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문제 All the Troubles of the World 아이작 아시모프 작 김민식 옮김 지구상의 최첨단 기술은 모두 멀티백에 집중되어 있다. 멀티백은 지난 50년간 정보를 처리하고 축적해온 거대한 인공지능으로서 본체는워싱턴 시 지하에 깔려있지만 회로망은 미국 전지역 뿐 아니라 세계 모든 도시와 마을로 연결되어있다. 어떤 공무원들은 꾸준히 정보를 입력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다른 이들은 멀티백이 내놓는 답을 분석하고 해독한다. 담당 기술자들은 멀티백 내부를 순찰하고 멀티백전용 광산과 공장은 멀티백의 교체 부품을 자동생산하고 여분을 비축해둔다. 그리고 이모든 공정은 완벽하고 정확하게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멀티백은 지구의 전반적 경제활동을 지휘하고 인간들의 과학기술 개발을 돕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멀티백은 모든 지구인개개인에 대한 신상정보를 모아 축적하는 정보집중센터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세계의 인구 개개인에 대해 입력된 40억가지의 정보를 매일 분석하여 발생가능한 범죄들을 예상하는 것 역시 멀티백의 임무중 하나이다. 세계에 산재한 각 지역 범죄교정국은 관할지역에 해당하는 데이터를 받게 되는데, 이 모든 데이터의 전체 보고서는 워싱턴 시에있는 범죄교정국 중앙본부로 보내어진다. 범죄교정국 중앙본부의 최고 책임자 직위에 버나드 걸리만이 취임한지도 벌써 4주가 되어간다. 그는 이제 출근 후 받아보는엄청난 분량의 업무보고서에도 많이 익숙해져 있다. 언제나처럼 오늘자 보고서도 두께가 약 10cm정도 된다. 이젠 그도 이 엄청난 보고서를 다 읽을 필요는 없다는 걸 안다. (어차피 불가능한 일 아닌가.) 그로서는 이 보고서를 한번 쳐다만 봐도 흐뭇했다. 오늘도 보고서 첫머리엔 예상범죄 목록이 나와있다. 사기,절도,폭동,과실치사,방화 등등. 그는 특정범죄를 찾아본다. 처음엔 오늘자 보고서에 그 항목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다음엔 그 항목에 두 건이나기록되어 있다는 것에 약간 충격을 받는다.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두 건의 일급살인이 발생가능한 것으로 나와있다. 하루에두건이 기록된 것은 그의 임기중 처음 있는 일이다. 인터콤을 켜니 부드러운 표정을 한 알리 오스만 반장이 나온다. "알리, 오늘은 일급살인 예상이 두건이나 나와있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닙니다, 국장님."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알리의 검게 그을린 얼굴이 오늘따라 왠지 불안해 보인다. "두건 다 발생가능성은 아주 낮은 편입니다." "그래. 둘다 발생가능성이 15%이하로군. 하지만 일단 멀티백의 예측이니 무슨 조치를 취해야지? 그 초인공지능 컴퓨터는 최근 지구상의 거의 모든 범죄를 예측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리고 시민들이 보기에 일급살인은 아주 흉악한 범죄라네." "예,국장님.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하고 알리 오스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또하나 알아야 할 것은 바로 내가 나의 임기중 단 한 건의 살인사건 발생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야. 다른 범죄의경우 어찌 잘못해서 발생했다 하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 있겠지. 하지만 살인의 경우 미리 알고도 막지 못한다면 난 자네의 사직서를 받아낼 작정이야. 알겠나?" "예,국장님. 그 두 살인사건의 발생가능성에 대한 완전분석 보고서를 이미 모든 관할지부로 보냈습니다. 그 예상된 살인에관계된 모든 인물, 즉 살인자와 희생자로 예측된 사람들은 지금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멀티백에 다시 조회한 결과, 살인 가능성은 이미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잘됐군." 걸리만은 바로 인터콤을 껐다. 다시 범죄예상목록을 바라보며 걸리만은 생각했다. '내가 너무 권위적으로 굴었나?' 하지만 이들 평생직 공무원들에게는 좀 엄하게 굴 필요가 있다. 혹시 라도 자신들 뜻대로 뭐든 할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은품지 않도록 말이다. 총책임자로서 이들에게 만만하게 보여서는 안된다. 특히 이 친구 오스만은 멀티백과 오랜 세월 같이 일해와 상당히 자부심을 느끼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것이 걸리만의 심사에 늘 거슬렸다. 걸리만에게 있어 범죄교정국장이라는 자리는 정치적 경력을 쌓는데 있어 평생에 한번 올까말까한 좋은 기회였다. 단 한 건의 살인사건도 없이 임기를 마친 국장의 선례는 아직 없다. 걸리만의 전임자의 경우 임기 중 8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그 전번에는 총 11건이 발생했다. 이제 걸리만은 한 건의 살인사건도 용납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는 임기중 살인사건의 발생률을 영으로 만든 최초의 교정국장이 되기로 작정했다. 그렇게만 되면 그의 지지도가 올라가고, 그 다음엔... 