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SF 걸작선 지은이: 아이작 아시모프 외/ 박상준 엮음 출판사: 고려원미디어 전설의 밤 지은이: 아이작 아시모프 천 년에 하룻밤만 별이 보인다면, 어떻게 인간이 신의 존재를 믿고 숭배하며 수많은 세대 동안 천국에 대한 기억을 보존한 수 있겠는가. 에머슨 싸로 대학교의 국장 아톤77은 아랫입술을 호전적으로 불쑥 내밀고 격노한 표 정으로 젊은 신문기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테레몬762는 태연히 그의 분노를 잘 받아넘기고 있었다. 지금은 광범 위하게 읽혀지는 그의 칼럼이 한낱 애송이 기자의 정신나간 아이디어로 취급받 던 젊은 시절에, 그는 불가능해 보이는 인터뷰 전문이었다. 그 대가로 그에게 돌 아온 것은 타박상과 눈언저리의 검은 멍, 부러진 뼈 등이었지만 덕분에 그는 풍 부한 자신감과 냉정함을 얻을 수 있었다. 아톤77은 감정을 억제하느라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유명한 천문학자 특유 의 주의깊고 다소 현학적인 어투로 말했다. “기자양반. 내게 그런 뻔뻔스런 제의를 하러 오다니 당신도 정말 강심장이군. ” 천문대의 전송사진 전문가 미니25가 혀로 마른 입술을 적시며 안달이 나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저, 교수님, 어쨌든...” 국장은 그를 돌아보며 흰 눈썹을 치켜뜨고 말했다. “참견하지 말게, 비니. 나는 자네를 믿고 기꺼이 이 친구를 데려와도 좋다고 했네만 지금 대드는 것은 참을 수 없어.” 테레몬은 지금이 끼여 들 때라고 생각했다. “아톤 국장님, 제가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게 해주십시오. 제 생각에는...” 아톤은 반박했다. “지난 두 달 동안 자네가 써온 그 일간지 칼럼을 생각해 볼 때... 나는 지금 자네가 말하려는 것이 어떤 것이든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지 않네. 자네 는 나와 내 동료들이 세계적인 조직체를 만들어서 이미 피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린 이 위험에 대비하려는 노력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신문 캠페인을 이끌어 오 고 있지 않나? 이젠 가도 좋네.” 말을 마치자 그는 돌아서서 이 행성의 여섯 개 태양 중 가장 밝은 감마가 지 고 있는 것을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그것은 벌써 어두워져서 지평선의 안개 속 으로 노랗게 가라앉고있었다. 아톤은 자기가 맨 정신으로 그 모습을 다시는 바 라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톤은 당황했다. “안 돼, 기다려. 이리 오게!” 그는 격렬하게 손짓했다. “자네에게 기사거리를 주겠네.” 기자는 노인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아톤은 바깥을 가리켰다. “여섯 개의 태양 중 하늘에 남은 것은 베타밖에 없네. 보고 있나?” 그것은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베타는 거의 천정에 와 있었다. 이미 넘어가고 있는 감마의 밝은 광선이 사라져 감에 따라, 베타의 붉은빛이 대지를 색다른 오 랜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베타는 원일점에 있었으므로 작게 보였다. 그것은 테레몬이 지금까지 보아 온 것 중 가장 작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베타는 라가쉬 하늘의 의심 할 바 없는 지배자였다. 지금은 라가쉬의 태양인 알파조차도 지평선 아래로 져 버리고 하늘에는 알파와 가장 가까운 별인 적색위성 베타만이 홀로 떠 있었다. 위를 향한 아톤의 얼굴은 햇빛 속에서 붉게 물들고 있었다. 아톤이 말했다. “이제 네 시간도 지나기 않아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이 문명은 종말을 맞게 된다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네. 보다시피 베타는 하늘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태양이야.” 그는 잔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걸 쓰게. 아무도 그걸 읽을 사람은 없을걸세.” “하지만 만약 네 시간이 지나고 또 네 시간이 더 지나도 아무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죠?” 테레몬은 부드럽게 물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말게. 충분히 많은 일들이 일어날테니.” “당연하겠죠. 하지만 그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또다시 비니25가 말문을 열었다. “교수님, 제 생각으로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테레몬은 말했다. “표결에 붙이시죠, 아톤 국장님.” 지금까지 주의깊게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나머지 다섯명의 천문대 연구원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아톤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네.” 그는 주머니 시계를 꺼냈다. “자네의 훌륭한 친구 비니가 이렇게 간곡히 주장하니 자네에게 5분의 시간을 주겠네. 얘기해 보게.” “좋습니다. 자,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제 눈으로 직접 본 사실들을 기사 로 쓸 수 있게 허락하신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 있습니까? 만약 국장님의 예언이 사실이 라면 제 위치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 경우 제 칼럼은 쓸 수 없을 테니까요. 반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국장님께서는 조롱당하거 나 더 나쁜 일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그런 조롱 따위는 우호적인 손길에 맡겨 버리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죠. ” 아톤은 코방귀를 뀌며 말했다. “우호적인 손길이라는 건 자네 손을 뜻하는 건가?” “물론입니다.” 테레몬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제 칼럼은 때때로 다소 거친 점이 있긴 하지만, 언제나 사람들을 위해서 의 심스러운 점은 유리하게 해석합니다. 지금이 라가쉬에게 <종말이 다가왔느니 라.>하고 설교하는 시대는 아니죠. 국장님은 사람들이 더 이상 묵시록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해서 과학 자들로 하여금 얼굴을 돌리고 컬트교도들이 결국 옳았노라고 말하게 만들죠.” “그런 게 이니라네, 젊은이.” 아톤이 가로막으며 말했다. “우리 자료 중 많은 부분이 컬트교로부터 얻은 것이긴 하지만, 우리의 결론 에는 컬트교의 신비주의 같은 것은 포함돼 있지 않네. 사실은 사실 그 자체이고 컬트교의 이른바 <신화>라는 것도 그 본질은 분명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네. 우리는 그것들을 들춰내서 그 신비를 벗겨 내었네. 보장하건데 이젠 컬트 교가 자네보다 우리를 더 증오할 거야.” “저는 당신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시민들의 분위기가 험학하다 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들은 성나 있습니다.” 아톤은 비웃으면서 입술을 비꼬았다. “성내라고 하게.” “좋습니다. 하지만 내일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일이라는 건 없어!” “만약 있다면요. 내일이 온다고 치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봅시다. 시민들의 분노는 심각한 사태를 몰고 올 겁니다. 분명합니다, 교수님.” 국장은 준엄하게 칼럼리스트를 주시하며 말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우리를 돕기 위해 자네가 계획하고 있던 일은 뭔가?” “글쎄요.” 테레몬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제 제안은 사람들을 제게 맡기시라는 겁니다. 제게는 어떤 일의 우스운 면 만 보이도록 사물을 잘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물론 참기 힘드실 거 라는 생각은 듭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모두를 바보들의 집단으로 보이게 만들어 야 할 테니까요. 하지만 만약 제가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분을 비웃도록 만든다 면 사람들은 아마 화내는 것을 잊어버리게 될 겁니다. 그 대가로 저희 사장님이 요구하는 건 독점 출판권이 전부입니다.” 비니가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교수님, 저희는 모두 그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두 달간 우리는 우리의 이론이나 재산, 그 둘 중의 하나에 잘못이 있을 백만분의 1의 확률을 제외하고 는 모든 것을 다 고려해 왔습니다. 우리는 그 백만분의 1의 확률 역시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상 주위에 둘러 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가 동의의 뜻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아톤은 마치 입 안 가득히 뭔가 쓴 것을 물고는 그것을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원한다면 여기 머물러도 좋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일을 방해하는 것은 그만뒀으면 하네.” 아톤은 뒷짐을 진 채 일그러진 얼굴을 앞으로 내밀고는 결연하게 내뱉었다. 만약 새로운 목소리가 방해하지만 않았다면 그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하고 있었 을 것이다. “안녕, 안녕, 안녕!” 하이테너의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새로운 방문객의 살찐 뺨은 즐거운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는 왜 이렇게 시체보관소 같은 분위기지? 아무도 기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통은 당황해서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건가, 쉬린? 나는 자네가 대피소에 남아 있기로 한 줄 알고 있었는데.” 쉬린은 웃으면서 뚱뚱한 몸을 의자에 던졌다. “나는 한창 달아오르고 있는 바로 이곳에 있고 싶네. 내게도 호기심이 있다 는 걸 모르겠나? 나는 컬트교도들이 언제나 떠들어대는 바로 그 별이라는 것을 보고 싶네. 대피소에서는 심리학자가 자기 밥값을 할 만한 데가 없다네. 그들에 게는 활동적이고 힘센 남자와 어린애들을 키울 수 있는 건강한 여자가 필요하 지. 나 말인가? 90킬로의 몸무게는 활동적인 남자로서는 너무 무겁고 애들을 키 우는 데도 나 같은 사람은 실패작이지. 그런데 뭐 때문에 군입을 하나 더 늘려 서 그들을 괴롭히겠나? 나는 여기가 훨씬 더 좋다네.” 테레몬이 활발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대피소가 뭡니까, 교수님?” 쉬린은 그 칼럼리스트를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불쾌한 듯이 넓은 뺨을 불룩하게 하고서 말했다. “근데 빨강머리, 자네는 도대체 누군가?” 아톤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무뚝뚝하게 투덜거렸다. “그 사람은 테레몬762라고 하는 신문기자라네. 자네도 들어봤을 텐데?” 칼럼리스트는 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싸론 대학교의 쉬린501이시죠,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대피소가 뭡니까, 교수님?” “글쎄...” 쉬린은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그... 말하자면 파멸에 대한 예언이 옳다는 것을 몇 사람에게 납득시켜서 그걸 구경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네. 그리고 그중 몇 사람은 적절한 능력을 시험받은 사람들이지. 그들은 주로 천문대 연구원의 직계 가족들과 싸로 대학교의 교수 요원들이고 그 밖에 외부 사람들도 조금 포함돼 있다네. 다 합치면 약3백 명 정도 되지만 4분 의 3정도는 여자와 아이들이야.” “알겠습니다. 그들은 암흑과 그, 별이라는 것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숨어서 세계의 나머지 지역이 파멸할 때 그곳에서 버티고 있도록 계획된 것이군요?” “할 수만 있다면. 아마 쉽지는 않을 거야. 모든 사람들은 미치광이가 되고 거 대한 도시가 불길에 싸여 타오르는 속에서는, 주위 환경은 살아 남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걸세 그러나 그들에게 음식과 물과 은신처와 무기가 있어.” “그게 다는 아니지.” 아톤이 말했다. “그들은 오늘 우리가 수집할 기록을 제외한 모든 우리의 기록을 가지고 있 네. 그 기록들은 다음 주기의 문명을 위해 우리가 남길 모든 것이며, 바로 그것 이야말로 끝까지 남아야 하는 것이라네. 그 나머지는 무시해도 좋아.” 테레몬은 낮고 긴 휘파람을 불고는 몇 분 동안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었다. 탁자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여러 명이 하는 체스판을 들고 나와 6인 경기 를 시작했다. 침묵 속에서 말들은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모든 눈이 체스판 위에 집중되어 있었다. 테레몬은 그들을 응시하고 있다가 일어나서 쉬린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아톤에게 다가갔다. “저 좀 보시겠습니까? 저 사람들이 방해하지 않을 만한 곳으로 갔으면 합니 다. 여쭤 볼게 있습니다.” 옆방에는 좀더 부드러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창에는 두꺼운 불은 커텐이 드 리워져 있고 바닥에는 밤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베타의 벽돌색과 어울려서 전체적으로는 마 치 말라붙은 핏빛을 띠고 있었다. 테레몬은 전율하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자, 단 1초 동안이라도 좋으니 백색광선을 한 번만 비춰 준다면 열 장의 신 용장을 제공할 용의가 있어. 감마나 델타만 하늘에 있어도 좋으련만...” “자네가 질문하고 싶은 게 뭔가?” 아톤은 물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기억해 주게. 한 시간 15분 정도만 지 나면 우리는 위층으로 올라가야 돼.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얘기할 시간이 없다네. ” “제 의문점은 바로 이겁니다.” “테레몬은 벽에 기대어 서서 팔짱을 끼고 말했다. “교수님께서는 몇 시간만 지나면 온 세계가 암흑 속에 잠기고 모든 인간은 완전히 미쳐 버릴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그 뒤에 숨은 과 학입니다.” “아니, 아니야. 그렇게 물으면 안 돼!” 갑자기 쉬린이 나섰다. “아톤에게 그런 걸 물으면, 물론 그가 대답해 줄 거라는 가정하에서 말이지 만, 이 친구는 그림과 그래프를 한아름 꺼낼 거야. 자네는 하나도 이해할 수 없 을걸세. 내게 묻는다면 아마추어의 관점에서 설명해 주지.” “좋습니다. 그럼 당신께 여쭤 보겠습니다.” “그럼 난 우선 한잔 해야겠네.” 쉬린은 손바닥을 비비면서 아톤을 바라보았다. “뭘 말인가?” 아톤은 투덜거렸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말게!” “자네가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말게. 오늘 술은 안 되네. 내 동료들을 취하게 만드는 건 아주 쉬운 일이야. 그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네.” 심리학자는 툴툴대고 있었다. 그는 테레몬에게 돌아서서 그 날카로운 눈으로 테레몬을 꼼짝못하게 하고서 말하기 시작했다. “자네도 라가쉬 문명의 역사가 순환한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분명히 말하지 만 순환한단 말이야!” 테레몬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대강 그렇지. 지금 이 세기에 와서는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이론이고. 이 순 환의 속성은 가장 큰 수수께끼 중의 하나라네. 아니 과거에는 그랬지. 우리는 여 러 계열의 문명을 조사했는데, 그중의 아홉 문명은 분명히 그리고 나머지 문명 들도 지금 우리의 문명에 필적할 만큼 발달했다는 근거를 찾아냈다네. 그리고 그 모든 문명들이 하나도 예외없이 그 발전의 극한에 이르렀을 때 불타서 파괴 되었다는 것도 알아냈어. 그리고 아무도 그 이유를 말할 수 없었지. 모든 문화의 중심지는 그 알맹이까지 다 불타 없어져서 그 원인에 대한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았던 거야.” 말이 끝나자마자 테레몬은 말했다. “석기 시대는 없었습니까?” “아마 있었겠지. 하지만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알려진 바 없네. 그 시대의 사 람들이 단지 지능이 있는 유인원 정도의 수준을 못 벗어났다는 것 이외에는. 그 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알겠습니다. 계속하시지요.” “이 순환하는 대이변에 대한 설명들도 있었지. 모두 환상적인 것들이지만. 어 떤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불의 비가 내린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라가쉬가 가끔 태양을 통과한다고도 했네. 이것보다 더 황당한 설명들도 있었다네. 하지만 이런 것들과는 전혀 다른 이론이 하나 있네. 그 이론은 수세기에 걸쳐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 “알았습니다. 