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랑 투르게네프 지음 손님들은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갔다. 시계가 12시 반을 쳤다. 방에 남은 사람은 주인과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그리고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뿐이었다. 주인은 초인종을 눌러 하녀에게 남아 있던 밤참을 치우게 했다. "그럼, 결정된 거로군요." 안락의자에 깊숙하게 몸을 파묻고 여송연에 불을 붙이면서 주인은 말했다. "우리들은 저마다 자기의 첫사랑 얘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먼저 당신부터 시작해 주십시오." 투박스럽고 허여멀건 얼굴에 오동통한 몸집을 가진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는 먼저 주인 쪽을 바라보고 다음엔 천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내게는 첫사랑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드디어 그는 입을 열었다. "나는 대뜸 두 번째 사랑부터 시작했으니까요." "그건 또 어떻게 돼서지요?" "아주 간단하죠. 나는 열여덟 살 때 처음으로 무척 귀엽게 생긴 아가씨의 꽁무니를 쫓아다녔습니다. 물론 그다지 새로운 맛이라는 걸 모르고 쫓아다녔었지요. 그 다음에도 많은 여자들을 사랑해 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여섯 살 때 내 보모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랑을 느꼈답니다. 그러나 너무도 오래 전의 일이 되어서,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상세한 일은 이미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또, 비록 기억에 남아 있다 해도 누가 그런 얘기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할까요?" 하고 주인이 입을 열었다. "내 첫사랑도 그 다지 재미있는 건 못 됩니다. 나는 지금의 아내인 안나 이바노프나아 알게 될 때까지는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아내와는 모든 일이 기름칠을 한 듯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양족의 아버님들사이에서 혼담이 나오자 우리는 금방 서로에게 반해 지체없이 결혼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형편이었으니까, 내 이야기는 두서너 마디로 끝나고 맙니다. 사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내가 첫사랑 얘기를 끄집어 낸 것은, 당신들에게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아직 노인이라고는 할 수 업승나, 그래도 꽤 나이가 많은 홀아비들이니까요.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당신이라면 우리에게 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을 듯한데요." "내 첫사랑은 그야말로 보통 이상이었지요." 백발이 뒤섞인 검은 머리에, 사십쯤 되어 보이는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말을 좀 더듬으며 대답했다. "아!" 주인과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더욱 멋지군요. 어디 들어 봅시다." "그러지요. 아니, 그만둡시다.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 좋겟습니다. 나는 말재주가 없어서 싱겁고 짤막한 얘기가 되거나, 또 길게 늘어놓아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얘기가 되고 말 테니까요. 그래도 원하신다면 나는 생각나는 모든 것을 수첩에 적어서----그걸 보여 드리겠습니다." 두 친구는 처음에는 동의하려 하지 않았으나,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끝내 자기 주장을 고집했다. 2주일 뒤에 그들은 다시 모였고,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자기의 약속을 성실히 지켰다. 그의 수첩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돼 있었다. 1 나는 그 때 열여섯 살이었다. 그것은 1883년 여름의 일이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부모님은 네스쿠치느이 공원 맞은편 칼루가 성문 근처에 있는 어느 별장을 빌려 쓰고 있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리 서두르지 않았고 제대로 공부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의 자유를 구속하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나의 마지막 가정교사와 헤어진 뒤부터는 제멋대로 하고 싶은 짓을 하고 있었다. 그 프랑스인 가정교사는 자기가 폭탄처럼 러시아 땅에 굴러떨어졌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언제나 마음이 들떠 있었다. 그리고 얼굴에 무서운 표정을 띠고, 날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지만 그래도 무관심한 편이었고, 어머니는 내가 외아들이었는데도 나에 대해서는 관심이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마으ㅁㄴ 다른 걱정거리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직 젊은데다가 매우 보기 드문 미남이었으며, 자기보다 열살이나 위인 어머니와 타산적인 결혼을 했던 것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슬픔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다시 말새서 언제나 흥분하든가, 질투를 일으키든가, 화를 내고 있었다----물론 아버지 앞에서는 그런 티를 내지 못했다. 어머니는 몹시 아버지를 두려워하였고, 한편 아버지는 엄격하고 냉정하여 언제나 거리감 있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그토록 침착하고 자신있고 자기 힘을 믿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 별장에서 보낸 처음 몇 주일을 나는 언제까지나 잊지 못할 것이다. 화창한 날시가 계속되었다. 우리는 5월 9일, 바로 성 니콜라이 축일에 시내에서 이 곳으로 이사해 온 것이었다. 나는 산책을 하였다----별장 정원인 네스쿠치느이 공원을 거닐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성문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언제나 무슨 책----이를테면 카이다노프의 교과서 등을 가지고 갔지만, 그것을 펴는 일이란 거의 없었고, 그보다는 꽤나 많이 외워 두었던 시들을 소리 높여 읊는 것이 일과였다. 피가 몸 속에서 용솟음치고 가슴은 뛰었다----그것은 정말 달콤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줄곧 겁에 질려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그리고 모든 것에 놀라움을 느끼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치 아침 노을이 물들었을 때, 종루 주위를 나는 제비 떼처럼ㅂ, 공상은 언제나 같은 환상의 주위를 빠른 속도로 맴돌면서 장난치는 것이었다.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슬픔에 젖기도 하며, 어떤 때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때로는 노래하는 듯한 시의 구절이며, 황혼의 아름다움에 휩쓸려 나오는 그러한 눈물과 우수를 통하여 용솟음치는 삶과 젊음의 기쁜 감정이 마치 봄의 풀처럼 파릇파릇 싹트기도 하였다. 나는 승마용 말을 한 필 가지고 있었다. 말에 손수 안장을 얹고는 혼자서 어디로든 먼 곳까지 나가곤 했다. 그리고 쏜살같이 말을 달리면서, 자신을 무술 경기에 나온 기사로 생각하기도 하고----그 때 바람결은 얼마나 즐겁게 내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던가!----혹은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그 눈부신 햇빛과 푸른 하늘을 활짝 열어젖힌 가슴으로 들이 마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여자의 모습이라든가 여자의 사랑이라든가 하는 환영은, 그 즈음 나의 머릿속에 뚜렷한 윤곽으로 떠오른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느끼는 모든 것에는 무엇인지 모를 새롭고 말할 수 없이 감미로운 여자에 대한 예감----알 듯 모를 듯하면서도 수줍은 예감이 숨어 있었다. 이러한 예감, 이러한 기대는 내 온몸에 스며들었다. 나는 그것을 호흡했다. 그 감정은 피 한 방울 한 방울에까지 스며들어, 나의 모든 혈관을 줄달음질쳤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실현될 수 있는 운명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별장은 둥근 기둥이 여러 개 세워진 목조 건물의 주인집과, 두 개의 야트막한 별채로 되어 있었다. 왼쪽에 있는 별채는 값싼 도배지를 만드는 자그마한 공장이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여러 번 그 곳에 구경을 하러 가 보았는데, 창백하게 야윈 얼굴에 머리칼이 헝클어지고 거름투성이 옷을 걸친, 바싹 마른 열 명 가량의 소녀들이 네모진 인쇄기의 판대기를 누르는 나무 지렛대 위로 쉴새없이 뛰어오르면서, 자기들의 연약한 몸무게로 가지각색의 도배지 무늬를 찍어 내고 있었다. 오른쪽 별채는 비어 있어 셋방으로 내놓고 있었다. 어느 날, 5월 9일부터 3주일 가량 지났을 때---- 이 별채 들창의 덧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두 여인의 얼굴이 나타났다----어떤 가족이 그리로 이사해 온 것이었다. 지금도 생각나지만, 바로 그 날 점심에 어머니는 하인에게 이웃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 여인이 자세키나 공작 부인이라는 말을 듣고, 어머니는 처음에는 그래고 어느 정도 경의를 표하는 말투로 "아, 공작 부인이야‥‥" 하더니, 곧 이렇게 덧붙였다. "아마 어느 가난뱅이 공작 부인이겠지." "짐차 세 대로 이사 오셧어요." 접시를 공손하게 내밀며 하인이 말했다. "자가용 마차도 없는 것 같고, 가구도 아주 초라하더군요." "그래." 하고 어머니는 말을 받았다. "하지만 어쨌든 잘됐어." 아버지가 차가운 눈초리로 흘끗 바라보자, 어머니는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실 자세키나 공작 부인이 부유한 여자일 리 없었다. 그녀가 세든 별채는 낡아바진 데다가 좁고 야트막한 집이라, 웬만큼 돈푼이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집에 살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기는 그 때 나는 그런 이야기를 귓전으로 흘려 버렸다. 공작이라는 칭호도 나에게는 아무런 감명을 주지 못했다. 나는 얼마 전에 쉴러의 <군도>를 읽었던 것이다. 2 나는 저녁마다 엽총을 가지고 뜰 안을 돌아다니며 까마귀를 쫓는 습관이 있었다. 조심스럽고 욕심 많고 교활한 그 새를 나는 미워했다. 바로이 이야기가 시작되었던 날, 나는 여느때처럼 정원으로 나갔다. 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선 정원의 가로수 길을 아무 소득 없이 모조리 돌아다니고 나서----까마귀는 나를 알아보고는 멀찍이서 이따금씩 까욱가욱 울고 있을 뿐이었다----우연히 나지막한 담장으로 다가갔다. 담장은 오른쪽 별채 저쪽으로 뻗어 있었는데, 별채에 딸린 좁다란 마당과 우리 집 정원을 구분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숙이고 걸어갔다. 갑자기 사람들의 말 소리가 들려왔따. 나는 담장 너머를 바라보고, 그만 돌처럼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상한 광경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에게서 불과 대여섯 발자국 떨어진 딸기나무 덩굴에 둘러싸인 푸른풀밭 위에, 줄무늬 있는 장미빛 옷을 입고 하얀 수건을 머리에 쓴 날씬한 몸매의 키 큰 처녀가 서 있고, 그 주위에는 네 명의 청년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처녀는 작은 회색 꽃으로 그들의 이마를 돌아가며 때려 주고 있었다. 나는 그 꽃 ㅇ디름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어린애들이 곧잘 가지고 노는 꽃이었다. 마치 조그마한 주머니처럼 생긴 그 꽃은 무엇이든지 딱딱한 물체에다 두드리면 탁 하고 요란스럽게 터지는 것이었다. 청년들은 좋아라고 이마를 내밀고 있었다. 처녀의 몸짓에는----나는 옆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떤 말할 수 없는 매력이 풍겼고, 명령하는 듯하면서도 상냥스럽게 어루만져 주는 것 같은, 조소하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여운 무엇인가가 엿보여서 나는 놀랍고도 만족한 나머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나도 저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이마를 얻어맞아 봤으면,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자리에서 당장 내던져 버려도 좋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엽총은 손에서 미끄러져 풀 위에 떨어졌다. 나는 모든 것을 잊고서 그 날씬한 몸매며 가느다란 목과 예쁜 손, 흰 머릿수건 밑으로 보이는 약간 헝클어진 블론드 머리며, 반즘 감겨진 영리한 눈과 속눈썹, 그리고 그 밑의 갸름한 볼‥‥ 이런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젊은 친구."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렸다. "남의 아가씨를 그렇게 바라보는 법이 어디 있어?" 나는 온몸이 움찔하고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바로 곁의 담장 너머에서 검은 머리를 짧게 깎아 올린 어떤 사내가 비웃는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그 순간, 처녀는 이ㅉ고을 돌아보았다. 표정이 풍부하고 활기 있는 얼굴에서 빛나는 커다른 회색 눈동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그 얼굴 전체를 가늘게 떨면서 웃음을 지었다. 흰 이가 반짝이고 눈썹은 아주 야릇하게 위로 치켜올라갔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풀 위에 떨어진 엽총을 주워 들었다. 그런 다음 커다랗기는 해도 심술궂은 데는 없는 호탕한 웃음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내 방으로 도망쳐 들어와 침대에 몸을 던지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슴 속이 마구 뛰었다. 나는 몹시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 유쾌하기도 했다. 나는 여태껏 경험해 본 일이 없는 흥분을 느꼈다. 잠시 숨을 돌린 뒤 나는 머리를 다시 빗고 옷을 매만지고 나서 아래층으로 차를 마시러 내려갔다. 젊은 처녀의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심장은 숨가쁜 고동을 멈췄지만 어쩐지 기분 좋게 죄어드는 것 같았다. "너 어쩐 일이냐?" 아버지가 불쑥 물었다. "까마귀는 잡았니?" 나는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려다가 국 참고 그저 빙긋이 웃어보이기만 했다. 잠자리에 들어갈 때 나는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나 자신도 모르게 한쪽 발을 쳐들고 세 번이나 뱅그르르 맴을 돌았다. 그리고 포마드를 바르고 자리에 눕자, 밤새도록 죽은 사람처럼 늘어지게 잠을잤다. 새벽녘에 잠이 개었으나 머리를 조금 쳐들고 환희에 찬 눈으로 주위를 잠깐 둘러보고는 다시 잠들어 버렸다. 3 어떻게 하면 저 집 사람들과 사귈 수 있을가? 이튿날 아침 눈을 뜨기가 무섭게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이런 생각이었다. 나는 차를 마시기전에 정원으로 나갔지만 담장에 너무 가까이 가지는 않았으며, 또 아무와도 만나지 않았다. 차를 마신 다음 나는 별장 앞 큰길을 몇 차례나 오락가락하며 멀리서 들창 안을 엿보았다. 커튼 뒤로 그녀의 얼굴이 보인것 같아서 나는 깜짝 놀라 이내 멀찍이 물러 나와 버렸다. 어쨌든 사귀고 봐야 할 텐데‥‥‥. 그러나 어떻게 해야 가갑게 사귈수 있는지 그게 문제란 말이야. 네스쿠치느이 공원 앞에 널찍이 깔린 모래터를 이리저리 거닐며 나느 생각했다. 나는 어제 그녀와 만났던 장면을 세세한 점까지 그대로 다시 눈앞에 그려 보았다. 어쩐 일인지 그녀가 내게 웃음을 던지던 일이 유난히 두렷하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하고 있는 동안 운명은 이미 나를 위해 적절한 배려를 하고 있었다. 내가 집에 없는 동안에 어머니는 새로 이사 온 이웃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우체국의 통지서나 싸구려 포도주의 병마개 따위에나쓰는 갈색 봉랍을 붙인 회색 종이에 씌어 있었다. 공작 부인은 무식하기작이 없는 말투와 지저분한 필적으로 쓴 이 편지를 보내 어머니에게 자기를 보살펴 달라는 청을 한 것이다. 공작 부인에 의하면 우리 어머니는 그녀와 그 자녀의 운명을 손아귀에 넣고 있는 몇 사람의 명사들과 절친한 사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중대한 소송 사건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는 품위있는 숙녀의 한 사람으로서' 그녀는 이렇게 편지에 쓰고 있었다. '역시 품위잇는 숙녀인 당신께 청을 드리고자 하는 것이오며, 이기회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다 그녀가 어머니를 방문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으면 좋겠다고했다. 내가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마침 아버지도 집에 계시지 않아서 아무도 의논해 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품위 있는 숙녀로서' 더욱이 공작 부인에게 답장을 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회답을 서야 할지 어머니는 망설이고 있었다. 프랑스 어로 쓰는 것은 어색할 것 같았고, 그렇다고 러시아 어 맞춤법에는 어머니도 그리 자신이 없었다.----어머니는 자기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는 매우 반가워하면서 곧 공작 부인을 찾아가서, 어머니는 언제나 힘 자라는 데가지 부인을 도와 드릴 용의가 있다는 것고, 오후 1시쯤에 오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하라고 했다. 나는 은근히 품고 있던 소원이 뜻밖에도 이처럼 빨리 성취된 것이 몹시 기뻤고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했다. 나는 내가 당황하고 있는 빛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새 넥타이와 플록 코트를 입으려고 우선 내 방으로갔다. 나는 정말 싫어서 못 견딜 지경이었지만, 아직도 집에서는 더블칼라가 붙은 재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4 내가 무의식중에 온몸을 떨면서 비좁고 지저분한 별채의 문간방에 들어서자, 거무죽죽한 구릿빛 얼굴에 돼지처럼 심술궂은 눈을 가진 백발의 하인이 나를 맞았다. 이마에 관자놀이로, 여태껏 내가 한 번도 본일이 없는 깊은 구르살이 진 노인이었다. 그는 듣어먹다가 남은 청어 가시를 접시에 담아 가지고 나오다가, 다음 방으로 통하는 문을 발로 닫으면서 메마르고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셧습니까?" "자세키나 공작 부인께서는 댁에 계십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보니파치!" 질그릇 깨지는 소리와도 같은 여자의 외침 소리가 다음 방에서 들려왔다. 하인은 아무 말 없이 나에게로 등을 돌렸다. 문장이 그려진 녹슨 단추가 오직 한 개 달려 있는 제복의 등이 몹시 닳은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접시를 마룻바닥에 내려놓고 들어가 버렸다. "경찰서에 다녀왔나?" 조금 전에 들려온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하인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뭐? 누가 찾아왔다고?" 다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집 도련님이야? 그럼, 어서 들어오시라고 해." "어서 응접실로 들어오십시오." 하인은 다시 내 앞에 나타나서 마룻바닥에 놓은 접시를 집어들며 말했다. 나는 옷깃을 매만지며 응접실로 들어갔다. 내가 발을 들여놓은 곳은 그리 깨끗하다고는 볼 수 없는 자그마한 방이었는데, 급작스럽게 벌여 놓은 것 같은 가구 등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들창가에 놓인 한족 팔걸이가 떨어져 나간 안락의자에는 쉰 살쯤 되어 보이는 못생긴 부인이 낡은 옷에 알락달락한 털실로 된 숄을 목에 감고 맨머리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가무잡잡한 눈은 나를 집어삼킬 듯이 쏘아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가서 머리 숙여 인사했다. "실례합니다. 당신이 자세키나 공작 부인이십니까?" "네, 내가 자세키나 공작 부인이에요. 당신은 B씨의 아드님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찾아왔습니다." "자, 어서 앉으세요. 보니파치! 내 열쇠 어디 있느지 못 봤나?" 나는 자세키나 부인에게 그녀의 편지에 대한 어머니의 회답의 말을 전했다. 그녀는 굵고 불그스름한 손가락으로 창문 언저리를 똑똑 두드리며 나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다가, 말이 끝나자 다시 한 번 나를 눈여겨 바라보았다. "대단히 고맙군요, 꼭 찾아가 뵙지요." 하고 그녀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당신은 아직 젊으시군요! 실례지만 올해 몇이지요?" "열여섯입니다." 나는 무의식중에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공작 부인은 주머니에서 무엇인지 한 가득 써 놓은, 손대가 반지르르한 서류를 꺼내더니 그것을 코 밑에 바싹 가져다가 이리저리 뒤적이기 시작했다. "참 좋은 나이군요." 의자 위에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기도 하고 엉덩이를 들썩거리기도 하면서 그녀는 불쑥 말했다. "뭐, 그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어요. 마음놓고 편히 앉아요. 우리 집에서는 누구나 허물없이 지내고 있으니까요." 나는 너무 지나치게 허물없이 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불현듯 혐오감을 느끼며 부인의 꼴사나운 겉모습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 순간 응접실에 붙은 저쪽 방문이 홱 열리더니 어제 뜰 안에서 본 그 처녀가 문턱에 나타났다. 그녀는 한손을 쳐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 얼굴에 엷은 미소가 살짝 스쳐 갔다. "이 애는 내 딸이랍니다." 팔꿈치로 처녀를 가리키며 공작 부인은 말했다. "지노치카. 이분은 이웃집 B씨의 아드님이시다. 실례지만 당신이름은?" "블라디미르입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흥분한 나머지 목쉰 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아버님은?" "페트로비치입니다." "아, 그래요! 내가 잘 아는 경찰서장이 한 분 있는데, 그분도 역시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라는 이름이지요. 보니파치! 열쇠는 내 주머니속에 들어 있으니까 찾을 필요 없어." 처녀는 여전히 엷은 미소가 깃든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벌서 무슈 볼리데마르(블라디미르를 프랑스 어로 부른 것)를 만난 일이 있어요." 하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그 목소리는 달콤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을 주며 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이렇게 프랑스식으로 당신 이름을 부르는 것을 용서하겠지요?" "좋은 대로 불러 주십시오." 나는 굳어 버린 혓바닥으로 우물쭈물 대답했다. "어디서 만났다는 거냐?" 하고 공작 부인이 물었다. 딸은 어머니의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내게서 눈길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지금 바쁘신가요?" "아니오, 바쁜 건 없습니다." "그럼, 털실 감는 걸 좀 도와 주시지 않겠어요? 이리 오세요, 내 방으로." 그녀는 나에게 머리를 까딱해 보이고는 응접실에서 나가 버렸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우리가 들어간 방 안에 놓인 가구는 그래도 좀 괜찮은 편이었고, 또 그것들은 아주 그럴 듯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하기는 그 순간 나는 거의 아무것도 독똑히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나는 마치 꿈 속에서처럼 몸을 움직이며, 우스꽝스러울 만큼 긴장된 행복감을 온 몸에 느끼고 있었다. 공작의 딸은 자리에 앉더니 새빨간 털실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자기 앞의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한 다음 열심히 실뭉치를 풀어 헤쳐 가며 그것을 내 양쪽 손에 걸어 놓았다. 그렇게 하는 동안 그녀는 장난치는 듯한 느릿느릿한 태도로, 벌려진듯 만 듯한 입ㅅ에 여전히 밝으면서도 심술궂은 미소를 띠며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트럼프를 꺾어 쥐고 거기에 털실을 감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밝은 눈길로 재빨리 내 얼굴을 훑어보았으므로 나는 무의식중에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반쯤 감은 것 같은 가느다란 그녀의 눈이 어쩌다 동그랗게 치뜨여질 때, 그 얼굴은 광채가 넘치는 듯 아주 모습이 변하고 마는 것이었다. 잠시 뒤 그녀가 물었다. "어제 나를 보고 어떻게 생각했지요, 무슈 볼리데마르? 아마도 나를 나쁜 여자라고 생각하셨겠지요?" 나는 어리둥절해서 대답했다. "나는‥‥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어떻게 내가 감히 그런 생각을‥‥" "내 말 좀 들어 봐요." 하고 그녀는 말을 받았다. "당신은 아직 나를 잘 모르겠지만 나는 참 이상한 여자예요. 나는 언제나 단 사람한테 사실 예길 듣고 싶어요. 당신이 열여섯 살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나는 스물한 살이나 먹었으니 내가 ㅅ씬 손위 아니에요? 