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피니아전기 02 /카야타 스나코 /대원씨아이 황금빛 전쟁의 여신 1장 "도라 장군!" "오오 나시아스 경!" 두 사람은 굳세게 서로의 양손을 맞잡았다. 그 이상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는 눈에 금새 뜨거운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곁에는 도라 장군의 딸인 샤미안, 그리고 나시아스의 심복 부하인 가렌스가 마찬가지로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어쩔 줄 몰라하며 나시아스가 말했다. "이렇게... 이렇게 장군의 건강하신 모습을 뵙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강제로 칩거하게 되셨다고 듣고는 바늘 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이었습니다." "뭘 겨우 이런 정도로. 나시아스 경이야말로 지금까지 이 요새를 잘 지켜주었네. 개혁파 녀석들이 나시아스 경에게 무슨 지독한 짓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내가 보통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네." 나시아스가 웃으며 끄덕였다. "이런 수 저런 수를 써가면 여러가지 이유로 왕궁에 출두하라고 불러댔습니다만 이쪽도 이런 저런 구실을 만들어서 미루고 있었지요. 가까이 갔다가 잡혀버리면 곤란할 테니까요. 도라 장군이야말로 용케도 무사히 탈출하셨습니다. 훌륭하십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니 낯 뜨겁구만. 자력으로 나온 것이 아니니까 말일세." "그렇다는 말씀은..." 장군의 작은 눈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녀석들이 자진해서 내보내 준걸세. 샤미안을 북쪽 탑에 보내고 싶지 않다면 폐하를 붙잡아 돌아오라고 명령하면서 말이야." 나시아스도 물빛 눈동자에 미소를 띠우면서 장군의 곁에 있는 샤미안을 보았다. "누가 낸 잔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페르젠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군요. 거참 될 소리가 있고 안될 소리가 있지..."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밖에 할 말이 없네. 그래놓고 이걸로 폐하께서 나를 의심하실 거라고 진짜 믿는 듯 했으니까." "수작을 걸 상대를 착각했다고 밖에 할 수 없겠군요." 두 사람은 한 목소리로 웃었다. 비르그나 요새는 델피니아에서도 굴지의 세력 중 하나인 라모나 기사단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지금의 정부에 대해 호의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데다 수도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코랄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골치 아픈 상대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아직도 예전의 주군에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도라 장군 역시 코랄을 지배하고 있는 개혁파에게 있어서는 골치 아프고 다루기 힘든 자였다. 국왕파의 사람들을 어떻게든 눌러두고 싶은 개혁파는 서로가 싸워 공멸해 주던가 아니면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쓰러뜨려 주리라는 데 걸고 도라 장군을 놔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르그나 요새는 유폐되어 있어야 할 도라 장군이 돌연 수백의 세력을 이끌고 아군으로 나타났다고 해서 그 심중을 의심하거나 하지 않았다. 도라 장군도 역시 어째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는가를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었다. "역시 샤미안 아가씨. 아버님께 직접 배운 무용武勇은 보통이 아니군요. 아버님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 혼자서 저 코랄성에서 탈출해 오시다니 대단한 실력이십니다." "아니오 나시아스님. 제 실력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실수입니다. 저에게 감시역으로 붙어있었던 것은 제대로 검도 쓸 줄 모르는 남작가의 자식이었던데다 감시도 엉망이었거든요. 제가 특별히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저를 여자라고 방심했던 것 이지요." 영롱한 대답에 나시아스와 가렌스는 슬쩍 눈짓을 교환했다. 쓴 웃음과도 같은 무언가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도라 장군은 그런 그들의 상태는 눈치채지 못한 채 몸을 기울이며 좀더 신경 쓰이는 점에 대해 물었다. "그래서 나시아스 경, 우리 폐하는 지금 어디 계신가?" "자세히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이 요새를 출발하실 때에 바로 코랄을 향할 생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허허." 예상했던 것이라 한다면 예상했던 것이지만 의외라고 하자면 의외인 대답이었다. 왕위 탈환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왕국의 심장부인 코랄을 되찾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국왕이 수도로 향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지만 그를 위해서는 상당한 병력이 필수불가결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어느 정도의 병사들을 데리고 가셨는가?" 이 말에는 나시아스와 카렌스가 서로를 마주보더니 뭔가 말하기 힘든 미소를 떠올렸다. "병사는 데리고 가지 않으셨습니다." "뭐라고?" "이 라모나 기사단의 병사는 단 한 명도 데리고 가지 않으셨습니다." 입을 딱 벌린 도라 장군이었다. "그, 그럼 폐하는 단 혼자서 코랄을 향하셨다는 건가! 나시아스경! 귀공 정도 되는 자가 어찌 그런 일을 하시게 했나!" 가렌스가 달래듯이 끼어 들었다. "아니 기다려 주십시오 도라 장군. 정확히 말하자면 폐하는 홀로 계신 게 아닙니다. 발도우의 딸이 함께 하고 있으니까요." "가렌스! 자네까지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아버지." 벌컥 화를 내고 있는 부친에게 샤미안이 가만히 말을 걸었다. 나시아스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라 장군. 가렌스는 비유나 예를 들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는 그렇다고 밖에 말씀드릴 수 없는 자와 함께 계십니다. 저도 이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전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만... 사실입니다." "대체 무슨 소린가?" 이 질문에 나시아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기사의 차림을 하고 있는 젊은 영예를 바라보았다. "예를 들자면... 샤미안 아가씨는 아버님도 자랑스러워하시는 용맹한 기사이기도 하시지만 이 가렌스를 힘으로 누르실 수 있겠습니까?" 거친 질문 내용에 샤미안은 개암나무빛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무리에요. 가렌스의 괴력은 로아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는 걸요. 힘 겨루기라면 아버지라고 하셔도 어렵지 않을까요." "이봐라 샤미안." "저는 별로 아버지를 가볍게 여겨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실이라고 생각해서 말씀드리는 것뿐이에요." "아니 물론 무술이라면 도라 장군께 비할 바가 못됩니다만..." 가렌스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칭찬해 주신대로 저도 힘에는 조금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며칠 전 힘싸움에서 그만 참패하고 말았지 뭡니까." "뭐라고. 자네를 힘으로 누를 수 있을 정도의 강정한 자가 이 근방에 있었다는 건가?" 이번에는 나시아스가 끄덕이며 말했다. "폐하가 데리고 계셨던 겁니다. 여행 도중 만나신 듯 했습니다만 소중한 친구라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코랄을 공격하는 데 있어서나 인질을 구출하는 데 있어서도 누구보다 마음 든든한 아군이 되어 줄 거라고도...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뭐라해도 저까지 멋지게 패배시켰으니까요." "어머." 샤미안이 눈을 크게 떴다. 델피니아에서 미기美技라고까지 칭송받고 있는 나시아스의 검술을 타파하다니 보통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흐음 그렇다면 그 용자가 폐하의 곁에 붙어 있다는 말인가?" "예. 한 사람이라고 해도 충분히 열다섯 정도의 병사에 상응할만한 전력임에 틀림없습니다." "흐음." 장군과 샤미안은 그 용자를 다음과 같이 상상했다. 필경 덩치는 저 국왕을 훨씬 압도할 정도의 거인일 테고 양팔에는 불끈불끈한 근육이 솟아 있으며 생김새는 정후하고 눈매는 날카로울 것이다. 겉은 강하고 속은 담백하여 용맹무비할 것이고 한 성질 할듯한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아마도 중년 이상의 남자일 것이다 라고. 힘과 기술을 두루 갖춘 전사라는 것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묘하군? 그 정도의 남자라면 소문 정도는 들어보았을텐데..." 가렌스가 급히 말했다. "아니오 장군. 남자가 아닙니다." "뭐라고?" "아니 처음 보았을 땐 소년처럼 보였습니다만... 소녀였습니다 그것이." 가렌스는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고 나시아스도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샤미안 아가씨보다 네다섯 살 연하가 아닐까 싶군요." 멍해져버린 도라 부녀였다. 샤미안이 조심조심 확인했다. "저기... 저기 그래도 나시아스님. 그래서야... 열둘인가 열셋 밖에 안 되는 것이 됩니다만?" "예에. 그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에 아무리 뭐라 해도 잠자코 있을 수 없던 도라 장군이 폭발했다. "자네들 두 사람! 대 대체 이것이고 저것이고 지금이 어떤 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겐가! 장난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얼굴이 시뻘개져 노성을 지르는 장군과는 대조적으로 나시아스는 진지한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장군, 그렇게 말씀하시는 기분은 충분히 압니다. 그것도 아주 싫을 정도로 통감합니다. 저희들도 이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실제로 검을 교환해보지 않았다면 이런 이야기는 절대 믿어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가렌스도 말을 첨가했다. "하지만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은 사실입니다. 저라고 해서 이런 걸 인정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저도 나시아스님도 진검 승부를 해서 그 소녀에게 지고 말았습니다. 그건 이 기사단의 주요 인물들이 전부 눈으로 확인한 사실입니다." 장군은 머리에서 김을 내뿜을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진지함 그 자체인 두 사람의 태도에 한발 물러섰다. "그렇다면 뭔가? 열둘 열셋 정도 나이의 소녀가 검술로는 귀공을 능가하고 힘으로는 가렌스를 상회한다는 건가?"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말이 안 되는군! 제군들이 장난으로 그 소녀에게 져준 것이 아니더란 말인가!" "그 정도로 힘을 써 본 일은 이전엔 없었지만 말씀입니다." "그렇게 힘든 상대와 만난 건 처음이었습니다." 즉시 대답하는 두 사람에게 장군은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샤미안도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부친과 두 사람의 얼굴을 교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시아스님. 대체 그 소녀는 어떤 자입니까?" "모르겠습니다. 이름은 그린다, 나이는 열둘 혹은 열셋, 저희들이 알고 있는 것은 그것뿐입니다만 무술도 두뇌회전도 그 나이의 소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 라기 보다는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가렌스가 말하자 나시아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저나 가렌스를 상대로 진검 승부를 하면서도 상처 하나 입히지 않고 승리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소녀의 몸으로 할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이 요새의 외벽을 가볍게 뛰어 오르는 것을 봤을 때에는 저도 모르게 오한이 들었습니다." "외벽에 뛰어 올랐다고?" "예. 아무래도 혼자 힘으로는 안 되는지 다른 사람의 어깨를 빌렸습니다만..." 설마 밟혀준 대상이 국왕 본인이었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넘어가 버린 나시아스였다. "그래도 사람의 다리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코랄의 성벽도 같은 식으로 뛰어넘으면 된다고, 그리고 잡혀있는 페르난 백작을 구해내면 된다고 아무렇지 않게 단언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에겐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 소녀라면 정말로 해낼 수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도라 부녀는 아연한 모습으로 나시아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 요새의 외벽은 물론 성벽도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에 충분한 높이였다. 그것을 도약해서 넘어선다는 것은 두 사람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뛰어내렸다간 즉사할 수밖에 없는 높이인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무서울 정도로 의심스런 눈초리를 향했찌만 그 무언의 질문에 나시아스는 무겁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자야말로 발도우의 딸이라 해야겠지요. 혹은 정말로 승리의 여신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치고는 외모가 너무 뛰어나지만 말씀입니다." 가렌스가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승리의 여신인 하미아가 아름답다는 소리는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만 그때의 하미아는 조금 어리긴 해도 그야말로 아름다웠습니다." "아름답다고요?" 놀란 듯이 물은 샤미안이었다. "예. 그 머리카락은 그야말로 황금처럼 빛나고 얼굴도 모습도 보석을 깎아 만든 것 같이 정연한데다 피부빛은 비유하자면 장미빛이고 눈동자는 그야말로 보석 같은 녹색..." "가렌스 무리해서 시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쓰지 말게. 못 들어주겠네." 젊은 주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가렌스는 흥이 깨진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뭐어. 조금쯤 표현이 진부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던 간에 굉장한 미소녀였습니다." 장군과 샤미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마주치고 가볍게 기침을 한 장군이 진지하게 물었다. "실례지만 두 사람 모두 대낮부터 꿈이라도 꾸고 있던 건 아니겠지?" "역시 못 믿으시겠나요?" "당연하잖나." 나시아스는 낮은 소리로 웃고 있었다. "도라 장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도 합니다. 부디 직접 장군의 눈으로 확인해주십시오. 그러면 아실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런 소리 않해도 나는 즉시 폐하의 뒤를 쫓겠네. 그... 그 소녀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폐하를 혼자서 코랄로 향하시게 놔 둘 수는 없네. 페르난 백작의 일로 마음이 아프신 것은 알지만 그러한 자살행위를 하시는걸 그 백작이 기뻐하겠나." 말하기 무섭게 몸을 돌린 도라 장군이었다. 즉시 샤미안이 뒤를 따랐고 그것만이 아니라 나시아스와 가렌스도 뒤를 따랐다. "도라 장군. 저희들도 함께 하겠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비르그나를 비워둘 셈인가. 코랄이 무슨 짓을 해올 지 알 수 없는데." "저희들도 그렇게 생각해서 폐하와 동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장군. 코랄이 걸어온 함정은 당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상 여기에서 가만히 앉아있을 이유도 없습니다. 일리는 있었다. 장군도 알고 있었다. 코랄을 지배하고 있는 개혁파느느 도라 장군과 비르그나 요새가 아니면 최소한 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도록 시켰던 것이다. 당연히 지금은 결과를 기다리는 태새를 취하고 있을 것이며 즉시 다음 행동에 들어갈 것 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듣게. 그 녀석들은 바로 코랄에 진군시키기 위해 나를 놓아준 걸세. 그렇게 해서 나를 진짜 역적으로 만든 뒤 일만의 근위병단으로 치려는 속셈이지. 그에 비해 우리측의 세력은 양쪽을 합친다 해도 2천 5백. 한번 로아에 돌아간다면 추가로 5백은 얻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길 승산은 없어." "그렇다면 전력을 모집해가면서 코랄로 향하도록 하지요. 폐하가 돌아오셨다고 선포한다면 눈치만 보고 있던 제후들도 생각을 달리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게 단언한 나시아스를 도라 장군이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귀공, 이상하게도 자신이 넘치고 있는데 뭔가 비책이라도 있는겐가?" "아니오. 전혀 근거는 없습니다만..." 나시아스는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이상하게도 지금은 상대가 누구든 질 것 같은 기분이 안듭니다. 폐하는 무사히 돌아오시고 장군과 이렇게 재회할 수도 있었고 게다가 폐하께는 발도우의 딸이 아군이 되겠다 약속하기까지 한 겁니다. 그렇다면 바로 결단의 때가 되었다 아니 할 수 있겠습니까." "나시아스 경..." 다시 기가막힌 듯한 얼굴이 된 장군이었지만 결국 탄탄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렇게 되면 귀공이 그 정도로 숭배하고 있는 그 소녀의 얼굴을 일부러라도 확인해보지 않으면 안되겠군." "그 실력도 입니다 도라 장군." 이때라는 듯이 가렌스가 덧붙였다. 2장 델피니아는 아벨도룬 대륙 중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대화삼국大華三國 중 하나로서 명성이 높았다. 특히 수도인 코랄은 중앙의 진주라고도 불리울 정도의 무역항이자 항상 활기와 열기가 넘치는 풍요로운 도시였다. 그러나 지금 그 평화와 번영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반년 전 관료귀족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라 칭하는 일파가 당시의 국왕을 첩실 소생이라는 이유로 추방하고 코랄을 손에 넣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때까지 국왕파였던 사람들은 권력을 빼앗기고 어떤자는 유폐, 어떤 자는 체포, 투옥 당하는 소동이 일어났따. 일종의 쿠데타였다. 이후 개혁파가 정부 명령을 선포하게 된 뒤 반년이 지났지만 그 치세는 그다지 확실한 점이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개혁파를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이 각자의 이익만을 생각해 국책을 결정하려 하는 것에 있었다고 결국 그들은 '개혁파'를 칭하고는 있지만 방해가 되는 국왕을 내쫓고 자신들 마음대로 백성의 고혈을 빨려했던 것뿐이라는 사실을 이제 와서 시민들도 눈치채기 시작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때에 다행히도 개혁파의 손에서 도망쳐 국외로 도망갔던 국왕이 다시 왕국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 돌아왔던 것이다. "이걸로 한번 난리가 나지 않으면 말이 안되겠네." 굉장한 소리를 태연하게 발설하고 있는 것은 아직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다. 실제로 나이도 그다지 먹지 않은 소녀였다. 간단한 웃옷과 바지만으로 구성된 옷을 입고 늘씬한 팔다리를 드런낸 채 머리에는 하얀 천을 감아 머리카락을 숨기고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문제는 그 환란이 어떻게 정리되는가다." 옆에서 걷고 있는 젊은 남자가 답했다. 이쪽으느 잘 단련된 건장한 장신이었다. 어깨도 가슴도 반해버릴 정도로 단단하다. 길가는 행인들이 대부분 돌아볼 정도로 이색적인 조합이었다. 남매라고 보기엔 외모의 차이가 너무 많았고 자유전사와 시종이라고 보자니 소녀의 태도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고 있는 자처럼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면 혹시나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애인 사이인가 하고도 짐작해보지만 그것 역시 무리가 많았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자면 그야말로 달콤함이라는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투를 쓰고 있었고 게다가 그 이상으로 대화 내용이 살벌했기 때문이다. "복습해 볼까. 너는 위험하니까 코랄에서 떨어진 곳에서 기다려. 그 사이 내가 성안에 숨어들어서 페르난 백작을 구해. 그리고 어딘가로 후퇴한 뒤 병력을 모아서 다시 한번 코랄을 치러 온다 라는 거지." "그것 말인데 리." 무언가를 생각하면서 남자가 말했다. "조용히 숨어드는 것 보다 병력을 모아가면서 진군하는 쪽이 나을 지도 몰라. 지금 가는 길을 쓸데없이 허비할 필요는 없으니까말이야." 녹색의눈동자가 휘릭 움직여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만큼 백작을 구하는 건 늦어지는데도?" "구했을 때 병사 한 부대라도 데리고 있지 못하면 내가 백작한테 야단 맞아."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모르는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그 구별을 하고 싶어." 소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남자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네 실력을 의심하고 있는 건 아냐. 하지만 말이다. 북쪽 탑에 침입해 들어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삼중 성벽의 안쪽에 있는 데다가 탑이라고 말은 하지만 결국 감옥이야. 내부는 안내가 없으면 함부로 걸어다닐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되어 있고 경비도 있어. 게다가 코랄성이나 북쪽 탑도 백작의 얼굴도 본 적이 없잖아." 소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묘한 말을 했다. "이렇게 되면 너와 백작이 같은 핏줄의 부자가 아니라는 게 아쉬운데." "무슨 소리야?" "피로 이어져 있으면 나도 네 아버지를 알 수 있어. 설사 처음보는 사람이라고 해도. 하지만 12년동안 같이 살았다고는 해도 실제로는 타인이었다고 하면 어느 정도 '같을'지는..."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몰라 고개를 모로 한 남자였다. "대체 무슨 소리야?" 소녀는 답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빙긋 웃으면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알아서 해.누가 뭐래도 이건 네 싸움이니까." 남자도 쓴 웃음을 지으며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보통은 왕위탈환이라고 하면 대대로 가문에 전해져 내려갈 정도의 중대한 사명일 텐데 말이야. 너한테 걸리면 아무 것도 아니게 되니." 즉시 소녀가 대꾸했다. "보통은 옥좌에서 쫓겨난 왕이라는건 좀더 비장한 결의로 수도탈환에 도전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야. 너한테 걸리면 완전히 놀자판이야." 남자는 굵은 목소리로 웃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월 그리크 로우 델핀. 코랄이 그 귀국에 뒤흔들리고 도라 장군이 혈안이 되어 응원을 위해 달려가려 하는 델피니아 국왕, 바로 본인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보이질 않는다. 관광여행이라도 온 것 같이 속 편한 모습이다. 지극히 재미있다는 듯 경치를 감상하면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오히려 소녀쪽이 기가 막혀 반 쯤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그린디에타 라덴. 리라고 부르라고 본인은 말한다. 어디에서 온 것인지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한 것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연령은 13세가 막 되었을 정도. 그리고 외모와는 달리 굉장한 괴력과 전투능력, 범상치 않은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비르그나 요새의 가렌스가 저도 모르게 칭찬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소녀였다. 나이는 아직 모자라지만 탐스러운 이마에 선명한 선을 그리는 녹색 눈, 장미빛 입술, 늘씬한 팔다리 등, 돈 많은 호색가가 군침을 흘리며 소유하고 싶어할 정도의 소녀였다. 옥의 티라면 바로 그 말투였다. 상대가 열살 이상 차이나는 연상의 어른이라는 것도 아니 그뿐 아니라 지금은 추방되어 있다고는 해도 왕이라고 하는 일국의 최고권력자라는 것도 이 소녀에게는 경외의 대상이 되지 않는 듯했다. "너같이 둔한 녀석은 누군가가 눈을 밝히고 있지 않으면 어디에서 어떤 바보짓을 할지 모르니까 말야." 그런 말을 눈앞에서 본인한테 대놓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왕 쪽도 전혀 지지 않았다. "내가 그 정도로 둔한가?" 그런 것을 아무렇지 않게 묻는다. "왕좌에서 쫓겨날 때까지 모반을 눈치채지도 못했으면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런 소리를 들으면 찔리지." "가능하다면 아군은 많은 쪽이 좋아. 지금으로선 분명하게 아군이 되어줄 만한 건 비르그나의 2천 뿐이야. 짚이는 데가 있다면 시험해 볼 필요가 있겠지." 비르그나를 출발해서 3일째의 아침이었다. 방랑의 국왕은 소녀의 허락을 얻음과 동시에 진로를 바꿔 그날 낮 사이에 어떤 저택의 손님이 되어 있었다. 델피니아 남부의 포트남 지방이라 불리는 지역의 영주 저택인듯 했다. 상당히 힘이 있는 호족의 저택인 듯 저택이라고 하기보다는 요새와 성의 중간정도 되어 보이는 훌륭한 구조였다. 반년 간 소식불명이었던 국왕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저택 주인은 놀라서 황급히 두 사람을 맞아들인 뒤 접대해 주었다. 정중한 환대가 있는 뒤 남자는 정곡을 찔러 말했다. "그나저나 이제부터 코랄을 되찾으러 갈 생각인데 전열에 가세헤 줄 수 없겠나. 이쪽의 세력은 비르그나, 로아, 마레바를 합쳐 4천을 넘어서네. 또한 코랄에 잡혀 있는 이누아 후작, 핸드릭 백작 등의 가신家臣들도 주인을 구출하기 위해 아군이되어 주기로 약속하고 있다. 추가로 우리끼리의 이야기지만 근위병단도 전부 다가 코랄에 충성을 바치고 있는 건 아니야. 삼분의 일은 이미 이쪽과 손을 잡고 있다. 그곳에 추가 4천의 군대가 일제히 쳐들어간다면 승산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소녀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현 시점에서 코랄과의 연락 따위는 전혀 취할 수 없고 로아라든가 마레바라든가 하는 건 처음 듣는 이름들이었다. 하물며 귀국한 직후이면서 근위병단 내부에 손을 써두고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태도에는 자신이 넘쳤고 진실로 자연스러웠다. 거짓말이나 위세를 부리고 있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저택의 주인은 진지한 얼굴로 침묵에 빠졌지만 드디어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신하의 한 사람으로서 무사히 귀국하신 일은 마음 깊이 기쁨을 느끼고 있다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원 약속은 드릴 수가 없습니다." "호오? 어째선가. 그대도 나를 가짜왕이라고 생각하는 한 사람이기 때문인가?" 주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폐하. 저는 폐하께 어떤 악의도 없습니다. 페르젠 후작이 뭐라고 떠들어대는 일도 진심으로 받아들여 본 일은 없습니다. 현재도 진실된 국왕은오리고에 맹세코 당신 한 분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양부이신 페르난 백작이 뒤집어 쓰고 있는 의혹도 대단히 의심스럽다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엉터리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고맙군." 주인은 똑바로 머리를 들고 "저는 유언비어에 현혹되는 인간이 아닙니다. 공교롭게도 백작을 만나뵌 일은 없습니다만 거의 북부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있던 페르난 백작이 전 국왕의 후계자를 암살했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고 똑똑하게 단언했다. "지금 폐하께 가담하기를 거절한 것은 당신의 인품을 의심하거나 페르난 백작의 정의를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더욱이 페르젠 후작에게 겁을 먹어서도 아닙니다. 그저 제게 소속되어 있는 자신들을 무익하게 죽게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 하나 때문입니다. 겁장이라고 비난하셔도 중앙에 이름 높은 근위병단과 난공불락의 코랄 성을 상대로 그렇게 쉽게 가담하겠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승산이 있다고 당신은 말하지만 신용할 수는 없다. 게다가 4천의 군세와 근위병단 내의 가담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확실한승리에는 부족하다. 확실하지 않은 이상 모험은 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야말로 불경스러운 말이었으나 남자는 시원하게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분명 이번엔 내 쪽이 예의가 없었던 듯 하다."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오리고에 맹세코 또한 투신 발도우에 맹세코 나는 반드시 왕좌와 나의 도시를 되찾겠다. 내가 지휘하는 군대가 코랄을 포위했다는 소식이 여기까지 들려온다면 그때에는 아군이 되어 주겠나." "말씀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저도 무장 자투리는 되는 몸입니다. 지각 참여라는 불명예는 결코 사양하고 싶으니까요. 폐하께서 군대의 선두에 서서 코랄에 진군하신다는 보고가 있는 즉시 반드시 원군으로서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보고 있던 소녀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누가 뭐래도 상대는 국왕이며 이 저택의 주인은 그 신하이다. 그런데 신하에게는 주군의 명령을 거부할 권리가 있는 듯 했다. 그뿐 아니라 주군의 세력이 약하면 모르는 척하고 강하다면 당당히 가세하겠다고 한다. 사람을 얕보는 이야기였다. 하룻밤 천천히 지내다가라는 청을 거절한 채 두 사람은 저녁이 다가올 즈음 저택을 나섰다. "최근 이 근처에는 묘한 자들이 돌아다녀 왠지 어수선합니다. 주무시고 가시는 것이 나으실 겁니다." 저택의 주인은 몇 번이나 권했지만 그들에게는 야숙을 하는 쪽이 익숙하기도 했고 성미에도 맞았다. 설사 도적질에 눈 먼자들 다섯이나 열이 덤빈다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등뒤로 아직 떠 있는 서쪽 해를 맞으며 갈 길을 서둘렀다. 그 도중에 소녀는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신하인데 저 정도로 확실하게 주인을 돕지 않을 자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네가 있던 곳에서는 아닌가?" 남자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물어왔다. "패배가 확실한 전투에 목숨을 거는 짓은 어리석음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지. 하물며 혼자 몸이 아니야. 비호하지 않으면 안될 식구들을 저 남자는 몇백 명이나 가지고 있는 거라고." "그거야 분명 그렇긴 하지만."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다만 비르그나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뭐 그런거나 여러 가지로 말이야. 이곳의 방법으로는 죽는다고 알면서도 주인에게 붙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기사의 명예라고 칭송받는 건가보다 생각했었으니까." "그건 분명 그렇긴 하지." 소녀와 똑같은 식으로 말했다. "요컨대 때와 장소가 있다는 거지. 의가 없다는 소리는 기사에게 무엇보다 치욕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무모하다는 것도 또한 이름을 더럽히지. 즉 자신의 경솔함으로 인해 가신들을 죽게 한다면 대대로 수치스러운 일이니까." "하항." "그 남자는 사려 깊은 인물이다. 괜히 사람을 죽게 하는 모험을 하지 않아. 내 세력이 정말로 확실한 것인지 알 때까지 지켜보는 자세를 취하겠지." "그래서 4천의 병력은 진짜 모이는 거야?" "그건 뻥이야." 소녀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뻥이라고?" "그래. 세상일은 뭐든지 기세라는 말도 있잖아. 설마 고립무언에다 눈앞이 깜깜한 상태라고는 말할 수야 없지. 아까처럼 말해두면 혹시 어딘가에 비장의 숨겨둔 군대라도 있나 하고 생각할고고. 혹시 정말로 코랄을 되찾아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거 아냐. 혹은 내 거짓말을 꿰뚫어 보고 이런 허풍선이 같으니 하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그 남자는 나를 붙잡으려고도 한자리 챙기려고도 하지 않았어. 그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소녀는 완전히 어이없다는 눈초리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꽤나 여러가지 종류의 인간들을 보아왔지만 정말로 이렇게 재미있는 녀석은 처음이야." 남자 쪽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걸로 네 번째다 그거. 재미있다 재미있다 너는 말하지만 나는 그저 보통의 일반적인 남자일 뿐이야." "자기가 그런 소리를 하는 녀석 치고 보통이었던 적이 없지." 소녀는 단언하고 말을 이었다. "바보인 건지 어딘가 끊긴 건지 둔한 건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 이런 걸 가지고 아무도 보통이라고는 말하지 않을 걸. 굉장히 재미있어 별나다구." 남자는 살짝 웃으며 옆을 걷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 "이전에도 비슷한 소리를 들은 적 있어." "아버지한테?" “아니 친구야. 소꿉친구였지." 소녀의 눈썹이 이 말에 살짝 움직였다.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는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이 남자는 어느 날 갑자기 전 국왕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거의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왕좌에 앉게 되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드문 행운을 잡았다고 할 지 모르지만 그 때문에 잃어버리게 된 것들이 훨씬 많았다. 첫 번째는 부친. 두 번째는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그때까지의 이 남자와 국왕이 된 이 남자를 다른 사람으로 취급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물론 두 사람만이 되었을 때에도 경어를 썼고 주종의 관계와 신하로서의 입장을 강하게 고집하여 결코 그 선을 넘어서려 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마도 그 소꿉친구 역시 친구이면서도 친구가 아니게 되어버렸을 것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남의 오랜 상처를 건드리는 듯한 짓을 소녀는 좋아하지 않았다. 화제를 돌렸다. "전부터 가끔 묻고 싶었는데 오리고라는 건 어떤 신이야?" "그렇군. 한마디로 말하자면 학문과 계약의 신이다. 무서울 정도로 엄격한 신이기도 하지. 대부분의 학사나 도서관에는 오리고의 제단이 모셔져 있고 모든 계약 의식에 반드시 동반된다." "계약이라고 한다면 예를 들면 동맹조약이라던가 지금처럼 아군이 될 건지 안될 건지 하는 그런 계약?" "물론이야. 뭐어 그런 일을 한다고 해도 깨어질 놈은 깨어지는 거지만. 여기 내가 바로 좋은 예지. 대관식 후 많은 귀족들이 나를 주군으로서 존경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겠다고 오리고에게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반년 뒤에 그 맹세를 깨버렸다는 거니까." "그렇다면 깬다고 해도 벌칙은 없는 거군?" "그렇지도 않아. 대놓고 맹세를 깬 다음 기분좋은 사람은 없지. 그 때에도 제후들은 우리들은 맹세를 깨는 것이 아니라 가짜 왕을 왕좌에 앉히는 잘못을 고치려 하는 거라고 그런 대의명분을 외치고 있었으니까." "말은 하기 나름이네." 형식적으로 대꾸하는 소녀를 보며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오리고는 일반적으로 결혼식을 집전하는 신으로서 유명하지." "결혼식에서 학문의 신을 부르는 거야?" 소녀가 눈을 둥글게 떴다. "뭔가 담당이 틀리다는 느낌이 드는데 말야. 뭔가 조금 그 애정의 신이라던가 부부를 사이좋게 해주는 신이라던가 그런게 달리 없는 거야?" 남자는 거의 폭소할 뻔하면서 소녀를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어느 쪽이냐고 그 눈이 말하고 있었다. 거한도 압도될 정도로 냉정한 얼굴을 보이는가 생각하면 지금처럼 순진한 어린아이 그 자체의 표정을 보여준다. "물론 사랑의여신은 따로 제대로 있어. 하지만 말이야. 사랑의 여신에게 의지하는 건 여인들이야. 그의 혹은 그녀의 마음을 내것으로 하고 싶다 그것을 위해서 힘을 빌려줬으면 좋겠다고 비는 거지. 결혼은 그 뒤에 드디어 이 상대와 일생을 함께 하기로 결정한 뒤의 일이니까 말이다. 이것도 일종의 계약임에는 틀림없지. 남자는 여자를 처로서 사랑하고 아끼며 여자는 남자를 남편으로서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계약의 신인 오리고 앞에서 서로 맹세하는 거야." "하항 알만하군." 감탄한 듯이 끄덕이는 소녀였다. 주변은 슬슬 옅은 어둠에 잠겨가고 있었다. 야숙할 생각이었던 두 사람이었지만 바로 그 때 전방에 작은 촌락이 보였다. 마을이라고 할 정도로 크지도 않고 몇 채의 농가가 모여있는 곳이었다. "저곳에서 오늘 밤 잘 곳을 빌리자." 비르그나에서 노자는 잔뜩 들고 온 데다 농가의 사람들은 설사 유랑하는 기사라 하더라도 무사武士에게는 예의바르게 대해 준다. 돈을 내고 부탁한다면 하룻밤 묵어가는 손님으로 맞아줄 것이라고 생각하여 들렀지만 그 작은 촌은 이방인에 대해서 이상할 정도의 경계심을 보였다. 아직 어스름인데도 어떤 집도 굳게 문을 걸어 잠그고 조용히 정적에 감싸여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집에 다가가 남자가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었다. 비어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사람의 기척은 있었다. 그것도 소리를 죽여 이쪽을 살피는 듯한 이상한 기척이었다.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다시 잠시동안 기다려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자 드디어 문에 붙어 있는 작은 엿보기창이 열렸다. "누구신지?" "여행하는 자인데 묵을 곳이 보이지 않아 부탁드리려는 것이오. 갑작스레 무례한 부탁이긴 하지만 이걸로 하룻밤 잠잘 곳을 제공해 주지 않을런지." 부드럽게 말하면서 은화를 보였다. 문 안쪽의 눈은 감정이라고 하는 듯 힐끔거리며 남자를 가차없이 훑어보고 있었지만 그래도 문을 열려고는 하지 않고 엿보기 창으로부터 손을 내밀어 보였다. 남자는 거역하지 않고 그 손에 은화를 떨어뜨렸다. 집주인은 문의 저쪽에서 은화가 진짜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더니 여전히 굳게 닫혀있는 문의 너머에서, "창고라도 괜찮다면 묵어 가십시오." 라고만 말했다. 남자는 이 무례한 대접에도 화를 내지 않고 "고맙소." 하고 인사한 뒤 소녀를 데리고 창고로 향했다. 소녀도 이상할 정도로 강한 경계심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위험인물로 보인 걸까?" "글쎄. 영주가 말했던 묘한 자들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는 지도 모르겠군." 창고 안은 넓고 누울 만큼 충분한 여유도 있었다. 먼지 냄새가 나는 흙바닥 침대지만 지붕도 벽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다르다. 누워있던 소녀가 문득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한 나라의 왕이 창고에서 자다니 말야." "지금의 나한텐 이걸로도 충분해." 남자도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봄이 한창일 때였다. 어둠도 따듯하니 기분이 좋았다. 두 사람은 금밤 잠이 들었다. 3장 하루 종일 계속 걸어다녔던 피로도 있어 두 사람은 깊이 잠들었다. 그러나 그 잠은 의외로 빨리 깨버렸다. 이상한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처음 들은 것은 말발굽 소리였다. 그것도 여러 필 똑바로 이쪽을 향해 오는 소리였다. 지금 자신들이 쫓기는 입장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 월이었다. 즉시 벌떡 일어났다. "리!" "일어났어." 언제나 그렇지만 어떤 상황에 놓여 있어도 이 소녀의 간담은 역전의 무장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미 일어나 앉은 채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많군. 여덟, 아홉... 좀 알기 힘든 걸. 대충 그 정도다." "기다려. 추적자치고는 상태가 이상해." 말발굽의 울림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것과 동시에 높은 기성이 들려왔다. 고주망태가 된 남자들이 바보스럽게 난동을 피우고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두 사람은 창고 문 사이로 가만히 밖을 내다보았다. 횃불이 어둠 속에서 맹렬히 타고 있었다. 동시에 남자들의 어조도 맹렬했다. 환성을 전후하여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계속해서 말의 울음소리, 돼지 우는 소리, 닭 우는 소리 등이 정적에 잠긴 어둠 속에서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가축도둑인 듯 했다. 게다가 이 정도로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 데도 근처의 집은 물론 습격받고 있는 집의 사람들도 뛰쳐나오려는 기척이나 놀라서 떠들썩해지는 기척도 없었다. 섣불리 거역했다 상처라도 입으면 큰일이라고 판단해서 가만히 찾아 넘길 셈인지 혹은 가축 만이라 다행인 거라고 스스로에게 들려주며 얌전히 있을 셈인 것인지 몰랐다. 남자들은 근처를 살피려고도 하지 않았따. 자기 것처럼 돼지를 쫓고 닭을 잡아가고 있었다. 창고 안에서 소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쩔거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남자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임금님이면 국민의 재산을 지킬 의무가 있는 거 아냐?" "때와 장소에 따라서지." 강도를 눈앞에 두고서도 두 사람은 냉정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만약 이 습격이 정기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거라면 일시적으로 쫓아버린다고 해도 의미가 없어. 그러긴 커녕 괜히 끼어들었다간 되려 사태의 악화를 부르지." "의외로 냉담하네." "냉정이라고 해 줘. 그러는 너는 어때. 약한 자들을 위해 떨쳐 일어나 녀석들을 쫓아내 버릴 생각은 없는 건가?" 소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사람들이 포기하고 맘대로 하게 내버려두고 있는 걸. 남이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잖아." "어느 쪽이 냉담한 거야." 그런 말을 나직하게 나누고 있었지만 그러던 도중 그러고 있을 수도 없는 사태가 일어나 버렸다. 그들이 창고를 빌린 집이 억지로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의 비명이 울렸던 것이다. 처음은 어린 소녀의 비명이었다. 이어서 어머니인 듯한 여자의 찢어지는 소리 거기에 아버지의 필사적인 애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 기다려 주십쇼! 집안 사람들에겐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습니까!" 남자 여럿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난리 칠 필요도 없잖아." "그렇고 말고.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별로 잡아먹겠다는 것도 아냐. 술 좀 따르게 하겠다는 건데 뭘 그래." "딸을 놔주십쇼!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릴 테니 제 딸만은 용서해주십쇼!" 비통한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끈덕지구만!" "집 채로 홀랑 타고 싶냐!" 둔한 구타의 음색. 고통의 신음소리. 쓰러지는 남편에게 매달리는 처의 비명.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딸은 반쯤 미쳐가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발버둥쳐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는 듯 했지만 남자들은 그런 저항을 재미있어하며 저마다 들어주기 힘들 정도로 저질스러운 말들 쏟아내면서 소녀를 놀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창고 안에서 즉각 마음을 정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보아 넘길 순 없다. 소녀는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소를 쫓는 데 쓰는 것인지 혹은 새를 쫓아내는 데 쓰는 것인지 손목만한 두께의 길다란 봉이 있었다. 한 자루를 들고 또 한 자루를 남자에게 던지더니 소녀는 창고에서 튀어나가며 외쳤다. "그 손을 놔!" 밖에서는 수염투성이의 남자들이 벌써 발버둥칠 힘마저 상실하고 늘어진 이 집 딸을 말 위에 태우려던 참이었다가 이 목소리에 놀라서 돌아보았다. 맑게 울리는 나이 어린 목소리와 딴 말을 허용하지 않는 거센 어조가 너무나 서로 부조화르르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다섯 명이 말을 타고 있었다. 그 외에 네 명이 말에서 내려 이집 사람들에게 무기를 들이대며 움직임을 봉쇄하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은 창고에서 나타난 것이 작은 어린애라고 보고 혀를 차면서 다가왔지만 소녀라고 알아차린 순간 빙그레 웃었다. "헤헤. 이런 곳에도 계집애가 숨어 있던 건가. 마침 잘됐군. 한 사람으론 아무래도 모자라던 차다. 따라 와." 말하며 소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런 짓을 하게 놔둘 리가 없었다. 양손에 자신의 키와 거의 같을 정도의 봉을 쥐더니 창처럼 자세를 잡고 소녀는 다가온 녀석을 있는 힘껏 찔렀던 것이었다. "으악!" 굉장한 기세였다. 그 남자는 공중 높이 떠올라 날아가더니 지면에 곤두박질치고는 기절해 버렸다. "뭐야?!" 웅성하고 나쁜 놈이 동요하는 가운데 소녀는 다시 한번 말했다. "그 손을 놓으라고 말하고 있다." 무뢰한들도 집 주인도 말안장에 태워질 참이었던 소녀도 아연해 하고 있었다. 특히 잘 생긴 말에 타고 있던 두목 격인 듯한 남자가 다각거리며 말을 가까이 몰아오더니 그 위에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뭐냐 네놈은?" "이 창고의 손님이야." "손님? 손님이라면 잠자코 있어. 집주인이라면 몰라도 손님한테 이래라 저래라 소리를 들을 입장은 아니란 말이다." "집주인은 딸을 놔주라고 말하고 있어. 그 아이도 싫다고 하잖아.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건 그쪽이야. 얌전하게 돌아가지 그래." 그러나 남자는 듣고 있지 않았다. 호리호리한 소녀의 몸을 흘낏 흘낏 훑어보고 있었다. "네놈 대체 어떻게 저 녀석을 날려보냈지? 그런 말라빠진 몸으로. 마법이라도 썼냐?" "돌아가라니까. 이걸로 세 번째야." 소녀의 완고한 자세에 도적은 반쯤은 화가 나면서도 반쯤은 재미있다고 느낀 듯 했다. "싫다고 하면 어쩔 셈이냐 에?" "이렇게 하지." 말하기 무섭게 소녀는 붕! 하고 봉을 휘둘렀다. 그 끝은 정확하게 말 위에 앉은 남자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으악!!" 말 위의 남자는 후두부를 붕 옆으로 강타당해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단순한 열세 살 소녀의 힘이 아니다. 거한인 가렌스조차 무릎꿇게 한 괴력인 것이다. 게다가 있는 힘껏 때린다면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잘되면 기절 나쁘면 즉사할 수도 있었다. 낙마한 남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소녀는 봉을 손에 든채로 휘릭 뛰어올라 방금까지 기수가 있던 위치에 멋지게 착지했다. 놀랍게도 소녀는 말을 조작하기 위해 고삐를 사용하지 않았다. 양손으로는 봉을 쥔 채 가볍게 배를 찬 것만으로 달리게 만들더니 눈 깜짝할 새에 다른 네 기騎에게 달려든 것이다. 말 위에서도 소녀의 무용은 퇴색함을 몰랐다. 좌우로 봉을 휘두르며 즉시 모든 안장을 비워버렸다. "이 이 빌어먹을 놈이!!" 지상에 있던 남자들은 격노하며 말 위에 있는 소녀를 잡으려고 무턱대고 돌진해왔찌만 소용없었다. 한 사람은 말의 앞발에 채이고 한 사람은 한 손의 봉에 머리를 얻어맞고 남은 한 사람은 소녀의 발에 후려쳐져 뻗어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도 소녀가 안장에서 내렸을 때에는 이미 아홉 명의 남자가 지면에 굴러다니고 있었다는 그야말로 마법을 사용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거야 참... 조금쯤은 봐주는 게 어때." 그런 말을 하면서 이제야 창고에서 나온 남자에게 소녀는 비꼬는 듯한 눈길을 향했다. "높은 데서 관람하시기로 결정한 놈이 할 소리냐." "별로 결정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나올 틈을 전부 빼앗겨 버려서 말이야." 조금은 원망스러운 듯 남자가 말하며 쓰러져 있는 자들에게 눈길을 보냈다. 다행히 라고 말하면 이상하지만 모두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분간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뭐 죽지 않은 것만이라도 운이 좋았던 것이리라. 두 사람은 창고에 있었던 밧줄을 들고 나와 남자들을 구슬 엮듯이 줄줄이 묶었다. 그렇게 해놓고야 그제서 두려워하면서 이쪽을 살피고 있는 이 집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유괴되기 직전에 구해진 소녀는 울면서 어머니와 끌어안고 지면에 주저앉아 있었다. 옆에는 부친이 같은 식으로 주저앉아 처와 딸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주인장 이 놈들은 어떤 자들이오? 집안 식구에겐 손을 대지 않는 약속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주인이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두 사람을 보았다. "딸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것만을 말한 뒤 다시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주인장 울고만 있어서야 사정을 알 수 없소. 이유를 말씀해주지 않겠소." 주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말씀드린다고 어떻게 될 문제도 아닙니다요." 그리고 다시 운다. 남자는 곤란함이 가득한 표정이 되었고 그 옆에서는 소녀가 양쪽 눈썹을 약간씩 올리며 들고 있던 봉으로 땅을 퉁퉁 치고 있었다. "저기 말야. 우는 건 어떻게 된 일인지 얘기해 주고 하지 않을래." 인정이고 사정이고 없다. 주인은 비장한 표정으로 이 자들은 기르취산의 산적이라고 설명했다. "원래는 타우 산맥의 산적인 듯 합니다만 그게 갈라져서 이런 남쪽 끝까지 흘러 들어온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의적이라고 칭송하며 기르취산을 본거지로 해서 지들 것인 양 주변을 휩쓸고 다녔습니다." "오늘 같은 일은 자주 일어나오?" "일상다반사입죠. 어딘가로 그냥 꺼져주면 좋을 것을. 이 포트남을 자기들이 경비해 준다느니 자기들에게 거역하는 건 타우를 거역하는 거나 같다느니 하고 떠들고 다녔죠. 이 근처 농가는 전부 그들에게 가축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셀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설마 딸까지..." 그 딸은 모친에게 딱 달라붙어 울고 있었다. "이 일을 알게 되면 그 녀석들은 반드시 보복하러 올 겁니다. 그랬다간 끝장입니다." "주인장, 그 산적들의 세력은 대충 어느 정도 되오?" "모릅니다요. 수십 명이라고도 수백 명이라고도 들었으니까요. 누구도 확인해 본 자는 없는 겁니다." "그런 것이 이 근처를 거점으로 하고 있는데 영주는 대체 뭘 하고 있는거지?" "영주님은 이 정도로 피해가 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시는 겁니다. 뭔가 묘한 자들이 늘어나서 곤란하다고는 생각하고 계시겠죠..." "그렇다면 탄원이라도 해보면 되지 않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남자가 말했지만 주인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거요? 이곳의 영주는 그 정도로 말이 안 통하는 남자가 아닐 텐데." "나그네분. 당신은 금방이라도 이 땅을 떠나실 겝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지금부터도 앞으로 몇 대나 계속해서 이 땅에서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관청에라도 신고했다고 알려졌다간 그야말로 산적들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는 겁니다. 그들의 배후에는 수천인지 수만인지 하는 타우의 산적이 붙어있는 거니까 말입니다." "그럼 지금처럼 계속 녀석들에게 식량과 숨을 곳을 제공하면서 살고 싶다는 거요?" 주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게다가 딸은 어떻게 되오? 지금은 무사히 지나갔지만 앞으로는 같은 재난이 반드시 반복될 거요." "딸네미는 내일이라도 친척들이 있는 곳으로 보낼 겁니다." "주인장. 그래서야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소." "나그네분, 저희들은 이렇게 해서 살아남아 왔습니다. 초지와 밭이 있는 이상 저희들은 이곳을 떠날 수도 없습죠. 달리 어떤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소녀는 가볍게 혀를 차고 남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쌍한 일이고 사정도 납득은 가지만 이 정도가 되면 동정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최선의 수단은 본인만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남이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없는 점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된 이상 보고 넘길 수는 없었다. "알았소. 그럼 그 산적들이 한 놈도 남김없이 붙잡혀 투옥되면 되는 거요?"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죠." "해보지 않으면 모르지. 주인장도 본 대로 이 소녀는 남자 열 명을 순식간에 쓰러뜨리지. 나도 뭐... 이 정도로 튀는 실력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는 되고. 