당신은 컬트교도들이 그들의 묵시록에서 말하는 <별>의 신화 를 말씀하시는 거지요?” “바로 맞췄네.” 쉬린은 만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컬트교도들은 2050년마다 라가쉬가 거대한 동굴로 들어가서 모든 태양이 사 라지고 완전한 어둠이 온 세계를 덮는다고들 말하네. 그리고 나면 <별>이라는 것이 나타나서는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아서 그들을 이성이 없는 짐승처럼 만들 어 버리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이룩한 문명을 파괴하게끔 만들어 버린다는군. 물론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종교 신화적인 언어로 뒤섞어 놓았지만 중심되는 생각은 바로 이것이라네.” 쉬린이 긴 한숨을 쉬는 동안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만유인력의 법칙까지 이르렀다네.” 그는 만유인력이라는 말을 특히 강조해서 말했다. 바로 그때 아톤이 창 쪽으 로 갑자기 나타나서 큰소리로 코방귀를 뀌더니 방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두 사람은 그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잘못된 게 있습니까?” “특별한 건 없네. 두 사람의 연구원이 한 시간 전까지 오기로 돼 있었는데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네. 지금은 대단히 일손이 부족하다네. 왜냐하면 반드 시 필요한 사람들이 거의 모두 대피소로 가버렸거든.” “교수님께서는 그들 두 사람이 도망가 버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군요. 그렇 죠?” “누구? 파로와 이모트 말인가? 물론 아니지. 하지만 그들이 제시간에 나타나 지 않으면 조금 귀찮게 될걸세.” 쉬린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눈을 깜박거렸다. “어쨌든, 아톤이 가고 없으니...” 그는 가장 가까운 창문까지 발끝으로 걸어가서는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창 문 바로 밑에 있는 상자에서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을 꺼냈다. 그가 그것을 흔들 자 뭔가를 암시하듯 출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아톤이 이건 모를 거라고 생각했지.” 쉬린은 빠른 걸음으로 탁자로 돌아오면서 말했다. “여기 잔은 하나밖에 없네. 자네가 손님이니까 그걸 가지게. 나는 병을 택하 겠네.” 그리고 그는 작은 컵을 적당히 채웠다. 병을 거꾸로 세우고 마시자 심리학자 의 목젖이 아래 위로 움직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쩝쩝거리며 만족한 소리를 내 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자네는 중력에 대해서 뭘 알고 있나?” “그것이 아주 최근의 성과라는 것 외에는 모릅니다. 그리고 아직은 그렇게 잘 정리되지 않았다면서요. 거기에 사용되는 수학은 너무 어려워서 라가쉬에서 열두 사람만이 그걸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던데요?”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허튼 수작이야! 나는 자네에게 그 속에 들어 있다는 기본적인 수학을 한 문장으로 말해 줄 수 있네. 만유인력의 법칙이란 우주의 모 든 물체 사이에 서로 끄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주어진 두 물체 사이에 존 재하는 이 힘의 양은, 두 물체의 질량 곱을 두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으로 나 눈 것에 비례한다는 것이라네.” “그게 전부입니까?” “그걸로 충분하네. 그 법칙을 세우는 데 400년이 걸렸어.” “왜 그렇게 오래 걸렸죠? 교수님 말씀대로 하면 아주 단순하게 들리는데요. ” “왜냐하면 위대한 법칙이란 번뜩이는 영감만으로 간파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 이라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말이야. 그런 법칙은 일반적으로 과학 자로 가득 찬 세계의수세기에 걸친 노력이 합쳐져서 얻어지는 것이지. 제노비41 이 라가쉬와 알파가 상호 공전하는 것이 아니라, 라가쉬가 알파의 주위를 도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이래로 (그건 400년 전이었지) 천문학자들은 계속 연구해 왔다네. 여섯 개의 태양에 의한 복잡 한 운동을 기록하고 분석하고 해석해 왔네. 계속해서 이론들이 발전하고 검토되 고 서로 비교되면서 개선되고, 또 버려지거나 살아남아서 또 다른 이론이 만들 어졌지. 그건 엄청난 일이었다네.“ 테레몬은 생각에 잠겨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잔을 들어서 술을 한 잔 더 청했다. 쉬린은 아까워하면서 겨우 몇 알의 루비구슬을 그의 잔에 떨어뜨려 주 었다. “20년 전...” 그는 목을 축인 뒤 계속 이야기했다.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여섯 개 태양의 궤도 운동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는 사실이 발표되었네. 그것은 위대한 승리였지.” 쉬린은 술병을 든 채 일어나서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중요한 시점에 서 있네. 지난 10년간 알파에 대한 라가쉬의 운동은 중력에 의하여 계산되었네. 그런데 계산 결과는 관측 사실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어. 다른 태양들에 의한 섭동까지 모두 고려했는데도 말이네. 법칙이 잘못되었거나 아직까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실이 관련되었거나 둘 중 하 나일세.” 테레몬은 창가로 가서 쉬린과 함께 비탈 너머 지평선 위에 싸로시의 뾰족탑이 핏빛으로 빛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베타를 잠깐 바라보는 동안 신문기자는 의혹 이 점점 더해갔다. 베타는 천정에서 작고 불길한 붉은 빛을 내고 있었다.” “계속 말씀하시지요, 교수님” 테레몬은 부드럽게 말했다. “천문학자들은 여러 해 동안 방황하고 있었네. 그 전보다도 더 불안정한 이 론을 내놓기도 했고 아톤이 컬트교를 끌어들이기 전에는 그랬었다네. 컬트교의 지도자 소르5는 그 문제를 아주 단순화할 수 있는 분명한 자료들을 자기고 있었 지. 아톤은 새로운 방향을 연구를 시작했네.” “만약 라가쉬와 같이 빛을 내지 않는 행성체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 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자네도 알다시피 그것은 반사광에 의한 빛밖에는 내지 못하네. 그리고 만약 그것이 라가쉬의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푸른색 바위로 구 성되어 있다면, 붉은 하늘에서 영원히 빛나는 태양의 밝은 광채가 그 빛을 완전 히 삼켜버려서 보이지 않게 돼버릴걸세.” 테레몬은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별난 이론도 다 있군요.” “별나다고 생각하나? 한번 들어보게. 만약 이 위성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 당한 질량과 궤도를 가지고 라가쉬의 주위를 공전해서, 이 위성의 인력이 라가 쉬의 실제 궤도와 이론적인 예측 사이의 편차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자 네는 어떤 일이 벌어질거라고 생각하나?” 칼럼리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때로 이 위성은 태양의 경로를 가로지를 수도 있겠군요.” 쉬린은 병에 남아 있던 것을 단숨에 비워 버렸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테레몬은 담담하게 말했다. “맞았어! 그러나 단 한 개의 태양만이 공전궤도면에 있다네.” 그는 엄지 손가락으로 하늘에 움츠리듯이 떠 있는 태양을 가리키며 말했다. “베타! 그리고 일식은 태양들의 배열 구조상 베타가 가장 먼 거리에 있으면 서 동시에 혼자서 하늘에 떠 있을 때 일어난다네. 그리고 바로 그때 그 달은 언 제나 최소거리에 와 있지. 달의 시직경이 베타보다 일곱 배나 크기 때문에 일식 은 라가쉬와 전지역에서 하루의 절반 동안 일어나게 되므로 이 행성의 어느 곳 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네. 이런 일식이 2049년마다 한 번씩 일어나는 거야.” 테레몬의 안색이 표정 없는 가면처럼 굳어졌다. “그게 제가 쓸 기사입니까?” 심리학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천문대에 있는 우리들)에겐 두 달의 여유가 있었네. 그리고 그 시간은 라가쉬의 주민들에게 위험을 설득하기에는 불충분한 시간이었네. 그러나 우리의 기록들은 대피소에 있고 오늘 우리는 일식을 촬영하네. 다음 문명 주기는 진리와 함께 시 작할 것이고 다음 일식이 돌아올 때에 인류는 마침내 그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 어 있을 거야. 생각해 보게나. 그것 역시 자네 기사거리의 일부이니까.” 테레몬이 창문을 열고 창틀에 몸을 기대자 가벼운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다. 그가 햇빛에 붉게 물든 그의 손을 내려다보는 동안 바람은 그의 머리카락을 차 갑게 스쳐갔다. 갑자기 그는 돌아서서 반항조로 말했다. “도대체 그 암흑 속에서 저늘 미치게 만드는 건 뭡니까?” 쉬린은 무심하게 빈 술병을 돌리다가 속으로 미소지었다. “젊은이, 자네는 암흑을 경험해 본 적이 있나?” 신문기자는 벽에 기대어 서서 생각했다. “아뇨, 경험해 봤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어떤 것인지는 저도 압 니다. 바로 음...” 테레몬은 손은 비비며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빛이 없는 상태지요. 동굴 속에서처럼.” “동굴 속에 가본 적 있나?” “동굴이라고요? 물론 없습니다.” 심리학자는 눈썹을 찡그리며 젊은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커튼을 닫을 수 있으면 닫아 보세.” 테레몬은 놀라서 말했다. “무엇 때문에요? 태양이 네다섯 개 떠 있을 때라면 빛을 조금 가리는 것이 편안하겠지만 지금은 아시다시피 충분한 양의 햇빛도 없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이라네. 커튼을 치게. 그리고 이리 와서 앉게.” “좋습니다.” 테레몬은 장식술이 달린 끈을 세게 잡아당겼다. 붉은 커튼이 넓은 창문을 가 로질러 미끄러지고 황동으로 만든 고리들이 쇠막대위로 마찰음을 내면서 움직였 다. 그리고 어두운 붉은색 그림자가 방을 뒤덮었다. 탁자를 향해 걸어오는 테레몬의 발소리가 침묵 속에서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반쯤 걸어오다가 멈춰 서서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교수님, 교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길을 더듬어 보게.” 쉬린은 긴장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하지만 교수님이 보이질 않습니다.” 신문기자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아무것도 볼 수 없어요.” 준엄한 대답이 들렸다. “자네가 원하던 건 뭐였나? 이리 와서 앉게!” 발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머뭇거리면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의 자를 더듬어 찾는 소리가 들렸다. 테레몬의 목소리가 갸날프게 들렸다. “여기 왔습니다. 저는 음... 괜찮습니다.” “괜찮지, 안 그래?” “아, 아닙니다. 아주 무서웠습니다. 벽들이 마치...” 그는 말을 멈췄다. “벽들이 제게 다가오는 것 같았습니다. 계속해서 그것들을 밀어 내고 싶었습 니다. 하지만 제가 미치고 있었던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사실 그렇게까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좋아, 커튼을 다시 열게.” 어둠 속에서 조심스런 발소리가 들렸다. 테레몬이 장식술을 더듬어 잡느라 커 튼에 부딪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커튼이 힘차게 주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붉은빛이 방안에 가득 찼다. 테레몬은 기쁨에 넘친 소리를 지르며 태양 을 바라보았다. 쉬린은 손등으로 땀을 닦아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그냥 암실에 지나지 않네.” “참을 만했습니다.” 테레몬은 가볍게 말했다. “그렇지, 암실 정도면. 하지만 자네는 2년 전에 정글러 시 백 주년 기념 박람 회에 간 적이 있지 않나?” “아뇨, 공교롭게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박람회라고는 하지만 6천 마일 이란 여행하기엔 너무 먼 거리였죠.” “나는 거기에 갔었다네. 어쨌든 자네는 시작하자마자 한달 만에 오락에서 전 례없는 기록을 세운 수수께끼의 터널에 대해서는 들어 봤겠지?” “네, 근데 거기서 무슨 소란이라도 있었습니까?” “별건 아니라네. 그건 비밀에 붙여졌지. 자네도 알겠지만 수수께끼의 터널은 그냥 한 1마일 정도의 빛이 없는 터널이었다네. 작은 무게차를 타고 암흑 속을 덜컹대며 15분 동안 달리는 거지. 상당히 인기를 끌었다네.” “인기라고요?” “분명히 그랬어. 그것이 게임의 일부분일 때에는 공포에 질린다는 것도 매력 있는 일이지. 아기들은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인 세가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네. 소음, 추락, 그리고 어둠이지. 이것이 바로 사람들 앞에 갑자기 뛰어가서 <왁>하 고 소리를 지를 때 재미를 느끼는 이유이고, 또 롤러 코스트를 재미있어 하는 이유가 된다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수수께끼의 터널이 돈을 벌기 시작한 이유 이기도 하다네. 사람들은 암흑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숨도 못쉬고 반쯤 죽어서 나오지. 그렇지만 여전히 그들은 거기 참가하기 위해서 돈을 지불했다네.” “잠깐만 기다려 보십시오. 이제 기억이 났습니다. 몇 사람이 죽어서 나왔지 요. 그렇지 않습니까?” 심리학자는 비웃으며 말했다. “흥, 두세 사람이 죽었지. 그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일세! 그들은 죽은 사람의 가족에게 보상을 했고, 정글러 시의회를 설득해서 그 사건을 무마시켰지. 결국 그들은 이렇게 말했네. 심장이 약한 사람이 터널을 통과한다면 그것은 그들 자 신의 책임이라고. 뿐만 아니라 다시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그들은 입 구에 있는 사무소에 의사 한 사람을 배치해 두고 차를 타는 사람은 누구나 의무 적으로 의료 검진을 받도록 했지. 확실히 그것은 더 많은 표가 팔리는 효과를 가져왔다네.” “그리고 나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또 다른 일이 벌어졌다네. 사람들은 완전히 건강한 채로 나왔지만 때로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겼지. 궁 전이나 맨션, 아파트, 공동 주택, 별장, 오두막, 판잣집, 텐트 등 어떤 종류의 집 에도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거야.” 테레몬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럼 그 사람들이 밖에서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잠 은 어디서 자고요?” “밖에서.” “억지로라도 집 안에 들여 놨어야죠.” “아, 그렇게 했지. 그렇게 했어. 그랬더니 그들은 격렬한 광기에 빠져서 벽에 자기 머리를 찧으려고 날뛰는 거야. 집 안으로 일단 들여 놓고 나면 구속복을 입히고 몰핀 주사를 놓지 않고는 가만히 있게 할 수가 없었다네.” “그들은 미쳤던게 틀림없습니다.” “분명히 그랬네. 터널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중 열 명에 한 명이 그런 꼴로 나왔다네. 그들은 심리학장게 불려갔는데, 우리는 가능한 단 한 가지 방법을 실 행에 옮겼어. 박람회문을 닫는 것이었지.” 쉬린은 두 손을 펼쳤다. “그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마지막으로 테레몬이 물었다. “그들은 불행히도 암흑 속에서 자신들을 덮친 밀실 공포를 극복할 만한 정신 적 탄력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지. 암흑 속의 15분이란 긴 시간이라네. 자 네는 기껏해야 2,3분 정도 있었는데도 내가 보기엔 상당히 당황했었어. 터널에서 나온 사람들은 소위 밀실 공포의 고착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네. 암흑과 폐쇄 공간에 대한 그들의 잠재적 공포가 결정화되고 심해져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영원히 계속된다네. 이것이 바로 어둠 속의 15분이 할 수 있는 일이지.” 긴 침묵이 흐른 후, 테레몬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는 그것이 그렇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걸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자네의 진심은 믿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쉬린은 닦아세우듯이 말했다. “자네는 믿는 것이 두려운 거야. 창 밖을 보게!” 테레몬은 그렇게 했다. 심리학자는 쉬지 않고 계속 말했다. “암흑을 상상해 보게. 모든 곳에서. 자네가 볼 수 있는 한 어디에도 빛은 없 네. 집, 나무, 들, 땅, 하늘 모든 것이 검은색이네! 그리고 별이 나타난다네. 내가 아는 한 그것이 무엇이건간에. 이해가 가나?” “네, 이해가 갑니다.” 테레몬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쉬린은 갑자기 화가 나서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거짓말이야! 