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RNING CHROME by William Gibson 무더웠다. 우리가 크롬을 불태웠던 그날 밤은. 밖의 상점가에서는 나방들 이 네온 사인에 몸을 부딪쳐 자살을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비의 로프 트의 어둠 속에서는 모니터 화면과 매트릭스 시뮬레이터의 전면에서 반짝 이는 초록색과 빨간색 LED가 유일한 조명이었다. 나는 보비의 시뮬레이터 안의 칩 하나하나까지 샅샅이 알고 있다. 겉보기에는 일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노-센다이의 '사이버스페이스 7'이지만, 내부는 내 손으로 철저하 게 개조되어 있었다. 안에 꽉 차 있는 실리콘 중 공장 출하시의 규격 회로 는 단 한 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시뮬레이터 콘솔 앞에 나란히 앉아 화면 왼쪽 아래의 시간 표 시를 바라보며 대기하고 있었다. "시작해." 내가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보비는 이미 몸을 앞으로 내밀며 손바닥으 로 러시아제 프로그램을 슬롯에 밀어 넣고 있었다. 그러는 그의 동작은 매 끄러우며 우아했고, 전자 오락에 자신 있는 소년이 보너스 게임까지 연속 으로 깰 작정으로 기계에 동전을 집어넣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머리 속에 매트릭스가 펼쳐지기 시작하며 은빛의 안내 섬광 phosphenes 이 밀물처럼 내 시야를 가로지른다. 완전히 투명한 무한대의 3차원 체스 판. 러시아제 프로그램은 우리가 그리드(격자) 안으로 들어섰을 때 순간적 으로 휘청거린 듯했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매트릭스의 이 부분에 먼저 접 속되어 있었다면 우리 컴퓨터를 의미하는 작은 노란색 피라미드로부터 명 멸하는 그림자가 파상적으로 풀려 나오는 장면을 목격했을 것이다. 이 프 로그램은 국부적 local 환경을 흡수, 어떤 상황에 맞닥치더라도 자신을 최 우선 긴급 지령으로 위장하도록 설계된 의태 병기인 것이다. "기뻐해 줘." 보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막 우리는 동부 연안 원자력 기구의 조사원이 됐어......." 그것은 우리가 소방 사이렌의 사이버네틱한 표현에 해당하는 것을 울 리며 광섬유의 도로를 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뮬레이션 매트릭스 속에서는 크롬의 데이터 베이스를 향해 곧장 돌진하고 있는 것처 럼 보인다. 베이스 자체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미 나는 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림자의 벽, 얼음의 벽이. 크롬: 그녀의 귀여운 동안은 강철처럼 매끄럽다. 대서양의 깊은 해구 바닥에 어울릴 듯한 눈동자. 가공할 압력하에서 서식하는 차가운 잿빛 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자신을 배반한 상대에게 악성 종양을, 그것 도 몇 년이나 걸려서 천천히 목숨을 앗아 가는 로코코풍의 특제 암을 선사 한다고 한다. 크롬에 관한 소문이라면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마 음 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모습을 지우고 대신 리키의 이미지를 불러냈다. 로프트의 강철과 유리로 된 격자 사이로 비스듬이 비치는 먼지 투성이의 빛 속에서 무릎을 꿇는 리키. 빛 바랜 미채 작업복. 반투명한 장미빛 샌 들. 도구가 든 나일론백을 뒤지는 그녀. 드러낸 등의 아름다운 곡선. 고개 를 들면 반 블론드의 곱슬머리가 드리워져 그녀의 코를 간지럽힌다. 미소 지으며 보비가 입던 낡은 셔츠의 단추를 채우는 그녀. 카키색의 면이 가슴 을 감싼다. 그녀가 미소짓는다. "죽여 주는군." 보비가 말했다. "지금 크롬한테 말했어. 우리가 IRS (국세청)의 세무 감사 및 최고 법원의 소환장 세 통이라고 말야...... 꽉 붙들고 있어, 잭......." 굿바이, 리키. 이젠 너를 못 볼지도 모르겠군. 어두운, 너무나도 어두운, 크롬의 얼음 회랑. 보비는 카우보이, 아이스는 그의 전공이었다. 침입 대항 전자망 Intrusion Countermeasures Electronics--약칭 ICE. 매트릭스란 데이터 시스템 간의 상호 관계의 추상적 표상이다. 합법적인 프로그래머는 이 매트릭스 속에서 고용주가 소유하는 섹터에 자기 자신을 접속한 후 밝게 빛나는 기하학적 도형에 둘러싸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도형이 나타내는 것은 소 속 기업의 데이터이다. 시뮬레이션 매트릭스의 무색 비공간에는 데이터의 탑과 광장이 늘어서 있다. 대량의 정보 처리와 교환을 손쉽게 하기 위한 전자 공학적 공감각 환상. 합법적인 프로그래머는 자신의 작업 영역을 에워싼 얼음의 벽을 볼 기회가 없다. 그 벽은 그들의 작업 내용을 국외자, 즉 산업 스파이나 보비 퀸 같은 비합법 프로로부터 감추기 위해 존재하는 그림자의 벽인 것이다. 보비는 카우보이였다. 광범위하게 확장된 인류의 전자적 신경계를 물 색한 후 혼잡한 매트릭스 속에서 데이터와 크레디트를 훔치는 금고털이, 밤도둑인 것이다. 모노크롬의 비공간에서는 밀집된 정보가 밤하늘의 별처 럼 빛나고, 그 위에는 대기업들의 소우주가, 군용 시스템의 차가운 와상지 spiral arms가 불타고 있다. '젠틀맨 루저'는 컴퓨터 카우보이와 좀도둑, 인공 두뇌 범죄자들이 애 용하는 근사한 술집이었고, 보비는 언제나 그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겉 늙은 작자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파트너였다. 보비 퀸과 오토매틱 잭. 보비는 검은 선글래스를 낀 마른 몸집의 창백 한 사내. 잭은 한쪽 팔에 근전식 myoelectric 의수를 단 인상이 좋지 않은 사내. 보비는 소프트웨어, 잭은 하드웨어. 보비는 콘솔을 두들기고 잭은 도움이 되는 부품이라면 뭐든지 조달한다. 만약 당신이 '젠틀맨 루저'의 자칭 소식통들에게 물어보았다면 그런 식의 대답을 들었을 것이다. 적어도 보비가 크롬 습격을 결심하기 전까지는. 아니, 보비가 이제 무디어지고 내 리막길에 들어섰다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보비는 스물여덟 살이었고, 콘솔 카우보이로서는 이미 늙은 부류에 속했다. 우리 둘 다 솜씨는 좋았지만 웬일인지 큰 껀수와는 아직 인연이 없었 다. 나는 필요한 물건을 입수하려면 어디로 가야 되는지 잘 알고 있었고, 보비도 자신의 일을 완전히 터득하고 있었다. 흰 테리천으로 된 헤어밴드 를 이마에 두른 보비. 그의 손가락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키 보드 위를 움직이며, 이 분야에서 가장 완벽하다는 아이스에도 구멍을 뚫 어 놓는다. 그러나 이것은 뭔가 이유가 있어서 보비가 진짜로 작업에 열중 했을 경우에 한했고,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보비에게는 그다 지 강한 동기가 없었고, 나는 나대로 방세를 낼 돈과 오늘 입을 깨끗한 셔 츠가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비에게는 기묘한 버릇이 있었다. 뭔가에 열중하기 시작할 때 는 언제나 여자가 마치 자기 전용의 태롯 tarot 이라도 되는 양 행동하는 것이다. 그 사실에 관해서는 서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지난 여름 그의 기 량이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그가 젠틀맨 루저에서 보내는 시간 은 한층 더 길어졌다. 벌레가 네온에 떼 지어 모이고 공기에서는 향수와 패스트 푸드 내음이 감도는 밤, 그는 열린 채로 있는 문 옆 테이블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곤 했다. 선글래스를 통해 행인들의 얼굴을 스캔 하다가 그는 리키야말로 자신이 고대하고 있던 상대라고 판단했음이 분명 했다. 