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로봇 아시모프 단편선 유에스 로봇사는 소송의 피고로써 배심원단없이 비공개 재판 을 진행할 수 있도록 온갖 영향력을 다 동원했다. 원고측인 노스이스턴 대학도 그러한 노력을 굳이 막으려 하지 는 않았다. 대학 측은 로봇의 과실이 일반 여론에 미칠 영향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로봇에 반대한 시위는 곧장 전체 과학에 대 한 국민의 반감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정부를 대표한 할로위 쉐인 판사 역시 이번 사태에 대한 신속 하고 조용한 결말을 바라는 편이었다. 유에스 로봇과 학계는 둘 다 재판하기 껄끄러운 상대였다. 쉐인 판사가 말문을 열었다. "기자도 방청객도 배심원도 없으니 공식 절차는 생략하고 바 로 본론에 들어갑시다." 그는 말을 하면서 슬쩍 웃었다. 그리고는 판사복을 약간 들어 올리며 편하게 자세를 취했다. 그의 혈색은 붉으스레하니 좋았고 턱은 둥글고 부드러웠다. 그의 양미간과 콧마루는 넓었다. 전반 적으로 보아 그의 얼굴은 위엄이 없었고, 판사 자신도 그러한 사 실을 잘 알고 있었다. 노스이스턴 대학의 바나바스 H. 굳펠로우 물리학 교수가 처음 증인석에 섰다. 그는 증인 선서를 하며 자신의 이름을 우물거렸 다. 의례적인 증인 심문을 몇 번 던진후 검사가 자신의 호주머니 에 손을 깊속이 찔러넣으며 물었다. "교수님, 로봇 EZ-27호의 고용을 처음 생각하신건 언제의 일 입니까? 그리고 그 계기는 무엇입니까?" 굿펠로우 교수의 인색해 보이는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 했다. "저는 유에스 로봇사의 연구부장 알프레드 래닝 박사와 약간 의 친분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약간 이례적인 제안을 해 온 것은 작년 3월 3일의 일입니다." "2033년 말이지요?" "예." "좋습니다. 계속 말씀해주십시오." 교수는 약간 양미간을 찌푸린채 기억을 되짚으며 증언을 계속 했다. 굿펠로우 교수는 마주한 덩치 큰 로봇을 불편한 눈으로 살펴 보았다. 그 로봇은 지하에 있는 자재 창고로 방금 막 포장된 채 운반되었다. 지구상에서는 항상 로봇을 포장해서 운반해야 한다 는 규정이 있었다. 그는 로봇이 오늘 도착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미처 마음 의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로봇을 대하게 되었다. 3월 3 일에 래닝 박사가 그에게 전화 통화를 했고, 당시 래닝 박사의 끈질긴 제안을 뿌리치지 못해 결국 이렇게 로봇이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눈 앞에 서있는 로봇의 덩치는 무척 컸다. 알프레드 래닝은 운반 도중 흠집은 나지 않았는지 로봇의 외 부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런후 그는 교수에게 몸을 돌렸다. "이것은 로봇 EZ-27호입니다. 같은 모델 중 일반 사용자 용으 로 특별 제작된 최초의 로봇입니다." 그는 다시 로봇에게 몸을 돌렸다. "이분은 굿펠로우 교수님이시네, 이지" "안녕하십니까,교수님." 이지는 수동적으로 인사를 했으나 워낙 갑작스런 로봇의 반응 에 교수는 얼굴을 붉혔다. 이지의 키는 7피트였고 사람의 외형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이는 바로 유에스 로봇사의 주요 판매전략이었다. 그 점과 더불 어 양자두뇌 분야의 몇가지 특허권 소유 덕분에 유에스 로봇사는 자동기계 시장을 거의 독점할수 있게 되었다. 로봇을 창고로 운반한 두 인부는 나가고, 이제 로봇과 두 사 람만 남았다. 교수는 로봇과 래닝을 차례로 쳐다본 후 불안한 목 소리로 물었다. "이 로봇, 별로 위험하지는 않겠지요?" "인간인 저보다 훨씬 덜 위험하지요. 저는 아무 이유없이 교 수님을 때릴 수 있지만, 이지는 그럴수가 없습니다. 로봇의 3원 칙은 이미 아시겠지요." "그럼요." "그 원칙은 제작 초기에 로봇의 양자두뇌에 입력됩니다. 로봇 의 존재 이유를 기술한 제1원칙은 인간의 생명과 안녕을 위해 로 봇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합니다." 박사는 이 대목에서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문제는 그 점을 전 지구인에게 이해시키기가 어렵다는 거지 요." "상당히 겁나게 생겼는데요." "그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기보다는 쓸모가 많은 로봇이란 걸 곧 아시게 될겁니다." "별로 확신은 가지 않군요. 말씀을 듣고도 어째 좀..." "이제 곧 실증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책을 한권 가져오셨습니 까?" "예." "한번 볼수 있을까요?" 굿펠러 교수는 여전히 로봇에서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못한채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는 발옆에 놓인 가방에서 책을 집어들었 다. 래닝이 그 책을 받아들고는 표지를 살펴보았다. "'전해질 용액의 물리화학'이라, 좋군요.분명 교수님이 무작 위로 고른 책이지요? 이 책의 선정에 제가 무슨 제안을 한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래닝은 그 책을 EZ-27호에게 넘겼다. 교수가 펄쩍 뛰었다. "안돼요. 그건 귀한 책입니다." 래님이 눈을 살작 치켜떴다. "이지가 힘자랑하려고 책을 북 잡아뜯거나 하려는게 아닙니 다. 교수님이나 저 못지않게 책을 소중하게 다룰 겁니다. 이지, 일을 시작하게." "감사합니다. 박사님." 이지는 다시 굿펠로우 교수 쪽으로 금속 상체를 슬쩍 돌려 말 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교수님." 교수는 약간 멍청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해보게." 기계적이고도 일정한 동작으로 이지는 책을 한쪽한쪽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좌우로 시선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렇게 몇 분이고 작업을 계속했다. "조명이 너무 어두운데요." 굿펠로우가 중얼거렸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지금 뭐하는겁니까?" 굿펠로우의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잠시만 기다리면 아시게 됩니다."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갔다. 래닝이 물었다. "어떤가,이지?" 로봇이 답했다. "거의 정확하게 쓰인 책이라 제가 지적할게 별로 없습니다. 27쪽의 스물두번째 줄에 있는 '양승반응'은 '양성반응'의 오식입 니다. 32쪽 여섯째 줄에는 반점이 하나 더 들어간 반면, 54쪽의 13째줄에는 반점이 필요한데 빠져있습니다. XIV-2번 공식의 더하 기 부호는 그 이전 공식과 일관성을 이루려먼 빼기가 되어야 합 니다. 그리고..." "잠깐, 잠깐!" 교수가 이지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지금 이 로봇이 뭐하는 겁니까, 박사님?" "뭘하는게 아니라 이미 끝마친 거지요. 이지는 방금 이 책의 교정을 끝마쳤습니다." "교정을 보았다구요?" "예. 책갈피를 넘긴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책의 내용을 모 두 읽고, 철자 맞춤법 문장부호에 관한 모든 실수를 찾아냈습니 다. 그는 어순의 잘못된 배열이나 비일관적인 내용 역시 잡아냈 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교정 내용을 글자 하나 틀리지않고 언 제까지라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노예 로봇 2 교수의 입은 딱 벌어졌다. 그는 래닝의 곁에서 이지 쪽으로 걸음을 내딛다가 다시 황급히 돌아왔다. 그는 팔짱을 끼고 둘을 꼼꼼히 지켜보았다. 한참후에야 교수가 말문을 열었다. "당신 말은 이게 교정보는 로봇이라는 거요?" "교정말고 다른 일도 하지요." "그런데 이걸 왜 내게 보여주는 거요?" "교수님이 이지의 사용을 학교측에 추천해주십사 해서 보여드 린 겁니다." "교정보는 용도로 말입니까?" "교정말고 다른 일도 하지요." 래닝 박사가 끈기있게 답했다. 교수는 완전히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이건 말도 안됩니다!" "왜요?" "우리 대학이 0.5톤이나 나가는 이 교정용 로봇을 구입할 이 유가 없고 또 그럴 여유도 없어요." "이지의 용도는 교정만이 아닙니다. 개략적 내용을 적어주면 보고서도 작성하고, 각종 양식에 따라 내용을 기입하고, 각종 문 서의 데이타베이스 노릇도 하고, 시험 성적도 매겨주고..." "다 하찮은 일들이오." 래닝이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을 내주신다면 교수님 연구실로 가서 좀더 차분하게 다른 기능들에 대해서도 설명드릴수 있습니 다. 교수님만 괜찮으시다면요." "나야 괜찮지만..." 창고를 나가려던 굿펠로우 교수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런데 이 로봇은 어떡합니까? 이걸 그냥 여기에 둘 수는 없 습니다. 다시 포장해서 가져가셔야 할 겁니다." "시간은 충분합니다. 이지는 당분간 여기 그냥 둬도 됩니다." "아무도 없는데 말입니까?" "어떻습니까? 그는 자신이 여기 머물러야 한다는 걸 잘 압니 다. 굿펠로우 교수님, 로봇은 인간보다 더 믿을만 하답니다." "그러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겁니다. 그 점은 제가 보장합니다. 별써 근무시간도 끝나지 않았습니까? 내일 아침 전까지는 아무도 여기 오지 않을 겁니다. 혹 무슨 일이 생긴다면 유에스 로봇사가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이 지에 대한 로봇 신뢰성 테스트 정도로 생각하십시오." 교수는 마지못해 창고를 나섰다. 그러나 5층에 있는 자신의 연구실에서도 교수의 얼굴은 계속 불편해 보였다. 그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흰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말 했다. "래닝 박사님도 아시겠지만, 지구에서의 로봇 사용은 법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물론 법적 문제가 항상 걸리긴 합니다. 공공 장소에서의 로 봇의 사용은 금지되어있고, 민간부문에서의 사용에 대해서도 여 러가지 제약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은 교육기관으로서 흔히 정 부 시책에 있어 우대를 받습니다. 만약 로봇을 제한된 장소에서 학문 관련 목적에만 사용하고, 또 명령자가 로봇 사용에 따른 각 종 주의사항을 충실히 지키기만 한다면 법적으로 별 문제는 없으 리라 봅니다." "사소한 교정 작업을 위해 그런 수고를 한단 말입니까?" "이지의 사용 용도는 무궁무진합니다, 교수님. 그동안 우리는 각종 단순 육체 노동으로부터 인간의 수고를 덜기 위해 로봇을 사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단순 지식 노동이란게 있지 않 습니까? 유용하고 창조적인 사고를 해야할 교수님들이 철자 확인 을 위해 수고스럽게 2주 동안 교정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로봇이 그러한 작업을 30분만에 대신 해 드리게 된 겁니다. 그게 과연 사소한 일입니까?" "그러나 가격이..." "가격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어차피 대학에서는 EZ-27호를 구입할 수 없습니다. 유에스 로봇사는 제품을 판매하 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학 측에 1년에 1천달라에 이지를 리스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극초단파 분광기 연속 기록장치보다 더 싸게 먹히는 비용입니다." 굿펠로우는 할 말을 잃었다. 래닝을 여세를 몰아갔다. "제가 교수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이곳의 집행위원회에 일단의견을 상정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만약 위원회에서 상세 한 사항을 알고싶어한다면 기꺼이 제가 와서 브리핑할 용의가 있 습니다." 여전히 의구스런 표정으로 굿펠로우가 말했다. "그럼 다음주 보직 교수 회의때 말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좋 은 결과가 있으리라고는 미리 확답을 못하갰군요." 래닝이 말했다. "그점은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피고측 변호사는 키가 작고 뚱뚱한 편이었다. 약간 위엄을 부 리듯 고개를 숙이고 있어 이중턱이 더 두드러져 보이는 편이었 다. 그는 자신이 이제 질문할 증인을 한번 쓱 쳐다보고 물었다. "조금 서둘러 동의하신 게 아닙니까?" 굿펠로우 교수가 답했다. "당시에는 래닝 교수에게 더이상 시달리기 싫어서 그런 겁니 다. 누구라도 그랬을 겁니다." "래닝 씨가 가고 나면 나머지는 내몰라라 하고 말입니까?" "....." "그런데 대학 보직 교수 집행 위원회에 그 안을 상정하기는 하셨더군요." "예." "즉 래닝 박사의 제안을 받아들이신 거지요. 마지못해 따랐기 보다는 당시에는 진정으로 이지의 임대를 바라신게 아닙니까?" "그냥 공식 절차를 따랐을 뿐입니다." "사실 박사님은 당시에는 지금처럼 로봇에 대해 반감을 갖지 는 않았습니다. 래닝 박사와 얘기할 때 이미 로봇의 3원칙에 대 해 잘 알고 있었고 말입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지를 그냥 그대로 창고에 방치해 두셨지요?" "그건 래닝 박사가 그래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만약 로봇이 약간이라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면 래닝 박사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게 아닙니까?" "나는 액면 그대로 믿었을..." 변호사가 갑작스레 말을 잘랐다. "더이상 심문할 게 없습니다." 노예로봇 3 굳은 표정의 굿펠로우 교수가 자리에 앉았다. 쉐인 판사가 고 개를 앞으로 숙이고 말했다. "사실 나도 로봇 공학에 대해서는 아는게 별로 없소. 래닝 박 사, 재판 진행 기록을 위해 로봇 3원칙을 기술해 주시겠소? 래닝은 자신의 이름이 갑자기 불리자 적잖이 당황했다. 그는 옆자리의 회색 머리를 한 어떤 부인과 한참 얘기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재판장님." 그는 마치 설교를 시작하려는 듯 자세를 가다듬고 설명을 시 작했다. "제1법칙, 로봇은 인간을 상해하거나, 인간이 다치도록 내버 려 둬서는 안된다. 제2법칙, 제1법칙에 어긋나지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제 3법칙, 제1,2법칙에 어긋 나지않는 한, 로봇은 항상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좋습니다." 한참 받아적고 있던 판사가 말했다. "이 세가지 법칙은 모든 로봇에게 입력되어 있습니까?" "예, 하나도 빠짐없이 말입니다." "EZ-27호에도 이 내용은 입력되어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어쩌면 방금한 그 말은 증인 선서를 하고 다시 해야 할지 모 르겠소." "어떤 경우라도 다시 진술할 용의가 있습니다." 래닝 박사는 다시 방청석의 자리에 앉았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회색 머리를 한 중년 부인은 바로 유에스 로봇사의 로봇 심리학자인 수잔 캘빈 박사였다. 캘빈 박사는 감 정없는 얼굴로 자신의 상사를 쳐다보았다. 사실 캘빈 박사는 모 든 인간을 감정없이 대했다. "알프레드, 굿펠로우의 증언이 정확한가요?" "글쎄요, 사실 그는 그당시 로봇에 대해 그렇게까지 불안해 하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임대조건을 제시했을때 상당히 긍정적 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틀린 부분은 없는것 같습니다. 캘빈 박사가 말했다. "차라리 임대료를 1000불 이상으로 불렀으면 더 낳았을텐데 요." "어떻게해서든 이지를 대학 측에 빌려주기 위해 가격 면에서 는 약간 양보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건 압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적극적이었던것 같습니다. 아마 저들은 우리에게 다른 의도가 있었던 처럼 주장할 겁니다." 래닝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제가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발언을 학교 이사회에서 했습니다." "그들은 아마 우리에게 이미 인정한 내용말고도 다른 숨겨진 의도가 있었던 것처럼 상황을 몰고갈 것입니다." 유에스 로봇사의 창업주의 아들이자 최대주주인 스캇 로버슨 씨가 캘빈 박사의 옆좌석에서 몸을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힘주 어 말했다. "왜 이지더러 직접 상황을 설명하도록 하지 않는거요?" "아치가 증언할 입장이 아니라는걸 사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 니까?" "증언하도록 만드시오. 당신은 로봇 심리학자가 아니오? 이지 에게 증언하도록 시키시오." "그 결정하도록 하지 않는거요?" "아치가 증언할 입장이 아니라는걸 사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 니까?" "증언하도록 만드시오. 당신은 로봇 심리학자가 아니오? 이지 에게 증언하도록 시키시오." "그 결정은 제가 내리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담당한 로봇은 자신의 안전을 위험할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차가운 캘빈 박사의 말에, 로봇슨이 얼굴을 찌푸리며 무어라 말하려 했다. 그때 판사가 장내 정숙을 요구하며 의사봉을 두드 렸다. 새로이 증인석에 선 사람은 영어학 학과장이자 대학원장인 프 랜시스 J.하트였다. 그는 뚱뚱한 몸집에 보수적인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반드르르한 대머리 양옆으로 머리칼이 몇가닥 흘러 있었다. 그는 양손을 무릎위에 올려두고 증언석 의자에 편안히 자리를 잡고 이따금씩 미소를 흘렸다. 그가 말했다. "로봇 EZ-27호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대학 보직 교수 위원회 에서 굿펠로우 교수가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입니다. 그후 작 년 4월 10일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특별회의를 소집했고 당시 저는 회의 의장이었습니다." "그 특별 회의에 대한 의사진행록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약간 이례적인 모임이었습니다. 그래서 비 공개 회의로 진행하고 의사록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 회의에서 다루어진 내용은 무엇입니까?" 하트 원장은 그 회의를 진행하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다 른 교수들도 마음이 편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참석자 중 속이 편 해 보이는 사람은 래닝 박사뿐이었다. 훌쩍 큰 키에 은발을 한 래닝 박사의 모습은 하트로 하여금 앤드류 잭슨의 초상화를 떠올 리게 했다. 로봇의 작업 결과가 테이블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고 이지가 작성한 도표가 물리화학자 미노트 교수의 손에 들려져 있었다. 그 화학자는 이지의 작업물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트가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 로봇이 일상적인 작업을 제대로 수행핼 수 있다는데 의심 의 여지는 없는것 같습니다. 나자신 회의전에 이들 서류를 검토 해 보았는데 오류를 거의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일반 책장보다 3배 정도 긴 프린트 출력물을 들어보였 다. 그것은 인쇄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교정을 보기위해 작성 된 원고였다. 그 종이의 양쪽 여백에는 교정부호와 내용이 깔끔 하게 기입되어 있었다. 원고상의 단어위에 줄이 그어진 경우 그 옆에 다른 단어가 씌어져 있었는데, 그 필체가 너무나 정교해서 프린트 출력한 것과 구분이 안갈 지경이었다. 교정 내용은 두가 지 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붉은색 펜으로 쓴 부분은 원저자가 실수한 부분을 고친 것이고, 파란색 펜으로 기입한 내용은 프린 트 상의 오류였다. 래닝 박사가 말문을 열었다. "사실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도 정확한 묘사는 아닙니 다. 하트 박사님, 사실 이지의 교정에 틀린 부분은 전혀 없습니 다. 원고의 작성에 관한 한 완벽한 교정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물론 영어 문장이 아닌 원고 내용 자체가 잘못된 경우 그것은 로 봇도 잡아내지 못합니다." "그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영어의 다양한 문장 양식과 표 현법에 미루어볼때 로봇의 교정이 항상 정확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수가 없습니다." "이지의 양자 두뇌에는 그 분야에 관한 모든 규칙이 입력되어 있습니다. 교수님도 이지의 잘못은 찾아내지 못하시리라 생각합 니다. 미노트 교수가 이제껏 들여다보던 그래프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 "래닝 박사님, 문제는 말입니다. 학교의 평판이 나빠질 수도 있는데 왜 우리가 굳이 컴퓨터가 아닌 로봇을 고용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박사님 회사의 기술로는 충분히 원고 교정을 보는 컴퓨터를 만들어낼수 있지 않습니까?" "그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같은 컴퓨터는 입력된 문자를 가지 고만 작업할 수 있을 것이고 결과 역시 컴퓨터의 주어진 양식으로만 출 력될 것입니다. 즉 교정을 보기위해서 문서를 새로 입력하는 작업과 함 께 결과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까지 고용해야 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러나 로봇은 모든 과정을 혼자서 알아서 척척 해내고, 다른 작업들까 지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교정용 컴퓨터라면 박사님이 보고계시 는 그래프를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노예 로봇 4 래닝이 말을 이어갔다. "양자두뇌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봇은 사람과 똑같이 도구와 컴퓨터를 사용할 줄 압 니다.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설득도 할 수 있습니다. 아주 단순한 로봇과 비교해 보더라도 양자 두뇌 가 없는 일반 컴퓨터는 덩치 큰 계산기에 불과합니다." 굿펠로우가 고개를 들고 물어보았다. "만약 우리가 로봇과 대화를 하고 설득도 할 수 있다면, 우리 의 명령이 로봇에게 혼란을 일으킬수 있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 까? 게다가 아무리 양자두뇌라도 데이타를 무한정 입력할수는 없 을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래서 보통 5년마다 회사에서 기억된 메 모리를 삭제해 줍니다." "회사가 말이오?" "예. 대여한 로봇에 대한 모든 아프터서비스는 저희 회사에서 책임집니다. 그것이 저희가 로봇을 직접 판매하지 않고 대여만 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일상 작업 수행을 위해서는 일반인도 누구나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자두뇌의 메모리 삭 제와 같은 좀더 복잡한 기능을 위해서는 유에스 로봇사의 기술자 가 필요합니다. 물론 일반인도 어떤 사실을 기억에서 지우라고 로봇에서 명령할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로봇의 논리과정 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억의 소거를 명하다가는 엉 뚱한 부분까지 삭제될 수 있고 로봇의 두뇌가 손상될 수 있습니 다. 그래서 우리는 나름대로 기억 소거 방지 장치를 내장해 두었 습니다. 누군가 고의나 실수로 로봇의 기억을 지우려 한다면, 쉽 게 이는 방지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 작업을 수행하는 경우 5년까지는 기억용량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트 학장은 양옆으로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최대한 고르게 퍼 기위해 얼마 없는 머리결을 매만졌다. "박사는 분명 우리 대학에 로봇을 들여놓는데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계시군요. 아무래도 이것은 유에스 로봇사에게 불리한 대 여조건아닙니까? 로봇 한대의 대여에 1년에 천불이면 터무니없이 싼 값입니다. 이 거래를 시작으로 다른 대학에 더 비싼 가격에 로봇을 들여놓는게 이번 거래의 진짜 목적 아닙니가?" "물론 그런 점도 있습니다." 래닝의 답이었다. "하지만 그럿다 하더라도 거래할 수 있는 대학의 수가 제한되 어 있을텐데요. 아무리 봐도 수지가 맞을것 같지 않군요." 래닝은 팔꿈치를 앞으로 끌어당기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쓸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의 로봇에 대한 거 부감때문에 현행법상 지구에서 로봇의 사용은 금지되어 있습니 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 정거장이나 행성 정착지 에 있어서의 저희 회사의 로봇 대여 사업은 아주 성공적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중요한 것은 회사의 이윤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 구상에서도 로봇의 사용이 허가된다면 인류의 복리증진에 더욱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변화맛굼 아닙니다. 우리는 지 구상에서도 로봇의 사용이 허가된다면 인류의 복리증진에 더욱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변화를 일구어 내기 위해서 는 초기의 투자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저희의 생각입니다. 회사에 로봇을 도입하려면 노동조합이 즉각 반대하고 나섭니다. 그러나 대학의 경우 그런 문제는 없습니다. 이지는 교수님 여러분의 단 순 작업에 대한 부담을 덜어드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찬성만하신 다면 여러분은 현대판 노예를 장만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전혀 윤리적 책임을 느길 필요도 없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지의 작 업에 만족하신다면 다른 대학과 연구소도 그 뒤를 따를 것입니 다. 학계에서 로봇을 받아들인다면 일반 대중의 로봇에 대한 인 식 역시 점차적으로 호전될 것입니다." 미노트 교수가 중얼거렸다. "오늘 노스이스턴 대학에서 시작하여, 내일은 전세계 시장을 공략한다는 거로군." 