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이 책을 'X 파일'의 수호자 스테파니에게 바친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는 관 뚜껑을 들어 올렸다. 스컬리는 그의 어깨 너머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아!"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름이 쫙 끼쳤다. 멀더의 표정을 보고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마치 천국에라도 올라간 것처럼 완벽하게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체격을 보니 레이 솜즈는 운동 선수는 아니었겠군." 그는 말했다. 시체는 흙투성이의 흰 천으로 싸여 있었다. 어린아이 만한 체격이었다. 머리는 커서 축구공만 했다. 살갗은 주름진 갈색 가죽 같았다. "이게 사람이에요?" 공포에 떨며 스컬리가 말했다." 제1장 젊은 여자가 캄캄한 숲속을 달리고 있었다. 맨발이었다. 돌부리에 넘어지고 낙엽 더미에 미끄러지기도 했다. 팔이 드러난 잠옷 차림이었다. 나뭇가지와 가시 때문에 그녀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런데도 여자는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녀의 얼굴이 그 이유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쫓기는 짐승과도 같은 표정이었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여자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순간 여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걸려 나동그라진 것이다. 그녀는 숲속 공터에 넘어져 숨을 헐떡이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발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다 끝났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추격전은 막을 내렸다. 먼지와 나뭇잎을 일으키며 숲 저편에서 회오리바람이 밀려왔다. 먼지 바람은 악마와도 같이 더 한층 빠른 속도로 여자를 에워싸고 소용돌이쳤다. 모래가 세차게 날리며 마치 수백만 마리의 벌떼처럼 그녀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여자는 절망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그때 갑자기 눈부시게 흰 빛이 터지며 여자의 눈을 가로막았다. 이내 그 일대는 이 세상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눈부신 빛으로 가득 찼다. 빛 속에서 윙윙거리는 높은 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나 소음은 고속으로 작동되는 기계톱 소리처럼 파고 들었다. 그리고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소음은 더 심해졌다. 여자는 이제부터 벌어질 일을 직감하곤 몸을 웅크리고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윤곽만 드러낸 한 형체가 흰 빛 속에서 나타났다. 빛이 더 환해졌다. 그 순간, 모든 것이(형체와 여자, 공터, 숲, 밤까지도) 빛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여자의 비명만이 맴돌고 있었다.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고통으로 찢어지는 소리였다. 여자의 비명 소리도 메아리 속에 사라지고 빛도 자취를 감추었다. 캄캄한 숲은 무덤처럼 조용해졌다. 그때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하고 바람에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렸다. 살려고 바둥대던 여자의 주검을 뒤로한 채 다시 삶이 시작되었다. 여자는 그 다음날 새벽 메추리 사냥꾼에 의해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는 소식을 알리러 전속력으로 읍내로 달렸다. 오레곤 주의 하늘이 아침 해로 푸르스름해질 무렵 경찰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8--12시간 전에 사망한 것 같습니다." 검시관이 형사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박고 엎어져 있는 여자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검시관의 조수 두 사람이 시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사인은요?" 형사가 물었다. 그는 체격이 크고 건장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넓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검시관은 대답하기 전에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외상은 없어요, 몇 군데 긁히고 타박상이 있는 것 빼곤. 구타나 강간 흔적도 없습니다, 더 이상은 알 수 없군요." 검시관은 시체 쪽으로 몸을 굽혀 여자의 잠옷을 들치고 등 아래쪽에 난 두 개의 붉은 흔적을 보여주었다. 동전 만한 자국이었다. 형사는 그 부분을 살펴본 뒤 검시관을 쳐다봤다. 두 사람 모두 놀라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냉혹한 사실 파악만이 있을 뿐이었다. 형사는 턱을 깨물었다. 다음 상황으로 넘어가야만 했다. "뒤집어 보시오." 그가 말했다. 조수들은 뻣뻣해진 여자의 시체를 뒤집었다. 안면에는 나뭇잎과 흙이 묻어 있었다. 코에서 흐른 피가 갈색 물감처럼 말라 붙어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신원을 파악하는 데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다만 그 이름을 입에 올리기가 고통스러웠을 뿐이었다. "카렌 스웬슨이군." 형사가 말했다. "틀림없나요?" 하고 조수 중 한 사람이 물었다. "내 아들하고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지." 형사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사륜 구동 트럭 쪽으로 걸어갔다. "89 년도 졸업생입니까?" 뒤에서 검시관이 소리쳤다. 형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도 검시관은 계속해서 소리쳤다. "또 그 일이 터졌군요, 그렇죠?"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소름끼치게도 그 말이 바로 정답이었다. 제2장 다나 스컬리는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여자가 아닌 창백한 남자의 시체였다.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마치 똥개 한 마리를 쳐다보는 투였다. 시체 다루는 것은 그녀의 일상 업무 일 뿐이었다. 스컬리는 젋고 아름다운 여자다, 하지만 그녀가 이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이 그 떄문은 아니었다. 머리가 좋았던 것이다. 그녀는 칼같이 예리했고, 또 그것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녀야말로 FBI가 찾던 그런 요원이었다. 이즈음 스컬리는 FBI에서 훈련 교육반을 맡고 있었다. 오늘 그녀는 시체를 가지고 감전사 판별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녀는 맹쾌하게 말하다가도 기차 바퀴에서 불꽃이 튀듯 재빨리 전문 용어를 구사하곤 했다. 학생들이 그녀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면 그것은 운이 나쁜 것이었다. 그런 학생이 훌륭한 FBI요원이 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었다. "감전은 심장 박동을 멎게 하고 자율신경 대부분을 파괴시킵니다. 심장 조직과 심장 혈관계의 세포들이 파괴됨으로써 사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도는 달라도 사람은 누구나 전기가 통합니다. 번개를 맞고도 무사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기 소켓만 만져도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축막이용 전기 울타리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조사할 때는 둥그런 붉은 상처를 찾아야 합니다." 스컬리는 말을 멈췄다. 요원 한사람이 교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이마를 찡그렸다. 누구든 자신의 수업을 방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건네준 쪽지를 읽은 그녀는 화를 내는 것도 잊어버렸다. '16시 정각에 워싱턴에 출두하기 바람. 특수 요원 존즈와 접촉할 것.' 스컬리는 소신있는 여자인 동시에 명령에 복종하는 요원이었다. FBI가 가장 아끼는 요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점 때문이었다. 오후 네시 정각, 스컬리는 FBI본부에 와 있었다. 그녀는 경비원에게 배지를 보이며, 말했다. "특수 요원 존즈라는." "스컬리 요원." 등 뒤에서 저음의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 보니 체격이 크고 인상이 강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오십대쯤으로 보였는데 그녀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는 짐작할 수가 있었다. "난 존즈요." 그가 말했다. "따라오시오, 늦었소." 그는 아무도 없는 긴 복도를 따라 스컬리를 데려갔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스컬리는 남자의 큰 보폭에 맞추느라 거의 뛰다시피 해야 했다. "제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녀가 물었다. "인터뷰가 있을 거요." 존즈가 말했다. "최고위층 사람들이오." 존즈는 큰 이중문을 지나 스컬리를 안내했다. 그 안은 회의실이었다. 타원형 탁자를 끼고 여섯 사람이 앉아 있었다. 모두들 육십대로 보였다. 스컬리는 그들의 지위를 알지 못했지만 권력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열린 냉동실 문 밖으로 퍼져나오는 한기처럼 그들로부터 권력이 펴져나왔다. 존즈는 스컬리에게 자리를 권하고 자신은 그녀 뒤에 서 있었다. 제일 먼저 말을 한 사람이 그중 가장 연장자인 듯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전혀 나이답지 않았다. 스컬리는 그 시선에 몸이 꿰뚫리는 느낌이었다. 그의 목소리 또한 노쇠한 구석이라곤 없었다. 강철과도 같이 야물고 차가운 음성이었다. "스컬리 요원, 와 줘서 고맙소." 그가 말했다. "부서에서 2 년간 일해 온 걸로 아는데?" "그렇습니다." 스컬리가 대답했다. "천문학을 전공했고."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의학 공부를 했지만 의사가 되진 않았군? 그 다음엔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땄고, 그렇게 여러 가지 공부를 한 이유를 설명해 주겠소?" "그건 저 저는 학구적인 집안 출신입니다." 스컬리가 대답했다. "그래서 과학을 공부하면 집에 대해 나름대로 반항할 수 있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스컬리는 자신의 어줍잖은 농담이 실패했음을 눈치챘다. 방안의 그 누구도 웃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말을 계속했다. "의대 졸업후, 국립 우주 연구소에서 공부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러자면 물리학이 필요할 것 같았어요. 그러나 FBI에 들어오기로 결정했지요. 물리학 학위는 FBI아카데미에서 받은 것입니다." 탁자에 앉은 사람들은 두꺼운 서류 뭉치를 넘기고 있었다. 스컬리는 자신의 모든 것이 거기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았다. 한참 동안 종이 넘기는 소리만 났다. 그때 갑자기 두 번째 인물이 물었다. "폭스 멀더란 요원을 압니까?" "네, 그렇습니다." 스컬리가 대답했다. "어떤 경로로?" 다시 그가 물었다. "소문을 들었죠" 스컬리가 대답했다. "다른 요원들이 가끔 그의 얘기를 하더군요. 아카데미에 있을 때 그를 '유령' 멀더란 별명으로 부르는 걸 들었습니다. 존즈가 끼여들었다. "단언하지만 그따위 소문은 잘못된 것입니다. 멀더는 뛰어나게 유능한 요원입니다. 하버드와 옥스퍼드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연쇄 살인자들과 초자연 현상에 관한 그의 논문 덕분에 힘든 사건 하나를 해결했습니다. 그는 아마 범죄국에서 가장 뛰어난 분석가일 것입니다." 존즈는 거기서 말을 끊어야 했다. 첫 번째 인물이 불쑥 그의 말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멀더 요원은 다소 이상한 프로젝트에 큰 관심을 가져왔소, 아니, 큰 관심 정도를 넘어서 완전히 미친 거지. X 파일이란 말 들어봤소?" "약간은 알고있습니다." 스컬리가 말했다. "기묘한 사건이나 설명하기 힘든 현상들을 다룬다고 들었습니다." "터무니 없는 이야기만 모아 놓은 거지." 두번째 인물이 투덜거리자 첫번째 인물이 그를 날카롭게 쳐다봤다. 그리고 스컬리 쪽을 보며 말했다. "멀더 요원은 그 자신과 부서의 시간을 X 파일에 수록된 사건들을 조사하는 데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소. 다른 임무를 맡으라는 제안은 들으려고도 않고 있소," 그는 스컬리가 자기 말의 속뜻을 헤아리도록 잠시 내버려 두었다가 계속해서 말했다. "스컬리 양, 당신의 탁월한 자질을 감안, 멀더의 X 파일 조사 작업을 돕는 임무를 주겠소. 연구 작업 현장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 작업이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당신의 솔직한 의견도 제시해야 하오. 보고서는 오직 우리들에게만 제출하게 될 것이오." 스컬리는 자신에게 내려진 임무를 즉각 파악했다. 그것은 머리는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 "X 파일 프로젝트를 밝혀달라는 뜻인가요?" 그녀가 물었다. 한순간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첫번째 인물이 말했다. "스컬리 요원, 우리는 당신이 적절한 과학적 분석을 해줄 것으로 믿소. 당신이 X 파일이 의심스럽다고 보고한다면 그게 사실일 것이오. 나는 멀더 요원의 뛰어난 재능을 다른 분야에 활용할 수 있다고 믿소. 당신 역시 마찬가지요. X 파일을 해결 하고 나면 당신에게도 그에 따른 대가가 있을 것이오." 그의 어조가 하도 단호해서 더이상의 질문은 할 수도 없었다. 스컬리는 한 가지밖에 할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알겠습니다." "존즈 요원이 상세한 브리핑을 해줄 것이오." 첫번째 인물이 말했다. "솔직한 보고를 해주시오, 점잔뺄 필요 없어요.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마침내 존즈와 같이 밖으로 나오게 되자 그녀가 물었다. "대체 멀더는 어떤 사람이죠?" 존즈는 입을 오므리며 혀를 찼다. "멀더? 똑똑하지, 아주 똑똑해요, 게다가 아주 독자적이고, 가끔 난해하기도 하고, 간단히 말해 FBI 기준으로 볼 때는 수상한 사람이죠."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덧붙였다. "당신이 뭘 하는지, 그는 정확히 알거요." 스컬리는 아주 천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아요, 다만 명령에 따를 뿐이죠." 제3장 스컬리는 폭스 멀더를 만나러 가면서 한 가지는 예상할 수 있었다. 틀림없이 뜻밖의 인물일 것이다. 과연 그랬다. 멀더의 사무실은 FBI 본부 건물 지하에 있었다. 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존즈가 데려다 주지 않았더라면 혼자서는 찾지도 못했을 것이다. 존즈는 노크만 하고 그냥 들어갔다. 스컬리도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FBI 사무실과 크게 달랐다. 사방 벽이 바닥에서 천장까지 책들로 채워져 있었다. 묵은 신문과 서류, 보고서 뭉치들이 책상마다 가득했다. 그것들은 얼룩진 사진들과 함께 바닥까지 넘쳐흘렀다. 한쪽 벽에 글귀가 붙어 있었다. '나는 믿고 싶다.' 멀더는 책상에 붙어 스탠드 불빛 아래서 사진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마지못해 손님을 맞았다. 스컬리는 처음으로 그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그건 맞지도 않은 퍼즐 조각들을 맞춰보려고 애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얼굴이 젊어, FBI의 특수 요원이라고 하기엔 어려 보이기 까지 했다. 머리는 FBI 기준 이상으로 길어서 MTV 비디오 자키를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달랐다. 거기엔 무언가 깊고,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이 있었다. 뭔가를 알고 있는 어떤 지혜 같은 것이 느껴졌다. 멀더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안합니다, 여긴 FBI가 싫어하는 사람 외엔 오지 않는 곳인데요." 하고 그가 말했다. 존즈는 농담기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멀더, 새 보조자가 왔네. 특수 요원 다나 스컬리양. 이쪽은 폭스 멀더 씨요." "보조자라구요? 갑자기 제가 그 정도나 된다니 기분 나쁘진 않은데요" 멀더는 스컬리를 돌아봤다. "당신더러 이런 일을 하라고 한 사람이 누굽니까. 스컬리?" 스컬리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꾹 참았다. 흥분하면 멀더가 눈치챌 지도 모를 일이므로, "당신과 같이 일하고 싶은 것뿐이^36^예요." "그래요?" 멀더가 말했다. 그는 스컬리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난 또 당신이 나를 감시하러 온 줄 알았소." 스컬리의 점잔빼는 미소가 굳어졌다. "제 자격이 의심스럽다면 기꺼이 밝혀 드리겠어요." 멀더는 굳이 대답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서류 뭉치 하나를 뒤적이더니 접혀진 곳을 찾아냈다. "아인슈타인의 두 가지 모순에 대한 재해석'이라," 그는 말했다. "다나 스컬리의 박사 학위 논문. 자격이 있군요, 아인슈타인을 해석하다니." "재미없었나요?" 스컬리가 물었다. 어쩔 수 없이 냉담한 목소리가 나왔다. "아, 그래요." 멀더가 말했다. "좋은 논문이긴 한데, 문제는 내가 하는 일에는 물리 법칙이 별로 소용이 없을 것이란 점이오." "스컬리 요원이 의학 박사라는 점도 알아야 하네." 존즈가 멀더에게 말했다. "아카데미에서 강의도 맡고 있어." "물론 알고 있습니다." 멀더가 말했다. "어쩌면 이런 사건에서는 의학적 소견이 요긴하게 쓰일 수도 있겠군요." 멀더는 방안의 불을 끄고 슬라이드 영사기를 틀었다. 그리고 조금 전 보고 있던 슬라이드 사진을 끼웠다. 벽면 스크린에 사진이 나타났다. 스컬리는 숲속 공터에 얼굴을 박고 쓰러져 있는 젊은 여자의 시체를 보았다. "오레곤 주 출신의 여성. 나이 21살. 사망 원인은 알 수 없음. 이상," 그는 두번째 슬라이드를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등에서 뚜렷한 자국 두 개가 발견되었음. 그게 무슨 흔적인지 알겠소, 스컬리 선생?" 스컬리는 화면 쪽으로 다가갔다. 두 개의 자국을 자세히 살폈다. "바늘 자국 같은데요." 그녀가 말했다. "짐승에게 물린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감전 흔적일지도 모르겠네요." "화학은 좀 압니까?" 멀더가 물었다. "이건 상처 주변 조직에서 발견된 물질인데." '이건 스무고개로군.' 시체 사진을 살피면서 스컬리는 생각했다. 대학교 1 학년 이후로 이런 식의 게임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이건 무기질이에요. 하지만 이런 종류는 처음 봐요, 합성 단백질류인가요?" 멀더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손들었어요. 전혀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것 좀 보세요, 다코타 남부의 스터기스에서 찍은 겁니다." 그는 또다른 슬라이드를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아주 건장한 남자의 시체였다. 그러나 등 뒤의 자국은 똑같았다. 또다른 슬라이드 하나가 들어왔다. 눈 속에 얼굴을 박고 있는 남자였다. 이번에도 등에 그 자국이 나 있었다. "텍사스 주 샴록이오." 멀더가 말했다. "짚이는 게 있으세요?" 스컬리가 물었다. "나요? 생각이야 많죠." 멀더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도 생각은 해 봤겠죠? 본부에서 내 말을 무시 하는 까닭이나, 이런 사건들을 설명할 수 없는 현상으로 간주해 버리는 까닭에 대해. 본부는 왜 이런 사건들을 파일로 만들어 묻어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돌연 멀더는 말을 중단했다. 