그러니까 당신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말을 해야 하고‥‥또 내 말을 잘 들어야 해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 덧붙였다. "내 얼굴을 좀 봐요--왜 나를 보지 않지요?" 나는 더욱 어쩔 줄 몰랐지만, 그러나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살짝 웃어 보였는데, 그 미소는 아까와 달리 퍽 호의가 담긴것이었다. "날 좀 보라니까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난 누가 내 얼굴을 쳐다본다고 해서 기분 나쁘지 않아요. 난 당신 얼굴이 마음에 들어요. 우린 금방 친구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당신은 내가 마음에 들어요?" 하고 아양을 떠는 말투로 물었다. "아가씨‥‥"하고 나는 겨우 입을 열었을 뿐이었다. "첫째, 이제부터 나를 지나이다 알렉산드로브나라고 불러 줘요. 둘째로는--어린애가(그녀는 말을 고쳤다0--젊은 남자가--자기의 느낀 바를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건 나쁜 버릇이에요. 그건 어른들이나 하는 짓이지요. 어때요, 내가 당신 마음에 들었지요?" 그녀가 나에게 이처럼 허물없는 태도로 말한다는 것은 무척 기쁜 일이기는 했지만, 나는 은근히 비위가 상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린애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에게 보여 주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거리낌없는 점잖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야 물론 마음에 들다뿐이겠습니까, 지나이다 알렉산드로브나. 나는 그걸 숨길 생각은 없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사이를 두고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당신한테 가정교사가 붙어 있나요?" 그녀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물었다. "아니오. 가정교사 같은 건 없어진 지 벌써 오랩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내가 그 프랑스 인과 헤어진 지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오! 그래요. 그럼, 어른이 다 된 셈이군요." 하고 그녀는 가볍게 내 손가락을 두드렸다. "손을 독바로 들어요!" 그녀는 열심히 실을 감기 시작했다. 그녀가 눈을 들지 않은 것을 요행이라 생각하고 나는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흘끗흘긋 몰래 ㅂ2ㅗ았지만, 얼마 뒤엔 차츰차츰 대답해졌다. 그녀의 얼굴은 어제보다 더욱 예뻐 보였다. 어느 모로보아도 가냘프고 총명하고 귀엽기만 했다. 그녀는 흰 커튼을 드리운 창문을 배경으로 하고 앉아 있었다. 햇빛이 그 커튼을 ㄷ고 들어와 그녀의 부드러운 금발과 깨끗한 목덜미, 둥그스름한 어깨와 고요하고도 가냘픈 가슴에 부드러운 빛을 던져 주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어느덧 그녀는 내게 더없이 귀중하고 더없이 친근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녀를 알았고, 또한 그녀와 알기 이전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에 없을 뿐더러, 이 세상에 살아 있었던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낡아빠진 거무죽죽한 옷을 입고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나는 그 옷과 앞치마의 주름을 하나하나 기쁜 마음으로 쓰다듬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치마 밑으로 구두코가 뽀족이 내보였다.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그 구두에 이마를 조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 이렇게 이 처녀 앞에 앉아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나는 드디어 이 처녀와 사귀게 되었다. 아, 얼마나 행복스러운 일이냐!) 나는 환희에 넘쳐 하마터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으나,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 어린애처럼 두 다리를 버둥거렸을 뿐이었다. 나는 물 속에 이는 물고기처럼 줄거웠다. 이제는 한평생 이 방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고, 또 이 자리를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의 눈까풀이 살며시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또다시 그녀의 맑은눈이 내 앞에서 상냥하게 빛났다.--그 얼굴에는 여전히 엷은 미소가 떠돌고 있었다. "당신은 나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군요." 그녀는 천천히 말하더니 손가락으로 나를 위협하는 시늉을 했다. 나는 얼굴을 붉혔다. 이 여자는 무엇이든지 다 아는 모양이다. 무엇이든지 모두 보고 있다. 이런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렇지, 모를 리가 있나, 보지 못할 리가 있나!' 갑자기 옆방에서 무엇인지 덜컹 하는 소리가 나더니 사벨이 절거덕지렸다. "지나!" 하고 공작 부인이 응접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벨로브조로프가 너한테 새기 고양이를 가져왔구나." "새끼 고양이!" 지나이다는 소리치며 의자에서 발딱 일어나더니, 내무릎 위에 털실 뭉치를 집어던지고 그냥 달려나가 버렸다. 나도 따라 일어나서 실뭉치와 구러미를 들창가에 얹어놓고는 응접실로 나오다가 깜짝 놀라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방 한가운데는 알록달록한 새끼 고양이가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고, 지나이다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조심조심 고양이의 턱을 받쳐들고 있었다. 공작 부인 곁에는 불그레한 얼굴에 눈앞이 튀어나온 희끄무레한 곱슬머리의 경기병이 들창 사이의 벽을 거의 다 차지하다시피 하고 서 있었다. "아이 참, 우스워라!" 하고 지나이다는 말했다. "눈도 회색이 아니고 새파란데다가, 귀는 또 어쩌면 이렇게 클까! 빅토르 예고르이치, 고마워요! 당신은 참 친절한 분이세요!" 나는 경기병이 어제 본 청년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머리를 숙여 보였는데, 그 순간 발꿈치의 박차가 짤깍 소리를 냈고, 사벨 자루도 절거덕 소리를 냈다. "어제 당신이 귀가 큰 얼룩 고양이를 갖고 싶다고 하셨기에‥‥그래서 내가 이놈을 구해 왔지요. 당신의 말은 곧 법령이니까요." 그리고 그는 다시 머리를 꾸벅 숙였다. 고양이는 가느다란 소리로 야옹 하고 방바닥을 핥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가 봐요!" 지나이다는 호들갑스럽게 소리쳤다. "보니파치! 소냐! 우유를 좀 가져와." 낡아빠진 노란 옷에 퇴색한 수건을 목에 감은 하녀가 우유 접시를 손에 들고 들어와서 고양이 앞에 놓았다. 고양이는 꿈틀하고 몸을 떨더니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핥기 시작했다. "어쩌면 혓바닥이 저렇게 빨갛지!" 지나이다는 마룻바닥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숙이고 고양이의 코ㄱ을 옆에서 들여다보며 말했다. 고양이는 다 먹고 나자 배가 부른지, 건방진 꼴을 하고 앞발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가르랑거리기 시작했다. 지나이다는 일어서더니 하녀를 돌아보고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고양이는 저리 갖다 둬." "고양이를 가져온 대가로--당신의 손을!" 하고 경비병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새 군복을 팽팽하게 입은 건장한 몸집을 뒤로 젖혔다. "양쪽 다!" 하고 지나이다는 대답하며 그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경기병이 그 손에 키스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사내의 어깨 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웃어야 할 것인지,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냥 잠자코 있어야 할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열린 현관문 밖으로 우리 집 하인 표도르가 나타났다. 그는 내게 손짓을 했다. 나는 기게적으로 그에게로 걸어갔다. "왜 그래?" 하고 나는 물었다. "마님께서 도련님을 불러 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하고 그는 소곤소곤 말했다. "대답을 들었으면 빨리 돌아올 것이지, 뭘 하고 있느냐고 화를 내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내가 뭐 그리 오래 있었나?" "한 시간도 넘었습니다." "한 시간이 넘었다구!" 나는 엉겁결에 그의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응접실로 돌아와서 인사를 하고 뒷걸음질치며 물러나오려 했다. "어디 가세요?" 경비병 뒤에서 얼굴을 내밀며 공작의 딸이 물었다. "이젠 집에 가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부인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럼,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인께서 오후 1시에 저희 집으로 오신다구요." "그렇게 말해 줘요, 도련님." 공작 부인은 갑작스럽게 담뱃갑을 꺼내더니 어떻게나 요란스럽게 냄새를 맞는지 나는 진저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럼, 그렇게 말해 줘요." 부인은 눈물이 글썽한 눈을 껌벅이며, 신음하는 듯한 소리로 거듭 말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인사하고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와 버렸다--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리라는 것을 느꼈을 대, 나이 어린 사람들이 으래 경험하는 그런 멋적은 기분을 등에 느끼면서. "이것 봐요, 무슈 볼리데마르, 자주 놀러 와야 해요." 지나이다는 이렇게 소리치고 또 웃어대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뭣 때문에 웃기만 하는 것일까?" 아무 말 없이 시무룩해서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표도르를 거느리고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는 내게 잔소리를 했다. 그리고 공작 부인 집에서 뭘 하며 그렇게 오래 붙어 있었는지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아무 대답도 않고 내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갑자기 서러워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ㅂ았다. 나는 그 경기병에서 질투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5 공작 부인은 약속한 대로 어머니를 찾아왔으나, 어머니의 환심을 사지는 못했다. 나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지만, 식사할 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그 자세키나 공작 부인은 '지극히 저속한 여자' 같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세르게이 공작에게 교섭해 달라고 치근치근 들러붙어서 애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줄곧 어떤 소송이며 치사스러운 금전 관계의 사건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필경 이만저만한 사기꾼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공작 부인을 딸과 함께 내일 점심에 초대했다는 것이었다. ('딸과 함께' 라는 말을 듣고, 나는 접시에 코를 틀어박을 듯이 얼굴을 숙였다.) 그래도 역시 이웃간이고 이름이 있는 사람인데, 모르는 척할 수 있겠느냐고 어머니는 덧붙여 말했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 아버지는, 그 부인이 누군지 이제야 생각난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죽은 자세키나 공작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훌륭한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이 없는 난봉꾼이었고, 파리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었기 때문에 사교계에서는 '파리장' 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는 굉장한 부자였으나 도박으로 전 재산을 탕진한 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똑똑히 알 수 없으나 필경 돈 때문에 어떤 하급 관리의 딸과 결혼했다.--하기는 좀더 좋은 상대를 골라잡을 수도 있었으련만 하고 아버지는 냉소를 띠었다. 그리고 결혼 뒤에는 투기사업에 손을 대서 무일푼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제발 돈을 빌려 달라는 소리나 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아주 많아." 아버지는 침착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 여자는 프랑스 어를 할 줄 아오?" "아주 엉망이에요." "험, 잘하든 못하든 우리한테야 뭐 상관 있나. 당신은 딸도 초대했다고 했는데, 누구한테 들은 말이지만 아주 예쁜데다가 상당히 교양있는 처녀라더군." "그래요? 그럼, 어머닐 닮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아버지를 닮지도 않았겠지." 하고 아버지는 대답했다. "그 사람은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좀 모자라는 데가 있었어." 어머니는 한숨을 쉬고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나는 몹시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식사가 끝난 뒤 나는 정원으로 나왔으나 총을 들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자세킨네 집 정원'에는 가까이 가지 않겠다고 속으로 맹세했지만, 걷잡을 수 없는 힘이 나를 그리고 이끌었다. 그리고 그것은 허사가 아니었다. 담장에 기댄 채 가까이 가기도 전에 나는 지나이다를 발견했다. 이번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책을 들고서 천천히 샛길을 걷고 있었다. 내가 있는 것도 모른는 눈치였다. 나는 그냥 그녀를 지나칠 뻔했으나 문득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 소리를냈다. 그녀는 돌아다보았지만 발길을 멈추지 않고 둥그런 밀짚모자에 늘어진 하늘빛 리본을 한손으로 걷으며 나를 보고 생긋 웃어 보이더니, 다시 책으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나는 모자를 벗어들고 잠시 그 자리에 주춤거리며 섰다가 무거운 가슴을 안고서 발길을 돌렸다. 'Quesuis-je pour elle(나는 저 여자에게 무엇이 되나)?' 하고, 나는 웬일인지 모르겠지만--프랑스 어로 생각해 보았다. 귀에 익은 발걸음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아버지가 언제나처럼 가볍고 빠른 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저 아가씨가 공작의 딸이냐?" 하고 아버지는 물었다. "네." "넌 저 아가씨를 아니?" "오늘 아침 공작 부인한테 갔다가 만났어요." 아버지는 걸음을 멈춰 섰다가, 곧 뒤꿈치로 몸을 돌리더니 오던 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지나이다의 옆에까지 가자 아버지는 그녀에게 점잖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지나이다도 역시 인사를 했으나 적이 놀란 얼굴로 책을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는 그녀의 눈길이 옆을 지나가는 아버지에게서 떠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독특하면서도 고상하고 멋진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모습이 이 때처럼 맵시있게 보인 적은 없었고, 그 회색 모자가 알맞게 숱이 빠진 곱슬머리 위에 이 때처럼 보기 좋게 얹혀진 적도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지나이다 쪽으로 가려 했으나, 그녀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시 책을 들여다보며 저쪽으로 가 버렸다. 6 그 날 저녁과 이튿날 아침 나절을, 나는 왜 그런지 풀이 죽은 일종의 마비 상태에서 지냈다. 나는 공부라도 해 볼 생각으로 카이다노프의 교과서를 손에 들었으나, 이 유명한 책의 길고 지루한 글줄이며 책장이 헛되이 눈앞을 어른거릴 뿐이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계속해서 열 번 가량 '줄리어스 시저는 군인으로서 용기가 뒤어난 사람이었다.'라는 구절을 되풀이해서 읽어 보았으나,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아 책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점심을 먹기 전에 나는 또다시 포마드를 바르고는 플록 코트를 입고 넥나이를 맸다. "너 왜 그러니?" 하고 어머니가 물었다. "아직 대학생도 아니고 더군다나 시험에 합격될지 어떨지도 모르면서, 재킷을 맞춰 준 지 며칠도 안됐는데 벌써 그걸 벗어 던질 작정이냐?" "손님이 오신다고 했잖아요!" 나는 거의 절망에 찬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작작해! 그게 무슨 손님이란 말이냐!" 어머니 말씀에는 순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플록 코트를 재킷으로 바꿔 입었지만 넥타이만은 풀지 않았다. 공작 부인 모녀는 식사하기 30분 전에 나타났다. 부인은 이미 내 눈에 익은 노란 숄을 걸치고 새빨간 리본이 달린 구식 실내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다짜고짜 수표 얘기를 꺼내더니 한숨을 섞어 가며 자기의 가난한 처지를 호소했다. 그리고는 조금도 체면을 차리지 않고 치근치근 애걸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집에서처럼 요란스럽게 담배를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들이마시며 의자 위에서 제멋대로 몸을 이리저리 돌리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녀는 자기가 공작 부인이라는 것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대신 지나이다는 그야말로 공작의 딸답게 거의 거만할 정도로 위신을 지키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냉정하고도 엄숙한 표정이 깃들어 움직일 줄 몰랐다. 그녀의 이런 새로운 표정도 아름답게 보이기는 했으나 나는 그녀가 아주 다른 사람처럼 보였고, 어제와 같은 그런 눈길과 그런 미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하늘색 깃이 달린 얇은 비단옷을입고, 머리는 영국식으로 길게 땋아서 양쪽 볼 위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 머리 모양은 그녀의 차가운 얼굴 표정과 잘 어울렸다. 아버지는 식사를 하는 동안 그녀의 옆에 앉아서, 남에게서 볼 수 없는 그 우아하고 침착한 태도로 친절히 그녀를 접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따금 그녀의 얼굴을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그녀도 가끔 아버지를 쳐다보곤 했는데, 그 눈길은 거의 적의를 품은 것같이 야릇했다. 아버지와 지나이다는 프랑스 어로 얘기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그 때 지나이다의 발음이 어찌나 고왔던지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공작 부인은 식사중에도 여전히 사양하지 않고 넓죽넓죽 집어먹으며 음식 솜씨를 칭찬하였다. 어머니는 공작 부인이 몹시 귀찮은 듯이 멸시하는 듯한 시무룩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대꾸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따금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미간을 찌푸렸다. 지나이다도 역시 어머니의 마음에는 들지 못했다. 이튿날, 어머니는 말했다. "그 따위 거만한 계집애가 어디 있어. 참, 내, 제가 뭘 뽐낼 게 있다고--그리세트(프랑스 하류 계급의 말괄량이 색시) 같은 얼굴을 해 가지고!" "당신은 그리세트를 본 일이 없지 않소." 하고 아버지는 핀잔을 주었다. "네, 보지 못한 게 다행이에요!" "물론 다행일 거요. 그러나 본 일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리세트 같으니 어쩌니 하고 말할 수 있느냔 말이오." 지나이다는 나에게 전혀 아무런 관심도 나타내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공작 부인은 곧 돌아가겠다고 인사했다. "앞으로 두 분께서 잘 돌봐 주시기만 바랍니다.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그리고 표트르 바실리예비치." 그녀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노래부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어쩔 수 있어야지요, 한때는 좋은 시절도 있었지만, 다 지나가 버리고 말았어요. 나도 귀족은 귀족이지만." 하고 그녀는 볼썽사납게 웃으며 덧붙였다. "우선 입에 풀칠도 못할 처지에 명예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아버지는 공손히 인사하고 그녀를 현관문까지 배웅했다. 나는 꽁지빠진 잠자리 같은 재킷을 입고 마치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처럼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마룻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나이다의 쌀쌀한 ㅌ가 나를 낙심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내 옆을 지나치면서 두눈에 어제와 같이 상냥한 표정을 띠며 재빨리 속삭였을 때 나의 놀라움은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저녁 8시에 우리 집으로 오세요. 알았지요, 꼭 와야 해요‥‥." 나는 그저 두 팔을 벌려 보였을 뿐이었다.--그녀는 하얀 숄을 머리위에 뒤집어쓰더니 총총걸음으로 나가 버렸다. 7 8시 정각에 나는 플록 코트를 입고 앞머리를 높이 치켜올려 빗고는 공작 부인이 사는 별채 현관으로 들어섰다. 어제 본 그 하인이 침울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며 마지못해 의자에서 엉거주춤하니 일어섰다. 응접실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문을 열자 깜짝 놀라 멈칫하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응접실 복판에 놓인 의자 위엔 공작의 딸이 남자 모잘글 들고 올라서 있었고, 그 주위를 다섯 사람의 사나이가 어깨를 비비대며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모자에 손을 집어넣으려고 발돋움을 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더욱 높이 추켜들고서 이리저리 빼돌리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 그녀는 소리질렀다. "잠깐만 기다려요, 기다리세요! 새 손님이 왔으니까요. 저 사람한테도 표를 주어야 해요." 그녀는 의자에서 껑충 뛰어내리더니 내 플록 코트의 소매를 붙잡으며 말했다. "자, 어서 들어오세요. 왜 이렇게 버티고 섰어요? 여러분, 소개합니다. 이분은 옆집 도련님인 무슈 볼리데마르예요. 그리고 이분은‥‥" 그녀는 나에게 손님들을 한 사람씩 차례로 소개했다. "말레프스키 백작, 다음은 의사 선생인 루신, 시인인 마이다노프, 예비역 대위인 니르마츠키, 그리고 경비병 벨로브조로프, 이분은 만나 뵌 일이 있지요. 서로 사이좋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나는 몹시 어리둥절하여 누구 한 사람에게도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다. 루신이라는 의사는 엊그제 정원에서 나에게 사정없이 무안을 준 바로 그 가무잡잡한 친구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초면이었다. "백작!" 하고 지나이다는 말을 이어ㅕ다. "무슈 볼리데마르에게 표를 만들어 줘요." "그건 불공평합니다." 백작은 폴란드 사투리가 좀 섞인 말로 대꾸했다. 그는 멋지고 사치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검은 머리에 표정이 풍부한 밤색 눈과 희고 오똑한 코를 가졌으며, 조그만 입가에 가느다란 콧수염을 기른 사나이였다. "이 사람은 우리들과 함께 내기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불공평하고말고." 벨로브조로프와 예비역 대위라는 신사가 덩달아 말했다. 마흔 살전후로 보이는 대위는 형편없는 곰보 얼굴에 흑인 같은 곱슬머리로 등과 다리마저 구부러졌으며, 견장도 없는 군대 예복을 가슴까지 헤쳐 놓고 있었다. "표를 만들라고 하잖아요!" 하고 공작의 딸은 재촉했다. "내 말에 반항하게다는 건가요? 무슈 볼리데마르는 우리들과 처음놀게 됐으니까, 오늘은 이분한테 그런 규칙을 내세우지 말기로 해요. 어서 잔소리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표를 만들라니까요!" 백작은 어깨를 흠칫했으나 공손히 머리를 숙여 보이더니, 반지를 여러 개 낀 흰 손에 펜을 들고 종이조각을 짖어서 거기에 이름을 써 넣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볼리데마르 씨에게 석명을 좀 드려야겠습니다." 루신이 빈정대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이분은 지금 몹시 얼떨떨한 모양이니까요. 이거 보시오, 친구, 우리는 지금 내기를 하고 있단 말이오. 이 집 아가씨가 벌을 받게 되었는데, 제비를 바로 뽑은 사람에게 아가씨 손에 키스할 권리가 부여되지요. 내 말 알아들었소?"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흘낏 쳐다보았을 뿐, 여전히 얼빠진 사람처럼서 있었다. 지나이다는 다시 의자 위로 뛰어올라가더니 아까처럼 모자를 흔들기 시작했다. 모두들 모자로 손을 뻗쳤다.--나도 그들이 하는대로 해ㅆ. "마이다노프 씨." 그녀는 키가 큰 청년에게 말했다. 그는 야윈 얼굴에 조그만 눈이 근시처럼 보였으며, 검은 머리카락이 굉장히 길게 자란 사나이였다. "당신은 시인이니까 마음을 너그럽게 가져야 해요. 당신의 표를 무슈 볼리데ㄹ마르한테 양보하세요. 그렇게 하면 저분은 기회를 두번 갖게 될 테니까요." 