크... 어둠 속에서 붕대 감은 남자가 웃음짓는다. - 두 근 심장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유난히 크게 두근거린다. 말로는 설명할 수조차 없는 공포를 느끼고 도망치듯 뒤쪽으로 물러났다. 붕 대를 걸친 남자는 날 쫓아오지 않는다. 그저 빙긋이 웃고 있을 뿐. 핏발 선 두 눈동자가 [이제야 알았냐]라는 듯 날 비웃고 있다. "보인단 - 말야?" 그래. 이놈한테도, [선]이 보이는 거야 - 그렇다면. 나 같은 건 단 한 방에 죽어버린단 소리 아냐 - - 크... 남자가 웃는다. 그렇게 웃음소리를 내며 조금씩 내게로 다가선다. 나는 - 나이프를 든 손을 그저 바들바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푹푹푹. 날카로운 그 고깃덩이가 날카로운 그 무엇인가에 꿰뚫리는 듯한 소 리가 3번. 잠시 후 들려오는, 몸뚱이가 벽에 세게 부닥치는 듯한 소리. "에 - ?" -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붕대 감은 남자는 갑작스럽게 날아들어온 세 자루의 창 같은 파이프에 꿰뚫 려 있었다. 창은 남자의 육체를 꿰뚫은 것만으로 끝내지 않고 그 상태로 남 자를 벽에 박아버렸다. 마치 채집해온 곤충을 핀으로 꽂아 고정해 놓듯이. " - 방, 해" 남자의 목소리는 몹시도 탁해보였다. 그와 동시에 - 남자의 몸에 꽂힌 세 자루 창은 마치 촛불처럼 활활 타올라 붕대 감은 남자의 온몸을 화염으로 휘감았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괴로움에 찬 목소리,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그 광경은 무참하다기 보다 오히려 아름답기까지 하게 느껴졌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붕대 감은 남자 - 아니, 지금은 온몸을 휘감고 있던 붕대마저 타오르는 불 길에 모조리 타버려 맨살을 드러내 놓고 있다. 그 남자는 불꽃에 휩싸여있 으면서도 날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핏발 가득히 선, 오로지 살의 하나로 가득찬 눈동자. 토노 시키만을 저주하 는 듯한, 흉기와도 같은 검은 눈동자. " - !" 그저 멍하니 보고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남자는 불꽃에 휩싸인 채 저 멀리 달아나 버린다. - 달이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난 불길이 일었고, 또한 악에 받친 고함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졌었음에 도 주변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다. " - " 무릎의 힘이 풀리며 저택 담벼락에 쓰러지듯 기대어섰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까 그 창이 날아온 방향. 높고도 머나먼 바로 그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 - "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가로등 위에 태연하게,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 홀로 서 있었다. "...에?" 외국의 신부들 같은 차림새. 손에 든, 대못 같이 생긴 칼.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푸르디 푸른 하늘빛 눈. "...선...배?" 달빛 쏟아지는 아래, 실루엣 밖에 보이지 않지만. 내게는 그 모습이 선배처 럼 느껴졌다. " - " 시선이 마주친다. 가로등 위에 서 있던 사람은, 마치 유령과도 같이 갑자기 그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아 - " 지면 위로 털썩 하고 몸이 주저 앉는다. 두통이 사라져가는 데 따른 푸근한 기분과 몸 긴장이 이완되어가면서 피곤 함을 느낀 때문일까. 나는 저택 담장에 등을 기댄 채 조금씩 잠의 나락에 빠져들어가는 나 자신 을 바라보고 있었다 - . <7. 직사의 눈 Ⅱ - 끝> -------------------------------------------------------------------------------- <8. 죽음> - 백색. 흰 빛깔은 그리운 옛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잊고 있던 기억. 잊어야만 했던 기억. 아버지가 잊으라고 했던 기억. 한 여름, 어느 더운 날. 푸른 하늘과 그리고 커다란 뭉게구름. 뜨거운 햇살에 일렁이는 풍경과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들리는 것 같은 매미 울음소리. 매미 울음소리. 매앰 맴맴 매앰 맴맴 매앰 맴맴 - 시끄러워서 죽고 싶을 정도로. 공터에는 매미의 허물이 떨어져 있고. 태양은 바로 내 곁에 떠있는 듯, 공터는 뜨거운 햇살에 이글이글 타들어 간 다. 한여름 어느 더운 날. 마치, 온 세상에 프라이팬이 된 것 같은. 아앙 앙앙 아앙 앙앙 아앙 앙앙 아키하가 운다. 언제나 얌전하고, 항상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아키하가 구슬 같은 눈물 을 흘리며 울고 있다. 아키하의 발밑에는 어떤 한 아이가 쓰러져 있다. 흰 색의 셔츠가 새빨갛게 물들어있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난 그걸 내려다보고 있다. 내 두 손은 쓰러진 아이처럼 붉다. 아니, 그게 아냐. 내 두 손은, 쓰러진 아이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는 거야. "아키하 - !" 어른들이 달려온다. 그리고 여기 일어난 참상을 보고는 안색이 달라진다. "어떻게 이런 - " 어른들은 아키하를 데려간다. 쓰러진 아이는 죽어있는 채로. 머나먼 하늘에는 흰 뭉게구름이 피어오른다. 난 홀로 그곳에 남겨져 멍하니 여름날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네가 죽였냐 - " 어른들은 목청껏 외쳐대고 있다. 아이를 죽인, 내 이름을 외쳐대고 있다. 단 두 글자의 이름을 미친듯이 부르짖고 있다. 단 두 글자. 어른들은 한데 모여 두 손이 새빨갛게 물든 나를, 시키(シキ)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운 기분이 드는, 그런 꿈을 꾼 것 같아. 잠에서 깨어났다. "........." 내 방에 누워있다. 그 일이 있은 후 - 저택을 감싸고 있는 담장에 기대어 의식을 잃은 후 어떻게 어떻게 겨우 내 방으로 돌아온 모양이다. 아직 머리 속이 혼란스럽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이 서로 뒤죽박죽이 되어 떠오르기 시작한다. 몸 여기저기에 붕대가 감겨있던 남자. 그녀석, 나하고 마찬가지로 [선]이 보였었드랬지. 그 사내는 전신을 검으로 꿰뚫린 뒤 온몸이 불길에 휩싸인 채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대며 모습을 감췄다. " - " 그 뒤에 이어진 광경은, 정말로 어렴풋이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가로등 위에 서 있던 사람. 날 도와줬던 그 사람은 시엘 선배와 어딘지 모 르게 닮은 것 같은 -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머리 속이 이제야 겨우 맑아졌다. 안경을 쓰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시 계는 오전 8시를 막 지나는 참이다. 평소였다면 벌써 아침식사를 끝마치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우리 학교 창립기념일인 관계로 하루 쉬게 됐다. "히스이는......없나." 여느 때였더라면 마치 그림자처럼 내 방 문 앞에 서있었을 히스이의 모습이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아침부터 몇 번 씩이나 깨우러 왔었다가 내가 좀처럼 깰 기색을 하지 않으니까 더 이상 깨우지 않고 다른 일을 하러 간 모양이다. "......하아" 한숨을 푹 하고 내쉰다. 어젯밤 - 알퀘이드와 헤어지고 나서 일어났던 그 일은 내 이해 범주를 벗어 나 있다. 붕대를 감고 있던 남자 일도 그렇고, 그녀석에게서 날 도와줬던 정체 모를 사람에 대한 것도 그렇고, 나 스스로 이것저것 아무리 생각해 봐 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 "좌우지간 오늘 밤에도 알퀘이드랑 만날 거니까. 알퀘이드라면, 틀림없이 뭔가 해답을 내려줄 지도 몰라." 이상한 트러블은 알퀘이드랑 상담하기로 하고, 어쨌든 모처럼 맞은 휴일인 데 적어도 이런 날 만큼은 내 원래 일상으로도 좀 돌아가 보고 그래야겠구 만. " - 좋아. 어쨌든 일단 밥부터 먹자." 사람은 모름지기 무엇인가를 먹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생물이 아닌가.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잠이 덜 깬 의식과 몸을 추스리고 거실로 향했다. "응......?" 2층 동관 복도 쪽에서 검은 양복 같은 게 보였다. "히스이...인가?" 히스이는 아키하 방에서 나온 것 같다. 어차피 나중에 얼굴 마주보게 될테니까 그냥 여기서 아침 인사 정도 해둬도 별로 문제될 건 없겠지. "저기~~, 히스이~~!" 큰 목소리로 히스이를 부른다. 그런 내 목소리가 히스이한테 들렸는지 히스 이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나를 향해 다가온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시키 님." "응, 안녕? 미안, 제 시간에 안 일어나서." "저야말로 일어나실 때 곁에 있어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 다." 히스이는 소리 없이 고개를 숙인다...오히려 히스이한테 사과받고 보니 한 밤중에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나 자신조차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제 방에 들어와서는 침대 속에 들어가 있던 나 자신이 엄청나게 극악무도한 악당 같아지는구만. "히스이는 잘못한 거 없어. 제 시간에 안 일어난 내가 더 잘못한 거니까, 히스이 차라리 불평 한 마디라도 해주면 좋을텐데. 오히려 그렇게 해주면 나도 좀 기운이 날 것 같고." "...불평 한 마디, 말씀이십니까...?" "응. 아는 친구가 그러는데 나라는 녀석은 천성이 게을러터진 녀석이라대? 그래서 좀 일부러라도 등 한 방 팡 하고 쳐줘야 애가 정신을 좀 차린다고 하더라구." "............" 히스이는 잠자코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런 상태로 약 1분 정도. 히 스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그저 내 눈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역시...어중간한 일 가지고 히스이한테 다른 사람들 같은 반응을 기대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됐어, 방금 전에 건 잊어버려. 아참, 그보다 나 아침밥 좀 먹고 싶은데 아 침식사 준비할 수 있겠어?" "...언니는 잠시 밖에 나갔습니다. 시키 님의 아침식사라면 식당에 이미 준 비되어 있습니다만..." "그래? 그럼 아침 좀 먹고 올게. 일하는데 불러서 미안했어. 나중에 봐." 나는 히스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며 1층으로 내려갔다. 아침을 다 먹은 뒤 거실로 돌아가니 히스이가 홀로 서 있었다. "아, 맛있게 잘 먹었어. 아침마다 맛있는 아침 만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감사감사, 두 손 모아 인사를 한다. "식사 준비는 언니가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칭찬하시려거든 제가 아닌 언 니에게 하여 주십시오." "그건 그렇지만 - 히스이랑 코하쿠 씨, 모든 일을 완전히 분담해서 하고 있 는 거야? 예를 들면 오늘처럼 나만 학교 안 가고 있을 땐 코하쿠 씨가 아니 라 히스이가 아침밥을 만들어준다든지..." "시키 님, 오늘 아침식사가 혹 입에 맞지 않으셨는지요?" " - 에?" 히스이한테서 엉뚱한 대답이 터져나온다. 히스이는 내가 지금 오늘 아침 아 침 식사가 맛없었으니까 언니 대신에 자기한테 밥 다시 만들라고 시키는 줄 알고 있는 거 아냐? "그런게 아니라...밥이 좀 식었어도 코하쿠 시가 만든 아침밥은 정말 맛있 다구...그냥 뭐, 역시 이왕 먹는 거니까 좀 따뜻한 밥을 먹는게 낫지 않나 싶어서 말야. 그래, 그 밥이 히스이가 만들어준 거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든지..." " - 안 됩니다. 시키 님을 위해 요리하라시는 분부에는 따를 수 없습니다." 히스이는 흘기는 듯한 시선으로 날 쏘아본다. "그, 그래...응, 하기 싫다는데 시킬 수는 없지...이것저것 살펴주는 것만 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으니까..." "............" 히스이는 아무 말도 없이, 뭔가 말하고 싶은게 있다는 듯한 시선으로 날 향 하고 있다. ...뭐지? 뭔가 말하기 힘든 거라고 있는 걸까. "왜 그래 히스이?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뭐 이상한 짓이라도 저지른 거야?"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젓는 히스이. 히스이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도 태도에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그럼, 일단 내 방에 돌아가 있을게. 무슨 일 있으면 불러줘." 말을 마치고 거실을 빠져 나가려고 걸음을 재촉하는 순간 - 한 발 앞서 히 스이가 로비로 나선다. " - 시키 님." "응?" "실례되는 줄은 알겠사오나, 가능한 시키 님께서 바라시는 바에 따르겠습니 다." "...응??" 히스이는 똑바로 날 쳐다본다. "오늘 아침엔, 지금까지 거쳐왔던 날들 중에서 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를 가장 뼈저리게 실감한 날이었습니다." "에 - 응?" "일곱 번입니다. 일곱 번이나 불러드렸는데도 대답 한 번 없으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일곱 번이라니, 그러니까 뭐가?" 지금 히스이,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히스이가 로비를 향해 발걸음을 돌린다. "솔직히 말씀해 올리자면, 시키 님께서는 정말 우둔하신 것 같습니다." 히스이는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를 내며 로비 쪽으로 사라져 버린다. "......뭐라굽쇼?" 홀로 외로이 거실에 남겨진 채 때늦은 대사를 말하는 나.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긴 끝에, 그제서야 겨우 지금 히스이가 내게 한 말이 나에 대한 불평이었다는 걸 알았다. - 차라리 불평 한 마디라도 해주면 좋을텐데. 그런 소리, 나 아까첨에 했었던가? "내가 바라는 바라...그건가." 아아, 아마도 틀림없을걸. 히스이는 2층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그 말을 내게 전하기 위해 거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아니 뭐, 불평 한 마디 해주면 좋을텐데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둔하시군요'라니, 그건 너무 스트 레이트한 거 아냐? ...저기, 별로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정말로 히스이, 나 미워하고 있는 거 아냐? 방으로 돌아와 봤지만 딱히 이렇다할 만한 일이 없다. 뭘 할까 하고 잠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8년 만에 저택 안을 산책하기로 했다. 로비에 내려왔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보니 어렸을 적에는 곧잘 저택 안을 탐험하다가 어른들한테 꾸중 듣고 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저택을 탐험 하자' 같은 생각이나 하는 철없는 꼬맹이도 아닐 뿐더러 잔소리가 심했던 아버지도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옛날엔 저택 복도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두근 하고 그랬지만 지금의 내게는 그런 감동은 조 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왠지 어렸을 적의 추억을 다시금 확인하고 싶어 천천히, 저택 안을 걷기 시 작했다. 길게 뻗은 복도. 어렸을 땐 이 복도가 무한히 계속되고 있다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택은 마치 성처럼 드넓었고 매일 조금씩 그 안을 돌아다 니며 벽이나 기둥, 테이블 등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곤 했었다. 아키하와 함께 놀곤 했던 그 당시, 땅따먹기 같은 게임이 유행했던 때문이다. '자기 이름을 새긴 곳이 자기 땅이다'라며 둘이서 저택 안을 돌아다니면서 이곳저 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었던 기억이 있다. "얼, 아직도 있네?" 계단 난간에 시키(シキ)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아버지가 저택 안에서 뛰 놀지 못하게 했던 건 이 놀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주변을 주의 깊게 살펴보니 이곳저곳에 나와 아키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넓은 저택. 어렸을 적, 정말로 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던 이 저택 도 지금은 약간은 도깨비집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게 하는 공허함 밖에 남아있지 않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어. 나와 아키하는 어렸을 때의 토노 시키와 토노 아키하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 있다. 저택 밖으로 나선다. 그러고 보니 - 보통은 요 앞 정원에서 곧잘 아키하랑 놀고 그랬었지. 아키하는 나와는 달리 아버지 말씀을 고분고분 잘 따르고 있었기에 하루에 30분 정도 밖에 놀지 못했었다. 그런 30분 정도의 짧은 시 간에도 불구하고 아키하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우리 뒤를 쫓아와서는 가 만히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일단 한 번 놀기 시작하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마구 뛰어다 니면서 뭘 하건 나랑 누가 이기나 누가 지나 가지고 서로 다투었더랬지. "...뭐야. 아키하 녀석, 어렸을 때부터 성깔있었던 거 아냐." 아버지 앞에서는 고양이 가죽을 한 다섯, 여섯 마리 정도 뒤집어쓰고 있었 는지도 모르지. 뭐,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의 아키하는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어. 8년이라는 세월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길었던 것일지 도... - 안뜰로 향한다. 저택 벽에 역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시키(シキ), 시키(志貴), 아키하, 시키(シキ), 아키하, 시키(シキ), 아키 하, 시키(志貴), 시키(志貴), 시키(シキ), 시키(志貴). 대충 세어본 결과 역시 시키(シキ)라는 이름이 훨씬 많이 새겨져 있다. 아 무래도 아키하는 여자애니까 남자애였던 내 행동범위에는 미치지 못했던 듯 하다. "후...적당적당히 좀 할 걸 그랬나?" 지난 시절의 내 행동을 돌이켜 후회해 본다 한들 낙서의 숫자는 변하지 않 는다. 이걸 보고 지는 걸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아키하는 얼마나 많이 울고 또 울었을까. "그래...아키하 녀석, 어쩌면 그때의 한을 지금에 와서 풀고 있는지도..." 뭐...적어도 아키하 만큼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서도 그 러면 또 뭐 어때? 그것도 나름대로 귀여울지도... "거참, 나도 어지간히 바보인 모양이군." 음. 정말 바보 오라버니다. " - 자아" 왠지 모르게 아련한,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안뜰을 산책한다. "히스이......?" 뒤뜰 쪽으로 향하던 내 시야에 마침 히스이의 뒷모습에 들어왔다. 히스이는 내가 있는지 아직 모르는 것 같다. 무슨 할 일이 있는지, 히스이는 숲 속으 로 향한다. " ? " 그런 히스이의 행동에 흥미가 인 나는 히스이의 뒤를 잠깐 따라가보기로 했 다. 히스이가 향한 바로 앞에는 작은 공터가 있는 것 같다. "......응? 저런 데 공터 같은게 있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음 속으로 떠올려 보려 애쓰지만 아무래도 기억이 확 실치가 않다. 저택 안 숲 속, 주변의 나무들을 잘라낸 듯한 공터가 보인다. 아니 - 보인 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만약 평소대로 이 근처를 지나다니고 있었더라면 절대로 보이지 않았을 거다. 히스이가 저쪽 방향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저택 에 살고 있으면서 평생동안 있는 줄도 모르고 지냈을 법 할 정도로 아무도 모르게 감추어진, 그리고 나무들에 둘러싸인 작은 공터. "......? 저런 데가 있었던가? 있었으면 곧잘 저기서 놀고 그랬을텐데." 적어도 숲 속 공터에서 아키하랑 같이 놀았던 기억은 없다. - 없는, 것, 같다. "............" 잠깐 생각에 잠긴 후 그 공터에 들어가보기로 했다. ......광장엔 특별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한 발 앞서 이리로 향한 히 스이의 모습도 찾을 수가 없다. "뭐야 - 별로 아무 것도 없잖아." 빠른 걸음으로 공터의 한가운데 쪽으로 걸어간다. 공터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그런 곳이었다. 평탄하게 고루 다져진 흙의 지면과 주변을 감싼 듯한 울창한 나무들. 매미 울음소리와. 녹아내릴 듯 강렬하게 내리쬐는 여름 햇살 - "에......?" 여름, 햇살이라고 - ? "아 - 윽......" 가슴의 흉터자국이 아파온다. 마치/푹 하고. 가슴을 칼로 찔린/것 같은/아픔. 매앰 맴맴 매앰 맴맴 매앰 맴맴 - 뭐야. - 어디서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 벌써 가을인데. - 흰, 모든 걸 녹일 듯 내리쬐는 여름 햇살. 저 멀리 하늘에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보이는 건 매미 울음소리. 발 밑에 나뒹구는 매미의 허물. 허물. 누군가의, 허물. " - ........." 상처가 벌어진다. 가슴이 새빨간 피로 물들고 내 두 손까지 검붉게 타오르듯. ...몸을 웅크린 누군가의 그림자. 그에 다가서는 어린 소녀의 발소리. 저 멀리 하늘에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매미가 나는 푸른 하늘. 정신을 차리니, 눈 앞에는 피범벅이 된 아키하의 우는 모습이. 매앰, 맴맴. 매앰, 맴맴. - 아아. 고막을 찢어발기려하는, 바늘 같이 날카로운 매미 울음소리. "아 - 윽" 가슴이 아파. 토할 것 같아. 상처는 벌써 예전에 다 아물었을텐데 어째서 이렇게 아픈 거지. 가슴이 터진다. 흉터자국이 벌어지고 적색의 얼룩이 흘러나온다. - 이런. 내 상처는 하나도 아물지 않았어. 아파. 무서워. 이게 바로, 죽음이라는 충동인가. 의식이 잠겨간다. 상처가 아프다. 내 몸이 털썩 하고 지면에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키하 님, 의사 선생님을 부르지 않으실 것이온지요?"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해 히스이. 그럼 어떻게 부르란 말야, 오빠 가슴에 난 상처는 보통 상처가 아닌데...!" ...아키하 랑 히스이 가 서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긴 시키의 방이다. 아무래도 침대 위에 눕혀져 있는 것 같다. 저 두 사람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해도 몸이 마음 먹은 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 가슴의 통증은 이미 느껴지지도 않는 주제에 몸은 마치 납덩 이라도 된 것처럼 무겁기만 하다. 만족스럽게 움직여지는 건 눈과 입 뿐인 것 같다. "대체 어쩌려고 그래, 히스이? 오빠를 거기 가까이 가게 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드릴 말씀이...없습니다." "이게 사과한다고 끝날 문제야? 히스이 널 오빠 전용의 사용인으로 붙여둔 건 이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 그랬던 거 아냐? 그런 것도 잊어버리고, 너 지 금까지 뭐하고 있었던 거야...!" 아키하는 평소와 같은 태도에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노 골적으로 있는 감정 없는 감정 모두 드러내며 히스이에게 화를 내고 있다. 이에 반해 히스이는 가만히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난, 지금 이 두 사람이 왜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히스이가 나 때문에 아키하한테서 심하게 꾸지람을 듣고 있다는 사실 정도 는 알 수 있었다. "대답해 히스이. 너, 오늘 하루 동안 어디서 뭘하고 있었어?" 아키하의 질문에 히스이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의 공 기는 점점 짓눌리듯 무거워진다. 아키하가 입술을 꽉 깨물더니 히스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선다. 아키하가 히스이를 때리려 한다는 건 내가 보기에도 명확한 사실이었다. 히스이도 물 론 그걸 알고 있을텐데도 고개를 떨군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걸 받아 들이려 하고 있다. " - 잠깐, 아키하." "오빠 - 일어나 계셨어요!?" "응, 아키하가 너무 시끄럽게 굴어서 방금 깼어." "아........." 아키하는 어색하다는 듯 옆으로 시선을 피한다. 히스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 인 채 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키하, 너무 히스이만 탓하지 마.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국 내가 쓰러진 것 때문에 그러는 거 아냐? 그럼 히스이한텐 아무 책임도 없 어. 그냥 어쩌다 갑자기 쓰러져 버린 것 뿐이니까." 두 팔에 힘을 주어 침대 위에서 겨우 상반신만을 일으킨다. 겨우 그 정도 움직인 것만으로 더 이상 꼼짝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히스이가 가뜩이나 풀이 죽어 있는 걸 본 이상, 무리를 해서라도 몸에 아무 이상 없 는 척이라도 해야만 해. "거참, 아키하 너도 내 일 가지고 그렇게 싸우고 그러지 말라구. 다 큰 어 른인 줄 알았더니 아직도 어린애구나." "하지만 - 오빤 아까부터 계속 정신을 잃고 계셨다구요. 지금까지 10시간 이상이나 혼수상태에 빠지셨던 적 없으시잖아요. 만약 - 오빠가 그대로 눈 을 뜨지 않으시면, 전 어떻게 하라고......!" "바보야, 그런 재수없는 소린 하는게 아냐. 겨우 빈혈 일으킨 것 가지고 뭘 그래...엑, 뭐야!? 벌써 밤 10시가 넘었잖아!" "말씀드렸잖아요, 오빠는 낮부터 지금까지 쭉 정신을 잃고 계셨다고."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하는 아키하. 하지만 내가 지금 걱정하는 건 내 몸이 어쩌고 저쩌고 그런게 아니라 밤 열 시에 공원에서 만나기로 한 알퀘이드와 의 약속에 대한 것이었다. "안돼, 빨리 가야지. 아키하, 나 나갔다 올테니까 뒷일 잘 부탁할게. 너무 히스이 괴롭히고 그러지는 마." "마,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저, 이제 오빠가 매일 밤 어디에 나가지는지 묻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오늘밤엔 가만히 여기서 쉬시라구요...!" "하하, 괜찮아 괜찮아. 늘 있는 일인데 뭘. 중학교 다닐 땐 하루에 두 번이 나 쓰러져 본 적도 있다구, 다 알잖아 아키하?" "그러니까 걱정된다는 거에요. 오빠 - 제발 부탁드릴테니까 오늘은 제가 하 는 말 들으세요." 아키하는 간절한 시선으로 날 바라본다. 나는 - <1. ...아키하가 시키는 대로 하자 - 선택> "..............." ...할 수 없지. 더 이상 아키하 하는 말에 뭐라고 대꾸하면 왠지 갑자기 울 어버릴 것 같아서 겁난단 말야. "...알았어, 오늘은 그냥 방에서 얌전히 잘게." 라며 침대에 몸을 눕힌다. "정말...? 나중에 몰래 방에서 빠져나가시기 없기에요?" "응, 알았다니까. 사실은, 아무래도 몸이 아직 덜 괜찮아진 것 같아서 말 야. 아키하 몰래 방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 - 다행이다..." 어깨의 힘을 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아키하. "히스이, 코하쿠한테 오빠가 정신이 드셨다고 전해줘. 오빠, 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 아니, 코하쿠 씨한테는 미안하지만 별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오늘 밤엔 그냥 이대로 잠이나 잘래." "...알겠어요. 그럼 히스이, 그렇다고 코하쿠한테 전해줘." 히스이는 고개 숙인 채로 끄덕하고 긍정의 표시를 해보인 후 방을 나선다. ...그래, 침대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또 잠기운이 몰려오는군. 이대로 있으 면 앞으로 1분도 채 안 걸리고 다시 잠들게 될 거야. - 아차, 그 전에. "아키하. 우리집 정원에, 그런 데가 있었던가?" "예. 오빠랑 제가 어렸을 적에 곧잘 뛰어놀던 곳이에요." "그래...왠지 잘 기억이 안 나서 말야." ...아아. 정말로 잊고만 있었어. "그리고 말야...이상한 거 물어봐서 미안한데, 어렸을 때 나랑 아키하 말고 - 또 한 명, 또래 어린애가 하나 있었다거나 그런 소리 못 들었어?" "예?" 아키하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렇겠지. 그런 애가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 그럼 또 이상한데. 꿈에서 봤던 광경과 그 공터에서 꾸었던 꿈. 이 두 가지가 같은 사실이라고 한다면 - 다른 한 명, 내가 죽여버린 다른 아이가 없을 리가 없어 - . "아니, 아무 것도 아냐. 그냥 꿈이야기 같은 거야." "그러세요...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오빠. 오늘밤은 푹 쉬도록 하세요." "응, 그럴게." 라고 아키하의 말에 대답한 순간. 난 여느 때와 같은 빈혈을 일으킨 듯 갑작스럽게 꿈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 다. <8. 죽음 - 끝> -------------------------------------------------------------------------------- <9. 붉은 홍월 Ⅰ> 짹짹, 짹짹짹, 짹짹짹짹짹 ...창문이 좀 열려 있나? 정원 쪽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싸늘한 바람이 내 볼에 와닿는다. 눈꺼풀 위로 비치는 희미한 아침햇살. 고요한, 동시에 은은한 빛깔마저 감도는 주변 색채. 아침은 그렇게 살짝 나를 찾아왔다. 아침, 인가. 어젯밤에 아키하가 내 병간호를 하고 있는 동안 잠이 들었다 가 그대로 아침까지 자버린 듯 하다. 몸은 침대 위에 가로누워 있었고 몸 여기저기가 미묘하게 무겁다. 그래도 어젯밤보다는 확실히 회복되어 있다.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킨다. 그때 - "아, 너 이자식 이제야 일어났겠다?" - 눈 앞에 알퀘이드의 얼굴이 보인다. " - !?"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머리 속이 새하얗게 되어버렸고 덩달아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입은 벙긋벙긋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만 뱉 어내고 있다. 정말로 -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저 내 눈 앞에 알퀘이드가 있고 여기는 내가 쓰는 방이며 시각은 이제 막 아침 아 홉시 정도를 지나고 있고, 거기에 알퀘이드가 신발을 신은 채로 침대 위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 정도 밖에 머리 속에 들어와 있지 않다. "너, 너, 너, 너" "거짓말쟁이. 내일 또 보자고 그렇게 약속했으면서." 어지간히 기분이 상하기라도 한 것일까, 알퀘이드의 붉은 눈동자는 여느 때 의 그 아름다운 눈동자가 아니다. 아니 - 꼭 그렇지만도 않을라나. 이렇게 가까이서 알퀘이드의 눈동자를 바 라보고 있노라니 오히려 평상시보다 선명하게, 아름답게 느껴진다. 알퀘이 드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 - 자, 잠깐 알퀘이드. 어째서, 어째서 네가 아침부터 남의 방에 있는 거 야......!" 나는 최대한도로 작은 목소리로 알퀘이드에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이런 상 황에서 빽 하고 소리를 질러버려 혹시나 히스이가 방에라도 들어오게 되면 그걸로 모든 것은 디 엔드다. 상황은 아직 혼돈 속에 빠져있었지만 그 정도 의 이성쯤은 차릴만큼 차리고 있다. "어, 어쨌든 저리로 좀 가봐...! 남의 방에 아무렇게나 들어와서 자는 사람 깜짝 놀라게 하면 그게 얼마나 왕재수인지 알기나 하는 거야......!?" "태도가 그게 뭐야. 내가 이런 곳까지 온 이유가 다 시키가 약속을 깨버렸 기 때문인 거 아냐. 남은 밖에서 쭉 기다리게만 하고 자기는 방 안에서 쿨 쿨 잠들어 있으면, 그게 대체 뭐하자는 짓거리야?" 알퀘이드는 정말로 기분 나쁘다는 듯 날 째려본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에 잠긴다. 아, 그런가. 어젯밤에 알퀘이드랑 만나기로 했던 약 속을 내가 깨버렸었던가. " - 우움" 이제야 겨우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된다. 동시에 알퀘이드가 왜 이리 화를 내고 있는지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 남이 쓰는 방에 신발 신고 함부러 막 들어오다니, 대체 머리 속이 어떻게 되어있는 거 야 알퀘이드 이자식은. 창문이 빼꼼히 열려져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거기 로 몰래 숨어들어온 모양이군. "...그래, 약속을 깬 건 나니까 그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미안하게 됐어. 하 지만 그렇다고 남의 집에 허락없이 침입해 버리는 건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 안 드냐?" "여기, 시키네 집이잖아." 알퀘이드는 단호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꾸한다. "그리고 나, 사실은 훨씬 더 많이 화나있어. 몇 시간 동안이나 밖에다 기다 리고 있다가 약속이 파토난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내가 머리 꼭대기까지 화 가 났었는지 알아? 진짜, 절대로 이대로는 못 끝내 하면서 시키 방까지 가 서 시키 목덜미를 아주 갈기갈기 찢어발기려고까지 했었어." 알퀘이드는 나를 노려본 채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간다. "시키, 잘 들어? 나 그런 거 절대로 못 참아. 스스로도 침착해지자 침착해 지자고 생각은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 돼서 미 쳐버릴 것 같아지니까." 아직도 그런 기분이 드는지 알퀘이드의 붉은 눈동자엔 나에 대한 비난의 물 결이 비치고 있다. "아아 - 확실히 그거, 못 참을만도 할 것 같은데." 내 목이 아직 무사하다는 사실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그렇 게 맞장구를 친다. "그치? 그래서 몰래 여기까지 숨어들어왔었는데 시키 자고 있으니까 좀 더 있어볼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어. 무슨 변명을 하나 일단 들어나 보고 싶었 으니까. 그래, 할 일도 없고 해서 시키 자는 모습이나 좀 보고 있었어... 응, 시키 자는 모습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편안해 보였어. 죽은 듯이 잠들 어 있어서, 이젠 영영 일어나지 못하는게 아닌가 하고 불안해 할 정도로 말 야." "...하아. 불안했으면 그냥 깨워버리면 좋았잖아. 난 너 밑에 깔려있는게 더 불안하단 말야." "그치만 자는 애 깨우는 것도 왠지 좀 그래서...내가 어떤 모습으로 자고있 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키 같은 모습으로 잠잘 수 있다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했었어. 시키는 어째서 이렇게 편안한 모습으로 잠잘 수 있는 걸까 하 고 아까부터 쭉 생각하면서 시키 자는 모습을 보고 있었어. 그랬더니 말야, 아까첨에 그렇게까지 폭발할 것만 같은 기분도 점점 사그라들더니 조금 있 다가 시키가 눈을 뜨더라구." "...너, 그럼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계속 거기서 그러고 있었어?" "응. 중간에 몇 번인가 이 집 사람들이 들어온 적은 있었지만 안 들키게 조 심했으니까 괜찮아. 아까도 시키 깨우러 어떤 여자가 방까지 찾아왔었는데 마음에 안 들어서 그냥 쫓아보내 버렸어." 알퀘이드는 아주 기분 좋다는 듯 깔깔대며 웃어댄다. "어이, 쫓아보내 버리다니...대체 뭘 - " "심하게는 대하지 않았어. 봐봐, 전에 흡혈귀한테 매료의 마안이란게 있다 고 말한 적 있었지? 그 여자한테는 [시키는 벌써 학교에 갔다]라고 암시를 줘서 돌려보냈으니까 내 기억 같은 건 남아있지 않을 거야." "기억이 남아있지 않을 거라니...너..." 거참, 정말 민폐덩어리 아냐? 뭐...그래도 알퀘이드는 자기 나름대로 우리 집 가정환경을 생각해서 그렇게 해준 모양이긴 하지만.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쉰다. "알았어. 어젯밤엔 정말 미안했어, 알퀘이드. 변명 같이 들릴지는 잘 모르 겠지만 나 두 번 다시 너랑 한 약속 안 깨도록 할게. 응, 약속해." 알퀘이드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단언한다. "반성하고 있어?" "응, 반성 중이야...약속 깨면 나중에 어떤 무서운 보복이 나한테 돌아올지 이제 확실히 알았어." 침대에 누워있는 채로 두 손을 들어올려 항복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나. 그러자 조금 전까지의 기분 나쁘다는 듯한 기색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알퀘이 드는 알았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서야 겨우 알퀘이드는 침대에서 몸을 내린다. "...거참, 남의 침대 위에 함부로 막 올라오기나 하고. 시트에 발도장 찍히 면 나중에 세탁할 때 얼마나 힘든지 생각이나 해봤냐?" 투덜투덜 불만을 쏟아내면서 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알퀘이드는 방 한 가운데 부근에서 느릿느릿 침대를 빠져나오는 날 바라보고 있다. "...근데...너, 거기서 뭐하냐?" "뭐하긴, 시키가 옷 갈아입는 거 기다리고 있잖아. 설마 그런 차림으로 밖 에 나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야 당연히 잠옷입은 채로 외출할 만큼 바보는 아니니까 - 어라, 알퀘이 드?" "응. 오늘은 하루 종일 시키랑 같이 행동하려고 해. 약속 어긴 대신에 그 정도 쯤은 해줄 수 있지?" 알퀘이드는 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꺼낸다. "오늘 하루종일이라니 -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난 학교도 가야 - " "뭐야. 반성하는 중이라고 말했으면서 나 팽개쳐두고 학교나 가겠다는 거야 시키?" " - 윽" 아픈 데를 찌르다니. 난 - <1. ...할 수 없지, 알퀘이드가 하자는 대로 하지 뭐 - 선택> " - " 흘끔 시계 쪽을 본다. 시각은 오전 9시를 이미 훌쩍 넘겨버린 뒤다. 이제와 서 학교에 간다 하더라도 이미 지각일테고 - 솔직히 말해 학교에 가는 것보 다 알퀘이드랑 함께 다니는 편이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고...... "알았어. 오늘 하루 동안은 너랑 같이 다녀줄게. 근데 해 떠있는 시간에 거 리에 나가봤자, 사자들 어슬렁거리고 있을리도 없고 뭐 그런 거 아냐?" "그런게 무슨 상관이야. 거리를 산책하는 정도라면 낮이라고 무슨 상관있겠 어?" "......? 뭐야, 어젯밤에 흡혈귀 찾으려다 못한 거, 지금부터 하려던게 아 니었어?" "응. 물론 밤이 되면 거리를 또 찾아봐야지. 하지만 하루 종일 시키한테 거 들어달라고만 하는 것도 좀 그러니까 적어도 낮 시간 정도 쯤은 좀 쉬러 돌 아다녀도 괜찮겠다 싶어서." "그야 뭐, 나도 그러는게 편하고 좋긴 한데. 하지만 단 둘이서 거리를 돌아 다니...그거 설마..." 속칭, 일반적으로는 데이트였던가 하는 그런 거 아냐?...흡혈귀인 알퀘이드 한테 그런 생각이 있을리 없으니, 아마 '나 데리고 어디 놀러 좀 데리고 가'라는 의미로 말한 거겠지만...나로서는 그러니까 - 좀 마음에 준비란 것 도 좀 필요하고 그리고... "......? 왜 그래 시키.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졌어?" " - 우으" 재빨리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알퀘이드에게서 시선을 피한다. 가만 생각해 보니 알퀘이드랑은 지금까지 몇 번 씩이나 단 둘이 있어보고 그랬었다. 하 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긴급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거였고 남자와 여자이 기 이전에 서로 협력하는 관계인, 그런 사이였었다. 때문에 - 알퀘이드를 속으로는 예쁘다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어도 그걸 머리로 의식하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아무런 위험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알퀘이드와 둘만이서 함 께 있게 된다면 알아서는 안 될 것에 눈을 뜨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왠 지 망설여지는 - "시키? 시키, 그냥 학교 갈래...?" "...학교를 왜 간다고 그래. OK 했으니까 오늘은 너랑 같이 지낼게.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몰라도, 거리 산책 정도라면 별 문제는 없을테 니까." "좋아. 그럼 빨리 나가자." 알퀘이드는 이 방에 들어왔을 때 통해왔을 빼꼼히 열려진 창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잠깐만 기다려. 금방 옷 갈아입을게, 거기서 밖에나 좀 보고 있어." "응? 나 불렀어?" "아앗, 불렀지만 안 불렀어! 됐으니까 그냥 밖에나 나가있어. 금방 갈게." "응, 저택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지금까지 진짜 진짜 오래 기다렸으니까 더 이상 나 기다리게 하지마, 시키." 알퀘이드는 마치 고양이 같은 날렵한 몸동작으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 다. 정원의 나무가 하나 둘 휘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알퀘이드는 정원의 지 면을 밟지 않고 정원 나뭇가지를 발판으로 삼아 저택 밖으로 빠져나갔다. 뭐...저런 몸놀림이라면 내 방에 아무도 몰래 숨어들어오기는 누워서 떡먹 기나 마찬가지겠구만. "...감탄하고 있을 때냐, 지금...나도 히스이한테 안 들키게 빨리 밖으로 나가야지." 잠옷을 벗고 평상복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런 후 방문을 조금 열고 복도 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 다음 빠른 발걸음으로 뒷문을 통해 저택을 나섰다. 다행히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저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알 퀘이드는 나를 등진 채, 뭐라고 뭐라고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리고 있다. "기다렸지? 자, 그럼 일단 가보자구 알퀘이드. 계속 이렇게 저택 근처에만 서 있으면 코하쿠 씨한테 들킨단 말야." "에? 아, 응...그럼 빨리 가지 뭐." 방금 전까지의 그 딱부러진 태도는 온데간데 없이, 알퀘이드의 대답에선 어 딘가 우물쭈물한 듯한 느낌이 든다. "왜 그래, 너 답지 않잖아. 나 기다리는 동안에 또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냥 아무 것도 아니야..." '또' 부분에 액센트를 실어 알퀘이드에게 말을 걸었지만 알퀘이드의 대답은 이번에도 어딘가 좀 우물우물하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왠지 -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설마, 낮이라 몸에 좀 안 좋은 데라도 있는 거야? 그다지 무리해 가면 서까지 외출할 필요는 없으니까 힘들면 그만두자." "으응~~몸 상태는 괜찮은 편인데...잠깐 이 집 담장을 보고 있으려니 어젯 밤 일이 떠올라서 말야." "......어젯밤 일? 공원에서 계속 나 기다리고 있었던 거 말야?" 알퀘이드는 알듯 모를듯 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나, 어젯밤에는 여기 이 담장을 전력으로 뛰어넘어서는 그대로 시키네 방 까지 숨어들어갔었는데...지금 생각해 보니 어딘지 좀 이상한데 싶어서 말 야. 나 왜, 어째서 어젯밤에 그렇게까지 화 나 있었던 거지? 그깟 약속 한 두 가지 쯤 지금까지 몇 번이고 안 지킨 적도 많았는데 말야." 알퀘이드는 팔짱을 끼고 잘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긴다. "아, 그래! 시키 너라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맨날 나보고 바보바보 바보소 리만 그렇게 해댔으니까 시키 너라면 내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있겠지?" "야......" 알퀘이드 본인이 모르는 걸 타인인 내가 알 리가 있나. 그런 걸 알 리는 없 지만 뭐, 굳이 대답해 보자면 - <2. 그야 네가 날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 - 선택> "...그건 네가 날 싫어해서 그런게 아닐까? 약속시간도 제대로 지키지도 않 고, 예전에 한 번 너한테 심한 짓도 한 적 있었잖아." ...내가 알퀘이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은 일단 한쪽에 고이 모셔두고 냉철하게 그 원인을 분석해 본다. " - 정말 그런 걸까? 나, 다른 누군가에게 감정을 가져본게 이번이 처음이 라 잘은 모르겠지만..." 라며 알퀘이드는 잠깐 말없이 가만히 서있나 싶더니 잠시 후 고개를 들더니 "...저기, 시키는 나 싫어......?" 라고, 물어본다. "나, 나......? 난, 그러니까 - " "..............." 알퀘이드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내 얼굴만 바라본다. "난 - 싫어하지 않으니까, 알퀘이드 도와주고 있는 거잖아." ...어쨌든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구나. 그럼 나도 시키랑 마찬가지일 지도 모르겠네." 납득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알퀘이드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의문은 풀리셨습니까? 그럼 어서 출발해 보실......근데, 알퀘이드. 너 어 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 "우웅, 잘 모르겠으니까 시키 가자는 데로 갈게. 어디 괜찮은 데 좀 없을 까?" ...자기가 먼저 산책하자느니 어쩌느니 말해놓고선...뭐, 어쩔 수 없지 - 나도 알퀘이드가 즐거워 할만한 데가 어딘지 딱히 짐작되는 곳은 없긴 하지 만, 어쨌든 둘이서 같이 놀만한 곳에 데리고 가볼까. 자아, 그럼 - <1. 정식 코스다. 영화관에 데려가야지 - 선택> -------------------------------------------------------------------------------- 우선 정식 코스랄까 안전빵이랄까, 가만히 보면서 앉아 있으면 적어도 심심 할 일은 없을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이 근처는 언제나 사람이 많네? 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알퀘이드는 내 옆에 바짝 붙어서 있다. " - " 여기까지 오는 도중 - 이랄까,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반짝거리는 시선이 우리쪽으로 향해온다. 그 이유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알퀘이드가 그리 쉽게 거리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미인이기 때문 일 것이다. 나도 조금은 그런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긴 하지만 주위의 그런 반응이 나로 하여금 쓸데없이 알퀘이드를 의식하게 해버려 난처하다. 알퀘이드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태도변화 없이 날 대하고 있는데 오히려 나 혼자서만 알퀘이드를 한 사람의 여자로서 느끼고 있는 탓에 아까 부터 계속 핀트에 안 맞는 엇갈린 소리만 하고 있다. "듣는 거야, 시키? 이제 우리 어디로 갈 건지 물어보고 있잖아." "아 - 저기, 이게 저 그러니까, 이런 데에 온 커플들은 대부분 영화관으로 들어가." 손가락으로 바로 앞에 보이는 영화관을 가리킨다. "영화관...흐응~~영화 보잔 말이지?" ...공주님께서는 영 마음이 내키시지 않는 눈치시다.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이상 다른 선택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애초에 여자 흡혈귀 어딜 좋아하는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렇게 된 이상 불평 한 마디 들을 각오 정도는 해둘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알았으니까 들어가자. 마음에 안 들면 여기서 따로따로 다니면 되는 거지 뭐." "뭐, 불만 같은 건 없긴 하지만..." 