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 맨 차 례 ................................... 저자의 말 정신 운동 간질 치료의 역사 지은이 소개 1971년 3월 9일, 화요일 : 입원 1971년 3월 10일, 수요일 : 이식 1971년 3월 11일, 목요일 : 인터페이스 1971년 3월 12일, 금요일 : 파국 1971년 3월 13일, 토요일 : 파멸 후기 옮긴이의 말 이 책의 주제가 무척 놀랍고도 충격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독자 여러분은 이것이 어떤 첨단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스스로를 기만할 필요는 없다. 뇌에 대한 물리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이미 1세기도 넘는 시절의 일이기 때문이다. 행동 수정에 대한 기술도 50년 이상 개발되어 왔다. 그런 문제들은 이미 수십년 전부터 모든 사람들이 관찰하고 논의하고 지지 혹은 반대할 수 있도록 활짝 개방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러한 주제가 세간의 주목을 끌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신경생물학 분야의 연구는 각 신문의 일요판 부록에 정기적으로 소개될 만큼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언론이 이 문제를 진실로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분야에 대한 불길한 이야기들과 경솔한 억측들이 난무한 끝에, 요즘의 언론은 '마인드 콘트롤'을 까마득히 먼 훗날의 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언젠가는 실현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결코 가까운 미래의 일은 아닐 것이며, 따라서 현재 살아 있는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것이다. 이 연구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공개적인 토론을 추구해왔다. 미시간 대학의 제임스 V.맥코넬은 몇 년 전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자, 우리는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어. 우리는 행동을 통제할 수도 있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누굴까? 만약 여러분이 너무나 바빠서 나더러 어떻게 그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 자신이 직접 여러분을 위해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지. 하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어 버린 후일 거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전에 정해진 경로를 따라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거의 결정들은 오염되고 탈인격화된 채 도시의 해악들과 함께 우리에게 남겨졌다.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결정을 대신해 주었으며, 우리는 그 결과에 찌든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유치하면서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책임의 부정이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모든 사람들은 그런 점을 명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연대기를 소개하는 바이다. M.C. 정신 운동 간질 치료의 역사 1864-모렐과 빠레 등을 비롯한 프랑스 신경학자들이 정신 운동 간질의 몇몇 요소를 설명. 1888-휴링스 잭슨(영국), 정신 운동 간질과 그 전조에 대한 고전적 이론 제시. 1898-잭슨과 콜맨(영국), 뇌의 측두골엽 부조 해명. 1941-자스퍼와 커쉬맨(미국, 캐나다), 정신 운동 간질 증세를 가진 환자의 뇌파는 측두골엽에서의 객담으로 특징지워진다는 사실을 발견. 1947-스피겔 연구팀(미국), 최초로 정위법 수술이 인체에 시도되었음을 보고 1950-펜필드와 프라나간(캐나다), 정신 운동 간질 환자에 절제 수술을 시도하여 좋은 성과를 이룸. 1953-히스 연구팀(미국), 깊은 전극의 정위법 이식 시술 1958-타라이라 연구팀(프랑스), 깊은 전극의 영구 정위법 이식 시작. 1963-히스 연구팀(미국), 환자에게 자의에 따라 이식된 전극을 통해 스스로 자극주는 것을 허용. 1965-나라바야시(일본), 정위법 수술로 치료받은 행동이 과격한 98명의 환자에 대한 보고 1965-세계 각국에서 인체에 대한 정위법 치료가 25,000건 이상 시술됨. 1968-달가도 연구팀(미국), 정신 운동 간질 증세의 보행 가능한 환자에게 "시티모시버"(무선 자극기 플러스 무선 수신기) 부착. 1969-뉴멕시코의 알라모고르도에서, 침팬지가 무선을 통해 뇌 자극을 프로그래밍하고 출력하는 컴퓨터에 직접 연결됨. 1971-환자 해롤드 벤슨, 로스앤젤레스에서 수술 받음. "나는 나 자신의 동기 가운데 일정한 부분이 거의 모든 경우 신비적인 요소를 드러내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왜 행동하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J.B.S.할데인 "무모함이 식민지 사람들을 다스린다." --프레드릭 잭슨 터너 지은이 소개 마이클 크라이튼 (Michael Crichton) [쥬라기공원] 출간이후 가장 뛰어난 과학소설가로 평가받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소설가. '마이클 크라이튼'은 하버드 의대를 졸업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땄으며 캘리포니아메디칼 리서치에서 과학기술에 대해 깊이 연구한 바 있다. 27세에 데뷰작 [안드로메다 스트레인]을 발표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5인의 환자] [재스퍼 존슨] [일렉트로닉 라이프] [여행] 등의 논픽션과 [대열차 강도] [시체를 먹는 자들] [콩고] [쥬라기 공원] [떠오르는 태양]등의 소설이 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현대의 과학문명에 대한 정확하고 다양한 지식을 바탕으로 문명이 초래할지도 모르는 인류의 대재앙을 경고하고 있어 90년대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 떠오르고 있다. 1971년 3월 9일, 화요일 입원 1 그들은 정오에 응급실로 내려와 구급차 주차장으로 통하는 회전문 뒤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엘리스는 약간 흥분한 듯 초조한 표정이었지만, 막대 사탕을 먹고 있는 모리스는 무척 느긋한 모습이었다. 그는 사탕의 껍질을 하얀 가운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곳에서는 햇살이 내려비치는 바깥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응급실'이라고 씌어 있는 표지판과 그보다 조금 작은 글씨로 '구급차 외 주차금지'라고 쓴 표지판 위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인가요?" 모리스가 물었다. 엘리스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아닐 것 같은데. 아직 시간이 너무 일러." 두 사람은 그대로 의자에 앉은 채 점점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엘리스는 안경을 벗어 넥타이로 렌즈를 닦았다. 응급실 간호사 한 명이 다가와 밝은 미소를 지었다. 모리스는 이름을 모르는 간호사였다. "환영 위원회 분들인가요?" 엘리스가 곁눈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모리스는 "우리가 그 자를 데리고 들어갈 거요" 하고 대답했다. "그 사람 차트가 여기 있소?" "네, 아마 있을 거예요, 선생님." 간호사는 바쁜 걸음으로 걸어가 버렸다. 엘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안경을 코에 걸치고는 간호사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모리스가 말했다. "뭐 다른 뜻이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군요." "이 병원에서 이번 일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아." 엘리스가 말했다. "비밀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큰 사건이니까." 사이렌 소리는 이제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들은 유리문 뒤로 구급차가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남자 직원 두 사람이 구급차의 문을 열고 바퀴 달린 이동식 침대를 끌어내렸다. 침대 위에는 연약해 보이는 늙은 여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누워 있었다. 모리스는 병실로 옮겨지는 그 여자를 쳐다보며 아마도 폐부종에 걸린 환자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멀쩡한 모습이었으면 좋겠군." 엘리스가 말했다. "누구 말입니까?" "벤슨 말일세." "그렇지 못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사람들이 거칠게 다루었을지도 모르니까." 엘리스는 멍한 눈길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리스는 그런 그가 무척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엘리스가 적잖이 흥분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했다. 모리스는 이미 엘리스와 많은 경험을 함께 했기 때문에, 그의 패턴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기다리는 동안에는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울 만큼 초조해 하다가도, 일단 수술이 시작되면 나태하게 보일 정도로까지 침착해지곤 하는 성미였다. "도대체 그자는 어디에 있는 거야?" 엘리스가 다시금 자신의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모리스는 화제를 바꾸기 위해 "우린 모두 3시 30분에 맞춰져 있는 건가?" 하고 말해 보았다. 오늘 오후 3시 30분 신경외과 대회의 때 벤슨이 병원 간부들에게 소개될 예정이었다. "내가 아는 한은 그렇지." 엘리스가 말했다. "로스 박사가 소개를 맡을 거야. 나는 그저 벤슨이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기를 바랄 뿐이야." 스피커를 통해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엘리스 박사님, 존 엘리스 박사님, 2234번 교환입니다. 엘리스 박사님, 2234번 교환입니다." 엘리스는 "빌어먹을!" 하고 중얼거리며 호출에 응답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리스는 그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2234번은 동물 실험실에 연결된 교환 번호였다. 따라서 이 호출은 원숭이들에게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엘리스는 지난 달 동안 1주일에 세 마리의 원숭이들을 실험해왔다. 따라서 엘리스와 그의 연구 팀은 항상 대기 상태에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리스는 엘리스가 로비를 가로질러 벽걸이 수화기를 집어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엘리스는 어렸을 때 입은 상처로 오른쪽 다리의 신경 계통이 절단되어 한쪽 다리를 약간 절고 있었다. 모리스는 엘리스의 그 상처가 후에 신경외과 의사가 되겠다는 그의 결심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엘리스는 결점을 수정하고 질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인간임에는 틀림없었다. 그가 항상 환자들에게 하는 말이 있었다. "우리는 당신을 고칠 수 있습니다." 하는 것이 그 말이었다. 게다가 그는 그 자신도 적지 않은 결함을 가진 인간이었다. 다리를 저는 데다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일찍 머리가 벗겨졌으며 시력이 아주 약해서 무겁고 두터운 안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혹은 어쩌면 그 조급한 성미는 외과 의사로 오랫동안 일해온 결과인지도 몰랐다. 그는 창밖의 주차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막 오후 방문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환자의 관계자들이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들어오거나 차에서 내리거나 혹은 높다란 병원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근심의 흔적이 역력했다. 병원이란 역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곳이 아닐 수 없었다. 모리스는 그 내방객들 가운데 벌써 햇볕에 검게 탄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로스앤젤레스의 봄은 따뜻하고 햇볕도 화창했지만, 모리스 자신은 매일같이 입고 있는 하얀 가운이나 바지와도 같은 창백한 혈색을 하고 있었다. 좀더 자주 바깥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다 못해 점심이라도 바깥으로 나가서 먹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물론 그는 테니스를 치기는 했지만, 그것은 대개 해가 진 저녁 무렵의 일이었다. 엘리스가 돌아왔다. "제기랄! 에텔이 봉합한 곳을 자기 손으로 뜯어 버렸다는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에텔은 전날 뇌 수술을 받은 새끼 리서스 원숭이였다. 수술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끝났다. 에텔 역시 다른 대부분의 리서스 원숭이와 마찬가지로 아주 귀여운 놈이었다. "나도 모르겠어. 어떻게 해서 묶어 놓았던 한쪽 팔을 빼낸 모양이야. 좌우간, 비명 소리를 듣고 가보니 한쪽 옆구리에 뼈가 삐져나와 있더라는 거야." "자기 손으로 직접 묶어 놓은 줄을 뜯어버린 건가요?" "그야 알 수 없지. 내려가서 다시 봉합을 해야겠어. 이 일은 자네 혼자 처리할 수 있겠지?" "어떻게 되겠지요 뭐." "경찰들이 같이 온다는데 괜찮겠어? 하기야 그들이 자네를 귀찮게 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가능한 한 신속하게 벤슨을 7층으로 데리고 가라구." 엘리스가 말했다. "그런 다음에는 로스에게 연락해. 나도 되는 대로 빨리 올라갈 테니까." 엘리스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덧붙였다. "에텔이 얌전하게 굴어 주기만 하면 다시 봉합하는데 한 40분이면 될 거야." "그 녀석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빕니다." 모리스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엘리스는 그다지 밝지 못한 표정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가 가고 난 다음, 응급실 간호사가 돌아왔다. "엘리스 박사님은 왜 저러시죠?" "신경이 좀 날카로운 모양이오." 모리스가 대답했다. "그럴 거예요." 간호사는 그렇게 말하며 창밖을 내다보는 척 옆에서 얼쩡거렸다. 모리스는 별 생각없이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그 동안의 병원 생활 덕분에 지위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암시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모리스는 아무런 지위가 없다고 할 수 있는 인턴 신분에서부터 출발했다. 그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간호사들은 의료에 대해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때로는 그것을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선생님.")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성형외과 레지던트가 되었고, 간호사들은 한결 공손한 태도로 그를 대해 주었다. 고참 레지던트가 된 그는, 몇몇 간호사들이 언젠가부터 퍼스트 네임으로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윽고 그가 신경정신병 연구 팀의 신예 스태프로 참여하게 되자, 격식이라고 하는 것이 지위의 새로운 상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 상황이 다른 것 같았다. 응급실의 그 간호사가 모리스 주위에서 얼쩡거리는 것은, 그가 지금 아주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병원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간호사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저기 오는군요." 모리스도 의자에서 일어나 바깥을 내다보았다. 파란색 경찰용 밴 한 대가 응급실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멎는 것이 보였다. "7층에 연락해서 곧 올라간다고 해요." "알았어요, 선생님." 간호사가 사라졌다. 구급차를 담당하는 남자 직원 두 사람이 병원 문을 열었다. 그들은 벤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모리스에게 물었다. "저 차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까?" "그렇습니다." "EW인가요?" "아니, 직접 입원이오." 직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밴을 운전하던 경찰관이 차에서 내려 뒷문의 자물쇠를 여는 것을 지켜보았다. 뒷자리에 타고 있던 경찰관 두 명이 햇볕에 눈이 부신 듯 얼굴을 찌푸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서 벤슨이 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모리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벤슨의 모습을 보고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34세인 그는 너무나도 온순한 인상의 땅딸막한 사내였다. 온순하다 못해 어딘지 어리벙벙한 인상까지 풍기는 것 같았다. 그는 팔목에 수갑을 찬 채 밴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모리스를 발견하고는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건넸지만, 이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경찰 한 사람이 말했다. "당신이 담당자입니까?" "그렇습니다. 닥터 모리스라고 합니다." 경찰은 몸짓으로 병원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내를 부탁합니다." 모리스가 말했다. "저 수갑을 좀 풀어주면 안되겠습니까?" 벤슨의 눈이 잠시 모리스를 바라보는 듯했지만, 얼른 시선을 떨어뜨렸다. "우린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명령도 받지 못했습니다." 경찰관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말했다. "뭐 별 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들이 수갑을 푸는 동안 운전사는 모리스에게 서류 한 장을 가지고 다가왔다. '의료 기관에 대한 혐의자 인도 증명서'였다. 모리스는 그 서류에 서명을 해주었다. "여기도 하나 더 해주십시오." 운전사가 말했다. 모리스는 다시 한번 서명을 하며 벤슨을 쳐다보았다. 벤슨은 팔목을 문지르며 똑바로 전방을 주시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인도하고 인수하는 과정의 비인격성과 서류에 서명하는 따위의 절차를 따르다 보니, 모리스는 문득 자신이 소포 꾸러미를 인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벤슨도 자신이 소포가 된 듯한 느낌을 받고 있는지 궁금했다. "됐습니다." 운전사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모리스는 두 사람의 경찰관과 벤슨을 병원 안으로 안내했다. 직원들이 문을 닫았다. 벤슨은 간호사가 가져온 휠체어에 앉았다. 경찰관들은 그걸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병원의 규칙이 그렇습니다." 모리스가 말했다. 그들은 함께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멈춰섰다. 내방객 대여섯 명이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리스와 휠체어를 탄 벤슨, 그리고 두 사람의 경찰관을 보더니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죄송하지만 다음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주십시오." 모리스가 그들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문이 닫혔다. 그들은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닥터 엘리스는 어디 있습니까?" 벤슨이 물었다. "그분도 여기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수술실에 있습니다. 금방 올라올 거예요." "그럼 로스 박사는?" "설명회 때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래요." 벤슨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명회라....." 경찰관들은 서로 의아한 표정을 교환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다. 7층에 도착하자, 그들은 모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7층은 복잡하고 어려운 환자들을 치료하는 특수 성형외과 병동이었는데, 반드시 필요한 연구 병동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심각한 심장병이나 신장염, 기타 신진대사 기능과 관련된 환자들은 이 곳에서 치료를 받곤 했다. 그들은 X자 모양으로 생긴 내부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간호 부서로 다가갔다. 그 방은 유리로 칸막이가 되어 있었다. 근무하고 있던 간호사가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경찰들을 보자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리스가 말했다. "이 분이 벤슨 씨입니다. 710호실, 준비 다 됐습니까?" "네, 다 됐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벤슨을 향해 밝은 미소를 지었다. 벤슨도 희미한 미소로 응답했지만, 그의 시선은 이내 방 한쪽 구석에 설치된 컴퓨터를 향해 옮겨졌다. "시(時) 배분 방식의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리스가 대답했다. "메인 컴퓨터는 어디에 있지요?" "지하실에 있습니다." "이 건물 지하실 말입니까?" "물론이죠. 그 컴퓨터는 전기를 아주 많이 소모하는데, 전력선이 이 건물로 들어오거든요." 벤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리스는 그의 그런 질문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벤슨은 가능한 한 수술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자신의 신경을 분산시키고자 애쓰고 있었으며, 게다가 그는 컴퓨터 전문가였기 때문이었다. 간호사가 모리스에게 벤슨의 차트를 건네주었다. 그 차트에는 대학 병원 봉인이 찍힌 통상적인 파란 비닐 커버가 덮여 있었다. 하지만 그 차트에는 신경외과를 뜻하는 빨간색 꼬리표와 철저한 주의를 의미하는 노란색 꼬리표, 그리고 모리스도 환자의 차트에서는 거의 본 적이 없는 하얀색 꼬리표도 붙어 있었다. 하얀색 꼬리표는 보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게 내 기록입니까?" 모리스가 710호실을 향해 벤슨의 휠체어를 밀고 가는 동안, 벤슨은 그렇게 물었다. 경찰관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더군요." "대부분 읽어내기 힘든 기호 같은 것들로 채워져 있지요." 사실 벤슨의 차트는 무척 두꺼웠고 일반인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내용이 많았다. 물론 그중에는 여러 가지 테스트 결과가 기록되어 있는 컴퓨터 출력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710호실 앞에 도착했다. 그들이 방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경찰관 한 사람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는 것이었다. 밖에 남아 있던 경찰이 "신중을 기하기 위해섭니다." 하고 말했다. 벤슨은 모리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이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아주 신중해요. 때로는 아첨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예요." 방으로 들어갔던 경관이 나왔다. "이상 없습니다." 모리스는 벤슨의 휠체어를 방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 방은 아주 컸고, 남향이었기 때문에 오후의 햇살이 가득 넘실거리고 있었다. 벤슨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이 병원에서 가장 좋은 방 가운데 하나지요." 모리스가 말했다. "이제 일어나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벤슨은 휠체어에서 일어나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는 매트리스의 탄력을 점검하려는 듯 몇 번 몸을 굴려 보더니, 침대를 아래 위로 움직일 때 사용하는 버튼을 눌러 보기도 했다. 그리고는 허리를 잔뜩 굽혀 침대 밑의 기계 장치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모리스는 창가로 다가가 직사광선을 줄이기 위해 블라인드를 내렸다. "간단하군." 벤슨이 말했다. "뭐가 말입니까?" "이 침대의 구조 말입니다. 아주 간단하군요. 피드백 장치가 있어야 침대 위에 누운 사람의 움직임이 자동적으로 커버될 텐데..." 벤슨의 목소리는 뒤로 가면서 흐려졌다. 그는 벽장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 다음, 욕실까지 점검한 뒤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일단 병원에 들어오면 겁을 먹기 마련이지만, 벤슨은 마치 호텔 방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군." 벤슨은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지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모리스를 쳐다보다가, 경찰관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 사람들이 여기에 있어야 됩니까?" "나가서 기다려도 될 것 같군요." 모리스가 대답했다. 경찰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에서 나가 문을 닫았다. "내 말은, 저 사람들도 계속 여기에 있어야 되느냐는 뜻입니다." 벤슨이 다시 말했다. "그렇습니다." "계속 함께 있어야 되는 겁니까?" "그래요. 당신에 대한 고소가 취하될 때까지는 그래야겠지요." 벤슨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그렇게... 그러니까 내 말은... 상태가 심각합니까?" "당신은 그 사람의 한쪽 눈을 멍들게 하고 갈비뼈 하나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래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요?" "물론이지요." "난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벤슨이 말했다. "기억이 모조리 지워진 것 같아요." "그건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괜찮다니 다행이군요." 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가져온 것 없습니까? 이를테면, 파자마 같은 거라도 말입니다." 벤슨이 대답했다.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준비할 수 있어요." "좋습니다. 곧 입원복을 갖다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괜찮지요?" "예. 괜찮습니다." 벤슨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술이라도 간단하게 한 잔 했으면 좋겠군요." 모리스도 마주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그건 안됩니다." 벤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리스는 그 방을 나왔다. 경찰들은 문앞에 의자를 하나 가져다 놓았다. 경관 한 사람은 그 의자에 앉고 나머지 한 사람은 옆에 서 있었다. 모리스는 자신의 노트를 펼쳤다. "당신들에게 일정을 알려 드려야겠군요." 모리스가 말했다. "30분 후에 벤슨이 서명할 재정 포기 각서를 가진 사람이 올 겁니다. 그 다음 3시 30분에는 아래층의 원형 회의실에서 벌어질 외과 의사 회의에 참석하게 될 겁니다. 오늘밤에는 머리를 잘라야 하고, 수술은 내일 아침 6시로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질문 있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좀 가져다 줄 수 없습니까?" 경관 한 사람이 물었다. "간호사에게 이야기해 놓겠습니다. 두 분 다 계실 겁니까, 아니면 한 분만 계실 겁니까?" "한 사람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8시간씩 교대로 근무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모리스가 말했다. "간호사들에게 그렇게 일러 놓겠습니다. 당신들의 출입을 간호사에게 확인하도록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들도 누가 이 층을 지키고 있는지 알아야 할 테니까요." 경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그 사람은 어디가 잘못된 겁니까?" "일종의 간질병입니다." "난 그 사람이 폭행한 피해자를 봤어요." 경관 한 사람이 말했다. "덩치도 크고 억세 보이는 인상이, 꼭 트럭 운전사 같더군요. 저렇게 조그만 사람이 어떻게...." 그는 팔꿈치로 벤슨의 방을 가리켰다. "그런 짓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사람은 발작을 일으키면 몹시 난폭해집니다." 경관들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어떤 수술을 받게 되는 겁니까?" "일종의 뇌 수술이지요. 우리는 제3단계 과정이라고 부릅니다만." 모리스가 말했다. 굳이 더 이상 설명할 필요를 느낄 수 없었다. 설명해 봤자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설령 이해한다 하더라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2 병원의 모든 외과 의사들이 모여 이례적인 사례들을 토의하는 신경외과 대회의는 평소의 경우 목요일 아침 9시에 열리게 되어 있었다. 특별 회의는 거의 소집되는 일이 없었는데, 그것은 병원의 모든 간부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대회의실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창백한 얼굴의 의사들이 잔뜩 모여 앉아 앞에 나와 있는 엘리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엘리스는 코끝에 걸린 안경을 밀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내일 아침 신경정신과 연구팀은 우리가 이른바 제3단계라고 부르는 인간 환자에 대한 대뇌 변연계 수술을 시도할 예정입니다." 청중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네트 로스는 회의실 출입구 근처의 모퉁이에 서서 회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엘리스의 그 말에 청중들의 반응이 그렇게 미미하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병원의 모든 사람들은 NPS가 그 동안 제3단계 수술을 시도할 적당한 환자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여러분에게 환자가 소개되고 나면 가능한 한 질문을 삼가해 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환자는 아주 예민한 성격인데다가 상태도 극히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환자가 소개되기 전에 몇 가지 배경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로스 박사님, 부탁 드립니다." 엘리스는 로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로스는 중앙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녀는 급경사를 이룬 계단식 의자에 앉아 있는 청중들을 둘러보며 잠시 망설였다. 자네트 로스는 늘씬한 몸매와 까무잡잡한 피부가 무척 보기 좋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 자신은 스스로를 너무 마르고 딱딱한 인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더 여자다운 부드러움을 갖추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외모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10년 가까이 주로 남자들이 많은 직업에서 훈련을 쌓은 결과 나이 서른에 이른 지금은 자신의 그런 미모를 이용하는 법도 터득했다. 그녀는 등뒤로 두 손을 한번 부딪쳐본 다음, 큰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대회의 시간이면 늘상 그러하듯 빠른 목소리로 배경 설명을 시작했다. "해롤드 프랭클린 벤슨은 올해 나이 서른네 살의 이혼 경력이 있는 컴퓨터 과학자입니다. 2년 전 산타 모니카 고속도로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누구 못지 않게 건강한 사람이었지요. 사고 직후 그는 얼마 동안 의식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근처 병원으로 옮겨져 밤새 치료를 받은 끝에, 다음날 건강한 모습으로 그 병원을 나섰습니다. 그 이후 6개월 동안은 아무 일 없이 정상적으로 생활했지만, 그때부터 그가 '의식 상실'이라고 표현하는 증세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청중들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식 상실 상태는 몇 분 동안 지속되었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나타나는 증세였습니다. 그 증세가 시작되기 전에는 무언가 이상하고 불쾌한 냄새가 느껴지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고 합니다. 의식 상실은 술을 마신 이후에 종종 발생하곤 했습니다. 그는 근처의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본 결과, 일을 지나치게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알코올의 섭취량을 줄이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받았습니다. 환자는 그 충고를 충실히 따랐지만, 증세는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청중들 가운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측두엽 간질의 전주곡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증세는 점점 더 심각해 질 것이었다. 로스가 계속 말을 이었다. "환자의 친구들은 그의 행동이 이상해졌다고 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지적을 무시해 버렸지요. 점점 사귀던 친구들이 그의 곁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이 무렵, 그러니까 지금부터 한 1년 정도 전입니다만, 그는 획기적인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벤슨은 인조 인간, 혹은 지능을 가진 기계 등의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컴퓨터 과학자입니다. 그러한 작업도중에 그는 기계가 인간에 대항해서 싸우고, 또 궁극적으로는 기계가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리라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청중들 사이에서는 약간의 수군거림이 일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정신의학자들이 많은 관심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로스는 자신의 은사인 매논 박사가 제일 뒷줄에 앉아 손으로 턱을 고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매논은 알고 있었다. "벤슨은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몇 남지 않은 친구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에게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보라는 충고를 했을 뿐입니다. 결국 그는 화가 나고 말았습니다. 지난 한해동안 기계가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그의 확신은 점점 더 굳어져 갔습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6개월 전에, 그가 경찰에 체포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어느 비행기 기술자를 구타했다는 혐의였지요. 그 사건은 결국 물증이 없다는 이유로 고소가 기각되기는 했지만, 그 일로 인해 벤슨은 충격을 받고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비행기 기술자를 사망 직전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구타한 범인이 바로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로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의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넉 달 전인 1970년 11월에 대학 병원 신경정신과 연구팀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머리에 상처를 입은 사실, 그리고 이상한 냄새를 느낀 이후 우발적인 폭력을 행사했다는 점 등 그의 발병 과정을 짚어볼 때 그의 증세는 정신운동 간질일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지금 NPS는 치료가 가능한 행동 장애 환자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신경과 검사는 완벽한 정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뇌파 검사 결과도 완벽한 정상이었습니다. 뇌파의 활동에는 아무런 병리 현상이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알코올을 섭취한 다음 같은 검사를 반복했더니, 비정상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뇌파 검사 결과 뇌의 오른쪽 측두엽에서 발작 증세가 관찰된 것입니다. 따라서 벤슨은 제1단계 환자, 즉 정신운동 간질의 특성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스는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 동안 청중들은 그녀가 한 말을 정리해볼 것이다. "환자는 매우 지적인 사람입니다." 잠시 후 로스가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병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자동차 사고 때 뇌에 손상을 입은 결과 '생각의 발작'을 유발하는 일종의 간질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육체의 발작이 아니라 마음의 발작으로 인해 난폭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증세입니다. 3개월 전 벤슨은 폭력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피해자는 스물네 살 난 토플리스 댄서였는데, 그 사람은 후에 고소를 취하했습니다. 병원 측에서는 벤슨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약간의 힘을 썼다고 합니다. 한 달 전에는 모라돈, p-아미노, 트리아밀린 등의 약물을 이용한 치료를 시도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벤슨은 어떠한 약물로도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제2단계, 즉 내(耐)약물 정신운동 간질이라는 판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제3단계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 부분입니다." 로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여러분에게 그 사람을 소개하기 전에 한 가지 더 말씀 드릴 게 있습니다. 그는 어제 오후 주유소 점원을 폭행하여 꽤 심한 부상을 입혔습니다. 그의 수술이 내일로 계획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그를 보호하겠다고 경찰에 협조를 요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폭력 혐의에 대한 신문을 받아야 하는 절차를 남겨 놓고 있다는 점을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방안에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로스는 잠시 쉬었다가, 벤슨을 데리러 나갔다. 벤슨은 휠체어에 앉은 채 회의실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에서 지급한 환자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자네트 로스가 나타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로스 박사님." "안녕하세요, 해리." 로스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기분은 좀 어때요?" 그것은 아주 정중한 질문이었다. 로스는 오랫동안 정신과 의사로 일한 경험을 통해, 벤슨이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초조하기도 하고 겁도 날 것이다. 그의 입술 위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으며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두 손은 무릎 위에서 맞잡고 있었다. "좋습니다." 벤슨이 대답했다. "아주 좋아요." 벤슨 뒤에서는 모리스가 휠체어를 밀어주고 있었고, 또 그 뒤에는 경찰관 한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 로스는 모리스를 향해 말했다. "저 분도 우리와 함께 들어가시는 거예요?" 모리스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 전에 벤슨이 먼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은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옵니다." 경찰관은 다소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로스가 말했다. 로스가 문을 열자 모리스가 벤슨의 휠체어를 밀고 회의실로 들어가, 엘리스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엘리스는 마중하듯 앞으로 나와 벤슨과 악수를 나누었다. "벤슨 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엘리스 박사님." 모리스는 벤슨의 휠체어를 180도 돌려 회의실에 앉아 있는 청중들과 마주 보게 했다. 로스는 한쪽 옆에 앉아 경찰관을 바라보았다. 그는 문앞에 서서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엘리스는 벤슨 옆에 나란히 서 있었고, 벤슨은 X레이 사진이 열두어 장 붙어 있는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벤슨은 그것이 자신의 두개골을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광택 유리 뒤의 형광등을 껐다. X레이 필름은 빛을 잃고 까맣게 되어 버렸다. "우리는 여기 계신 의사 선생님들의 몇 가지 질문에 답변해 주십사 하고 당신을 여기로 모셔온 것입니다." 엘리스는 반원을 그리며 앉아 있는 의사들을 가리켰다. "이분들이 당신의 신경을 건드리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엘리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렇게 내뱉고 있었다. 로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로스는 지금까지 이런 회의에 수백번도 넘게 참석해 보았지만, 환자들은 그렇게 많은 의사들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신경이 쓰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걸 직접적으로 물어 보면, 신경이 쓰인다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환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신경이 많이 쓰이는군요." 벤슨이 말했다. "의사들이 이렇게 지켜보고 있으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로스는 애써 미소를 참았다. 멋있는 대답이에요, 하고 로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벤슨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이 하나의 기계라고 가정합시다. 내가 당신을 한 무리의 컴퓨터 전문가들 앞에 가지고 나왔어요. 그 사람들은 당신의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지를 알아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그럴 경우 당신이라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엘리스는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는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로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로스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지금은 벤슨의 정신병리 현상을 의사들에게 보여줄 상황이 아니었다. "나도 신경이 쓰였겠지요." 엘리스가 대답했다. "그럼 이제 내 기분도 아시겠군요." 벤슨이 말했다. 엘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로스는 그가 무척 흥분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끼를 덥석 물어서는 안되리라. "하지만 나는," 엘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로스는 다시금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말입니다." 벤슨이 엘리스의 말을 받았다. "당신의 기능이 기계적인 요소, 반복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런 기능들은 간단하게 프로그램 될 수 있고, 만약 당신이...." "내 생각에는, 앞에 계신 분들에게서 질문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로스가 일어서며 말했다. 엘리스는 그런 로스의 참견이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뭐라고 반박하지는 않았다. 벤슨 역시 고맙게도 입을 다물어 주었다. 로스는 청중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뒷줄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벤슨 씨, 의식 상실 상태에 빠지기 전에 느껴진다고 하는 그 냄새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 "글쎄요." 벤슨이 대답했다. "그건 아주 이상한 냄새입니다. 그게 내 대답의 전부예요. 몹시 끔찍한 냄새이긴 하지만 무슨 냄새와 비슷한 것 같다고 잘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냄새를 어떻게 정의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가장 비슷한 것을 예로 들어볼 수 없을까요?" 벤슨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테레빈유 속의 돼지 똥 냄새 같다고나 할까요." 또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벤슨 씨, 그러한 의식 상실 증세의 빈도가 점점 잦아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증세가 지속되는 시간도 더 길어졌습니까?" "그렇습니다." 벤슨이 말했다. "지금은 몇 시간 정도 계속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깨어날 때는 기분이 어떻습니까?" "속이 울렁거립니다." "좀더 자세히 말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때로는 정말로 구토를 하기도 합니다. 그 정도면 됐습니까?" 로스는 또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 벤슨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질문 없습니까?" 로스는 제발 없기를 바라며 그렇게 물었다. 청중들을 둘러보았지만, 오랜 침묵이 흐를 뿐이었다. "그럼 좋습니다." 엘리스가 말했다. "지금부터는 제3단계 수술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들을 논의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벤슨 씨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계속 참석할지 않을지는 본인의 의사에 따르기로 하겠습니다." 로스는 그것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엘리스는 자신의 환자가 기꺼이 수술을 받고자 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은 것이었다. 벤슨에게 이 자리에 계속 남아 있으라고 하는 것은 옳은 처사가 아니었다. "나도 참석하겠습니다." 벤슨이 말했다. "좋습니다." 엘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흑판으로 다가가 뇌의 모형도를 그렸다. "질병의 진행 과정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뇌의 일부가 간질로 손상되었고 상처가 형성되어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신체의 다른 기관에 나타나는 상처와 비슷한 것으로서 섬유질 세포의 위축 및 만곡이 심하게 일어난 부분입니다. 또한 그것은 비정상적인 전기적 부하의 핵심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연못에 돌을 던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핵심으로부터 물결처럼 퍼져 나오는 파동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스는 뇌의 한 지점을 중심으로 삼아 동심원 몇 개를 그렸다. "이러한 전기적 파문이 발작을 초래합니다. 뇌의 일부분에 있는 이러한 핵심이 신체의 경련이나 입에서의 객담 등의 증세를 유발하는 거지요. 다른 부분에서는 다른 효과들이 나타납니다. 벤슨 씨의 경우처럼 그 핵심이 측두엽에 자리할 때는 이른바 정신운동 간질이라고 하는 증세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신체의 경련이 아니라 사고의 경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한 생각들이 머리를 사로잡고 폭력적인 행동이 유발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이상한 냄새가 그 전조로 나타나곤 하는 것이지요." 벤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심히 듣고 있었다. 엘리스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많은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 뇌의 정확한 파손 지점에 전기적 충격을 가함으로써 발작을 방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발작이 느려지기 시작합니다. 발작이 시작되기 전에는 몇 초, 때로는 몇 분 동안에 이르는 시간적 여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충격을 가하면 발작을 방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스는 동심원 위에 커다란 X 표시를 했다. 그런 다음 뇌를 새로 그리더니 그 뇌를 둘러싼 머리와 목을 그려 넣었다. "우리는 두 가지 문제점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엘리스가 말했다. "먼저, 충격을 가할 뇌의 정확한 지점이 어디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대략 그것이 편도선, 즉 이른바 대뇌 변연계라고 불리우는 전방부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확한 지점을 알 수는 없지만, 뇌에 복수의 전극을 이식함으로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벤슨 씨에게는 내일 아침 40개의 전극이 이식될 것입니다." 엘리스는 뇌에서 두 개의 선을 끌어냈다. "우리의 두번째 문제점은, 발작이 시작되는 시기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발작 방지용 충격을 어느 순간에 가해야 할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충격을 가하는데 이용되는 바로 그 전극을 뇌의 전기적 활동을 '판독'하는 데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발작이 시작되기 전에는 특징적인 전기적 패턴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엘리스는 말을 멈추고 벤슨을 한번 바라본 다음, 청중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따라서 우리는 피드백 시스템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동일한 전극이 새로운 발작을 감지하는 데뿐만 아니라 발작 방지용 충격을 전달하는 데도 이용됩니다. 이러한 피드백 메카니즘을 통제하는 데는 컴퓨터가 이용될 것입니다." 엘리스는 흑판에 그려진 도형의 목 부분에다가 조그만 사각형을 그려넣었다. "NPS 스태프는 뇌의 전기적 활동을 감시할 수 있는 컴퓨터를 개발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발작이 시작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고, 뇌의 정확한 부분에 충격을 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컴퓨터의 크기는 우표 한장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무게도 10분의 1온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컴퓨터가 환자의 목 피부 밑에 이식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엘리스는 목 밑부분에 직사각형을 그려 넣고, 그것과 컴퓨터를 나타내는 사각형을 연결하는 선을 그렸다. "컴퓨터의 전원으로는 환자의 어깨 피부 밑에 이식될 핸들러 PP--J 플루토늄 파워 팩이 이용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환자는 외부에서 전원을 공급받을 필요가 전혀 없어집니다. 이 파워 팩이 적어도 20년 동안은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스는 분필로 자기가 그린 도형의 다른 부분을 톡톡 두들겼다. "따라서 이것은 완벽한 피드백 시스템을 구축하게 됩니다. 뇌에서 전극으로, 컴퓨터로, 파워 팩으로, 그리고 다시 뇌로 이어지는 모든 과정이 철저하게 내부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고안된 것입니다." 엘리스는 별다른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벤슨을 돌아보았다. "하실 말씀 있습니까, 벤슨 씨?" 로스는 다시 한번 마음 속으로 신음을 내질렀다. 그녀가 보기에는 엘리스가 벤슨을 충돌질 하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아무리 외과 의사라해도 그것은 가학적인 취향일 뿐인 것이다. "없습니다." 벤슨이 대답했다. "할 이야기가 없어요." 벤슨은 그렇게 말하며 하품을 했다. 벤슨이 휠체어에 앉은 채 회의실을 나갈 때, 로스도 그 뒤를 따랐다. 반드시 그녀가 같이 가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어쩐지 그의 상태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엘리스가 그를 그런 식으로 대한 것이 마치 자기 책임이라도 되는 듯 괜히 죄스럽기도 했다. 로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소감이 어때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벤슨이 말했다. "어떤 점에서죠?" "글쎄요, 그 토론은 전적으로 의학적인 것이었습니다. 사실 나는 좀더 철학적인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우린 그저 현실적인 사람들에 지나지 않아요." 로스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루다 보니까 그렇게 되는 건지도 모르죠." 벤슨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건 뉴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말했다. "무엇 때문에 사과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는가 하는 문제보다 더욱 현실적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당신은 정말로 이 문제에 대해 철학적인 접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나요?" 벤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래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단지 그렇지 않은 척하고 있을 뿐이겠지요." 로스는 걸음을 멈추고 복도에 서서 벤슨의 휠체어가 엘리베이터 입구 쪽으로 다가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벤슨과 모리스, 그리고 경찰관은 그곳에서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리스는 그 특유의 조급하고 신경질적인 태도로 계속해서 버튼을 눌러대고 있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그들은 모두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벤슨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로스는 대회의실로 돌아갔다. "....10년 동안 개발해오고 있었습니다." 엘리스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거의 해마다 되풀이되는 사소한 수술 때마다 배터리를 교환해야 하는 맥박 조정기의 불편을 없애기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의사에게나 환자에게나 번거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원자력 팩은 긴 수명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아주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 벤슨 씨가 그때까지 살아 있다고 한다면, 20년 후에나 팩을 교환해 주면 될 것입니다." 자네트 로스가 회의실로 들어갔을 때는 막 어떤 사람의 질문이 시작되고 있었다. "40개의 전극 가운데 어떤 것이 발작을 방지할 것인지를 어떻게 결정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40개의 전극 모두를 이식할 것입니다." 엘리스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컴퓨터와 연결해 놓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 전극도 24시간 동안 폐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수술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무선을 통해 전극 하나 하나에 자극을 가할 것이고, 어떤 전극이 가장 잘 작동하는지를 결정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원격 조정 장치를 통해 그것들을 폐쇄하게 됩니다." 저 뒤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헛기침과 함께 질문을 시작했다. "기술적인 세부 사항은 아주 흥미롭습니다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문제의 핵심을 외면하고 있는 것 같군요." 로스는 고개를 들어 매논을 바라보았다. 매논은 정신과 명예 교수였는데, 요즘은 일흔 다섯의 나이 때문에 병원에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따금 나오긴 하지만, 그럴 때도 이미 현대적인 사고 혹은 옛날의 명성과도 거리가 먼 퇴물 정도로 대접받기 일쑤였다. "내가 보기에 환자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것 같은데." 매논이 덧붙였다. "그것은 그런 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관점입니다." 엘리스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매논이 대답했다. "하지만 적어도 환자가 심각한 성격상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거요. 인간과 기계에 대한 그의 혼란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걱정스러운 요소인 것 같은데." "성격상의 혼란은 그가 안고 있는 질병의 일부일 뿐입니다." 엘리스가 말했다. "예일 대학의 하리 연구팀은 최근의 연구 결과 측두엽 간질 환자 가운데 50퍼센트는 직접적인 발작과 무관한 성격상의 혼란을 수반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습니다." "아, 그래요." 하지만 매논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불안감이 드러나 있었다. "그건 확실히 발작과는 무관한 그의 질병의 일부지요. 하지만 당신의 수술이 그걸 치료할 수 있을까요?" 자네트 로스는 흐뭇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매논 역시 자신과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엘리스가 말했다. "바꿔 말하면, 이번 수술은 그의 발작을 중지시키기는 하지만 그의 망상을 해소하지는 못한다는 얘기 아니오." "아마 그럴 겁니다." 엘리스가 대답했다. "잠깐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하는데," 매논은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런 종류의 사고는 내가 NPS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소. 당신만을 꼭 찝어서 하는 말은 아니고, 말하자면 의료계 전반의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거요. 예를 들어서, 자살을 하려는 의도로 약물을 과다하게 복용한 환자가 응급실로 실려온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 우리의 접근 방식은 위를 세척하여 약물을 뽑아내고 한바탕 설교를 한 다음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조치라고 할 수는 있어도 치료라고 하기는 어려운 행위일 거요. 환자는 조만간 다시 응급실로 돌아올 테니까 말이오. 위 세척이 우울증을 치료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오. 그것은 단지 약물 과용에 대한 조치일 뿐이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잘 알겠습니다마는...." "우리 병원에서 있었던 L씨의 경우를 상기시키고 싶군요. 당신도 그 사건을 잊지는 않았겠지요?" "그 사건이 이번 일과 관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엘리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뻣뻣하고 한껏 과장되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매논이 말했다. 청중석의 몇몇 의사들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L씨의 사건은 아주 유명한 일화를 남겼소. 그는 당시 서른 아홉 살이었는데, 말기에 이른 신장염 환자였지요. 만성적인 사구체염이었소. 신장 이식 수술을 시도할 수 있는 후보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이식 수술을 행할 수 있는 우리 병원 측의 능력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사회에서 환자를 선별해야 했던 거지요. 이사회의 정신과 의사들은 L씨에 대한 이식 수술에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그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는 태양이 지구를 지배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죽어도 바깥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소. 우리는 신장 이식 수술을 감당하기에는 그의 정신이 너무나도 불안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오. 하지만 결국 그는 수술을 받게 되었소. 그로부터 6개월 후, 그는 자살을 하고 말았소. 비극적인 일이었지요.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과연 누가 그 이식 수술에 들어간 엄청난 비용과 시간과 노력을 보상해 줄 것인가 하는 것이었소." 엘리스는 초조한 듯 앞뒤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의 성하지 못한 다리가 약간씩 바닥에 끌리는 소리를 냈다. 로스는 그런 그의 모습에서 그가 지금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평소의 엘리스는 자신의 결함을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신경을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유심히 관찰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다리를 전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피곤하거나 화를 내거나 혹은 위기 의식을 느낄 때, 그의 결함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떻게 보면 무의식중에 상대방의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를 공격하지 마세요, 나는 절름발이예요.' 하지만 물론 그는 의식적으로는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선생님이 반대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엘리스가 말했다. "선생님의 주장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정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문제를 약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벤슨이 혼란에 빠져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의 수술이 그런 문제를 깨끗이 해소할 수도 없으리라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수술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연 그것이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될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의 발작이 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주위 사람들에게까지도 평생토록 계속될 심각한 위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발작은 이미 그로 하여금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여 적지 않은 곤경을 초래했고, 게다가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이번 수술은 그런 발작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환자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매논은 자리에 앉은 채 어깨를 약간 으쓱거려 보였다. 자네트 로스는 그 몸짓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 막다른 골목과도 같은,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좋습니다." 엘리스가 말했다. "다른 질문 없습니까?" 더 이상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3 "제기랄, 이런 빌어먹을!" 엘리스가 이마를 훔치며 투덜거렸다. "정말 지독한 양반이야." 자네트 로스는 그와 함께 주차장을 가로질러 랑거 리서치 건물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은 이제 서서히 기운을 잃고 창백하게 퇴색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관점은 타당한 것이었어요." 로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도 그 사람 편이라는 걸 자꾸만 잊어버리는군." "왜 그럴까요?" 로스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되물었다. 그녀는 NPS 스태프의 정신과 의사로서, 애초부터 벤슨의 수술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것 봐요." 엘리스가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거요. 물론 벤슨을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그런 능력은 없소. 단지 그를 도와줄 수 있을 뿐이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도우려는 것뿐이오." 로스는 말없이 그의 곁을 따라 걸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엘리스에게 몇 번이나 자신의 생각을 말한 바 있었다. 수술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사실 어쩌면 벤슨의 상태는 오히려 더 악화될지도 모른다. 로스는 엘리스도 그런 가능성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고집스럽게 그 점을 무시하고 있었다. 혹은 그녀가 보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 그녀는 다른 외과 의사만큼은 엘리스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녀는 외과 의사들이란 무언가를 하고 싶어 안달하는 행동 지향적인 남자들(사실 그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로스는 그 점을 중시하는 입장이었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엘리스는 다른 의사들보다 한결 나은 데가 있었다. 벤슨 이전에 제3단계 수술이 논의되던 몇몇 후보 환자들을 거부한 것은 엘리스가 취한 아주 현명한 조치 가운데 하나였다. 로스는 누구보다도 새로운 수술을 시도하고 싶어하는 엘리스로서는 그런 결정을 내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만사가 다 싫소." 엘리스가 말했다. "뭐가 말이에요?" "정치적인 문제 말이오. 차라리 원숭이를 상대로 수술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소. 정치적인 문제는 개입될 여지가 없으니 말이오." "하지만 당신은 벤슨을 수술하려는 거잖아요...." "나는 준비가 되어 있소." 엘리스가 말했다. "우리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소. 우리는 이제 막 최초의 거보를 내디디려는 순간이오. 지금은 그런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이란 말이오." 그는 로스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당신이 그렇게 불확실해 보이는 이유는 뭐요?" "불확실하기 때문이죠." 로스가 대답했다. 그들은 랑거 빌딩에 이르렀다. 엘리스는 맥퍼슨과 이른 저녁을 먹기로 되어 있었다. 그의 신경질적인 표현을 빌자면, 그것 역시 정치적인 저녁식사일 뿐이었다. 로스는 그를 보내고 4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신경정신학 연구팀은 10년 동안 꾸준히 확장되어온 끝에 지금은 랑거 리서치 건물의 4층 전체를 사용하고 있었다. 다른 층들은 찬바람이 일 정도의 흰색 페인트 일색으로 칠해져 있었지만, NPS만은 화려한 원색으로 밝게 치장되어 있었다. 환자들로 하여금 낙관적이고 쾌활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하자는 의도였지만, 로스에게는 언제나 그 반대의 영향을 미치곤 했다. 마치 장애 아동을 위한 유치원처럼, 허위적이고 인위적인 쾌활함을 강조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로스는 엘리베이터를 내려 접수계를 바라보았다. 한쪽 벽에는 하늘색, 다른쪽은 빨간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NPS의 다른 대부분의 요소와 마찬가지로, 그 색깔 역시 맥퍼슨의 아이디어였다. 