그러나 마이다노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는데, 이 때 기다란 머리카락이 너풀거려다. 나는 맨 나중에 모자 속에 손을 넣어 표를 한 장 집어 펼쳐보았다. 아! 종이조각에 씌어 있는 '키스'라는 두 글자를 보았을 때 내마음이 어떠했으랴! "키스!" 나는 엉겁결에 부르짖었다. "브라보! 이분이 뽑았어요." 지나이다가 내 말을 받았다. "아이, 좋아라!" 하며 그녀는 의자에서 내려오더니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이 맑고 달콤한 길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 가슴은 금방 터져 버릴것만 같았다. "당신도 기쁘지요?" 하고 그녀는 다시 내게 물었다. "나 말입니까‥‥?" 나는 혀가 굳은 소리로 되물었다. "그 표를 나한테 파십시오." 별안간 벨로브조로프가 내 귓전에다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1백 루블 드리지요." 내가 대답 대신 분노에 찬 눈초리를 경기병에게 던지는 것을 보고 지나이다는 손뼉을 쳤고, 루신은 "됐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만." 하고 루신은 말을 이었다. "의전부장의 자격으로 나는 모든 것이 규책대로 시행되도록 감독할 책임이 있습니다. 무슈 볼리데마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시오. 우리들 사이에서는 모두 그렇게 하기로 되어 있으니까요." 지나이다는 내 앞에 서서 나의 거동을 자세히 보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하고 거드름을 피우며 한손을 내밀었다. 나는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한쪽 무릎을 털썩 꿇고는 지나이다의 손가락에 몹시도 서투르게 입술을 갖다 댔다. 그래서 코가 그녀의 손톱에 걸려 가벼운 상처까지 나고 말았다. "그만!" 하고 루신이 소리치며 나를 붙잡아 일으켰다. 내기놀이는 다시 계속되었다. 지나이다는 나를 자기 곁에 앉게 했다. 그녀는 정말 신기할 정도로 사나이들을 골탕 먹이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내었다. 한 번은 그녀가 '입상'이 되어 보여야 했는데, 그 때 그녀는 못생긴 니르마츠키를 발판으로 선택하여 그에게 무릎을 꿇고 엎드려 얼굴을 가슴에 틀어박고 있으라고 명령했다. 웃음소리가 터져 나와 한참 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예의범절을 따지는 귀족 집안에서 자라나 다른 사회와 격리되어 엄격한 교육을 받아 온 소년인 나는 이렇게 떠들썩한 고함 소리며, 체면이고 뭐고 없이 난폭하리만큼 들뜬 분위기, 여태껏 경험한 바 없는 처음 사귄 사람들을 대하게 되자 굉장히 흥분해 버리고 말았다. 나는 마치 술취한 사람 같았다. 나는 딴 사람보다도 더 큰 소리로 웃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슨 의논할 일 때문에 이베르스키 성문 근처에서 불러 온 어떤 하급 관리와 옆방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늙은 공작 부인까지도 내가 노는 꼴을 보러 일부러 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더없이 기분이 들떠서, 누가 나를 비웃든, 누가 나를 흘겨보든 그런 것은 그야말로 쇠뿔의 모기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지나이다는 계속해서 나에게 우선권을 주어 나를 자기 곁에서 놓아 주지 않았다. 무슨 벌인가 받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와 나란히 붙어 앉아서 얇은 비달 숄을 함께 뒤집어쓴 일도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자기의 비밀'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우리 두 사람의 머리는 갑자기 무더운, 반쯤 투명하고 향긋한 안개에 싸여 버렸다. 이 안개 속에서 그녀의 눈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부드럽게 빛났고, 방긋이 벌려진 입숙은 뜨거운 입김을 내뿜었으며, 흰 이가 드러나 보였다. ㅡ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내 얼굴을 간지럽히며 화끈거리게 했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신비스럽기도하고 깜찍하게 보이기도 하는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있다가 드디어 속삭였다. "어때요, 네?" 그 말에 나는 얼굴을 붉히며 외면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숨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놀이도 싫증이 났다.--우리들은 줄돌리기(동그런 줄 안에 '고양이' 노릇을 하는 사람이 들어가 앉아서, 그 줄을 돌리다가 둘레에 있는 사람의 손을 치면 손을 두들겨 맞은 사람이 대신 고양이가 되는 놀이)를 시작했다. 아!내가 어쩌다 잘못해서 지나이다한테 따끔하게 손가락을 얻어맞았을 때, 나는 얼마나 깊은 환희를 느꼈던가! 그 다음부터 나는 일부러 멍청한 꼴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나를 약올려 줄 생각에선지 앞으로 내놓은 나의 손을 건드리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날 저녁의 우리들의 장난은 그 정도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피아노를 치고, 노래하고, 춤을추고, 또 집시들의 흉내도 냈다. 니르마츠키를 곰으로 가장시키고, 소금물까지 먹였다. 말레프스키 백작은 트럼프를 가지고 여러 가지 재주를 부려 보이고 나서, 그 트럼프를 모두 뒤섞더니 휘스트(트럼프 놀이의 일종)의 끝수가 높은 트럼프장을 모조리 자기한테 오게 해따. 거기에 대해 루신은 '그에게 찬사를 드리는 영광'을 가졌다. 마이다노프는 자기가 지은 서사시 <살육자>의 한 구절을 낭독했다.(시대는 로맨티시즘의 전성기를 택한 것이었다.) 그는 검은 표지에 적색으로 표제를 인쇄하여 출판한다고 했다. 그 다음 우리는 이베르스키 성문에서 온 관리의 무릎 위에서 모자를 훔쳐다가, 모자를 돌려 준다는 조건으로 그로 하여금 카자크 춤을 추게했고, 보니파치 영감에게 부인용 모자를 씌우기도 하고, 또 지나이다가 남자 모자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우리들의 장난은 일일이 헤아릴수도 없을 정도였다. 다만 벨로브조로프 한 사람만은 성난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고 줄곧 구석에 처박혀 있었는데, 이따금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금방이라도 우리들에게 덤벼들어 나뭇조각처럼 모두를 이리저리 집어던질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지나이다가 한 번 노려보며 손가락으로 위협하는 시늉을 하기만 하면 다시 쑥 기어들고 마는 것이었다. 마침내 우리들은 지쳐 버렸다. 공작 부인은 그녀 자신이 말하듯 아주 너그러운 성미여서 아무리 떠들어대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여자였지만, 그래도 역시 피로를 느꼈던지 좀 누워야겠다고 말했다. 밤ㅂ참이라고 나왔는데, 그것은 오래되어 꼬들꼬들한 치즈와 햄을 다져 넣은, 다 식어 빠진 괴상한 피로그(고기만두와 같은 것)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피로그가 어떤 고급 만두보다 더 맛있는 것 같았다. 포도주는 겨우 한 병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그나마 거무죽죽하고, 마개 있는 데가 부풀어오른 것 같은 이상한 병이었고, 그 속에 든 붉은 포도주도 물감 냄새가 풍겼다. 나는 녹초가 되어, 정신이 몽롱할 만큼 행복감을 느끼며 별채에서 나왔다. 헤어질 때 지나이다는 내 손을 곡 잡고 또다시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무겁고 축축한 밤공기가 나의 상기된 얼굴을 스쳤다. 소나기라도 한바탕 퍼부으려는 것 같은 날씨였다. 검은 비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서 윤곽이 연기처럼 변하여 순식간에 하늘을 덮고 있었다. 한 줄기 바람이 우중충한 나무 사이에서 불안스럽게 몸부림치고, 어딘지 먼 지평선 저쪽에서는 천둥 소리가 성난 듯이 혼자 으르렁거렸다. 나는 뒷문으로 해서 내 방에 들어갔다. 나한테 딸려 있는 하인이 마룻 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의 몸을 타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인은 잠에서 깨어 나를 보더니, 어머님이 또 화를 내시며 나를 부르러 보내려는 것을 아버님이 말리셨다고 보고했다.(지금까지 나는 어머니에게 밤인사를 드리지 않고, 축복의 말을 듣지 않은 채 자리에 들어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하는 수 없었다! 나는 하인에게 옷은 내 손으로 갈아입겠다고 말하고 촛불을 겄다. 그러나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았고 자리에 눕지도 않았다. 나는 마치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오랫동안 ㄴ을 잃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내가 느끼고 맛본 것은 실로 새롭고 감미로운 것이었다. 나는 주위에 눈망울을 굴리는 듯 마는 듯 꼼짝도 않고 앉아서 조용히 숨을 쉬고있었다. 그리고 이따금 오늘 저녁의 일을 생각하고 소리없이 웃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나는 사랑에 빠졌나 보다, 이것이 다름 아닌 연애라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마음 속이 섬뜩해지는 것이었다. 지나이다의 얼굴이 눈앞의 어둠 속에 조용히 떠올랐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어둠 속을 떠돌고 있었다. 그 입술은 여전히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었고, 그 눈은 약간 엇비슷하게 무엇을 묻고 싶은 듯이, 혹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상냥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아까 그녀와 헤어지던 순간과 독같은 그런 눈길이었다. 드디어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조용히 침대에 다가가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조심조심 베개에 머리를 얹었다. 마치 거친 동작으로 마음 속에 가득 찬 감정을 쫓아 버리게 될가 봐 걱정하는 것처럼‥‥ 자리에 누워서도 나는 눈을 감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무엇인가 엷은 빛 같은 것이 자꾸만 방 안으로 비쳐 들어오는 것을 개달았다. 나는 반쯤 몸을 일으켜 들창을 바라보았다. 들창의 창살이 신비롭게 희멀건 유리 위에 뚜렷이 떠올랐따. 뇌우로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확실히 뇌우는 뇌우였다. 그러나 어딘지 아주 먼 곳에서 오고 있는지 천둥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다만 무수히 가지가 뻗은 것 같은 기다란 번개가 쉴새없이 먼 하늘에서 희미하게 번쩍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번적거린다기보다 차라리 숨이 끊어져 가는 새의 날개가 푸드득푸드득 움직이면서 떨고 있는 것과도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들창가로 다가가 그대로 아침까지 서 있었다.‥‥번개는 잠지도 멎지 않았다. 그날 밤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이른바 '참새의 밤(7월 10일쯤, 밤이 가장 ㅈ은 때)'이었다. 나는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는 모래터와 네스쿠치느이 공원의 시커먼 숲과 먼 건물의 누르스름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미한 번갯불이 번쩍일때마다 그 건물도 부르르 떠는 듯이 보였다. 나는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릴 수가 없었다. 소리도 없는 이 번갯불은--억제된 것같이 흐릿한 이섬광은 마치 내 마음 속에 남몰래 불타오르고 있는 말없는 충동에 호응하는 듯했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아침 노을이 진분홍 반점을 이루며 나타났다. 해가 떠오를 시간이 가까워지자 번개도 차츰 빛을 잃고 기다랗던 섬광도 짧아져 갔다. 그 가냘픈 전율도 차차 줄어들고, 드디어 떠오르는 태양의 분명하고 찬란한 햇빛 속으로 빠져들어가 사라지고 말았다. 내 마음 속의 번갯불도 사라졌다. 나는 말할 수 없는 피로와 정적을 느꼈다. 그러나 지나이다의 자태는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여전히 내 마음 속에서 떠날 줄 몰랐다. 다만 그 자태도 이제는 침착해진 것같이 보였다. 그것은 연못가의 풀숲으로부터 물 가운데로 나온 백조처럼, 자기를 에워싸고 있던 보기 흉한 주위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잠을 청하기 전에 신뢰와 존경에 찬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그녀의 모습에 작별의 키스를 했다. 오, 첫눈에 불타오르던 애정이여, 감동한 영혼의 부드러운 음향이여, 그 아름다움과 그윽함이여, 첫사랑의 감격에 감미로운 기쁨이여--그것들은 어디 있는가. 아, 지금은 어디 있는가. 8 이튿날 아침, 차를 마시러 아래층에 내려갔을 때, 어머니는 내게 잔소리를 했다.--그러나 각오하고 있던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어젯밤에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 말해 보라고 했다. 나는 여러 가지 자세한 말은 생략하고, 전체적으로 보아 매우 순진한 느낌을 주도록 애쓰며 간단히 대답했다. "어쨌든 그 사람들은 점잖은 인간들이 아니야."하고 어머니는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집에 드나들지 말고 시험 준비나 열심히 해." 내 시험 공부에 대해 어머니가 걱정을 한대야 그것은 겨우 이런 말 몇마디로 끝나고 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대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를 마시고 난 뒤 아버지는 내 팔을 붙잡고 함께 정원으로 나와, 내가 자세킨네 집에서 본 것을 모두 털어놓게 하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기묘한 감화력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의 관계도 기묘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교육을 거의 돌보지 않다시피했으나, 그렇다고 나에게 모욕을 주는 일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나의 자유를 존중하여--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내게 공손한 태도까지 취했다. 단지 나를 자신 곁으로 그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뿐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좋아했고, 또 아버지에게 매혹되어 있었다. 내 눈에는 아버지가 남성으로서의 전형적인 인물로 보였던 것이다. 만일 아버지의 손길이 나를 멀리하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마음 속에 느끼고 있지 않았던들, 나는 얼마나 열정적으로 아버지를 따르며 사랑했을까! 그 대신, 마음이 내킬 때면 아버지는 불과 한 마디의 말이나 손짓 하나로 순식간에 한없는 신뢰감을 내 가슴 속에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면 내영혼의 문은 열린다. 나는 총명한 친구나 관대한 스승을 대하는 것처럼 아버지를 상대로 열심히 지껄여댄다. 그러나 결국은 또다시 나를 버리고 만다. 아버지의 손길이 다시 나를 떠밀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손길은 부드럽고 상냥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나를 떠밀어 내는 손길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버지는 이따금 기분이 몹시 쾌활해질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그는 마치 어린애처럼 나와 함게 자안을 치고 뛰놀기를 사양하지 않았다.--대체로 아버지는 과격한 운동을 즐겼다. 언젠가 한 번--여태껏 단 한 번밖에 없었다.--아버지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상냥하고 부드럽게 나를 애무해 준 일이 있었다. 나는 그 때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었다. 그러나 그 쾌활함과 상냥함은 순식간에 흔적조차없이 사라지고, 조금 전에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났던 일은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기약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나는 마치 꿈을 꾸고 있었던 것처럼 허전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나는 곧잘 아버지의 현명하고 시원스럽게 잘생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일이 있었다. 그러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나의 몸과 마음이 송두리째 그에게 휩쓸려들어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버지는 내 마음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듯 옆을 지나는 길에 내 뺨을 가볍게 두드려 주지만, 그러다간 그냥 훌쩍 가 버리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서만 볼 수 있는 일종의 독특한 태도로 금방 얼음덩어리처럼 굳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도 그만 위축된 채 얼어붙고 만다. 어쩌다 한 번씩 ㅏ타나는 나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의 발작은 입 밖에 내지는 않더라도 첫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나의 애원의 힘으로 불러일으켜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나 예기치 않았던 때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다. 아버지의 성격에 대해 뒷날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나는 이러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아버지는 나나 가정 생활 같은 데 붙잡혀 있을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그는 좀더 다른 것을 사랑했고, 또 그 다른 것을 마음껏 향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힘이 미치는 것은 자기가 차지해야지, 다른 사람 손에 넘겨 줘선 안 돼. 그리고 자기는 자기 자신의 것이 돼야 해. 여기에 인생의 온갖 묘미가 있는 거야." 하고 아버지는 언젠가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도 언젠가 나는, 젊은 민주주의자의 견지에서 아버지와 자유에 대해 토론한 일이 있다.--그는 그 날 말하자면 '착한 아버지'였는데, 그런때는 그에게 무슨 말이든지 할 수 있었다. "자유라‥‥" 그는 입을 열었다. "너는 무엇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지 알고 있느냐?" "무엇ㅇ이지요?" "의지야, 자기 자신의 의지란 말야. 이것은 자유보다도 귀중한 권력을 인간에게 주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명령을 내릴 수도 있게 되거든." 아버지는 무엇보다도 먼저 삶을 향락하려 했다. 그리고 삶을 향락했다. 어쩌면 그 때 아버지는 자기가 오래오래 인생의 '묘미'를 맛볼수 없다는 것을 미리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아버지는 마흔 두살이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자세킨네 집을 방문한 데 대해 아버지에게 상세히 얘기했다. 압지는 벤치에 앉아서 채찍 끝으로 모래에다 무엇인지 끄적거리며 귀를 기울이는 듯, 혹은 귓전으로 흘려 버리는 듯한 태도로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간혹 웃음소리를 섞어 가며 무엇 대문인지 명량해져서 농담을 하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면서 짤막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내 말에 대구도 하며 나를 놀렸다. 처음에 나는 지나이다의 이름조차 입 밖에 낼 용기가 없었지만, 끝내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어서 그녀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갔더니,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나는 아버지가 집에서 나올 때, 말에 안장을 올려놓으라고 한 것이 생각났다. 그는 훌륭한 기마 선수여서 레니 시보다 훨씬 일찍부터 사나운 말을 다루는 기술을 체득하고 있었다. "나도 함께 따라갈 수 없어요, 아버지?" 하고 나는 물었다. "안 돼." 아버지는 대답했다. 그 얼굴에는 여느대와 같이 상냥하기는 하나 무관심한 표정이 떠올랐다. "가고 싶으면 너 혼자 가거라. 그리고 나는 말이 필요 없다고 마부한테 일러." 아버지는 나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버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버지는 대문 밖으로 사라져 버렸드나, 담을 다라가는 아버지의 모자가 자세킨네 짐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는 옆집에서 한 시간 이상 있지 않았다. 그리고 곧 시내로 들어 갔다가 저녁녘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은 뒤 나는 자세킨네 집으로 갔다. 응접실에 들어갔더니 늙은 공작 부인이 혼자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뜨개 바늘 끝을 실내 모자 밑에 찔러 넣어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느닷없이 진정서를 한 장 정서해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 "네, 써 드리지요." 나는 의자 귀퉁이에 걸터앉으며 대답했다. "될 수 있는 대로 글씨를 큼직큼직하게 써 줘요." 손때 묻은 종이를 한 장 내주며 공작 부인은 말했다. "그리고 오늘 안으로 써 줄 수 없을까요, 도련님?" "네, 오늘 안으로 꼭 서 드리지요." 옆방으로 통하는 문이 조금 벌어지더니 그 틈으로 지나이다의 얼굴이 엿보였다. 머리를 아무렇게나 뒤로 쓸어 넘겼고, 핼쑥한 얼굴은 수심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크고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살며시 문을 닫았다. "지나, 얘 지나!" 하고 공작 부인이 불렀다. 지나이다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부인의 진정서를 가지고 돌아와서 그것을 쓰느라고 하룻저녈 내내 붙어 앉아 있었다. 9 나의 '미친 사랑'은 그 날부터 시작되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지만, 나는 새로 직장에 들어간 사람이 느끼는 것과도 같은 기분을 경험했다. 나는 이미 단순한 소년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사나이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 날부터 나의 미친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했지만, 나의 괴로움도 바로 그 날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이다가 곁에 없으면 나는 아주 풀이 죽어 아무것도 머리속에 들어오지 않았고,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날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곧 그녀 생각만 했다.‥‥나는 우울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 앞에서도 나는 활기를 회복하지 못했다. 나는 질투를 하거나, 나의 하잘것없음을 스스로 의식하거나, 공연히 뽀로통해지거나, 어리석게 노예처럼 굽실거리기도 했다. 그렇건만 억제할 수 없는 힘이 나를 자꾸만 그녀에게로 끌고 갔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무의식중에 행복의 전율을 느끼며 그녀의 방 문턱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지나이다는 내가 자기를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고, 나도 그것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연정을 재미있게 생각하여, 나를 희롱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또 괴롭히기도 했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최대의 환희와 깊은 비애의 유일한 원천이 되고, 아무 책임도 없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원인이 된다는 것은 상쾌한 일일 것이다. 나는 지나이다의 손 안에서 마치 말랑말랑한 밀랍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하긴 나 혼자만이 그녀를 연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의 집을 찾아다니는 모든 사나이들이 그녀에게 홀딱 반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을 모두 밧줄에 묶어 자기 발 밑에 꿇어 ㅇㅍ드리게 하였다. 그들의 마음 속에 때로는 희망을, 때로는 불안을 불러일으키며 마음대로 그들을 조종하는 것을--그것을 그녀는 저희들끼리 서로 맞붙어 싸우게하는 거라고 했다.--그녀는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거기에 거역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기꺼이 그녀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싱싱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몸 저네에는 교활함과 어수룩함, 기교와단순, 조용함과 활발함, 이런 것들이 뒤섞인 일종의 특이한 매력이 넘치고 있었다. 그녀의 말 한 마디, 그녀의 일거일동에는 미묘하고 경쾌한 아름다움이 넘치고, 그녀의 모든 것이 독특한 연기력을 보여 주었다. 그녀의 얼굴도 쉴새없이 변화하여, 언제나 표정이 풍부했다. 그것은 냉소와 수심과 정열을 거의 동시에 나타내고 있었다. 바람 불고 맑게 갠 날의 구름처럼, 여러 가지 감정이 가볍고 재빠르게 그녀의 눈과 입술을 끊임없이 스쳐 가는 것이었다. 