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피니아 전기 04 /카야타 스나코 /대원씨아이 공허의 왕좌 1장 그날 마레바를 눈앞에 둔 국왕군의 진지는 어딘가 이상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함락 직전이라고 여겨졌던 마레바는 어제 심야부터 갑자기 활기를 되찾았고 그에 반해 국왕군의 내부에서는 무언가 중대한 사태의 변화가 있었던 듯 했다. “저는 아무래도 그... 잘 모르겠습니다만 핸드릭 백작은 아누아 후작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말씀하시긴 했지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루카난 대대장은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국왕에게 물었다. 어젯밤 돌연 국왕군의 진영을 방문한 핸드릭 백작은 루카난 대대장에게 국왕군을 떠나 자신의 지휘하에 들어오도록 명령했지만 대대장의 입장에서 보자면 납득이 갈 리가 없었다. 근위사령관이라고 해도 국왕 휘하에 있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지금의 대대장은 그 국왕군의 일각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도 핸드릭 백작은 국왕군을 이탈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명령제일이라는 방침을 가진 근위병단이었지만 루카난 대대장은 이 명령에 즉시 따르지 않았다. 따를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쪽이 옳으리라. 루카난 대대장은 일단 자신의 행동을 보류하고 날이 밝는 것을 기다려 국왕에 접견을 요청했던 것이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폐하. 명령을 내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침식사를 막 마친 국왕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태도로 미소를 지었다. “명령을 하라니 대대장?” 그 모습이 너무나 평온했기에 대대장 쪽이 곤혹스러워하고 있엇다. “그.... 다시 말씀드려 사령관의 명령은 폐하의 의지라고 생각해도 괜찮겠습니까?” “핸드릭 백작에게 자줏빛 외투를 입힌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누아 후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대대장은 백작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겠지.” “하지만.” 대대장은 아직도 의심스러운 얼굴이었다. 장교로선 사령관에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국왕은 바로 그 사령관에 대한 명령권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국왕이 사령관에 대한 겸양을 보이는 말을 하는지 대대장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자신이 무언가 눈밖에 날 짓을 하여 은근히 쫓겨나는 게 아닌가 하고 루카난 대대장은 불안스럽게 생각함과 동시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국왕은 더욱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미안하네 대대장. 지금은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지만 조금 다루기 어려운 문제가 될것같아. 여기에서 헤어지는 걸로 하지. 핸드릭 백작의 지휘하에 들어가 주게.” “예....”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유감이야. 자네에게 연대장의 외투를 수여할 날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오늘까지의 자네 협력에 깊이 감사하네.” 이런 소리까지 듣게 되면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다. 대대장은 일이 어찌 흘러가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인 채로 국왕 앞에서 물러났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국왕 옆에 잠자코 서 있던 이븐이 작은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이봐 말투를 조심하라고. 지금같이 그래서야 나는 이제 연대장의 자격을 줄수없게 됐다고 자백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잖아.” “사실 그렇게 됐잖아.” “야 임마 월.” 이븐은 인상을 찡그리며 의자에 앉아있는 소꿉친구를 내려다보았다. “정신 좀 차려. 그건 내부 사정이고 비밀이고 밖에 이야기하면 안되는 거고 덧붙여 말하자면 그런 일은 없었던 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쪽도 아까까지의 온화한 표정과는 완전히 달라져 자포자기한 얼굴이 된 상태였다. “언제까지 그런 걸 숨겨둘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빨리 공표해버리고 끝장을 내고 싶어.” “그런 짓을 해서 무슨 이득이 있는데?” “이득의 문제가 아니야. 信義신의의 문제지.” “잘 들어 임금님.” 이븐은 바로 손닿는 곳에 있는 남자의 머리를 벅벅 휘저어놓은 뒤 말을 잘못 알아듣는 어린아이에게 천천히 들려주듯 말했다. “정직도 때와 장소가 있는거야. 세상에는 말이다 해선 안 될 거짓말하고 하지 않으면 안될 거짓말이라는 게 있는 거라고.” 국왕이 반론하는 것보다 먼저 대대장과 자리를 바꾸듯이 찾아온 리가 이 말을 듣고 감탄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이네.” 그리고 쳐져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는 작게 웃었다. “이 임금님 계속 이런 돌부처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거야?” “아아 일어난 뒤부터 계속 말이야. 꽤나 기분이 나쁘신 모양이야.” “누구 탓인데.” 무뚝뚝하게 대답한다. “리. 너도 너야. 둘이서 코랄로 가자던 이야기는 어찌 된거야?” “그렇게 말하지만 말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단둘이서 저 코랄 성에 숨어들어 페르젠 후작을 때려잡고 살아서 나온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구.” “발도우의 딸이 무슨 한심스런 소리를. 너는 북쪽 탑 지하에도 잠입했다가 가볍게 탈출해 나왔잖냐.” “머리 좀 식히라니까. 왕궁 구석 자리에 세워져 있는 출입금지된 북쪽 탑하고 정한가운데 있는 집무실하곤 얘기가 틀리다구. 페르젠이 있는 곳까지 가는 동안 아무도 뛰어나오지 않을 리가 없잖아.” “그래도 말이다....” 남자는 다시금 불만스럽게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소녀 역시 자그마한 손으로 남자의 머리카락을 휘저으며 말했다. “저기 말야. 여기 이 임금님은 페르젠만 쓰러뜨리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난 다르다구. 동반자살도 개죽음도 사양하고 싶어.” “그럼 사양해야지.” 이븐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기 위해선느 네가 임금님으로 앉아 있어줘야 한다고. 최소한 개혁파를 때려부술 때까지는 말이야.” 좌우로부터 실로 호흡이 맞는다 아니할 수 없는 공격을 받자 남자는 다시 포기한 얼굴로 침묵해 버렸다. 어젯밤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이 남자는 즉시 국왕군을 떠나 코랄로 향하려 했다. 함께 있었던 소녀가 제지하는 것도 듣지 않고 마침 그곳에 찾아온 도라 장군과 나시아스에게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고는 작별 인사를 고했다. “두분 오랫동안 저같이 젊은 놈을 위해 힘써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단신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코랄에 가겠습니다. 다시 뵐 일은 없겠지만 이제까지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안색이 변했다. “폐하!” “저는 그런 인물이 아닙니다. 태생도 양친의 이름도 모르는 비천한 자유 전사입니다. 두분 모두 반란군의 동료 취급을 받기 전에 서둘러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주십시오.” “폐하 기다리십시오! 부디 그런 경솔한 행동은 참아주십시오!” 도라 장군이 말하자 나시아스도 “폐하께서 단독으로 코랄에 가신다면 이 세력은 대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저희들이 영지로 돌아가면 끝날 그런 문제가 아닌 겁니다!” 필사적인 모습으로 남자를 설득했다. 소녀 또한 지금 당장이라도 천막을 뛰어나갈 듯한 남자의 앞을 막아섰다. “이 바보가. 달랑 혼자서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급할수록 돌아가라잖아. 페르난 백작의 원수를 확실하게 갚을 셈이라면 우선을 개혁파를 쓰러뜨려야지. 그걸 위해서는 반드시 이 군사가 필요해. 이런 군사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임금님이 필요하고. 이럴 대는 진실은 잠깐 옆으로 치워두고 네가 좀 더 임금님 행세를 해야 된다고.” “나는 그런 사기는 싫다.”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듣고 있던 두 사람은 힘차게 끄덕였다. 두 사람 모두 이 소녀가 문제의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을 눈치챘으나 그 입장을 묻기 전에 소녀 쪽에서 스스로 말해준 것이다. “정말입니다 폐하.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도 발도우의 따님 말씀대로라고 생각합니다.” 실로 세 명이 총동원된 설득이었지만 남자는 그래도 끄덕이려하지 않았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왕가의 핏줄이자 전국왕의 자식이라는 그 사실 하나뿐이다. 이 세력들도 내가 국왕의 사생아라고 생각했기에 모여준 거지. 이렇게 사실이 밝혀진 이상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국왕 노릇을 하는 건 못해. 나는 여기에서 빠지겠다.” “잠깐 기다리라니까!” 소녀가 결국엔 조급해져 체격 차이도 상관없이 남자와 한판 붙으려 하는 차에 이븐이 훌쩍 나타났다. 소꿉친구라는 친근함 때문인지 경비병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이렇게 무단으로 찾아 들어오곤 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도 역시나 이 장소의 이상한 분위기에는 눈을 둥글게 떴다. 벌써 자정도 넘어선 시각인데 국왕은 외투를 입고 검을 찬 데다 소녀는 그 허리띠를 쥐고 뒤에서 끌어 말리고 있다. 도라 장군이나 나시아스 역시 아무래도 평소답지 않은 모습으로 안색을 바꾼 상태였다. “방해했나 봅니다?” 도라 장군도 나시아스도 당황하여 이상황을 얼버무리려 했지만 소녀는 이 산적 출신의 친위대장을 따돌릴 생각은 없는 듯 했다. “마침 잘 됐다 이븐.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만약의 이야기인데 월이 前王전왕의 자식이 아니라고 하면 이븐은 어쩔 거야?” 산적의 푸른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어서 무엇인가 탐색하는 빛이 되어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장군과 나시아스를 바라보았지만 곧바로 싱긋 웃었다. “나야 뭐 별로 관계없지. 내가 알고 있는 건 애초부터 그냥 소꿉친구 녀석일 뿐이라고. 어찌된 일인지 그녀석한테 왕관이 붙어있다는 식이 된 거지만 말이야.” “붙어있지 않아도 별로 상관없어?” “당삼이지. 왕관이 붙어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라도 된다는 거냐?” 이 말을 들은 당사자인 임금님은 즐겁다는 듯이 커다랗게 웃었던 것이다. “어려울 때 친구라는 건 정말 고맙군. 그럼 당장이라도 코랄로 가보도록 할까.” “그러니까 잠깐 기다리라고 했잖아! 이븐 말려! 이 바보자식 지금부터 코랄에 숨어들어서 페르젠을 때려잡겠다는거야!” “뭣이라?” 미심쩍은 얼굴이 된 이븐이었으나 강하게 술기운이 떠돌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곤 눈살을 찌푸리며 소녀에게 물었다. “잠깐만 설마.... 어이 이 녀석 얼마나 비운거야?” “저거 전부 다.” 그렇게 말하며 가리킨 술병 더미를 보고 이븐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납득한 듯 말했다. “역시나 너 취했구만.” “난 제정신이야.” 남자는 태연하게 대꾸했지만 이븐은 탁 하고 자신의 이마를 때렸다. “이거 안되겠군. 완전히 갔어. 빨리 재워버리는게 낫겠다. 무슨짓을 할지 모른다구.” “그래?” 소녀쪽이 놀라서 붙잡고 있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일단은 제정신으로 보이는데?” “그러니까 처치가 곤란한거야. 취하지 않았으면 아무리 이 멍청이라도 그런 무모한 소리를 할까보냐. 대체 쿠코 酒주를 다섯병이나 비워놓고 제정신인 놈이 있을 리가 없잖아. 서있는 것만으로도 이상할 정도라고.” 그 소리를 들은 나시아스가 술병에 남은 향을 맡아보더니 크게 납득한 듯한 모습으로 끄덕였다. “분명히.” “한 병 비우면 떡대라도 쓰러질 놈이라구요 그건.” “난 안 취했다니까.” 끝까지 주장하는 친구에게 이븐은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알았으니까 오늘은 얌전히 자라. 얘기는 내일 하는 거다.” “그렇습니다 폐하. 쉬시지요.” 도라 장군도 급히 끼여들었지만 남자는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더 이상 폐하 따위가 아닙니다. 그런 것보다 저 페르젠을 이 이상 하루라도 더 숨쉬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가려고 하는 남자의 목덜미를 이븐이 단단히 붙잡고 힘으로 끌어 당겼다. “성가시게 구는 임금님일세. 됐으니까 얌전하게 자란 말이다.” 재빨리 남자의 허리에서 검을 풀어내고 소녀에게 던졌다. 그리고 실로 멋들어진 손놀림으로 남자의 몸을 빙글 돌려 침대에 밀어 넣었다. 남자는 그래도 잠시 투덜대며 저항했지만 역시 취해있었던 듯했다. 눕게 되자 금방 자는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자를 재워두고 나자 이븐은 도라 장군과 나시아스를 돌아보았다. “이 녀석은 제가 살펴보고 있을 테니까 아래쪽 놈들을 부탁합니다. 뭔가 묘한 기척들이더만요.” “음 핸드릭 백작 말이로군?” “예예. 이런 밤중에도 저 외투는 눈에 띄니 말입니다. 게다가 마레바 쪽에서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같고. 망보는 놈이 달려와서 하는 소리론 유폐 중인 기사단장 비슷한 놈이 나타나서 성문을 지나갔다고도 하고요. 졸병들만이 아니라 타르보나 가렌스 형씨들도 뭔 일인가 해서 불안해하고 있더군요.” 그 불안감을 진정시키는 것이 대장의 역할이다. 두 사람이 딱딱한 얼굴로 끄덕이고는 물러서려던 순간 도라 장군이 돌아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 “두 사람. 그 불안의 원인에 대해서 자세한 건 불명이라는 정도로 이해해 주겠나.” “전 암 소리도 못 들었습니다.” 이븐이 표표히 말하자 소녀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개혁파가 뭔가 더러운 수단을 서서 왕을 편드는 사람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던 거겠지. 혹시 가족을 인질로 잡혔다던가 한건지도 모르겠네.” 라고 가볍게 말했다. 장군은 미소 반 쓴웃음 반을 흘리며 만족스럽게 국왕의 천막에서 물러났다. 침대에 잠든 국왕을 옆에 두고 소녀와 두 사람만이 마주하게 되자 이븐의 모습은 일변했다. 목소리를 죽이고 무서울 정도의 얼굴로 소녀에게 따졌다. “방금 전 이야기는 정말이냐?” 소녀도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야 월이 전왕의 아이가 아닌 걸 알았대.” 뭐라고 표현할 길 없는 신음소리가 이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농담이 아니잖아. 그럼 페르난 백작은 뭘 위해 죽은거야!” “월도 그런 말 했어.” 이 남자는 자신의 신변보다도 그 사람의 죽음이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는 것에 분노를 느끼고 참을 수 없는 심정에 계속 잔을 기울였음에 틀림없다. 이븐이 다시금 낮게 신음했다. “그게 정말이라고 해도 어째서 이제 와서야 알게 됐다는 거야? 아니 대체 진짜로 정말이긴 해? 개혁파가 흘린 공갈 아냐?” “가능하다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데 좀 어렵네.” 소녀는 신중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왜냐면 핸드릭 백작도 발로 씨도 그걸 믿었으니까 여기까지 나온거야. 이런 얘길 절대 믿고 싶지 않아 할 사람들이 아무리 잘못되어도 지금의 국왕군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 할 사람들이 싫으면서도 개혁파에게 찬동해서 국왕군의 진군을 막겠다고 온거야. 웬만큼 탄탄한 증거가 나온 게 아니겠다고 판단해야 돼.” “어떤 증건데?!” “나도 몰라. 다만 이대로는 틸레든 기사단과 근위병단이 이쪽의 적으로 돌아서게 될거야.” 이븐은 다시금 뭐라 말하기 힘든 신음 소리를 흘렸다. “코랄을 눈앞에 두고 뭔 일이야 이건.” “나시아스나 도라 장군도 똑같은 생각일 거야. 하지만 저 모습을 봐선 두 사람 다 이곳에서 물러날 생각은 없는 것 같아.” “넌 어떤데?” 질문을 던진 산적의 푸른 눈동자는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녹색 눈동자의 소녀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월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힘을 빌려줄거야.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정말이라면 이 녀석은 이젠 왕위를 계승할 수는 없는 거라고.” “이제 와서는 왕관보다는 페르젠의 목을 갖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어. 나도 그걸로 됐다고 생각해.” 이번에는 소녀가 진지한 얼굴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내 쪽이 오히려 묻고 싶어. 지금이라도 월이 왕이 아니라 해도 같은 편이 되어줄거야?” “여태 뭘 듣고 있었던거야. 자랑은 아니지만 이 군대 안에서 이 녀석이 왕이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잘라 말할수있는건 나하고 아마 너뿐일 거다.” 끄덕인 소녀였다. 이 남자라면 괜찮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야기했던 것이다. “월은 나하고 둘이서 페르젠의 목을 따러 갈 생각인 것 같지만 그건 무모해. 아니 그보다 무리야. 지난번에 코랄 성을 보고 그 점에 대해선 잘 알게 됐어. 아무래도 군대를 이끌고 개혁파를 쓰러뜨리던가 쫓아내서 페르젠을 타도할 수밖에 없어.” “그걸 위해서도 이 녀석은 좀더 임금님으로 있어줘야 한다 이거구만.” 이븐은 무겁게 잘라 말하고 이어서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었다. “분명 싫어할 거야. 옛날부터 그런 면에는 융통성이 없는 놈이었거든.” “그걸 어떻게 좀 해줘.” 이것 역시 단언해 버린 소녀였다. “소꿉친구잖아? 겁을 주던 달래던 뭐라도 좋으니까 어쨌거나 당분간은 왕으로 있겠다고 합의하게 만들어 달라고.” 이 너무나 딱 부러지는 태도에 이븐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소녀는 진지했다. “이렇게 되면 이 바보는 말 그대로 군대 안을 자신은 국왕이 아니라고 큰소리로 떠들면서 돌아다니고도 남을 거란 말이야. 그런 짓만은 시키면 안돼.” “아아 그것만은 안되지.” 이븐도 동의했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간 도라 장군과 나시아스의 각오나 노력도 물거품이 된다. 그들의 견해는 이 시점에서 일치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당사자의 협력을 얻어내 끝까지 국왕군으로서 틸레든 기사단, 근위병단, 그리고 코랄과 맞서기로 한 것이다. “해서 나보고 이 녀석을 설득하라고?” “협박이던 강요던 뭐든지 좋아. 수단을 가릴 상황이 아니니까 말야.” “맞는 말이다. 네가 좀더 컸더라면 미인계라는 수단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그런 건 관할 밖이니까. 타우의 산적 씨한테 일임할게.” 아무래도 온건치 못한 회담이었다. 무참하게 바보라고 불려댄 남자는 그런 베갯머리의 불온한 공기도 모른채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숙취에 시달리는 남자에게 이븐이 어떤 수단을 사용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남자는 뚱하게 기분 나쁜 얼굴로 앉아 있게 되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난 몰라.” 거의 던지듯이 말했지만 “괜찮아 그럼.” “그래그래. 이런 일은 어렵게 생각할 게 아니라구.” 라며 두 사람은 가볍게 흘려 넘겨 버렸다. 그러나 진영의 긴장은 상당했다. 소녀가 나타나는 것을 전후하여 나시아스가 국왕에게 면회를 청해 군대를 후퇴시키자고 제안했다. “후퇴 말입니까? 퇴각이 아니라?” “예. 이곳은 요새에 너무 가깝습니다. 어제까지의 마레바라면 실수로라도 덤벼오는 일은 없었겠지만 지휘관이 바뀌면 군대의 성질이 완전히 틀려집니다. 더구나 코랄에서 돌아온 척후병의 보고로는 지금까지 靜觀정관하는 자세로 있던 영주들이 일제히 출격 준비를 가다듬고 있다는 것 같습니다.” 이유는 명백했다. 페르젠 후작의 지시를 받는 것이 불만스러워 움직이려 하지 않았던 제후들도 아누아 후작, 핸드릭 백작, 기사 발로, 더구나 시종장 브룩스라고 하는 쟁쟁한 진용들이 반국왕파로 돌아서서 국왕 공격을 시도하려 한다는 정보를 탐지했기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전쟁의 정석대로라면 마레바는 그 응원군을 기다려 요새와 응원군으로 저희들을 협공하는 것이 보다 안전하고 확률 높은 전법입니다만.” 나시아스는 조금쯤 슬퍼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했다. “기사 발로가 튼튼한 요새와 응원군에 기대어 수비전으로 갈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한판 제대로 겨루고자 할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도 유리하게 군사를 전개할 수 있는 장소로 이동해야 합니다.” 남자는 그런 나시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발로가 온다는걸 알면서도 맞서 싸울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폐하. 그 어법만큼은 우선 바꾸어 주십시오. 당신이 저에게 경어를 쓰시다니 곤란합니다.” “그냥 심술입니다. 신경 쓰지 마시길.” 나시아스는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표정을 지었따. 웃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웃어 넘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했다. “폐하. 이미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어떤 수단을 써서든 마레바를 빼앗지 않으면 안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발로는 어떻게 해서든 우리들을 여기에서 막으려 하겠지요. 어젯밤엔 다행히 아무 일 없었습니다만 오늘밤이라도 기습을 걸어올 가능성이 큽니다. 빠른 결단을 부탁드립니다.” 남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시아스경. 어젯밤도 말했지만 나 한 사람이 이 세력에서 떠나가면 무엇이든 원만하게 해결될 일이 아닙니까. 당신들은 내 언변에 놀안나 단순한 패해자일 뿐이라고 한다면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무익하게 피를 흘릴 필요도 없어지지 않습니까.” 나시아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폐하. 사태는 이미 그런 단계를 지나쳤습니다. 정부군에 호응하는 자들이 늘어가는 가운데 우리들에게 연락을 보내는 영주들의 수도 이곳에 와서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ㅂ니다. 사태는 더 이상 작은 분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라 안이 완전히 둘로 갈라지는 내전으로 발전하고도 남을 겁니다.” 달갑지 않은 이야기였다. “당신은 사실을 명백히 하고자 바라십니다만 저 페르젠마저도 그런 일은 생각지 않을 겁니다. 그 사실이 왕국 내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내키지 않습니다만 그곳에 저희들이 노릴 틈이 있습니다.” “다시 말헤 페르젠은 결코 제 신원을 밝힐 수 없다는 점말입니까?”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남자가 어제까지 그런 뒷수단에 의지하고 있을지는 상당히 의문 아닙니까.” “그러니까 더욱 마레바를 제압해야 합니다.” 평소에는 기사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우아한 인상마저 주는 나시아스였으나 역시 검과 함께 자라난 사람이자 동란의 시대를 이겨 나온 사람이었다. “저는 기사입니다. 다른 방법을 모릅니다. 말로 해결될 수 있을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발로는 틀림없이 우리들을 격파할 기세로 공격해 올 겁니다. 진다면 다시 일어설 수 없습니다. 개혁파들이 생각하는 대로 우리들에겐 반란군의 오명이 씌워질 테고 자칫 잘못하면 역적이 되고 맙니다.” 더욱더 달갑지 않은 이야기였다. 나시아스를 뒤쫓듯이 들어온 도라 장군도 완전히 같은 의견이었다.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만 전시에 있어선 승자야말로 정의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패배란 곧 악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전 국왕을 가까이 모셨던 입장에서는 싸우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도 품은 뜻에 반하여 악한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사양하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대로 군대의 지휘봉을 잡아달라고 두 사람에게 재촉당한 남자는 머리를 감싸쥐며 말했다. “두분 대체 지금부터 상대할 적에 대해 자신의 부관이나 따님에게 어떻게 설명하실 작정입니까?” “있는 그대로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적으로 삼기 싫은 상대를 적으로 돌려야만 하게 되었다고.” 도라 장군이 말하자 나시아스도 말을 이었다. “녀석에겐 녀석의 생각과 신념이 있으리라고. 그러나 양보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가렌스도 실전의 틈바구니에서 버텨온자입니다. 틸레든 기사단에는 아는 사람도 많고 맞부딪치고 싶지 않은 마음은 가득하겠습니다만 이것 역시 전쟁에선 흔히 있는 일. 어쩔수없다고 각오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봐주기라도 했다간 이쪽이 오히려 쓰러져 버리리라는 사실을 깊이 알고 있는 인간입니다.” 남자는 다시금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뭐라 해도 완고한 점에 있어선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정의감에 비춰본다면 이대로 국왕 행세를 계속하는 건 생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도라장군이나 나시아스도 결단코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이어서 소녀도 말을 덧붙였다. “그 마음은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페르젠의 목을 갖고 싶다면 이 기회에 다소 사기를 치는 건 눈을 감아 줘야 해. 우선 개혁파를 쓰러뜨리는게 먼저잖아?” “개혁파를 쓰러뜨렸어. 페르젠의 목을 땄어. 왕은 못 돼. 그걸로 다 된다고 생각하나?” 도라 장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폐하. 진실로 분별이 있는 자는 페르젠을 중심으로 하는 독재 체제에 결코 찬동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염려는 자격이 본디 없는 자에게 왕관을 주어선 안된다는 이 한 견해에 모여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점. 본래대로라면 왕관을 받을 자격도 없는 자를 이대로 국왕군의 수장으로 내버려두는 건 모순이 아닙니까?”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추가로 개인적인 말씀을 드리자면 페르난은 제 오랜 친구였습니다. 저로서는 죽은 친구에게 얼굴을 들 수 없을 짓은 결코 사양하고 싶으니 말씀입니다. 지금 당신을 들판에 내버려둔다는 건 냉큼 페르젠의 수중에 던져버리는 것과 같은 짓입니다.” “그렇기도 하겠네.” 소녀도 끄덕였다. “이만큼 용의주도하게 역전극을 노리고 있던 인간이 제일 중요한 모든 악의 근원을 내버려둘 리가 없는 걸.” “지극한 말투구만.” 이 정도 되자 이븐마저도 쓴웃음을 지었지만 소녀는 진심이었다. “그렇지도 않아. 그럴 것이 페르젠 입장에서 본 모든 악의 근원이라면 우리들에겐 비장의 무기가 되는 거잖아.” 나시아스가 웃으며 끄덕였다. “역시 발도우의 따님은 좋은 말을 하는군.” 도라 장군도 수염 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렇고말고. 당신은 우리들의 비장의 패입니다. 페르젠은 당신의 신상을 명확하게 밝히는 짓을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 당면한 문제는 지휘관을 얻은 틸레든 기사단이 마레바로 도망쳤던 영주군과 합심하여 근시일 내에 대규모 공격을 가해올 것이 틀림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들에겐 어떻게든 당신이, 국왕이라는 이름의 지휘관이 필요합니다.” 남자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자신에게 거부권은 없는 듯 했다. 하물며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하며 큰 은혜를 입은 도라 장군에게 이런 말까지 들어서야 개인적인 감정은 뒤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소녀가 쐐기를 박았다. “개혁파를 쓰러뜨릴 때까지 페르젠의 목을 거둘 때까지 아주 잠깐 동안이야.” “잠깐이면 끝날 거라고 생각해?” “끝내면 돼. 지금의 국왕군에겐 그 정도의 기세는 있잖아.” 강한 힘이 담긴 말이었다. 도라 장군도 나시아스나 이븐도 그리고 월도 저도 모르게 소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자 역시나 소녀도 놀라서 드물게 보이는 당황한 모습이 되었지만 기가 죽지는 않았다. 또렷하게 남자의 눈동자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기자구.” 모두 저도 모르게 말을 삼켰다. 남자는 이상한 감격에 휩싸이면서 소녀의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너는 정말로 우리들에게 승리를 내려주기 위해 내려온 건가.” “월.”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발도우의 딸도 아니거니와 신도 아니야. 그런 건 몰라. 다만 이것만은 알 수 있어. 페르난 백작은 훌륭한 사람이었어. 좋은 아버지였어. 개혁파는 그런 백작을 근거도 없는 죄를 씌워 죽였어. 월은 분하지 않아? 화나지 않냐고.” “열이 뻗쳐 뒤집어질 정도지.” “그럼 할 일은 정해져 있잖아.” 오히려 초조하다는 듯 리는 남자의 어깨를 흔들었고 그러자 남자 쪽이 쓴웃음을 지었다. “너 남보고는 바보라느니 돌머리라느니 하지만 네쪽이 훨씬 직선적인 거 아니냐.” “물론이지. 지금까지 뭐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거야 뭐라 해도 軍神군신의 딸이니까 말이다. 침착하고 대범하다거나 혹은 꿈은 크고 사려는 깊게라는 말이 어울리거나, 거기다 냉정하게 앞을 생각해서 만사를 판단하는 거다. 뭐 그렇게만 생각했지.” “농담이겠지?” 어깨를 으쓱거리며 간단하게 말했다. “질색이야 그런건. 나는 하고 싶다고 생각한 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을 그 자리에서 한다구. 언제나 그래.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움직여 왔어. 대체 말야 월은 백작의 원수를 갚고 싶다지, 도라 장군하고 나시아스는 개혁파를 어떻게든 하고 싶다지. 이해는 일치하잖아. 그럼 사기건 나발이건 상관할 거 있어? 이 군사를 이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무섭도록 강인하며 명쾌한 이론에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소녀는 어른스러운 것인지 어린 것인지 아무래도 알 수가 없다.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행동하며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점은 어리게 보이는 듯도 하지만 상관없으니까 이용해버리라고 말하는 점은 늙고 교활한 軍師군사가 세우는 책략처럼 들리기도 했다. “알았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도리가 없군. 한동안은 국왕으로서 장식되어 있는 걸로 할까.” 그 장소에 있던 전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국왕은 짓궂게 웃으며 소녀에게 다시 확인했다. “약속이다. 여차하면 책임을 지고 야반도주를 도우라고 할테니까 말이야.” “맡겨두라니까. 월은 파키라를 넘었었잖아? 저 산이라면 나도 넘어갈수있어. 도망칠 길 같은 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구. 뭐하면 둘이서 사랑의 도피라도 해볼까?” 국왕의 큰 폭소가 천막을 뚫고 밖으로 울려 퍼졌다. 너무나 호쾌한 웃음이었기에 멀리 파견되어 있던 병사들까지도 무슨 일인가 하여 왕의 천막으로 달려왔다. “폐하?!” 무례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은 천막으로 돌입했지만 안에서는 도라 장군이 허리가 빠지기 직전이고 나시아스는 어깨의 상처를 누르며 웃음의 발작을 참고 있으며 이븐에 이르러서는 몸을 반으로 꺾고 폭소하는 것을 겨우 억누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녀 혼자만이 태연히 팔짱을 낀 채 그런 남자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국왕은 아직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병사들에게 말을 걸었다. “수고하는군. 모두들 어떤가. 식사는 끝냈나?” “옛! 전군 폐하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아. 그럼 준비가 끝나는 대로 이곳에거 이동한다. 모두에게도 그렇게 전해다오.” “알겠습니다.” 명령을 내리는 동안에도 국왕은 웃음을 씹어 삼키고 있었지만 이동이라고 들은 병사들의 얼굴은 안색이 변했다. 병사들이 이리저리 달리고 장군들도 소녀도 서둘러 출발 준비를 위해 나가자 혼자 남은 친위대장이 이윽고 돌아보았다. 눈가에서 눈물을 훔치고 어깨를 떨면서 웃음을 참고 있었다. “못 당하겠구만. 저 아가씨한텐.” “내 참. 심각하게 고민할수록 더 바보같은 기분이 되어버리는걸.” 남자는 오히려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부터 자신들이 하려하는 일은 인사치레로라도 옳다고는 하기 어렵다. 그러나 돌아설 수도 없다. 어떻게 해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면 어둡고 비정하게 가는 것보다는 밝고 긍정적으로 덤벼드는 쪽이 나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것이 꽤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지금 나쁜 건 전적으로 이쪽이라는 사실을 아는 만큼 더욱 그렇다. 남자는 다시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지만 이븐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입꼬리만 올려 웃어 보였다. “상관없지 않을까 그걸로. 이 상황에서 고민해봤자 어찌 되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답이 나올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니 생각하기로 했다.” 시원시원하니 말한 국왕이었다. 아마도 앞으로는 지금까지 이상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음이 틀림없다. 기분이 좋은 일도 아니다. 그러나 물러날 길은 없다. 전진만 있을 뿐이다. 이븐은 무언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뭐어 저 사람들 앞에선 결코 말못하지만 나는 어느쪽이냐 하면 네가 왕이 아니게 되어서 더 좋은 걸.” “그러냐?” 약간 놀라서 반문하자 “거야 뭐. 임금님이 되면 꼬셔서 놀자고 돌아다닐 수도 없으니까 말이야. 이걸로 사양 않고 맘놓고 놀 수 있다는 거지.” 라고 대답했다. 남자는 무섭도록 의심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이븐. 그건 마치 지금까진 생각해서 조심했다는 것처럼 들린다.” “했었단 말이다.” “어디가.” “아 상처받았어. 나는 국왕폐하에 대한 예의를 뼈 빠지게 차리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어디가?” 양쪽 다 진지하게 말싸움에 돌입한 두 사람이었다. 2장 마침 그 무렵 코랄 성의 한 방에서는 페르젠 후작이 마레바에서 달려 돌아온 핸드릭 백작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예상대로 그 남자는 군대를 해산할 의사가 없으며 이대로 코랄을 향해 진군해 올 셈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후작은 얼굴을 찌푸렸다. “핸드릭 백작도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시는군요. 그렇다면 제쪽에는 사자를 보내주시기만 해도 충분했을 텐데. 그대로 발로님과 함께 가짜 국왕군을 격파해 주시는 편이 좀더 바람직했을 텐데 어찌하여 일부러 돌아오셨습니까?” “귀공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분연하게 말한 백작이었다. 사실 상대는 백작보다 작위가 높은 윗사람일 터였다. 하지만 페르젠 후작은 원래대로 따지면 가난한 소귀족의 아들로 궁내에서 일하는 일개 사무관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탄가에서 시집온 왕비의 마음에 들어 측근으로 일하던 차 전 페르젠 후작의 눈에 들어 사위로 들어가는 덕에 작위를 잇게 되었던 것이다. 이레 중의 이레라고 할 수 있는 큰 출세였다. 일설에는 전 후작의 이 사람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사위로 맞이한 것이라고도 하고 다른 일설에는 그 후작 영애에겐 그다지 좋지 않은 소문이 나 있어서 어울리는 계급의 집안과는 아무래도 인연을 맺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런한 전말이 없었다 하더라도 핸드릭 백작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핸드릭 백작은 자신이 그렇다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예의를 차리거나 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귀공, 페르난 백작을 기억하고 있겠지.” “페르난 백작?” 의심스러운 얼굴이 된 페르젠 후작이었다. 기억의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던 이름인 듯 떠올리는 데 약간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예 기억하고 있지요. 저 남자를 이 왕궁에 데리고 와서 이번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 말씀이군요. 본인은 그런 점을 알지 못하고 저지른 일 같습니다만 곤란한 짓을 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거요?”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초리가 꽂히자 페르젠 후작은 더욱더 이상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핸드릭 백작.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르는 척 하지 마시오! 페르난 백작을 북쪽 탑에 집어넣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입에 담기도 무서운 고문을 가해 죽인 건 귀공이 사주한 짓일 텐데!” 서류를 훑어보며 핸드릭 백작을 상대하던 페르젠 후작이었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을 들었다. 분명 안색이 변한 채였다. “페르난 백작이 죽었다는?” “언제까지 시치미를 뗄 건가!” 일갈을 내뱉은 핸드릭 백작이었지만 페르젠 후작도 또한 무서운 표정이 되더니 고갤르 저으며 일어섰다. “기다리십시오 핸드릭 백작. 그 말씀은 그냥 들어 넘길 수가 없군요. 저는 페르난 백작을 북쪽탑에 투옥하고 결코 도망치지 못하도록 엄중한 감시를 붙이라 명하긴 했지만 결코 죽이지는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인질이라는 것은 살아있어야 그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죽여 버린다면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북쪽탑에서 옥사했다면 당연히 그 보고가 제게 들어왔을 겁니다.” “뭐라고? 그렇다면 귀공, 백작이 탈옥했다는 사실을 모르시오?” “뭐라고요?!” 이번에야말로 경악하여 목소리를 거칠게 낸 페르난 후작이었다. 두 사람은 황급히 정보를 교환했다. 이곳까지 핸드릭 백작과 동행했던 루카난 대대장이 불려 들어왔고 대대장은 아무래도 껄끄러운 일이라고 느끼면서도 얼마 전 북쪽탑에 침입하여 구출한 페르난 백작의 상태를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아누아 후작도 찾아왔다. 이것은 핸드릭 백작의 배려였다. 근위대 기사에게 있어 아누아 후작의 말은 무엇보다도 무게가 있는 것이었다. 아누아 후작은 핸드릭 백작에게 들었던 대로 북쪽탑에 잠입했던 행동을 문책하지 않겠다는 언질을 준 뒤에 자세한 이야기를 하도록 시켰다. 대대장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 내렸고 애초에 페르난 백작에게 취한 조치에 분개하고 있었던 것도 있고 하여 열심히 이야기를 했다. “그거야 뭐 지독한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나 정말로 그 정도로 괴롭혀야 할 필요가 있었던가 의문스럽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화살을 맞은 것이 원인이 되어 돌아가셨지만 그대로 감옥에 있었어도 여생은 길지 않았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살아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의 상처였습니다.” 핸드릭 백작은 물론 아누아 후작도 단숨에 안색이 엄숙해졌다. 페르젠 후작만은 다른 점에 마음이 걸린다는 듯이 대대장에게 질문했다. “그건 그렇고 귀관들은 단 세명이서 북쪽 탑에 잠입했다는 건가.” “예. 그 죄송합니다. 그것이 폐하의 의지이셨기 때문에.” “알고 있다. 문책하자는 게 아니야. 하지만 잘도 숨어들 수 있었군 그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진지하게 말한 대대장이었따. “그러나 북쪽 탑으로 잠입한 것도 백작의 구출도 제 힘으로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그날 밤 북쪽 탑에서 근무하던 병사들에게 물어보셔도 아시겠지만 저는 통행 수단으로서 쓰였을 뿐입니다.” “그럼 묻겠는데 실제로 페르난 백작 구출을 지휘한 것은 누구인가?” “예 그것은....” 말에 쫓기게 된 대대장이었다. 그 소녀에 대해 말한다 해도 과연 믿어줄까 걱정한 것이다. 사정을 시종일관 지켜보고 있었던 자신조차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데. “누구란 말인가. 도라 장군인가 그도 아니면 라모나 기사단장인가?” “아니 그것은....” 뭐라 답해야 할지 대대장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자 핸드릭 백작이 초조한 듯이 끼여들었다. “누구라도 상관없겠지. 지금 와서 그러한 일을 따져서 뭐가 된다는 거요.” “분명 그렇군.” 아누아 후작도 끄덕이며 핸드릭 백작에게 질문을 던졌다. “폐하는 페르난 백작의 죽음에 무척이나 분개하고 계셨다 하셨지요.” “예에. 무리도 아닙니다. 저도 모르게 등줄기에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격앙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심각한 얼굴이 된 아누아 후작이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수습되지 않을 모양이다. “핸드릭 백작. 피곤하실 텐데 죄송스럽습니다만 마레바가 걱정입니다. 지금 다시 한번 말을 달려서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발로 경에게는 제가 돌아갈 때까지 서두르지 말도록 말씀드리고 왔습니다만 그분 성격으로는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아누아 후작도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하고는 이번엔 루카난 대대장에게 말을 걸었다. “귀관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겠지만 근위병단은 이후 폐하의 코랄 진군을 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귀관은 짧은 기간이라 해도 국왕군과 함께 있었으니 내부 사정을 자세히 알 것이다. 그러니 수고스럽지만 지금 핸드릭 백작과 함께 마레바로 출발해주게.” “예!” 최고 격식의 경례를 바친 대대장이었다. 돌연한 방침 전환이었지만 그것 자체가 별로 드문 일도 아니었다. 얼마 없는 국왕파로 알려진 아누아 후작의 변모가 이상한 건 분명하지만 그런 것은 자신이 생각할 바가 아니었다. 다만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국왕의 용맹함, 저 소녀의 상식에서 벗어난 무용, 무엇보다 전군을 수족처럼 부리는 국왕의 통솔력. 그 점들을 되새겨 볼수록 냉정하게 봐서 정면에서는 부딪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루카난 대대장을 일단 물러나게 한 뒤 핸드릭 백작은 뚫어지게 페르젠 후작을 노려보았다. “들은 대로요.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지 않겠소.” 페르젠 후작은 한숨을 내쉬고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향했다. “단언해 두겠습니다만 당치도 않은 누명입니다. 페르난 백작의 죽음도, 고문 얘기도 저는 지금 처음 들은 일입니다.” “만사에 빠지는 데 없는 귀공의 말씀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차갑게 말한 핸드릭 백작이었다. 아누아 후작도 기품 있는 안면이 혐오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지금 코랄의 전권을 쥐고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당신이 명령한 것이 아니라면 누가 내린 명령이라는 겁니까?”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거리낄 것 없이 말하는 후작을 보며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서로 눈길을 교환했다. “북쪽 탑은 아시는 대로 전문적인 감시관의 관리하에 놓여있습니다. 탑의 유지에서 죄인의 감시까지 내부의 일은 그들이 일절 담당하지만 신분상으로는 대단히 낮은 위치이므로 누군가 신분이 높은 상대라면, 그렇지요. 예를 들자면 개혁파를 구성하는 누군가에게서 백작을 고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고 시킨 대로 행할 겁니다.” 아누아 후작이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개혁파 내부에 있어 페르젠 후작의 의지는 절대적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후작이 등장하지 않는 곳에서 다른 누군가가 마음대로 명령을 내렸다 해도 사정을 모르는 자로선 판단하기가 힘들다. 어느 쪽도 똑같은 ‘개혁파’의 명령으로서 받아들이리라. 핸드릭 백작은 그래도 의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정말로 귀공이 명령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오?” “백작. 제 쪽에서 오히려 묻고 싶군요. 페르난 백작을 고문해서까지 캐내지 않으면 안될 일이라는 건 뭡니까?” “.......” “아시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백작이 뒤르와님의 손에서 아기를 받았던 것, 그 아기를 진실로 뒤르와님의 자식이라 믿었던 것은 명백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백작 자신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는 겁니다. 다만 이런 소동을 일으킨 책임을 묻는 의미도 있고 저 남자에 대한 억제책이 되리라 생각하여 신병을 구속해 두었던 겁니다. 