화난 얼굴로 래닝이 수잔 캘빈에게 속삭였다. "지금 증언한 것만큼 당시 내가 열성적이거나 저들이 망설인 것은 아니었는데! 1년에 1천불이라고 얘기했을때는 금방이라도 계약을 하자고 덤빌것 같았어요. 미노트 교수도 이지가 작성한 도표가 아주 훌륭하다고 몇번이나 칭찬했고... 하트도 이지의 교 정에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고 직접 인정했는데..." 캘빈 박사의 수심에 찬 표정은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 다. "차라리 저들이 지불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가격을 부르 지 그랬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든 저들이 열심히 가격을 깎아 보려 했을텐데 말입니다." "글쎄요." 래닝의 풀죽은 답이었다. 하트 교수에 대한 검사측의 질문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래닝 교수가 떠난후 로봇 EZ-27호를 받아들일 것인가를 표결 에 부치셨지요?" "예."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다수결에 의해 로봇을 대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한 결정이 나오게 된 주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봅니까?" 이 질문에 대해 변호인 측이 즉각 이의를 제기했다. 검찰측이 새로 질문을 했다. "교수님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입니까? 물론 교수님 도 찬성쪽에 투표하셨겠지요?" "예 분명 찬성했습니다. 제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래닝 박 사의 얘기를 듣고 일반 대중의 그릇된 통념을 깨는것도 학자의 본분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다시 말하자면 래닝 박사의 말에 설득된 것이군요." "그게 그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그는 웅변에 상당히 능했 습니다." "더이상 질문할 게 없습니다." 피고측 변호사가 증인석에 가서 한동안 하트 교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실 증인은 당시 EZ-27호의 대여에 상당히 적극적이지 않으 셨나요?" "당시 저는 로봇이 제대로 작동만 한다면 쓸만하다고 생각했 습니다." "제대로 작동만 한다면요? 저는 교수님이 EZ-27호의 작업을 면밀히 겆토하신 후 작업 결과에 대해 만족했다고 알고있습니 다." "그건 그렇습니다. 당시 문제는 영어 교정이었고 영어학 교수 인 내가 그 내용을 검토해 본겁니다." "좋습니다. 당시 결과물에 무슨 불만스러운 점이 있었습니까? 당시의 교정원고는 여기 있습니다. 이중 혹시 마음에 안든 내용 이 있었다면 지금 지적해 주실 수 있습니까?" "글쎄요..." "간단한 질문입니다. 교수님이 보시기에 문제가 있는 교정이 있습니까?" 하트 교수가 약간 긴장된 목소리로 답했다. "그 로봇이 일단 실수했다하면, 그건 아주 중대한 실수였습니 다." "제가 드린 질문에만 대답해 주십시오!" 변호사가 목청을 높였다. "이 원고들중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하트 학장이 각 원고를 세심히 살펴보았다. "아니, 없습니다." "오늘 재판의 원인이 된 사건을 제외하고 EZ-27호가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습니까?" "그 사건을 제하고는 없습니다." 노예로봇 5 피고측 변호사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EZ-27호를 고용할 것인가에 대한 투표의 결과가 다수결에 의 한 찬성이었다고 증언하셨습니다. 정확한 표차가 어떻게 됩니 까?" "제 기억에 13 대 1이었습니다." "13대 1이라! 단순한 과반수가 아니라 압도적인 지지였군요." "과반수는 똑같은 과반수지요." "반대표는 누가 행사한 것입니까?" 하트 학장은 약간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사이몬 닌하이머 교수였습니다." 변호사는 짐짓 놀란 척했다. "사이몬 닌하이머 교수라구요? 이 재판의 원고 말입니까?" "예." 이 대목에서 변호사는 약간 뜸을 들였다. "다시 말하자면, 피고인 유에스 로봇사에 75만불에 달하는 피 해보상을 청구한 장본인이 바로 처음부터 로봇의 사용에 반대한 인물이었다는 얘기가 되는군요. 사이몬 교수를 제외한 교수 위원 회 모든 사람은 다 로봇의 사용에 찬성했는데 말입니다." "표결에 반대한 것은 정당한 그의 권리 행사였습니다." "교수님의 증언 중에 회의 중 닌하이머 교수가 한 발언에 대 한 부분은 없었습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까?"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한다니요?" "말했습니다." "로봇의 사용에 반대하는 발언이었습니까?" "예." "격렬한 발언이었습니까?" 하트 학장이 잠깐 생각하는 눈치였다. "정열적인 발언이었습니다." 변호사는 점점 더 자신감을 보였다. "개인적으로 닌하이머 교수를 알게된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12년 정도 됩니다." "잘 아시는 사이입니까?" "그렇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의 성격을 미루어볼때 표결에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지 못한 후에도 원고가 계속해서 로봇에 대한 반감을 가 져왔다고..." 말을 미처 끝마치기도 전에 검사가 일어나 격한 목소리로 이 의를 제기했다. 변호사는 증인에게 증인석에서 내려가도 좋다는 손짓을 했다. 쉐인 판사는 점심을 위한 휴정을 선언했다. 로벗슨은 자신의 울화를 샌드위치에다 풀고있었다. 75만불을 소송에서 잃는다고 유에스 로봇사가 재정상의 타격을 입지는 않 는다. 그러나 이번 소송에서의 패배는 여러가지 면에서 악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다. 그는 회사에 대한 사람들의 이미지 손상에 대해 더 염려하고 있었다. 로벗슨이 툴툴거리는 투로 물었다. "도대체 이지가 대학에 들어가게 된 경위에 대해 심문하는데 왜 그리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겁니까? 도대체 저들이 바라는게 뭡 니까?" 피고측 변호사가 조용히 답했다. "로벗슨 씨, 재판이란 서양장기와 비슷한 겁니다. 승리는 항 상 상대보다 몇 수 더 빨리 읽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법입니다. 이번 검사가 그 점에서 결코 풋내기는 아닙니다. 그들은 이지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재판이 시작하자 마자 따질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신에 시간을 끌면서 우리가 어떤 전략으로 나올 건지를 살핀 겁니다. 그들은 어차피 우리가 결국에는 이지의 변 호를 위해서 로봇의 3원칙을 들고 나오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좋아요, 그게 우리의 결정적 무기니까. 그리고 가장 타당한 변론이기도 하고..." "로봇 공학자에게는 그럴지몰라도 판사에게도 반드시 그러리 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검찰측에서는 곧 이지가 불량 로봇이라 고 주장할 것입니다. 사실 이지는 지구에서 상용화된 최초의 로 봇입니다. 우리는 이지를 대학에서 시험운용 해보려 했습니다. 그래서 래닝 박사가 이지를 노스이스턴 대학에 납품하는데 그렇 게 열성을 보인것 아닙니까? 아마도 검찰측은 대학에서 실험해보 려한 이지의 공공 실용성이 이번 사건의 발발과 함께 실패로 끝 났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게 저쪽편의 전략입니다." "하지만 이지는 결코 불량 로봇이 아니잖소? 이지는 동급 모 델 중 27번째 로봇으로 모든 결함을 수정한 완전무결한 제품이 오." "어떻게 보면 그게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점은 바로 이전의 26대의 로봇에 분명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가 아닙 니까?" "임무에 부적합하다고 판정이 날 정도로 잘못된 로봇은 없었 습니다. 단지 처음으로 상용화되는 양자두뇌 로봇이라 회사에서 좀더 신중을 기한 것 뿐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로봇에 다 로봇 3원칙은 입력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로봇이라도 그 3대 원칙은 충실히 지켰을 겁니다." "그 점은 래닝 박사로 부터 이미 얘기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 지만 문제는 판사가 그 말을 믿어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판사는 로봇 공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고, 단지 자신의 상식과 법률적 지식에 근거해서만 판결을 내리려 할 것입니다. 검찰측이 우리 쪽의 논리에서 약간의 헛점이라도 발견한다면 그는 이를 십분 이 용하려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위험을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로벗슨 씨가 투덜거렸다. "이지를 증인으로 채택할 수만 있다면." 변호사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로봇은 증인으로 설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이지가 왜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되었는 지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수잔 캘빈 박사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그녀의 표정은 붉게 상기되었다. "그러한 동기는 아주 잘 알고 있지요. 바로 누군가 그렇게 명 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누차 말하지만 이지의 이번 동기는 누 군가의 명령이었습니다." "누가 그런 명령을 했다는 겁니까?" 로벗슨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아무도 이런 얘기를 내게 해주지 않다니! 이들은 자신들이 유에스 로봇사의 주인인 듯 행동하고 있구만!' "원고가 그랬을 겁니다." 캘빈 박사의 답이었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단 말입니까?" "이유는 저도 아직 모릅니다. 아마 피해 보상금을 노리고 한 짓일지도 모르지요." "왜 그럼 이지가 그 일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겁니까?" "척 보면 모르시겠어요? 그가 이지에게 함구령을 내린 겁니 다." "그걸 어떻게 안다는 거요?" 로벗슨이 캘빈 박사에게 물었다. "로봇 심리학은 제 전공입니다. 이지가 그 문제에 대해 직접 적 답변을 하려들지 않는다면, 저는 여러가지 유도 질문을 던져 봅니다. 함구령이 내려진 문제에 근접할수록 이지가 대답을 망설 이는 정도가 커집니다. 그가 망설이는 이유는 아마 로봇 제 1법 칙 때문일 겁니다. 그가 대답하는 경우, 인간에게 위해가 가해질 것이라고 누군가 그에게 말한겁니다. 아마도 그 피해 대상자는 명령을 내린 장본인 즉, 닌하이머 교수일겁니다. 그러한 상황에 서 이지는 함구령을 따를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지더러 증언을 하지않으면 유에스 로봇사가 피해 를 볼것이라고 말해주는게 어떻소?" "유에스 로봇사는 자연인이 아니라 법인입니다. 고로 로봇의 제1법칙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미 입력된 명령에 상충 하는 명령을 다른 사람으로 부터 받는다면 이지의 두뇌에 손상이 가해질수 있습니다. 이지의 두뇌를 손상하는 일 없이 주어진 명 령을 번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명령자인 닌하이머 교 수입니다. 그외의 방법을 강구하다가는..." 수잔은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결코 이지가 위험에 빠지도록 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노예 로봇 6 경직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래닝이 나섰다.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로봇이 그러한 일을 절대 저지를수 없 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물론 여러분은 가능하다고 생각할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점 을 이해하고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 즉 피고인 유에스 로봇사 직원뿐입니다. 판사가 피고인 여러분의 증언을 액면 그대 로 받아들일까요?" "우리는 이 방면의 전문가들입니다. 판사도 전문가의 의견은 참고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아무도 판사의 결정에 왈가왈부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전문가의 의견을 배제하고 소신껏 결정을 내리려할 겁니다. 자신의 명예에 먹칠을 해가면서까지 돈을 벌려고하는 닌하이머 교수같은 작자와는 달리 판사는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겁니다. 게다가 판사도 결국에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와 로봇이 잘못하는 경우 중 판사에 게는 후자가 더 그럴듯하게 들릴 겁니다. 고로 이 재판에서 우리 는 상당히 불리한 입장에 처해있는 겁니다." "사람은 잘못을 저지를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복잡다양한 동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가 어떤 짓을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로봇은 분명 예측 가능하고 합리적인 행동만 합니다." "그 점을 판사에게 납득시키도록 해야겠지요." 변호사가 약간 기운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벗슨이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어떻게 하는 건지는 감이 안 잡히는구만." "두고 봐야지요. 분명 힘든 일이지만 그렇다고 미리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이곳에 계신 캘빈 박사님의 도움으로 이 미 몇가지 작전을 준비해 뒀습니다." 변호사는 동석한 로봇 심리학자에게 눈길을 보냈다. 래닝은 두사람의 얼굴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민거야?" 그 순간 법정정리가 입장해서 재판의 속개를 알렸다. 그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이 모든 골칫거리를 가져온 장본인 을 쳐다보았다. 증인석에 자리잡은 사이몬 닌하이머 교수는 머리숱이 적은 편 으로 매부리 코에 주걱턱 때문에 매서운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 다. 그는 얘기를 하다 중요한 대목에 이르러서 반드시 말을 멈추 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습관이 있었다. 심지어 그는 일출에 대 해 말할때에도 '해는, 에... 동쪽에서 뜹니다.'라고 말할 것이 다. 즉, 혹 해가 서쪽에서 뜨는 일은 없는지를 반드시 고려해본 후 말을 마치는 것이다. 검사가 질문했다. "증인은 유에스 로봇사의 임대계약 건에 대해 교수 회의에서 반대한 일이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저는 당시 우리가 유에스 로봇사의, 에, 동기를 완전히 이해 하진 못했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그들의 의도를 믿지 못했습니 다." "그 로봇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리라 생각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그 이유를 기술해 주시겠습니까?" 사이몬은 8년째 '우주 여행과 우주 개척에 따른 사회 긴장 문 제'라는 제목의 책의 집필에 매달리고 있었다. 닌하이머는 완벽 주의자로서 그의 말버릇에 그러한 성격이 배어있었다. 그는 말할 때 뿐아니라 글을 쓸때도 늘 완벽한 정확성을 추구했다. 그런 그였기에 몇번이나 원고를 교정하고도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교정을 볼수록 그의 마음은 더 불편해졌다. 교정부호가 난잡하게 들어찬 원고를 볼때마다 박박 찢어버리고 새로 쓰고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사회학과 강사이자, 곧 부교수가 될 짐 베이커가 닌하이머 교 수를 찾은 것은 원본이 교정작업을 시작한 후 사흘 뒤의 일이았 다. 원래 모두 세 부의 원고가 있었다. 하나는 닌하이머 교수가 교정볼 원고였고, 또 하나는 베이커를 위한 원고였고 나머지 하 나는 보존용 원본이었다. 두사람은 각자 원고를 가지고 교정을 보고 후에 서로 논의를 통해 최종 원고를 작성하기로 했다. 지난 3년간 같은 방식으로 별탈없이 여러 논문을 작성해 왔다. 젊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지닌 베이커가 자신이 교정을 본 원 고를 가지고 와서 말했다. "제 1장을 다 봤는데 타이핑 실수가 몇개 있었습니다." "첫 부분은 늘 그렇지 뭐." 시큰둥한 닌하이머 교수의 답이었다. "지금 한번 보시겠습니까?" 닌하이머 교수가 시선을 들어 베이커를 보고 말했다. "난 아직 교정 작업을 시작하지 않았어.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아서..." "신경을 쓰고 싶지 않다면..." 닌하이머가 마른 입술을 적셨다. "나는 그 작업을, 에, 기계에게 맡길까 생각중이야. 그는 원 래, 에, 교정용으로 제작된 기계니까 시켜도 괜찮을꺼야. 이미 작업 일정도 잡아뒀어." "기계라구요? 이지 말씀이십니까?" "맞아. 그 우스꽝스런 이름을 붙여준 기계말이야." "하지만 교수님은 그 로봇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걸로 아는데 요." "교수중에서 나만 그랬지. 하지만 이제는 나도 그 기계를, 에, 이용해야 될 때가 온 것같아." "그렇다면 저혼자 괜히 1장을 교정하느라 시간낭비한것 같군 요." 부루퉁한 베이커의 말이었다. "낭비한건 절대 아니지. 어차피 그 기계가 한 작업과 자네의 교정본을 비교해볼 생각이니 말이야." "그렇다해도..." "그렇다해도?" "어차피 이지가 하는 작업에 실수는 없을 겁니다. 원래 그렇 게 제작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건 두고 볼 일이지." 닌하이머 교수의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노에 로봇 7 나흘뒤 베이커가 새로운 교정본의 1장을 가지고 왔다. 그는 그것을 이지와 그 주변기기들이 있는 방에서 가져오는 길이었다. 베이커는 아주 흥분해 있었다. "닌하이머 교수님, 그 로봇은 제가 지적해낸 실수들을 다 찾 아냈을 뿐 아니라, 제가 놓친 여나믄개의 오류들을 추가로 찾아 냈습니다. 그것도 단 12분안에 말입니다." 닌하이머는 여백에 깔끔한 글씨로 교정이 되어 있는 원고를 쓰윽 쳐다봤다. "그래도 자네나 내가 하는 만큼 완벽하지는 못해. 나라면 스 즈끼의 '저중력 상태가 신경구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문을 각주에 추가했을걸세." "사회학 학회지에 실린 논문 말씀이십니까?" "음." "그건 로봇이 수행할수 없는 작업입니다. 로봇이 그런 참고문 헌까지 알고 있을 수는 없지않습니까?" "그건 자네 말이 맞아. 사실 내가 각주를 여기 작성해 뒀는 데, 그 로봇이 각주를 제대로, 에, 처리해 내는지 한번 보고싶 군." "잘 해낼겁니다." "그래도 직접 확인하고 싶어." 닌하이머 교수는 어렵사리 이지와의 면담시간을 얻어냈다. 워 낙 이지의 작업량이 많아 저녁 늦게 약 15분 정도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15분도 충분했다. 이지는 각주의 처리방식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닌하이머는 처음으로 로봇을 마주하게 되어 불안한 마음을 감 출수가 없었다. 그는 이지에게 겨의 무의식적으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내 논문이 마음에 들던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닌하이머 교수님." 이지가 눈동자의 역할을 하는 광소자를 반짝이며 대답했다. "내이름을 어떻게 아는가?" "추가 내용을 제게 가져다 주셨다는 것과 책에 대한 저의 느 낌을 물어왔다는 것은 선생님이 그 원고의 저자임을 뜻합니다. 그리고 저는 원고의 상단에 적힌 저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 다." "흠. 그러니까, 에, 논리적으로 추론해낸 거로군. 좋아. 그럼 이 글에 대한 솔직한 평은?" "작업하기 아주 즐거웠습니다." "즐거웠다고? 에, 감정이 없는 기계가 어떻게 그런걸 느끼는 가?" "교수님의 글이 저의 논리회로에 잘 들어맞았습니다." 이지가 설명했다. "박사님의 글을 이해하는 것이 저의 두뇌 회로에 별 무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러한 상태를 '즐겁다'는 것으로 해석합 니다." "어떻게 내 책이 읽기에 즐거웠다는 건가?" "박사님의 글은 무기 물질이나 수학적 기호가 아니라 인류의 문제를 다룹니다. 교수님의 논문은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를 증진 하고 인류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제는 양자두뇌에 입력되어 있는 로봇의 존 재이유와 일치하고 그래서 읽기에 '즐거웠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교수님." 약속된 15분이 다 지났다. 닌하이머 교수는 이지와의 면담을 마친 즉시 대학 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 폐관하려는 도서 관에 들어가 그는 로봇 굣학 입문서를 몇권 대출했다. 그후 가끔 교수가 추가 원고를 이지에게 보내왔다. 이지가 교 정을 본 원고는 차례차례 출판사로 넘겨졌다. 처음 한동안은 인 쇄에 들어가기 전에 이지의 교정본을 교수가 검토해 보았으나, 시간이 지나자 그럴 필요를 못느낀 교수는 바로 인쇄소로 원고를 넘겼다. 하루는 베이커가 이에 대해 약간 볼멘 소리를 했다. "이제 제가 별로 쓸모없어 진것 같군요." "무슨 소린가, 이제야 말로 자네의 개인 연구를 시작할 여유 가 생긴거 아닌가." 닌하이머는 읽고있던 사회과학개론 책에서 눈도 들지 않고 말 했다. "하지만 저는 아직 마음이 안놓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인줄 알 지만 여전히 이지가 하는 교정에 대해 불안감이 듭니다."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하는군." "며칠전에는 이지가 출판사에 보내려는 원고를 중간에서 가로 채서 한번 읽어보았습니다." "뭐라고?" 닌하이머 교수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의 손에 들여있 던 책이 탁 소리나게 닫혔다. "자네가 그 기계의 작업을 방해했단 말인가?" "잠깐 읽어봤을 뿐입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 그 로봇이 '잔인무도한'이라는 단어를 '무자비한'으로 바꾼걸 보았 습니다. 문맥상 그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닌하이머 교수가 이 말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더니 다시 물었 다. "자네 생각은?" "이지가 교정한게 괜찮아 보여서 그냥 뒀습니다." 닌하이머 교수는 자신의 조교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 위 해 몸을 돌렸다. "이것봐. 난 자네에게 두번 다시 그런 행동을 하지말라고 충 고하고 싶군. 내가 일단 그 기계를 사용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 상, 나는 그 기회를, 에, 최대한 활용하고싶어. 기껏 자네 시간 을 벌어주었더니 쓸데없이 기계가 하는 작업을 감독하고 있구만. 그런일에 시간을 허비한다면 애초에 기계를 사용하는 의미가 없 어지지 않겠나? 나는 이제 자네가 자신의 일에 더 충실하기를 바 래.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닌하이머 교수님." 풀죽은 목소리로 베이커가 답했다. '사회적 긴장'의 초판본은 5월 8일 교수의 연구실에 도착했 다. 그는 책을 한번 주욱 훑어보았다. 여기저기 내용을 한번 살 펴봤지만 별 문제는 없는 듯 했다. 그는 곧바로 책을 책장에 갖 다 꽂았다. 나중에 그가 진술한 바에 따르면, 이지가 교정 작업을 해서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는 동안, 그는 새로운 연구에 착수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책에 대해서는 이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심 지어 베이커까지도 닌하이머 교수에게 한번 잔소리를 들은 후 자 신의 연구에 집중하느라 책이 나온 뒤 교수에게 책을 증정본을 한권 얻을 생각도 못했다. 사건이 터진 것은 한달이 넘게 지난 6월 16일의 일이었다. 닌 하이머 교수가 걸려온 영상 전화를 받고는, 화면을 보고 깜짝 놀 랐다. "스피델! 이제 웬일인가? 학교로 다시 돌아온건가?" "아니, 아직 클리블랜드에 있네." "그래? 그런데 웬일인가. 그간 연락한번 없더니?" "지금 한참 자네의 새책을 읽고있다네. 그런데 닌하이머, 이 게 도대체 무슨 변고인가? 자네 갑자기 머리가 이상해 진거 아닌 가?" 노예 로봇 9 닌하이머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뭐, 잘못되었나?" "잘못되었나구? 562페이지에 보니 말이야. 자네가 내 책을 제멋대로 해 석해서 인용했더만. 내가 언제 범죄형이란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정작 범죄의 근원은 법 집행 기관이라고 말했나? 이것봐, 내가 읽어보지..." "잠깐만! 잠깐만!" 놀란 닌하이머가 허둥지둥 그 페이지를 찾으며 소리쳤다. "내가 한번 보지. 어디... 오, 이런 세상에!" "어떤가?" "스피델,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할수가 없군. 나는 결코 이런 문장을 쓴 일이 없어!" "하지만 그렇게 책에 나와있지 않나. 게다가 의미가 왜곡된 문장은 거기 뿐만이 아닐세. 690페이지를 한번 읽어봐. 이파델이 자네가 그의 연구결과를 이렇게 엉망으로 정리해 놓은걸 보고 뭐라고 하겠나? 이 책에는 이런 엉터 리같은 문장들이 수두룩해! 자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 으나 나라면 당장 이 책을 각서점에서 회수하겠네. 그리고 다음번 학회 총 회때 자네는 이번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해명해야 할 것이네!" "이봐, 스피델. 내 말을 좀..." 그러나 닌하이머 교수가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스피델은 전화를 쾅하 고 끊었다. 잔상이 사라져가는 화면을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던 교수는 책을 펼쳐들고 처음부터 붉은 줄을 쳐가며 다시 숙독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지를 찾아갔다. 