지나이다의 숭배자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그녀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그녀가 '나의 맹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거저 '내 사람'이라고 부르는 벨로브조로프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불 속에라도 기꺼이 뛰어들 만한 위인이었다. 자기의 지력이나 그 밖의 재능에 자신이 없는 그는 끊임없이 그녀에게 결혼을 신청하며, 다른 사나이들은 다만 말로만 애정을 표시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은근히 비꼬는 것이었다. 마이다노프는 그녀 영혼에 시적인 줄을 울리려고 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이면 거의 모두 그렇듯 그도 본디 냉정한 성격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를 아주 열렬히 사모하고 있노라고 맹세했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자기 스스로 그것을 마음 속에 다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시로 그녀를 찬미하고, 그 시를 몹시 어설프고 감격어린 투로 그녀에게 낭독해 주곤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를 동정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비웃는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그를 그리 미덥게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진정을 토로한 작품을 실컷 듣고 나서는 다시 푸슈킨의 시를 낭독하게 했는데, 그녀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탁한 공기를 깨끗이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루신은 빈정거리기를 잘하고 노골적인 말을 예사로 지껄이는 의사였는데, 그녀의 사람됨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없는 데서나 있는 데서나 함부로 그녀를 욕했지만, 누구보다도 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존경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유달리 취급하는 적은 없었다. 그리고 때때로 특히 심술궂은 만족의 빛을 보이며, 너도 역시 내 손 안에 들어 있다는 느낌을 그가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그녀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말했다. "난 애정이라는 걸 모르는 몹쓸 여자예요. 본디 배우의 소질을 타고난 여자니까요. 좋아요! 그럼, 손을 내놓으세요. 내가 바늘로 찔러 드릴 테니. 당신은 이 젊은 사람에게 부끄럽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리고 아프겠지요. 그래도 당신은 성실한 양반이니까 아마 웃으실 거예요." 루신은 빨갛게 붉어진 얼굴을 옆으로 돌리면서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래도 결국은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바늘로 콕 찌르자, 과연 그는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꽤 깊이 바늘을 찔러 넣고는, 공연히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사나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깔깔거리고 웃어대는 것이었다. 지나이다와 말레프스키 백작의 관계가 나로서는 가장 알기 어려웠다. 그는 잘생기고 재간 있고 영리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열 여섯 살의 소년인 나의 눈에도 그에겐 어쩐지 수상하고 사기꾼 같은 데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지나이다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 놀랐다. 그러나 어쩌면 그녀는 그 엉터리를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별로 그 점을 싫어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불규칙한 교육, 기묘한 교제와 습관, 줄곧 옆에 붙어 있는 어머니, 가정의 불행과 무질서, 젊은 처녀에게 부여된 자유, 주위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의식--이러한 모든 것이 그녀에게 거의 경멸하는 듯한 무관심한 태도와 자포자기적인 성격을 조장케 한 것이다.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보니파치가 와서 설탕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해도, 무슨 하잘것없는 소문이 들려와도, 손님들이 서로 다투는 일이 있어도 그녀는 곱슬곱슬한 머리채를 흔들며 '쓸데없이!'라고 말할 뿐 그리 염두에 두는 기색이 없었다. 그 반대로 나는 온몸의 피가 한꺼번에 머리로 치솟아오르는 것같이 느껴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가령 말레프스키가 여우처럼 교활하게 건들건들 몸을 흔들며 그녀에게 다가가서 우아한 태도로 그녀 의자 뒤에 기대어, 흐뭇한 듯이 아첨하는 듯한 미소를 띠며 그녀 귀에다 소곤거리고, 그녀는 그녀대로 가슴 위에 두 팔을 끼고 사내를 찬찬히 쳐다보면서 자기도 따라 웃으며 고개를 가닥거리는 때는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말레픗키 같은 사람을 집에 찾아다니게 하다니, 당신도 어지간하군요." "그래도 그분은 아주 멋진 수염을 기르고 있지 않아요?" 하고 그녀는 대꾸했다. "하지만 그런 건 당신이 참견할 문제가 아니에요." 또 언젠가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혹시 당신은 내가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생각할는지 몰라도‥‥그렇지 않아요. 나는 내가 높은 위치에 서서 내려다보아야 하는 그런 남자는 사랑할 수 없으니까요. 나를 꼼짝하지 못하게 정복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야 하거든요. 그렇지만 그런 사람과는 맞닥뜨릴것 같지는 않으니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난 누구의 손아귀에도 잡히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그럼, 당신은 결코 아무도 사랑할 수 없겠군요?" "그렇다고 당신도? 나는 정말 당신까지도 사랑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녀는 장갑 끝으로 내 콧잔등을 두드렸다. 사실 지나이다는 나를 마음껏 희롱했다. 3주일 동안 나는 매일같이 그녀와 만났는데, 그녀는 갖은 방법으로 나를 골려 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우리 집에 놀러오는 일이 그리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 오면 그녀는 의젓한 사교계 아가씨--공작의 따님으로 표변하는 것이었고, 나도 그녀를 피하려 했다. 어머니한테 꼬리를 밟히지 않을까 겁났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지나이다에게 매우 나쁜 감정을 품고 증오의 눈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리 두렵지는 않았다. 그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대해 주었다. 그리고 지나이다와 얘기를 주고받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으나, 아버지의 말은 유식하고 의미심장한 것 같았다. 나는 공부도 독서도 그만두고 말았다. 가까운 교외를 산책하거나 멀리 말을 달리는 것도 중지해 버렸다. 마치 다리를 잡아매 놓은 딱정벌레처럼 나는 그리운 별채 주위를 쉴새없이 빙글빙글 돌고만 있었다. 나는 언제까지나 그 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심했고, 또 어떤 때는 당사자인 지나이다가 쫓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나는 방 안에 틀어박혀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원 끝까지 가서 높은 석조 온실이 허물어진 곳으로 기어올라가서는 큰길로 향한 벽에다 발을 늘어뜨린 채,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앉아서 아무것도 보려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멍청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곁에서는 먼지투성이가 된 쐐기풀 위를 하얀 나비 몇 마리가 날개를 팔랑거리며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따. 날쌔 보이는 참새 한 마리가 가까운 데 있는 동강난 붉은 벽돌 위에 앉아서, 연신 앞뒤로 까딱이며 꼬리를 부채살처럼 펴고는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로 짹짹거리고 있었따. 아직도 나를 미심쩍게 생각하는 까마귀란 놈들은 벌거숭이가 된 높고 높은 자작나무 꼭대기에 앉아서 이따금 생각난 듯 까옥거리고 있었다. 태양과 바람은 그 엉성한 나뭇가지를 조용히 희롱하고, 돈스키 수도원의 종소리는 때때로 바람을 타고 은은히 서글프게 들려왔따. 나는 가만히 앉아서 보고 또 들었따. 그러고 있노라면 그 어떤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마음 속에 넘쳐 왔따. 그 속에는 우수, 환희, 미래에 대한 예감, 희망, 삶의 공포, 그 밖의 온갖 것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러한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내 마음 속에서 발효하고 있는 것 중의 어느 한 가지에도 이름을 붙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이들 모든 것을 통틀어 하나의 이름으로--지나이다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나이다는 흡사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줄곧 나를 희롱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양을 떨면 나는 금방 흥분해서 녹아나는 듯한 기분이 되었고--그러다가 갑자기 몰인정하게 밀쳐 버리면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갈 수도 없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지금도 생각나지만 그녀는 며칠을 두고 내게 아주 냉정한 태도를 보인일이 있었다. 나는 완전히 겁쟁이가 되어 벌벌 떨면서 별채에 뛰어들어 가서는 되도록 늙은 공작 부인 겨에 붙어 있으려 했다. 하기는 바로 그무렵에 공교롭게도 부인은 화가 잔뜩 나서 고래고래 고함만 치고 있었다. 수표 사건이 불리하게 되어 벌써 두 번이나 경찰관과 이러쿵저러쿵 말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담 옆을 따라 걷고 있다가 지나이다를 발견했다. 그녀는 두 손을 땅에 짚고 앉아서 꼼짝 않고 있었다. 나는 살그머니 물러나려 했으나, 그녀가 갑자기 얼굴을 들더니 명령하는 듯 손짓해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버렸다. 처음에 나는 그녀의 손짓이 무슨 뜻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같은 손짓을 되풀이했따. 나는 곧 담을 뛰어넘어 좋아라고 그녀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녀는 눈짓으로 나를 제지하고, 두어 발자국 떨어진 좁다란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서 나는 길가에 무릎을 끓었다.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핼쑥하고 깊은 비애와 피로의 빛이 그 하나하나의 윤곽에 너무나도 뚜렷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따. 나는 엉겁결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하고 중얼거렸따. 지나이다는 손을 뻗쳐 무슨 풀인지를 뜯어서 이빨로 씹어 보고는 곧 저쪽으로 홱 던져 버렸다. 한참만에 그녀는 물었다. "당신은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지요? 그렇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못했다.--하긴 대답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요?" 그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야 그렇겠지요. 그 눈과 똑같이 생긴 눈이겠죠‥‥" 그녀는 이렇게 덧붙이고 생각에 잠기더니 별안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난 모든 게 다 싫어졌어." 학 그녀는 소곤거렸다. "아주 이 세상 끝에라도 가 버렸으면. 난 정말 견딜 수 없어. 난 이런 일을 수습할 수 없어요‥‥그리고 내 앞길에 기다리고 있는 건 뭘까요! 아, 난 괴로워‥‥정말 괴로워 죽겠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나는 겁을 먹고 물었따. 지나이다는 대답 대신 다만 어깨를 흠칫해 보였을 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비통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내 가슴 속에 깊이깊이 파고들었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기쁘게 생명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눈길을 모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녀가 괴로워하는지는 몰랐지만, 그녀가 참을 수 없는 슬픔의 발작에 못이겨 뜰에 나와 갑자기 발목이 부러진 듯 땅 위로 쓰러지는 광경을 똑똑히 머릿속에 그려 볼 수 있었다. 주위는 온통 밝은 빛이 가득 차서 푸르렀따. 바람은 나뭇잎을 산들산들 흔들고 이따금 지나이다의 머리 위에뻗친 기다란 딸기나무 가지도 흔들고 있었다. 어디선지 비둘기가 구구 울었다.--꿀벌은 듬성듬성한 풀 위를 낮게 날아다니며 붕붕거렸따. 눈을 들면 푸른 하늘이 부드럽게 펼쳐져 있었다.--나는 말할 수 없이 슬프기만 했다. "나에게 무슨 시든지 읊어 주세요." 지나이다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팔꿈치로 얼굴을 받쳤다. "난 당신이 시를 읊어 주는 것이 좋아요. 당신의 읊조림은 노래를 부르는 것 같지만 그건 상관 없어요. 젊다는 증거니까요. <그루지아의 언덕에서(푸슈킨의 시)>를 들려 주세요. 하지만 우선 편히 앉아요." 나는 앉아서 <그루지아의 언덕에서>를 읊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지나이다는 이러한 구절을 되풀이했다. "그래서 시가 좋다는 거지요. 이 세상에 없는 걸 말해 주니까요. 그리고 실제로 있는 것보다도 더 훌륭할 뿐더러 진실에 훨씬 가까운 것을 들려 주니까요.‥‥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걸요!"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자, 우리도 가요. 마이다노프가 어머니한테 와 있어요. 그가 쓴 장편시를 갖고 온 걸 그냥 두고 나와 버렸어요. 그사람도 지금 역시 풀이 죽어 있을 거예요. 그러나 하는 수 없어요! 당신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제발 나한테 화를 내지는 말아 주세요!" 지나이다는 바쁜 듯이 나의 손을 잡고 앞장 서서 뛰어갔다. 우리는 별채로 들어갔다. 마이다노프는 엊그제 출판되어 나온 자작시 <살육자>를 낭독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목청을 뽑아 사운각 장단조의 시를 고함치듯 읽었따. 각운은 뒤죽박죽이 되어 마치 여러 개의 작은 방울이 한꺼번에 울리듯 공연히 커다란 소리만 내고 있었다. 나는 쉴새없이 지나이다의 얼굴을 지켜보며 그녀가 내게 말한 마지막 말의 뜻을 풀어 보려고 애썼다. 혹시 남 모르는 연적이 있어, 뜻밖에 그대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아닌가? 별안간 마이다노프가 코막힌 소리로 외쳤다.--순간 내 눈이 지나이다의 눈과 부딪쳤다. 그녀는 눈길을 떨어뜨리고 얼굴을 조금 붉혔다. 그녀가 얼굴을 붉힌 것을 보자 나는 놀란 나머지 온몸이 싸늘해졌다. 나는 이미 이전부터 그녀를 질투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 그녀는 사랑에 빠졌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내 머릿속을 스쳐갔던 것이다. '아, 어쩌면 좋은가?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 10 나는 본격적인 번민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따. 나는 무척 애를 태우며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고 또다시 고쳐 생각해 보았따. 그리고 가능한 그런 빛을 보이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지나이다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어떤 변화가 생겼따.--그것은 명백했다. 그녀는 혼자서 산책을 하러 나가서는 오랜 시간 헤매고 돌아다녔다. 어떤 때는 손님이 와도 나오지 않고 몇 시간이나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는 일도 있었다. 이전에는 그런 일이 결코 없었다. 나는 갑자기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게 되었다. 적얻 가지게 된 듯싶었다. '저 사나이가 아닐까! 혹은 이 사나이가 아닐까!' 그녀를 사모하고 있는 사나이들을 하나하나 모조리 꼽아 보며 나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스스로 물어 보는 것이었다. 말레프스키 백작이--이렇게 인정한다는것은 지나이다를 위해 수치스러운 일이기는 했지만--다른 누구보다도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마음 속으로 점을 찍었다. 그러나 나의 관찰력은 내 코끝까지밖에 미치지 못했고, 또 나의 비밀 정책은 누구의 눈도 속이지 못한 것 같았다. 적어도 의사인 루신은 곧 내 뱃속을 빤히 들여다보고야 말았따. 하기는 루신 자신도 요즘 태도가 달라졌따. 눈에 띄게 얼굴이 수척해졌고, 이전처럼 곧잘 웃어대기는 했지만, 어쩐지 그 웃음소리는 더욱 허전하고 독기를 품은 것같이, 막돼먹은 데가 있었다. 이전의 가벼운 풍자와 일부러 꾸민 듯한 노골적인 아유는 어느 새 신경질적인 초조함으로 바뀌었다. "여보게, 자네는 뭣하러 밤낮 이런 곳에 찾아다니는 건가?" 어느 날 자세킨네 집 응접실에 나와 단둘이 남아 있게 되었을 때 그는 내게 말했따. 공작의 딸은 산책하러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공작 부인이 버럭버럭 고함치는 소리가 2층 가운데에서 들려왔다. 부인은 하녀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네처럼 젊은 시절엔 공부도 하고 일도해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 자넨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내가 집에서 공부를 하는지 안하는지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압니까?" 이렇게 반박한 내 말투에는 허세가 깃들어 있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한편 당황한 빛을 감출 수는 없었다. "공부는 무슨 공부야! 정신은 딴 데 팔려 있는 주제에‥‥하지만 자네하고 이러쿵저러쿵하고 싶진 않네. 자네만한 나이엔 그게 당연하니까. 그렇지만 자넨 상대를 선택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어. 이 집이 대체 어떤 집인지 자넨 모르겠나?" "난 당신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나는 대꾸했다.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그렇다면 더욱 나쁘지. 난 자네한테 충고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네. 우리처럼 나이 먹은 독신자들이야 이런 데 찾아다녀도 무방하지. 우리들은 까딱없거든. 쓴맛 단맛 다 본 인간들이 돼서 겁날 게 없으니까. 하지만 자네는 아직 살가죽이 얇으니까, 이 집 공기는 자네한테 해롭단 말이야. 내 말을 믿어 두는 게 좋을 걸세. 전염될지도 모르니까."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무슨 말이냐가 아니야. 그래 자넨 지금 건강하다고 생각하나? 과연 자네는 정상적인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느냔 말이야. 자네가 느끼고 있는 그 기분이 과연 자네한테 이로울 게 있을 것 같나?" "내가 무얼 느끼고 있다는 겁니까?" 나는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의사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봐, 젊은이." 의사는 마치 이 말 속에 무엇인지 내게 몹시 모욕적인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듯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누굴 넘겨짚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안 될 말이지. 미안하지만 자네마음 속에 있는 게 얼굴에 모조리 나타나 있단 말일세. 하기야 나도 이러니저러니 자네한테 말할 수 없긴 하지. 나 자신으로 말하더라도 만일‥‥(의사는 여기서 이를 악물었다)‥‥만일 자네처럼 미친 인간이 아니라면 이런 데 찾아다닐 리 없으니까. 다만 내가 이상스레 생각하는것은, 어째서 자네처럼 똑똑한 사람이 자기의 바로 옆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르느냐 하는 것이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까?" 나는 그의 말끝을 가로채며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따. 의사는 비웃음과 동정이 뒤섞인 야릇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도 좋은 사람은 못돼." 그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이 사람한테 그런 얘기를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 하고 그는 소리를 높여 말을 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이 집 분위기는 자네한테 이롭지 못해. 그야 재미있긴 하지. 그러나 실은 그런 게 아니라네! 온실 속에서도 기분 좋은 향기는 나지만--그렇다고 그 속에서 아주 살 수는 없단 말이야. 여보게! 내 말을 알아들었으면 가서 가이다 노프의 교과서나 다시 들여다보게!" 공작 부인이 들어와서, 의사에게 이가 아파 죽겠다고 우는 소리를 했다. 조금 뒤 지나이다가 나타났다. "이봐요, 의사 선생!" 하고 공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저 애를 좀 나무라 주세요. 온종일 얼음물만 마시고 있으니 그렇잖아도 가슴이 약한 애가 대체 어떻게 되겠어요?" 루신이 물었다. "왜 그러지요?" "그래서 뭐 안 될 게 있나요?" "안 될 게 있냐구요? 감기에 걸려서 앓다가 죽을 수도 있지요." "정말요? 네? 그러나 죽어도 좋아요! 오히려 그게 나을 거예요." "원, 저런!" 하고 의사가 중얼거렸다. 공작 부인은 방에서 나가 버렸다. "원, 저런?" 지나이다는 의사의 말을 흉내냈다. "산다는 게 정말 그렇게 재미있을까요? 단 한 번 주위를 둘러보세요. 뭐 신ㅌㅇ한 게 있어요? 당신은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얼음물을 마시는 게 참으로 기분 좋아요. 순간적인 만족 때문에 일생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고 당신은 정색을 하고 내게 설교를 할 수도 있겠지만--난 이제 행복이니 뭐니 하는 건 입 밖에 내기도 싫어요." "말하자면‥‥"하고 루신이 말했다. "변덕과 고집‥‥당신에겐 이두 마디로 충분합니다. 당신의 성격은 이 두 마디에 모두 포함되어 있어요." 지나이다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미안하지만 좀 늦었어요, 의사 선생님. 당신의 진찰은 들어맞지 않았어요. 좀 시대에 뒤떨어졌군요. 안경이라도 쓰시지요. 난 지금 변덕을 부릴 겨를이 없답니다. 당신들을 놀려 주거나 내 자신이 바보짓을 한다고 해서‥‥그런 게 뭐 재미있겠어요? 그리고 내가 고집은 또 무슨 고집이에요? 무슈 볼리데마르‥‥" 하고 그녀는 갑자기 나를 돌아보며 발을 굴렀다. "제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지 말아요. 나는 다른 사람한테서 동정을 받는 것이 제일 싫으니까요‥‥"그녀는 총총걸음으로 나가 버렸다. "해로워. 이런 분위기는 자네한테 해롭단 말이야." 루신은 또 한 번 내게 이런 말을 했다. 11 그 날 저녁 자세킨네 집에는 언제나 놀러오는 패들이 모였는데, 나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화제는 마이다노프의 장편시로 ㅇ겨 갔다. 지나이다는 진심으로 그 시를 칭찬했다. "그러나 어떨까요?" 하고 그녀는 마이다노프에게 말했다. "만일 내가 시인이라면 좀더 다른 주제를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건 어리석은 얘긴지는 몰라도--이따금 기이한 새악이 머리에 떠오를 때가 있어요. 이른 새벽, 하늘이 장미빛이나 잿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을 무렵, 뜬눈으로 잠을 못 이루고 있을 때면 한결 더해요. 예를 들면 내가 만일‥‥이런 말을 하면 당신들은 아마 웃을지도 모르지만‥‥" "천만에! 절대로!" 우리들은 일제히 외쳤따. "나는 말예요." 그녀는 가슴 위에 두 손을 얹고 한 옆으로 조용히 눈길을 쏟으면서 말을 이었다. "밤중에 고요한 강 위에서 커다란 배를 타고 있는 수많은 젊은 처녀들을 그릴 거예요. 달빛이 환하게 내리비치는데 처녀들은 흰 옷에 흰 화환을 쓰고 모두들 노래를 부르거든요. 무슨 찬송가 같은 노래를 말예요." "알겠습니다. 알고말고요. 어서 다음을 말씀해 주십시오." 마이다노프는 함축성 있는 꿈꾸는 듯한 어조로 맞장구를 쳤따. "그러자 별안간 강 언덕 쪽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와 커다란 웃음소리, 횃불이 타는 소리, 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오지요.‥‥그건 바커스의 여종들이 소리높이 노래를 부르며 떼를 지어 달려오고 있는 장면이에요. 이런 정경을 묘사하는 건 시인 양반인 당신이 맡아서 해야 할 거예요. 다만 내가 바라고 싶은 건 횃불은 아주 붉디붉게 무겁도록 연기를 내며 타오르고, 바커스의 여종들의 눈이, 머리에 둘러쓴 화환 밑에서 반짝이고 있어야 해요. 그리고 화환도 거무죽죽한 빛이라야 하고요. 또, 호랑이 가죽이나 술잔을 잊어선 안 돼요--그 밖에 금도 많이, 되도록 많이 써야 하겠지요." "금은 어디다 사용할 겁니까?" 반들거리는 머리털을 뒤로 젖히고,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마이다노프가 물었다. "어디다 쓰느냐고요? 어깨에도 손에도 발에도 어디든지 모두. 옛날엔 여자들이 발목에 팔찌같이 생긴 걸 끼고 다녔다지 않아요? 바커스의 여종들은 배에 탄 처녀들을 자기 쪽으로 부릅니다. 처녀들은 찬송가를 뚝 그쳐 버리지요.--노래를 계속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처녀들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어요. 