우리들이 산적굴을 파헤쳐서 관리에게 통보하는 걸로 하겠소. 청원한 것이 여행하는 자유전사라면 주인장에게도 해가 미칠 리 없고." "어이." 소녀는 기가 막혀 살짝 남자의 주의를 끌었다. "그런 샛길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야." 큰 일 전에 작은 일부터라고도 한다. 지금은 똑바로 코랄을 향해 가며 중간중간 유력한 제후들을 꼬시고 가능한 한 확률 높은 수도탈환을 위한 수단을 만들지 않으면 안될 때인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이갸기까지 들어놓고 내버려둘순 없어. 그냥 뒀다가는 피해가 점점 커지기만 할 거다." "그렇다면 아까 그 영주한테 이걸 전해주면 되잖아. 자기 영지니까 그 뒤엔 그쪽에서 어떻게든 하겠지."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었다. "산적 퇴치라는 건 그렇게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지리적 이점은 그 녀석들에게 있어. 함부로 공격했다간 영주군쪽이 험한 꼴을 당할 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무엇보다 타우의 산적이 이런 남쪽까지 내려와서 광폭하게 휩쓸고 다닌다는 게 신경 쓰여. 내가 아는 한 그들은 동료 이외의 인간들과는 관계를 피하고 무고한 양민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을 터였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와 시민들로부터 식량을 약탈했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어." "그렇다고 해서 네가 타우 산적의 명예회복에 나설 필요는 없잖아." 맞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진 않았다. "산적을 위한 게 아니야. 나를 위한 거다. 이곳은 내 나라이고 그들은 내 백성이야. 부당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주는 것이 의무라는 거다." 확실하게 단언했따. 고지식하다 해야 할지 고집불통이라 해야 할지, 무슨 소리를 해도 물러설 기색은 없어 보였다. 소녀는 결국 포기하고 그야말로 거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페르젠이 너를 쫓아낸 이유를 아주 자알 알 것 같아. 다루기 힘든 게 이 정도는 없겠어." "영광이군." 웃지도 않으며 남자가 말하자 소녀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째서 이런 이상한 놈하고 알게 된 건지." "그거야말로 발도우의 인도하심이라는 거겠지. 같은 배를 탄 거라고 생각하고 따라 와." 역시나 진지하게 남자가 답하자 그렇잖아도 화가 나있던 소녀는 정강이를 차버렸다. 기르취 산맥은 델피니아 남부에서는 최대의 산맥이었다. 붙잡은 산적을 관리들에게 넘기고 북으로 진로를 바꾼 그들의 눈앞에 그것은 마치 파도가 치듯 넘실넘실 펼쳐져 있었다. 중심을 이루는 것이 기르취산이며 그 외에도 다섯 개의 산이 있고 각각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것들이 날렵하게 늘어서 있는 모양은 상당히 웅대한 광경이었지만 남자의 말로는 "타우에 비교하면 모형정원이나 마찬가지야." 라는 듯 했다. 무슨 인연에서인지 산적 퇴치에 나서게 되어버린 그들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실제 두 사람만으로 퇴치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쨌든 본거지를 알아내서 영주에게 통보해 뒤는 그들에게 맡기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본거지를 찾아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두 사람은 간단하게 자신들이 미끼가 되기로 결정했다. 비르그나를 출발한 그들은 로쉐의 가돌르 통하지 않은 채 남쪽으로 내려가서 항구로 돌아 코랄에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이 포트남을 포함한 남부지방의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가기 위해 로쉐의 가도를 나가려 할 때라면 기르취 산맥을 넘어가는 쪽이 일반적 이었다. 모형정원 같은 것이라고 남자는 말했지만 이것을 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보통 여행객은 해돋이와 동시에 기르취산의 산기슭을 떠난다. 자연스레 가다보면 정상 근처에서 점심을 맞이하고 해가 질 무렵에는 산의 반대편 로쉐의 가도에로 내려 갈 수 있게 된다. 길도 정비되어 있는 데다가 도중에는 여행객들이 잠시 쉬어가기 위한 찻집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하루가 거의 꼬박 걸리는 산넘기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일부러 한낮이 지나서야 기슭을 출발해 천천히 산을 올랐따. 꼭대기에 닿을 즈음에는 이미 해는 저물어 있도록 나아갔던 것이다. 상당히 일정에 쫓기고 있거나 뭔가 뒤가 구린 자들이 아니라면 밤중에 산을 넘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태양이 숨어버린 암흑의 무서움은 누구나가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길을 잘못 들 지도 모르는 데다 발을 다치게 될 지도 모른다. 짐승에게 습격받을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늑대 무리와 만나게 되어도 어쩔 도리가 없다. 반대로 말하자면 밤에 고개를 넘는 여행자는 산적에게 있어 절호의 사냥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너무 정직하게 능선을 올라오는 자를 놓칠 리가 없었다. "생각은 잘 했는데 말야..." 거대하게 부풀어오르는듯 보이는 저녁노을에 눈을 가늘게 뜨며 소녀가 말했다. "덮쳐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 무사히 능선을 넘어가서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음 그래도 돈 좀 가진 것처럼 보이면 좋겠지만 말이다." 남자는 묘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예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다른 여행객들이 지나가는 걸 기다려보는건 어떨까." "다른 사람을 기다려서 어쩌게?" "아니. 돈이 있어 보이면 산적들도 주목하고 있다가 습격해 올테니까 말야. 그걸 중간에 가로채던가 사냥감을 털은 걸 미행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자동적으로 본거지에 도달하게 되지 않을까." 소녀는 기가 막혀 대꾸했다. "무슨 속편한 소리를 하는 거야.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가만히 보고 있자고?" "아 그런가. 안되겠군. 죽여버리나." "바보." 아무리 봐도 13세의 소녀와 24세의 남자가 할 대화가 아니다. "대체 그런 위험한 작전을 세우는 쪽이 뭔가 이상한 거지. 큰 일을 눈앞에 두고 살해당할 지도 모른다던가 그런 생각은 안해 본거야?" 아픈 데를 찔린 듯 했다. "그건 생각하지 못했군 그래." "정말 나사가 어디 한 군데 빠져있다니까. 제일 먼저 생각해야 될 부분이잖아." 투덜거리면서도 소녀는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닌 듯 했다.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뭐 그건 그렇지. 그건 그렇지만..." 남자도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며 "아무래도 말이지. 너와 함께 있으면 죽을 것 같은 생각이 안 든단 말이야." 소녀가 눈을 둥글게 떴다.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월 혹시 내가 불사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던가 한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말해도 별로 설득력이 없는 걸."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그런 몸으로 열 명분의 괴력에 명인급 무술에다 사당패급 몸놀림이라 치면 불사신이 아닌가 하고 의심해도 누구도 날 뭐라하지 않을 걸." "날 때부터 이런 것도 아니고 자랑하려고 배운 것도 아냐. 살아남으려고 몸에 익힌 거다."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말투였따. 남자는 흠칫 놀라서 곁을 걸어가고 있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정말 한순간 무언가 위험한것이 번뜩인 것을 느꼈지만 소녀는 곧 그런 기척을 깨끗이 지우고 빙그레 웃었다.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똑같은 생물이라는 것은 틀림없어. 베이면 아프고 심장이 멎으면 죽는다고. 만약의 사태에는 내 몸 하나 지키는 걸로 바쁘니까 말야. 너무 뒷치닥거리하게 하지마." "조심하지." 그런 걸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점점 태양은 기울고 주변은 빠르게도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정상 근처에는 찻집이 오똑하니 세워져 있었다. 여행자들을 위한 것인 듯 했다. 그러나 아직 해가 지기도 전인데 굳게 문은 닫혀 있었고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듯한 상태였다. 산적들이 번번히 출몰하게 되어 장사가 되지 않게 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찻집 마당을 빌려 야숙을 하기로 했다. 출발하기 전에 신세를 졌던 농가에서 식량을 챙겨주었다. 딸을 구해준 답례라고 했다. 모닥불을 피우기 위한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붙이고 물통에 담겨있던 에일 주와 육포로 식사를 떼웠다. 그러는 사이 태양은 서쪽으로 넘어가 사라지고 주변은 시커면 어둠에 뒤덮였다. 하늘에는 가느다란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흘러가는 구름이 그 희미한 빛을 보였다 숨겼다 하고 있었다. 지상에서는 불꽃이 춤추며 타닥거리며 불이 타는 기분 좋은 음을 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외에 들려온다 한다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사락거리는 소리 정도였다. 가끔가다 무언가 생물이 가까이를 스쳐 지나가는 기척이 들었다. 불을 무서워해 모습을 보이지는 않지만, 그럴 때마다 남자는 고개를 들고 표정만으로도 소녀에게 질문을 던졌고 소녀는 고개를 흔드는 것만으로 위험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 모두 만약의 사태에는 놀랄 정도로 조용해졌고 서로의 침묵에 짝을 맞추었다. "나와줬으면 싶을 땐 안 나오는군 그래." 딴 사람 일처럼 남자가 중얼거리자 소녀는 작은 쓴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습격받고 싶어?" "귀찮은건 빨리 해치우는 쪽이 좋으니까 말이다. 뭐라 해도 큰 일을 앞둔 몸이라." "내 참. 왕이 이런 곳에서 객사해버리면 코랄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분명 곤란해질거야." "그렇겠지." "그렇다면 자기만의 몸이 아니라는 점을 조금쯤은 자각하는 게 어때." 남자는 입 끝만으로 웃어 보였따. "나는 혼자야. 이 대지에서 나보다 더 홀로 있는 자도 없을 거다." "...?" "예전에는 내게도 가족이 있었지. 친구도 있었고 그냥 아는 사람도 신세를 진 사람도 우러러보며 존경하는 사람도 잔뜩 있었지만 지금은 혼자 뿐이다." 검은 눈동자가 조금쯤 야유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몰랐어.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아버지로부터 내 정체를 들었을 때에도 왕좌에 앉기로 결정되었을 때도 그랬다. 물론 놀라기도 했고 큰일이 났구나 하고 생각햇지만 말이다. 나는 나라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데 어느새 보니 소중한 사람들은 하나 남김없이 잃어버리고 있었다. 왕같은 건 달갑지 않은 거라고 뼈저리게 느꼈지." 그 사람들이 좋아서 멀어져 갔을 리도 없다. 그저 그들의 의식안에서 국왕이라는 것은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설사 아무리 남자에 대해 친밀감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솔직하게 표시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소녀는 작게 웃었다. "자기만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그런가?" "그래. 최소한 여기에도 똑같이 혼자뿐인 녀석이 있으니까." 남자는 입을 다물고 이 별난 일행을 쳐다보았다. 그 말대로였다. 천애고아의 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오기 전에는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도 아는 사람도 있었을 터였다. 지금 소녀는 자신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과 헤어지게 되었고 돌아갈 길도 연락을 취할 길도 없는 상태였다. "혼자가 되는 건 일부러 하려고 해도 어려운 일이야." 한숨을 쉬면서 그런 말을 하고 남자를 보더니 빙긋 웃었다. "모두 분명 마음속에서는 지금까지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거야." 남자도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도 일단은 예전의 지인이나 친구들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는 입장이 된 거니까 마찬가지겠지." 그래도 즉위이래 느껴왔던 고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녀가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표정을 변화시켰다. 남자도 입을 다물고 검에 손을 댔다. 밤중의 숲에서는 낮보다 배는 소리가 잘 퍼진다. 하물며 짐승도 아닌 인간의 몸으로선 아무래도 발소리를 죽이기 힘들다. 그 누군가는 애초부터 발소리를 숨길 생각은 없는 듯 했다. 퍼석퍼석 수풀을 가르며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났다. 두 사람은 돌연 나타난 방문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거 옆에 가도 괜찮것습니까?" 삼십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될 수 있는 대로 정중하게는 말하고 있지만 말투도 몸가짐도 제대로 되어 있다고는 말 할수없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상관없소." 남자가 가볍게 대답했지만 그쪽은 다가오려고 하지 않는다. 살피는 듯 두 사람을 비교해보며 서 있었다. "이런 시간에 야숙이라니. 거 꽤나 급한 여행인가 봅니다?" "아아 출발이 늦어져버려서 어떻게든 오늘 밤 안에 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렇게 어두워서야 말이오. 곤란해하던 중이오." "그거 곤란하시겠구만요. 그쪽만 괜찮다면 안내해줄 수 있겄습니다만." "이렇게 어두운데 길을 알 수 있소?" "저는 사냥으로 먹고사는지라 이 산은 앞마당처럼 훤합니다. 쫓아옵쇼." 생각지도 못했던 초대였다. 사냥꾼이라는 남자는 상당히 익숙한 모습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기르취산을 오르는 것이 처음인 두 사람은 어디를 어떻게 걸어가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산기슭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산길이었다. 자랄 대로 자란 수풀들이 손발은 커녕 얼굴까지 가려버린다. "꽤나 험한 길을 택하는군." "이쪽이 지름길이굽쇼." "산기슭까지는 얼마나 남았소?" "금새요. 날 쌜 때까진 도착합니다." 초승달의 빛이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하게 발치를 밝혀주는 가운데 신중하게 나아가던 그들이었지만 갑자기 정면에 빛이 보였다 "뭐지?" 민가인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곳은 넓게 열린 공터였다. 지금까지 본 목초가 빽빽이 자라던 경치와는 전혀 달리 발치엔 풀도 자라있지 않았다. 그리고 불빛의 정체는 공터를 빙 둘러싸듯 자라있는 커다란 나무들에 몇 개인가 달려있는 촛불들의 빛이었다. 이곳만이 마치 낯인 것 같은 밝기였다. 눈 앞에는 조잡하나마 커다란 오두막이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특히나 수상한 것은 촛불빛 아래에 숨어있었던 듯한 남자들이 일제히 달려나와 두 사람을 에워싼 것이었다. 어떤 자는 창을 들고 어떤 자는 활을 잰 채 두 사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냥감이 남자 한 명과 어린애라고 알자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무기를 내렸다. 한 사람이 오두막 쪽으로 말을 걸었다. "두목 손님입니다요!" "오 그래!" 그에 응해서 오두막 안쪽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연령은 40정도일까. 뚱뚱하니 살이 찐 커다란 몸집으로 팔은 두툼하고 배는 커다란 북 같았다. 딱 보기에도 산적 두목의 모습이었다. "잘 오셨수다 손님들." 그릇깨지는 것 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월은 그에 상관하지 않고 두 사람을 안내해온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산기슭 치곤 묘한 곳이군." 남자는 비열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물론 산기슭으로는 제대로 모시겠수다. 그나 그 전에 낼 건 다 내지 않음 안되시것수다." "낼 것이라니?" 오두막에서 나타났던 남자가 외쳤다. "이 산은 우리들 의적이 장악하고 있다. 그런 데를 무단으로 통과하는 짓은 용서 못하지. 해서 통행료를 받아야 쓰겠다." "그렇군. 요금은?" "있는 돈 다 내." "그것 참 지독한 바가지군." "시끄럽다. 빨리 지갑 안에 있는 걸 놓고 사라져. 그러면 목숨은 살려주마. 시체 처리도 귀찮은 일이니까 말이야. 걸어서 사라져주는 쪽이 고맙겠다 이거지." "그 전에 하나 묻고 싶은데 이 산에 있는 의적이라는 건 이게 다인가?" "뭐라고?" 산적 두목은 의심스러운 표정이 되어 슬금슬금 다가왔다. 이런 상황에 빠져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질문을 하는 여행객이 있다는 자체가 극도로 드문 일이다. 드문 정도가 아니라 이상한 일이다. "어이 너 어째서 우리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물어보는 거냐? 혹시 관리가 보낸 놈인가. 그럼 살려서 돌려보낼 수는 없구만." "무슨 소릴. 그저 있는 돈 다 빼앗기고 나중에 또 나타나서 빼앗기는 일이라도 생기면 곤란하니까. 그렇게 생각한 것 뿐이다." "호호. 칭찬할만한 마음가짐이구만. 그렇다면 내 가르쳐 주지. 기르취산의 의적은 이 몸을 수령으로 해서 오십 명, 그 대부분이 여기 있다." "다른 동료는?" "잠깐 아래 쪽에 출타 중이다." 다시 말하면 농가로부터 가축을 약탈하러 가있다는 소리였다. 의적의 수령이라고 자칭한 남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것만이 아니지. 우리들은 원래 타우 산적의 일파다. 불렀다 하면 수천 명의 동료가 즉시 이쪽에 모여 온단 말이지. 이런 시골 촌구석의 관리 따위가 뭔 짓을 하겠나. 함부로 건드렸다간 마지막에 큰 불 뒤집어쓰는 건 그 관리가 될 거라 이 말씀이다." "알만하군." 타우의 산적 운운하는 건 따로 생각하고 전부해서 오십 명. 그 중에서 이곳에 있는 것은 대략 30명 정도였다. 어젯 밤 붙잡은 것이 아홉명이니까 그걸 빼면 열 명 정도가 산 기슭에 내려가 있다는 것이 된다. 슬쩍 소녀를 보았지만 마치 자기는 아무 관계없다는 듯한 표정 이었다. 그쪽이 제안한 거니까 알아서 해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들은 대로 소지금을 전부 내주려고 했다. 산적들이 이 장소를 본거지로 삼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듯 하고 그 뒤로는 압도적인 전력을 보내면 된다. 어디 다치기 전에 잽싸게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산적 중 한 명이 갑자기 의심스럽다는 듯한 소리를 냈다. "어이 이 녀석 혹시 계집애냐?" "뭐라고?" 두목의 눈빛이 변했다. 다른 남자들도 일제히 숨을 삼켰다. 눈깜짝할 사이에 산적들의 시선은 남자로부터 소녀로 이동했다. 하얀 천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는 리를 산적들은 소년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듯 했다. "계집이냐 정말이냐." 소녀는 혀를 차고 있었지만 얼굴을 가까이 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앳띠면서도 향기 나는 듯한 미모는 숨길 수 없었다. 두목은 미친 듯이 좋아하며 외쳤다. "이거 좋구만! 네 놈의 통행료는 있는 돈 전부하고 이 꼬마다. 맘 툭 놓고 내고 꺼져라!" 소녀의 손을 붙잡고 강하게 끌어당긴다. 주변 남자들은 군침이라도 흘릴 듯한 표정으로 그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량배들 사이에는 엄격한 상하 위계가 있다. 아무리 굶주려 있어도 두목을 내버려두고 말단에 해당하는 쪽이 먹어치울 수는 없는 것이다. 거한인 두목은 입맛을 다시고만 있었다. 왜소한 어깨를 안고 수염투성이 얼굴을 매끈한 하얀 얼굴에 갖다 대더니 핥아먹듯이 속삭였다. "귀엽구만. 몇 살이냐 열둘이냐 셋이냐? 처녀겠지? 조금 빠르지만 뭐 이런 건 나이 같은 건 관계없는 거지. 내가 하나 하나 찬찬히 가르쳐서 제대로 된 여자로 만들어 줄테니까 말이다. 금새 기분 삼삼하니 좋아 죽게 만들어 주마." 듣고 있던 월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런 경우의 당연히 나올 대사라고는 해도 어느 짓 어느 말 하나 소녀의 폭발을 부추기기에 충분치 않은 게 없었다. 박차를 가하듯이 다른 산적들은 비열한 웃음과 부러움의 눈길을 주며 빨리 자신들에게 '차례가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놀리듯 말을 걸고 있었다. 소녀는 거역하지 않았다. 잠자코 만지작거리는 대로 있었지만 그 눈에는 처절한 살기가 빛나고 그 손은 기분 나쁘게 움직였다. 그 순간 남자가 남의 일처럼 말했다. "내고 가라고 해도 곤란해. 그 녀석은 내 소유물도 아니고 우선 네놈들에겐 아깝다." "뭐라고?" 두목이 눈을 크게 뜨고는 소녀의 손을 놓았다. 남자는 덧붙여 말했다. "자칭이라고는 하지만 의적이라니 잘도 갖다 붙이는군. 진짜 의적들에게 미안할 지경이다. 죄 없는 농가를 괴롭히고 가축을 빼앗고 여자들을 납치하고 나쁜 짓이라고는 빼놓지 않고 저지르는 놈들이 의적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구나. 괴적이나 비적이라고 개명하는 게 낫다. 훨씬 어울리니까." "건방진 놈!" 일갈한 두목은 휙하고 손을 올렸다. 이 애송이를 해치워버려 라는 신호였지만 순간 무릎을 꿇고 그 커다란 몸체가 앞으로 쓰러졌다. "우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생각했다. 그곳에는 오늘 밤 잔뜩 귀여워해주마 하고 더러운 마음을 품고 있던 소녀가 한 명 서 있을 뿐이었다. 꼬꾸라진 남자를 녹색으로 불타는 극도의 차거움을 내뿜는 불꽃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쩔거야?" 낮은 목소리였다. 두목에게 던져진 질문이었지만 그 두목은 고사하고 의미를 알수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애초에 소녀도 대답 따위는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혐오스러움에 일그러진 괴로운 표정으로 자신의 팔을 문지르고 있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어. 게다가 한동안 가라앉을 것 같지도 않아. 너 이거 어쩔거야?" 사랑스러운 생김새와는 닮을래야 닮을 수 없는 서슬 퍼런 어조에 두목도 산적들도 멍청해져 버렸다. 그 틈을 남자는 놓치지 않았다. 대검을 뽑아 들고 좌우의 두 사람을 베어 쓰러뜨리더니 포위를 빠져나갔던 것이다. "이 이 녀석!" 남자를 막으려고 했던 한 명에게 이번엔 소녀가 덤벼들었다. 쓰러진 두목을 뛰어넘더니 검을 뽑을 지도 모르는 사이에 베어 넘긴 것이다. "뭐야!" 산적들에게 있어 이 기습이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분노와 불쾌감에 불이 붙은 소녀의 검 끝은 용서 없이 추가로 두 명을 베어 버렸다. 그대로 광장을 뚫고 지나 수풀 속에 뛰어 들고 바로 그 뒤로 남자가 따라왔다. "이놈들!" 산적들은 난리가 났다. 빠르게 산적들은 두 사람을 쫓아 수풀을 밟아 들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절대 살려두지 마라! 계집애는 죽이지 마! 상처도 입히지 마라!" 그런 소리를 듣지 않아도 그럴 생각인 부하들이었다. 하물며 이 숲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훨씬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한편 월은 수풀 속에 몸을 숨긴 것까진 좋지만 이 뒤에 어찌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산적들은 끝까지 자신들을 쫓아올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일단 산을 내려가서 영주군에게 응원을 부탁하는 것이 적당했지만 저 녀석들이 얌전하게 내려가도록 놔줄 리가 없었다. 게다가 파트너인 소녀는 결코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애초에 눈빛이 틀려져 있었다. 기백이 틀렸다. 전투태세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방금 전의 굴욕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듯 했다. 털을 전부 세운 삵쾡이 같은 모양이었다. "남김없이 전부 죽여버린다." 그런 말을 분연히 내뱉었다. "어이 리...." "저 두목만 살려둬. 관리에게 넘겨줄 주모자가 필요하니까. 그외엔 전부 죽여." 남자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남은 건 대략 이십 명. 게다가 지형도 잘 알아. 우리들에게 지형적 이득은 전혀 없다. 승산은?" "한 놈씩 처리한다. 이런 풀숲이라면 내 쪽이 유리해." "너한텐 좋아도 말야. 나한테는..." "시끄러워.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해." 말을 던지더니 소녀는 휙 몸을 굽히고 물러서더니 수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놀랄 정도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남자는 무척이나 놀라면서 소녀가 사라진 수풀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몸이 이런 풀 속을 자유자재로 빠져나간다는 것도 믿기 힘들고 흉내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뒤를 쫓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산적 중 한 명이 남자를 발견해서 기세 좋게 외쳤던 것이다. "여기 있다!" 이젠 할 수 없다. 남자는 어둠 속에서 검을 휘둘렀다. 뭐라해도 발 밑은 불안정하고 광장에는 점점이 촛불빛만 밝혀져 있었다. 자신은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덤벼오는 것만 격퇴하는 식으로 하여 그래도 다섯명을 쓰러뜨렸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소녀가 종횡으로 활약하며 오른손의 검으로 모두 해결하고 있는 듯 했다. 저 소녀는 밤눈이 좋다. 더구나 이 수풀 속에서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산적들로서 보자면 한밤중에 맹수를 상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가만히 놔둘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땅은 남자 쪽엔 약간 불리했다. 지리에 대한 감도 없는 데다 소녀처럼 소리를 내지않고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한편 산적 쪽에는 분명 지형적인 이점이 있었다. 고군분투하는 남자에게 차례차례 질리지도 않고 덤벼오고 있었고 게다가 오른쪽 왼쪽에서 계획적으로 공격해 와 움직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서 방금 전의 광장으로 다시 밀어냈던 것이다. 몸을 피하려고 했을 때에는 귓가로 화살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화살을 겨누고 있는 산적은 세 명. 촛불 빛을 받으며 서 있는 남자를 확실히 겨누고 있었다. "좋았어. 그대로 죽여주마!" 두목이 외치며 손에 소형의 등산용 칼을 뽑아 들었다. 그것만이라면 받아 낼 수 있겠지만 화살이 있다. 그것도 세 명이나 있어서야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다. 되든 안 되든 싸울 수 밖에 없다고 각오한 순간 반대측 수풀 속에서 산적 한 사람이 새파란 얼굴로 뛰쳐나왔다. 소녀를 쫓고 있던 무리 중 한 명인 듯 했다. 그것이 유령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외쳤던 것이다. "두 두목! 큰일입니다! 몽땅 죽었어요! 당해버렸단 말입니다!" "뭐라고!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그 놈은 여기 있잖아!" 광장에 돌아와 있던 산적들이 두목을 포함해 너도 나도 말했지만 혼자서 뛰어 돌아온 산적은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야! 이 놈이 아냐! 그 그 계집년이 모조리 죽였단 말이다! 그 그건 마물魔物이 틀림없어!" 설마하고 생각했겠지만 이 자들은 소녀가 허리에 검을 차고 있던 것도 멋진 손놀림으로 그것을 휘두르는 것도 실제 보았다. 두목이 험악한 표정이 되어 옆에 있던 한 사람에게 "상태를 보고와" 라고 명령했지만 새파란 얼굴의 산적이 필사적이 되어 미친듯이 말렸다. "안 돼! 그건 마물이야! 인간이 아냐! 이런 수풀 속에서 움직이면서 소리도 안 낸다고! 뛰어 들었다간 이길 방법이 없어! 모조리 같은 꼴을 당할 뿐이란 말이다!" "대체 몇 명이 당했다는 거냐!" "그러니까 전부요! 그 년을 잡으러 갔던 일곱 명 모두 당했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자 모두 안색이 변했다. 무법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이상 무력싸움에 대해선 싫증날 정도로 익숙해 있는 자들이다. 웬만한 관리가 쳐들어온다 해도 쉽게 붙잡혀주지 않을 자신도 잇고 그 자신감을 뒷받침할 만큼의 완력이나 기력도 가지고있을 터였다. 두목이 안색이 변해 남자에게 덤벼들어선 칼 끝을 남자 코끝에 들이밀고 심문했다. "이봐 너 네 놈은 저 꼬마년의 뭐냐." "글쎄 뭘까." "헛소리 할래! 대체 뭐냐 저 계집년은!" "나도 모른다. 사람이 아니라고는 하더라만. 뭔지는 내가 오히려 알고 싶은걸." 이 남자도 끝까지 표표히 굴고 있었다. 그것도 신경이 쓰였으리라. 수염투성이의 두목은 무섭도록 의심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두목...." 역시나 동료들도 진정치 못하고 어찌해야 할지 시선을 마주하며 수령의 안색만 살피고 있었다. 산적 두목은 혀를 차더니 동료들을 향해 턱을 긁어 보였다. "어이." 그에 대해 재빨리 다른 산적이 남자의 손에서 검을 빼앗더니 활을 향했다. 그렇게 해서 남자의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하고 두목이 목청을 돋궈 소리쳤다. "어이! 계집애! 듣고 있나! 지금부터 열을 센다! 그 사이에 나오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네 년의 남자 목을 뎅겅 날려버릴거다!" 그릇 깨지는 목소리로 하나아 두우울 하고 남자의 사형집행 순간까지의 시간을 세었다. 그 목소리가 일곱까지 세었을 때 전혀 소리를 내지 않은 채 호리호리한 몸집이 광장 가장자리에 나타났다. 오른손에는 피칠갑이 된 검을 들고 골치아픈 표정으로 남자를 보고 있다. 남자는 최대한 미안한 눈으로 소녀를 마주 보았다. 무기를 빼앗기고 목덜미에는 검이 들어와있는 채인 것이다. 아무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소녀가 나타나는 것을 보더니 화살을 재어둔 남자들이 일제히 과녁을 소녀로 바꾸었다. "그 칼 버려라!" 두목이 고함쳤다. 소녀는 얌전하게 오른손의 검을 놓았다. 지면에 푹하고 꽂아 세웠던 것이다. "좋아 알겠냐. 천천히 이쪽으로 오는 거다." 흥분해가면서도 침착하게 두목이 말했다. 소녀는 들은 대로 천천히 걸어 왔다. "머 멈춰!" 움직임을 봉쇄당한 남자, 그 남자에게 칼을 들이대고 있는 두목, 그리고 소녀 사이에는 가까스로 손이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만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끔찍할 정도로 잘 알고 있을 소녀일 테지만 주도권을 잡고 있는 두목에게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날카롭게 대꾸했다. "정정해. 누가 내 남자라는 거냐." "뭐 뭐라고?" 눈을 휘번덕거리고 있는 두목에겐 신경도 쓰지 않고 소녀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최고의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에 돌머리에 거기다가 둔하기까지. 이런 놈을 애인으로 둘 정도로 난 우스운 놈이 아냐.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하라고 내가 말했을 텐데." "면목없다." 아무래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실은 이런 상황에서도 입가가 웃으려고 하고 있었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얼마나 화를 낼지 알 수가 없었다. 남자는 열심히 성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어딘가 재미있어 하고 있다는 거을 소녀는 민감하게 느낀 듯 더욱 엄격하게 가시돋힌 말을 뱉었다. "너 계속해서 방해밖에 안 되고 있잖아. 미래가 뻔히 보인다." 가시 돋힌 말이라기보다 형이 동생을 야단치는 듯한 말이었지만 맞는 말이었다. "정말로 미안해." 이렇게 되면 뭐라 해도 정직하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라면 깊이 머리라도 숙이고 싶었지만 이런 짓을 했다간 목거죽이 잘릴 상황이었다. "그래도 말이야. 잠자코 잡혀준 건 아니라고. 이래 뵈도 다섯 명은 쓰러뜨렸어." "뭐야 그럼 나랑 똑같잖아." "호? 너치고는 별로 안 잡았군." "어쩔 수 없어. 저 녀석들 나를 죽이지 않고 잡을 생각인 듯 했으니까. 덤벼 오면서도 살기가 없어. 그럼 이쪽도 죽이기 힘들어. 어디까지 사람을 얕잡아 볼 생각인지." "정말 그래. 나 같은 건 신경쓰지 말고 너한테 집중해주면 좋았을걸." 남자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두목이 안절부절 하다가 외쳤다. "뭔 소리를 주절대고 있는 거냐! 이봐 계집! 네년 도대체 내 부하를 몇 명이나 죽인 거냐!" "그러니까 다섯 명. 나중의 두 사람은 서로 찌르더군." 여기까지 와서도 두목은 납득이 가지 않는 듯 했다. 이 작은 소녀가 실력에 자신이 있는 자신의 부하들을 다섯 명이나 어떻게 쓰러뜨린 것인지 분명하게 의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 너 이자식. 정체가 뭐냐?" "글쎄?" 소녀의 배짱도 대단했다. 무기를 놓고 동료인 남자는 인질로 붙잡히고 산적은 열 명 이상이나 멀쩡하게 남아 있는 데도 조금도 기죽어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두목 쪽이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방 다시 생각한 듯 했다. 뭐라고 해도 상대는 맨 손, 이쪽의 동료는 족히 열 명. 이 두사람을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자신의 자유인 것이다. 꿀꺽하고 마른 침을 삼켰다. "알았냐 이 남자를 죽이고 싶지 않으면 내 말을 들어라." 소녀의 말을 빌리자면 발정하고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말투였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그런 기분이 되는 건지 다시 말하면 그 정도로 이 소녀의 외견이 호리호리하고 갸날프며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두 두목! 그놈은 마물입니다요!" 아까의 산적이 외쳤지만 "시끄러워! 이런 먹음직스러운 걸 아무 짓도 안하고 내버려 두라는 거냐!" 하고 윽박질렀다. 다른 동료들 사이에서도 저마다 동의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한 것이었다. 대체적인 사람들은 다소 위험한 냄새가 난다 해도 믿고 싶지 않은 건 믿지 않는다. 이 남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소녀를 위안거리로 삼고 싶은 듯 하니 실제 그 눈으로 보지 않는 한 이 소녀가 마물이라는 동료의 말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목을 죄는 듯한 목소리로 두목은 말했다. "버 벗어." 이렇게 될 거라고 알고 있었는지 소녀는 조용히 양손을 올려서 머리를 감싸고 있던 천을 풀었다. 머리를 묶어 올리고 있던 끈을 풀자 묶여 있던 황금색 머리카락이 소용돌이치며 흘러 내렸다. 촛불빛에 반짝이는 색채의 향연에 산적들 사이에서 일제히 경탄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나이를 생각해보면 완전히 어린 소녀에 지나기 않는다. 그런데도 묘령의 여성과 같은 화려함이 남자들의 눈에 뛰어든 것은 다름 아닌 그 황금색의 반짝임에 의한 것이었다. 오늘 소녀는 산행을 한다는 이유로 긴소매의 옷을 입고 긴 바지와 장화를 신은 채 소매 위에는 천을 감아 두고 있었다. 양팔의 천을 느릿느릿 풀고 장화를 벗어 던졌다. 허리에 감았던 검띠를 지면에 떨구고 윗옷을 잡고 머리부터 거꾸로 벗어 올렸다. 산적들이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소녀의 가슴에는 천이 둘러져 있었지만 나타난 피부의 하얀 빛과 비틈없이 잘 빠진 몸매의 매끈한 선은 굶주린 남자들의 눈을 끌어들이는 데 충분했다. 보고 있던 월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리가 하는 일이다. 무언가 생각이 있어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겠지만 혹시 이대로 리가 산적들에게 유린당하기라도 한다면 농담으로 끝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설사 목이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막지 않으면 안 된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소녀가 하반신을 두르고 있는 옷을 벗기 위해 허리띠를 푸르려 했을 때 새로운 소동이 일어났다. "두목! 크 큰일입니다아!" 화급함이 담긴 목소리를 높이며 흐트러진 모양새로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자가 있었다. 말을 타고 있는 것을 보면 식료를 조달하러 아래로 내려갔던 동료인 듯 했다. 얼마나 서둘렀는지 숨을 급하게 헐떡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된거야?!" 그 남자는 말에서 뛰어내려 뒤를 돌아보더니 서둘러 말했다. "다른 녀석들은 되다 당해버렸어. 남은 건 나 혼자야."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발정난 짓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게 되어버린 두목이 말했다. "과 관리들 짓이냐?" 산기슭에서 말을 달려온 남자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관리들이 그런 거친 짓을 할 리가 없슴다요.어제부터 돌아오지 않는 녀석들도 있고 해서 우리들은 열 명이 한조가 되서 가장 산에 가까운 농가를 습격했습죠. 언제나 하는 짓이라 집안의 놈들은 굳게 문을 걸어 잠그고 코빼기도 안 보이고 쉽게 쉽게 수확물들 걷어 가지고 돌아오려는데 갑자기 이상한 놈들이 습격해왔던 겁니다. 구석에 숨어 있다가." 산적들도 이렇게 되자 동요한 듯 했다. "무슨 소리냐! 어제는 또 뭐고 오늘은 뭐야!" "두목 어쩌지요?!" "상대가 관리들이라면 정면으로 상대하는 건 상황이 너무 안좋습니다요." 소식을 가져온 남자가 완고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관리 따위가 아니라니까! 오리혀 우리들같이 산에 사는 남자들로 보였어. 그것도 꽤나 거친 놈들이야." "으음." 신음소리를 내버린 산적 두목이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남자에게 들이대고 있던 검은 느슨해졌고 의식도 남자로부터 떨어지고 있었다. 반라가 된 소녀가 흘낏 남자에게 시선을 주는 것과 남자가 순간적으로 몸을 돌린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앗!" 산적들이 황급히 태세를 갖췄지만 월은 재빨리 두목의 검으로부터 도망쳐서 눈앞에 있는 산적에게 몸을 부딪혀서 자신의 검을 되찾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소녀도 가장 가까운 한 명에게 덤벼들었다. 일격으로 거한을 때려 넘긴 뒤 그 손에서 검을 뺏어 든다. 월에게 칼을 들이댔던 두목을 노려서 굉장하나 기세로 내던졌다. "우왁!" 간발의 차이로 두목은 몸을 피했고 검은 허공을 갈랐다. 그 사이에 남자는 완전히 두목의 손에서 도망쳐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이 사이에 소녀는 지면에 박아 두었던 자기 검까지 날듯이 뛰어가 그것을 뽑아 들고 있었다. "이리 와!" 소녀가 커다랗게 외쳤다. 남자를 향한 부름이었다. 애초에 거역할 이유가 없다. 외투를 휘날리며 한달음에 소녀가 있는 광장 끝까지 이동했다. "이놈들!" "놓칠까 보냐!" 산적들은 질리지도 않고 남자와 소녀를 쫓아오려 했지만 그 순간 돌연 암흑으로부터 날아든 화살이 두 발 산적들을 덮쳤다. "으악!" 그 화살은 멋지게 활을 들고 있던 산적 두 사람을 지면에 꿰어 버렸다. 이것에는 남자도 소녀도 놀랐다. 재빠르게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상황을 살폈다. "뭐냐!" "무슨 일이야!" 산적들은 있을 수 없는 기습에 일제히 놀란 목소리로 떠들었다. "어디에서 쏴대고 있는 거냐!" 두목이 으르렁거렸다. 주변은 여전히 조용했다. 이 과장은 주변의 촛불로 밝게 밝혀져 있었다. 어두운 수풀 속에서 보자면 절호의 과녁들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이겠지만 열 명이나 있는 남자들 중에서 활을 든 자를 노려서 쏜다는 것은 대단한 실력이었다. 산적들도 그것은 알 수 있었으리라. 너도나도 무기를 들고 방심없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것에 대답하듯 산기슭을 향해 있는 광장 한쪽 끝에서 곤봉을 든 남자가 천천히 나타났다. 사십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거기에 활을 든 자가 두명, 등산용 소도나 단도를 들고 있는 자가 네 명. 전부 해서 일곱 명이 차례대로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차림새도 장비도 제멋대로엿지만 아까 달려 돌아왔던 남자가 말했던 것처럼 산과 들에서 거칠게 살아가는 남자들로 보였다. "뭐냐 네놈들은!" 두목이 물었다. "그건 이쪽이 할 소리다." 일곱명의 뒤쪽 수풀 속에서 목소리가 울려왔다. 의외일 정도로 젊고 청량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나무들이 방해를 해서 두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자의 예의로 먼저 이름 좀 들어둘까. 네 놈들의 수령의 이름과 뒷조직은?" 동업자라는 소리를 듣자 두목은 갑자기 살아난 듯 했다. "어디의 조무라기들인지 모르지만 굉장한 짓을 하는구만! 기슭에서 우리들의 방해를 한 것도 네놈들일 테니 듣고 놀라지마라! 우리 뒤에는 타우 산맥의 거친 사내들이 그대로 버티고 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문잡무용으로 동료를 죽였겠다! 각오해 둬라!" 무법자들 사이에서도 타우 산적의 이름을 듣고 겁먹지 않는 자는 없다. 그러나 이 자들은 틀렸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까와 같은 목소리가 말했다. "모두들 들었겠지?" 각자는 끄덕이는 것 뿐 곧 아까의 대답으로 변했다. "그럼 이쪽도 이름을 대두지. 우선은 타우의 북쪽 츠이르 마을 대표 브란." "음." 가장 먼저 나타났던 두꺼운 곤봉을 든 남자가 짧게 답했다. "마찬가지로 북쪽의 카지크 대표 니모. 북서 누이늬 대표 프렉카. 동북 렌트 대표 사르지. 동쪽 소베린 대표 죠그. 같은 동쪽의 아델포 대표 달리. 동남에서는 페토르 대표 아자레이."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란히 늘어선 일곱 명의 남자들이 각각 날카롭게 답변했다. 한편 산적들의 모습은 눈에 띄게 변하고 있었다. 그때까지의 위세는 어디로 갔는지 모두가 얼굴이 창백해져 떨고 있었다. "이 이름은 알고 있다는 건가?" 비웃는 듯한 말투였다. "그렇다면 타우 자유민의 이름을 사칭한 자가 어떻게 되는지 정도는 알고 있겠군 그래?" 풀숲에 숨어서 이것을 듣고 있던 두 사람도 이 정도 되자 역시 놀라고 있었다. 아무래도 진짜 타우의 산적이 자신들의 이름을 사칭하는 놈들을 해결하러 온 듯 했다. "대단한데다 의리있는 산적들이로군."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로 돌아와 중얼거린 소녀였지만 남자는 응수하지 않았다. 놀란 듯한 표정으로 광장 쪽을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보이고 있는지 소녀도 시선을 광장으로 돌렸다. "이런 남쪽에서 하는 일이니까 설마 우리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젊은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재미있다는 듯이 계속되고 있었다. 지휘를 잡고 있는 바로 그 남자의 모습만이 보이지 않았다. 저마다 무기를 잡고 지금은 완전히 산적들을 압도하고 있는 타우의 사내들과 저항할 기력도 뿌리채 빼앗긴듯한 산적들만이 보일 뿐이었다. "공교롭게도 타우에는 온 대륙의 여행자들이 지나가는 관문이 있다고. 특히 이 중앙에서 일어나고 있으면서 우리들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게 있을 거 같냐. 반달 전의 일이었지. 언제나터럼 풍족한 상인한테 아주 약간 통행료를 받으려고 했더니 기절초풍하더란 말이지. 델피니아 남쪽 포트남 지방에 타우의 자유민이 출장 나가 있다고 하더구만. 게다가 뭐야? 농가로부터 가축을 빼앗고 목장을 엉망으로 만들고 마을의 처녀들을 납치해? 그러던 끝에 저항하는 마을사람들을 죽여 묻더라고? 농담이 아냐. 그런 타우의 자유민이 있을 리도 없고 있다면 보통 일도 아니란 말이지. 잽싸게 두목의 명령으로 우리들이 진위를 확인하러 온 거다." 거기까지 말하고 한 발 앞으로 나선 남자의 옆얼굴이 두 사람이 있는 곳에서도 보이게 되었다. 젊은 남자였다. 그것도 산적이라고 하기엔 아까울 정도로 단정한 옆모습이었다. 늘씬한 장신을 감싼 것은 위로부터 장화까지 검은 색 일색으로차려진 의상이었다. 얼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햇볕에 까맣게 그을려져 있어 금갈색의 피부빛과 검은 의복이 어둠에 녹아드는 것 같았다. 대조적으로 옅은 금발을 깔끔하게 깎고 허리에는 장검을 차고 있었다. 산적이라고 하기보다 그야말로 자유전사라고 말하는 쪽이 어울릴 듯한 풍모였다. 소녀는 이제 어떻게 되려나 하고 산적들의 싸움을 구경할 생각이었지만 일행인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경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븐!!" 그야말로 커다란 소리의 부름이었다. 갑자기 이름을 불려 움찔한 것은 지휘를 하고 있던 남자였다. 저도 모르게 돌아서서 수풀 속에서 나타난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이쪽도 경악스런 표정을 얼굴 가득 띄웠던 것이었다. "월?! 너...." 한 순간 멍하니 서버린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지간히 믿어지지 않는 재회인 듯 했다. 갑자기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 순간에 기르취산의 산적들이 숨을 돌렸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제 이판사판이었다. "우와아아아!" 그런 함성을 지르면서 일제히 타우의 산적들에게 덤벼들었다. "치잇!" 이븐이라고 불린 남자는 곧바로 검을 뽑아들었다. 남자도 뛰어 나갔다. 소녀도 그 뒤를 이었다. 물론 편을 드는 건 타우의 산적 쪽이었다. 아직 활을 들고 있던 한 사람이 급히 시위를 당기는 것을 소녀가 덤벼들었다. 대검이 순간 번뜩이며 시위를 절단해 버렸다. "뭐야!" 당황했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이미 활은 못 쓸 물건이 되어 있었다. 한편 검을 쥐고 있던 산적들은 과감하게 타우의 산적들에게 맞섰지만 타우의 사내들은 쉽사리 이것들을 대접해 주었다. 곤봉을 쥔 츠이르의 브란이나 그 외의 동료는 휘두르는 검 따위 물건 취급도 안 하듯이 상대에게 곤봉의 일격을 꽂아 넣었다. 저도 모르게 눈이 커지며 풀썩 무릎이 꺾이는 순간 다시 목덜미에 일격. 두목인 가레프는 아까까지 남자에게 들이대고 있던 등산용 검을 휘두르면서 적측의 '두목'으로 보이는 이븐에게 덤볐지만 상대방의 장검 쪽이 비교도 되지 않게 빨랐다. 늘씬하고 마른 몸집으로 보이는 이븐이었지만 그 검 끝의 예리함은 완전히 가레프를 압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힘도 겸비해서 2합도 되기 전에 가레프의 검은 땅에 떨어졌고 움직임이 봉쇄되었던 것이다. 두목과 함께 이븐을 공격하려던 사적이 또 한 명 있었지만 이것은 월이 간단하게 해치워 버렸다. 그럴 즈음에는 다른 싸움도 이미 끝이 나 있었다. 기르취산의 산적은 모두 땅에 쓰러져 있거나 양손을 들어 항복의 의사를 표시하고 있었고 타우의 산적들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듯한 밧줄을 이용해 그들을 묶어 두고 있었다. "브란. 이 녀석도 부탁해." 그렇게만 말하고 피도 묻지 않은 검을 검집에 돌려놓고 이븐은 갑작스레 나타난 아군을 돌아보았다. 남자도 아무 말 없이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내밀면 닿을 거리인데도 그것이 서로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도 없이 상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가 다른 동료들도 이게 어찌된 일인지 상황을 살피고 있자 이븐이 만면에 장난기가 가득한 웃음을 띠며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 국왕폐하!" 월도 마음으로부터 기쁜 듯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이게 꿈은 아닌가 했다 이븐!" 강하게 서로 포옹했다. "잘도.... 어떻게 달도 살아있었잖아! 완전히 늑대한테 잡아먹힌줄 알았다 임마!" 검은 옷의 산적은 상대의 어깨건 등이건 있는 힘껏 붙잡으며 확인하듯이 두드려대고 있었다. "너야말로야! 5년이나 연락도 없다고 생각했더니 산적개업이나 하고 있냐!" 월은 상대의 짧은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흐트려 놓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얼굴 한가득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아 들은 대로야." 조금쯤 진정했는지 이븐이 말했다. "타우에 말이지. 마을 하나에 식객으로 늘러 붙었던 거야. 뭐 약간은 산적 흉내도 내긴 했지만. 그러고 있었는데 어디의 웃기는 놈들이 하필이면 타우의 자유민을 사칭하고 있어서 두목한테 부탁 받아 여기까지 왔던 거지." "두목이라는건 타우 산적의 우두머리 말이냐?" "아니 뭐...." 이븐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필이면 '국왕'에게 산적의 구성을 설명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리라. "다시 말하자면 촌장인데 말야. 만약 하나의 마을이 전투집단으로 바뀔 때엔 그렇게 부르는 거야. 여기 있는 동료들도 각각의 마을을 대표하고 있어. 조두목이라고 불리고 있는 사람들이지." "호오."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정도의 실력자들이 가짜 퇴치에 일부러 나오다니. 오랫동안 바로 근처에서 살고 있었는데도 타우의 산적이 이 정도로 의리가 깊은 줄은 지금까지 전혀 몰랐었다." 솔직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그런 모양을 이븐이 피식 웃었다. "타우에는 타우의 규칙이 있어. 그걸 이렇게까지 개똥취급 당해서야 잠자코 보고만 있을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건 그렇군. 인의仁義라는 건가." "뭐 그런 걸까." 그 동료들은 여전히 이상하다는 듯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이븐이 그야말로 가볍게 말을 걸었다. "여 모두들 소개할께. 놀라 자빠지지 마. 이쪽은 월 그리크 라고 해서 말이야 델피니아의 임금님이다." 남자들의 얼굴에 실소가 떠오른 것 말할 필요도 없었다. "페노아의 부두목은 굉장한 농담을 하는 구만." "임금님이 이런 산 속을 배회하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부두목이라는 소리를 듣고 월 쪽이 오히려 놀랐다. "꽤나 출세했네." "놀리지 마. 웬일인지 페노아의 두목이 나를 맘에 들어해서 그렇게 불리고 있을 뿐이야. 저기 말야 모두들. 믿어지지 않는 건 알겠지만 이 녀석은 진자 정당한 왕이라고. 반년 전 코랄에서 난리법석 났을 때 왕이 혼자서 파키라를 넘어 국외로 도망쳤다고 모두 들었을 거 아냐. 그 본인이야." 그리고는 월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말했다. "무사히 국외로 도망쳤는지 어쩐지 의심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돌아온 걸 보니 설마 너, 코랄하고 한판 붙을 생각이냐?" "물론이지. 어떻게든 내 도시하고 왕관을 되찾을 거다." "헤헤? 역시나 말하는 폼이 꽤나 임금님답게 됐구만." "놀리지마. 나한텐 필사적인 일이라고." 산적 동료들은 아직도 반신반의했는지 한 사람이 조심스레 말했다. "혹시 말야 부두목. 이 분이 진짜 왕이라는 건가?" 다른 한 사람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 어떻게 임금님 같은 거 하고 가까이 지내게 된 거야?" 이것에 대한 이븐의 대답은 밝은 것이었다. 두터운 남자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면서 말했다. "내가 아는 놈으로 옛날에 같이 새까맣게 구르면서 놀았던 건 임금님도 뭣도 아니고 그냥 시골 백작의 아들네미였다고. 그게 무슨 인연인지 놀랍게도 그 아들네미가 실은 위대한 뒤르와 명현왕의 사생아였다는 거야." 타우의 산적들은 일제히 눈을 크게 떴다. 이븐은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여행하다 말고 그 소리를 들었을 때엔 정말 뒤로 나자빠졌다니까. 나도 그대로 델피니아 국민 쪼가리라고. 나라에 임금님이 없으니 얼마나 마음이 안타깝던지. 그런데 일년 전 이난리 저난리 끝에 겨우 새 왕이 결정됐다고 생각했더니 그게 웬일인지 원래는 스샤의 페르난 백작의 외동 아들이라잖냐. 나는 말야. 그 말을 해준 녀석 멱살을 잡고 다섯 번이나 같은걸 물어봤다고." 남자도 쓴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나한테도 청천벽력이었어. 제일 먼저 너한테 들려주고 싶었지만...." 당사자인 소꿉친구는 쑥스러운 듯이 목을 움츠려 보였다. "집을 나가있어서 잘 됐어. 그 고집 센 백작께는 죄송스런 일이지만 아무래도 말야. 원래라면 이제 이런 식으로 가볍게 말을 걸면 안 되는 거겠지만 뭐라고 해도...." 곤란한 듯이 머리를 긁어대고 있었다. "옛날 일이 옛날 일이니까 말이야. 절대로까지는 아니지만 너한테 폐하라고 예의 차려서 말하지 못했을 테니까 말야. 지금도 이런 상황인데 남들 앞에서라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거 미안하다." 오래 전의 소꿉친구라도 지금은 하늘과 땅만큼 입장의 차이가 있는 상대였다. 망설이면서 말을 꺼낸 이븐이었지만 월은 거의 눈시울을 붉혀가면서 있는 힘껏 끄덕였다.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 실은 말이야. 너라면 그렇게 말해주지 않을까 하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 부친마저도 머리를 숙인다는 현실을 모르기 때문인지 예전처럼 대해주고 있다. 말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남자에게는 무엇보다 기쁘고 고마운 일이었던 것이다. "너도 어지간히 걸출한 놈이다." 이븐 쪽이 외려 기가 막혀하고 있었다. "그래서? 코랄 탈환을 해야 할 임금님이 이런 곳에서 혼자 뭐하고 있는거야?" "아니 혼자가 아니야." 그제서야 겨우 소녀의 존재를 떠올리고 돌아보자 소녀는 다시 매무새를 정돈하고 있는 중이었다. 윗옷을 입고 검띠를 두르고 장화를 신고 양손에 천을 두르고 있었던 중이었다. 남은 것은 머리를 묶어 올리는 것뿐이었지만 남자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작고 하얀 얼굴의 아름다움과 허리까지 흘러내린 황금빛 머리카락의 훌륭함에 이번에는 타우의 산적들이 일제히 숨을 삼켰다. "이건 또...." 이븐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청년을 소녀는 올려다보고 빙긋 미소짓더니 남자에게 물었다. "친구?" "아아 이 녀석은 말야 스샤의 이븐. 예전에 좀 장난도 치면서 같이 놀았던 소꿉친구다." "잘됐네...." 소녀가 그것도 마음 깊이 우러나서 말했다. 뭐가 '잘됐다'는 것인지 이븐은 알 수 없었다. 이상한 표정이 되었지만 월도 미소를 지을 뿐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이븐, 이 소녀는 그린디에타 라덴. 그렇지 내 전우戰友야." 다시 눈을 둥글게 뜬 이븐이었다. 선명하고 또렷하게 짙은 푸른 색 눈동자였다. "전우라고오....?" "그래. 코랄 탈환을 위해서 중요한 전략이고 둘도 없는 아군이기도 해." 이번에는 이븐 쪽이 무섭도록 의심스러운 눈으로 소녀를 보았다는 것은 당연히 말할 필요도 없다. 소녀는 긴 머리카락을 익숙하게 정리해 올려 끈으로 묶고 있었다. 작은 손은 그렇게 머리를 묶거나 또는 꽃을 따거나 하는데 훨씬 적당하게 보이고 호리호리한 몸집은 이런 산 속에 놔두는 것이 가련하게 느껴질 정도로 보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타우의 부두목은 드디어 작은 소리로 친구에게 귓속말을 했다. "어이.... 