자신의 울화를 억누르기 위해 그는 무던히 노력 했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책을 이지에게 넘 겨주며 물었다. "562,631,664,690 페이지를 한번 읽어봐." 이지가 네번 책장을 쓱 쳐다봤다. "예. 닌하이머 교수님." "이것은 나의 원본에 있던 내용이 아닌데?" "예, 아닙니다." "자네가 바꾼 것인가?" "예, 이것들은 모두 제가 교정한 내용입니다." "왜 그랬나?" "선생님이 쓰신 원고 내용은 특정 집단의 인간들에게 감정적 피해를 줄 수 있는 소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방향 으로 문장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왜 감히 그런 짓을 한건가?" "로봇 제1법칙 때문입니다. 저는 인간이 고통 받는 것을 방관할 수 없습 니다. 교수님의 학계 내 저명도를 고려해 볼 때 분명 많은 사회학들이 이 책을 읽고 또 그 내용에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교수님이 지목하신 특정 부류의 사람들은 교수님의 견해에 의해 피해를 입게 될 것입 니다." "하지만 네가 내용을 고치는 바람에 이제는 내가 피해를 보게 되었는 데?" "다수의 피해자와 소수의 피해자 가운데 저는 소수의 희생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치밀어오는 분노로 닌하이머 교수는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지경이 되었 다. 누군가 이러한 사태에 대해 분명 책임을 져야했고, 그 대상은 바로 유에 스 로봇 사였다. 이러한 진술에 대해 피고측의 긴장은 약간 고조되는 듯 했다. 이에 담당 검사는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그럼 로봇 EZ-27호가 스스로 이번 사건의 원인은 로봇 제1원칙에 있다 고 분명히 밝혔단 말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즉 로봇으로서 다른 대안이 없었다고 말입니까?" "예." "그렇다면 이 로봇의 기능은 문법적 오류 교정이 아니라 인간이 쓴 글을 로봇의 관점으로 다시 쓰는 것이로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 대목에서 변호인은 해당 질문에 대해 증인은 판단할 수 없다는 이유 에서 즉각 이의를 제기했다. 판사는 이러한 질문을 한데 대해 검사에게 형 식적인 주의를 주었으나 이미 대세는 원고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변호인은 반대심문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동안의 휴정을 요청했고 이러한 요구는 곧 받아들여졌다. 변호사는 수잔 캘빈 박사에게 낮은 소리로 물었다. "방금 닌하이머 교수가 진술한 대로 이지가 로봇 제1원칙에 따라 이런 잘못을 저질었을 가능성이 실제로 있다고 보십니까?" 캘빈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아닙니다.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닌하이머 교수의 마지막 부 분 진술은 분명 위증입니다. 이지는 결코 어려운 사회학 논문의 내용을 스 스로의 판단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책의 내용으로 인해 어떤 부류의 사람 들이 피해를 입을것인가 이지가 독자적으로 판단했을리는 없습니다. 로봇 의 양자두뇌는 그러한 추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박사님의 얘기를 로봇의 논리 과정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 과연 믿어줄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힘들겠지요. 그러한 증거를 제시하기란 상당히 힘든 일입니다. 하 지만 우리의 계획을 그대로 진행시키면 승산이 있습니다. 우리는 닌하이머 교수의 위증을 반드시 밝혀내야 합니다." "좋습니다. 박사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판사가 의사진행봉을 두들겨 재판의 속개를 알렸다. 닌하이머 교수가 다 시 증인석에 앉았다. 그는 승리를 확신하는 듯, 반대심문을 받게되는 이 시 점에도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변호사가 증인석으로 걸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증인은 6월 16일 스피델 교수가 전화하기 전까지는 이러한 책 내용의 변화를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로봇 EZ-27호가 교정을 본후 전혀 내용을 확인해 본 일이 없다는 겁니 까?" "처음에는 확인해 봤습니다. 하지만 곧 그것이 시간낭비라는 걸 알게되 었습니다. 저는 유에스 로봇사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겁니다. 그 로봇 은 주로 책의 후반부에 가서 내용을 바꿨었습니다. 저는 그때쯤에는 그 기 계도 사회학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증인이 생각한 바에 대해서는 진술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일어난 사실만 말하십시오. 베이커 씨가 초반부 한가지 내용의 수정을 얘기 한 바 있습니다. 그 증언 기억납니까?" "예. 베이커가 지적했듯이 어떤 페이지에서 단어를 하나 수정했었습니 다." 변호사가 다시 물었다. "증인은 1년이 넘도록 로봇에 대해 불신하고 또 처음에는 혼자서 반대투 표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증인은 어느날 갑자기 8년간에 걸친 노작을 이 기 계의 손에 완전히 맡겨버렸습니다.이 점 약간 이상하지 않습니까?" "별로 이상할것 없습니다. 저는 단지 그 기계를 십분 활용해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교정 내용을 전혀 검토도 하지 않으셨다는 겁니까?" "내가 말했듯이 나는 유에스 로봇사를, 에,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료 베이커 교수가 로봇의 작업을 검토하려 하자 그렇게 질색 을 하고 반대하신 겁니까?" "질색을 한건 아닙니다. 단지 나는 그에게 자신의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 하지 마라고 충고했을 뿐입니다. 적어도 당시에 나는 그러한 확인 작업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단어 하나 정도 바꾼 것이 크게 중요한 문제라고는..." 변호사가 상당히 냉소적인 투로 말했다. "한낱 기계가 감히 교수님 원고의 단어를 수정한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대한 분이 어떻게 베이커 교수의 행동에는 그토록 민감한 반응을 보이셨 습니까?" "결코 민감한 반응을 보인건 아닙니다." "책이 인쇄되어 나왔을때 베이커 교수에게는 증정본 한부 안주셨지요?" "그냥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연구에 신경을 뺏기는 통에 학교 도서관에도 책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닌하이머 교수는 슬쩍 미소를 흘렸다. "보통 교수들의 건망증은 유명하지 않습니까?" "1년 이상 아무 이상이 없었던 로봇 EZ-27호가 증인의 책을 교정하면서 처음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은 약간 이상하지 않습니까? 로봇이 교정을 본 그 수많은 책 가운데 딱 한권이 문제가 되고 하필이면그 책의 저자가 로봇 에 대해 가장 거세게 반대한 교수님이라는 사실말입니다. 이것이 그냥 우연 의 일치입니까?" "그 기계가 작업한 책들 중에 내 책을 빼고는 다 수학이나 자연과학을 다룬 것이었습니다. 심오한 사회학을 다루면서 양자두뇌에 입력된 로봇 3원 칙이 그 기계의 논리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지요." "그동안 증인은 몇번이나 로봇 공학에 대한 상당히 잘 아는듯한 진술을 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 한권 빌려보고 어떻게 그렇게 잘아십니까?" "글쎄요. 제가 로봇공학에 대한 책을 본 이유는, 에, 순전히 호기심 때문 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책을 읽은 덕에 로봇이 어떻게 증인의 책내용을 왜곡하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있게 된거군요." "그렇습니다." "아주 편리하군요. 하지만 혹 로봇 공학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다른데 있었던 것 아닙니까? 이를테면 증인의 어떤 목적을 위해 로봇을 조작하려고 말입니다." 노예 로봇 9 이 질문에는 짐짓 냉정한 척하던 닌하이머도 얼굴을 붉혔다. "그건 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이같은 반박에 변호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로봇이 잘못 교정했다는 얘기는 거짓 진술이고 원래 교수의 원고 가 그렇게 씌어져 있었던 것 아닙니까?" 닌하이머는 흥분해서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다. "그것은 어, 어, 완전히 허튼 소리입니다. 나는 당시 어, 어, 로봇의 교정 본을..." 닌하이머 교수가 심하게 말을 더듬자 검사가 일어나 잽싸게 판사에게 말 했다. "판사님, 허락만 해 주신다면 당시 닌아히머 교수가 로봇 EZ-27호에게 준 원고와 로봇의 교정본을 함께 증거로 제시하겠습니다. 또 필요하다면 변 호인이 지금 이 자리에서 두 원고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변호사는 손을 내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 원고는 나중에라도 증거로 채택될수 있을 겁 니다. 아마 그 원고들에는 증인이 주장하는 대로 내용의 차이가 나와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문제는 증인이 당시 베이커 교수에게 주었던 원고를 현 재 갖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베이커 교수에게 준 원고요?" "예! 증인은 베이커 교수에게도 교정볼 원고를 한부 주었다고 진술했습 니다. 만약 갑작스런 건망증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법정 서기에게 그 부분의 진술을 낭독하게 할수도 있습니다. 교수들은 건망증이 심하다고 하셨지요?" "아닙니다. 기억 납니다. 하지만 기계가 교정을 본 판국에 베이커 교수의 교정원고가 왜 필요합니까?" "그래서 그 원고는 소각해 버리셨나요?" "아닙니다. 그냥 쓰레기 통에 버렸습니다." "소각해 버린거나 쓰레기 통에 버린거나 그게 그거 아닙니까? 결국 증인 은 그 문서를 폐기해 버렸다는 얘기아닙니까?" "그게 뭐 잘못되었습니까?" 자신없는 닌하이머의 말이었다. "뭐 잘못되었냐구요?" 벽력같은 변호사의 말이었다. "잘못된 건 없지요. 다만 이제와서 증인이 로봇에게 준 원고의 내용과 베이커 교수에게 준 것을 비교 확인해 볼 길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 입니다." 검사는 벌떡 일어나 이의를 제기했다. 판사는 목을 길게 빼고 최대한 근 엄한 표정을 짓고 변호사에게 물었다. "변호인이 방금 한 발언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변호사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물증은 없습니다. 하지만 증인의 진술중에 나온 로봇에 대한 극심한 반 감, 갑작스런 로봇 공학에 대한 관심, 타인의 교정 작업 확인에 대한 신경질 적 반응, 출판 직후 저서에 전혀 무관심했던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변호인." 판사가 약간 화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우리가 이곳에 변호인의 추측을 듣자고 온게 아니오. 변호인은 사실에 관한 심문만 하시오. 변호인의 절박한 심정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증 인의 명예를 손상시킬수 있는 발언을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만약 방금한 발언을 뒷받침할 물적 증거가 있다면 계속 심문해도 좋지만 그렇지 못하다 면 근거없는 인신공격성 발언은 중지하기 바랍니다. 심문할 내용이 또 있습 니까?" "아니오, 없습니다." 로벗슨은 자리로 돌아오는 변호사에게 물었다. "아니 왜 그런 쓸데없이 손해볼 소리를 한겁니까? 이제 판사는 완전히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말았지 않았습니까." 변호사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중요한 것은 닌하이머 교수가 적쟎이 당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 가 헛점을 보였다는 것은 내일 우리의 작전이 성공할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 다." 옆에 앉아 있던 수잔 캘빈 박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검찰측의 나머지 증인 심문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베이커 박사가 증인으로 채택되어 닌하이머 교수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했다. 스피 델 교수와 이파티에프 교수 역시 증인석에 서 자신들이 이지의 잘못된 교정 으로 입게된 피해에 대해 진술했다. 그들은 또한 이번 사건으로 닌하이머 교수의 학자로서의 명예 역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고 증언했다. 원고가 제출한 교정 전후의 원고와 출판본이 증거로 채택되었다. 변호인 측은 그날 더 이상 반대 심문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판사는 다 음날꺄지 휴정을 선포했다. 이틀째 재판이 시작되자 변호인 측은 바로 판사에게 청원을 내었다. 내 용인 즉슨 사건 당사자인 로봇 EZ-27호가 재판절차를 참관할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검찰측은 즉각 이의를 제기ㅎ고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를 함께 가까이로 불렀다. 검사가 흥분해서 말했다. "이것은 명백히 불법적인 요청입니다. 로봇은 어떤 상황에라도 공공 건 물에 입장할수 없습니다." "재판에 관련있는 모든 당사자에게 있어 이 법정은 분명 열린 공간입니 다." "이미 사고를 저지른 바 있는 커다란 기계가 법정에 등장한다면 원고는 엄청난 불안감을 느낄 것입니다." 판사는 이같은 검사의 주장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그는 변호인에게 몸을 돌려 약간 딱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 요청을 하게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로봇 EZ-27호가 단독으로는 절대 그런 행위를 할수 없다고 저희들은 믿습니다. 고로 로봇에게 몇가지 시범을 시켜보일 작정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판사님. 유에스 로봇사가 피고인 상황에서 유에 스 로봇 측이 보여주는 시범에 우리는 법적 신빙성을 부여할 수 없습니다." "판사님, 법적 신빙성의 여부는 판사님 재량에 달린 것이지 원고측이 가 타부타 할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권위를 새삼 의식한 쉐인 판사가 말했다. "내가 알기로도 그렇소. 하나 로봇이 법정에 등장한다는 것은 법적 문제 발생 소지의 여부가 있소."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본 법정에서 만큼은 판사님의 결정이 모든 법 률에 우선해서 적용됩니다. 그리고 그 로봇없이는 저희의 입장을 제대로 변 호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로봇을 이곳까지 실어나르는 것도 큰 문제일텐데..." "판사님,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당 로봇은 현재 법원 외부에 주차된 트럭에 안전하게 실려 있습니다. 로봇 EZ-27호는 포장 된 상태로 있고, 두사람의 경비원이 현재 지키고 있는 중입니다. 트럭의 문 은 안전장치가 완벽하게 되어있습니다. 저희는 로봇 운반 및 보관에 대한 연방 정부의 규정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습니다." 판사는 약간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변호인이 재판부의 결정을 미리 지레짐작하고 사전에 준비를 마친 것 같군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그냥 돌려보내면 됩 니다. 판사님이 어떤 결정을 내리시더라도 바로 따르기위해 만전의 준비를 기울인것 뿐입니다." 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 법정은 변호인의 요구를 수락합니다." 곧 커다란 상자가 법정으로 운반되어 왔고 두사람의 인부가 포장을 풀었 다. 법정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 졌다. 노예 로봇 마지막회 수잔 캘빈은 두꺼운 포장재가 하나하나 풀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 는 손을 앞으로 내밀고 말했다. "이리 나와, 이지." 로봇은 그녀를 보고 커다란 금속 팔을 내밀었다. 캘빈 박사보다 키가 훨 씬 더 큰 로봇이 박사를 따라가는 모습은 마치 엄마를 따라가는 아이같았 다. 어떤 사람이 나즈막이 킬킬거렸으나 수잔 캘빈 박사의 매서운 눈길에 곧 잠잠해 졌다. 이지는 법정 정리가 가져온 의자에 조심스레 앉았다. 의자는 이지의 무 게에 불평하듯 삐걱거렸으나 제대로 버텨나갔다. 변호사가 말했다. "재판부의 요청이 있으면 이 로봇이 바로 사건의 원인 제공자인 로봇 EZ-27호라는 것을 언제든 증명해 보일 것입니다." "좋습니다." 판사의 흔쾌한 답이었다. "이제 저는 첫 번째 증인으로 사이몬 닌하이머 교수를 다시 부르고 싶습 니다." 변호사의 엉뚱한 요청에 법정 정리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판사를 보았 다. 판사 역시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지금 피고측 증인으로 원고를 부르겠다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판사님." "변호인은 증인에 대한 반대 심문을 마쳤지않습니가? 또다시 증인에 대 한 인신공격성 심문을 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아닙니다. 단지 사실을 좀더 알아보고 싶어 그러는 겁니다. 간단한 질문 몇가지면 됩니다." "좋소. 그렇다면 변호인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소. 증인을 부르시오." 닌하이머는 다시한번 증인석에 앉았다. 법정 정리는 그에게 어제 한 선 서가 오늘도 유효하다는 말을 일러주었다. 변호사는 사람좋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증인은 피고측에 손해배상금을 75만불 요청했습니다." "에, 예... 그렇습니다." "상당히 많은 금액이군요." "상당히 큰 피해를 입었으니까요." "그렇게 큰 피해는 아니지 않습니까? 문제가 되는 문장은 책의 아주 일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출판되는 모든 책이 다 완벽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닌하이머를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저는 이번 저서에 학자로서의 명예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 도 학계의 인정을 얻기는커녕 사람들의 조롱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간 쌓 아올린 학자로서의 명성은 이제 온데간데없어지고, 나는 로봇에게 저서 감 수를 맡긴 얼간이가 된 겁니다. 이번 재판의 결과에 상관없이 나의 학자로 서의 경력은 끝장났습니다." 변호사는 교수가 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는 동안 묵묵히 자신의 손끝 만 보고 있었다. 변호사가 달래듯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닌하이머 교수님, 앞으로 교수님이 남은 평생 교수로 봉직하면 서 받게될 급료의 총액은 기껏해야 15만불 정도입니다. 75만불이면 좀 지나 친 요구아닌가요?" 닌하이머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양 ㅎ분된 어조로 답했다. "내가 보상받고자 하는 것은 남은 내 일생이 아닙니다. 이번 사건을 계 기로 나는 길이길이 어리석은 사회학자로 기억될 것입니다. 내가 평생 이룩 한 성과는 뒷전에 처지고, 나의 우매함만이 역사에 남게 될 것입니다. 게다 가 내가 죽고 난 후에도 후세 사람들중에는 바로 지금 당신처럼 내가 돈을 바라고 이런 짓을 했을거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거요. 나는 이제 영원히 사기꾼이라는..." 로봇 EZ-27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바로 이순간이었다. 옆에 앉 아있던 수잔 캘빈 박사는 마치 이같은 일을 기대했던양 이지의 갑작스런 움 직임에 아무런 제동을 걸지 않았다. 그녀는 담담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고, 변호사가 나즈막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지는 기계치고 듣기좋은 음성을 갖고 있었다. "지금 본 법정에서 문제가 되는 내용을 삽입한 것은 바로..." 7피트나 되는 로봇이 뿜어내는 금속성 위엄에 법정안의 모든 사람은 기 가 질려 있었다. 심지어 검사마저도... 그는 로봇이 법정 내 발언권이 없다는 사실을 제기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곧 검사가 사태를 수습하려고 나섰을 즈음, 때는 이미 늦었다. 왜냐하면 닌하이머 교수가 얼굴이 시뻘개져서 이지에게 고함을 치고 난 후였기 때문 이다. "닥쳐! 이 문제에 대해 너는 입닥치고 있으라고..." 교수는 황급히 말을 삼켰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검사가 잽싸게 재판의 무효를 요구하고 나섰다. 판사는 의사진행봉을 두들겼다. "조용하시오. 물론 분명 무효 심리를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나는 법적 정의를 위해 닌하이머 교수가 방금 자신의 발언을 해명할 것을 요구하 는 바이오. 분명 증인은 로봇에게 어떤 사안에 대한 함구령을 내린 것 같은 데, 그 내용을 사실대로 진술하시오. 도대체 어떤 일에 대해 침묵을 지키라 는 것이오, 증인?" 닌하이머 교수는 할말을 잃은채 판사를 묵묵히 바라봤다. 쉐인 판사가 다시 무게를 실어 말했다. "로봇 EZ-27호에게 한 명령의 내용을 진술하시오." "판사님..." 닌하이머는 목이 콱 잠겨 말을 이을수가 없었다. 판사의 언성이 날카로와졌다. "당신 자신이 로봇에게 문장의 수정을 명하고 그 사실에 대해 입을 다물 라고 한 것이오?" 감사가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나왔다. 이떼 증인석에서 갑자기 닌하 이머 교수가 외쳤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렇다구요!" 닌하이머는 쏜살같이 증인석을 내려와 출구족으로 빠져나가려다 경비에 게 팔을 잡혔다. 그는 옆의 빈 의자에 푹 주저앉아 얼굴을 감쌌다. 쉐인 판사가 말했다. "로봇 EZ-27호를 법정으로 데려온 것은 변호사의 어떤 의도였던 것 같 군요. 비록 그 속임수로 인해 진실은 밝혀졌지만 변호인의 행동은 법정모독 죄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두기 바랍니다. 그리고 원고는 분명 자신의 명예 를 의도적으로 훼손하고 이에대한 피해보상을 피고측에 청구했습니다. 이는 중대한 사기죄에 해당하므로..." 물론 그 재판의 승리는 피고측에 돌아갔다. 수잔 캘빈 박사는 대학 연구동에 있는 닌하이머 교수의 연구실에 직접 방문하겠노라 했다. 함께온 회사 연구원들은 박사가 닌하이머 교수를 만나 는 동안 같이 있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말에 박사는 코웃음을 쳤다. "그 사람이 내게 해꼬지라도 할까봐? 걱정말고 여기서 기다려요." 닌하이머는 누구에게 시비조차 걸 수 없을 정도로 풀이 죽어 있었다. 그 는 재판의 내용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떠나기위해, 허위허위 짐을 꾸 리고 있었다. 그가 캘빈 박사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당신네 회사가 나를 상대로 소송을 걸 예정이라면 꿈깨라고 말해주고 싶소. 당신네 들이 손해보상을 청구해봤자 내게는 지급할 돈이 한푼도 없으 니까... 게다가 이제는 일자리도 없고, 학자로서의 명예도 없소. 소송비용을 치를 돈조차 내겐 없소..." "누굴 탓하고 누굴 원망하겠어요? 이 모든 게 당신이 시작한 일인데... 어쨌든 나는 당신에게 소송을 걸 겠다고 온게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유에 스 로봇사는 위증죄로 당신을 기소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재판부에 확실히 밝혀두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속좁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아, 그래요? 덕분에 내가 자유롭게 지내고 있는거군요. 대단한 수수께끼 가 하나 풀렸습니다, 그려." 다시 교수가 씁쓸한 표정으로 발했다. "이제 당신들이 원하던 대로 되었으니 승자의 아량을 보여주겠다는 겁니 까?" "물론 우리가 원하던 대로 된 것도 있지요. 먼저 이 대학이 이지를 계속 고용하기 위해 더 비싼 임대료도 지불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고, 다른 연구 기관에서도 이지를 임대하려고 섭외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번 일이 알려지면서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날 염려도 그만큼 줄었지요." "그럼 날 찾아온 이유가 뭐요?" "아직 내가 원하는 모든 답을 얻은 것은 아니니까요. 나는 당신이 그토 록 로봇을 혐오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싶어요. 비록 당신이 이번 소송에 서 이겼더라도 당신은 학자로서의 명예를 잃게 되는데 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였는지 아직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단순히 로봇에 대한 증오로 이런 일 을 벌인겁니까?" "캘빈 박사, 별안간 사람의 심리로 전공을 바꾼거요?" 닌하이머 교수가 조롱하듯 물었다. "로봇의 미래에 관련된 일이라면 사람의 심리라도 내 관심의 대상이 되 지요. 그리고 나는 어느정도 인간 심리학도 배웠습니다." "나를 속여 넘길수 있을 정도로 말이지요." 박사는 가시돋힌 말을 애써 무시했다.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캘빈 박사가 담담히 말했다. "정작 어려운 것은 로봇의 안전을 보장할수 있는 해결 방법을 찾는 일이 었지요." "참 그렇지요, 당신네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의 안녕이 아니라 로봇의 안 전이었지요." 교수는 박사를 차가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박사는 상대의 적개심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렇게 보일수도 있지요. 