그리고 스컬리에게 오늘의 가장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스컬리, 외계인의 존재를 믿습니까?" 그럴듯한 대답을 찾느라 스컬리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과학자의 입장에서 말이오." 멀더가 덧붙였다. "물리적으론 믿지 않는다고 해야겠군요." 머뭇거리며 스컬리가 말했다. '나는 이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한다. 잘못된 방식으로 출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주 끝에서 끝까지의 거리는 너무도 엄청나죠. 필요한 에너지만 보더라도 우주선 하나에." 멀더가 말을 가로챘다. "오레곤의 그 여자 말입니다. 그녀 이전에도 그녀가 졸업한 고등학교의 학생 세 명이 전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었어요. 보다시피 과학은 아무 해답도 주지 못하죠. 이래도 과학을 벗어나선 안된다는 겁니까? '공상의 세계' 따윈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걸까요?" 스컬리는 참느라 애를 먹었다. 이런 식으로 애매 모호하게 대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그 여자가 죽은 이유를 모른다는 건," 그녀는 말했다. "검시 중에 놓친 게 있기 때문일 겁니다. 시체 처리를 소홀히 했는지도 모르죠, 제가 공상이라고 할 때는 단 한 가지 경우 뿐이에요. 과학의 영역을 벗어난 곳에서 해답을 찾는 게 바로 공상이란 거죠." 멀더의 얼굴에 즐거운 미소가 스쳤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반갑군요 스컬리 요원." 그가 말했다. "여기 존즈 요원도 틀림없이 당신 생각에 동의 할 겁니다. 명령 계통에 매인 사람은 마찬가지겠지만." "자, FBI 일원인 '나'는 이런 사람이오. 우리가 할 일은 조사 작업이오. 즉시 시작하는 게 좋겠소." 멀더는 슬라이드를 끄고 방안의 불을 켰다. "스컬리, 희망찬 내일, 아침 일찍 봅시다." 그는 명랑하게 말했다. "아침 여덟시 정각에 오레곤으로 가는 거요." 제4장 다음날 아침, 스컬리는 오레곤 행 비행기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중앙 통로 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 멀더가 좌석을 네 개나 차지하고 곤히 자고 있었다. 스컬리는 워크맨을 끼고 있었다. 무릎 위에는 두툼한 파일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음악을 듣지도 파일을 읽지도 않았다. 다 아는 노래들이었고 서류 내용도 이미 다 훑어 본 것이었다. 벨레풀러 고등학교 89 년도 졸업생 중 네 명의 기이한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나중에 좀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지금 그녀는 어젯밤 만난 남자 친구 에든 미넷을 생각하고 있었다. 스컬리가 주말의 데이트 약속을 깼을 때 에든은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스컬리는 그가 그럴 줄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할 일이 생겼다고만 말했다. 에든도 늘 그런 식이었다. 따지고 보면 약속을 깨는 것은 그 사람 쪽이 더 자주였다.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 바빴지만 특히 에든의 일이 바빴던 것이다. 에든은 멀더를 안다고 했다. 일년 전, '유령' 멀더가 아이오와의 한 의원을 설득해 UFO 연구 기금을 따냈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 얘기는 워싱턴의 일대에서는 다 아는 얘기였다. 에든은 그 방면에 밝았다. 상관의 지시에 따라 정치인들을 다루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보수도 많아서 에든은 밤낮없이 일했다. 어쩌다 틈이 나면 한번쯤 만나는 정도였다. 그들은 여가용 연인이었다. 아무튼 스컬리는 아무도 없는 편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든 생각은 쉽게 잊혀졌다. 안보면 마음도 멀어지기 마련이니까. 존즈와의 마지막 대화는 쉽게 떨쳐 버릴수가 없었다. 멀더의 사무실을 나오면서 스컬리는 존즈에게 물었었다. "윗분들은 왜 멀더가 실패하기를 바라죠?" "그 사람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존즈가 말했다. "그럼 나를 택한 이유는?" 스컬리가 물었다. "실은 내가 당신을 뽑았소." 존즈가 말했다. "왜죠?" 스컬리가 물었다. "당신이라면. 공정할 것 같아서." 존즈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 눈은 스컬리가 있는 그대로 밝혀 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또 자신은 멀더에 대해 고위층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스컬리는 멀더를 곁눈으로 훔쳐보았다. 정신없이 자고 있는 모습이 아기처럼 천진하고 연약해 보였다. '이 사람은 괴짜 천재인가, 아니면 골치 덩어리 미치광이인가.?' 참고 기다리며 지켜볼 일이었다. 갑자기 비상등에 불이 들어왔다. 스피커에서 기장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주시기 바랍니다. 하강하겠." 그 다음 말은 들리지 않았다. 비뱅기가 심하게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거인의 주먹에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머리 위 화물함이 열려 짐들이 쏟아졌다. 기내 불빛이 깜박거렸다. 제트 엔진 소리가 멈추었다. 비행기가 급강하하자 깜깜한 기내는 승객들의 고함과 비명으로 뒤덮였다. '정신 차려야 해.' 스컬리는 중얼거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두 손으로 좌석 양쪽 손잡이를 안간힘을 다해 붙잡고 있었다. 갑자기 불이 들어왔다. 요란한 엔진 소리가 다시 들렸다. 멀더가 눈을 크게 뜨고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이제 다 온 모양이군." 그가 말했다. 스컬리에게 렌트 카 키를 건네주면서 멀더가 다시 웃었다. "아까 비행기 여행이 맘에 들지 않았다면," 그가 말했다. "틀림없이 내 운전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스컬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운전석에 앉자마자 출발했다. 차는 공항 인근 도로를 따라 가다가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옆에는 멀더가 선글라스를 끼고 앉아 있었다. 그는 라디오를 틀고 다이얼을 돌려 댔다. 마음에 드는 채널을 맞춘 그는 종이 봉지 하나를 꺼냈다. "해바라기 씨, 들겠어요?" 그가 권했다. "싫어요." 스컬리가 말했다. "운전할 때 방해하지 마세요." "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오." 멀더는 씩 웃었다. "방해했다면, 미안해요." "그 파일 읽어봤어요." 앞을 보면서 스컬리가 말했다. "FBI가 이 사건을 벌써 조사했다는 말을 왜 안해 주셨죠?" "FBI는 처음 세 사건만 조사했어요." 멀더가 시인했다. "수사는 종결됐소. 증거 부족으로 X 파일로 넘어왔더군." 그가 안경을 쓰고 있어서 스컬리는 그의 눈을 볼 수 없았다. 하지만 분명히 눈을 가늘게 뜨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의 죽음과 동창생 세 명의 죽음 사이에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스컬 리가 말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멀더가 말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그 여자의 경우에만 의문의 자국 두 개와 조직 샘플이 나왔다는 거요." 스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 안에서 훑어본 파일이 생각났다. "그 네 명 중 그 여자만 다른 의사가 검시했다는 것도 특이 하죠." 멀더의 표정이 환해 졌다. "잘 맞췄어요. 스컬리. 생각보다 훨씬 잘하는데요." "당신 기대 이상으로만 잘한다는 거^36^예요?" 스컬리가 말했다. "한계를 지닌 과학은 한계를 가진 과학자를 만들어 내죠." 멀더가 대답했다. "그 말이 당신의 그 해바라기 씨만큼이나 맛있길 바래요." 스컬리가 말했다. 그러나 멀더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라디오 앞에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엘비스의 노래가 멈추고, 대신 저음으로 윙윙대는 큰 소리가 라디오에서 나오고 있었다. 귀를 찢는 듯한 소리였다. 대단했다. 스컬리는 그런 소리는 생전 처음 들었다. "차를 세워요.!" 멀더가 말했다. "차를 세우라니까!" 스컬리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너무 급하게 서는 바람에 뒷 트렁크가 튕기듯 열려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멀더가 차 밖으로 나갔다. 트렁크로 가서는 뭔가를 꺼냈다. 스컬리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멀더는 스프레이 통을 들고 있었다. 밝은 오렌지색 스프레이였다. 멀더는 고속도로를 따라 10 미터쯤 뒤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지점 아스팔트 위에다 스프레이로 크게 X자를 그렸다. "도대체 그건 뭐^36^예요?" 멀더가 차로 되돌아오자 스컬리가 물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멀더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리곤 스컬리를 쳐다보면서 덧붙였다. "어쩌면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건지도 모르죠, 안 그래요?" 스컬리는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녀는 자기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멀더의 머리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도로상에 어떤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제5장 큰 글씨의 표지판이 서 있었다. '친근한 곳, 벨레플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응은 친근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관공서 앞에 몰려 있는 군중들은 금방 돌이라도 던질 태세였다. "이럴 줄 알았어." 멀더가 말했다. "무슨 일이죠?" 스컬리가 물었다. "검시관 사무실에 팩스를 보냈었소." 멀더가 말했다. "우리가 올 거라구." "그런데 왜들 이러죠?" 스컬리가 말했다. "이곳 사람들은 FBI를 싫어하나 봐요." "팩스에다 우리가 다른 세명의 시체도 조사한다고 했거든요." 멀더가 설명했다. 그러나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차에서 내리자 군중들이 다 밝혀 주었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FBI요?" 한 중년 남자가 소리쳤다. "우리 일에 상관 마시오." "무슨 권리로 이래요?" 한 여인이 큰 소리로 따졌다. "걔들은 우리 애들이에요." "이 분들은 그 동안 충분히 고통받았소." 목사가 말했다. 권위를 풍기는 부유한 옷차림의 한 남자가 소리질렀다. "이미 범인이 잡혀서 재판을 받고 판결까지 났어! 다시 걔들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다구!" 그런 와중에도 멀더는 조용히 미소만 띠고 있었다. 스컬리는 그 미소가 다소 지겨워졌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지을수 있는 웃음이었다. 그녀가 보기에는 말썽을 몰고 올 소지가 있는 그런 미소였다. 경관 한 사람이 다가올 때까지도 멀더는 웃고만 있었다. "멀더 요원." 그가 말했다. "당신 앞으로 서류가 와 있습니다. 벨레풀러 주민들이 당신의 행동은 불법이라는 법원의 결정을 받아 냈습니다." 멀더는 서류를 받아 들고 훑어본 뒤 어깨를 으쓱했다. "검시관 사무실에 다녀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요." 그가 스컬리에게 말했다. "고맙기도 하군요, 이런 곳에서 기다리라니."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멀더의 등에 대고 그녀가 말했다. 지금 그녀는 자기 고향 팀에게 아웃을 선언하는 심판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멀더와 검시관의 대면도 그다지 좋진 않았다. 주민들에 비하면 조금 부드럽긴 했지만 그다지 우호적이진 않았다. "트루트 씨죠?" 멀더가 물었다. "예, 바로 접니다." 검시관이 대답했다. 차가운 음성에 냉담한 눈길이었다. 곁에선 그의 조수 두 사람 역시 멀더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난 FBI 특수 요원 멀더요." 멀더가 말했다. "전화로 통화한 적이 있죠. 언제쯤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지금은 법원 명령이 내려져 있어서 즉각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트루트가 말했다. 새 몇 마리를 삼킨 고양이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하지만 난 시체 해부실을 좀 써야겠소. 그리고 사람도 몇명 필요하오." 멀더가 말했다. "제 입장을 말씀드려야겠군요." 트루트가 말했다. "여긴 매우 외진 곳입니다. 하지만 법은 지키고 살죠. 진심으로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만, 보시다시피." "고맙습니다." 멀더가 잘라 말했다. "나를 도울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세 건의 사건에 관심이 있어요. 그런데 법원의 명령은 두 건에만 적용되고 있죠. 한 사람이 빠졌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트루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난 FBI입니다." 멀더가 검시관에게 상기시켰다. "나는 법을 대표하고 있어요." "빠진 사람은 레이 솜즈입니다." 마지못해 검시관이 대답했다. "왜 그의 가족들은 우리가 시체를 파지 못하도록 법원에 요청하지 않았지요?" 멀더가 물었다. "레이 솜즈의 가족은 3 년 전에 사라졌어요." 트루트가 말했다. "사라졌다구요? 정말 사라졌나요?" 멀더가 캐물었다. 그러나 멀더는 이미 트루트에게서 얻어낼 것은 다 얻어냈다. 검시관은 입을 꽉 다물어 버렸다. 그래도 좋았다. 일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것은 이미 다 얻었으니까. 그 이름이 중요했다. '레이 솜즈라.' 멀더는 기분 좋게 작별 인사를 했다. 트루트와 조수들은 인사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괴롭히지 않았어요?" 밖으로 나온 멀더가 스컬리에게 물었다. "괴롭혔냐구요? 전혀요. 그저 작은 마을의 환대를 받았을 뿐이에요. 그것도 아주 융숭하게." 스컬리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늘 이런 작은 마을에까지 바람을 일으키나요?" "내 방식이 마음에 안 드시오?" 멀더는 렌트 카로 고개를 돌리며 가볍게 물었다. "우리가 여기 온 건 한 사건의 살인 여부를 수사하기 위해 서잖아요." 스컬리가 날카롭게 말했다. "이곳 사람들의 협조를 바라는 건 무리죠." 멀더의 얼굴에 예의 그 약올리는 듯한 미소가 번졌다. "뭘 기대했소, 스컬리?" 그가 말했다. "이곳 사람들이 풍악을 울리며 우릴 맞아줄 줄 알았소? 기존의 FBI 방식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당신이 내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소. 언제든지 그만두고 나에 대한 보고서를 올릴 수 있잖소. 그게 파견 목적 아니오?" "난 당신의 일을 돕기 위해 왔어요." 스컬리는 황급히 말했다. "그래요?" 눈썹을 치켜올리며 멀더가 말했다. "그게 진심이고 진실이란 말이죠?" 체격이 좋고 얼굴색이 붉은 한남자가 느닷없이 그들 사이에 끼여든 덕에 스컬리는 적당한 대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를 만나러 왔소?" 그는 매우 화가 나 있었다. "그건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멀더가 말했다. "누구십니까?" "의사 제이 네먼이오." 그가 밝혔다. "지역 의료 검시관이시군요." 멀더가 말했다. 스컬리는 그걸 거라고 생각했다. 멀더가 이미 다 알아봤을 테니까. "그렇소." 그는 벌컥 화를 냈다. "당신들 지금 내가 그 시체들 검시에서 놓친 게 있다고 말하러 온 거요?" "그렇지 않습니다." 멀더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별도의 조사를 하는 중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어쨌든." 네먼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말했다. "명심하시오, 시체를 보고 싶으면 내 허락을 받아야 하오. 여긴 내 구역이니까." "마지막 인물, 카렌 스웬슨은 왜 검시하지 않았습니까?" 멀더가 물었다. "난 그때 휴가 중이어서." 네먼이 변명하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멀더가 쌀쌀하게 말했다. "이간 연방 차원의 문제입니다. 스컬리 박사가 시체를 점검해 봐야겠습니다." "이봐요!" 의사가 호통을 쳤다. "저 부모들에게 다시 악몽을 겪게 하고 싶소?"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멀더를 렌트 카에 대고 세게 밀쳤다. 그리곤 금방이라도 후려갈길 듯 큰 망치같은 주먹을 들어올렸다. 멀더가 싸움을 잘하는지 스컬리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잘했다. 그녀는 행동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췄다. "아빠, 그만두세요." 애띤 여자의 목소리가 매달렸다. "제발! 집으로 가요!" 렌트 카 옆에 세워진 자동차에서 난 소리였다. 앞 좌석에 앉은 그 여자는 얼굴이 희고 아무렇게나 쓸어 올린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목소리에도 똑같이 어두운 두려움이 깔려있었다. 네먼은 아직도 멀더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뒤돌아서 자기 차로 걸어갔다. 그는 차에 올라 요란하게 시동을 걸었다. "괜찮은 사람인데," 멀더가 말했다. "딸도 예쁜걸." 그는 차 문을 열었다. "묘지로 가보지 않겠소. 스컬리?" "그러죠." 스컬리가 말했다. "우리 무덤이나 파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제6장 트루트가 레이 솜즈의 무덤을 파는 일에 성의가 없음은 분명했다. 그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멀더는 온갖 FBI의 위력을 발휘해야 했다. 인부가 작업하러 올 때까지 트루트와 조수들은 두 명의 경관과 떠들어대고 있었다. 무덤을 파는 인부의 몸에서 땀방울이 떨어졌다. 오레곤의 태양은 뜨거웠다. 한낮인데도 공기가 무척 눅눅했다. 벨레플러 공동묘지 전체가 한증탕 같았다. 그러나 멀더는 늘상 그랬듯이 침착하게 서 있었다. 새까만 파리 떼가 윙윙거리는 중에도 해바라기 씨를 씹고 있었다. 마치 소가 되새김질하는 것 같다고 스컬리는 생각했다. 블라우스가 축축했다. "이건 시간 낭비고 땀 낭비예요." 그녀가 초조한 듯 발했다. "대니 도티라는 이 사람이나 만나 보는 게 어때요? 한 사건의 범인으로 확정됐지만 나머지 사건도 그 사람 짓일 수 있잖아요." "대니 도티는 다 털어놨어요." 멀더가 말했다. "세 명을 다 살해했노라고. 문제는 경찰이 그를 단 한 사건외에는 연관시킬 수 없었다는 점이에요. 게다가 경찰은 그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아요. 증거는 거의 없고 추측 수사만 했다는 뜻이죠. 자백이 없었다면 그를 석방시켜줄 뻔했을 정도요. 하지만 사람들은 살인자를 잡는 데 혈안이 돼 있어서 그의 말을 그대로 접수했소. 이곳 사람들은 대니가 나머지 사람도 죽였을 거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일을 다 잊고 싶은 거지." "그렇다면," 스컬리가 따졌다. "그가 자신이 하지도 않은 살인까지 자백한 이유는 뭘까요?" "늘 있는 일이잖아요. 살인자 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 멀더가 말했다. 그는 해바라기 씨를 씹다가 껍질을 뱉어 냈다. "어쨌든 대니는 여기서 북쪽으로 60 마일 떨어진 곳에 수감 돼 있어요. 가서 그를 만나 볼까요?" 그녀가 말했다. "만나서, 무슨 대답을 들으려구?" 멀더가 말했다. 스컬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기대한 것 이상을 얻을지도 모르잖아요? 그가 이번 마지막 사건도 저질렀노라고 자백할지도 모른다구요. 감방에서 빠져나와서 했다고 말이^63^에요."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멀더가 말했다. 스컬리는 파헤쳐진 무덤에서 관이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여기 죽은 시체보다는 살아 있는 대니가 더 많은 것을 말해 줄 걸요." 그녀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관이 잘 빠져 나오지 않았다. 바닥의 나무뿌리들이 관에 얽혀 있었다. 