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를 가져다 준 기계 글쓴이: 아이작 아시모프 올린이: 최용덕 리더스다이제스트 91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기쁨에 넘친 축하연은 끝날 줄을 몰랐다. 심지어 '멀티백'이 설치되어 있는 깊고 조용한 지하실에까지도 축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기술자들이 거대한 컴퓨터의 본체 주위를 분주히 오가지도 않았고, 약한 불빛들이 불규칙적으로 깜빡이지도 않았다. 이처럼 정보의 흐름이 정지되기는 10년만에 처음이었다. 모두들 기뻐 날뛰는 이 대도시에서 이곳만이 유일하게 평화로운 장소였다. 세 사나이는 본능적으로 이곳을 찾았다. 태양계연맹연구소의 소장 러마 스위프트가 군모를 벗고 지친 듯 기술자들이 사용하는 회전의자에 주저앉았다. 구겨진 그의 군복은 무거워 보였다. 그는 군복을 입고 있을 때는 한번도 편안한 적이 없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끔찍한 일이었지만 막상 지내놓고 보니 허전한걸. 데네브(백조자리의 알파별. 광도 1.3의 초거성)와 전쟁을 하지않고 지내던 시절이 과연 있었던가 할 정도로 긴 전쟁이었으니까. 평화롭다는 것, 아무 걱정없이 별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군." 다른 두 사람은 둘 다 스위프트보다 나이가 아래였다. 그들은 머리가 희끗희끗하지도 않았고, 지쳐 보이지도 않았다. 입이 가벼운 존 헨더슨은 승전에서 오는 해방감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전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여러 해 동안 지구와 인간에게 닥친 위협에 대해 너무나 많은 말을 주고받았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지금 살아있고, 파멸당한 쪽은 데네브인들이라니." "멀티백 덕분이지." 스위프트가 좀처럼 냉정을 잃지않는 맥스 재블런스키를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재블런스키는 전쟁기간동안 줄곧 중요한 신탁을 해석하는 수석 해석관으로 일해 왔다. "그렇지, 맥스?" 재블런스키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모두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는 굵은 엄지손가락을 자기 오른쪽 어깨 쪽으로 움직여 위를 가리켰다. "맥스, 시샘하는 거야?" "사람들이 멀티백 만세를 부른다고 제가 시샘한단 말씀인가요?" 재블런스키의 울퉁불퉁한 얼굴에 경멸의 빛이 나타났다. "그게 저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다면, 멀티백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계라고들 생각하라지요." 헨더슨은 눈꼬리로 두 사람을 훔쳐보았다. 죄의식의 무게가 묵직하게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갑자기 그 무게가 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듯했다. 이제 전쟁도 끝났으니 이 무거운 짐도 벗어 던져야겠다고 생각하고 그가 입을 열었다. "멀티백은 승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지요. 입력한 자료 이상의 일을 해낼 수는 없지요." 그는 자기 말에 흠칫 놀라며 말을 멈추었다. 재블런스키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료를 공급한 사람이 바로 자네라는 걸 알아야 하네. 그게 아니라면 그 공적만을 자네가 치지하고 있는건가?" "그게 아녜요!" 헨더슨은 버럭 화를 냈다. "그까짓 일이 공적은 무슨 공적입니까? 멀티백이 사용해야 했던 자료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그것들은 지구를 비롯하여 달과 화성, 심지어 타이탄(토성의 여섯 번째 위성)에까지 설치되어 있는 100개의 보조컴퓨터를 통해서 미리 소화된 겁니다. "8년 전에 내가 수석 프로그래머가 됐을 때는 전쟁은 아직 멀리 떨어진 곳의 일이었습니다. 실질적인 위험이 따르지 않는 모험이었지요. 그때는 아직 유인 우주선들이 전쟁을 떠맡고, 행성간의 인력 조작으로 행성 하나를 삼킬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지는 않았었지요. 그 이후로 정말 어려운 일들이 닥치기 시작했지요. 두 분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요." 헨더슨이 말했다. "말해보게." 스위프트가 재촉했다. "그러니까 그 자료들이 무의미하게 된거에요. 아무 쓸데없게 되어 버렸죠. 두 분은 이런 문제에 접할 기회가 없었지요. 맥스, 자네는 멀티백을 한번도 떠난 적이 없었지. 그리고 소장님도 공식 방문을 할 때 외에는 관저를 떠나신 적이 없었지요. 공식 방문 때에는 그들이 보여주기를 원하는것만을 보셨을테구요." "난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라구." 스위프트가 말을 받았다. 헨더슨이 다시 말했다. "전쟁 수행에 중요한 요소인 생산능력, 자원 잠재력과 훈련된 인력 등에 관한 자료가 전쟁 후반기에 얼마나 부정확해졌는지 알고 계십니까? 민간 부문과 군의 지도자들은 모두 자기가 맡고 있는 부서의 이미지 보호에만 열을 올렸지요. 나쁜 것은 덮어 버리고, 좋은 것은 과장했지요." 재블런스키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하지만 자네는 자료가 신뢰성이 없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어." "그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나?" 헨더슨이 되받았다. "우리들의 전쟁 노력은 모두 이 멀티백에 맞추어져 있었지. 데네브인들은 그런 기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멀티백은 우리 쪽의 훌륭한 무기였지. 파멸을 눈앞에 두고 있던 우리들의 사기를 높여주는 것이 뭐가 있었나? 