하지만 만약 당신이 로봇에 대해 좀더 잘알았 더라면 로봇에 대한 개선 노력이 곧 인류의 번영과 복지에 직결된다는 점을 이해할겁니다." "나도 로봇에 대해서는 알만큼 압니다!" "교수님의 지식은 책 한 권에 한정된 것입니다. 당신은 로봇의 약점을 찾는데 주력했습니다. 당신은 그 얄팍한 지식을 통해 로봇의 기억을 삭재할 방법은 없다는 것을 알아냈지요. 하지만 대신 로봇에게 함구령을 내릴수 있 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무덤을 파는 격이었지만 말입니다." "로봇이 침묵을 지키는 바람에 오히려 사실을 추측해 내기가 쉬웠다는거 요?" "그것은 추측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흔적을 숨기는데 서툴렀지 요. 그 흔적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것을 법정에서 증명하는 일어었습니다. 당신의 로봇 공학에 대한 무지는 궁극적으로 우릴 돕는 셈이 되었습니다." "왜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거요?" "교수님이 로봇을 제대로 이해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잘못된 교정문제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면 당신이 실직하게 된다고 로봇을 협박했습 니다. 이지는 명령자인 인간에게 해를 끼칠수 없기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했습니다. 만약 유에스 로봇사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이지에게 무리한 요 구를 했다면 자칫 그의 양자 두뇌 회로를 파괴시킬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증인석에서 자신이 처한 더 큰 위험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바로 당 신의 명예가 대대에 걸쳐 실추될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지는 당신이 맞 게된 실직 이상의 더 큰 위험을 막기 위해서 자신에게 내려진 함구령까지 어겨가며 당신을 변호하려 했지요." "맙소사..." "이지가 말문을 연 이유를 이재 알겠습니까? 이지가 나선 이유는 당신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변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은 이지가 말문을 열었을 때 로봇이 스스로 변호하려고 사실을 밝히리라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지는 로봇 제 1원칙을 지키기위해 거짓말까지 하려 했습니다. 이 지는 거짓말이 로봇의 두뇌회로에 손상을 가할수도 있는 행위라는 것도 알 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에게 어머니와 같은 유에스 로봇사가 입게될 손해를 무릅쓰고라도 당신을 도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로봇의 의도 를 오해하고 외려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당신은 로봇을 증오하기만 했지, 로 봇의 사고를 이해하려 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당신의 함정은 바로 로봇에 대한 당신의 무지였습니다." 닌하이머 교수가 차갑게 말했다. "당신의 그 잘난 로봇이 언젠가는 당신에게 덤벼들 날이 올거요." "쓸데없는 걱정을 다하시는군요. 이제 내가 알고싶은 것은 당신이 왜 이 런 일을 꾸몄는가 하는 것입니다." 닌하이머가 씁쓸하게 말했다. "위증죄에서 나를 풀어준 댓가로 나의 범행동기를 밝히라는 거요?" "그건 마음대로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나중에 나같은 사람이 또 나타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그러는 거요? 더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그럴수도 있지요." "좋소... 하지만 내 말이 당신네에게 별 도움은 안될것이오. 왜냐하면 당 신들은 인간의 심리를 완전히 이해할수 없기 때문이오. 당신들에게는 차라 리 기계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오. 왜냐하면, 당신들 자신이 바로 기계니 까... 인간의 탈을 쓴 기계말이오." 교수는 가만히 숨을 가다듬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았다. 이제 는 조심해서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난 250년간 로봇은 각 분야에서 인간의 노동을 대치해왔소. 이제 사 람의 손에서 창조되던 모든 제품은 자동기계에 의해 생산되고 있고... 당신 네는 그것을 진보라고 부르겠지. 이제 기계는 도예공의 일까지 대신 하고 있소. 사람이 영감을 떠올리고 이를 입력하면 기걔가 나머지 작업을 알아서 하지요.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영감을 떠올리는 과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흙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다듬는 과정 아닌가요? 우리의 사고활동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바로 육체노동아닌가요?" "로봇이 교수님같은 사회학자의 역할까지 대신 할수는 없습니다." "아니, 나역시 노동자요.바로 책을 쓰고 논문을 발표하는 지식 노동자 말 이오. 이제껏 책을 쓰는 모든 과정은 작가의 손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작가가 초고를 쓰고, 다시 교정을 보고, 각고의 노력 끝에 퇴고를 마치는 겁니다. 한권의 책이 나오는 과정에 작가는 자신의 글을 백번은 대하게 되는 법이 오. 이러한 교정 작업이 괴롭고 단순한 과정이기는 하나 그것 역시 작가에 게는 가치있는 노동이오. 하지만 이제 당신네 로봇은 단순작업이라는 이름 을 붙이고 교정작업을 대신하겠다 합니다. 우리의 손에서 노동을 앗아가는 겁니다." "그럼 타자기나 금속활자는 어떡합니까? 인간의 수고를 덜어준 모든 기 계문명을 이제 버리고 다시 중세로 돌아가자는 겁니까?" "사무기기가 인간에게서 노동의 수고를 덜어준 것도 사실이오. 하지만 이제 당신네 로봇은 인간에게서 사고의 즐거움까지 앗아가게 될 것이오. 지 금은 당신네 로봇이 교정을 보지만 나중에는 직접 저술활동까지 하려고 들 것이오. 골치아픈 각종 연구활동이나 철학적 고찰의 수고까지 로봇이 대신 하게 된다면 우리네 학자들은 어떻게 되겠소? 우리가 하는 결정은 로봇에게 어떤 명령을 내릴 것인가에 국한 될것이오. 생각해보시오. 그것이 과연 우리 가 꿈꾸는 이상향인가를... 나는 미래 인류를 위해, 나의 학자적 명예를 희생 해서라도, 당신네 계획을 막아야 했소." "당신의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로서는 달리 방안이 없었소." 캘빈 박사는 교수의 연구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든 것을 잃게된 닌 하이머 교수에게 박사는 어떤 감정도 느낄수 없었다. 하지만 돌아서는 그녀의 마음은 처음보다 더 무거웠다. 거위의 간 아이작 아시모프 이 글을 대하는 독자 여러분에게 이름을 밝힐 수는 없는 것이 내 입장이다. 이해해주기 바란다. 내가 원래 무슨 소설작가는 아니다. 이따금씩 학술정보지에 글을 몇 편 올리기는 했지만 이렇게 과학소설잡지에 글을 올린다는 것 은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씨의 이름을 빌어 이 글을 싣게 되어 영광이다. 많은 작가 중에서 하필 아시모프씨에게 대필을 부탁한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아시모프씨는 생화학을 전공한 이학박사 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 도 어느 정도는 알아들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는 이전에 비슷한 주제의 글을 두편 정도 쓴 적이 있으므로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 가 그에게 그리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대단한 거위를 처음 만난 영광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소 유권이 국가로 양도되기 전에 그 거위의 주인은 텍사스 사는 이안 앵거스 맥그리거라는 사람이었다.(사정상 등장인물의 이름과 지명 등을 바꾸었다. 혹시 현실과의 연관을 캐더라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면화를 재배하던 맥그리거씨는 밭에다 거위들을 풀어 길렀다. 거 위들은 잡초만 뽑아먹고 면화는 건드리지 않았기에 그는 자신의 거위들을 자동제초기라 불렀다. 모이가 필요없는 거위사육법이라 고 자랑했다. 언젠가 유기농법을 하시는 분들에게서 비슷한 얘기 를 들은 기억이 있다. 맥그리거는 이 거위들이 거름, 알, 거위털, 그리고 가끔씩은 통거위요리를 제공하는 아주 충실한 일꾼이라고 말했다. 1955년 여름, 그는 편지를 십여 차례 계속하여 미 농무성으로 보 내왔다. 각 편지에서 그는 거위알을 부화시키는 요령에 대해 물어 왔다. 농무성에서는 그때마다 관련책자를 보내주었다. 그런데도 이 농부는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문의를 해왔다. 급 기야 그는 자신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어떤 국회의원에게 농무성 의 안일한 대민지원활동에 대해 알리겠노라 으름장까지 놓게 되었 다. 당시 나는 농화학을 전공한 뒤 농무성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었 다.(이 사실을 토대로 나의 신원을 추적하려 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마침 나는 1955년 7월 산 안토니오에서 열리는 한 회의에 참석하 기 위해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상부에서 가는 길에 이 성가신 농 부에게 들러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나라의 녹을 먹는 공무원으로서 세납자의 애로상항을 파악하고 돕는 것은 물론 당연 한 일이다. 물론 그 즈음 농무성이 어떤 국회의원의 편지를 한 통 받았던 사실 역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내가 그 거위를 처음 마주하게 된 것은 1955년 7월 17일의 일이 었다. 물론 내가 먼저 만난 것은 그 주인 맥그리거씨였다. 그는 키가 큰 50대 농부로서 상당히 의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나 의 방문목적과 신원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공무원 신분증을 보여주고 농무성에서 파견 나온 농화학자라고 설명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나는 농무성에서 그에게 이미 보낸 거위알 부화에 관한 자료내용을 일일이 다시 설명해줬다. 인공 부화기의 사용법, 식단 에 들어갈 영양소, 비타민 E의 효능, 항생제 첨가물의 사용법 등 등을 늘어놓았다. 그는 머리를 계속 흔들었다. 그 모든 방법을 사용해 봤지만 여전 히 알이 깨지 않는다고 했다. 인근 농부들에게서 귀동냥으로 들은 몇 가지 전통적 방법들까지 동원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 불 평했다. '아니, 상황이 그렇다면 가브리엘 대천사장을 찾을 일이지, 나같 은 공무원을 불러 뭣하나?' 나는 그에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늘어놓은 뒤 그래도 안 된다면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여전히 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래서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그 말썽 많은 거위들을 한번 보고 가야겠다고 말했다.(최소한 상부에 뭐라고 보고는 해야하니 말이 다) 맥그리거가 투덜거렸다. "문제가 되는 거위는 한 놈뿐인데요." "그럼, 그 한 마리를 좀 볼 수 있을까요?" "그건 약간 곤란합니다." 뚱한 그의 대답이었다. "아니, 그렇다면 제가 선생님을 더이상 도와드릴 방법이 없지 않 습니까? 그리고 정 거위 한 마리가 그렇게 말썽이라면 뭘 그리 속 을 끓이십니까? 그냥 잡아먹어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현상태에서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은 그것뿐입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집어들었다. 갑자기 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가 입술을 지긋이 물고 눈을 한참 찌푸린 걸 보아 심각한 고민 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제가 지금부터 보여드리는 것에 대해 비밀을 지켜줄 수 있습니 까?" 그는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에도 그가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요구하고 나선걸 보니 어지 간히 다급한 모양이었다. "글쎄요. 혹 법에 저촉되는 사항이라면..." "절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가 딱잘라 말했다. 나는 그를 따라 마당의 거위우리로 갔다. 우습게도 그 거위우리 에는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고 문은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그 안 에 들어있는 거위는 한 마리뿐이었다. 이놈이 바로 그 골치 아픈 거위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놈입니다." 맥그리거씨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잔뜩 서려있었다. 가만히 앉아있는 거위를 살펴보았다. 다른 거위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오히려 약간 거만하고 성질이 급해 보였다. 나는 최 대한 전문가답고 엄숙한 표정을 짓고 거위를 관찰했다. "흠..." "여기 그놈의 알도 있습니다. 인공부화기 속에 넣어두었지만 아 무런 변화가 없었답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알을 꺼내어 보였다. 그러는 그의 동작이 왠 지 어색해 보였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했다. 일반 거위알보다 크기도 작 고 모양이 아주 둥글었다. 맥그리거씨가 말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손을 내밀어 알을 집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알이 훨씬 더 무거웠던 것이다. 힘을 좀더 주자 그제야 간 신히 알이 들려 올라왔다. 멕그리거씨가 알을 들고 있는 모습이 어색했던 이유를 알 수 있 었다. 알의 무게는 거의 2파운드나 나갔다.(나중에 정확히 측정해 보았을 때 나온 무게는 852.6그램이었다) 나는 손바닥 위의 거위알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맥그리거씨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걸 한번 떨어뜨려 보시죠." 내가 무슨 말인지 몰라 주저하자 그가 알을 집어가 땅에 떨어뜨 려 버렸다. 툭하고 땅에 부딪혔지만 알은 깨지지 않았다. 흰자도 노른자도 전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무게 때문에 약간 땅에 파묻혔을 뿐이 었다. 다시 주워들어 보았다. 땅에 부딪힌 부분의 껍질이 갈라져 있었 다. 갈라진 틈새로 누런 금속이 보였다. 손이 가볍게 떨리는걸 느낄 수 있었다. 조심스레 껍질을 벗겨보 았다. 둥글고 노란 금속공이 손위에 남았다. 굳이 성분분석을 해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드디어 그 유명한 거위를 만난 것이다. 바로 황금 알을 낳는 거위 말이다. 물론 독자제위는 나의 말을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이 글을 집어들었을 때 여러분은 과학소설 한편을 기대하고 있었을테 니 말이다. 자세한 설명은 잠시 뒤에 다시 나올 테니 당분간은 그대로 생각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당시 나의 최대 당면과제는 어떻게 맥그리거에게서 그 거위알 을 넘겨받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주 거칠게 이 고집센 농부 를 닦아세웠다. 그 황금알을 빼앗아 오기 위해서라면 그를 때려눕 히기라도 했을 것이다. 온갖 감언이설과 회유책을 다 동원했다. "인수증을 써드리겠습니다. 반드시 현금보상도 해드릴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선생이 이 거위알을 팔려면 많은 애로가 있을 겁니다. 이 정도의 황금을 어떤 경로를 통해 입수하게 됐는 지 법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개인이 내다 팔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집에서 마냥 보관하시겠습니까? 만약 혹시 정부에서 이 사실을 알고 세무조사라도 한다면 그때 가서 어떻게 설명하실 겁 니까?" "난 이 일에 정부가 끼여드는 것은 싫소." 그가 고집스레 말을 잘랐다. 하지만 고집세기로 치자면 나도 뒤질 사람이 아니었다.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을러대기도 하고 구슬리기도 했다. 몇 시간을 씨름한 후에야 이 고집센 텍사스 농부를 설득할 수 있었다. 난 그에게 인 수증을 써주었다. 그러고도 그는 영 미덥지 않은지 바깥에 세워둔 차까지 계속 따라나왔다. 그는 내가 차를 몰고 나오는 내내 마당 에 서서 내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맥그리거는 두번 다시 그 알을 구경하지 못했다. 물론 그는 정부 로부터 황금알에 대한 현금보상을 충분히 받았다. 세금을 제하고 도 그에게는 656달러 47센트의 현금이 떨어졌다. 물론 그 정도 돈은 정부로 보아서 별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 황금알이 지니는 진짜 가치를 고려한다면 말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지니는 가치의 정확한 이해, 그것이 바로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이다. 농무성에서의 나의 상관은 루이스 P. 브론스타인씨였다(이 사람 의 이름 역시 농무성 인명록에서 찾아봤자 헛수고일 것이다. 혹 굳이 찾아보려는 사람이 있다면 가운데 P.는 핏필드의 이니셜이라 고 친절히 알려주고 싶다. 아마 더 혼동될 것이다) 나와 브론스타인 부장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에게 마음 툭 터놓고 거위 사건을 얘기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나를 잘 몰랐다면 그는 즉각 나를 정신병원으로 보내려 했을 것이 다. 그럼에도 나는 사소한 모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우선 거위알부터 책상에 올려놓았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본 후에야, 그는 무슨 폭발물 대하듯 그 알을 손끝으로 툭 건드려 보았다. "한번 집어들어보시죠." 꽤 머뭇거렸지만 큰 맘 먹고 그는 알을 집어들었다. 물론 그도 나처럼 알을 가볍게 보고 그냥 들려했다가 두번째에야 겨우 들 수 있었다. "노란색 금속이니, 놋쇠일 가능성도 있지요. 하지만 질산농축액 을 떨구어보니 전혀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알의 외부 만 황금입니다. 힘을 주어 보시면 약간 뒤틀립니다. 아마 알 전체 가 황금이었다면 아마 무게가 10파운드가 넘어갈 겁니다." 브론스타인이 말했다. "이건 무슨 속임수야. 분명히 농간이라구." "사기치는 데 진짜 황금을 사용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리고 제가 처음 이 알을 보았을 때 그것은 진짜 알 껍질 속에 있었습니다. 그 알 껍질도 가져와서 성분을 조사해 봤더니 자연산 탄산칼슘이 더군요. 이것도 조작이라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그리고 이제 그 알을 반으로 쪼개어 봐서 만약 흰자와 노른자가 나온다면 그땐 조 작의 의혹이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부장님께서 직접 쪼 개어 보시라고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부장님, 이건 분명 연구 가치가 있는 물건입니다. 부장은 한참을 난처한 표정으로 황금알을 쳐다봤다. "도대체 어떻게 장관님께 보고를 해야한다?" 브론스타인 부장은 결국 몇 군데 전화통화를 했고, 그날 하루 종 일 높은 분들에게 보고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보고를 받은 윗 분 중 몇몇은 직접 그의 사무실로 찾아와 황금알을 보고 가기도 했다. 1955년 7월 20일, 이날이 바로 '거위'라 명명된 비밀 프로젝트가 시작된 날이었다. 처음부터 나는 책임 연구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이 문제가 너무나 커져 나의 소관과 거리가 멀어질때에도 내가 모든 연구과정을 담당했다. 먼저 내가 가져온 알에 대해 물리적 분석부터 시작했다. 알의 평 균반지름은 35mm였다. 최장축은 72mm, 그리고 최단축은 68mm였다. 황금 껍질의 두께는 2.45mm였다. 나중에 그 거위의 다른 알들도 조사해 봤을 때 우리는 이 수치가 약간 높은 축에 속한다는 걸 알 게 되었다. 황금껍질의 평균 두께는 2.1mm로 나왔다. 그 황금껍질 속에는 역시 생각했던 대로 진짜 알이 들어있었다. 냄새도 생김새도 진짜 거위알이었다. 화학분석을 해보니 유기성분은 지극히 정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흰자위는 알부민을 9.7% 함유하고 있었다. 노른자에는 비테린, 콜 레스테롤, 인지질, 카로티노이드 등이 있었다. 처음에는 정밀분석 을 할 수 없었으나 나중에 다른 알들도 조사해보니 보효소, 뉴클 레오티드, 황산족 화합물 등과 같은 평이한 성분들이 추가로 발견 되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 보통 거위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물질 이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열에 대한 거위알의 반응이었다. 알의 내용 물을 끓였을 때 순식간에 완숙이 되어버렸다. 그걸 쥐에게 먹여보 았더니 별 이상이 없었다. 나도 그 완숙을 약간 떼어서 살짝 씹어보았다. 너무 작은 양이라 맛을 느낄 수는 없었으나 구역질이 나려 했다. 아마도 선입관 때 문이었으리라. 농무성의 연구고문으로 있는 템플대학의 생화학교수 보리스 핀리 박사가 모든 실험을 감독했다. 그는 거위 알의 완숙효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단백질이 열에 이토록 빨리 반응하는 것은 단백질의 변성이 있 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알을 둘러싼 외부성분의 독특함을 생각해 볼 때, 혹시 이러한 반응이 중금속오염의 결과가 아닌가 사료됩니 다." 그래서 이번에는 알의 무기질 분석을 시도했다. 그 결과 금염이 온의 성분비가 높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화학기호 AuCl4인 물 질로서 금 1원자와 염소4원자로 이루어진 이온이다. 여기서 금염 이온의 성분비는 총질량대비 0.32%로 고농축 금 단백질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수치였다. 핀리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알이 부화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다른 알들도 마찬가지지요. 중금속에 중독된 겁니다. 금이 납보다 보기에는 좋 을지 몰라도, 단백질에 치명적인 것은 납과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부패할 염려는 없군요." 나의 의견이었다. "그렇습니다. 금염철에 중독된 단백질에서 살 수 있는 미생물은 전혀 없으니까요." 외곽의 황금에 대한 화학분석이 나왔다. 거의 백퍼센트에 가까운 순금이었다. 실제로 나타난 불순물은 약간의 철분이었는데 황금의 0.23%에 지나지 않는 양이었다. 이러한 철분은 일반 거위 알의 노 른자에서 나타나는 수치보다 2배가 더 많은 것이었다. 하지만 당 시에는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많은 철분의 양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거위'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일주일후 본격적인 연구조사단이 텍 사스로 파견되었다. 실험장비가 가득한 트럭 세 대와 특수부대 1개 분대가 동원되었다. 그리고 조사단에는 다섯 명의 생화학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까지도 우리는 황금알의 발생원인이 생화학 적 이상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최초 보고자인 나도 함께 갔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맥그리거 농장을 외부로부터 완전 격리시켰 다. 처음부터 이러한 격리조치를 실시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 다. 우리는 나중에야 처음에는 엉뚱한 이유로 실시된 이 조치가 아주 필수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엉뚱 한 이유란 다름 아니라 가능한 한 이 프로젝트를 비밀에 붙이고 싶어한 농무성의 용의주도함이었다. 상부에서는 여전히 황금거위 알을 모종의 사기극으로 생각하던 차라 혹시라도 이 일이 외부로 알려질 경우 국민의 세금으로 얼빠진 짓을 한다는 비난여론을 감 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혹 황금알이 진짜로 밝혀지더 라도 언론이 이를 기사화했을 경우 받게 될 정치적 부담과 책임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거위 프로젝트의 진정한 의미와 중요성이 알려진 것은 맥그리거 농장에 도착하고 한참 후의 일이었다. 물론 맥그리거씨에게는 자신의 농장에 들이닥친 정부관리들과 각 종장비들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거위가 이제는 국가 재산이라는 말에 어이없어 했다. 자신의 황금 알들을 연구대상이 라고 압수해 가는 과학자들의 처사 역시 탐탁치 않았다.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정부의 계획에 동의하게 되었 다. 특수요원 1개 분대가 자신의 집 둘레에 참호를 파고 기관총을 설치하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정부가 내놓은 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물론 그는 정당한 현물보상을 받았다. 정부가 하는 사업에는 항 상 공정한 보상이 따르는 법이다. 돈 몇 푼이 나라에게 무슨 소용 이 있는가?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못마땅해 한 것은 거위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 놈은 혈액샘플 채취를 아주 싫어했다. 화학 약품에 무 슨 거부반응을 보일까봐 마취제 따위는 전혀 쓰지 않았다. 그래 서 매번 혈액채취마다 건장한 특수요원 두 명이 동원되었다. 