그 떄문에 끌어올리는 밧줄이 곧 끊어질 것 같았다. 관이 공중으로 올려졌을 때 결국 밧줄이 끊어졌다. 스컬리는 숨을 죽였다. 모두들 긴장했다. 관은 흙바닥에 나뒹굴더니 언덕 아래로 미끄러졌다. 이끼 낀 묘비 하나에 부딪혀 멈췄다. 멀더는 그리고 걸어갔다. 스컬리도 바로 뒤따랐다. 검시관과 조수들은 그대로 서 있었다. 관 뚜껑이 조금 열려 있었다. 멀더는 관을 열려고 서둘렀다. 스컬리도 잘 보려고 몸을 기울였다. 그녀는 프로였고 이런 일은 늘상 하는 일이였다. 비위가 약한 사람은 가까이 오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만두시오." 트루트가 소리쳤다. "이건 공식 절차에 어긋납니다." "아, 예 그렇군요. 오늘밤 자기 전에 규정을 다시 봐야겠는데요." 멀더가 말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는 관 뚜껑을 들어 올렸다. 스컬리는 그의 어깨 너머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아!." 소리를 내지 않을수 없었다. 소름이 쫙 끼쳤다. 멀더의 표정을 보고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마치 천국에라도 올라간 것처럼 완벽하게 만족한 표정이었다. "체격을 보니 레이 솜즈는 운동 선수는 아니었겠군." 그가 말했다. 시체는 흙투성이의 흰 천으로 쌓여 있었다. 어린아이 만한 크기였다. 머리는 커서 축구공만 했다. 살갗은 주름진 갈색 가죽같았다. "이게 사람이에요?" 스컬리는 숨도 못 쉬었다. 뭘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요." 검시관이 간신히 이렇게 말하곤 더는 말하지 못했다. "다시 봉하시오." 멀더가 지시 했다. "아무도 보거나 만져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그러나 멀더의 말뜻은 그게 아니란걸 스컬리는 알고 있었다. 그말은, 자기 말고는 그 누구도 시체를 조사하는 재미를 즐겨선 안되다는 뜻이었다. 물론 곁에 있는 스컬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검시관은 자기 연구실을 쓰는 게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멀더가 자신과 스컬리만 빼고 다 나가 달라고 해도 반대하지 않았다. "이건 당신 시체니 당신이 하시오." 멀더가 막 문을 닫으려 할 때 트루트가 말했다. 멀더는 안에서 문을 잠갔다. "자 의대에서 뭘 배웠는지 봅시다." 그가 스컬리에게 말했다. "안심하세요." 스컬리가 말했다. "전에도 시체를 검시해 봤으니까." "그래요?" 멀더가 말했다. "이런 비슷한 것도?" "시체는 다 마찬가지죠, 뭐." 스컬리가 말했다. "찾아내는 게 당신 일 맞죠?" 멀더가 물었다. "그래요, 찾고야 말겠어요." 얼른 스컬리가 말했다. "잠깐 녹음기나 준비하구요. 전 찾아낸 걸 녹음해 놓거든요." "후손에게 남길려구?" 멀더가 물었다. "아니면 고위층에다 보고할려구?" "두 가지 다라고 해두죠." 스컬리가 말했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한테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죠. 파트너니까." "좋소." 멀더가 말했다. "당신은 조사해서 말로 남기시오. 나는 사진을 찍을 테니." 그는 자그마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냈다. 스컬리가 작업하는 동안 시체 주변을 왔다갔다 하며 여러 각도에서 셔터를 눌러댔다. "실험재료의 키는 156센티미터." 그녀는 녹음기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몸무게 52파운드. 이미 부패가 진행된 상태. 안구가 크고 편평한 두개골. 이상으로 볼 때 이 시체는 인간의 것이 아님." "그렇다면 스컬리 요원, 도대체 뭐란 말이오?" 멀더가 끼여들며 빈정거렸다. 스컬리는 음성을 낮추었다. "포유류의 일종인 것 같아요. 유인원류로 추정되는 군요. 침팬지 같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한테 한번 그렇게 말해 보시지. 아니면 솜즈 가족한테 하든지." 멀더가 말했다. 그의 눈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그는 계속해서 찰칵찰칵 카메라를 눌러 댔다. "섬유 조직을 채취하고 X레이를 찍어봐요." 그가 덧붙여 말했다. "혈액형. 약물검사. 그리고 유전적 조사를 다 해보시오." "정말이에요?"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스컬리가 물었다. "이 자리서 할 수 없는 건 지시하면 되니까." 멀더가 말했다. 스컬리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정말 이게 외계인일 거라고 생각하세요? 보세요, 누가 들으면 배를 잠고 웃을 일이에요. 여기 이것과 레이 솜즈의 시체를 바꿔치기 한 작자 말이에요. 우린 지금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거라구요." 그러나 그녀야 말로 말을 낭비하고 있었다. 멀더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X레이 찍을수 있어요?" 멀더가 물었다. 스컬리의 음성이 높아졌다. 그를 설득시키려 했지만 목만 아픈 노릇이었다. "당신은 뭔가에 홀렸어요, 멀더." 그녀가 말했다. "그 여자를 살해한 범인은 여전히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어요. 또다른 살인을 할 수도 있어요. 아주 간단하게, 언제든지." "그렇소." 멀더가 말했다. "그러니 지금 즉시 범인을 저지해야 돼요." 멀더는 시계를 보았다. "10시 좀 넘었군. 총을 들고 FBI가 포기한 살인범을 찾아 나서 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시체를 과학적으로 조사해 보는 게 좋겠소. 이게 도대체 누구인지, 아니 무엇인지에 대해 일체의 의문도 남겨서는 안되오." 그는 말을 끊었다. 그의 표정은 애원에 가까웠다. "이봐요. 스컬리, 나는 돌지 않았어요." 그가 말했다. "나 역시 당신과 똑같은 의문을 느끼고 있어요. 나를 도와 주시않겠소?" 제7장 다음날 새벽, 스컬리는 모텔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등갓에 괴물체의 X레이 필름을 붙여 놓고 그것을 다시 한번 보았다. 그리고 노트북 컴퓨터를 켰다.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자신의 목소리가 크고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그녀는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X레이로 볼 때 그 동물은 포유류가 확실함. 그러나 비강 안에 심어진 작은 금속 조각은 X레이로는 알 수 없음. 이 물체는 회색의 금속성임. 길이는 4mm. 아직까지 파악 불가능.' 스컬리는 타이핑을 멈추고 녹음기를 껐다. 그녀는 시체에서 발견된 물체를 한 번 더 보려고 일어났다. 그 작은 원통형 금속은 지금 유리병 안에 들어 있다. 스컬리는 그것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멀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도 물어 보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더 이상 그의 생각을 듣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생각들이 점점 더 사실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만약 감시하는 입장이 아니었다면 그녀도 멀더못지않게 미쳤을 것이다. 노크 소리가 났다. 멀더였다. 그는 색바랜 자주색 바지와 흰 티셔츠의 조깅복 차림이었다. 셔츠 한쪽 어깨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머리에는 '브룩클린 다저스'라고 새겨진 야구 모자를 썼다. 그는 해맑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초조해서 잠이 안 오더군." 그가 말했다. "조깅하러 갈건데 같이 가겠어요?" "난 됐어요." 스컬리가 말했다. "그 친구 코에서 나온 물체의 정체는 밝혀 냈어요?" 멀더가 짓궂게 물었다. "아뇨." 스컬리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못 자진 않았어요." 멀더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쪽지 한 장을 건네 주었다. "프런런에 당신 앞으로 와 있었소." 스컬리는 멀더가 조깅 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그는 마치 떠가는 것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아직도 공기가 차가웠지만 서서히 열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늘이 벌써 하얀 새벽에서 짙푸른 아침으로 바뀌고 있었다. 오늘도 푹푹 찔 것 같았다. 스컬리는 문을 닫고 쪽지를 읽었다. 연락해 달라는 에든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스컬리는 워싱턴에 있는 에든의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이렇게 아침 일찍 전화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만, 지금 스컬리는 이 사건과 무관한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누구든, 아무라도 좋았다. 외계에서 온 자그마한 침입자 따위 얘기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벨이 울리자 마자 에든이 받았다. "여보세요." 별로 밝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나^36^예요. 스컬리." 스컬리가 말했다. "깨워서 미안해요." "깨어 있었소." 에든이 툴툴댔다. "조금전에 웬 작자가 전화를 해 놓곤 끊어 버렸거든." 스컬리는 혼자 웃었다. 틀리없이 멀더였을 것이다. 그는 스컬리를 체크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그녀를 믿지 않고 있으니까. 그래도 그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 자신도 멀더와 마찬가지 아닌가. 그를 감시하는 임무. 두 사람은 아주 잘 어울리는 파트너였다. 서로를 감시하는. "아침부터 재수가 없군요." 그녀가 에든에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오." 에든이 맞장구 쳤다. "그건 그렇고 지금 몇 시요?" "여긴 다섯 시^36^예요." 스컬리가 말했다. "거긴 여덟 시겠군요."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뭐하는 거요" 에든이 물었다. "아직 잠자리에 들지도 않았어요." 스컬리가 말했다. "밤을 꼬박 새워 일했거든요. 당신 메모를 보고 중요한 일인가 해서요." "전혀 아니오. 그냥 해본 거요." 에든이 말했다. 그가 하품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런데." 별로 할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컬리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 생각이 든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에든과는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 같이 일하는 그 작자가 혹사시키는 게 틀림없군." 에든이 말했다. "이름이 뭐랬지, 유령 비슷한 뭐 아니었소?" "네, 맞아요. 유령 누구누구." 스컬리가 말했다. 갑자기 수화기를 든 손이 무겁게 느껴졌다. 끊고 싶어졌다. "그래, 그 작자가 뭐 좀 알아냈어요?" 에든이 물었다. "사실은." X레이 필름과 유리병 안의 물체를 쳐다보면서 스컬리가 말을 꺼냈다. 그러나 곧 입을 다물었다. 에든의 반응이 어떨지는 뻔했다. '눈썹을 치켜올리고 손으로 이마를 탁 치겠지.' 그녀 자신도 그러는 그를 나무라지 못할 것이다. 이틀 전이었다면 자신도 그처럼 반응했을 테니까. 멀더와 함께 한 그 이틀이 어쨌단 말인가. 그녀는 생각 해보았다.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본 이틀이었다.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사물을 보게 되지는 않을까? "아 어쨌든, 너무 깊이 빠져들진 말아요. 알겠지?" 에든은 말을 하고 다시 하품을 했다. "그리고 그 노련한 유령이 더 이상 당신을 혹사시키지 못하도록 만들어요. 적당히 협박하라구." "그렇지만 내 생각엔." 스컬리가 말하기 시작했다. "잠깐, 더 얘기 나누고 싶지만 오늘 할 일이 많아서." 에든이 말했다. "나중에 또 연락합시다." "그러죠, 나중에." 스컬리가 말했을 때는 이미 전화에서 뚜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다시 X레이 쪽으로 다가갔다. '코 속에 작은 금속을 심어야 했던 이유는 뭘까?'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는다. 만일 그게 말이 되는 거라면, 그렇다면 그녀가 지금까지 믿어 온 다른 모든 것들은 터무니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멀더가 즐거운 얼굴로 방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녀는 창문을 열었다. "같이 갔으면 좋았을걸." 멀더가 말했다. "잠이 번쩍 깼을 텐데. 찬물에 샤워해요. 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일 준비를 할 테니까." 스컬리는 신음소리를 냈다. "이번에도 관두겠어요. 나는 뜨거운 목욕을 하고, 푹 자겠어요." "그러지말고, 이리 와요." 멀더가 말했다. "놓치면 후회할 거요. 이건 평생에 한 번 올까말까 한 기회라구요. 진짜 살아 있는 연쇄 살인범과 마음의 대화를 할 기회가 자주 있을 것 같아요?" 제8장 대니 도티는 호리호리한 체구의 젊은이였다. 그러나 교도소 측은 방심하지 않았다. 팔목에는 수갑이, 발목에는 짧은 사슬이 달린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교도관들이 데리고 오는 걸 보니 간신히 걷는 정도였다. "그 사람을 두고 나가 주시오." 멀더가 교도관들에게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그 중 한사람이 말했다. "이 자는 위험하다구요." "그렇게 안 보이시겠지만." 다른 교도관이 말했다. "이 놈은 살인자입니다. 아주 교활한 놈이죠." "됐소." 멀더가 말했다. "알아서 하겠소. 우린 FBI요." 첫번째 교도관들이 스컬리를 미심쩍게 쳐다봤다. "걱정말아요." 멀더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녀는 총을 갖고 있으니까." 두번째 교도관이 어깨를 으쓱했다. "좋습니다. 당신들 일이니." 교도관들은 면회실에서 물러갔다. "전 총을 갖고 있지 않아요." 스컬리가 멀더에게 말했다. "아무려면 어때요." 멀더가 말했다. "그리고 여기 대니도 사고를 치진 않을 거요. 안 그런가 대니?" 대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번쩍이는 눈이 스컬리를 긴장시켰다. 교도관들이 괜한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사람은 틀림없는 정신 이상자다. 그런데도 멀더는 오래 전 헤어졌던 형이나 되는 것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갑네, 대니." 그는 더할 수 없이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안녕하시오." 대니는 다람쥐가 찍찍대는 투로 말했다. "나이도 많지 않은 날 보러 오셨나? 그러는 사람 별로 없는데. 나 대니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아요. 그들은 나에게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던져 버렸지. 파일로 만들어 쳐박아두는 것 처럼 말이야. 하지만 괜찮아. 때리는 것만 빼곤 안전하거든. 무덤 속처럼 안전하지. 그리고 그다지 차갑지도 않구." 아무것도 없이 흰 페인트가 칠해진 큰 방 안에는 의자만 세개 있었다. 멀더와 스컬리는 나란히 앉았다. 대니는 그들을 마주보고 앉았다. "대니, 난 FBI요원 멀더고 이쪽은." 멀더가 말하기 시작했다. "이봐요, 당신들이 여기 온 이유를 알고 있어." 대니가 말했다. "그들이 카렌 스웬슨을 그렇게 했어." "카렌을 아나?" 멀더가 물었다. "물론이지." 대니가 말했다. "괜찮은 애였는데, 하지만 일은 벌어지게 되어 있었어. 그건 시간 문제였단 말이야. 그들은 진짜 멋지게 해냈지." 그가 웃었다. "그들이 늘 하는 일이니까." "그들이 누구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멀더가 물었다. 대니는 흰자위가 보일 정도로 눈을 굴렸다. 그러더니 멀더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그들'이라고 했나?" 대니가 말했다. "실수 했군. 사실은 내가 한 일이오. 여기서 나가서, 텔리파시로 해치웠지. 뭐랄까. 식은죽 먹기였어. 그저 '카렌, 귀여운 것, 너는 죽는다'라고 생각만 했을 뿐이야. 그리고는, 제기랄, 그녀가 사라졌어. 그렇지만 걱정마슈. 내가 한 짓에 대해서는 기꺼이 처벌받을 테니까. 종신형이나 때리시지." 대니는 미친 듯이 키득거렸다. 멀더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카렌 스웬슨의 등에 난 이 흔적에 대해 아는 게 있나?" 대니에게 사진 한 장을 보이며 그가 물었다. "클레오파트라가 뱀한테 물린 거지." 대니가 재빨리 말했다. "그래, 틀림없이 한 사람은 클럽에 있었어." "그래?" 멀더가 말했다. "무슨 클럽인데?" "무슨 클럽 같아? FBI 선생." "레이 솜즈도 그 클럽에 있었나?" 멀더가 물었다. "레이 솜즈?" 대니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표정이 밝아졌다. "아, 그 레이 말이군. 그럼, 레이는 에 뭐라더라? 가족 회원이었지." 또다시 그는 광적인 웃음을 흘렸다. 멀더가 스컬리를 보았다. "대니한테 물을 것 있소?" 그가 물었다. "아뇨 계속하세요." 스컬리가 말했다. "대니와 당신은 꽤 잘 통하는 것 같군요." 멀더는 죄수를 돌아봤다. "이봐 대니, 자네를 돕고 싶네." 그가 말했다. "맙소사. 난 아무 도움도 필요 없어." 대니가 말했다. 이젠 그의 얼굴에는 미친 기색이라곤 없었다. "난 죄인이^36^예요. 아시겠어요? 죄인, 죄인, 죄인이라구요. 난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아요. 저 높은 담 안에 있는 게 좋아요. 나갈 수도 없고, 아무것도 들어 올 수도 없는. 난 정말로 빌리 마일즈가 있는 곳엔 가고 싶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빌리 마일즈는 누군가?" 멀더가 물었다. "빌리요?" 대니가 말했다. "다들 빌리를 아는 줄 알았는데, 그는 축구할 때 퀴터백이었거든요. 물론 더 이상 시합은 할 수 없겠지만. 그들이 그를 정신 병원에 넣었기 때문이죠." 주립 정신 병원은 벨레플러 외곽에 있었다. 잘 깎은 잔디로 둘러싸인 근사한 흰색 건물이었다. 일급 병원이었다. 병원장인 윌리엄 글래스 박사도 일류인 듯했다. 지적으로 생겼고 매너도 좋았다. 대답도 분명하게 해주었다. 그는 벨레플러에서 유일하게 그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기꺼이 도와주려고 했다. "예, 빌리 마일즈는 이곳 환자입니다." 그가 말했다. "3 년 이상 입원하고 있는 환자 중 하나죠." "그럼 박사님이 담당 의사입니까?" 멀더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그의 치료를 감독하니까요." 글래스 박사가 말했다. "빌리는 89 년도 졸업생입니다." 멀더가 말했다. "그 아이들 사건을 아십니까?" 글래스 박사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수년 동안 그중 몇 사람을 만나 봤습니다. 대니 도티도 왔었죠." "그들에게 어떤 처방을 하셨습니까?" 멀더가 물었다. "환자들 얘기는 할 수 없습니다." 글래스 박사가 말했다. "의사로서의 불문율이죠." 멀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러시겠죠. 그래도 대충 말씀해 주시면 안될까요?" "그럽시다," 박사가 말했다. "그들은 모두 유사한 증상을 보였어요. 외상 후 스트레스였죠. 극심한 충격 뒤에 오는 증상입니다." "어떤 종류의 충격이었습니까?" "그건 모르겠습니다." 박사가 솔직히 말했다. "그 아이들도 아는 것 같지 않았어요.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그게 어떤 것이었든 그 충격은 아이들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어요. 머리까지 휘저어 놓았죠." 스컬리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임무는 멀더가 어떻게 사건을 풀어 나가는지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하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대니 도티가 친구를 살해했다고 생각하세요?" 그녀가 물었다. "그 문젠 경찰과 법원에서 판단하겠죠." 박사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은 있으실텐데요?" 스컬리가 말했다. "내 일은 병든 정신을 치료하는 겁니다." 박사가 말했다. "누구를 감방에 처넣는 일이 아닙니다." "정신을 치료한다면, 최면술도 쓰시나요?" 멀더가 끼여들었다. 글래스 박사는 쓴 웃음을 지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정신 이상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최면 같은 허튼짓을 했다가는 큰일 납니다. 아무 때든 발작을 일으키죠. 그저 간단한 처치나 하는 게 좋습니다. 