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지,루딘 지은이 : 투르게네프 출판사 : 범우사 이 책을 읽는 분에게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는 러시아가 낳은 작가들 중 그 우아한 예술적인 향기와 미에 대한 섬세한 감각, 완전무결하다고 할 수 있는 풍부한 필치, 그리 고 예리한 관찰력의 소유자로서 감히 다른 작가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적인 문호이며 시인이다. 또한 투르게네프는 수많은 러시아 작가 중에서 가장 먼저 외국에 알려졌고 가장 많은 작품이 읽힌 작가로, 전세계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러시아 문학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불러일으킨 공로자이기도 하다. 그 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의 이름이 독서계를 정복함으로써 투르게네프 의 이름이 쇠퇴한 듯한 느낌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피상 적인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투르게네프는 예술의 완성, 조화에 넘친 구성, 미적 인 감각으로 볼 때 여전히 세계 문학에서 제일급 작가로서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들 중에는 낯익히기 어려운 작가와 낯익히기 쉬운 작가가 있다. 도스토예 프스키나 톨스토이 같은 작가가 전자에 속한다면, 투르테네프는 후자에 속한다 고 말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같은 작가는 모랄의 극단성, 사상 과 종교적인 집착으로 해서 독자들에게 부담을 주고 당황하게 하는 자기 주장 적인 경향이 농후하다. 그러나 투르게네프의 문학에서는 그런 객관성의 결여나 극단적인 경향을 찾아볼 수 없다. 독자들은 그저 그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아름 다운 정취와 시정에 매혹될 따름이다. 바로 이러한 종교나 사상성을 배제한 예 술성이 독자들로 하여금 쉽게 낯을 익히게 하는 한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 다. 투르게네프의 예술은 냉정, 공평 무사, 진리에 대한 사랑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는 시대 정신을 포착하는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시인의 눈이 고 인간 심리를 포착하는 눈이며 시대를 관찰하는 눈이었다. 투르게네프는 러시아 인텔리겐차의 정신사를 묘사함에 있어 언제나 남녀간의 사랑을 줄거리로 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흔히 '사랑의 가수' 또는 '여성 심리 의 명수'라고 불리기도 한다. 여기 실린 <처녀지>와 <루딘>에서도 사랑의 갈 등을 볼 수 있지만, 그가 묘사하는 사랑은 조금도 추잡한데가 없는 순수하고 깨 끗한 사랑이다. 그의 사랑은 찰나적으로 점화되었다가 꺼지는 비운의 사랑, 애 수의 사랑이기도 하다. 특히 그는 순진하고 영리한 소녀가 고상한 감정과 사랑 에 눈뜨면서 참된, 그러면서도 순간적인 사랑에 승화되어 가는 비련의 과정을 즐겨 묘사했다. 투르게네프가 묘사한 남녀 주인공의 비극은 19세기 러시아의 비극으로 그치 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고전이 시대를 초월하듯이 이것은 시대와 사회를 초월 한 비극이며 진리다. 투르게네프가 죽은 지 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의 작품이 변함없이 공감되고 독자들의 인생 반려자로 끊임없이 애독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의 처녀작인 <루딘>과 마지막 작인 <처녀지>를 함께 읽음으로써 투르게 네프의 문학적 향기를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옳긴이 제1편 1 1868년 봄 정오가 좀 지났을 무렵, 제멋대로 허술한 옷차림을 한 스물 일곱 가량의 한 사내가 페테르부르크 오퍼체르스가야가의 어느 5층 건물 뒤층계를 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다 떨어진 덧신을 무겁게 털벅거리고 볼품없는 육중한 몸을 천천히 흔들면서 간신히 층계 맨 위까지 올라갔다. 그러고는 반쯤 열린, 다 부서진 문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초인종을 누를 생각도 않고 그저 한 번 숨을 내쉬고는 어두컴컴한 조그만 문간방으로 들어섰다. "네지다노프, 집에 있소?" 그는 굵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안 계세요. 제가 있으니 들어오세요." 제법 거친 여자의 목소리가 옆방으로 부터 들려왔다. "마슈리나요?" 손님은 이렇게 되물었다. "그래요. 당신은 오스트로두모프씨죠?" "피멘 오스트로두모프." 그가 대답했다. 그리고 우선 힘들여 덧신을 벗은 다 음 낡아빠진 외투를 못에 걸고 여자 목소리가 들려온 방으로 들어갔다. 엷은 초록빛으로 페인트칠 된 벽에 천정이 낮고 더러운 방은 먼지투성이인 두 개의 조그만 창문으로부터 희미한 빛을 겨우 받고 있었다. 가구라고는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철 침대와 방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탁자 하나, 그리고 몇 개의 걸상과 난잡하게 책을 쌓아올린 책 선반뿐이었다.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은 서른 살 가량의 여자가 검은 털옷을 입고 탁자 옆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 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오는 오스트로두모프를 보자, 그녀는 말없이 넓적하고 붉은 손을 내밀었다. 그 역시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는 걸상에 자리를 잡자 옆주머니에서 반쯤 부서진 시가 한 대를 끄집어냈다. 마슈리나가 불을 빌 려주자 그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서로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러잖아도 담배 연기로 가득 찬 방안의 탁한 공기 속에다 연신 담배 연기를 내뿜어댔다. 얼굴 윤곽으로 보면 그 두 흡연자는 서로 닳은 데가 없었으나,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그들 사이엔 공통점이 있어 보였다. 엄청나게 큰 입술이며 코, 이 할 것 없이, 두 사람의 짜임새 없는 허술한 모습 속에는 -오스트로두모프는 게다가 곰 보이기도 했다.- 왠지 정직하고 끈기 있고 근면한 면이 엿보였다. "당신, 네지다노프를 보셨소?" 마침내 오스트로두모프가 입을 열었다. "봤어요. 이제 곧 돌아올 거예요. 도서관에 책을 갖다 주러 갔으니까요." 오스트로두모프는 옆에다 침을 뱉었다. "왜 그렇게 맨날 뛰어다니기만 할까? 도대체 만날 수가 있어야 말이지." 마슈리나는 새 담배 하나를 꺼냈다. "답답해서 그럴 거예요." 조심스럽게 담 배에 불을 댕기면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답답하다니요!" 오스트로두모프가 핀잔 섞인 어조로 말했다. "철부지 같은 소릴 다 하는군. 도대체 우리가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가 보지. 이제부터 모든 걸 쳐부숴 나가야 할 판인데, 답답해하다니!" "모스크바에서 편지가 왔나요?" 마슈리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이렇게 물었다. "왔습니다. 사흘 전에, " "읽어보셨어요?" 오스트로두모프는 머리만 한 번 끄덕여 보였다. "그래.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라뇨, 곧 떠나야 할겁니다. " 마슈리나는 입에서 담배를 뗐다. "그건 또 왜요? 거기선 모든 일이 잘되고 있 다고 들었는데요. " "예정대로 일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저 한 사람, 희망을 걸 수 없는 사람이 끼여들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교체시킬 필요가 생긴 거죠. 어쩌면 완전히 제명 하게 될지도 몰라요. 게다가 또 다른 용무도 있고 해서, 당신도 오라고 했던 거 구요. " "그 편지예요?" "예, 그 편지에." 마슈리나는 더부룩한 머리를 뒤로 흔들어 젖혔다. 머리 뒤에 조그만 끈으로 제멋대로 동여맨 머리카락이 이마와 눈썹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죠!"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일단 명령이 내려졌다면 왈 가왈부할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그야 물론 없을 테죠. 하지만 돈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거든요. 어디서 구하죠, 그 돈을?" 마슈리나는 생각에 잠겼다. "네지다노프가 구해야 할 테죠." 그녀는 혼잣말처 럼 나직이 말했다. "하긴 나도 그 일로 왔습니다만" 하고 오스트로두모프가 말했다. "편지는 당신이 가지고 계신가요?" 갑자기 마슈리나가 물었다. "내가 가지고 있습니다. 읽으시겠소?" "주세요. 아니 필요 없어요. 이따가. 함께 읽도록 해요." "전 사실대로 말하는 겁니다" 하고 오스트로두모프는 볼멘 소리로 말했다. "의심할 필요는 없소." "저도 의심해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여기서 두 사람은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말없는 두 사람의 입에서 내뿜어진 담배 연기만이 가느다랗게 굽이를 이루며 그들의 굽슬굽슬한 머리 위로 솟아오 를 뿐이었다. 그때 문간방 쪽에서 누군가의 덧신소리가 들려왔다. "그분일 거예요!" 하고 마슈리나가 속삭였다. 살며시 문이 열리더니 문틈으로 불쑥 머리 하나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검고 거친 머리카락에 주름투성이인, 짙은 눈썹 밑에 유난히 생기 있게 빛나는 조그만 갈색 눈을 한 둥근 얼굴이었는데, 코는 물오리처럼 번쩍 위로 들려져 있 고, 조그만 장밋빛 입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꽉 다물어져 있었다. 그는 주위를 한번 둘러본 후 머리를 끄떡이며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이때 그는 조그만 횐 이를 여러 개 드러내 보였다.- 가는 허리와 짧은 팔 그리고 약간 휘고 또 약간 절뚝거리는 두 다리를 이끌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마슈리나와 오스트로두모프는 그 사내를 보자마자 일부러 경원하는 듯한 멸 시감 같은 표정을 띠었다. 마치 두 사람 모두 마음속으로, '아니 저 친구였군!' 하고 혼잣말이라도 한 듯,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몸 하나 까딱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영접에도 불구하고 새로 온 손님은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을 뿐 더러 오히려 일종의 만족감 같은 것을 느끼기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떻게 된 겁니까?" 하고 그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중창 이 시군요? 왜 삼중창이 아니죠? 도대체 제1테너는 어딜 갔습니까?" "당신 지금 네지다노프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겁니까, 파클린씨?" 하고 오스트 로두모프가 정색하며 그에게 말했다. "맞습니다, 오스트로두모프씨. 그 사람에 대해서 묻는 겁니다. " "이제 곧 돌아올 겁니다, 파클린씨." "그거 참 좋은 소식이군요, 오스트로두모프씨." 절름발이 사내는 마슈리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앉은 채 계속해서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고 있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친애하는. 친애하는. 아이구, 이게 탈이거든! 당신의 이름 과 부칭을 자꾸 잊어버려서." 마슈리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런 건 아실 필요 없어요! 제 성만 아시면 되 니까요. 그 이상 뭐가 필요하세요? 그건 그렇고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니, 무슨 인사가 그렇죠? 아니 제가 여기 있는 것도 보이지 않으세요?" "그거 참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파클린은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이렇게 외쳤다. "만약 당신이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이 충실한 머슴도 여기 이렇게 찾아뵙고 말씀드릴 영광을 가질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니 제 인 사는 고리타분한 습관에서 온 거라고 양해해 주십시오. 하지만 당신의 이름과 부칭에 대해서 말인데. 다짜고짜로 마슈리나 하고 부르자니 어쩐지 거북한 느낌 이 든단 말입니다. 하긴 당신이 편지의 말미에서까지 보나파르트 아니 그게 아 니라 '마슈리나'로밖에 서명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 래도 얘기를 나눌 때면 역시." "아니 누가 당신더러 얘기를 해달랬어요? 파클린은 흐느끼는 듯한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를 냈다. "자, 그만해 둡시다, 아 가씨. 손을 내주세요, 화를 내지 마시고. 당신이 누구보다 선량한 사람이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선량한 사람이니까요. 자아." 파클린은 손을 내밀었다. 마슈리나는 침울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하는 수 없이 그녀도 마주 손을 내밀었다. "당신이 꼭 제 이름을 아시고 싶다면" 하고 여전히 침울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가 말했다. "말씀드리죠. 제 이름은 표클라라고 해요." "전 피멘올시다" 하고 오스트로투모프가 베이스로 덧붙였다. "아아! 이건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뵌 이상 저, 표클라양! 그리고 피멘씨! 한 가지 묻겠는데요, 어째서 당신들 두 사람은 그토록 저를 서먹서먹하 게 대하시는 겁니까? 왜 저를 언제나 서먹서먹하게 대하시느냔 말예요. 전 별 로." "마슈리나가 보기엔" 하고 오스트로두모프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아니 마슈 리나만의 생각은 아닙니다만, 당신은 모든 사람을 우스운 각도로 바라보며 일을 하기 때문에 우린 당신을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파클린은 뒤꿈치로 획 몸을 돌렸다. "바로 그겁니다. 바로 그것이 절 비난하 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잘못이란 말입니다. 존경하는 피멘씨! 첫째로 저는 언제나 웃고만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둘째로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아무 방해도 되지 않으며, 또 저를 신임하는 데 있어서도 문젯거리가 될 수 없습니 다. 그 증거로 지금까지 제가 여러 동료들 사이에서 두터운 신임을 받아온 것도 벌써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전 정직한 인간입니다, 존경하는 피멘씨!" 오스트로두모프는 이 사이로 내뱉듯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파클린은 머리를 흔들면서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으나, 그의 얼굴은 이미 웃고 있지 않았다. "아닙니다. 전 언제나 웃기만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전 쾌활한 사람이 아니 란 말입니다! 자, 제 얼굴을 좀 보십시오!" 오스트로두모프는 파클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실 파클린이 웃지 않고 가 만히 있을 때에는 그 얼굴은 겁을 집어먹은 듯이 맥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입을 열면 그 얼굴은 갑자기 우스꽝스러워지고 심술궂은 표정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로두모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클린은 다시 마슈리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공부는 어떻습니까? 당신 의 그 참된 인류 애호 기술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나요? 처음으로 이 지상 에 태어나는 미숙한 시민을 돕는 일이니 꽤 힘드실 테죠?" "아뇨 당신보다 별로 크지만 않다면 그렇게 힘들 건 없어요." 바로 얼마 전에 산파 시험을 치른 바 있는 마슈리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일년 반쫌 전, 그녀는 남러시아의 가난한 귀족 가정을 버리고 은화 6루블을 손에 쥔 채 페테르부르크로 와서는 어느 산파 학교에 들어가 끊임없는 노력 끝 에 자기가 바라던 면허장을 얻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녀는 처녀였다. 그것도 그지없이 순결한." "그게 뭐 놀랄 만한 일이라고!" 그녀의 용모에 관한 설명을 상기해 낸 회의주 의자는 이렇게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니, 그건 놀랄 만큼 희귀한 사실 이다!"고 나는 감히 단언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대답을 듣자 파클린은 또다시 웃기 시작했다. "당신은 멋진 분이셔, 아가씨!" 하고 그는 외쳤다. "호되게 한대 얻어맞았군요. 제 꼴이 요 모양이니 하는 수 없죠! 하필이면 왜 이렇게 절름발이로 태어났는지! 그건 그렇고 도대체 이 집 주인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나요?" 파클린이 말머리를 돌린 데에는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자기의 왜소한 키, 전체적으로 볼썽사나운 꾀죄죄한 외모를 항상 마음속으로 꺼리고 있 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굉장히 여자를 좋아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럴수록 그의 고민은 더욱더 심했던 것이다. 여자의 마음에 들 수만 있다면 그는 무슨 일이든지 사양하지 않았으리라! 자기의 초라한 용모에 대한 의식은 자신의 비천 한 신분이며 하잘것없는 사회적인 위치보다도 훨씬 예리하게 그의 마음을 자극 시키는 것이었다. 파클린의 아버지는 갖은 못된 짓을 다한 끝에 9등관까지 올라갔던 평민 출신 으로, 소송 사건의 대행 업무를 맡아보는 투기업자였다. 그는 토지나 가옥을 차 압하면서 푼푼이 돈을 모았으나, 만년에 이르자 술독에 빠지다시피 하여 죽은 뒤에는 한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젊은 파클린은 -그의 이름은 실라(러시아어로 힘이라는 뜻). 실라 삼소니치라고 불렸는데, 그는 이것도 자기 자신에 대한 조 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업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거기서 독일어를 훌 륭히 습득했다. 그 후 그는 갖가지 괴로운 경력을 쌓은 끝에 마침내 연봉 1천5 백 루블의 어느 개인 회사에 취직되었다. 그는 이 돈으로 자기 자신과 병환중에 있는 아주머니 그리고 꼽추인 여동생을 양육해야 했다. 당시 그는 겨우 스물 일 곱 살을 갓 넘겼을 뿐이었다. 파클린은 많은 대학생, 젊은이들과 사귀었는데, 냉 소적이면서도 약삭빠른 태도며 자신만만한 연설조의 악의 없는 울분이며, 한쪽 으로 치우쳐 있어 공론과는 거리가 멀기는 해도 박식한 지식으로 해서 그는 이 들 젊은이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가끔 봉변을 당할 때도 없지는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정기적인 회합에 늦은 적이 있었다. 그는 회합 장소로 들어가기 가 무섭게 황급히 변명을 시작했다. "가련한 파클린이 겁을 집어먹었군" 하고 누군가가 구석에서 놀려대자 사람 들은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파클린은 몹시 기분이 언짢았지만 그 자신도 마침내는 웃고 말았던 것이다. '그 녀석이 아픈 데를 찔렀군!' 하고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파클린이 네지다노프와 알게 된 것은 그리스인이 경영하는 어느 간이식당에 서였다. 그는 자주 그곳으로 식사를 하러 가서는 곧잘 자유주의적인 극렬한 의 견들을 나누곤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민주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 것은 주 로 자기의 간장을 자극한 그리스 요리 덕분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아니. 정말 이 집주인은 어디로 사라졌지?" 하고 파클린은 되풀이했다. "내가 보기엔 그 사람 요즈음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 혹 사랑에 빠진 건 아닐는지. 그랬다간 큰일이지만!" 마슈리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분은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어요. 그분은 사랑을 하고 있을 시간도 없거 니와 그런 상대도 없어요." '당신하곤 어때요? 하마터면 파클린은 이 말을 입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제가 그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것은" 하고 파클린은 큰소리로 말했다. "어떤 중대한 용건으로 꼭 상의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용건이시죠?" 하고 오스트로두모프가 끼여들었다. "우리들의 일입니 까?" "어쩌면 당신들의 일일지도. 아니 우리 공동의 일일 테죠." 오스트로두모프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마음속으론 파클린의 말을 믿지 않았으나 곧 다시 이렇게도 생각했다. '그래, 알 수 없지! 저자는 어디든 안 끼는 데가 없으니까.' "아, 이제야 돌아오는 것 같군요" 하고 갑자기 마슈리나가 말했다. 문간방 출 입문으로 쏠린 그녀의 못생긴 조그만 두 눈에서 따스하면서도 상냥스러운 어떤 것이 스쳐갔다. 그것은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밝은 반점과도 같은 것이었 다. 문이 열렸다. 이번엔 학생모를 쓰고 한 꾸러미의 책을 겨드랑이에 낀 스물 셋 가량의 청년이 방으로 들어왔다. 바로 네지다노프였다. 2 그는 자기 방에 모여 있는 손님들을 보자, 문지방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한번 쭉 둘러보았다. 그는 모자를 벗어 던지고 책을 그냥 마룻바닥에 떨어뜨리 더니, 말없이 침대 옆으로 다가가 가장자리에 몸을 쭈그리고 누워버렸다. 굽슬 굽슬 물결치는 검붉은 머리카락 때문에 한층 더 새하얗게 보이는 아름다운 그 외 얼굴은 불만과 분노의 빛을 나타내고 있었다. 마슈리나는 살며시 고개를 돌리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오스트로두모 프가 신음하듯이 말했다. "아, 드디어 !" 파클린이 맨 먼저 네지다노프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나,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러시아의 햄릿. 누구한테서 언짢은 말 이라도 들었나보군! 아니면 공연히 그저 우울증에라도 빠져 있는 건가?" "제발 좀 가만있게, 러시아의 메피스토펠레스" 하고 네지다노프는 짜증 섞인 어조로 말했다. "난 지금 자네와 그 평범한 해학 같은 걸 주고받을 만한 여유가 없단 말일세." 파클린이 웃기 시작했다. "자네의 표현은 정확치 않군, 가령 해학이라면 평범할 리가 없고, 또 평범 하 다면 해학일 수가 없으니 말일세." "그래, 좋아, 좋아. 자네가 똑똑하다는 건 다 알고 있으니까." "자네, 신경이 좀 날카로워졌군 그래" 하고 파클린이 띄엄띄엄 말했다. "아니 면,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그저 이 페테르부르크란 지긋지긋한 도시에선 코를 거리로 약간 내밀기만 해도 당장 그 어떤 저속한 컷, 어리석은 것, 추악한 불평 등이나 무의미한 것에 맞부딪치지 않을 수 없으니. 이젠 더 이상 여기서 살 순 없어." "아, 그래서 자넨 시골의 가정교사라도 좋다는 신문 광고를 낸 거로군" 하고 오스트로두모프가 다시 신음하듯이 말했다. "암, 물론이지. 난 기꺼이 여길 떠나려네! 어떤 머저리라도 나타나서 내게 일 자리를 준다면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여기서 자기 의무를 완수해야 할 책임이 있어요." 여전 히 외면한 채 마슈리나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건 무슨 뜻이죠?' 네지다노프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리며 이렇게 물었다. 마슈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스트로두모프씨가 당신에게 말할 거예요." 네지다노프가 오스트로두모프 쪽으로 몸들 돌렸다. 그러나 오스트로두모프는 단지 목젖을 한 번 울리고 헛기침을 했을 뿐이다. '좀 기다리게' 하는 뜻이다. "아니, 정말 농담이 아니라" 하고 파클린이 끼여들었다. "자넨 무슨 불쾌한 소 식이라도 들은 게로군그래?" 네지다노프는 마침내 내동댕이쳐진 사람처럼 누워 있던 침대로부터 벌떡 일 어나 앉았다. "자네에겐 아직도 불쾌한 것이 부족하단 말인가?" 그는 갑자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쳐댔다. "러시아의 반은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고 <모스크바 통보>는 승리를 구하는가 하면, 고전주의는 부활하고 학생 금고는 금지되고 있으며, 게다가 가는 곳마다 간첩과 압박과 밀고와 허위와 사기가 횡 행하고 있으니 우린 한발자국도 발을 내디딜 곳이 없지 않은가 말야. 그런데도 자넨 아직도 모자라서 새로운 불쾌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니. 내가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아나. 바사노프가 체포됐단 말일세." 그는 약간 언성을 낮추며 이렇게 덧붙였다. "도서관에서 그 소식을들었어." 오스트로두모프와 마슈리나는 동시에 머리를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봐,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하고 파클린이 말하기 시작했다. "자넨 지 금, 흥분하고 있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렇지만 자넨 지금 우리가 어떤 시대에 그리고 또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지를 설마 잊어버리진 않앉을 테지. 사 실 지금의 러시아에선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자기가 붙잡을 지푸라 기를 자기 손으로 만들어내야만 하지 않느냔 말야! 지금이 어느 때라고 감상에 빠져 있을 텐가. 우린 지금 악마의 눈이라도 냉정히 바라 다볼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해. 애들처럼 화를 내선 안 되는 거야." "아아, 제발, 제발!" 네지다노프는 괴로운 표정으로 말을 가로채더니 가슴이 아픈 듯 얼굴을 찡그렸다. "자네가 정력적인 인간이란 건 나도 잘 알고 있네. 자넨 아무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내가 아무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파클린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 다. "도대체 어떤 놈이 바사노프를 밀고했을까?" 네지다노프는 말을 이었다. "알 수가 있어야지 !" "그야 뻔하지. 친구의 짓일 것이야. 친구란 자들은 그런 면에선 선수란 말야. 그래서 항상 친구를 조심해야 하는 거지! 예를 들어 내게도 한 친구가 있었는데 겉보기엔 매우 좋은 사람 같았고 항상 내 일을 근심해 주곤 했다네. 내 평판을 말야! 곧잘 내 옆으로 와서는 '이봐, 자네에 대해서 터무니없는 얘기를 퍼뜨리 고 다니는 놈이 있단 말야. 자네가 친삼촌을 독살했다느니, 자네가 어떤 집에 처음으로 소개되었을 때 여주인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서 밤새껏 움직이지 않았 기 때문에 여주인은 그 모욕을 참다못해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느니 하는 말들 을 떠벌리고 다닌단 말일세! 얼마나 바보 같은 소린가! 얼마나 실없는 소리냔 말야! 그런 걸 진짜로 믿을 바보가 어디 있겠나!' 하고 말하곤 했단 말일세, 그 런데 어떻게 됐겠나? 일년 후 그 친구와 싸움을 했을 때, 그 친구는 절교장 속 에 이렇게 쓰질 않았겠어 '자넨 친삼촌을 죽인 놈이야! 자넨 교양 있는 귀부인 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모욕을 주고도 그것을 깨닫치 못하는 무뢰한이 아니냔 말야.' 등등. 바로 이런 게 친구라는 거야!" 오스트로두모프는 마슈리나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하고 그는 묵직한 베이스로 말을 꺼냈다. 오스트 로두모프는 방금 시작된 무익한 잡담을 여기서 중단시키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 한 모양이었다. "모스크바의 바실리 니콜라예비치한테서 편지가 왔네" 네지다노프는 가볍게 몸서리를 치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뭐라고 써 있던가?" 네지다노프는 뜸을 들이다 이렇게 그에게 물었다. "아니, 그저 이 사람하고 나하고." 오스트로두모프는 눈짓으로 마슈리나를 가 리켰다. "떠나라는 거야." "아니, 이 여자도 불렀단 말인가?" "함께 불렀더군 " "그럼 왜 꾸물거리고 있는 거지?" "뻔하지 뭐야. 돈 때문이지." 네지다노프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많이 필요한가?" "50루블. 그보다 적으면 곤란해." 네지다노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지금은 그 돈이 없지만," 그는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퉁기다가 마침내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무튼 마련해 보겠네. 마련해 보지. 편지는 자네가 가지고 있나?" "편지 말인가? 암. 물론." "왜 당신들은 언제나 저를 빼돌리려고만 하는 겁니까?" 하고 파클린이 외쳤 다. "제가 당신들의 신임을 얻지 못할 일이라도 한단 말인가요? 설령 제가 당신 들의 계획에 전적으로 동조하진 않는다 해도 그렇다고 제가 뭐, 당신들을 배반 하거나 고자질 따위를 할 그런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까?" "아마 고의로 그러는 건 아닐 것이오!" 하고 오스트로두모프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고의건 고의가 아니건 그런 건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도 마슈리나 양 은 저를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고 계시지만 전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아요." 마슈리나가 톡 내쏘았다. "하지만 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고 파클린은 말을 이었다. "당신들에 겐 직관력이 없단 말예요. 당신들은 누가 진짜 친군지 그걸 식별할 수 있는 능 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단 말입니다. 사람이 웃고 있으면 실없는 사람이 라고 생 각해 버리니 말예요." "사실이 그렇지 않을까요?" 하고 마슈리나가 재차로 쏘아붙였다. "자, 그 예로," 이번엔 마슈리나에 대한 대꾸조차 하지 않으면서 더욱 힘있는 어조로 파클린은 말했다. "당신들은 지금 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네지다노프 에게도 지금은 돈이 없으니 제가 그 돈을 내도 상관없을 테죠." 네지다노프가 창문으로부터 획 몸을 돌렸다. "아냐, 아냐. 그럴 필요까진 없 어! 내가 구하겠네. 연금의 일부를 선불받으면 되니까. 아직 그만한 돈은 남아 있을 테니까. 그런데 오스트로두모프, 그 편지를 좀 보여주게." 오스트로두모프는 한동안은 몸을 움직일 생각조차 않더니 이윽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몸을 굽혀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린 다 음, 장화 목으로부터 단정하게 접은 파란 종이 쪽지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 다 음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쪽지를 한 번 푸우 하고 분 다음 네지다노프에게 넘 겨주었다. 네지다노프는 종이를 받아들어 주의 깊게 읽고선 마슈리나에게로 넘겨주었다. 마슈리나는 우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다음, 역시 조심스럽게 편지를 읽고는 파클린이 손을 내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네지다노프에게 돌려주었다. 내 지다노프는 한쪽 어깨를 들썩해 보이고는 그 신비한 편지를 파클린에게 주었다. 파클린도 자기 나름대로 편지를 읽고 나더니 의미심장하게 입술을 깨물고 경건 한 표정으로 살그머니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오스트로두모프가 그 편지 를 잡고 커다란 성냥개비에 불을 붙였다. 유황 냄새가 코를 쿡 찔렀다. 그는 우 선 좌중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이 종이쪽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올리더니, 손가락이 타도록 끝까지 종이쪽을 다 태우고는 그 재를 난로 속 에 던져버렸다. 그 일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거니와 몸 하 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스트로두모프는 무슨 일에 골몰한 사무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고, 네지다노프의 얼굴은 심술궂어 보였다. 파클린은 긴장된 표정이었고, 마 슈리나는 마치 거룩한 의식에라도 참석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2분 가량이 흘렀다. 이윽고 모두들 약간 어색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파클린은 우선 자기가 이 어색한 침묵을 깨뜨릴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자, 어떻습니까?" 하고 그는 말문을 열었다. "조국의 제단에 바치는 제 헌금 을 받아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만약 전액 50루블이 안 된다면 25루블이나 30루 블이라도 좋으니, 공동의 사업에 바치게 해주십시오!" 네지다노프가 얼굴을 붉혔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 는 것 같았다. 엄숙한 편지의 화장도 그것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그 울분 은 외부로 뛰쳐나올 구실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건 필요 없다고 이미 말했잖나. 필요 없다니까, 필요 없어! 그런 건 허 용하지도 않겠거니와 받지도 않겠네. 내가 그 돈을 마련하지. 당장 마련하겠네. 난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단 말일세!" "아니, 자넨" 하고 파클린이 말했다. "혁명가라지만 민주주의자는 아닌 것 같 군그래!" "솔직히 말하는 게 어때, 아리스토크라시(귀족)라고 말야!" "그래, 자넨 정말 아리스토크라시지. 어떤 의미에선." 네지다노프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결국 자넨 내가 사생아라는 걸 즐기고 싶은 거지. 그런 헛수고는 그만두는 게 나을 거야. 자네가 그런 근심 해주지 않 아도 난 그걸 잊지 않고 있으니 말야." 파클린은 손뼉을 한 번 치고 나서 말했다. "알료샤(네지다노프의 애칭), 도대 체 왜 그러나! 내 말을 그렇게 받아들이다니! 자넨 오늘 아무래도 좀 이상하군 그래." 네지다노프는 초조하게 머리와 어깨를 움직였다. "바사노프의 체포가 자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겠지만, 그것은 그 사람 스스 로 너무 부주의하게 행동한 때문이 아닐까." "그 사람은 자기 신념을 감추지 않은 거예요" 하고 마슈리나가 침통한 어조 로 끼여들었다. "우린 그 사람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어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그 사람도 다른 사람의 신변을 좀 생각할 필요는 있었 겠죠. 그 사람 때문에 여럿이 화를 입을지도 모르니까요." "어째서 그 사람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이번에는 오스트로두모프가 낮 게 깔린 음성으로 말했다. "바사노프는 확고한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결코 남을 파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부주의란 점에 있어서는 아시다시피 세상 사람들 모두가 조심스러울 수만은 없지 않을까요, 파클린씨!" 파클린은 모욕을 느끼고 뭐라고 대꾸하려고 했으나, 네지다노프가 그를 막았 다. "여러분!" 하고 그가 외쳤다. "제발 부탁이니, 잠시 정치 이야기는 집어치웁시 다!" 침묵이 찾아왔다. "전 오늘 스코로피힌을 만났답니다!" 참다못해 파클린이 말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전국에 명성을 떨치는 비평가인 동시에 미학가(美學家)이고 감격파인 그 사람을 말입니다, 정말 형편없는 작자더군요! 한시도 쉬지 않고 부글부글 끓 으며 쉬쉬 소리를 내는, 마치 다 썩어가는 시큼한 크바스(러시아인이 애용하는 음료의 일종) 병이라고나 할까. 급사가 달려가면서 코르크 마개 대신 손가락으 로 병을 막으면 건포도 알 같은 포말이 병 위로 끓어오르며 노상 빠져 나가려 고 삐삐 소리를 내는데, 거품이 다 빠지고 나면 병 밑엔 더럽고 끈적끈적한 크 바스가 몇 방울 남아 있을 뿐, 목의 갈증을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목을 더 아 프게 자극하기에 안성맞춤이죠. 젊은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해로운 존재더군요!" 파클린이 시도한 비유는 정확하고 사리에 맞는 것이었지만, 누굴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오스트로두모프만이 유미주의(唯美主義) 같은 데 관심을 갖는 청년 따위는, 가령 스코로피힌에게 현혹당했다 할지라도 조금도 애 석해할 것이 못 된다고 주석을 달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제 말을 좀 들어보세요" 하고 파클린은 열띤 어조로 외쳤다. 그는 자 기가 동정을 받지 못할수록 더욱더 열을 내는 성격이었다. "가령 이것은 정치와 는 관계가 없다 하겠지만, 아무튼 중대한 문제임에는 툴림이 없습니다. 스코로 피힌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낡은 예술 작품은 그 낡았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미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예술이나 미술이라는건 하나의 유행에 지나지 않게 되어 진지하게 논의할 만한 가치도 없게 되는 셈이지요! 만 약 예술 속에 영구불변한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까짓것 마음대로 되라지요! 예 를 들어 과학이나 수학상으로 본다 해도 당신은 오일러나 라플라스, 하우스 같 은 사람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멍청이라고 생각하진 않으실 테죠? 이런 사람들 의 권위는 인정하면서도, 라파엘로나 모차르트 같은 사람은 바보 취급을 해도 좋단 말입니까? 여러분의 오만한 자랑이 그들의 권위에 대해 반감을 느끼게 하 는 걸까요? 그야 물론 예술의 법칙은 과학의 법칙보다는 포착하기가 힘듭니다. 그건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법칙만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안 보인다면 그 사람은 소경이죠.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요컨대 소 경임에는 틀림없어요!" 파클린은 입을 다물었다. 마치 입에 물이라도 가득 담고 있는 듯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파클린에 대해 어느 정도 겸연쩍은 생각까지 들었 던 것이다. 다만 오스트로두모프만이 신음하듯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어쨌든 스코로피힌에게 현혹되는 청년이라면 조금도 동정할 만한 여 지가 없습니다." '그래,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하고 파클린은 혼자 생각했다. '이젠 나도 돌아 가 줄 테니 !' 그가 네지다노프한테 온 것은 <북극성>이란 잡지를 외국으로부터 주문하는 문제에 대해서 -<경종>이란 잡지는 미미 폐간되고 없었다.- 자기 생각을 전하 기 위해서였지만, 대화가 이런 식으로 빗나가버렸기 때문에 그 문제는 아예 꺼 내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파클린이 돌아가려고 모자에 손을 댔을때, 갑 자기 문간방 쪽에서 이렇다 할 인기척이나 노크 소리도 없이 놀랄 만큼 상쾌하 고 윤택한 남성적인 바리톤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의 음향만으로도 무 언가 말할 수 없이 고상하고 품위 있는 향기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지다노프씨, 댁에 계십니까?" 하고 바리톤의 그 음성은 되풀이했다. "있습니다만." 가까스로 네지다노프가 이렇게 대답했다. 조심스럽게 미끄러지듯이 문이 열리더니 반짝이게 윤이 나는 모자를 천천히 벗으면서 -짧게 깎은 머리가 품위 있어 보였다.- 늘씬하게 균형 잡힌 사십 안 팎의 위풍당당한 한 사내가 방으로 들어왔다. 이미 4월도 끝나갈 무렵인데도 최 고급품 해리 깃을 단 멋진 나사(羅紗) 외투를 입은 그의 모습하며, 정중하면서 도 자신만만해 보이는 세련된 몸가짐, 그리고 상냥하면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은 그 인사성 이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 네지다노프나 파클린뿐만 아니라 마슈리나까지 아니, 오스트로두모프까지도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이다. 그 사람이 나타나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부지중에 모두 몸을 일으켰다. 3 우아한 차림새의 그 신사는 네지다노프 곁으로 다가오더니 정다운 미소를 지 으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네지다노프씨, 전 이미 사홀전에 당신을 만나뵙고 얘 기를 나는 적이 있었지요. 생각나십니까? 극장에서 말입니다." 그는 상대방에게 생각할 여유라도 주려는 듯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네지다노프는 살며시 머리를 끄떡이며 얼굴을 붉혔다.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여기 온 것은 당신이 신문에 낸 그 광고 건 때문입니다. 당신과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여기 계신 분들께 방해가 되지는 않을는지. (손님은 마슈리나에게 인사를 하고 스웨덴제 회색 장갑을 낀 손으로 파클린과 오스트로두모프 쪽을 가리켰다.) 여러분께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아뇨. 조금도." 하고 네지다노프는 다소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했다. "염려하 실 거 없습니다. 여기 좀 앉으시죠." 손님은 명랑한 표정으로 상반신을 숙이더니 가만히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어 자기 앞으로 의자를 끌어당겼으나 앉을 생각은 않고 -방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 두 서 있었기 때문이다.-반쯤 감은 밝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을 뿐이었다. "안녕히 계세요,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갑자기 마슈리나가 이렇게 말했 다. "나중에 또 들를게요." "그럼 나도" 하고 오스트로두모프가 덧붙였다. "나도 다음에 들르겠네." 마슈리나는 손님 옆을 지나면서 일부러 시위라도 하는 듯이 네지다노프의 손 을 잡고 한 번 흔들고는 아무에게도 안사하지 않고 그대로 훌쩍 나가버렸다. 그 러자 오스트로두모프도 괜히 쿵쿵 구둣소리를 내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는 나가면서, '이거나 먹어, 해리 같은 놈아!' 하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이 두 어 번 코웃음을 쳤다. 손님은 정중하면서도 다소 흥미 어린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파클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마치 방금 나간 두 사람의 행동을 모방할 파클린의 차례를 기다리고나 있는 듯한 눈치였 다. 그러나 미지의 신사가 나타난 순간부터 수줍은 미소를 띄우고 있던 파클린 은 옆으로 물러서더니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버렸다. 그러자 손님도 의 자에 앉았다. 네지다노프도 뒤따라 앉았다. "저는 시퍄긴이라고 합니다. 혹시 어디서 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하고 손님 은 자랑과 겸손이 섞인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어떻게 네지다노프가 이 신사를 극장에서 만 나게 되었는지를 말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도프스키가 모스크바에서 상경했을 때, 오스트로프스키의 희곡 <남의 썰매 를 타지 마라>를 상연한 적이 있었다. 루사코프역은 아는 바와 같이 명배우가 좋아하는 역 가운데 하나였다. 식사 전에 네지다노프는 미리 매표구에 들렀으 나, 거기엔 벌써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는 하등석 표를 살 생각이 었다. 그러나 그가 매표 창구로 다가서려는 순간 뒤에 서 았던 장교가 네지다노 프의 머리 너머로 3루블짜리 지폐를 들이밀면서, "그 사람(네지다노프)은 거스 름돈을 받아야 하겠지만, 난 필요 없으니 제1열 표를 빨리 좀 주시오. 바빠서 그래요!" 하고 소리 질렀다. "장교님, 실례지만" 하고 네지다노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제1 열 표를 사려는 중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3루블을 창구로 내던졌다. -그 것은 그가 가진 돈의 전부였다. 매표원이 그에에 표를 내주었다.- 이렇게 되어 그날 밤 네지다노프는 알렉산드린스키 극장 귀족석에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초라한 옷차림에 장갑도 안 끼고 더러운 장화를 신고 있는 자기 모습에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그런 기분을 느끼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의 오른쪽에는 훈장으로 가슴을 메우다시피 한 장군이 앉아 있었고, 그 왼쪽에는 우아한 신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이틀 후 네지다노프의 집으로 찾아와서 마슈리나와 오스트로두모프를 그토록 흥분시킨 3등관 시퍄긴이었다. 네지다노프 오른쪽에 앉아 있던 장군은 무언가 예기치 않 은 불쾌한 것을 대하기라도 하는 듯 멸시하는 시선으로 흘끔흘끔 네지다노프를 바라보았다. 그와 반대로 시퍄긴은 곁눈질로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 시선에는 조 금도 적의라는 것이 깃들여 있지 않았다. 네지다노프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사 람들은 첫째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명사'라고나 할만한 인물들이었고, 둘 째 모두 서로 잘 아는 사이여서 짤막한 대화며 이야기며 때로는 간단한 감탄사 까지도 교환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네지다노프의 머리 너머로 인사를 주고받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넓고 편안한 의자에 수드라(인도의 최하층 사람)처럼 쪼그 리고 앉아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는 수치심과 불쾌감 때문에 비통한 마음까 지 들었다. 오스트로프스키의 희극도, 카도프스키의 연기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정말 기적과도 같았다!- 어느 막간의 휴식 시간에 왼쪽 에 앉아 있던 사람이 -훈장을 단 장군이 아니라, 가슴에 아무 표지도 달지 않은 사람- 무척 겸손한 태도로 점잖고 부드럽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모스트로프스키의 희곡을 화제로 해서 '신시대의 대표자의 한 사람'인 네지다노프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깜짝 놀란 네지다노프는 겁에 질리다시피 되어 처음 한동안은 무뚝뚝하 게 제대로 말을 받아주지도 못했다. 그는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잠시 후, 왜 나는 이렇게 흥분하고 있는 걸까, 이 사람도 다 같은 인간이 아닌 가? 이렇게 생각하자 네지다노프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여기서 그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솔직히 자신의 의견을 털어놓기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옆 에 앉은 훈장투성이의 장군이 싫은 눈치를 보일 정도로 큰 소리로 이야기에 열 중해 버렸다. 네지다노프는 오스트로프스키의 숭배자였다. 그러나 <남의 썰매를 타지 마라>에 나타난 작가의 재능에는 모든 존경을 아끼지 않았으나, 이 희극 속의 인물 비호레프를 희화화(戱畵化)함으로써 문화를 비하(卑下)시키려는 의도 가 명백히 드러나 있는 데는 도저히 찬성할 수가 없었다. 옆의 신사는 매우 관 심 있게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다음 막이 끝났을 때 두 사람은 다시 이야 기를 계속했지만, 이번에는 오스트로프스키의 희곡이 아니라 일반적인 생활이며 과학이며 정치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신사는 말솜 씨가 좋은 옆의 친구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편 네지다노프 는 "내 말에 흥미를 느낀다면 자, 실컷 들어봐라!"는 식이었다. 오른쪽의 장군은 이미 시끄럽다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성이 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퍄긴은 무척 호감 어린 태도로 네지다노프와 헤어졌다. 그러나 상대 방의 이름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시퍄긴은 정면 계단에서 마차를 기다리다가 우연히 그의 다정한 친구이자 시종무관인 G공작을 만났다. "난 특별석에서 자넬 바라보고 있었네." 향무 냄새가 풍기는 콧수염 사이로 미소를 지으면서 공작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자네와 얘기하던 사람이 누군 지 아나?" "아니, 몰라. 자넨 알고 있나?" "왜 똑똑한 사람이지, 안 그래?" "굉장히 똑똑하더군. 도대체 누구지?" 그러자 공작은 몸을 굽히고 그의 귀에다 프랑스어로 속삭였다. "내 동생이야. 암, 내 동생이고말고. 아버지의 서자인데 네지다노프라고 부르 지. 자네에게 언제 한 벌 얘길 해주겠네. 아버지는 그 애를 낳으리라곤 전혀 예 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애의 이름을 '네지다노프(뜻밖에 생긴 사람이란 뜻)' 라고 지은 걸세. 하지만 그의 생활 방도는 강구해 주었지. 아무 불편 없이 살게 말야. 아버지 덕분에 훌륭한 교육까지 받았다네. 그런데 완전히 머리가 돌아 공 화당 비슷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젠 집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고 있지. 할 도리가 있어야지! 자, 그럼 이만 실례 하겠네. 마차를 부르고 있는 중이니까." 공작은 이렇게 말하고 그에게서 떠났다. 그 이튿날 시퍄긴은 <정치 사보>에 낸 네지다노프의 광고를 읽고 그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나는 시퍄긴이라고 합니다." 그는 네지다노프 앞의 낡아빠진 의자에 앉아서 위엄 있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실은 당신이 가정교사직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신문에서 보고 알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가지고 당신을 찾아뵙게 된 것입니다. 나에게는 아내와 아들 하나가 있습니다. 아홉 살 난 사 내아이인데, 솔직히 말씀드려서 매우 재능이 있는 애지요. 우리는 여름과 가을 은 대부분 S현의 시골에서 보내곤 합니다. 현청 소재지에서 5킬 로미터쯤 떨어 진 곳이지요. 자, 어떻습니까? 휴가 기간 동안 우리와 함께 그곳으로 가서 내 아들에게 러시아어와 역사를 가르치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그것은 당신이 신문 광고 속에 열거하고 있는 바로 그 조건이기도 합니다만. 아마 당신도 나 자신이 나 우리 가족, 영지의 경치 같은 것에 만족해하실 거라고 은근히 자부하고 있습 니다. 아름다운 정원도 있고 강도 있거니와, 맑은 공기에 집도 널찍하니까요. 동 의해 주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당신의 조건만 알아보면 되겠는데, 내 생각으로는," 살며시 얼굴을 찌푸피며 시퍄긴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 점에 대해 선 서로간에 조금도 염려할 만한건 없으리라고 믿습니다만." 시퍄긴이 말하고 있는 동안 네지다노프는 뚫어지게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었 다. 약간 뒤로 젖혀진, 그리 크지 않은 머리, 좁고 낮으면서도 영리해 보이는 이 마, 좁은 매부리코, 기분 좋은 눈, 감동적인 말이 거침없이 술술 흘러나오는, 윤 곽이 또렷한 입술, 영국식으로 길게 기른 구레나룻. 네지다노프는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수상쩍은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건 어떻게 된 걸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왜 이 사람은 내 비위를 맞추려고 엉터리 짓을 하는 걸까? 이런 귀 빈과 내가 어떻게 만나게 됐지? 그리고 어떻게 여길 찾아왔을까?' 그는 너무나 자기 생각에 골똘해 있었기 때문에 시퍄긴이 얘기를 끝내고 상 대방의 대답을 기다리느라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도 좀처럼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퍄긴은 방구석으로 시선을 돌려 파클린을 바라보았다. 그도 네 지다노프에 못지않게 뚫어지게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지다노프도 이 제3 자가 있기 때문에 선뜻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시퍄긴은 스 스로 원해서 찾아든 이 기괴한 환경에 굴복이라도 하는 듯이 눈썹을 높이 치켜 올리고는 뒤따라 목소리도 좀 높이 올리면서 자기의 질문을 되풀이 했다. 네지다노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움찔했다. "물론" 하고 그는 다소 당황 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동의하겠습니다. 기꺼이 하지만 솔직히 말 씀드려서 아직도 약간의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군요. 제게는 소개인도 없거니와 게다가 그끄저께 극장에서 말씀드린 제 의견은 오히려 이런 교섭에 있어서 방 해가 됐어야 마땅할 텐데요." "그건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알랙세이.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시퍄긴은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자유주의적 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인간으로 알려져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의견도, 젊은 사람 특유의 점만을 뺀다면, 욕하지 마세요, 젊은 사람에게 흔히 있는 약간의 과장벽만 뺀다면 결코 내 의견에 반대가 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젊은 열정이 마음에 들 정도니까요!" 시퍄긴의 말은 조금도 걸리는 데가 없었다. 마치 꿀이 기름 위를 둥글둥글 굴 러내리듯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내 처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죠."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 사람의 견해가 나보다는 당신 의견에 더 가 까울지도 모르죠. 하긴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 사람이 더 젊으니까! 극장에서 당신을 만난 다음날 신문에서 당신의 이름을 보았을 때, (겸해서 말씀드리지만 당신은 일반적인 관습과는 달리 주소와 함께 성함까지도 적어두셨더군요. 실은 당신의 성함은 이미 극장에서 물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것이 그 사실이 강하게 내 마음을 친 겁니다. 난 그 속에서 -그 대조 속에서- 무언가, 미심쩍은 표현을 용서하십시오. 무언가, 마치 운명의 손길 같은 걸 느낀 겁니다! 당신은 소개인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내겐 소개인 같은 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당 신의 외모, 당신의 인격이 나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거니까요. 그것으로 나는 만족합니다. 나는 항상 내 눈을 믿어왔습니다. 자, 그러니 이젠 당신에게 기대를 걸어도 괜찮습니까? 동의 하시 겠습니까?" "동의합니다. 물론" 하고 네지다노프는 대답했다. "될 수 있는 대로 당신의 기 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애쓰겠습니다. 그런데 미리 한 가지 말씀드려 둘 것이 있 습니다. 전 아드님의 선생이 되는 데는 아무 이의가 없습니다만, 아드님의 애보 기가 되고 싶진 않습니다. 전 그럴 능력도 없거니와 자유를 박탈당해서까지 예 속당하고 싶진 않으니까요." 시퍄긴은 마치 파리라도 쫓듯이 가볍게 한 손을 허공에 들고 흔들었다. "그 점은 염려 마세요. 당신은 애보기 따위나 할 그런 족속과는 종류가 다르 니까요. 게다가 나도 애보기 같은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나는 선생을 구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 선생을 구한 셈이죠. 그건 그렇고, 조건은? 어떻게 할까요? 사례 조건은? 결국 돈 문제입니다만." 네지다노프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자, 어떻습니까?" 그는 손끝으로 정답게 네지다노프의 무릎을 건드리며 이렇 게 말했다." "점잖은 사람들 사이에선 이런 문제도 간단히 해결되는 법이죠. 월급은 백 루블, 왕복 여비는 물론 내가 부담하구요. 동의하시겠습니까?" 네지다노프는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려던 것보다도 훨씬 많은 금액입니다. 왜냐하면 전." "좋습니다, 좋습니다." 하고 시퍄긴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이제는 이 문제도 해결된 걸로 보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이젠 우리 가족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마치 선물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갑자기 희색이 만연해지며 태도가 누그러졌다. 그의 모든 동작 속에는 일종의 유쾌한 친근미와 농담조의 기분까지도 엿보였다. "그럼 며칠 내로 출발합시다." 그는 허물없는 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시 골에서 봄을 맞길 좋아해요. 하긴 직업상 사무적인 인간이라 줄곧 도시에만 얽 매여 있습니다만. 그건 그렇고 당신과의 계약은 오늘부터 시작하는 걸로 해주십 시오. 내 아내와 아들은 벌써 모스크바에 가 있습니다. 먼저 출발했으니까요. 우 리는 시골에서 그들을 만나게 될 테죠. 자연의 품안에서 말입니다. 우리 함께 떠납시다. 독신자들끼리 말이오. 헤, 헤!" 시퍄긴은 능청스런 콧소리를 내며 웃 었다. "자, 그럼." 그는 외투 주머니에서 검은 바탕의 은빛 지갑을 꺼내더니 거기서 명함 한장 을 끄집어냈다. "이것이 이곳에 있는 내 주소올시다. 내일이라도 들르십시오. 저 열두 시쯤 해서. 좀더 얘기를 나눕시다. 교육에 관한 내 의견도 좀 말씀드릴 겸 출발 일정도 정해 버립시다" 하고 시퍄긴은 네지다노프의 손을 잡았다. "그런 데,"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머리를 갸우뚱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미리 돈이 필요하시다면 조금도 사양하실 건 없습니다! 한 달 월급을 선불해 드릴 수도 있 으니까요." 네지다노프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그 밝고도 유쾌한, 그러면서도 완전히 인연이 먼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 었다. 그 얼굴은 그의 앞으로 바싹 다가와서는 겸손한 미소를 그에게 던지고 있 었다. "필요치 않으세요, 네?" 하고 시퍄긴은 속삭였다. "만일 그렇게 해주신다면, 내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지다노프는 마침 내 이렇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내일 또 만납시다." 시퍄긴은 네지다노프의 손을 놓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요," 갑자기 네지다노프가 말했다. "당신은 아까 제 이 름을 극장에서 미리 들으셨다고 말씀하셨는데, 도대체 누구한테서 들으신 겁니 까?" "누구한테서냐구요? 네, 당신을 잘 아는 사람한테서죠. 아마 친척이신 것 같 던데, 공작 G공작 말입니다." "시종무관인?" "네, 바로 그 사람이죠." 네지다노프는 아까보다도 더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입을 열긴 했으나 그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시퍄긴은 다시 한 번 악수를 나누고 -이번 엔 아무 말도 없었다.- 먼저 네지다노프에게 그리고 파클린에게 각각 인사를 한 다음 바로 문앞에서 모자를 쓰고 자못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운채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것은 이 방문에서 얻은 깊은 인상에 대한 스스로의 자각을 그대로 드 러내는 그러한 미소였다. 4 시퍄긴이 문지방을 넘어서기가 무섭게 파클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네지 다노프한테로 달려들면서 축하의 인사를 퍼붓기 시작했다. "마침내 자넨 굉장한 철갑상어 한 마리를 낚아올렸군그래!" 하고 그는 발을 구르고 킥킥거리면서 되풀이했다. "자넨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나? 그 유명 한 시종무관인 시퍄긴이란 말야. 어떤 의미에선 사회의 기둥이기도 한 미래의 장관감이지!" "난 그런 사람 금시초문이야." 하고 네지다노프는 침울하게 말했다. 파클린은 화가 나는 듯이 두 손을 마구 흔들었다. "바로 그게 우리의 결점이 란 말야,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우린 아무도 모르고 있거든! 행동하기를 원 하고, 전세계를 거꾸로 뒤집어엎기를 원하면서도 우린 바로 그 세계에서 유리된 생활을 하고 있잖나 말야. 고작 두서너 친구를 상대로 조그만 서클 속에 틀어박 혀 꾸물거리고 있으니." "미안하지만" 하고 네지다노프가 말을 가로챘다. "그건 그릇된 생각이야. 우린 다만 우리의 적과 교제하기를 원하지 않을 뿐이지, 우리와 같은 계층의 사람들 이나 민중과는 항상 교섭하려고 노력하고 있잖은가." "잠깐, 잠깐, 잠깐만 기다려!" 이번에는 파클린이 말을 가로챘다. "먼저 적이라 는 것에 대해 괴테의 시 한 구절을 자네에게 인용하게 해주게. Wer den Dichter wil lversteh'n Muss in Dichter's Lande geh'n 시인을 이해하려 하는 자는 시인의 나라로 가야 하느니 그런데 난 이렇게 말하지. Wer die Feinde will versteh'n Muss in Feindes Lande geh'n 적을 이해하려 하는 자는 적의 나라로 가야 하느니 자기의 적을 피해서 그 풍속과 습관을 모르고 있다는 건 어리석기 짝없는 일 이지! 어리석기 짝이 없단 말야! 암, 그렇고말고! 만일 숲속의 늑대를 쏘고 싶다 면 늑대의 통로를 속속들이 알지 않으면 안 된단 말야. 둘째로 자넨 지금 민중 과 접촉한다고 했지. 이봐! 폴란드인들은 1862년에 그 '숲속'으로 들어갔지만, 이번엔 우리가 똑같은 숲속으로, 즉 민중 속으로 들어가려는 중이지. 사실 민중 이라는 건 어떤 숲 못지않게 울창하게 어둡단 말야!" "그럼 자네 생각으론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가?" "인도인들은 성차(聖車)의 바퀴 밑으로 뛰어든다지 않나" 하고 파클린은 우울 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바퀴에 치어 죽어가면서도 법열(法悅) 을 느낀다는 거야. 우리도 역시 성차를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놈이 우릴 깔아 뭉갰을 때 우린 법열을 느낄 수는 없거든."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다는 건가?" 하고 네지다노프는 외치다시피 말 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어떠한 방향"을 제시해 주는 소설이라도 쓰란 말인가?" 파클린은 두 손을 쳐들고 머리를 왼쪽 어깨로 기울였다. "자네라면 어쨌든 소 설을 써낼 수 있을 거야. 당신은 문학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자, 화내지 말게. 나도 그만둘 테니. 자네가 그런 암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나도 잘 알 고 있네. 하지만 난 자네 의견에 동감이야. '아아!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녀 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라느니, '난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야! -그는 머리를 긁었다' 하는 따위의 새로운 유행 화법들을 곁들인 궁상맞은 내용의 얘기들을 써낸다는 건 그야말로 지긋지긋한 일일 테니까 말야. 