그 거위에게는 24시간 감시가 붙여졌고, 만에 하나 거위의 신 변에 불상사가 생긴다면 책임자를 군사재판에 넘길 거라는 엄명 이 떨어졌다. 당시의 요원들이 혹시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그들 의 그 우스꽝스러운 거위 경호작전이 어떤 일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자신의 신상에 무엇이 이로운지 잘 안다면 이 일을 타인에게 절대 발설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당시 우리는 거위에게서 채취한 혈액을 가지고 온갖 실험을 다 해봤다. 혈액에서 약 0.002%의 금염이온이 검출되었다. 특히 간정맥에 서 채취한 샘플에서의 이온 농도는 다른 혈액에 비해 배 정도나 높았다. 핀리 박사가 툴툴거렸다. "간이 문제로군." 거위의 엑스레이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보니 간의 색깔이 인접 한 장기보다 더 밝게 나타났다. 무엇인가가 엑스레이의 투과를 막은 것이다. 아마 황금일 것이다. 간 주위의 혈관은 그보다는 약간 더 어두운 것으로 나타났다. 난소의 경우 완전 백색으로 나왔다. 난소에서의 엑스레이 투과율은 제로인 것이다. 이런 결과는 초기 보고서에서 쉽게 드러났다. 핀리 박사는 충 분히 예상가능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보고서의 내용을 풀어 서 이렇게 설명했다. "금염이온은 간에서 생성되어 혈액 속으로 용해되어 갑니다. 그리고 난소에서 혈액 중의 이온이 걸러집니다. 금염이온은 이 때 금속성 황금으로 변이된 후 농축되어 알의 외곽껍질을 이루 게 됩니다. 그리고 농축되지 않은 이온은 그대로 알의 단백질 속에 침투하여 남게 됩니다. 아마 거위에게는 이것이 체내에 농축될 경우 치명적이 될 수 있는 금속성분을 걸러내는 아주 중요한 과정일 것입니다. 동물 의 세계에서 금속에 중독된 알을 낳는다는 것은 아직 선례가 없 는 발견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과정이 이 거위의 생명 을 유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만 거위에게는 불행하게도, 난소가 완전히 중독 되어 있기에 알을 자주 내놓지 못하며 알이 나온다 해도 결코 부화하지는 못 합니다. 그리고 이 거위의 경우, 알을 낳는 과정은 금속성분의 체외분비 정도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상이 보고서의 내용이었다. 그는 끝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곤란한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나는 그가 말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바로 거위 체내에 있는 금의 출처는 어디냐 하는 것이었다. 해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비관적인 증거들만이 수두 룩했다. 거위의 먹이에 금이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꼼꼼히 거 위의 식단을 검사해 봤다) 어디에서 사금을 집어먹는 것도 아니 었다.(인근 지역의 광물부존량 탐사도 해봤다) 집 근처에 무슨 금단추나 금시계, 금붙이가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혹 금니가 빠진 게 있나 맥그리거 가족의 치아검사까지 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물론 맥그리거 부인의 결혼 반지가 금반지였지만 그녀는 밭일 할 때에는 결혼 반지를 끼지 않는다고 맹세했다. 도대체 거위 체내에 있는 금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해결의 실마리는 1955년 8월 16일에 나타났다. 퍼듀 대학의 알 버트 네비스 교수는 소화기관의 내용물에 대한 성분을 분석하기 위해 튜브를 거위의 식도를 통해 삽입해서 장내부검사를 실시했 다. 물론 이번 검사 역시 거위의 완강한 반항에 부딪혀 고전하 기는 했다. 하지만 혹시 외부로부터의 어떤 금관련 물질의 섭취 가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검사였다. 소화기관 속에서 금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너무나 미량이어서 외부에서 들어 왔다기보다는 오히려 소화분비액에 섞여 장으로 분비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결국 금은 거위의 내부에서 생성되 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실험의 결과 중에서 정작 주목할만한 사실은 다른 곳에 있었다. 네비스 박사가 거위우리 옆에 세워진 임시막사로 핀리 박사를 찾아왔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네비스 박사가 먼저 말문 을 열었다. "거위의 소화분비액에서는 쓸개즙색소의 함량이 아주 낮은 걸 로 나왔습니다. 십이지장의 내용물에서는 쓸개즙색소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핀리 박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마도 금 농축 때문에 간 기능이 형편없이 저하되었기 때문 일 겁니다. 쓸개즙자체가 전혀 분비되지 않는 거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쓸개즙은 분명히 나오고 있습니다. 쓸개즙 산의 농도 역시 정상입니다. 아니, 거의 정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없는 건 쓸개즙색소뿐입니다. 대변에 대한 성분분석 도 해보았더니 결과는 같았습니다. 쓸개즙색소가 전혀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잠시 간단한 설명을 곁들이자면, 쓸개즙산은 간에서 쓸 개로 분비되는 스테로이드의 일종이다. 쓸개즙산은 세제와 비슷 한 역할을 하는 물질로서 지방의 분해와 소화에 관여한다. 쓸개 즙의 균질화과정이 지방을 소화하기 쉬운 상태로 만들어준다. 그 거위에게서는 검출되지 않은 쓸개즙색소의 경우, 쓸개즙과 는 성격이 완전히 판이하다. 쓸개즙색소는 간에서 생성되며, 그 원형은 헤모글로빈이다. 아시다시피 헤모글로빈은 붉은 색의 단 백질로서 혈액 속의 산소를 운반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노화한 헤모글로빈(hemoglobin)은 간에서 분해되어 헴(heme)만이 떨어 져 나온다. 헴(heme)은 철 원자(Fe) 하나를 가운데 두고 있는 둥근 분자로서, 포르피린이라고도 불린다. 간은 헴의 철 원자를 분리해 내어 다음번 사용을 위해 저장해두고, 쓸모 없어진 포르 피린은 잘게 부순다. 이때의 포르피린 파편이 바로 쓸개즙색소 가 된다. 쓸개즙색소는 차후의 화학적 변화에 따라 녹색 혹은 갈색을 띄게 되며 간에서 쓸개로 분비된다. 쓸개즙색소는 인체에 전혀 쓸모가 없기에 폐분비물로 소화물과 섞이게 된다. 그런 후 창자 내부를 거쳐 나중에는 대변의 일부 가 되어 나온다. 핀리 박사의 눈이 반짝였다. 네비스가 나섰다. "내가 보기에는 간에서의 포르피린 이화작용이 제대로 일어나 고 있지 않은 것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내게도 그 점은 분명했다. 그러한 연구 진전은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것은 그 거위에게서 나타난 최초의 비정상적인 신진대사과정이었다. 드디어 첫 단추를 꿴 것이다. 우리는 곧이어 간 조직검사를 실시했다. 기다란 주사기로 거위 의 간 조직을 일부 채취했다. 거위가 약간 고통스러워했으나, 건강에 별 지장은 없었다. 혈액샘플도 추가로 뽑았다. 그 다음 에는 혈액에서 헤모글로빈을 추출하고 간 조직에서 시토크롬을 추출했다.(시토크롬은 산화효소로서 역시 헴을 포함한다) 헤모 글로빈과 시토크롬에서 헴을 따로 분리해냈다. 그리고 이를 산 성용액에 침전시키니 밝은 오렌지색 화합물이 응고되어 남았다. 그 오렌지색 화합물은 헴과 비슷한 물질이었으나 성분이 달랐 다. 헴속의 철분은 보통 2가 철이온(Fe++)이나 3가 이온(Fe+++) 의 형태로 존재한다. 3가 철이온을 포함하는 경우 화합물은 헤 마틴이라 불린다.(영어로 철을 나타내는 ferric 혹은 ferrous는 라틴어 ferrum에서 왔다) 우리가 헴으로부터 분리해낸 오렌지색 화합물의 경우, 포르피 린 구성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중심원자는 철이 아닌 금으로 이 루어져 있었다. 더 정확하게 밝히자면 금 3가이온(Au+++)이 중 심 핵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이 발견한 이 화 합물을 금과(auric) 헴(heme)의 합성어인 '오렘'(aureme)이라고 명명했다. '오렘'은 자연상태에서 발견된 첫 번째 금 유기화합물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세계 생화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 만한 발견이었지만 당시 우리들은 이를 별 대수롭지 않은 것으 로 취급했다. 적어도 그 발견이 열어준 새로운 과학의 지평에 비견했을 때는 말이다. 그 거위의 간에서는 헴이 쓸개즙색소로 분리되지 않았다. 대신 헴을 '오렘'으로 바꾸어주고 있었다. 즉 헴속의 철이온 대신 금 이온이 자리잡는 것이다. 오렘은 금염이온과 평형을 이룬 상태 에서 혈관을 통해 난소로 이동해 갔다. 그곳에서 금은 분리되고 포르피린부분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어떤 과정에 의해 처분되는 것 같았다. 계속진행된 연구는 거위의 혈액 속에 있는 금의 29%가 금염이 온의 형태로 혈장 속에 용해되어 있는 걸로 나타났다. 나머지 71%는 '오레모글로빈'(auremoglobin)의 형태로 적혈구 속에 포 함되어 있었다. 오레모글로빈이 난소로 얼마나 빨리 이동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거위에게 방사능에 노출시킨 금을 먹여보았다. 이는 방사능탐지기를 이용하여 거위의 혈액에서 적혈구와 혈장 속에 포함된 금이온을 추적하기 위한 실험의 일환이었다. 혈장 속에 용해된 금염이온 chloraurate ion보다 오레모글로빈의 반 응이 더 느려 보여 이를 뒷받침할 자료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왜냐하면 거위 체내 방사능 을 전혀 추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들 중 누구도 방사성 동위원소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없었기에, 우리는 이 실험의 실패를 경험부족 탓으로 돌렸다. 사실 이 결과는 무척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아무도 이 실패의 중요 성을 몰랐다. 이를 간과함으로써 나중에 우리는 며칠을 까먹는 셈이 되고 말았다. 오레모글로빈은 물론 혈액내 산소운반에 있어 전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비율이 전체 적혈구 헤모글로빈의 0.1%에 지나지 않아, 거위의 산소공급작용에는 전 혀 지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계속해서 우리는 금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숙제에 대해 궁리 했고, 결정적 실마리를 처음 내놓은 건 우리들 중 네비스박사였 다. 1955년 8월25일의 저녁에 열린 전체회의에서 그는 이런 가능성 을 제기했다. "혹시 거위의 간에서 금과 철이 자리바꿈 하는 게 아니라, 철 그 자체가 금으로 바뀌고 있는 게 아닐까요?" 내가 네비스를 그해 여름 거위 프로젝트를 통해 직접 만나기 전, 나는 그의 이름을 쓸개관련 생화학 및 간기능에 대해 쓴 그 의 논문을 통해 알고 있었다. 글을 통해 받은 인상은 그가 아주 주의 깊고 논리가 뚜렷한 사 람이라는 것이었다. 거의 지나칠 정도로 말이다. 그 누구도 네 비스 박사가 중세 연금술사나 생각해낼 법한 그런 엉뚱한 제안 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제안은 이 거 위 프로젝트가 그를 얼마나 절망적으로 또, 무기력하게 만들었 는지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를 이렇게 절망적으로 만든 것은 바로 금의 출처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거위는 몇 달 동안 매일 평균 38.9그램 의 금을 꼬박꼬박 내어놓고 있는데 그 출처는 아무도 모르고 있 었다. 금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를 밝힐 수 없다면, 금이 어딘 가에서 만들어진다는 억측이라도 해야했다. 또, 그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은 바로 우리 눈앞에 앉아있는 황 금알을 낳는 거위의 엄연한 존재였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세 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우리 는 무엇이라도 가능한 동화의 세계 속에 들어와 있었고 그렇기 에 우리는 현실감각을 잃어버렸다. 그런 우리에게 불가능한 가 정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나의 이런 서글픈 유추에도 불구하고 핀리 박사는 네비 스 박사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간으로 들어간 헤모글로빈의 일부가 오레모글로빈으로 바뀌어 나옵니다. 거위 알의 황금에서 발견된 유일한 불순물은 철이었 지요. 노른자위에서 발견된 금속 성분은 두 가지입니다. 주종은 물론 금이었고, 그 나머지는 철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종 합해 볼 때, 우리는 네비스 박사가 말한 다소 어처구니없는 가 설에 이르게 됩니다. 여러분, 이제 다시 상부의 지원을 요청해 야겠습니다." 지원 요청과 함께 그 조사는 세 번째 단계에 접어들었다. 첫 번째 단계란 나 혼자 와서 한 기초조사였다. 두 번째는 생화학 자들로 구성된 화학적 분석연구였다. 이제 가장 규모가 크고도 중요한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 드디어 핵물리학자들의 합류가 이루어졌다. 1955년 9월 5일, 캘리포니아 대학의 죤 빌링스 교수가 도착했 다. 그는 필요한 실험기자재를 가져왔고, 뒤이어 몇 주 동안 지 원인력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가건물을 추가로 몇 채 더 세워야 했다. 그해가 채 다가기도 전에 거위우리 주위에는 연구단지가 하나 들어설 것처럼 보였다. 빌링스 박사는 도착 당일 즉시 저녁 회의에 참석했다. 핀리 박 사가 그 동안의 연구결과를 설명해주었다. "현재의 '철을 금으로 바꾼다.'는 가설에는 몇 가지 중대한 논 리적 오류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그 거위 체내의 철의 전체 함량이 기껏해야 0.5그램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이 거위는 매 일 40그램의 황금을 생산해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빌링스가 말문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약간 고음이었지만 깨끗한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그것보다 더 중대한 에너지량의 모순을 놓치고 계시는군 요. 비질량편차 곡선상에서 철은 거의 최하단에 위치합니다. 금 은 그보다 훨씬 높은 점에 자리합니다. 즉,철 1그램을 동일질량 의 금으로 바꾸자면, 우라늄-235(U-235) 1그램을 핵분열시킬 때 발생하는 정도로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핀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문제는 당신에게 맡기겠소."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물론 생각만 한다고 풀릴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빌링스 박 사는 거위에게서 새로이 추출한 헴heme 표본을 연소시켜서 남은 산화철을 브룩헤이븐으로 보내 동위원소 검사를 하게 했다. 이런 특별한 실험을 하게 된 이유는 사실 없었다. 그저 무작위 로 실시한 수많은 실험들 중 한가지에 불과했는데 수수께끼의 실마리는 바로 이 실험에서 나왔다. 동위원소 분석결과를 받아본 빌링스박사의 얼굴에는 충격의 빛 이 역력했다. "철-56(Fe-56)이 전혀 없군요." "다른 동위원소는 어떻습니까?" 핀리가 즉각 질문을 던졌다. "다른 동위원소는 다 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적정비율로 나 타났는데 철-56만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또 설명을 좀 해야할 것 같다. 철은 자연상태에서 네 가지 동위원소로 구성된다. 이들 동위원소는 모두 같은 철 원자 이지만 원자량이 서로 다르다. 원자량이 56인 철 동위원소는 Fe -56으로서 전체철 원자의 91.6%를 차지한다. 나머지 동위원소는 각각 원자량이 54,57,58이다. 거위 체내에서 추출한 헴에서 발견된 철 동위원소는 철-54(Fe -54), 철-57(Fe-57), 철-58(Fe-58) 뿐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즉 거위의 간에서 모종의 핵반응이 일어나고 있 다는 것이다. 보통 핵반응은 한가지 특정동위원소만을 소모하며 다른 동위원소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반대로 화학반응의 경우, 그 성격에 관계없이 모든 동위원소에 똑같이 적용된다. 핀리가 나섰다. "하지만 그것은 에너지 역학적으로 불가능한 얘기 아닙니까?" 핀리박사의 지적은 에너지의 문제를 처음 들고나왔던 사람은 바로 빌링스 자신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듯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들렸다. 생화학자들인 우리는 많은 화학반응이 우리 신체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이러한 화학반응은 저마다 에너지 소 비를 필요로 하기에 모든 화학반응의 경우 흡열반응과 발열반응 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화 학반응은 1몰당 몇 kcal의 에너지를 생성시키거나 소비할 뿐이 다. 핵반응은 수백만 kcal의 에너지를 동반한다. 고로 또다른 발열 핵반응이 있어야 흡열 핵반응이 일어날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후 이틀동안 빌링스의 모습을 구경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가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결론을 제시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하는 사실은 발열반응이 발생시키는 열량이 흡열 반응에서 소비되는 양과 완전히 동일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열량이 부족하다면 핵 반응은 전 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천문학적 숫자의 원자핵이 반 응한다는 사실을 참고해 볼 때, 조금이라도 열량이 초과한다면 그 여분의 에너지는 순식간에 거위를 증발시키고도 남을 겁니 다." "그래서요?" 핀리가 끼여들었다. "고로 가능한 핵반응의 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 경우 에 들어맞는 핵 반응은 딱 한가지뿐입니다. 바로 산소-18(O-18) 이 철-56(Fe-56)으로 변환할 때의 반응입니다. 이때의 발열량은 철-56을 금-197로 바꾸는데 필요한 열량과 동일합니다. 시이소 에서처럼 힘의 평형이 이루어지는 거지요. 물론 이 대목은 아직 좀 더 연구가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연구 말입니까?" "먼저 거위 체내의 산소 동위원소 구성비를 검사해 볼까 합니 다." 산소는 자연상태에서 세 가지 동위원소로 구성되며, 자연상태 로 가장 많이 존재하는 동위원소의 원자량은 16이었다. 원자량 이 18인 산소-18(O-18)의 구성비는 전체 산소원자의 1/250을 차 지한다. 또다시 혈액샘플을 채취했다. 진공상태에서 수분을 증발시킨 후 다시 질량 분광기로 걸러냈다. 분석결과 혈액 중의 산소-18 (O-18)동위원소 구성비는 전체의 1/1300에 불과했다. 기대치에 서 80%가 모자라는 수치였다. 빌링스박사가 말했다. "이제야 확증을 잡았습니다. 산소-18이 소모되고 있는 겁니다. 사료와 물을 통해 꾸준히 거위 체내에 공급되는데도 계속해서 없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금-197(Au-197)이 생기는 겁니 다." 철-56(Fe-56)은 핵연쇄반응의 중간 생성물이었고, 이는 생기자 마자 다시 금-197(Au-197)로 핵융합 되기에 동위원소 분석에서 철-56 (Fe-56)은 전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에게는 좀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그래서 새로운 실험 을 해 봤다. 산소-18을 농축시킨 물을 일주일간 거위에게 먹였 다. 그 즉시 금 생산량이 증가했다. 일주일이 다되자 하루 45.8 그램으로 금 생산량이 증가했고 그럼에도 체내의 산소-18 함량 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빌링스가 말했다. 그는 연필을 꺾어 부러뜨리며 일어섰다. "저 거위는 살아있는 원자로입니다." 그 거위는 분명 돌연변이였다. 돌연변이라는 사실은 방사능에 의한 돌연변이의 가능성으로 이어졌고, 방사능 노출의 가능성은 맥그리거 농장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실시되었던 핵실험 을 상기시켜 주었다.(만약 핵실험이 텍사스에서 실시된 적이 있 는가하고 반문하는 독자가 있다면 확률은 반반이다. 내가 여러 분에게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거나, 아니면 여러분이 진실을 모 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인류가 핵을 개발한 이래, 일개 농장에 대해 그토록 정밀 한 방사능 누출검사가 실시되고, 꼼꼼한 토양 분석검사의 예가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관련 과거기록도 모두 살펴보았다. 아무 리 엄중한 기밀을 요하는 문서라도 우리의 손을 빠져나가지는 못했다. 이미 그 때쯤에는 '거위' 프로젝트에 무소불위의 권한 이 부여되어 있었다. 두 가지 사실이 드러났다. 첫째, 그 농장의 방사능 수치는 평균보다 약간 높았다는 것이 다.(물론 인체에 해를 줄 정도는 아니었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둔 다) 그리고 그 거위가 태어났을 당시 맥그리거 농장은 두 차례 에 걸친 낙진 피해지역의 한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었다.(물론 이 낙진 역시 인체에 유해한 정도는 아니었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해 둔다) 둘째, 그 농장의 거위들 중에서, 아니 인간을 포함한 방사능 분석검사가 가능한 모든 생물중 오로지 황금알을 낳는 거위만이 방사능의 수치가 0이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물은 극히 미량의 방사능을 지니게 마련이다. 또한 농장의 토양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되었는데 그 거위만이 유독 방사능검사에 전혀 양성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히 특이한 사실이었다. 핀리 박사는 1955년 12월 6일, 추가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과 학적 보고서의 내용을 쉽게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 거위는 아주 특이한 돌연변이입니다. 탄생 당시 고준위 방 사능에 노출되었습니다. 흔히 이는 다양한 형태의 유전자 변화 를 가져오는데, 보통의 돌연변이가 부정적 방향으로 일어나는 반면, 이 거위의 경우에는 아주 긍정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거위에게는 다양한 핵 반응을 촉진시키는 효소체계가 있습니 다. 이 특이한 효소체계에 단일 효소가 관여하는지 아니면 다수 의 효소가 복합적으로 관여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또 문제가 되는 효소의 속성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전혀 없습니 다. 일반효소 촉진 화학반응 보다 몇 만 배나 더 높은 열량을 필요로 하는 핵반응을 어떻게 체내 효소가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현재 알려진 이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전반적 핵융합반응은 산소-18에서 금-197이 생성되는 과정입니다. 산소 -18은 거위의 환경에 풍부한 원소이며 식수와 사료를 통해 상당 량이 공급됩니다. 결과물인 금-197은 난소를 통해 축적됩니다. 알려진 중간 생성물은 철-56입니다. 이 과정에서 오레모글로빈 이 형성된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특정효소가 헴heme을 반응 매개체로 이용하지 않았는가 사료됩니다. 저희는 이러한 전반적 핵반응이 거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해 봤습니다. 산소-18 은 전혀 무해한 원소이고 금-197은 처분하기 골치 아픈 금속인 한편 중독의 위험성을 내포합니다. 금이 거위알을 통해 축적되 는 이유는 더 큰 위험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은 무척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 다. 우리가 실패작으로 넘겨버린 빌링스의 합류 전에 행하여진 방 사능 추적실험에 대한 대목이 나왔을 때 빌링스는 갑작스레 발 작을 일으켰고, 나는 그가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하는 줄 알았 다. 나는 사람이 그토록 심한 발작을 일으키고도 살아날 수 있 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우리가 거위 체내에 주입 한 방사능 추적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간과할 수 있었는가하고 그는 한동안 우리의 지적수준에 의문을 표시하는 발언을 계속했다. "당신들은 풋내기 기자와 꼭 같아요! 마을 결혼식에 취재차 보 냈더니 돌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신랑이 나타나지 않아서 결혼 식이 취소되었으니 기사거리가 전혀 없었다고 하는 격입니다. 거위에게 방사성을 띈 금을 먹였는데 추적해보니 반응이 나타나 지 않았다구요. 그 뿐 아니라 거위에게선 그 어떤 자연 방사능 도 검출되지 않았다구요. 그러고도 그 실험이 실패였다는 겁니 까?" 우리는 거위에게 방사능 동위원소를 먹이기 시작했다. 처음에 는 소량씩 먹였으나 별 반응이 없어 1956년 1월 말에 가서는 거 의 한 숟갈씩 퍼 먹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거위의 신 체에서는 방사능이 검출되지 않았다. 빌링스가 방사능 실험 결 과를 발표했다. "실험결과 이 거위의 효소촉진 핵반응은 불안정한 동위원소를 안정된 동위원소로 변환시키는 기능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 났습니다." "참 편리한 기능이군요." 나의 견해였다. "편리하다구요? 이건 거의 예술입니다. 우리는 핵무기 시대에 있어 최상의 방위수단을 드디어 발견한 겁니다. 들어보십시오. 산소-18이 금-197로 융합되는 과정에서 산소원자 하나당 양성자 8개와 약간의 양성자 파편이 생깁니다. 이는 전자와 반응할 때 감마선 8개와 약간 량의 양성자가 생긴다는 걸 뜻합니다. 