자네는 이해할 수 없어! 자네의 두뇌는 무한이나 영원과 같은 개념 이상의 어떤 개념에도 적합하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어. 자네는 단지 그것 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지. 사실의 일부분조차 자네를 당혹하게 만들 수 있네. 그리고 사실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에 자네의 두뇌는 이해 범위의 바깥에 서 일어나는 현상에 직면하게 되는 걸세. 자네는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미쳐버 릴 거야! 의심할 바 없이.” 쉬린은 슬픈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2천 년에 걸친 또 하나의 고통스런 투쟁이 어무로 막을 내리는 거 야. 내일이면라가쉬의 어디에도 멀쩡하게 서 있는 도시는 하나도 없을걸세.” 테레몬은 다소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말했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아직도 하늘에 해가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 로 제가 미치게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설사 제가 그렇게 되 고, 모든 사람들이 다 미치광이가 된들 어떻게 도시를 파괴하겠습니까? 우리는 광기를 가라앉힐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쉬린은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만약 자네가 암흑 속에 있게 되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자네가 원하게 될 것이 뭔지 아나? 자네의 모든 본능이 요구하게 될 게 뭔지 아느냔 말일세. 그건 빛이야. 제기랄, 빛이라구!” “그런데요?” 쉬린은 말했다. “선생, 당신은 뭔가를 불태우게 될 거란 말일세. 산불을 본 일이 있나? 캠핑 가서 나무로 스튜 요리를 해본 적 있나? 자네도 알겠지만 나무에 불을 붙였을 때 얻을 수 있는 건 열만이 아니란 말일세. 거기서는 빛도 나오네. 그리고 사람 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어두워지면 사람들은 빛을 원하게 되고 그들은 그것 을 얻으려고 할 거야.” “그래서 나무를 불태웁니까?” “그들은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뭐든지 태우게 되네. 그들은 빛을 얻으려고 하지. 뭔가를 태워야겠는데 나무는 손쉽게 얻어지지 않네. 그래서 그들은 가까운 데에 있는 것은 뭐든지 태울 거야. 그들은 빛을 얻게 되고 거주 지역의 중심부 는 어디든지 화염에 휩싸이게 되네!” 테레몬은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거친 숨소리 때문에 닫힌 문 뒤의 바로 옆방에서 들여오는 갑작스런 소동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쉬린은 자기 말이 사실처럼 들리도록 애쓰면서 말했다. “이모트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네. 그와 파로가 돌아온 것 같으니 가서 어떻 게 왔는지 보도록 하세.” “그게 좋겠습니다.” 테레몬은 주얼거렸다. 그는 긴 한숨을 쉬고 몸을 한 번 떨었다.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 방에서는 연구원들이 외출복을 벗고 있는 두 사람에게 몰려들어 법석을 떨 고 있었다. 그들은 쏟아지는 질문들을 대충 얼버무리고 있었다. 아톤은 부산을 떨며 사람들 을 헤치고 들어가서 새로온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화를 내며 말했다. “자네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30분도 안 남았다는 것을 알고나 있나? 도대체 어디에 있었나?” 파로24는 앉아서 손바닥을 비볐다. 그의 뺨은 밖의 냉기 때문에 상기되어 있 었다. “이모트와 저는 조금 정신나간 것처럼 보이는 실험을 방금 마쳤습니다. 저희 는 암흑과 별에 대해서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 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상황 을 직접 만들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했지요.” 듣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혼란스런 웅성거림이 지나갔다. 그리고 아톤의 눈이 갑자기 관심의 빛을 보였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게 됐지?” 파로는 말했다. “이모트와 저는 오래 전부터 그 생각을 하고 있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 씩 일을 했습니다. 이모트는 도시 안에 둥근 지붕이 있는 낮은 일층집을 하나 알고 있는데, 그것은 제 생각에는 한때 박물관으로 쓰였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그곳으로 가서 가능한 한 완전한 암흑으로 만들기 위하여 검은색 벨벳으로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덮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천장과 지붕에 몇 개의 작 은 구멍을 뚫고 조그만 금속 뚜껑으로 덮고 나서, 한 번의 스위치 조작으로 뚜 껑들이 모두 한꺼번에 열릴 수 있도록 장치했습니다. 적어도 그 부분만은 저희 가 직접 하지 않았습니다. 목수와 전기 기사, 그리고 몇 명의 인부를 고용했지 요.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요점을 지붕에 있는 그 구멍들을 통해 우리가 빛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별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가 하는 것이었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이 뒤따랐다. 아톤은 급히 말했다. “자네들은 개인적인 실험을 할 권리가...” 파로는 겸연쩍어하는 듯이 보였다.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모트와 저는 이 실험이 다 소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 효과가 실제로 나타난다면 쉬린이 이 모 든 것에 대해 이야기했던 내용으로 볼 때 저희들이 미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고 그런 위험은 스스로 감당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대답한 사람은 이모트였다. “저희는 들어가서 문을 닫고 어둠에 눈이 익숙해 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것은 극도로 오싹한 느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암흑 속에서는 마치 천 장과 벽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 느 낌을 이겨내고 스위치를 올렸습니다. 금속 뚜껑들이 열리고 지붕은 조그만 빛의 점들로 가득차서 반짝였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실험의 이상한 부분이었습 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건 구멍 뚫린 지붕이었고 실제로 그렇 게 보였습니다. 저희은 실험을 계속해서 되풀이했습니다. 그게 저희가 늦은 이유 입니다. 여전히 아무런 효과도 볼 수 없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듯 침묵이 뒤따랐다. 그리고 모든 눈이 쉬린에게로 향했는데 그 는 꼼짝 않고 입을 벌린 채 앉아 있었다. 테레몬이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쉬린 교수님은 이 실험 결과가 당신이 세운 이론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 고 계시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테레몬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웃었다. 그러나 쉬린이 손을 들며 말했다. “잠시 기다리게. 내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게 해주게.” 그리고 나서 그는 손가락으로 깍지를 끼고 있었다. 그가 머리를 들었을 때 그 의 눈에는 놀라움도 의혹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는 말을 마칠 수가 없었다. 어딘가 위쪽에서 날카롭게 <쨍그랑>하는 소리 가 들렸다. 그리고 비니가 계단을 달려 올라가면서 말했다. “도대체 뭐야?” 나머지 사람들도 그를 따랐다. 사건은 급작스럽게 일어났다. 돔에 올라가자마자 비는 사진건판들이 산산히 부숴져 있고 한 사람이 그것을 보고 있는 무서운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침입자 에게 사납게 몸을 날려 그의 목을 죽어라고 잡았다. 거친 격투가 벌어졌다. 다른 연구원들이 합세하자 침입자는 6명의 성난 사람들에게 짓눌려 헉헉거리며 숨을 내뿜고 있었다. 아톤은 마지막으로 올라와서 무거운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를 일으키게!” 그들은 마지못해 떨어졌다. 침입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옷이 찢어지고 이 마에는 머이 든 채 끌려 일어섰다. 그는 컬트교의 영향을 받은 듯 정성들여 꼰 짧은 노란색 턱수염을 가지고 있었다. 비니는 그의 손을 목깃으로 옮겨서 움켜 쥐고 거칠게 흔들며 말했다. “좋아, 이 도둑놈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했어? 이 건판들은...” 컬트교도는 차갑게 반박했다. “난 그 뒤에 있지 않았어! 그건 사고였어.” 비니는 강렬한 눈빛으로 으르렁거렸다. “알았어. 너는 카메라 바로 뒤에 있었지. 그렇다면 사진 건판에 사고가 난 건 너를 위해선 요행이었다. 만약 네놈이 스내핑 베르타나 그 외에 하나라도 더 건 드렸다면 너를 서서히 고문해서 죽여버렸을 거야. 이렇게...” 그는 주먹을 뒤로 뺐다. 아톤이 그의 소매를 잡았다. “멈춰! 그를 놔줘.” 젊은 기술자는 망설이다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팔을 내렸다. 아톤은 그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컬트교도 앞에 섰다. “자네 이름은 라티머지, 그렇지 않나?” 컬트교도는 딱딱하게 절은 하고는 자기 엉덩이에 있는 기호를 가리켰다. “저는 라티머25, 쏘르5전하의 3급 부관입니다.” 아톤은 흰 눈썹을 위로 치켜뜨며 말했다. “그리고 자네는 내가 지난주에 전하를 찾아 뵈었을 때에 함께 있었지, 그렇 지 않나?” 라티머는 다시 한번 절을 했다. 쉬린은 친절한 태도로 미소지으며 말했다. “자네는 단호한 저주꾼이군, 그렇지? 내가 증명해 줄 것이 있네. 자네는 저 젊은이를 창문에서 봤겠지? 그는 힘세고 거친 친구일세. 주먹도 잘 쓰고, 게다가 문외한이기 때문에 일식이 시작된 후에 그가 할 일이라곤 자네를 감시하는 일 외에는 없네. 그의 옆에는 내가 있을걸세. 격렬한 주먹다짐을 하기에는 조금 뚱 뚱한 편이지만 아직도 도울 수는 있다네.” 쉬린은 칼럼리스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에 가서 앉게, 테레몬. 그냥 형식적으로 말이네. 이봐, 테레몬!” 그러나 신문기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입술까지 창백해져 있었다. 하늘을 가리키는 그의 손가락은 떨고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건조하게 갈라져 있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을 돌린 순간 얼어붙은 듯이 모든 숨소리가 멈추 었다. 베타의 한쪽 가장자리가 잘려 나가고 없었던 것이다! 검게 변한 부분은 손톱 두께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그것 은 운명의 신호로 확대되어 보였다. 그들은 아주 잠깐 동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고 혼란스런 상황은 그보다 더 짧았다. 각자는 미리 정해진 자기 위치로 재 빠르게 움직였다. 그 중요한 순간에 감정에 휩쓸릴 여유는 없었다. 그들은 단순 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과학자일 뿐이었다. 아톤조차 감정이 가라앉았다. 쉬린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첫번째 접촉은 15분 전에 일어난 것이 틀림없어. 조금 빠르긴 하지만 계산 오차를 고려한다면 아주 정확하네.” 쉬린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아직도 창 밖을 응시하고 있는 테레몬에게 발끝으 로 다가가서 그를 살짝 끌어당겼다. “아톤은 화가 나 있다네.” 쉬린이 속삭였다. “그러니 가까이 가지 말게. 아톤은 라티머 때문에 벌어진 소동으로 최초의 접촉 순간을 놓쳐 버렸다네. 그러니 만약 자네가 그를 방해하면 자네를 창문 밖 으로 집어 던져 버릴걸세.” 테레몬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앉았다. 쉬린은 그를 바라보고는 놀라면 서 말했다. “이런 제기랄, 자네는 떨고 있군.” “네?” 테레몬은 마른 입술을 적시며 웃으려고 노력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뿐입니다. 사실입니다.” 심리학자의 눈빛이 굳어졌다. “기가 죽은 거 아닌가?” “아뇨!” 테레몬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제게 기회를 좀 주시겠습니까? 저는 사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이런 황당 무계한 이야기는 믿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 적을할 수 있게 시간을 좀 주십시 오. 교수님은 두 달, 아니 그 이상 준비해 오신던 일 아닙니까?” “그건 자네가 옳아.” 쉬린은 생각에 잠겨서 대답했다. “교수님께서는 제가 지나치게 겁에 질려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좋 습니다. 제 이야기를 좀 들어 보십시오. 저는 신문기자로서 어떤 이야기를 보도 할 임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자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알겠네. 직업적인 자세. 바로 그거지?”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교수님, 저는 지금 당신이 마시던 그 술의 절반짜리 크기라도 좋으니 술 한 병만 준다면 제 오른팔이라도 잘라 주 고 싶은 심정입니다.누군가에게 술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접니다.” 테레몬은 말을 멈췄다. 쉬린이 갑자기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저 소리가 들리나? 들어 보게.” 테레몬은 그가 턱 끝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컬트교도를 보았다. 그는 주 위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채 창문을 향해 의기 양양한 얼굴을 하고 노래부르듯이 단조롭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칼럼리스트는 속삭였다. “그는 지금 묵시록 제5장을 인용하고 있는 거라네.” 쉬린은 대답하고는 다급히 말했다. “제발 잠자코 들어 보게.” 컬트교도의 목소리가 갑자기 열정적으로 높아졌다. “그리고 그때에 태양 베타는 그 공전중의 가장 긴 시간 동안 하늘의 외로운 파수꾼이 되었도다. 그 공전 시간의 절반 동안 그것은 홀로 차가운 빛을 라가쉬 의 머리 위에 뿌렸도다. 그리고 정오에 트리곤의 도시에서 벤드렛2가 나타나서 트리곤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 너희 죄인들이여! 그대들이 정의의 길을 멸 시하였으나 심판의 날은 올 것이니라. 이제 곧 동굴이 라가쉬와 라가쉬에 속한 모든 것을 삼키러 오리라.>그리고 그가 말하고 있는 동안에조차 캄캄한 동굴의 혓바닥은 베타의 가장자리를 지나, 라가쉬의 어디에서도 베타를 볼 수 없었도다. 베타가 사라지자 인간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영혼의 두려움이 그들을 엄 습하였도다. 동굴의 암흑이 라가쉬를 덮치자 땅 위에서는 한줌의 빛도 찾을 수 없었도다. 인간은 장님과 같이 되었으며 이웃의 숨결이 얼굴에 느껴지는데도 그 를 볼 수는 없었도다. 바야흐로 어둠 속에서 수많은 별들이 나타났도다. 그리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가락이 흘러나와 나뭇잎들조차 혀로 변하여 기적을 노래하 였도다. 바로 그때 인간의 영혼은 그 몸을 떠났고 버려진 인간의 육체는 야수와 같이 되어 버렸도다. 캄캄한 라가쉬의 도시 위를 그들은 야수의 소리를 지르며 헤매고 다녔도다. 그때 별로부터 하늘의 불길이 쏟아져 내려와 그것이 닿은 라 가쉬의 모든 도시는 불꽃 속에서 완전히 파괴되어 인간과 인간이 만든 모든 것 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도다. 그때에도...” 라티머의 어조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지만 어쩐 지 자기에게 열중하고 있는 두 사람의 존재를 알아 차린 것 같았다. 숨쉬기 위 해 멈추지도 않은 채 그의 목소리 음색은 순조롭게 변했으며 음절은 더욱 유창 해졌다. 테레몬은 놀라움에 사로잡혀 바라보았다. 그 단어들은 그가 익숙한 말과는 거 리가 좀 있는 것 같았다. 강세에 미묘한 변화가 있었고 모음의 억양에도 약간의 변화가 보였다. 그뿐이었다. 그런데도 라티머의 이야기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쉬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고대어로 말을 바꾼 것이라네. 아미 그들의 용어로는 제2차 주기의 언어일 거야. 자네도 알겠지만 묵시록은 원래 그 언어로 씌여졌지.” “상관없습니다. 들을 건 다 들었으니까요.” 테레몬은 그의 의자를 옮기고 이제는 떨리지 않는 손으로 머리를 뒤로 빗어넘 겼다. “이젠 기분이 훨씬 나아졌습니다.” “그래?” 쉬린은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신경과민이었나 봅니다. 