그러기에 나는 언제나 되 풀이하는 걸세. 상류 계급을 비롯한 모든 사회 계층과 접촉을 가져야 된다고! 그렇게 언제까지나 오스트로두모프 일파에게만 외곬으로 의지할 순 없단 말야! 물론 그들은 정직하고 좋은 사람들이지. 그러나 그 대신 바보란 말야, 바보! 자, 우리 친구라는 그자를 보게나. 장화 밑창만 하더라도 현명한 사람들 것과는 다 르잖나 말야! 그 친구가 왜 여기서 나가버렸는지, 자네가 그 이유를 알겠나? 틀 림없이 귀족과 한방에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싶지 않 았던 거야!" "제발 내 앞에서 오스트로두모프에 대한 비평을 말아주게" 하고 네지다노프 는 성급히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가 투박스러운 장화를 신고 있는 건, 값이 무척 싸기 때문이지." '그런 뜻에서 말한 게 아니라.' 하고 파클린은 말하려고 했다. "그가 귀족과 한방에 남아 있기를 원치 않았다면," 네지다노프는 목청을 돋우 어 말을 이었다. "난 그 친구를 찬양하는 바야.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친구는 자기 희생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다는 거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그는 죽음 을 향해 나갈수 있는 사내야. 자네나 나 따윈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 지." 파클린은 가련하게 얼굴을 찌푸리고는 절뚝거리고는 비쩍 마른 두 다리를 가 리켜 보였다. "나 같은 게 어떻게 싸울 수 있겠나,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당치 않은 말 이지! 그러나 이런 말은 집어치우세.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자네가 시퍄긴씨와 사귀게 된 것을 난 마음속으로부터 기뻐하는 바네. 뿐만 아니라 그분과 사귀게 됨으로써 커다란 이익을 가져오리라 믿네. 물론 우리의 사업을 위해서지. 자넨 상류 사회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거지! <스페인 통신>에 써 있는 것과 같은 사 교계의 사자들이며, 강철의 용수철처럼 탄력 있는 벨벳 살결의 여인들을 볼 수 일을 걸세, 그들을 연구하게, 그들을 연구하는 거야! 만일 자네가 향락주의자였 다면 나도 자네를 위해 근심을 했을는지 모르지. 이건 정말이야! 그러나 자네의 목적은 그런 데 있지 않고 가정교사로 가는 거니까!" "내가 가정교사로 가는 건," 네지다노프가 말을 받았다. "이런 궁핍 상태를 모 면하기 위해서야. 그리고 자네들과도 잠시 떨어져 있고 싶어서지" 하고 네지다 노프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그야 물론 그럴 테지! 그러기에 나도 자네보고 연구하라고 말하는 걸세! 그 런데 그 신사는 굉장한 냄새를 남기고 갔군!" 하고 파클린은 주위의 공기를 들 이마셨다. "이게 바로 그거로군. <검찰관>의 시장 부인이 공상했던 진짜 방향 (芳香)은 바로 이걸 두고 하는 말이야!" "그 사람은 G공작에게 내 신상을 꼬치꼬치 캐물었을 거야." 네지다노프가 다 시 창문에 얼굴을 맞대며 나직하게 말했다. "아마 지금쯤은 내 경력을 죄다 알 고 있을는지도 모르지." "아마 정도가 아니라, 정확히 다 알고 있을 걸세! 그러나 그게 어쨌다는 건 가? 난 내기라도 하겠지만, 결국 그 사람은 그것 때문에 교사로 채용할 생각이 났을 걸세. 글쎄 뭐니뭐니해도 자네 자신은 귀족이 아니냔 말야. 혈통으로 봐서 말일세. 결국 그러고 보면 다 같은 동료인 셈이지. 그건 그렇고 너무 오래 앉아 있었군. 사무소로 갈 시간인데. 착취 계급한테로 가봐야지! 자, 그럼 잘 있게 !" 파클린은 문으로 다가갔으나 다시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왔다. "그런데 알로샤" 하고 그는 구슬리는 어조로 말했다. "자넨 아까 내 청을 거절했어. 자네에게 곧 돈이 생기리라는 건 나도 알지만, 조금이라도 좋으니 공동 사업에 기부하게 해줄 순 없겠나! 딴 것으로 도울 수 없으니 제발 호주머니 돈으로라도 좀 돕게 해주게! 괜찮겠지? 여기 탁자 위에 10루블 놓고 가네! 어때, 받아주겠나?" 네지다노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침묵은 승낙의 표시겠지? 고맙네!" 하고 파클린은 유쾌하게 외치며 밖으로 사라졌다. 네지다노프는 혼자 남았다. 그는 여전히 유리창을 통해, 여름 햇빛마저 들지 않는 음침하고 좁은 안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도 침울했다. 네지다 노프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부유한 고급 부관인 G공작과 그집 딸의 가정 교사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대학 출신의 아름다운 처녀였지만, 해산하는 그날로 죽고 말았다. 네지다노프는 유능하고 엄격한 어느 스웨덴 선생 의 기숙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대학에 들어갔다. 네지다노프는 법률가가 되고 싶었으나, 니힐리스트(19세기 후반 러시아의 혁 명적 민주주의자)를 증오했던 그의 아버지는 '미학(美學)'(네지다노프는 쓴웃음 을 지으며 이 말을 하곤 했다), 즉 역사·언어학과에 그를 입학시켰다. 네지다 노프의 아버지는 일년에 서너너덧 번밖에 아들을 만나지 않았지만, 그의 장래에 대해선 무척 근심을 한 듯 임종시에는 '나스첸카(그의 어머니)의 기념'으로 6천 루블의 재산을 그에게 물려주라고 유언했다. 그 이자가 '예금'이라는 명목으로 그의 형 G공작으로부터 지급되고 있었다. 파클린이 그를 귀족이라고 부른 것도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조그마한 귀, 손, 발이며 약간 작긴 해도 그 섬세한 얼굴 윤곽이며, 연약한 피부, 보드라운 머리칼, 간혹 명확하진 않아도 기 분 좋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그의 출신 성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지독하게 신경질적이고 남달리 자존심이 강했으며, 예리한 감수성을 지닌데다가 변덕스럽기까지 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가 놓여졌던 애매한 위치가 모욕을 느끼기 쉽고 성내기 쉬운 성격을 조성시켜 주었던 것이 다. 그러나 타고난 관대한 마음씨는 그가 의심 많고 비뚤어진 인간이 되는 것을 막아주었다. 네지다노프의 성격에서 발견되는 모순도 역시 애매한 사회적인 위 치에 의해서 설명되었다. 까다로울 정도로 청결하고 무서우리만큼 결백한 성격 이면서도, 그는 말만으로는 횡포한 파렴치한이 되려고 애썼다. 날 때부터 이상 가고 정열가며 순결하고도 대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겁이 많은 그는, 자기 자신 의 공포심과 순결성을 치욕적인 죄악처럼 여겨 온갖 이상을 조소하는 것을 자 기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상냥한 마음씨의 소유자였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을 피했고, 성내기 쉬운 성격이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악행을 기억에 남겨 두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미학 공부를 시켰다고 해서 아버지에게 분개하고 있는 그는 남이 보는 앞에서는 정치·사회 문제만 연구하고, 가장 극단적인 의견들을 토론하면 서도 -그것은 물론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예술 이며 시며 그 밖의 모든 미(美)의 표현을 즐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시 까지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시를 적어놓은 조그만 수첩을 조심스럽 게 간직하고 있었다. 페테르부르크의 동료들 중에서 그 수첩의 존재 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은 파클린뿐이었다. 그것도 그 사내만이 가지고 있는 예민한 후각 덕분이었던 것이다. 네지다노프는 그것을 용서할 수 없는 자 신의 약점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시작(詩作)에 대한 털끝만한 암시에 서도 심한 모욕감을 느끼고 화를 버럭 내곤 했다. 한편 스웨덴 선생의 교육 덕 분에 그는 어지간히 많은 사실에 정통해 있었고 노동을 겁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진해서 일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일은 어느 정도 발작적이면서도 불규칙적이 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많은 친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의 내면적인 정직성과 선량함과 순결성이 그들의 마음을 끄는 것이었다. 그 러나 네지다노프는 행복한 별 밑에서 태어난 인간은 아니었다. 그의 생활은 편 안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그것을 마음속 깊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언제까지나 자기를 고독한 인간으로 자인하고 있었다. 그는 창문 옆에 선 채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목전에 다다른 출발이며, 이 뜻하지 않은 새로은 운명의 전환을 생각하니 슬프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다. 그 는 페테르부르크에 미련을 느끼지는 않았다. 거기에는 소중한 것이라곤 아무것 도 없었다. 게다가 가을까지는 돌아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런지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고 자기도 모르게 자꾸 울적한 심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었다. '나 같은 게 선생이라니!'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굉장한 선생도 다 있지!' 그는 교사의 직책을 받아들인 자기 자신을 책망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 다. 그러나 그런 자책은 그에게 온당치 않은 것이었다. 네지다노프는 충분한 지 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신경질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애들도 자연 히 그를 따르게 될 것이고, 또 그 자신도 쉽사리 애들에게 애착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네지다노프의 마음을 휩쓸고 있는 우수는 거처 를 옮길 때마다 으레 따라다니게 마련인 감정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곧잘 경험 하는 그런 감정인 것이다. 원기왕성한 다혈질의 사람들은 그런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틀에 박힌 일상 생활의 궤도가 무너지고 평범한 주위 환경이 변하는 것을 오히려 기뻐할 정도인 것이다. 네지다노프는 너무나 자기 생각에만 골몰해 있었으므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자기 생각이 입밖으로 새어나왔 다. 그의 내부에서 방황하고 있던 감정은 이미 규칙적인 음절로 조립되어 가고 있었다. "에잇 망할 것!" 하고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난 또 시를 짓고 싶어하는군!" 그는 부르르 몸서리를 치며 창문에서 물러났다. 탁자 위에 놓인 파클린이 놓고 간 10루블짜리 지폐를 보자, 그것을 호주머니 속에 넣고 이리저리 방안을 거닐 기 시작했다. '선불을 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됐군,' 그는 혼자서 여러 가지 궁리를 하고 있 었다. '다행히 그 신사가 먼저 제안을 해줬으니. 백 루블이라 그리고 형한테서 - 공작 각하한테서 백 루블 50루불은 빚을 갚고, 50루블 내지 70루블은 여비로 쓰 고 나머지 돈은 오스트로두모프에게 주면 된다. 그리고 파클린이 준 돈 역시 그 친구에게 주도록 하자. 또 메르쿨로프한테서도 얼마쯤 받아야겠군." 그가 머리 속에서 이런 계산을 하고 있을 동안 조금 전의 음절이 또다시 그 의 내부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는 한 곳만을 응시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윽고 그의 손은 더듬다 시피 책상 서랍을 찾아 열고 그 맨 밑에서 글자가 하나 가득 적혀있는 수첩 하 나를 끄집어냈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도 여전히 한 곳만을 응시한 채 펜을 들었다. 그러고는 콧 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리는가 하면, 가끔 머리를 흔들기도 하고, 혹은 지우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면서 한 줄을 써내려갔다. 그때 문간방 문이 반쯤 열리더니 마슈리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네지다노프는 그것도 모른 채 자기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마슈리나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 고 있었으나, 이윽고 머리를 좌우로 설레설레 흔들고는 뒤로 몸을 움츠리고 말 았다. 이때 네지다노프가 갑자기 몸을 뻗치며 주위를 돌아보다가 그녀를 보았 다. "아니, 당신은!" 네지다노프는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수첩을 서랍 속으로 집 어던졌다. 그러자 마슈리나가 성큼성큼 방안으로 들어왔다. "전 오스트로두모프씨 심부 름으로 온 거예요." 그녀는 띄엄띄엄 이렇게 말했다. "언제 돈을 받을 수 있겠 는지 알아보라더군요. 만일 오늘중으로 돈을 구하신다면 우린 오늘 저녁에라도 떠날 생각이에요." "오늘은 안 됩니다."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대답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내일 들르세요." "몇 시에?" "두 시." "좋아요." 마슈리나는 잠시 말이 없다가 네지다노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방해를 한 것 같군요. 용서하세요. 하지만 떠나가는 몸이라 이제 두 번 다시 만 나지 못할지도 몰라서요. 그래서 작별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네지다노프는 그녀의 붉고 싸늘한 손가락을 잡았다. "당신 아까 그 신사를 보 셨죠?" 하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난 그 사람과 계약을 했습니다. 그 집에 가정 교사로 가기로요. S현에 영지가 있다더군요. S시 바로 근처에." 마슈리나의 얼굴에 갑자기 희색의 미소가 떠올랐다. "S시 근처라고요? 그렇다 면 우린 다시 만날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그곳으로 파견될지도 모르니까요." 마슈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왜 그러시죠?" 하고 네지다노프가 물었다. 마슈리나는 긴장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럼 안녕 히 계세요! 아무것도 아녜요." 그녀는 다시 한 번 네지다노프의 손을 잡고는 이내 나가버렸다. '이 넓은 페테르부르크에서 저 괴상한 여자만큼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도 없 을 거야!' 네지다노프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뭣 때문에 나 를 방해해야만 했을까. 아니, 오히려 그 편이 좋았던 거다.' 이튿날 아침 네지다노프는 시내에 있는 시퍄긴의 저택으로 향했다. 근엄한 서 재에는 자유주의적인 위정자(爲政者)로서 또한 훌륭한 신사로서의 그의 위엄에 잘 어울리는 웅장한 양식의 가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거대한 사무용 탁자 위에 는 아무 쓸모도 없는 서류며,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엄청나게 큰 상아 칼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네지다노프는 책상 앞에 앉아서 무 려 한 시간 동안이나 주인의 자유사상적인 견해를 듣고 겸손하고도 호감 어린, 현명한 언어 세례를 받소 난 다음에야 비로소 백 루블의 전도금(前渡金)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열흘 후, 네지다노프는 자유파의 현명한 위정자며 신 사인 시퍄긴과 나란히 1등차 특별석의 벨벳 소파 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덜컹거리는 니콜라예프스키 철도를 따라 모스크바로 달리고 있었다. 5 1820년대의 유명한 농학자(農學者) 겸 '압제자'로서 이름을 떨쳤던 시퍄긴의 부친에 의해 건립된 그리스식 합각(合閣)과 원주가 달린 커다란 석조 건물 응접 실에서 시퍄긴의 아내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전보로 전해진 남편의 도착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좀처럼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응접실의 장 식은 최신 유행의 섬세한 감각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었고 방안의 모든 것이 정다운 기쁨으로 넘치고 있었다. 견직물 벽포(壁布)며 커튼의 조화된 색채를 비 롯하여 선반, 탁자 위에 즐비하게 진열된 도자기, 청동 조각, 수정 조각품들의 형형색색의 윤곽에 이르기까지, 활짝 열어젖힌 높은 창문을 통해 자유롭게 흘러 드는 즐거운 5월의 햇살 속에 이 모든 것이 부드러운 조화를 이루며 선명히 떠 오르기도 하고 녹아내리기도 했다. 은방울꽃 향기를 흠뻑 머금은 응접실의 공기 는 -아름다운 은방울 꽃다발들이 여기저기서 하얗게 봄 향기를 내뿜고 있었 다.- 무성한 정원 숲 위를 조용히 맴도는 산들바람에 나부껴 이따금 하늘하늘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리고 여주인 발렌치나 미하일 로브나 시퍄긴 자신은 이 그림의 완성자로서 거기에 생명과 의의를 부여해 주고 있었 다. 그녀는 서른 살 가량의 호리호리한 여인으로, 짙은 아마빛 머리카락에 시스 티나 성당의 마돈나를 상기시키는 가무스름하면서도 생기가 도는 티없는 얼굴 과 한없이 깊은 벨벳 눈을 하고 있었다. 입술은 좀 큰 편이고 파리했으며, 어깨 는 좀 높은 편이고 손도 보통 여자보다는 커 보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 구하고, 살짝 허리춤을 졸라맨 날씬한 몸을 꽃 쪽으로 숙이고서 미소를 띄우며 꽃향기를 맡는가 하면 중국산 도자기 화병을 옳겨놓기도 하고 혹은 거울 앞에 서 윤기 있는 머리카락을 재빨리 손질하기도 가고, 그 아름다운 눈을 가늘게 뜨 고 깜빡이면서 자유롭게 방안을 걸어다니는 그 우아한 모습을 본사람이라면 아 마 누구나 할 것 없이 마음속으로, 아니 오히려 큰소리로 '저렇게 매력적인 여 자는 아직 본 적이 없다'고 소리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머리가 곱슬곱슬한 아흡 살 가량의 귀여운 사내아이가 응접실로 뛰어들어왔 다. 스코틀랜드 양복을 입고 머리에는 잔뜩 포마드를 발랐으나, 양말은 신지 않 았다. 소년은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를 보자 멈칫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니, 콜랴?" 하고 그녀는 물었다. 그 음성 역시 그녀의 두 눈과 마찬 가지로 벨벳처럼 부드러웠다. "근데 엄마" 하고 사내아이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 아줌 마의 심부름으로 온 거야. 은방울꽃을 가져오라고 해서. 아줌마 방에 쓰려고. 그 방엔 꽃이 없단 말야."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아들의 턱을 잡고 포마드 바른 머리를 살며시 치켜 올렸다. "아줌마에게 이렇게 말씀드려라. 은방울꽃이 필요하다면 정원사한테 가보시라 고. 이 은방울꽃은 내 것이니 이걸 다시 건드지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다. 모 처럴 매만져놓은 걸 흐트러뜨리기 싫어서 그런다고 아줌마한테 가서 말씀드려. 내가 한 말을 그대로 할 수 있겠니?" "할 수 있어." 하고 사내아이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어디 한번 말해 봐." "이렇게 말하지 뭐. 이렇게 엄마가 싫댄다고."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역시 부드러웠다. "아직 도 너한텐 말 심부름을 못 시키겠구나. 아무튼 괜찮으니 네 생각대로 말씀 드려 라." 소년은 손가락마다 가락지로 장식된 어머니의 손에 황급히 입을 맞추고는 쏜 살같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금박을 칠한 새장 쪽으로 다가갔다. 그 속에는 초록빛 앵무새 한 마리가 부리와 발로 조심스럽게 철망 벽에 달라붙은 채 살금살금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앵무새를 한 번 희롱한 다음 나직한 소파에 앉아서 조각된 원탁으로부 터 <양세계 평론(兩世界評論)> 최신호를 끌어다가 책장을 들추기 시작했다. 그때 정중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뒤돌아보자 문지방에는 정식 연미 복에 하얀 넥타이를 맨 점잖은 하인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아가폰?"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아까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세묜 페트로비치 칼로메이체프씨께서 오셨습니다. 모실까요?" "아, 이리로 들어오시라고 해요. 그리고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에게 응접실로 나오시라구 일러줘요."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양세계 평론>을 탁자 위로 집어던지고는 소파등 에 몸을 기댄 채 눈을 위로 향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은 그녀에게 너무나 잘 어울려 보였다. 이윽고 서른둘 가량의 젊은 신사 세묜 페트로비치 칼로메이체프가 방으로 들 어왔다. 꾸밈없이 소탈하고 느릿느릿한 몸가짐이며, 갑자기 명랑하고 밝은 표정 을 지으면서 갸우뚱하고 모로 인사를 한 후 탄력 있게 몸을 곧추세우는 동작, 콧소리도 아니고 알랑거리는 소리도 아닌 이상한 어조,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의 손을 잡고 정성스럽게 키스하는 경건한 태도 이러한 모든 점으로 미루어볼 때, 지금 들어온 이 손님은 시골에 사는 시골 신사도 아니거니와 어쩌다가 우연 히 사귀게 된 돈 많은 지주도 아닌 그야말로 페테르부프크에서도 이름 있는 명 사라는 것을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최고급품 영국식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얼룩 무의 재킷의 편편한 윗주머니에는 염색을 한 하얀 삼베 수건 의 끝부분이 조그만 세모꼴로 비어져 나오고 어지간히 폭넓은 검정 리본 위에 는 외눈박이 안경이 매달려 있었으며, 스웨덴제 무광택 장갑은 연회색의 격자 무늬 바지에 잘 어울려 보였다. 칼로메이체프는 머리를 짧게 깎고 매끈하게 면 도를 하고 있었다. 눈과 눈이 서로 맞붙다시피 한 조그마한 두 눈과 위로 치켜 올려진 코, 그리고 통통하게 부푼 빨간 입술을 한 어딘지 모르게 여자 티가 나 보이는 그의 얼굴은 교양 높은 귀족의 경쾌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얼굴 은 화기에 넘쳐 있었으나 때에 따라서는 쉽사리 사나워지기도 하고 난폭해지기 도 했다. 누구든지, 또 무엇이든지 세묜 페트로비치의 자존심을 건드리기만 하 면 그 보수적이면서도 애국적인 원리 원칙이나 종교적인 주장들을 건드리기만 하면, 오오! 그때야말로 그는 포악무도한 인간으로 돌변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우아한 태도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조그맣고 상냥스러운 두 눈은 사나운 불길처럼 타오르며, 아름다운 입은 아름답지 못한 말들을 내뱉으면서 "고소할 테다, 당국에 고소 할 테다." 하며 째지는 목소리로 외쳐대는 것이다! 세묜 페트로비치의 가계(家系)는 평범한 채소 장수 출신이었다. 증조부는 자 기가 출생한 토지의 이름을 따서 콜로메이체프라고 개명을 하고 아버지 대에서 는 칼로메이체프라고 부르게 되었고, 마침내 세묜 페트로비치에 이르러선 e 자 리에 야치(러시아의 자모)를 삽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자신은 자기가 정말로 순수한 귀족이라고 믿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성은 30년 전쟁 때 오스트리아의 원수(元帥)였던 폰 갈렌메비예프 남작에게서 직접 유래한 것이라 고 넌지시 암시하기까지 했다. 칼로메이체프는 궁내성에 근무하면서 시종무관의 칭호를 갖고 있었다. 그의 교육 정도로 보거나 또 여성들에 대한 인기나 용모로 보아 외교관 생활이 그의 천분(天分)인 것처럼 생각되었으나, '절대로 러시아를 떠날 수는 없다!'는 그의 완고한 애국심 때문에 그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칼로 메이체프는 상당한 자산가인데다가 훌륭한 연줄도 많았다. 그는 믿을 만한 성실 한 인간이라는 정평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봉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단 말야." 페테르부르크 관계(官 界)의 거성으로 이름난 B공작이 그에 대해 한 말이다. 칼로메이체프는 두 달간의 휴가를 받아 S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명분은 영 지의 사업을 돌보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은 '어떠한 사람에게는 공포를 주고 또 어떤 사람을 쥐어짜기 위해서'였다. 그는 실제로 그러지 않고선 못 배기는 성격 이었던 것이다. "전 보리스 안드레예비치께서 벌써 오신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어느 고관 의 모습을 흉내라도 내듯 점잖게 발을 옮겨 디디며 몸을 흔들다가 갑자기 옆으 로 눈길을 주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가 실눈을 만들며 물었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여기 오시지도 않았겠네요?" 칼로메이체프는 몸을 뒤로 젖혔다. 그만큼 시퍄긴 부인의 물음이 경우에 맞지 않는 부당한 질문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하고 그가 외쳤다. "제발 그렇게 생각진 마세요." "아무튼 좋아요. 자, 앉으세요. 보리스 안드레예비치는 곧 도착하실 거예요. 정거장까지 마차를 마중 보냈으니까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그분을 만나실 수 있 을 테죠. 지금 몇 시나 됐어요?" "두 시 반입니다." 조끼 주머니에서 보석으로 장식된 큼직한 금시계를 꺼내며 칼로메이체프가 말했다. 그는 시퍄긴 부인에게 그 시계를 보였다. "제 시계를 구경하셨던가요? 이건 미하일이 선사한 건데, 아시죠. 저, 세르비야 공작 오브레 노비치 말이에요. 이게 그 사람의 머리글자올시다. 자 보십시오 그 사람과 저하 곤 막역한 사이랍니다. 곧잘 함께 사냥도 다녔지요. 훌륭한 사람입니다! 정치가 로서 갖추어야 할 철완(鐵腕)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렇죠, 그 사람은 농담조차 싫어한단 말입니다! 싫어하다마다요?" 칼로메이체프는 안락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는 천천히 왼쪽 장갑을 벗기 시 작했다. "우리가 사는 이 지방에도 미하밀과 같은 그런 인물이 있다면!" "왜 그러시죠? 당신은 뭐가 불만이세요?" 칼로메이체프가 콧날을 찌푸렸다. "언제나 그놈의 지방 자치제가 말썽이란 말 입니다. 모두가 그 자치제 탓이죠!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단지 행정력을 약화시키고 게다가 쓸데없는 과격 사상을 불러일으킬 뿐이죠. -칼로메이체프는 장갑의 압박에서 벗어난 왼쪽 손을 허공에 흔들었다.- 그리고 실현 불가능한 희 망들만 품게 하고 있거든요 -그는 이번에는 자기 손을 한 번 푸우 불었다.- 전 페테르부르크에서도 이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들어줘야지요! 바람은 아주 딴 방향으로 불고 있으니까요. 댁의 주인까지도. 어떻습니까? 하긴 댁의 주인은 자 유주의자로 알려진 분이시니까!" 시퍄긴 부인은 소파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뭐라구요, 칼로메이체프씨? 당신 은 정부 시책에 반대하시는 건가요?" "제가요? 반대한다구요? 천만에요. 그럴 수 있나요! 그저 제 생각을 말했을 뿐입니다. 가끔 비평을 할 때도 있습니다만, 저는 언제나 정부에 복종하는 주의 죠." "그러나 전 당신과는 반대예요. 전 비평도 하지 않지만 복종도 않거든요." "아아, 그거 참 말씀 잘하셨습니다! 부인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당신의 그 현명한 말씀을 제 친구 라디슬라스에게 들려주고 싶군요. 부인도 아실테죠. 그 사나이는 상류 사회를 소재로 어떤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소설의 처음 몇 장을 들려주기까지 했습니다만, 아마 멋진 소설이 나올 겁니다! 러시아의 상류 사회 도 드디어 그 사람에 의해서 완전히 드러나게 되는 셈이죠." "그건 어디에 실리죠?" "물론, <러시아 통보>지요. 그건 우리의 <양세계 평론>이니까요. 보아하니 부인께서도 그걸 읽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요. 하지만 요즈음은 굉장히 따분해졌더군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럴지도 몰라요. <러시아 통보> 역시 얼마 전부턴, 요새 유행어로 말해 살며시 취기가 돌기 시작한 모양이니까요." 칼로메이체프는 크게 입을 벌리고 웃어댔다. 그는 '취기가 돌았다'는 말이나 '살며시'라는 표현이 무척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잡지는 자존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그게 중요한 점이죠. 저는 솔직히 말씀드려 러시아 문학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문학은 이상하게도 평민만을 주로 묘사하고 있 더군요. 심지어 어떤 것은 부엌데기를, 단순한 부엌데기를 소설의 여주인공으로 삼기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오. 정말 한심한 얘기죠! 그러나 라디슬라스의 소설 만은 꼭 읽을 작정입니다. 거기엔 무언가 사람을 웃기는 데가 있고 어떤 주장이 있단 말입니다! 주장이 있어요! 아마 니힐리스트들이 호되게 봉변을 당할 겁니 다. 라디슬라스의 지금까지의 사고 방식이 그걸 보증해 주고 있으니까요. 이건 틀림없어요." "하지만 그분의 과거는 그렇지가 못했어요" 하고 시퍄긴 부인이 주석을 달았 다. "아아, 젊었을 때의 잘못은 좀 관대히 봐주는 게 어때요!" 칼로메이체프는 이 렇게 외치고 이번에는 오른쪽 장갑을 벗었다. 시퍄긴 부인은 또다시 살짝 실눈 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눈으로 넌지시 희롱하는 버릇이 있 었다. "세묜 페트로비치." 그녀는 말했다.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요, 당신은 러시아 어를 말할 때 왜 그토록 많은 프랑스어를 사용하시는 거죠? 어쩐지 제 생각으 론 실례되는 말씀 같습니다만 그건 이미 고루한 느낌이 드는군요." "왜 그러시죠? 왜 그렇죠? 예를 들어 당신처럼 모국어를 훌륭히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단 말입니다. 저 자신만 하더라도 러시아어는 정부 의 명령이나 법규의 언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전 러시아어의 순수성을 존중해 요. 카람진(러키아의 문학가·역사가) 앞에서는 머리를 숙입니다. 그러나 일상어 로서의 러시아어가 과연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령 비근한 예로 제가 아까 'C'est un mot!'라고 외쳤을 때 당신은 그걸 뭐라고 번역하시겠 습니까? ` 그건 말이다!'고 번역하시겠습니까? 천만에요!" "저 같으면 '멋지게 말하셨군요'라고 번역하겠어요." "멋지게 말했다구요!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당신은 그 말 속에 뭔가 학교 냄새 같은 딱딱한 어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양념이 죄다 빠져버린 느낌 말예 요." "글쎄,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건 그렇고, 도대 체 마리안나는 어떻게 된 걸까?" 그녀는 초인종을 눌렀다. 카자흐식 차림의 소 년이 들어왔다. "아까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더러 응접실로 나오시란다고 이르라 했는데, 어 떻게 됐지?" 소년이 미처 대답할 사이도 없이 그의 등뒤 문지방에 품이 넓은 검정 블라우 스를 입은 단발머리의 젊은 처녀가 나타났다. 그녀가 바로 시퍄긴의 조카뻘 되 는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 시네츠카야였다. 6 "용서하세요,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시퍄긴 부인 쪽으로 다가서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일이 있어서 좀 늦었어요." 그 다음 그녀는 칼로메이체프에게 인사를 하고는 옆으로 물러서서 앵무새와 나란히 조그만 안락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앵무새는 그녀를 보자 곧 날개 를 퍼덕이며 그녀 쪽으로 목을 뻗쳤다.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앉지, 마리안나." 마리안나가 안락의자에 앉을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시퍄긴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그 조그만 친구 곁을 떠나기 싫은가보구나? 아시겠어요, 세묜 페트로비치" 하고 그녀는 칼로메이체프 에게로 몸을 돌렸다. "저 앵무새는 우리 안나에게 흘딱 반했단 말예요!" "거 참, 이상하군요! 아마 부인께서는 희롱하시기 때문일 테죠?" "아뇨 천만에요. 전 설탕까지 먹이는데도, 내 손에선 아무것도 가지려 들지 않는 걸요. 아녜요. 이건 공감과 혐오감의 대조라고나 할지." 마리안나는 흘끗 시퍄긴 부인을 쳐다보았다. 시퍄긴 부인도 그녀를 바라보았 다. 이 두 여인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외숙모와 비교해 본다면 마리안나는 추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둥근 얼굴에 커다란 매부리코를 하고 휘둥그런 잿빛 눈은 놀랄 만큼 맑았으나, 가느 다란 눈썹과 역시 가느다란 입술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숱이 맡은 금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있었고, 붙임성이라고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 나 그녀의 몸 전체에서는 대담하고도 굳센, 어디론가 돌진하는 듯한 정열 같은 것이 넘쳐 흘렀다. 손과 발은 무척 작은 편이었고, 단단하면서도 탄력 있는 조 그만 몸은 16세기의 플로렌스 조각품을 연상시켰다. 그녀의 몸놀림은 경쾌하고 도 맵시가 있었다. 시퍄긴가(家)에서의 시네츠카야의 위치는 몹시 괴로운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 지는 폴란드 피가 섞인 매우 총명하고 민첩한 사람으로서 장군까지 승진을 했 었으나, 거액의 공금횡령죄로 하루아침에 실각되고 말았다. 그는 재판에 회부되 어 유죄 선고를 받고 관등과 귀족 칭호를 박탈당한 후 시베리아로 유형 되었다. 그 후사면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다시는 그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극도의 빈곤 속에서 세상을 마치고 말았다. 그의 처인 마리안나의 어머니는 시 퍄긴의 친동생이었는데, 그녀의 모든 행복을 앗아간 그 타격을 참지 못해 남편 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마리안나는 외숙댁인 시 퍄긴가에서 살게 되었으나,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산다는 것이 그녀로서는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의 완고한 성격으로 해서 자유로운 몸이미 되려고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을 쳤다. 그리하여 그녀와 그녀의 외숙모 사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던 것이다. 시퍄긴 부인은 그녀 를 니힐리스트적인 무신론자로 보고 있었고, 마리안나는 또 그녀대로 시퍄긴 부 인을 자유를 속박하는 압제자로서 증오하고 있었다. 마리안나는 외숙에 대해서 는 서먹서먹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아니, 외숙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에 대해 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과 사귀기를 꺼려했을 뿐 결코 그들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기질은 겁쟁이와는 아주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혐오감이라" 하고 칼로메이체프는 되뇌었다. "사실 그건 이상야릇한 거예요. 예를 들어 제가 신앙심이 강한 사람이란 것과 명실공히 진정한 정교 신자라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러면서도 승려들의 긴 머리나 노끈으로 동여맨 머리채만은 태연히 바라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마음속에서 뭔가가 자꾸 끓어오른단 말예요. 부글부글 끓어오르거든요!" 칼로메이체프는 이렇게 말하고 정말 가슴속이 끓기라도 하는 듯이 주먹 쥔 손을 두어 번 불쑥 쳐들어 보였다. "당신은 언제나 머리카락이 마음에 걸리시는군요, 세묜 페트로비치"하고 마리 안나가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저처럼 머리를 짧게 자른 사람 들도 태연히 바라볼 수 없으시겠군요." 시퍄긴 부인은 살며시 눈썹을 치켜올리고 머리를 갸우뚱했다. 그것은 마치 요 즘의 젊은 처녀들이 너무나 당돌하게 얘기를 하는 바람에 적이 놀라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칼로메이체프는 그런 대로 겸손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칼로메이체프가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처럼 아름다운 그 머리카락이 무자비하게 가윗날에 싹둑 잘리게 되는 것을 애석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 그렇지만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는 아니지요. 그러 나 어쨌든 간에 당신의 본보기가 저를 개종케 하지는 못할 테죠!" 칼로메이체프는 적당한 러시아어가 떠오르지 않았으나, 여주인의 주의도 받은 터였으므로 프랑스어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우리 마리안나가 아직껏 안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건 다행이에요"하 고 시퍄긴 부인이 끼여들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소맷깃이나 옷깃 같은 것도 떼어버리려고 하지 않아요. 그 대신 과학을 연구하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게다가 여성문제에까지도 흥미를 느끼 고 있으니. 그렇잖아, 마리안나?" 이것은 모두 마리안나를 낭패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마리 안나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그래요, 아주머니"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쓴 거라면 전 모두 읽고 있어요. 여성 문제가 어떤 것이라는 걸 전 알고 싶은 거예요." "그것도 다 젊기 때문일 테죠!" 하고 시퍄긴 부인은 칼로메이체프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이나 저나 이젠 그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잖아요, 어때요?" 칼로메이체프는 동감의 미소를 지었다. 사랑스런 여주인의 즐거운 농담을 받 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는!" 하고 그는 말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젊어서 이 상주의나 낭만주의로 가득 차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가면." "그렇지만 그건 저 자신을 모독하는 것도 같군요." 시퍄긴 부인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런 문제에는 저 역시 흥미가 있는걸요. 하긴 저도 아직 그렇게까 지 늙진 않았으니까요." "저 역시 그 문제에는 흥미를 느끼고 있죠" 하고 칼로메이체프가 황급히 말 했다. "하지만 그런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금하고 싶습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금하고 싶다고요?" 마리안나가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대중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흥미를 갖는 것은 무방하 지만 말만은 하지 말라구요!" 그는 손가락으로 입을 막았다. "어떤 경우든 간에 인쇄물에 대해서 말하는 건 엄금하고 싶습니다, 무조건!" 시퍄긴 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왜 그러세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 해 성내(省內)에 위원회라도 만들 생각이세요?" "그야 위원회라도 말들어야지요. 도대체 저 굶주린 가난뱅이 문인들보다 우리 의 무지의 문제 해결 방법이 더 서투르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자들은 자기 코밑 의 일조차 모르는 주제에 으뜸 가는 천재로 자처하고 있단 말입니다. 저 같으면 부군인 보리스 안드레예비치를 위원장으로 추천하겠어요." 시퍄긴 부인은 한층 더 큰소리로 웃었다. "조심하세요. 경계하셔야 해요. 보리스 안드레예비치는 간혹 자코뱅당이 될 때가 있으니까요." "자코오, 자코오, 자코오." 앵무새가 흉내내며 울어댔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앵무새를 향해 손수건을 흔들었다. "현명한 사람들의 말을 방해하면 못 써! 마리안나, 앵무새를 좀 달래줘요." 마리안나는 손톱으로 앵무새의 목덜미를 긁어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앵무새는 곧 머리를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그래요," 시퍄긴 부인이 말을 이었다. "보리스 안드레예비치는 가끔 저를 깜 짝 놀라게 할 때가 있어요. 그분에겐 어딘지 모르게 호민관다운 기질이 있거든 요." "그건 웅변술에 능하기 때문이죠!" 칼로메이체프는 흥분한 나머지 프랑스어로 말을 받았다. "부군께서는 아무도 당하지 못하리만큼 능란한 화술을 지니고 계 시고, 게다가 빛나는 성공에도 자신이 붙어버려 자기 자신의 말에 취하실 때가 있죠. 거기에 덧붙여 인기를 얻으려는 야심도 갖고 계시니. 그런데 요새 부군께 선 좀 화가 나 계신 것 같더군요, 그렇지 않아 요? 뭔가 좀 불만이시죠, 그렇죠?" 시퍄긴 부인은 마리안나 쪽으로 눈을 돌렸다. "전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요." 잠시 말이 없다가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요," 칼로메이체프는 생각에 잠긴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신성주간 (神聖週間)에 다소 무시를 당한 느낌이었으니까요." 시퍄긴 부인은 또다시 그에게 마리안나 쪽을 눈짓해 보였다. 칼로메이체프는 빙긋이 미소를 짓고는 '네, 잘 알았습니다' 하는 듯이 가늘게 실눈을 만들었다.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칼로메이체프가 엄청나게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금년에도 학교에서 수업을 하실 작정이십니까?" 마리안나는 새장에서 물러났다. "그런 일에도 흥미를 가지시나요, 세묜 페트 로비치?" "물론이죠, 이만저만한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죠." "학교를 금지시키진 않으시겠어요?" "니힐리스트 같으면 학교를 생각조차 못 하게 하겠습니다만, 종교의 지도 밑 에 -종교의 감독 밑에 운영되는 학교라면야- 자진해서라도 학교를 열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 금년엔 어떻게 될지, 작년의 결과가 너무 좋지 않아서. 게다가 여름이니 학교가 어디 잘될라구요!" 마리안나는 말하고 있는 동안 점점 얼굴이 빨개져 갔다. 마치 말하기가 아주 힘이 들어서 마지못해 말을 이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직도 그녀에겐 자존심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직 충분한 준비를 갖추진 못했지?" 비꼬는 듯한, 떨리는 목소리로 시퍄긴 부인이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뭐라고요!" 칼로메이체프가 또다시 큰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씀들을 하십 니까? 정말 놀라겠군요! 농사꾼 딸에게 알파벳을 가르치는 데도 준비가 필요합 니까?"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엄마, 엄아! 아빠가 오세요" 하고 외치며 콜랴가 응접 실로 뛰어들었다. 뒤따라 실내모에 노란 숄을 두른 백발의 노부인이 굵고 짧은 다리를 휘청거리며 방으로 들어와서는 "보렌카가 곧 이리 올 거다" 하고 되뇌 었다. 이 노부인은 안나 자하로브나라고 하는 시퍄긴의 고모였다. 응접실에 앉아있 던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문간방으로 달려가 층계를 따라 현관문으로 내려갔다. 깔끔하게 다듬은 전나무 가로수 길이 한길로부터 곧장 현관 입구로 길게 뻗어 있었다. 사두마차가 이미 가로수 길을 질주해 오고 있었다. 맨 앞에 서 있던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가 손수건을 흔들기 시작했고, 콜랴는 째지는 소 리로 외쳐댔다. 마부는 흥분에 들뜬 말들을 멋지게 급정거시켰다. 그러자 머슴 이 날쌔게 마부대에서 뛰어내리고, 자물쇠와 손잡이를 한꺼번에 낚아채듯 마차 문을 열었다. 이윽고 입과 눈 할 것 없이 만면에 관대한 미소를 띄운 보리스 안 드레예비치가 멋지게 어깨로 외투를 걷어젖히며 땅으로 내려섰다. 발렌치나 미 하일로브나는 우아하고 빠른 동작으로 그의 목에 두 손을 감고는 세 번 키스를 했다. 콜랴는 발을 동동거리며 뒤에서 아버지의 프록코트 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시퍄긴은 우선 불편하고 몰골 사나운 스코틀랜드 여행 모자를 벗은 다 음, 안나 자하로브나와 키스를 하고, 역시 현관까지 마중 나온 마리안나와 칼로 메이체프에게 인사를 건넸다. 칼로메이체프와는 힘차게 영국식 악수를 했다. 마 치 종이라도 치는 듯이 힘차게 흔들어댄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는 아들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는 겨드랑이를 들어 안아올리며 자기 얼굴 쪽으로 끌어갔다. 이렇게 한창 인사들을 주고받고 있을 동안, 네지다노프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 지른 사람처럼 슬그머니 마차에서 빠져나와 모자도 벗지 않은 채 흘금흘금 눈 치를 살피면서 마차 앞바퀴 옆에 서 있었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남편과 포옹을 하면서 재빨리 어깨 너머로 이 새로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퍄긴은 가 정교사를 데리고 온다고 미리 그녀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주인과 계속해서 인사와 악수를 나누는 가운데 일동은 하인들 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계단 위로 올라갔다. 하인들은 주인 옆으로 다가와 손 에 입을 맞추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 아시아식 예절은 이미 오래 전에 폐지되 었다. 그들은 그저 경건하게 인사를 할 뿐이었다. 시퍄긴은 이들에게 머리보다 는 주로 눈썹과 코를 움직여 가볍게 응답해 주었다. 네지다노프도 넓은 계단을 올라 위로 올라갔다. 그가 현관 홀로 들어서자, 아 까부터 그를 눈으로 찾고 있던 시퍄긴이 아내와 안나 자하로브나, 마리안나에게 그를 소개시켰다. 그리고 콜랴에게는 "이분이 네 선생이시니 말씀 잘 들어야 한 다. 자, 악수를 해야지!" 하고 말했다. 콜랴는 머뭇머뭇 네지다노프에게 손을 내 밀고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에게 아무 신기한 것이나 재미있는 것을 찾아내지 못한 듯 다시금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네지다노프는 전에 극장에 갔을 때처럼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보기에도 초라한 낡은 외투를 입고 있었 고, 얼굴과 손은 흠뻑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뭐 라고 상냥하게 그에게 말을 했으나, 네지다노프는 그녀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 했으므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유달리 밝고 상냥스런 표정으 로 남편을 바라보면서 남편 곁에 바싹 달라붙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을 뿐이었 다. 콜랴의 모습에서는 포마드를 바른 곱슬곱슬한 머리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 았다. 칼로메이체프를 보곤, '어지간히 뻔지르르한 쌍판을 하고 있군!' 하고 생 각했다. 그리고 딴 사람에게는 아예 관심도 돌리지 않았다. 시퍄긴은 자기의 페 나트(로마 신화의 가신(家神))를 점검이라도 하는 듯이 두어 번 위엄 있는 태도 로 머리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길게 늘어진 그의 구레나룻과 다소 강파른 뒷머 리가 놀랄 만큼 뚜렷이 돋보였다. 이윽고 그는 조금도 여독을 느끼게 하지 않는 힘차고 유쾌한 목소리로 한 하인에게 이렇게 외쳤다. "이반! 선생님을 녹색 방으로 안내해 드려. 그리고 트렁크도 그쪽으로 날라가 도록." 그 다음 네지다노프를 향해서, 이제부터 좀 쉰 다음 물건도 정리하고 몸 도 씻으라고 말하면서 식사는 정각 5시라고 일러주었다. 네지다노프는 인사를 한 다음 이반을 따라 2층 녹색 방으로 올라갔다. 일동은 응접실로 옳겨갔다. 거기서 다시 한 번 인사가 되풀이되었다. 눈이 반 쯤 먼 듯한 늙은 유모가 인사를 하러 방으로 들어왔다. 시퍄긴도 유모에게만은 그녀의 나이를 존중하는 뜻에서인지 자기 손에 입을 맞추게 했다. 그 다음 시퍄 긴은 칼로메이체프에게 실례한다고 말하고는 자기 아내와 함께 침실로 사라졌 다. 7 하인이 네지다노프를 안내해 준 넓고 깨끗한 방은 정원 쪽으로 창문이 나 있 었다. 열려져 있는 창문으로부터 산들바람을 받아 하얀 커튼이 가볍게 흐느적거 리는가 차면 부풀어오르기도 하고, 흑은 다시 제자리로 가라앉기도 했다. 금빛 햇살이 조용히 천정을 미끄럼질하고 다소 습기 어린 싱싱한 봄 향기가 방 전체 에 넘치고 있었다. 네지다노프는 먼저 하인을 돌려보내고 트렁크에서 짐을 푼 다음,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여행에 지쳐 있었다. 만 이틀 동안 알 지도 못하는 사람과 함께 오만 가지 쓸데없는 얘기를 지껄이며 여행을 했으니 그의 신경이 곤두선 것도 당연했다. 권태도 아니고 울분도 아닌 어떤 쓰라린 감 정이 그의 마음속 아주 깊은 곳까지 살며시 파고들었다. 그는 소심한 자기 자신 에게 화가 치밀었으나, 그럴수록 그의 가슴은 더욱더 아프기만 했다. 그는 창문으로 다가가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모스크바 저쪽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조상 전래의 흑토(黑土) 정원이었다. 완만하게 경사진 넓 은 언덕 위에 자리잡은 정원은 뚜렷이 네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집에서 2 백 보쯤 떨어진 곳에 아카시아와 라일락 숲이 우거진 넓은 꽃밭이 있었고, 둥근 화단 사이에는 조그만 모랫길이 곧바로 나 있었다. 왼쪽은 마구간을 지나 탈곡 장에 이르기까지 사과, 배, 자두, 구즈베리, 나무딸기 등을 빽빽이 심은 과수원 이 연달아 있었다. 집 정면에는 열십자로 교차된 보리수의 가로수들이 정방형을 이루며 우뚝 서 있었다. 오른쪽은 한길 양쪽에 두 줄로 심은 은빛 포플러 때문 에 시계(視界)가 차단되고 있었다. 늘어진 자작나무 숲 너머로 가파르게 경사진 온실 지붕이 보였다. 정원 전체가 아름다운 봄의 첫 개화를 맞아 연녹색으로 물 들고 있었다. 아직은 시끄럽게 울어대는 여름 벌레의 울음소리도 안 들리고, 다 만 어린 나뭇잎들이 살랑거리는 소리와 여기저기서 울어대는 멋쟁이 새, 언제나 같은 나무에만 앉아 있는 두 마리의 산비둘기, 언제나 자리를 바꿔 앉는 뻐국새 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이따금 물방앗간의 연못 뒤에서 여러 대의 수 레바퀴가 한꺼번에 삐걱거리는 듯한 까마귀떼의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이 젊음에 넘친, 속세를 떠난 듯한 한적한 생활 위를 밝은 구름들이 커다랗고 게으른 새처림 가슴을 부풀리면서 둥실둥실 헤엄쳐 가고 있었다. 네지 다노프는 이 모든 것을 보고 들으면서, 싸늘하게 식은 입술 사이로 마음껏 봄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러자 그의 마 음도 어느 정도 홀가분해진 것 같았다. 정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아래층 침실에서도 역시 그에 대한 말이 오가고 있었다. 시퍄 긴은 자기 아내에게 네지다노프와 알게 된 동기며, G공작이 자기에게 한 말이 며, 여행중에 두사람이 주고받은 얘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영리한 머리를 가지고 있지!" 하고 그는 되풀이했다. "게다가 학식도 꽤 있 는가봐. 물론 적색 사상을 가진 것만은 사실이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내겐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된단 말이오. 최소한 그들에게는 강한 포부가 있거든. 게다가 콜랴만 해도 아직 어리니까 별로 바보 같은 생각을 주입시키려고 하진 않을 거 요."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상냥하면서도 동시에 비웃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시퍄긴이 장난기 어린 이상 야릇한 태도로 아내에게 참회라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자기 의 군주이자 주인이기도 한 남편이, 당당한 신사인 동시에 고관이기도 한 남편 이 가끔씩 느닷없이 20대의 청년에 지지 않을 만한 장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어쩐지 기쁘기까지 했던 것이다. 눈처럼 새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파 란 비단 멜빵을 한 시퍄긴은 거울 앞에 서서 영국식으로 두 개의 솔을 사용하 여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한편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신을 신은 채 낮은 터 키식 소파에 올라앉아 농장 일이며 제지 공장 일 -유감스럽게도 이 일은 예상 한 만큼 잘되지는 못했다.- 요리사를 갈아야겠다는 것, 교회의 석회(石灰)가 떨 어졌다는 얘기, 그 밖에도 마라안나와 칼로메이체프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 을 남편에게 일일이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들 부부 사이에는 거짓 없는 신뢰와 화목이 유지되고 있었다. 옛날 사람들 의 말대로 그들은 정말로 금실이 좋은 부부였다. 시퍄긴은 몸치장을 마치자 옛 날 기사차럼 발렌치나의 손을 청했다. 이에 그녀는 두 손을 내밀고 남편이 그 손에 번갈아 키스하는 모습을 자랑이 넘치는 상냥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감정은 선량하고 정직한 것이었다. 단지 차이가 있었다면, 그녀는 그러한 감정이 라파엘로에게 묘사를 시켜도 부끄럽지 않을 그 아름다운 눈에 빛났고, 시퍄긴은 단조로운 장군의 두 눈에 나타났다는 것뿐이었 다. 정각 다섯 시에 네지다노프는 식사를 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사 신호는 종소리가 아닌, 길게 울려 퍼지는 중국식 징이었다. 가족은 이미 모두 식당에 모여 있었다. 시퍄긴은 눈짓으로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안나 자하로브나와 콜랴 사이의 자리를 가리켰다. 안나 자하로브나는 죽은 시퍄긴 아버지의 여동생으로 이미 늙을 대로 늙은 노파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장농 속에 간직해 둔 옷처럼 나프탈린 냄새를 물씬물씬 풍기며 안정이 없는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 집에서 그녀는 콜랴를 돌보고 그의 가정교사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네지 다노프를 자기와 콜랴 사이에 앉혔을 때, 그녀의 불만투성이 얼굴은 더욱더 붙 만의 빛을 나타냈던 것이다. 콜랴는 자기의 새로운 선생을 흘끔흘끔 곁눈질해 보았다. 영리한 소년은 새 가정교사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기분이 언 짢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네지다노프는 눈을 내리깐 채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콜랴는 그것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그는 지금까지 새로 올 선생이 엄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아니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도 이따금씩 네자다노프에게 눈길을 주었다. '아직 학생 티를 못 벗었군'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게다가 사교 생활도 해보 지 못한 것 같고. 하지만 얼굴은 흥미있게 생겼는걸. 머리카락도 이상한 빛을 띠어, 마치 옛날 이탈리아 화가들이 곧잘 그리던 빨강 머리의 인물과 흡사한 데 가 있어. 손도 예쁘고.' 그리고 식탁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네지다노프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 다. 그들은 네지다노프를 용납해 주려는 듯 처음 얼마 동안 그대로 놔두자는 듯 한 눈치였다. 네지다노프 자신도 그것을 느끼고 만족하고 있었으나, 그와 동시 에 왠지 울화가 치밀어오르기도 했다. 식탁의 대화는 칼로메이체프와 시퍄긴 사 이에 오고갔다. 화제는 지방 자치회, 현지사, 도로 개수 의무, 농노 해방에 따른 부금 계약(賦金契約),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 있는 공통의 지인(知人)들, 극 히 최근에 유력해지기 시작한 카트코프씨의 학습원(學習阮), 노동자의 구득난 (求得難), 농장의 피해, 벌금, 66년의 전쟁 등등 나중에는 나폴레옹 3세까지 언 급되었다. 칼로메이체프는 나폴레옹 3세를 훌륭한 인물이라고 찬양했다. 이 젊 은 시종무관은 극히 보수적인 의견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는 이야기 끝에, 비록 농담조이기는 하나 어느 명명일(命名日) 축연에서 자기 친구가 했다는 건배사까 지 인용하는 추태를 부렸다. "저는 제 자신이 인정하는 유일한 주의를 위해 건 배합니다" 하고 흥분에 겨운 지주는 외쳤다는 것이다. "그 주의라는 건 다름 아 니라, 회초리와 료데데르(프랑스의 정치·경제학자)올시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인용은 지나친 악취미라고 말 했다. 시퍄긴은 그 반대로 극히 자유주의적인 의견을 표명하고 정중하면서도 어 딘지 모르게 퉁명스러운 어조로 칼로메이체프의 의견을 논박했다. 그 어조에는 조롱기까지도 엿보였다. "이봐요, 세묜 페트로비치. 농노 해방에 대한 당신의 우려는," 시퍄긴은 자기 이야기 끝에 이렇게 말했다. "저 선량하고 존경할 만한 알렉세이 이바니치 트베 리치노프가 1860년에 제출했던 각서를 연상시키는군요. 그분은 페테르부르크의 살롱이란 살롱은 다 돌아다니면서 그 각서를 읽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좋았던 것은 우리의 해방된 농민이 횃불을 손에 들고 조국의 방방곡곡을 찾아다닐 거 라는 대목이었어요. 그 사랑스러운 트베리치노프씨가 양볼을 부풀리고 눈을 부 릅뜬 채, 어린애 같은 그 귀여운 입으로 '횃불! 횃불! 횃불을 들고 다닐 거요!' 하고 말했을 때의 모습은 정말 볼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해방이 실현된 지금 도대체 횃불을 든 농민은 어디 있습니까?" "트베리치노프씨는," 칼로메이체프가 우울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 대상이 틀 렸을 뿐입니다. 횃불을 들고 다니는 건 농민이 아니라 딴놈들이죠." 이 말을 들었을 때, 그 순간까지 조금도 마리안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던 네 지다노프는 -그녀는 네지다노프와 엇비슷하게 앉아 있었다.- 얼른 그녀 와 시 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 두 사람은 -이 우울한 처녀와 그는- 동일 한 신념과 동일한 경향을 지닌 인간들이라는 것을 느꼈다. 시퍄 긴이 그에게 마 리안나를 소개해 주었을 때,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인상도 불 러일으키지 못했 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지금 그녀와 눈을 마주치게 된 걸까? 여기서 그는 자 기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여기 앉아서 여러 가지 의견들을 들으면서 아무 대꾸도 없이 시종 침묵만 지킴으로써 나 자신도 그들의 의견에 찬성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상대방에게 준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인 가?'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한 번 마리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눈에서 자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읽은 듯이 느쪘다. '제발 기다리 세요.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녜요. 그럴 필요도 없고요. 나중에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 테니까요.' 마리안나가 자기를 이해해 준다고 생각되자 네지다노프는 마음이 흐뭇했다. 그는 또다시 귀를 기울였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남편을 대신해서 보다 자 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의견을 토로했다. 그녀는 젊고 교양 있는 사람이 그렇게 고루한 인습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퍄긴 부인이 말을 덧붙였다. "당신이 익살을 떨기 위해 그런 말을 했으리라는 걸 저는 알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의 의견은 어떠세요, 알렉세이 드 미트리예비치?" 그녀는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네지다노프 쪽으로 몸을 돌 렸다. 그는 시퍄긴 부인이 어느새 자신의 이름과 애칭을 알고 있는 데 대해 내 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세묜 페트로비치의 기우론(杞憂論)에 찬성하지 않으시리라 믿어요. 여행중에 주인과 하신 말씀을 보리스한테서 죄다 들었으니까요." 네지다노프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접시 위로 떨어뜨리면서 뭔가 영문 모 를 말을 중얼거렸다. 그것은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렇게 호화로 운 신사 숙녀들과 말을 주고받는 것에 익숙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퍄긴 부인 은 계속해서 그에게 미소를 던지고 있었고, 시퍄긴은 보호자다운 태도로 아내에 게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러나 칼로메이체프는 둥근 외눈박이 안경을 천천히 눈썹과 코 사이에 갖다대고는 불손하게도 자기의 위구론(危懼論)에 찬성하지 않 는 학생 나부랑이를 오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네지다노프 를 당황하게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네지다노프는 곧 고개를 들 어 이번에는 자기 쪽에서 상류 사회의 고관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마리안나에게 동지 의식을 느꼈던 것처럼, 칼로메이체프를 대뜸 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칼로 메이체프도 이를 느끼고, 안경을 벗으면서 외면을 한 채 너털웃음을 웃으려고 했다. 그러나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은근히 칼로메이체프를 존경하고 있던 안나 자하로브나만이 그의 편을 들어 주 면서 자기와 콜랴의 사이를 갈라놓은 침입자에 대해 남다른 증오를 느끼고 있 을 뿐이었다. 이윽고 얼마 안 있어 식사가 끝났다. 일동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 테라스로 옮 겨갔다. 시퍄긴과 칼로메이체프는 시가를 태우기 시작했다. 시퍄긴은 레가리야(고급 담배의 일종) 한 대를 네지다노프에게 권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아, 그렇지!" 하고 시퍄긴이 외쳤다. "또 잊었군. 자기 담배밖에 안 피운 다 는 걸!" "이상한 취미도 다 있지." 칼로메이체프가 이 사이로 내뱉듯이 말했다. 네지다노프는 간신히 울분을 참아냈다. '레가리야와 내 담배의 차이쯤은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남의 신세를 지고 싶지 않은 겁니다.' 이런 말 이 하마터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뻔했으나 그는 자신을 억제했다. 그러나 그 는 이 두번째의 불손한 행동을 자기 적에 대한 '빚'으로 기입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리안나!" 갑자기 시퍄긴 부인이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손님 앞이라고 사양할 건 없잖아. 어서 마음대로 담배를 피우려무나. 그런데," 그녀는 네지다노프에게로 몸을 돌리면서 덧붙였다. "듣자니 당신네 동료들 사이에선 처 녀들도 죄다 담배를 피운다더군요?" "네, 그렇습니다" 하고 네지다노프가 어설프게 대답했다. 