인질로서 쓰려면 살려두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도가 지나친 고문을 가한 끝에 죽이다니 생각지도 못할 일이지요.” 강한 어조의 말을 듣자 아무리 핸드릭 백작이라도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 대체 누가? 루카난의 말이 맞다면 한두 번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텐데.” “유감스럽습니다만 그런 짓을 할만한 인물에 짚이는 데가 있습니다.” 반드시 연극이라고는 할 수 없는 괴로운 한숨을 내쉰 페르젠 후작이었다. 엄한 부름을 받고 황급히 달려온 제나 제사장은 세 명분의 비판적인 시선을 받으며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혹여 백작은 저 남자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게다가 뒤르와 폐하의 손에서 직접 아기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그 증거는 백작의 말뿐이다. 어딘가에서 주운 아기를 폐하의 아이라 속이고 데려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한 이야기를 하염없이 되풀이했다. “실제로 그러니까 페르젠 후작의 조사에 의해서 그 남자가 전 폐하의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페르젠 백작은 모르는 척 아닌 척 하고 있었지만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어떻게든 그런 점을 캐묻기 위해서 나는 그저 후작을 도와줄 생각으로....” “제사장님.” 페르젠 후작은 지겹다는 표정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이번 소동이 전부 페르난 백작의 궤변이자 광언에 의한 것이었다면 브룩스에게 맡겨진 폐하의 유언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 “또 한가지 묻고 싶습니다만 북쪽 탑에 침입자가 있었던 사실, 그 침입자가 백작을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갔던 사실, 더없이 중요할 터인 이 보고들이 어째서 저에게까지 올라오지 않았던 겁니까?” 제사장은 아무래도 껄끄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그 남자의 정체도 알았고 그렇게 되면 페르난 백작을 잃는다 해도 큰 문제는 없을테고 바쁜 후작의 손을 번거롭게 할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아니 물론 북쪽 탑의 감시관들에겐 엄중한 주의를 주었고 말고요.” “큰 문제가 없을 거라니. 황송스럽군요.” 페르젠 후작은 다시금 괴로운 한숨을 내뱉고 아누아 후작과 핸드릭 백작에게 눈짓으로 사과의 뜻을 비쳤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일이 바쁜 것에 치여. 아니 이것은 변명이 되겠군요. 하지만 북쪽탑에 투옥해 두면 안심이라고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 같군요.” 핸드릭 백작이 역시나 날카로운 눈동자로 제나 제사장을 노려보았다. “땡중이면 땡중답게 기도문이나 읊고 있으면 될 것을. 피비린내 나는 짓을 하고 나서니 이야기가 무서울 정도로 귀찮게 진행되었어.” “뭐 뭐라고?!” 이 폭언에 제사장은 안면이 온통 붉게 변했지만 이 상황에서 제사장을 동정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페르젠 후작이 엄한 표정으로 쐐기를 박았다. “핸드릭 백작 말씀대로입니다. 당신이 쓸데없는 짓을 해 주신 덕분에 사태는 생각 이상으로 어렵게 진행되어 가고 있군요. 그 남자는 이 사건으로 태도를 더 딱딱하게 굳혔고 어떻게든 부친의 원수를 갚겠다며 기염을 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씀이시오? 고작 가짜 왕에 반란군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닙니까. 어서 진압해버리면 될 일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의 제사장에게 페르젠 후작은 상당한 인내심을 가지고 사태를 설명했다. “간단하게 그렇게 된다면 고생할 일이 없겠지요. 도라 장군과 라모나 기사단, 추가로 5천에 가까운 영주군이 그 ‘국왕’에 가세하여 지금도 그 수를 계속 늘려가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시길.” 제사장은 이번엔 초조해져서 말했다. “그런 미적지근한 말씀하지 마시고 그 남자가 가짜라는 사실을 그 영주들에게 밝히면 만사 해결되는 것 아닙니까.” “아시겠습니까 제나 제사장.” 페르젠 후작은 인내심에 있어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이렇게 되자 아무래도 목소리며 표정에 험악한 기운이 섞이기 시작했다. “그러한 일은 큰 소리로 떠들며 돌아다니시지 않도록 절실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야니스 신전의 최고위 성직자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비밀도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 비밀을 아는 자는 최소한으로만 유지시켜야 합니다. 지방 영주들에게 안이하게 말하기라도 한다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 들어가게 될지 모릅니다. 만일의 경우 국외에 흘러나가기라도 하면 엄청난 일이 됩니다.” 제나 제사장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흘러나가면 안된다고요?” 아누아 후작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핸드릭 백작은 노골적인 경멸의 표정을 띠며 두 사람이 함께 페르젠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 페르젠 후작은 바늘 같은 얼굴로 제사장을 직시하고 있었다. “당신은 대화삼국으로 이름높은 이 델피니아가 왕가의 피를 잇지 못한 자에게 대관을 허용했다는 전대미문의 추문을 대륙 전체에 퍼뜨리라고 말씀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다른 두 대국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피할 길 없는 삼류 국가의 낙인이 찍히게 되는 겁니다!” 날카로운 일갈을 뒤집어쓰고 나니 아무리 제사장이라 해도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그런 가능성은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듯 했다. 당혹감이 서린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하신다는.” “어떻게 하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관여하실 문제가 아니지요.” 단호하게 말한 후작이었다. “아시겠습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부디 섣부른 짓은 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당신은 이제부터라도 어떻게든 힘이 되어주셔야만 할 분이니까 이 이상 사려가 부족한 돌출 행동은 하시지 않도록 다시금 부탁드립니다.” 말은 탄원이었지만 그 어조는 협박과 다를 바 없었다. 자기 몸이 아까우면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 라는 뜻이었다. 아무리 제나 제사장이지만 이 소리는 알아들은 듯 했다. 창백해져 무언가 중얼거리면서 잽싸게 물러났다. 그 뒷모습을 배웅한 핸드릭 백작이 표정도 바꾸지 않고 말했다. “아예 저 시건방진 땡중의 목을 그분께 바쳐버리는 쪽이 나은게 아닌지. 그걸로 그분이 코랄 진군을 멈춰준다면 싼 대가일 게요.” 야니스 신전의 제사장이라고 한다면 수많은 사제들 중에서도 최고의 권력자이다. 국왕마저도 그 머리 위에 왕관을 얹어주는 상대로서 일단은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 인물이지만 핸드릭 백작에게는 단순한 경거망동의 원흉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아누아 후작도 이 의견에 동의했다. “그걸로 그분이 생각을 바꿔 주실지 어떨지는 차치하더라도 야니스께서도 참 한탄스러우시겠습니다.” 저런 자가 제사장이라니. 그렇게 말하고 싶은 듯 했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페르젠 후작에게 새로이 비난의 눈길을 돌렸다. 이 영웅들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후작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제 실수입니다. 저 사람에게 이런 단독 행동을 할 재주가 있을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쯤 너무 제멋대로 내버려둔 것 같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참 잘도 맞는군. 부디 잠자던 목덜미를 물리지 않도록 조심하시구려.” 핸드릭 백작이 쓴 소리를 던지고 자줏빛 외투를 펄럭이며 집무실에서 나가버렸다. 아누아 후작도 그 뒤를 쫓았다. 핸드릭 백작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걸어가면서 아누아 후작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척이나 유감입니다. 그다지 친밀하게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인상이셨는데 말입니다.” 아누아 후작은 국왕의 후견인이었던 페르난 백작에 대해서 끝까지 손윗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있었다. 핸드릭 백작도 아까까지의 위세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폐하나 도라 경의 심중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한판 싸우지 않고는 끝날 것 같지가 않습니다. 여기에선 역시 당신이 나서 주시는 쪽이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습니다만 저는 페르젠 후작의 동향에 신경이 쓰입니다. 후작은 그분의 진실된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얼마 안 있어 금방 결과가 나올 겁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것을 알게 되었다 해도.” 너무 늦은 건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워하는 백작이었지만 아누아 후작은 신중한 모습이었다. “핸드릭 백작. 저는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예?” “백작은 저 같은 자보다 훨씬 이전부터 뒤르와님의 곁에 계셨으니 젊은 시절의 모습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예에 물론입니다.” 아누아 후작은 퍼뜩 백작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분과 뒤르와님은 무척 닮으셨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저도 모르게 생각에 잠긴 핸드릭 백작이었다. “음. 분명히 그러고보니 뒤르와 폐하도 눈길을 빼앗길 정도로 훌륭한 체격의 소유자이셨지만.” “눈 색도 머리카락의 색도 비슷하지요.” “아니 하지만. 그건 성급한 의견입니다. 비슷한 체격, 비슷한 눈과 머리색을 가진 남자는 어느 나라에든 얼마든지 있습니다. 애초에 그분과 뒤르와님은 몸에 배인 분위기라는 것이 너무나 틀립니다. 그분은 아시는 대로 꼬인 데가 없는 쾌활한 성격이시지만 뒤르와님은 젊은 시절부터 사려 깊고 냉정하시며 거의 감정을 노출하시는 적이 없으셨습니다. 무언가 명하실 때에도 언제나 부드럽고 조용한 모습이셨지만 그래도 저희들이 俯伏부복하지 않고 배길 수 없을 정도의 위엄을 항상 풍기고 계셨지 않습니까.” “예에 그건 저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문을 향해 본궁 안의 대회랑을 걸어가고 있던 아누아 후작이었지만 문득 진로를 바꾸어 멋들어진 문을 하나 지나갔다. 핸드릭 백작은 아무 말 없이 뒤를 따랐다. 그곳은 천정이 높지만 작은 거실이었다. 실무나 접대를 위해 준비된 방이 아닌 듯 아무런 가구도 없었다. 다만 방 그 자체의 구조는 최고급이라 해도 좋았다. 바닥도 천장도 훌륭하게 장식되어 있고 벽에는 꽃을 든 천사나 여신을 본뜬 금촛대가 달려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지만 문을 들어와 정면에 보이는 벽에 이방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었다. 아누아 후작과 핸드릭 백작은 황금 액자로 장식된 거대한 초상화를 아무 말 없이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그려져 있는 것은 젊은 남성의 전신상이었다. 눈이 부실 정도의 황금빛 의장에 둘러싸인 어깨는 널찍하고 가슴은 두터워 뛰어난 체구의 소유자라는 것을 쉽게 알수있었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빛은 깊은 지성과 정기로 가득하고 깔끔하게 다듬어진 수염과 풍부한 구레나룻이 장식된 입가에는 자신에 찬 미소가 걸려 있으며 한 점 흐트러진 데도 없이 빗어 넘긴 검은머리 위에는 델피니아 국왕의 왕관이 얹혀 있었다. 제17대 델피니아 국왕 뒤르와 젠타 반 델핀. 그 즉위 당시를 그린 초상화였다. “닮으셨을까요?” 핸드릭 백작이 중얼거렸다. “뒤르와님도 범상치 않은 큰 체구를 가지셨고 눈도 머리도 검은색이셨지만 닮았다고 한다면 그 정도가 아닐까요.” 확실히 인상이 너무 틀렸다.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 인물의 눈매는 깊고 날카롭고 준엄하게까지도 보인다. 전신에 떠도는 압도적이기까지 한 기백과 王者왕자의 위엄은 이때 20대 전반이었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저는 마음에 걸립니다.” 아누아 후작이 나직하게 말했다. “분명히 눈이나 머리카락이 검은 젊은이도 몸집이 큰 젊은이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현재 뒤르와님을 닮은 젊은이를 발견해서 데리고 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요. 하지만 갓 태어난 아기를 보고 그 장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태어났을 때에는 옅은 색의 머리카락이라도 성장하는 동안 검게 되는 일도 있고 눈 색마저 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눈이나 머리카락이 검은 남자아이라고 누구나 뒤르와님과 같은 체격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겠지요. 뒤르와님은 젊은 시절부터 무술에 열심이시기도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흔히 볼 수 없는 거한이셨으니까요.” “제가 걸리는 건 그 부분입니다.” 아누아 후작은 다시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뒤르와님의 자손과 그분이 뒤바뀌었다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연하게 바꿔치기 된 어린 아이가 성장해서 뒤르와님처럼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비범하게 훌륭한 체격을 갖추게 된다는 것은. 조금 너무 그럴듯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으음.” 핸드릭 백작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그렇군요. 일리 있습니다.” 아누아 후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쓸데없는 구실이라 비웃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저는 다시 한번 파란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을수가 없군요. 다행히 왕궁 내에서만이라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몸이 되었으니까 납득이 갈 때까지 조사해볼 생각입니다. 게다가.” 후작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제사장과 똑같은 짓을 생각할 인간이 달리 없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시녀장의 신변이 걱정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핸드릭 백작은 조용히 대답했다.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나 지금에 와서는 시녀장이 최후의 보루였다. “백작께 큰 수고를 억지로 떠맡기는 셈이 됩니다만.” “무슨 말씀을. 도라 경이라면 상대로서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만큼 어렵기도 하겠지만 우리들이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그도 맹장이라 불리는 남자이니만큼 보기 싫은 사태는 만들진 않을 겁니다.” 활과 칼을 든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도라 장군은 깨끗이 자신의 신병을 이쪽으로 넘길 것이다. 핸드릭 백작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벗을 구하기 위해서도 자신의 주군을 믿고 있던 그 젊은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도 이번 전투는 절대로 이겨야만 했다. 대기시켰던 루카난 대대장을 이끌고 핸드릭 백작은 다시금 마레바로 출발했다. 정문에서 아득한 저편으로 내려다보이는 대수문을 향해 기수를 나란히 하여 달려가던 중 핸드릭 백작은 루카난 대대장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는 얼마 전까지 국왕군과 함께 있었으니 그들에게 이기려면 어찌 대응하면 좋겠나?” 아무래도 복잡한 입장에 몰리고 만 대대장이었다. 아누아 후작에게도 느꼈지만 이 사람 역시 국왕군을 증오하여 싸우려는 것이 아닌 듯 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기백이 절절하게 전해져 왔다. “주제 넘는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이기겠다 하셨지만 지금의 국왕군에게 승리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고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호오?” 창을 들면 천하일품이라 칭송 받는 영웅은 재미있다는 눈빛이 되었다. “국왕군은 6천. 마레바의 정부군은 8천. 그것도 지휘봉을 잡은 사람은 열화 같다 알려진 틸레든 기사단장이다. 그래도 이기지 못하리라 말하는건가.” “저는 이번에 처음으로 폐하의 지휘 아래 움직였습니다만 그 멋진 군사 배치에 감복하였습니다. 또한 폐하 자신의 무예와 용맹도 말 그대로 두려울 정도로 소문 이상이였습니다. 귀신과 같다는 것은 바로 그런 모습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 국왕군에 이기기 지극히 어렵다는 첫 번째 이유는, 그러니까 말씀드리기 힘듭니다만서도.” “상관없다. 말해라.” 루카난 대대장은 거의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말 위에서 가슴을 폈다. “폐하께는 발도우의 딸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실을 말한 대대장이었지만 핸드릭 백작은 이 말을 관념에 머무는 수준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알만하군. 그만큼 기세가 있다는 얘기인가.” “예에.” 어쩔까 고민한 루카난 대대장이었다. 국왕군에는 정말로 그렇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자가 붙어 있다. 그 소녀와 흑마의 전투 모습은 숙련된 기사 20명에도 필적한다. 게다가 그 존재가 다른 병사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그 소녀가 가세하는 것만으로 연대 하나 정도의 전력 차가 생겨난다고 판단하는 것이 좋았다. 더 자세히 설명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백문은 불여일견이라고 한다. 마레바에 도착해서 그 소녀가 싸우는 모습을 근처에서 지켜보면 싫어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설명하면 된다. 루카난 대대장은 그렇게 판단하고 그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3장 마레바 성채 요새 앞에 진을 치고 있던 국왕군은 그날 한낮이 지날 때쯤 후퇴를 개시했다.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마레바를 방치하고 코랄로 진군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런 짓을 했다간 맹렬한 추격을 당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해서 광대한 마레바 요새를 향해 포위전으로 나갈 정도의 전력은 국왕군에겐 없다. 그렇기에 마레바 정부군을 끌어내어 유리한 장소에서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 포진을 변화시키는 작전으로 나온 것이다. 국왕군은 추격해 올 것에 미리 대비하여 엄중하게 후방 방위를 굳혔지만 마레바에 그러한 기색은 없었다. 그렇기는커녕 유인이라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도 마레바의 정부군은 성에서 나와 野戰야전을 선택했다. 후퇴를 계속하는 국왕군을 추격하는 것도 아니었고 수천의 군세는 오히려 느린 속도로 성문을 나와서는 국왕군이 포진을 끝낼즈음 그에 대응하는 형태로 진을 쳤다. 그곳은 성으로부터 서쪽으로 14, 5카티브 정도 내려온 곳으로 산에 둘러싸인 분지였다. 산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국왕군의 오른쪽에는 분지가 있을터였다. 왼쪽으로는 코랄로 가는 길이 있다. 그 분지의 입구는 좁고 양옆에는 잡목이 우거진 산이 있다. 낮고 어둠침침하지만 산은 산이다. 병사를 산개시켜 습격해오기는 힘들다. 국왕군은 적을 한방향으로 이끌어들여서 포위하여 싸울 작정이었다. 정부군 쪽도 역시나 눈치채고 분지의 가운데까지 깊이 들어오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 바로 앞에 진을 쳤다. 마레바를 등지고 응원군을 기다리는 태세로 보였다. 그렇다면 이런 곳까지 나올 필요도 없을 법했지만 틸레드느 기사단은 애초에 야전이 장기였다. 게다가 그 용병술은 불꽃처럼 격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틸레든 기사단을 주류로 하는 8천의 정부군은 무장으로부터 일개 병졸까지 엄격한 긴장감이 팽배해 있었다. 쓸데없는 말을 하는 자조차 한 사람 없었다. 그것은 2카티브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로 노려보는 태세에 들어간 국왕군도 마찬가지였다. 대략 6천 정도의 군대는 대열을 짠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태양이 기울기 시작하고 노려보기만을 계속한 양측 군사를 곁눈질하며 하루 해가 저물었다. 양쪽 다 잠자코 야영 준비를 했지만 경계만은 엄중히 하여 성대한 구화를 피워 올리고 경비를 세워둔 채 잠이 들었다. 내일 아침에는 전투가 벌어질 것을 양쪽 모두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다. 정부군의 중핵에는 양 날개를 펼친 거대한 독수리의 깃발 아래 틸레든 기사단이 포진해 있었다. 2천명 정도인 기사들의 표정은 누구나 복잡해 보였다. 그들은 반년이나 되는 동안 개혁파의 손에 의해 마레바에 감금당해 있었지만 그동안에도 오로지 단장의 무사를 기원하고 국왕의 무사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국왕의 귀환을 알게 되었을때 모두가 입을 모아 목숨과 바꿔서라도 그쪽 편에 붙겠다며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바로 그 국왕군과 지금은 적으로서 맞서고 있는 것이다. “단장님 배치는 끝났습니다. 오늘밤에라도 공격을 개시할 수 있습니다.” 냉정한 목소리로 말한 것은 틸레든 부기사단장 아스틴이었다. 발로가 단장에 취임했을때 그 젊음을 보완하기 위해 붙여진 부관이었지만 이 사람도 35, 6세의 젊은이였다. 그러나 소년 시절부터 냉정하고 침착한 전투 행동으로 알려져 젊은 혈기에 폭주하기 일쑤인 단장을 적확하게 보좌하는 명 부관이었다. 흰 피부에 단정한 외모는 이 사람을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이게 했지만 눈 색깔은 깊고 표정도 침착하여 어딘가 노숙한 분위기가 있었다. 이 사람에 대한 개혁파의 시선은 엄격했다. 개혁파는 틸레든 기사단에 대한 단속을 엄격하게 다잡아 단원들의 불만을 부추겨 문제를 일으키게 하고 그것을 구실로 틸레든 기사단을 완전히 지배하에 두거나 혹은 괴멸시킬 심산이었던 것이다. 아스틴을 비롯한 기사단의 주된 인물들은 외출 금지였던 마레바 성 내에서도 또한 감시 받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틸레든 기사단의 고참 기사들은 어떤 취급에도 태연히 견뎌냈다. 때로는 개혁파에 대한 불만과 분노에 폭발할 것 같은 젊은 단원들을 다독이며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도 마레바를 지켜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젯밤 기쁘게도 기사단장과 재회하여 성채 요새와 기사단원을 아무 손상없이 지휘관에게서 넘겨받는다는 컫란 소원을 이루어낸 참이었다. 그런 때에도 아스틴은 광희난무하는 다른 대원들과는 달리 단 한마디 ‘어서 돌아오십시오.’ 라고 인사했을 뿐이었다.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만큼 희로애락을 억제하는 것에 선수라 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어려운 일에도 가볍게 대응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상당히 목소리의 어조가 틀렸다. 보고를 받은 발로는 딱딱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하고싶은 말이 있는 것 같군 아스틴.” “아니오 그다지.” 부드럽게 온화하게 부정한 부관에게 발로는 어두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확실하게 말하는 게 어때. 납득이 안 간다고 어째서냐고.” “명령을 내린 것은 당신입니다. 저에게도 부하들에게도 그걸로 충분합니다.” 이것 역시 드문 일이다. 발로의 판단을 신뢰하고 있다고도 할수 있겠지만 암묵적으로 비난하며 비꼬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말투였다. 그러나 야유꾼이라면 발로 쪽이 원조다. 뻔뻔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의 명령은 너희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을 텐데. 좀더 따지고 들어서 설명을 요구하는 게 어때?” 아스틴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만 저도 당신과는 오랜 인연이다 보니 따지고 들어봤자 소용없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틸레든 기사단장은 숨기는 일에 능한 성격이 아니다. 이렇다 결정한 일은 물어보지 않아도 솔직하게 밝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것이 이번엔 표정도 무겁고 말수도 적고 그야말로 돌연히 지금까지의 방침과 정반대인 명령을 내린 것이다. 상당한 일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결코 본심에서 싸우고 싶어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발로는 지금도 자기 자신 속에서 심하게 갈등하고 있었다. “라모나 기사단에는 네 친구도 많이 있을텐데. 내일이 되면 그 친구들과 죽고 죽여야 해. 그래도 상관없다는 거냐.” 충실한 부관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단장님답지 않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희들도 라모나 기사단도 단장의 명령이라면 설사 상대가 누구라도 설사 국왕이라해도 싸웁니다. 터놓고 말하자면 왕명보다도 단장의 의지를 존중하여 따른다는 그런 성격을 가진 자들입니다. 비르그나의 무리들도 마찬가지 생각이겠지요.” 안색도 변하지 않은 채 말한 아스틴이었지만 결국은 한마디 덧붙였다. “다만 기왕에 말씀드린다 한다면 그만큼 대하기 힘든 비상하게 대적하기 힘든 상대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알고 있지요. 마찬가지로 그들도 우리를 알고 있습니다. 하루 밤낮만에 결판을 지을 수는 없을 겁니다.” “짓지 않으면 안돼.” 발로는 낮게 신음하듯 말했다. “어떻게든 그들의 진군을 막지 않으면 안돼. 그것도 조속하게.” “라모나 기사단과 도라 장군을 상대로 말씀입니까? 어려운 주문이시군요.” “그런 건 알고 있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린 발로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들을 코랄로 향하게 둘수는 없어. 나는, 그 사람과 나시아스를 구하기 위해서 이 장소에 나온 거다.” 아스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져나갔다.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한 마디로 충분했다. “야습을 시도해 볼까요?” 발로는 잠시 생각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일 아침 使者사자를 보내라. 그래도 응하지 않으면 일제 공격을 개시한다.” 이번엔 아스틴이 조금 생각에 잠긴 뒤 확인을 하듯이 말했다. “일제히 말입니까?” “그래.” “쓸데없는 참견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상대가 상대입니다. 정면에서 일제 공격을 한다고 큰 폭으로 무너지리라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그 정도면 충분해.” 발로가 나지막히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 야박한 놈에게 내 각오를 보여주고 말 테다. 중앙 돌파해서 전멸시킬 각오로 총공격을 퍼붓는다. 그렇게 하면 나시아스도 그 사람도 알 수 있게 되겠지.” 아스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무래도 사태는 예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듯 했다. 혹시나 아는 사람들끼리의 전투가 되지는 않을까 생각지 못한 것도 아니었으나 발로는 진심으로 오랜 친구를, 사촌형인 국왕을 적으로 결정짓고 싸우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대로 이쪽의 피해가 최소한이 되도록 머리를 쓰는 것이 아스틴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 뒷맛이 씁쓸한 역할이 될 것 같았다. 비슷한 시기. 국왕군의 진지에도 숨을 죽이고 정부군의 구화를 바라보고 있는 그림자가 있었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괴로운 목소리로 말한 것은 도라 장군의 부관인 타르보. “꼴사납다는 소리를 들을지 모르겠으나 무언가 착각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은 기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음하듯 말한 것은 나시아스의 부관 가렌스였다. 두 사람 모두 부하들 앞에서는 어디까지나 쾌활하게 여유만만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 코랄로 향하는 데는 변함이 없고 이름하여 틸레든 기사단이라면 바라마지 않던 상대라고 호언하며 병사들의 불안을 떨쳐내 버리고 전의를 고무시켰지만 내심으로는 깊이 고뇌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 반드시 구출하려 생각하던 상대가 지금 바로 적이 되어 이쪽을 향해 공격하게 된 것이다. 샤미안이 조용히 걸어와 그들과 나란히 섰다. “아가씨. 이제 슬슬 쉬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내일은 힘든 전투가 될 겁니다.” “으응.” 그렇게 말하면서도 샤미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환하게 피어오르고 있는 적진의 구화를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타르보. 대체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당신은 듣지 못했어?” “아가씨. 그것은 제가 되려 여쭙고 싶을 정도입니다.” 병사들의 바로 코앞이라 목소리는 억제한 상태의 대화였다. “장군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무언가 생각이 있으실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저에게도 한 마디 해 주시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갑니다. 아니 본래라면 제 쪽이 장군님의 심중을 알아서 살펴드려야만 하는데 한심스럽게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가렌스 당신은요?” “마찬가지입니다.” 라모나 부기사단장은 커다란 어깨를 아무렇게나 움츠려 보였다. “나시아스님은 틸레든 기사단이 적측에 붙은 것을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하시고 발로님을 설득해 보려고 하시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 이유도 원인도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 나시아스님께서 큰 독수리 문장을 향해 공격 명령을 내리시는 일 따위를 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래도 자신들의 주인이나 부친에 대한 깊은 신뢰를 기울이고 있기에 망설이진 않는다. 다만 가능하다면 그 이유를 알고 납득하고 싶었다. 샤미안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저 발로님이 어째서 개혁파에 조력하겠다는 결심을 하셨을까?” “동감입니다.” 두 부관이 저도 모르게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알 수 없는 것은 그점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 정도로 완고하게 폐하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계시던 분이 어째서. 그것도 최악의 경우에는 근위병단을 이끄는 핸드릭 백작이 적측에 참전할지도 모른다니 무슨 일이 어찌 된 건지! 정말 가르쳐주시면 좋겠습니다.” “가렌스 목소리가 크네.” 타르보가 낮은 소리로 끄짖었다. 그리고 그들 세 명의 눈은 자연스럽게 국왕의 천막으로 모였다. 내일에 대한 軍議군의는 벌써 끝난 뒤였다. 그때에는 그들과 주요 영주들도 참가하여 각각의 수순을 서로 확인했다. 국왕은 적의 새로운 세력에 대해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쓴웃음을 지으며 從弟종제님도 괴로운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만 말했다. 이번 출격은 발로의 본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자신들이 승리를 거두어주는 쪽이 그 사람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했다. “그렇다해도 종제님에게도 기사로서의 면목이 있다. 중앙 전토에 명성 높은 틸레든 기사단이라면 더욱더 조잡한 싸움 모습은 보일리없다. 내일의 공격은 틀림없이 지극히 격렬한 것이 되리라 생각한다. 각자 부디 방심하는 일 없도록 또한 상대를 봐주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부탁한다.” 영주들은 그런 말을 듣고 크게 안심하며 납득한 듯 했다. 국왕이 말한 내용은 옳은 것이며 설득력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 세 명은 마음 속으로 끄덕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발로를 알고 있었다. 그 성격도 국왕에 대한 충성심도, 나시아스와의 우정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이유가 있다 해도 그 두 사람에게 칼을 들이대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국왕의 천막 안에서는 그 나시아스와 도라 장군이 월과 얼굴을 마주하고 진짜 내일의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이 부군의 지형에 아군과 적군의 위치를 써놓은 도면을 펼치고 도라 장군이 설명했다. “우리 군의 위치는 이곳 그리고 이곳에 틸레든 기사단. 그 좌우를 점하는 것이 근위 제3군과 영주군. 적진에 핸드릭 백작이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코랄에 보고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전선을 이탈했을 뿐이라고 보아야겠지요. 이곳에서 코랄까지는 이틀을 꼬박 달려야 돌아올 수 있는 거리이니 말씀입니다. 아누아 후작 정도는 아니라 해도 백작이 지휘하는 근위병단을 상대하게 된다면 상당히 곤란해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 속공으로 끝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기군요.” 한숨을 내쉰 월이었다. “나시아스경. 틸레든 기사단장은 어떤 비책을 세울 거라 생각하십니까.” “폐하 우선 그 어법부터 고쳐주십시오.” 라고 나시아스는 다시 확인하고 “발로는 잔재주를 부리는 성격은 아닙니다. 성격이 거친 남자이니만큼 상식적인 공격을 해올 심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대를 두셋으로 나누는 일은 있어도 기본적으로는 정면에서 승부를 걸어오는?” “단순한 듯 합니다만 오히려 그 점이 어렵습니다.” 단언한 나시아스였다. “그들의 통제력 있는 기동력은 물론이거니와 발로는 전투의 흐름을 읽어 기선을 제압하는 데에는 천재적입니다. 실제로 마의 5년 동안 일어난 몇 번의 분쟁에서 전투를 했습니다만 틸레든 기사단의 돌격을 견뎌낸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도라 장군이 나직하게 웃었다. “그것은 라모나 기사단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귀공들은 국왕 부재 기간에 실로 훌륭하게 활약해 주었으니까 말이야.” “예에. 그 당시에는 각지에서 영주들의 분쟁이 끊임없었고 저희들의 출동도 빈번했으니까요. 발로와도 자주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안에서 싸우기만 하고 있으면 다른 두 나라가 끼여들 틈을 주게 될 뿐이라고. 하루라도 빨리 정통한 국왕을 맞이할 필요가....” 나시아스는 거기에서야 문득 생각난 듯 말을 끊었다. 당황하여 남자를 보더니 깊이 머리를 숙였다. “용서해주십시오. 무례한 소리를.”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시아스경.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곤란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자신의 문제는 어찌되던 상관없지만 이 델피니아가 어찌될 것인지 지금에 와서는 그쪽이 걱정이군요.” 조용한 어조였다. 그리고 부드러운 눈으로 나시아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난다면 개혁파를 타도하고 페르젠을 쓰러뜨린다면 당신도 발로 경에게 왕관을 권해 주십시오. 무섭게 완고한 종제님이지만 당신이 설득해준다면 그 융통성 없는 부분도 많이 부드러워질 거라 생각합니다. 혹시나 또 국왕 같은 건 성미에 안 맞는다고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승낙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될테니 말입니다.” 결전을 지척에 둔 전사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시아스는 거의 눈시울을 붉히며 끄덕였다. 어째서 그리 되는 것인지는 자신도 알수없었다. 도라 장군도 본의 아니게 눈동자를 붉혔지만 그래도 훌쩍 가슴을 폈다. “같은 소리를 여러번 해봤자 의미가 없겠지요. 지금은 당신이 국왕이십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합시다.” 아침이 다가왔다. 마레바 서측 분지에 진을 치고 있던 국왕군, 정부군의 진영 양측에서 아침식사의 연기가 융성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해가 뜨기 전에 배를 채워두려는 것이다. 날이 밝으면 언제 결전이 시작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승전을 계속한 터라 들떠있던 국왕군의 병사들도 역시나 이제부터 싸울 상대에 대해 생각하면 긴장하는 모습들이었다. 그것은 이미 식사를 끝내고 임전 태세에 돌입한 국왕 측근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째서인지 이븐의 모습이 없었다. “브란 너희들 대장은 어디 갔나?” 그때 이래 항시 곁을 떠나지 않았던 이븐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어 국왕이 물었지만 타우의 간부장도 모르는 것 같았다. 곤혹스러운 양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집보기라. 폐하한테 딱 달라붙어 있으리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아침까지는 돌아온다고 말하고 모두들 끌고 나갔습니다.” “리도 함께 갔나?” “아뇨. 그 아가씨는 아가씨대로 뭔가 생각이 있는 모양이라 예의 그 말하고 같인 나갔습죠 예.”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차에 이븐이 찾아왔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산속에 있었던 듯 했다. 몸에 풀과 밤이슬의 냄새가 짙게 떠돌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남자는 가볍게 끄덕이고 물었다. “뭔가 알아냈나?” “아니요. 적군 형씨들이 이쪽에 일제 공격을 가할 것 같다는 정도밖엔 못 찾아냈습니다.” “그런가.” 그런 일을 시킨 기억은 없지만 국왕은 태도에 나타내지 않았다. 한편 브란은 동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대장. 녀석들은 어찌된 거요?” “다른 일을 맡겨놨어.” 그리고 다시금 이븐은 소꿉친구인 국왕에게 허리를 굽히며 말을 꺼냈다. “폐하 제멋대로이긴 합니다만 오늘 전투에서 친위대는 별도 행동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국왕은 보일락말락 미소를 지었다. “별도 행동은 너뿐인가 아니면 저 소녀도 마찬가지인가.” “나도야.” 모두가 흠칫했다. 이곳은 들판이다. 눈치채이지 않게 다가와서 말을 거는 일 따위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소녀는 국왕이 앉아있는 의자 바로뒤 천막 뒤쪽에서 나타났다. “리 놀래키지마.” 왕이 말했다. “내가 할 말이야. 이래서야 뒤가 보이질 않잖아. 위험하다구.” 리는 돌아보면서 막을 잡아 당겼다. “뭘 그거야말로 노루나 늑대라도 되지 않으면 이 본진의 뒤에서부터 접근하는 일은 불가능해. 산짐승이라도 너처럼 기척을 죽이고 다가오는 일은 하지 못할 거다.” 느긋하게 말한 국왕이었다. 소녀는 대답하지 않은채 방금 넘어온 산을 바라보았다. 잡목이 우거진 산이었다. 분지이기 때문에 시선을 돌려보아도 주변은 산뿐이다. 자신들과 적이 있는 곳만이 직경 2카티브 정도의 평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분지의 입구에 진을 치고 있는 적을 바라보면서 소녀는 말했다. “월.” “왜?” “저거하고 싸워서 얼마나 버틸 수 있어?” 국왕은 잠자코 적진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왕의 옆에는 도라 장군, 나시아스, 그리고 타르보, 가렌스, 샤미안이 서있었다. 그들도 국왕과 마찬가지로 대전 상대쪽으로 눈길을 향했다. 북적대는 군사의 중앙에 큰 독수리를 그린 깃발이 나부끼고있다. 그 외에도 각각의 영주들을 표시하는 이런 저런 깃발이 자리가 좁다하며 펄럭이고 있었다. 저편에서 바라본 이쪽도 같은 식으로 보일 것이다. 두개의 세력 사이에 펼쳐진 녹색 초원에는 초여름의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군데군데에는 붉고 흰 작은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그러나 저 꽃들은 이제 곧 짓밟히게 된다. 그뿐 아니라 이 녹색 초원은 철저하게 파헤쳐지고 피에 물들것이다. 국왕은 특별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겠군. 나는 질 생각이 없지만 발로도 그럴 테니까.” 샤미안이 몸을 떨었다. 기사로서 살아가는 길을 택했던 것에 후회한 적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무언가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전신을 덮쳐 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망을 보고 있던 타르보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전장이 될 평야에 눈길을 주자 적 진영에서 기사 한 사람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말에 탄 從者종자는 큰 독수리의 문장을 그린 기를 높이 들고 있었다. 使者사자였다. 투항을 권고하기 위해 이쪽 진영까지 올 생각이었겠지만 사자가 아직 전장을 반절 횡단하기도 전에 가렌스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아보았다. “폐하, 나시아스님. 외람되오나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가렌스!” 나시아스가 제지하려 했지만 가렌스는 이미 말에 뛰어 오른 뒤였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던 것이다. “기다려!” “무슨 소리를 할지는 모르겠으나 국왕군은 결코 투항 따위 하지 않겠다고 전해줄 뿐입니다.” 가렌스는 짧게 말을 남기고 달려갔다. “기다려 가렌스!” “나시아스 말을 빌려 줘.” 소녀가 말하곤 훌쩍 나시아스의 말에 뛰어올라 가렌스의 뒤를 쫓았다. 뭐라해도 그라이아를 탄다면 너무 눈에 띄어버린다. 그리고 가렌스를 쫓아가 약간 물러선 채로 말을 몰자 몸집이 작은 만큼 소녀는 가렌스의 從者종자처럼 보였다. 나시아스는 약간 초조해하며 국왕을 돌아보았지만 국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거절하는 말을 전할뿐인데 라모나 부기사단장이 일부러 나갈 필요도 없겠지만 상대를 알고 있는만큼 억지로라도 자신이 말하고 싶었겠지.” 침착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했다. 이 본진에는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병사들도 있는 것이다. 나시아스도 마음을 되잡았다. 자신이 당황한다면 그런 그들이 의심한다. 양군으로부터 천천히 나아간 사자들은 전장이 될 장소의 한가운데 멈춰 서서 말에 탄 채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소녀는 종자인 척 하면서 정부군의 사자를 깊게 관찰했다. 27, 8세 정도로 보이는 젊은 기사였다. 늘씬한 몸집은 가렌스의 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잘 단련되어 있을 것이다. 흰 피부에 이지적인 외모로 입가는 부드럽게 닫혀 있었지만 시원스럽고 옅은 찻빛 눈동자만은 엄격한 긴장감에 가득 차 있었다. “이런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가렌스가 낮게 신음했다. 아스틴도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그쪽에 투항을 권고하기 위해 왔지만 쓸데없는 일이겠지.” 예전부터 친한 기사단의 부관들인 것이다. 물론 친교가 있었다. 가렌스는 위엄 있는 얼굴을 고뇌로 일그러뜨리며 오랜 친구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스틴. 나는 아무래도모르겠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발로님은 너에게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던가?” 틸레든 부기사단장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너에게 물으려 했던 거다. 우리 대장님은 저래 보여도 의외로 다루기 쉬운 사람이었는데 이번만큼은 두손다 들었다.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고 있어.” 한층 더 험악한 표정이 된 오랜 친구를 보고 아스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시아스님도 마찬가지인가.” “그래. 그저 어떻게든 마레바에 꼭 입성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실뿐이다.” “너나 나나 골치 아픈 주인을 가진 것 같군 그래.” 어디까지 본심인지 알수없지만 아스틴은 담백하게 말하며 희미하게 미소를 떠올려 보였다. “그래도 실수로라도 나시아스님만은 적으로 삼지 않으려 할 우리 대장이 흰 백합의 문장을 공격하라고 하시는 거다. 적당히 비기는 걸로는 안되겠지. 하물며 사자의 깃발이라면 더더욱 말이야.” 뭐라 할 수 없는 쓴웃음을 지은 아스틴이었지만 이것 역시 한순간이었다. 똑똑하게 말을 남겼다. “이것도 무언가의 因果인과라는 거겠지.” “음.” 가렌스도 처음으로 당당한 표정이 되었다. “틸레든 기사단이라면 상대로서 부족함이 없다. 힘껏 싸우도록 하자.” “아아.” 감상적이 되는 것도 여기까지다. 남은 것은 사력을 다한 전투가 되리라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충분히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동안 리는 종자인 척 가만히 듣고 있었지만 말을 돌려 진지로 돌아오던 도중 살짝 물어보았다. “방금 그 사람이 발로 씨 부관?” “그래.” “발로 씨도 꽤나 젊은 단장이었지만 저 사람도 무척 젊네.” “아니 젊어 보이지만 저 얼굴로 분명 서른다섯은....” 