포커의 와일드 카드, 행운을 불러오는 여자, 새로운 상대라고. 나는 시장 조사를 위해 뉴욕 시로 갔다. 쓸 만한 장물 소프트웨어를 물색 하기 위해서였다. 핀의 가게의 쇼 윈도에는 회색 먼지로 된 털외투를 뒤집어쓴 파리 시 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그 위에 '메트로 홀로그래픽스'라고 쓰인 고장 난 홀로그램이 떠올라 있었다. 가게 안에는 허리 높이까지 폐품이 쌓여 있 었고, 일부는 벽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이름모를 잡동사니와 지금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압축판지제 선반에 가려 벽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선반 위에는 오래 된 포르노 잡지와, 노란 등을 한 몇년 분의 <내셔널 지오그래 픽>지가 놓여 있었다. "총을 찾고 있군." 핀이 말했다. 고속 굴파기 인간 제조를 위한 유전 자 재조합 프로젝트에서 태어난 것 같아 보이는 사내다. "재수가 좋군. 이 번에 신형 스미드 앤드 웨슨이 들어왔어. 408 전술용 피스톨. 이걸 봐. 총 신 밑에 달린 건 크세논 방전관이고, 전지는 손잡이 안에 들어 있어. 캄캄 한 밤에는 오십 야드 전방에 직경 십이 인치의 대낮같이 밝은 원을 투사하 게 되어 있지. 광원은 너무 작아서 거의 탐지가 불가능할 정도야. 야간 전 투에서는 부우두voodoo 마술 같은 거지." 나는 한쪽 팔을 테이블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테이블 표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의수 내부의 서보 모터가 과로한 모기가 윙윙 거리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핀이 이 소리에 질색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 었다. "이걸 저당 잡히려고 왔나?" 그는 이빨 자국이 난 펠트펜 끝으로 듀랄 루민제의 내 손목을 쿡쿡 찔렀다. "조금 더 조용한 걸 사면 어때?" 나는 계속 테이블을 두드렸다. "총은 필요 없어, 핀." "알았어." 그가 말했다. "알았다니까." 나는 두드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지금 있는 건 하나뿐이고, 그게 무슨 물건인지조차도 몰라." 그는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난주에 저지에서 온 양아치들이 놓고 간 거 야." "어떤 물건인지 모르고 살 때도 있나, 핀?" "잘난 놈 하나 났군." 그는 내게 투명한 비닐 봉투를 건넸다. 완충 패드를 통해 녹음 카세 트 같은 것이 비쳐 보였다. "놈들은 여권을 가져왔어. 크레디트 카드와 손목 시계도 함께. 그리고 이걸." "그러니까 누군가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던 거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권은 벧기에 발행이야. 아무래도 위조 여권인 것 같아서 소각로에 서 태웠어. 카드하고 같이. 시계는 괜찮아. 포르셰. 고급품이지." 문제의 물건이 플러그 접속식의 군용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봉투에서 꺼내 보니 소형 돌격 소총의 탄창 비슷하게 보였 고, 반사 방지를 위해 검은색 플라스틱 코팅이 되어 있었다. 가장자리와 네 모서리의 코팅이 벗겨져 밝은 색깔의 금속이 드러나 있었다. 한동안 난 폭하게 다루어진 것 같았다. "헐값에 넘겨 주겠네, 잭. 오랜 친구 사이니까 말야." 이 말에는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핀이 물건 값을 깎아 줄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거운 슈트케이스를 들고 공항 복도를 열 블록이나 걸어야 할 때 하느님이 중력의 법칙을 무효화해 주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였 다. "러시아제 같아 보이는데. 레닌그라드 교외의 긴급 하수 처리 프로그 램인가 보군. 내가 이걸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 "이봐. 나한텐 네 나이보다 더 오래 된 구두가 있어. 가끔 저지의 저 능아들과 네가 막상막하라고 느낄 때가 있다는 걸 아나? 무슨 대답을 듣고 싶나? 이게 크렘린으로 들어가는 열쇠라고 해 줄까? 이 빌어먹을 물건이 뭔지 알아내는 건 네가 할 일이야. 물건을 파는 건 내 일이고." 나는 물건을 샀다. 육체가 없는 우리는 곡선 궤도를 그리며 크롬의 얼음 성채로 돌입한다. 눈 이 핑핑 돌 정도로 빠른 속도. 마치 침입중인 프로그램 꼭대기에서 파도타 기를 하는 느낌이다. 발 밑에는 소용돌이치며 돌연변이를 계속하고 있는 글리치glitch 시스템 군. 우리는 지각을 가진 작은 유막이 되어 그림자의 복도 위를 흘러간다. 어딘가에 우리의 육체가 존재한다. 머나먼 곳, 강철과 유리로 된 천장 이 있는 비좁은 로프트 안에. 어딘가에서 마이크로세컨드 단위의 초읽기가 계속되고 있다. 도주를 위해 남겨진 시간을 재는. 우리는 세무 감사와 세 통의 소환장으로 변신해서 크롬의 게이트를 돌 파했다. 그러나 그녀의 방어 체계는 이런 식의 공권력 개입에 대처할 수 있도록 특별히 고안되어 있었다. 그녀가 설치한 최신형 아이스는 경찰이나 법원, 또는 국세청이 보낸 영장 전부를 그대로 받아넘기도록 구축되어 있 는 것이다. 첫 번째 관문을 돌파했을 때 대부분의 데이터는 이미 코어 코 맨드 아이스 뒤로 사라지고 없었다. 몇 킬로미터나 계속되는 복도, 그림자 의 미로 뒤로. 그와 동시에 다섯 개의 독립된 육상 통신선을 통해서 법률 사무소 앞으로 크롬의 조난 구조 신호가 발신됐다. 그러나 파라미터 아이 스는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였다. 글리치 시스템이 조난 신호를 전부 집어삼키고, 의태 서브 프로그램은 코어 코맨드가 미처 지우지 못한 데이 터를 스캔하기 시작한다. 러시아제 프로그램은 남아 있던 데이터 중에서 통화 횟수, 평균 통화 시간, 크롬의 응답 속도 등을 참고로 해서 동경의 어떤 번호를 선별해 낸 다. "됐어." 보비가 말한다. "일본에서 크롬의 한패가 건 스크램블러 통화로 둔갑하는 거야. 이거 라면 효과가 있을 걸." 달려라, 카우보이. 보비는 자신의 미래를 여자를 통해 점쳤다. 그가 낚는 여자들은 곧 그의 전조이며 운세였다. 그는 젠틀맨 루저에 밤새도록 죽치고 앉아서 새로운 얼굴이 마치 카드와도 같이 눈앞에 펼쳐질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 밤 나는 밤늦게까지 로프트에서 일하고 있었다. 의수를 떼어버 린 후 팔의 절단면에 직접 부착한 매직 핸드로 칩을 깎는 일이었다. 그 때 보비가 내가 본 적이 없는 젊은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낮선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일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당하면 나는 언제나 약간 거북해진다. 잘리고 남은 상박부에서 튀어나온 경질 탄소 볼트에 리드선이 잔뜩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거리낌없이 옆으로 다가와 스크 린의 확대 영상을 쳐다보았고, 시선을 돌려 진공 처리된 더스트 커버 밑에 서 움직이고 있는 매직 핸드를 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바라보 고만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가끔은 그럴 때도 있다. "오토매틱 잭이야, 리키. 내 파트너." 그렇게 말한 보비는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그의 목소리 에서는 오늘밤은 어딘가의 싸구려 호텔에 가서 자 달라는 눈치가 역력했 다. "안녕, 잭." 하고 그녀가 인사했다. 늘씬한 키, 나이는 열아홉 내지 스무 살, 빼어난 용모임에는 틀림이 없다. 콧마루를 가로지르는 귀여운 주 근깨. 