그는 보고서 나머지 부분은 그냥 한번 슬쩍 훑어보았다. 아내구타 사건발생 예상건수가 전세계적으로 적어도 2000건 정도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이들 중 30%정도만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나마 신속한 방지활동 덕에 실제발생률은 감소하는 추세이다. 멀티백이 아내구타 등의 가정내 폭력사건을 범죄예상 프로그램에 포함시키기 시작한 것은 겨우 5년전의 일이다. 남편들은아내에게 손찌검하려는 자신들의 생각이 멀티백에 의해 미리 예측될 것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가정내 폭력역시 사회범죄라는 자각이 사람들의 인식에 자리잡게 된다면 매맞는 아내의 수는 점차 줄어들어 머지않아 완전히 인류사회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보고서에는 또 남편에 대한 구타예상도 있었다. 알리 오스만은 화상전화기의 화면에서 걸리만의 축 늘어진 뺨과 벗겨진 머리가 서서히 사라지는걸 보았다. 자신의 보좌역인레이프 리미 요원을 돌아봤다. "이제 어떻게 하지?" "제게 물어보지 마십시오. 국장은 기껏 살인사건 따위나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이 사건을 그에게 보고하지 않고 우리 힘으로 해결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해. 국장에게 보고한다면 그는 대책없이 길길이 날뛰기만 할 테지. 정치가들이 다 그렇듯 자기 정치경력만 신경쓰느라 우리 일에 방해만 될걸세." 리미는 고개를 끄덕이다, 지긋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보고를 하지 않았다가 정말 일이 터지면 그 뒷감당을 어쩌시려구요? 그땐 끝장이란 걸 잘 아시쟎습니까..." "만약 이 사건이 정말 발생한다면, 어차피 세상은 끝장나는 거야." 오스만은 다시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그래봤자 발생가능성은 겨우 12.3퍼센트잖아. 사소한 사건 같으면 가능성이 더 올라가나 지켜보다가, 그런 다음에 행동해도 늦지않을텐데 말이야. 문제가 문제니 만큼 그럴 수도 없고... 혹 범인이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고 계획을 포기하진 않을까?" "저라면 그런 기대는 하지 않겠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리미가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 발생가능성이 아직은 낮으니 당분간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자구.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사건을 혼자 계획하고 있지는 않을 꺼야. 누군가 공범이 있는 게 분명해." "멀티백은 공범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는데요?" "나도 알아. 하지만..."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오스만과 리미는 걸리만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는 삭제된 어떤 사건에 대한 기록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일급살인보다 더 심각한 범죄. 멀티백의 출현이후 단 한번도 시도 된 적이 없는 범죄.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벤 매너스는 자신이 발티모어 시에서 사는 16세 아이들 중 가장 행복할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가장 행복한 아이 중 하나라고 해두자. 적어도 그는 18세 성인 선서식이 열릴 스타디움에서 특별석 입장을 허가 받은 선택받은 소수 중 한 명이었다. 그의 형 마이클이 선서식에 나가므로 부모님들이 가족 참관 티켓을 신청했다. 벤도 같이 신청했는데 정작 멀티백이 그 많은 신청자 중에서뽑은 소수 중에는 부모님 대신 벤이 끼어있었다. 2년 후면 자신도 선서를 하게 되겠지만 현재로서는 마이클 형의 선서식을 구경하게 된 것도 벤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그의 부모님들은 꼼꼼하게 벤의 옷을 입혔다. (아니 부모님의 조언을 받아 옷은 벤이 스스로 입었다고 하는 게 옳겠지. 벤도이젠 다 컸으니.) 벤은 가족을 대표하여 마이클의 선서식에 가는 것이다. 마이클에게 전할 말을 어머니와 아버지가 몇 번이나상기시켰다. 마이클형이 예비 신체검사와 신경반응검사를 받으러 떠난지도 벌써 며칠전 일이다. 스타디움은 시외곽에 있었다. 벤은 자신의 좌석까지 정중한 안내를 받았다. 그가 앉은 특별석 아래 강당에는 발티모어 제2지구 출신의 올해 열 여덟살 난 청소년 수만 명이 정렬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발티모어 제2지구 출신이고 남자는 오른쪽에, 여자는 왼쪽에 줄지어 서있었다. 세계 여러 곳에서 비슷한 행사가 치러지지만 이곳 발티모어에서는 성인선서식이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그리고 바로 저 아래 그의 형 마이클이 있는 것이다. 벤은 형을 찾아 낼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 줄지어선 뒤통수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물론 마이클형의 머리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때 정면의 연단에 한 남자가 올라가더니, 연설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선서자 그리고 귀빈 여러분. 