말하다 말고 가렌스는 퍼뜩 입을 다물었다. “전사여.” 말을 걷게 하면서 소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발로님을 본 일이 있는 듯한 말투로군. 어디에서 보았나?” 아무래도 움찔해 버린 소녀였다. 국왕군 전체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집중되어 있을 터이다. 가렌스는 말 위에서 자세를 바로잡고 어디까지나 정면을 바라본 채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새삼 확인했다. “나시아스님의 어깨는 발로님의 짓인가?”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가렌스도 이미 눈치는 어느 정도 채고 있었으리라. 그 이상 캐묻지 않았지만 대신 이런 말을 던졌다. “발도우의 딸에게 묻고자 하는데 이번 전투에서 정의는 우리들과 발로님 중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어느쪽이 옳으냐 그런 이야기?” “그렇지.” “어느쪽이나 다 옳아.” 가렌스의 눈동자만이 날카롭게 움직여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다시 한번 말했다. “어느쪽도 옳아. 발로 씨는 나시아스도 월도 죽이고 싶지 않은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결전을 하러 나온 거고. 나시아스도 월을 죽이고 싶지 않으니까 발로 씨의 도전을 받아들인거야.” “거기까지는 나도 알수있어.” 낮게 신음한 가렌스였다. “알수없는건 한가지다. ‘어째서’인 거지?” “생각하고 있을 틈은 없어. 이제 곧 개전이야.” 그들이 본진으로 돌아오는 것을 신호로 삼은 듯이 바로 전투는 시작되었다. 4장 결전은 비장했다. 이 전투에서 쫓기고 있는 것은 국왕군 쪽이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에서 적을 격파하여 성채 요새를 제압하지 않으면 뒤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 기합을 넣어 덤벼들었지만 정부군도 무시무시한 맹공으로 임해왔다. 며칠 전의 전투 때와는 다른 군대가 된 것처럼 살아남을 계산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의 전투 모습이었다. 그러나 국왕군도 얌전히 당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상대가 정신없이 공격해올 때는 방어를 강화하고 지친 모습을 보일 때에는 그 틈을 비집어 무너뜨리는 전법으로 나갔다. 녹색의 초원은 보병, 기병이 섞여든 대혼전의 장소로 변해 버렸다. 뚫고 들어가는 선두를 맡은 병졸은 적의 얼굴을 확인할 여유도없이 그저 덤벼오는 자들을 죽을 기세로 찌르고 베어 넘겼다. 적도 마찬가지로 고함을 지르며 이쪽을 죽일 듯 덤벼들어왔다. 이런 극한 상태에서는 기세가 죽는 쪽이 진다. 병사들은 다소 부상을 입어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고 그중에는 팔다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마저 모른 채 새로운 적에게 덤벼들어 계속 싸워나가는 자도 있었다. 기병대는 전장을 자유자재로 달려 다니며 눈에 띄는 상대와 말을 달려 지나가며 격렬하게 창을 맞부딪혔다. 어느 쪽도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 무시무시한 공방이 되었다. 이른 아침과 함께 시작된 전투는 두 시간 정도 지속되었고 이대로는 끝이 나지 않겠다고 본 양군은 종을 울려서 각자 군사를 일단 진지로 후퇴시켰다. 그리고는 서로가 사자를 보내어 전장에 남겨진 부상자와 전사자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국왕군에서는 선두와 중진에 나섰던 세리에 경과 니체리경이 숨을 몰아쉬면서 국왕에게 전황 보고를 했다. “역시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적이지만 멋진 움직임이었습니다. 저희들도 상당히 격렬하게 공격했습니다만 한번에 기세가 쇠퇴하질 않는군요.” “그렇지만 지금 다시 공격한다면 반드시 적의 선봉을 무너뜨릴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부군의 주력인 틸레든 기사단은 그 기마대의 대부분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은 국왕군도 마찬가지였다. 국왕의 지시로 라모나 기사단의 기마대는 후진에 머무른 채 전황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후진에서 드디어 참지 못하고 나시아스가 찾아와 국왕에게 진언했다. “외람되오나 폐하 다음 전투에서는 저희들의 참전을 허락해 주십시오.” “안된다.” “그러나 이대로는.” 나시아스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있었다. 오래 끌어 코랄의 응원군이라도 도착한다면 이쪽의 패배는 거의 결정적이다. 그전에 어떻게 해서든 틸레든 기사단을 때려눕히지 않으면 안된다고 나시아스는 생각하고 있었다. 저 친구도 아마 그것을 바라고 있을 터였다. “틸레든 기사단을 저희들이 억누르고 그 사이에 총공격으 해본다면 무너뜨리지 못할 상대도 아닙니다. 반드시 격파할 수 있을겁니다.” 그렇게 진언했지만 국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라모나 기사단이 틸레든 기사단에게 실력적으로 월등하다면 그래도 좋겠지.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호각. 하물며 발로가 이번 전투에 담은 의지는 보통이 아니야. 그런 상대에게 전면전으로 맞서 봤자 큰 타격을 입을 뿐이다.”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레바를 빼앗을 수 있다면 저희들은 언제라도 버리는 말이 될 각오로 있습니다.” 진심으로 말한 나시아스였지만 국왕은 끝까지 온화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 귀공을 여기에서 개죽음하게 둘 수는 없다.” “그러나!” “나시아스. 잊지말게. 이것은 귀공과 틸레든 기사단의 싸움이 아니야. 귀공들 사이에 결론이 난다고 다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걸세.” 냉정한 목소리에 라모나 기사단장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분명히 자신들 사이에서 결론이 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레바를 빼앗고 코랄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많은 전력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 2천의 라모나 기사단을 피해 없이 남겨두기 위해 3천의 영주군이 큰 타격을 입어서야 의미가 없다. 나시아스는 분한 듯 왼쪽 어깨를 눌렀다. 옷 아래에 숨겨져 있지만 얼마 전 발로에게 입은 상처는 생각이상으로 몸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었다. 이것만 없었더라면 아예 자신과 발로의 일대일 대결로 이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면 좋았을 테지만 이런 꼴이어서야 일대일을 제안한다 해도 저 친구가 받아줄 리가 없었다. “나시아스, 섣부른 생각은 하지 말게.” 저도 모르게 번쩍 고개를 들자 국왕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나시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셨습니까?” “그렇게 분한 듯한 얼굴로 어깨를 붙잡고 있으면 말이야. 그렇게 서두르지 말게. 종제님이라 해도 귀고오가 결투 같은 걸 하고 싶진 않을테니.” “아니오. 저 남자 성격이니 지금쯤 괜시리 서둘렀던 것을 내심 후회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로서도 절대적으로 비난해 주고 싶은 기분이고요.” 국왕은 재미있다는 듯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렇고 말고. 살아남지 않고선 종제님과 싸우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니까.” 나시아스도 미소지었다.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국왕이 평상시의 국왕인 게 안심했다. “폐하께서는 무언가 승산이 있으신 건가요.” “그렇게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야. 그 소녀가 이 싸움에 참가고 있잖아.” 느긋하게 말한다. “이븐도 마찬가지고. 무엇을 할 심산인지 나한테도 아무 말 없이 나갔는데 조금쯤 기다려보자고 생각하고 있네.” 믿음직스러운 듯 믿음직스럽지 못한 듯한 대답에 나시아스는 기도하는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저 소녀와 친위대장이 무언가를 할 생각이라 해도 이쪽이 괴멸할 정도의 타격을 받은 뒤에는 너무 늦어버리는 것이다. 한편 정부군에서도 총지휘관인 발로가 각 영주들로부터 전황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 옆에는 감시하는 의미도 겸해 충실한 부관이 대기하고 있었다. 혹시 이 단장이 선두를 제치고 뛰어나가려 한다면 몸으로 막아서라도 말릴 생각이었지만 발로는 의외로 본진에 남아 앞으로 나서려 하지 않았다. 드문 일이었다. 용맹함으로 알려진 이 사람이라도 오랜 친구와는 싸우고 싶지 않은 것인가 하고 아스틴은 생각했지만 전황 보고를 받은 발로는 마음에서 우러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뿔싸.” “예?” “이렇게까지 성가시게 될줄알았다면 그 녀석에게 부상을 입히는게 아니었어.” “예?” “아무리 그래도 부상자를 상대할순 없으니까 말이야. 정말 너무 성급한 짓을 해버렸군.” 무시무시한 상상이 떠올라 아스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발로는 내심 억울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지만 곧 기분을 바꾼 듯 했다. 먼젓번의 전초전에서 협공으로 나왔던 것을 발로는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공격의 제2탄에 관하여 자세한 지시를 내렸지만 그 내용은 적의 복병에 대비하여 세력을 충분히 남겨두고 선봉을 쐐기 모양 진형으로 짜서 적 정면을 돌파한다는 것이었다. 기회가 왔다 싶을 때에는 발로의 지휘 하에 대기 병력을 단숨에 투입한다 하니 적이 웬만한 대군이라면 몰라도 이쪽에 비해 규모가 열세인 이상 이것으로 무너뜨리지 못할 상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라모나 기사단을 끌어내는 일이다. 뭐라 해도 그것이 적의 주력이니까. 그럴 마음가짐으로 한층 거세게 공격해 들어간다.” 정부군은 응원군도 기대할 수 있다. 오늘 늦게까지는 핸드릭 백작이 휘하의 세력을 이끌고 합류할 것이다. 전력의 온전은 고려하지 않아도 좋았다. “라모나 기사단이 응전하여 전장에 나온다면 단번에 대기 병력을 투입한다. 그때가 승부다. 단장 나시아스를 붙잡는 자에게는 바라는 대로의 보상을 내리겠다. 충분히 격려하라.” 그리고 자신은 본진에 남아 지휘용 의자에 앉았다. 두 번째의 전투는 그로부터 곧 이어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였었지만 이미 태양은 중천에 있었다. 정부군의 병사들은 국왕군을 향하여 온 힘을 다해 전진에 전진을 거듭했다. 정부군의 본진에는 이 장소를 지키기 위한 수비용 병사가 상당히 남아 있었으나 그들도 전투에 참가하고 싶어 들썩들썩 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가운데 그 모습을 가까이의 산 중턱에서 내려다보는 자들이 있었다. 이븐을 비롯한 타우의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이곳까지 눈에 띄지 않도록 산 중턱을 지나와 정부군에게 근접한 상태였다. 다행히 잡목림에 무성하게 가려진 산이다. 대군으로 이동하면 그래도 눈에 띄겠지만 열명남짓한 적은 숫자로는 발견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수풀투성이로 아무래도 지나갈 수 없을 법한 곳을 강행돌파한 것은 역시 산적 출신이랄까. 그렇다고 해도 그들에게도 결코 쉬운 행군은 아니었다. 소베린의 죠그가 땀을 닦고 숨을 헐떡이며 이븐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적의 대장은 국왕님의 사촌 동생이잖수? 죽여버리면 곤란한 거 아닙니까?” “거야 곤란하지.” 이븐도 발을 멈추지 않고 대꾸했다. 이곳까지 와서도 아직도 활의 사정거리 내에 들지 않았다. 조금더 가까이 갈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뭐 쬐끔 다치게 하는 정도야 상관없을거라고 봐. 어쨌든 이대로는 끝장이 안 나잖아. 적을 혼란시켜서 전의를 상실하게 하려면 대가리를 때리는 게 제일이니까 말야.” “예이. 습격의 기본이구먼요.” 가치 있는 것을 주렁주렁 단 상인 대열을 습격할 때를 떠올리며 브란이 말했다. “피래미들을 하나하나 상대하고 있다간 그 사이에 진짜 월척이 도망가 버리니까 말씀이요.” “거참. 우째 국왕님도 장군님도 그런 걸 안한답니까?” 아델포 출신 달리의 의문에는 렌트의 사르지가 뽐내는 얼굴로 대답했다. “거야 임마. 기사의 체면인가 명예인가 뭐 여러 가지 어려운 게 있는거 아니겠냐.” “그런거지.” 이븐도 끄덕였다. 저 소꿉친구에게 적의 대장을 급습하겠다고 한다면 반대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질러 버린 뒤에 잔소리를 듣는 쪽이 낫다고 이븐은 각오한 것이다. 그들은 소리를 죽이고 가능한 한 기척을 지우며 눈앞에 조그맣게 보이는 적의 본진에 가까이 다가갔다. 승부는 최초의 한 발로 결정된다. 맞으면 소동을 틈타 도망칠수도 있겠지만 빗나가면 자신들에겐 탈 말도 없다. 즉시 적에게 쫓겨서 붙잡혀 버린다. 그런 위험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븐은 동료들을 데리고 이 혼란 작전에 나선 것이다. 저 친구에게도 다른 장군들에게도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용맹함과는 반대로 자신들의 정의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기력의 충실함을 따져볼때 분명 정부군보다 못한 상태인 것이다. 정공법으로 싸워서는 이길수가 없다. 그렇다고 국왕군의 간판을 세운 그들이 비겁한 짓을 할수있을 리도 없다. 그런 점에서 자신들이라면 애초에 산적 출신이다. 다소 기사도에 벗어나는 짓을 한다 해도 국왕군에게 손해될건 없었다. 이븐이 동료들의 선두에 서서 가는 길을 방해하는 수풀을 열심히 치워내면서 정부군의 본진에 다가가고 있던 중 갑자기 누군가가 그 팔을 잡았다. “.......?!”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지만 소녀는 소리도 내지 않고 나타나서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조용히 하라고 말없이 표시해 보였다. “리! 놀래키지 말라구.” 이마의 땀을 훔쳐낸 이븐이었다. 소녀는 수풀 안에 오랫동안 몸을 숨기고 있었던 듯 했다. “이런데에 모두들 뭐하러 온거야?” “그러는 너는 뭘 하고 있었어.” 아무래도 두사람다 목적은 같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적 중에서 눈에 띄는 지휘관에게 부상을 입힐 작정이었던 이븐의 생각에 소녀는 난색을 표명했다. “국왕의 친위대가 그런 짓을 했다간 곤란해.” “그럼 네 목적은 뭔데?” 저 남자는 이미 국왕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서도 이븐은 소녀의 생각을 듣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정신이냐 너?!” “그거야말로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니 거야 그렇겠지만. 할수있겠냐?” “해보지 않으면 몰라. 마침 잘 됐다. 도와줘.” 허를 찔린 타우의 남자들은 소녀에게 이끌린 채 조금씩 산을 내려가 적의 본진에 다가갔다. 이미 목표는 거의 바로 눈앞이었다. 섣부른 움직임을 보였다간 즉시 들켜버릴 거리였다. 그들이 놀란 것은 그곳에 그라이아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로아의 흑왕은 그 거구를 아름드리 나무 그늘에 잘도 숨기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나갈 순서가 될 때까지 그렇게 조각상처럼 대기하고 있을 생각인 듯 했지만 등 위의 안장에는 묘한 것이 붙어 있었다. 가는 밧줄이니 거적이니 통상의 곱절은 될 것 같은 특대 크기의 麻袋마대 까지 있었다. 의심스럽게 이븐이 묻자 소녀는 간단히 대답했다. “보급대가 가지고 있던 거야. 곡물이 들어있던 자루인데 몇 개 정도 이어가지고 합쳐서 만들었어.” “그건 알겠는데 왜 이런 걸 일부러 준비한 거야?” “일단 보이지 않게 묶는 쪽이 좋겠다고 생각한 건데 필요없을까나?” 이븐은 무척이나 어이가 없어 한숨을 내쉬곤느 점잖게 서 있는 말에게 말을 걸었다. “너도 참 이런 골치 아픈 놈한테 반한 덕에 고생바가지구나.” 흑마는 울음소리를 내거나 하진 않았지만 슬쩍 이븐을 보고는 가볍게 푸르릉거려 보였다. 그것은 이븐에게는 마치 ‘피차 마찬가지다’ 라고 말하는 듯 들렸다. 전투는 슬슬 정부군이 우세한 형상으로 기울어져 갔다. 선두의 민스, 니체리 세력의 전투 양상은 힘겨워졌고 중진에서 로아 세력이 응원을 위해 달려가 열심히 응전했지만 정부군의 기세를 여간해서 막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후위에 있는 라모나 기사단이 참전하는 것도 시간 문제로 생각되었다. 이 기회를 노리고 있던 발로는 틈을 주지 않고 지휘봉을 휘두르며 외쳤다. “2진 양 날개 동시에 돌격!” 이 명령이 내려지는 것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부대들이었다. 둑이 터진 듯 국왕군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본진 가까이에 수비병으로서 머물고 있던 부대도 흥분을 누르지 못한 모양이었다. 돌격 허가를 구하러 왔다. 지금 한번 밀어붙이면 적이 패주할 것은 必至필지. 부디 이곳에서 자신들의 활약 무대를 만들어달라고 전령이 다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발로는 외쳤다. “허락한다 가라!” 후진에 있다보니 무척이나 안절부절못했던 모양이었다. 기마들로부터 보병에 이르기까지 시위를 떠난 화살 같은 기세로 돌진해 나갔다. 시작했을 때에는 양쪽 군의 중간 정도에서 벌어졌던 전투였으나 어느새 전장은 분명하게 국왕군 측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것은 당연히 정부군의 본진이 점점 비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본진에는 대장석에 앉아있는 발로 외에 열 명 정도의 정예가 호위를 위해 붙어 있을 뿐이었다. 남은 자는 모두 국왕군을 공격하러 나가 있었던 것이다. 정부군의 본진 뒤에 있는 나무에 몸을 숨긴 소녀가 기다리고 있던 때는 바로 이 순간이었다. 물론 타우의 사내들도 알고 있었다. 고작 아홉 명의 무리와 한 필의 말은 수풀을 뛰쳐나가 정부군 본진을 향하여 단숨에 달려내려갔다. 정부군의 용사들이 눈치챘을 때에는 선두의 소녀가 이미 본진 바로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국왕군과 마찬가지로 천막을 치고 있는 그 막 바로 아래로 후릭 숨어들었다. 거의 동시에 타우의 사내들이 이번엔 옆으로부터 정부군의 본진에 뛰어 들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때에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로부터 돌격을 받은 정부군은 경악하며 혼란에 빠졌다. “웬 놈이냐?!” “주제 넘은 놈들!” 저마다 외치며 응전하려 했지만 타우의 사내들에겐 기습으로 인한 잇점이 있었다. 그들은 말 위의 기사들에게 무기를 잡을 틈조차 주지 않고 일격으로 때려 눕혀갔다. 말 위의 적을 쓰러뜨리고 말을 빼앗는 일이라면 산적인 그들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한편 천막을 통과해 본진에 뛰어든 소녀는 목표로 삼은 인간에게 똑바로 달려들었다. “네놈은?!” 발로가 외치고 허리의 검에 손을 댔으나 뽑진 않았다. 그 순간 소녀는 미리 양손에 쥐고 있던 곤봉을 발로의 몸통에 힘껏 찔러 넣었다. 허리에 손을 댄 자세 그대로 발로는 아무 소리 없이 그대로 무너졌다. “단장님!” 안색이 변한 아스틴이 검을 뽑아 소녀에게 덤벼들었지만 이븐이 그보다 먼저 그 검을 쳐서 떨어뜨렸다. “리 서둘러!” “잠깐 기다려. 짐을 싸야만 돼.” 소녀는 그라이아에 얹어두었던 밧줄로 발로를 잽싸게 묶어버린 뒤 거적으로 둘둘 말아 예의 마대의 입구를 열고 그 안에 발부터 집어넣어 버렸다. 아무리 이븐이라 해도 얼굴을 가리고 싶어졌다. 정부군의 병사들은 예상 외의 기습에 당황하여 황급히 응전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말 위에 타버린 타우의 사내들은 접근을 허용치 않았다. 그 사이 소녀는 적당히 보쌈을 끝내고 단단하게 주둥이를 묶은 마대를 그라이아에 얹었다. “이븐 가자.” “그래.” 아스틴에게 들이밀었던 검을 거두고 이븐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구만. 받아 가겠수.” 휘릭 몸을 돌려 브란이 제압해둔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들은 국왕군의 진지를 향해 전장을 가로지르며 달려갔다. “뭐냐?!” 놀란 것은 싸우고 있던 양쪽 군사들이다. 정부군에서 보자면 이런 적은 수의 응원군이 나타날 리가 없다. 그렇다고 격전장의 바로 뒤통수 쪽에서 적이 나타날 리도 없다. 국왕군쪽에서 보자면 전투가 시작되고 나서 계속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그들이 정부군의 진지에서 이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나시아스님! 그 전사가!” 가렌스가 저도 모르게 외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말을 달려 오고 있다. 그러나 소녀는 자신의 발로 달리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는 마대를 실은 그라이아가 달리고 있다. 전력 질주하는 말에 이기지도 뒤지지도 않는 속도로 소녀는 낮게 대지를 달려갔다. “뭐야?!” 가까이에서 이 광경을 본 정부군의 용사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싸우는 것도 잊고 아연해있는 사이에 여덟 기와 한 필, 그리고 한 사람은 쉽사리 정부군의 진지를 넘어 국왕군의 진지까지 달려갔던 것이다. 이것을 쫓아야 할지 싸움을 계속해야 할지 완전히 갈피를 잡지못해 버린 정부군에게 퇴각의 종이 울렸다. 국왕도 또한 이 상태를 본진에서 바라보다가 희미한 미소를 짓고 퇴각의 종을 울리도록 명령했다. 이리하여 양군 모두 이 행동에 허를 찔린 형태로 두 번째의 전투가 종료했다. 전장의 끝에서 끝까지 질주한 타우의 사내들은 겨우 긴장에서 풀려나 땀투성이가 된 채로 말에서 내렸다. “이거야 졌다 졌어. 말도 안되는 짓을 시키는구만.” “수명이 5년은 줄었수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타우의 사내들이라도 이런 무모한 짓은 해본 일이 없다. 이븐도 식은땀을 닦으며 대꾸했다. “투덜거리려면 저 꼬마에게 하라구. 돌아가는 길은 똑바로 달리는 쪽이 빠르다니 잘도 말했다 정말. 이건 완전히 엉망진창이야.” 몸을 돌려서 바라보자 정부군의 진지는 상당한 혼란 상태에 있었다. 그때까지의 압도적 우세가 거짓말인 것처럼 당황해 허둥대고 있다. 총지휘관이 납치되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쓴웃음을 참으며 소녀의 모습을 찾아보자 소녀는 역시 다른 이유로 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라이아를 데리고 똑바로 나시아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나시아스도 또한 놀란 표정으로 소녀를 맞이했다. “리.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온거야?”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그라이아에 실었던 커다란 두릅을 끌어내려 양어깨에 얹고는 나시아스의 앞에 털썩 놓은 뒤 말했다. “이거 나시아스한테 선물.” “선물? 나에게?” “응 줄께.” 나시아스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단도를 써서 푸대의 입구를 열고 안을 훔쳐보았다. 그때에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시선을 돌려 다시 소녀를 바라본 얼굴은 무섭도록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폭소 직전의 표정이었따. 정확하게는 아슬아슬한 순간에서 있는 힘껏 이를 깨물고 참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건.... 내가 받아도 되는 거야?” “그럴 생각으로 가져온거야. 이븐 일행이 도와준 덕에 잘 해결됐어. 나중에 고맙다고 말해줘.” 간단하게 말하고 말을 데리고 재빨리 가버렸다. 자신과 말의 땀을 닦아내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나시아스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덕분에 다시 어깨가 아파질 정도였다. 이상하게 생각한 가렌스가 가까이 다가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뭐라 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부탁했다. “가렌스 미안하지만 이것을 내 천막으로 옮겨주지 않겠나. 눈에 띄지 않게.” “예 상관없습니다만 뭡니까 이건?” “발도우의 따님이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하더군. 살짝 안을 들여다보게.” 가렌스는 시킨 대로 해보더니 우왁?! 하고 기성을 울렸다. 황급히 입을 다물고 푸대의 입구를 움켜 쥔 채 좌우를 돌아본 것은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에서였으리라. “이 이것은 분명히.... 눈에 띄면 곤란하겠군요.” 나시아스는 어찌어찌 웃음의 발작을 참아내고 마음 깊이 감탄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얼굴을 들자 그 소녀가 국왕과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이봐 가렌스.” “예.” 가능한 한 정중하게 마대를 져 올린 가렌스가 돌아보았다. “저 소녀는 정말로 하미아의 화신일지도 모르겠어.” “예.” 가렌스는 마대의 안쪽을 걱정하며 목소리를 죽였지만 고개만은 힘차게 끄덕였다. “저렇게나 작고 저렇게나 아름다운 것이 거짓말 같습니다만 저 인물이야말로 우리들에게 있어 승리의 여신임이 틀림없습니다.” “정말이다. 그건 그렇고 받은 거라고는 해도 일단은 폐하께 보고하고 오겠네. 아무래도 아까 리의 모습으로 봐선 선물 내용까지 폐하께 말씀드렸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니까 말이야.” “예.” 가렌스는 기묘한 표정으로 웃음을 죽이며 다시 한번 끄덕였다. 마대로 둘러싼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사람 눈을 끌지 않았지만 보쌈을 당한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루 말할 수 없는 낭패였다. 주변 따위 상관없이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을 정도의 굴욕이었음에 틀림없다. 국왕에게 사정을 이야기한 나시아스는 가만히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와 바닥에서 구르고 있는 마대에 신중하게 말을 걸었다. “깨어 있나?” 대답은 없었지만 마대가 조금 움직인 것 같았다. “지금 빼내 주겠지만 이곳은 국왕군의 본진이다. 소동 부리거나 하진 말아줘.” 일침을 박아두고 가렌스가 다시 묶어 두었던 마대의 입구를 풀어 주었지만 안에서 나타난 이 이상 없을 정도의 부루퉁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뿜어냈다. “딱한 일을 당했군 그래.” “나시아스....” 아직 묶인 채인 발로의 입에선 부득부득 이빨 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놈 대체 제정신이냐. 이건 대체 무슨 짓이야!” 나시아스는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에게 투덜거려도 곤란해. 너는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것 같으니 말이다.” “너는!” 발로는 분개했다. 다만 아직 허리 아래로는 마대 안에 들어있을뿐더러 팔은 묵여 있다는 것을 떠올린 듯 했다. 포기한 듯 말했다. “이것부터 풀어주는 게 어때.” “난리 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적의 본진에서 난리를 쳐서 어쩌겠어? 아무리 나라고 해도 포로가 어찌 처신해야 하는지는 안다.” 나시아스는 몸을 둘둘 말고 있는 밧줄을 끊어주었지만 발로는 즉시 튕겨 일어나 마대를 벗어 던지고는 나시아스에게 덤벼들었다. “자아 고백해! 저 꼬맹이 자식은 대체 뭐야?! 저 녀석 때문에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승부를 도둑맞았단 말이다!” 멱살을 잡힌 나시아스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놔. 상처가 아프다.” 이 말에 발로는 핫 하고 물러났다. 다른 누가 아니다. 자신이 만든 상처다. 나시아스는 천막 안에 놓여있는 탁자에 다가가 술병을 들어올렸다. “어때 한 잔?” 이렇게까지 되면 저항한다 해서 어찌 되는 것도 아니다. 발로는 초조한 듯 앉았다. “나를 대체 어쩔 셈이야?” “글세 어쩔까. 너는 내가 받은 거니까 말이다.” “맘대로 정하지마!” 머리끝까지 화가 난 모습의 발로와는 반대로 나시아스는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곳에 국왕과 도라 장군이 찾아왔다. “오오 오랜만이군 종제님. 아니 이젠 사촌 사이가 아닌 거지만 편의상 그렇게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더더욱 망연해져버린 발로였다. 예전의 사촌형을 노려보듯이 하며 말했다. “당신이 이런 정당하지 못한 짓을 하리라곤 생각 못했소. 잘도 뻔뻔스럽게 국왕군이라고 이름을 대고 있군.” “거참 딱 동감입니다. 그 명칭은 나도 제발 어찌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왕은 아주 성실하게 말하고 탁자에 앉았다. 도라 장군은 금방 나시아스의 천막을 빠져나와 그 소녀의 모습을 찾았다. 눈에 띄지 않게 데려왔다고는 해도 적의 총대장을 붙잡았다. 타우의 사내들도 그 습격에 참가했으니 만큼 이런 큰 뉴스가 흘러나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고전하고 있었던 국왕군은 단숨에 활력을 되찾았고 병사들의 표정도 밝아지는 참이었다. 전투의 흐름을 바꾼 작은 軍神군신은 본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말을 돌봐주고 있는 참이었다. “들었다. 대활약이었더군.” “그런 것 같아.” 소녀는 아무 생각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의기양양하여 떠버릴 대활약이라고 해도 소녀의 모습은 언제나와 별다를 게 없었다. “왜 그러나. 별로 기분 좋은 것 같지가 않구나?” “활약을 하려고 생각해서 한 게 아니야. 친구끼리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하다니 좋지 않다구.” 장군은 일순 말을 잃었다. 전장에 서면 그런 감상에 이끌려 슬퍼할 여유는 없어진다. 상대가 누구든 싸우는 것이 당연하며 기사의 의무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 전투에 임해왔지만 이 소녀에겐 그것은 납득할수 없는 일인 모양이었다. “좋지 않은가.... 그렇군.” “이런 싸움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을 텐데 말이야.” 소녀는 중얼거리며 손질이 끝난 그라이아의 엉덩이를 두드려 주었다. 흑마는 용맹스러운 갈기를 휘두르며 가볍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산책이라도 갔다 올 셈인 듯 했다. “조금만 더 전력이 있다면 단숨에 코랄 공격이 가능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월에 대해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들이 페르젠의 편 따위 그만 관두고 먼 데서 구경하기만 해줘도 좋을 텐데. 괜히 불끈해서 쳐들어온단 말이야. 이런 싸움 무지무지하게 쓸데없고 바보 멍청이 같애.” 소녀가 엄숙한 얼굴로 말했을 때 장군은 각오를 했다. “작은 전사여. 상담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소녀는 약간 눈을 크게 떴다. “페르난 백작도 날 그렇게 불렀어.” 도라 장군은 뭐라 말하기 힘든 쓴웃음을 흘렸다.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아니 그대를 인정하고 부탁하고 싶은 것인데.” “뭔데?” “그대의 말대로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무익하게 다투는 것은 아무런 득도 되지 못한다. 적의 본진을 배후에서 습격해 발로 경을 사로잡은 것은 분명히 지금까지의 전법에서 보자면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지만 상식에만 의존하면 이 전쟁은 오래 끌게 되고 마침내는 델피니아의 우수한 인재들끼리 죽고 죽이게 되겠지. 바람직하지 못한 사태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이 기회에 다소 파격적인 수단이라도 허용되는 게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야. 발로 경을 제압한 것으로 적의 움직임은 절반도 넘게 둔해졌지. 그것을 보아서 말인데 다시 한번 그런 식으로 제압하고 싶다 생각하는 것이네만....” 도라 장군은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있었다. 자신도 무리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의견이었기에 확실하게 입에 담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소녀 쪽은 더없이 솔직하게 또한 장난기 역시 겸비하고 있었다. 말을 고르는 데 악전고투하고 있는 장군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며 그 얼굴을 빼꼼히 들여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도라 장군도 선물 받고 싶어?” “.......” 이렇게되자 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장군이었지만 다음 순간 수염에 뒤덮인 입가에 염치불구한 웃음이 떠오르며 힘차게 끄덕였다. “부디 꼭 받아보고 싶군.” 소녀는 팔장을 끼고 일부러 어렵다는 표정으르 지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한번 해보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도라 장군을 위해서라면.” 녹색 눈동자가 짓궂게 빛나며 장군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소녀의 얼굴을 뜯어보던 장군은 드디어 참지 못하고 높은 웃음소리를 올렸다. 5장 그날 저녁 무렵 수하들을 이끌고 핸드릭 백작이 정부군에 합류했다. 그러나 와서 보니 아군의 총지휘관이 적의 손에 떨어졌다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백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반적인 총사령관이 아니다. 전 국왕의 조카이자 국내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대귀족이며 그 남자에게서 왕위를 빼앗게 되면 새롭게 왕관을 써야만 할 인물이었다. 백작이 격노한 것도 당연했다. “제군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나! 아스틴 감시역인 자네가 옆에 있으면서 이 대체 무슨 일인가! 발로 경이 할 법한 일을 예상치 못했단 말인가!” “면목 없습니다.” 눈앞에서 주인을 납치 당한 아스틴은 역시나 만면이 창백해져 있었다. “저도 그분의 성격은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의 사태에는 목이 베일 각오로 막으려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선 분별심을 발휘하여 본진에서 지휘봉을 휘두르고 계셨습니다. 그곳에 적이 나타나....” 적이 은밀하게 뒤로 돌아 극소수로 급습해 왔다는 소리를 듣고 백작은 이를 갈았다. 그러한 얄팍한 전술은 백작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이놈들....” 여기까지 함께 온 루카난 대대장도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놀라고 있었지만 그곳에 국왕군의 사자가 찾아왔다. “에에이 인질을 방패삼아 투항하라 말하려는 속셈일 테지만 내 그렇게 놔줄 줄 아느냐.” 핸드릭 백작은 분노하며 스스로 사자 앞에 나섰다. 그러나 사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 군에 포로가 되어 계신 틸레든 기사단장을 돌려드림에 있어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호오? 그 조건을 들어주면 발로 경을 풀어주겠다는 게냐?” 대답하며 거기에 걸맞을 만한 거물이 이쪽에 포로로 잡혀있나 하고 아스틴에게 눈짓만으로 물어보았다. 이러한 경우는 포로 교환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틸레든 기사단장과 교환하게 된다면 웬만한 인물로는 따라 갈 수가 없다. 아스틴이 살짝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백작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초조함이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뭐냐 빨리 말해라.” “송구스럽습니다만 내일 아침 저희 군을 대표하는 용사와 기마 승부를 해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뭐라 말씀드려도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의 전투, 그것도 예전에는 뜻을 같이했던 분들과의 전투입니다. 또한 이쪽에서도 발로님의 신병은 한시라도 빨리 돌려드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대일의 승부로 발로님의 신병을 넘겨드리고자 승인을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호오!” 저도 모르게 감탄한 핸드릭 백작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도라 장군의 생각임에 틀림없다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백작보다도 상당히 연하인 도라 장군이지만 장군은 핸드릭 백박이 자신에게 필적하는 무용을 소유한 자라고 진정으로 인정하는 단 한명의 상대였다. “일대일 승부를 소망한다는 말씀이렸다.” “예. 정말로 황송한 말씀입니다만 가능하다면 백작님께서 몸소 출두하여 주셨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만 어떠하시겠는지.”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나가지.” “백작님?” 아스틴을 비롯한 영주들이 놀라서 막으려 했지만 완고함 하나로 알려진 사람이다. 들을 리가 없었다. “허나 이 몸이 직접 나가는 이상 발로 경의 신병을 돌려 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때에는 국왕군이 전면적으로 투항하기 바란다.” “알겠습니다.” 백작은 끄덕였고 반대하는 자세를 휘하던 제후들도 이 말을 듣고는 불만스럽지만 일단 물러났다. 오십을 넘어선 핸드릭 백작이었지만 창을 든 기마전에 있어서는 천하일품이다. 설사 도라 장군이나 국왕이 상대한다 해도 그에 뒤질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그쪽은 누가 나오는 거냐. 도라 경인가 아니면 폐하께서 직접 나오시는가?” “아니오. 저희 군에 조력하고 계신 발도우의 따님이 상대하실 겁니다.” “뭐라고?” 의심스러운 표정이 된 핸드릭 백작이었다. 그 옆에서 새파래진 것은 루카난 대대장이었다. “그 그건 안됩니다.” “왜 그러나 루카난.” 핸드릭 백작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고 루카난 대대장은 말이 막혔다. 설마하니 그 소녀가 상대라면 아무리 핸드릭 백작이라 해도 확실하게 승리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그러니까 그 소녀는 국왕군에 가담하고는 있지만 정규 병사가 아닙니다. 델피니아 사람도 아닌데다가 이러한 중요한 전국을 결정하는 장소에 있어서 국왕군을 대표할 수 있는 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국왕군의 사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저희 군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대대장님의 의견에는 찬동할 수가 없습니다. 폐하는 물론이시거니와 저희 군에 소속된 자들은 장수로부터 일개 병졸에 이르기까지 발도우의 따님과 생사를 함께 할 작정입니다.” “그렇다면 상관없다.” 핸드릭 백작이 엄격하게 말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이 핸드릭 봐주지는 않겠다. 전력으로 상대할 뿐이다. 돌아가 폐하께도 그리 전해라.” 사자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정부군의 진지에서 물러나갔다. 다음날 아침 양군이 긴장한 채 바라보는 가운데 그 결투는 이루어졌다. 핸드릭 백작은 갑옷과 투구로 몸을 감싼 채 의욕이 가득한 모습으로 애마에 올라타 시합용으로 만들어진 날이 무딘 창을 종자에게 들린 상태였다. 선명한 자줏빛 외투를 휘날리며 사람과 말이 한몸이 된 그 모습은 국왕군의 용사들마저도 반하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백작 자신도 누가 나오던지 한번에 끝장을 내주겠다고 용기 백백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타난 대전 상대가 너무나 의외인 모습이었으므로 순간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라이아에 탄 소녀는 어제 발로를 납치했던 때의 그녀가 아니었다. “처음 뵙겠소.” 청명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허리에는 검을 차고 손에는 날 없는 창처럼 생긴 길다란 봉을 쥐고 있었따. “나는 그린다. 국왕군을 대표하는 승리의 여신. 이 전투의 승패를 걸고 승부를 요청하오.” 핸드릭 백작은 아직도 아연한 상태였다. 백작에게 있어 손녀 뻘인 나이의 소녀이므로 무리도 아니지만 거리낌없이 그 모습을 위에서 아래까지 훑어보고는 시중도 겸해 옆에 있던 도라 장군을 향해 노성을 질렀다. “도라경! 이건 무슨 짓인가! 나를 속이려는 겐가!” “무슨 말씀을.” 장군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소녀라면 귀공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 믿어서 한 일이오. 봐줄 필요는 없소. 아니 봐주기라도 하신다면 귀공이라 하더라도 실패하실 것임은 분명한 사실.” “바보 같은. 말이 안 통하는군! 경은 이 몸에게 저런 어린 소녀와 대결하라고 말씀하시는 겐가!” 도라 장군이 무언가 반론하기 전에 소녀가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노인장. 오히려 묻고 싶소. 보아하니 상당히 고령인 듯 한데 무기를 잡고 말을 달리거나 해도 괜찮은 거겠지. 이제 승부다 하는 때에 허리라도 삐끗하거나 하는 건 싫으니까 말이오.” 이 말에는 아무리 도라 장군이라도 말 위에서 간이 오그라들었으니 핸드릭 백작이 머리에서 분노의 불꽃을 뿜어내게 만드는데에는 충분했다. “네 이놈! 무례하게!” “중요한 승부요. 후회 없게끔 하고 싶소. 나와 제대로 싸울 자신이 없다면 괜찮소. 누군가 대리를 세우는 것이 좋을 거요.” 물 흐르듯 지껄여대는 소녀에게 장군은 이번엔 고소르르 금치 못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사람을 도발하는 데에 재능이 있다. 핸드릭 백작은 분노한 나머지 폭발 직전이었지만 역시나 희대의 호걸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도라 장군이 틀림없이 진심이라는것도 이 소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상대하려 하고 있다는 것도 역정을 일으키면서도 납득했다. “알았다.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잡는 데도 전력을 다한다 했거늘. 가진 힘을 다 바쳐 상대해 주마. 그 결과가 어떠한 것이 되더라도 원망하진 마라!” “좋소.”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어제의 전장이었던 초원의 한가운데였다. 양군 모두 정연하게 대열을 짜고 두사람의 모습을 멀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양군 사이에 만들어진 길고 좁은 광장의 중앙에는 이미 심판역이 준비하고 있었다. 국왕군에서는 도라장군과 가렌스가 정부군에서는 아스틴과 베레 경이 각각 시중을 겸하여 증인역으로 여기까지 따라 나왔다. 소녀가 말했다. “조건에 대해 확인하고 싶소. 노인장이 이긴다면 발로 경을 돌려주고 국왕군은 무조건으로 투항하겠소. 문제는 내가 이겼을 때인데....” “그런 일은 없다!” 도라 장군이 수염에 가려진 입가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소녀는 약간 눈썹을 치켜올리며 이어서 말했다. “그렇게까지 자신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받아들여 주겠지. 내가 이긴다면 노인장의 신병은 국왕군에서 맡겠소.” “뭣이?” “또 하나. 무조건적으로 마레바를 넘겨주시오.” 핸드릭 백작은 껄걸 웃었다. 허황된 소리를 하는 소녀라고 생각했으리라. “우습기 짝이 없군. 좋다. 네가 쥐고 있는 그 봉으로 내 몸을 스치기만 해도 기꺼이 포로가 되어 주마. 마레바의 해방에 대해서도 기사단장을 붙잡고 있는 한 우리가 뭐라 할 필요도 없이 안의 녀석들은 기꺼이 성은 넘겨주리라. 그러나 내가 이겼을 때는 각오해라. 네놈에겐 충분하게 벌을 좀 줘야겠다.” 소녀는 가볍게 끄덕이고 정부군의 동반인 두명에게 확인했다. “두 사람 만약의 경우에는 당신들이 증인이다. 잘 부탁한다.” 두 사람 모두 기사의 명예에 걸고 승패가 어찌 나더라도 지금의 조건을 행사하겠다고 맹세했다. 당사자인 두 사람은 일단 등을 돌리고 말을 몰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우의 일대일 대결은 서로가 바라본 채 돌격하여 지나쳐 가는 식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다. 침착한 모습으로 말을 몰고 있는 소녀의 옆에서 도라 장군이 속삭였다. “어떠냐 핸드릭 경의 인상은?” “비장할 정도로 기세가 좋은 할아버지네.” 소녀는 살짝 속삭여 대답했따. “하지만 강해. 그건 알겠어.” “그렇고 말고. 허리가 삐끗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지. 기마전이라면 아마 자네라 해도 승패는 반반일게야.” “그렇겠지.” 소녀의 표정도 엄숙했다. “스스로도 말했듯이 핸드릭 경은 상대가 그대 같은 소녀라도 봐주진 않을 게야. 틀림없이 가슴이나 머리를 노릴 테지. 우선은 어떻게든 피해라. 그 뒤는 맡길테니.” 발로에 이어 핸드릭 백작을 포로로 만들 수 있다면 마레바 공략도 다 된 밥이나 마찬가지다. 원래라면 자신이 싸웠어야 할 도라 장군이 소녀에게 이 역할으르 양보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은 적군과 아군으로 나뉘었다고는 해도 도라 장군과 핸드릭 백작은 오랜 친분이 있는 사이다. 어느 쪽이 이겨도 주변은 납득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장군은 이 소녀에게 국왕군의 운명을 맡기려고 생각했다. 예전에 뜻을 같이했던 사람들과 이 이상 쓸데없이 싸우지 않기 위해서도 소녀가 말하는 바보 같은 전투를 종결시키기 위해서도 백작을 사로잡는 것이 무엇보다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소녀에겐 기마 전투를 해본 경험이 전혀 없다고 했다. 말에서 뛰어 내려 자신이 가진 다리 힘을 활용해 혼란시킨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지만 그래서는 핸드릭 백작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어젯밤 도라 장군에게 기마 결투의 예법과 요령 등을 즉석에서 배운 소녀였다. 예비 지식이 없어서는 아무래도 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런 말이나 하고 있을 수도 없었따. 한편 핸드릭 백작의 시중으로 붙어있던 아스틴 역시 굳어진 얼굴로 백작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백작님. 무례함을 알면서도 방심은 금물이라 여쭙겠습니다. 어제 발로님을 납치했던 것은 저 소녀의 소행입니다.” “뭐라고?” “저 소녀가 발로님을 쉽게 들어올려 말에 태우는 광경을 저는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어째서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으나 보이는 대로의 소녀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으음.” 백작도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발로는 평범치 않은 체격의 소유자이다. 덩치 큰 어른이라면 몰라도 저런 소녀라면 끌고 가는 것마저 불가능할 터였다. “걱정마라. 아까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전력으로 쓰러뜨릴 것이다.” 국왕군의 진지에서는 샤미안만이 필사적인 모습으로 주먹을 쥐고 있었. 저 소녀의 무용이나 신비한 힘을 의심하진 않았지만 이 일전에 국왕군의 운명이 걸려있다. 어떻게든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본진에서는 국왕이 여전히 태연하게 이 승부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긴장한 표정의 나시아스와 씁쓸한 얼굴의 발로가 있었다. 충분한 거리를 두자 양쪽은 서로를 바라보는 자세로 섰고 동행들도 옆에서 떨어졌다. 