너 언제부터 그런 취미가 됐나?" 언제부터 성인 여성이 아니라 이런 소녀를 좋아하게 되었느냐고 말하는 듯 했다.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상상하는 것 같은 일은 전혀 없어. 나는 이 녀석이 좋아할만한 남자로는 낙제인 것 같으니까." 아까 호되게 비난받았던 일을 말하는 듯 했다. "뭐야 신경 쓰고 있었어?" 원래대로 머리를 감싸면서 소녀가 간단하게 말했다. "아니 뭐어 그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래 바보인 것도 돌머리인 것도 둔한 것도 진짜잖아?" "리이...." 남자도 결국은 얼굴을 찌푸렸다. "자각이 있는 만큼 뭐라고는 못하겠지만.... 그 좀 더 어떻게 안 되겠냐." 소녀는 즐거운 듯이 웃더니 말했다. "아까 그건 거짓말이야. 바보인 것도 돌머리인 것도 둔한 것도 싫진 않아. 너무 잔머리가 돌아가거나 너무 예민하고 폭발하기 쉬워서 자멸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 뭐." 남자도 웃음소리를 높였다. "그것 참. 갖다 붙이는 대로군. 알았다 그런 걸로 해 줘." "그래." 묘한 합의였다. 국왕의 소꿉친구는 더욱 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 날 밤은 기르취의 산적 본거지였던 광장에서 하룻밤, 산적들과 국왕 사이의 그간 이야기가 꽃피었다. 몇 년만의 재회를 기뻐하던 이븐은 사소한 것에 구애되지 않고 자신들의 연회에 소꿉친구를 초대한 것이었지만 타우의 남자들은 저마다 말을 아껴 이름을 댄 뒤에는 왠지 곤란한 듯한 상태였다. 뭐라 해도 자신들은 법을 어기고 있는 몸이고 상대는 지금은 유랑의 몸이라 해도 그 법을 세우는 장본인인 것이니까 마음을 터놓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왕 쪽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남자들 사이에 끼어 들었다.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지만 타우의 산적은 대단한 자들이군. 이렇게 멀리까지 자신들의 이름을 더럽히는 놈들을 일부러 징벌하러 오다니. 웬만해선 못하는 일이지." "똑바로 말해. 타우의 자유민이야. 타우 마을의 남자들은 자신들을 산적이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이븐이 말했다. 다른 한 사람, 누이의 프렉카라고 칭한 남자가 작은 소리로 웃었다. "뭐어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사냥꾼이라던가 그렇게 불러도 약간 곤란하지만서도. 최소한 이 녀석들처럼 극악무도한 짓은 안 하지." 츠이르의 브란도 힘차게 끄덕였다. "그래. 아까 산기슭에서 이야기를 듣고 난 그냥 뚜껑 열리는 줄 알았다고. 이런 떨거지들이 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여 놓고 결국 타우의 이름을 대고 돌아다녔다니. 우리 입장이 말이 안되지." "확실히 그 말대로군. 그 의기만이 아니라 먼 길을 와서도 이런 활약을 보여준다는 것도 훌륭한 일이고. 반드시 뭔가 보답이라도 해야 할 일이니 나도 영주에게 말해두도록 하지." 그러자 남자들은 당황하여 표정을 바꾸며 "아니 그...." "그건 좀...." 강하게 사양하는 태세였다. "뭔가 곤란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이상하다는 듯 남자가 묻자 이븐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기 말이야. 임금님한테 이런 소리 하긴 싫지만 우리들은 일단 쫓기는 몸들이라고. 그런 주제에 대낮에 영주의 저택 같은 데 어슬렁거리고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실제로 대단한 피해를 주던 산적들을 퇴치한 건 그쪽 활약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럼 아무 소리말고 보수 받아서 돌아가도 나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쁜 놈을 퇴치한 자들에게는 보상이 주어지는 건 당연한 거라고." 이븐은 더욱 기가 막혀하며 한숨을 내쉬었고 타우의 산적들은 자기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말을 못이었고 그리고 혼자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이상한 왕이로군." "동감이야." 이븐이 마음 깊이 동의를 표시했다. "왕궁에 가서 왕 노릇하기 시작해서 조금은 변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더니 이거야 원.... 그게 참도 국왕폐하가 할 소리냐." "하지만 너희들로서도 여기까지 오는 데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텐데." "글세. 추가로 피해를 입은 농가에도 적당한 변상을 해주지 않으면 안되니까 말야." 월은 놀라면서 친구를 쳐다보았다. "그런것까지 하는 거냐 너희들이?" "그 정도 돈이야말로 산적질로 모아두었으니까. 착각하지 말라구. 우리들은 별로 정의감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게아냐. 결론은 확실히 지어두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대신이라고 하긴 뭐 하지만...." 이븐의 푸른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타우의 이름을 사칭한 녀석들은 이쪽 관리들에겐 넘겨주지 않을 거다. 두목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데리고 돌아간다는 거야? 수고스럽고 긴 여행이야. 단 여덟 명이서 호송할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타우에겐 타우의 방식이 있는 거야." 이븐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타우의 두목들이나 이곳에 있는 동료들도 이 녀석들이 이름을 더럽혔다. 당연히 그 오욕은 자기 손으로 갚아주지 않으면 안 돼. 남에게 맡길 수 없는 일이니까 이렇게 여기까지 나온 거다. 이 녀석들의 처벌은 타우의 20명의 두목이 결정할 거다." 결국 개인적인 형벌에 처하겠다는 말이었다. 소녀는 잠자코 남자를 보고 있었다. 어떻게 할 셈인지 하고 생각한 것이다. 법을 지키는 측에 붙어 있는 이상 이런 무법행위를 내버려둘수는 없을 터였다. 하물며 국왕이라는 최고권력자라면. 타우의 사내들도 딱딱한 눈초리로 남자를 바라보고 그가 할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이 녀석들 아마 살인도 저질렀겠지." "아아. 밑에서 들은 얘기만도 세 명은 살해당했어. 그래서 밑에 있는 농가의 사람들은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겠다고 처박혀 있던 듯 하더군." "그 타우의 장로들의 처벌에서 사형 이외의 판결이 날 가능성은 있는 건가?" "그렇긴 커녕 가장 가벼워야 사형일 걸." "그런가." 월은 담백하게 끄덕였다. "그렇다면 너희들에게 맡기지. 세 명이나 죽인 이상 어쨌든 이쪽 법률로도 사형이다. 귀찮은 일 줄이는 셈 치지." 소녀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븐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힘차게 친구의 어깨를 두드렸다. "역시 넌 얘기가 통하는 놈이야." 남은 자들은 벌어지는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지 그 중에는 조용히 이븐에게 이런 것을 속삭이는 자도 있었다. "저기 부두목. 거참 이상하게 생겨먹은 왕도 다 있구만." "나는 애초에 우리들까지 몽땅 관리에게 넘겨버리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고." 원래대로 한다면 맞는 소리이긴 했다. 그러나 부두목은 그런 동료들에게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던 것이다. "그럼 그럼. 이런 이상한 왕은 대륙 전체를 다 뒤져봐도 안 나올 걸." 기쁜 듯한 어조였다. 이 남자도 나름대로 지금은 구름 위 존재가 되어버린 친구의 성격이 변하지 않은 것을 기뻐하고 있는 듯했다. 기분 좋게 술을 기울이며 남자에게도 권했다. "그래서? 코랄을 되찾는데 군대는 얼마나 모았어?" "지금은 이 소녀 한 명이야." 하마터면 술잔을 떨어뜨릴 번 한 이븐이었다. 그러나 소녀도 남자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특히 소녀는 사내들이 마시고 있는 강한 술에 흥미가 솟은 듯 했다. 남자의 손에서부터 나무로 만들어진 잔을 빼앗아 한 모금 마셨다. "어 어이...." 보고 있던 거친 사내들 쪽이 기겁했지만 물론 그런 걸로 이 소녀가 어찌 될 리가 없었다. "맛있네." 하고 눈을 빛냈다. 옆에 있던 월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상한 국왕이라면 이 꼬마는 그야말로 이상한 여자애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녀석이야." "그러니까 꽤나 서로 잘 맞지." 소녀가 말하면서 이번은 넘실거리게 잔에 담겨있던 술을 단숨에 넘겼다. 남자들은 멍청해져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4장 다음날 저녁 열 명으로 늘어난 국왕 일행이 기르취산을 넘어 로쉐의 가도를 나아가고 있었다. 이븐을 비롯한 타우의 사내들이 모조리 동행하자고 말해왔기 때문이었다. 산적들을 잡은 다음 날 타우의 사내들과 함께 가도방면으로 산을 내려온 월은 똑바로 근처의 촌장을 방문해 종이와 펜을 빌려 포트남 영주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일의 전말에 대해 기록한 것이었다. 그 동안 소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해도 타우의 일행까지 움직이지 않고 남자가 용무를 끝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을래야 띄지 않을 수가 없다. 뭐라 해도 남자들의 발치에는 밧줄로 꽁꽁 묶인 기르취산의 산적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아침 작업을 하러 나서는 농부들이 몇 명이나 눈을 크게 뜨고 때로는 속닥거리는 귓속말을 하며 지나가는 자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용무를 끝내자 남자는 소녀를 데리고 가도를 향했다. 기르취산을 내려와 로쉐의 가도를 나서면 작으나마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길이 만들어져 있다. 그 통로를 나아가는 동안 이븐이 잠깐 기다리라고 말을 꺼냈다. "나도 같이 간다." 라는 것이다. 월은 상대가 그렇게 말할 것이라는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듯 했다.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앞으로 어찌될 지 알 수 없는 길이야. 더구나 이 산적들을 호송한다는 이야기가 어떻게 되겠어?" "그러니까 잠깐 기다리라고." 이븐은 웃을 뿐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발을 멈춘 그곳의 한 쪽은 황야였다. 저 멀리 민가가 드문드문 보이고 돌아서면지금 내려온 기르취산맥이 멀리 푸른 그림자를 보이고 있는 곳이다. 전후로 가늘게 뻗어나가는 일자로에는 왼쪽으로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동료들은 멈춰서 길에서 벗어나 나무 밑에서 기다리는 태새로 들어갔다. "누군가와 만날 약속이야?" "글쎄 뭐 그런 거지." 이미 태양은 높이 떠올라 있었다. 예상대로 잠시 기다리자 다른 산에서 내려온 것 같은 남자들이 일행과 합류했다. 역시 이쪽도 산에 사는 남자들인 듯 했다. 연령은 각양각색이었지만 각자가 탄탄한 몸집에 발에는 단단히 준비를 하고 허리에는 손도끼나 검을 차고 있었다. 열 명 정도 되는 남자들 사이에서 삼심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한 명 나서서 친근하게 한 손을 올려 이븐에게 인사했다. "여어 페노아 친구." "야아 마이키. 상황은 어때." 마이키라고 불린 남자는 가볍게 끄덕이고는 밧줄에 묶인 포로를 보고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풀린 것 같군." "아아. 그쪽은?" "간신히. 할 수 있는 일은 해뒀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엇다. 이븐이 붙잡았던 남자들을 인도하고 호송을 부탁한다고 말하자 마이키는 놀란 듯 했다. "무슨 일이야?" "잠깐 말야. 다른 일이 생겨서." 이븐은 남자와 소녀를 돌아보고는 함께 따라온 동료들에게 말했다. "미안해. 나도 옛 정도 있고 하니 이 녀석 편에 가담한다. 여기서 헤어지자. 페노아의 두목에겐 근시일 내에 인사하러 갈 거라고 전해 줘." 이븐은 자기 혼자 빠져나와 친구와 행동을 함께 할 셈인 듯 했지만 다른 남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이븐과 마찬가지로 월과 함께 동쪽을 향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당신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라는 게 우리 두목의 명령이었으니까." 라고 브란이 말하자 "나도 그렇게 들었다." "나도야. 그런 자네를 혼자 남겨두고 우리만 마을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거지." 모두 미리 말이라도 맞춰둔 듯이 같은 소리를 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하는 소리로 속마음은 이상한 인연으로 가까이 하게 된 '임금님'이 마음에 걸린 듯 했다. 그것도 이 왕은 웬만해선 쉽게 볼 수 없는 진기한 걸물이었다. 흥미를 가지게 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븐도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유별난 친구들일세." 라고만 말하고 끝냈다. "여 임금님. 그렇게 돼서 산적이라도 괜찮다면 그쪽 군대에 한 역할 해주고 싶은데 말이야. 뭐어 훈련된 병사들처럼은 되지 않겠지만 그것도 쓰기 나름일 거야. 상대가 파키라산이라면 우리들도 할 일이 있겠지." 관광에라도 따라가는 듯이 가벼운 분위기였다. 원래대로라면 좀더 제대로 격식을 갖춰서 무릎을 꿇고 국왕폐하께 가담하겠습니다 하고 고해 바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중요한 건 속내용이다. 형식같은 건 나중에 갖춰도 된다는 게 이븐의 방식이었다. 남자도 거절은 하지 않았다. 웃으면서 끄덕였다. 한편 새롭게 나타난 사내들은 이채를 띠고 있는 한 명의 남자가 국왕이라는 것을 듣고는 무척이나 놀란 듯 했다. 몇 명 인가는 뒤로 물러나고 몇 명인가는 저도 모르게 싸울 태세를 잡았을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마이키라고 불렸던 남자는 안색을 바꾸며 이븐에게 따지고 들었다. "페노아 친구. 뭔 일이야 이건?!" "뭔일도 전일도 아냐. 들은 대로라고. 이쪽은 월 그리크. 이름 정도는 들은 적이 있을 거야. 델피니아 왕이지. 지금은 땡전 한푼없는 임금님이지만." 마이키를 필두로 하는 열 명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몇 명은 조심조심 월의 표정을 살폈다. "왕이라고...." "진짜야?" 타우의 산적들에겐 백 년 이상의 역사가 있다. 원래는 산기슭의 소수의 산악민이 살고 있던 작은 촌락이었을뿐이지만 도망쳐온 남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점차적으로 산 속으로 이동하여 여자들도 그곳에서 살게 되었으며 지금은 스무개의 마을이 만들어져 있다. 타우에서 나서 자라 봉건제도의 상황을 모르는 세대도 많은 것이다. 지금 타우 산맥에 살고 있는 산악민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공화정치라고도 할 수 있는 것에 의해 스스로를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뿌리를 생각해보면 무언가의 범죄를 저지르고 체포를 피해 도망쳐 온 자들이다. 그 이래로 국가에 대한 의무는 일절 수행하고 있지 않았다. 노출된다면 형벌을 피할 수 없는 몸인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군주라고 하는 것에 대한 실감이 없다고 하더라도 권위라는 것이 자신들과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존재라는것을 타우에 사는 자들은 뼈 속에 사무치게 깨닫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타우의 마을 중에서도 깊은 역사가 있고 따라서 세력도 있는 페노아의 부두목이 그 권위 측에 붙는다고 한다.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마이키의 옆에있는 젊은 남자가 험악한 시선으로 이븐에게 따지고 들었다. "어처구니 없는 녀석이군. 그 정도로 페노아의 두목에게 귀여움을 받았으면서 우리들을 배신하고 국왕 따위에게 붙는다는 거냐? 어차피 바깥에서 온 녀석은 바깥 녀석인 거냐. 이런 일을 두목이 들으면 분명히 탄식하실 거다." "이런 이런. 타우의 자유민이 바깥에서 왔다느니 하는 소리를 해도 되는 건가?" 이븐은 아무렇지도 않게 즉시 대꾸했다. "애초에 중앙의 이런저런 지방의 인간들이 도망쳐 와서 생긴 게 타우다. 바깥 놈이고 토박이고 있을까 보냐. 타우를 목적지로 도망쳐온 자는 누구든지 맹세를 지키기만 하면 쾌히 받아들여 준다. 그렇기에 더욱 명예스럽게 자유민이라고 지칭하는 거지. 그렇지 않나?" "그걸 알면서 어째서 국왕 따위의 편을 드는 거냐!" 이븐의 푸른 눈이 처음으로 심각한 빛을 띠었다. "너라면 어쩔 건데. 오 년만에 만난 친구가 단 혼자서 싸움터에 뛰어든다고 한다면? 그것도 난공불락의 코랄 성과 일만명의 근위병단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면? 간판이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하고 내버려두는 게 남자냐." 젊은 남자는 꾹 하고 말을 삼켰다. 월은 이 상황을 잠자코 보고 있었다. 이븐을 도와주거나 변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이곳은 자신이 나설 곳이 아니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페노아의 두목에게는 나중에 반드시 사과하러 갈 거다. 어쨌든 일단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타우의 이름을 사칭했던 놈들은 모조리 여기 모아 놨다. 뻔뻔스러운 놈들이지. 자기네들 뒤에는 타우의 사내들이 줄줄이 있다고 당당하게 떠들어댔으니까." 그 타우의 남자들이 일제히 노려보았으니 묶여 있던 산적들은 그야말로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얼마 안 되는군. 너희들의 3배는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페노아의...." "아니 남은 건 그쪽의 임금님이 해치웠다." 이번에는 산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국왕에게 향했다. 애초에 당사자인 왕은 이것에 이견을 달려고 했다. 실제로는 대부분 소녀가 해치운 것이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소녀가 몸짓으로 막았다. 이야기가 복잡해 질 뿐이고 여기에선 남자의 활약으로 해두는 쪽이 좋다고 녹색의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산적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남자는 한 발 앞으로나서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타우의 자유민에게 포트남 지방의 농가를 대표해서 감사한다. 이 근처 사람들은 꽤나 이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내가 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은 보는 대로 이런 처지이니까 신세를 졌다." 마이키도 다른 남자들도 이렇게 되자 허둥지둥 머리를 숙였다. "그....임금님에게 칭찬받을 일은 아무 것도 안 했수다. 우리들에겐 당연한 일로...." "거 참 쓸데없는 놈들이라...." 그런 소리를 횡설수설 늘어놓고 있었다. 남자는 거기에 추가하여 말했다. "타우 사람들의 의지, 분명히 보았다. 스샤에서 자란 나에게 있어서 타우는 항상 고향의 자랑이었다. 그 모습도 지금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마음 깊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렇게 두목에게 전해주게." "헤." 이 정도로 칭찬을 받아버리니 어찌 해야 좋을 지 몸둘 바를 몰라 남자들은 그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마이키도 물론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 하나의 마을에서 부두목을 밭고 있는 남자였다. 감탄하듯 눈을 크게 뜨고 조금 떨어진 곳까지 이븐을 끌어내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꽤나 탁 트인 왕인 것 같군." "당연하지. 누가 뭐래도 이 이븐님의 소꿉친구니까." 미소를 띤 이븐이었지만 마이키는 심각한 얼굴로 덧붙여 말했다. "너는 그래서 코랄 탈환을 위해 국왕군에 참가하겠다는 거냐?" "저 녀석은 군사라고 말할 정도로 대단한 건 아무 것도 안 가지고 있어. 뭐라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아군은 저 여자애한 명뿐이라는 상황인 듯 하니가 말야." 마이키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렸다. "상대는 난공불락의 코랄 성과 일만의 근위병단. 그 의미를 알고는 있는 거냐?" "응." "십중팔구 아니 백에 구십구 이길 승산이 없는 전투가 될 거다." "응." "일단, 살아서 돌아오지도 못할 거야." "그건 어찌될지 모르지." 이븐은 말했다. 결단코 허세가 아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떤 승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저 바보자식 정말로 코랄을 되찾을 생각이야." "말도 안 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븐은 감개무량해 하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엉망진창이야. 그런 정도는 나도 알 수 있어. 저 녀석 편을 들어줄 만한 사람들은 죄다 붙잡혀서 갇혀있고 용병을 고용할 정도의 돈도 없어. 가짜왕의 오명도 왕족살해의 의심도 벗겨진 게 아니고. 이 델피니아에 그런 벌거숭이 왕과 한 편이 되어줄 정도로 사람좋은 녀석들이 얼마나 있을지 대단히 의심스럽지. 그야말로 고립무원 이라는거다. 그런데 저 녀석은 조금도 비관하고 있지 않아." 마이키는 이번에는 왠지 기분 나쁘다는 듯한 눈으로 동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국왕을 바라보았다. "저 왕.... 이쪽은 멀쩡한 거겠지."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면서 의심스럽게 말했다. 이븐은 낮은 소리로 웃고 있었다. "옛날부터 저런 걸. 아무 생각도 없는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침착하다니까. 눈썰미도 있고 둔중하게 보이면서도 놀랄 정도로 행동력이 있어. 진짜 걸출한 놈인지 그게 아니면 단순히 바보인건지 자주 고민했을 정도다. 임금님이 되어서 조금은 변했을까 하고 생각했더니 어이없을 정도로 예전 그대로야." "너는 그게 기쁜 것 같구만." 웃지도 않은 채 마이키가 말했다. 이븐은 입술 끝만으로 웃어 보였다. 장난기가 담긴 미소 가운데 특징적인 푸른 눈동자 만이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알고 잇으면 쓸데없이 물어보지 마." 가벼운 한숨을 내쉰 마이키는 포기한 얼굴로 동료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페노아의 두목에게 원망을 들을 것 같군. 그 사람은 결국에 너를 자기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는데." 이븐의 단정한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그러나 금방 그런 표정을 지우고는 시치미를 뚝 떼며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아. 그 사람은 나같이 흘러 들어온 놈에게 정말 잘해주었으니까 말이야." 마이키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할 수가 없다. 아무리 뜯어 말린다고 해도 이 남자는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리라. "죽지 마라 이븐." "당연하지. 두목에게 사과하러 가지 않으면 안되니까." 그리고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왕이 마이키를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던 것이었다. "지금 들었는데 제군들이 농가의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가축의 변상을 해주었다더군. 고맙네." "그 그만두쇼...." 갑자기 약해져버린 마이키였다. "정말루 거, 별난 짓 한 것도 아니라니깐서두...." 언제나 귀족이나 국왕이 대체 뭐라는 거냐하고 코웃음 쳐왔지만 실제로 이렇게 높은 사람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아무래도 몸이 경직되어 버렸다. 지금까지 각지를 돌아보고 국왕이니 귀족이니 하는 자들은 서민을 가축이나 마찬가지로 취급한다는 인식을 재확인했었던 마이키에게 이 왕은 그야말로 믿어지지 않는 예외적인 왕이었다. 그 뒤로 그들은 잠시동안 나란히 길을 걸어갔다. 어쨌거나 방향이 같기 때문이었다. 도적인 그들이 백주 대낮에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행군하고 있다. 대단한 배짱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것뿐이 아니다. 가돌르 타기 위해 샛길을 그들과 함께 나아가다 보니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엄중히 여행채비를 하고 있는 남자들이 나타나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일행에 합류했던 것이다. 선두에서 걷고 있는 자들도 나중에 추가된 자들도 일절 대화는 하지 않았다. 장군의 지휘 아래 놓인 군대라도 보고 있는 듯이 정연한 행동이었다. 그런 일이 몇 번이고 계속되어 가도에 도달했을 즈음에 일행의 숫자는 놀랍게도 백 명에 가까우루 정도로 불어나 있었다. "이거 참 굉장하군." 월이 감탄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을 정도였다. 그애 대해 이븐이 낮게 웃었다. "타우의 사내들이 자기들을 산적이라고부르지 않는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됐냐?" "대충 납득했다. 타우에는 이십 개나 되는 마을이 있다고 하는데 모두 이런 식인 거냐?" "그래. 그들은 나라에서 쫓겨나거나 혹은 스스로 조국에서 뛰쳐나와서 타우에서 살아갈 장소를 찾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야. 그만큼 자신들의 생활은 자신들 손으로 지킨다는 그런 의식이 강렬하지. 관리도 왕도 타우에는 없으니까 말이야."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인가." "그만큼 지금의 타우에는 인재가 모여있다는 소리도 되지. 너는 흉내내지 마라?" 역시 소꿉친구라고 할까. 월도 웃으며 끄덕였다. "알고있어. 아무리 나라도 해도 혼자서 코랄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럼 어쩔 생각이야?" "음. 로아를 향해볼까 하고 생각중이야." "로아인가. 하지만 그곳은...." 남자의 옆에서 걷고 있던 소녀가 물었다. "로아라는 건 포트남의 영주 저택에서 말했었던 거기네. 어떤 곳이야?" 이븐이 대답했다. "뭐야? 꼬마 아가씨는 로아에 가본 적이 없는 거야?" "가보긴 커녕 어디에 있는 건지도 몰라. 어떤 곳이야?" 새롭게 추가된 타우의 남자들은 남자와 소녀에게 다소 흥미가 있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동료가 아닌 것은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페노아의 부두목과 친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살펴보지 않고 가만있을 수는 없는듯 했다. 이븐도 마이키도 그리고 다른 남자들도 일부러 말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동료들 안에서 혼란이 일어나는 것이 싫었는지도 모른다. 소녀의 질문에는 이븐이 대답했다. "그렇구만. 로아는 말이 유명해. 그곳의 남자들은 대대로 말을 만드는 것에 뛰어나지." "말을 만들어? 어떻게?" "다시 말해....몇 필이나 태어나는 그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말을 접붙여서 말이야. 접붙이는 게 뭔진 알겠어?" "교배하는 거 말이지." "그래. 그렇게 해서 좋은 말만 태어나도록 만드는 거야. 물론 그 뒤의 조련에 대해서도 로아 사람들은 대단하지만." 이븐은 웃으며 말했다. "말이라는건 말야. 본래 무지하게 겁이 많은 동물이라더군. 야생말은 조금 커다란 소리를 내기만 해도 놀라서 도망가버리지. 그러니 전장에서 이동력으로 사용할 때도 함성에 놀라서 도망가버리거나 하면 얘기가 안되잖아? 그래서 조련이 필요한 거야. 로아의 남자들은 좋은 말을 발굴해서 더욱 더 다듬을 수가 있지. 그만큼 본인들의 마술馬術도 뛰어난거고." 소녀는 감탄한 듯 끄덕이고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거기에 가서 말을 조달할 생각?" "그것도 있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있지만 로아의 영주는 페르난 백작의 오랜 친구다. 지금은 코랄 성내에서 칩거하는 중이지만 내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반드시 든든한 아군이 되어 줄 사람이야. 어떻게든 로아의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연락을 넣고 싶은 건데...."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말야 월." 이 남자도 국왕을 이름만으로 부르고 있었다. "도라 장군이라면 틀림없이 네 편이 되어주겠지만.... 그 정도는 개혁파들이라도 알고 있을 거라고." "그렇지. 그게 바로 어려워." 당사자인 장군이 코랄 성에 있긴 커녕 그들과 어긋나는 형태로 서부의 비르그나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남자를 쫓아서 되돌아오는 형태로 급히 비르그나를 출발했다는 것을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남 포트남 영주. 세리에 경은 곤란의 극에 달해 있었다. 아침부터 계속해서 이상한 보고가 들어왔던 것이다. 최근 자신의 영내에 묘한 자들이 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알고 잇었다. 상소하는 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확실히 알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상당히 난폭한 짓을 일삼고 있다는 정도는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 사람도 무언가의 수단을 강구할 필요를 느끼고 있던 차, 오늘 갑자기 신하가 고하길 그 무법자들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어떤 자들에 의해 퇴치된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놀라서 더욱 자세한 사정을 얘기해 보라고 하자 피해를 입었던 농민들이 입을 모아 말하길 타우의 자유민이라 칭하는 남자들이 새로운 가축을 사라면서 다량의 금전을 놔두고 갔다고 한다는 것이다. 모두 그 남자들에게 뭐라 고마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갸우뚱거리고 있는 차에 틀림없이 국왕의 필적인 편지가 도달한 것이다. 내용은 귀공의 영내를 환란케 하던 자들은 이미 타우의 자유민들이 붙잡았으므로 그 처벌을 국왕권한으로 타우에 일임하기로 하였으니 추적도 뒷수습도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경은 그저 고개를 이리저리 갸우뚱거리게 될 뿐이었다. 갑자기 유랑하던 국왕의 방문을 받았던 것은 바로 이틀 전의 일이었다. 그때의 국왕은 어린 시종 한 명을 데리고 있을 뿐이었다. 타우의 산적은 작은 나라의 군대에도 필적할 힘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나라의 편도 들지 않고 어떤 권력자의 지휘 아래에도 들어가지 않는 존재일 터였다. 그러나 이 상황을 보자면 타우의 산적이 그 국왕의 지휘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지 않은가. 실제로는 단순한 우연이었지만 세리어 경은 그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감탄하기도 하고 경탄하기도 했다. 왕권탈환의 이야기를 반신반의하며 듣고 있었지만 혹시 저 국왕은 정말로 코랄을 되찾을 지도 모른다. 진실된 델피니아의 군주로서 다시 일어설 날이 오는 것도 결코 꿈은 아닐지도 모른다. 저도 모르게 무장으로서의 피가 끓었다. 아군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도 사실은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따. 스스로 왕위를 바라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페르젠을 필두로 하는 개혁파는 정권을 힘으로 빼앗았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은데다가 겨우 관료일 뿐인 후작의 지배를 받고 이것저것 지시를 받는 것은 그야말로 참기 힘들었다. 물론 신변을 생각한다면 아직 움직이기엔 너무 빠른 시기였다. 정세가 좀더 잘 보이게 될 때까지는 당분간 얌전히 있어야 하겠지만 자신의 내부에 그 국왕에 대한 호감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것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감정에 의해 움직인다면 경솔함과 동시에 단순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많은 수의 가신들이 운명을 떠맡고 있는 몸이다. 좀더 사려깊게 행동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깊은 사려란 무엇인가. 스스로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국이 지금 이대로 좋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좋을 리가 없다. 오 년 동안 델피니아는 주군을 가지지 못했다. 경을 포함한 제후들은 모셔야 할 상대를 잃고 어쩔 수 없이 페르젠의 관료정치에 따랐었지만 이것 또한 같은 급수여야 할 혹은 동료에 가까운 다른 상대의 지도를 받는 것이니 달가울 리가 없었다. 월 그리크가 나타났을 때 경은 오히려 안도했다. 그 외에도 그런 자들은 많았을 터이다. 첩실 소생리던 무엇이던 단 한 사람 남은 전왕의 자식이었다. 기쁘게 모시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너 것이 일단 한번 왕위에 올려놓고 페르젠을 대표로 하는 일파는 트집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유로 국왕을 추방했다. 다시 또 관료정치로 돌아가는 것인가 하고 괴로움을 느끼며 이를 악물고 있을 때 저 국왕은 코랄과 싸우기 위하여 단 혼자의 몸으로 돌아왔다. 적기適期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었다. 저 왕은 지금은 혼자다.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듯이 보인다. 편을 들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페르젠의 개혁파가 가지지 못한 재산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세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보석을 이미 손안에 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과 마찬가지로 현상타개를 바라고 저 젊은 국왕에게 마음이 기우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을 지도 모른다는 괜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색에 빠져있던 영주에게 신하 한 사람이 서둘러 달려온 것은 이때였다. "주인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구냐?" "로아의 도라 장군 및 신하 약 오백 명. 라모나 기사단장 나시아스님과 그 기사단원 2천명. 함께 오셨습니다." 세리에 경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도라 장군은 코랄에 유폐되어 있는 몸일 터였다. 그것도 기사단원 2천명이라면 라모나 기사단의 전체 병력이 아닌가. 믿지 못할 눈으로 재차 확인하자 신하도 이해한다는 듯이 서둘러 끄덕였다. "모두 완전히 전투 준비를 하고 계시며 각각 거대한 보급부대를 끌고 온 괸장히 용맹한 모습이십니다. 코랄에 진군하는 길목이지만 아무 일 없이 지나쳐 가는 것도 무례한 일이므로 우선 인사를 하러 올라오셨답니다." 세리에 경은 낮게 신음했다. 국왕이 말하던 것이 정말이었던가 하고 우선 생각했다. 도라 장군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면현재 방관 태세에 있는 로아부터 스샤를 포함한 중북부 지방은 일제히 태도를 바꿔 그의 편에 붙을 것이다. 희대의 맹장이라 불리는 도라 장군이다. 그 정도의 영향력은 갖고 있었다. 게다가 비르그나가 움직인 것이라면 양날개라고도 칭할 수 있는 딜레든 기사단의 본거지 마레바가 가만히 앉아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마레바는 단장인 발로를 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것 때문에 지금은 코랄의 관리 하에 놓여있어 외부와는 연락이 되지 않도록 격리되어 있을 터였지만 소동이 커지면 언제까지고 숨겨둘 수 있을 리 없었다. 언젠가는 기사단 내부에 알려질 것이다. 기폭제가 되기엔 충분하고도 남는 재료였다. "저어.... 주인님. 실은 도라 장군님과 나시아스님께서 반드시 주인님을 만나뵙고 싶다고 청하고 계십니다....어떻게 할까요?" 이 정도 대군의 방문을 맞아본 일이 없는 집사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만나겠다. 정중하게 모셔라." 세리에 경은 힘찬 목소리로 명령했다. 이미 마음 속은 결정되어 있었다. 해가 저물 즈음 로쉐의 가도에 도달하자 타우의 사내들은 국왕 일행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이대로 가도를 횡단하여 북상해서 스샤를 경유하는 형태로 타우에 들어가게 된다. 한편 월의 일행은 가도에서 멀어지거나 접근하지도 않고 평행해 가는 형태로 로아를 향하기로 했다. 얼굴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가도 자체를 타고 갈 수는 없지만 그 지방사람들이 사용하는 샛길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남자는 타우를 향해 가는 일행의 지휘간인 마이키에게 짧지만 정중한 인사를 고했다. 마이키는 그들 산악민이 믿는 신에게 국왕의 전도무사를 기원해 주었다. 애초에 이것은 국왕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주로 친구를 위한 것인 듯 했다. 아쉬움에 가득 차서 어깨를 안아주었다. 이븐 역시 언제까지고 멀어져 가는 동료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식객이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깊게 타우의 생활에 적응해 있던 듯 했다. 하물며 이것이 이번 생애 마지막 이별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월은 배웅을 방해하는 행동도 앞길을 서두르려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소꿉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타우의 남자들과 소녀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고 소녀는 타우의 남자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페노아 마을이라는 건 타우에서도 큰 거야?" "그래 크지." 프렉카가 대답했다. 사르지가 그 뒤를 이었다. "타우 중에서도 오랜 역사가 있는 마을이야. 타우의 중심이기도 하고 중개역할이기도 하지." "그렇다면 페노아의 두목이라는 건 상당한 실력자인 건가?" "물론이고 말고. 그런 정도가 아니라 이십 명의두목 중에서 페노아의 질 두목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건 겨우 두세명 정도일 거다." "헤에...." 소녀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정도의 거물이 외부인인 이븐을 부두목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럼 페노아 마을의 사람들은 이븐이 부두목이 되는 걸 납득한 거야?" 남자들은 이것에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아가씨도 입놀리는 게 꽤 남 못지 않은 걸." "분명 전례가 없는 일이야. 페노아에서 나서 자란 녀석들에겐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이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이다." 남자들은 그러면서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소리를 해서는 안 되는 게 타우의 규칙이다. 우리들은 오랜 동안 독립을 지켜오며 우리들을 속박하려 하는 자들과 싸워왔다. 태어난 출신은 관계없어. 중요한 것은 우리들과 같은 마음을 가졌는가 아닌가다." "저 부두목은 나이는 젊어도 멋진 남자야. 실력도 있고 머리도 좋지. 기분타이기도 하고 페노아의 두목이 맘에 들어 했던 것도 무리는 없다고." "흐응...." 소녀는 다시금 동료들을 배웅하고 있는 이븐의 등과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월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월도 그 부두목이 반해 있어도 무리 없을 정도로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하지만 말야." 남자들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 이거 참 꼬마아가씨는 재미있구만." "그럴듯한 소리긴 하지만. 분명히 저 임금님도 재미있긴 하지." "그래그래. 왕이 아니라면 좋은 자유민이 되었을 텐데 말이야." 한 사람이 그런 말을 꺼내자 다른 자들은 열심히 목소리를 죽여 가며 쓴웃음을 참으려 노력했다. 이런 일은 아무래도 큰 소리로는 말할 수 없었다. 하물며 관리나 높은 사람들에겐 절대 들려주지 못할 거라는 그러한 것이었다. "한번은 부두목이 저 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긴한데.... 아니 그 때는 설마 왕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저 왕이었던 것 같구만." 츠이르의 브란이 왠지 곰곰히 생각하듯 말을 꺼냈다. "거참 있는 대로 씹는 거긴 했지만 자기보다 연상인 주제에 느리지 둔하지 융통성도 없지.... 못 말릴 놈이라고 말하시더구만. 참 드문 일이지만 꽤나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었지." 소녀가 이상하다는 듯이 녹색 눈동자를 휘릭 움직였다. "마음에 드는데 그렇게 나쁜 소리를 해?" 그렇게 묻자 브란은 웃으며 답했다. "페노아의 부두목은 그런 사람이야. 진심으로 나쁜 소리를 하는게 아냐. 오히려 저 사람이 누군가를 칭찬하거나 하면 그쪽이 외려 무서운 거다." "하하아.." 알것 같기도 모를 것 같기도 한 기분이 들면서 소녀는 애매하게 끄덕였다. "나이도 젊고 말이야. 그렇게 순순하게 친구를 칭찬해줄 수가 없는 거겠지." "바로 그거구만." 프렉카가 웃으면서 동의했다. "저 사람에겐 묘하게 그런 귀엽다고 할까 그런데가 있어. 여자한테는 들어주기도 힘든 미사여구가 줄줄이 나오면서 말이야." 각각 사십대는 되어 보이는 브란과 프렉카엿지만 단순한 젊은이에 지나지 않는 이븐에 대해 말할 때의 언어에는 어딘가 정중함이 깃들어 있었다. 소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타우의 남자들의 규율의 엄격함과 이 남자들이 이븐에게 갖고있는 호의의 정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아예 타우로 불러들이라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집안을 잇지 않으면 안 되는 귀족 도련님이라서 산적은 못할거라고 말하셨지. 그것이 어찌 이렇게...." "아아 저 왕이라면 좋은 두목이 될 텐데 말이야." 이 남자들도 꽤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석양에 붉게 물들은 동료들의 최후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이븐은 겨우 발걸음을 돌렸고 바로 가까운 거리에서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소꿉친구의 눈과 마주쳤다. "뭐 뭐 하는 거야." 너무 진지한 표정이어서 저도 모르게 머뭇거리자 상대는 망설이듯 말을 꺼냈다. "정말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았던 거야?" "뭘 새삼스레. 그럼 너 말야 내가 없는 쪽이 낫겠냐?"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그저 너를 부두목으로 점찍고 있었던 사람에 대해 의리 없는 짓을 한게 아닌가 걱정된 것뿐이야." 이븐은 낮게 웃엇따. 한 성깔 할 것 같은 수상한 자의 웃는 방식이었다. 이 남자에겐 묘하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산적 두목과 그 쫄짜 사이를 진짜로 걱정해준다니까 이 임금님은." "이븐.... 장난치지 마." "알아 알아. 괜찮아. 페노아의 두목은 그렇게 속이 좁은 사람이 아냐." 위에서 아래까지 검은 색 일색인 산적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것보다는 네가 전왕의 사생아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가 더 뒤집어졌지." "그건 어젯밤 들었어." "일단 들어 봐. 나는 말이야. 이제 두 번 다시 너랑은 못 만나는 줄 알았다고." 남자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이상한 소리를. 아무리 왕궁 생활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딱딱하진 않다고. 성에 들러서 이름을 알려주면 나는 언제든지 기쁘게 너를 만났을 텐데...."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이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란 말이다. 내가 말하는 건 두 번 다시 이전의 너랑은 못 만날 거라고 생각했다는 그런 소리야." 남자는 진지하게 친구를 보았다. 이븐은 놀리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권력을 쥔 인간은 반드시 변하는 거니까 말야. 하물며 말 그대로 임금님 생활이니까. 중앙은 물론 대륙 전체에서 모아온 온갖 사치와 쾌락, 추종하며 따르는 녀석들, 화려한 귀부인들, 말 한마디면 자유자재로 움직여지는 강력한 군대에다거의 신이라고 할만한 권력. 그런 것에 둘러싸여 변하지 않고 있는 쪽이 이상하지. 누구라도 거만해 질 거다. 권력을 즐기는 일에 푹 빠지게 돼서 너도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 거야. 아무리 네가 둔한데다 시골 출신이라고 해도 왕좌에 엉덩이를 붙이고 왕관이 머리에 씌워지면 권력과 권위에 집착하는 놈들 중 하나가 분명히 돼버릴 거라고 말이야." "미안하게도 내 촌생활은 뼈에 박힌 거라서 말이야, 거기에 익숙해 질 틈도 없었다고.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너라면 그정돈 알 수 있지 않냐."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남자는 대꾸했고 이븐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튼 간에 참 내.... 너 그래도 일단은 대관식도 끝낸 임금님이잖아. 그런 지방영주 아들네미 고대로 인 걸 어찌 시종이나 측근들이 참아 줫냐. 에에 월리?" 오랜만에 애칭으로 불리자 월도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하는 이일 저일 눈을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더라. 그거야 말로 어쩔수가 없잖아. 뭐 그쪽이 포기하는 수밖에 없는거고. 곰 새끼가 백조가 될 리가 없는 거잖아. 안 그래 이브?" 이쪽도 예전의 애칭으로 불리자 간지럽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던 산적은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자로는 변할 지도 모르지." "...." 남자는 갑자기 대꾸할 말이 없어졌다. 사자는 델피니아 왕가의 문장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포효하는 사자의 옆얼굴에 두 자루의 검을 교차시킨 웅장한 모습이다. 국왕만이 지닐 수 있고 깃발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다. "나는 그게 보고 싶어졌어." 산적의 푸른 눈에 순간 날카로운 빛이 떠올랐지만 곧 사라졌다. 대신 시치미를 떼듯 입술에 미소를 떠올리며 옛 친구의등을 두드렸다. "자 가자구. 꽤 시간을 허비해 버렸구만. 어디 쉴 곳이라도 찾아야지. 내일이면 로아에는 도착하고 싶으니까 말이야." 동료가 되어 주는 이유 같은 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라는 듯한 행동이었다. 혹은 한순간이라도 진지해졌던 자신을 쑥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주 어릴 때부터 사귀어 온 사이였다. 그런 성격은 잘 알고 있었지만 남자는 저도 모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이븐." "왜?" "아니...." 고개를 저었다. 뭔가 친구의 후의에 감사하는 말을 찾으려 했지만 얼굴을 맞대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창피하기도 했고우선 저쪽이 웃어 넘겨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망설이면서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응?" "화내지 말고 들어. 그러니까 만약인데 내가 왕좌를 되찾으면 아니 꼭 되찾을 생각이지만 그때 너한테 포상으로 뭘 해주면 좋겠어?" 이븐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걸 보고 김칫국부터 마신다 라고 하는 거지 아마. 앗차 실례. 그건 이제부터의 활약을 보고 결정해 주십시오 국왕폐하." "이 자식..." 국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친구의 뒤를 쫓았다. 녹색이어야 할 주변이 어느 새 붉은 색에 물들어 있었다. 언제까지고 저물지 않을 것만 같은 석양에 소녀가 살짜기 눈을 가늘게 하고 있었다. 5장 "이것 참 곤란하게 됐군요." 하고 페르젠 후작이 말했다. 말과는 달리 특별한 감정은 보이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야말로 현 정권을 뒤흔들만한 중대한 사태였지만 그것을 깨닫고 있는 건지 어떤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말투였다. 어느 정도로 쉽지 않은 사태인가 하는것은 이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 중에 평온하게 보이는 것은 후작 단 한 명이라는 사실을 보더라도 명백했다. 다른 사람들을 보자면 어떤 자는 초조해하고 어떤 자는 평정을 잃고 있었으며 어떤 자들은 아예 뚜렷이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후작은 어디까지나 초연한 자세로 말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을 한탄하고만 있어서야 아무 소용이 없지요. 대책을 협의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아니 후작. 그건 순서가 틀렸소. 우선 이 사태를 일으킨 책임을 따져야 할거요." 초조해하고 있던 자들의 대표, 상그 사령관이 경멸의 눈초리를 숨기지도 않은 채 타뮤 남작 부자에 대해 내뱉듯이 말했다.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오는 일일세. 도라 장군이 로아에 도착할까 말까하는 때에 중요한 인질을 놓쳐버리다니. 무엇 때문에 그 정도로 수고를 해서 장군으르 설득해서 그 남자를 정벌하러 보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남작가의 아들 치폰은 불만과 수치로 폭발할 것 같았지만 사령관이 하는 말은 틀린 말이 한마디도 없었다. 가까스로 반박하려던 것을 생각만으로 삼킬 수 있었다. 사령관은 이어서 말했다. "대체 로아에서 태어난 자가 나이가 적다고 해도 또 여자의 몸이라고 해도 말의 취급에 있어서 미숙할 리가 없는 일인데 그걸 뻔히 보면서 달리는 것을 허락해 주다니 도망쳐달라고 비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결국 시종은 두드려맞고 본인은 말에서 끌어내려지다니! 어찌 남자라고 생긴 것이 거기까지 창피를 입을 수가 있는 것인가." 이 이상 침으로 한번 더 찌르는 식의 짓이라도 했다면 틀림없이 치폰은 폭발해버렸을 것이다. "분명히 영애를 놓쳐버린 것은 아들놈의 잘못이고 말달리기를 허락한 것은 제 책임입니다." 시커먼 얼굴이 되어가면서도 가능한 한 냉정하게 남작이 말했다. "하지만 사령관. 요 반년, 그 처자는 완전한 규중의 아가씨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생각지도 못한 일을 벌일줄이야 우리 중 누가 예상할 수 있었습니까. 애초에 열일곱의 아가씨 한명을 어마어마하게 감시하는 쪽이 오히려 남자의 체면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타뮤 남작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혹시 치폰이 정말로 샤미안을 경계하여 예를 들면 근위병단의 일개 부대를 호위로 붙이려고 했었다면 사령관은 즉시 어린 소녀 한 명에게 거기까지 신경을 쓰느냐고 치폰을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머리가 돌아가는 사령관은 아니었다. 미운 상대방의 실수를 계속 추궁하는 것 외엔 머리 속에 없었다. "결국 놓쳐버린 주제에 무슨 소리를 해도 소용이 있나." 기회다 라는 생각에 계속해서 그 말만 하는 것이었다. "자기 자식하고 같은 취급을 한다면 더욱 더 실례라는 거지. 나는 상대가 여자라고 해도 그런 실수를 저지른 일은 단한번도 없네." "글쎄 그건 과연 어떨런지." 악의가 듬뿍 담긴 '온화한' 목소리였다. "어디까지나 소문입니다만 사령관께서는 그런 신분을 가진 사람이라면 드나들리 없는 풍기문란한 변두리에 밤산책을 나가시는 것이 가장 즐기는 취향이라는 설이...." 꾹 하고 말을 삼켜버린 사령관이었다. 남작은 용서 없었다. "분명히 얼마 전에도 싯사스의 매춘가에서 미인이 있다고 이름난 술집을 대부분 빌려 소동을 벌였다던가. 이런 저런 여자들의 술시중을 받으면서 무척이나 기분이 좋으셨는지 눈 둘 곳이 없을 정도로 우쭐대고 계시더라더군요."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뜬소문이다!" 얼굴이 시뻘개진 사령관이었다. 그 다왕하는 모습만 봐도 과연 뜬소문인지 아닌지 쉽게 추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남작은 실수했다는 듯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렇겠죠. 사령관 정도 되시는 분이 그런 추태를 부리실 리가 없으니까 말이죠. 그래도 참 똑같이 닮았던 모양입니다. 본인이 아니시라면 쌍둥리라고 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거 참 기괴한 이야기입니다만 가령관님이실 리가 없으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겠죠. 아니 뭐 세상에 닮은 사람이 셋은 있다는 그런 걸까요." "무 물론...." "뭐랄까 사령관님과 꼭 닮은 그 남자 돼먹지 못하게도 허리의 검을 내려놓고는 잊어버린 채로 주점의 여자들과 날이 샐 때까지 놀아나다가 낄낄거리며 돌아갔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나중에야 시종 같은 자가 와서 몰래 검을 되찾아 갔다고 하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까. 천박스럽게도 무장 나부랑이나 된다느 자가 참 잘도 그런 창피한 짓을 하는 일입니다 그려." 이번에는 사령관 쪽이 분화하기 직전의 화산 같은 상태가 되었다. 입을 열어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진 않는다. 꽉 쥐어잡은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안면은 새빨갛게 충혈되고 눈은 분로로 핏발쳐 있었다. 타무 남작은 벼락부자의 얼굴에 음험한 미소를 띠며 큰소리만 뻥뻥치는 사령관을 노려보고 있었다. 불순하게 서로를 노려보기만 하는 상황을 수습한 것은 역시 페르젠 후작이었다. "상그 사령관 각하, 타뮤 남작도 기분은 풀리셨는지요"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칼날의 차가움과 예리함이 듬뿍 담긴 목소리였다. 특별히 목소리를 거칠게 하거나 험악한 표정을 보인 것도 아닌데 도 그 장소를 조용히 만드는 데는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 남작도 사령관도 움찔하고 있었다. 후작은 입가에 미소마저 띠고 있었지만 그 눈은 살무사나 도마뱀의 그것과 같았다. 이 회의실에서 쫓겨나고 싶은 것인가 아니 지금의 지위를 뿌리채 빼앗기고 싶은 것인가 하고 협박당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령관은 창백해지고 남작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후작은 어디까지나 온화하게 말했다. "왕국이 존망의 위기에 처해있는 이런 때에 두 분이 언쟁을 벌이시는 것은 달갑지 못하군요. 지금이야말로 우리들이 힘을 합쳐 왕국의 적을 격퇴하고 올바른 국왕을 옹립해야 할 바로 그때입니다. 두분은 어떤 일 한가지에도 그 힘이 되어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겁니다. 자아 쓸데없는 감정들은 버리고 이후에 어찌하면 좋을지 지혜를 모아주시지 않겠습니까." 당근과 채찍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두 사람 모두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후작에게 눈인사를 했다. "후작님의 말씀대로 입니다. 영애와 합류한 도라 장군이 다음에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게 문제입니다." 낭패스러운 것을 숨기기 위해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남작은 일부러 입에 담았다. 남작만이 아니었다. 