알퀘이드는 하아 하고 깊게 한숨을 쉬고는 내 뒤를 따라온다. 힘없이 축 처 진 알퀘이드의 두 어깨가 나를 [능력없는 놈]이라고 탓하고 있는 것만 같아 내내 뒤통수가 따갑기만 하다. "그럼 표 사올게, 뭐 볼래? 어디보자...지금 하고 있는게 연애물이랑 연애 물이랑 연애물인데......뭐야 이 영화관..." 나까지 다른 데 가고 싶어졌다. "아무거나 보자. 다 똑같은 내용 같으니까." "그래. 그럼 대충 골라볼까?" 사람들이 얼마 줄서지 않은 곳에 서서 영화표 두 장을 샀다. "받아. 그 표를 영화관 안에 들어갈 때 보여주면 돼. 들어갈 때 영화표 반 을 찢을텐데 원래 그렇게 하는 거니까 거기서 또 화내고 그러지마." "그 정도 쯤은 나도 다 알아. 시키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르는 그런 여자인 줄 아는 거야?" "아......아니, 그냥 뭐...인간사회에 대한 지식이 얼마 없지 않은 건 아닐 까 해서..." "그런 지식 쯤 다 알고 있다고 전에 안 말했던가? 나, 영화관이 뭔지 정도 는 안다구." 알퀘이드는 고개를 홱 하고 돌리더니 영화관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실패야...역시 흡혈귀들은 영화관 같은데 가도 영 재미없다고 생각하 는 모양이다. - 영화관을 나섰다. 알퀘이드랑 둘이서 본 영화는 연애물로, 보다가 졸 정 도로 지겨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재미있는 구석이 있는 것 도 아니었다. 전형적인 프랑스 영화였는데 순식간에 분위기가 고조되는 그 런 장면들보다는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 쪽에 중점을 두고 만든 작품이었 다. 영화관을 나선 후 알퀘이드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을 걷고만 있다. "........." ...어색한 침묵. 액션물이나 호러물 같은 거라도 봤더라면 그래도 얼마만큼 은 알퀘이드도 신나했을지도... "저기, 알퀘이드" "응, 정말 재밌었어 시키!" 에, 에에에에에에에......!? "응? 재미있었다니, 알퀘이드?" "정말이지 듣는 거랑 보는 거랑 이렇게 다를 줄은~~영화관이 어떤 데인지는 지식으로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 거 다 쓸데없는 망상일 뿐이었어." ...알퀘이드는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웃어대고 있다. "일단 주변이 어둡다는 게 참 좋았어. 막 큰 소리가 들리고 그러는데 전혀 시끄럽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시키가 옆에 앉아있다는 것도 즐거웠어. 그치 만 그런 것들보다 내용이 정말 재밌었어! 참 뭐랄까, 지어낸 이야기를 그런 수준으로까지 만들어낼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깜짝 놀랐다니까? 영화속의 섬세한 배경에 비하면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 같은 건 정말 애들 장난 같은 수준이었고, 어쨌든 정말로 깜짝 놀라버렸어." "......아, 그, 그러세요...?" "어머? 시키 표정이 왜 그래? 혹시 재미없었던 거야?" "아니, 재미없다기 보다는 그...좀 평범해서 말야. 그것말고 더 재미있는 영화도 있으니까." "거짓말. 아까 우리 본 영화, 얼마나 재밌었는데!?" "뭐...일반적으로는 아까 본 영화 같은게 괜찮다 어떻다 그래도 그냥 단순 하게 더 재미있는 영화들도 얼마나 많은데. 지금은 시즌이 지나서 상영하진 않고 있지만 대작이라 불리는 영화들은 아까 그 영화보다 몇 배는 더 재미 있다구. 솔직히 말해서, 순위를 매긴다면 아까 본 건 중하 랭크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였어." "......깜짝" "......참 감정표현도 보는 사람 알기 쉽게 하는구나, 알퀘이드." 놀랐다기 보다는...어처구니 없다는 느낌일까. 알퀘이드 이자식...보기 전까지만 해도 막 화난 것같이 쌀쌀맞게 굴고 그래 서 나중에 꼭 뭐라고 뭐라고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더니만 겨우 이 정 도 밖에 안 되는 영화에 애들처럼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기나 하고. "...아쉬운걸? 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말 괜찮은 영화 하나 하고 있었는 데. 그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데려오는 건데." 고맙다는 감사 인사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순수하게 알퀘이드를 즐 겁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 "그래...타이밍이 안 좋았구나, 나랑 시키." 실망이 큰 듯 알퀘이드의 두 어깨가 축 처진다. "정말이네, 왠지 자꾸 헛방만 치는 것 같아." 실망이 큰 듯, 내 어깨도 힘없이 축 처진다. ...응, 정말이지...알퀘이드가 즐거운 듯 웃음짓는 모습을 조금만 더 보고 싶었는데. 오후 2시가 좀 넘어 슬슬 고파지는 배를 채우려 적당한 패스트푸드 점을 찾 아 들어갔다. 알퀘이드가 이런 종류의 음식물을 먹을 수 있을지 어떤지는 의문이었지만 알퀘이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한참 노려보더니 결국 엔 내가 고른 세트메뉴를 주문했다. "........." 자리에 앉아 알퀘이드를 마주대한다. 알퀘이드는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살 피더니만 익숙한 손놀림으로 프라이드 포테토를 입으로 가져간다. "...헤에~~제법 잘하는데? 난 또 너, 이런데 처음 오는 건 줄 알았지." "응, 이런데 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야. 전부터 뭐하는 곳인지는 알고 있었지 만 그런 어디까지나 지식으로서 알고 있었던 거였으니까." "지식으로서라...아, 뉴스를 본다는 소리는 잡지 같은 것도 보고 있다는 소 린가." "우웅~~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 살고 있는 시대에 걸맞는 상식 정도는 필요 하잖아? 그래서 일어날 때에는 그 시대의 정보를 머리 속에 떠올려 가며 행 동해. 뭐, 보통은 하루 이틀이면 승부가 나버리니까 결국 쓸데없는 짓이 되 어버리지만." "......?" 알퀘이드는 가끔, 이렇게 통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한다. "흐응~~쓸데없는 짓이라니, 어째서?" "그야 금방 잠들어버리니까지. 다음에 언제 눈을 뜨게 될지 나로서도 알 수 가 없으니까 기껏 배워둔 지식을 사용할 기회가 거의 없어. 볼일이 끝나면 바로 잠들어버리는걸...응, 하지만 그거, 왠지 손해 본 듯한 느낌이야. 나, 지금까지 세계를 지식으로밖에 알지 못했어. 이렇게 인간들이 모이는 장소 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도 그걸 경험하지 않았던 거야." "그렇구나...하지만 알고 있으면 그걸로 된 거 아냐? 방금 전에도 전에도 시켜본 적 있는 것처럼 메뉴를 보고 주문하고 그랬었잖아." "그야 당연하지. 그런 식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지식을 습득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지식은 겨우 거기서 머무를 뿐이야. 경험이란 이론을 능가하니 까. 몇 억 개나 되는 단어를 알고 있다한들 실제로 말하지 않으면 아무 것 도 손에 넣을 수가 없잖아." 알퀘이드는 하아 하고 은근한 한숨을 내쉰다. "그런 걸까나......이론은 경험을 보충한다 라든지, 그런 반대개념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이론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지나지 않아...얼마 전까지의 나 역시 그런 부류에 속했지만." 알퀘이드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진다. 뚜렷한 이유도 없으면서 자꾸만 어두 워져 가는 그런 알퀘이드의 얼굴을 보는 건 싫다. "과연 그럴까? 난 그냥 이론만으로 경험을 보충할 수 있는 사람과 경험으로 이론을 커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여러 가지 사 람들이 있으니까 그 누구도 자신과 같을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 "와아앗, 시키가 진지한 이야기를 했어!" "이보쇼, 알퀘이드 씨. 댁이 진지한 이야기를 하시니까 나도 이런 이야기 하는 거 아닌가. 말 좀 중간에 끊지 마시게." 모처럼 네가 자기 이야기를 하니까 그러는 거 아냐... "응, 나 다 알아. 시키, 내가 말하고 싶은 걸 말하고 싶을 때 나하고 같이 있어준다는 거 말야. 평소에는 나한테 막 소리나 지르고 그래도 좀 심각해 지겠다 싶을 땐 이렇게 이야기도 해주고 그러잖아." 알퀘이드는 밝은 표정으로 소리내어 웃는다. ...흥.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마 알퀘이드 제멋대로의 착각일테지만...역시 알퀘 이드한테는 이런 순수한 웃음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하지만 방금 시키가 했던 말, 가만히 생각해봤어. 나 정말 좁게만 생각했 어. 스스로가 이렇게 하자! 하고 결정해 버리면 나,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돼. 나 말고는 아무 것도 필요없어, 내 생각만 옳은 생각이야 라는 식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었어. 그래 - 수많은 생각들이 있 기에 내가 못하는 것들을 당연하다는 듯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는 엄청나게 많이 있는 거야." 알퀘이드는 왠지 차분해진 어조로 자신을 반성한다. "아, 그치만 아무리 반성하고 그래도 내 성격은 하나도 변하지 않긴 하지만 말야. 나, 지금의 나를 제일 좋아하는데다 아무래도 내 생각이 옳은 생각이 라고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알퀘이드는 미소지은 얼굴로 시원스럽게 말을 한다 싶더니 또 주변을 두리 번 두리번거리며 바라본 뒤 햄버거를 한 입 베어문다. 한 입, 두 입. 흡혈귀의 이미지를 불식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정크 푸드를 먹어치워가는 알 퀘이드. "........." 어째서일까. 햄버거를 먹는, 아무리 미화시켜 생각해 봐도 결코 우아하게는 보이지 않는 행위를 알퀘이드가 하니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왜그래......?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기만 하고. 아, 설마 이거 이렇게 먹 는 거 아니었어......!?" 서둘러 햄버거를 쟁반 위에 되돌려놓는 알퀘이드. 종이 냅킨으로 입 주변을 닦는 알퀘이드였지만 어째서일까, 그런 단순한 동작 하나하나가 뭐라 설명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기품이 있어 보인다. "...아니, 그렇게 먹는 거 맞아. 그렇긴 하지만...네가 그렇게 먹으니 어딘 가 좀 이상해. 안 어울리니까 먹지마." 햄버거를 햄버거 답게 한 입 베어물면서, 스스로도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건 지 알 수 없는 소리나 하고 앉아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안 어울리다니, 대체 무슨 의민데?" "이미지 상의 문제야. 너처럼 입이 작은 녀석한테 패스트푸드는 하나도 안 어울려. 얌전히 앉아서 감자나 집어먹는 건 별 문제 없으니까 내 것까지 다 먹어." 알퀘이드 쪽 쟁반 위에 내 프라이드포테토를 얹어놓는다. ...나 스스로도 통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됐어. 그런 것만 먹고 있으면 뭘 먹는다는 기분이 안 든단 말야." 알퀘이드는 뾰루퉁한 표정으로 햄버거에 입을 갖다댄다. 이번엔 내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아까보다는 평범한, 뭐 이 정도라면 참아낼 수 있는 범위다. ...그건 그렇고, 햄버거를 먹는 흡혈귀라...무엇인가를 먹어 활동하는데 필 요한 영양분을 얻지 못하면 생물은 살아갈 수가 없다. 예전에 알퀘이드는 피를 빨지 않는다고 단언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알퀘이드의 영양원은 우리 와 마찬가지로 보통의 평범한 식사인 건가...? "...저기, 알퀘이드." "뭐야, 심술쟁이 씨." "아니, 이제 뭐라고 안 그런다니까.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데, 말해도 돼?" "응 - 뭔데?" "저기 말야, 너 흡혈귀지? 그럼 제대로 식사한다고 할 수 있는 음식물은 혈 액 밖에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알퀘이드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역시 너무 실례되는 질문이 었던 모양이군. 알퀘이드 표정도 순식간에 딱딱해지지......않네. "저기 말야, 시키. 기본적으로 난 식사를 안 해. 확실히 이렇게 뭔가를 먹 고 있으면 자신의 힘만으로 움직일 수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분 상의 문제야. 난 식사를 하는, 다시말해 영양분을 보충하는 방법이 시키랑은 달 라. 식욕이야 있기는 하지만 그건 성욕이랑 비슷해. 먹지 않으면 안절부절 못하지만 난 그다지 식사 자체를 중요시하고 있지 않으니가 반전충동에 휩 싸이는 일도 거의 없지." 너무도 간단하게, 알퀘이드는 혈액식사설을 부정했다. 아아, 결국엔 이런 소리로군. 알퀘이드는 정말로 피를 안 마셔도 괜찮은 모 양이다. "그래 - " 다행이야. 알퀘이드가 식사를 하기 위해 인간을 죽이거나 하는 그런 녀석이 아니라서 정말로 다행이야. 아씨, 알퀘이드도 처음부터 [난 피를 빨지 않는 흡혈귀야"라고 말해줬었더라면 나도 처음부터 순순히 알퀘이드한테 협력했 을텐......데...... "......어이, 잠깐! 너 그럼 흡혈귀가 아니잖아!" "흡혈귀야. 시키도 하루 종일 굶고만 있으면 배고파서 못 견디게 되지? 신 소인 흡혈종 - 내 경우에는 그런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최상급의 음식물이 혈액이야. 그래서 [활동한다], [욕구를 충족시킨다]라는 행위를 위해서라면 이런 것들로 대용품을 삼을 수 있단 소리지. 하지만 이 문제가 시토 - 인간 에서 흡혈종이 된 흡혈귀에 이르면 문제가 달라져. 그들은 자기 자신이 존 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다른 사람의 혈액이 필요하니까 말야." "......? 아, 에, 음, 그러니까 너한테 있어서 공복감을 채우기 위해 가장 적당한 재료가 혈액이라는 소리로군...하지만 알퀘이드, 너 피를 빠는게 싫 다고 했었지? 예를 들어 인간한테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이 있는 것 처럼 알퀘이드도 피 맛이 싫다거나 뭐 그런 소리야?" 오랜 동안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까 풀어낸 듯 회심의 기분으로 의견을 말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건 내멋대로의 추측에 지나지 않은 듯 했다. "......모르겠어. 피가 무슨 맛인지, 나 모르니까." " - 에?" "난 흡혈종으로서 완성되지 못했다고 전에 한 번 말했었지? 피가 어떤 맛인 지 몰라. 그것이 대체 어떤 것인지도 아직 잘 몰라. 단 하나 알고 있는 건 - 피를 빤다는 사실은 피를 빤 상대를 인간으로서 인식하지 않게 된다는 것 뿐이야." 알퀘이드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날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저기 시키. 만약...만약에 새나 물고기한테 시키 같은 인간이랑 비슷한 지 성과 수명이 있다고 치면 시키는 그런 것들을 먹을 수 있겠어? 아무리 지성 이 있다 하더라도 먹을 건 먹을 거니까 아무런 느낌 안 들고 먹을 수 있겠 어?" " - 아니, 그건..." 먹을 수 있 - 을까? 모르겠어. 하지만 지성을 가진 생명체는 그렇다치고 지성을 갖지 않은 다른 것들이라면 먹을 수 있을걸. "그래, 그거야. 내가 피를 싫어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야...뭐, 시키가 말했 던 것처럼 뭐가 좋고 뭐가 싫다 이런 게 있을지도 몰라. 나, 되도록이면 피 는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 그래, 만약 인간에게 나와 동격의 지성과 가 치관이 없었더라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피를 빨았을지도 모르겠어. 살아 가기 위해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는 자연계에서는 당연한 섭리 인걸." 알퀘이드는 '그렇지?'하는 시선으로 찬동을 구한다. 그것을 - 다른 그 누구 도 아닌 알퀘이드에게 들었다 해도 난 그걸 부정할 수밖에 없어. 긍정은 하 고 싶지 않아. "분명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인간과 넌 비슷한 존재잖아...그러니까 그런 비유는 들지마. 만약 어찌어찌해서 이렇다면 같은 이야기는 별로 좋아 하지 않으니까." "그래? 난 IF가 좋은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런 생 각을 했을 땐 무슨 답이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 IF......만약에, 인가. 그럼 만약 - 알퀘이드가 다른 흡혈귀들처럼 피를 빠는 그런 녀석이었더라면 나는 이렇게 녀석과 마주앉아 이야기하고 있었을 것인가. "왜 그래, 시키?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졌잖아. 아, 혹시 화장실 가고 싶어 서 그래?" "......야. 남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하필이면 한다는 소리가 그런 거냐?"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쉰다. 내가 아무리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본다 한들 피 를 빨고 빨지 않고에 관한 문제는 알퀘이드한테 있어서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인 모양이다. "그래 -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긴가." "뭐야, 아까부터 혼자서 중얼중얼 거리기나 하고. 그런 거 남자답지 못해, 시키!" 또 뾰루퉁한 표정으로 고양이처럼 소리를 지르는 알퀘이드. "별로 혼자서 숨기거나 그러지는 않는데? 도대체가 그렇게 혼자서 뭐 숨기 기만 하고 그러는 건 오히려 네 쪽이잖아. 맨날 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나 하면서 혼자서 재미있어나 하고." "재미있어 하 - 그런 거, 아냐." 좀 전까지의 기분 나쁘다는 듯한 표정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얌전한 태도 로 돌변해 버리는 알퀘이드. 사실을 듣고 기가 죽어버린 듯한, 그런 시선을 내게 향한다. "...뭐야, 정말로 내가 머리 싸매고 골머리 썩히고 있는 걸 재미있어 했단 말야? 대체 애가 장난치길 좋아하는 건지 비밀주의를 선호하는 건지...뭐, 어차피 난 너랑은 다른 생물이니까 어찌되든 상관없지만." "그, 그런게 아니라......! 나, 시키한테는 제대로 다 얘기해주고 있단 말 야. 이것저것 숨기는 구석이 많아 보이는 건 시키가 제대로 잘 안 들어서 그러는게 아닐까......?" "흐~~응~~ - 그럼 물어보면 대답해 주겠네? 뭐든지." "응. 우리, 서로 협력하는 그런 팀 사이잖아." OK. 그렇다면 원하시는 대로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의문점들을 물어보도록 할 까? 『그냥 3개의 선택기 모두 번역했으니 골라 보시길. 이후 부분은 어느 선택기로 나가도 내용이 통합되므로 다음 이 시간에.』 By 2M ---------------------------------------------- <1. 좋아, 어제 새벽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 보자 - 선택> 알퀘이드가 환한 대낮부터 외출하자고 말하는 바람에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 지만 나는 알퀘이드한테 꼭 한 번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될 일을 겪지 않았던 가. "그럼 질문. 알퀘이드, 나 사실 이틀 전 한밤중에 이상한 녀석한테 죽을 뻔 했었어." "에? 이상한 녀석이라니, 어떤 녀석인데?" "아아, 그게 - " 일단 분위기를 환기시킨 후 가능한 한 자세히 이틀 전 한밤중에 일어났던 일을 알퀘이드에게 설명한다. "...그렇게 된 건데 - " 긴 설명을 끝나치고나서 알퀘이드의 안색을 살펴본다. 내 이야기가 시작되 고나서부터 쭈욱, 알퀘이드의 눈은 한 번 풀리는 기색 없이 날카롭게 번뜩 이고 있었다. "왜 그래 알퀘이드. 그 붕대맨이랑 신부 같은 옷을 입은 녀석, 네 적이야?" "...응. 둘 다 내 [적]이야. 그 붕대 감은 남자는 누군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 신부복을 입은 여자라면 누군지 대강 짐작이 가." 알퀘이드는 몹시 기분 나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다. 아니, 기분 나쁘다기 보다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무언가를 초조해 한다는 느낌이다. "시키를 구해줬다는 그 녀석은 나랑은 서로 아는 사이일 지도 몰라...쳇, 확실히 그 여자라면 나보다 빨리 [적]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알퀘이드는 분해 죽겠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문다. "잠깐. 나, 그 신부복 입었다는 사람이 여자라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아니, 틀림없어. 이단 사냥을 단독으로 수행하는 권한을 갖고 화장식전과 철갑작용을 복합시킨 흑건(黑鍵)을 쓰는 대행자는 그 여자 뿐이니까." 알퀘이드의 초조한 태도는 거의 적의와 닮아있다. 네로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조차 알퀘이드가 이렇게까지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일은 없었는 데. "...알퀘이드. 저기...날 구해준 그 사람도 혹시 흡혈귀인 거야...?" "아니, 그렇지는 않지만 - 그래, 시키한테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을 아직 안 가르쳐주고 있었어. 전에 설명한 적 있는 것 같은데, 이 마을에 둥지를 틀 고 있는 흡혈귀처럼 인간을 자신의 노예로 삼아 스스로의 영지를 넓혀가고 자 하는 흡혈귀들은 말야,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은폐하려고 하지. 희생자 를 낸다 하더라도 주변에서 그러한 사실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마술을 걸어. 왜 그럴까?" "......그야, 인간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겠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 그 런 괴물이 살고 있다는게 밝혀지면 바로 반격해 들어오겠지. 아무리 인간이 나약하다 하더라도 경찰이나 뭐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인간들 만으로도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 - 뭐, 그런 이유도 있긴 하지만 경찰은 인간들에 대한 법률조직이잖아? 우린 그런 건 하나도 고려하고 있지 않아. 하지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 스로 흔적을 없애려고 한다, 는 건 맞는 이야기야. 시키, 흡혈귀들에게는 천적이 있어. 그것도 최근에 들어서는 힘의 균형이란 면에 있어 저들이 흡 혈귀들보다 우세한, 마치 살인청부업자 같은 집단이 말야...다른 초월종들 도 그렇지만 특히 흡혈종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외부에 드러내게 되면 그건 자신의 목을 죄는 행위가 되어버리지. 아무리 작은, 문명사회에서 격리된 산속 마을 하나를 지배해서 비밀의 왕국을 만들어도 희생자가 발생하면 반 드시 [그들]이 냄새를 맡고 쫓아오니까. 흡혈귀들이 인간들을 비밀리에 착 취하는 건 다른 그 무엇때문도 아닌, 오로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야. 흡 혈귀는 사회적인 풍문(風聞)이 아닌 그 천적들이 접근하는 걸 싫어해서 자 연스럽게 사체를 은폐하는 거야." "...하아. 흡혈귀들의 천적이라...또 말도 안 되는 괴물 같은 놈들이 나오 는구만..." 보통의 인간 입장에 서있는 나로서는 더 이상 상식이란게 통하지 않는 녀석 들이 난입해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는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 천적들이란 건 시키들, 인간을 말하는 거라구." " - ? 천적이라구, 우리가?" "응. 아득히 먼 옛날, 인간은 갖가지 마술, 신비학, 식전의례를 중심으로 조직체계를 만들어 인간 이외의 영장류를 배제하기 시작했어.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기독교 - 법왕청이 자랑하는 엑소시스트 집단이야. 구교(카톨릭) 은 옛날부터 [인간이 아닌 것]을 철저하게 도태시켜왔지만 그 중에서도 특 히 흡혈귀에 대한 적대심은 유별날 정도였어. 전 세계의 그 어떤 종교를 놓 고 보더라도 카톨릭만큼 흡혈귀를 적대시하는 종교는 없어. 완전히 뭐에 씌 인 것 같아. 너무나 병적이라서 나조차 그들하고는 상관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라구." 알퀘이드는 깊게 한숨을 내쉰다. "시키를 구해준 건, 카톨릭 내부에서도 이단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녀석들 의 일원이야. 매장기관이라고 해서, 그리스도 교의 모순점을 법이 아닌 힘 으로 처리하려고 하는 녀석들이지. 절대로 표면으로는 나오려고 하지 않는, 살인청부업자들 같은 엑소시스트." "........." 흡혈귀를 퇴치하는 신부들, 인가. 뭐랄까...너무 이야기가 진지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말이 다 안 나온다. "그치만 말야, 그 소린 다시 말해 너랑 동맹관계에 있다는 소리 아냐? 그 매장기관인지 뭔지 하는 녀석들도 흡혈귀 퇴치가 목적이라면 함께 흡혈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 - 안돼. 녀석들은 흡혈귀라면 그 무엇에도 개의치 않아. 그들에게 있어서 사람이 아닌 영장류는 그것만으로 [적]이 되는 거지. 인간의 피를 빠는가 빨지 않는가는 상관없어. 그 엑소시스트, 어쩌면 이 마을에 둥지를 튼 흡혈 귀가 아니라 나를 봉인하러 왔을지도 몰라." "........." 왠지 좀 얘기가 복잡해졌다. 알퀘이드의 적은 자신과 같은 흡혈귀에게도 목 숨을 위협받고 있고, 또 흡혈귀들을 적대시하는 녀석들에게도 표적이 되어 있다. "...뭐야. 너 그럼 외톨이인 거 아냐?" "응, 그게 흡혈종이니까. 네로랑 싸웠을 때도 말한 적 있지, 흡혈귀들이란 아무리 동족 사이라 하더라도 그 성질이 서로 너무나 다르기에 결국엔 혼자 뿐이라고." 햄버거를 한 입 베어무는 알퀘이드. 알퀘이드는 자신이 외톨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입에 담는다. "........." 석연치 않은 기분에 휩싸인 채 무뚝뚝한 표정으로 한쪽 귀로 흘려듣는다. ------------------------------------------- <2. 그럼 알퀘이드의 [적]에 대해 자세하게 물어보자 - 선택> ......그래. 이렇게 알퀘이드를 도와 그런 알퀘이드의 [적]이란 놈을 찾아 헤매고 있긴 하지만 난 그녀석이 대체 어떤 녀석인지조차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럼 질문. 알퀘이드, 네가 말하는 그 [적]이란 결국 어떤 흡혈귀인 거야? 이곳까지 쫓아왔다는 건 나름대로 면식이 있단 소리겠지?" "그건 - 그러니까 - " 알퀘이드는 시선을 피한다. "뭐야. 나한테는 아무 것도 숨기지 말고 다 털어놓으라고 방금 전에 이야기 한게 누군데?" "그건 그렇지만...화내지말고 들어. 이 도시에 흡혈귀가 숨어지낸다는 걸 알게 된 건 극히 최근에 들어서야. 이 나라 이 도시에 [적]이 있다는 걸 알 고 곧바로 이곳에까지 찾아오긴 했지만 아직 본체하고는 만난 적이 없어. 그런 때문에 솔직히 나도 이번의 [적]이 어떤 녀석인지 하나도 모르는 상태 라구." "모른다니 - 네로랑 싸울 땐 그 까마귀 모습만 보고서도 뭐가 나타났는지 한 방에 알아맞췄잖아?" "네로는 유명하고 또 그 형태도 항상 변화하지 않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쫓고 있는 [적]은 그렇게 강력한 흡혈귀도 아니고 이번엔 뭐가 특기고 어떤 인간이 되어있는지조차도 짐작이 안 갈 정도로 그 변화폭이 큰 녀석이야. 시키한테는 미안하게 됐지만 - 정말로 나, 이 정도 밖에 말할 수 없어." ...알퀘이드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역시 뭔가 중심 핵이 될만한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예를 들 면 그건 - "알았어, 알퀘이드도 모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뭐. 하지만 - 아무리 그래도 그 [적]이란 녀석의 이름 쯤은 알고 있겠지?" "이름 - " "그래, 이름." 알퀘이드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뭔가 사정이 있는 듯 내게 그 이름을 가르쳐주지 못한 채 난처해 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 놈의, 이름" 섬찟. 급격하게, 이 가게의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얼어붙은 듯한 오한이 들었다. "놈의 이름은 말야, 시키." 알퀘이드는 하나도 망설이고 있지 않다. "......놈의 이름은 미하일. 미하일 로어 바르담욘. 우로보로스라 불리는, 인간에서 흡혈귀가 된 시토 중 한 명이야." 고개 숙인 알퀘이드의 입술이 그렇게 움직인다. 그곳에 머물러 있는 건 피 를 토해내는 듯한 증오 뿐이었다. "알퀘이드, 너 - " " - " 알퀘이드의 어깨가 떨리고 있다. 금방이라도 터뜨려버리고 싶은 감정을 겨 우 참아내려고 애쓰는 듯한 모습이다. "......미안. 이상한 거 물어봐서 미안해. 괜찮으니까 방금 일은 잊어줘." 알퀘이드는 희미하게 고개를 좌우로 가로젓는다. 절대로 잊을 수 없다고 말 하는 듯. 잠시 무언의 시간이 흘러갔다. " - 미안해" 고개 숙인 알퀘이드에게서 어렴풋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 - 응"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후 마찬가지로 극히 자연스럽게 우린 패스트푸드 점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3. 자아 그럼 알퀘이드의 취미, 사고, 경력 및 쓰리 사이즈에 대해 질문할 수밖에! - 선택> - 흠. 이런 벌건 대낮부터 패스트푸드 점에서 알퀘이드랑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두 번 다시 있을 리도 없을테니 흡혈귀 사건이랑은 상관없는 상식적 인 질문이나 하지 뭐. "그럼 질문. 알퀘이드, 네 취미라든지 옛날 일이라든지 쓰리 사이즈라든지 가르쳐줄래?" "그런 걸 듣고 싶은 거야? 별 걸 다 물어보네, 시키." "별 걸 다가 아냐. 난 너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니까 아주 조금만이 라도 알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욕구 아니겠어?" "아, 그건 나도 동감. 그래 - 그런 거라면 괜찮아. 하지만 취미라든지 옛날 일이라든지, 나 그런 거 말할게 없는걸. 쓰리 사이즈도 재 본 적도 없고 시 키 같은 인간들처럼 자신의 나이나 키 같은 걸 기록한 적도 없고 말야." "그게 뭐야. 알퀘이드는 자기 자신한테 아무 관심도 없는 거야?"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다지 우선적이지는 못하지. 필요한 건 시토.. ...흡혈귀를 사냥해내는 능력 뿐이었으니까." "그래도 이 마을에 오기 전의 일이라든지 그런 건 있을 거 아냐. 난 그런 이야기가 듣고 싶을 뿐이라구." "이 마을에 오기 전이라......음, 8년 쯤 전의 이야기려나? 그땐 이 나라 말고 다른 나라에서 흡혈귀를 사냥하고 있었어. 프랑스의 외딴 시골마을에 흡혈귀가 둥지를 트는 바람에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도(死都)로 변해버렸었 어. 이틀 만에 [적]을 찾아 그 마을을 지배하고 있던 여자 시토를 처리하긴 했었는데 - " 왠지 기분 나쁜 일이라도 떠올려버린 듯, 알퀘이드는 눈썹을 찡그리며 중간 에 말을 끊는다. "8년 전, 인가...그럼 그때부터 최근까지 알퀘이드는 뭘하고 있었는데?" "뭘 하긴, 성에 돌아가서 자고 있었지. 내 역할은 시토를 사냥하는 거야. 그 이외에 존재할 의미가 없으니까 시토가 다시 표면적으로 활동할 때까지 는 계속 잠들어있을 뿐 아니겠어?" "무슨 - " 계속 잠들어있을 뿐이라니, 그거 설마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 건가? 아니, 그건 그렇다치고 - "......잠깐 기다려봐. 성이라니, 그 성을 말하는 거야? 설마 설마 하고 물 어보는 건데 알퀘이드 네 집은 신데렐라 성 같은 그런 성인 거야......!?" "신데렐라 성?"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알퀘이드. "아 - 아니, 신데렐라 성이란 표현은 좀 안 어울리려나. 에, 그러니까, 요 컨대 너, 그......공주님, 이야?" "응, 일단은 그렇긴 해. 옛날엔 머리도 자르면 안 된다고, 왕족답게 좀 행 동하고 다니라고 엄청 잔소리 들었었는데." " - " ...할 말이 없군요. 그러고 보니 네로 놈도 공주였던가 뭐라던가, 하여간 그런 소리를 했었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 "공주님, 이십니까..." 몰래 알퀘이드의 모습을 훔쳐본다. 확실히 터져나오는 숨마저 멎게 만들어 버릴 정도의 미인이긴 하지만 이 철부지 꼬맹이 같은 계집애가 공주님이라 니, 왠지 이미지가 안 맞는구만. "......뭐, 제멋대로인 점은 확실히 공주님 이미지이긴 하지만." 땅이 꺼져라 크게 한숨을 몰아쉰다. "뭐야, 시키가 말해달라고 해서 말해줬더니 듣는 태도가 그게 대체 뭐야!" 공주님께서는 울컥하며 나를 노려보신다. 뭐...알퀘이드도 자기 자신을 공 주님이라고 의식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고 하니 이 일은 머리 속에서 깨끗하 게 지워버리지 뭐. 알퀘이드는 투덜투덜 화가 난 채 햄버거를 먹는다. 알퀘이드의 식사가 끝나 고 그런 알퀘이드의 기분이 제법 나아질 타이밍에 맞춰 다음 장소로 이동하 기로 했다. -------------------------------------------------------------------------------- 점심 식사를 마치고 큰길가를 이곳저곳 적당히 둘러보고 다니던 우리는 어 째서인지 학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해도 이제 막 저물려 하고 있는 시간.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알퀘이드가 [시키네 학교에 좀 가보자]라 며 말을 꺼냈고 그걸 내가 차마 거절하지 못한 때문이다. "말해두겠는데 학교 안에는 못 들어가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난 오늘 하루 결석한 사람이고 또 알퀘이드는 학교 관계자도 아니니까." "알았다니까? 시키 힘들게 하는 짓은 안 할테니까 안심해." 빼꼼히 교문 앞에 서서 학교 안을 살펴보는 알퀘이드. "어머......?" 알퀘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알퀘이드의 등 너머로 교정 쪽을 바라본다. "어.....어라?" 이번엔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교정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시각은 아직 저녁 여섯시가 되기 전 무렵이다. 이런 시간이라면 체육계 특 별활동을 하는 녀석들이 아직 운동장에 남아있어야 할텐데 - "시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아아, 어떻게 된 이유에서인지 학생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운 동장 쪽 뿐만 아니라 교사 쪽에도 학생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시키, 안에 아무도 없는데?" 알퀘이드는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다...대충, 알퀘이드가 무슨 소릴 하고 싶어하는지 알 것 같군... "안 돼." 매몰차게 잘라말한다. 하지만 알퀘이드는 내가 하는 말에 조금도 귀를 기울 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으면 나 안에 들어가봐도 아무도 화내는 사람 없겠지? 후훗...우 리, 타이밍 아주 좋을 때 온 것 같은데?" "그러니까 절대로 안 된다니까." "헤에~~생각보다 넓은데? 교사도 제법 크고, 이 정도면 꽤 쓸만하겠어." ...이상한 일이야...알퀘이드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게 아니라 교정 쪽에서 들리고 있잖아... "시키~~, 여기 이 문 안 열리는데 부수고 들어가도 돼~~~?" 엄청난 고속이동. 알퀘이드는 이미 교사 출입문 앞에 서서 유리문을 박살내려고 소매를 걷어 붙이려 하고 있는 참이다. "이......사람 말이 말 같지 않냐, 너어어어어어어어!" 전속력으로, 출입문을 박살해려고 하는 알퀘이드를 향해 달려나섰다. "아, 왔네?" 뭐가 그리도 기분이 좋으신지, 알퀘이드는 활짝 웃는 모습이다. "......야. 남의 학교에 와서 뭐가 그렇게 좋으셔? 재밌는 데라면 여기 말 고도 다른데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런데 적당히 데려다줄게 다른데 가자." "꼭 그렇지만도 않은데? 시키 네 학교,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알퀘이드. "시키, 나 교사 안에 좀 들어가 보고 싶어. 거기 그 출입문 자물쇠 좀 죽여 주지 않을래?" "죽, 죽여주지 않을래라니...너 - " "내가 하는 것보다 시키가 하는게 훨씬 더 깨끗하게 되고 좋잖아? 시키가 베어낸 자리는 다른 그 어떤 칼들로도 만들어낼 수 없는 절단면을 가지고 있어. 나중에 누가 발견해도 자연스럽게 떨어져나간 거라고 생각할걸?" 알퀘이드는 이리 보라는 듯 복도 쪽 창 유리를 가리킨다. "......아이씨, 네가 무슨 애냐?" 안경을 반쯤만 벗는다. ...자아 어디보자, 크리센트 자물쇠 언저리에 [선]이 보이는 창문이... "......쳇, 딱 저기에 있네." 주머니 속에서 나이프를 꺼내든 후 스윽 하고 자물쇠를 잘라낸다. 아니, 잘 라낸다기 보다는 [죽이며 자른다]라는 표현이 적당하려나. "됐어. 여기로 들어가자." 창문을 열고 신발을 신은 채 교사 안으로 들어간다. "............하아..." 뭐...예상대로랄까 무슨 약속 같은 거랄까, 알퀘이드가 맨 처음에 안내하라 고 가리킨 곳은 우리 교실이었다. "근데, 시키는 여기서 뭘 배워?" "뭘 배우냐니 - 일반적으로 학생들이 배우는 걸 배우고 있지. 역사 공부에 서 우리 나라의 문화에 대한 깊은 조예(造詣)라든지. 더 나아가서는 사물의 상태를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물리랑 수학도 배우고. 아, 언젠가 다른 외국 여러 나라들을 여행할 때를 대비해서 영어 같은 것도 배우고 있어." "그렇구나. 난 또 효율적인 인체해부술이라든지 칼 종류를 다루는 법이라든 지, 그런 것들을 배우는 줄 알았지." 알퀘이드는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다. "알퀘이드. 너, 처음부터 여기가 뭐하는 데인지 알고 있었지?" "아하하, 정답입니다~~" 짝짝짝짝 박수까지 쳐댄다. ......평소에도 알퀘이드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번엔 특히 더 심하게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런 곳에까지 일부러 찾아들어와서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하려는 속셈이지? "시키." "뭐야. 갑자기 그런 표정해가지고. 역시 여기 무슨 이유가 있어서 데려오고 그런 거야?" "아니, 딱히 여기 온 데에 대한 이유 같은 건 없어. 난 그저 여기서의 생활 을 듣고 싶었을 뿐이야." "......여기서의 생활, 학교 생활 말야?" "응. 시키는 여기서 하루의 절반이나 되는 시간을 보내고 있잖아. 그렇게까 지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모두 활용해 본 적 있어? 시키는 스스로에게 불 필요한 지식을 배우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거나 그러지 않아?" "아아 - ?" 알퀘이드의 지금 이 질문은 지금까지 해왔던 질문들 중에 가장 무슨 소리인 지 알기 힘든 질문이다. "예를 들어 여기서 배운 기술들을 한 번도 써먹어보지 못한 적도 있을 거 아냐. 그런 거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뭐, 확실히 그렇긴 하네. 수학을 배우고는 있지만 실생활에서 활용하는 건 셈하기 정도의 레벨이고 말야. 나라의 역사라든지 영어 같은 걸 배운다 쳐도 그걸 앞으로 사용할지 안할지도 전혀 알 수가 없으니까." "뭐야, 시키 다 알고 있었잖아? 하지만......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쓸데없 는 짓들을 하는데? 인간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없으니까 그런 짓들을 하고 있을 시간 같은 건 얼마 없을텐데 말야." "시간이 없다라...뭐, 뚜렷하게 정해진 목적 같은게 지금은 없으니까. 그런 게 생길 때까지는 이렇게 쓸데없는 시간이나 보내며 살아갈 뿐이지." "말도 안 돼. 스스로 무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그 걸 일상의 굴레처럼 반복해서 하고 있다니...응, 난 도저히 못 믿겠 어." 알퀘이드의 목소리에서 매우 낙심한 듯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난 그 이유 를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일상의 굴레라...확실히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말야 쓸데없는 시간 을 보낸다는게 그렇게 안 좋은 일일까?" " - 에?" "좀 그렇게 지낸다는게 뭐가 어때서 그래.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학교에서 밖에 써먹을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해도 또 나름대로 일상의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 것 아냐. 언젠가 나이가 들어 그저 할 일없이 시간만 축내고 있을 때, '아아,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고 쓴웃음 지으면서 떠올려낼 수 있는 일들이라면 그건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거야." "......모르겠어. 그런 추억들 자체가 쓸데없는 것들인데도 그걸 즐겁게 회상해낼 수 있다는 거야, 시키는?" "아아, 그 부분이라면 괜찮아. 나 자신에게 있어 그다지 기억해 내고 싶어 하지 않는 추억은 떠올릴 수 없도록 만들어져있으니까, 인간이라는 생물은. 애초에 인생 자체가 그런 것들로 꽉 채워져 있고 또 가만히 생각해보면 살 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런 쓸데없는 일이잖아. 그러니까 난 별로 심각하 게는 안 받아들여.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하도록 자신을 끝없이 속이면서 살아가는게 살아가는 당연한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까 말야."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잘 알면서 시키는 그걸 끝까지 계속해 나가......몰 라, 난 그런 일은 못해. 지금까지도 필요한 것 이외에는 한 적이 없었으니 까." "무슨 소리야. 그럼 오늘 있었던 일들은 다 그 모양 그 꼴 아냐. 알퀘이드 의 목적은 흡혈귀를 찾아내는 거였지? 그럼 나랑 같이 거리를 다닐 필요는 없었던 거 아냐?" "......그래. 그게 나도 잘 모르겠어서 그런 쓸데없는 짓만 하고 다니는 시 키한테 질문해 봤지만...더 더욱 모르게 돼버렸어." - 씰룩. "예이예이, 이거 참 죄송하게 됐군요. 그래, 전 쓸데없는 짓만 하고 다니는 그런 인간입니다~~" "............아 - 응...미안, 시키가 무슨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지는 나도 잘 알아. 인간이라는 생물은 무리를 지어 생활하기에 가치기준을 개인이 아 닌 전체에 두고 있어. 때문에 개개인의 잘못도 전체가 올바르다면 용서받을 수 있는 거야. 하지만 우린 처음부터 개체였기 때문에 스스로의 잘못은 절 대로 용서받을 수 없어. 자기 이외의 의사를 결코 스스로에게 반영시켜서는 안 돼. 그렇기에 - 무익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쭉 배워왔어." ......조용히, 그리고 마치 참회라도 하듯 알퀘이드는 입을 열었다. " - 하지만 알 수 없게 되어버렸어. 정말로 잠깐 동안, 겨우 7일 밖에 안 지났는데...내 생각이 정말로 올바른 걸까? 지금 나, 너무 즐거워. 이렇게 하는게, 이렇게 살고 있다는게 단지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기쁘다는 생각...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어." "알...퀘이드?" "나, 어떻게 된 거 아닐까. 지금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 깨어있던 적이 없었 으니까 - 사실은 벌써 오래전에 잠들어서 내가 꾸고 싶어하는 꿈을 꾸면서 잠들어있는 건 아닐까?" ......알퀘이드는 조용히, 텅 비어버린 듯한 눈동자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무슨 - " 소리를 낼 수가 없다. 알퀘이드의 모습은 마치 스크린에 비친 허상처럼 흐릿하다. "......어떻게 됐다니, 뭐가 말야. 너, 그냥 평범하게만 보이는데." "겉보기에는 그럴지는 몰라도 안은 달라져있어...즐거움, 괴로움...그런 쓸 데없는 감정들이 지금 엄청나게 커져있다구. 에전엔 무시해왔던 것들이 무 시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면 곧 어떻게 되어버렸다는 걸 의미하는 거겠지. 그리고 말야, 난 평범하지 않아. 시키랑은 다르게 흡혈귀니까." 알퀘이드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던 것 같은...마치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기분에 사로잡혀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 사이로 몸을 감추듯. " - 지" 왠지, 이상해. 이런 건, 이상하다구. 저녁 노을이 머무는 교실. 붉은 태양빛을 받으며 의지할 곳 없이 외로이 고 개숙인 소녀. 그런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니. "너답지 - 않아." 그래, 너답지 않아. 넌 흡혈귀니까 - 그런, 평범한 여자애들한테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외로운 구석은 보이지 말란 말야. "무시할 수 없다느니 쓸데없는 짓을 한다느니, 타인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 느니 - 그런 거 그냥 신경 끊고 내버려두면 되는 거 아냐? 자신에 대해 너 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었지? 뭘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지는 잘 모 르겠지만 너한텐 아무 문제도 없어. 다른 누구한테도 - 불편한 짓 한 적도 없고." "그럴까? 나, 시키한테 맨날 잔소리 듣고 그러는데 그런 건 다른 거야?" " - 난 예외. 토노 시키는 알퀘이드를 죽인 죄가 있으므로 너한테 이리저리 질질 끌려다니는 건 자업자득이란 말씀이십니다. 알겠어? 난 내가 좋아서 너하고 같이 다니는 거니까 나한테 주어지는 피해라든지 그런 건 생각하지 마." "..............." 알퀘이드의 시선은 여전히 어둡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정말로, 난처 해진다. 뭉클한 마음이 들어 이대로, 껴안아버리고 싶어지니까. "...제발 부탁이니까 얼굴 좀 펴라, 알퀘이드. 뭐...넌 제멋대로에 사람 이 야기도 제대로 안 듣는 그런 문제있는 녀석이긴 하지. 하지만 그거 말고 다 른 부분은 의외로 정상적이야. 어디 뭐 이상하게 된 데도 없고 평범한 여자 애들이랑 다른 데도 없어. 그러니까 - 웃어. 네가 그런 표정 짓고 있으면 내 기분도 이상하게 되어버리잖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 그 정도로 제멋대로야?" 살짝 내 안색을 엿보며 알퀘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린다.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아마 이 공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제멋대로였는지 자각하고 계시지 못했던 듯 하다. " - 크, 아하하하하! 무슨 소리야, 너한테서 '제멋대로'라는 말을 빼면 남 는 건 뼈 밖에 없다구 뼈 밖에!" 어딘가 지금 내뱉은 말이 모순되어있다는 걸 느끼면서도 무심결에 큰 소리 로 웃음을 터뜨리는 나 - 알퀘이드가 그렇게 수줍은 표정 지으면서 자신을 부끄러워할 줄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단 말야. ".....................!!" 아, 화났네. "시키 바보! 남이 진지하게 상담 좀 하려고 했더니...뭐야 이 바보야!!" "그러~~니~~까아~~, 난 너한테 하는 것 빼고는 다른 사람한테는 친절하게 대한다고 말했었잖아. 너한테 그렇게 대한 게 지금이 처음인 것도 아니구."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아가면서 알퀘이드를 정면으로 쳐다본다. 방금 전까지의, 세상 다 산 것 같은 기색은 온데간데 없이 정말로 알퀘이드다운 순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래도 뭐, 역시 넌 밝고 활달하게 있는게 제일 나아. 나도 왠지 좀 마음 이 놓이는데?" "에......? 어, 어째서 시키가 마음이 놓이는데? 맨날 나한테는 쌀쌀맞게 굴고 그러잖아, 시키." "아 - 그러고 보니 또 그렇네?" 꾸벅 하고 생각에 잠긴다. 이상한데...나도 왜 마음이 놓였는지 잘 모르겠어...아까는 그냥 알퀘이드 가 그렇게 풀죽어 있는게 보기 그래서 어떻게 좀 도와줘야지 하고 생각했었 는데 - "............" 말도 안 돼. 확실히 알퀘이드는 얼굴도 예쁘고 썩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같 이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다고도 생각한다구...