눈동자 빛깔은 짙은 앰버와 프렌치 커피의 중간색. 종아리까지 말아 올린 꼭 끼는 청바지. 장미빛 샌들에 매치하는 폭이 좁은 플라스틱제 벧 트. 그러나 지금, 잠 못 이루는 밤에 이따금 보는 그녀는 스프롤화한 도시 와 스모그 너머에 서 있다. 마치 내 망막에 새겨진 홀로그램처럼. 그녀는 우리가 만났을 무렵 한 번 입었던 밝은 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 무릎에 닿을락말락한 치마 자락. 날씬하고 쭉 뻗은 맨다리. 금빛 줄이 섞인 갈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지고, 어딘가에서 부는 바람에 나부낀다. 그녀가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하는 것이 보인다. 보비가 녹음 카세트 더미를 보라는 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지금 나가실 참이다, 카우보이." 나는 매직 핸드를 떼어 내며 말했다. 그녀는 내가 다시 의수를 장착하 는 것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고장난 물건도 고칠 수 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물론 뭐든지 고칠 수 있지. 뭐든지 가지고만 와 봐. 이 오토매틱 잭 이 고쳐 줄 테니까." 나는 듀랄루민제의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 보였다. 그녀는 벧트에서 소형의 심스팀 덱을 꺼내 카세트 뚜껑의 연결 부분이 부서져 있는 것을 내게 보였다. "내일 고쳐 줄께." 내가 말했다. "그쯤은 아무것도 아냐."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말야.' 나는 잠 기운에 끌려 삼층 아래의 입구 로 향한 계단을 내려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런 껀수를 올렸으니까 이 제 보비의 운세도 트일까? 만약 녀석의 시스템에 발동이 걸린다면 내일 당 장이라도 크게 한탕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길가로 나온 나는 씩 웃고 하품을 한 다음 손을 들어 택시를 불렀다. 크롬의 성이 녹고 있다. 깜박이며 사라져 가는 그림자의 빙판. 러시아제 프로그램으로부터 풀려 나오는 글리치 시스템한테 먹히고 있는 것이다. 우 리의 중앙 논리 회로의 공격이 아이스의 구조 자체를 잠식하고 있다. 글리 치 시스템이란 자기 복제 기능과 왕성한 식욕을 가진 바이러스의 사이버네 틱스판. 쉴새없이 돌연변이를 계속하는 바이러스 집단은 크롬의 방어를 파괴하고, 흡수한다. 우리는 이미 상대를 마비시킨 것일까. 아니면 어딘가에서 비상벧이 울 리고 빨간 불이 반짝거리고 있을까. 그녀는 알아차렸을까? 리키 와일드사이드. 보비는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처음 몇 주일 동안 그 녀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네온빛 아래에서 펼쳐지는 이 잡다 한 도시의 모든 것이 그녀 눈에는 신선하게만 비쳤다. 쇼핑 센터를 몇 마 일이나 배회하는 것이 그녀의 일과였고, 모든 상점과 나이트클럽은 그녀의 지치지 않는 탐험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녀 곁에는 와일드사이드, 즉 도 시의 복잡하고 어두운 이면과, 그 곳에 서식하는 인종의 이름에서 특기에 관해서까지 일일이 설명해 줄 수 있는 보비가 있었다. 그는 그녀를 편안한 기분이 되도록 해 주었다. "그 팔은 어떻게 하다 그렇게 된 거에요?" 어느 날 밤 그녀가 내게 물었다. 젠틀맨 루저의 구석진 곳에 있는 작 은 테이블에 앉아 셋이서 같이 술을 마시고 있었을 때의 일이었다. "행글라이딩 중에." 내가 말했다. "사고였어." "밀밭 위를 행글라이더로 날던 중이었지." 보비가 말했다. "키에프 라는 곳에서 말야. 잭은 캄캄한 밤에 오십 킬로나 되는 레이더를 가랑이 사이에 끼고 야간용 패러글라이더에 매달려 있었어. 그 때 어떤 멍청한 러 시아군이 쏜 레이저 광선이 우연하게도 팔을 태워 버린 거야." 어떻게 그랬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나는 화제를 딴 데로 돌렸다. 나는 계속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신경이 날카로 워진 이유는 리키가 아니라 그녀를 다루는 보비의 태도 때문이라고. 우리 는 오랫동안 함께 지내 왔다. 전쟁이 끝났을 무렵부터 이미 그를 알고 있 었고, 그가 여자를 게임의 칩 정도로 간주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보 비 퀸 vs. 부, 보비 퀸 vs. 시간과 도시의 밤. 바로 그가 어떤 계기, 어떤 목표를 필요로 하고 있었을 때에 리키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래서 보비는 그녀를 그가 원했으면서도 손에 넣을 수 없었던 모든 것, 손에는 넣었지만 계속 지니고 있을 수 없었던 모든 것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녀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보비의 고백을 계속 들어 줘야 하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그가 자기 말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괴로웠다. 뼈저린 실연과 그 실연에서 회복하는 속도에 있어서는 아무도 그를 따라잡을 작자가 없다. 나는 지금까지 열 번도 넘게 그것을 목격해 왔다. 차라리 선글래스의 렌즈 위에 녹색의 형광 도료로 NEXT라고 대문자 로 써 놓으면 어떨까. 젠틀맨 루저의 테이블 사이로 그럴듯한 껀수가 지나 가자마자 그 단어가 반짝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보비가 그 여자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그들 을 상징으로 대치했다. 파란 만장한 그의 인생 지도에 새겨진 마술적 기 호, 술집과 네온 사인의 바다에서 그를 이끌어 줄 항해용 비콘으로. 그것 말고 어떤 목표가 있단 말인가? 돈? 그는 그 빛을 쫓을 만큼 돈 그 자체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 다른 인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권력을 쟁취하 기 위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권력에 수반하는 책임을 그는 혐오했다. 자신의 기술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긍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지 속적인 동기는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여자로 그것을 대신했다. 리키가 나타났을 때 그는 여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것도 제일 나 쁜 맥락에서. 그의 기량은 눈에 띌 정도로 쇠퇴해 가고 있었고, 소식통들 사이에서는 그의 게임에서 왕년의 날카로움이 사라졌다는 귀엣말이 이미 들려 오고 있었다. 그는 큰 점수를 딸 필요가 있었다. 그것도 빨리. 왜냐 하면 그는 그 이외의 생활을 몰랐고, 그의 시계는 전부 카우보이의 시간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계의 눈금에는 위험과 아드레날린, 그리고 자신의 움직임이 모두 옳았다는 증명으로 누군가의 크레디트가 통째로 당 신의 구좌로 굴러 들어올 때 느낄 수 있는 그 지고한 새벽의 고요함이 새 겨져 있다. 목돈을 만든 후 일에서 은퇴할 시기가 그에게도 온 것이다. 그래서 리 키는 다른 누구보다도 높고 먼 자리로 치켜 올려졌다. 그러나 그녀는--나 는 그에게 이렇게 고함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녀는 지금 바로 눈앞 에 현실로 살아 존재하는 인간이다. 