물결은 배를 강 언덕 쪽으로 밀고갑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들 가운데 한 처녀가 조용히 일어서지 않겠어요? 여기 이 장면은 잘 묘사해야 돼요.--처녀가 달빛 속에서 살며시 일어나는 모습이라든지, 다른 동무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말예요. 그 처녀가 뱃전을 넘어서자 바커스의 여종들은 처녀를 에워싸고 어둠 속으로 쏜살같이 사라져 버립니다.‥‥여기서 연기가 동그랗게 피어오르고, 모든 것이 수라장으로 변해 버리는 광경을 그려야 하지요. 다만, 처녀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올 뿐, 그리고 강가에는 끌려간 처녀의 화환이 떨어져 있고‥‥" 지나이다는 입을 다물었다. 아, 그녀는 사랑에 빠졌구나! 나는 다시 이렇게 생각했다. "그것뿐입니까?" 하고 마이다노프가 물었다. "그것뿐이에요."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는 점잔을 빼며 말했따. "그것만으로는 커다란 서사시의 주제가 될 수 없지만, 서정시의 소재로서 당신의 아이디어를 한 번 살려 봅시다." "그건 로맨틱한 것이 되겠지요?" 말레프스키가 물었따. "물론 로맨틱하지요. 바이런적인 데가 있습니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위고가 바이런보다 좋은 것 같아요." 젊은 백작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리고 더 재미있고요." "위고로 말하면 제일급에 속하는 작가입니다." 마이다노프가 말을 받았다. "내 친구인 튼코세예프도 자기가 쓴 <엘트로바도르>라는 스페인을 무대로 한 소설에서‥‥" "아, 그 의문부호가 거꾸로 된 책 말이지요?" 지나이다가 말을 가로챘다. "그렇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그렇게 습관이 된 모양이더군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튼코세예프가‥‥" 지나이다는 다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것 보세요! 당신들은 또 클래시시즘이니 로맨티시즘이니 하는 걸 가지고 토론하려는 거군요. 그기보다 뭐 놀이라도 해요." "내기를 할까요?" 루신이 말을 받았다. "아니, 내기는 재미없어요. 누가 비유를 그럴 듯하게 하는가 하는 놀이를 해요." 이것은 지나이다 자신이 생각해 낸 놀이로, 무엇이든 제목을 하나 내놓고 모두들 그것을 다른 사물과 비교해서, 그 중 제일 훌륭한 비유를 생각해 낸 사람이 상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들창가로 가까이 갔다. 태양이 지금 막 떨어진 뒤여서 하늘에는 붉고 기다란 구름이 드높이 떠 있었다. "저 구름은 무엇과 비슷할까요?" 하고 지나이다는 물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기가 먼저 말했다. "나는 저 구름이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오를 맞이하러 갈 때 타고 간 황금배의 진홍빛 돛과 같다고 생각해요. 그렇지요, 마이다노프? 요전에 당신이 나한테 그얘길 들려 주었지요?" 우리들은 모두 <햄릿>의 폴로니어스처럼, 저 구름은 정말 그 때의 돛과 흡사하다, 그 이상 근사한 비유는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할 것이라고 규정지었따. "그 때 안토니오는 몇 살이었을까요?" 그녀가 물었다. "분명히 젊었을 겁니다." 말레프스키가 한 마디 했다. "그렇습니다, 젊었었지요." 마이다노프가 자신있는 말투로 확인했따. "실례지만." 루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토니오는 이미 사십이 넘었었답니다." "사십이 넘었었다고요?" 지나이다가 흘낏 그를 쳐다보며 되물었따. 얼마 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그녀는 분명 사랑에 빠졌어." 나의 입술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이 새어 나왔다. "그렇다면 상대는 누굴까?" 12 며칠이 흘러갔다. 지나이다는 차차 더 이상스럽게, 차츰 더 알 수 없게 변해 갔다. 어느 날 내가 그녀 방에 들어가 보았더니, 그녀는 등의자에 걸터앉아 뽀족한 귀퉁이에 머리를 틀어박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 얼굴은 온통 눈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아! 당신이었군요!" 그녀는 잔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리 좀 와요." 나는 그녀의 옆으로 갔다. 그녀는 내 머리 위에 손을 얹더니 느닷없이 머리털을 움켜쥐고 비틀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비명을 울려다. "아아!" "그래요! 아프세요? 그럼, 나는 아프지 않은 줄 아세요, 네?" 하고 그녀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어머나!" 내 머리에서 한 줌의 머리칼을 뽑아 낸 것을 보고 지나이다는 소스라치며 외쳤다. "내가 이게 무슨 짓일까? 아, 가엾은 무슈 볼리데마르!" 그녀는 뽑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가지런히 모아서 반지 모양으로 손가락에 감았다. "당신의 이 머리카락을 메달에 넣어 늘 몸에 지니고 다닐게요." 그녀의 두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반짝이고 있어다. "그렇게 하면 당신 마음을 어느 정도 풀어 드릴 수 있을 거예요.‥‥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 줘요."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불유쾌한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따. 어머니는 무엇인지에 관해 아버지한테 따지고 들었으나, 아버지는 여느때처럼 냉정하고 점잖은 태도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곧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어머니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더욱이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일 만한 정신적인 여유도 없었떤 것이다. 다만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와 말다툼이 끝난 다음 어머니는 나를 방으로 불러 내가 자세킨네 집을 너무 자주 방문한다고 매우 못마땅하여 꾸중했는데, 어머니 말에 의하면 공작 부인은 무엇이든 못할 짓이 없는 여자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 손에 키스하고--그것은 이야기를 중단시키려할 때에 언제나 내가 쓰는 술책이었따.--내 방으로 물러나왔다. 지나이다의 눈물은 내 마음을 아주 혼란에 빠뜨렸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그냥 울고 싶을 뿐이었다. 비록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지만 나는 역시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이미 말레프스키 같은 자는 염두에도 없었다. 하긴 벨로브조로프는 날이 갈수록 더욱 험악한 표정으로 마치 늑대가 양을 노리듯 그 엉큼스러운 백작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또 누구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갖가지 공상에 사로잡혀 줄곧 한적한 장소를 찾아다녔다. 특히 마음에 드는 곳은 반쯤 허물어진 그 온실이었다. 곧잘 높은 담 위에 올라가 우울하고 고독하고 불행한 청년으로 자처하고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자기 자신이 정말 한없이 불행하게 여겨지는 것이었다.--이 쓰디쓴 느낌이 내게는 위안이 되었다. 나는 그 느낌 속에 마음껏 잠겨 있었따. 어느 날 내가 이 담장 위에 앉아 물끄러미 먼 산을 바라보며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문득 무엇인지가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미풍도 아니고 몸부림도 아닌 그 무슨 숨결 같은 것이라고 할까, 그 무엇이 접근해 오는 데 대한 직감이라고 할까, 그 같은 것이었다. 나는 눈길을 떨어뜨렸따. 그러자 발 아래 큰길에 연회색 옷을 입고 장미빛 양산을 어깨에 얹은 지나이다가 바쁜 듯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따. 그녀는 나를 보자 발을 멈추고 밀짚모자 챙을 치켜올리며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따. "거기서 뭘 하고 있어요, 그런 높은 담장 꼭대기에서?" 몹시 야릇한 미소를 띠며 그녀는 물었따. "아, 그렇지."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따. "당신은 밤낮 나를 사랑한다고 맹세했었는데,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어디 내 옆으로--이 큰길 아래로 뛰어내려 봐요." 지나이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낸 것처럼 벌써 아래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담장 높이는 2사젠(1사젠은 약 2미터)이상이나 되었다. 나는 발부터 땅에 닿았지만 너무 가속도가 강했던 탓으로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나는 거기 쓰러진 채 한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잠시 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눈을 뜨지 않았찌만 지나이다가 곁에 있음을 느꼈다. "나의 귀여운 어린애." 내게로 몸을 굽히며 그녀는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근심스러운 듯한 상냥함이 깃들어 있었따. "어떻게 당신은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요‥‥어쩌자고 내 말을 곧이듣느냔 말이에요. 나도 역시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자, 일어나요." 그녀의 가슴은 바로 내 가슴 가까이에서 호흡하고 그 손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아, 그 때의 내 심정이 어떠했으랴--그녀의 부드럽고도 생생한 입술이 내 얼굴 전체에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따. 내 입술에도 닿았다. 그렇지만 그 때 지나이다는 내가 눈을 뜨지 않았는데도 내 얼굴 표정으로 보아 의식을 회복했따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재빨리 몸을 일으킴벼 말했따. "자, 일어나세요, 장난꾸러기. 당신은 철부지야. 어ㅓ자고 이런 먼지속에 그냥 누워 있지요?" 나는 몸을 일으켰따. "내 양산이나 집어 줘요." 하고 지나이다는 말했다. "어쩌면 내가 저런 곳에 내동댕이쳐 버렸을까. 그렇게 날 보지 말아요‥‥그런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어요! 어디 다친데 없어요? 쐐기풀에 찔렸나요? 아니, 날 보지 말라고 그러는데도 참‥‥아무것도 못 알아듣나? 말대답도 않고‥‥"하며 그녀는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따. "무슈 볼리데마르, 어서 집으로 돌아가서 몸이나 깨끗이 씻어요. 내 뒤를 따라오면 안 돼요. 따라오면 난 화를 낼 거예요. 그리고 다시는, 절대로‥‥" 그녀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재빠르게 저쪽으로 가 버렸따. 나는 길 가운데 쭈그리고 앉았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쐐기풀에 찔린 손이 뜨끔거리고, 등은 욱신욱신 쑤시고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나 그 때 내가 경험한 행복감은 내 일생에 두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것은 달콤한 아픔이 되어 내 전신에 넘쳐 흘렀고, 급기야는 환희에 찬 도약과 부르짖음이 되어 용솟음쳐 나왔따. 참으로 나는 아직도 어린애였던 것이다. 13 그 날 하루종일 나는 매우 유쾌하고 자랑스러운 기분이었따. 내 얼굴에 지나이다가 해 준 키스의 감촉을 생생하게 느끼며, 나는 환희의 전율속에서 그녀가 한 한 마디 한 마디의 말들을 되풀이하여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뜻하지 않은 행복을 아주 소중히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행복의 요인이 된 그녀를 보는 것조차 두려웠다. 아니, 차라리 보고 싶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이제 더 이상 운명한테 바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는 오직 '마지막 숨결을 깨끗이 거두고 죽어 버리면 그만이다'라는 심경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별채로 가면서 나는 몹시 당황했따. 비밀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이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처럼, 나는 점잖고도 거리낌없는 듯한 가면을 쓰고 나의 심경을 감춰 보려 했으나 그 노력을 허사였다. 지나이다는 아무런 동요의 빛도 보이지 않고 아주 태연한 태도로 나를 맞이했따. 그리고 손가락으로 위협하는 듯한 시늉을 해 보이며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나의 점잖고도 거리낌없는듯한 태도도, 신비스러운 어떤 기분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동시에 당황한 마음도 없어졌다. 물론 나는 지나이다에게 어떤 특별한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침착한 태도는 마치 내 몸을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녀가 나를 볼 때, 역시 나는 어린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나이다는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며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생긋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은 어딘가 먼 곳을 헤매고 있었다. 그것은 나도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먼저 어제 얘기를 꺼내 볼까. 어제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갔는지 한 번 꼬치꼬치 캐물어 볼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저 한손을 저었을 뿐, 한쪽 구석에 가서 앉고 말았다. 벨로브조로프가 들어왔다. 그가 나타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성질이 온순한 말은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따. "풀라이 다크를 한 필 틀림없이 얻어 준다고 합니다만 믿을 수가 없습니다. 걱정이 되는군요." "무엇 때문에 그리 걱정이 된다는 거지요?" 하고 지나이다가 물었따. "어디 얘기나 좀 해 보세요." "무엇 때문에요? 당신은 말을 탈 줄 모르지 않습니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그건 그렇고, 갑자기 또 왜 말을 타겠다는 겁니까?" "그런 것까지 참견할 필요는 없어요, 나의 맹수님. 그렇다면 피ㅇ 바실리예비치한테 부탁하겠어요." 피요트 바실리예비치란 나의 아버지였다. 나는 아버지가 그런 청을 들어 주리라 믿고 있는 듯한 말투로 그녀가 서슴치 않고 아버지 이름을 부르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렇습니까?" 하고 벨로브조로프가 말을 받았다. "그러면 당신은 그분과 함께 말타고 소풍가려는 겁니까?" "그분과 함께 가든지 딴 분과 함께 가든지--당신한테는 마찬가지겠지요. 당신하고 함께 가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니까요." "나와는 함께 안 간다고요?" 벨로브조로프는 말했다. "그럼, 마음대로 하십시오. 할 수 없지요. 어쨌든 나는 말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알아들으시겠지요? 순한 말이라고 해서 소 같은 놈을 끌고 오면 안 돼요. 미리 다짐을 해 두겠어요. 나는 마음껏 한 번 달려 보고 싶으니까요." "아마 곧잘 달릴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대체 누구와 가는 겁니까, 말레프스키입니까?" "왜 그분과 함께 가면 안 되나요, 맹수님? 그렇지만 걱정 마세요. 그렇게 눈을 번뜩일 필요는 없어요. 당신도 데리고 갈 테니까요. 당신도 아시잖아요, 지금 말레프시키 같은 사람은 내 안중에 없다는 걸."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머리를 저었따. "당신은 나를 안심시키려고 그러는 거지요?" 하고 벨로브조로프는 투덜거렸다. 지나이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말로 안심이 되나요? 오‥‥오‥‥오‥‥맹수님도 참 딱하시군요!" 지나이다는 달리 할 말이 없었는지 말 끝을 돌렸따. "무슈 볼리데마르, 당신도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어요?" "나는 사람이 많은 데는 좋아하지 않습니다.‥‥"나는 눈을 밑으로 내리깐 채 중얼거리듯 대답했따. "당신은 둘리 마주앉아 있는 편이 좋겠지요? 좋아요, 자유로운 자에겐 자유를 주고, 구함을 받은 자에겐 천국을 주라는 말이 있으니까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벨로브조로프 씨, 곧 가서 수고 좀 해 줘야겠어요. 말은 내일까지 필요해요." "그렇지만 돈은 어디서 생긴단 말이냐?" 하고 공작 부인이 말참견을했따. 지나이다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니더러 내놓으라고 하지 않아요. 벨로브조로프가 나ㅡ 믿고 돌려 줄 테니까요." "돌려 줘? 돌려 주다니‥‥" 부인은 입속말로 중얼거리더니, 별안간 목청이 터지도록 큰 소리로, "두나슈카!" 하고 하녀를 불렀따. "어머니, 제가 초인종을 드렸잖아요?" 딸이 어머니를 나무랐다. "두나슈카!" 하고 공작 부인은 다시 소리쳤다. 벨로브조로프는 인사를 했다. 나도 그와 함께 물러나왔으나, 지나이다는 나를 만류하려는 기색도 그리 없었다. 14 이튿날 아침 나는 일찍이 일어나서 지팡이 하나를 만들어 가지고 성문 밖으로 나갔다. 멀찍이 나가서 슬픈 마음을 좀 풀어 볼 작정이었따. 청명한 날씨인데다가 그리 덥지도 않았따. 즐겁고 상쾌한 바람이 땅 위를 감돌며 모든 것을 가볍게 흔들 뿐, 아무런 불안감도 없이 산들산들 불어오고 있었따. 나는 오랫동안 산과 숲 속을 헤맸다. 나는 자신을 몹시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마음껏 우수에 잠기고자 집을 나온 것이었따. 그러나 젊은, 상쾌한 날씨, 맑은 공기, 빠른 걸음걸이가 자아내는 흐뭇함, 푹힌함, 풀 위에 조용히 몸을 뉠 때의 아늑함‥‥이런 것들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여, 잊을 수 없는 그녀의 말과 키스의 추억이 다시금 내 마음 속에 되살아났다. 어쨌든 지나이다는 나의 단호한 정신과 영웅적 행위를 정당히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자, 나는 적이 유쾌해졌다. 그녀는 눈에는 다른 사나이가 나보다 훌륭하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염려할 것 없어! 다른 사나이들은 단지 입으로만 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을 나는 실제로 해 보이지 않았떤가! 더욱이 그녀를 위해서라면 더 어려운 일이라도 얼마든지 해 보일 수 있다) 나의 상상력은 활동을 개시했다. 나는 자신과 적의 수중으로부터 그녀를 빼앗는 광경이라든가, ㅍ성이가 되어서 그녀를 감옥에서 구출하는 장면이라든가, 마침내는 그녀의 발 밑에서 죽어 가는 정경을 마음 속에 그려 보았다. 나는 우리 집 응접실에 걸려 있는 말레크아델이 마칠리다를 안고 달리는 그림을 생각해 냈다. 그러나 금방 가느다란 자작나무 줄기를 타고 기어올라가는 커다랗고 얼룩얼룩한 딱따구리에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딸따구리란 놈은 마치 콘트라베이스의 잘록한 손잡이 뒤에서 얼굴을 내미는 악사처럼, 쉴새없이 나무줄기 뒤에서 불안스럽게 좌우로 번갈아 가며 주둥이를 내미는 것이었따. 그러다가 나는 <눈은 희지 않도다>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어느 새 그것은 그 당시 널리 유행하던 <산들바람 불어올 때 그대를 기다리네>라는 노래가 되어 버렸다. 그 다음 나는 호마코프의 비극에 나오는 예르마크의 별에 부치는 구절을 우렁찬 목소리로 읊기 시작했따. 그리고는 감상적인 시를 한 수 지으려 했는데, 맨 끝구절까지도 머리에 떠올랐따. 그것은 '오, 지나이다! 지나이다!' 라는 것이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는 없었따. 그러는 동안 점심때가 되었따. 나는 골짜기로 내려왔다. 좁다란 모래밭 길이 꾸불꾸불 골짜기를 따라 시내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나는 그길을 걷기 시작했다. 문득 분명치는 않으나 말발굽 소리 같은 것이 등뒤에서 들려왔다. 뒤돌아본 나는 자신도 모르게 문득 걸음을 멈추고 모자를 벗었따. 아버지와 지나이다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몸을 여자 쪽으로 굽히고, 한손으로 말의 목을 누르면서 무슨 얘긴지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 얼굴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지나이다는 잠자코 약간 엄숙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다문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처음 내가 본 것은 두 사람뿐이었지만, 잠시 뒤 골짜기 저쪽 모퉁이에서 경기병 제복을 입고 외투를 걸친 벨로브조로프가 거품을 입에 문 검은 말을 타고 나타났다. 겉보기에도 늠름한 그 말은 머리를 좌우로 내젓고 코를 벌름거리면서 날뛸 것 같은 자세로 가까이 왔다. 벨로브조로프는 고삐를 당기기도 하고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나는 한옆으로 피해 버렸다. 아버지는 말고삐를 고쳐 쥐며 지나이다에게 기울였떤 몸을 바로잡았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들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말을 달려 지나가 버렸다. 벨로브조로프는 사벨을 절걱거리며 쏜살같이 그 뒤를 쫓아갔따. 벨로ㅂㄹ프의 얼굴은 저렇게 새빨간데‥‥그녀는‥‥어째서 그토록 얼굴빛이 핼쑥할까? 아침부터 대낮이 되도록 말을 달렸는데도 얼굴이 핼쑥하다니. 웬일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따. 나는 걸음을 재촉하여 점심 시간 조금 전에 집에 돌아왔따. 아버지는 이미 말쑥하게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고는 어머니의 안락의자 옆에 앉아서 부드럽고 낭랑한 목소리로 어머니에게 평론 잡지의 사회면을 읽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리 귀담아 듣고 있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나를 보자 온종일 어디 가 있었느냐고 물은 다음 도대체 알 수 없는 사람과 아무 데나 함께 싸돌아다니는 것은 질색이라고 말했다. 나는 혼자서 바람을 쐬고 왔다고ㅗ 대답하려다가 아버지를 보자 웬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15 그 뒤 대엿새 동안 나는 지나이다를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몸이 편치 않다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별채를 드나드는 사나이들이--그들의 말을 빌린다면--당직하러 오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다만, 마이다노프만은 예외였다. 그는 감격할 기회가 없어져 버리자, 아주 풀이 죽어서 싫증을 내는 것 같았다. 벨로브조로프는 양복 단추를 모조리 채우고, 얼굴이 벌개 가지고 시무룩해서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말레프스키 백작의 핼쑥한 얼굴에는 언제나 음흉한 인상을 주는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확실히 지나이다가 자길ㄹ 곱게 보지 않게 되자, 이번에는 특히 공작 부인의 비위를 맞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마차를 세내어 부인과 함께 모스크바 총독에게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그 여행은 실패로 돌아갔고, 말레프스키는 불쾌한 일까지 당했다. 총독이 백작과 교통부 장관 사이에 말썽을 일으켰던 어떤 사건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즈음 자기는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랬노라고 변명을 늘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루신은 하루에 두 번씩 찾아오긴 했지만, 오래 앉아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얼마 전에 그의 충고를 받은 뒤부터 그를 좀 꺼리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그를 따르게 되었다. 어느 날 나는 그와 함께 네스쿠치느이 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그는 몹시 상냥하고 친절하게 굴었고, 갖가지 화초의 이름이라든가 성질 등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다가 불쑥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자기 이마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아, 나는 바보였어. 그 여자를 놀아먹는 여자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야! 아마도 사람에 따라서는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에 쾌감을 느낄 수도 있는 모양이지." "그건 대체 무슨 말입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자네한테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네." 루신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지나이다는 나를 피하고 있었다.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그것은 나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불쾌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정말 무의식중에 나한테서 얼굴을 돌려 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괴로웠고, 그것이 안타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어쩔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될 수 있으면 그녀 눈에 띄지 않도록 하면서 은근히 먼 곳에서 지켜보려 했지만 그것도 꼭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그 어떤 원인 모를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얼굴이 아주 딴판이 되어 가고,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녀의 이와 같은 변화가 특별히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어느 조용하고 따뜻한 저녁의 일이었다. 