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 야기가 어딨다고 그래. 정신차려 시키! 이 녀석은 흡혈귀란 말야. "진짜 웃기지도 않는 사람이네. 자기가 뭘 했는지도 모른단 말야?" "......시끄러, 난 잘 몰라도 돼. 처음부터 내가 어디 좀 이상하다는 건 알 고 있었어. 항상 기억 속이 애매한 건 그 때문이라구." "그래...그래서 시키는 맨날 멍하니 있는 거구나?" 진심으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알퀘이드. "..............."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대충 내뱉은 변명거리를 그렇게까지 진심으로 믿 어버리니 딱 화부터 내기도 전에 정말로 그런 거 아냐? 하고 스스로 깊은 생각에 빠져들어 버린다. " - 자아" 언제까지고 교실 안에 있을 수는 없어. 적당히 밖에 나가지 않으면 학교에 남아있는 교사들에게 발견될 지도 몰라. "야, 슬슬 나가자. 더 이상 볼 일도 없잖아?" "응, 그렇긴 하지만......시키?" 응? 하고 시선을 던진다. 알퀘이드는 잠깐 하려했던 말을 목구멍 안쪽으로 집어삼켰다가 내게 이상한 질문을 물어온다. "시키는 말야, 즐거운 일 같은 거 있어?" "......너, 오늘 열있는 거 아냐?" "말장난 하는게 아냐. 나, 시키의 몸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구. 시키도 잘 알고 있잖아? 자신의 몸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는 거 말 야." " - !?" - 두근. 가슴의 흉터가 꿈틀대는 것 같다. "너 - 뭐, 사람은 언젠가 죽지." "시키의 경우, 다른 사람보다 빨리 죽게 되겠지만 말야." ......알퀘이드의 눈이 매섭다. 하지만 누구의 몸에나 죽음의 선은 있으니 까, 따라서 죽음에 이르기 쉬운 부분은 엄청 많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나 혼자만이 - 그런, 죽음에 이르기 쉬운 몸을 갖고 있는 게 아냐. "대답해봐. 그렇게 불안정한 육체로 즐겁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 시키?" " - 너, 정말 바보 아냐?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안다고 그래." ......다만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게 있다면. 8년 전, 내가 죽을 뻔 했을 때 아주 잠깐 동안. 아마 병원 수술실에서 수술 을 받고 있을 때였겠지만 그때 난 새카만 그런 곳에 있었던 것 같다. 꿈일 지도 모르지. 단지 그때, 나는 내가 죽는구나 하고 실감하고 있었고 그곳이 바로 죽음이구나 하고 생각했었어.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후 선생님 과 만났고 평범한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게 너무나도 기뻤어. 죽을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실이지만...세계는 이렇게나 평화롭고 이 토록 즐거운 곳이었구나...비록 즐거운 일들을 찾아낼 수는 없지만 인간은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한 거야. 그러니까 - 이렇게, 이 모든 것들이 무익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살아가 지...그렇기 때문에. 즐거운가 하는 질문에 대해, 그것이 정녕 용서받지 못 할 행위가 아니라면 난 즐겁다고 대답할 수 있을 거야.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충족하고 있어. 죽음이라는 무(無)보다 확실하게. 다른 누구에게 배울 필요도 없이 그것 하나만큼은 알 고 있어.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것만으로 그건 정말로 엄청나게 멋진 일이 라는 사실을 - " - 그냥 뭐,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즐겁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의 삶이 즐거웠으니까 앞으로도 잘 살아봐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걸걸, 아 마...뭐, 이쯤 하면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됐을라나?" 이제 겨우 17년 정도 밖에 살아보지 못한 토노 시키이기에 그렇게 대단한 대답은 할 수 없겠지만... "그래, 그게 시키의 마음이구나...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라 ...그래, 쓸데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즐거울 수 있기에 그걸 저버리지 못하는 거야...난 그게 마음에 걸려서 계속 이상한 질문 물어보고 그랬었는 데...일단은 그 정도 대답으로 괜찮을지도." " - 뭐야. 아까 그거,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어?" "응. 그치만 일단 속은 다 시원해졌어. 그러니까 이 마을에 둥지를 틀고 있 는 흡혈귀를 쓰러뜨릴 때까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어. 그때까지 시키랑 함께 싸울래." 알퀘이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이 미소짓는다. " - " 흡혈귀를 쓰러뜨릴 때까지, 인가. "......그랬지 참. 나하고 너, 그런 관계였었나..." 오늘 하루, 너무나도 평범하게 보냈기에. 그토록 당연한 대전제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 - 저기말인데, 알퀘이드." 그저, 아무런 생각한 것도 없이. "다 끝난 다음에 - 흡혈귀를 쓰러뜨린 다음에 말야. 우리 헤어지기 전에 다 시 한 번 이렇게 만나지 않을래?" 라고, 정말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에 - ? 그게 무슨 소리야?" "알퀘이드의 목적이 달성되면 딱 한 번만 더 이렇게 쓸데없는 짓을 해보자, 하고 했어. 나랑 너, 결국엔 서로 협력하는 사이라 이렇게 함께 있는 거 아 냐. 그러니까 - 정말로 아무런 의무 같은 것도 없어져버린 다음에, 그냥 아 무런 의미도 없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하고 생각해봤어." - 그런게 아니라. 그저, 서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 사이로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흡혈귀 같 은 건 생각하지 않고. 다만 아주 평범한 추억을 만들어주면 틀림없이 알퀘이드도 기뻐할 거라고 생각한 것 뿐이야. " - 네가 정 바쁘다면 뭐 굳이 안 만나도 상관없어. 나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니까 말야." 마음 속과는 정반대의 소리를 한다. 알퀘이드는 잠시 동안 멍하니 두 눈 크게 뜨고 날 쳐다보더니 잠시 후 끄덕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응 - ! 다 끝나면 또 학교 오는 거다, 시키!? 아무 이유도 없지만 틀림없 이, 틀림없이 정말로 즐거울 거야 - " 석양빛으로 물든 교실 안. 알퀘이드는 솔직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나와 그렇게 약속했다. ......결국 학교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해가 완전히 서산 너머로 진 뒤였 다. 7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각. 다소 빠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달리 할 일도 없는 관계로 흡혈귀 찾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자아.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알퀘이드?"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알퀘이드 쪽으로 몸을 향한다. "뭐야, 벌써 가는 거야? 이제 막 해가 졌을 뿐인데?" "그건 그렇지만, 일찍 시작한다고 달리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낮에 충분히 잘 놀았으니까 밤에는 그래도 잘 좀 해봐야되지 않겠어? 알퀘이드, 한 번 정한 약속은 끝까지 잘 지켜보자구." "시키, 이상하게 진지하게 나오는데? 지금은 그렇게 나오면서 어제는 왜 약 속을 깨버리셨을까?" "야...그거 어쩔 수 없는 일 아냐? 어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단 말야. 정 말로 자기 직전까지는 공원에 가려고도 했었다니까." 그래, 아키하가 가로막지만 않았더라면 그런 몸을 이끌고 공원으로 나섰을 거다. "흐~~응,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어딘지 좀 뜬금없는 표정으로, 알퀘이드는 또 남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소 리를 한다. "그러자니, 뭘 말야?" "그러니까 시키, 어제 공원에 가려고 했었지? 아직 시간도 좀 있는 편이니 까 어제 못했던 거라면 지금부터 해도 되잖아?" 알퀘이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저만치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정말 공원으로 향하려는 모양이다. " - 잠깐, 기다려봐, 야......!" 달려나가는 알퀘이드를 놓치지 않으려 나 역시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봐, 이러쿵저러쿵 해도 잘 따라오잖아 시키." 알퀘이드는 즐겁다는 듯 소리 높여 웃는다. "......바보, 널, 혼자 냅두면, 다른 사람한테, 피해가, 가니까, 그렇지... ..." 공원까지 뛰어오느라 흐트러졌던 호흡을 가다듬는다. "역시 요 시간대에는 사람이 많네? 여기저기서 사람 기척이 나서 좀 신경이 쓰여." "......그러니까. 어째서, 남의 말을 귀기울여 듣지 않는, 거야, 너란, 녀 석은......" "그래? 나, 시키 목소리 잘 들리는 같은데?" "......그래. 다 들리는데, 무시하는 거라면, 엄청 죄질이, 나쁘군" "무시한 거 아냐. 그냥 시키가 짜증내고 그럴 때 말대꾸하면 꼭 꼭 [바보] 소리 하니까 그냥 가만히 있었던 거라구." "......그래. 그거, 나한테도, 문제가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하아, 하아.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학교 앞에서부터 공원까지 대략 6km 정도. 뛰었다기 보다 빨리 걸었다고 하 는 편이 맞긴 하지만 그 정도 거리를 내달린 심장은 좀처럼 제 페이스를 되 찾지 못하고 있다. 알퀘이드가 빨리 달려서가 아니다. 아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알퀘이드로서는 오히려 느린 편에 속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어제 일으 켰던 빈혈의 후유증 탓인지 내 몸이 원래 상태가 아니었던 것 뿐이다. "괜찮아, 시키? 무리하지 말고 벤치에서 좀 쉬지 그래?" "......그러지. 좀 쉬었다가 거리 쪽으로 갈 테니까 말야, 알퀘이드." "핏. 시키가 진짜로 할 마음이 들었다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아직 시간이 너무 이르단 말야. 네로랑 싸울 때도 그랬지만, 흡혈귀는 자신들의 시간이 아니면 함부러 활동하지 않는다구. 흡혈귀들은 좀 더 밤의 기운이 짙어지지 않으면 활동하지 않으니까 가만히 여기서 시간 좀 보내고 있어야 돼." " - " 그런 건 미리미리 좀 말해주지 그랬냐... - 벤치에 앉아 멀뚱히 시계를 바라본다. 공원의 시계는 이제 막 9시를 지나 고 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도 차츰 사라져갔으며 밤은 점점 깊어만간다. 알퀘이드는 어째서인지 벤치에 앉지 않고 심심하다는 듯 요 앞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시계바늘이 째깍째깍 움직인다. 어느새 공원에 도착한지 2시간 가까운 시간 이 흘렀다. " - 후우" 몸은 이미 본 페이스를 되찾았고 주변에는 사람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밤 은 점점 더 깊어만 간다. "알퀘이드, 이제 그만 가도 되지 않을까?" "응, 딱 적당한 것 같아." 내 의견에 동의하고 있긴 하지만 알퀘이드는 아직 그리 썩 내켜하지는 않는 모습이다. "아까부터 왜 그래, 알퀘이드.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 - 그런게 아니고...시키가 말했던 그 붕대 감은 남자가 좀 신경 쓰여서 말야." 뭔가를 생각이라도 하고 있다는 듯, 알퀘이드는 한숨을 내쉰다. "아, 그러고 보니 시키. 나, 어제 여기서 어떤 남자가 말 걸어왔다~" " - 하아?" "그러~~니~~까아~~, 여기서 어떤 남자가 나한테 말 걸어왔었다니까." "...아니, 두 번 안 말해줘도 되긴 한데...너, 붕대맨에 대해 생각하고 있 었던게 아니야?" "했었어. 그러니까 생각났다는 거잖아. 시키가 붕대맨한테 습격당했던 것처 럼, 나한테도 어떤 남자가 말 걸어왔었지 하고 말야." "......그렇군. 그거 참 잘됐네. 확실히 겉으로 보기에는 너 미인은 미인이 니까 말야. 혼자서 그렇게 멍하니 서있고 그러면 제대로 된 신경구조를 가 진 남자라면 한 번쯤 말도 걸어보고 그러겠지." 어이없어하면서도, 그렇게 내 감상을 피력한다. 가끔 너무나도 정직한 내 이런 모습이 미워지기까지 한다. "그래? 나도 처음에는 적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는데 전에 시키가 했던 말 이 떠올라서 말야. 나, 그냥 가만히 서있어도 눈에 띈다며. 그래서 가만히 상대가 어떻게 나오나 좀 보고 그 사람이 그냥 평범한 인간이라는 걸 알았 어." "......잠깐만. 너...설마 아니라고는 생각하지만, 너한테 말 건 그 녀석한 테 또 뭐 이상한 짓 하고 그런 건 아니지?" "으응, 나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잠깐 좀 이야기하다 헤어졌을 뿐이니까 ...시키가 전에 했던 말을 생각 못했으면 큰일날 뻔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 잘했어 알퀘이드. 너한테도 '분별'이란게 있었구나?" "당연하지. 날 화나게 하는 건 시키 정도 뿐인걸." 왠지는 모르겠지만 알퀘이드, 상당히 즐거운 듯한 목소리다. 그야 뭐, 그 어떤 누구라도 [살해당하면] 머리 꼭대끼까지 화가 치밀어오르는게 당연하 겠지만. 하아...한숨을 쉬며 공원을 한바퀴 훑어본다...한 달 전. 이 마을에 연쇄살 인사건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시간에도 공원에는 젊은 커플들이나 밖 으로 놀러나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을텐데. 지금은 이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나와 알퀘이드 뿐이다. 가만히 앉아 지금 나 자신이 처한 위치를 돌이켜 생각해 본다. 대체 언제부 터 토노 시키는 이러한 일상에 발을 들여놓게 되어버린 것인가 - ? "아. 시키, 저기봐." 갑자기 알퀘이가 내게 말을 건넨다. "왜, 뭐라고 있어?" "응. 봐봐, 저기 저 시계. 이제 딱 좋은 시간이 됐어."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띄운 채 알퀘이드는 공원의 시계를 가리킨다. 그쪽을 바라보니 - 시계바늘은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약속의 시간. 밤 10시에 여기서 만나자고 했던 약속. ...어젯밤. 내가 지키지 못했던, 만나자고 했던 시간. " - " 왠지 말문이 막혀버린다. 어째서 이런 사소한 일에 나는 찡한 감동을 받으며. 어째서 이런 사소한 일에 이녀석은 이다지도 기쁜 듯한 표정을 짓는 걸까. ......정말 이해가 안 가. 오늘 하루 동안 알퀘이드와 거리를 걸었어. 알퀘 이드가 진짜 흡혈귀인지 하나도 실감이 안 나서... "......하나만 물어보자." - 하지마, 시키. "응, 뭔데?" "......저기, 너 말야." - 그런 말같지도 않은 거 물어보지 말라니까. "응, 내가 뭐?" "......정말로, 흡혈귀인 거야?" -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 거냐, 넌. "흡혈귀인 거 - 시키, 이제와서 무슨 소리야?" "이제와서라니. 이제야 겨우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라구." 라고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는 나. "하아...시키, 참 머리 속이 유연한 건지 딱딱한 건지...난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쓰지만 그거 엄청난 모독이라구.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릴 한 건지 좀 이야기해줄래?" 근거 같은게 있을 리가 있냐. 하지만 - 그와 마찬가지로 네가 흡혈귀라는 증거도 없잖아. 그러니까 - "...그치만 너, 피 보는게 싫다면서. 그런 흡혈귀가 어딨어? 너, 전에 자기 가 제몫도 다 못하는 흡혈귀라고 한 적 있는 거 같은데 피도 못 빠는 흡혈 귀는 그 정도도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야." - 그게 아니라. 그냥. 알퀘이드가 흡혈귀 같은게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는게 아닌가, 토노 시키의 본심은. "시키, 잠깐 일어서봐." 알퀘이드가 벤치 가로 다가선다. 난 알퀘이드가 시키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 났다. " - " 알퀘이드와 시선을 맞춘다. 약 2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나와 알퀘이드는 서 로 떨어져 있다. 알퀘이드는 하아 하고 크게 한숨을 쉬더니 갑자기 빙긋 하고 미소를 지어보 인다. "그치? 나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했었어. 알퀘이드 브륀스타드는 정말로 흡 혈귀일까요? 하고 말야." 라며 알퀘이드는 웃는다. ......마음이 놓인다. 왠지 방금 질문에 알퀘이드가 상처를 받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알퀘이드가 농담하듯 받아넘겨줘 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 - 그치? 알퀘이드는 아무리 봐도 흡혈귀 같지가 않아." 라며 알퀘이드는 웃는다. "그럼 시험해 볼까?" 라며 알퀘이드는 웃음 지은 얼굴로 그렇게 말을 한다. "시험해본다니 - 에?" "내가 정말로 피를 빨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 볼까? 만약에 피 빨면 나중 에 칭찬 같은 거 해줄 수 있어, 시키?" " - !?" 알퀘이드는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내를 향하 다가오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알퀘이드의 발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 온다. 방금 한 말이 농담이란 건 서 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아. "자 - " 잠깐, 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말이 터져나오지 않았다. 알퀘이드가 능력을 써서 그런게 아니라 - 나 스스로가 그 말을 목구멍으로 집어삼켰기 때문이 었다. 알퀘이드는 점점 다가온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고개 숙인 채로 조금씩. 나는 -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알퀘이드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다 - "시키는 내가 제몫도 못하는 흡혈귀라고 말했지만" 머리 뒤쪽에서 울리는 듯한 달콤한 목소리. 또각. 발걸음 소리가 바로 곁에서 멈춘다. - 사실은 말야. 피를 빠는 건 아주 간단해. 그런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턱. 알퀘이드의 체중이 목덜미에 실린다. " - " 목이 꽁꽁 얼어붙은 듯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저 목덜미 쪽에 알퀘이드의 숨결만이 와 닿을 뿐. - 그것이, 마치 불꽃처럼 뜨거웠을 뿐... "알 - " 이름을 부르려다 멈춘다. 스스로의 의사로 그만두었다. 알퀘이드의 이름을 부르면 그녀가 곧 내 곁에서 멀어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 으니까. " - "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알퀘이드의 숨결이 느껴진다. 어깨를 잡고 있는 흰 손가락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다. - 무서워, 해. 텅 빈 내 사고 속에는 공포도, 다른 그 무엇도 존재치 않는다. 그저 알퀘이 드만이 미미하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목에 와 닿는 숨결만이 떨리는 알퀘이드의 몸에 겹쳐간다. 작고 미약한 숨결에서 거칠고 빠른 숨소리로. "알 - 퀘이드?" "농담 - 이었는데" 알퀘이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내 어깨를 붙잡은 손가락은 더 이상 떨 리지 않는다. 그 대신 - 마치 새 발톱이라도 되는 양 어깨죽지에 깊숙히 파 고 들었다. " - 윽!" 고통에 목소리가 높아진다. 하지만 알퀘이드의 손톱에 실린 힘은 약해지지 않는다. 떨어지려고 애쓰는 나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엄청난 힘으로 날 붙들 고 있다. "알퀘 - 미안, 장난이 좀 심했나봐. 너 놀려서......미안하니까. 비켜 - 주지 않을래?" "시 - 키" 알퀘이드의 손가락이 내 몸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 안 돼. 이성이 경종을 울리며 두 팔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고는 알퀘이드의 몸을 밀쳐내려고 한다. 그 전에. 두 어깨에 날카로운 통증이 내달린다. "............으윽!!!" 두 팔이 움직이지 않아. 양 어깨에 파고든 알퀘이드의 손톱이 한층 더 세게 어깨를 잡고 있는 바람에 팔이 마비돼 버렸어. " - , - , ㅡ " ...목덜미에 닿는 알퀘이드의 숨결이 어지러워진다. 미쳤어. 알퀘이드의 이가 목덜미에 닿으려 한다. " - 안 돼......!" 어깨를 붙잡은 새하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다음 순간. 비명 같은 숨소리 를 내몰아쉬며 알퀘이드는 내게서 멀리 떨어졌다. 하아 - 하아 - 하아 - 끊어질 듯한 숨소리가 공원에 울려퍼진다. 거칠어진 숨소리는 나와 - 눈 앞 에서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는 알퀘이드의 것이었다. "시 - 키" 온몸을 떨면서, 마치 숨을 쉴 수가 없다는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알퀘이 드는 멍하니 자신의 두 손을 쳐다본다. 하얀 손가락은 내 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붉은 피가 손끝을 타고 손바닥 으로, 그렇게 다시 팔로 흘러내린다. "아 - " 그 광경을 괴로운 듯이,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듯한 모습으로 알퀘이드는 바라보고 있다. "......알퀘이드, 방금, 그 - " 말을 건넨다. 알퀘이드는 손바닥으로 흐르는 핏줄기에서 시선을 옮겨 날 바 라본다. "시 - 키?" "......아아, 여기 있어. 방금, 그 - 장난한 것치고는, 도가 지나친, 것 같 은데..." 정말 단순히 좀 심한 장난을 친 것 정도로 해두고 싶은 마음에 그런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역효과였던 것 같았다. "시키 - 나, 너무 - " 알퀘이드의 눈은 초점을 잃고 있다. "목이 - 말라서 - " 몸은 한층 더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알퀘이드는 금방이라도 - 무너져내릴 것만 같이 불안정하게 보였다. "부탁이야 - 오늘밤엔, 시키는 집에 가." "야, 알퀘이드......!?" 그대로 알퀘이드는 달리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저만큼 가버렸 다. 수 시간 전처럼 내가 따라올 수 있도록 적당히 달리던 때의 속도가 아 니었다. 내가 전력으로 뛰어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스피드로 알퀘이드는 밤거리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 - 무슨" 집에 가라니, 그런 걸 보고서 바로 그리 간단히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냐. "알퀘이드 자식 - 그렇게 힘든 몸으로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거야, 바보..... ....!" 이대로 집에 돌아갈 수는 없어. 찾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 역시 밤의 거리 사이로 달리기 시작했다. - 알퀘이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거리는 너무도 넓었고 그 어떤 단서가 될 만한 것 하나 없이 어떤 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 깝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막 이곳저곳 찾아다니기 보다는 알퀘이드가 향했 을만한 곳을 예상해서 모든 걸 걸고 거기만 집중적으로 찾아보는 편이 찾아 낼 수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을 거다. 그렇다면 - <2. 번화가를 찾아보자 - 선택> - 번화가를 철저하게 뒤져보자. 알퀘이드는 그토록 괴로워하고 있었지만 그 렇다고 어디 가서 몸을 쉬고 있을 그런 녀석이 아냐. 알퀘이드는 '시키는 집에 가'라고 했어. 거꾸로 생각해 보면 '난 안 가'라는 소리가 되겠지. 알 퀘이드는 혼자서 흡혈귀 찾기를 계속할 생각일 거야. 그렇다면 - 번화가 쪽 으로 가서 내가 먼저 그 흡혈귀인지 사자인지 하는 놈을 찾아내 버리겠어. 알퀘이드는 찾을 수 없겠지만 안경만 벗으면 사자를 구분할 수는 있게 되니 까. " - 좋아" 안경을 벗고 다소간의 두통을 참아내면서 번화가 쪽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 다. "윽 - " 지끈, 관자놀이에 통증이 내달린다. 그다지 일부러 의식해가면서 [선]을 보 고 있는 건 아니지만 맨눈인 채 거리를 걷기만 해도 아무래도 뇌에 부담이 가해지는 모양이다. "제길 - 안경까지 벗었는데 아무 데도 안 보이잖아." ......번화가를 걷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선]을 하고 있다. 예전에 봤던, 전신이 마치 낙서들도 도배되어 있는 것 같은 사람은 그 어디에도 찾 아볼 수가 없다. "......아윽..."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갖다댄다. 안경을 벗고 있는 한 두통은 점점 더 심해 져만 갈 거다. 하지만 -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보냐.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다시 한 번 번화가를 달리기 시작했다. "하아 - 하아, 하아 - " 너무 오랫동안 달린 피로감과 두통 탓에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몇 번 을 달리고 또 달려봐도 사자는 커녕 다른 이상한 사물들조차 보이지 않는 다. 이마에 손을 대 보니 이상할 정도로 열이 달아올라 있었다. 악성 감기 에 걸려 40도에 가까운 열을 내뿜고 있는 모양이다. "......제길, 아직은 - " 혼잣말을 되뇌이며 순회를 재개한다. 그때 - "............아" 요 근처가 아닌, 좀 더 떨어진 곳에. 빌딩과 빌딩 사이에 있는 좁은 골목길에서 뭔가 불꽃 같은 것이 사방으로 흩어지는게 보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죽음의 [점]이 퍽 하고 튀어올라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느낌. " - 저건" ......틀림없어. 예전에 알퀘이드가 사자를 쓰러뜨렸을 때랑 같은 거야. 알 퀘이드 이자식 - 그런 몸을 해갖고서 역시나 혼자서 싸우고 있었군......! " - 찾았어......!" 피로감도 두통도 모두 잊고 골목 쪽으로 달려나간다. 골목으로 들어가는 길목. 빌딩과 빌딩 사이에 있는 좁다란 길을 달려간다. [죽음]은 사방으로 흩어지고는 이내 사라져버린다...제법 많은 수의 사자와 싸우는 걸까, 이 정도의 죽음의 양은 어딘가 이상하다. " - 큭" 정말로 참을 수 없는 건. 목적한 골목 뒤쪽으로 가까이 감에 따라 끼익 끼익 하고 삐걱거리며 소리를 내는 내 등골이었다. "하 - 아" 마치 뼈를 톱으로 조금씩 썰어내는 듯한 느낌. 그건 나 스스로에게서 발해 내보내지고 있는 아픔이다. 본능이 부르짖고 있다. 이 앞은 위험하니까 지금 당장 돌아가라고. "시끄러 - " 하지만 그런 사실 쯤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어. 이 죽음 의 양은 보통이 아냐. 이 안쪽. 골목 뒤켠에서 무엇인가, 엄청난 일들이 일 어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이제와서 물러설 순 없어. 알퀘이드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어. 만 약 - 여기서 내가 도망치듯 물러나 버린다면 알퀘이드는 멋대로 죽어버릴 거야. 그러한 예감이 머리 속에서 내내 지워지지 않았고 나 자신 스스로가 죽음이 충만한 그 장소에 발걸음을 옮겨 들어가고 있었다. " - !?" 의식이, 얼어붙었다. 그곳에 펼쳐진 광경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지면에 나뒹굴고 있는, 몇 사람이나 되는 인간의 형체. 얼굴이 없고 팔이 으깨어졌으며 창자가 사방으로 찢겨흩어져 있는, 온몸을 시뻘건 색으로 물 들인 시체들. 벽도, 바닥도, 그리고 머리 위의 달 마저도. 여긴, 그저, 붉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 마지막 한 사람이었는지 온몸이 낙서로 도배되어있는 인간의 모습을 한 그 것은 그녀의 손에 절명했다. 한 손으로. 사자의 머리를 벽에 처닥고는 마치 토마토 으깨듯 박살내 버린다. 그래도 아직 성이 차지 않았는지 그녀는 머리가 없는 시체의 몸뚱이를 세로로 찢고 는 그대로 노면에 처박아 버렸다. "알 - 퀘이드" 달빛과 붉은빛만이 존재하는 세계. 그 중심에 알퀘이드가 있었다. 알퀘이드 는 내가 있는 줄 모르는 것 같다. 그저 달을 쳐다보며 - 활홀한, 거친 숨소 리를 연신 내뱉을 뿐이다. " - " 말을, 걸 수가 없어. 등골에서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는 정점에 달해있다. 톱은, 벌써 뼈를 썰어내 버린 모양이다. - 끼이, 끼. 의식이 비명을 내지른다. 여기 있으면 위험해, 라고. 난 아직 죽고 싶지 않다고 외쳐대고 있다. 그때. 알퀘이드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알퀘이드의 눈은 평소의 붉은 빛깔이 아닌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눈을 마주친게 아냐. 그저 내가, 그 [눈]을 본 것 에 지나지 않아. 두, 근. 온 몸의 피가 용솟음쳐 오르고 의식이 멀어진다. - 가장 처음에 느낀 건 압도적이기까지 한 위기감. 여기 있으면 안 돼. 저것의 앞에 있어서는 안 돼. 죽을 거야. 절대 못 이겨. 저 [생물]은 레벨이 너무도 달라. 레벨이 높고 낮은 것하고는 상관없이 레 벨이라는 판단기준 그 자체가 우리와는 너무다 다르다구. 저 앞에서는 그저 - 그곳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틀림없이 죽을 거라구. 두, 근. 몸 속의 모든 혈관이 팽창한다. 처음엔 공포.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완전하기까지 한 살의. 왜냐하면 저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니까. 그러니까 죽여. 빨리 죽이 라구. 여기서 죽여버려. 어서 죽여. 이 피의 맥동에 따라 저걸, 이 자리에 서 파괴해 버려 - 심장이 두방망이질 친다.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상대를 죽이라며 온몸이 비명 을 내지르고 있다. 이런 모순이 있을 수가 - 죽임당할 줄 뻔히 알면서 상대 를 죽이란 말야? 죽기 싫으니까 죽이라면서, 여기 가만히 서서 죽으라고 한 단 말인가. "카 -, 아" ......안 돼. 난, 여기에 존재하지 않아. 저 눈 - 저 금빛 눈을 봐서는 안 돼.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알퀘이드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 어. 두근, 두근, 혈액이 끓어오른다. 거스르기 힘든 피의 약동.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이성의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것이 있다. "크 - 하아, 아 - " 무엇 때문에 죽이고 싶은 거지? 죽고 싶지 않으면 죽기 전에 죽이란 말야? 아니, 그런 건 전혀 이유가 되지 않아. 살의에 이유는 필요치 않아. 이제 그만 자신한테 솔직해져 보지 그래, 토노 시키. 아주 오래 전에 - 넌, 저 여자를. "입 - 다물어" 아니, 입다물어할 쪽은 이 이성(理性) 쪽이라구. 확실히 그렇지. 난 그냥 녀석이, 알퀘이드를 원할 뿐이야. 생각해 내봐, 그때의 감각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거 다 알고 있었잖아. 저 생물을 이 손으로 죽여 살인자로서의 동정을 잃은 바로 그 순간부터 - ! "아 - 아" 그래, 모든 걸 원해. 마음도 몸도, 눈물도 타액도, 피도 육체도 죄도 벌도 욕망도 초조함도 - "하 - 아......!" 호흡이 거칠어져. 의식을 가눌 수가 없어. 알퀘이드의 눈동자에 먹혀들어가. 흐릿하게 흔들리는 금빛 눈동자. 그건, 죽여도 다 채워지지 않을 정도의. " - 시키!?" 알퀘이드가 내 존재를 눈치챘다. 알퀘이드는 내가 그 눈동자에 홀린 듯 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곧 눈동자를 원래 색인 붉은빛으로 되돌린다. 하지만 이제와서...그런 짓 해봐야 너무 늦었어. 나이프를 손에 들고 알퀘이드를 밀쳐 넘어뜨린다. 알퀘이드에 몸에는 아무 런 힘도 들어가 있지 않아 매우 손쉽게 힘으로 억누를 수 있었다. 마치 말 을 타는 듯한 자세로. 한 손을 여자의 머리에 두고, 나이프를 든 다른 한 손을 머리 위로 힘껏 치켜든다. 남은 일은. 그 가슴 사이로 이 일격을 찔러넣는 것 뿐. "진정해 - ! 그건 네 의사가 아니잖아, 시키......!" 알퀘이드의 목소리가 들린다. 머리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닥쳐 - !" 목을 조르는 팔에 힘을 가한다. 알퀘이드는 괴로운 듯 거친 숨을 내몰아쉰 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저렇게나 강인하던 생명이 지금은 팔 하나조차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고 있어. "시 - 키" 거친 숨을 내몰아쉬며 알퀘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두근. 심장이, 흥분된 피로 맥동한다. "하아 - 하아 - 하아 - " 호흡이 어지럽게 흐트러진다. 시야가 바르게 보이지 않는다. 몸이 뜨거워 - 지금 당장 벗어나고 싶어. "하아 - 하아 - 하아 --" 몸을 움직인다. 여자의 배 위에 올라타 있던 몸을 옆으로 미끄러뜨린다. 알퀘이드의 두 발을 벌리고 그 사이로 몸을 들이댄다. "......!" 불안한 눈동자로 날 쳐다본다. 그 시선이, 더욱 내 머리 속을 어지럽게 만 들어버린다. "하아 - 하아 - 하아 - " 충혈되어 있어. 생식기는 터져버릴 정도로 발기했고, 난, 지금 당장 이 여 자를 범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붉게 상기된 뺨. 부드러운 목줄기. 내 밑에 깔린,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 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여자의 육체. "하아 - 하아 - 하아 - " 약동하는 피의 흐름이 온몸에 전해져 온다. "하아 - 하아 - 하아 - !" 금색의. 영혼마저 빨아들일 것 같았던 눈동자. 머리에서 팔을 치운다. 그리고 그대로 여자의 가슴에 만진다. 몸을 만진다. 발을 만진다. 옷 아래의 흰 배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며 그 차가온 체온을 느껴본다. "하지마 - 이런 거, 시키답지, 않아......!" 열기를 머금은 목소리. 간절히 애원하는 듯한 붉은 눈동자. 그리고 내 의식은 완전히 날아가버렸다. "응......!" 필사적으로 수치심을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알퀘이드는 필사적으 로 두 팔로 날 밀쳐내려고 한다. 그런 알퀘이드의 두 팔을 모두 붙잡은 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도록 지면에 눌러버린다. 못이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 때문에 양손의 자유를 잃은 알퀘이드는 마치 십자가에 매달린 듯 한 포즈로 날 원망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 - 큭" 그 모습이 더 없이 매혹적이다. 나도 두 팔은 쓸 수 없다. 두 팔을 놓으면 알퀘이드는 틀림없이 내 머리를 베려들 거야. 그 긴장감. 상대를 범한다는 사실보다 서로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짐승처럼 끓어오르는 성욕에 박차를 가했다. " - 그, 그만 - 그만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할 거 - " 그런 흔해빠진 대사를 마지막까지 지껄이게 놔둘 것 같냐. 난 내 온몸 중에 유일하게 자유로운 입으로 알퀘이드의 옷을 벗겨나가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숨소리를 내뱉는 입으로 거칠에 알퀘이드의 옷을 벗긴다. "......응, 시키, 제발, 진정 - !" 약하게 움찔움찔 경련까지 일으키면서 아직도 그따위 저항이나 하고 앉았고 말야. - 하, 아. 거칠어질대로 거칠어진 내 숨소리가 알퀘이드의 배 위로 흐른다. "아 - 응............!" 상당한 민감체질인지, 겨우 그 정도 한 것 가지고 알퀘이드는 몸을 비틀어 댄다. ...두근두근거리는군. 옷을 벗겨내며 그녀의 흰 살결을 혀로 핥는다. "시키, 안 돼 - !" 알퀘이드의 두 팔에 강하게 힘이 들어가보지만 지금은 내가 훨씬 더 세다. 저항하게는 안 내버려둬. 그대로 옷을 계속 벗긴다. 중간에 가슴의 융기된 부분에 옷이 걸렸지만 억지로 웃도리를 잡아채버렸다. 두 개의 가슴이 상하로 흔들린다. 아름다운, 틀림없은 여자의 증거가 거기 있었다. 그대로 한쪽 가슴을 물었다. "아아 - !" 알퀘이드가 소리를 지른다. 그녀의 몸이 활처럼 휘어 튕겨오른다. 상관없어. 뜯겨나가기 직전까지 꼭 물고 있다가 마치 맛이라도 음미하듯 혓 바닥을 놀린다. "시......키........., 그만......!" 알퀘이드의 목소리에 미약하게 열이 달아오른다. 핑크빛 유두가 딱딱해진 다. 수컷들의 발기랑 마찬가지인 듯 알퀘이드의 유두는 건드리면 건드릴수 록 이성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딱딱하게 일어나기만 한다. "응 - !" 그런 사실이 스스로도 부끄러운 모양인지, 알퀘이드는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눌러 참는다. "시키 - 이런 짓하고, 나중에 - " 알퀘이드가 하는 소리 따위는 무시한 채 그녀의 가슴을 계속 핥는다. "응......아 - !" 알퀘이드의 머리가 덜컥하고 흔들린다. 힘을 주면 준 만큼 도로 퉁겨져 오 르는 가슴의 감촉. 새하얀 가슴은 점점 부풀어올랐고 조급하게 무언가를 바 라고 있기라도 한 듯 붉은빛을 띠기 시작한다. 세차게 빨아올리듯 가슴에 입을 댔다. "......읏......으응......아, 응 - " 달아오른 목소리. 땀으로 범벅이 된 여자의 육체.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녀의 얼굴은, 그렇게 움직일 때마다 괴로운 숨을 내몰 아쉬고 있다. 부드러운 유방을 혀로만 유린한다. 의미는 없다. 그 비슷한게 있다면 그저 핥고, 적시고, 마구 괴롭히고 싶은 그런 욕구들 뿐.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다. 타액으로 흥건히 젖어든 흰 유방은 희미하게 반짝 반짝 빛을 내뿜고 있는 것 같다. "...하악......그, 그만......절대로......이런 짓......용서 안 할...거, 야......!" 이를 악물고내는 듯한 소리. 아직도 수치짐을 모조리 버리지 않은, 그런 어 중간한 목소리는 기분만 잡칠 뿐이다. 유두를 깨문다. "응, 큭 - !" 알퀘이드의 몸이 다시 한 번 꿈틀하고 튀어오른다. 이번엔 아까보다 좀 더 높이. 마치 가슴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튀어올랐다기 보다는 터져올랐다라 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어차피 정성들여 애무할 것도 아니다. 그대로 고개를 움직인다. "그, 그만......시키, 제발 - " 혀를 유두에서 가슴 사이로. "거기, 그렇게 하면, 나, 정말 - " 새하얀 살결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듯 강렬하게, 맨 피부를 빨아댄 다. "하아 - !" 알퀘이드의 두 팔이 마구 요동친다. 그걸 힘으로 억누르면서 다시 혀로 핥 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쇄골로, 거기서 목덜미 쪽으로 적셔들어간다. "아냐......시키......는, 나, 안 좋아......하는데......!" 그런 거 몰라. 그딴 거 하나도 안 들려. 온몸이 땀으로 젖어든 알퀘이드의 육체는 이성을 완전히 잃어가고 있다. 그 렇지 않아도 아름다운 그녀의 육체는 땀으로 젖어들어 특히 더 아름답게 보 인다. - 두근. 혈류가 아파와. 남근은 지금 당장이라도 알퀘이드의 안에 들어가고 싶어해. "하아, 하아, 하 - 아" 참을 필요는 없어. 하고 싶으면 하면 되잖아. 알퀘이드의 목덜미에서 떨어져 하복부의 수풀 쪽으로 입을 옮겼다. ".........!!!" 한층 더 강렬하게 알퀘이드의 몸이 요동쳐댄다. 이대로는 그녀의 두 손마저 금방이라도 풀려날 것만 같다. 그 전에. 움푹 파인 배꼽보다 훨씬 더 아래 쪽의, 금빛으로 물든 수풀림의 한가운데. 핑크빛으로 떨고 있는 살짜기, 부 풀어오른 그 부분을 혀로 핥는다. 두 장의 벽을 가르기라도 하듯 혀를 안쪽으로 찔러넣고 윗부분에 있는 둥근 융기를 가볍게 삼킨다. "아 - 그, 그만 - !" 전신이 활처럼 세차게 꺾이는 알퀘이드. 여성의 성감대 중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을 깨물은 때문이다. 이렇게, 그저 온몸을 혀로 핥기만 했을 때의 감각 이란 그야말로 다른 차원의 쾌감이라 할 수 있다. 가만히 보니. 알퀘이드의 그 안쪽은 점막과 점막 사이로 촉촉히 물기를 머 금어가기 시작한다. 무르익은 과실이 그런 싱그러운 자기 자신을 자랑이라 도 하는 것 같은 촉촉하고 달콤한 향기. 아직 이물을 삽입하기에는 윤활유 가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 여자를 제대로 한 번 안고싶다는 생각은 내 머리 속에 조금도 자리잡고 있지 않으니까. 난 그냥 - 이 여자의 몸을 원할 뿐이야. " - 시, 키"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안 듯 알퀘이드의 목소리는 매우 가늘어져 있다. 저항할 뜻도 없는지 그저 젖어있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고만 있을 뿐 이다. " - " 젖은, 눈동자. 그건. 울고 있다, 는 소린가. "큭.........!" 두통이 인다. 빨리 계속하라고 본능이 외쳐대고 있다. 여기서 그만두면 반 드시 죽어. 여기서 이 여자를 꼼짝못하게 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틀림없이 어떤 비겁한 수작을 써서 날 죽이려 들 거야 - 라고 심장이 사납게 날뛰어 댄다. " - " 울고 있어. 어째서 - 울고 있는 거지. 나같았으면, 절대로 울리거나 그러지 않았을텐데. 두통이 인다. 계속하라고 외친다. - 내가 망설이다니, 이건 말도 안 돼. 뭘 해야 하는지 이미 결정돼 있잖아. 나는 알퀘이드가 - <1. 싫어하는 짓은 절대 못 해 - 선택> - 못해. 알퀘이드가 싫어하는 짓은 두 번 다시 할 수 없어. 난 한 번, 이 두통에 눌려 그녀를 죽인 적이 있었어. 그러니까 두 번 다시. 자신에게 져서 알퀘이드에게 눈물을 보이게 하는 짓 만큼은 아무리 두통 때문에 내 머리가 박살난다하더라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거 아냐 - "하 - 아!" 알퀘이드에게서 떨어진다. 두통도 사라졌고 심장박동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마음 속에 가득하던 흉폭한 생각들도 사라지고 난 이제서야 겨 우 지금까지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돌이켜 본다. " - 무슨 - 짓, 을" 나 스스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하지만 그 기억은 뚜렷하게 남아있어. 알퀘이드를 쓰러뜨린 기억. 머리를 잡아누르고 나이프로 찌르려 했던 기억. ...그리고 그 다음에 있은 능욕행위를. " - "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알퀘이드는 옷을 고쳐입고 그 자리에 서 있다. 나는 - 어떻게 사과하면 되 지? 미안해, 같은 소리로 용서받을만한 일이, 아냐. " - 알퀘이드, 나 - "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정작 사과해야 할 쪽은 오히려 나니까." 알퀘이드는 어색하다는 듯 시선을 옆으로 피하며 그렇게 답했다. "무 - 무슨 말 하는 거야, 잘못한 건 내쪽이라구. 내가 - 좀 더 똑바로 정 신차리고 있었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소용없어. 시키의 힘으로는 견뎌낼 수 없었을테니까. 시키는 내 [마안]을 본 거란 말야." "에 - ? 마안이라니...네로 때의, 그 눈 말하는 거야......?" "......그래. 나, 아깐 제정신이 아니었어. 나로서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 로 갈증을 느꼈고 혼자서는 해결조차 할 수 없었어. 그래서 - 사자들을 찾 아내 어떤 충동을 파괴충동으로 바꿔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던 거야. 그때 난 나 자신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 그때 여기 온 시키가 내 마 안을 보게 된 거야." "......확실히 내가 이상하게 된 것도 알퀘이드의 금빛 눈동자를 보고나서 부터이긴해도 - 하지만, 그냥 한 번 본 것 뿐이잖아. 난, 나 스스로 - " "그게 아냐. 시키, 내 마안은 매료의 마안이라고 해서 쳐다본 상대를 내 노 예로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어...시키가 나한테 성적욕구를 느낀 것도 틀 림없이 그 때문일 거야." " - 그건 - 아니라고, 보는데." 왜냐하면 알퀘이드한테 조종당하지 않고 있어도. 난 알퀘이드를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이번 일은 내가 부주의해서 생긴 일이야...미안해, 시키. 시키 마 음이랑은 상관도 없이 시키 몸을 마음대로 조종해 버려서." 알퀘이드는 시선을 피하며 그렇게 이야기한다...그런 식으로 사과하면 내 마음은 어떻게 되는데. 나한텐 조종당하고 있다는 의식을 조금도 하고 있지 않았어. 오히려 - 그걸 기회로 삼아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자 했었단 말야. 그런데... "알퀘이드, 나 - " "사과하지마...시키, 이건 사고였어. 나도 잊어버릴게, 시키도 잊어줘. 그 렇게 하는게 틀림없이 서로를 위해 도움이 될 거야." 라고 말하곤, 알퀘이드는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알퀘이드......?" " - 오늘밤은 이걸로 끝내기로 하자. 이걸로 사자들을 모두 죽여버렸으니까 더 이상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도 무의미해." "...그건 상관없는 일이지만, 이 시체의 산은 어떻게 처리하려고 그래. 남 들이 보면 큰일이라구." "걱정할 필요 없어. 한 번 흡혈종이 된 것들의 유체는 남지 않아. 흙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거들은 소멸하게 되면 재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질 뿐이 야. 잠시 지나면 각자 모두 티끌로 돌아갈 거야." 알퀘이드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왠지 힘없는 듯한 발걸음으로 골목길 을 빠져나갔다. "..............." 그런 알퀘이드를, 지금의 나로선 막아설 수 없었다. 내 두 손에는, 아직 알 퀘이드의 감촉이 남아있다. " - 바보. 뭐 이런 바보자식이 다 있어." 홀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참극의 무대가 된 후미진 골목 안에서 참회라도 하듯 저 하늘의 달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9. 붉은 홍월 Ⅰ - 끝> -------------------------------------------------------------------------------- <10. 붉은 홍월 Ⅱ> - 아침이 됐다. 눈을 뜨고 베갯머리 맡에 놓아둔 안경을 쓴다.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 흠 잡을 데 없는 그런 아침을 맞았으나 기분은 무겁게 가라앉아있다. 이유 같은 걸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어젯밤, 알퀘이드와 나 사이에 있었던 그 일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었고 그걸 떠올릴 때마다 죄책감에 괴로운 마음이 든 때문이다. "......서로 잊어버리자고 - 그걸 어떻게 잊어버리란 거야." 가만히 두 손을 내려다본다. 이 손가락은 아직도 알퀘이드의 육체를 기억하 고 있다. 아직도 알퀘이드의 살갗을 만졌을 때의 느낌이라든지 마치 차가운 얼음 같던 그 체온을 떠올려본다. 그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이렇게 그때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느낌이 확실히 전해져온다. 그런 짓을 하고서도. 알퀘이드는 잊어버리자고, 없었던 일로 하자고 말해줬 음에도 난 그 일을 후회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조금도 잊어버리지 못하고 있 다. 후회한다, 그것은 어제 어째서 내가 제대로 된 이성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것 뿐이다. 어제처럼 마치 동물들이나 하는 것처럼 대하지 말고 좀 더 인간적으로 대해줬더라면, 그랬더라면 - - 알고 있었어. 난 알퀘이드의 금빛 눈동자를 보고 자아를 잃은게 아냐. 