마주 보는 두 기수의 중간 부근에 심판이 서 있었다. 대열을 짜고 있는 양군 사이에서는 기침 소리 한번 들리지 않았다. 어느 쪽도 심상치 않을 정도로 조용해져 이 승부의 행방을 주목하고 있었다. 심판이 높게 들어올린 기를 휘둘러 내렸다. 커다란 함성이 솟아올랐다. 동시에 백작과 소녀는 상대를 향해 돌진을 개시했다. 백작은 멋진 기마술을 보이며 만전의 자세로 소녀에게 달려갔다. 소녀 쪽은 언제나처럼 고삐가 없었다. 말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다. 백작은 날을 무디게 한 창을 쥐고 있었지만 소녀가 손에 든 것은 보통 곤봉일 뿐이다. 분명 소녀가 불리했다. 더구나 날을 무디게 했다고는 해도 핸드릭 백작 정도의 달인이 휘두르면 위력은 진검과 다를 바가 없다. “받아라!” 백작은 진심을 다해 상대가 손녀 같은 나이의 소녀이건 말건 상관없이 전력을 다해 창을 찔러넣었다. 승부에 임한 이상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창 끝은 다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기세로 소녀의 가슴을 노렸다. 맞으면 소녀의 뻐대 정도야 두세 개는 부러질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리에게는 보였다. 아무리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라도 확실하게 잡아내는 그 눈은 이제까지도 여러번 소녀의 목숨을 구하곤 했었다. 이번에도 한순간 빠르게 곤봉을 휘둘러 그녀는 백작의 창을 때려 넘겼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에 백작은 경악했다. 그 사이에 두 필의 말은 서로 스쳐 지나가 위치가 바뀌었다. 백작은 숙련된 손놀림으로 말의 위치를 바꾸고 다시 한번 돌진하려 했다. 그러나 그때에 소녀가 탄 흑마는 벌써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 백작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어떻게!” 정부군 사이에서 경악의 탄식이 울려 퍼졌다. 스쳐 지나갔다는 것을 확인할까 말까 했을 때 벌써 이루어진 방향 전환이었다. 그것도 고삐는 매여있지 않다. 말이 스스로 움직인 것이다. 웬만큼 훈련한 군마라도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녀석은 없다. 국왕군에서는 타르보가 힘차게 끄덕이고 있었다. 역시나 로아의 흑왕이다. 백작의 말도 상당히 훌륭한 것이겠찌만 흑왕의 빠른 발과 말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좋은 두뇌에는 몇 번이나 새삼 경탄하게 되었다. “보통 말이 아니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그와 거의 동시에 소녀는 백작에게 덤벼들었다. 달리면서 곤봉을 던져 버린다. 단숨에 거리를 줄이고 처음으로 허리에 손을 대는가 싶은 순간 빼어든 一閃일섬으로 백작의 창 끝을 날려버렸다. “뭣이?!” 백작이 경악했다. 검을 뽑을 사이도 없이 다음 일섬이 덤벼들었다. 크게 몸을 틀었지만 이미 늦었다. 소녀의 검은 무시무시한 날카로움으로 백작의 갑옷 가슴을 갈라버렸던 것이다. 거기에 반동으로 되돌아돈 검의 옆면을 사용해 소녀는 백작의 몸통을 때렸다. 자세가 무너져 있던 차에 열 명 분의 일격을 받아서야 아무리 핸드릭 백작이라해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과거 수 차례의 승부에서 단 한번도 져본 일이 없는 영웅이 수천명 아군의 면전에서 말로부터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양군에서 무시무시한 절규가 올랐다. 국왕군에게 있어서는 환희의 외침이었고 정부군에게 있어서는 악몽의 비명이었다. 지면에 떨어져 버린 백작은 엉덩이를 땅에 붙인 채 얼이 빠져 있었다. 가슴 부근을 자른 일격은 옷 한 겹을 남긴 채 갑옷만을 갈라놓고 있었다.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분연히 일어서자 소녀가 말 위에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기마전 실력이라면 노인장의 승리. 말과 눈의 우수함으로 내 승리군.” “네 이놈....” “약속은 약속이지. 순순하게 포로가 되어 주실까.” 백작이 대답하기에 앞서 이 승부의 결과를 바라보고 있던 월이 호랑이처럼 일어나 커다란 음성으로 외쳤다. “전군 마레바로 진격!” 커다란 함성이 올랐다. 대열의 선두에 대기하고 있던 보병은 튀어 오르듯 정부군을 향해 돌진했다. 정부군이 이것을 냉정하게 맞아 칠 수 없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굴지의 호걸이라 불리던 사람의 패배를 눈앞에서 본 직후였다. 처음부터 허리가 뒤로 빠져 있었다. “공격하라!” 국왕이 지시할 것도 없었따. 즉시 격렬한 추격적이 벌어졌다. 아니 이것은 이미 전투라 할 수도 없었다. 정부군의 병사는 완전히 전의를 잃은 상태였따. 무장들은 그대로 열심히 자리에서 버티려 했지만 졸병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는 토끼처럼 달아나 버렸다. 말에서 떨어져 버린 핸드릭 백작은 이를 갈면서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백작과 소녀의 옆을 국왕군의 병사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전원이 한 덩어리가 되어 동쪽을 향해 돌진해 갔다. 도라 장군이 다가와 분함에 몸을 떨고 있는 백작에게 말을 걸었다. “핸드릭 경. 이번엔 귀공의 패배요. 자 우리드로가 함께 마레바로 갑시다.” “나는 여기에서 안 움직이겠다.” 역전의 영웅은 그 장소에 책상다리를 한 채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스스로 나서서 포로가 되었따 생각될 정도라면 죽음보다 더한 굴욕이다. 끝내 하겠다면 내 목을 줄로 매서 끌고 가도록 해라.” “핸드릭 경. 기분은 알겠소만....” 도라 장군은 지극히 곤란해하면서도 어떻게든 백작을 설득하려 했다. 그 옆에서 소녀가 가볍게 고개를 모로 꼬았따. “이쪽도 거적말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려나?” “뭐라고?” 이때 이븐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서는 여유 작작하니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혹시나 이게 또 필요하신 거 아닙니까?” 내민 것은 발로를 붙잡았을 때와 똑같은 가느다란 밧줄과 특대급의 마대였다. 소녀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준비성 좋네. 그거 말고도 이 사람 꽤 시끄럽게 굴 것 같은데 뭔가 입을 막을 천 같은 거 없어?” “여기 보시는 대로 빠짐 없이 있습니다요.” 이것 역시 꽤나 능청스러운 남자가 아닐 수 없다. 소녀는 그것들을 받아 들더니 자 그럼 하고 말하는 듯 백작의 뒤로 다가갔다. “무슨 짓이냐?!” “끌고 가라고 한 건 노인장이잖아. 이제 와서 볼품없게스리.” “그만두지 못할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백작이 난리를 쳤을 때는 이미 소녀가 백작에게 덤벼든 뒤였다. 지면에 떠밀어 눕힌 뒤 몸과 발목에 잽싸게 밧줄을 묶고 소동을 부리지 않도록 한다면 재갈을 물린 데다 마대를 뒤집어 씌웠다. “자 일단락.” 훌륭한 솜씨에 이븐이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너 말이지. 조금만 수업을 쌓으면 끝내주는 산적이 되겠어.” 한편 도라 장군은 완전히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조금은 너무 심한 짓 아닌가?” “그런가?” 백작이 들어있는 마대는 조금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어떻게든 이 구속을 풀어보겠다며 부자유스런 몸으로 발악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소녀는 자루 옆에 앉아서 그런 백작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노인장. 마레바에 닿을 때까지 얌전하게 말을 타고 있겠다고 약속해 주면 여기에서 꺼내줄께.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군량미용 말에 얹혀서 갈래?” 이미 보고도 못본척 하는 외에 도라 장군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핸드릭 백작은 꽤나 저항하고 있었던 듯 했지만 식료품 취급하여 운반되는 것은 포로의 굴욕보다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장절한 돌부처 얼굴이 되어서는 마대에서 나와 말에 타고 갈 것에 동의했다. 기세를 탄 국왕군은 혼쾌히 진격을 계속하여 순식간에 마레바에 육박했다. 틸레든 기사단장이 붙잡히고 그 신병을 되찾으려했던 핸드릭 백작까지 포로가 되어서야 마레바를 지키는 병사들도 대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어찌해야 좋을지 알수가 없는 것이다. 성문까지 몰려간 국왕군의 병사들은 그와는 반대로 한눈도 팔지 않는 맹진이었다. 성벽 위로 활을 쏘고 사다리를 만들어 벽에 걸더니 국왕군의 병사들은 개미처럼 성벽을 기어 오르기 시작했다. 몇 명인가 떨궈졌지만 그런 정도로 이 맹진을 멈출 수는 없었다. 떨궈진 이상의 기세로 성벽에 붙어서 기어올라간다. 마레바를 지키는 성문이 안쪽에서 열릴 때까지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동으로부터 침입하여 2동, 본동까지 연속적으로 함락한 국왕군은 그날 밤 마레바 성내에서 야숙을 했다. 어제까지의 긴장감에서 해방되어 국왕군의 병사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들떠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정부군의 역습에 대비하여 파수꾼은 세워두었지만 이전의 전초전에 이어 대승리를 거둔 것이다. 크게 사기가 올라 있었다. 국왕 또한 도라 장군과 나시아스, 두 사람과 함께 축배를 들었지만 그 자리에 초대된 발로와 핸드릭 백작은 험상궂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식욕이 없으십니까 두분?” 벌레라도 씹은 듯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던 두 사람에게 국왕이 이상하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會食회식이 한창이었지만 발로나 핸드릭 백작은 요리에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았다. “독 같은걸 타진 않았습니다만?” 끝까지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국왕에게 핸드릭 백작이 분노하며 탁자를 때렸다. “당신은 대체 언제까지 이런 광대놀음을 게속할 생각이십니까!” “페르젠의 목을 거둘 때까지입니다.” 불타오른 백작과는 대조적으로 남자는 태연하게 말하며 다음 접시로 옮겨갔다. “광대놀음이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저 남자가 혼자서 걸어나와 준다면 국왕군 같은건 필요 없겠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코랄 성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으니 말입니다. 곤란한 건 오히려 제 쪽입니다.” 초조한 듯 고개를 젓더니 남자는 더욱 성실하게 두 사람에게 물었다. “상담거리가 있습니다만 두 분 혹시 그 남자가 혼자가 될 때라던가 어딘가 몰래 혼자서 돌아다니는 장소라던가 그런 걸 알고 계시진 않습니까? 그러면 제가 혼자서 특공을 하러 들어가고 끝날 일입니다만.” “폐하!” 이것 역시 핸드릭 백작이었다. “아니 이젠 폐하라 불러선 안되겠지만 기왕 말한 김에 다 말해두겠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깎아 버릴 만한 말씀을 하시다니 무슨 행동입니까! 페르젠이 들었다면 그놈은 역시 그 정도밖에 안되는 남자였다면서 조소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국왕군의 두 명의 용사인 나시아스와 도라 장군은 잠자코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도라 장군이 형식적으로 이야기했다. “핸드릭 경. 목소리가 너무 높으시오.” 예전의 친우를 한번 노려본 백작은 그래도 일단은 그 충고를 따라 목소리를 낮췄다. “추가로 말씀드리자면 실례이지만 당신의 그 결의는 크게 잘못되어 있습니다. 페르난 백작에게 고문을 가해서 간접적으로 죽음에 몰아넣은 장본인은 페르젠이 아닙니다. 제나 제사장입니다.” 식사를 하고 있던 남자의 손이 멈췄다. “정말입니까?” “틀림없습니다. 저와 아누아 후작이 확인했습니다.” “그렇군요.” 남자는 두세 번 끄덕였다. “분명 그 돼지라면 할만한 짓입니다. 이걸로 베어야 할 목이 두개가 되었군요.” 부드러운 어조이고 표정이었지만 그 뒤에 있는 단호한 결의는 누구의 눈에도 명백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이 남자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발로가 가슴을 펴며 말했다. “나역시 조언하지만 코랄 진군은 포기하는 것이 당신 자신을 위한 일이오. 지금은 밀려났다고 해도 틸레든 기사단의 猛者맹자들이 이대로 물러날 리가 없어. 핸드릭 백작의 수하들도 마찬가지. 지금의 곱절은 되는 준비를 해서 공격해 올 것이 틀림없소.” 나시아스와 도라 장군이 골치 아픈 얼굴이 되었다. 그런 사태는 지금의 그들이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침묵이 그 장소를 가득 채웠다. 애초부터 화기애애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분위기였지만 이제 식사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곳에 갑자기 소녀가 요리를 산더미처럼 쌓은 큰 접시를 들고 문을 박차면서 들어왔다. “예입 기다리셨습니다!” 발로와 핸드릭 백작이 놀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나시아스와 도라 장군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고 국왕 혼자서만 태연하게 말했다. “리. 문을 발로 차고 다니면 안돼.” “손을 쓸수 없어서 말야. 봐 줘.” 소녀 쪽은 일동에게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들 앞에 커다란 접시를 내려 놓았다. “이게 마지막 요리래. 나도 끼워줘.” 말하는 것과 동시에 자리에 앉더니 재빨리 요리를 집어 들어 먹기 시작했다. “너, 네가 먹으려고 날라 온 거냐?” “다른 데서는 먹을 수가 없다구 시끄러워서. 이븐은 벌써 도망쳐 버렸어.” “아하. 그 정도의 활약을 했으니까 말이다. 모두가 네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건가.” “그런 것 같아.” 끊임없이 배를 채우고 있던 소녀였지만 세상에 이런 기묘한 표정이 다시 없이 자신을 보고 있는 발로와 핸드릭 백작을 눈치채고는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특히 두 사람의 요리가 전혀 줄어들지 않은 것을 의문스럽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안 먹어? 맛있는데.” “이 이놈.” 발로가 분연히 벌떡 일어섰다. 무장 해제되지 않았더라면 검을 뽑아들었을 것이 틀림없는 기세였다.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게 바로 이런 거로구나! 어제는 잘도 그런 짓을 했겠다 꼬맹이 자식!” 나시아스가 여기에서 끼어들었다. “이봐 발로. 이런 미녀 후보에게 꼬맹이 자식이라니 실례야.” “뭐라고?” 발로는 아무래도 지금까지 리를 소년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꿀꺽 목을 울리고는 탁자에 앉은 소녀를 훑어보았다. “너 너 설마 여자냐?” “의외로 눈이 나쁘네.” 소녀는 태연했다. “그렇게 안 보여? 남자일 때는 자주 여자 같은 얼굴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소녀의 의견은 발로의 귀에 닿지 않은 듯 했다. 나시아스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하 하지만 이 녀석은 나를 어깨에 얹었었다고!” “가렌스도 얹을 수 있어. 무겁지만.” 말문이 막힌 발로를 대신해 핸드릭 백작이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네가 어떤 정체의 소녀인지는 모르나 무서울 정도라고 하는 것이 좋겠군. 허나 이대로 끝날 거라고 생각지 마라. 지금은 어쩔수없이 후퇴했지만 결국은 우리들의 수하가 이 마레바를 향해 맹공격을 해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을 풀어주지 않을 수 없지. 이번은 군대를 가지고 승부를 결정지어 주마.” 그리고 백작은 같은 선언을 남자에게도 했다. “나쁜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투항하십시오. 그것이 당신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당신이 쓸데없이 목숨을 버리는 일이나 반란군의 오명을 쓰는 것을 죽은 페르난 백작이 기뻐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승승장구하는 기분이신 모양이오나 그것도 저희들의 군대가 돌아올 때까지 얼마 안 되는 동안일 뿐입니다.” 국왕이 무언가 대답하기도 전에 소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또한 장난스럽게 말했다. “군대는 안 돌아와.” 도라 장군과 나시아스, 발로와 핸드릭 백작, 그리고 윌까지 소녀를 쳐다보았다. “뭐라고?” 국왕이 짧게 물었다. “군대는 아마도 안 돌아올 걸. 발로 씨랑 핸드릭 백작이 여기 잡혀 있으니까 말야.” “바보 같은 소리.” 이것은 발로였다. “틸레든 기사단의 맹자들이 그런 걸로 우물거릴 것 같은가. 내가 말하기도 뭣하지만 과격한 녀석들이다. 내 몸의 안전 같은 건 제쳐두고 맹렬하게 공격해 올 게 틀림없어.” 나시아스가 맞는 말이라는 듯 끄덕였다. “지휘관의 성격을 멋지게 반영하고 있군 그래.” “.......!” 발로가 뭔가 쏘아붙이기 전에 나시아스는 딴 사람처럼 부드러운 어조로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이라면 분명히 발로의 목숨같은건 신경도 안 쓰고 공격할 거야. 그들은 그것이 충성이라고 믿고 있는데다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는 결의를 보이는 것으로 지휘관을 되찾으려 생각할 테니 말이야.” “정말로 과격하네.” 소녀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이번엔 사정이 틀려. 발로 씨도 핸드릭 백작도 일부러 잡혀 준 게 틀림없다고 모두들 생각하지 않을까나.” “웃기지 마라! 누가 그런 짓을 할 것 같은가!” 핸드릭 백작이 분연하게 외쳤지만 역시나 국왕은 소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아들은 듯 했다.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만하군. 그렇게 되는 건가.” “그래. ‘그’ 핸드릭 백작이 ‘그’ 기사 발로가 나같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여자아이한테 엉망진창 당했다고 누가 믿겠어? 더구나 둘둘 거적말이가 되어서 실려갔다는 건 절대로 아무도 안 믿을 걸.” 국왕이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뭐어. 우리들은 네 힘을 잘 아니까 두 사람의 실수도 그렇게까지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고 보지만.” “다른 사람은 그런 식으로 생각 않겠지.” 소녀는 단언했다. “분명 무언가 생각이 있어서 자신의 의사로 일부러 잡혀 주었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 아닐까. 그렇게 되면 애초에 하고 싶은 전투도 아니었고 두목이 그런 심산이라면 아 이거 방해하면 안되겠구만 하고 생각하는 게 좋은 쫄짜라는 거겠지?” 벌레를 씹은 듯한 표저잉었던 두 사람은 여기에서 움찔했다. 어떤 영웅이라도 인간인 이상 완벽할 리가 없다. 드물게는 패배하는 일도 포로가 된느 일도 있으리라. 없는 쪽이 이상하다. 그러나 이런 소녀를 상대로 진다는 일만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렇게 잘라 말할 수 있을 만큼의 武名무명을 쌓아올린 두 사람이다. 물론 두 사람 모두 고의로 붙잡히거나 져 준 것이 아니다. 실수를 한 것은 분명하지만 전력으로 싸웠다. 그리고 패배한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연해져 버린 발로와 핸드릭 백작을 옆에 두고 국왕이 높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군. 이쪽의 두 사람은 실로 적절한 방법을 선택해준 거로군. 나와 싸우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데다 이렇게 한다면 불충하다는 소리도 듣지 않을 수 있으니.” 이번에는 소녀가 식사하던 손을 멈추려고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조금 정직하지 못한 방법이었을지 모르지만 이럴 땐 할 수 없는 거지 응.” “틸레든 기사단의 용사들이나 용맹 과감하다고 알려진 백작의 부하들도 주인의 심중을 헤아려서 손을 대지 않게 되겠군 그래.” “그거야 그렇지. 간접적이라고는 해도 두목이 국왕군하고 싸우는 건 싫다고 선언해 버린 걸?” “두 사람 모두 몸바쳐서 우리 군의 존재가 옳다고 인정해준 셈이군.” “이런 말도 안 되는 전투를 피하기 위해서는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다른 네 명은 얼이 빠져서 소녀와 국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듯한 태도이고 농담 같은 어조였지만 말하는 내용은 농담으로 끝날 수준이 아니었다. 국왕은 빙그레 웃으며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당연히 페르젠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겠지.” 자신이 놓인 입장에 그제서야 생각이 미친 발로는 얼굴이 창백해졌고 반대로 핸드릭 백작은 새빨개져서 외쳤다. “폐하!” “왜그러십니까.” 태연하게 침착하게 백작을 마주보는 국왕이었다. 기세가 빠지고 분노가 갈 길을 잃은 핸드릭 백작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미 늦었다. 지금쯤이면 두 사람이 국왕군의 포로가 되었다는 보고가 코랄에 닿았을 것이 틀림없다. 사자는 당연히 그때의 상태를 이야기하리라. 틸레든 기사단장은 본진에 있으면서 적의 손에 떨어졌으며 용맹 과감하고 창의 명인으로 알려진 핸드릭 백작은 손녀 뻘인 소녀와 결투를 하여 패배해 말에서 떨어져 버렸다고 있는 그대로 전달하리라. 페르젠이 아니더라도 믿을 턱이 없다. 두 사람 모두 진심으로 싸우지 않았다. 일부러 승부에서 져서 포로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게 확실했다. 즉 그들은 코랄에 대해 분명하게 친국왕파의 입장을 표시한 게 되어버린 것이다. “한가지 묻고 싶습니다만.” 분함과 억울함에 휩싸인 모습으로 주먹을 굳게 쥔 핸드릭 백작은 갑자기 소녀를 가르키며 남자를 향해 분연히 외쳤다. “이 소녀는 당신의 숨겨둔 자식입니까?!” 나시아스는 과실주를 뿜어내버릴 뻔했고 도라 장군은 하마터면 씹어 넘기던 고기가 목구멍에 걸릴 뻔했다. 국왕은 일부러라 할 만큼 눈을 커다랗게 떴고 소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내가 열한 살 때 낳은 아이라는 계산이 되는군.” “무리가 있네. 열 살때 여자를 꼬시지 않으면 안 되잖아?” “지독하게 무리네.” “적당히 해두십시오! 대대대 대체 이 소녀는 뭐란 말입니까!” “노인장 그렇게 흥분하면 몸에 나빠.” 소녀가 이 또한 진지하게 말했다. “에에이! 애초에 그 노인장 노인장 하는 것 자체가 되먹질 못했다! 나는 아직 쉰다섯이란 말이다!” “자아 핸드릭 경. 조금만 진정하시오. 그렇게 역정을 내시면 분명히 몸에 안 좋소이다.” 도라 장군이 식은땀을 흘리며 토닥였고 나시아스는 졌다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백작님은 대체 어디에서 숨겨둔 자식이라는 발상을 꺼내신 겁니까?” “당연하지 않나. 많이 닮았으니까 그러는 거다.” “그렇습니까?” “겉모습을 보고 하는 소리가 아니야.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는 모습하며 아무렇지 않게 급소를 푹푹 찔러대는 것하며 똑같지 않은가.” “하하아.” 나시아스는 납득하여 끄덕였지만 소녀는 의심스럽다는 듯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윌의 경우엔 그런 척이 아니라 정말로 몰라서 그러는 거라는 기분이 들지만서도.” “글세 어떨까. 너는 어떤데?” “시치미 뗀다고 하면 이븐 같은 걸 말하는거 아냐?” “음. 그녀석은 옛날부터 그런 걸 잘했지. 나는 뭐라 해도 빙빙돌려 말해서 남을 움직이거나 하는 건 잘 못해서 말이야.” “그렇겠지이.” 두 사람은 마음 깊이 서로 끄덕이고 있었다. 국왕군의 두 사람은 이런 광경에도 익숙해져 있었기에 쓴웃음만 지었지만 정부군에서 온 두 사람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것을 느낀 듯 했다. “어이 꼬마. 조금은 입놀림을 조심해라. 이분은 원래대로 하면 델피니아의 국왕이었던 분이란 말이다.” 발로의 말에 소녀는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페르젠이 실권을 쥐거나 네가 임금님이 되는 것보단 월이 임금님이 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말야.” “뭐라고?!” “기다리게 발로경.” 핸드릭 백작이 진지한 얼굴이 되어 발로를 제지했다. “폐하 그리고 도라경. 지금 이 소녀가 한 말은 당신들의 본의라고 생각해도 좋습니까?” “아니오.” 화제를 잘못 꺼냈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한 발로를 옆에 두고 남자는 침착한 표정으로 백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에도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왕관도 왕좌도 이쪽의 종제님에게 양보하지요. 그때 퇴위의 수순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다만 페르젠과 저 돼지의 목을 거두고 나서입니다.” “어떤 돼지?” 소녀가 물었다. 남자는 조금 전 핸드릭 백작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다시 한번 소녀에게 해주었다. “제사장이라는 건 잘난 사람이야?” “국왕의 대관식에서 왕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는 역할을 맡고 있지. 수많은 신들의 사제들 중에서도 최고위의 신관이라는 건데 말이다. 그 녀석의 경우엔 성직자라기보단 금박으로 치장한 단순한 돼지다.” “돼지가 왕관을 씌워졌어?” “그래. 누가 뭐래도 대관식 도중에 돼지통구이를 떠올렸을 정도니까 말이야. 엄청나게 배가 고파져서 곤란했었다고.” 도라 장군은 철썩 하고 이마를 때렸다. 국왕으로서 최초로 맞이하는 가장 엄숙한 식전에 임하는 도중 돼지통구이라니 하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는 그런 장군의 한탄은 무시하고 다시금 백작에게 말을 걸었다. “제 목적은 개혁파뿐입니다. 페르젠과 저 돼지의 목만 거둘 수 있다면 미련은 없습니다. 뒷일은 당신들께 일임하겠습니다. 왕위를 노리는 야심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어디의 말뼈다귀인지도 모를 출신의 이런 저에게 왕관 같은 건 의미가 없습니다. 바라는 분께 바치겠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원수만 갚을 수 있다면 당신들이 바라는 대로 유랑의 몸이 되어 두 번다시 코랄에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뻔뻔스러운 바램인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부디 끄때까지만 손을 놓고 방관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지한 요청이었다. 이 남자의 말에는 거짓이 없다고 듣고 있던 누구나 생각했다. 돌려말할 줄 모른다고 한 것은 겸손도 견제도 아닌 진실이었으리라. 서투른 남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서투른 열의는 왕왕 유창한 연설을 이긴다. 성의만으로는 대부분의 일을 해결할 수 없지만 성의 없이는 어떠한 일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핸드릭 백작의 굳은 표정이 처음으로 조금 풀렸다. “손을 놓고 방관하라 말씀하시지만 저는 당신의 포로이니까요. 얌전하게 구경할 도리 외에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발로도 으쓱 어깨를 움츠렸다. “페르젠의 소행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건 전부터 느끼던 일이오. 새삼스럽게 들을 필요도 없군요.”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도라 장군 또한 백작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고 나시아스는 감사하는 뜻을 담아 친구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이렇게 결정나면 우물쭈물하지 않는 것이 기사의 마음가짐 중 하나인 듯 했다. 백작은 처음으로 식기에 손을 내밀었다. “그건 그렇고 기왕 만든 요리니까 잘 먹도록 하겠습니다.” “식어버렸지요. 새걸 가져오게 하겠습니다.” “아니 이걸로 됐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무엇보다 전장에서 그런 사치스러운 소리를 하겠습니까.” “하물며 포로의 몸이라면야 더 말할 필요도 없지요.” 발로도 무겁게 끄덕이고는 요리를 베어 물기 시작했다. 6장 코랄 성의 본궁에는 수많은 방이 있다. 국왕이 앉는 壯麗장려한 옥좌가 있는 방, 내외의 손님을 모시는 크고 작은 손님방, 과거 수백년간에 걸친 웅대한 기록을 적은 서고에서부터 젊은 집무관이 근무하는 실무적인 작은 방까지 넒이도 종류도 다채로운 여러 방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한 격식을 갖춘 방 하나가 최고회의실이었다. 문자 그대로 왕국의 동향을 좌우하는 중요한 결정이 여태껏 몇 번이나 이 방에서 내려졌다. 적을 때는 몇 명 많을 때는 20명 넘는 중신들이 회의를 열어 그 결과를 국왕에게 보고 혹은 판정을 받았다. 정치에 관혀하는 자 뜻을 두는 자에게 있어서는 이 방에 들어갈 권리를 얻는 것이 최고의 영예라고 해도 좋았다. 그곳엔 내장이나 가구는 물론이고 촛대하나라 해도 펜타스에 특별 주문을 하여 만들어진 호화로운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이 방은 본궁의 최상층에 있어서 대수문에서 곽문, 정문을 지나 저 멀리 트레니아 灣만까지 한번에 볼 수 있는 훌륭한 전망실이기도 했다. 지금 텅 비어있는 이 방에는 단 한 사람이 햇살에 반짝이는 트레니아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페르젠 후작이었다. 바로 조금 전 핸드릭 백작이 루카난 대대장을 데리고 마레바로 출발한 그 오후였다. 페르젠 후작은 미동도 하지 않고 집무실의 창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지만 그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상태였다. “부모의 원수인가....” 드물게도 작은 혼잣말을 남기고 뭐라 표현하기 힘든 기분나쁜 웃음을 짓는 후작이었다. 저 남자의 유치한 정의감이 우스웠다. 키워주었을 뿐인 상대에 대해 은혜를 느끼고 그 죽음을 원통해 하며 위험을 감수해서까지 스스로 호랑이의 입 속으로 뛰어들려는 것이니 우습다 할 수밖에 없었다. 건전하고 갸륵한 마음씨였지만 역시나 어리석은 자나 하는 짓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스웠던 것은.... 만약 저 남자가 진짜 뒤르와 왕의 자식이었더라면 하는 것이다. 만약 저 남자가 그 여자가 낳은 아이였더라면. 그것도 그리 틀리지 않은 증오였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웃는 것이다. 후작은 먼 옛날의 소동을 되새기고 있었다. 이십 몇 년 전의 이야기였다. 후작은 언젠가 처가 될 후작 영애와 아직 만나지도 않았으며 궁내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부터 결코 이대로 끝나진 않겠다며 불타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언젠가는 국왕 가까이에서 근무하며 일부 중신들밖에 드나들 수 없다는 최고회의실에도 자유로이 발을 디딜 수 있게 되겠다고 당시의 후작의 신분이나 지위에서 생각한다면 도리에도 맞지 않는 그런 꿈을 꾸고 있었다. 內宮내궁이란 왕족 여성을 중심으로 귀족 여성들이 둘러싸고 시녀들이 그것을 떠받치는 여자들의 세계이다. 당연 가장 큰 관심사라고 한다면 남자였다. 특히 국왕의 총애가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왕족의 거주지라고도 할 수 있는 내전에서 일하는 女官여관들의 대부분은 이렇다하게 이름이 알려진 명가의 부인이거나 영애였다. 여관이라 하더라도 땀을 흘리며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위해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들은 따로 있다.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왕족의 적절한 상대역이 되어 그 마음에 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그렇게 되면 웬만한 관리들이 거스를 수 있을 리가 없다. 사실 젊은 시종 정도는 턱으로 이래라 저래라 부릴 수 있었다. 젊은 시절의 후작도 그랬다. 내전에서 나오지 못하는 여자들을 위해 심부름을 다니는 일에서부터 좀더 음험한, 권력에 관계된 여자들 특유의 自己愛자기애를 만족시키는 냉혹한 부분까지 젊은 시절의 페르젠은 그러한 것들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내궁에서 근무하고 있다보면 때로 가까이에서 국왕의 모습을 보게 되는 일도 있었다. 뒤르와 왕은 동성인 자신이 보아도 남자다운 매력에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왕관까지 딸려 있다면 여자들이 눈빛을 바꾸지 않을 리가 없다. 게다가 한 사람의 애첩도 없다 한다면 권력을 원하는 귀족들이 역시 내버려 둘리가 없다. 어느 가문이나 전부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여자를 내궁에 집어넣기에 혈안이 되었다. 덕분에 당시의 델피니아 왕궁은 눈을 휘둥그렇게 뜰 정도의 아름다운 여성들로 흘러 넘쳐 무척이나 화려했지만 동시에 뒤쪽에서는 싸움도 지독했다. 여자들은 싸움 상대를 탈락시키는 데에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국왕이 마음을 두는 것 같은 처녀가 있으면 이런저런 수단을 동원해 쫓아냈다. 그들의 배후에는 각각 유력한 귀족들이 붙어 있었다. 때로는 가문들끼리의 다툼으로 번지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 여자들에게 있어 기절초풍할 사건이 벌어졌다. 어떤 귀부인에게도 적극적인 사랑을 보여주지 않았던 뒤르와 왕이 마구간의 하녀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이전부터 국왕의 애첩 자리를 노리고 있던 귀부인들이 모두 질투에 미쳐버리지 않을까 하고 다들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다. 웃어 넘겨 버렸다. 내심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을 테지만 진심으로 질투하기에는 상대의 신분이 너무 낮았던 것이다. 마구간에서 일하는 여식이랍니다. 어머 세상에. 말 냄새를 풍기는 건 아닐까요? 폐하도 별난 취미를 가지셨네요. 그런 식으로 무관심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 하녀가 임신하여 남자아이를 낳게 되자 더 이상 내버려둘 수가 없었던 듯 했다. 그뿐 아니라 좀 더 냉혹한 보복을 결의했던 것이다. “그대도 마구간 하녀의 일은 알고 있겠지요.” 베일로 얼굴을 가린 귀부인은 이름도 대지 않은 채 그렇게 말을 꺼냈다. “예. 소문만은.” “그 여식이 이번에 남아를 낳았다 합니다.” “예.” “곤란해요.” “예.” “진정으로 곤란한 일입니다.” “예. 그러한 염려 이해 말씀 올립니다.” 이 여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무엇을 보고 곤란하다는 것인지 내궁을 잘 알고 있는 페르젠 후작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근시일 내에 그 여식에겐 일을 쉬게 만들 겁니다. 밖에서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겠지요.” “잘 알겠습니다.” 일자리에서 쫓아낸다면 이 이상 붙잡고 늘어질 필요도 없을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태연하게 끄덕인 후작이었다. 신분이 높은 여자들이 하는 일에 일일이 의문을 가져서는 내궁의 관리 같은 일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이 여자의 정체나 누구의 지시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를 후작은 알고 있었다. 이쪽에 빚을 지게 만들어둬도 손해볼 일은 없는 상대였기에 반드시 걱정을 덜어드리겠습니다 하며 그 역할을 청했던 것이다. 그 여성은 보상 대신 금화를 가득 채운 자루를 던졌고 후작은 그것을 받아 들었다. 결국 마구간의 하녀는 아기를 안은 채 자기가 태어난 마을로 돌아갔다. 일설에 의하면 뒤르와 국왕은 이것을 꽤나 말렸다고 했다. 그리고 페르젠 후작은 예전부터 수하로 있던 자에게 명령해 웨트카 마을에 가서 폴라와 그 아이를 비밀리에 처치하도록 일렀다. 이때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먼저 아기를 없애도록 명령해두었다. 정말로 국왕의 아이인지 어떤지 그때 그 여자의 반응으로 알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다. 후작의 수족으로 움직이던 남자는 여자와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에도 안색하나 변하지 않은 채 떠났다. 때마침 해가 바뀐 바로 직후 살을 에는 것 같은 지독한 추위가 한창이었다. 남자는 한 달 정도 뒤에 돌아왔다. 출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료정인 채로 모친이었던 여자가 잠시도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아서 의외로 시간이 걸렸다며 사소한 변명을 했다. 그래도 가까스로 틈을 봐서 아이를 훔쳐냈지만 곧장 모친에게 발각되어 쫓기게 되었다고 했다. 곤란했지만 먼저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받았기에 아이를 안은채 곧바로 호수로 달려가 살얼음이 얼은 호수에 던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하자 어미 쪽이, 그 여자는 굉장한 기세로 제 뒤를 쫓아오고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자마자 호수로 뛰어들어 아이를 구하려고 하는 터에....” “호오?” “상당히 멀리 던져 버렸기에 일단 구해내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있는 힘껏 헤엄쳐 가서 아이를 껴안고는 반대편 물가로 나아가더군요. 먼저 그쪽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밀어 넣어야 하나 생각했지만 역시나 힘이 모자랐는지 도중에 가라앉았습니다.” 얼마나 불쾌하고도 메스꺼운 이야기인지 모를 일이었지만 후작에겐 어쨌든 상관없었다. “그 여식은 얼어붙은 호수로 즉시 뛰어들은 것이군?” “예.” “한순간도 망설임 없이?” “예. 뭐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잘 듣지 못했습니다.” 후작은 약간 생각에 잠겼다. 혹시나 정말로 국왕의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이름도 없는 병사나 마구간지기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 그것도 부친이 없는 아이를 그렇게까지 해서 감싸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모친이라면 목숨을 걸고 아이를 지키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될지 모르나 가난한 농촌에서는 키울 수 없는 아기가 버려지거나 죽임 당하는 것이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즉 그 여자는 아기가 죽는 것, 살해당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계급 출신인 것이다. 부친도 없는 아이라면 곧바로 그런 대상이 되고도 남는다. 그런데 얼굴색이 변해서 훔쳐간 아이를 되찾으려 했고 얼음이 언 호수에 던져 버렸다는 것을 알자 목숨과 바꿔서라도 구해내려고 했다 한다.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알았다. 수고했다.” “예.” 이번 일을 의뢰했던 여성에게 보고를 하려 했으나 상대에게 있어서는 이미 지나버린 일인 듯 결과를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뭐라 말해도 너무 바빴던 것이다. 재위 십 주년 기념식 준비에 쫓기다 결국 무사히 치러내자 이번엔 탄가 왕녀와 국왕과의 결혼식 준비가 닥쳐 내전에서 일하고 있던 후작은 새로운 왕비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만 했다. 왕궁은 새로운 왕비의 이야기로 떠들썩했고 귀부인들은 모두들 왕비가 가장 마음에 들어할 자가 누가 될 것인지를 놓고 경쟁했다. 이젠 누구도 마구간 하녀의 일 따위는 기억해 내지도 못했다. 페르젠 후작 자신도 그런 처녀가 있었다는 일도 그 목숨을 빼앗았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따. 그랬기 때문에 브룩스에게 맡겨져 있던 국왕의 유서가 공표되었을 때 페르젠 후작의 경악은 말로 형용하기 힘든 정도의 것이었다. 대체 어째서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생겼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폴라가 낳은 아이는 벌써 예전에 죽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페르젠 후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할 수 없다.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마구간의 하녀라고는 해도 살인은 살인이다. 하물며 국왕의 아들을 죽였다는 것은 중죄가 된다. 그렇다면 모친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들어서 그 아이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입증시키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말을 꺼낼 수 있을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당시 내각을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격론은 국왕의 자식이라 해도 서자 따위에게 대관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의견과 전 국왕의 遺志유지인 만큼 왕관을 수여해야 한다는 의견 둘로 완전히 나뉘어 논점은 거기에만 시종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 판인데 ‘그 아기가 정말 폐하의 자식이었을까요.’ 하는 발언같은 걸 했다간 쓸데없는 주목을 끌게 된다. 그러다간 이십 몇 년 전의 사건 경위를 조사하게 되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어영부영 넘길 수도 없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후작은 최대한 목소리를 높여 서자 따위를 왕으로 맞이할 수는 없다는 반대 세력에 섰다. 그러나 결국엔 찬성 의견이 다수를 점하게 되었고 어디의 말뼈다귀인지도 알 수 없는 저 남자가 왕관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오로지 괴로운 마음으로 이 일련의 진행을 바라보고 있던 후작의 머릿속에 그때 어떤 계획이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저 남자가 누구인지 어째서 뒤르와 왕의 아이와 바뀐 것인지 밝히려면 얼마든지 밝힐수 있었을 테지만 그것보다 아예 이렇게 된 이상 이대로 저 남자를 왕좌에 앉혀 둬 보자고 생각한 것이다. 페르젠 후작은 뒤르와 왕의 두 왕자들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틀림없이 고귀한 혈통이며 존경하는 뒤르와 왕의 자식이기도 했건만 생전부터 그 무능함이나 쇠약한 성격에는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저 정도의 인물에게서 어째서 이런 못난 것들이 태어났는지 눈살을 찌푸렸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런 자에게 국정을 맡길 정도라면 자신이 왕이 되는 쪽이 훨씬 낫다는 생각마저 할 정도로 두 왕자는 위대한 부친의 장점들을 그 조각조차 이어받지 못했던 것이다. 새롭게 옹립된 국왕의 아들도 전의 두 사람에게 하나 뒤질 것 없는 실로 평범 그 자체의 인물처럼 보였다. 아마도 레온 왕자에게지지 않는 바보 왕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저 남자에게 묘한 기대를 품고 있던 사람들이 실망하고 낙담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일파의 존재를 어필하면 관료 정치라 해서 눈살을 찌푸리던 사람들도 생각을 다시 해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말할 수 없이 대담한 계획이었지만 그만큼 페르젠 후작은 자신의 정치 수완에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국정을 담당하면 마의 5년동안 황폐해져 버린 델피니아를 재건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남에게 좌우되는 몸이어서는 안된다. 상당한 권력을 쥐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포석으로 삼을 생각에서 저 남자를 왕좌에 앉혀본것이지만 그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저 남자는 얌전하게 장식품이 되어 앉아 있을 성격도 말하는 대로 조종될 성격도 아니었다. 바보라 한다면 바보 그 나름대로 눈썰미가 있었고 시끄러울 정도로 이쪽 관할까지 머리를 들이밀었다. 거구나 어떤 수단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외무관 브룩스, 근위사령관 아누아 후작, 핸드릭 백작, 도라 장군, 그리고 페르젠이 몰래 다음 국왕으로 점찍고 있던 발로까지도 아군으로 삼아버렸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저 남자의 대관에 반대했던 자들이 위기감을 느낀것도 당연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 국왕의 서거 이래 자기 마음대로 이권을 탐내왔던 무리에게 있어서 저 남자는 국왕이긴 커녕 역병이었다. 후작은 그런 자들을 자신의 수완으로 아군으로 만들었고 사보아 공작가의 내부에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이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되어 어떻게든 저 남자를 쫓아낼수 있었다. 그러나 혁명 이라는 거친 치료법을 동원해야만 했던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 덕분에 국왕과 친밀하게 지냈던 인물들이 시끄러운 비난을 개혁파에 뒤집어 씌웠고 페르젠 후작 자신에 대한 평가도 단숨에 하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페르젠 후작은 자신의 힘과 정의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일시적인 감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도 결국엔 태도를 바꾸어 발로를 왕으로 삼는 것에 동의해 주리라 생각했다. 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나라에서 쫓겨난 국왕 따위에게 충성을 바쳐 보았자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상은 다시금 빗나갔다. 저 남자는 살아 돌아오질 않나 주도 면밀하게 펼쳐두었던 국경 부근의 함정을 전부 빠져나와 라모나 기사단을 자기편으로 붙이질 않나 와이베커를 함락시킬 않나 부로가 수천으로 2만의 대군을 격파하질 않나. 페르젠 후작도 이것에는 기가 막힌 정도를 넘어섰다. 도저히 사람이 하는 재주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이건 괴물이다. 그러나 그런 저항도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세 번째는 없다. 밖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후작은 다시 한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생각해보면 기묘한 인연이다. 저 남자가 정말로 그 여자의 아이였다면 자신은 분명히 모친의 원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의 아이, 다시 말해 뒤르와 국왕의 아들은 24년전 웨트카 마을에서 죽었다. 그리고 저 남자는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국왕의 자식으로서 페르난 백작에게 넘겨졌다. 지금에 와서는 시녀장인 카린도 24년전에는 왕녀에게 딸린 시녀 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중류 귀족의 딸이었다니 직접 왕녀에게 봉사하고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같은 女官여관이라 해도 이 계급의 처녀들과 국왕의 애첩 추보가 되는 대귀족의 딸들과는 격이 다른다. 중류 귀족의 딸은 대귀족의 딸들의 손발처럼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처지에 지금은 시녀장이 되었으니 카린도 내궁에서는 크게 출세한 것이다. 