나는 가지가 무성한 말오줌나무 그늘 밑에 있는 나지막한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는 언제나 이 곳을 좋아했다. 거기서는 지나이다의 방 창문이 바라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머리 위의 검푸른 나무 덤불 속에서는 새가 한 마리 분주하게 바스락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때 회색 고양이가 허리를 길게 펴고 살금살금 마당으로 기어들어왔다. 올 들어 처음 나타난 딱정벌레가, 이미 어두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투명한 공기 속에서 윙윙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한자리에 앉아서 창ㅁㄴ을 바라보며 이제나저제나 그것이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과연 창문이 열리더니 거기 지나이다가 나타났다. 그녀는 흰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며 어깨며 손이며 할 것 없이 백지장처럼 파리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꼼짝 않고 서서 얼마쯤 찌푸린 눈썹 밑으로 눈을 모아 똑바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여태껏 그와 같은 그녀의 눈길을 본 적이 없었다. 드디어 그녀는 두 주먹을 힘차게 움켜쥐더니 주먹을 입술과 이마로 가져갔다. 그리고 느닷없이 손가락을 펴서 귀에 덮인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머릴ㄹ 홱 젖혔다. 그리고는 무엇을 결심한 듯이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이고 나서 창문을 탁 닫아 버렸다. 사흘쯤 지나 정원에서 그녀를 만났다. 나는 한 옆으로 피해 버리려 했으나, 그녀 쪽에서 나를 말렸다. "손 좀 잡아 줘요." 그 전처럼 상냥한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꽤 오랫동안 얘기를 못했군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잔잔히 빛나고, 얼굴에는 흡사 아지랑이 속을 통해서 보는 듯한 아늑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아직도 몸이 불편하십니까?"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아뇨, 이젠 다 나았어요." 대답하며 그녀는 작은 장미꽃 한 송이를 따서 들었다. "몸이 좀 나른하긴 하지만 곧 괜찮아지겠죠." "그럼 또 그 전처럼 되어 주겠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지나이다는 장미꽃을 얼굴로 가져갔다.--나에겐 꽃잎이 비쳐진 게 그녀의 뺨에 떨어진 것같이 생각되었다. "정말 내가 변하긴 변한 모양이지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변하고말고요." 나는 입속말로 대답했다. 지나이다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따. "내가 당신한테 너무 쌀쌀맞게 굴었어요.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런 일에 신경쓰지 마세요. 나도 달리 어쩔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새삼스럽게 이런 말을 해서 뭘 하겠어요!" 나는 자신도 모르게 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게 당신은 싫다--그것뿐이겠지요?" "아니에요, 사랑해 주세요. 그렇지만 그 전처럼 그렇게는 말고." "그럼, 어떻게?" "우리, 친구가 돼요. 그렇지 않으면 안 돼요!" 지나이다는 내 코 밑에 장미꽃을 갖다 대며 말했다. "내 말 좀 들어 봐요. 나는 당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지 않아요? 당신의 아주머니뻘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정말이에요, 아주머니가 못 된다면 누님은 될 수 있겠지요. 그런데도 당신은‥‥" "당신 눈에는 어린애로 보일 겁니다." 하고 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그렇고말고요. 어린애지요. 그렇지만 귀엽고 잘생기고 영리한 애여서 나는 정말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해요! 나는 오늘부터 당신을 시종으로 삼을 테니 그리 아세요. 시종이란 늘 주인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걸 잊지 마세요, 네? 자, 이게 당신이 새로 받은 직위의 표시예요." 그녀는 내 재킷 단추구멍에 장미꽃을 꽃아 주며 덧붙였다. "나의 총애를 받는다는 증거예요." "그렇지만 이젠엔 이와 다른 종류의 총애를 당신한테 받았습니다." 나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머나!" 지나이다는 곁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참 기억력도 좋지! 그럼, 할 수 없군요. 난 지금도 그럴 수 있으니까‥‥" 그녀는 몸을 굽히더니 내 이마에 순결하고 침착하게 키스했다. 나는 다만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지나이다는 재빨리 얼굴을 돌리며 "자, 우리 시종 양반, 나를 따라와요." 하더니 별채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지나이다의 뒤를 쫓아갔지만, 마음 속에서는 이상한 생각이 줄곧 떠나지 않았다. 이 의젓한 처녀가 정말 내가 알고 있는 지나이다와 같은 인물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걸음걸이조차도 전보다 얌전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 전체에 전과는 다른 위엄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고, 또 더욱 세련된 것같이 보였다. 아! 이 때 내 마음 속에는 새로운 사랑의 불길이 얼마나 강하게 불타올랐던 것인가! 16 점심때가 지나서 별채에는 다시 손님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공작의 딸도 그 자리에 나타났다. 내가 좀처럼 잊을 수 없는 그 첫날 저녁에 모였던 맴버가 빠짐없이 모두 와 있었다. 니르마츠키까지도 어슬렁어슬렁 찾아왔다. 마이단프는 이 날 누구보다도 맨 먼저 나타났다. 그러나 그자리에서는 기묘한 방법도, 어리석은 장난도, 떠들썩한 소음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말하자면 집시풍의 요소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지나이다는 좌석 전체에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시켰다. 나는 시종의 자격으로 그녀 곁에 앉아 있었다. 여러 가지 놀이 가운데서도 특히 그녀는 제비를 뽑은 사람이 꿈 얘기를 하기로 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그것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꿈 얘기라는 것들이 도대체 재미도 없거니와--벨로브조로프는 말에게 잉어를 먹였더니 말의 모가지가 나무통으로 변해 버리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면 일부러 꾸며 낸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마이다노프는 꿈 얘기를 한답시고 우리에게 한 편의 소설을 들려 주었다. 이야기 속에는 무덤이 나오는가 하면 현악기를 가진 천사가 나오고, 또 말을 하는 꽃이 나오는가 하면, 이상스러운 음향이 먼 곳에서 들려오는 대목도 있었다. 지나이다는 끝까지 다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젠 꿈 얘기가 창작이 되어 버리고 말았으니‥‥" 하고 그녀는 말했다. "제각기 꾸며 낸 얘기를 하기로 해요. 그 대신 반드시 자신이 생각해 낸 얘기가 아니면 안 돼요." 역시 벨로브조로프가 맨 먼저 이야기할 차례가 되었다. 젊은 경기병은 당황해서 "난 아무것도 생각해 낼 수가 없습니다!" 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바보 같은 소리 그만둬요!" 하고 지나이다가 내쏘았다. "예를 들면 당신한테 아내가 있다고 상상해 봐요.--그러면 당신은 부인과 어떤 생활을 할 것인지, 그걸 우리한테 얘기하면 되잖아요? 아마 당신은 아내를 방에 가둬 놓겠지요?" "가둬 놓겠지요." "그리고 당신도 그 옆에 붙어 있겠지요?" "반드시 붙어 있을 겁니다." "거 참 좋겠군요. 하지만 아내가 만일 싫증이 나서 당신을 배반한다면?" "아마 죽여 버릴 겁니다." "그렇지만 달아나 버린다면?" "쫓아가서 역시 죽여 버려야지요." "원, 저런! 그럼, 만일 내가 당신 아내라면? 그 땐 어떻게 하시겠어요?" 벨로브조로프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대답했다. "그 때는 내가 자살하고 말겠습니다‥‥" 지나이다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보기에 당신 얘기는 그리 길 것 같지 않군요." 둘째 번 제비는 지나이다가 뽑았다. 그녀는 천장에 눈ㅇㄹ 두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럼, 얘기하겠어요." 학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난 이런 생각을 했어요.--아주 으리으리한 궁전을 상상해 주세요. 여름 밤인데 호화 찬란한 무도회가 열렸어요. 이 무도회는 젊은 여왕이 베풀었는데, 여기에도 저기에도 온통 금이니 대리석이니 수정이니 비단이니, 그리고 등불, 다이아몬드, 꽃, 향불 할 것 없이 갖가지 사치스러운 물건으로 장식되어 있어요." "당신은 사치를 좋아합니까?" 하고 루신이 가로챘따. "사치란 아름다운 것이니까요." 하고 그녀는 대꾸했다. "나는 아름다운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좋아요." "훌륭한 것보다도 더 좋단 말씀입니까?" 하고 그는 물었다. "어쩐지 빈정대느라고 묻는 말 같군요. 그런 건 난 모르겠어요. 내 이야기를 방해하지 마세요. 어쨌든 호화 찬란한 무도회예요. 모든 사람들이 모였는데, 모두가 젊고 훌륭하고 늠름하며, 그리고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여왕을 사모하고 있어요." "손님 가운데 여자는 아무도 없습니까?" 말레프스키가 물었다. "없어요. 아니, 있기는 있어요." "아니, 모두 못생긴 여자들이겠군요?" "미인들이지요. 그렇지만 남자들은 모두 여왕한테 반했거든요. 여왕은 늘씬하고 키가 큰데, 그 검은 머리에 자그마한 금관을 쓰고 있어요." 나는 지나이다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그녀는 우리들보다 훨씬 고상하게 보였고, 움직일 줄 모르는 잔잔한 눈썹과 흰 이마에서 형용할 수 없이 밝은 예지와 위엄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마음 속으로 그 여왕이란 바로 당신입니다!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모두들 여왕을 에워싸고." 지나이다는 얘기를 계속했다. "저마다 있는 지혜를 다 짜내어 여왕의 마음에 들려고 말재주를 부립니다." "그럼, 여왕은 아첨을 좋아하는군요?" 루신이 물었다. "참 심술궂은 양반도 다 있어! 빈번이 남의 말을 가로채고‥‥그야 비위를 맞춰 줘서 싫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하고 말레프스키가 끼어들었다. "여왕한테는 남편이 있습니까?"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없다고 해요, 남편이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물론이지요." 말레프스키가 말을 받았다. "남편은 있어서 뭘 합니까?" "Silence (조용히)!" 프랑스 말에 서투른 마이다노프가 외쳤다. "Merci (고마워요)." 라고 지나이다가 그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여왕은 그런 말들을 듣기도 하고 또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손님들의 얼굴은 본 체 만 체합니다. 천장에서 마룻바닥까지 여섯 개의 창문이 열려 있는데, 창 밖으로는 커다란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과 굵다란 나무가 무성한 어두운 정원이 보입니다. 여왕은 물끄러미 정원을 내다보고 있어요. 거기에는 나무 그늘에 분수가 있어서 어둠 속에서도 희끄무레한데, 그것이 무슨 유령처럼 길게 흐느적 거리는 것같이 보입니다. 여왕은 사람들의 말소리와 음악 소리 속에서 조용히 흐르는 물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합니다.--여러분, 당신들은 모두 고상하고 현명하고, 또 부유한 분들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에워싸고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전전긍긍하며 모두 내 발 밑에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나는 당신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저기 분수 가에, 저기 찰랑거리는 물 옆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사람이 기다리고 서 있습니다. 그분은 화려한 옷도 입지 않았고, 또 보석도 몸에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분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내가 나오리라는 것을 굳게 믿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물론 나는 갈 것입니다. 내가 그분한테 가서 그분과 함께 있으려 할 때, 나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이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나는 그분과 함께 정원의 어둠 속으로, 설레는 나무 그늘로, 물소리가 속삭이는 분수 뒤로 자취를 감추고 말 것입니다." 지나이다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것은 만들어 낸 얘깁니까?" 말레프스키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지나이다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따. "여러분." 하고 루신이 불쑥 입을 열었다. "만일, 우리들이 그 손님들 가운데 끼어 있다가, 분수 옆에 서 있는 행운아에 대해서 알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고 지나이다는 말을 막았다. "여러분이 그런 경우에 어떻게 하실지 내가 한 사람씩 얘기할께요. 벨로브조로프 씨, 당신은 그 사람한테 결투를 신청할 것이고, 마이다노프씨, 당신은 풍자시를 쓸 거예요. 아니, 당신은 풍자시를 못 쓰니까 바르비에 식으로 기다란 장단음을 써서 그걸 [전신:그 즈음의 잡지 이름]에 싣겠지요. 니르마츠키 씨, 당신은 그 사람한테 돈을 빌려 달라고 할 거예요. 아니, 당신이 오히려 그 사람에게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 줄 거예요. 그리고 의사 선생, 당신은‥‥"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글쎄요, 당신에 대해선 알 수 없어요. 대체 무슨 짓을 할까요?" "나는 왕실 의사의 직책상." 하고 루신이 대답했다. "이렇게 여왕에게 충고할 것입니다. 손님들을 상대할 정신적 여유가 없는 그런 때에는 무도회를 열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고요." "아마 그 말이 옳을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백작, 당신은?" "나 말입니까?" 말레프스키는 역시 음흉한 미소를 띠며 되물었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독이 든 과자를 권하겠지요.: 지나이다가 대신 대답했다. 말레프스키의 얼굴이 좀 일그러지며 순간 유대인 같은 표정을 띠었으나, 그는 금방 껄껄 웃어 버렸다. "볼리데마르, 당신은 아마‥‥" 지나이다는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젠 그런 얘긴 그만두고 우리 무슨 다른 놀이라도 해요." "볼리데마르는 시종의 자격으로, 여왕이 정원으로 나갈 때 그 기다란 치맛자락을 잡아 드릴 겁니다." 말레프스키가 독기를 품은 어조로 말했다. 나는 전신의 피가 머리끝으로 확 치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지나이다가 내 오른쪽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좀 떨리는 목소리로 손가락으로 문 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백작, 나는 당신한테 버릇없는 말을 함부로 하라는 권리를 절대로 준일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당장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미안합니다, 아가씨." 말레프스키는 파랗게 질려서 중얼거렸다. "아가씨의 말이 옳습니다." 하고 외치며 벨로브조로프도 벌떡 일어났다. "나는 절대로 그런 뜻에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말레프스키는 변명을 계속했다. "내가 한 말에는, 조금도 그런‥‥그런 뜻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을 모욕한다거나, 그런 마음은 꿈에도 없었습니다. 혹시 잘못됐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지나이다는 차가운 눈길로 그를 쏘아보고 입가에 비웃음을 띠었다. "그럼, 남아 있어도 좋아요.: 그녀는 아무렇게나 손짓해 보이며 말했다. "하기는 나나 볼리데마르 씨가 화까지 낼 필요는 없겠지요. 당신은 농담삼아 좀 빈정거렸을 뿐이고‥‥또, 그러는 걸 재미있어 하는 분이니까." "용서하십시오." 말레프스키는 거듭 사과했다. 나는 조금 전의 지나이다의 태도를 다시 머릿속에 그려 보고, 비록 진짜 여왕이라 하더라도 그 이상의 품위를 가지고 무례한 사나이에게 문쪽을 가리켜 보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소한 사건이 있은 뒤 내기놀이도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모두좀 계면쩍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직접 이 사건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떤 분명치 않은 무거운 감정 때문이었다. 누구 한 사람 그것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자기 자신에게서도, 동료들에게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따. 마이다노프가 자작시를 낭독했다. 그러자 말레프스키가 굉장한 열의를 가지고 그 시를 칭찬했다. "저 친구, 아주 착한 인간으로 보이려고 애쓰는군." 하고 루신이 내게 속삭였다. 얼마 뒤 우리들은 흩어졌다. 지나이다는 갑자기 무슨 생각에 잠겨 버렸고, 공작 부인은 하인을 보내어 두통이 난다고 했으며, 또 니마츠키는 신경통이 심하다고 우는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늦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지나이다의 얘기가 내게 깊은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 얘기 속에 암시 같은 것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하고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암시했을까? 만일 그 무언가를 암시한 게 사실이라면‥‥그러나 확실히 그렇다고 인정할 근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나는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뺨을 번갈아 베개에다 대고 몸을 뒤척거리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까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때의 지나이다의 표정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문득 네스쿠치느이 공원에서 루신이 무심결에 부르짖던 말과, 나에 대한 그녀의 급변한 태도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상상의 실마리를 잃고 말았다. "상대자는 대체 누구일까?" 이 한 마디가 마치 어둠 속에 씌어 있는 것처럼 내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흡사 낮고 불길한 구름이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었다.--나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구름이 폭풍우로 변하는 것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에 나는 여러 가지 사물에 익숙해졌다. 자세킨네 집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질서한 생활, 싸구려 촛불, 부러진 나이프와 포크, 침울한 보니파치라는 하인, 지저분한 꼴을 한 하녀들, 공작부인 자신의 언동--이런 기묘한 생활은 나를 이미 놀라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내가 어슴푸레하게 느끼고 있는 지나이다의 변화--이것만은 나도 익숙해질 수 없었다. '말괄량이'--언젠가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불렀다. 말괄량이--그것이 바로 나의 우상이 아닌가, 나의 신이 아닌가! 이 한 마디가 부젓가락으로 나를 찌르는 것 같아, 나는 그것을 피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한편, 만일 그 분수 가의 행운아가 될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떠한 짓이라도 해낼 수 있고, 또 어떠한 희생이라도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온몸의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정원‥‥분수‥‥ 나는 잠시 생각했다. 정원에 좀 나가 볼까? 나는 분주히 옷을 걸쳐 입고 방에서 빠져나왔다. 캄캄한 밤이었다. 나무들은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를 내며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하늘에선 조용하고 차가운 기운이 내리고, 채소밭 쪽에서는 참깨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정원의 오솔길이란 길은 모조리 다 걸어다녔다. 나의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고, 또 기운을 북돋아 주기도 했다. 나는 때때로 발을 멈추고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내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듣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담장에 가까이 와서 가느다란 말뚝에 기대어 섰다. 불현듯 공연히 생각한 데 지나지 않았을까? 너댓 발자국 앞에서 언뜻 여자의 그림자 같은 것이 스쳐갔다. 나는 눈을 모아 어둠 속을 들여다보며 숨을 죽였다. 저건 무엇일까? 내가 발자국 소리를 들은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역시 내 심장의 고동 소리였을까? "누구요, 거기에 있는 건?" 나는 겨우 알아들을 정도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저건 또 무슨 소리일까? 소리를 죽여 가며 웃는 것일까? 혹은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소리일까? 그렇지 않으면 바로 귀 밑에ㅅ 누가 내뿜는 한숨 소리일까? 나는 겁이 났다. "누구요, 거기에 있는 건?" 나는 더욱 가느다란 소리로 다시 한 번 물었다. 순간, 공기가 흔들렸다. 하늘에서는 불줄기 같은 것이 번쩍했다.--유성인 모양이었다. "지나이다?"라고 나는 물어 보려 했으나, 목소리가 입술에 얼어붙고 말았다. 한밤중에 종종 그렇듯 주위가 쥐죽은 듯 갑자기 고요해졌다. 수풀 속의 귀뚜라미까지 울음 소리를 멈춰 버렸다. 다만 어디선가 탁 하고 창문 닫는 소리가 들려왔을 뿐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꼼짝 않고 서 있다가 얼마 뒤 내 방의 싸늘한 잠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이상스러운 흥분을 느꼈다. 마치 애인을 만나러 갔다가 고독 속에 홀로 남게 된 것 같은, 다른 사람의 행복 옆을 지나온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17 이튿날 나는 지나이다를 먼 빛으로 언뜻 보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마차를 타고 어디론지 나가고 없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루신과 말레프스키를 만났다. 루신은 나한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으나, 젊은 백작은 일부러 웃음을 지어 보이며 사뭇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별채를 찾2아다니는 친구들 가운데 그 사람 혼자만이 약삭빠르게 우리 집으로 기어들어와서 어머니의 눈에까지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실례가 될 정도로 겸손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아, 시종 양반이시로군!" 하고 말레프스키는 나한테 말을 걸었다. "마침 잘 만났네. 자네가 모시고 있는 어여쁜 여왕님께선 무얼 하고 계시나?" 말쑥하게 잘생긴 그의 얼굴도 그 순간 내게는 징그럽기 짝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눈이 조롱하는 듯한 경멸의 빛을 띠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넨 아직도 내게 화를 내고 있나?"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그건 너무한데. 자네한테 시종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내가 아니니까, 여왕에겐 시종이라는 게 붙어 있게 마련이지. 이건 실례가 될는지 모르지만, 내가 자네한테 한 마디 충고하겠는데, 자넨 자기 직무에 태만한 것 같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시종이란 항상 여왕님 곁에 붙어 있어야 하는 법이야. 그리고 시종은 여왕님이 하시는 일을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어야 하지. 여왕님의 거동까지 일일이 살피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일세." 그리고 그는 다시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낮이든 밤이든 가리지 말고‥‥" "당신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고? 나는 알아들을 만하게 똑똑히 말한 것 같은데. 