그게 최선은 아니겠지만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제이 네먼 박사의 딸을 치료한 적이 있습니까?" 멀더가 물었다. 박사는 주저하다가 마침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헛기침을 했다. "그 부모들은 알지 못해요. 그 아이 스스로 왔더군요. 최선을 다했지만." 그는 말을 끊었다. "미안합니다. 말씀드렸듯이 환자의 사적인 얘기는 할 수 없습니다." "빌리 마일즈 얘기도 안 되나요?" 멀더가 물었다. "안 됩니다." 의사가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 몇가지 물어 보는 건 허락해 주시겠죠?" 멀더가 고집스럽게 물었다. 글래스 박사는 이마를 치켜들었다. "미안합니다. 아시는 줄 알았는데요. 빌리 마일즈는 기묘한 혼수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깨어 있지만 혼수 상태죠 의식은 있는 것 같은 데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몇 년 동안 아무하고도 말해 본 적이 없습니다. 괜한 시간 낭비만 하실 것 같군요." 멀더는 멈칫했다. 한 대 맞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금방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렇다면 잠깐 그를 보기만 해도 될까요?" 그가 물었다. 박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입니다.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리고 이걸 알아두세요. 빌리는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박사의 그 말은 아주 완곡한 표현이었다. 빌리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윤곽이 뚜렷하고 체격도 좋은 잘 생긴 젊은이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듯했다. 입을 살짝 벌리고 숨만 쉬고 있었다. 가끔가다 눈만 깜박이곤 했다. 그것이 그가 살아 있다는 유일한 표시였다. "저것좀 보세요." 머리를 가로 저으며 간병인 말했다. "한때는 벨레플러 고등학교의 자랑스런 축구 선수였죠. 대학에서도 전국적인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웬 놈들이 나타나 그를 박살내 버렸죠. 아주 뭉개 버렸어요. 완전히 치고 달리기였죠. 범인은 잡지도 못했습니다. 4 년전 얘기죠." "그때 이후로 쭉 저랬나요?" 스컬리가 물었다. 속이 좋지 않았다. 시체도 다뤄 본 그녀였다. 그러나 살아 있는 송장은 또 달랐다. "하나도 변한 게 없어요." 간병인이 말했다. "식물 인간입니다. 내가 저랬다면 차라리 벌써 땅에 묻히고 말았을 겁니다. 가족들도 요즘엔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안옵니다. 걱정해 주는 사람이라곤 페기 오델밖에 없어요." 이렇게 말한 간병인은 스컬리의 어깨 너머로 말했다. "그렇지, 페기? 휠체어에 앉은 젊은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스컬리와 멀더는 비켜섰다. 그녀는 젓가락같이 마르고 유령같이 창백했다. 그녀는 빌리를 보러 온 방문객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침대위의 인물에게만 눈길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휠체어를 움직여 빌리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위에 놓인 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저 여잔 빌리의 친구입니다," 간병인이 말했다. 그는 스컬리에게 윙크를 했다. 그렇지, 페기? 이분들하고 얘기해 봐요. 당신처럼 빌리를 보러 온 분들이니까." 그 여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멀더가 부드럽게 물었다. "빌리하고 같은 학교에 다녔어요?" 페기는 못 들은 체 했다. "빌리는 내가 책을 읽어 주길 바래요." 그녀는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멀더가 다시 시도 했다. "빌리한테 사고가 나기 전부터 알고 지냈어요?" 페기의 목소리가 몽롱해졌다. "빌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녀가 기억을 더듬었다. "학교에서 제일 인기 있는 남학생이었으니까요." "책을 읽어주면 좋아하나요?" 멀더가 그녀에게 물었다. "전 지금 빌리를 돌봐야 해요." 페기가 말했다. 여전히 넋이 나간 듯한 음성이었다. "우린 영원히 함께 할 거^36^예요." 그녀가 말을 끊었다. 그리곤 벽이 울릴 듯이 말했다. "빌리와 난 그 빛을 봤어요." 제9장 "빌리와 난 그 빛을 봤어요.!" 페기의 말이 충격적으로 병실에 울려 퍼졌다. 멀더와 스컬리는 입을 쩍 벌렸다. 그러나 더 충격을 받은 것은 빌리 마일즈 같았다. 그의 눈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얼굴이 뒤틀렸다. 목에 힘줄이 섰다. 목젖이 꿈틀거렸다. 입이 벌려지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짐승처럼 으르렁 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조용해졌다. 빌리는 다시 식물인간으로 돌아갔다. 멀더가 말하는 소리가 났다. "페기, 무서워하지 말아요. 스컬리 박사가 당신을 보려는 것 뿐이오." 스컬리는 공포로 뒤틀린 페기의 창백한 얼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싫어요! 안돼, 안된다구요!" 페기가 소리 질렀다. 숨을 헐떡이며 휠체어를 움직여 문 쪽으로 갔다. 간병인이 뒤에서 휠체어를 붙잡았다. "괜찮아, 페기." 그가 달랬다. "괜찮다니까." 페기는 말을 듣지 않았다. 휠체어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간병인이 벽에 붙은 비상벨을 눌렀다. 그 동안 스컬리는 페기를 의자에 앉히려고 애쓰고 있었다. 페기는 완강했다. 스컬리가 그녀에게 손을 대려 하자 양팔을 거칠게 휘둘러 댔다. 멀더가 스컬리를 도와주었다. "고마와요. 성난 고양이 같애." 스컬리가 말했다. 그런데 멀더는 다른 것을 보느라 그녀의 말은 듣고 있지도 않았다. 스컬리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게 뭔지 보였다. 페기의 환자복이 들려져 등 아래가 드러났다. 하얀 피부에 두 개의 붉은 자국이 찍혀 있었다. 멀더는 만족스러운 듯 쳐다보고 있었다. 대만족인 것 같았다. 하지만 스컬리는 달랐다.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통증도 약간 느껴졌다. 이 모든 상황이 그녀가 소화하기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스컬리는 이 정신병원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돌아 버리기 전에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남자 간호사 두 명이 페기를 돌보러 오고 있었다. 그녀는 복도를 지나 정문 앞으로 나왔다. 초록빛 잔디와 푸른 하늘.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다시 자신의 예전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정상이고 통제력을 상실하지 않은. 그녀는 렌트 카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 사건의 파일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 진실에 대한 갈증이 났다. 진짜 분명하고 냉철한 진실들 말이다. 그녀는 차에 앉아 카렌 스웬슨의 사망 기사를 다시 읽었다. 기사 제목이 '89 년 졸업생들의 네번째 비극'이었다. 그 밑으로, 숲속 공터에서 카렌을 발견하기까지의 상세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 모든 일들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스컬리는 생각했다. 자신이 그걸 알아내야 한다. 차창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스컬리는 놀라서 펄쩍 뛸 뻔했다. 멀더가 씩 웃으며 유리창으로 보고 있었다. "장난이 심하시군요." 창을 내리며 그녀가 말했다. "빌리가 작별 인사를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더군." 멀더가 말했다. "흥!" 스컬리가 코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그런 흔적을 가지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죠?" "여자? 어떤 여자?" 멀더가 말했다. "아, 그 무도회에서 본 캐리 같이 생긴 여자 말이오?" 스컬리는 인내력에 한계를 느꼈다. 이런 식의 게임에는 질렸다. 더구나 멀더 자신이 규칙을 정하고 야릇한 장치를 한 게임이 아닌가. "멀더, 그만해요." 그녀가 말했다. "대답해 주세요. 지금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죠? 그 흔적에 대해 알고 있는게 뭐죠? 그게 뭐냐구요." "진실을 알고 싶어요?" 멀더가 물었다. "그래요." 스컬리가 대답했다. "받아들일 수 있겠소?" 멀더는 알고 싶어했다. "두고 보면 알잖아요." 스컬리가 말했다. "내 생각엔 그 아이들은 유괴됐던 것 같아요." 멀더가 말했다. "도대체 누가?" 스컬리가 말했다. " '무엇'이 그랬냐는 뜻이오?" 멀더가 말을 바로잡았다. 스컬리는 차에서 내려 멀더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이 문제를 결판 짓고 넘어가야 했다. "진심으로 외계에서 온 '존재'란 걸 믿으세요?" 그녀가 따졌다. "이봐요. 난 멋지게 설명해 줄 참이었는데," 그가 말했다. "당신이 들어만 준다면." "당신은 미쳤어요." 스컬리가 냉담하게 말했다. "내 생각으론 그 젊은이들이 사이비 종교 같은 것에 관계됐던 것 같아요. 알잖아요? 악마 숭배 같은 거. 젊은이들은 특히 그런 데 빠지기 쉽죠." "그런가?" 멀더가 말했다. "틀림없어요." 스컬리가 말했다. "그리고 숲속은 야밤에 그런 수상한 의식을 치르기에 안성 맞춤인 장소죠. 카렌 스웬슨이 잠옷 바람으로 숲에서 발견된 것도 그 때문이에요. 숲속에 가 봐야 해요. 거기 단서가 있을 거^36^예요. 촛불이나 십자가, 뭐 어떤 거든 있을 거^36^예요." "좋은 생각이오." 멀더가 웃으며 말했다. "난 복도 많지, 당신을 내게 보내주다니. 당신이 없었더라면 완전히 헤맬 뻔했어." "또, 또, 장난이군요." 스컬리가 말했다. "아무튼 숲으로 가 봐요." "그럽시다." 멀더가 말했다. "그렇지만 어두워진 다음에. 이곳 사람들을 자극할 만한 일은 더 이상 안돼요. 우리가 쑤시고 다니면 더 예민해질 테니까. 이의 있소.?" "아뇨." 스컬리가 말했다. "난 성인이에요. 어둠 따위는 무섭지 않아요." 그러나, 그날 밤. 그녀는 몸서리쳐지는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혼자였다. 멀더와 분담해 숲의 서로 다른 장소를 조사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런, 침착해야지." 나무 사이로 손전등을 비추면서 그녀는 중얼거렸다. 앞에 공터가 보였다. 나뭇가지를 쓸어 내면서 그리로 갔다. 그녀는 풀이 타 버린 자리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손을 대보니 회색 재가 묻어 났다. 신문기사가 떠올랐다. 카렌 스웬슨의 시체가 발견된 곳이 틀림없었다. 나지막하게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일 뿐이야." 그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바람은 불고 있지 않았다. 소리가 더 커졌다. 그녀는 멀더를 찾기로 했다. 그녀는 일어나서 왔던 길로 향했다. 눈부시게 흰 빛이 눈을 가로막았다. 금속성 도구에서 나는 것 같은 찰칵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상한 발자국 소리 같기도 했다.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숨쉬기도 힘들었다. 소리는 더 커졌다.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때 뭔가가 보였다. 현란한 빛 가운데 어두운 형체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멀더? 당신이에요?" 그녀가 불렀다. 그러나 그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건 멀더가 아니었다. 제10장 "눈에는 눈이야." 스컬리는 중얼거리며 행동에 돌입했다. 그녀는 현란한 빛을 향해 손전등을 맞비추었다. "이봐. 누구요!" 웬 음성이 들렸다. 이제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순찰 중인 경관 같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발사할 태세였다. "당신은 사유지를 침범했소."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조사 작업을 하고 있어요." 침을 꿀꺽 삼키고 스컬리가 말했다. "우린 FBI예요." "누구든 간에." 그 남자가 말했다. "차를 타고 당장 나가시오. 아니면 침입죄로 체포하겠소." 감자기 어둠 속에서 멀더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긴 범죄 현장이오." 스컬리는 소리나는 쪽으로 손전등을 비췄다. 공터 저 편에 멀더가 서 있었다. "난 경찰이오." 그가 말했다. "즉시 차를 타고 떠나시오." 멀더는 형사의 단호한 눈빛을 쳐다보다가 권총을 보았다. 그는 스컬리에게 말했다. "들었지요? 법을 따르는 수밖에." 스컬리는 형사의 사륜 구동 트럭을 지나 멀더를 따라 갔다. 트럭 위에 고성능 조명대가 있었다. 조금 전 그녀의 눈을 부시게 한 것이 바로 그것인 것 같았다. 그녀가 들었던 그 요란한 소리는 트럭의 엔진 소리였음에 틀림없다. '그럼 그렇지. 저것 때문이었어.' 그녀는 이제 지칠 대로 지쳤다. 애초에 뭔가를 상상하고 시작했던 것이다. 불가능한 일을. 게다가 이런 오싹오싹한 숲속에서였으니. 느닷없이 그녀가 놀라 펄쩍 뛰었다. 하늘에 번개가 일고 있었다. 천둥소리가 공중을 갈랐다. "여길 떠나요." 그녀가 멀더에게 말했다. "그럽시다." 마침내 차 있는 곳으로 오자 멀더는 운전석 옆자리에 앉으려 했다. "이번엔 당신이 운전하세요." 스컬리가 말했다. "점검해 볼 게 좀있어요." "좋을 대로 해요." 멀더가 말했다. 그는 들고 있던 나침반을 운전 계기판 위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안전 벨트를 맸다. "당신도 착용하는 게 좋을 거요." 그가 충고했다. 또다시 번개가 쳤다. 차 유리에 빗방울이 튀었다. 멀더는 와이퍼를 켰다.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멀더는 비에는 아랑곳 없이 엑셀러레이터를 밟아 댔다. 자동차는 숲을 벗어나 도로를 향해 큰 소리를 내며 달렸다. 한편 스컬리는 공터에서 긁어 온 태워진 풀과 재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게 생겼을까요?" 그녀가 물었다. "산불이 났었나?" 멀더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야영객이 그랬을까요?" 그는 씩 웃었다. "왜 나한테 묻는 거요? 내 생각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모종의 의식이 치러졌었는지도 몰라요. 제물을 바친다던가 하는." 스컬리가 말했다. "악마 숭배 의식이 있었던게 분명해요. 다시 되돌아 가 봐요." "허, 정말이오?" 멀더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차라리 날씨 얘기나 했으면 나을 뻔했다. 멀더는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데 더 열심이었다. 그의 손이 갑자기 라디오 버튼 위에서 얼어붙은 듯했다. 라디오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오다가 곧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치 차가 송전선 밑을 지나온 것 같았다. "이걸 봐요." 멀더가 말했다. 스컬리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 나침반을 보았다. 나침반 바늘이 까닭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멀더는 창 밖을 내다봤다. "괜찮아요, 멀더?" 스컬리가 물었다. "뭘 찾는 거^36^예요?"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잠자코 빗속을 달렸다. 도로변에 웅덩이가 여럿 패여 있었다. 그러나 자동차는 거침없이 달렸다. "이봐요, 멀더. 혹시 당신." 그녀가 말을 꺼냈다. 느닷없이 무시무시한 번갯불이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하늘이 섬광으로 되덮였다. 자동차도 빛으로 뒤덮였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자동차 불빛도 꺼져 버렸다. 비가 차창을 때리는 소리만 들렸다. 엔진도 정지했다. 차는 속력이 줄어들다가 도로 한쪽에 정지해 버렸다. "이런, 무슨 일이죠?" 스컬리가 물었다. "시동이 꺼졌소. 브레이크도, 핸들도 작동이 안되는군." 멀더가 그녀에게 말했다. 한데 그는 화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설령 그랬다 해도 목소리는 즐거웠다. 아니, 행복해 했다. 가장 신나는 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그는 손목 시계를 보았다. "3분이 실종됐군." 그는 기뻐서 비명을 지르다시피 했다. "뭐가 실종됐다고요?" 스컬리가 물었다. "3분이란 말이오!" 멀더가 다시 소리쳤다. 그리고 그는 차에서 내려 퍼붓는 빗속을 뚫고 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스컬리는 한숨을 쉬고는 그를 쫓아 차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자기가 파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아이처럼 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3미터 떨어진 곳에 멀더가 서 있었다. 그는 스컬리가 올 때 까지 기다렸다. "우린 3분이란 시간을 잃어버렸어요." 그가 한 번 더 말했다. "섬광이 일기 직전 시계는 9시 3분이었어요. 섬광직후에 봤더니 9시 6분 이었고. 그리고 지금 여기 이곳을 봐요." 그가 아스팔트 바닥을 가리켰다. 오렌지색으로 큰 X자가 빗물 속에 가물거리고 있었다. 스컬리는 멀더가 언제 그곳에 와서 스프레이를 뿌렸을까 생각해봤다. 그러느라 잠시 시간이 걸렸다. 어제였다. 그런데 한 일 년쯤 된 것 같았다. 어제 이후로 너무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들 주변에. 그리고 그녀의 내면에. 이건 좀 지나치다고 스컬리는 생각했다. 데이터가 넘치게 입력될 때 컴퓨터의 상태가 어떨지 이해가 갔다. 그리고 부팅을 위해 컴퓨터에 공급되는 전력이 급증할 때의 상태까지도. 그녀는 이제 사건들이 그만 일어나기를 바랬다. 최소한 잠깐만이라도. 하지만 이미 걷잡을 수는 없었다. "유괴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시간의 실종을 말하곤 했어요." 멀더가 말했다. "목격한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유괴된 사람들이라고?' 스컬리는 찡그리며 생각했다. 멀더는 외계인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그런 것들의 존재를 정말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오늘 밤 여기에 외계인이 왔다는 것이다. 펄쩍 뛸 일이다. "이봐요, 나한테 그런 얘기." 스컬리가 말하기 시작했다. "저길 봐요!" 멀더가 말했다. 그는 도로 저 뒤쪽을 가리켰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저절로 다시 켜졌다. "저럴 수가." 스컬리는 숨이 막혔다, "경고를 했죠? 내가 운전하면 조심하라고." 멀더가 말했다. "내가 운전석에 앉으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요. 각오해 두시오." "내가 지금 이 순간 원하는 게 뭔지 말하죠." 스컬리가 말했다. "곧장 호텔로 돌아가요. 중간에 멈추지 말고. 우회하지도 말고. 지체없이!" "좋은 생각입니다." 멀더가 말했다.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니까." "충분한 정도를 넘었죠." 스컬리가 그에게 확인시켰다. 마침내 자신의 방에 돌아와 혼자가 되자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기분 좋게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푹 자고 나면 오늘 일은 개꿈쯤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먼저 할 일이 있었다. 그녀는 책상 위에 컴퓨터를 놓고 앉아서 두드리기 시작했다. '미지의 힘에 의한 시간 실종이라는 멀더 요원의 보고를 본 요원은 지지할 수 없다. 그것이 극도로 불가능하다고 믿으며 그 대신, 본 요원이 믿는 것은.' 그 순간 모텔 방의 전등이 깜빡거리더니 불이 나가 버렸다. 스컬리의 컴퓨터 화면은 문제가 없었다. 배터리로 작동되었기 때문이다. 스컬리는 자기가 쓴 마지막 문장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이 극도로 불가능하다고 믿으며 그 대신, 본 요원이 믿는 것은.' 그녀는 자신을 에워싼 어둠을 응시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문장에 커서를 맞춘 뒤 '삭제 키'를 눌렀다. 