이 회의에 참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같은 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 남자에게 비밀스러운 기대를 품고 있는 양대 세력 중에서 마레바는 코랄의 바로 눈앞에 있었다. 즉 감시하기도 쉬웠다. 단장 발로는 성내에 붙잡혀 있고 다른 용사들에게도 하나하나 감시역을 붙여두었다. 우선 지금 당장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었다. 그에 비해 비르그나는 지금까지도 최대한의 경계를 필요로 하는 상대였지만 이렇게까지 되었을 때는 완전히 적으로 돌아선다보아도 틀림없었다. 제나 제사장의 낭패한 얼굴을 불안으로 일그러뜨린 채 후작의 안색을 살폈다. "후작. 혹시나 그 남자와 일전一戰 겨루게 되는 일이 된다 해도 이 코랄이 전화에 타오르게 되는 일만은 피해줬으면 하네." 무시무시한 예언에 그 곳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 일제히 동요가 퍼졌다. "역시나 전쟁이...." "상대가 비르그나에 도라 장군이라고 한다면...." "그렇지. 아무 일 없이 지나갈 리가 없으니." 반년 전의 내란은 거의 유혈사태가 되지 않고 무사히 끝났었다. 더욱이 이 장소에 있는 것은 실전경험이 없는 관료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만큼 불안을 숨길 수가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상그 사령관이 분연히 반론했다. "뭐 두려울 것이 있다는 건가. 비르그나와 도라 장군의 전력을 합친다 해도 우리 근위병단의 사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 일을 잊었는가. 하물며 이 코랄이 삼천도 되지 않는 병력에 무너질 리가 없다. 덧붙여 말하자면 혹시 그자들이 마레바에구원을 요청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그때가 적기가 아닌가. 적이 자기들 스스로 가까이 다가와 준다는 것이니까 말이야. 우리들은 사냥감이 덫에 걸리기만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올 테면 와라 하고 사령관은 말하고 싶은 듯 했다. 오히려 당초의 계획대로 된 것이다. 아무런 문제도 없을 터였다. "글쎄요. 그렇게 잘 되어 준다면 좋겠습니다만." 야유가 섞인 눈초리를 사령관에게 향한 후 남작은 페르젠 후작에게 말을 걸었다. "마레바에 대한 경계를 지금 이상으로 엄중히 해야 합니다. 도라 장군과 비르그나의 전력을 합쳐 이미 삼천. 그 위에 딜레든 기사단까지 빼앗긴다면 적의 병력은 충분히 이쪽에 필적할만한 수준이 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남작."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후작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아무리 딜레든 기사단이라고 해도 그것은 전원이 한 덩어리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위협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지금의 딜레든 기사단은 영웅이라고까지 불렸던 지휘관을 잃고 있습니다. 그 뒤엔 전력이 될 정도로 통합되지만 못하게 한다면 그다지 위험한 존재라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기사단 안에서도 이렇다 할만한 통솔력이 될만한 자들은 한사람 한사람 격리하여 엄중히 다른 자들과의 접촉을 금지해두고 있습니다." "이건... 탐복할 뿐입니다." 역시 이 사람이 하는 일에는 빈틈이 없었다. 그러나 후작은 그 외에는 특별히 이거라 할만한 방침을 정하지도 않고 상대방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자는 결론만으로 회의를 폐회했다. 고개를 갸우뚱거린 타뮤 남작이었다. 현재의 상황이 결코 낙관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남작도 알고 있었다. 하물며 페르젠 후작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우연히도 그 남자와 자신들이 서로 옳고 그름을 따지게 된 셈이지만 옳은 쪽이 어느 쪽인가는 명백했다. 자신들은 어차피 선대의 국왕에게 임명받은 관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국왕의 지시에 의해 내정을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왕국의 정당한 주인이 될 자격 같은 건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누구에게 들을 필요도 없이 그 남자를 추방한 남작도 사령관도 그런 것은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권력을 탐냈다. 그것을 위해서는 그 남자가 방해가 되었다. 그러니까 추방했다. 가지고자 원한 강한 힘을 눈앞에 두고 백을 흑이라 둘러 붙이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하물며 첩실 태생인 데다 갑작스레 어디서 뚝 떨어진 경력이었다. 시정의 사람들에게도 아무런 익숙함이 없었다. 침침한 의혹을 뒤집어 씌워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몰아붙이는 데에는 거의 별다른 힘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에 대해 저 밑바닥에서부터 의혹의 목소리가 올라와 산불처럼 퍼지고 있는 지금 말만으로 이것을 침묵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정도도 모를 후작이 아닐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태평스럽게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무언가 자신들에게마저도 은밀히 비장의 수단을 숨기고 있는 것인가. 타뮤 남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델피니아 왕궁은 여러가지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문자 그대로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본궁本宮이었다. 몇 개나 작은 궁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은 날개를 편 새와 같기도 했고 여덟 겹으로 만개한 꽃과 같기도 했다. 왕궁내에서도 특히 높은 부지에 서 있는 본궁은 그 자체로 델피니아를 상징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본궁에는 여러가지 부분이 있었다. 특히 겉부분은 정치의 장소였다. 개혁파가 여러가지 의논이나 결재를 행하는 것이 바로 이곳이다. 그러나 안쪽 부분은 왕족과 왕족의 생활을 담당하는 자들의 사생활 장소여서 궁내부라고 하는 부서의 관할에 들어가 있었다. 내각에 뒤지지도 넘어서지도 않는 중요한 부서이며 현재의 책임자는 두명. 왕족의 몸가짐을 정연히 하며 시녀들을 총괄하는 시녀장인 카린. 그리고 서무 일체를 담당하는 시종장 브룩스였다. 최고회의실을 나선 페르젠 후작은 그대로 본궁의 안쪽을 향해 중개인에게 방문을 고하고 시종장과 만나고 싶다는 희망을 전달했다. 궁내는 정권이 변화한 뒤 그대로 개혁파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여자들, 시종들로 구성되어 있는 궁내이기 때문에 가능한처세술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표면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후작은 알고 있었다. 그다지 기다리지도 않고 페르젠 후작은 훌륭한 중간 홀에서 브룩스와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시종장." "드문 발걸음을 하셨군요 후작님. 제게 무슨 용무이신지?" 부드럽게 인사하는 브룩스는 후작과 동년배의 오십줄로 보였다. 그러나 얼굴도 몸집도 하늘하늘 말라있어 그야말로 풍채가 없었다. 당당한 후작의 체구 앞에서는 불면 날아갈 듯이 빈약하게 보였다. 인품도 온순함 그 자체로 태도도 말투도 지극히 정중하고 부드러웠다. 흘낏 본 것으로는 연약한 인상마저 주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외유내강이라는 것은 바로 이사람을 위해 있는 말이라고 페르젠 후작은 생각하고 있었다. 브룩스는 전 국왕의 통치기간 중 거의 대부분의 시기동안 훌륭한 정치실력을 발휘했던 사람이엇다. 국왕의 숨겨둔 검으로서 또한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그 이름은 국내만이 아니라 외국까지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브룩스의 역할은 정부고관임에 동시에 국왕의 측근이기도 했다. 외교의 결과를 정부에 알리기보다 먼저 국왕에게 알리고 그것을 상담한 뒤에 국왕의 의향을 정부에 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페르젠으로선 이런 사람을 적으로 돌리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든 개혁파 안에 끌어들이려고 했었지만 브룩스는 자신이 모시는 것은 델피니아 왕가이며 왕가의 핏줄이라고 고집 세게 협력을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그저 성내를 관리하는 시종장으로서 성의 재부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제 일선에서 움직이고 있던 사람이 소위 한직으로 좌천당한 것이었지만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조금도 당황하거나 혹은추하게 직무에 집착한다던가 하는 일도 없이 가볍게 몸을 빼고는 전 국왕이 남겨두었던 편지나 수집품을 슬슬 정리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일반적인 배짱과 정신이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못한다. 아쉬운 일이라고 페르젠은 생각했다. 본의 아닌 일이지만 지금 자신의 동지인 자들은 지혜는 있어도 품위와 용기가 없고 용기가 있으면 지혜와 품위가 없으며 품위를 갖추고 있는자는 지혜와 용기가 없었다. 한번에 그 세 가지를 가지라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두 가지는 갖추고 있어주었으면 하고 후작은 냉정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풍채없는 남자는 우선 틀림없이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있었다. 문제는 세 번째였지만 품위라고 후작이 부르는 것 대신에 양심이라고 하는 것으로 자신을 엄하게 다스리고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후작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것을 입에 담진 않는다. 자세를 바로하고 진지한 표정과 어조로 말을 걸었다. "실은 긴히 당신과 상담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 남자가 델피니아에 돌아온다고 하는 이야기는 당신도 이미 들으셨겠지요." "폐하라고 부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작." 끝까지 온화하게 그러면서도 분명하게 브룩스는 말했다. "그 분은 뒤르와 폐하의 피를 이어 야니스의 신전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모든 사람이 이 성의 주인이라고 인정했던 분입니다." 후작은 슬며시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나 고집 센 분이로군 그래.... 시골영주의 아들에 지나지 않았던 남자가 위대한 델피니아 국왕의 혈맥이라고 인정받았던 것도 애초의 시발점이 된 건 당신이었지요." 브룩스는 침묵하고 있었다. 후작은 아무래도 말하기 힘든 양 고개를 흔들고 이해를 바라마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 때.... 저를 포함하여 동생분이신 아에라님을 비롯한 누구 한 사람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성의 안쪽 사정은 당신들 궁내부의 관할이지요.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폐하의 피를 이은 아이가 이 왕궁에서 몇 명 태어나건 당신들이 입을 다물면 그것은 절대로 우리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브룩스는 천천히 되물었다. "후작은 내궁에서 바늘 하나 떨어져도 들을 수 있는 귀를 소유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페르젠 후작은 생각지도 못한 상대방의 야유에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후작의 정보수집 능력은 분명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도 대부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 현재, 제대로 하자면 요 몇 년간의 이야기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제가 뛰어난 귀를 갖고 있다고 해도 20년전의 일까지 들을 수는 없지요. 지금에 와서야 그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작년 목이 터져라 당신과 논쟁을 벌일 일도 없었을 텐데요." "글쎄요." 브룩스는 이상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것은 이미 전부 결론이 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후작은 당시를 되새기는 듯이 단어를 고르고 있었다. "그때 페르난 백작은 지금 자신의 자식이 되어 있는 젊은이가 실은 뒤르와 폐하의 핏줄이라고 말하고 이십여 년 전 이 본궁에서 직접 그 손으로부터 받아 든 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바보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믿겠습니까. 만약 정말국왕의 핏줄이 이 성내에서 탄생했다면 어째서 일부러 성밖으로 내보낼 필요가 있었던 것인가? 그것도 스샤라는 벽지에말입니다. 국왕의 총애가 깊었던 여성이라면 더욱 말할 필요도 없는 일. 그 분의 성격으로 보아서 자신의 아이를 들판에버리는 것 같은 일을 하실 리가 없습니다. 정당한 명예를 부여받고 세상에 알려졌을 겁니다 .우리들은 일제히 그렇게 반론하며 페르젠 백작을 그 아들과 함께 왕족사칭죄로 투옥하려 했습니다. 기억하시겠지요?" "폐하께는 폐하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으셨겠지요." 브룩스가 답했다. 단정하게 등을 펴고 있었다. "저는 신하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군의 의향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불손한 짓은 할 수도 없으며 그대로 실행할 뿐입니다.폐하께서 서거하시기 직전에 델피니아 왕가의 문장으로 엄중히 봉해진 서간을 제게 맡기셨던 것도 그리고 지극히 기묘한 유언을 남기셨던 것도 저는 상대가 누구이건 입밖에 내지 않고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두렵다는 듯한 표정이 되어 낮게 말했다. "그 기묘한 유언이란 이 서간의 존재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제 전 책임을 다해 관리할 것. 단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결코 개봉해서는 안될 것. 그리고 만약 그 한 가지 경우가 제 목숨이 있는 동안 현실로 벌어진다면 이 서간을 즉시 극비리에 처리 할 것." 그런 기묘하기 그지없는 유언을 주군에게 받고 브룩스는 정말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편지를 열어보지도 않은 것이다. 신하의 표상이라고 해야 할만한 사람이었다. "그 단 한가지 경우라는 것은 실은 명령을 받았을 때엔 전혀 무슨 영문인지 알수 없었습니다만.... 폐하가 말씀하셨던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혹시 당신의 사후 계승자의 일로 무언가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을 때에 그리고 혹시 계승자 문제가 일어났을 때 스샤의 페르난 백작이 자식을 데리고 등정하는 일이 생긴다면 최고회의 석상에서 이것을 자신의 유지로서 공표하라고..." 페르젠 후작은 다시 한번 희미하게 쓴웃음을 입가에 떠올렸다. "불쌍하신 아에라님께선 그 장소에서 졸도해버리셨지요." 그것은 누구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편지를 들고 들어왔던 브룩스 자신이 기절하는 게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대사제도 비서관도 혈안이 되어 편지의 신뢰성을 밝히려 했지만 필적은 틀림없이 뒤르와 왕 자신의 것이라는 점, 그리고다른 인간은 손을 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왕가의 인장이 그 편지에 뚜렷이 찍혀 있었다는 점. 그 어느 쪽도 명백했다. 내용은 이제 와서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스샤의 페르난 백작가의 월은 본명은 월 그리크 로우 델핀이라고 칭하며 틀림없는 자신의 피를 이은 남자아이이자 이 서간이 공표된 시점에서 왕자 두 사람이 무언가의 사정으로 왕위를 잇지 못할 상황이라면 월 그리크에게 델피니아의 왕자가 가지는 모든 권리를 부여한다. 이러한 내용이 활달하고 남성적인 문체로 낭랑히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회의는 대혼란에 빠져버렸지요." 당시를 회상하며 후작은 이어서 말했다. "위조일 수는 없습니다. 폐하의 필적, 폐하가 사용하시던 인지, 그리고 인장. 이것들 모두를 위조 혹은 사용할 수 있는자가 따로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폐하께서 다른 누구에게 말씀하시지 않은 것도 당신에게만은 이야기하신다는 것은 성내에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었지요." "송구스럽습니다." 서론을 풀어낸 후작은 약간 어조를 바꾸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24년 전이라고 말하면 폐하의 재위 십년 축제가 있었던 해였던가요..." 슬슬 본론에 들어갈 모양이었다. "깊은 추억이 있는 해였지만 기억하십니까. 그 흥겨운 식전이 4월에 행해져 9월에는 탄가 완녀와의 인연을 맺기로 하고때마침 농작도 대풍이라 그야말로 기쁨에 넘쳤던 1년이었지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페르난 백작이 그 해 3월 마침 십년제의 준비를 위해 성안이 온통 정신없는 가운데 이 성을 혼자 방문한 것이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비밀리에 폐하가 부르신 것이겠지만... 혹시 소환장을 당신이 쓰신 건 아닌가요." "글쎄요 그것은..." "상당히 능숙한 방법입니다. 평소라면 모르지만 그때에는 정문까지도 하루 종일 개방되어 성내에는 기술자건 상인이건 물론 지방 귀족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종류의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다소 모르는 얼굴이 성내에 들어왔다 해도 누구도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아마 그렇겠지요." 브룩스는 맞장구를 치고 있을 뿐 상대가 일방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결코 요점을 찌르거나 하지 않는 것이 이 사람이라면 이 사람다운 점이었다. "그런데... 그때 돌아가신 폐하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는 그 여식은 이름을 뭐라 했던가요. 분명히 폴라인가 했지요. 동북의 작은 마을 출신었던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 여식이 남아를 출산했던 것은 십년제가 있던 해의 바로 전 겨울, 새해로 넘어가기 전의 일이었지요." "잘 알고 계시군요." "그 여식을 조사했던 것이 저입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서도 그대로 날짜만은 기억하고 있지요." "그렇습니까." "해가 바뀌고 다음 해 3월에 폐하는 일부러 스샤에서 페르난 백작을 불러들여 아이를 맡기셨지요. 놀랍게도 당신에게마저 비밀로 하고." 브룩스는 희미하게 미소를 떠올렸다. "뭐라 말씀하셔도 이런 것은 여성의 분야이니까요. 시녀장에게는 모두 밝히고 협의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애초에 그 당시에는 시녀장이 아니라 공주님을 모시는 시녀였습니다만." "호오? 처음 듣는군요." 후작은 약간 놀라움을 보였다. 정말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시녀장도 당신도 이전에는 그런 말씀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만."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슨 말씀을. 그것을 말씀해주셨다면 상당히 사정은 틀려졌을 겁니다. 당신께도 이야기의 진실을 확실하게 알려드릴 수 있었을텐데." "무슨 말씀이신지요?" 변함없이 평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브룩스였지만 자그마한 불안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후작도 역시 변함없이 부드러운 태도였다. "그렇다면 시녀장은 태어나자마자의 그 남자에 대해 잘 알고 계시겠군요?" "아마도요. 왜 그러십니까?" "그것만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폴라라고 하는 여식이 아이를 낳았던 것은 12월. 페르난 백작이 아이를 받았던 것은 다음 해 3월. 그 3개월 동안 아이가 어떻게 지냈던 것인지 누가 돌봐주고 있었던 것인지 그것만은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브룩스는 이상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사료됩니다만. 폐하께서 이 왕궁에 계셨던 것은 겨우 3개월의 일이었으므로 누군가 일하던 자가 일시적으로 돌봐드리고 있던 게 아니겠습니까." 왕궁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들은 왕족의 유모라고는 해도 거의 자신의 젖을 물리는 일은 없다.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교육계'로 뽑혀 어린 주인을 모시는 것이다. 실제로 젖을 물리는 여자는 수유기의 기간 동안만 고용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사정은 후작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큰 문제가 됩니다. 그것을 말씀드리자면 그 폴라라는 여식은 아이를 낳자마자 즉시 휴가를 얻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당시의 시녀장에게 행실불량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당연한 일이겠지요. 어디의 누구인지도 모르는남자의 아이를 가졌으니 말입니다." "델피니아 국왕의 자손이십니다. 말씀에 주의를 해주십시오." "끝까지 고집 센 분이로고. 좋겠지요. 그렇다면 폐하의 자손이라고 해두지요. 그러나 지금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이를 낳고 곧바로 그 여식은 휴가를 받아 왕궁을 떠났습니다. 낳자마자의 아이와 함께 말입니다." 브룩스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화했다. "뭐라고요?" "자주 있는 일이지요. 내궁에서 일하던 시녀들조차도 때로는 이런 일을 벌이는 법입니다. 하물며 마구간의 하녀라고 한다면 무리도 아니지요. 당시의 시녀장은 이미 돌아가셨기에 말씀을 들을수 없으나 같은 마구간에 일하고 있던 자, 당시의 상황을 목격했던 문지기라던가 하는 자들에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폴라는 해가 바뀌기 조금 전에 낳은 아이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어떤 남자들도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브룩스는 크게 신음했다. "그, 그 여식은 아이를 데리고 궁정을 나갔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하녀에 지나지 않는 여자였지요. 없어진다 해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고." "...." "여식은 당연하게도 태어난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탄가와의 국경에도 가까운 웨트카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여식은 양친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은 아니었습니다만 폴라가 돌아왔을 때에 갓 태어난 것으로 보이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고 몇 명인가 마을 사람들이 증언해주었습니다. 문제인 것은 그 뒤의 일입니다만 아무래도 묘한 일이지만 그 여식과 아이는 해가 뀌는 것과 거의 동시에 죽었다고 마을 사람들이 말했던 겁니다. 다시 말해 페르난 백작이 이 왕궁에서 아이를 받기 2개월도 전에 말입니다." 브룩스는 안면이 창백해졌다. 후작은 보라는 듯이 한숨을 쉬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가 얼마나 놀랐을지 아실 수 있겠지요?" 짖궂은 울림이 들어 있다. 단번에 혈색을 잃은 브룩스의 얼굴을 보면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거 참. 어째서 지금까지 아무도 이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인지. 물론 당신이 제출하신 폐하의 유언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제대로 된 것이었음은 틀림없습니다." "그 그러나..." 브룩스는 망연자실한 몸이었지만 그것도 순간적인 일이었다. 곧바로 다시 제정신을 찾았다. "그러나 그 유언에는 틀림없이 폐하의...." "예. 알고 있습니다. 폐하가 그 여식의 아이를 자기 아이라고 믿고 계셨던 점. 아마도 궁정 내의 정쟁을 싫어하는 페르난 백작가의 아이로 내보내셨던 점. 어느 쪽도 진실이겠죠. 그러나 아시겠습니까. 만약 폴라라는 여자가 낳은 아이가 진정 폐하의 피붙이라고 해도 말씀입니다. 그 아이는 생후 2개월도 되지 않은 사이에 모친과 함께 동북쪽의 작은 마을에서 짧은 생애를 마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지금 당신이 폐하라고 부르는 저 남자는 누구인 겁니까?" 그러나 여기까지 흔들려지면서도 브룩스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날카롭게 되물었다. "후작. 그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째서 지금까지 이 일에 대해 잠자코 계셨던 겁니까?" "저도 그 유언에 현혹되었던 한 사람입니다. 처음엔 외람되오나 폐하도 무슨 경박한 일을 저지르신 것인가 생각해 말하자면 진정한 오리고의 축복을 받지도 못한 자를 명예스러운 델피니아 왕가의 한 자리에 폐하의 아이로서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를 그럴수는 없는 일이라는 이유로 그 남자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반대한 것입니다. 그에 대해 폐하의 핏줄이라는 것과 그 의향을 중시해야 한다는 당신에 의해 1년도 넘게 논의를 거듭하여 결국 우리들이 당신에게 한 발 양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득 이상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마구간의 하녀가 낳은 아이를 폐하의 아이로서 내궁에 들이게 된다면 이건 그야말로 큰 일입니다. 그만큼 큰 소동도 일어났을 겁니다. 그런데 십년제의 준비에 쫓기고 있었다고는 해도 관료인 우리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 그런 정도가 아니라 폐하가 가장 친하게 곁에 두셨던 당신마저도 모르고 계셨다. 이건 조금 이야기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혹시나 무언가 어딘가 커다란 착오가 숨어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후작이 하는 일이다. 훨씬 이전부터 의문을 품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확실한 증거가 모일 때까지 의심하고 있다는 모습을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남자들의 기억으로는 그 여식은 산달까지 왕궁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친하게 지내던 병사들의 호의로 그 집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들은 아이의 부친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여식이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말한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의외였지만 그 여식은 친한 사람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께는 폐하의 아이라고 말한 건 어찌된 일입니까?" 후작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말하면 직장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겠죠. 천박한 여식이 생각할만한 짓입니다. 문제인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남자들이 이야기해준 여식의 행동은 이런 경우에 당연한 것이었던 겁니다. 그 여식은 잘못을 저질러서 어디의 누군가도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베었고 왕궁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기에 아이를 데리고 집이 있는 마을에 돌아갔다고. 뭐 자주 있는 이야기지요. 이렇다면 완전히 납득이 갑니다. 이것이 만약 궁정에 출입하던 귀부인의 누군가가 폐하의 아이를 베어 친족의 기대를 은몸에 받으며 출산한 것이라 한다면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체 어떻게 해서 페르난 백작은 누구도 모르게 폐하의 손으로부터 아이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인가. 고민하다 못해 당시의 일을 그녀 본인에게서 다시 한번 들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웨트카에 사람을 보내 조사했더니 이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브룩스는 창백해진 채로 침묵하고 있었다. 지금 그 안색은 종이보다 하얗고 손끝은 숨길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더욱 놀라야 할 것은 지금까지 누구도 이 간단한 증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후작은 표정도 어조도 전부 열띤 상태였다. 브룩스에게 손가락을 들이밀듯이 하여 거의 밀어붙이듯이 한번에 말했다. "서둘러 시녀장에게 물어봐 주십시오. 일의 흐름을 봐서는 최고 회의에 출두할 것을 요청합니다. 다시 말해 십년제의 전년 폐하의 총애를 받았다는 여식은 아이를 데리고 왕궁을 나섰다고 하는데 그 아이도 모친도 그때부터 곧바로 코랄에서 떠나 목숨을 잃었다는데 어떻게 해서 그 다음 3월 폐하는 페르난 백작에게 아이를 맡기실 수 있었던 것인가. 그 3개월 동안 이 왕궁의 가장 깊은 곳에서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그리고 지금 당신이 끈질기게도 이 왕궁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그 남자는 대체 어떤 자인가 즉시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반론할 수는 없었다. 브룩스는 얼어붙은 표정 그대로 살짝 끄덕임으로써 이 절대적인 명령을 받아들였던 것이었다. 6장 연일 계속된 따듯한 햇살에 소녀는 머리를 둘둘 말고 있는 것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정리해 올린 머리카락을 드러내지 않은 채 남자들과 함께 나란히 행군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타우의 사내들은 이 소녀가 어떤자인지 어째서 국왕과 함께 있는 것인지 슬슬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듯 했다. "그러니까 말이죠 국왕님." 츠이르의 브란이 머리를 굽신거리며 말했다. 어떻게 대접하면 좋을지 태도를 어찌 잡아야 할지 곤란해하고 있는 모습이 여실했다. 아무리 그래도 페노아의 부두목처럼 맞먹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일단 '국왕님'이라고 통일하기로 한 듯 했다. "왜 그러나?" "예이. 저 꼬마아가씨 말씀입니다만 어디까지 데리고 가실 생각이신지요?" "물론 코랄까지지. 저 아이는 내 옆에서 싸워주겠다고 했으니까 말이야." "어이 월." 이븐이 목소리를 낮춰서 살짝 말했다. "나는 네가 요령이 좋은 놈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어. 그런 정도가 아니라 확실히 말하자면 바보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확실히 말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국왕의 탄식을 소꿉친구인 산적은 완전히 무시했다. "상황판단은 할 줄 아는 녀석이라고 생각했었다고. 저런 어린애를 데리고 가서 대체 어디다 써먹겠다는 거야?" "금방 알게 될 거야." 국왕은 태연했다. 저 소녀가 얼마나 소녀같이 생겨먹지 않았는지 말로 설명한다고 그들은 믿어주지 않을 것이 분명할뿐더러 자신도 무척이나 놀랐었던 것인 만큼 남들도 그 정도는 놀라게 만들어주지 않으면 손해인 셈이다. 기묘한 이유로 국왕은 침묵을 계속 지켰고 소녀 쪽도 일부러 드러낼 필요가 없는 이상은 평범하지 않은 자신의 힘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되면 다소 별나기는 해도 극히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기 때문에 타우의 사내들은 오로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녀의 안전을 걱정하고 만약의 경우가 일어났을 때의 장애물이 될까(참으로 우스운 일이지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소녀가 그 능력을 단편적으로라도 남자들에게 보였던 것은 우선 청각에 관련해서였다. 가도 옆의 작은 길을 따라 일행의 후방을 걷고 있던 도중 갑자기 뒤를 돌더니 가만히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왜그래 리?" "뭔가가 와." 과거에 몇 번이나 이 귀의 덕을 보았던 남자는 즉시 멈춰서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이븐을 비롯한 타우의 사내들은 이 긴장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뭐가 보인다는 거야?"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는 대로 봄햇살이 찬란하게 내려쬐고 있는 녹색 들판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듯이 보였다. 새가 지저귀고 언덕 위를 구름의 그림자가 흘러간다. 평화 그 자체인 광경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긴장한 태세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 왔던 방향으로 의심스러운 눈길을 주고 있었다. "많은데. 이건 보통 일이 아닐 정도로 많아." "오십이나 백 정도?" "그 정도면 이렇게 들리지 않아. 아마 최소한이라고 해도 2천은 되겠어." "뭐라고!" 국왕은 놀라고 다른 남자들은 멍해져버렸다. "이봐 이봐 꼬마 아가씨. 바보 같은 소리하는 거 아냐." "그렇고 말고. 그래서야 완전히 전장에 나가는 군대급이잖아." "그럴걸. 절반 정도가 기마騎馬야. 게다가 아마 전원이 무장한 것 같아." "농담이겠지?" 이븐이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지만 국왕은 망설이지 않았다. 즉시 몸을 날려 동료들에게도 숨도록 손짓으로 지시했다. "어이 월." "조용히 해 이븐. 서쪽에서 온다는 거면 그 군대는 우리들 앞을 통과할 거다." "너.... 그걸 믿는 거야?" "금방 알 수 있어." 그 말대로 곧 알 수 있었다. 산사람들의 눈은 예리하다. 멀리서 창 끝이 빛나고 그것보다 먼저 무수한 깃발이 하늘을 찌르듯 세워져 있는 것이 즉시 남자들에게도 보였던 것이다. "이건 놀랐는데...." 이븐의 입에서 정직한 감상이 흘러나왔다. 소녀가 말한 것이 맞았기 때문이 아니다. 곧 전장에 충범하려는 듯한 일군의 위엄에 놀란 것이다. 게다가 군세 중에 세워져 있는 깃발들을 확인했을때 국왕이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뭔가 이건! 로아의 깃발이잖아. 게다가 라모나 기사단기旗까지!" 모두 설마 하고 생각했다. 로아의 영주는 코랄에 붙잡혀 있을 터였다. 가신들이 주인이 집을 비운 때에 함부로 주인의 깃발을 내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며 일단 방향부터가 반대였다. 이래서야 마치 로아에 돌아가는 듯이 보이고 있었다. "저거 아군이야?" 소녀가 물었다. "깃발이 맞다면." 남자가 대답했다. 상황을 살피는 태세였다. 이 국왕은 아무 생각도 없는 듯 하면서도 의외로 사려가 깊다. 기쁨에 겨워 뛰어나가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깃발을 위조한다는 건.... 제대로 된 인간이 할 짓이 아니야." 이븐이 말했다. 전장에 있어서 깃발은 적아군을 식별하기 위해 가장 먼저 보는 소재이다. 이름과 무용의 모든 것이 신분을 증명하는 깃발에 담겨져 있다. 기사의 명예에 걸고 그 정체를 위조하는 짓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고말고. 사도邪道나 하는 짓이지. 하지만 페르젠이라면 할 수 있어. 악마처럼 나쁜 지혜엔 출충한데다 양심이라곤 한 조각도 없는 남자다. 나를 장사지내기 위해서라면 근위병단에게 로아의 깃발을 들리는 일 정도는 하고도 남을 거야." "하지만 정말로 로아 사람들이라면?" 소녀가 말했다. "게다가 라모나 기사단의 깃발도 있어. 확인하는 쪽이 나아." "음." 그들은 일단 군대의 눈에 띄지 않는 곳까지 후퇴하여 나무그늘에 숨어 다가오고 있는 군세를 바라보았다. 이쪽은 열명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확인한다고 해도 섯불리 말을 건다거나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백주 대낮의 일이다. 군세가 가까이 오면 싫어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게된다. 하물며 남자의 눈은 오랜 세월 친하게 지낸 그리운 인물을 잘못 볼만한 불량품은 아니었다. "대낮에 꿈꾸고 있는 게 아니라면 로아기旗의 중심에 있는 건 틀림없이 도라 장군이군." 단언했다. 한편 도라 장군은 이 반년 동안 계속해서 안타깝게 생각만 하던 사람이 말없이 진군하던 길 앞에 서서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것을 봤을 때 로아의 남자로서 절대 있을 리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안장에서 굴러 떨어질 뻔 했다고 나중에 이야기했다. 진군 정지의 뿔나팔이 울려퍼졌다. 도라 장군은 굴러 떨어지듯 말에서 뛰어 내려 끌어안듯이 국왕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어 어찌 무사히. 어찌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그 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국왕 쪽도 이 충실한 신하의 손을 잡고 일으키면서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아니고 여러번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람이엇다. "건강한 것 같아 무엇보다 다행이네." 겨우 그 한마디만을 했다. 양쪽 모두 눈이 뜨거운 것으로 젖어 있었다. 국왕의 건재 소식을 들은 로아의 용사들이 차례대로 말을 돌리고 어떤 자들은 한 마디 인사라도 여쭙겠다며 달려나왔다. 하마터면 혼란에 빠질뻔하는 것을 도라 장군이 진정시켰다. "여기에서 군세를 멈춰서는 안 된다. 폐하 어쨌든 로아에 들려서 가고 싶습니다만 이론異論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있을 리가 없네.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국왕귀환을 전군에게 알리는 뿔나팔이 높게 울려 퍼졌다. 그에 응해 선두에서도 후미에서도 차례대로 음색이 다른 뿔나팔이 울렸다. "폐하 이쪽으로...." 로아의 남자들이 말을 끌고 왔다. 아마도 자신들이 갈아 탈 말이겠지만 국왕은 고맙게 받아들여 자신의 일행에게도 말을 주도록 부탁했다. 방금 전까지 단 아홉 명의 동료밖에 없었던 국왕이 지금은 이천오백의 군세를 이끌고 있는 총대장이었다. 그것도 도라 장군이 짧게 보고한 바에 의하면 뒤를 이어 포트남 영주군, 로쉐 가도를 돌아가는 부분에서는 민스 영주군, 합쳐서 천 명의 군대가 참전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보다도 아군을 만드는데 능숙하군 그래." 남자가 말하자 "농담하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로아에 도착하는 즉시 폐하께서 돌아오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근처의 영주들에게 파발을 보내겠습니다. 그래도 나서지 않는다면 큰 목소리로 불충한 놈들이라고 떠들고 다녀 주지요." 남자는 낮게 웃음소리를 냈다. 도라 장군의 성격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그것이 기뻤다. 말을 탄 나시아스와 가렌스가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지 않은 채 그저 목례를 했다. 전군이 하나가 되어 나아가는 행진이었다. 보명의 걸음도 말발굽 소리도 깨끗하게 일치하여 그 용맹스러움에 가슴이 뛰는 듯했다. 그런 가운데 타우의 사내들만은 조금쯤 껄끄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자기들은 죄인들이며 이 군세는 말하자면 관리들의 집합체였다. 말이 주어지고 국왕이 바로옆이 비어있기는 하지만 또한 자신들이 여기에 있어도 괜찮은 것인가 하고 누구나 일순 생각했지만 이븐이 아무말 없이 그 동요를 진정시켰다. 그는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인 양 남자의 오른쪽에 바싹 붙어서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행군하고 있었다. 왼쪽에는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당연하다는 듯이 소녀가 있었다. 타우의 남자들은 질 수 없다며 어떤 자는 남자의 뒤에 어떤 자는 이븐의 옆에 나란히 서서 주변을 빙 둘러 감쌌다. 로아의 남자들은 타고난 기수라고 하지만 그것은 타우의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능숙하게 말을 몰며 한 기 또 한 기가 국왕의 주변을 강고히 둘러싸고 있었다. 자신들은 국왕과 좀 더 친밀한 병사라고 암암리에 주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라 장군이 그런 그들에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주었지만 국왕이 살짝 고갤르 흔드는 것을 보고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국왕의 눈빛을 본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납득한다는 것은 역시라고나 할까. 혹은 로아에 도착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인지도 몰랐다. 말을 약간 앞ㅇ로 나서게 한 것은 이 남자들이 양날개를 맡아준다면 자신은 전위를 맡겠다는 그런 뜻과 같았다. 천천히 말을 달리고 있는 남자와 소녀의 옆에 한 필의 말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타우의 남자들은 자신들에게 신경쓰지 않고 국왕에 접근하려고 하는 자를 노려보려 했지만 기수가 젊은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샤미안이었다. 로아를 대표하는 여기사는 국왕에게 예의바르게 목례하고 곁에서 나아가고 있는 소녀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안녕. 처음 만나네. 나는 샤미안. 당신이 그린다?" "리라고 불러도 돼." 그것만 말하고는 소녀는 약간 눈을 크게 뜨며 샤미안을 보았다. "남자 형제는 없어?" "응? 그래." "아버지는 그러니까 여자애인데도 너를 전장에 데리고 가는 거야?" "어머 아버지를 알고 있어?" "도라 장군이지?" "응 그래. 폐하께 들었니?" 샤미안이 그렇게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엇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름을 대지 않고 자신과 아버지를 부녀라고 보는 사람은 극히라기보다 아예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런데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 들어도 알아. 많이 닮았는 걸." "어머." 미소를 띄운 샤미안이었다. 재미있는 말을 하는 소녀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이 소녀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라모나 기사단장과 부단장의 모습을 떠올리고 우스워져 버렸다. 아무래도 자신과 아버지는 두 사람에게 놀림을 당했던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상당한 열연熱演이었지만 이 소녀가 가렌스를 때려눕히고 나시아스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상상하는 것도 힘들었다. 2천 5백의 군대는 당당하게 행진을 계속했다. 웅장하게 가도를 나아가는 군세에 길 가던 행인들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놀라는 자가 있는가 하면 대체 어디의 군대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도라 장군 휘하의 사람들은 말 위에서 모반자들을 추방하기 위해 결성된 국왕군이라고 큰 소리로 설명을 했다. 그 정보는 군세와 같은 정도의 속도로 퍼져나가 로아에 도착할 즈음에는 국왕군의 존재가 근처 일대에 남김없이 퍼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도라 장군의 저택에 도착한 국왕 일행은 가신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곳에서 스샤까지는 사흘 거리였다. 가깝다고 말하면 가깝기도 하고 도라 장군과 페르난 백작은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 사이라서 매년 한 번은 반드시 서로의 저택을 방문하는 관계였다. 남자도 아버지와 함께 이 로아까지 몇 번이나 발을 옮긴 적이 있었다. 그러니만큼 당연히 딸인 샤미안이나 신하들의 얼굴도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었다. 장군가의 사람들은 주인으로부터 말단 하인까지 페르난 백작가의 아드님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다. 전 국왕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그들이 남자에게 보내는 호감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국왕폐하! 국왕폐하! 다행히도 무사하셨군요!" 문지기가 환희의 목소리를 높이자 시녀들이 안도와 희색을 만면에 띄운 채 그들을 맞이했다. 장군가에 오랜 세월 일해온 집사가 즉시 국왕을 대접하기 위한 만찬과 손님용 객실을 준비시켰다. 그러나 곤란해진 것이 의복이었다. 현재 이 저택에는 국왕이 입도록 진상할만한 옷이 없었다. 만약 있다면 주인인 도라 장군의 것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치수가 너무 틀렸다. 국왕은 대부분이 남자들과 나란히 서도 월등한 신장이고 중간키에 중간 몸집인 도라 장군과는 신장의 차가 너무 나는 것이다. 집사는 들리 말씀이 없다는 표정으로 그 일에 대해 보고하고는 즉시 여자들에게 만들게 하겠다고 변명했다.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일 정도로 부인들의 손을 번거롭게 해서야 미안하지. 나는 이대로도 충분하네." "아니 충분치 않습니다 폐하." 갑옷을 벗고 편한 모습이 된 도라 장군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 폐하께서는 국왕군의 선두에 서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폐하야말로 우리들의 깃발이십니다. 그렇다면 그 깃발에게 지저분하고 더러운 복장을 입혀드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전투는 옷차림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만 누구의 눈에도 저분이 국왕이다 하고 분명해질 수 있을 정도의 모습이 아니면 안됩니다." 장군이 말하는 바는 옳았다. 전쟁이라는 것은 맨몸의 사람과 사람이 맞부딪히는 것이다. 우선 외견으로 다른 자를 압도하는 것이 전투의 첫걸음이었다. 병사의 지휘를 맡은 무자, 대장, 하물며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국왕 정도 되면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취향이 의심스럽지 않을 정도의 차림은 하는 것이 상식이며 교양이기도 했다. "즉시 최상품의 천을 공급하는 상인을 불러들이지요. 공교롭게 저희 집은 여자들은 왕가의 문장을 본 일이 없는 자들 뿐이지만 샤미안이라면 수를 놓을 수 있을 겁니다." 남자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샤미안을 보았다. "호오? 샤미안 양이 범상치 않게 검을 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바늘도 쓰시는 건가?" "어머 폐하. 그건 실례의 말씀이세요." 젊고 앳띤 백작 영애는 약간 뺨을 홍조시키며 말했다. "저 역시 이래 뵈도 여자는 여자인 걸요." "이거 실례했군." 남자도 얼굴을 붉히고는 커다란 몸을 둥글게 하듯이 고개를 숙였다. 석양이 다가오자 밖에서는 이천오백의 군대가 일제히 야영을 시작한 듯 했다. 광대한 로아의 영지에 하얀 연기가 몇 줄기고 솟아오르는 것이 저택의 이층 창에서부터 아주 잘 보였다. 그리고 도라 장군 이하의 부하들은 식사를 적당히 끝낸 뒤에 왕을 둘러싼 채 작전회의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그 회의의 참가들의 진용은 약간 별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도라 장군과 부관인 타르보는 당연하고 샤미안도 로아에서는 유명한 여기사이므로 그렇다 치자. 라모나 기사단장 나시아스와 부단장 가렌스, 이것도 당연한 진용이었다. 하지만 다른 두명, 이븐과 리는 어떻게 봐도 이 장소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이 두 사람은 처음 도라 장군과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장군은 빤히 소녀를 바라보며 나시아스와 가렌스의 두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한 눈초리를 향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이곳에서 쓸데없는 논의를 벌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기 때문에 정색한 얼굴로 잠자코 있었다. 어떻게 보더라도 걸리적거리기만 할 듯한 소녀에 검은 옷의 남자가 타우의 산적이라는 소리까지 듣자 장군은 기가 막힌다거나 화를 내기보다는 한꺼번에 힘이 빠져버린 듯했다. "폐하 정신은 멀쩡하신 것이겠지요." "이 이상 멀쩡할 수 없을 정도로." 맑은 흑색의 눈동자가 바라보자 장군은 홀쭉하니 어깨를 늘어뜨렸다. 장군이 젊은 국왕의 감시역으로서의 책무를 사무치게 느낄 때가 바로 이런 때였다. 그렇다기보다 자신이 붙어있지 않으면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일종의 부성애와도 비슷한 감정이었다. "말대답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또한 분명히 지금 현재 이쪽의 상황을 반성해보면 아군은 한 사람이라도 많은 쪽이 좋을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산적들의 힘을 빌려서까지 왕위를 되찾는다면 장래 세상사람들에게 어떤 소리를 듣게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맞는 말이었지만 남자는 시원스럽게 "말하라고 해." 라며 넘어가 버렸다. "게다가 이븐을 비롯한 여덟 명은 이미 산적이 아닐세. 내 신변을 지켜주는 친위대지. 그런 건 없다는 소리를 하지말게. 지금 방금 만들었으니까." 철썩하고 자신의 얼굴을 때린 도라 장군이었다. "폐하 부디 참아주십시오. 저희들이나 라모나 기사단을 놔둔채 하필이면 산적에게 신변의 경호를 맡긴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안되는 건가?" 진지한 얼굴로 대꾸하는 걸 보면 어디까지 시치미를 떼는 건지 알수 없는 남자였다. "나는 딱딱한 건 질색이야. 무엇보다 그들은 고립무원인 내 편에 붙겠다고 단언해주었다. 그런 의기를 가볍게 여겨보게. 코랄 탈환 같은 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일이 될 거야. 그런 무례한 놈에게 발도우가 가호를 내려줄 리가 없으니까 말일세." 이렇게 되면 이 인간은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장군도 상당히 고집 센 성격이었지만 포기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참.... 당신은 정말 페르난 백작을 꼭 닮았습니다." 남자의 얼굴에 미약한 고통의 색이 떠올랐다. 닮은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22년동안 자신의 아버지였다. 지금도 가능하다면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국왕으로서 그것은 피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었다. "문제는 가능한 한 적은 피해를 내며 코랄을 되찾는 일이지." 남자는 태연한 척 하며 원래의 의제로 돌아갔다. 놀랄만한 정신력이었다. "그걸 위해서는 아군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도라 장군은 아까 근처의 영주들에게 파발을 보냈다고 말했지만 나는 최소한 이 중북부 지방에서 이천의 병사를 모으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약간은 시간이 걸리겠군요. 지금부터 설득을 한다 해도 그들이 결심을 하기 위해서라면 하루 이틀 걸릴 일이 아닙니다.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더구나 남자에게 씌워진 누명은 아직 벗겨지지 않았다. 유력한 영주로서 본다면 어느 쪽에 붙을 것인지 망설여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만으로 먼저 출발해도 좋네." 남자가 말했다.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어. 섣부른 돌격은 피해야 하지만 이곳에서 코랄은 너무 멀다. 조금은 군대를 진군시켜 놔야겠지." 로아에서 코랄까지는 도보로 주파하면 3일이지만 군대를 이끌고 가기 위해선 7일이 걸린다. 싸우기 위한 여력을 남겨두면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가렌스가 망설이면서도 끼어 들었다. "그러나 폐하. 나중에 따라올 포트남, 민스 군을 합친다고 해도 우리 세력은 오천을 넘을까 말까 합니다. 근위병단의 겨우 반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거기까지 낙관은 할 수 없겠지." 도라 장군이 진중하게 말했다. "코랄 근교의 영주들은 페르젠의 위세를 두려워하고 있을 터. 압력을 받으면 코랄 쪽에 가담하겠지. 실제 우리들이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군세는 일만 오천에다 약 이만...." 무거운 분위기가 회의장 안을 떠돌았다. 거의 열 배에 가까운 군세를 상대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승산이 없었다. 나시아스가 삼가하는 폼새로 말을 꺼냈다. "하지만 오천의 병력이 있다면 코랄은 무리라도 마레바는 해방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나도 그 생각을 했네." 남자가 끄덕였다. "딜레든 기사단이 참가한다면 우리들의 세력은 7천을 넘는다. 그래도 상대방보다 열세라면 열세라고 하겠지만 전투의 우세는 단순히 병사의 숫자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야. 딜레든과 라모나 두 기사단, 추가로 로아의 민중을 상대로 하고 싶어하는 영주가 어느 정도 있을 것인지는 큰 의문이니까. 우리들에게 가담하지 않으려 한다 해도 맞서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해 방관하는 자세를 취한다면 이야기는 크게 틀려질 거야." 나시아스와 가렌스 그리고 도라 장군이 힘차게 끄덕였다. 자만도 무엇도 아니다. 선왕 시절보다 이전부터 굴지의 전투집단이라 불려왔던 자부심이었다. 게다가 딜레든 기사단을 해방시킬 수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대장인 발로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로 똘똘 뭉쳐 코랄에의 진군을 개시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국왕군에게 있어서 바라마지 않는 일이지만 타르보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발로님의 목숨이 위험해지지 않겠습니까." 국왕이 나직하게 웃었다. "코랄의 녀석들이 어떤 수단을 쓸지는 모르지만 발로에 관해서만은 무슨 소리를 해도 소용이 없을 거야." "예?" 나시아스가 그것 재미있다는 듯 뒤를 받았다. "이런 경우의 상식적 수단이라고 한다면 기사단원들에게 제군들의 단장은 이 폭권을 크게 한탄하며 즉시 다시 생각하기를 청하고 있다고 전해오는 것이겠지만 그들은 코웃음 쳐 넘겨버릴 겁니다. 기사 발로가 자기 목숨을 위해 더러운 목숨구걸을 할리가 없고 만약 정말로 목숨이 아까워 우리들에게 그만두라 청해온다면 그건 가짜가 틀림없다고 말입니다." 일동은 이때만큼은 왁자하게 웃었다. 목적의 첫 번째는 딜레든 기사단을 해방하여 전력에 추가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지만 본래의 목적인 코랄 탈환에 관해서는 모두 이렇다 할 묘안이 나오지 않았다. 