그런 데 감마선 역시 전혀 거위에게서는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즉 이 거위는 감마선을 흡수하고도 멀쩡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다시 그 거위에게 감마선을 쏘여보았다. 별 탈이 없었 다. 강도를 높이자 거위의 체온이 약간 올라가서 우리는 깜짝 놀라 실험을 중단했다. 그러나 그건 단순한 열이었을 뿐 방사선 숙취 는 아니었다. 하루가 지나 열이 가라앉자 거위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빌링스 박사가 다시 물어왔다. "이제 이 거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과학의 경이지요." 핀리 박사가 국민학생 취급당하는 것이 불편한 듯 신음하며 대 답했다. "맙소사! 아직도 이 거위의 진정한 용도를 모르시겠습니까? 우 리가 이 거위의 간 기능을 파악해서 실험실에서 핵반응과정을 똑같이 복제할 수만 있다면 완벽한 방사능 제거 방법을 얻을 수 있게 될 겁니다. 현재 원자력 개발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뭡 니까? 바로 용도폐기된 핵폐기물의 저장 및 처리 아닙니까? 만 약 방사능물질을 대형 저장소에 어떤 효소와 함께 넣어 두는 것 만으로도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여러분! 이 거위의 독특한 간기능만 파악해 낸다면, 이 시대가 안고 있는 핵군축, 핵무기, 핵발전, 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게 됩니다. 핵개 발 이후 처음으로 인류는 방사능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 니다. 만약 그 간기능을 변형시킬 수 있는 방법까지 어떻게 알아낸다 면, 우린 거위들을 이용해 다른 필요한 물질을 생산하게 할 수 도 있습니다. 우라늄 거위알은 어떻겠습니까? 그 간기능을 파악 해 낼 수만 있다면 현대판 연금술이 가능해 지는 겁니다!" 그는 안타까움에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게 무슨 소용 있으랴! 우리들 과학자들은 모두 꼼짝하지 않고 멀뚱멀뚱 눈을 굴리는 그 거위를 쳐다봤다. 만약 거위 알이 부화만 된다면 원자로 거 위 1개 분대가 생길텐데. "분명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닐 것이야. 황금 알을 낳는 거위 얘 기가 그냥 생긴 것은 아닐거라구." 핀리 박사가 중얼거렸다. "또 다른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나타날 때까지 마냥 기다리자 는 거요?" 빌링스의 냉소 섞인 반박이었다. 만약 이런 거위가 몇 마리만 더 있어도 기꺼이 해부해 볼 수 있었을 텐데. 난소를 연구해 볼 수 도 있고, 충분한 재료를 통 해 갖가지 세포조직 이식 및 배양실험을 해 볼텐데. 물론 그것 역시 별 소용이 없을지 모른다. 조직 검사 때 채취해둔 간 조직 은 온갖 수를 다 써보았지만 전혀 산소-18과 반응하지 않았다. 부분조직이 아니라 온전한 간을 가지고 실험해보는 것은 어떨 까? 아니면 수정란을 발육시켜, 간의 형성과정을 연구하고 이를 복제해 본다면? 하지만 해당 거위가 한 마리뿐인 상황에서 생체 실험이 무슨 소용 있으랴! 우리 중 그 누구도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현대판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비밀은 바 로 저 살찐 거위의 간에 있었다. 살찐 거위의 간! 빠뜨 드 포와 그라!(pate de foie gras : 살찐 거위의 간, 프랑스 별미요리 :역주) 살찐 거위의 간을 두고 고민하는 우리들, 구미가 당기기 보다는 오히려 식욕만 잃을 뿐이었다. 네비스가 골똘히 생각하며 말했다. "우리에겐 무언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합니다. 아주 신선한 출발점, 정말 파격적인 사고 말입니다." "말만 한다고 그게 나옵니까?" 빌링스가 낙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오랜만에 말문을 열었다. "신문에 아이디어 모집광고를 내볼까요?" 민망할 정도로 풀이 죽은 이 최고의 석학들 앞에서 그냥 한번 웃자고 한 소리였다. 그런데 그 농담이 내게 어떤 영감을 주었 다. "과학소설이라면!" "뭐라구요?" 핀리 박사가 물었다. "과학소설 잡지에는 가끔 익명을 요구하는 작가의 글도 올라옵 니다. 독자들은 그런 걸 또 좋아하거든요. 사람들은 그런 글에 오히려 더 진지한 흥미를 보여줍니다." 나는 일전에 읽은 비슷한 주제의 아시모프의 글에 대해 말했 다.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내가 서둘러 덧붙였다. "기밀유지는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소설이라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난 이들에게 원자폭탄이 일반에 알려지기 1년전인 1944년에 클 리브 카트밀이란 사람이 이미 원자폭탄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쓴 바 있지만, FBI는 굳이 이 일에 대한 책임추궁을 하지 않았다 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래도 그들에게서는 별 호응이 없었다. "과학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상상력이 풍부합니다. 그들의 지적 수준을 결코 과소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소설이라고 생각 하더라도 개중에는 자신의 의견을 출판사로 보내오는 사람도 있 을 겁니다. 어차피 우리에게 더 이상 뾰족한 수가 없으니 이런 시도라도 한번 해 본다고 손해볼게 뭐 있습니까?" 여전히 분위기는 시큰둥했다. 그래서 마지막 수를 썼다. "사실 저 거위가 언제 죽을지 누가 압니까?" 그제야 내 말이 먹혀들었다. 우리는 먼저 상부의 허락을 얻어야 했고, 다음에는 과학소설 편집자인 죤 켐벨씨에게 접촉을 해야했다. 그가 나에게 아시모 프씨를 연결해 주었다. 이제 글은 다 썼다. 독자 여러분이 글의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허구이다. 다만.... 혹시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분쟁해결사 (Strikebreaker)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엘비스 불라이는 살찐 손을 비비며 말했다. "자급자족이 바로 그 비결입니다." 그는 지구에서 온 스티븐 라모락을 밝은 곳으로 인도하면서 어색한 웃 음을 지었다. 그의 가는 눈웃음과 부드러운 표정에는 부자연스러운 냄새가 가득 풍겼다. 라모락은 담배 연기를 맛나게 한모금 빨면서 호리호리한 다리를 꼬았다. 그의 머리칼은 회색이었고 턱은 크고 강인해 보였다. "이거 여기 담배인가요?" 그는 물고있던 담배를 찬찬히 살펴 보며 물었다. 상대방의 경직된 분위 기에서 오는 불편함을 애써 숨기려 했다. "그럼요." 블라이의 대답이었다. "이렇게 작은 별에서 기호품을 재배할 여유가 있는지는 생각도 못했는 데요." (라모락은 우주선에서 내려다 본 엘 써비어의 첫 인상을 떠올렸다. 엘 써비어는 들쭉날쭉한 모양에 대기가 없고 직경이 수백 마일 밖에 되지않 는 미행성이었다. 항성으로부터 2억 마일 떨어져 거의 보일까 말까하는 행 성이었다. 어찌보면 표면이 거친 커다란 바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나마 그 항성계의 행성 중에서 지름이 1마일이 넘는 유일한 별이었기에 인 류는 이 미행성에서 정착촌을 일구게 되었다. 라모락은 사회학자로서 이 기이한 우주 정착지에서 인간이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지 연구하기 위해 이 곳을 방문했다) 블라이의 공손한 웃음이 약간 더 커졌다. "여기가 그렇게 작은 별만은 아닙니다, 라모락 박사님. 2차원적 기준으 로 이 별을 판단하시는군요. 엘 써비어의 지표 면적은 뉴욕 주의 4분의 3 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엘 써비어의 지하까지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셔선 안됩니다. 반경이 50마일인 구체의 경우, 체적은 오십만 평방 마일이 넘습니다. 만약 엘 써비어 내부 를 50피트 간격으로 개발한다면 이 미행성의 전체 표면적은 5천 6백만 평 방마일에 이르게 되며, 이는 지구의 전체 지표 면적과 맞먹는 수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하 개발 공간에는 버릴 땅이 없습니다." "그래요?" 라모락은 잠시 멍해보였다. "맞습니다. 제가 그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요. 하긴, 전은하계를 통 틀어 땅 속까지 철저히 개발된 소행성은 엘 써비어뿐이니, 저같은 외부인 에게는, 우리들에게 삼차원적 공간 개발은 아주 생소하답니다. 일단, 저의 이번 연구를 허락해 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블라이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라모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람 상당히 불편해 보이는군. 무슨 일이 생긴건가? 뭔가 이상해..) 블라이가 계속 설명했다. "물론 아직은 면적이 무척 좁습니다. 엘 써비어 지하 공간의 개발은 아 직 초기 단계입니다. 사실 개발을 서두를 마음은 없습니다. 의사중력 동력 장치와 태양열 발전기의 용량에 한계가 있으니까요."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블라이 의원님, 개인적 호기심 때문에 그러는 데, 농경층이나 목축층부터 먼저 볼 수 있을까요? 땅속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방목한다는 것을 늘 신기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가축이라 하기엔 보잘 것 없습니다. 덩치가 좀 작은 가축들입니다. 사 실 밀도 수확량은 얼마 안 됩니다. 누룩을 많이 배양하는 편이지요. 보여 드릴 만한 밀밭은 있습니다. 면화와 쌀 뿐아니라 과일까지 재배합니다." "멋지군요. 역시 자급자족이 확실하군요. 그렇다면 자원 재활용율은 어 떻습니까?" 이 마지막 말에 블라이가 흠칫하는 것을 라모락의 날카로운 눈은 놓치 지 않았다. 그 엘 써비어인의 가는 눈매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더욱 가 늘어졌다. "물론 재활용하지요. 공기, 물, 식량, 광물 자원 등 우리가 사용하는 모 든 물자는 반드시 재활용되어야 합니다. 폐기물까지 재활용됩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는 에너지가 소모되지만 동력은 충분합니다. 에너지 효율이 백 퍼센트는 안되지만 그래도 꽤 높은 편입니다. 매년 물 약간량을 수입하 고 있습니다. 특별히 수요가 많은 경우에는 연료와 산소 역시 수입하기도 합니다." "언제 견학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블라이 의원님?" 라모락이 물었다. 이제 블라이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졌다. "최대한 빨리 시작하지요. 하지만 먼저 밟아야 할 공식절차가 있습니 다." 라모락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비벼껐다. '공식절차? 예비접촉 당시에는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 "빈틈없이 조직된 사회에서 저 같은 외부인이 어쩌면 외부 불청객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요?" 라모락은 말을 마치고 블라이가 약간 당황해 하는모습을 조용히 지켜 보 았다. "예, 사실 저희 엘 써비어 성은 다른 은하계에 비해 약간 배타적인 별이 지요. 우리만의 관습이 있고 또 저마다의 신분이 있습니다. 사실 고정 신 분이 없는 이방인의 방문은 저희에게 약간 불편한 일이지요." "하지만 신분제도라는 것 자체가 불편한 것 아닙니까? "인정합니다. " 블라이가 재빨리 답했다. "하지만 저희에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저희는 타신분간의 결혼 을 엄격히 규제하며 엄격한 직업의 상속을 권장합니다. 모든 엘 써비어 인 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각자의 신분과 위치를 잘 받아들입니다. 그럼으로 써 개개인은 사회에 의해 받아지는 겁니다. 사실 우리 사회에 노이로제나 정신병같은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성 질병은 없습니다." "사회 부적응자는 없습니까?" 라모락이 물었다. 블라이는 '아니오' 하려는 듯 입을 벌리려다 갑자기 말을 삼켜 버렸다. 그의 이마에는 주름이 잡혔다. 잠시 후에 그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박사님을 위한 저희 별 안내 일정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은 하루 편히 쉬시면서 노독부터 푸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라이는 공손히 지구인이 먼저 나가도록 문 쪽을 가르켰다. 라모락은 블라이와의 대화에서 약간의 위기의식을 감지했다. 신문을 보자 그런 느낌은 더욱 커졌다. 그는 잠자리에 들기전에 신문을 세심하게 읽어보았다. 신문 읽는 일은 사회학자로서 그의 주된 소일거리였 다. 이곳의 신문은 인조 용지로 만들어진 8면 타블로이드판이었다. 기사중 4분의 1은 신변 잡기에 관한 것으로 출산, 결혼, 공지사항, 신개발 용적 등을 다루었다.(이곳에서는 개발 면적이 아니라 개발 용적이다. 3차원 공 간이라는 점을 상기하도록) 그 나머지는 학술 원고, 교육 자료, 소설 등 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라모락의 관점에서 뉴스라 부를 만한 것은 전혀 없 었다. 뉴스 비슷한 기사가 하나 있었지만 정보의 불충분이라는 점에서 으 스스한 느낌을 주는 글이었다. 기사의 제목은 작았다. <요구 사항 불변> 어제도 그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평의회 의장이 두 번째 면담 후 그의 요구 사항은 완전히 불합리하기에 어떤 경우에도 받아 들여 질 수가 없다고 발표했다. 기사 끝부분에는 괄호 속에 다른 활자체로 편집국의 입장이 실려 있었 다.(본 신문의 편집위원 일동은 엘 써비어가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결 코 그의 요구에 굴복해서도 또 굴복할 수도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라모락은 그 기사를 세 번이나 읽어보았다. 그의 태도, 그의 요구, 그의 도발. 그가 누구인가? 라모락은 꺼림직한 기분에 편히 잠을 청하지 못했다. 그후 며칠 동안 라모락은 워낙 바빠서 신문 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 이상한 기사는 내내 마음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라모락의 안내원 겸 길동무 역할을 맡은 블라이는 갈수록 냉정해 보였 다. 삼일 째 되는 날의 일이다.(이곳의 하루 시간은 인공적 개념으로 지구에 서 처럼 하루는 스물 네 시간이다) 블라이가 설명했다. "이번 층은 화학 공장 전용 층 입니다. 저 지역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나 다음 층으로..." 블라이가 재빨리 다음 층으로 넘어 가려고 하자 라모락이 그의 팔을 잡 았다. "이 지역의 생산물은 무엇입니까?" "비료 관련 특정 유기물질입니다." 블라이가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라모락은 멈추어 서서 블라이가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는 배경 지역을 살펴보았다. 그는 지평선과 지층사이에 낮게 들어 선 건물들을 훑어 보았다. 라모락이 물었다. "저기 저것은 개인용 주택 아닙니까?" 블라이는 계속 시선을 피했다. 라모락이 다시 물었다. "저 주택은 내가 본 중에서 가장 큰 것 같은데요. 저런 개인 주택이 왜 이런 공장 전용층에 있지요?" 그 점은 정말 특이했다. 엘 써비어에서 라모락이 본 모든 층들은 다 거 주 공간, 농경 공간, 산업 공간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그가 돌아보며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블라이를 불렀다. "블라이 의원님!" 블라이는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기에 라모락은 서둘러 따라가야 했 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의원님?" 블라이가 중얼거렸다. "제가 무례하게 굴고 있다는 걸 압니다. 그 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어 떤 문제로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말을 하면서도 블라이는 보조를 늦추지 않았다. "'그의 요구' 말씀이시군요." 블라이는 걸음을 딱 멈추었다. "그 문제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내가 말한 정도 뿐입니다. 그것만 신문에 실려있더군요." 블라이가 낮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라모락이 물었다. "라구스닉이라구요? 그게 뭡니까?" 블라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얘기를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창피하고 또 무척 난처한 문제입니다. 평 의회에서는 짧은 시일 내에 문제가 정리되리라 생각하고 박사님의 방문에 는 별 방해가 안되리라 생각했습니다. 박사님께서 신경 쓰실 필요는 없는 문제입니다.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갑니다.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는 형국이니 모양새가 좀 안 좋더라도 박사님은 지금 이 별을 떠나시는 게 좋 겠습니다. 외부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이 별에 남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 다." 지구에서 온 라모락이 못 믿겠다는 웃음을 지었다. "죽음을 무릅쓰다니요? 이렇게 작고 평화로운 별에서 그게 무슨 말씀이 십니까?" 평의회 의원이 말했다. "설명해 드리지요. 그래야 이해를 하실테니... 말씀드린 대로 엘 써비어 의 모든 물자는 재활용되어야 합니다. 그 점은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예." "그 중에는 분뇨도 포함됩니다." "그러리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철저한 증류에 의해 재생됩니다. 남은 것은 누룩에 쓰기 위해 비 료로 만듭니다. 그 중 일부는 유기 화학 산업의 원료나 다른 제품으로 활 용됩니다. 지금 보고 있는 저 공장들이 바로 분뇨 처리 작업을 담당합니 다." "그런가요? " 사실 라모락이 처음 엘 써비어에 도착했을 때, 식용수 역시 재생한 것이 겠거니 하는 생각에 물 마시기가 약간 꺼림직했었다. 하지만 곧 그는 그런 거부감을 극복했다. 지구에서도 물은 온갖 종류의 불쾌한 물질에서 자연에 의해 재생되는게 아닌가. 블라이는 점점 더 불편해 보였다. "분뇨의 직접적인 처리공정의 책임자는 이고르 라구스닉이라는 사람입니 다. 엘 써비어 정착지가 처음 개척된 이래 그의 선조가 대대로 그 작업을 수행해 왔습니다. 최초 정착자 중에 미하일 라구스닉이란 사람이 있었는 데... 그는, 에, 그러니까..." "자원 재활용 전문가였군요." "예, 방금 박사님께서 지적하신 집은 라구스닉 저택입니다. 이 소행성에 서 가장 훌륭하게 지어진 집이지요. 라구스닉은 우리가 갖지 못한 많은 특 권을 누립니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약간 어이없는 요구를 해왔습니다." 의원의 목소리에 갑자기 노기가 묻어 나왔다. "뭐라구요?" "그는 완전한 사회적 평등을 요구합니다. 그는 자신의 아이들과 우리 아 이들이 함께 놀 수 있기를 요구하며, 그들의 가족이 사교모임에 참석하는 등... 오!.." 그는 라구스닉의 요구사항을 입에 담기조차 역겹다는 듯 한숨으로 말을 끝맺었다. 라모락은 신문기사에 대해 잠시 다시 생각해 봤다. 그러고 보니 신문 기 사에도 그의 이름이나 요구사항은 거론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직업 때문에 천민 취급을 받는 거군요." "당연하지요. 그는..." 블라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후에 그는 더 침착하게 말했다. "지구에서 온 이방인으로서 이해하기는 힘들거라 봅니다." "나 자신 사화학자로서, 어느 정도는 이해합니다." 라모락은 고대 인도의 장의사 노릇을 한 천민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또 고대 유대에서 돼지치기를 떠올렸다. "엘 써비어는 결코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이군요." 박사가 말했다.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절대로!" 블라이는 격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라구스닉은 이미 조업을 중단했습니다." "파업을 벌였군요." "그렇습니다." "파급 효과가 심각한가요?" 당분간 지탱할 식량과 물은 있습니다. 재활용의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폐기물이 처리되지 않고 누적된다면 이 작은 소행성은 금방 오염될 것입니다. 수 세대에 걸쳐 치밀하게 질병의 발병율을 통제해 왔기에, 엘 써비어인의 신체는 병균에 대해 저항력이 낮습니다. 일단 전염 병이 돌기 시작하면, 수 백명씩 죽어가게 될 것입니다." "라구스닉도 그러한 사실을 압니까?" "그럼요." "그런데도 그가 자신의 협박을 실천에 옮기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는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작업을 중단했고 박사님이 도착하 기 하루 전 부터 오물 처리 작업은 전면 중단에 들어갔습니다." 블라이의 주먹코는 마치 구린내라도 맡은 듯 킁킁 댔다. 라모락도 반사 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이 별을 떠나시는 게 왜 현명한 선택인지 아시겠지요. 물론 저희에게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말입니다." 라모락이 의원의 말을 가로막았다. "잠시만요, 아직은 좀... 세상에, 이것은 오히려 제 전공과 관련된 아주 흥미있는 사건입니다. 제가 라구스닉과 대화할 수 있을 까요?" "그건 절대 안됩니다." 블라이가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나는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 곳의 사회상 황은 아주 특이하며 우주 그 어느 곳과도 다릅니다. 과학의 이름으로..." "어떤 대화를 원하십니까? 화상통화도 됩니까?" "그럼요." "평의회에 먼저 물어봐야겠습니다." 블라이가 중얼거렸다. 평의회 의원들은 근심을 애써 감추며 엄숙하게 라모락 주위에 둘러 앉았 다. 블라이는 그들 가운데 앉아 지구인 라모락의 시선을 피하려 무던히 애 쓰고 있었다. 회색 머리에 가는 목과 주름이 많이 잡힌 얼굴을 한 평의회 의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라모락 박사께서 그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환영할만한 일입니 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가 그의 요구에 굴복할 것이라고 말해서 는 안됩니다." 라모락의 뒤로 엷은 장막이 드리워졌다. 그는 장막 건너편 위원회 사람 들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라모락은 자신앞에 놓인 수신기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화면이 밝아졌다. 화면 속에 어떤 얼굴이 나타났다. 억센 턱과 얇고 붉은 입술이 단호하게 맞물린 강한 표정의 사나이였다. 화면 속의 인물이 의심스러운듯 물어왔 다. "당신은 누구요?" "제 이름은 스티븐 라모락, 지구에서 온 사람입니다." "이방인이오?" "그렇습니다. 연구목적으로 엘 써비어를 방문했습니다. 당신이 라구스닉 입니까?" "이고르 라구스닉, 분부대로 대령했습니다." 조롱조로 라구스닉이 대답했다. "하지만 선생이 어떤 분부를 내리든, 나와 내 가족이 사람 대접을 보장 받기 전에는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이오." 라모락이 물었다. "엘써비어가 처한 위험을 알고 있습니까? 돌림병이 돌게 될거란 걸 아십 니까?" "내게 인간적 대우만 해준다면 24시간 이내에 상황은 원상태로 돌아갈 겁니다. 선택은 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보니 선생은 고등교육까지 마치신 것 같군요." "그래서요?" "제가 듣기로 선생은 모든 물질적 편의를 누린다고 하더군요. 의식주 생 활은 엘 써비어의 그 누구보다도 훌륭하고 자녀 교육은 최상의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그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편의는 자동제어 기계들에 의해 제공됩니다. 고아가 된 여자 아기들은 일찌기 우리에게 보내어져 성인이 되면 우리의 아내가 됩니다. 그런 후 그들은 외로움에 일찍 세상을 떠나지 요. 왜 그렇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갑자기 흥분조로 바뀌었다. "왜 우리는 마치 괴물인 양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살아야 하는 겁니까? 우리도 남들과 똑같이 욕구와 감정을 지닌 인간입니다. 우리의 작업은 명 예롭고 유용한 일입니다." 라모락의 뒷편에서 한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라구스닉이 이를 듣고는 언 성을 높였다. "평의회 여러문, 그 뒤에 숨어 있는 줄 압니다. 대답해 보시죠. 과연 명 예롭고 유용한 일 아닙니까? 당신이 내놓은 당신의 분비물이란 말입니다. 어찌 폐기물을 생산하는 사람보다 정화하는 사람이 더 천한 인간이란 말이 오? 내말을 잘 들으시오. 평의회 나리들. 난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오. 엘 써비어의 모든 사람이 병들어 죽게 되고, 나와 내 아들도 같은 처지가 된다해도, 결코 나는 양보하지 않을 것이오. 내 가족은 지금처럼 사느니 차라리 병들어 죽는 편을 택할 것이오." 라모락이 말을 가로 막았다. "당신은 평생을 이렇게 살아 왔지 않습니까?" "그렇소만?" "이젠 이런 대우에 익숙해 지지 않았습니까?" "절대로 아니오. 포기했다면 몰라도 익숙해진건 아니오. 내 아버지는 포 기했었지. 나도 한동안 그랬고. 하지만 난 내 아들이 커가는 과정을 지켜 보고있소. 내게는 형제가 있어 그나마 괜챦았지만 내 아들은 독자라 같이 놀아 줄 친구 하나 없다오. 그 애는 영원히 친구나 동기 없이 평생을 살 것이오. 이제 나도 더 이상은 단념한 채 살아가지 않을 것이오. 내겐 이따 위 생활이 지긋지긋하고, 빌어먹을 엘 써비어도 지긋지긋하고, 이 놈의 대 화도 지긋지긋하오." 수신기가 꺼졌다. 의장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져 하얗게 질렸다. 라모락 곁에 남은 이는 의 장과 블라이 뿐이었다. 의장이 말했다. "그는 미쳤소. 어떻게 다뤄야 할 지 모르겠소." 의장은 옆에 놓인 포도주 한 잔을 들었다. 손이 심하게 떨려 하얀 바지 에 포도주 방울이 떨어져 주홍색 얼룩이 남았다. 라모락이 말했다. "그의 요구 사항이 그렇게 비이성적인가요? 왜 그를 떳떳한 사회의 일원 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요?" 블라이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노기를 띄었다. "그는 분뇨 처리자요." 