그 저 스스로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을 뿐, 이미 오래 전부터 토노 시 키는 알퀘이드 자신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던 거야. 그런 단순한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 저택의 아침 풍경은 여느 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 히스이가 날 잠자리에서 깨우려 방으로 찾아온 후 거실로 내려가보니 아키하와 코하쿠 씨가 있어서 학교에 가기 전에 가볍게 아침인사를 나눈다. 여느 때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어. 하지만 내 기분은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어딘지 뻥 뚫린 듯한 느낌이 었고 누가 말을 걸어와도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한 채 멍한 모습으로 저택을 나설 뿐이었다. 교문을 지나는 학생들의 표정은 모두 밝아보였다. "아참. 오늘 토요일이었지." 요 며칠 동안 알퀘이드한테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고 그랬던 덕분에 완 전히 날짜 감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요일로 따지면 알퀘이드랑 처음 만났던 날은 금요일이었던가. 알퀘이드는 1주일 전 아침, 학교 앞 교차로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지. "......그자식, 웃고 있었지 아마." 그러고 보니 확실히 웃고 있었어. 자기를 죽인 상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면서 즐거운 듯 두 눈을 반짝거리며 토노 시키라는 살인자를 기다리 고 있었다구. "......왜 그랬지...만약에 오늘밤에 알퀘이드가 오면 왜 그랬는지 물어나 볼까."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아마 알퀘이드는 공원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생각하면 생각해볼수록 어젯 밤이 마지막 밤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렇게도 마음이 무거운 채 무엇 하나 제대로 손에 잡히는 일이 없는 건 그 때문이다. 난 더 이상 알퀘이드하고 못 만날지도 몰라. 그런 후회감이 무거운 사슬이 되어 내 몸 을 옭아매고 있었다 - 내 자리에 가서 앉는다. HR 시간까지 앞으로 약 5분 쯤. 아무 행동도 취하 지 않고 그저 벙하니 교정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상습 땡땡이범이...어제도 학교 빼먹기나 하고, 대체 어디서 뭘 하시느 라 그러시는 걸까요, 토노 군께서는?" "............" 하아, 너무도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쉰다. 여느 때 같았더라면 그냥 대충 상대해줘도 괜찮았겠지만 오늘만큼은 아리히 코를 상대해줄 여력조차 없다. "......왜그래, 왜 또 그렇게 힘이 없는 건데? 어젠 어제대로 학교에도 안 나오고 오늘은 오늘대로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멍하니 있고. 싫어싫어~~토노 가 그러고 있으면 학교에 와도 재미 하나도 없단 말야~~" 아리히코는 과장섞인 몸동작으로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 - 아리히코. 미안하지만 오늘은 혼자 있게 좀 해주라, 알았지? 나같은 거 하고 안 놀아도 너한테는 선배가 있잖아. 아니, 오히려 내가 없는 편이 훨 씬 더 낫지 않겠냐?" "하아 - ? 선배라니, 나 3학년 중에 아는 사람 없는데?"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너. 시엘 선배는 2학년이 아니라 3학년이라 구...하긴 뭐, 가끔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아래 학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선배는 선배야." "시에루 선배라......그게 누군데? 우리 학교에 유학생이라도 왔었던가?" 아리히코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선배는 엄연한 일본인......" 아니, 잠깐. 선배가 일본인이라는 소리, 아무도 안 했었잖아. "......뭐, 아무도 그런 소린 안 했지만...그래도 다들 당연한 듯이 선배한 테 시엘 선배, 시엘 선배 하고 불렀었잖아." "그러~~니~~까아~~, 누구냐니까 그 선배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왜 그래 토 노. 아직도 어디 아프고 좀 그런데 있는 거 아냐?" 아리히코의 농담조차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런............" 그래. 어째서 그런 명백한 위화감을 진작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아무 리 생각해 봐도 시엘이란 이름은 일본사람의 이름이 아니잖아. 난 선배랑 서로 아는 사이였음에도 풀네임조차 모르고 있었어.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몇 학년 몇 반에 다니는 선배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구. 그 이전에. 내가 선배랑 처음 만났던 그 때, 어째서 난 그 사람을 옛날부터 알고 지내 온 사이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 - !"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 왜 그래 토노, 너 아까부터 어디 좀 이상해 보인다?" "잠깐 교무실에 좀 다녀올게. 미안하지만 담임한테는 잘 좀 말해놓고 있 어." 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아리히코를 내버려둔 채 난 교실을 달려나섰다. 교무실에 가서 3학년들 명단을 찾아봤지만 역시 시엘이라는 이름의 학생은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교무실에 있던 교사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시 엘 선배를 기억하는 교사는 한 명도 없었다. 방과후. 토요일이라는 특성상 HR이 끝나자마자 같은 반 녀석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듯 교실을 나섰다. " - " 모처럼 맞은 토요일임에도 아무 것도 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마치 사자(死者)와도 같은 생기없는 모습으로 홀로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긴 다.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 시키 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히스이가 마중을 나왔다. 일부러 마중까지 나와 기다 려준 히스이가 고맙긴 했지만 그런 히스이에게 제대로 된 인사 한 번 제대 로 하지 못하고 내 방에 틀어박혔다. - 저녁식사를 끝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알퀘이드와 약속했던 시간까지 얼 마 남지 않은 시각. "......이제 그만 가볼까." 그녀석이 올지 안 올지 나로서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두 번 다시 약속을 깨지 않겠다고 알퀘이드 앞에서 맹세한 이상 스스로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 었다. 10시가 되기 조금 전에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 주변에 사람들은 거의 보이 지 않는다. 벤치에 앉아 시계 초침이나 세고 있자는 듯 그저 알퀘이드가 오 기만을 기다렸다. <2. ...좀 더 기다려본다 - 선택> 11시가 됐다. 공원 안은 마치 얼어붙은 듯 아무런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 다. 공기의 새로운 흐름, 공원을 찾아오는 사람들 또한 전혀 없었다. 알퀘이드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다. 시간 만이 그저 헛되게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 <1. ...좀 더 기다려본다 - 선택> - 두 시계 바늘 모두 정점에 다다르려 하고 있다. 공원에 오고 벌써 2시간 째. 알퀘이드는 아직도 오지 않은 것 같다. 나는 - <1. ...좀 더 기다려본다 - 선택> ............공원의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약속시간이었던 10시 에서 2시간이나 지났다. " - 후우" 벤치에 기대어앉아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쉰다. "......아무래도 안 오려나, 알퀘이드..."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 - 아아, 이렇게 되면 아침까지라도 기다려보지. 제길..."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로 벤치 등받이 너머로 몸을 젖힌다. 바로 그 순간 - "......어라?" 잠깐있어봐. 휴게소 뒤편으로, 방금 흰 그림자 같은게 언뜻 보인 것 같은 데...게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어디론가 피해버리는 듯한 그런 움직임. " - " 벤치에서 몸을 일으켜 뚜벅뚜벅 휴게소까지 걸어간다. 더 이상 숨을 수 없 게됐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흰 그림자는 훌쩍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하하~~~들켰네~~?"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밝은 모습으로 알퀘이드는 내 앞 에 모습을 드러냈다. "알퀘이드, 너 - " "응? 왜?" " - 정말, 왔잖아." 아직도 이게 사실인지 믿을 수가 없어 그런 말을 꺼내버리고 말았다. "왔잖아라니? 약속했으니까 당연히 온 거잖아. 그것도 시키 도착했을 때보 다 10분 정도 빨리 와있었단 말야." 알퀘이드는 토라진 듯 모른척 다른 곳을 본다. "10분 빨리...저기, 난 - " 10시 되기 전에 도착했는데, 넌 그보다 빨리 와 있었단 말야? "어째서......? 나보다 빨리 도착해 있었으면 왜 말도 한 번 안 걸어주고 그런 데에서 기다리고 있었냔 말야." "왜긴, 숨어서 시키가 뭐하는지 보고 있었지 뭘." " - " ......그렇군. 평소랑 다르지 않은 척 하고 있어도, 알퀘이드 역시 어제일 을 마음에 걸려 하고 있었어. 그래서 - 얼굴 마주대하기가 힘들어 그런 곳 에 숨어있었던 걸지도 몰라. "......미안. 그렇지, 역시 그렇게 간단하게는 - " "정말이야. 시키, 나 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있었잖아. 나, 시키가 언제 날 찾을까 하고 두근두근 거리면서 기다리고 있었다구. 가끔은 이렇게 만나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키가 멍하니 가만히 있으니까 말짱 헛고생만 했잖아." " - 에?" 헛고생이라니, 뭐가? "알퀘이드 - 너, 나 대하기 어색해서 숨어있었던 게 아냐......?" "왜? 나, 그냥 심심하니까 시키랑 한 번 놀아보려고 그러고 있었을 뿐인 데." 너무나도 간단히, 내가 얼마나 초조해 하고 있었는지 눈꼽만큼도 몰랐다는 말투로 알퀘이드는 잘라 말한다. "......나랑 놀려고...알퀘이드, 너 - " 알퀘이드와 만난데 따른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만났으니 이젠 뭘 어떻게 할까 하는 걸 생각하고 있을 분위기도 아니다...아니, 이 녀석은 예 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내 기분 따위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 마음 내키 는대로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그런 참 할일도 없이 태평하기만한 그런 녀 석이다. " - 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슴 속 깊이 한숨을 들이마신다. 화가 났달까, 아니 오히려 어이가 없을 정도군. 알퀘이드의 태도가 너무나도 맨날 하고 다니던 그대로라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렇게나 잔뜩 찌푸 려있던 내 마음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맑게 비워진 것 같다. "......쳇...너한테는 못 당하겠다니까." "그래? 그냥 시키 혼자 멍하니 있었을 뿐인데?" "아니, 숨바꼭질 하던 거 말고." ......뭐, 말로 해도 소용없을라나. "그보다, 만나서 다행이야. 솔직히 말해서 두 번 다시 못 보는 줄 알았었으 니까." " - 에? 시키, 겨우 2시간 기다리게 한 것 갖고 그런 생각까지 했었단 말 야?" "......그게 아니라. 어제, 그런 일이 있었잖아. 나...다시는 너랑 못 만날 거라고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 - 안 돼, 시키...그 일은 잊어버리자고 했잖아." 알퀘이드의 힘 없는 목소리. "아 - " ......바보. 정말 나란 놈은 세상에서 제일 가는 바보다. '알퀘이드, 평상 시랑 하나도 안 달라졌구나'라고 제멋대로, 자기 편한대로만 생각하고 있었 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알퀘이드는 알퀘이드 나름대로 날 생각해 주는 마음에 여느 때랑 마찬가지로 날 대해주고 있었던 거야. "......미안해. 내가 바보였어. 이래서야 너한테 화내고 그럴 자격도 없겠 군." "이제 그만하라고 했잖아. 그 일에 대한 책임은 나한테 있어. 그러니까 잊 어. 그게 서로를 위해 훨씬 더 낫지 않겠어?" 알퀘이드는 밝은 목소리로 날 속이려 한다. 어젯밤의 일, 그리고 그걸 마음 에 두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하지만. 그런 표정을 하고 남한테 잊어버리라 고 하다니, 오히려 더 잊어버릴 수가 없잖아... " - 아니. 내가 미안하다고 한 건 어젯밤 일 때문이 아냐. 내가 나 스스로 를 바보라고 한 건 잊어버려야 할 걸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야." "에 - 시키?" "오늘도, 아침부터 계속 너만 생각하고 있었어. 너랑 만나면 뭐라고 사과하 면 좋을까, 뭐라고 이야기하면 좋을까 쭉 그것만 생각했다구. 그걸 이제와 서 - 어떻게 잊어버리란 거야." " - " 알퀘이드는 내게서 시선을 피한다. 나도 - 알퀘이드를 정면으로 쳐다볼 수 가 없었다. 말하지 말아야 할 걸 말해버린 듯한 기분에 알퀘이드와 눈을 마 주칠 수가 없다. 알퀘이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서로, 상대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결 과적으로 기나긴 침묵만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단 둘이 그렇게 서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알퀘이드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이었다. "......응, 사실대로 말하면 말야...나도 못 잊어버렸어, 시키." 알퀘이드는 머뭇머뭇 두 뺨을 붉게 물들이며 그렇게 말했다. "알퀘이드 - " 그 모습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엽다. 그렇게 생각을 한 순간 - 알퀘이드는 재빠른 동작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어느 틈엔가 주변에는 몇 사 람이나 되는 무리가 모여있었고 마치 우릴 에워싸기라도 하듯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다. ".........!!"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에 머리 속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포위됐어. 시키, 준비해. 안 싸우면 죽게될 뿐이야." "싸우라니, 그럼 이 녀석들 - " "시키도 안경을 벗고 보면 알게 될 거야. 이녀석들은 몸 어느 곳에도 정상 적인 피가 흐르고 있지 않은 '사자'들의 무리야." "............!" 서둘러 나이프를 꺼내들고 안경을 벗었다. 확실히. 나와 알퀘이드를 둘러싼 5명 정도 되는 사람들은 사람의 형체를 하 고 있는 낙서들이었다. "어째서 - ! 사자는 이제 다 죽였다고 어제 그렇게 말했었잖아, 알퀘이드!" " - 응. 이 사람 모습을 한 것들은 어젯밤 내가 멸해버린 사자들이야." 알퀘이드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의 사자들을 노려본다.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사자들이 다가온다. "어제라니, 그럼 죽은 척 하고 있었단 말야......!?" "설마. 나, 그런 걸까지 놓쳐버릴 정도로 약하지 않아...하지만 방심하고 있었단 사실은 뭐라고 변명할 수가 없겠군. 이녀석들이 재가 되어 사라지는 걸 끝까지 보지 않았으니까." 저벅. 포위망을 점점 더 좁혀들어오는 사자들. 나이프를 쥔 내 손이 미미하게 떨 리고 있다. 솔직히 말해 우릴 포위하고 서 있는 사자들 중 그 어느 하나에 게서도 중압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네로라는 괴물에 비하면 이런 녀석들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고나 할까. 하지만 5명 - 나는 이렇게 많은 사자 들을 - 원래는 인간이었던 것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 - 시키, 망설이면 죽어. 이녀석들은 더 이상 산 생명들이 아냐. 흡혈귀에 게 피를 빨려 사자가 된 뒤 나에게 두 번째 삶도 무로 돌려보내져 - 그러고 도 무(無)가 되지 못한 채 사역당하는, 단순한 인형. 이걸 죽여도 죄가 되 지 않아." 등 너머로 알퀘이드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느 틈엔가 무방비 상태인 내 등 뒤쪽을 커버해 준 것 같다. "잠깐만 기다려봐.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세상에는 죽은 자를 다루는 마술이 많다는 소리지. 인간의 시체 는 동물이나 형태를 지니지 않은 것들보다 마력을 담아넣기가 쉬우니까 편 리하게 사용되어지곤 하는데 - 미안, 자세히 설명할 여유는 없는 것 같아. 녀석들이 와." 알퀘이드의 기척이 내게서 멀어진다. 동시에 사자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죽음의 형태가 날 덮쳐든다. 양손을 벌린채 단순히 아무렇게나 달려든다. " - 큭!" 옆으로 점프하며 돌진하는 사자를 피한다. 그와 동시에 배후에 드는 기분 나쁜 느낌. "이 - 이자식......!" 온 힘을 다해 몸을 돌린다. 거기에는 방금 전의 사자처럼 아무렇게나 마구 나를 향해 달려들려하는 사자가 있었다. 사자의 몸에는 - [선]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죽음이 충만해 있다. 따라서 어딜 노리든 내 나이프는 아주 손 쉽게 그들의 육체를 절단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사자들의 움직임은 느 렸다. 네로의 몸속에서 뛰쳐나온 그 어떤 짐승들보다도 더뎠다. " - " 사자가 달려든다. 그들은, 간단히, 죽일 수 있다. 사자가 휘둘러댄 팔을 피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왼쪽 아래 복부를 노린 다. [선]이라는 혈관이 꿈틀대는 사이에 있는 [점]이라는 심장을 직시한다 - "제 - 제길.........!!!!" 무언가 잘려나가는 소리. 나이프는 사자의 왼쪽 아래 복부가 아닌, 방금 휘 두른 팔을 절단했을 뿐이다. 한쪽 팔만 남은 사자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다시금 날 향해 달려든다. 또 하나의 사자도 두려움 없이 날 덮친다. 한 팔만 남은 사자가 달려든다. 그걸 피하는 바로 그 틈을 노려 다른 하나 의 사자가 뒤에서 덮쳐들어왔다. "아 - " 뒤에서 내게 업히는 듯한 자세로. 사자는 내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피를 빠 는 그런 종류의 행위가 아니다. 이건 동물이 사냥감을 즉사시키기 위해 이 빨로 목을 물어뜯으려 하는 행위와 마찬가지였다. "큭 - !" 과연 인간의 입으로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을까. 사자의 입은 그리 깊지 않게 목덜미에 박혀 있었다. 어금니가 아닌 앞니로 물어뜯고 있다. 얼마 지 나지 않아 뿌득 하는 소리와 함께 사자의 이가 부러져버렸다. 하지만 - 너 덜너덜해진 입으로, 사도는 내 목을 계속 물어뜯으려 한다. 통증은 거의 없었다. 다만 싫었다. "아......아, 아 - " 앞에서는 한쪽 팔이 잘려나간 사자가 걸어온다. 어쨌든 뒤에 매달려 날 물 어뜯고 있는 사자를 죽이지 내가 죽어버리겠어. 방법은 간단하다. 쓸데없이 아직도 날 물어뜯으려 하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 는 사자의 얼굴을 나이프로 잘라내 버리기만 하면 되니까. " - " 하지만 - 그건 사람을 죽이는 행위야. 알아. 저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며 살 아있지 조차 않다는 걸 - 하지만 죽여서는 안 될 것만 같아. - 너무나도 유약한 생각. 아무래 좀비라고는 해도. 사람의 형체를 지닌 것,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들을. 같은 인간인 내가 죽여버린다는 건 뭔가, 결 적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 "시키 - !?" 멀찍이서 3명의 사자들을 상대하고 있는 알퀘이드의 소리가 들린다. 무심코 눈 앞에까지 사자가 와 있음에도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리고 - 거기에는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 - " 알퀘이드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저렇게 느린 몸놀림의, 알퀘이드였다면 그야말로 1초도 안 걸리고 모조리 해치울 수 있을 것만 같은 사자들을 상대 로 알퀘이드가 궁지에 내몰리고 있다. 알퀘이드의 호흡이 가쁘다. 발걸음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고 저런 - 나조차 간단히 피할 수 있을 사자의 일격을 정통으로 맞고 있다. 사자의 팔이 알퀘이드의 팔을 할퀴고 지나간다. 알퀘이드의 반격. 알퀘이드 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반동으로 사자의 몸을 머리부터 허리까지 힘차게 둘로 갈라버렸다. 두 조각이 되어 지면에 나뒹구는 사자. 그와 동시에 - 사 자에 집중되어 있던 검은 죽음의 물결이 알퀘이드로 옮겨간다. "아 - " 털썩, 알퀘이드가 무릎을 꿇는다. 제법 거리가 있는 내쪽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알퀘이드는 거칠게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그런 알퀘이드에 - 사자 둘이 덤벼들었다. 무릎을 꿇은 탓에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알퀘이드의 얼굴을 걷어차 지면에 쓰러지게 한다. "그 - " 그런 다음, 녀석들은. 아무런 표정도 없는 주제에 천박한 웃음을 흘리며 알퀘이드의 몸 위로 올라 탄다. "그만 - " ......마치 십자가에 매달듯. 어젯밤, 내가 알퀘이드를 능욕했을 때처럼. "그만둬, 이자식들아 - !" 서걱. 뒤에 매달려 물어뜯고 있던 사자의 얼굴을 절단한다. 내 눈 앞에서 왜인지 멈추어 서있던 사자의 왼쪽 아래 복부를 찌른다. 거기 가 사자의 [죽음]이다.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무너져내리는 사자를 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얼굴 없는 사자 역시 죽였다. 달린다. 알퀘이드에 올라탄 사도들이 내 존재를 느끼고 일어선다. 덤벼든 다. " - " 아무 문제될 것은 없었다. 덤벼든 순서대로 죽음의 [점]을 절단했다. "하 - 아" 모든 것이 끝났다. 겨우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 - 아" 눈 앞에는 잿더미로 변한 사람형체를 한 것들이 4구. 알퀘이드가 해치운 걸 포함하면 5구인가. "하 - 아" 죽였어. 주저없이 숨통을 끊었어. "하, 아" 머리 속이 좀처럼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아. 후회감이나 자계감 같은 감정들 이 스스로를 탓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하아 - 하아 - 하아" 그래도, 괜찮아. 알퀘이드가 다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난 처음으로. 틀림없는 자신의 의사로, 토노 시키라는 이성을 온전히 갖춘 채로 - 누군가를 위해 이 힘을 사용했다구. "하아 - 하아 - 하아" 숨이 골라지지 않아. 그 거친 호흡 사이로 헐떡이는 소리가 미미하게 섞여 들어온다. "......알퀘이드." 몸을 돌려 알퀘이드를 쳐다보니, 알퀘이드는 아직도 괴로운 듯 무릎을 꿇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괜찮아, 알퀘이드......!" 알퀘이드에게 다가선다. 알퀘이드는 몸을 둥글게 말고는 마치 거칠어진 숨 소리 밖에 낼 줄 모르는 생물처럼 괴로워하고 있었다. "왜 그래, 온몸이 땀에 젖었잖아. 전에 그 상처, 또 벌어진 거야......?" 몸을 웅크리고 앉아 알퀘이드의 안색을 살피려 했다. "시 - ㅋ ㅣ" 하지만 알퀘이드는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보이는 건 - 손가락 틈으로 보이는 붉게 핏발선 눈동자 뿐이었다. " - " 이렇게 알퀘이드가 괴로워하는 모습은, 어딘가 정상이 아냐. 하아, 하아,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내몰아쉬는 호흡은 헐떡임에 가까운,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다. 허기진 호흡. 핏발선 눈.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금색 머리칼. "알 - 퀘" - 섬뜩.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위기감을 느끼고 급히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내 그 런 움직임보다 내 피를 빨려하는 알퀘이드의 이가 몇 배는 더 빨랐다. 알퀘이드의 팔이 뻗쳐온다. 그대로 날 꼼짝 못하게 붙든다. "알 - "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숨이 멈췄다. 핏발선 눈. 짐승처럼 날카롭게 일어선 이. 의사소통조차 불가능할 정도의 압도적이기까지 한 위압감. 지금 내 앞 에서 내 목덜미를 물려하고 있는 것은 토노 시키가 알고 있는 그녀가 아니 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다. 잡아먹힌다는 것. 그 저 포식당하는 입장이란 이런 것인가. 목덜미에 이가 박힌다. 머리 속에는 그저 공포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히익 - !" 비명을 지른다. 내가, 나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한심하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정말로 기분 탓일른지도 모르겠지만. 알퀘이드의 움직임이 거기서 우뚝 멈춰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걸 확인하기도 전에. 눈 앞에서 뭔가 격한 파열음이 들리더니 날 덮치고 있던 알퀘이드의 몸이 뭔가에 얻어맞은 듯 옆으로 날려가버렸다. "무슨 - " 마치 바로 옆에서 차에 치이기라도 한 것처럼 알퀘이드는 몇 미터나 멀찍이 날려가버렸다. 그럼에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는지 알퀘이드는 곧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 알퀘이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나도 - 뭘 해야 할 것인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 "토노 군의 피를 빨려고 했어요, 당신은." 어디선가 강렬하면서도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당신의 본성이에요, 알퀘이드 브륀스타드." 그 냉정한 목소리는 위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달을 올려다본다. 거기에는 - 과거의 어떤 밤을 떠오르게 하는, 법의 차림 의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선, 배 - " 틀림없어. 아무리 봐도 저건 시엘 선배 본인이야. 선배는 바로 발 아래에 있는 날 본 척도 하지 않고 멀리서 무릎을 꿇고 있 는 알퀘이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동족인 흡혈귀를 수없이 멸하였다 한들, 당신이 흡혈종이라는 사실에는 변 함이 없습니다...무슨 속셈으로 그를 끌어들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언젠가 이러한 결과가 나올줄 당신은 생각지 못했던 겁니까?" 선배의 목소리는 평소와 너무다 달랐다. 딱딱하지도, 그렇다고 부드럽지도 않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 목소리는 너무도 - 인간미라는 부분 이 결여되어 있었다. 작은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선배는 가로등 위에서 지면으로 내려선다. "원래는 제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일반인이 당신에게 죽임을 당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당신과의 싸움은 예정 외의 일이지만 - 필요하다면 여기서 서로의 사적인 원한을 털어버리도록 하죠." "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 너같은 녀석하고 상관하고 싶지는 않아. 게 다가 - " 알퀘이드는 증오심에 가득 찬 눈동자로 선배를 노려본다. "난, 시키를 죽이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 - 설득력 없는 말씀이시로군요. 방금 전까지 당신이 무얼 하고 있었나. 토노 군이 당신을 보고 어떤 소리를 내질렀나, 인식할 수 없었던 건 아니시 겠죠?" " - " "절 미워하는 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흉안(凶眼)을 그에게 향 했습니다. 그때의 감상을 토노 군 본인에게 물어볼까요?" 처음으로, 선배가 내게 시선을 향한다. " - " 알퀘이드는 괴로운 듯 시선을 피한다. 침묵이 밤의 공원을 지배한다. 뚜벅. 법의를 입은 선배가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선다. "물러가세요, 흡혈귀. 당신이 그의 곁에 있을 자격은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요." "무슨 - " 절대로 안 그래. 선배가 대체 누군지, 방금 전의 알퀘이드가 대체 어떻게 된 거였는지 상황을 하나도 모르겠지만 그것만은 단언할 수 있어. 왜냐하면 - 나 자신이, 알퀘이드의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 "아냐......! 왜 그래 선배, 이상한 차림으로 갑자기 불쑥 튀어나와서는 전 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나 하고 있고......! 확실히 알퀘이드는 흡혈귀이 긴 하지만 피를 빤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단 말야! 방금 전에도 무슨 장난 같은 거였을테고, 선배가 말하는 그런 자격 같은, 그런 건 - " "토노 군은 잠자코 있어요. 한 번도 피를 빤 적이 없다, 고요? 예, 확실히 그녀가 최근 8백년 정도 동안 희생자를 냈다는 기록은 없죠. 하지만 - " "시끄러! 그런 뭐가 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는 이제 됐어......! 잘 들어, 알퀘이드를 가로막겠다면 아무리 상대가 선배라고 해도 절대로 용서 하지 않을 거야. 원래부터 내가 - 나 자신이 좋아서 알퀘이드랑 같이 다니 고 있는 거니까 선배한테 이러쿵저러쿵 들을 이유가 어디있다고 그래 - !" " - 토노 군, 토노 군은 - " 선배의 목소리에 미약하나마 감정이 실린다. " - 알겠어요. 토노 군 본인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주제넘게 제가 자격운 운하고 들먹거릴 수는 없겠군요. 하지만 - " 선배의 시선이 알퀘이드 쪽으로 향한다. 알퀘이드는 - 고개 숙인 채 선배 쪽도, 내 쪽도 보고 있지 않았다. "....................." "들으셨겠죠, 알퀘이드 브륀스타드. 이래도 당신은 그의 곁에 있으려 하는 겁니까?" 알퀘이드는 대답하지 않는다. 단 한 번, 내 쪽을 보려고 고개를 들다가 그 대로 -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듯 공원 밖으로 달려 사라졌다. "뭐 - 뭐야, 어째서 도망치는 거야, 알퀘이드......!" 알퀘이드를 쫓아가려고 한다. 털썩. " - !?"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선배가 천천히 내쪽으로 다가선다. "그녀 뒤를 쫓게 내버려두지 않겠어요. 토노 군을 그리 쉽게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까요." 선배의 손에는 가는 막대처럼 생긴 칼이 쥐어져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내 발밑의 지면 - 토노 시키의 그림자에 꽂혀있었다. "말씀드리겠는데 그걸 빼내지 않는 한 움직일 수 없어요. 토노 군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봐도 토노 군의 그림자가 토노 군과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있으니까..." " - 이런 짓 좀 하지마, 알퀘이드 놓쳐버리겠잖아!" 발밑에 박힌 칼을 잡는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 봐도 빠지지 않았다. "말씀드리는 걸 잊었는데, 그걸 뽑을 수 있는 사람은 저 뿐이니 포기하세 요." 라며 선배는 내 앞에 멈춰선다. " - " 선배를 노려본다. 선배는 내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 어처구니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진짜 정말 - 어째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시는 거죠, 토노 군?" " - 에......그러니까, 선배?" "다 알고 있어요. 저도 그녀가 미운 건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있 는 편이 서로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에요. 조금만 더 있다가 그거 빼드릴테 니까 잠깐 제 이야기를 듣고 계셔주세요." 정말로 걱정스럽다는 눈으로 선배는 날 쳐다본다. 그 모습은 지금까지 학교 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왔던 선배 그 자체였다. 그 때문일까. 여전히 어 떻게 된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기분만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기에 토노 군이 절 적대시할 줄은 각오하고 있어 요.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있어요. 저 기, 그런 식으로 구속해서 정말 죄송해요." 선배는 꾸벅하고 고개를 숙인다. ...이상한 차림을 하고 위험한 무기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선배는 역시 내 가 아는 바로 그 선배였다. " - 괜찮아. 화 안 났으니까 그렇게 사과할 필요 없어. 한 번 선배 덕분에 죽을 뻔하다가 산 적도 있고 내쪽에서도 선배한테 듣고 싶은 게 있고 그러 니까." " -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하지만 토노 군이 저한테 듣고 싶으시다는게 대체 뭐죠?" "......저기 말인데. 그런 거 뻔한 질문 아냐? 선배는 대체 뭐하는 사람입 니까, 하는 거 말야. 그런 차림으로 알퀘이드를 저만치 날려보내기나 하고 학교에서 선배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건 나 혼자 뿐이고." 선배는 김 샌다는 듯 거꾸로 내게 물어온다. "그럼 뭣 좀 여쭤보겠는데요, 토노 군은 절 어떻게 생각하고 계세요?" "......응. 나도 알퀘이드한테서 들은 정도로 밖에 모르지만, 교회인가 하 는 곳의 사람이 아닌가 하는데." "그렇군요. 토노 군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 전 교회의 엑소시스트로 흡혈귀 를 전문으로 하는 일을 맡아 하고 있어요. 그 이상은 대답해드릴 수 없지만 토노 군한테는 그 정도로 충분할 거라고 생각해요." "충분하다니 - 그래, 어째서 그런 사람이 우리 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거야. 흡혈귀 퇴치가 전문이라면 알퀘이드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는 편이 훨씬 낫지 않아?" "아뇨, 제가 토노 군의 학교에 다녔던 건 의미가 있어서 그랬던 거에요. 그 러니까......그래요, 마침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랑 겹치니까 여기서부터 는 제가 질문 드려도 될까요? 토노 군은 그녀에게 협력하시는 것 같은데, 그녀가 무얼 쫓고 있는지 알고 계세요?" "응......그러니까 사람의 피를 빨아 영지를 넓혀간다는, 오래된 타입의 흡 혈귀라고 들었는데." "흡혈귀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뉘어진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그렇다면 그들 이 불완전한 불로불사란 사실도 들으셨을 것 같은데 - " "들었어. 인간의 피를 빨지 않으면 육체를 유지해나갈 수 없다고. 하지만 거꾸로 인간의 피를 빨고 있는 동안에는 영원히 늙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이거였지?" "예. 하지만 그건 결국 [불로불사]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들 중에서도 피를 빠는 것만으로는 육체를 보전해 나갈 수 없는 흡혈귀도 있고 또 저희에게 처리당하는 흡혈귀도 있어요. 이런 식으로 [죽어버리는] 것들은 불로불사라고는 부를 수 없죠." " - 뭐, 확실히 - 죽는 이상 불사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난 선배가 대체 뭘 말하고 싶은지 도저히 모르겠다. "근데 그거, 선배가 학교에 다녔던 거랑 상관이 있는 이야기야?" "상관이 있어요. 정말, 이제 겨우 이야기 시작하려는 참이니까 잠자코 듣기 나 해요." "......응, 알겠는데 - 저기...될 수 있는대로 짧게 좀, 요약해서 이야기해 주면 좋겠는데." "......그러세요? 뭐, 토노 군이 그러시고 싶으시다면 쉽고 빠르게 설명해 드릴게요." 선배는 왠지 모르게 아쉬운 듯한 표정이다. "그럼 가능한 간략하게 설명드릴게요. 어디보자...일단 시토로 구별되는 흡 혈귀의 불로불사란 상당히 불안정한 거에요. 시토의 경우 단순히 수명만 인 간의 몇 배에 이르게 됐다는 정도 뿐이니까." "......질문. 그녀석들, 수명말고도 힘이라든지 그런 것들도 장난이 아닌데 그런 건 상관없는 거야?" "기본적으로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시토의 고유능력은 그들이 인간이었던 시절에 손에 넣은 것을 그대로 몇 백 년 동안 성장시킨 것들이니까요. 그들 은 자신이 배운 것들을 흡혈귀가 되어서도 계속 배워나가 결과적으로 그것 이 초월적 현상으로 승화된 거죠. 시토들은 각각이 완전히 다른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방금 말한 [배웠던 것]이 한 사람 한 사람 다른 것도 그 때문이죠. 그래서, 말씀인데요. 그런 시토들 중에서도 중점적으로 불로불사 를 연구했던 시토가 있었어요." "......? 불로불사가 됐는데도 불로불사를 연구했다고?" "예. 시토들은 흡혈귀가 된 시점에서 그게 인간의 몸으로 얻을 수 있는 불 로불사의 정점이란 걸 자각해요. 하지만 '그'는 그걸 오히려 퇴화했다고 생 각했던 거죠. 이런 불완전한 불로불사는 필요없다, 자신은 좀 더 완전한 불 로불사를 만들겠다...라고." "..............." 왠지 선배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하지만, 이렇게 형태가 있는 이상 죽음은 필연적이에요. 시간의 압박은 그 어떠한 존재에도 예외를 두지 않으니까요. 흡혈귀들은 그 압박에 견뎌낼 수 있는 강도가 인간들보다 높게 설정되어 있을 뿐이에요. 생명은 태어난 바로 그 시점에 죽음을 내포하고 있죠. 스스로가 여기에 존재하는 이상, 아무리 나이를 먹지 않는 육체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죽음에서 도망칠 수는 없 어요. 죽음으로부터 도망친다, 라는 건 죽는다는 의미. 그 절대적인 모순은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죠." " - 그래. 죽음은 누구에게나 있어. 없는 녀석이 있다면 그건 - "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녀석이겠지. 알퀘이드 역시 낮에는 죽음이 보인다 구. 정말로 죽지 않는 녀석 따위 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어. "그렇게 된 이야기지만, 예의 '그'는 그렇다면 죽은 다음에도 스스로가 계 속 존재해나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불로불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 르게 됐어요...저희 교의에는 들어있지 않지만 흔히 말하는 윤회전생이란 거죠. 현세의 자신이 죽어도 자신을 보존한 채 새로운 인간으로서 태어날 수 있다면 그건 죽음을 앞지른 것이 되니까...뭐, 아무리 그래도 소멸하지 않는 시점에서 이미 그건 죽음이 아니니까 죽음을 앞지른다...라는 이야기 는 성립되지 않지만 말이죠." "윤회전생 - 쉽게 말해서, 죽으면 다시 갓난아기로 태어난다는 거야?" "그래요.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 다음번 자신의 육체를 사전에 정해두고 그 적자가 탄생했을 때 '자신'의 모든 정보를 이식한다. 그의 정보는 그 적자 가 성인 내지는 자기 자신으로서의 지성을 가질 때까지 그림자를 숨기고 있 죠. '자신'을 이어나가는데 잘 어울리는 지성을 갖는 단계에서 그 적자는 '그'라는 흡혈귀가 되어버리는 거에요." " - 잠깐 기다려봐. 결국 무슨 소리야? 설마 애가 아직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수술 같은 걸 한단 소리야?" "아뇨, 의학적인 수단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가 죽음을 맞이한 순간에 '그'는 [다음엔 이 모체(母體)로 하자]라고 미리 점찍어둔 것에 전생하니까 요. 방금 전에는 '모든 정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알기 쉽게 설명드리자면 곧 혼이라고 할 수 있죠. 혼이 대기 중을 돌아다니다가 타인의 몸에 옮겨 들어간다는 건 잘 실감이 나지 않으시겠지만, 이를테면 전파랑 비슷한 거에 요. 이럴 경우 전파를 발신하는 것도 수신하는 것도 인간의 뇌. '그'의 특 징이라면 혼이라고 하는 계측불능의, 육체라는 그릇을 떠나버리면 산산이 흩어져 버리는 것을 전달가능한 것으로 가공했다는 데에 있어요." "......미안한데, 선배. 그 이야기가 선배가 학교에 다녔던 거랑 무슨 상관 이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상관이 있어요. 다시 말해 그 [전생하는 흡혈귀]가 토노 군이 다니는 학교 에 있단 소리죠." " - 하아!?" "제가 쫓고 있는 흡혈귀와 알퀘이드가 쫓고 있는 흡혈귀는 같은 것이죠... 아마, 알퀘이드는 토노 군에게는 단순한 [적]이라고밖에는 말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요."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알퀘이드는 [적]이라는 단어를 말하기는 했어도 그게 어떤 흡혈귀인지에 대한 설명은 하나도 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원래 흡혈귀를 죽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그'가 나타나면 서부터는 '그'만을 집요하게 쫓게 됐어요. '그'가 지금까지 전생한 회수는 17번. 그 하나하나를, 그녀는 모두 소멸시켰죠." "......하나하나 모두 소멸시켰다니......하지만 그녀석, 결국은 죽어도 또 태어나버리잖아? 그렇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거 아냐?" " - 그렇군요. '그'는 그녀에 죽고 그때마다 전생해서 다시 그녀에게 죽임 을 당하죠. 그게 지금까지 계속 반복돼 왔던 거에요. 그녀......알퀘이드에 게 상대의 육체가 아닌 그 의미를 소멸시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이렇게 까지는 되지 않았을텐데요." 선배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으득 하고 이를 악문다.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알퀘이드와 마찬가지로, 선배도 그 [적]에 게 어떤 원한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선배. 예의 '그'라는 흡혈귀는 대체 어떤 녀석이야?" "일단은 남성이지만, 전생체의 육체에 의해 성별이 달라져요. 이 시토의 귀 찮은 점은 이를 발견하기가 극히 곤란하다는 사실이죠. 어쨌든 정상적인 인 간의 적자로 나며 부모도 있죠. '그'가 흡혈귀로서 육체와 의식을 변모시키 는 건 '그'가 만족스럽게 활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된 다음부터에요. 때문에 그 인간은 그때까지는 흡혈귀로서의 특징을 전혀 보이지 않죠. 그러면서 한 번 '그'로서 자각해 버리면 지금까지 키워왔던 인간관계를 이용해서 완전히 사회에 녹아들어가 버리죠. 교회 분들께서 '그'의 존재를 알아냈을 땐 대개 하나의 마을이 그대로 사도(死都)가 된 다음이라고 들었어요." "잠깐. 그러니까, 말야. 그녀석이 전생한 아기는 그녀석이 눈을 뜰 때까지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걸 전혀 모르는 채로 있는 거야?" "......예. 하지만 하나의 육체에 두 개의 인격이 공존하는 건 아니니까 인 간으로 태어난 아기 역시 '그'라고 할 수 있어요. 단지 태어난 환경에 따라 그것이 좋은 인격과 나쁜 인격으로 갈릴 뿐...그것도 원래 인격인 '그'가 각성한 시점에서 완전히 없어져 버리지만요. 어디보자, 그러니까 말이죠... 그는 죽으면 다음 육체로 거듭 태어나 그 육체가 온전한 지성을 갖추게 된 시점에서 전세의 자신의 인격을 되찾아와 흡혈귀로서의 자신을 완성시켜버 리는 거죠." " - " 뭐야. 그 이야기는 너무도 - 듣기에, 무서울, 지경이다. "......이상하잖아, 그거. 잘은 모르겠지만 어딘가 좀 이상해. 흡혈귀라는 거, 흡혈귀가 되면서부터 바로 괴물이 되는 건 아니잖아? 그렇다면 아무리 전세의 인격이란게 각성한다 해도 몸은 인간인 채로 있는 거 아냐......?" "아뇨, 전쟁하는 건 인격이 아니라 혼이니까요. 한 번 신소에게 피를 빨린 인간은 그 육체 뿐만 아니라 혼까지 오염당하죠. '그'는 혼이라는 정보 전 체를 [다음번 자신]에게 이어가니까 일단 '그'가 각성한 시점에서 육체도 흡혈귀의 그것이 되어버리는데요 - " "데요, 뭘." "토노 군이 말씀하시는 대로, 그건 너무도 약하죠. 그 때문에 그는 다음번 전생체를 살아있는 동안 결정해요. 전생할 대상으로 뽑힌 가문은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하는데 하나는 부호일 것. 사회적지위도 높고 재산도 풍 족한 가문의 아이로 태어나게 되면 그 이후 도시 전체를 흡혈귀화 하기가 매우 쉬워지니까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요...저희같 은 평범한 인간들 중에서도 특별한 힘을 갖춘 사람이 있어요. 마술이라고 불리는, 배우면 습득할 수 있는 신비가 아닌 태어날 때부터 그 육체에 함께 하는 특이능력 - 흔히 초능력자라든가 귀신의 자식이라며 차별당하는 사람 들을 가리키죠. 특이능력이라는 건 육체적인 것이기에 물론 가계 - 혈통으 로 유전돼요. '그'는 자신의 새로운 육체에 그러한 [인간이 아닌 것]의 가 계를 고르는 거죠. 부와 명성이 있으며 그 이면에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가계. 그게 '그'가 전생대상을 선택하는 조건이에요, 토노 시키 군." " - " 뭔가 좀 이상해. 그 이야기, 아무래도 이상하잖아. 뭐가 이상하냐하면 - 어 째서 그런 이야기를 나한테 들려주고 있느냔 말야, 그게 제일 이상하잖아 선배 - "......그녀석 이름." "예? 뭐라고 말씀하셨죠?" "그녀석 이름......! 적인지 '그'인지, 그렇게 말하면 모르잖아! 이름을 가 르쳐달란 말야, 그 녀석의 이름을......!"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격한 기분이 되어 선배에게 큰 소리를 내지른다. 선배에게 당황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 마치 무언가를 동정하듯 날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알겠어요. '그'는 시토 사이에서는 아카샤의 뱀이라고 불리고 있어요. 뱀 은 무한과 순환의 상징이니까요. 탈피해서 새로운 육체를 얻는 개념은 '그' 에게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속칭이었겠죠. 반면 교회에서는 '무한전생자'로 기록하고 있어요. 인간이었을 때의 이름은 미하일 로어 바르담욘. 부를 땐 단순히 '로어'라고 잘라 부르고 있지만요." "로, 어 - " 들어본 적도 없다...당연한 소린가. 그런 녀석, 지금까지 만나본 적도 없으 니까 말야. "결국, 선배는 우리 학교에 그 로어란 녀석이 있다는 걸 알고 찾아왔다는 거야?" "예. 뭐...사실은 대강 때려맞추는 정도지만, 어쨌든 이 일대에 로어의 전 생체가 있다는 건 확실해요. 저, 로어에 관해서는 알퀘이드보다 감각이 예 리하거든요. 그래서 그녀보다 빨리 이 마을에 와 있었고 사실은 벌써 누가 전생체인지도 알아냈어요." ㅡ. 왠지, 숨이 멈춰졌다. 선배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왠지 동정하는 듯한 눈빛 으로 날 쳐다본다. "......좀 전에도 설명드렸는데오, 로어는 뛰어난 육체와 부유한 가문을 다 음 전생대상으로 결정하죠. 때문에 로어가 이 마을에 있다는 걸 안 시점에 서 그 조건에 맞는 일족을 조사하다보면 해답은 저절로 나오기 마련이에 요." " - " "이 일대에서 로어의 조건에 맞는, 뼈대있는 가문은 하나 밖에 없어요. 그 다음은 말 안 해도 아실테죠, 토노 - 시키 군." -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이상하다고 했잖아. "하" "하" "하하하, 하" 탁한 웃음 소리는 내 목구멍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선배. 