배고픔을 느끼고, 발랄하며, 따분해 하고, 아름답고, 흥분한, 이 모든 것을 합친 인간이란 말이다....... 내가 핀을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가기 일 주일 전쯤 되던 날의 오후 보비가 외출했던 적이 있었다. 그가 바깥에 나간 후 로프트에 남겨진 우리 는 폭풍우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장에 난 채광창의 반은 미완성 인 채로 남겨진 돔에 덮혀 있었고 나머지 반을 통해 비구름이 낀 검푸른 하늘이 보였다. 작업대 옆에 서서 오후의 더위에 멍해진 눈으로 하늘을 쳐 다보고 있었을 때 리키의 손이 나를 만졌다. 내 어깨를, 의수를 달아도 반 인치 정도 바깥에 보이는 핑크색의 옥죄인 흉터 가장자리를. 다른 여자의 손은 그 곳에서 어깨로, 목으로 옮겨 가고는 했다. 그러나 리키는 그러지 않았다. 검게 칠해진 그녀의 손톱은 뾰족하다기 보다는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타원형이었다. 매니큐어 색깔은 탄소 섬 유로 도금된 내 의수보다도 약간 짙었다. 그녀의 손이 의수를 타고 내려가 고 검은 손톱은 의수 표면의 접합선 위를 따라 움직인다. 검게 양극 산화 처리된 팔꿈치 관절로, 손목으로. 어린애같이 부드러운 그녀의 손. 펼쳐진 손가락이 내 손을 깍지 끼고, 다공성 perforated 듀랄루민 위에 그녀의 손 바닥이 겹쳐진다. 그녀의 다른 쪽 손이 피드백 패드 위를 가볍게 스쳤다. 그 날 오후에 는 계속 비가 내렸고, 보비의 침대 위에서는 빗방울이 강철과 매연에 그슬 린 유리창을 두들기고 있었다. 아이스의 벽이 그림자로 만들어진 초음속의 나비 떼처럼 날아가고 있다. 그 너머에 펼쳐지는 것은 매트릭스의 환상이 만들어 내는 무한대의 공간. 마치 조립식 빌딩의 건축 광경을 녹화해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테이프는 고속으로 역회전하고 있고, 빌딩 벽은 찢어진 날개이다. 거듭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노력한다. 이 장소와 그 너머의 심연 은 표상에 불과하다고. 우리는 크롬의 컴퓨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것과 인터페이스로 접속되어 있을 뿐이라고. 보비의 로프트에 있는 매트릭 스 시뮬레이터가 눈앞의 환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코어 데이 터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기 시작한다......이 곳은 얼음의 반대 쪽, 내 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매트릭스의 내부, 천오백만 명의 합법적 콘솔 오퍼레이터들이 매일 보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광경이다. 직립한 화물 열차처럼 우리를 에워싼 코어 데이터의 탑은 액세스를 위 해 갖가지 색으로 분류되어 있다. 원색의 1차 정보는 투명한 공허 속에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반짝이고, 육아실풍의 엷은 청색과 핑크빛 으로 채색된 무수히 많은 수평면들이 그것들을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그 무엇인가는 아직도 아이스에 가려진 채로이다. 크롬이 설치한 고가의 어둠 중심에 있는 것, 크롬의 심장 그 자 체....... 뉴욕으로의 쇼핑 원정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가 되어 있었다. 천장의 채광창을 통해 비치는 햇빛은 이미 희미했지만 보비의 모니터 화면 에서 아이스의 패턴이 반짝이고 있었다. 누군가의 컴퓨터 방어망의 2차원 적 그래픽 표시, 아르 데코풍의 무릎 깔개처럼 짜여진 네온의 선. 나는 콘 솔의 스위치를 껐고, 화면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리키의 소지품이 작업대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의류와 화장품 이 삐져 나온 몇 개인가의 나일론백. 새빨간 카우보이 부츠. 카세트 테이 프. 심스팀 스타 전문의 번쩍거리는 일본 잡지. 그것들 모두를 작업대 밑 으로 쓸어 넣은 후 의수를 떼고 나서야 핀한테서 산 프로그램이 웃옷의 오 른쪽 포켓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왼손으로 힘들게 그것을 꺼낸 후 보석 세공용 바이스의 패드를 댄 집게 사이에 끼웠다. 매직 핸드는 옛날에 쓰이던 원형 레코드를 올려 놓는 식의 오디오 턴 테이블을 닮았다. 투명한 더스트 커버 밑에는 바이스가 달려 있다. 매직 핸드의 팔 자체의 길이는 일 센티미터를 약간 넘을 정도이고, 턴테이블의 톤암에 해당하는 부품 위에서 회전한다. 그러나 리드선을 팔의 절단부에 이을 때 나는 그 쪽이 아닌 스코프 쪽을 본다. 매직 핸드의 팔 부분이 40 배로 확대된 흑백영상을 보는 것이다. 공구를 점검한 후 레이저를 집어 들었다. 약간 무거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중량 감지 장치의 입력을 그램당 4분의 1 킬로그램으로 하향 조정 한 후 작업을 개시했다. 40배로 확대된 프로그램의 측면은 트레일러 트럭 만큼이나 커 보인다. 해독하는 데는 여덟 시간 걸렸다. 매직 핸드와 레이저, 네 다스의 탭 을 써서 세 시간, 콜로라도의 중개상과의 전화 통화에 두 시간, 여덟 살 수준의 기술 러시아어를 번역할 수 있는 사전 lexicon 디스크로 프로그램 을 처리하는 데 세 시간. 이윽고 키릴 문자가 모니터에 찍혀 나오기 시작하고, 화면 중간에서 한 번 일그러지더니 영어로 바뀌어 갔다. 군데군데 빠진 곳이 있었다. 콜 로라도의 중개상으로부터 구입한 리드아웃에서 렉시콘이 전문적인 군사 약 어와 마주친 곳이다. 하지만 핀이 나한테 판 물건이 뭔지는 대략 짐작이 갔다. 잭나이프를 사러 갔다가 대신 소형 중성자 폭탄을 사들고 온 깡패가 된 기분이었다. '또 잡쳤군'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패싸움에 중성자 폭탄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더스트커버 밑에 있는 것은 나따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이걸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지, 어디서 바이어를 찾 아야 하는지조차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 작자는 이미 죽었 다. 포르셰의 손목 시계와 위조 벧기에 여권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 하지 만 장물 매매에 직접 손을 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핀이 고용한 교외의 강도들에게 당한 그 누군가는 극히 불순한 직업의 소유자였음이 틀림없다. 보석 세공용 바이스 사이에 끼워진 프로그램은 러시아제의 군용 아이 스브레이커(쇄빙기), 치명적인 바이러스 프로그램이었다. 보비는 새벽녘에 혼자서 돌아왔다. 사 가지고 온 샌드위치를 무릎 위 에 올려 놓은 채 나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먹을래?" 아직도 잠에서 덜 깬 채 나는 보비에게 샌드위치가 든 봉지 를 내밀었다. 프로그램에 관한 꿈을 꾸고 있었다. 게걸스러운 글리치 시스 템과 의태 서브 프로그램의 꿈을. 꿈 속에서 그것은 모양이 없고 유동적인 일종의 동물로 느껴졌다. 그는 봉지를 손으로 밀쳐 내고 콘솔 앞으로 다가가 기능키를 눌렀다. 화면에 어제 오후에 보았던 복잡한 패턴이 나타났다. 나는 잠을 쫓기 위해 왼손으로 눈을 문질렀다. 오른손으로는 할 수 없는 동작이다. 나는 잠이 들기 전까지 그 프로그램 얘기를 보비에게 해야 할지 아니면 안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혼자 물건을 처분한 후 돈을 독차지해서 리키와 함께 어 딘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누구 거지?" 내가 물었다. 그는 검은 면직 점프 수트를 입고 낡은 가죽 점퍼를 망토처럼 어깨에 걸친 채 서 있었다. 