그녀는 무엇을 써야 할지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이 모든 일들이 너무 엄청났다. 그녀의 상태는 단순히 지친 것 이상이었다. '머리가 죽어 버렸어. 낮에 생각해 보면 좀 쉬울지도 모르지.' 컴퓨터 모니터에서 나오는 빛으로 양초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하나를 켰다. 그리고 기지개를 펴며 하품을 했다. 멀더는 내일 아침에도 혼자 조깅을 할 것이다. 그녀는 최대한 오래 잘 생각이었다. 그녀는 촛불을 들고 욕실로 들어가서 세면대 위 선반에 놓았다. 거울과 흰 타일 벽에 비쳐진 촛불 빛이 깜빡거리며 욕실을 밝혔다. 스컬리는 샤워기를 틀었다. 물이 차가운지 만져 보았다. 뜨거운 물이 세차게 뿜어 나왔다. 물에 들어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옷을 벗었다. 그때 갑자기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제11장 스컬리는 한 손에 촛불을 든 채 멀더의 방 문을 두드렸다. 그녀의 얼굴 표정을 보고 멀더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일이에요, 스컬리?" 그가 말했다. "유령이라도 봤소?" 스컬리는 목소리를 낮추느라 애썼다. "들어가도 될까요? 보여줄 게 있어요." 멀더가 한쪽으로 비켜 주었다. 스컬리는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방에도 역시 촛불이 켜져 있었다. 스컬리는 한숨을 쉬고는 입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아주 당혹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도 걱정이 돼서 부끄러움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멀더가 자기를 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늘 다른 것에 관심이 가 있었다. 스컬리는 속옷만 입은 채 멀더 쪽으로 등을 돌렸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는 자기 등을 가리켰다. 그녀가 막 샤워하려 할 때 욕실 거울을 통해 보았던 것을 멀더에게 보여주려 했다. "그게 뭐죠?" 그녀가 멀더에게 물었다. 멀더는 자세히 보려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말이 없자 스컬리는 목소리를 높였다. "멀더, 도대체 뭐냐니까요?" 멀더가 일어섰다. "볼록한 붉은 자국 두 개 말이오?" 그가 물었다. 스컬리는 비명이 나올 것만 같은 것을 참느라고 애썼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래요, 그 볼록한 붉은 자국 두 개." "아무것도 아니오." 멀더가 말했다. "모기한테 물린 자국인데." "모기 자국이라고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가 말했다.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난 그 숲속에서 스무 군데나 물렸어요. 보겠소?" 멀더가 말했다. 그는 셔츠를 벗으려 했다. "그만둬요, 알았으니까." 스컬리가 말했다. 그녀는 황급히 가운을 다시 입었다. 문 쪽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한줄기 전율이 그녀를 휩쌌다. 그녀는 떨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밖에는 비가 퍼붓고 천둥이 내려치고 있었다. 방 안의 촛불이 미친 듯이 깜빡였다. 그녀는 겁내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겁낼 것 없어." 그러나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괜찮아요?" 멀더가 물었다. "네, 아무렇지도 않아요." 스컬리가 거짓말을 했다. "정말이오?" 멀더가 말했다. "다 보이는데." "말했잖아요, 멀쩡하다고." 스컬리가 우겼다. 그리곤 덧붙여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오늘 밤엔 내 방에서 안 잘 거^36^예요." "그래요?" 멀더가 말했다. "더 좋은 데라도 있소?" "멀더, 얘기 좀 해요." 스컬리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제 진실을 말해 줄 때도 됐잖아요." "진실?" 멀더가 말햇다. "어떤 진실 말이오?" "당신이 알고 있는 진실 말이에요." 스컬리가 말했다. "또 당신이 그것을 알게 된 경위에 관한 것도요." "한 가지 조건이 있소." 멀더가 말했다. "어떤?" 스컬리가 말했다. "내 말을 진지하게 들을 것." 멀더가 말했다. "전 언제나 어떤 얘기든 열심히 듣고 있어요." 스컬리가 그를 안심시켰다. "그럼, 앉아요." 멀더가 말했다. "아니, 그보단 침대에 눕는 게 좋겠군. 난 의자에 앉을 테니. 들어야 할 게 많아요. 알아야 될 것도."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해바라기 씨 좀 들겠어요?" "알아서 먹을게요. 그녀는 멀더의 목소리를 들으며 씨를 씹었다.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진작 먹어볼 걸 그랬다. "그 일이 있었을 때 난 열두 살이었어요." 멀더가 말했다. "내 여동생은 여덟 살이었지. 우린 같은 침실을 썼어요. 아기 때부터 그 다음 달부터는 각방을 쓰게 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한 번도 그래보지 못했소. 왜냐하면 그 얘가 어느 날 밤 갑자기 사라져 버렸으니까. 공중으로 사라졌단 말이오." "어린아이가 어떻게 사라져요?" 스컬리가 물었다. "그건 아는 사람이 없었소." 멀더가 말했다. 그의 음성은 멀리서 들려오는 듯 했다. 마치 그때로 돌아가 있는 듯 했다. 어린아이 적의 그 모습으로 겁 많고 어리둥절해 하는 아이와도 같은. "우리 집은 부유했소. 연줄도 많았고,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펼쳤죠. 경찰, 사설 탐정, 신문." "그래서요?" 스컬리가 물었다. "아무 효과가 없었소." 멀더가 말했다. "그래서 우린 협박 편지를 기다렸죠. 얼마든지 줄 생각이었지. 하지만 편지는 오지 않았소." "결국 동생을 못 찾으셨군요?" 스컬리가 말했다. "그 일로 가족이 풍비박산됐어요." 멀더가 말했다. "그 일을 마음에서 삭이는 데 몇 년이 걸렸지요. 그렇지만 결코 완전히 잊혀지지 않았소. 치유되지 않을 상처 같은 거지요. 붕대로 싸고 또 싸도." "지금까지도 당신 마음에 남아 있군요., 그렇죠?" 스컬리가 말했다. "그렇소." 멀더가 시인했다. "잊어버리려 많은 애를 썼지요. 그리고는 고향을 떠나 영국으로 공부를 하러 갔어요. 그게 좋을 것 같아서. 하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동생을 잊을 수가 없었소. 그 애의 증발로, 난 불가사의한 일을 파헤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죠. 무엇보다 불가사의한 건 마음이었소. 그 다음이 범죄 미스터리고. 난 FBI에 들어갔소. 유능한 요원이 되었고, 다들 크게 될 거라고 했지. 계속해서 승진했소."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스컬리가 물었다. "하루는 우연히 X 파일을 보게 되었어요." 멀더가 말했다. "기이한 사건들이라 사람들은 장난 삼아 그렇게 불렀지." "당신만 빼고요." 스컬리가 말했다. "나도 처음엔 호기심으로 봤을 뿐, 곧 지나칠 거라고 생각했어요." 멀더가 말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어요. 나도 모르게 그것들에 빠져들었죠. 난 전 사건 기록을 다 읽었습니다. 수천 수만 건을 다. 또 신기한 일들에 관한 자료를 찾는 대로 모두 읽었죠. 비학, 초자연적 현상, 그리고 결국에는 심도 깊은 역최면에 대해서 까지 알게되었소." "그게 정확히 뭔데요?" 스컬리가 물었다. 그녀는 자기가 그의 말을 쫓아가고 있다는 걸 확인시키고 싶었다. "그건, 사람의 마음에서 닫혀진 부분을 여는 최면입니다." 멀더가 설명했다. "그것으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들을 기억해 낼 수 있어요. 너무도 무서워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 말이오." "당신은 기억해 냈군요. 그게 뭐였나요?" 반쯤 대답을 짐작하면서 스컬리가 물었다. "스컬리, 날 봐요." 멀더가 말했다. 스컬리는 침대에 앉아 그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이런 얘기는 부서의 어느 누구한테도 한 적이 없어요." 멀더가 말했다. "들으면 웃을거요. 나도 처음에는 그걸 믿으려 하지 않았지. 난 당신을 믿어요. 당신은 나와 비슷한 것 같아서. 당신은 답을 원하죠, 맞죠?" "맞아요." 스컬리가 말했다. "어떤 전문가가 날 최면시켰어요." 멀더는 마치 최면 상태로 들어가는 것처럼 천천히 말했다. "난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갔어요. 동생이 사라진 그날 밤으로. 내가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봤어요. 갑자기 내가 잠을 깼어요. 바깥에서 밝은 빛이 나더니 어두운 형체가 방 안으로 들어왔어요." 멀더의 두 주먹이 꽉 쥐어져 있었다. 목소리가 고통에 물들어 있었다. "난 두려움으로 얼어붙은 어린 내 모습을 봤어요. 여동생이 살려 달라고 소리 지르는 걸 들었어요. 그들은 동생을 데려가 버렸고. 난 그들에 반항 한번 못했소. 잘 들어요. 스컬리. 이건 실제로 존재해요. 그게 무엇인지, 왜 그러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난 그 정체를 밝히고 말거요. 그리고 저지시키겠소. 내게 있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이번 일은 그것에 접근할 아주 좋은 기회요. 믿거나 말거나 당신 자유요,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난 당신 말을 믿어요." 스컬리가 말했다. "그렇지만 경고하겠는데." 멀더가 말했다. "그들은 위험한 놈들이오. 그리고 우리가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위험도 더 커질 거요." "그 말도 믿겠어요." 스컬리가 말했다. "어쩌면 당신, 손을 떼야 될지도 몰라요." 멀더가 말했다. "어쩌면 절대 안 물러설지도 모르죠." 스컬리가 말했다. "잊으셨어요? 난 보고서를 써야 돼요. 임무를 달성해야 하는 사람이 당신뿐인줄 아세요?" 전화벨이 울렸다. 멀더는 못 들은 체 했다. "정 그러시다면." 그가 말했다. "네, 그래요." 스컬리가 말했다. 벨이 다시 울렸다. 멀더가 수화기를 들었다. 스컬리는 전화 내용을 듣고 있는 그의 입이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알았소." 그가 전화 상대에게 말했다. "즉시 가겠소." 그는 전화를 끊고 스컬리에게 말했다. "또 일이 터졌어요." 제12장 "어디서 온 전화^36^예요?" 스컬리가 물었다. "나도 몰라요. 밝히지 않았소. 누군가가 음성을 위장하고 말했소." 멀더가 말했다. 벌써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거^36^예요?" 스컬리는 궁금했다. "페기 오델. 병원에 있는 빌리 마일즈의 여자 친구 말이오." 멀더가 말했다. "그녀가 죽었소. 철길과 만나는 지점 숲속에서. 전화에서 들은 건 그게 다요. 나머지 경위를 알아 봐야겠소." "잠깐 옷 좀 입고요." 스컬리가 말했다. 그녀는 자기 방으로 뛰어가서 옷을 입었다. 얼굴에 물을 끼얹고 머리를 빗었다. 화장할 시간이 없었다. 멀더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갑시다." 그가 조급하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문을 잠궈야죠." 스컬리가 말했다. 그녀가 문을 잠그는 동안 멀더는 발을 툭툭 차며 서 있었다. "잠글 필요 없어요." 그가 말했다. "누군가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한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자, 갑시다. 누가 운전할지 동전이나 던져 볼까." "그럴 것까지 없어요." 스컬리가 말했다. "내가 할게요. 그게 더 편할 것 같아요." "그럴 것 같군." 멀더가 동의했다. 그는 차 키를 그녀에게 던져 주었다. 비는 그쳐 있었다. 상큼한 미풍이 불어왔다.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오락가락 하는 흰 구름을 비춰주고 있었다. 모텔 주차장에 생겨난 물 웅덩이에도 달빛이 비쳤다. 차 지붕 위에 물방울이 반짝거렸다. 그들은 차에 올라 벨트를 채웠다. 스컬리가 키를 꽃고 돌렸다. 엔진이 요란하게 살아났다. 그들은 모텔을 출발했다. 주차장을 빠져 나가면서 스컬리가 멀더에게 말했다. "알고 계세요? 나 우스운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같이 느껴져요. 누군가, 아니면 어떤 것이 말이에요." 그들이 도착했을 때 현장에는 경찰이 우글대고 있었다. 순찰차들에서 나온 불빛이 영화 촬영이나 하는 것처럼 숲 교차로를 환히 밝히고 있었다. 폭우 때문에 나뭇가지들이 부러져 나가고 어떤 것들은 뿌리까지 뽑혀 있었다. 여러 개의 화물칸을 달고 있는 기관차가 철길에 멈춰 있는 것이 보였다. 멀더는 곧바로 철길 곁에 서 있는 두 명의 경관 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입니까?" 경관이 물었다. 상황을 자세하게 알고 싶소." 경관 한 사람이 멀더를 슬쩍 훑어보았다. "염려 마시오, 선생. 잘 통제되고 있으니까." "물었잖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멀더가 다시 물었다. "이봐요. 시간이 없소." "젊은 여자 하나가 기차에 치였습니다." 경관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 여자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멀더가 물었다. 경관이 막 말을 하려 할 때 또 다른 경관이 말했다. "이것 봐요, 웬 질문이 그리 많소? 먼저 신분을 밝히는 게 순서 아닙니까?" 멀더는 못들은 체했다. "그녀가 휠체어를 타고 있던가요?" "휠체어요? 그런건 전혀." 첫번째 경관이 머리를 긁적였다. 멀더는 어깨에 손이 닿는 것을 느꼈다. 뒤를 돌아 본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까 숲에서 봤던 그 형사였다. 그에게 꺼지라고 했던 그 인물이었다. 크고 건장한 그 남자는 계속해서 멀더를 붙잡고 있었다. 점점 세게 어깨를 죄어 왔다. "이 부근에서 사라지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가 말했다. 그는 어깨를 풀어 주고는 멀더의 가슴을 밀어냈다. "나도 말했소.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 형사의 손을 밀치며 멀더가 말했다. "이게 마지막 경고요." 형사가 말했다. "한 번만 더 이러면 고발하겠소. 감방에서나 무슨 일인지 알아보시지." 그가 다시 멀더를 밀쳤다. 멀더의 재킷이 풀어졌다. 첫번째 경관이 눈을 빛냈다. "이것 좀 보게. 이런걸 갖고 다니네." 경관이 소리쳤다. 그는 멀더의 옆구리에서 권총을 낚아챘다. 그가 상관인 듯한 사람에게로 가려 했다. "난 FBI야, 멍청한 사람아." 총을 뺏으려 하자 멀더가 말했다. "그러시겠지." 총을 든 채 경관이 말했다. "난 다툴 시간이 없어." 멀더가 말했다. 그는 형사를 돌아보았다. "이봐요, 정신차리고 들어봐요, 난 휠체어에 앉은 그 소녀를 바로 오늘 오후에 봤단 말이오. 휠체어도 없이 그 소녀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지 말해보시오." "아까 말한 것과 똑같아." 형사가 말했다. "여기서 꺼져, 이 자식아!" 스컬리는 멀더와 형사가 맞서는 걸 보고 있었다. 서로 버티며 싸우고 있는 수사슴들 같았다. 멀더는 조사에 착수할 수 없게 됐다. 이제 뭔가 좀 캐보는 일은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는 철길 곁에 놓인 담요를 모았다. 가까이 가서 담요를 살짝 들어 올렸다. 페기 오델의 부서진 시체였다.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눈동자가 돌아가서 흰자위만 보였다. 스컬리는 오늘 오후에 봤던 페기의 모습을 생각지 않으려고 애썼다. 빌리 마일즈를 사랑하는 것 같던 페기를 기억해 내고 싶지 않았다. 지금 페기는 시체에 불과하다. 스컬 리가 작업해야 할 일일뿐이다. 스컬리는 자세히 보려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죽은 소녀의 손에 갈색 머리카락이 한 움큼 쥐어져 있었다. 증거로 가져갈까 생각해 봤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증거물을 슬쩍하면 경찰이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경찰은 이때다 하고 그녀와 멀더를 가둬 버릴 것이다. '그냥 두고 머리 속에 기록했다가 나중에 보고서에나 쓰자' 그러다 그녀는 또다른 것을 발견했다. 페기는 시계를 차고 있었다. 기차에 부딪힐 때 시계도 깨진 것 같았다. 그걸 보면 사망시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컬리는 페기의 손목을 잡았다. 싸늘했다. 시계를 보려고 손목을 뒤집었다. 소름이 끼쳤다. 시계가 9시 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9시 3분. 시간이 멈춰졌다가 곧 사라져 버렸던 바로 그 순간. 멀더에게 말해야 했다. '그에게 얘기해야 해.' "일어나시오, 아가씨." 웬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같이 갑시다." 그녀는 올려다 보았다. "저, 경관님, 오해하신 거^36^예요. 난 단지." "당신은 증거물을 만지고 있었소." 경관이 말했다. "하지만 내 얘기를." 스컬리가 항변하려 들자 "판사에게나 말하시오." 경관이 딱 잘라 말했다. "시체에 무슨 짓을 했는지도 말해야 될거요." 경관이 스컬리의 옷을 열어 제치고 허리에서 권총을 낚아챘다. "자, 당신 친구나 보러 갑시다." 경관이 말했다. 멀더는 순찰차 앞에 날개 편 독수리같이 서 있었다. 스컬리가 그의 곁에 와 같은 모양으로 서자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경찰의 조치에 무척 화가 나 있었다. 그들의 멍청함에 전력이 난 둣했다. "정보국에 조회해 보겠소." 형사가 그들에게 말했다. "나중에 권총을 찾으러 나오시오." "여기 신분증 있잖아요." 스컬리가 말했다. "소용없어요. 들으려고도 않아." 멀더가 말했다. "순 불한당들만 봐 온 모양이오." 바로 그때 한 음성이 들렸다. "풀어 주시오. 내가 보증하겠소." 검시관이었다. "아!트루트." 멀더가 안도하며 말했다. "하늘이 도왔군요. 이제 일을 시작할 수 있겠군." "새로 시작할 게 뭐 있겠소." 트루트가 말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요, FBI 선생. 당신이 연구실에 가보고 뭐라고 할지 걱정이오." 제13장 멀더가 얼굴을 찌푸렸다. "알겠습니다, 트루트. 나쁜 소식이군요.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요. 어디 들어나 봅시다." "괴한들이 사무실로 쳐들어 왔어요." 머리를 내저으며 트루트가 말했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은연중 걱정했어요. 이곳 사람들은 법을 잘 지킵니다. 그런데 당신이 그들을 자극했어요." "사무실을 부쉈다." 멀더가 말했다. 지치고 체념한 듯한 목소리였다. "그것 말고 다른 짓도 했을 것 같은데?."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단 말이오?" 트루트가 말했다. 그러다 말을 덧붙였다. "아, 잊어버리고 있었군, 당신이 파낸 그 망할 놈의 송장에 너무 정을 주지 말걸 그랬소." "그들이 그걸 가져갔군. 그렇죠?" 멀더가 말했다. "우습군, 그게 놀랄 일이 아니요?" 트루트가 말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가져갔는지 나한테 묻지 마시오." 머리를 긁적이며 검시관이 말했다. "난로 위에 걸어 둘 그런 건 아니잖소." "당신한테 물어볼 생각은 전혀 없소." 멀더가 말했다 "왜 경비를 소홀히 했는지도 묻지 않겠소." "경비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소. 당신이 사람들을 휘저어 놓기 전까진." 트루트가 대답했다. "항상, 외부에서 온 선동자들이 문제를 일으킨다니까." 멀더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스컬리!" 그가 소리를 질렀다. "차 키 주시오! 얼른!." 그녀가 키를 건네주었다. 이유를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차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가 간신히 차에 올랐을 때 그는 벌써 시동을 걸고 있었다. "왜 그리 서둘러요?" 그녀가 물었다. 차는 벌써 요란하게 달리고 있었다. "필요한 걸 다 건질지 걱정이군." 도로에서 눈을 떼지 않은 멀더가 말했다. 그가 옳았다. 저쪽 지평선 위로 치솟는 불길을 보고서야 스컬리는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녀가 말했다. 멀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침울하게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차가 가까운 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들이 투숙한 모텔의 상항을 똑똑하게 볼 수 있었다. 대화재였다. 멀더는 도로에 주차된 소방차 옆에 차를 세웠다. 그는 스컬리와 함께 소방관들과 잠옷 차림의 모텔 투숙객들 사이를 헤치고 나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불길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불꽃이 자신들의 객실을 집어삼키는 광경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소방 호스의 물길은 침 뱉는 것보다도 효과가 없었다. "내 보고서가 저기 있는데. 