하나의 조직에 그 지도자의 성격이 그렇게도 많이 반영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맥퍼슨 자신은 언제나 유치원생 같은 쾌활함과 낙천주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확실히 해리 벤슨 같은 사람에게 수술을 시도하려면 낙천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지 않으면 안될 듯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퇴근한 이후라 주위는 조용했다. 로스는 '초음파 촬영실' '피질 기능실' '뇌파 연구실' 'RAS 측정실' '체벽 T' 등과 같은 간판이 붙은 방들 앞을 지나 복도를 걸었다. 홀의 한쪽 끝에 '텔레콤프'라고 씌어진 간판이 보였다. 이런 방들에서 진행되는 작업들은 그 이름만큼이나 복잡한 것이었다. 이것은 맥퍼슨이 이른바 '응용'이라고 부르는 환자 치료를 위한 기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응용이라 함은 개발, 즉 케미트로드, 콤프심, 이래드 시나리오 등을 담당하는 연구 활동과 대비되는 개념이었다. '조지'와 '마르타' 혹은 폼 Q와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는 말할 필요도 없고, 개발 분야는 응용보다 적어도 10년은 앞서가고 있었다. 1년 전 맥퍼슨은 로스에게 각 언론의 과학 담당 기자들을 데리고 NPS를 안내해 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그가 그녀를 선택한 것은 그의 표현을 빌면 "그녀가 좀처럼 보기 힘든 걸작"이기 때문이었다. 로스는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고, 또 어떻게 보면 약간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평소의 그는 마치 아버지와도 같은 정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녀가 받은 충격은 기자들이 받은 충격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로스는 그들에게 응용과 개발 두 분야를 모두 보여 주려고 계획을 세웠지만, 일단 응용 분야를 본 그들의 흥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로스는 계획을 축소해야 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자 로스는 그 점이 무척 걱정스러웠다. 기자들은 나태하지도, 그렇다고 경험이 부족하지도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네의 온 생애를 바쳐 하나의 과학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끊임없이 왕래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로스가 보여준 것을 보고는 말문이 막히는 모양이었다. 그녀 자신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3년째 NPS에서 일하고 있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곳에서 진행되는 일들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인간과 기계의 접합, 인간의 두뇌와 전자 두뇌의 결합은 더 이상 이상하거나 자극적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한발 더 앞으로 전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로스는 벤슨에 대한 제3단계 수술을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그랬다. 그녀는 벤슨이 적당한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제 그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기회는 단 한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복도의 끝, 즉 텔레콤프실의 문 앞에 이른 로스는 걸음을 멈추고 출력기가 돌아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안에서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로스는 문을 열었다. 텔레콤프는 신경정신학 연구팀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널찍한 방에 온통 각종 전자 장비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벽과 천정에는 방음 장치가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덜거덕거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는 텔레타이프를 판독 콘솔로 이용하던 시절의 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요즘에는 그 대신 소리가 나지 않는 브라운관 즉 CRT를 이용하거나 혹은 기계적으로 타이핑하는 것이 아니라 노즐을 통해 글자를 뿌리는 방식의 출력기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 출력기에서 나는 가벼운 소음이 이 방에서 나는 가장 시끄러운 소리였다. 맥퍼슨은 덜거덕거리는 구식 텔레타이프가 병을 고치러 NPS를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방해가 된다며 가능한 한 조용한 기계들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게르하르드와 그의 조수인 리차드가 마침 그곳에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쌍둥이 마법사라고 불렀다. 게르하르드의 나이가 이제 겨우 스물넷이었고, 리차드는 그보다 더 어렸다. 그들은 NPS와 관련된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덜 전문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둘 다 텔레콤프를 복잡한 장난감들이 가득 차 있는 놀이방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일을 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일하는 시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늦은 오후부터 일을 시작하여 새벽녘까지 계속하는 경우도 흔히 있었다. 그들은 각종 회의나 공식적인 모임 같은 자리에는 거의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맥퍼슨은 그것을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카우보이 장화와 작업복 바지, 자개 단추가 달린 새틴 셔츠를 즐겨 입는 게르하르드는 이미 열세 살의 나이에 전국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그는 피닉스에 있는 자기 집 뒤에서 20피트짜리 고체 연료 로케트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로케트는 놀랄 만큼 복잡한 전자 유도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었고, 게르하르드는 그 로케트를 궤도권으로 발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완성된 로케트의 앞부분이 뒷마당 차고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본 이웃 주민들은 깜짝 놀라 경찰에 신고하는 소동을 벌였고, 급기야는 육군에서까지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육군에서는 게르하르드의 로케트를 조사한 끝에 발사를 위해 화이트 샌드로 실어갔다. 결국 그 로케트는 발사 직전에 2단계 연료가 발화되면서 2마일 상공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무렵 게르하르드는 이미 자신의 유도 장치로 네 개의 특허를 가지고 있었고, 각 대학과 기업체에서 장학금을 지급하겠다는 제의를 받고 있었다. 그는 그 모든 제의를 거부하고 자신의 삼촌에게 특허권에 대한 투자를 부탁했다. 그리고는 운전 면허증을 소지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자마자 마제라티 자동차를 한 대 구입하여 캘리포니아 팜데일의 록히드 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1년 뒤 공식적인 기술사 자격증이 없다는 이유로 승진의 길이 막혀 있는 것을 알고 그 회사를 그만두어 버렸다. 하긴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마제라티 자동차를 가진 열 일곱 살짜리 소년, 그것도 한밤중에만 일하는 버릇을 가진 동료를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에게는 '협동 정신'이 없다고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 맥퍼슨은 인간의 두뇌와 결합될 수 있는 전자 부품을 디자인하는 일에 투입하기 위해 그를 신경정신학 연구팀으로 끌어들였다. NPS의 책임자인 맥퍼슨은 그 일을 '하나의 도전'이라거나 혹은 '흥미로운 시스템 개발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수십 명의 지망자들과 면접을 해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 일이 재미있을 것 같다고 대답한 게르하르드가 즉석에서 채용되었던 것이다. 리차드의 배경도 그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6개월 가량 대학을 다니다가 육군에 소집되었다. 그는 원래 베트남으로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그 무렵 그는 육군의 전자 주사(走査) 장치의 개선점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제안은 커다란 효율을 보장한다는 사실이 증명된 후, 리차드는 전쟁터 근처에는 얼씬도 못해 보고 대신 산타 모니카의 연구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제대를 하고 나자 곧장 NPS에 들어온 것이었다. 쌍둥이 마법사는 그런 경력을 가진 젊은이들이었다. 로스는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잔." 게르하르드가 인사를 건넸다. "잘 돼 가요?" 리차드도 그녀를 반겼다. 둘 다 아무런 격식을 따지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스태프들 중에서 맥퍼슨을 "로그"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도 그들뿐이었다. 맥퍼슨도 그런 그들을 봐주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요." 로스가 대답했다. "제3단계 수술이 대회의를 통과했어요. 조금 있다 그 환자를 만나러 갈 거예요." "우리도 막 컴퓨터 점검을 끝냈어요."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괜찮아 보이는군요." 그는 각종 전자 계기들로 둘러싸인 현미경이 놓여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어디 있어요?" "무대 밑에 있죠." 로스는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우표 크기만한 플라스틱 패키트가 현미경 렌즈 밑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플라스틱을 통해 극소화된 전자 부품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플라스틱에서 40개의 접촉면이 돌출되어 있었다. 쌍둥이는 현미경의 도움을 받아가며 고성능 탐침(探針)을 이용하여 그 접촉면들을 반복적으로 테스트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점검해야 할 부분은 논리 회로예요." 리차드가 말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예비 장치도 준비해 놓았어요." 자네트는 파일 카드를 정리해 놓은 선반으로 다가가 테스트 카드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사이코덱스 카드는 더 없어요?" "그건 여기 있어요."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5-스페이스를 원하나요, 아니면 n-스페이스를 원하나요?" "N-스페이스요." 로스가 대답했다. 게르하르드는 서랍을 열더니 두꺼운 종이 한장과 플라스틱 종이 끼우개를 꺼냈다. 그 종이 끼우개에는 연필처럼 생긴 뾰죽한 금속 탐침이 체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건 제3단계 수술을 위한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래요." 로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까지 그 사람에게 사이코덱스 테스트는 몇번이나 해봤잖아요." "기록을 위해 한번 더 해보려는 것뿐이에요." 게르하르드는 카드와 종이 끼우개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환자는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고 있나요?" "거의 다 알고 있죠." 로스가 대답했다. 게르하르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정신이 좀 나간 사람인 것 같군요." "사실 그래요. 바로 그게 문제죠." 로스가 말했다. 7층에 도착한 로스는 벤슨의 차트를 보기 위해 먼저 간호사실에 들렀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새로 온 간호사의 말은 이러했다. "죄송합니다만 내방객에게는 의료 기록을 보여 드리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는 닥터 로스라고 해요." 순간 간호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 되었다. "미안해요, 박사님. 선생님의 명찰을 미처 보지 못했어요. 선생님 환자는 704호실이에요." "어떤 환자 말인가요?" "제리 피터스가 선생님 환자 아닌가요?" 로스는 잠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아과 선생님 아니신가요?" 간호사가 다시 물었다. "아니에요." 로스가 말했다. "난 NPS의 정신과 의사예요." 로스는 자신의 목소리에 노골적인 불쾌감이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심 깜짝 놀랐다. 하지만 어린 시절 사람들에게 "넌 의사가 아니라 간호사가 되기로 마음먹는 게 더 좋을 거야" 라거나 "음, 여자에게는 소아과가 최고지. 내 말은 그게 가장 자연스럽다는 뜻이야...." 라는 말들을 듣고 자라온 그녀로서는, 그 간호사의 말이 자신도 모르게 불쾌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아, 그렇다면 710호실의 벤슨 씨를 찾으시는 거군요." 간호사가 말했다. "그 사람은 수술 준비를 끝냈어요." "고마워요." 로스는 그렇게 말하고 차트를 받아든 다음, 홀을 가로질러 벤슨의 방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벤슨의 방문을 노크했을 때, 안에서는 총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문을 열자 침대 맡의 조그만 램프 하나만 켜놓았을 뿐 어둠침침한 방안에는 텔레비전의 초록색 불빛이 감돌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어떤 남자가 "...그 놈은 땅에 쓰러지기도 전에 숨을 거두고 말 거야. 총알 두 개가 그의 심장을 정통으로 꿰뚫었거든....." 하는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로스는 방문을 조금 더 밀어젖히며 말했다. 벤슨은 뒤를 돌아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침대 옆에 있던 버튼을 눌러 텔레비전을 껐다. 그의 머리에는 수건이 둘러져 있었다. "기분은 좀 어떠세요?" 로스는 방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그리고는 침대 옆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발가벗은 기분이오." 벤슨은 머리에 두른 수건을 만지며 그렇게 대답했다. "재미있어요. 당신은 머리칼을 모두 잘라 보기 전에는 그 머리칼이 얼마나 많은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할 겁니다." 벤슨은 다시 수건을 만졌다. "여자들은 더 흉칙하게 보이겠지요." 벤슨은 그렇게 말하며 로스를 바라보더니,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누구에게나 별로 재미있는 일은 아닐 것 같군요." 로스가 말했다. "그럴 겁니다." 벤슨은 베개 위로 비스듬히 몸을 기대며 말했다. "머리털을 자르고 나서 쓰레기통을 한번 쳐다보고는 깜짝 놀랐어요. 머리털이 엄청나게 많더군요. 그리고 머리가 자꾸 서늘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머리가 서늘하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머리에 수건을 둘러 주더군요. 나는 빡빡머리인 내 모습이 보고 싶다고 말했지요. 하지만 그 사람들 말이,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 사람들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대에서 기어나와 화장실에 들어갔지요. 하지만 막상 화장실에 들어가니...." "그랬더니요?" "수건을 벗겨볼 수가 없었습니다." 벤슨은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지었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모르겠군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벤슨은 다시 웃음을 지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무엇 때문에 한번도 솔직한 대답을 해주지 않는 겁니까?" 벤슨은 담배를 하나 붙여 물고는 약간은 반항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담배를 피우면 안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어차피 피는 걸요, 뭐." "크게 문제될 거야 있겠어요?" 로스가 말했다. 그녀는 벤슨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기분이 꽤 좋은 것 같았다. 로스는 그의 그런 기분을 망쳐 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뇌 수술을 받기 직전의 환자가 그렇게 쾌활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도 그리 정상적인 일은 아니었다. "몇 분 전에 엘리스 박사님이 왔다 갔습니다." 벤슨은 담배를 뻑뻑 빨아대며 말했다. "내 머리에 뭔가 표시를 하더군요. 보입니까?" 벤슨은 자기 머리 오른쪽의 수건을 약간 밀어올렸다. 두개골을 덮고 있는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귀 뒤에 파란색 'X' 표시가 두 개 되어 있었다. "내 모습이 어때요?" 벤슨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좋아 보이는군요. 기분은 어때요?"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걱정되는 건 없나요?" "없습니다. 걱정할 게 뭐 있나요?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앞으로 몇 시간만 지나면 나는 당신의 손에, 그리고 엘리스 박사의 손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술을 앞두고 약간 걱정들을 하는 것 같더군요." "당신이 참으로 이성적인 정신과 의사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드러나는군요." 벤슨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한 다음,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고는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걱정이야 되지요." "뭐가 걱정이에요?" "모든 게 다." 벤슨이 말했다. 여전히 담배를 빨아대고 있었다. "모든 게 다 걱정이오. 지금 당장 어떻게 잠들 건가도 걱정이고, 내일이면 어떤 기분이 들 건가도 걱정이오. 수술이 다 끝나면 또 어떤 기분이 들 것인가, 누군가가 실수라도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일이 잘못 돼서 식물인간이라도 되어 버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프지는 않을까, 만약 내가, 만약..." "죽으면?" "그래요, 그것도 걱정이지요." "이건 정말 간단한 수술에 불과해요. 맹장 수술보다 복잡할 게 하나도 없다니까요." "당신이 뇌 수술을 받는 모든 환자에게 똑같은 말을 할 것이라는데 내기라도 걸 수 있소." "아니에요, 그게 아니에요. 이건 정말 시간도 얼마 안걸리는 간단한 수술이에요. 기껏해야 한 시간 반 정도밖에는 안 걸릴 거예요." 벤슨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스는 자신이 그에게 위안이 되어 주고 있는 건지 어떤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도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벤슨이 말했다. "내일 아침 마지막 순간 의사들이 들어와 '당신은 이제 다 치료되었습니다. 벤슨. 이제 집에 가도 좋아요.' 하고 말할 거라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으니까요." "수술을 받고 나면 그렇게 될 거예요." 로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지만, 다행히도 그런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당신은 정말 이성적이오." 벤슨이 말했다. "때로는 그걸 참을 수 없는 때가 있을 정도요." "지금도 그런 경우인가요?" 벤슨은 다시금 자신의 머리에 둘러진 수건을 만졌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런 빌어먹을, 그 사람들이 내 머리에 구멍을 뚫고 전선을 쑤셔박을...." "그건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잖아요." "그야 그렇지요." 벤슨이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바로 그 전날 밤이란 말이오." "화가 나나요?" "아니, 그냥 겁이 날 뿐이오." "그렇다면 그건 완벽하게 정상적인 현상이에요.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화를 내서는 곤란하겠죠." 벤슨은 담배를 비벼 끄더니, 이내 새 담배에 다시 불을 붙였다. 그는 화제를 바꾸려는 듯 로스가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종이 끼우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뭣니까?" "사이코덱스 테스트예요. 한번 더 해보았으면 하구요." "지금 말인가요?" "그래요. 그냥 기록을 위한 것일 뿐이에요." 벤슨은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이미 전에도 사이코덱스 테스트를 몇 번이나 받아본 적이 있었다. 로스는 그에게 종이 끼우개를 건네주었다. 벤슨은 질문 카드를 가지런히 늘어놓은 다음, 크게 소리내어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코끼리가 되는 것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원숭이가 되는 것이 낫겠습니까? 원숭이가 되는 게 낫지. 코끼리는 너무 오래 살거든." 벤슨은 금속 탐침으로 자신이 선택한 답변 위에 구멍을 뚫었다. "만약 당신이 색깔이라면, 초록색이 되고 싶습니까, 노란색이 되고 싶습니까? 노란색. 나는 지금 아주 노란 기분이 들어요." 벤슨은 웃음을 터뜨리며 답변에 구멍을 뚫었다. 로스는 그가 서른 개의 문항에 대한 자신의 답변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답변을 마친 벤슨은 종이 끼우개를 로스에게 건네 주었다. 다시금 기분이 약간 우울해진 것 같았다. "당신도 올 겁니까? 내일 말입니다." "네." "당신을 알아볼 정도의 의식은 있을까요?" "아마 있을 거에요." "내가 언제 수술실에서 나오게 되지요?" "내일 오후나 저녁쯤 될 거예요." "그렇게 빨리?" "정말로 간단한 수술이라니까요." 로스는 다시 한번 그렇게 말했다. 벤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스가 뭐 필요한 것 있으면 갖다 주겠다고 하자, 벤슨은 맥주가 마시고 싶다고 했다. 로스는 수술 12시간 전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 다음, 잠시 잠을 푹 잘 자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주사를 맞게 될 것이며, 내일 아침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주사를 맞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로스는 그 방을 나왔다. 방을 나오는 순간, 로스는 텔레비전이 다시 켜지며 누군가의 금속성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것 봐, 중위, 난 3백만의 인구가 살고 있는 도시 어딘가에 살인범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 로스는 방문을 닫았다. 로스는 그곳을 떠나기 전에 벤슨의 차트에 간단한 메모를 적어넣었다. 그리고는 간호사들의 눈에 띄기 쉽게 붉은 연필로 동그라미를 쳤다. 정신과의 메모 34살 난 이 남자는 2년 동안 정신운동 간질을 앓은 병력이 있다. 병인(病因)은 자동차 사고에 따르는 정신적 충격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 환자는 이미 2명의 피해자를 살해하고자 했으며, 기타 다수의 폭력 사건에 연루된 바 있다. 그가 병원 관계자에게 "우스운 기분이 든다."거나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등의 말을 할 때는 일단 발작이 시작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그 즉시 NPS와 병원 경비과에 연락하기 바란다. 환자는 그러한 질병의 한 부분인 성격상의 혼란을 수반하고 있다. 즉, 기계가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믿음은 무척 강한 것이며, 무리하게 그러한 생각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반발심과 의구심을 끌어내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는 또한 무척 지적이고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때로는 많은 요구 사항을 내걸 수도 있으나, 단호하고 존중하는 태도로 대하는 것이 좋다. 그의 명료하고 지적인 태도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의 태도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는 방향으로 유도할지도 모른다. 그는 정신적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기질성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한 두려움과 우려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의학박사 자네트 로스 NPS 4 "이해할 수가 없군요." PR맨이 말했다. 엘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맥퍼슨은 참을성 있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것은 폭력적인 행동의 기본적인 원인이오." 그가 말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번 일을 바라봐야 하오." 그들 세 사람은 병원 옆에 있는 포 킹스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이른 시간에 저녁식사를 하자고 제안한 것은 맥퍼슨의 아이디어였다. 엘리스가 그 자리에 낀 것은 맥퍼슨이 그도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스는 그날 모임을 그냥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엘리스는 웨이터에게 손을 흔들어 커피를 좀더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 커피가 오늘밤 자신의 수면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제대로 잠을 자긴 글렀으니 별로 문제될 것도 없었다. 인체를 대상으로 제3단계 수술을 행하기 전날 밤 잠을 잘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엘리스는 머리 속으로 수술 과정을 몇 번씩이나 되짚어 보며 침대에서 뒤척거릴 자신의 모습이 눈에 보일 듯했다. 이미 손금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는 과정이었지만, 그래도 거기에 대한 생각이 그의 머리를 떠날 날이 없었다.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제3단계 수술은 이미 여러 차례 시도해본 바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154마리의 원숭이가 그의 실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 수술은 오히려 원숭이의 경우가 더 어려운 것 같았다. 봉합해놓은 실을 잡아뜯는가 하면 심지어는 전선을 잡아당기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툭 하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거나 의사를 깨무는 일도 흔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꼬냑 한 잔 드시겠소?" 맥퍼슨이 물었다. "좋지요." PR맨이 대답했다. 맥퍼슨은 엘리스에게도 의중을 묻는 듯 가만히 쳐다보았다. 엘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자신의 커피에 크림을 넣은 뒤, 의자에 몸을 기대며 하품을 깨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 PR맨이라는 사람은 어딘가 원숭이를 닮은 데가 있었다. 새끼 리서스 원숭이... 아래턱이 축 처지고 무엇엔가 놀란 듯한 밝은 눈빛이 영락없이 그 원숭이를 닮은 모습이었다. PR맨의 이름은 랄프였다. 엘리스는 그의 이름을 완전하게 다 알지는 못했다. 원래 PR맨들은 자신의 이름을 다 가르쳐 주는 일이 없었다. 물론 랄프도 병원에서까지 PR맨으로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보과장 혹은 뉴스과장 등이 그의 직함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그런지 그는 점점 더 원숭이 같아 보였다. 엘리스는 그의 귀 뒤의 두개골 부근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바로 전극이 이식될 부위였다. "우리는 폭력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맥퍼슨이 말했다. "물론 선량한 납세자들이 낸 세금으로 보수를 받는 사회학자들이 쓰레기 같은 이론들을 더러 내놓기도 합니다만,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정신운동 간질이라고 하는 특정한 질병이 환자로 하여금 폭력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신운동 간질이라...." 랄프가 맥퍼슨의 말을 되씹었다. "그렇습니다. 정신운동 간질은 이제 여타의 간질병만큼이나 보편적인 질환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명 인사들 중에서도 그 질환에 시달렸던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이를테면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사람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우리 NPS에서는 폭력적인 행위를 되풀이해야 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특히 정신운동 간질에 걸릴 위험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경찰이나 갱단, 폭도들, 폭주족 등이 그 예지요. 이런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병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또한 세상에는 성질 자체가 고약한 사람들도 많다는 주장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랄프가 말했다. 엘리스는 맥퍼슨이 국민학교 교사를 했으면 딱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는 무언가를 가르치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연구하는 사람으로서는 약간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맥퍼슨은 자신의 하얀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넘기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정신운동 간질이 얼마나 보편화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추측컨대 미국 인구의 1 내지 2퍼센트는 이 증세로 고통을 겪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2백 내지 4백만의 미국인이 해당되는 셈이지요." "맙소사." 랄프가 중얼거렸다. 엘리스는 커피를 마시며 그 '맙소사'라는 말을 생각해 보았다. 빌어먹을, 맙소사라니... 맥퍼슨은 꼬냑을 가져온 웨이터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계속해서 말했다.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정신운동 간질은 발작을 일으키는 동안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원인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질환에 수반되는 또 한가지 증세는 과도한 성욕과 병리적인 중독 증세입니다." 랄프가 갑자기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맥퍼슨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질환을 가지고 있던 한 여성의 사례가 있습니다." 맥퍼슨이 말했다. "그 여자는 발작 상태에서 하룻밤 동안에 12명의 남자와 성관계를 맺고도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겁니다." 랄프는 자신의 꼬냑을 꿀꺽 삼켰다. 엘리스는 랄프가 한창 유행하는 도발적인 폭넓은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홍보 활동을 맡고 있는 40대의 이 사나이는 그 여성 환자를 생각하며 꼬냑을 들이키고 있는 것이었다. "병리적인 중독이란 극소량의 음주로 인해 초래되는 과도한 취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한 두 모금의 술에 의해서도 그런 증세가 나타날 수 있지요. 그 정도의 술이 발작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엘리스는 자신이 앞두고 있는 최초의 제3단계 수술을 생각해 보았다. 바로 벤슨이었다. 덩치도 조그맣고 온유하기 짝이 없는 성격을 가진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벤슨이, 술을 마시면 사람들을 폭행한다. 남녀를 가리지도 않고 그저 눈에 띄는 대로 무조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뇌에다 전선을 연결하는 것으로 그런 사람을 치료한다는 생각 자체가 터무니없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랄프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 수술로 그런 폭력적인 행동을 치료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습니다." 맥퍼슨이 대답했다.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소. 하지만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수술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내일 아침 병원에서 이 수술이 시도될 겁니다." "그렇군요." 랄프는 마치 이 저녁식사의 이유를 이제사 불쑥 깨달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이건 언론을 고려하더라도 무척 민감한 문제입니다." 맥퍼슨이 말했다. "그렇겠군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랄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수술은 누가 맡게 됩니까?" "내가 합니다." 엘리스가 말했다. "음..." 랄프가 말했다. "우리 파일들을 점검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최근에 찍은 당신의 사진과 보도 자료로 쓸 수 있는 명료한 약력이 필요하겠군요." 랄프는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엘리스는 그런 랄프의 반응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생각하는 거라곤 그런 것뿐이란 말인가? 최근에 찍은 사진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맥퍼슨은 여유있는 태도를 잃지 않고 있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뭐든지 다 구해 주겠소." 맥퍼슨의 말이었다. 그날 모임은 그렇게 끝이 났다. 5 로버트 모리스가 병원 카페테리아에 앉아 애플 파이를 먹고있을 때, 무선 호출기가 삑삑거리고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 전기음은 모리스가 벧트에 차고 있는 호출기의 작동을 멈출 때까지 고집스럽게 울어댔다. 모리스는 호출기를 꺼버리고 계속해서 파이를 먹었다. 잠시 후 삐삐가 다시 울어대기 시작하자, 모리스는 하는 수 없이 포크를 놓고 욕설을 삼키며 벽에 걸린 전화기를 향해 걸어갔다. 한때는 모리스도 벧트에 찬 호출기를 무척이나 대단한 물건으로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가씨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을 때 호출기가 울어대기라도 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 신호음은 그가 대단히도 바쁜 인물, 사람의 생사가 걸린 일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라도 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하면 모리스는 불쑥 잠깐 실례한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기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그만큼 일말의 책임감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자리를 함께 하던 아가씨들도 그의 그런 모습을 좋아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고 나자, 호출기는 전혀 대단한 물건이 아닌 것으로 되어 버렸다. 때와 장소도 가릴 줄 모르는 그 조그만 기계는 너무나도 비인간적인 것으로 느껴졌고, 마치 그의 삶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기분마저 느끼게 했다. 그는 한시도 상사들의 호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고, 심지어는 새벽 2시에 투약 지시를 확인하기 위한 간호사의 호출이나, 환자인 어머니의 수술 후 간호 방법을 묻는 환자 가족의 호출 등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한번은 회의에 참석하라는 통보를 위한 호출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호출을 받았을 때 그는 이미 그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중이었던 일도 있었다. 이제 하루 중 가장 기분좋은 시간은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서 단 몇 시간 동안이라도 그 호출기를 집어던져 버릴 수 있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그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모리스는 그때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모리스는 건너편 자신의 테이블에 남아 있는 애플 파이에 눈길을 주며 교환 전화번호를 눌렀다. "모리스 박사입니다." "모리스 박사님, 2471번이에요." "고맙소." 그것은 7층 간호사실의 교환 번호였다. 모리스는 자신이 웬만한 교환 번호는 다 암기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대학 병원 내의 전화선은 사람을 해부해 놓은 것만큼이나 복잡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 적이 없는데도 대부분의 교환 번호를 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모리스는 7층으로 전화를 걸었다. "모리스 박사요." "아, 박사님. 어떤 여자분이 해롤드 벤슨 씨가 부탁한 물건이라며 조그만 여행용 가방을 가지고 왔어요. 개인적으로 필요한 물건이 들어 있다는데, 전달해 줘도 될까요?" "내가 지금 올라가겠소." 모리스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박사님." 모리스는 자기 테이블로 돌아가 남은 파이 찌꺼기를 쟁반에 담았다. 그리고는 쓰레기통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찌꺼기를 버렸다. 그 순간 다시 삐삐가 울어댔다. 모리스는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모리스 박사요." "모리스 박사님, 1357번입니다." 그것은 신진대사 담당 부서의 교환 번호였다. 모리스는 다이얼을 돌렸다. "모리스 박사입니다." "나는 핸리 박사입니다." 낯선 목소리였다. "스테로이드 정신질환으로 보이는 여성 환자가 있는데, 당신이 좀 봐줄 수 없을까 하고 연락했습니다. 비장 절제 수술 후 용혈성 빈혈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안됩니다." 모리스가 말했다. "내일도 일정이 꽉 짜여져 있어요." 그것은 입버릇처럼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었다. "피터스에게 연락해 보셨습니까?" "아뇨..." "피터스 박사는 스테로이드 질환에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연락해 보십시오." "알았습니다. 고맙소." 모리스는 전화를 끊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7층 버튼을 눌렀다. 그때 세 번째로 그의 호출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모리스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6시 30분이었다. 정규 근무가 끝난 시각이었지만, 그래도 모리스는 그 호출에 응답해 보기로 했다. 상대방은 소아과 레지던트인 켈소였다. "테니스 한판 어때?" 켈소가 말했다. "좋지. 몇 시에 볼까?" "음... 한 30분 후쯤?" "자네가 공만 준비해 준다면." "공은 내 차 안에 있어." "그럼 코트에서 보자구." 모리스가 말했다. 그리고는 어쩌면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어, 하고 덧붙였다. "너무 많이 늦지는 말게. 금방 어두워질 테니까." 켈소가 말했다. 모리스는 가능한 한 서둘러 보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7층은 조용했다. 대부분의 다른 병동들은 이 시간이면 환자 가족이나 내방객들 때문에 무척 소란스럽고 붐빌 터였지만, 7층은 언제나 조용했다. 간호사들은 그런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신중한 배려를 기울이고 있었다. 근무하고 있던 간호사가 그를 보더니 소파에 앉아 있는 아가씨를 향해 고개짓을 해보였다. "저 사람이 그 여자분이에요, 박사님." 아주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로, 얼핏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리도 무척 늘씬했다. "나는 모리스 박사라고 합니다." "안젤라 블랙이에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극히 형식적인 태도로 모리스와 악수를 나누었다. "해리에게 이걸 가져왔어요." 그녀는 조그만 파란색 여행가방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받았거든요." "좋습니다." 모리스는 그녀에게서 가방을 받아들며 말했다. "내가 가져가 보지요." 그녀는 잠깐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 사람을 만날 수 없나요?"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군요." 벤슨은 지금쯤 머리를 잘랐을 터였다. 수술을 앞두고 있는 환자가 머리를 자르고 나면, 대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잠깐도 안될까요?" "그에게는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합니다." 모리스가 말했다. 아가씨의 얼굴에는 실망하는 빛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럼 말씀 좀 전해 주시겠어요?" "그러죠." "내가 내 옛날 아파트로 돌아갔다고 말해 주세요. 그렇게만 말하면 알아들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잊어 버리진 않으시겠죠?" "잊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전해 드리지요." "고마워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길다란 속눈썹과 짙은 화장에도 불구하고 아주 매력적인 미소였다. 왜 젊은 여자들은 자신의 얼굴을 저렇게 못살게 구는 것일까?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그녀는 짧은 스커트와 긴 다리를 자랑이라도 하듯 자신있는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모리스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제법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집어들었다. 710호실 앞에 앉아 있던 경찰관이 모리스를 발견하고 물었다. "어떻게 돼 갑니까?"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모리스가 대답했다. 경찰관은 모리스가 방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가방을 힐끗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리 벤슨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서부 영화를 보고 있었다. 모리스는 텔레비전의 볼륨을 줄이며 말했다. "아주 예쁜 아가씨가 당신에게 이걸 가져왔소." "안젤라?" 벤슨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녀는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지. 속은 그렇게 복잡한 편이 아니지만, 겉모양만은 괜찮은 여자요." 벤슨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모리스는 그에게 가방을 건네주었다. "다 챙겨왔나?" 모리스는 벤슨이 가방을 열고 내용물을 침대 위에 꺼내 놓는 것을 지켜보았다. 파자마 한 벌과 전기 면도기, 남성용 쉐이브 로션, 그리고 페이퍼백 소설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이어서 벤슨은 까만 가발을 가방에서 꺼냈다. "그건 뭣니까?" 모리스가 물었다. 벤슨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조만간 필요할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들이 조만간 나를 이곳에서 내보내줄 것 아니오?" 모리스도 그를 따라 웃었다. 벤슨은 그 가발을 도로 가방에 집어넣고, 대신 조그만 플라스틱 통을 하나 꺼냈다. 뚜껑을 열자, 다양한 크기의 십자 드라이버가 가지런히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건 어디에 쓸 겁니까?" 모리스가 물었다. 벤슨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드러낸 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이해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뭔데요?" "나는 언제나 이걸 가지고 다닙니다. 말하자면 호신용이지요." 벤슨은 드라이버를 도로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 드라이버를 만지는 벤슨의 태도는 경건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신중했다. 모리스는 환자들이 이상한 물건들을 병원으로 가져오는 일이 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일이 많았다. 환자들은 그런 물건들이 일종의 토템과도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런 물건은 흔히 환자의 취미나 가장 좋아하는 활동과 관련된 경우가 많았다. 뇌종양으로 입원한 어느 요트 애호가는 돛을 수리하는 도구들을 가지고 왔고, 심장병으로 입원한 어떤 여자는 테니스 공을 한 통 가지고 온 일이 모리스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뭐 대충 그런 식이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리스가 말했다. 벤슨은 미소를 지었다. 6 그녀가 들어왔을 때 텔레콤프는 텅 비어 있었다. 컴퓨터와 프린터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고, 화면에는 의미없는 숫자들만 잔뜩 나열되어 있었다. 그녀는 방 한쪽 구석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온 다음, 벤슨의 최근 사이코덱스를 컴퓨터에 넣었다. NPS가 개발한 정신과 테스트는 사이코덱스 테스트 말고도 컴퓨터로 분석되는 것이 몇 개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맥퍼슨이 이른바 '양날을 가진 사고'라고 부르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번 사례의 경우 그의 의도는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방식, 즉 두 가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는 두뇌를 개발하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두뇌를 점검하고 그 작동을 분석하고,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여 축적된 두뇌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보다 나은, 그리고 보다 효율적인 컴퓨터를 개발하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맥퍼슨의 말처럼 "두뇌가 컴퓨터의 모델인 것과 마찬가지로 컴퓨터는 두뇌의 모델"인 셈이었다. NPS는 컴퓨터 과학자와 신경생물학 학자들이 이미 몇 년 전부터 함께 일해오고 있었다. 그러한 관계의 산물이 폼 Q와 조지 및 마르타 같은 프로그램, 그리고 새로운 정신외과적 기술, 사이코덱스 등이었다. 사이코덱스는 비교적 간단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정신과적인 질문에 대한 솔직한 답변을 요구하고, 그 답변들을 복잡한 수학적 공식에 의거하여 계산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데이타가 컴퓨터에 입력되는 동안 로스는 복잡한 수식들이 연이어 화면에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로스는 그 수식들은 무시해 버렸다. 그 숫자들은 최종적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중간 과정, 즉 컴퓨터의 메모 용지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로스는 게르하르드가 거기에 대한 설명을 하던 때를 생각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공간 속에서 30행 30열의 행렬을 회전시킨 다음 요소들을 추론하여 직각으로 만들고 그 요소들에 가중치를 준다는 것이다. 사실 로스는 아무리 그런 설명들을 들어도 너무나 복잡해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로스는 이미 오래 전에 컴퓨터가 작동하는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동차나 진공 청소기, 혹은 자기 자신의 두뇌를 사용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화면에는 '계산이 끝났습니다. 디스플레이 시퀀스를 불러 주십시오'라는 글자가 점멸하고 있었다. 로스는 디스플레이 시퀀스에 세 자리 숫자를 눌렀다. 컴퓨터가 세 자리 숫자는 81퍼센트의 분산 수치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화면에는 급경사를 이룬 산 모양의 3차원 영상이 나타났다. 로스는 그 화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수화기를 집어들고 맥퍼슨을 불렀다. 맥퍼슨은 그 화면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엘리스가 그의 어깨 너머로 넘겨다 보고 있었다. "명백하죠?" 로스가 말했다. "완벽하군." 맥퍼슨이 말했다. "이 테스트는 언제 한 겁니까?" "오늘 한 거예요." 로스가 대답했다. 맥퍼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싸움을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거로군, 그렇지 않소?" 로스는 대답 대신 버튼을 눌러 두 번째 산봉우리를 불러냈다. 그것은 처음 것보다 훨씬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이게 먼저번에 한 테스트 결과예요." "이 수치에 의하면 상승 곡선이..." "정신 질환이라고 볼 수 있죠." 로스가 말했다. "지금은 훨씬 더 명백해진 셈이군." 맥퍼슨이 말했다. "한 달 전보다 훨씬 뚜렷해졌어." "그렇죠." 로스가 말했다. "당신은 벤슨이 이 테스트를 가지고 장난을 쳤다고 생각하오?" 로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최근 네 번의 테스트 결과를 차례로 보여 주었다. 추세가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테스트가 거듭될수록 산봉우리의 경사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음, 그렇다면," 하고 맥퍼슨이 말했다. "그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군. 당신은 아직도 그 사람에 대한 수술을 해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는 것 같군요." "나의 확신은 점점 더 굳어지고 있어요." 로스가 말했다. "그는 의심할 나위 없는 정신병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그의 머리에 전선을 연결한다면...." "알았소." 맥퍼슨이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있소." "...그는 자신이 기계로 변해 버렸다고 생각하게 될 거예요." 맥퍼슨은 엘리스를 돌아보았다. "토라진으로 이러한 상승치를 감소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오?" 토라진은 대표적인 진정제였다. 정신질환자 중에는 이 약으로 보다 맑은 사고를 할 수 있게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맥퍼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역시 마찬가지요. 자네트, 당신 생각은 어떻소?" 로스는 화면을 응시한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테스트가 작동하는 방식은 참으로 기묘했다. 산봉우리는 피실험자의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수학적인 수치였다. 그것들은 손가락이나 발가락 혹은 키나 몸무게와 같은 한 인간의 진정한 특징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네트?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맥퍼슨이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나는 두 분께서 이번 수술에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 거요?" "인정을 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벤슨에게 그런 수술을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할 뿐이에요." "토라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오?" 맥퍼슨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건 도박이에요." "시도해볼 가치도 없는 도박이라는 거요?" "어쩌면 가치는 있는지도 모르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구요. 하지만 도박은 도박이에요." 맥퍼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스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아직도 벤슨에게 수술하기를 원합니까?" "예." 엘리스는 화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직 원하고 있습니다." 7 모리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병원 코트에서 테니스를 치는 것은 이상한 느낌을 준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앞에 우뚝 버티고 서 있는 병원 건물은 언제나 그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수도 없이 늘어선 창문들, 그 창문들 뒤에는 모리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소리도 적지 않게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혹은 소리의 부재가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병원 옆으로는 고속도로가 뚫려 있었기 때문에 자동차의 소음이 라켓에 와 닿는 공의 타격음을 삼켜 버렸던 것이다. 이제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시야에 많은 장애를 느낄 정도였다. 보이지 않던 공이 불쑥 자신의 코트로 넘어오곤 하는 것 같았다. 켈소는 아직도 공을 쫓아가는데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모리스는 농담삼아 켈소가 평소에 당근을 너무 많이 먹는 것 같다고 투덜대곤 했지만, 이유야 어쨌건 간에 늦은 시간에 켈소와 테니스를 치는 것은 모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둠은 철저하게 그의 편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모리스는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미였다. 모리스는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경쟁력에 대한 부담을 털어버렸다. 모리스는 한시도 경쟁을 멈추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게임을 할 때도, 일을 할 때도, 여자를 놓고도 그는 끊임없이 경쟁을 벌였다. 로스도 그에게 그런 그의 성격을 몇 번인가 지적한 적이 있었다. 정신과 의사들 특유의 교묘한 방법으로 그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슬며시 화제를 돌려 버리곤 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모리스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것은 그 자신의 인생의 문제였고, 그 함축된 의미---뿌리 깊은 정서 불안, 스스로를 인정하고자 하는 욕구, 우월감 등등---가 무엇이든 간에 거기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는 경쟁에서 쾌락을, 승리에서 만족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게다가 적어도 지금까지는 자신의 인생에서 패배보다는 승리를 더 많이 맛봐온 셈이었다. 그가 NPS에 합류한 것은 도전할 대상이 뚜렷했고 또한 그에 대한 잠재적인 보상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유의 일부로 꼽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40세 이전에 외과 교수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진 모리스였다. 그의 과거의 경력도 전혀 남부러울 게 없었고---엘리스가 그를 받아들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미래에 대해서도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외과 분야의 주요한 이정표를 세우는 작업과 관계를 맺는 것도 전혀 손해될 것이 없는 일이었다. 모리스는 유쾌한 기분으로 30분 가량 열심히 테니스를 쳤다. 그러고 나니 피곤하기도 했지만, 주위는 이제 더 이상 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손짓으로 켈소에게 그만치자는 신호를 보냈다. 고속도로의 소음 때문에 말로 하는 것보다는 몸짓으로 의사를 소통하는 것이 훨씬 편했다. 두 사람은 네트 앞에서 악수를 나누었다. 모리스는 켈소가 흥건히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멋진 게임이었네." 켈소가 말했다. "내일도 같은 시간에, 어때?" "장담은 못하겠어." 모리스가 대답했다. 켈소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를 하더니 이내 이렇게 말했다. "아, 맞아. 자네, 내일은 무척 바쁘겠군." "그렇겠지." 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기랄, 그 소문이 소아과 레지던트의 귀에까지 들어갔단 말인가? 모리스는 잠시 엘리스가 느끼고 있을 기분과 똑같은 심정이 되었다. 대학 병원의 모든 직원이 이번 수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데서부터 비롯되는 부담감이었다. "그럼, 그 일이 잘 되길 빌겠네." 켈소가 말했다. 모리스는 병원을 향해 걸어오다가, 멀리 주차장을 가로질러 절뚝이는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는 엘리스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막 자신의 자동차에 올라 타 집을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 1971년 3월 10일, 수요일 이식 1 아침 6시. 자네트 로스는 3층 수술실에서 초록색 수술복을 입은 채 커피와 도너츠를 먹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외과의 라운지는 무척 붐볐다. 수술 시간은 여섯 시로 잡혀 있었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15분이나 20분 때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외과 의사들은 둘러앉아 신문을 보거나 주식 시세 혹은 골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따금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 위의 갤러리에서 자신의 수술실 준비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의사들도 눈에 띄었다. 그 방에서 여자는 로스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녀 때문에 방안의 남성적인 분위기가 약간 변화된 것 같기도 했다. 로스는 자신이 그 방에서 유일한 여자라는 사실이 신경쓰였다. 남자들이 자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조용하고 더 정중하며 덜 쾌활하고 덜 짓궂은 모습을 가장하고 있는 것도 그녀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설사 그들이 짓궂은 모습을 보인다 하더라도 눈썹 하나 까딱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마치 침입자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괜히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런 침입자 노릇을 해온 듯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는 사실에 대한 실망스러움과 안타까움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던 외과 의사였다. 만약 로스가 아들이었다면 그녀의 아버지가 세웠던 인생 계획에 보다 부합하는 자녀 역할을 할 수 있었을 터였다. 주말 아침이면 그를 병원으로 데려와 수술실 구경도 시켜 주고 했을 것이었다. 그런 일은 오로지 아들에게만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딸아이는 외과 의사로서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 다른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닌 침입자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로스는 라운지에 앉아 있는 의사들을 한바퀴 쭉 둘러보다가, 불편한 심기를 감추기 위해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7층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닥터 로스입니다. 벤슨 씨 준비되었습니까?" "방금 떠났습니다." "언제 나갔죠?" "한 5분쯤 되었어요." 로스는 전화를 끊고 자기 테이블로 돌아왔다. 저쪽에 엘리스가 나타나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컴퓨터를 점검하느라 5분 정도 지연될 것 같소." 엘리스가 말했다. "환자는 준비되었소?" "5분 전에 나갔대요." "모리스 못봤습니까?" "아직 안 보이던데요." "얼른 좀 내려왔으면 좋겠는데." 엘리스가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로스는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모리스는 벤슨과 간호사 한 사람, 그리고 경찰관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었다. 벤슨은 바퀴 달린 이동식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모리스가 경찰관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 층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죠?" "우리는 지금 곧장 무균실로 내려갈 겁니다." "왜 나는 가면 안되죠?" 그 경찰관은 약간 머리가 둔한 것 같았다. 아침 내내 웬지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본격적인 수술 과정으로 접어들자, 자신은 무기력한 이방인인 것 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당신은 3층의 갤러리에서 지켜보도록 하십시오. 데스크의 간호사에게 내가 허락했다고 말하면 들여보내줄 겁니다." 경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는 2층에서 멈춰섰다. 문이 열리자 초록색 수술복을 입은 의사들이 복도를 오가는 것이 보였다. '여기는 무균 지역입니다. 허락 없이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라고 쓰인 커다란 표지판이 서 있었다. 글씨는 빨간색으로 씌어 있었다. 모리스와 간호사는 벤슨의 침대를 밀어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경찰관은 약간 초조한 표정으로 그냥 남아 있었다. 그가 3층으로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자 문이 닫혔다. 모리스는 벤슨과 함께 복도를 내려왔다. 잠시 후 벤슨이 말했다. "난 아직 정신이 말짱합니다." "물론 그럴 겁니다." "하지만 나는 깨어 있고 싶지가 않군요." 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벤슨은 30분 전에 수술 준비용 주사를 맞았다. 이제 곧 그 약물이 효력을 내기 시작하면 서서히 졸리움을 느낄 것이다. "입안은 어떻습니까?" "바짝 말라 있소." 그것은 아트로핀이 효력을 내고 있다는 증거였다. "곧 괜찮아질 겁니다." 모리스 자신은 한번도 수술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수술을 시술한 것은 수백번도 넘지만, 자신이 직접 수술대에 올라가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모리스는 얼마 전부터 입장이 바뀌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참담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곧 괜찮아질 겁니다." 모리스는 다시 한번 그렇게 말하고는 벤슨의 어깨를 잡아 주었다. 벤슨은 멍한 눈길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제9수술실로 들어갔다. 제9수술실은 이 병원에서 가장 큰 수술실이었다. 사방 30피트는 족히 될 만한 공간에 각종 전자 장비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었다. 모두 12명이나 되는 수술팀이 다 들어오면 그 넓은 방이 꽉 차는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술실 간호사 두 사람이 회색 타일이 깔린 동굴 모양의 공간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살균 테이블을 설치하고 그 주위에 의자를 배열하고 있었다. 제9수술실에는 수술대가 없었다. 수술대 대신 부드러운 쿠션이 깔린 의자가 놓여 있었다. 마치 치과용 의자처럼 생긴 의자였다. 자네트 로스는 수술실과 분리된 살균실의 유리문을 통해 간호사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녀 옆에서는 살균을 마친 엘리스가 뭐라고 투덜대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의 모리스가 더럽게도 늦게 온다는 불평이었다. 엘리스는 수술 직전만 되면 입이 제법 더러워지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그런 신경질적인 모습을 다른 사람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로스는 이미 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몇 번의 수술에서 엘리스의 그런 모습을 확인한 바 있었다. 수술 전에는 잔뜩 긴장하여 욕을 지껄이다가도 일단 수술이 시작되고 나면 얼음과도 같은 냉정을 되찾는 엘리스였다. 엘리스는 팔꿈치로 수도꼭지를 잠그고 팔이 문에 닿지 않도록 엉덩이부터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간호사가 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는 손을 닦으며 로스를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들어 유리벽이 설치된 머리 위의 갤러리를 올려다 보았다. 로스는 그 갤러리에 수술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윽고 모리스가 내려와 살균을 시작했다. 로스가 말했다. "엘리스는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척 궁금해 하더군요." "환자를 위해 관광 안내를 했지요." 모리스가 대답했다. 순회 간호사 한 사람이 살균실로 들어와 말했다. "로스 박사님, 방사능 연구실에서 엘리스 박사님을 위한 유니트를 가지고 왔는데, 박사님이 그걸 지금 원하실까요?" "준비만 다 되었으면 괜찮겠죠." 로스가 말했다. "물어보겠어요." 간호사는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갔다. 잠시 후, 그녀가 빼꼼히 고개를 들이밀고 다시 말했다. "준비는 다 되었대요. 하지만 박사님의 장비가 차단되어 있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군요." 로스는 수술실의 모든 장비가 이미 1주일 전에 다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플루토늄 교환기는 많은 방사능을 분출하지 않는다. X-레이 판을 뿌옇게 만들 정도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도로 섬세한 과학 장비에는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물론 인체에 대한 위험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건 다 차단되어 있어요." 로스가 말했다. "그 사람에게 수술실로 가져오라고 하세요." 로스는 옆에서 살균을 하고 있는 모리스를 돌아보았다. "벤슨 씨는 어때요?" "약간 초조한 모양이오." "그렇겠지요." 로스가 말했다. 모리스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수술용 마스크 위로 드러나 있는 그의 두 눈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스는 손의 물기를 털며 수술실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방사능 연구실 사람이 바퀴 달린 쟁반에 차징 유니트를 담아 오는 장면이었다. 그것은 납으로 만든 조그만 상자 속에 들어 있었다. 그 상자의 옆구리에는 '위험 방사능 물질'이라는 글자와 방사능을 나타내는 세 잎 오렌지 심볼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어쩐지 우스꽝스러운 인상을 주었다. 차징 유니트는 비교적 안전한 물건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엘리스는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가며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는 고무 장갑에 두 손을 찔러넣더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제자리를 찾았다. 그는 방사능 연구실 사람에게 "그거 살균된 겁니까?" 하고 물었다. "뭐라구요?" "그 유니트가 살균되었는지를 묻는 겁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저쪽 간호사에게 주어서 살균하도록 하시오. 반드시 살균이 되어야 합니다." 로스는 손을 닦으며 수술실의 한기에 으스스 몸을 떨었다. 대부분의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엘리스도 온도가 낮은 방을 좋아했다. 사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추울 정도였다. 하지만 엘리스가 언제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내가 쾌적하면 환자도 쾌적해요." 엘리스는 살균을 하지 않은 순회 간호사가 환자의 X-레이를 게재하는 동안 뷰잉 박스 앞에 서 있었다. 엘리스는 이미 몇 번이나 관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그 필름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그것들은 완벽하게 정상적인 두개골 필름이었다. 