며칠 동안 깎지 않은 수염이 덥수룩했고, 얼굴은 평소 보다 더 야위어 보였다. "크롬" 하고 그가 대답했다. 내 의수가 경련하며 철컥거리기 시작했다. 공포가 탄소 볼트를 통해 근전 시스템에 전달된 것이다. 샌드위치를 떨어뜨렸다. 시든 양배추와 노 란 생치즈가 청소하지 않은 나무 마루 위로 떨어졌다. "완전히 돌아 버렸군." "아니." 그가 말했다. "크롬이 알아차릴까 봐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없어. 그랬더라면 우린 벌써 죽어 있어야 옳아. 몸바사의 3중 무작위 렌탈 시스템과 알제리의 통 신 위성 경유로 접근했어. 그러니까 누가 엿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어도 역탐지하는 건 무리야." 만약 보비가 아이스에 손을 댄 경로를 크롬이 탐지했다면 우리는 이미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보비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나 는 뉴욕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살해당했을 테니까. "하필이면 왜 그 여자를 택했지? 보비, 뭐든지 좋으니까 이유를 대 봐......." 크롬: 그녀를 젠틀맨 루저에서 대여섯 번 정도 본 적이 있다. 슬럼가 탐방, 아니면 서민의 생활 상태를 조사하려고 그 곳에 왔는지도 모른다. 그런 상태에 있기를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하트 모양 의 작고 귀여운 얼굴에 더할 나위 없이 살벌한 두 눈. 사람들의 기억으로 는 그녀는 언제나 열네 살이었다. 대량의 혈청과 호르몬 투여로 정상적인 신진 대사 같은 건 이미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 도시 최악의 산 물이었지만 지금은 슬럼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녀는 마피아 지방 지부의 거물들, 통칭 '더 보이즈'의 정식 멤버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합성 뇌하수체 호르몬이 아직 비합법이던 시절에 판매인으로 이 세계에 발을 들 여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 일을 계속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그녀는 '푸른 등불의 집'의 소유주인 것이다. "넌 제 정신이 아냐, 퀸. 저런 걸 스크린에 내놓은 이유가 도대체 뭐 지? 당장 없애 버려. 지금 당장......." "루저에 있다가 들은 얘기야." 보비는 어깨를 움직여서 가죽 점퍼를 떨구며 말했다. "블랙 마이론과 크로우 제인. 제인은 이 도시의 섹스 산업에 관해선 모르는 게 없어. 그 여자 말로는 거기서 생긴 돈이 전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는 거야. 크 롬이 단순히 '더 보이즈'의 간판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푸른 등불의 이권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고 마이론한테 주장하고 있었어." "보비, '더 보이즈'라는 말을 상기해 봐. 아직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 할 정도의 머리는 남아 있겠지? 그치들 일에는 끼어 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잊었나? 우리가 아직도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도 그걸 지켰기 때문이야." "우리가 아직 가난한 것도 그것 때문이라네, 파트너." 보비는 콘솔 앞의 회전 의자에 앉아 점프 수트의 지퍼를 내린 후 마르 고 창백한 가슴을 긁었다. "하지만 그 가난과도 곧 결별할 수 있을 거야." "그러기 전에 이 파트너와는 영원히 결별한 걸로 간주해 줘." 그러자 보비는 나를 보고 씩 웃었다. 그 웃음은 진짜 광인의 웃음이었 다. 그의 흉포하고 살기 어린 눈을 본 순간 그가 죽는 것따위에는 전혀 개 의치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봐." 내가 말했다. "내게 돈이 아직 좀 남아 있어. 그걸 가지고 튜브(고속 지하철)로 마 이애미까지 가는 거야. 거기서 잠자리를 타고 몬테고 배이로 날아가면 어 때? 지금 너한테 필요한 건 휴식이야. 가서 컨디션을 되찾는 거야." "잭, 내 컨디션은," 보비는 키보드로 뭔가를 입력하면서 말했다. "일 찍이 지금만큼 좋았던 적이 없었어."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이 끼어 드는 것과 동시에 화면 속의 무릎 깔개가 몸서리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스의 선이 최면적으로 진동하며 화면을 누빈다. 살아 움직이는 만다라. 보비가 키를 계속 쳐 감에 따라 화면의 움 직임이 느려졌다. 패턴이 정리되고 약간 덜 복잡해진 후 희미한 두 개의 배열이 교대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제1급의 솜씨였다. 그에게 아직도 이 정도의 실력이 남아 있다고는 미처 생각 못 했다. "됐어." 보비가 말했다. "저거야, 보이지? 기다려. 저거야. 저기 또 있어. 그리고 저기.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 바로 저거야. 한 시간 이십 분 간격으로 분사 송신이 놈들의 통신 위성을 향해 올라가고 있어. 크롬이 매 주마다 송금하는 역금리만 해도 우리한텐 일 년치 생활비가 돼." "누구의 통신 위성이라고?" "취리히. 크롬의 거래 은행의. 저건 그녀의 예금 통장이야, 잭. 매상 을 입금하는 곳. 크로우 제인 말이 옳았어." 나는 아직도 선 채로 있었다. 의수도 철컥거리는 것을 잊고 있었다. "뉴욕 일은 어떻게 됐나, 파트너? 내가 얼음을 자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걸 찾았나? 손에 넣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끌어 모을 필요가 있 어." 나는 그의 눈을 쳐다보며 매직 핸드의 보석 세공용 바이스 쪽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더스트 커버 밑에 러시아제 프로그램이 있다. 와일드 카드. 행운의 열쇠. "리키는 어디 있지?" 나는 콘솔로 다가가서 교대로 화면에 나타나는 패턴을 들여다보는 척 하며 그에게 물었다. "친구하고 같이 있어." 보비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직 애야. 모두 심스팀에 푹 빠져 있어." 그는 방심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 모두 그녀를 위해 하는 일이야, 친구." "보비, 잠깐 바깥 바람을 쐬면서 생각해 보겠어. 내가 돌아오는 걸 보 고 싶거든 그 보드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마." "그녀를 위해 하는 일이야." 등뒤로 문을 닫았을 때 보비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지." 밑으로, 밑으로, 이제 프로그램은 롤러 코스터이다. 그림자의 벽으로 이루 어진 너덜너덜한 미로를 지나, 원색의 탑 사이의 잿빛 대가람 같은 공간을 질주한다. 무모할 정도의 속도. 검은 아이스. 그것에 대해선 생각하지 말자. 검은 얼음. 젠틀맨 루저에서 매일같이 듣던 소문. 검은 아이스는 신화의 일부분이 다. 살상용 아이스. 물론 비합법이지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 가? 일종의 신경 피드백 병기로 단 한 번이라도 접촉하면 즉사한다고 들었 다. 사악한 주문처럼 마음을 안 쪽에서부터 갉아먹는다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영원히 계속되는 간질성 경련처럼. 우리는 크롬의 성의 기저를 향해 급강하하고 있다.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노력한다. 