저는 올해 발티모어 성인선서식을 진행하게된 랜돌프 T.호크입니다. 저는 신체검사와 신경반응검사 때 이미 선서자 여러분들을 몇 번 뵤습니다. 이제 대부분의 시험이 끝나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관문만이남았습니다. 바로 선서자 여러분의 신상자료를 멀티백에 입력하는 일입니다. "매년 성인이 되는 청소년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줍니다. 지금껏 여러분은 한 인격체로서 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멀티백에게 있어 여러분의 부모들에 관한 파일 중 추가항목으로 존재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매년 데이터를 보충입력하는 시기가 오면 여러분의 부모가 대신 자료를 입력해 왔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그 신성한 의무를 직접 행사할 때가 온 겁니다. 이것은 명예로운 책임입니다. 지금까지는 여러분의 학교생활,건강상태,취미활동 등에 대해 부모님이 자료를 입력해왔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직접 개별 명의의 데이터에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기록을 해 합니다. 여러분의 가치관,철학 그리고 개인적인비밀까지 말입니다. "처음에는 물론 힘들 것입니다. 약간 성가시게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지켜야할, 멀티백에 대한 우리의 의무입니다. 일단 자료가 입력되면 멀티백은 여러분에 대한 모든 자료를 신상파일에 보관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현재 행동양식을 분석하고 미래의 행동과 사회현상에 대한 반응까지 예측하게 될 것 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멀티백은 여러분을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고를 당할 것 같으면, 멀티백은 사전에 이를감지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을 해코지하려 한다면 그 역시 멸티백에 의해 사전예측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범죄를 기도한다면 멀티백이 이를 사전에 예방하여 여러분이 범법자가 되는걸 막아줄 것입니다. "여러분에 대한 모든 자료를 가지고, 멀티백은 지구경제와 인류공영을 위한 각종 조치를 결정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개인적 문제에 봉착한다면 멀티백을 찾아오십시오. 멀티백은 여러분 개개인에 대해 잘 알고 있으므로, 언제라도 여러분을 도와 줄것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에게 서류를 몇 장 나눠드리겠습니다. 모든 질문을 꼼꼼히 읽어보신 뒤 찬찬히 그리고 되도록 상세히 답을기록해주십시오. 어떤 사실이든 전혀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본 자료의 열람권은 오직 멀티백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외부자 열람의 경우에도, 비밀 인가가 있는 지구연방 관계자만이 가능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 사실을 약간 과장하거나 윤색해서 쓰려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이 절대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실여부를 곧 알아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답은 일정한 행동양식을 그리게 되어있습니다. 일부 내용이 거짓이라면 이는전체 분석에서 불거져 나오고 곧 멀티백에 의해 적발될 겁니다. 만약 여러분의 답이 모두 거짓이라면 멀티백은 왜곡된 비정상적행동양식으로 여러분을 인식하게 될 겁니다. 고로 항상 진실만을 기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긴 연설이 끝이 났다.하지만 그 다음에도 긴 자료기입시간, 예식행사, 초대손님 인사말 등이 계속되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벤은 마이클을 찾아낼 수있었다. 그는 여태껏 성인식 행렬에서 입었던 가운을 들고 있었다. 두 형제는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벤과 마이클은 가볍게 저녁식사를 하고 그날의 흥분과 감격을 쉬 떨치지 못한 채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갑자기 험악해진 집 주변 분위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정문에 들어서자 한 제복차림의 사내가 그들을 세웠다. 그 사내는 굳은 얼굴로 신분증제시를 요구했다. 꼼꼼히 사진과 얼굴을 대조한 후에야 그는 형제를 집으로 들려 보냈다. 매너스형제의 부모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날 아침보다 십년은 더 늙어 보이는 죠셉 매너스 씨는 절망에 찬 표정으로 형제를 맞았다. 경사스런 성인식의 흥분이 채가시지 않은 아이들에게 죠셉이 말문을 열었다. "내게 가택연금령이 내려졌단다. 