그럴 리가 없잖아." 선배는 대답하지 않는다. 마치. 내가, 그 로어인가 하는 녀석의 전생체라고 말하는 듯. "......하지만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토노 가의 사람들에게는 '이질적 인 것'의 피가 섞여있어요. 권력도 있고 로어가 필요로 하는 인간 이상의 잠재능력도 있죠. 아까 사자들을 쓰러뜨린 토노 군의 힘은 인간의 것이라고 는 생각할 수 없는게 아니었던가요? 따라서 - 이번 로어의 전생체는, 토노 시키임에 틀림없어요." - 모르겠어. 선배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거지, 선배?" "그거야 그걸 결정한게 저이기 때문이니까요." 선배는 확고한 목소리로,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잘라 말한다. "에, 에에에에에!?" "......하지만, 아니에요. 살해당한 쪽은 토노 군 쪽이에요. 하지만 살아남 은 것도 토노 군. 죽은 쪽이 살아남고 죽인 쪽이 죽어버렸죠. 모든 잘못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걸 거에요." 뭔가를 생각하는 듯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선배는 내 발밑에 꽂혀있던 '검 '을 뽑아들었다. "아 - "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게 전부에요. 나머지는 토노 군의 판단에 맡 기겠어요." "맡기겠다니, 선배 이야기 듣고 있으면 내가 무슨 -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토노 군은 지극히 평범하 고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그런 학생이에요. 그러니까 틀림ㅇ벗이 제가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거겠죠. 왜냐하면 - 토노 군은, 제가 있는 곳 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니까요." 왠지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띤 선배는 내게서 멀찍이 떨어진다. 마치 이제 부터는 우린 남남 사이에요 라고 말하는 듯한, 손이 닿지 않는 먼 거리. " - " 난 - 역시 알퀘이드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어. 지금부터라도 그녀석의 뒤 를 쫓아가지 않으면 정말로 앞으론 두 번 다시 알퀘이드와 만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알퀘이드를 쫓아가시게요, 토노 군?" 선배의 목소리는 알퀘이드를 쫓아보내던 때의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억 양이 없는, 감정조차 희박한 목소리로. " - 응. 선배가 교회란 곳의 사람이고 알퀘이드가 그 적이란 건 나도 잘 알 겠어. 하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나랑 알퀘이드랑 서로 협력 하고 있는 사이야. 그러니까 빨리 찾지 않으면 안 돼. 알퀘이드를 혼자 내 버려뒀다만 뭘 어떻게 할지 알 수도 없고 말야." 가볍게 피식 웃으며 선배에게 작별인사를 하듯 등을 돌린다. " - 잠깐만요. 알퀘이드를 쫓아가도 토노 군은 그저 죽임을 당할 뿐이에요. 알퀘이드 브륀스타드와는 이제 두 번 다시 만나서는 안 돼요." "죽임당할 뿐이라고 - 뭐, 선배는 안 믿을지도 모르겠지만 알퀘이드는 정말 로 피를 빨지 않는단 말야. 그녀석, 의외로 괜찮은 녀석이라니까." "......저도 알아요. 확실히 그녀는 인간의 피를 빤 적이 없었을테죠. 하지 만 그것도 이젠 다 끝이에요. 한 번 흡혈중동에 패해버린 신소는 타락할 뿐 이니까요." 발걸음이 멈추어선다. "......선배? 신소에 - 흡혈충동, 대체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피를 빨고 싶어하는 욕구를 말하는 거죠. 토노 군. 시토라 고 불리는 흡혈귀들은 그 태반이 흡혈귀에게 피를 빨려 흡혈귀가 된 것들이 에요. 시토들은 열등해져가는 자신의 육체를 보충하기 위해 인간의 피를 필 요로 하죠. 말하자면 그들의 흡혈행위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행위인 셈인 거죠. 하지만 처음부터 흡혈귀였던 것들의 경우는 달 라요...시토는 아무리 흡혈귀라고는 해도 원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었던 자들. 어쩌면 아직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존재죠. 하지 만 태어났을 때부터 흡혈종으로 태어난 것들은 과연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 는 존재들일까요?" "무 - 무슨,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선배. 내가 묻고 있는 건 알퀘이드에 대 한 이야기잖아." "그러니까 이게 바로 알퀘이드에 관한 이야기라는 거에요. 생각해 본 적 없 어, 그런 말은 듣지 않겠어요. 시토가 흡혈귀에게 흡혈귀화된 존재라면. 그 근원, 그 중심점에 해당하는 '처음부터 흡혈귀였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이러한, 처음부터 생명으로서의 계통수가 우리와는 일치하지 않는 흡혈종을 신소라고 불러요. 인간의 피 같은 건 필요로 하지 않는, 시토들과 마찬가지 로 ...아니 그 이상의 초월능력을 가진 자들. 그녀는 그 신소라 불리는 일 족의 왕족이에요...그들에게는 신분계급이라는게 없으니까 왕족, 이란 표현 은 올바르지 못한 것이긴 하지만요." " - 그러니까 그게 어쨌다는 거야, 선배. 그런 이야기 -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단 말야......!" "상관 있어요. 신소라고 불리는 흡혈종에는 그 노예에 해당하는 시토들보다 엄청나게 강한 흡혈충동이 있어요." 선배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그저 거울처럼, 심 하게 동요하고 있는 내 얼굴만이 비추이고 있었다. "잘 들으세요, 토노 군. 신소들은 원래 인간의 피가 없어도 생존해 나갈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진화의 과정에서 어떤 트러블이 일어났는지 아니면 완벽 한 존재 같은 건 원래부터 없었던 건지 어쨌든 그들에게는 정말 지극히 당 연한 것처럼 인간의 피를 빨고 싶어지는 시기가 존재해요...그들에게 피를 빨린 인간은 그 시점에서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리죠. 신소와 인간은 생명으 로서의 스케일이 서로 너무나 차이가 나죠. 신소라는 강대한 생명과 피를 교환한 시점에서 그 너무도 큰 차이 앞에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게 되죠. 작은 물결이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 큰 물결에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인간은 그 신소의 분신 - 이른바 인형이 되어버리는 거에요. 문제는 그들의 흡혈충동에 이유가 없는 점이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막을 수가 없다. 신소 란 완벽한 생명이 내포한 결점. 죽음에 이르는 병, 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 죠. 어쨌든 그들은 자신들의 '피를 빨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며 살아가고 있어요. 그건 이성으로 참아내는 등의 레벨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에요. 그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힘을 자기자신의 욕망에 대해 사용해서 힘으로 스스로를 봉인하고 있는 거에요...스스로의 강대한 힘을 자기자신에 게 사용함으로써 그들은 흡혈충동을 억누르고 있다. 하지만 만약 - 어떤 외 적 요인으로 인해 그 신소의 능력이 저하됐을 경우, 억누르고 있던 흡혈충 동이 어떻게 될지 아시겠어요?" ...어떤 외적 요인으로 스스로의 능력이 저하된 경우...? 예를 들면, 깊은 상처를 입고 그걸 치료하기 위해 힘을 사용하거나 한 번 철저하다 싶을 정도로 죽임을 당했다가 다시 소생하는데에 힘을 사용했다던 가 하는 경우 - ...알퀘이드한테 10이라는 힘이 있다고 치자. 그 중 7 정도를, 알퀘이드는 지금까지 계속 자기자신의 '피를 빨고 싶다'는 욕구를 억제하는데 사용해 왔다고 치자. 하지만 만약 - 어떤 요인으로 10이라는 힘 중 5의 힘을 잃어 버리게 되었을 경우 아무리 남아있는 모든 힘을 쏟아부어도 알퀘이드는 자 기자신에 대해 5의 힘 밖에는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부족한 분의 숫자 는. 그대로 그녀 자신에게서 무엇을 끌어내어가는 것일까 - "......그래서. 그 충동이란 걸 억누르지 못하게 된 신소가 어떻게 되는데, 선배." "물론 사람의 피를 빨게 되죠. 그 다음엔 아무 것도 없어요. 한 번 충동에 패해버린 신소는 그 후엔 계속 타락해 갈 뿐이에요. 한 번 피의 맛을 알아 버린 신소는 그 충동에 의한 고통 역시 배가 된다고 들었어요. 그 결과, 두 번 다시 흡혈충동을 견딜 수 없게 되어버리죠. 그렇게 흡혈충동을 견딜 수 없게 되어버린 신소는 마왕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 되죠. 신소들은 확실 히 극히 우수한 생명종이긴 하지만 스스로의 흡혈충동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견뎌낼 수밖에 없는 그러한 굴레가 있기에 전력을 발휘할 수가 없어요. 하 지만 타락한 신소는 더 이상 자신을 속박할 필요가 없죠. 그 다음엔 그저 스스로의 쾌락을 위해 사람의 피를 빠는 마물이 될 뿐." ......좀 전의 알퀘이드의 모습이 떠오른다. 핏발선 눈. 거칠었던 호흡. 목덜미에 와 닿은, 그저 내뱉을 뿐이었던 한숨. ".....거짓말..." 그건 다 거짓말이야. 왜냐하면 그 녀석, 확실히 피를 빠는게 무섭다고 - "아" ......그래, 무서운 거야. 한 번 피를 빨아버리면 더 이상 충동을 막아낼 방법이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으니까. "......다만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흡혈충동이 돌발적이라는 거죠. 신소들 은 단 한 사람, 스스로 도저히 흡혈충동을 견뎌낼 수 없을 때를 대비해 자 기자신용의 노예를 준비해둡니다. 그것이 시토라 불리는자들의 시작인 셈이 죠. 그들은 이미 죽은 시토. 신소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고통을 멎게해줄 목적으로 길러지는 흡혈귀. 그것이 이 마을에 둥지를 들고 있는 흡혈귀의 정체인 거에요.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것이 없죠......아니, 지금까지 필요 하지 않았어요. 신소들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였던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만 으로 흡혈충동을 꾹 참고 있었으니까요." " - 그럼 결과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는 거잖아. 그녀석 다친 데만 나으면, 그녀석이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 흡혈충동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견뎌낼 수 있게 되는 거 아냐, 선배......?" "......아뇨. 그래도 한계는 찾아오기 마련이에요, 토노 군. 흡혈충동에 끝 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사라지는 법도 없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참아온 충 동이라는 침전물은 그러면서 차츰 그릇에서 넘쳐흐르게 되죠. 신소들은 오 래 살면 오래살수록 스스로의 안에 내포한 흡혈충동 역시 비대화시켜버려 요. 그렇게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충동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게 됐을 때 - 그들의 충동이 스스로의 능력을 앞질러버렸을 때 그들은 같은 신소들의 손에 의해 목숨을 빼앗기게 되죠. 그것이 수명이 없는 그들에게 있어서의 수명 같은 거에요." " - 그치만 알퀘이드는 괜찮단 말야. 지금은 나 때문에 힘이 좀 약해져 있 긴 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꼭 - " "......그럴 지도 모르죠. 하지만 어차피 그녀는 이제 한계상태예요. 아무 리 실제 활동시간이 수 년 밖에 되지 않는다고는 해도 그녀의 존재시간 그 자체에는 변함이 없죠. 오랜 동안 그녀 안에 뭉쳐있던 충동은 이제 곧 그녀 자신을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갈 거에요. 그때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어요. 그녀는 - 알퀘이드는, 더 이상 구원받을 수 없는 생명이에요." - 두근. 처음으로. 빈혈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말에. 눈 앞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듯한 현기증을 일으켰다. " - " 결국은 뭐야. 알퀘이드는 스스로도 더 이상 못 참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 면서 이런 곳에서 흡혈귀 퇴치 같은 걸 하고 있었단 거야? - 그거, 이상해. 그런 소리 -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선배가 하는 말은 모두 다 거짓말이야. 봐봐, 자기가 지금 어떻게 됐는 줄을 알고 있다는 녀석이 우릴 위해서 이런 곳까지 흡혈귀를 퇴치하러 올 이유가 없잖아." "그녀가 흡혈귀를 처리하는 건 우릴 위해서 그러는게 아니에요. 그게 그녀 의 역할이기 때문이죠." "역할이라고? - 그런 걸 누가 정했어." "그녀 이외의 신소들이겠죠. 그녀가 태어난 12세기 무렵은 시토와 타락한 신소들이 가장 많이 활개를 치던 시대였어요. 신소들은 타락한 신소도, 그 신소가 헛되이 그 수만 불려나가고 있는 시토들도 내버려둘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오로지 죽이기만 위한. 그 이외의 것들은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 는 가장 순수한 신소를 탄생시켜 처형역으로 삼았죠. 그게 알퀘이드라는 신 소에요. 그녀는 생각 없는 핵 미사일처럼, 일단 성에서 빠져나오면 표적이 된 흡혈귀를 확실히 멸해버린다고 하더군요." - 두근. 또, 현기증이 인다. ......그런 말투로 이야기하지마. 그녀석은 엄연한 인간이야. 그런 식으로 병기 취급하는 말투, 화가 나. "아뇨, 병기(兵器)에요. 원래부터 그녀는 그러한 의미로 밖에 존재를 인정 받지 못하고 있었어요......그러니까 방금 전 같은 그녀의 태도는 어딘가 이상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겠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그녀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원래 알퀘이드 그녀는 말을 하는 적이 없었으니까요." - 하? 자, 잠깐만. 말을 하지 않는다니 - 그거 이상하잖아. "그녀는 불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아요. 옛날부터 - 그래, 수백 년 전부터 그녀는 그렇게 살아왔어요. 저 산간 고성에서 생명을 받아 태어났을 때부터 쭉 영원히 변함없이." - 두근. 심장 뛰는 소리와, 어두운 현기증......어째서지. 내가 모르고 있을 광경, 떠오를 리 없는 기억이 눈 앞에서 펼쳐져 간다. 넓은, 성의 정원. 오로지 황량한 초원만이 펼쳐져 있는, 혼자만의 성. 하얀 그녀는 그저 멍하니 하늘을 바라다보고 있다. "그녀에게는 불필요한 지식도, 목적 이외 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유도 없었어 요. 쓰러뜨려야 할 대장이 결정되었을 때만 그녀는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 죠. 쓰러뜨려야 할 상대에 따른 지식을 주입받고 적을 확실하게 처형할 수 있도록." 아무도 없어. 말할 상대도 없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상대도 없어. "표적이 된 흡혈귀를 죽이고 성으로 돌아온 그녀는 주입받은 지식을 모두 깨끗이 잊어버리고 잠이 들게 되죠. 아무 것도 모르는 채 흡혈귀를 죽인다 는 사실 이외에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아무 것도 없어. 누군가와 이야기한다는 즐거움.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대고 앉아 인사를 나눌 때의 소중함. 그런 것들은 그녀의 존재에서 모조리 배제되어 있었다. "그녀의 힘은 타락한 신소들조차 없애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어요...하 지만 아이러니하죠. 너무도 강대한 그 능력이 화근이 되어 그녀는 신소들 사이에서도 속박당하고 있었어요. 공주님으로 모셔졌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았죠. 성을 하사받았으면서도 그녀의 세계는 어두운 지하 실 뿐이었어요. 그래서 그녀에게 감정을 전해줄 것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던 거죠." 그건. 오히려 살아있다는 사실이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로. 우스운, 존재. "그녀에게는 스스로의 언어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시간도 없었다고 해 요. 신소들은 마치 병기를 손질하듯 그녀를 다루고 있었던 거겠죠. 병기에 쓸데없는 기능은 필요치 않으니까. 빵을 굽는 기능도, 빨래를 하는 기능도 필요없죠. 그런 쓸데없는 것들을 부속시킬 바에야, 좀 더 병기다운 기능을 부속시키는 편이 낫겠죠?" - 불필요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쭉 그렇게 배워왔어. 알퀘이드는, 그렇게, 마치 노래하듯 말했다. 지금까지 스스로 모든 걸 해결 해왔다며 공허한 눈빛을 띠고 있던 이유. 그래서, 다른 사람은 필요없었던 건가. 아니, 그저 모르고 있었을 뿐인가. "신소들이 그녀에게 원했던 건 그저 뛰어난 성능의 상살능력 뿐이었어요. 그래서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죠. 살아있다는 의미란 무엇인가 같은 장황한 것들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알지 못하는..." 그녀석은, 언제나 그토록 밝은 표정으로. 사소한 것들에도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냥 저런 녀석인가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나 잔혹한 착각이었던가. 알퀘이드는 단지 - 그런 당연한 사실들이 정말로 즐거워서. 스스로도 잘 모 를 정도로 즐거워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어. - 그치만 너무 재밌는걸. 살아있다는 사실이 단지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라고,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는걸. 그걸 이해할 수 없는 불안. 조심스런 목소리로 이야기를 청해왔던, 저녁노 을 비친 교실. "알퀘이드는 오랜 동안 존재해 있음에도 살아있다는 그 자체의 의미를 우리 인간들보다 모르고 있어요. 그녀가 행동을 용서받은 시간은, 활동시간으로 환산해 보면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이죠. 그녀의 생애는 거의 대부분이 잠든 가운데 이루어졌어요. 그것도 아마 마치 어둠 속과도 같았겠지만요." - 그래? 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데. "타락한 신소들을 모조리 처단한 후 그녀는 성에서 나올 일이 없어졌어요. 일단의 목적이 완료됐기에 신소들도 그녀를 제대로 교육시키려고 했었죠. 하지만 그녀는 자유롭게 되지 못했어요. 정말로 사소한 실수로 성에 남은 신소들을, 그녀는 모두 죽여버리고 말았으니까요." 흡혈귀를 죽이는 것만을 배운 존재는 성실히 자신이 받은 명령대로 마지막 까지 임무를 완수했던 걸지도 몰라. 결국 홀로 남겨진 알퀘이드는. "신소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처형한 후 그녀는 스스로 성 안에 틀어박혀 버렸어요.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게 된 신소들의 성 안에서, 성벽에서 뻗 어나온 천 개의 쇠사슬에 묶여서. 로어라는 흡혈귀가 전생할 때마다 잠에서 깨어나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활동하죠." 그렇게 정해진 세계 안에서. 단 한 마디도, 말을 한 적이 없었어. "때문에 그녀는 본질적으로 처형인이란 거에요.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던 신 소들이 모조리 없어져버렸음에도 아직 흡혈귀 사냥만을 목적으로 배회하는. 아마 그녀에게는 그것 말고 다른 즐거움이 없는 거겠죠." 그건, 틀린 말이야. 그녀석이 즐거워하고 있던 건 그런게 아니었단 말야. " - " 난,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있었어. " - 말" 알퀘이드의 말, 즐거워하는 얼굴. 좀 더 자세히 보고 있었더라면 - 알았을 텐데. " - 짓말" 알퀘이드가 지금까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어.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감정. 마음이 통하는 친구끼리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시간이 언제 흘 렀는지도 모를 정도의 즐거움들. 하루일과를 마치고 침대에 털썩 누워 그저 멍하니 시간만 보내고 있다는 사 실을 그리 대단하게 생각지 못하는 것과 같은 평안함. 그런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들이 알퀘이드에게 있어서는 정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행복이었다니. " - 거짓말" 비참함 - 그건 알퀘이드 자신이 스스로가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를 조금도 느끼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 그런 지독한 - 그런 장난 같은 고독이 어디있 다고... " - 전부 거짓말이야." ......어려운 이야기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저 알퀘이드가 당연한 사실들을 행복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런 것 쯤, 언제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당연한 것들이라고 느끼게끔만 해줄 수 있었더라면 - "토노 군 - ?" 선배의 목소리에 눈이 떠진다. "왜 그러세요? 갑자기 멍하니 서계시고, 제 이야기 들으셨어요?" "아니 - 미안, 기억이 안 나. 선배가 이야기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이야기한 것 같기도 해." 선배는 한숨을 쉬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어디보자...그러니까요, 그녀는 - " "됐어. 알퀘이드가 뭘 하고 있든, 어떤 녀석이든 어찌됐든 상관없어. 더 이 상 녀석을 혼자 있게 할 순 없으니까 이제 그만 가볼게." 선배를 뒤로 향하며 밤의 거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 - 토노 군. 일단 흡혈충동을 참아내지 못하기 시작한 신소는 절대로 원래 대로 돌아오지 않아요. 만약 그녀가 토노 군 앞에 나타난다면 그건 토노 군 의 피를 빨러 온 거란 뜻이죠." 선배는 말은, 아마 선배에게 있어서 진실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내 진실과는 또 다른 진실이다. "그렇지 않아. 알퀘이드는 아직 피를 빨지 않았잖아." "아뇨. 제가 못 빨게 막지 않았더라면 토노 군은 틀림없이 피를 빨렸을 거 에요." "......아니라니까. 왜냐하면 중간에 멈췄단 말야. 알퀘이드는 괜찮았다구. 그러니까 - 선배가 그녀석을 날려보내지 않았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 야." 그래, 확실히. 알퀘이드는 이를 끝까지 다 깨물지 않았다. "......끝까지 그녀의 편을 드시겠다, 는 말씀이시군요 토노 군." "아아. 선배한테는 미안하지만..." 선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한숨소리만 들려오는 것 같았다. " - 토노 군이랑 저, 싸우게 될 지도 몰라요." "그래. 하지만 난 사과 안 할 거야, 선배." "............" 선배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선배의 기척만 멀어질 뿐. 멀어져 가는 발소리. 난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밤거 리를 향해 달려나섰다. -------------------------------------------------------------------------------- - 거리에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알퀘이드의 모습은 커녕, 거리를 지 나는 사람들의 모습조차 찾아볼 수 없다. "큭 - " 이래선 어젯밤이랑 완전히 똑같을 뿐이잖아. 내게는 알퀘이드를 찾아낼 수 단 같은게 없다. 지금, 이렇게 알퀘이드랑 만나고 싶어함에도 나한테는 그 녀석을 찾아낼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다. - 그녀석이. 알퀘이드가 그토록 괴로워하고 있는데도 난 아무 도움도 줄 수 가 없어 - " - 빌어먹을!" 가슴이 답답해 미쳐버릴 것만 같아. 어떻게 해서든 - 어떻게 해서든 빨리 알퀘이드를 찾아야만 해, 토노 시키는 더 이상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가 없어 - "하아......하아......하아......" 거리 곳곳을 뛰어다녀봐도 알퀘이드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몸은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고 호흡도 제대로 골라지지 않는다. "하아......하아......하아 - " 가슴의 흉터가 심장에 부담을 준다. 지금처럼 - 이런 고물딱지 같은 내 몸 이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하아......하아......하......아" ......못 찾겠어. 그냥 아무렇게나 뛰어다니기만 해서는 알퀘이드를 찾아낼 수는 없어. "......하.........아" 만약. 만약 그 녀석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건 - <2. ......이대로, 공원이 있자. - 선택> ......여기 남자. 약속했잖아. 여기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했잖아. 우린 아 직 오늘 밤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어. 여기서 만나서 같이 싸우지 않았단 말야. - 그러니까. 내게 있어 이 약속이 도저히 저버릴 수 없는 그런 것이고 알퀘 이드 역시 그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해 준다면. 알퀘이드는 여기로 돌아올 거야. 그걸 믿고, 지금은 그저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는 없어. 시간이 흐른다. 시계 바늘은 정확히, 아무런 의사도 내비치지 않고 째깍째깍 일 초 일 초 돌아간다. " - " 숨막히는 시간. 몸은 겨우 1분조차 제대로 기다릴 수가 없었다. 바보처럼 여기서 이렇게 멍하니 서서만 기다리고 있느니 지금이라도 빨리 일어서서 알퀘이드를 찾아야만 해. " - " 하지만 마음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다. 겨우 1분조차 기다리지 못할 정도 로 몸은 안달이 나 있음에도 마음만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밤, 달 을 바라보며 기다리기를 계속한다. - 너무도 고요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모든 것들이 얼어붙어 버린 것만 같은 밤. 마치 이 세상에 나와 알퀘이드 말고는 모두 다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정적. 그 속에서 계속 기다릴 수 있다면 영원히, 몇 시간이 흘러도 고통스럽지 않아. 그러니까 이런 시간 쯤. 행복한 마음에 숨이 멎을 것 같다. 시간만이 흘러간다. 해가 뜰 때까지 앞으로 2시간 정도. 해가 뜨면 알퀘이 드도 지금의 이런 나도 두 번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지. 그렇게 시간만이 흘러가고 있을 무렵. 마치 설원에 흰 토끼가 찾아오듯, 그녀는 공원에 그 모습을 드러내주었다. "..............." 알퀘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결코 내쪽으로 다가오려 하지 않는다. " - 알퀘이드." 말을 건넨다. 알퀘이드는 대답은 커녕 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 말을 건넬 수가 없어. 뭐라고 말하면 알퀘이드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돌아 오게 할 수 있을지, 난 잘 모르겠어.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알퀘이드를 더 슬프게만 할 것 같아서. ......... ..................... .................................... 영원히 흘러가는 건 아닌가 하고 착각이 들 정도의 시간. 실제로는 약 천 번에도 못 미치게 초침이 움직였을 뿐. 알퀘이드는 무슨 눈부신 것이라도 보는 양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린다. "시키, 계속 안 가고 있잖아. 내버려둘 수 없어서 와 봤어......사실은 이 대로 집에 돌아갈까도 생각했었는데..." 군데군데 갖다맞춘 부분이 보이는 그런 말투이긴 했지만 어쨌든 평상시의 알퀘이드로 돌아와 준 것 같았다. "......당연히 안 돌아가지. 너랑한 약속, 안 깬다고 말했었잖아. 오늘밤엔 아직 널 도와주지도 않았고 말야." " - 됐어. 그런 건 이제 됐어." "됐다니 - 뭐가 됐다는 거야, 알퀘이드......!" "말할 것도 없겠지. 역시 난 흡혈귀고 시키는 인간이란 거야. 난 시키한테 도움받을 자격 같은 건 없었어. 그런 것도 모르고 자칫 시키를 해치려고까 지 했었어. 그러니까 - " 이젠 됐어, 라고 알퀘이드는 중얼거린다. - 이제 와서, 뭘. 그런 것 쯤, 내가 너한테 협력하겠다고 말한 시점에서 이 미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야. 네가 흡혈귀란 건 너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 어. 알고 있으면서 널 돕겠다고 말한 거란 말야. 이런 거 - 나 하나도 안 좋아한단 말야......! "......알퀘이드. 아까 일이라면 신경 안 써도 돼. 넌 몸이 좀 약해져서 그 냥 좀 피곤해져 있었을 뿐이야. 내가 바보라서 네가 한 거짓말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어. 널 괴롭혔던 건 몸에 난 상처가 아니라 흡혈충동이었지?... 선배한테 다 들었어." "......그 여자...매장기관은 언제부터 그렇게 수다쟁이가 됐을까..." 밉기 때문이라기 보다 피곤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알퀘이드는 한숨을 내쉰 다. "......선배한테 모두 다 들었어. 그러니까 확실히 말해줄게. 너한텐 아무 문제도 없어, 알퀘이드. 지금은 좀 괴롭겠지만 며칠 지나고 나면 원래대로 괜찮아질 거잖아? 그럼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게다가 아까 전에도 - 그렇게 힘들어하고 있었으면서 잘 참아냈었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앞으로도 지금 까지 해왔던 것처럼 해나가자." ".................." 알퀘이드는 약하게 쓴웃음을 짓어보인다. "......시키는 아무 것도 몰라. 무리야, 이렇게 되면...난 지금도 시키 피 를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 - 생각만 하는 거잖아. 그럼 힘내서 좀 참아...지금까지도 그렇게 잘 참 아왔잖아 너." "......그래, 지금까지 그렇게 자신을 억눌러왔지. 아니, 억눌러올 수 있었 어. 하지만 이젠 다 틀린 것 같아. 난 생각도 모자라고 흡혈귀를 사냥하는 것만이 내 모든 의미였는데 불필요한 짓을 너무 많이 해버렸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으면 뭘 바라려고도 하지 않았겠지. 시키한테 기대지 않고 혼자 적을 쫓았더라면 좋았을걸." " - " 혼자서 쫓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진심으로? 진심으로, 그런 이야기를 입에 담은 걸까, 알퀘이드는? 그런 슬 퍼보이는 표정을 하고? 울 것 같은 목소리로?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그런 고독한 얼굴로? " - 아아, 짜증나! 제발 이제 그만 좀 해라, 이 바보야......!" "무슨........." "웃기지마......! 뭐가 '혼자서 적을 쫓았더라면 좋았을걸'이냐! 혼자선 무 리니까 -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서 나한테 좀 도와 달라고 했었잖아!? 그럼 끝까지 부탁해봐......! 내가 도와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도와준다고 - !" 그런, 얼굴을. " - 두 번 다시......이젠 됐다는 소리, 하지 마." ......이제서야 겨우. 겨우, 살아있다는게 얼마나 즐거운지 알았으면. 그 당연한 행복을 간단히 뿌리치는 짓만큼은, 하지 마. "시키 - 너, 울어......?" "안 울어......! 어째서 내가, 너 같은 녀석 때문에 울어야 하는 거야...!" 단지 알퀘이드나 너무나 바보 같은 소리만 늘어놓으니까. 너무도 화가 나서 감정이 어떻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지만. "아아 젠장, 어쨌든 흡혈귀 찾기는 계속할 거야! 그, 로어인지 뭔지 하는 녀석을 빨리 이 마을에서 쫓아내 버리면 너도 쉴 수 있잖아. 그럼 만사 OK 지? 아무 문제도 없어......!" 알퀘이드는 조용히, 너무도 온화한 눈동자로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치만 - 역시 안 되겠어, 시키. 시키는 내가 아까 잘 참았다고 얘기해줬 었지만, 그건 참아낸 게 아니었어. 아깐 말이지. 내가 잠깐 동안 멈칫했던 건 시키가 날 무서워했기 때문이었어. 나...지금까지 몇 사람이나 되는 사 람들한테 괴물이라면서 날 무서워했었어. 그래서 나한테 쏠리는 혐오감이라 든지 그런 거, 이젠 더 이상 못 느끼게 됐어......그런데 참 이상하지? 시 키가 날 괴물취급하듯 바라보니까 너무 싫은 기분이 들었어. 난 시키 입장 에서 보면 틀림없는 괴물인데도 말야." 아하하. 메마른 웃음소리를, 알퀘이드는 억지로 짜내고 있었다. "......그런 - 그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놀라서 - " ......거짓말. 그건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이야. 알퀘이드는 괴로운 듯 시선을 아래로 향한다...선생님이 말씀하셨잖아. 스 스로도 속일 수 없는 거짓말은 남을 상처입힐 뿐이라고. "......내가 잠깐 동안 멈칫한 건 그 때문이야. 시키가 그런 눈으로 쳐다보 는게 무서웠어. 앞으로도 시키의 그런 눈을 보면 나, 아마 부서져버릴 거 야. 그러니까 - 시키랑은, 이젠 만나지 않겠어." "야 - " "여기서 그만 헤어지자, 시키. 우린, 아마 너무 친해져서 이런 걸거야." 내 얼굴이 안 보이도록 빙글 내게로 등을 돌린 후. 알퀘이드는 그렇게 말했 다. ......너무 친해져서, 인가. 그 말은 사실이다. 나도 알퀘이드도. 이렇게 서로에 대해 깊이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거다. 난 간단히 알퀘이드에게서 멀어져 일상생활로 돌아가고 알퀘이드는 또 다시 홀로 흡혈귀를 사냥했을 거다. "......그래. 확실히 우린 너무 친해졌어. 하지만 난 괜찮다고 생각해. 언 제까지고 혼자서만 있는 건 너무 외로운 일이잖아." " - " 알퀘이드는 답하지 않는다. 알퀘이드의 등은 너무도 연약해 보였고. 이대로 꼭 껴안고 아무데도 가지 못하게 하고 싶은 마음에, 괴로웠다. "그리고 말야, 솔직히 요 며칠 동안 정말로 즐거웠었어.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지만, 기분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라구......그러니까 마지막까지 도울 수 있게 해줘. 이대로 그냥 가버리면 신경 쓰여서 잠도 못 잘 것 같단 말야." "......으응, 그 점은 걱정 안 해도 돼. 난 반드시 로어를 쓰러뜨릴 거야. 나까지 같이 죽게 된다고 해도 반드시 해치우겠어......그러니까 시키는 더 이상 상관 안 해도 돼. 이 마을은 금방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거고 걱정 할만한 일들은 더 이상 안 일어나게 될 테니까." 등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엔 평소의 밝은 표정이 묻어나 있지 않다. ......더 이상은 못 참겠어. 더 이상 가만히 있기는 싫어. "......바보. 내가 걱정하는 건 그런게 아냐." 라고 말하며 알퀘이드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선다. "아 - " 도망가려하는 알퀘이드. 그녀의 팔을 뒤에서 붙잡고 억지로 내쪽을 보게 한 다. "시 - 키" "똑바로 말하지 않아서 모르겠는 거라면 다 말해줄게...잘 들어, 내가 도와 주겠다고 말한 건 이 마을을 어수선하게 하고 있는 흡혈귀를 쓰러뜨리기 위 해서가 아냐. 내가 사는 마을을 지킨다든지 그런 잘나 빠진 이유 같은 건 사실은 없었단 말야. 그래, 말로는 그렇게 지껄여대면서 스스로한테도 그렇 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런 이유 같은 건 대의명분에 지나지 않아. 난, 그저. 그저 단순히 네가 좋아서. 네 힘이 되고 싶어서 도와주겠다고 한 거 야. 그걸 이제와서 - 없었던 일로 하자니...난 못해." 똑똑히 말한 후. 정면에서 알퀘이드를 끌어안았다. "아 - " 알퀘이드의 목소리에 저항의 뜻은 담겨 있지 않다. 그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뚝 서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날 받아들이고 있다. 두근. "네가, 내 피를 마시고 싶다는 거라면 하나도 잘못된 거 없어." 두근. "......시키, 아파 - 팔, 아프다구 - " 두근. "그건 서로 마찬가지였다구. 왜냐하면, 그거라면 - " 두근. "나도, 전부터 쭉 널 원하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껴안고 있는 지금도 - 알 퀘이드의 심장 뛰는 소리 들으면서 미쳐버릴 정도로 널 원하고 있어." 두근. 그녀를 안은 팔에서, 하나로 포개어진 몸에서. 알퀘이드의 고동이, 느껴진다. "......아냐, 시키. 그건......그저 이 순간만, 나 때문에, 정신이 없을, 뿐이야......" 두근, 두근. 그 소리 만으로 이렇게나 - 으스러져라 껴안고 싶어질 정도로 미쳐버릴 것 같아. " - 그래도 괜찮아. 지금, 알퀘이드를 사랑하고 있는...그게 토노 시키의 진실이야. 그 다음 일 같 건 몰라." 두근. "아니면 - 내가, 싫어?" 두근. 두근거리는 소리가, 갑자기 멈춘다. "......안 돼. 그 질문에는, 대답 못 해." 심장소리가 없어진다. 그 대신. 조용히, 마치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 알퀘이 드의 두 팔이 내 등 뒤로 감겨져 들어온다. 처음엔 부드럽게. 그리고 무엇 인가를 느끼듯 점차 격렬하게. 알퀘이드의 두 팔이, 내 몸을 꼭 끌어당기고 있었다. 아주 잠깐 동안의 포옹. 누가 먼저 상대에게서 떨어졌는지 나도 잘 모르겠 다. 그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린 서로의 몸을 감고 있던 팔을 풀었 다. ".................." 알퀘이드는 고개 숙인 채, 그저 두 뺨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 - " 해가 뜰 때까지, 앞으로 1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날이 밝는다. 알퀘이드의 시간이 끝난다. 하지만 - 난 이대로 알퀘이드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만약 가능하다면, 이 자리에서 그녀를 - " - 우리 방." "에?" "......저기, 우리 방에, 가지 않을래......? 나 지켜준다고 했었으니까 - 오늘은, 보내고 싶지, 않아."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간신히 이어져나가는 목소리. ......아무리 나같은 놈이라도 알퀘이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의미를 이 해할 수 있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나는 마치 뜨거운 기운에 넋이 나간 듯한 모습을 하고 알퀘이드의 집으로 향했다. 먼저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다......뒤에는 알퀘이드의 기척만이 느껴질 뿐이다. 알퀘이드를 보니 정말 그대로 미쳐버릴 것만 같을 정도로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하지만 사고는 놀라울 정도로 냉철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난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건 미칠 것 같으면서도 모든 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그런 모순된 충동을 가리키는 말인지도 몰라. " - 알퀘이드." 뒤를 돌아보려 한다. 그 직전 - 알퀘이드의 손이 가볍게 내 등 뒤에 와 닿 았다. "돌아보지마......조금만, 이렇게, 있자." ......알퀘이드의 목소리는 이미 차분해져 있었다. 내 등에 올린 손은 무엇 인가를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 "......저기, 시키. 내가 처음 시키를 기다리고 있었던 날, 기억 나?" "응. 내가 죽였던 상대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날 기다리고 있었지. 그걸 어 떻게 잊어버리겠어." "응 - 그때 말야. 나, 정말로 네가 미웠어." 그런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알퀘이드의 목소리는 정말로 따뜻했다. "......알퀘이드?" " - 더 이상 나 스스로도 흡혈충동을 이겨낼 수 없다는 걸 알고서. 아마 이 번이 마지막 찬스일 거라고 각오하고 로어를 쫓아왔어. 겨우 로어를 찾아냈 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한 번 만난 적도 없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해 모 든게 물거품이 되어버렸지. 그때의 내 감정은, 그저 미움 밖에는 없었어. 그렇게 날 죽인게 누군지 찾아내서 시키가 오기만을 그 길가에서 계속 기다 리고 있었어. 빨리, 빨리 오란 말야. 내가 있는 줄 알아차린 바로 그 순간 에 내가 당했던 거랑 똑같이 죽여줄테니까, 하고 말야......정말로 시키가 미웠어. 정말 정말 미워서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을 정도로 계속 기다리 고 있었어." 등 뒤에 얹은 손에 힘이 실린다. "......알......퀘이드......?" "그치만 말야, 날 그런 식으로 죽인 상대는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지. 조 금, 어떤 녀석일까 하고 흥미도 일었었어. 그리고 - 그렇게 그 누군가를 강 렬하게 생각해 본 적,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어. 처음엔 그저 미울 뿐이었 지. 하지만 네가 어떤 사람일까 하고 생각이 들었을 때 그게 180도로 뒤집 혀져 버렸어. 어쨌든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다. 날 그런 식으로 죽인 녀석, 처음으로 내가 나 자기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릴 정도로 - 쭉 생각하는 그 누군가와. 시키 - 아까 말했었지? 혼자서는 쓸쓸할 거라고 말야. 나, 그 럴 리 없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 그토록 미친듯이 누군가를 떠올리고 시 키 너를 언제 오나 언제 오나 하고 계속 기다렸을 때의 기분은 정말로 행복 했었어. 사실은 당장이라도 만나러 가보고 싶었지만 꾹 참으면서 시키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서 좋았어. 그 땐 정말 즐거웠지. 가슴이 마구 두근 두근거리고 시키가 어떤 사람일까 하고 맘대로 상상하고 그랬었어." ......알퀘이드의 손이 등에서 멀어진다. 나는 - " - 생각해보니 말야. 그때부터 난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하게 되어버린, 스스로가 혼자라는게 너무도 참을 수 없게끔 느끼기 시작해 버렸어. 시키는 날 좋아한다고 했지만......난 시키랑 만나기 전부터 시키 자신이랑 사랑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 " 알퀘이드의 목소리는 그저 사랑스럽기만 할 뿐이다......더 이상 망설일 필 요는 없어. 뒤를 돌아 그대로 알퀘이드를 꼭 껴안았다. (H신입니다) "......피곤......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침대 위에 누워있는 알퀘이드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알퀘이드는 편안한 모습으로 새근새근 잠들어있다. ".........응" 왠지 가만히 생각해 보고 있자니 좀 부끄러워진다. 알퀘이드를 안았다는 사 실에 내겐 한 점 후회도 없었다. 다만 아주 조금. 아주 조금만 더 이성을 차려서 알퀘이드의 피부의 감촉이라든가 부끄러워하던 표정 같은 것들을 천 천히 음미해보고 싶었다. "......아직 무리려나. 지금은 그냥 이러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니 까..." ...아니 그보다, 앞으로 알퀘이드의 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수 있을 날 이 과연 올지 어떨지도 의문이다. 오늘도 결국엔 내가 뭘 어떻게 했는지조 차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는 것 정도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냐 하면, 사실은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체력 을 소모해버렸을 정도로. " - 후암" 하품을 참아가며 자고 있는 알퀘이드의 얼굴을 바라본다......난, 알퀘이드 를 정말로 사랑해. 일방적인 그 감정에 알퀘이드는 응해줬어. 내가 사랑하 고 있는 형태와는 다른 것일지도 모르지만 알퀘이드도 날 필요로 하고 있 어. 그것 만으로도. 그것만으로도 난 지금 너무도 기뻐. 내가 그토록 원해왔던 거잖아. 알퀘이드가 - 지금까지 쭉 외톨이였던 알퀘이드가 자신 이외의 다 른 사람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너무 기뻤다. " - 그렇게 하면 말야. 넌 더 이상 외톨이로 안 있어도 돼." 의식이 멀어진다...아무래도 나도 슬슬 다운 기미를 보이는 것 같다. 알퀘 이드가 자들어 있는 침대에 몸을 눕히고 크게 한숨을 내쉰다. 그대로, 마치 가라앉듯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깊은 꿈 속에서. 먼저 일어난 알퀘이드가 뭔자 좋지 않은 짓을 하는 꿈을 꿨다. 알퀘이드는 혼자서 몰래 뭔가를 하고 있다. 뭘 하느냐고 물어보는 나. "어머? 시키 일어나 있었어?" 아니......일어났다기 보다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알퀘이드 덕분에 아 직 몸 이곳저곳이 좀 말을 듣지 않아서 말야. " - 그래. 좋았지만, 괜지 좀 부끄러워." ......알퀘이드는 소녀처럼 활짝 웃는다. 눈을 감고 있을텐데도 알퀘이드의 하는 동작 하나 하나가 보인다는게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너무도 행 복해 보이는 표정 때문에 그런 사소한 일들은 잊어버린다. "저기, 시키?" 왜 그래, 또. 너도 피곤할테니까 밤이 될 때까지 자고 있으라구. "만약에 말야. 만약에 내가 정말로 흡혈귀가 되면 시키는 어떻게 할 거야?" ...별 이상한 소리 다 물어보네. 하지만 그건 일어날 리 없는 일이야. 왜냐 하면 넌 피를 빠는게 무섭댔잖아. " - 그러니까 만약에 말야. 살아가기 위해 다른 생명을 뺏는 건 자연계에선 당연한 섭리잖아. 그러니까 - 만약에 내가 그렇게 되어버렸을 때 말야." ......그만해. 그런 일이 있을 리도 없을 뿐더러 - 만약에 라는 이야기는 별로 안 좋아한다고 전에도 말한 적 있었잖아. "그래? 난 IF가 좋은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땐 뭔가 방법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 ......아아, 그러고 보니 전에도 그런 소리 한 적이 있었지, 알퀘이드. "응. 그러니까......시키가 좀 더 험악하고 그런 녀석이었더라면 난 어떻게 했었을까나?" ......알......퀘이드......?" " - 좋아해, 시키. 이런 기분이 들게 해줘서, 그걸 입으로 전해줘서 정말로 고마웠어." ......어째서. 알퀘이드는 울고 있는 거지? "그럼, 시키가 일어나기 전에 나 가볼게......시키 얼굴 마주보고 작별인사 를 할 수 없으니까, 이걸로 봐주라." ......찰칵, 문이 닫히는 소리. 잠이 들어있는 채. 멍하니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 - 응" 정신이 들었다.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아직 밝은 햇살이 스며들어온다. 시 계를 보니 이제 막 12시를 넘긴 시각이다. "아차, 학교......!" 몸을 일으킨다...아니, 가만 보니 오늘 일요일이잖아. 학교에 갈 필요도 없 고 뭐 좀 켕기는 일이 있다면야 또 집에 연락도 안 하고 알퀘이드 네 집에 서 하룻밤 묵었다, 는 정도 뿐일까. " - " 그러고 보니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은데. 그러니까 알퀘이드랑 이야기를 하 고 마지막에 알퀘이드가 나한테 키스를 해준 내용의 꿈. "......하아. 나도 참 많이 풀어진 모양이네." 침대에는 아직도 알퀘이드가 자고 있을텐데도 그런 속편한 꿈이나 꾸고 있 다니, 그야말로 행복하다는 증거일지도 몰라. "그렇지, 알퀘 - " 침대 쪽을 돌아다본다. 목소리는, 거기서 멈췄다. " - 알......퀘이드?" 멍하니 침대를 바라만 볼 뿐. 침대 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알퀘이드의 모습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그럼, 갈게. 