밤낮 할 것 없이 말일세. 낮엔 그래도 이럭저럭 큰 탈은 없겠지. 환히 밝고 또 사람 눈도 많으니까. 하지만 밤엔 어쨌든 탈이 나기 쉽거든. 그러니 자넨 밤마다 자지 말고 잘 살피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하는 것뿐일세. 그야말로 전력을 다해 살펴야 하네. 자네도 기억하고 있을 태지--정원에서, 밤의 분수 가에서--이런 곳에서 지키고 있어야 하네. 아마 자네는 나한테 감사하단 말을 하게 될 걸세." 말레프스키는 껄껄 웃으며 나에게서 빙그르르 몸을 돌려 버렸다. 아마도 그는 자기가 한 말에 무슨 특별한 뜻을 부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본디 그는 속임수를 잘 쓰기로 유명한 인물이어서, 가장 무도회 같은 데서도 곧잘 사람들을 놀려대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인간 전체에 배어 있는, 거의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허위성에 힘입은바 큰 것이었다. 그는 필경 나를 좀 놀려 주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었겠지만, 그러나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무서운 독이 되어 내 혈관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온몸의 피가 한꺼번에 머리로 치솟아 올라왔다. 아! 그랬던가! 나는 마음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렇지! 엊저녁에 내가 정원으로 끌려나간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야! "그런 일이 과연 있을 수 있느냔 말이야!" 나는 커다란 소리로 버럭 고함을 지르며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하기는 무슨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인지 나 자신도 확실히 알지 못했던 것이지만. 그런 말을 하는 말레프스키 자신이 정원으로 찾아오는지도 몰라 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가 무심결에 그런 소리를 지껄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그는 그런 짓쯤은 넉넉히 할 만한 철면피니까.(그렇지 않다면 대체 누굴까)--우리 집 정원의 담장은 아주 낮기 때문에 그것을 뛰어넘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었다.--(어쨌든 어느 놈이든 내 손에 걸려들기만 하면, 재미없을 걸! 누구든지 내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온 세상에, 그리고 그 배신자에게--나는 서슴치 않고 그녀를 배신자라고 ㅂㄹ렀다.--나도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야 말걸)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책상 서랍을 열고 얼마 전에 산 영국제 나이프를 꺼내 칼날을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차다차게 굳어진 결심과 함께 그것을 주머니 속에 간직했다. 마치 그런 짓을 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또 이번이 처음도 아닌 것 같은 그런 태도였다. 나의 심장은 독을 품고 긴장되어 돌처럼 굳어졌다. 나는 밤중까지 찌푸린 미간을 한시도 펴지 않았고, 악문 이를 늦추지도 않았다. 나는 불덩이처럼 뜨거워진 나이프를 주머니 속에서 움켜쥔 채 미리부터 어떤 무서운 사태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쉴새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이 새로운 느낌은 내 마음을 사로잡고 어느 정도 유쾌한 기분까지 자아내어, 정작 지나이다에 대해서는 그리 생각하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내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이런 구절이 떠올랐다. 젊은 집시 알레코(푸슈킨 작 <집시>의 주인공)--'젊은 미남자야, 어디로 가느냐? 누워서 잠들라‥‥그대는 온몸이 피투성이로구나!‥‥오, 그대는 대체 무슨 짓을 했느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얼굴에 아주 잔인한 미소를 띠며 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를 거듭 되풀이했다.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그러나 요즘 거의 날마다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듯한 어머니가 나의 심상치 않은 태도를 눈치채고 밤참을 먹을 때 말했다. "너는 뭣 때문에 보릿자루를 노리는 생쥐새끼처럼 뾰로통해 가지고 그러니?" 나는 대답 대신 그저 너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 모두들 내 속을 알고 있다면 하고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시계가 11시를 알렸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으나 옷은 벗지 않았다. 이윽고 12시가 되었다. 이젠 시간이 됐겠지! 나는 악문 이 사이로 중얼대며 양복 저고리 단추를 턱 밑까지 모조리 채우고, 소매까지 걷어붙인 뒤 정원으로 나갔다. 나는 미리부터 지키고 서 있을 장소를 생각해 두고 있었다. 정원의 한쪽 끝, 우리 집과 자세킨네 집 뜰 안을 가로막고 있는 담장 옆에 전나무가 한 그루 외따로 서 있었다. 그 무성한 나뭇가지 밑에 성 ㅣ으면 어둠이 허락하는 한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죄다 볼 수 있었다. 그 곳에는 언제나 내 눈에 신기롭게 보여지는 한 갈래의 좁다란 길이 꾸불꾸불 뱀처럼 담장 밑을 따라 굽이쳐서--이 부근의 담장을 넘나드는 것같은 흔적이 보였다.--순전히 아카시아나무로만 지은 정자가 있는 쪽으로 뻗어 있었다. 나는 그 전나무 밑까지 가서 나무 줄기에 몸을 기대고 망을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날 밤과 같이 고요한 밤이었다. 그러나 하늘엔 구름이 얼마 없어서--나무 덤불뿐만 아니라 키가 큰 꽃나무의 윤곽까지도 똑똑히 분간할 수가 있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숨가쁜 순간이었다. 아니, 무서울 지경이었다. 나는 이미 어떠한 사태도 각오하고 있었지만, 다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어디로 가는 거야? 기다려라! 바른대로 말해봐!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릴 테다!"라고 호통을 쳐야 할 것인지, 또는 군말 없이 푹 찔러 버리고 말 것인지, 그 점을 이리저리 생각학 있었다. 바스락하는 소리 하나에도, 나뭇잎이 나부끼는 소리에도 심상치 않은 무슨 연유가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그러나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들끓던 피는 점차로 식어서 조용해졌다. 이러고 있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건 내가 생각해도 좀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나는 말레프스키의 놀림감이 되었나 보다.--이러한 의식이 내 마음 속에 기어들어왔다. 나는 내가 숨어 있던 곳을 떠나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어느 곳에서도 바스락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쥐죽은 듯하고, 우리 집 개까지도 사립문 옆에 웅크리고 엎드려 잠자고 있었다. 나는 무너진 온실 벽으로 기어올라가 눈앞에 멀리 펼쳐져 있는 들판을 바라보며, 지나이다와 만났던 그 날을 회상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몸을 흠칫하며 놀랐다. 문 열리는 소리가 삐걱 나고, 뒤이어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나는 껑충껑충 두 번만에 온실에서 밑으로 뛰어내려 숨을 죽이고 그 자리에 섰다. 가볍고 빠르면서도 조심성 있는 발자국 소리가 분명 정원 안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내가 있는 쪽으로 차츰 가까워졌다. 저놈이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경련을 일으킨 듯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 들고 칼을 폈다.--무슨 불꽃 같은 것이 눈 속에서 빙그르르 돌며 공포와 증오로 머리털이 쭈뼛 솟는 것 같았다. 발자국 소리는 곧장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몸을 구부리고 발자국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목을 길게 뽑았다. 드디어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것은 나의 아버지가 아닌가! 아버지는 검은 망토로 온몸을 감싸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있었지만, 나는 곧 알아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발뒤꿈치를 들고 가만가만 내옆을 지나갔다. 아무것도 내 몸을 감춰 주지 않았지만, 나는 거의 땅바닥과 맞닿을 정도로 넓죽하게 몸을 구부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내가 거기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사뭇 살인을 하려는 각오를 가지고 질투에 불타던 '오델로'는 별안간 조그만 중학생으로 변하고 말았다. 나는 뜻하지 않은 아버지의 출현에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서, 아버지가 어느 쪽으로부터 와서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처음에는 도무지 짐작도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주위가 또다시 고요해졌을 때, 그제야 비로소 나는 몸을 펴고--아버지는 뭣하러 이토록 깊은 밤중에 정원을 거닐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엉겁결에 나이프를 풀 속에 떨어뜨렸지만, 그것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번에 취기가 가신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전나무 밑에 있는 그 벤치를 찾아가 지나이다의 침실 들창을 쳐다보았다. 밖으로 조금 굽은 유리창은 밤하늘에서 내리비치는 희미한 광선을 받아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유리창 빛이 변했다. 그리고 들창 안쪽에서--나는 보았다. 분명히 내 눈으로 보았다.--하얀 커튼이 조심스럽게 살며시 내려와 창 문턱까지 다 가리고 다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건 또 무엇일까?" 다시 방 안에 들어서자 나는 거의 무의식중에 소리내어 말했다. "꿈인가, 우연인가. 그렇지 않으면‥‥"문득 내 머리에 떠오른 상상은 너무나 새롭고 넘부나 괴이했으므로, 나는 그런 생각에 깊이 잠길 용기마저 없었다. 18 이튿날 아침 나는 심한 두통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젯밤의 흥분은 사라지고 그 대신 무거운 의혹과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그 어떤 이상한 우수에 사로잡혔다.--그것은 흡사 나의 내부의 그 무엇이 죽음에 직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째서 자네는 그렇게 뇌수를 절반쯤 뽑아 버린 토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나?" 루신이 나를 만나자 이런 소리를 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침 식사 때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색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아버지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태연했고, 어머니는 역시 언제나처럼 마음속에 초조함을 숨기고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가끔 하는 습관대로 혹시 아버지가 나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어오지나 않을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날마다 보여 주던 차가운 애무마저 보여 주지 않았다. 지나이다한테 모든 것을 얘기하기는커녕--예사로운 이야기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공작 부인의 아들인, 올해 12살 된 유년 학교 학생이 휴가를 받아 페테르부르그에서 돌아왔던 것이다. 지나이다는 곧 동생을 나한테 맡겨 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볼로쟈." 하고 그녀는 말했다--그녀가 나의 애칭을 부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당신한테 친구가 생겼어요. 이애 이름도 역시 볼로쟈랍니다. 아무쪼록 귀여워해 줘요. 이 애는 아직 철이 없지만 마음씨는 착하니까요. 네스쿠치느이 공원도 좀 구경시키고, 함께 소풍도 다니며 이 애를 돌봐 줘요, 네? 그렇게 해 줄 테지요? 당신도 역시 정말 좋은 분이니까!" 그녀는 상냥하게 두 손을 내 어깨에 얹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이 소년의 도착은 나까지도 어린애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저쪽도 역시 입을 다문 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나이다는 깔깔 웃으면서 우리 두 사람을 끌어다 맞붙였다. "자, 어린 동무끼리 포옹해요!" 우리들은 포옹했다. "정원에 나가 보지 않겠니? 내가 안내하지." 나는 유년 학교 학생에게 물었다. "네, 고맙습니다." 그는 과연 유년 학교 학생답게 좀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나이다는 또다시 웃어댔다. 그녀의 얼굴이 이처럼 아름다운 홍조를띤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느꼈다. 나는 유년 학교 학생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우리 집 정원에는 낡은 그네가 있었다. 나는 그를 좁다란 판자위에 앉혀 놓고 밀어 주었다. 그는 옷깃에 넓은 금빛 테두리를 한 두꺼운 천으로 만든 새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꼼짝 않고 앉아서 그네줄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목의 호크라도 풀어." 하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습관이 돼서요."라고 그는 대답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는 자기 누이를 닮았다. 더욱이 눈 같은 데는 쏙 빼낸 듯싶었다. 나는 그를 돌봐 주는 것이 유쾌하기는 했지만, 한편 쑤시는 듯한 서글픔이 심장을 씹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젠 나도 아주 어린애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제만 해도‥‥ 나는 어젯밤 나이프를 떨어뜨린 장소가 생각나 그것을 찾아 냈다. 유년 학교 학생은 나한테 졸라 나이프를 받아들고 굵다란 땅두릅 나뭇가지를 잘라서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오델로도 역시 피리를 불었다. 그러나 그 날 저녁 바로 이 오델로는 지나이다의 팔에 안겨 얼마나 슬프게 흐느꼈던가! 그녀는 나를 정원 한구석에서 발견하고, 어째서 그토록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별안간 그녀가 깜짝 놀랄 만큼 내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아니, 왜 그래요, 볼로쟈?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녀는 거듭 물었지만, 내가 대답도 없이 울음도 그치려 하지 않자, 눈물에 젖은 내 뺨에 키스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 흐느낌 속에서 속삭였다. "나는 다 알고 있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나를 장난감으로 취급했습니까? 나의 사랑이 당신에게 무슨 필요가 있지요?" "당신한테 미안하게 됐어요, 볼로쟈‥‥"지나이다는 입을 열었다. "아, 정말 내가 잘못했어요." 그녀는 두 손을 움켜쥐었다. "내 몸 안에는 아주 좋지 못한 어둡고 악한 마음이 숨어 있는가 봐요. 그렇지만 지금은 나도 당신을 장난감으로 취급하지 않아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어째서, 어떻게라는 것은 당신이 꿈에도 생각지 못하겠지만‥‥그건 그렇고, 당신은 대체 무엇을 알고 있다는 거지요?" 내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내 앞에 서서 빤히 나를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녀가 나를 들여다보기만 하면 나는 곧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그녀의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15분쯤 지나서 나는 벌써 유년 학교 학생과 지나이다와 함께 달리기 내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우는 것이 아니라 웃고 있었다.--비록 부어오른 눈에서 웃을 때마다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긴 했지만. 내 목에는 넥타이 대신 지나이다의 리본이 매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붙잡을 수 있었을 때 나는 어찌나 기뻣던지 고함을 지르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나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던 것이다. 19 실패로 돌아간 그날 밤의 탐험 뒤, 1주일 동안 내 마음 속에 일어난 모든 것을 한 번 자세히 말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아마도 커다란 곤혹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괴이한 열병을 앓을 때와 같이 지극히 모순된 감정, 사상, 의혹, 희망, 기쁨, 번뇌--이런 것들이 회오리바람처럼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혼돈된 세계였다. 나는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기가 두려웠다.--만일 16살밖에 안 된 소년도 자기 마음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분명히 의식하는 것을 꺼렸다. 나는 그저 어떻게 하루 해를 저녁때까지 보내느냐 하는 것만을 염두에 두었을 뿐이었다. 그 대신 밤에는 잘 잤다. 어린애다운 단순한 생각이 나를 도와 준 것이다. 나는 내가 사랑ㄴ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기도 싫었다. 나는 되도록 아버지를 피하려 했으나 지나이다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녀 앞에 나서면 나는 뜨거운 불에 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를 불태우며 녹여 버리는 그 불이 대체 어떤 불인지는 별로 알 필요가 없었다.--나로서는 불타며 녹아 버리는 것 자체가 말할 수 없이 달콤한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온갖 감상에 스스로를 내맡기고, 자기 자신을 농락해 보기도 하고, 추억을 외면하고, 또 미래에 대한 예감에서 눈을 가려 보기도 했다. 이런 번뇌도 필경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을 테지만, 아무튼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 갑자기 일어나 모든 것을 결말짓고, 나를 새로운 궤도로 옮겨 놓아 주었다. 어으 날, 꽤 오랫동안 산책을 하다가 점심을 먹으러 돌아와서 뜻밖에도 나 혼자 식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아버지는 어디론가가 버렸고, 어머니는 편치 않으셔서 식사할 생각이 없다고 하며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하인들의 표정을 보고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을 눈치챘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캐물어 볼 수도 없었는데, 다행히도 식당에서 일하는 젊은 하인인 필립이라는 만만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시를 무척 좋아했고 기타를 잘 쳤다.--나는 그에게 물어 보기로 했다. 이 하인한테 들은 바에 의하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그것을 하녀 방에서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죄다 들을 수 있었다. 프랑스 말로 한 대목도 많긴 했짐반, 파리에서 온 마샤라는 하녀는 양복점에 5년이나 있었으므로 무슨 말이든다 알아들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행실이 나쁘다고 공격하며 옆집 딸과의 교제를 묽 늘어졌다. 아버지는 처음엔 변명했으나 나중에는 불끝 화를 내며 어머니의 나이를 들추며 좀 지나친 대꾸를 했으므로,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리며 공작 부인한테 준 수료 얘기를 꺼내고 부인뿐만 아니라 딸에 대해서까지 몹시 좋지 않게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협박 비슷한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소동이 일어난 동기는." 하고 필립은 말을 이었다. "발신인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편지 때문입니다. 누가 그런 편지를 써 보냈는지 모르지만, 그것만 아니었어도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있겠습니까? 그럴 이유가 없지요." "그럼, 옆집 딸과 아버지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군?" 나는 가까스로 물었다. 나의 손발이 싸늘해지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필립은 의미있게 눈을 깜박였다. "있고말고요. 그런 일을 끝까지 숨길 수는 없지요. 그 방면으론 주인님도 꽤 조심성이 있으신 편이지만--그ㄹ 우선 예를 든다면 마차 같은 것을 빌려야 하거든요. 아무래도 딴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는 안된단 말씀입니다." 나는 필립을 돌려 보내고 침대 위에 쓰러졌다. 나는 목놓아 울지도 않았고, 또 절망 속에 빠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ㅇ았고, 어째서 진작 좀더 빨리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던가를 이상스럽게 여기지도 않았을 뿐더러, 아버지를 원망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내가 알게 된 이 사실은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뜻밖의 발견은 나를 여지없이 부스러뜨리고 말았다. 모든 것은 끝장이 났다. 내가 아끼던 꽃은 한꺼번에 모조리 꺾여, 내 둘레에 산산이 흩어진 채 짓밟혀 버리고 만 것이다. 20 이튿날 어머니는 이사를 간다고 말했다. 아침에 아버지는 어머니와 침실에 들어가 오랫동안 두 분이서만 얘기를 하였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들은 사람은 없었지만, 어머니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어머니는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식사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나 밖에 나오지도 않고, 이사한다는 결심도 바꾸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나는 그 날 하루 종일 공연히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정원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고, 또 한번도 벌채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그 날 저녁 나는 놀라운 사건을 목격했다. 아버지가 말레프스키 백작의 팔을 붙잡고 응접실에서 문간방으로 끌고 나가더니, 하인들 앞에서 냉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삼 일 전에도 당신은, 어떤 집에서 문 밖으로 나가 달라는 말을 들었다지요. 그러나 나는 여러 말을 할 생각은 없소. 다만 한 마디 해두겠는데, 만일 당신이 두번 다시 내 집에 오면 그 때는 들창 밖으로 집어던지고 말 테요. 나는 당신의 필적이 마음에 들지 않소." 백작은 고개를 푹 숙이고 이를 악물면서 몸을 움츠리고는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시내로 이사 갈 준비가 시작되었다. 아르바트(모스크바에 있는 광장)에 우리 집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자신도 이제는 더 이상 별장에 남아 있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소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잘 부탁한 것 같았다. 모든 일이 조용하게 천천히 진행되어 갔다. 어머니는 공작 부인한테 사람을 보내, 몸이 불편한 탓으로 출발 전에 찾아뵙지 못하여 유감스럽다는 인사를 전했다. 나는 미친 듯이 쏘다녔다. 그리고 한시바삐 모든 것이 결말이 나기를 바랐다. 다만 한가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어째서 그 젊은 처녀가, 그래도 공작의 딸이라는 어엿한 신분을 가진 여자가 아버지한테, 가정이 있다는 걸 알면서 당돌하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하다못해 벨로브조로프한테라도 시집 갈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녀는 대체 아버지한테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자기 장래를 파멸시키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정욕이라는 것이고, 그것이 참된 애착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사람에 따라선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는 일에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모양이지." 하고 언젠가 루신이 한 말이 문득 생각났다. 때마침 별채의 들창에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보였다. 저건 지나이다의 얼굴이 아닐까? 과연 그것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 한 마디 못하고 헤어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나는 기회를 보아 별채로 찾아갔다. 