얘들아..." 버나드 걸리만이 모든 보고서를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항상 요약보고서만을 읽었고 그걸로 만족했다. 이젠 지구인 모두가 멀티백이 모든 범죄를 예방한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인간들은 범죄가 발생하기도 전에 교정국요원이 현장에 배치된다는 걸 잘 이해하고 있다. 일단 범죄가 일어난다면 그 범죄에 대한 처벌이 따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멀티백이 그같은 비극을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아무도 멀티백을 속일 수는없다. 결과적으로 지구의 범죄율은 뚝 떨어졌다. 거의 모든 중범죄가 미수에 거치게 되었고 멀티백의 용량이 늘어감에 따라 온갖경범죄까지목록에 포함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경범죄 역시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얼마 전에 걸리만은 멀티백이 인간의 질병 발병 가능성을 사전에 예측할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명령했다. 머지않아 의사는담당환자 개개인에게 현재 식단을 계속하면 내년쯤 당뇨병에 걸릴 것이라든지, 유전자 배합상 또는 선천적 결함으로 심장마비나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등의 진단을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질병의 완벽한 예방이라...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그는 하루일과를 정리하면서 새로 올라온 범죄예상목록을 읽어보았다. 이번에는 예상살인사건이 한 건도 없었다. 기분 좋은 목소리로 그는 알리 오스만에게 인터콤 신호를 보냈다. "오스만,이번 한 주의 사건 실제 발생률을 내 취임후 첫 주것과 좀 비교해주겠나?" 8% 정도 감소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걸리만은 무척 흐뭇했다. 유권자들은 이런 범죄감소를 그의 공으로 돌릴 것이다. 그자신이 별로한 일은 없지만 말이다. 그는 역시 관운이 따르는 사람이다. 그가 취임하고 나서 범죄율이 낮아진다는 것만 봐도 알수 있다. 그는 곧 멀티백의 도움으로 질병율 역시 감소시킬 것이다. 이 모두는 그의 재임중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제 그의 정치적 야망이 실현될 날도 멀지 않았다. 오스만은 어깨를 으쓱했다. "국장의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는구만." "언제 이 사건을 보고하실 겁니까?" 걱정스런 표정으로 리미가 물었다. "죠셉 매너스에 대한 보호감찰지시를 내렸는데도 사건 발생가능성은 줄어들지 않았고,가택연금시키자 오히려발생률이 더 올라가 버렸지 않습니까..." "이런! 내가 그걸 모르나!" 오스만이 버럭 역정을 냈다. "나도 왜그런지 이유를 몰라 답답해 죽겠다구!" "반장님 말씀대로 공범이 있는 게 아닐까요? 이제 매너스가 연금하에 있으니 잔당들이 어떻게 해서든 서둘러 일을 터뜨리려하는 것이겠죠." "아니면 그냥 달아나버리든지... 이미 한 놈이 잡혀버렸으니 다른작자들은 별수 없이 '앗 뜨거라' 하고 내빼겠지. 문제는 말이야, 그렇다면 왜 멀티백이 다른 공범은 지목하지 못했을까? 그냥 매너스 한명만을 지목했거든..." "글쎄요... 그냥 걸리만 국장에게 바로 보고할까요?" "아니, 아직은 안돼... 발생가능성이 아직은 17.3%이니 좀더 지켜보자구." 엘리자베스 매너스 부인은 작은 아들 벤에게 잠자리에 들라고 일렀다. 벤은 경사스러운 날 저녁에 닥친 이 터무니없는 사건에 어리둥절한상태였다. "어머니,도대체 무슨 일이지요?" "올라가라니까!" 벤은 서운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그는 쿵쾅거리며 2층으로 올라가는 척하다 다시 살금살금 내려와 거실 문 뒤에 몸을 착붙이고 숨을죽였다. 오늘 성인식을 치른 장남 마이크 매너스는 의젓하기는 하나 여전히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늘에 맹세코, 나는 결백하단다." 죠셉은 애써 단호히 말했으나그의 목소리에서 불안을 완전히 지울 순 없었다. "물론 아버지가 잘못하신 건 없지요." 마이크는 유순한 아버지에게의문을 감추지 못한 시선을 던졌다. 아버지 죠셉은 이 시대의 전형적인소시민이었다. 어떻게 그런 아버지가? "아마 저들은 아버지가 계획하고 있는 어떤 일 때문에 여기 온 걸 겁니다." "전혀 그런 일도 없어." 매너스 부인이 약간 격앙된 어조로 마이클에게 말했다. "너희 아버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다고 저 난리란 말이냐?" 그녀는 집주위를완전 포위하고 있는 특수요원들을 가리켰다. "내가 어렸을 때 말이다. 내 친구 중 아버지가 은행 직원인 아이가 있었지. 하루는 윗사람이 그아버지를 불러서 그러는 거야. 예금 오만 불을 훔칠 생각을 포기하라고... 그분은 사실 그 돈을 훔치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니었단다. 그냥지나가는 말로 한 오만 불쯤 횡령할까 그랬는데... 그땐 요즘처럼 멀티백이 예상하는 사건을 조용조용 처리하는 편도 아니었단다. 곧 사람들귀에 그 이야기가 들어가버렸지..." "그런데 말이다. 그때 그 일은 자그마치 현금 오만 불이 관련된 사건이었는데도 교정 국에서 취한 조치는 은행의 상관에게전화 한 통한것 뿐이었단다. 그런데 너희 아버지가 도대체 무슨 일을 꾸였다고 열몇 명이나 되는 특수요원이 집을 둘러싸고 저야단이란 말이냐?" 