뇌실에 공기가 주사되었기 때문에 촉수가 어두컴컴하게 서 있었다. 수술팀의 다른 의사들이 하나하나 수술실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살균 간호사 두 명, 순회 간호사 두 명, 남자 간호사 한 명, 엘리스, 모리스를 포함한 보조 외과 의사 두 명, 전기 기술자 두 명, 컴퓨터 프로그래머 한 명 등이 수술팀의 멤버들이었다. 마취사는 아직 벤슨과 함께 바깥에 있었다. 전기 기술자 한 사람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물었다. "이제 언제든지 시작해도 좋습니다. 박사님." "환자가 들어와야 시작할 것 아니오." 엘리스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숨죽인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로스는 수술실 안에 설치된 7대의 텔레비전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 스크린들은 중요도에 따라 크기도 제각기 다르고 설치된 위치도 달랐다. 가장 작은 스크린은 수술 장면을 녹화하는 폐쇄 회로를 모니터 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 스크린에는 텅빈 의자만이 잡히고 있었다. 수술용 의자 근처에 설치된 또 하나의 스크린은 뇌파, 즉 EEG를 모니터 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지금은 열 여섯 개의 펜이 하얀 직선을 그려내고 있을 뿐이었다. 또 심전도, 주변 동맥압, 호흡, 심장 출력, 중앙 정맥압, 직장 체온 등의 수술의 기본적인 변수들을 나타내는 대형 스크린도 준비되어 있었다. 이것 역시 EEG 스크린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직선만을 그려내고 있었다. 또 한 쌍의 스크린은 아직까지 완전히 죽어 있었다. 여기에는 수술 중의 흑백 영상 강화 X-레이가 나타날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두 개의 칼라 스크린에는 대뇌 변연계 프로그램 출력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는 아직 좌표가 입력되지 않고 있었다. 스크린 상에는 컴퓨터에 의한 무작위 좌표가 점멸하는 동안 두뇌의 영상이 3차원적으로 표현될 것이다. 로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 컴퓨터가 지금 수술실에 들어와 있는 또 한 사람의 인간인 것처럼 느껴졌다. 수술이 진행될수록 그런 느낌은 점점 더 강해지곤 했다. 엘리스는 X-레이 점검을 마치고 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시계는 6시 1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벤슨은 아직 마취사의 점검을 받느라 수술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엘리스는 다른 사람들과 간단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방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친절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고, 로스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녀는 문득 갤러리를 올려다보았다. 병원의 이사와 외과과장, 약품과장, 연구과장 등이 모두 모여 유리창 너머로 수술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스는 그때서야 엘리스가 그렇게 친절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벤슨이 수술실로 들어왔을 때는 시계가 6시 2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잔뜩 약기운에 취해 몸이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고, 눈꺼풀도 무척 무거워 보였다. 그의 머리에는 초록색 수건이 둘러져 있었다. 엘리스는 벤슨이 이동식 침대에서 수술용 의자로 옮겨지는 과정을 감독했다. 벤슨은 자신의 팔과 다리가 가죽 끈으로 묶여질 때 잠시 의식을 되찾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당신이 미끄러져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엘리스가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상처를 입는 것을 바라지 않거든요." "아, 예." 벤슨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엘리스가 간호사들에게 고개짓을 해보이자, 그들은 벤슨의 머리에서 살균된 수건을 벗겨냈다. 머리털을 모두 잘라 버린 그의 머리는 무척 작아 보였다. 로스는 환자의 머리를 보면 언제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두피는 왼쪽 이마 부근의 면도날 자국 외에는 매끈했다. 엘리스의 파란색 'X' 표시가 오른쪽 귀 뒤에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벤슨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는 두번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기술자 가운데 한 사람이 모니터 도선을 전해질 반죽으로 그의 몸에 연결하기 시작했다. 그 작업은 금방 끝났다. 이제 벤슨의 몸뚱이는 다양한 색상의 갖가지 전선에 의해 전자 장비와 연결되었다. 엘리스는 텔레비전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제 EEG는 16개의 톱니 모양의 선을 그리고 있었다. 심장 박동도 기록되기 시작하고, 호흡이 들쑥날쑥하는 모습도 보였다. 체온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기술자들은 수술 이전의 변수들을 컴퓨터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연구실 수치가 이미 입력되어 있었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컴퓨터는 5초 간격으로 모든 생명 징후들을 모니터 할 것이고, 무언가 이상이 발생하면 즉시 신호를 보낼 것이었다. "자, 이제 음악을 틀어 주시오." 엘리스가 지시하자, 간호사 한 사람이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휴대용 카세트에 테이프를 밀어넣었다. 바하의 콘체르토가 감미롭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엘리스는 언제나 바하의 음악을 틀어놓고 수술하는 버릇이 있었다. 바하의 천재성보다는 정확성이 자신에게 전염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들은 이제 수술 개시를 향해 한발한발 다가서고 있는 셈이었다. 벽에 붙은 디지탈 시계는 6시 29분 14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옆에는 실질적으로 수술에 소요된 시간을 나타내는 디지탈 시계가 붙어 있었는데, 아직은 0:00:00을 가리키고 있었다. 로스는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살균 가운을 입고 장갑을 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장갑을 끼기가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살균을 하지 않는 일이 종종 있었고, 장갑에 손을 밀어넣는 순간 손가락이 얼른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 주지 않는 바람에 애를 먹곤 했던 것이다. 간호사는 마스크 때문에 눈만 빼꼼 내놓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그런 로스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로스는 엘리스를 비롯한 다른 의사들이 모두 환자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어 다행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로스는 수술실 바닥에 널려 있는 두꺼운 전선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수술실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 검은 전선들은 마치 뱀처럼 꿈틀대고 있는 느낌이었다. 로스는 수술 초기 단계에서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정위법 메카니즘이 작동하여 좌표가 결정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로스는 한쪽 구석에 서서 손가락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열심히 장갑 속에서 손을 놀릴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로스가 이 수술에 참여해야 할 실질적인 이유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맥퍼슨은 고집스럽게 언제나 실질적인 수술팀 이외의 의사 한 명을 수술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래야 단결력이 강화된다고 하는 것이 적어도 그가 표면상으로 내세우는 이유였다. 로스는 엘리스가 조수들과 함께 벤슨 쪽으로 다가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폐쇄 회로 모니터에도 그들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나중을 위해 수술의 전 과정이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시작해도 될 것 같군." 엘리스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사를 놓으세요." 의자 뒤에서 움직이고 있던 마취사가 벤슨의 척추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요추골 사이에 바늘을 찔렀다. 벤슨이 몸을 꿈틀 하며 가벼운 신음 소리를 냈다. 이어서 마취사가 말했다. "얼마나 주사할까요?" 컴퓨터 콘솔에는 <수술이 시작되었습니다>라는 글자가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컴퓨터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되기 시작한 수술 소요시간 표시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30cc만 놓읍시다." 엘리스가 말했다. "자, X-레이를 찍어 주세요." X-레이 기계가 환자의 머리 앞과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어서 필름 판이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끼워졌다. 엘리스가 바닥에 설치된 버튼을 밟자, 텔레비전 스크린이 작동되기 시작하며 두개골의 모습을 비추는 흑백의 영상이 나타났다. 엘리스는 공기가 뇌실 안으로 주입되면서 촉수의 윤곽이 검게 드러나는 것을 화면으로 지켜보았다. 프로그래머는 컴퓨터 앞에 앉아 빠른 손놀림으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화면에는 <폐 사진이 준비되었습니다>라는 글자가 나타나 있었다. "좋아, 그럼 모자를 씌우지." 엘리스가 말했다. 환자의 머리 위에 상자처럼 생긴 관 모양의 정위법 기구가 씌워진 다음, 구멍을 뚫을 자리가 정해졌다. 엘리스는 그것을 확인한 다음 환자의 두개골에 국부 마취제를 주사했다. 이어서 피부를 잘라 뒤로 젖히고는 두개골의 하얀 표면을 노출시켰다. "드릴." 엘리스는 2밀리짜리 드릴로 두개골의 오른쪽에 두 개의 구멍을 뚫었다. 이어서 그는 정위법 기구, 즉 '모자'를 환자의 머리 위에 씌우고 안전하게 밑으로 내렸다. 로스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 박동과 혈압을 나타내는 수치들이 계속해서 점멸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정상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컴퓨터 역시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보다 복잡한 문제들을 다루게 될 것이었다. "위치를 점검해 봅시다." 엘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환자에게서 몇 발 뒤로 물러섰다. 벤슨의 빡빡 깎은 머리와 그 위에 씌워져 있는 금속 기구를 보며 약간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X-레이 기술자가 앞으로 나와 사진을 찍었다. 옛날에는 사람이 직접 X-레이 판을 들고 가서 눈으로 판의 위치를 확인해야 위치를 결정할 수 있었다. 그 방법은 시간도 많이 걸릴 뿐 아니라 컴퍼스와 각도기, 자 등의 도구를 이용하여 X-레이 판 위에 선을 긋고 그것을 측정한 다음 다시 점검을 해야 했다. 지금은 컴퓨터에 데이타만 입력시키면 훨씬 빠르고 정확한 분석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모두들 컴퓨터의 출력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X-레이 영상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대신 도형이 나타났다. 정위법 장치의 맥스필드 위치가 계산되었다. 이어서 실질적인 위치가 표시되고, 일련의 좌표가 나타난 다음, '정확한 위치가 선정되었습니다'라는 글자가 나왔다.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해 줘서 고맙소." 엘리스는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전극이 놓여있는 쟁반으로 다가갔다. 수술팀은 이제 브릭스 스테인리스 스틸 테프론 코팅 전극 배열을 이용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써보지 않은 재질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금, 플라티늄 합금, 심지어는 굴절 강철까지 이용해 보았다. 물론 검사에 의해 전극의 위치가 결정되던 시절의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과거의 검사 수술은 문자 그대로 피 튀기는 과정이었다. 두개골을 큼지막하게 떼내고 뇌의 표면을 노출시키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의사는 그 뇌의 표면 자체에서 목표점을 찾아야 했고, 그 다음에는 뇌의 표면에 직접 전극을 접합시켜야 했다. 만약 전극을 뇌 속의 깊숙한 부위에 넣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나이프로 뇌실까지 뇌를 절개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그것은 정말 복잡한 과정이 아닐 수 없었다. 당연히 수술 시간도 오래 걸렸다. 게다가 그런 수술을 받고 난 환자가 양호한 상태로 회복되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지금은 컴퓨터가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컴퓨터는 의사로 하여금 3차원의 공간상에서 정확한 위치를 결정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초창기에는 NPS도 이 분야의 다른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뇌 속의 깊숙한 부분을 두개골의 구조와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해왔다. 그들은 눈의 궤도와 귀의 도관, 그리고 시상 봉합점으로부터 목표 지점을 측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시도가 제대로 들어맞을 리 없었다. 인간의 두뇌는 두개골의 구조와 꼭같이 들어맞지 않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뇌 속의 깊은 지점을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뇌의 다른 지점과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럴 경우 논리적 목표 지점은 뇌 속의 액체가 차 있는 공간, 즉 뇌실이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스템에 의하면, 모든 것은 뇌실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되게 되어 있었다. 이제는 컴퓨터의 도움으로 뇌의 표면을 노출시키는 일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되어 버렸다. 그 대신 두개골에 조그만 구멍을 뚫어 전극을 삽입시키면 컴퓨터가 X-레이를 통해 그 전극들이 정확한 위치에 도달했는지를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엘리스는 최초의 전극 배열을 집어들었다. 로스가 서 있는 곳에서는 그저 단순한 전선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서로 엇갈린 접점을 가진 20개의 전선이 합쳐진 다발이었다. 각각의 전선은 겉으로 노출되어 있는 마지막 1밀리미터를 제외하고는 테프론으로 코팅이 되어 있었다. 각각의 전선은 또한 길이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확대경으로 관찰하면 전극의 끝이 마치 조그만 계단과도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엘리스는 커다란 확대경으로 배열을 점검했다. 그는 조명을 더 비춰 달라고 부탁하며 접점 하나하나를 면밀히 조사했다. 그런 다음에는 살균 간호사에게 그 배열을 테스트 유니트에 삽입하게 한 다음 모든 접점을 다시 점검했다. 이것은 사전에 이미 몇 번이나 되풀이된 확인 절차였지만, 엘리스는 언제나 실질적인 삽입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다시 한번 점검을 하곤 했다. 게다가 그는 정작 필요한 것은 두 개뿐이면서도 항상 네 개의 배열을 준비하도록 했다. 엘리스는 그만큼 신중한 사람이었다. 이윽고 엘리스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전선 준비는 다 됐소?" 그가 물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스는 환자 앞으로 다가가며 "그럼 이제 시작합시다." 하고 말했다. 수술이 여기까지 진행되는 동안 그들은 두개골에 구멍을 뚫기는 했지만 뇌와 척수 유동액을 덮고 있는 경뇌막은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엘리스의 조수들이 탐침을 이용하여 경뇌막에 구멍을 냈다. "유동액이 나오는군." 엘리스가 말했다. 두개골에 뚫어 놓은 구멍에서 투명한 액체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간호사가 얼른 그 액체를 닦아냈다. 로스는 뇌의 자기 방어 기능을 볼 때마다 놀라운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다른 신체 기관 역시 훌륭하게 보호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폐와 심장은 갈비뼈라는 울타리 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간장과 비장은 갈비뼈의 가장자리 밑에 숨어 있다. 또한 신장은 지방질과 두터운 근육에 의해 보호받고 있기도 하다. 그 정도만 해도 철저한 보호벽이라 할 수 있지만, 중앙 신경계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두터운 뼈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그 뼈의 내부에는 뇌척수를 가진 액낭 모양의 막피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 뇌척수는 압력을 받고 있기 때문에 뇌는 탁월한 안정성을 보장하는 일정 압력의 액체 시스템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셈이었다. 맥퍼슨은 그것을 양수가 차 있는 자궁 속의 태아와 비교한 적이 있었다. "아기는 언젠가 자궁에서 나와야 하지만 뇌는 그 자신의 특수한 자궁 바깥으로 나오는 일이 절대로 없지." 맥퍼슨이 한 말이었다. "이제 삽입하지." 엘리스가 말했다. 로스는 몇 발 앞으로 나아가 환자의 머리 주변에 모여 있는 나머지 수술팀과 합류했다. 그녀는 엘리스가 전극 배열의 끄트머리를 두개골에 뚫은 구멍으로 밀어넣고 살며시 힘을 주는 것을 보았다. 기술자는 계속해서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화면에는 '삽입 지점이 확정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나와 있었다. 환자는 움직이지도 소리를 내지도 않고 있었다. 그의 뇌는 통증을 느끼지 못할 것이었다. 뇌에는 통증을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체의 모든 부위에서 통증을 감지하는 기관이 그 자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로스는 엘리스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X-레이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하얗게 윤곽만 나타나는 전극 배열이 서서히 뇌 속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로스는 전면과 측면을 천천히 훑어본 다음 컴퓨터의 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컴퓨터는 뇌의 모형도를 그려 X-레이의 영상을 해석하고 있었다. 측두엽의 목표 지점은 빨간색으로, 그리고 전극이 삽입 지점으로부터 목표 지점으로 옮겨가야 할 노선은 파란색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엘리스의 작업이 완벽하게 수행되고 있는 셈이었다. "예쁜 그림이로군." 로스가 말했다. 컴퓨터는 전극이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재빠른 연결 화면으로 3중 좌표를 나타냈다. "완벽하군." 엘리스가 별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제 정위법 모자에 부착된 척도 축소 장치를 이용하고 있었다. 스케일러는 그의 손가락의 움직임을 전극 움직임의 변화로 반영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손가락을 2분의 1인치 가량 움직인다고 한다면, 스케일러는 그것을 2분의 1밀리미터로 변환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전극은 아주 느린 속도로 뇌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로스는 스크린에서 눈을 들어 엘리스의 작업 모습을 보여주는 폐쇄 회로 텔레비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 실물을 보는 것보다는 그렇게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쪽이 훨씬 간편했다. 하지만 벤슨의 입에서 "음--" 하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로스는 얼른 몸을 돌렸다. 엘리스가 동작을 멈추었다. "무슨 소리지?" "환자에게서 난 소립니다." 마취사가 벤슨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엘리스는 동작을 멈추고 허리를 숙여 벤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괜찮습니까, 벤슨 씨?" 엘리스는 유난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예, 괜찮소." 벤슨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약기운에 잔뜩 취해 있는 듯했다. "아픕니까?" "아니오." "좋습니다. 긴장을 푸십시오." 엘리스는 그렇게 말한 뒤 작업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로스는 벤슨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몹시 긴장했었다. 벤슨은 고통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로스는 그에게 투여된 진통제가 완전히 의식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쯤 잠이 든 상태로 만들어 주는 종류의 약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벤슨의 의식을 마비시킬 이유, 전신 마비의 위험을 무릅써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로스는 컴퓨터 스크린을 향해 몸을 돌렸다. 컴퓨터는 이제 목 부근에서부터 반전된 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전극의 트랙은 한쪽 귀퉁이에 나타나 있었고, 파란색으로 표시된 지점은 몇 개의 동심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엘리스는 지정된 트랙의 1밀리미터, 즉 25분의 1인치의 오차를 유지해야 했다. 그는 지금 0.5밀리미터를 벗어나 있었다. '50 트랙 에러.' 컴퓨터의 경고였다. 로스가 말했다. "조금 빗나갔군요." 전극 배열은 경로를 멈추었다. 엘리스는 스크린을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베타 값이 너무 높은가?" 하고 중얼거렸다. "감마가 너무 넓어요." "알았어." 잠시 후 전극은 다시 경로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40트랙 에러.' 다시 컴퓨터의 경고가 나왔다. 컴퓨터에 나타난 뇌의 영상이 전측면을 중심으로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20 트랙 에러.' "멋있게 수정해 가고 있군요." 로스가 말했다. 엘리스는 바하의 곡조를 따라 흥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0트랙 에러.' 컴퓨터는 에러가 조정되었다는 메시지를 낸 뒤, 측면을 중심으로 뇌의 영상을 한 바퀴 회전시켰다. 두 번째 스크린은 완전히 전방에서 본 뇌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잠시 후 스크린에는 '목표 지점에 접근중'이라는 메시지가 나왔다. 로스는 그 메시지를 전달했다. 잠시 후 화면에는 '목표 지점 도달'이라는 글자가 점멸했다. 엘리스는 한발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가슴 위로 팔짱을 꼈다. "이제 좌표를 점검해 봅시다." 하고 엘리스가 말했다. 수술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는 수술 이후 27분이 경과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프로그래머는 빠른 손놀림으로 자판을 눌러댔다. 스크린 상으로는 전극의 위치가 컴퓨터에 의해 표시되어 있었다. 그 표시는 '목표 지점 도달'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실제 위치와 마찬가지로 종료되어 버렸다. "그걸 일치시켜 봐." 엘리스가 말했다. 컴퓨터는 화면상에 나타난 그 표시를 환자의 X-레이 사진에 나타난 지점과 일치시켰다. 겹치는 부분이 완벽하게 들어맞고 있었다. 컴퓨터는 '한계 범위 내에서 일치'라는 메시지를 내보냈다. "됐군." 엘리스가 말했다. 그는 전극을 두개골에 단단히 고정시키는 조그만 플라스틱 단추를 돌렸다. 그 다음에는 치과용 시멘트를 그 위에 발랐다. 엘리스는 전극 배열에서 나오는 20개의 전선을 풀어서 한쪽 옆으로 밀어놓았다. "자,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겠군." 두 번째 이식이 끝날 무렵 나이프를 이용하여 환자의 두개골을 약간 절개하는 과정이 있었다. 중요한 혈관과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귀 옆의 전극 삽입 지점으로부터 목에 이르는 부위까지가 절개된 다음, 거기서부터는 오른쪽 어깨까지가 곧장 절개되었다. 엘리스는 날이 무딘 해부 기구를 이용하여 오른쪽 가슴 측면, 겨드랑이 근처의 피부 밑을 약간 들어냈다. "차징 유니트는 준비가 다 됐나?" 엘리스가 물었다. 차징 유니트가 그의 손으로 넘어왔다. 그것은 크기가 담배곽보다도 더 작았는데, 그속에는 방사능 동위원소 플루토늄 239 산화물 37그램이 들어 있었다. 방사능은 열을 발산하는데, 그 열은 열이온 장치에 의해 전력으로 직접 변환되도록 되어 있었다. 켄벡 고체 상태 DC/DC 회로가 출력을 필요한 전압으로 변환시켜줄 것이었다. 엘리스는 차징 유니트를 시험기에 넣고 이식 전 마지막 점검을 했다. 그는 그것을 손에 든 채 "무척 차갑군. 나 같으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겠어." 하고 중얼거렸다. 로스는 진공판으로 만들어진 절연재 때문에 바깥 면은 차갑게 느껴지지만, 그 내부의 방사능 캡슐은 화씨 500도의 열을 발산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정도의 열량이면 충분히 로스구이를 해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엘리스는 방사능이 새는 데가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계기들은 모두 정상보다 낮은 수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물론 일정량의 방사능이 자연적으로 흘러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 양은 상업용 칼라 텔레비전에서 방출되는 방사능의 양보다 더 적은 양이었다. 이윽고 엘리스는 이른바 '개목걸이'를 달라고 주문했다. 이 인식표는 벤슨이 자신의 몸속에 원자력 차징 유니트를 지니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그 인식표에는 이 사람의 몸속에 원자력 조정기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문귀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로스는 그 전화번호를 돌리면, 녹음된 메시지를 하루 스물 네 시간 동안 자동 응답으로 들려주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응답 내용에는 차징 유니트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총상이나 자동차 사고, 화재, 기타의 손상이 플루토늄을 방출할 수 있다고 하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플루토늄은 강력한 알파 미립자를 방출하는 물질이었다. 응답 내용은 이어서 의사나 검시관, 장의사 등이 반드시 알아야 할 주의 사항과, 차징 유니트가 제거되기 전에 시신을 화장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엘리스는 미리 절개해 놓은 가슴 근처의 부위에 차징 유니트를 삽입했다. 다음에는 그 장치를 고정시키기 위해 주변의 세포층을 봉합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런 다음 엘리스는 우표 크기만한 전자 컴퓨터에 관심을 돌렸다. 로스는 갤러리를 올려다 보다가 쌍둥이 마법사 게르하르드와 리차드가 진지한 표정으로 수술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엘리스는 그 컴퓨터를 확대경으로 면밀히 점검한 다음, 옆에 있던 기술자에게 건네주었다. 기술자는 그 소형 컴퓨터를 병원의 메인 컴퓨터와 연결했다. 로스가 보기에, 이 수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그 컴퓨터였다. 그녀는 3년 전부터 NPS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컴퓨터가 서류 가방만한 크기에서부터 손바닥에 올려 놓을 수 있는 현재의 모델로까지 줄어드는 과정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이 소형 컴퓨터는 그만큼 크기가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의 대형 컴퓨터가 지니고 있던 모든 기능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컴퓨터를 피하에 이식할 수 있는 것도 그 크기가 그렇게 소형화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덕분에 환자는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고 샤워도 할 수 있었으며 그밖에 자신이 원하는 모든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차징 유니트를 환자의 벧트에 부착하고 그것도 모자라 온몸에 연결선을 두르고 있어야 하다시피 했던 시절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진보가 아닐 수 없었다. 로스는 컴퓨터 스크린에 '작동 모니터의 장애는 전자적 점검을 위한 것입니다'라는 메시지가 점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스크린에는 회로의 도형이 나타났다. 컴퓨터가 각각의 경로와 요소를 점검했다. 한번의 점검에 1백만 분의 4초가 소요되었다. 따라서 모든 과정은 단 2초만에 모두 종결되었다. 컴퓨터에 '전자적 점검 음성 반응'이라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잠시 후에 컴퓨터에는 뇌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컴퓨터가 다시 수술 과정을 모니터하는 역할로 돌아간 것이었다. "좋아, 이제 전선을 연결하지." 엘리스가 말했다. 그는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으로 두 개의 전극 배열에서부터 플라스틱 유니트에 이르는 40개의 전선을 연결했다. 그런 다음 그는 전선을 환자의 목으로 늘어뜨려 피부 밑의 플라스틱 속으로 집어넣고, 봉합을 지시했다. 소요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는 1시간 2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 모리스는 벤슨의 침대를 회복실로 밀고 갔다. 수술 직후의 환자들을 수용하는 길고 천정이 낮은 방이었다. NPS는 심장병 환자나 화상 환자들을 위한 것과 비슷한 특수한 회복실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NPS 병동에서는 복잡한 전자 장비 때문에 한번도 그 회복실이 이용된 적이 없었다. 말하자면 벤슨이 최초의 사례인 셈이었다. 벤슨은 얼굴이 무척 창백해 보였지만 그것 말고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다. 머리와 목에는 붕대가 잔뜩 감겨 있었다. 모리스는 벤슨이 이동식 침대에서 정식 침대로 옮겨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방 건너편에서는 엘리스가 전화로 수술 경과를 메모하고 있었다. 교환 번호 1104번을 누르면 전화기를 통한 녹음 장치가 작동된다. 거기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을 구술하면, 나중에 비서가 타이프를 쳐서 벤슨의 기록에 삽입시키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엘리스의 목소리가 무슨 배경음처럼 나즈막히 깔리고 있었다. "...오른쪽 측두엽 부근을 절개하고, K-7 드릴로 2밀리미터짜리 구멍을 뚫었다. 브릭스 전극의 이식은 컴퓨터의 대뇌 변연계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수행되었다. 주어진 오차의 한계 내에서 컴퓨터가 전극의 삽입 위치를 결정하여 X-레이로 촬영하였다. 전극은 타일러 피베이션 캡과 70번 치과용 봉랍으로 고정되었다. 전환 전선은..." "이 환자, 어떻게 할까요?" 회복실 간호사가 물었다. "생명 징후 Q를 처음 한 시간 동안은 5분간, 두 시간부터는 15분간, 세 시간부터는 30분, 그 이후로는 매시간 간격으로 투여하시오. 환자가 안정을 찾으면 6시간 후에 원래 병실로 옮겨도 좋습니다."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지시를 메모했다. 모리스는 침대 옆에 걸터앉아 수술 경과를 간단하게 메모했다. 해롤드 F. 벤슨의 수술 경과에 대한 메모 수술전 병명 : 정신운동(측두엽) 간질 수술후 병명 : 상동 과정 : 오른쪽 측두엽에 브릭스 전극 배열을 이식하고, 컴퓨터와 플루토늄 차징 유니트를 피하에 삽입함. 수술전 투약 : 페노바르비탈 500mg, 아트로핀 60mg을 수술 한 시간 전에 투여. 마취 : 리도카인(1/1000) 에피네프린 국부 주사 혈액 상실 추정 : 250cc 용액 보충 : 200cc D5/W 수술 소요 시간 : 1시간 12분 수술후 상태 : 양호 메모를 마친 모리스는 로스가 간호사에게 "환자가 깨어나는 즉시 페노바르비탈 투여를 시작하세요." 하고 지시하는 것을 들었다. 무척 화가 난 목소리였다. 모리스는 로스를 바라보았다. "뭐가 잘못 됐습니까?" "아니에요." 로스가 대답했다. "화가 난 것 같군요." "나한테 시비를 거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있소." 모리스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페노바르비탈 투여를 확인한 것뿐이에요. 우리는 인터페이스가 가능해질 때까지 환자의 안정을 유지해야 하니까요." 말을 마친 로스는 거칠게 방을 나가 버렸다. 모리스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엘리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구술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모리스와 로스의 대화를 줄곧 듣고 있던 엘리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로스 박사님이 왜 저러죠?" 간호사가 물었다. "좀 피곤한 모양이군." 모리스가 말했다. 그는 벤슨의 머리 위 선반에 놓여 있던 모니터 장비를 조정했다. 그리고는 스위치를 넣고 잠시 기다린 다음, 벤슨의 어깨 주위에 임시 유도 장치를 부착했다. 수술을 하는 동안 모든 전선이 연결되기는 했지만, 아직은 작동을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그 전선들이 작동을 시작하기 전에 벤슨은 먼저 '인터페이스'가 되어야 했다. 이것은 40개의 전극 가운데 어떤 것이 간질의 발작을 저지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벤슨의 피하에 이식된 컴퓨터의 적당한 스위치와 연결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컴퓨터가 피부 밑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연결은 피부를 뚫고 작동할 수 있는 유도 장치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인터페이스는 내일까지는 행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윽고 장비가 벤슨의 뇌파를 모니터하기 시작했다. 침대 위의 스크린은 초록색 빛을 발하며 벤슨의 뇌파를 하얀 선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벤슨의 뇌파는 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벤슨이 눈을 뜨고 모리스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모리스가 물었다. "졸리는군요." 벤슨이 대답했다. "이제 곧 시작될 모양이지요?" "다 끝났습니다." 모리스가 말했다. 벤슨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는 것이었다. 방사능 연구실의 기술자가 들어와 게이저 카운터로 플루토늄의 방출을 점검했다.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모리스는 벤슨의 목에 개목걸이를 둘러 주었다. 간호사가 그것을 집어들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읽어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엘리스가 다가왔다. "아침 먹을 시간이지?" "예." 모리스가 대답했다. "아침 먹을 시간이군요." 두 사람은 함께 그 방을 나갔다. 3 문제는 그가 자신의 목소리를 몹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무척 거칠고 쇳소리가 났으며 발음도 정확하지 못한 편이었다. 맥퍼슨은 그래서 말을 하기보다는 마음속에 문장을 글로 썼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보는 것이 훨씬 낫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맥퍼슨은 녹음기의 마이크 버튼을 눌렀다. "로마 숫자 3. 철학적 의미." III. 철학적 의미 맥퍼슨은 말을 멈추고 자신의 사무실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커다란 뇌의 모형이 책상 한 귀퉁이에 놓여 있었다. 한쪽 벽을 따라 걸려 있는 선반에는 잡지가 잔뜩 늘어서 있었다. 텔레비전 모니터도 눈에 띄었다. 화면에는 아침에 행해진 수술 장면이 방영되고 있었다. 볼륨을 낮춰 놓았기 때문에 뿌연 화면만 소리없이 비춰지고 있었다. 맥퍼슨은 그 화면을 바라보며 구술을 시작했다. 이번 수술은 인간의 두뇌와 컴퓨터간의 직접적인 결합을 목표로 하는 최초의 시도이다. 그러한 결합은 영구적인 것이다. 물론 어떤 한 인간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누름으로서 컴퓨터와 상호작용을 주고 받는 경우, 그것만으로도 컴퓨터와 인간이 결합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맥퍼슨은 아무래도 너무 뻣뻣하다는 느낌이 들어 테이프를 앞으로 돌린 다음 수정을 가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누름으로서 컴퓨터와 상호작용을 주고 받는 사람은 컴퓨터와 결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결합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다. 영구적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번 수술 과정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을 제시한다. 여러분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좋은 질문이군. 맥퍼슨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텔레비전에 비춰지고 있는 수술 장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구술을 계속했다. 이런 경우 컴퓨터가 하나의 보철 기능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팔이 절단된 사람은 팔의 역할을 대신하는 기계 장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뇌에 손상을 입은 사람도 그로 인한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기계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수술도 그런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이해하기 쉽다. 말하자면 컴퓨터를 고성능의 목발 정도로 간주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 의미는 목발보다 훨씬 더 심원한 것이지만 말이다. 맥퍼슨은 말을 멈추고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방송실에 있는 누군가가 테이프를 바꿔 끼운 모양이었다. 수술 장면 대신 벤슨이 수술 직전에 정신과 인터뷰를 받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벤슨은 무척 흥분하여 담배를 피우며 격렬한 몸짓과 함께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맥퍼슨은 호기심이 일어 볼륨을 약간 높여 보았다. "...그들이 하는 짓을 알아야 합니다. 기계는 없는 곳이 없어요. 처음에는 인간의 하인으로 이용되던 것이 지금은 인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겁니다." 엘리스가 고개를 들이밀고 텔레비전 스크린을 바라보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사전' 그림을 보고 있습니까?" "할 일이 좀 있어서 말이오." 맥퍼슨은 그렇게 말하며 녹음기를 가리켰다.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닫고 나갔다. 벤슨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인간에게는 반역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기계들이 보다 높은 지능을 갖게 되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지요. 인공 지능을 개발하는 것이 나의 일입니다. 그리고---" 맥퍼슨은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때까지 볼륨을 죽였다. 그런 다음 다시 구술을 계속했다. 컴퓨터 하드웨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중앙 처리장치와 주변 장치를 구분한다. 메인 컴퓨터는 설사 그것이 어느 후미진 구석---이를테면 빌딩의 지하실 같은 곳에 처박혀 있다 할지라도 인간의 개념으로는 중앙 처리장치인 것으로 간주된다. 컴퓨터의 입력장치, 디스플레이 콘솔, 기타 등등은 모두 주변장치이다. 그것들은 컴퓨터 시스템의 가장자리, 빌딩의 다른 층에 위치한다. 맥퍼슨은 다시 텔레비전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벤슨은 아까보다 더 흥분한 모습이었다. 맥퍼슨은 볼륨을 높이고 그의 말을 들어 보았다. "...점점 지능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증기기관, 그 다음에는 자동차와 비행기, 그리고 전자계산기가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컴퓨터와----" 맥퍼슨은 다시 볼륨을 낮췄다. 인간의 두뇌는 중앙 처리장치에 비유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입이나 팔 다리 같은 신체 기관을 주변 장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뇌의 명령을 수행, 즉 출력한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이러한 주변 장치의 활동을 가지고 뇌의 작동을 판단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하는 말, 그리고 그가 하는 행동을 가지고 그의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유추하는 것이다. 이런 개념은 누구에게나 익숙해져 있다. 맥퍼슨은 텔레비전 스크린에 나와 있는 벤슨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벤슨이 이런 말을 들으면 뭐라고 할 것인가? 동의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 하지만 그런 게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하지만 이번 수술에서 우리는 하나의 뇌가 아닌, 두 개의 뇌를 가진 인간을 창조했다. 그는 생물적인 뇌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손상을 입었다. 또한 그는 이제 그러한 손상을 교정하기 위해 고안된 컴퓨터 두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 새로운 두뇌는 생물적인 두뇌를 통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새로운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환자의 생물적인 두뇌는 새로운 컴퓨터에 대한 주변적인 단말기, 문자 그대로 주변적인 단말기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 대신 새로운 컴퓨터 두뇌가 총체적인 통제력을 장악한다. 따라서 환자의 생물적인 두뇌는, 또한 그의 모든 신체는 새로운 컴퓨터의 단말기가 된 셈이다. 우리는 하나의 독립적이고 거대하고 또한 복잡한 컴퓨터 단말기를 가진 인간을 창출해낸 것이다. 환자는 새로운 컴퓨터를 위한 판독 장치이며, 판독에 대한 통제력은 전혀 갖지 못한다. 텔레비전 스크린이 그것을 통해 제시되는 정보를 통제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 문장은 너무 강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맥퍼슨은 버튼을 누르고 이렇게 말했다. "해리어트, 그 마지막 문장을 타이프 해줘요, 나도 한번 보고 싶군. 로마 숫자 4. 요약 및 결론." IV. 요약 및 결론 맥퍼슨은 다시 말을 멈추고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였다. 벤슨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을 증오합니다. 특히 창녀를 증오하지요. 비행기 기술자들, 댄서들, 번역가들, 주유소 직원들, 기계로 만들어진 인간들 혹은 기계에 봉사하는 인간들, 그리고 창녀들, 나는 그들 모두를 증오합니다." 벤슨은 말을 하는 동안 계속해서 손에 들고 있던 담배로 허공을 쑤셔대고 있었다. 4 "기분이 어떻소?" 라모스 박사가 물었다. "화가 나요" 자네트 로스가 대답했다. "미쳐 버릴 것만 같아요. 거기 서 있던 그 간호사는 모든 것을 다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마치 자기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더라구요." "당신이 화를 내는 것은..." 라모스 박사는 말꼬리를 흐리며 그렇게 말했다. "수술 때문이에요. 벤슨 씨 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결국 그 수술을 하고 말았어요, 나는 처음부터, 그래요 아주 처음부터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하지만 엘리스와 모리스와 맥퍼슨은 모두 그 수술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 같더군요. 정말 너무나도 고집불통인 사람들이에요. 특히 모리스가 더 그래요. 회복실에서 모리스가 벤슨을, 온몸에 붕대를 감고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벤슨을, 흡족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을 보고 나는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벤슨은 너무나도 창백했고 또 음---" 로스는 말을 멈추었다. 적당한 대답을 찾으려고 애써 보았지만, 논리적인 대답이 얼른 생각나 주지 않았다. "나는 그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알고 있소." 라모스가 말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술을 받고 나면 안색이 창백하기 마련이지 않소. 무엇 때문에 당신이 이토록 화가 났을까?" 로스는 한참 동안이나 망설인 후, 간신히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요." 로스는 라모스가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지금 소파 위에 누워 있었고, 라모스 박사는 그녀의 머리 뒤에 서 있었다. 로스가 천정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생각하는 동안 오랜 침묵이 흘렀다. 머리속에서 생각들이 빙글빙글 맴을 돌기만 할 뿐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이윽고 라모스 박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간호원이 옆에 있었던 것이 당신에게 중요하게 느껴진 모양이군." "그래요?"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소." "기억이 안나요." "당신은 간호원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 알고 있었다고 말했소.... 그런데, 정확하게 말해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요?" "나는 미칠듯이 화가 났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지 않소?..." "아니, 알고 있어요." 로스가 말했다. "그건 모리스 때문이었어요. 그 사람은 너무나도 고집이 세요." "고집이 세다?" 라모스 박사가 그녀의 말을 되풀이했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해요." "아까는 고집이 세다고 하지 않았소." "그게 그렇게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에요. 단지 표현이 그렇게 나왔다는 것뿐이지---" 로스는 말을 멈추었다. 지금도 그녀는 화가 치밀고 있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목소리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은 지금도 화를 내고 있군요." 라모스 박사가 말했다. "무척 화가 나요." "이유가 뭐요?" 로스는 오랜 침묵 끝에 대답했다. "그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요." "누가 당신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겁니까?" "그들 모두요. 맥퍼슨도, 엘리스도, 모리스도, 그 누구도 내 말을 듣지 않았어요." "엘리스 박사나 맥퍼슨 박사에게 당신이 화내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습니까?" "아뇨."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분노를 모리스 박사에게는 표현했지요?" "그래요." 라모스 박사가 그녀를 어디론가 유도해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로스는 그것이 어떤 방향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녀는 재빠른 두뇌 회전으로 모든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모리스 박사는 몇 살이오?" "모르겠어요. 내 또래쯤 될 거예요. 서른 살이나 서른하나--- 뭐 그 근처일 걸요." "당신 나이와 비슷하군요." 라모스 박사는 마치 약이라도 올리듯, 로스가 한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래요, 제기랄, 내 나이와 비슷해요!" "그리고 외과 의사지요?" "그래요...." "당신과 나이가 비슷한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이 훨씬 편한가요?"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 "당신의 아버지 역시 외과 의사였지요. 하지만 그는 당신의 또래가 아니었소." "쓸데없는 상상은 하실 필요 없어요." 로스가 말했다.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군." 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화제를 좀 바꿔 봐요." "좋지요." 라모스 박사는 부담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로스는 그의 그 목소리가 좋을 때도 있었지만 싫을 때도 많았다. 5 모리스는 초기 면담을 싫어했다. 초기 면담의 스탭은 대부분 임상 정신과 의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지루한 업무였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NPS를 찾아오는 환자 40명 가운데 1명만이 보다 심도깊은 진찰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환자들 중에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뇌 질환을 가진 것으로 인정되는 사람은 83명 가운데 1명뿐이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초기 면담이 쓸데없는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중이 떠중이 환자가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1년 전 맥퍼슨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NPS에 대한 소문을 듣고 직접 찾아오는 사람은 모두 다 봐주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었다. 물론 대부분의 환자들은 아직까지도 다른 사람의 소개를 받고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맥퍼슨은 NPS의 이미지가 스스로 찾아오는 환자들을 어떻게 원만히 처리하는가 하는데 달려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맥퍼슨은 또 스태프진의 모든 의사들이 때때로 초기 면담을 맡아 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모리스는 한쪽에서만 상대편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설치된 조그만 면담실에서 한달에 2일을 일해야 했다. 오늘도 그 이틀 가운데 하루였지만, 모리스는 정말이지 그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도 아침의 수술로 인한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그는, 이런 종류의 지루한 일상적인 업무가 몹시 못마땅했던 것이다. 모리스는 다음 환자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불쾌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작업복 바지에 셔츠를 입고, 머리가 아주 긴 20대의 청년이었다. 모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나는 닥터 모리스라고 합니다." "크레이그 베커만입니다." 악수를 나눌 때 그의 손은 무척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을 주었다. "앉으시죠." 그는 자신의 책상 맞은 편, 한쪽만 보이는 거울 뒤에 놓여 있던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저, 호기심 때문에요. 당신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베커만이 말했다. "잡지에서 말이에요. 당신이 이 병원에서 뇌 수술을 한다면서요?" "그건 사실입니다." "음... 나는 그 점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호기심이죠?" "글쎄요, 그 잡지 기사에서는---여기서 담배 피워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모리스가 대답했다. 모리스는 재털이를 베커만 앞으로 밀어놓았다. 베커만은 카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책상 위에 톡톡 두들기더니 불을 붙였다. "잡지 기사에 뭐라고 나와 있었습니까?" "예, 당신이 뇌 속에 전선을 삽입한다고 되어 있더군요.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런 수술을 행하지요." 베커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피웠다. "음, 그러니까, 전선을 연결하면 쾌락을 느낄 수 있다고 하는 것도 사실인가요? 그것도 아주 강력한 쾌락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리스는 가능한 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장하며 그렇게 대답했다.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모리스는 그렇게 대답하며 펜을 흔들어 잉크가 떨어졌다는 암시를 준 다음, 책상 서랍을 열어 다른 펜을 꺼냈다. 동시에 그는 서랍 안쪽에 숨겨져 있던 버튼을 눌렀다. 즉시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전화 벧이 울리기 시작했다. "닥터 모리스입니다." 수화기에서는 비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생님이 전화를 거셨나요?" "그렇소. 모든 전화를 보류하고, 그 전화들을 개발 부서로 연결해 주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맙소." 모리스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개발 부서 사람들이 거울 반대편에서 이쪽을 관찰하기 위해 곧 이곳에 도착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뇌 속에 전선을 삽입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 그렇지요. 우리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는 그런 수술을 시도합니다, 베커만 씨. 하지만 아직은 실험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건 괜찮습니다." 베커만이 말했다. 그는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나한테는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수술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원하신다면, 관련 자료를 복사해 드릴 수 있습니다." 베커만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정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수술을 원하고 있는 겁니다. 자원을 하고 싶은데요." 모리스는 놀라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베커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기사를 보니, 전기 충격 한 번이 열 번의 오르가즘과 맞먹는다고 하더군요. 정말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당신의 뇌를 수술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베커만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그겁니다." "이유가 뭐죠?" "농담하시는 겁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 수술을 받겠다고 찾아오지 않나요? 그런 쾌락을 맛볼 수 있다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부탁을 하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군요." "왜 그렇죠?" 베커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비용이 엄청나게 비싸거나, 뭐 그런 문제점이 있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소한 이유 때문에 뇌수술을 하지는 않습니다." "우와." 하고 베커만이 비명을 질렀다. "당신네들은 그런 사람들이군요. 이런 빌어먹을!" 베커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방을 나가 버렸다. 세 명의 개발 부서 사람들은 다들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도 옆방에서 거울을 통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베커만이 나가고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환상적이군." 모리스가 말했다. 개발 부서 사람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꺼냈다. "할 말이 없군." 모리스는 그들의 머리속에 어떤 생각이 오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몇 년 동안에 걸쳐 기업화 가능성 조사, 잠재적 응용 범위 조사, 분기점 조사, 산업화 작동 조사, 입출력 조사 등을 진행시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머리 속에서 먼 훗날의 일로 맴돌고 있던 것이 불쑥 현실로 나타난 셈이었다. "그 사람은 전기 중독자야."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기 중독이라는 개념은 학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새로운 중독증이었다. 약물에 의한 자극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기적인 충격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이 개념은, 거의 환상적이라 할 수 있는 사고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병원에는 잠재적인 중독 증세를 가진 환자들이 실제로 나타나고 있었다. "전기 자극이 무엇보다도 가장 짜릿하다더군."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 소리에는 긴장과 우려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모리스는 맥퍼슨이 이런 일을 두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아마도 무언가 철학적인 이야기를 할 것 같았다. 맥퍼슨은 요즘 들어 부쩍 철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전기 중독이라는 개념은 1950년대 제임스 올드스의 놀라운 발견이 소개되면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올드스는 두뇌 가운데 전기적 자극이 강렬한 쾌감을 산출하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가 이른바 '보상의 강'이라는 명칭을 붙인 뇌세포 조직의 일부였다. 만약 그런 영역에 전극을 삽입하면, 실험용 쥐는 충격을 받기 위해 스스로에게 자극을 주도록 고안된 레버를 시간당 5천 번 이상 누를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 쥐는 쾌감에 대한 욕구 때문에 음식이나 물도 거부한 채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계속해서 그 레버를 누를 것이다. 이 놀라운 실험은 금붕어와 돼지, 돌고래, 고양이, 그리고 염소 등을 대상으로 되풀이되었다. 그 결과 두뇌 속에 쾌락 단말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없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것은 인간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전기 중독이라는 개념은 그러한 이론적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얼핏 생각하면 인간이 전기적 충격에 중독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예를 들어 기술적 장치를 갖춘 하드웨어는 값이 비싸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필요없게 되어 버릴 것이다. 약삭빠른 일본 기업들이 2, 3달러짜리 전극을 만들어 수출하는 사태를 얼마든지 상상해 볼 수 있다. 뇌 수술이 불법화 되는 것도 그리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니다. 한때는 1년에 1백만 명의 미국 여성들이 불법적인 낙태 수술을 받은 적도 있었다. 뇌 수술은 낙태 수술보다 훨씬 복잡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철저하게 금지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앞으로는 수술 기술도 점점 더 발전할 것이다. 멕시코나 바하마에 뇌 수술을 전문으로 시술하는 병원들이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런 일을 할 만한 의사를 찾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숙련된 신경외과 의사라면 하루 동안 열심히 일하면 열 명에서 열 다섯 명까지의 환자를 수술할 수 있다. 또한 뇌 수술의 경우 환자 한 명당 적어도 1천 달러는 받을 수 있다. 그 정도의 수입이 보장된다면 비양심적인 의사들도 얼마든지 나타날 것이다. 일주일에 현찰로 10만 달러를 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법을 어길 만한 충분한 위험 수당이 되는 셈이다. 실제로 그런 법안이 통과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현실적으로는 뇌 수술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1년전 병원에서 '생물의학적 기술과 법률'이라는 주제로 법학자들을 초청하여 세미나를 조직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전기 중독 문제도 의제 가운데 하나로 채택되어 논의에 부쳐졌지만, 법률가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전기 중독이라는 개념은 마약 중독을 통제하는 기존 법률의 패턴과 산뜻하게 부합되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런 모든 법률은 어떤 한 사람이 비자발적으로 혹은 아무것도 모른 채 마약 중독자의 길로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한 인간이 자신을 중독자로 만들어 줄 외과 수술을 추구한다는 전제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개념이었다. 대부분의 법률가들은 그러한 수술을 추구하는 대중적인 관심이 유발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다시 말해서 대중적인 수요가 없는 한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태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베커만의 출현으로 하여 그러한 수요가 존재한다는 명백한 증거가 제시된 셈이었다. "우린 모두 저주를 받겠군." 개발 부서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모리스는 그 말이 별로 타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신도 NPS에 합류한 이래로 느낀 바가 있었다. 그것은 모든 일이 너무나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반면에 충분한 주의나 통제가 뒤따르지 못한다고 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추세로 계속된다면 아무런 통제도 경고도 없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6 오후 6시, 신경정신학 연구팀의 책임자인 로저 맥퍼슨은 자신의 환자를 점검하기 위해 7층으로 올라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맥퍼슨 자신은 벤슨을 자신의 환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소 소유적인 생각인지는 몰라도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만은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맥퍼슨이 없으면 NPS도 없고, NPS가 없으면 수술도 벤슨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그가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710호실은 불그스름한 석양빛과, 그리고 깊은 정막에 휩싸여 있었다. 벤슨은 잠이 든 것처럼 보였지만, 맥퍼슨이 문을 닫는 소리에 눈을 떴다. "기분은 좀 어떻소?" 맥퍼슨이 침대 곁으로 바짝 다가가며 물었다. 벤슨은 미소를 머금었다. "모두들 그걸 알고 싶어하는군요." 맥퍼슨도 그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자연스러운 질문이지요." "피곤합니다. 그것뿐이에요. 무척 피곤하군요.... 때로는 나 자신이 시한 폭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당신은 내가 언제 폭발할지 궁금해 하고 있겠지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소?" 맥퍼슨이 물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벤슨의 이불을 추스려 I.V.라인을 확인했다.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째깍." 벤슨이 다시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째깍." 맥퍼슨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미 벤슨의 기계적인 은유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 사람은 인간과 기계를 혼돈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술이 끝난 지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다시금 그런 현상을 보인다는 것은.... "아프진 않소?" "괜찮아요. 마치 어디에서 떨어진 것처럼 귀 뒤가 조금 쑤실 뿐입니다. 그것뿐이에요." "떨어지다니요?" "나는 떨어진 사람입니다." 벤슨이 말했다. "나는 굴복했어요." "무엇에 굴복했다는 말이오?" "기계로 전환되는 과정에 굴복한 셈이지요." 벤슨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뜨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혹은 시한 폭탄에 굴복했을 수도 있구요." "무슨 냄새나 이상한 기분이 느껴지지는 않소?" 맥퍼슨은 그런 질문을 던지며 침대 위에 설치되어 있는 뇌파 탐지기를 올려다 보았다. 뇌파는 정상적이었다. 발작을 일으킬 징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오, 그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당신이 폭발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맥퍼슨은 로스도 똑같은 질문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도 있지요." 벤슨이 대답했다. "다가오는 전쟁에서는, 우리 모두 폭발해 버릴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오?" "귀찮아 하는 표정이군요." 벤슨이 말했다. "귀찮은 게 아니라 혼란스러운 겁니다. 다가오는 전쟁이라니, 그건 도대체 무슨 뜻이오?" "인간과 기계 사이의 전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인간의 두뇌는 당신도 알다시피 이미 폐물이 되었어요." 그것은 새로운 사고였다. 맥퍼슨은 전에는 벤슨에게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맥퍼슨은 침대에 누워 있는 벤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머리와 어깨에는 붕대가 칭칭 감아져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상체와 머리가 유난히 커보였다. "그렇소, 인간의 두뇌는 이미 갈 데까지 다 가버렸지요." 벤슨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인간의 두뇌는 다음 세대의 지능의 형태를 낳은 겁니다. 그것들은---왜 이렇게 피곤한 겁니까?" 벤슨은 도로 눈을 감아 버렸다. "수술 때문이지요." "간단한 수술이었는데." 벤슨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그는 코를 골기 시작했다. 맥퍼슨은 한동안 벤슨의 침대 옆에 멍하니 서 있다가, 창가로 다가와 태평양 너머로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벤슨은 좋은 방을 차지했군. 산타 모니카의 고층 아파트 사이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맥퍼슨은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벤슨은 깨어나지 않았다. 이윽고 맥퍼슨은 벤슨의 차트에 메모를 남기기 위해 간호실로 나왔다. '환자, 의식 회복, 반응 보임, 세 시 방향 지향.' 맥퍼슨은 거기까지 쓴 다음 손놀림을 멈추었다. 벤슨이 사람과 장소와 시간을 지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런 점들을 면밀히 관찰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벤슨은 말짱한 정신으로 그의 질문에 대답했으므로, 맥퍼슨은 메모를 계속했다. '사고의 흐름은 질서정연하고 명료하지만, 기계에 대한 상상은 수술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음.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수술이 발작 사이의 정신 이상 증세를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는 초기의 예측이 적중하는 듯함.' 그리고는 '의학박사 로저 A. 맥퍼슨'이라는 서명을 했다. 