교수님의 이야기와 중력에 관해 듣고, 일식이 시작되는 것을 직접 보고 하는 바 람에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테레몬은 엄지손가락으로 노란 턱수염을 기른 컬트교도를 경멸적으로 가리키 며 말했다. “이런 이야기는 제 유모가 제게 말하곤 하던 이야기들입니다. 저는 언제나 이런 이야기는 웃어 넘겨 왔습니다. 이제 그런 이야기에 놀라지는 않을 겁니다. ” 그는 깊은 숨을 한 번 쉬고 나서 매우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저는 제 자신의 좋은 면만 간직하고 싶습니다. 창문에서 의자를 멀 리 띄워 놓겠습니다.” 그는 주의깊에 창문에서 의자를 돌려 놓고는 어깨 너머를 불쾌하다는 듯 한 번 쳐다보고 말했다. “저는 이 <별의 광기>에 상당한 면역성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듭 니다.” 심리학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베타는 천정을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 에 창문의 모양을 비추고 있던 핏빛 사각형은 이제 쉬린의 무릎까지 올라와 있 었다. 그른 생가에 잠겨서 그 음침한 빛을 보고 있다가 허리를 굽힌 다음 눈을 가늘게 뜨고 태양 그 자체를 바라보았다. 한쪽 가장자리의 작은 조각이었던 것 이 이제는 베타의 3분의 1정도를 침범하고 있었다. 그는 전율했다. 그가 다시 허리를 폈을 때 그의 혈색 좋던 뺨에서는 원 래의 빛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거의 변명하듯이 웃으면서 그도 역시 의자를 뒤로 돌렸다. “싸로 시에 사는 약 2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 한 번의 거대한 사건으로 즉시 컬트교에 가입하려고 하고 있네.” 그리고 나서 그는 비꼬는 듯한 투로 덧붙였다. “컬트교는 한 시간 동안 전례없는 부흥을 이루게 될 것이네. 그들은 그 순간 을 최대한 이용할 것이 틀림없네. 그런데 자네가 하던 이야기는 뭐였지?” “그건 바로 이런 것이빈다. 어떻게 컬트교도들은 여러 문명 주기에 걸쳐서 묵시록을 보존ㅎ하고 관리해 올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도대체 그 책은 처음에 어떻게 씌어질 수 있었을까요? 어떤 종류의 면역성이 존재해 왔음이 틀림없습니 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미치광이가 되었다면 누가 남아서 그 책을 썼겠습니까? ” “자연스럽게, 최초에 그 책은 역사학자로서의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들, 즉 어린아이나 저능아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씌어 졌다네. 그리고 아마 여러 문명 주기에 걸쳐 광범위하게 재편집되었을걸세.” 테레몬이 끼어 들었다. “그럼 교수님은, 우리가 중력의 비밀을 다음 주기로 전달하려고 하는 바로 그 방법을 이용해서 그들이 그 책을 전해 오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쉬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마도. 하지만 정확한 방법이 무엇이었나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네. 내가 주목하는 점은 그 책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록 사실에 근거했 다 하더라도 오히려 왜곡된 내용이라는 점이네. 예를 들자면, 파로와 이모트가 지붕에 구멍을 뚫고 했던 실험이 그 예지. 아무 효과가 없었던 그 실험 말일세. ” “네?” “자네는 왜 그 실험이 효과가 없었는지 알고...” 그는 말은 멈추고 놀라면서 일어났다. 아톤이 놀라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아톤은 그를 한쪽으로 끌고 갔다. 쉬린은 그의 팔꿈치를 잡고 있는 아톤의 손 가락이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큰소리로 말하지 말게.” 아톤의 낮은 목소리는 불안에 떨고 있었다. “방금 비밀회선을 통해 대피소로부터 연락을 받았네.” 쉬린은 말을 가로채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들에게 문제가 있나?” “그들이 아닐세.” 아톤은 그들이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말했다. “그들은 조금 전 대피소를 폐쇄시켰네. 모레까지는 거기 묻혀진 채로 있게 될걸세. 그들은 안전해. 그러나 쉬린, 도시가... 도시는 지금 수라장이네. 자네는 몰라...” 그는 말하기 힘든 것 같았다. “뭐라고?” 쉬린은 조급하게 말했다. “그게 어째ㅎ단 말인가? 도시 상황은 점점 나빠질걸세. 도대체 뭘 걱정하고 있는 건가?” 그리고 나서 그는 의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자네 지금 기분은 어떤가?” 아톤은 그의 암시에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가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돌 아와서 말했다. “자네는 이해 못 하네. 컬트교도들은 활동적이야.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함께 천문대로 몰려오고 있다네. 그들은 약속을 하지. 지금 즉시 은총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들은 뭐든지 약속한다네. 쉬린, 어떻게 하면 좋지?” “도박을 해보는 수밖에 없지. 위험할 만큼 많은 수의 폭도들을 조직하려면 시간이 걸릴걸세. 그들을 여기까지 끌고 오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테고. 우리는 도시에서 5마일은 족히 떨어져있네.” 그는 창밖을 응시했다. 비탈길 아래 경작지가 끝나고 교외의 하얀 집들이 모 여 있는 곳을 지나, 꺼져 가는 베타의 광채 속에 안개처럼 보이는 지평선 위로 대도시 그 자체가 희미하게 보이는 곳까지 바라보았다. 그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시간이 걸릴걸세. 계속 일하게, 그리고 개기식이 먼저 오기를 기도하게나.” 베타는 절반이 잘려 나가서, 나누는 선이 태양의 아직도 밝은면 쪽으로 약간 들어간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 세계를 비추는 빛 위에서 비스듬 하게 감고 있는 거대한 눈썹처럼 보였다. 방에서 희미하게 딸깍거리던 소리들도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지금 그는 오직 창 밖 들판의 무거운 침묵만 느끼고 있었 다. 곤충들조차 놀라서 침묵해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모든 사물이 희미해졌다. 그는 귓전에서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테레몬이 말했다.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 “응? 아, 아니야. 의자로 가서 앉게. 우리는 잘해 나가고 있어.” 그들은 자기들이 있던 구석 쪽으로 미끄러져 갔다. 그러나 심리학자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목깃을 풀고 목을 앞뒤로 흔들어 보았지만 기분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자네, 숨쉬기가 힘들지 않나?” 신문기자는 눈을 크게 뜨고 두세 번 큰숨을 쉬었다. “아뇨, 왜 그러십니까?” “나는 아마 창 밖을 너무 오래 보고 있었나 보네. 어둠에 취해 버렸어. 폐쇄 공포증의 맨 첫번째 증세 중의 하나가 바로 호흡 곤란이라네.” 테레몬은 다시 한번 큰숨을 내쉬었다. “아직 저는 괜찮습니다. 저기 또 한 사람 오는군요.” 비니는 구석에 있는 두 사람 앞에서 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쉬린은 걱정스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천문학자는 체중을 다른 발로 옮기면서 힘없이 웃었다. “잠시 앉아서 대화에 참가해도 괜찮겠지요? 제 카메라는 설치가 끝났고 개기 식까지는 할 일이 없습니다.” 비니는 말을 멈추고 컬트교도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15분 전부터 소매에서 작은 가죽표지의 책을 꺼내서 줄곧 그 책만 열심히 보고 있었다. “저 녀석이 무슨 말썽을 부리지는 않았습니까?” 쉬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어깨를 뒤로 젖히고 규칙적으로 숨을 쉬려고 노 력하느라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숨쉬는 데 지장을 느끼지 않나, 비니?” 비니는 돌아서면서 코로 숨을 들이쉬었다. “전 별로 거북하지 않은데요?” “폐소공포증이라네.” 쉬린은 변명하듯 설명했다. “오오! 그 증세는 내겐 조금 다르게 나타났네. 마치 내 눈이 뒤로 당겨지는 듯한 느낌이야. 사룸이 흐릿하게 보이고..., 글쎄 아무것도 분명히 보이질 않네. 그리고 추워.” “네, 춥습니다. 맞아요. 그건 착각이 아닙니다.” 테레몬은 얼굴을 찡그렸다. “저는 마치 발가락을 냉동차에 싣고 온 나라를 가로질러 운반하는 듯한 느낌 입니다.” 쉬린은 말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리의 마음을 바깥일에 모두 빼앗기는 걸세. 테레몬, 나는 조금 전 자네에게 지붕에 구멍을 뚫고 했던 파로의 실험이 왜 아무 결과 없이 끝났는지를 말하고 있었네.” “교수님은 말씀을 꺼내기만 하셨습니다.” 테레몬은 대답했다. 그는 두 팔로 무릎을 감싸안고 뺨을 비비고 있었다. “맞아, 말을 꺼내기만 했었지. 그들은 묵시록을 씌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저질렀다네. 그 책에는 아마 별들에 대해 아무런 과학적인 의미도 부여되지 않 았을걸세. 자네도 알다시피 완전한 암흑 속에서 인간의 마음은 빛을 만드는 것 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네. 빛에 대한 이런한 환상 때문에 별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게 되는 것이지. 다른 말로 하면.” 테레몬이 말을 가로챘다. “별은 광기의 결과이지 그 원인이 아니란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비니의 사 진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아는 한,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 또는 그 반대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서 필요하지. 그리고 다시...” 그러나 그때 비니가 의자를 가까이 당겨 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갑작스럽게 열정이 떠올랐다. “두 분께서 이런 이야기를 화제로 삼고 계시는 것을 보니 즐겁습니다.” 비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을 쳐들었다. “저는 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가 정말로 근사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그건 물거품 같은 개념이지요. 저는 그런 개념을 진지하게 발전시킬 생각 같은 건 없습니다만 재미는 있을 겁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반쯤은 마지 못해 하는 듯이, 쉬린은 뒤로 기대며 말했다. “계속하게, 듣고 있네.” “좋습니다. 그럼, 우주에 또 다른 태양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비니는 수줍어하면서 잠시 말을 멈췄다. “제 얘기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기에는 너무 어두 운 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제가 공상소설을 읽고 있는 것처럼 들릴 것 같습니다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네. 물론 그 태양들이 중력법칙에 따라 서로의 인력에 이끌려서 결국 눈에 보이게 될 것이라는 가능성은 배제되어 있네만.” 비니가 대답했다. “그 태양들이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다면이 아니라, 정말로 멀리(4광년 또는 그 이상)떨어져 있다면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섭동을 측정할 수 없을 겁니다. 섭동의 크기가 너무 작기 때문이죠. 그 정도로 먼 거리에 많은 별들, 12개나 또 는 24개 정도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테레몬은 노래부르듯이 휘파람을 불었다. “훌륭한 일요일 숙제로군. 우주 속에서 8광년 떨어진 거리에 있는 12개의 태 양이라, 우와! 그건 아마 우리 우주를 짜부라뜨려서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릴 걸? 독자들은 그 책을 먹어 버릴 거야.” “생각일 뿐입니다.” 비니는 씩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요점을 이해하고 계십니다. 일식이 진행중인 동안 이 12개의 태양은 눈에 보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가릴 진짜 태양이 없어져 버렸 기 때문이죠.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마치 조그만 공기돌처럼 자게 보이게 됩니다. 물론 컬트교도들은 수백만 개의 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만 그건 아마 과장일 겁니다. 우주에는 백만 개의 태양이 있을 공간이 없습니다. 있 다면 서로 들러붙어 버리겠죠.” 쉬린은 점점 관심을 더해 가며 듣도 있었다. “비니, 자네는 뭔가 중요한 것을 알아 낸 것 같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 나 하는 것에 대해서는 과장이 정답인 것 같네. 우리의 마음은, 자네도 알겠지 만, 5이상 되는 숫자는 직접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네. 그 이상의 숫자에 대해서 는 <많다>라는 개념만이 존재하지. 12는 백만이 될 수도 있다네. 정말 훌륭한 생각이야.” “그리고 저는 또 다른 작은 개념 하나를 생각해 봤습니다.” 비니는 말했다. “충분히 단순한 중력계에서 인력이 얼마나 쉬운 문제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 으십니까? 이 우주에 단지 한 개의 태양만 가지는 행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행성은 완벽한 타원궤도를 그릴 것이고 중력이 너무나 정확하게 작용하기 때문 에 하나의 공리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세계의 천문학자 들은 망원경이 발견되기도 전에 벌써 중력에 대해 알고 있을 겁니다. 맨눈으로 만 관측해도 충분하지요.” “매우 훌륭한 생각이야.” 쉬린은 비니의 가정을 받아들였다. “이상기체나 절대영도 같은 순수한 이상으로는.” “물론,” 비니는 계속해서 얘기했다. “그런 행성에는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열과 빛이 충 분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그 행성이 자전한다면 하루의 절반은 완전히 캄캄해 져 버립니다. 그런 환경에서 생명체의 발생(그것은 근본적으로 빛에 의존하기 때 문에)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쉬린이 갑자기 뛰어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주루륵 밀려 나갔다. “아톤이 빛을 가지고 왔다네.” 비니는 <허!>하고 말하며 돌아보고 나서 입이 찢어질 정도로 웃었다. 아톤은 팔에 길이가 한 자 정도 되고 굵기가 3센티 정도 되는 막대기들을 들고 서서 연 구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종교 의식에 사용되는 가장 신성한 물건을 수행하는 분위기로 쉬린은 크고 거 친 성냥개비 하나를 탁탁 튀는 소리를 내는 생명체로 만들어서 아톤에게 넘겨 주었고, 아톤은 그 불꽃을 막대기의 한쪽 끝으로 옮겼다. 그것은 잠시 동안 꼭대기 근처에서 변변찮게 타고 있다가 갑자기 타닥 소리를 내며 섬광을 일으켜 아톤의 주름진 얼굴을 노랗게 비췄다. 그가 성냥을 던지자 동시에 환호 소리가 일어나고 창문이 부르르 떨렸다. 막대기 끝에서는 활활 타 오른 불꽃이 흔들리고 있었다. 같은 방법으로 다른 막대기에도 불이 붙어서 여 섯 개의 독립된 불이 방의 뒤쪽을 노란빛으로 물들였다. 그 빛은 어두웠다. 희박한 태양보다더 더 어두웠다. 불꽃은 미친듯이 비틀거려 서 그림자를 술에 취한 듯이 흔들리게 만들었다. 횃불에서는 지독하게 연기가 많이 났고 마치 부엌에서 뭔가를 태우는 것 같은 냄새가 났다. 그러나 횃불들은 노란빛을 내뿜고 있었다. 베타의 음침하고 어두운 빛과 함께 네 시간을 보낸 뒤 여서인지 그 노란빛 속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라티머조차 책에서 눈 을 떼고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테레몬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횃 불을 주시했다. 그는 코를 벌름거리며 고약한 냄새를 맡고 나서 말했다. “이건 뭘로 만든 겁니까?” “나무라네.” 쉬린은 짧게 대답했다. “오, 아닙니다. 나무가 아닌데요? 나무가 타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꼭대기 3센티는 숯으로 되어 있고, 불꽃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모르겠군요.” “그것이 바로 이 물건의 멋있는 점이라네. 이것은 정말 효율적인 인공 광원 이야. 우리는 이런 것을 한 2, 3백 개 정도 만들었는데 물론 대부분은 대피소에 갖다 뒀지. 보게나.” 쉬린은 돌아서서 검게 더럽혀진 손을 손수건에 닦고 말했다. “갈대의 심을 뽑아서 완전히 말린 다음 동물 수지에 적신다네. 그 다음에 불 을 붙이면 기름이 조금씩 타들어가지. 이 횃불은 거의 30분 동안 쉬지 않고 탄 다네. 교묘하지, 안 그런가? 우리 싸로대학교의 젊은 친구 하나가 개발한 작품이 라네.” 어쨌든 분위기는 점점 무거워져 갔다. 황혼은 마치 뚜렷한 실체처럼 방 안으 로 들어와서 횃불 주위에서 춤추는 노란빛의 원을 주위에 엄습하는 회색빛 속에 뚜렷하게 새겨 놓았다. 연기에서 나는 악취와 횃불이 탈 때 나는 탁탁거리는 작은 소리, 탁자 주위를 조심스럽게 발끝으로 다니면서 일하는 어떤 사람의 부드러운 발끌림 소리, 가끔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세계 속에서 냉정을 잃지 않으려고 누군가가 숨을 들이쉬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한 소음을 가장 먼저 들은 것은 테레몬이었다. 