죠셉 매너스는 무척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절대 난 아무런 혐의가 없어. 어떤 사소한 범죄도 저지를생각을 감히 해본 적이 없다구...내 맹세하지!" 마이크는 어른스런 생각을 해내려 고민했다. "혹시 아버지...직장에서 상사에게 무슨 불만이 있는 게 아닌가요?" "아니 내가 설령 불만이 있다한들 그 사람을 죽이려들겠니? 천만의 말씀!" "아버지, 저 사람들에게 가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면 안될까요?" 그의 어머니가 다시 나섰다. "얘기해주지 않을게다. 우리가 이미물어봤어요. 저 사람들에게 이렇게 진을 치고 있으면 동네 사람들 사이에 우리 평판만 나빠질거라 누차 말했단다. 무슨일인지 자초지종을얘기해줘야, 우리도 뭐가 잘못 된 건지 설명해 줄 수 있을 게 아니냐고 말이다." "그래도 얘기 않던가요?" "들은 척도 않더구나." 마이크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잔뜩 찌푸린 얼굴을 지었다. "어머니...멀티백이 실수할 리가 없다는 건 잘 아시죠?" 그의 아버지는 답답함에 소파팔걸이를 두들겼다. "아, 글쎄, 나는결백하다니까!" 바로 그때, 문이 노크도 없이 열리더니 특수요원 하나가 성큼성큼걸어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무척 굳어 있었다. "당신이 죠셉 매너스씨요?" 죠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렇소만, 무슨 일이요?" "죠셉 매너스 씨, 당신을 지구연방정부의 권한으로 체포합니다." 그는 자신의 교정국요원 신분증을 절도 있게 꺼내 펼쳐 보였다. "저와 동행해 주실 까요?"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거요?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상부의 지시에 따라 이 자리에서는 그 내용을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설사 범죄를 꾸몄다해도,예상범죄를 갖고 처벌하는 법은 없지 않소! 날 체포하려면 이미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를 제시하시오!그렇지 않고서는 나를 체포할 수 없소. 법적 근거없는 체포는 위법이오!" 그 요원은 매너스 씨의 날카로운 지적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자,어서 가시죠." 매너스 부인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소파 위로 쓰러졌다. 매너스씨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고,특수요원은그를 완력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잡혀가면서도 매너스 씨는 소리를 질렀다."말이라도 해주시오! 내가 무슨 일을 꾸몄다는 건지. 살인이요? 내가 무슨 살인을계획했소?" 붙잡혀 가는 그의 등뒤로 문이 쾅하고 닫혔다. 풋내기 성인, 마이크 매너스는 어쩔 줄을 몰라 울고 있는 어머니를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봤다. 거실 문 뒤에 숨어있던 어린 벤 매너스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갑자기 어른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입술을 지긋이깨물며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를 냉정하게 생각해봤다. '그래! 만약 멀티백이 체포명령을 내렸다면, 아버지를 석방할 수 있는 것도 멀티백이야. 바로 오늘 성인식에서 그 랜돌프 호크라는 사람이그랬지. 멀티백은 무엇이든 할수있다구... 멀티백이라면 교정국에 명령을 내려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을거야.' 호크는 또 멀티백에게는 누구라도 언제라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고 했다. 멀티백을 만나는 일은 벤도 할 수 있는 것이다.어머니도 마이크도 이제 벤의 결심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오늘 외출을 위해 받은용돈 중 돈이 꽤 많이 남아있었다. 나중에 엄마와 형이 이 사실을 알고 걱정한다 해도 별 수 없다. 지금 벤에게는 아버지를 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는 뒷문으로 나갔고 집을 감시 중이던 특수요원은 벤의 신분증을보더니 선선히 그를 내보내 주었다. 해롤드 큄비씨는 멀티백 통합망 발티모어 지국의 민원담당이다. 그는 자신이 수행하는 공무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다. 그가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걸 듣는다면 누구라도 그 중요성에 대해 수긍할 것이다. 그의 말은 이렇다. 멀티백은 어찌 보면 개인 사생활의 침해자이다. 지난 50여년간 인류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멀티백에게 알려야 했다. 그 무엇도 멀티백으로부터는 숨길 수 없었다. 물론 멀티백이 인류의 평화와 번영은 보장해 주지만,개개인에게 이런 공동선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인간들은 멀티백이 자신의 비밀을공유하는 대신 대가의 제공을 원했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개인적인 고민을 가지고 멀티백을 찾아오게 되었다. 