맥퍼슨은 그것을 잠시 바라본 다음, 차트를 접어 선반 위의 제자리에 꽂아 두었다. 빗나간 예측을 고집하지 않는 냉정하고 직접적인 메모였다. 차트는 결국 법적인 근거가 될 서류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법원에 제출될 수도 있었다. 물론 맥퍼슨은 벤슨의 차트가 법원에 제출되는 상황을 예측하지는 않았지만, 신중을 기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또한 자신의 직업이 자신을 그렇게 만든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규모가 큰 과학적 연구팀의 책임자는 정치적 기능을 외면할 수 없다. 그것을 부정하는, 혹은 혐오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진실이었고, 반드시 필요한 업무의 한 부분이었다. 책임자는 사람들이 자신의 조직 속에서 함께 일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영웅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일은 힘들어진다고 하는 것은 정치판에서나 병원에서나 다를 바 없었다. 연구팀의 책임자는 외부에서 돈줄을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 또한 순수한 정치의 일환이다. NPS와 같이 민감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연구팀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맥퍼슨은 이미 오래 전부터 양고추냉이 과산화물의 원칙을 발전시켜오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이론이었다.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양고추냉이 과산화물 효소를 발견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제시하면, 6만 달러 정도는 간단하게 긁어모을 수 있다. 하지만 마인드 컨트롤을 개발하겠다고 해서는 단돈 60센트도 얻지 못할 것이었다. 맥퍼슨은 선반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차트들을 바라보았다. 낯선 이름들 속에 '벤슨, H.F., 710호실'이라는 글자가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이라고 한 벤슨의 말이 옳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인드 컨트롤 기법으로 치료받은 사람은 모든 종류의 비이성적인 선입견의 희생자가 된다. 심장 보정기의 형태를 띠고 있는 '심장 컨트롤'은 놀라운 발명으로 간주된다. 약물을 통한 '신장 컨트롤'은 하나의 축복으로 떠받들어진다. 하지만 '마인드 컨트롤'은 문자 그대로 죄악이오, 재앙이었다. NPS의 통제 작업이 다른 기관에 대한 통제 작업과 직접적인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사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들은 심장의 작동을 위해 최초로 원자력 보정기를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편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벤슨은 스스로를 시한폭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맥퍼슨은 한숨을 내쉬며 차트를 다시 집어들었다. 의사의 지시가 들어 있는 부분을 펼쳐 보니, 엘리스와 모리스가 이미 수술 이후의 치료에 대한 지시를 적어놓고 있었다. 맥퍼슨은 그 밑에 이렇게 덧붙였다. '내일 오전 인터페이스 이후, 토라진 투여를 시작할 것' 맥퍼슨은 자신이 써넣은 문구를 바라보다가, 간호사들이 인터페이스가 무엇인지 모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먼저 쓴 문구를 지워 버리고 이렇게 고쳐 썼다. '내일 정오 이후에 토라진 투여를 시작하시오.' 맥퍼슨은 7층에서 내려오며 일단 벤슨에게 토라진이 투여되기 시작하면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토라진이 시한폭탄의 뇌관을 제거해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 시한 폭탄을 차가운 물통 속으로 빠뜨려 줄 수는 있을 것이었다. 7 밤이 꽤 늦은 시각, 텔레콤프에서는 게르하르드가 컴퓨터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몇 가지 명령을 더 타이핑한 다음, 프린터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길다란 출력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프로그램된 명령에 포함되어 있을 에러를 찾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컴퓨터 자체는 결코 실수를 범하는 일이 없었다. 게르하르드는 각기 상이한 장소에서 각기 상이한 컴퓨터를 10년 가까이 사용해 왔지만, 컴퓨터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물론 언제나 실수는 발생하기 마련이었지만, 그것은 항상 프로그램상의 실수였지 결코 기계 자체의 실수는 아니었다. 때로는 그러한 절대적인 확실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관점으로는 그런 게르하르드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기계가 언제나 실수를 저지르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퓨즈가 끊어지고 전축이 고장나고 오븐은 과열되며 자동차는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기계에게도 그에 걸맞는 실수의 몫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컴퓨터는 달랐다. 컴퓨터를 가지고 일한다는 것은 참으로 치욕적인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컴퓨터는 절대로 틀리는 법이 없다. 그것은 그렇게 간단했다. 문제의 근원을 밝히는데 몇 달 동안의 시간이 걸리는 경우에도, 하나의 프로그램을 수십 명의 전문가들이 수십 번이나 점검했을 경우에도,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이번만은 컴퓨터 회로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고 있을 경우에도, 결국에는 언제나 그 모든 것이 인간의 실수로 판명되고 만다.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리차드가 코트를 벗으며 들어왔다. 그는 커피를 한 잔 따라 들고는 잘 돼가? 하고 물었다. 게르하르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지에게 문제가 생겼어." "또? 빌어먹을." 리차드도 컴퓨터를 들여다보았다. "마르타는 어때?" "마르타는 괜찮은 것 같아. 문제는 조지야." "어떤 조지 말야?" "세인트 조지."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정말 골치덩이로군." 리차드는 커피를 마시며 컴퓨터 옆에 와 앉았다. "내가 한번 해볼까?" "좋지."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리차드의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세인트 조지를 위한 프로그램을 불렀다. 그 다음에는 마르타를 위한 프로그램을 불러냈다. 그런 다음, 상호작용을 명령하는 키를 눌렀다. 리차드와 게르하르드가 이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대학에서 개발된 프로그램 몇 개를 수정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개념 자체는 동일했다. 컴퓨터가 사람처럼 감정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그런 프로그램에 조지나 마르타 같은 이름을 붙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논리적인 일이었다. 물론 보스턴의 엘리자나 영국의 알도스 같은 선조들이 있었지만 말이다. 조지와 마르타는 약간의 차이점을 가진, 거의 동일한 프로그램이었다. 애초의 조지는 자극에 대한 반응을 중화하기 위해 프로그램된 것이었다. 그 다음 마르타가 만들어졌다. 마르타는 심술쟁이였다. 좋아하는 것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조지가 탄생했다. 이것은 아주 다정한 조지로, 흔히 세인트 조지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각각의 프로그램은 사랑과 공포, 그리고 분노라고 하는 세 가지 감정적 상태로 반응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한 세 가지 감정은 각기 접근, 위축, 그리고 공격이라고 하는 세 가지 반응을 나타낼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지극히 추상적인 것으로서, 실제로는 숫자의 개념으로 수행되었다. 예를 들어 오리지날 조지는 대부분의 숫자들에 대해 중립적이지만, 751이라는 숫자를 싫어했다. 애당초 그 숫자를 싫어하도록 프로그램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확대되어 그와 비슷한 숫자, 이를테면 743이나 772 등과 같은 숫자들도 싫어하게 되었다. 그대신 403이나 133, 918 등과 같은 숫자는 아주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런 숫자를 입력하면 조지는 사랑과 접근이라는 방식으로 반응한다. 만약 707이라는 숫자를 입력하면 조지는 위축된다. 만약 750이라는 숫자를 입력하면 조지는 자신이 출력하는 숫자에 따라 화가 나서 공격한다. NPS의 스태프는 오랫동안 이 프로그램들을 가지고 놀았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컴퓨터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에 수정을 가했다. 이제 숫자가 문장으로 번역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실질적인 상호작용은 '크리스마스 게임'으로 표현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선물을 주고 받는 형식의 행동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숫자와 마찬가지로 지정된 혹은 습득된 감정적 값을 가지는 대상이었다. 정상적인 조지와 마르타가 상호 작용을 하면, 궁극적으로는 조지가 마르타를 이기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마르타는 심술이 나서 배경 속으로 숨어 버린다. 하지만 마르타에게 그보다 훨씬 더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세인트 조지였다. 세인트 조지의 다정한 인정은 마르타를 한껏 몰아붙이곤 했다.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다. 리차드는 화면상에 나타나는 문구들을 지켜보았다. 안녕, 나는 세인트 조지야 안녕 네 이름은 뭐니? 마르타야 너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구나, 마르타. 안해 하지만 나는 네가 좋아. 왜 나는 너를 싫어하지. 난 그걸 이해할 수 있어. 어떻게 도와줄까? "마침표가 제대로 찍히지 않는군." 리차드가 말했다. "언제부터 그랬어?" "그건 아무것도 아냐."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계속 보기나 하라구." 돕는다구? 그래, 나는 너틀 돕고 싶어. 고양이를 가져. 리차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고양이는 조지와 마르타가 다같이 싫어하는 것으로 프로그램 되어 있었다. 조지에게 고양이를 준다는 것은 대단히 적대적인 움직임이었다. 고마워 다른 고양이를 가져, 고마워 넌 무척 친절하구나. 또 다른 고양이를 가져. 고맙지만 이제 됐어.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니? 좋아해 하지만 고양이는 이제 충분해 고릴라를 가져. "정말 심하군." 리차드가 말했다. "다른 상호작용들은 어때?" "거의 비슷해."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이렇게 심해?" "더한지도 모르지." 그들은 이제 컴퓨터가 상호작용을 하면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상호작용의 일반적인 형태는 짐작할 수 있지만, 특정한 결과는 불확실했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가 서양 장기를 두는 것과 비슷해서, 이길 거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정작 이기는 것은 매번 다른 길을 통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 길은 상대방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었다. 나는 고릴라를 원하지 않아. 너는 고릴라를 싫어하니? 고맙지만 됐어. 너는 아주 공손하구나. 너를 화나게 했다면 사과할게. 너는 말이 너무 많아. 미안해. 가지를 가져. 리차드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컴퓨터를 지켜보았다. 세인트 조지는 가지를 위한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오이와 바나나를 싫어했다. 고맙지만 됐어. 가지를 좋아하지 않니? 별로 안좋아해. 여기 가지가 또 하나 있어. 고맙지만 됐어. 나는 네가 가졌으면 좋겠어. 고맙지만 됐어. 계속해서 가져. 고맙지만 됐어. 나는 계속 우길 거야 고맙지만 됐어. "세인트 조지가 어떻게 된 거야?" 리차드가 물었다. "대답이 다 똑같잖아." "나도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파." "프로그램 상에서 반복하도록 되어 있는 게 뭐지?" "네가 들어오기 전에 나도 그걸 찾아보고 있었어." 나는 네가 오이를 가지라고 우길 거야. 나는 거부해. "조지!" 리차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럼 바나나를 가져. 싫어. "조지가 뭔가 잘못됐어." 리차드가 말했다. "더 이상 성인(saint)이 아니잖아." 그럼 바나나와 오이를 둘 다 가져. 고맙지만 됐어. 나는 우길거야. 지옥에나 가. 나는 너를 죽일거야. .............................. .............................. 화면은 하얀 점들로 가득 차 버렸다. "저게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거지?" 리차드가 물었다. "나도 몰라. 나도 오늘밤에 처음 보는 현상이야." "지금까지 이 프로그램이 몇 번이나 실행되었지?" 리차드가 물었다. "마르타와 함께 실행된 건 110번째야." "습득한 걸 삭제한 일이 있어?" "없어." "빌어먹을." 리차드가 중얼거렸다. "아주 성질 고약한 성인이 되어 버렸군." 리차드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이걸 인쇄해 보자." 게르하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프린터 쪽으로 다가갔다. 이론적으로 따지자면 지금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은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었다. 조지와 마르타는 둘 다 경험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습득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었다. 서양 장기에서와 마찬가지로---여기서는 기계가 게임을 거듭할수록 점점 실력이 좋아지게 되어 있었다---이 프로그램은 기계가 새로운 반응을 '배울' 수 있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110번의 실행 경험을 가진 세인트 조지가 어느 순간 갑자기 성인의 모습을 벗어 버릴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세인트 조지는 성인의 모습을 가지도록 프로그램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타에 대해서는 성인 노릇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세인트 조지의 기분이 어떤지 알 만하군." 리차드는 컴퓨터의 전원을 끄며 그렇게 중얼거린 후, 그런 현상을 가능하게 한 프로그래밍의 오류를 찾고 있는 게르하르드와 합세했다. 1971년 3월 11일, 목요일 인터페이스 1 자네트 로스는 빈 방에 앉아 벽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전 9시였다. 그녀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꽃병과 노트가 하나씩 놓여 있을 뿐 텅 빈 책상이었다. 로스는 다시 눈을 들어 맞은편의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돼가요?" 천정에 붙은 스피커에서는 철컥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게르하르드의 목소리가 간단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향이 제대로 나오려면 몇 분 더 있어야 될 것 같아요. 조명은 아주 좋아요. 잠시 이야기 좀 할까요?" 로스는 어깨 너머로 등뒤의 거울을 힐끗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에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 뒤에서 게르하르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목소리가 좀 피곤한 것 같군요." 로스가 말했다. "어젯밤에 세인트 조지가 말썽을 부려서요."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나도 피곤해요." 로스가 대답했다. "성인도 아니면서 말썽을 부리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로스는 자기가 한 말에 스스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방안의 음향 수준을 맞추기 위해 그냥 아무 말이나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방금 한 말도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더는 결코 성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몇 주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로스는 그가 꽤 괜찮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 로스는 그 사람에게 반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반했다? 음... 평소에도 그런 표현을 씁니까?" 로스는 라모스 박사의 그런 말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 아더는 미남에다,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는 노란색 페라리 자동차를 가지고 있었고, 남자다운 박력과 매력이 흘러넘치는 사람이기도 했다. 로스는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여자다운 다소곳한 태도를 취하곤 했다. 그는 어떤 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옥수수빵 요리를 만드는 조그만 레스토랑을 찾아 그녀를 데리고 멕시코 시티까지 날아갈 정도로 엉뚱한 짓을 하기도 했다. 로스는 그의 그런 행동이 한심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은근히 즐기기도 한 것이 사실이었다. 약이나 병원, 혹은 정신과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만난 것은 어떻게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더는 그런 일에는 통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오로지 여자로서의 로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섹스의 대상으로서가 아니고?" 또 다시 라모스 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사람을 조금 더 깊이 알게 되자, 로스는 자신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아더가 그녀의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약간은 놀라운 일이었다. 아더는 그녀의 직업에서 일말의 위협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는 이른바 성취라고 하는 것에 대한 컴플렉스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주식 중개업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부잣집 아들이 그런 직업을 갖기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몹시 진지한 태도로 돈과 투자와 이윤율과 사채의 발행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의 태도에는 어딘지 스스로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듯한 공격적이면서도 동시에 방어적인 모습이 느껴졌다. 그 무렵 로스는 아더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주된 이유가, 그녀 자신의 사회적인 능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왜 진작부터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론상으로는 범블스와 캔디 스토어 같은 곳을 드나드는 싸구려 여배우보다는 로스 같은 여자를 꼬시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더 큰 만족을 안겨 주는 일이기도 했다. 마침내 로스도 그런 아더 앞에서 요조숙녀처럼 행세하는 것이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매사가 다 마찬가지였다. 로스는 그 모든 징후들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었다. 병원 일은 점점 더 바빠지고, 그 때문에 아더와의 데이트 약속을 취소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그를 만나면, 그의 세련된 태도와 그의 격렬한 충동과 그의 옷차림과 그의 자동차에 심한 염증을 느끼게 되기 마련이었다. 로스는 그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한때 자신이 그에게서 발견했던 것을 다시 한번 찾아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전에 그녀가 느꼈던 그의 매력은 이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바로 어젯 밤, 로스는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끝내 버렸다. 두 사람 다 충분히 짐작하고 있던 결말이었다. 왜 그런 일이 그녀를 우울하게 만드는 걸까? "말을 하지 않는군요."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음, 이제 좋은 사람들은 모두 환자를 도우러 와야 할 시간이에요. 재빠른 갈색 여우가 개구리에게 달려드는군요. 우리는 모두 하늘의 마지막 공동 항로를 향하고 있어요." 로스는 잠시 말을 끊었다. "이 정도면 됐어요?" "조금만 더 해봐요." "매리, 매리, 너희 정원은 얼마나 자랐니? 미안해요, 그 다음은 생각이 나지 않아요. 이 시가 어떻게 이어지죠?" 로스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렇게 말했다. "이제 됐어요. 대충 맞춰진 것 같아요." 로스는 스피커를 올려다 보았다. "테스트를 끝낸 다음에 인터페이스를 할 건가요?" "아마 그렇게 되겠죠."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모든 일이 잘 진행되면 말입니다. 로그는 환자에게 얼른 진정제를 주고 싶어서 안달을 하더군요." 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벤슨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마지막 단계였다. 진정제를 투여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기도 했다. 벤슨은 전날 밤 자정까지 페노바르비탈의 힘을 빌어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머리가 맑아졌을 테니, 인터페이스의 준비가 된 셈이었다. '인터페이스'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은 맥퍼슨이었다. 맥퍼슨은 컴퓨터 용어를 무척 좋아했다. 인터페이스란 두 개의 시스템 사이의 경계를 말하는 개념이었다. 혹은 컴퓨터와 작동체 메카니즘 사이의 경계라고 할 수도 있었다. 벤슨의 경우, 인터페이스는 두 개의 컴퓨터 사이의 경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의 두뇌라는 컴퓨터와 그의 어깨에 삽입된 소형 컴퓨터 사이의 경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둘 사이에는 전선이 연결되어 있기는 했지만, 아직 스위치를 넣지는 않은 상태였다. 스위치를 넣고 나면 벤슨-컴퓨터- 벤슨이라는 순환 고리가 성립되는 셈이었다. 맥퍼슨은 이번 사례를 하나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었다. 이번 수술을 계기로 삼아 간질병 환자에서부터 정신분열증 환자, 정신 지체 환자, 맹인 환자에 이르는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거기에 관련된 차트들이 그의 사무실 한쪽 벽을 채우고 있었다. 또한 그는 그러한 종류의 수술에 점점 더 복잡한 컴퓨터를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기도 했다. 결국 그는 로스가 보기에도 터무니없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인 폼 Q 같은 프로젝트를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당장 그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40개의 전극 가운데 어떤 것이 발작을 방지하는 역할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아직은 아무도 그 해답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실험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수술 때 그 전극들은 목표 지점에서 단 몇 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삽입되었다. 그것은 훌륭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지만, 뇌의 조밀도를 감안한다면 그 정도의 정확성은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뇌의 신경 세포는 직경이 불과 1미크론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1밀리미터의 공간에는 수천 개의 신경 세포가 있는 셈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벤슨의 뇌에 이식된 전극들은 대충 아무렇게나 삽입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많은 전극들이 요구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던 것이다. 정확한 지점에다 복수의 전극을 삽입하면, 적어도 그 중의 하나는 발작을 방지하는 정확한 위치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 다음에는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자극을 가해 보면, 어떤 전극을 이용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게 되는 셈이었다. "환자가 오고 있어요." 게르하르드가 머리 위의 스피커를 통해 말했다. 잠시 후, 벤슨이 휠체어에 앉은 채 방으로 들어왔다. 파란색과 하얀색 줄무늬가 있는 입원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그는 어깨에 감긴 붕대 때문에 동작이 어색한 듯 다소 뻣뻣한 자세로 로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런 그의 표정은 약간 긴장되어 있었다. "기분은 좀 어떻습니까?" 벤슨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건 내가 물어 봐야 할 질문인데요." "여기선 그 질문을 나에게 양보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벤슨이 말했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웬지 날이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로스는 문득 그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왜 그런 사실이 놀랍게 받아들여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히려 침착하지 못했던 것은 로스 자신이었다. 간호사는 벤슨의 어깨를 한번 두들겨준 다음, 로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방을 나갔다. 이제 벤슨과 로스는 단 둘이 남은 셈이었다. 잠시 두 사람 다 말을 꺼내지 않았다. 벤슨은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고, 로스도 그의 시선을 맞받았다. 그녀는 게르하르드가 천정에 달린 텔레비전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고 또 자극을 주기 위한 장비들을 점검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고 싶었다. "오늘은 무얼 하는 겁니까?" 벤슨이 물었다. "당신의 전극에 자극을 주어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확인할 계획이에요." 벤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차분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로스는 그의 그런 차분함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잠시 후 벤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픕니까?" "아뇨." "그럼 됐어요." 벤슨이 말했다. "시작하지요." 게르하르드는 옆방의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주위는 각종 장비의 스위치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초록빛 말고는 캄캄한 암흑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그런 상태에서 막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로스와 벤슨을 지켜보고 있었다. 게르하르드 옆에서는 리차드가 녹음기 마이크를 든 채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극 시리즈 1, 환자 해롤드 벤슨, 1971년 3월 11일." 게르하르드는 자기 앞에 설치되어 있는 네 개의 텔레비전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자극 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 벤슨의 모습을 비디오 테이프에 담을 폐쇄 회로 화면을 보여 주고 있었고, 또 하나의 화면에는 벤슨의 뇌 속에 삽입된 40개의 전극이 2열로 나란히 늘어서 있는 모습이 컴퓨터에 의해 잡히고 있었다. 전극 하나하나에 자극을 가할 때마다 화면상으로 그 전극의 위치가 표시되도록 되어 있었다. 세 번째 스크린에는 충격파의 오실로스코프가 나타나게 되어 있었고, 마지막 스크린에는 벤슨의 목에 삽입된 소형 컴퓨터의 연결 도형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또 자극이 회로 경로를 통과하는 상태를 나타내기도 할 것이었다. 옆방에서는 로스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당신은 다양한 감각을 느낄 거예요. 그중에는 무척 기분좋게 느껴지는 것도 있을 거구요.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느끼는 것을 말해 주시면 되요. 어때요?" 벤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차드가 말했다. "전극 1, 5밀리볼트, 5초간." 게르하르드는 버튼을 눌렀다. 컴퓨터의 도형에는 회로가 폐쇄되고 벤슨의 어깨에 설치된 컴퓨터의 복잡한 미로를 통해 자극이 전달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들은 거울을 통해 벤슨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벤슨이 말했다. "재미있군요." "뭐가 재미있어요?" 로스가 물었다. "기분이 말이에요." "설명해줄 수 있겠어요?" "글쎄요, 마치 햄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듯한 기분이군요." "당신은 헴 샌드위치를 좋아하나요?" 벤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배가 고픈가요?" "뭐 특별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다른 것은 느껴지지 않나요?" "아뇨. 그냥 햄 샌드위치의 맛이 느껴질 뿐입니다." 벤슨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호밀로 만든 샌드위치군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게르하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전극은 희미한 기억의 흔적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리차드가 말했다. "전극 2, 5밀리볼트, 5초간." 벤슨이 말했다. "화장실에 좀 다녀와야겠어요." "곧 괜찮아질 거예요." 로스가 말했다. 게르하르드는 컴퓨터에서 약간 물러나 커피를 한모금 마시며 벤슨과 로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전극 3, 5밀리볼트, 5초간." 이번 전극은 벤슨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벤슨은 조용한 목소리로 레스토랑과 호텔과 공항 등지의 화장실에 대해서 로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한번 해봐, 전압을 조금 높여서."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전극 3 반복, 10밀리볼트, 5초간." 리차드가 말했다. 텔레비전 스크린에는 전극 3을 통해 전달되는 회로가 표시되었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4번으로 넘어가지."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그동안 그는 벤슨의 반응을 메모하고 있었다. #1- ? 기억의 흔적(햄 샌드위치) #2-방광 팽만감 #3-변화 없음 #4- 게르하르드는 4번 옆에 대쉬를 그어놓고 반응을 기다렸다. 40개의 전극을 다 실험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지만,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도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다. 전극들 사이의 간격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미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전극이 나타내는 반응은 현저하게 달랐다. 그것은 인간에게 알려진 것들 중에서 가장 복잡한 구조물이라고 일컬어지는 뇌의 조밀도를 다시 한번 입증해 주는 결과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한 인간의 뇌 속에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의 수만큼이나 많은 세포가 들어 있었다. 때로는 그런 뇌의 밀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게르하르드는 NPS 초창기 시절에 인간의 뇌를 해부해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그는 신경해부학 책을 수십 권이나 펼쳐 놓고 며칠 동안에 걸쳐 뇌를 해부해 보았다. 그는 전통적으로 뇌의 해부에 쓰이는 도구인 무딘 나무 막대를 가지고 뇌에서 흘러나오는 회색 물질을 걷어냈다. 그는 끈기있게, 그리고 신중하게 그 물질을 걷어내고 또 걷어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남는 것이 하나도 없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뇌는 간이나 허파와는 달랐다. 육안으로는 지극히 단조롭고 지루해서, 도무지 그 기능을 알아차릴 수가 없다. 뇌는 너무나 미묘하고 복잡한, 또한 너무나도 조밀한 기관이었다. "전극 4." 리차드가 녹음기에 대고 말했다. "5밀리볼트, 5초간." 충격이 가해졌다. 그러자 벤슨은 갑자기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유랑 쿠키 좀 먹으면 안될까요?" "이거 재미있군." 게르하르드가 벤슨의 반응을 주시하며 말했다. 리차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몇 살 정도인 것 같아?" "기껏해야 대여섯 살밖에 안되겠는데." 벤슨은 쿠키와 세발자전거에 대한 이야기를 로스에게 늘어놓고 있었다. 이후 몇 분 동안 벤슨은 마치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서서히 나이를 먹어갔다. 이윽고 그는 다시 성인으로 돌아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나 쿠키가 먹고 싶었는데, 그녀는 한번도 내게 쿠키를 주지 않았습니다. 쿠키를 많이 먹으면 이빨이 썩는다는 것이었지요." "계속 진행하지."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리차드가 다시 말했다. "전극 5, 5밀리볼트, 5초간." 옆방에서는 벤슨이 불편한 듯 휠체어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로스는 뭐가 잘못 되었느냐고 물어 보았다. 벤슨은 "이것 참 재미있군요." 하고 대답했다. "무슨 뜻이죠?"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마치 샌드페이퍼 같군요. 점점 초조해 집니다." 게르하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노트에 이렇게 적어넣었다. '#5-잠재적 발작 전극.' 때때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경우에 따라 전극이 발작을 자극하는 경우도 발견되는 것이다. 아무도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게르하르드는 개인적으로 그 누구도 이유를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뇌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르하르드는 조지와 마르타 같은 프로그램으로 작업을 해보니, 비교적 단순한 컴퓨터 명령이 복잡하고도 예측 불가능한 기계적 행동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프로그램된 기계가 프로그램을 짠 당사자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것은 1963년, 아더 사무엘이라는 사람에 의해 극명하게 증명된 바 있었다. 당시 그는 IBM에서 서양 장기를 둘 수 있는 기계를 프로그램했다. 하지만 그 기계는 결국에 가서 사무엘 자신을 이길 수 있을 정도로까지 장기 실력이 늘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개미의 뇌보다도 더 단순한 회로를 가진 컴퓨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인간의 뇌는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인간의 뇌를 프로그래밍 하는 것은 이미 수십년 전부터 시도되었다. 그런 인간의 뇌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에는 또 철학적인 문제도 따르고 있었다. 이른바 괴델의 이론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어떠한 기계도 그 자신을 설명할 수는 없으며, 어떠한 기계도 그 자신의 작동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이론이었다. 오랜 연구를 거치면 인간의 뇌가 개구리의 뇌를 해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뇌가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해독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게르하르드의 믿음이었다. 그러한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초인간적인 뇌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게르하르드는 컴퓨터가 개발을 거듭하다 보면 언젠가 인간의 뇌 속의 수백억 개, 수조 개의 세포의 상호관계를 풀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인간은 자신이 원하던 정보를 가지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도 인간이 직접 이루어낸 성과는 아니다. 또 다른 지능의 명령이 그러한 결과를 이룬 셈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인간은 물론 그 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알지 못한다. 모리스가 커피 잔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커피를 마시며 유리창 너머의 벤슨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 좀 어떤가?" "아직은 괜찮습니다."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전극 6, 5밀리볼트, 5초간." 리차드가 말했다. 옆방의 벤슨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로스에게 수술과, 자신의 두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척 침착한 모습이었다. 이번 자극으로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게르하르드는 자극을 반복해 보았지만, 벤슨의 행동에는 변화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전극 7, 5밀리볼트, 5초간." 리차드가 그렇게 말하며 자극을 가했다. 벤슨이 갑자기 앉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 이건 아주 좋은데." "뭐죠?" 로스가 물었다. "원한다면 한번 더 해도 좋소." 벤슨이 말했다. "어떤 느낌인데요?" "아주 좋아요." 벤슨이 말했다. 그의 외모 전체가 미묘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벤슨이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군요, 로스 박사." "고마워요." 로스가 말했다. "게다가 아주 매력적이오. 전에도 내가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군." "지금은 기분이 어때요?" 로스가 물었다. "나는 당신이 대단히 좋아졌소." 벤슨이 말했다. "전에도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군." "좋아." 게르하르드가 벤슨의 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 "아주 좋아." 모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력한 P-터미널이군. 성적으로 흥분한 것이 틀림없어." 게르하르드는 다시 메모를 했다. 모리스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벤슨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리차드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전극 8, 5밀리볼트, 5초간." 실험은 계속되었다. 2 정오가 되자 인터페이스가 진행되던 곳에 맥퍼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들은 사소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수술을 통해 전극과 컴퓨터와 파워 팩을 이식했고, 그 모든 것을 서로 연결시켜 놓았다. 하지만 인터페이스 스위치가 눌러지기까지는 아무것도 작동하는 것이 없었다. 마치 자동차를 다 만들어 놓고 마지막으로 시동을 거는 단계와 흡사했다. 게르하르드는 맥퍼슨에게 자극 실험 결과를 적은 노트를 보여주었다. "5밀리볼트의 자극을 가해본 결과, 세 개의 전극이 긍정적인 반응을, 두 개의 전극이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낸 전극은 7번, 9번, 31번 전극이고, 부정적인 반응은 5번, 32번 전극입니다." 맥퍼슨은 그 노트를 들여다보더니, 눈을 들어 유리창 너머의 벤슨을 바라보았다. "긍정적인 P-터미널 반응을 보이는 것은 없었소?" "7번인 것 같습니다." "강력해요?" "제법 강력합니다. 자극을 주었더니, 벤슨은 무척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로스 박사에게 성적으로 흥분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강해? 그러다가 한계점을 넘어서는 것 아니오?" 게르하르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짧은 시간 내에 여러 차례의 자극이 가해지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노르웨이인의 경우에도...."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네." 맥퍼슨이 말했다. "앞으로 며칠 동안 벤슨을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만약 일이 잘못 되면 다른 전극에 스위치를 넣으면 되지 않겠소. 당분간 그의 움직임을 주시해 보도록 합시다. 9번 전극은 어떻소?" "확실하지는 않지만 무척 미약합니다." "환자가 어떤 반응을 보였소?" "자발성이 아주 약간 고양된 것 같았습니다. 미소를 짓거나, 행복하고 긍정적인 일화를 이야기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맥퍼슨은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31번은?" "진정 효과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차분하게 긴장이 풀어졌으며 행복감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맥퍼슨은 두 손을 맞부비며 말했다. "그걸 이용하면 될 것 같군." 그는 다시 한번 벤슨을 쳐다본 다음, 이렇게 말했다. "환자에게 7번과 31번 전극으로 인터페이스를 시도해 봅시다." 맥퍼슨은 의료 역사상 중요한 하나의 획을 긋는, 극적인 순간을 맞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게르하르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텔레비전 화면 밑에 컴퓨터가 놓여 있는 방의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는 자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텔레비전 스크린이 생명을 부여받았다. 잠시 후, 스크린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벤슨, H.F. 인터페이스 과정 가능 전극 : 연속적인 40개 가능 전압 : 연속 가능 기간: 연속 가능 주파 형태 : 펄스 게르하르드가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깨끗이 지워졌다. 잠시 후 일련의 질문들이 나타나자, 게르하르드는 대답을 입력했다. 인터페이스 과정 벤슨, H.F. 1. 어떤 전극을 이용하겠습니까? 7번, 31번 2. 7번 전극에 얼마의 전압을 적용하겠습니까? 5mv 3. 7번 전극에 얼마의 시간을 적용하겠습니까? 5초 잠시 간격을 두고 31번 전극에 대한 같은 질문이 반복되었다. 게르하르드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입력했다. 맥퍼슨은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모리스에게 말했다. "이것 참 놀라운 일이오. 우리는 소형 컴퓨터에게 어떻게 작동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것 아니오. 소형 컴퓨터는 큰 컴퓨터에서 명령을 받고, 큰 컴퓨터는 더 큰 컴퓨터인 게르하르드에게서 명령을 받고 있으니 말이오." "그럴지도 모르지요." 게르하르드는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금 화면에 메시지가 나왔다. 인터페이스 파라미터가 저장되었습니다. 프로그램 보조 유니트를 준비하십시오. 모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기 생전에 컴퓨터에게서 '보조 유니트'라는 말을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르하르드가 재빠른 동작으로 자판을 두드렸다. 다른 텔레비전 스크린에 소형 컴퓨터의 내부 회로가 나타났다. 그것은 전선이 연결되면서 간헐적으로 깜빡이는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벤슨 H.F.는 인터페이스 되었습니다. 이식된 장치가 뇌파 데이타를 판독하여 적정한 피드백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모리스는 다소 실망감을 느꼈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좀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르하르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스템 체크를 수행했다. 화면이 하얗게 지워졌다가, 이내 다음과 같은 마지막 메시지가 나왔다. 대학 병원 시스템 360컴퓨터는 이 흥미로운 환자를 치료할 수 있게 해준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게르하르드는 미소를 머금었다. 옆방에서는 아직도 벤슨이 로스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무언가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3 자극 실험을 마친 자네트 로스는 기분이 무척 울적했다. 그녀는 복도에 서서 벤슨의 휠체어가 밀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간호사가 휠체어를 밀며 모퉁이를 돌아가는 순간, 로스는 그의 목에 둘러진 하얀 붕대를 얼핏 보았다. 이내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로스는 현란한 색채가 칠해진 NPS 출입구를 지나 복도를 따라 반대편으로 걸었다. 문득 무슨 이유 때문인지 자신이 아더의 노란 페라리 자동차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정말이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답고 신기한 자동차였다. 말하자면 완벽한 장난감인 셈이었다. 로스는 발렌시아가 가운을 입은 채 아더의 페라리 자동차에서 내려 몬테 카를로의 도박장 계단을 올라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문득 시계를 내보니, 이제 겨우 12시 15분이었다. 앞으로도 반나절을 더 견뎌야 했다. 차라리 소아과 의사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아마 재미있었을 것이다.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가며 주사를 놓고, 엄마들에게는 아이들이 변을 가릴 수 있게 훈련시키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로스는 다시 한번 벤슨의 어깨에 감겨 있던 붕대를 생각하며 텔레콤프로 들어섰다. 게르하르드와 단 둘이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그 방에는 맥퍼슨과 모리스와 엘리스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유쾌한 표정으로 종이컵에 담긴 커피로 건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손에 컵을 쥐어 주었다. 맥퍼슨은 마치 아버지와도 같은 태도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오늘 벤슨이 당신에게 홀딱 반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랬어요?" 로스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음, 당신이라면 남자들의 그런 반응에 익숙해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소." "꼭 그렇지도 않아요." 로스가 다시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반응에 쾌활했던 기분이 약간 가라앉은 듯, 방안은 아까보다 훨씬 조용해졌다. 그녀는 그것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성적인 흥분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흥미있고 놀라운 일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재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도 재미있다는 말인가? 엘리스가 뒷주머니에서 조그만 위스키 병을 꺼내더니, 로스의 커피잔에 투명한 액체를 넣어주며 말했다. "이렇게 아일랜드 식 커피를 만들어 먹으면 훨씬 맛이 좋지." 그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편에 있던 게르하르드를 바라보았다. "쭉 마셔요." 엘리스가 말했다. 게르하르드는 모리스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심각한 대화라도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 여자, 나에게 넘겨주는 게 어때?" 하고 말하는 모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게르하르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모리스도 웃고 있었다. 그들은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맛이 괜찮을 거요." 엘리스가 말했다. "어떻소?" "아주 좋군요." 로스는 한모금 마셔본 후 대답했다. 그녀는 슬며시 엘리스와 맥퍼슨 곁에서 빠져나와 게르하르드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모리스가 커피를 한 잔 더 가지러 간 동안 그는 잠시 혼자가 되어 있었다. "게르하르드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로스가 말을 꺼냈다. "물론이죠." 게르하르드는 그렇게 말하며 로스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무슨 일입니까?" "알고 싶은 게 있어요. 여기서 메인 컴퓨터로 벤슨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을까요?" "이식된 장치들을 모니터한다는 뜻인가요?" "그래요." 게르하르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가능이야 하지요.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런 수고를 해야 하죠? 우리는 이식된 장치들이 작동된다는 것을 알고..." "나도 알아요." 로스가 말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은밀하게 그걸 좀 해줄 수 없겠어요?" 게르하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무엇에 대해서 은밀하란 말입니까? "부탁이에요." "알았어요." 이윽고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사람들이 나가는 즉시 모니터를 시작하겠어요." 그는 턱으로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1시간에 두 번씩 체크를 하지요." 로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1시간에 네 번쯤이면 되겠습니까?" "10분마다 한번씩은 어떨까요?" 로스가 말했다. "좋습니다." 게르하르드가 대답했다. "10분에 한번씩 하도록 하지요." "고마워요." 로스는 커피잔을 비웠다. 그녀는 커피 때문에 뱃속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 방을 나왔다. 4 엘리스는 710호실 한쪽 구석에 앉아 대여섯 명의 기술자들이 침대 주위에서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방사능을 조사하기 위해서 온 방사능 연구실 사람이 두 명, 스테로이드 수치를 측정하기 위해 혈액을 채취하러 온 화학 연구실의 아가씨 한 사람, 모니터를 점검하는 뇌파 기술자 한 사람, 그리고 인터페이스 연결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는 게르하르드와 리차드 등이 그 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벤슨은 천정을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팔을 건드리거나 시트를 들춰보곤 하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방사능 연구실에서 온 직원 한 사람은 하얀 가운의 소매 사이로 빠져나온 손에 털이 북슬북슬 나 있었다. 그 사람은 벤슨의 붕대 위에 그 털북숭이 손을 잠시 얹었다. 엘리스는 그 손을 보자 자신이 수술했던 원숭이가 문득 떠올랐다. 원숭이를 수술하는 것과 사람을 수술하는 것은 기술적인 전문성이 요구된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유사점이 없었다. 아무리 아닌 척해도, 원숭이는 원숭이일 뿐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설사 수술 도중 실수를 저질러 원숭이의 한쪽 귀에서 다른쪽 귀까지를 찢어놓는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어도 왜 그랬느냐고 물어 보는 사람도 없고 피해자의 가족이 항의하는 일도 없었으며 변호사나 언론이 떠들어대는 일도 없다. 심지어는 병원측에서도 80달러짜리 원숭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오는 일도 없었다. 그 누구도 그런 것에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엘리스 자신도 원숭이를 도우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단지 인간을 도우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벤슨이 끙 하는 신음을 냈다. "피곤하군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스를 바라보았다. 엘리스가 말했다. "자, 여러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까?" 기술자들은 하나하나 침대에서 물러서며 도구와 데이타를 챙겨서 그 방을 나갔다. 마지막으로 게르하르드와 리차드가 나가고 나자, 이윽고 엘리스와 벤슨은 둘만 남게 되었다. "졸립니까?" 엘리스가 물었다. "빌어먹을 놈의 기계가 된 듯한 기분입니다. 마치 복잡한 정비소에 들어와 있는 자동차가 된 것 같아요. 수리를 당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벤슨은 서서히 화를 내고 있었다. 엘리스는 자신도 슬며시 긴장감이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엘리스는 당장 간호사와 남자 직원들을 불러 벤슨을 제지하고 싶었지만, 가만히 앉아서 그를 지켜보았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군요." 엘리스가 말했다. 벤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엘리스를 바라보았다. 엘리스는 침대 위의 모니터를 올려다보았다. 뇌파가 점점 불규칙해지며 발작 때와 비슷한 형태를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벤슨은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이건 무슨 냄새야?" 벤슨이 말했다. "이 더러운..." 침대 위의 모니터에는 빨간 불이 반짝거리며 '자극'이라는 글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뇌파를 나타내는 하얀 선이 약 5초 동안 심하게 흔들리며 찌그러졌다. 벤슨의 동공이 팽창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 뇌파 선이 다시 가지런히 잦아들었다. 동공도 정상적인 크기로 돌아왔다. 벤슨은 등을 돌려 창밖으로 보이는 오후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벤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때요, 정말 좋은 날이지요?" 5 자네트 로스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밤 11시쯤 병원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몇 주 전부터 끈질기게 접근해온 병리과의 레지던트와 영화를 보러 갔었다. 그들이 본 영화는 살인 사건을 다룬 미스터리 물이었는데, 그 레지던트는 자신은 그런 영화 아니면 보지 않는다고 했다. 로스는 다섯 명의 피해자가 목숨을 잃는 것까지 세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힐끗 돌아보니, 레지던트는 미소를 머금은 채 영화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로스는 병리과 레지던트라는 사람이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그런 영화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가학적인 취향을 가진 외과 의사, 유아적인 미숙함을 벗어버리지 못한 소아과 의사, 여자를 혐오하는 산부인과 의사 등이 그 좋은 예였다. 물론 미친 정신과 의사도 빠뜨릴 수 없겠지만 말이다. 영화가 끝나자 레지던트는 로스를 도로 병원까지 태워다 주었다. 로스의 자동차가 병원 주차장에 그냥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스는 자기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특별한 이유도 없이 NPS로 올라갔다. NPS는 텅 비어 있었지만, 로스는 게르하르드와 리차드가 일을 하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역시 그들은 텔레콤프에서 컴퓨터 출력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로스가 방안으로 들어와 커피를 따를 때까지도 그녀가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게르하르드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오늘은 마르타가 골치를 썩히는군요. 처음에는 조지가 말썽을 피우더니, 이제 또 마르타가 갑자기 착해져 버렸어요. 모든 게 엉망진창이군요." 리차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환자가 있듯이 우리에게도 우리의 환자가 있는 셈이지요." "내 환자는...." "아 참." 게르하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당신이 올라온 이유를 깜빡 잊고 있었어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아니면 데이트가 형편없었나요?" "형편없는 건 영화였어요." 로스가 대답했다. 게르하르드는 컴퓨터의 자판을 누르고 있었다. 글자와 숫자들이 출력되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 1시 12분부터 시작한 체크 기록이예요." 01 : 12 정상뇌파 01 : 42 수면뇌파 01 : 22 정상뇌파 01 : 52 정상뇌파 01 : 32 수면뇌파 02 : 02 정상뇌파 02 : 12 정상뇌파 04 : 52 정상뇌파 02 : 22 정상뇌파 05 : 02 수면뇌파 02 : 32 수면뇌파 05 : 12 정상뇌파 02 : 42 정상뇌파 05 : 22 정상뇌파 02 : 52 정상뇌파 05 : 32 수면뇌파 03 : 02 정상뇌파 05 : 42 정상뇌파 03 : 12 수면뇌파 05 : 52 정상뇌파 03 : 22 수면뇌파 06 : 02 정상뇌파 03 : 32 자극 06 : 12 정상뇌파 03 : 42 정상뇌파 06 : 22 정상뇌파 03 : 52 수면뇌파 06 : 32 정상뇌파 04 : 02 정상뇌파 06 : 42 정상뇌파 04 : 12 정상뇌파 06 : 52 자극 04 : 22 정상뇌파 07 : 02 정상뇌파 04 : 32 수면뇌파 07 : 12 정상뇌파 04 : 42 정상뇌파 07 : 22 수면뇌파 07 : 32 수면뇌파 10 : 12 정상뇌파 07 : 42 수면뇌파 10 : 22 정상뇌파 07 : 52 정상뇌파 10 : 32 자극 08 : 02 정상뇌파 10 : 42 수면뇌파 08 : 12 정상뇌파 10 : 52 정상뇌파 08 : 22 수면뇌파 11 : 02 정상뇌파 08 : 32 정상뇌파 08 : 42 정상뇌파 08 : 52 정상뇌파 09 : 02 자극 09 : 12 수면뇌파 09 : 22 정상뇌파 09 : 32 정상뇌파 09 : 42 정상뇌파 09 : 52 정상뇌파 10 : 02 정상뇌파 "이것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군요." 로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졸다가 깨다가 졸다가 깨다가, 이따금 자극 몇 번 하는 식이군요. 그렇지만..." 로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덧붙였다. "다른 형태로 출력할 수는 없을까요?" 그녀가 말을 하는 동안 컴퓨터에서는 또 하나의 데이타가 뽑혀 나왔다. 11 : 12 정상 뇌파 게르하르드가 짐짓 초조한 목소리를 흉내내며 말했다. "사람들은 기계의 데이타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지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기계는 끝없이 이어진 숫자들의 나열을 얼마든지 감당해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특정한 패턴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반면 기계들은 그러한 패턴을 인식하는데 몹시 서툴렀다. 거기에 관련된 가장 고전적인 문제는 기계로 하여금 'B'라는 글자와 'D'라는 글자 사이의 차이점을 구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정도는 아이들도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기계가 그 두 가지의 패턴을 파악하고 그 차이점을 알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그래픽 형태로 보여 드리지요."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그가 자판을 두드리자 화면이 깨끗이 지워졌다. 잠시 후 화면상에 모눈종이 같은 눈금과 함께 그래프가 나타났다. "이럴 수가." 로스는 그래프를 보자, 혼자 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게르하르드가 물었다. "자극을 받는 횟수가 점점 잦아지고 있어요. 처음에는 꽤 오랫동안 자극이 없다가 나중에는 두 시간에 한번씩 자극을 받더니, 지금은 한 시간에 한번씩은 나타나는 것 같군요." "그래서요?" 게르하르드가 물었다. "뭔가 떠오르는 게 없어요?" 로스가 물었다. "뭐 특별한 건 없는데요." "이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로스가 말했다. "당신은 벤슨의 뇌와 컴퓨터가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죠?" "예..." "그 상호작용은 일종의 학습 패턴을 띠게 될 거예요. 마치 어떤 꼬마가 과자 상자를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죠. 만약 그 아이가 과자를 향해 손을 뻗을 때마다 당신이 아이의 손을 때린다면, 아이는 머지 않아 과자를 향해 손을 뻗지 않게 되겠죠. 이걸 보세요." 로스는 종이에다 대충 그림을 그렸다. "자, 이건 부정적인 강화의 과정이에요. 아이는 손을 뻗을 때마다 고통을 당하니까, 과자를 향해 손을 뻗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거예요. 나중에는 결국 완전히 멈추게 되겠죠. 그렇죠?" "그렇지요."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하지만..."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봐요. 만약 그 아이가 정상적인 아이라면 그렇게 될 거예요. 하지만 만약 그 아이가 피학성 취향을 가진 아이라면, 사태는 완전히 달라질 거에요." 로스는 다른 도형을 그렸다. "여기서는 아이가 과자를 향해 더 자주 손을 뻗고 있어요. 왜냐하면 맞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부정적인 강화가 되어야 하는데, 사실은 반대로 긍정적인 강화가 되는 셈이지요. 세실의 경우를 기억하고 있어요?" "아뇨."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컴퓨터에는 또 하나의 데이타가 들어오고 있었다. 11 : 22 자극 "맙소사,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로스가 말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겁니까?" "벤슨은 긍정적인 과정의 사이클로 접어들고 있어요." "이해할 수가 없군요." "세실의 경우와 똑같아요. 세실은 전극을 통해 컴퓨터와 연결되었던 최초의 원숭이에요. 1965년의 일이죠. 당시는 컴퓨터가 지금처럼 소형화되지 못한 시절이었죠. 컴퓨터의 덩치가 아주 컸기 때문에 진짜 전선이 원숭이와 컴퓨터를 연결해야 했죠. 그래요, 세실은 간질병을 앓고 있었어요. 컴퓨터는 발작이 시작되는 순간을 포착해서 그것을 중단시키기 위한 충격을 가하게 되어 있었어요. 그래요, 발작의 빈도는 점점 줄어들었지요. 꼬마가 과자를 향해 손을 뻗는 횟수가 줄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였지요. 하지만 그 대신 그와 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세실이 그 충격을 좋아하게 되었던 거죠. 세실은 충격으로 인한 쾌감을 즐기기 위해 발작을 촉발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럼 벤슨도 그런 경우란 말입니까?" "그런 것 같아요." 게르하르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잔,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하지만 인간은 자의에 따라서 간질의 발작을 일으키거나 멈출 수 없어요. 한마디로 발작을 통제할 수가 없다는 거지요. 발작은....." "비자발적인 것이죠." 로스가 말했다. "그건 맞아요. 심장 박동이나 혈압이나 땀을 흘리는 것 등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발작 역시 임의로 통제할 수는 없죠." 오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게르하르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것 같군요." 컴퓨터의 화면이 다시 깜빡거렸다. 11 : 32 --------- "내가 이야기를 해볼게요." 로스가 말했다. "당신은 회의를 너무 많이 빼먹은 것 같군요. 자율적인 학습이라는 말 들어본 적 있어요?" 게르하르드는 민망한 듯 한참을 망설이다 간신히 대답했다. "아뇨."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커다란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어요. 고전적으로는 자발적인 행동을 통제하는 법만을 배울 수 있다고 여겨졌죠. 당신은 자동차를 운전하는 법을 배울 수는 있지만, 당신의 혈압을 낮추는 법을 배울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의도적으로 자신의 몸이 요구하는 산소의 양을 점점 줄일 수 있고, 또 자신의 심장 박동을 거의 사망 상태로까지 저하시킬 수 있는 요가 수도자들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장의 연동 운동을 역전시켜서 항문으로 액체를 마실 수도 있죠. 하지만 그런 것은 모두 증명이 되지 않은 것들이고,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에요." 게르하르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완벽하게 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어요. 쥐에게 한쪽 귀만을 붉히도록 가르칠 수 있다는 거예요.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지요. 혹은 쥐에서 혈압이나 심장 박동을 낮추거나 높이는 방법을 가르칠 수도 있지요.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에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에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죠?" 게르하르드는 몹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이전에 느꼈던 당혹감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예를 들어서, 혈압이 높은 사람들을 팔에 혈압계를 부착하여 특정한 방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리고는 혈압이 떨어질 때마다 종을 울리는 거죠. 그 사람에게 가능한 한 종을 자주 울리도록 노력해 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종이 울린다고 하는 그 보상을 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처음에는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으로 보이겠지요. 하지만 머지 않아 그들은 보다 자주 종을 울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당연히 종은 더 자주 울리겠죠. 몇 시간이 지나면 종은 쉴새없이 울어댑니다." 게르하르드는 머리를 긁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벤슨이 충격이라는 보상을 받기 위해 더 자주 발작을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래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죠? 어차피 그 사람은 발작을 일으킬 수 없어요. 컴퓨터가 발작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을 테니까 말이에요." "그건 그렇지 않아요." 로스가 말했다. "몇 년 전 노르웨이의 어느 정신분열 환자가 전선으로 연결된 다음, 자신이 원하는 만큼 쾌락 터미널을 자극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어요. 결국 그 사람은 경련이 일어날 때까지 자신에게 과도한 자극을 주었어요." 게르하르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리차드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뭔가가 잘못 됐어." "뭐가?" "데이타가 들어오지 않는군." 11 : 32 ---------- 11 : 42 ---------- 로스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한 곡선의 컴퓨터 외삽법을 한번 찾아 봐요." 로스가 말했다. "벤슨이 정말로 학습 사이클로 접어들었는지, 그 속도는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볼 수 있겠죠." 로스는 문을 나서며 덧붙였다. "나는 벤슨이 어떻게 되었는지 가보겠어요." 문이 쾅 하고 닫혔다. 게르하르드는 서둘러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1971년 3월 12일, 금요일 파국 1 7층(특별 수술 병동)은 조용했다. 