널찍한 회의실 안에서 그저 생각에 잠겨 있자니 밖에서 기다리도록 해둔 시동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상당히 급한 일이 아닌 이상 방해는 하지 말라고 해둔 참이었다. 야단치려고 문을 연 후작이었지만 망설이듯 시종이 고한 용건을 듣고는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좋다. 내 방에서 듣지. 통과시켜라.” 카린의 신상 조사를 시켰던 자가 성과를 가지고 돌아왔다는 보고였다. 다음날 마레바에서 코랄을 향해 파발이 달렸다. 마레바 요새는 함락되었고 틸레든 기사단장 노라 발로와 핸드릭 백작, 두 사람이 국왕군의 포로가 되었다는 보고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해는 졌고 성내에는 구화들이 밝게 지펴진 참이었다. 열심히 말을 달려 온 듯 사자는 숨을 헐떡이며 자세한 보고를 했다. “틸레든 기사단은 지휘관이 붙잡힌 이상 독단으로는 움직일 수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전선을 이탈, 현재는 상태를 살피는 태세에 들어갔습니다. 또한 제2군은 마레바와 코랄의 중간에 일단 주둔하여 이후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외 정부군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던 영주군은 각각 가까운 영지로 돌아가 관조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것은 의외로 아누아 후작이었다. 어제부터 페르젠 후작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는 듯 마레바에서 무언가 소식이 오면 대신 받아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이쪽이 의외로 간단히 끝나게 되리라 생각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믿어지지 않는 비상 사태였다. 아누아 후작은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며 물었다. “다시말해 지금 현재 전투는 중단된 상태라는 것이군.” “예. 국왕군은 마레바에 머무른 채 정부군을 추격하려는 양상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중단이라 말하자면 중단입니다만.” 사자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후작도 잘 알 수 있었다. 적은 사기 충천해 있는 것에 비해 이쪽은 주력이 될만한 전력들이 말도 못하게 전의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여력은 충분히 남아있지만 사실상 국왕군의 대승리였다. 아누아 후작은 사자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고 옆에 있던 관리를 향해 사자에게 식사를 주고 휴식을 취하게 해 주도록 명령했다. 보고를 받는 도중에도 또한 사자가 자신 앞에서 사라진 뒤에도 아누아 후작은 심사 숙고하고 있었다. 그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생각했다. 발로는 그렇다 해도 핸드릭 백작이 이런 짓을 한다는 건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아누아 후작은 페르젠 후작을 만나기 위해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집무실을 향했다. 페르젠 후작은 안전하다고는 말하기 힘든 인물이지만 그런 만큼 딱 부러지는 사람이었다. 특히 일에 열심인 점만은 아누아 후작도 인정하는 바였다. 또한 페르젠 후작은 무척이나 조심성이 깊은 사람이다. 자기 주변엔 언제나 호위를 두었고 방문할 때에는 반드시 시종을 거쳐야만 한다. 그것은 아누아 후작 정도의 대귀족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핸드릭 백작은 페르젠 후작의 이러한 행동에 화를 내며 자기를 왕족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 비난했지만 하급 관리로부터 여기까지 승진해 온 인물이다. 하물며 지금은 개혁파의 중추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사고 있는 입장이기도 하다. 당연한 배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누아 후작이 페르젠 후작의 거실에 들어간 때를 전후하여 브룩스가 찾아왔다. “오오 시종장.” “아누아 후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후작님도 페르젠 후작께 불려 오신 것인지요.” “아니. 저는 다른 보고를 가지고 왔습니다.” 어느 쪽 얼굴도 그리 밝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일하던 중이었던 듯한 페르젠 후작 역시 묘하게 굳은 미소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두 분이 함께 오셔서 마침 잘 됐습니다. 우선 앉으십시오.” “페르젠 후작. 바로 지금 마레바에서 중대한 이야기가 들어왔습니다만.” “예. 정말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역시나 빠른 귀였다. 내전에 있던 시종장에겐 아직 이 소식이 도달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누아 후작은 다시 한번 발로와 핸드릭 백작이 국왕군에게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고 브룩스도 단숨에 곤란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거 참 골치 아프게 되었군요.” “예에. 이런 시간에 무례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금후의 일에 대해 반드시 페르젠 후작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안 되겠다 생각하여 온 것입니다.” “그전에 아누아 후작.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우선은 시종장에게 이야기를 해두려고 생각했습니다만 두분이 함께 계신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누아 후작과 브룩스가 서로를 마주보고는 끄덕였다. 두 사람 모두 후작의 모습이 평소와 틀리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어딘가 냉정하며 언어 유희를 즐기는 듯한 부분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표정도 어조도 무섭도록 진지하고 엄숙하다고까지 할만 했다. 대단한 중대사가 후작을 찾아온 것이라 생각해도 좋았다. 후작은 곁에 있던 서기관을 물리치고 시종들도 방에서 내보내 브룩스와 후작과 자기까지 세 명만을 남게 했다. 그렇게 되자 완전히 새롭게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히작했다. “제가 이전부터 그 남자의 신원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만 그 결과가 어제 나왔습니다.” “어제?” “어째서 지금까지 가만히 계셨습니까?”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두분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제게도 믿어지기 힘든 놀라운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말입니다. 확인에 확인을 거듭할 생각이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거의 틀림은 없으리라 봅니다.” 두 사람은 호들갑스럽다며 웃어 넘길수가 없었다. 왕국이 뿌리부터 흔들릴지도 모르는 갈림길인 것이다. 아무리 신중하게 취급해도 지나칠 일이 없었다. “들려주십시오.” 조용한 목소리로 아누아 후작이 말했다. 브룩스도 잠자코 끄덕였다. 페르젠 후작은 마른 입술을 축이고 신중하게 말을 골라가며 설명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그 남자가 뒤르와 폐하의 자소노가 바꿔치기 되었다는 배경에 시녀장이 깊이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녀장의 과거를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 결과 실로 중대한 사실이 판명되었습니다.” “어떤 일입니까?” “그전에 묻고 싶습니다만 시종장. 분명히 시녀장은 십년제의 전 해부터 왕궁을 떠나있던 상태였지요.” “예. 아버님께서 병으로 쓰러지셔서 그 간병에 전념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왕궁일을 그만두었다는 것 같습니다.” “당신께는 부친의 간병을 위해서라고 보고했던 거로군요?” 이말에는 브룩스쪽이 놀랐다.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아니오 그렇겠지요. 시녀장의 부친은 십년제가 있었던 그 해에 돌아가신 듯 하니 처음에는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알아낸 사실은 약간 틀립니다.” 페르젠 후작은 브룩스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코랄의 귀족 티모아의 딸인 카린은 25년전 카피아의 귀족 노만과 결혼했습니다.” 아누아 후작은 눈을 크게 뜨고 絶句절구함으로써 받은 충격의 크기를 말없이 표현했다. 시종장은 안면이 온통 얼어붙었지만 그래도 시종장의 입장을 잊지 않았다. “그것이 어떻다는 말씀이십니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길게 유지되진 못했습니다. 노만은 결혼 4개월 후 전염병에 걸려 결국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망인이 된 카린은 반년 후 남자아이를 낳았습니다만 불행히도 이 아이에게도 빠른 죽음이 찾아왔던 겁니다. 그 아이가 죽은 것이 마침 십년제가 막 끝났을 4월 하순 생후 5개월이었던 듯 합니다. 문제는.” 페르젠 후작은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구별짓듯 불길한 것의 이름을 고하듯이 말했다. “문제는 그 아이의 시체를 확인한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페르젠 후작!”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이며 일어서 버린 브룩스였다. “당신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겁니까?!” “시종장. 부디 진정하고 냉정하게 제 말씀을 들어주십시오. 이런 무시무시한 결과가 밝혀지리라고는 저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틀림없는 진실입니다!” 두 사람은 이를 악물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동료를 감싸고 싶은 당신의 입장은 알겠습니다. 허나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시녀장은 자기 자식이 귀여운 나머지 눈이 멀어 그 영달을 꾀한 끝에 전대미문의 대범죄를 저지른 대역죄인이 되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어느 쪽도 한발도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후작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으로 완벽하게 앞뒤가 맞는 것이다. 시녀장이 어딘가에서 아이를 손에 넣었는가 하는 의문을 해결하기에도 충분하고 시기도 딱 맞았다. 브룩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저 시녀장이 그런 커다란 음모를 꾸밀 리가 없다는 강한 신념이 있었다. 그 신념을 기초로 하여 브룩스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페르젠 후작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념에 기초하여 단언했다. “달리 생각할 방도가 없습니다.” 두 사람이 묵연히 서로를 노려보며 일어선 가운데 아누아 후작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시녀장에게 결혼 경험이 있었다니 처음 듣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궁의 여자들도 끝에서 끝가지 확인해 보았습니다만 십년 가까이 시녀장을 위해 일했던 시녀도 알지 못한다 했습니다. 뒤가 구린 일이 없다면 어째서 숨기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까.” “침묵했다는 사실이 곧 숨겼다는 것이라니 너무나 극단적인 결론이 아닙니까!” “실제로 당신에겐 부친의 병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결혼했다는 사실도 출산했다는 사실도 남편과 아이를 병으로 잃었다는 사실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까!” 다시금 불꽃이 튀었다. 이대로라면 끝없는 토론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아누아 후작이 진지한 모습으로 일어나 두 사람을 제지했다. “페르젠 후작. 그 이야기는 좀더 자세하게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브룩스 경도 우선은 후작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지 않으면 안 될 겁니다. 의논이라면 그런 뒤에 해야 하겠지요.” 맞는 말이었다. 두 사람 다 일단 호흡을 가라앉히고 의자에 앉았으며 페르젠 후작은 조사 결과를 자세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카린과 마주 앉아 있는 브룩스의 모습이 있었다. 페르젠 후작과 조용하지만 엄숙한 의논을 한 끝에 브룩스가 말을 꺼낸 것이었다. 시간은 심야에 가까웠다. 감시의 보고로는 카린은 이미 잠들었다고 했지만 내일로 미룰만한 여유는 브룩스나 아누아 후작, 페르젠에게 없었기에 무리하게 깨운 것이었다. “시녀장. 이런 시간에 죄송합니다만 단도직입적으로 듣지 않으면 안될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 무슨 일이신가요?”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멍한 눈으로 카린이 말했다. “당신의 아들에 대한 일입니다.” “아들? 제게 아들은 없습니다.” “예전엔 있으셨지요. 생후 불과 반년도 지나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난 아들이.” “어머나 저런!” 놀란 듯 기쁘다는 듯 눈을 크게 뜬 카린이었다. 다만 그것은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 특유의 공허함을 느끼게 하는 기쁨이었다. “시종장이 제 아이 유벨에 대해 알고 계시다니 기쁘게 생각합니다. 정말로 좋은 아이였지요. 얌전하고 손도 안 타고. 안아주면 언제나 제 얼굴을 보고 기쁜 듯이 웃었지요.” “시녀장.” 브룩스는 내심 격렬한 초조감을 느끼면서 그래도 열심히 이야기를 이어가려 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의 유벨은 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어디라니 그런 건 저도 모르지요. 죽은 인간이 어디로 가는지 당신은 알고 계신다는 건가요?” “유벨은 죽었다는 말씀이시군요?” “예에. 가벼운 감기가 원인이 되어 결국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결혼했었다는 것도 아이가 있었다는 것도 침묵한 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실로 막힘 없이 술술 대답이 나왔다. 이 위화감에 브룩스는 다시금 강하게 긴장했다. “시녀장.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당신의 아드님은 정말 24년 전에 죽은 겁니까?” “어머 제가 당신께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말씀인가요?” 여전히 노래하듯 박자는 안 맞아도 두드리면 울릴 듯한 대답이었다. “페르젠 후작은 그렇게 생각질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당신에겐 지금 무척 커다란 의혹이 걸려 있습니다.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고 큰 범죄를 꾸몄다는 겁니다.” “어머나 세상에 무서워라. 제가 어떤 범죄를 범했다 하시는 건가요.” 브룩스는 카린의 눈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국왕의 아이와 바꿔치기 했다는 겁니다.” 카린은 소리내어 웃었다. 마음 깊이 우스워하는 목소리였다. “바보 같은 말씀 말아주세요. 유벨은 죽었습니다. 장례도 치렀으니까요.” “하지만 유벨이 죽는 장면을 본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 “병상에 누운 부친의 청으로 당신은 얼굴도 잘 모르는 노만과 결혼했습니다. 자주 있는 일이지요. 카피아는 코랄에서 40카티브. 마차를 타면 하루만에 충분히 오갈 거리입니다. 당신은 카피아에 신혼 살림을 차리고 병상의 아버지를 내버려둘 수 없었기에 코랄과 카피아에서 이중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 “결혼 후 4개월만에 노만은 죽고 미망인이 된 당신은 카피아에서 유벨을 낳았지요. 십년제의 전 해 11월의 일입니다.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 “그러나 그때 이후 곧장 당신은 유벨을 데리고 코랄로 돌아와 반년 후 아기용 관과 함께 다시 카피아에 나타났습니다. 유벨이 죽었다고 말하며. 부친이 잠든 이 장소에 아이를 묻고 싶어서라고 말하며. 그렇지요?” “.......” “그렇다면 유벨은 코랄에서 죽은 것이 됩니다. 페르젠 후작은 당시 일을 기억하고 있는 자들을 찾아 당신의 집 근처에서 하나하나 사정을 물어 본 모양입니다만 가장 친하게 지내던 집안 사람들조차 당신의 아버님이 돌아가신 것은 잘 기억하고 있어도 그 집에 아기가 죽은 일이 있었던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상황입니다. 아니 애초에 당신에게 아이가 있었던가 하는 것마저 모른다고 합니다. 좀더 확실한 증언을 할수있을 당신 집의 하인들은 가장 오래 일하고 있는 자라 해도 15년 전부터 일하기 시작한 터라 이쪽 역시 당신의 그 당시 상황을 이야기해 주진 못했습니다. 그 이전에 당신 집에 있던 하인들은 모두 휴직하여 행방을 알 수 없고요. 아무리 페르젠 후작이라도 24년전에 코랄의 티모아 가에서 일하던 심부름꾼이라는 정도로는 찾아낼 방도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이야기니까요.” “.......” “하지만 당신은 알고 있을 겁니다. 하인이건 요리사건 심부름꾼이건 좋습니다. 당시 당신 집에 있었고 유벨이 죽었을 때의 상황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자가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겁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계속 침묵하고 있던 카린은 이 요청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응했다. “그런 말씀을 하셔도. 상당히 옛날 이야기입니다. 하인들은 자주자주 바뀌는 법이니 어디의 누구였느냐 말씀하셔도 기억해내는 건 무리입니다.” 브룩스는 깊이 실망했다. 이렇게까지 양보했는데도 그녀는 협력해줄 수 없는 듯 했다. “시녀장. 어떻게 해도 솔직히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면 저희들은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카린은 겁먹은 듯이 브룩스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끝까지 비협조적인 입장을 고집한다면 카피아의 묘지를 파헤치겠습니다.” 이 말이 카린에게 준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안면이 창백해져 벌떡 일어서더니 입술을 떨면서 외쳤다. “그 아이의 묘를 파헤친다는 겁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만두세요! 그런 무서운. 그 아이는 조용히 잠들어 있습니다! 죽은 자의 잠을 방해하는 짓 같은 건 그만두어 주세요!” “그렇다면 제발 부탁이니 정직하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이런 비상 수단을 쓰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우리들은 몰려 있단 말슴입니다!” 브룩스는 필사적인 모습이었다. 이 대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내용은 傳聲管전성관에 의해 페르젠 후작의 귀에 들어갈 터였다. 자신이 섣부른 소리를 꺼낼 수는 없었다. “그런 짓을 해서 뭐가 해결된다는 말씀입니까! 그 아이는 죽었다고 어머니인 제가 말씀드리는데!” “그러니까 시녀장. 당신의 그 말씀을 증명할 것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카피아의 사람들은 아기용 관을 보았다. 그러나 관은 이미 엄중하게 봉인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누구도 그 안을 확인해보지 않았다. 모친인 카린이 유벨은 죽었다고 말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혹시 그 관은 비어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유벨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죽었다고 증명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게다가 운이 나쁘게도 시기가 너무 잘 들어맞는다. 동기도 조건도 너무 잘 부합되어 있다. 태어난 직후의 아이를 안고 있는 상황, 아이 아버지는 죽었고 자기 부친도 병상에 누워 앞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 얼굴을 아는 시골 처녀가 국왕의 아이라고 생각되는 아기를 안고 마을로 돌아간다고 인사하러 왔다. 그 아기와 자신이 낳은 아기는 2주 정도 밖에 생일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물며 태어난 직후의 갓난아기의 얼굴 따위는 어느 아기나 똑같아 보인다. 이만큼 조건이 겹쳐진다면 아무리 확실한 사람이라는 평판의 카린이라 해도 자기 아이가 귀여워 잠시 눈이 멀었다 해도 이상할건 없으리라고 페르젠 후작은 말했다. 더구나 이러한 공작을 저지를 만한 요건을 카린은 지니고 있었다. 고의로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일부러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코랄 근처에서 카린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거의 없었다. 카피아에서라면 알려져 있는 일이지만 불과 40카티브라고 해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사람들은 거의 그 토지를 떠나는 일이 없다. 카피아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코랄에 전해질 일은 우선 없고 코랄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카피아에 흘러들 일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래도 브룩스는 믿을 수 없었다. 분명히 후작의 의견은 일리가 있다. 그걸로 뭐든지 설명이 된다. 그래도 그럴 리는 없다고 하는 목소리가 마음 속 어딘가에서 들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기의 묘를 파헤친다는 얘기에 안색이 변하여 반대하는 카린의 모습을 보고 브룩스의 그 신념도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생각한다면 이 말엔 쾌히 응해야 할 것이다. 관 안에 아이의 뼈가 들어있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카린에 대한 의혹은 웃어 넘길 일로 변하는 것이다. “시녀장. 죽은 자의 잠을 방해하지 말라 말씀하셨지만 이대로라면....” “마레바는 어찌 되었습니까?” 너무나 당돌한 질문에 브룩스는 얼이 빠졌다. “국왕군이 마레바를 점거한 듯 합니다. 발로님도 핸드릭 백작도 붙잡히셨다다던가.” 카린은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그건 무엇보다 다행이군요. 역시 폐하십니다.” “시녀장. 당신이 그렇게 그분의 일에 신경을 쓰시는 것도 그분이 나타나셨을 때부터 친밀하게 주변 일을 돌보시는 것도 모두....” 브룩스는 결심하고 말했다. “그분이 자신이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그래서가 아닙니까?” “아닙니다.” 카린은 단정하게 가슴을 폈다. “신께 맹세코 유벨은 죽었습니다.” “그럼 그 유체를 확인시켜 주십시오.” 카린은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실은 페르젠 후작은 이미 손을 써서 유벨의 유체를 파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카피아의 사제라는 사람이 무척이나 엄격한 자라 그런 벌받을 짓은 용서할 수 없다 어떻게 해도 열어보겠다면 최소한 어머니인 카린 씨의 허락을 얻어 와라 그렇지 않은 이상 한 발짝도 묘지에 들여보내지 않겠다며 기염을 토했다는 겁니다. 작은 마을의 일이고 밀어붙이면 마을 사람들의 반발에다 필요 이상의 흥미를 사버리게 되어 곤란하다고 생각해 일단 물러났다고 후작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다면 페르젠 후작은 완강하게 유벨의 관을 열어제칠 것이 틀림없습니다.” “.......” “이대로 침묵만 지키신다면 당신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극악무도한 범죄자로서 극형에 처해지는 겁니다.” 카린은 침착하지 못하게 눈길을 이리저리 돌렸다. 오랜 기간 구속된 탓에 야윈 얼굴과 불안하게 깜빡이는 눈동자가 겁을 먹은 작은 짐승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이라도 저는 범죄자나 마찬가지 취급을 받고 있는데. 사실을 말하라고 말씀하셔도....” 힘없이 중얼거리는 카린에게 브룩스는 최대한의 성의를 가지고 말을 걸었다. “시녀장. 용기있는 결단을 부탁드립니다. 당신은 그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가련한 모습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던 카린은 시종장의 안색을 살피면서 말했다. “저는 무섭습니다. 이렇게나 큰 사태가 되어버리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겁니다.” “예에 압니다.” 브룩스는 크게 끄덕였다. “그 때문에 당신은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가 없겠지요. 잘 압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못합니다. 사태는 더욱 나빠질 뿐입니다. 사문회에 말하지 못하신다면 저에게 밝혀주십시오. 결코 나쁘게 되지는 않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브룩스는 열을 띠고 진지하게 시녀장을 설득했다. 그 서오가가 있어서인지 계속 침묵을 지키던 카린은 드디어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제가 아는 사실을 이야기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오오.” 브룩스는 기뻤지만 그것은 이른 감정이었다. 카린은 이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전에 폐하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시녀장?!”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직접 폐하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브룩스는 결국 머리를 감싸쥐고 말았다. 카린이 극도의 긴장 상태에 있던 나머지 제정신을 잃은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직접이라고 말씀하셔도. 그분은 아직 마레바에 계십니다.” “벌써 마레바입니다. 이 코랄까지는 한번 달리면 끝납니다. 어떻게 해서든 폐하를 뵙고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집요하게 요청하는 카린의 눈은 이상한 광채에 감싸여 있었다. 국왕의 숨은 검이라 불리던 브룩스가 저도 모르게 압도되었을 정도의 기백이었다. “두 사람만 있게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많은 수의 중신들이 증인으로서 입회할 겁니다. 그 앞에서 이야기하시게 되는 거란 말씀입니다.” “상관없습니다. 제 말이 직접 폐하의 귀에 가서 닿을 수 있다면 달리 어떤 분들이 계셔도 괜찮습니다.” 브룩스는 끄덕이고 카린의 방을 나섰다. 실현시키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회담이었지만 마침내 카린이 사실을 말하겠다고 해준 것이다. 해볼만한 가치는 있었다. 옆방에서 전말을 듣고 있던 페르젠도 이 의견에 찬성하여 관료들에게 의논했다. 사태는 급속한 전개를 보이기 시작했다. 카린과의 대담이 있은 다음날 사자의 임무를 띤 브룩스가 코랄 성을 출발했다. 7장 마레바 요새에서 브룩스와 대면한 월 크리크는 눈을 크게 뜬 채 말문을 잃었다. 그 옆에서는 도라 장군, 나시아스, 그리고 리도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브룩스는 과거 핸드릭 백작이 그러했듯 남자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였다. 과거 외교의 제일인자로서 열강들과 겨뤄 온 브룩스였다. 허약해 보이는 외견과는 어울리지 않게 체력도 겸비하고 있었고 근성도 충분했다. 말하기 힘든 사실을 때로는 정확하게 거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어렵고 힘들게 임했던 교섭은 없었다. 의자에 앉은 채 시종장과 대면하고 있는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시녀장이 나를 낳아준 모친이라는 말씀이신지?”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게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재 상황입니다.” 일동 모두가 소리없이 조용해졌다. 나시아스나 도라 장군은 그저 창백해질 따름이었다. 남자는 아직도 멍한 채였고 소녀는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는 모습을 하고 그런 사람들을 교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말이야. 이 또 무슨 새로운 사실이란 말인가.” 남자는 나직하게 말하고 브룩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시녀장은 나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는 것이로군.” “예.” “어차피 그러기 위해서는 나보고 나오라 이 말씀이시고요.” “예.” “실하도 말한다면 시녀장은 처형당한다는 말이로군.” 잠시 침묵 후 브룩스는 고뇌하는 표정으로 끄덕였다. “예.” “안 됩니다!” 도라 장군이었다. 더욱더 창백한 얼굴이 된 채였다. “무슨짓을 브룩스경. 당신은 어찌 뻔뻔스럽게 이런 사절을 맡아서 온 건가! 폐하 절대 안됩니다. 이것은 당신을 불러들이기 위한 함정입니다!” “그렇겠지. 저 페르젠이 얌전하게 시녀장과 만나게 해줄 리가 없지. 조건은 뭡니까?” “우선은 발로님과 핸드릭 백작의 신병을 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회담 장소에 대해서는 이쪽과 상담 후에 결정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만.” “상담이고 뭐고 나에겐 그쪽 조건을 받아들이는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지요. 부디 사양말고 말씀하시죠.” 남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브룩스는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눈길을 내리깔았다. “장소는 코랄 성의 최고회의실. 일시는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그때에는 호위로서 일개 중대를 허용합니다만 대수문부터는 근위병대와 교대하겠습니다.” “말이 안 되는군!” 도라 장군이 이전보다 더욱 분노하여 외쳤다. “호위로서 최소한 병사 3천을 코랄로 진군시킬 것과 회담 장소의 변경을 요구하오! 그것도 하필이면 본궁이라니 논의할 가치도 없구먼! 페르젠의 소굴이 아닌가!” “도라 장군. 저희들은 그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당신들의 바램이기도 할 것입니다. 더욱이 시녀장을 왕궁에서 밖으로 내보내 드릴 수는 없는 겁니다.” “왕궁으로 향했다간 마지막에 이분을 어찌 요리할 것인지는 코랄 마음대로지. 게다가 그것을 수중에 쥐는 것은 당신들이 아니야. 페르젠이란 말이다! 이런 바보 같은 조건을 어찌 받아들이란 겐가!” “도라 장군. 제 목숨과 바꿔서라도 이분의 안전만은....” “실례지만 당신의 그 약속은 아무런 의미도 없소! 만약의 사태가 되면 페르젠은 당신까지 묶여서 이분을 말살시키고도 남으르 테니까!” 도라 장군은 남자와는 달리 분노에 불타는 눈동자로 브룩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브룩스는 기가 죽지 않았다. 이 역할을 스스로 지원해서 왔기에 이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고회의실이 안 된다면 그것은 양보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최소한 一郭일곽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호위에 관해서도 3천의 병력은 무리라 해도 가능한 한 희망에 응해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그렇겠지. 시녀장에게서 당신들이 바라는 말을 끄집어내기만 하면 모든 일이 끝날테니까. 페르젠의 완전 승리다. 결국 이분은 처형되겠지. 시녀장도 같은 죄인가.” “도라 장군. 저는 그런 사태만큼은 피하고 싶습니다. 아니 그것만은 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언제나 온화한 태도였던 브룩스가 몸을 내밀고 두드러질 정도로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런 해결을 바란다면 제가 일부러 나올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저희들의 제안은 카린 여사가 이분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발언을 했을 때 그 자리에서 시녀장의 직위를 해임하고 이분에겐 퇴위 선언을 받겠다는 겁니다. 이유는 그때 뭐라고라도 붙이도록 하지요. 여러분은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분과 카린 여사는 함께 국외 영구 추방을 할 생각입니다.” 도라 장군의 굵은 눈썹이 꿈틀 하고 움직였다. 의자에 앉고는 깊이 생각에 잠기는 표정이 되었다. 서로 이득을 볼 것도 없지만 최소한 큰 손해는 보지 않는 조건이었다. “그래서야 저 페르젠이 납득하겠습니까?” “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애초에 후작에게 있어서 이분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태생을 밝히고 왕위에는 어울리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을 일부 중신들에게 증명할 수만 있다면 그 이상 붙들고 늘어질 필요도 없게 됩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가 없는가입니다.” 도라 장군이 대답하기 보다 먼저 남자가 잘라 말했다. “동의하지요.” 모두 일제히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폐하.” “도라 장군. 그 폐하라는 소리는 이제 그만둡시다. 이건 마침 좋은 기회 아닙니까. 사실을 알고 왕위에서 물러난다. 바라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아니 그렇지만.” “무엇보다 만약 정말로 시녀장이 제 생모라 한다면 못 본 체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짓을 했다간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얼마나 꾸짖으실지 알 수 없으니까요.” 브룩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국왕의 후견인이었던 페르난 백작은 브룩스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곽은 곤란합니다. 그럴 것이 그 회담에는 이쪽 장군들도 반드시 출석하시려 할 테니.” “당연합니다.” 나시아스와 도라 장군이 숨쉴 틈도 없이 즉석에서 대답했다. 남자는 이어서 말했다. “시종장의 말씀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지금의 집무부는 페르젠의 사유물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합니다. 저 남자가 만약 저에게 국외 추방 이상의 것을 바라고 뭔가 수를 쓸 경우 저희가 일곽에 있다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최소한 이곽에서 하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 페르젠이라도 거기까지라면 시녀장을 데리고 나올 수 있겠지요.” 시종장은 왠지 눈을 가늘게 뜨며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말씀드릴 필요도 없겠지만 회담 전에는 무기를 전부 보관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이쪼의 아군들에 대해서도 가능하면 이곳에 머물러 주셨으면 합니다만.”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무리한 말씀입니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라모나 기사단과 로아의 사람들은 주인과의 사이에 30카티브나 거리를 두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코랄깢 줄줄이 데리고 오셔셔야 곤란합니다.” “그렇다면 그 중간까지는 어떨까요.” 도리에 맞는 남자의 교섭에는 도라 장군도 끼여들 틈이 없었다. 결국 회담 장소는 이곽에 있는 귀족 저택 중에서 적당한 곳을 고르는 것으로 낙착했고 국왕군의 세력도 2천 정도는 코랄과의 중간 거리까지 전진시켜두는 것으로 했다. 정부측에서 보자면 대폭 양보한 것이었지만 브룩스는 그 정도는 어쩔 수 없다고 처음부터 계산하고 있던 듯 했다. 그들 입장에서 보자면 본궁이나 이곽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남자와 시녀장을 대면시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시녀장이 문제의 발언을 하도록 만들기만 하면 된다. 정부측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을 안 이 남자가 자포자기하는 것이다. 이 남자는 지금 현재 庶出서출이라는 이유로 왕위에서 쫓겨났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를 편드는 자들의 수는 결코 얕볼수없다. 사실을 백일하에 밝힐수없다는 것도 이쪽의 약점이다. 이 남자가 개혁파에 불만을 가진 자들을 선동하여 끝까지 싸우려 드는 것을 코랄은 가장 경계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남자가 스스로 왕위를 버리게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퇴위한 뒤의 남자에 대해서도 국외 추방만으로는 약하다는 목소리가 정부 내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오랜 기간의 경험에 의해 사태를 시끄럽게 드러내지 않는 쪽이 낫다는 확신이 브룩스에게는 있었다. 혹여 페르젠 후작이 강경 수단을 쓰려고 한다면 그 자리에서 결별을 선언하고 아누아 후작과 함께 이번에는 자신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겠다는 각오를 굳건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페르젠 후작이라도 그런 각오는 무시할 수 없었던 듯 했다. 브룩스는 문자 그대로 전권 대사로서 마레바를 방문한 것이다. 다행히 국왕군 측도 대범하게 합의해 주었다. 남은 것은 상세한 내용이다. 자세한 일시와 장솔르 결정하기 위하여 브룩스는 일시적으로 코랄에 돌아갔다. 그날 밤 나시아스와 도라 장군은 자신들의 부관들과 딸에게 처음으로 사실을 밝혔다. 코랄에서의 회담을 눈앞에 둔 지금 더 이상 숨겨 둘 수는 없었고 숨겨둘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세 사람은 말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은 그래도 상관없이 개혁파와 페르젠을 타도하기도 맹세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도 불가능해진 것 같다. 남은 것은 최소한 저분의 목숨을 지켜드리는 일 정도 밖에 없을 듯 하다.” 장군의 어조는 아무래도 무겁고 힘이 없었다. 나시아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무엇이든 다 페르젠의 생각대로 흘러가 버린 것이 무엇보다 유감입니다.” 세명 모두 대꾸할 말이 없었지만 핏기를 잃은 샤미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폐하는.... 저분은 두 번다시 국내엔 돌아오실 수 없게 되는 건가요” “어쩔수가 없다.” “하지만 그래선 저분이 너무나 가엾습니다.” “알고있다. 그렇지만 국외 영구 추방만으로 끝난다면 생각지도 못했던 온정이다. 아마도 브룩스 경의 배려겠지.” 가렌스도 어두운 얼굴로 혀를 찼다. “폐하께서.... 저분이 국외로 추방되고 페르젠 후작이 델피니아를 좌우하게 되는 겁니까.” 타르보가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분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그런 바보같은 이야기가.” 그 마음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침묵이 그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즈음 남자는 혼자서 본동의 망루에 올라갔다. 올려다 보면 하늘 가득히 별이 있었다. 과거 비르그나에서도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돌아왔다는 감격을 맛보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기대도 불안도 초조도 느끼지 않는다. 절망도 없다. 오히려 고요한 기분으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굉장한 별들이네.” 문득 바로 가까이에서 목소리가 났다. 남자가 가만히 그쪽을 보자 어느 사이에 온 것 인지 소녀가 서 있었다. 이븐도 함께였다. “뭔가 일이 어렵게 된 것 같네.” “아아.” 두 사람은 조용히 걸어와 망루에 섰고 남자는 숨을 내쉬며 두 사람을 향했다. “거참. 대체 나는 어떤 놈이냐는 생각만 든다. 처음에는 지방귀족, 그 다음엔 국왕, 이름도 모를 자유전사. 이번에는 시녀장의 아들이라는 것 같으니. 눈이 빙빙 돌 지경이지 뭐냐.” 농담처럼 말하지만 자조하는 울림이 뒤섞여 있는 어투였다. 소녀가 물었다. “코랄에 가는 거야?” “응.” “어머니를 구하러?” “그래.” “페르젠은?” “그게 문제야.” 남자는 결코 복수를 잊어버린 것이 아니다. “아버지를 직접 죽음에 몰아넣은 장본인은 저 돼지라고 해도 그 근본은 페르젠이니까 말이다. 포기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번엔 그 문제는 뒤로 돌려야해. 우선은 시녀장을 구출하지 않으면 안된까.” 소녀와 이븐은 얼굴을 마주보고 잠시 잠자코 있었지만 소녀가 확인을 하듯이 물었다. “그 사람 정말로 월의 어머니인 거야?” 남자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내 어머니는 열두살 때 돌아가셨어.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가 진짜 어머니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도 나의 양친은 페르난과 스레이야 뿐이다.” “아름다운 분이셨지. 나 같은 장난꾸러기한테도 상냥하게 대해주셨어.” 이븐이 말했다. “그렇다고 시녀장을 내버려둘 순 없어. 시녀장은 나에게 여러 가지로 참 잘해 주었던 사람이니까.” 소녀는 망설이듯 말했다. “하지만 그사람하고 같이 국외로 추방되면.” 남자도 알고 있었다. 페르난 백작의 원수를 갚는 일은 결코 달성할 수 없게 된다. 영구 추방자가 돌아와서 국경에 발을 내디디려 한다면 즉석에서 중죄인이 된다. 페르젠에게 당당하게 이 남자를 없앨 구실을 부여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리. 너는 이기자라고 말했지.” “응.” “나도 이기고 싶다. 최소한 지고 싶진 않아. 당초 생각했던 것같은 승리는 바랄 수 없겠지만 아직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소녀는 살짝 웃으며 남자를 보았다. “괜찮아.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떻게든 되는 법이야.” 남자 역시 눈꼬리에 미소를 띠었다. “네가 말하면 정말로 어떻게든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희한한 일이지.” 그리고 다시 한번 두사람에게 물었다. “나는 코랄 성에 가서 시녀장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너희들은 어쩔테야?” “그런 건 묻는 게 시간낭비라는 거다.” 이븐이 망설임 없이 말하고 “같이 갈께. 그런다고 약속했잖아?” 소녀 역시 가볍게 말했다. 남자는 뭐라 말하기 힘든 미소를 띠었다. “희한한 놈들이다. 살아 돌아올 거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는데.” “그러니까 그러는 거야. 월은 둔하니까 말야. 같이 가서 위험하게 되면 업어서라도 성밖으로 끌어내야지.” 말은 장난스럽지만 그 태도는 진지했다. 이븐도 같은 식의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너희 어머니를 구하게 된다면 타우로 와라. 거긴 원래 이런 식의 이유로 나라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까 말이야.” 남자는 낮게 웃었다. “아마 타우 최초로 국왕이라는 경력을 가진 산적이 되겠지. 리 너도 갈 테냐?” “응 같이 갈게.” 가볍게 대화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각각 체격이 다른 세 명은 별이 가득한 하늘 아래에서 몸 한번 움직이지 않고 조용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현실에 펼쳐진 어려운 상황을 진저리 날 정도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브룩스는 다음날 다시 마레바로 나타나 지금부터 5일 뒤 정오 코랄 성의 이곽에 있는 도라 장군의 저택에서 회담을 거행하고 싶다고 고했다. 일부러 장군의 저택을 선택한 것은 조금이라도 이쪽의 경계심을 풀게 하려는 브룩스의 배려인 듯 했다. 국왕군은 총세력 2천을 데리고 마레바를 출발하여 코랄에서 15카티브 떨어진 위치에서 정지했다. 페르젠 측은 남자를 맞이할 무대 준비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본래 성의 경호가 임무여야 할 근위병단의 대부분은 적당한 이유를 붙여 파견되고 대신 페르젠에게 호의적인 대귀조들의 사병이 성의 경비를 맡게 되었다고 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페르젠 후작의 영지에서 2천의 군세가 코랄 경비의 명목으로 진군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노골적인 짓이냐.” 도라 장군은 긴장감을 머금고서 기가 막히다는 어조로 말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이 통용되다니. 지금의 집무부는 페르젠의 소유물이라는 폐하의 말씀이 실로 정곡을 찌르고 있구나.” 여기까지 함께 온 핸드릭 백작이나 발로도 마찬가지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대체 이래서야 저분을 퇴위시킨다 해도 상황은 아무것도 호전되지 않겠군.” “그것보다 이런 곳에 어슬렁거리고 직접 나서다니. 자진해서 함정에 빠져주는 거나 마찬가지 짓이오.” 도라 장군도 그것을 걱정하여 남자를 말리려 했지만 남자의 결의는 굳어진 뒤였다. “지금의 페르젠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제가 자포자기해서 될대로 되라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만일을 걱정해서 준비하는 위협이겠지요. 만약 저 남자가 정말로 저를 없애려 생각했다면 이 정도로 노골적인 짓은 하지 않고 좀더 능숙하게 처리할 겁니다. 코랄의 상황이 어떻든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만 합니다.” 아무리 도라 장군이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자줏빛 외투를 몸에 두른 핸드릭 백작이 힘차게 끄덕였다. “도라경. 만약 페르젠 후작이 이 사람을 속이고 그 자리에서 제거하려 꾸미고 있다면 그때에는 맡겨 주시오. 이몸이 바로 이손으로 그놈의 목줄기를 뽑아버릴 테니.” 회담 당일 국왕군에서 출발한 것은 고작 한 개 중대였다. 남자를 중심으로 하여 도라 장군, 샤미안, 나시아스, 발로, 핸드릭 백작 그리고 이븐과 리가 있었다. 타르보나 가렌스는 남는 역할을 맡기로 했다. 만약의 사태에는 곧바로 코랄을 향해 달려오기 위해서였다. 코랄까지 향하는 여정 동안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성에 도착한 그들은 눈에 띄지 않게 제5문으로 입성했지만 三郭삼곽에 들어서자마자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대가 둥글게 그들을 포위했다. “우리들까지 범죄자 취급인가.” 핸드릭 백작이 분통이 터지는 듯 읊조렸다. 그들은 라모나 기사단의 기사들 대신 성내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곽문을 통과해 이곽에 들어섰다. 광대한 이곽의 중심 부근에 세워진 장군의 저택은 명문가의 이름에 어울리는 훌륭한 모습이었다.