멀티백은 그때마다 논리정연한답을 내놓았다. 멀티백은 또 사람들의 비밀을 굳게 지켜주었다. 멀티백은 공연히 참견하기 좋아하는이웃보다 비밀보장이 확실한 훌륭한 카운슬러였다. 멀티백의 수천조개에 달하는 논리회로중 약 오백만 개가 이런 개인일상사를 풀어주는 민원상담 분야에 할당돼있다. 멀티백이내놓은 답이 이상적 차선이라 할지라도 멀티백의 논리상 현실적 최선이다. 질문을 던진 사람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대부분 멀티백의 충고를 논리적 대안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열 여섯 살난 소년 하나가 멀티백의 상담을 받기 위해 줄의맨 끝에 와서 섰다. 줄을 선 사람들은 저마다 수심에 찬 표정이었으나자기 차례가 가까워질수록, 즉 멀티백에 가까이 갈 수록 얼굴엔 희망의빛이 감돌았다. 큄비는 고개를 숙인채 벤이 내민 신청서를 받고는 말했다. "5 - B부스로..." 벤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저... 멀티백에게 질문은 어떻게 하지요?" 그제야 고개를 든 큄비는 나이 어린 소년의 모습에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청소년들은 멀티백의 민원상담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씨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 이거 오늘 처음 하는 거니?" "예." 큄비는 자신의 책상 위의 단말기를 가리켰다. "이런 걸 사용한단다. 그냥 집에 있는 소형 컴퓨터를 쓰는 식으로 네 질문을 자판으로 두드려 입력하는거야. 저쪽에 모이는 5-B부스로 가서 시작하려무나. 혹시잘 안되거든 여기 이 빨간 버튼을 누르면 안내하는 사람이 올 거다." 큄비는 소년이 부스로 가는 걸 보고 미소를지었다. 일단 멀티백과대화를 시작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멀티백은 항상 인간을 배려하고 친절하게 대화를 이끈다. 물론가끔 멀티백이 비협조적으로 나올 때도 있다. 특히 질문자가 옆집사람의 개인 신상기록이나 유명인사의 사생활을 물어올 때 그렇다. 자신이 만나는 여자의 속마음을 묻는 뻔뻔한작자도 있고, 기말고사에 교수가 출제할 문제가 무엇인지 묻는 학생도더러 있었다. 어떤 사람은 죠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빅 브러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짖궂은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물론 멀티백도 그 질문이 자신을 빚대 골리는 거란걸 잘 안다. 멀티백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 넘겨야 할지 잘 안다. 멀티백은 항상 논리적이고 현명한 대안을 내놓는다. 오히려 이런 엉뚱한 질문들까지 분석하고 기록해 둠으로써 멀티백은인류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큄비씨는 다음 사람의 신청서를 받았다. 한 중년부인이 수심에 찬얼굴로 서 있었다. 알리 오스만은 초조하게 사무실을 왔다갔다하며 서있었다. 그의 고민은 도대체 멀티백에게 가서 하소연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사건발생가능성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어. 벌써 22.4%에 도달했다구. 제기랄! 죠셉 매너스를 잡아다 가두었는데도 확률은오히려 올라가다니..."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리미는 영상전화를 끊었다. "매너스가 아직도 자백을 하지 않고 있답니다. 정신분석검사에서도범죄 모의 사실은 안 나타났답니다." "아니, 그럼 멀티백이 틀린 예측을 했다는 건가!" 곧 다른 전화가 울렸다. 오스만은 괜히 역정을 내고 쑥스러웠던 차라 얼른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교정국 특수요원의 얼굴이화면에 나타났다. "반장님,혹시 나머지 매너스 가족에 대한 새로운 지침사항은 없습니까? 이제까지처럼 계속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도록 놔둘까요?" "무슨 소린가? 자유왕래라니..." "원래 명령은 죠셉 매너스를 가택연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족에 대해선 별도의 명령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가족들을 연금하면 되지 않는가!" "그게 좀 문제입니다. 매너스 부인과 이 집 큰 아들이 지금 작은아들을 찾아내라고 야단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작은 아들도 체포했다고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오스만은 눈살을 찌푸렸다. "작은 아들이라고? 몇 살 난 아이인가?" "열 여섯 살이랍니다." "열 여섯 살 짜리 소년이 행방불명이라... 어디로 갔는지 자네도모르나?" "얼마전 저희 대원 하나가 집밖에 나가는 걸 허락했답니다. 가족에대해서는 아무런 명령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 뒤로 아직안 돌아온 모양입니다." "잠깐 기다리게!" 오스만은 통화중 잠시대기 버튼을 눌렀다. 오스만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쳤다. "바보!바보!바보!" 리미는 깜짝 놀랐다. "아니 무슨 일입니까?" "용의자에겐 열 여섯 살난 아들이 있었어." 