이것이 시퍄긴 부인 에 대한 그의 첫번째 말이었다. "하지만 전 피우지 않으니," 벨벳 같은 두 눈으로 살포시 실눈을 만들면서 시 퍄긴 부인이 말을 이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셈이군요." 마리안나는 일부러 외숙모에게 보이기라도 하는 듯 침착한 태도로 천천히 담 배와 성냥갑을 꺼내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네지다로프도 마리안나에게서 불을 댕겨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놀랄 만큼 상쾌한 저녁이었다. 콜랴는 안나 자하로브나와 함께 정원으로 나갔 다. 나머지 사람들은 상쾌한 공기를 즐기면서 한 시간 가량 더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재법 활기 있는 대화가 오갔다. 칼로메이체프가 문학을 공박하기 시작 한 것이다. 시퍄긴은 이번에도 자유파가 되어 문학의 독립성을 옹호하기도 하고 그 유용성을 입증하기도 하면서 알렉산더 1세가 샤토브리앙(프랑스의 작가·정 치가)에게 성 안드레이 훈장을 하사하던 일까지 끄집어냈다. 네지다노프도 이 논쟁에는 끼여들지 않았다. 시퍄긴 부인은 물끄러미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표정은 그의 겸손한 자제력에 감탄하는 한편 다소 이상하다고 생 각하는 눈치였다. 차를 마실 시간이 되자 모두들 응접실로 옳겨갔다.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시퍄긴이 네지다노프에게 말했다. "우리집에는 좋 지 않은 습관이 있어서 저녁마다 카드 놀이를 한답니다. 게다가 금지된 노름 '스트콜카'를 한단 말예요. 어때요! 당신에게 권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 대신 마 리안나는 마음씨가 착하니까 피아노를 들려줄 테죠. 당신도 아마 음악은 좋아하 리라 믿습니다만, 그렇죠?" 이렇게 말하고 시퍄긴은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카드 뭉치를 집어들었다. 마리안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멘델스존의 <말없는 노래>중의 몇 곡을 연주 했는데, 그 솜씨는 그다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멋있군, 멋있어! 정말 훌륭한 터치거든!"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칼로메 이체프가 멀리서 프랑스어로 외쳤다. 그러나 그는 예의상 그렇게 외친 데 지나 지 않았으며, 네지다노프 역시 시퍄긴의 예상과는 달리 음악에 대해서는 조금도 취미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시퍄긴 부부는 칼로메이체프와 안나 자하로브나와 함께 카드 놀 이를 위해 자리를 잡았다. 콜랴는 양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차 대신 큰 우 유컵 한 잔을 받아들고 잠자리로 돌아갔다. 시퍄긴은 내일부터 알렉세이 드미트 리예비치 선생과 공부를 시작한다고 아들 등뒤에다 소리쳤다. 잠시 후 방 한복 판에 멍청히 앉아서 사진첩을 뒤적이고 있는 네지다노프를 본 시퍄긴은 여행 때문에 피로할 테니 사양 말고 가서 자라고 말하면서, 이 집에서는 무엇보다도 자유가 제일 신조라고 말해 주었다. 네지다노프는 허락이 내린 것을 기회로 일동에게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갔 다. 문간에서 그는 마리안나와 마주쳤다. 그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자기와 이 처녀는 서로 동지가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신했다. 비록 그녀 는 미소를 던지기는커녕 눈썹까지 찌푸려 보이기는 했지만. 자기 방으로 들어와 보니, 신선한 봄 향기가 방안 가득히 넘쳐 흐르고 있었 다. 하루 종일 창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창문 바로 맞은편 정원에서는 나이 팅게일 울음소리가 토막토막 끊기며 낭랑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밤하늘은 원을 그린 보리수 가지 위에서 희미한 불빛으로 다사롭게 물들어 있었다. 달이 떠오 르고 있었던 것이다. 촛불을 켰다. 잿빛 밤나비들이 어두운 정원으로부터 몰려 와 서로 부딪치며 불빛 주위를 맴돌았으나, 이윽고 나비는 바람에 쫓기고 청황색 촛불만이 가물가물 바람에 떨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어느 새 침대 속에 몸을 눕힌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생각 했다. '주인 부부는 마음이 좋아 보이고 자유주의적인 인도주의자 같은데 왜 그 런지 마음이 내키지 않거든. 시종. 시종무관. 그렇지, 아침은 밤보다 현명하다지 않나. 감상에 젖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정원에서 야경꾼의 끈덕진 딱딱이소리가 요란스레 들려오고 "불 조오심" 하는 길게 끄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조오심!' 또 하나의 목소리가 침울하게 응답했다. "제기랄, 이게 뭐야! 마치 요새 속에 있는 것 같군그래!" 8 네지다노프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하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옷을 갈아 입고는 정원으로 나갔다. 굉장히 넓고 아름다운 정원은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 다. 품팔이꾼들이 삽으로 오솔길을 다지고 있었다. 파릇파릇한 덤불 속에서 갈 고리를 손에 든 시골 처녀들의 빨간 머릿 수건이 여기저기서 어른거렸다. 네지 다노프는 연못가로 다가갔다. 연못에서는 이미 아침 안개를 찾아볼 수 없었으나 연못의 그늘진 굴곡에서는 아직도 군데군데 연기처럼 피어오르 고 있었다. 낮게 뜬 태양이, 비단결처럼 매끈한 납덩이 같은 넓은 수면에 장밋 빛 햇살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네댓 사람의 목수가 뗏목 옆에서 일하고 있었 다. 바로 그 옆에는 새로 페인트칠을 한 보트 한 척이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가볍게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간혹 목소리를 죽인 듯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 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아침과 정적과 능률적인 작업의 힘이 넘쳐 흐르고 일정한 생활의 질서와 규칙을 나타내고 있었다. 가로수 길을 도는 모퉁이에서 우연히도 네지다노프는 바로 그 질서와 규칙의 권화(權化)라고 할 수 있는 시퍄 긴과 마주쳤다. 그는 가운처럼 생긴 완둣빛 코트에 얼룩 모자를 쓰고 영국식 참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방금 면도를 한 듯한 그의 얼굴에서는 흐뭇한 만족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는 집안일을 살피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시퍄긴은 정답 게 그에게 인사를 했다. "아아!" 하고 그는 외쳤다. "당신은 젊은이답지 않게 일찍 일어나시는군요! 그 는 격에도 맞지 않는 이런 농담으로 네지다노프가 자기처럼 잠꾸러기가 아니라 는 사실에 찬의를 표하려고 했던 것 같다. 우리는 여덟 시에 식당에서 모두 함 께 차를 마시고, 열두 시에 조반을 듭니다. 그러니까 열 시에 콜랴에게 러시아 어의 첫수업을 해주십시오. 그리고 두 시에는 역사를 가르쳐 주세요. 내일은 5 월 9일 그 애의 명명일이니까, 수업은 안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 시작 해 주었으면 좋겠군요!" 네지다노프는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시퍄긴은 연거푸 자기 입술과 코로 손을 가져가며 프랑스식의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힘차게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 나갔 다. 그는 고관이나 명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선량한 러시아의 시골 신사와도 같았 다. 네지다노프는 여덟 시까지 정원에 남아 고목의 그늘과 신선한 공기, 새의 노 랫소리를 즐기고 있었다. 이윽고 징소리가 들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들 식당에 모여 있었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그를 매우 상냥하게 대해 주었 다. 아침 화장을 한 그녀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마리안나 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엄하고 긴장된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정각 열 시에 시퍄긴 부인 앞에서 첫번째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먼저 방해가 되지 않겠느냐고 네지다노프에게 물어본 다음, 수업이 끝날 때까지 시종 겸손한 태도 를 유지했다. 콜랴는 이해가 빠른 애였다. 처음 얼마 동안은 누구나 그렇듯이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눈치였으나, 이윽고 수업을 무사히 끝마쳤다. 시퍄긴 부인은 네지다노프에게 매두 만족한 듯이 몇 번이나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걸었다. 네지다노프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을 버리 지 않고 있었으나 그래도 그다지 심한 편은 아니었다. 시퍄긴 부인은 두번째의 수업 러시아 역사에도 참석했다. 그녀는 자기에게도 콜랴에 못지않게 역사 선생 이 필요하다고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첫수업 때와 마찬가지로 단정한 모습으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네지다노프는 두 시에서 다섯 시까지 자기 방에 앉아서 페 테르부르크에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의 기분도 차차 안정이 된 것이다. 이젠 지루하지도 않고 우울하지도 않았다. 긴장되었던 신경도 다소 누그러졌다. 그러 나 이러한 신경은 식사때에 다시 긴장되었다. 칼로메이체프도 없었고 조심스러 운 여주인의 상냥한 태도에도 변함이 없었으나, 그 조심스러운 태도가 오히려 네지다노프의 마음을 다소 언짢게 했던 것이다. 게다가 옆자리에 앉아 있는 노 처녀 안나 자하로브나는 잔뜩 적의 어린 표정으로 부어 있는가 하면 마리안나 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콜랴마저 벌써부터 버릇없게 네지다노 프를 두 발로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시퍄긴 역시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 다. 그는 많은 돈을 치르고 고용한 제지공장의 독일인 지배인에게 굉장히 큰 불 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독일인 전체에 대한 욕설을 퍼붓고는, 자기는 광신자 는 아니나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는 범슬라브주의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솔로민 이라는 젊은 러시아인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소문에 의하면 그 사람은 어느 상인이 가지고 있는 이웃 공장을 훌륭히 정리해 준 장본인이라는 것이었 다. 그는 이 솔로민과 무척 사귀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저녁녘에 칼로메이체프가 왔다. 그의 영지는 시퍄긴의 알자노예에서 불과 30 여 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농노 해방의 조정리(調停吏) 일을 본다 는 지주도 찾아왔다. 레르몬토프는 어느 지주의 모습을 자기의 유명한 이행시 속에 다음과 같이 정확히 묘사한 적이 있는데 그 조정리는 바로 이러한 유형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목은 넥타이 속으로 움츠러들고 옷자락은 발꿈치까지 찢어지는 음성 그리고 흐리멍덩한 눈초리 그리고 또 이가 빠진 침울한 얼굴에 유달리 깨끗한 옷차림을 한 이웃 지주와 군의사(郡醫師)도 찾아왔다. 그 의사는 엉터리인 주제에 학술용어만을 휘둘러대 기 좋아하는 사내였다. 이를테면 자기는 푸슈킨보다 크콜리니코를 더 좋아하는 데, 그 이유는 크콜리니코 쪽이 '원형질'을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이었다. 그들은 모두 카드 놀이를 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네지다노프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 자정 넘어서까지 책을 읽기도 하고 쓰기도 했다. 이튿날 5월 9일은 콜랴의 명명일이었다. 집안 식구들은 포장을 열어젖힌 세대 의 사륜마차에 타고 마차 뒷자리에는 머슴을 태운 채 미사에 참배하러 떠났다. 교회까지는 3백 미터도 채 안 되었다. 미사는 매우 정중하고 화려하게 진행되었 다. 시퍄긴은 휘장을 달고,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파리풍의 아름다운 연자색 옷을 입고 있었다. 교회에서 미사를 할 동안 그녀는 빨간 벨뱃 표지를 씌운 조 그만 책을 들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그 책은 교회 안의 모든 노인들을 놀라게 했다. 노인 중의 한 사람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는지, "아니, 저 여잔 마술을 부리고 있는 게 아뇨?" 하고 옆사람에게 물었을 정도였 다. 교회는 꽃향기와 농부의 새 외투에서 풍기는 유황 냄새, 타르칠을 한 장화 와 펜틀화(靴)에서 풍기는 역한 냄새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으나, 그 모든 냄새 를 압도하는 것은 바로 숨막힐 듯이 상쾌한 향불의 향내였다. 보제(補祭)와 교 회 일꾼들이 놀랄 만큼 열심히 합창석에서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합창대는 공 장 직공들이 가담하고 있어 마치 음악회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들 은 가끔 불쾌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테너의 목소리가 -그것은 악성 폐병에 걸 린 크리므 직공의 목소리였다.- 자기 멋대로 반음이며 단음, 변음의 음조를 내 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음조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으나, 그나마 도중에서 끊어진다면 음악회는 순식간에 뒤죽박죽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노래는 무사히 끝났다. 무척 근엄한 용모에 높직한 모자를 쓰고 법의 를 두른 키프리안 신부는 수첩을 보면서 매우 교훈적인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충실한 신부는 무엇 때문엔지 아시리아의 현왕 (賢王) 이름을 열거하게 되어 어느 정도 자기의 박식을 과시할 수는 있었으나, 그 발음에 무척 고심했기 때문에 어지간히 땀을 흘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미 오랫동안 교회에 가본 적이 없는 네지다노프는 교회 한쪽 구석 시골 여인들 틈 에 끼여 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성호를 긋고 머리를 숙여 절을 하기도 하고, 얌 전히 갓난애의 코를 닦아주기도 하면서 가끔 네지다노프를 곁눈질해 볼 뿐이었 다. 그러나 새 외투를 입고 이마에 구슬 장식을 한 시골 처녀들과 어깨에 수를 놓고 겨드랑이에 빨간 섶을 단 루바시카에 허리띠를 동여맨 사내아이들은, 똑바 로 그쪽에게 얼굴을 돌린 채 이 새로운 예배객을 조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 고 있었다. 그들은 네지다노프를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무척 긴 기도가 있은 후 -그것은 누구나 다 알다시피 정교회의 모든 기도 중 에서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기적의 성인 니콜라이에 대한 감사기도였다.- 사 제 일동은 시퍄긴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와 다시 필요한 두서너 가지의 의식을 행하고 방마다 성수를 뿌렸다. 이윽고 호화 로운 식사가 나왔다. 식사를 하는 동안 평범하면서도 점잖은, 그러나 다소 지루 한 대화들이 오고갔다. 주인 부부는 이런 시간에 식사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 으나, 그들 역시 자리에 앉아 음식을 떠보기도 하고 잔을 입에 대보기도 했다. 시퍄긴은 매우 품위가 있으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일화까지 들려주었다. 그것은 그의 빨간 휘장과 위엄 있는 풍채를 고려해 보더라도 좌중의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데 충분했다. 키프리안 신부는 감사와 경탄의 빛조차 띠었 다. 그리고 주인에 대한 응답으로 그러나 동시에 자기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에 못지않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을 과시라도 하듯 키프리안 신부는 어느 주교와의 대화를 끄집어냈다. 그 주교는 관구(管區)를 순회하면서 군 내의 성직자들을 모두 거리의 수도원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 주교님은 말할 수 없이 엄격한 분이셨답니다." 키프리안 신부는 설득조로 말했다. "처음엔 자연이며 질서에 대해서 물어보시더니, 나중엔 시험을 치르지 않겠어요. 제게도 역시 물으시더군요. '교회의 제일(祭日)은 언제인가?' 구세주 변용제(變容祭)올시다.' '그럼 그날의 찬송가를 알고 있는가?' '알다뿐이겠습니 까!' '불러보게!' 거기서 제가 곧 '산 위에서 모습이 변하셨네, 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 하고 노래하자, 또 물으셨습니다. '잠깐! 변용이란 무엇이며 그 뜻을 어 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한마디로 말씀드려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영광을 보이려고 하신 것입니다!' '좋아, 기념으로 이 성상(聖像)을 주겠다.' 저 는 주교님의 발밑에 엎드렸습니다. '주교님, 감사합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그 분한테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겁니다." "저도 주교님과는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습니다." 시퍄긴이 점잖은 어조로 말 했다. "아주 훌륭한 분이시죠!"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키프리안 신부가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교구 주임 을 지나치게 신임하는 데는 좀."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농민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미래의 여선생 으로 마리안나를 가리켰다. 우람한 체격에 어딘지 모르게 '오르로프'산(産) 말꼬 리에 빗질을 한 듯이 느껴지는 굽슬굽슬한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던 보제는 -그는 학교의 감독을 위임받고 있었다.- 부인의 말에 찬의를 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목청의 힘을 고려치 않고 너무나 큰 소리로 외쳐댔으므 로 그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도 모두 놀라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다음 교 회 사람들은 곧 시퍄긴 집에서 물러갔다. 금단추가 달린 새 재킷을 입은 콜랴가 이날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선물과 인 사를 받았고 앞문과 뒷문의 방문객으로부터 손에 키스를 받기도 했다. 뒷문 방 문객은 대부분 직공, 머슴, 노파, 시골 처녀들이었다. 농부들은 주로 농노 제도 하의 옛 풍습에 따라 집앞에 모여 만두며 보드카 병들이 놓여 있는 탁자 주위 에서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있었다. 콜랴는 기뻤으나 한편으론 수줍어하기도 하 고 으스대기도 했으며, 겁을 먹기도 했다. 또한 부모에게 재롱을 떨며 방안에서 밖으로 뛰쳐나가기도 했다. 식사때 시퍄긴은 샴페인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리 고 아들의 건강을 위해 축배를 들기 전에 일장 연설을 했다. 그는 먼저 '토지에 대한 봉사'가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 말하고 나서 자기 아들 니콜라이 -그는 분명히 이렇게 불렀던 것이다.-가 어떤 길을 택하기를 바라며, 무엇이 그의 장 래를 기대할 권리를 갖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했다. 그것은 첫째로 가족, 둘째로 계급, 셋째로 국민 -"그렇습니다, 여러분. 국민입니다"- 그리고 넷째가 정부라는 것이었다. 점점 기세를 올려가던 시퍄긴은 마침내 웅변의 경지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로베스 피에르의 흉내를 내어 연미복 뒷자락 쪽으 로 한 손을 놀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과학'이라는 말에 감격한 후, 'Labremus(일합시다)!'라는 라틴어의 절규로 자기의 연설을 마쳤다. 그러나 이 라틴어는 즉시 러시아어로 번역되었다. 콜랴는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 탁자를 따라 아버지 곁으로 가서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모든 사람들과 키스를 나누었다. 네지다노프는 또다시 우연히 마리안나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아마 동일 한 것을 느끼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렇지만 네지다노프는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아니꼽고 불쾌하다고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재미있고 우스꽝스럽게 느꼈다. 그에게는 여주인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가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는 현명한 부인처럼 생각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는 현명하고도 통찰력이 빠른 또 한 사람의 사내가 있다 는 것을 마음속으로 은근히 기뻐하는 눈치였다. 여주인의 환대에 의해서 네지다 노프의 자존심이 어느 정도 만족을 느꼈는지에 대해서는 아마 그 자신도 확실 히는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튿날부터 다시 수업이 시작되었고, 모든 생활은 평상시의 궤도를 따라 달음 질치기 시작했다. 어느새 한 주일이 지났다. 네지다노프가 경험하고 사색한 것은, 그가 실린이 라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일단에서 무엇보다도 잘 엿볼 수 있다. 실린은 네지 다노프와는 중학 동창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멀리 떨어 진 어느 현청 소재지에서 부유한 친척집에 얹혀 살고 있었다. 그는 한 번도 그 와 같은 환경에서 벗어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것이 그의 입장을 설명 해 주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는 무력하고 겁이 많은데다가 머리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으나, 놀랄 만큼 순결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정치에 는 전혀 흥미가 없었고 가끔 무슨 책을 읽었으며 지루할 때에는 피리를 불었으 나 여자는 두려워했다. 실린은 열렬히 네지다노프를 사랑하고 있었다. 대체로 그는 남을 잘 따르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네지다노프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블라지미드 실린을 빼놓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있을 때면, 그는 언제나 가깝고 친근한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 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세계의 인간 같기도 하고 혹 은 자기 양심을 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네지다노프는 다시 실린과 같은 거리에 서 정답게 살 수 있으리라고는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곧 실린에게 냉담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점이라곤 거 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네지다노프는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자주 편지를 쓰 고 있었다. 그것은 흉금을 털어놓은 진실 그대로의 편지였다. 적어도 다른 사람 에게 편지를 쓸때에는 가장 하거나 수식을 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실린에게만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다지 글재주가 없었던 실린은 문장이 서투른 짤막 한 편지를 가끔 보내올 뿐이었다. 그러나 네지다노프는 구질구질하게 긴 회답을 필요로 하진 않았다. 그런 것 없이도 노상의 먼지가 빗방울을 빨아들이듯 이 친 구가 자기의 말 하나하나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면서 마치 성물(聖物)과도 같이 자기의 비밀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네지다노프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빠질 길이 없는 한적한 고독 속에 버림받은 듯이 남아 있는 실 린은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자기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네지다노 프는 실린과의 교우 관계를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할 뿐, 아무에게도 그것을 이 야기한 적이 없었다. "순결한 나의 친구 블라지미드!" 그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 그는 언제나 실린 을 순결하다고 부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제발 축하해 주게. 멋진 목초를 찾아냈기 때문에 나도 이젠 휴식을 하며 힘을 기를 수 있게 되었다네. 다름 아니라 시퍄긴이라는 유복한 고관 댁에서 가정교 사로 지내면서 이 집 아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는 걸세. 신기한 음식을 먹고 (나는 지금까지 그런 것은 먹어본 적이 없다네!) 편안히 잠을 자고 아름다운 집 근처를 마음껏 산책하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행한 것은 폐테르부르크 친구들 의 감시로부터 잠시나마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걸세. 하긴 처음 얼마 동안은 지 루해 혼났지만, 이젠 그럭저럭 마음도 편해졌어. 그러나 자네도 알다시피 얼마 안 있으면 맡겨진 의무를 수행해야만 한다네. 버섯으로 자처한 이상 광주리 속 에 들어가게 마련이니까. (나를 여기 보낸 것도 실은 그 때문이라네.) 그러나 나 는 당분간 귀중한 동물적인 시간을 보내면서 배를 좀 불릴 수 있게 된 거지. 마 음이 내키면 시를 쓸 수도 있겠지. 이른바 관찰은 당분간 연기하려네, 영지는 잘 정돈되어 있는 듯하지만, 공장만은 좀 수상한 것 같더군. 농노에서 해방된 농민들은 어쩐지 사귀기가 힘들고, 저택의 고용인들은 너무 예의바른 쌍판들을 하고 있거든. 그러나 이런 것은 나중에 다시 연구하기로 하세. 주인 부부는 예 의바른 자유주의자들이지. 주인은 언제나 겸손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가끔 느 닷없이 거만을 떨 때가 있는, 교양 있는 사내라고 해두지! 부인은 그림같이 아 름다운 미인이지만, 아무래도 뱃속이 검은 여자 같아. 시종 남을 감시하면서도 그 상냥한 몸가짐이란 마치 뼈가 없는 여자 같단 말야! 나는 여자가 좀 두렵네. 자네도 알다시피, 산 귀부인의 상대가 될 기사형과는 인연이 머니까! 이웃 사람 들은 모두 바보 같은 작자들뿐이야. 그리고 나를 증오하는 노파가 한 사람 있 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관심을 끄는 한 처녀가 있는데, 친척인지 아니면 부 인의 말상대인지는 아직 모르겠어! 그 처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지만, 어쩐지 동일한 지반(地盤) 출신의 여자 같은 생각이 든단 말야. 여기서 마리안나의 용모와 그녀의 습성들을 낱낱이 묘사한 다음, 그는 다시 이렇게 계속했다. 이 처녀는 불행하고 거만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내성적이지만, 그중에서도 불 행하다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네. 무엇 때문에 그녀가 불행한지는 아직 나도 모르겠어. 그녀가 정직한 여자라는 것만은 명백하지만, 착한 여자인지 아 닌지는 아직 의문이야. 하긴 바보가 아닌 이상 착하기만 한 여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그리고 실제로 그런 여자가 필요하냔 말야? 아무튼 나는 여자에 대해선 문외한이니까. 여주인은 마리안나를 좋아하지 않고 그녀 역시 같은 태도 로 여주인을 대하고 있다네. 그러나 두 사람 중에서 누가 옳은지는 나도 모르겠 어. 아마 여주인 쪽이 나쁠지도 모르지. 마리안나에 대한 여주인의 태도가 지나 치게 정중한 데 비해, 그녀는 여주인과 이야기를 할 때면 신경질적으로 눈썹을 실룩거린단 말야. 정 말 그녀는 이만저만한 신경질이 아니지. 그 점 역시 나하고 같거든. 그리고 그 녀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뒤틀려진 인간임에 틀림없어. 비록 사정은 다를지 모 르지만 말야. 이 모든 것이 어느 정도 확실해지는 대로 다시 편지를 쓰겠네. 그 녀는 자네에게도 말한 것처럼, 나와 얘기할 때라고는 거의 없다네. 그러나 그녀 가 내게 하는 몇 마디의 말 속에는 언제나 불쑥, 예기치 않게 하는 말이지만 딱 딱하고 노골적인 어조가 깃들여 있단 말야. 내겐 그것이 오히려 유쾌하다네. 그건 그렇고 자네의 친척은 어떤가? 여전히 자네를 말려 죽일 작정인가? 그 래도 죽고 싶진 않은가보군. 자넨 <유럽 통보>에 실린, 오렌부르크현의 새로운 참칭자(僭稱者)에 대한 논 문을 읽었나? 글쎄, 1834년의 사건이니 말야! 나는 그 잡지를 좋아하지 않고 게 다가 필자도 보수파지만, 그 내용만은 흥미로운 데가 있더군. 잠시 생각케 하는 데가 있어서 말야. 9 어느새 5월도 중순이 지나 초여름의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네지다 노프는 역사 수업을 마친 뒤 정원으로 나가 자작나무 숲으로 발길을 옮겼다. 숲 의 한쪽 끝이 이 정원과 접해 있었다. 이 숲의 일부는 약 15년 전에 상인들에 의해 벌목되었으나, 지금 그 자리에는 어린 자작나무가 촘촘히 자라고 있었다. 잿빛 동그라미 무늬를 가진 나무 줄기들이 희부연 은빛 기둥처럼 배게 늘어서 있었다. 조그만 나뭇잎들은 파릇파릇 정답게 반짝이고 있어, 마치 누군가가 물 로 씻은 다음 그 위에 래커 칠이라도 한 것 같았다. 지난해의 싯누런, 두툼한 낙엽층을 뚫고 새파란 봄풀이 예리한 혓바닥처럼 솟아나오고 있었다. 좁다란 몇 줄기의 오솔길이 숲 전체를 종횡으로 꿰뚫고 있었다. 부리가 노란 개똥지빠귀 무리가 깜짝 놀란 듯, 갑자기 요란스럽게 울어대며 땅 위를 낮게 날더니 쏜살같 이 숲속으로 사라져 갔다. 30분쯤 산책을 한 후 네지다노프는 마침내 잘려진 나무 그루터기를 찾아서 그 위에 앉았다. 주위에는 낡은 잿빛 나무 부스러기들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 다. 언젠가 도끼 날에 찍혀 떨어진 나뭇조각들이 그대로 그 자리에 쌓여 있는 것이었다. 겨울 눈이 몇 번인가 그 위를 뒤덮었다가는 봄과 더불어 사라져 갔지 만, 아무도 그것을 건드린 사람이 없었다. 담처럼 촘촘히 늘어선 어린 자작나무 숲으로 등을 돌린 채 네지다노프는 짧고도 짙은 그늘 속아 앉아 있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야릇한 봄의 감각에 온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저기 에는 언제나 젊은이의 마음이나 늙은이의 마음이나 다 같이 어떤 우수 같은 것이 뒤섞이게 마련이다. 그것은 젊은이에게는 희망에 들뜬 우수, 늙은이에게는 멍들어 움직이 지 않는 후회의 우주인 것이다. 네지다노프는 갑자기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짚신이나 무거운 장화를 신은 농군의 발 소리도 아니거니와 그렇다고 맨발의 시골 여인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천천히 규칙적으로 걸어오는 것 같았다. 가볍게 살랑거리는 여인의 옷자락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갑자기 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내의 목소리였다. "그래, 이것이 당신의 마지막 말인가요? 앞으로도?" "앞으로도!" 여자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그 목소리는 네지다노프도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바로 자작나무 숲을 가로지르고 있 는 오솔길 모퉁이에서 거무죽죽한 검은 눈의 사나이와 마리안나가 나타났다. 그 는 처음 보는 사나이였다. 두 사람은 네지다노프를 보자 못박힌 듯이 그 자리에 멈추어섰다. 네지다노프 도 깜짝 놀란 나머지 자기가 앉아 있던 그루터기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했 다. 마리안나는 머리끝까지 빨개졌으나, 곧 멸시가 담긴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는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홍당무처럼 빨개진 그녀 자신을 비웃는 것 일까? 아니면 네지다노프를 조소한 것일까? 한편 그녀의 동반자는 짙은 눈썹을 찌푸린 채 노르께한 두 눈을 불안스럽게 번뜩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 사나이와 마리안나는 시선을 주고받자 두 사람 모두 네지다노프에게 등을 돌리더니 별로 걸음을 재촉하지도 않으며 말없이 저쪽으로 가버렸다. 그동안 네지다노프는 놀 란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전송하고 있었다. 30분 후 네지다노프는 집으로 돌아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징소리에 불려 다시 응접실로 들어가자 아까 숲에서 만났던 그 거무죽죽한 낯선 사나이 가 눈에 들어왔다. 시퍄긴은 네지다노프를 그 사람 옆으로 데리고 가서는 이 사 람은 자기의 처남, 즉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의 오빠 세즈게이 미하일로비치 마 르켈로프라고 소개해 주었다. "제발 두 분께서 정답게 지내주시기 바랍니다!" 자기 특유의 위엄과 상냥함이 깃들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방심 어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시퍄긴이 이렇게 외 쳤다. 마르켈로프는 말없이 인사를 했다. 네지다노프도 같은 방식으로 답례했다. 시 퍄긴은 조그만 머리를 살며시 뒤로 젖히고 어깨를 들먹이며 옆으로 물러났다. '자, 이제 인사도 끝났으니, 지금부터 자네들이 친하고 안 친하고는 조금도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때 발렌치나 미하알로브나가 옴쭉달싹 않고 서 있는 두 사람 곁으로 다가 오더니 또다시 두 사람을 서로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그녀는 마치 누구의 명령 이라도 받은 듯이 그 아름다운 눈에 한층 더 상냥스러운 빛을 띠면서 오빠와 말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세르게이, 우릴 그렇게도 잊어버리다니! 콜랴의 명 명일에도 와주시질 않고. 그렇잖으면 일이라도 많이 밀렸나보군요? 이 사람은 자기 농민에게 어떤 새로운 제도를 실시하고 있답니다." 그녀는 네지다노프 쪽 으로 몸을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아주 기발한 착상이죠. 전체 수확의 4분의 3 을 농민에게 주고, 자가는 4분의 1만을 가진다는 거예요. 그래도 이 사람은 아 직도 너무 많이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니까요." "동생은 농담을 좋아해서," 이번에는 마르켈로프가 네지다노프에게 말했다. "그러나 난 동생의 말에 기꺼이 찬성하는 바입니다. 사실 백 사람이 소유 할 만 한 것 중에서 한 사람이 4분의 1을 소유한다는 것은 확실히 많다고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저,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제가 농담을 좋아한다는 것은 당신도 아셨을 테죠?" 시퍄긴 부인이 눈과 목소리에 여전히 부드럽고 상냥한 빛을 띤 채 이렇 게 물었다. 네지다노프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적당한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때 칼로메이체프가 왔다는 전갈이 있었다. 여주인이 그를 맞으러 나갔다. 그 리고 잠시 후 하인이 나타나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식사 준비가 되었다고 아 뢰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네지다노프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 마리안나와 마르켈로프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들은 나란히 앉아 있었으나, 두 사람 모두 눈을 내리 깔고 입술을 깨문 채 침울하고 사납게, 성이라도 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네지다노프를 놀라게 한 것은 '어떻게 해서 마르켈로프 같은 사람이 시퍄긴 부인의 오빠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사실 두 사람 사 이는 너무나도 닮은 데가 없었던 것이다. 구태여 닮은 곳을 찾는다면 두 사람 모두 피부가 가무잡잡하다는 것이었으나,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에게 있어서는 가무스름한 얼굴과 손 그리고 어깨의 색조가 오히려 그녀의 매력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지만, 그녀의 오빠는 그 색조가 검다는 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점잖은 사람은 그런 색깔을 청동색이라 부르지만, 러시아 사람의 눈에는 장화의 목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마르켈로프는 고수머리에 코끝이 약간 숙었으며 입술은 두껍고, 두 볼과 배는 우묵하게 들어갔으며 손은 힘줄 투성이었다. 게다가 몸 전체가 몹시 여위었으며, 그 목소리는 날카롭고 단속적(斷續的)인 금속성을 띠 고 있었다. 졸린 듯한 눈초리, 음울한 표정 그야말로 담즙질(膽汁質)의 징후 그 대로였다. 그는 거의 식사를 하지 않고, 동그랗게 빚은 빵으로 장난을 하고 있 는 편이 많았다. 그리고 가끔 칼로메이체프를 바라볼 뿐이었다. 칼로메이체프는 방금 시내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현지사(懸知事)를 만 나고 왔는데,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불쾌한 용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에 대해서는 그도 조심스럽게 입을 봉하고, 꾀꼬리처럼 다른 이야기만을 지 껄이고 있었다. 시퍄긴은 전과 다름없이, 칼로메이체프가 몹시 거드름을 떨 때 마다 그의 기세를 꺾어주곤 했지만, 그의 경구와 일화에는 여러 번 웃음을 터뜨 렸다. 그러면서도 시퍄긴은 '그자는 지나친 반동주의자거든' 하 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칼로메이체프는 여러 가지 이야기 끝에 농군들이 - "그렇습니다, 그렇게 단순한 농군들이 말입니다"- 변호사를 '허풍선이' 라는 별 명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보고 그야말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허풍선이! 허풍선이!" 하고 그는 감탄이 어린 어조로 되풀이했다. "러시아 농민 은 정말 미묘한 데가 있단 말예요!" 그 다음 그는 어느 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는 학 생들에게, "스트로포카밀(타조의 별명)이 뭐지?" 하고 물어본즉, 학생은 물론 선 생조차 대답을 못 했으므로 이번에는 다시, 피삐크(그리스어로 원숭이란 뜻)는 뭐지? 하고 두번째의 질문을 던진 다음 "지혜가 모자란 피삐크도 맹수의 얼굴 묘사에는 명수라는 햄니체르(18세기 러시아의 우화 작가)의 시를 인용하여 들려 주었는데도 역시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런 것 이 초등학교의 실정이란 말입니다!" 하고 말했다. "저, 실례지만,"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가 입을 열었다. "저도 모르겠네요. 그 건 도대체 어떤 짐승들이죠?" "부인!" 칼로메이체프가 외쳤다. "부인께선 그런 걸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농민들은 왜 알아야 하죠?" "농민에겐 브르통(프랑스의 시인)이나 아담 스미스를 알기보다 피삐크나 스토 로포카밀을 아는 편이 휠씬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때 시퍄긴이 또다시 칼로메이체프를 공박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 담 스미스는 인류 사상의 빛나는 하나의 발광체이기 때문에(그는 이 대목에서 '샤토 디켐 주'를 자기 잔에 따랐다.) 어머니의 (그는 코밑을 쓸고 술냄새를 맡 았다.) 모유와 함께 그의 주의 주장을 빨아들인다는 것은 지극히 유익하다는 것 이었다. 그리고 시퍄긴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칼로메이체프도 함께 잔을 비우 고는 술맛이 좋다고 칭찬했다. 마르켈로프는 페테르부르크의 시종무관이 떠들어대는 쓸데없는 얘기에는 별 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나, 네지다노프에게는 두어 번 가량 호기심 어린 시 선을 던졌다. 그리고 둥글게 빚은 빵조각을 던졌을 때, 하마터면 그것이 웅변가 의 콧등에 명중할 뻔했다. 시퍄긴은 자기 처남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 들 부부는 마르켈로프를 괴짜로 취급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그를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식사 후 마르켈로프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당구실로 갔고, 네지다노프는 자기 방으로 갔다. 그는 복도에서 우연히 마리안나와 마주쳤다. 네지다노프는 그 옆 을 지나치려고 했으나 그녀는 날카로운 손짓으로 그를 불러 세웠다. "네지다노프씨," 그녀는 다소 당황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든 실은 조금도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그래도 전. 전. (그녀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신에게 이것만은 말씀드릴 필 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오늘 제가 마르켈로프씨와 숲속을 거니는 것을 보았을 때 당신은 아마 이상하게 생각하셨을 테죠. -어째서 두 사람은 그렇게까지 당황 해했을까? 무엇 때문에 이런 곳으로 왔을까- 마치 밀회라도 하나 하고 생각하 셨을 테죠?" "사실 좀 이상하게 생각은 되더군요." 하고 말하고 네지다노프는 계속 말을 이으려고 했다. "네지다노프씨," 그런 마리안나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 사람은 제게 구혼 을 한 거예요. 그리고 전 그걸 거절한 겁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건 이게 전부예요. 그럼, 안녕! 저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그녀는 획 몸을 돌리고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따라 가버렸다. 네지다노프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창문가에 걸터앉아서는 생각에 잠겼다. '정 말 이상한 여자도 다 있군. 그 당돌한 행동이며, 그 원하지도 않는 고백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도대체 왠가? 독창성을 보이기 위한 욕망 때문일까, 아니 면 말의 농간에 지나지 않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아마 자존심이라는 게 그중 가장 정확할 것 같다. 그녀는 아주 조그만 의혹마저도 참 아낼 수 없는 여자다. 남이 자기를 잘못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참을 수 없는가보다. 정말 이상한 여자로군!' 네지다노프는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한편 아래층 테라스에서는 그에 대한 화제가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얘 기는 그의 귀에까지도 똑똑히 들려왔다. "전 냄새로 알 수 있습니다." 칼로메이 체프가 이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빨갱이라는 것은 냄새로 알 수 있 습니다. 전에 모스크바 지사의 특수 기관에 근무하고 있을 때, 저는 라지슬라프 와 함께, 그 나라들 즉 빨갱이 족속과 분리파 교도(分離派敎徒)들에게 꽤 많은 신경을 썼으니까요. 어떤 때에는 후각으로 잡을 때도 있었지요, 공기 속의 냄새 로 말예요." 여기서 칼로메이체프는, 어느 날 모스크바 교외에서 어떤 늙은 분 리파 교도의 뒤꿈치를 붙잡았던 이야기를 덧붙여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경관 과 함께 이 노인을 급습했을 때 그 노인은 하마터면 창문에서 밖으로 뛰어내릴 뻔했다는 것이었다. 글쎄 그 한가한 노인은 그때까지 편안히 가게에 앉아 있었 다니까요!" 그러나 칼로메이체프는 이 노인이 감옥에 들어간 후 일체의 식사를 거부한 끝에 스스로 굶어 죽었다는 것만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댁의 새로 운 가정교사는," 혈기왕성한 시종무관은 말을 이었다. "빨갱입니다. 틀림없어요! 당신은 눈치 채지 못하셨나요? 그 사내는 절대로 자기가 먼저 인사를 하는 법 이 없거든요!" "아니, 어째서 그 사람이 먼저 인사를 해야 하죠?" 시퍄긴 부인이 되물었다. "전 오히려 그분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요." "전 이 집의 손님이고 그 사람은 이 집의 고용자올시다." 하고 칼로메이체프 는 외쳤다. "그렇고말고요. 그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하나의 고용 노동 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그 사람의 윗사람이고, 따라서 그 사람은 마땅히 먼저 인사를 해야 하는 거죠." "이봐요, 당신은 너무 까다로워서 탈이거든." 시퍄긴이 끼여들었다. "그런 사 고방식은, 실례지만, 어쩐지 지나치게 고루한 냄새를 풍긴단 말씀이야. 난 그 사 람의 봉사와 노동을 샀을 뿐이므로 그 사람은 여전히 자유로운 인간으로 남아 있는 거요." "그자는 절제라는 걸 모릅니다." 칼로메이체프가 말을 이었다. "절제, 르 프렝 (le frein) 말입니다! 저 빨갱이들은 모두가 다 그래요. 당신들에게 말이지만, 전 그들에 대해 매우 예민한 코를 가지고 있어요! 이 점에 있어서는 라지슬라프만 이 저하고 비견(比肩)할 수 있을 겁니다. 만일 저 가정교사가 내 손에라도 떨어 져 보세요. 본때있게 혼을 내줄 테니! 옴쭉달싹 못하게 혼을 내줄 거예요! 그러 면 그도 태도를 표변(豹變)해서 저한테도 고분고분 인사를 하게 될 테죠. 통쾌한 일일 겁니다!" '더러운 자식, 큰소리만 치는군!' 네지다노프는 하마터면 2층에서 이렇게 외칠 뻔했다. 그러나 바로 이때 그의 방문이 열리더니, 놀랍게도 마르켈로프가 방으 로 들어왔던 것이다. 10 네지다노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마르켈로프는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오더니, 인사도 미소도 없이 다짜고짜로 "당신은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알렉 세이 드미트리예비치 네지다노프임에 틀림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마르켈로프는 옆주머니에서 겉봉을 뜯은 편지 한 통을 끄집어냈다. "그렇다면 이걸 읽어보십시오. 바실리 니콜라예비치한테서 온 겁니다." 의미심장하게 목소 리를 낮추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네지다노프는 편지를 펼쳐 읽었다. 그것은 반(半)공식적인 회장(回章) 같은 것 으로, 이 편지의 지참인 세르게이 마르켈로프는 '동지'의 한 사람으로 완전히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소개한 다음, 상호 활동의 긴박한 필요성이며 어떤 규약의 보급에 관한 훈령이 적혀 있었다. 또한 이 회장에는 신임할 수 있 는 동지의 한 사람으로 네지다노프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네지다노프는 마르켈로프에게 손을 내밀고 의자를 권한 다음, 자기도 걸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르켈로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부터 피우기 시작 했다. 네지다노프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 고장 농민들에게 접근해 봤습니까?" 마침내 마르켈로프가 이렇게 물었다. "아뇨, 아직 그럴 틈이 없었습니다." "이리 오신 지는 오래 되었습니까?" "곧 두 주일이 됩니다." "일은 많습니까?" "뭐 그다지." 마르켈로프는 침울한 표정으로 기침을 했다. "음! 이 고장 농민들은 어지간히 머리가 빈 사람들이라서," 그는 말을 이었다. "아주 몽매한 사람들이죠. 교화시켜야 해요. 가난에 몹시 시달리면서도, 그 가난 이 어디서 오는지 설명해 줄 만한 사람을 갖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당신의 매부댁 농민들은, 제 생각으로 그다지 궁핍하지 않은 것 같던데요."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제 매부는 교활한 사람이라 남의 눈을 속이는 데는 명수지요. 이 지방 농민 은 사실상 그다지 심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매부에겐 공장이 하나 있는데, 바로 거기에 힘을 경주해야 합니다. 그곳을 파헤치기만 하면 개미집을 쑤신듯이 당장 소동이 일어날 겁니다. 팜플렛은 가져왔습니까?" "가져왔습니다만 많지는 않습니다." "그럼, 제가 갖다 드리지요. 왜 좀 많이 가져오질 않고!" 네지다노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르켈로프 역시 아무 말 없이 담배 연기만을 코로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칼로메이체프는 정말 진절머리가 나더군." 느닷없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 식사때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 나리에게 다가 가 뻔뻔스러운 상판때기를 온통 상처투성이로 만들어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그 통쾌한 꼴을 보이고 싶었던 거죠. 그러나 참았습니다! 지금은 시종무관 같은 걸 때리기보단 좀더 중대한사업이 있으니까요. 지금은 바보들이 바보 같은 소릴 지껄인다고 화를 낼 때가 아니라, 바보가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할 때란 말입니다." 네지다노프는 동의하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마르켈로프는 또다시 담배를 피 우기 시작했다. "이 집의 머슴들 가운데 한 사람 쓸모 있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마르켈로프 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시중을 드는 이반말고 그자는 생선처럼 매끄 러운 놈이죠, 또 한 사람 '키릴'이라고,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사내올시다. (이 키릴은 지독한 술꾼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 사람에게 한번 관심을 돌려보세 요. 난봉꾼이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도 사실 점잔을 떨 처지는 아니니까요. 그건 그렇고 제 동생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는 갑자기 머리를 쳐들며 그 노란 눈으로 네지다노프를 응시하며 이렇게 덧붙 였다. "그애는 매부보다 더 교활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 매우 유쾌하고 상냥스러운 부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굉장한 미인이 시더군요." "음, 페테르부르크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섬세한 표현을 즐기시는군요. 그 런데 저, 그 문제에 관해서는." 그는 이렇게 말머리를 꺼내다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빛을 흐리더니 하던 말을 중도에서 끊고 말았다. "어차피 당신과 는 나중에 다시 상의해야 할 테니까요."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여기선 안 됩니다. 문틈으로라도 엿듣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자, 우리 이러면 어때요? 오늘은 토요일이니까, 내일은 당신도 조카에게 공부를 가르치진 않으실 테죠? 그렇죠?" "내일 세 시엔 연습을 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연습이라뇨, 마치 연극이라도 하는 것 같군요. 그건 틀림없이 제 동생이 고 안해 낸 말일 테죠.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어때요? 지금 저와 함께 가시지 알겠습니까? 제 집은 여기서 10베르스타(약 25리) 되는 곳에 있습니다. 게다가 말이 좋아서 단숨에 달릴 수 있지요. 우리집에서 하룻밤 묵으시고 아침 나절을 보내신 다음, 내일 세 시까지 다시 이리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동의 하십 니까?" "좋습니다." 하고 네지다노프가 말했다. 마르켈로프가 들어오는 순간분터 그 는 거북스러운 홍분 상태에 빠져 있었다. 뜻하지 않은 이 사람의 접근은 그를 당황하게 하였으나, 또한 동시에 그의 마음을 끌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존재는 우둔할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정직하고 강인한 사람일 것이라고 느끼고 이해했던 것이다. 게다가 자작나무 숲에서의 이상한 해후며 뜻 하지 않은 마리안나의 고백. "자, 그럼 됐습니다!" 마르켈로프가 외쳤다. 빨리 준비를 해주십시오 그동안 전 아래로 내려가서 마차에 말을 매라고 일러놓겠습니다. 이 집 주인한텐 양해 를 얻지 않아도 무방할 테죠?" "제가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 말 없이 집을 떠난다는 건 좋지 않을것 같아서." "제가 그렇게 말씀해 드리죠." 마르켈로프가 말했다. "근심하지 말아요. 그사 람들은 지금 카드 놀이에 미쳐 있기 때문에 당신이 없어도 눈치 채진 못 할 겁 니다. 제 매부는 줄곧 대정치가가 되고자 노리고 있지만, 그 사람이 가진 재간 이라곤 카드 놀이를 잘한다는 것밖엔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을 수단으로 해서 출세하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자, 그럼 준비하세요. 곧 떠날 차비를 하겠습 니다." 마르켈로프는 나가버렸다. 한 시간 후 네지다노프는 마르켈로프와 나란히 여 행 마차의 커다란 가죽 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폭넓은 구식 마차였으나 그래도 매우 안정감을 주었다. 작달막한 마부가 마부대에 앉아서 말할 수 없이 유쾌한 새소리 같은 휘파람을 계속해서 불어젖히고 있었다. 검정 갈기에 꼬리를 땋아 늘인 얼룩말에 이끌려 삼두마차는 탄탄대로 위를 쏜살같이 내달렸다. 이미 밤의 그림자 속에 가려진 -출발할 때 열 시를 쳤었다.- 하나하나의 수목이며 숲, 들 판, 초원, 골짜기물이 어떤 것은 뒤로 어떤 것은 앞으로 미끄러지듯 질주해 갔 다. 마르켈로프의 조그만 마을은 -보르존코보라고 불리는 이 마을은 모두 합해 2 백 정보밖에 되지 않았으며 약7백 루블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현청 소재지 에서 약 3킬로미터 되는 곳에 있었고, 시퍄긴의 영지는 7킬로미터쯤 떨어져 있 었다. 보르존코보 마을로 가자면 시내를 지나가야 했었다. 두 사람의 새로운 지 기(知己)가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기 전에, 이미 교외의 초라한 민가들이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짜부라진 판자 지붕이며 일그러진 창문에 아롱진 희미한 불빛들이 눈에 들어오는가 하면 이윽고 거리의 포석(鋪石)에 바퀴가 요란스레 울리면서 포장마차는 위로 뛰어오르기도 하고 좌우로 뒤흔들리기도 한다. 그리 고 주랑(柱廊)이 달린 상인들의 몰골사나운 2층 석조 건물이며 원주카 늘어선 교회, 선술집들이 마차가 충격을 받을 때마다 껑충 위로 뛰어오르면서 마차 옆 을 스치고 지냐갔다. 일요일 전날 밤이라 이미 거리에는 통행인이 없었지만, 술 집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다. 거기서는 쉰 목소리며 술취한 노랫소 리, 코맹맹이 손풍금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문이 열릴 때마다 더러운 온기 와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찌르고, 빨간 등잔 불빛이 새어나왔다. 거의 모 든 선술집 앞마다 복실복실하고 허리통이 굵은 시골 말을 매단 짐마차들이 서 있었다. 말은 헝클어진 머리를 얌전히 숙인 채 잠들어 있는 듯이 보였다. 갈기 갈기 찢어진 옷에 허리띠도 안 맨 농군 한 사람이, 털모자를 자루처럼 머리 뒤 로 늘어뜨린 채 술집에서 나와 수레 의 채에 가슴을 기대고 서서 무언가를 힘없이 더듬으며 찾고 있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삐뚜름하게 벙거지를 쓰고 중국 무명 셔츠의 앞가슴을 풀어 헤친 깡 마른 맨발의 한 공장 직공이 -장화는 술집에 맡겨둔 것이다.- 망설이는듯 몇 걸음 걷다가 멈추어서더니 잔등을 긁고는 느닷없이 앗! 소리를 지르면서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러시아인은 술에 먹히고 있어!" 마르켈로프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통을 덜기 위해섭니다,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마부는 뒤돌아보지도 않 은 채 이렇게 말했다. 그는 술집 앞을 지날 때마다 휘파람을 그치고 자기 생각 에 몰두하는 것 같았다. "자, 빨리 몰아, 빨리!" 마르켈로프는 화가 나는 듯 외투 깃을 흔들면서 이렇 게 말했다. 마차는 양배추며 가마니 냄새로 악취를 풍기는 넓은 시장터를 가로질러, 문전 에 얼룩무늬 초소(哨所)가 있는 지사 저택, 탑이 있는 개인 주택, 최근에 심은 나무들이 벌써 시들기 시작한 가로수 길, 개짖는 소리와 쇠사슬소리가 쩔렁거리 는 가게 옆을 지나 성문 밖으로 빠져나왔다. 마차는 초저녁에 출발한 긴 짐마차 행렬을 앞지르고 다시 자유로운 교외의 대기 속으로 빠져나오자 버드나무가 늘 어선 넓은 한길을 따라 다시 힘차게 규칙적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마르켈로프 는 -그에 대해서 몇 마디 언급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여동생인 시퍄긴 부인보다 여섯 살이나 위였다. 그는 포병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장교로 임관되 어 그곳을 졸업했다. 그러나 중위 시절에 독일 출신의 사령관과의 불쾌한 사건 때문에 군대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때부터 그는 독일인, 특히 러시아에 귀화 한 독일인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의 퇴역은 아버지와의 언쟁을 불러왔고, 그 후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은 후 조그만 마을을 상속받고 그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자기가 숭배하는 각양각색의 총명하고 진보적인 사람들 과 자주 접촉을 가졌고, 마침내 그의 사고 방식도 그 방향으로 굳어졌다. 마르 켈로프는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었으나, 주로사업에 관련된 책을 읽고 있었고 특 히 게르첸을 좋아했다. 그는 군인적인 자세를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어서 스파르 타인이나 수도자와 같은 생활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몇 년 전에는 어떤 여자 를 열렬히 사랑한 적이 있었으나, 그녀는 아주 매정하게 그를 배신하고 어느 부 관과 결혼해 버렸다. 공교릅게도 그 부관 역시 독일인이었다. 마르켈로프는 그 부관까지도 증오하게 되었다. 그는 러시아 포병의 결함에 대해서 전문적인 논문 을 쓰려고 시도했으나, 서술의 재능이 전혀 없었으므로 단 편도 끝까지 완성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어린애 글씨 같은 큼직하고 서투른 필적으로 커다란 잿빛 원고지를 계속 메워 나가고 있었다. 마르켈로프는 자포자 기에 가깝도록 대담무쌍한 그리고 자기 자신이나 학대받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는 항상 모욕감을 느끼고, 무슨 일에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의 한정 된 두뇌는 언제나 한 우물만을 파나갔다.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그의 허위와 기만에 대해서 대단히 멸 시하고 중오했다. 상류 사회의 인간, 즉 그의 이른바 반동층(反動層)에 대해서는 날카롭고도 거 칠게 대하고 있었으나, 일반 민중들에게는 소탈했고 농민에게는 친형제 못지않 게 친절히 대해 주었다. 농장 경영주로서의 그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머 리 속에는 여러 가지 사회주의적인 계획들이 맴돌고 있었으나, 마치 포병술의 결함에 대해 쓰기 시작한 논문을 탈고할 수 없었듯이 그러한 계획들도 실현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언제 무슨 일을 하든 도대체 운이라는 것이 따르지 않았다. 유년 학교에서는 실패자란 별명까지 붙었었다. 성실하고 곧은데다가 정 열적이면서도 불행한 생각을 지녔던 그는, 경우에 따라서는 악한(惡漢)이라 불 릴 정도로 잔인하고 흉악한 행동을 할 때도 있었으나 그와 동시에 추호의 미련 이나 동요도 없이 자기 자신을 희생시킬 수도 있었던 것이다. 거리에서 3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마차는 어두컴컴한 사시나무숲 으로 접어들었다. 보이지 않는 나뭇잎들이 살랑살랑 바람에 떨로 신선하면서도 씁쓰레한 숲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 위에서는 희미한 달빛이 스며들고 아래에는 나무 그림자들이 뒤엉켜 있었다. 구리 방패처럼 벌겋고 둥근 달이 벌써 지평선 위로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마차가 숲으로부터 빠져나오자, 이내 조그만 지 주 저택이 눈앞에 나타났다. 불을 켠 세 개의 창문이 네모꼴로 빛나면서, 나직 한 집 정면에서 블룩 튀어나와 보였다. 달은 집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활짝 열어젖뜨린 대문은 아직까지 한 번도 닫힌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어두컴컴한 마 당에는 높다란 포장마차가 보이고 하얀 역관마(驛館馬) 두 필이 뒤쪽 횡목에 매 여 있었다. 어디서 달려 나왔는지 하얀 강아지 두 마리가 적의 없는 순진한 목 청으로 시끄럽게 짖어댔다. 집안 사람들이 서성거리기 시작할 즈음 마차는 현관 입구로 다가섰다. 마르켈로프는 발로 쇠발판을 더듬으면서 -관례에 따라 집의 대장장이를 시켜서 만든 쇠발판이 아주 불편한 곳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가까 스로 마차 밖으로 빠져나오더니 네지다노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드디어 도착했군요. 당신은 이제 여기서 뜻밖의 손님들을 만나게 될 겁니다. 물론 당신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만. 자, 어서." 11 뜻밖의 손님이란 우리의 옛 지기 오스트로두모프와 마슈리나였다. 두 사람은 극히 초라하게 장식된 마르켈로프의 조그만 응접실에 앉아 석유 등잔 밑에서 맥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은 네지다노프가 왔는데도 별로 놀라 는 기색이 없었다. 마르켈로프와 함께 네지다노프가 오리라는 것을 미리부터 알 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네지다노프는 두 사람을 보고 무척 놀랐다. 그가 방 에 들어섰을 때 오스트로두모프는, "야아, 오랜만이군!" 하고 말했을 뿐이었다. 마슈리나는 홍당무처럼 얼굴을 붉힌 다음 말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르켈로프는 오스트로두모프와 마슈리나가 가까운 시일 내에 꼭 실 현해야 할 '공동 사업'을 위해 이곳으로 파견된 것이라고 네지다노프에게 설명 해 주었다. 두 사람은 일주일 전에 페테르부르크를 떠났는데, 오스트로두모프는 선전을 위해 S현에 남고, 마슈리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기 위해 K로 간다는 것 이었다. 아무도 마르켈로프에게 언짢은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느닷없이 화를 내 고 있었다. 그는 수염을 뜯는가 하면 눈을 번쩍이면서 잘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 지만 또렷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가지가지의 난맥상 (亂脈相)과 즉각 행동에 옮길 필요가 있다는 것, 실제로 모든 것이 준비된 지금 행동을 망설인다는 것은 비겁하기 짝없다는 것, 가령 종기가 아무리 무르익었다 할지라도 침으로 종기를 찔러야 낫듯이, 어느 정도까지의 폭력은 불가피한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는 침의 비유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 비유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의 착상이 아닌 어떤 책에서 읽은 것 이었다. 