그것은 공허하고 아무 체 계도 없는 듯한 소리였는데, 돔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죽음의 침묵이 아니었다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 같았다. 신문기자는 똑바로 앉아서 수첩을 바로잡 았다. 테레몬은 숨을 멈추고 듣고 있다가 마지못해 일어나 태양망원경과 비니의 카메라 사이로 가서 창문 앞에 섰다. 베타는 이제 연기내며 타는 한낱 파편이 되어 그 마지막 절망적인 모습을 보 이고 있었다. 도시쪽의 동쪽 지평선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싸로에서 천 문대로 오는 , 양쪽 가장자리에 나무를 심어 놓은 도로는 흐릿한 붉은색으로 보 였는데 거기 서 있는 나무들은 하나 하나를 알아볼 수 없게 뭉쳐서 연속된 그림 자 덩어리로 보였다. 그러나 주위를 끈 것은 도로 그 자체였다. 도로를 따라 한없이 많은 군중의 그림자가 물결치고 있었다. 이톤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도시의 미친 군중들! 그들이 왔어!” “개기식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쉬린이 물었다. “15분. 그러나... 그러나 그들은 5분이면 이곳에 도착한다네.” “괜찮아, 사람들보고 계속 일하라고 하게. 그들은 막을 수 있네. 이곳은 요새 처럼 지은 곳이라네. 아톤, 우리의 젊은 컬트교도를 감시하며 행운이나 빌고 있 게. 테레몬, 나와 함께 가세.” 쉬린은 문 밖에 섰고 테레몬은 그의 뒤꿈치에 서 있었다. 그들 발아래 계단은 건물의 주기둥 둘레를 둥글게 휘감고 내려가서 그 끝은 습기차고 음산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처음 한순간 그들은 15미터 정도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그러자 돔의 열린 문 에서 어둡게 깜빡거리며 비치던 노란빛이 사라져 버리고 위아래 모두 음침한 그 림자가 그들을 덮쳐 왔다. 쉬린은 멈춰서서 짧고 두터운 손으로 가슴을 꽉 잡았다. 그는 툭 튀어나온 눈 을 하고 마른 기침 소리를 내며 말했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네... 자네 혼자... 가게... 문을 모두 닫아.” 테레몬은 몇 발자국 더 내려가다가 돌아섰다. “기다려요! 한 1분만 참으실 수 없겠습니까?” 테레몬은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그의 폐를 드나드는 공기는 마치 같은 양의 당밀이 드나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로 발밑에 있는 불가사의한 어둠 속으로 내려간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공포에 질려 날카로운 비명을 지를 것 같 았다. 테레몬도 결국 어둠이 두려웠던 것이다. “여기 계십시오. 곧 돌아오겠습니다.” 테레몬은 한 번에 두 계단씩 밟으며 위로 뛰어 올라갔다. 단지 빨리 돌아가려 는 노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심장이 미칠 듯이 고동쳤다. 그는 돔으로 구르듯이 뛰어 들어가서 횃불을 벽걸이에서 낚아챘다. 횃불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났고 연 기 때문에 눈이 쓰려서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마치 기뻐서 키스라도 할 듯이 횃불을 움켜쥐었다. 그가 다시 계단을 돌진해 내려가자 횃불이 뒤로 길 게 늘어졌다. 테레몬이 내려다보자 쉬린은 눈을 뜨고 신음하고 있었다. 테레몬은 그를 거칠 게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당황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겐 빛이 있습니다.” 그는 발 옆에 횃불을 세우고 버둥대는 심리학자를 팔로 받치고 나서 안전한 빛의 원 한가운데에 그의 머리를 내려놓았다. 1층에 있는 사무실들은 아직 빛이 있을 때와 같은 상태였다. 테레몬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공포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 있습니다.” 그는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횃불을 쉬린에게 건네 주었다. “밖에서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들을 수 있었다. 떠들썩한 소음의 파편들과 무언의 외침을. 역시 쉬린이 옳았다. 천문대는 마치 요새처럼 지어져 있었다. 지난 세기에 신 가보티안 양식의 건축이 전성기를 맞고 있을 즈음 건축되었기 때문에 미적인 면 보다는 안정성과 지속성에 더 치중하여 설계된 건물이었다. 창문은 콘크리트 창턱에 깊이 박혀 있는 두꺼운 강철 창살로 보호되어 있었 다. 벽은 단단한 돌로 되어 있었는데 지진에도 끄떡없을 것 같았고 정문은 전략 적인 면을 고려하여 강철로 강화된 거대한 참나무판으로 되어 있었다. 테레몬이 빗장을 지르자 둔탁하게 덜커덩 소리를 내며 닫혔다. 회랑의 반대편 끝에서 쉬린이 욕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여왔다. 그는 솜씨좋 게 쇠지레로 뒤집어 놓아서 쓸모없게 되어 버린 뒷문의 자물쇠를 가리키고 있었 다. “라티머가 들어올 때 이렇게 해놓은 것이 틀림없어.” 쉬린이 말했다. “자, 거기 서계시지 마십시오.” 테레몬은 조급하게 소리질렀다. “가구들을 끌어내는 거나 도와주십시오. 제 눈앞에서 횃불 좀 치워 주시겠습 니까? 연기 때문에 죽겠습니다.” 테레몬은 두꺼운 탁자를 문에 쾅 하고 밀어붙였다. 그리고 몇분이 지나자 그 는 미와 조화가 결여된, 단지 그 무게의 관성에 따라 만들어진 장벽을 하나 설 치해 놓았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맨주먹으로 뭄을 맹렬히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밖에서 들리는 비명과 고함 소리도 반쯤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폭도들은 싸로 시를 떠날 때 두 가지 생각만을 마음에 담고 출발했다. 그것은 천문대를 파괴함으로써 컬트교의 구원을 얻는다는 것과 그들은 거의 마비시켜 버린 미칠 듯한 공포였다. 자동차나 무기, 지도자나 조직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그들은 천문대까지 걸어와서 맨손으로 공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했을 때, 베타의 마지막 빛, 불꽃의 마지막 루비빛 붉은 방 울이 이제 삭막한, 전세계적인 공포만이 남은 인류의 머리 위에서 미약하게 깜 박이고 있었다! 테레몬은 신음 소리를 냈다. “돔으로 돌아갑시다!” 돔에서는 이모트만이 태양망원경 앞의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머지는 카메라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비니가 쉰 목소리로 떠들썩하게 지시를 내리고 있 었다. “기억하십시오. 절대... 절대 좋은 사진을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두, 두 개의 별을 동시에 카메라 시야 속에 넣느라고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하나면 충 분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만약 자기가 미칠 것 같은 조짐이 보이면 카메라에서 멀리 도망가십시오.” 문에서 쉬린은 케레몬에게 속삭였다. “아톤에게 데려다 주게. 나는 그를 볼 수가 없다네.” 신문기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천문학자들의 공허한 모습이 흐릿하게 흔들거렸다. 머리 위에 있는 횃불은 마치 노란 얼룩처럼 보였다. “너무 어둡습니다.” 테레몬은 울먹이듯이 말했다. 쉬린은 손을 내밀었다. “아톤.” 쉬린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아톤!” 테레몬은 뒤따라가서 그의 팔을 잡았다. “잠깐,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는 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어둠에 대해 눈을 감고 암흑속에 있을 혼란 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닫았다. 아무도 그들의 소리를 듣지도, 주의를 기 울이지도 않았다. 쉬린은 벽을 향하여 비틀거리며 다가섰다. “아톤!” 심리학자는 떨리는 손 하나가 자기를 치더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것을 느꼈다. “쉬린, 자넨가?” “아톤!” 그는 숨을 고르게 가누려고 애쓰며 말했다. “폭도들은 걱정하지 말게. 이곳은 그들을 막아 줄걸세.” 베타의 마지막 햇빛을 바라보는 비니의 얼굴이 희미하게 빛났다. 카메라 위에 허리를 굽히고 있는 비니를 보던 라티머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자기 몸을 긴장 시키는 동안 손톱으로 자기 손바닥의 살점을 뜯어내고 있었다.」 그는 뛰기 시작하면서 미친 듯이 비틀거렸다. 그의 앞에는 그림자밖에 없었다. 그의 발밑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를 덮쳐서 바닥에 넘어 뜨린 후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라티머는 무릎을 굽히고 공격자를 강하게 걷어 찼다. “일으켜 주지 않으면 죽여 버릴 테다.” 테레몬은 날카롭게 고함을 지르고는 고통스런 오리무중의 어둠속에서 낮게 으 르렁거렸다. “이 배신자 녀석!” 신문기자는 모든 것을 단숨에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는 비니가 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잡았습니다, 카메라로. 여러분!” 그러자 모두들 마지막 횃불이 엷어지다가 마침내 사라져 버렸다는 기이한 느 낌을 받았다. 라티머의 손에서 힘이 풀리면서 축 늘어졌다. 테레몬은 컬크교도의 눈을 들여 다보았다. 위를 쳐다보는 검은 동자 속에서 횃불의 반짝이는 노란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라티머의 입술 사이에서 거품방울이 끓어 오르고 그의 목에서 동물적인 흐느낌 소리가 나고 있었다. 서서히 두려움에 질려서 그는 한쪽 팔을 짚고 일어나 창 밖으로, 피도 얼어붙 을 것 같은 암흑으로 눈을 돌렸다. 창문을 통하여 별이 빛나고 있었다! 지구에서 맨눈으로 볼 수 있는 360개의 반짝이는 별들이 아니었다. 라가쉬는 거대한 성단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것이다. 3만 개의 강력한 태양이 지금 전세계 를 휩쓸고 있는 모진 바람보다 더욱 무섭게 차가운 무관심으로 영혼조차 태원 버릴 듯한 광채를 내리비추고 있었다. 우주의 찬란한 벽이 산산히 부숴져 무서 운 검은 파편들이 인간을 짓밟고, 압박하고, 말살하기 위하여 무너져 내리고 있 었다. “빛이다!” 테레몬은 비명을 질렀다. 어딘가에서 아톤이 마치 놀란 아이처럼 떨며 울부짖고 있었다. “별... 모두 별이야... 우린 전혀 모르고 있었어. 우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우리는 이 우주에서 여섯 개의 별이 전부 다인 줄 알았고 암흑이 영원히, 영원히, 영원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저 별이 갑자기 나타났어. 우리는 몰랐어, 우 리는 알 수가 없었어. 아무것도...” 누군가 횃불을 집어던져서 꺼버렸다. 바로 그 순간 별의 무서운 광채는 그들 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섰다. 싸로 시 쪽으로 난 창 밖의 지평선 위로 심홍색의 빛이 점점 밝게 커지고 있 었다. 그것은 태양빛이 아닌 두려움에 떠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불빛이었다. 전설의 밤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위대한 문학가 지은이: 아이작 아시모프 「아, 물론이지.」 피니스 웰치 박사가 말했다. 「역사상의 유명한 위인들 영혼도 불러올 수 있지.」 박사가 좀 취해 있지만 않았어도 이런 얘기는 처음부터 꺼내지 않았을 것이 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가볍게 취하는 것은 누구나 너그럽게 봐줄 만한 일이 어서 박사도 긴장이 풀렸던 모양이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는 젊은 교수 스콧 로버트슨은 안경을 고쳐 쓰고 대 화를 듣는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입니까, 웰치 박사님?」 「아, 물론이지.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불러오는걸.」 「그런 일은 아주 불가능한 줄로 알았는데요.」 로버트슨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불가능할 것까지야 없지. 단순한 일시적 이동일 뿐인데 뭐.」 「그러니까, 시간 여행을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은 아주... 음... 신 기한 일이군요.」 「원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지.」 「어떤 원리입니니까, 박사님?」 「내가 가르쳐 줄 것 같나?」 물리학자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는 마실 것을 찾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 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박사는 얘기를 계속했다. 「꽤 많은 사람들을 현대로 데리고 와보았지. 아르키메데스, 뉴턴, 갈릴레이. 다들 불쌍한 양반들이야.」 「그 사람들이 현대를 좋아하지 않았나요? 제 생각엔 그들이 현대 문명과 발 달된 과학기술에 몹시 놀랐을 것 같은데요.」 로버트슨은 늙은 과학자와의 이상한 대화에 점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그야 그랬지. 물론 그랬고말고. 특히 아르키메데스의 경우는 볼 만했지. 내가 끙끙거리며 간신히 그리스 말로 몇 가지를 설명해 주었더니 얼마나 좋아하 는지, 난 그가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내 참...」 「왜요?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결국 문화의 차이가 문제더군. 다들 현재의 생활 방식에 도무지 적응하지 못하는 거야. 잔뜩 겁을 집어 먹은 채 외로움과 향수병에 시달리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어. 그래서 원래 그들이 살던 시대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지. 」 「그것 참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렇지. 다들 위대한 지성으로 떠받들지만 그 지성이 유연하지 못한 게 흠 이더군. 그래서 세익스피어를 한번 데려와 봤지.」 「뭐라구요?」 로버트슨은 소리를 꽥 질렀다. 영문학 강사인 그가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허, 소리지르지 말아, 이 사람아. 사람 놀라게스리.」 「세익스피어를 현대로 데리고 왔단 말씀입니까?」 「그랬다네. 넓고 유연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데려와 보고 싶었지. 그 사람의 글이나 생각이 몇 세기에 걸쳐 두고두고 애독되는, 그 정도로 인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그런 위인 말이야. 세익스피어야말로 그런 위인이지. 그의 서명도 받 았다네. 물론 기념삼아 해달라고 한 것이지만.」 「세익스피어가 박사님에게 서명을요?」 로버트슨이 눈을 껌벅거렸다. 「여기 가지고 왔네.」 웰치 박사는 주머니를 하나씩 뒤졌다. 「아, 여기 있군.」 박사는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앞쪽에는 이라고 씌어 있었고, 그 뒷면에 라는 글이 휘갈겨져 있었다. 로버트슨은 흥분하여 묻기 시작했다. 「세익스피어는 어떻게 생겼던가요?」 「글쎄, 초상화와는 별로 안 닮았더군. 대머리에다 턱수염이 수북하게 났지. 목소리는 아주 걸걸하고 말야. 물론 나는 세익스피어가 우리 시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도움은 다 주었어. 현대 사람들도 당신의 희곡들을 변함없이 좋아하며 아직도 극장에서 자주 상연된다고 말해 주었네. 또 당신의 작품들은 영문학 사상 최대의 걸작들로 평가되며 심지어는 전세계의 문학을 통틀어 가장 빼어난 작품들로 여겨지기도 한다는 얘기를 했네.」 「그렇죠, 그렇죠. 정말 잘하셨어요.」 로버트슨의 숨이 가빠졌다. 「이제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희곡에 대해서 연구 논문이나 평론을 썼 다고 말했지. 그랬더니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 글을 보고 싶어 하길래 도서관에 서 하나 구해다 주었어.」 「그랬더니요?」 「몹시 흥미로워하더군. 현대 영어에서 사용하는 관용구나 1600년대 이후에 나온 책들의 인용 때문에 고생하긴 했지만 내가 도와준 덕분에 끝까지 읽었지. 그런데 그 뒤의 모습은 보기에 정말 안됐어. 불쌍한 양반이야. 그런 대접을 받으 리라곤 상상도 못 했나봐. 계속 이렇게 중얼거리는 거야. <어허 맙소사. 5백 년 동안 이처럼 내 글을 난도질할 수가 있나? 멋대로 왜곡 한 것 투성이로군!>」 「그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단 말입니까?」 「정말일세. 그는 희곡들을 가능한 빨리 써야 했다더군. 스스로 말하기를 원고 마감 시간에 쫓겼다는 거야. <햄릿>도 6개월 만에 탈고한 것이라고 했네. 하긴 그런 이야기 설정은 예로부터 내려오던 고전적인 구성이고, 그는 단지 그 소재 를 멋지게 재구성해서 반짝반짝 광을 낸 것뿐이지 않나.」 「광을 내다니요? 광을 내는 건 망원경 거울 따위지.」 영어 강사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웰치 박사는 그러나 로버트슨의 말을 무시한 채, 바에 가서 새 칵테일 잔을 집어들고 왔다. 「난 그 위대한 시인에게 세익스피어에 관한 대학 강의도 있다고 말해 주었 지.」 「저도 하나 맡고 있지요.」 「알고 있네. 내가 세익스피어를 자네 강의에 등록시켜 주었으니까. 그 동안 꽤 여러 사람들을 현대로 데려와 보았지만, 후손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네. 세익스피어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더구먼.」 