멀티백이 언제든지 데네브인들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미리 대응해 줄 것이라는 확신밖에 없었지. 내가 만약 자네에게 자료들이 신빙성이 없다고 했다면, 자네는 날 믿기는커녕 나를 다른 사람으로 갈아치우려고 있을걸. 그러니 내가 그런 얘기를 입밖에 낼 수 있었겠나?" "그래서 어떻게 했다는거야?" 맥스 재블런스키가 따졌다. "자료를 수정했지." "어떻게?" 스위프트가 끼어들었다. "직관에 따랐죠. 처음에는 아주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만 여기저기 조금씩 손을 댔죠. 그래도 아무 일 없더군요. 나는 점점 대담해졌죠. 종전 무렵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마구 고쳤지요. 필요한 자료를 아예 내가 만들어 넣었으니까요. 내가 고안한 비밀 프로그램에 따라 멀티백 애닉스가 나에게 자료를 공급하도록 해놓았었죠." 전혀 뜻밖에도 재블런스키가 미소를 지었다. 주름진 아래 눈꺼풀 뒤에서 새카만 그의 눈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허가를 받지 않고 애닉스를 사용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한테 세 번이나 들어왔었지만, 내가 묵살해 버렸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면, 난 추적하여 바로 자네를 찾아냈을테고, 자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밝혀낼 수 있었을거야. 하지만 그 무렵에는 멀티백은 전혀 중요하지가 않았어. 그래서 자넨 무사했던거야."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구?" 헨더슨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 뭘 보고 자넨 멀티백이 제구실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나? 전쟁 말기에 우리 부서의 기술자들이 어디 있었는지 알고 있나? 그들은 1000개의 서로 다른 우주장치에 실린 컴퓨터에 필요한 자료를 입력하느라고 모두 정신이 없었어. 내 곁을떠나 버렸던거야. 나는 믿을 수 없는 풋내기들과 시대에 뒤떨어진 퇴역 노병들을 데리고 일을 꾸려나가야 했다구. 나에게는 멀티백에 입력되는 자료가 믿을 만하든 믿을 수 없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어. 거기서 나오는 결과를 믿을 수 없었으니까.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지."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했지?" 헨더슨이 물었다. "나도 자네와 똑같이 했다구. 직관에 따라 행동했지. 그렇게 해서 그 기계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걸세." 스위프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두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놀라운 일이군!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근거로 삼으라고 내게 제공된 정보가 멋대로 작성한 자료를 멋대로 해석한 것이었다는 얘기로군. 내가 그 정보게 크게 의존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었구먼." "그 정보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얘깁니까?" 조금 전에 자기의 해석이 엉터리였다는 걸 털어놓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재블런스키는 전문가로서 모욕을 당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사실이야. 멀티백은 저기가 아니고 여기를 때려라,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난 도무지 멀티백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었거든." "멀티백의 최종 보고서는 언제나 분명하지 않았습니까?" 맥스가 항변했다.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였을지 모르지. 내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어. 중대한 결정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까." 잇달아 점점 더 놀라운 비밀이 드러나고 있었다. 흥분한 재블런스키는 존칭 붙이는 것도 잊은 채 다그쳤다. "그렇다면 어떻게 했다는 겁니까? 아무튼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스위프트가 호주머니를 더듬더니 오래된 주화 하나를 끄집어냈다. 금속이 부족해서 컴퓨터가 통제하는 신용 거래 시스템으로 전환되기 이전에 사용되던 동전이었다. 그는 동전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말했다. "관리자의 어깨에서 결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덜어준 도구는 멀티백뿐만은 아니지. 그런 도구는 전에도 많이 있었고 그중에는 멀티백보다 더 능률적인 것도 있었지. 전쟁의 승리를 가져온 도구가 하나 분명히 있긴 있었지. 아주 간단하고, 멀티백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이지. 특별히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마다 난 그걸 사용했지." 스위프트가 말했다. 스위프트는 회상에 잠긴 듯 엷은 미소를 띠고 동전을 위로 던졌다. 동전은 허공에서 번쩍이며 돌다가 앞으로 내민 그의 오른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는 움켜쥔 오른손을 왼쪽 손등에 포갠 다음 말했다. "맞혀 보시지. 앞면인지, 뒷면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