마리안나에게서 완전히 실연의 고배를 마신 그는 이미 아무런 미련도 없이 하루바삐 '사업'에 착수하기만 고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도끼 로 물건을 빠개듯이, 아무런 계략도 없이 날카롭고 단순하게 그러나, 독기 어린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파리하게 질린 입술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말은 단조 로우면서도 묵직해서 마치 집을 지키는 사나운 늙은 개가 사납게 짖어대고 있 는 듯이 느껴졌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근처의 농군과 직공들을 잘 알고 있으며, 그중에는 유능한 인간, 즉 골로플료츠키 예레메이와 같이 어떤 일에도 당장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골로플료츠키 예레 메이 즉 골로플료츠 마을의 예레메이라는 이름이 끊임없이 그의 입에서 오르내 렸다. 그는 열 마디마다 오른손으로, 그것도 손바닥이 아닌 손등으로 탁자를 내 리치고 왼손으로 집게손가락만을 펴서 허공을 찌르곤 했다. 그 털복숭이 깡마른 두 손이며 손가락, 그 신음하는 듯한 목소리, 이글이글 불타는 두 눈은 강력한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마르켈로 프는 네지다노프와 그다지 말이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 쌓이고 쌓였던 울분은 이제 드디어 폭발을 한 것이었다. 마슈리나와 오스트로두모프는 미소를 짓기도 하고 눈짓도 하고 때로는 짤막한 감탄사를 내기도 하면서 그의 말에 동감을 표 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네지다노프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 이상한 현상이 일어 나고 있었다. 그는 우선 마르켈로프에 대한 반박을 시도하면서, 시기가 성숙하 기도 전에 분별 없이 성급히 서두르는 것은 해로운 것이라고 설득했다. 무엇보 다도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모든 것을 아무 의심도 없이 제멋대로 결정해 버리 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려 들지도 않으면서 국민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 지 그것을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의 신경은 현악기의 현처럼 팽팽히 죄어지면서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는 절망에 빠진 사람처럼 눈에는 울분의 눈물까지 괴고, 깨지는 소리로 외쳐대면서 마르켈로프처럼 흥분 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마르켈로프보다 한충 더 심한 정도였다. 무엇 이 그를 그토록 흥분시켰는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으리라. 최근에 와서 자기도 모르게 약해진 듯이 느껴지는 자기 마음에 대한 뉘우침 때문이었을까?자기 자 신은 물론 타인에 대한 울분 때문이었을까? 무언지 모르지만 꿈틀거리는 마음 속의 벌레를 짓누르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새로 도착한 밀사 앞에 서 자신의 용감성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일까? 혹은 마르켈로프의 말이 그대로 작용하여 그의 피를 들끓게 한 것일까? 그들의 이야기는 동이 틀 무렵까지 계 속되었다. 오스트로두모프와 마슈리나는 자기 의자에서 꼼짝하지 않았고, 마르 켈로프와 네지다노프는 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마르켈로프는 시종일관 한자리 에 서 있었으므로 마치 보초를 방불케 했으며, 네지다노프는 고르지 않은 걸음 걸이로 어떤 때에는 천천히 혹은 성급하게 한시도 쉬지 않고 방안을 걸어다니 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부터 취해야 할 수단과 방법, 각자가 분담해야 할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여러 가지 팜플렛과 전단을 골라서 다발로 묶기도 했다. 그 리고 분리파 교도인 골루시킨 상인의 이야기도 나왔다. 그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긴 하지만 매우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그 밖에, 키슬랴코 프라는 젊은 선전원도 화제에 올랐다. 그는 아는 것은 무척 많았지만 너무나 약 아빠져 자기의 재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는 것이었다. 나 중에는 솔로민의 이름도 나왔다. "방직 공장을 관리한다는 그 사람 말입니까?" 시퍄긴의 식탁에서 들은 바 있 는 그의 이름을 상기하고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물었다.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마르켈로프가 말했다. "당신도 그 사람과 친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린 아직까지 그의 정체를 확실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유능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어요." 골로플료츠 마을의 예레메이가 또다시 화제에 올랐다. 그 다음 시퍄긴 집의 키릴로와 두치크(얼굴이 퉁퉁 부은 듯한 사람)란 별명을 가진 멘델레이가 추가 되었다. 그러나 이 두치크란 사내는 술을 마시지 않을 때에는 용감하지만, 일단 술을 마시면 겁을 집어먹으며 게다가 거의 언제나 술에 취해 있기 때문에 그다 지 신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는 사람 중에서" 하고 네지다노프가 마르켈로프에게 물었다.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마르켈로프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만 말할 뿐, 단 한 사람의 이름도 밝히지 않 았다. 그러고는 거리의 상인과 신학생에게로 화제를 옳겼다. 그들은 강한 완력 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매우 유용하다는 것이었다. 일단 완력을 휘두를 단계가 되면 그야말로 한몫 단단히 할 것이라고 마르켈로프는 말했다. 네지다노프는 귀 족에 대해서도 약간의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나 마르켈로프의 대답에 의하면 젊 은이들 가운데 대여섯 명의 유망주가 있고 그중에서도 가장 과격한 사람은 독 일인인데, 다 알다시피 독일인은 하나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동지를 기만하거나 배신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키슬랴코프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올는지, 그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네지다노프는 군인에 대해서도 역시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자 마르켈로프는 아무 말 없이 잠시 자기 의 긴 구레나룻을 잡아뜯고 있더니, 지금 현재론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없으니 키슬랴코프가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마지막 실토를 했다. "아니, 대관절 그 키슬랴코프란 사람은 누굽니까?" 네지다노프가 참을 수 없 다는듯 이렇게 외쳤다. 마르켈로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그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긴 저도 그 사람에 대해 잘은 모릅니다." 하고 그는 덧붙였다. "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사람이 보내는 편지는 정말 멋있습니다. 정 말 멋져요! 나중에 보여드리죠. 당신도 놀랄 겁니다! 그건 글이 아니라 불이란 말이에요! 게다가 그 멋진 활동이란, 러시아 전국을 다섯 번이나 여섯 번 횡단 한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정거장에서마다 열 장 내지 열두 장씩의 편지를 보내 온답니다!" 네지카노프는 의심쩍은 눈으로 오스트로두모프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목상처 럼 앉은 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마슈리나도 입가에 쓴웃음을 지은채 말 한마디 없었다. 네지다노프는 마르켈로프에게 농촌 경영에 대한 사회적 개혁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오스트로두모프가 입을 열었다. "지금 그런 것을 의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 래도 나중엔 몽땅 갈아치워야 할 판인데." 대화는 다시 정치적인 화제로 되돌아갔다. 마음속에 숨은 벌레는 여전히 네지 다노프의 가슴을 괴롭게 물어뜯고 있었다. 그러나 그 괴로움이 강하면 강할수 록, 그는 더욱 큰소리로 맹렬히 떠들어댔다. 그는 겨우 맥주 한 잔을 마셨을 뿐 이었지만, 가끔씩 자신이 완전히 취해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심장은 병적으로 두근거렸다.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가까스로 토론이 끝났다. 일동은 문지방에서 잠들어 있는 카자흐 소년의 옆을 지나서 각자의 침상으로 흩어져 갔다. 네지다노프는 침상에 들기 전에 문앞의 마룻바닥을 응시한 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 있 었다. 그는 마르켈로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에서 끊임없이 마음을 쥐어뜯는 듯한 구슬픈 음향을 느꼈던 것이다. 마르켈로프는 자존심의 손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마땅히 괴로워했어야 했다. 개인적인 행복을 위한 희망은 산산 이 부서지고만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자신을 잊으려고 애쓰며, 진리라고 믿는 것에 온몸을 내맡기고 있으니! '옹졸한 인간이군.'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생 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이를테면 나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나 같은 이 러한 인간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그런 옹졸한 인간이 되는 쪽이 백 배나 낫지 않을까? 그러나 이때,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하에 울분을 느쪘다.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나도 희생할 각오쯤은 되어 있지 않나 말야! 너희 들도 기다려 보면 알 거다. 그리고 파를린, 자네도 이제 나를 알게 될 테지. 비 록 내가 미학도고, 시를 쓴다 할지라도 말야.' 그는 화가 나는 듯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치켜올리고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급히 옷을 벗고 습기 찬 싸늘한 침상 속으로 쑤시고 들어갔다. "안녕히 주무세요!" 문밖에서 마리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당신 옆방 이에요." "안녕."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때 문득 간밤 내내 그녀의 시선이 자기에게서 떠나지 않았던 것을 상기했다. "저 여잔 어쩌자는 걸까?" 그는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아아, 빨리 잠이나 들었으면!' 그러나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히기는 힘들었다. 아침해가 제법 하늘 높이 떠올 랐을 무렵에야 그는 가까스로 괴롭고 무거운 잠에 빠질 수 있었다. 느지막이 두통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옷을 입고 나서 자기 방 2층 창문으로 다가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솔직히 말해 마르켈로프의 집은 지주의 집 이라고 할 만한 저택은 못 되었다. 숲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조그만 집 한 채가 바람받이 위에 서 있었다. 그 옆에 창고, 마구간, 움, 반쯤 무너져내린 초가 지붕 오막살이가 서 있었고 또 한켠에는 초라한 연못, 채마밭, 아마밭 그 리고 역시 지붕이 반쯤 무너져내린 또 한 채의 오막살이가 서 있었다. 그리고 좀더 멀리 떨어진 곳에 건조장, 곡물 헛간, 텅 빈 방앗간이 보였다. 이것이 시야 에 들어오는 그의 재원(財源) 전부였다. 모든 것이 너무나 초라하고 낡아, 손질 을 하지 않아 황폐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잘못 이식한 묘목처럼 보였다. 아니, 처 음부터 번영 시대라고는 모르는 것 같았다. 네지다노프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마슈리나는 식당에서 사모바르 앞에 앉아 네지다노프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오스트로두모프는 어떤 사업을 위해 떠났으므로 두 주일 안엔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집주인은 품 팔이 일군들을 돌보기 위해 나갔다는 것이었다. 마르켈로프는 이제 5월도 막바 지로 접어들고 그다지 서둘러야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자비로 조그만 자작나 무 숲을 벌목하리라 생각하고 아침 일찍 그곳으로 떠난 것이었다. 네지다노프는 이상한 심적인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젯밤만 해도 조금도 지체할 이유가 없으며 이제 남은 것은 당장 '행동에 옳기는 것'뿐이라고 장황하 게 떠들어댔으나,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지체치 않고 행동한다는 것인가? 마슈 리나한테는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그녀는 동요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여자로 서 자기 할 일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느끼지 않았다. 그녀가 할 일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K로떠난다는 것이었고, 그 밖의 일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네지다노프는 그녀와 무슨 말을 나눠야 좋을지 몰라 차를 마시자 곧 모자를 쓰고 자작나무 숲을 향해 밖으로 나갔다. 그는 한길에서 거름을 주고 돌아오는 농군들을 만났다. 마르켈로프의 지난날의 농노들이었다. 그는 그들에 게 말을 걸어보았으나 요령 있는 대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들 역시 피로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네지다노프 자신이 느끼는 피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 다. 그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육체적인 피로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자신들의 옛 지주는 마음씨 착한 나리지만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 영지도 조만간에 파산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예언했다. 일의 순서도 모르면서 조상과는 달리 만사를 제멋대로 해치우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가끔 지나치 게 현명한 말을 하므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참 좋은 사 람이지만, 네지다노프는 계속 걸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마르켈로프를 만 났다. 그는 일군들에게 둘러싸여 걷고 있었다. 멀리서도 일군에게 뭐라고 설명하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으나, 이윽고 한 손을 내젓는 것으로 보아 설 명을 단념한 것 같았다. 그와 나란히 관리인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몸가짐으로 보아 조금도 묵직한 데가 없는, 시력이 약한 젊은이였다. 그는 끊임없이 "그건 주인님 의사에 달렸습죠"를 되풀이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보다 독창적인 의견 을 기대하고 있는 자기 주인을 몹시 화나게 하고 있었다. 네지다노프는 마르켈 로프 옆으로 다가갔다. 그는 마르켈로프의 얼굴에서도 자기자신이 느끼는것과 똑같은 피로감을 느꼈다.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었다. 마르켈로프는 다시 간밤 의 여러 '문제'며, 혁명이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이 야기는 그다지 길지 않았으나,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피로의 표정이 가시지 않 았다. 그는 온몸이 먼지와 땀투성이 였다. 대팻밥이며 푸른 이끼들이 실처럼 옷 에 달라붙어 있었고,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일군들은 침묵 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겁을 집어먹은 것도 아닌, 그렇다고 비웃는 것도 아 닌 야릇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네지다노프는 마르켈로프의 모습을 보자, 다 시금 오스트로두모프의 목소리가 머리 속으로 울려 퍼졌다. "무엇 때문에 그런 걸 하는 거지? 아무래도 나중에는 몽땅 갈아치워야 할 판인데!" 잘못을 저지른 듯한 한 일군이 마르켈로프에게 벌금을 물지 않게 해달라고 끈덕지게 조르고 있었다. 마르켈로프는 처음 얼마 동안은 성이 나서 맹렬히 외쳐댔지만, 결국은 용서해 주고 말았다. '아무래도 나중엔 몽땅 갈아치워야 할 판인데.' 네지다노프 는 집으로 가고 싶으니 마차와 말을 빌려달라고 그에게 부탁했다. 마르켈로프는 이 부탁에 적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곧 마차 준비를 시키겠다고 대답했다. 마르켈로프는 네지다노프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비틀거릴 정도로 녹 초가 되어 있었다. "아니 왜 그러시오?" 하고 네지다노프가 물었다. "지쳐버렸어요!" 마르켈로프는 거칠게 내뱉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설명을 해줘도! 도대체 알아들어야죠. 게다가 지시한 대로 하지도 않으니 우선 러시아 어조차 모르거든요. '농지(農地)'라는 말은 잘 알면서도 '참여'라고 하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른단 말이오! 그건 러시아어가 아니란 말인가. 제기랄! 그 자들 은 내가 땅이라도 나눠주는 줄 아는가봐요!" 마르켈로프는 농군들에게 조합이라 는 것을 설명하고 그것을 자기 영지 안에 설립하려고 했으나, 농군들은 고집을 부리며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그중 한 사람은 거기에 대해 이런 말까지 했 다. "옛날에도 구멍은 깊었으나 지금은 밑창까지 보이지 않게 됐답니다." 그런 데다 다른 농군들도 일제히 깊은 한숨을 내쉬었기 때문에 마르켈로프는 완전히 패배하고 만 셈이 었다. 집안에 들어서자 마르켈로프는 시중드는 사람들을 모두 물러가게 한 다음 마 차며 말, 식사에 관한 것까지 직접 자신이 지시하기 시작했다. 하인이라고는 조 그만 카자흐 소년과 식모, 마부 그리고 옛날 마르켈로프의 할아버지 시중을 들 었다는, 살쩍이 많은 노인이 전부였다. 파도무늬의 긴 카프탄(러시아의 농부들 이 입는, 띠가 달린 상의)을 입은 이 노인은 시종 울적한 표정으로 주인을 바라 볼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 일을 하고 싶어도 기력이 없는 것 같았 다. 노인은 조그만 상자 위에 웅크리고 앉아서 잠시도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삶은 계란과 청어와 쇠고기가 든 야채 수프로 식사를 마치자 카자흐 소년이 낡은 포마드 상자에 든 겨자와 향수병에 든 식초를 가져다 주었다. 네지다노프 는 전날 밤에 타고 온 바로 그 여행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이번엔 말이 올때의 세 필과는 달리 두 필밖에 없었다. 한 필은 편자를 씌우자 다리를 절었 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마르켈로프는 거의 말이 없었다. 그는 아무것 도 먹지 않고 거칠게 한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농장에 대한 불평을 두서너 마디 털어놓았으나, '아무래도 나중엔 몽땅 갈아치우게 마련이니까.'하는 듯이 또다시 한 손을 내저었다. 마슈리나가 거리까지 데려다 달라고 네지다노프에게 부탁했다.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거리로 나가야 했던 것이다. "돌아을 때에는 걸어도 괜찮아요. 그렇잖으면 돌아오는 농군에게 말해 짐마차 를 타고 와도 좋구요." 마슈리나는 이렇게 말했다. 마르켈로프는 층계 입구까지 그를 전송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까운 시일내 에 다시 당신을 부르러 보내겠으니, 그때엔. 그때엔(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으나 이내 용기를 내어) 완전히 결말을 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엔 솔로민도 올 것입니다. 다만 나는 바실리 이바노비치한테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릴 뿐입니 다. 그렇게 되면 단 하나, 즉 지체 없이 '행동에 착수'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민 중 -'참여'라는 말을 이해 못 하는 그 민중을 말한다.- 은 더 이상 기다리기를 원치 않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됐죠, 당신이 제게 보여준다던 그 편지는? 뭐라고 했더라, 키 슬랴코프던가요?"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물었다. "다음에. 다음에." 마르켈로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모두 한꺼번에 하도록 합시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단단히 준비하세요!" 마르켈로프의 마지막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옆에는 '머슴 중의 머슴'이라고 할 조부모 때부터의 늙은 하인이 역시 아까와 다름없는 침울한 눈으로 서 있었다. 노인은 귀가 먹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면서도, 꾸 부러진 허리 위의 가슴을 앞으로 내민 채 두 손을 잔등에 얹고는 검정 빵과 파 도 무늬의 카프탄 냄새를 사방에 풍기며 멍청히 서 있었다. 마슈리나는 거리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마차 가 거리의 성문에 이르자 그녀는 갑자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마르켈로프)가 불쌍해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갔다. "지나치게 안달을 하더군요." "제가 불쌍하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니예요." "그럼 무슨 뜻이죠?" "그는 불행한 사람이에요. 운이 없어요. 그만한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거든요. 들어맞질 않아요!" 네지다노프는 자기의 동행자를 바라보았다. "그럼 당신은 뭔가 아시는가보군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그런 것을 느끼게 마련이 니까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마슈리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한 시간 후 네지다노프는 시퍄긴의 마당 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밤새 한잠도 못잔데다 가 그 의론과 그 토론들. 창문으로 아름다운 얼굴이 나타나며 그에게 정다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시 퍄긴 부인이 그 귀가를 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눈이 저렇게도 아름다울까!' 네지다노프는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12 식사때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네지다노프는 식사를 마친 후 좌중 의 혼잡을 틈타서 자기 방으로 빠져나갔다. 그는 이번 여행에서 얻은 인상을 정 리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자신과 단둘이 마주 앉고 싶었던 것이다. 식사를 하는 동안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여러 번 그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으나 말을 걸 처지는 못 되는 것 같았다. 한편 마리안나는 뜻밖의 행동으로 그를 놀라게 한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지 네지다노프를 피하고 있었 다. 네지다노프는 펜을 들었다. 그는 자기 친구 실린과 종이 위에서 이야기를 나 누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친구에게조차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몰랐 다. 너무나 많은 모순된 사상과 감각들이 그의 머리 속에 뒤엉켜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정리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이 모든 것을 다음 날로 연기했다. 식사하는 손님들 중에는 칼로메이체프도 끼여 있었다. 그가 오 늘처럼 신사적인 모멸과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 다. 그러나 그의 허물 없이 떠들어대는 이야기도 네지다노프에게는 아무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아무것도 그의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마치 구름 속에라도 들어앉은 것 같았다. 그것은 흐릿한 장막처럼 그와 외계 사이를 가로 막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 장막을 통해 단지 세 얼굴만이 그의 눈에 보였다. 게다가 여자의 얼굴이었고, 한결같이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 었다. 그것은 시퍄긴 부인과 마슈리나 그리고 마리안나의 얼굴이었다. 이건 무 슨 뜻인가? 왜 세 얼굴만이 보이는 것인가? 그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으 며, 그들은 내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그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상념 이 그를 휩쓸었다. 피할 수 없는 종말, 죽음에 대한 상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있어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허무라는 개연성(蓋然性) 앞에 전율하 기도 하고 때로는 기쁨과 흡사한 마음으로 그것을 환영하면서 여러 가지로 그 상념을 되씹어왔던 것이다. 드디어 그는 자기에게 낯익은 특별한 느낌을 느쪘 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아 잠시 명상에 잠긴 후, 거의 수정 없이 다음과 같은 시를 자기의 비밀 수첩에 적어넣었다. 사랑하는 벗이여,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이것은 내 유언이 되리라. 내가 남긴 무수한 필적은 그때는 남김 없이 없애다오! 내 몸엔 꽃을 덮고 방안엔 햇빛이 스미게 하고 열려진 문밖에는 악사의 무리를 앉혀다오. 그러나 비통한 울음은 금하고 축제의 노래처럼 광란의 왈츠를 미친 듯이 연주해 다오 현악의 연주 밑에! 멀어져가는 현의 여운에 꺼져가는 청각을 다소곳이 기울이며 잠자듯이 나는 사라져가리. 허황된 신음으로 죽음 앞의 정적을 흐리지 않고 가벼운 지상의 기쁨, 가벼운 음향을 자장가 삼아 새로운 세계로 나는 가리라! '벗'이라는 말을 썼을 때 그는 역시 실린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작은 소리 로 자작시를 낭송해 보고 자기 손에서 나온 그 시에 자신도 깜짝 놀랐다. 이 회 의, 이 무관심, 이 경솔한 불신 이 모든 것은 평상시의 자신의 주의와 너무나 흡사했고, 더구나 마르켈로프의 집에서 자기가 말한 자기의 주장과 너무나 일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서랍 속에 수첩을 내던지고는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훤히 동터 오는 하늘에서 첫 종달새가 울기 시작한 새벽녘에야 가까스 로 잠들 수가 있었다. 그 다음날 네지다노프가 막 수업을 끝내고 당구실에 앉아 있는데 시퍄긴 부 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주위를 살핀 후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오더 니 자기 방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녀는 가벼운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매우 산 뜻해 보이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가장자리에 레이스가 달린 소매는 팔 꿈치까지 내려와 있었고 폭넓은 리본이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또한 숱 많은 머 리카락이 목덜미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의 모든 것 반쯤 감겨진 부드러운 두 눈, 목소리, 몸가짐 그리고 그 걸음걸이에 이르기까지 느긋한 상냥스러움이 넘쳐 마치 그녀의 몸 전체가 정다운 애정으로 숨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경계하는 듯하면서도 격려를 주는 애정이기도 했다. 시퍄긴 부인은 아늑하면서 도 아담한 자기 방으로 네지다노프를 안내했다. 방 전체가 꽃과 향수 냄새 그리 고 여자의 옷과 일용품에서 풍기는 정결하고 상쾌한 향기로 넘쳐 홀렀다. 부인 은 그를 안락의자에 앉히고 자기도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의 여행 소감이며 마르켈로프의 생활 방식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묻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묻는 품이 말할 수 없이 상냥하고 조심스러웠으며 정다웠다. 그녀는 오빠의 운명에 대해서 마음으로부터의 동정을 표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네지 다노프 앞에서 오빠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로 미루어보아 마리안나가 오빠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감정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살며시 슬픈 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이 마리안나가 오빠의 선택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처녀였기 때문인지 끝내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 러나 중요한 것은 시퍄긴 부인이 네지다노프를 구슬러서 그의 마음속에 신뢰감 을 불러일으키고, 지금까지의 서먹서먹한 태도를 없애버리려고 어지간히 애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네지다노프가 자기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하면서 다소 책망 어린 핀잔까지 주기도 했다. 네지다노프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의 손이며 어깨를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그녀의 장밋빛 입술과 가볍게 나부끼는 머리카락에 눈을 주기도 했다. 그는 처음 얼마 동안은 아주 짤막하게 그녀의 묻는 말에 대답하고 있었다. 그는 목과 가슴이 무언가에 눌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도 차 차 다른 감정으로 변해 갔다. 여전히 불안감이 깃들이기는 했으나, 거기에는 일 종의 감미로운 느낌도 없지 않았다. 이렇게 신분이 높은 아름다운 부인이, 이러 한 귀족 부인이 자기와 같은 일개 초라한 대학생에게 흥미를 가지리라고는 꿈 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흥미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그에게 교태를 부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네지다노프는 마음 속으로 자문해 보랐다. '왜 그녀는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는 해답 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그는 그런 해답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퍄긴 부인은 콜랴의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뿐만 아니라 그녀 는 자기가 네지다노프와 가까이 사귀고 싶었던 동기는 자기 아들 문제에 대하 여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한편으로 러시아의 아동 교육에 대하여 그의 의견을 듣고자 한 것이었다고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갑자기 그러한 생각이 싹텄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중 요한 것은 이러한 그녀의 말이 아니라 어떤 육감적인 흐름이 그녀를 엄습했다 는 사실에 있었다. 그녀는 굴복을 모르는 이 사내의 머리를 자기 발밑에 숙이게 함으로써 그를 완전히 정복해 버리고 싶은 욕망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뒤로 돌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50년 동안 겨우 한 개의 훈장과 휘장을 받았을 정 도로 매우 옹졸하고 융통성이 없는 장군인 아버지와 지나치게 약삭빠른 소러시 아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대부분의 동향인과 마찬 가지로 지극히 단순하고 다소 어수룩해 보이기까지 했으나 그러면서도 가능한 한 이득을 모두 빼낼 수 있는 수완을 지니고 있었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의 집안은 그다지 유복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그녀는 스몰리느이(황실 직할의 귀족 여학교) 수도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그녀는 공화당으로 지목되 고 있었으나, 열심히 공부하고 품행이 단정했기 때문에 남의 눈에 들었고 평판 도 좋았다. 스몰리느이를 마친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조그맣고 아담한, 그러나 몹시 추운 집으로 이사를 했다. 오빠는 시골로 가버리고, 훈장과 휘장을 가진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이 새로운 집은 말을 하면 입에서 김이 하얗게 서릴 정도였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마치 교회에 온 것 같네요." 하며 곧 잘 웃곤 했다. 그녀는 가난에 따른 온갖 불편과 구차한 살림을 꿋꿋이 참아 나갔다. 그녀는 놀랄 만큼 성격이 원만했다.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새로운 지기와 교제를 유지하며 교유(交遊)를 넓혀갔다. 그 녀에 대한 칭찬은 자자했으며 상류 사회에서조차도 매우 아름답고 교양 있으며 예의바른 처녀라는 정평을 받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몇 사람의 구혼자가 있었 다. 그녀는 그중에서 시퍄긴을 골라잡고, 극히 간단하고 신속하면서도 교묘하게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러나 시퍄긴 쪽에서도 이내 그녀보다 나은 배 필을 구하기 힘들다고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영리하고 약하지 않은 아니 오히 려 마음씨 착한 편이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싸늘하고 무관심한 여자였다. 그녀는 내심 자기에게 무관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사랑스러운 이기주의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넘쳐 있었다. 이런 아름다움 속에는 시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감수 성은 없지만, 대신 상냥스러운 동정이 있고 부드러운 애정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이기주의자들의 의견에 반항했다가는 큰일이다. 그들은 권세욕이 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타인의 독립을 참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시 퍄긴 부인과 같은 여자들은 경험이 없는 정열적인 인간을 흥분시키고 자극하기 를 좋아하지만, 반면에 자신들은 규칙적이며 고요한 생활을 즐기는 것이다. 그 들은 선을 행하는 데에도 인색하지 않고 동요도 모른다. 그리고 남에게 명령하 고 남의 마음을 끌고 남 의 마음에 들려는 끊임없는 희망이 그들에게 움직임과 광채를 더해 준다. 그들 은 대개 완고한 의지의 소유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닌 그 매력 자체도 부분 적으로 이 완고한 의지에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맑고 순결한 여인의 얼굴에 무 의식적인 비밀의 애무가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남자는 거기에 대항할 힘을 잃고 만다. 그리고 이제나저제나 하며 때가 오기만을 얼음이 녹기 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 빛나는 얼음은 빛으로 희롱할 뿐 결코 녹지도 않거니와 그 빛을 흐리지도 않는 것이다. 교태를 부린다는 것은 시퍄긴 부인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에게 어떠한 위험도 없으며 또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 었다. 그러나 남의 눈을 흐리게 하고 남의 목소리를 떨거나 그치게 하며 남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는 것은 아아, 그것은 그녀의 마음속에 얼마나 감미로운 느 낌을 주었던가! 밤늦게 깨끗한 잠자리에 몸을 뉘고 평화롭게 잠을 청하면서 그 흥분된 목소리와 눈초리, 한숨을 상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유쾌한 일이었던가! 그러고는 흐뭇한 만족의 미소와 더불어 아무도 자기를 침범할 수도 건드릴 수 도 없다는 자의식에 사로잡힌 채 교양 있는 남편의 합법적인 품안에 공손히 자 기 몸을 내맡기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 다. 그녀는 때때로 감격적인 나머지 선행을 해서 이웃을 돕고싶은 충동을 느낄 때조차 있었다. 언젠가 미칠 듯이 그녀를 사랑하던 대사관의 비서관이 자살을 기도하자 그 후 그녀는 조그만 자선원(慈善院) 하나를 세운 적도 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매우 약한 종교심밖에 가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서관을 위해 마음속으로부터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이런 뜻에서 그녀는 네지다노프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를 자기 의 발밑에 꿇어앉히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녀는 네지다노프에게 자 기 옆으로 바싹 다가오게 하고는 그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털어놓을 듯한 시늉 을 해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 아름다운 용모에 호기심을 가진 존엄한 과격파 가 어설프게 슬금슬금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정다운 호기심과 어머니다 운 애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하루, 한 시간 아니 일분 후면 이 모든 것은 흔 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그녀도 즐거웠다. 그러나 한편으론 다소 우습기도, 겸연쩍기도 하고 그리고 다소 처량하기도 했다. 시퍄 긴 부인은 네지다노프의 출신 성분을 잊고, 그에게 청년 시절이며 그의 가족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캐묻기 시작했다. 그녀는 네지다노프에 대한 이러한 관심이 고독하고 소외된 그에겐 무척 위안이 되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당황한 듯한 퉁명스러운 대답을 듣자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새 알아차린 그녀는 자기의 실책을 만회하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아까보다 좀더 크 게 마음의 문을 열어놓았다. 그것은 마치 찌는 듯한 무더운 여름 한낮에 향기로 운 꽃잎들을 활짝 열어젖뜨린 만발한 한 송이의 장미꽃과도 같았다. 하긴 싸늘 한 밤의 한기와 더불어 곧 오므라들게 마련이지만.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실책 을 충분히 만회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일단 아픈 곳을 찔린 네지다노프는 이미 그전처럼 그녀를 대할 수가 없었다. 그가 언제나 지니고 다녔고 또 언제나 마음속에 느끼고 있던 쓰라린 감정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적인 의혹과 자책감이 잠을 깬 것이다. '난 이런 것 때문에 여기 온 것은 아니다.' 그 는 생각했다. 또한 조소 어린 파클린의 충고가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침 묵의 첫 순간을 이용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되는대로 인사를 하고는 어리석기 짝없는 표정으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 말을 자기 자신에게 속삭였던 것이 다.- 방을 나와버렸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가 그의 당황하는 모습을 놓칠리 없었다. 그러나 네지다노프를 전송하는 그녀의 미소로 보아 그녀는 네지다노프 의 당황하는 모습을 자신에게 유리한 각도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당구실에서 네지다노프는 우연히 마리안나와 마주쳤다. 그녀는 방문 옆 들 창 가에 단단히 팔짱을 낀 채 창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거의 흙빛 으로 변해 있었으나 대담한 그녀의 두 눈은 힐문하듯 네지다노프를 노려 보았 고 굳게 다문 입술은 깊은 경멸과 모욕적인 연민을 나타내고 있었다. 네지다노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제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물었다. 마리안나는 이내 대답하지 않았다. "없어요. 아니, 있어요. 할 말이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좀 기다려주 세요. 내일, 아니 어쩌면 영원히 안 할지도 모르죠. 전 당신이 정말로 어떤 분인 지 아직도 잘 모르니까요." "그러나," 네지다노프가 말했다. "전 때때로 이런 느낌이 듭니다. 당신과 저 사이엔." "당신은 저에 대해선 조금도 모르고 계세요." 마리안나가 그의 말을 가로챘 다. "하지만 좀 기다려주세요. 어쩌면 내일 말씀드릴지도 모르죠. 지금은 여주인 한테 가봐야 하니까요. 그럼 내일 다시." 네지다노프는 두어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가 갑자기 뒤돌아섰다. "아참!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 전 이것을 꼭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언제 한 번 저를 학교로 데려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수업을 참관하고 싶어서요. 폐교하기 전에 말입니다." "미안해요. 제가 당신께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학교에 대한 것이 아녜요." "그럼 무슨 일이죠?" "내일 다시." 마리안나는 이렇게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일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와 네지다노프와의 대화는 바 로 그날 밤, 테라스 옆에서 시작되는 보리수의 가로수 길에서 이루어졌던 것이 다. 13 그녀는 자기편에서 먼저 네지다노프에게로 다가왔다. "네지다노프씨," 그녀는 성급히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발렌치나 미하일로 브나 부인에게 완전히 매혹 당했을 테죠." 그녀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빙그르르 몸을 돌려 가로수 길을 따라 걷 기 시작했다. 네지다노프도 그녀와 나란히 걸음을 옳겼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잠시 후 그는 이렇게 물었다. "그럼 그렇지 않단 말씀이신가요? 그게 사실이라면 오늘은 그분의 성과가 좋 지 않았던가보군요, 무척 애를 쓰면서 여기저기 잔 그물을 쳐놓았을 텐데요. 짐 작이 가죠." 네지다노프는 아무 말 없이 이 이상한 처녀의 옆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저," 그녀는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전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부인 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건 당신도 잘 아실 거예요. 제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 실지 모르지만 우선 잘 생각해 보세요." 마리안나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흥분한 것이었 다. 그녀는 흥분하면 마치 성난 사람처럼 보였다. "당신은 아마 마음속으로," 그녀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왜 이 여잔 그런 얘기를 나한테 하는 걸까 하고 자문하실 테죠. 제가 마르켈로프씨에 대한 소식 을 전했을 때에도 필경 지금과 똑같은 생각을 하셨을 거예요." 그녀는 갑자기 몸을 굽혀 조그만 버섯 하나를 따더니 그것을 반으로 쪼개 길 옆으로 버렸다.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계십니다,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 네지다노프는 이렇 게 말했다. "오히려 저는 당신의 신임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전 기뻤던 거구요." 네지다노프의 이 말은 사실과는 전혀 달랐다. 엉겁결에 그런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을 뿐이었다. 마리안나는 흘끗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줄곧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제게 신뢰감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었어요." 그녀는 깊은 생각 에라도 잠기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과 저는 아주 남남이나 다름 없으니까요. 그러나 서로의 처지가 매우 흡사하긴 하죠. 우리 두 사람은 다같이 불행하니까요. 이 불행이 우리 둘을 연결시키고 있는 거겠죠." "당신이 불행하시다고요?" "그럼 당신은 그렇지 않으신가요?" 네지다노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제 내력을 알고 계시죠?" 그녀는 활기를 띠며 말하기 시작했다. "저 희 아버지의 사건, 아버지가 유형당한 사건 말이에요. 모르신다구요? 그럼 말씀 드리죠. 아버지는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선고를 받고 관등과 전재산을 박탈당한 채 시베리아로 유형되셨어요. 그 후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 역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오빠 되는 외숙부, 시퍄긴씨가 저를 돌보 게 된 거랍니다. 제가 외숙부댁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이상 외숙부나 외숙모는 모두 제 은인이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배은망덕한 행동으로 그들은 대 하고 있거든요. 필경 제 마음이 비뚤어진 탓일 거예요. 게다가 본래 남의 빵이 란 쓴 것이고 또한 저는 관대한 모욕을 참을 수 없는 성격이라서 동정이란 것 을 참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숨길 수도 없구요. 항상 바늘 로 쿡쿡 찔리면서도 제가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은 결국 제 자존심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일 거예요." 이렇게 단속적으로 말을 이어가며 마리안나는 점점 걸음을 빨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아시겠어요? 외숙모는 저를 강제로 처치해 버리려는 속셈으로 그 보기도 싫 은 칼로메이체프에게 시집을 보내려는 거예요. 외숙모는 제 신념을 잘 알고 있 으니까요. 외숙모의 눈에는 제가 니힐리스트로밖엔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 데 저는 물론이고 그 사람도 제가 마음에 들지 않을 거예요. 전 예쁘지가 않으 니까요. 그러나 저를 팔아버릴 순 있지요. 그것도 하나의 자선이니까요." "왜 당신은."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으나 곧 막히고 말았다. 마리안나가 또다시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왜 제가 마르켈로프씨의 구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나, 그 말을 하고 싶으신거 죠? 그럴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 사람은 훌륭한 분이 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분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제 잘못은 아니니까 요." 마리안나는 이 뜻밖의 고백에 대한 일종의 의무적일 응답에서 상대방을 해 방시켜 주기라도 하는 듯 또다시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가로수 끝까지 이르렀다. 마리안나는 울창한 전나무 숲 사이로 나 있는 좁다란 오솔길로 재빨리 접어든 다음 길을 따라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네지다노프도 그녀 뒤를 따라갔다. 그는 두 가지의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이 붙임성 없는 처녀가 왜 갑자기 자기에게 이토록 노골적인 태도로 나오는지에 대해서도 이상했지만 그보다 더욱 이상하게 생각된 것은 그녀의 이러한 노골적 인 태도가 조금도 그에게 이상스럽게 여겨지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자연적인 현상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마리안나는 갑자기 홱 몸을 돌리더니 길 한가운데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문 에 그녀의 얼굴은 네지다노프의 얼굴에서 두 자밖에 떨어지지 않았고 그녀의 두 눈은 뚫어질 듯이 그의 두 눈을 쏘아보았다. "알랙세이 드미트리예비치" 하고 그녀는 말하기 시작했다. "제 외숙모를 나쁜 여자라곤 생각지 마세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 여자는 거짓말로 뭉쳐진 사람 이에요. 그 여잔 꼭두각시예요. 그리고 위선자예요. 그 여자는 모든 사람으로부 터 미인이라는 칭송을 들으며 마치 성녀처럼 숭상받기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그 여자는 그럴싸한 말을 생각해 내서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하고는 다시 똑같 은 말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수없이 되풀이한단 말예요. 그것도 지금 막 그 말 을 생각해 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요. 게다가 그 아름다운 눈으로 멋지게 희롱을 하거든요! 그 여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어요. 자기가 마돈나와 흡사 하다는 것도 알고 있죠. 그러면서도 그 사람은 아무도 사랑하질 않는단 말예요! 시종 콜랴를 돌보는 척하지만 고작 한다는 것이 현명한 사람들을 상대로 그 애 의 말을 지껄이는 거죠. 그 여자는 남이 불행하게 되는 것을 원하진 않아요. 그 여자의 몸 전체가 자비의 권화(權化)니까요! 하지만 그 여자 앞에서 당신의 뼈 가 모조리 부러진다고 해도 그 여잔 아무렇지도 않을 거예요! 당신을 돕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란 말예요. 그러나 만일 그것이 자기에게 필요하 고 유익하다고 생각되면 그땐. 아아, 그땐!" 마리안나는 입을 다물었다. 분노가 그녀를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그녀는 분 노를 마음대로 터뜨리기로 마음먹었다. 도저히 그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던 것이 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 끊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특별히 불행한 계층에 속하는 여자였다. (러시아에서는 이런 계층의 사람들을 꽤 자주 만나게 되었다.) 정의는 그들을 만족시키지만, 기쁨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 의에 대해서는 무서울 정도로 예민하여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그녀가 말을 하고 있는 동안, 네지다노프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짧은 머리가 살짝 헝클어지고 얇은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 는 빨갛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은 무섭게도 보이고 뜻이 있게도 보였으며 아름 답게도 보였다. 가느다란 나뭇가지 사이로 비스듬히 비쳐 내리는 달빛이 그녀의 이마 위에 황금빛 반점으로 얼룩져 있었다. 부드럽게 넘실거리는 달빛은 흥분에 들뜬 그녀의 얼굴 표정과 커다랗게 뜬, 움직이지 않는 빛나는 두 눈, 열띤 목소 리에 잘 어울려 보였다. "그런데요," 마침내 네지다노프가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째서 당신은 저 를 불행하다고 보시는 겁니까? 제 과거를 아십니까?" 마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어떻게 아시죠? 저에 대한 얘기를 누구한테서 들으신 모양이군요?" "전 알고 있어요. 당신의 출신을." "알고 계시다고요? 도대체 누가 당신께 말했죠?" "역시 그 사람이죠. 당신이 매혹당하고 있는 바로 그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부인 말예요. 그분은 제 앞에서 평상시와 다름없는 가벼운 태도로 당신에 대해 말을 하는 걸 잊지 않았어요. 그러나 아주 분명한 어조였고 동정하는 듯한 표정 은 조금도 없이 모든 편견을 초월한 자유파인 것 같은 태도로, 이번에 온 가정 교사의 생애에는 이러이러한 사건이 있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놀라진 마 세요.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저에게도 마찬가지니까요. 그 여잔 약간 동정 어린 표정으로, 내 조카딸에게는 이러이러한 사건이 있었다느니, 그 애의 아버 지는 수뢰죄(受賂罪)로 시베리아에 유형되었다느니 하며 거의 모든 손님에게 지 껄여댄단 말입니다! 그 여자가 아무리 귀족 티를 낸다 해도 결국 입빠른 위선자 에 지나지 않아요. 당신이 좋아하시는 그 라파엘로의 마돈나는 말이에요!" "저 실례지만," 네지다노프가 말했다. "도대체 그 여자와 제가 어쨌다는 겁니 까?" 마리안나는 얼굴을 돌리고 또다시 오솔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당신은 그 여자와 꽤 오랫동안 얘기를 하시더군요." 한참 후 그녀는 애매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단 한마디도 제대로 말한 것이 없습니다." 네지다노프가 대답했다. "그 사람 혼자 줄곧 지껄여댔으니까요. " 마리안나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조그만 길이 옆으로 빠지면서 전나 무 숲을 좌우로 갈라놓았다. 그리고 눈앞에 조그만 초원이 펼쳐졌다. 초원 한복 판에는 큰 구멍이 난 자작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둥근 벤치가 고목의 밑동을 감싸듯 둘러서 있었다. 마리안나는 벤치에 앉았다. 네지다노프도 나 란히 자리 를 잡았다. 두 사람의 머리 위에는 파릇파릇한 작은 잎으로 뒤덮인 기다란 나뭇 가지가 살며시 흔들거리고 있었다. 고르지 않은 풀밭 속 여기저기에는 하얀 방 울꽃이 피어 있고, 초원 전체에서 향긋한 봄풀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 냄새는 전나무에서 풍기는 진 냄새 때문에 답답하기 그지없던 가슴을 상쾌하게 풀어주 었다. "저와 함께 이곳 학교를 구경하고 싶다고 하셨죠?" 이윽고 마리안나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가시죠. 하지만 마음에 드실는지. 그다지 만족하진 못하실 거 예요. 당신도 들으셨겠지만 보제(補祭)가 주임교사니까요. 그는 선량한 사람이긴 하지만 학생들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학생 중에 가라샤라는 사내아이가 있는데요, 열 살 먹은 고아지요. 그런데 어떻겠어 요? 그 애가 공부를 제일 잘한다니까요!" 마리안나는 갑자기 화제를 바꿈과 동시에 그녀 자신도 어쩐지 변한 것처럼 느껴졌다. 얼굴은 다시 창백해지고 흥분도 가라앉았다. 그리고 너무 많이 지껄 인 것이 부끄러운 듯 얼굴에는 당황한 빛마저 띠었다. 그녀는 네지다노프의 관 심을 다른 '문제'로 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학교 문제라도 상관없고 농민 문제도 좋았다. 단지 지금과 같은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 이었다. 그러나 네지다노프는 이 순간 다른 문제로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 그는 말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지금 우 리들 사이에서 발생한 이 모든 것은 저로서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입 니다. (그녀는 '발생했다'는 말에 살며시 신경을 곤두세웠다.) 우리는 갑자기 아 주 친한 사이가 된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하긴 어차피 친해질 수밖에 없었을 테죠. 우린 이미 오래 전부터 서로 가까운 사이로 있으면서도 그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니까요. 저도 앞으로 하나도 숨김 없이 당신에게 모두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은 이 집에서의 생활이 괴롭고 싫으실 겁니다. 그러나 당신의 외숙부는 소견이 좁은 사람이긴 하나 제가 보는 바에 의하면 인정이 있는 사람 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분은 당신의 입장을 이해해 주지 않습니까? 당신 편을 들어주지 않나요?" "외숙부 말인가요? 첫째로 그 사람은 인간이랄 수도 없지요. 그 사람은 관리 예요. 상원의원인지 장관인지 저도 잘 모르긴 하지만. 둘째로 저는 쓸데없는 불 평을 늘어놓거나 남을 중상하기를 원하진 많아요. 전 이 집에서의 생활이 괴롭 다거나 싫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아요. 이 집에서 저를 학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사실 말이지 외숙모의 가시 돋친 말 같은 건 조금도 대수롭지 않아 요. 전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에요." 네지다노프는 놀란 듯이 마리안나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당신이 지금까지 말한 건 모두." "당신이 비웃어도 할 순 없는 일이지만" 하고 그녀는 말을 가로챘다. "제가 불행하다고 한 것은 제 자신의 불행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가끔 이 러시아에 살고 있는 가난하고 불쌍한, 하대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괴로워하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어요. 아니예요,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나고, 울분을 느끼는 거죠. 전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요. 다만 제가 여자라는 것과 이런 식객이라는 것이 전 불행한 거예 요. 또한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고 할 능력도 없다는 것이 불행하다는 거예 요! 아버지가 시베리아에 계시고 어머니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을 때, 아 아, 전 얼마나 아버지한테 가고 싶었는지 몰라요. 그렇다고 아버지를 남달리 사 랑했다거나 존경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전 알고 싶었던 거예요. 그 유형수들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 거죠. 그 때문에 저는 저 자신은 물론 아무 부족 없이 편안하고 배불리 사는 모든 사람에게 분노를 느꼈던 겁니다. 이윽고 아버지가 쇠약할 대로 쇠약 해진 몸을 이끌고 돌아와서 남의 비위를 맞추려고 굽실거리며 동분서주하게 되 었을 때 제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정말이지 아버진 잘 돌아가셨어요. 어 머니 역시 마찬가지죠. 하지만 저는 이렇게 살아남았어요. 도대체 전 무엇 때문 에 살고 있 는 걸까요? 제가 성격이 나쁜 배은망덕한 여자고, 아무와도 사귈 수 없는 까다 로운 여자라는 걸, 그리고 세상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절감하기 위해서일까요!" 마리안나는 옆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녀의 한 손이 벤치 위에서 흘러내렸다. 네지다노프는 그녀가 몹시 측은하게 생각되었다. 그는 힘없이 늘어진 그녀의 손 을 살며시 어루만져 주려고 했다. 그러나 마리안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것 은 네지다노프의 행동을 불손하다고 여긴 때문이 아니라, 자기는 털끝만큼도 남 의 동정을 바라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에게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전나무 숲 사이로 멀리 여자의 옷자락이 어른거렸다. 마리안나는 몸을 곧추 세웠다. "저것 보세요, 당신의 마돈나가 정탐꾼을 보냈군요. 저 하녀는 항상 저를 감 시하면서 제가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있는지 주인 마님께 보고하는 것이 의무 니까요! 아마도 외숙모는 제가 당신과 함께 있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나보군요. 그리고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을 거예요. 특히 당신 앞에서 그런 감상적 인 장면들을 연출한 뒤이고 보니 더할 거란 말이에요. 그건 그렇고 이젠 정말 돌아갈 시간이군요. 가시지요." 마리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지다노프도 자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한쪽 어깨 너머로 네지다노프를 돌아보았다. 그때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약간 당황한 듯한 어린애 같은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당신, 제게 대해 화를 내고 계시진 않으실 테죠? 설마 제가 당신을 농락했다 고는 생각하지 않으시겠죠? 아니예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실 분이 아니예요." 그녀는 네지다노프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도 저처럼 불행한 사람이고, 당신 역시 저처럼 까다로운 기질을 가졌거든요. 그럼 내일 우 리 학교로 가기로 해요. 이젠 우리도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됐으니까요." 마리안나와 네지다노프가 집에 도착했을 때,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발코니 위에서 오페라 글라스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언제나처럼 상냥 스런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고 있었다. 열려진 유리문을 지나 객 실로 들어서자 시퍄긴이 차를 마시기 위해 들른, 이 빠진 근처의 지주와 함께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시퍄긴은 끊으면서 끄는 듯한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 다. "바깥 공기가 꽤 습하죠. 그런 공기는 건강에 좋지 않아요!" 마리안나와 네지다노프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지금 막 상대방의 득점을 빼앗은 시퍄긴은 장관다운 의젓한 시선을 옆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던졌다. 그 리고 아내의 볼을 지나 점점 위로 올라간, 잠에 취한 듯하면서도 찌르는 듯이 싸늘한 그 시선은 어두운 정원에서 방금 들어온 젊은 한 쌍의 남녀에게 옮겨졌 다. 14 그로부터 두 주일이 지났다. 