저택 주변에는 이미 엄중하게 경비가 세워져 있었다. 주변만이 아니었다. 현관 안쪽에도 병사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었다. 도라 장군이나 샤미안의 입장에서는 이런 형태로 자신들의 집에 돌아올 줄은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장군과 면식이 있는 듯한 무장이 나타나 무례를 용서하시고 허리의 물건을 맡겨주십사 간곡히 요청했고 그들은 잠자코 이말에 따랐다. 국왕군은 이미 핸드릭 백작이나 발로에게 그들의 검을 돌려주었지만 안내역을 겸한 무장은 그런 그들의 무기도 맡겨달라고 말했다. “어째서냐. 우리는 성측에 해당하는 자들이다.” “이것은 일단 평화 회담이라는 형식이기 때문에 무장 해제가 원칙입니다.” 한순간 꺼림칙한 표정이 된 두 사람이었지만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했으리라. 얌전히 그 말에 따랐다. 그들이 안내한 곳은 도라 장군이 손님을 대접할 때 이용하는 대강당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아누아 후작, 시종장 브룩스를 비롯해 20명 정도의 각료들이 모여 있었다. 만찬이 거행될 때에는 긴 탁자를 놓고 의자를 나란히 세워두는 강당이었지만 지금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각료들은 각각 서 있는 채였다. 알현 장소로서 만들어 둔 것일지도 몰랐다. 각료들은 각각의 심경을 표시하는 복잡한 얼굴로 남자를 비롯한 국왕군의 진용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중에는 발로와 핸드릭 백작에게 경멸과도 비슷한 동정의 눈길을 주는 자도 있었다. 또한 한 사람은 총 여덟명인 그들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더니 나서서 이런 말을 했다. “쓸데없는 인간들을 데리고 들어오다니 곤란하군. 뭔가 이 자들은.” 주로 소녀와 이븐에 대한 질문인 듯 했다. 남자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 두 사람은 이번에 국왕군을 대표하여 증인으로 함께 온 자들이다. 신경쓰지 말도록.” “하지만 보아하니 일개 병졸과 시동인 듯 한데. 그런 자들이 군을 대표하다니.” 이븐의 눈썹이 꿈틀 반응을 보이며 소녀를 보았다. 소녀 쪽은 입가를 살짝 들어올리고 이븐을 바라보았다. 일개 병졸이란 이븐을 시동이란 소녀를 말하는 듯 했다. 한쪽은 친위대장으로서 또 한쪽은 여신으로서 국왕군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두 사람이었지만 남자는 그런 설명은 하지도 않고 대꾸했따. “우리 군의 구성에 간섭은 필요없다. 증인은 많은 쪽이 그쪽에게도 좋을텐데.” “말씀하시는 대로입니다.” 상석과 마주보고 있는 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남자의 얼굴이 살짝 험악해졌다. “겨우 뵐 수 있게 되었군요 국왕폐하. 아니면 유벨 공이라고 불러드리는 쪽이 적절할까요.” 페르젠 후작이었다. 소녀는 처음으로 보는 적의 수괴를 주의깊게 관찰하는 중이었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책략가라는 인상이 있었던 만큼 단련이 된 튼실한 장신의 소유자라는 점에 우선 놀랐다. 풍채도 결코 나쁘지 않다. 미남이라고 해도 좋을 단정한 외모와 침착한 태도에서는 좋은 인상마저 풍겨 나왔다. 사람은 외견만으로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이런 것을 말하는지도 몰랐다. 유벨이라고 불린 남자는 죽여도 시원치 않을 원수의 한 사람을 눈앞에 두고 흉흉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나의 생모를 만나게 해 준다고 하기에 멀리서부터 찾아왔네만? 그렇지 않으면 귀공의 빈정거림에 대해 그거 황공합니다 하고 고개라도 숙이지 않으면 감동적인 대면은 시켜주지 않겠다는건가?” “무슨말씀을. 서로 최대한 양보를 하여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니까요. 최소한 무사히 끝낼 수 있도록 해봅시다.” “고마운 얘기로군. 그건 그렇고 저 성의를 두른 돼지는 어찌 되었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페르젠 후작은 남자의 도발에 걸려들지 않았다. 함께 왔던 발로와 핸드릭 백작을 향해 조금 곤란하다는 얼굴을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두분 모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포로가 되었다고 들었을때엔 하마터면 두분의 빛나는 무명에 해가 간게아닌가 걱정했습니다.” 핸드릭 백작이 초조한 듯이 말했다. “그런건 아무래도 좋소. 언제까지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때울 셈인가. 할말이 있다면 빨리 해치우는 게 어떤가.” 발로도 덧붙였다. “맞는 말슴이다. 이 사람을 왕궁에 너무 오래 붙잡아두면 도중에 대기시켜 둔 군대가 기다리다 못해 달려올 테니 말이야.” 후작은 퍼뜩 깨달았다는 듯이 손을 쳤다. “그랬군요.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실례가 되겠습니다. 시녀장을 모시고 와라.” 아누야 후작과 브룩스를 제외한 정부측의 나머지 대표들에게서는 모두 여유가 느껴졌다. 남은 카린의 한 마디로 만사가 해결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한시라도 빨리 이런 광대놀음을 끝내고 싶다는 조급함마저 묻어나왔다. 그에 비해 국왕군측의 진용들은 숨을 죽이며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다. 카린이 무엇을 말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뒤의 일이 더 중요했다. 정말로 여기에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지 그들은 모두 그점을 염려하고 있었다. 시종에게 부축을 받듯이 하여 카린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고 샤미안이 작은 비명을 질렀다. 혈색이 좋고 풍만한 체격에 생생한 모습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다니던 시녀장이 홀쭉하게 야윈 창백한 얼굴이 되어 불안한 발걸음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린은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똑바로 등을 세웠다. 창백해져 있던 얼굴에도 점점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 가슴이 크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남자도 고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잠자코 시녀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더닞 그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서로를 바라본채 움직이지 않는 두 사람을 교대로 보던 페르젠 후작이 상냥하게 토닥이듯이 카린에게 말을 걸었다. “자 카린 여사. 이 남자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셨다지요.” “예에.” 카린은 한발한발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가서 그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국왕폐하. 지금 이렇게 또 한번 모습을 뵐 수있게 되다니 이 이상 없는 기쁨이옵니다.” 그야말로 국왕에 대한 신하의 표본과도 같은 정중한 태도였다. 보고 있던 일동은 아연해졌다. 아니 남자 자신이 놀랐다. “시녀장?”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것보다 먼저 각료들이 저마다 소리를 질렀다. “시녀장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바보 같은 연극은 그만두시오! 그 남자는 당신 자식이 아닌가!” 카린은 똑바로 일어서더니 분노하고 있는 각료들을 향해 태연하게 말했다. “제가 언제 그런 말씀을 드렸던가요?” “시녀장?!” 예상외의 전개였다. 카린은 완전히 포기하고 사실을 이야기하기로 약속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그러한 의문과 초조함에 가득 찬 시선을 일제히 페르젠에게 던졌다. 무언의 비난을 받은 후작은 물론 다른 누구보다도 초조하고 기가 막히고 화가 나 있었다. “시녀장. 고집은 적당히 해 주시지요. 지금에 와서까지 그런 허언을 관철시키려 하다니. 포기가 느린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허언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실례되는!” 카린은 분연히 대꾸하며 후작으르 노려보았다.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이야말로 허언이 아니던가요. 이분이 제자식이라니 무슨 증거로 그런 얼토당토 않는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알수가 없군요.” “그럼 묻겠습니다만 이 남자가 당신의 자식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제가 폴라님에게서 넘겨받았던 뒤르와 폐하의 아기님이십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페르젠 후작의 인내도 역시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래서야 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바보 같은 자리를 마련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아시겠습니까 시녀장. 그렇다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폴라가 죽었을 때 자기 아이를 안고 있었다는 이 사실은 어찌 되는 겁니까? 뒤르와 폐하의 아기는 틀림없이 모친과 함께 죽은 겁니다!” 카린은 입을 다물고 말에 쫓기고 있었다. 그땎지의 자신있는 태도는 사라지고 눈에 보일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것은 분명 폴라님은 상냥하신 분이니까.... 아기를 잊지 못해서 본가에 돌아가던 도중에 버려진 아기를 어떻게 주워서 돌아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예 그렇게 생각하는 외에 달리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요.” “농담에도 정도가 있소!” 내뱉듯이 후작이 말하자 카린은 질수없다는 듯이 감정적으로 소리쳤다. “농담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버려진 아이 따위는 그리 드물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인내에 인내를 거듭하고 있던 후작이었지만 그 순간 그야말로 인내심의 끈이 끊겨버렸다. 저도 모르게 외쳤다. “주운 아기를 구하기 위해 얼음이 언 호수에 뛰어들거나 할 것같소!” 카린의 모습이 일변했다. 바로 지금까지 감정적으로 일그러져 있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지워졌다. 새빨갛게 홍조를 띠던 뺨이 한순간 얼어붙듯이 창백해지더니 그뒤 점차로 피가 올라왔다. 양손을 불끈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카린은 말했다. “어째서 알고 계신 건가요?” “뭐라고?” “폴라님이 아기를 구하기 위해 한겨울 호수로 뛰어들었다는 걸 어찌 알고 계시는 겁니까?!” 무시무시한 외침이었다. 남자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카린은 딴 사람 같은 형상으로 페르젠 후작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답해 보시지요 후작님. 당신은 분명히 얼음이 인 호수에 뛰어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야기 대체 어디에서 들으신 건지요?” 페르젠 후작은 내심 혀를 차면서도 재빠르게 본 궤도를 찾았다. “어디에서라니.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해 준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식이 죽었을 때의 상태를 자세하게 듣는 것도 조사의 중요한 목적이니까.” “그럼 그 증언을 한 마을 사람은 어떤 이름이었습니까?” “뭐라고요?” “남자였나요 여자였나요 연령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시녀장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대답하세요!” 무시무시한 일갈이었다. 페르젠은 물론이고 그 장소에 있던 자들은 카린의 이 험악한 태도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시녀장. 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 여성의 사인이 어떻다는 겁니까?” 브룩스가 당황하여 물었다. 카린은 브룩스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페르젠 후작을 노려본 채로 말했다. “끼어들지 마십시오 시종장. 저는 지금 폴라님과 국왕의 아이를 죽이려 한 용의자를 심문하고 있는 겁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짜증나는 듯 페르젠 후작은 말했다. “무례한 것도 적당히 해두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런 생각도 못할 소리를 하는 것이지. 웨트카 마을의 사람이 말했다는 것뿐이오.” “거짓말입니다!” 몸속에서 쥐어짜내는 듯한 절규였다. “웨트카 마을의 사람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폴라님은 아기를 안은채 발을 잘못 디뎌 호수에 떨어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폴라님의 진짜 사인을 알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폴라님과 아기에게 손을 댔던 장본인뿐입니다!” “적당히 해두시지요.” 페르젠 후작은 내심의 동요나 초조함을 한 조각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끝까지 상대를 비난하는 자세를 관철하고 있었다. “제가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도 하필이면 폐하의 아이에게 손을 대다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일이 아닙니까.” “그렇게 하라고 명령받았으니까요. 당신은 당시 궁내에서 일하고 있는 젊은 관리였지요. 그리고 폴라님은 당시 궁내의 질투와 선망을 한 몸에 받고 계셨습니다. 이유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시녀장 기다리시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자유입니다. 다만 지금은 그런 것을 논의하고 있을 때가 아니오. 이 남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 여식의 사인이 어떻게 되었든 국왕의 아이는 여식과 함께 죽었단 말씀입니다!” 카린이 웃었다. 뱃속에서부터 넘쳐흘러 멈출 수가 없는 마음 깊이 우스워하고 있는 목소리였다. 몸을 기울이며 히스테릭하게 높은 소리로 계속해서 웃어댔다. 심상치가 않았다. 정부의 각료들은 물론 국왕측마저도 얼이 빠져 버렸다. “결국으 미쳤나!” 짜증스럽게 중얼거린 페르젠 후작을 향해 카린은 겨우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너무나 바보 같은 소리를 하기에 웃은 겁니다.” “무슨 소릴.” “당신이 죽인 것은 국왕의 아기님이 아닙니다.” 카린은 가슴을 펴고 눈물이 배인 눈동자로 후작을 노려보며 입술을 떨면서 단언했다. “제 아들 유벨입니다.” 8장 페르젠 후작의 얼굴이 뻐끔히 허공에 떨어져버린 듯이 변했다. 거의 본심을 보이지 않는 후작이 지금은 그저 말문이 막힌 채 서 있을 뿐이었다. 페르젠 후작만이 아니었다. 그 장소에 있던 누구나가 마찬가지였. 남자는 숨을 삼키고 소녀와 이븐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도라 장군을 비롯하여 국왕과 친밀한 사람들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믿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오랜 침묵 뒤 브룩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시 시녀장. 지금 뭐라고?” 카린은 희미하게 시선을 브룩스에게 옮기고 끄덕였다. “시종장. 저는 처음부터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적 따윈 없다고. 다만 말하지 않은 게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요. 24년전 그때 폴라님은 분명히 아기님을 맡기려 저희집에 들르셨습니다. 여기까지는 말씀드린대로입니다. 그러나 폴라님은 혼자서 마을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맡긴 유벨을 안고 돌아가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브룩스가 외쳤다. “폴라님이 제게 아기님을 맡기신 것은 이 아기를 마을로 데리고 돌아가서는 농군밖에 시킬수없으니 그래서는 이 아기에게도 아기의 부친에게도 죄송스러울 뿐이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왕궁에서 교육을 받도록 하면 어떨까 말씀드리자 왕궁은 안된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곳은 위험하다 아기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알 수 없다 하셨습니다. 제가 유벨을 폴라님께 맡겼던 것은....” 카린은 입술을 깨물며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인내하고 있었다. “폴라님은 임신 이후부터 계속 불안을 토로하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내전의 불온한 공기를 느끼셨던 것이겠지요. 저희집을 방문하실 때에도 밤중에 몰래 찾아오셨을 정도였습니다. 이 아기를 제게 맡겼다는 것이 알려지면 이곳도 위험할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국왕폐하의 아기님을 낳은 일로 신경이 날카로워지신 거라고만 생각해서 그렇다면 이 아기를 데리고 가시라며 유벨을 넘겨드렸던 겁니다.” 최대한 냉정하게 이야기를 하는 카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폴라님이 그 정도로 겁을 먹고 위험을 느끼고 계셨는데 제대로 듣지 않았던 제 탓입니다. 결코 지위가 높지 않았던 여관인 저는 뒤르와 폐하께 아기에 대해 비밀리에 알려드리는 기회를 얻는 데만도 그때부터 1개월이나 걸렸습니다. 그러나 폐하는 폴라님의 마음씀을 안타까워하시며 왕궁에서 키우고 싶지 않다는 의견에 동의하셨고 그리하여 페르난 백작이라면 반드시 이 아기를 훌륭한 기사로 키워주리라 하시며 아기님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3월 말엽의 일입니다.” 카린은 눈물이 흘러 넘치는 눈동자로 다시금 날카롭게 페르젠 후작을 노려보았다. “4월이 되었을 때 아기님이 좋은 양부모를 얻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리고 제 아기를 돌려 받기 위해 웨트카를 찾아가던 저를 기다리고 있던 건 폴라님과 유벨이 두달도 훨씬 전에 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사고라고 믿고 있었습니다만 저는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폴라님은 주의깊고 현명한 분입니다. 아기를 안은 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호숫가 주변에 가까이 가실 리가 없습니다. 저는 마을 사람들에게 한 명도 빠짐없이 물어보고 다녔습니다. 말을 할 수 있는 자라면 한명도 빠짐없이 물어보고 다녔습니다. 말을 할 수 있는 자라면 다섯 살 어린애에게까지 뭔가 눈치챈 일은 없는가 이상한 자의 모습은 보지 못했는가 하고 묻고 다녔습니다. 성과는 거의 없었지만 단 하사람 당시 여덟살이던 아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물소리가 두 번들린 것 같았다고.” 전원이 마른침을 삼키며 카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자라면 흘려 들었겠지요. 혹은 눈뭉치라도 떨어졌으리라 생각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저에게도 확신은 없었습니다. 혹시나 정말로 그냥 사고였을지도 모른다 폴라님은 정말로 발을 잘못 디뎌 유벨을 안은채로 호수에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목숨과 바꿔서라도 이 아기를 지키겠다고 자신의 아기라 생각하며 돌보겠다고 폴라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물소리가 두 번 들렸다는 그 아이의 말에 무언가 의미가 있는건 아닐까.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건 아닐가. 저는 필사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혹시 두 사람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떨어진 것이라면? 아니다. 생후 3개월도 되지 않은 아기가 스스로 움직일 리가 없다. 그럼 누군가가 유벨을 납치해서 호수에 던져 넣었다면? 그 가능성에 눈을 떴을 때 저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카린은 흘러내리는 눈물도 개의치 않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참을수없다는 듯이 남자를 올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용서해 주십시오. 모든 것이 다 저의 경솔한 행동 탓입니다. 폴라님은 당신의 어머님은 제 아기를 지키려다가.... 제 아들을 구하려고 하시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엎어져서 울음을 터뜨린 카린의 어깨를 남자가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감싸안아 주었다. “시녀장.” 정부측 각료들은 단숨에 핏기가 사라진 모습이었다. 그에 반해 국왕파의 사람들 특히 브룩스는 흥분으로 얼굴이 시뻘개져 있었다. “여관장. 그러면 그렇다면 이분은....” 남자의 팔안에서 울고 있던 카린은 얼굴을 끄덕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몇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이분은 진실되고 정통하신 뒤르와 폐하오 폴라님 사이에 태어난 아기님이십니다. 델피니아의 정통한 국왕폐하이신 겁니다.” “거짓말이다!” 각료중 한 명이 역시나 얼굴이 시뻘개져 외쳤다. “지 지금 이야기가 전부 시녀장이 날조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니있나!” 카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날카롭게 그 각료를 노려보며 대꾸했다. “증거 첫 번째는 저희집에서 일하고 있던 하인과 심부름꾼입니다. 각각 카센 마을, 데남 마을에 살아있으니 물어보시면 되겠지요. 24년전 제가 아이를 데리고 집에 돌아온 직후 시골 여자 한명이 나타나 자기 아이를 두고 갔다고 대신 제 아이를 데려 갔다고 증언해줄 겁니다.” 브룩스가 감탄스러운 눈으로 카린을 바라보았다. “증거 두 번째는 시종장. 지금이야말로 카피야의 관을 파헤쳐보라 하지요. 말씀하셨던 대로 그 관에 유벨의 유체는 담겨있지 않지만 거기에 저는 24년전 이분의 몸을 감싸고 있던 아기옷과 폴라님이 왕궁에서 떠나실 때 폐하께서 하사하셨던 팔찌 -그것을 폴라님은 그대로 제게 맡기고 가셨습니다만, 그 팔찌를 넣어두었습니다. 그 어느쪽에도 물론 사자의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 “증거 세 번째는 아시겠습니까. 이분의 머리카락을 깨끗하게 넘기고 얼굴의 아랫부분을 수염으로 덮어 즉위 직후의 뒤르와 폐하의 초상화와 비교해 보시지요. 그래도 아직도 이분이 뒤르와 폐하의 자제분이 아니라 주장한다면 그런 쓸모도 없는 눈알 따위는 즉시 뽑아서 길거리에 던져버리는 쪽이 좋을 겁니다!” 불똥이 튈 것같은 눈으로 카린은 페르젠 후작을 향했다. “24년간 저는 폴라님과 유벨을 죽인 자를 찾았습니다. 제게는 그자가 반드시 왕궁에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아무런 증거도 힘도 없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다른 사람들의 언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관찰하는 것뿐입니다. 왕자님과 공주님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이분의 존재가 처음으로 밝혀졌을 때의 소동은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 누군가는 반드시 반응을 나타낼터 저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당신은.” 카린은 한 발자국 페르젠 후작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이분이 나타났을 때부터 이분을 경멸하고 있었어. 다른 사람들이 골치 아파졌다면서 곤혹스러워하고 눈썹을 찡그리고 있던 것에 비해 당신은 놀라면서도 주변의 난리 법석을 냉소하고 있었지. 논의를 하면 하는 만큼 쓸데없는 짓이라고 저 남자에겐 왕위를 이을 자격 따위는 없다고. 어째서?” 그녀는 다시 한번 후작에게 다가갔다. 표정을 잃은 페르젠 후작은 자그마한 시녀장에게 압도되어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국왕의 서자 따위 당신에게 있어 좀더 다루기 쉽고 이용하기 쉬운 자였을 텐데. 평소의 당신이라면 곧바로 왕으로 맞이해야한다고 찬성하고는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었을텐데.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반대 입장을 취했던 건 이분이 뒤르와님의 아이가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폐하의 아기님은 죽었다는 확신이 당신에게는 있었던 거야. 그때부터 2년. 지금에 와서야 겨우 말할수있어. 아니 24년 전부터 계속이었어.” 똑바로 페르젠 후작을 손가락질하며 카린은 외쳤다. “살인자!” 24년간 참으려 해도 참기 힘들었던 것을 모두 담은 것 같은 외침이었다. “폐하의 총애를 받은 폴라님을 죽이고 폐하의 아기님을 죽이려 꾸민 반역자!” 페르젠 후작은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흙빛이 된 이마에는 땀이 배고 자줏빛이 된 입술을 떨며 시녀장에게 밀려나는 모양으로 뒷걸음질치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대강당에서 도망쳐 나갔다. 남겨진 정부 관료들은 창백해져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국왕군의 용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패배의 굴욕을 각오하고 찾아왔는데 이러한 전개가 벌어지다니. 아무리 그들이라 해도 즉각적인 반응을 할수없었던 것이다. 발로는 흥분하여 얼굴이 새빨개졌고 도라 장군은 환희의 말을 중얼거렸으며 나시아스와 샤미안은 눈을 빛내며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페르젠이 도망쳐간 문을 잡아먹을 듯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어느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누아 후작이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 “핸드릭 백작.” “예?” “이런 때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그 외투 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주름 깊은 백작의 얼굴이 환희에 가득 찼다. “무 물론 기꺼이 돌려드리겠습니다.” 영광의 증명이기도 한 자줏빛 외투를 곧바로 벗어서 내밀었다. 아누아 후작은 내밀어진 것을 받아들고 남자를 향해 물었다. “폐하 주제 넘는 말씀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을 다시 한번 두르는 것을 허용해 주시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네.” 페르젠이 도망쳐나간 문을 노려보면서 남자는 말했다. “근위병단장의 임명권은 국왕에게만 있다. 귀공은 내가 왕이 되기 이전부터 그 직위에 있었고 내 자신은 귀공을 해임했던 기억이 없어. 따라서 귀공은 지금도 그 외투를 두를 자격을 가지고 있을 터이다.” “감사합니다.” 각료들은 더욱 더 떨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 것을 붙들고 늘어질 여유는 국왕측에게 없었다. 국왕파의 사람들 가운데 가장 먼저 현실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역시 소녀와 이븐이었다. 두 사람 모두 그 사이에 잽싸게 저택 입구까지 달려가 수거 당했던 자신들의 무기를 안고 돌아왔던 것이다. “서둘러 포위됐다간 끝장이야.” 도라 장군이 힘차게 끄덕였다. “폐하 가시지요. 우선은 이곳을 탈출하여 본대와 합류해야 합니다.” “알고있다.” 대역전극의 입안자가 된 카린을 보니 긴장의 실이 끊어졌는지 털썩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브룩스가 그런 카린의 옆에 앉아 열심히 격려해주고 있었다. “시녀장 멋졌습니다. 정말 훌륭했습니다!” 남자도 그 옆에 무릎을 꿇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잘해 주셨소 시녀장. 자 우리들과 함께 갑시다. 이곳은 위험합니다.” “아닙니다.” 카린은 힘없이 읊조리며 고개를 저었다. “제 일은 신경쓰지 마시고 부디 저 페르젠을 쓰러뜨려 주십시오. 저는 오늘 바로 이 날을 위해 폴라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주제에 살아있는 염치를 부렸습니다. 이젠 더 이상 아쉬울 게 없습니다.” “안돼.” 남자는 힘차게 말하며 카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지금 여기에서 당신을 내버린다면 죽은 친어머니께도 내 대신 죽게 된 그대 아드님에게도 드릴 말씀이 없어져 버려.” 그리고는 가볍게 카린을 안아 들었다. “폐하!” “싫다고해도 데리고 가겠습니다. 시종장 그대로. 말에 탈수있겠지요?” “물론입니다.” “폐하. 이쪽으로 어서!” 구조를 다 알고 있는 도라 장군이 대강당의 다른 입구를 막아선채 불렀다. 카린을 안은 채 그쪽으로 걸어가던 국왕은 아직도 한무리가 되어 떨고 있는 각료들을 돌아보았다. “나를 왕이라 부를 각오가 없는 자는 이 기회에 어디론가 사라져라. 나는 곧 돌아올 테니까.” 말을 남기고 그는 장군의 뒤를 쫓아갔다. 아누아 후작, 카린, 브룩스까지 더해 총 11명이 된 그들은 곧장 성밖으로 탈출을 계획했다. 밖에 나가서 올려다보니 정문 근처가 시끄러웠다. 아무래도 페르젠 후작은 본궁으로 도망쳐 들어간 듯 했따. “이쪽에 병사가 없는 것이 아무래도 분하군요.” 도라 장군이 이를 갈았다. “아누아 후작. 핸드릭 경. 지금 왕궁에 당신들이 움직일 수 있는 수하는 없소?” 두 사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기껏해야 수십에서 백명 정도의 적은 인원을 모으는게 고작입니다.” “사자를 보내서 돌아오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그래도 시간이 걸리오.” 가장 가까운 것은 역시 코랄에서 15카티브 거리에 세워둔 라모나 기사단과 로아 세력인 듯 했다. “틸레든 기사단도 그 근처에 있을 터. 어떻게든 그곳까지 닿을수 있으면 이쪽에 승산이 있소.” 발로가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런 말을 했다. 그 사이에도 그들은 곽문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달려 내려가는 중이었지만 이곽을 지키는 문은 단단하게 잠겨 엄중하게 경비가 서 있었다. 그것도 그 수가 스무명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페르젠의 숨결이 닿은 자들인 듯 아누아 후작, 도라 장군, 핸드릭 백작이라는 거물들이 줄줄이 얼굴을 보이며 문을 열라 명령해도 반응이 거의 없었다. “죄송합니다. 페르젠 후작 각하의 허가 없이는 이곳을 통과 시켜 드릴 수 없습니다.” “웃기지마라! 언제까지나 그녀석이 시키는 대로 할 셈이냐. 그놈은 뒤르와님의 자손을 살해하려고 꾸몄던 중죄인이다!” 핸드릭 백작이 일갈해도 그들의 반응은 변하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우선은 각하의 허가를 얻지 않으면....” “말이 안 통하는군! 물러나라!” 경비의 지휘를 맡고 있는 병사를 밀어붙이려고 한 핸드릭 백작이었지만 놀랍게도 그 병사는 백작에게 무기를 들이댔다. “무슨 짓이냐?!” 역시나 그 병사도 죄송스럽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대로 무기를 집어넣지는 않았다. “백작님 용서해주십시오. 만약 이 문을 강행 돌파하려 한다면 그 장소에서 여러분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누구의 명령이냐!” 계속 잠자코 있던 남자가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이라는 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병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종제님. 그대가 물어봐주게. 누구를 체포하라고 한 것인지 그리고 이 자들이 대체 어디 소속의 병사들인지를.” “예?” “이자들은 나를 국왕으로 인정할 생각이 없는 듯 하지만 종제님의 말이라면 듣겠지.” 발로는 핫 하고 놀랐다. “너희들 사보아 가문의 병사들이냐?!” 대답을 못하는 것으로보아 정곡인 모양이었다. 사보아 공작가는 발로를 필두로 수많은 친족들을 가지고 있다. 미망인이라고는 해도 모친인 아에라 공주는 광대한 영지를 가지고 있고 발로의 숙부나 비슷한 연배의 종형들은 각각 한 가문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중에서 누군가의 군사임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사보아 공작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이 문을 열어라!” 병사는 그래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공작님. 사보아 가문의 가장인 당신께서 언제까지고 가짜 국왕 따위를 받드셔서야 공작가의 위신에도 누가 됩니다. 무례함을 무릅쓰고 여쭙습니다만 당신이 끝까지 이 남자와 행동을 함께 하시겠다면 저희들은 무력으로 당신을 막지 않으면 안됩니다.” “누구에게 지금 그런 소리를 지껄이느냐!” 발로의 일갈을 뒤집어쓰고도 그들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무척이나 확립된 명령 계통에 지배받고 있다고 보아야 할 상황이었다.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종제님. 미안하네만 시간이 없군. 그대 집안의 병사라는 것이 약간 내키지 않지만.” 소녀가 이미 허리의 검에 손을 갖다 댄 채 말했다. “양보 같은 걸 하고 있을 때야? 뒤를 봐. 본궁에서 몰래 부대가 움직이고 있어. 네가 하지 않으면 내가 한다.” 이븐도 말했다. “도와주마. 나하곤 별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녀석들이니까.” “음. 종제님. 시녀장과 시종장을 부탁하네.” 남자는 계속 안고 있던 시녀장을 발로에게 넘겨주고 검을 뽑아들더니 병사들에게 덤벼들었다. 이븐과 소녀는 그보다 먼저 뛰어든 참이었다. “비켜라!” 도라 장군이 외치며 남은 자들을 배후로 밀어붙이고 나시아스도 검을 뽑았다. 이쪽에 덤비는 자들이 있다면 베어버릴 셈이었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아누아 후작도 핸드릭 백작도 사태를 파악하고 황급히 가세하려 했을 때에는 이미 그들의 몫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무섭게 난폭한 수단으로 그들은 곽문을 돌파하고 삼곽으로 나가 대기시켜 두어던 중대와 합류하여 제5문을 통해 성 밖으로 탈출했다. “단장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중대를 지휘하고 있던 기사가 너무나 황급한 그 모습에 놀라 열심히 말을 달리면서도 물었다. “지금은 설명할 틈이 없다! 추적대가 온다!” 나시아스가 고함으로 대답한 것과 거의 동시였다. 비상 사태를 고하는 뿔나팔이 왕궁에 울려 퍼졌다. 돌아보자 대수문이 열리고 그곳에서부터 기사로 이루어진 부대가 차례차례 달려나왔다. “서둘러라!” 이쪽은 호위병사를 합쳐도 수십명. 아무래도 제대로 싸울 수가 없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저놈의 자식. 드디어 강경 수단으로 나오셨구만!” 뒤를 돌아보며 이븐이 외쳤다. “이곳에서 너를 단칼에 해치우고 증거인멸을 할 셈이야!” “이제 와서 그런 짓을 한다해도 쓸데없다는걸 모르는가!” 핸드릭 백작이 고삐를 조종하면서 외쳤지만 아누아 후작이 엄숙한 얼굴로 부정했다. “아니 지금의 페르젠 후작이라면 이 장소에 있던 각료들의 입을 막는 정도는 쉬운 일입니다!” 그 뒤는 자신들을 말살해 버리기만 하면 그대로 후작의 천하가 된다는 것이다. “지독한 이야기구만.” 이븐이 탄식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들은 필사적으로 말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소녀는 맨 후방으로 돌았다. 바싹 쫓기게 된다면 끝에서부터 맞서 싸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추적대는 갑자기 발을 멈추고 쫓아왔던 기세 이상으로 왕궁을 향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뭐지?” “상관하지마. 서둘러!”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대기시켜 두었던 부대에 도착했다. 아누아 후작, 카린, 브룩스라는 진용들을 보고 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가렌스와 타르보가 놀란 것은 물론이었다. “장군님 대체 이건?”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 마레바에 급히 전령을 보내라! 전 병력을 이곳에 집결시킨다!” 장군만이 아니었다. 발로도 틸레든 기사단에 가세하라는 전령을 보냈고 핸드릭 백작도 자신들의 수하에게 최대한 빨리 달려오도록 사자를 보냈다. 여기까지 오면 수가 많은 쪽이 이긴다. 남은 문제는 시간이다. 어느 쪽이 빨리 상대보다 많은 전력을 모을 수 있는가. 어느쪽이 먼저 상대에게 효과적인 일격을 가하는가. 그 점에 모든 것이 걸려 있었다. 페르젠이 코랄 주변에 모아두었던 세력은 약 2천. 지금의 국왕군의 세력과 비슷했지만 성안에는 예측할 수 없는 세력이 있었다. “마레바에서 증원이 올 때까지는 적극적으로 싸울 순 없다. 어떻게 해서든 버텨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그때까지 약 한 시간 반을 견뎌낼 수 있다면 이쪽의 승리다. “시녀장 몸은 괜찮소?” 카린은 익숙지 못한 말로 계속 달려오는 바람에 완전히 지쳐버렸다. 서둘러 조용한 천막으로 옮기고 브룩스가 옆에 붙었다. “시녀장은 제가 보고 있겠습니다 폐하. 저희들은 신경쓰지 마시고 페르젠 놈의 수하들을 격파해 주십시오.” 브룩스도 이곳이 결전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태에 대한 설명을 황급히 들은 타르보와 가렌스는 용솟음치는 기쁨과 함께 스스로 척후로 나섰지만 곧 험악한 얼굴로 말을 달려 돌아왔다. “아룁니다! 코랄 성 쪽에서 적 세력 접근 중! 대략 3천!” “큰일입니다! 마레바 방면으로부터 탄그레이 세력! 5천!” 탄그레이는 페르젠 후작의 영지였다. 5천의 군사를 돌파하지 않으면 마레바와의 합류는 불가능해졌다. 그것도 성에서 진격하는 세력과의 사이에 협공을 당하게 된다. 국왕군 내부에 긴장감이 달려갔다. 페르젠 후작은 코랄 경비라는 명목으로 불러들인 군사 외에도 근처의 파키라 산속에 놀랍게도 3천의 병력을 숨겨두고 있었다. 그 군사가 지금 그야말로 일제히 일어서 군왕군의 퇴로를 막고 불과 2천명인 그들에게 덤벼들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코랄로부터는 3천의 군대가 밀려온다. 이것이 누구의 명령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는 알수없지만 곽문에서 병사들과 붙었던 일도 있었다. 최소한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당했나.” 남자는 이를 갈았다. 페르젠 후작은 처음부터 얌전하게 자신들을 국외로 내보낼 생각 따위는 없었음이 틀림없다. 최악의 경우 라모나 기사단이나 도라 장군마저도 반역자로서 처분할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나 대규모 군사를 은밀히 불러들일 리가 없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마레바와의 연락이 끊긴 이상 가장 가까운 틸레든 기사단이 달려와 줄 때까지 기다리자면 2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약 30분 후에는 총 세력 8천이라는 대군이 이쪽을 습격해 올 것이다. 아무리 장군들이라 해도 할말이 없었다. 순간 패배를 각오한 그들의 귀에 청명한 목소리가 날아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자 갈까.” 리였다. 이 상황에서 무엇을 어쩐다는 것인지 소녀는 창을 쥐고 허리의 검을 확인하며 그라이아를 불렀던 것이다. “리. 대체 무엇을.” “정면에서 3천. 뒤에서부터 5천의 병사가 온다면 수가 적은 쪽을 상대하면 돼.” 돌아보면서 말했다. “어차피 싸울 거라면 기다리고 있을 필요도 없지. 이쪽에서 치고 나가면 되는 거야.” 누구나 다 말을 잃었다. 그러나 가장 먼저 국왕의 높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발도우의 딸이 말하는대로다. 수수방관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 “폐하!” “달리 방법은 없다.” 남자는 엄숙하게 말했다. “시녀장과 시종장에게는 한 부대를 붙여서 피난시켜라. 코랄을 향해 진군한다!” 마레바 방면에서 나타난 세력에게 공격당하기를 각오하고 그보다 먼저 정면의 적을 격파한다. 혹은 틸레든 기사단이나 근위병단 둘 중 하나가 달려올 때까지 끌 수 있다면 승산은 있다. 소녀는 국왕군의 선두에 서서 다른 자들을 한참 뒤에 떼어놓고 코랄을 향해 달렸다. 그 옆에는 이븐을 중심으로 한 친위대가 있었다. “어쩔 수 없다니까! 부두목하고 같이 있다간 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란다구요!” “그런 말은 저 녀석한테 하라고!” 어느쪽이나 다 기분 좋게 외치면서 말을 달려 똑바로 적군에게 돌격했다. 놀란 것은 정부측 세력들이었다. 국왕군은 마레바까지 단숨에 도망치려 할 테니 그곳까지 추격을 하겠다는 심산이었는데 오히려 저쪽에서 덤벼들어 온 것이다. “웬놈이냐!” “우리들은 델피니아 국왕의 친위대다! 왕에 대해 무기를 향하려는 네놈들이야말로 뭐냐!” 이븐의 질문에 대해 정부군의 무장은 조소하듯이 응했다. “누가 국왕이냐! 애초를 따지면 뿌리도 알 수 없는 비천한 여식이 낳은 들개가 아닌가!” “뭐라고?!” 이 폭언에는 이븐도 격분했지만 그 이상으로 화가 난 것이 리였다. 누구나가 눈을 휘둥그레 뜰 정도로 멋진 흑마에 탄 소녀는 마구잡이로 달려나가 아무 말도 없이 창을 휘둘렀던 것이다. 바로 지금까지 짖어대고 있던 기사의 목이 그 일격으로 몸에서 떨어져 하늘로 날았다. 멋들어진 기량에 병사들도 저도 모르게 물러섰다. 튄 피마처도 뒤집어쓰지 않고 선두의 병사를 쓰러뜨린 소녀는 또렷하게 선언했다. “너희들의 국왕을 들개라고 부를 놈이 그 외에도 또 있다면 앞으로 나와라. 두 번다시 그 입을 놀리지 못하게 해주마.” “이놈이!” “건방지게!” 몇 명이 과감하게 덤벼들었지만 그 정도로는 이 소녀를 막는 데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했다. 커다란 남자들이 다섯 명, 눈깜짝할 사이에 베여 넘어졌다. 추가로 다섯 명이 차례차례 덤볐지만 소녀의 움직임은 무시무시했다. 어느 기사나 일합도 버티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져 버렸다. 그만큼의 활약을 하고도 소녀는 숨결이 거칠어지지도 않았다. 수백은 되고도 남을 선봉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선두가 멈추면 이어서 오는 자들도 발을 멈추게된다. 3천이라는 군사가 단 한 사람의 소녀에 의해 멈춰 버렸다. 소녀의 뒤쪽에서는 국왕군이 차례차례 달려오고 있었다. 선봉의 부대에 그 광경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그들의 동요는 언제 공포로 변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장교 중 한 명이 아군의 주저하는 기색을 보며 날카롭게 외쳤다. “물러서지 마라! 함성을 질러라! 저 국왕군의 뒤에서는 탄그레이의 세력이 곧 달려온다! 그렇게 되면 녀석들은 독 안의 쥐가 된다! 지금이야말로 가짜 왕을 쓰러뜨리고 정통한 국왕을 맞이할 때다! 공격!” 사기를 올리기 위해 함성을 지르려 했던 장교의 가슴을 소녀의 손에서 날아간 창이 꿰뚫었다. 뒤이어 검을 뽑은 소녀는 정부군의 선봉에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뒤쳐지지 마라!” 이븐이 외쳤다. 그곳에 국왕군의 본대가 그들을 뒤쫓아 도착했다. 도라 장군이 있다. 아누아 후작이 있다. 핸드릭 백작이나 발로, 나시아스도 있다. 이제 이렇게 되어서는 설득 따위 무의미하다는 사실은 누구의 눈에도 명백했다. 그래도 아누아 후작은 적장을 향해 분연히 외쳤다. “검을 치워라! 그것은 국왕에 대한 반역이다!” “고귀한 분의 말씀이시지만 국왕이 제대로 된 국왕이어야 하기에 저희들은 일어선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입니다. 저희들도 진언을 드리겠습니다만 곧 탄그레이 군이 달려온 것입니다. 그쪽이야말로 투항을 생각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 말대로였다. 격렬하게 싸움이 벌어지는 사이 국왕군의 후방에 수천의 군사가 나타난 것이다. 국왕군은 정면의 적을 어떻게든 돌파하려고 무시무시한 맹공을 가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적이 나타나는 것이 예상이상으로 빨랐다. 고전하고 있던 정부군에 기세가 붙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새로운 적은 수천. 게다가 정면의 적은 아직도 무너지려 하지 않고 있다. 국왕군은 아누아 후작, 핸드릭 백작을 후방으로 돌리고 일개 병졸로부터 무장에 이르기까지 전군이 하나가 되어 싸웠다. 국왕은 스스로 말을 갈아타고 창을 휘두르며 누구보다도 용맹한 활약을 보였지만 열세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격렬한 전투의 한 순간을 빌려 도라 장군이 험악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진언했다. “폐하. 여기에선 일단 폐하만이라도.”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어느쪽 얼굴도 땀과 먼지 상대에게서 튄 피로 더럽혀져 있었다. “혼자라면 어떻게든 될 겁니다. 저희들이 적을 이 장소에 붙들고 있는 틈에 부디 옥체를 보전해 주십시오.” “장군들을 죽게 하고 나 혼자 살아남아 뭐가 되나?” “하오나 이대로는!” 절체절명의 상황인데도 남자는 굵은 목소리로 웃었다. “걱정하지 말게 도라 장군. 우리에게는 발도우의 딸이 함께 있으니.” “폐하! 아버지!” 샤미안이 말을 달려 돌아왔다. 상당히 거친 싸움이었으리라. 말은 거품을 물었고 샤미안 자신도 크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묶어 올린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여기저기 핏자국이 튄 채로 얼굴은 장군이나 이 남자와 마찬가지로 새카맸다. 그러나 눈동자만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뢰옵니다! 코랄로 통하는 돌파구가 앞으로 한 발짝이면 열립니다!” “좋아 금방 가겠다!” 두 사람 모두 곧바로 고삐를 쥐었다. 코랄 방면의 적을 무너뜨려도 뒤에서 두 배 이상의 세력이 추격해 올 것이다 국왕군이 더욱더 쫓기게 될 것은 일목요연했다. “샤미안. 그 소녀는 어디 갔나?” 국왕의 질문에 샤미안은 뒤를 돌아보며 힘차게 끄덕여 보였다. “괜찮습니다. 승리의 여신은 아직 우리 진 안에 계십니다!” 샤미안은 저 소녀가 있다는 사실로 사기가 고무되어 있었다. 그것을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자그마한 체구에 금발의 소녀는 항상 선두에 서서 적을 접근하지도 못하게 마들며 하나하나 쓰러뜨려 맹렬하게 돌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주변을 지키는 이븐일행 역시 베고 베고 또 베어 넘겼다. 어느 정도 쓰러뜨렸는지 이젠 셀 수도 없었다. 그러나 적은 뒤에서 뒤에서 샘솟듯 쳐들어왔다 .아무래도 사정이 좋지 못했다. “제기랄 끝이 없잖아!” 누이의 프레카가 외쳤다. 분전에 분전을 거듭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남자들의 세배는 활약하고 있는 소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틸레든 기사단놈들 서두르지 않으면 두목의 시체만 보게 될 거라고.” 산발이 된 금색 머리카락은 이마에 달라붙고 가느다란 어깨는 크게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깨로 숨을 몰아쉬면서도 이븐은 그런 소녀를 놀렸다. “헤. 너라해도 지치는 일이 있긴 있구만.” “뭐 조금 머릿수가 많잖아.” 조금 정도가 아니다. 소녀는 틀림없이 백명 이상 쓰러뜨렸다. 전선에서 일시적으로 물러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들이었지만 소녀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버리고는 다시 검은 친구의 목을 두드렸다. 마찬가지로 땀투성이가 된 그라이아가 흘낏하고 어이없다는 눈으로 소녀를 보았다. “어쩔수없어. 이미 타버린 배니까 말이야.” 말이 놀리듯이 콧소리를 올렸지만 싫어하진 않았다. 소녀는 다시 말 위에 올라타고 달려온 국왕과 합류했다. “오오 있었구나!” “있고말고!” 