간호사실에는 두 명의 간호사가 있었다. 한 사람은 환자의 차트에 메모를 적어넣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사탕을 먹으며 영화 잡지를 읽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 다 차트가 정리되어 있는 선반으로 다가가 벤슨의 자료를 검토하는 로스에게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로스는 벤슨에게 정해진 약물이 투여되었는지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차트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벤슨에게 왜 토라진이 투여되지 않은 거죠?" 로스가 물었다. 간호사들은 깜짝 놀란 얼굴로 로스를 올려다보았다. "벤슨이라뇨?" "710호실 환자 말이에요." 로스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이미 자정이 지나 있었다. "그 환자는 정오부터 토라진을 복용하기로 되어 있었어요. 12시간 전부터 말이에요." "죄송합니다만... 차트 좀 봐도 될까요?" 간호사 한 사람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로스는 차트를 넘겨준 다음 간호사가 간호지시서를 뒤적이는 동안 가만히 지켜보았다. 토라진을 투여하라는 맥퍼슨의 지시에는 어떤 간호사가 붉은색으로 동그라미를 쳐놓았는데, 그 옆에 쓰여 있는 '연락'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로스는 벤슨에게 토라진이 다량으로 투여되지 않을 경우 그의 병적인 사고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게 되고, 따라서 위험한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그렇군요," 하고 간호사가 말했다. "이제 기억이 났어요. 모리스 박사님이 자기 자신과 로스 박사님의 투약 지시만을 따르라고 했어요. 우리는 이 맥피 박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연락을 해서 확인을 해보려 했죠..." "맥퍼슨 박사는 NPS의 책임자예요." 로스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간호사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그의 서명을 들여다 보았다. "우리가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당신이라도 이 서명을 읽을 수가 없었을 거예요. 한번 직접 보세요." 간호사는 그렇게 말하며 차트를 도로 내밀었다. "우리는 그게 맥피라고 쓴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찾아 보니 이 병원에는 맥피라는 이름을 가진 의사가 산부인과에 한 사람 밖에 없더라구요. 그건 말이 안되잖아요. 하지만 때로는 의사들이 실수로 남의 차트에 노트를 하는 수도 있기 때문에..." "알았어요." 로스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알았으니, 지금이라도 당장 그 사람에게 토라진을 투여하세요. 알았어요?" "알겠습니다, 박사님." 간호사가 말했다. 그녀는 로스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한번 흘겨본 다음, 약제실로 들어갔다. 로스는 710호실을 향해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벤슨의 병실을 지키고 있던 경찰관은 벽에 의자를 비스듬히 기댄 채 <몰래 한 사랑>이라는 잡지를 읽고 있었다. 그는 로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 잡지에 몰두하고 있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어디서 그런 잡지를 구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간호사 가운데 한 사람이 심심해하는 그를 보다 못해 그 잡지를 주었을 것이다. 경찰관은 또 바닥에 놓여진 재떨이를 향해 아무렇게나 재를 떨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로스가 다가가자, 그 경찰관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박사님." "안녕하세요." 로스는 그의 태만한 근무 태도에 뭐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상대가 경찰관이니만치 그녀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로스는 간호사들 때문에 무척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굳이 그런데까지 관여하고 싶지가 않았다. "별 일 없어요?" 로스가 물었다. "예, 아주 조용합니다." 710호실 안쪽에서는 텔레비전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토크쇼를 하는지,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누군가가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고 말하자, 더 커다란 웃음 소리가 터졌다. 로스는 방문을 열어 보았다. 방안에는 전등이 꺼져 있었고, 유일한 불빛은 텔레비전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벤슨은 깊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머리를 출입구 반대쪽으로 놓은 채 시트를 어깨까지 덮고 있었다. 로스는 텔레비전을 끄고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그의 다리에 손을 갖다댔다. "해리," 그녀는 조그만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해리..." 문득 로스는 동작을 멈추었다. 벤슨의 다리가 주는 감촉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손에 약간 힘을 주어 보니, 다리가 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로스는 침대 옆의 램프로 손을 뻗어 불을 켜보았다. 일순간에 방안은 환하게 밝아졌다. 이어서 로스는 시트를 걷어 보았다. 벤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침대 위에는 쓰레기통에 끼우는 비닐 봉지 세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바람을 불어넣어 아가리를 꽉 묶어 놓은 비닐 봉지였다. 그리고 머리와 팔 부분은 수건을 둘둘 말아 불룩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경찰 아저씨," 로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좀 들어와 보세요." 경찰관은 권총을 향해 손을 뻗으며 엉거주춤 안으로 들어왔다. 로스는 몸짓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이런 맙소사!" 경찰관이 내뱉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내가 물어 보고 싶은 말이에요." 경찰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즉시 욕실로 들어가 보았다. 텅 비어 있었다. 그 다음에는 벽장을 들여다 보았다. "옷은 여기 그대로 있군요..." "마지막으로 이 방을 들여다본 게 언제죠?" "....근데 신발은 없어졌어요." 경찰관은 여전히 벽장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는 당혹한 모습으로 로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사람 어디 갔죠?" "마지막으로 이 방을 들여다본 게 언제였어요?" 로스는 다시 한번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그리고는 침대 옆의 부저를 눌러 야간 당직 간호사를 불렀다. "한 20분 정도 되었을 겁니다." 로스는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창문은 열려 있었지만, 깎아지른 절벽 같은 7층 밑은 주차장이었다. "방문에서 떨어져 있었던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이것 봐요, 박사님, 그건 불과 몇 분밖에..." "몇 분이나 됐죠?" "담배가 떨어졌어요. 병원에는 담배 자동판매기가 없기 때문에 길 건너편의 다방에까지 갔다와야 했지요. 한 3분쯤 걸렸을 겁니다. 그때가 11시 30분 경이었지요. 그 동안 간호사들이 봐주겠다고 했어요." "잘 하셨군요." 로스는 그렇게 말하며 침대 옆의 테이블에 벤슨의 면도기가 놓여 있는 것을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의 지갑과 자동차 열쇠 등등 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다. 부저 소리를 들은 간호사가 나타나 문뒤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무슨 일입니까?" "환자가 사라진 것 같아요." 로스가 말했다. "뭐라구요?" 로스는 침대 위에 놓여 있던 비닐 봉지를 가리켰다. 간호사는 머리가 무척 둔한지, 한참만에야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엘리스 박사에게 연락하세요." 로스가 말했다. "맥퍼슨 박사와 모리스 박사에게두요. 그들은 아마 집에 있을 거에요. 교환대에 연락해서, 비상 사태가 생겼다고 하세요. 벤슨이 사라졌다고 하면 될 거예요. 그 다음에는 병원 경비실에도 연락하구요. 알겠어요?" "예, 박사님." 간호사는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로스는 벤슨의 침대에 걸터앉아 경찰관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 이 봉지들은 어디서 구했을까요?" 경찰관이 말했다. 로스는 이미 거기에 대한 추측을 해보았었다. "하나는 침대 옆 쓰레기통, 또 하나는 문 옆의 쓰레기통, 나머지 하나는 욕실의 쓰레기통에 있던 거예요. 두 개의 수건 역시 욕실에 있던 거구요" "현명하시군요." 경찰관이 말했다. 그리고는 벽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멀리는 가지 못했을 겁니다. 옷을 다 놔두었으니까요." "신발은 가지고 갔잖아요." "붕대를 두르고 입원복을 입은 사람이 설사 신발이 있다 한들 가봤자 얼마나 갔겠습니까." 경찰관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아무래도 본부에 알려야겠군요." "벤슨이 통화를 한 적이 있나요?" "오늘밤에 말입니까?" "그럼 지난 달에 통화한 걸 묻는 줄 아세요?" "이것 보세요,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로스는 그제야 그 경찰관이 20대 초반의 상당히 젊은 청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척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지만, 그는 아직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미안해요." 로스가 말했다. "그래요, 오늘밤에 통화한 적이 있어요?" "전화를 한 통 걸기는 했어요." 경찰관이 말했다. "11시 경이었지요." "통화 내용을 들었어요?" "아뇨."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난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조차...." 그는 미처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는 11시에 전화를 걸고, 11시에 이 병원을 나간 셈이군요." 로스는 병실 바깥으로 나가 간호사실이 있는 복도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언제나 간호사들이 근무를 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 앞을 지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간호사들의 눈에 띄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빠져나간 걸까? 로스는 복도의 반대쪽을 바라보았다. 그쪽 끝에는 계단이 있었다. 어쩌면 걸어서 내려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7층이나 되는 계단을 걸어서 내려가기엔 벤슨의 체력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입원복을 입은 차림으로 1층의 로비를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빠져 나갔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알 수가 없군요." 경찰관이 복도로 나오며 중얼거렸다. "어디로 갔을까요?" "그 사람은 무척 머리가 좋아요." 로스가 말했다. 모두들 그 사실을 잊고 있는 듯했다. 경찰에게 있어서 벤슨은 폭력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런 사람을 하루에도 수백 명씩 접하고 있을 것이다. 병원측 사람들에게 있어서 벤슨은 위험하고 정신 나간 환자일 뿐이었다. 따라서 벤슨이 누구 못지 않게 영리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똑똑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컴퓨터 분야에서 벤슨은 남다른 성과를 이루어냈다. NPS에서 처음에 실시한 정신과 테스트에 포함되어 있던 지능지수 검사에서, 그의 I.Q.는 144인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는 면밀하게 탈출 계획을 세운 다음, 문틈에 귀를 기울이고 담배를 사러 간다는 경찰관과 간호사의 대화를 엿들을 만한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불과 몇 분만에 감쪽같이 병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벤슨은 입원복 차림으로는 절대로 병원을 빠져나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외출복도 그냥 병실에 놔두었다. 어쩌면 외출복을 갈아입어도 병원을 빠져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면회 시간이 이미 3시간 전에 끝난 이 한밤중에 외출복 차림으로 병원을 나서다가는, 당연히 로비의 데스크에서 제지를 당할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갔단 말인가? 경찰관은 본부로 전화를 걸기 위해 간호사실로 다가갔다. 로스는 그 뒤를 따라가면서 각 병실의 문들을 살펴보았다. 709호실에는 화상 환자가 입원해 있었다. 살며시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그 환자 혼자 있을 뿐이었다. 708호실은 비어 있었다. 신장 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가 오늘 퇴원했던 것이다. 로스는 그 방도 역시 들여다 보았다. 그 옆방에는 '물품 보관실'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그 방에는 붕대나 봉합에 쓰이는 기구들, 기타 침대 시트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 로스는 각종 용해액 병들이 일렬로 쭉 늘어서 있는 사이를 조심스레 훑어보았다. 그 다음에는 살균 마스크와 가운, 간호사와 병원 남자 직원들의 작업복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 로스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선반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구겨서 집어던진 듯한 파란 입원복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 주위에는 병원의 남자 직원들이 입는 하얀 바지와 셔츠, 재킷 등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로스는 간호사를 불렀다. "그건 불가능해요." 엘리스는 간호사실 안에서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며 잘라 말했다. "절대 불가능하지. 그자는 수술 받은 지 이틀, 아니 정확히 말해서 하루하고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은 사람이오. 그런 사람이 병원을 빠져나가다니, 그건 말도 안됩니다." "하지만 그는 나갔어요." 자네트 로스가 말했다.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방법을 이용했죠. 남자 직원의 유니폼을 훔쳐 입은 거예요. 그런 차림으로 6층까지 내려간 다음, 거기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갔을 거예요. 아무도 그게 벤슨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겠죠. 남자 직원들은 그 시간에도 수시로 들락거리니까요." 엘리스는 디너 재킷과 술이 달린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나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친 채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로스는 지금까지 그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믿소. 그자는 토라진에 취해 정신도 제대로 차릴 수 없었을 거요, 게다가..." "그는 하나도 먹지 않았어요." "하나도 먹지 않다니?" "토라진이 뭣니까?" 경찰관이 무언가 메모를 하며 그렇게 물었다. "간호사들은 지시서에 의문점이 있어서 그 지시를 따르지 않았대요. 어젯밤 자정 이후로 벤슨은 안정제나 진정제를 단 한 알도 먹지 않았어요." "빌어먹을." 엘리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죽여 버릴 듯한 시선으로 간호사들을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머리는 어떻게 했단 말이오? 그의 머리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었소. 누군가 그걸 알아보았을 거요."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모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가발을 가지고 있었어요." "농담하는 건가?" "내 눈으로 봤어요." 모리스가 말했다. "그 가발의 색깔은 무슨 색이었습니까?" 경찰관이 물었다. "검은색이요." 모리스가 대답했다. "오, 하느님!" 엘리스가 중얼거렸다. 로스가 말했다. "어떻게 가발을 손에 넣을 수 있었죠?" "그 사람 친구가 갖다 주었어요. 입원하던 날이었지요." "이것 보시오." 엘리스가 말했다. "설사 가발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을 거요. 그는 지갑도 돈도 모조리 다 놔두고 갔소. 이 시간에는 택시도 없을 거요." 로스는 현실을 부정하는 엘리스의 능력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벤슨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금 있는 힘을 다해서 벤슨이 사라졌음을 보여 주는 증거들과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로스가 말했다. "11시 경에 말이에요." 그녀는 다시 모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가발을 가져온 사람을 기억하고 있어요?" "예쁜 아가씨였어요." 모리스가 말했다. "이름은요?" 로스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안젤라 블랙이라고 하더군요." 모리스가 얼른 대답했다. "전화번호부에 그런 이름이 있는지 좀 찾아보세요." 로스가 말했다. 모리스는 전화번호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때 전화 벧이 울렸다. 엘리스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는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로스에게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여보세요." 로스가 말했다. "컴퓨터를 분석해 봤어요." 게르하르드의 목소리였다. "지금 막 끝났는데, 역시 당신 말이 맞았어요. 벤슨은 이식된 컴퓨터를 이용해 학습 사이클로 접어들었어요. 그가 자극을 받은 시점이 예측한 곡선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어요." "놀라운 일이군요." 로스가 말했다. 그녀는 게르하르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엘리스와 모리스와 그리고 경찰관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뭔가 기대에 찬 시선으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당신이 한 말과 완전히 맞아 떨어져요."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벤슨은 그 충격을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발작이 점점 잦아지기 시작했어요. 곡선이 날카로운 각도로 상승하고 있는 중이에요." "언제 한계점을 넘어설까요?" "얼마 남지 않았어요."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그가 주기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물론 그렇겠지만, 새벽 6시 4분에는 거의 연속적인 자극을 받게 될 겁니다." "확실합니까?" 로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동시에 시계를 내려다보니, 바늘은 이미 1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틀림없습니다."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오늘 아침 6시 4분에는 연속적인 자극이 시작될 겁니다." "알았어요." 로스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다음,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벤슨은 자신의 컴퓨터를 이용하여 학습 단계로 접어들었어요. 오늘 아침 6시면 한계점에 이를 거예요." "맙소사." 엘리스가 벽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섯 시간도 채 남지 않았군." 저쪽에서는 모리스가 전화번호부를 한쪽으로 밀어놓고 114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럼 웨스트 로스앤젤레스를 찾아봐 주세요." 잠시 후 그가 다시 말했다. "신규 가입자 명단은요?" 경찰관은 메모를 멈추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섯 시에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겁니까?" "그럴 것 같아요." 로스가 대답했다. 엘리스는 여전히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2년만에 다시 담배를 피워보는군." 엘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담배를 비벼 껐다. "맥퍼슨도 알고 있소?" "전화를 걸었어요." "등록되지 않은 번호들을 살펴봐 주시오." 모리스가 말했다. 잠시 후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대학 병원의 모리스 박사라고 합니다. 지금 긴급 사태가 벌어졌어요. 반드시 안젤라 블랙을 찾아야 합니다. 만약..." 모리스는 미처 말을 마치지 못하고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빌어먹을!" "별 소득이 없나 보죠?" 모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벤슨이 그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아닌지도 아직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있소." 엘리스가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전화했을 수도 있지 않소." "그게 누구든 간에, 그 사람은 앞으로 몇 시간 후면 커다란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로스가 말했다. 그녀는 벤슨의 차트를 뒤적여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오늘밤은 아주 길어질 것 같군요.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각자 움직여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2 고속도로는 무척 혼잡했다.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금요일 새벽 1시에도 말이다. 그녀는 마치 화낸 뱀처럼 몇 마일 앞에까지 이어져 있는 앞 차들의 빨간 미등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은 모두 이 시간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자네트 로스는 고속도로에 접어들면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이따금 밤 늦은 시간에 차를 몰고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다 보면, 머리 위로 휙휙 지나가는 커다란 초록색 간판과, 위로 혹은 아래로 거미줄처럼 이어진 인터체인지 사이를 질주할 때,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 같아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했다. 그녀가 어렸을 때 처음 고속도로가 건설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라날수록 고속도로도 점점 자라나는 듯했다. 하지만 로스는 그것을 나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풍경의 일부일 뿐이었다. 고속도로는 빠르고, 그리고 재미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기술 문명에 종속된 도시라 할 수 있을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자동차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자동차 없이 살아가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치 수백 마일이 떨어진 곳에서 파이프로 물을 끌어오지 않으면, 혹은 특정한 건축 기술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이 도시의 현실이었고, 금세기 초부터 줄곧 그래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로스는 자동차 안에서의 생활이 자신에게 미치는 미묘한 심리적 영향을 느끼기 시작했다. 로스앤젤레스에는 노천 카페 같은 것이 없었다. 걸어다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느긋하게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는 노천 카페 같은 것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장소였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신호등에 걸려 잠시 자동차가 멎었을 때 옆 차에 타고 있는 사람을 흘끗 쳐다보다가는, 신호가 바뀌면 휭 하니 달려가 버리는 것이 전부였다. 거대한 유리와 강철로 지어진, 냉방이 되고 카페트가 깔리고 단조로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립된 누에고치 속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은 확실히 비인간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서로 모이고 싶어하고, 상대방을 보거나 혹은 상대방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구를 방해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이 부근의 정신과 의사들은 이 지역에 탈인격화 증후군이라 부를 만한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로스앤젤레스는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도시이고, 따라서 그들은 모두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자동차가 그들을 계속해서 이방인으로 묶어놓았다.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들고, 그렇다고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인간적인 만족감을 맛보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외로워졌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것, 친구도 없고, 가족이나 옛날과 같은 가정을 가질 수도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자살의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 바로 자동차였다. 경찰은 그런 현상을 '개별 단위의 참사'라는 말로 표현한다. 마음에 드는 고가도로를 선택하여 80이나 90킬로 정도로 속도를 내어 난간을 들이받으면, 아주 간단하게 모든 것을 끝내 버릴 수 있다. 때로는 망가진 자동차의 잔해에서 시신을 끌어내는데 몇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로스는 시속 65마일의 속도로 다섯 개의 차선을 가로질러 선셋가의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이른바 스위스 알프스라고 불리우는 지역을 통해 헐리우드 힐을 향해 달렸다. 스위스 알프스는 그 부근에 동성연애자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로스앤젤레스로 모여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도시가 자유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었다. 물론 물자가 부족하다는 대가를 치르기도 하지만 말이다. 로렐 캐년으로 접어든 로스는 빠른 속도로 커브길을 돌았다. 바퀴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나며,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둠을 훑듯이 가로질렀다. 이곳에는 지나다니는 차들도 별로 없었다. 이제 몇 분 후면 벤슨의 집에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론상으로 로스와 기타 NPS 스텝들이 안고 있는 문제는 아주 간단했다. 여섯 시 이전에 벤슨을 찾아내어 병원으로 데리고 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만 할 수 있으면 이식된 컴퓨터의 연결을 풀고 지금 진행되는 주기를 멈출 수 있었다. 그런 다음에는 며칠 안정을 취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새로운 단말기를 연결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은 전극을 잘못 선택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그것은 그들도 이미 예상하고 있던 위험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얼마든지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위험이었기 때문에 기꺼이 감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기회는 그들의 눈앞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벤슨을 도로 병원으로 데려와야만 했다. 문제는 간단했고, 해답도 비교적 간단한 편이었다. 그들은 벤슨의 차트를 면밀히 검토한 끝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로스는 로렐에 있는 벤슨의 집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고, 엘리스는 벤슨이 자주 드나들던 자크래빗이라는 이름의 스트립 바를 찾아나섰다. 모리스는 벤슨의 직장인 산타 모니카의 오토 트로닉스라는 회사를 향해 출발했다. 모리스가 그 회사의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더니, 그가 직접 사무실로 나와 문을 열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들 세 사람은 한 시간 후에 다시 만나 서로의 성과들을 비교해 보기로 했다. 무척이나 단순한 계획이었다. 로스는 정말이지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로스는 벤슨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현관 문을 향해 다가갔다. 현관 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안에서는 누군가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로스는 노크를 한 다음, 현관 문을 열어 보았다. "계세요?"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지 않았다. 웃음 소리는 집 뒤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로스는 홀로 들어섰다. 벤슨의 집에 와 본 적이 없는 로스는, 그가 어떻게 생긴 집에서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대충 주위를 둘러보니,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던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에서 볼 때는 그저 평범한 목재 건물에 지나지 않았다. 벤슨 자신과 마찬가지로 특별히 눈에 뜨일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서고 보니, 마치 루이 14세의 응접실 같은 분위기를 짙게 풍기고 있었다. 우아한 골동품 같은 의자와 소파들, 벽에 걸린 장식용 벽걸이, 탄탄해 보이는 나무가 깔린 바닥 등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무도 없어요?" 로스는 다시 한번 큰소리로 외쳐 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집안에 메아리처럼 울리는 것 같았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지만, 웃음 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로스는 그 소리를 따라 집 뒤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부엌이 나왔다. 역시 고풍스런 가스 스토브가 눈에 띄었을 뿐 오븐도 식기 세척기도 전기 믹서도 심지어 토스터기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부엌이었다. 말하자면 기계라고는 하나도 없는 셈이었다. 벤슨은 현대적인 기계가 하나도 없는 공간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부엌의 창문을 통해 집 뒤쪽이 내다보였다. 거기에는 잔디가 깔린 조그만 마당과 평범하다 못해 왜소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조그만 풀장이 하나 있었다. 역시 벤슨의 평범하고도 겸손한 성격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셈이다. 그 뒷마당에는 풀장 밑바닥의 조명등에서 새어나오는 푸르스름한 빛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풀장 안에서는 두 명의 아가씨가 웃음을 지으며 서로 물방울을 튀기고 있었다. 로스는 바깥으로 나가 보았다. 그 아가씨들은 로스가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물놀이를 계속하고 있었다. 마치 물 속에서 레슬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로스는 풀장 옆에까지 다가가서 "집안에 아무도 없어요?" 하고 물어 보았다. 아가씨들은 그제서야 로스를 발견하고 서로 떨어졌다. "해리를 찾아왔어요?" 둘 가운데 한 아가씨가 말했다. "그래요." "경찰인가요?" "난 의사예요." 아가씨 하나가 나긋나긋한 몸놀림으로 물 속에서 나오더니, 수건으로 몸을 닦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그만 빨간색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한발 늦었군요." 그 아가씨가 말했다. "하지만 우린 경찰을 부를 마음은 없었어요. 그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그녀는 한쪽 다리를 의자 위에 올려놓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로스는 그 동작이 무척 유혹적인 동시에 파괴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잘 계산된 행동임에 틀림없었다. 로스는 그 아가씨 두 명이 서로를 좋아하고 있는 사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언제 떠났죠?" "몇 분밖에 되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은 언제부터 여기 와 있었죠?" "한 일주일쯤 됐어요." 풀장에 남아 있던 아가씨가 대답했다. "해리가 우리를 초대했거든요. 그 사람은 우리가 무척 귀엽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다른 아가씨가 어깨에 수건을 두른 채 말했다. "우린 그 사람을 자크래빗에서 만났어요. 그 사람, 거기 자주 오는 편이거든요." 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아가씨가 말했다. "오늘밤에는 무슨 옷을 입고 나타났는지 아세요?" "글쎄요?" "병원 유니폼을 입고 있었어요. 온통 하얀색으로 말이에요."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덧붙였다. "정말 못말리는 사람이에요." "이야기를 나눠 봤어요?" "물론이죠." "그 사람이 뭐라고 하던가요?" 빨간 비키니를 입은 아가씨가 집 안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로스도 그 뒤를 따랐다. "경찰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어요. 즐겁게 지내고 있으라는 말도 하더군요." "왜 여기를 다녀갔을까요?" "뭔가를 가지러 왔대요." "그게 뭐죠?" "글쎄요, 자기 서재에서 뭔가 가져가더군요." "서재는 어느 쪽이죠?" "보여 드릴게요." 그녀는 로스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을 지나갈 때 마룻바닥에 그녀의 맨발 자욱이 찍혔다. "분위기가 좀 험하죠? 해리는 정말 미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어요?" "네." "그럼 당신도 알겠군요,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그녀는 주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이상한 물건들 좀 보세요.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죠?" "그는 환자예요." 로스가 말했다. "그런 것 같았어요." 아가씨가 말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걸 봤거든요. 무슨 사고라도 당했나요?" "그 사람은 수술을 받았어요." "농담하지 마세요. 정말로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단 말이에요?" "그래요." "설마..." 그들은 거실을 통해 침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아가씨는 복도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더니 방문 하나를 가리키며 거기가 서재라고 일러주었다. 고풍스런 책상과 램프가 눈에 띄었고, 소파 위에는 잡동사니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그 사람은 여기로 들어와서 뭔가를 가지고 나갔어요." "뭘 가지고 가는지 못봤어요?" "우린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어요. 무슨 커다란 종이를 둘둘 말아서 들고 가는 것 같았어요." 아가씨는 두 손으로 표시를 해가며 이렇게 덧붙였다. "아주 큰 종이였어요. 무슨 청사진처럼 보이더군요." "청사진?" "두루마리 안쪽이 푸른색이었어요. 바깥쪽은 흰색이었구요. 그리고 무척 커다란 종이였어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다른 것은 가져간 게 없나요?" "있어요. 금속으로 만든 상자 같은 것이었어요." "어떤 상자였죠?" 로스는 내심 무슨 도시락 가방이나 조그만 여행용 가방을 염두에 두며 물었다. "무슨 연장 상자 같았어요. 그 사람이 상자를 닫기 전에 얼핏 속을 들여다 보았는데, 무슨 연장 같은 것을 본 것 같아요." "당신이 알아볼 수 있을 만한 물건은 없던가요?" 아가씨는 입술을 깨물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글쎄요, 정확히 본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요?" "그 상자 속에 권총이 들어 있는 것 같았어요." "어디로 간다는 말은 하지 않던가요?" "아뇨." "무슨 단서가 될 만한 이야기도 없었나요?" "없었어요."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은요?" "글쎄요, 그것도 재미있었어요." 아가씨가 말했다. "그는 먼저 나에게 키스를 하고 수지에게도 하더니, 즐겁게 놀고 있으라고 말했어요. 그리고는 경찰에 말하지 말라고 하고서는, 우리를 두 번 다시 못보게 될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재미있는 말이었어요. 하지만 당신도 해리가 어떤 사람인지 아시잖아요." "알죠." 로스가 말했다. "나도 해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로스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1시 47분이었다. 이제 4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3 엘리스가 처음으로 느낀 것은 냄새였다. 무슨 시커먼 동물의 체취와도 같은 후덥지근하고 축축하고 매캐한 냄새였다. 엘리스는 역겨움에 코를 벌름거렸다. 벤슨은 어떻게 이런 냄새를 참아낼 수 있었을까? 그는 스포트라이트가 어둠을 가르며 날아가 늘씬한 허벅지를 비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손님들이 일제히 잔뜩 기대에 찬 모습으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엘리스는 해군에 복무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당시 그들은 볼티모어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런 장소에 와보기는 그때 이후로 지금이 처음이었다. 한마디로 환상과 좌절이 뒤범벅된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그렇게도 빨리 흘러가 버렸다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자,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신디아 양을 소개합니다. 아름다운 신디아를 위해 아낌없는 박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스포트라이트가 점점 넓어지더니, 다소 추해 보이긴 하지만 완벽에 가까운 몸매를 가진 아가씨가 나타났다. 스포트라이트가 그녀의 눈 위에까지 올라가자, 그녀는 윙크를 해보이며 이상야릇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녀의 춤은 음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이 보였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엘리스는 손님들을 둘러보았다. 남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머리를 짧게 자른 험악한 인상의 여자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해리 벤슨? 예, 그 사람 여기 자주 옵니다." 지배인이 말했다. "최근에 본 적 있습니까?" "글쎄요, 최근에는 잘 모르겠군요." 지배인이 기침을 하며 말했다. 엘리스는 그의 기침에서 짙은 술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제발 그 작자, 여기 좀 얼씬거리지 않았으면 좋겠소. 아무래도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 같더군. 언제나 아가씨들을 귀찮게 군다니까. 이런 곳에 아가씨들을 끌어들이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소? 그놈의 살인 사건 때문에 말이오."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손님들을 훑어보았다. 어쩌면 벤슨은 옷을 갈아입었을지도 모른다. 설마 아직까지 병원 유니폼을 입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엘리스는 사람들의 뒷통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얀 붕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최근에는 그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말입니까?" "없소." 지배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안 보인지 한 일주일 가량 되었을 거요." 토끼를 연상시키는 비키니 유니폼을 입은 웨이트레스 하나가 옆을 지나갔다. "샐, 요새 해리 본 적 있나?" "그 사람 수시로 드나들잖아요."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술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걸어가 버렸다. "제발 그 작자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소." 지배인은 다시 기침을 하며 그렇게 말했다. 엘리스는 클럽 안으로 좀더 깊이 들어가 보았다. 무대 위에서 춤추는 아가씨를 따라 스포트라이트가 움직일 때마다 머리 위로 담배 연기가 자욱히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무대 위의 아가씨는 브래지어를 푸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그녀는 일종의 투 스텝 셔플 춤을 추며 멍한 눈으로 손님들을 바라보며 등 뒤로 손을 돌려 브래지어의 고리를 더듬고 있었다. 그때 엘리스는 벤슨이 스트립 걸을 기계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말 그대로 기계적이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또한 인위적이기도 했다. 신디아의 브래지어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엘리스는 그녀의 양쪽 가슴에서 성형 수술을 받은 흔적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엘리스는 자글론이 이런 모습을 보면 무척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계와의 섹스에 대한 그의 이론에 딱 들어맞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글론은 개발부서의 청년이었는데, 그는 인간의 지능을 가진 인공 지능을 개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성형 수술 및 인체에 대한 기계류의 이식으로 인해 인간이 보다 기계에 근접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보트의 개발로 말미암아 기계가 보다 인간과 비슷해지는 추세로 나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그는 인간이 인조 인간과 섹스를 즐기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고 주장하곤 했다. 엘리스는 스트립 걸을 바라보며 자글론의 주장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는 다시 한번 손님들을 둘러보았지만, 그런 곳에서 벤슨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 웬지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그는 공중전화 박스와 남자 화장실까지 들여다보았다. 좁아 터진 남자 화장실에는 가뜩이나 구토한 찌꺼기까지 남아 있었다. 엘리스는 다시 한번 얼굴을 찌푸리며 세면대 위에 걸려 있는 깨진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자크래빗 클럽에 대한 다른 소문들은 어떤지 몰라도, 악취만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엘리스는 벤슨이 그런 사실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했다. 엘리스는 홀을 통해 출입구 쪽으로 걸어나왔다. "그 작자, 찾았소?" 지배인이 물었다. 엘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대로 그곳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는 신선한 밤 공기를 호흡하며 자신의 자동차에 올랐다. 냄새에 대한 생각들이 머리 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는 전에도 그런 문제를 생각해본 적이 있었지만,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벤슨에게 행해진 수술은 대뇌 변연계라고 하는 뇌의 특정한 부위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진화의 개념으로 따져 보면, 뇌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부분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 부위였다. 그 본래의 목적은 냄새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 부위가 옛날 용어로는 '냄새맡는 뇌'라는 뜻인 '라이넨세파론'이라고 불리운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라이넨세파론은 파충류가 지구를 지배하던 시대인 1억 5천만 년 전에 형성되었다. 그것은 가장 원시적인 행동, 즉 분노와 공포, 욕망과 배고픔, 공격과 위축 등의 행동을 통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악어 같은 파충류들은 자신의 행동을 지배할 다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인간에게는 대뇌 피질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뇌 피질이 생겨난 것은 최근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적인 형태로 진화하기 시작한 것이 불과 2백만 년 전부터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대뇌 피질이 지금과 같은 상태로 진화한 것은 그중에서도 10만 년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은 진화의 시계라는 척도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다. 대뇌 변연계를 둘러싼 피질이 점점 성장해가는 동안 변연계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새로운 피질 속에 점점 더 깊게 파묻히는 형상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사랑을 느끼고 윤리를 걱정하며 또는 시를 쓰거나 하는 등의 작용을 하는 피질은 그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악어의 뇌와 불편한 평화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때로는 벤슨의 경우처럼 그 평화가 깨지고 악어의 뇌가 간헐적으로 대세를 지배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냄새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 것인가? 엘리스는 그 점을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이상한 냄새가 느껴지면서 발작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로지 그런 관계밖에 없는 것인가? 다른 영향은 아무것도 없을까? 엘리스는 어차피 그런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자동차를 몰았다. 유일한 문제는 악어의 뇌가 발작을 일으키기 전에 벤슨을 병원으로 데리고 오는 것뿐이다. 엘리스는 NPS에서 일방 유리를 통해 자신의 눈으로 그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던 벤슨이 갑자기 격렬한 동작으로 벽을 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의자를 집어들고 벽을 내려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발작은 그런 식으로 아무런 경고없이 시작되었고, 일단 시작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함을 수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 6시. 엘리스는 이제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4 "무슨 일입니까, 무슨 비상 사태라도 생긴 겁니까?" 파레이가 오토 트로닉스의 현관문을 열며 물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모리스는 한기에 몸을 떨며 바깥에 선 채 그렇게 대답했다. 꽤나 추운 밤이었는데다가, 30분 동안이나 파레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탓이었다. 파레이는 키가 크고 늘씬한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작은 무척 느린 편이었다. 어쩌면 아직 잠이 덜 깬 것인지도 몰랐다. 그가 현관문의 자물쇠를 열고 모리스를 안으로 안내하는 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전등을 켜자, 평범한 로비 같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건물의 뒤쪽으로 모리스를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마치 동굴을 연상시키는 방이 자리하고 있었다. 거대한 기계 주위로 책상 몇 개가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모리스는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만합니다." 파레이가 말했다. "너무 어수선하지요?" "아뇨. 그게 아니라..." "사실 좀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일을 해야 하니 어쩔 수가 없지요." 그는 방 건너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해리의 책상입니다. 하프 옆에 있는 책상 말입니다." "하프라니요?" 파레이는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커다란 기계를 가리켰다. "우리는 농담 삼아 희망없는 자동 탁구 연습기를 줄여서 그냥 하프라고 부릅니다." 파레이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뭐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우리들끼리 주고받는 농담인 셈이지요." 모리스는 그 기계 주위를 한바퀴 삥 돌며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 기계가 탁구를 친다는 말입니까?" "별로 잘 치지는 못합니다." 파레이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 연구가 끝난 상태는 아니지요. 이건 DOD(국방성)에서 주문을 받은 것인데, 그들은 탁구를 칠 수 있는 로보트를 만들어 달라고 하더군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어요. 별로 중요하지 않은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는 것 같군요." 모리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이 번번히 알아맞히는 것도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파레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런 걸 원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물론 성능은 뛰어납니다. 컴퓨터가 3차원의 공간에서 빠른 속도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공을 식별해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맞받아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설마 국무성에서 탁구 대회를 개최하려고 이런 걸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은 아니겠지요." 파레이는 방 뒤편으로 걸어가더니, 냉장고 문을 열고 병 두 개를 꺼냈다. 그 냉장고에는 '방사능'을 나타내는 오렌지 표시와 함께 '허락 없이 손대지 말 것'이라는 경고문이 씌어져 있었다. 파레이가 '커피 드시겠소?' 하고 물었다. 모리스는 경고문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 직원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괜히 붙여놓은 겁니다." 파레이가 다시금 웃음을 터뜨리며 그렇게 말했다. 모리스는 그의 쾌활한 태도가 다소 마음에 거슬렸다. 그는 파레이가 인스턴트 커피를 타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리스는 벤슨의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해리는 좀 어떻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모리스가 되물었다. 제일 윗서랍에서는 종이와 연필, 삼각자, 이런저런 계산을 해놓은 메모지 등이 들어 있었다. 두 번째 서랍에는 서류들만 잔뜩 들어 있었다. 대부분 편지인 것 같았다. "음, 병원에 입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라져 버렸어요. 지금 찾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이 좀 이상해졌어요." 파레이가 말했다. "그런 것 같아요." 모리스는 서류들을 쭉 훑어보며 대답했다. 대부분 업무상의 편지들이었고, 이따금 청구서 같은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 기억나는군요." 파레이가 말했다. "분수령 주간 동안이었지요." 모리스가 고개를 들고 되물었다. "무슨 주간이라구요?" "분수령 주간이요." 파레이가 말했다. "커피는 어떻게 드십니까?" "블랙으로 주십시오." 파레이는 모리스에게 컵을 건네준 다음, 자기 잔에는 프림을 타서 휘휘 저었다. "분수령 주간은 1969년 7월에 있었어요. 아마 들어보지 못했을 겁니다." 모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지만, 우리는 다들 그렇게 부릅니다." 파레이가 말했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들 그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무슨 날 말입니까?" "말 그대로 분수령이지요. 전세계의 컴퓨터 과학자들은 그걸 알고 있었고,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1969년 7월의 일이었지요. 그날은 전세계 모든 컴퓨터의 정보 처리 능력이 전세계 모든 인간의 두뇌의 정보 처리 능력을 추월하는 날이었습니다. 컴퓨터가 전 세계 35억 인구의 두뇌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입력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게 분수령이라는 겁니까?" "그렇지요." 파레이가 말했다. 모리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혀끝이 타는 듯이 독했지만, 정신은 좀 나는 것 같았다. "혹시 농담 아닙니까?" "천만에요, 절대 아닙니다." 파레이가 말했다. "그건 사실이에요. 분수령은 1969년에 지나갔고, 그 이후에도 컴퓨터는 꾸준히 성장해 왔어요. 1975년이 되면 컴퓨터는 기능 면에서 인간을 50대 1의 비율로 앞서게 될 겁니다." 파레이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해리는 그런 사실 때문에 무척 당혹해 하고 있었지요." "상상이 가는군요." 모리스가 말했다. "그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습니다. 아주 이상하고 은밀해지기 시작했지요." 모리스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컴퓨터 장비가 한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니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컴퓨터가 가득 들어차 있는 공간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모리스는 자신이 벤슨에 대해 무언가 잘못 생각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벤슨도 다른 보통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인간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결코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경험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언젠가 로스가 한 말이 생각났다.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는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자유주의적인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나머지 보통 사람들과 비슷한 점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파레이는 다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상황에서 파레이를 만났다면 모리스는 아마 그를 어릿광대 쯤으로 치부하고 무척 혐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나칠 정도로 명랑해 보였다. 그런 웃음과 코믹한 태도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당신은 이 분야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지 잘 모를 겁니다." 파레이가 말했다. "정말 더럽게 빨라요. 우리는 불과 지난 몇 년 사이에 100분의 1초의 시대에서 10억분의 1초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1952년에 '일리악 1'이라는 컴퓨터가 개발되었을 때, 그 녀석은 1초에 1만 1천 회의 수학적 연산을 할 수 있었습니다. 꽤 빠르다고 생각되지요? 지금은 '일리악 4'의 개발이 거의 끝나가는 단계입니다. 이 컴퓨터는 1초에 2억 회의 계산을 해치웁니다. 말하자면 제4세대 컴퓨터가 개발된 거지요. 물론 이 컴퓨터는 다른 컴퓨터의 도움 없이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겁니다. 그들은 새로운 일리악을 개발하기 위해 다른 두 개의 컴퓨터를 2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작동시켜야 했으니까요." 모리스는 커피를 마셨다. 어쩌면 피곤 때문인지도 몰랐고, 또 어쩌면 당장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그 방의 분위기 때문인지도 몰랐지만, 이제 모리스는 벤슨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디자인하는 컴퓨터. 어쩌면 좀더 세월이 지나면 그놈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 로스는 이런 현상을 뭐라고 표현했던가? 망상의 공유? "책상에서 뭐 흥미로운 거라도 발견했습니까?" "아뇨." 모리스가 대답했다. 그는 책상 뒤의 의자에 앉아 방안을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벤슨과 같이 행동하고 벤슨과 같이 사고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벤슨이 되어 보고 싶었다. "벤슨은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습니까?" "그건 잘 모릅니다." 파레이가 맞은편 책상 위에 걸터앉으며 대답했다. "그는 몇 달 전부터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자꾸만 숨어들기 시작했어요. 뭔가 법에 저촉되는 짓이기라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나는 그가 병원에 입원하려 한 것도 알고 있었소. 하지만 그는 당신네 병원을 무척 싫어하는 편이었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모리스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렇게 물었다. 벤슨이 병원을 싫어한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파레이는 대답 대신 몇 가지 종이 조각과 사진이 꽂혀 있는 게시판 쪽으로 다가가더니, 노랗게 변색한 신문 기사 하나를 뽑아 들고 모리스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1969년 7월 17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에서 오려낸 신문 기사였다. '대학 병원, 새로운 컴퓨터를 구입하다'라는 제목 아래, 병원 지하실에 IBM 시스템 360 컴퓨터가 설치되어 연구와 수술보조를 비롯한 다양한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날짜를 보셨소?" 파레이가 말했다. "바로 분수령 주간이었소." 모리스는 그 신문 조각을 들여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5 "나는 논리적인 사고를 하려고 애쓰고 있소, 로스 박사." "이해할 수 있어요, 해리." "이런 문제를 논의할 때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로스는 녹음 테이프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맞은 편에서는 엘리스가 눈을 감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담배가 타들어가고 있었다. 모리스는 녹음기에 귀를 기울이며 커피를 또 한 잔 마셨다. 로스는 이제부터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지금까지 그들이 알고 있는 내용들을 정리해 보고 있었다. 테이프가 계속 돌아갔다. "나는 내가 이른바 반대해야 할 추세들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거하여 사물을 분류합니다." 벤슨이 말했다. "중요하게는 우리가 반대해야 할 네 가지 추세가 있지요. 그게 무엇인지 들어보고 싶습니까?" "그럼요, 물론이죠." "정말입니까?" "정말 들어보고 싶어요." "첫 번째 추세는 컴퓨터의 일반성입니다. 컴퓨터는 기계임에 틀림없지만,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 등장한 다른 어떤 기계와도 다릅니다. 다른 기계들은 각기 특정한 기능을 가지고 있지요. 자동차나 냉장고, 식기 세척기 등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기계가 당연히 특정한 기능을 가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컴퓨터는 그렇지가 않소. 컴퓨터는 모든 종류의 일을 처리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컴퓨터는..." "내가 말을 끝까지 할 수 있게 해주시오. 두 번째 추세는 컴퓨터의 자율성입니다. 옛날에는 컴퓨터도 자율성을 띠지는 못했지요. 단순한 전자 계산기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시절에는 말입니다. 그때는 언제나 사람이 옆에 붙어 앉아서 버튼을 누르고 일을 시켜야 했습니다. 마치 자동차처럼 말입니다. 자동차는 운전자가 없으면 절대로 굴러가지 못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소. 컴퓨터는 점점 자율성을 띠어가고 있는 겁니다. 다음 번에 할 일에 대해서 명령을 내려두기만 하면, 사람이 없어도 저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합니다." "해리, 하지만..." "제발 내 말을 방해하지 말아 주시오. 이건 무척 심각한 이야깁니다. 세 번째 추세는 소형화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요. 1950년에는 방 하나를 통째로 차지해야 했던 컴퓨터가 지금은 담배곽만한 크기로 줄어들었소. 조만간 그보다도 더 작아질 겁니다." 테이프 속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네 번째 추세는..." 벤슨이 다시 말을 시작했을 즈음, 로스는 녹음기를 꺼버렸다. 그녀는 엘리스와 모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건 듣고 있어 봐야 아무 소용도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들은 피곤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로스는 자신이 작성한 메모를 들여다 보았다. 벤슨, 12시 30분에 집에 들러 청사진(?)과 권총(?), 그리고 연장 상자를 가지고 가다. 최근에는 자크래빗 클럽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벤슨. 69년 7월에 설치된 대학병원의 컴퓨터 때문에 혼란스러워 함. "뭔가 짚히는 것이 있소?" 엘리스가 물었다. "아뇨." 로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맥퍼슨과 이야기를 좀 해야 될 것 같아요." 로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스를 바라보았다. 모리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알았어요." 로스가 말했다. "내가 하죠." 그때가 새벽 4시 30분이었다. "사실 우리는 더 이상 대책이 없어요." 로스가 말했다. "시간만 자꾸 흘러가고 있구요." 맥퍼슨은 자신의 책상 앞에 앉은 채 로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그가 말했다. "경찰에 알리세요." "경찰은 이미 알고 있소. 처음부터 경찰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니, 일이 터진 직후부터 다 알고 있지 않소. 지금쯤 7층에는 경찰들이 벌떼처럼 와글거릴 거요." "경찰은 수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빌어먹을, 그 자를 수술하라고 데리고 온 것이 경찰이었잖소. 그들이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소." "하지만 그들은 그 수술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요." "그런 건 물어 보지도 않았소." "그들은 또 오늘 새벽 6시에 컴퓨터 프로젝션이 발생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잖아요."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거요?" 로스는 슬며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맥퍼슨은 너무나도 고집스러웠다. 그 역시 지금 로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벤슨이 오늘 새벽 6시에 발작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경찰의 태도도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맥퍼슨이 의자 위에서 체중을 반대쪽으로 옮기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경찰은 그를 폭력 혐의를 쓰고 있는 탈주범이 아니라, 머리 속에 전선이 가득찬 미치광이 살인범으로 생각하게 되겠지." 맥퍼슨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지금 그들의 목표는 그를 체포하는 것이오.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면, 그들은 그를 죽이려 할 거요." "하지만 지금 그의 손에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이 달려 있어요. 만약 프로젝션이...." 맥퍼슨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컴퓨터 프로젝션. 그건 세 차례의 자극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입력이라 할 수 있는 것 아니오. 세 개의 그래픽 포인트가 있으면 수많은 곡선을 그릴 수 있을 거요. 수많은 방식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말이오. 우리는 벤슨이 6시에 한계점에 도달한다고 믿어야 할 이유가 그리 많지 않소. 실제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오." 로스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벽에는 각종 차트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었다. 맥퍼슨은 바로 이 방에서 NPS의 미래를 계획하고, 거기에 대한 자료들을 색색가지 차트에 담아 가지런히 정리해 두고 있는 것이었다. 로스는 그 차트들이 맥퍼슨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그가 보여 주고 있는 태도는 지극히 비합리적이고 무책임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로스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았다. "이것 봐요, 잔." 맥퍼슨이 말했다. "당신은 처음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대책이 없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소. 우리에게는 기다림이라는 대책이 있기 때문이오. 나는 벤슨이 자기 발로 이 병원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소. 그런 가능성이 있는 한, 나는 기다리는 쪽을 선택하겠소." "경찰에는 알리지 않을 생각인가요?" "그렇소." "만약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또한 발작을 일으켜서 누군가 무고한 사람을 해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그런 생각도 하고 있소." 맥퍼슨은 그렇게 말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가 새벽 다섯 시였다. 6 그들은 모두 무척 피곤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텔레콤프에 모여 앉아서 컴퓨터 프로젝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한계점이라고 추정하고 있는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시계가 5시 30분을 가리키는가 했더니, 어느새 15분이 또 훌쩍 흘러가 버리고 있었다. 엘리스는 담배 한 갑을 다 태우고 새로 담배를 사러 나갔다. 모리스는 무릎 위에 펼쳐 놓은 잡지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쳐다볼 뿐이었다. 로스는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을 지켜보며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있었다. 하늘은 동녘부터 아련한 갈색 스모그 위로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엘리스가 담배를 구해 돌아왔다. 