모든 것은 일정한 질서를 유지하며 흘러가고 있 었다. 시퍄긴은 장관다운 태도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국장쯤은 될 위엄을 가지고 나날의 사무를 규칙적으로 실행해 나가고 있었다. 또한 여전히 고상하면서도 안 정이 있는, 다소 거리감을 두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콜랴는 수업을 받 고 있었고, 안나 자하로브나는 마음속에 맺힌 원한 때문인지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었으나 손님들이 쉴 새 없이 찾아와 카드놀이에 열중하고 있었으므로 별로 지루해 보이진 않았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여전히 네지다노프에게 교태를 부리고 있었으나, 그녀의 애교 속에는 어딘지 모르게 선량한 풍자 같은 것이 섞 이게 되었다. 마리안나와 네지다노프는 이제 완전히 가까운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네지다노프가 놀란 것은 그녀의 성격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무리가 없는 편이어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다지 날카로운 대립을 느낄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네지다노프는 마리안나와 함께 두 번 가량 학교를 방문했으나 첫 방문시에 이미 거기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 을 알아차렸다. 주임 교사인 보제는 시퍄긴 부인의 허가를 받고 자기 마음대로 학교를 관리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구식 방법이긴 했으나 읽고 쓰기만은 제대 로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시험 때면 아주 동떨어진 문제들을 내고 있었다. 이를테면 어느 날 그는 가라샤에게 "구름 속에 물이 검나니"라는 표현을 어떻 게 설명해야 좋으냐고 물었던 것이다. 가라샤는 그 질문에 대하여 보제 자신이 가르친 대로 "그건 설명 할 수 없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학교 는 곧 문을 닫고 말았다. 여름 휴가 때문에 가을까지 쉬기로 한 것이다. 네지다노프는 파클린과 다른 친구들의 충고를 상기하면서 농민에게 접근하려 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관찰이 허용하는 한 농민을 연구하고 있을 뿐이지, 조금도 선전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는 지금까지 줄곧 도시 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시골 사람과 그 사이에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골 짜기와 도랑 같은 것이 가로놓여 있었다. 네지다노프는 주정쟁이 키릴로와 멘델 레이와 몇 마디의 말을 주고받을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 앞에 서면 어쩐지 어색한 느낌만 들고 게다가 그들에게서 들은 것은 극히 흔해 빠진 간단한 욕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또 한 사람 피추에프는 그를 완전 히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 농군은 남달리 건강한, 거의 산적과도 같은 인상 을 주었다. '그렇지, 이 사내라면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고 네지다노프는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는 백수건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황소처럼 힘이 세고 건강했으나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합으로부 터 땅을 몰수당하고 만 것이었다.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깊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피추에프는 흐느껴 울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전 일할 수 없단 말이오.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아니면 스스 로 목을 매고 죽어버려야지!" 하고 말하고는 으레 빵값으로 몇 푼 구걸하는 것 이 상례였다. 그러면서도 그 얼굴만은 리날리도 리날리진과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네지다노프는 공장 직공에게도 역시 조금도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 들은 매우 약삭빠르지 않으면 매우 침울한 사람들뿐이었다. 결국 네지다노프는 그들에게서도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자기 친구 인 실린에게 긴 편지를 써보냈다. 그는 그 편지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쓰라리게 하소연하고는, 그 모든 원인이 자기가 받은 저주스러운 교육과 해로운 문학적인 본성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불현듯 자기의 사명이 선전 사업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말로 하는 선전이 아닌 글에 의한 선전을 해야겠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그가 계획했던 팜플렛도 제대로 마무리되지가 않았다. 그가 종이 위에 나타내려고 한 모든 것들은 그 자신에게까지 일부러 꾸민 듯한 부자연스 러움으로 느껴졌고 그 어조나 말에 있어서도 어쩐지 부정확한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두어 번 가량 (오오, 그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시작과 회의적인 개인적 토로로 펜이 빗나가고 말았다. 그는 이러한 실패를 마리안나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하였다. (그것은 신뢰와 접 근의 중대한 징후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 속에서 동정을 찾았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의 문학 취미에 대한 동정이 아닌 그를 괴롭히고 있는 정신적인 질병에 대한 동정이었다. 그것은 그녀 자신 에 있어서도 전혀 인연이 먼 것은 아니었다. 마리안나는 그에 못지않게 문학 취 미를 공경하고 있었다. 그녀가 마르켈로프를 사랑할 수 없어서 그와 결혼하지 않았던 것도 결국 마르켈로프에게서는 그 문학적인 취미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물론 마리안나는 이러한 사실을 자기 자신에게까지 도 고백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내부에 가장 강력한 것이 있다면, 그 것은 우리 자신들마저 그 존재를 잘 알 수 없는 비밀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번거롭고 고르지 않게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루하지는 않았 다. 한편 네지다노프의 마음속에는 뭔가 야릇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자 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자기의 태만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말 속에는 언제나 찌르는 듯한 자책감과 짜증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 깊은 어 느 한구석은 그다지 기분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어떤 안정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전원의 정적과 신선한 공기, 여름이란 계절, 맛있는 음 식, 편안한 생활 때문인지, 아니면 생전 처음 여성의 마음과 접할 수 있었던 그 감미로운 감정 때문인지는 쉽게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홀가 분해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비록 그의 친구 실린한테는 마음으로부터의 불평을 토로하고 있긴 했지만. 그러나 네지다노프의 이러한 감정은 어느 날 뜻밖의 사건에 의해 강제적으로 깨뜨려지고 말았다. 그날 아침, 그는 바실리 니콜라예비치로부터 짤막한 편지를 받았다. 그 속에 는 앞으로의 지령을 기다릴 동안 마르켈로프와 함께 솔로민과 S시에 사는 구교 도 골루시킨과 시급히 말나 일을 상의하라고 쓰여 있었다. 이 편지는 네지다노 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편지 속에서 자신의 나태함에 대한 비난을 듣는 것만 같았다. 지난 얼마 동안 말로만 표현했던 비통한 감정이 또다시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쳐올랐던 것이다. 식사를 할 무렵 칼로메이체프가 찾아왔다. 그는 몹시 화가 나고 기분 나쁜 표 정이었다. "글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거의 울다시피 외쳐댔다. "전 지금 말할 수 없 이 무서운 소식을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사랑하는 제 친구 세르비야의 미하일 오브레노비치 공작이 어떤 악당에 의해 베오그라드에서 암살을 당했다는 겁니 다! 지금이라도 어떤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그 자코뱅파와 혁명파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나 시퍄긴은, 실례지만 자기 의견으로는 그 저주스런 암살은 결코 자코뱅 파의 소행이 아니라 (그런 건 세르비야에 있을 리도 없지만) 오브레노비치의 적 인 카라게오르기예비치 일당의 짓일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칼로메이체프는 그 의 말을 귀담아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울음 섞인 목소리로, 죽은 공작은 자기를 무척 사랑해 주었다느니 자기에게 훌륭한 총을 선사해 주 었다느니 하면서 또다시 한바탕 늘어놓기 시작했다. 점점 흥분 하며 자기 이야 기에 열중해 버린 칼로메이체프는 외국의 자코뱅당으로부터 국내의 니힐리스트 와 사회주의자들에게 화살을 돌리고는 드디어 본격적인 연설조로 맹렬히 욕설 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의 유행에 따라 열정적인 파리장들이 '카페 리슈 '에서 곧잘 그러듯이, 큰 흰 빵 조각을 두 손으로 잡은 다음 수프 접시 위에서 그것을 두 동강 내면서, 가령 상대가 무엇이든지 또 누구든 간에 반항하는 놈들 은 모조리 쳐부수고 박살을 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정말 이렇게 말했던 것 이다. "때는 왔습니다! 때는 왔어요!" 그는 수저를 입으로 가져가며 이렇게 되풀이 했다. "때는 왔습니다! 때는 왔어요!" 헤레스주를 따르려는 하인에게 술잔을 내 밀면서 그는 또다시 되풀이했다. 그 다음 그는 존경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 모스 크바의 위대한 평론가의 이름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라디슬라스, 착하고 선량한 우리 라디슬라스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떠날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치 그 눈으로 적을 찌르기라도 하는 듯이 끊임없이 네지다노프를 쏘아보고 있었다. '자, 어때 이 자식아! 이 따끔한 맛을 좀 봐라! 이건 바로 너를 두고 하 는 말이다. 자, 한 번 더 받아봐!' 마침내 네지다노프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조금씩 대꾸하기 시작했다. 사실 약간 떨리는 듯한 -그렇다고 겁을 집어먹은 것은 물론 아니다.- 목소리였으나 어쨌든 젊은 세대의 이상과 사상, 희망 등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칼로메이체프 는 곧 째지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그는 성이 나면 언제나 째지는 듯한 소리를 내곤 했다.- 난폭한 언사로 응수하기 시작했다. 시퍄긴은 의젓한 태도로 네지다 노프의 편을 들었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도 역시 남편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 다. 안나 자하로브나는 콜랴의 주의를 분산시키려고 애쓰면서 눌러 쓴 모자 밑 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마리안나는 돌처럼 굳어진 채 움직일 줄 물랐다. 그러나 라디슬라스란 이름이 스무 번이나 되풀이되는 것을 듣자 마침내 네지 다노프는 얼굴을 붉히며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이렇게 외쳤다. "참 대 단한 권위자를 내세우시는군요. 마치 라디슬라스가 어떤 자라는 걸 우리가 모르 기라도 하는 듯이! 그 자는 원래 부화뇌동밖에 모르는 사람이란 말이오!" "아 아 아아니, 저런 뭐 뭐라구요?" 분노에 찬 나머지 말을 더듬으며 칼로메 이체프가 신음하듯 말했다. "당신은 블라젠크람프 백작과 코브리슈킨 공작 같은 명사까지도 존경하는 그런 사람에 대하여 그렇게 불손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이 오?" 네지다노프는 어깨를 흠칫했다. "그 추천인이 참 멋지군요. 코브리슈킨, 광적 인 아첨꾼은." "라디슬라스는 내 친구요!" 칼로메이체프가 소리쳤다. "그분은 내 동료고 나 는." "그렇다면 당신에 대해서는 더욱 사정이 나빠지는군요." 네지다노프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당신도 그의 사고 방식을 좇고 있는 셈이니까, 내가 한 말은 자연히 당신에게도 해당되게 마련이니까요." 칼로메이체프는 분노에 찬 나머지 파랗게 얼굴이 질리고 말았다. "아 아아니! 뭐라구요?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 그저 당장 당신을." "도대체 지금 당장 저를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죠?' 네지다노프는 비꼬는 듯한 공손한 어조로 다시 한 번 그의 말을 가로챘다. 만일 시퍄긴이 재빨리 그들을 말리지 않았더라면 이 두 적수간의 싸움이 어 떤 끝장을 보게 될는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근엄한 표정을 지 으며 약간 언성을 높여 침착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태도 는 고관으로서의 위용 같기도 했고 혹은 주인으로서의 위엄 같기도 했다. 그러 나 뭐라고 딱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는 자기 집의 식탁에서 그런 과 격한 표현들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자기는 오래 전부터 온갖 종 류의 신념을 존경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삼아오고 있지만 (그는 신성한 의무 라고 말을 정정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으니, (여기서 그는 도장 무늬 반지를 낀 집게손가락을 쳐들었다.) 그 신념도 어느 정도까지는 예의 범절을 갖 추지 않으면 안 될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네지다노프씨의 몇몇 과격한 표현들 을 핀잔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그것은 나이가 젊다는 점에서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고, 또 한편 칼로메이체프씨의 자기 적대자에 대한 신랄한 공격도 찬성할 만한 것은 못 되나, 그것 역시 사회의 복지를 위한 그의 열정에 의해서 납득이 갈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지붕 밑에는" 하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시퍄긴가의 지붕 밑에는 자코뱅 파도 부화뇌동하는 자도 없고, 단지 선량하고 양심적인 사람들만 있으니 일단 이해가 되었으면 서로 악수를 함으로써 화해를 하셔야 하는 겁니다!" 네지다노프, 칼로메이체프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악 수를 청하지는 않았다. 아직 상호 이해의 시기는 먼 것 같았다. 아니 그와는 반 대로 지금까지 그들은 그토록 강한 증오감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이 다. 불쾌하고 멋쩍은 침묵 속에 식사가 끝났다. 시퍄긴은 어느 외교계의 일화를 이야기하다가 그만 도중에서 집어치우고 말았다. 마리안나는 자기 접시만을 뚫 어질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네지다노프에 의해서 불러일으켜진 동정을 얼굴에 나타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소심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소심할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의 마 음속을 시퍄긴 부인에게 들여다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찌르는 듯한 부인의 응시를 자기 몸에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시퍄긴 부인은 마리안나에게 서, 아니 그녀와 네지다노프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네지 다노프의 뜻하지 않은 격분은 우선 총명한 귀부인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뒤이 어 무엇인가 그녀의 마음속을 비게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 거렸다. "아아." 그녀는 갑자기 네지다노프가 자기에게서 멀어져버렸음을 깨달 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 손에 안기려고 하던 그 네지다노프가. '여 기에는 필경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흑시 마리안나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 마리안나가 틀림없다. 마리안나는 저 사내가 좋은 것이다. 그리고 저 사내도." '방법을 강구해야겠군.' 그녀는 자기 생각을 이렇게 매듭지었다. 그러는 동안 칼로메이체프는 여전히 분노에 찬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두 시간 가량 지난 후 카드 놀이를 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패스!" 혹은 "사겠소!" 하고 외쳐대고 있었 다. 그는 얼굴에는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띠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모욕에 찬 음향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퍄긴만은 그 모든 사건에 대해서 매 우 흐뭇한 만족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막 일기 시작하려는 폭풍을 가라앉히고, 자기의 웅변력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라틴어를 알고 있었으므로 베르길리우스의 "나 그대를(Quos egoi)!"이란 문구쯤은 모르는 바도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어떤 공감을 느끼며 이 해신(海神)을 상기해 냈던 것이 다. 15 적당한 기회가 오기만 기다리던 네지다노프는 재빨리 자기 방으로 가서 문을 잠가버렸다. 그는 아무와도 얼굴을 마주치기가 싫었다. 그러나 마리안나만은 예 외였다. 그녀의 방은 2층 전부를 가로지른 기다란 복도의 맨 끝에 자리잡고 있 었다. 네지다노프는 단 한 번 그 방에 들어간 적이 있으나 그것도 불과 몇 분 동안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방을 찾아간다 해도 그녀는 성을 내지 않을 것 만 같고 오히려 그녀도 자기와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같은 생각이 들 었다. 이미 시간이 꽤 되었다. 아마 열 시쯤은 되었으리라. 시퍄긴 부부는 식탁 에서의 사건이 있은 후라 네지다노프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 각하고 여전히 칼로메이체프와 카드 놀이를 계속하고 있었다. 발렌치나 미하일 로브나는 두어 번 가량 마리안나에 대해서 물었다. 그녀도 식사 후 곧 자취를 감추어버렸던 것이다.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는 대체 어딜 갔을까?" 그녀는 처음에는 러시아어로, 그 다음에는 프랑스어로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히 누구한테 물었다 기보다는 오히려 담벽에 대고 물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무슨 일에 깜짝 놀란 사람들이 흔히 이런 짓을 하는 법이다. 어쨌든 그녀는 다시 카드놀이에 열중해 버리고 말았다. 네지다노프는 몇 번이나 방안을 왔다갔다하다가 드디어 복도를 따라 마리안나의 방문까지 이르렀다. 그는 살그머니 문을 노크했다. 대답이 없 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노크를 하고는 문을 열려고 했으나 문은 잠겨 있었다. 그가 자기 방으로 돌아와 미처 외자에 앉기도 전에 그의 방문이 살며시 삐걱거 리더러, 마리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제 방에 왔던 분이 당신이었나요?"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달려나갔다. 마리안나는 촛불을 손에 든 채 파리한 얼굴로 우두커니 문앞에 서 있었다. "예 저였어요." 그는 속삭였다. "가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녀는 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더니 나직한 방문을 손으로 밀었다. 텅 비다시피한 조그 만 방이 네지다노프의 눈에 들어왔다. "이 방이 좋을 거예요, 알렉세이 드미트 리예비치. 여기라면 아무도 우릴 방해하지 못할 테니까요." 네지다노프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마리안나는 촛불을 창턱에 놓고 네 지다노프를 뒤돌아보았다. "당신이 왜 저를 만나고 싶어했는지 전 알고 있어요." 그녀는 말하기 시작했 다. "당신은 이 집에서 살기가 괴로운 거죠.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만." "그래요,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 전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네지다노프는 대답했다. "그렇지만 당신과 가까이 사귀게 된 다음부터는 이곳도 그다지 괴롭진 않습 니다." 마리안나는 생각에 잠긴 듯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하지만 말씀해 주세요. 이렇게 꼴사나운 일들이 있은 후에도 당신은 그대로 여기 남아 있을 작정이신가요?" "그대로 남아 있진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저를 내쫓을 테죠!" 하고 네 지다노프가 대답했다. "당신이 자진해서 거절하진 않으시겠어요?" "자진해서요? 아뇨." "그건 왜죠?" "당신은 그 참뜻을 알고 싶습니까? 그건 당신이 여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안나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안으로 약간 물러났다. "게다가," 네지다노프는 말을 이었다. "저는 여기 남아 있을 의무가 있습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계사지만, 저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마리안나 곁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덥석 움켜잡 았다. 그녀는 그 손을 별로 뿌리치려고도 하지 않고 유심히 그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들어주시오!" 그는 불현듯 강한 충동을 느끼면서 이렇게 외쳤다. "제 말을 들어주시오!" 방안에는 두서너 개의 걸상이 있었으나, 네지다노프는 그 어느 곳에도 앉을 생각을 않고 여전히 마리안나의 손을 잡은 채 흥분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뜻밖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열띤 웅변조였다. 그는 자기의 계획과 의도, 시퍄긴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연유, 자기의 모든 친척과 지기, 과거의 생활,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자기의 비밀들을 모조 리 마리안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지금까지 받은 편지는 물론 바실리 니 콜라예비치를 비롯하여 저 실린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숨기지 않고 모두 털 어놓았던 것이다. 그의 말은 성급하긴 했으나 거침없이 술술 흘러나오고 있었 다. 그것은 마치 지금까지 마리안나에게 자기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지 않은 것 을 스스로 책망하는 것도 같았고 그녀 앞에서 용서를 빌고 있는 것도 같았다. 마리안나는 열심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녀도 놀란 듯 했으나 곧 그러한 느낌은 사라지고 말았다. 감 사, 보람, 신뢰, 결심 그녀의 마음은 이런 것들로 충만해졌다. 그녀의 얼굴과 두 눈에서도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네지다노프의 손 위에 자기의 손을 포 개놓았다. 그녀의 입술이 기쁨에 넘쳐 살그머니 벌어졌다. 그녀는 별안간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자로 변해 있었다. 네지다노프는 드디어 이야기를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이런 얼굴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거룩하고 그리운 얼굴이 기도 했다. 그는 푸우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정말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모두 털어놓은 걸!" 그의 입술은 가까스로 이렇게 속삭일 수 있었다. "네, 잘하셨어요. 잘하셨어요!" 그녀 역시 속삭이는 소리로 말을 받았다. 그녀 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네지다보프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목소리까지 잠겨 있 었던 것이다. "이젠 당신도 아실 테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전 당신의 지시대 로 따르겠어요. 저 역시 당신의 사업을 돕고 싶어요.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지 하고, 또 가라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각오가 되어 있어요. 전 마음속으로 늘 당신와 같은 것을 바라왔던 거에요." 그녀 역시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했던들 그녀의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쏟아져나왔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녀의 굳센 마음도 몸도 갑자기 촛농 처럼 녹녹해졌다. 활동과 희생, 지금이라도 당장 자기 몸을 희생시키고 싶다는 열망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문밖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민첩하고 가벼운, 조심스러운 걸음 걸이 였다. 마리안나는 흠칫 몸을 일으켜세우고 그에게서 손을 뺐다. 그러더니 금새 표정 이 변하면서, 나중엔 즐거운 빛까지 띠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멸시하는 듯한, 강 자의 조소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누가 지금 우리 말을 엿듣고 있는지 전 알아요." 한마디 한마디가 똑똑히 복 도에 울려 퍼질 정도로 그녀는 큰소리로 말했다. "시퍄긴 부인이 엿듣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전 조금도 상관없어요." 바스락 거리던 발소리가 딱 그쳤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마리안나는 네지다노프에게 물었다. "도대체 전 무 엇을 하면 좋을까요? 어떻계 하면 당신을 도울 수 있을까요? 자, 말해 주세요. 어서 말해 주세요! 무엇을 하면 좋아요?" "무엇이냐구요?" 네지다노프가 말했다. "저 역시 잘은 모릅니다. 전 마르켈로 프한테서 편지를 받았을 뿐이니까요." "언제요? 언제?" "오늘 저녁입니다. 전 내일 그 사람과 함께 솔로민의 공장으로 가야 합니다." "네 그렇군요. 마르켈로프씨도 참 좋은 사람이죠!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친구 예요!" "저도 마찬가진가요?" 마리안나는 네지다노프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아니예요. 마찬가지가 아녜요." "어떻게요?" 그녀는 획 몸을 돌렸다. "아아! 당신은 정말 모르시나요? 당신이 제게 있어 지금 어떤 사람이 되었고 또 이 순간 제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네지다노프의 심장은 힘차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눈 을 내리깔고 말았다. 이 처녀, 자기와 같은 불행한 가난뱅이를 사랑하면서, 자기 를 믿고 자기 뒤를 따라 아니 자기와 함께 동일한 목표를 향해 떠날 각오가 되 어 있는 이 놀라운 처녀 마리안나는, 그 순간 네지다노프에게 있어서는 이 지상 에서의 모든 좋은 것과 모든 올바는 것의 권화였다. 그녀는 또한 아직까지 경험 한 적이 없는 가정의 사랑, 혈육의 사랑, 아내의 사랑의 권화인 동시에 조국· 행복·투쟁·자유의 권화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자기에게 쏠리고 있는 그녀의 눈길을 보 았다. 아아, 밝게 빛나는 아름다운 그녀의 눈초리가 얼마나 깊이 그의 마음속을 꿰 뚫고 들어갔던 것일까! "그래서," 네지다노프는 분명치 않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전 내일 떠 나겠습니다. 거기서 돌아오면 당신께 말씀드리죠. (이때 문득 마리 안나에게 '당 신'이라고 경어를 쓴 것이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보고 들은 것이며 결 정된 사실들을 당신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턴 제가 앞으로 할 모든 일, 제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당신은 하나도 빠짐없이 알게 될 겁니다." "아아, 기뻐라!" 마리안나는 이렇게 외치고 또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 "저 역 시 그대에게 똑같은 약속을 하겠어요!" 이 '그대'라는 말은 너무나 부드럽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에서 튀어 나왔으므로, 그 밖의 다른 표현은 없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것은 가까운 친구 사이에 통용되는 '그대'였던 것이다. "편지를 볼 수 있어요?" "자 여기, 여기 있습니다." 마리안나는 재빨리 편지를 훑어보고는 존경에 가까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굉장히 중대한 임무를 맡고 계시네요?" 그는 대답 대신 빙긋 웃어 보이고 편지를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참 이 상도 하지!" 네지다노프가 말했다. "우린 서로 사랑을 고백한 사이인데도,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오." "그럴 필요가 있겠어요?" 마리안나는 이렇게 속삭이고는 느닷없이 그의 목에 달려들며, 그의 한쪽 어깨에 자기 머리를 꼭 눌렀다. 그러나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누진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 저속해 보였고 또 어쩐지 기분이 좋을 것 같지도 않았다. 적어도 그들 두 사람은 그렇게 느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굳게 악 수를 나눈 다음 이내 헤어졌다. 마리안나는 빈 방의 창턱에 그대로 두고 온 촛불을 가지러 되돌아갔다. 그러 자 그때 비로소 그녀의 머리 속에 하나의 의혹이 떠올랐다. 그녀는 촛불을 끄 고, 캄캄한 복도를 재빨리 빠져나와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옷을 벗고 자리에 몸을 뉘었다. 캄캄한 어둠 속이었지만 어쩐지 그녀에게만은 마냥 기쁘기 만 했다. 16 이튿날 눈을 떴을 때, 네지다노프는 어젯밤의 일을 상기하면서도 그다지 쑥스 러운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분 좋은 진지한 기쁨에 넘칠 정도였다. 마치 오래 전에 성취했어야 하는 것을 이제 비로소 달성한 듯한 느낌 이었다. 네지다노프는 시퍄긴에게 이틀 동안의 말미를 얻고 마르켈로프의 집으 로 떠났다. 시퍄긴은 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래도 휴가를 곧 승낙해 주었 다. 그녀 역시 조금도 수줍어하거나 당황해하는 빛 없이, 결심 어린 침착한 눈 으로 그를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그대'라고 불렀다. 그녀는 마르켈로프의 집에 서 일어날 일에 대해서만 무척 흥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 을 모두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야 물론이죠" 하고 네지다노프가 대답했다. '사실 말이지.' 네지다노프는 생각했다. '우린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지 않은 가? 우리 두 사람의 접근에 있어서 개인적인 감정은 부차적인 역할을 했지만, 우리는 영원히 결합된 것이다. 공동의 사업을 위해서. 그렇다, 공동의 사업을 위 해서다!'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생각 속에는 어느 정도의 진실이 있고 또 어느 정도의 허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 자신도 미처 생각 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르켈로프를 만났지만, 그는 여전히 피곤하고 음울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 다. 그럭저럭 되는대로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마르켈로프의 여행 마차를 타고 (마르켈로프의 말은 여전히 절름거리고 있었으므로, 아직 한 번도 마차에 매달 아 본 적이 없는 아주 어린 시골 말을 농군에게서 빌려 둘째 말로 쓰고 있었 다.) 상인 팔레예프의 커다란 방직 공장으로 향했다. 솔로민은 그 안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네지다노프는 호기심에 들떠 있었다. 최근에 그토록 소문이 자 자한 그 사람을, 그는 꼭 한 번 가까이서 만나보고 싶었던 것이다. 솔로민에게 는 미리 통보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여행자가 공장 문앞에 마차를 세우고 이름을 대자 곧 기사 겸 감독이 살고 있는 허술한 곁채로 안내되었다. 그러나 솔로민은 공장 본동(本棟)에 가 있었다. 한 직공이 그를 찾으러 간 사이 마르켈 로프와 네지다노프는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공장은 한창 번영중이었고 산더미 같은 일에 쫓기고 있는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의 음향과 왁자지껄한 소음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여러가지 기계가 증기를 내뿜으며 덜 컹거리는가 하면 방직기는 삐걱거리고 바퀴는 붕붕 소리를 냈으며 벨트는 탕탕 튀기고 있었다. 손수레며 커다란 통, 짐을 실은 마차들이 눈앞에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뭐라고 지시하는 외침소리와 종소리, 기적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가죽 끈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셔츠 위에 띠를 두른 직공, 무명옷을 입은 여직공들이 부산스럽게 뛰어다니고, 달구지를 끄는 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또한 현처럼 팽팽히 긴장된 수천 명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질서 있고 합리적이며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사치스럽다거나 정돈된 점은 보이지 않을 뿐더러 깨끗한 곳이라곤 어느 한군데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그와는 반대로 어디를 가도 놀랄 만큼 지저분하고 더럽고 그을음투성이였다. 어 떤 곳에는 창문이 깨어져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는 회벽이 벗겨지고 판자가 떨어져나가 활짝 열어젖뜨린 문으로 바람이 들어오기도 했다. 큰뜰 한복판에는 거무튀튀한 불구덩이가 있었고 그 속에서는 부패물이 무지갯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너머 에는 버려진 벽돌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가마니, 짚 수세미, 상자, 새끼줄 조각 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리고 배가 훌쭉한 복슬개 한 마리가 짖지도 않으 며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다. 울타리 밑 한쪽 구석에는 헝클어진 머리에 맹꽁이 배를 하고 온통 까맣게 그들은 네댓 살 가량의 사내아이가 사고무친의 고아처 럼 요란스레 울어대며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역시 그을음투성이의 돼지 한 마 리가 얼룩무늬 새끼 돼지에게 둘러싸인 채 양배추 줄기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 었고, 구멍 뚫린 옷가지들이 새끼줄 위에서 너풀거리고 있었다. 말할 수 없는 악취와 숨막힐 듯이 답답한 공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러시아의 공장이었 다. 결국 독일의 공장도, 프랑스의 공장도 아니었던 것이다. 네지다노프는 마르켈로프를 쳐다보았다. "솔로민의 탁월한 재능에 대해선 너무 자주 들어왔기 때문에,"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사실 말이지 이 모든 무질서를 보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군요. 이전 정말 뜻밖인데요." "별로 무질서랄 건 없어요." 마르켈로프는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바로 이것 이 러시아식 방임이라는 거죠. 아무튼 백만 루블의 사나이니까요! 게다가 솔로 민 자신도 옛 풍속이나 실제의 사업, 그리고 공장 주인에게 각각 적응을 해야 하거든요. 당신은 팔레예프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습니까?" "아뇨, 전혀?" "모스크바 제일가는 구두쇠란 말이오. 한마디로 말해 부르주아랄밖에!" 이때 솔로민이 방으로 들어왔다. 네지다노프는 공장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에 대해서도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른 보아 솔로민은 핀란드, 아니 오 히려 스웨덴인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희끗희끗한 머리에 수척했으며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또한 그는 노랗고 긴 얼굴에 짧고도 넓은 코, 놀랄만큼 조 그만 초록빛 두 눈, 침착한 눈초리, 앞으로 툭 튀어나온 큼직한 입술, 역시 큼직 하고 하얀 이, 솜털에 살짝 뒤덮인 양분된 턱을 하고 있었다. 옷차림은 직공이 나 화부(火夫)와 다를 것이 없었고, 머리에는 쭈글쭈글한 바둑무늬 벙거지를 쓰 고 있었다. 목에는 털목도리를 두르고 발에는 타르 칠을 한 장화를 신고 있었 다. 그와 함께 평범한 나사 코트를 입은 40세 가량의 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매우 민첩해 보이는 접시 같은 얼굴에 칠흑 같은 날카로운 눈을 하고 있었는데, 들어오기가 무섭게 네지다노프에게 그 매서운 눈초리를 던졌다. 마르켈로프는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솔로민의 충복으로 알려진 파벨이라고 하는 사내였다. 솔로민은 천천히 두 손님 옆으로 다가와 뼈가 앙상한 못박힌 손으로 한 사람 한 사람씩 말없이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책상 서랍에서 봉해진 꾸러미를 꺼내어 역시 말없이 파벨에게 넘겨주자, 파벨은 곧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다음 그는 몸을 쭉 펴고 헛기침을 하더니 뒤통수에 걸려 있는 모자를 획 낚아채 벗 고는 페인트칠 된 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는 마르켈로프와 네지다노프에게 긴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어서!" 마르켈로프는 먼저 네지다노프를 솔로민에게 인사시켰다. 그러자 그는 다시 한 번 네지다노프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윽고 마르켈로프는 사업 이야기에 들어 갔고, 바실리 니콜라예비치의 편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네지다노프는 그 편지를 솔로민에게 넘겨주었다. 그가 한 줄 한 줄 눈을 옮겨가며 편지를 천천히 조심스 럽게 읽고 있을 동안 네지다노프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로민은 창문 가까이 앉아 있었다. 이미 낮게 기운 태양은 햇볕에 그을고 다소 땀에 젖 은 그의 얼굴을 빨갛게 빛내 주었고, 먼지투성이인 하얀 머리카락을 황금빛으로 불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은 마치 한마디 한마디 발음하듯 움직이고 있었고, 두 손은 단단히 편지를 잡은 채 높이 쳐들고 있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어쩐지 네지다노프의 마음에 들었다. 솔로민은 네지다노프에게 편지를 돌려주고 한번 빙긋이 웃어 보이더니 다시 마르켈로프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마르켈로프는 한참 동안 계속해서 이야기를 한 후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말이오," 솔로민이 말하기 시작했다. 다소 목쉰 소리였으나, 젊고 패 기가 있는 그 음성 역시 네지다노프의 마음을 끌었다. "여긴 그다지 좋은 장소 가 못 되거든요. 당신 집으로 가는 것이 어때요? 불과 7킬로미터밖에 안 되니. 여행 마차를 타고 왔을 테죠?" "그렇습니다." "그럼 제가 탈 자리도 있겠군요. 한 시간 후면 일이 끝나 저도 자유로운 몸이 되니, 우리 함께 이야기나 합시다. 당신도 별지장 없으시겠죠?" 하고 네지다노 프 쪽으로 몸을 돌렸다. "모레까진 괜찮습니다." "그거 잘됐군요. 그럼 우리 함께 이 사람 집에서 묵도록 합시다. 괜찮지요, 세 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새삼스레 뭘 묻습니까! 물론 괜찮구말구요." "그럼 곧 다녀오겠습니다. 옷이라도 좀 정돈하고 가야지요." "공장 사정은 어떻습니까?" 마르켈로프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솔로민은 얼굴을 돌렸다. "우리 이따가 이야기합시다." 그는 또다시 이렇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곧. 뭘 좀 잊어버린 것이 있어서." 그는 밖으로 나갔다. 만일 그가 네지다노프에게 전체적으로 좋은 인상을 주지 않았다면 네지다노프는 마르켈로프에게 이렇게 물었을는지도 모른다. '아니, 저 사람 혹시 꽁무니를 빼는 게 아니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그의 머리에 떠 오르지조차 않았다. 한 시간 후 거대한 건물 각 층에서 소란스러운 직공 떼가 층계를 따라 사방 의 문으로 와르르 쏟아져나왔을 때, 마르켈로프와 솔로민을 태운 여행 마차는 공장문을 지나 한길로 나서고 있었다. "바실리 패토트이치, 하는 겁니까?" 대문까지 전송나온 파벨이 뒤에서 큰소리 로 솔로민에게 물었다. "좀더 기다리게 해." 솔로민이 대답했다. "저건 야간 작업에 대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그는 자기 동지들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보르존코보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마친 후 -체면에 못 이긴 간단한 식사였다.- 시가를 태우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권태라는 것을 모르는 러시아인 특유의 대화로서 그 규모와 형식으로 보아 도저히 다른 나라 국민에 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솔로민은 여기서도 네지다노프의 기대 를 만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그는 이상하리만큼 말이 적었다. 너무 말이 없었으 므로 거의 언제나 침묵을 지키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남의 이야기에는 조 심스럽게 귀를 기울였으며 가끔 어떤 판단이나 의견을 말할 때에는 무척 간결 하긴 했으나 적절하면서도 무게가 있어 보였다. 솔로민은 가까운 시일 안에 러 시아에 혁명이 일어나리라고는 믿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의 의견 을 남에게 강요하기를 원치 않고 있었으므로, 남의 말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그 들을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멀리서 바라보는 관찰이 아닌 바로 옆에 서 행하는 관찰이었다. 그는 페테르부르크의 혁명가들을 잘 알고 있었고, 자기 자신이 민중 출신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진 그들을 동정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언는 일이긴 하나 진정한 의미메서의 민중이 러시아에는 존재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오랜 시일에 걸쳐 그 민중을 육성하는 방법과 목적은 현재의 혁명가들이 하고 있는 그런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방 관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결코 남을 속이려는 교활한 동기에서 나온 것 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남을 공연히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그의 분별 있는 생각에서 연유된 것이었다. 그리고 남의 의견을 듣는다는 것은 조금도 해로울 것이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솔로민은 어느 교회 일꾼의 외아들이었다. 그에게는 다섯 명의 누이동생이 있 었는데 모두 사제와 보제에게 출가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아 버지는 매우 진중하고 착실한 사람이었다.- 신학을 버리고 수학 공부를 하기 시 작했으며 기계 공학에도 열중했다. 그 후 그는 영국인으로부터 친자식 이상의 사랑을 받아 맨체스터에 다녀오는 여비를 받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2년 동안 체재하면서 영어를 습득했다. 그가 모스크바 상인의 공장에 들어간 것은 최근의 일로, 부하 직공들을 들볶는다고 핀잔을 듣긴 했으나 -그는 영국에서 그런 방법 을 수없이 보아왔던 것이다.- 그들의 기분을 잘 맞춰주었으므로, 직공들로부터 '그 사람은 우리 편이야!' 하는 정평을 얻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도 그의 출세에 만족해하면서 '착실한 자식'이라고 칭찬하고 있었으나, 그가 결혼하지 않는 데 대해서만은 좀 섭섭해하고 있었다. 마르켈로프의 집에서 밤의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솔로민은 시종 침묵을 지키 다시피 했으나, 마르켈로프가 공장의 직공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이야기를 시작하자 솔로민은 언제나처럼 간단명료하게, 러시아의 직공은 외국과 달리 아 주 조용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럼 농민은?" 마르켈로프가 물었다. "농민요?" 이젠 그들 가운데도 꽤 많은 부농들이 생기고, 그런 자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단 말이오. 게다가 그들은 자기네 이익만 추구하고 있거든요. 그 밖 의 농민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한 양과 다를 것이 없구요."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솔로민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찾아라, 그러면 얻으리라겠지요." 그의 얼굴에서는 거의 언제나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것 역시 교활한 데라 고는 없어 보이는 솔직한 미소이긴 하나,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영문을 알 수 없는 아리송한 미소이기도 했다. 네지다노프에 대한 그의 태도는 특별한 것이었 다. 그의 마음속에 이 젊은 대학생은 애정과도 같은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던 것 이다. 이날 밤 대화를 하는 동안, 네지다노프는 갑자지 흥분하며 격정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이때 솔로민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더너 그 휘청거리는 특유 한 걸음걸이로 방안을 가로질러 네지다노프의 머리 뒤편의 열려진 창문을 닫아 주었다.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까." 그는 연사(演士)의 놀란 눈초리에 답하면서 정다 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네지다노프는 솔로민에게, 그가 맡고 있는 공장 안에 어떤 사회적 이상을 실 현하려 하고 있으며, 직공들이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어떤 사업을 실시하고 있 는가를 물었다. "이것 봐요!" 솔로민이 대답했다. "우린 학교 하나와 조그만 병원 하나를 세 웠을 뿐인데 그것을 가지고도 공장주는 곰처럼 생떼를 썼다니까요!" 단 한 번 솔로민은 정말로 화를 내었다. 그는 우람한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 기 때문에 그 위에 있던 모든 것이 -잉크병 옆에 있던 무거운 서진(書鎭)까지도 - 껑충 뛰었을 정도다. 그것은 어느 재판소에서의 부정 사건과 노동조합에 대한 박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네지다노프와 마르켈로프가 어떻게 사업에 착수해야 하며 행동 계획은 어떻 게 세워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을 땐 솔로민은 얼굴에 존경 어린 호 기심까지 띠면서 조용히 듣고만 있을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 는 새벽 네 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이 건드리지 않은 문제라고는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이야기를 계속하는 동안 마르켈로프는 권태를 모르는 방랑자 키슬랴 코프와 갈수록 흥미를 더해 가는 그의 편지에 대해서 신비로운 암시를 던져주 었다. 그는 네지다노프에게 그중 몇 통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하면서, 편지가 너 무 길고 필적을 잘 분간할 수 없기 때문에 집에 가져가서 읽어도 좋다고 말했 다. 그 밖에도 그 편지 속에는 많은 학식이 나타나 있으며 가끔 시까지도 튀어 나오지만, 그것은 흔해빠진 경박한 내용이 아니라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 다고 했다. 그의 말은 키슬랴코프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병사, 부관, 독일인으 로 옳겨지더니 나중에는 자기가 쓴 <포병론>에까지 이르렀다. 네지다노프는 하 이네와 뵈르네의 대립파 브르통의 이야기, 예술에서의 사실주의(寫實主義) 문제 들을 끄집어냈다. 한편 솔로민은 담배를 피우면서 시종 조심스럽게 듣고만 있었 다. 그는 그럴싸한 말이라곤 한마디도 없이 줄곧 미소만 짓고 있었으나, 실제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계가 새벽 네 시를 쳤다. 네지다노프와 마르켈로프는 피로 때문에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으나 솔로민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세 친구는 각자의 잠자 리로 흩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헤어지기에 앞서 서로 상의한 끝에 내일은 선전 을 위해 구교도 상인 골루시킨이 사는 거리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골루시킨은 매우 열성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새로운 동지들을 규합하겠다는 약속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로민은 골루시킨을 방문할 가치가 있겠느냐고 회의를 표시하 려 했지만, 결국 그럴 필요가 있다는 것에 동의하고 말았다. 17 두 사람의 손님이 아직 깨어나기 전에 여동생인 시퍄긴 부인의 편지를 가진 심부름꾼이 마르켈로프를 찾아왔다. 발렌치나는 이상적인 농장 경영에 대해 말 하고 나서 빌려간 책을 돌려달라고 쓰고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생각난 듯이 추 신으로 '재미있는' 소식을 그에게 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옛 애 인 마리안나가 가정교사인 네지다노프를 사랑하고 있으며, 가정교사 역시 그녀 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자신이 결코 뜬소 문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자기 귀로 직접 들은 것을 말한다는 것이었다. 마르켈로프의 얼굴은 백지장보다도 더 창백해졌 다. 그러나 그는 한마디 말 없이, 심부름꾼에게 책을 내주라고 일렀다. 그리고 2 층에서 내려오는 네지다노프를 보자 언제나처럼 인사를 나누고, 약속했던 키슬 랴코프의 편지 뭉치를 그에게 내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곧 '농장의 용무' 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네지다노프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그 편지를 훑어보았다. 이 젊은 선전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과 열성적인 자기 활동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지난 한 달 동안 열한 군데의 군을 돌아다녔으며 아홉 개의 도시와 스물아홉 개의 촌락, 쉰세 개의 부락, 한 개의 농장 그리고 여덟 개의 공장을 방문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열엿새 동안 건초 헛간에서 밤을 지냈 고 하룻밤은 마구간에서, 또 하룻밤은 외양간에서 잤다고 했다. (여기서 그는 괄호를 치고, 자기는 벼룩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주를 달고 있었다.) 그 다음 그 는 토굴에 들어가기도 하고 노동자의 합숙소에도 다니면서, 어디서나 가르치고 훈계하고 팜플렛을 뿌리는 등 민첩하게 정보를 수집했다고 하였다. 어떤 것은 즉석에서 수첩에 기입하고 또 어떤 것은 최신의 기억법에 의하여 머리 속에 집 어넣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긴 편지를 네 통, 짧은 것을 스물 여덟 통, 수기 형 식의 것을 열여덟 통이나 쓰고 있었다.(그중에서 네 통은 연필로, 한 통은 피로, 한 통은 그을믐을 물에 타서 쓴 것이었다). 그가 이렇게 많은 것들을 할 수 있 었던 것은 크빈틴 존슨과 스베를리츠키, 칼레리우스 그밖의 다른 사회 평론가들 과 통계학자들의 학설을 적용하여 체계적인 시간 할당법을 배웠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또다시 자기 자신의 일과 자기의 운수, 자기가 어 떻게 푸리에의 정열론을 보충했는가에 대하여 말한 다음, 자기는 마침내 맨 처 음으로 지반을 발견한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이 세상을 지나칠 수는 없다'고 확신하면서, 어떻게 자기처럼 젊은 스물두 살의 청년이 벌 써 인생과 과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고 자기 스스로도 놀라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러시아를 전복시키겠다', '러시아를 뒤흔들어놓 겠다!', 'Dixi!!(라틴어로 '나는 말했노라')라고 덧붙이고 있었다. 이 Dixi라는 말 에는 이중 감탄사가 붙어 있었다. 한 통의 편지에서는 어느 처녀에게 보낸 사회 주의적 경향의 시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를 사랑하지 말고 내 이상을 사랑해 다오! 네지다노프는 마음속으로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키슬랴 코프의 자만심에 놀랐다기보다는 오히려 마르켈로프의 선량한 정직성에 대해 놀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런 미학적인 습성은 머려 야 해! 키슬랴코프도 유익한 사람일는지 모르니까.' 차를 마실 시간에 세 사람은 다시 식당에 오였지만 어제와 같은 논쟁은 되풀 이되지 않았다. 아무도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연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솔로민뿐이었다. 네지다노프와 마르켈로프는 은근히 마음속으로 흥 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차를 마신 다음 세 사람은 거리로 나갔다. 마르켈로프의 노복은 상자 위에 앉 은 채 변함 없는 침울한 눈으로 자기의 옛주인을 전송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네지다노프가 만나려고 하는 골루시킨 상인은 약종상(藥種商)으로 벼락 부자가 된 상인의 아들로서, 페도세이파의 구교도였다. 그는 아버지의 재 산을 늘리지는 못했다. 이른바 그는 향락주의자였고 러시아식 쾌락주의자였으므 로 장사 소질이라곤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보기 흉한 곰보에 조그만 돼지 눈을 한 마흔 안팎의 제법 비대한 몸집의 사내였다. 그는 너무 급히 말을 하여 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또한 두 손을 휘저으며 종종 걸음으로 걸었고 곧잘 큰 소리로 웃어대곤 했다. 너무 귀여움을 받아선지 지나 치게 자존심이 강해 전체적으로 좀 바보스런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교양인으로 자처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독일식으로 옷을 입고, 좀 더럽기는 하나 개방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데다가, 극장에도 가고 저속한 여배우의 보호자 도 되고 또 그 여배우를 상대로 프랑스어랍시고 지껄여댈 수도 있었기 때문이 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유명해지겠다는 것이 그의 으뜸가는 욕망이었다. 골루시 킨이라는 이름을 전세계에 떨쳐보자! 수보로프나 표좀긴보다 카피탄 골루시킨이 못할 것이 무엇인가? 바로 이러한 욕망이 타고날 때부터의 그의 구두쇠 정신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자신에 찬 표현을 빌리자면, 바로 이러한 격렬한 욕망 때문에 그는 오포지치야(정부 반대자)로 몸을 던지게 되었으며(그 전에는 그저 '포지치야(陣地)'라고 말하고 있었으나 후에 다른 사람의 충고로 고치게 된 것이다) 니힐리스트와도 접촉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무척 극 단적인 의견을 토로하기도 하고 구교에 대한 자기 자신의 신앙을 조소하기도 했으며, 정진일(精進日)에 육식을 하고 카드 놀이를 하고 샴페인을 물처럼 퍼마 시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이 아무 탈 없이 무사히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일에 대한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필요한 부서의 상관들을 모두 매수하고 뚫릴 만한 구멍을 모두 막아버렸으므로 세상의 입과 귀를 모조리 봉해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거든." 그는 홀아비였고 자식이 없었 다. 누이의 아들들이 비굴할 정도로 아첨을 떨며 그의 주위에서 맴돌았지만 그 는 그들을 야만인 혹은 무식한 바보라고 부르면서 자기의 눈앞에는 거의 얼씬 도 못 하게 했다. 그는 커다란 석조 건물에서 살고 있었으나 집안 살림은 무질 서하기 그지없었다. 어떤 방에는 패인트 칠을 한 걸상 몇 개와 유포(油布)를 씌 운 긴 의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저기 그림이 걸려 있었으나 모두가 하 나같이 저속한 불그죽죽한 풍경화, 자줏빛 바다 경치, 몰레르의 '키스', 팔꿈치와 무릎이 빨간 뚱뚱한 나부화(裸婦畵) 같은 것뿐이었다. 골루시킨에게는 가족이 없었으나 수많은 머슴과 식객들이 그 집에서 살고 있었디. 그가 이렇게 많은 식 객을 거느리고 있는 것은 어떤 자비심에서가 아니라, 역시 남에게 지시하고 뽐 내고 싶은 그의 명예욕 때문이었다. 그는 남을 속이려고 할 때 곧잘 '나의 식객 들' 이란 말을 쓰곤 했다. 그는 책을 읽고 있지는 않았으나 학술적인 표현 같은 것 을 훌륭히 따로 외고 있었다. 세 젊은이는 골루시킨의 서재에서 만났다. 긴 실내 코트를 걸치고 시가를 입 에 문 그는 신문을 읽고 있는 듯했으나 손님들을 보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얼굴을 붉히고 수선을 떨면서 빨리 안주를 내오라고 소리치는가하면 무어 라고 묻기도 하고 영문 없이 껄껄거리며 웃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행동 은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마로켈로프와 솔로민은 그전부터 아는 사이 였지만, 그에게 있어 네지다노프는 새로운 얼굴이었다. 그가 대학생이라는 말을 들은 골루시킨은 또다시 껄껄거리고 웃더니 다시 한 번 악수를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좋습니다! 우리 부대의 인원이 는 셈이군요. 학문은 광명이고 무식 은 어두움이란 말이 있지만, 나 자신 제대로 교육을 받진 못했어도 사물을 이해 할 줄은 알지요. 그러니까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거지만!" 네지다노프에게는 골루시킨이 겁을 집어먹고 당황해하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당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심해라, 카피탄! 체면을 손상시켜선 안 된다!' 이것이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의 머리에 맨 먼저 떠오르는 생각 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안정을 되찾고, 성급하고 분명치 않은 더듬거리는 어조 로 바실리 니콜라예비치의 일이며 그의 성격, 프로퍼갠더(그는 이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으나 느릿느릿하게 발음하는 습관이 붙어 있었다)의 필요성, 자신이 아주 유능한 새 젊은이를 찾아냈다는 것, 이젠 시기가 임박한 것 같아서, 란세 트(針)를 사용할 만큼 되었다는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란세트란 말을 할 때에는 흘끗 마르켈로프를 쳐다보았지만, 네지다노프 쪽으로 몸을 돌려 그 위대한 통신원 키슬랴코프에 못지않을 정도로 장황하게 자기 선전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이미 오래 전에 고집쟁이 상인형으로부터 탈피했으며 프롤레타리아(그는 이 말도 따로 외고 있었다)의 권리도 잘 알고 있 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장사를 그만두고 재산을 늘리기 위해 은행 사업을 하 고 있지만 그것은 유사시에 그 재산을 사회 운동을 위해 이른바 민중을 위해 내놓으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자기는 돈이라는 것 을 멸시하고 있다고 했다. 이때 하인이 안주를 들고 들어왔다. 골루시킨은 군침 을 한 번 삼키고는 "자, 한잔씩 드시는 것이 어떻소?" 하고 물어본 후 자기부터 큰잔에 따른 후추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손님들은 안주를 들기 시작했다. 골루시킨은 큼직한 어란 조각을 입에 넣었 다. 그는 "자, 어서 좀 드십시오. 아주 기가 막힌 어란이에요" 하고는 깨끗이 잔 을 비웠다. 그리고 그는 다시 네지다노프에게로 몸을 돌려, 어디서 왔으며 여기 서는 얼마나 머무를 작정이며 또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리 고 네지다노프가 시퍄긴 집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듣자 그는 깜짝 놀란듯 이 렇게 외쳤다. "그 지주라면 나도 알고 있어요! 머리가 텅 빈 사람이죠!" 그러고는 다짜고짜 로 S현의 지주란 지주는 모조리 헐뜯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민적(公民的)인 정 신이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것 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욕설을 퍼붓고 있는 동안에도, 이리저 리 구르고 있는 그의 두 눈에는 여전히 불안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사내는 어떤 인간이기에 저 모양일까? 무엇 때문에 이런 사람이 우리에게 필요 하단 말인가! 네지다노프에게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솔로민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르켈로프는 너무나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므로, 네지다노프가 참다못해 왜 그렇게 우울하냐고 물어보았을 정도였다. 거기에 대 해 마르켈로프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은 '뭔가 할 말은 있 어도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야' 하는 듯한 표정을 상대방으로 하여금 느끼도록 하고 싶을 때 사람들이 곧잘 쓰는 그러한 어조였다. 