컴퓨터는 어쩌지? 최신형인데다 얼마나 어렵게 구한 건데." 스컬리가 말했다. 절친한 친구를 잃은 기분이었다. "그 X레이도 저기 있소." 멀더가 말했다. "내 카메라. 일한 게 모두 저기 있는데. 어제 파해친 결과도 모두. 누가 그걸 없애려고 하는지 궁금하군. 뭐 짚이는 게 있소,스컬리?" 스컬리는 뭔가를 말하려다 그만 두었다. "전혀 없는데요." 그녀가 말했다. "그게 아니라, 짚이는 건 있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아니오?" 멀더가 말했다. 스컬리는 잠시 우물쭈물했다. 하지만 그에게 대답하지 않아도 되었다. "저기 누가 오는군요." 화제를 돌리며 그녀가 말했다 "네먼 박사의 사랑스런 따님이군." 군중 속을 지나온 그 인물이 불빛에 드러나자 멀더가 말했다. "저 아가씨도 험악한 밤을 보낸 것 같군요." 주차된 아빠 차에 있던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저 단정치 못해 보였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프랑켄슈타인의 신부와도 같은 몰골이었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엉켜 있었다. 긴 잠옷은 흙투성이고 가장자리는 찢어져 있었다. 맨발에다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도와주세요, 절 지켜줘요." 멀더는 웃옷을 벗어 그녀의 들썩이는 어깨를 덮어 주었다. "오늘 밤은 밖깥 날씨가 차요." 그가 말했다. "한기가 들면 안되지." 그리고는 "따뜻한 걸 마실 수 있는 곳으로 갑시다. 얘기도 좀 나누고. 기분 좋게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말이오. 말하고 싶은 건 다해요. 있는 그대로 다시 모든 걸 정상으로 돌리자고요. 그게 좋겠죠, 그렇죠?" 라고 말했다. 그녀가 끄적였다. "모든게 다시 정상으로 된다. 아 좋고 말고요." "조금전 차 타고 오다 보니까 밤샘하는 간이 식당이 있었어요." 스컬리가 제안했다. "그리로 가요." "나도 거기를 생각했소." 멀더가 동의했다. "이심전심이라더니." 그들이 들어갔을 때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따분하게 생긴 웨이트리스가 와서 커피 주문을 받았다. 웨이트리스는 완전히 누더기 인형처럼 보이는 여자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3교대 근무로 일하다 보니 별로 놀랄 일이 없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스컬리는 여자가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더 마실래요?" 멀더가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아뇨." 그녀가 말했다. "마셔도 별 효과가 없어요. 입에서 나는 이 맛이 지워지지 않아요." "어떤 맛?" 멀더가 물었다. "쇠붙이 맛 같은 거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가 말했다. "아니 다른 거^36^예요. 훨씬 더 지독한 맛이에요. 우." 멀더가 측은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끔찍한 맛일 것 같군요. 오늘 밤에 이를 잘 닦는 게 좋겠어요." 그는 어린아이에게 말하듯 여자에게 천천히 말하고 있었다. 여자는 20 대 초반으로 보였지만 표정은 겁에 질린 다섯 살 짜리 어린 아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말해봐요, 이름이 뭐죠?" 그가 물었다. "테레사. 테레사 네먼이^36^예요." 그녀가 말했다. "이 밤에 잠옷 차림으로 밖에 나와 뭘 하고 있었어요? 평소에는 이런 식으로 숲속을 헤매고 다니지 않았을 것 아니오." "저도 모르겠어요." 머리를 흔들며 테레사가 말했다. "나도 모르게 거기 나와 있었어요. 그 일은 늘 그런 식으로 일어나죠. 매번 내가 그곳에 나와 있고, 난 어떻게 된 건지 왜 나왔는지도 모르고요." "그럼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스컬리가 물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 소녀는 크리스탈 처럼 쉽게 깨어질 듯이 보였다. 그리고 놀란 토끼처럼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테레사의 목소리는 아주 멀리서 그녀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졸업하던 해 여름 이후로 쭉 그랬어요." 그녀가 말했다. "내 친구들에게도 일어났죠. 나를 보호해 달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나한테 그런 일이 생기는 건 싫어요. 애들처럼 그렇게 죽고 싶진 않아요. 오늘 밤의 페기처럼 되기는 싫다구요.!" 그녀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스컬리는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테이블 건너편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 손은, 좀 전에 기찻길 옆에 놓여 있던 페기의 손처럼 차가웠다. "절 지켜 주실 거죠, 그렇죠?" 여자가 흐느끼는 중간중간 간청했다. "절 지켜준다고 약속하세요.' "틀림없이 약속해요." 스컬리가 여자를 위로했다. "믿어도 좋아요." 스컬리는 순간 입에서 쓴 맛을 느꼈다. 쇠붙이 같은 맛. 그녀는 그게 뭔지 알았다. 바로 거짓말의 맛이었다. 제14장 스컬리는 더 이상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이번 일을 평범한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과학이 모든 해답을 줄거라고, FBI에서 받은 훈련으로 살인자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더 이상 확신할 수 않았다. 게다가 더 이상 멀더를 허술한 사람, 기인, 혹은 얼간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컴퓨터가 재로 변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당분간은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고민할 필요가 없다. 멀더가 알고 있는 것을 상부에 납득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그것을 믿으리라고 상상할 수도 없다. 그녀라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이 사건은 주의해서 기록해야 한다. 멀더의 직장이 사라지느냐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녀의 장래까지도 걸려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X 파일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FBI 최고위층은 그 파일을 자물쇠로 잠그고 열쇠를 없애버릴 것이다. 스컬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X 파일은 공개된 채 남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멀더가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를 돕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충분히 목격했지만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모고 싶었다. 멀더가 그녀를 제대로 본 것이다. 그녀는 그와 닮은 데가 있다. 그녀는 X 파일의 해답을 원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게 무엇으로 판명되든. "사실을 말할 때가 됐어요." 멀더가 말했다. 스컬리는 몸이 굳어졌다. 그러나 곧 그게 자기에게 말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테레사에게 말하고 있었다. "오늘 밤 내게 전화한 건 당신이죠, 테레사?" 멀더가 물었다. "당신이 내게 페기 오델이 죽었다고 알린 거요,"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았다. 단호하게 그녀의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제 진실을 밝힐 때라고 판단한 거야.' 스컬리는 생각했다. 그는 마치 피 냄새를 맡은 짐승 같았다. 잔인하고 냉혹했다. 전에는 보지 못한 일면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테레사는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멀더의 눈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멀더의 꿰뚫는 듯한 시선이 점점 그녀를 죄어 갔다. "그래요." 그녀가 힘없이 말했다. "저였어요."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죠?" 멀더가 물었다. "아빠가 말하는 걸 들었어요." 테레사가 말했다. 스컬리는 멀더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제이 네먼 박사가 방화범?' 그 사람은 그 전날 미친 듯이 날뛰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미쳤었나?' 멀더는 어깨를 약간 으쓱했다. 그도 알 수 없었다. 다시 의사의 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실을 밝힐 작정이었다. "당신 아버지가 누구한테 얘기하고 있었죠?" 멀더가 물었다. "누구에게 그 모텔 얘기를 했냐구요?" "아빤 빌리의 아버지와 얘기하고 있었어요.' 테레사가 말했다. "빌리? 빌리 마일즈 말이오?" 멀더가 물었다. "그래요, 빌리는." 그녀가 말을 끊었다. 다음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가까스로 다음 말을 이었다. "빌리도 우리와 같은 반이었어요." "그건 알아요. 테레사." 멀더가 말했다. "당신들은 모두 이 일과 관계돼 있어요. 89 년 졸업반 말이오. 그건 그렇고 오늘 얘기나 합시다. 페기가 죽은 걸 어떻게 알았지요?" "아빠가 전화를 받고 있었어요." 테레사가 말했다. "전화에 대고 묻는 걸 들었어요. '페기가 죽었다구요? 정말이오?' " "그때가 몇 시였죠?" 스컬리가 끼여들었다. 그녀는 정확한 시간을 알고 싶었다. 일분 일초까지. 오늘은, 특히 그 몇 분이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 어쩌면 전부를 의미할 수도 있었다. "9시오, 거기서 2분 더 지난 시간이었죠." 테레사가 말했다. "전화 벨이 울렸을 때 내가 좋아하는 텔레비전 쇼가 막 시작됐던 게 기억나요." "그리고 그 다음엔 어떻게 됐죠?" 멀더가 물었다. "당신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들은 후에 말이오." 테레사는 힘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몰라요, 기억이 안 나요. 그 다음 기억나는 건 내가 숲속에 있었다는 거^36^예요. 누군가가 날 쫓아오고 있었어요." "누가?" 멀더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소녀가 말했다.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멀더는 늦추지 않았다. "당신 아버지였소?" 그가 말했다. "아니에요." 테레사가 말했다. 거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빤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것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로 한 게 무엇이오?" 멀더가 날카롭게 그것을 물었다. 스컬리는 그를 욕할 수 없었다. 지금 그녀는 그와 똑같은 기분이었다. 그들은 지금 진실에 너무 가까이 와 있어서 그만두고 여기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전 페기에 대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으려 했어요." 테레사가 말했다. "빌리 마일즈 얘기도, 아빠가 도와준 얘기도요." "당신 아버지가 도와줬다고? 누굴 도와줬어요?" 멀더가 궁금해했다. "페기를요." 테레사가 그에게 말했다. "아빠가 페기를 어떻게 도와주었죠?" 멀더가 물었다. "아빠가 페기의 주치의였어요. 페기는 페기는 아기를 낳게 돼 있었어요." 테레사가 말했다. "하지만 아긴 죽었어요." "빌리도 아기 얘길 알고 있었나요?" 멀더를 제치고 스컬리가 물었다. "아뇨." 테레사가 말했다. "빌리는 그때 여기 없었어요. 졸업 직전에 사라져서는 몇 달 동안 보이지 않았죠. 그해 여름이 끝나도록 돌아오지 않았어요. 페기 말로는 빌리가 아기 아빠라고 했어요. 하지만 아무도 그녀 말을 믿지 않았죠. 빌리는 여기 없었으니까." "아기 아빠가 누군지 당신 아버지는 알고 있었나요?" 멀더가 물었다. 테레사는 또 한번 망설이더니 결국 말했다. "아빠가 페기의 출산을 도왔죠. 그런데 그런데 아기가 없었어요. 다른 게 있었죠. 페기가 그렇게 된 건 몸에 그 자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아빠가 그랬어요." 스컬리는 어렵게 침을 삼켰다. 페기가 아기 말고 무엇을 낳았는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덤에서 가져온 생물체에서 나온 것이 떠올랐다. 속이 뒤집혔다. 멀더를 쳐다봤다. 그는 힘들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그 자국?" 그가 물었다. "페기 등에 난 그 자국 말이오?" "그래요," 테레사가 말했다. "우리들 전부가 그 자국이 있어요. 숲에서 그렇게 된거죠, 우린 모두 죽을 거^36^예요." 제15장 거기까지가 테레사가 말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지금 그녀는 얼굴을 탁자에 묻고 격렬하게 흐느끼고 있었다. 스컬리는 테레사의 손을 잡으려 자기의 손을 뻗었다. 손이 아직도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때 테레사가 고개를 들었다. "이런, 맙소사." 스컬리가 외쳤다. 테레사의 코에서 피가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스컬리는 냅킨 통에서 종이 냅킨을 한 움큼 꺼내 테레사에게 건네주었다. 그때 한 가지 장면이 번쩍 떠올랐다. 관에서 나온 그 괴물체. 그 코 안의 이식 물질. '테레사의 코에도 그 물질이 있단 말인가?' 스컬리는 거기까지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 식당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제이 네먼 박사가 식당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 바로 뒤에는 숲속 공터에서 본 형사가 있었다. 그는 아까보다 더 야비해 보였다. 웨이트리스가 스컬리와 멀더가 테레사와 같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박사님, 따님이에요." 웨이트리스가 말했다. "저 사람들이 따님을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말도 못해요. 가엾게도." 웨이트리스가 전화를 한 게 틀림없었다. 이곳 주민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특히 외부인과 관계된 일에서는, 물론 지상의 외부인들 얘기다. 네먼 박사는 스컬리와 멀더를 본 체도 하지 않았다. 오직 딸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집으로 가자, 애야." 그가 말했다. "집에 가면 편안해 질거야. 고통스럽게 꼬치꼬치 캐묻는 이런 사람들하고 있으면 안 돼." 그러나 테레사는 그의 손길에 몸을 오그렸다. 그녀의 눈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가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멀더가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끼여들지 마시오." 의사가 소리질렀다. "얜 아픈 애요. 많이 아프다구. 헛것을 상상하지. 정신병자가 되기 직전이오. 흥분하면 안된단 말이오." 테레사는 식당 한 구석에 움츠리고 있었다. 몸을 공처럼 동그랗게 하고 있었다. 자궁에 든 아기처럼. 형사는 그녀에게 팔을 뻗었다. "아빠가 집으로 가자신다. 테레사, 착하지?" 그는 달래듯이 말했다. "집에 가서 씻고 좀 누워 있어라. 뜨거운 초콜릿도 마시고. 그 맛, 좋아하지?"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마. 기분이 좋아질 데로." 네먼 박사가 맞장구쳤다. "너도 알잖니?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마일즈 형사님과 내가 가만 있지 않을 거란 걸." 멀더가 돌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당신이 빌리 마일즈의 아버지입니까?" 그는 형사에게 물었다. 형사의 큰 몸집이 멀더 쪽으로 돌아섰다. "그렇소." 그는 멀더를 험악하게 내려보았다. "그러니 내 아들한테 접근하지 마시오. 알겠소? 그 앤 갈 데 까지 간 상태야. 외부인들이 와서 동물원의 동물 구경하듯 그 애를 쳐다보는 게 싫소." "이봐요, 조, 좀 도와줘요." 네먼 박사가 마일즈 형사에게 말했다. 네먼이 테레사의 한 팔을 잡고 마일즈가 다른 팔을 잡았다. 테레사를 들어올려 끌다시피 해서 식당에서 나갔다. 멀더와 스컬리는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부모의 권리와 법의 위력에 대들 방법이 없었다. 테레사는 문을 나가면서 마지막으로 공포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곳이 좋아질 거요." 남은 커피를 들면서 멀더가 말했다. "매일매일이 할로윈 데이 같잖소." "그녀의 말을 믿어도 될까요?" 스컬리가 말했다. "어쩌면 그 아버지의 말이 사실인지도 몰라요. 그녀가 미쳤다는 거. 이 마을은 정신병자의 소굴 같아요. 먹는 음식에 뭔가 이상이 있는 지도 모르죠." "미쳤든 아니든, 사람의 힘으로 이 모든 걸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멀더가 말했다. "그 대답은 당신이 알잖아요." 스컬리가 말했다. "하지만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어요. 이를테면 페기 오델의 시계가 9시 3분에서 멈춰 있었던 것 말이에요. 페기가 그 시간에 기차에 부딧힌 게 틀림없잖아요? 그런데 테레사는, 마일즈 형사가 9시 조금 지나서 자기 아버지한테 페기의 사망소식을 알려 주었다고 했어요. 그 시간엔 그럴 수가 없죠." "누가 알겠소." 멀더가 말했다. "테레사가 시간을 잘못 알았을 수도 있지. 그런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실수를 하거든. 아니면 그녀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어요. 우리한테. 아니, 자기 자신한테도. 납득하기 힘든 게 몇 가지 있어요. 테레사는 페기와 텔레파시로 통했던 것 같아요. 89 년도 졸업반 아이들은 뭔가에 의해 하나로 연결돼 있어요. 그들이 도저히 끊을 수 없는 뭔가에 의해 말이오." 멀더는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잔은 이미 비워져 있었다. "진실이 어떻든 간에, 그것이 법정에까지 가게 되는 일은 없을 것 같군요."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테레사가 한 얘기도 마찬가지요. 그녀의 정신이 나갔다고 하지 않소? 자기 아버지가 딸을 그렇게 말하니 어떤 법정에서 그녀의 말을 인정하겠소? 의사나 경찰의 말을 믿지." 스컬리가 끄덕였다. "X표시를 한 도로 위에서 있었던 일을 법정에서 설명하는 당신 꼴을 상상해 봐요. 9시 3분, 시간이 3분 동안 사라졌다고 말했었죠. 그 진실 여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발 판사 앞에서 그런 얘기는 하지 마세요." 멀더가 씁쓸하게 웃었다. "벌써 오래 전에 포기 했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명백한 증거요." "그건 나도 알아요." 스컬리가 말했다. "감시관의 사무실을 부수고, 우리가 들었던 모텔 방에 불을 지른 그 누군가도 그 점을 알고 있었던 거^36^예요. 조사 결과로 내놓을 게 재밖에 안 남은 걸 보면." "방화범이 누구인 것 같소?" 멀더가 물었다. "네먼 박사?" "그럴 수도 있죠." 곰곰이 생각하면서 스컬리가 말했다. "그가 우리 편이 아닌 건 확실해요. 어쩌면 빌리의 아버지하고 같이 했는지도 모르죠. 그 두 사람이 우리를 싫어하는 게 눈에 보이잖아요? 두 사람 다 누군가의 자취를 덮어두려 하는 것 같아요." 갑자기 멀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스컬리도 그게 무슨 신호인지 안다. 그녀도 일어났다. "지금 어디 가려는 거^36^예요?" 그녀가 물었다. "방금 생각났는데." 멀더가 말했다. "아직 그들이 없애지 못한 증거가 있을지도 몰라요." "어디에요." 스컬리가 말했다. 그러나 멀더는 이미 문으로 가고 있었다. 스컬리는 그를 쫓아 차로 갔다. 그가 그녀보다 앞서 운전석을 차지했다. "조심해서 하세요." 도로를 달릴 때 그녀가 멀더에게 말했다. 하늘에 다시 구름이 끼었다. 가느다란 빗방울이 떨어졌다. 아스팔트는 물기로 반질반질했다. "우리가 송장이 되면 사건도 해결할 수 없으니까요." "적어도 죽을 자리에서 죽겠지." 멀더가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엑셀러레이터를 밟아 댔다. 마침내 차가 정확하게 멈춰섰다. 스컬리는 밖을 내다 보았다. 벨레풀러 공동 묘지였다. 그가 멈췄다. "너무 늦었군." 그가 말했다. 