국왕은 달리면서 옆에 있는 소녀에 대해 생각했다. 파라스트 외곽에서 이 소녀와 만나 여기까지 왔다. 모든 것이 전부 그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황을 보니 그들의 운명도 여기에서 끊기려 하고 있었다. 깨끗하게 포기하고 죽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지만 이 남자는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다만 자신만 도망칠 수는 없었을 뿐이다. 이곳에 있는 2천의 군사는 자신을 위해 패배를 각오하고도 싸워주고 있다 .이런 사태만은 회피하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아마도 여기에서 쓰러지게 되리라 각오를 굳히고 있었다. “리!” 달리면서 말을 걸었다. “너에겐 돌아갈 곳이 있는게 아니었나!” 그렇게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지금의 상황을 이 소녀가 모른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래도 도망치라고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전처럼 곁에 있어달라고도 말하지 못했다. 처음 만난 이래로 아직 2개월도 지나지 않았는데 마지막까지 함께 싸워달라고는 그런 사치스러운 바람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소녀는 흘낏 남자를 보고 대답했다. “맹세를 이룰 때까진 돌아갈 수 없지!”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남자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전선에 나선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수비를 굳히고 있는 적진을 힘으로 밀어붙였다. 잠시도 기세가 쇠퇴하지 않는 국왕군에 비해 정부군의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수적인 우세는 압도적이다. 언젠가는 배후에서 안군인 탄그레이군이 나타나 국왕군을 무너뜨려 주리라 믿고 완강하게 수비를 굳히고 있었다. “한놈도 보내지 마라! 화살받이로 막아라!” “활이다! 활을 쏴라! 저게 국왕이다!” “쏴서 떨어뜨려라!” 정부군의 기병대가 창을 버리고 궁기병으로 재빨리 전환했다. 접근전이 되어 같은 편을 쏘는 것을 막기 위해 말의 빠른 발과 높이를 활용하여 거리를 벌렸다. 사선이 생길 정도의 거리를 주면 화살이 비오듯 쏟아질 것이다. 국왕군의 용사들은 어떻게든 거리를 줄이려 했지만 아무래도 이곳이 결전장이라 적도 분발하는 통에 이쪽이 다가가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븐이 창백해져서 달려왔다. 항상 그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타우의 사내들도 함께였다. “큰일이야! 뒤쪽이 한계다!” 드디어 후방이 탄그레이 군이 거리를 좁혀온 듯 했다. 이렇게 되자 후퇴도 할 수 없게 되었따. 남자는 낮게 신음했다. 정면에서는 궁기병대가 자세를 갖추고 이쪽으로 활시위를 향하고 있었다. 후방에서는 적군의 함성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까지인가 하고 각오했다. 바로 그때였다. 국왕군을 향해 활을 당기려 했던 기병들이 급격히 태세를 무너뜨리며 낙마했다. 그것도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부군의 궁기병들은 차례차례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무슨 일이냐?!” 화살이었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화살이 정확하게 그들을 노려 쓰러뜨렸던 것이다. “국왕군의 가세인가!” “어디에서 쏜 거냐!” 정부군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국왕군도 의외이 응원군에 놀라고 있었다. 애초에 구원자의 모습 자체가 보이질 않았다. 어디에서 활을 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위다!” 소녀가 외쳤다. 그들의 왼쪽에 높게 치솟아 있는 파키라 산, 그 산중턱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 내려오는 부대가 있었다. 난공불락의 파키라 산에도 드물게 넘나들 수 있는 고개가 있다. 소녀 일행이 페르난 백작을 구출하러 나섰을때 넘어갔던 길이었다. 매우 어려운 여정일 터인 그 길에 지금 수백 명 아니 수천명으로 보이는 군대가 모습을 드러내고 여유 있게 달려내려오고 있었다. 이븐의 옆에 있던 브란이 부르짖었다. “부두목! 저기를!” 군사의 가운데에 깃발이 보였다. 좌우는 붉은색 위아래는 녹색. 그 두가지 색으로 물들여진 위에 십자가 그려진 깃발이 커다랗게 펄럭이고 있었다. 타우의 남자들이 일제히 외쳤다. “자유의 깃발이다!” 파키라를 넘어서 나타난 응원군을 보고 있는 사이에 고개를 넘어 달려와 국왕군의 후방을 공격 중인 탄그레이 군에 덤벼들었다. 측면에서 치고 들어온 급습에 5천의 수를 헤아리는 탄그레이 세력도 크게 흔들렸다. 상대의 정체를 알수없다는 불안감도 있었다. 9할의 승리를 눈앞에 두었던 지휘관은 이를 갈며 외쳤다. “어디 세력이냐?!” 거의 전원이 기마였지만 장비는 모두 제멋대로였다. 말에도 아무런 장식이 달려있지 않았다. 본적도 없는 깃발이 휘날리고 있을 뿐 가문 이름을 표시하는 문장도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세력은 무서울 정도로 강했다. 5천이라는 군세의 횡부를 물어뜯을 듯한 기세로 달려들어 준열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전투를 밀어붙였다. 상대는 신경도 쓰지 앟고 사람을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는 양 산산조각으로 흩어버리는 그 용맹함에 고전을 강요당하고 있던 국왕군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폐하! 저것은 대체 어디의 수하들입니까?!” 뒤쪽에서 몰리고 있던 아누아 후작, 핸드릭 백작이 달려와 물었지만 남자는 대답하는 대신 날카롭게 지시를 내렸다. “당황하지 마라! 지금이야말로 호기다! 코랄로 향할 돌파구를 전력으로 열어라!” “옛!” 분명히 그말대로였다. 멍하니 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후방에 대한 걱정이 없어진 장군들은 코랄 방면을 무너뜨리는것에 전력을 다하러 갔지만 남자는 그 장소에 멈춰섰다. 소녀와 브란, 사르지와 달리가 그곳에 있었다. 국왕도 남자들도 말에서 내려 갑자기 나탄나 응원군이 무슨 말을 해올지를 기다렸다. 소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지만 역시 그들을 따라 말에서 내렸다. 의문의 군대로부터 몇 기가 떨어져 나와 국왕군의 진지를 향해 똑바로 가로질러 다가왔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자 남자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마이키인가!” 상대는 끄덕여 보였다. 로쉐의 가도에서 헤어졌던 타우의 산적, 그들식으로 말하자면 자유민인 아산의 마이키였다. 타우의 사내들이 새삼 환호성을 올리며 동료들을 맞이하는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마이키의 옆에 있는 말 탄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페노아의 두목이다!” “질 두목!” 한눈에 의문의 군대의 지휘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그 남자는 그들을 보고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브란. 그녀석은 뭐하고 있나?” “자 잠깐 기다리십쇼. 부두목 부두목! 질 두목이 행차하셨소!” 이 말을 들은 이븐이 달려오더니 그들과 마찬가지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질! 당신 이런 데서 뭐하고 있는거야?” “뭘 하고 있냐니 그것 멋진 인사로군. 한 마디 해 주러 온 거다.” “뭐라고?” “이븐. 너희 국왕은 어디 있느냐?” “이놈이 그건데.” “오오 이쪽이신가. 그거 실례했군.” 위에서 아래까지 새카매져 있는 남자를 보고 이 자가 국왕이라고는 눈치채지 못했던 듯했다. 말 위에 앉은 자세 그대로였지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타우의 자유민을 대표하여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페노아의 질이라고 합니다.” 페노아의 두목은 타우의 두목들 중에서도 굴지의 실력자라더니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남자는 두목이라고 하는 말에 장로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상대는 의외일 정도로 젊었다. 사십 근방으로 밖에 안보였다. 가느다란 강철처럼 단단하게 생긴 장신에서는 위압감마저 풍겨 나왔고 마른 얼굴이면서도 조각상처럼 깊고 정후한 생김새. 지성이 숨겨진 날카로운 눈동자는 도저히 일반적인 산적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에 대한 말투도 정중하기는 하지만 경외하는 기색은 없었다. 일단 예의를 지켜 인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금방 알수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 상대를 향해 정중하게 예의를 표시했다. “월 크리크 로우 델핀이오. 위험하던 차에 구원을 받은 것에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오.” “황공합니다.” “하지만 어째서 타우의 자유민이 내가 처한 위기를 구해 주었는지 지금 한창 이해하기 어려워하던 중이오. 당신들은 어느 국가와도 특별한 관계를 가지지 않고 자신들의 자치를 유지하고 있다고 들었소만.” 질은 끄덕였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실은 이렇게 조력하는 것이 폐하를 위한 일인지 어떨지 저희들로서도 알수가 없습니다. 다른 양쪽 대국이 폐하와 저희들 사이에 밀약이라도 체결된 것이 아닌지 착각하게 되는 것도 필연적이니까 말씀입니다. 하지만 폐하는 저희들에대해 관대한 이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우선은 그 은혜를 갚기위해 왔다 생각해 주십시오.” 듣고 있던 이븐이 뭐라 말하기 힘든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부관의 그런 모습을 모르는 척 하며 질은 이어서 말했다. “추가로 만약 폐하가 군사를 필요로 하신다 말씀하신다면 타우의 자유민 삼천 명을 지금 곧 빌려드릴수 있겠습니다. 물론 무료로 드린다고는 할수없습니다만 실력에 있어서 만큼은 보신 그대로입니다.” 남자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어서 큰 소리로 웃었다. “나보고 당신들을 용병으로 고용하라는 거요?” 질도 보기좋은 입가의 수염을 들어 올리며 살짝 웃었다. “강매는 안합니다. 뭐라 해도 저희들은 악명높은 타우의 산적이니까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탄가나 파라스트라는 양대국이 이상한 소리를 해올지도 모릅니다. 필요없다 말씀하시면 즉시 타우로 돌아가겠습니다.” “쓰도록 하지.” 이번엔 질이 눈을 크게 떴다. 남자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였다. “다만 지금의 내겐 당신들에게 치를 보수가 준비되어 있지 않소. 후불이라도 상관없다면 한 사람당 사금 한 포대씩 피르도록 하겠소. 어떤지?” 페노아의 질은 말 위에서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곧 뻔뻔스럽게 웃으며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리고 저 깃발은 당신들의 상징인가?” “예. 타우에 사는 자 모두가 의지로 삼고 있는 물건입니다. 타우의 녹색과 우리들의 핏빛을 나타내는 자유의 깃발이지요.” “그럼 내가 왕좌를 탈환했을 때엔 저 깃발을 왕의 깃발과 함께 걸어두도록 하겠소.” 말머리를 돌리려던 질이 놀란 듯 또한 재미있다는 듯 돌아보았다. “산적의 상징과 왕의 깃발을 함께 나란히 걸어두겠다 하시는 겁니까?” “나라를 구해준 영웅들의 깃발이지.”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도 얼굴은 웃고 있어도 눈은 웃지 않던 질이었지만 처음으로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럼 첫 번째 봉사로 저 적들을 내쫓아버리고 오겠습니다. 저희들의 지휘관을 데려가도 상관없겠습니까.” “지휘관은 당신이 아닌가?” “아니요. 여기에 있습니다.” 시선을 받은 이븐이 놀라서 말했다. “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우리들은 그런 생각으로 온거다. 네가 국왕의 친위대장인지 뭔지로 자리잡았다는 소리를 들으니 이건 좋은 투자거리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뭔가가 뒤통수를 스치더군. 하지만 사금 한 포대씩이라니 놀랐다. 마이키가 한 말대로 별난 임금금이군.” 질은 처음으로 호쾌하게 웃었다. “자아 잽싸게 말 타고 오거라. 우리들은 지금부터 네 부하다. 지시를 내리지 않으면 봐주는 것 따위 없는 놈들이니 말이다. 무슨짓을 어떻게 저지를지 모른다.” 멍청해져버린 이븐을 옆에 매단 채 질은 말에 박차를 가해 탄그레이군을 쫓아내고 있는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남은 마이키가 말 위에서 이야기를 걸어왔다. “이븐. 두목은 분명히 진심이다. 20명의 두목들끼리 얘기를 나눠서 결정한거야.” “나한텐 농담으로밖에 안들려. 타우의 자유민이 용병업에 손을 대도 되는거야?!” “가끔은 괜찮지 않겠냐고 이야기가 됐어.” 이븐은 머리를 감싸쥐었고 그 옆에서는 남자가 부러 하듯 이야기했다. “그런 사람들한테 별나다는 소리를 들어야 될 것 같진 않은데 말이다.” “말하지마! 괜히 더 머릿속이 이상해진다구! 에에이 젠장! 가자 자식들아!” “예이!” 이미 모여서 엉덩이를 들썩이면서 사태의 진전을 살피고 있던 타우의 일곱 사내들은 이븐과 함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달려나갔다. 그리운 얼굴들을 눈앞에 두자 피로도 어딘가 날아가 버린 듯 했다. 수로 치자면 탄그레이 군이 우위에 있었지만 기습을 받은 데다 산적일로 단련된 속공과 강철 같은 결속력으로 달려오는 타우의 자유민을 상대로 하자니 아무래도 사태가 좋지 않았다. 산적 부류의 전법은 하나하나 이름을 대는 짓은 하지 않는다. 일격 필살이란 기세로 맹렬하게 돌진하는 것이다. 승리가 당연시되는 전투를 하고 있었던 탄그레이 군과의 기백이 틀렸다. 승부가 안 된다고 본 병사들은 즉시 혼란해져서 우물쭈물하게 되었다. 지휘관이나 무장들은 힘차게 목소리를 높이고 진영을 돌아다니며 아군의 혼란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타우 세력의 공격이 너무나 빠르고 날카로워 도저히 쫓아갈 수가 없었다. 혼란은 점점 넓게 퍼져나가 한 무리로 뭉쳐있던 군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결국은 도주하기 시작했다. 코랄로 통하는 가도를 막고 있던 정부군은 이것을 보고 완전히 전의를 상실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이윽고 마레바에서 라모나 기사단, 추가로 틸레든 기사단이 달려왔을 때에는 2천의 국왕군은 8천의 적군을 멋지게 격퇴하고 타우의 자유민들과 함께 승리의 함성을 올리고 있었다. 9장 뒤늦게 들려온 틸레든 기사단의 용사들은 단장인 발로가 국왕에게 귀순했다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라모나 기사단의 친구들과 어깨를 감싸안으며 기뻐했다. 그 중에는 물론 가렌스와 아스틴의 모습도 있었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근위병단도 아누아 후작의 부름 아래 계속하여 국왕의 아래에 집결했고 국왕은 즉시 제1, 제3, 제4군단을 코랄 성으로 향하게 하여 상황을 탐색하도록 시켰다. 성에서 나온 병사들은 끝까지 국왕을 적대시하려는 태세를 무너뜨리지 않았으나 그러한 세력은 성내에서도 소수파가 되어가고 있었다. 탄그레이 군은 후작의 직속 부하들이므로 끝까지 주인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한 것이지만 페르젠 후작이 무언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애초부터 개혁파를 쾌히 생각지 않았던 세력은 마침 잘됐다는 듯 국왕군에게 달려와 붙었다. 삼곽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은 환희하며 근위병단을 맞이하였고 이곽에서는 국왕군에게 곽문을 넘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병사들 사이에 격렬한 논의가 일어났다. 이 계층에서도 개혁파에 불만을 가진 자들은 다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개혁파를 지지하는 대귀족 밑에서 일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전역에서 말사움이나 다툼이 일어난 듯 했다. 척후는 달음질쳐 돌아와서는 그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아무래도 곽문을 굳게 잠그고 있는 상황이라 정확히는 알 수 없었사오나 성내의 혼란은 상당한 듯 합니다. 삼곽에 몰려있는 병사들도 계속해서 이곽에 투항하라 요청하고 있고 폐하가 여기까지 나오셨다는 사실도 들어 알고 있을 테니 폐하를 지지하는 병사들이 다수를 점하는 것도 시간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음 곽문이 열린다면 곧바로 병사를 진군시키도록 군단장에게 전해라.” 지금 국왕군은 코랄 성 밑까지 들이닥친 상태였다. 도시의 유력자들은 기뻐하며 국왕을 맞이했고 모두가 자신들의 저택을 국왕군의 숙소로 제공하였으며 시민들은 돌아온 국왕을 한번이라도 보겠다고 소동을 벌이고 있었다. 국왕군의 용사들 역시 지금 금방이라도 공성전을 벌이겠다며 의욕에 가득했지만 남자는 곽문이 안에서부터 열리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상대는 난공불락의 코랄 성이다. 억지로 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이후의 일을 생각하면 성을 파괴하는 것은 결코 득책이라 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국왕군의 용사들과 타우의 산적들 사이에 첫대면이 이루어졌고 장군들도 놀랄 일막도 있었다. 대화삼국에서도 뜨거운 감자 취급을 받는 자들이다. 질이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다른 양대국의 반응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국왕은 그런 일은 정권을 되찾은 뒤에 걱정하면 된다면서 상대하지 않았다. 피난시켜 두었던 카린과 브룩스를 시민들이 제공한 집 중 하나에 수용하고 국왕군의 주된 진용은 다시금 카린 주변에 모여들었다. 이번의 대 역전은 오로지 카린의 공적이라 말해도 좋았다. 페르젠을 실각시킨 것만이 아니다. 국왕의 자식을 살해하려 했다는 범죄 경력까지 폭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린은 낮 전투의 피로가 몰려들었는지 장기간의 심문에 의한 피로가 쏟아졌기 때문인지 지금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당신에겐 뭐라 고맙다 말해야 할지 모르겠소.” 남자는 말했다. 간병을 하고 있던 브룩스도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시녀장에게는 저도 완전히 속았습니다. 아드님의 일은 안되신 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아드님이 폐하를 지키신것과 마찬가지지요. 대단한 공적입니다.” “시종장.” 카린이 누운 채로 나직하게 말했다. “저는 그런 말을 듣는게 싫어서 아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브룩스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승리의 기쁨에 들끓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또한 저도 모르게 눈길을 내리깔았다. “폐하께서는, 뒤르와 폐하께서는 그 일로 저를 가엾게 여기시어 궁내에서 일할수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월님의 목숨을 구할수있었으니까요. 그 아이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남즐이 들으면 뭐라 할까요. 자신의 아이를 출세의 도구로 사용했다고 말할게 틀림없습니다.” “.......” “폴라님에게 있어 월님이 보물이셨듯이 저에게는 유벨이 보물이었습니다.” 카린의 뺨에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자는 카린의 베갯머리에서 힘차게 말했다. “시녀장. 아드님의 원수는 반드시 갚겠소. 당신은 이미 충분히 싸웠어요. 이젠 충분히 쉬기만 하면 됩니다.” 카린은 희미하게 웃으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뒤르와 폐하께서는 단 한번 폐하를 만나러 스샤에 가셨던 적이 있습니다.” 남자는 놀랐다. 전혀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언제 일입니까?” “당신이 열다섯 살이 되셨던 봄입니다. 국왕으로서가 아니라 신분을 감춘 채 여행 중인 귀족을 가장해서요. 폐하는 그 뒤에 저 유서를 준비하셨습니다.” 변경 지방 귀족의 아들이었던 월은 단 한번도 국왕을 알현한 일이없다. 진짜 아버지는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죽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버지쪽은 은밀히 아들을 만나러 왔던 것이다. 카린은 크게 숨을 토해냈다. “폐하는 당신을 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셨던지. 그리고 어찌 그렇게나 훌륭하게 키워주었는지 모르겠다며 페르난 백작님을 칭찬하셨습니다. 북쪽 탑에 투옥되신 백작님께는 정말 죄송스러운 일을 했지만 이젠 어느 누구나 그분을 가장 큰 공로자라고 칭송하겠지요.” 남자는 순간 말을 잃었다. 도라 장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고 샤미안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나시아스와 발로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아누아 후작과 핸드릭 백작도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했다. 소녀는 잠자코 카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에 카린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 “설마 페르난 백작님이 설마....” “시녀장.” 남자는 시녀장의 머리맡에 몸을 굽히며 말했다. “지금은 회복에만 전념하시오. 당신의 싸움은 끝났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들 차례요.” “저 저 때문입니다!” 카리은 듣지 않았다. 핏기가 빠진 입술을 떨며 외쳤다. “제가 자식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던 탓에, 폴라님도 제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페르난 백작님마저! 그 그런데 저는 혼자서 태평하니 살아남아....” “시녀장!” 남자는 딱 잘라 말했다. “당신은 나를 왕이라 말해주었소. 그렇지?” “예. 예에.” “그렇다면 왕의 명령이오. 괜시리 한탄하는 것도 자신을 비하하는 것도 허용치 않겠소. 하물며 자해 따위는 생각지도 말 것이오. 결코 용서하지 않을테니.” “폐하....” “시녀장은 아직 여러 가지로 해 주어야 할일이 많으니까. 당신이 아니면 나는 내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말이오.”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카린의 어깨를 잡았다. “페르젠을 쓰러뜨리면 그걸로 끝이 아니오. 그게 시작이지. 나는 유벨 대신은 되지 못할지 모르지만 당신의 역할은 이제부터요.” “그렇고말고 시녀장.” 도라 장군도 힘차게 끄덕였다. “악당에게 점령당했던 백아궁이 해방되는 것도 시간 문제요. 그렇게 마음 약한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럼 그렇고 말고.” 병자의 머리맡이라는 것도 잊고 그런 이야기를 용맹스럽게 나누고 있자니 성으로부터 다시 한번 사자가 달려왔다. 바로 지금 곽문이 해방되었다는 보고였다. 국왕군은 즉시 본거지를 이곽으로 이동하고 성내를 제압하기 시작했지만 저항다운 저항을 하는 자도 거의 없었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이곽에 남아있던 귀족들은 양손을 번쩍 들고 국왕군을 맞이했다. 그중에서는 페르젠 후작이 더 이상 볼일이 없다고 판단하여 폐문 시킨 타뮤 남작 부자도 있었다. 부친인 남작은 남자의 발 아래 납작 엎드려 감사를 빌었고 아들인 치폰은 고개를 숙이면서 무척이나 복잡한 얼굴로 남자 옆에 있는 샤미안을 바라보았다. 귀족들 중에서는 국왕에 대해 불만을 가진 자들도 아직 있었겠지만 아누아 후작을 비롯해 국내에서도 이름 높은 진용들이 국왕을 지지하자 이 이상 반항하는 것은 득책이 아니라고 판단한듯했다. 국왕군은 순식간에 이곽을 장악했지만 그곳에서 멈춰야만 했다. 페르젠 후작은 투항 권고를 무시하고 일곽에 들어앉아 끝까지 저항 태세를 보였던 것이다. 일곽을 지키는 제1성벽은 그 자체가 거대한 요새라 해도 좋았다. 충분히 폭을 둔 두터운 격벽의 내부에는 군대가 자유로이 이동할수 있도록 통로도 건설되어 있었다. 격벽의 바깥에는 화살구멍이나 투석창이 빼곡하게 나 있고 균일한 간격으로 공격탑도 만들어져 있었다. 지금은 그 공격탑에도 화살구멍에도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페르젠은 무척이나 공을 들여 일곽의 병사들을 감독했는지 여기까지 쫓기면서도 그들은 전투 의욕을 잃지 않고 있었다. 섣불리 다가가면 화살이 비가 되어 쏟아져 내릴 것이다. 국왕군은 하루 내내 일곽의 병사들에게 투항을 권고했다. 그러나 아누아 후작, 사보아 공작, 발로라는 인물들이 되풀이 토로해도 그들은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적이지만 경탄스럽다 아니할 수 없군요.” 그 굳건한 결속과 페르젠 후작에 대한 충성심에는 사람을 감독하는 일로는 누구에게도지지 않는 아누아 후작까지 혀를 내둘렸다. “감탄하고 있을 땝니까 아누아 후작. 탄그레이 군이 언제 포위망을 형성해 올지 알 수 없는 거요.” 초조하게 발로가 말하자 나시아스도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탄그레이만으로 끝난다면 좋겠지만.” 아누아 후작도 끄덕였다. “저도 그 점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페르젠 후작은 자신의 영지만이 아니라 각지의 대영주들과 은밀한 관계를 맺어두었을 겁니다.” “그 필두가 제 친족들이겠죠.” 발로는 곽문에서의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리고는 이를 갈고 있었다. “어머니이건 대숙부건, 그렇지 않다면 종형 중 누군가가 끝까지 나를 왕좌에 앉히려고 꾸미고 있는 거야. 바보 같은 자들! 누가 자기들 맘대로 될까보냐!” “아니 일단 그 걱정은 없어졌다 봐도 될 겁니다. 대세는 분명 폐하께 이롭게 움직이고 있는 데다 그렇다면 사보아 가문 정도의 대귀족이 반역자의 오명을 나서서 쓸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요.” 라고 브룩스가 말했다. 이런 논의를 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로 그들은 결정적인 수단을 갖고 있지 못했다. 제1성벽에는 병사들이 촘촘히 늘어서서 가까이 다갈 틈을 주지 않았다. 일곽의 식량 창고에는 2년이나 3년은 충분히 농성할 수 있을 비축분이 있다. 무기에 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그 즈음의 국왕은 화살의 사정 거리를 피해 굳게 닫힌 정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옆에 붙어 있던 이븐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의외로 질긴데 그래.” “음.” “이 문 어떻게 안 되는 거냐.” “밖에서 억지로 여는 건 무리야. 이 바깥문을 연다 해도 그 사이엔 강철로 된 내리닫이 격자가 있다. 이 수십년 동안 한번도 내렸던 적은 없는 것 같지만 지금은 틀림없이 내려져 있을 거야.” “문이 안 된다면 다른 곳은 어때. 저 아가씨는 이 벽을 한번은 넘어갔잖아.”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에 와선 무리일 거다. 방심하고 있었던 그때와는 달라. 이 성벽 안에는 병사들로 꽉 채워져 있다. 아무리 저 아이라도 혼자서는 어쩔 수 없을 거야.” 검은 옷의 친위대장은 분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짧은 머리카락을 쥐고 흔들었다. “골치 아픈 것만 만들어 붙이는구만.” “이곳은 애초부터 난공불락이라고 일컬어졌던 전투용 名城명성이라고.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말이야.” “역시 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건가.”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린 이븐을 남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돌아보았다. “이븐?” “월 각오해 두라고. 무사히 임금님 자리에 앉게 되어도 너, 저 아가씨한테는 평생 걸려도 못 갚을 정도로 빚이 생길 테니까.” “무슨.” “파키라를 넘어가면 된다고 가뿐하게 말하더라고. 지금 아래로 살펴 보러갔어.” 남자는 눈을 크게 뜨고 본궁의 배후에 울창하게 자리잡은 파키라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넘는 것과는 이야기가 틀려! 본궁의 배후는 사냥꾼들에게도 입산 금지 구역이라고!” “그러니까 완벽한 원시림에 길다운 길도 하나 없어. 게다가 경사는 끔찍하게 급한데다 발 디딜 곳도 만만치 않지. 군대를 이끌고 통과할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렇지?” 되새김질하듯이 이븐이 말하고는 뻔뻔스럽게 웃어 보였다. “타우의 자유민을 우습게 보지마라. 질이 그녀석하고 같이 갔어. 지나갈 수 있을지 어떨지 그걸로 확인은 될 거다.” “하지만 지나간다 해도....” 남자가 말하려는 그때 페노아의 질이 옆에서 다가왔다. 의복의 여기저기에 작은 나뭇가지나 풀입을 묻힌 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븐이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어땠어?” “어렵군. 타우에 비하자면 작은 언덕 같은 거지만 발 밑이 여간 나쁜 게 아니야.” “타우의 자유민이라도 파키라에는 덤빌 수 없는 건가.” 이븐의 말에 질은 낮게 웃어 보였다. “그런 소린 안 했다. 이쪽의 폐하가 혼자서 넘어가신 산이니까 말이야. 본업으로 삼는 우리들이 간단하게 항복해서야 곤란하지.” “하지만 질 공. 나는 분명 저 산을 넘어가긴 넘어갔지만 그걸로 고작이었소. 그 뒤엔 싸울 힘 같은 건 한 조각도 남지 않았단 말이오.” 남자가 말하자 질도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저 산을 전력으로 주파했다면 무리도 아닙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이번에는 싸울 전력을 남겨두지 않으면 이야기가 성립되질 않는다. 어떻게 본궁까지 내려간다 해도 피로에 절어 검을 휘두를 수 없는 상태라면 의미가 없다. “리는 어떻게 됐어? 함께 온 게 아닌가?” 이븐의 질문에 페노아 두목의 단정한 얼굴이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타우의 실력자에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미약한 낭패감과 그 이상으로 미약하지만 경외심에 가까운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던 것이다. “폐하께 여쭙겠습니다만 저 아가씨는 대체 뭡니까?” “저 소녀는 발도우의 딸이자 승리의 여신이고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자요.” 질의 눈이 살짝 둥그렇게 되었다. 이븐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질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녀석 또 뭔가 한 거야?” “늑대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수렵이 금지되어 짐승의 수가 많다는 것도 파키라를 지나가기 힘든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리는 그러한 짐승들에게 길을 물었다고 했다. “아가씨 몸뚱이보다 한 아름은 더 커다란 놈까지 있었는데 말이지. 꿈쩍도 않더군. 그 지역의 사냥꾼이라도 자세히 모를 파키라도 그들이라면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말하더군. 그거야 뭐 분명히 그렇긴 하겠지만.” 질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리들이라도 그런 짓은 흉내도 못내. 인간이라면 결코 할 수 없을 일이지.” 세 명은 잠자코 파키라를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석양이 그 반대편에 숨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 파키라에 안겨 있듯 코랄 본궁의 하얀 모습이 있었다. “폐하!” 이곽 아래쪽에서 타르보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발도우의 따님이 돌아오셨습니다!” “곧 가겠다!” 그에 응하여 발걸음을 돌리려 한 국왕은 문득 고개를 돌려 본궁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곽까지는 되찾았다. 남은 것은 본궁 뿐이다. 그리고 저 안에는 페르젠과 제나 제사장이 있다. 반드시 저곳에 가고 말겠다. 결의도 새롭게 이븐 일행의 뒤를 쫓았다. 소녀는 하루 종일 파키라 안을 돌아다녔던 것 같았다. 온몸에 나무열매나 작은 나뭇가지를 묻히고 돌아왔다. 지도다운 지도가 왕궁에서조차 없는 파키라 산이지만 국왕군의 진용을 앞에 두고 간단하게 길목을 그려 보았다. “하루 걸리면 이곳에서 이렇게 지나서 본궁의 뒤쪽으로 나갈 수 있어. 물론 제대로 된 길이 아니야.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지나갈수 없지만 타우의 사람들이라면 어떻게든 될 거야. 게다가....” 지도로 그린 본궁의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에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것 같은 건물이 있었어. 본궁에서 꽤 멀지만 그곳부터는 일단 다져져 있어. 돌입하기엔 딱좋아.” 핸드릭 백작이 눈을 크게 떴다. “너 설마 파키라를 올라가서 西離宮서리궁까지 갔다 온 게냐?” “서리궁이라고 부르는 거야? 일층 건물에 하얗고 지붕이 평평하던데.” 모여있던 국왕군의 주요 인물들이 하나같이 동요를 보였다. “틀림없어. 몇 대 전의 국왕이 피서를 위해 만들어둔 별궁이다. 너 다시 한번 거기까지 갈 수 있겠지?” 국왕이 확인했다. “당연하지. 내가 안내할 테니까 대충 열 명 정도 와 주면 좋겠어. 어떻게든 해서 안에서 정문을 열테니.” “쉽게도 말한다.” 삼천 명의 지휘관 역할이 떠맡겨진 이븐이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알겠냐. 서리궁은 여기, 정문은 여기라고. 충분히 1카티브 가까이 돼. 사이엔 병사들이 드글드글하고. 그런 곳은 단 열명이서 어떻게 돌파해서 정문까지 간다는 거야?” “우리들은 들키지 않게 몰래 숨어드는 거야. 그 뒤에 삼천 명의 타우 사람들이 일부러 위세 좋게 돌입해. 그렇게 하면 병사들의 주의는 전부 파키라로 향하겠지.” 질이 갑자기 힘이 빠진 얼굴로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때론 굉장치도 않은 소리를 하는 꼬마라고 생각했으리라. “그 사이에 너희들을 포함한 열 명으로 정문을 열겠다는 거군?” “응.” 도라 장군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작은 전사여. 간단하게 말하지만 그 정문은 내문과 외문 사이에 강철로 된 격자가 내려져 있다네.” “그럼 안에서 열 때 내문을 열고 격자를 끌어올린 다음에 외문이야?” “아니. 도르래는 문 양쪽의 탑에 있어 동시에 조작하게 되어 있어. 먼저 격자를 올리고 내문을 열고 외문일세. 허나....” 장군은 골치 아픈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 도르래는 커다란 장정들이 다섯 명씩 동시에 덤벼들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거창한 물건이지. 내문 외문이라 해도 거대한 빗장을 질러 두었고. 이것도 어른 남자가 최소한 두 명은 매달리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걸세.” 아누아 후작도 단정한 얼굴에 어려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 리라고 했지.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열 명으로는 힘들지 않을까. 최소한 열명은 더 데리고 가는게 어때?” “너무 루리 지어 가면 들켜버려.” 열세살의 소녀를 중심으로 국왕군은 작전회의가 한창이었다. 대부분의 진용들은 진지하게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발로는 아직도 벌레 씹은 표정이었다. “파키라를 넘어가는 길이 밝혀졌다면 거기에서 일군을 밀어 넣으면 되지 않습니까. 별로 이런 소녀나 산적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을텐데.” 이 말에는 이븐이 흰자위를 드러냈다. “말씀은 좋습니다만 기사단장님. 리가 말하는 대로 길이라고 할수도 없는 길이랍니다. 갑옷으로 몸을 둘러싼 기사님들이라면야 본궁에 내려가기도 전에 지쳐 떨어져서 말하고 같이 찌그러져 버릴 게 틀림없다 그거죠.” 발로의 얼굴에 즉각 험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산적 조무래기가 우리를 능멸할 생각이냐.”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뿐입니다만.” “재미있군. 네 녀석이 어느 정도나 되는 놈인지 한번 볼까.” “해보시겠습니까?” 이번엔 검을 가지고 있는 발로가 즉시 허리에 손을 댔고 이븐도 푸른 눈동자를 심상치 않게 번뜩였다. “그만두지 못할까 두사람.” 국왕이 중간에 끼여들자 두 사람이 맞춘 듯 한꺼번에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 녀석이!” 멋진 합창이었다. “그만두라고 했다. 쓸데없는 일로 다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븐도 말이 지나쳤지만 종제님의 제안도 무리가 있네. 파키라의 길 안내는 리가 아니면 불가능하고 산속을 은밀히 넘어가는 데 타우의 자유민 이상의 적임자는 없어.” 발로는 아직도 기분좋지 않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신참 주제에 이 녀석들 태도가 지나칩니다. 형님께 무례하게도 마치 친구한테 대하는 양....” 여기에서 리가 슬쩍 끼여들었다. “나는 그쪽 태도가 훨씬 잘난 걸로 보이는데.” “뭐라고?” 소녀는 장난스럽게 노래하듯이 말했다. “그도 그럴것이 틸레든 기사단장님인 우리 발로야는 대체 누구 덕분에 친구를 죽이는 것도 형님을 죽이는 것도 하지 않고 끝날 수 있게 된 걸까나?” 발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는 점점 얼굴에 피가 올라 목까지 새빨개졌다. 뭔가 대꾸하려고 해도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나시아스와 국왕이 동시에 웃음소리를 뿜어내고 폭소해 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핸드릭 백작이나 도라 장군은 배를 잡고 유쾌하게 웃었고 아누아 후작이나 샤미안 정도가 겨우 웃음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이건 한 수 당했구먼. 발로 경.” “리. 너는 하여튼. 대단한 아가씨야.” “핸드릭 경! 나시아스!” 발로는 새빨개진 얼굴로 부르짖었지만 국왕이 아직도 웃으면서 말했다. “종제님. 이번엔 포기하시게나. 어떻게 생각해도 리가 하는 말이 옳으니까.” “예. 그....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이를 갈면서도 일단은 물러선 발로였다. “리. 아까 이야기인데 파키라에서 들어가는 공격에 맞춰 바깥에서도 제1성벽을 공격하도록 하겠다. 그러면 안쪽 병력은 파키라 방면과 양쪽으로 나눠질 테니까 말이다.” “응.” “언제하지?” “하늘 상태를 보고 내일 결정할께. 달이 숨어주지 않으면 어려울 테니까.” “음. 빠르면 내일 밤이로군.” “월.” 소녀는 확인하듯 말했다. “이번엔 안돼. 월은 남아 있어.” 남자가 무언가 대답하려 했지만 소녀는 그 이상 말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일곽을 가능한 한 거창하게 밖에서부터 공격해줘. 임금님이 있으면 안쪽 병사들도 그쪽이 진짜라고 생각할 거야.” “리. 하지만.” “임금님이 성에 돌아가는거야. 정면 현관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모양새가 안 나잖아.” 소녀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정문은 반드시 열겠어. 그러니까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남자는 잠시 침묵하며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결국은 작게 숨을 토해냈다. “알았다. 이븐 일행도 같이 가잖아.” “엄청난 일이 됐구만. 내 참.”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븐은 즐거운 듯 했다. 즉각적으로 3천의 타우 세력은 언제나 출발할 수 있도록 타우의 산기슭으로 이동했고 국왕군은 총공격의 준비에 들어갔다. 다음 날은 아침부터 무거운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소녀의 모습은 파키라 산으로 사라지고 국왕군은 숨을 죽이고 밤을 기다렸다. 밤이 되어도 상당히 두터운 구름이 계속 하늘을 덮고 있었다. 이곽에 남겨두었던 국왕군은 긴장한 표정으로 파키라 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병력을 양쪽으로 나누어 각각의 성벽 끝에 배치시켜 두었다. 일곽 내에서 소동이 일어나면 그에 맞춰 일제히 성벽을 공격할 예정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장군님.” 타르보가 불안스럽게 주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수염 난 장군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서두르지 마라. 서두른다 해도 어찌 되는 일도 아니고. 지금 우리가 할수있는건 기다리는 것뿐이다.” 샤미안이 딱딱하게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하겠다 한 일은 반드시 성취해 보였습니다. 이번에도 분명히 폐하를 정문으로 맞이해 입성시켜 드릴 것이 틀림없습니다.” 때때로 성벽 위에서 이쪽을 향해 화살이 날아왔다. 일제 공격의 태세를 보이고 있는 국왕군을 경계하는 것이다. 국왕군은 성대하게 함성을 올리며 화살을 쏘아대어 병사들의 주의를 끌었다. 이곽에 있는 병사들의 주의가 쏠릴수록 파키라의 잠입 부대가 할일이 수월해진다. 그 즈음 타우 세력은 이미 하루를 꼬박 걸려 파키라를 넘었고 서리궁의 그늘에 숨듯이 하여 바로 아래 있는 본궁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가능한 한 걷기 쉬운 곳을 골라 남자들을 안내했지만 전혀 발길이 닿은 적 없는 산맥인데다 절벽에 가까운 급격사이다. 산적인 그들도 이런 장소를 지나다니진 않는다. 도중에 이븐이 이런 걸 길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중얼거렸을 정도였다. 점심나절에 한번 저녁나절에 한번 군량을 사용하고 태양이 숨어들기를 기다려 3천의군사는 은밀히 서리궁에 결집했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다고는 해도 국왕의 별장인 서리궁은 당연히 整地정지가 잘 되어 있었다. 군대를 세워놓기엔 절호의 장소였다. 조명을 쓸 수는 없기 때문에 이곳까지 내려오는 것은 또 하나의 고생길이었다. 몇 명인가는 발을 잘못 디뎌 굴러 떨어졌지만 그들도 산을 건너다니는 게 직업이었다. 어떻게든 전원이 서리궁에 도달하여 숨을 골랐고 질을 지휘관으로 하는 돌격대는 언제든지 행동을 개시할 수 있도록 배치에 들어갔다. 페노아의 두목은 눈 아래 펼쳐진 본궁을 사무치게 아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깝군 그래. 저건 완전히 보물단지인데.” “질.” 이븐이 주의를 줬다. “당신이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여기에선 본업에 손을 댔다간 우리는 다 끝장이라고.” “농담이다. 혼란시키기 위해 다소 불은 사용할지 모르지만 건물에는 결코 손을 대지 말라고 모두한테도 엄격하게 얘기해 뒀다.” 그곳에 소녀가 다가왔다. “이븐 준비는 됐어?” “아아 지금 가. 그럼 잘 부탁해.” 소녀도 질에게 다시 확인했다. “우리들이 정문에 도착했을 쯤에 돌격해. 가능한 한 거창하게 해줘.” “맡겨둬라. 아가씨네들도 잘 하라고.” 소녀와 함께 가는 것은 서로서로 속을 잘 알고 있는 국왕친위대의 인물들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소녀의 힘을 지금까지 싫을 정도로 몇 번이고 봐 왔다. 이번에도 그들의 작은 승리의 여신을 믿고 광대한 일곽에서 조용히 행동을 개시했다. 일곽 안에서 소동이 일어난 것은 자정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국왕군도 제1성벽의 병사들도 소소한 도발에 질린 듯 한숨 돌리고 있었지만 그런 태만한 기색을 날려버리듯 커다란 소동이 본궁 뒤쪽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수백 이상의 군대가 파키라에 나타나 손에 손에 구활르 들고 함성을 지르면서 눈사태처럼 밀려 내려온 것이다. “기습이다!” “국왕군인가?!” “응원군을 불러라! 파키라에서 적이 나타났다!” “구화를 지펴라! 불을 좀더 가져와!” 농성 중인 병사들이 대부분이 성벽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일곽은 위아래가 뒤집히는 듯한 큰 소동이 벌어졌다. 국왕군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전개였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라!” 고함을 지르고 성대하게 징과 종을 울리며 성벽의 양단에서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내부의 혼란은 점점 더 심해졌다. 뒤도 신경이 쓰인다. 그런데다 정면의 양옆에서 쏟아지는 공격도 한층 격렬함을 더하고 있다. 넓은 곽내가 잡작스러운 재난에 빠지자 지휘계통에 혼란이 오는 것은 바깥에서도 손에 잡힐 듯 알수있었다. 국왕은 수백의 정예를 이끌고 정문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성벽을 과감하게 공격하는 양 부대는 활발하게 국왕 주변을 오가고 있었다. 조금 회수가 많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국왕은 미동도 하지 않고 차분하게 지휘봉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눈은 정면을 직시한 채 그대로였다. 저 소녀는 반드시 정문을 열 거라 말했다. 바깥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이미 오늘 하루를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은 마음으로 기다렸던 뒤였다. “리.” 남자는 손 안에 밴 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때쯤 소녀 일행은 국왕의 바로 코앞에 있었다. 정문을 근처에서 볼 수 있는 수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말 그대로 막 덤벼들려는 참이었다. 성벽의 양옆과 뒤쪽에서 큰 소동이 일어난 덕에 상당히 경계가 느슨해진 참이었지만 사람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열 명 정도가 남아 있었다. “조심스럽기도 하시지.” 이븐이 작게 혀를 찼다. 저 병사들을 헤치우지 않으면 격자의 도르래를 움직이는 등뒤를 간단히 당해버리게 된다. 어른 신장의 3배는 될 내문에는 그만큼 무거워 보이는 빗장이 위아래로 두 군데에 걸려 있었다. “리 어떡할래?” “우물쭈물 할 시간 없어. 가자.” “양쪽에서 조작하지 않으면 격자는 안 움직여.” “한 사람이 한 사람씩 베어 쓰러뜨리면 된다. 내가 두 사람 맡지.” 간단하게 말했다. “이븐과 달리, 아자레이는 나와 함께 좌측 탑으로 들어간다. 나머지 다섯 명은 우측 탑이다.” 말하기가 무섭게 소녀는 뛰어나갔다. 즉시 남자들도 그 뒤를 쫓았다. 바로 그들의 실력이다. 병사 열 명을 베어 쓰러뜨리는 일 정도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전원 동시에 행한다는 점이 쉽지 않았다. 병사 한 사람이 숨이 넘어가면서 호루라기를 불었던 것이다. 혼란한 성 안이라 해도 그 소리는 의외일 정도로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것은 성벽 양쪽 옆에 붙어 있던 병사들의 주의를 끄는 데는 충분했다. “서둘러!” 그들은 양쪽으로 나뉘어 탑에 뛰어들었다. 그 안의 2층, 3층에 모여 있던 병사들이 이변을 감지하고 달려내려왔지만 소녀는 눈깜짝할 사이에 그들을 쓰러뜨렸다. 문제의 도르래는 3층에 있었다. 다섯 개의 봉이 끼워진 거대한 철제 맷돌처럼 생긴 것에 매우 굵은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그 쇠사슬의 굵기가 격자의 무거움을 무엇보다 여실히 대변하고 있었다. “부두목!” 반대측 탑으로 달려들어갔을 터인 브란의 목소리였다. 살펴보니 양쪽탑이 서로 마주볼 수 있도록 작은 창이 뚫려 있었다.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이리라. “이쪽은 됐습니다!” “좋았어 간다!” 도르래기에 달라붙어 힘을 쏟는 이븐에게 역시 맷돌의 봉을 잡은 소녀가 말했다. “이븐 여기는 나 혼자서도 괜찮다. 내문과 외문의 빗장을 열어라.” “뭐라고?” 소녀는 여기에서도 인간 같지 않은 괴력을 발휘했다. 