「윌리엄 세익스피어가 내 강의를 들었다구요?」 로버트슨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는 술에 취하여 환상을 보는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술에 취해서 잘못 들었나? 그러나 로버트슨은 이상 한 말투를 구사하던 대머리 남자를 기억해 냈다. 「물론 본명으로 등록시키진 않았지.」 웰치 박사는 얘기를 계속했다. 「무슨 이름이었는지 생각하려고 애쓰지는 말게나. 애초에 등록시켰던 것이 실수였으니 말일세. 큰 실수였지. 불쌍한 양반.」 웰치 박사는 칵텍일을 쭉 들이키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뭐가 실수였다는 거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를 1600년대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네.」 웰치 박사는 어쩐지 책망하는 듯한 어조로 얘기했다. 「자네는 사람이 모욕감을 견딜 수 있는 한도가 어느 정도까지라고 생각하나? 」 「모욕이라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웰치 박사는 칵테일을 단숨에 들이켰다. 「이 바보 같은 친구야! 바로 자네가 세익스피어에게 F학점을 주었어!」 잃어버린 즐거움 지은이: 아이작 아시모프 마기는 그 일을 그날 밤 일기에 쓰기로 했다. 2157년 5월 17일이라 적힌 쪽 위에. 마기는 이렇 게 썼다. 「오늘 토미가 진짜<책>을 찾아냈다.」 그것은 매우 낡은 책이었다. 마기의 할아버지는 언젠가 말씀하셨다. <내가 어렸을 때 말이다, 우리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옛날에는 모든 이야기가 종이에 인쇄되 어 있고 그걸 책이라 부르면서 읽었다고 하시더구나.」 두 아이는 누렇게 퇴색되어 부스럭거리는 책장을 넘겨 보았다. 화면에서처럼 움직이는 글자들 만 보다가, 가만히 정지해 있는 단어들을 읽는 것은 정말 재미있었다. 게다가 아까 보았던 곳으로 다시 책장을 넘겨 보면, 처음에 보았던 단어들이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토미가 말했다. 「에이, 무슨 낭비람. 책을 다 읽게 되면, 아마 던져 버리고 말거야. 우리 텔레비젼 화면엔 백만 권의 책이 들어 있잖아. 양으로 보면 그게 훨씬 더 많지. 버리지도 않을 거구.」 「내 생각도 그래.」 마기가 말했다. 마기는 11살이었으며, 토미만큼 많은 전송책을 읽지는 못했다. 토미는 13살이었다. 마기가 말했다. 「어디서 그걸 찾아냈니?」 「집에서.」 토미는 고개를 들지 않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책읽기에 열중해 있는 것이다. 「다락에서.」 「무슨 얘기가 있는데?」 「학교.」 마기는 경멸조가 되었다. 「학교? 학교에 대해 뭐 쓸게 있나? 난 학교가 싫어.」 마기는 원래 학교를 싫어했지만, 지금은 전보다 더 싫어하고 있었다. 로봇 선생에게 치른 지리 학 시험 성적이 갈수록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비통하게 마기의 머리를 잡고 흔들더니, 지 역 장학사에게 데리고 갔다. 장학사는 붉은 얼굴에 키가 작고 통통한 사람이었는데, 다이얼과 전 선이 뒤엉킨ㅈ 연장 상자를 갖고 있었다. 그는 웃으면서 마기에게 사과를 준 다음, 로봇 선생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마기는 그가 다시 조립하는 방법을 모르기를 바랐지만, 한 시간쯤 후에 그 크 고 검은, 지긋지긋한 화면이 켜지더니, 그 동안 배운 것들과 문제들이 흘러나왔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마기가 가장 싫어하는 데는, 숙제와 시험 친 답안지를 집어 넣는 홈이었다. 마기는 언제 나 그것들을 천공 부호-여설 살 때 배운-로 바꿔 써넣어야 했고, 그러면 로봇 선생은 순식간에 채점을 끝내고 점수를 매겼다. 장학사는 일을 마치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마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마기의 엄마에게 얘 기했다. 「아이의 잘못이 아닙니다, 존슨 부인. 지리학 회로 부분이 좀 어렵게 조절되어 있는 것 같군 요. 가끔 이런 일이 생깁니다. 10살짜리 아이의 평균 수준에 맞게 재조정해 놓았습니다. 사실 이 아이의 전반적인 발전도는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마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기는 실망했다. 로봇 선생을 아주 가져가 버리기를 바랐는데. 언젠가 토미의 선생은, 역사학 부분이 완전히 지워져 버리는 바람에 약 한달간 집을 떠나 있었다. 그래서 마기는 토미에게 물었다. 「왜 학교에 대한 얘기를 써놨을까?」 토미가 거만한 눈으로 마기를 쳐다보았다. 「우리들의 학교와는 다른 종류이기 때문이야, 바보. 백 년도 더 전의 오래된 학교 얘기야.」 토미는 으스대는 듯 의식적으로 말했다. 「1세기 전의.」 마기는 기분이 나빴다. 「아아, 그래! 난 그런 옛날의 학교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구.」 마기는 잠시 토미의 어깨 너머로 책을 읽어 보고는 말했다. 「어쨌거나, 그때도 선생은 있었구나.」 「그랬지. 하지만 그땐 정상적인 선생이었어. 사람이 했다니까.」 「사람이? 사람이 어떻게 선생이 될 수 있지?」 「응, 그 선생은 아이들에게 배울 것을 얘기해 주고 숙제와 시험을 냈지.」 「사람은 그렇게 많이 알지 못하잖아.」 「아냐. 우리 아버지는 선생만큼 많이 알아.」 「그럴 수 없어. 사람은 선생만큼 많이 알 수가 없어.」 「내기해도 좋아. 우리 아버지는 아는 게 많아.」 마기는 그 논쟁에서 이길 자신이 서질 않았다. 「난 낯선 사람이 날 가르치러 우리 집에 오는 건 싫어.」 토미는 소리치며 웃었다. 「아직 잘 모르는구나, 마기. 선생들은 집에서 살지 않아. 그들은 특별한 건물을 갖고 잇고, 아 이들이 배우러 거기에 가는 거야.」 「그러면 모든 얘들이 다 똑같은 걸 배운단 말야?」 「그럼, 같은 나이라면.」 「그렇지만 우리 엄마는 아이들마다 제각각의 특성에 맞게 선생이 조정되어야 하고, 또 가르치 는 것도 다 달라야 된다고 하셨어.」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야. 그게 싫다면, 그 책을 읽을 필요가 없지.」 「난 그게 싫다고는 안 했어.」 마기는 재빨리 말했다. 마기는 그 재미있는 학교에 대한 얘기를 좀더 읽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이 책을 채 반도 읽기 전에, 마기의 엄마가 불렀다. 「마기야! 학교!」 마기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이요, 엄마.」 「시간이 됐어.」 존스 부인이 말했다. 「그리고 토미도 시간이 되었지, 아마.」 마기가 토미에게 말했다. 「학교 끝난 후에 좀더 읽을 수 있을까?」 「어쩌면.」 토미가 무심하게 얘기했다. 그는 먼지투성이 낡은 책을 옆구리에 낀 채, 휘파람을 불며 가버렸 다. 마기는 공부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침실 옆에 있었으며, 로봇선생이 불을 켠 채 기다리고 있 었다. 선생은 토요일, 일요일을 제외하곤 언제나 같은 시간에 불이 들어왔으며, 그것은 여자아이 는 항상 규칙적인 시간에 공부해야 더 효과가 있다는 엄마의 소신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화면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산수 공부는 진분수의 덧셈입니다. 먼저 어제 내준 숙제를 알맞은 홈에 넣어 주세요. 」 마기는 한숨을 쉬며 시키는 대로 했다. 마기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다녔다는, 그 옛날의 학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웃의 모든 아이들이 함께 가서, 학교 운동장에서 같이 웃 고 떠들며 논다. 또 교실에 모두들 같이 앉아 배우고, 일과가 끝나면 함께 집으로 간다. 그들은 똑같은 것을 배우기에, 숙제도 같이 토론하여 서로 도와서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선생님들도 사람이고... 로봇 선생이 화면에서 번쩍거렸다. 「분수 2과 4을 더할 때에는...」 마기는 그 옛날 아이들이, 얼마나 학교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이 누 렸던 즐거움을 생각하고 있었다. 쿠겔마스 씨의 에피소드 지은이: 우디 앨런 쿠겔마스는 시립대학의 인문학 교수이다. 그는 두번째 결혼을 했는데도 행복하지 못했다. 그의 아내 데픈 쿠겔마스가 얼간이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첫째 부인인 플로와의 사이에 멍청한 아 들이 둘 있는데, 그 생계비와 아이들의 양육비까지 부담해야 했다. 어느날 그는 그의 정신과 담당의사에게 넋두리를 했다. 「일이 이렇게 꼬일 줄 내가 알기나 했겠습니까? 데픈은 확실히 괜찮은 여자였어요. 그 여자가 비치볼처럼 뚱뚱해져서 혼자 걷기도 힘들어지리라고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나와 결혼하기 전에는 데픈을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여럿 있었어요. 그것이 결혼할 만한 적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지만, 하여튼 그 여자는 건강하고 매력있는 여자였어요. 제 심정이 이해되세요, 의사 선생님?」 쿠겔마스는 대머리에다 털보였지만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계속 하소연을 했다. 「나는 새로운 여자를 만나서 연애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외도를 해서는 안 되겠지 만 좌우간 나는 로맨스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내게는 달콤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젊어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베니스에 가 사랑에 빠져 보기도 하고 재치 있는 익살로 마 음껏 웃어도 보고 싶습니다. 은은한 촛불 아래 붉은 와인을 놓고 수줍은 사랑의 눈길을 주고받는 연애를 하고 싶단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의사 만델은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연애를 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너무 비현실적입니 다. 문제가 더 심각해질 겁니다.」 쿠겔마스가 맞받았다. 「오히려 연애를 하는 것이 신중한 행동입니다. 나는 이제 두 번 이혼할 경제적인 여력이 없습 니다. 데픈과 이혼하게 되면 난 알거지가 될 겁니다.」 「쿠겔마스 씨...」 「이혼한다면 시립대학에 있을 수도 없습니다. 데픈도 같은 대학에 있으니까요. 뉴욕 시립대학 의 교수들이야 말로 별로 문제될 것이 없지만, 남녀 공학인 그 학교의 어떤 이들은...」 「그렇지만 쿠겔마스 씨...」 「제발 저 좀 도와주십시오. 어젯밤에도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소풍 바구니를 손에 들고 풀밭 을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그 바구니에는 <선택의 자유>라고 씌여 있었어요. 그리고 나서 다시 보 니 바구니에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쿠겔마스 씨, 당신의 그 행동은 최악의 사태를 나타냅니다. 여기 이 자리에서 당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우리 두 사람이 그것을 함께 분석해야 합니다. 당신에게는 하룻밤에 나을 수 잇는 치료법이 없다는 것이 오랫동안 당신을 치료하면서 내리게 된 결론이오. 다시 말해 나는 정신과 의사지 마술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게 필요한 사람은 아마 마술사겠군요.」 쿠겔마스는 이렇게 말하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더 이상 치료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2주일 후 어느 날 밤, 쿠겔마스와 그의 아내 데픈은 두 개의 낡은 기계처럼 그들의 아파트를 청소하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쿠겔마스가 받았다. 「여보세요?」 「쿠겔마스 씨 되십니까? 나는 퍼스키라고 합니다.」 「누구시라고요?」 「퍼스키, 아니 위대한 마법사 퍼스키라고 해야 할 것 같군요.」 「네? 실례지만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내가 듣기로는 당신이 좀 색다른 삶을 살고 싶어서 마술사를 찾아 온 시내를 돌아다닌다는데 그 말이 맞습니까? 아니면...」 「쉿, 전화를 끊지 마시오, 퍼스키 씨. 전화를 걸고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다음날 이른 오후, 쿠겔마스는 브루클린의 부시워크 거리의 낡아빠진 아파트 3층 계단을 오르 고 있었다. 어두운 복도를 더듬어 그가 찾던 문을 발견하고는 초인종을 눌렀다. 여기 온 것을 후 회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그는 혼자 생각했다. 잠시 후 작고 깡마른 사람이 나왔다. 그의 표정은 밀납처럼 창백했다. 쿠겔마스가 물었다. 「당신이 위대한 마법사 퍼스키입니까?」 「그렇소, 내가 위대한 마법사 퍼스키요. 차 한잔 들겠소?」 「아니, 됐습니다. 그것보다 나는 로맨스를 원합니다. 그리고 음악도. 사랑과 아름다움을 만끽하 고 싶단 말입니다.」 「차는 필요없다? 재미있군. 좋소, 앉으시오.」 퍼시키는 뒷방으로 갔다. 상자와 가구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퍼스키는 삐걱 거리는 롤러 스케이트 바퀴가 달린 커다란 물건을 밀고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는 그 위에 덮인 낡은 실크 손수건을 벗기더니 입으로 먼지를 훅 불었다. 그것은 중국풍의 싸구려 상자였는데 옻 칠이 여기저기 벗겨져 있었다. 쿠겔마스가 물었다. 「퍼스키 씨, 당신의 속임수는 어떤 것입니까?」 퍼스키가 대답했다. 「주의를 집중하시오. 이것은 놀라운 물건이오. 나는 작년 <기사피티어스(그리스 전설 속의 인 물)의 날>에 이것을 만들었는데 신청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소. 자, 이 상자 안으로 들어가시오. 」 「왜요? 내가 이 안으로 들어간 다음에 칼 같은 것으로 마구 찌르려고 그러는 것 아닙니까?」 「칼이라니! 이곳에서 칼을 본 적이 있소?」 쿠겔마스는 얼굴을 찌푸린 채 상자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자기 얼굴 바로 앞에 놓인 베니어 판에 박혀 있는 조잡한 인조 다이아몬드 한 쌍을 쳐다보았다. 그가 투덜댔다. 「이거 아무래도 장난 같은데...」 「바로 그거요, 장난. 그게 바로 포인트요. 내가 당신과 함께 어떤 소설을 이 상자 안에 집어 넣고 문을 닫은 후 상자를 툭툭 세번 치면, 당신은 그 책 속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요.」 쿠겔마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퍼스키가 말을 이었다. 「내 손은 하느님께 닿아 있소. 소설뿐만 아니라 짧은 이야기나 희곡, 시 같은 것도 가능합니 다. 당신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가들이 만들어 낸 어떤 여인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꿈 꾸는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마치 정복자처럼 당신은 원하는 모든 것을 영위할 수 있소. 당신이 환희에 차 큰소리로 외친다면 나는 눈깜박할 사이에 당신을 이곳으로 되돌아오게 할 것이오.」 「퍼스키 씨, 당신 혹시 어디 아픈 것은 아닙니까?」 「나는 진심으로 당신에게 말하는 것이오.」 쿠겔마스는 여전히 의혹이 가시지 않았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집에서 두드려 만들 싸구려 상자가 방금 당신이 묘 사한 여행을 시켜 준다는 것입니까?」 「그렇소, 단 20달러에.」 쿠겔마스는 지갑을 꺼내면서 말했다. 「이 물건을 봤으니까 믿도록 하겠습니다.」 퍼스키는 지페를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고 책꽂이 쪽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자, 당신은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시스터 캐리? 헤스터 프린네? 오필이아? 솔 벨로우가 만들어 낸 여자? 드레이크 신전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어떻소? 비록 당신 정도 나이의 남자라 할 지라도 그 여자는 쉽게 응할 것입니다.」 「프랑스인, 나는 프랑스인 애인과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니나?」 「그런 여자를 위해 돈을 쓰고 싶지는 않아요.」 「<전쟁과 평화>의 나타샤는 어떤지?」 「나는 분명히 프랑스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엠마 보바리도 가능합니까? 그 여자는 나의 이상형 입니다.」 「물론, 가능합니다. 쿠겔마스 씨, 당신이 만족하게 될 때 나에게 크게 소리치시오.」 퍼스키는 플로베르의 소설 복사판을 던져 주었다. 퍼스키가 문을 닫으려 할 때 쿠겔마스는 물었다. 「확실히 안전한 겁니까?」 「안전합니다. 하지만 요새같이 미친 세상에 완전히 안전한 게 어디 있겠소?」 퍼스키는 그러면서 문을 닫고는 세 번 톡톡 두드렸다. 쿠겔마스는 사라졌다. 그리고는 욘빌에 위치한 샤를과 엠마 보바리의 저택 침실에 나타났다. 그의 앞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그 여자는 그에게 등을 보인 채 혼자 시트 같은 것들 을 접고 있었다. 쿠겔마스는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그 의사(샤를)의 부인을 보면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거기에 있 었고 엠마 또한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엠마가 놀라 돌아서면서 말했다. 「어머나, 놀래라. 당신은 누구세요?」 엠마는 영어로 번역된 소설책처럼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쿠겔마스는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얼마 후 여자가 말을 건 상대가 자신임을 깨닫고 쿠겔 마스가 대답했다. 「실례합니다. 나는 시드니 쿠겔마스란 사람입니다. 맨해튼 북쪽에 있는 뉴욕 시립대학의 인문 학과 교수입니다.」 