그 정도로 어려운 문제였다. "근위병단을 어떻게 해서든 성벽에서 끌어낼 수만 있다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가렌스가 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이번 경우엔 성 밖에라도 안 돼. 마을이 직격으로 피해를 입어 버린다." "으음." 가렌스만이 아니었다. 도라 장군도 타르보도 나시아스도 골치 아픈 얼굴이 되어 있었다. 상대는 코랄이라고 하는 최고의 요새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부러 딱딱한 껍질 밖으로 나와 결전에 임할 필요는 없다. 이쪽이 손도 발도 못 내밀고 분해하고 있는 것을 엄중한 수성守成 태세 가운데 구경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코 옆을 긁으면서 이븐이 말했다. "미리미리 주민들을 피난시켜두고 그 뒤에 시가지를 결전장으로 한다는 건 어떨까요." "시민이 줄줄이 도망치는 것을 개혁파가 가만히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건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다소의 피해는 각오하지 않으면 안될 거 아닙니까." "맞는 말이다." 입술에 미묘한 미소를 띄워 올리며 국왕은 말했다. 이 소꿉친구가 그래도 일단 예의를 차려주려고 하고 잇는 것이 아무래도 간지러웠던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싶다. 시미의 피해가 최소한으로 끝날 수 있다면 건물 쪽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상이다. 실제로는 시미의 피해를 생각하고 있을 여유도없는 격전이 될 거다. 무엇보다 코랄에서의 결전이라는 형태가 된다면..." "십중팔구 이쪽의 패배야." 냉정하게 말한 목소리에 일동은 한꺼번에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냉랭한 얼굴이었다. "그것보다 그 근위병단을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걸 생각하는 게 어떨까." "이 녀석. 입을 조심하지 못할까." 꾸짖은 것은 타르보엿다. 그는 솔직히 어째 이런 소녀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인가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고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야단치는 어조가 된 것이다. "어린아이가 입을 놀릴 자리가 아니다. 잠자코 얌전히 있으면 되는 거다." 소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국왕은 찬성 의사를 표시하며 끄덕였다. "근위병단을 끌어들이는 것은 나쁜 생각이 아니야." "분명히." 도라 장군도 끄덕였다. "지금의 사령관인 상그는 인망이 거의 없습니다. 원래는 그저 대대장이었으니까요. 그것이 갑자기 자리를 뛰어넘었다고생각하면 당시의 연대장도 하물며 다섯 명의 군단장들도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근위병단의 구성은 어떻게 되어 있어?" 하고 소녀가 말했다. 타르보는 다시 야단치려 했으나 국왕이 그것을 막았다. "전군의 지휘권을 가지는 것은 글자 그대로 병단장이지만 일반적으로 사령관이라고 불리는 일이 많은 것 같다. 그 밑으로 다섯 명의 군단장이 있어. 한 사람의 군단장은 이천 명을 지휘하에 두고 여러 명의 연대장을 가진다. 한 사람의 연대장은 4, 5백명을 지휘하에 두는 거지만 역시 여러명의 대대장을 거느리지. 그 밑으로 중대 소대로 이어지는 거다." 다시 말해 근위병단이라는 것은 다섯 개의 군단으로 구성되며 다섯 명의 군단장을 지휘하는 것이 사령관이라는 것이 된다. 고개를 갸웃거린 소녀였다. "지금의 사령관은 대대장에서 올라간 거라고?" "바로 그렇다." "연대장도 군단장도 뛰어넘어서? 왜 그런 이상한 일이 생긴거야?" "평상시라면 이런 파격적이다 못해 염치없은 인사행정이 일어날것 같으냐." 도라 장군이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 녀석은 가장 먼저 페르젠에게 넘어간 거다. 그때까지도 모반을 하자는 꼬심을 여기 저기 뿌려대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아마도 가장 먼저 걸려든 것이 염치도 모르는 저 상그 놈일 게다. 반년 전 그녀석이 지휘하는 대대가 자진해서 왕궁의 겨이에 임한 뒤 성내의 모반자들과 호응해서 일제히 움직였다. 개국이래 야밤에는 상시 엄중히 닫혀있지 않으면 안되었던 세 개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페르젠과 그 외의 반란군들을 들어보내 왕궁을 제압했던 것이다." 이븐이 야유하듯 웃었다. "그 공적으로 사령관이라니. 잘도 다른 다섯 군단장이 납득해줬네 그래." "어쩔 수 없는 상황일 걸세. 싫다고 말한다면 자신들의 부하가 자기 대신이 될 뿐이니까." "하지만 그래서야 지금의 근위병단이 사령관의 지시대로 움직일깝쇼?" "최소한 지금 상황으로선 목숨이 아깝다면 움직일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내심은 끓고 있지 않을 수 없을 거야." 남자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이븐은 낮게 웃었다. "폐하. 나는 이 꼬마 아가씨의 의견에 찬성입니다만. 군단장 한명 정도 꼬셔서 그대로 2천명. 이쪽 편이 될 수 있다는 상정이니까." "조용히 해라 산적. 그렇게 간단하게 될 것 같으냐." 틈도 없이 타르보가 반론했다. "분명히 다섯 명의 군단장 중 두 사람은 이전부터 폐하께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상대도 알고 있을 터이다. 우리들에게 호의적인 인물을 선봉에 내보낼 리가 없다. 만약 내보낸다고 해도 군단장은 언제나 전군의 가장 뒤에서 지휘를 잡고 있다. 그리 간단히 접촉할 수 있을 리가 없느니." 그러나 소녀가 재빨리 말했다. "아니야. 뒤에 있는 군단장이나 연대장 같은 건 내버려둬도 돼. 선두에 나오는 대대장을 하나하나 꼬시는 거야. 열 사람 설득하면 그걸로 천 몇 백 명은 데려올 수 있을 걸." 국왕과 이븐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야 꼬마 아가씨 멋진 소리를 하는구만." "거 참 그 말 그대로구나." "폐하! 이건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돌머리 역할을 맡아버린 타르보가 다시금 목소리를 거칠게 했다. "아무도 농담 같은 건 안 하고 있다니까." 라고 역시 소녀가 아주 진지한 눈초리로 말했다. 타르보는 물론 도라 장군도 머리에서 김을 뿜어낼 것 같았다. 진심으로 말하는 것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나시아스와 가렌스는 불쌍하게도 웃음을 참는 것이 겨우인 상황이었다. "나시아스경 뭐가 우습나?" "아닙니다." 미검사 나시아스도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영웅이었던 수염 성성한 장군이 노려보자 얌전하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군. 전력 면에 있어 우리들은 압도적으로 불리합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방법을 강구한다 해도 자멸의 길을 걸을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 경우 다소 파격적이긴 합니다만 또한 전례가 없는 일이긴 합니다만 유효하다고 생각되는 수단은 전부 시험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장군도 잘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적이 강대하다 하며 아군이 빈약하다 해도 이것은 비기는 것만으로는 용서되지 않을 전쟁이었다. 물론 져서도 안된다. 이렇게까지 악조건이 겹쳐 있으면 좋든 싫든 상관없이 정공법만을 사용하고 있을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이 이런 소녀의 입에서 나온다면 아무래도 솔직하게 귀를 기울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도 당연했다. 국왕은 재빨리 마레바를 향해 병사를 일으킬 것을 결정하고는 일단 회의를 종료시켰다. 7장 보통은 한산한 목초지인 로아는 갑작스러운 열기에 뒤덮인 토지가 되어 있었다. 장군은 말한 대로 근처의 영주들에게 차례차례 사자를 보냈고 자신들의 영지에서도 추가로 오백의 병사를 모집했다. 라모나 기사단도 로아의 남자들도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타우의 사내들은 로아 남자들이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맞아준듯 했다. 그들은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강건한 남자들인데다 말도 능숙하게 다룬다. 왕의 경호를 정식으로 명령받았어도 교만떠는 일 없이 충실히 근무한다는 것도 좋게 비친 듯 했다. 도라 장군은 국왕의 전투용 갑옷을 준비시켰다. 분홍색 끈으로 장식한 칠흑의 외투, 금으로 상감한 투구와 검띠에 박차 등, 눈부신 물건들이 차례차례 저택에서 날라져 왔다. 소매가 긴 윗옷의 가슴에는 사자의 옆얼굴과 교차하는 두 자루의 검이 늠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샤미안이 본을 뜨고 여자들이 한 땀 한 땀 정중하게 수놓은 것이었다. 도안이 복잡한데다가 금사은사를 잔뜩 사용하여 자수로서는 상당히 거창한 품목이기 때문에 샤미안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험삼아 입어본 국왕은 누가 봐도 한숨을 내쉴 정도로 멋진 대장의 모습이었다. 그 다음은 말이었다. 도라 장군은 로아제일의 명마를 국왕의 애마로서 진상하기로 약속했다. 덤으로 타우의 사내들과 소녀도 말을 고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군마로 유명한 로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대범한 씀씀이었다. 잘 조련된 군마라는 것은 그 정도로 비싼 것이다. 로아의사람들의 말에 대한 접근 방식은 독특했다. 명산지로 일컬어질 정도이므로 어느 정도 되는 집에서는 누구나 반드시 말을키우고 있었지만 마구간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다. 방목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말도둑은 경계했는지 말을 탄 감시역이몇 명인가 함께 나가 있긴 하지만 방목지로 울타리라는 것도 없었다. 그저 넓게 펼쳐져 있는 초원을 말은 마음껏 걷고 달릴 수 있듯이 보였다. "그런 짓을 했다가 자기 말하고 다른 사람 말이 섞여 버리지 않는 겁니까?" 이븐이 묻자 장군은 큰 소리로 웃었다. "이 로아에서는 말이야. 자기 말과 다른 사람의 말을 구분하지 못할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네. 설사 가진 말이 몇 백 필이 된다해도 말이지. 모르는 말이 섞여 들어온다면 한 눈에 알 수 있고 근처 말들도 기억해두니까 말이야. 누구네 말인지는 대강 알 수 있지." "하아. 굉장하구만요." 솔직하게 감탄하는 이븐이었다. 영주인 도라 장군은 물론 로아에서도 제일 가는 말주인이었다. 남자들은 어쨌거나 지금까지의 말에 올라타고 장군의 목초지로 나가보았지만 거기에 있는 말들은 전부 훌륭한 것들뿐이었다. 계절은 봄이 한창인 때였다. 나무들도 지면도 온통 녹색이었다. 그 가운데 이런저런 색의 말들이 천천히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는 망아지들도 많이 있었다. 어미말의 젖을 빨고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많은 수의 인간들을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예쁘네." 바라보고 있던 소녀가 감탄한 듯이 말했다. "말이, 아니면 경치가?" "둘 다." "이봐 꼬마 아가씨는 어떤 말로 할거야?" "이븐은?" "나는 저게 좋겠는데." 이븐이 가리킨 것은 그곳에 있는 말들 중에서도 특히 멋들어진 흑마였다. 양 앞발 끝 쪽이 희고 이마에도 하얀 별이 박혀 있었다. "아니 저건 안돼." 하고 장군이 말했다. "저건 폐하께 드리려고 생각한 말이거든. 미안하지만 다른 걸 고르게." "하아 아쉽군요." 아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은 이븐이었지만 상대가 국왕이어서야 어쩔 도리가 없다. 포기하고 다른 말을 고르기로 했다. 남자들도 각자 말을 고르고 있었다. 이곳에서 활약한 것이 장군의 시종들이었다. 이쪽도 물론 말을 탄 채였다. 다만 그들은 모두 손에 손에 기묘한 낚시대를 들고 있었다. 가느다란 낚시대 끝에는 역시나 가느다란 가죽끈이 묶여져 조금 둥글게 휜 다음 낚시대의 중간 정도에 묶여져 있었다. 저 말이 좋다고 말을 하면 그들은 한 손으로 그 대를 들고 가볍게 접근하여 도망가는 말을 쫓아간다. 곧바로 따라 잡고는 대를 한번 휘둘러 목적한 말의 목을 붙잡는다. 그리고 갑자기 정지한다. 말은 상당히 날뛰지만 목을 붙잡힌 상태론 어쩔 도리가 없다. 조금 지나면 곧 지쳐서 발을 멈추고 만다. 역시 군마의 명산지라고 자부할 자격이 있는 멋들어진 솜씨였다. 보고 있던 소녀가 들떠서 손뼉을 쳤다. "재미있어. 말을 잡는 낚시네." 타우의 남자들도 감탄한 듯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알만하군. 로아의 사람들이라는 건 대단하구만." 브란이 말하자 이븐도 끄덕이며 말했다. "완전히 붙잡은 것 같지만 저거 꽤나 힘이 없으면 대를 빼앗겨버릴 걸." 장군이 국왕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던 흑마도 잡혔고 그들은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했지만 그때에 타르보가 날카롭게 주인의 주의를 끌었다. "장군님! 흑왕입니다." "오오." 장군이 저도 모르게 고삐를 당겨 말을 멈췄다. 흑왕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이븐 일행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로아의 남자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확 퍼진 듯 했다. "어디 어딥니까 타르보님." "저쪽이다. 나무 사이에 살짝 보였다." 남자들은 이상한 열의로 그 무언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타우의 남자들도 소녀도 타르보가 가리킨 쪽을 보고 있었다. 드디어 나무 그늘 사이로부터 여유롭게 나타난 것은 한 필의 말이었다. 그러나 보통 말이 아니었다. 로아의 남자들만이 아니라 타우의 남자들도 일제히 감탄사를 내뱉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말이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전투에 있어서 중요한 기동력이 되는 존재다. 당연히 그 성능을 구분하기 위한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나타난 말은 그런 그들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몸의 윤기도 그렇고 근육의 뻗은 모습도 그렇고 보는 순간 반해버릴 정도로 훌륭한 모습이었다. 전신은 완저한 검은 색, 칠흑 일색에 약간 자색빛이 도는 듯한 멋들어진 몸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크다. 장군이 왕을 위해 골라두었던 말보다 확실히 한 급수는 더 커다란 것이 틀림 없었다. 갈기를 휘두르는 모습도 용맹스럽고 한 무리의 인간들을 보고도 태도에 한 점 변화가 없었다. 그것도 사람에게 익숙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경계할 가치도 없는 것들을 보는 눈이었다. 이쪽을 흘끗 본 눈이 빛나는가하는 순간 인간 쪽이 주눅이 들 정도의 날카로움이 거기 있었다. 위풍당당이라는 단어를 말에게 사용하는 것이 옳다면 이 흑마가 그야말로 그 말에 어울렸다. 이븐은 작게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장군 어째서 저 말을 폐하한테 갖다 주지 않는 겁니까?" "그럴 수 있다면 고민 안 하지." 장군이 말했다. 그러나 고민스러운 말투는 아니다. 오히려 감탄하고 있는듯한 분위기가 풍겼다. "저건 말일세. 로아의 흑왕이라는 놈이네. 이름 그대로 로아의 왕이자 누구의 것으로도 할 수 없는 말이지."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렇지. 벌써 백년 이상 이전부터 말이야." 이븐이 푸른 눈을 크게 뜬 것도 당연했다. "저 말은 백년 이상 살아있다는 겁니까?" "바보 같은 소릴. 물론 대는 바뀌었지. 지금의 흑왕은 5대째인가 6대째지 아마." 말의 대물림이라니 기묘하기 그지없는 소리였다. 타우의 남자들은 귀를 기울이며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달라 했다. "초대 흑왕이 언제 어느 집에서 나타난 것인지는 확실치 않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지. 그 당시부터 저 모습대로 살 떨릴 정도의 명마였던 건 확실하지. 말주인들이 몇명이나 눈을 뒤집고 이걸 붙잡으려고 했었는지...." "못했던 겁니까?" "그래. 당시의 일은 잘 모르지만 말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현명하고 얼마나 힘이 센지 몇 명이 한꺼번에 달라붙어도 못잡았다더군. 그 이래로 흑왕은 언제나 흑왕이었던 걸세. 언제나 온 몸이 칠흑인 모습으로 나타나 결코 사람과 친해지지 않는 거야. 잡히지도 않고." 타우의 남자들은 커다란 놀라움에 휩싸여 고고하게 풀을 뜯고 있는 흑왕을 바라보았다. 그런일도 다 있는가 하고 생각했다. "장군 저는 당신한테 비교하면 그 정도로 말을 잘 아는 건 아닙니다만 사람 손을 거치지도 않았는데 백년 넘는 동안 같은 털색에 같은 성질을 가진 말이 계속 태어난다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겁니까?" "있지. 아니 그렇다기보다 없어야 옳겠지. 나는 선대의 흑왕도 그 전대의 흑왕도 잘 알고 있네. 지금의 흑왕처럼 감탄을 금치못할 정도의 모습이었다네. 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서든 길들여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장군의 말투에는 쓴웃음과 그리움이 섞인 울림이 들어 있었다. 그 옆에서 타르보가 비슷한 어조로 말했다. "로아에서 태어난 젊은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은 꿈꾸는 일이니까요." "틀림없지. 하지만 누구나 결국엔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알게되지. 저건 사람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야." 시종들이 말없이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그곳에 있던 말들도 검은 말이 다가오면 자연스레 진로를 양보했다. 암컷을 모아둔 무리의 말에는 당연히 경계하는 의식이 있을 터였는데로 무리의 리더는 끼어 들어오는 흑마를 쫓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말들에게 있어서도 로아의 흑왕은 특별한 존재인듯 했다. "선선대로부터 선대로 대가 바뀌었을 때 나는 아직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눈이 이상해졌나하고 생각했었네. 완전히 똑같은 모습, 똑같은 털색, 멋지게 쭉 빠진 다리에 목을 흔드는 모습에 표정까지 완전히 똑같았지. 모르는 자가 봤다면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나이가 달랐어. 어느 사이엔가 어려져 있더군. 싫어도 믿게 될 수밖에 없던 게야." 로아의 남자들은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거대하다고 말해도 좋을 흑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대로부터 지금의 흑왕으로 바뀐 것은 바로 얼마 전의 일이지. 그때까지의 흑왕이 어찌 되었는지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모르네. 알고 있는 건 저것이야말로 로아의 왕이라는 거지." 이븐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장군을 보았다. "영주인 당신이 그런 소리를 합니까?" 장군은 호걸의 미소를 띄워 올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말을 키우고 그것을 길들이며 전장에서의 다리로써 사용하지. 사람이 주인이고 말이 가축처럼 보이지. 실제 그렇게 말하는 자들도 있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라네. 우리들 쪽이 말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 거야. 말은 사람이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우리들은 말이 없이는 어쩔 도리가 없지. 그것을 잊어버리고서는 이 로아에서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어." 순수한 신조와 절도에 이븐은 일종의 기분 좋은 느낌을 받으면서도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깝군요. 저것이야말로 델피니아 국왕의 애마로 어울릴만한 말인데." "나도 동감이지만 아무래도 사람이 죽기까지 해가면서 저 말을 진상코자 내키지는 않아서 말이야." 남자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말 위의 장군은 아주 진지한 얼굴이었다. 대신해서 타르보가 설명을 했다. "아까 귀공은 말을 붙잡을 때 힘이 없담변 대를 빼앗길 거라 말했지만 바로 그대로다. 다만 저 흑왕은 머리를 한번 휘둘러서 갈고리대는 커녕 앉아 있는 인간까지 그대로 끌어가 버리는 거지. 결국 목숨을 잃은 자가 지금까지 몇 명이나 되는지 셀 수도 없다." 나오는 거라곤 탄식밖에 없는 남자들이었다. 누이 출신의 프렉카가 기가 막힌다는 듯 모두의 심경을 변호했다. "그렇게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저 말을 냅둔다는 겁니까?" 수염 성성한 장군은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죽여야 한다고 말하려는 겐가? 공교롭게도 우리들에게 있어 말은 무엇보다 친숙한 생물이야. 게다가 붙잡지 못한 건 이쪽이 미숙해서니까." "하지만 그래도 말이죠." 타우의 사내들은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위험한 거 아닙니까.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잖습니까?" "이쪽이 아무 짓 안 하면 흑왕만큼 안전한 말은 없다네." 결정타를 날린 장군이었다. "애초에 붙잡으려 할 때 저항하는 건 어떤 말이나 다 똑같은 거지. 그것을 제압하는 게 사람의 기량이고. 자기 기량도 모르고 혈기에 넘쳐 뛰어든 어리석은 자들에게 우연히 흑왕이 반격했다 해서 나는 저 말을 원망할 생각은 없어." 무모하게 발을 내딛은 미숙한 자가 상응의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원한을 가지기보다는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장군은 생각하는 듯 했다. 엄격하지만 올바른 의견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이 의견에 찬성한 자가 있었다. "그렇다면 탈 수만 있다면 누가 타도 상관없다는 거네." 소녀였다. 도라 장군은 약간 눈을 크게 떴다. "물론 그렇지. 그렇지만 백년 동안 누구도 타지 못했다. 그것도 말에 있어서는 중앙 제일을 자랑하는 로아의 남자들이 말이다." "길들여주마 하고 생각하니까 그래." 시원하게 말한 소녀는 가까이 있던 남자에게서 '말낚시대'를 라고 불렀던 도구를 빌렸다. "잠깐 갔다 올께." "어 어이 꼬마 아가씨." 이븐이 황급히 말리려 했지만 소녀는 잽싸게 말을 달려 풀을 뜯고 있는 흑왕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가씨 위험해! 몇 사람이 밟혀 죽었는지 모르는 말이라고!" "뭘 내버려 둬." 타르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흑왕은 머리가 좋다. 저런 아이는 상대도 하지 않아. 자기가 알아서 피하겠지." 장군도 웃고 있었다. "더구나 한번 본 것만 가지고 갑자기 갈고리대를 쓴다 해도 근처에 걸지도 못할 거네. 저건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니까 말이야." "거참 당돌합니다. 운이 좋게 걸린다고 해도 대를 빼앗기는 게 고작이겠죠." 낚시대 채로 몸까지 끌려가기 위해서는 그 정도 되는 악력握力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저런 작은 손으로는 약간 끌어 당기는 것만으로도 대를 놔버릴 거라고 타르보가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문제의 흑마는 소녀가 가까이 다가가자식사를 그만두고 머리를 들었다. 묘한 게 다가오고 있구나 그렇게 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디까지나 초연하게 꼬리를흔들며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하려고 걸음을 옮겼지만 숫말에 탔던 소녀가 나란히 그것을 쫓았다. 흑마는 한번 귀찮다는 듯이 돌아보더니 걸음을 빨리 했다. 소녀도 말을 가속시켰다. 보통의 말이라면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을 텐데 놀랍게도 흑마는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마주했다. 결코 굽히는 태도는 아니면서 무슨 짓인가 해올 생각이라면 어디 봐주마 하는 그런 자세였다. 그러자 소녀도 말을 멈추었다. 마치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양 타고 있는 말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호오 저 소녀. 제법 하는군." 도라 장군이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남자들은 이제 어찌될 것인가 흥미진진한 모습으로 보기 드문 구경에 몰입해 있었다. "하지만 달리기 시작할 때까지로구먼. 저 말로는 도저히 흑왕을 따라갈 수 없지." "당연하지요. 상대는 로아 제일의 명마입니다. 저 거대한 몸집으로 달릴 때의 속도만큼은 이미 유명하니까요." "그렇게 빠릅니까?" 다시 프렉카가 묻자 장군도 타르보도 무겁게 끄덕였다. "선대 때의 이야기이지만 어떻게 해서든 붙잡아보자고 다섯명이 한꺼번에 달라붙어 시험해 본 자들이 있었는데 완전히포위망을 뚫고 달아나 버렸다더군." 타우의 남자들은 일제히 눈을 둥글게 떴다. "그것도 그 다리가 얼마나 잘 버티는 지 달아난다면 어디 지쳤을 때 붙잡아 보자며 밤낮으로 쫓아다녔던 자도 있는데 갈아타는 말 다섯 마리가 모조리 나가떨어진 뒤에 도망쳐버렸다는 소리도 있지." 즉 저 말은 보통 군마 다섯 마리 분의 내구력을 가진다는 뜻이된다. 이번에는 츠이르의 브란이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로 거, 말 맞습니까?" "우리들도 언제나 같은 생각을 하지. 결국은 강제적인 수단으로 저것에 손을 대는 건 안 된다는 사실만 알게 되는 거야. 저 소녀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 그러나 장군은 알지 못했다. 로아의 흑왕이 평범한 말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린디에타 라덴도 보통 소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흑마가 다시금 천천히 걸어나가는 것을 계산하여 소녀는 바로 그 한순간 전에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을 단숨에 달리게 했다. 절묘한 호흡이었다. 흑왕이 이변을 느끼고 달려나간 그 순간 소녀는 바로 옆에 다가와 있었다. 그러고는 간발의 차이도 주지 않고 갈고리대를 휘두러 멋지게 흑마의 목에 줄을 걸었던 것이다. "오오!" 남자들은 환성을 질렀지만 이것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문제는 이제부터인 것이다. 흑마는 확하고 눈을 떴다. 그 전신에서 불을 내뿜듯이 두 발로 뛰어 올랐다. 몸의 빛깔은 화락하고 선명하게 윤기가 더해진 듯 보였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이런 무례한 짓을 한 자에겐 심한 댓가를 치르게 했던 말이었다. 뒷발만으로 서서는 목덜미에 감겨든 이물질을 떨궈내려고 힘껏 몸을 흔들었다. 구경하던 누구라도 대를 빼앗겨서 끝나리라 생각했지만 그 움직임이야말로 소녀가 노리고 있던 것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발걸이에서 발을 떼고 말 등에 한 발을 걸더니 흑마가 고개를 흔드는 것에 맞춰 오히려 자기 쪽에서 안장을 뛰어올라 다음 순간에는 흑마의 등 위에 멋지게 착지했던 것이다. "뭐야!" 로아의 남자들은 대부분 비명을 질렀다. "안돼! 굴러떨어진다!" 이븐도 창백해졌다. 흑마의 격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사람을 태운 일이 없는 말이다. 땅이 패일 정도로 뛰어 오르더니 맹렬하게 머리를 흔들어대며 갑자기 등에 올라탄 무례한을 흔들어 떨구기 위해 지진이라도 낼 기세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고삐도 안장도 없는 맨몸의 말이었다. 이 정도로 난폭하게 굴면 거친 사내라 해도 한숨도 버티지 못할 텐데 소녀는 뛰어 오르는 말의 갈기를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 양발은 어디를 누르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발광하는 말 등에 딱 붙어 아무리 떨어뜨리려 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말은 곧 전법을 바꾸었다. 난리를 치는 것으로도 떨어지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달리기로 한 것이다. 로아는 남쪽 절반이 초원이지만 북쪽 절반은 숲을 포함한 경사로 되어 있다. 강도 있고 절벽도 있었다. 쓰러져 있는 거대한 나무나 암석도 있다. 말은 그것들을 뛰어 넘으며 지쳐 떨어질 때까지 달리려고 생각한 듯 했다. 머리를 북쪽으로 향했다. "이런!" 이렇게 되자 장군이 말의 배를 차서 뛰어나갔다. "장군님!" 타르보도 그 뒤를 따랐다. 이어서 그 뒤를 이븐이 쫓았다. 다른 남자들은 남았다. 고삐를 묶었을 뿐인 말을 여덟 필이나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갈기에 딱 달라붙어 있는 성가신 짐을 태우고도 흑마는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장군도 로아의 남자다. 가까스로 뒤를 쫓아 큰 소리로 외쳤다. "말에서 뛰어 내려라!" 말도 안 되는 주문이었지만 지금까지의 행동을 보았을 때 이 소녀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내짚은 것이다. "숲에 들어가면 흑왕이 뛰어 넘을만한 곳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 곳에서 떨궈지면 단번에 끝장난다. 차라리 지금 뛰어 내리는거다!" "괜찮아!" 소녀는 갈기를 꼭 붙잡은 상태로 소리쳐 대답했다. "바보 같은 놈! 흑왕은 도약도 잘 한단 말이다! 너 같은 건 한줌거리도 안 돼!" 로아 제일의 명마라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어느 사이엔가 장군의 말과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열심히 채찍을 휘둘러 뒤쳐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장군이었지만 애초에 말의 속도가 너무 틀렸다. 아무래도 쫓아갈 수가 없었다. 점점 뒤쳐져서 곧 작아져 가는 말의 등 위에서 소녀가 이어서 무언가 소리를 쳤다. "저녁 때까지는....돌아갈 테니까...." 그 뒤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어 버렸다. 소녀를 태운 흑마는 로아의 북쪽에 울창하게 자라있는 숲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던 것이다. 장군은 어쩔 수 없이 말을 멈추고 크게 신음 소리를 냈다. "어쩌면 좋단 말이냐." 고통스러운 어조였다. "장군님." 쫓아온 타르보도 불안한 얼굴이었다. 자신의 역량도 모른채 장난삼아 저 말에 도전했던 자라면 목숨을 잃어도 자업자득이라고 장군은 생각하고 있었지만 상대는 겨우 어린 소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국왕이 마음에 들어 하고 있는 상대라면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숲을 탐색해 볼까요?" 타르보가 물었지만 장군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풀어도 수가 모자란다. 우선은 폐하께 보고 드리지 않으면 안되겠다." 저택까지 급히 달려 돌아온 장군 일행은 즉각 국왕이 있는 거실로 달려갔다. 그러나 충실한 신하가 얼굴이 새파래져 보고하는 것을 듣고 국왕은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던 것이었다. "뭐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폐하께선 그 소녀가 시체로 발견되어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장군의 그 걱정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할만했다. 함께 있던 로아의 남자들은 모두 그 소녀가 흑왕에게 밟혀 죽던 가 낙마해서 목숨을 잃던가 둘 중 하나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입을 모아 국왕에게 진언했다. "어린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멋진 기술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결코 사람과 친해지지 않는 야생마입니다. 그래도 나이를 먹은 흑마는 나름대로 온화해지지만 지금의 흑왕은 아직 네살. 보통의 말이라도 가장 혈기왕성할 연령입니다." "지금 빨리 사람을 풀어 숲을 찾아봐야 합니다. 낙마했어도 경상으로 끝날 경우도 있고 혹시 중상을 입었다고 해도 처치에 따라 목숨을 건질 수도 있으니까요." 국왕은 쓴웃음 반 불쌍한 표정 반을 각각 떠올리며 부하들을 보았다. "아무래도 제군들은 저 소녀가 흑왕에게 밟혀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 "폐하, 폐하도 이전에 가끔 이 땅을 방문하셨던 분이십니다. 로아의 흑왕이 어떤 것인지는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내가 보았던 건 선대의 말이지만 정말 멋졌었지. 기사라면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명마였으니까. 모르는 사이에 대가 바뀌었다니 말이야. 나도 지금의 흑왕을 보고 싶군 그래." 하고 국왕은 어디까지나 태평한 모습이었다. "저녁때까지는 돌아온다고 그 소녀가 말했다면 그 말대로 돌아오겠지. 아무 걱정 할 필요 없네." "농담하시면 곤란합니다." 장군이 말하고 타르보와 다른 남자들도 저마다 동의를 표시했다. 장군은 덧붙여 말했다. "설사 죽지 않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 기세로는 어디까지 달려갈 지 알 수가 없습니다. 대저, 오늘 내로 돌아올 수 없을 만한곳까지 흑왕이라면 달려가고도 남습니다. 인기척 없는 숲 속에서 저런 어린아이 혼자 내버려둔다면 대체 어찌 될지. 하룻밤을 무사히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정당한 의견이었지만 국왕의 검은 눈동자는 변함없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럴까. 나는 의외로 흑왕에 탄 채로 이 저택에 돌아올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말일세." ".....!" 그 자리에서 노성을 지를 뻔 한 장군을 막으며 말했다. "그런 바보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고 싶은 것 같은 얼굴이군." "말씀하시는 대롭니다." "그렇다면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보지 않겠나. 그 아이라면 절대 걱정할 필요 없으니까." 해가 지던 숲 속에서 혼자가 되던 그 소녀가 겁을 먹거나 공포를 느끼는 일은 없다. 하물며 상처를 입거나 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그것은 국왕이 자기 스스로 체험하여 얻은 결론이엇다. 아무리 먼 거리에 놓고 간다 해도 자기 발로 달려서 돌아올 것이다. 거기에 문득 장난기가 돌아 국왕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장군, 혹시 그 소녀가 정말로 흑왕과 함께 돌아온다면 어쩌겠나?"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말씀드렸을 겁니다. 분명히 그 나이의 아이로서는 상당히 멋진 솜씨였습니다만 그런 마른 몸으로 계속해서 달릴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반드시 힘이 빠져 지게 됩니다." "글쎄 그건 어떨까?" 더욱 재미있어진 듯 국왕은 웃고 그 뒤로는 라모나 부기사단장이 또한 묘한 표정으로 끄덕이고 있었다. "그럼 어디 뭘 걸고 내기해 볼까." "폐하!" "됐으니까 들오보게. 그 소녀는 세번이나 내 목숨을 구해주었어. 매번 인간같지 않은 재주로 말이야. 나는 틀림없이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네. 게다가 로아의 흑왕이라면 발도우 딸의 애마로서 어울리지 않는가." 즐겁다는 듯 말하는 주군을 보며 장군은 피곤한 듯 했다. "또 그런 농담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장군. 만약 그 아이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혹은 흑왕을 데리고 돌아온다면 그 소녀를 국왕군의 참모로서 내옆에 두어도 아무 말 하지 않아 주겠나?"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장군은 아무래도 놀란 듯 했다.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그 아이와 약속했다. 아니 내가 일방적으로 제안한 것이지. 군대를 이끌고 코랄에 진군할 때가 온다면 그 아이를국왕의 친구로서 대우하며 조력을 구하겠다고. 장군 쪽이 여러가지 해준 덕분에 의외로 빨리 그 때가 찾아왔지. 그렇다면 왕을로서 자신이 맹세한 약속을 깰 수는 없지 않겠나." 도라 장군은 낮게 신음했다. "폐하 그런 꼴을.... 저런 소녀를 특별 취급을 하며 고마워하는 국왕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본다면 뭐라 말할지, 그걸 모르실 당신도 아니실 텐데." "그럴까? 저 정도의 미소녀가 로아의 흑왕에 타고 진군한다면 실로 멋진 그림이 될 텐데. 군대의 선두에 서게 한다면 멋진 선언도 되겠지." 듣고 있던 이븐이 맞장구를 쳤다. "그건 확실히 그림은 되겠구만." 즉각 도라 장군이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노려보아 목을 움츠리고 말았다.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 소녀에겐 그 정도의 능력이 있는 걸세.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이상한 힘이." 고집 그 자체인 주군의 태도에 장군은 결국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가 그 소녀의 안부를 걱정해 탐색에 나서자 했던 이야기가 어찌 잘못 나가면 군의 선두에 세우겠다느니 참모를 삼겠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되는 건가.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됐습니다. 그 소녀는 죽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그래도 만약 만약의 일입니다." 장군은 실로 괴롭다는 표정으로 단숨에 말했다. "폐하가 말씀하신 것이 현실로 나타난다면 저는 이 수염을 뿌리채 뽑아 먹어 보이겠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만 만약 그 소녀가 무사히 돌아오게 된다면 그 때엔 부디 바라시는 대로 하십시오." 말을 던지고는 재빨리 일어서 사라져 버렸다. 꽤나 화가 난 듯 했다. 국왕은 그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장소에서 시종 함께 듣고 있던 샤미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국왕에게 다가갔다. "폐하 저어 주제 넘는 말씀인 지도 모르지만...." "아니 말해주시오." "저도 아버지의 의견에 찬성입니다. 그 소녀를 내버려둬 죽게 하는 건 어떨지 도저히...." "이런 이런 나는 완전히 악인이군 그래." 국왕은 곤란하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괜찮다고 내가 아무리 말해도 믿어줄 수 없겠소?" 상냥한 질문을 듣자 샤미안은 어딘간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다른 지방에서 오신 분들은 모르실 지 모르나 로아의 흑왕은 말이면서도 말이 아닌 존재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어찌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만하군. 왕이라고까지 불리고 있는 말이다. 사람의 손으로는 어쩔 수 없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면? 국왕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밖에 내지 않고 오랜 친구를 바라보았다. "이븐 네 의견은?" 검은 옷의 산적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었다. "뭐어 그런 나이의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했던 건 사실이죠. 그것에는 나도 좀 놀랐습니다. 하지만말이죠. 그 꼬마 아가씨는 로아에 오는 게 처음인데다 그 말은 이 근처를 자기 앞마당으로 하고 있을 테고 또 그 말이 보통 말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좋다는 건 나도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 아가씨 쪽이 운이 나빴던 게 아닐까요." "그럼 내기가 안되잖아." 국왕은 중얼거렸다. "흑왕을 데리고 돌아올까 혼자서 돌아올까가 문제인 건데, 그 녀석의 생환을 믿고 있는 게 나혼자라서야 내기도 안되지." "폐하!" 샤미안이 비명 같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 소녀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건데 언제나 상냥했던 국왕이 어째서 저렇게까지 냉랭하게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샤미안은 이해할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 혼자라도 숲으로 찾으러 나가겠습니다." 샤미안은 그 소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그런 어린 몸이 말발굽에 짓밟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프게 죄여올 정도였다. "샤미안 양. 부탁이니 기다려주시오. 해가 질 때까지 그리 시간도 남지 않았으니."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면 너무 늦어버린다는 겁니다!" 아무래도 국왕에대한 압박은 꽤나 강력한 듯 했다. 가렌스가 곁에 있었지만 이런 때에 적절한 말을 할 줄 아는 남자도 아니었다. 상대가 젊은 여성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그곳에 바로 구세주가 빙글빙글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나시아스였다. "폐하, 방금 밖에서 들었습니다만 그 소녀가 로아의 흑왕과 대결에 나선 모양이더군요." "아아 바로 그거야. 서로 달라붙은 채 숲으로 사라진 것 같더군. 그래서 이 저택 사람들이 그 녀석을 꽤나 걱정해서 말이야. 숲에 탐색대를 내자고 하는 걸 겨우 말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거 수고스러우셨겠군요." 남자에게 있어서는 고난의 이야기였지만 나시아스에게 있어서는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까운 일입니다. 그 승부 꼭 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폐하께서는 어느 쪽이 이길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거야 물론 리쪽이 유리하지 않을까." "아니 그건 모릅니다. 상대가 네 발 달린 존재라면 그 소녀도 약간은 힘들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이 변방에서는 신이나마물과도 같다고 일컬어지는 명마이니까요. 저는 흑왕 쪽이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있군. 그럼 내기라도 할까." "좋고 말고요." 완전히 의기투합해서 들떠있는 차에 샤미안의 벼락이 떨어졌다. "나시아스님까지!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상당히 화가 나버린 듯 했다. 휘릭 하고 등을 돌리고 뛰쳐나가 버렸다. 국왕은 목을 움츠리면서도 놀란 듯이 말했다. "역시 부녀로군. 화내는 모습 같은 건 완전히 똑같으니 말이야." 나시아스도 곤란하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우리들의 확신은 이 지방 사람들에게는 이해받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실제로 입으로 아무리 설명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시아스도 가렌스도 직접 그 눈으로 볼 때까지 믿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 가렌스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을 꺼냈다. "하지만 폐하. 이건 좋은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로아의 흑왕과 대결하여 무사히 돌아온다면 커다란 훈장이나 마찬가집니다." 나시아스도 끄덕였다. "이 지방 사람들이 흑왕을 존경하는 것은 전사가 발도우를 존경하는 것과도 비슷한 데가 있으니까요." 그 소녀의 생환을 의심하지 않는 두 사람의 어조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게다가 하물며 흑왕에 타고 돌아온다고 한다면 그 녀석은 흑왕하고 같을 정도로 이 지방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겠지." 라모나 기사단장의 물빛 눈동자에 소년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글쎄요. 거기까지 잘 될지 어떨지." "내기하겠나?" 어디까지고 장난기가 넘치는 임금님이었다. 나시아스도 웃으면서 끄덕이고는 "받아들이죠" 하고 말했다. 태양이 크게 서쪽으로 기울고 녹색의 초원이 한쪽을 주홍으로 물들일 때 도라 장군의 저택 주변에 펼쳐져 있던 진영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이 저택 주변은 장군 수하의 세력들이 지키고 있었다. 라모나 기사단은 2천명이라는 대규모리기도 해서 저택 안에 나시아스와 가렌스를 남겨둔 채 약간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장군의 심복부하들이 저택 주변을 지키고 있다는 뜻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이름 있고 나이도 있어 다시말해 상당히 제대로 정신이 박혀있는 무장들이 거의 반광란상태가 되어 저택 안의 장군의 방으로 뛰어들어 온 것이다. "여 영주님! 장군님! 크 크 큰일입니다!" 그 뒤로 말이 이어지질 않는다. "무슨 일이냐 소란스럽게." 장군은 불만스럽게 말했지만 바깥에 뭔가 큰 소동이 난 것이 집안에까지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코랄에서 먼저 병사라도 나타난 거냐." 무장은 반쯤 미친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좌 좌 좌우지간 빨리 나와보십시오!" 거의 비명에 가까운 말을 남긴 채 도망가는 토끼처럼 달려서 돌아갔다. 보통 일이 아니다. 장군도 서둘러 애용의 창을 쥐고는 뒤를 쫓듯이 저택 밖으로 달려나갔지만 나와보고는 더욱 놀랐다. 병사들이 모조리 진영에서 뛰어 나와 서 있었고 모두 같은 방향을 잡아먹듯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대체...." 말을 하려다 장군도 말문이 막혔다. 하마터면 손에 든 창을 떨어뜨릴 뻔 했다. 그 바로 뒤에서 따라 나온 듯한 샤미안이작은 비명소리를 냈다. 마찬가지로 저택에서 뛰어나온 나시아스와 가렌스는 감탄의 소리를 흘렸고 이븐은 푸른 눈을 둥그렇게 떴으며 국왕은 빙그레 웃으며 나시아스에게 말했다. "내기는 내가 이긴 것 같군." 거의 수백 명 이상의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소녀는 경쾌하게 말을 달리고 있었다. 고삐대신 갈기를 휘어잡고 느리지 않은 빠른 걸음에 가까운 속도로 저택을 향하여 발걸이도 없는데 말의 움직임에 잘도 몸을 맞추고 있었다. 도라 장군의 입가에서 신음소리와도 같은 소리가 흘렀다. 기도문인 듯 했다. 급히 세워진 병참에 둥글게 둘러싸여 있는 장군가家도 현관으로 통하는 길만은 뚫려 그곳만은 정연한 통로가 되어 있었다. 소녀는 당연히 그 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양옆에 줄줄이 늘어선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말과 소녀를 위해서 길을 양보해주었다. 소녀는 말 위에서 아무런 조작도 하고 있지 않았다. 말이 알아서 걷도록 맡기고 있었다. 그리고 말은 마치 길을 알고 있는 듯이 경쾌하게 건물의 현관에 다가왔던 것이다. 병사들은 각각 마른침을 삼키며 요사스러운 것이라도 보는 듯한 눈초리로 바로 눈앞을 지나가는 흑마를 전송하였다. "이게 꿈인가?" 그런 말을 망연하게 중얼거린 병사가 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똑같은 말을 도라 장둔도 타르보도 샤미안도 생각했을 터였다. 그들에게 있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현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소녀 쪽은 그런 사람들의 긴장과 경악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장군이나 국왕이 서 있는 현관까지 오자 가볍게 뛰어 내려 "다녀왔어." 하고 말했다. 사람도 말도 땀투성이었다. 바로 지금까지 올라타 있던 것은 물론 로아의 흑왕이었다. 발을 멈춘 흑왕을 바로 앞에 두고장군 일행은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정도로 가까이에서 이 말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놀랍게도 아까 보았던 때와는 말의 상태가 전혀 틀렸다. 그 정도로 격노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기분이 좋은 것 같아 보였다. 맞이라허 나온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상처럼 되어버린 것을 곁눈질로 보며 소녀는 가볍게 말의 목을 두드리더니 "이리와 땀을 씻어 줄게." 하고 말했던 것이다. 말은 대량의 땀을 흘리고 있는데다가 그 땀을 내버려둔 채로 놔두면 몸 상태가 망가져서 못쓰게 되어버린다. 야생마는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흑왕은 상당한 장거리를 달렸으리라.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따라오라고 해서 그것에 따르는 야생마는 없다. 하물며 사람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데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의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마는 실로 간단하게 소녀의 말을 듣고 얌전히 그 뒤를 따라갔다. 도라 장군의 곁에서는 아까 뛰어들어왔던 시종이 창백해져 주인을 살폈지만 주인도 그 심복도 종잇장 같은 안색이 되어있었다. 장군가에는 비상용의 말을 모아두는 마구간이 있었다. 말의 손질을 하는 장소도 문 밖에 만들어져 있다. 소녀는적당히 말의 땀을 닦아주었지만 아무런 종류의 구속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말은 자유로이 걸어다니는 상태였다. 손질이끝나자 소녀는 말의 엉덩이를 가볍게 때렸고 말은 지금왔던 길을 유유히 돌아갔다. 병사들은 두 번째로 기절할 지경이 되어 로아의 흑왕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로아의 영주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흑마가 말하는 대로 소녀의뒤를 쫓아가는 것도 땀을 떨어내는 동안 얌전하게 있는 것도 게다가 손질한 뒤에 말이 혼자서 초원으로 가볍게 달려가는 것까지 바라보면서도 내내 경직한채로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다. 국왕을 보면 지금 해야 할 일은 웃음을 참는 일이라는 듯이 열심히 입 끝을 당기고 있었고 나시아스도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잠자코 장군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이븐은 완전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소녀와 사라져 가는 말을 번갈아 비교해보고 있었다. 흑마를 초원에 돌려보낸 뒤 소녀는 겨우 자신의 일에 신경이 미친 듯 했다. 심각한 얼굴로 국왕을 올려다보고 물었다. "무지막지하게 배가 고픈데 뭔가 먹을 거 없을까." "너를 위해서라면 로아 내의 산해진미를 전부 여기다가 늘어놓고말고." 국왕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하고는 흑왕이 사라져간 방향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하루 사이에 굉장히 친해졌군 그래." "덕분에. 안장이있으면 좋겠는데. 하나 준비할 수 있어?" 아직도 망연자실한 상태의 타르보가 똑같이 망연자실한 어조로 물었다. "안장이라고....?" "그래." 말하는 의미가 머리 속으로 이어지지 않는 듯 했다. 더더욱 방심 상태가 되어 기계적으로 물었다. "안장을 준비해서....어쩌겠다는 거냐." 녹색의 눈동자가 둥글게 되었다. "어떻게 하다니. 보통 안장이라는 건 말 등에 올려서 쓰는 거 아냐? 저대로 놔두면 타기 힘들다구." 충격에 충격을 거듭 받은 그들도 이것이 한계였다. 이 말을 들은 병사들, 타르보, 그리고 도라 장군마저도 눈을 뒤집으며 일제히 소리쳤다. "흑왕에 안장을 놓는다고!!" 그야말로 절규였다. 회침은 거대한 파도처럼 차레차례 전달되고 그런 중에 국왕은 드디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높은 웃음소리를 올리고 있었다. 굶어 죽기 직전의 부랑아와 같은 기세로 먹을 것을 쑤셔 넣고 있는 소녀를 도라 장군과 타르보가 말도 하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서는 샤미안이 급사 노릇을 했고 국왕은 소녀와 마주보는 위치에 앉아 팔꿈치를 짚은 채 쿡쿡대고 웃고 있었다. "나 참. 너라는 아이는... 덕분에 내기는 나 혼자 이겼다." "뭘 걸었어?" 입안 가득 음식을 쑤셔 넣으면서 되묻는다. "나시아스에게는 앞뒤 깨끗하게 금화 한 장 착복했어. 그리고 도라 장군은 그 수염을 뿌리 채 뽑아 드시겠다고 말했지만서도...." 장군은 살짝 이마를 경직시켰지만 용감하게 가슴을 폈다. "물론 폐하, 그렇게 하라 말씀하신다면..." "농담이야." 국왕은 아무래도 웃는 걸 멈출 수가 없는 듯 했다. 소리를 죽여가며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원인의 대부분은 장군과 타르보의 표정이 너무 우스웠기 때문이었으리라. 두 사람 모두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 듯 했다. 나시아스마저도 불쌍하다고 여기는 듯 하면서도 살짝 입가를 가리고 있었으니까. 한번에 5년은 늙어버린 듯한 장군이었지만 언제까지고 멍청하게 있을 순 없다. 어떻게든 다시 제정신을 차리려 하며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이다 꼬마야." "뭔데 할아버지." 국왕의 입가에서 푸흡하고 기묘한 소리가 났다. 웃음소리를 죽이려다가 조금 실패한 것이다. 도라 장군도 옆 눈으로 국왕을 노려보고 수염이 난 입가를 깨물면서 특대의 거대한 주먹을 꽉 쥐고 다시 한번 도전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그 정도로 고생해서 타고 온 말을 가게 놔둬도 괜찮았던 거냐. 다음에 또 잡을 수 있을 거라고는 보장할 수 없는 게다." "괜찮아. 저쪽에서 놀러 올 거야." 상 위에 엎어져버릴 뻔 한 장군이었지만 어떻게 겨우 멈출 수 있었다. 타르보도 이전까지였다면 이 말에 분명히 노성을질렀겠지만 방금 전 결코 있을 수 없는 현상을 만난 직후였다. 아무래도 다음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샤미안이 물었다. "흑왕이 이곳에 오겠다고 했어?" "그렇게 약속했어." "어머 꼭 흑왕하고 대화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네." "샤미안은 못해?" 녹색의 눈동자가 순진하게 자신보다 몇 살 연상의 아가씨를 올려다보았다. 이것을 내려다보는 개암나무빛 눈동자는 곤란한 듯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도 로아의 인간인 걸. 말과는 자주 이야기를 해요. 하지만 그건 사람에게 길들여진 말의 경우고 상대가 흑왕이라면 아무래도 이야기는 못해. 무서워서." 샤미안은 비교적 빨리 충격으로부터 회복한 듯 했다. 그와 동시에 그 말을 탈 수 있었던 소녀의 기량에 깊이 감탄하고 있는 듯 했다. "리는 무섭지 않았어? 흑왕은 상당히 화가 났었을 텐데." "처음에는 말야. 하지만 정말 처음만 그랬어." 고기 덩어리를 집어 들면서 소녀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동물은 사람하곤 달라서 말이 통하니까. 친구가 되는 것도 어렵지 않다구." "알만하군." 국왕은 감탄했다는 듯이 끄덕였다. "흑왕은 네 친구가 되어 준거냐." "응. 인간은 안 돼. 전혀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걸." "나도 그런가?" 장난기를 발동시켜 묻자 소녀는 귀엽게도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월은 인간치고는 꽤나 괜찮은 편이야." 하고 말했다. 그 장소에 있던 충실한 신하들은 반은 얼굴이 새빨개지고 반은 쓴웃음을 금치 못했다. "리, 폐하께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샤미얀이 주의를 주었지만 눈살을 찌푸렸다기보다는 쓴웃음에 가까운 말투였다. 이 백작 영애는 나이가 어린 만큼 아버지 일행보다는 정신이 유연한 듯 했다. 국왕과 소녀 사이에 있는 무언가가 자신이나 아버지가 품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라는 점을 이론이 아니라 느낌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소녀의 식사를 바라보고 있는 자들 중에서는 이븐도 있었는데 아무 생각없이 질문을 던져왔다. "저기 꼬마 아가씨. 너 그 말로 전투에 나갈 생각이야?" "그럴거야." "하지만 저런 말로 싸우기엔 키가 작잖아. 팔 길이도 그렇고. 너한테 저 말은 좀 아깝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말야. 아예 폐하한테 양보하면 어때?" 