두 개의 파헤쳐진 무덤 위로 손전등 불빛이 넘실댔다. 그 옆에는 관 두 개가 뚜껑이 열린 채 있었다. 멀더가 관 안을 비췄다. 스컬리도 그의 어깨 너머로 안을 들여다 보았다. "둘 다 비었어요." 멀더가 말했다.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도대체 어찌된 일이죠?" 스컬리가 물었다. "전부 미친거^36^예요. 내가 돈거^36^예요?" 멀더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기 생각에 빠져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스컬리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표정이 천천히 살아났다. 그는 스컬리의 어깨를 감쌌다. 눈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순수한 기쁨의 눈빛이었다. 그의 목소리도 똑같이 기쁨으로 젖어 있었다. "방금 막 떠올랐소."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게 누군지 알았어요." "누구라니요?" 스컬리가 말했다. "그 짓을 한 사람" 멀더가 말했다. "그 짓을 해요?" 스컬 리가 말했다. "페기를 살해한 사람 말인가요?" 멀더가 행복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머지 일도?" 스컬리가 말했다. "우리의 증거물을 훔쳐 가고, 테레사를 겁주어 미치게 한 것도 그 사람이란 말이에요?" 멀더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이고 동일인이오." 그가 말했다. 그게 누군지 알았어요." 제16장 "당신의 재미를 망치고 싶진 않지만, 실은 나도 그 답을 알고 있어요." 스컬리가 말했다. 그녀는 속으로 여러 가지 단편들을 끼워 맞췄다.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요?" 멀더가 말했다. "정말 알아요?" "덩치 큰 경관 마일즈 아닌가요?" "당신은 역시 똑똑하오." 멀더가 말했다. "FBI 아카데미의 자랑이오. 하지만 정답은 아니오." "아니라고요?" 스컬리가 말했다. "아니오. 그렇지만 근접했어요." 멀더가 말했다. "답에 가깝다고요?" 스컬리가 말했다. "그건 그의 아들, 빌리 마일즈요." 멀더가 선언했다. 스컬리는 멀더가 괜찮은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다. 선의를 가지고 있었고 재능도 뛰어났다. 마음도 따뜻했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분명히 나사가 풀려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어 대며 웃었다. "빌리 마일즈라고요?" 그녀가 말했다. "지난 사 년간 식물 인간이었던 그 청년 말인가요? 그가 이곳에 와서 혼자 힘으로 무덤을 팠단 말이에요?" 멀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완전히 다 아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소." 그가 스컬리에게 말했다. "모든 내막을 말이오. 하지만 이건 외계인들에 의한 납치 사건과 그 유형이 꼭 들어맞아요. 날 믿어요, 안 미쳤으니까. 난 컴퓨터로 수백 가지의 유사 사건을 살펴봤소. 그리고." "이번 일이 그와 유사하다?" 스컬리가 말했다. 그녀는 지난 이틀 동안의 그 정신 나간 일들을 전부 생각해 봤다. 모종의 틀이 있음에는 틀림없다. "들어봐요." 멀더가 말했다. "페기 오델의 시계는 9시 3분에 멈춰 있었어요. 당신이 봤잖아요. 정확하게 바로 그 시간에 우리는 고속도로에서 3분을 잃었던 거요. 한편, 똑같은 시간에 테레사 네먼은 집을 빠져 나와 필사적으로 숲속을 뛰어다니고 있었어요. 내 생각엔 바로 그 3분 동안에 모든 일이 일어났던 것 같소. 시간이 멈췄던 바로 그때 말이오." "좋아요, 멀더, 알았다구요." 스컬리가 말했다. "이제 그만 모텔로 돌아가는 게 어때요? 띠뜻한 우유를 한잔 마시고 한잠 푹 자고 나면 내일 아침엔 기분이 훨씬 나아 질 거^36^예요." 멀더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 말을 믿지 않는군?" 그가 말했다. "멀더 요원, 난 지금 비를 맞고 진흙탕 속에 서 있어요." 스컬리가 말했다. "난 지금 텅 빈 관 두 개를 보고 있어요. 사람인지 뭔지도 모를 그것을 파낸 묘지에 와 있다구요. 게다가 그 엉뚱한 애는 자기도 그 붉은 점 때문에 죽게 될 거라고 했어요. 그래요, 난 당신을 믿어요, 멀더. 하지만 그건 당신이 옳다는 말은 아니에요. 내 정신이 돌기 직전이란 뜻이에요. 내 상태가 이러니 못 믿을 사람이 어딨고 안 믿어질게 뭐 있겠어요. 우리 둘이 달을 보고 짖고 있다 해도 놀라지 않을 거^36^예요." "진정해요, 스컬리, 내 애길 들어봐요." 멀더가 그녀에게 말했다. "진정하라고요?" 스컬리가 말했다. "그러려면 약효가 아주 강한 약이 필요해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는 말을 멈추고 싶어졌다. 멀더의 목소리에 뭔가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진실을 향한 그의 열정, 철저한 확신, 아무튼 그게 뭐든 그녀는 입을 다물고 그의 얘기를 들었다. "내 생각엔 여기 벨레풀러에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아요." 멀더가 그녀에게 말했다. "이곳에 올 때 비행기가 착륙하기 직전 우린 그걸 느꼈어요. 고속도로상에서도 그걸 체험했죠. 이상한 힘이 작용하고 있었던 거요. 시계에 이상이 생기고 나침반은 완전히 제멋 대로였고, 내 말은, 이 힘이 시간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빌리 마일즈는 무덤을 파러 올 수 있었고, 약탈과 방화, 그리고 살인까지 할 수 있었던 거죠, 주위 사람이 전혀 모르게 눈치채지 못하게 침대에서 빠져나와서 말입니다. 스컬리는 멀더 말을 듣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닷물 속에서 썰물을 버티며 서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녀는 그의 생각에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 위력과 그 의도에 이끌려. 발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바다 깊이깊이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 '힘'이, 그것이 시간을 연장시킨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묻고 있었다. "그래요." 그가 대답했다. "그 젊은이들의 등에 붉은 점을 남긴 것도 바로 그 힘이오. 그 점이 있는 아이들은 납치되어 실험에 이용됐던 겁니다. 그리고 숲속의 공터로 옮겨진 거죠. 그들의 몸 속에, 우리가 규명할 수 없었던 그 물질을 넣은 겁니다. 그것이 유전적 변화를 일으키는 거죠." "그럼 오늘 밤 숲속에서 테레사를 따라온 것도 그 '힘'이었나요?" "아니오." 멀더가 말했다. "그건 빌리 마일즈였소. 그는 자신의 DNA에 옮겨진 어떤 충동에 의해 행동한 거죠. 대니 도티도 똑같은 종류의 충동을 느끼고 있어요. 감방에 있고 싶어하는 이유도 바로 그겁니다. 교도소에 갇혀 있으면 그 충동에 따를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는 거죠." 스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말이 됐다. 완벽하게 말이 되는 것이다. 질문할 것도 없었다. 이 모든 얘기를 하고 있는 멀더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또한 그 얘기를 듣고 수긍하고 더 얘기해 달라고 재촉하고 있는 그녀 역시 완벽하게 정상이었다. 멀더가 얘기하는 그것은 이 세계의 또 다른 영역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허파에 바람이 든 것처럼 몸을 구부리며 웃어댔다. 멀더가 그런 그녀를 보더니 같이 웃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슬비 내리는 캄캄한 묘지에서 머리가 떨어져 나가도록 웃으며 서 있었다. "아시죠? 우리가 미쳤다는 거." 마침내 스컬리가 말했다. "미친 게 틀림없죠." 멀더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마침내 그가 숨을 돌렸다. "자, 그만 갑시다." 그가 스컬리에게 말했다. "어디로요?" 아직도 웃음기를 느끼며 스컬리가 물었다. "꼭 가야 할 곳." 멀더가 말했다. "그 재미있는 식물 인간, 빌리 마일즈를 만나야죠." 제17장 스컬리는 멀더와 함께 빌리 마일즈의 침대 앞에 와 섰다. 빌리를 돌보는 간병인도 같이 있었다. "우린 빌리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그 순간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간병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빌리는 그곳에 시체처럼 조용하게 누워 있었다. 가슴이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것만이 그가 숨쉬고 있음을 알게 했다. 그의 얼굴은 죽음의 가면을 쓴 것처럼 보였다. 눈은 초점이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삼년을 이렇게 여기 누워 있었어요." 간병인이 말했다. "그 전에 일 년 동안은 집에 있었죠." "틀림없어요?" 스컬리가 물었다.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 말^36^예요.' "난 빌리에게서 눈을 Ep지 않습니다." 간병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대신 빌리의 아버지에게서 돈을 더 받고 있어요. 혹시 살아난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제일 먼저 그에게 알리기로 약속했죠. 내 말을 믿으세요. 빌리가 눈만 깜빡해도 난 압니다." 멀더는 듣고만 있었다. 그러더니 앞쪽으로 걸어가 섰다. "어제 밤 빌리의 변기를 갈아 주었나요?" "저 말고는 할 사람이 없어요.' 간병인이 말했다. "평소하고 다른 점 없었어요?" "다른 점요?" 간병인이 당황해서 말했다. "무슨 뜻입니까? 이런 곳에 있는 빌리한테 무슨 일이 있겠어요? 이미 말씀드렸듯이 지금까지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어제 밤 9시에 뭘하고 있었지요?" 멀더가 물었다. "텔레비젼을 봤던가.?" 간병인이 말했다. "아, 그래 맞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어요." "어떤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죠?" 멀더가 날카롭게 물었다. "네, 그건." 간병인이 말을 멈췄다. 그는 갑자기 당황해 했다. "우스운 얘기지만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요, 뭘 보고." 간병인이 돌연 말을 멈췄다. 스컬리가 빌리의 침대에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가 뭔가를 발견했다. 깨끗한 흰 시트에 검은 얼룩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침대 아래쪽으로 가 담요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이봐요, 뭐 하는 겁니까?" 간병인이 물었다. 스컬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담요를 젖히고 빌리의 맨발을 내려다봤다. "도대체 뭘 찾는 거죠?" 간병인이 따졌다. 스컬리는 빌리의 발톱 밑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진흙. 검은색 진흙이었다. 간병인은 화가 났다. 빌리 일에 간섭하는 이 낯선 사람들이 맘에 들지 않았다. 빌리는 그의 일이었다. 아니 일 이상의 것이었다. 그의 밥줄이니까. 간병인은 스컬리를 저지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멀더가 다시 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어젯 밤 누가 페기 오델을 돌보고 있었죠?" "난 아닙니다." 간병인이 자기 방어를 했다. "그 아인 내 담당이 아니에요. 내 담당 구역이 아니라구요. 하지만 그 애 일에 관해선 부끄럽습니다. 빌리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빌리에겐 페기가 그 어떤 의사들보다도 훨씬 도움이 됐었죠. 어떤 땐 그녀가 곁에 있다는 걸 빌리가 진짜 아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죠." "그녀가 어떻게 여길 나갈 수 있었을까요?" 멀더가 물었다. "휠체어도 없이." "난 모릅니다." 간병인이 고집했다. "말씀드렸듯이 그건 내 일하곤 관계없어요."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스컬리를 주목했다. 스컬리는 가방에서 금속 도구를 꺼내 빌리의 발톱 밑에 낀 흙을 긁어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그마한 유리병에 집어넣었다. 그녀는 간병인이 말리기도 전에 일을 다 끝내 버렸다. 간병인은 별 수 없이 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걸 어디다 쓸려고 그럽니까?" 멀더가 스컬리 대신 대답했다. "시간 내줘서 고마왔소." 간병인은 입을 벌린 채 멀더와 스컬리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간병인은 빌리 곁에 와서 말을 걸어 보았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는 매일 빌리에게 말을 걸었다. 완전히 일방적인 대화였지만 별 상관없었다. 간병인은 자기 목소리 듣기를 좋아했다. "이것 좀 봐,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간병인이 말했다. "이 깨끗한 시트를 다 망쳐 놨어. 바로잡아야지. 물론 네 발톱이야 깨끗해졌지만 그 더러운 걸 뭐하려는지 모르겠어. 기분 나빴지? 넌 살아 있어 빌리. 그게 아니라면 네 아버지가 나한테 매주 그나마 몇 푼이라도 줄 리가 없지. 아직 난 돈을 벌고 있어. 하긴 너하고 늘상 갇혀 지내는 게 재미는 없지만. 넌 내가 꿈꿔 오던 동반자는 아니란 뜻이지. 그것 말고도 걸리는 게 있어. 그 여자가 네 발톱을 긁을 때 넌 분명히 그 여자에게 시선을 던졌어. 그건 내가 이 일을 그만두고 쉴 날이 오게 된다는 뜻이거든. 아니면 조만간 딴 사람이 내 대신 오게 될지도 모르구." 한편, 밖에서는 스컬리가 멀더에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아세요?" "모텔까지 아, 불 타고 남은 잔해라고 해야지. 돌아가려면 20분만 달리면 될거요." 멀더가 말했다. "그렇다면 뭘 찾아야 할지 당신한테 물어 볼 필요도 없군요." 스컬리가 말했다. "찾을 수 있길 바랍시다." 멀더가 말했다. 숯이 된 모텔 방을 들어서면서 스컬리는 코를 찡그렸다. 고약한 악취가 났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냄새 따윈 까맣게 잊어버렸다. "우린 운도 좋아." 반쯤 녹아 버린 자루 하나를 집어들고 그녀가 말했다. 안에 든 내용물은 아무 이상도 없었다. "숲속 공터에서 흙 샘플을 가져오길 잘했지." "FBI 아카데미 교육도 쓸모가 있군." 멀더가 동조했다. "불길에서 살아 남은 게 여기 또 있네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유리병 하나를 집어들었다. 병은 깨져 있었다. 그러나 그 작은 금속성 물질(관에 있던 생물체에서 나온 이식 조각)은 그대로 있었다. "불지른 친구가 좋다 말았겠군요." 스컬리가 말했다. "다행이요." 멀더가 말했다. "연구실로 갑시다. 할 일이 있어요." "그야 어렵지 않죠." 스컬리가 말했다. "간단히 해치울 수 있어요." 그녀가 옳았다. 작업은 간단했다. 그녀는 빌리의 발톱에서 나온 흙을 유리 슬라이드 위에 올려놓았다. 그 옆에는 숲속 공터에서 가져온 샘플을 놓았다. 일단 현미경으로 슬라이드를 관찰했다. 얼른 보고 싶었다. "적중했어요."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완벽하게 일치해요." "손 내봐요." 멀더가 기뻐 날뛰었다. 그는 스컬리와 승리의 맞장구를 치려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가 봐야 할 목적지가 생겼어." 제18장 "우리만 온 것 같지 않은데." 멀더가 말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구동 트럭이 비춰졌다. 숲 한 쪽에 주차되어 있었다. 스컬리는 즉각 알아보았다. "나이 든 친구, 마일즈 형사에요." 그녀가 말했다. "밤에 이 숲에 오는걸 즐기나 봐요." "늙은 보이 스카웃이 틀림없군." "오늘 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 궁금한데?" "알게 되겠죠." 스컬리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접어 둡시다. 먼저 알아내야 할 게 많아요." 그녀는 트럭 옆에 차를 세웠다. 그들은 차에서 내려 손전등을 켰다. 환한 손전등 빛을 따라 캄캄한 숲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길을 알 것같이 생각되죠?" 스컬리가 말했다. "하지만 이 숲에 오면 왠지 길을 잃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아니 이 숲만이 아니고 이 사건 전체에서 길을 잃을 것 같다구요. 인내심을 잃게 돼요. 한 가지 해답을 찾았나 싶으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기거든요." "동지가 생겼군." 나뭇가지를 한쪽으로 쓸어 내며 멀더가 말했다. 난 지금까지 수년 동안 그런 기분을 느껴 왔어요. 마치 미로에 빠진 것 같죠. 끝없이 꼬이고 구부러진 미로.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빠져나가기 힘든 미로 말이오." 그는 침묵에 빠졌다. 숲이 내는 소리만이 들려 왔다. 바람이 나무를 스치는 소리, 올빼미 우는 소리, 알지 못하는 짐승들이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부드럽게 사각거리는 자신들의 발자국소리. 멀더가 말했다. "당신은 어때요, 스컬리? 이 미로를 어떻게 생각해요? 겁이 납니까? 나중에 얻을 것이 아무리 좋더라도 꽁무니를 빼고 나가 버리고 싶지 않소? 아니면 당신도 나처럼 생각해요? 되돌아가기엔 너무 깊이 들어와 버렸다고?" "지금 꼭 그 대답을 해야 하나요?" 약간 장난기를 풍기며 그녀가 말했다. "아니면 혼자 고민해 보란 건가요?" "충분히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봐요." 멀더가 말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대답해야 할거요. 당신도 알죠? 나한테 하라는 게 아니고 당신 자신한테 말이오. 또 당신을 내게 파견한 사람들한테도 물론이고, 존경하는 우리 상관들 말이오." "차차 생각할게요." 스컬리가 말했다. 그녀는 회색 재와 검은 흙을 채취했던 그 현장을 찾아냈다. "저길 보세요." 스컬리가 말했다. 그녀의 손전등이 재 위에 찍힌 자국을 비췄다. "발자국이군." 멀더가 말했다. "맨발 자국이에요." 스컬리가 말했다. "그대로 찍혔는데요." "들어봐요." 멀더가 말했다. "누군가 뛰고 있소." 스컬리도 소리를 들었다. 덤불을 헤치고 나아가는 소리였다. 멀더는 소리나는 쪽으로 재빨리 손전등을 옮겼다. 나무 사이로 움직이는 형체를 잡아낼 만큼 빨랐다. 그러나 그게 누군지 알아 볼 정도로 빠르지는 못했다. 멀더가 뛰기 시작했다. 스컬리는 가슴이 뛰어 멈칫했다. 그 다음 순간 그녀도 뛰기 시작했다. 멀더를 따라 잡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뛰고 있는 그의 모습은 볼 수 있었다. 스컬리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험한 산 속에서 요리조리 달리는 훼방꾼을 추적하는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저 앞에서 멀더가 나무 사이로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돌진하고 있었다. 스컬리는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잠시 그를 놓쳤다고 생각됐다. 그러나 곧 나무 틈 사이로 그가 보였다. 그는 멀리 달리고 있었다. 속력을 내야 했다. 하지만 다리가 납덩이 같았다. 숨이 찼다. 그래도 심호흡을 해가며 더 빨리 달렸다. 털썩. 뭔가가 뒷다리를 세차게 때렸다. 갑자기 다리가 없어졌다. 넘어진 것이다. 땅바닥에 넘어지면서 팔꿈치에 충격이 왔다. 턱이 바닥에 닿아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흙으로 뒤덮인 닳아빠진 장화가 눈에 들어왔다. 청색 바지 차림의 육중한 다리를 따라 위로 쭉 흝어보았다. 조여진 벨트 위로 셔츠 단추를 압박하고 있는 커다란 배가 보였다. 그녀의 시선은 자기 머리를 겨냥하고 있는 번쩍이는 권총에서 멈췄다. 남자의 얼굴을 살피려고 고생할 필요도 없었다. "마일즈 형사님이군요." 그녀가 말했다. "여기서 당신 품으로 뛰어들다니 기가 막히군요." "내 자식을 건드리면 죽여 버리겠어." 그가 말했다. 그리곤 총을 거두고 달려가 버렸다. 스컬리는 마일즈가 어디로 가는 건지 알았다. 그 미친 경관이 무슨 짓을 하기 전에 멀더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멀더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랐다. '뭔가 해야해. 어떤 것이든.' 총이 없는게 참으로 아쉬웠다. '멀더라도 총이 있으면 좋을 텐데.' 방탄조끼는 착용하고 있겠지만 그것도 믿을게 못된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숲을 헤치고 달려갔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눈을 감고 달리는 것과 같았다. 멀더와 마일즈 둘 다 시야에서 놓쳐 버렸다. 