갑작스런 호흡 정지와 구토감, 그리 고 마지막에 찾아오는 신경의 이완에 대비하기 위해. 어둠 밑바닥에서 기 다리는, 차가운 워드에 대한 두려움. 나는 밖에서 리키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어느 카페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같이 있던 소년은 센다이제 의안을 달고 있었고, 흉터가 남아 있는 눈구멍 을 중심으로 반쯤 아문 봉합선이 방사상으로 뻗어 있었다. 리키는 테이블 위에 번쩍번쩍한 팜플렛을 펼쳐 놓고 있었다. 한 다스의 사진 속에서 탤리 아이샴이 우리를 보고 웃고 있다. '짜이스 아이콘의 눈을 가진 여자.' 리키의 작은 심스팀 덱은 어젯밤 작업대 밑으로 쓸어 넣은 물건 중 하 나였고,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다음날 수리해 준 기계였다. 리키는 접속 밴드를 마치 회색의 플라스틱제 티아라(보관)처럼 이마에 달고, 유니트에 접속된 채 몇 시간이고 있곤 했다. 탤리 아이샴은 그녀의 우상이었다. 접 속 밴드를 달고 있을 때 그녀는 현실과는 완전히 유리된 상태에서 심스팀 최고의 스타가 레코딩한 감각 세계의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모 의 자극 simulated stimuli: 탤리 아이샴에 의해 지각되는 세계. 적어도 그 중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전부. 포커 에어쿠션기로 애리조나의 메사 정 상을 나는 탤리. 트럭 제도의 자연 보호 구역에서 바다로 뛰어드는 탤리. 그리스의 개인 전용 섬에서 억만 장자들과의 파티를 즐기는 탤리. 가슴이 아플 정도로 청아한, 새벽녘의 작고 하얀 항구의 광경. 실은 리키는 탤리와 많이 닮았다. 비슷한 피부색과 광대뼈 모양. 리키 의 입술 쪽이 더 강한 느낌을 준다. 대가 셀 것 같은. 그녀는 탤리 아이샴 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위를 갈망하고 있었다. 심스팀계에 데 뷔하는 것이 그녀의 야심이었다. 보비는 그런 그녀를 웃으며 상대하지 않 았다. 그래서 듣는 역은 내게 돌아왔다. "이 눈, 나한테 어울릴 것 같아요?" 그러면서 페이지 전체를 점령한 얼굴 사진을 들어 올려 탤리 아이샴의 푸른 짜이스 아이콘을 자신의 황갈색 눈동자 옆에 대본다. 이미 각막 수술 을 두 번 받았지만 아직 그녀가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 이콘을 달고 싶어하는 것이다. 스타임을 증명하는 브랜드. 굉장히 비싸다. "아직도 윈도쇼핑 중인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앉았다. "타이거가 하나 샀어요." 그러는 그녀는 어쩐지 지친 듯한 표정이었다. 타이거는 신품의 센다이 의안에 만족한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미소지었 다. 그런 이유라도 없다면 웃을 녀석이 아니다. 그는 일곱 번 이상 성형 부티크 신세를 진 작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종의 규격화된 미모의 소유자였다. 아마 남은 일생 동안 매 시즌마다 바뀌는 매스컴의 총아들과 어딘가 모르게 닮은 얼굴을 유지해 나갈 것이다. 노골적인 복제는 아니지 만 그다지 개성적이지도 않은 얼굴을. "센다이, 맞지?" 나는 그를 보며 미소지었다. 타이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심스팀 스타를 흉내내서 음미하는 듯 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레코딩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있는 것 같았 다. 내 의수를 너무 오래 응시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 근육이 아물면 주변 시야가 굉장히 넓어질 거야." 타이거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더블 에스프레소를 마시려고 손을 뻗는 그의 동작이 얼마나 조심스러운지를 알고 있었다. 센다이제 의안은 원근 지각의 결여와 속출하는 보상 소송으로 악명이 높았다. "타이거는 내일 할리우드로 간대요." "그 다음엔 치바 Chiba 시티겠지, 아마?" 나는 그에게 웃어 보였다. 그는 웃지 않았다. "출연을 제안받았나, 타이거? 좋은 에이전트를 알고 있어?" "일단 가 보기로 했어."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리키에게는 짧게 작별 인사를 했지만 내겐 아무 말도 없었다. "저 녀석의 시신경은 육 개월 안에 악화되기 시작할 거야. 알고 있잖 아, 리키? 센다이제 의안은 영국, 덴마크 등 많은 나라에서 판매 금지된 물건이야. 신경은 재생할 수 없으니까." "잭, 설교는 그만." 그녀는 내 크르와상 한 개를 슬쩍해서 끝 부분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난 네 어드바이저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래요. 타이거가 그렇게 머리 회전이 빠른 편이 아닌 건 사실 이지만 센다이에 관해서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 애가 살 수 있었 던 건 센다이뿐이에요. 그래서 도박을 한 거에요. 일자리를 얻으면 나중에 바꿀 생각으로." "이걸로 말야?" 나는 짜이스 아이콘의 팜플렛을 가볍게 두들기며 말했다. "이게 얼마짜린 줄은 알지, 리키. 넌 그런 도박을 할 만큼 바보는 아 니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콘을 가지고 싶어요." "지금 보비한테 갈 생각이라면 내가 연락할 때까지 꼼짝 말고 있으라 고 해 줘." "알았어요. 일 때문이죠?" "일 때문이야." 일이 아니다. 미친 짓이다. 내가 커피를 마시는 사이 그녀는 내 크르와상 두 개를 다 먹어치워 버 렸다. 보비의 로프트에 그녀를 바래다 준 뒤 전화를 열다섯 통 걸었다. 한 번 걸 때마다 각각 다른 공중 전화를 사용했다. 일. 완전히 미친 짓. 결국 습격 준비를 하는 데는 6주일 걸렸다. 보비의 그녀에 대한 사랑 고백도 6주일 동안이나 듣고 있어야 했다. 나는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 해 자신을 더 혹사했다. 대부분의 준비는 전화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처음에 내가 보낸 열다섯 통의 극히 우회적인 조회가 각각 열다섯 마리씩 새끼를 친 느낌이었다. 내 가 찾고 있었던 것은 보비와 내가 세계 지하 경제의 불가결한 일부라고 상 상하고 있었던 일종의 서비스업이었다. 하지만 그 조직은 한 번에 다섯 명 이상의 고객을 받는 일이 없을 것이다. 물론 광고를 낼 리도 없었다. 우리가 원하던 것은 세계 최대의 장물 취득인, 온라인으로 송금되는 백만 불 단위의 거금을 드라이 클리닝해도 아무런 뒤탈이 없는 무소속의 돈 세탁 공장이었던 것이다. 결국 필요한 정보는 핀한테서 얻었다. 그 많은 전화 통화는 전부 헛수 고였다는 얘기가 된다. 내가 블랙 박스를 사러 뉴욕으로 간 이유도 전화 요금으로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가정법을 써서 핀에게 질문해 보았다. "마카오." 그가 대답했다. "마카오?" "롱 험 일가. 주식 브로커." 핀은 전화 번호까지 알고 있었다.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롱 험 일가의 우회적 스타일에 비하면 그 때까지만 해도 교묘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내 접근 방식은 전술 핵공격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거래 를 확정 짓기 위해 보비는 두 번이나 홍콩을 왕복해야만 했다. 자금이 바 닥 나는 것도 이제 시간 문제였다. 내가 왜 이 계획에 찬성했는지는 지금 도 알 수 없다. 