곧 다시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당신은 지구에서 왔으니..." "라구스닉이 실제로 분뇨를 다룹니까? 제 말은 신체적 접촉이 있습니까? 분명히 전공정이 자동기계에 의해 처리된다고 아는데요." "물론입니다." 평의회 의장의 답이었다. "그렇다면 라구스닉이 하는 일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그는 기계의 조작을 담당합니다. 고장난 부분은 작동 중지시켜 자동수 리가 이루어지도록 하지요. 반입량에 따라 작업용량을 조절하기도 하고 시 장 수요에 따라 생산 할당량을 조절합니다." 의장은 다시 한탄조로 덧붙였다. "물론 이런 제어과정까지 자동화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면 현재의 10 배 정도 되는 공장시설이 필요하게 됩니다. 불필요한 공간의 낭비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라구스닉이 하는 일은 단지 버튼을 누르고 전원을 내리는 게 아닙니까?" "그렇죠." "그렇다면 그의 일이 다른 엘 써비어인의 작업과 다를 게 뭐 있습니까?" 블라이가 경직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를 못하시는 군요." "당신 아이들의 생명을 걸 만큼 큰 차이입니까?"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블라이의 목소리에는 괴로운 빛이 역력했다. 그렇게 괴로와하는 얼굴빛 에서 그에게는 정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라모락은 알 수 있었다. 라모락은 이 모든 상황이 넌더리가 나서 극약처방을 제시했다. "물리력을 동원해서 파업을 중지시키는 건 어떨까요? 강제로 말입니다." "어떻게 말이오?" 의장이 물었다. "도대체 누가 그에게 가서 그를 붙잡는단 말이오? 또 원거리에서 그를 저격한다.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오." 라모락이 생각 끝에 물어보았다. "그의 기계를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십니까?" 의장이 발끈하여 일어섰다. "내가 말이오?" 라모락이 깜짝 놀라 황급히 변명했다. "특별히 의장님을 지칭한 건 아닙니다. 누구라도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 고 물어 본 겁니다. 혹시 다른 누군가 라구스닉의 기계 작동법에 대해 알 고 있습니까?" 천천히 의장의 얼굴에서 노기가 사라졌다. "설명서는 있소. 나 자신은 그런 작업의 설명서에 관심을 둬 본적이 결 코 없지만 말이오." "그렇다면 라구스닉이 파업하는 동안 다른 누군가가 작동법을 익혀 그의 일을 대신하면 되지 않나요?" "누가 그런 짓을 하려 들겠소? 나라면 곧 죽어도 못 할거요." 블라이의 말이었다. 라모락은 지구에도 이에 비견할 만큼 중대한 금기사항이 있을까 생각해 봤다. 식인풍습, 근친상간, 신성모독 등을 이에 비유할 수 있겠지... 다시 물어봤다. "라구스닉의 유고시 직위 승계대책은 무엇입니까?" "그가 사망할 경우, 그의 아들이 자동적으로 그 자리를 물려 받습니다. 아들이 없을 땐 가장 가까운 친척이 대신합니다." "아무런 친척이 없다면요? 만약 전가족이 한꺼번에 죽는다면요? " "그런 일은 일어난 적도 없고, 일어날 리도 없소." 의장이 덧붙였다. "혹시나 그럴 위험이 있다면 다른 아기를 키워서 그 자리를 잇게 하지 요." "아, 그럼, 그 아기는 어떻게 고르지요?" "라구스닉가의 신부를 정할 때처럼 고아가 된 사내아이들 중에서 고릅 니다. " "그렇다면 제비뽑기로 지금 라구스닉을 대신할 사람을 뽑으면 되겠군 요." 라모락이 말했다. 의장이 놀라 말했다. "그건 안됩니다. 절대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어떻게 그런 제안을 할 수 있소? 사리 판단력이 없는 아기를 골라서 라구스닉처럼 키운다면, 어차피 그는 커서도 자신의 삶에 큰 불행은 못느낄 겁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다른 어른을 골라 라구스닉처럼 대우한다면... 오, 라모락 박사. 그건 안 될 말이오. 우린 그런 야만적 행위는 할 수 없소." '아무런 소용이 없군.' 라모락이 무기력하게 생각했다. '결국 그 방법외에는...' 그는 남은 한가지 방법에 대해 생각해 봤다. 별로 내키지 않는 대안이었 다. 그날밤 사실 라모락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라구스닉이 요구하고 있 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권인 '인간다운 삶'이다. 그러나 그러한 요구에 대해 전체 엘 써비어인 3만 명이 목숨을 걸고 반대하고 있다. 한편에는 3만 명의 생사가 달려있고, 또 다른 쪽에는 한 가족의 요구가 걸려있다. 한 가족을 부당하게 대우하므로 엘 써비어인은 모두 죽어 마땅 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도대체 부당하다는 것이 누구의 기준으로 내린 판단인가? 지구인의? 엘 써비어인의? 라모락에게는 과연 이를 판단할 자격 이 있는가? 라구스닉에게는 그 같은 자격이 있는가? 그는 자신의 판단하나로 3만 명 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개중에는 차별적 관습을 별 생각없이 그저 관습 으로 받아들인 남녀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이들도 있다. 3만 명의 목숨과 한 가족의 권리. 밤새 고민하다 라모락은 거의 절망에 가까운 기분으로 어떤 결정을 내렸 다. 날이 밝자, 평의회 의장에게 전화를 했다. "의장님, 만약 작업을 대신할 사람만 찾아 낸다면, 라구스닉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킬 가망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닫고 별수 없이 다시 작업에 복 귀하게 될 것입니다." 의장이 한숨을 몰아 쉬었다. "대체할 사람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이미 설명했쟎소." "엘 써비어인에게는 불가능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엘 써비어인이 아닙니 다. 저는 이곳의 관습에 괘념치 않습니다. 제가 그 대리 작업자가 되겠습 니다." 그들은 흥분했다. 라모락 자신보다 그들이 더 들떠보였다. 몇 번이고 진 정으로 하는 얘기냐고 물어왔다. 면도도 하지못한 라모락의 얼굴에는 피곤 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진지하게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또 라구스닉이 파업을 위 협할 때에도 대리 작업자를 외부에서 불러 고용함으로써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다른 별에는 이런 작업을 금기시하지 않으므로 돈만 충분히 준다면 단기적으로 일해줄 사람은 많이 있을 겁니다." (라모락은 자신의 행위가 부당한 착취를 당한 한 인간에 대한 배신이라 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라구스닉은 사회의 배척 말고는 아 주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하는 생각으로 죄책감을 애써 지우려 했다) 평의회 사람들은 라모락에게 사용 설명서를 주었고 그는 여섯 시간 동안 그 책을 자세히 읽어봤다. 누굴 잡고 물어보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 다. 엘 써비어인 중에서 그 일에 대해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고, 그 작업 을 주제로 대화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누구나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런지 하울러에 빨간 불이 들어왔을 때는 항상 검류계의 눈금을 0에 맞 추어 둘 것." 라모락이 소리내어 읽었다. "여기서 런지 하울러가 어떤 것입니까?" "가보면 무슨 표시가 되어 있을 겁니다." 블라이가 낮게 말했다. 엘 써비어인들은 모두 비굴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떨구고 손끝만 묵묵히 바라보았다. 라구스닉 일가가 수 대에 걸쳐 작업해 온 공장 건물로 그들은 라모락을 인도했다. 건물 근처에 다다르기 전에 엘 써비어인들은 모두 라모락을 떠 났다. 라모락은 어떤 길목에서 어디로 방향을 틀고 어느 층으로 어떻게 가 야하는 지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다른 이들은 멀찍이 물러서서 그 가 가는 것을 지켜보고 서있었다. 그는 찬찬히 방들을 살펴보았다. 그는 기기들과 계기판들이 설명서에 나 와있는 도해와 일치하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저기 런지 하울러도 있군.' 그는 적쟎이 마음이 놓였다. 정말로 기계마다 표시가 붙어있었다. 그것 은 반원형의 계기판으로 다양한 색의 전등이 여러 구멍 속에서 점멸하고 있었다. 왜 '울부짓는다'라는 뜻의 '하울러'를 이름으로 붙였을까? 알 길 이 없었다. '이 공장 어딘가에 분뇨가 저장되어있고 오십 여 가지 공정의 다양한 기 어와 출구, 파이프, 증류기가 재가동을 기다리고 있겠지.' 한치의 주저없이 그는 '시동'이라고 쓰인 첫 번째 스위치를 아래로 당겼 다. 공장이 다시 웅웅하며 돌아가는 진동을 벽과 바닥을 통해 느낄 수 있 었다. 그가 한 손잡이를 돌리자 불이 들어왔다. 비록 전공정을 다 암기했지만, 한 단계 한단계 그는 책을 보고 확인하 며 기기를 조작했다. 그 때마다 각 기계실에 불이 들어왔고 각 계기판의 눈금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공장의 가동음이 점점 더 커졌다. 공장 어딘가에서 쌓인 폐기물이 재활용 처리되고 있었다. 시끄러운 신호음이 갑자기 들려 라모락은 흠칫 집중하고 있던 작업을 멈 추었다. 그것은 수신기에서 나오는 신호였다. 라모락은 당황하여 수신기 전원을 올렸다. 놀란 라구스닉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처음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그것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일이 그렇게 된 거로군." "아시다시피 나는 엘 써비어인이 아닙니다. 내가 이 일을 하는 건 별 문 제가 되지 않습니다, 라구스닉씨." "하지만 이번 일에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왜 남의 일에 끼어들어 방해 하는 거요?" "나는 심정적으론 당신 편이지만 상황에 미루어 어쩔 수 없었소." "내 편이라면 왜 이러는 거요. 당신네 별에서도 여기서처럼 나 같은 사 람을 벌레 취급합디까?" "요즘은 그런 일이 없지요. 하지만 당신의 뜻이 옳다고 해서 3만 명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에 가서 내 요구에 굴복했을 것이오. 당신이 내 유일한 기 회를 망쳐버렸소." "그들은 절대 항복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당신이 이 긴 겁니다. 이제 그들은 당신도 불만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 니다. 이제껏 그들은 라구스닉은 불행도 못 느끼고, 별 대단한 사회문제가 못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와서 그들이 그걸 알아줘본들 뭐 합니까. 이제 그들은 아무때건 내 가 문제를 일으키면 다른 별 사람을 고용하기만 하면 되는데..." 라모락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는 이미 밤새도록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봤었다. "그들이 안다는 것은 엘 써비어인들이 당신의 존재와 당신이 느끼는 고 통을 인정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머지않아 당신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가 과연 옳은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도 나올 겁니다. 그리고 다른 별 사람이 고용될 경우, 그 이방인들은 엘 써비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문제 를 나중에 돌아가서 자기 별에 알리게 되는 창구가 될 것이고 머지않아 전 은하계의 여론은 당신 편이 될겁니다." "그런 후에는?" "만사가 좋아지겠죠. 적어도 당신의 아들 대에 가서, 아들이 받게되는 대우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질거요." "내 아들대라...." 라구스닉의 볼이 씰룩거리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난 나의 대에서 변화를 이루길 바랬소. 어쨌든 이번은 내가 졌소. 다시 일을 시작하리다." 라모락은 주체못할 안도감을 느꼈다. "지금 선생님께서 이리 오신다면 금방 작업을 넘겨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신다면 제가 선생을 직접 뵙고 악수라도 할 기회를 갖게될 거 고... 그렇게 된다면 제게는 영광입니다." 라구스닉은 라모락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쳐들었는데, 그의 표 정에서 약간씩 피어나는 자부심을 엿볼 수 있었다. "당신은 나에게 '선생님'이라 부르고 악수를 청하고 있지만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가서 당신 일이나 하라는 거요. 지구인, 나라면 남의 자리를 넘 보기보다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겠소." 라모락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엘 써비어의 위기상황을 무사히 넘기게 되어 마음은 놓였으나, 울적한 기분만은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돌아가는 통로가 막혀있어 깜짝 놀라 멈춰섰다. 다른 길을 찾아 보려 둘러 보았다. 그때 커다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와 다시 한번 놀랐다. "라모락 박사, 내 말 들리시오? 나 블라이 의원이오." 라모락이 위를 보았다. 그 소리는 어떤 스피커에서 나오는 것 같았는데 보이지는 않았다. 그가 외쳤다. "뭐가 잘 못 되었소? 내 말 들리시오?" "잘 들립니다." 본능적으로 라모락이 외쳤다. "뭐가 잘못 되었소? 여기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소. 라구스닉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 겁니까?" "라구스닉은 다시 작업을 시작했소." 블라이의 목소리가 답했다. "위기는 이제 끝이 났고, 박사는 떠나야만 합니다." "아니, 떠나다니요?" "엘 써비어를 떠난다는 말입니다. 당신을 위한 우주선이 준비되어 있 소." "하지만 난 아직 내 연구를 위한 자료수집도 마치지 못했습니다." 라모락은 갑작스런 사태 전환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문제는 도와드릴 수가 없소. 이제부터 우리는 당신에게 우주선으로 가는 길을 지시할 것이고 당신의 소지품은 자동처리 장치를 통해 우주선 화물칸에 실리게 될 겁니다. 우리는... 에, 우리는..." 어떤 생각이 라모락의 뇌리를 스쳤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우리는 당신이 어떤 엘 써비어인에게도 접근하거나 말을 걸려하지 않으 리라 믿습니다. 물론 미래에도 서로를 위해 엘 써비어로 돌아오려는 시도 는 삼가해 주길 바랍니다. 추가 자료 수집을 위해 다른 사람이 오는 경우 라면 기꺼이 환영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라모락이 메마른 목소리로 답했다. 이제는 그도 라구스닉이 된 것이다. 그는 분뇨처리 장치를 다루었고 이제 그도 이 사회의 천인이 된 것이다. 그는 이제 시체 염하는 사람, 돼지치기, 백정이 된 것이다. "잘 있으시오." 라모락이 말했다. 다시 블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는 길을 안내하기 전에, 라모락 박사, 엘 써비어 평의회를 대신하여 우리를 이번 위기에서 구해준 데 대해 감사하는 바이오." "원 별 말씀을..." 라모락이 씁쓸하게 답했다. ---------끝---------- 로봇 비전 아시모프 지음 먼저 내 자신에 대해 잠시 소개하자면, 나는 템프랄 그룹의 일원이 다. 사람들 중에는 2030년대라는 가혹한 시대를 살아가는데 바빠 템 포랄 그룹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템포랄 그 룹은 현대 과학의 거장들로 이루어진 연구 집단이다. 이 조직은 이 시대의 가장 어려운 난제를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우주의 지속적인 팽창 속도와는 다른 속도로 시간 사이를 이동하는 것...쉽 게 얘기해서 바로 시간 여행 말이다. 템포랄 그룹에서 내가 하는 역할은... 글쎄, 사실 나는 물리학자는 아니다. 그냥... 에... 그냥, 그저 그런 멤버라 하고 넘어가자. 나 는 고등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템포랄 연구자들이 몰두하고 있는 '시간 속의 가상 경로' 라는 개념을 처음 언급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아시다시피 시간 여행을 실행하는데 가장 큰 골칫거리는 바 로 지구의 물리적 위치가 전체 우주를 기준하여 볼 때 시시각각 변한 다는 것이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태양은 우리 은하의 중심을 축으로 돌 고, 우리 은하는 다시 국부 은하군의 중력 중심 주위를 돌고...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얘긴지 알 것이다. 만약 시간여행을 통해 어제 나 내일로 간다면 그 하루동안 지구는 태양 주위 공전 궤도 상에서 2 백 5십만 킬로를 이동하게 된다. 그동안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도 운 동을 하고, 다른 것도 다 움직이게 된다. 고로, 시간 여행은 항상 공 간 이동을 동반하게 된다. 나는 '문자 그대로의 시간 여행이 아니라, 4차원의 가상 경로를 통한 여행이라면 이같은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 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4차원에서라면 시간 상의 어느 위 치로 이동하건 물리적 본래 위치는 그대로 유지되는 경로가 존재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이같은 생각을 템포랄 학자들에게서 얘기했더니 생각보다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과학의 대가들이 벌인 이론 적 근거에 대한 열띤 논의를 이 자리에서 설명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일단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한편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도출해 낸 일련의 논리전개도 내가 한 말에서 촉발된 것이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방 정식으로 풀어보았을 때, 에너지에 관련한 일부 변수는 무한대를 넘 어서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일리가 있는 결론이었다. 만약 과거로 의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면, 그 결과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현재 를 완전히 바꿔 놓을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보아 과거는 고정된 것 이다. 고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불가능한 셈이다. 그러나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에 미래로의 여행과 다시 현 재로의 귀환은 가능할 것이다. 이같은 생각을 해 냈다고 별 보상을 받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템포 랄 팀은 나의 이같은 아이디어들이 다 소발에 쥐잡기 식으로 나온 것 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그같은 아이디어에서 이론을 확립시킨 것은 그들의 공이었다. 재반 여건을 고려해 볼 때, 나는 그런 처사에 불만 이 없었다. 다만 그런 생각들을 해냄으로써, 그들이 나를 이 시대 최고의 두뇌 집단에 계속 남아있도록 해주었다는 게 기뻤을 뿐이다. 물론 이론 확립 후에도 시간 여행 장치를 고안하는 데에는 수 년이 걸렸다. 그러나 이 글은 그 과정에 대한 과학적인 논문이 아니다. 이 글은 이번 시간여행 프로젝트에서 일어난 어떤 일을 기술하려는 의도 로 씌어진 것이다. 이 글은 미래의 지구 후손들에게 남기기 위한 기 록이지, 동시대인에게 읽히기 위해서 쓰여진 것은 결코 아니다. 시간 여행을 실험하면서 우리는 몇 가지 물체를 성공적으로 미래로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후에도 우리 템포랄 그룹은 만족할 수 없었다. 모든 실험체는 타임머신을 작동하는 순간 사라졌다. 나중엔 살아있는 동물을 보내기 시작했다. 미래로의 아주 짧은 시간 여행을 시도해 보았다. 오분이나 닷새씩 말이다. 실험체들은 오분이나 닷새 가 지나 다시 나타났다. 실험 동물의 생명이나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미래로의 시간여행이 성공한 것이다. 이제 문제는 무언가 미래로 보내고 귀환 후 미래에 대한 결과를 보 고 받는 일이었다. "적어도 200년 후의 미래로 보내야 할 겁니다." 라고 한 템포랄 팀 멤버가 말했다. "요점은 미래를 관찰한 후 결과를 우리에게 보고하는 일입니다. 우 리가 알아내야할 사항은 인류의 생존여부와 생활 방식입니다. 200년 이면 충분할 겁니다. 어찌보면 불과 200년후라 할지라도 인류의 생존 확률은 미약합니다. 이미 지난 백년간 지구환경과 생존여건은 심각 하게 악화되었지 않습니까?" 이것이 누가 한 말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템포랄 그룹에 학자는 수 십명 정도 있는데 일일이 누가 누군지 설명할 필요 는 없다고 본다. 다른 학자는 약간 침울하게 자신의 의견을 내 놓았 다. "저는 별로 미래를 알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만약 인류문명이 멸망했다거나 극소수만이 비참한 상태로 생존하고 있다면 어떻게 합 니까?" 또 다른 학자가 말을 받았다. "어떻게 하다니요? " "그런 경우라면, 더 가까운 미래로 시간 여행을 해서 원인과 대처 방안을 밝혀내야지요. 그리고는 미래를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는 겁니다. 과거와 달리, 미래는 결정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문제는 누구를 보내느냐로 귀착됐다. 수많은 동물 실험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템포랄 팀 연구자들 중 선 뜻 자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복잡한 인간 두뇌에 시간여행이 혹 무슨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한 탓이다. 혹시라도 지구의 석 학들인 그들의 사고능력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는가... 그 중에서 가장 낮은 직급에 있는 멤버는 나였다. 그래서 내가 손 을 들어 막 자원하려는 순간, 한 사람이 내 표정을 읽고 미리 나를 저지했다. "안돼. 아무리 당신이라도 함부로 모험을 시킬 순 없어."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게 칭찬인가? 욕인가?'' 그는 말을 이었다. "해결책은 RG-32호를 보내는 거야." 그거 말 되는군. RG-32호는 구형 로봇이었다. 고로 소모품인 셈이 다. 비록 인간에 맞먹는 지능은 없지만, 충분히 주위 현상을 관찰하 고 보고할 능력은 갖추고 있었다. 로봇이라면 공포를 느끼지 않고, 임무를 착실히 수행할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프로그램 된대로 진실 만을 보고하게 될 것이다. 완벽한 선택이야! 그런 생각을 왜 진작에 못하고, 바보같이 자원하 려 했을까? 아마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본능의 발로였겠지. 어찌됐건 RG-32호를 보낸다는 것은 유일한 논리적 결론 이었다. 사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아치에게 설명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보통 로봇의 별명은 제조번호와 비슷한 이름으로 붙여진다) 아치는 자신이 시간여행을 해야하는 이유나 안전의 보장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로봇으로서 이해가능하고 수행가능하다면 어떤 명령이 라도 받아 들였다. 시간 여행에 대한 명령을 마치 그는 오른손 치켜 들라는 명령에 반응하듯 아무런 감정 표시없이 따랐다. 로봇으로써, 이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세부 사항의 전달은 시간이 걸렸다. "일단 미래에 도착하면, 충분히 관찰했다고 느낄 때 까지라면 아무 리 오래 머물러도 좋다." 한 고위 템포랄 학자가 아치에게 일러주었다. "임무를 완수하면, 다시 시간여행 장치로 돌아와 우리가 설명한 방 식으로 기계를 조작해서 다시 현재로 돌아와야 한다. 네가 미래에서 5주를 머무르던, 5년을 지내던 관계없이 우리 눈에 너는 잠시 사라졌 다. 눈깜짝할 새 다시 나타난 것처럼 보일 것이야. 미래에 도착하면 시간 여행 장치를 안전한 장소에 보관해야 한다. 가볍게 제작 되었으 니 운반에 별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보관 장소를 잘 기억해 두어야 한다." 다른 학자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이러한 브리 핑은 더 복잡하게 되었다. "200년후에 언어는 얼마나 변해 있을까요?" 물론 이같은 의문에 대한 확실한 답변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미래 에서 아치의 의사소통 가능 여부를 두고 열띤 논란이 벌어졌다. 결국 과학자 하나가 논란을 매듭지었다. "이것들 봐요. 지난 수세기 동안 영어는 계속해서 세계 공용어로서 의 위치를 굳혀왔지요. 앞으로도 그런 추세는 계속 될 것 같습니다. 지난 2백년간 영어문법에 있어 의사소통에 지장을 줄만한 커다란 변 화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2백년 내에 무슨 큰 변화가 생긴단 말입니까? 설사 생긴다 하더라도 언어학자 중에는 '고대 영어'를 구 사하는 이도 있을 겁니다. 그런 이가 없어도 미래사회를 관찰하는데 에는 별 지장이 없습니다. 인류의 멸망 여부를 확인하는 데 의사 소 통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학자 한 명이 말했다. "타임머신을 아주 작게 설계해서 옷 속에 숨기는 건 어떨까요? 그 렇다면 위험한 상황도 쉽게 피할 수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이 톡 쏘았다. "그게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런 소형 기계를 만드느라 고생하다 보 면 굳이 타임머신을 쓸 필요도 없이 200년이 지나가 버릴 겁니다. 무 슨 사고가 생겨 아치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다시 시도하면 되지 않습 니까?" 이는 아치 면전에서 한 말이었지만, 아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 찌보면 아치는 미지의 시간으로 귀양보내지는 것이고, 또 파괴의 위 험까지 무릅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한다 는 제3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내린 명령 복종을 따라야한다 는 로봇의 제 2원칙이었다. 