엠마 보바리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뭘 좀 마시겠어요? 와인 어때요?」 쿠겔마스는 엠마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와 침대를 함께 써온 그 유인원 같은 데픈과 어떻 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는 갑자기 이 아름다운 여자를 품에 안고 엠마가 자신이 꿈꾸던 이상 향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는 목이 약간 잠겨 말했다. 「네, 와인 좋습니다. 적포도주는 말고 백포도주로 주십시오.」 「샤를은 일 때문에 밖에 나가고 없어요.」 엠마의 목소리엔 어떤 암시가 배어 있었다. 와인을 마신 후, 두 사람은 아름다운 시골 마을을 산책했다. 「나는 어떤 신비한 이방인이 나타나 나를 이 시골 생활의 단조로움으로부터 구출해 주기를 늘 갈망해 왔답니다.」 엠마가 쿠겔마스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한 조그만 교회를 지나칠 때에는 또 이렇게 나직히 속삭였다.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이 정말 맘에 들어요. 이 근처에서는 이런 옷을 본 적이 없어요. 너무 나... 음... 너무나 현대적이에요.」 쿠겔마스는 애정 어린 어조로 말을 받았다. 「이것은 레져복이라는 것입니다. 할인 판매 때 샀죠.」 그러면서 갑작스럽게 쿠겔마스는 엠마에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나무 아래 기 대고 앉아 밀어를 속삭였다. 한 시간 동안이나 눈빛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깊은 의가 있는 것들 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쿠겔마스가 벌떡 일어섰다. 부루딩데일에서 데픈과 만나기로 한 것이 생각난 것이다. 그가 말했다. 「난 돌아가야 하오. 그러나 염려 말아요. 곧 돌아올 테니까.」 그는 엠마를 정열적으로 껴안았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엠마의 집으로 돌아왔다. 쿠겔마스는 엠마의 볼을 손으로 감싸며 다시 키스했다. 그리고 외쳤다. 「이제 됐소, 퍼스키 씨. 나는 3시 30분까지 부루밍데일에 가야 합니다.」 그러자 <펑>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쿠겔마스는 부루클린으로 되돌아왔다. 「그래, 내가 거짓말을 했소?」 퍼스키가 의기 양양하게 물었다. 곧이어 쿠겔마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수난의 시대 지은이: 로만 포들니 서기 2074년 어느 화창한 봄날, 그 남자와 그 여자는 열대지방의 삼림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곳은 지구상에 몇 안 남은 자연보호지구였는데, 그들은 어디든 지 단번에 날아갈 수 있는 작은 비행기를 타고 와서 야자나무 그늘 아래에 세워 놓곤 수풀 사이 벤치에 다정하게 앉아 있었다. 바람조차도 잔잔해서 그들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 백 킬로 안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이 입술이 막 여자의 입술로 가려는 찰라, 뭔가 쉬익 하는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알지 못할 어떤 힘이 두 사람 사이 를 갈라놓았다. 그리고는 난데없이 키작은 텁석부리 노인이 벤치 위에 나타났다. 낯선 이방인은 즉각 상황을 깨닫고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런, 용서하시오.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었소...」 그리고는 곧 본래의 침착한 태도로 돌아와서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과거에서 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면 당연히 나의 실례를 용서하게 될...」 그러나 그 노인은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젊은 남자가 한숨을 푹 쉬며 이렇 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이구 미치겠네. 또 나타났어!」 그리고는 여자에게 말했다. 「이봐, 맹세하건데 나와는 절대로 상관없는 일이야.」 「나도 알고 있어요.」 여자도 냉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낯선 방문자가 항변했다. 「그렇지만 이것들 봐요! 나는 과거에서 시간여행을 왔는데, 왜 환영하지 않는 거요?」 젊은 남자는 이런 경우에 대답하는 일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환영 인사는 처음 한두 번이면 충분해요. 할아버지는 6백만 번째가 넘었다 구요!」 「무슨 소릴, 나는 미래로 시간 여해을 할 수 있는 장치를 발명해서 이제 첫 번째로 테스트한 것인데!」 「네에, 축하합니다. 할아버지.」 남자는 건성으로 얘기를 계속했다.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어릴 때 학교에서 배웠어요. 그런데 할아버지보다 나중에 출발해서 할아버지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무지무지 많아요. 정말이 에요. 아아, 너무 놀라지 마시고 제 얘기를 들어 보세요.」 맥이 탁 풀려 있던 젊은 남자의 얼굴이 활기를 띠었다. 「왜 과거에서 날아오는 사람들은 하필이면 이렇게 부적당한 장소에, 부적당 한 순간에 나타나는지 모르겠어요. 확률의 법칙이란게 뭔지 반물질세계는 또 무 슨 상관이 있는 건지...<세계학술원>에서도 도무지 설명을 못 하니 원... 뭔가 다 른 해결 방법은 없는 걸까?」 여자도 뽀로통한 목소리로 한마디 거들었다. 「제가 남자한테 사랑의 고백을 들으려는 순간에 산통이 깨긴 것만 네번째라 구요, 이게.」 「아아 저런, 정말 미안하게 됐군. 근데 젊은이, 만약 학교에서 나에 대해서 배웠다면 말이지, 타임 머신이 사람만 보내고 기계는 그냥 그 자리에서 머물러 있는다는 사실도 알겠군. 그냥 사람만 미래로 보내는 거야. 얼마나 앞선 미래로 보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과 공간의 성질이란 게 아직 모르는 게 많아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여행하는지, 언제 어디에 나타나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다 네...」 위대한 발명가는 어느덧 연구실에서 강의하는 교수의 태도로 변해 있었다. 「저도 알고 있어요.」 젊은이는 이미 흥을 잃은 듯했다. 「음... 이보게, 나는 어떻게 될까? 아마 지금 시대에는 다시 과거로 여행하는 기계도 만드는 데 성공했겠지? 난 집으로 돌아가고 싶네.」 「휴우, 그런게 있다면야 좋게요. 이제까지 과거에서 날아온 6백만 명의 사람 들이 한결같이 그러더군요. 미래를 흘낏 봤으니까 이제 다시 과거로 돌아가겠다 고. 정말로 돌아갔으면 왜 그렇게 많이 왔겠어요? 모두들 그랬어요. 자기 친척과 친구들이 있는 과거로 돌아가려고 무척 애를 태웠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8 년 전에 처음으로 과거에서 온 사람이 나타난 다음, 세계학술원에서는 4처만 명 의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을 동원해서 다시 과거로 가는 방법을 연구했어요. 사실 그중에 몇몇은 애초부터 반대했는데, 인과율의 법칙이란 걸 깰 수는 없기 때문 에 과거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구 그러더라구요. 그렇지만 원래 인간 들은 자연의 법칙이란 걸 주물러 왔잖아요? 아무튼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너든 이란 위대한 과학자가 한 가지 제안을 했어요. 과거에서 온 사람들을 다시 미래 로 보내자구요. 그러면 미래에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장치가 만들어졌을 테 니까 그들도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죠. 그래서 그 동안 4백만 명 정도가 다시 미래로 날아갔어요. 근데 그 즈음 어떤 시인이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과 거로 돌아가는 여행이 가능해졌다면, 왜 미래에서 온 사람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는가?>그 바람에 모든 연구가 그냥 중단되었지요. 그리고 과거에서 온 사람들 을 다시 미래로 보내는 일도 중지했어요. 결국 우리가 맡아야 할 문제들을 미래 사람들에게 떠넘긴 꼴이 됐지만.」 「무슨 문제들을 말인가?」 「무슨 문제들이야구요? 4백만 명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고 갖가지 질병을 치 료해 주고 이 시대에 적응해 살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이게 어디 보통 문젠가 요?」 위대한 과학자 너든은 연단에 서서 만족스런 눈초리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제가 여러분들께 기쁜 소식을 한 가지 알려드리겠습니다. 계산에 따르면, 6 백 2만 4천 5백 3십 3번째 사람이 방금 1974년으로부터 백 년을 날아와 현재인 2074년에 도착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시 미래로 보낸 사람들은 앞으로 백 년이 지나야 나타나므로 우리는 그 동안 준비할 시간을 버는 겁니다...」 너든이 서 있는 연단이 갑자기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황당한 표 정을 짓고 있는 젊은이가 너든의 옆에 나타났다. 「아니, 자네는 니콜라이가 아닌가!」 위대한 과학자는 놀라서 헐떡거렸다. 「자네는 8년 전에 과거로부터 처음 나타난 사람이었잖나? 그래서 우리는 자 네를 다시 미래로 보냈는데...」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침통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네, 근데 그게 날아 온 백 년 만큼만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어서...」 산책하는 사람 지은이: 레이 브래드버리 어둠이 완전히 내리깔린 11월의 저녁. 도시의 침묵에 둘러싸인 채 울퉁불퉁한 콘크리트 보도 위로 걸음을 내딛는다.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보도 블록의 이음새 사이로 난 잡초들을 밟으며 침묵 속의 어둠을 걸어가는 것. 레오나드 미 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교차로에 다다르면 걸음을 멈추고 달빛에 드러난 네 갈래 길을 돌아본다. 어느 길로 갈까. 그렇지만 어느 방향을 선택하더라도 별 다른 차이는 없다, 서기 2131년에 거의 혼자나 다름없이 고독한 삶을 사는 그가 어느 방향으로 길을 가든. 마침내 갈 방향을 정하고 나면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담배 연기처럼 주위를 감싸고 있는 어스름 안개를 밀쳐 가며. 이따금 그는 몇 시간 동안이나 밤산책을 즐기곤 했다. 몇 마일씩 걷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자정이 다 되었다. 산책길에서 그는 불꺼진 창들이 촘촘히 박 힌 상자 같은 집들을 본다. 다닥다닥 붙은 소규모 주택들 사이로 걷노라면 마치 공동 묘지 한가운데를 지나는 것 같다. 가려진 커튼들 사이로 언뜻언뜻 깜박거 리는 텔레비전 화면이 마치 도깨비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간혹 유령같은 회색 빛 그림자가 커튼 뒤로 왔다갔다 움직이기도 하고, 어쩌다 불꺼진 창에 커튼이 열려 있으면 속삭이거나 웅얼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오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이 묘지 풍경을 연상시킨다. 레오나드 미드는 그러면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하며 귀를 기울일 때도 있 다. 그러나 다시 소리없는 걸음을 내딛고 만다. 도시의 보도들이 여러 가지 꽃이 며 잡초들로 뒤덮이게 된 지도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다. 10년 가까이 밤이나 때로는 낮에도 산책을 했지만, 그 동안 산책한 거리가 수천 마일에 이르지만 그 는 단 한 번도 산책하는 사람과 마주친 적이 없다. 그는 밤에 걸을 때면 반드시 부드러운 고무창을 댄 신발을 신는다. 딱딱한 밑 창이 달린 신발을 신고 걷다 보면 그 소리를 야간순찰대의 경비견들에게 들킬지 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찰칵 하고 불이 켜지고, 어둠 속에 그의 얼굴 이 떠오르고, 11월 초순 어스름에 잠긴 도시 전체가 이 고독한 산책자 때문에 깜짝 놀랄 것이다. 오늘 저녁엔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어딘가 감추어진 바다를 향해. 마치 수 정으로 된 서리가 내리는 것처럼 안개가 깔려 있다. 코가 싸아해지면서 허파 속 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열린 것 같은 기분. 차가운 빛알갱이가 들릴듯 말듯 가을 낙엽들을 밟는 소리를 은근하게 즐기고 있다. 차갑고 조용한 휘파람 소리가 새 어 나올 때도 있고, 이따금 낙엽 하나를 주워 어두운 불빛에 그 앙상한 골격을 비춰 보기도 한다. 아니면 낙엽을 코에 바짝 갖다대고 그 케케한 냄새를 맡아 본다. 「거기 안에, 안녕들 하시오?」 그는 지나치는 모든 집들마다 속삭인다. 「오늘 밤 채널 4번에서는 뭘 하지요? 채널 7번에선? 9번에선? 카우보이들은 어디로 달려가고 있지요? 미합중국 기병대는 누구를 구출하러 언덕을 넘어가고 있지요?」 거리는 조용했고 길게 뻗어 있었으며 텅 빈 채였다. 황량한 사막 위를 나는 매의 그림자처럼 오로지 그의 그림자만이 움직이고 있다. 눈을 감고 얼어붙은 듯 가만히 서서, 사방 천 마일에 집이라고는 한 채도 없는 을씨년스런 애리조나 의 겨울 한복판에 와있는 것처럼 상상해 본다. 오로지 말라붙은 강바닥만이, 쓸 쓸한 거리만이, 침묵에 잠긴 도시만이. 「지금은 뭘 할까?」 그는 손목시계를 보며 또 집들에게 묻는다. 「저녁 8시 30분이라, 살인의 천태 만상? 시사 풍자극? 아니면 코미디언이 무 대에서 엉덩방아를 찧고 있나?」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집들 안에서 지금 흘러나오는 것은 웃음 소리일 까?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어 보지만, 곧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깨닫고 다시 걷는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두 개의 커다란 도로가 마주친 입체교차로에서 그는 또 망설인다. 낮 동안에는 이 길로 차량들의 물결로 홍수가 난다. 가스 충 전소는 언제나 붐빈다. 딱정벌레나 풍뎅이 모양의 차들이 쉴 새 없이 질주하며 엔진의 연소음을 거리에 뿌린다. 모두들 어둠이 오기 전에 거리를 미끄러지듯 달리며 집으로들 향한다. 혹은 머나먼 지평선으로. 그러나 지금 고속도로는 달빛 에 비쳐 말라붙은 강바닥처럼 허옇게 텅 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집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 불록만 더 가면 집이 나올 즈음, 갑자기 차 한 대가 길모퉁이를 돌아와서는 그의 앞에서 눈부신 빛줄기를 내쏘았다. 그는 놀라서 그자리에 붙박혀 버렸다. 마치 불꼬체 사로잡힌 나방처럼. 금속성 목소리가 날카롭게 외쳤다. 「꼼짝마라.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서 있으라!」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두 손을 들라.」 「아아, 나는...」 「두 손을 들라! 안 그러면 발포하겠다!」 물론 경찰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불운할 수가 있는가. 3백만 명의 인구가 사 는 도시에 순찰차라고는 단 한 대뿐인데. 지난해, 즉 선거가 있었던 2130년에 순 찰차는 세 대에서 한 대로 줄었다. 범죄는 사실상 없어지다시피 했으므로 경찰 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심야의 텅 빈 거리를 돌고 또 도는 이 순찰차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름은?」 순찰차의 메마른 금속성 목소리가 말했다. 그는 눈이 부셔서 차안에 타고 있 는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레오나드 미드.」 「크게 말하라!」 「레오나드 미드요!」 「직업은?」 「글쎄, 작가라고 하면 되겠지.」 「무직.」 순찰차의 목소리는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듯한 말투였다. 눈부신 불빛이 그를 박물관의 표본처럼 꼼짝못하게 붙들어 두고 있었다. 바늘로 가슴을 관통시켜 찔 러 두듯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미드는 이미 몇 년째 글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잡지나 책들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그는 공동묘지 같은 도시의 주택들에서 매일 밤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마치 환상처럼 여겨진다. 무덤 같은 집 안에서 텔레비전 불빛을 받으며 사람들은 시체처럼 멍하니 화면만 바라본다. 텔레비전의 화려한 빛줄기들이 사 람들의 표정없는 회색빛 얼굴을 어루만지지만 실제로 얼굴을 어루만져 주는 것 은 아무것도 없다. 「무직.」 칙칙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전기 저편에서 누군가가 반복했다. 「밖에서 무얼 하고 있소?」 「걷고 있소.」 「걷고 있다고!」 「그냥 걸었을 뿐이오.」 간단하게 말한 미드는 유난히 얼굴이 춥다고 느껴졌다. 「걷고 있다, 그냥 걸었을 뿐이다, 그냥 걸었다고?」 「그렇소.」 「어디로 걸어간단 말이오? 무엇 때문에?」 「바람을 쐬기 위해서. 거리를 둘러보기 위해서요.」 「당신 주소를 대시오!」 「세인트 제임스 거리 남쪽 11번지요.」 「당신 집에도 공기가 있겠지? 에어컨이 있겠지?」 「그렇소.」 「그리고 텔레비전도 있겠지?」 「없소.」 「없다고?」 법칙 위반에 대한 기소를 하는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결혼했소?」 「안 했소.」 「미혼.」 눈부신 불빛 뒤에서 목소리가 말했다. 