나는 크롬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또 그렇게까지 해서 부자 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푸른 등불의 집'을 태워 버린다는 건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거긴 비 합법 매춘굴이기 때문이다, 하는 식으로 내 자신을 납득시키려고도 해 보 았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내가 푸른 집을 좋아하지 않 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 곳에서 최악의 기분으로 밤을 지샌 적이 한 번 있 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실도 크롬 습격을 정당화하지는 못했다. 나는 우리가 습격 도중에 죽을 것이라고 반쯤 믿고 있었다. 그 필살 프로그램이 있어도 승률은 반을 못 넘는 것이다. 보비는 일련의 코맨드를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걸 크롬의 컴 퓨터망 한가운데에 박아 넣는 일은 내 몫이다. 보비는 러시아제 프로그램 이 먹이를 찾아 폭주하려는 것을 견제하느라고 다른 데 신경을 쓸 틈이 없 을 것이다. 프로그램은 너무 복잡했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는 수정이 불가 능했다. 그래서 내가 필요로 하는 2초 동안 보비가 그것을 누르고 있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마일즈라는 스트리트파이터와 계약을 맺었다. 거사일 밤에 리키 를 계속 미행하다가 정해진 시각에 내게 전화를 걸어 주기로 한 것이다. 만약 내가 집에 없거나 미리 약속한 방식으로 대답하지 않는 경우 그는 당 장 리키를 붙잡아 가장 가까운 튜브에 태워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럴 경우 그녀에게 건낼 돈과 편지가 든 봉투도 마일즈에게 맡겨 두었다. 보비는 그런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실패할 경 우 리키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그는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서 같이 살 것인지, 또 번 돈을 어떻게 쓸 것 인지에 대해서만 계속 지껄였다. "그럼 먼저 아이콘을 한 세트 사 주는 게 어때, 친구.리키가 갖고 싶 어하는 건 바로 그거야. 그 애는 정말로 심스팀 스타가 되고 싶어하고 있 어." "그런 건 필요 없어." 키보드에서 고개를 든 그가 말했다. "일할 필요가 없단 말야. 우린 성공할 거야, 잭. 리키는 내 행운이고, 우린 일생 동안 놀고 먹을 수 있게 되는 거야." "행운?" 나는 보비만큼 행복한 기분이 아니었다. 과거에 행복했던 기억도 없었 다. "최근에 그 행운을 만난 적 있나?" 못 보았다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 감정이 푸른 등불의 집에서 보낸 어떤 밤을 내게 상기시켰다. 그 곳에 간 것도 다른 누군가와 만나지 못하는 외로움 때문이었다. 나는 우선 술에 만취하고 난 다음에 바소프레신(뇌하수체 호 르몬의 일종) 흡입기를 사용했다. 만약 당신이 걸 프렌드에게 버림받은 직 후라면 술과 바소프레신은 매저키스틱한 약물 남용의 궁극적인 형태가 될 수 있다. 알콜은 당신을 감상적으로 만들어 질질 짜게 만들고, 바소프레신 은 당신의 기억을 부활시킨다. 진짜로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다. 병원에서 는 이 약을 노인성 기억 상실증의 치료제로 쓰고 있지만 인간들은 어떤 것 에도 새로운 용도를 발견한다. 그렇다. 나는 과거의 정사의 초강력한 재생 체험을 돈으로 산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아름다운 추억만 재생되 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동물적 엑스터시만을 기대했던 당신은 자신이 했던 말, 그녀의 대답, 그리고 그녀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당신을 떠나는 광경까지 덤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왜 푸른 등불로 갈 생각을 했는지, 또 어떻게 그 곳으로 갈 수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쥐죽은 듯이 조용한 복도와 어딘가에서 졸졸 흐 르고 있는 시대 착오적인 장식 폭포. 그날 밤에는 돈을 잔뜩 가지고 있었 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아이스에 3초간 구멍을 내준 대가로 보비에게 거금을 건냈던 것이다. 입구의 종업원들이 내 행색을 어여삐 여겼을 리가 없었겠지만 내 돈은 그 곳에서도 충분히 위력을 발휘했다. 그 곳에 간 목적을 완수한 후 또 술을 마셨다. 그 때 숨은 네크로필리 악closet nechrophiliac들에 대해 바텐더에게 한 농담이 상대방을 불쾌하 게 한 것 같았다. 그 때 거구의 놈씨가 옆에 끼어 들더니 나를 전쟁 영웅 이라고 끈질기게 불렀기 때문에 이번엔 이쪽이 불쾌해졌다. 그래서 놈에게 내 의수의 숨은 위력을 약간 보여 준 것도 같았지만 곧 정신을 잃었다. 다 음에 눈을 뜬 곳은 어딘가에 있는 기본 수면 모듈이었다. 목을 멜 데도 없 는 싸구려 캡슐 안이었다. 나는 폭이 좁은 기포 고무제의 매트 위에 앉아 울었다. 이 세상에는 고독보다도 더 끔찍한 것이 있다. 그러나 푸른 등불의 집 에서 제공하는 상품은 그 높은 인기로 인해 거의 합법화 직전까지 와 있는 것이다. 어둠의 심장, 그 고요한 중심에서 글리치 시스템이 빛의 회오리 바람으로 어둠을 갈기갈기 찢는다. 회전하며 튀어 나가는 반투명한 면도날. 우리는 소리 없는 슬로 모션의 폭발 중심에 떠 있다. 얼음조각들이 영원한 궤적을 그리며 떨어져 나가고, 보비의 목소리가 몇 광년이나 떨어진 전자적 허공 의 환영을 가로질러 들려 온다---- "저년을 태워 버려. 더 이상 이걸 못 누르겠어----" 러시아제 프로그램이 데이터의 탑을 꿰뚫고 나와 육아실의 색채를 지 우기 시작한다. 나는 보비의 수제 코맨드 패키지를 크롬의 차가운 심장 한 가운데에 접속했다. 그 때 분사 송신이 끼어 든다. 위를 향해 똑바로 발사 된 농축된 정보 펄스는 점점 농후해지는 어둠의 탑과 러시아제 프로그램 곁을 누비고 상승한다. 보비가 필사적으로 결정적인 1초를 컨트롤하려 하 고 있다. 아직 모양이 갖춰지지 않은 그림자의 팔이 치솟은 어둠 속에서 꿈틀거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해냈다. 매트릭스가 마치 종이학을 접을 때처럼 내 주위에서 접혀 간다. 로프트에는 땀과 불탄 회로 내음이 충만해 있었다. 크롬의 비명을, 금속적인 절규를 들은 것 같았지만 물론 그랬을 리가 없다. 보비는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모니터 화면 모서리에 표시된 경과 시 간은 07:24:05였다. 습격에는 8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러시아제 프로그램은 슬롯 안에서 녹아 있었다. 우리는 크롬의 취리히 예금 대부분을 한 다스 남짓한 국제 자선 단체 에 기부했다. 어차피 전부 처리할 수도 없을 정도의 거금이었고, 크롬을 지금 철저하게 파산시키지 않으면 나중에 우리를 추적해 올 가능성이 있었 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총액의 10퍼센트 미만을 마카오의 롱 험 일가의 조 직으로 송금했다. 그들은 거기서 60퍼센트의 수수료를 뗀 나머지를 홍콩 증권 거래소의 가장 얽히고 섦힌 루트를 경유해 우리에게 다시 보내 왔다. 취리히에 개설해 둔 두 구좌에 우리 몫이 입금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나는 모니터 화면의 의미 없는 숫자 뒤에 동그라미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부자가 된 것이다. 그 때 전화가 울렸다. 마일즈였다. 자칫 암호 문구를 틀릴 뻔했다. "이봐, 잭.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랬지? 네 여자 친구 말야. 