이것이 이븐의 본심에서 나온 발언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뭐라 해도 표정을 숨기는 정도는 식은 죽 먹기처럼 하는남자였다. 일부러 이런 언동을 해서 소녀의 반응을 보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이 장군 일행에게 있어 구원의 밧줄이었음은 틀림없었다. "분명히 이븐 경이 말한 대로다." 타르보가 겨우 안색이 되돌아오며 끄덕이자 도라 장군도 힘차게 동의했다. "아니 그거 참 맞는 말이다. 그 정도의 명마는 일군의 총대장이야말로 어울리는 것이지. 나도 처음부터 생각하진 못했지만 흑왕이 사람을 태운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그 이상의 것은..." "고마운 말이지만 나는 겸손하게 사양하는 걸로 해두겠네 장군." 부드럽게 국왕이 말했다. "로아 제일의 명마라면 발도우의 딸에게야말로 어울리겠지. 게다가 아마 흑왕도 이 소녀이니까 양보해주었을 거라고 생각해." "월같이 무거운 거 태워달라고 말해도 그쪽이 싫어할걸." "어이 내가 분명히 체중이 좀 나가긴 해도 그만큼 마술馬術에는 자신이 있다고." "알게 뭐야. 나보다 열 배는 나갈 것 같은 덩치인 주제에." "열 배나 될거 같냐. 기껏해야 세 배야." 발끈해서 대꾸하는 국왕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븐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소꿉친구가 국왕이라는 것은분명 어딘가 틀린 것이고 무리가 있는 이야기고 믿어지질 않는다. 사무치게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물론 입 밖으로 내서말하지는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흑왕은 정말로 장군가의 근처에 나타났다. 발견한 것은 하필이면 문밖의 진지에 있던 병사였다. 야생마가 스스로 인가에 다가온다. 그것도 그 인가 주변에는 수백 명의 인간이 진을 치고 있는데 태연하게 가까이 온다는 사태가 일어나니 오히려 인간쪽이 당황하고 동요하여 어쩌면 좋을지 다시 장군에게 알리기 위해 전령이 달렸다. 그러나 소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 친구를 맞이했고 저택의 사람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초대부터 백년의 지날 동안 처음으로 이 땅의 수호신으로마저 생각되었던 흑마에 안장이 놓이는 것을 마른침을 삼키며 바라보았던 것이었다. 어젯밤 국왕이 말햇던 것은 옳았던 듯 흑마는 소녀 이외의 사람 손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장 패우기를 도와주려고 조심조심 접근했던 시종이 있었지만 하마터면 물어뜯길 뻔하여 황급히 도망가는 꼴이 되었다. 말이 쓴웃음을 지을수 있다면 소녀가 안장을 놓고 복대를 채울 동안 흑왕의 모습이 그야말로 그것이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어쩔수 없다고 말하는 듯한 모습으로 보였다. 그리고 소녀는 이븐이 말했던 자신의 체격 부족을 충분히 알고 있는 듯 했다. 안장만을 놓은 말과 함께 즉시 기사騎射연습에 들어간 것이다. 이것은 로아 남자들의 집안놀이였다. 그리고 실로 타우의 자유민들의 특기이기도 했다. 문자 그대로 말을 달리면서 차례차례 활을 쏘는 것인데 흔들리는 말 위에서 하는 일이니 만큼 상당한 수련을 쌓지 않으면 명중률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기습을 할 경우에 이것만큼 효과가 있는 전법도 없었다. 로아의 남자들은 모두 매우 빠르게 활을 쏘는 실력자들이었다. 물론 그만큼 연습을 하기 위한 마장馬場도 있었다. 소녀가 활과 화살을 준비하고 흑마에 타서 연습장에 향하자 병사들이 줄줄이 그 뒤를 따라가고 말았다. 로아의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라모나 기사단에서도 저 소녀가 이번엔 활을 당긴다고 하니 주요 기사들이 전부 놓칠 수 없다면서 구경하러 나온 결과가 되었다. "이봐! 뭘 하고 있는건가!" 도라 장군이 쫓아가서 마장에 모여있데 된 병사들을 꾸짖었지만 뭐라 해도 선두에서서 구경하고 있는 것이 국왕이었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째서 꼬마 아가씬 재갈을 물리지 않은 거지?" 이븐이 묻고 있었다. "양손이 자유로운 쪽이 활을 쏘기 편할 테지. 실제로 부자유스러운 것 같이 보이지 않고 이걸로 내기는 또 내가 이기는건가." "아 젠장. 이제 저 아가씨에 대해서는 절대 너랑 내기 안 한다." 국왕은 어젯밤 나시아스에게서 착복한 금화 한 장외에 이 산적에게서도 은화 다섯 장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던 듯 했다. "폐하! 그리고 이븐! 폐하를 너라 부르다니 무슨 짓인가. 폐하도 폐하십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 뭘 즐기고 계신 겁니까!" 벼락 내리기에 바쁜 장군에게 그곳에 있던 샤미안이 새파란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아버지 저걸 보세요..." 샤미안이 가리키는 것은 연습장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궁술용 표적이었다. 그것을 본 장군도 한번에 핏기가 빠져나가는것을 느꼈다. 평균적인 간격을 두고 늘어서 있는 열개 남짓한 표적에 전부 화살이 꽂혀 있었다. 그것 만이라면 아무것도 희한할 게없었다. 그러나 어느 화살도 깔끔하게 둥근 표적의 정 가운데를 꿰뚫고 있는 것이다. 저도 모르게 눈을 의심했다. 그런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터였다. 발을 멈추고 자세를 고정한 채 당긴다고 해도 뭐라 해도 거리가 있다. 기사용 활로는 어려운 일이다. 장군 수하의 정예라고 해도 달려가면서 전부 가운데 근처를 맞추기만 해도 잘한 것으로 상당한 실력이라고 칭찬 받는다. "어느 정도 속도로 했느냐." 갈라진 목소리로 장군은 딸에게 물었다. 명중률이 높다면 말의 속도는 느리다. 혹은 반동이 적다. 그런 것이 보통이다. "또 한번 오네요." 샤미안이 가리킨 쪽을 장군도 보았다. 흑마는 정해진 위치에 닿은 참이었다. 상당히 멀다. 거대한 몸집의 흑마가 망아지 같은 크기로 보인다. 그것이 먼지를 휘날리며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듯한 굉장한 속도로 질주해 왔다. 이 정도의 빠르기로는 등의 화살통에서 하나하나 뽑아서 쏜다해도 절대 시간에 맞춰 쏠 수가 없다. 화살 하나 둘 쏘는 동안 지나쳐버리고 만다. 그러나 소녀는 속사의 명수였다. 작은 손은 한 번에 몇 개의 화살을 등의 화살통에서 뽑아 표적을 지나쳐 가는 사이에 차례차례 쏘았다. 거의 틈도 없이 활시위가 울리고 흑마가 표적 앞을 지나쳐 갔을 때에는 모든 표적의 중심에 새로운 화살이 꽂혀져 있었다. 병사들 사이에서 터질 듯한 함성과 박수가 솟아올랐다. 어떤 병사도 누를 수 없는 흥분에 얼굴을 홍조시켰고 그 눈은 열광적인 찬미의 빛으로 반짝였다. 그 모습에는 단순한 기량에 대한 찬탄이라기보다 숭배에 가까운 것이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이 땅에서는 말을 능숙하게 타고 화살의 취급에 통달한 자가 보다 존경받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누구도 길들일 수 없었던 흑마를 타고 남자들중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솜씨로 활을 쏘아 보인 그 사람은 아직 어리고 호리호리한 아름다운 소녀인 것이다. 비르그나 요새의 담 위로 도약해 올랐던 소녀를 보았을 때의 기사단원들과 마찬가지 혹은 그 이상의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샤미안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소녀는 정말로 발도우의 따님인 걸까요." 혀를 찬 장군이었다. "너까지 그런 소리를 하다니." "하지만 아버지...." 진지한 눈을 화살 표적에 향했다. "저것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흐음." "저런 것은 저도 절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정예병으로 이름높은 자들은 몇 명 있습니다만 그런 그들도..." 아마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장군도 그것은 알고 있었다. 샤미안은 이어서 말했다. "로아의 흑왕은 사람에게는 길들여지지 않는 존재. 저는 지금까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상대가 발도우의 딸이라고 한다면 안장을 놓는 것을 용서해 줄지도 모르지 않을까요." 낮게 신음한 장군이었지만 눈앞에는 두 개의 화살이 꽂혀 있는 표적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시선을 돌리자 말에서 내린소녀에게 국왕이 웃는 얼굴로 말을 걸고 있는 참이었다. "벌써 끝이냐. 병사들에게도 뭣보다 좋은 눈요기감이었던 것 같다. 조금 더 보여주면 좋을 텐데." "앞으로 실전에서 얼마든지."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장군은 국왕과의 약속을 생각해 냈다. 친구로서 대우하며 조력을 구하겠다고 국왕은 말했던 것이다. 진심이라고 생각지 않았지만 이래서야 저 소녀가 당당히 국왕의 곁에서 진군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븐의 말도 떠올랐다. 저 정도의 미소녀. 흑왕에 태워서 군의 선두에 세운다면 얼마나 멋진 그림이 될 것인가. 괴로운숨을 토해낸 장군이었다. 분명히 어린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멋진 활솜씨였다. 승마법도 진정 훌륭했다. 그러나 전장에 데리고 가기엔 너무 어리지 않은가 하는 의식이 사라지질 않는다. 그러한 장군도 실은 15세도 되기 전에 첫 전투에 나갔었지만 아무리 뭐래도 소녀인 것이다. 낮게 신음했다. "이번 국왕군의 포진은 상당히 기묘한 것이 될 것 같구나." 샤미안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형식파괴는 폐하가 언제나 하시는 일인걸요. 게다가 아버지는 이전에 싸움은 체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요." 쓴웃음을 지은 장군이었다. "말을 잘 다루고 무기를 다룰 줄만 안다면 남자도 여자도 관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그 말씀대로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다름 아닌 샤미안에게 검술을 가르칠 때에 했던 말이었지만 장군은 조금쯤 쓸쓸한 표정을 떠올렸다. "내게 아들이 있었더라면 너를 기사로서 키울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렇다면 당연하게 여자로서의 생활을 보내게 해줄 수 있었을텐데 하는 부친의 애정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아직 젊은 여기사는 아무리 상대가 부친이지만 이 말을 치욕으로서 받아들인 듯 했다.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없군요. 저는 지금의 자신에게 긍지를 가지고 있고 여자라고 해도 델피니아 국민인 이상 자신이 믿는 왕을 위해 싸울 권리가 있는 겁니다." 수염의 장군은 자신의 실언에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으며 딸의 용기를 칭찬했던 것이었다. 8장 샤미안은 그 무용으로써 왕을 위해 싸우겠다 선언했지만 지금 개혁파에게 지배되고 있는 코랄 성내에서도 전혀 다른 방법으로 국왕을 위한 싸움에 도전하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 있었다. 며칠 전 페르젠 후작과 시종장 브룩스와의 내밀한 대화가 벌어졌던 그 방보다 훨씬 안 쪽 본궁 안에서도 정치와는 거의 관계없는 내궁이라 불리는 부분이었다. 이곳은 왕족을 위한 사적인 주거공간이었다. 의장용 방, 침구를 두는 방, 여러가지 물건을 두는 창고방, 오락을 위한 방, 특별한 조리실, 지금은 죽은 국왕이나 왕비의 방 등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당연히 이 정도의 설비를 관리 유지하기 위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내궁에는 그것을 위한 급사나 시종들이 다수 드나들고 있었고 또한 왕족의 살림을 맡는 시녀나 여관女官들의 주거지도 이곳에 있었다. 다만 그녀들이 자신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방은 한정되어 있었고 사실私室에 남성을 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궁내에서 일하는 남성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대낮, 근무상의 문제로 대화를 나눠야 할 때에 한정되어 있으며 그것을 위한 장소도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곳에는 어디에 어떤 귀가 숨겨져 있을 지 알 수 없다. 지금 궁내를 대표하는 두 사람의 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완전히 날이 저문 한밤중에 시종장인 브룩스와 시녀장인 카린은 복잡한 창고방에서 은밀히 몸을 숨겨 만나고 있었다. 젊은 시녀와 시종이라면 뭔가 연애사건과 관련 되어 만난 것이라는 추측도 하겠지만 등장인물이 이 두사람이라면 그런 일과는 전혀 무관할 뿐 아니라 극히 중대한 용건을 위해서라는 것을 금방 알수 있다. 그러나 이 밀회는 처음부터 소득 없는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 동기에 가까운 시종자에게 갑작스러운 부름을 받아 페르젠 후작과의 일련의 응답에 대해서 듣게 되었을 때에도 시녀장은 그 태도를 눈꼽만큼도 변화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분은 제대로 된 델피니아 왕가의 핏줄이십니다." 완강하게 말했다. 오랜 세월 왕궁에서 일하고 있는 카린은 브룩스와 동년배인 오십줄로 보였다. 그러나 외견의 양상은 상당히 틀렸다. 키는 보통 여성보다 작고 얼굴도 몸집도 둥글게 부풀어 있었다. 나이에 비해서는 혈색도 좋고 작은 눈동자에는 의지의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반백의 머리카락을 꽉 묶어 올려 등은 똑바로 세운 채 눕혀놓은 다리받침에 앉아 있었다. 시종장은 옆으로 놔둔 쓰레기받이에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나지 않는 밀회장소였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진지 그 자체였다. "시종장도 어울리지 않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이제 와서 그의 혈통에 의심을 갖다니.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할만한 게 아닙니까. 반역자인 후작이 무슨 말을 했다고 해서 그들의 행위가 정당화될 거라고 라도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상대의 모습은 상당히 심각했다. "시녀장, 지금은 그런 것을 논의하려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일을 남김없이 이야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그 분이 뒤르와 폐하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확신이 무서운 오해일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후작의 말을 전면적으로 인정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분명히 폐하의 유언에만 정신이 팔려 산모의 확인을 태만이 했던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뭐라 해도 그분이 이런 종류의 문제를 일으키신 것은 단 한번. 그것도 당시의 의견으로는 그녀의 미친 소리로 보는 견해가 강해 저마저도 그녀의 행방도 아이가 언제 태어났는가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한심스러운 상황입니다. 그거 참, 어째서 그 때에 좀 더 자세하게 확인하지 않았었는지 그것이 후회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시종장이 스스로를 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당시의 시녀장마저도 웃어넘겼을 정도였으니까요." "최소한 폴라라는 그 여자가 살아있었다면 진실을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폴라님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도 현국왕의 어머님이십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서로 이가 맞지 않는 대화였다. 브룩스는 카린의 말을 거의 듣지 않는 듯 이마의 식은땀을 닦고 있었다. "당시의 국왕이 아무리 단 한번이라 해도 그 처녀를 불러들이셨던 것은 틀림없는 일인데, 달과 날짜도 맞아 들어가고 있는데 누구도 아이의 부친이 폐하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건....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그때문에 그 여성은 왕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니." "그것도 후작의 짓입니다." 내뱉듯한 카린의 어조였다.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서 애초부터 다른 남자의 아이일 것이라고 결정짓고는... 무례하게도 엉덩이가 가벼운 창녀라느니하며 천한 것 취급을 하고! 내궁에서 일하던 시녀가 아니라는 그런 이유만으로!" "그녀의 정절이 문제가 되었다 그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그 처녀는 왕궁의 최하층에서 근무하는 마구간지기였다. 다시 말해 통용문을 지나서 자유로이 시가지에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마구간에 근무하는 자들 중에서는 젊은 남자도 있었다. 얼굴을 아는 병사나 출입하는 상가商家에서 물건을 바치러 온 사람 등, 아이의 부친이 될만한 남자는 얼마든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것은달리 보면 다른 남자와의 관계가 있었다고 몰아붙이는 것도 간단하다는 말이 된다. 골치 아픈 얼굴로 브룩스가 말했다. "후작은 그렇게 말했지만... 의외로 그녀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알았던 건지도 모르겠군요. 그 때문에 왕의 서자 특히나 남자아이의 탄생을 꺼려했던 것인지도." 왕자가 두 명 있는 것만으로 관료가 두 파로 갈려 파벌싸움을 되풀이하는 예도 있을 정도였다. 자신의 정적政敵이 어린서자를 방패로 하여 세력을 만드는 것을 걱정한 것인가 생각해 보지만 그래도 이상한 점은 어째서 왕위계승권도 가지지 않은 서자의 탄생을 그렇게까지 경계했던 것인지 하는 점이다. 혹시 그 외에도 무언가 남이 알고 있는 이상의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눈이 빙빙 돌 정도로 두뇌를 회전시키고 있자니 카린이 확신을 담은 어조로 단언했다. "그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무래도 카린은 자신의 생각에 빠져있는 듯 했다. 표정도 험악한 상태로 단숨에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임신중인 폴라님을 왕궁에 모셔둘 이유 따위는 없는 겁니다. 애초에 한번 질의를 가졌던 것만으로 반년이상 방치해두더니 태어난 아이가 남자라는 사실을 듣자마자 부정을 이유로 해직을 명령하다니 뭐 하자는 짓입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다면 임신했던 그 시점에서 면직하면 될 일일 것을." "시녀장 당신은 무엇을 알고 계신 겁니까?" 브룩스는 날카롭게 물었다. "당시 그 여성은 얼마든지 바꿀 여력이 있는 마구간지기의 한사람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그 여성의일을 그렇게까지 잘 아시는 겁니까?" "저는 당시 루피아 공주님의 시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렇다기보다 옛 시녀라고 해야할 지도 모르겠군요. 집안 사정으로 한때 왕궁을 떠나 있었으니까요." "그건 몰랐습니다." 성에서 일하고 있는 시녀들이 왕궁에서 떠나는 것은 주로 결혼이나 부모의 사망 등이 이유가 된다. 그러나 그 뒤에 복직하여 돌아오는 자들도 있다. 카린은 코랄 시내에 있는 중류 귀족의 딸이었다. 부친이 중병에 걸려 간병에 전념하기 위해 왕궁을 그만두었던 것이라 했다. "왕궁을 떠난 몸이라면 곽문을 지날 수도 없습니다만 저는 내려와 있을 동안에도 가끔가다 통용문을 출입하고 있었습니다. 이성이라는 것은 이상한 곳이라 일하고 있을 때엔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서도 또 나와 있으면 이상하게도 그리워지는 겁니다. 이곳에는 동료도 있었고 공주님의 상태도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다행히 저의 본가는 시내에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병이 위독해질 때까지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반드시 성을 방문하여 아래쪽에서 일하고 있던 자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제 낙이 되어 있었습니다. 폴라님과도 그 때에 알게 된 사이였습니다." "그렇군요." 카린은 신분의 고하에 막론하여 남을 잘 돌봐주는 여성이었다. 그러한 자들로부터라면 분명히 환영받았을 것이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하며 밝은 성격하며 저는 참으로 좋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폐하가 같은 식으로 생각하셨다 해도 무슨 이상할 게 있을까요." 날카로운 눈초리를 올려 뜨며 카린은 확실하게 잘라 말했다. "폴라님으로부터 폐하의 은총을 받았다고 들었을 때에도 폐하의 아이를 임신했다 들었을 때에도 저는 그것이 사실임이틀림없다고 알 수 있었습니다. 거짓말쟁이에 염치도 모르는 것은 폐르젠 후작 쪽입니다." "시녀장..." 브룩스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지금은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듣고 싶은 것은 그 여성이 아이를 낳은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욱더 중요한 것은 태어났던 아이가 대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알고 계신다면 부디 큰 일이 되기 전에 제게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어떻게 되었다니 이상한 말씀을. 시종장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아이는 스샤에서 건강하게 성장하여 지금은 이 나라의 국왕폐하가 되어 계십니다." "시녀장..." 브룩스는 머리를 감싸쥐고 싶어졌다. 그는 이 동료를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심지 깊고 대범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래서야 완전히 도망치고 있는 꼴이었다. "이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고 계시면서도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페르젠 후작의 주장을 인정하시는 것으로도볼 수 있습니다." 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꽉 당겨 다물고 있었다. "시녀장, 아시겠습니까? 후작은 당신을 최고회의에 출두시키는 것도 감수할 태세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커다란 사내도 몸이 떨릴 터였지만 카린은 살짝 눈썹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저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시종장." 그런 일쯤은 이미 각오하고 있던 듯 했다. 분명히 이 시녀장은 보통 여자는 아니었다. 상당히 담이 큰 여성인 것이다. 브룩스는 괴롭지만 강한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최고회의에 소환된다면 그 뒤는 후작이 생각하는 대로 재판이 진행될 겁니다. 그들은 당신을 허위진술을 한 죄인으로 만들어 북쪽 탑에 보낼 것이 틀림없습니다. 부디 그렇게 되기 전에 숨기시지 말고 진실을 말해주십시오. 그것밖에 당신을 구할 방법은 없는 겁니다." "외외로군요. 저는 아까부터 당신의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다시 한번 정직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목소리에 힘을 담은 브룩스였다. 싫어도 담기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실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되며 이 동료를 감옥에 보낼수도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왕국의 미래가 걸려 있었다. "24년 전 십년제의 해에 정확히는 그 전 섣달, 폴라는 남자아이를 출산했지요." "예." "그 아이에게 옷을 입히고 젖을 물렸던 것은 누구입니까?" "물론 폴라님입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폴라와 함께 모친이 태어난 고향 마을로 돌아갔던 겁니까?" "아니오." 시종장의 가슴이 뛰었다. "마을에 돌아가지 않았다?" "당연합니다. 그때부터 3개월간 황송스러운 일입니다만 제가 돌봐드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예 폴라님은 국왕의 자식에 어울리는 교육을 바라고 계셨기 때문에 저에게 아기님을 맡기시고 돌아가셨던 겁니다. 그리고 저는 곧 복직하여 폐하께 이 일에 대해 내밀히 보고드렸고 폐하는 폴라님을 딱하게 여기시며 성안에서 키우는 것은오히려 아기님을 위해 좋지 않다 판단하시어 스샤의 페르난 백작을 불러들이셨던 것입니다." 브룩스는 초조한 듯이 무릎을 때렸다. "시녀장, 그래서야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전혀 맞질 않아요. 그 여성이 아이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갔다고, 최소한 이 왕궁을 나갈 때에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고 증언하는 자를 후작은 몇 사람이나 찾아냈단 말입니다." "그건 그렇겠죠. 아무것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폴라님은 아기님을 데리고 성을 나와 그대로 코랄 시내에 있는 저희 집을 방문하셨던 거니까요."" "하지만 그 아이는 모친과 함께 훼트카의 마을에서 죽었다는 겁니다!" 브룩스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거칠어져 있었다. "당신은 그 여성이 아이를 코랄에 남겨두고 혼자서 마을에 돌아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페르젠 후작은 확증도 없이 이런 이야기를 내뱉을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인가 후작인가, 어느 쪽인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모든 신께 맹세코 저는 진실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안색이 나빠졌으면서도 끝까지 고집스러운 시녀장이었다. 브룩스는 지쳤다는 듯이 숨을 토했다. "시녀장, 그렇다면 그 여식이 마을로 돌아갔을 때 데리고 있었다는 아이는 어찌되는 겁니까? 태어났던 아이는 한 사람 그런데 당신은 그 아이가 코랄에서 스샤로 갔다고 말하고, 후작은 동북의 마을에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대체 어느 쪽이옳은 겁니까? 가르쳐주십시오." 시녀장은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부드럽게 말했다. "후작의 조사는 바로 최근에 한 것이니까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 오류가 있었을 지도 모르지요." 브룩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애매한 것을 가지고 저 후작이 이런 말을 꺼낼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단호한 태도로 나온 이상 상당한 자신이 있는 것이겠지요." 더구나 문제의 성질이 성질이다. 후작에게 있어서는 기사회생의 대승리를 거머쥐기 위한 비장의 수단일 것이다. 확실치않은 일로 이런 승부에 나설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카린쪽이 무언가 딴 생각을 품거나 혹은 허구를 섞고 있는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떠올려 보면 카린은 그 남자가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정중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대우하고 있었다. 아직 그 남자가 국왕이라고 결정되기 전부터 말이다. 상당히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이야기가 틀리다. 한 나라의 정권에 관련된 중대사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지 좋고 싫어하는 것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그런데 카린은 또다시 사적인 문제를 꺼내들었다. "그건 그렇고 함께 돌아가셨다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요. 폴라님은 건강 그 자체이신 분이셨는데 출산 후의 경과도 매우좋았었는데 어째서 그때부터 불과 두달도 지나지 않는 사이에 돌아가시게 된 걸까요." "글쎄요... 그것이야말로 옛날 일입니다. 원인이 무엇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왕가의 피를 이었을 터인 아이는 생후 2개월로 목숨을 잃었다. 브룩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중요하지 그 외의 것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카린은 이 의견에 찬성할 수 없는 듯했다. "그렇게까지 확실하게 함께 돌아가셨다고 한다면 후작은 폴라님의 사인死因을 알고 계시다는 거겠지요." "시녀장?" "저는 그분과 매우 친하게 지냈었으니까 어째서 돌아가신 것인지 무척 신경이 쓰이는군요. 게다가 왕궁에서 쫓겨나서 곧바로 불의의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은 기묘하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당신은 저만 책하고 계시지만 책임을 물을 상대가 틀렸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후작같이 간계만 뛰어난 자가 무슨 짓을 했을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죠." 입술을 깨물고 있던 시녀장이 탄식하듯 말했다. "혹시나 비밀리에 손을 써서 폴라님을 암살하고 게다가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고 뻔뻔스럽게도 당신에게 바람을 넣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시녀장!" 브룩스의 얼굴에서 단숨에 핏기가 사라졌다. 두려워하는 듯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말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있는 겁니다." "어째서 안 되는 겁니까. 페르젠 후작은 그 정도 일쯤이야 얼마든지 하고도 남을 인간이 아닙니까." "시녀장,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세요!" 낮고 칼로 자르는 것 같이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핏기가 없는 입술을 깨물면서 떨리는 주먹을 꽉 쥐고 브룩스는 소리 죽인 목소리로 단번에 말했다. "당신답지 않군요. 그런 소리를 남들이 들었다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십니까!" 이 시종장이 이렇게까지 안색을 바꾸며 남을 야단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카린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얼굴을 붉히며 깊게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말이 지나쳤습니다." "아무래도 당신은 폴라라는 여성을 너무나 비호하다보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커다랗게 한숨을 쉬고 이마의 땀을 닦는 브룩스였지만 카린은 왠지 시선을 멀리 두고 있었다. "제가 옳은 것인지 후작이 옳은 것인지는 폐하가 돌아오시면 명확해질 겁니다." "글쎄 돌아오실 수 있을 런지..." "시종장?" 브룩스는 단숨에 십 년은 늙어버린 듯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런 동료의 모습을 보고 카린의 표정도 의심스러운 것이 떠올랐다. "시종장은 성내에 암약하는 온갖 잡것들의 편을 드시겠다는 뜻입니까?" "시녀장, 제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질문하고 있는 건지 모르시겠습니까? 후작은 폐하의 출생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를 또다시 공격의 소재로 삼을 셈입니다. 개혁파의 소행에 괴로워하며 첩실의 왕이라도 상관없다고 하고 있는 시민들입니다만 그것이 양보할 수 있는 최대한이겠지요. 지금의 폐하가 왕가의 피를 잇고 있지 않다는 식이 되기라도 한다면..." 깊은 한숨을 쉰 브룩스였다. 절망적인 표정이 되어 있었다. "이젠 끝입니다. 아무리 개혁파의 압제에 신음하던 시민들이라도 설마 그러한 분을 국왕으로서 인정할 리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그분의수족이 되어 움직여야 할 제후들이 이 사실을 듣는다면... 대체 어떻게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서출이라고 해도 전 국왕의 자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로소 아누아 후작도 핸드릭 백작도 저 남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개혁파에 대한 반대의 자세를 고집해왔던 것이다. 그 외에도 개혁파의 횡포를 용서할 수 없다고 은밀하게 생각하고있는 영주들의 수는 결코 적은 수가 아닐 터였다. 그러나 중요한 바로 그 남자가 실은 국왕의 자격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 분의 편을 들려는 자는 한 사람도 나오지 않게 되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코랄 탈환은 단순한 그림의 떡, 탁상 공론이 되어버립니다. 혼자서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승리의 여신이 그분께 미소지어줄 리가 없습니다." 카린은 고개를 저었다. 혈색 좋은 얼굴에 고뇌의 표정이 떠오르고 양손이 하얗게 될 정도로 꽉 쥐고 있었지만 확실하게말했다. "신은 진실된 왕의 편에 서실 것입니다. 투신 발도우도 계약의 오리고도 반드시 그분께 가호를 내려주시어 이 코랄까지 이끌어주시겠지요." 브룩스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라는 건 감정에 빠지기 쉽고 미신을 신봉한다고 한다는데 이런 거다 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도리라는 게 통하질 않는다. "어떻게 해도 진실은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당신께 거짓을 말씀드린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이 이상 드릴 말씀은 아무것도 없군요." 굳은 표정의 카린이었다. 이것은 브룩스에게 있어서 실로 의외이며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서로 허심탄회하게대화를 나누면 어떤 형태로든 카린의 입에서 정확한 진실을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쉽습니다 시녀장. 진심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런 사태만은 피하고 싶었습니다만 저는 당신에게 들은 것을 후작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카린은 긴장된 표정이 되면서도 천천히 끄덕였다. "그것이 당신의 직무이실 테니까요."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된 창고방의 밀담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시종장은 한숨을 쉬면서 성의 바깥부분을 향했고 이미 심야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페르젠 후작에게 면회를 청했던 것이었다. 시녀장의 태도를 들은 페르젠 후작은 분명한 경멸의 미소를 띠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는 그 여성에 대해 약간은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고 있었던듯 하군요." "예." "왕국 존망의 시기에 문제의 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시다니 곤란한 일입니다." 브룩스는 창백해진 얼굴을 보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반론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똑같은 바를 그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할 것은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녀장은 실은 폴라와 그 아이의 죽음에 관련되어 당신의 조사에 다소의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같은 점을 질문드리고 싶습니다만." 후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계속해서 짓고 있었다. "시종장께서는 사람의 아기라는 것이 도로변의 돌맹이처럼 아무데나 굴러다니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설마 그런 식으로는..." "그렇다면 당신과 시녀장의 의문은 전혀 논의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 여식은 틀림없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아기를데리고 마을로 돌아갔던 겁니다. 저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 하시면 장소를 가르쳐드리지요. 당시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자는 그 마을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종장 자신께서 직접 확인하셔도 좋겠지요." 후작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진실이리라. 페르젠 후작은 선인善人이라고 말하기 힘든 인물이지만 멍청하지도 않다. 더구나 금방 드러날 듯한 거짓말을 한다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리고 여식의 사인에 대해서입니다만 이것도 확인해 두었습니다. 동북 변경의 겨울이 얼마나 거친 것인지 당신도 알고계시겠지만 그 여자는 바깥일을 끝내고 돌아오다 잘못하여 살얼음이 얼은 호수에 빠져 얼어죽었다고 합니다. 혼자였다면가장자리에 매달려 기어올를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아이를 구하려고 했던 것이겠죠. 아기를 가슴에 단단히 껴안은 모습으로 물에서 끌어내졌다 합니다." 브룩스는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꽤나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닙니까. 자기 아이가 아니라면 못할 일이지요. 델피니아 국왕의 핏줄을 이을 아기가 차가운물 속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픈 일이지만 말입니다." 표정만은 슬픈 척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바늘에 찔린 것만큼의 느낌도 갖고 있지 않음이 틀림없었다.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구하려고 했던 것은 그것이 자신의 아이이니까. 틀립니까? 그것도 이 경우에는 모친이 목숨을 던지기에 충분한 고귀한 피를 이은 아기였습니다." 후작은 부드러운 미소마저 띠고 있었다. "폴라가 아기를 안은 채 죽었다고 증명해줄 자들은 그 마을에 몇 명이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시녀장에게 아기를 맡겼다는 것을 증명할 자는 당사자인 시녀장 외에 누구도 없습니다. 당신은 그래도 시녀장을 믿으라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아니 저는..." 물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브룩스는 말할 수 없었다. 후작이 말하는 바가 옳다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입밖에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페르젠 후작도 대답을 바라고 있지는 않았다. 들을 필요도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심야에 불려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후작은 집무시의 의복인 채였다. 정치의 중심인물로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보통양이 아니다. 모든 것을 결제하는 데에 한밤중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이리라. 최근에는 거의 저택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왕궁에서 묵고 있는 듯 하다는 소리도 들은 적이 있었다. "시녀장을 최고회의에 소환하실 겁니까." 브룩스가 비장한 결의로 묻자 후작은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이상 거기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그 남자 자신이 어떤 자인지 그것을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은 아쉽습니다만..." 약간 생각에 잠긴 후작이었다. 아기라는 것은 도로변의 돌맹이처럼 굴러다니는 것이 아니다. 지금 후작이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시녀장은 그 남자를 어디에서 데리고 온 것인가. 역시 이 문제는 좀더 자세하게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저는 가능하다면 이 사실을 공표하지 않고 넘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쓸데없이 혼란만 부르는 일인 데다 자격도 갖지못한 자에게 왕관을 넘겨주었던 것도 사실. 이러한 추문을 스스로 세상에 공표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돌아가신 선왕의 명예는 지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분명히..." 어떻게 해서 이런 잘못이 일어난 것인가 지금에 와서 그것을 후회해봤자 소용은 없다. 왕국을 위해서 최선의 처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될 뿐이다. "다만 그 남자를 열심히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밝히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특히 그 남자를 사촌형이라 믿고 있는 분께는." "...." "추가로 이 왕궁 내에 있어 그 남자를 위해 일하겠다는 무모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빠른 시일 내에 잘못을 정정해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델피니아의 귀중한 인재를 쓸데없이 잃어버려서는 안되니까 말입니다." 예견하고 있던 사태의 빠른 도래에 브룩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발로, 아누아 후작 그리고 정당한 국왕의 귀환을 기다리며 포로의 신분을 달갑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의 절망을 생각하면 견딜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마음에걸리는 것은 그 남자의 앞으로의 행보였다. 도라 장군, 라모나 기사단 등의 아군을 얻어 이 코랄까지 도달한다 해도 그후에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생각하면 차가운 것이 등골을 흘러 떨어지는 듯 하다. "후작은 그분을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브룩스에게 후작이 보인 미소, 그 답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간웅奸雄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종장, 설사 오해로라고 해도 상대는 한번은 왕좌에 앉았던 인간입니다. 설마 불손한 일을 벌일 수야 없지요." "물론 그렇지요." "그 남자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상그 사령관 같은 경우엔 교수형에 처하자고 법석을 피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심한 짓을 피하는 것이 나중에도 지장이 없겠죠."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 북쪽 탑에서 일생을 마치게 하도록 하지요. 발로님도 이번만큼은 저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주실 테고 몇 년 지나면 그런 남자가 있었던가 하고 국민들은 깨끗이 잊고 새로운 국왕의 통치에 감사하게될 겁니다." "...." 지금 현재 영웅시되고 있는 그 남자의 목숨을 섣불리 빼앗는다면 시민들 사이에서 부풀어 오르고 있는 불만의 불꽃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된다. 후작은 그 점을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다시 해를 보는 일 없이 가둬둔 상태로 말려 죽이겠다는 속셈이다. 브룩스는 안면이 창백해진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당신도 이번만큼은 협력해 주십시오." 하는 말에 움찔 고개를 들었다. "그 남자는 지금 로아에 있습니다. 이미 라모나 기사단과 로아의 군대를 손에 넣었고 더우기 그 남자를 따르며 모이고 있는 자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상황입니다. 그들의 착각을 여기에서 정정해줄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쉽게 코랄에접근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습니다. 민중들 사이에서 옳지 못한 움직임이 생겨나게 되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다는?" "뭐 쓸데없는 짓일지도 모르겠지만 손은 써두었습니다." 후작의 얼굴에는 미소반 쓴웃음반이 떠올라 있었다. 어떤 수단인지는 모르지만 그다지 효과는 기대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묘한 말을 중얼거리고는 시종장을 보았을 때에는 진지함 그 자체의 표정이 되어 있었다. "폐하가 서거하시고 오년 동안 여러가지 문제가 수면으로 떠올랐습니다만 도라 장군도 두려워할 것은 못됩니다. 그 남자만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델피니아에 진정한 새벽이 찾아오는 겁니다." "예..." "아시겠지요?" 그것은 이 앞으로 무엇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묵인해달라는 강요이기도 했고 궁내부의 불만이나 노여움을 전부 억제하라는 명령이기도 했다. 한없는 고통이었다. 그 남자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고 지금도 섭정에 의문을 품고 있는 만큼 이 명령에 따르는 데에는 격렬한 고통이 수반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고통에 찬 선택이라 하더라도 브룩스에겐 고개를 끄덕이는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9장 국왕이 로아에 도착해서 열흘 뒤 총세력 삼천이 된 국왕군은 코랄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코랄을 공략해 무너뜨리기엔 불안한 군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럼 그만둡시다 하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전쟁이다. 특히 이번 같은 전쟁이 그랬다. 후속 영주군이 모일 때까지 출발을 연기하면 어떨까 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래서는 코랄에 시간을 주는 꼴이 되어버린다. 이곳에서 코랄까지의 주요 영주들에겐 국왕의 귀환에 대해 알려두었다. 개혁파가 하는짓을 달갑게 생각지 않는 자도 상당히 있을 테니 도중에 아군에 참가해오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설사 가세해오지 않는다 해도 이쪽을 건드리지만 않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편해지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이것이 당초의 목적인 것이지만 - 딜레든 기사단의 본거지인 마레바는 코랄의 바로 눈앞이었다. 싫어도 그쪽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국왕은 앞서 준비해둔 전투복장을 구비하고 검은 말에 탄 채 군대의 선두에 섰다. 본래라면 가슴의 문장과 같은 국왕기를 세워야 하지만 그것까지는 아무래도 준비할 수가 없었다. 이븐은 여전히 검은색으로 통일된 모습이었다. 게다가 사슬갑옷을 입거나 철판갑옷을 걸치지도 않았다. 그래서야 아무래도 불안하니 방어구를 좀더 입는 쪽이 좋다고 권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런 것을 입었다간 무거워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웃으며 사양했던 것이다. 다른 타우의 남자들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타우에겐 타우의 방식이 있는 듯 의복 아래에 두터운 홑옷을 겹쳐 입고 그 사이에 무언가를 집어넣어 둔 것 같았다. 가볍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둔 것이다. 라모나 기사단은 사슬갑옷에 똑같은 문장을 염색해둔 긴 상의를 걸치고 있었다. 샤미안은 밤색 머리카락을 묶어 올리고 짙은 찻빛 안감 위에 수정장식의 갑옷을 두르고 가늘게 만든 은색검을 차고 있었다. 그 일종의 신비한 아름다움은 병사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지만 뭐라 말해도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왕의 옆에서 진군하게 된 소녀였다. 상당히 따뜻해진 지금에 와서는 결국 머리에 천을 두르는 것은 그만두었다. 가는 끈으로 묶어 올린 황금의 머리카락과 은 머리 장식이 싫어도 햇빛에 반짝였다. 저택의 여자들이 만들어준 의복은 가볍고 움직이기 쉽게 되어 있었다. 긴소매의 옷 위에는 소매 없는 두터운 질감의 윗도리를 입고 허리띠로 졸라매는 것뿐인 모습이었다. 다리는 넉넉한 바지를 통해 내려가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드러운 장활르 신고 있었다. 타우의 남자들보다도 더욱 가벼운 차림이었다. "저런 호리호리한 몸으로 갑옷도 입지 않고 괜찮을런지?" 도라 장군이 걱정스러운 듯 묻자 "화살 쪽에서 알아서 피해가겠지." 하고 국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소녀는 말안장에 화살통과 활을 매고 다른 남자들과 같은 식으로 식량을 실어 올렸다. 흑왕은 군마로서의 훈련을 전혀 받지 않았는데도 몇 번이나 전투에 나갔던 것처럼 침착한 모습이었다. 소녀는 언제까지고흑왕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하며 그라이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흑마도 이 이름이 마음에 든 듯 소녀에게 이름을 불리면 확실하게 반응했다. 고집쟁이인 도라 장군이나 융통성이 없는 그 부관도 저 말은 진짜로 소녀와 친해진 것이라고,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소녀에게만 친하게 굴고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로아를 떠나 며칠 동안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지만 삼천의 군대가 로쉐의 가도를 넘어 파키라 산맥에 다가갔을 즈음 척후가 황급히 말을 달려 돌아왔다. 마레바나 코랄에 가기 위해서도 파키라 산맥과 기르취 산맥의 사이를 통과하지 않으면안 되는데 그 근방의 영주들이 서둘러 전쟁 준비를 하는 기색이라는 것이다. 물론 국왕군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알려두었다. 그 중에서는 확실하게 아군이 되겠다 통보해 온 자도 있었는데 그렇다 한다면 이쪽에 대해 한 마디도 더 전해오지 않는 것이 묘했다. 그뿐 아니라 파키라 산맥의 입구에 있는 영주의 성에 차례차례로 군대들이 집결하여 엄중하게 성의 방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마레바에 도착하기 전에 일전一戰 치르지 않으면 안될 것 같군." 국왕은 영주들의 변심을 분개하지도 않은 채 담백하게 말하며 부장副將을 돌아보았다. "장군, 이 근처에 진영을 펼칠만한 곳이 있는가." "있습니다. 조금 앞쪽에 마을이." 전투가 시작될 것 같아지면 그 지역의 사람들은 재빠르게 움직인다. 가재도구를 들고 집을 남겨둔 채 어딘가로 피난해 버리는 것이다. 미안한 생각도 들지만 야영지로 하기에도 숙소로 쓰기에도 이 이상의 것은 없었다. 삼천의 군대가 마을을 중심으로 정돈되자 국왕은 약간의 수하만을 데리고 성의 상태를 보러 나갔다. 이 부근의 일대는 와이베커라고 하는 영지였다. 그러므로 문제의 그 성은 와이베커 성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약간 높은 언덕 위를 올라가 보니 와이베커 성은 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강의 중심에 있는 삼각주에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망원경을 사용하지 않아도 탑에도 성벽에도 군대가 배치되어 방심하지 않고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삼각주의 절반 정도는 성이 점하고 있고 남은 부분은 모래톱의 공터였지만 그곳에도 강을 마주하는 방책이 세워져 있고 진지가 몇 개나 펼쳐져 기병 보병이 섞여서 상당수가 오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총세력은 성 밖 사람들만으로도 4천은 넘을 것 같아 보였다. 국왕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이쪽의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의기충천한 상태였다. "이건 금방이라도 건드려 오겠군." "그렇군요." 도라 장군도 골치 아픈 표정으로 끄덕였다. 이쪽의 병력은 상대편보다 약간 모자란 정도였지만 저쪽에는 성이 있었다. 성벽을 상대로 하는 전투는 어렵다. 정면 승부는 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철칙이다. 병력은 사실상 열 배는 필요로 하며 거기에 많은 시간을 들여 보급을 차단해야 하고 혹은 압도적인 공성용 무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국왕군에게는 그런 시간도 자원도 없었다. 그리고 일제 공격을 받았다간 지금의 마을로는 단숨에 밀려버리고 만다. "어떻게 할까요?" 도라 장군이 물었다. 빠르게도 승부처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장군은 이 젊은 국왕의 무용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믿기도 했지만 대관식이래 겨우 반년 만에 왕좌에서 추방당한 국왕에겐 아직 군대를 통솔한 전투 경험이 없었다. "모여있는 것은 근처 영주의 세력뿐인가." "아니오." 장군은 잘 살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근위병단의 일부도 파병되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군. 그렇다면 영주들은 싫어도 진을 펼칠 수밖에 없겠지." 국왕군을 격파했을 때의 보상은 듬뿍 약속되어 있을 거라 생각해도 틀림없을 것이다. 대략 적의 세력을 보아둔 뒤 마을로 돌아와 마을 사람으로 변장시킨 첩자를 풀어서 상대방의 상황을 자세히 탐색해 오도록 시켰다. 역시 근위병단으로부터 2개 연대가 파견되어 있다고 했다. 그 전력이 대강 천명, 와이베커의 성주와 그 일족의 전력이 천오백, 근처로부터 모여든 영주의 세력이 합쳐서 사천에 가깝다고 하니 총세력은 6천 이상이었다. 이쪽의 두 배가 훨씬 넘었다. 게다가 견고한 성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늦던 빠르던 승리는 절망적이라고 생각되었다. 단 한가지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국왕군은 자기들 스스로의 이상을 믿으며 의기백배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사기만으로 전쟁을 할 순 없지." 이것도 또한 진실이었다. 전력의 부족을 무언가로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날 해질 무렵 국왕의 숙소였다. 신중한 어조로 도라 장군이 결연히 말했다. "저는 이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은 기합만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사기가 승리요인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맞는 말이지만 이쪽의 피해가 적지 않을 걸세.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어." "꼬마 아가씨가 말했던 대로 저쪽을 이리로 끌어들여 볼까요?" 이븐이었다. 나시아스와 가렌스, 그리고 샤미안 도라 장군의 저택 이래로 완전히 익숙해진 진용들이 나란히 있었다. 나시아스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폐하, 전투가 시작되면 그렇게 여유로운 일을 할 수 있을지 어떨지." 가렌스도 끄덕였다. "아군을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포트남과 민스 세력이 온다면 병사의 수도 그다지 큰 차이가 안 나게 됩니다." 