제때 멀더와 만나지기를 빌면서 계속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숲의 또다른 공터에 와 있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멀더를 본 것이다. 그는 공터 저 편에 서 있었다. 손전등을 공터 바닥에 비추고 있었다. 거기 빌리가, 손전등 빛을 받으며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아랫도리 파자마만 입은 채였다. 스컬리는 나무둥치 하나를 붙들고 몸을 가누었다. 빌리의 등에 붉은 자국 두 개가 보였다. 그것만 보고도 섬뜩해졌다. 그러나 빌리의 팔에 안긴 축 늘어진 형체는 그녀를 더욱 떨리게 만들었다. 그것은 테레사 네먼, 의사의 딸이었다. 잠옷 위에 목욕 가운을 입은 채였다. 그녀는 완전히 죽은 것처럼 보였다. "빌리!" 멀더가 소리쳤다. "테레사를 내려놔, 빌리!" 빌리는 공허한 표정으로 멀더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엔 스컬리가 소리칠 차례였다. 마일즈 형사가 나무 사이에서 나와 멀더 뒤로 가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의 눈에 살기가 서려 있었다. "멀더!" 스컬리는 목이 아프도록 소리를 질렀다. "조심해요! 뒤를 봐요! 총을 갖고 있어요! 그가 쏠려고!" 그러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는 너무 늦었다는 걸 알았다. 제19장 멀더는 스컬리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뒤로 돌았다. 돌진해 오는 마일즈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일즈가 자신을 총으로 내리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 건장한 형사는 멀더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직 자기 아들에게만 눈길을 주고 있었다. "빌리! 널 사랑한다! 하지만 이 길밖에 없어!" 마일즈는 부상당한 곰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빌리를 향해 총을 들어 올렸다. 총알이 발사되어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순간 마일즈가 멀더의 손에 쓰러졌다. 그녀는 멀더가 총을 잡기 위해 몸을 굽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멀더를 도우러 앞으로 나갔다. 한편 빌리는 테레사를 팔에 들고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때 스컬리가 얼어붙었다. 공터가 살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흙과 낙엽의 회오리가 바닥에서 위로 소용돌이쳤다. 회오리는 빌리 주변에 빙빙 도는 벽을 만들었다. 나무 숲에서 바람이 신음 소리를 냈다. 바람 위쪽에서 윙윙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 뒤로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쨍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눈부신 흰 빛이 공터에 넘쳐 났다. 눈이 멀 듯한 그 빛 속으로 멀더과 마일즈가 사라졌다. 그것은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끝이 났다. 스컬리는 초점을 맞추려고 눈을 깜빡거렸다. 빌리와 테레사가 바닥에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몸은 흙과 낙엽으로 뒤덮여 있었다. 멀더와 마일즈도 두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두 사람에게로 달려갔다. 스컬리도 그들에게 달려갔다. 마일즈는 아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빌리." 그는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빌리가 고개를 들었다. "아빠?"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빌리는 몸을 일으켰다. 마일즈가 부축해 주었다. 빌리 옆에서 테레사가 몸을 꿈틀댔다. 스컬리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당신은 누구세요?" 테레사가 물었다.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죠?" 스컬리는 그녀의 얼떨떨해 하는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팔을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멀더였다. 스컬리는 멀더가 말없이 응시하는 곳을 보았다. 빌리의 등을 보고 있었다. 스컬리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붉은 점이 사라지고 없었다. "마일즈 씨." 멀더가 말했다. "빌리한테 몇 가지 물어 봐도 될까요?" "되냐고요? 그야 물론이죠." 형사가 말했다. 그는 빌리를 부드럽게 안고 경이와 기쁨에 찬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내가 아버지된 사람으로서 도저히 하지 못할 짓을 할 걸 막아 줬소. 당신은 내 아들의 목숨을 구했어요. 아들이 죽음에서 살아 나오도록 도와주었어요. 원하는 대로 하세요." 마일즈는 자기 혼자서도 빌리를 병원으로 데려갈 수 있다고 우겼다. 멀더과 스컬리는 테레사를 집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리고 나서 병원으로 향했다. "이봐요, 속력 좀 줄여요." 멀더가 스컬리에게 주의를 주었다. "둘다 무모한 운전자가 돼선 안되죠." "정말 맞는 말이군요." 스컬리가 말했다. 그녀는 마지못해 표준 속도까지 줄였다. 차 사고 따위로 죽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빌리한테서 해답을 얻어낼 때까진. 그들이 도착했을 때 빌리는 자기 침대로 돌아와 있었다. 글래스 박사가 같이 있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듯했다. "정말 보기 드문 경우입니다." 그가 말했다. "내 평생 이런 일은 처음 봅니다." "맞습니다." 멀더가 말했다. "이건 진짜 희귀한 경우^36^예요. 그러니까 빌리에게 물어 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세요.' 박사가 동의했다. "하지만 짧게 하세요. 빌리는 아직 허약해요. 회복되려면 시간이 걸릴 겁니다." 빌리는 힘이 없어 보였다. 지난 3 년 동안 사용했던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었지만 이제 그의 눈은 살아나 있었다. 목소리도 약하긴 했지만 또렷하게 발음을 했다. 멀더는 계속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는 정상이 된 빌리의 정신을 혼란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아직도 종이로 만든 집처럼 부서지기 쉬웠다. "그 빛에 대해 말해 봐요, 빌리." 멀더가 말했다. "처음 그걸 본 게 언제죠?" "숲에서였어요." 빌리가 말했다. "우린 모두 그 숲속에 있었어요. 파티를 하고 있었죠. 내 친구들 모두. 축하 파티였어요." "뭘 축하했는데?" 멀더가 물었다. "졸업요." 빌리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졸업도 못했잖아요." 멀더가 말했다. "못했죠." 빌리가 말했다 "그 빛이 나를 데려가 버렸으니까요?" "당신을 어디로 데려갔죠?" 멀더가 물었다. "실험 장소로요." 빌리가 설명했다. "그들이 당신을 가지고 실험했소?" 멀더가 물었다. "그래요." 빌리가 말했다. "그들이 다른 친구들을 실험하는 걸 당신이 도와 주었나요?" 멀더가 물었다. "예." 빌리가 말했다. "난 그들의 지시를 따랐죠. 애들을 모으라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지시를 내렸죠?" 멀더가 물었다. "코 안에 이식된 물체를 통해서요." 빌리가 말했다. "하지만 실험이 진전이 없자 그들은 그 동안의 모든 증거를 없애려고 했어요. 난." 빌리의 음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미풍에 흔들리는 촛불 같았다. "당신이 뭘?" 멀더가 대답을 재촉했다. 멀더는 빌리의 말을 들으려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멀더 뒤에 있던 스컬리도 같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빌리의 뺨에서 눈믈이 흘러 내렸다. 빌리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사실을 아무도 알게 해서는 안된다고 했죠. 그들은 모든 걸 없애 버리려 했어요. 난 무서워요. 그들이 다시 올까 두려워요."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 없어요." 멀더가 빌리를 안심시키려 했다. "이제 나한테 말해 주기만 하면." 그러나 빌리는 오늘밤 할 말은 이미 다 해버렸다.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울고 있었다. "안됐지만 이제 다 말한 모양입니다." 글래스 박사가 멀더에게 말했다. "얘길 충분히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나한테 묻지 마세요." 멀더가 그에게 말했다. "여기 스컬리 요원에게 물어 보세요." 그런 다음 멀더는 자신이 직접 물었다. "어때요? 스컬리? 충분히 들었소? 당신의 그 보고서를 쓸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제20장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특수 요원 존즈가 스컬리에게 말했다. 스컬리는 하마터면 멀더와 눈을 마주치려고 몸을 돌릴 뻔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멀더는 거기 없으니까. '우습군.' 그녀는 생각했다. 멀더와 같이 있는 것에 얼마나 익숙해졌는지. 두 사람이 얼마나 빨리 한 팀이 되었는지. 생각하면 우스웠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혼자였다. 워싱턴의 FBI 본부에 돌아와 있었다. 상부에서는 이미 그녀가 제출한 보고서를 읽었다. 그들은 그녀를 보자고 했다. 존즈는 그녀를 회의실로 데려갔다. 테이블에는 먼저와 똑같은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 눈에 내가 변함없이 보일까? 그들이 정신 나간 사건에 투입했던 건전하고 온전한 요원의 모습으로 봐줄까?' 자리에 앉았을 때 그녀는 예의 그 침착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보이려고 애썼다. 그리고는 질문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가장 상관인 FBI 국장이 먼저 말했다. "우린 당신의 보고서를 살펴보고 있었소. 스컬리 요원." 그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린 이 보고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소."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물었다. "멀더 요원이 당신에게 무슨 속임수를 쓰진 않았소? 뭘 제대로 못 보게 했다든가, 세뇌시키려 했다든가." 스컬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멀더 요원은 제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전혀 속이거나 왜곡하지 않았습니다. 공정하고 정직했습니다." 세번째 인물이 합세했다. 목소리에 심술궂은 날카로움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당신은 외계인이 미국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광선 총으로 사람들을 죽인다고?" 스컬리는 억지로 공손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상대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척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가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기엔 증거가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증거에 대해 읽어봤소." 두번째 인물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시간 실종, 괴상한 시체, 그리고 나머지 하나 그건 또 뭐요? 이식된 물질이라고 했던가?" 스컬리는 주머니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어쩌면 이것이 보고서가 못한 일을 해 줄지도 몰라. 이들도 눈으로 보면 믿게 될지 모르지.' 그들은 유리병을 돌려 가며 구경했다. 한 사람씩 차례로 병 안에 든 금속 물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실험으로는 그 금속을 규명할 수 없습니다." 스컬리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 물질은 그 시체의 코 속에서 나왔습니다. 빌리 마일즈도 똑같은 물질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의 말로는 그것이 자기 코 안에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그에게 살인 지시를 내렸다는 거죠. 그건 일종의 팩시밀리 같은 것으로서 살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을 했습니다." 유리병은 국장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굳은 표정으로 스컬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만 지상의 얘기로 돌아갑시다. 그 청년은 어떻게 되었소? 빌리라고 했던가? 재판은 받고 있소?" "법정은 빌리의 아버지와 지역 의료 검시관에게 공무집행 방해를 선고했습니다." 스컬리가 말했다. "물론 빌리도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자백했습니다." "연루됐다고?" 두번째 인물이 소리를 질렀다. "그럼 도대체 나머지 연루자는 누구요?" 스컬리가 대답하기 전에 국장이 물었다. "그 청년이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될 거라는 거요?" "아닙니다." 스컬리가 대답했다. "우리는 지방 법원을 설득해서 이 사건을 기각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관련자 모두에게 최선책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거요." 두번째 인물이 소리쳤다. "우리가 원하는 건 멀더를 법정에 세울 수 있는 그런 수완 좋은 변호사요. 살인죄를 면제시키기 위해 '외계인에 의한 납치'란 구실로 FBI 요원을 이용하다니." 세번째 인물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 청년을 단순한 정신 이상의 살인자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소?" 스컬리는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국장이 그녀를 구제해 주었다. "이 회의의 주제로 돌아가 봅시다." 그가 말했다. "멀더 요원은 뭘 믿고 있소?" 이제 스컬리는 새로운 문제에 부딪혔다. 할 말이 너무도 많았다. 멀더는 너무도 많은 것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이 세상 사람 대부분이 믿지 않을 너무도 많은 것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이 사람들도 믿지 않을 것이란 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가능한 한 조금만 말했다. "멀더 요원은 이 지구상에 인간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장이 그녀를 주시했다. 그리곤 어깨를 약간 움직였다. 아마 어깨를 으쓱했던 것이리라. "수고했소, 스컬리 요원." 그가 말했다. "가도 좋아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건 단지." 스컬리가 말을 시작했다. "수고했습니다. 스컬리 요원." 그가 한 번 더 말했다. "네, 국장님. 감사합니다." 스컬리가 말했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밥맛이 뚝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다만 한 가지,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게 있었다. 그녀를 문 밖으로 배웅해 주면서 존즈 요원이 보여 준 작은 미소가 그것이었다. 그 미소는 그녀에게 잘 해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안에서 문을 닫은 후 존즈의 미소는 사라졌다. 상관들에게로 되돌아 왔을 때 이미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테이블에 앉은 인물들은 메모한 걸 비교해 보느라 바빴다. "그녀의 보고서는 국방부 문서로 분류된 것들과 일치합니다." 세번째 인물이 말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 저었다. 두번째 인물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 "이게 언론에 보도되면 그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의회에 들어가도 마찬가지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유령이나 우주인을 쫓는 데 시간을 허비해야 할 겁니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인물이 불쾌한 듯 말했다. "FBI가 연방 유령 조사단쯤으로 되겠죠." "사람들이 알게 되면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킬 겁니다." 세번째 인물이 선언했다. 국장은 그들의 말이 끝날 때까지 말없이 듣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의 결정을 듣기 위해. 그는 헛기침을 했다. "여러분." 그가 말했다. "이 보고서만 봐선 아무런 확증도 잡을 수 없어요. 스컬리 요원이 계속 멀더를 감시하도록 해야 하오. 그녀는 틀림없이 X 파일을 영구히 페쇄 시킬 수 있도록 우리에게 충분한 자료를 제공해 줄 거요. 그때까지는 스컬리 요원의 보고서에 담긴 정보가 외부로 새 나가서는 안됩니다. 존즈 요원, 일반 양식으로 증거를 보관하시오." "네, 국장님." 존즈가 대답했다. 그는 탁자에 있던 보고서 복사본들을 모았다. 분량이 꽤 됐다. 스컬리가 일을 철저하게 한 모양이었다. 그때 국장이 금속 조각이 든 유리병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특히 잘 보관하시오." 그가 존즈에게 말했다. "네, 국장님." 존즈가 말했다. 회의실을 나온 존즈는 먼저 본부 지하로 내려갔다. 그는 극소수 요원만 알고 있는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의 열쇠를 가진 요원은 그보다 더 적은 수였다. 방 안에는 스테인리스 강철 박스가 하나 있었다. 그는 박스의 뚜껑을 열고 보고서들을 던져 넣었다. 버튼을 눌렀다. 그는 사납게 타오르는 오렌지색 불꽃들을 지켜보았다. 그는 불꽃이 보고서들을 다 태울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나서 방을 나와 바삐 걸어갔다. 그는 본부 주차창으로 갔다. "특수국 차 한 대 주시오." 그가 안내인에게 말했다. "또 특수 임무입니까? 존즈 씨." 안내인이 물었다. "드라이브하기 좋은 날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팔자도 좋지. 난 이게 뭐야, 6시까지 자리를 지켜야 하다니." "맞소, 난 운이 좋아." 존즈가 말했다. 그는 도시를 떠났다. 포토맥 강을 건너 버지니아의 초록빛 전원을 달려갔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표지판도 없는 좁은 아스팔트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높다란 돌담의 쇠문 앞에 멈췄다. 사유지 입구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유지라면 반자동 소총을 든 군인 두 사람이 지키고 서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존즈씨." 존즈가 신분증을 꺼내 보이자 담당 하사관이 말했다. "또 새 임무인가요?" "새 임무요." 존즈가 동의했다. 문이 열리고, 존즈는 아스팔트 길을 따라 크고 네모진, 창 없는 콘크리트 건물로 갔다. 문 앞에 있던 군인에게 신분증을 보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선반들이 설치된 미로였다. 선반들은 하나같이 잠겨진 강철 상자들로 비좁았다. 존즈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찾아가는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창고 끝에서 그는 멈췄다. 열쇠를 꺼내 암호가 표시된 강철 상자 하나를 열었다. 그는 가지고 온 유리병을 상자 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바로 옆에는 표시가 된 또다른 유리병이 네 개 있었다. 상자를 닫고 잠그면서 그는 자신이 또 얼마나 많은 여행을 해야 할지 궁금해졌다. 스컬리를 생각해 봤다. 멀더도 생각했다. 사건들로 넘쳐 나고 있는 X 파일도 생각했다. 건물을 떠나면서 그가 경비에게 말했다. "또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