별들 사이로 높이 떠오른 달이 선명하 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무덤 같은 집들은 변함없이 침묵에 잠겨 있다. 「아무도 날 원하지 않았지.」 미드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시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미드는 기다렸다. 「그냥 걸었다고 했소, 미드 씨?」 「그렇소.」 「그러나 당신은 그 목적을 설명하지 않았소.」 「설명했잖소. 바람을 쐬고 거리를 둘러보기 위해서라고. 그냥 걸었을 뿐이오. 」 「이런 일을 자주 했소?」 「지난 몇 년간 밤마다 걸었소.」 밤거리 한가운데 정차한 채 순찰차는 계속 무전기와 대화를 나누며 금속성 목 소리로 윙윙거렸다. 「자, 미드 씨.」 「질문은 끝났습니까?」 미드는 공손하게 물었다. 「그렇소.」 철컥 하는 소리가 나더니 순찰차의 뒷문이 열렸다. 「타시오.」 「아니 이봐요, 난 아무 짓도 안 했소!」 「타시오.」 「못 타겠소!」 「미드 씨!」 그는 갑자기 술 취한 사람처럼 앞으로 걸어갔다. 순찰차 옆을 지날 때 차창 안을 눈여겨 보았다. 짐작대로 앞좌석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순찰차는 빈 차였던 것이다. 「타시오.」 그는 손으로 차 뒷문을 잡으면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검은색 막대들로 짜여진 자그마한 감옥이었다. 냉랭한 금속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인간적인 체취란곤 조 금도 없었다. 너무도 깨끗하고 너무도 딱딱한 금속의 분위기였다. 부드러운 것이 라곤 전혀 없었다. 금속성 목소리가 말했다. 「당신이 결혼해서 알리바이를 증명할 부인이 있다면...」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요?」 순찰차는 가만히 있었다. 마치 자료 카드를 읽는 컴퓨터처럼 희미하게 웅웅거 리면서. 「역행성 경향자 연구 및 심리치료센타로 갑니다.」 그는 차에 탔다. 뒷문이 철컥 닫혔다. 순찰차는 전조등을 켠 채 밤거리를 미끄 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뒤 차는 어떤 집 앞을 지나갔다. 온통 어둠으로 뒤덮인 도시 전체에서 유일하게 불을 밝힌 집을. 차가운 어둠을 덥히려는듯 그 집은 창문마다 불빛을 당당하게 쏟아내고 있었다. 「저게 내 집이지.」 레오나드 미드가 말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순찰차는 메마른 강바닥 같은 거리를 질주하며 텅 빈 보도들과 텅 빈 거리들 을 지나갔다. 그 뒤에 남겨진 으스스한 11월의 밤 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아무 런 움직임도 없었다. 수로 지은이: 레이 브래드버리 돌로 만들어진 그것은 온 나라 전체를 꿰뚫고 하늘 위로 지나가고 있다. 그러 나 지금 그것은 텅 비어 있다. 수문들 사이로는 을씨년스런 바람만이 휭휭거리 며 지나간다. 북쪽 나라에서 그 수로를 끌어 와 남쪽 나라까지 연결시키는 공사 는 꼬박 1년이 걸렸다.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얘기하곤 했다. 「이제, 곧 공사가 끝나고 수로가 완성된단다. 그러고 나면 북쪽나라에서 천 마일을 달려온 깨끗하고 시원한 물이 우리 농작물을, 우리 꽃들을, 우리 목욕탕 을, 그리고 우리 식탁을 즐겁게 해줄 거란다.」 아이들은 단단한 돌덩어리가 차곡차곡 쌓여 수로가 모양을 갖추어 가는 모습 을 지켜보았다. 하늘 위 10미터에 걸린 채 끝없이 뻗어 있는 수로에는 백 미터 마다 괴물 머리가 조각된 홈통 주둥이가 달려 있어 아래쪽 바닥의 저수지로 물 줄기가 곧장 떨어지게 되어 있다. 북쪽 나라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그 두 나라는 지난 몇 해 동안 서로 칼 을 들이대고 방패를 부딪치며 좋지 않은 사이로 지내오고 있었다. 수로 건설 공사가 끝나는 해가 왔다. 그리고 북쪽의 두 나라는 서로 백만 발 의 화살을 쏘아 대고, 백만 개의 방패를 쳐들며 싸움을 시작했다. 칼과 방패들이 백만 개의 태양처럼 번쩍거리며 부딪쳤다. 천지를 뒤덮는 듯한 함성과 아우성이 아련히 남쪽 나라까지 들려왔다. 그 해가 거의 저물 무렵, 마침내 수로가 완공되었다.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 아 래에서 남쪽 사람들은 기다렸다. 「언제 물이 오지? 북쪽 나라들이 전쟁을 한다는데, 우리 모두 목말라 죽는 거 아냐? 우리 농작물이 다 말라 죽는 거 아냐?」 북쪽 나라에 가 있던 대사가 달려왔다. 「아주 끔찍한 전쟁입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학살이 저질러지고 있어요. 이 미 죽은 사람들이 1억 명도 넘습니다.」 「왜들 그렇게 싸우는 거요?」 「그들은 서로 생각이 다릅니다. 북쪽의 두 나라는 서로 의견이 달라요.」 「그거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들이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건.」 남쪽 나라 사람들은 모두 수로 아래로 길고 긴 대열을 이루며 모여들었다. 전 령들이 노란 댕기를 휘날리며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그들은 수로에 모인 사람들 에게 외쳤다. 「꽃병도 좋고 그릇들도 모두 가지고 나와요! 쟁기를 들고 밖으로 나가서 준 비해요! 목욕통도 가져다 대어 놓고 물컵도 들고 있어요!」 콸콸거리는 소리가 북쪽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나긴 가뭄에 시달리다 모 여든 남쪽 나라 사람들은, 죄다 항아리며 주전자며 사발을 높이 쳐들고 수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홈통에선 아직 스산한 바람만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온다!」 소식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순식간에 수백 마일을 달려 갔다. 드디어 엄청난 액체의 흐름이 메마른 돌바닥을 휩쓸고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점점 빠르게, 마침내 거칠 것 없이 격렬하게 수로 를 타고 흐르는 소리가 뜨거운 태양 아래서 남쪽 나라를 가로질렀다. 「들어 봐, 왔다! 준비하자!」 사람들은 저마다 들고 온 주전자며 높이 치켜들었다. 수문의 홈통 주둥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액체가 양동이로, 목욕통으로 그리고 밭으로 뿌려졌다. 들판의 곡식들도 이제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 사람들 은 감격에 겨워 목욕을 했다. 들판마다 도시마다 노랫소리가 울려 나왔다. 「근데, 엄마!」 한 아이가 잔을 들어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 안에 담긴 액체가 천천히 요 동했다. 「이건 물이 아니잖아요!」 엄마가 말했다. 「조용하거라, 얘야!」 「이건 색깔이 붉어요. 그리고 걸쭉해요.」 「자, 여기 비누가 있다. 그러니까 아무 말 말고 네 몸을 깨끗하게 씻으렴. 입 다물고 조용히.」 사람들이 외쳤다. 「빨리 밭으로 나가서 물고를 트자! 논에 물을 대자!」 밭에선 아버지와 두 아들이 서로 얼굴을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이대로만 가준다면 앞으로는 사는 데 아무런 걱정이 없겠구나. 창고에 곡식 을 가득 채우면서 항상 청결한 몸으로 살 수 있어.」 「걱정 마세요, 아버지. 우리 대통령이 북쪽에 사람을 보냈거든요. 앞으로도 북쪽의 두 나라느 의견 일치를 보기 어려울 거예요.」 「그럼, 누가 알아! 전쟁은 50년도 더 갈걸?」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날 밤 모두 행복하게 잠자리에 든 남쪽 나라 사람들 귀엔 여전히 수 로를 흐르는 풍성하고 기운찬 <물>소리가 들려왔다. 수로는 남쪽 나라의 대지 를 아침의 세계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밤 지은이: 레이 브래드버리 「오늘밤이 이 세상의 마지막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어?」 「어떻게 할 거냐구요? 농담하는 거 아니죠?」 「그래, 진지하게 물어 보는 거야.」 「모르겠어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남자는 잔에다 커피를 부었다. 거실 양탄자 위에서는 두 딸아이가 초록색 조 명등 아래에서 집짓기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잠시 뒤, 따뜻한 커피향이 저녁 공기 위로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글쎄, 이젠 좀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 「무슨 얘기에요, 당신? 실없는 얘기라도 할 작정이예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전쟁인가요?」 남자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수소폭탄이나 원자폭탄이 떨어지기라도 하나요?」 「아니야.」 「세균전인가요?」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남자는 천천히 커피를 저으며 말했다. 「그냥, 저 뭐랄까, 책을 덮는 것과 마찬가지야.」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군요.」 「나도 그래, 정말 잘 모르겠어. 그냥 느낌이 그래. 가끔 이런 느낌이 들어 놀 랄 때가 있어. 그렇다고 요란하게 깜짝 놀라는 건 아니고, 그냥 문득 그런 생각 이 드는 거야.」 남자는 등뒤로 아이들을 흘낏 쳐다보았다. 아이들의 금발이 빛을 받아 반짝거 렸다. 「그 동안 당신에겐 얘기를 안 했지만, 이건 나흘 전 밤에 처음 생긴 일이야. 」 「무슨 일이요?」 「꿈을 꾸었어. 모든 게 끝장나게 된다, 어떤 목소리가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어떤 종류의 목소리였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하여튼 그 목소리가 그랬 어. 이 지구상의 모든 것이 이제 종말을 맞게 된다고. 다음날 나는 그 꿈에 대해 서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지. 그런데 사무실에서 스탠 윌리스를 보았어. 그 친구 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더군. 나는 그 친구에게 다가가서 이봐 뭘 그렇 게 곰곰히 생각하나 그랬지. 그랬더니 그 친구 말이, 간밤에 어떤 꿈을 꾸었다는 거야. 난 그 친구가 꾼 꿈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가 말하기 전에 이미 알 수 있 었어. 내가 먼저 얘기할 수도 있었지만, 난 잠자코 그 친구 얘기를 들었지.」 「당신이 꾼 것과 같은 꿈이었나요?」 「같은 꿈이었어. 난 스탠에게 나도 그런 꿈을 꾸었다고 말했지. 그는 별로 놀 라는 것 같지도 않더군. 오히려 긴장이 풀어지는 기색이었지. 우리 둘은 말없이 일어나서 사무실 안을 걸었어. 즉흥적인 행동이었지. 잠깐 걸을까 뭐 이런 말도 않고 그냥 둘이서 각자 일어난 거야. 사무실 사람들은 모두들 책상 위, 아니면 자기 손을, 또는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더군. 몇 사람들고 얘기를 나눠 봤 지. 스탠도 그렇게 했고.」 「모두들 그런 꿈을 꾸었대요?」 「모두들 그랬대. 같은 꿈을 꾸었다고 그러더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당신은 그걸 믿어요?」 「믿어. 이제껏 이번보다 더 확신을 가진 적은 없었어.」 「그럼 언제 끝나지요? 이 세상이 말이에요.」 「밤이 되면, 우리가 잠들고 온 세상이 어둠에 싸이면, 그러면 세상은 다시는 밝아지지 않을 거야. 24시간이 지나면 모두 다 사라지는 거야.」 두 사람 다 커피잔엔 손도 대지 않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잔을 들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우리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 덧없는 존재인가요?」 「이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야. 누가 우릴 심판하고 그러는게 아냐. 그런 데 당신은 의외로 담담하군. 왜 내 꿈 얘기를 그냥 받아들이는 거지?」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요.」 「당신이 일하는 사무실 사람들도 그래?」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여요. 어젯밤에 처음 그 꿈을 꾸었죠. 오 늘 낮에 동네 여자들이 모두 그 꿈 얘길 했구요. 모두들 꿈을 꾸었대요. 난 그저 우연의 일치려니 하고 여겼는데.」 여자는 저녁 신문을 집어 들었다. 「신문에는 그 일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군요.」 「모두들 빠짐없이 알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굳이 신문에 실을 필요가 없지. 」 남자는 의자 뒤로 등을 기대며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신, 두려워?」 「아뇨. 이런 때가 온다면 굉장히 두려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두렵지가 않아 요.」 「흔히들 말하는 자기보존 본능이라는 건 죄다 어디로 갔지?」 「모르겠어요. 당연하다, 필연이다 하고 생각되면 무슨 일이든지 별로 흥분하 지도 않게 도나 봐요. 이건 어쩐지 필연적이란 느낌이 들어요. 잘 알 수는 없지 만 그저 우리가 살다가 언제든 이런 때가 온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둘이 그 동안 지내온 삶이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지?」 「그럼요, 아주 좋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난 아마 이게 문제라면 문제였다고 생각해요. 세상에는 비참하고 안타까운 일도 무척 많았는데, 너무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 살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두 딸아아기 놀다가 까르르 웃었다. 「이런 순간이 닥치면 사람들이 모두들 거리로 나와서 비명을 지를 줄 알았는 데...」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닥치면 모두들 초연하게 받아 들이지.」 「난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지만, 당신과 저 두 아이들만큼은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이 도시나 내 직업이나 그 밖에 다른 어떤 것이든 미련이 없지만, 그러 나 당신과 아이들은 정말 사랑해요. 아아, 우린 어쩌면 이럴 수가 있죠?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이런 얘기나 주고받다니.」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지.」 「그래요, 물로 그렇죠. 뭔가 다른 할 일이 있다면 벌써 하고 있었겠죠. 아마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오늘 밤에 무엇을 할지 미리 알 수 있었던 날은 역사상 오늘이 처음 아닐까요?」 「글쎄, 다른 사람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이제 앞으로 남은 몇 시간 동안 다들 뭘 할까?」 「쇼를 보러 가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카드놀이를 하거나, 아이들을 재우거나, 아니면 스스로 침대에 누워 잠들거나, 뭐 보통 때하고 똑같 겠지요.」 「그래, 보통 때하고 똑같겠지. 그 생각을 하니 어쩐지 대견하다는 느낌이 드 는군.」 남자는 커피를 한 잔 더 따랐다. 「왜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죠?」 「왜냐면...」 「왜 이번 세기의 마지막 밤이 아니지요? 왜 5세기나 10세기 전에 닥치지 않 았을까요?」 「오늘이라는 날짜는 다른 어떤 날하고 전혀 다를 게 없어. 다른 어떤 날도 오늘하고 다를 게 없구. 그것이 이유지. 그냥 온 세상이 끝나는 순간이 되고 보 니 올해이고, 이번 달이고, 오늘이 된 거야. 특정한 날짜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거지.」 「오늘 밤 늦게 출격하는 폭격기들이 있다면, 그들은 영영 육지를 보지 못하 겠군요.」 「그렇겠지.」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무얼 할까? 접시를 닦을까?」 그들은 함께 부엌으로 가서 설거지를 하고는 접시들을 차곡차곡 찬장에 집어 넣었다. 8시 30분에는 아이들을 침대에 눕히고 잘 자라고 입을 맞춰 주었다. 그 리고는 아이들 머리맡에 희미한 조명을 켜놓고 방문을 아주 조금 열어둔 채 나 왔다. 「궁금하군.」 아이들 방에서 나오다가 잠깐 뒤를 돌아보면서 남자가 말했다. 「뭐가요?」 「저 방문이 저렇게 조금 열려진 채로 계속 있을지, 아니면 아주 꼭 닫히게 될지 말이야.」 「아이들도 알고 있을까요?」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들은 거실에서 신문을 보거나 얘기를 나누었다. 라디오 음악에 귀를 기울이 기도 하고 벽난로가에 앉아서 석탄덩이가 타들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도 했다. 시계가 10시 반을 쳤고, 11시를 쳤고, 다시 11시 반을 쳤다. 그들은 세 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을 생각했다. 각자 나름대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을 사 람들을 생각했다. 마침내 남자가 말했다. 「자, 이제 그만 잡시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키스를 나누었다. 「우리 둘은 그동안 행복하게 지냈어요.」 「당신은 울고 싶은거야?」 「아니에요.」 그들은 집 안의 불을 모두 끄고 침실로 갔다. 그리고는 밤의 냉기 속에서 옷 을 벗고 침대 시트를 열었다. 「시트의 감촉이 좋군.」 「난 피곤해요.」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피곤하지.」 그들은 침대에 누웠다. 「잠깐만요.」 여자는 침대에서 나와 부엌으로 갔다. 잠시 뒤 돌아오면서 여자가 말했다. 「깜박 잊고 수돗물을 잠그지 않았어요.」 남자는 웃었다. 여자도 같이 웃었다. 이윽고 그들은 서로 손을 마주잡고 머리를 나란히 붙인 채 눈을 감았다. 잠시 뒤에 남자가 말했다. 「잘 자요, 여보.」 「잘 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