마레바에 가까이 갈 때까지는 코랄 측도 별다른 수를 쓰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탓인지 역전의 무장인 그들도 신속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국왕은 마지막으로 소녀에게 물었다. "네 의견은 리?" "아군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 신중하게 대답한 소녀였다. "저 정도의 군세잖아. 태세가 정비되면 즉각 일체 공격으로 들어올 테고 그렇게 되면 이쪽의 병력이 얼마나 남게 될까가 의문스러워." "거기까지는 나도 완전히 동감인데 그럼 너라면 어떻게 할 테냐?" 소녀는 조금 생각한 뒤 말했다. "다르 경이 썼던 수법은 어떨까. 적 쪽은 저 성을 믿고 있을 테니까." "성을 태우자고?" 국왕은 놀라서 되물었다. "안될까?" "아니. 전술로서는 확실히 효과적이다. 성이 타버린다면 아무리 대군이라고 해도 단번에 투지를 잃고 지리멸렬하게 도망갈 것이 틀림없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어떻게 태우지? 야밤을 틈타서 기습 공격으로 불화살을 쏜다 해도 돌벽에 튕겨 나오는 결과밖에 안될 거야." "그러니까 안에서부터 불을 붙이면 돼." 이븐이 푸른 눈을 커다랗게 떴다. "무슨 재주로?" 소녀는 잠자코 있었다.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리고 국왕을 바라보는 그 모습은 허가를 구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국왕은크게 당황하여 황급히 말했다. "리, 기다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총대장은 너니까 해도 좋다고 하면 갔다 올게." "그러니까 잠깐 기다리라고! 너 설마 혼자서 성안에 잠입해서 불을 붙이겠다는 거냐?!" 마실 것을 입에 물고 있던 가렌스가 성대하게 뿜어내 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경악해 있었다. "뭐?" "잠깐 전사여, 그건." 라모나 기사단 대표 두 사람은 그래도 온건하게 반대의사를 표시했지만 이븐과 샤미안은 거의 비명을 질렀다. "안돼요! 그런 짓은!" "아무리 뭐라고 그래도 말도 안 돼!" 샤미안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고 이븐은 분개하는 어조로 책상을 때렸다. "이봐 꼬마 아가씨. 그쪽이 물론 어디 보통 아가씨가 아닌 건 잘 알았다 이거야. 그래도 말이지 봤잖아 성 밖에도 방책위에도 병사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눈을 빛내고 있다고. 그런 안에를 무슨 재주로 돌파해 들어간다는 거야? 게다가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걸로 저쪽이 전의상실을 일으켜 준다면 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꼬마 아가씨, 죽을 셈이야?" "설마." 소녀는 부정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아무래도 그렇게 들리질 않았다. 나시아스도 상냥한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띄우며 말했다. "리, 그대가 하는 일이니까 물론 경계가 엄중한 저 성에도 들어갈 순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나오는 건 불가능해요. 아무리 그대라도 말이지. 운 좋게 적병에게 발견되지 않는다 해도 자기가 붙인 불에 둘러싸여 나오지 못하게 될 거야." "동감이야." 국왕이 끄덕였다. "너무 위험해. 나는 그런 도박으로 너를 잃을 생각은 없다고." "하지만 시간이 없어!" 소녀는 하나하나 정확히 지적하기 시작했다. "병력은 저쪽이 압도적으로 많아. 전면전이 돼서 제대로 서로 부딪히게 되면 이쪽이 얼마나 사람을 잃게 될지 알수가 없어. 그렇다고 설마하니 화살 한 대 쏴보지도 않고 퇴각할 수도 없어. 그렇다고 아군인 영주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엔 지형적인 무리가 있어. 덤으로 적은 내일이라도 총공격으로 나올 수 있을 태세야.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 오늘 밤 내에 뭔가 수를 쓰지 않으면 안돼." "오늘밤?" 전원의 합창이 되어버렸다. "그래. 잘 되면 내일 아침 해뜰 무렵 성에서 불꽃이 오를 거야. 그렇게 되면 적 쪽은 분명히 당황하겠지. 거기에 이쪽의 군세가 한번에 밀고 들어가는 거야. 어때?" 타르보가 웬만큼 어이없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 이 소녀는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습니다. 조금 쉬게 하던가 후방으로 물러가 있게 하는게 좋을 듯 합니다." "아 뭐... 조금 기다려." 국왕은 왠지 깊은 눈빛이 되어 있었다.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지금 말한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전투는 우리들의 승리다 하지만..." "정말로 할 수 있냐고 묻는 거지?" "아니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이다." 국왕은 진지함 그 자체의 표정으로 다시 확인했다. "너는 어쩔거냐? 무사히 돌아올 수 있는 거겠지?" 소녀는 빙그레 웃었다. "당연하잖아. 아직 마레바나 코랄도 가야 되는데. 페르난 백작도 구하지 않으면 안되고. 내일 아침에는 합류할게." 다른 얼굴들은 이 과정을 믿어지지 않는다는 일념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가볍게 일어섰지만 거기에서 일침을 두었다. "내일 아침까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마. 잘 될지 어떨지 모르니까 말야." "기다려라! 그런 애매한 걸로 이런 홍두깨 같은 제안을 한 게냐?" 도라 장군의 날카로운 질문이었지만 소녀는 천연덕스럽게 "안 돼?" 하고 대꾸했다. "절대로 확실한 전술이라는 게 있으면 한 번 보고 싶군 그래. 그래도 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가는 거야. 뭔가 할 말 있어?" 장군은 분연히 일어서서는 책상을 내리쳤다. 그렇다고 말하기 보다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기세였다. "너는! 이 중대사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대기가 떨리는 듯한 일갈이었다. 끝끝내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 했다. 국왕을 포함해 그 장소에 있던 모두가 목을 움츠리는 가운데 소녀는 가볍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저기 말이야 장군. 나는 이 군대에서 확실히 말해 그냥 외부인이야. 델피니아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이 나라의 정권이니 미래니 하는 것엔 흥미도 없어." 불에 기름을 붓는 것 같은 말이었다. 이번에는 타르보가 자신의 연령도 잊고 상대가 그저 소녀라는 사실도 잊은 채 부르짖었다. "이 불충한 자가!" "흥미가 있는 건 이곳에 있는 전혀 왕답지 않은 왕을 옥좌에 앉히고 왕관을 씌워보고 싶다는 그것 뿐이야." 이븐의 푸른 눈동자가 조금 웃은 것 같았다. 나시아스도 가렌스도 미소를 띠며 끄덕였다. 그러나 장군은 굳어진 표정을풀지 않았고 타르보는 머리에서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특히나 타르보는 건방진 소녀의 말에 상당히 화가 났던 것이리라. 국왕이 이 소녀를 제멋대로 하게 놔두고 있다는 것을 미리부터 씁쓸하게 생각하고 있던 탓도 있어 미숙한 부하를 야단칠 때처럼 굉장히 험악한 모습으로 끄짖었다. "알겠느냐 꼬마.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군의 규율이라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각자가 부서를 맡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알아 대장의 지휘하에서 일제히 움직여야 그제서 승리의 여신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너같이 제멋대로 하물며 제대로 할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일을 떠벌려서 규율을 어지럽히는 어리석은 자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목숨을 단축하게 되는 거다. 그뿐 아니라 군에 있어서도 치명상이 된다. 잘 기억해 둬라!" 지당한 정론이었지만 소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싹하고 목소리가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규율을 중요시하다가 공멸共滅하라는 거냐." 장군도 타르보도 놀라서 멍해졌다.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뭐?" "규율을 중시하는 건 꽤 좋은 일이지만 그걸로 이기지 못할 때는 어쩔건데? 유효한 수단이 있는 걸 알고 있는데 규율에반하는 일이니까 쓰지 않고 결국 참패를 맞이하라는 건가 응, 어때?" 어떠냐고 말해도 남자들은 다른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무리도 아니다. 바로 지금까지 다소 별나긴 해도 사랑스러운 소녀였는데 돌연 무언가 틀린 존재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녹색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너희들은 자멸하는 건 너희 맘대로지만 나는 싫으니까 말이야. 그런 개죽음에 휘말려줄 줄 알아. 조금은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봐. 단독행동은 안 된다고 너희들은 말하는데 왜 안 된다는 거냐? 삼천 명의 대군이야. 나 하나 빠진다고 무슨 지장이 있어? 오히려 실패한다해도 그때는 모로지 일어나 총공격을 하면 될거 아냐. 애초에 이 상황에서는 그 전법을 쓸 수밖에 없는 거니까." 무서운 소리를 간단하게 말했다. 그런 짓을 하면 얼마나 전력을 잃을 지 알 수 없다고 방금 전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말이다. 조금이라도 그 부하를 가볍게 해주기 위해서 너희들하고 아무런 연관도 없는 내가 몸 바쳐서 적 측의 성을 공략해주겠다고 하는 거다. 고맙다는 소리는 듣지 못할 망정 잔소리 듣고 있을 생각은 없어. 주절주절 떠들어대지말고 기분좋게 보내주는 게 어때!" 두 사람은 눈을 뒤집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무례한 말투를 들었던 적이 없었던 것이리라. 노여움을 느끼기보다는 기가 막혀서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국왕을 제외한 전원이 마찬가지로 아연해하고 있었다. 분명히 무언가를 들었지만 귀가 받아들이지 않는 듯한 상황이었다. 소녀는 험악한 얼굴 그대로 국왕을 돌아보았다. "성에 와 있는 연대장의 이름은 아나?" "알지만 왜?" "그 연대장 두 사람은 너한테 있어서 살려둬야 할 인간이냐 아니면 쓸모 없는 인간이냐." 국왕은 입가만으로 웃으며 단언했다. "없어져 준다면 그야말로 그 이상 가는 일이 없을 녀석들이지." "한눈에 연대장이라고 알 수 있을 표식은?" "간단해. 푸른 안감의 백은색 외투에 네 개의 별을 새긴 투구를 쓰고 있는 놈들이다." "알았다." 끄덕이고는 소녀는 숙사에서 나가버렸다. 아직도 경악하여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도라 장군에게 국왕이 살짝 말을걸었다. "장군, 말은 난폭했지만 지금 것은 저 아이가 옳아." "폐하, 대체 저건 뭡니까 저 소녀는..." “저 아이는 알고 있는 걸세. 상황타개를 위해서는 되던 안되던 전군공격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서는 우리 전력이 급격하게 줄어들 것도 알고 있는 거야. 그때문에 성에서 무언가를 하겠다고 제안한 거다. 격려해주지는 못할 망정 쓴소리를 하고 있을 입장은 아니지." "하지만 말씀입니다 폐하! 큰소리를 치는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하지도 못할 일을...." "장군은 이번에야말로 그 수염을 통째로 뽑아서 드시고 싶으신건가?" 끝까지 온화한 태도로 국왕은 말했다. "저 소녀는 허풍따위를 칠 위인이 못돼. 게다가 우리들에겐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저 소녀에게까지 불가능하다고 할 수도 없고. 그것은 흑왕 사건으로 증명이 끝났을 텐데." "분명히." 나시아스가 동의했지만 지금의 소녀에게는 역시나 놀란 듯 했다. 한번 저런 말투로 국왕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을 본 일이 있지만 박력이 틀렸다. 도라 장군의 안색을 살피면서 살짝 물었다. "그건 그렇지만 화나게 하면 무섭다고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것은 이걸 두고 하신 것이군요." "저 정도라면 아직 서막이야."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침묵이 그 장소를 가득 채웠다. 저걸로 서막이라고 한다면 제대로 막이 오르면 대체 어떻게 되는거냐고 전원이 생각한 것이다. 가렌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우뚱했다. "하지만 연대장의 표식같은 걸 물어서 어쩔 셈일까요." "잘 되면 없애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암습이라는 건 그다지 칭찬할만한 전술은 아니지만 그래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수하의 대대장들을 설득할 때 직접적인 장애물이 사라지는 거니까." 아주 진지하게 단언한 국왕을 보며 그 장소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장군, 병사들에게는 이 일에 대해서 말하지 말게. 내일 아침 적의 성으로 일제공격을 가한다는 것만 전달해 두도록." "폐하." 딱딱한 얼굴의 장군이었다. 아무래도 이것만큼은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폐하는 그렇게까지 그 소녀를 의지하고 계신 겁니까." 국왕은 살짝 웃었다. "의지하고 있는 게 아니야. 믿고 있는 거다. 저 소녀가 할 수 있다고 말했으니 할 수 있을 것이고." "폐하, 전쟁이라는 것은 한 사람 두 사람의 행동으로 어찌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용사는 결코 병사를 이끌고 있는 한 명의 지휘관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것은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터." "물론 알고 있네." "그렇다면 거기까지 개인에게 의지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저런 소녀를 말인가?" 도라 장군의 기분은 잘 알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해 엄격한 진언을 하는 것도 이쪽의 몸을 걱정하고 앞일을 걱정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전에는 아버지의 친구였고 소년 시절부터 자신을 진짜 아들처럼 귀여워 해주었던 사람인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인과因果 때문에 지금은 충실한 부하가 되어 있었지만 일방적으로 애정을 쏟아 붓는 그 모습은 예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국왕은 달래듯이 미소를 지었다. "의지하는 것처럼 보인다니 미안하네. 하지만 장군, 공정히 생각해도 그 소녀가 말하는 바가 정확하다고 생각지 않나." 장군은 괴로운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 라고 한다면 거짓말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말대로다 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다. "저 아이가 성공해준다면 우리들의 승리, 실패한다고 해도 아무런 손해가 있을 리 없어. 그렇다면 시켜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네. 그런 것뿐이지만 무언가 이견이 있다면 듣겠네." 반론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회의는 그것으로 해산하게 되었다. 와이베커 성은 상당히 견고한 구조였다. 전체적으로 흙을 쌓아 올린 위에 지어져 본당과 제2당의 두개의 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성벽 위는 톱날을 박아넣은 흉벽으로 되어 있고 벽의 5개소에는 탑이 서 있었다. 하나는 풍차탑이었지만 나머지는 물론 망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추가로 부지 전체가 강의 삼각주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무언가가 다가온다면 한눈에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성 밖에도 성대하게 모닥불들이 피워져 병사들이 교대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중심주의 진영에서 바라보면 구화(횃불을 피우는 등롱)에 둘러싸인 성은 밤하늘에 우뚝 솟은 거대한 산과 같았다. 이 성은 지키기에 쉽고 공략하기에 어려웠다. 이상적인 진지陣地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병사들 사이에서도 싸우기전부터 이겼다는 분위기가 퍼져있었다. 그에 비해 눈앞은 강이었다. 마침 좋은 날씨가 계속되어 그다지 깊진 않지만 사람의 가슴까지는 올 듯 했다. 말로 건너려면 얕은 곳을 골라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국왕군이라고 해도 총세력이 이쪽의 절반 이하라니. 벌써 이긴거나 진배 없구만." "그럼. 불쌍하기도 하지. 임금님은 코랄을 다시 한번 보지도 못할 거라더만." 나눠진 술을 마시며 고주망태가 되어 들뜬 기분으로 그런 소리를 떠드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야영지의 불빛을 소녀는 반대편 강가에서 몸을 낮춘 상태로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무성하게 자란 나뭇가지나 수풀이 숨겨주고 있었다. 도라 장군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한 어려운 일이지만 소녀는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다. 혼자라면 정면에서 들어갔다 나오는 것도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야영지에 나와있는 군대가 생각보다 많았던 것은 오산이었다. 우선은 저것을 어찌하지 않으면 섣불리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가만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전쟁하는 법을 배우고 검의 취급법을 배워도 그것을 이런 식으로 실전에서 써먹을 때가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이것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어떤 흐름에 의해 자신은 저 남자와 만나고 이렇게 목숨을 건 한 편이 되게 된 것일까. 배를 대고 엎드린 채 저도 모르게 자문한 소녀였다. 도라 장군이 말했던 대로 본래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싸움인 것이다. 델피니아의 국왕이 누구든 이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일 터였다. 이렇게 고개를 들이밀고 도와주는 것도 솔직히 말하자면 좋은일인지 나쁜 일인지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최소한 저 남자에 대한 호의만은 의심할 수 없었다. 재미있는 남자였다. 방금 만났을 뿐인 자신을 진짜로 믿어 주는 데다 친구라고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한 순박함은 소녀가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를 목숨걸고 구해내려 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던지 어떻게든 저 남자를 아버지와 재회시켜 주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소녀의 비범한 귀가 뒤로부터 살짝 접근해 오는 사람의 기척을 느꼈다. 들켰나 하고 허리의 검에 손을 댔지만 나타난 그림자를 보고는 자세를 풀었다. 이븐이었다. 낮게 포복한 채 가까이 다가와서는 소녀와 나란히 엎드린 상황이 되었다. "뭐하는 거야?" "뭐어, 이렇게 멋진 역할을 꼬마 아가씨 혼자한테만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해서 말야. 뭔가 내가 할 일은 없을까." 이것도 저 국왕과는 다른 의미에서 희한한 남자였다. "유별난 사람이군. 이런 위험한 역할을 일부러 도와줄 것도 없을 텐데." 이븐은 가볍게 턱을 긁으며 등뒤를 가리켜 보였다. "나도 말이야. 뒤에 있는 녀석들한테 똑같은 소리를 했거든. 저 꼬마 아가씨 혼자서 활약을 보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하다고. 한 수 도와주러 간다면서 말이야. 다만 목숨이 걸려있는 일이니까 따라오지 않아도 좋다고 거절했더니 목숨 거는 일 따위는 부두목하고 있으면 언제나 있는 일이라고 대꾸하더란 말이야. 뭐어 분명 그 말대로라서 대꾸할 수가 없었던 거지만." 엎드려 있는 채로 소녀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타우 진용들이 전부 와있는 거야?" "아아." "그렇다면 부탁이 있어. 저 야영지를 어떻게든 하고 싶어. 일시적으로라도 성의 주변에서 끌어내고 싶은데 부탁할 수 있을까." "해보지 뭐." 이것도 상당히 어려운 일일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무언가 갑자기 생각난 듯 작게 웃었다. "아니 뭐, 아까 그 도라 장군에게 쏟아부었던 말들에는 아주 뒤집어졌어.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지만 도라 장군이라고 하면 선대의 임금님마저도 뭔가 말할 때는 옥좌에서 내려와서 상대의 눈을 마주보고 이야기했을 정도의 거물이라고. 불쌍하게도 그 영감님 턱이 빠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구." 그 거물을 영감님이라고 부르는 이 남자도 상당하다 아니할 수 없다. "나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야." "분명 그렇지.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해서 저 안에 들어갈 생각이야?" "여기서부터 헤엄쳐서 반대편 강가를 올라간다.그 뒤엔 사다리를 걸고 올라가면 돼." "그러니까 어떻게?" 소녀는 들고 있던 짐을 풀어 보였다. 안에서는 몇 자루의 단검과 곤봉 등 야단스러운 물건들이 이것저것 나타났지만 그중에서도 커다란 갈고리가 달린 튼튼하게 짜여진 길다란 밧줄이 있었다. "이런 일도 있을까 해서 대장간에 부탁해서 만들어 뒀어." "준비성 좋구만." 한눈에 보기에도 도둑질용 도구였다. 성벽 위에 걸어둔 밧줄을 기어오르는 것이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기술은 아니지만 이 소녀라면 못할 일도 없다. 그곳에 세 번째 목소리가 끼어 들었다. "그런 게 있다면 나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소녀는 입을 딱 벌렸다. 몸을 낮추고 있던 사실도 잊어버리고 뛰어오를뻔 했다. "월! 뭐하고 있는 거야?!" 억누른 목소리이면서도 야단치는 어조가 된 것은 물론이었다. 국왕은 찬란하 전투복장을 벗어둔 채 방랑시절과 똑같은 자유전사의 복장이었다. 이쪽도 몸을 낮춘 채 다가와서는 소녀와 나란히 엎드렸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 혼자한테 이런 위험한 일을 시켜놓고 구경하러 앉아있을 수도 없어서 말이야. 도와주러 왔다." 소녀는 짐승과 같이 으르렁 거렸다. 그리고는 숨죽인 낮은 목소리라고는 해도 쏜살같이 국왕에게 뒤집어씌운 욕설과 잔소리의 무시무시함은 산적인 이븐마저도 얼굴을 돌리고 싶어질 정도의 것이었다. 최소한 열 번은 불경죄로 감옥에 쳐넣어져도 할 말 없을 정도의 설교를 펼친 뒤 소녀는 단호히 진영에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알겠어. 너는 국왕군의 총대장이란 말이야! 삼천의군대는 너 하나를 신주로 삼아서 싸우고 있는 거라고. 내일이면 결전이 시작되는데 당사자인 신주단지가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이런 일은 남한테 맡겨두고 너는 본진에서 얌전히 있으면 돼. 그것도 일이란 말이다!" "보통의 대장이라면 그걸로 괜찮겠지만 말이야." 남자도 양보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나는 지금까지 계속 선두에 서서 뛰어나가 싸우는 전투만 해와서 말이야. 갑자기 장식품이 되라고 말해도곤란하단 말이다." "월, 너는 임금님답지 않은 게 장점인 왕이긴 하지만 말야. 그것도 때와 장소가 있는 거다. 여기에선 국왕에게 어울리는 태도가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이건 내 전쟁이야." 남자는 후덕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네가 말했었잖아. 자신은 외부인이라고. 분명히 그 말대로다. 제일가는 당사자는 바로 나지. 그러니까 이 난관에 최소한 참가라도 하는 게 의무겠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 소녀를 남자는 황급히 막고 원래대로 지면에 엎드리게 했다. 섣부른 움직임을 일으키면 반대편이 눈치를 채버리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인간의 몸인 내가 발도우의 딸을 걱정하다니 분수를 모르는 짓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말이야. 너 혼자 이런 어려운 일을 맡겨두고 내 눈이 닿지 않는 장소에서 너 혼자 싸우게 만드는 건 싫은 거야." 애원과 변명이 적당히 섞인 말투였다. 소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노여움이 사라지고 가만히 남자를 뜯어보고 있었다. 옆에 있던 이븐이 낮게 웃었다. "음 뭐어, 그런 거다. 높은 데 앉아서 구경하는 건 성질에 안 맞아." 엎드려있는 소녀는 어깨를 푹 늘어뜨렸다. 농담이 아니다. 총대장이라는 것은 특등석에 앉아 구경하는 것으로 먹고 사는 것 아닌가. 아군이 곤란한 처지에 있어도 그것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너무 잘 되어가고 있다 해도 들뜨지 않고 언제나 태연하게 있는 것이 우수한 지휘관의 제일 조건인 것이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태연한 것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도 없다. 둔하다고 할 정도로 두툼한 신경이었다. 그러나 총지휘관이 야밤의 기습에 참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전대미문 그것이야말로 규율위반의 최고봉이다. 기가 막혀 하면서도 일침을 놓았다. "도라 장군에게는 숨기고 왔겠지?" "당연하지. 말했다간 침대에 꽁꽁 묶이게 됐을 걸." 소녀는 머리를 감싸쥐고 신음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산적에게 동정의 눈초리를 보냈다. "네가 이 바보에 대해 브란한테 한탄했던 심정이 너무 이해가 간다." "그렇지 응? 한탄하고 싶어지지?" 소녀의 오른쪽에서 이븐이 묘하게 위세당당하게 나섰다.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이 바보자식은... 하고 생각하게 되지?" "어이 왜 내가 너한테 그런 소릴 들어야 돼." 이번엔 왼쪽에서 월이 발끈해서 반론한다. "여기까지 어슬렁거리고 나온 네가 남의 말 할 처지냐. 잘못하면 이 녀석한테 방해가 될 뿐이라고." "아 이 자식. 타우의 자유민을 우습게 보지마. 꼬마 아가씨 혼자로는 어렵겠다고 생각해서 가세하러 온 거잖아. 너야말로 도라 장군한테 어마어마하게 벼락 맞을 거나 각오해 둬라." "무슨 소리야. 성을 공략해서 점령하면 벼락도 비켜갈 거 아니냐." "그을쎄다. 그렇게 잘 되겠냐. 상대는 너한테 요만큼도 뒤질 것 없는 돌머리라고." "얼씨구 잘도 말했겠다." "얼마든지 말해주지." 머리 위에서 오고가는 남자들의 문답에 소녀는 그야말로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갑자기 진지한 얼굴이 되어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자 꼬마 아가씨.어쩌면 되는 거야?" "시간이 아까워. 빨리 하는 쪽이 좋겠어." 남의 기력을 뿌리 채 뽑아놓고 잘도 그런 소리를 한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현명하게도 입에 담지 않은 채 간단한 작전을 설명했다. 싸우기 전부터 완전히 이긴 분위기로 들떠 있던 야영지에 긴장감이 퍼져나간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어둠을 틈타 적진에 시찰을 간 것인지 혹은 무언가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인지 몇 명인가가 황급히 다리를 건너와 경비병에게 속삭였던 것이다. "어이 큰일이다. 국왕군은 오늘 밤 내로 강을 건너서 코랄을 향할 셈이야!" "뭐라고?" "정말인가?" "으응. 틀림없어. 바로 저쪽 불을 끈 채 대군이 이동중이야!" 정말이라면 큰 일이다. 들떠서 떠들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바라지도 않았던 좋은 기회인 것이다. 보고를 들고 온 것은 기사도 아니고 전투를 위해 징집된 농부인듯 했지만 이 정보는 즉시 무장격의 인물에게까지 전달되었다. "국왕군이 강을 건넌다고? 확실한가?" "아니 저 밑의 녀석들의 소문이라서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도강 연습을 하려던 자가 비밀리 이동중인 대군을 발견해 즉시 달려와 보고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놔둘 순 없지. 잘못된 보고라고 해도 확인하지 않으면 안되겠군." 성밖의 삼각주에 진을 치고 있는 세력이 빠르게 움직였다. 성안도 시끄러웠다. 2동에서 대기중이던 부대도 국왕군의 탐색에 가세해 성안에 남는 병사는 꿈틀대는 횃불의 불빛과 용맹스럽게 달려나가는 부대를 믿음직스럽게 배웅했다. 성벽은 벽을 따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곳에 서 있는 경비병은 탑에서 근무하는 자와는 별도로 본래라면 각 방향을 보며 눈에 불을 밝히지 않으면 안되지만 지금은 당연하다는 듯이 부대가 출진하는 성문의 방향, 즉 성의 서쪽방면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면으로부터의 싸움은 승산이 없다고 보고 고식적인 수단을 쓰는 게로군.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경비병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경멸스럽다는 말투였지만 흥분한 느낌이 강한 어조였다. 승리가 가까이 왔다는 예감에서 나온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 소동의 정반대인 동쪽 방책 아래에 달라붙듯이 하여 엿듣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작은 그림자가 하나, 그리고 큰 그림자가 둘. 소녀와 국왕 그리고 이븐이었다. "어째서 너까지 따라오는 거야?" 강을 건너기 전에 두 사람 모두 그렇게 물었지만 답은 "이쪽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라는 것이었다.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유상종이라는 건 참 맞는 말이다. 덕분에 이런 커다란 남자를 두 사람이나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된다니 너무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옷을 벗어 머리 위에 묶어 얹고 세 명은 소리 없이 강을 건너 방책 아래에서 다시금 옷을 입었다. 그때쯤에는 중간주에서 커다란 소동이 일어났고 이븐은 만족스럽게 말했다. "브란 일행이 잘 했나보군." "하지만 그들 쪽은 괜찮은거야?" "걱정말아. 이런 일이라면 그 녀석들에겐 딱이니까. 게다가 이렇게 어둡다면 말이야. 그것보다 우리 쪽이 훨씬 어렵다고." 이븐이 말한 대로였다. 지금은 대부분이 서쪽으로 몰려가 있지만 성안에는 아직 경비병이 많이 있을 게 틀림없는 것이다. 거기에서 도적용구의 활약이 나올 차례였지만 소녀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밧줄을 묶어 어깨에 걸쳤다. 단검은 허리띠에 끼우고 한 손에는 곤봉을 쥔 채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도와줘." "또 발판이냐." "아니 좀더 빠른 방법이 있어." 그리고는 잠시동안 그들은 무언가를 논의했고 남자는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자." 소녀는 약간 물러났고 남자는 벽에 등을 붙이고 소녀 쪽을 보고 섰다. 뭘 시작하려는 건가하고 이븐이 바라보고 있자 소녀는 남자를 향해 짧게 달려갔고 남자는 몸 정면에서 양손을 깍지껴 낮게 대주고는 기세 좋게 달려오는 소녀가 깍지 낀 손을 밟았을 때 온몸의 탄력을 이용해 있는 힘껏 양손을 위로 올렸다. 재주꾼들이 자주 보이는 기술이었다. 반동을 이용해서 공중에 높이 솟아올라 회전해 보이거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남자는 거의 똑바로 소녀를 위로 던져 올렸고 소녀는 멋지게 방책 위에 착지했던 것이었다. 곧 위에서부터 가느다란 밧줄이 내려왔다. 아연해있는 이븐을 곁눈질로 보며 남자는 줄을 잡았고 그 큰 몸집이 거짓말처럼 휘리릭 올라가고 있었다. 역시 산에서 자란 값어치는 했다. 이븐도 서둘러 뒤를 쫓았다. 성벽의 이곳저곳에는 구화가 세워져 있지만 양동 작전의 효과 더분에 벽을 오르는 두 사람의 모습은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듯 했다. 방책 위에 도달해 내부를 보자 바로 아래쪽에 튀어나온 부분이 있었다. 그저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사람이 다섯 명 정도 나란히 지나갈수 있는 폭이었다. 망보기와 이동을 겸한 통로였다. 이 통로는 벽의 안쪽에 전부 만들어져 있어 벽의 각개소에 있는 탑에 연결되어 있었다. 세 명은 재빨리 통로에 몸을 숨기고 주변을 살폈다. 왼편은 길고 똑바로 뻗어나와 탑으로 이어져 있었다. 상당한 거리가있었다. 그에 비해 오른편의 탑은 꽤 가까웠다. 소녀는 몸을 숙인 채로 오른편의 탑을 향해 소리 없이 몰래 다가가 아무렇게나 뛰어들었다. 놀란 것은 탑에 있던 경비병이었다. 국왕군이 이동하는 기색이라는 것 때문에 대부분의 병사가 구경하러 이동해있었지만 아무리 그대로 탑을 비워둘 정도는 아니었다. 다섯 명 정도가 남아있었다. "뭐냐?!" 한 사람이 외쳤을 때에는 소녀의 주먹이 그 병사의 배를 찌르고 있었다. 다른 네 명은 갑작스런 사태에 경악하면서도 이 침입자를 격퇴 혹은 동료에게 알리려고 했지만 소녀 쪽이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 명을 때려 눕혔다. "침입자..." 최우의 한 명이 가까스레 그렇게 외치려고 했지만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도 전에 곤봉의 일격을 맞아 바닥에 털썩 쓰러 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의 빠르기였ㄷ. 뒤에서 달려온 이븐과 월이 끼어들 시간도 없었다. "가자." 아래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살피던 소녀가 짧게 말했다. 남자들은 말없이 그 말에 따랐다. 어디에 불을 놓을 것인가. 두사람의 연대장을 쓰러뜨리는 것은 불을 놓기 전인가 후인가. 불을 붙인 뒤 탈출수단은 어찌할 것인가. 자세한 것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다행히 한층 내려갈 때까지 다른 병사들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이 어둠속에서 나아가려 했을 때에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교대 병사인 듯 했다. 뛰어나갈 뻔했던 세 명은 즉시 탑 안쪽으로 되돌아가 몸을 숨겼다. 입구 양측에 월과 이븐이 달라붙어 들어온 자들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계단을 향하자 그 등뒤에서 뛰어들었다. "우왁!" "무슨..." 단 한마디를 흘리고 즉시 그 병사들은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그동안 소녀는 바깥 상태를 엿보며 현재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눈앞이 본동이었다. 군데군데 구화가 세워져 있는 거대한 모습이 어둡고 육중하게 우뚝 솟아있었다. 활발하게 움직이던 이동과는 달리 조용히 가라앉아 장엄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어떤 공격을 받더라도 함락되지 않는다는 자신감과 안심의 표현이리라. 고개를 돌려 지상을 쳐다보니 곡물을 적재하기 위한 풍차탑, 가축용 곳간, 마굿간, 부엌, 그리고 일반병사를 위한 병참이 보였다. 불을 놓을만한 곳은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다. 아니 좀 더 좋은 것이 있었다. 벽에 기대듯이 거대한 땔감의 산이 쌓여져 있는 것이다. 저것이 타기 시작하면 성안은 커다란 소동에 휩싸일 것이 틀림없었다. "월." 작은 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코랄에서 온 연대장은 어느 부근에 있을 것 같아?" 남자는 턱으로 눈앞에 있는 본동의 최상층을 가리켰다. "아마 저기겠지. 주인의 침실에도 가까운 곳이다." "그렇군." 더욱더 안성맞춤이었다. "저곳에서 불이 난다면 멀리에서도 잘 보이겠지." 아무리 이븐이라고 해도 안색이 변했다. "꼬마 아가씨, 설마 저기까지 숨어 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벽을 하나 넘어가는 것과 본동의 천수각까지 잠입하는 것은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우물을 파려거든 끝까지 파라잖아." 남자가 놀리듯 말했다. "이것도 타버린 배라는 거겠지." 특별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로 소녀가 말했다. 최초로 변화를 눈치챈 것은 탑에서 이동용 통로로 나온 병사였다.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국왕군의 기척이 나지 않나 눈에 불을 켜고 있었지만 몰래 통과하려 하면서 불을 들고 가는 바보는 없다. 그런데다 이렇게 멀리서는 사람 눈으로 확인하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아예 포기하고 문득 성안으로 시선을 돌린 직후 입을 딱 벌렸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장면을 본 것이다. 그것도 한 군데가 아니었다. 장작의 산더미에서도 식료를 저장해둔 풍차탑에서도, 부엌에서도 하얀 연기가 피어올라 장작더미에서는 이미 붉은 화염이 치솟기 시작하고 있었다. 큰일이었다. "불이다!" 절규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때쯤에는 지상에 있는 자들도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어디가 타고 있는 것인지 어째서 불이난 것인지 어두운 만큼 파악하기 힘들었으리라. 횃불을 손에 든 병사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커다란 목소리로 무언가지시가 오갔다. 한시라도 빨리 불을 끄라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다행히 눈앞은 강이다. 성문을 크게 열고 병사들은 모래톱으로 달려나갔다. 손에 손에 물을 퍼올릴 것을 들고 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대규모 소화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런 때 국왕군에게 공격받았다간 단숨에 무너지고 만다. 그런 불안이 가슴속에 있는 만큼 어떤 병사도 필사적이었다. 한편 성주를 비롯하여 이 전투의 중심인물들은 남자가 예측했던 대로 본동의 최상층에 있었다. 아군은 적의 배를 훨씬 넘는 수이니 만큼 성주는 안심해서 자고 있었던 것이지만 성안에 벌어진 화재 보고는 즉시 성주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이 성의 주인은 신의에 의해서라던가 혹은 동지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득을 계산하여 개혁파에 붙기로 결정했던 인물이었다. 국왕군과 개혁파의 양쪽으로부터 거의 동시에 손을 빌려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빈털터리에 가까운 국왕의 편에 붙어봤자 얻을 건 아무 것도 없다. 더구나 지금 현재 코랄을 장악하고 있는 개혁파에게 밉보이는 것은 손해라고 계산했다. 그래서 국왕군이 근처에 올 때까지 아군이 되는 척 하여 방심시켜둔 뒤 공격을 하자며 기다리기로 했다. 개혁파는 기뻐하며 반드시 국왕군을 저지하도록 혹은 국왕을 제거하도록 유명한 근위병단의 일부를 파견해주었다. 모든것이 잘 흘러간다면 눈이 돌 정도의 보상을 해주마 약속해주었다. 그랬던 만큼 방심하다 패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전야제에 어느 정도 술을 마시고 기분 좋게 잠들었지만 순식간에 뛰어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다. 이것은 코랄에서 파견된근위연대장도 마찬가지였다. 이쪽도 황급히 몸단장을 끝낸 듯 했다. 안내하는 시동도 통하지 않고 성주의 침실로 뛰어 들어왔다. "성주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니 그것이 부끄럽게도 성안에 불이 난 것 같습니다." "뭣이라고요?" "설마 적이 한 짓은 아니겠지요." "아니요 아니요." 성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마 취사하다가 불을 제대로 꺼두지 못한 것이겠지요. 성벽 바깥에서 화살을 쏴봤자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까지 접근하도록 내버려뒀을 리가 없습니다. 곧 불을 끌 수 있을 터이니 부디 안심하십쇼." 당황과 식은땀을 웃는 얼굴로 얼버무린 변명이었다. 연대장 두 사람은 잠자코 그 변명을 듣고 있었다. 성주가 소화작업을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도와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지금은 손님이기도 하거니와 집안에서 일어난 잘못은 집주인이 모든 책임을 가지고 처리해야 할 일이다. 성주가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스쳐 지나와 연대장의 심복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성안에서 일어난 화재임에 틀림없지만 성벽에 있는 몇 개소에서 일제히 불이 치솟았다고 한다. 그것이 의심스러웠다. "어찌 된 일이지." 한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어려운 얼굴이 되어 있었다. "사고나 실수에 의한 화재라고는 생각되지 않소. 그렇다고 성밖에 있는 적이 이렇게까지 대단한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고. 이 성 안에 적과 내통하는 자가 있을 지도 모르겠소." "음, 있을 법한 이야기군." 이렇게 되면 성의 방어에 안심하고 있을 수가 없다. 근처에 배반자가 있다면 섣불리 성안에 머물고 있는 것은 커다란 위험을 불러오게 된다. 퇴로를 잃은 것만은 피해야 하는 것이다. "적과 화살 한번 교환해보지 않고 무슨 꼴인지." 꽤나 씁쓸했다.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려 했지만 성안은 이미 상당한 혼란상태였다. 애초에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 근위연대 외에는 영주 몇 명의 혼합부대인 것이다. 오합지졸이라고 해도 틀리진 않다. 더구나 안좋은 것은 달이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이라 누구의 부하인지도 모를 녀석들이 뛰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아군이라고 속이고 가까이접근하는 자가 있다고 해도 우선 알아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사태에 휘말리는 것만큼은 피해야겠다고 즉석에서 판단했다. 성안에 진을 치고 있는 부하들에 대해 즉시 무장을 하고 성밖의 모래톱에 모여 적습에 대비하도록 지시했다. 적이 숨어들어 왔을지도 모르는 성에서 농성하느니 바깥에 나가는 쪽이 훨씬 안전한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최상층이다. 높은 곳에서 구경하기엔 좋은 장소일지 모르나 아래로부터 쫓기게 된다면 도망갈 구석이 없다. "그렇다고 해도 그 남자는 그렇다 쳐도 용사라고 알려진 도라 장군이나 라모나 기사단도 타락한 모양이오. 이런 기책을쓰지 않고는 싸움에 나설 수 없다니." "그만큼 저쪽이 괴로운 상황이라는 거요. 뭐라 해도 장수가 가짜왕이라서야 사기가 오르지 않아도 이상할 것도 없지." "그렇고말고." 그런 말을 번갈아 입에 담으며 자신들도 시종들을 데리고 계단 아래로 내려가려 했지만 그 앞을 막아 선 그림자가 있었다. "오랜만이군 두사람." 어두운 성안이었지만 통로에 걸려있는 횃불에 비춰진 모습, 그리고 그 목소리에 두 사람은 경악했다. 호흡이 멎었다. 눈과 귀를 의심했다. "서 설마..." 주인의 움츠림을 똑바로 보고는 시종들도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상대는 그에 응하듯 한 발짝 앞으로 내밀었다. 흔들리는 불빛이 상대의 얼굴에 진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어둠에 반쯤 가려진 그 얼굴은 오싹할 정도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쩐 일이냐. 주군의 얼굴도 잊어버렸나." 억양 없이 말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반년만에 보는 '국왕'의 얼굴이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얼굴은 지금 반대편 강가에 있어야 했다. 두 사람의 연대장은 낭패하여 그대로 서 있었다. 적의 장수가 이곳에 있다고 큰 소리로 외쳐야 할 테지만 너무나 의외인 만남에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 때에 더욱 두 사람의 낭패를 부추기는 듯한 비명이 바로 근처에서 솟았다. "불이야! 불이 났다!" 아래층이 아니다. 같은 이 최상층의 어딘가였다.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 이것은 당신이 한 짓인가..." 더듬으면서도 한 사람이 묻자 국왕은 대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분명 그렇다. 이곳의 성주가 실은 나와 손잡고 있었다는 건 몰랐던 모양이군." 그야말로 입을 벌렸지만 동시에 납득이 갔다. 그들은 국왕이 고작 세 명이서 이곳까지 숨어들었다는 것을 모른다.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일은 가능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누군가가 손을 내밀었고 대군에 의해 지켜지는 가운데 성문을 넘어 이 천수각까지 왔음이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동시에 성주에 대한 분노가 솟아올랐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잘도 뻔뻔스럽게 아군인 척 붙어서 감쪽같이 속여넘기다니. 핏기를 잃은 자신들과는 반대로 국왕은 태연했다. 그것 역시 성주가 다른 마음을 품은 것과 통해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이 성 안은 우리들의 수하가 점령하고 있다. 이 이상 쓸데없이 목숨을 빼앗을 필요도 없겠지. 바로 투항하면 나쁘게는 하지 않겠다. 다만." 국왕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반년 전 굳게 충성을 맹세했음에도 제군들의 부대가 똑바로 왕궁에 쳐들어왔던 그 이유는 반드시 자세한 설명을 듣지않으면 안 되겠지만 말이야." 두 사람은 번쩍이는 칼날로 베이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자신들의 행위가 결코 칭찬받을 것이 못된다는 건 왕에게 들을필요도 없었다. 그들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야앗!" 한 사람은 소리치며 검을 뽑고 한 사람은 성주군을 적시하도록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 목소리에 근처에 있던 시종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이쪽도 일순 얼어붙었던 것이다. 주인의 명령에 정신이 돌아와 숨을 되돌렸지만 눈앞을 막아서고 있는 국왕의 옆을 지나쳐갈 용기는 없었다. 서둘러 발을 돌려 반대쪽 계단을 향해 돌진했다. "성주가 배신했다!" "성주는 국왕과 내통하고 있다!" 그런 말을 너도 나도 외치며 달려 내려갔던 것이다. 놀란 것은 지상에서 겨우 소화작업을 끝내고 있던 성주 쪽이었다. 전혀 기억에 없는 소리였다. "무 무슨 소리냐!" 분연히 일어섰지만 연대장의 시종들은 그 눈으로 국왕의 모습을 보고 국왕 스스로 성주는 아군이라고 말했던 것을 그 귀로 들었다. 연대장 수하의 병사들은 일제히 경계를 강화하고 성주에게 따져들었다. "이 화재도 극히 수상하다. 스스로 불을 지르고 국왕군을 끌어들이려 한 것이지!" "무슨 소리를! 모르는 일이다!" 땀투성이가 되어 변명하던 도중 이번엔 성주의 시종이 비명을 올렸다. "주인님! 저것을!" 가리키는 방향을 올려다보자 놀랍게도 본동의 최상층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지 않은가. "이 이건 대체 뭔 일이냐?!" 계속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기사들이야 어쨌든 오합지졸의 아랫 병사들이 평상심을 유지할 리가 없었다. "배신이다!" "성안에 적이 숨어들었다!" 불안과 공포가 섞여 들은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울렸다. 본동에서 화재가 났다는 것도 있고 근위병단의 두개 연대가 성주의 세력을 적대시한 것도 있어 성안은 아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누구를 적대해야 할 지도 모르고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자들, 도망가게 놔둘 수 없다며 성주세력에 덤벼드는 근위병단의 자들, 같은 이유로 반격에 나선 성주 수하의 자들. 빨리도 전의를 상실하고 성문을 향해 이리저리 흩어져 달려가는 자들. 그야말로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소동이었다. 그 중에서도 최상층의 혼란은 뜨거웠다. 방금 근처에서 불꽃이 오른 것은 물론이고 근위연대장 스스로가 검을 뽑고 두 사람이 덤벼들어 그것도 하필이면 국왕을 상대로 심한 검투를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연대장 쪽은 필사적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지금 이곳에서 이 남자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자신들은 파멸이었다. 기량을 생각하면 남자쪽이 훨씬 월등하지만 죽을 각오로 덤벼드는 인간의 힘은 얕볼 수 없다. 평상시라면 생각할 수 없을 능력을 발휘해서 일시적으로는 두 사람 쪽이 약간 우세로도 보였다. 이때다라고 하듯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뭘 하고 있나! 쳐라!" 바쁘게 검을 교환하면서도 시종들에게 그렇게 외쳤다. 하필이면 국왕에게 그것도 몇 사람이나 한꺼번에 검을 들이대라는 명령에 시종들은 아무래도 망설였지만 결국은 주인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사관 두 사람 쪽은 비겁도 정의도 관계없다. 필사적이었다. 어쨌든 지금 이 남자를 쓰러뜨리는 것이 중요했다. 두 개의 날카로운 검 끝을 겨우 받아치던 남자의 등이 일순 시종들 쪽으로 똑바로 향했다. 절호의 기회였다. 검을 휘두르며 거의 베어 들어가던 그 이마에, 어디에서 인지 날아 들어온 단검이 정확하게 꽂혀 들어갔다. 단검은 한 자루로 끝나지 않았다. 멋진 기술로 국왕에게 덤벼들려 했던 시종들만 노려 날아들었다. "비겁한 놈들. 한 사람을 상대로 무슨 짓이냐!" 틀림없는 소녀의 목소리가 늠름하게 들려와 시종들은 당황하여 몸을 떨었다. 연대장 두 명도 당황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는지 그림자로부터 이븐이 걸어나왔다. "2대 1이라니 연대장님들, 사성四星 투구가 울고 가겠습니다 그려. 비천한 잡것이긴 합니다만 이 몸은 스샤의 이븐. 상대가 되어드리겠습니다." 사람을 갖고 노는 말솜씨였다. 국왕은 빙긋 웃고 이븐과 자리를 바꿔 다음 순간에는 서로 등을 마주대고 적과 대처하게되었다. 이것만큼은 이븐쪽이 적임이었으리라. 소녀와 남자로는 신장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등을 마주 댄다고 해도 남자의 등은 무방비로 열려버리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 소녀는 어쩌고 있느냐 하면 연대장은 남자들에게 맡겨둔 뒤 재빨리 자신의 일로 움직이고 있었다. 기름을 발견하면 즉시 바닥의 깔개고 벽의 천이고 상관없이 뿌려댄 뒤 불을 놓았다. 물론 방해하는 자는 남김없이 베어 넘겼다. 이만큼 움직였는데 성이 무사할 리가 없다. 이곳저곳에서 불이 올랐고 이미 최상층에는 연기가 충만해가고 있었다. 창으로 밖을 보면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태양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지만 새까맣던 하늘이 서서히 군청색으로 옅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날이 밝으면 국왕군의 총공격이 시작된다. 그때까지는 이곳에서 빠져나가 저 국왕을 군대의 선두에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소녀가 결투의 현장으로 달려가 보자 마침 결론이 난 참이었다. 두 사람의 연대장은 근위병단에서라면 내노라 알려진 인물들이었겠지만 한 쪽은 타우의 산적이라해도 굴지의 실력의 소유자이며 한 쪽은 스샤의 거친 자연환경 속에서 단련된 검사였다. 이븐을 목표로 달려들었던 연대장은 정확하게 교차된 뒤 반대로 목줄기가 잘려졌다. 혼시의 힘을 다해 국왕의 머리를 노렸던 연대장은 국왕의 일격에 검이 부러진 다음 순간 깊숙이 가슴이 베어져 절명했다. 어느쪽도 즉사였다. "일 잘하는 임금님이로군." 소녀는 웃지도 않은 채 묘한 야유를 담아 말했다. "쬐금 성가셨네." 이븐이 말하며 검을 털었다. "오래 있어봤자 소용없다. 나가자." 월도 검을 털었지만 두 사람 모두 검집에는 집어넣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녀가 선두에 서서 계단을 뛰어내려갔지만 그곳에서 갑자기 두 사람을 제지했다. 사람이 온다. 아래층에서 다수의 인간이 달려오고 있는 기척이 났다. 본동 내부에는 저수장貯水場이 건설되고 있었다. 식량으로 쓰기 위한 귀중한 것이지만 지금은 그런 소리를 할 때가 아니다. 소화용으로 사용한 것 같았다. 아래층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나 있었지만 이 성이 타서 무너지면 그대로 끝장이라는 것을 병사들도 알고 있었다. 손이 빈 자들은 전부 저수장에서 물을 퍼다 미친 듯이 불을 끄기 위해 최상층으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육탄전이었다. 뒤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미 최상층은 불에 휩싸여 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든 무리지어 달려오는 병사들을 쓸어버리고 계단을 내려갈 수밖에 없다. 이븐은 이런이런하고 말하는 양 심상치 않은 미소를 띠웠다. "쬐금 더 생각하면서 불을 붙여줬으면 했지만서도." 남자는 검을 쥐고 장절하게 웃었다. "여기까지는 잘왔다. 이젠 우리가 살아남던가 검의 녹이 되어 사라지던가다." 소녀가 일침을 놓듯 말했다. "녹이 될 생각을 해서 어쩌려고. 마음이 약해지면 그걸로 지는거야." 그 말대로였다. 단어 그대로 소녀는 똑바로 날아 내려갔다. 나선계단을 올라오던 병사들에게 정면으로 덤벼들어 몸을 부딪히는 기세로 뛰어들은 것이다. "뭐?!" 보고 있던 이븐이 일순 부르짖었을 정도였다. 그 이상 놀란 것이 힘차게 불을 끄러 계단을 올라오던 병사들이었다. 갑자기 위에서 뭔가가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굉장한 힘으로 돌진해 온 것이다. "우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선두의 한 사람은 완전히 밸런스를 잃고 뒤에 있던 사람에게 격돌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뭐 뭐야 뭐야?!" 뒤에서 뒤로 목걸이처럼 늘어선 병사들이었다. 어딘가에서 간신히 멈췄는지 전원 한꺼번에 굴러 내려가는 꼴은 피했지만 거기에 두 번째의 위격이 강타했다. 소녀가 다시 한번 뒤집어진 거북이 꼴이 되어 있던 선두의 병사에게 돌진해 날려버린 것이다. 도저히 어떻게 멈출 방법이 없었다. 모두가 한 덩어리 경단처럼 되어서 계단을 둘러 내려가게 되었다. 소녀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한 계단 아래의 층까지 뛰어내려가 그곳에도 불을 붙였다. 아연해있는 남자들을 올려다보더니 손짓을 한다. 두 사람은 황급히 그에 따랐다. 애초에 이곳까지 올라온 순간부터 소녀의 활약은 무시무시했다. 때로는 몸을 숨기도록 지시하고 때로는 지나가는 병사들을 어둠속에 끌어들여 기절시키고 기름병을 발견하면 즉시 천에 적신 뒤 가는 밧줄의 끝에 불을 붙여서 시한발화장치를 만들던지 하여 거의 두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일 없이 최상층까지 데리고 올라왔던 것이다. 이븐은 소녀의 솜씨에 감탄하거나 놀라기보다 어이없어 했다. "굉장한 아가씨군 그래." 지금 소녀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차례차례 불을 붙여 성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불씨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소화하려는 의욕도 날아가고 도망가려는 심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불꽃은 반대편에 있는 도라 장군이나 나시아스에게 그들의 성공을 알리게 될 것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대체 어떻게 이곳에서 탈출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성안의 부지도 성 바깥의 모래톱도 지금쯤은 성주세력과 근위병단의 교전으로 혼전이 되어 있을 터였다. 그런 가운데를 고작 세 명이서 뛰어들어가는 것은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남자들은 상당히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소녀는 2층까지 단번에 뛰어 내려가더니그곳에 있는 창문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이 정도라면 뛰어내릴 수 있을까?" "그래." 소녀가 똑바로 휘릭 뛰어내리고 남자와 이븐이 그것에 따랐다. 