골루시킨은 다시 어떤 사람 에 대해 욕설을 퍼붓고 나서는 젊은 세대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요즈음 젊은 세대는 정말 똑똑하거든. 똑똑해. 정말이야!" 솔로민은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 골루시킨이 아까 말한 유능한 젊은이란 도대체 누구며 어디서 찾아냈느냐고 물어보았다. 골루시킨은 큰 소리로 웃어대 더니 "이제 곧 알게 됩니다, 이제 곧 알게 돼요" 하고 두어 번 되풀이하여 말한 뒤, 솔로민에게 곧장 일이며 사기꾼 공장주에 대하여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 다. 솔로민은 아주 짤막하게 대답해 주었다. 이때 골루시킨은 일동에게 샴페인 을 따라주고 네지다노프의 귓전으로 몸을 굽히며 "공화국을 위하여" 하고 속삭 이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네지다노프도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솔로민은 아 침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하며 사양했다. 마르켈로프는 울분 어린 단호한 표 정으로 밑바닥까지 죽 잔을 비웠다. 그는 몹시 초조한 표정이었다. '노상 이렇게 편안히 술이나 마시고 있으니, 본론으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는 책 상을 쾅 내리치고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그러고는 말을 계속하려 고 했다. 바로 이때 항아리 같은 얼굴에 머리를 곱게 빗어내린, 폐병에 걸린 듯한 사나 이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상인식으로 남경산(南京産) 무명 저고리를 입고 있 었고, 두 손을 날개처럼 벌리고 있었다. 그는 손님에게 인사를 하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골루시킨에게 뭐라고 보고한다. "이제 곧, 이제 곧 가지." 골루시킨은 성급하게 대답했다. "여러분" 하고 그는 덧블였다. "좀 실례를 해야겠습니다. 우리집 점원 바샤가 사건(골루시킨은 일부 러 농담삼아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나를 가져왔군요. 그래서 좀 다녀와야겠습 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오늘은 제집에서 식사를 해주십시오. 오후 세 시 올시 다. 그땐 훨씬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 테니까요!" 솔로민이나 네지다노프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그러나 마르켈로 프는 여전히 우울한 빛을 띤 채 곧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그렇게 하죠. 그렇지 않으면 이게 무슨 꼭두각시놀음입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골루시킨은 이렇게 말하고 마르켈로프 쪽으로 몸을 굽히 며 덧붙였다. "아무튼 천 루블은 사업에 기부하겠소. 그것만은 근심 말아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오른손 새끼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뻗치고 세 번쯤 흔 들어 보였다. '문제없어요!'라는 뜻이다. 그는 문간까지 손님들을 바래다주면서 문지방에 서서 이렇게 외쳤다. "세 시에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하고 마르켈로프 혼자만이 대답했다. "여러분!" 세 사람 모두 한길로 나오자, 솔로민이 말했다. "난 마차를 집어타 고 공장으로 돌아가겠소. 도대체 점심때까지 무엇을 한다는 거요. 이렇게 빈둥 빈둥 시간을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게다가 그 상인이란 자에게서는 내가 보 기엔 털은 고사하고 젖도 짜낼 수 없을 것 같으니 말이오." "아니, 털쯤은 얻을 수 있을 거요." 마르켈로프가 침울하게 말했다. "바로 지 금도 기부금을 약속하는 걸 보았죠. 그건 그렇고 당신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인가요? 우린 일일이 사람을 가려낼 처지는 못 됩니다. 우린 선택에 까다로운 아가씨들과는 다르니까요." "내가 왜 남을 싫어하겠소!" 솔로민이 조용히 말했다. "난 그저 자문해 보았 을 뿐이에요. 내가 남아서 무슨 이익이 있을까 하고요. 그렇지만," 그는 네지다 노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럼 남도록 하죠. 친구 따라 강남도 간다는데요 뭐." 마르켈로프는 머리를 들었다. "그동안 공원에라도 가봅시다. 날씨가 좋으니 사람 구경도 할 겸." "갑시다." 그들은 걷기 시작했다. 마르켈로프와 솔로민이 앞장서고. 네지다노프는 그 뒤 를 따랐다. 18 네지다노프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지난 이틀 동안 그는 얼마나 많은 새로운 감각과 새로운 얼굴을 경험해 왔던가. 그는 생전 처음 이성과의 접 촉을 가졌다. 십중팔구 그는 그 처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여러 가 지 사업 계획과도 관련을 맺었다. 그는 이 운동에도 자기의 전력을 바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한가? 그는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럼 동요하고 있는 것일까?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일까? 당황해하고 있는 것 일까? 오오, 물론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적어도 전투가 임박함에 따라 통반 되는 그 정신적인 긴장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제1선으로 돌진하고자 하는 병 사의 갈망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역시 아니다. 그렇다면 끝으로 자기 사업은 믿고 있는 것일까? 자기의 사랑은 믿고 있는 것일까? "오오 탐미파여! 회의파 여!" 그의 입술은 소리 없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큰 소리로 외치고 싶고 미친 듯이 날뛰고 싶은데도 왜 이토록 피곤하고 말조차 하고 싶지 않은 걸까? 그러 나 마리안나는? 그 사랑스러운 충실한 동지, 그 순결하고 정열적인 마음, 그 놀 랄 만큼 아름다운 처녀, 과연 그녀는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와 만 나서 그녀의 우정과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 이것은 진정 위대한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지금 자기 앞을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의 친구 - 마르켈로프와 아직도 잘은 모르나 어쩐지 애착을 느끼게 하는 솔로민- 가 진정 러시아의 본질, 아니 러시아 생활의 뛰어난 전형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리고 그 들과의 교제, 그들과의 접근을 역시 행복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왜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혼란하고 아픈 것일까? 무엇 때문에, 어째서 이러한 우수가 생기는 것일까? "만일 네가 반성가이고 우울병자라면," 그의 입 술이 또다시 소곤거렸다. "그런 주제에 어떻게 혁명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너 같은 놈은 찌푸린 얼굴과 감각에 골머리를 앓으면서, 오만 가지 심리적인 고 찰이나 섬세성을 파헤치고 있는 편이 나을 게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자네의 그 병적이고도 신경질적인 울분과 발작을, 신념이 강한 사람의 사내다운 분노와 정 의의 증오처럼 착각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오오, 햄릿, 햄릿, 덴마크의 왕자. 어 떻게 하면 너의 그늘에서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너에 대한 온 갖 모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알렉세이! 이봐, 러시아의 햄릿!" 마치 지금까지의 모든 상념에 대한 반향 과 도 같이 갑자기 째지는 듯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곳에서 당신 을 만나다니!" 네지다노프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파클린이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배이지색 여름 양복에 넥타이도 없이 파란 리본을 두른 밀짚모자 를 뒤통수까지 눌러쓰고, 목피신을 신은 목동 차림의 파클린이었다. 그는 곧 절뚝거리며 네지다노프 곁으로 다가와서 그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우선," 파클린은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린 공원 안에 있긴 하지만, 역시 옛날 습관대로 서로 껴안고 키스를 해야지. 한 번! 두 번! 세 번! 둘째로 오늘 여기서 지네를 만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일은 틀림없이 자네를 만날 수 있었 을 걸세. 자네의 거처를 알고 있으니 말이야. 그리고 이 거리에 온것도 실은 자 네를 만나기 위해서라네. 어떻게 알았냐고? 그건 나중에 말하기로 하세. 그리고 셋째로 자네의 친구들을 소개해 주게나. 그들이 어떤 사람이고 또 내가 누구라 는 걸 간단히 소개해 주게. 그 다음 마음껏 인생을 향락해 보세나!" 네지다노프는 친구의 청을 받아들여서, 파클린과 마르켈로프와 솔로민의 이름 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누구는 어디에 살고 무엇을 하며 어떠어떠한 사람이라 고 일일이 소개해 주었다. "좋습니다!" 파클린이 외쳤다. "그럼 이제부터 무지한 군중 옆을 떠나, 하긴 그런 군중은 보이지도 않지만, 조용히 벤치로 여러분들을 모시게 해주십시오. 내가 공상에 젖을 때면 언제나 그 벤치죠. 정말 멋진 경치에요. 현지사의 저택 과 얼룩무늬 초소가 둘, 헌병이 셋, 그 밖엔 개 한 마리 없다 그 말씀입니다. 하 지만 내 이야기에 너무 놀라지는 마세요. 나는 여러분을 웃기기 위해 공연히 애 쓰고 있는 데 불과하니까요! 친구들의 의견에 의하면, 나는 러시아 의 기지를 대표하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겁 니다." 파클린은 친구들을 조용한 벤치로 안내하고 남루한 옷차림의 두 여인을 벤치 에서 쫓아낸 다음, 그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젊은 친구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대체로 꽤 지루한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특히 처음 얼마 동안 더했다. 그리고 유익한 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잠깐만!" 파클린이 네지다노프 쪽을 바라보며 갑자기 외쳤다. "내가 왜 여기 왔는지, 그걸 자네한테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 자네도 알다시피 난 여름 마다 여동생을 어디론가 데리고 가는 버릇이 있지 않나. 그런데 자네가 이 도시 근처로 떠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이 도시에 놀랄 만한 두 인물이 살고 있 다는 걸 생각해 낸 걸세. 어머니 쪽으로 친척뻘이 되는 한 부부가 살고 있지, 우리 아버지는 서민 출신이었지만(네지다노프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파 클린은 새로운 두 사람을 위해 일부러 말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귀족 출신이었 거든. 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릴 초대하고 있었던 거야! 가만있자! 나는 생 각했지. 그것 참 안성맞춤이군. 두 분 다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니까 여동생도 그 집에 있는 것이 편할 것이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 오누이는 달려온 거라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대로야! 여긴 정말 좋더 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정말이야! 정말사람들이 좋아! 당신들도 한번 사귀 어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도대체 당신들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겁 니까? 어디서 식사를 하실 작정이세요? 그리고 또 여긴 무슨 일로 오시게 됐 죠?" "우린 오늘 골루시킨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어. 여기 그 런 상인이 살고 있지." 네지다노프가 대답했다. "몇 시에?" "세 시에." "자네들이 그 사람과 만나는 건, 역시 그 문제에 대해서." 파클린은 솔로민, 마르켈로프에게 시선을 던졌다. 솔로민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마르켈로프는 점 점 얼굴빛이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이와, 알로샤. 이 친구들한테 말 좀 해주게 나도 자유 사상가라는 걸 알려주 란 말이야. 그러니 내 앞에선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구. 나도 자네. 자네도 조직체의 일원이 아니냔 말이야." "골루시킨 역시 우리 편이야." 네지다노프가 말했다. "아, 그것 참 잘됐군! 세 시까진 아직도 시간이 많으니 어때, 우리 친척집에나 가는 것이." "아니, 자네 정신이 나갔나!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그 집에선 근심할 필요가 없네! 내가 책임을 지지. 그곳은 정말 오아시스라 고 할 수 있지! 정치건 문학이건 현대적인 것이라곤 조금도 얼굴을 들이밀 수 없는 곳이니까. 비록 집이라곤 지금 어디를 가도 찾아볼 수 없는 부풀어오른 게 딱지 같은 것이지만, 그 속에서 풍기는 냄새가 고전적이란 말이야. 그리고 인간 도, 공기도, 무엇을 보든지 모두가 고전적이거든. 그곳에는 에카테리나 2세 것도 있는가 하면 콤팩트 파우더, 옛날식 스커트 등 15세기 것이 즐비하단 말일세! 주인 부부는 글쎄 상상 좀 해보게. 두 사람 모두 같은 연배의 늙어빠진 노인들 이지만 주름살 하나 없다네. 토실토실 살찐 몸에 옷차림도 깨끗하여 마치 한 쌍 의 앵무새 부부라고나 할까. 또 바보라고 하리만큼, 아니 거룩하다고 하리만큼 그지없이 선량한 노인들이야! 아마 '그지없이' 선량하다는 건 때때로 도덕적인 감정의 결핍을 수반할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까지는 개입하지 않기로 하고, 어쨌든 이 노부부가 선량하다는 것만은 확실해! 거리에서도 그들을 '행복한 부부'라고 부르고 있더 군. 두 사람 모두 이상한 물무늬가 있는 실내옷을 입고 있지만 그 천이 매우 질 겨서 지금은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이라네. 또한 이들은 서로가 몹시 닮아 서, 한쪽이 실내모를 쓰고 있으면 또 한쪽은 나이트캡을 쓰고 있다는 정도의 차 이뿐이지. 게다가 그 나이트캡마저 실내모와 마찬가지로, 매듭만 없을 뿐이지 역시 리본이 달려 있단 말이야. 만일 그 리본의 매듭만 없다면 누가 누군지 잘 분간할 수도 없을 걸세. 게다가 남편에게는 수염조차 없다네. 그들 부부는 한쪽은 포무슈카, 또 한쪽은 피무슈카라고 부르지. 자네에게 말이 지만 돈을 주고서라도 꼭 한 번 가서 만나볼 만한 인물들이야, 노부부는 애지중 지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누가 그들을 찾아오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대환영이 지! 당장 있는 물건을 모두 꺼내 보일 정도로 마음씨가 유순하단 말이야. 단 한 가지 그 집에선 담배를 피울 수 없는 게 흠이지. 그렇다고 그들이 뭐 분리파 교 도라는 건 아닐세. 다만 담배를 무척 싫어하니까 말이지. 하긴 그럴 수도 있겠 지, 그들 시대에야 누가 담배를 피웠겠나? 그렇다고 그들이 카나리아를 기르고 있는 것은 아닐세. 카나리아 역시 그 당시엔 그다지 유행했던 것이 아니니까. 어쨌든 좀처럼 만날 수 없는 기회니 동의해 주게나! 자, 어때, 가겠나?" "글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하고 네지다노프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 아직도 할 말을 다 못 했어. 두 사람은 목소리마저 닮아 눈을 감고 듣고 있으면 누가 말하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라네. 자, 여러분, 여러분은 지 금 위대한 사업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가공할 만한 전투일지 도 모릅니다. 그 소용돌이치는 파도 속으로 뛰어들기 전에 한 번 그런 분위기에 잠겨보는 것도." "물구덩이 속에 잠겨보란 말인가요?" 마르켈로프가 가로챘다. "설령 그런들 어떻습니까? 그야 물론 물구덩이지만, 그래도 썩은 물은 아니니 까요. 초원에 가끔 그런 못들이 있지요. 물이 흐르지 않는데도 항상 깨끗한 못 말입니다. 결국 그것은 밑에서 샘이 솟아오르기 때문이죠. 내가 말하는 부부도 가슴 밑바닥에 그런 샘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샘을 말 이오. 그리고 다른 건 고사하고라도 백 년 전, 아니 150년 전의 인간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을 보는 것만 해도 충분한 가치는 있을 겁니다! 자, 어서 가봅시다. 내 뒤를 따르세요. 그렇잖으면 갑자기 그들에게도 좋은 말이 다 가와서 -그건 두 사람 다 틀림없이 같은 시각이겠지만- 그 한 쌍의 앵무새가 자기 나무에서 떨어지고 말 겁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고풍의 양식도 그들과 함 께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말 테죠. 그 부풀어오를 듯한 집은 흔적도 없이 사 라지고, 그 자리에는 저희 할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이 살던 자리'엔 언제 나 자라게 마련인 쐐기풀, 우엉, 방가지똥, 약쑥, 수영이 더부룩이 자라게 될 겁 니다. 나중에는 한길마저 없어져 사람들이 찾아와도 영원히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테죠." "어때요?" 하고 네지다노프가 외쳤다. "어디 한번 가볼까요?" "나도 무척 가보고 싶군요" 하고 솔로민이 말했다. "내 분야와는 인연이 멀지 만, 그래도 흥미가 있어 보이니까. 우리가 이렇게 몰려가도 그다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파클린씨가 보증만 해준다면야 구태여." "제발 그런 근심은 하지 마십시오?" 이번엔 파클린이 외쳤다. "도리어 기뻐할 겁니다. 덮어놓고 기뻐할 거예요. 체면을 차릴 것도 없구요! 여러분께 말한 것처 럼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니까요. 우리 노인에게 노래라도 시켜봅시다. 그런데 마르켈로프씨, 당신도 동의하십니까?" 마르켈로프는 화가 난 듯 어깨를 들먹였다. "나 혼자만 여기 남아 있을 순 없 잖소! 그러니 좇아갈 수밖에요." 그들은 모두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친구는 왜 저렇게 험상궂지?" 하고 파클린이 마르켈로프를 가리키면서 네지다노프에게 말했다. "저 친군 영락없이 메뚜기만 먹고 살았다는 세례자 요 한이군그래. 꿀도 없이 메뚜기만 처먹은! 그런데 이쪽은," 그는 턱으로 솔로민을 가리키며 이렇게 덧붙였다. 멋진 친구야! 그렇게 기분 좋게 웃다니! 내가 보기 엔 남보다 뛰어난 사람만이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거야. 웃는 사람 자신은 그걸 느끼지 못하겠지." "과연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네지다노프가 물었다. "드물긴 하지만 있긴 있지." 파클린은 대답했다. 19 포무슈카와 피무슈카 즉 포마 라브렌치예비치와 예브피미야 파볼로브나 수보 체프는 두 사람 다 뼈대 있는 러시아의 귀족 가문에 속해 있었고, 이 시에서는 가장 오랜 주민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남달리 일찍 결혼을 한 그들 부부가 거리 가장자리에 있는 이 조부(祖父) 전래의 목조 건물에 정착한 것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다. 그때부터 그들 부부는 한 번도 그 집을 떠난 적이 없었고, 자기네의 생활 양식이나 습관을 바꾸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는 시계 바늘이 멎어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떠한 '새로운 유행'도 그들의 '오아시스' 장벽을 뚫 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가진 재산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여전히 일년에 몇 차례씩 가금(家禽)이며 그 밖의 식료품을 상납하고 있었고, 관리인은 약속된 시기에 소작료와 멧닭 한 쌍씩을 들고 찾아오곤 했다. 그 멧닭 은 지주의 숲속에서 쏘아 잡은 것처럼 보고되고 있었으나 실은 오래 전에 흔적 도 없이 사라진 별장 쪽에서 잡은 것이었다. 관리인은 응접실 문지방에서 차를 대접받고, 양피 모자와 녹색의 녹비(鹿皮) 장갑 한 켤레를 선사받은 후 잘 가라 는 인사와 함께 돌려 보내지곤 했다. 수보체프가에는 옛날과 다름없이 하인들이 넘쳐 흘렀다. 늙은 하인 칼리오프이치는 깃이 높고 조그만 쇠단추가 달린 굉장 히 두꺼운 나사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는 옛날처럼 "식사 준비가 되었습니다 " 하고 노래 부르듯 보고하기도 하고, 노부인의 안락의자 뒤에 선 채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그는 식기장을 관리하면서 여러 가지 식료품과 카르다몬(약용식물의 일종), 레몬까지 취급하고 있었다. "농노가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느냐?"고 물으면 그때마다 그는 "그 런 엉터리 같은 소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 자유라는 건 터키인에게나 있는 거예요. 그런 재난을 무사히 피할 수 있는 걸 저는 다행으로 생각해요"하고 대 답하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푸프카라는 난쟁이 처녀를 심심풀이로 데리고 있었 고, 늙은 유모 바실리예브나는 식사때마다 커다란 검정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들어와서는 바람이 새는 목소리로 나폴레옹이며 12년 전쟁, 반기독교 사상, 살 갗이 횐 아랍인의 이야기 등을 늘어놓았다. 또 어떤 때에는 슬픈 이야기라도 하 듯이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자기가 꾼 꿈과 그 꿈에 대한 해몽, 자기의 트럼프 점괘들을 일일이 보고하기도 했다. 수보체프의 집은 그 건축 양식마저 거리의 다른 집과는 달랐다. 집 전체가 참 나무로 지어져 있었고 창문은 모두가 정사각형인데다가 이중으로 된 그 창들은 아직까지 한 번도 떼어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각양각색의 현관 마루와 자질구 레한 방들, 밝고 깨끗한 안방, 대청, 난간이 달린 지붕 밑 테라스, 반들반들한 기둥으로 받쳐진 곁채, 뒤 층계, 골방들이 있었다. 집 앞에는 방책으로 둘러싼 조그만 정원이 있었고, 뒤에는 뜰이 있었다. 뜰에는 새장, 헛간,창고, 움냉동실 등이 널려 있어서 마치 무슨 소굴과도 같았다. 그렇다고 이 모든 건물 속에 재 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중 어떤 것은 벌써 쓰러져가고 있 는 것도 있어서 그저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다는 것뿐이 었다. 수보체프가에는 말이 두 필밖에 없었다. 옛날의 승마용 털북숭이 말이었는데 그중 한 필은 너무 나이가 들어서 군데군데 횐 털로 얼룩지기까지 했다. 네드비 가(움직이지 않는다는 뜻)가 그 말의 이름이었다. 고작 한 달에 한 번쯤 마차에 말을 달곤 했으나, 그 마차는 온 장안에서 화제가 될 만큼 괴상한 것이어서 마 치 지구의의 앞부분을 4분의 1가량 태어낸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마차 안은 큰 사마귀 같은 알맹이가 촘촘히 돋친 도톨도톨한 외국제의 황색 천으로 입혀져 있었다. 아마 이런 천은 앨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우트레흐르나 리용에서 짠 것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부도 생선 냄새와 타르 냄새가 몸에 밴 케케묵은 노인이었다. 구레나룻이 바로 눈 근처에서 시작되고 두 눈썹이 조그만 폭포수처럼 그 구레나룻 속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전체적으로 동작이 느 려서 잠시 담배 냄새를 맡는데도 5분이나 걸리고, 채찍을 허리에 차는 데 2분, 네드비가 한 필을 마차에 다는데도 두 시간 이상 걸렸다. 그의 이름은 페르피슈 카라고 했다. 수보체프 부부는 일이 생겨 외출을 하게 되어, 마차가 조그만 비 탈길이라도 올라갈 때면 겁에 질려(비탈길을 내려갈 때에도 그들은 역시 겁에 질리곤 했다) 마차의 손잡이를 꼭 잡으면서 소리를 내어 "말에게 말에게 사무엘 의 힘을 주시고, 우리는 솜털보다 가볍게, 솜털보다 가볍게" 하고 애원하곤 했 다. S시의 사람들은 모두 수보체프 부부를 괴짜 혹은 미치광이와 다름없이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자신도 스스로 현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자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슬퍼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기가 태 어나고 성장하고 결혼했던 그 생활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옛날 습관 중 에서 단 하나 그들이 길들일 수 없었던 특징이 있었다면, 아직까지 그들은 한 번도 남을 처벌하거나 욕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만 일 어떤 하인이 소문난 술주정꾼이거나 도둑놈이라고 판명되었을 때에는, 우선 오랫동안 참고 또 참아냈다. 그것은 마치 사나운 날씨를 꾹 참아내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 집을 떠나 다른 집으로 가도록 주선해 주는 것이 었다. 남의 집에 가서 좀더 고생을 해봐야 해, 하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은 그들 부부의 생애에서 하나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을 정도였다. 그 들은 곧잘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건 참 오래 전의 일이지. 그 일이 있은 것은 우리집에 장난꾸러기 알도슈카가 있었을 때였으니까." 혹은 이렇게도 말했다. "그건 여우 꼬리가 달린 할아버지의 털모자를 잃어버렸을 때의 일이었어." 수보 체프가에서는 아직까지도 그런 종류의 모자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옛날 습관에 없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특징 중 그들 부부에게서 찾 아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피무슈카도 포무슈카도 그다지 믿음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포무슈카는 오히려 볼테르의 신조를 믿고 있을 정도 였고, 피무슈카는 성직자를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워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 면 성직자는 흉악한 눈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집에 사제가 와서 앉아 있었 는데," 그녀는 곧잘 이렇게 말했다. "글쎄, 나중에 가보니 크림이 썩어 있질 않 겠어요?" 그들 부부는 가끔 교회에 나가곤 했으며 정진(精進)도 카톨릭식으로 하면서 달걀과 버터, 우유를 사용하고 있었다. 거리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 으나, 물론 그것으로 그들 구부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선량함은 모든 것을 이겨냈다. 모두들 수보체프 부부를 조소하면서 괴짜니 바보 니 행복한 사람들이니 하며 뒷말들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그들 을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그들 부부가 존경을 받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을 방문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역시 그것을 한탄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 이 함께 있으면 그들은 조금도 지루한 줄을 몰랐다. 그러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한 번도 헤어진 적이 없고 또 다른 사람과의 교제도 원하지 않았다. 또한 포무 슈카와 피무슈카는 지금까지 한 번도 앓아 누운 적이 없었다. 만일 그들 중의 어느 한쪽이 가벼운 병에라도 걸리면, 그들 두 사람은 함께 보리수 꽃을 절인 술을 마시고 따스한 버터를 허리에 바르거나 아니면 따끈한 수지(獸脂)를 발바 닥에 떨어뜨렸다. 그러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거뜬해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매 일매일 똑같은 생활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침 늦게 일어나서는 약 절구와 같 이 생긴 조그만 찻잔으로 초콜릿을 마셨다. "차는 우리보다 늦게 유행하기 시작 한 거지." 그들은 노상 이렇게 말했다. 그 다음 그들은 서로 마주 앉아서 무슨 이야긴가를 주고받기도 하고 (화제만은 언제나 풍성했다!) 오락 잡지나 <세계의 거울> 혹은 <아오니드>를 읽기도 했다. 또한 금박 테두리에 빨간 산양 가죽으 로 장정한 낡은 사진첩을 들추기도 했다. 표지의 글에 의하면 이 사진첩은 옛날 바르바라 로브일리나 여사의 소유였는데 언제, 어떻게 이 사진첩이 그들의 손에 들어왔는지는 그들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그 속에는 프랑스어로 쓴 몇 편의 시 와 러시아 시 그리고 산문들이 들어 있었다. 그 일례로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키케로에 관한 간단한 감상문이 적혀 있었다. 키케로는 자신이 어떤 각오 속에 출납 봉공(出納奉公)의 직책을 맡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했도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직책을 맡을 때마자 항상 성심성의껏 일하겠다는 것을 신에게 맹세하고, 그 임무를 완전히 수행하는 것만 이 신에 대한 거룩한 의무라 생각했노라." 이러한 결심을 품은 키케로는 불의의 쾌락에 몸을 맡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의당 불가결하다고 생각되는 향락조차 애써 피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는 이렇게 덧붙여져 있었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 시베리아에서 씀." 그리고 <치르시스>라는 시도 꽤 재미있었다.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우주 위에 평온이 깃들이고 즐겁게 이슬비 반짝이면 자연은 싸늘하고 부드럽게 새 생명을 되찾는다! 치르시스 혼자만이 비탄에 젖어 안타까이 고민하고 슬퍼하지만 사랑하는 아네타가 없는 곳에서 어느 누가 그대를 위로하리오! 그리고 1970년 길 가는 대위(大尉)의 즉흥시인 <엿샛날의 환상>이란 시도 있 었다. 언제까지나 잊지 않으리 그대 사랑하는 마을이여! 그리고 영원토록 기억하리라 꿈속같이 흘러간 그 시간을! 내가 보낸 그 시간의 그리움이여! 마을의 여주인 곁에서 수많은 아가씨와 아낙네들 그리고 흥겨운 사람들의 더없이 흐뭇한 분위기 속에서 행복하게 흘러간 닷새간이여! 사진첩의 마지막 장에는 시 대신 위병과 경련의 처방뿐 아니라 놀랍게도 기 생충의 구제법까지 적혀 있었다. 수보체프 부부는 정각 열두 시에 점심을 들었다. 요리는 모두가 옛날식으로 치즈 과자, 오이 즙, 걸죽한 생선 수프, 오이지가 든 고기 수프, 오트밀, 계란빵, 젤리, 전, 사프란을 바른 닭구이, 꿀을 바른 밀가루 부침 같은 것들이었다. 식사 후면 두 사람은 낮잠을 자지만 한 시간을 넘지 않았다. 잠을 깨면 두 사람은 다 시 마주 앉아 빨간 앵두즙을 마셨다. 가끔 '40대의 지혜'라고 불리는 소다수를 마실 때도 있지만 그것을 마실 때면 거의 대부분 소다수가 몽땅 밖으로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그들 부부는 배를 끌어안고 웃곤 했다. 그러나 칼리오프이치만은 적지않게 투덜거렸다. 사방에 흩어진 소다수를 훔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는 음료수를 고안해 낸 사람이 마치 가정부와 요리사나 되는 것처 럼 그들에게 길게 불평을 퍼붓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뭐가 맛있다구? 가구 만 더럽힐 뿐인데." 그 다음 수보체프 부부는 다시 뭔가를 읽기도 하고 난쟁이 푸프카와 한바탕 웃기도 하고 혹은 옛날 유행가를 둘이 합창하기도 했다.(두 사 람은 목소리가지 똑같았다. 높고 가냘프며 다소 떨리면서도 쉰 목소리 특히 낮 잠을 잔 후에는 목소리가 더 쉰 듯했으나 그래도 듣기에는 기분 좋았다). 그들 은 또 카드 놀이를 했으나 그것 역시 옛날 놀음이어서 코레브스나 라무슈, 보스 톤삼프란젤 같은 것들뿐이었다. 이윽고 사모바르가 나왔다. 그들은 매일 밤차를 마셨다. 이 점에서만은 그들도 시대 정신에 양보를 하고 있었지만, 차를 마실 때마다 그들은 이것은 나쁜 버릇이며 이 중국 엽차 때문에 사람은 약해지는 것 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대체로 그들은 신시대의 공적이나 구시대의 찬미는 피하고 있었다. 그들은 출생 후 지금까지 다른 생활 양식이라고는 모르고 살아 왔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이상하 게 여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생활 방식을 좋게 생각하고 있기까지 했 다. 다만 그들이 자기들에게 변화를 강요하지만 않으면 되었던 것이다. 여덟 시 가 되면 칼리오프이치가 저녁마다 먹는 야식 오코로슈카(고기와 야채를 넣은 수프)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아홉 시가 되어 폭신폭신한 줄무늬 새털 이불이 포무슈카와 피무슈카의 뚱뚱한 몸을 포근히 감싸주면 곧 평화로운 잠이 그들의 눈꺼풀에 찾아드는 것이다. 그러면 낡은 집은 온통 고요한 정적 속에 잠겨버린 다. 등잔이 가물거리고 생쥐와 멜리사의 냄새가 풍기며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이런 가운데 선량하고 우스꽝스럽고 천진난만한 그 부부는 고요 한 꿈나라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파클린은 바로 이 괴상한 집으로, 아니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여동생이 묵고 있는 '앵무새'의 집으로, 자기의 친구들을 안내했던 것이다. 그의 여동생은 똑똑한 편이였고 얼굴도 밉지는 않았다. 특히 그녀의 눈은 놀 랄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꼽추라는 신체적인 조건이 그녀를 상심 케 했고, 모든 자부심과 명랑함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의심 많은 짓궂은 여자로 만들어버렸다. 그 이름도 지나치게 까다로워서 스난둘리야라고 불리고 있었다. 파클린은 소피야로 개명시키려고 하였으나 그녀는 꼽추에게는 스난둘리야 같은 이름이 어울린다고 하면서, 여전히 그 괴상한 이름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훌륭한 음악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어서 피아노도 제법 잘 쳤다. "제 손 가락이 길기 때문이에요." 수심 어린 목소리로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꼽 추는 대개 손가락이 길게 마련이거든요." 손님들이 그 집에 들어간 것은, 포무슈카와 피무슈카가 식사 후의 낮잠에서 깨어나 앵두즙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우린 지금 18세기로 들어가는 겁니다." 수보체프가의 문지방을 넘어서자마자 파클린이 이렇게 외쳤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18세기는 현관에서부터 나지막하고 푸르죽죽한 병풍으로 손님들을 맞아주었다. 병풍에는 화장한 귀부인과 기사들의 흑색 반면 화상(半面 畵像)이 오려붙여져 있었다. 라파체르의 착상이 들어맞아 1880년대 러시아에서 는 이런 그림들이 대유행을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네 사람씩이 나 갑작스레 나타났다는 것은, 거의 방문객이라고는 없었던 이 집에 놀랄 만한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구둣소리가 나는가 하면 맨발로 왔다갔다하는 소리도 들 리고 몇 명의 여자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가는 다시 사라졌다. 또한 누구를 밀치 는 소리와 누군가의 비명소리, 콧바람소리, 또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 는 소리도 들려왔다. "저리 꺼져!" 이윽고 칼리오프이치가 거친 나사 제복을 입고 나타나서 대청 문을 열며 커 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나리, 실라 삼소니치가 친구분들과 함께 오셨습니다." 주인 부부는 하인들보다 훨씬 덜 당황해했다. 객실은 꽤 넓은 편이었으나 그 래도 네 사람의 건장한 사내들의 불의의 침입은 두 부부를 어느 정도 놀라게 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파클린이 익살을 섞어가며 한 사람 한 사람씩 소 개함으로써 주인 부부를 곧 안심시킬 수 있었다. 그는 네지다노프와 솔로민, 마 르켈로프 셋 다 얌전한 사람들이고, 결코 관원들이 아니라고 했다. 포무슈카와 피무슈카는 관원, 즉 관직에 있는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빠의 부름을 받고 나온 스난둘리야는 수보체프 부부보다는 휠씬 더 흥분하 고 훨씬 더 체면을 차리기에 급급했다. 수보체프 부부는 같은 어조로 똑같이 손님들에게 의자를 권하고, 차와 초콜릿 그리고 잼이 든 소다수 중에서 어느 것을 들겠느냐고 물었다. 손님들이 조금 뒤 골루시킨이란 상인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어 있으므로 아무것도 들고싶지 않다 고 말하자, 노부부는 더 이상 권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똑같이 두 손을 배 위에 얹고는 손님들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처음 얼마동안은 활기가 없었으나, 곧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파클린은 유명한 고골리의 일화, 즉 시장이 초만원을 이룬 교회 속을 뚫고 들어간 이야기며, 시장 자신이 만들었다는 우스 운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노인 부부를 몹시도 웃겼다. 그들 부부는 웃는 것까 지도 같았다. 째지는 듯한 높은 소리로 웃다가 나중에는 기침을 하면서 빨갛게 상기된 얼굴에 땀까지 흘리는 것이었다. 파클린은 수보체프 같은 사람에겐 고골 리의 인용문이 매우 강력한, 그 어떤 폭발적인 효과를 주리라는 것을 미리부터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부부를 위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 부부를 친구에게 보이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전술을 바꾸어 노부부가 마음놓 고 떠들어댈 수 있도록 대화를 이끌어갔다. 포무슈카는 나무로 조각한 비장(秘 藏)의 담배 케이스를 손님들에게 꺼내보였다. 옛날에는 그 케이스에서 각양각색 의 사람 모습을 서른다섯까지나 셀 수 있었으나 이미 오래 전에 다 닳아 없어 져 이젠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포무슈카에게는 그것이 보였다. 아니, 아직까 지 그것이 보일 뿐만 아니라 하나하나 셀 수도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가리키 며 말했다. "자, 보시오, 여기 한사람이 창문을 내다보죠. 잘 보세요, 목을 내밀고 있어 요." 그러나 손톱 끝이 올라간 그의 통통한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담배 케이스 뚜껑의 나머지 부분과 마찬가지로 편편하고 매끄러울 뿐이었다. 그 다음 그는 자기 머리 위에 걸려 있는 한 폭의 유화에 손님들의 주의를 기울이게 했 다. 그것은 암갈색의 말을 타고 쏜살같이 설원을 질주하는 사냥꾼의 옆모습을 (말도 옆모습이었다. ) 그린 것이었다. 사냥꾼은 파란 띠가 달린 높다란 백색 양 피모를 쓰고 금속 띠를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 비단으로 수놓은 장갑 한 켤레가 허리띠에 찔려 있었고, 검은 보석이 붙은 은테 단검이 거기에 매달려 있었다. 무척 젊고 살쪄 보이는 사냥꾼은 빨간 술로 장식된 커다란 뿔나팔을 한 손에 들고 또 한 손에는 고삐와 채찍을 잡고 있었다. 말은 네 발을 모두 공중에 들고 있었는데, 화가는 편자는 물론 하나하나의 못까지도 알아볼 수 있게 섬세하게 그려 놓았다. "자세히 보세요." 말 다리 뒤의 하얀 공간에 그려진 네 개의 반원 형 얼룩점을 포무슈카는 그 통통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눈 속의 발자국 그것까지도 그렸다니까!" 발자국이 왜 네 개뿐이고, 그 뒤에는 하 나도 보이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포무슈카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나랍니다!" 잠시 후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는 이렇 게 덧붙였다. "뭐라고요?" 네지다노프가 소리쳤다. "노인은 사냥도 하셨나요?" "했지요. 잠깐 동안이긴 하지만. 한번은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말머리 위로 굴 러 떨어지는 바람에 쿠르페이를 망가뜨렸다니까요. 암, 피무슈카도 깜짝 놀랐지 요. 그래, 사냥을 못 하게 하더군요. 나도 그 후부터 사냥을 버리고 만 거죠." "무엇을 망가뜨렸다구요?" 하고 네지다노프가 물었다. "쿠르페이 말이오." 포무슈카는 목소리를 낮추며 되풀이했다. 손님들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쿠르페이가 무엇인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마르켈로프는 카자흐나 체르케스인들의 모자에 달려 있는, 털이 많은 술을 쿠르페이라고 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어쨌든 노인의 쿠르페이라 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도 선뜻 용기를 내어 물어보지는 못했다. "아니, 당신이 그렇게 자기 자랑을 한다면," 피무슈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도 좀 자랑을 해볼까요?" 그녀는 조그만 '그날의 행복' -다리가 휜 낡은 책상인데, 위로 올릴 수 있는 원형 뚜껑이 책상 등받이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속에서 타원형의 청동 사진 틀에 끼운 조그만 수채화를 끄집어냈다. 그것은 활통을 어깨에 메고 파란 리본 을 가슴에 드리운 채 손끝으로 뽀족한 화살을 검사하고 있는, 네 살 가량의 발 가벗은 계집애를 그린 것이었다. 굉장히 곱슬곱슬한 머리에 눈은 약간 사팔뜨기 였지만 얼굴에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피무슈카는 수채화를 손님 들에게 보였다. "이게 나랍니다."하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라구요?" "그래요, 나예요. 어릴 때지요.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명일에 나를 그려준 거랍 니다. 아주 훌륭한 화가였어요. 그 후에도 자주 우리집에 들르곤 했지요. 집에 들어초면 한 발을 문지르고 홱 뒤로 빼면서 내 손에 키스를 하는 거예요. 그리 고 나갈 때에는 자기 손가락에 키스를 하잖겠어요? 정말이에요! 그러고는 오른 쪽, 왼쪽 그리고 앞과 뒤로 인사를 하거든요. 정말 멋있는 프랑스인이었어요!" 손님들은 화가의 솜씨를 칭찬했다. 파클린은 어딘지 좀 닮은 데가 있어 보인 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때 포무슈카가 현재의 프랑스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즘의 프랑스 인들은 모두 잔악해진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건 왜 그렇죠, 포마 라브렌치예비치?" "글쎄 생각들 좀 해봐요. 그 사람들의 이름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이를테면?" "그럼, 예를 들죠. 노잔천트로잔, 이건 정말 강도의 이름이지 뭐예요!" 포무슈카는 말이 나온 김에, 지금 파리에서는 누가 왕위에 올라 있느냐고 호 기심 어린 질문을 했다. 나폴레옹이라는 말을 듣자 그는 놀라기도 하고 낙심한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그런 노인을." 그는 말을 이으려다가 당황한 듯이 주위를 돌아보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포무슈카는 프랑스어를 잘 몰랐기 때문에 볼테르도 번역된 것으로 읽고 있었다. (그의 베개 밑에 있는 비밀 상자에는 < 캉 디드>의 사본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끔 이런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여보시오, 이건 '포스 파르케'요(이건 의심스럽소, 이건 옳지 않소)!" 노인 의 그런 표현은 적지않은 웃음거리였지만 어느 유식한 프랑스인이 아타나서 그 것은 1879년까지 프랑스에서 사용되던 낡은 의회 용어라고 설명한 것을 들은 후부터 모두 웃음을 그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의 화제가 프랑스와 프랑스인에게 미치게 되자, 피무슈카도 항 상 마음속에 품고 있던 몇 가지의 문제를 물어 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먼저 마르켈로프에게 물어 보려고 했으나, 그는 무척 성이 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 으므로 솔로민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 사람도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평민 출신이었으므로 프랑스어를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녀는 네지다노프에게로 몸을 돌렸다. "저 실례지만, 한 가지 물어보고 싫은 게 있는데요." 하고 그녀는 말하기 시 작했다. "글쎄 이 실라 삼소니치는 제 친척이긴 합니다만, 제가 늙고 무식하다 고 자꾸 저를 비웃기만 한답니다." "도대체 뭔데요?" "다른 게 아니라, 만일 프랑스어로 '이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고 싶다면 '께세 께세 께세 랴'고 말하면 되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그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나요, 께세 께세 랴?" "그럴 수도 있죠." "그럼 단지 '께세 랴'라고만 해도 되나요?" "네, 그럴 수도 있어요." "그건 다 같은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피무슈카는 생각에 잠기며 두 손을 벌렸다. "그래 실루슈카(파클린의 애칭)야," 그녀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잘못 했다. 네가 옳았어.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정말 제멋대로군!" 파클린은 이 노부부에게 짤막한 노래라도 불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두 사 람은 그의 엉뚱한 생각에 깜짝 놀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들은 곧 승낙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스난둘리야가 피아노에 앉아 반주를 해야만 된다는 조건 이 붙어있었다. 응접실 한쪽 구석에 조그만 피아노가 놓여 있었으나 손님들 중 아무도 그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스난둘리야는 그 피아노에 앉아 몇 개의 화음 을 잡아보았다.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이가 빠져 맥빠진, 늙고 시든 노인의 노래 를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노부부는 곧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랑 속에 슬픔을 포무슈카가 먼저 이렇게 노래했다. 찾기 위해서 하느님은 사랑을 주신 것일까? 불행도 원한도 없이 피무슈카가 받았다. 오로지 사랑만 있는 곳이 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고? 아무데도, 아무데도, 아무데도! 포무슈카가 받았다. 아무데도, 아무데도, 아무데도! 피무슈카가 되풀이했다. 사랑, 이 슬프고 쓰라린 것은 이 세상 어디에나 다 있다네! 두 사람이 함께 합창을 했다. 이 세상 어디에나 다 있다네! 포무슈카가 혼자 길게 뽑았다. "브라보!" 하고 파클린이 외쳤다. "그건 1절이 죠, 2절은?" "좋아." 포무슈카가 대답했다. "그런데 스난둘리야 삼소노브나, 도대체 트릴 (전음. 높이 떠드는 음조의 소리)은 어떻게 됐지? 이 노래 끝에는 트릴이 있어 야 하는 법인데." "네, 알겠어요." 스난둘리야가 대답했다. "트릴을 넣을게요." 포무슈카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사랑했던 사람 중에 고통을 몰랐던 자 있었으리요! 사랑을 했다는 그 누구가 눈물과 한숨을 몰랐으리요! 그러자 피무슈카가 이어받았다. 바다에서 부서진 조각배처럼 가슴속의 슬픔을 달랠 길 없어 어쩌자고 사랑은 주셨나이까? 고통을 주려고, 고통을 주려고! 포무슈카는 이렇게 외치고, 스난둘리야에게 트릴을 칠 여유를 주기 위하여 잠 시 기다렸다. 스난둘리야는 트릴을 연주했다. 고통을 주려고, 고통을 주려고! 피무슈카가 되풀이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두 사람이 함께 신이여, 내 사랑을 가져가소서 고스란히 예전대로 바치오리다 고스란히 예전대로 바치오리다! 이렇게 하여 노래는 또 한 번의 트릴로 끝을 맺었다. "브라보! 브라보!" 바르켈로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이렇게 외치고 박수까지 보냈다. '도대체 이 노인들은,' 박수소리가 잠잠해지자,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무엇을 느끼고 있는 걸까? 광대 놀음이라도 하고 있는 기분일까? 아니, 그렇지 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아니, 근심할 건 없어! 남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위로해 주는 것이니까!) 이렇게 느끼고 또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잘 생각해 보면 그들이야말로 옳다. 그들이야말로 천만 번 옳은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네지다노프는 갑자기 두 노인에게 고맙 다는 인사말을 하기 시작했다. 노부부는 이 인사에 허리를 굽혀 답례를 했을 뿐 그대로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바로 이때 침실 아니면 하녀방인 듯싶은 옆방으로부터(그 방에서는 이미 오 래 전부터 속삭이는 소리와 살랑거리는 옷자락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난쟁이 푸프카가 유모 바실리예브나와 함께 갑자기 모습을 나타냈다. 푸프카는 빽빽 소 리를 지르고 우스꽝스럽게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는데, 유모는 그러는 그녀를 달 래기도 하고 혹은 짓궂게 놀려주기도 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참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마르켈로프는(한편 솔로민은 여느 때보다 더 크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갑자기 포무슈카 쪽으로 몸을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전 노인께서 이러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자기 특유의 날카로운 어조로 그는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처럼 교양 있는 분이 실제로 당신은 볼테르의 숭배 자라 들었습니다만 그러나 당신이 연민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러한 불구자를 노리개로 삼고 있다니 천만 뜻밖입니다." 여기서 마르켈로프는 문득 푸프카가 파클린의 여동생임을 상기하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한편 포무슈카는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그건 내 탓이 아니라 그 애 자신이." 그러자 푸프카는 노인 대신 마르켈로프에게 대들었다. "아니, 뭐라구?" 그녀는 분명치 않은 목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했다. "우리 주인 님을 모욕해도 분수가 있지! 나 같은 불구자를 보살펴 잠자리를 주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것이 그렇게도 배가 아프냐? 도대체 어디서 이런게 굴러들었 지? 더럽고 메스꺼운, 까무족족한 상판에 딱정벌레 같은 수염을 하고서 말야." 여기서 푸프카는 투박하고 짧은 손가락으로 그의 수염 흉내를 냈다. 바실리예브 나는 이가 빠진 입을 벌리고 웃어댔다. 옆방에서도 덩달아 웃어대는 소리가 들 려왔다. "저는 물론 당신을 나무라는 것은 아닙니다." 마르켈로프는 포무슈카에게 이 렇게 말했다. "불구자나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것은 좋을 일일 테죠. 그렇지만 기탄 없이 말씀드려서, 치즈가 기름 속을 굴러가는 듯한 만족스 러운 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반면에 눈앞의 복지를 위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것은 선한 일이라곤 볼 수 없는 겁 니다. 적어도 저 자신은 그러한 선량성에 대해서, 솔직히 말씀드려 한푼어치의 가치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때 푸프카가 귀청이 뚫어질 정도로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마르켈로프 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으나, 감히 어디라고 저 '까무족족한 녀석'이 욕 설을 퍼부을까! 하고 생각했던 첫이다. 바실리예브나도 역시 뭐라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포무슈카는 가슴 위에 두 손을 얹고는 자기 아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말하였다. "이봐요, 피무슈카," 그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손님의 말을 들었겠지? 자네나 나나 우린 죄인이야. 우린 나쁜 사람들이야. 우린 위선자들이 야. 치즈가 기름 속을 굴러가는 생활이라. 오오! 오오! 오오! 우린 거리로 나가 야 해. 집을 버리고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거야. 손에 비를 들고 나가 자기 몫을 자기자 벌어야 하는 거야. 오오, 오오, 오오!" 이렇듯 슬픈 이야기를 들은 푸프카는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 했다. 피무슈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찡그리고는 마음껏 울음을 터뜨리기 위해 가슴 가득히 공기를 들이마셨다. 만일 파클린이 참견하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의 결말이 어떻게 났을는지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었다. "아니, 왜들 이러세요! 진정들 하세요." 두 손을 흔들고 큰소리로 웃어대며 파 클린이 말하기 시작했다.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마르켈로프씨는 농담을 하고 싶었던 거예요. 저 사람의 얼굴 표정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좀 엄하게 들렸는 지 모르겠지만 그래 당신들은 그걸 곧이들으셨나요? 자, 그만해 두세요! 그런데 예브피미야 파블로브나, 우린 이제 곧 떠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자, 어때요, 작 별에 즈음해서 우리들의 점을 한번 쳐주지 않으시겠어요? 당신은 그 방면의 명 수니까요. 스난둘리야! 카드를 가져다 줘!" 피무슈카는 남편의 표정을 살폈다. 이젠 남편도 완전히 평온을 되찾고 앉아 있었으므로 그녀도 마음을 놓았다. "카드, 카드를"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이젠 다 잊어버렸을 거야. 잊어버릴 수밖에, 오랫동안 그걸 손에 들지 않았으니." 그러면서도 그녀는 벌써 스난둘리야에게서 이상하게 생긴 옛날의 롬베르용 카드를 받아들고 있었다. "어느 분의 점을 치라는 거지?" "전부 다요." 파클린은 이렇게 말하면서 속으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 말 융통성 많은 할머니셔! 무슨 말이건 다 들어주니 말이야. 정말 좋은 분이야.' "전부 다예요, 할머니, 전부 다 쳐주세요." 그는 커다란 소리로 덧붙였다. "우리 모두의 운수며 성격, 미래 전부 말씀해 주세요!" 피무슈카는 카드를 늘어놓기 시작하다가 갑자기 카드를 모두 던져버렸다. "점을 칠 것까지도 없지!" 하고 그녀는 외쳤다. "점을 치지 않고서도 당신들 하나하나의 성격을 다 알 수 있어요. 사람의 운수라는 건 각자의 성격 나름이니 까. 먼저 이 사람은(그녀는 솔로민을 가리켰다) 언제나 변함없이 시원한 사람이 고 또 이 사람은(그녀는 마르켈로프에게 위협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남을 파멸시킬 수 있는 불타는 성격의 사내야. (이때 푸프카는 마르켈로프에게 불쑥 혓바닥을 내보였다.) 그리고 너에겐(그녀는 흘끗 파클린을 쳐다보고) 아무것도 할 말이 없어. 너 자신이 자기를 잘 알고 있잖니 변덕쟁이라구 말이야! 그런데 이 사람은." 그녀는 네지다노프를 가리키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왜 그러시죠?" 네지다노프가 말했다. "자, 어서 말씀 좀 해주세요. 전 어떤 사람이죠?"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구. 피무슈카는 말꼬리를 끌었다. "당신은 정말 가엾은 사람이라우!" 네지다노프는 흠칫 몸을 떨었다. "가엾다뇨! 왜 그렇죠?" "그저 그런 거지! 내겐 가엾게 보인다니까. 그것뿐이요!" "하지만 왜 그래요?" "왜냐하면 내 눈에 그렇게 보이니 어떻게 하우. 당신은 날 바보라고 생각할는 지 모르지만, 그래도 당신보단 내가 좀 나을 거유. 당신이 아무리 빨강머리를 하고 있더라도 말이오. 내겐 당신이 가엾게 보여요. 더 이상 할 말이 없군요!" 모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손님들은 서로서로 눈길을 주고받고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파클린이 침묵을 깨뜨렸다.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싫증이 나셨을 테죠. 이 손님들도 갈 때가 되었으니 저도 함께 실례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 가지로 폐가 많았어요." "안녕히들 가세요, 안녕히들 가세요. 제발 고깝게 생각지 마시고 다시 들러주 시오." 피무슈카와 포무슈카가 한목소리로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러다가 별안간 포무슈카가 노래라도 부르듯이 이렇게 말했다. "오오래, 오오래, 오오래들 사십시오. 오오래." "오오래, 오오래." 뜻밖에 칼리오프이치까지 젊은 손님들에게 문을 열어주며 굵직한 목소리로 이랗게 말했다. 네 사람의 일행은 어느새 한길로 나와 부풀어오른 듯한 집 앞에 서 있었다. 그때 창문 안에서 푸프카의 째지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바보 자식" 그녀는 되풀이하여 외쳤다. "바보 자식!" 파클린은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웃음에 호응하지 않았다. 마르켈로프는 분개의 말이라도 기대하는 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을 살피 기까지 했다. 솔로민만이 예나 다름없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20 "자, 어때요!" 파클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18세기에도 다녀왔으니 이젠 20세 기로 곧장 굴러 들어가 봅시다. 골루시킨은 진보적인 인간이니까 19세기 취급을 하면 실례가 될 거야." "아니 자넨 그 사람을 알고 있나?" 네지다노프가 물었다. "소문이란 게 있잖나 말야. 그리고 내가 '굴러 들어가자'고 한 것은 실은 자네 들과 함께 가자는 뜻에서 한 말이지 뭐겠나."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자넨 그 사람과 아는 사이도 아니잖나." "뭐라구! 그럼 자네들은 그 앵무새 부부와 아는 사이였나?" "그건 자네가 우릴 그 노부부에게 소개시켜 주지 않았나?" "그러니까 자네도 나를 소개시키면 되지 않나! 나한테 숨길 만한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골루시킨만 하더라도 마음은 넓은 사람일 걸세. 두고 봐, 그 사 람은 새 얼굴이 나타난 것을 더 기뻐할지도 모르니까. 게다가 이 고장 S시 사 람들은 모두 소박하단 말야!" "아, 그렇군요." 마르켈로프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 고장 사람들은 그렇게 뻔뻔스럽군요." 파클린은 고개를 설레설래 저었다. "그건 아마 나한테 대고 하는 말이시겠죠. 할 말이 없군요! 난 그런 비난을 받을 만하니까. 그렇지만 말입니다, 새로운 친구 당신의 담즙질에서 솟아오르는 음울한 생각만은 좀 다른 데로 돌려주었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 새로운 친구 양반," 마르켈로프가 성급히 그의 말을 가로챘다. "나도 당신 에게 나대로 한마디 경고의 말을 해두겠는데, 난 어느 때건 농담이란 것에 대해 서는 도시 관심이 없는 사람이지만 오늘은 특별히 더하단 말입니다! 그리고 도 대체 내 성격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거죠? (그는 '성격'이란 마지막 음절에 힘 을 주었다.) 우리가 서로 처음 인사를 나눈 것도 그렇게 오래 된 것 같지는 않 은데 말이오." "자, 좀 기다리세요, 기다리세요. 그렇게 성을 낼 것도 없고, 또 그렇게 심각 하게 맹세할 필요도 없어요. 그렇잖아도 난 당신을 믿으니까요." 파클린은 이렇 게 말했다. 그러고는 솔로민 쪽으로 몸을 돌리며 "나 좀 봐요" 하고 외쳤다. "당 신은 그 천리안 피무슈카로부터 시원한 사람이란 정평을 들었고, 또 실제로 당 신은 남을 안정시키는 듯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제발 좀 말씀해 주십시오. 과연 나는 누구에게든 불쾌한 느낌을 주고 또 장소에 맞지 않게 쓸모없는 농담이나 지껄여대는 그런 소견머리 없는 인간입니까? 난 그저 여러분과 함께 골루시킨 집으로 가자고 청했을 뿐입니다. 전 사실 조금도 나쁜 인간이 아닙니다. 마르켈 로프씨의 얼굴빛이 노랗다고 해서 그것이 내 잘못은 아니니까요." 솔로민은 먼저 한쪽 어깨를 흠칫하고, 그 다음에 또 한쪽 어깨를 흠칫 치켜올 렸다. 그것은 솔로민이 즉석에서 대답을 꺼려할 때 언제나 하는 습관이었다. "그건 말할 필요도 없이,"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한테나 모욕 을 줄 리가 없거니와 그럴 생각도 하지 않으실 겁니다, 파클린씨. 그리고 골루 시킨 집이라고 해서 당신이 가서 안 된다는 법도 없지요. 골루시킨 집에 서도 당신 친척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쾌하게 그리고 그 정도로 유익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파클린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위협하는 시늉을 했다. "오오, 당신 사람이 꽤 나쁜 것 같은데요! 그런데 당신도 골루시킨 집으로 가 시는 겁니까?" "물론 가구말구요.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다 잡아먹은 걸요." "그럼, 자, 앞으로 갓! 20세기로! 20세기로! 네지다노프, 진보적인 인간, 어서 안내하게!" "좋아 따라와. 하지만 자네의 익살만은 좀 삼가주었으면 좋겠어. 이미 그 밑 바닥이 드러나 가고 있다는 것쯤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니 말야." "그래도 자네 친구한테는 충분할 걸세." 파클린은 유쾌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 꾸하고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그것은 껑충거리는 걸음걸이라 기보다는 약간 '절룩거리는' 걸음걸이였다.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군!" 파클린 뒤에서 네지다노프와 팔짱을 끼고 따라가 면서 솔로민이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물론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모두 시베리아로 유형을 간다해도 우리를 즐겁게 해줄 사람이 있으니 다행이로군요!" 마르켈로프는 맨 뒤에서 말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 사이에 상인 골루시킨의 집에서는 호화스러운 요리, 아니 품위 있는 요리 를 내놓기 위하여 갖가지 방법이 강구되고 있었다. 기름투성이의 서투르기 짝없 는 생선 수프가 끓여지고, '파티쇼'와 '프로이카세이'가 만들어졌다. (골루시킨은 구교도이기는 했지만 유럽 문화의 정상에 서 있는 인간으로서 프랑스 요리의 숭배자이기도 했다. 그가 고용하고 있는 요리사는 불결하다고 하여 클럽으로부 터 해고당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몇 병의 샴페인이 냉 동된 채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주인은 자기 특유의 부자연스러운 거드름과 함께 부산한 태도로 실없이 웃어 대며 젊은 청년들을 맞이했다. 파클린의 예언대로 그의 방문은 주인을 무척 기 쁘게 했다. 그는 "우리 동료일 테죠?" 하고 묻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이 렇게 외쳤다. "그야 물론 그러실 테지!" 