게르하르드는 컴퓨터 앞에서 물러나와 커피를 탔다. 모리스도 자리에서 일어나 게르하르드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게르하르드를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로스는 벽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꽤 크게 들리는데도 지금까지 한번도 그 소리를 의식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기이하게 여겨졌다. 초침 소리뿐만이 아니라, 1분에 한 번씩 분침이 움직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가 자꾸만 로스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로스는 은근히 그 분침이 움직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시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문득 그녀는 자신이 과거에 경험했던 다른 정신병 증세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전에 어디선가 경험해본 적이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는 기시감(其視感), 어딘가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현실 상실증, 기타 복합관계, 망상, 각종 공포증 등이 얼핏 떠올랐다. 건강과 질병, 정상적인 정신 상태와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스펙트럼과도 같은 것이고, 모든 사람들은 그 스펙트럼 상의 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셈이다. 당신이 그 스펙트럼 상의 특정한 지위를 점하고 있을 때,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벤슨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벤슨 역시 그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6시가 되었다. 모두들 시계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확하게 6시 4분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군요."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그들은 다시 기다리기 시작했다. 시계가 6시 4분을 가리켰다. 그래도 아무 일도 없었다. 전화벧이 울리지도 않았고, 누군가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오지도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엘리스는 담배곽의 셀로판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로스는 그 소리 때문에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엘리스는 그 셀로판을 구겼다가 폈다가 다시 구기곤 했다. 로스는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 6시 10분이 지나 15분이 되었다. 맥퍼슨이 그 방으로 들어왔다. "지금까지는 아무 일도 없는 셈이군." 그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도로 나가 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5분이 더 흘러갔다. "알 수가 없군." 게르하르드가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쩌면 프로젝션 자체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기입점이 세 군데밖에 없었으니, 곡선을 새로 그려보아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게르하르드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초록색 배경에 하얀 선으로 다른 곡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게르하르드가 동작을 멈추며 말했다. "아닌데.... 아무래도 처음 곡선이 맞는 것 같아요." "어쩌면 컴퓨터가 아예 잘못됐는지도 모르지." 모리스가 말했다. "6시 30분이 다 되어가잖아. 식당이 문을 열 시간이군. 누구 같이 아침 먹으러 갈 사람 없습니까?" "그것 좋은 생각이로군." 엘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잔? 같이 가지 않겠소?" 로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여기서 좀더 기다려 보겠어요."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아요." 모리스가 말했다. "어차피 뭘 좀 먹어야 될 것 아닙니까." "난 여기서 기다려 보겠어요." 로스의 입에서 같은 말이 반사적으로 되풀이되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모리스는 손을 내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는 엘리스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두 사람이 함께 밖으로 나갔다. 로스는 게르하르드와 함께 그냥 남아 있었다. "그 곡선의 신뢰성 한계를 알고 있나요?" 로스가 물었다. "물론이죠." 게르하르드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신뢰성 한계는 이미 지났어요. 플러스 마이너스 2분 정도의 오차를 감안해도 99퍼센트의 신뢰도가 나오거든요." "6시 2분에서 6시 6분 사이에 발작이 일어났을 거라는 뜻인가요?" "대충 그렇게 될 겁니다." 게르하르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발작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군요." "발견될 때까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럴 수도 있겠죠." 게르하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자신이 없는 표정이었다. 로스는 창가로 돌아섰다. 태양은 창백한 붉은빛을 띠며 지평선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일출 때의 햇살이 일몰 때보다 항상 더 약한 이유는 무엇일까? 똑같아야 되는 것이 아닐까? 그때 등뒤에서 이상한 신호음이 들려왔다. "어... 어." 게르하르드가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로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뭐예요?" 게르하르드는 한쪽 모퉁이의 선반 위에 놓여 있던 조그만 상자를 가리켰다. 그 상자는 전화기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지금 거기서 파란 불빛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게 뭐죠?" 로스가 다시 한번 물었다. "저건 특별 회선이에요." 게르하르드가 대답했다. "개목걸이에 적힌 전화번호의 24시간 자동응답기죠." 로스는 번개처럼 달려가 전화기 위에 놓여 있던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단조롭고 공허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식된 원자력 물질이 제거되기 전까지는 시신을 화장하거나 어떠한 손상을 가해서는 안됩니다. 원자력 물질을 제거하지 못했을 때는 방사능 오염의 위험이 있습니다. 자세한 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로스는 게르하르드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이걸 어떻게 끄죠?" 게르하르드가 상자에 붙어 있던 버튼을 누르자, 자동응답이 중단되었다. "여보세요?" 로스가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지금 누구한테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나는 로스 박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신경정신과 연구팀의 관계자인가요?" "네, 그래요." "종이와 연필을 준비하시오. 주소를 불러드릴 테니까. 나는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의 앤더스 반장이라고 합니다." 로스는 몸짓으로 게르하르드에게 종이와 연필을 갖다 달라는 시늉을 했다. "무슨 일이죠, 반장님?" "여기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소." 앤더스가 말했다. "당신네한테 물어볼 게 좀 있어서 말이오." 7 선셋 가의 아파트 건물 앞에는 세 대의 순찰차가 멎어 있었다. 아직 서늘한 기운이 도는 아침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찰차의 빨간 비상등이 점멸하는 것을 본 구경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로스는 한쪽 길 옆에 차를 세우고 아파트 현관으로 다가갔다. 젊은 경찰관 하나가 그녀를 제지했다. "이 아파트 주민이십니까?" "나는 로스 박사라고 해요. 앤더스 반장님이 전화를 하셨더군요." 경찰관은 턱으로 엘리베이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3층에서 왼쪽으로 꺽어지십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로스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로스가 로비로 걸어들어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구경꾼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저희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리며 서로의 어깨 너머로 로비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로스는 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의문을 떠올려 보았다. 순찰차의 비상등이 로비 안에까지 간헐적으로 붉은 빛을 쏟아붓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로스가 올라타자 스르르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 안의 장식은 조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무 무늬를 흉내낸 플라스틱 판넬과 낡은 초록색 카펫에는 무수한 애완 동물들의 배설물이 찌들어 있었다. 로스는 엘리베이터가 3층에 이를 때까지 참고 견디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그녀는 여기가 어떤 종류의 아파트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보나 마나 동성연애자나 마약 중독자,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 등이 살고 있는 아파트일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아파트는 일정한 기간 동안 계약을 해서 임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달 그달 집세를 지불하면 되는 그런 곳이었다. 로스가 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리자, 어느 현관문 앞에 경찰들이 잔뜩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경찰관 한 사람이 다시 로스의 앞길을 막아섰다. 로스는 앤더스 반장을 만나러 왔다는 말을 한번 더 반복했다. 경찰관은 아무것도 손대면 안된다는 경고와 함께 그녀를 통과시켜 주었다. 그곳은 스페인풍의 가구들이 놓인 침실 하나짜리 아파트였다. 그 좁은 집안에 20명 가까운 사람들이 먼지를 털거나 사진을 찍거나 길이를 재거나 증거품을 수집하는 등의 작업을 하며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경찰들이 들이닥치기 전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던 곳이었는지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앤더스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보수적인 검은 양복을 입은 그는 30대 중반의 비교적 젊은 형사였다. 목덜미의 옷깃에까지 닿을 정도의 긴 머리칼과 뿔테 안경을 낀 모습이었다. 학자를 연상시킬 정도로 그의 외모는 일단 로스의 예측을 크게 벗어나고 있었다. 로스는 자신이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점잖게 말을 꺼내는 그의 목소리도 무척 부드러웠다. "당신이 로스 박사입니까?" "그래요." "앤더스 반장입니다." 그의 악수는 간략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시신은 침실에 있습니다. 지금 검시관도 와있지요." 앤더스는 침실로 로스를 안내했다. 희생자는 20대의 아가씨였는데, 벌거벗은 몸으로 사지를 쭉 뻗고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머리가 박살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머리에 큰 상처를 입었고,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흉기에 찔린 자국이 난 모습이었다. 침대는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방안에는 역겨운 피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방안은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화장대 앞의 의자는 뒤집어져 있었고, 화장품과 로션 병이 깨져 양탄자를 뒤덮고 있었으며, 침대 옆의 램프도 깨져 있었다. 그 방안에는 모두 여섯 명의 남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사망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 검시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분은 로스 박사님입니다." 앤더스가 말했다. "대충 설명을 좀 해주시지요." 검시관은 시체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보시다시피 아주 잔혹한 방법을 동원한 살인 사건이군요. 왼쪽 관자놀이 부근에 강한 충격을 입어 두개골이 함몰되고 그 즉시 의식을 잃은 것 같소. 무기는 저기 보이는 램프인 것 같군요. 희생자의 혈액형과 동일한 피와 머리카락 몇 개가 램프에 붙어 있었으니까요." 로스는 램프를 흘낏 쳐다본 다음, 다시 시신을 쳐다보았다. "찔린 상처는 뭐죠?" "그건 사망 이후에 입은 상처 같습니다. 직접적인 사인은 머리에 입은 충격인 셈이지요." 로스는 시체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한쪽이 마치 바람 나간 축구공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꽤 아름다운 얼굴이었을 텐데 지금은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보시다시피 피해자는 반쯤 화장을 하다가 살해당했습니다." 검시관이 시체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우리 나름대로 정황을 재구성해보면, 피해자는 저기 화장대 앞에 앉아서 화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녀의 머리 위쪽에서 비스듬한 각도로 타격이 가해지면서 의자가 엎어지고 화장품이 쏟아진 것이지요. 그런 다음 범인은 피해자를 안아들고..." 의사는 팔을 들어 짐짓 힘을 주는 시늉을 하며 가상의 시체를 들어올렸다. "침대 위에 눕힌 겁니다." "범인은 꽤 힘이 센 사람이어야 되겠군요." "물론이지요. 남자가 틀림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죠?" "샤워기 배수구에 음모가 몇 개 떨어져 있었는데, 종류가 두 가지였소. 하나는 피해자의 음모와 일치하고, 또 하나는 남자의 음모였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남자의 음모는 여자 것과 비교할 때 약간 꼬불꼬불하고 횡단면이 보다 완만한 타원형을 그리거든요." "난 그런 건 몰랐는데요." 로스가 말했다. "원한다면 직접 예를 보여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범인은 범행을 저지르기 전에 피해자와 성교를 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정액으로 혈액형을 추출해 보니, AO형이라는 결론이 나왔어요. 범인은 성교 후에 샤워를 한 다음, 침실로 들어와 살인을 저지른 거지요." 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에 일격을 당한 피해자는 범인에 의해 침대 위에 다시 눕혀졌습니다. 이때까지는 피를 별로 흘리지 않았어요. 화장대나 바닥의 양탄자에도 피가 별로 묻어 있지 않은 걸로 봐서. 하지만 범인은 무언가 흉기를 집어들고 피해자의 복부를 몇 차례 난자했습니다. 가장 깊은 상처는 모두 하복부에 나 있는데, 이것은 그 행위가 범인에게 모종의 성적인 함축을 가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측의 일방적인 추측일 뿐이지요." 로스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다. 내심 그 검시관은 무척 교활한 사람일 거라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로스는 필요한 것 이외에는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로스는 찔린 상처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시신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상처는 모두 조그만 구멍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고, 그 주위로 피부가 상당히 벌어져 있었다. "흉기는 찾아냈나요?" "못 찾았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무엇이 이용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확실치는 않습니다. 무척 날카로운 것은 아니지만, 아주 튼튼한 물건이 틀림없어요. 그렇게 날이 무딘 흉기로 이런 상처를 내려면 아마 많은 힘이 들었을 겁니다." "범인이 남자라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되겠군요." 앤더스가 말했다. "그렇지요. 내 생각에는 편지 봉투 뜯는 칼이나 금속 자, 혹은 십자 드라이버 같은 금속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의사의 말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발견되는 이 현상입니다." 그는 피해자의 왼쪽 팔을 가리켰다. 그 팔은 깊은 상처를 입은 채 침대 위에 늘어져 있었다. "보시다시피 범인은 피해자의 복부를 찌른 다음 일련의 연속 동작으로 팔을 찔렀습니다. 잘 보세요. 범인은 팔이 놓여 있던 곳을 지나서도 찌르는 동작을 멈추지 않았어요. 시트와 담요도 찢어져 있는 것이 보이지요? 그것이 피해자의 상처와 일직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검시관은 찢어진 부분을 가리켰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범인이 맹목적인 동작을 기계적으로 계속 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범인은 마치 일종의 기계처럼 계속해서 찌르고 또 찔렀던 거지요..." "정확한 표현이군요." 로스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범인이 일종의 무의식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유기적인 것인지 아니면 기능적인 것인지, 혹은 자연적인 것인지 인위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피해자가 범인을 아파트 안으로 들어오게 내버려두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무의식 상태는 이곳에 들어온 이후에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로스는 지금 검시관이 쓸데없이 자기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그런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슬며시 부화가 일었다. 지금은 한가하게 셜록 홈즈와 노닥거리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이다. 앤더스가 그녀에게 개목걸이를 건네주었다. "의례적인 조사 과정에서 이걸 발견했습니다." 로스는 새삼스레 그 표식을 들여다보았다. 내 몸속에는 원자력 조정기가 이식되어 있습니다. 육체적인 손상이나 화상으로 인해 캡슐이 파괴되면 유독 물질이 방출될 수도 있습니다. 본인이 상처를 입거나 사망한 경우에는 NPS, (213) 652-1134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발견한 즉시 당신에게 전화를 한 겁니다." 앤더스가 말했다. 그는 로스를 유심히 살펴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가 아는 것을 다 말씀드렸으니, 이제 당신 차례인 것 같군요." "그 사람의 이름은 해리 벤슨이에요." 로스가 말하기 시작했다. "나이는 34살이고, 정신운동 간질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죠." 의사가 손가락 마디를 우두둑 꺾으며 말했다. "빌어먹을!" "정신운동 간질이라는 게 뭣니까?" 앤더스가 물었다. 그때 사복을 입은 형사 하나가 거실로 나왔다. "범인의 지문을 발견했습니다." 형사가 말했다. "그 지문은 국방성의 데이타 뱅크를 비롯한 도처에 등록되어 있더군요. 이 자는 1968년부터 현재까지 비밀 출국 허가서를 가지고 있으며, 이름은 해리 벤슨이고,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비밀이란 말인가?" 앤더스가 물었다. "아마 컴퓨터 기술에 대한 것일 거예요." 로스가 말했다. "맞습니다." 사복 형사가 말했다. "지난 3년 동안 컴퓨터 연구 분야의 비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앤더스는 메모를 하며 물었다. "혈액형도 등록되어 있던가?" "예, AO형으로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로스는 의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피해자에 대해서는 알아 보셨나요?" "이름은 도리스 블랭크푸트, 무대 명은 안젤라 블랙. 26살이고, 6주 전부터 이 아파트에 세들어 있었소." "직업이 뭐였죠?" "댄서였소." 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앤더스가 물었다. "그게 무슨 특별한 의미라고 가지고 있습니까?" "그자는 댄서에 대해서 뭔가가 있는 모양이에요." "댄서를 좋아했다는 말인가요?" "좋아하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지요." 로스가 대답했다. "이야기가 좀 복잡해요." 앤더스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로스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녀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무슨 간질병을 앓고 있었다구요?" "네, 정신운동 간질이라는 병이에요." 앤더스는 그것도 메모를 했다. "설명이 좀 필요하겠군요." 그가 말했다. "그렇겠지요." "신상 기록이나 사진 같은 것도...." "모두 구해 드리겠어요."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부탁드립니다." 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가졌던 경찰에 대한 저항심, 협력하지 않겠다는 결심 등은 어느새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로스는 피해자의 움푹 패인 머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사건 당시의 돌발성, 공격의 격렬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로스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7시 30분이군요. 난 병원으로 돌아가야겠지만, 그 전에 잠깐 집에 들러 샤워를 하고 옷이라도 좀 갈아입어야 되겠어요. 집으로 오셔도 좋고, 아니면 병원에서 만나기로 해도 좋아요." "집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앤더스가 말했다. "여기서는 한 20분이면 다 끝날 것 같군요." "좋아요." 로스는 그렇게 말하며 주소를 적어 주었다. 8 샤워는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맨살에 와닿는 물줄기가 마치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그녀는 뜨거운 증기를 호흡하며 나른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언제나 샤워를 좋아했다. 샤워가 남성 취향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좋은 것은 좋은 것이었다. 라모스 박사는 언젠가, 남자는 샤워를 좋아하고 여자는 목욕을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유형이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녀는 한 사람의 개인일 뿐이었다. 그녀는 샤워가 정신 분열증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에 번갈아 샤워를 하면 차분함을 되찾는 환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정신 분열증 환자라는 말이오?" 라모스 박사가 껄껄 웃으며 그렇게 말했었다. 그는 좀처럼 웃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따금 그녀는 그를 웃기기 위해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여 보기도 했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었다. 그녀는 물을 잠그고 수건으로 몸통을 가린 후, 욕실의 거울에 서린 김을 닦아냈다. 그리고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몰골이 말이 아니군." 그녀는 자신을 향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거울 속의 자신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샤워 때문에 그녀가 하는 유일한 화장인 눈화장마저 지워져 버리고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눈이 유난히 작고 피곤해 보였다. 오늘 라모스 박사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몇 시였던가? 아니, 그 약속이 오늘이 맞긴 맞나? 그나저나 도대체 오늘이 무슨 요일이던가? 그녀는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내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최소한 지난 24시간 동안 한번도 눈을 붙여 보지 못한 셈이었다. 그녀는 인턴 시절에 경험했던 수면 부족 증후군이 고스란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위산이 위장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는 듯한 기분과 함께, 온몸이 쑤시고 있었다. 머리 속도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참으로 기분 나쁜 느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증세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네다섯 시간 정도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그녀는 수면에 대한 몽상을 시작할 것이다. 침대와 매트리스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기 시작하고, 이어서 잠으로 빠져드는 순간의 달콤한 감각에 집착하게 될 것이었다. 그녀는 조만간 벤슨을 찾아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거울에 다시 김이 서렸다. 그녀는 신선한 공기를 통하게 하기 위해 욕실 문을 열어 놓은 다음, 손으로 또 한번 거울을 닦았다. 그녀가 막 눈화장을 시작하려 했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앤더스가 온 것이리라. 로스는 현관 문을 잠그지 않은 채로 내버려 두었었다. "열려 있어요." 로스는 그렇게 소리친 다음, 다시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쪽 눈을 다 그린 후, 잠시 손길을 멈추고 다시 한번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커피 드시고 싶으면 부엌에서 물을 좀 끓이세요." 그녀는 남은 한쪽 눈을 마저 그린 다음 수건을 한층 단단히 조여매고 바깥으로 나가며 큰 소리로 말했다. "필요한 건 다 찾았어요?" 하지만 현관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해리 벤슨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로스 박사." 그가 말했다.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방해가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로스는 그렇게 겁을 내고 있는 자신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벤슨이 손을 내밀자, 로스는 자신의 행동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녀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무엇때문에 이렇게 겁을 내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전에도 그와 단 둘이 자리를 함께 한 적도 많았지만, 한번도 두려움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러한 두려움 중에는 그를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된 놀라움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로스는 그제서야 자신이 아직도 수건만을 몸에 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벗은 다리에는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잠시 실례하겠어요." 로스가 말했다. "옷을 좀 입고 올게요." 벤슨은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로 들어갔다. 로스는 침실 문을 닫고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먼 거리를 쉬지않고 달려온 것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무척 초조했지만, 초조해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던 어떤 환자의 말이 생각났다. "내가 우울해 한다고 말하지 말아요. 나는 지금 끔찍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구요." 로스는 벽장으로 다가가 옷을 한 벌 꺼냈다. 아직도 자신이 어떤 옷을 집어들었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다음 로스는 다시 욕실로 들어가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대로 꼼짝도 하지 말고 숨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아무래도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로스는 큰숨을 한번 들이쉰 다음, 거실로 나갔다. 벤슨은 약간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로스는 그의 눈을 통해 자신의 거실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았다. 현대적이고 메마른, 아주 적대적인 아파트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대적인 가구와 검은 가죽 소파, 벽에 걸린 현대적인 그림 등등 효율적이고 기계적인 거실의 분위기는 벤슨에게는 전적으로 적대적인 환경으로 비칠 터였다. "당신이 이런 곳에서 살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요." 벤슨이 말했다. "우리는 서로 같은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으니까요, 해리." 로스는 가능한 한 밝은 목소리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커피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벤슨은 산뜻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저고리와 넥타이도 무척 단정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검은 가발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그의 피로하고 공허한 눈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피로의 정점에 다다른 사람의 눈 같았다. 그녀는 쾌락을 맛보기 위해 스스로에게 과도한 자극을 가하던 실험용 쥐가 결국은 어떤 모습으로 쓰러졌는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충격 레버를 잡아당기기 위해 숨을 헐떡거리며 사력을 다해 앞으로 기어나가려 애쓰던 쥐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여기서 혼자 삽니까?" 벤슨이 물었다. "네." 그의 왼쪽 뺨, 눈 바로 밑에 조그만 멍이 하나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로스는 그의 붕대를 바라보았다. 가발 밑부분과 옷깃 윗부분에 가려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뭐가 잘못 됐습니까?" 벤슨이 물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의 목소리는 정말로 걱정스러운 것 같았다. 어쩌면 방금 또 한번의 자극을 받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로스는 그가 인터페이스 직전의 자극 테스트 때 자신을 향해 성적인 흥미를 느끼는 것처럼 행동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로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웃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군요." 벤슨이 말했다. 로스는 피의 흔적을 찾아 그의 옷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살해 당한 아가씨는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벤슨도 그 피를 뒤집어썼을 것이 틀림없지만, 그의 옷에는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를 살해한 다음 샤워를 한번 더 하고 옷을 입었는지도 몰랐다. "음, 나는 커피를 한 잔 마셔야겠어요." 로스는 그렇게 말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벤슨에게서 떨어져 부엌으로 들어오니, 숨을 쉬기가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로스는 렌지 위에 주전자를 올리고 불을 켠 다음, 잠시 그곳에서 머뭇거렸다.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여 이 상황을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녀는 벤슨이 불쑥 자신의 아파트를 찾아왔다는 사실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반면, 그가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정신 운동 간질을 앓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폭력성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는 왜 병원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 로스는 다시 거실로 나갔다. 벤슨은 커다란 창문 옆에 서서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때문에 화가 났습니까?" 벤슨이 물었다. "화가 나요? 왜요?" "내가 도망을 쳤기 때문에 말입니다." "정말 왜 도망을 쳤죠, 해리?" 로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서서히 힘과 통제력이 회복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을 다룰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이 그녀 자신의 할 일이었다. 그녀는 지금보다 훨씬 위험한 상황에서도 남자와 단 둘이 있어본 적이 많이 있었다. 그녀는 카메론 주립 병원에서 정신병자나 연쇄 살인범 등의 환자를 돌보던 6개월 동안의 일이 생각났다. "왜냐구요? 왜냐하면..." 벤슨은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잠시 몸을 뒤척여 보더니, 이내 도로 일어서는 것이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가구들이 모두 무척 불편하군요. 어떻게 이렇게 불편한 곳에서 삽니까?" "나는 그게 좋아요." "하지만 불편하잖아요." 그는 다소 반항적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스는 이런 곳에서 그를 만나게 된 것이 다시 한번 유감스러웠다. 이런 환경은 벤슨에게는 지나치게 위협적인 요소가 될 것 같았다. "어떻게 여기를 알아냈어요, 해리?" "놀랐습니까?" "네, 조금요." "나는 무척 신중한 사람이에요." 벤슨이 말했다. "나는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당신과 엘리스, 맥퍼슨이 각기 어디에 사는지 알아두었어요. 모두 다 알고 있지요." "왜 그랬어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지요." "어떤 경우를 예상하고 있었나요?" 벤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다시금 바깥을 내다보았다. "저곳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찾고 있어요." 그가 말했다. "그렇지요?" "그래요."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나를 찾아낼 수 없을 겁니다. 이 도시는 너무나 크거든요." 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스는 벤슨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부엌으로 들어가 커피를 탔다. 동시에 그녀의 눈은 무언가 묵직한 것이 없을까 하고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쩌면 벤슨의 머리를 한방 때려 눕혀야 할지도 모른다. 엘리스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벽에 그림을 걸어 놓았군요." 벤슨이 큰 소리로 말했다. "숫자들이 잔뜩 들어 있는 그림 말입니다. 누가 이런 그림을 그렸지요?" "존스라는 사람이에요." "무엇 때문에 숫자를 그렸을까? 숫자는 기계를 위한 것인데...." 로스는 인스턴트 커피를 휘휘 저은 다음, 우유를 넣어서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았다. "해리...." "아니에요, 내 말은, 이걸 좀 보십시오. 이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요?" 그는 주먹으로 다른 그림을 툭툭 치며 말했다. "해리, 이리 와서 좀 앉아요." 벤슨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소파 맞은 편에 걸터앉았다. 그는 약간 긴장하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잠시 후에는 느긋한 모습으로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동공이 팽창되는 것 같았다. 로스는 또 한 번의 자극이 주어졌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이 여자는 무얼 하려는 것일까?' "해리," 하고 로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벤슨은 여전히 긴장이 풀린 모습으로 대답했다. "당신은 병원을 빠져나가서..." "그래요, 나는 하얀 유니폼을 입고 병원을 나왔지요. 안젤라가 나를 데리러 와 있었어요." "그 다음엔요?" "그 다음엔 내 집으로 갔지요. 나는 무척 긴장하고 있었소." "왜 그랬을까요?" "글쎄요, 난 결국에는 어떻게 끝나게 될지를 알고 있소." 로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끝날 건데요?" "우리 집에서 나온 다음, 우리는 그녀의 아파트로 갔소. 술을 조금 마신 다음,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지요. 그리고 나는 그 여자에게 이번 일이 어떻게 끝날지를 이야기해 주었소. 그녀는 겁을 내는 것 같더군. 그리고는 병원에 전화를 해서 내가 있는 곳을 알리겠다고 하는 것이었소..." 벤슨은 잠시 혼란이 오는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로스는 강제로 그의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발작을 일으켜서 자신이 그녀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기억상실증은 철저하고도 총체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로스는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고 싶었다. "왜 병원을 나갔죠, 해리?" "그날 오후였지요." 벤슨이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날 오후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어요. 문득 모든 사람들이 나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마치 기계처럼 나를 돌보고 있었던 거지요. 나는 그 모든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어요." 로스는 마음 속 한구석에서 한 가지 의심이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벤슨의 기계에 대한 혐오증은 그 근저를 따져볼 때, 자신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는 것, 즉 종속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싫어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 벤슨은 로스 자신에게 종속되어 있는 셈이었다. 과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당신들은 나에게 거짓말을 했소." 벤슨이 불쑥 말했다.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해리." 벤슨은 화를 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니오, 거짓말을 했소. 당신들은..." 벤슨은 문득 말을 멈추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순간적으로 동공이 커졌다. 또 한 번의 자극이 가해진 것이리라. 이제 자극 사이의 간격이 아주 줄어들어 있었다. 머지않아 또 한 번 한계점에 이를 것이 틀림없었다. "당신도 알고 있소? 이건 세상에서 가장 기분 좋은 느낌이오." 벤슨이 말했다. "어떤 느낌인데요?" "뭔가가 윙윙거리는 것 같소." "그런 느낌이 든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모든 것이 까맣게 보입니다. 그러다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다시 기분이 좋아져요." 벤슨이 말했다. "기분 좋을 만큼 따뜻해지고 아주 행복해집니다." "자극이에요." 로스가 말했다. 로스는 시계를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앤더스는 20분 후에 오겠다고 말했었지만, 그가 늦어질 수 있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설사 그 사람이 온다 하더라도 그가 벤슨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정신 운동 간질이 일단 통제력을 상실하고 나면, 그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앤더스는 어쩌면 결국 벤슨을 쏘아 버리고 말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은 로스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다. "하지만 또 다른 게 있소." 벤슨이 말했다. "윙윙거리는 소리는 언제나 기분 좋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오. 그 소리가 지나치게 무거워지기 시작하면... 숨이 막혀요." "지금 그 소리가 무겁게 느껴지고 있나요?" "그렇소." 벤슨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로스는 그의 미소를 보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환자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그녀가 배워온 모든 것들, 사고의 흐름을 유도하는 모든 방법들, 관찰하는 방법들, 기타 그 모든 그녀의 지식들이 지금은 하나도 소용없는 쓰레기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말을 이용해서 벤슨을 통제하는 방법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광견병에 전염된 환자나 뇌종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말을 통한 설득이 효력을 미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벤슨은 육체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환자였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발작 상태로 내모는 기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말을 통해 그의 몸속에 이식된 컴퓨터의 작동을 멈추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그의 지적인 기능에 호소해 보려는 시도를 해 보았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세요, 해리? 당신에게는 지나친 자극이 가해지고 있어요. 당신을 발작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구요." "그래도 기분은 좋습니다." "하지만 방금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요." "그런 현상을 고치고 싶지 않으세요?" 벤슨은 잠시 생각을 해보는 눈치였다. "고친다구요?" "그래요. 다시는 발작을 일으키지 않도록 변화시키는 거지요." 로스는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하고 있었다. "당신은 내가 수리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벤슨의 그 말은 엘리스를 상기시켰다. 외과 의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었다. "해리, 우리는 당신이 보다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할 수 있어요." "나는 기분이 좋아요, 로스 박사." "하지만 해리, 당신이 안젤라의 아파트에 갔을 때..."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소." "당신은 병원에서 나간 다음, 그곳으로 갔어요."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소. 기억 테이프가 모두 지워진 모양이오. 무슨 잡음 같은 것밖에 생각나지 않소. 굳이 듣고 싶다면 오디오에 연결해 보시오." 벤슨은 그렇게 말하며 입을 벌렸다. 쉿 하는 쇳소리가 났다. "들었소? 그런 소리밖에 느껴지지 않소." "당신은 기계가 아니에요, 해리." 로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은 아니지요." 로스는 속이 쓰려왔다. 긴장감 때문에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감정적인 상태가 육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입증되는 셈이었다. 로스는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엘리스와 맥퍼슨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벤슨의 몸에 기계 장치를 이식하는 것은 그의 착란 상태를 한결 악화시킬 뿐이라는 주장을 수도 없이 되풀이했던 그 숱한 회의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누구도 로스의 그런 주장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던 것이다. 로스는 지금 이 순간, 그들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당신들은 나를 기계로 만들어 버리려 했소." 벤슨이 말했다. "당신들 모두 마찬가지요. 나는 당신들과 맞서 싸울 거요." "해리....." "내 말을 끝까지 들어요." 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다시금 미소가 떠올랐다. 또 한 번의 자극이 가해진 것이다. 이제 그 자극은 불과 몇 분 간격으로 가해지고 있었다. 도대체 앤더스는 어디에 있는 건가? 다른 사람들은? 밖으로 뛰쳐나가 비명이라도 질러야 하는 건가? 병원에 전화를 걸기 위해 애를 써보아야 하나? 아니면 경찰에? "이건 정말 기분이 좋아요." 벤슨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정말 좋아요. 이렇게 좋은 기분은 아무것도 없소. 나는 영원히 이런 기분 속에 빠져 지내고 싶소." "해리. 긴장을 풀어요." "나는 긴장하고 있지 않소. 하지만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지 않소." "그럼 내가 원하는 건 뭐죠?" "당신은 나를 훌륭한 기계로 만들고 싶어해요. 당신은 내가 내 주인들에게 복종하고, 그들의 지시를 따르게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것 아닌가요?" "당신은 기계가 아니에요, 해리." "앞으로 절대 기계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소." 벤슨의 미소가 점점 옅어졌다. "죽어도 죽어도 말이오." 로스는 큰숨을 몰아쉬었다. "해리." 그녀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병원으로 돌아오기를 원해요." "안돼요." "우린 당신이 더 좋은 기분을 느끼게 할 수 있어요." "안돼요." "우리는 당신을 걱정하고 있어요, 해리." "당신이 나를 걱정한다?" 벤슨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 나쁜 웃음 소리였다. "당신은 나를 걱정하고 있지 않소. 당신은 당신의 실험 준비를 걱정하고 있을 뿐이오. 당신은 당신의 과학적 실험 계획을 걱정하고 있을 뿐이오. 당신은 당신의 추종자들을 걱정하고 있을 뿐이오. 당신은 나를 걱정하고 있지 않소." 그는 이제 무척 흥분해서 화를 내고 있었다. "당신네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환자들을 보살펴 왔지만, 그 가운데 한 환자가 완전히 미쳐 버려서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는 기사가 의학 잡지에 실리게 된다면, 별로 좋지 않을 거요." "해리...." "나도 알아요." 벤슨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1시간 전에 몸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톱 밑에 피가 묻어 있었소. 피가 말이오. 나도 알고 있소." 그는 손톱을 안쪽으로 구부려서 자신의 손을 들여다 보더니, 이어서 붕대를 만져 보았다. "수술이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한 것 같소." 벤슨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눈물이 천천히 뺨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대로 되지 않았소. 나는 이해할 수가 없소..." 그는 눈물을 흘리는 동시에 또한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다시 자극이 가해진 것이다. 이번에는 먼젓번 자극 후로 1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로스는 앞으로 불과 몇 초가 지나지 않아 벤슨은 한계점에 도달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아무도 해치고 싶지 않아요." 벤슨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로스는 그런 벤슨에 대한 동정심과 슬픔이 한꺼번에 치밀었다. "이해할 수 있어요." 로스가 말했다. "병원으로 돌아가요." "안돼, 안돼..." "내가 함께 가겠어요. 항상 당신 옆에 있을게요. 아무일도 없을 거예요." "나에게 명령하지 마시오!" 벤슨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먹을 움켜쥔 채 그녀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나는 듣지 않을....." 그는 문득 말을 멈추었으나, 이번에는 미소를 짓지 않았다. 벤슨은 이내 허공에 대고 코를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냄새지?" 그가 말했다. "난 이 냄새가 싫어. 무슨 냄새지? 싫단 말이야, 내 말 안들려!" 벤슨은 코를 킁킁거리며 로스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해리....." "난 이런 기분이 싫어." 벤슨이 말했다. 로스는 소파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벤슨은 손을 앞으로 내민 채 그녀를 따라왔다. "나는 이런 기분을 원하지 않아. 원하지 않는다구." 벤슨이 말했다. 그는 이제 코를 킁킁거리지 않았다. 완전한 발작 상태로 접어들어 로스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해리..." 그의 얼굴은 마치 로보트처럼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마치 몽유병자 같기도 했다. 그의 움직임이 무척 느린 편이었기 때문에 로스는 간신히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뒤로 물러설 수 있었다. 그때, 벤슨은 갑자기 유리로 만든 묵직한 재털이를 집어들더니, 그녀를 향해 내던졌다. 로스가 재빠르게 몸을 숙이자, 재털이는 커다란 유리창에 부딪히며 유리를 박살내 버렸다. 다음 순간 벤슨은 펄쩍 뛰어 로스를 덮치고는 두 팔로 꽉 껴안는 것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이었다. "해리." 로스는 신음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해리." 로스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로스는 있는 힘을 다해 벤슨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벤슨은 신음 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히고 기침을 해댔다. 그 바람에 로스는 간신히 그의 팔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다. 로스는 얼른 달려가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다이얼을 돌렸다. 벤슨은 아직도 허리를 꺾은 채 기침을 하고 있었다. "교환입니다." "교환! 경찰을 대주세요." "비버리 힐즈 경찰서를 연결해 드릴까요, 아니면 로스앤젤레스 경찰을 원하시나요?" "아무 데나 상관없어요!" "글쎄요, 그렇다면..." 로스는 수화기를 떨어뜨렸다. 벤슨이 다시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로스는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교환수의 조그만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벤슨은 난폭하게 전화기를 집어들더니, 힘껏 집어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램프를 집어들더니, 아래쪽이 위로 오게 거꾸로 들고는 커다란 원호를 그리며 미친 듯이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로스는 얼른 고개를 숙여 벤슨의 공격을 피했다. 머리 위로 묵직한 금속이 휭 하는 바람 소리를 내며 스쳐갔다. 거기에 한 대 맞으면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로스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벤슨은 램프를 떨어뜨리고 그녀를 쫓아왔다. 로스는 황급히 싱크대의 서랍을 열었다. 칼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조그만 과도밖에 눈에 뜨이지 않았다. 커다란 식칼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벤슨이 부엌으로 쫓아 들어오고 있었다. 로스는 그를 향해 주전자를 집어던졌다. 벤슨은 무릎에 와서 부딪히는 주전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로스의 머리 속에는 학문적인 사고가 진행되고 있었다. 부엌에는 틀림없이 그녀가 이용할 수 있는 물건이 무언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란 말인가? 벤슨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로 다가왔다. 그는 여전히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로스는 그의 팔목을 잡고 자신의 목에서 떼어내려 안간힘을 다했다. 동시에 다리로 벤슨을 걷어차려고 버둥거려 보았지만, 그는 자신의 몸을 그녀에게 바짝 밀착시킨 다음, 카운터에 대고 그녀의 등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로스의 허리가 꺾어졌다. 로스는 이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눈앞에서 파란 별이 번쩍번쩍 튀는 것 같았다. 가슴이 쥐어짜듯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계속해서 카운터 위를 긁어대고 있었다. 무언가 벤슨을 때릴 수 있는 물건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집히지 않았다. 부엌.... 로스는 사력을 다해 두 팔을 버둥거렸다. 식기 세척기의 손잡이와 오븐의 손잡이가 느껴졌다. 그녀의 부엌에 있는 기계들이었다. 이제 로스의 시야는 파랗게 멍이 들고 있었다. 파란 별들이 더욱 커졌다. 그것들은 그녀의 눈앞에서 어지럽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부엌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엌, 부엌, 부엌의 위험. 로스의 가물거리는 의식에 그런 단어들이 떠올랐다. 전자레인지. 로스는 이제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온통 단조로운 회색으로 변해 버렸지만, 아직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전자렌지의 손잡이를 더듬고 있었다. 유리문이 열리고... 그 다음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다이얼을 돌렸다. 순간 벤슨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녀의 목을 누르고 있던 힘이 사라졌다. 로스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벤슨은 처절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듯 정신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로스의 시력이 서서히 되살아났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벤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벤슨은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는 로스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미친 듯이 몸을 비틀며 상처입은 동물 같은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계속 비명을 지르며 부엌에서 뛰쳐나가 버렸다. 거기까지 확인한 로스는 그제서야 몸을 반듯이 누이고 의식을 잃어 버렸다. 9 그녀의 목 양쪽에는 벌써 시퍼렇게 멍이 들기 시작했다. 로스는 거울을 바라보며 가볍게 멍든 부분을 문질러 보았다. "언제 도망갔소?" 앤더스가 물었다. 그는 욕실 문 앞에 서서 로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아마 내가 기절했을 무렵일 거예요." 앤더스는 거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난장판이군요." "그럴 거예요."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당신을 공격했을까요?" "발작을 일으킨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그의 의사가 아닙니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로스가 말했다. "그는 발작을 일으키면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려요. 그 순간에는 아마 자기 자식을 죽일 수도 있을 거예요. 실제로 그런 짓을 한 사람들도 있어요." 앤더스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로스는 그가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신 운동 간질 환자가 발작을 일으키는 것을 보지 못한 사람은, 그 발작이 얼마나 맹목적이고 잔혹한 폭력을 유발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정상적인 생활 속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측면이었다. 그 무엇도 그 발작 상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음." 이윽고 앤더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당신을 죽이지는 않았군요." 로스는 여전히 멍든 부분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앞으로 몇 시간이 지나면 멍은 한층 더 흉칙해질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화장으로 가릴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에게는 화장품이 없었다. 목이 긴 스웨터를 입을까? "그래요, 죽이지는 않았죠. 하지만 그냥 있었으면 틀림없이 죽였을 거예요." "어떻게 했는데요?" "전자 레인지를 켰거든요." 앤더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간질 환자를 다스리는 방법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벤슨의 몸속에 들어 있는 전자 장치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죠. 부엌에 전자 레인지가 있는데, 거기서 나오는 단파가 조절기의 주파수를 흔들어 놓는 거예요. 심장 보조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커다란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어요. 이른바 부엌의 위험이라고 일컬어지죠. 최근에는 그와 관련된 기사도 많이 발표되고 있어요." "아." 앤더스가 중얼거렸다. 앤더스는 로스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밖으로 나가 전화를 몇 통 걸었다. 그녀는 목이 긴 까만 스웨터와 회색 스커트를 입은 다음,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았다. 멍이 든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문득 검정과 회색이라는 색깔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그런 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단조롭고 차가워 보이기 때문이다. 로스는 잠시 옷을 갈아입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 로스는 앤더스가 거실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가 마실 것을 준비했다. 이제 커피는 질린 것 같았다. 얼음을 띄운 스카치가 마시고 싶었다. 로스는 술병을 따르다가, 카운터 위에 길게 남아 있는 자신의 손톱 자욱을 발견했다. 로스는 그제서야 손톱을 들여다 보았다. 모두 세 개의 손톱이 부숴져 있었다.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로스는 마실 것을 준비한 다음 거실로 나갔다. "예." 앤더스가 수화기에 대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아뇨... 잘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노력은 해보지요." 그리고는 한참 동안이나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로스는 유리가 깨진 창가로 다가가 도시를 내다보았다. 태양은 건물들 위의 갈색 대기를 비추고 있었다. 주거 환경으로는 열악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얼른 공기 맑은 해변으로 이사를 가고 싶었다. "이봐요, 내 말 잘 들어요." 앤더스가 화가 났는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당신들이 병원의 그 사람 병실 앞에 경비원만 잘 세워놨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 점을 명심해두는 것이 좋겠군요." 로스는 수화기가 쾅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빌어먹을!" 앤더스가 중얼거렸다. "정치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경찰서에도 그런 게 있나요?" "경찰서가 더 심하지요." 앤더스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잘못되면, 갑자기 다들 누구를 물먹일까 혈안이 된다니까." "당신에게 물을 먹이려 한다는 거예요?" "나를 시범 케이스로 물고 늘어지려는 모양입니다." 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지금쯤 병원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병원은 이 지역에서의 이미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마도 원장은 진땀 꽤나 흘려야 될 것이고, 이사들은 자금 조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앤더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병원에도 누군가 물먹을 사람이 있어야 할 터였다. 그러기에는 맥퍼슨은 너무 거물이었고, 로스 자신과 모리스는 너무 잔챙이였다. 어쩌면 부교수라는 지위를 가진 엘리스가 목표물이 될지도 몰랐다. 만약 부교수를 해고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지나치게 성급하며 또한 지나치게 야심적인 것으로 드러난 인물과의 임시적인 약속을 파기한다는 암시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정교수를 해임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만약 정교수를 해임한다면, 그를 교수 자리에 임명했던 이전의 결정이 잘못되었던 것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가 나올 테니 말이다. 역시 엘리스가 모든 것을 뒤집어쓸 가능성이 많았다. 로스는 엘리스 자신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는 최근 브렌트우드에 새로 저택을 구입했었다. 그는 그 저택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해서, 다음 주에 NPS의 전 직원을 초대해 집들이를 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로스는 다시금 깨진 유리를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간질병과 심장 조정기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까?" "아무 관계도 없어요." 로스가 말했다. "벤슨은 심장 조정기와 아주 비슷한 두뇌 조정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말이에요." 앤더스는 자신의 노트를 뒤적였다. "처음부터 천천히 설명해 주는 게 낫겠군요." "그렇게 하죠." 로스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먼저 전화부터 한 통 하구요." 앤더스는 소파에 기대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스는 맥퍼슨에게 전화를 건 다음, 차분한 어조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10 맥퍼슨은 전화를 끊고 아침 햇살이 비치는 자신의 사무실 창문을 바라보았다. 햇살은 이제 창백하고 차가운 빛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아침은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로스의 전화로군." 맥퍼슨이 말했다. 모리스가 한쪽 구석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무슨 일이랍니까?" "벤슨이 자기 아파트로 찾아왔는데, 놓쳐 버렸다는군." 모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일진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맥퍼슨은 그렇게 말하며 여전히 태양을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나는 행운을 믿지 않네." 그는 모리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자네는 어떤가?" 모리스는 무척 피곤했다. 사실 그는 맥퍼슨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뭐 말입니까?" "행운을 믿느냔 말일세." "그럼요. 모든 외과 의사들은 행운을 믿습니다." "나는 행운을 믿지 않네." 맥퍼슨은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절대로 믿지 않아. 나는 언제나 계획한 것을 믿는 편이지." 그는 벽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차트를 가리키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 차트들은 실로 방대한 분량이었다. 늘어선 길이가 4피트나 되었지만, 그 모두가 총천연색으로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것은 사실 기술의 진보를 나타내는 영광스러운 흐름도에 지나지 않았다. 맥퍼슨은 항상 그 차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1967년 그는 진단법의 개념화와 수술 기술, 그리고 극소 전자공학 등 세 가지 분야의 현황을 면밀히 검토한 끝에, 그 성과들을 모두 합치면 1971년 7월경에 정신운동 간질을 치료할 수 있는 수술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 비록 4개월의 오차는 있었지만, 그 정도면 엄청나게 정확한 예측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럽게 정확하군." 맥퍼슨이 중얼거렸다. "뭐가 말입니까?" 모리스가 물었다. 맥퍼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곤한가?" "예." "우리 모두 마찬가지일 거야. 엘리스는 어디 있나?" "커피를 타러 갔습니다." 맥퍼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를 마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는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언제쯤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힘들 것 같았다. 벤슨이 돌아오기 전에는 절대로 그럴 수가 없었다. 벤슨이 몇 시간 내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어쩌면 또 하루가 지나야 할지도 몰랐다. 맥퍼슨은 다시금 차트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모든 일이 훌륭하게 진행되어 왔다. 전극의 이식은 계획보다 넉 달이나 앞당겨졌다. 행동을 통제하기 위한 컴퓨터 자극은 무려 9개월이나 앞당겨진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조지와 마르타 프로그램이 말썽을 피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폼 Q는 또 어떤가? 맥퍼슨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폼 Q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젝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본격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흐름도 상으로는 1979년에 폼 Q가 완성될 예정이었고, 1986년에는 인체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했다. 1986년이면 설사 그때까지 그가 살아 있는다 해도 그의 나이는 75세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만큼은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만큼 맥퍼슨이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는 계획이었다. 폼 Q는 NPS의 모든 성과들이 한데 집약된 결정체가 될 것이었다. 애초에 그 프로젝트는 폼 동키호테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그만큼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맥퍼슨은 그것이 그렇게 필요한 것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현실화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한가지 문제는 크기였고, 또 한가지 문제를 들라면 그것은 비용의 문제였다. 현대적인 컴퓨터, 즉 제3세대 IBM 디지탈 컴퓨터는 수백만 달러의 비용을 잡아먹을 것이다. 게다가 그 정도의 컴퓨터는 엄청난 전력을 필요로 한다. 공간 또한 아주 넓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용량이 큰 컴퓨터라 할지라도 그 회로의 수는 개미의 두뇌와 맞먹는 정도에 불과하다. 인간의 두뇌의 용량을 가진 컴퓨터를 만들려면 거대한 마천루 같은 덩치가 필요할 것이다. 거기에 소요되는 전력 역시 인구 50만의 도시가 소비하는 전체 전력과 맞먹을 것이다. 