일층 정도라면 이 두 사람에게 있어 별 것도 아니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소녀는 지상에 뛰어내리자 똑바로 가까운 탑을 향해 달려간 것이었다. "어 어이!" 이븐이 부르짖었다. 황급히 뒤를 쫓아가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겨우 지상에 내려왔는데 다시 높은 곳으로 올라가다니. 하물며 외벽의 망루로 올라가려 하다니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이었따. 그러나 월 쪽은 뭔가 번뜩이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성벽 바깥으로 뛰어내릴 생각이다." "무슨 재주로?! 밧줄은 더 없어!" 가능하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고 싶었지만 쓸데없는 짐을 가질 여유가 있는 싸움이 아니었도 발화장치로 하거나 이것저것에 이용한 덕에 침입할 때 썼던 밧줄은 전부 사용해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성 주변을 돌고 있는 강은 뛰어내려도 될 정도의 깊이가 아니었다. 하늘은 점점 밝아져가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군청이 감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태양이 뜨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세 명은 대혼란의 성안으로 뚫고 들어갔다. 정문과는 반대측인 동쪽으로 내려왔기에 사람이 밀집해있는 곳은 피할 수 있었지만 완전히 들키지 않을 수는 없었다. 때로는 지키는 자가 있어 검문하려 했지만 물론 무시했다. 그래도 따라오는 놈에겐 검을 휘둘렀다. 하룻밤의 노동치고는 상당한 중노동이었다. 탑을 올라가서 흉벽의 안쪽 이동용 통로에서 나왔을 때에는 세 명 모두 어깨를 크게 움직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 성안은 적아군이 구별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본봉은 뭉게뭉게 하얀 연기를 올리며 소화작업이 이미 불가능한 상태였다. 게다가 이것은 모두 단 이 세 명이서 벌인 일이었다. 참가했던 이븐마저도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잘됐네." 소녀가 말했다. "그렇고말고. 너무 잘됐을 정도다." 국왕이 힘차게 응수했다. "우리들이 생환한 새벽 무렵엔 이 전투는 기적의 승리로 일컬어지게 되겠지. 물론 승리를 불러드린 전쟁의 여신의 이름과 함께 말이야." "속 편하게 말하지마. 최대의 난관은 이제부터니까." 소녀가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상 피곤한 짓은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가 없지.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 남자도 곤란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미안. 결국 장애물이 되어 버렸군." "그렇지도 않아. 이간질을 시킨 건 잘했어." 그 말대로 기껏 여기까지 혼란시킨 것이다. 다시금 결속할 시간을 줘서는 안되었다. 국왕군에게는 맹장이라 불리는 도라장군을 필두로 희대의 용사가 줄줄이 모여있었다. 병사의 수로서는 열세였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사람들이 아니다. 성을태워 무너뜨릴 기세로 맹공을 해올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든 그 전에 이곳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아군의 화살에 쓰러진다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두 사람, 검을 내놔." 소녀의 말에 월은 솔직히 따랐지만 이븐은 눈을 크게 떴다. "왜?" "부딪히면 위험하니까 내놓으라는 거야." "어이 대체 무슨 소리를...." 소녀는 그 이상 말하게 놔두지 않았다. 억지로 남자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허리에서 검집을 뽑아냈다. "너희들이 조금이라도 가벼우면 쉬울 텐데." 그런 소리를 웅얼거리더니 가볍게 흉벽을 넘어 그 반대편으로 휘릭 뛰어 내렸다. 입을 딱 벌린 이븐이었다. "꼬마 아가씨!" 황급히 몸을 내밀었다. 이런 높이에서 떨어져서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래야 하는데 거기에서 다시금 눈을 둥그렇게 뜨게 되었다. 소녀는 자기 발로 강톱에 서서 두 자루의 검을 지면에 내려놓는 참이었다. 이쪽을 올려다보더니 "내려와!"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것만으로도 아연했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더욱 기가 막힌 소리를 했다. "좋아. 이븐 뛰어내리자." "바 바보 같은 소리 작작해!" 아무리 타우의 산적이라고 해도 창백해졌다. 그것은 다시 말해 죽자고 하는 소리였다. "걱정마. 저녀석이 받아줄 테니까." "엥....월! 너 제정신이냐!" 지극히 제정신이었던 국왕은 말해봤자 소용없음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실력행사로 들어갔다. 갑자기 친구의 목덜미를 붙잡고 무릎 밑을 들어올려 그 몸을 방책 건너편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비명을 삼킨 것은 이 남자의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음 순간에는 강가에 격돌하여 죽을 것이라도 믿어 의심치 않아 강하게 눈을 감았지만 그것치고는 의외로 부드러운 것에 턱 하고 가라앉는 듯이 떨어진 것 같았다. 눈을 떠보자 놀랍게도 자신의 몸은 소녀의 팔에 안겨있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체중은 자기 쪽이 두 배를 훨씬 넘고 거기다 즉사하지 않을 수 없는 높이에서 떨어진 것이다. 고양이 한 마리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인 가는 팔이었는데 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도 못하는 사이 강가에 떨궈졌다. 그야말로 떨궈졌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취급이었다. 그리고 엉덩방아를 찧은 이븐의 눈앞에서 이번엔 국왕이 방책 위로부터 뛰어내렸다. 전신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시간에 댈수가 없다. 눈앞이 새까매졌지만 대신 소녀가 앞으로 나섰다. 이븐은 더욱 새파래졌다. 무모하다고 외치려고 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도 함께 곤두박질쳐서 찌부러져야 할 소녀는 발을 딱 버티고 서서 이 무거운 짐을 양손으로 받아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당한 충격이었던 듯 했다. 어떻게 버티려고 했지만 양발은 강톱에 깊이 패여 들어가고 입에서는 낮은 신음소리가 흘렀다. 그만큼 몸에도 무리를 시킨 듯 했다. 한편 커다란 몸을 둥글게 해서 그 팔 안에 답싹 안겨든 국왕은 열심히 그것도 순진하게 "이런 떨어지는 방식이면.... 어때?" 하고 물었던 것이다. "이전보다는 훨씬 나아...." 소녀는 다시 한번 신음했다. "하지만....무거워!" 거기에서 버틸 수 없게 된 듯 했다. 남자의 몸을 던져버리고 자신도 강가에 주저앉아 버렸다. "제기랄, 농담이 아냐. 건강에 나쁘다로 이런 짓." 큰소리로 끙끙대고 있었다. 이븐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방금 전 뛰어내렸던(라기보다 억지로 던져졌던) 방책을올려다보았다. 섬뜩할 정도의 높이였다. 그리고 나서 팔을 누른 채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 국왕이 불안한 듯한 표정으로 그런 소녀를 살피고 있었다. "어딘가 다친 거냐?" "아니. 별 건 아니지만....." 가볍게 손목을 흔들어 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힘드네. 너무 자주 이런 짓을 하면 팔을 못 쓰게 될 지도 몰라." 놀라고 당황한 국왕이었다. "그 그건 곤란해." "누구 탓이야?" 흰자위가 보이도록 노려보자 국왕은 다시금 커다란 몸집을 움츠리며 변명했다. "아니 그...내가 너무 무거운 탓이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음부터는 얌전하게 집이나 지키고 있어. 대장에게는 대장의 임무가 있는 거야." 이번에야말로 낮게 신음소리를 낸 것은 이븐 쪽이었다. 등줄기로 차가운 것이 흘러 내려가는 것, 분명하게 눈초리가 험악해지는 것을 자신도 알 수 있었다. "월..." "왜?" 묻고 싶은 것은 산더미 같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이 소녀는 뭐냐고 묻고 싶었다. 이건 이미 열 사람 분의 힘이라던가 평범하지 않다던가 하는 범주를 초과해 있었다. 엄하게 질문하려 했지만 친구의 눈과 마주쳐 저도 모르게 말을 삼켰다. 마주 돌아온 남자의 눈동자는 그야말로 순진하고 맑으며 미소마저 담겨져 있었다. 그것도 이쪽이 말하려는 점을 깊이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기운이 빠졌다. 뚫어져라 그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자연스럽게 쓴웃음이 올라와 버린다. 검은 옷의 산적은 몇 번인가 말을 삼키더니 짧은 금발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겠어. 이거야 분명히 보통 아가씨가 아닌 것 같구만." "이제야 알았냐 둔한 녀석." 이때다 라고 하는 듯이 대꾸한 왕이었다. 매일같이 심하게 둔하다니 뭐라느니 하는 소리를 들었던 보복인 듯 했다. 그 국왕도 방책을 올려다보았다. 결전 직전이라는 상황인데도 감개무량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누구에게 말해도 이런 쾌거는 믿어주지 않으리라. 도라 장군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금지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단지 몇 명이서 이 벽을 넘어 성안에 불을 붙이고 당면한 적들을 멋지게 때려눕힌 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살아서 안전한 강가에 있었다. 남자는 깊은 감사를 담아 소녀에게 웃어 보였다. "또다시 빚이 늘어나 버렸구나." "이제야 알았냐 둔한 녀석." 이것 또한 장난스럽게 소녀가 대꾸했다. 강턱에 주저앉은 남자들, 그리고 소녀는 잠시동안 소리 높여 웃었다. 이 때 태양의 최초의 한줄기 빛이 강턱을 눈부시게 비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햇빛이 퍼지며 국왕군의 부대가 들고 있는 창 끝과 갑옷의 반사광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을 그들이 있는 곳으로부터도 아주 잘 볼 수 있었다. "자, 제 2막이다." 소녀가 말하며 일어섰다. 그야말로 전투의 여신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어조였다. 10장 소녀의 일행 세 명이 어둠에 섞여 적성의 본동에 돌입하려 할때 즈음 자신의 숙사로 물러났던 도라 장군은 깊은 우울함에 빠져 있었다. 다른 것이 아니다. 국왕의 언동이 원인이었다. 사실무근의 죄를 뒤집어 쓰고 나라에서 쫓겨나 반년이나 방랑생활을 보내온 것에도 불구하고 그 인품이 이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에 마음 깊이 안도하고 기뻐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헛된 기쁨인 듯 했다. 내일 아침이면 일찌감치 결전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하필이면 13살 소녀를 의지해서 손을 비우는 태도를 취하다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내일 아침에 전투가 개시된다는 것에 대해서 이견은 없다. 하지만 만약에 그 소녀가 실패한다면....거기까지 생각하고 장군은 혀를 찼다. 만약이 아니다. 애초부터 실패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저 견고한 성과 6천의 병사를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면에서의 일제공격 따위는 설사 그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너무나 위험했다. 이쪽의 수를 조금이라도 많게 보이게 하기 위한 공작 혹은 적의 내부를 교란시킬 필요가 있는데도 국왕은 맹목적으로 그 소녀에게 의지하기만 하고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다는 생각은 잠자리에 들어서도 계속해서 맴돌았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던 지방귀족의 자제였던 때와는 틀리다. 그 남자는 대화삼국 중 하나인 대국 델피니아를 다스릴 군주인 것이다. 지금은 왕좌에서 쫓겨나 있다고 해도 아니 오히려 더더욱 내것인 양 왕궁에서 날뛰는 자들을 추방하고 그 왕국이 본래 있어야 할 장소로 되돌려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당사자인 국왕은 그 시작부터 고개를 갸웃거릴만한 일만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잠이 들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장군은 결국 일어나 의복을 갖추고 심야이긴 하지만 국왕의 숙사를 방문했다. 촌장의 집이라 생각되는 건물에서 국왕은 쉬고 있다. 어쨌든 총대장이다. 방 앞에는 물론 현관에도 불침번이 서 있었다. 젊은 병사였지만 장군의 모습을 확인하자 자세를 다시 잡고 그 장소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려 하는 것을 말리며 "폐하는 쉬고 계신가?" 라고 물었다. "예, 내일 아침 공격을 시작할 때까지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중요한 용건이다. 통과시켜다오." 도라 장군 정도의 인물에게 이런 말을 듣고서야 경비병 따위가 자기 고집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문 앞을 담당하고 있던 병사도 마찬가지로 길을 열어주었다. "수고한다." 격려하는 말을 걸어주고는 실내에 들어가 무례하다는 것은 잘 알면서도 침실 밖에서 말을 걸었다. "폐하, 쉬고 계시는데 죄송합니다. 도라입니다."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폐하?" 장군은 수상쩍게 생각했다. 무장인 자가 결전을 앞두고 사람 목소리를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깊게 잠들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국왕이라 한다면 말할 필요도 없다. 가만히 실내를 들여다 보고는 입을 딱 벌렸다. 침대는 비어 있었다. 그것도 가까이 다가와 만져 보자 침구는 완전히 식어 있고 잠을 잔 흔적도 없었다. 열려진 창문 아래쪽은 그 집의 뒷마당이었다. 저 국왕은 누구도 통과시키지 말라고 입을 막아 놓고 이곳을 통해 몰래 빠져나간 것이었다. 장군의 입에서 장절하게 이를 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국왕의 침실에서 나왔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초가 "용건은 끝나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장군은 미소를 보였다. "아니 편히 쉬고 계셔서 죄송스러워져서 조용히 나왔다. 내일이야말로 승부를 걸어야 할 테니 말이다. 너도 슬슬 누군가와 교대하도록 해라." 상냥하게 말하고는 물러났다. 이런 일이 병사들 사이에 알려졌다가는 큰 일이다. 절대로 숨기고 지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었다. 장군은 그 걸음으로 나시아스의 침소를 방문했다. 그렇다기보다 안내역도 무시하고 상대가 아직 이불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강제로 밀어 붙여 통과한 것이었다. "대체 어쩐 일이십니까 장군." 라모나 기사단의 지휘관도 이것엔 놀라서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폐하가 안 계신다. 침대는 이미 빠져나간 빈 껍질이다." 낮게 신음하는 듯이 말했다. 행방을 묻는 어조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시아스도 금방은 말을 꺼내지 못했으나 곧 납득한듯 했다. "아마도 성으로 가겼겠지요." 다시 한번 으르렁대듯 신음한 장군이었다. 그렇지 않을까 하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그 말을 들으니 기운이 빠졌다. "나시아스 경, 침착하게 있을 땐가? 폐하의 옥체에 관계되는 일일세!" "하지만 장군. 지금부터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섣불리 소동을 벌여 성의 병사를 모으게라도 한다면 도리어 폐하의 생명이 위험해집니다." 그 말대로였다. 국왕은 이미 성에 잠입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국왕의 신변이 걱정된다 하더라도 가만히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누구에게 듣지 않아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탄 섞인 말이 새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전혀 모르겠네. 대체 폐하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인지. 이 중요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시는 것인지.대장군이나 되시는 분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을 벌여. 병사들의 사기에 어느 정도 관련이 될지. 그 분은 알고 계시지 못하다는 건가." 잠을 방해받았을 뿐 아니라 베개 옆에서 이렇게까지 깊은 한탄을 듣는 꼴이 되다니 나시아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재난임에 틀림 없으나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잠옷 차림으로 열심히 연상의 영웅을 달래기 시작했다. "도라 장군. 폐하는 시운을 보는 데 뛰어난 분입니다. 이 전투의 중요성도 아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한 것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장군께서 잘 알고 계실 것 아닙니까." "하지만 말일세. 일군의 장수가 침대를 빠져나가 적의 성에 잠입을 계획하다니, 제정신으로 하시는 행동이 아닐세.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만의 하나..." 나시아스는 옅게 웃었다. "그 소녀와 폐하가 함께라면 괜찮을 겁니다. 성 하나나 둘 정도 순식간에 함락시켜 보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시 한숨을 쉰 장군이었다. 무언가 말하려 하는 것을 나시아스가 가로막았다. "도라 장군, 제가 비르그나에서 말씀드렸지요. 저자야말로 발도우의 딸, 혹은 승리의 여신이라고. 정말로 그대로 입니다. 열세에 있는 우리들이 멋지게 이 전투를 이기기 위함이라면 그 소녀의 협력없이는 불가능하며 아마 폐하도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장군은 뭐라고도 대답할 수 없었다. 싸움은 개인의 움직임으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신념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이거야 참, 나는 완전히 머리가 굳은 할애비 역활이로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 장군이었으나 나시아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기분은 잘 압니다. 뭐라 말씀드려도 장군은 소년시절부터의 폐하를 알고 계시는 데다 가족들과도 친하게 지내셨다는 말씀을 들었으니까요. 걱정되시는 것도 다른 사람들과 같지는 않으시겠지요." 또다시 한숨을 쉰 장군이었다. "귀공이 말하는 대로다. 도대체가 그 분은 외견은 진짜 부친인 전 폐하를 꼭 빼닮았지만 속은 키워준 애비를 쏙 빼닮은것 같네." "그렇습니까?" "그렇고 말고. 페르난도 옛날부터 무척이나 완고한 인간이라 한번 이렇다고 결정하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지. 그런 주제에 묘하게 애교가 있는 것까지 똑같아." 저도 모르게 살짝 웃음을 흘린 나시아스였다. 그 말투로 보아 이 수염의 장군은 국왕의 양부에게도 때때로 머리 감싸쥘일을 당했던 듯 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날이 밝기를 기다리지요 장군." "확실히 그것 밖에. 지금의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군 그래." 어딘가 초연하게 중얼거리고 장군은 방해한 것을 사과하더니 훌쩍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들어가서도 한숨도 자지 못하고 깜빡 졸지도 못한 채 아침을 맞았다. 적성에 불을 지르고 그리고 연대장을 굴복시킨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수장首將이 부재인 상태로 적성을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 더욱 사태를 우려한다면 국왕이 무사할 가능성도 대단히 낮다. 몸을 어디다 둬야 할 지 모를 정도로 고뇌스러웠다. 그 고뇌가 날아간 것은 밝아지고 있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도중이었다. 정찰을 보냈던 병사가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으로 달려돌아와 보고했다. "보고합니다! 적성으로부터 불꽃이 피어올랐습니다!" "뭐라고?" "해냈나?!" 도라 장군은 자기도 모르게 되묻고 나시아스는 쾌재를 불렀다. 물론 아무것도 듣지 못했던 다른 무장들은 놀란 나머지 일제히 벌떡 일어날 뻔했다. 척후병은 흥분한 얼굴로 덧붙였다. "연기에 가로막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습니다만 본동에 불이 난 것은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성내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합니다. 지금 현재 성주의 군대와 근위병단이 중앙주에서 다투고 있습니다!" 도라 장군은 귀를 의심했다. 성공을 기뻐할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그만큼 믿기 힘든 보고였다. 옆에서는 나시아스가 기세좋게 척후병에게 물었다. "그 성주 세력과 근위병단의 싸움은 어느 쪽이 유리해 보였나?" "비슷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수로서는 압도적으로 부족한 근위병단이지만 역시 중앙 제일의 정예입니다. 영주군도 이들과 제대로 부딪히고 싶지는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아 도라 장군!" 나시아스의 부름에 장군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델피니아에는 이 사람이 있다고 일컬어질 정도의 영웅이다.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는 바로 헤아렸다. "전군, 기마! 즉시 출진한다!"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자신도 즉시 준비를 갖추었다. 명하기도 전에 장군의 시종이 말을 끌고 왔다. 나시아스, 가렌스에게 있어서는 예상했던 대로의 전개였다. 이쪽도 빨랐다. 투구를 쓰고 라모나 기사단의 문장이 그려져있는 긴 옷을 휘날리며 따르는 자들에게 창을 들게 한 모습은 용맹스러웠고 병사들의 사기는 말할 수 없이 높았다. 샤미안도 늦을 수 없다며 식사도 중간에 멈추고 애마에 올랐다. 이곳 저곳에서 종자들이 주인의 말을 끌고 혹은 무장을 갖추고 자신도 말에 올랐다. 진영은 갑자기 활기가 들어찼는데 그런 가운데 탄 사람도 없는 말이 한 필, 유유하게 나아가고 있는 것이 샤미안의 눈에 들어왔다. "그라이아!" 지금은 그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로아의 흑왕이었다. 샤미안의 부름에 한 번 돌아보기는 했으나 멈추지는 않았다. 하인들이 눈치를 채고 막으려 했으나 상대가 상대다. 고삐도 매어져있지 않으니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흑마는 진영을 벗어나더니 명확하게 성을 향하여 가볍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 흑왕이 갑니다!" "오오...." 샤미안의 보고를 받기 전부터 장군도 눈치채고 있었다. 저 흑마가 어째서 기수도 없는 채 달리기 시작했는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셈인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미 말에 올라 투구의 전갑을 내린 나시아스가 진중한 말투로 말했다. "저 말은 승리의 여신에게 불려서 가는 겁니다." 현실적인 시점을 가지고 듣는다면 이만큼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없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상식은 관계가 없었다. 도라장군도 동의를 표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뒤쳐질 수는 없겠지." 말 위에 나란히 선 나시아스와 가렌스는 눈과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다. 도라 장군도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3천의군세는 흑마를 쫓는 형태로 일제히 진군을 개시했다. 흑마는 어제 왔던 길을 기억하고 있다는 듯 또한 뒤에서 쫓아오는사람들의 목적을 알고 있다는 듯, 미묘하게 속도를 조절하면서 성으로 향했다. 질수는 없다며 그 뒤를 사람과 말의 집단이 쫓아갔다. 흑마와 3천의 군세는 곧 흰 연기를 뿜고 있는 성에 다가갔다. 강에 다가가자 성문은 활짝 열려진 채 병사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 장군들에게도 똑똑히 보였다. 그제서야 이쪽의 접근을 눈치채 서둘러 내분을 멈추고 방어를 굳히려 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마지막 발악에 가까웠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본 국왕군의 사기는 더더욱 올라갔다. 지금 한번 밀어붙인다면 승리는 이쪽의 것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라! 다리를 빼앗아라!" 북쪽에서부터 단숨에 내려온 장군의 군대는 본동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2동 앞까지 노도처럼 밀어붙여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석궁대! 앞으로!" 나시아스의 지시로 라모나 기사단에서 한 부대가 앞으로 나섰다. 활을 당기는데 시간이 드는 석궁이지만 효과는 발군이다. 3열, 5열로 각각 줄을 서 한발을 쏘면 바로 다음 열과 교대하는 방법으로 흉벽 위를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도 장군은 국왕의 신변을 걱정치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성벽 안에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시라도 빨리 성을 함락하여 국왕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때 그들을 여기까지 선도해 온 흑마가 머리를 돌렸다. 성문에서 떨어져 본동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도라 장군은 자신도 모르게 외치고 있었다. "샤미안!" "예!" 아버지가 말하려 하는 바를 파악하고 샤미안이 한 부대를 이끌고 전열에서 벗어났다. 저 말은 소녀가 있는 곳을 알고 있다. 지금이라면 샤미안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국왕은 소녀와 함께 있다. 눈앞은 강이다. 건너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도 질겼다. 탑위나 흉벽 위에서 집요하게 화살을 쏘아 오고 있어 함부로 몰려 들어갈 수는 없었다. 흑마는 성에 나란히 달리는 모습으로 흙먼지를 일으켰고 반 바퀴도 돌지 않고 스스로 강에 뛰어들었다. 약간 뒤늦게 샤미안은 그 반대편에서 바라던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폐하!" 국왕은 생각한 대로 그 소녀와 검은 옷의 산적과 함께였다. 성벽 바로 아래에 있었다. 성벽 위에 진을 진 적들은 그들을 눈치채지는 못하고 있었다. 다만 급히 접근해온 샤미안의 부대에게 경계를 강화한 듯 하다. 성벽 위로 보이는 병사의 수가 갑자기 많아졌다. 샤미안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흑왕의 뒤를 따라 강으로 말을 몰고 말을 몰면서 돌아보고 외쳤다. "석궁병을 이쪽으로 돌려라!" 이 단연한 도하에는 성벽 위의 병사들도 놀란 듯 했다. 그러나 쉽게 건너게 할 수는 없었다. 샤미안이 이끄는 부대를 향해 비처럼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몇 명인가가 강에 쓰러졌지만 여기사의 돌진은 멈추지 않았다. 병사들을 독려하고 머리 위를 향해 화살을 쏘면서 강을 압박해 넘으려고 과감히 시도했다. "저 아가씨도 꽤나 무모한 짓을 하는구만." 반대편 기슭에서 보고 있던 이븐이 자기도 모르게 감상을 흘렸을 정도였다. "속 편한 소리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남자가 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들은 별로 구경하고 있으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먼저 기동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부터의 싸움에는 아무래도 말이 필요했던 것이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역시 로아의 흑왕이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역시 로아의 흑왕이었다. 힘차게 강을 헤엄쳐 나가 소녀가 기다리는 반대편 기슭으로 건너왔고 소녀는 순신간에 말 위에 오른 사람이 되었다. "도와주고 올게. 여기서 움직이지마." 남자 두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 두고 흑마는 방금 전에 건너왔던 강으로 뛰어들었다. "리?!" 놀란 것은 샤미안 쪽이었다. 비처럼 화살이 쏟아지는 가운데로 이 소녀는 스스로 뛰쳐나온 것이었다. "떨어져! 위험해!" "바보 같은 소리하지마. 그쪽이 훨씬 위험해. 활을 빌려줘!" 여기사의 종기사로부터 활을 빌려 들고 소녀는 강 한가운데에서 흉벽 위를 노려 활을 당기기 시작했다. 무섭도록 정확한 활이었다. 화살 하나도 빗나가는 일이 없었다. 마장에서 보여준 실력은 실전에서도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고 퇴색하긴 커녕 더욱 빛나는듯 했다. 활의 현이 열 번 울리면 성벽 위에서는 열 명이 쓰러졌다. "뭐야 저건!" "어린애인가!" “계집애 같은데?!" 그런 소리가 다가오는 쪽에까지 들려왔다. 샤미안이 이끄는 일대가 강을 반 정도 건넜을 때 이번엔 타우의 남자들이 서둘러 달려왔다. 기뻐한 것은 이븐이었다. "늦었잖아 자식들아!" "미안. 끌어낸 녀석들을 따돌리는데 시간이 걸렸어." 그런 소리를 외치면서 이쪽도 강에 뛰어들어 휘적휘적 다가왔다. 호응하듯이 석궁대도 달려왔다. 지휘를 맡고 있는 것은가렌스였다. "표적! 건너편의 성벽!" 깨진 종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도 결코 폐하를 구하라는 따위로 외치지 않은 것은 역시랄까. 지금 아직 국왕은 적의 발밑에 있다. 섣부른 소리를 질렀다가는 적에게 수장의 존재를 알리게 되고 만다. "한 명도 놓치지 말고 쏴라! 방해물이 없어지면 도보로 강을 건넌다!" 그런 말을 외치면서 어쨌든 국왕의 머리위만은 지키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화살의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그 덕택에 샤미안의 부대도 타우의 남자들도 강을 건너 각각의 지휘관과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폐하! 무사하셨군요!" "부두목, 어찌 잘 살아 있었구만! 게다가 잘도 진짜 불을 붙였구만요!" 다른 종자들도 입을 모아 그 솜씨를 칭찬했지만 국왕도 타우의 산적도 겸허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들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거 참, 무작한 짐짝이 돼 버려서 말씀이야." 각각 말하고는 강에서 오라온 소녀에게 눈을 돌렸다. 흑마는 크게 몸을 흔들어 물기를 털었다. 말 위의 소녀는 활을 모두 쏘아버렸지만 여기에서 손을 늦출 생각은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자아 끝장내자. 성문을 부순다." 말하기 무섭게 이번에는 종자 중 한 명에게서 창을 빌려들고 다른 한 명으로부터 활통을 받아 단숨에 말을 달리게 했다. "뒤쳐지지 마라!" 국왕이 외쳤다. 이미 국왕도 이븐도 샤미안의 부하로부터 말을 받아 말 위에 올라 있었다. 소녀를 선두로 국왕, 이븐, 그리고 샤미안의 부대와 타우의 남자들은 성문을 향해 강가를 돌진했다. 놀란 것은 성문을 지키고 있던 적병이었다. 그들은 성문 앞의 중심주에 울타리를 설치하고 강을 건너려는 적을 막는 요새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정면에서의 맹공격에도 벅차하는 상황에 갑자기 옆으로부터 새로운 적이 접근해 온 것이다. 게다가 그냥 새로운 적이 아니다. 이 나라에서도 이름 높은 용사인 국왕과 장군이 직접 단련시킨 샤미안 이하의 로아의 용사들, 게다가 이븐을 비롯한 무법자들 사이에서도 두려움의 대상인 타우 남자들의 집단이었다. 성쪽은 즉시 고전에 빠졌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성의 세력을 누른 것이 흑마에 탄 소녀였다. 거의 풀린 금발을 나부끼며 거대하다고조차 생각되는 검은 말을 가볍게 다루며, 가지고 놀듯이 장창을 휘두르며 거한을 밀어젖히고 쓸어 날리고 베어 넘겼다. 누가 보더라도 신음할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너무나 무시무시한 기세에 가까이 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이것이 덩치 큰 무사라면 또 몰라도 부러질 듯한 가는 팔다리의 소녀이다 보니 적은 물론 반대편의 아군마저도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때 적으로부터 한기가 앞으로 튀어 나왔다. 백은의 붉은 안감을 댄 외투를 휘날리며 상감으로 세 개의 나란한 별이 찍혀진 투구를 쓰고 있었다. "네 이놈! 꼬마 계집!" 너무도 의외였고 분노했던 것이리라. 이름도 대지 않고 갑자기 베어 들어왔다. 쉽게 이 일격을 처리한 소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이름을 들어둘까. 보아하니 피라미는 아닌 것 같은데." 상대가 눈을 부릅뜨고 굉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근위병단 제1군 제2연대 소속 루카난 대대장을 피라미라고?!" "대대장이라면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군. 나는 그린다. 월 그리크의 친구이자 승리의 여신, 덤벼라!" "건방진 놈!" 기골이 장대한 루카난 대대장이다. 아군이 조그만 소녀에게 고전하고 있다고 듣고 무슨 일인가 하고 골치 아프게 생각하며 달려온 것이었다. 이미 지시를 받아야 할 연대장은 두 사람 모두 죽었으며 대대는 각각 독자의 판단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동료들 중에서는 이렇게 된 이상 국왕군에게 투항하던가 어떻게 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진다고 해도 지는 방법이라는 것이 있다. 무인 쪼가리나 된다는 자로서 무용을 한조각 펼쳐보지도 못한 채 꺾일 수 있으랴 하는 것이 루카난 대대장의 고집이었다. 이런 소녀를 상대로 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 탐탁치 않았지만 적의 기세의 절반은 이 소녀의 움직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번 상대해주마 하고 나선 것이지만 즉시 핏기가 빠져나가는 꼴이 되었다. "음!" 되풀이 내리쳐지는 검의 속도도 힘도 대대장의 예측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일격에 베어 넘길 셈이었는데 오히려 몰려서 일방적인 방어전이 되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성 쪽이 초조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바로 지금까지 싸우고 있던상대이지만 당면의 적은 국왕군이다. 지금은 근위병단에게 있어서도 국왕군은 적인 듯 했다. 그렇다면 협력해서 이 강적에게 대항해야 할 것이다. 훌륭한 전쟁철학을 바탕으로 성안의 책임자는 외쳤던 것이었다. "대대장을 구해라!" 성문이 열리고 안으로부터 우르르 시종무사들이 뛰어나왔다. 성주군으로서는 재빨리 쳐들어오는 자들을 처리하고 대대장과 함께 성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국왕이 이끌고 있는 부대가 내버려두지 않았다. 특히나 돌격대의 선두에 선 국왕의 움직임은 맹렬하여 마치 귀신과도 같았다. 소녀와 새로 등장한 적병 사이를 막아서 한 명도 지나쳐 보내지 않겠다는 태세로 종횡으로 창을 휘둘러 실제로 한 사람도 놓치지 않았다. 보병은 젖혀지고 기사는 공중으로 튕겨져 올랐다. "적은 강하다!" "둘러 싸라!" 성의 병사는 설마 이것이 국왕이라고는 알 수 없었다. 차림새도 별 볼일 없는 데다 이런 난전에 설마 총지휘관이 참가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신분이 낮은 기사라고 보고 모양새에 상관없이 여러 명이 한꺼번에 덤벼들었지만 결과는 거꾸로 끝났다. 일반 병사들로서는 무리라고 보고 무장격의 병사가 대응해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상대가 델피니아 제일의 검호라고 알았더라면 아마 그들은 그 자리에서 도망쳐버렸으리라. 왕에게 있어서는 이곳이 승부처이자 익숙해져 있는 기마전이기도 했다. 기백이 달랐다. 국왕과 검을 맞부딪혀 2합까지 버틴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그 옆에는 이븐과 샤미안이 딱 달라붙어 있었다. 국왕을 지키면서 튀어 들어오는 자들을 마침 잘되었다는 듯이 하나 하나 베어 넘겼다. 적들 사이에 동요가 퍼졌다. 그런 동안에도 말 위의 소녀와 대대장은 검격을 교환하며 호각 이상의 싸움을 반복하고 있었다. "루카난! 뭐하고 있나?!" 동료의 고난을 보다 못했는지 혹은 어린아이 한 명에게 시간을 잡아먹고 있는 것을 초조하게 생각했는지 대대장과 같은복장의 기사가 삼각주로부터 달려나와 가세하기 시작했다. "꼬마 아가씨!" 이븐이 달려들려 했지만 국왕이 막았다. "저 아이에게 맡겨둬! 적을 접근시키지 마!" 이 이상 두사람의 기사를 편드는 적을 가까이 오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샤미안이 그에 응해 종기사들과 함께 삼각주 쪽으로 돌아 강을 건너온 아군과 합류하여 적의 접근을 막았다. 대대장 두 사람을 상대로 하게 되었어도 소녀의 기세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차례차례 내뻗어지는 두 자루의 창과 대검을 정확하게 막으며 두 배의 기세로 밀어붙여 한순간도 말을 멈추지 않고 호각의 공방을 계속하고 있었다. 너무나 심한 격렬함에 적도 아군도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전투 모습이었지만 외견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소녀였다. 싸우고 있는 대대장에게는 의혹과 조급함이 있었다. 언제까지고 시간을 들이고 있어서야 기사의 수치가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네 이놈!" 루카난 대대장이 필사적인 일격을 반복했다. 받아내려 했던 소녀가 크게 비틀거렸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말 등에서 굴러 떨어졌다. 됐다! 하고 두 명의 대대장은 생각했으리라 곧바로 말을 가까이 다가가게 했지만 이것은 소녀의 함정이었다. 일부러 낙마했던 것이다. 착지했을 때는 이미 만전의 태세를 잡고 승리를 확신하며 급히 접근해온 대대장을 노려서창을 한 손에 쥐고 짓쳐 들어갔다. "우오!" 황급히 튕겨내려 했을 때에는 루카난 대대장 눈앞에 소녀의 얼굴이 있었다. (말도 안 돼...!) 명치에 강렬한 일격을 받고 눈앞이 어두워졌다. 어느사이엔가 말에서 굴러 떨어져 있었다. 커다랗게 뛰어오른 소녀는 창 끝이 아닌 봉의 끝으로 대대장의 배를 쳤던 것이다. 즉시 비게 된 대대장 말의 고삐를 잡고 반쯤 탄 자세로 또 한 명의 대대장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면서 날카롭게 외쳤다. "그라이아!" 흑마도 호흡을 맞춰 대대장을 향해 돌진했다. 상대는 사람도 말도 기겁했다. 그래도 기수는 가까스로 소녀를 베려고 했지만 창 한번 휘두른 데 튕겨졌고 거기에 흑마가 부딪혀 들어왔다. "뭐야?!" 자세가 무너진 차에 또 한번 창 손잡이의 일격이 들어와 말에서부터 떨어져 버렸다. 땅에 쓰러진 대대장에게는 즉시 로아의 남자들이 덤벼들어 재빨리 밧줄로 묶고 대대장을 잡았다고 환성을 올렸다. 이 전체를 시종일관 반대편에서 보고 있던 도라 장군의 입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타르보도 말분이 막혀 있었다. 뭔가 말하려고 해도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저 소녀가 싸우는 모습을 근처에서 본 것이지만 아무래도 열세살 소녀의 기량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이 정도로 훌륭한 재주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도라 장군은 백전의 맹장으로 불리며 타르보는 그 부관으로서 무용에 있어서는 넘칠 정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저런 흉내는 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저 소녀는 처음부터 적의 대대장을 보고 죽이지 않고 사로잡을 셈이었던 것이다. 죽일 셈이라면 더 빨리 해치웠을 것이라도 지금 와서는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발도우의 딸인가!" 도라 장군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런 탄식이 흘러나왔다. 옆에 있던 나시아스가 끄덕이며 "혹은 우리들을 승리로 이끌어줄 전쟁의 여신이겠지요." 라고 진지함 그 자체의 말투로 말했다. "적편의 푸른 안감의 외투가 한번도 보이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연대장 두 사람은 아마도 어젯밤에 전사했겠지요." 장군에 입에서 또다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단련된 탄탄한 몸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도대체 저 아가씨는 무엇인가. 어디에서 왔다는 건가." 나시아스도 그에 대해 몇 번이나 생각했다. 하지만 물어본다고해도 원하는 답을 얻을 수는 없으리라. 게다가 그런 것은아마도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저 소녀는 폐하의 친구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엄정한 말투였다. "진실된 국왕을 왕좌에 앉히고 왕관을 씌워 주는 것이 도리라고 그때의 왕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저 소녀는 말했습니다.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 그런 것 보다 그 말 속에야말로 바꿀 수 없는 보물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름도 없는 자유전사의 차림을 하고 고립무원이었던 폐하에게 저 소녀는 대가 없이 동료가 되겠다고 말해준 것입니다. 저는 폐하의신하로서 깊은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라 장군은 또다시 신음했으나 이번에는 감탄의 신음에 가까왔다. "저 소녀는 인간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보내진 자인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발도우의 딸인가. 전쟁을 관장하는 신의 화신이 폐하의 편이 되겠다 말해준 것이로구먼." "그 말씀대로입니다." 두 사람 모두 반 정도는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 그러나 반 정도는 어딘가 종교적인 숭배에도 가까운 마음에서 우러난 말이었다. 도라 장군은 채찍을 들어 올리며 후속부대를 돌아보고 외쳤다. "전투신의 딸, 그 자신이 일을 하시게 만들어서야 기사의 수치다! 가자!" 말함과 동시에 채찍을 한번 휘둘러 뛰어나갔다. 그 뒤에 있던 기마대가 노도처럼 그 뒤를 따라 금방이라도 다리를 빼앗을 기세로 성문을 달려들었다. 연대장을 잃고 대대장을 두명이나 잡히게 된데다 더불어 이런 맹렬한 총공격을 눈 앞에서 두고서야 성 쪽의 기력이 버틸 리가 없었다. 서둘러 성문을 닫아 방어하려 했으나 덤벼드는 국왕군은 그렇게 하게 놔두지 않았다. 뭐라 해도 기세가 틀렸다. 단숨에 밀어 붙여 문을 돌파하고 성측의 저항에 신경도 쓰지 않고 환호성을 올리면서 성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국왕과 이븐은 이때까지 적 측의 용사를 다수 쓰러뜨렸지만 돌격대가 나오는 것을 보자 아랫사람들에게 길을 양보했다. 이러한 돌격은 무장격 인원들의 일이 아니다. 계급이 낮은 자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빠지자 이븐." "그래. 뭐 이제 이거면 시간 문제다." 중심주에 남아 있던 병사들도 전의를 상실하여 속속 투항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근위병단의 병사들인 듯 했다. 샤미안이하의 기마대가 병사들의 무장해제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쪽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자니 도라 장군과 타르보, 그리고 나시아스가 다리를 건너서 달려왔다. "폐하!" 조건반사적으로 목을 움추린 국왕이였다. 틀림없이 초특대형의 벼락이 떨어지리라고 각오하고 있었으나 예상과는 반대로 장군은 본마음이 아닌 듯 창백해져 있는 것 같았다. "멋진 솜씨셨습니다..." 국왕은 또 고개를 저었다. "나의 공적이 아니야. 그것은 장군도 알 수 있을 테지." 그들의 눈은 자연스럽게 그 소녀에게 향했다. 그 존재를 적과 아군에게 강렬하게 새겨넣은 적은 전쟁의 신은 말에서 내려 빌렸던 창을 샤미안의 종기사에게 되돌려주고 역시 말에서 내린 이븐과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검은 옷의 산적은 자신도 상당히 움직인 셈이었지만 대대장 두 사람을 잡은 소녀의 솜씨에는 그야말로 경악하고 눈을 의심한 듯 했다. 어젯밤부터 계속해서 이 소녀에게는 계속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 표정을 만드는 것이 능숙하고 웬만해서는 진심을 드러내지 않는 남자였지만 지금은 역시나 상대에 대한 의혹과 미약한 공포의 빛이 떠올라 있다. 눈을 올려다보니 그곳에는 성벽이 보였다. 바로 조금 전에 자신은 그 위에서 떨어졌고 이 소녀가 그것을 받아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보고 있어도 그것이 현실의 일이었다고는 아무래도 믿기질 않는다. 내려다보면 자신의 가슴 정도 밖에 키가 오지 않는 소녀인 것이다. "꼬마 아가씨. 하겠다고 생각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도 있는 것 아냐?" 짓궂은 말이었다. 일반적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은근히 암시하는 말이기도 했다. 소녀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입가만으로 웃었다. "타우의 산적은 쓸데없이 죽이고 다니기도 하는 건가?" "그쪽 같은 물건하고 똑같이 취급하는 게 아냐." 정말로 묘한 기분이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열 살이나 연하인 소녀라는 것을 잊을 것 같은 대화였다. 저 소꿉친구가 이 소녀를 전우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의미였는가 생각했지만 그 말을 얌전하게 믿어주기에는 아무래도 시각적인 방해가 컸다. "꼬마 아가씬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저도 모르게 묻고 있었다. "이븐은?" 거꾸로 질문이 돌아왔다.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랬다. 무언가를 물으면 먼저 대답하는 처지가 된다. 남자는 무뚝뚝한 태도로 머리를 긁었다. "나야... 뭐어 이것저것. 알고 지낸 지도 오래됐고 저 녀석이라면 재미있는 임금님이 될 테고 말이야." "나도 대강 그런 거야." "안지 얼마 안됐잖아?" "그래도 알 수 있어. 저 녀석이 꽤나 재미있다는 것 정도는 말이지." 어엿한 남자같은 말투였는데 거기서 생글하고 웃었다. "또 한가지 있다고 한다면...." "뭐야?" "월은 한번도 날보고 괴물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일까나." 냉랭한 말투였다. 이븐은 묵묵히 소녀를 내려다 보았다. 녹색의 눈동자에 비슷하게 차가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등골이오싹해짐을 느끼는 이븐이었다. 동시에 아 그런건가 하고 납득도 했다. 이 소녀에게 있어서 괴물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보통의 일이었던 것이다. 일일이 화를 내고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13세라고 하는 나이로 게다가 누가 봐도 미소녀라고 하기에 틀림없는 모습으로, 그만큼의 괴력과 이런 성격이라면 무리도 아니다. 머리가 굳은 자들이 무슨 말을 했을지 대략 상상이 갔다. 틀림없이 불쾌한 경험을 해 왔을 것이다. 쓴웃음을 지은 이븐이었다. 하마터면 그런 작자들과 동격이 될 뻔했다고 생각하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저 친구는 이 소녀가 하는 행동에 마음으로부터 놀랐음에도 그 이상의 것은 탐색하려 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소녀는 그 반응을 조금은 희한하다고 느꼈으리라. 그렇게 해서 마음에 들었고 동료가 되어줘도 좋겠다고 기분 썼다는 것이다. 별다른 것도 아니다. 알기쉬운 이유였다. 현실적이랄까. 이 소녀에 대한 의혹도 공포심도 감쪽같이 사라져갔다. "아까 그거, 쬐끔은 기분 괜찮두만." 남자의 혼자말에 소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가?" "허공에 던져졌던 거 말이야. 나중에 또 해 볼 수 있으려나." 소녀가 눈을 크게 뜨더니 빙그레웃었다. "새파래져서 빌빌 떨었던 주제에." "....!"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분개하는 이븐이었다. 열 살이나 어린 소녀에게 이런 말까지 듣고서는 물러날 수는 없었다. "당연하잖아. 난 말야. 너랑은 다르게 제대로 된 인간이라구. 맨날 그렇게 방책 위에서 뛰어내린 일 같은 게 있을까 보냐. 멍청하게 그런 짓이나 해 봐라. 이런 잘 생긴 남자가 순식간에 고기 빈대떡이 될 거라고. 그걸 아까워서 어떻게 하냐." 소녀는 배를 잡고 웃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대굴대굴 웃었다. "정말이야. 아깝겠네." 그렇구말구. 무지무지한 손실이지. 네가 받아준다면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고 끝난다 이거야." 묘한 논리에 소녀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마지막 제안에는 고개를 저었다. "이젠 무리야. 그건 굉장히 팔에 부담이 가. 애초에 어째서 내가 너희들같이 덩치 큰 남자들을 맨날 그렇게 끌어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저 녀석, 전에도 너를 목표로 뛰어내린 일이 있는 거냐?" "그래. 그때는 제대로 받지 못해서 기절해 버렸지. 무겁지 뭐하지,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아." 몸을 떠는 소녀를 보고 이븐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거대한 짐이 하늘에서 떨어져 온다면 확실히 받아주는 쪽은 쉬울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한가지만 더 물을까. 너 언제까지 그 녀석 편에 있어주는거야?"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적으로 돌아설 이유는 없고 일단은 코랄을 되찾을 때까지 여기에 있을 거야. 머리 굳은 아저씨들이 인정해 준다면 말이지만." 금갈색으로 탄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아예 힘으로 입 다물게 하는 건 어때? 꼬마 아가씨라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닐텐데 그래." 이번에는 소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븐." "왜?" "너 언제까지 나를 꼬마 아가씨라고 부를 셈이냐?"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녹색의 눈동자가 이쪽을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귀엽다고 하기보다는 날카로운 것이 밑에서 빛나는 듯한 어수선할 정도로 장난기가 담긴 눈동자였다.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꿀꺽 하고 침을 삼키고 두번 세 번 주저하고 나서 이븐은 말했다. "그건....실례했구만." "응." "확실히 언제까지나 꼬마 아가씨는 좀 그렇겠지." "좀 그렇다고 생각해." 진지한 투로 말했다. 이때 땀에 젖은 샤미안이 다가와 이븐에게 목례하고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축하해. 대단한 활약이었어." "그렇지도 않아." 방금까지 있었던 위험한 기백은 어디로 갔는지 없다. 이미 극히 평범한 말투였다. "이간질시키는 것은 월의 생각이었고 연대장 두 명을 쓰러뜨린 것은 이븐과 월의 공적이야. 나는 불을 붙였을 뿐이야." "어이 아가.... 리." 얼굴을 찌푸린 이븐이었다. "그건 이야기가 반대잖아. 우리들은 네 뒤를 졸졸 쫓아갔을 뿐이라구. 누가 보던지 네가 최고의 공로자잖아." "그렇지 않아." 진지한 얼굴로 대꾸한 소녀였다. "최고의 공로자는 국왕이고 그 뒤를 이은 제2의 공로자는 국왕의 친위대장. 그런거지." "아니 뭐. 그야 확실히 연대장 중 한 명은 내가 해치웠지만...." "대단한 활약이잖아." 라고 소녀가 또다시 진지한 투로 말했다. 샤미안도 끄덕이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븐 경도 반드시 표창 받으셔야 해요." "그래. 덕택에 대대장을 설득하기 쉬워졌으니까." "그 대대장을 사로잡은 것은 너의 공적 아니야?"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소녀는 귀찮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상관 없잖아 그런건. 지금은 좌우지간 몸을 씻고 배터지게 먹고 싶어. 아무래도 지쳤다. 어젯밤부터 너무 많이 일했어." "그거라면 괜찮아. 오늘밤은 특별대접이니까. 성의 식량도 손에 들어온걸." "샤미안이 요리하는 거야?" 여기사는 웃었다. "설마. 나 혼자의 힘으로는 부족해. 3천명분의 식사인 걸? 취사반이 하겠지." "뭐가 나올까나." 완전히 사랑스러운 소녀가 되어 있는 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븐은 상당히 어이없다는 모습으로 고개를 저었다. 오랜 친구에게 질문의 시선을 보낸다. 상대는 그 시선을 느끼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신에게 물어봐도 곤란하다고 말하고 싶은 듯 하지만 이븐은 그걸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저 소꿉친구를 쥐어짜서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남김없이 듣고야 말리라고 단단히 결의했던 것이었다. 11장 대승리를 거둔 국왕군 앞으로 코랄에서의 사자가 도착한 것은 아직 사후처리에 쫓기던 도중의 일이었다. 필시 잡혀 있는 근위병단 사관의 신병을 반환하라고 요청해 오리라고 생각했지만 사자는 이 곳에서 싸움이 있었던 일따위는 알지도 못하고 없었던 듯한 모습으로 조용하게 말했다. "스샤의 아드님께, 코랄에 손님으로 체재하고 계시는 페르난 백작이 심히 몸을 상하셔서 병상에 눕게 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지금 치유에 전력을 다하고는 있으나 의사의 이야기로는 아무래도 상태가 좋지가 않아 최악의 경우에는 이대로 회복을 못하실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백작도 이미 자신의 증세를 낙관할 수 없는 것이라 각오하신 듯 단 한 명 뿐인 가족이며 후계자이기도 한 아드님과 그저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아드님께 있어서도 단 한 분 뿐인 아버님이실 테니설마 이대로 내버려두실 수는 없으실 겁니다. 지금은 흉흉한 때도 때이니 만큼 면회를 원하신다면 서둘러 코랄까지 오시도록 이렇게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또 그럴 경우에는 아드님 한 분에게 한해서 코랄에의 통행증을 발행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국왕은 장승처럼 서서 표정을 만드는것도 잊은 듯 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곁에는 국왕의 측근들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도라 장군이 목소리마저 떨면서 사자에게 물었다. "그건.... 그건 누구의 제안이냐? 아니 애시당초 제정신으로 하는 수작이냐?!" 사자는 어디까지나 정중하게 하얀 벽과 같은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이것은 페르젠 후작님의 호의입니다. 본래라면 면회는 허락되지 않을 터이지만 페르난 백작은 돌아가신 폐하의 총애도깊고 유서 깊은 가문의 분이십니다. 그 혈통이 끊기는 것을 후작님은 안타까워하시는 것입니다." 이븐이 통렬하게 혀를 찼다. 언제나 시치미 떼고 웃음을 멈추지 않는 남자이지만 지금은 무서울 정도로 딱딱한 표정이 되어 있다. 이븐만이 아니었다. "수치스러운지도 모르는가 페르젠!" 도라 장군은 사자 앞에서 그렇게 외쳤다. "어떤 혓바닥을 가지고 있길래 뻔뻔스럽게!" 온후한 나시아스 조차도 이 궤변에는 노기를 드러내고 있을 정도였다. 국왕은 특별히 표정을 바꾸지는 않았으나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아버지의 목숨이 아깝다면 즉시 투항, 혹은 지휘권을 포기하라고 협박해 온 것임이 명백했다. - 3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