꿈 속에서.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잠깐..." 방 안을 이리저리 찾아다닌다. 알퀘이드의 모습은 당연히 찾아볼 수 없었 다. 그저 찾아낸 것이라곤. 테이블 위에 있던 한 장의 쪽지 뿐이었다. " - 이" ......무슨 장난을 치고 잇는 건지, 아니면 다른 나라 말인지. 쪽지에는 그저 '바이바이' 라고 밖에 적혀있지 않았다. " - 어째서" 믿을 수가 없어. 하지만 그 이상으로 - 알퀘이드가 어떻게 됐는지 머리 속 으로 이해해 버린다. " - 어째서, 야" ......장난치지마. 바이바이 라니, 너무 간단하잖아. 약속했는데. 함께 있 자고 약속까지 했는데, 알퀘이드한테 끝까지 협력해 주겠다고 말했는데. 어 째서 - 어째서 또 외톨이로 돌아가 버린 거야, 알퀘이드 - "어째서야, 알퀘이드 - !!" 있는 힘껏 외치고는 쪽지를 구겨버렸다. - 그리고 마치 정신이 나가버린 듯. 방을 뛰쳐나와 거리를 찾아헤맸다. ......알퀘이드를 찾을 수가 없어. 나도 알아. 두 번 다시 알퀘이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 나도 잘 알아. - 하지만 절대로 포기 못 해. 이대로라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 알퀘이드 를 찾아서 있는대로 소리라도 질러주지 않으면 정말로 미쳐버릴 것만 같은 데도 알퀘이드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이젠 절대로 만날 수 없어. " - " 무언가가 절망적으로 끝나버렸다. 알퀘이드는 홀로 로어라는 흡혈귀와 승부를 지으러 사라져버린 거야...... 아니, 벌써 로어를 해치우고 이미 이 마을을 떠나버렸는지도 몰라. " - " 미쳐버리기 전에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됐다. ......매앰. 귀 안쪽에서 매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매미의 허물. 몸이 가벼워지고, 안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게 되고,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게 바로 넋이 나간다는 걸까. 눈물조차 흘러나오지 않 는다. 빈 껍질만 남은 채 발이 움직인다. 동물의 귀성본능이라는 걸까. 아 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나는 자신의 집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10. 붉은 홍월 Ⅱ - 끝> -------------------------------------------------------------------------------- <11. 불길한 밤> 히스이가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깬다. 어젯밤 - 저택으로 돌아온 후 내 방에 틀어박혀 내내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시키 님, 뭔가 불편하신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 - 아니. 아무렇지도 않아." 라고 말한 뒤 침대에서 일어난다. ......나 스스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정도야.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 아하면서 몸은 평소와 같은 생활을 하려고 하다니. "아침 먹으라 이거지? 금방 갈게." "......예. 그럼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히스이는 뭐라고 말하고 싶은 듯한 표정인 채 방을 나선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아키하와 코하쿠가 있었다. "안녕."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인사를 하고 식당으로 들어선다. 아침을 먹은 뒤 거실 로 돌아왔다. 그대로 소파에 앉아 멍하니 시계를 쳐다본다. "......오빠? 저기, 오늘 학교 가시는 날이라는 거 아시는 거죠?" "응 - ? 아아, 그렇지. 학교엔 반드시 가야지." 잊고 있었어.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어져서, 앞으로는 이대로 영원히 껍질 째로 살아가게 되는 건 아닌가 하고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지. "......나한테는 토노 시키로서의 생활이 있지.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으면 학교에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오빠......?" 아키하가 왜 그러시느냐는 듯한 걱정스러운 시선을 내게로 보낸다. ......뭐라고 둘러대기도 귀찮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등교길에 나섰다. 여느 때와 다를바 없이 시간은 흘러만 가고 있다. 이렇게 몇 시간 째, 아무 런 목적도 없이 수업을 듣고 있다. 또각거리는 분필 소리. 칠판 위에 빠르 게 적혀가는 수식들을 무의식적으로 노트에 옮겨 쓴다. 문득 창 너머를 본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 - " - 나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런 곳에서 가만히 앉아서 수업이나 듣고 있고. 알퀘이드를 찾지도 않고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가서 말야. " - " 하지만 내게는 알퀘이드를 찾아낼 수단도 방법도 없어. 알퀘이드가 스스로 몸을 숨긴 이상 그녀석을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 그러니까, 정말로. 난, 알퀘이드를 잃어버린 거야 - . 뚝. "............" 내 책상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아...별 일 아냐. 그냥 샤프를 너무 세게 쥐 고 있다보니 또다시 부러져버렸을 뿐이라구. 수업이 끝났다. 시끄럽게 웅성거리는 교실 한가운데, 나 혼자 만이 수업중 과 마찬가지로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토노, 잠깐 좀 볼래?" 교단에서 수학선생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 - 예, 무슨 일이시죠?" 대답을 하고 교단 위로 올라선다. "토노, 네가 요즘 이상한 행동을 하고 다니는 것 같아서 말이다. 네가 밤늦 도록 거리를 쏘다닌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때, 그런 적 있었어?" "......예. 지난 며칠 동안 한밤중에 볼일이 좀 있어서." " - 그래." 수학선생 - 뭐, 우리 담임이긴 하지만 - 은 좀 언짢은 듯한 표정을 지어보 였다가 이내 안됐다는 듯한 표정을 얼굴에 띄운다. "토노 네가 늦은 밤에 쓸데없는 짓거리를 할만한 그런 학생이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직원회의 때 문제가 좀 생겨서 말이다. 학 생지도부 선생님께서 토노랑 이야기를 좀 하시고 싶다던데. 그러니까 수업 끝나면 학생지도실로 좀 가 봐. 재수없이 걸렸다고 생각하고 그냥 참아라." 말을 마친 담임은 교실을 빠져나갔다. 방과후. 학생지도실에 가보니 지도부 선생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잠깐 생 각해 보니 지도부 선생들은 모두 체육계 특활부의 고문을 맡고 있는 사람들 뿐이다.설마 하니 자기들 부 활동이 다 끝날 때까지 안 올 생각인지도 모른 다. " - " 의자에 앉아 자세를 바로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큭" 입술을 깨문다. 여기서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구. 하지만 내게는 이것 밖에 할 일이 없어. 창 너머로 비치는 풍 경은 저녁노을로 붉게 물들어 있다. 교정에서는 부활동에 열을 올리는 학생 들의 고함소리와 하교하는 학생들이 서로 떠들어대는 소리가 뒤섞여 물결치 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런 가운데, 이 교실 만이 마치 바깥세상과 단절되어있는 듯 조용할 뿐이 었다. ......화가 난다. 어째서 난 이런 곳에서 이런 짓이나 하고 있는 거지? 아 무 것도 못하는. 너무도 무력한 나 자신에 대책없이 화만 치밀어오른다. 하 지만 그걸 해결할 수단이 없기에 결국엔 허물조각처럼 남이 명령한 거나 듣 고 있을 수밖에는 없다. "......나, 뭐하고 있는 거지" 대답이 없다. 그대로 쭉,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방과후 들려오는 소리만 듣 고 있었다. 찰칵. 긴 초침이 밤 7시가 됐다는 사실을 내게 알린다. 학생지도실에는 아무도 찾 아오지 않았다. 학교 문 닫는 시간이 6시, 교사들이 퇴근하는 시간이 6시 반이었으니까 학교에는 이미 아무도 남아있지 않으리라. "......잊어버린 건가?" 의자에서 일어선다. 홀로 지금까지 생각에 잠겨있던 탓인지, 머리 속이 다 소 평상시 상태로 돌아온 것 같았다. 쭉, 생각하고 있었다. 난 이제 뭘 어떻게 해야만 할까, 뭘 우선해야만 할까 에 대한 것들을. 난 지금부터 - <1. 쓸데없는 일이 되더라도 알퀘이드를 찾아나설 뿐이야 - 선택> - 알퀘이드를, 찾아나서자. 그게 아무리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쓸데없는 일인 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머리 속에 그것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찾아 낼 때까지 계속 찾을 거야. 알퀘이드를 혼자 내버려둘 수도 없는데다, 멋대 로 - 멋대로 로어인가 하는 녀석이랑 승부를 내게 내버려둘 것 같냐. " - 좋았어" 결심을 내렸다. 일단 그렇게 결정했으면 이런 데에서 시간이나 낭비하고 있 을 수만은 없지. 한시라도 빨리 거리로 나가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퀘이 드를 찾아내야해 - 당연한 소리겠지만, 복도에는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형광등 불 빛도 꺼져있었고 창 너머로 비춰들어오는 달빛만이 복도를 푸르스름하게 비 추고 있을 뿐이었다. " - " 복도에서 밤하늘을 보고서야 알았다. 오늘 밤은 다른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둥근 달이 떠있는 줄을. "............" 잠시, 모든 것을 잊고 달을 올려다본다. 은빛 달. 마치 유리로 조각된 듯한 저 아름다움은 손을 대면 금새 깨져버리기라도 할 듯 위태롭기만 하다. 그런 달을. 어렸을 적.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보고 있었던. 것 같다. - 찌릿. "큭............!?" 갑자기 가슴의 흉터가 아파온다. - 두근. 심장이 한층 더 격렬하게 뛴다. 온몸의 혈관이 활성화되고 호흡이 일정치 않게 돌변한다. - 찌릿. 가슴에 손을 대어보니. 교복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흉터가 벌어져 피가 새어나오고 있다. - 두근. "하 - 아, 하아 - 학 - " 호흡이 거칠어진다. 온몸에 오한이 들었고 마치 등골이 그대로 껍질을 찢고 밖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을 정도로, 아프다. - 찌릿. - 두근. - 찌릿 - 두근 - 뚜벅. 두근거리는 소리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아 - " 누군가, 오고 있어. 복도 안쪽에서 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어. 뚜벅 했던 소리는 발소리였어. 뭔가 - 위험해. 지금까지처럼 목숨이 왔다갔다 할지도 모르는 위험함을 느끼고 온몸이 마구 요동쳤던 것과는 틀려. 두통이 인다. 이 아픔. 이 위기감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 토노 시키는, 이 정체불명의 존재하고만큼은,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될 것 같은 - . "하아......하아......" 거친 숨을 내뱉으며 안경을 벗는다. 나이프는 - 주머니 안에 들어있다. 누군가가 다가온다. 달빛 쏟아지는 가운데, 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아무 래도 남자인 것 같았다. 죽음의 [점]은 그의 몸 중심에 심장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마치 기계의 전선들처럼 온몸 구석구석으로 이리저리 퍼져있는,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죽음의 [선]. " --------------------------------------" 호흡이 멈췄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걸 거야. 저런 사람, 난 알지도 못해. 하지만 - 누군 가와 닮아있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뚜벅, 뚜벅. 남자가 내게로 다가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드러 난다. " --------------------------------------" 누구랑 닮았지. 누구랑 닮았지. 누구랑 닮았지. 누구랑 닮았지. 난, 그 누군가가 누군지 잊어버린 건가 - - 핏발 선 눈. 온몸에 퍼져있는 죽음. 마치 대기가 얼어붙기라도 한 듯, 이질감을 느낄 정도의 적막감. 틀림없어, 이 녀석은 인간이 아냐. 뚜벅, 더욱 더 가까이 다가온다. 사내는 나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소리없 이 빙긋 얼굴에 웃음을 지어보인다. " ------------------------------!" 나이프를 손에 쥔다.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날이 빠져나온다. 남자 는 내게로 다가선다. 생각할 시간도, 주저할 여유도 없었다. 흰 달빛 아래. 마치 슬로모션이라도 연기하듯 눈 앞에 서있는 남자 쪽으로 나이프를 겨눈다.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천천히. 마치 내 시간만이 멈춰져 있는 것처럼. 남자는 내 손에서 간단히 나이프를 빼앗아들더니 그 나이프를 내쪽으로 향 하게 잡는다. " - !?" 몸이 - 움직이지, 않아 - "......시키. 죽음을 볼 수 있는 능력은, 너 혼자만의 특권이 아냐."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팔을 움직였다. - 찌릿.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뇌수가 얼어붙는다. 예전에, 같은 일을 당했던 내 몸이 그 아픔을 기억하고 있었다. " - 아" 육체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눈 앞의 남자에게 빼앗겼던 내 나이프는 나 자신의 가슴에, 깊이 찔러박히 고 있었다 - 몸이 나동그라진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바닥에 무너져내린다. 펄럭. 흰 천 같은 것이 땅에 떨어진다 - 나이프에 찔리기 직전에 그 남자의 몸에 기대어섰던 때문이리라. 난 땅에 쓰러지면서, 남자의 몸에 감긴 붕대를 풀 어헤쳤다. "그래. 내 맨얼굴이 보고 싶은 거야, 시키?" 라며, 남자는 스스로 붕대를 풀기 시작한다. " - " 눈 앞이 캄캄해진다. 남자의 얼굴. 이 남자의 얼굴을 확실히 난 알고 있었 다 - 닮았어. 왜냐하면 이 남자의 얼굴은 - 그 더웠던 여름 어느날에, 내 앞에서 피범벅이 되어있던 소년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있으니까 - .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나이프는 가슴에 꽂혀진 채였다. 이 상하게도 아무런 아픔도, 출혈도 없었다. 그저 체온만 내려갈 뿐.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간다. 신체의 자유가 완전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너한테 죽었을 때의 빚, 확실히 갚아줬다." 남자는 날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 남자의 얼굴. 남자의 그 모습은 확실히 기억에 있는 그것이었다. - 아니, 있어야 당연할 것이었다. 아아 - 어째서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걸 까. 어렸을 적. 토노 저택에서 뛰놀던 나와, 아키하와, 또 다른 한 아이의 대한 일을. 언제나 - 언제나 우린 함께였어. 아키하랑 놀 때도, 언제나 난 "그녀 석"이랑 함께 아키하를 우리 놀이에 끼워주고 그랬었는데 어째서 - 난 지금 까지 "그녀석"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걸까......? "시 - 키" "그래, 시키. 정말 오랜만이야." 눈 앞의 남자 - 시키는 이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입가를 위로 올린다. 시키(シキ). 시키(志貴). 아키하. 시키(シキ). 시키(シキ). 아키하. 시키( 志貴). 그런 의미없는 낙서자국들. "이건 - 말도 안 돼" "미안해 시키. 너하고 좀 더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돼서 말야, [점]을 조금 빗겨나가게 찔렀어. 즉사하진 않을 거고, 앞으로 잠깐 동안은 의식이 붙어 있을 거야. 그렇게 쉽게 죽진 말라구." 기분 나쁜 웃음 소리와, 네로와의 싸움에서 기분 나쁠 정도로 느꼈었던 불 쾌감.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난 깨달았다. 이녀석이 - 알퀘이드의 "적"이야, 라고. "그럼 - 거기 그 나이프는 내가 가져가도록 하지. 어차피 금방 있으면 사라 져 없어져 버릴 너한테는 필요없는 물건일테니까 말야." 남자의 팔이 내 가슴에 박힌 나이프로 뻗어나온다. 그리고 나이프 자루를 손에 쥔다. 그게 뽑혀나가면 난 틀림없이 바로 그 순간에 죽음을 맞이하겠 지. 하지만 너무도 무력했다. 내 몸은, 이젠 눈꺼풀조차 깜빡일 수 없을 정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 다. "으윽 - !?" 날았다. 갑자기 시키의 몸이 차에라도 들이받힌 듯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검은 법의를 입은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있는 복도는 3층에 있었음에도 그녀는 복도 창문 유리를 깨뜨려가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큭 - !" 몇 미터나 뒤로 날려가버린 후. 시키는 천천히 자세를 바로잡더니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나와 - 나를 감싸듯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있는 시엘 선배를 응시한다. "너 - 한 번도 모자라서 두 번씩이나 날 방해하다니" ".................." 선배는 아무 말없이 그저 시키(シキ)만을 노려볼 뿐이다. 시키는 선배에게 달려들려는 듯 허리를 앞으로 숙인다. - 그때.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갑자기 시키는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후후, 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 그래, 너 그랬었구나! 설마 설마 했지만 정말로 그랬을 줄이야! 정말 재밌어, 이러한 사태는 800년 동안 되풀이되어 온 중에서도 정말 처음 있는 일이야......! 그렇다면 아마도 이번엔 지금까 지랑은 다른 전개가 기다리고 있겠군......!" 진심으로 웃음이 나와 견딜 수 없다는 듯, 시키는 계속 웃고만 있다...선배 는, 그저 아무 말없이 눈 앞에 서있는 흡혈귀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그래? 날 죽이려고 찾아왔잖아? 아니면 뭐야? 역시 껍데기는 아무 것도 못한단 소린가?" " - " 선배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흡혈귀에서 시선을 피하며 땅에 쓰러진 내 몸 을 안고 일으켜 세운다. "호오. 나와의 인과를 끊기보다, 그 가짜를 더 소중히 여긴다는 건가? 하지 만 그건 쓸데없는 짓이야. 그녀석, 이젠 못 산다구. 지금까지 토노 시키(遠 野志貴) 지 하고 싶은 대로 해왔었던 짓을 그대로 돌려 갚아줬으니까 말야. 사선에 상처를 입은 녀석한테는 그 어떠한 치료도 무의미하지. 저 공주님 조차 소생하기 위해 8백년의 세월을 맞바꿀 수밖에 없었으니까 - 그녀석 같 은 평범한 인간한테 '죽음'에서 도망칠 방책은 없어." 비웃음 소리만이 들려온다.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결국, 단 한 마디도 내뱉지 않고서. 선배는 날 감싸안은 채 흡혈귀를 뒤로 하고 3층 창문에서 밖으로 뛰어내렸다. 3층 이라는 높이는 선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가벼운 발놀림 으로 지면에 내려서자마자 선배는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학교에서 빠져나가 려 달리기 시작한다. - 그런 가운데. 난 공허해진 눈동자로 밤의 교사(校舍)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 다. 방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3층 복도. 승리에 찬 미소를 띄우며 우릴 그 냥 도망치도록 내버려두는, 긴 흑발의 흡혈귀의 모습을 멍하니, 텅 비어가 는 의식 속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 . <11. 불길한 밤 - 끝> -------------------------------------------------------------------------------- <12. 달세계> 선배는 날 들쳐업는 채 곧바로 토노 저택으로 향했다. 뭐하려는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좀 곤란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 가슴엔 아직도 나이프가 꽂혀져 있는 말도 안 되는 상태고 틀림없이 죽음의 문턱을 오르내리고 있는 그런 상황이다. 그런 모습을 아키하가 보기라도 한다면 평소 때처럼 걱정만 하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거란 말야 - " - " ......젠장, 목소리가 안 나와. 제발 가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 소리는 커녕 숨만 쉬고 있기도 벅찰 지경이었다. "토노 군은 잠자코 계세요......괜찮아요, 토노 군의 여동생 분이시라면 틀 림없이 토노 군을 구해낼 수 있을 거에요." " - " ...구해낸다니, 그건 무리야 선배. 나이프에 가슴을 찔려 이젠 몸도 자유롭 게 움직이지 않아...그런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을 구해낼 수 있는 녀석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단 말야. "아뇨, 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말이 되지 않는다구요......! 아시겠 어요? 토노 군의 여동생 분이 토노 군을 구해낼 수 없다면 토노 군은 벌써 8년 전이 이미 죽었을 거에요. 그러니까 - 틀림없어, 이번에도 아직 늦진 않았을 거에요......!" ......너무 토노 군, 토노 군 하는 바람에 선배가 하는 말이 뭐가 뭔지 잘 알아듣기가 힘들다. " - " .....선배, 그거 무슨 - "됐으니까 입 좀 다물어요! 계속 그렇게 말씀하시면, 토노 군 정말로 죽게 될 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그런 심각한 얼굴로 선배는 내게 소리를 지른다... 왠지 엄청나게 나쁜 짓을 한 것 같아 두 눈을 꼭 감는다. ............뭐, 이래저래. ...............더 이상. 눈 뜨고 있기가. 힘들어졌 으니까. - 쭉, 가족들 하고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어렸을 적부터 가슴 속 깊이 간직해 오고 있었다. 토노 가에서 아리마 가에 맡겨졌을 때부터.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훨씬 옛날부터 쭉 가족과는 동떨어진 관계였 다. 어째서일까, 그 이유를 생각해본 적도 없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나 혼자였고. 주변에는 부모님 비슷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들의 아이로 있으 려 나 나름대로 많이 노력했을 뿐이었다. 오래된 다다미 방이 있었던 집이 제일 처음 내가 있었던 곳인 것 같다. 거 기서 어떤 사고가 일어나 큰 저택집에 맡겨졌다...거기엔 내 나이 또래의 남매가 있었는데 나하고 아주 사이 좋게 지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 남 매의 아버지하고는 마치 어떤 벽 사이에 가로막힌 것 같은 관계가 계속되고 있었다......그래도 서로가 진짜 가족 같은 그런 사이를 만들려 노력은 하 고 있었다. 피가 서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린 한가족이라고 믿으 려 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끝이 나 버렸다. 큰 사고가 일어나 병원에 실려 갔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가운데 내 눈이 이상하게 변해버려. 그때까지 도 혼자 있는 채로, 결국엔 혼자서. 이제 그만 남들 앞에서 사라져 버릴까 도 생각했었다. 저 맑게 개인 푸른 하늘처럼 아름다웠던 마법사를 만날 때까지는. ...................................................................... ....................................................그리운 마음이 들게 하는, 꿈. "살아 - 있네"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입에서 터져나온다. 몸은 여전히 손가락 하나 꼼 작도 하지 않는 그런 상태였지만 그럭저럭 말은 할 수 있는 것 같다. 의식 도 원래대로 돌아와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내 방이라는 것도 이미 파악하 고 있었다. "......오빠? 정신이 드셨어요?" "아키하 - 뭐야, 거기 있었어?" 아키하는 베갯맡에 서서 줄곧 날 간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키하, 너 - " 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아 아키하를 쳐다본다. 아키하는 왠지 어색하다는 듯 내게서 시선을 피해버린다. "......저기......이 상처는, 말야" 그녀석한테 - 시키한테 입은 거야, 라고 말할 순 없어. 아키하는, 이런 상 처를 입고 돌아온 날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가슴에 나이프가 찔려있는 그런 상처를 입었다면 보통은 바로 병원으로 보냈지 집에는 들이지 않을 것 같긴 한데...... "아키하, 저기말이지 - "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대강의 사정은 그 분께 들었으니까요." "......그 분이라면......선배를 말하는 거야?" 아키하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 ......왠지 엄청나게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진다. 대강의 사정이라니, 선배 는 아키하에게 어떤 사정을 설명한 걸까......? "............음" 안 돼. 선배가 아키하한테 어떻게 설명했는지를 모르는 이상 이상한 걸 물 어볼 수는 없는 노릇 아냐. "저기......음, 아키하. 선배는 어떻게 됐어?" "그 분이시라면 거실에서 몸을 쉬시게끔 하고 있어요......원래대로라면 저 러한 사람은 저택에 들여놓아서는 안 될 일이지만 그래도 오빠를 구해주신 분이시니까요. 함부로 대해드릴 수는 없죠." - 그리고. 아키하의 표정은 조금씩 딱딱하게 굳어진다. "오빠. 그 가슴에 난 상처는 시키한테 입으신 거로군요." 단호히. 아키하는 그 사실을 내게 물어온다. "아, 아키하, 너 - " "말씀드렸죠? 그 분한테서 대강의 사정은 들어 알고 있다고...뭐, 굳이 듣 지 않았어도 오빠의 용태를 보고 한눈에 모든 사정을 알았지만요." " - " 말이, 터져 나오지 않아. 아키하는 - 마치, 처음부터 시키를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잖아. "아키하, 너......시키를 - " "......예, 알고 있어요. 전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서 오빠를 이 저택으로 다시 불러들인 거니까요." 마치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현기증이 일어난다. "......자, 잠깐 기다려봐.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 리야? 난 아직......솔직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확실히 어렸을 적 에 나랑 아키하 말고 또 다른 애 한 명이 있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걸 물어보면 넌 - " 저희 말고 다른 애는 없었어요, 라고 했었잖아. "......죄송해요. 저, 오빠한테 거짓말만 해드렸어요......이번 일도...... 이렇게 될 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쭉 거짓말로 속이려고만 하고 있었어 요." "속이다니......그럼 역시 우리 말고 다른 애가 있었던 거구나. 그치만 어 째서 그 3번째 애, 갑자기 사라져버린 거지?" ......그래, 정말로 기억나지 않았다. 3번째 아이......내 나이 또래의 소 년이 있었고 언제나 둘이서 이리저리 뛰놀았던 건 기억이 나. 우린 그렇게 때때로 아버지의 눈을 피해 밖에 나가 아키하와 함께 놀았었어. 하지만 아 무리 해도 기억이 나지 않아. 그 녀석이 사라졌던 이유. 그 녀석의 이름이, 나와 같은 시키였다는 사실 등. 그래, 그 모든 기억을 -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어. "......잘 모르겠어. 기억나는 거라고 해봤자, 그건 - " 저 정원에서 봤던 광경. 이 저택에 돌아왔을 때 마치 어떤 백일몽처럼 뇌리 에 스쳐지나갔던, 저 무더운 여름날의 광경 뿐. 이카하가 있었고, 그리고 내가 있었고. 눈 앞에는 피로 얼룩진 또 다른 소년의 시체가 있었고. " - 아" 그래, 시키는 이렇게 말했어. "너한테 죽었을 때의 빚, 확실히 갚아줬다", 라고. 그건, 다시말해 - "그 꿈은 - 나, 정말로, 그 애를 - " 죽여버린 거란 말인가. 그래서 그 애는 갑자기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고 난 나에게 있어 가장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줄곧 잊고만 있었단 소린가. "아키하, 나 - " "아뇨, 아니에요. 오빠는 아무도 죽이거나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생각하게 끔 토노 마키히사......저희 아버님이 오빠께 명령하셨던 거죠." "아버지......가?" ......그런, 정말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잖아. 어째서 아버지가, 나한 테 그런 명령을 했다는 거야. "......아키하. 너,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 날 다시 불러들였다고 했지? 그래, 어떻게 된 건데. 너 - 너 8년 전의 일도, 시키에 대해서도, 전 부 알고 있었단 소리야?" "......예. 시키에 대해서, 오빠가 그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어 요. 될 수 있다면 영원히 잊고 살게하고 싶었어요......하지만 그것도 이젠 다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렸군요. 처음부터 -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이야기였 어요." 라며, 아키하는 왠지 자조 섞인 미소를 짓는다. 아키하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빠. 토노 가가 특별한 혈족이라는 사실은 그 분한테서 들으셨겠 죠? 믿지 못하시겠지만 토노의 피 속에는 인간 이외의 것들의 피가 섞여들 어와 있어요......적어도 전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 그렇게 배우며 자라왔 죠. 물론 그걸 곧이 곧대로 믿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도저히 믿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생기고야 말았어요......그게 8년 전의, 오빠가 시키한테 살해당 한 사고였죠." "......살해당했다, 라고......내가, 시키한테......?" 아키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하지만, 그거 말이 안 되는 소리잖아. 완전히 거꾸로잖아. 피범벅이 되어 땅에 쓰러져 있던 건 시키였고......아까 시키가 분명히 [너한테 죽었 을 때의 빚, 확실히 갚아줬다] 라고 말했었잖아......!? "......토노 가의 사람들은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스 스로의 안에 '이질적인 피'가 점차 늘어만 가죠. 이 피는 그다지 좋은 건 아니에요. 토노 가의 혈통에 섞여들어온 이종(異種)은, 단순한 짐승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자신의 본능을 비대화시켜요. 인간다운 부 분을 이성이라고 칭한다면 짐승에 가까운 부분인 본능이 이성을 몰아내버린 다고 할까요." "............아키하, 그 소리..." "......저도 알아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믿기 힘드시겠지만 지금은 잠자 코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 아니. 그거랑 비슷한 녀석을, 난 잘 알고 있어. 지금도 시키 같은 놈이랑 만나지 않고 이 내 몸뚱이 하나만 제대로 움직이고 있었더라면 녀석을 찾으 러 바람처럼 뛰쳐나갔을테니까. "하지만, 토노의 혈통에 속한 자들이 인간으로서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건 훨씬 나이가 들고나서부터에요......저희 오빠처럼......시키처럼 어렸을 적에 '반전(反轉)'하는 예는 지금까지 없었어요. 토노 가 사람이 각각 어떤 이종의 피를 몸 안에 가지고 있는가에는 개인차가 있다고 들었어요. 겉모습 이 거의 변하지 않는 자도 있는가 하면 정말로 몸의 형태 자체가 변해버리 는 자들도 있죠. 시키는 - 전형적인 후자에 속했어요." "후자라면......몸의 형태가 바뀌어버리는......" "......예. 시키가 왜, 그토록 어린 나이에 미쳐버렸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 어요. 다만 어떤 예고도 없이 반전해 버렸고, 그때 시키가 달려든 것이 오 빠......당신이에요." "시키가......나에게, 달려들었다고......?" 가슴의 상처가 아려오는 것 같다. "그 때의 장소가 저 정원이었어요. 오빠는 시키에게 가슴을 꿰뚫려 거의 빈 사상태였죠. 그 자리에 아버지께서 달려오셔서 시키를 말리셨어요......이 성을 잃은 시키를 말리기 위해서는 숨통을 끊을 수밖에 없다...토노 가의 당주에게는 그렇게 반전해 버린 일족의 구성원을 처리할 의무가 있어요. 아 마도 - 오빠가 본 피에 젖은 시키란, 아버지께 처리당한 후의 시키가 아니 었을까요." " - "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때 다른 무엇인가가. 너무도 중요한 일이 있었 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오빠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셨어요. 그 다 음 내용은 오빠가 기억하시는 대로 '토노 시키가 사고를 당했다'라는 거짓 말로 병원이 실려가신 거죠." " - " "......제가 차녀이면서 당주로서 키워진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한 번이라 도 '반전'한 자를 당주로서 맞아들일 수는 없기에 시키는 당주의 자리를 잇 지 못하게 됐고 유일하게 피를 이은 제가 당주의 뒤를 잇게 된 거죠." ......그렇구나. 그런 경위로 아키하가 당주라고 하는 큰 책임을 짊어지게 된 건가......응? "아키하. 좀 이상하지 않아? 봐봐, 그러니까, 반전을 일으킨 건 시키잖아. 난 - 저기, 정상이잖아?" "......말도 안 돼. 오빠, 이런 이야기를 믿으시는 거에요......?" " - 저기 말야 아키하. 네가 이런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그......뭐, 이 런 종류의 이야기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거든. 어쨌든 그런 것보다! 그거 좀 이상하지 않느냐고 물어봤잖아, 아키하." "그러셨었죠......하지만 오빠. 이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이야기에요. 그 러니까 더 이상은 묻지 않아주시면 안 될까요......?" " - 안 돼, 아키하. 미안하지만 시키에 대한 일은 나한테 있어서도 중요한 이야기니까말야. 그놈은 나한테 있어서도, 그 녀석한테 있어서도 공통된 적 이야. 무시할 순 없어. 그러니까 - 정체를 알아야 해. 그걸 위해서 의문점 같은 건 남겨둘 수 없는 거야. 어째서 아버지의 손에 죽었을 시키가 살아있 는지, 어째서 - 내가, 그런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는지. 제발. 가 르쳐줘, 아키하." "......간단한 이야기에요. 오빠한테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토노 가의 당주 자리를 이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죠. 정말로 그런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 었군요, 오빠......그 신기루가, 언제까지고 영원히 계속됐더라면 좋았을텐 데." "......아키하......?" "......오빠는 토노 가 사람이 아니에요. 그저 아버지께서 지나가시는 마음 으로 제 오빠인 시키(シキ)와 같은 시키(志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양자로 들였던 아이였으니까요." ----------------------------------------, 에? "......오빠와 저, 그리고 시키(シキ). 우린 친남매처럼 키워졌죠. 오빠와 시키는 정말 사이가 좋았었어요...저도 어린마음에 질투할 정도로, 정말 사 이가 좋았었어요. 하지만 시키가 반전해 버린 그 순간 모든 것이 미쳐버렸 던 거에요. 시키는 은밀히 처리해버렸지만, 토노 가의 장남을 죽일 수는 없 었죠. 토노 가는 사회적으로도 나름대로의 지위를 갖고 있는 가문이잖아요? 그래서......간단하게, 토노 가의 뒤를 이을 장남이 죽어버렸습니다 하고 주위에 알리실 수 없었던 거죠. 그때 아버지는 생각해 내셨어요. 시키한테 죽을뻔 했던 오빠를 진짜 토노 시키로 삼고 반전해서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 린 시키를 사고로 사망한 양자로 처리해 버리면 된다, 고. 결국 - 오빠는 시키(シキ)가 되어버리신 거에요. 죽은 쪽이 살아남고 죽인 쪽이 죽어버렸 죠. 그게 오빠와 시키의 관계에요." 하 ------------------------------ 하. "......그럼, 뭐야. 난 아키하의 오빠 같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토노 가 의 사람도 아닌 - " 물론 아리마 가 사람도 아닌. 난 - 대체 누구란 말야. "......죄송해요......이제 그 누구도 그 질문에는 대답해 드릴 수 없어요. 오빠는 - 시키란 이름을 가진 아이는 이제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요. 시키(志貴)란 아이는 8년 전에 죽었어요. 그건 수명이 다해 죽는 그런 죽음 이 아니라 존재가 사라진다는 의미의 죽음이에요. 호적도 과거도 집도, 그 기억조차 이젠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아요. 오빠가 토노 시키(シキ)가 되 신 8년 전, 모두......아버지께서 처분해 버리셨으니까요..." --------------------------------- 하. "그래서......오빠는 아리마 가에 맡겨지셨던 거에요. 당신의 체면을 위해, 어쨌든 토노 가의 장남은 계속 살아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사실은 피가 이 어져있지 않기에 당주 자리는 물려줄 수 없다. 아버지는 사고 때문에 몸이 약해졌다는 이유를 들어 오빠를 아리마 가로 추방하신 거에요......두 번 다시, 토노 가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라고 제게 명령하시고..." ......아키하의 목소리가 왠지 떨리고 있는 것 같다. 고개를 숙이고, 마치 무엇인가를 참아내는 듯한 모습을 취한다. ......아키하는, 나에 대한 엄청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을 거다. 난 그런 걸 - 탓할 생각은 없다. 거꾸로 아키하가 그렇게 생각해 주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조금 마음이 나아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 지금은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안 돼. 의문점이 아직 2개나 남았어. 이야기를 계속하자, 아키하. 모든 게 아직 다 해결되지 않았어." " - 오빠?" "먼저 첫 번째. 내가 토노 가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그럼 다 른 의문점이 생겨버리잖아...토노 가 사람은 특별한 인간이라고 했는데. 사 실은 말야, 나도 좀 특이한 체질을 갖고 있다구. 선배는 내가 토노 가 사람 이니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말했고 나도 그대로 믿어버렸지. 하지만 난 토 노 가 사람이 아니잖아? 그럼 이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모르겠어요. 확실히 아버지께서는 일시적인 기분으로 양자를 들이실 그런 분이 아니시니까 - 오빠를 양자로 들이신 것도 다른 어떤 이유가 있어 서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뭐, 이제 와서 내가 누군지 하는 그런 것들, 솔직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야. 그러니까 아키하도 그렇게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필요 없 어. 그러니까, 말야. 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하 고 있는데. 원래는 그대로 죽어버렸어야 정상일 상처였잖아? 그럼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래. 그런 것들보다, 문제는 - "그래, 두 번째. 시키는 어째서 살아있는 거지?" 무의식 중에. 나는 아키하에게 적의가 담긴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오빠......그건......" "이상하잖아, 시키 그 녀석이 살아있다니. 시키는 토노의 피에 밀려 반전인 가를 해버렸댔잖아? 그래서 날 죽이고 아버지의 손에 숨통이 끊어졌어. 그 럼 - 저렇게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 " - 그건 - 그러니까" "가능성을 따지자면 한 개밖에 없겠지. 내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것처 럼 놈도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거야......아니, 어쩌면 아버지는 시키의 숨통을 끊을 수 없었을지도 몰라. 아무리 미쳐버렸다 해도 자신의 피를 나 눈 부모자식사이잖아. 그러니까 죽이지 않고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서 요양시키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병원에 갇혀지냈던 것처럼 말야." 아키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지금 내 발언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래. 그래서 시키가 정상으로 돌아오면 토노 시키(志貴)로서 저택 으로 불러들일 생각이었겠군, 아버지는 말야." "그런......그렇지는 - " 않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걸까. 아키하는 말없이 고개 숙인다. "......괜찮아. 아키하한테도 잘못 없고 아버지한테도 잘못 없어. 물론 시 키한테 잘못이 있다는 소리도 아냐. 원인은 말야, 정말 우연한 거였다니까. 어쩌다가 운이 좀 없어서 다른 나라의 어떤 미친 녀석이 시키한테 들어가버 린 것 뿐이라구. 아키하는 모든 게 미쳐버렸다고 했었지? 그냥 그 뿐인 거 야." 아키하는 고개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 좀 피곤해졌어. 솔직히 말해 나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았었어. 지금은 그런 쓸데없는 것들보다 빨리 알퀘이드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아키하. 좀 피곤한걸. 잘테니까 밖에 좀 나가주지 않을래?" ".........예. 오빠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아키하가 방 문쪽으로 향한다. " - 아키하." 물어보고 싶은게 아직 하나 더 남은 때문에 아키하를 다시 불러세웠다. "무슨 일이시죠, 오빠?" "아아......아키하는, 왜 날 이 저택으로 불러들인 거지? 난 아키하의 친오 빠도 아닌데 말야." "......그런 바보 같은 말씀 하지 마세요. 저에게 있어 오빠는 오빠 한 사 람 뿐이에요. 지금도 옛날에도, 오빤 잊어버리고 있을테지만 어렸을 때부터 쭉. 토노 아키하한테 있어 - 오빠는 오빠 한 사람 뿐이에요, 시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키하는 방 밖으로 나가버린다. -------------------------------------------------------------------------------- "............" 아키하가 나간 후 난 겨우 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계 바늘은 이제 막 밤 10시를 지나고 있다. 시키 - 아니, 학교에서 로어에게 습격당하고서부터 아직 3시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 내 몸은 아직 완전 하게는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내 몸이 리모컨으로 움직이는 로봇이라도 된 기분이다. 의식은 확실히 돌아와 있었고 몸 어느 곳에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고 있음에도 팔과 다리는 똑바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 -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쉬고 기분을 가라앉혀본다. 팔과 다리같이 큰 부분을 움직이 려고 하니까 움직이지 않는 걸 거야. 일단은 진짜 작은 부분부터. 예를 들 면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온 신경을 집중시켜본다든지. " - 큭" 온몸의 모든 힘을 짜내어 새끼손가락에 집중시킨다.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 어들 정도로 힘을 준다. 수 분이 지나 겨우 새끼손가락이 꿈틀하고 움직였 다. 그 정도 움직인 것만으로도 몸을 움직이는 감각이란게 어느 정도 되돌 아온 것 같다. 온몸에 퍼져있는 신경 감각이 어떤 것인지를 떠올리듯 새끼손가락에서부터 약지, 손바닥, 손목, 팔, 어깨로 움직이는 신체부위를 늘려간다. "하아 - 하아 - 하아 - "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 늘어가면 늘어갈수록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간 다. 아무래도 - 아픔을 느끼지 못했던 건 다시말해 온몸이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조금씩 신경 감각을 되찾아가면서 동시에 통증도 함께 원래대로 돌아오게 되어버리는 모양이다. "큭......윽......!"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에 찔린 듯한 통증이 온몸에 퍼져나간다. 하지만 이렇게 몸의 자유를 되찾아두지 않으면 방에서 나갈 수 없어. 방에서 나가, 거리로 가서, 학교로 향한 뒤. 알퀘이드를 찾을 수가, 없단 말야. "크악 - 큭......!" 넘어올 것 같은 기분을 견뎌내며 상반신을 일으킨다......이 상태로는 단순 히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힘들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로어 한테 가슴에 난 점을 찔리고도 살아났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야. 더 이상 뭘 바랄 수 있단 말야. 나이프에 찔린 가슴의 상처를 본다. 그러나 - 내 가슴에는 죽음의 점이라 여겨지는 것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머리 속이 차분해 진다. 생각해 보면 - 죽음의 점을 찔리게 되면 찔린 바로 그 순간 그대로 죽어버리게 되지 않던가. 저 네로라는 불사신 괴물을 상대 할 때 역시 예외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럼 나 같은 인간이 죽음의 점을 찔리고도 무사할 리가 없어. " - 보이는게, 다를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 때.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선배가 방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 - 토, 토노 군!? 절대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소리도 못 들으셨어요? 어째 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시는 거에요, 토노 군......!" 선배는 황급히 침대맡까지 다가선다. ".................." 어쨌든 아무 말 없이 선배의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 왜 그러세요, 토노 군? 제 얼굴에 뭐라고 묻었나요?" "아니. 안녕을 안 쓰고 있어서 말야." "예, 좀 아쉽네요. 지금까지 토노 군이랑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 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웃음을 지어보일 수 있다니, 역시 선배는 선배인 모양 이다. 신부같은 차림을 하고 정면에서 로어를 상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라고 할지라도 선배는 내가 알고 있는 시엘 선배 바로 그 사람이었다. "......고마워. 