남자들이 한 사람도 붙잡지 않았는데 철제 도르래는 점점 쇠사슬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반대측 탑에서는 브란 일행 다섯 명이 힘을 모아 돌리고 있을 터였다. “빨리 시간이 없어!” 아까 났던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병사들이 이 정문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븐의 푸른 눈에 진지한 빛이 떠올랐다. “알았다.” 이븐 일행 세 명은 탑을 달려 내려와 어른 신장의 3배는 될 것 같은 내문에 달려붙었다. 이 빗장도 무시무시하게 무거웠지만 들어 올려 떨어뜨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훨씬 나은 편이었다. 그렇게 문을 열고 안에 뛰어든 그들이 본 것은 이미 반넘게 올라간 철제 격자였다. “해냈다!” 세 명은 즉시 격자 아래로 지나가 외문에 달라붙었다. 뒤에서는 병사들의 기척이 뚜렷해지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격자를 올리고 있는 동료들이 그 병사들의 먹이가 되어버린다. 이븐, 달리, 아자레이는 거의 불난 집 가구 들어내듯 괴력을 발휘해 빗장을 끌어 올렸다. 모든 장애물이 사라진 두꺼운 문의 바로 바깥에 국왕군이 있다. 그들은 이때다 하고 외치듯이 몸을 문에 부딪혀 들어갔다. 10장 일곽은 전장으로 변했다. 본궁에 남아 있던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싸움이라면 질색이라는 각료나 문관들도 미처 도망치지 못해 상당수가 남아 있었는데 그들은 이러한 갑작스러운 사태에는 익숙지 않은 자들이었다. 본궁에 남아 있던 군세가 국왕군을 격퇴해 주기만을 최후의 희망으로 삼고 농성 중이었지만 이제 국왕군은 정문을 뜷고 노도와 같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어떤 자는 몸을 떨면서 머리를 감쌌고 어떤 자는 책임자인 페르젠 후작을 찾으러 넓은 본궁 안을 뛰어 다녔다. 그러나 본궁이 함락 직전이라는 사태인데도 후작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떡하지?” “이 이건 얘기가 틀려!” “이렇게 되면 투항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새파란 얼굴로 그런 일들을 서로 의논하고 있었다. 그 안에 있던 제나 제사장은 가장 먼저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투항한다면 다른 자들은 살수있을지 모르나 그 남자가 자신을 살려둘 리가 없다. 국왕군이 문을 뚫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과 동시에 제사장은 은밀하게 본궁을 빠져나가 예배당으로 향했다. 한정된 지위에 있는 자들 밖에 모르는 일이지만 예배당 지하에는 숨겨진 방과 납골당으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가 있다. 잠시 지하실에 몸을 숨기려 생각한 것이다. 예배당에는 본궁의 옆쪽을 통해 갈 수 있다. 아주 약간 바깥쪽을 내다보았지만 횃불을 든 말 탄 남자들이 자기 땅이라는 양 일곽 안을 뛰어다니고 병사들의 함성이나 검의 울림도 바로 근처까지 다가온 뒤였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황급히 예배당으로 향했다. 국왕군의 목표는 본궁 뿐이라고만 여겨졌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조용하니 정적에 잠겨 있었다. 뒤뚱뒤뚱 예배당에 도착하여 안도의 한숨을 쉬던 제사장의 등뒤에서 오싹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딜가나?” 제사장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가장 이 자리에 있을 리 없는,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자의 목소리였다. 용수철 인형처럼 펄쩍 뛰며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틀림없는 국왕이 이쪽을 직시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야 지하에 숨으려 했나. 아니면 비밀 통로라도 사용하려고 한 건가.” “어 어떻게 그것을.”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를 누구라 생각하는 건가? 네놈이 그 손으로 왕관을 씌워준 국왕이다. 본궁은 물론 이 일곽의 구조는 하나도 남김없이 머릿속에 들어있다.” “히익.” “성을 지키는 주인 되는 자. 아무리 넓더라도 그 구조에는 누구보다 정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네놈이 살해한 내 아버지의 가르침이다.” 제사장은 혼이 꺼질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 했지만 남자는 일순간에 거리를 좁혔다. 돼지와 사자로는 승부가 될 리가 없다. 격렬한 노여움에 가득 찬 국왕의 검 끝은 제사장의 양다리를 노려 무릎 아래를 일격에 절단해 버렸다. “으아악!” 그 자리에 쓰러진 제사장은 격통에 몸부림치면서 자기가 저지른 일도 잊고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구걸했지만 남자는 냉엄하게 내뱉었다. “아버지가 맛보았던 고통의 백 분의 일이라도 맛보며 죽어가라.” 도라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국왕을 쫓아 달려왔지만 빈사의 중상을 입고 버둥거리는 제사장을 보고도 아무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남자에겐 어울리는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국왕은 저 소녀가 말했듯이 왕궁의 주인으로서 정면 현관으로 본궁에 들어섰다. 이미 내부는 국왕군이 대부분 제압한 뒤였다. 투항하는 자들에겐 하나하나 감시를 붙여놓았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는 즉시 병사가 향했고 내전에까지 들어가 시녀들도 제압했건만 가장 중요한 페르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숨었나?!” “에에잇. 그 녀석을 놓치면 다시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어딘가 혼자서 숨어 있는 건 아닌가!” 광대한 본궁이다. 하려고 한다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무수하다고도 할 수 있는 방들을 하나하나 조사하는 것은 정신이 아득해질 만한 작업이다. “폐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날이 밝는 것을 기다려 탐색을 개시할까요?”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더니만 외투를 펄럭이며 걸어 나갔다. “폐하 어디로 가십니까?” “짚이는 곳이 있다.” 간단히 말하고 본궁의 안쪽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ㄷ.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다면 저희들이 가겠습니다.” “아니 직접 가겠다. 그녀석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위험합니다 폐하!” 장군들이 안색을 바꾸며 남자를 말리려 했지만 계단을 오르던 국왕은 돌아보며 말했다. “나 혼자면 된다. 따라오는 건 용서치 않겠다.” 엄숙한 목소리에 국왕군의 용사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것은 틀림없는 ‘국왕의 명령’이었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계단 아래에선 소동이 벌어진 본궁이지만 위쪽으로 올라서자 조용하니 정적에 잠겨있었다. 북쪽 탑이 성의 음지이고 1층의 집무부는 실용적인 두뇌라면 이부근은 겉에 드러내기 위한 화려한 얼굴이었다. 밤중에도 휘황찬란한 불이 밝혀져 있어 걷는 데 불편하지 않았다. 넓은 복도의 끝에는 술이 달린 호화로운 천이 넘칠 정도로 걸려있다. 때때로 나타나는 문 안에는 외국 귀빈을 맞이할 손님방이나 응접실이 있었고 대무도회가 열리는 강당도, 축전을 거행하는 공간도 있었다. 어느 방이나 눈부실 정도로 기라성 같은 것들이었다. 델피니아라는 국가의 품격을 나타냄과 동시에 나라의 풍요함이나 크기를 티내지 않고 표시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격조 높음을 자랑하는 것이라면 왕좌를 모셔놓은 알현실이었다. 남자는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소녀가 남자의 옆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오지 말라고 했다.” “나는 네 신하가 아니야. 명령받을 이유는 없는데.” 어느 쪽도 방심하지 않고 복도를 나아가며 그런 대화를 나직하니 교환했다. “방해는 않겠어. 내 역할은 주변 청소다.” 남자도 그 이상 막지 않았다. 알현실은 본궁의 바깥 부분으로서는 가장 안쪽에 위치했다. 천장에 닿을 듯한 거대한 문을 남자가 아무렇게나 열어젖히자 문은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안쪽도 무서울 정도로 천장이 높았다. 수백명은 수용할 수 있을법한 넓이였다. 촛대라는 촛대에는 전부 불이 밝혀져 대낮처럼 밝았다. 앞쪽 저 멀리 높은 곳에 위치한 대좌 위에 옥좌가 놓여 있고 그 바로 앞에 페르젠 후작이 서있었다. 며칠 전 회견시에는 긴 문관복을 입고 있었건만 지금은 기사와 같은 차림으로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용맹스러운 모습이로군 페르젠.” 남자는 말했다. “투항하겠나 아니면 싸우겠나.” “저는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몸이니까 말씀입니다. 당신 상대가 될 수 있을 리가 없겠지요.” 이 뒤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도 페르젠 후작은 최소한 겉으로는 침착한 모습이었다. “이걸로 당신은 경사스럽게 왕좌를 되찾을 터 축하드린다고 말씀드려야 하겠군요.” 남자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거 미안하다고 대답해야 할까. 그렇지 않으면 용의주도하게 이 옥좌를 노렸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형태로 좌절하게 되다니 안됐다고 해야 할까.” “안된 것은 델피니아 쪽입니다. 결국 첩실 소생의 국왕을 맞게 되어 버렸으니까요.” “대역죄인인 재상보다야 훨씬 낫겠지.” 딴사람 일처럼 대화하면서 남자와 소녀는 거리를 줄여갔다. 앞으로 한 발자국 검을 뽑아 덤벼들면 상대를 베어버릴 수 있을 곳까지 와서 남자는 발을 멈추었다. “너는 너무나 많은 것을 내게서 빼앗았다.” “.......” “네가 나에게서 빼앗은 것이 국왕이라는 명함뿐이었다면 나는 이곳에 있지 않았다. 네가 노린 바대로 나라를 버리고 이름을 버리고 유랑의 전사로서 살아가고 있었겠지.” “.......” “너는 얼굴도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고는 해도 나를 낳아준 어머니를 죽이고 카린의 아이를 죽였다.” “.......” “내 아버지로부터 명예를 빼앗고 긍지를 빼앗고 죄인으로서 죽게 했다.” “누명도 그 정도되면.” 후작이 대꾸했다. “페르난 백작을 죽게 만든 건 내가 아니오. 제사장이지. 당신의 모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시녀장은 나를 원수라 말했지만 나는 단순한 실행자일 뿐. 그렇고 말고. 명령을 내린 자는 아직 이 나라에 살아 있소. 벌을 받는 일도 없이 큰 손을 휘두르며 이 왕궁에 출입하고 있지. 그 장본인은 내버려둔 채 나만을 책하는 건 본말 전도라는 것이오.” 끝까지 끈질긴 후작이었다. 독기에 가득 찬 어조로 이어서 말했다. “당신을 추방한 것에 관해서도 그래. 나는 누구보다 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기에 그런일을 한 것이오. 나를 비난하는건 당신 마음이지만 당신도 나라를 지배하는 입장이 되면 반드시 나와 같은 일을 하게 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일국을 담당하는 일 따위 할 수가 없소. 국정이라는 큰일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데도 개인의 목숨이나 사혹 따위의 자잘한 일에 하나하나 붙잡혀 있어서야 아무것도 할수없다는 사실을 얼마 안가 진저리가 날 정도로 알게 되겠지.” “누가 나라를 지배한다고 말했나?” 조용한 남자의 반론에 페르젠은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나라는 생물이다. 그것도 개인의 손엔느 쥘 수 없는 거대한 생물이다. 설사 국왕이라 해도 그 목에 사슬을 채워 조종하는 일 따위는 할수없어. 할수있는건 그 진로에 다소의 수정을 가하는 정도다.” “무슨.” “너는 권력을 쥐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먹은 대로 나라를 움직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마지막까지 눈치채지 못한 것 같군.” 남자는 현란하게 장식된 옥좌를 올려다보더니 가련하다고도 할수 있을 감정이 깃든 눈초리를 숙적에게 향했다. “너에겐 이 옥좌는 지배자의 상징으로 보였겠지만 내게는 단순한 관리자의 의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누가 앉아도 똑같은 거다.” 페르젠 후작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면서도 남자를 조소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역시로군. 비천한 계집에게서 태어난 국왕의 생각이란 그런 정도인가. 돌아가신 폐하가 들으시면 무척 한탄하시리라.” “그건 돌아가신 국왕 외엔 모르는 일이다.” 두 사람의 대결을 잠자코 듣고 있던 소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월이 말하는 쪽에 일리가 있군. 그건 그렇고 후작, 뒤에 숨겨둔 병사들의 출현은 아직인가?” 남자는 저도 모르게 몸을 뺐고 페르젠 후작은 움찔하여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대좌 뒤쪽의 벽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슬쩍 보아서는 나무에 부조 세공이 된 보통 벽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숨겨둔 병사인가. 얄팍한 수로군.” 이 벽은 눈가리개였다. 벽처럼 생긴 문의 안쪽에는 알현 중인 왕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 병사를 숨겨둘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소녀가 태연하게 그 벽에 말을 걸었다. “나와라. 나오지 않으면 이쪽에서 간다.” 그 말에 각오를 굳혔는지 아니면 이 이상 몸을 숨겨도 소용없다 판단했는지 벽으로만 보이던 부분이 뻥 뚫리며 안에서 15명 정도의 병사가 나타났다. 테세를 취한 남자를 소녀가 제지했다. “물러나 있어. 잔챙이들은 내가 처리한다.” 페르젠 후작도 뻔뻔스럽게 웃었다. “국왕군에는 발도우의 딸이 붙어있다더니 어디 활약을 보여 주실까.” 소녀는 흘낏 후작을 보았다. “너 대체 뭐 하자고 이런걸 준비했나. 월을 속여서 쓰러뜨리면 아직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라고 했나.” “아니 그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오랜 습성이라는 것은 숨기기 힘들어서 말이야. 다른 사람을 만날 때에 단둘이 있었던건 이제 기억에도 남지 않은 일이야.” 소녀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 되었다. “죄많은 직업이로군 권력자라는건.” 나타난 병사들에게 몸을 돌렸다. “그런거라면 괜히 목숨을 버리기 싫은 놈은 지금 투항해라. 그렇게까지 이 남자에게 붙어 있을 필요는 없을 텐데.” 그러나 병사들은 아무도 투항하려 하지 않았다. 말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이것은 충성심이라고 하기보다는 될대로 되라는 행동이었다. 그들이 페르젠을 위해 어떤 활약을 했었는지는 모르나 주인인 페르젠이 쓰러지면 자신들도 끝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설득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안 소녀도 말없이 앞으로 나섰다. 페르젠 후작이 최후의 비책으로 썼을 정도이니 무척이나 엄선된 정예들이겠지만 상대는 아직 소녀라 해도 전쟁의 여신이라 청해질 정도의 기량을 가진 자였다. 춤추듯이 검을 휘두르는 소녀의 다리를 누구도 쫓아가지 못했다. 문자 그대로 다대 일임에도 불구하고 보고 있는 사이 몇 명이나 쓰러뜨렸고 그러고 나서도 아직 여유 만만이었다. 남자는 감탄의 시선을 보내고 자신도 검을 빼들어 페르젠 후작과 맞섰다. “이야기가 길었군. 종지부를 찍자.” 후작도 이번에는 결심을 굳힌 듯 했다. 조용히 검집을 뽑아 던졌다. 일선에서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페르젠 후작이 무예에도 뛰어난 사람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남자도 조용히 자세를 취했다. 소녀가 휘두르는 칼날 소리와 쓰러지는 병사의 비명만이 들려오는 가운데 남자와 후작은 거리르 두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어느쪽도 움직이지 않았다. 칼을 쥐고 정면에서 자세를 취하면서 페르젠은 말했다. “아기였던 당신을 죽이라 명령했던 자는 아직도 살아있다.” “그런 것 같군.” “국내에서도 꽤 알려진 명문가의 사람이지. 알고 싶지 않은가?” “흥미없다.” “호오?” 의심스러운 표정이 된 페르젠 후작이었다. “그 정도로 부친의 원수를 갚겠다고 난리를 쳤으면서 정작 명령한 본인은 추궁하지 않겠다니 이상한 이야기로군.” “누구의 이름을 들어도 신용할 순 없다. 네가 여기에서 죽으면 끝날 일이다.” 남자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 누군가는 네가 말한 것이 아닌가 하고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겠지. 나의 복수가 두려워서 얌전히 있어주면 그걸로 좋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또 무언가 하려 든다면 그때 죽인다.” 페르젠 후작의 표정이 변했다. 지금까지 한번도 보인 적이 없는 진지한 빛을 눈에 띠고 자신과 대치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검끝이 흔들리고 후작은 놀란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 했다. “월!” 소녀의 외침이 울렸다. 어차피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 병사 중 한명이 소녀가 아닌 남자의 등을 향해 뛰어든 것이다. “음!” 돌아보는 일격으로 남자는 병사를 베었지만 그 사이 페르젠 후작이 단숨에 틈을 좁혀왔다. “웃!” 후작의 검날은 의외일 정도로 날카롭게 남자의 몸체를 노렸다. 남자는 간신히 피했다. 페르젠은 더욱 깊이 치고 들어왔다. 무척이나 호되게 단련했으리라. 오십을 넘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결정타를 서두르고 승부를 재촉한 만큼 움직임에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 남자는 그런 틈새를 못 보고 지나칠 전사가 아니었다. 페르젠이 두 번째 일격을 날리려 했을 때에는 남자는 이미 자세를 되찾았고 다음 순간 거구라 해도 좋을 남자의 체구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페르젠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후작의 입에서 이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힘이 빠진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그 뒤를 쫓듯 페르젠 후작은 앞으로 엎드려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소녀는 최후의 한 명을 쓰러뜨렸다. 페르젠은 남자에게 왼쪽 옆구리를 베였지만 아직 희미하게 숨이 붙어있었다. 소녀가 피투성이가 된 몸을 똑바로 눕혀주자 페르젠은 남자를 올려다보며 핏기를 잃은 입술에 보일듯말듯한 미소를 띠고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뭐라고?” 소녀가 후작의 입가에 귀를 가까이 댔다. 한 마디, 두 마디, 무언가를 중얼거린 것이 최후였다. 페르젠 후작의 눈이 천천히 감기고 그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갔다. 숨이 끊어진 페르젠 후작을 놔둔 채 소녀는 일어섰고 남자를 돌아보았다. 염원하던 원수를 갚은 남자는 기쁨이나 감격을 표시하지도 않고 가만히 옥좌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가 앉아도 상관없는 것이다. 저런것은. 다만 목에서 손이 기어 나올 정도로 갖고 싶어하는 자에게는 결코 주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페르젠 후작이 자신만의 이득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야심을 좀더 커다란 방향으로 돌리는 정치가였다면 남자는 기쁘게 장식용 인형으로 앉아있었으리라. “월.” “왜?” “페르젠이 마지막으로 뭐라고 말했다고 생각해?” “글세 저주의 말이라도 흘렸나.” “뒤르와님. 그렇게 말했어.” 남자는 진지한 얼굴로 소녀를 보고 이제는 아무말도 할수없게 된 후작을 내려다보았다. 소녀도 같은 식으로 후작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이 남자 나름대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던 것 같다. 최후의 최후에서야 겨우 네가 그 주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거야.” “둔한 놈이군.” 다른 누구에게 들어도 이 남자에게만은 듣고 싶지 않을 것이라 소녀는 생각했지만 남자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무리도 아니지. 이 녀석은 처음부터 내가 전 국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녀장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시녀장은 나를 친부와 똑같다고 말했고 이녀석은 닮았다 해도 닮을 수가 없는 얼간이라고 판단한 거다. 적당적당 한 일도 이 정도인 게 또 있을까.” 쓰디쓴 어조로 말한 남자였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피투성이가 된 소녀를 보고는 미소를 띠며 왼손을 내밀었다. “끝났군.” 소녀도 검을 집어넣고 작은 손을 내밀었다. “아아 끝났어.” “이겼군.” “그래.” 두배는 크기 차이가 날 손과 손이 굳게 서로를 맞잡았다. 이때 계단 아래에 남겨져 있던 장군들이 참을 수 없었던 듯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에 쓰러진 페르젠 후작의 시체를 보고 도라 장군은 굳건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샤미안은 참을 수 없는 듯 눈시울을 붉혔다. 핸드릭 백작은 활짝 웃었고 발로와 나시아스는 서로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누아 후작이 두 사람의 신관을 데리고 앞으로 나섰다. “폐하 부디 이것을.” 신관 한명이 자줏빛 벨벳이 깔려 있고 사방에 금술이 달린 받침대를 받쳐들고 있었다. 그 위에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델피니아의 왕관이 놓여 있었다. “부디 지금 이 자리에서 저희의 진정한 국왕의 모습을 알현할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두 사람의 신관은 야니스 신전에 봉사하는 자들인 듯 했다. 제사장이 국왕의 逆鱗역린을 거슬러 죽었기 때문에 그 다음 자리에 있는 자가 천천히 왕관을 들어올리려 했지만 국왕이 그 동작을 제지했다. “야니스는 만물을 관장하는 신이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검을 휘두르는 게 직업이라서 믿지도 않는 신에 의해 왕관을 쓰는 건 싫다.” “예?” 신관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장군들도 놀랐다. “하지만 폐하 이것은 대대로 내려오는 관습으로....” “엿 먹으라고 해. 어차피 축복을 받아야만 하는 거라면 나는 내가 믿는 신에게 축복을 받겠어.” 남자는 호쾌하게 단언했다. 왕국 제일의 보물을 들고 있던 신관을 데려와 소녀의 옆에 세우더니 소녀의앞에 무릎을 꿇었다. “월!” “네가 나를 다시 한번 이 옥좌로 이끌어 주었다. 발도우의 딸이 나를 다시 왕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 최후의 마침표를 부탁하고 싶다.” “잠깐 기다려!” 소녀는 진심으로 당황하여 말려주길 바라며 장군들을 돌아보았지만 공교롭게도 아무도 입을 벌리려 하지 않았다. 도라 장군, 나시아스, 타르보, 가렌스, 샤미안이라는 국왕군의 진용은 빙긋이 웃고만 있었고 나중에 참가한 핸드릭 백작이나 발로도 이곳에선 어쩔 수 없다는 듯 팔장만 끼고 있었다. 아누아 후작도 남자의 심정을 깊이 이해한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고 이븐을 비롯한 친위대 인간들은 박수까지 치고 있는 실정이었다. 소녀는 맥빠진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진지한 표정으로 꿇어앉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뭐어. 그래도 좋다는 거라면 할 수 없지만.” 중얼거리며 참으로 간단하게 왕관을 들어올렸다. 항상 공손할 정도의 취급에 익숙해져있던 장군들은 저도 모르게 간이 콩알만해졌지만 소녀는 여전한 태도로 그 보물을 가볍게 남자의 머리 위에 올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네가 너 자신으로 있는 한, 전사의 혼을 잊지 않는 한, 네가 국왕이다.” 남자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끄덕였다. 검으로 왕좌를 되찾은 자신에게는 무엇보다 어울리는 선언이었다. 바라보고 있던 장군들은 물론이고 본궁을 점거하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승리의 환성을 올렸다. 국왕 만세라고 높이 치솟는 환희의 목소리는 이윽고 왕궁 전체로 퍼져나가 언제까지고 자랑스럽게 울리고 있었다. 11장 왕좌를 되찾고 나서 10일간은 남자에게나 새정부의 주요 인물들에게 있어서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다. 온 나라의 대귀족이나 실력자들이 새정권에 충성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 차례차례 거품을 물고 달려왔던 것이다. 그중에는 월이 쓰러져 페르젠이 기반을 공고히 할 것을 크게 기대하고 있었으리라고 여겨지는 자들도 많았다. 윈저의 다르 경 같은 자가 바로 그 예였다. 무엇보다도 다르 경은 예전 남자가 소녀에게 말했듯이 그야말로 정중한 태도로 왕국이 진실된 국왕을 맞이하다니 경사라는 기쁨을 줄줄이 토로하고 축하의 뜻으로 눈이 부실 정도의 진상품을 아낌없이 들고 와 바쳤다. “꽤나 뒤가 켕기는 일이 있는 모양이지.” 하고 남자는 말하여 도라 장군의 실소를 샀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폐하께 들은 바에 따르면 다르는 폐하 암살 음모를 꾸미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맨몸으로 사자의 면전에 나서는 것 같은 심정으로 달려왔을 겁니다.” 남자쪽은 너무나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인지 윈저에서의 사건을 빨리도 잊을 뻔하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듣자 그렇군 하고 납득했다. 그러고 보니 그 성이 불타 버렸다는 사실을 떠올린 국왕은 일어나서 물러나려 하는 다르경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았다. “다르경. 주거지가 불타버렸으니 무언가 불편하진 않은가.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나?” 남자는 진심으로 친절한 마음에서 한 질문이었지만 불쌍하게도 다르 경은 펄쩍 뛰어 올랐다. “시 심려하실 것 없습니다. 그 불타버린 성 근처에 別邸별저가 있어 지금은 그쪽에서 그러니까 침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그건 잘됐군. 훌륭한 성이었는데 안된 일이야.” 자신이 하는 말이 강렬한 비꼼이 된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남자가 어디까지나 진지한 얼굴로 화재에 대한 위로를 하는 바람에 다르 경은 온몸을 식은땀으로 적셔가며 도망치듯 알현장을 뒤로 했다. 타우에서의 응원군은 약속대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사금 1포대씩 보수를 받았고 델피니아 王旗왕기 옆에 나부끼는 자신들의 깃발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정연하게 대열을 맞춰 타우로 돌아갔다. 페노아의 질도 국왕에게 정중히 작별 인사를 고하고 산으로 돌아갔지만 이븐은 질과 두 사람만 남게 되었을 때 살짝 독설을 내뱉었다. “당신도 은혜 갚음이라니 잘도 둘러대는구만.” 이븐과는 애비 자식처럼 연령 차이가 나는 산적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뭐 괜찮지 않냐. 만사가 원만하게 수습되었으니까. 지금은 말이다.” “그러니 말인데 앞으로 또 어찌 될지 모른다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타우의 자유민이 델피니아에 붙었다고 하면 탄가와 파라스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 “그렇겠지.” 질은 바람아 불어라 하는 태도였다. “타우도 언제까지나 무법지대로만 있을 수는 없어. 사람도 많아졌고 산에 숨어있기만 할수도 없어진 거다. 이제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어떻게 해서든 어딘가와 손을 잡지 않으면 안돼.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마이키가 네 소꿉친구 임금님 이야기를 들고 왔다. 마침 잘됐다고 할 수 있었지.” 이븐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농담이 아냐. 그럼 우리들이 저 녀석을 이용한 것 같잖아.” “뭘. 너네 임금님도 알고 있을 거다.” 질은 웃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자유의 깃발을 저렇게나 당당하게 걸어둘까. 우리들과 손을 잡았다고 큰소리로 선언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자칫 잘못하면 탄가나 파라스트하고 전쟁이 날 수도 있지만 저쪽이 어떻게 나오는지 시험해보고 싶다는 속셈 아닐까.” 이븐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녀석 과연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까.” “그렇군. 아무 생각도 없을지도 모르지.” 왕기와 나란히 휘날리는 자신들의 문장을 쓴웃음과 함께 올려다본 질이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임금님이다. 네가 혼자서 아군에 붙겠다고 결의한 만큼의 가치는 있군.” “걸어봐서 손해는 안 나지?” “아아 대박이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하고 호쾌하게 웃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 나는 가지만 너도 한번은 마을에 돌아와라.” “아아 여기가 좀 더 정리되면 꼭 들를 테니까.” 계속 이븐과 함께 했던 친위대의 진용들도 가족의 얼굴을 보기위해 타우에 돌아갔지만 이븐은 왕궁에 남았다. 다시금 국왕으로 돌아온 소꿉친구의 공사다망함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여서 직접 돕는 일은 없다 해도 그냥 훌쩍 떠나버리기 어려웠던 것이다. 바쁘게 오락가락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단순히 국왕의 기분을 살피러 오는 인간들이 있는가 하면 진심으로 저 남자를 국왕으로 맞이하여 기뻐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븐은 자기 나름대로 그런 사람들을 구분해 볼 생각이었다. 루카난 대대장은 약속대로 청색 안감의 외투를 수여 받고는 크게 기뻐하며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자신의 의지와는 반하여 개혁파에 가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람들, 특히 핸드릭 백작이나 브룩스 등은 다시금 그 남자 앞에 엎드려 일시적이라고는해도 적으로 돌아섰던 일을 깊이 사죄한 듯 했다. 그리고 국왕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넙죽 엎드려 사과해야만 했던 것이 바로 발로였다. 사보아 공작가의 가장으로서 친족에 대해서는 자신을 가볍게 여기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을 엄하게 규탄하고 단호한 태도로 임했던 발로였지만 성 안에 평화가 돌아오게 되자 아무래도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관문이 있었다. 지금도 식은땀을 흘리며 오랜 친구에게 하염없이 사과하고 있었다. “나시아스 내가 잘못했다. 바보였다. 어리석었다. 몇 번이라도 사과할께! 그러니까 이제 적당히 좀 용서해 줘!” “거절하겠어.” 연상의 친구는 실로 냉담했다. “거 거절한다니 너 말이야.” “간단하게 용서해줬다가 또 칼이나 휘두르며 덤벼들면 어떡하게.” 나시아스는 태연했다. 맞는 소리이기 때문에 발로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또한 그곳에 발로가 못 이기는 할아범까지 가세하게 되자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시아스님.” “오오 카사인가! 무사했나.” “예. 다행히 몸만은 튼튼한 덕분에 개혁파 놈들의 협박도 별 것 아니게 지나갔습니다. 제 일 같은 것보다는 그간 나시아스님께 정말 드릴 말씀이 없는 일이....” 하며 일부러 그러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이 할아범의 교육이 미치지 못하는 바람에 도련님은 멍청하니 페르젠의 혓바닥에 놀아나고 게다가 심지어 나시아스님께 칼을 들이대기까지 했다니요. 그거야말로 정말 피가 얼어붙는 줄 알았습니다. 몸에 어디 지장은 없으셨습니까.” “카사가 마음 쓸 필요는 없어. 중요한 때에 왼쪽 어깨가 말을 듣지 않아서 몇 번이나 분통함을 삼켰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머리가 날아간 것보다는 나으니까 말일세.” 이어서 더욱 큰 한숨을 쉬며 사보아 가분의 집사는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정말로 뭐라 사과드릴 말씀도 없습니다. 주인의 죄는 이 할아범의 죄입니다. 사보아 공작가의 총수이신 도련님을 그러한 사려없는 게다한 경솔한 더구나 독단적 아니 단세포적인 성격으로 키운 것은 모두 이 놈 잘못입니다.” “무슨 말인가. 카사가 내내 옆에 붙어서 감시해 주었으니까 이 단세포도 다소는 지혜를 발휘하게 되어 왼쪽 어깨만으로 끝내준 것 아니겠나. 자네에겐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어.” “적당히 좀 해라! 둘다!” 참지 못하게 된 발로가 노성을 질렀다. 그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음에도 들어버린 리와 샤미안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본궁 안의 빈 공간에서 벌어진 막간극이었지만 그쪽에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황급히 멀리 떨어졌다. 소녀는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나시아스도 다른 사람에겐 언제나 상냥하면서 어째서 발로한테는 저렇게 맨날 짓궂게 구는 걸까?” “어머 나시아스님도 즐기고 계신 거야. 저래 보여도 다시 한번 발로님과 말싸움을 할수있게 되니 기뻐서 어쩔줄 모르시는 거라구.” 샤미안도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완전히 밝아진 본궁 안을 거닐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 이 안을 자기 집처럼 활보하던 자들에겐 각각 처벌이 내렸고 지금은 브룩스를 중심으로 하는 문관들이 실무에 임하는 중이었다. 샤미안도 도라 장군화 함께 이곽의 저택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카린이 아직 완전한 몸도 아닌데 내전 일로 바삐 움직이고 있어 그것을 돕기 위해 매일같이 성으로 걸음을 하는 것이다. 샤미안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런 상태라면 앞으로 십년 정도는 계속 그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네. 불쌍한 발로님.” “이런이런 저에 대한 말씀입니까?” 정말로 화내기 시작한 친구로부터 도망쳐 나와 두 사람의 뒤를 쫓는 형태가 되어버린 나시아스가 이 말을 듣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샤미안은 희미하게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경박한 소리를.” “아니오 정말이니까요.” 나시아스도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저에겐 그럴 권리가 있지요. 리가 막아주지 않았다면 목이 떨어졌을 참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럴까나.” 하고 소녀가 말했다. “발로씨가 정말로 진심이었다면 나시아스는 최초의 일격으로 죽지 않았을가 생각하지만.” 샤미안은 이 말에 놀란 표정이 되었지만 나시아스는 온화한 눈빛이 되어 살짝 끄덕여 보였다. 소녀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역시나. 알고 있다면 그렇게까지 괴롭히지 않아도 되잖아. 정말로 죽이려고 했다는 건 진짜지만 내가 막지 않아도 분명 못했을거야.” “아니 그럴순없지. 여기에서 엄하게 말해두지 않으면 다시 똑같은 짓을 저지르게 되어도 그때가서 할말이 없는걸.” 하고 낮은 목소리로 살짝 말했다. 소녀는 이런이런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로 불쌍한 발로씨네.” “아니지. 한사람 정도는 사보아 공작과 얼굴을 맞대고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역할이 필요한 거야.” “이해하겠어요. 대귀족이시니까요.” 샤미안도 끄덕였다. “이런 이야기는 그다지 큰 소리로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언제 제2의 페르젠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힘이 사보아 가문에는 있어요.” 무섭도록 딱 부러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시아스도 끄덕였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샤미안양. 발로 본인에겐 그런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어요. 그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동족 중 누군가가 아마도 페르젠과 결탁했던 것이겠지요. 지금 발로는 전력을 다해 그 누군가를 찾아내려 하고 있습니다. 일족 전체가 떨면서 당주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애초에....” 나시아스는 숨을 토해내고 밝아진 바깥 경치에 눈길을 주었다. “이미 끝난 일입니다. 지나치게 일을 크게 벌였다간 역효과라도 나면 곤란하지요. 그런 부분은 카사가 잘 처리해 줄 겁니다.” “예 정말이에요. 이미 끝난 일이니까요.” 세명은 왠지 잠자코 입을 다문 채 이 본궁에서 보이는 트레니아 만의 눈부실 정도의 푸르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절은 슬슬 여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분이 끝난 것도 있어 항구에는 각국의 배들이 돛을 나란히 하고 있었다. 기다려 마지 않았던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소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그래도 잘됐다. 이제는 안심하고 여길 나갈 수 있겠어.” 두 사람은 용수철처럼 퍼뜩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리?!” “그게 처음부터 월이 임금님이 될 때까지 힘을 빌려준다는 약속이었는걸. 그 약속은 성취했고 내가 자기 자신에게 했던 맹세도 지켰어. 그 뒤엔 더 이상 이런 심심한 성에 있을 이유도 없다구.” 소녀는 두 사람을 올려다보고는 “월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려고 생각했는데 아침부터 손님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시간이 나질 않는대. 잘 있으라고 전해 줄래?” 그럼 하고 말하며 간단하게 발걸음을 돌리는 소녀에게 두 사람은 문자 그대로 기성을 올리며 붙잡고 늘어졌다. “잠깐 기다려!” “부탁이야. 그렇게 서두르지마!” 그 기세에 소녀 쪽이 눈을 크게 떳다. 샤미안이 열심히 소녀를 설득하는 동안 나시아스는 평소의 그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기세로 본궁으로 달려가 국왕의 알현식 도중에 난입해 들어갔다. 사정을 들은 국왕도 참모로서 그 옆에 있던 도라 장군도, 서기로서 앉아있던 브룩스까지도 안색이 변해서는 의자에서 튕기듯이 뛰어 올랐다. 버림받은 손님은 아연하여 도망치는 토끼처럼 달려가 버린 국왕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리!” 안쪽의 알현실에서 본궁의 입구까지 단숨에 달려온 국왕은 그 기세 그대로 맹렬하게 소녀에게 덤벼들었다. “여기를 나가겠다니 정말이야! 대체 왜?!” “왜라니.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지.” 당연하잖아 라고 말하는 말투였다. “월은 임금님이 됐고 샤미안이나 나시아스나 도라 장군도 원래처럼 왕의 신하로 되돌아갔어. 하지만 나는 왕의 신하도 아니고 델피니아 사람도 아니니까 여기에 있는 쪽이 이상한 거라구.” “리 그린다 잠깐 기다려. 그렇게 간단하게 결정하지 말라.” 알현용으로써 지금은 남의 눈에 보이기 위한 옷을 입고 있는 남자는 호화로운 의복에 감싸인 커다란 체구를 숙이며 필사적으로 소녀를 붙들었다. “그 말이다. 이론적으론 네가 말한 대로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전부 옳지는 않다구. 애초에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네가 여기를 나가서 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심산이냐?” “누가 데리러 올 때까지 여기 저기 구경할래. 델피니아 말고 다른 나라도 보고 싶고 대충 이쪽의 아이처럼 통용될 자신도 붙었으니까.” “바보같은소리! 너 같은 기괴한 어린아이가 어디 데굴데굴 굴러다닐 것 같으냐!” 주변에 모여있던 요인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도라 장군이 나서서 말했다. “작은전사. 나도 부탁하겠네. 급한 용무가 없는 거라면 부디 당분간 왕궁에 있어주지 않겠나.” “뭣 때문에?” 진지한 얼굴로 대꾸하자 장군은 할말에 쫓겼다. “싸움은 끝났어. 그렇게 되면 내가 타우 사람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전사는 필요 없다구. 나는 검을 쥐는 자고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아니 그말이다. 그런 문제가 아닌데.” “그래.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남자도 힘차게 말했다. “너 스스로는 모르는지도 모르지만 너에겐 단순한 전사 이상의 가치가 있다. 최소한 나한텐 말이다. 무릇 나는 그렇고 말고 평생 다해도 갚지 못할 정도로 너에게 빚이 있단 말이다. 그중에 하나라도 갚을 기회도 안 주겠다니 너무하지 않나냐.”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거니까 무섭다. “빚을 지울 생각은 없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씁쓸하게 소녀는 말했지만 “나는 신경 쓸거다. 반드시 신경 쓰고 말 테다.” 이렇게까지 힘찬 대꾸가 돌아와서야 머리를 감싸쥐게 되어 버린다. 주변을 보자니 샤미안이나 도라 장군, 나시아스나 브룩스도 진지한 표정이었다. 소동을 듣고 다가온 이븐이나 발로까지도 소녀의 태도를 옳지 못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리. 이 임금님은 이제야 겨우 출발점에 선 거라고. 지금 당장은 왕좌에 앉아 있지만 언제 홀딱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단 말이다. 발도우의 딸씩이나 되면서 한번 편 들어준 상대를 중간에 냅두는 건 별로 보기 안 좋아.” 이유답지도 않은 이유였지만 설득력은 있었다. 발로도 재미없다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시간이 비면 반드시 평범한 승부를 해보자고 할 셈이었다. 이기고 도망치다니 못 쓰겠군.” 대체 뭐가 일어나고 있는건지 알수없다는 표정으로 소녀는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하 하지만 할수없잖아. 나한텐 그러니까 여기 있을 이유도 없고....” 몸을 구부린 채 소녀를 설득하던 남자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기세 좋게 일어섰다. “알았어. 이유가 있으면 되는 거지?” “저기 잠깐 윌?” 아무래도 무시무시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어 남자를 말리려 했지만 늦었다. 남자는 줄줄이 늘어선 실력자들 앞에서 이미 말을 내뱉고 있었다. “전부터 생각하던 일이지만 마침 잘됐다. 그대들이 증인이다. 나는 이 소녀를 공주로서 왕궁에 맞이하겠다!” 사람들 사이에서 역시나 경악의 외침이 흘러 나왔다. “폐 폐하 하오나....” 법률의 전문가이기도 한 브룩스가 황급히 이의를 제기하려 했지만 남자는 그 뒷말이 나오게 두지 않았다. “서출인 내가 국왕이 될 수있다면 발도우의 딸을 공주로 두어서 뭐가 나쁜가!” 그러한 남자의 눈동자는 절대적으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아연해 있는 소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비르그나에서 말했었지. 내가 왕좌를 되찾을 땐 누구나가 너에게 한 수 접을 만한 지위를 주겠다고. 이렇게 하면 너에게 이 왕궁을 자유롭게 걸어다닐 권리도 자유롭게 드나들 권리도 줄수있어.” “농담?!” “진심이다. 전부터 생각해온 일이야.” “내가 공주님?! 할수있을 리가 없잖냐!” “별로 아무짓도 안해도 돼. 너는 좋을 대로 행동하면 되고 어디에 나돌아다녀도 상관없어. 다만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고 싶은거다. 최소한 네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남자는 열심히 애원했다. “나는 그러기 위한 장소를 네가 좋아할 곳에 준비할 거고. 행동의 자유도 보장할께. 최소한 그 정도 일은 할 수 있게 해다오.” 소녀는 금빛 머리를 싸잡았다. “저기 말야 월. 내가 말하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야. 알겠어? 여기에 있는 무시무시하게 색다른 일부의 사람들은 별도로 해도 그 외에 산더미 같은 신하들한텐 대체 뭐라고 말할 생각이야! 어느날 갑자기 공주가 생겼다고 하면 모두가 납득할 거라고 생각하는거야?” 비명과 같은 외침이었지만 남자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걱정하지마. 성문조례도 전부 조사했다. 거기 어디에도 국왕이 양녀를 맞으면 안된다는 문장은 없어.” 이 말에는 소녀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브룩스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국왕이 양녀를 맞이하면 안된다는 법이 확실히 없긴 하군요.” 도라 장군이 이 말에 성실하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없다는 거로군?” “예. 최소한 위법은 되지 않겠습니다.” “저렇다는 거다.” 국왕이 만면에 미소를 띠며 소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소녀는 그저 하염없이 멍청해져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마찬가지로 눈을 크게 뜨고 있던 나시아스가 작게 웃음 소리를 뿜어냈다. 도라 장군이 그 뒤를 따랐다. 샤미안은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고 이븐은 참을수없다는 듯 폭소했으며 최후에는 왕좌 탈환의 공로자들에 의한 호쾌한 웃음의 대합창이 되었다. 오직 한 사람 남은 소녀는 새빨갛게 되어 분개하며 “그런 법률 너무 바보 같아서 아무도 글로 써두지 않은 거란 말이다!” 하고 외쳤디만 아무래도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델피니아 왕녀 그린디에타 라덴. 좋은 어감이잖아.” 하고 남자는 장난기 가득하게 말했다. 정권 취득 후의 정신 없는 상황에 뒤섞여 국왕은 입법이고 채결이고 건너 뛰어버리고 작업을 진행했다. 애초에 왕이라는 이름하에서는 다소의 무리도 가능한 것이 군주제의 좋은 점이다. 그리하여 이 날로부터 세어 7일째 대륙 전체에서도 달리 예를 찾을 수 없는 전대미문의 왕가의 피를 잇지 않은 공주가 델피니아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 1부 끝. 5권에 계속 - 작가 카야타 스나코 - 1992년 <델피니아의 희장군>으로 소설계에 데뷔. 이후 출판사를 옮겨 <델피니아 전기>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을 시작한다. 여성적인 섬세함과 탄탄한 설정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 <델피니아전기> 외에는 <키리하라 집안의 사람들>과 <스칼렛 위저드>등이 있다. ※ 델피니아전기는 전 18권입니다. 나머지는 사서 읽으시던가 빌려서 읽으시던가 다른분이 쳐주시던가(웃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