그 다음 자기는 방금 괴짜 현지사한테 서 돌아오는 길인에 그 망할 놈의 지사는 영문도 모를 어떤 자선 병원 문제로 자꾸 추근추근 달라붙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도대체 이 골루시킨이란 사람은 현 지사 관저에 출입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진보적인 청년들 앞에서 현지사에 대한 욕설을 퍼부을 수 있다는 것에 더 만족 을 느끼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약속했던 동지를 모두 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런데 그 동지라는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는 다름 아닌 주걱 같은 얼굴에 폐병 걸린 사람처럼 보이는 말쑥한 옷차림의 사내로 오 늘 아침에도 보고를 가지고 들어왔던, 바샤라고 하는 바로 이 집의 관리인이었 다. "언변은 그다지 좋지 않지만," 골루시킨은 다섯 손가락을 다 펴서 그를 가리 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업에 마음을 다 바치고 있습니다." 바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굴을 붉히고 눈을 깜박거리며 하얀 이를 드러내 보였을 뿐이었다. 그의 표정만으로는 바보 같은 속물인지 혹은 그와는 반대로 산전수전 다 겪은 능구렁이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자, 그럼 식탁에, 여러분 식탁에 앉아주십시오." 골루시킨은 흥이 나서 말했 다. 생선 수프를 내온 다음 골루시킨은 곧 샴페인을 내오라고 일렀다. 엷은 얼 음 조각 같은 샴페인이 병으로부터 여럿의 잔에 따라졌다. "우리의 사업을 위해 서!" 골루시킨은 이렇게 외치면서 한쪽 눈을 깜박이고는 하인 쪽을 턱으로 가리 키면서 국외자 앞에서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시늉을 해보였다. 동지인 바샤는 걸상 한 귀퉁이에 걸터앉은 채 여전히 말이 없었다. 주인의 말에 의하 면, 그는 이 사업에 온 마음을 다 바치고 있다고 했지만 그의 전체적인 태도는 그런 주의 사상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비굴해 보였다. 그러나 술만 은 꿀꺽꿀꺽 열심히 마셔대고 있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잘 지껄여 댔다. 그러나 주로 많이 지껄인 사람은 주인과 파클린이었다. 파클린은 특히 더 했다. 네지다노프는 마음속으로 짜증을 내고 있었고 마르켈로프는 울분에 못 이 겨 분개하고 있었다. 좀 다르긴 하나 수보체프 집에서와 마찬가지의 강한 분노 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솔로민은 조용히 관망만 하고 있었다. 파클린은 잔뜩 흥에 겨워 있었다. 골루시킨은 파클린의 이런 재치 있는 말 솜 씨가 마음에 들었다. 설마 이 '꼽추'가 옆에 앉아 있는 네지다노프의 귀에대고 골루시킨 자신에 대해 능글맞기 짝없는 욕설을 계속해서 속삭이고 있으리라고 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골루시킨은, 이 꼽추는 평범한 인간일 테니까 자기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클린이 자신의 마 음에 들었던 것도 실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일 파클린이 자기 옆 에 앉아 있었다면, 그는 이미 오래 전에 그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거나 어 깨를 쳤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시종 식탁 너머로 파클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머리를 내젓기도 했다. 그러나 파클린과 네지다노프 사이에는 우선 그 비구름 같은 마르켈로프가 버티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솔로민이 자리 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 골루시킨은 파클린이 말을 할 때마다 큰 소리로 웃어댔다. 아직 우스운 이야기가 나오기 전인데도 푸르죽죽한 잇몸을 드러내고 배를 두들기면서 미리부터 웃어대곤 했다. 파클린은 자기가 할 역할을 재빨리 알아차리고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 대하여 닥치는 대로 욕설을 퍼붓기 시작 했다. 파클린에게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의 기회였다. 보수파와 자유파, 관리, 변 호사, 행정관, 지주, 자치회, 국회의원,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이 모든 것이 그 의 욕설을 피하지 못했다. "그렇지, 그래" 하고 골루시킨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고말고, 정말 그대로야. 비근한 예로, 이 고장 시장만 해도 당나귀와 다를 것이 없으니까. 여간한 돌대 가리가 아니거든요! 내가 이러이러한 말을 들려주어도 통 알아듣지를 못한단 말 이오. 우지 현지사 못지않을 거요." "당신네 현지사는 바본가요?" 파클린은 다소 흥미 어린 어조로 이렇게 물었 다. "방금 말했잖아요. 당나귀라고!" "당신은 느끼지 못하셨나요? 그 사람이 쉰 목소리를 내는지, 코맹맹이 소릴 내는지를?" "뭐라구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골루시킨은 이렇게 물었다. "아니 그것도 모르고 계셨나요? 우리 러시아에선 고급 문관은 쉰 목소리로 말하고, 고급 무관은 코맹맹이 소리로 말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진짜 최고급에 이르면 쉰 소리와 콧소리를 동시에 내거든요." 골루시킨은 방안이 떠나갈 것처럼 웃어대어 눈에는 눈물까지 괴었다. "그래요, 그래요." 그는 분명치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콧소릴 내더군요. 콧소릴 내요. 그놈은 무관이거든요!" '예잇, 이 바보 같으니.' 파클린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나란 어딜 가든지 다 썩었어요!" 골루시킨은 잠시 후 이렇게 외쳤다. "모조리, 모조리 썩었단 말입니다!" "존경하는 카피탄 안드레이치." 파클린은 설득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 리고 동시에 네지다노프에게는 이렇게 속삭였다. "왜 저 사람은 자꾸 두 팔을 벌리곤 할까. 아마 프록코트의 겨드랑이 밑이 아픈가보지?") "저, 존경하는 카피 탄 안드레이치, 제 말을 믿어주세요. 그런 임시 방편적인 얘기는 우리의 경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단 말입니다!" "아니, 임시 방편이라니!" 갑자기 웃음이 가신 얼굴에 흉악한 표정을 띠면서 골루시킨은 이렇게 외쳐댔다. "지금 할일은 단 하나, 뿌리째 뽑아버리는 것밖엔 없어요! 바샤, 어서 마셔, 마서!" "마시고 있는 중입니다, 카피탄 안드레이치," 술잔을 입으로 기울이면서 관리 인이 대답했다. 골루시킨도 꿀꺽꿀꺽 술을 들이켰다. "저렇게 마셔대도 배가 터지지 않는 게 이상하군!" 파클린이 네지다노프에게 소곤거렸다. "습관이니까." 네지다노프가 대답했다. 그러나 술을 마신 것은 관리인만이 아 니었다. 모두들 점점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네지다노프와 마르켈로프, 아니 솔 로민까지 조금씩 대화에 끼여들기 시작했다. 네지다노프는 먼저 자신의 그 나약한 성격 때문에 공연히 헛수고만 하고 있 는 자기 자신에게 어떤 멸시와 모욕 같은 것을 느끼면서, 이젠 말장난들은 그만 집어치우고 '행동'으로 나가야 할 때라고 역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기반은 다 구축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기 모순을 느끼지 못한채, 의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제시해 달라고 요구하 기도 했다. "공감이 없는 사회, 자각이 없는 민중 바로 이 속에서 몸부림을 쳐 야 하니까요!" 물론 그의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꾸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좌중의 사람들이 각자 자기 멋대로 떠들어댔기 때문이었 다. 마르켈로프는 독기 어린 굵직한 목소리로 단조롭고 끈기 있게 지껄이고 있 었다. "마치 배추를 동강내는 소리 같군," 파클린이 귀띔을 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잠시 조용해지는 순간, '포병'이란 낱 말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마 자기가 발견했다는 포병의 결함을 상기해 낸 것 같았다. 그리고 독일인과 부관에 대한 공격도 나왔다. 솔로민까지 도 참견을 하여, 일을 기다리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아 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일을 전진시키면서 기다리는 방 법이라고 했다. "점진파(漸進派) 같은 건 우리에겐 필요가 없어요." 마르켈로프가 음울한 어 조로 말했다. "지금까지의 점진파는 상부로부터 해내려왔지만," 솔로민이 설명했다. "우린 그걸 하부로부터 시도하려는 겁니다." "필요 없어요, 그런 건! 필요 없고말고" 골루시킨이 맹렬히 대꾸했다. "단번에, 단번에 때려 눕혀야 해요!" "그럼 당신은 창문에서 뛰어내릴 건가요?" "암, 뛰어내리죠!" 골루시킨은 마구 외쳐댔다. "뛰어내리고말고요! 바샤도 뛰 어내립니다. 내가 명령만 하면 당장 뛰어내릴 거예요! 어때? 바샤! 너 뛰어내리 겠지?" 관리인은 잔에 남은 샴페인을 끝까지 다 들이켰다. "카피탄 안드레이치,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좇아가게 마련이죠. 제 게 무슨 이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암, 그렇겠지! 지독히 한번 혼을 내줘야지!" 이윽고 술꾼들 사이에서 '바빌론 탑 건립'이라고 불리는 혼잡한 상태가 다가 왔다.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위대한' 외침과 소음들이 일어났다. 따사로운 가을 의 공기 속에 알록달록 눈부시게 반짝이며 펄럭이는 첫눈처럼, 골루시킨가의 열 띤 공기 속에서도 각양각색의 이야기들이 서로 부딪치고 밀치면서 맴돌기 시작 했다. 진보·정부·문학·조세 문제·교회 문제 ·여성 문제·재판 문제·고전 주의·현실주의·허무주의·공산주의·국제 동맹·교권주의 ·자유파·자본 행 정·조직·조합·결정(結晶)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다루지 않는 문제라곤 거의 없었다. 이러한 혼잡은 골루시킨을 더욱 흥겹게 해준 것 같았다. 그는 바로 이 러한 혼잡 속에서 자기의 참된 본질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표정은 승 전 장군과도 같았다. '우리가 누군지 알겠지! 자, 길을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죽일 테다! 카피탄 골 루시킨께서 행차하시니!' 관리인 바샤는 콧김을 내뿜으며 접시에다 대고 이야기 할 정도로 취해 버렸다. 그는 별안간 미친 사람처럼 이렇게도 외쳤다. "망령 같 은 소리도 다 있군.'프로김나쟈' 라니 !" 골루시킨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발그레한 얼굴을 뒤로 젖히고, 득의 만면한 거친 표정에 내심의 공포와 전율과도 같은 또 다른 감정을 교묘히 뒤섞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난 천 루블을 희생하겠소! 바샤, 가져와!" 그러자 바샤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 답했다. "굉장한데!" 파클린은 새파랗게 질린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으나 (그도 마 지막 15분 동안은 관리인 못지않게 퍼마셨던 것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 니, 두 손을 머리 위로 치켜올리면서 띄엄띄엄 말하기 시작했다. "희생하겠소! 이 사람은 희생한다고 말했지? 오오, 이건 신성한 말에 대한 모독이오. 희생! 아 무도 희생의 높이까지 올라갈 수는 없는 법이오. 아무도 그러한 의무를 수행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진 못해요.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 중에서도 그런 것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단 말이오. 그런데 이 천치 바보는, 이 돈주머 니는 뚱뚱한 배를 흔들며 한줌어치밖에 안 되는 돈을 뿌리면서도 희생이라고 떠벌리고 있단 말이오! 게다가 이 비열한 감사를 요구하고 월계관까지 기대하고 있으니!" 골루시킨은 파클린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그저 농담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지, 어쨌든 그는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외쳐댔다. "그래! 천 루블! 카피탄 골루시킨이 한 말은 성언(聖言)이오!" 그는 갑자기 옆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자, 여기 있소. 그 돈이! 자 받아두시오. 하지만 카피탄 골루시킨만은 잊지 말아주시오!" 그는 조금이라도 흥분하면 어린애처럼 자기를 3인칭으로 부르는 버릇이 있었다. 네지다노프는 술에 젖은 식탁보 위에서 흩어 진 돈을 주워 모았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고, 꽤 시 간도 늦어서 일동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들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바깥 공기를 쐬니 빙글빙글 머리가 돌았다. 특히 파클린은 더했다. "내가 어디로 갈 것 같소?" 파클린이 말했다. "당신이 어디로 갈지 내가 어떻게 알겠소." 솔로민이 대답했다. "하지만 난 집 으로 돌아갈 테요." "공장으로요?" "공장으로." "이 밤에, 걸어서요?" "그러면 어때요? 여긴 늑대도 없고 강도도 없어요. 그리고 난 걷길 좋아하니 까요. 밤은 시원해서 더 좋고." "하지만 4베르스타(약 10리) 가량은 될 텐데요!" "그까짓, 5베르스타라면 어때요, 자, 여러분 안녕히들 가십시오." 솔로민은 단추를 채우고 깊숙이 모자를 눌러쓰며 시가에 불을 붙이고는 성큼 성큼 한길을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그럼 자넨 어디로!" 파클린이 네지다노프에게 이렇게 물었다. "난 이 사람 집으로 가네." 팔짱을 낀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마르켈로프를 가 리키면서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마차와 말을 기다리게 했으니까." "그거 잘됐군. 포무슈카와 피무슈카가 있는 저쪽 집도 난센스거니와 이쪽 집 도 난센스야. 그러나 저쪽의 난센스 18세기의 난센스 쪽이 이쪽의 20세기보다는 좀더 러시아의 본질에 가까운 것 같군그래. 자, 그럼 잘 가게. 내가 이렇게 취했 다고 욕하진 말게나, 아, 참 한마디만 더 들어주게! 내 여동생 스난둘리야 말야 그 애처럼 착하고 좋은 여잔 아마 이 세상에 둘도 없을 걸세. 그런데 글쎄 곱사 등이에다 이름까지 스난둘리야니 세상 만사가 다 그렇게 마련이거든! 하긴 그 애에겐 그 이름이 어울릴지도 모르지. 자넨 성 스난둘리야가 어떤 사람인지 아 나? 그녀는 여기저기 감옥을 찾아다니면서 죄수와 병자의 상처를 고쳐주었다는 덕망 높은 부인이라네. 자, 그럼 잘 가게! 잘 가. 네지다노프, 가엾은 친구! 그리 고 장교님, 당신도 우우! 고집불통 나리, 안녕!" 그는 절뚝거리는 걸음걸이에 비틀거리기까지 하면서 '오아시스'를 향해 걸음 을 옳겼다. 마르켈로프는 네지다노프와 함께 여행 마차를 맡겨둔 여인숙을 찾아 내어 말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30분 후 그들은 대로를 따라 마차를 달리고 있 었다. 21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나직이 깔려 있었다. 그래도 아주 캄캄한 밤은 아니어 서 앞에 나 있는 긴 바퀴 자국이 파르스름하게 빛나 보이기도 했으나, 좌우 양 쪽은 어둠의 장막에 싸여 물체의 하나하나의 윤곽들이 커다란 얼룩점으로 흐릿 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흐리멍덩하고 고르지 않은 밤이었다. 가끔 습기 어린 바람이 분류처럼 휘몰아치며 봄비와 광활한 보리밭 냄새를 실어다 주었다. 길잡 이 구실을 하는 떡갈나무 숲을 지나 시골길로 접어들자 길은 점 점 더 험악해져 갔다. 마부는 마차의 속도를 늦추었다. "제발 길을 잃지 말아야 할 텐데!"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네지다노프 가 입을 열었다. "걱정 말아요. 길은 잃지 않을 테지!" 마르켈로프가 달했다. "하루에 두 가지 재난이 겹치는 법은 없으니까." "도대체 첫번째 재난이란 어떤 거죠?" "어떤 거라뇨? 하루 종일 허송했다는 걸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십니 까?" "하긴 그렇군요. 그 골루시킨이란 잔 정말 거기서 그렇게 많은 술을 먹는 것 이 아니었는데!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프군요." "난 골루시킨의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최소한도 돈이라도 내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어쨌든 방문했던 보람은 있는 셈이죠!" "그럼 당신은 파클린이 자기 친척 아이구 뭐라더라 그 앵무새집으로 데려간 데 대해서 화를 내고 있는 겁니까?" "그까짓 화를 낼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기뻐할 것도 없어요. 난 그런 노리개 에 흥미를 느낄 만한 그런 종류의 인간과는 다르니까요.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그런 재난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거죠?" 마르켈로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외투에 몸을 감싸기라도 하듯 자기가 앉아 있는 한쪽 구석에서 약간 몸을 움직였을 뿐이다. 네지다노프는 그의 얼굴 을 자세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까만 콧수염이 쭈뼛하니 옆으로 삐죽이 나 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른 아침부터 마르켈로프로부터 그 어떤 울적 하고 비밀스런 초조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건드리지 않는 편 이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저,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잠시 후 네지다노프가 입을 열였다. "당신은 농 담이 아니라 장말 그 키슬랴코프씨의 편지에 감탄하고 있는 겁니까? 당신이 오 늘 아침에 읽어보라고 준 편지 말예요. 이렇게 말하면 실례일지 모르지만, 사실 그건 철없는 넋두리에 지나지 않더군요!" 마르켈로프가 몸을 곧추세웠다. "첫째로," 그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편지에 대해서 당신과는 전혀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난 그 편지를 아주 훌륭하고 성실하다고 봅니다! 둘째로 키슬랴코프씨는 고생하고 있습니다.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 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믿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사업을 믿으며 혁명을 믿고 있습니다! 난 당신에게 꼭 한 가지 말해 둘 것이 있습니다, 알렉세이 드미트리 예비치! 내가 보기엔 요즈음 당신은 우리 사업에 좀 냉담해진 것 같더군요. 당 신은 우리 사업을 믿지 않고 있어요." "어떤 점에서 그렇게 단정하시는 거죠?" 네지다노프는 느릿느릿하게 물었다. "어떤 점에서라뇨? 당신의 모든 말, 당신의 모든 행동에서 알 수 있는 거죠! 오늘 골루시킨 집에서, 의지할 수 있는 현실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한 건 도대체 누굽니까? 당신이 아니냔 말이오! 그걸 보여달라고 요구한건 누구예 요? 역시 당신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친구 파클린이, 그 텅 빈 광대같은 녀석이 허공을 바라보며, 우리들 중에서 희생할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지껄였 을 때 거기에 맞장구를 치고 찬동하며 머리를 끄먹여 보인 것은 누굽니까? 아 니, 당신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당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마음대로 말하고 또 원하는 대로 생각하시죠. 그건 당신의 자유니까요. 그렇지만 나는 인생의 아름 다운 모든 것을 분연히 물리치고 사랑의 행복까지도 내동댕이친 채 자기의 신 념에 봉사하며, 그 신념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인간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오늘 물론 그런 것엔 관심조차 없었을 겁니다!" "오늘이라뇨? 하필이면 왜 오늘이라고 강조하시는 거죠?" "제발 그렇에 시치미를 떼진 마시오. 당신은 행복한 돈 환, 사랑의 승리자가 아니냔 말이오!" 앞자리에 마부가 있다는 것도 완전히 잊은 채 마르켈로프는 이 렇게 외쳤다. 마부는 마부대에서 몸을 돌리지 않고서도 그들의 말을 충분히 알 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마부에게는 자기 뒤에 앉아 있는 나리들의 의론보다도 길에 대한 근심 쪽이 휠썬 더 컸던 것이다. 그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다소 겁에 질리기까지 한 표정으로 가운데 말을 제어하고 있었다. 말은 궁둥이 에 힘을 주고 머리를 휘저으면서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여기쯤에 이런 비 탈길이 있을 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실례지만, 전 당신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군요." 네지다노프가 이렇 게 말했다. 마르켈로프는 큰 소리로 웃어댔다. 증오에 찬 어색한 웃음이었다.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구요? 핫, 핫, 핫! 여보시오, 난 죄다 알고 있어요! 당신이 어제 누구한테 사랑을 고벅했으며, 또 당신의 그 행복스러운 외모와 달 변으로 누굴 매혹했고 또 누가 당신을 자기 방으로 밤 열 시가 지나서 끌어들 였느냐 하는 것도 다 알고 있단 말입니다!" "나리!" 갑자기 마부가 마르켈로프를 돌아보며 말했다. "짬깐만 고삐를 좀 잡 아주세요. 내려가 봐야겠습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군요. 여기 물구덩 이가 있는 것도 같구." 과연 마차는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마르켈로프는 마부가 넘겨준 고삐를 잡 은 채 여전히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당신을 책망하는 건 조금도 아닙니다,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당신은 기회를 이용한 것뿐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거죠.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 는 것은, 당신이 우리 사업에 냉담해졌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뿐입니 다. 다시 반 번 말씀드리지만 당신의 머리 속에는 딴 것으로 가득 차 있을 테니 까요. 겸해서 사견으로 덧붙여두겠는데, 처녀들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이며 또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사전에 미리 추측해 낼 수 있는 사내 는 도대체 어떤 인간일까요!" "이제야 겨우 당신의 말을 이해하겠습니다." 네지다노프가 말했다. "당신이 번 민하는 이유도 알겠고, 또 우리의 말을 엿듣고 성급히 당신에게 일러바친 장본 인이 누구라는 것도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건 조금도 뽐낼 만한 것이 못 되죠." 마르켈로프는 네지다노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한 표정을 짓고는 일루러 한마디 한마디 노래 부르듯 끌 며 자기 말을 계속했다. "정신적 혹은 육체적으로 어떤 뛰어난 자질이 있기때문 도 아닙니다. 아니예요! 거기엔 다만 모든 사생아에게 주어진 저주받을 행운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모!" 마르켈로프는 마지막 말을 재빨리 내뱉고는 갑자기 얼어붙기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말았다. 네지다노프는 어둠 속이긴 하지만 온몸이 새파랗게 질리고 두 볼이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당장이라도 마르켈로프에게 달려들어 그 목덜미를 움켜잡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그것을 참아냈다. '이 모욕은 피(血)로 씻어야 한다, 피로.' "길을 찾아냈습니다!" 오른쪽 앞바퀴 옆으로 갑자기 모습을 나타내며 마부가 이렇게 외쳤다. "왼쪽으로 지나치는 바람에 길이 좀 틀렸어요. 이젠 괜찮습니다! 단숨에 달릴 수 있습죠! 댁까진 1킬로미터도 안 될 겁니다. 조금만 더 참아주세 요!" 그는 마부대에 기어오른 후 마르켈로프에게서 고삐를 넘겨받고 가운데 말을 옆으로 돌렸다. 여행 마차는 두 번 가량 크게 뒤흔들리더니 이윽고 평탄한 길을 따라 쏜살같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어둠이 위로 좀 벗겨진 것 같았다. 연기 냄 새가 풍겨오고 앞에 언덕 같은 것이 나타났다. 불빛 하나가 반짝이더니 곧 사라 졌다. 또 하나의 불빛이 깜빡였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리 마을입니다." 마부가 말했다. "아니, 이놈들이!" 점점 많은 불빛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그런 모욕을 받은 이상," 네지다노프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로선 도저히 당신 집에 묵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도 잘 아실 텐데요,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그래서 몹시 불쾌한 일이긴 합니다만, 전 당신 집에 도착하는 대로 즉시 이 마 차를 빌려 타고 다시 거리까지 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내일이면 그럭 저럭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도 강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다음에 제가 통지를 드리도록 하겠습니타. 당신도 아마 각오는 하셨겠지만." 마르켈로프는 곧 대답하지는 않았다. "네지다노프," 나직한 목소리긴 했지만 거의 절망적인 어조로 그는 마침내 이 렇게 말했다. "네지다노프! 제발 부탁이니 내 집으로 가주시오. 당신 앞에 무릎 을 꿇고 용서를 빌겠소. 제발 그것만이라도 하게 해주시오, 네지다노프! 있어줘 요. 내 그 미치광이 같은 소릴 잊어주시오, 잊어줘! 아아, 내 이 불행한 신세를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마르켈로프는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두드 렸다. 그러자 그 속에서 무슨 신음 같은 소리가 들렸다. "네지다노프! 제발 좀 너그럽게 생각해 줘요! 자, 손을 내주시오. 내청을 거절하지 말아요!" 네지다노프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딘지 좀 망설이는 표정이었으나 그래 도 그는 손을 내주었다. 마르켈로프가 얼마나 힘껏 네지다노프의 손을 움켜 잡 았던지 하마터면 그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마차는 마르켈로프의 집 현관 입구에 멈추었다. "내 말 좀 듣게, 네지다노프." 15분 후 서재에 앉아서 마르켈로프가 네지다노 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말 좀 들어줘." 그는 어느새 네지다노프에게 '당신' 대신 '자네'라는 호칭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뜻하지 않은 '자네'라는 호칭. 조금 전만 해도 치명적인 모욕까지 주면서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던 그가 사랑에 승리한 자기 연적(戀敵)에게 부르는 이 '자네'라는 호칭 속에는 단 호하고도 굳센 체념과 겸허하고도 쓰라린 애원, 그리고 일종의 권리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네지다노프는 자기도 마르켈로프에게 '자네'라고 부르기 시작함으 로써 그의 이 권리를 인정해 주었다. "내 말 좀 듣게! 난 방금 자네에게 자기 신념에 봉사하기 위해서 사랑의 행복 을 거절했다. 그 행복을 물리쳤다고 말했지만 실은 모두 헛소리였어! 모두 자만 심에서 나온 헛소리였단 말이야! 아직까지 한 번도 그런 행복을 받아 보지 못한 나로서 무슨 물리칠 것이 있겠나 말인가! 난 아무런 재능 없는 인간으로 태어났 기 때문에 그런 인간으로 살게 마련이지. 아니, 어쩌면 그게 당연할지도 몰라. 결국 난 그런 방법하곤 인연이 먼 사람이니까, 자연히 다른 것에 정신을 쏟을 수밖에! 만일 자네가 그 양쪽을 다 결합할 수만 있다면, 즉 사랑하고 사랑을 받 으면서 그와 동시에 사업에도 봉사할 수만 있다면 그 이상 좋을 게 어디 있겠 나! 난 자네가 부럽네 그러나 난 틀렸어! 난 그것이 불가능해. 자넨 행복한 사 내야. 행복하고말고! 하지만 난 행복할 수 없거든." 마르켈로프는 야트막한 걸상에 앉아서 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맥없이 늘어뜨 린 채 나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네지다노프는 어떤 명상에 사로잡힌채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마르켈로프한테서 행복한 사나이라는 칭찬을 듣기는 했으 나 네지다노프 자신은 자기를 행복하다고 보지도 않았거니와 그렇게 느끼지도 않았다. "난 젊었을 때 어떤 여자한테 기만당한 일이 있다네." 마르켈로프는 말을 이 었다. "그 여잔 아름다운 처녀였지 하지만 그 여잔 날 배반하고 말았어. 누구 때문이었는지 알겠나? 독일놈 때문이었지. 부관 때문이었어! 그러나 마리안나 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입밖에 냈지만, 그 이름은 그의 입술을 지글지글 태우는 것 같았다. "마리안나는 나를 속이지는 않 았어. 솔직담백하게 내가 싫다고 말한 거야. 사실 마음에 들 리가 없지 않냔 말 이야! 그 다음 그녀는 자네한테 몸을 맡겼지.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건 그 여자의 자유가 아니냔 말야." "잠깐만 기다리게, 잠깐만!"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외쳤다. "도대채 자넨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몸을 내맡겼다는 건 뭐야! 자네 누이가 뭐라고 써보냈는지는 모르겠으나, 난 자네에게 똑똑히 말해 두겠네." "난 육체적인 뜻에서 말한 것이 아닐세, 정신적으로 몸을 맡겼다는 거지. 정 신과 마음에서 말야." 마르켈로프는 이렇게 말을 가로챘으나, 네지다노프의 외 침소리가 어쩐지 그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건 잘한 일이지. 그런데 내 누 이는 물론 날 슬프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닐 거야. 다시 말해서 내 누이에겐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그 앤 틀림없이 자넬 미워할 걸세, 마리안나도 마찬가질 테고. 그 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야. 그러나 그애가 뭐란들 무슨 상관 인가?" '그렇다,' 네지다노프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 여잔 우리 둘을 증오 하고 있다.' "모든 일이 잘돼 나갈 걸세." 마르켈로프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자기말을 이 었다. "이제야 마지막 쇠사슬이 떨어져 나간 셈이군. 이젠 날 방해할 거라곤 아 무것도 없단 말이야! 자네도 골루시킨더러 고집통이니 뭐니 하진 말게.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 그리고 키슬랴코프의 편지 말인데, 사실 그건 좀 우스울지도 모 르지. 그러나 좀더 중요한 데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게. 그의 말에 의하면 가는 곳마다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걸세. 하긴 그것까지도 자넨 믿지 않을지도 모르 지만 말이야!" 네지다노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네 생각이 옳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모든 것이 완전히 갖추어질 때 까지 기다리다간 영영 일을 시작하지도 못할 걸세. 미리부터 그렇게 하나하나 모두 저울질을 한다면 그 속에는 반드시 뭔가 나쁜 것도 끼여 있게 마련이거든. 비근한 예로 우리 선구자들이 농노 해방을 계획했을 때를 생각해 봐! 해방의 한 결과로서 고리대 지주(高利貸地主)라는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리라는 것을 과연 누가 예견할 수 있었겠느냐 그 말이야. 그 자들은 농민에게 썩은 귀리 한 가마 를 6루블에 팔면서, 농민한테는 이렇게 말한다네. (마르켈로프는 손가락 하나를 꺾었다.) 첫째 그 6루블에 해당하는 만큼의 노동과 거기에 덧붙여 (마르켈로프 는 두번째 손가락을 꺾었다.) 한 가마의 옹근 햇귀리를 달라고 말일세. 게다가 (마르켈로프는 세번째의 손가락을 꺾었다.) 그들은 농민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 지 빨아먹고 있는 실정이거든! 우리 선구자들도 이것만은 예측할 수 없었을 거 야. 그렇잖나 말야! 하지만 만일 그들이 이것을 예견하고 있었다손 치더라도 모 든 결과를 저울질하지 않고 농노 해방을 결행한 것은 어쨌든 잘한 일이었지. 그 래서 나도 결심하게 된 걸세!" 네지다노프는 의심쩍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마르켈로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르켈로프는 자기 눈을 한쪽 구석으로 돌리고 말았다. 그의 눈썹이 일그러지면 서 동공을 가렸다. 그는 입술을 악물고 잘강잘강 수염을 깨물고 있었다. "그래, 난 결심했어!" 거무튀튀한 털북숭이 주먹으로 힘껏 자기 무릎을 치면 서 마르켈로프는 이렇게 되풀이했다. "난 워낙 고집통이니까 내가 반(半) 소러 시아인이라는 데도 이유가 있겠지." 그 다음 마르켈로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맥빠진 사람처럼 발을 질질 끌면서 침실로 들어가더니 유리에 끼여져 있는 마리안나의 조그만 초상화를 들고 나왔 다. "이걸 갖게." 그는 슬프면서도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내가 그린 걸 세. 그림은 서툴지만 그래도 잘 보게. 좀 닮은 데가 있을 거야. (연필로 그린 옆 모습의 초상화는 정말 그녀와 흡사해 보였다.) 이걸 받게나. 이건 내 유언과도 같은 걸세. 이 초상화와 함께 내 권리 아니, 내겐 그런 권리 같은건 없었지만 어쨌든 모든 걸 자네한테 넘기겠어. 그녀까지도. 여보게, 그 여잔 좋은 사람이 야. 마르켈로프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가슴은 눈에 보이게 들먹이고 있았다. "자, 받아줘. 내게 화를 내고 있는 건 아닐 테지? 그럼 받아주게. 이젠 이런 것도 다 소용이 없어졌으니까." 네지다노프는 초상화를 받았다. 그러나 이상한 감정이 그의 가슴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는 이 초상화를 넘겨받을 권리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일 마르켈 로프가 그의 이런 마음을 알아차렸다면, 자기에게 이 초상화를 넘겨주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네지다노프는 검은 테에 가느다란 금종이를 정성껏 두른, 조그맣 고 둥근 마분지 조각을 손에 든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한 사나이의 전생명이 지금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생각했 다. 그는 마르켈로프가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 필이면 왜 자기에게? 이 초상화를 돌려줘 버릴까? 아니다! 그러면 더욱더 그를 모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게다가 생각해 보면, 이 얼굴은 자기에게도 얼마나 소중한 얼굴인가? 자기는 이 여자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네지다노프는 다소 마음속으로 공포를 느끼면서도 마르켈로프에게로 눈을 들 었다. 마르켈로프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지나 않을까 자기의 상념을 포착하려고 애쓰고 있지나 않을까? 그러나 마르켈로프는 또다시 방구석만을 응시한 채 수 염을 씹고 있었다. 노복이 손에 촛불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마르켈로프는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자, 이젠 자야지. 알렉세이!" 마르켈로프는 이렇게 외쳤다. "밤보다 아 침이 낫다는 속담이 있지 않나. 내일 마차 준비를 시킬 테니 집으로 가도록 하 게. 그럼, 안녕!" "영감, 자네도 잘 자구!" 노복 쪽으로 몸을 돌리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그는 갑자기 이렇게 덧붙였다. "날 나쁘게 생각하진 말아줘!" 노인은 얼마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촛불까지 떨어뜨릴 뻔했다. 그리고 주인을 바라보는 눈초리에는 평상시의 울적한 표정과는 달리 뭔가 많은 뜻이 깃들여 있었다. 네지다노프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직도 술때 문에 머리가 아팠고 귀가 멍멍했다. 그리고 눈은 감고 있는데도 자꾸 어떤 영상 들이 어른거렸다. 골루시킨, 관리인 바샤, 포무슈카와 피무슈카 등이 그의 눈앞 에서 빙글빙글 맴돌았다. 멀리 마리안나의 모습이 보였지만, 그녀는 그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옆으로 다가오기를 꺼리고 있었다. 네지다노프는 자기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기만이고 거짓이며 아무 쓸모없는 입에 발 린 넋두리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자기가 꼭 해야 하고 자기가 매진해야 할 목 표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열 개나 겹겹이 자물쇠가 채워진, 도 저히 도달할 수 없는 지옥 속에 있는 것 같았다. "푸우! 정말 더러운 인생이로군!" 그는 마침내 이렇게 소리쳤다. 이튿날 아침 네지다노프는 일찍 그 집을 나섰다. 마르켈로프는 벌써 농군들에 둘러싸인 채 현관 입구에 서 있었다. 그가 농군들을 불러 모았는지, 아니면 농 군들이 스스로 모여들었는지 네지다노프는 알 도리가 없었다. 마르켈로프는 건 성으로 아주 짤막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는 농군들에게 뭔가 중대한 보고라도 하려는 듯이 보였다. 늙은 머슴은 여전히 똑같은 눈을 하고 거기에 서 있었다. 마차는 순식간에 거리를 가로질러 들판으로 나와 전속력을 다해서 달리기 시 작했다. 말은 어제와 다름없었으나 마부는 -네지다노프가 부잣집에 살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떤 꿍꿍이속이라도 있었는지- 두둑이 술값을 받으리라 기대 하고 있었다. 누구나 알다시피 마부가 술을 한잔 들이켰거나, 틀림없이 술값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을 때에는 신나게 말을 몰게 마련인것이다. 6월이지 만 날씨는 선선했다. 푸른 하늘을 높게 질주하는 구름, 고르게 불어오는 강한 바람, 어제 내린 비로 먼지 하나 안 나는 한길, 설렁거리고 반짝이며 물결치는 버드나무 모든 것이 움직이고 모든 것이 질주하고 있었다. 메추라기의 울음소리 가 푸른 계곡을 지나 멀리 떨어진 언덕으로부터 가느다란 휘파람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그 울음소리 자체에 날개가 달려서 그것을 펼치고 날아오는 것 같 았다. 까치들은 햇볕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검은 벼룩 같은 것이 벌거숭이 지평선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농부 가 휴간지(休墾地)를 일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네지다노프는 이 모든 것을 눈여겨보지 않고 그냥 옆으로 흘려 보내 기만 했다. 그는 시퍄긴 영지에 도착한 것까지도 모르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만 큼 그는 자기 생각에만 골똘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저택의 지붕 이 보이고, 2층이 보이고, 마리안나의 창문이 보였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 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은 갑자기 다사로워졌다. '그 친구 말이 맞아. 그 여잔 좋은 사람이야. 난 그녀를 사랑한다.' 22 네지다노프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수업을 하기 위해 콜랴에게로 갔다. 식당 에서 시퍄긴을 만났지만, 그는 싸늘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이 사이로 내 뱉듯이 "여행은 재미있었소?" 하고 말한 다음, 자기 서재로 사라져버렸다. 이 정부 고관은 자기의 장관급 머리 속에서, 여름 휴가가 끝나는 대로 '지나치게 위험 사상'을 지닌 이 가정교사를 곧 페테르부르크로 되돌려 보내리라 작정하 고, 당분간은 그대로 감시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만은 나도 실수 했단 말이야.'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나빠지진 않겠지.' 네지다노프에 대한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의 감정은 훨씬 더 강하고 단호했 다.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철부지 같은 녀석이 나를 모욕 하다니! 마리안나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었다. 마리안나와 네지다노프의 이야기 를 복도에서 엿들은 것은 다름 아닌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였던 것이다. 명가 (名家)의 귀부인도 그런 행동을 나쁘게 생각지는 않았다. 그가 없었던 지난 이 틀 동안 그녀는 경솔한 자기 조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화 같은 건 내지 않겠다. 왜냐하면 한편으론 멸시하고 또 한편으론 동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는 듯한 표정을 끊임없이 마리안나에게 풍기고 있었 다. 마리안나를 바라보거나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억지로 참는 듯한 내부 의 멸시감이 시퍄긴 부인의 두 볼에 넘쳐 흘렀고, 어딘지 조소하면서도 동시에 동정하는 듯한 표정이 그녀의 눈썹을 살짝 치켜뜨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은 부드러운 의혹과 슬픈 혐오의 빛을 띠면서 이 거만한 처녀에게로 쏠려지곤 했다. 여러 가지 환상과 기이한 언행을 거친 끝에 결국 도 착한, 그 공부도 제대로 다 마치지 못한 초라한 학생 나부랑이와 캄캄한 방에서 카스를 나눈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 가련한 마리안나여! 그러나 아직까지 그녀의 엄숙하고 자랑스러운 입술을 건 드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자기의 발견을 남편에게 알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다만 남편이 있는 앞에서 마리안나에게 뭐라고 간단히 말을 걸 때에 이야기의 내용자는 전혀 관계없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는 것으로 만족 해했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오빠에게 편지 쓴 것을 어느 정도 후회하기까 지 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편지를 쓰지 않고 후회를 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 라리 편지를 쓰고 후회를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네지다노프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할 때 얼른 마리안나를 보았다. 그녀의 얼 굴은 좀 여위고 노래진 것 같았다.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그 가 식당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재빨리 던져진 그녀의 눈초리는 그의 가슴속 깊은 곳을 꿰뚫었다. 반면에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흘끔흘끔 그를 쳐다보면 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축하해요! 아주 잘하시더군요. 매우 재치 있게!'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르켈로프가 자기 편지를 보여주었는지 아닌 지를 그의 얼굴에서 읽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편지를 보았을 것이 라고 단정해 버렸다. 시퍄긴은 네지다노프가 솔로민이 관리하고 있는 공장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하자 '모든 점에서 흥미있는 그 제조소'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청년이 공장 내용은 전혀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곧 점잔을 빼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 미숙한 철부지한테서 도움이 될 정보라도 기대했던 자기 자신을 스스로 책망하는 눈치였다. 마리안나는 식당에서 나갈 때 네지다노프에게 다음과 같이 속삭이는 데 성공했다. "정원 끝 늙은 자작나무 숲에서 절 기다려줘요. 틈이 생기는 대로 나갈게요," '이 여자도 나에게 격식 없는 인칭을 사용하는구나. 그 사내와 마찬가지로.'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쩐지 기분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역 시 기뻤던 것은 사실이다. 만일 그녀가 갑자기 경어를 다시 쓰기 시작함으로써 자기에게서 멀어져간다면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될 것인가? 그렇다, 그런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불행한 일이라고 네지다노프는 느꼈다. 과연 자기는 마리안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이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기에게 소중하고 가깝고 필요한 존재라는 것 다른 무엇보다도 필요한 존재라는 것만은 그도 자기의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안나가 만나자고 한 숲에는 키 큰 고목들이 수없이 자라고 있었는데, 대 부분이 가지가 아래로 늘어지는 자작나무들이었다. 바람이 여전히 불고 있었으 며 다발처럼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들이 헝클어진 머리채처럼 흐느적거리며 흔 들리고 있었다. 높이 뜬 구름은 여전히 빨리 질주하고 있었다. 구름이 태양에 걸리면 주위의 모든 것은 검은 색이 아닌 단조로운 빛으로 변하고 만다. 그러나 그 구름이 지나기만 하면 주위의 모든 것은 다시금 선명한 빛의 반점으로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그러고는 그림자의 반점과 엉키고 뒤섞이며 찬란한 빛의 무 늬를 만들어냈다. 소음과 움직임은 전과 다름없었으나 거기에는 어떤 화사한 기 쁨이 첨가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의 즐거운 강제력을 지닌 정열이 어둡게 물결치는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것이었다. 실제로 네지다노프도 지금까지 바로 이러한 마음을 가슴속에 지녀왔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아니,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르켈로프의 집에 있을 때보다 더 무섭고 더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마리안나 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두 개의 산 존재를 홀연히 결박해 줄 올가미 가 이미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네지다노프는 배가 나루터에 닿으려고 할 때 배 에서 나루터로 던져지는 밧줄을 상기했다. 이미 밧줄은 나무 기둥에 감기고 배 는 멎고 말았다. 나루터에 닿은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갑자기 몸부림을 쳤다. 여자의 옷 이 멀리 떨어진 오솔길에서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였다. 그러나 자기쪽으로 다가오는 건지, 자기에게서 멀어져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빛과 그늘의 반점이 그녀의 몸 아래서 위로 미끄러지는 것을 보자 이쪽으로 다가온다는 것 을 알았다. 만밀 그녀가 멀어져가고 있었다면 그 반점은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 지게 마련인 것이다. 다시 몇 초가 흐르자 어느새 그녀는 그의 옆,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눈에는 상냥한 빛을 띠고, 입술에는 가냘프면서도 즐거운 미소를 머 금은 채 정답고 활기 있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자기 앞으로 내민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그러나 당장엔 아무 말도 그의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도 역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무척 빨리 걸어왔기 때문에 다도 숨결이 가빴으나 네 지다노프가 자기를 기쁘게 맞아준 데 대하여 무척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어요," 그녀는 말하기 지작했다. "빨리 들려주세요. 당신의 결정을!" 네지다노프는 어리둥절했다. "결정이라니 뭐,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글쎄, 제 마음을 아시잖아요. 어떤 얘기들을 하셨는지 들려주세요. 누굴 만나 보셨지요? 솔로민과 사귀셨어요? 어서 말해 줘요. 죄다. 죄다! 가만, 우리 저쪽 으로 가요. 좀더 멀리. 제가 장소를 알아요. 그곳이라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앞장서서 네지다노프를 끌고 갔다. 그는 드문드문 자란, 키큰 마른 풀 을 해치면서 조용히 그녀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네지다노프를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폭풍에 쓰 러진 커다란 자작나무가 있었다. 두 남녀는 그 나무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 말해 줘요!" 하고 그녀는 되풀이했으나 곧 이렇게 덧붙였다. "아아! 당신 을 만나 뵈니, 정말 기쁘군요! 전 지난 이틀 동안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몰 라요. 그런데 말예요, 전 이제 확신하게 되었어요.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가 우 리 말을 엿들었다는 걸." "그 여잔 그걸 마르켈로프한테 편지로 알렸더군요." 네지다노프가 이렇게 말 했다. "그분에게요?" 마리안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좀더 강한 다른 감정 때문이었다. "정말 심술궂은 나쁜 여자예요!" 그녀는 천천히 이렇게 속삭였다. "그 사람에 겐 그런 짓을 할 만한 권리가 없거든요.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죠! 자, 어서 얘기 나 들려주세요, 어서." 네지다노프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리안나는 돌처럼 굳어진 조심스러운 표정 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만 네지다노프가 바삐 서두르며 상세 히 설명하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에만 그의 말을 가로챌 뿐이었다. 하긴 상세한 모든 여행담이 똑같이 그녀의 마음을 끈 것은 아니었다. 포무슈카와 피무슈카의 이야기는 그녀를 웃기기는 했으나 그녀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그들의 생활 양식은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마치 나부코도노스르(바빌론의 왕)의 얘기라도 듣고 있는 것 같군요." 그녀 는 그들의 이야기에 대하여 이렇게 평했던 것이다. 그녀는 마르켈로프의 말은 물론 골루시킨의 사고 방식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이 사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던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다. 특히 솔로민이 어떤 의견을 가졌으며, 그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안 타까운 호기심을 느끼며 알기를 원했다. "언제지요? 도대체 언제요?" 이런 의문 이 끊임없이 그녀의 머리 속에 맴돌고 있어서, 네지다노프가 이야기하는 동안에 도 이 질문은 잠시도 그녀의 입에서 떠날 때가 없었다. 한편 네지다노프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대답을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일부러 피하고 있는 듯했다. 그도 마리안나에게 그다지 흥미를 줄 수 없는 자질구레한 서술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자기 도 모르게 자꾸 그런 문제로 되돌아가는 데는 어쩔 수 없었다. 유머에 넘치는 그의 서술은 그녀의 마음속에 초조감을 불러일으켰다. 환멸 내지 우울증에 걸린 듯한 그의 어조는 그녀를 슬프게도 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사업'이나 '문제' 쪽 으로 화제를 이끌어가야만 했다. 그런 문제라면 아무리 서술이 길어도 그녀를 피곤하게 하지 않았다. 네지다노프는 자기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 어느 잘 아는 친구의 별장에서 여름을 보낼 때 그집 아이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던 일 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들 역시 묘사적인 서술이며 개인적인 감각의 표현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들은 사건과 사실만을 요구했던 것이다. 마리안나는 어린애는 아니었지만, 그 감정의 단순함과 솔직함에 있어서는 어린애와 다를 게 없었다. 네지다노프는 마음속으로부터 마르켈로프를 극구 찬양했다. 그리고 솔로민에 게는 특별한 동정을 보이기까지 했다. 감격에 젖은 듯한 어조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자문해 보았다. '아니, 무엇 때문에 나는 이 사람을 이토록 높이 평가하는 것일까? 별로 총명하다고 생각될 만한 의견도 없지 않았는가. 심지어 그의 어떤 의견은 나의 신념과는 모순되는 것처 럼 느껴지기까지 했는데. 그렇다. 그건 침착한 성격 탓이 다' 이런 생각이 네지다노프의 머리에 떠올랐다. '피무슈카의 말대로 시원한 사람 이고 착실한 사람이다. 그릇이 큰 사람이다. 침착하고 굳센 사람인 것이다. 그 사내는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고 또 자기를 신뢰하고 있다. 그것이 또 한 남에게도 신뢰의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그에게는 불안이란 없다. 균형! 그렇 다, 균형이 잡혀 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결국 나에게는 그러한 균형 이 없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채 네지다노프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 다. 별안간 그는 자기 어깨에서 부드러운 손길을 느졌다. 그는 머리를 들었다. 마리안나가 근심 어린 상냥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 었다. "아니, 왜 그러시죠?" 그녀가 이렇게 물었다. 네지다노프는 어깨에서 그녀의 손을 내리고, 처음으로 그 조그맣고 굳센 손에 키스를 했다. 마리안나는 살짝 웃어 보였다. 그런 상냥한 키스가 어떻게 그의 머리에 떠올랐을까 자못 놀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녀도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마르켈로프씨가 당신에게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의 편지를 보여주던가요?" 그녀는 마침내 이렇게 물었다. "그럽디다." "그래 뭐라던가요?" "그 사람 말이오? 그 사람은 희생 정신에 넘치는 그지없이 훌륭한 사내더군 요! 그 사람은." 네지다노프는 마리안나에게 초상화 아야기를 꺼내려다가 자기 자신을 억제하고 다만 이렇게 되풀이했다. "그지없이 훌륭한 인물입니다!" "네, 그건 사실이에요!" 마리안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던 자작나무 위에서 네지다노프 쪽으로 몸을 돌리며 재빨 리 이렇게 말했다. "그래, 당신은 어떻게 결정하셨죠?" 네지다노프는 어깨를 흠칫했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당분간은 아무 결정도 할 수 없어요. 좀더 기다려봐야 하니까." "또 기다리다뇨 도대체 무엇을?" "마지막 지령을." 네지다노프는 '난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누구한테서요?" "저, 당신에게도 말한 바 있는 바실리 니콜라예비치한테서요. 그리고 오스트 로두모프가 돌아오는 것도 기다려야 하고." "그런데 당신은 그 바실리 니콜라예비치란 분을 직접 보신 적이 있나요?" "두어 번 보긴 했죠. 흘끔." "어떤 분이세요. 훌륭한 사람?"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지금은 그 사람이 우두머리니까 모든 일을 처리해 나 가는 거죠. 우리들의 사업은 규율 없이는 도저히 해낼 수 없거든요. 무조건 복 종을 해야 하는 거요." 네지다노프는 '이것 역시 모두 헛소리야' 하고 생각했다. "어떻게 생기신 분이에요?" "어떻게 생겼냐구요? 키는 작지만 육중한 몸집에 거무스름하고 칼므이크처럼 광대뼈가 튀어나온 거친 얼굴을 하고 있죠. 그런데 그 눈만은 굉장히 생기가 있 거든요." "그럼, 말은 어떻게 해요?" "말한다기보다는 호령을 친다고 해야 좋을 거요." "어떻게 그분이 우두머리가 된 거죠?" "결국 성격 때문이죠. 무슨 일에든 후회라는 걸 모르니까. 필요하다면 사람까 지 죽이거든요, 그러니까 모두 그 사람을 무서워 하는거요." "그럼, 솔로민은 어떻게 생기셨죠?" 잠시 후 마리안나는 이렇게 물었다. "솔로민도 아름다운 편은 못 되죠. 그러나 그 사람은 호인다운 얼굴을 하고 있어요. 단순하고 정직해 보이는 얼굴 말이오. 선량한 신학생들 자운데 가끔 눈 에 띄는 그런 얼굴 말이오." 네지다노프는 솔로민의 얼굴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마리안나는 오래도록 네지다노프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이윽고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당신도 역시 좋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당신이라면 함께 살 수 있을 것 같군 요." 이 말은 네지다노프를 감동시켰다. 그는 또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 입술로 가 져가려고 했다. 참으세요. 호의는 고맙지만." 마리안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손에 키스 를 받을 때마다 언제나 웃음을 짓곤 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전 당신한테 죄를 저질렀어요." "그건 또 무슨 뜻이죠?" "제 말을 들어보세요. 당신이 안 계실 때 당신 책상 위에서 시를 쓴 수첩을 발견하지 않았겠어요. (네지다노프는 흠칫 몸을 떨었다. 정말이다.) 전 당신 앞 에서 참회하겠어요. 전 그만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그걸 다 읽고 말았어 요. 그건 당신이 쓴 시일 테죠?" "내가 쓴 거요. 그런데 마리안나! 내가 얼마나 당신을 생각하고 또 얼마나 당 신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은, 당신에게 거의 화를 내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입증이 될 거요." "거의라뇨? 그럼 조금은 화를 내고 있다는 뜻이네요? 참 당신은 저를 마리안 나라고 부르지만, 전 당신을 네지다노프라고 부를 순 없어요! 전 당신을 알렉세 이라고 부를게요. 그건 그렇고, '사랑하는 벗이여,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하고 시작되는 시도 당신의 시인가요?" "내 것이오. 그런데 제발 부탁이니 그런 말은 그만둬요. 날 괴롭히지 말고." 마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굉장히 슬픈 시더군요. 그 시는 저와 알기 전에 쓰신 것이길 바라겠어 요. 그러나 제가 보기엔 아주 잘된 시예요. 당신은 문학가가 될 수도 있다고 느 꼈지요. 하지만 전 잘 알아요. 당신에겐 문학 같은 것보다 더 훌륭하고 더 고상 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다른 일이 불가능했던 그전 같으면 문학을 해도 좋았을 거예요." 네지다노프는 재빨리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래요, 나도 당신과 동감이오. 여기서 성공하기 보단 저기서 파멸하는 편이 나으니까요." 마리안나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요, 알렉세이. 당신 말이 옳아 요!" 그녀는 이렇게 외쳤다. 그녀의 얼굴 전체가 환희로 빛나며 불타오르고 위 대한 감격으로 넘쳐 흘렀다. "당신 말이 옳아요! 그렇지만 우린 당장 파멸하지 않을지도 모르죠. 우리도 성공할지 몰라요. 두고 보세요. 우리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될 거예요. 우리들의 생활이 헛되게 망하진 않을 테니까요. 우린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당신 은 무슨 직업을 가질 수 있죠? 모르세요? 아니, 상관없어요. 우리 일해요. 우리 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우리 동포에게 바치도록 해요. 필요하다면 전 식모라도 되겠어요. 재봉일이나 세탁일도 하겠어요. 두고 보세요, 두고 보세요. 그건 아무 것도 칭찬받을 만한 일은 아닐 테죠. 그러나 그건 행복해요. 행복하고말고요." 마리안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먼 곳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경치가 아 니었다. 그것은 아직 아무도 모르는, 그리고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 던 다른 세계였지만 그녀만은 그것을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네지다노프는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오오, 마리안나!" 그는 이렇게 속삭였다. "난 당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 가 없는 사람이오!" 그녀는 별안간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집으로 갈 테예요, 돌아갈 시간이에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잖으면 또다시 우릴 찾아 헤맬 테니까요. 하긴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도 이젠 단념했을 는지도 모르지만. 그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저는 타락한 여자일 테니까요!" 마리안나가 말할 수 없이 명랑하고 기쁜 표정으로 이 말을 했기 때문에, 네지 다노프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고는 "타락한 여자!" 하고 되풀이하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여잔 굉장히 모욕을 느끼고 있어요." 마리안나는 말을 이었다. "당 신이 그 여자의 발밑에 엎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런 건 아무것도 아 녜요. 그것보다도 전 이 집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순 없어요. 여길 뛰쳐 나가야겠 어요." "뛰쳐나가다뇨?" 네지다노프가 되물었다. "네, 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도 여기 남아 있을 순 없잖아요? 우리 함께 떠나요. 우린 함께 일해야 해요. 당신도 저와 함께 가주실 테죠?" "이 세상 끝까지!"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외쳤다. 그 목소리는 갑자기 솟아오르 는 감사의 마음과 흥분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이 세상 끝까지!" 이 순간 그는 마리안나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아무 미련 없이 그녀를 따라 나설 것만 같았다. 마리안나도 그의 이런 마음을 알고는 행복스러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제 손을 잡아줘요. 하지만 키스는 말구요. 힘껏 잡아줘요. 동지로서, 친 구로서. 네, 그렇게요!" 두 남녀는 생각에 잠긴 행복한 모습으로 나란히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파릇 파릇한 억새가 그들의 발밑에서 아양을 떨었고, 어린 나뭇잎들이 주위에서 소란 스럽게 술렁거리고 있었다. 빛과 그늘의 반점이 그들의 옷 위를 미끄러지며 줄 달음쳤다. 그들 두 남녀 역시 분망스러운 주위의 장난과 즐겁게 때려주는 바람 결, 상쾌하게 반짝이는 나뭇잎과 함께 자기 자신들의 젊음 그리고 상대방에게 서로 즐거운 미소를 던져주고 있었다. 제 2 편 23 골루시킨가에서 만찬을 마친 솔로민이 5킬로미터의 밤길을 원기 있게 걸어 공장을 둘러싼 높다란 담장의 샛문을 두드렸을 때는, 이미 아침놀이 동녘 하늘 에 물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문지기가 이내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털북숭이 꼬리를 요란스레 내두르는, 쇠사슬 매인 세 마리의 목양견(牧羊犬)을 거느린 채 존경과 근심 어린 표정으로 솔로민을 곁채에까지 안내해 주었다. 그는 상관이 무사히 돌아와 준 것을 몹시 기뻐하는 눈치였다. "어떻게 이리 새벽 일찍 돌아오셨지요, 바실리 페토트이치? 우린 날이 밝아야 돌아오실 줄 알았어요." "괜찮네, 가브릴라. 밤에 산책하는 것도 과히 나쁘진 않거든." 