또 선배 덕분에 목숨을 구했어." "예, 이걸로 3번째에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절대로 안 구해드릴 거니까 각 오하고 계시는 편이 좋을 걸요?" "......그래. 알았어, 각오하고 있을게. 다음엔 반드시 내가 당하기 전에 먼저 해치워버릴테니까." 라며 선배를 똑바로 쳐다본다. "토노 군......설마, 아직도 포기하지 않으신 거에요?" "......선배. 포기하고 자시고 간에, 난 엄연히 피해자라구? 저쪽에서 먼저 날 공격해 왔단 말야. 포기할 게 어디있다고 그래." "그건 그렇지만......토노 군, 의욕이 너무 넘쳐보이시잖아요." "....................." 선배의 대답을 말 없이 받아넘긴다. 나 자신이 정말로 선배 말처럼 의욕이 넘치고 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 이런 곳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을 뿐이다. " - 선배. 하나만 물어봐도 돼?" "......안 돼요, 라고 말해봤자 토노 군한테는 안 통하겠죠? 좋아요, 겨우 그 정도로 토노 군이 얌전하게 있어만 주신다면 얼마든지요. 잠시 말 상대 를 해드리도록 하죠." 선배는 방금 전까지 아키하가 앉아있던 의자 위에 앉는다......틀림없이 나 못 나가게 하려고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시 선배의 진의가 무엇 인지 통 알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그럼 질문. 아까 그 녀석이 로어인 거지, 선배?" "......예. 저것이 이번 대의 로어의 전생체예요. 8년 전에 토노 군의 생명 을 약탈했던 토노 시키......그때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키하 씨한테 들 어 알고 계시죠?" "아아, 들었어......뭐야, 선배. 아키하랑 친해진 거야? 아키하 녀석, 선배 를 어지간히도 싫어하는 눈치던데." "예, 싫어하시는 것 같아요. 아키하 씨는 이단사냥꾼이라는 제 직업도 못마 땅하시고 또 저 자신에 대해서도 마음에 드시지 않으신다더군요. 어디 가만 있어보자......이만저만 싫어하시는게 아니더라니까요?" ......왠지 엄청나게 심각한 소리를 선배는 미소 띤 얼굴로 이야기하고 있 다. " - 그래. 뭐, 그건 그렇다치고. 로어 이야기로 돌아가서 말야, 그 녀석이 살고 있다는 곳이 설마 우리 학교였던 거야?" "......엄밀히 말하자면 틀린 말씀이시지만, 그 학교 건물을 근거지로 삼고 있다는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알퀘이드가 로어의 사자들을 남김없이 해치워 버렸기에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 거라고 생각해요." "..............." 다시 말해, 아직 알퀘이드는 로어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건가. 그렇다면 - 아직 알퀘이드를 찾아낼 찬스는 남아있어. "토노 군?" "아 - 아니, 그냥 혼자 생각이야. 하지만 말야, 어째서 로어는 우리 학교 같은 데를 자기 둥지로 삼은 거지?......아니...오히려 그 녀석, 로어라기 보다 시키 같다는 느낌이 들어. 왠지 흡혈귀였다는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 았었단 말야. 그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건 말이죠, 그의 인격 소스(source)가 시키라는 인물의 것이기 때문이에 요. 흡혈귀 같지 않다, 라고 생각하시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인 셈이죠." "......? 잠깐 있어봐. 시키는 로어란 놈의 전생체잖아. 그럼 성격은 로어 것이니까 시키란 인간의, 인간다운 부분은 사라져버리게 된다는 소리 아니 었어......?" "......아뇨, 그렇지 않아요. 잘 들으세요, 토노 군. 로어가 전생체로 선택 한 육체는 로어와는 별개의 인격, 인간으로서 성장하게 돼요. 로어의 의식 이 부상(浮上)할 때까지 완성된 하나의 인간으로서 성장하지 않으면 모처럼 로어가 지니고 있는 지성을 활용할 수 없게 되어버리니까요. 따라서 로어로 서 각성한 이후에도 해당하는 시대의 로어의 행동원리는 해당 전생체의 육 체에 따르게 되어있어요." "그럼 그 녀석은 내가 알고 있는 시키 그 녀석이고 로어라는 인격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단 소리야?" "......예. 어떤 의미로 로어, 라는 인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셈이죠. 그곳에 존재하는 건 단순히 영원이라는 대상, 불로불사를 추구하는 강박관 념에 지나지 않아요. 골치아픈 점은 그 강박개념이 의사와 역사, 지금까지 축적되어온 마도(魔道)의 지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에요. 로어로서는 단순히 불로불사라는 명제만 영원히 추구해 나갈 수만 있다면 그 이외에 자신이 무 슨 일을 하려하든 전혀 개의치 않아요. 로어는 사자의 수를 늘려가죠. 하지 만 그건 [아이를 낳는다]는 종으로서의 본능과 흡사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시키 본인의 의사, 그가 마음 속으로 원하는 건 그것과는 달라요." "......시키 본인이, 원하는 것......" "예. 아마 시키 자신의 목적은 알퀘이드를 회유하는 것이 아니라 토노 군, 당신을 살해하는 걸 제 1 목적으로서 하고 있을 거에요." " - 하?" 선배가 내린 결론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 다. "시키의 목적이 날 죽이는 거라니, 어째서?" "......그렇군요. 말씀드리기 정말 죄송한 일이지만, 토노 군이 시키(シキ) 자신을 죽인 장본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전 생각하고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살해당한 건 오히려 내쪽이라구. 이야기가 완전히 반대 로 되어있잖아." "하지만 토노 군은 살아있잖아요. 그리고 시키는 죽임을 당했고. 그 결과 토노 군은 토노 시키(志貴)가 되어버리셨죠? 시키(シキ)는 토노 가 사람들 의 손에 의해 처벌받은 이후 토노 군처럼 기적적으로 소생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다시 살아난 후 자신의 집에 돌아왔어도 시키가 머무를 곳은 이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토노 시키(志貴)는 엄연히 살 아있는 존재였고 여동생인 아키하 씨와 둘이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으니까 요. 어떤 의미로 생각해 봤을 때 - 토노 군은 토노 시키(シキ)라는 인물을 죽인 셈이 돼요. 그가 돌아올 장소를, 토노 군이 송두리째 빼앗아버렸죠. 토노 마키히사에 의해 어딘가에 유폐되어있던 시키(シキ)가 자기 자신이 되 어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던 토노 군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을지 너무도 쉽게 상상이 갈 정도예요." "......시키한테 있어서, 난 스스로의 이름을 이용해 토노 시키가 되어 살 아가고 있는 그런 가짜 같은 존재란 말야?" "예. 시키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당신을 증오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토노 군." 그런 - 나라고 좋아서 한 일이 아니잖아. 하지만 그런 건 시키에게 있어 어 떻게 되든 상관없는 그런 이야기일 거다. 녀석한테 있어서 나라는 존재는 자신의 모든 걸 앗아가 버린 증오스러운 가짜 시키일테니까. 스스로가 돌아 가야 할 곳을 타인에게 빼앗겨버린 남자. 그 원한은 커져갔으면 커져갔지 절대로 사그라드는 법 없이 8년 동안이나 계속 쌓이고 또 쌓여만 왔다... 과연, 정말로 그렇다면 확실히 일단 나부터 죽이려 들려고 하겠지. " - 하지만 말야. 죽임을 당한 건 내 쪽이란 말야, 선배." "토노......군?" 그래, 빼앗겼다는 건 나도 마찬가지란 말야. 8년 전이라면 내가 9살 때였던 가. 그때까지 생을 살아가고 있었던 시키(志貴)라는 인간은 온데간데 없이 완전하게 사라져버리고 말았어. 과거의 기억도 잘 떠오르지 않아. 친부모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하지만 그 사람들이 내게 소중한 사람 들이었다는 기억도 이젠 없어져버려. 일개 시키라는 인간의 존재는, 더 이상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구 - "토노 군. 증오심에 휩싸여 싸움을 거는 짓은 결코 올바르지 못한 행위에 요." ......내 혼잣말에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이라도 받았는지, 선배는 그렇게 내 게 충고한다. 설마, 고개를 가로젓는다. "별로 그렇다는 소리가 아냐. 내가 로어를 해치우려고 하는 건 다른 이유 때문에 그래." "미워하지, 않으시는 거에요......?" "아주 안 미워한다면 그건 거짓말일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그 냥 로어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을 뿐이야.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뒀 다간 공주님께서 혼자 또 말도 안 되는 짓을 하실테니까. 그러니까 도와줘 야만 해. 마지막까지 도와준다고, 그 녀석하고 약속했단 말야." - 그래. 그러니까 이런 곳에서 혼자 태평하게 쉬고만 있을 수 없단 말야. 알퀘이드는 줄곧 - 이 정도의 아픔은 참아내면서 내게는 밝은 모습만을 보 여줘 왔잖아. "......정말 모르겠군요.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녀를 도우려 하시는 거죠? 알퀘이드는 흡혈귀라구요. 토노 군과는 다른 존재란 말이에요." " - 그런 거 알게 뭐야. 그냥 난 알퀘이드를 사랑하고 있을 뿐이라구. 알퀘 이드를 도와야 하는 이유는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선배의 눈을 바라보며 똑똑히 내 생각을 전한다. 선배는 기가 막히다는 듯 한숨을 쉬며 손으로 입을 가렸고 그런 선배의 두 뺨이 왠지 모르게 붉게 달 아오르는 것 같았다. " - 잘 알겠어요. 그렇게까지 그녀에게 협력하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시로군 요, 토노 군." "응. 이런 곳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로어가 학교에 있다면 지금 빨리 그쪽으로 가야만 - " 알퀘이드가 로어를 찾아내 싸움을 벌일지도 모른단 말야. 그랬을 경우 알퀘 이드가 무사하리란 보장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다구. 그러니까 빨리 가서 도 와줘야해. 지금의 나 자신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이지 만, 그래도 알퀘이드 혼자서 싸우는 것보다는 훨씬 도움이 될 거야. " - 무리에요. 아무리 토노 군이 만족스럽게 몸을 움직일 수 있다손 치더라 도 지금 그녀의 능력으로는 로어한테 대항할 수 없어요." "대항할 수 없다니......선배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단순한 계산으로도 알 수 있어요. 그녀는 한 번 터져나오기 시작한 흡혈충 동을 계속 억눌러가면서 활동하고 있죠. 그 때문에 그녀의 능력은 엄청나게 떨어져 있어 로어의 능력의 50%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태예요. 토노 군의 힘 은 로어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니까 토노 군이 그녀한테 협력한다 한들 로어 에게는 당해낼 수가 없어요......그리고 그녀는 지금 죽음의 문턱에 올라서 있어요. 능력이 쇠약해져 있음에도 그 약해진 능력으로 자신의 흡혈충동을 다시 억누르고 있으니까요. 저희 같은 인간들에 비유하자면 폐가 날아가버 렸음에도 계속 활동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 무 - " 그게 무슨 소리야. 죽음의 문턱에 올라서있다니. 확실히 그녀석, 괴로워하 고 있긴 했지만 죽어가고 있다는 인상은 하나도 받지 못했었는데......!? "물론, 그건 흡혈충동만 억지로 참아내지만 않는다면 어떻게 해결될 문제라 고 할 수 있죠. 괴로움에서 해방되고 싶다면 인간의 피를 빨면 된다. 하지 만 알퀘이드는 두 번 다시 사람의 피는 빨지 않을 거에요. 때문에 로어를 계속 쫓고 있는 한 알퀘이드는 한없이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 되 죠." "마...말도 안 돼, 그딴 소리......!" 침대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버린다. 몸도 똑바로 가누지 못 한 채 쿵 하고 마치 쓰레기더미처럼 카펫 위로 고꾸라졌다. "학 - 큭......!" 너무도 - 너무도 약해. 알퀘이드가 그런 상황에 처해있는데도 난 - 혼자서 제대로 걸어다니지도 못할 정도로, 약해. "무리하지 마세요, 토노 군. 토노 군의 상처 자체는 이미 다 나은 거나 마 찬가지지만 지금 토노 군을 움직이고 있는 생명력은 텅 빈 상태나 마찬가지 예요. 이번 대의 로어의 전생체, 시키의 능력이겠죠. 토노 군은 겨우 나이 프에 찔린 것만으로 '생명' 그 자체를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거에요." "......생......명......?"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에너지라고도 할 수 있겠죠. 토노 군을 살아가게 하 는 원동력을 말하는 거에요. 이건 무한한 것이기는 하지만 끝없이 샘솟아나 오는 건 아니에요. 살아있는 한 생명력은 계속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그 축 적량에는 개인차라는 게 존재해요. 때문에 - 한 사람의 몸에서 뽑아낼 수 있는 생명력은 무진장(無盡藏)한 것이 아닌, 어떤 한계라는 것이 있게 되 죠. 우린 축적된 힘을 모조리 써버리기 전에 최후의 힘을 짜내어 무한인 생 명에서 다시 생명을 저장할 수가 있는 거에요. 따라서 축적한 생명력을 일 순간에 빼앗겨버리게 되면 아무리 무한이라고는 해도 그 무한에서 생명력을 끌어낼 힘이 남아있게 않게 되므로 그 개체는 생명활동을 정지하게 되어버 리는 거죠." ......생명. 생명을, 유지시키는, 생명. "......그 소린......존재를, 유지시킨다는, 소리야......?" "글쎄요, 엄밀히 말하자면 죽는다는 소린 아니죠. 기름이 다 떨어져서 움직 이지 않게 됐다, 라는 개념이니까요." 라며 선배는 쓰러져 있는 날 일으켜세우며 그대로 침대 위에 눕히려고 한 다. "......됐어. 안 누워 있을 거야." "뭐예요. 혼자서는 제대로 일어나 서 있을 수도 없는 사람이 무슨 소릴 하 시는 거에요? 누워계시는게 싫으시다면 이렇게라도 하고 계세요." 선배는 억지로 내 몸을 누르고는 침대 위에 걸터앉게끔 한다. "......하......아" 겨우 침대에 걸터앉은 것만으로 숨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한다. " - 빌어 - 먹을" 이런 상태로는 아주 불가능하다는 소린 아니지만 학교에는 갈 수가 없겠잖 아. 만약 알퀘이드랑 만나게 된다고 쳐도 이런 상태로는 알퀘이드의 발목만 붙잡는 꼴이 되어버릴 거 아냐......! "괜찮아요. 토노 군은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돼요. 로어에 대한 일은 앞으 로 며칠 안 있어 매듭이 지어질 테니까요." " - ? 매, 매듭이 지어진다니, 그게 무슨......" "로어의 전생체가 특정되었으니까, 법왕청......그러니까 저희들의 본거지 를 말하는 건데요, 거기에 요청이 들어갈 거에요. 한 1주일 쯤 지나면 법왕 예하(猊下)직속 매장기관이 이곳으로 보내질테니까 그때 로어도 끝장나는 거죠......결국, 또 다시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겠지만 어쨌든 그걸로 이번 대의 로어는 처리할 수 있게 되는 거죠." ......7일. 7일, 이라고......? "......안 돼. 그렇게는 못 기다려. 오늘밤에라도 알퀘이드는 로어랑 승부 를 지으려 나설지도 모른단 말야. 그럼 - 기다려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잖 아......!" 두 다리에 힘을 준다. 거칠어진 호흡을 애써 추스려가면서 침대에서 다시 몸을 일으켜세웠다. "......선배. 내 나이프, 어딨어." "제가 가지고 있긴 하지만 - 토노 군에게 드릴 것 같아요?" "......아니. 하지만 남의 물건에 손대면 안 되지, 선배. 길에서 주은 물건 은 주인한테 돌려줘야 하는게 상식 아니겠어?" 선배는 그렇다면서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어든다. "이 단도는 토노 군 거니까 돌려드리도록 하겠지만요. 역시 학교로 돌아가 실 생각이세요, 토노 군?" " - 아아. 알퀘이드가 로어를 찾아내기 전에, 내가 - " 놈을, 해치우겠어. 이래저래 시키의 목적의 나라고 한다면 서로 맞부딪히게 되는 건 피할 길이 없을테니까. 그렇다면 - 알퀘이드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직접 놈을 해치워주겠어. "그런 몸으로, 말씀이세요?......역시 정말로 모르겠어요. 토노 군이 그렇 게까지 그녀에게 매달리는 이유를 좀 듣고 싶은데요. 그 말 한 말씀만 해주 시면 더 이상 가로막지 않을테니까요." ......선배는 아까랑 같은 질문을 내게 해온다. 그 시선은 부드러우면서도, 진지했다. 선배는 진짜 대답을 원하고 있는 거다. " - 나는 - " 내가, 알퀘이드를 돕고 싶어하는 이유. 알퀘이드를 좋아하니까, 일까. 알퀘이드랑 함께 있으면 즐거우니까, 일까. ......아아, 그건 너무도 당연한 소리잖아. 하지만 좀 더 깊숙한 그곳에. 다른 그 무엇에게도 넘겨줄 수 없는 그것이 있어. "......알퀘이드, 외톨이잖아. 왠지, 혼자 내버려둘 수가 없단 말야. 아마 그게 이유일 거야." " - 거짓말. 그따위 이유 때문에 스스로의 목숨을 내버리지는 못해요. 솔직 하게 대답해 주세요, 토노 군......그따위 이유에 전 납득할 수 없어요." "아니, 정말로 그게 이유 때문이라니까......알퀘이드는 지금까지 쭉 혼자 지내왔었고 이 세상에 즐거운 일이 얼마나 많은지도 모르고 있었다구. 줄곧 바보처럼, 외톨이로 지내왔어. 그런 거 너무 외로울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 아? 그런 의미없는 인생, 난 인정 못해. 그러니까 - " 그러니까, 그저, 알려주고 싶었어. 이 세상엔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있고 그 대부분은 무의미하면서 동시에 쓸데없는 짓들이긴 하지만. 그걸 알게 된 다는 것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의 즐거움이라는, 애들도 알만한 그런 사 실을 - "......그냥, 가르쳐주고 싶었어. 알퀘이드는 그토록 즐거운 듯이 웃어대고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그 누구라도 손에 넣을 수 있는 그런 것들이라는 걸 가르쳐주고 싶었단 말야. 이 세상에는 좀 더 - 좀 더 많은, 그야말로 쓸데 없는 걱정 따위는 한 방에 달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즐거운 일들이 가득 있 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려 몇 번이고 데리고 나가보고 싶었어. 당연한 사실 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 알퀘이드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어." 항상 진실로 웃을 수 있도록. 알퀘이드의 그 미소가, 난 좋았었으니까. "생각해 봐. 그녀석, 지금까지 아무도 도와주지 못했던 것만큼 그 몇 배의 몇 배 이상으로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 돼. 그렇게 생각하고서 그대로 하지 않으면 그건 거짓말이 되는 거지. 그 녀석이 더 이상 외롭게 혼자 지내지 않게 하는 방법은 정말 간단한 거니까 말야." ......그래, 정말 간단하지. 그저 누군가랑 이야기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는 거니까. "......아마 그건 다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일 거야. 나 말고 다른 누구 라도 그 녀석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어. 그러니까 - 확실히, 내가 이 런 약해빠진 몸으로 이런 식으로 나설 필요는 없을지도 몰라. 다른 그 누구 라도 알퀘이드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지 않을 수 있으니까." ...나도 알아. 다 알고 있긴 하지만, 그건 핑계거리가 되지 않아. " - 하지만, 안 돼.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맡겨둘 수도 없고 이대로 그 녀 석이랑 헤어질 수도 없어......나한텐 이제 알퀘이드 밖엔 없단 말야." 왜냐하면.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알 퀘이드 밖에 없으니까. "......알퀘이드를 사랑해." 남자로서, 정말로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난, 내 손으로 알퀘이드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단 말 야. 그 때문이라면 내 목숨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어. 이대로 알퀘이드를 잃 고 싶지 않아. 지금은 단지 - 그것 뿐이야, 선배." ......그래, 그것 뿐이야. 나보다, 지금은 그저, 알퀘이드가 더 소중하니까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다른 그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 에요. 왜냐하면 그런 걸 말할 수 있는 건 전세계에서 토노 군 한 사람 뿐이 니까요." 크게 한숨을 내몰아쉰 선배는 양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 - 선배" "......하아, 좀 화가 나는데요? 알퀘이드, 이 정도면 벌써 충분히 행복하 잖아요?" 왠지, 무언가를 포기하듯이. 선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 그때. 창 밖에서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 "아, 놀라진 마세요. 그녀가 가버린 것 뿐이니까요. 아까부터 이상한 느낌 이 들어서 이게 뭘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시 그랬던 모양이네요." 선배는 창 밖으로 슬쩍 시선을 던진다. "로어보다 토노 군을 우선해서 찾아오다니,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군요. 뭐 - 이런데도 로어를 우선하시겠다면 그건 천벌 받을 말씀이시라구요." "......에?" 그건, 그러니까. 방금 전까지 창 밖에 알퀘이드가 있었다...란 말야? "어째서 - 알퀘이드가, 내 방에 찾아온단 말야 선배......!" "토노 군이 로어한테 상처를 입었으니까 걱정이 돼서 달려온 거겠죠. 저랑 토노 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지금 막 로어가 있는 곳으로 가 버린 모양이지만." - 다시 말해 그 말은. 로어와 승부를 내러 갔다, 란 말인가. "무슨 - 가다니, 어째서......!?" "당연한 소리 아니에요? 그런 소릴 들었으면 저라도 같은 행동을 취했을 거 예요......응, 정말 부럽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가엾기도 해요." " - 그러니까, 왜 - " "토노 군은 그녀를 도와주고 싶어하죠. 하지만 그녀는 토노 군을 이 일에 휘말리게 싶어하고 있지 않아요. 그렇다면 - 대답은 한 가지." 마치 이렇게 될 줄을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선배는 냉정하기만 하 다. "토노 군도 이제 포기하셨겠죠. 토노 군이 아무리 애를 써봤자 그녀를 뒤쫓 을 수는 없어요. 그러니가 뒷일은 저희들에게 맡기지고 천천히 휴식을..." " - 닥쳐!" 격한 감정에 휩싸여 선배의 옷깃을 움켜잡는다. 단지 그런 행동을 취한 것 만으로 현기증이 일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이렇게 될 줄 알고서 나한테 그 이유를 물었던 거야, 선배 - !" "......아뇨. 전 토노 군이 그녀를 그런 식으로 대하고 있는 줄 꿈에도 모 르고 있었어요......확실히, 이건 제 실책이로군요." 하지만 선배의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차분한 그 눈동자는 옷깃을 세차게 틀어쥐고 있는 날 쳐다보고 있다. " - " ......여기서 이러고 있어봤자 아무 것도 달라지는 건 없어. 알퀘이드는 벌 써 가버렸다구. 여기서 내야 해야 하는 일은 선배를 탓하는 그런 게 아냐. " - 알퀘이드를 쫓아가겠어. 데려가." "토노 군의 말씀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에요?" 아아, 물론 그렇게는 생각 안 하지. "내 말 안 들을 거면 지금 이 자리에서 봐주지 않고 강간해 버리겠어." " - " 선배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마치 내 가슴 속까지 꿰뚫어버리는 듯한 시선. 하지만 이제와서. 그런 시선에 겁내며 물러날 수는 없어. " - " 잠시 후. 선배는 도대체 몇 번 째인지 모를 한숨을 다시금 내뱉는다. "그 제안, 확실히 매력적이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제가 실수를 저지 른 것도 있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와 버렸으니까요. 이렇게 된 이상 마지막까지 함께 해드리겠어요." 선배는 자신의 옷깃을 부여잡은 내 손을 뿌리친 후 잔걸음으로 내 옆에 와 선다. "그럼 데리고 가 드릴테니까, 얌전히 있으셔야 돼요?" "에 - ?" 내가 놀라고 있을 틈도 없이. 선배는 힘을 주며 내 몸을 끌어안는다. "아키하 씨한테 들키면 틀림없이 못 가게 막을테니까 그녀와 같은 방법으로 가보도록 할까요?" "에 - 에!?" 가벼운 발소리. 선배는 날 끌어안은 채로 창 밖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 ......학교에 도착했다. 선배는 날 안고 있으면서도 숨 한 번 헐떡거리는 일 없이, 마치 혼자서 달리고 있는 마냥 전력질주로 학교까지 뛰어왔다. "토노 군, 걸을 수 있으시겠어요?" " - 그럭저럭. 이제 로어랑 상대하러 가려는 참인데 이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으면 말이 안 되잖아." "그렇네요. 그럼 여기서부터는 스스로 걸어가도록 하세요." 선배는 날 지면에 내려놓는다. " - " 교사는 기분 나쁠 정도의 정적에 휩싸여 있다. 건물 안에 들어가면, 녀석과 의 대결이 남아있을 뿐이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안경을 벗었다. 두통이 일어난다. 몸이 만족스럽게 움 직여주지 않는 것과 하나가 되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버리고 싶을 정도로 불쾌한 기분이 든다. "......안 좋은데요." 선배는 심각해진 표정으로 밤하늘을 쳐다본다. 만월. 밝게 쏟아져내리는 달 빛이 밤의 교사를 내리 비추고 있다. "......안 좋다니, 뭐가?" "......예. 원래 신소는 달의 백성이라 불릴 정도로 월령(月齡)의 영향을 강하게 받죠. 그건 신소 직속의 시토이기도 한 로어 본인도 마찬가지일테니 까 오늘밤의 로어는 끝없이 불사신에 가까워져 있을 거에요......지금의 제 장비로는 해치우지 못할 지도 모르겠어요." 으득 하고 이를 악문다. - 끊없이 불사신에 가까운, 인가. 하지만 그건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 는 일이야. 접근할 수만 있다면. 그 다음 순간 내 가슴이 꿰뚫려져도 괜찮 으니까 접근만 할 수 있다면 그대로 - 녀석의 [죽음]을 꿰뚫어버리겠어. " - 그건 그렇고 오늘 밤은 달이 참 밝네요. 이래선 어둠을 틈타 몰래 숨어 들어가기도 어렵겠어요......달이 밝은 밤을 좋아하긴 하지만, 오늘만큼은 예외로군요." 하아, 한숨을 내쉬는 선배. ......얼어붙을 듯 맑고 차가운 달빛이 쏟아지는 밤. 빛나보이기까지 하는, 죽음의 선. "그래. 난 달 밝은 밤은, 싫어해." "토노 군......?" 삐걱. 뇌수를 삐걱인다. "......햇빛 말고,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 아래에선 쓸데없이 더 잘 보인단 말야. 선을 하나도 안 보이게 싹 지워버릴 정도로 강렬한 태양빛이나 정말 아무 것도 안 보일 정도로 어두운 쪽을 훨씬 더 좋아한다구." 삐걱. 아픔이 아닌, 그 사실 자체가 삐걱인다. "아아 - 오늘밤은 특히나 더 미쳐버릴 것만 같은데. 이거나 저거나 모조리 다 죽기 쉬운 상태라 마치 달 속의 황야에 서 있는 기분이야." - 하지만, 이런 상태라면. 만에 하나라도, 로어의 [죽음]을 못 보고 놓칠 일은 없을 거야. 안경을 다시 쓴다. 나이프를 손에 쥐고, 교사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정문을 지난다. 만족스럽게 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교사까지의 남은 거리 가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다. "토노 군, 여기서 헤어져야겠어요." 갑자기, 선배는 내게 그렇게 말을 해온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세요. 전 따로 할 일이 있으니까요." "......따로 할 일 - 선배, 뭐 하려고?" "저기 말이죠......저도 로어를 처리하는게 목적이라구요. 다만 이번의 로 어는 지금까지의 전생체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 같으니까 정면에서부터 싸움을 걸 수는 없지 않겠어요? 토노 군이랑 알퀘이드가 로어의 손에 목숨 을 잃었을 때 그 틈을 노려 로어를 처단하겠어요." 거짓을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얼굴로, 선배는 단호히 말한다. "......진심, 인 것 같네 선배." "예. 더 이상 임무에 사적인 감정을 집어넣지는 않겠어요. 토노 군은 알퀘 이드를 위해서 싸우시는 거죠? 그와 마찬가지로 저에게도 저 나름대로의 이 유라는게 있어요. 그러니까 - 더 이상 토노 군을 도울 수는 없어요." "그래........응, 고마워 선배. 어쩌면 이걸로 영영 헤어지게 될 지도 모르 니까 하는 소린데, 나...선배를 좋아했었어. 선배랑 아리히코랑 셋이서 이 것저것 이야기하고 그렇게 다니는게 정말 즐거웠었어." " - 예. 저도 참 즐거웠었어요." 선배는 검은 그림자처럼 그대로 교사 안으로 사라져 들어갔다. "그럼 - 가 볼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현기증을 일으켜대는 스스로의 몸에 채찍질을 해가면 서 교사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교사 안은 온통 상처 투성이였다. 마치 소형 태풍이 미친듯이 날뛰어 내며 그대로 위로 위로 이동한 것 같은 느낌이다. 알퀘이드와 로어의 싸움은, 이미 시작한 듯 하다. "......위층인가......!" 숨을 고른 후 계단을 박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아 - 하아 - 하아 -- " 4층에 발을 디딘다. 주위의 모든 벽에 내달리듯 나 있는 흔적들은 그대로 복도 끝 - 교사와 교 사 사이를 잇는 외부통로 쪽으로 이어져 있다. "제길 - !" 휘청이는 발걸음을 겨우 가누며 통로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복도를 빠져나와 통로 쪽으로 이어지는 커브 지점에 도착한다. 거기가 - 종 착지였다. 외부통로의 한가운데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거리를 두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통로의 끝자락, 반대쪽 교사 복도 앞에는 여유있는 모습으로 꿈쩍도 않고 서있는 시키와. 외부통로의 한가운데에는 거친 숨을 숨을 내몰아쉬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알퀘이드의 모습이 보인다 - "알퀘이드 - !" 그런 알퀘이드에게 다가서려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그에 앞서. 찌릿. 알퀘이드는 꿇어앉은 채로 자신에게 다가서려는 날 노려본다. "..................!?"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알퀘이드의 눈을 본 순간, 몸이 - 마치 돌덩 이처럼 조금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아......! " - 너무하시는군. 모처럼 도와주러 오신 친구분을 마안으로 속박해 버리시 다니 말야. 함께 죽어주겠다는 호의 쯤은 받아들여도 좋을텐데." 큭큭큭. 유쾌한 표정으로 시키 - 아니, 로어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안 - 어째서" 어째서 알퀘이드가 내게 그런 걸 향한단 말야. 겨우. 겨우 이렇게 늦지 않 게 시간 맞춰서 왔는데 - " - 어째서야. 어째서냐구 알퀘이드......!!" 알퀘이드는 내게서 로어에게로 시선을 옮겨버린다......아무 것도, 말하지 않아. 알퀘이드는 아무 말도 내게 하지 않는다. 그저 눈 앞의 적을, 괴로운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냐구 - 왜 - " 목소리조차 낼 수 없게 되어버린다. 알퀘이드의 마안 때문이 아냐. 여기까 지 왔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너무도 분하고 원통한 나머지 지금까지 억지로 움직여왔던 내 몸이 그 열기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나와 알퀘이드를 쳐다보며 로어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 다. " - 과연...이제서야 겨우 각오를 굳히셨나, 공주!" 로어는 조금씩 알퀘이드를 향해 다가서기 시작한다. 알퀘이드는 한쪽 무릎 을 꿇은 채 꼼짝도 않는다. "이거야 원, 제법인데 시키. 공주님께서는 널 도망치게 하려고 여기서 나랑 싸우다 같이 죽으려고 한 모양이야. 하지만 말이지...예전이 공주라면 모를 까, 지금의 그녀는 평범한 흡혈귀일 뿐이야. 신소로서의 힘도 발휘하지 못 하고 있다구. 거참 - 욕망이 시키는 대로 타락해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닥쳐!" 알퀘이드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진다. - 저게 뭘까.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 알퀘이드의 주변이 울 렁울렁대고 있는 것 같은데. " - !" 가까이 다가서던 로어의 발걸음이 멈춘다. " - 공상구현화인가. 아직도 그만큼의 능력이 남아있었다니, 과연 신소의 왕족답군." 움찔. 로어는 두려운 기색으로 뒷걸음질 친다. "하지만, 넌 나한테 이길 수 없어. 나에겐 너한테는 없는 게 있으니까 말 야." " - " 알퀘이드의 호흡은 멈춰져 있었다. 마치 지금, 자신의 모든 활동을 포기하 고 오로지 힘만을 모으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너도 알지? 그래, 그건 바로 죽음의 실질적인 체험이야. 난 죽음을 알고 있지만 넌 그걸 모르지. 그게 우리들의 결정적인 차이야......뭐, 살아있는 한 생물은 죽음을 체험할 수 없지. 그걸 알아낸 건 전생무한자인 나 뿐이겠 지만 말야." ......알퀘이드의 몸 주변의 일렁이는 흐름이 점점 더 커져만 간다. "사람은 미지(未知)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생물이야. 그건 초월 자인 신소라고 해서 별반 다를게 없지. 아무리 신비(神秘)를 배운다쳐도, 아무리 오래 사는 생물이 있다쳐도 죽음을 체험할 수는 없어. 너흰 죽음을 거부함으로써 그 강대한 힘을 얻었지만 그와 동시에 유약해지기도 했지. 죽 음을 회피하는 너와 죽음을 받아들인 나. 그것이 알퀘이드 브륀스타드와 미 하일 로어 바르담욘의 질적인 차이야. 나는 지금도 인간으로서 인간의 시대 에서 살아가고 있지. 시대에 뒤처진 망령에 지나지 않는 네게 날 벌할 권리 는 존재하지 않아." 쨍그랑. 외부통로의 창 유리가 산산조각난다. " - 난 알아. 죽음을. 저 어둠을. 몇 십 번이나 헤쳐나왔던 저 허무를 - ! 따라서 내게 있어 이곳에서의 죽음 따위는 그저 단순한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아. 이 자리에서 이 육체가 사멸한다 하더라도 로어는 또 다시 다른 세상 에서 부활할 거야. 여기서 나랑 서로 싸우다 같이 죽는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왜 알지 못하는 거지, 공주?" 두 손을 펼쳐보이는 로어. 알퀘이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 - 뭐, 할 수 없지. 그래도 나에게 도전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그때야 말로 넌 천 년 동안의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까." 두 팔을 내리고, 로어는 자세를 낮춘다. 알퀘이드의 주변은 금방이라도 사 방으로 튕겨져 나갈 것만 같다. "아 - " 소리가, 나질 않아. 안 돼. 이대로는 안 된다고 머리 속에서 경고신호가 울 려대고 있는데. 이유도 잘 모르겠고 확증도 서지 않아. 다만 지금까지 수많 은 죽음을 보아온 난 알 수 있어. 로어와 알퀘이드. 그들 중 어느 한쪽이 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가 하는 그런 느낌을. "그 - 만" ......소리가 안 나와. 나오지, 않는다구. - 붕. 대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알퀘이드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일그러짐이 복도 전체를 침식해 들어간다. 두근두근, 복도 전체가 맥박친다. 창유리도 벽도, 알퀘이드의 앞에 선 복도 와 교사 그 자체가. 마치 야채를 썰 듯 몇 십, 몇 백, 몇 천, 도저히 숫자 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단층이 되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키익 - !" 로어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왜곡되고, 절단당하고, 압축되어. 남 아있는 건 오로지 발목 뿐이었다. 복도의 일렁임은 금방 사라졌다. 방금 전 의 것은 순간적인 것이었던 모양이다. 외부통로의 모습은 맨 처음 그대로이 다. 다만 그곳에 로어의 발목만이 남아있을 뿐.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 - " 발목이 움직인다. 빠른 발걸음으로 발목이 알퀘이드를 향해 달려나간다. 그 과정에.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발목에서 허벅지가, 허리가, 또 한 쪽 발이, 몸통이, 양팔이 생겨난다. " - " 알퀘이드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 앞 에. 로어의 얼굴이 목에서 불쑥 솟아나왔다. "알 - " 그녀를 부르는 소리는 그곳에 닿지 않는다. 완전히 원형 그대로 소생한 로 어는, 그대로 알퀘이드의 배를 갈라버렸다. [선]을 자르듯 너무도 깨끗이, 다른 육체를 찢지도 않고 피를 흘리는 법도 없이. " - 이런이런. 역시 오늘밤을 골라놓길 잘한 것 같군. 달이 이지러진 상태 였다면 아무래도 발목부터 소생하는 건 불가능했을 거야." " - " "그리고 공주님. 넌 내가 낸 상처에서 소생할 수 없어. 내 손톱은 거기 있 는 저녀석이랑 같은 능력을 갖고 있거든." 털썩. 알퀘이드는 바닥에 무너지듯 쓰러져버린다. " - 이게 죽음을 체험하고 얻은 힘이야. 스스로 말하기도 좀 뭣하지만, 나 자신도 이걸 어떻게 쓰는지를 모르고 있었지. 내게 그 방법을 가르쳐 준 건 저기 저 녀석이야. 죽음을 보아 온 내게 있어 사물의 죽음을 형상화 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 로어는 자랑스러운 듯 지껄여대며 알퀘이드의 몸을 힘껏 걷어차 버렸다. 알 퀘이드는 내쪽을 향해 퉁기듯 날아들어온다. "알퀘이드......!" 몸이 움직여진다. 그건 - 알퀘이드의 마안의 힘이 사라졌다는 뜻. 알퀘이드의 힘이,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하고 있지 않다는 뜻. " - 큭!" 그런 생각들을 머리 속에서 털어내며 알퀘이드의 몸을 감싸 안는다. - 그녀를 감싸 안은 순간, 몸이 움찔한다. 알퀘이드의 몸은 너무도 싸늘했 다. 그나마 남아있던 열기는 마치 촛불의 불길과 닮아있었다. 눈 앞에는 아 직도 로어가 서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은 그저 - 알퀘이드를 도와주고 싶었다. "알퀘이드 - !" 그녀를 부른다. 꼭 감겨있는 알퀘이드의 눈꺼풀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처럼 힘있게 떠진다. "아하 - 못 볼 걸, 보여줘버렸, 네."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알퀘이드는 멍하니 얼굴에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무슨 바보 같은 소릴 하는 거야, 알퀘이드. 어째서 - 어째서, 이 런 - " ......말이 터져 나오지 않는다. 좀 더, 좀 더 괜찮은 표현을 말해주고 싶 은데 머리 속에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냉정을 되찾으 란 말야. 가슴에 안겨있는 알퀘이드의 체온은 너무도 절망적이야. 지금 안 경을 벗으면 - 훨씬 더 절망적인 모습이 보일 게 분명해. - 그런 건. 그런 건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아. "어째서 - 어째서, 왜 - " 그런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 나 자신에게 너무도 초조한 마음이 들어 꼬옥. 지금까지 중에서 제일 힘주어, 알퀘이드를 품안에 안는다......그렇게 안은 알퀘이드에게서 어떤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알퀘이드의 몸에는 더 이상 그 어떤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알퀘이드는 그저 기쁜 듯이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야 - !" 그래. 이건 틀림없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 - 어째서 - 왜 이런 - 어째서 혼자, 하는 거야......! 우린 친구잖아, 협 력하겠다고 - 마지막까지 도와주겠다고, 그렇게 말했었잖아......!" "......그래......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었지. 왠지......잊어버리고 있었 어......" "그런 건 잊어버리지 말란 말야......! 이렇게 되면 - 이러면 난 쓰레기 같 은 놈이 되잖아. 널 도와주겠다고, 그렇게 말해놓고서. 확실히 도와주겠다 고 했으면서 - 그 무엇 하나도, 도와주지, 못했어..." "......으응, 그렇지 않아 시키. 나, 시키한테 정말 도움 많이 받았는걸... 그러니까 더 이상......도와주지, 않아도, 돼..." 입가에 피를 흘린 채 알퀘이드는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다. "......그러니까, 그 보답으로, 이 정도는, 해줘야 할 것 같아서. 마지막으 로, 로어한테서 시키를 지킬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 - " 숨을 삼킨다. ......알퀘이드의 눈은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스스로의 상처 쪽도, 로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도......그녀의 시간은. 좀 전의 일격을 날린 시점에서 이미 그 끝을 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 - 고, 고. 고마, 워. 덕분에, 살았어." 라는. 그런 거짓말조차 난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알퀘이드의 눈빛이 흐려진다. 체온이 점점 제로에 가깝게 떨어져 간 다. - 죽음. 이대로 그녀를 떠나보낼 것인가. "......알, 퀘이드." " - 응, 왜?" "......내 피를 마셔. 그럼 네 힘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다른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그것만을 외치고 있었다. "........." 알퀘이드는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자칫 못 보고 지나쳤을 정도로 미약하 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 - 왜!? 설마, 아직도 무서운 거야!? 잘 들어, 알퀘이드. 전에도 한 번 말 한 적 있었지? 만약 새나 물고기한테 자신과 비슷한 정도의 지성이 있었다 면 먹을 수 있겠느냐고. 나는 먹어. 안 먹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까. 살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빼앗는 행위는 자연계에서는 정말이지 당연한 사실이잖 아......!" 그건 알퀘이드 자신이 내뱉었던 말. 하지만. 그녀는 슬픈 듯한 눈동자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 만약에 라는 거, 안, 좋아해." 거절의 대사. 그건 - 내, 입버릇이었는데. 알퀘이드는 이렇게 말했어. IF 는. 만약에라는 거 좋아한다고. 거기에 어떤 해결책이 있을 것 같으니까 라 고. " - 그래? 나, 난 좋아해. 아무리 궤변 같이 들려도 말야. 나름대로, 어딘 가 - 해결책이 있을 것 같..." 지 않아,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에. 제대로 발음할 수 가, 없었다. "......그랬구나......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하고 싶은게, 있어." 떨리는 목소리로 그 내용을 묻는다. "응......시키, 키스해, 줄래?" - 뭐야. 그런 간단한 걸로 괜찮겠어? 입술을 포갠다. 그건 지난 날과도 같았던 달콤한 것도, 그렇다고 부드러운 성격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차가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어놓기만 하는,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단순한 입맞춤. 그리고. 정말로 기쁜 듯, 그녀는 미소 지었다. "......고마워. 해보고 싶었어, 이런 키스." "......그래. 이상한 걸 다 해보고 싶어하는구나, 알퀘이드." "......응. 왠지 기뻐. 겨우 그 정도의 키스였을 뿐인데도, 너무나 기분이 좋아. 제법 오랫동안 살아왔었는데도, 지금만큼 행복했던 적은 없었어." - 그러니까 "이대로 사라져 없어져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남은 체온은 남김없이 사라져 버렸다. "알......퀘이드......?" 대답이 없다. 몸은 있지만. 아직 이렇게도 부드럽지만. 고막은, 여전히 알퀘이드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지만. - 더 이상, 두 번 다시. 그들이, 반복되어지지 않게 되어버린 것일까. "아 ------------------------- "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나는. ......이녀석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여러 가지 것들을 가르쳐 주고 싶었었는데. 여러 곳에 데리고 돌아다녀보고도 싶었었는데. 영원히, 함께 있고 싶었었는데. 그건,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아. " ---------------------------- " 안 돼. 뭐라고 말해도, 지금 건 무효야. 갑자기 그 어떤 유효한 말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혼자서 정신이 아득한 저편으로 멀어져 버렸다. 이럼 - 평생 동안, 난 잊어버릴 수가 없단 말야. 이 죽음을. 미쳐버렸는지 도 모를 정도로, 이토록 가라앉은 이 기분을. 난, 평생 잊지 못할 거야. 뚜벅. 지금까지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다 끝났어, 시키?" "아아, 다 끝나버렸지." - 라며. 난 나 자신의 적에게 시선을 향했다. 달빛으로 물든 복도에서 우린 서로를 마주 대하고 있었다. 로어는 방금 전 까지 알퀘이드가 있던 장소에서 꼼짝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지금까지 잠자 코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도 놈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여유의 표현일까. "설마, 살아있었을 줄이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로어는 그렇게 내게로 말을 건넨다. - 안경을 벗고 나이프를 손에 쥐었다. "죽음을 볼 수 있는 인간이란 죽음에서도 쉽게 도망칠 수 있는 듯 하군. 생 명력이 세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고 말야. 하지만 - 그런 걸 세간에서는 쓸데없이 생에의 집착이 심하다고들 표현하지."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텐데. 나나 너나, 한 번은 죽을 뻔 했었던 그 런 놈들이니까." 마치 그렇다는 듯 로어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린다.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죽음이란 걸 이해할 수 있게 되지. 나와 너는 그 중 에서도 한층 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케이스야. 나는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17번이나 죽음을 체험해 왔지만 - 넌 고작 단 한 번 뿐인가. 솔직히 재능의 차이 같은 그런 거겠지. 만약에 너를 전생체로 삼았더라면 얼마만큼의 능력 을 발휘하게 됐을지, 정말 흥미진진하군." - 한껏 여유로움에 가득 찬, 거슬리는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깨 어질 듯 아프다. "......물어볼 게 2개 있고, 가르쳐줄 게 하나 있어." 통증으로 점차 가득해져가는 머리를 감싸안고 로어에게 말을 건다. " - 호오. 좋아, 말해봐." 절대적인 우위에 있다는 데에서 나온 여유일까. 로어는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회답한다. "......첫 번째로 물어보는게 제일 중요한 건데 말야. 너 - 왜 알퀘이드를 죽인 거지?" "이유 같은 건 없어. 날 죽이려 들었으니까. 살기 위해 죽이는 건 당연한 거잖아? 하지만 - 내가 원했던 건 그런 약해빠진 공주가 아니었지만 말야. 이번의 나라면 틀림없이 공주를 산채로 해체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런 일개 흡혈귀와 별 차이점 없는 신소를 내 것으로 만들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래서 내 것으로 삼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 그대로 해치워 버린 거 지. 