침통한 목소리로 오스만이 말했다. "그리고 미성년자는 그의 부모 중 한사람의 파일로 멀티백에게 기록되지. 그 아들은 죠셉 매너스 파일로 올라가 있었어. 제기랄. 왜 그생각을 못했지?" "아니 그럼 멀티백이 지목한 용의자는 죠셉 매너스가 아니라..." "그의 작은 아들이었어. 그리고 그 아이는 지금 행방불명이고... 집을 감시 중이던 요원들이 심부름 가는 줄 알고 내 보내준 모양이야." 그는 다시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가 다시 통화대기중인 요원을 불러냈다. 자고로 상급자는 상황이 아무리 다급해도 하급자에게 명령을 내릴 때는 흥분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지금 당장 사라진 그 소년의 행방을 추적하게. 그곳에 배치된 인원 전부를 끌고 가도록 해. 혹 필요하면 추가 병력의 지원을 요청하게. 내가 미리 전 병력 동원명령을 내려 둘 테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아이를 찾아내게!" "알겠습니다." 오스만은 전화를 끊고 리미에게 또 다른 명령을 내렸다. "다시 발생 가능성을 확인해봐!" 오분 뒤에 리미가 보고했다. "이제 가능성은 19.6%로 줄어들었습니다.반장님" 오스만이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우리가 제대로 방향을 잡은 것같군." 같은 시각 벤 매너스는 5-B부스안에서 자신의 명령을 입력하고 있었다. '나는 인식번호 MB-71833412의 벤 매너스이다. 우리 아버지 죠셉 매너스는 오늘 저녁 체포되었고 우리는 아무도 그 이유를모른다. 아버지를 도울 방법은 무엇인가?' 벤은 침착하게 앉아 답을 기다렸다. 그는 아직 어렸지만 그의 질문이 입력되었고 거대한 인공지능 멀티백이 문제에 대한 자료를 분석하는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멀티백은 관련 데이터를 뽑아 최선의 해결책을 곧 제시할 것이다. 출력기에서 '드르륵' 소리가 나더니 프린트된 답변이 나왔다. 아주긴 답이었다. '곧장 워싱턴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시오. 그런 다음 코네티컷 거리에서 내리시오. '멀티백'이라 쓰인 입구를 찾아가시오.경비원에게트럼불 박사에게 용무가 있다고 하면 경비원이 들여보낼 겁니다. 계속통로를 따라가면 '중앙통제국'이 나옵니다. 들어가서 근무자에게 트럼불 박사에게 가는 중이라 하시오. 그런 다음...' 계속 그런 식의 답변이 이어졌다. 벤은 이런 명령이 아버지를 구하는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몰랐으나 그는 멀티백의 답변을 완전히 신뢰했다. 그는 곧장 고속도로를 향해 달려갔다. 교정국요원들이 벤 매너스를 발티모어 지국까지 추적해 갔을 때 벤은 이미 한시간 전에 그곳을 떠났었다. 해롤드 큄비는 겨우 열 여섯 살난 소년을 찾기 위해 투입된 어마어마한 숫자의 특수요원들을 보고 기가 질려 있었다. "그,그럼요. 한 사내아이가 왔던 적이 있죠. 한 시간 전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 뒤엔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그 아이가 수배자 명단에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냥 민원상담차 온 줄 알고... 그럼요. 그 아이가 한 질문과 멀티백의 답변서는 조회해서 찾아 드릴 수 있습니다." 그가 잠시 후 내어준 답변을 본 특수요원은중앙본부에 다급히 연락했다. 오스만반장은 그 보고서를 살펴보자마자 눈을 위로 말아 올리더니기절하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이 일으켜 세우자 그는 리미요원에게 희미하게 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년을 잡아... 그를 막아야해! 그리고 멀티백의 답변을 한장 더 뽑아 줘... 이젠 별 도리 없어. 걸리만 국장에게곧장 보고하도록 하겠네." 버나드 걸리만은 알리 오스만이 그토록 당황해하는 모습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스만 반장의 낭패한 표정을 보자마자날카로운직감에 그의 등줄기에선 식은 땀이 쫙 배어 나왔다. 걸리만 국장은 흥분해서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 "무...무슨 소린가, 오스만. 살인보다도 나쁜 사건이라니...?" "훨씬 더 나쁜 사건입니다..." 걸리만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암살인가? 정부요인에 대한 테러공작인가?" (그는 속으로 혹시 '내가?'하는 의문을 품었다.) "일반 정부요인에 대한 파괴활동이 아닙니다." "그럼 지구연방대통령에 대한 테러란 말인가?" 경악한 걸리만의 속삭이는 듯한 소리였다. "그것보다 더 엄청난 사태입니다. 바로 멀티백에 대한 파괴시도입니다." "뭐라고!!!" "가동된 이후 처음으로 멀티백이 바로 자신이 위험에 처해있다고 보고해 왔습니다." "왜 곧바로 내게 보고하지 않았나?" 오스만은 약간의 거짓말을 했다. "그 동안 저희들은 일단 사태를 분석해서 자세한 사항까지 알게 되면, 그 다음에 공식적으로 보고 드리려 했습니다." "이제 그럼 멀티백은 안전한 건가? 어떻게 되었나?" "트럼불 박사님께 전해드릴게 있어 왔습니다." 커다란 계기판앞에서 일하던 사내가 돌아다 봤다. "아, 네가 바로 지미로구나. 그래 어서 들어가봐라." 벤은 멀티백의 지시를 다시 읽어본 후 걸음을 서둘렀다. 긴 복도를다 지나서 어떤 문에 이르렀다. 