응접실에서 공작 부인이 여느때처럼 무뚝뚝한 말투로 나를 맞았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도련님. 왜 그렇게 빨리 옮겨가지요?" 그녀는 양쪽 콧구멍에다 코담배를 쑤셔 넣으며 말했다. 나는 부인의 얼굴을 살펴보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필립에게서 들은 수표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었기 때문이다. 부인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적어도 그 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옆방에서 검은 옷을 입고 빗질을 하려고 머리를 풀어 헤친 지나이다가 핼쑥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고는 자기 방으로 끌고 갔다. "당신 목소리가 들려와서‥‥"하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곧 달려나왔지요. 당신은 아주 태연하게 우릴 버리고 가는군요? 무정하기도 하지." "지나이다, 당신한테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아마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겁니다.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 곳을 아주 떠납니다." 지나이다는 눈을 모아 나를 바라보았다. "네, 들었어요. 그러나 와 주어서 고마워요. 난 당신을 만나지 못하고 마는가 보다고 생각했지요.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 줘요. 이따금 당신을 곯려 주긴 했지만, 그래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여자는 아니니까요." 그녀는 외면을 하고 창가에 기대고 섰다. "정말이에요. 난 그런 여자는 아니에요. 당신이 나를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알고 있어요." "내가요?" "네, 당신이‥‥당신이 말예요." "내가요?" 하고 나는 비통한 목소리로 거듭 물었다. 내 심장은 이전처럼 이길 수 없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힘에 매혹되어 떨려 왔다. "내가 말입니까? 믿어 주십시오. 지나이다 알렉산드로브나, 비록 당신이 무슨 짓을 하고, 또 아무리 나를 괴롭히더라도, 나는 목숨이 붙어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을 사랑하겟습니다. 그리고 사모하겠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몸을 홱 돌리더니 두 팔을 크게 벌려 내 머리를 끌어안고는 뜨겁고도 힘찬 키스를 퍼부었다. 이 열렬한 작별 키스가 누구를 찾는 것이었는지 그것을 누가 알 수 있었으랴. 그러나 나는 줆주린 듯 그 달콤한 맛에 취했다. 나는 그것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녕히, 안녕히‥‥"나는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녀는 나를 떼어 놓고 나가 버렸다. 나도 그 집에서 물러나왔다. 그때 내 가슴에 어렸던 심정을 도저히 그대로 전할 수는 없다. 나는 그러한 심정을 언제건 다시 느낄 수 있게 되기를 결코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생애에 한 번도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나는 자신을 불행하게 여겼을 것이다. 우리들은 시내로 옮겨 왔다. 나는 쉽사리 지나간 일을 잊어버릴 수 없었고, 따라서 금방 공부를 시작할 수도 없었다. 나의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렸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한테 조금도 나쁜 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눈에는 아버지가 더욱 크게 비치기까지 했다. 심리학자들에게는 자기들의 이론에 따라 제멋대로 이 모순을 설명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느 날 나는 산책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루신을 만났다. 나는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나는 그의 솔직하고 가식없는 성격이 좋았다. 더욱이 그는 내 마음 속의 추억을 되살아나게 한 점에서 내게 더없이 반가운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로 달려갔다. "아!" 하고 그는 미간을 좀 찌푸리며 말했다. "자네로군 그래! 어디 얼굴이나 좀 보여 주게. 여전히 얼굴빛은 누렇지만 그래도 눈 속에는 그전처럼 먼지가 끼어 있지 않군. 이젠 방 안에서 기르는 강아지 같은 점은 찾아볼 수 없고, 아주 의젓한 사나이로 보이네. 잘 됐어. 그래, 어떤가? 공부라도 하나?" 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다.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어쨌든 좋아." 하고 루신은 말했다. "풀 죽어 있을 필요는 없어. 중요한 것은 쓸데없는 데 정신을 팔지 말고, 정상적인 새활을 해야 하는거야. 공연히 미쳐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물결이란 어느 쪽으로 몰려가든--결코 좋은 일은 없으니까. 인간이란 비록 단단한 바위 위에서 있다 해도 역시 자기 몸을 받쳐 주고 있는 건 제 다리거든. 나는 요새 이렇게 쿨룩쿨룩 기침을 하고 있다네. 그건 그렇고, 벨로브조로프 말인데--자네, 소식 들었나?" "어떻게 됐습니까? 난 듣지 못했는데요." "행방 불명이 되어 버렸어. 카프카스로 갔다는 말도 있는데, 자네처럼 젊은 친구에겐 좋은 교훈이 될 거야. 그것도 결국은 적당한 시기에 단념을 하고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데 원인이 있지. 그래도 자네는 용케 빠져나온 모양이네만, 또다시 걸려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네. 그럼, 잘 있게." 이젠 걸려들지않을 걸‥‥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을 테야 하고 나는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나 나는 또 한 번 지나이다를 만날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21 아버지는 날마다 말을 타고 외출했다. 아버지는 썩 좋은 영국산 밤색 말을 가지고 있었는데, 목이 가늘고 다리가 늘씬하며 지칠 줄 몰랐지만 성미는 아주 사나웠다. 이름은 엘렉트릭이라 불렀다. 아버지를 빼놓고는 아무도 그 말을 다룰 수 없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기분이 좋은 표정으로 내 방에 들어왔다. 그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외출할 채비를 하고 장화에 박차까지 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함께 데리고 가 달라고 졸랐다. "그보다 말타기놀이나 하고 노는 게 좋을 거야." 하고 아버지는 대답했다. "너의 그 독일종 말로는 나를 쫓아오지 못할 걸." "쫓아갈 수 있어요. 나도 박차를 달 테니까요." "그럼, 맘대로 하렴." 우리들은 집을 나섰다. 내 말은 털이 북슬북슬한 시꺼먼 망아지였는데, 다리가 튼튼하여 곧잘 달렸다. 하기는 엘렉트릭이 마음껏 달릴 때는 있는 힘을 다하여 발을 자주 놀려야 했지만 어쨌든 뒤떨어지지 않ㄱ 용케 쫓아갔다. 나는 아버지만큼 말을 잘 타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말 탄 모습은 아주 맵시 있었고, 또 아무렇게나 말을 다루는데도 날쌘 솜씨가 엿보였다. 그래서 아버지를 태운 말조차 그것을 알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같이 보였다. 우리는 가로수가 우거진 거리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돌고는, 제비치예 들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몇 번이나 울타리를 뛰어넘었으며--처음에 나는 뛰어넘는 것이 무서웠지만, 아버지가 겁쟁이를 경멸하고 있었으므로 나도 겁을 내지 않기로 했다--모스크바 강을 두 차례나 건넜다. 그래서 나는,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려니 생각했다. 더욱이 아버지도 내 말이 지쳤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갑자기 내 곁을 떠나 크르임스키 여울 근처에서 방향을 옆으로 돌리더니 강변을 따라 자꾸만 달려갔다. 나도 그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낡은 통나무 목재를 높게 쌓아올린 곳까지와서 아버지는 날쌔게 엘렉트릭에서 내리더니, 나에게도 말에서 내리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 말고삐를 내게 주며 통나무 옆에서 잠깐 기다리게 하고는 혼자 좁다란 골목길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말 두 필을 끌고 엘렉트릭을 쉴새없이 나무라면서 강변을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엘ㄹㄱ트릭은 걸으면서도 연방 머리를 내저으며 몸을 부르르 떨기도 하고, 코를 킁킁거리다가는 으흐흥 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또 내가 멈춰 서면 앞발로 번갈아 가며 땅을 파헤치고 으르렁거리며, 내 독일종 말의 목을 물려고 덤볐다. 말하자면 귀여움을 받고 자란 순종답게 굴었다. 아버지는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강 쪽에서는 퀴퀴하고 습기찬 바람이 불어 왔다. 가랑비가 소리없이 내리기 시작하여 모양없는 회색 통나무에 거무죽죽한 무늬가 이루어졌다. 나는 하릴없이 그 통나무 옆을 왔다갔다 했다. 외롭고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좀처럼 돌아와 주지 않았다. 핀란드 출신 같아 보이는 교통 순경이 아래위로 모두 회색 옷을 입고, 항아리 모양의 낡은 헬멧을 뒤집어쓰고는 길다란 몽둥이를 들고 나한테로 가까이 왔다. 어째서 교통 순경이 이런 모스크바 강변에 있을까? 그는 노파같이 주름살투성이인 얼굴을 들이대며 말을 걸었다. "도련님, 웬 말을 두 필씩이나 끌고 이런 데서 뭘 하오? 자, 이리 주시오. 내 좀 붙잡고 있을 테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나한테 담배를 하나 달라고 했다. 이 귀찮은 순경을 피하려고--더욱이 기다리고 있기가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나는 아버지가 사라진 방향으로 슬금슬금 발길을 옮겼다. 골목길 끝까지 가서 모퉁이를 돌아서면서 나는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내가 있는 데서 40보쯤 되는 큰길, 어떤 목조 건물의 열려진 창 앞에서 아버지가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아버지는 들창 문턱에 가슴을 대고 있었다. 집 안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커튼에 반쯤 몸을 가리고 앉아서 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지나이다였다. 나는 그만 그 자리에서 돌기둥이 되어 버렸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는 달아나려 했다. 혹시 아버지가 돌아다본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파멸이다. 그러나 그 어떤 이상한 감정이--호기심보다도 강하고 시기심보다도 강하고 공포보다도 강한 감정이--내 발을 떼지 못하게 했다. 나는 그쪽을 유심히 바라보며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는 무엇인지를 고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나이다는 아버지의 의견에 따르려 하지 않는 눈치였다. 지금도 나는 그 때의 그녀 얼굴을 눈 앞에 똑똑히 그려 볼 수 있다--슬프고도 심각한 표정을 한 그 아름다운 얼굴엔 형용할 수 없는 우수와, 몸도 마음도 모두 바쳐 버린 듯한 애정과 함께 그어떤 절망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나는 이 밖에 다른 말을 찾아낼 수 없다. 그녀는 짤막한 말로 간단히 대꾸하고는 눈을 내리깐 채 엷은 웃음을 띠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것은 온순하면서도 완고한 결심이서려 있는 미소였다. 나는 오직 그 미소에서만 이전의 지나이다를 발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어깨를 흠칫해 보이고 모자를 고쳐 썼다.--그것은 아버지가 마음이 초조해질 때 언제나 하는 버릇이었다. 조금 뒤, "당신은 헤어져야 해요, 이런‥‥"하는 말이 들렸다. 지나이다는 몸을 똑바로 펴고 한손을 내밀었다. 순간 내 눈앞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자기 팔소매의 먼지를 털고 있던 채찍을 느닷없이 휘둘러 올렸다. 뒤이어 팔꿈치까지 내놓은 그녀의 팔에 채찍이 맞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악 하는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지나이다는 꿈틀 몸을 떨고는 말없이 아버지를 쳐다보고 나서, 자기 손을 조용히 입으로 가져가 뻘겋게 된 채찍 자국에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는 채찍을 내던지고는 빠른 걸음으로 현관 층계를 달려 올라가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지나이다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두 손을 벌리고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들창가에서 떨어져 갔다. 나는 놀란 나머지 정신이 마비되어 의혹에 찬 공포를 가슴에 안은 채왔던 길을 되돌아나왔다. 하마터면 나는 엘렉트릭을 놓칠 뻔하면서 골목길을 빠져나와 강변으로 돌아왔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냉정하고도 참을성 있는 성격을 지닌 아버지가, 이따금 광적인 발작을 일으킬 때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방금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곧 이렇게 느꼈다.--앞으로 내가 얼마를 더 살더라도 지나이다의 그 몸짓, 그 눈매, 그 미소를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그녀의 모습--뜻밖에 내 눈에 비쳐진 그 새로운 모습은 영원히 내 기억속에 새겨진 것이다. 나는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보며 눈물이 줄줄 흘러 내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여자가 매를 맞다니‥‥하고 나는 생각했다. 매를 맞다니‥‥매를 맞다니‥‥ "얘야, 너 뭘 하느냐, 말을 이리 다오!" 등 뒤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계적으로 말고삐를 아버지에게 내주었다. 아버지는 훌쩍 엘렉트릭에 올라탔다. 추위에 떨고 있던 말은 몸을 곤두세우고 두 칸쯤 앞으로 껑충 뛰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곧 그것을 진정시켰다. 말 옆구리를 박차로 꾹 누르고 목덜미를 주먹으로 내리친 것이다. "제기랄, 채찍이 없군." 하고 아버지는 투덜거렸다. 나는 조금 전에 그 채찍이 찰싹 하고 그녀의 팔츨 후려치던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아서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렸다. 잠시 뒤 나는 물었다. "채찍을 어쩌셨어요?" 아버지는 대답도 않고 앞으로 말을 달렸다. 나는 뒤를 바싹 쫓아갔다. 나는 아버지 얼굴을 꼭 보고 싶었던 것이다. "혼자 적절했겠구나." 아버지는 이 사이로 내뱉듯 말했다. "네, 좀. 그런데 채찍을 더디다 떨어뜨리셨어요?" 난즌 다시 한 번 물어 보았다. 아버지는 나를 흘끗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떨어뜨린 게 아니야, 버렸지." 아버지는 무엇을 생각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이 때 나는 처음으로,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엄격한 얼굴의 전체가 얼마나 부드러운 인정과 연민의 정을 나타낼 수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다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그 뒤를 쫓아가지 못하고 아버지보다 15분이나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사랑인가 보다." 이미 공책과 교과서들이 놓여진 책상 앞에 앉으면서 그날 밤 나는 또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그것이 정욕이라는 것이다!‥‥어떤 사람한테라도‥‥비록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한테라도 그렇게 얻어맞으면 분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러나 사랑에 빠지면 그럴 수도 있을 거야. 그런데 나는‥‥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였던가‥‥" 이 한 달 동안은 나의 정신을 여간 성숙케 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의 사랑이나, 거기에 따르는 온갖 번민과 고통도 내가 이제야 겨우 상상할 수 있게 된 미지의 그 무엇인가에 비한다면 어쩐지 아주 조그맣고 어린애 장난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 무엇이란 마치 사람이 어슴푸레 한 어둠 속에서 분간해 내려고 헛되어 애쓰는, 미지의, 아름다우면서도 한편 무시무시한 얼굴처럼 내 마음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날 밤, 나는 괴이하고도 무서운 꿈을 꾸었다. 나는 천장이 낮고 어두운 방에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한손에 채찍을 들고 서서 발을 쾅쾅 구르고 있었다. 한구석에는 지나이다가 몸을 움츠리고 있었는데, 팔이 아니라 이마 위에 붉게 부풀어오른 줄이 보였다. 그러자 두 사람 뒤에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벨로브조로프가 몸을 일으키더니 파리한 입술을 놀려 분노에 찬 목소리로 아버지를 위협하였다. 두 달 뒤 나는 대학에 들어갔다. 그 뒤 반 년이 지나 아버지는 페테르부르그에서--졸도로--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것은 아버지가 어머니와 나를 데리고 그 곳으로 이사 온 바로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죽기 4, 5일 전에 아버지는 모스크바에서 온 편지를 한 통 받았는데, 그것을 보고 몹시 흥분했던 모야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무엇인가를 부탁했다. 그리고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졸도를 일으킨 그 날 아침에 아버지는 프랑스 어로 나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다가 그만두었다. '내 아들아'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하라. 그 행복, 그 독을 두려워하라‥‥'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꽤 많은 돈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22 4년쯤 지났다. 나는 대학을 막 졸업했을 뿐이었으므로 무슨 일을 시작해야 할지, 어떤 문을 두드려야 할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얼마 동안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놀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뜻밖에도 극장에서 마이다노프를 만났다. 그는 결혼하고 취직도 했다는데, 내가 보기엔 조금도 달라진 데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쓸데없이 감격하는가 하면, 금방 풀이 죽어 버리는 것이었다. "자네 아나?"하고 그는 말했다. "돌리스카야 부인이 이 곳에 있네." "돌리스카야 부인이라니, 누구 말입니까?" "아니, 자네 잊었나? 왜 우리 모두가 홀딱 반했던 그 자세킨 공작의 딸 말일세. 자네도 역시 우리측에 끼지 않았었나? 생각나겠지, 네스쿠치느이 공원 근처의 별장에서 말이야." "그녀가 돌리스카야와 결혼했나요?" "그렇다네." "그럼, 그녀가 여기 이 극장에 와 있단 말입니까?" "아니, 페테르부르그에 있지, 요 며칠 전에 이 곳에 왔는데, 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더군." "남편은 어떤 사람인데요?" 하고 나는 물었다. "아주 좋은 사람으로 재산도 꽤 가지고 있지. 모스크바에 있을 때 내동료였어. 자네도 알고 있는 그 사건 뒤‥‥아마 자네도 그 사건을 잘 알고 있을 테지만--마이다노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녀는 배우자를 구하기가 꽤 힘들었지. 여러 가지 소문이 뒤따라 다녔으니까. 그러나 본디 영리한 여자니 불가능한 일이 있겠나. 한 번 찾아가 보게. 자네라면 아주 반가워할 거야. 그녀는 더 예뻐졌다네." 마이다노프는 지나이다의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제무트'라는 호텔에 묵고 있었다. 오래 된 추억이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나는 이튿날이라도 곧 '옛 애인'을 찾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생겨 한 주일 두 주일 그대로 넘겨 버렸다. 드디어 제무트 호텔에 가서 돌리스카야 부인을 찾았을 때--뜻밖에도 나는 그녀가 나흘 전에 해산을 하다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무엇인지 가슴 속에서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겼다. 나는 그녀를 만나볼 수 있었는데도 끝내 만나지 못하고 말았구나. 그리고 이제는 그녀를 영영 볼 수 없게 되었구나 하는 비통한 상념이 거역할 수 없는 격렬한 비난이 되어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죽고 말다니!"나는 흐려 오는 눈으로 문지기를 바라보며 이렇게 되뇌었다. 나는 조용히 큰길로 나와 정처없이 걷기 시작했다. 지나간 모든 일이 한꺼번에 떠올라 눈앞을 가로막았다. 그 젊은 열렬하고 빛나던 생명은 이리하여 끝장이 났단 말인가! 그처럼 조급히 흥분하며 애타게 달려간 궁극의 목적이 이런 것이었던가! 나는 생각하며 이제는 축축한 땅 밑, 어둠 속에 묻혀 좁은 관 속에 들어 있을 그 귀한 모습, 그 눈, 그 머리칼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그것은 아직도 살아 있었으며, 내게서 먼 거리에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와는 겨우 몇 발자국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공상의 날개를 폈다. 그러는 동안 다음과 같은 구절이 가슴에 울려 왔다. 무심한 사람의 입으로부터 나는 들었노라, 그리고 나 또한 무심히 그 말에 귀를 기울였노라. 오! 청춘이여! 청춘이여! 그대는 아무것에도 구속을 받지 않는다. 그대는 마치 우주의 온갖 보물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우수도 그대에게는 위로가 되며, 비애조차 그대에게는 어울린다. 그대는 대담하며 자부심이 강하다. 그대는 '보아라, 사람들아, 세상은 오로지 나의 것이다!' 라고 말하지만, 그대의 좋은 시절도 흘러가 드디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 그대가 차지했던 모든 것은 햇빛을 받은 흰 말랍처럼, 또는 눈처럼 녹아 사라져 버린다. 어쩌면 그대가 지니는 아름다움의 비밀은 무엇이든 해내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는 것이지도 모른다. 그대의 충만한 힘을 다른 어느 것에도 기울여 보지 못하고 바람결에 따라 흩날려 보내는--그런 점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누구나가 다 스스로를 진심으로 낭비자라 믿고 있는--그런 점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마음 속으로부터 "아, 만일 내가 헛되이 세월을 보내지 않았어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해 냈을텐데!"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믿는--그런 점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도 역시 그렇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첫사랑의 환영을 오직 한 가닥 한숨과 권태로운 감각만으로 간신히 더듬는 주제에 내가 과연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으랴? 얼마나 풍성한 미래를 바라볼 수 있었으랴? 내가 기대했던 모든 것 중에서 과연 무엇이 실현되었는가? 그리고 나의 인생에 황혼의 그림자가 깃들기 시작한 지금, 봄날 새벽에 한바탕 휘몰아치고 지나간 뇌우보다 더욱 상쾌학 더욱 귀중한 추억이 과연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나는 공연히 스스로를 비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철없던 젊은 시절에도 나는 나에게 호소하는 슬픈 목소리나, 무덤 속에서 들려오는 엄숙한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지나이다의 죽음을 안 지 며칠 안 되어 나는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우리와 한 집에 살고 있던 어느 가난한 노파의 임종을 보았다. 누더기에 싸여 딱딱한 판자 위에 자루를 베개로 하고 누워 그 노파는 몹시 괴로워하며 애타게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일생은 그날 그 날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얻으려는 고난에 찬 투쟁 속에서 흘러가버린 것이다. 그녀는 기쁨이라는 것을 몰랐고, 행복의 단꿈도 맛보지 못했다.--이러한 그녀는 자유와 평안함을 주는 죽음을 기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늙어빠진 육체를 버릴 수 있는 순간까지, 그 얼음장 같은 손 밑에서 가슴이 애끓는 호흡을 계속할 수 있는 순간까지, 노파는 쉴새없이 성호를 그으면서, "주여, 내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하고 자꾸만 입 속으로 되뇌었던 것이다.--그리하여 최후의 의식이 번쩍했다가 꺼졌을 때, 비로소 노파의 눈에서도 죽음에 대한 무서움과 두려움의 표정이 사라졌다.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이 가난한 노파의 임종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지나이다의 최후가 연상되어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서, 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를 올리고 싶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