좀 이상한 일이 있어서......." "무슨 일? 말해 봐." "네가 말한 대로 딱 달라 붙어 있었어. 그 쪽에서는 전혀 눈치 못 챈 채. 처음엔 루저에서 좀 시간을 보내다가 튜브를 타더군. 어디로 가는가 했더니 푸른 등불의 집에----" "뭐가 어쨌다고?" "샛문으로 들어갔어. 종업원 전용의. 그걸로 끝이야. 경비 때문에 따 라 들어갈 수가 없었어." "아직도 안에 있나?" "아니. 방금 놓쳐 버렸어. 지금 여기선 난리야. 푸른 등불이 문을 닫 은 것 같아. 그것도 영구히. 비상 경보가 일곱 개나 울리지 않나, 모두 뛰 쳐나오지 않나, 경찰의 폭동 진압대가 출동하지 않나....... 지금은 보험 조사원에다가 부동산업자, 시청 번호를 단 밴까지 와 있어......." "마일즈, 그 애는 어디로 갔지?" "놓쳤어, 잭." "알았어. 마일즈, 그 봉투에 든 돈은 네가 가져. 알겠어?" "그게 정말이야? 이봐, 정말로 미안해. 난----" 나는 전화를 끊었다. "기다렸다가 같이 말해 주면 어떨까." 보비가 타월로 가슴을 문지르며 말하는 것이 들렸다. "네가 직접 그녀한테 말해, 카우보이. 난 잠깐 나갔다 오겠어." 나는 밤과 네온이 있는 곳으로 나가 인파에 휩쓸려 정처 없이 걸었다. 나는 집단적 유기체 안의 단순한 분절, 지오데식 돔 아래에서 표류하는 의 식의 한 조각이 되려 하고 있었다. 한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발을 교 대로 내딛고 있었을 뿐이지만, 잠시 후 사고력을 되찾고 나서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크롬 생각도 했다. 직접 그녀의 목을 딴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그녀를 말살한 것에 대해서. 상점가로 나를 운반해 온 밤은 지금은 크롬 뒤를 쫓 고 있고, 그녀에게는 도망칠 곳이 없다. 이 인파 속에서만도 그녀의 적은 몇 명이나 될까? 그녀 뒤에 있는 돈에의 공포가 사라진 지금, 얼마나 많은 자가 행동을 개시할 것인가? 우리는 크롬의 전 재산을 강탈했다. 그녀는 무일푼이 되어 다시 거리로 돌아왔다. 새벽까지 살아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제서야 그 카페를 생각해 냈다. 타이거를 만났던. 그녀의 선글래스가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한쪽 렌즈 구석에 화장 용 스틱의 얼룩이 묻은 커다란 검은색 선글래스. "안녕, 리키." 그녀가 선글래스를 벗었을 때 나는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푸른색. 탤리 아이샴의 푸른색. 트레이드마크로 유명한 맑고 투명한 푸른색. ZEISS IKON이라는 미세한 글자가 양쪽 홍채를 두르고, 금빛 반점 이 되어 그 곳에 떠 있다. "아름다워." 살색 스틱으로 수술 자국을 숨기고 있었다. 이 정도 솜씨의 수술이라 면 흉터는 남지 않는다. "돈을 모은 거군." "응, 모았어요." 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몸을 떨었다. "하지만 더 이상 모을 생각은 없어요. 그런 방법으로는." "거긴 이제 폐업한 것 같아." "그래요?." 그녀의 얼굴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신품의 푸른 눈은 깊게 가라앉 아 있었다.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어. 보비가 기다리고 있어. 방금 큰 껀수를 하나 올렸거든." "아니, 난 가야 해요. 보비는 이해해 주지 않겠지만, 난 꼭 가야 해 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수가 그녀의 손을 잡기 위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몸의 일부라는 느낌이 안 들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꼭 붙잡고 있었다. "할리우드로 가는 편도 티켓을 샀어요. 타이거 친구들 집에 묵을 거에 요. 잘하면 치바 시티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르죠." 리키가 보비에 관해서 한 말은 옳았다. 일단 그녀를 데리고 돌아갔지 만 그는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러나 보비 입장에서는 그녀는 충분히 자기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보비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말라고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백을 챙겨 나 왔지만 그는 복도로 나와 작별 인사를 하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백을 내려 놓은 나는 키스로 그녀의 화장을 망쳐 놓았다. 무엇인가가 나의 내부에서 치밀어 오른다. 마치 살인 프로그램이 크롬의 데이터 위로 솟아올랐을 때 처럼. 말이 존재하지 않는 그 어딘가에서 갑자기 숨이 막힌다. 하지만 그 녀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보비는 모니터 앞에 놓인 회전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자기 것이 된 동그 라미의 행렬을 선글래스 너머로 응시하고 있었다. 보나마나 밤이 되기 전 에는 이미 젠틀맨 루저에 죽치고 앉아 운명의 반전, 새로운 전조, 새로운 생활이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줄 그 누군가를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 의 생활이 전과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옛날보다야 쾌적하겠지만 그는 언제나 다음 카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푸른 등불의 집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상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세 시간 교대 근무제의 의사 REM 수면. 그 동안은 그녀의 육체 와 일련의 조건 반사가 그녀를 대신해 일한다. 고객들이 그녀의 반응이 가 짜라고 불평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짜 오르가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것은, 만약 그랬다면 말이지만, 어딘가 잠의 주변부에 나타나는 어렴풋한 은빛 섬광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 다. 이것은 너무 인기가 있어서 거의 합법화 직전까지 와 있다. 고객들은 누군가를 원하는 마음과 혼자 있고 싶다는 마음 사이에서 고뇌한다. 신경 전자공학의 발달이 그 양쪽을 다 만족시킬 수 있게 되기 전부터 이 게임의 본질은 어차피 그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전화를 들어 그녀가 이용할 항공 회사의 번호를 눌렀다. 직원에 게 그녀의 본명과 플라이트 넘버를 대고 말했다. "행선지를 변경하고 싶 소. 치바 시티로. 맞아. 일본의." 나는 크레디트 카드를 슬롯에 밀어 넣고 암호 번호를 눌렀다. "퍼스트 클래스." 내 크레디트의 신용 상태를 주사하 는 희미한 기계음이 들렸다. "왕복 티켓으로 해 주시오." 하지만 그녀는 리턴 티켓을 환불받았거나 쓰지 않은 모양이다. 리키는 돌아오지 않았다. 밤늦게 심스팀 스타들의 포스터가 늘어선 진열창 앞을 지날 때면, 그들의 아름답고 획일적인 눈이, 거의 똑같아 보이는 획일적인 얼굴이, 나를 응시하는 것을 느낀다. 가끔은 그녀의 시선을 느낄 때가 있 다. 하지만 얼굴이 다르다. 어느 얼굴도 그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스프롤 화한 밤과 도시 너머에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볼 때, 그녀는 언제나 손 을 흔들어 내게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