현재의 기술을 이용하여 그런 컴퓨터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새로운 방법이 개발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맥퍼슨은 그러한 새로운 방법이 조만간 등장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를테면 살아 있는 세포 조직 같은 것이 그 예였다. 이론은 무척 간단했다. 인간의 두뇌와 비슷한 컴퓨터는 각각의 기능 단위들로 구성된다. 일종의 교호접속식 세포가 그 단위로 될 것이다. 그러한 단위의 크기는 세월이 흐를수록 괄목할 만한 크기로 줄었다. 고밀도 집적회로와 기타 극소 전자공학 기술이 발전되면 그 크기는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전력 요구량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개별 단위는 결코 신경 세포, 즉 뉴론만큼 작아지지 않을 것이다. 1평방 인치에는 10억 개의 신경 세포가 들어간다. 인간의 힘으로는 그만한 공간의 경제를 이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신경 세포처럼 적은 에너지를 가지고 작동할 수 있는 단위를 만들어내는 것 역시 인간의 방법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신경 세포를 이용하여 컴퓨터를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조직 배양체를 이용하여 독립된 신경 세포를 키우는 것은 현재의 기술로도 가능하다. 상이한 방법으로 인위적인 수정을 가함으로서 그런 일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앞으로는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되도록 하여 특정한 신경 세포를 배양하는 일도 가능해질 것이다. 일단 거기에까지 성공하고 나면, 6평방 피트의 공간에 1조 개의 신경 세포를 포함하는 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 그 컴퓨터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도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방출되는 열과 부산물 등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컴퓨터는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 존재한 가장 지능적인 개체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폼 Q 프로젝트였다. 이미 전국 각지의 수많은 연구소와 정부 연구 기관에서 그 준비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일정한 성과도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맥퍼슨이 가지고 있는 가장 흥미로운 전망은 엄청난 지적 수준을 가진 유기적인 컴퓨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정말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인간의 두뇌를 대치할 수 있는 유기적인 인공 두뇌의 개발이었다. 유기적인 컴퓨터, 즉 살아 있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산화되고 영양화된 혈액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는 컴퓨터가 개발되고 나면, 그것을 인간의 두뇌 속으로 이식하는 작업은 비교적 간단하다. 그렇게 되면 두 개의 두뇌를 가진 인간이 탄생하는 셈이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될지 맥퍼슨으로서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물론 거기까지에도 수많은 문제점들이 있었다. 상호 연결의 문제, 위치의 문제, 원래 있던 뇌와 새로 이식된 뇌 사이의 경쟁에 대한 문제 등등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1986년까지는 그런 숱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많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1950년대 사람들은 인간이 달을 여행한다는 생각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비웃지 않았던가. 폼 Q 이제 그것은 맥퍼슨의 유일한 목표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금의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맥퍼슨은 벤슨이 병원을 빠져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러한 자금 지원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 것이다. 엘리스가 사무실 문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커피 드실 분 있습니까?" "한잔 주시오." 맥퍼슨이 모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괜찮습니다." 모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벤슨의 인터뷰 테이프나 돌려 보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좋은 생각이오." 맥퍼슨이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어쨌거나, 모리스가 바쁘게 움직인다는 것은 나쁠 게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모리스가 나가고, 이어서 엘리스도 나갔다. 혼자 남은 맥퍼슨은 색색가지 차트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11 로스가 앤더스에게 설명을 마쳤을 때는 정오 무렵이 되어 있었다. 로스는 무척 피곤했다. 스카치를 한 잔 마신 것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기는 했지만, 피로는 한층 증폭되었다. 마지막에는 자꾸만 말이 헛나오고 생각도 제대로 가닥이 잡히지 않는 기분이었다. 일단 말을 했다가, 그것이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다시 수정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까지 피곤해본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반면 앤더스는 눈에서 초롱초롱 빛이 나고 있었다. "벤슨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 것 같습니까? 어디 짚히는 곳이 없나요?" 그가 물었다. 로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 알아내기란 불가능해요. 그는 지금 발작을 일으킨 후의 상태이니까, 누구도 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어요." "당신은 그 사람의 정신과 의사가 아닙니까." 앤더스가 말했다. "틀림없이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할 수 있는 길이 어딘가 있지 않을까요?" "전혀 없어요." 로스가 말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올 만큼 피곤했다. 왜 이 형사는 이렇게 말귀를 못알아 듣는다는 말인가? "벤슨은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에요. 거의 정신병자에 가까운 상태라구요. 그는 지금 무척 혼란스러운 상태이며, 수시로 자극을 받고 있고, 수시로 발작을 일으키고 있어요. 그는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단 말이에요." "만약 그가 혼란에 빠져 있다면..." 앤더스가 말꼬리를 흐렸다. "혼란에 빠져 있을 때는 무슨 짓을 하지요? 어떻게 행동합니까?" "이것 보세요." 로스가 말했다. "그래 봤자 소용없어요. 그런 식으로는 알아낼 수가 없단 말이에요. 그는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다니까요." "알았습니다." 앤더스가 말했다. 그는 로스를 힐끗 쳐다본 다음, 커피를 홀짝 마셨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은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벤슨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여 그를 추적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는 전혀 현실성이 없는 생각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 모든 사람들은 이번 사태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짐작하고 있었다. 누군가 벤슨을 발견하고 총질을 할 것이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나 버리는 것이다, 설사 벤슨의 말처럼... 로스는 생각을 멈추고 얼굴을 찌푸렸다. 벤슨이 뭐라고 말했던가? 이번 일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긴 한 것 같았다. 정확한 그의 표현이 뭐였더라? 로스는 안간힘을 다해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은근히 그때의 공포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이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앤더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며 말했다. "다른 도시에서라면 혹시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곳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사방 거리가 5백 마일이 넘는 도시이니까요. 이 도시는 뉴욕과 시카고와 샌프란시스코와 필라델피아를 모두 합쳐 놓은 것보다 더 큽니다. 당신도 그걸 알고 있었습니까?" "아뇨." 로스는 거의 그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숨을 곳이 너무나 많지요. 도망갈 구멍도 너무나 많습니다. 도로도, 공항도, 항구도 수없이 많아요. 그 자가 제법 현명한 두뇌를 가졌다면 아마 지금쯤 이 도시를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멕시코나 캐나다로 가버렸을지도 모르지요." "그렇게는 하지 않을 거에요."" "그럼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그는 병원으로 돌아올 거예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당신이 그의 행동을 예측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건 예측이 아니라 그냥 직감일 뿐이에요." 로스가 말했다.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군요." 앤더스의 말이었다. NPS는 마치 전쟁 상황실 같은 분위기였다. 환자들의 방문은 월요일까지 전면적으로 금지되었고, 병원의 스태프와 경찰을 제외한 그 누구도 4층에 접근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개발 부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래라도 씹은 얼굴로 분주히 4층을 드나들고 있었다. 마치 자기네의 일자리가 위험에 처해 있지 않은가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표정 같았다. 게다가 전화 벧은 쉴새없이 울려댔고,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맥퍼슨은 병원의 경영진과 함께 자기 방에 처박혀 있었고, 엘리스는 전방 10야드 이내에 접근하는 모든 사람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모리스는 어디론가 사라져 통 볼 수가 없었다. 게르하르드와 리차드는 빈 전화 회선을 찾아 프로젝션 프로그램을 수행하려 했으나, 모든 회선이 다 통화중이었다. NPS는 문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재떨이에는 꽁초가 수북히 쌓여 있었고, 바닥에는 구겨진 종이컵들이 널려 있었으며, 먹다 만 햄버그가 사방에 나뒹굴고 있었다. 의자의 등받이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가운과 유니폼들이 내던져져 있었고, 전화 벧은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로스는 앤더스와 함께 자신의 사무실에서 벤슨에 대한 기록을 검토하며 범죄 보고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록은 컴퓨터로 처리되어 있었지만, 비교적 정확했다. '남성 코카시안 검은 머리 갈색 눈동자 신장 5피트 8인치 체중 140파운드 나이 34세.' 개인적 특성 : 312/3 가발, 319/1 목의 붕대. 40/11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을 가능성. 특징 : 23/60 비 정상적인 행동(기타). 범행 사유 : 23/86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추측). 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컴퓨터의 분류와 꼭 맞아떨어지지는 않는군요." "그런 경우는 하나도 없습니다." 앤더스가 말했다. "누군가가 범인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만 정확하기를 기대할 뿐이지요. 우리는 그의 사진도 배포하고 있습니다. 지금 수백 장의 사진이 시내에 뿌려지고 있지요. 그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이제 어떻게 하죠?" 로스가 물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요." 앤더스가 말했다. "당신이 그가 숨을 만한 곳을 생각해내지 않는 이상 말입니다." 로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기다립시다." 앤더스가 말했다. 12 천정이 낮은 대신 널찍하고 하얀 타일이 깔린 방이었다. 머리 위에는 형광등이 밝게 켜져 있었다. 여섯 개의 철제 테이블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그 테이블의 끄트머리는 각기 방 한쪽의 싱크대로 이어져 있었다. 여섯 개의 테이블 가운데 다섯 개는 비어 있었고, 나머지 한 테이블에 안젤라 블랙의 시신이 누워 있었다. 부검이 진행되는 동안 두 명의 경찰 병리학자와 모리스가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리스는 시체를 해부하는 장면을 많이 목격해 봤지만, 지금은 의사의 입장으로 부검에 참여할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병리학자들은 시체의 외관을 관찰하는데 거의 30분 가까이나 소비했으며, 시신에 칼을 대기 전에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들은 이른바 '연속 열상(裂傷)'이라고 표현하는 찔린 상처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병리학자 한 사람이 이것은 상처가 날이 무딘 흉기에 의한 것임을 의미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런 종류의 상처는 피부가 베어지는 것이 아니라 파고들어서 찢어진다는 것이었다. 또한 처음에 흉기가 닿은 곳은 깊은 관통상이 나있는 부분보다 조금 위쪽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체모가 상처 속으로 눕혀져 있는 것 역시 흉기가 날이 무딘 물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라는 것이었다. "어떤 종류의 흉기였을까요?" 모리스가 물었다. 그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알 길이 없습니다. 관통 부위를 조사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관통이란 흉기가 몸 속으로 들어간 깊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측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피부는 탄력성을 가지고 있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사망 전 혹은 사망 후에 하층의 세포 조직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부검은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모리스는 어찌나 피곤한지 눈알이 따끔따끔 쓰릴 정도였다. 잠시 후 그는 부검실을 빠져나와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피해자의 소지품이 커다란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었다. 모두 세 사람의 직원이 그 물건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물건을 식별하면, 다른 한 사람은 기록을 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꼬리표를 붙였다. 모리스는 말없이 그들이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물건들은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립스틱과 컴팩트, 자동차 열쇠, 지갑, 화장지, 껌, 피임약, 전화번호 수첩, 볼펜, 아이 새도우, 헤어 클립 등속이었다. 그 옆에 성냥 두 통이 놓여 있었다. "성냥 두 통." 경찰관 한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둘 다 공항 마리나 호텔의 상표가 찍혀 있어." 모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 역시 아주 느린 속도로, 참을성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부검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로 이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해서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모리스는 그런 그들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기가 무척 힘들었다. 자네트 로스는 무언가 단호한 행동을 취하고자 하는 이러한 욕구를 외과 의사의 질병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끈질기게 기다릴 줄을 모른다는 점을 꼬집은 말이었다. NPS 초창기 시절, 월리라는 이름의 여자 환자를 두고 제3단계 수술의 후보자로 적당한지 여부를 논의하는 회의가 벌어진 적이 있었다. 모리스는 그 여자가 몇 가지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수술 후보로 결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었다. 그때 로스는 코웃음을 쳤다. '충동을 통제하는 힘이 형편없다.'고 하는 것이 그녀의 빈정거림이었다. 그 순간, 모리스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엘리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월리 부인은 적임자가 아니라고 말했을 때도 모리스의 살의는 식지 않았다. 모리스는 월리 부인이 후보자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있지만 그런 가능성을 당분간 보류해두는 것이 좋겠다는 맥퍼슨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생애 최악의 커다란 실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충동을 통제하는 힘이 형편없다? 빌어먹을! "공항 마리나 호텔이라고?" 경찰 한 사람이 말했다. "거긴 스튜어디스들이 묵는 호텔 아닌가?" "나도 몰라." 다른 경찰관이 말했다. 모리스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눈을 문지르며 커피나 한잔 더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난 36시간 동안 전혀 눈을 붙여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잠을 잘 형편이 못될 것 같았다. 모리스는 그 방을 나와 커피 자동판매기를 찾아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어딘가 자판기가 있을 법도 했다. 설마 경찰이라고 해서 커피도 마시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모두들 커피는 마시니까. 그 순간 모리스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몸을 오스스 떨었다. 그는 공항 마리나 호텔을 알고 있었다. 그곳은 벤슨이 비행기 기술자를 구타한 혐의로 처음 체포된 곳이었다. 그 호텔 구내에 있는 바에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모리스는 자신의 기억을 확신할 수 있었다. 모리스는 손목시계를 한번 들여다본 다음,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재빠르게 움직이면 러시 아워를 피해 공항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리스가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공항 대로로 접어들었을 때, 머리 위에서는 제트기 한 대가 둔탁한 비명을 지르며 활주로를 향해 하강하고 있었다. 모리스는 길가에 늘어선 술집과 모텔과 렌트 카 사무실을 지나 계속 차를 몰았다. 라디오에서는 교통 정보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샌디에고 고속도로에서 사고 트럭이 북쪽 방면의 차선 세 개를 막고 있습니다. 컴퓨터 측정 속도는 시속 12마일입니다. 샌버나디노 고속도로 엑스터 인터체인지의 남단 좌측 차선에는 고장난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습니다. 컴퓨터 측정 속도는 시속 31마일입니다...." 모리스는 다시 벤슨이 생각났다. 어쩌면 진짜로 컴퓨터가 세상을 지배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문득 병원에서 강연을 하던 조그만 영국인의 말이 떠올랐다. 조만간 외과 의사들은 이쪽 대륙에 앉아 저쪽 대륙의 환자를 수술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로보트 팔을 이용하고, 조종 신호는 위성을 통해 전송된다는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리스의 동료들은 다들 흠칫하는 표정이었다. "하스켈 서쪽의 벤투라 고속도로에서는 승용차 두 대의 충돌 사고 때문에 소통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컴퓨터 측정 속도는 시속 18마일입니다." 모리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교통 정보 방송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컴퓨터를 이용했건 하지 않았건 간에,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교통 정보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날씨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교통 정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있었다. 모리스는 미시간에 살다가 캘리포니아로 옮겨왔었다. 캘리포니아에 온 지 몇 주 동안은 사람들에게 오늘 날씨가 어떨 것 같으냐, 혹은 내일 날씨는 어떻겠느냐 하는 질문을 곧잘 하곤 했다. 신참인 그로서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해소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모리스는 한참 후에야 이곳은 아무도 날씨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는 고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날씨 이야기가 논의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 이야기가 나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것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제 가운데 하나였다. 누가 무슨 차를 몰고 다닌다는 둥, 당신 차가 아주 마음에 든다는 둥, 이 차의 안전성은 어떻다는 둥, 이런 차를 타고 다니면 어떤 문제에 부딪힐 거라는 둥 거의 모든 화제가 자동차와 연결되어 있다시피 했다. 같은 맥락에서, 운전을 하다가 경험한 일들, 열악한 교통 사정, 자신이 찾아낸 지름길, 자신이 경험한 교통 사고 등등도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이야깃거리였다. 로스앤젤레스에는 자동차와 관계된 것은 무엇이든 많은 시간과 관심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진지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모리스는 만약 화성인들이 로스앤젤레스를 내려다본다면 이 지역의 가장 지배적인 생활 양식으로 자동차 문화를 꼽을 것이라고 주장하던 어떤 천문학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정확한 지적일 수도 있는 말이었다. 모리스는 공항 마리나 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로비로 들어갔다. 이 건물은 그 이름만큼이나 캘리포니아의 다양한 특성들을 한데 합쳐 놓은 듯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마치 싸구려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일본식 여인숙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모리스는 곧장 구내의 바로 들어갔다. 오후 5시의 바는 거의 비어 있었다. 한쪽 구석에 스튜어디스 두 명이 음료수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고, 바에는 사업가 타입의 남자 두어 명이 앉아 있었다. 바텐더도 할 일이 없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모리스는 바에 걸터앉았다. 바텐더가 다가오자, 모리스는 벤슨의 사진을 카운터 위로 내밀었다. "이 사람 본 적 있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바텐더가 물었다. 모리스는 손가락으로 사진을 톡톡 두드렸다. "여긴 술집입니다. 마실 것을 제공할 뿐이지요." 모리스는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마치 막 수술을 시작하려 할 때의 기분 같았다. 어딘지 섬찡한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벤슨입니다." 모리스가 말했다. "나는 그의 의사이지요. 이 사람은 무척 심각한 상태에 있는 환자입니다." "무슨 병인데요?" 모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럼요, 많이 봤지요. 해리 아닙니까, 그렇지요?" "맞습니다. 해리 벤슨이에요. 마지막으로 이 사람을 본 게 언젭니까?" "1시간 쯤 전이요." 바텐더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 사람이 무슨 병을 앓고 있습니까?" "간질병 환자입니다. 한시 바삐 그 사람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까?" "간질병? 이런 제기랄!" 바텐더는 사진을 집어들고 불빛에 비춰 가며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 사람 틀림없군. 그런데 머리를 염색한 것 같아요." "그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습니까?" "내가 보기엔 전혀 환자 같지 않았는데. 아니, 정말로 이 사람이...." "이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바텐더는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모리스는 큰 소리로 윽박지른 걸 후회했다. "당신, 의사가 아닌 모양이군." 바텐더가 말했다. "왜 큰소리를 치고 그럽니까!" "나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모리스가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모리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지갑을 꺼내 자신의 신분증과 크레디트 카드, 기타 의학박사라는 직함이 찍힌 모든 것을 카운터 위에 늘어놓았다. 바텐더는 그런 것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경찰도 그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모리스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소." 바텐더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요." "당신의 대답을 듣기 위해 경찰을 데리고 올 수도 있습니다. 일이 잘못 되면 당신도 살인범의 공범이 될지도 모릅니다." 모리스는 자신의 그 말이 제법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약간 극적으로 들리기는 했다. 바텐더가 그의 명함 한 장을 집어들고 한참 들여다 보더니,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가 말했다. "이 사람이 수시로 이곳에 드나든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몰라요." "오늘은 어디로 갔습니까?" "몰라요. 조와 함께 나갔습니다." "조가 누구지요?" "기술자지요. 유나이티드의 야간 근무조로 일하고 있습니다." "유나이티드 항공사 말입니까?" "그래요." 바텐더가 말했다. "이것 봐요, 거기에 대해서는...." 하지만 이미 모리스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모리스는 호텔 로비에서 NPS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교환에게 앤더스 반장을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예, 앤더스입니다." "나 모리스입니다. 지금 공항에 와 있어요. 벤슨이 어디로 갔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는 1시간 전에 공항 마리나 호텔의 바에 나타났어요. 그리고는 유나이티드 항공사에서 일하는 조라는 이름의 기술자와 함께 나갔다는 겁니다. 그 사람은 야간 근무자랍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모리스는 앤더스가 바쁘게 메모를 하고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알았습니다." 앤더스가 말했다. "뭐 다른 건 없습니까?" "없습니다." "당장 병력을 보내겠습니다. 당신은 그 자가 유나이티드 항공사의 격납고로 갔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당장 순찰차를 보내지요." "만약에...." 모리스는 말을 멈추고 멍하니 수화기를 바라보았다.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모리스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이제부터는 경찰이 할 일들 뿐이었다. 벤슨은 위험 인물이다. 경찰이 처리하도록 내버려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반면에, 경찰이 여기까지 도착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경찰서가 어디에 있던가? 잉글우드인가? 아니면 컬버 시티? 이미 러시 아워가 시작된 시간이므로 아무리 사이렌을 켜고 달려온다 해도 적어도 20분은 잡아야 될 것 같았다. 어쩌면 30분이 넘게 걸릴지도 모른다. 그것은 너무 오랜 시간이었다. 벤슨은 30분이면 이미 다른 곳으로 피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 동안 모리스 자신이 그를 추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의 위치만 파악하고 있으면 될 것이다. 섣불리 덤벼들지도 말아야겠지만, 그렇다고 놓쳐 버려서도 안된다. '유나이티드 항공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쓴 커다란 표지판이 보였다. 그 표지판 바로 밑에 경비 초소가 있었다. 모리스는 차를 세우고 차창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나는 모리스 박사라고 합니다. 조를 찾고 있어요." 모리스는 이곳으로 들어가야 하는 사정을 설명할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경비원은 별로 까다롭게 굴지를 않았다. "조는 한 10분쯤 전에 왔습니다. 7번 격납고로 갔어요." 모리스의 눈앞에는 주차장이 딸린 커다란 비행기 격납고 세 개가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어떤 게 7번이죠?" "왼쪽 끝입니다." 경비원이 말했다. "무엇 때문에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손님을 데리고 가는 것 같더군요." "어떤 손님이었습니까?" "방명록에는 그냥 손님이라고 서명했습니다..." 경비원은 방명록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벤슨 씨로군요. 그 사람을 7번 격납고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속엔 뭐가 있지요?" "DC-10기가 수리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지요. 아직 작업이 시작되지는 않았습니다. 새 엔진을 가져와야 하거든요. 아마 다음 주에나 도착할 겁니다. 조는 그 비행기를 손님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고맙습니다." 모리스가 말했다. 그는 정문을 통과한 다음 7번 격납고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는 차에서 내려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실 그는 아직 벤슨이 이 격납고 안에 있는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 먼저 그것부터 확인해 보아야 될 것 같았다. 만약 경찰이 도착했을 때 벤슨이 안에 없다면, 모리스는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벤슨이 빠져나가는 동안 이곳 주차장에 멍청히 앉아 있는 결과가 될 테니 말이다. 모리스는 아무래도 격납고 안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렵지는 않았다. 그는 아직 젊고 몸도 건강한 편이었다. 또한 그는 벤슨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전 지식이 어느 정도는 그를 보호해 줄 것이다. 벤슨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는 특히 더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리스는 벤슨이 과연 안에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격납고를 둘러보기로 마음먹었다. 격납고는 거대한 구조물이었지만, 비행기가 드나드는 커다란 문 말고는 따로 출입구가 없는 듯이 보였다. 그 문은 지금 굳게 닫혀 있었다. 사람들은 어디로 드나든단 말인가? 모리스는 건물 바깥쪽을 둘러보았다. 벽은 대부분 물결 무늬의 철판으로 되어 있었다. 그때 왼쪽 끝에 정상적인 크기의 문이 하나 눈에 띄었다. 벤슨은 다시 차를 몰고와 그 문에서 가까운 곳에 세운 다음, 격납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모리스는 잠시 문 옆에 서서 분위기를 살폈다. 그때 나즈막한 신음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모리스는 전등의 스위치를 찾아 벽을 더듬어 보았다. 철제 박스가 손끝에 느껴졌다. 그 안에는 커다란 스위치 몇 개가 붙어 있었다. 모리스는 그 스위치를 내렸다. 높다란 천정에 달린 전등들이 하나하나 켜지기 시작했다. 격납고 한가운데는 거대한 비행기 한 대가 전등의 불빛을 반사하며 버티고 서 있었다. 비행기가 실내에 들어와 있으니 평소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모리스는 그 비행기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섰다. 다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그 소리가 나는 방향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바닥도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커다란 날개 근처에 사다리가 하나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모리스는 사다리가 있는 쪽을 향해 날렵하게 생긴 비행기의 꼬리 밑을 걸어갔다. 격납고 안에는 휘발유와 윤활유 냄새가 가득 차 있었고,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다시 한번 신음 소리가 났다. 모리스는 조금 더 속도를 내어 걷기 시작했다. 그의 발소리가 텅빈 격납고 안에 울리고 있었다. 신음 소리는 비행기 안쪽 어디에선가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비행기 안으로 어떻게 들어가던가? 모리스는 비행기를 여러번 타본 적이 있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물론 평소에는 조종실 근처에 부착되는 경사로를 통해 들어간다. 하지만 이곳 격납고에서는... 저렇게 거대한 덩치를 가진 비행기 안으로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모리스는 보조 날개 근처에 달린 두 개의 제트 엔진 밑을 통과했다. 엔진은 안쪽에 시꺼먼 터빈 날개가 들어 있는 거대한 원통처럼 보였다. 엔진이 그렇게 크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몰랐던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아마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또 한번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모리스는 사다리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6피트 정도를 올라가자, 날개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날개는 나사가 촘촘히 박힌 거대한 은빛 철판 같았다. '여기를 밟으시오'라고 쓰인 글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 글자 옆에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날개 건너편으로 눈길을 돌리던 모리스는, 이윽고 피로 범벅이 된 한 남자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리스는 그쪽으로 몇 발 다가섰다. 남자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팔은 비정상적인 각도로 뒤로 젖혀져 있었다. 그 순간 모리스는 등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번개처럼 몸을 돌렸다. 갑자기 격납고 안의 모든 전등이 일시에 꺼져 버렸다. 모리스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갑자기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끝도 없는 어둠 속에서 허공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모리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숨을 죽인 채 무작정 기다렸다. 상처를 입은 남자가 다시 한번 비명소리를 냈다. 그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리스는 무릎을 꿇었다. 자신이 왜 그런 동작을 취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겁을 먹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정신이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때 어디선가 가벼운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모리스는 그제서야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벤슨?"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벤슨, 거기 있어요?" 역시 대답이 없었다. 대신 콘크리트 바닥 위를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어둠 속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해리, 나 모리스 박사입니다." 모리스는 조금이라도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서 있는 날개의 끝도 보이지가 않았다. 심지어는 동체의 윤곽조차 보이지 않았다. 발자국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해리, 난 당신을 도우려고 온 겁니다." 모리스는 자신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벤슨도 그 목소리를 듣고 그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리스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고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해리...." 역시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발자국 소리도 멈췄다. 어쩌면 벤슨도 포기해 버린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자극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냥 마음을 바꾼 것인지도 몰랐다. 이내 새로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삐걱거리는 금속음이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또 한번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벤슨은 사다리를 올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모리스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사다리를 등지고 있는지 아니면 마주 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있었다. 또 한번의 삐걱거리는 소리. 모리스는 소리의 방향을 향해 신경을 집중시켰다. 소리는 자신의 정면에서 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날개 뒷부분의 꼬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 즉 사다리를 마주 보는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 한번의 삐걱거리는 소리. 사다리에 계단이 모두 몇개였던가? 어림 잡아 여섯 개쯤 되었던 것 같았다. 벤슨은 이제 곧 날개 위로 올라설 것이다. 뭔가 무기로 사용할 만한 것이 없을까? 모리스는 주머니를 더듬어 보았다. 그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지금 자신의 몰골이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벤슨은 환자이고, 그는 벤슨의 의사였다. 잘 타이르면 벤슨도 그의 말을 들을 것이다. 또 한번의 삐걱거리는 소리. 그래, 신발이다! 모리스는 재빨리 한쪽 신발을 벗었다. 밑창이 고무로 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욕설이 튀어나오려 했다. 모리스는 그 신발을 머리 위로 단단히 집어들고 휘두를 준비를 했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기술자의 얼굴이 마음 속에 떠올랐다. 모리스는 문득 자신이 이 신발을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해 벤슨을 후려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벤슨을 죽여 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삐걱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모리스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모리스는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들릴 듯 말 듯 가느다란 소리였지만,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경찰이 오고 있는 것이다. 벤슨도 저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포기할 것이다. 또 한번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벤슨이 사다리를 도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리라. 모리스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모리스는 뭔가가 긁히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발 밑의 날개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벤슨은 사다리를 내려 간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계단을 올라왔던 것이다. 이제 그는 날개 위에 서 있는 셈이었다. "모리스 박사?" 모리스는 하마터면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할 뻔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벤슨에게도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소리를 듣고 목표물의 위치를 측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리스 박사? 나를 좀 도와 주시오." 사이렌 소리는 시시각각 더 커지고 있었다. 모리스는 이제 곧 벤슨이 체포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순간적으로 힘이 솟는 듯했다. 이 모든 악몽 같은 사건들이 이제 그 막을 내리는 것이다. "제발 나를 좀 도와 주시오, 모리스 박사." 모리스는 문득, 벤슨의 그 말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의사인 자신에게는 그를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 "부탁이오." 모리스는 몸을 일으켰다. "나 여기 있습니다. 해리." 모리스가 말했다. "자, 마음을 편하게 먹고......" 그때 무언가 휙 하고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모리스는 순간 그것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서 입과 턱 부근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이 뒤로 넘어지며 날개 위를 구르기 시작했다. 이내 일찍이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고통이 그의 몸을 덮쳐왔다. 모리스는 그대로 암흑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날개 위에서 땅바닥까지 떨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였지만, 모리스에게는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영원히 계속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렇게 의식을 잃고 말았다. 13 자네트 로스는 응급실 밖에서 조그만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두 여섯 명의 의료진이 모리스를 둘러싼 채 치료를 하고 있었다. 로스는 그들의 몸에 가려 모리스의 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쪽 신발을 신고 있을 뿐 나머지 한쪽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모리스 주위는 사방이 피투성이였다. 응급실 의사들도 피를 흥건히 뒤집어쓰고 있을 정도였다. 그녀와 함께 바깥에 서 있던 앤더스가 말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그럼 하지 마세요." 로스가 대답했다. "그 사람은 무척 위험한 인물입니다. 모리스 박사는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요." "하지만 경찰도 그를 잡지 못했잖아요." 로스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그렇게 쏘아붙였다. 앤더스는 아직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환자에 대한 의사의 책임감, 누군가 다른 사람을 돌보아야 하는 사람의 책임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리스도 그 자를 잡지 못한 것 마찬가지 아닙니까." 앤더스가 말했다. "경찰은 왜 못잡았죠?" "경찰이 격납고에 도착했을 때는 벤슨이 이미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어요. 그렇다고 그 경찰들이 주변을 샅샅이 뒤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구요. 그들은 비행기 날개 밑에서 모리스를, 날개 위에서 기술자를 각각 발견했는데, 두 사람 다 심한 부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응급실 문이 열렸다. 엘리스가 면도도 하지 못한 피곤한 모습으로 패잔병처럼 걸어나왔다. "좀 어때요?" 로스가 물었다. "괜찮은 편입니다." 엘리스가 말했다. "한 일주일 정도는 말을 하지 못하겠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소. 지금 바로 수술을 시작해서 턱을 봉합하고 이빨을 모두 걷어내야 될 것 같소." 엘리스는 앤더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기는 발견했소?" 앤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2피트짜리 쇠파이프입니다." "그걸 입 근처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모양이군." 엘리스가 말했다. "부러진 이빨 조각이 몸속으로 들어가지 않은 게 다행이오. 사진을 찍어 보니, 기관지는 깨끗하더군." 엘리스는 한쪽 팔을 로스의 어깨에 둘렀다. "저 의사들이 모리스를 잘 치료할 거요." "다른 사람은 어때요?" "기술자 말이오?" 엘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사람은 장담을 못하겠소. 코뼈가 부러져서 그 파편이 뇌 속으로 뚫고 들어갔어요. 지금 콧구멍으로 CSF가 흘러나오고 있소. 출혈이 너무 심하고 뇌염이 발생할 위험이 아주 높은 상태지요." 앤더스가 말했다. "회생할 가능성을 어느 정도로 추측합니까?" "그는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소." "알았습니다." 앤더스는 그렇게 말하고 저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로스는 엘리스와 함께 휴게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엘리스는 계속해서 로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정말 난리가 아니로군." 엘리스가 말했다. "모리스는 정말 괜찮을까요?" "물론이오." "아주 잘 생긴 사람인데..." "턱을 제대로 붙여 놓으면 겉보기도 괜찮을 거요." 로스는 몸을 오싹 떨었다. "추워요?" "네." 로스가 말했다. "그리고 피곤해요. 너무너무 피곤해요." 로스는 휴게실에서 엘리스와 함께 커피를 마셨다. 시계는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음식을 먹고 있는 병원 직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천천히 커피 잔을 집어드는 엘리스의 동작에도 피로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재미있군." 엘리스가 말했다. "뭐가요?" "오늘 오후에 미네소타 대학에서 전화가 왔었소. 신경정신과 교수를 구하고 있다며 나에게 관심이 있느냐고 묻는 거였소." 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미있지 않소?" "아뇨." 로스가 대답했다. "여기서 해고되기 전까지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다고 말해 줬지." 엘리스가 말했다. "정말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오?" 엘리스가 물었다. 그는 하얀 가운을 입은 간호사와 인턴과 레지던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네소타는 너무 추워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좋은 학교인데......" "아, 그야 물론 좋은 학교지요." 엘리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로스는 그런 엘리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이내 억지로 그런 감정을 떨쳐 버렸다. 그는 그녀의 조언을 무시한 채 스스로 이 모든 일을 벌인 셈이었다. 지난 24시간 동안 로스는 '내가 그렇다고 말했잖아요.' 하는 소리를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벤슨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무엇보다도 걱정하는 것은 바로 벤슨이었다. 하지만 로스는 이제 그야말로 용감한 수술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을 느낄 수가 없었다. 용감한 수술은 수술을 행하는 쪽이 아니라 수술을 받는 쪽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이 아무리 잘못 된다 해도 의사로서는 명성에 약간의 금이 가는 것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NPS로 가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나 지켜봐야겠군." 엘리스가 말했다. "이런 기분 알아요?" "어떤 기분이요?" "경찰이 그 자를 죽여 버렸으면 좋겠소." 엘리스는 그렇게 말하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수술은 7시에 시작되었다. 로스는 모리스가 침대에 실린 채 수술실로 들어가는 장면을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았다. 의사들이 그 옆을 따르고 있었다. 벤딕슨과 커티스가 수술을 맡을 예정이었다. 그들은 둘 다 성형외과에서는 내노라 하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라면 다른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모리스를 치료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모리스의 얼굴에서 거즈가 떼어지고 맨살이 드러나자, 로스는 커다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의 윗 부분은 조금 창백하기는 해도 멀쩡한 편이었다. 하지만 아랫 부분은 마치 정육점에 걸려 있는 고깃덩어리를 연상케 했다. 도무지 입이 어딘지를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엘리스는 응급실에서 모리스의 상처를 이미 보았었다. 로스는 꽤 멀리 떨어진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모리스의 상처가 무척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로스는 사건 현장이 훨씬 생생하게 머리 속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로스는 모리스의 몸뚱이와 머리 주위에 시트가 드리워지는 것을 보았다. 의사들은 가운을 입고 장갑을 끼고 있었다. 수술에 필요한 도구들을 준비해 놓은 테이블도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간호사들도 준비를 갖춘 채 대기하고 있었다. 수술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마치 무슨 의식처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로스는 그것이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완벽하고도 엄밀한 의식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의사들 자신도 미처 자신의 동료를 수술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었다. 환자에게는 마취제가 있듯이, 의사들에게는 바로 그 의식이 마취제의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로스는 잠시 그 주변에서 머뭇거리다가 그 방을 나왔다. 14 로스는 NPS로 다가가다가 건물 바깥에서 한떼의 기자들이 엘리스를 에워싸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엘리스는 불쾌함이 역력하게 나타나는 태도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었다. 로스는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말이 몇 번 되풀이되는 것을 들었다. 로스는 약간의 죄책감을 뿌리치고 반대편 입구의 엘리베이터를 집어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마인드 컨트롤. 아무래도 일요판 특집에는 마인드 컨트롤에 대한 기사가 쫙 깔릴 것 같았다. 이어서 각 일간지에도 거기에 대한 박스 기사가 실릴 것이고, 의학 잡지에도 통제되지 못한 무책임한 연구의 위험이 대대적으로 보도될 것이었다. 로스는 그 모든 전개 과정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마인드 컨트롤, 빌어먹을! 사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의미에서 통제되고 있다. 모두들 그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마인드 컨트롤러는 아마 부모일 것이다. 그들은 가장 커다란 해악을 미친다. 이론가들은 흔히 편견이나 노이로제, 혹은 정신적 장애를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 증세들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작용이 가해지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의도적으로 자신의 자녀에게 해악을 미치고자 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아이들에게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태도들을 주입시키려 할 뿐이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프로그래밍 되기를 기다리는 조그만 컴퓨터와도 같다. 그들은 잘못된 어법에서부터 못된 행실에 이르기까지, 배운 것을 모조리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그들 역시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분별력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들에게는 좋은 생각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무척 타당한 것처럼 여겨진다. 많은 사람들은 컴퓨터의 맹목적이고 단순한 성격을 비판한다. 예를 들어 만약 컴퓨터에게 '신발을 신고 양말을 신으시오.'라는 명령을 내린다고 했을 때, 컴퓨터는 틀림없이 신발 위에 양말을 신을 수 없다는 대답을 할 것이다. 어린이의 경우, 가장 중요한 모든 프로그래밍은 7살 때까지 모두 완료된다. 인종적인 태도, 성적인 태도, 윤리적인 태도, 종교적인 태도, 국가에 대한 태도, 그 모든 것이 그 시기에 결정되는 것이다. 일단 하나의 축이 설정되고 나면, 아이들은 그 축에 따라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인드 컨트롤. 사회적 관습이라는 것처럼 단순한 것이 또 있을까? 누군가를 만나면 악수를 하는 것은 어떤가?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문쪽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좌측 통행은? 포도주 잔을 오른쪽에 놓아야 하는 것은? 사람들은 사회적 상호 관계를 원활히 유지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사소한 관례들을 따라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사람들은 커다란 혼란을 일으킨다. 사람들은 마인드 컨트롤을 필요로 한다.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게 없어지면 사람들은 심각한 혼돈에 사로잡힐 것이다. 하지만 일단의 사람들이 오늘날 이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 즉 통제되지 않는 폭력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자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마인드 컨트롤을 외치고 있는 형국이었다. 통제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되지 않는 것이 더 좋은가? 로스는 4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복도에서 경찰관 몇 사람을 지나쳐서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앤더스가 전화통을 붙잡고 있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지금 막 첫 번째 미끼가 물렸습니다." 앤더스가 말했다. "그래요?" 로스는 초조했던 마음이 기대감의 물결 속에 파묻히는 것을 느꼈다. "미끼가 물리긴 물렸는데, 그게 도무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알 길이 없군요." 앤더스가 말했다. "뭔대요?" "벤슨의 신상명세와 사진을 시내에 뿌렸더니, 누군가 그 자를 알아본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누구예요?" "시청의 건축계획과에 근무하는 서기입니다. 열흘 전에 벤슨이 찾아와서 이 도시에 건축된 모든 공공 건물의 명세서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특정한 빌딩의 코드를 관리하고 있지요." 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벤슨은 그 서기를 찾아와서 어느 건물의 명세서를 보고 싶다고 했다는 겁니다. 특히 전기 배선 청사진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전기 기술자라며 신분증까지 제시하더라는군요." 로스가 말했다. "그의 집에 있던 아가씨들은 그가 무슨 청사진 같은 것을 가지고 나갔다고 했어요." "음, 아마 건축계획과에서 구해간 청사진이 틀림없을 겁니다." "그게 어떤 건물의 도면이었죠?" "대학 병원의 도면입니다." 앤더스가 말했다. "그는 지금쯤 병원 전체의 배선 시스템을 훤히 알고 있을 겁니다. 당신 같으면 그걸 가지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8시가 되자 로스는 선 채로 졸기 시작했다. 목이 무척 아프고, 머리도 지끈지끈 쑤시기 시작했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잠시라도 눈을 붙이지 않으면 이대로 쓰러져 버릴 것이었다.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로스는 앤더스에게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방을 나왔다. 그리고는 제복을 입은 경찰관 몇 명을 지나치며 NPS 복도를 걸어내려왔다. 이제 경찰은 그녀의 눈에 띄지도 않았다. 마치 옛날부터 거기 그렇게 버티고 서 있었던 듯한 느낌이었다. 로스는 맥퍼슨의 방을 들여다 보았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어깨 위에 떨어뜨린 채 잠들어 있었다. 이따금 짧은 신음 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마치 무슨 악몽이라도 꾸는 사람 같았다. 로스는 살며시 도로 문을 닫았다. 남자 직원 한 사람이 담배 꽁초와 종이컵이 가득찬 재떨이를 들고 그녀 앞을 지나갔다. 남자 직원이 청소를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로스는 해답은커녕 문제조차도 제대로 정리해낼 수가 없었다. 그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지만, 로스는 결국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생각의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비어 있는 병실 하나를 발견하자,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후 진찰대 위에 몸을 눕혔다. 다음 순간, 그녀는 이미 꿈의 세계로 빨려들고 있었다. 15 라운지에서는 엘리스가 11시 뉴스에 등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은 일말의 허영심과 호기심 때문이었다. 게르하르드와 리차드, 그리고 앤더스 형사도 그 옆에 같이 있었다. 화면상의 엘리스는 조금씩 카메라를 의식해가며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 앞에는 수많은 마이크가 얽혀 있었지만, 그의 태도는 자신이 보기에도 제법 침착해 보였다.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그가 내놓는 대답들도 무척 합리적이었다. 기자들이 수술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엘리스는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답변을 했다. 그러자 기자 한 사람이 되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수술을 한 겁니까?" "환자는 폭력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간헐적인 발작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엘리스가 대답했다. "그는 유기적인 뇌의 질환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다시 말해서 그의 뇌가 손상을 입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는 그 점을 치료하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는 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엘리스는 그 누구도 자신의 그런 답변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맥퍼슨조차도 그 정중한 답변에는 마음이 흐뭇해질 것이다. "뇌의 손상이 폭력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까?"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는 우리도 모릅니다." 엘리스가 대답했다. "우리는 또 뇌의 손상 자체가 얼마나 보편적인 현상인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 전체 미국인 가운데 1천만 명 이상은 명백한 뇌의 손상을 입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가벼운 뇌 손상을 입은 사람까지 합치면 그 수는 5백만 명은 더 늘어날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모두 1천5백만 명이라는 말입니까?" 기자가 되물었다. "그건 13명 가운데 1명 꼴이로군요." 엘리스는 제법 계산이 빠른 친구로군,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계산해 보니 13명이 아니라 14명 가운데 1명 꼴이었다. "대충 그 정도의 수치입니다." 화면의 엘리스가 말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뇌의 마비 증세를 나타내고 있는 사람도 250만 가량이 됩니다. 간질병을 포함한 경련성 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2백만, 정신 지체 환자는 6백만에 달하고 있으며, 과다 활동성 행동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 대략 250만 명 정도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 폭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폭력적인 사람들 가운데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은 비율이 면밀히 조사해 보면 각종 뇌 손상을 입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물리적인 뇌의 손상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사실은 가난과 차별과 사회적 불의와 사회적 혼란 등의 문제와 관련된 수많은 이론들을 뒤집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요인들은 물론 폭력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리적인 뇌의 손상 역시 주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사회적인 요법만으로는 물리적인 뇌의 손상을 치료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자들의 질문이 잠시 끊어졌다. 엘리스는 그 침묵의 순간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 순간 그는 마음 속으로나마 승리의 쾌재를 불렀었다. "폭력이라고 할 때, 내가 말하는 폭력이란 각 개인에 의해 촉발되는 맹목적인 습격을 의미합니다. 폭력은 이 세계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1969년 한해 동안 우리 나라에서 살해당하거나 폭행을 당한 사람의 수는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들의 수보다 더 많습니다. 좀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기자들의 깜짝 놀라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14,500건의 살인 사건, 36,500건의 강간 사건, 그리고 306,500건의 폭행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을 모두 합치면, 한해 동안 무려 35만 건에 달하는 폭력 사건이 발생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물론 자동차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자동차를 이용한 폭력 사건은 무수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동차 안에서 사망한 사람이 56,000명, 부상을 입은 사람은 무려 3백만 명에 달합니다." "당신은 항상 숫자에 밝은 편이군요." 게르하르드가 텔레비전을 지켜보며 말했다. "그게 효과적이잖아. 그렇지 않은가?" 엘리스가 말했다. "그럼요, 물론 그렇지요." 게르하르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의 표정은 자꾸만 카메라를 쳐다보는 게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군요." "그게 내 평소의 표정일세." 게르하르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화면에서는 한 기자가 다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당신은 그러한 수치가 물리적인 뇌의 질환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크게 보아서는 그런 셈이지요." 엘리스가 말했다. "한 개인의 물리적인 뇌 질환을 나타내는 단서 가운데 하나는, 반복되는 폭력의 행사입니다. 그것과 관련된 유명한 사례들이 더러 있습니다. 텍사스에서 17명의 인명을 살해한 찰스 휘트만은 악성 뇌종양을 앓고 있었는데, 사건 몇 주 전에 그를 치료했던 정신과 의사는 그가 탑 꼭대기에 올라가 사람들을 쏘아 죽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보고한 바 있습니다. 리차드 스펙이라는 살인범 역시 8명의 간호사를 살해하기 이전에 이미 여러 차례 잔혹한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었지요. 리 오스왈드는 자신의 아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반복적으로 공격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은 모두 널리 알려진 사례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는 사례들이 1년에 30만 건 이상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수술을 통해 그러한 폭력적인 행위를 치료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결코 경멸받을 만한 시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이 고귀하고도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마인드 컨트롤은 아니지 않습니까?" 엘리스가 말했다. "당신은 고등 학교 때 받은 강제적인 교육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교육이라고 부르지요." 기자가 말했다. 엘리스의 인터뷰는 그렇게 끝났다. 엘리스는 화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저 대답이 나를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군."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앤더스 형사가 말했다. 1971년 3월 13일, 토요일 파멸 잔혹하고도 억센 주먹이 그녀를 정신없이 내려치고 있었다. 로스는 몸을 뒤척이며 신음을 내질렀다. "일어나세요." 게르하르드가 그녀의 몸을 흔들며 말했다. "일어나 봐요. 잔." 로스는 눈을 떴다. 방안은 캄캄했다.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스는 하품을 했다. 뻣뻣한 진통이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에요?" "전화가 왔어요. 벤슨이에요." 로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게르하르드의 부축을 받으며 로스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몇 번 세차게 흔들었다. 목은 물론 온몸 구석구석이 지끈지끈 쑤시고 있었지만, 애써 그 고통을 외면했다. "어디에요?" "텔레콤프예요." 로스는 복도로 뛰쳐나갔다. 밝은 빛 때문에 눈이 어찔했다. 복도에는 아직도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도 이제 지루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로스는 게르하르드와 함께 텔레콤프로 들어갔다. 리차드가 수화기에 대고 "지금 왔어요." 하고 말한 다음, 로스에게 건네주었다. 로스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해리?" 맞은편에서는 앤더스가 다른 수화기로 통화 내용을 듣고 있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해리 벤슨이 말했다. "그만 두고 싶어요, 로스 박사." "무슨 일이죠, 해리?" 로스는 벤슨의 목소리가 피로에 찌들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투도 무척 느리고 약간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자극을 받았던 실험용 쥐는 어떻게 되었던가?