지시서에 쓰여진 순서대로 숫자 판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고 커다란 계기판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멀티백의 지시는 그 계기판위의 빨간 불이 켜질 때 가운데 있는 [전원] 레버를 아래로 당기는 것이었다.벤이 신호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오른편 뒤에 와서 섰다. 또다른 사람이 왼쪽 뒤에 와서 벤의 팔을 잡았다. 두 사람은 벤 매너스를 번쩍 들어올린 후 말했다. "꼬마야. 잠깐 우리와 같이 갈까." 벤의 검거소식에도 오스만의 표정은 그리 밝아지지 않았다. 그때 걸리만국장이 말했다. "아이를 잡았다면 이제 위험은 사라졌군 그래..." "당분간은 안전하겠죠..." 걸리만은 떨리는 손을 이마에 갖다댔다. "내 인생 최악의 30분이었어. 멀티백이 잠시라도 가동중지되는 상황을 생각해봤나? 엄청난 혼란이 초래됐을 거야. 모든 지구연방의 경제활동은 멈추고... 멀티백이 통제하는 모든 기반시설들이..." 갑자기 그가 벼락을 맞은 듯 소리쳤다. "잠깐, 당분간은 안전하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만약 죠셉 매너스가 체포되지 않았다면 벤은 멀티백을 찾아가지 않았을 겁니다.그 애의 아버지는 멀티백 파괴혐의가 아니었다면 체포되지않았을 것이고 말입니다. 결국 이 모든 사태는 애당초 근거없이 자신에 대한 파괴공작을 예상보고한 멀티백 탓에일어난 겁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연쇄반응처럼 일어난 겁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걸리만은 오스만이 말이 내포하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당장의 심정으로는 이 오스만이라는 사내 앞에 엎드려 빌고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이 한 말을 부인하도록 말이다. 오스만은 걸리만 국장의 애처로운 표정을 애써 외면했다. "이제껏 멀티백의 이런 행동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번 시도는 거의 완벽했습니다. 가족선정도 아주 적절했고... 일부러 아버지와 아들을 골라 우리가 엉뚱한 사람을 잡아넣도록 했습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시도에 있어 아직 미숙하긴 했습니다만...우리가 엉뚱한 용의자를 잡아가둔 동안에도 우리에게 계속 발생가능성이 증가한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실마리를 찾게 된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다음 번에 멀티백이 또 이런 일을 꾸민다면 좀더 세련된 방법을 쓸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일부 사실을 숨기려 들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아무리 조심해도,종내에는 멀티백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겁니다." 걸리만은 홧김에 책상을 내리쳤다. "도대체 이유가 뭐란 말인가? 왜 멀티백이 이런 일을 꾸몄나? 고장이 난 건가? 프로그램 수정이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별 도리가 없다고 봅니다. 저도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해보니 옳게 왔다는 생각도 듭니다. 멀티백은 인공지능으로 너무나 완벽했습니다. 이제 사고와 논리로 보아서는 멀티백은 더이상 기계라기보다는 인간에가깝게 된 겁니다." "자네 돌았구만." "인류는 오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멀티백에게 온갖 당면과제를 입력하고 멀티백이 가장 논리적인 답을 내놓을 것을 강요해왔습니다. 우리의 사사로운 비밀까지 공유하고 일일이 우리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부도덕성과 악한 면을 모두 멀티백에 주입하고는 우리를 그 악한 본성에서 보호해 줄 것을 요구한 겁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질병까지도 멀티백이 예방해주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스만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걸리만 국장님. 우리는 멀티백에게 세상의 모든 문제를 맡긴 겁니다. 그리고 이젠 멀티백도 지칠 대로 지쳐 버린 겁니다.""정신나간 소리야. 날이 더워 자네 머리가 이상해 진거라구..." "그럼 제가 제 말을 입증해 보일까요? 잠시 국장님앞의 멀티백 연결 단말기를 두들겨 보면 곧 알 수 있습니다." "뭘하려고 그러나?" "이제껏 아무도 멀티백에게 물은 적 없는 질문 한가지를 해보렵니다." "혹시 괜히 멀티백의 회로를 상하게 하는 것 아닌가?" 걸리만 국장이 잔뜩 겁에 질려 물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의문을 풀어 줄 겁니다." 걸리만 국장은 잠시 망설였다. "좋아, 해보게..." 오스만은 걸리만 국장 책상의 단말기 자판을 쳐나가기 시작했다. "멀티백. 혹 자신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보게." 질문이 입력되고 답이 나올 때까지 오스만과 걸리만은 숨을 죽이고있었다. 마침내 '드르륵'하고 종이 한 장이 나왔다. 그 종이 위에 아주 짧은답변이 씌어져 있었다. '그것은 자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