온갖 가능성이 제기되고 한참의 논란 끝에,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 는 과학자가 없어지자, 마지막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 아치는 로봇 특유의 침착성과 정확성을 갖고 자신의 명령을 암송했 다. 또한 타임 머신 작동법 역시 로봇다운 침착성과 정확성으로 터득 해냈다. 당시 일반 대중은 시간 여행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인 사실을 모르 고 있었다. 이론 검토 작업만이 진행되었을 때엔 비용이 많이 먹히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기계 제작 및 실험 단계에 들어가자 많은 돈이 투입되어야 했다. 이 연구 자금이 모두 국민의 세금이라는 점을 감안 할 때, 이 프로젝트가 실패하는 날에는 거센 비난 여론을 감수해야 했다. 시간여행이라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계획에 헛돈을 날린 것을 달가와할 이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 템포랄 과학자들은 연구의 진행 은 국가기밀로 하고 성공했을 때만 결과를 외부에 공표하기로 결정했 다. 상황이 그런지라 과학자들은 모두 이번 실험의 성공 여부가 갖는 중대성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실험 장소로서 어느 외딴 사막을 선택했다. 이 장소는 우리 의 4호 프로젝트에 할당된 국유지였다. 우리가 진행하는 연구의 속성 을 감추기 위해 프로젝트 명도 암호화 했다. 그러나 외부의 누군가 머리가 잘돌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4차원 여행이란 말을 생각해내 이 프로젝트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아낼 법도 했다. 그러나 물론 아직 그 런 불상사는 없었다. 실험준비가 완료되자 우리는 모두 긴장해서 숨을 죽이고 기계를 지 켜봤다. 타임머신 안의 아치는 한손을 들어 준비되었음을 알렸다. 순 간 기계가 번쩍 했다. 눈깜짝할 새라고 표현하기에도 너무나 짧은 찰나의 일이었다. 내가 무엇을 봤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다른 사람도 그 찰나의 번쩍임 을 보았는지 물어보려다 그만 두었다. 그들이 먼저 말하기 전에는 얘 기를 꺼내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들은 다들 고위 과학자이고 나는 그냥... 그냥 그런 멤버니까... 어쩨든 그때 아치에 모두 정신이 팔려 그 빛에 대해서는 말을 꺼낼 여유도 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건 아니니까. 너무나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우리 눈에 아치는 그 자리에 가 만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여행에 분명 성공했다는 데에 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기계의 외부에는 녹이 약간 슬었고 색도 바래져 있었다. 아치도 마찬가지 였다. 기계에서 나오는 아치는 방금 전의 아치가 아니었다. 훨씬 더 낡아 보였고, 금속의 마모로 표면이 반들 반들해 보였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는 그의 눈길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것 같았다. 아치가 분명 오랜 세월 후에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치에게 던져진 첫번째 질문은 세월에 관한 것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렀나? " 아치가 답했다. "5년입니다. 선생님, 철저하게 조사하기 위해 제가 받은 명령어 중 에서 가장 오랜 기간을 선택했습니다." "다행스런 징조로군." 어느 학자가 말했다. "만약 지구상에서 인류가 사라진 후라면, 정보를 수집하는데 5년이 나 걸렸을 이유가 없으니 말이야." 그러나 누구 하나 감히 '아치, 인류는 멸망했나?'라고 물으려는 사 람은 없었다. 과학자들은 모두 아치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고, 아치는 로봇 특유 의 인내심으로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고요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인간이 먼저 묻고 그 다음에 답변해야한다는 것이 로봇의 예의였다. 이 경우 미래를 본대로 보고해야한다는 것이 아치의 원래 임무였다. 그래서 아치는 곧 자발적으로 말문을 열었다. 아치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미래 세상은 아주 평화롭습니다. 인류 사회는 안정과 번영을 누리 고 있습니다." "안정과 번영이라구?" 과학자 한명이 반문했다. 그는 의외의 긍정적인 답변에 놀란 둣 했 다. "전세계가 말인가?" "미래 인간들은 제게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제가 지구의 전지역을 돌아보고 조사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전세계가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이것은 분명 믿기 어려운 보고였다. 2030년 현재 거의 모든 과학자들은 인류 문명이 붕괴되고 및 지구 환 경이 파괴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200년 후에는 모 두 평화와 번영을 누린다니... 과학자들은 다시 차근차근 질문을 던졌다. "나무들과 삼림은 어찌되었나?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데?" "대대적 녹화사업으로 대부분의 열대립이 복원되고 산림은 잘 보존 되고 있었습니다. 모든 황무지는 거의 다시 나무로 뒤덮이게 되었습 니다. 유전공학 덕분에 동물원의 야생동물이나 애완동물의 유전자를 토대로 다시 멸종한 생물들을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공해도 역시 사 라지고 자연이 아름답게 되살아났습니다." "지금 그것 확실한 얘긴가? " 한 과학자가 물었다. "저는 지구의 모든 곳을 가보았습니다. 그들은 제가 청하는 곳은 어디나 보여주었습니다." 한명이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아치에게 물었다. "아치, 잘 들어. 혹시 인류의 멸망을 보고하면 우리가 충격을 받고 집단 히스테리나 자살극이라도 벌일까봐 거짓말을 하는 것 아냐? 인 간에게 해를 끼쳐선 안된다는 로봇 제1원칙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그 건 잘못 생각한 거야. 너는 우리에게 반드시 진실만을 얘기해야 한다 구." 아치가 차분히 답했다. "저는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든 만약 제 가 거짓말하고 있다면, 제 양자 두뇌 회로는 혼란을 일으킬 것입니 다. 회로도를 조사해 본다면 제 말이 진실이란 걸 아실겁니다." "일리있는 얘기군." 템포랄 학자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아치의 양자 두뇌를 검사해 보았다. 모두 컴퓨 터 화면에 나타난 거짓말 탐지 결과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분명, 아 치의 양자 두뇌는 정상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건 분명 아니었다. 다시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지구의 도시는 어떻게 되었나? " "지금과 같은 형태의 도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2230년대, 도시 인구 집중은 완화되어 도시와 같은 인구 밀도가 높은 촌락의 형성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통신 시설이 잘 발달되어 사람들이 굳이 한곳에 모여 살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주는? 우주 탐험은 어떻게 바뀌었나?" "달 개척은 상당히 진척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주 식민지의 건설 이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지구와 화성 주위 궤도에도 우주 정착지 가 건설되어 있었습니다. 소행성대 정착지 개발이 추진되고 있었습니 다." 아치의 답이었다. "다 들은 얘기인가? " 한 과학자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선생님. 우주 정착지 몇 곳은 제가 직접 들러 보았습니다. 달 기지에서 약 두 달, 그리고 화성 주변 우주기지에서 한 달 정도 지냈습니다. 화성 자체의 식민지화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 분한 상태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화성에 미개한 생물 종을 이식하고 스스로 진화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 놓았습니다. 그 리고 소행성 지역 식민지에는 가보지 못했습니다." "어째서 그들이 그렇게 자네의 조사에 협조적이었나?" "제가 받은 인상은 그들이 제가 오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 다는 것입니다. 막연한 어떤 전설같은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마치 제가 올 것을 기대하고 있던 것 같아 보였습니다." "자네가 과거로부터 올 줄 알았다고 그들이 직접 말하던가?" "그건 아닙니다. 선생님." "그 부분을 물어보았나?" "예, 약간 물어보기 불편했지만, 임무 수행을 위해 궁금한 것은 모 두 물어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뚜렷한 답변은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다른 과학자가 끼어 들었다. "자네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은 게 또 있던가?" "좀 있었습니다." 학자 한명이 이 대목에서 턱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역시 무언가 수상해. 2230년의 인구는 얼마던가? 아치,그건 얘기 해주던가?" "예, 물어보았더니 지구의 인구는 10억 정도이고 우주 정착민이 1억 5천만명 정도 된다고 했습니다. 지구 인구는 안정되어 있고 우주 인구는 계속 증가하는 중이라고 답했습니다." "아,그렇군. 하지만 현재의 지구 인구는 거의 100억에 육박하고 그 중 반수는 가난에 찌들어 살고 있지. 어떻게 인구가 200년 사이에 10 분의 1로 줄어버린거지?" "그 부분도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사이에 '불행한 시기'가 있 었다고 했습니다." "불행한 시기라고?" "예." "어떤 면에서 말인가?" "그건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불행한 시기'가 있었다고 말하 고는 그이상의 답변은 기피했습니다." 다른 흑인 과학자가 냉정하게 물어보았다. "2230년의 사람들의 용모는 어떻던가?" "용모라니요?" "피부색이나 눈매 말이야." "오늘날과 거의 같습니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머리칼이 다른 사람들 등 지금처럼 아주 다양한 인류가 살고 있습니다. 정확히 통계 를 내보지는 않았지만 평균신장은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더 젊고, 강 하고, 건강해 보였습니다. 사람들의 용모는 다양했지만 영양실조나 비만증에 걸린 사람은 없었습니다." "인종 학살도 없고?" "그런 징후는 못 보았습니다. 물론 범죄나 전쟁, 독재 역시 없었습 니다." 템포랄 과학자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해피엔딩처럼 들리는데?" "해피엔딩이라, 너무 결론이 좋으니 오히려 의심이 가는군. 무슨 동화책에 냐오는 꿈나라같아.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해피엔 딩이 나오게 된걸까? 나는 아무래도 나는 그 '불행한 시기'가 마음 에 걸려." "이렇게 앉아 마냥 고민할 필요가 있나? 아치를 다시 100년이나 50 년 후로 보내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조사하면 되지않 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치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들은 제가 역사상 최초의 시간 여행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들은 제가 도착한 시간보다 이른 시점에 또 다른 시간 여행이 이루진 다면 자신들의 현재, 즉 미래가 급격히 바뀔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또 다른 시간 여행 시도에 대한 심한 우려를 표했습니다."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과학자들은 토론을 하기 위 해 아치를 내보냈다. 사실 나 역시 과학자는 아니므로 중요한 토론이 있을 때는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그 부분에 대해 말하는 이 가 없어 그냥 남았다. "문제는 인류의 미래가 이상향으로 종결지어졌다는 겁니다. 우리가 다시 시간여행을 시도한다면 자칫 그러한 해피엔딩을 망칠 수도 있습 니다. 그들은 아치가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치가 사실대 로 보고해주어, 우리가 실험을 중단해주길 바란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우리에게 숨기고 싶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냥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대로 둔다면 어차피 그들대에 가서는 지 구상에 인류의 낙원이 실현되겠지요." "어쩌면, 만약 우리가 다시 무슨 행동을 한다면 잘못된 결과가 생 길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불행한 시기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어쩌면 우리가 무언가를 한다고 해서 그 비극을 막는다는 보 장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역사의 순리를 막아 궁극적인 낙원의 형 성을 방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상황에서 현명한 판단은 시간 여 행 계획을 중지하고, 우리의 연구가 실패한 것으로 보고하는 게 아닐 까 생각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게 현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판단일 겁니다." "잠깐, 만약 그들이 아치의 도착을 알고있었다면 시간 여행이 성공 했다는 보고가 있었다는 얘기 아닌가요? 그렇다면 실패했다고 발표할 수는 없지 않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풍문을 통해 아치의 도착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했지 않습니까? 무슨 전해내려오는 전설 같은 것 말입니다. 내 생각에 우리의 실험 결과가 외부에 누설된 것 같습니다. 어쨌든 공식 발표는 하지 않는게 낫겠습니다." 며칠 동안 그들은 토론을 거듭했다. 논의가 거듭될수록 문제의 심 각성은 더 커지는 것 처럼 보였다. 나는 처음부터 그 논의의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전혀 그 논의에서 나의 의견을 내세우 지 않았고, 과학자들도 내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유전공학이 처음 개발될 때 과학자들은 혹시라도 전혀 새로 운 바이러스나 병균이 생겨나 인류에 해악을 끼치지 않을까 두려워 자신들의 연구 활동을 스스로 제한한 적이 있다. 템포랄 과학자들이 내린 결론도 이와 비슷한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미래 에 어떤 불행한 영향이 미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들의 시간 여행 연구를 아예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한 과학자가 이 모든 논의를 결론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인류가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미래를 탐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할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도 아직 요원한 미래의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단계에서 그러한 숙제의 해 결을 좀더 책임있는 후손들의 손에 맡기기로 합시다." 과학자 일동은 모두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로서는 약간 께름직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마 내 가 이들 학자들과는 달리 생각이 깊지 못해서 단순한 호기심을 통제 하지 못한 탓일까? 한 분야에서 너무 오래 일을 하거나 너무 많이 알 게 되면 조심스러워지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는 이들과 다르다. 나는 호기심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서 몰아낼 수 없었다. 며칠 뒤 여가 시간이 생겨 나는 아치를 찾아갔다. 아치는 인간의 신분을 구별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도 다른 이곳의 과학자 들 처럼 깍듯이 주인 대접을 해줬다. 어차피 그에게는 나도 다른 이 들과 같이 복종해야할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미래의 인간들은 그들의 선조를 어떻게 생각하던가? 어리석은 원 시인으로 생각지는 않던가?" 아치가 공손히 답했다. "전혀 그런 기색은 없었습니다. 저를 보더니 무척 흥미로와 했습 니다. 저를 볼 때마다 그들은 늘 미소를 지어주었습니다. 사실 미래 에는 로봇이 없기에 그들에게 제가 신기해 보였는지 모릅니다." "미래에는 로봇이 없다고?" "예, 그들은 자기들의 시대에는 저같은 로봇이 없다고 말했습니 다." "로봇을 전혀 보지도 못했고?" "예, 단 한 대도 보지 못했습니다." 한참 생각 끝에 다시 물었다. "그들은 현재 우리 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던가?" "제 생각에 여러가지 면에서 과거의 인류문명을 존경하는 눈치였 습니다. 그들은 제게 '고속성장의 시대'라는 이름의 박물관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의 도시 전체가 박물관으로 보존되고 있었습니다." "200년 후의 세계에는 도시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곳은 도시가 아니라 박물관입니다. 맨하탄 섬 전체가 유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그곳을 구경시켜 주며 여러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제게서 역사적 고증을 받고 싶어 했는데, 저 도 맨하탄에는 가보지 못해서 별 도움은 못 되었습니다. 그 맨하탄 박물관의 보존 상태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는 눈치였습니다. 다른 몇몇 도시들도 잘 보존되어 있었고 과거의 공장이나, 종이로 만든 책이 들어있는 도서관, 과거의 의복과 패션, 가구 등이 유물로 써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과거 인류의 문명은 크게 진보되지 는 않았으나, 밝은 미래를 위한 기초를 제공했다고 말했습니다." "어린아이나 아기는 보았나?" "아니요." "아이에 대해 얘기한 적도 없고?" "없었습니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켯다. "내 말 잘들어, 아치..." 내가 만약 템포랄 과학자들보다 확실히 더 잘 아는 분야가 있다 면, 그것은 바로 로봇이었다. 이곳의 과학자들은 로봇을 그냥 단순 한 사고를 하는 고철덩어리 정도로 취급했다. 그래서 특별히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는 로봇에게 말을 거는 일이 없었다. 특히 로봇에게 뭔가 물어본다는 것은 학자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또 나는 로봇의 양자 두뇌의 작동 논 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동료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 할 방법으로 아치의 사고를 조종할 수 있었다. 나는 템포랄 과학자들이 아치를 다시 심문할 일은 없으리라 보았 다. 아니 있다하더라도, 아치는 이제 특정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치는 자신이 자신의 주인들에게 무언가 숨기 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한동안 곰곰이 궁리해 보았다. 나는 다음 200년간 생길 일을 어느 정도 추측해 낼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을 거듭할수록 내가 도출해낸 결론에 대한 믿음은 커져갔다. 사실 아치를 미래로 보낸 것은 실수 였다. 왜냐하면 그는 사고의 폭이 좁은 원시 로봇이기 때문이다. 그 에게 사람은 그냥 사람이었다. 그는 차이를 구분할 능력이 없었다. 그는 인간이 그토록 발달한 문명을 누리고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데 대해 전혀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그에게 인간은 자신의 전지전능한 창조주였으므로. 템포랄 과학자들이 처음 미래 인류가 그토록 고고하고 평화롭게 살고 있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아치와 달 리 그들은 인류의 속성을 아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인간이라는 약점 때문에 아치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 들은 인류의 희망찬 미래를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치보다, 또 과학자들보다 더 냉철하고 체계적인 사 고를 하는 편이다. 먼저 인구의 문제가 내게는 약간 이상하게 들렸다. 만약 100억의 인구가 10억으로 줄만큼 큰 재앙이 있었다면 어떻게 일부만 살아남 을 수 있었을까? 인구분포 얘기를 들어보면 전세계적으로 고르게 생 존자가 남았는데 어떤 재앙이 그런 결과를 낳을 수 있었을까? 살아 남은 10억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다른 90억보다 생리적으로 강한 종족인가? 더 혹독한 조건을 견뎌낼 수 있는 선택받은 인류인가? 게 다가 미래의 인류는 평화롭고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분명 전쟁을 통해 다른 90억을 멸망시킨 사람들이 아니었다. 과연 그러한 사람들이 인류였을까? 그들은 아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시대에는 아치와 같은 로봇이 없다고 했다. 만약 금속형의 로봇이 아닌 안드로이드의 경우 는 어떠했을까? 만약 미래에 가서 인간과 동일한 신체구조와 동일한 화학적 유기성분으로 이루어진 안드로이드의 개발이 있었다면? 지금 과 같은 고철 덩어리 금속형 로봇이 아닌 인간과 똑같이 생긴 유기 체 로봇이 미래에 생긴다면, 아치가 그것을 인간과 구분할 수 있었 을까? 만약 미래의 어떤 불치병이 만연하여 인류는 소멸하고 인간형 로봇만이 남게 된다면? 미래에는 아이가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인 구의 수도 고정적이었다. 아치가 두 달동안 달 우주정착지에 가 있 는 동안, 아기는 전혀 보지 못했는데 달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다 고 했다. 어쩌면 아치가 본 미래 지구의 주인은 인간을 꼭 닮은 로봇일지 모른다. 그러한 섬찝한 추측이 희망을 던져주기도 한다. 환경을 파괴하고 서로를 살륙해 온 인류 대신 지구는 로봇이라는 평화롭고 이성적인 주인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인간형 로봇들이 자신들의 소 명에 충실하고 과거의 인간들이 저지른 과오를 다시 범하지만 않는 다면, 이들은 현존 인류보다 더 나은 문명을 일구어 낼 수 있을 것 이다. 얼마나 많은 우주의 지적 생명체들이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갔는가? 아마 지구의 주인으로 가장 합리적인 인류의 후 손은 로봇일지 모른다. 어찌보면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럼 이러한 사실을 나는 현재의 인류에게 알려야 하는가? 아니면 템포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가?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먼저 그들이 내 말을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혹시 믿는다 하더라 도 그런 사실에 분노해 지구상의 모든 로봇을 파괴해 버릴지 모른 다. 그러면 아치가 본 그런 이상향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로 봇을 파괴한다고 해서 인류의 멸망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인류 멸망 후의 지구를 황폐하게 만들 뿐이다. 인류의 꿈을 계 속할 새로운 지구의 주인을 없애는 결과가 될 것이다. 나는 그런 결과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치가 본 미래의 낙원이 현실화되기를 바란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에서이다. 이 글은 200년 동안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가 아치의 도착 시점 약간 전에 미래 지구의 주인들에 의해 개봉될 것이다. 그리하 여 미래의 인간형 로봇들은 아치가 템포랄 과학자들에게 낙원이 된 지구의 미래를 보고하도록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미래의 시간은 과 거에 의해 방해 받지 않고 그대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내 생각을 확신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이같은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 는 입장에 있다. 나는 템포랄 과학자보다 낮은 지위에 있다고 글머리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나는 또 로봇에 대해서는 그들보다 내가 더 잘 안다고 적었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로봇이기 때문이 다. 나는 아치가 착각할 정도로 인간을 꼭 닮은 최초의 로봇이다. 그리고 앞으로 나와 같은 조직에서 배양된 로봇이 계속 개발될 것이 고, 이들은 언젠가 함께 원대한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바 로 로봇 비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