이런 형태로 결과가 나버리게 된 데에 대해서는 나로서도 정말 유감스 러운 일이야." 큭큭.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적]은 웃음을 짓는다. - 머리가, 아파. 빨리 - 한시라도 빨리 숨통을 끊어놓겠어. 이 녀석이 1초라도 더 오랫동안 [존재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견디기가 힘들어. "그래.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설마 그런 몸으로 나랑 대결해 보겠다 는 속셈은 아닐테고. 저항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구, 시키." ......그런 것 쯤, 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어. 현기증으로 눈 앞이 아찔해져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는다. 하지만 - 다시 일어날 힘조차 없으면서도, 상대를 응시한다. "포기하시지. 아무리 내 [죽음]을 찾았다 하더라도 접근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구. 난 말이지, 시키. 네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흠, 아무래도 시키로서의 인격은 사라져가는 중인 모양이군. 너에게 담겼던 한 을 해소했으니까 지금의 나는 시키라기 보다는 로어라고 하는 편이 맞을라 나. 뭐, 자질구레한 일들은 어찌되든 상관없지만 말야." 로어가, 한 걸음, 내게로 다가선다. "이 힘 정말 대단하지 않아, 시키? 기뻐하라구. 직사의 마안을 지닌 건 이 세상에서 나와 너 둘 뿐이니까 말야. 그런 희소능력을 없애버리는 건 정말 아까운 일이고 무엇보다 우린 닮은 꼴이잖아. 다른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파트너로서, 이만큼이나 마음 든든한 상대가 있을까." "......같은 편이 되라, 고 말하고 싶은 건가?" "아니. 우리 편이 되란 소린 안 했어. 내 동료로 만들어주겠어, 이 몸께서 말야. 네 의사 같은 건 상관없어. 오히려 그런 건 방해만 될 뿐이지. 안심 하고 있으라구 - 그 피를 빨아 영혼까지 약탈해 간 뒤. 네가 아무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되게끔 만들어 줄테니까." - 으득. "......그래. 그럼 또 하나 물어보자. 너한테 보이는 건 선이랑 점 중 어느 거지? 아니, 좀 더 간단하게 물어보지. 네가 볼 수 있는 건 생물의 죽음 뿐 이겠지? 그 이외에는 보이지 않을 거야." "......응? 당연한 소릴, 생물이 아니면 생명은 존재치 않아. 생명의 근원 이 되는 '부분'은 생물에 밖에는 있을 리 없다구." " - 역시. 이제야 알겠어, 흡혈귀." 나이프를 거머쥔다. 두통이 머리 속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고 이제 보이는 건 오로지 단 하나 뿐. "......이해가 안 가는군...너의 지금 발언은 살아있는 동안의 마지막 대사 치고는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뭐, 어쨌든...잡담은 끝이야. 어딘가에 숨어있는 교회의 여자도 처치해야 하고. - 기뻐하라구, 시키. 내 노예가 된 다음의 가장 첫 번째 상대는 네가 그토록 믿고 있는 바로 그 여자가 될테니 까 말야." 로어가, 다가온다. 일그러진 시야는 로어의 모습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 " - 난 네가 보는 거랑은 다른 걸 본다구, 시키." 머리 속 깊숙한 곳에서. 찰칵 하고 스위치가 켜졌다. "넌, 그저 생명을 보고 있을 뿐이야. 죽음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어. 그러 니까 나도 못 죽이고 단지 연약한 여자들 밖에 못 죽이는 거라구." 뇌수가, 하얗게 타들어간다. " - 뭐, 뭐라고?" "죽음이 보인다면 맨정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지. 네가 이해한 건 사물을 살 아가게 하는 부분들 뿐이야. 죽음이 보이면 - 도저히 일어서 있을 수조차 없단 말야." - 예를 들면, 마치 달세계처럼. 모든 것들이 죽어 없어진 황야와 비슷해. 눈에 보이는 것들 모두에 존재하 는 죽음의 실밥. 건드리면 사라져 없어져버리는 세계의 사상(事象). "너 - 무슨" "......사물의 [죽음]이 보인단 소리는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불확실 하며 위태로운 지경에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는 뜻이야. 발 디디고 서있는 땅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하늘도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 지." "무슨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시키." 로어의 목소리가 동요하고 있다......그도 그렇겠지. 왜냐하면 내가 말하는 것들을 로어는 1mm 만큼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건 결국 - 녀석과 내 눈은 서로 닮아있으면서 사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의미니까. " - 그만. 그런 눈으로 - 그 눈으로 날 쳐다보지마." 로어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배어있다. 마침 로어 스스로가 이런 말을 한 적 이 있다. 사람은 미지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생물이라고. "......금방이라도 전 세계가 죽어버릴 것만 같은 착각을, 넌 모르고 있어. - 그게 죽음을 본다는 행위지. 내 눈은 말야, 너처럼 자신감에 넘쳐 이 소 리 저 소리 늘어놓아댈 수 있는 그런 힘을 갖고 있지 않아." 그래, 걸어다니는 것조차 두렵고 무서웠던 그 무렵. 내가 - 선생님하고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미 훨씬도 전에 미쳐버렸을 거다. "그게 네놈의 착각이란 거야, 흡혈귀. 생명과 죽음은 서로 등을 맞대고 있 을 뿐, 영원히 서로의 얼굴을 마주대할 기회는 없다구." "그러니까 -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말라고 했잖아......!" 달리는 소리. 하지만 내쪽이 몇 배는 더 빨랐다. " - 가르쳐주지. 이게, 사물을 죽인다는 거다." 라고 말한 후. 통로에 난 [점]을 찔렀다. 순간 - 외부복도 이곳저곳에 퍼져 있던 선들이 순식간에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 - !!" 로어의 비명소리도 무너져내리는 돌더미 속에 묻혀 이내 사라져 버린다. 외부통로는 글자 그대로 죽어버렸다. 의미를 상실한 돌더미들은 순식간에 와해되어 무너져내린다. 로어 입장에서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일격을 먹은 셈일까. 무너지는 통로 속에 휩쓸려 돌더미에 깔려가며 로어는 지상으로 낙하해 갔 다. "........." 눈 앞에서 모든 것들이, 외부통로는 무너져 내렸다. 지끈거리는 머리와 휘청이는 몸을 이끌고 계단 쪽으로 향했다. "........." 알퀘이드의 유체를 지나 운동장 쪽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달빛이 내리비추이는 아래. 외부통로가 있던 자리는 한쪽이 돌더미들의 바다로 탈바꿈해 있었다. 그 중 심에 들썩들썩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 진짜 질긴 녀석...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몸을 이끌며 그쪽으로 이동했다. ......대단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로어의 하반신은 완전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돌더미 사이에서 기어나온 로어의 상반신은 그런 사실과 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활동하고 있다. 그런 그의 생명력에는 순수하게 경 의를 표해야 할른지도 모르겠군. " - 방금, 뭐였지?" 떨리는 목소리로, 로어는 중얼거렸다. 외부통로의 잔해 위를 걸어 로어의 앞으로 이동한다. " - 시키" 로어는 고개를 들고 내쪽을 바라본다. 그 눈동자 속에는 안구에서 흘러넘칠 정도의 증오심이 충만해 있었다. " - 괴물, 자식" 미움이 가득 찬, 원망 섞인 목소리. "누가." 라며 로어의 앞에 섰다. 로어의 [죽음]은 심장에서 약간 오른쪽 언저리에 있었다. 나이프로 힘껏 그곳일 찌른다. 마치 종이를 뚫고 지나는 듯한 감 각. 그 감촉이야말로 [죽음]이었다. 아 로어는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로어도 죽음을 체험해왔던 남자다. 그 감촉을 잘 알고 있으리라. "......무섭지는 않겠지? 너한테 있어서는 아주 익숙한 걸테니까 말야. 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단 한 가지." " - 이번엔, 영원히 못 돌아와." 나이프를 뽑아들고 로어를 등진다. 로어는 아직 죽음에는 이르지 않았다. 알퀘이드와 마찬가지로 오래도록 살아왔던 만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다소 긴 것이리라. "하.........아" 의식이 아득해진다. 몸이 한계라면, 머리 속은 훨씬 더 한계상황을 맞이하 고 있었다. ......알퀘이드가 이런 소릴 했었던가. 광물의 죽음은 억지로 봐서는 안 된 다고. 만약 억지로 광물의 죽음을 봐 버리면 뇌 속의 혈관들이 끊어져 버린 댔던가 어떻다던가. "............" -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걸로 되는 일이었다면. 내가 폐인이 되는 걸로 되는 일이었다면 좀 더 일찍, 로어를 해치울 걸 그랬어. 그랬다 면 넌,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텐데 - ".........!?" 쓰러졌다. 지면에, 내가 쓰러져 있다. 발목이 아프다. 몸을 돌려 그쪽을 바 라보니 거기에는 - 상반신만으로 이곳까지 기어온 로어의 모습이 있었다. "너, 너너, 너 이자, 식 - " 핏발 선 눈을 부릅뜬 채 땅바닥에 쓰러진 내 몸 위로 스스로의 몸을 질질 끌며 올라타려 한다. "사라, 사라져, 내,,,내가, 사라, 져 - " 피범벅이 된 두 팔로 내 머리를 감싸안는다. "무슨, 무슨 짓을, 했나 - 사라져, 왜, 어, 어떻, 게, 나를, 죽였, 여여여 여여여여였, 어어, 어어,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 " 날카로운 톱날들이 일어선 입을 벌리고 내 목을 물어뜯으려 한다. "사라, 지지않아, 나와 너는, 서로, 이어져 있, 으니까. 너에, 게로, 옮겨 가면, 아, 직, 존재의 사슬은, 끊어지지 않아.........!" - 이가. 내 목에 파고 든다. "아 - " 사라졌어. 로어의 몸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 - 예. 이걸로 이 사람을 죽인 건 제가 되겠군요." 검을 손에 들고 거친 숨을 내쉬는, 선배가 그곳이 있었다 - . "......에?" 잠깐, 선배가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 이해가 잘 안 가. "그러니까 로어를 죽인 건 저라구요......상대가 그 어떤 존재라 하더라도 함부로 살인을 해서는 안 돼요. 토노 군은 이쪽으로 와서는 안 되는 사람이 에요. 그러니까 죽인 건 바로 제가 되는 거죠." 양손을 허리에 짚고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양 선배는 그렇게 잘라 말했다. "......선배. 그거, 궤변이라구." "궤변, 일까요? 하지만 선의의 거짓말이라면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 각해요. 아무리 위선이라 해도 왠지 모르게 그곳이 해결책이 있을 것 같잖 아요?" " - " 그 말,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어. 만약이란 말은 하지말라고 내가 말했었을 때, 알퀘이드가 답했던 말과 비슷 해. "......응, 그래......왠지 모르게 - 어딘가에 해결책이, 남아있을지도, 모 른다면" 실로,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뭐, 그런 건 어찌됐든 상관없는 일이구요. 괜찮으세요, 토노 군? 혹시 물 리시지는 않으셨어요!?" 선배는 쓰러져있는 날 걱정스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준다. " - " 의식이 멀어져간다. 더 이상은 움직이기 싫어, 라고 뇌가 쉬고 싶어하고 있다. "......군......시키......참......!" ......점점 더 아득히 멀어진다. 눈을 뜬 채로. 머리 위엔 유리로 만든 듯한 달이 떠 있는 채,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린다. 바로 직전. 마치 TV 스위치를 껐을 때랑 비슷한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12. 달세계 - 끝> -------------------------------------------------------------------------------- <월희(月姬) - 에필로그> -진 엔딩- "시키 님, 아침입니다. 일어나십시오." ......귀에 익은 목소리. "시키 님......어서 일어나십시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다시 지각하시게 되 옵시면 아키하 님과의 약속을 깨뜨리는 일이 되어버리니까요." ......절박한 심정에서 저러는 건지 아니면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좀처럼 판별하기 힘든 목소리다. "시키 님. 오늘 아침에도 아키하 님께 꾸중을 듣게되셔도 괜찮으시다는 말 씀이시온지?" ......그게 괜찮을 리가 있냐. "......일어날게. 일어날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시트를 뒤집어 쓴 채 그렇게 대답을 한 뒤 감겨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시키 님." "어, 잘 잤어?" 잠기운에 아직도 멍해져 있는 채로 아침인사를 나눈 뒤 안경을 쓴다. 아침 7시를 조금 넘긴 시각. 여느 때와 마찬가지 시간에 날 깨우러 히스이가 왔 고, 그런 가운데 드물게도 히스이의 부름에 눈을 뜬 내가 있었다. "그럼 아침 식사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옷을 다 갈아입으시면 식당으 로 내려와주십시오." 꾸벅 인사를 하고 히스이는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간다. "하 - 아" 크게 한 번 하품을 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교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뒤 문득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옮겼다. 테이블 위에는 그때 이후로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나이프가 놓여져 있었다. 커튼이 펄럭인다. 히스이가 열어두었을 그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정말 기분이 상쾌해질 정도로 맑게 개어있었다. 다만 불어오는 바람은 살을 에이 는 듯 차갑다. 창문을 닫으려 창 쪽으로 다가섰다. - 결국. 그 일이 있은 후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난 내 방에 누워있었다. 선배가 옮 겨다 주었던 듯 다행히도 아키하나 히스이, 코하쿠 씨 등은 내가 방에서 빠 져나갔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밤으로부터 1주일. 토노 시키의 생활은 예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키하와의 관계는 다소 약간은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오빠와 여동생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학교 쪽은 외부통로를 수리하고 있 는 중이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예전과 그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은 없다. ......아니, 달라졌을라나. 학교에는 시엘이라는 이름의 선배는 그 어디에 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기억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거리를 떠들썩 하게 했던 연쇄살인마 사건도 그 일이 있은 후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 다. 범인이 잡힌 건 아니었기에 아직 밤거리는 한산하기 그지 없지만, 앞으 로 한 달 정도만 지나면 예전의 밤의 모습으로 돌아오리라. 나는 결국. 가슴 속에 도저히 그 무엇으로도 메꿔질 것 같지 않은 구멍을 만들어 둔 채 그럼에도 예전과 같은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아니, 견뎌나가고 있달 까. 때때로 멍하니 앉아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고 있노라면 정말 참을 수 없는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아직 정신이 어떻게 되고 그런 일은 없는 것 같다. 언젠가. 이 추억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어 이대로 미쳐버리게 되는 걸까, 아니 면 그런 현실에 적응이 되어 평범한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걸 까. 뭐, 확률적으로는 50 대 50 일 거다. 다만 - 그때까지는. 좀 남자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 녀석이랑 했던 마지막 약속 을 매일같이 지켜나가는 그런 나 자신이 있을 거다. " - 가을도, 거의 다 끝나가는군." 밖은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로 푸르른 하늘. 딱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창문을 소리나게 닫았다. 수업이 끝나고 교실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지만 해가 떨어질 때까지는 저택 에는 돌아가지 않는다. 붉은 교실. 창 너머에는 타들어가는 듯한 저녁노을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 었다. 마치 너른 하늘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새빨간 태양이 녹아간다. " - " 줄곧,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 알퀘이드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고 그걸 잊 어버리지 않는 한 계속 여기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단 하나, 지키지 못했던 약속이 있다. "모두 다 끝난 다음에 - 흡혈귀를 쓰러뜨린 다음에 말야. 헤어지기 전에, 한 번만 더 이렇게 놀아보지 않을래?" 알퀘이드,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 있었던가. "그러니까 말야 - 정말로 그 어떤 의무 같은 것도 모조리 다 없어져 버린 다음에 말야, 그냥 아무 의미도 없이 서로 만나면 어떻게 될까나 하고 생각 해 봤을 뿐이라구." ......말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마음 속으로는 그저, 그녀에 대한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네가 정 바쁘고 그러면 어쩔 수 없지만 말야. 나도 그냥 그렇게 생각이 들 었을 뿐이니까." ......그저. 서로 협력하는 그런 사이 같은 거 말고. 서로 마음이 통하는 그런 친구 사 이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정말로 평범한 추억을 만들어 주면. 틀림없이 알퀘이드는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었던 그 때. 응 - ! 모두 다 끝나면 또 여기 와보자, 시키! 별다른 의미도 없지만 그거 틀림없이, 틀림없이 정말로 즐거울 거야 - 두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가 이내 끄덕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저녁노을에 물든 교실 안에서. 그녀는 솔직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렇게 약 속했었다. - 그 약속을, 난 기억하고 있어. - 그 미소를, 난 기억하고 있어. - 그 모두를, 난 기억하고 있어. 잊지 못 해. 어떻게 잊어버리란 말야. 타들어가는 듯한 교실 안에서, 여기 다시 와보자는 약속을 언제까지나 계속 기억하고 있다구 - "........." 해가 점점 더 깊이 가라앉아간다. 이 붉은빛이 사라져버릴 때까지 앞으로 수 시간 정도. 진홍의 공기가 없어져버릴 때까지의 고요한 시간. 영원하다 고도, 정말 순식간이라고도 여겨질 그런 정지된 세계. 어쩌면 난 이미 훨씬 오래 전에 미쳐버렸는지도 몰라. 오지 않을 걸 뻔히 아는 상대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마음은 너무나도 평온하게 가라앉아있어. - 덜컹. 무언가가 책상에 와 닿는 소리. 시선을 그쪽으로 향한다. 창문이 열려져 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붉은 태양빛에 물든, 그녀가 창가에 서있었다. 그녀는 창가 쪽에서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은 채 그곳이 그대로 서있었 다. 틀림없이 내 눈 앞에 있음에도, 절대로 환영 같은게 아님에도, 도저히 손길이 닿지 않게 하는 어떤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 ------------------ " 말이 터져 나오지 않아. 하지만 마음은 너무도 차분히 가라앉아있어. "......나도 참. 원래는 아무도 모르게 살짝 사라져버리려고 했었는데, 시 키가 계속 그렇게 기다리고 있잖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이렇 게 나와버렸어." 부끄러운 듯,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뭐, 말했잖아. 너랑 한 약속은 두 번 다시 깨지 않겠다고." "그랬었지. 고마워, 약속을 지켜줘서. 하지만 미안. 이번엔 내가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아." "......어째서?" ......스스로도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화내지도, 그렇다고 매달리지도 않는 정말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는 그 렇게 속내를 밝혔다. "......응. 시키한테는 내가 로어를 왜 쫓고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 았었지. 저기, 사실은 말야. 나, 오래전에 딱 한 번 사람의 피를 빤 적이 있었어. 그때 내 힘의 일부를 그 사람한테 빼앗겨버려서 그녀석은 엄청나게 강력한 사도가 됐지. 결국 나 이외의 신소들은 모두 그녀석한테 죽임을 당 했어." - 그 말은, 그러니까. "......그게, 로어?" "응. 그때까지 난 흡혈충동이란 걸 전혀 모르고 지내왔었지. 다른 신소들도 나한테는 흡혈충동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난 단순히 그게 찾아드는 것이 다른 이들보다 늦었을 뿐. 그때까지 - 나, 스스 로가 흡혈종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 그래서 - 그게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지냈어." ......그런가. 그 무엇 하나 불필한 것들은 배운 적이 없는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죽여 왔던 상대들과 스스로가 서로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내왔었던 거야. "단 한 번의 실수로, 난 다른 모든 이들을 없애버리고 말았어......그래서 두 번 다시 사람의 피는 빨지 않아.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피를 빨아버린 신소는 사람의 피를 빨지 않으면 맨정신으로 있을 수 없게 되어버리지." " - " "......내가 여기 이렇게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말야 시키가 로어를 완전히 [죽여]주었기 때문이야. 지금까지 내가 몇 번이나 로어를 소멸시켰어도 사 라지는 건 언제나 육체였을 뿐 영혼까지는 없애지 못했어. 하지만 시키는 녀석의 존재 그 자체를 완전히 없애줬지. 그러니까 - 로어한테 빼앗겼던 힘 이 원래대로 돌아와 겨우 소생할 수 있게 된 거야." " - 그 - 러" "하지만, 그게 한계였어. 내 안에 존재하는 흡혈충동은 더 이상 억제하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러버렸지. 그러니까 - " " - 그런 건 - 아무래도, 상관없어." "......시키랑은, 이젠 만날 수 없어. 약속, 깨버려서 미안해."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단 말야. 난 그저 - 네 곁에 있고 싶 을 뿐이라구. "......약속, 지키란 말야." "시키......?" "내 피를 빨아. 그럼 - 넌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돼." 시간만이 흘러가고 있을 뿐.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정말로 미쳐버 릴 듯한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 - 그래. 하지만 역시 사양할래. 시키 피는 필요없어." "어째서. 내 피는 왜 안 되는데. 내 피를 빨지 못하는 이유라고 있는 거 야?" 고개를 끄덕이는 알퀘이드. "좋아하니까, 안 빨 거야." 알퀘이드는 이제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 마냥 얼굴에 웃음을 띄워보인다. "..................윽" 크게 한숨을 들이쉰 후. 단지 기분만을 억눌러놓는다. 막고 싶었어. 막고 싶었어. 막고 싶었어. 막고 싶었어. - 죽여서라도, 못 가게 막고 싶었어. 하지만 그 미소가 너무도 아름다운 나머지. 내멋대로의 마음으로 그것을 더럽힐 수는 없었다. " - 안녕. 지금까지 정말로 고마웠어, 시키." "..............." 목소리가 너무도 떨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 작별인사를, 말해야해. "......난, 거짓말쟁이야." "왜? 시키는 약속을 지켜줬잖아." " - 정말 엄청난 거짓말쟁이야. 널......행복하게 해주겠다고, 그렇게 말했 었으면서." 그렇게, 맹세했었으면서. "......으응, 그렇지 않아. 난 이제부터 깊은 잠에 들게 되겠지만, 그렇게 자고 있는 동안 시키의 꿈을 꿀 거야. 시키랑 보내왔던 시간들은 정말로 즐 거웠으니까. 그러니까 그때의 꿈을 앞으로도 계속 꿀 거야." " - "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일테지만 그거 틀림없이, 틀림없이 정말로 즐거울 거야. 그러니까, 시키. 난 행복하다구. 시키는 정말로 내게 행복을 안겨다 줬으니까 말야." "크............윽!" 목이 메인다. 그런 걸 - 그런 걸 난. "......정말 마음이 착하구나, 시키. 응, 역시 마지막에 작별인사를 전하러 와서 정말 다행으로 생각해. 나, 시키를 사랑하고 있어. 정말로, 맨날 멍하 니 있으면서 나한테만 잔소리 해대고 적극적으로 앞만 보고 달려나가는 그 런 시키를 사랑해. 그러니까 부탁할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나가 줘 ." 정말 잠깐 동안. 슬픈 듯한 표정으로, 그녀는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바이바이 하고 손을 흔들며 저녁노을 사이로 녹아없어져 버리듯 내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윽"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내게 웃는 모습을 보여 줬으니까 적어도 눈물을 흘리고 싶지는 않았다. -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 약속, 지켰잖아, 알퀘이드." 이 교실에서. 저녁노을 비추이는 교실에서 다시 한 번 만나자는 약속은, 틀림없이 지켜졌 다......잃은 것이 있긴 하지만, 이걸로 모든 게 끝났어. 알퀘이드를 알고 나서 지금까지 헤쳐나왔던 시간들이 이곳에서 그 막을 내렸다.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헤어짐이란 언제 어느 때에라도 있을 수 있는 거다. 나와 알퀘이드의 경우, 그게 다른 경우보다 빨랐을 뿐. 그렇게 생각 해 보면 꽤 만족스러운 이별의 장면이었다. 알퀘이드는 살아있었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해줬, 으, 니, 까. "......거짓말......! 그렇지 않아, 그런 걸 - 난 바라지 않았단 말야..... ....!" - 그래. 좀 더 - 좀 더 함께 있고 싶었어.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어. 좀 더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어. 좀 더 - 좀 더 저 밝은 미소를 보고 싶었어. 계속. 앞으로도 계속 -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녀석은.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로, 내게, 살아가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바보......" 그것이 알퀘이드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다 할 지라도 - 지금은 스스로를 달래고 속이면서 언젠가 지금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려볼 수 있을 그날까지 오로지 앞만 보고 살아나가라고, 미소 지은 표 정으로 그렇게 말했어. "윽..................!" 어떻게 그렇게 살아가란 말야. 나에게는 - 그렇게 살아갈 자신(自信)이 하 나도 없단 말야. " - " 그래도 그녀가 행복한 꿈을 꾸며 살아갈 수 있도록. 적어도, 그 정도의 소망은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아" 정신이 들고 보니 이미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새빨갛던 주변 분위기는 온 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하늘은 푸르디 푸른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 나선을 그리는 듯한 구름들과, 그 사이로 떠 있는 하얀 빛을 내뿜는 달. - 남은 건 그것 뿐. 하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기억. " ------------------- " 하아. 길게, 마치 기도하듯 한숨을 내쉰다. 이제 그녀는 이곳에 없지만. 잊고 있었던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돼. "잘 가......나도, 정말 즐거웠었어." 때늦은 이별의 언어가 교실 안에 메아리친다. 밤하늘에는 유리로 만든 듯한 달만이 떠 있을 뿐이었다. 머나먼,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 같은 푸른 달. 그 달을 언제까지나 - 날이 밝을 때까지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었다. ################################################# <오마케> 시엘 선생님의 수업을 받으시겠습니까? - 예 알퀘이드 트루 엔딩을 보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각 히로인에게는(딱 한 명 예외가 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두 종류의 엔딩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트루 엔딩과 굿 엔딩이 바로 그것이지요. 어느 한쪽의 엔딩에 도달하신 후 조금 앞으로 되돌아가 다시 한 번 이야기를 진행시켜 보세요. 다른 어떤 전 개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자아, 그럼 지금까지 플레이 해주셔서 정말로 감사 말씀 드리겠습니다. "월 희"의 세계에서 다시 만나요! -------------------------------------------------------------------------------- <월희(月姬) - 에필로그> -굿 엔딩- "시키 님, 아침입니다. 일어나십시오." ......귀에 익은 목소리. "시키 님......어서 일어나십시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다시 지각하시게 되 옵시면 아키하 님과의 약속을 깨뜨리는 일이 되어버리니까요." ......절박한 심정에서 저러는 건지 아니면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좀처럼 판별하기 힘든 목소리다. "시키 님. 오늘 아침에도 아키하 님께 꾸중을 듣게되셔도 괜찮으시다는 말 씀이시온지?" ......그게 괜찮을 리가 있냐. "......일어날게. 일어날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시트를 뒤집어 쓴 채 그렇게 대답을 한 뒤 감겨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시키 님." "어, 잘 잤어?" 잠기운에 아직도 멍해져 있는 채로 아침인사를 나눈 뒤 안경을 쓴다. 아침 7시를 조금 넘긴 시각. 여느 때와 마찬가지 시간에 날 깨우러 히스이가 왔 고, 그런 가운데 드물게도 히스이의 부름에 눈을 뜬 내가 있었다. "그럼 아침 식사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옷을 다 갈아입으시면 식당으 로 내려와주십시오." 꾸벅 인사를 하고 히스이는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간다. "하 - 아" 크게 한 번 하품을 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교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뒤 문득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옮겼다. 테이블 위에는 그때 이후로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나이프가 놓여져 있었다. 커튼이 펄럭인다. 히스이가 열어두었을 그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정말 기분이 상쾌해질 정도로 맑게 개어있었다. 다만 불어오는 바람은 살을 에이 는 듯 차갑다. 창문을 닫으려 창 쪽으로 다가섰다. - 결국. 그 일이 있은 후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난 내 방에 누워있었다. 선배가 옮 겨다 주었던 듯 다행히도 아키하나 히스이, 코하쿠 씨 등은 내가 방에서 빠 져나갔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밤으로부터 1주일. 토노 시키의 생활은 예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키하와의 관계는 다소 약간은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오빠와 여동생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학교 쪽은 외부통로를 수리하고 있 는 중이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예전과 그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은 없다. ......아니, 달라졌을라나. 학교에는 시엘이라는 이름의 선배는 그 어디에 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기억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거리를 떠들썩 하게 했던 연쇄살인마 사건도 그 일이 있은 후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 다. 범인이 잡힌 건 아니었기에 아직 밤거리는 한산하기 그지 없지만, 앞으 로 한 달 정도만 지나면 예전의 밤의 모습으로 돌아오리라. 나는 결국. 가슴 속에 도저히 그 무엇으로도 메꿔질 것 같지 않은 구멍을 만들어 둔 채 그럼에도 예전과 같은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아니, 견뎌나가고 있달 까. 때때로 멍하니 앉아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고 있노라면 정말 참을 수 없는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아직 정신이 어떻게 되고 그런 일은 없는 것 같다. 언젠가. 이 추억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어 이대로 미쳐버리게 되는 걸까, 아니 면 그런 현실에 적응이 되어 평범한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걸 까. 뭐, 확률적으로는 50 대 50 일 거다. 다만 - 그때까지는. 좀 남자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 녀석이랑 했던 마지막 약속 을 매일같이 지켜나가는 그런 나 자신이 있을 거다. " - 가을도, 거의 다 끝나가는군." 밖은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로 푸르른 하늘. 딱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창문을 소리나게 닫았다. <2. 알퀘이드를 잊을 수 없어 - 선택> 언덕 위의 저택에서 학교를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일상은 이렇다 할 변화 를 보이지 않았고 아침공기엔 평온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제 곧 가을 이 가고 겨울이 찾아들 것이다. 여름처럼 덥지도 않고 겨울처럼 춥지도 않 은 이 애매한 계절이 지나면. 이런 투명하기만 한 내 기분도 조금은 바뀌어질 지도 모른다. 학교 근처에 가까워지니 교복차림의 학생들이 점차 눈에 많이 띄기 시작한 다.오늘이 토요일인 이유에서인지 대부분의 학생들은 활짝 웃는 모습으로 길을 지나고 있다. 이 교차로를 지나고 조금만 더 가면 정문이다. 토노 저 택에 이사하고 나서 약 한 달. 이 등교길로 학교에 가는 것도 이제 어느 정 도 익숙해졌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어 횡단보도 앞에 우뚝 멈춰선다. "........." 여기서 이렇게 신호를 기다릴 때마다 그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니까, 그 때. 이 교차로에서, 지금 저기 저만치에서 녀석이 날 기다리고 있는 모습처 럼 알퀘이드는 가드레일에 몸을 기대어 앉아서는 토노 시키를 기다리고 있 었지. " - 에?" 무심결에 놀란 소리가 터져나온다. 차들이 빠른 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도로에, 그때와 똑같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 아" 그곳에 있던 사람은 그녀였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에 흰 옷. 가늘고 긴 눈썹과 붉은 눈동자. 절대로 -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잘못 봐버릴 리 없 는, 이미 사라져버렸을 그 모습. " -------------------- " 신호가 파란불로 바뀐다. 학생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한다. 그런 가운데. 나만이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가만히 서있었고, 오직 그녀만이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 야호 하는 소리가 정말로 잘 어울릴 것만 같은 미소 지은 표정으로, 알퀘이 드는 도로를 가로질러 오기 시작한다. " -------------------- " 말이 터져 나오지 않는다. 가슴이 터져나갈 듯 무언가 꽉 들어차서 뭘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 아무리,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다시 한 번 알퀘이드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실에, 눈물이 새어나올 정도로 기뻐하고 있다. "안녕? 학교 가는 거야, 학생?" ......이럴 수가. 헛것이 이젠 말까지 걸어오잖아? "시키? 야, 왜 아무 말도 안 해? 혹시 내가 누군지 잊어버린 거야?" 아래에서 위로, 날 빤히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그걸, 잊어버릴 리가 있겠어?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알퀘이드가 이렇게 살아있을 리가 없 잖아. " - "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알퀘이드는 토라진 고양이 마냥 찡그린 표정으로 내 얼굴을 이리저리 쏘아 본다. "진짜 뭐하는 거야. 만나러 가고 싶은 걸 애써 참고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 었는데......혹시 시키, 화났어?" "우 - " ......믿을 수가, 없어.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것은 헛것도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진짜, 진짜 - "......알......퀘이드......?" "응, 나야. 다행이다 - 시키, 로어랑 한 판 붙고 나서 혹시 폐인이 되어버 린 건 아닐까 하고 정말로 걱정하고 있었단 말야." " - " - 잠깐, 기다려봐. 저기 - 너무 머리속이 혼란스러워서 뭘 말해야 좋을지, 어떤 것부터 기뻐하면 좋을지, 뭘 해야 할지. 정말 - 무엇인가가 가슴 속에 답답할 정도로 꽉 들어차서,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아. "시키......? 야, 아까부터 너 이상해. 입은 헤~벌리고 있고 눈은 껌뻑껌뻑 만 하고 있고......뭐, 나한텐 다 재밌으니까 계속 보고만 있어도 하나도 안 질리지만 말야." " - 알, 퀘이드" "그것 보라구......증말, 아까부터 내 이름만 불러대고 있잖아. 모처럼 이 렇게 다시 만났으니까 좀 더 괜찮은 말 좀 할 수 없어?" - 아아, 틀림없어. 이런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입에 담을 수 있는 건 이녀 석 밖에 없을테니까. "......어째서" "응? 뭐라고? 잘 안 들려. 더 크게 좀 말해봐." 예쁘장하게 생긴 귀를 내쪽으로 들이대는 알퀘이드. " - 어째서 살아있느냔 말야, 알퀘이드!" 가능한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지금의 기분을 표현했다. "꺄악 - 시키, 목소리 너무 커~~" "너 이자식......목소리 너무 커~~~란 말이 나오냐! 어째서, 어째서 살아있 느냔 말야......! 나 - 넌 이젠 이 세상에 없다고,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 다고 지금까지 계속 - " 후회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그렇게 밝은 모습으로 마치 어제 헤어졌다가 오늘 아침 다시 만나는 사람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인사 같은 걸 할 수 있느 냔 말야......! "아참. 시키한텐 아직 안 말했었던가?" 알퀘이드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짝 하고 손뼉을 친다. "내가 로어를 쫓고 있었던 이유. 나, 로어한테 내 힘의 일부를 빼앗겼었어. 그걸 되찾으려고 지금까지 줄곧 녀석을 쫓고 있었는데 로어, 시키한테 져서 완전히 사라져버렸지? 덕분에 로어에게서 해방된 내 힘이 원래대로 돌아와 서 겨우 소생할 수가 있었던 거야." "그, 그런 소리, 나 한 번도 들은 적 없다구!" "그런 걸 왜 말해. 시키한테는 별로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너 - " 넌 어떻게 그런 - "근데 어떻게 어떻게 해서 겨우 소생하긴 했는데 흡혈충동이 도저히 참아낼 수 없을 정도로 솟구쳐 올라서 말야. 그 상태로 시키 만나러 갔다간 틀림없 이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사고를 쳐버릴 것 같아서 힘이 돌아올 때까지 쭉 잠들어 있었어. 그 결과, 이렇게 원래의 몸으로 돌아오고 흡혈충동을 억누 를 수 있게 되는데 7일간의 시간이 걸려버린 거지." "에 - 그, 그럼 정말로 이젠 괜찮아진 거야 알퀘이드......?" "물론이지! 안 그랬으면 이렇게 시키 앞에는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야." 만면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며. 알퀘이드는 내 손을 덥썩 잡는다. "나말야, 시키. 자고 있는 동안 이렇게 만날 날만 쭉 기다리고 있었다? 시 키랑 만나면 이곳저곳 데려가준다고 약속했었잖아. 빨리, 조금이라도 빨리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좋을텐데 하고 생각했었어."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알퀘이드는 내 얼굴을 바라 본다. " ---------------- "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그건 안 좋은 의미가 아닌 - 정말로 기쁜 나머지. 알퀘이드의 미소를 볼 수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앞으로의 일도. 예전에 선배한테 말했던 것처럼 알퀘이드를 홀로 내버려두기 싫다는 내 바 램도. 그 무엇 하나도 - 난, 잃어버리지 않았던 거야. " ------------------ " 말하고 싶은 것들, 전하고 싶은 것들은 산더미처럼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 은 그냥 내 솔직한 마음이 말로 표현될 뿐이었다. " - 어서와. 알퀘이드 널, 쭉 기다리고 있었어." 알퀘이드의 손을 마주 잡으며 짧게, 그 말만을 전한다. 알퀘이드는 휘둥그 레진 눈으로, "......응" 이라며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다. "......알퀘이드?" 그녀를 부른다. 그리고 잠시 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만면에 한가득 웃 음을 지어보였다. "응, 나 왔어 시키. 시키가 예전의 시키로 있어줘서 정말 다행이야." " - " 가슴이 꼭 메인다. 지금 이곳이 통학로만 아니었어도 꼭 껴안고 키스 한 번 나누었을 정도로 알퀘이드의 미소는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자아, 그럼 가볼까 시키? 나 데리고 여기저기 가보고 그런다고 했었지?" 알퀘이드는 스르르 잡았던 손을 놓으며 마치 토끼처럼 깡총 한걸음 점프해 보인다......그 모습은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다. "그치만, 저기 - 가자니, 어디에?" "어디든지. 시키가 괜찮겠다 싶은 데로." 알퀘이드는 활짝 개인 얼굴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렇게 대답한다. 하지 만 그건 좀 힘든데 말이지. "......저기 말야. 나 이제부터 학교 가야 하거든?" "뭐야. 오늘 하루 쯤은 시키 스케줄을 나한테 맞춰도 괜찮지 않겠어?" 불만스런 시선으로 날 대하는 알퀘이드. "......윽" ......아무래도, 이녀석의 이런 표정에 난 끝없이 약해지는 모양이다...... 뭐, 이래저래 이런 기분인 채로 학교에 가봤자 손에 잡히는 일도 없을테고 무엇보다 - 나 자신이 알퀘이드와 함께 있어하고 싶어하니까. "......응, 그러자. 이참에 자질구레한 것들 따위 다 떨어내버리지 뭐. OK, 알퀘이드. 오늘은 하루종일 공주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와아!" 갑자기. 알퀘이드가 내쪽으로 몸을 기대어온다. "저기, 시키. 그날 밤, 시엘한테 말했었을 때의 기분, 변하지 않았지?" 아래에서 불쑥 얼굴을 들이대며 알퀘이드는 내게 그렇게 묻는다. "......그날 밤의 기분...이라니 - 그게 뭔데?" "날 사랑하고 있다던, 그거 말야." " - !" 쿨럭쿨럭.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알퀘이드 본인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왠지 좀 부끄러워지는걸. "......아참, 잊어버리고 있었어. 엿듣는 건 안 좋은 버릇이야, 알퀘이드." "밖에까지 들렸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저기, 됐으니까 빨랑. 그때 했 던 말,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는 거지?" - 바보. 그런 건 말할 필요도 없잖아. "......응, 안 변했어. 보증은 할 수 없지만, 아마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야." 너무도 부끄러운 나머지 먼산 바라보듯 한 표정으로 웅얼대듯 대답했다. 그리고. 몸을 기대어 서있던 알퀘이드가 내 한쪽 팔에 꼭 매달리낟. "그래? 그럼 앞으로 각오 단단히 해, 시키?" "각오라니, 무슨 각오." 일말의 불안 같은 걸 느끼며 되묻는다. 알퀘이드는 내 한 팔을 꼭 붙들고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언제까지나 함께 있겠다는 약속. 맨 처음에 말했었지? 날 책임 지게 하겠다고 말야." 그렇게 알퀘이드는 내 팔을 꼭 붙잡은 채 걸음을 재촉한다. 마치 놀이공원 에 빨리 가고 싶어하는 아이 같은 저 에너지로. "하 - 그렇군, 확실히 각오가 필요하겠군, 그거." 남에게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며 그녀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등교하는 학생들 사이를 역행하여 그 어느 곳이라도 괜찮은 장소로 발걸음 을 옮긴다. 어디든지 가볼까? 뭐, 갈 수 없는 곳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내 곁에 서계 시는 달나라 공주님께는 햇빛마저도 너무도 잘 어울리니까 말야. - 하늘은, 정말로 뭐라 흠잡을 데 없는 그런 푸른 하늘. 우린 서로 손을 꼭 잡고 두 사람한테 있어 처음 가보게 될 그 어느 곳을 향 하여 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 알퀘이드 루트 번역물이였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두 엔딩을 따로 놓아두었습니다. 번역하시는 분의 수고가 없었다면 일본어를 알지 못하시는 분들은 어쩔수 없이... 구경만 해야 할 상황이라는거 알아두시구요^^...번역하시는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봅시다. 』 By 허접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