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피곤해요." "우린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로스가 말했다. "그 기분 말입니다." 벤슨이 말했다. "그 기분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고 있어요. 이제 정말 그런 기분은 느끼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도움을 받도록 하세요, 해리." "난 당신들을 믿을 수가 없소." "당신은 우릴 믿어야 해요, 해리." 오랜 침묵이 흘렀다. 앤더스가 고개를 들고 로스를 바라보았다. 로스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해리?" 로스가 말했다. "당신네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했소." 벤슨이 말했다. 앤더스는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말이에요?" "수술 말입니다." "우린 당신을 고칠 수 있어요, 해리." "나는 내 손으로 직접 고치고 싶었습니다." 벤슨이 말했다. 마치 토라진 아이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내 몸 속의 전선들을 빼내고 싶었습니다." 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시도를 해보았나요?" "아니오. 붕대를 떼내려 해보았더니 너무 아프더군요. 아픈 건 싫습니다." 벤슨은 정말로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듯했다. 로스는 그것이 과연 벤슨에게만 나타나는 고유한 현상인지, 아니면 두려움과 피로에 지친 결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나는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벤슨이 말했다. "이 기분을 중단시켜야 해요. 그래서 나는 컴퓨터를 고쳐볼 생각입니다." "해리, 당신은 그런 일을 할 수 없어요. 그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에요." "아닙니다. 내가 고쳐볼 생각입니다." "해리." 로스가 마치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 같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해리, 제발 우리를 믿어 주세요." 벤슨은 대답이 없었다.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로스는 긴장된 혹은 기대에 찬 방안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해리, 제발 우리를 믿어 줘요. 이번 딱 한번만이라도 좋아요. 그러면 모든 일이 잘 될 거예요." "경찰이 나를 찾고 있소." "여긴 경찰은 없어요." 로스가 말했다. "모두 가버렸어요. 여기는 당신이 와도 안전해요.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예요." "당신은 전에도 나에게 거짓말을 했소." 벤슨이 다시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해리. 그건 모두 실수였을 뿐이에요. 만약 지금 당신이 여기로 온다면, 모든 일이 괜찮아질 거예요." 아주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합니다." 벤슨이 말했다. "나는 이 일이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어요. 나는 내 손으로 컴퓨터를 고쳐야 합니다." "해리...."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뚜뚜-- 하는 통화중 신호가 흘러나왔다. 로스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앤더스는 즉시 전화 회사에 전화를 걸어 방금 벤슨의 통화를 추적할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아마 그것 때문에 아까 시계를 들여다본 모양이었다. "제기랄!" 앤더스가 수화기를 쾅 하고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 "추적할 수가 없다는군. 걸려오는 전화도 추적할 수 없다니, 멍청한 녀석들!" 앤더스는 로스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꼭 어린아이 같았어요." 로스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사람이 컴퓨터를 고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자기 어깨에서 전선을 뽑아낸다는 의미 같았어요." "그건 시도해 보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어요." 로스가 말했다. "그는 지금 커다란 혼란에 빠져 있어요. 지금까지의 자극과 발작 때문이죠." "전선을, 그리고 컴퓨터를 뽑아낸다고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가능하죠." 로스가 말했다. "동물들은 가끔 그런 짓을 해요, 원숭이들...." 로스는 눈을 문질렀다. "커피 좀 없어요?" 게르하르드가 커피를 따라 주었다. "불쌍한 해리." 로스가 말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양이에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앤더스가 말했다. "그 사람이 정말로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럼요." 로스는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설탕 좀 남은 것 없어요?" "정말로 컴퓨터를 망가뜨려 놓을 만큼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설탕은 벌써 몇 시간 전에 다 떨어졌어요."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르겠어요." 로스가 말했다. "그 자는 이 병원의 배선 설계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앤더스가 말했다. "그의 수술을 도와준 역할을 한 메인 컴퓨터가 병원의 지하실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로스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앤더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다시 한번 눈두덩이를 문지르고는 커피잔을 집어들었지만, 이내 도로 내려놓고 말았다. "나도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잠들어 있을 동안 병리학자들이 전화를 했었습니다." 앤더스가 말했다. "그들은 벤슨이 댄서를 찌른 흉기가 십자 드라이버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런 다음 그는 기술자를 공격했고, 이어서 모리스를 공격했습니다. 기계 혹은 기계와 관련된 사람들이 그의 공격 대상인 셈이지요. 모리스는 그 자신을 기계로 만드는 과정과 연관된 사람이었으니까 말입니다." 로스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기서는 내가 정신과 의사예요." "그냥 물어 보는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까요?" "그야 물론이죠...." 그때 다시 전화 벧이 울렸다. 로스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NPS입니다." "여기는 퍼시픽 전화삽니다." 어떤 남자의 목소리였다. "앤더스 형사가 부탁한 통화를 다시 점검해 보았습니다. 혹시 거기 계십니까?" "잠깐 기다리세요." 로스가 앤더스에게 고개짓을 해보이자, 앤더스는 얼른 수화기를 들었다. "예, 앤더습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앤더스는 다시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추적한 시간대가 언제지요? 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앤더스는 전화를 끊더니, 이내 다시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원자력 팩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주십시오." 앤더스가 다이얼을 돌리는 동안 로스를 향해 말했다. "무슨 설명 말인가요?" "그게 파괴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고 싶은 겁니다." 앤더스는 전화가 연결되었는지 전화통에 관심을 돌렸다. "폭발물 전담반 부탁합니다. 나는 살인반의 앤더스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로스를 바라보았다. 로스가 말했다. "그의 몸 속에는 방사성 플루토늄, 즉 Pu-239 37그램이 들어 있어요. 만약 그게 파괴된다면 제법 광범한 지역이 방사능에 오염될 거예요." "그럴 경우 어떤 미립자가 방출됩니까?" 로스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앤더스를 바라보았다. "나도 대학물은 먹은 사람입니다." 앤더스가 말했다. "필요한 경우에는 읽고 쓰기 정도는 할 수 있지요." "알파 미립자예요." 앤더스가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살인반의 앤더스입니다. 지금 즉시 대학병원으로 장비를 보내주십시오. 방사능이 유출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인체와 주변 환경이 Pu-239 알파 미립자에 의해 오염될지도 모릅니다." 앤더스는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로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폭발할 위험성도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로스가 대답했다. "폭발성은 없습니다." 앤더스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잠시 귀를 기울였다. "좋습니다. 알았어요. 그 사람들을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이리로 보내 주십시오." 앤더스가 전화를 끊자, 로스가 물었다.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 거죠?" "전화 회사에서 아까 그 통화를 추적한 결과, 벤슨이 전화를 한 시간에 병원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는 한통도 없었답니다." 로스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겁니다." 앤더스가 말했다. "병원 내부의 어디에선가 전화를 한 것이 틀림없어요." 로스는 4층의 창가에서 주차장을 내려다보았다. 앤더스가 적어도 20명은 족히 될 것 같은 경찰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시를 받은 경찰들은 절반 가량이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건물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며 저희들끼리 뭐라고 수군대고 있었다. 그때 폭발물 전담반의 봉고차 한대가 미끄러져 들어오더니 철갑처럼 보이는 회색 옷을 입은 남자 세 명이 차에서 내렸다. 앤더스가 그들에게 잠시 뭐라고 설명을 한 다음, 그들과 함께 이상하게 생긴 장비들을 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앤더스는 NPS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 옆에서 준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게르하르드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벤슨도 빠져나가지 못하겠군요." "그럴 거예요." 로스가 말했다. "나는 줄곧 그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휴대용 단파 송신기를 이용할 수 없을까요?" "나도 그런 생각을 해보았어요."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안전하지가 못해요. 그것이 벤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 중에 심장 보조기를 달고 있는 사람들도 커다란 혼란을 일으킬 것이 틀림없어요." "그럼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요?" 게르하르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틀림없이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예요." 로스가 말했다. 게르하르드는 계속해서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 곧 통합된 환경이 한계점에 달할 거예요." "이론적으로는 그렇겠지요." 게르하르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통합된 환경이라고 하는 것은 NPS의 개발 부서에서 만들어낸 개념이었다. 그것은 아주 기초적인 응용 분야를 가진 간단한 개념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시작된 것이었다. 즉, 뇌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었다. 환경은 경험을 산출하고, 그것은 다시 기억, 태도, 습관 등으로 변화한다. 무언가가 뇌 세포 사이의 신경 경로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로는 모조의 화학적, 전기적 유형으로 고정되어 있다. 평범한 노동자의 육체가 그의 일의 성격에 따라 변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두뇌 역시 과거의 경험에 따라 변화된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는 노동자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경험이 종료된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된다. 그러한 맥락에서 뇌가 과거의 환경과 통합된다고 하는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우리의 뇌는 과거의 경험들의 총합이다. 그것은 경험들 자체가 사라진 이후에도 오랫 동안 지속된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원인과 치료가 동일하지 않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행동의 혼란은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부터 기인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원인을 제거함으로서 혼란을 치료할 수는 없다. 그 원인은 어른이 됨으로 하여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치료는 다른 방향에서 모색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개발 부서 사람들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성냥은 화재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일단 화재가 나고 나면, 성냥을 끈다고 해서 화재 전체가 꺼지지는 않는다. 이제 문제는 더 이상 성냥이 아니다. 화재가 문제인 것이다." 벤슨의 경우, 그는 자신의 몸속에 이식된 컴퓨터를 통해 24시간 이상 강력한 자극을 받았다. 그러한 자극은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기대를 제시함으로서 그의 두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말하자면 새로운 환경이 통합된 것이다. 이제 조만간 그의 뇌가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태가 도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벤슨의 옛날 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경험의 산물인 새로운 뇌인 것이다. 앤더스가 방으로 들어왔다. "준비는 다 됐습니다." 그가 말했다. "알았어요." "지하로 통하는 모든 출입구에 두 명씩의 경찰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현관 앞에 두 명, 응급실 앞에 두 명, 그리고 세 대의 엘리베이터 앞에도 각각 두 명씩을 배치했지요. 하지만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동 근처에서는 모든 병력을 철수시켰습니다. 그런 지역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로스는 속으로 자상도 하시군요, 하고 중얼거렸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앤더스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2시 40분이군." 그가 말했다. "누가 나에게 메인 컴퓨터를 좀 보여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건 저쪽 본관의 지하실에 있어요." 로스는 병원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내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러죠." 로스가 말했다. 그녀는 이제 정말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이번 사건의 결과에 무언가 영향을 미쳐 보겠다는 환상도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녀는 자신이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과거의 수많은 결정들과 관련된 냉혹한 현실에 말려들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은 어차피 일어나기 마련일 것이다. 로스는 앤더스와 함께 복도를 걸어가다가, 문득 크라일 부인의 사례가 떠올랐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크라일 부인을 벌써 몇 년 동안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녀도 다 장성한 50대 여인이었는데, 남편이 자신에게 지루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자네트 로스는 당시 일말의 개인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그 환자를 맡았었다. 젊은 혈기를 가지고 있던 그녀로서는 마치 전쟁을 준비하기라도 하는 듯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전략을 짜고 계획을 몇 번이나 수정하는 등 치밀한 준비를 하고 있는 크라일 부인의 충동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크라일 부인은 로스의 치료를 받는 동안 두 번의 자살 기도를 했고, 두 번 모두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자 로스는 자신의 능력과 기술과 그리고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크라일 부인은 조금도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자살 기도는 점점 더 교묘해졌다. 결국 그녀는 스스로를 죽이는데 성공을 거두고 말았다. 하지만 그 무렵 로스는 이미 다행스럽게도 그 환자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역시 벤슨에 대한 그녀의 집착이 무너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로스와 앤더스가 텔레콤프에서 나와 복도의 반대편 끝에 이르렀을 때, 등뒤에서 게르하르드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자네트! 자네트, 아직 거기 있어요?" 로스는 지체없이 텔레콤프로 돌아갔다. 앤더스도 호기심에 이끌려 그녀를 따라왔다. 컴퓨터실 안에는 화면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걸 좀 보세요." 게르하르드가 출력기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현재의 프로그램은 종료되었습니다. 프로그램 챈스인 05 04 002 01 00 프로그램 챈스 "메인 컴퓨터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하려 하고 있어요."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그런데요?" "우리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어요." "새로운 프로그램이 뭔대요?" "나도 모르겠어요."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우리는 아무런 변화도 지시하지 않았으니까요." 로스와 앤더스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프로그램은... 그런 다음 갑자기 화면에서 모든 문자들이 사라져 버렸다. 앤더스가 말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나도 모르겠어요."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어쩌면 다른 시배분 방식의 터미널이 우리를 덮어쓰고 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우리는 지난 12시간 동안 우리 터미널에 우선권이 부여되도록 잠궈 놓았거든요. 프로그램을 변화시킬 수 있는 터미널은 우리 것밖에 없어요." 화면에는 새로운 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프로그램은 기계의 부조로 판독됩니다 모든 프로그램은 종료되었습니다 종료되었습니다 종료되었습니다 종료되었습니다 "뭐라구?"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그는 얼른 자판을 몇 번 두드려 보았지만, 이내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새로운 명령이 먹지를 않아요." "왜 그렇죠?" "지하실의 메인 컴퓨터가 어딘가 잘못된 모양이에요." 로스는 앤더스를 바라보았다. "당장 컴퓨터를 살펴보는 게 낫겠군요." 앤더스가 말했다. 그때, 그들의 눈앞에서 컴퓨터 하나가 완전히 죽어 버렸다. 모든 표시등이 일제히 꺼져 버리더니, 화면 역시 팍 하고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컴퓨터도 작동을 멈추었다. 텔레프린터도 죽어 버렸다. "컴퓨터가 스스로를 봉쇄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게르하르드가 말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군." 앤더스가 말했다. 그는 로스를 앞세우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습기를 많이 머금은 저녁이었다. 본관 건물을 향해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그들의 피부에 와닿는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앤더스는 주차장 가로등 불빛을 향해 몸을 틀고는 자신의 권총을 점검했다. "한가지 미리 알려드릴 게 있어요." 로스가 말했다. "그 총으로 벤슨을 위협하는 건 아무런 효과도 없을 거예요. 어차피 합리적으로 대응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앤더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자가 기계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까?" "그냥 그럴 것 같아요. 만약 그가 발작 상태에 있다면, 총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고, 쳐다본다 해도 그게 무언지도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 따라서 당신이 기대하는 반응을 보일 리도 없죠." 그들은 밝은 불이 켜진 현관을 통해 본관으로 들어간 다음, 중앙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앤더스가 말했다. "원자력 팩은 어느 부분에 이식되어 있습니까?" "오른쪽 어깨의 피부 밑이에요." "그게 정확하게 어디쯤이죠?" "여기요." 로스는 자신의 어깨에 조그만 사각형을 그리며 말했다. "크기도 그만합니까?" "그래요. 담뱃갑만한 크기예요." "알았습니다." 앤더스가 말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안에도 두 명의 경찰관이 타고 있었는데, 둘 다 권총에 손을 갖다댄 채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앤더스는 걸음을 옮기면서 자신의 권총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걸 쏘아본 적이 있습니까?" "아뇨." "한번도 없단 말입니까?" "없어요." 앤더스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지하실의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그들은 앞에 펼쳐진 복도를 바라보았다. 벽은 페인트도 칠해지지 않은 콘트리트였고, 머리 위에는 천정을 따라 몇 가닥의 파이프가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 등뒤로 문이 닫혔다. 그들은 잠시 귀를 쫑긋 세운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멀리서 전력 장치가 돌아가는 희미한 웅- 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앤더스가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평소 밤에도 이 지하실에 사람이 있습니까?" 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실 사람들이 있어요. 병리학자들도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으면 있을 거구요." "병리 실험실이 이 밑에 있는 겁니까?" "그래요." "컴퓨터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쪽이에요." 로스는 복도를 따라 앤더스를 안내했다. 앞으로 곧장 나아가면 세탁실이 있었다. 밤이라 출입구는 잠겨 있었지만, 복도에는 커다란 수레와 빨래감들이 쌓여 있었다. 앤더스는 그 빨래감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본 다음, 중앙 주방으로 나아갔다. 주방 역시 문은 닫혀 있었으나, 하얀 타일이 깔린 널찍한 공간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식기를 얹어 놓는 철제 테이블들이 일렬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쪽이 지름길이에요." 로스가 부엌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타일 위에 울려퍼졌다. 앤더스는 권총을 약간 앞으로 내민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은 주방을 지나 다른 복도로 나왔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아무래도 그 복도는 그들이 처음에 출발했던 곳과 비슷한 것 같았다. 앤더스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로스를 돌아보았다. 로스는 그런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자신도 처음에 이 지하실의 구조를 익히느라 무려 몇 달간의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오른쪽으로 꺾어져요." 로스가 말했다. 그들은 '직원 여러분은 모든 종류의 사고를 상사에게 보고하십시오' 라고 쓰인 표지판 밑을 지나갔다. 그 표지판에는 손가락에 조그만 상처를 입은 남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조금 더 가니 다른 표지판이 나타났다. '대출이 필요하십니까? 신용 조합을 찾아 오십시오.' 그들은 다시 한번 오른쪽으로 복도를 꺾어들었다. 그곳은 커피와 도우넛, 샌드위치, 막대 사탕 등을 파는 자동판매기가 설치된 조그만 공간이었다. 로스는 레지던트 시절, 야근을 할 때면 곧잘 이곳으로 내려와 군것질을 하곤 했다. 그때만 해도 의사가 되면 훌륭하고 희망찬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그런 생활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앤더스가 그 곳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걸음을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걸 좀 봐요." 로스는 무슨 일인가 하고 그가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았다. 바닥에 막대 사탕과 샌드위치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커피 자동판매기 앞에는 커피가 쏟아져 나와 조그만 언덕을 만들고 있기도 했다. 앤더스는 그곳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찢어진 자판기의 윗면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도끼 자국 같군." 그가 말했다. "어디서 도끼를 구했을까?" "소방 기구들 중에는 도끼도 있잖아요." "여기선 도끼를 본 적이 없는데." 앤더스는 방을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로스를 힐끗 쳐다보는 것이었다. 로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방을 나와 계속해서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복도가 꼬부라진 곳이 나왔다. "어느 쪽입니까?" "왼쪽이에요." 로스가 말했다. 그리고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하고 덧붙였다. 그들의 눈앞에서 복도가 다시 한번 꼬부라지고 있었다. 로스는 그 근처에 병원의 자료들이 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컴퓨터는 바로 그 뒤에 설치되어 있었다. 계획을 세운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컴퓨터를 자료실에서 가까운 곳에 설치한 모양이었다. 언젠가는 병원의 모든 자료를 컴퓨터로 처리하게 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앤더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로스도 발을 멈추고 그와 함께 귀를 기울였다.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앤더스는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거기 꼼짝도 하지 말고 있으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은 조심스럽게 꼬부라진 쪽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다. 콧노래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앤더스는 꼬부라진 모서리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안쪽을 살폈다. 로스는 숨을 멈추고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으악!"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가 했더니, 갑자기 앤더스의 팔이 마치 한마리 독사처럼 모퉁이를 돌아 뻗어나갔다. 다음 순간, 한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로스가 있는 쪽으로 미끄러져 오는 것이 보였다. "으악!" 물통에 담겨 있던 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로스는 그 남자가 나이많은 관리실 직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도대체...." "쉿...." 로스는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그 남자를 부축해 일으켰다. 앤더스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 지하실에서 나가지 마시오." 앤더스가 남자에게 말했다. "주방으로 가서 기다리는 게 좋겠군요. 절대로 밖으로 나가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무척 흥분되어 있었다. 로스는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하실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나 대기하고 있던 경찰의 총알을 맞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겁에 질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로스가 그 사람에게 말했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지금 이곳에 우리가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요." 로스가 말했다. "아저씨는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돼요." "주방에서 꼼짝도 하지 마시오." 앤더스가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을 툭툭 턴 후, 저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는 한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뒤를 돌아보았다. 모퉁이를 돌아 계속 앞으로 나아간 로스와 앤더스는 이윽고 자료실에 닿았다. '환자 기록'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앤더스가 로스를 돌아보며 어떻게 할 거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로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함께 자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자료실은 꽤나 넓은 공간이었다. 바닥에서 천정까지 이어진 선반에는 환자의 기록들이 빽빽히 꽂혀 있었다. 마치 거대한 도서실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앤더스가 놀라는 기색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대부분은 장부들이에요." 로스가 말했다. "지금까지 이 병원을 드나든 환자의 자료를 다 모아놓은 모양이지요?" "아니에요." 로스가 대답했다. "이건 최근 6년 사이에 진료한 환자들의 기록이예요. 그 이전 것은 다른 창고에 보관되어 있어요." "대단하군!" 그들은 나란히 늘어서 있는 선반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어나갔다. 앤더스는 권총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때때로 그는 선반 사이의 빼꼼한 공간을 통해 건너편을 살펴보기도 했다. 그들의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근무하는 사람도 없습니까?" "누군가 있겠죠." 로스는 끝없이 이어져 있는 진료 차트들을 훑어보았다. 자료실은 언제 봐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현직 의사로서 꽤 많은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때는 한 주 동안에 수백 명의 환자를 진료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 자료실에는 수백만에 달할지도 모를 방대한 기록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곳 단 한군데의 기록들만 그만큼이라면, 이 도시에 있는 다른 병원, 아니 이 나라에 있는 모든 병원을 합칠 경우, 문자 그대로 엄청난 수의 환자들이 있는 셈이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것이 있지요." 앤더스가 말했다. "이따금 자료를 분실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수시로 그런 일이 생기죠." 앤더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그때, 열 다섯이나 여섯 정도밖에 안되어 보이는 소녀 하나가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두 팔로 자료 한뭉치를 힘겹게 들고 있었다. 앤더스가 반사적으로 총구를 들었다. 소녀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자료를 떨어뜨린 채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조용히 해." 앤더스가 쇳소리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의 비명이 뚝 멎었다. 그 대신 두 눈은 왕방울만큼 커져 있었다. "나는 경찰이야." 앤더스는 그렇게 말하며 경찰 뺏지를 보여 주었다. "여기서 누구 본 사람 없니?" "누구...." "이 사람 말야." 앤더스는 사진을 보여 주었다. 소녀는 그 사진을 들여다 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틀림없어?" "네... 그러니까, 아뇨... 그게 저 내 말은..." 로스가 말했다. "아무래도 컴퓨터실까지 가봐야 될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서 로스는 겁에 질린 그 소녀를 보는 순간 마음이 별로 편치 못했다. 병원에서는 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맡기기 위해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아르바이트를 고용하고 있었는데, 그 보수는 정말 하잘 것 없는 것이었다. 로스 자신도 그 소녀 또래의 나이 때 깜짝 놀란 적이 한번 있었다. 그녀는 그때 어떤 소년과 함께 숲속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뱀이 나타났던 것이다. 소년은 그 뱀이 방울뱀이라고 했다. 그래서 로스는 더더욱 겁이 났었다. 하지만 로스는 훨씬 뒤에, 그 소년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들이 본 뱀은 독이 없는 종류였던 것이다. 로스는--- "좋습니다." 문득 앤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컴퓨터실은 어느 쪽입니까?" 로스는 다시 길을 안내했다. 앤더스는 다시 한번 소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떨어뜨린 차트를 줍고 있었다. "만약 이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말을 걸려고 하지 마.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지르란 말이야, 알겠니?"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로스는 이번에는 진짜 방울뱀이 나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다시 복도로 나와 컴퓨터실을 향해 다가갔다. 지하실에서 단장이 된 곳은 이 컴퓨터실밖에 없었다. 컴퓨터실이 가까워지면 콘크리트 바닥이 갑자기 카페트로 변한다. 복도의 한쪽 벽은 대형 유리로 만들어져 있어서, 복도에서도 컴퓨터실의 메인 뱅크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로스는 그 컴퓨터가 설치될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녀가 보기에 한쪽 벽을 유리로 장식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비용의 낭비인 것 같았다. 그래서 맥퍼슨에게도 그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었다. "사람들이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아." 맥퍼슨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컴퓨터는 하나의 기계일 뿐이라는 뜻이오. 다른 대부분의 컴퓨터보다 더 크고 비싼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계는 기계일 뿐이오. 우리는 사람들이 얼른 그 기계에 익숙해지기를 원하고 있소. 컴퓨터를 두려워하거나 숭배하게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소. 우리는 그 컴퓨터가 그냥 단순한 환경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는 말이오." 하지만 로스는 그 컴퓨터실 앞을 지날 때마다 그 반대의 느낌이 들곤 했다. 복도에는 카페트가 깔리고,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장식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맥퍼슨의 말과는 반대로 컴퓨터를 무언가 특별하고 비범한 것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병원에서 바닥에 카페트가 깔린 곳은 1층의 예배실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로스는 그 예배실에 들어가면 괜히 주눅이 들 듯이, 컴퓨터 앞에서도 주눅이 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컴퓨터가 바닥에 카페트가 깔려 있는지 어떤지 알 게 무어란 말인가? 병원 직원들은 그 유리벽 너머의 광경에 대해 나름대로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 유리에 누군가 '컴퓨터를 귀찮게 굴지 마시오' 라고 쓴 쪽지를 붙여 놓았던 것이다. 로스와 앤더스는 유리의 높이 밑으로 잔뜩 허리를 숙인 채 기어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앤더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아이마냥 살며시 고개를 들어 안쪽을 훔쳐보았다. "뭐가 보여요?" 로스가 물었다. "그 자를 본 것 같소." 로스도 가만히 고개를 들어보았다.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고 온몸이 뻣뻣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방안에는 모두 여섯 개의 마그네틱 테이프 장치가 있었다. 중앙처리기를 위한 L자 모양의 커다란 컨솔 하나, 프린터 하나, 카드 펀치 판독기 하나, 그리고 디스크 드라이브 장치 두 개 등이었다. 그 장비들은 모두 반짝반짝 윤을 내며 환한 형광등 불빛 아래 말없이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로스의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컴퓨터 장비들만이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마치 영국의 거대한 돌기둥인 스톤헨지를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바로 그때, 로스는 벤슨을 보았다. 검은 머리칼의 한 남자가 직원 유니폼을 입은 채 두 개의 장비 사이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 사람이에요." 로스가 말했다. "출입구는 어디 있습니까?" 앤더스가 물었다. 그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다시 한번 권총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탄창을 고정시켰다. "저쪽이에요." 로스는 출입구가 나 있는 복도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 10피트 가량 떨어진 거리였다. "다른 문은 없습니까?" "없어요." 로스는 아직까지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앤더스와 그의 총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좋습니다. 당신은 여기서 기다려요." 앤더스는 그렇게 말하며 로스를 바닥으로 밀어붙였다. 그런 다음 그는 출입문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동작을 멈추고 로스를 한번 돌아보았다. 로스는 앤더스 역시 겁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은 물론 몸까지 긴장으로 뻣뻣이 굳어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쭉 내민 팔에 권총이 부자연스럽게 들려 있었다. 우리는 모두 두려워하고 있군. 로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음 순간, 앤더스는 문을 박차고 컴퓨터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번개처럼 몸을 날려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로스는 그의 고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벤슨!" 그 소리와 거의 동시에 총성이 울려퍼졌다. 이어서 제2, 제3의 총성이 귀를 찢을 듯 터져나왔다. 로스는 둘 중에 누가 총을 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카페트가 깔린 바닥에 엎드린 앤더스의 발이 문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열린 문을 통해 회색 연기가 스물스물 복도로 기어나오고 있었다. 또 다시 두 발의 총성이 연달아 들려왔다. 처절한 비명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로스는 눈을 감은 채 뺨을 카페트 위에 찰싹 갖다 대고 있었다. "벤슨! 항복하라! 벤슨!" 그건 아무 소용도 없어. 로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앤더스는 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이번에는 콩을 볶는 듯한 연속적인 총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로스의 머리 위 대형 유리가 박살이 나며 유리 조각들이 소나기처럼 그녀의 어깨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로스가 막 머리 위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털어내는 순간, 놀랍게도 벤슨이 벽을 넘어 그녀 바로 옆의 복도로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불과 몇 피트밖에 되지 않았다. 로스는 그의 한쪽 다리가 피에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하얀 바지 위로 빨간 피가 스며나오고 있었다. "해리..." 그녀의 목소리는 기묘하게 갈라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두려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이 사람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를 두려워 한다는 것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 또한 그에 대한 의사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신뢰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징후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벤슨은 얼핏 그녀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눈길은 마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공허하기만 했다. 그는 이내 복도를 뛰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해리, 잠깐만." "그냥 놔두시오." 앤더스가 컴퓨터실에서 뛰어나와 벤슨을 쫓아 질주하며 소리쳤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뻣뻣한 자세로 총이 들려 있었다. 그 어색한 모습 때문에 로스는 웃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벤슨의 발자국 소리가 메아리처럼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앤더스의 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제 스타카토로 짧게 끊어지는 발자국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이제 그녀 혼자 남은 셈이었다. 몸을 일으켜 보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로스는 앞으로 전개될 일들을 훤히 떠올릴 수 있었다. 벤슨은 궁지에 몰린 동물처럼 비상구로 뛰쳐나갈 것이다. 그가 바깥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이 그를 향해 총을 발사할 것이다. 비상구는 모조리 봉쇄되어 있었다. 벤슨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로스는 자신의 눈으로 그런 장면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로스는 컴퓨터실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메인 컴퓨터는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두 개의 마그네틱 테이프 뱅크도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주 통제판에는 망치로 내려친 듯한 움푹한 구멍이 몇 개나 나 있었고, 이따금 스파크가 일어 불꽃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로스는 어쩌면 화재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은 자신의 힘으로 막아야 했다. 그녀는 소화기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벤슨의 도끼가 한쪽 모퉁이의 카페트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옆에는 권총도 떨어져 있었다. 로스는 호기심에 사로잡혀 그 권총을 집어들었다. 총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크고 기름이 번들번들 하는 듯한 손잡이의 감촉이 차갑게 느껴졌다. 로스는 앤더스가 여기서 나갈 때 총을 쥐고 있는 것을 보았었다. 따라서 이것은 벤슨의 총이 틀림없었다. 로스는 묘한 기분으로 그 총을 들여다 보았다. 마치 그 총이 벤슨에 대한 무슨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만 같았다. 지하실 어디선가 네 발의 총성이 연속으로 울려퍼졌다. 미로 같은 지하실을 따라 총성의 메아리가 뒤를 이었다. 로스는 깨진 유리 조각 위를 걸어나와 복도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추격전은 끝난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등뒤에서는 계속해서 스파크가 튀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뭔가 단조로운 기계음이 찰싹거리며 되풀이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기 테이프의 릴이 끊어져 한바퀴씩 돌아갈 때마다 기둥을 때리는 소리였다. 로스는 그쪽으로 다가가 릴의 작동을 멈추는 스위치를 눌렀다.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니, '에르미나'라는 글자가 수없이 되풀이해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때 아까보다는 좀더 가까운 곳에서 두 발의 총소리가 났다. 로스는 벤슨이 아직 살아서 도망을 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스는 망가진 컴퓨터실의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선 채 모든 것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또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로스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확인하고 마그네틱 테이프 뱅크 뒤에 몸을 숨겼다. 벤슨이 숨었던 컴퓨터 뒤에 이제 자신이 몸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마치 그 쇳덩어리 뒤에 숨어 있으면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고 믿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어서 누군가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 소리가 멈춰졌다. 컴퓨터실의 문이 열렸다가 쾅 하고 닫혔다. 로스는 그때까지 테이프 뱅크 뒤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두 번째 발자국 소리가 달려오더니, 컴퓨터실을 지나쳐서 계속 복도를 달려가 버렸다. 그 소리는 메아리를 남긴 채 희미하게 멀어져 갔다. 이내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그때 로스는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와 기침 소리를 들었다. 로스는 몸을 일으켰다. 하얀 유니폼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채 왼쪽 다리를 붉게 물들인 해리 벤슨이 벽에 반쯤 몸을 기댄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온몸에서 비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고, 숨소리에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는 이 방안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똑바로 눈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스는 아직까지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권총을 생각하며 일말의 자신감을 가져 보았다. 이제 뜻밖에도 일이 잘 풀릴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잘만 하면 벤슨을 산 채로 데리고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경찰의 손에 의해 살해당하기 전에 이렇게 둘만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이 기쁘기까지 했다. "해리." 그는 천천히 시선을 옮겨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안녕하시오, 로스 박사." 보기 좋은 미소였다. 로스는 잠시 백발의 맥퍼슨의 모습을 떠올렸다. 벤슨을 산 채로 데리고 옴으로서 위기에 빠졌던 자신의 프로젝트를 구해준 로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때 난데없이 로스의 의식 속에는 자신의 의과 대학 졸업식장에서 갑자기 속이 좋지 않다며 자리를 떠나 버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이런 순간에 그런 기억이 되살아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일은 다 잘 될 거예요, 해리." 로스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다. 그것이 스스로를 흐뭇하게 했다. 로스는 가능한 한 벤슨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움직이지도 그를 향해 접근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컴퓨터 데이타 뱅크 뒤에 몸을 숨긴 자세 그대로를 유지했다. 벤슨은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기만 할 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망가진 컴퓨터 장비들을 둘러보았다. "난 마침내 해냈소." 그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당신은 이제 곧 좋아질 거예요, 해리." 로스가 말했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이미 일정이 짜여지고 있었다. 우선 오늘밤 당장 상처 입은 다리를 수술한다. 내일 아침에 컴퓨터를 떼내고 전극을 다시 프로그램하면, 모든 것을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파국은 면할 수 있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굉장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엘리스는 새로 산 자신의 저택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맥퍼슨은 계속해서 새로운 영역으로 NPS의 활동을 확대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감사를 느낄 것이다. 그들은 그녀가 한 일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로스 박사..." 벤슨이 고통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움직이려 하지 말아요, 그냥 그렇게 있어요, 해리." "나는 움직여야 하오." "그대로 있으라니까요, 해리." 벤슨의 눈에 잠시 불꽃이 튀겼다. 어느 새 미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를 해리라고 부르지 말아요. 내 이름은 미스터 벤슨이오. 미스터 벤슨이라고 부르시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이 로스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를 도우려 했다. 벤슨은 아직도 자신을 도우고자 하는 사람은 오로지 로스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벤슨은 계속해서 몸을 일으키기 위해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지 말아요, 해리." 로스는 그렇게 말하며 권총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화난, 그리고 적대적인 동작이었다. 그가 그녀를 화나게 했다. 로스는 벤슨에게 화를 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벤슨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내 총이군." "지금은 내 손에 있어요." 로스가 말했다. 그는 미소와 고통이 합쳐진 듯한,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벽에 몸을 의지한 채 몸을 일으켰다. 그의 다리가 닿았던 자리에는 카페트가 검붉게 얼룩져 있었다. 벤슨은 그 얼룩을 내려다 보았다. "나는 상처를 입었소." 그가 말했다. "움직이지 말아요. 당신은 이제 괜찮을 거예요." "그 자가 내 다리를 쏘았어..." 그는 고개를 들어 로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당신은 그 총을 쏘지는 못할 거요, 그렇지 않소?"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하고 로스가 말했다. "쏠 수도 있어요." "당신은 나의 의사가 아니오." "그곳에 그대로 있어요, 해리." "나는 당신이 정말로 그 총을 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벤슨은 그렇게 말하며 로스를 향해 한발짝 다가왔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해리." 벤슨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또 한걸음을 옮겨놓았다. 불안한 걸음걸이였지만, 균형을 잃지는 않았다. "당신이 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의 말이 로스를 겁먹게 했다. 로스는 자신이 벤슨을 향해 총을 쏠까봐 두려웠다. 동시에 쏘지 못할까봐 두렵기도 했다. 이렇게 망가진 컴퓨터에 둘러싸인 채 벤슨과 단 둘이서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앤더스!" 로스가 소리쳤다. "앤더스!" 그녀의 목소리가 지하실에 메아리쳤다. 벤슨이 다시 한걸음을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단 한순간도 로스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몸의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리다가, 디스크 드라이브 컨솔에 거칠게 몸을 기댔다. 그 바람에 그의 하얀 자켓의 겨드랑이가 찢어졌다. 벤슨은 찢어진 옷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찢어졌군..." "꼼짝 말아요, 해리. 꼼짝 말라니까요." 마치 동물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동물을 귀찮게 하지 마시오. 로스는 마치 곡마단의 사자 조련사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벤슨은 드라이브 컨솔에 몸을 의지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총이 필요하오." 그가 말했다. "그걸 나에게 주시오." "해리...." 그는 끙 하는 신음과 함께 컨솔을 밀어내고 그 반발력으로 로스를 향해 계속 다가오기 시작했다. "앤더스!" "그래 봤자 소용없소." 벤슨이 말했다. "이제 시간이 없소, 로스 박사." 벤슨의 시선은 로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로스는 순간적으로 그의 동공이 확대되는 것을 보며, 자극이 가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름답군." 벤슨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자극이 잠시 그의 행동을 제지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내면으로 들어가 그 감각을 즐기는 표정이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차분하고 그윽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그들이 지금 나를 쫓고 있소. 그들은 자기네의 조그만 컴퓨터를 이용해 나를 방해했소. 프로그램은 사냥이오. 사냥과 살해.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프로그램이지. 사냥과 살해.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는 이제 불과 몇 발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로스는 아까 앤더스가 하는 것을 본 대로 뻣뻣한 자세로 총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 정도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발 가까이 오지 말아요, 해리." 로스가 말했다. "부탁이에요." 벤슨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한발 더 다가섰다. 로스는 미처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의식하지도 못한 채 방아쇠를 움켜쥐었다. 순간 총이 발사되었다. 그 소리는 엄청나게 컸고, 반발력 때문에 그녀의 손과 팔이 뒤로 확 젖혀졌다. 하마터면 로스는 뒤로 자빠질 뻔했다. 어느 새 로스의 등은 벽에 닿아 있었다. 벤슨은 희미한 연기 속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다시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보기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오." 로스는 총을 고쳐 쥐었다. 이제는 그녀의 체온이 전해져 손잡이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로스는 총구를 앞으로 내밀고 다른 한손으로 밑을 받쳤다. 벤슨은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해리. 농담이 아니에요." 갖가지 영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맨 처음 벤슨을 만나던 순간이 떠올랐다. 끔찍한 문제를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겉보기에는 얌전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던 인터뷰, 각종 테스트, 약물 시험 등을 거치면서 그와 대면했던 순간들이 순간순간 스쳐갔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솔직하고, 그리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전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었고 엘리스의 잘못이었으며 맥퍼슨의 잘못이었고 그리고 모리스의 잘못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구겨진 종이장마냥 벌겋게 망가져 있던, 정육점에 매달린 고기를 연상케 하던 모리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로스 박사." 벤슨이 말했다. "당신은 나의 의사가 아니오. 당신은 결코 나를 해치지 못할 거요." 그는 이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녀가 쥐고 있는 총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의 손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다가올 때마다 로스는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로스는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는 수평을 유지하고 있었다. 순간, 벤슨의 몸이 놀랄 만한 총알의 힘에 의해 허공으로 솟구쳤다. 로스는 흐뭇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그를 해치지 않고 데려가야 했다. 이제 곧 앤더스가 달려와 그를 수술실로 데리고 갈 것이다. 하지만 벤슨의 몸뚱이는 프린터 장치 위에 쓰러졌다. 그 충격 때문에 프린터기가 단조로운 기계음을 내며 무슨 메시지를 출력하기 시작했다. 벤슨의 몸이 천천히 돌아갔다. 그의 가슴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그의 하얀 유니폼이 진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해리?" 로스는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해리? 해리?" 로스는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분명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앤더스가 달려와 그녀의 손에서 총을 빼앗았다. 회색 작업복을 입은 남자 세 명이 이동식 침대 위에 길다란 플라스틱 캡슐을 싣고 왔을 때, 앤더스는 로스를 방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그 남자들은 캡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노란 벌집 모양의 절연재가 장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특수 작업복에 피가 묻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벤슨의 시신을 들어 그 캡슐 안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뚜껑을 닫고 특수 자물쇠를 채웠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그 캡슐을 바깥으로 들고 나갔다. 나머지 한 사람은 삑삑거리는 소리가 요란한 방사능 측정기를 들고 컴퓨터실 안을 돌아다녔다. 그 소리가 로스에게는 화난 원숭이의 비명소리처럼 들렸다. 그 사람이 로스에게 다가왔다. 로스는 그가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회색 헬멧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유리에는 안개가 끼어 있었다. "이곳에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 사람이 말했다. 앤더스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로스는 비로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후 기 정신운동 간질에 대한 노트 이 책의 하드커버판이 출판되고 난 이후, 몇몇 신경학자들이 신경운동 간질증후군에 대한 묘사가 부정확하다는 지적을 해왔다. 그 전문가들은 정신운동 간질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범죄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은 평범한 다른 개인들과 비교할 때 결코 더 높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들은 또한 정신운동 간질 환자가 발작을 일으킨다 해도 우연한 사고를 제외하면 타인에게 해를 미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발작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복합적이고 의도적인 공격적 행동의 예는 지극히 희박하며,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명백한 자료가 뒷받침되고 있는 정신운동 간질 환자에 의한 폭력 사건을 해명해 달라는 부탁에, 그 신경학자들은 그러한 공격적인 행동이 설사 반복적이고 돌발적이며 또한 부적절한 것이라 할지라도, 실질적인 발작의 표현 행위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혹자는 그것을 '간질적 형태'의 행동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간질병 그 자체가 문제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표명한다. 어떠한 종류의 뇌 손상---그것이 간질의 형태로 표출되든 아니든 간에---이 폭력적인 행동을 통제하는 억제력의 우연적인 상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만족스러울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운동 간질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환자로 치료하고 있는 대부분의 신경정신과 의사들은 자신의 환자들이 <터미널 맨>에 등장하는 해리 벤슨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하는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정신운동 간질 환자의 압도적인 다수는 폭력적이거나 성적인 혼란 증세를 보이고 있지 않다. 그들의 발작은 훌륭히 통제되고 있으며, 풍족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해 나간다. 그들은 또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으며 가족들을 훌륭히 부양하고 있기도 하다. 임상 신경학자들 사이의 괄목할 만한 논쟁을 접한 나는, 유기적인 뇌 손상과 폭력적인 행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이 책을 쓸 당시에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명백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이것이 앞으로 크게 유익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연구 분야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 반면, 나는 내가 본의 아니게 아직도 이 사회에 남아 있는 간질병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을 불식시키고자 하는 잘 통제된 간질 환자들의 노력을 방해하지 않았을지 심히 우려하는 바이다. 마이클 크라이튼, 로스앤젤레스 옮긴이의 말 이 책은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이미 널리 알려진, 미국의 대표적 베스트셀러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MICHAEL CRICHTON)의 출세작, [터미널 맨](THE TERMINAL MAN)의 완역본이다. 이 책의 주인공 해리 벤슨은 간질병 환자다. 조만간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오리라는 망상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망상을 가진 사람의 병을, 기계인 컴퓨터를 이용하여 치료하려고 하는 데서 비극의 씨앗이 싹튼다. 기계란 본디 인간의 생활을 보다 풍요롭고 편안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문명의 이기이다. 현대 문명에서 그러한 기계의 총아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컴퓨터이다. 하지만 기계가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의 생활을 보다 비참하게 만들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산업 혁명 초창기, 거대한 괴물과도 같은 방적 기계가 등장하는 바람에 일자리를 빼앗긴 영국의 노동자들이 기계를 때려 부수는 운동을 벌인 것도 그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요즘 같은 세상에서 단 하루라도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해리 벤슨과 같이 기계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도 없다. 하지만 맥퍼슨이나 엘리스 박사처럼 인간의 모든 문제를 기계가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맹목적인 기계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살아서는 좀 곤란하다. 그러한 환상이 어떠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가하는 것을 마이클 크라이튼은 공상과학 소설의 형식을 빌어 이 작품에서 명쾌하게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 작품을 읽으며 생각해 볼 만한 일은, 현대 의학의 발전이 과연 어디에까지 이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그 간단한 맹장 수술을 받지 못해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죽어가는 사람을 의학의 힘으로 살려 놓는 것은 확실히 하나의 축복일 수 있다. 하지만 의학이 점점 더 발전해 불치의 병들이 하나하나 정복되어 가고, 나아가 노화를 방지하거나 신체의 일부를 기계로 대치하는 등의 방법이 개발되기 시작한다면, 도대체 인간의 수명은 얼마나 연장될 수 있을까? 그렇게 인간의 수명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것은 혹시 살 때 살고 죽을 때 죽어야 하는 자연의 섭리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가? 원숭이의 간을 이식하여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마술과도 같은 의학의 힘이 발휘되는 이 시대에, 죽어가는 응급 환자가 대여섯 군데의 병원에서 문전 박대를 당한 끝에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마는 현실이 공존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한 권의 작품을 쓸 때마다 엄청난 양의 사전 조사와 자료 수집으로 전문 서적 못지 않은 참고 문헌을 소개하는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들은, 그래서 그런지 소설 한 권 읽은 죄 치고는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하는 투정이 생길 정도로 많은 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해 준다. 어쨌든 이 작품은 감동과 함께 인간에 대한 통찰을 깊이 할 수 있게 한다. 1992년 7월 13일 화곡동에서 정 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