솔로민과 공장 사람들 사이에는 다소 이상한 점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서로 좋은 관계들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솔로민을 손윗사람으로 존경함과 동시에 자기들과 대등한 사람 혹은 동료처럼 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장 사람 들의 눈에는, 솔로민은 놀랄 만한 지식의 소유자임에 틀림없었다. "바실리 페토트이치가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은 곧잘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하느님의 말씀과 다름없거든!" 그 사람은 모든 일에 도통하고 있지. 그렇기 때 문에 어떤 영국인이라도 그 사람을 당해 낼 수는 없단 말이야!" 실제로 언젠가 한 번 영국의 권위 있는 공장주가 이 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 었다. 그때 솔로민이 그 사람과 영어로 말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그의 지 식에 놀라서인지 어쨌든 영국인은 노상 솔로민의 어깨를 두드리고 웃으면서 자 기와 함께 리버풀로 가자고 권하기도 했다. 그리고 직공들에게는 러시아어로 "이 사람 참 좋습니다. 오오! 정말 좋습니다!" 하고 되풀이했다. 직공들도 흐뭇 한 보람을 느끼며 덩달아 크게 웃었다. "그것 봐, 우리 대장이 어때! 우리 대장 이!" 사실 솔로민은 그들의 동료였고, 동시에 그들의 대장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솔로민의 부하 파벨이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솔로민 을 깨우고 세수물을 떠준 다음, 무슨 말을 하기도 하고 또 뭔가 묻기도 했다. 그리고 파벨과 함께 황급히 차를 마신 다음 솔로민은 기름 투성이 회색 작업복 으로 갈아입고 공장을 향해 떠났다. 그의 생활은 다시 커다랗게 쳇바퀴 돌듯 회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회전은 또다시 정지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솔로 민이 돌아와서 닷새 가량 지났을 때 멋진 네 필의 말이 끄는 아름다운 경마차 (輕馬車) 한 대가 공장 마당으로 들이닥쳤다. 연녹색 제복을 입은 하인은 파벨 의 안내를 받아 곁채로 들어오자 문장이 찍힌 편지를 정중하게 솔로민에게 넘 겨주었다. '보리스 안드레예비치 시퍄긴 각하'로 시작한 편지였다. 보통 향수가 아닌 그 어떤 특별히 고상한 향료 냄새가 물씬거리는 이 편지는, 비록 3인칭으 로 쓰여져 있긴 했으나 비서의 손을 거치지 않고 각하 자신이 직접 쓴 것이었 다. 편지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교양인으로 자처하는 알쟈노예 마을의 영주는 일찍부터 고명하신 존함을 들어 알고는 있지만 개인적으로 안면이 없는 당신에 게 서신을 띄우게 된 것을 먼저 사과하고, 어떤 중대한 공업상의 기획에 관해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당신의 고견을 듣고 싶은 마음에서 '무례한' 청인 줄은 알면서도 이곳 영지까지 왕림해 주십사고 부탁드리는 바이다. 솔로민씨의 친절 하신 동의를 기대하여 이 마차를 보내는 바이나, 만일 솔로민씨께서 오늘 내방 하실 수 없으시다면 어느 날이건 편리한 일정을 알려주기 바란다. 이 마차는 솔 로민씨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판에 박힌 표현들이 뒤따르고, 편지 끝에는 추신이 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1인칭으로 쓰고 있었다. "평상시대로의 프록코트 차림으로 저희집 식사에 응해 주셨으면 고맙겠 습니다." '평상시대로'라는 낱말 밑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이 편지와 함께 그 연 녹색 제복의 하인은 다소 겸연쩍은 표정으로 봉인도 없이 풀칠만 한 보통 편지 를 솔로민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네지다노프한테서 온 것으로 간단히 이렇게 적 혀 있었다. "제발 와주십시오. 여긴 당신을 매우 필요로 하고 있으며, 당신의 방 문은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물론 시퍄긴씨에 대해서만은 아닙니다." 시퍄긴의 편지를 읽고 솔로민은 생각했다. '평상시의 복장이 아니곤 달리 입 고 갈 것도 없지 않나 말이야. 연미복 같은 건 공장에 있을 리도 없고, 게다가 무엇 때문에 그런 곳에 갈 필요가 있담. 그저 시간만 허비할 따름이지!' 그러나 네지다노프의 편지를 재빨리 훑어본 솔로민은 뒤통수를 긁으며 망설이는 듯 창 문가로 다가섰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연녹색 제복의 하인은 정중하게 이렇게 물었다. 솔로 민은 다시 얼마 동안 창문 옆에 서 있다가 마침내 머리카락을 뒤로 젖히고 한 손으로 이마를 쓸며 말했다. "갑시다! 옷을 갈아입을 동안 잠깐 기다리시오." 하인은 점잖게 방에서 물러갔다. 솔로민은 파벨을 불러 잠시 말을 주고받은 후 다시 공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시골 재단사가 만든, 허리가 무척 긴 검정 프 록코트를 입고, 블그스름하게 다소 색이 바랜 실크 해트를 쓴 다음(실크 해트를 쓰자 그의 얼굴은 금세 딱딱한 표정으로 변하고 말았다)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 나 문득 장갑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상기하고는, 그림자처럼 떨어질 줄 모르는 파벨에게 장갑을 가져오라고 외쳤다. 그는 방금 세탁한 하얀 녹피 장갑 한 켤레 를 가져왔다. 손가락 끝이 하나같이 모두 비스켓처럼 부풀어오른 장갑이었다. 솔로민은 장갑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는 출발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하인 은 별안간 아무 소용도 없는 위세를 부리며 껑충 마부대로 뛰어올랐다. 예절바 른 마부가 이상한 소리로 신호를 하자 곧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솔로민이 시퍄긴의 영지로 달려오고 있을 동안 이 정부 고관은 자기집 응접 실에 앉아서 반쯤 갈라진 정치 팜플렛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자기 아내와 솔 로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공장 성적이 말할 수 없 이 불량하여 근본적인 개혁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솔로민을 자기 공장으로 빼돌릴 수는 없을까 알아보기 위해 그를 부른 것이라고 본심을 토로했다. 시퍄 긴은 자신이 솔로민에게 보낸 편지에서 편리한 대로 날짜를 정하라고 제안은 했으면서도 솔로민이 방문을 거절하거나 다른 날짜를 택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공장은 제지 공장이지 방직 공장은 아니잖아요?" 발렌치나 미 하일로브나가 참견했다. "매일반이지. 이봐요, 저쪽도 기계고 이쪽도 기계거든. 그리고 그 사람은 기계 기사란 말이오!" "하지만 그 사람은 전문 기사일지도 모르죠!" "여보, 첫째 러시아에는 전문 기사라는 것이 없고, 둘째로 되풀이해서 말하지 만 그 사람은 기계 기사란 말이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당신 조심하세요. 벌써 젊은 사람한테 한번 손을 데지 않았어요? 제발 두번째의 실수는 없도록 하세요!" "그건 당신, 네지다노프를 두고 하는 말이오? 그러나 어쨌든 나로선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보는데. 콜랴의 선생으로선 당신도 알다시피 Non bis idemi 니 말이오! 제발 내 이 현학적인 표현을 용서해 줘.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계 속해서 두 가지 실수를 저지를 수 없다는 뜻이지."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러나 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되풀이된다고 봐요. 특히 사물의 본성에 따라. 젊은 사람들 사이엔 더욱 그렇다고 봐요." "Que voulez-vous dire(당신 그게 무슨 뜻이지)?" 시퍄긴은 크게 원을 그리는 손짓으로 팜플렛을 책상에 던지면서 이렇게 물었다. "Ouvez les yeux et vous verrez(눈을 뜨세요, 그럼 보일 테니)!" 시퍄긴 부인 은 이렇게 대답했다. 프랑스어로 말할 때만은 그들도 서로 경어를 쓰고 있었다. "흠!" 시퍄긴이 말했다. "그건 당신, 그 학생에 대해서 말하는 거요?" "네, 그 학생에 대해서죠." "흠! 그래! 그 학생이 여기서(그는 이마 옆에서 손을 회전시켜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각해 냈단 말이오, 응?" "눈을 뜨세요!" "마리안나 말인가, 응?" 이 두번째의 '응?'은 첫번째 것보다 더욱 콧소리로 말 했다. "눈을 뜨시라지 않아요!" 시퍄긴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 우리 그런 건 나중에 자세히 알아봅시다. 그런데 지금 한마디만 말해둘 게 있어. 솔로민은 다소 당황할지도 몰라요. 그야 당연한 일일 테지. 이런 생활 에 익숙치 않을 테니까. 그래서 그 사람한텐 될 수 있는 대로 상냥하게 대해 주 어야 할 거요. 너무 놀라지 않도록. 난 당신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 오. 당신이야말로 내겐 보배와 다름없지. 당신은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대번 에 매혹시킬 수 있는 수완을 가졌거든. J'en sais quelquechose,madame(나도 거 기 대해선 좀 안단 말이오, 마담)! 난 결국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 말을 하는 거요. 바로 그 사내만 해도." 그는 선반 위에 얹혀 있는 유행형 회색 모자를 가리켰다. 그 모자는 오늘 아 침부터 알쟈노예 영지에 와 있는 칼로메이체프의 것이었다. "Il est tres cassant(그 사람은 너무 과격하단 말이야). 당신도 알다시피 그 사람은 너무 민중을 멸시하거든. 나도 그 점에선 찬성할 수 없단 말이오! 게다 가 요 얼마 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그 사람은 괜히 짜증을 내면서 남의 꼬투리 만 잡으려 든단 말이오. 아마 '그쪽' 일이 (시퍄긴은 애매한 방향으로 머리를 흔 들어 보였다. 그러나 시퍄긴 부인은 그 뜻을 이해했다) 잘 진전되지 않는가보 지, 어때?" "눈을 뜨세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시퍄긴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응? (이번의 '응?'은 전혀 다른 성질, 다른 어조로 말했다. 아까보다는 훨씬 낮았던 것이다.) 뭐라고,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눈을 크게 떠야겠군 그래." "그건 당신 마음대로죠. 그리고 오늘 새로 온다는 젊은이세 대해선데 만일 그 사람이 오늘 오기만 한다면, 조금도 근심할 건 없어요. 모든 일을 조심해서 처 리할 테니까요." 그런데 사실은 어떠했을까. 조심해서 일을 처리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솔로민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겁을 집어먹지 않았던 것이다. 하인이 그의 도착을 알렸을 때 시퍄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까지 들리는 큰소리로 "이리 모 셔라! 자, 이리로 모셔!" 하고 말하고는 응접실 쪽으로 걸어가 바로 그 문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솔로민이 문지방을 넘어서자마자 시퍄긴은 그에게 두 손을 내 밀었다(그는 자칫하면 솔로민과 부딪칠 뻔했다). 그러고는 정답게 새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고 머리를 끄덕이면서 즐거운 어조로 말했다. "아, 이거 참 잘 오셨 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 다음 시퍄긴은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가 있는 곳 으로 솔로민을 안내했다. "자, 이 사람이 제 처올시다." 시퍄긴은 마치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쪽으로 솔로민을 떠밀기라도 하는 듯 손바닥으로 살며시 그의 등을 누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분은 우리 현에서도 제일 가는 기계 기사인 동시에 관리인 바실리 페토세이치 솔로민이오." 시퍄긴 부인은 다소곳이, 마치 친한 사람이라도 대하는 듯 허물 없이 미소를 던졌다. 그러고는 팔꿈치를 몸에 살짝 붙인 채 목을 약간 앞으로 기울이면서 손 바닥을 위로 하여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마치 무엇을 애원하는 여인의 모습 같 기도 했다. 솔로민은 그들 부부로 하여금 자기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게 하고는, 두 사람의 손을 잡고 의자를 권하는 첫마디에 앉아버렸다. 시퍄긴은 그 에게 필요한 것이 없을까 하고 근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솔로민은 아무것도 필요없다고 말하면서 여행의 피로조차도 전혀 없으니 제발 근심하지 말아달라 고 대답했다. "그럼 공장 쪽으로 한번 가봐 주시겠습니까?" 그토록 관대하고 겸손한 손님 의 태도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지, 어쩐지 좀 꺼리는 듯한 표정으로 시 퍄긴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솔로민은 말했다. "아아! 당신은 정말 의무감에 충실한 분이시군요! 그럼, 마차 준비를 시킬까 요? 아니 원하신다면 걸어가실 수도 있지만." "참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죠, 당신의 공장은?" "반 킬로미터쯤 되죠. 그보다 멀진 않아요!"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마차를 준비시키겠습니까?" "아, 그럼 좋습니다. 이봐, 모자를 가져와. 지팡이도, 빨리! 그리고 여보, 당신 은 점심 준비나 돌봐주구려. 모자!" 시퍄긴은 손님보다 훨씬 더 흥분하고 있었다. "도대체 내 모잔 어떻게 된거 지!" 그는 다시 한 번 이렇게 소리치고는 (고관이라는 신분도 잊고서!) 마치 장 난꾸러기 초등학생처럼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그가 솔로민과 이야기하고 있 을 동안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이 '새로운 청년'을 조심스럽게 흘끔흘끔 바 라보고 있었다. 솔로민은 장갑을 끼지 않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는 (결국 그 는 장갑을 끼지 않았던 것이다.) 태연한 표정으로 안락의자에 앉 아 있었다. 그리고 다소 호기심 어린 침착한 눈으로 가구며 액자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무슨 사람이 저럴까?'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평민이야. 그런데 어쩌 면 저렇게 자연스러울까!' 사실 솔로민은 극히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 다. 그러나 자연스럽기는 하지만 '자, 나를 봐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지!' 하는 듯한 자만 어린 태도가 아니라, 사상과 감정이 견고하면서도 복잡하지 않 은 사람. 바로 이런 사람에게서 보는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시퍄긴 부인은 솔로 민에게 말을 걸고 싶었으나 놀랍게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장 생각이 떠오르 지 않았다. '저런!' 그녀는 생각했다. '정말 난 이 사람에게 위압을 당한 것일 까?' "보리스 안드레예비치는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는지 몰라요." 그녀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귀중한 시간을 그분을 위해 할애해 주셨으니까요." "뭐 그다지 귀중할 것도 없죠, 부인." 솔로민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오 랫동안 여기 있을 것도 아니니까요." '드디어 곰이 발톱을 내미는군.' 그녀는 이 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이때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든 남편이 열려진 문지 방에 나타났다. 그는 비스듬히 몸을 돌리면서 허물 없는 태도로 이렇게 외쳤다. "바실리 페토세이치! 떠나보실까요?" 솔로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에게 인사를 하고는 시퍄긴 을 따라 걸어나갔다. "날 따라오세요. 이리로, 이리. 바실리 페토세이치!" "제게 부칭을 불러주시는 건 고맙습니다만," 솔로민은 천천히 이렇게 말했다. "제 부칭은 페토세이치가 아니라 페토트이치올시다." 시퍄긴은 어깨 너머로 뒤돌아보았다. 자못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아아, 제발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바실리 페토트이치." "괜찮습니다, 그러실 필요까진 없어요." 그들은 마당으로 나갔다. 그들 맞은편으로부터 칼로메이체프가 다가왔다. "어디 가시죠?" 솔로민에게 곁눈질을 하며 그는 이렇게 물었다. "공장으로 가 십니까? 이 사람이 바로 그분인가요?" 시퍄긴은 눈알을 굴리며, 조심하라는 듯이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보였다. "그래, 공장으로 가는 길이오. 내 실책과 결함을 이 기사님께 보여드리 려고, 인사들 하시죠! 칼로메이체프씨, 이 공장 지주지요. 그리고 이분은 솔로민씨." 칼로메이체프는 간신히 알아볼 정도로 두어 번 머리를 끄덕여 보였으나, 그것 은 솔로민 쪽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다. 그는 솔로민을 바라보려고도 하지않 았다. 한편 솔로민은 칼로메이체프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반쯤 감 긴 두 눈에서는 무엇인가가 번쩍였다. "동반해도 괜찮겠습니까?" 칼로메이체프가 이렇게 물었다. "당신도 아시다시 피, 전 배우기를 좋아하니까요?" "암, 괜찮고말고요." 시퍄긴이 대답했다. 그들은 마당에서 한길로 나갔다. 스무 걸음도 채 가기 전에 법의 자락을 쑤셔 넣고 자기 집, 이른바 승려촌으로 돌아가고 있던 교구의 승려를 만났다. 칼로메 이체프는 재빨리 두 사람 곁을 떠나 성큼성큼 승려에게로 다가갔다. 승려는 전 혀 뜻밖의 일이었으므로 다소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이었다. 칼로메이체프는 승려 에게 축복해 주길 부탁하고는 땀이 난 빨간 그의 손에 요란스럽게 입을 맞춘 뒤, 솔로민을 돌아다보며 도전하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보건대, 그도 이 기사에 대해선 '조금' 아는 바가 있었으므로 자기의 행동을 과시함으로써 이 학자연(學 者然)하는 사기꾼의 코를 납작하게 꺾어놓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네, 시위를 하는 건가?" 시퍄긴은 이사이로 내뱉듯이 말했다. "그래요, 요즈음 시대에는 이런 시위도 필요하거든요!" 그들은 공장에 도착했다. 텁수룩한 턱수염에 틀니를 한 소러시아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시퍄긴이 끝내 해고해 버린 독일인의 후임이었다. 이 소러시아 인은 임시로 고용되고 있었는데, 확실히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오또' 혹은 '바이두제'라고만 되풀이할 뿐 연방 한숨만 쉬고 있었다. 공장의 검사가 시작되었다. 직공 가운데는 솔로민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으므로 그에게 인사를 하기도 했다. 솔로민은 그중 한 사람에게, "아, 그리 고리, 잘 있었나! 자네 여기 있었군그래!" 하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곧 공장이 잘못 운영되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자금은 수없이 들였으면서도 일은 엉망진 창이었다. 기계는 품질이 좋지 않았고,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것이 많은 반면 정 작 필요한 것은 상당히 부족한 상태였다. 시퍄긴은 솔로민의 의 견을 알아보려고 끊임없이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겁먹은 표정으로 질문을 던 지고 있었다. 그는 적어도 공장 질서만은 만족할 만하냐고 물었다. "질서는 서 있습니다만," 솔로민은 대답했다. "수입이 있을는지는 의문이군 요." 솔로민은 공장에 들어서자 마치 자기 집처럼 아주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어 마치 그가 이 공장의 주인같이 보였다. 이것은 시퍄긴 뿐만 아니라 칼로메이체프까지도 이렇게 느꼈던 것이다. 그는 기수가 말의 목을 만지듯 기계 위에 손을 얹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기계 바퀴를 눌러보기도 했다. 그러면 기계는 멎기도 하고 다시 돌기도 했다. 그리고 통 속에서 제지용 원료인 펄프를 손바닥 위에 약간 떠놓으면, 곧 그 결점이 드러나 버렸다. 솔로민은 거 의 말이 없었으며 텁석부리 소러시아인은 거들떠보려고도 하지않았다. 그는 여 전히 침묵을 지킨 채 공장에서 나왔다. 시퍄긴과 칼로메이체프도 그의 뒤를 따 랐다. 시퍄긴은 아무도 전송하러 나올 필요가 없다고 이르고 발로 땅을 내리치며 부드득 이를 갈았다. 그는 매우 기분이 언짢았던 것이다. "당신의 얼굴 표정으로 봐서," 그는 솔로민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공장에 불 만인 듯싶습니다만, 사실 공장 상태가 불안전하여 수익이 없다는 것은 나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발 부탁이니 솔직히 좀 말씀해 주십시오. 가장 중 요한 결점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공장을 개선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제지 공업은 제 전문 분야가 아닙니다만," 솔로민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 에게 한 가지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공장 경영은 귀족들이 할 일이 아니라 구요." "그럼 당신은 이 사업이 귀족에겐 천하다 그 말씀이십니까?" 칼로메이체프가 끼여들었다. 솔로민은 자기 특유의 미소를 만면에 지었다. "아니 천만에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천할 리가 있겠어요? 그리고 설령 또 그런 점이 있다 하더라도 귀족들이 그걸 싫어할 리도 없구요." "아니 뭐라고요?" "다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솔로민은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귀족들 은 이런 종류의 사업엔 익숙치 않다는 겁니다. 거기엔 상업적인 타산이 필요합 니다. 모든 것을 다른 지반으로 바꿔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끈기 있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귀족들은 이런 것은 생각지도 않는단 말입니다. 우 리는 도처에서 귀족들이 나사 공장이니 제지 공장이니 하는 공장들을 계획하는 것을 보지만 결국 이런 공장들은 모두 누구의 손으로 떨어지는지 아십니까? 상 인들의 손에 들어가고 마는 겁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상인도 역시 거머리와 다름없으니까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당신의 말을 듣자면," 칼로메이체프가 외쳤다. "우리 귀족들은 경제문제를 취 급할 자격이 없다는 거군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 면에선 오히려 귀족들이 선수라고 할 수 있죠. 철 도의 이권을 획득한다든지 은행을 설립한다든지 어떤 특혜를 얻는다든지 이런 등속의 일에 있어서는 감히 귀족을 따를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워낙 재 산이 많으니까요. 당신이 아까 화를 내셨을 때에도, 전 바로 이점을 암시했던 겁니다. 그러나 전 어디까지나 정당한 생산 기업을 고려해서 하는 말입니다. 제 가 정당하다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지금 많은 귀족이나 지주들이 하고 있는, 개 인 주점을 하거나 물물교환 잡화상을 경영하거나, 1할 내지 1할 5푼의 이자로 농민에게 곡물과 돈을 대부하거나 하는 이따위 사업들을 모두 본격적인 재정 사업으로 간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칼로메이체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르켈로프가 지난번 네지 다노프에게 언급한 바 있는 바로 그 고리대 지주라는 새로운 종족에 자신이 속 해 있었기 때문이다. 칼로메이체프는 지금까지 직접 농민들과 거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향수 냄새가 물씬거리는 유럽식 서재에 농군들을 들여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언제나 관리인을 통해 거래하였으므로 더욱 가혹하게 자 기 요구를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관심해 보이면서도 침착하기 그지없는 솔로민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칼로메이체프는 내장이 몽땅 뒤집히는 듯한 느 낌이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꾹 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턱을 악물고 있는 데서 오는 근육의 움직임만이 그의 내부의 암투를 말해 주고 있을 뿐이었 다. "그렇지만 저 실례지만 바실리 페토트이치," 시퍄긴이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신이 말씀하신 것이 전시대, 즉 대부분의 귀족 계급이 특수한 상태에서 지금 과는 전혀 다른 특권을 행사하고 있던 구시대에 대한 것이라면, 두말할 나위 없 이 모두 옳은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훌륭한 개혁을 거친 오늘, 이렇게 융성한 공업 시대를 맞은 오늘, 귀족들이라고 해서 자기의 주의와 능력을 이러 한 기업에 돌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을까요? 단순하고 무식한 상인까지 이해 하는 것을 어째서 귀족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건가요? 교양이 부족하다는 점에 서 귀족을 나무랄 수는 없으시겠죠. 그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선 그야말로 문 명과 진보의 대표자들이라고 단언해도 결코 틀리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시퍄긴의 말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 그것이 만일 페테르부르크의 어느 국 (局)이거나 혹은 더 높은 곳이었다면, 그의 웅변은 굉장히 큰 효과를 가져왔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솔로민에게는 아무런 인상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귀족들은 그런 사업을 처리해 나갈 수가 없어요." 그는 여전히 이렇게 되풀 이했다. "아니, 왜 그렇죠? 왜 그래요?" 칼로메이체프가 외치다시피 말했다. "왜냐하면 귀족도 역시 관리니까요." "관리?" 칼로메이체프는 독기 어린 목소리로 크게 웃었다. "솔로민씨, 당신은 아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실 테죠?" 솔로민은 여전히 미소를 그치지 않은 채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칼 로멘켈프씨? (자기 성이 그토록 왜곡되게 발음된 것을 듣자 칼로메이체프는 흠 칫 놀라기까지 했다.) 전 언제나 제가 한 말을 똑똑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아까 하신 말은 무슨 뜻인지, 어디 한번 설명해 보시죠!" "그랗게 하죠. 제 생각에 의하면 관리라는 건 모두 민중과는 인연이 먼 사람 들입니다. 그건 지금까지 언제나 그래 왔습니다. 그런데 요새와선 귀족도 역시 그런 인간이 되어버렸단 말일니다." 칼로메이체프는 한층 더 큰소리로 웃어댔다. "저, 실례지만 저 같은 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건 당신을 위해서도 몹시 좋지 않습니다. 좀더 노력을 해보십시오.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이봐요!" "자, 여러분, 왜들 그러십니까?" 높은 곳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한 표정으 로, 시퍄긴은 재빨리 말하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칼로메이체프, 제발 부탁이 니 진정해 주게. 이제 곧 식사도 시작될 테니까. 자, 여러분, 뒤따라오십시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칼로메이체프는 그로부터 5분 후 시퍄긴 부인의 방 으로 뛰어들면서 울부짖는 소리로 말했다. "주인께서 하시는 일은 정말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한 놈의 니힐리스트가 있으면 그만이지, 글쎄 또 한 놈을 데려 오다니! 게다가 이번에 온 자는 더하단 말예요!" "그건 왜 그렇죠?" "왜라니요! 그 자는 영문도 모를 말을 떠벌리고 있단 말입니다. 게다가 한 가 지만 봐도 알 수 있죠. 글쎄 주인과 한 시간 내내 얘기를 하면서도 한 번도, 단 한 번도 각하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 이 말씀이에요! 떠돌이 같은 녀석이!" 24 시퍄긴은 식사 전에 아내를 도서실로 불렀다. 그는 아내와 단둘이서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근심스런 표정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공장이 엉망진창이라 는 사실과 솔로민은 다소 자주적이긴 하지만 굉장히 많이 아는 것 같으니, 그에 게 계속 친절을 베풀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아아, 그 친구를 빼올 수만 있다 면 얼마나 좋을까?" 시퍄긴은 두어 번 가량 이렇게 되풀이했다. 그리고 그는 칼 로메이체프의 방문에 대해서는 무척 화를 내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런 때 오다 니! 그의 눈에는 누구나가 다 니힐리스트로만 보여서, 그들을 어떻게 쳐부술까, 그것만을 궁리하는 것 같거든! 글쎄, 그런걸 쳐부수겠으면 자기 집에서나 하라 지! 그는 한시도 혓바닥을 놀리지 않곤 못 배긴다니까!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도 그 새로운 손님에게 기꺼이 친절을 베풀 용의는 있으나, 다만 그쪽에서 그런 친절을 요구하지 않는 것 같고 또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말 했다. 솔로민은 지나치게 냉담해 보였으나, 그래도 행동이 거칠진 않았다. 평민 출신의 인간으로서는 정말 놀랄 만한 일이었다. "어쨌든 좀 노력해 줘!" 시퍄긴은 애원하듯 말했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노력하겠다고 약속을 했고, 실제로 노력도 했다. 그 녀는 먼저 칼로메이체프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 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칼로메이체프는 자기가 무슨 말을 듣든지 얌전히, 공 손하게 앉아 있겠다고 굳게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식탁으로 나왔다. 이 사전의 '체념'은 그의 용모 전체에 가벼운 우수의 그림자를 던져주고 있었다. 그 대신 거기에는 많은 위엄이 서려 있었다. 오오! 그의 일거일동에는 얼마나 많은 위엄 이 풍기고 있었는지 모른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모든 집안 식구들을 솔로민에게 소개했다. (그때 솔 로민은 누구보다도 주의 깊게 마리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식탁에서 시퍄긴 부인은 솔로민을 자기의 오른편에 앉혔다. 칼로메이체프는 그녀의 왼쪽에 자리 잡았다. 칼로메이체프는 냅킨을 펼치면서 실눈을 만들고는 빙긋 웃어 보였다. 자, 이제부터 희곡을 연출해 보실까요! 하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시퍄긴은 그 맞은편에 앉아서 다소 근심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칼로메이체프를 주시하고 있었다. 주인의 새로운 명령에 의해서 네지다노프는 마리안나 옆이 아닌 안나 자하로브나와 시퍄긴 사이에 앉혀졌다. 그리고 마리안나는 자기의 이름표를 칼 로메이체프와 콜랴 사이의 냅킨 위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정식 만찬이었던 것이 다. 호화롭게 준비된 만찬이었다. 아름다운 무늬가 든 메뉴까지 각자의 식기 앞 에 놓여져 있었다. 수프를 들고 난 시퍄긴은 또다시 자기의 공장으로 화제를 돌 리고는, 계속해서 전체적인 러시아의 공장 운영에 대해서 말했다. 솔로민은 여 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짤막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가 말을 꺼낼 때마다 마 리안나는 재빨리 그에게로 시선을 던지곤 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칼로메이체 프는 그녀에게 온갖 친절을 타 베풀고 있었으나 -그는 '논쟁을 야기시키지 마라 '는 부탁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귀를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긴 그 자신도 마지못해 싱거운 칭찬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었다. 이 젊은 처녀와 자 기 사이에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어떤 도랑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도 이 미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네지다노프와 집주인 사이에는 몹시 악화된 갑작스런 변화가 이루어지 고 있었다. 시퍄긴에게 있어 네지다노프는 한낱 집안의 가구 또는 공간에 불과 한 것이어서 전혀, 그야말로 전혀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 새로운 관계 는 갑작스러우면서도 확고한 것이었다. 그래서 식사 도중 네지다노프가 옆자리 의 안나 자하로브나의 물음에 답하느라고 두서너 마디 뭐라고 말했을 때에도 "도대체 어디서 이런 소리가 나지?" 하고 자문이라도 하듯 깜짝 놀란 표정으로 네지다노프 쪽을 바라보았을 정도였다. 확실히 시퍄긴은 러시아의 고관에게서 볼 수 있는 어떤 특질을 구비하고 있 었음이 분명했다. 생선 요리가 나온 후, 자기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솔로민에게 갖은 매력과 유 혹을 풍기고 있던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가 탁자 너머 자기 남편에게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손님께선 포도주를 드시지 않는데, 어쩌면 맥주를 좋아하시는지도 모르겠어 요." 시퍄긴은 큰 소리로 '엘류'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러자 솔로민은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쪽으로 점잖게 몸을 돌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인, 아마 부인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2년 남짓 영국에 가 있었으므로 영 어를 들을 줄도, 말할 줄도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혹시 제 앞에서 무슨 밀담이 라도 하시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미리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당신에게 해로운 말이라곤 하나도 없을 테니 그런 근심은 하실 필요가 없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솔로민 의 행동이 다소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으나 자기대로의 섬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인정했다. 칼로메이체프는 이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당신이 영국에 계셨다니," 그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아마 그곳 풍습 같은 것도 괄찰하셨을 테죠. 한 말씀 물어보겠는데, 당신은 그것을 모방할 가치가 있 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것은 그렇고 또 어떤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간단해서 분명하지가 않군요." 시퍄긴의 신호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칼로메이체프는 이렇게 말 했다. "그러나 당신은 오늘도 귀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만 물론 당신은 영 국의 이른바 귀족 지주라는 것을 본고장에서 연구하실 기회를 가졌을 테죠?" "아뇨, 제겐 그런 기회가 없었습니다. 전 완전히 다른 사회 환경을 전전(轉轉) 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런 양반들에 대한 개념만은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생각하시죠? 그런 귀족 지주는 우리나라에는 불가능하다고 보 십니까? 아니면 도대체가 그런 건 바랄 것도 못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첫째 그런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둘째로 그런 것은 바랄 가치도 없다고 봅니다." "어째서 그렇죠, 네?" 칼로메이체프는 말했다. 이 '네?'라는 말꼬리는 굉장히 흥분한 나머지 걸상 위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시퍄긴을 가라앉히기 위한 사 명을 띠고 있었다. "왜냐하면 앞으로 2,30년만 지나면 당신이 말씀하시는 귀족 지주 같은 건 저 절로 없어지게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실례지만, 왜 그렇게 된다는 거죠, 네?" "그때가 되면 토지는 문벌의 차별 없이 소유자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기 때문 입니다." "그건 상인입니까?" "아마, 대부분이 상인일 테죠." "어떤 방법으로?" "상인들이 그걸 사는 거죠. 그 땅 자체를 산단 말예요." "귀족한테서요?" "귀족 나리들한테서요." 칼로메이체프는 일부러 관대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은 아까 공장과 제조소에 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하신 것 같은데, 이번엔 토지 전반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건가요?" "지금은 토지 전반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무척 기쁘시겠군요?" "천만에요. 이미 당신께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렇게 된다고 해서 인민이 편해 지는 건 아닙니다." 칼로메이체프는 손을 약간 쳐들었다. "굉장히 인민을 생각하시는군, 나참!" "바실리 페토트이치!" 시퍄긴은 목청을 다해 외쳤다. "맥주를 가져왔습니다! 조심해 줘, 세묜!" 그는 나직한 소리로 이렇게 덧붙였 다. 그러나 칼로메이체프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제가 보건대" 솔로민 쪽으로 몸을 돌리며 칼로메이체프는 또다시 이렇게 말 했다. "당신은 상인들을 그다지 좋게 생각하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그들도 출신으로 보자면 역시 민중에 속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어쨌다는 거죠?" "제 생각으론 민중의 모든 것, 그리고 민중에 관련된 모든 것을 당신은 훌륭 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뇨 그건 틀립니다! 그건 당신이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러시아의 민중은 많은 점에서 비난받을 만한 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물론 언제나 나 쁘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러시아 상인은 약탈자였 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재산을 지배하는 데 있어서도 약탈자의 근성을 버 리지 못하고 있거든요. 하긴 할 수 없는 일이죠! 자기도 약탈을 당하니까 남을 약탈할 수밖에요. 그렇지만 민중은." "민중은?" 칼로메이체프는 이상야릇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민중은 잠꾸러기지요." "그래서 당신은 그걸 깨우고 싶은 거군요!" "그것도 나쁘진 않겠죠." "아하! 아하! 바로 그렇군요." "저, 미안합니다만" 시퍄긴이 명령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드디어 경계를 설 정해야 할 시기, 이 의론을 종식시켜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고 느꼈던 것이다! 팔꿈치로 탁자를 누른 채 오른손 손목을 흔들면서, 그는 심중하고도 긴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보수파를 찬양하고 또 한편으로는 지유파를 찬동한 다 음 결국 후자 쪽에 약간의 우위권을 주면서 자기 자신도 그들 속에 포함시켜 버렸다. 그는 민중을 찬양했으나 동시에 그들의 약점도 지적했다. 정부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을 피력하면버도 모든 관리들이 정부의 선량한 의도를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 문학의 이익과 중요성은 인정 하면서도 최대한의 경계 없이는 무의미하다고 선언했다. 서쪽을 바라보고는 처 음 환희를 느꼈으나 곧 지쳐버렸고 동쪽을 바라보고는 처음 휴식을 느꼈으나 나중엔 분기(奮起)했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동맹체의 번영을 위해 축배 를 들자고 제안했다. 그것은 종교와 농업과 공업 이었다. "권력의 옹호 밑에!" 칼로메이체프가 준엄하게 덧붙였다. "영명하고 관대한 권력의 옹호 밑에!" 시퍄긴이 이렇게 정정했다. 축배는 침묵 속에 행해졌다. 시퍄긴 쪽의 네지다노프라고 불리는 보이지 않는 공간은, 뭔가 불만스러운 듯한 소리를 내기도 했으나, 어느 누구의 주의도 환기 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조용히 가라앉고 말았다. 그런 다음 두 번 다시 새로운 논쟁에 말려들지 않고 무사히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면서 솔로민에 게 한 잔의 커피를 권했다. 솔로민은 커피를 다 마시자 벌써 자기 모자를 눈으 로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퍄긴은 슬며시 그의 팔을 붙잡고 지체없이 그를 자 기 서재로 끌고 갔다. 솔로민은 먼저 최고급 시가를 받은 후, 최상의 조건하에 시퍄긴의 공장으로 옳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당신은 완전히 공장의 지배자가 되시는 겁니다, 바실리 페토트이치. 완전한 지배자 말이오!" 솔로민은 시가만을 받았을 뿐, 전임의 권고는 거절했다. 시퍄긴이 아무리 권해도 그는 끝까지 자기 의 거절을 취소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짜고짜로 '안 된다!'고만 말하지 마세요, 바실리 페토트이치! 적어 도 내일까진 생각하겠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아무래도 마찬가집니다. 전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요." "내일까지, 바실리 페토트이치! 그래서 안 될 일도 없잖습니까?" 솔로민도 그럴 필요까진 없다는 것에 찬성은 했으나 서재에서 나오자 다시 모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솔로민과 한마디의 말도 주고받지 못한 네지다 노프가 그 옆으로 다가와 재빨리 속삭였다. "제발 부탁이니 돌아가지 말아주시오. 그러잖으면 우린 말할 기회가 없지 않 아요!" 솔로민은 모자를 내버려두기로 했다. 게다가 시퍄긴도, 망설이는 표정으로 왔 다갔다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외쳤다. "당신은 물론 우리집에서 머무르시겠죠?"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솔로민이 대답했다. 마리안나가 솔로민에게 던진 감사의 눈초리는 -그녀는 응접실 창가에 서있었 다.- 그로 하여금 잠시 생각에 잠기게 했다. 25 솔로민의 방문 전만 해도, 마리안나는 그를 전혀 다른 사람처럼 상상하고 있 었다. 그녀는 솔로민을 처음 보는 순간 어쩐지 그가 성격이 없는 몹시 애매한 사나이처럼 느껴졌다. 사실 그녀는 아마빛 머리카락에 심줄이 곤두선 깡마른 사 나이들을 지금까지 수없이 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유심히 그를 바라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에 대한 신뢰감은 더욱 더 강해져갔다. 그야 말로 믿음직스런 신뢰감이었다. 얼굴이 잘 생기지는 않았으나 육중하고 침착하 게 보이는 그는 거짓말을 하거나 뽐낼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람이라면 돌담에 기대듯이 마음놓고 의지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는 남을 배반하지 않을 뿐더러 남의 마음을 이해하며 도와주는 기둥이 되어줄 것만 같 았다. 솔로민은 마리안나 자신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은 느낌을 주었으리라고 그녀는 생각되었을 정도였다. 마리안나도 그의 말 이 그다지 대수로운 가치가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 상인이니 공장이니 하는 의론은 그녀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말하 는 모습이며 말할 때의 눈매와 미소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진실한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또한 그녀의 마 음을 움직이게 했던 것이다. 러시아인은 세상에서도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백성 이지만, 또한 반면에 누구보다도 진리를 존경하고 동경하는 백성이기도 했다. 이것은 언뜻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기는 하나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기도 했다. 게다가 마리안나의 눈으로 보면 솔로민에게는 특별한 인상이 부각되어 있었다. 솔로민은 그들의 수령인 바실리 니콜라예비치 자신이 자기 부하에게 소개한 사 람으로서의 영예로운 배경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식사를 하는 동안 마리안나 는 여러 번 '그의 일로' 네지다노프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자기 도 모르게 그 두 사람을 비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은 네지다 노프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물론 얼굴 윤곽으로 보자면 네지다노프 쪽이 솔로민 보다 훨씬 아름답고 인상이 좋았지만, 그의 얼굴 자체는 울분과 당황과 초조가 뒤섞인, 우울하고도 불안한 느낌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바늘방석에라도 앉은 듯 안절부절못하고, 말을 하려다가는 다시 침묵을 지키며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 반면 솔로민은 다소 지루해 보이면서도 자기 집과 다름없는 침착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사람이라면' 언제 어떤 경우일지라도 '다른 사람 들처럼' 동요하지는 않으리라. '아무래도 이 사람의 충고를 청할 필요가 있겠다.' 마리안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뭔가 유익한 말을 해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하 여 식사 후 네지다노프를 솔로민 곁으로 보냈던 것도 실은 그녀였던 것이다. 저녁 한나절이 어지간히 무료하게 흘러가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만찬이 저녁 늦게야 끝났으므로 잠자리에 들 때까지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칼로메이체프는 얼굴을 부풀린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당신은 왜 그러시죠?" 시퍄긴 부인이 반 농담조로 칼로메이체프에게 이렇게 물었다. "뭘 잊어버리기라도 했나요?" "네, 말씀 그대롭니다." 칼로메이체프가 대답했다. "어느 근위대장의 말에 이 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장은 그의 부하들이 '코' 벤 것을 비관한 나머지 '내 코를 찾아내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존칭 어미 S를 찾아달라고 말 하고 싶습니다! 존칭 어미가 없어지고 말았어요. 그와 함께 상관에 대한 존경어 도 예의도 몽땅 없어지고 말았단 말입니다!" 시퍄긴 부인은 그런 수색에는 도움을 줄 수 없다고 칼로메이체프에게 말했다. 식탁 연설의 성공에 고무당한 시퍄긴은 계속해서 두서넛의 연설을 시도했다. 거기에 덧붙여 그는 긴급을 요하는 국가적인 시책에 관한 몇몇 의견을 말한 다 음, 몇 가지의 경구를 인용하기도 했다. 이 경구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발표하기 위해 자신이 준비한 것으로 예리하기보다는 오히려 무게가 있어 보였다. 그중 하나는 '만일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하는 단서를 붙인 채 되풀이 되기까지 했다. 그것은 그 당시의 어느 장관에 대한 말이었는데, 장관의 생각은 경박하고 우유부단해서 항상 공상적인 목적에 돌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한편 시퍄긴 은 민중 출신의 러시아인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몇 가지의 격언을 과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퍄긴은 자기 자신이 러시아인일 뿐만 아니라 '순 수한 러시아인'이라는 것을 입증함과 동시에, 민중 생활의 본질에도 조예가 깊 다는 것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비때문에 건초 수확에 지장 을 가져올 것이라는 칼로메이체프의 의견에 대하여 그는 "건초는 까매져도 그 대신 메밀은 하얘진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주인 없는 물건은 고아와 다름없다", "열 번 겨냥을 해서 한 번에 잘라라", "빵이 있어야 궁리도 생긴다", "예고리 날(4월 23일)에 자작나무 잎이 동전만 해지면 성모제에 곡식 을 한아름 거둬들일 수 있다"는 따위의 속담을 자주 인용하기도 했다. 하긴 자 기도 모르게 가끔 실수로 "도요새(귀뚜라미의 잘못)도 자기 집을 안다!", "집은 장식으로 아름답다!" 하는 표현들도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실책을 듣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선량하고 순수한 러 시아인'이 실수를 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코브리슈킨 공작 덕분에 이런 러시아식 '왜곡된 표현'에는 이미 익숙 해 있었다. 시퍄긴은 이러한 속담과 격언을 유달리 힘찬 어조로, 다소 목쉰 소 리로 말했다. 농민의 어조를 흉내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가 페테르부르크에 서 때와 장소에 잘 맞추어 이러한 격언을 인용할 때면, 유력한 고관 부인들은 "우리 서민들의 풍습을 어쩌면 저렇게도 잘 아실까!" 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 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의 남편인 유력한 고관 나리들은 "풍습과 요구로 군!" 하고 덧붙이곤 했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솔로민 옆에서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척 애를 써 봤지만 그 노력이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께닫자 그만 맥이 풀리고 말았 다. 그리고 칼로메이체프 옆을 지나가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이 렇게 말했다. "아아, 전 완전히 지쳐버렸 어요!" 그 말에 칼로메이체프는 풍자적인 인사와 더불어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 스 스로가 그걸 원하지 않았던가!" 이윽고 피로한 모든 사람들 얼굴에 갑자기 상냥스러운 인사들이 오고가는 작 별의 순간이 다가왔다. 갑자기 손을 잡기도 하고 미소를 던지고 다정한 콧소리 를 내며 손님과 주인 부부는 피곤한 몸들을 이끌고 뿔뿔이 흩어져 갔다. 솔로민에게 배당된 2층 방은 이 집에서도 가장 좋은 방으로 영국식 세면 도 구와 욕실이 붙어 있었다. 솔로민은 자기 방에서 나와 네지다노프에게로 갔다. 네지다노프는 먼저 솔로민이 머무르는 것을 승낙해 준 데 대하여 뜨거운 사의 를 표했다. "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당신에겐 희생이라는 걸." "아니, 그런 말 말아요!" 솔로민은 천천히 이렇게 대답했다. "희생이랄 게 뭡 니까! 게다가 당신의 부탁이니 거절할 수도 없었지요." "그건 또 무슨 뜻이죠?" "그건 당신이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죠." 네지다노프는 한편 기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놀랍기도 했다. 솔로민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걸상 위에 걸터앉아 시가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의자 등에 양팔꿈치를 괴고 말했다. "자, 들려주시오. 무슨 일인지." 네지다노프는 솔로민과 마주 보며 걸상에 걸터앉았다. 그러나 시가는 태우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요? 다름이 아니라, 여길 도망치려는 겁니다." "이 집을 떠나시겠다 그 말이군요? 그래도 괜찮겠죠 뭐! 무사하길 빌겠습니 다!"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겠다는 겁니다." "아니, 당신은 붙잡혀 있는 몸입니까? 아마 전도금이라도 받으신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그저 한마디만 말씀하면 될 텐데. 나라도 기꺼이." "솔로민씨,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계십니다. 내가 떠나지 않고 도망치겠다고 말한 것은, 이 집을 나가는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솔로민은 머리를 들었다. "그럼, 누구하고?" "당신이 오늘 여기서 본 그 처녀하고." "그처녀 하고요! 그 여잔 얼굴이 좋게 보이던데요. 그런데 어떻게 된 겁니까? 당신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인가요? 아니면 그저 있기가 싫어서 이집을 함께 떠 나기로 결심한 건가요?"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하!" 솔로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처녀는 이 집의 친척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우리와 완전히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무슨 일이든 해낼 각오가 서 있습니다." 솔로민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네지다노프, 당신도 각오가 되어 있나요?" 네지다노프는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런 걸 묻는 거죠? 난 나의 각오를 실제 행동에서 입증하겠습니다." "당신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네지다노프. 당신 이외엔 아무도 각오가 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저 한번 물어보았을 뿐입니다." "그럼, 마르켈로프는?" "그렇군요! 마르켈로프 정도일 테죠. 아마 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각오가 되어 있었을 겁니다." 바로 이때, 누군가가 조용하면서도 성급하게 노크를 하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그 사람은 마라안나였다. "전," 방에 들어선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보신다해도 그다지 놀라시지 않으리라 믿어요. 이분이(마리안나는 네지다노프를 가리켰다) 물론 모두 말씀드렸을 테니까요. 저, 당신 손을 잡게 해주세요. 그리고 당신 앞 에 정직한 처녀가 서 있다는 걸 믿어주세요," "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솔로민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마리안나가 나타나자 곧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 "전 이미 식사를 할 때부터 당신을 바라보며, '저 아가씨는 정말 성실한 눈을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전 네지다노프한테서 당신들의 계획을 들었습니 다. 그러나 사실 말이지, 왜 여길 떠나려고 하시는 겁니까?" "왜냐고요? 그건 제가 공감하고 있는 사업이. 제발 놀라지 마세요. 네지다노 프는 제게 하나도 숨기지 않고 죄다 얘기해 주었으니까요. 그 사업이 가까운 시 일 내에 시작될 것이 분명한데 허위와 기만만이 들끓고 있는 이런 지주 저택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순 없잖아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데 어째서 제가." 솔로민은 손짓을 하여 그녀의 말을 멈추게 했다. "흥분하지 마십시오, 자 앉으세요. 저도 앉겠습니다. 네지다노프, 당신도 앉도 록 해요.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만일 당신들에게 다른 원인이 없다면, 당신들이 이 집을 뛰쳐나간다는 건 아주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우리의 사업은 당신이 생 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빨리 시작되지는 않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선 좀더 분별 있는 사고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무턱대고 앞으로만 나간다고 해서 일이 다 되 는 건 아니니까요.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마리안나는 자리에 앉아서 어깨에 걸친 커다란 숄 자락을 여미었다. "하지만 전 여기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순 없어요! 모든 사람이 절 모욕하는 걸요. 오늘만 하더라도, 글쎄 그 바보 같은 안나 자하로브나가 콜랴 앞에서 저 희 아버지에 대한 암시로,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멀리 떨어지는 법이 없다지 않 겠어요! 콜랴는 깜짝 놀라며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묻기까지 하더군요. 그리고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에 대해선 말할 필요도 없고요!" 솔로민은 또다시 그녀의 말을 제지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리안나는 그가 다소 자기를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그래 도 그의 미소는 결코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일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가씨? 전 안나 자하로브나가 누군지, 그리고 당신이 무슨 사과나무에 대해서 말씀하시는지 조금도 모르지만 당신은 바보 같은 여자가 바보 같은 소릴 한다고 해서 그걸 참아낼 수 없단 말인가요? 그래 가지고 어떻게 세파를 헤쳐 나갈 생각이신가요? 이 세상은 바보 같은 사 람들로 이루어져 있는 거예요. 아니, 그건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뭔가 다른 이 유라도 있습니까?" "난 확신합니다." 네지다노프가 나직한 목소리로 끼여들었다. "시퍄긴씨는 오 늘 아니면 내일 중으로 자기 쪽에서 먼저 날 해고해 버릴 겁니다. 아무래도 누 군가가 고자질을 한 것 같아요. 나를 대하는 그 사람의 태도가 지나치게 경멸적 이란 말입니다." "그럼, 뭐 때문에 뛰쳐나가겠다는 거예죠, 그렇지 않아도 해고당할 바엔?" 네지다노프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아까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는 이렇게 말머리를 돌렸다. "이 분이 그렇게 말한 것은," 마리안나가 그의 말을 받았다. "저하고 함께 떠 나야 하기 때문이에요." 솔로민은 그녀를 바라보고 호인답게 머리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아가씨. 그렇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려 두겠는데, 당신들이 이 집을 떠나고 싶은 이유가 당장 혁명이 일어날 것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라면." "우린 바로 그것 때문에 당신을 뵙자고 한 겁니다" 하고 마리안나가 그의 말 을 가로챘다. "우리들의 사업이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그걸 확실히 알 고 싶어서." "그렇다면," 솔로민이 말을 이었다.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당신은 아직도 꽤 오랫동안 이 집에 그대로 머무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서로 사랑하 므로, 그 밖에는 달리 결합할 방법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이집을 뛰쳐나갈 수밖 에 없다면, 그땐." "그땐 어떻다는 거죠?" "그땐 옛날의 속담대로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살라고 당부할 뿐이죠. 그리 고 필요하다면, 힘 자라는 데까지 제가 도와드릴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아가씨, 전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네지다노프도 역시 그랬지만, 혈육처럼 제 마음 에 들었기 때문이죠." 마리안나와 네지다노프는 좌우에서 솔로민에게로 다가가 그의 양손을 하나씩 잡았다. "어서 말씀해 주세요. 우린 무엇을 하면 되는 거죠?" 마리안나가 이렇게 물었 다. "가령, 혁명은 아직 멀었다고 해도 여러 가지 준비 작업이며 노력. 이런 집 의 이런 상태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해요. 그래서 우린 그 사업을 위해서 기꺼이 떠나려는 거예요. 단둘이서 제발 그걸 가르쳐주세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 지 그것만이라도 말해 주세요. 우릴 보내주세요!우릴 보내주실 테죠?" "어디로요?" "민중 속으로 민중 속이 아니면 갈 데가 어디 있겠어요?" '숲속으로!' 네지다노프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파클린의 말을 상기했던 것이다. 솔로민은 뚫어질 듯이 마리안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민중을 알고 싶습니까?" "네, 하지만 우린 민중을 알고 싶을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고 싶은 거예 요. 민중을 위해 일하고 싶은 거예요." "좋습니다, 약속하죠. 이제 민중을 알게 해 드릴 테니까요. 행동의 가능성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민중을 위해 일할 수 있게요. 그럼 네지다노프, 당신도 앞 으로 나갈 각오가 되어 있겠죠. 이 사람의 뒤를 따라 민중을 위해서!" "물론 각오하고 있고말고요!" 황급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차(聖車)' 파클린 의 또 다른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제 그 놈이 움직이는 거다. 그 거대한 마 차가 천지를 진동하는 요란한 바퀴소리가 들리는 것같다.' "좋습니다." 솔로민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되풀이했다. "그런데 언제쯤 뛰쳐 나갈 생각이세요?" "내일이라도!" 마리안나는 이렇게 외쳤다. "좋습니다. 그럼 어디로?" "쉬, 조용히." 네지다노프가 속삭였다. "누군가 복도를 거닐고 있어요." 모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어디로 뛰쳐나갈 생각이시죠?" 솔로민은 목소리를 낮추고 다시 이렇 게 물었다. "어디로 갈진 몰라요," 마리안나가 대답했다. 솔로민은 네지다노프에게로 눈을 옮겼다.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을 뿐이었 다. 솔로민은 손을 뻗쳐서 조심스럽게 양초 심지를 떼어냈다. "그럼, 두 사람 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있는 공장으로 오도록 하시오. 더러운 곳이지만 그래도 위험하진 않으니까. 제가 숨겨드리죠. 저 있는 곳에 조그만 방이 하나 있으니까, 그곳이라면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거기까지 무사히 도착만 한다면 우리가 당신들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공장이니 까 사람이 많다고 하실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오히려 좋을 거예요. 사람이 많 은 곳일수록 숨기가 쉬우니까요. 어때요, 됐습니까?" "우린 그저 감사하다고 말할 수밖에요." 네지다노프가 말했다. 마리안나는 공 장이라는 말에 처음엔 좀 당황하는 듯 했으나, 곧 활기 있게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이죠, 물론이죠! 당신은 정말 마음이 착하시군요! 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우릴 내버려두진 않으실 테죠? 우릴 어디로 보내주시겠죠?" "그건 당신들 마음에 달렸지요. 그리고 당신들이 결혼을 하고 싶을 경우에도 우리 공장은 아주 편리한 점이 있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 사촌동생뻘 되는 승 려가 살고 있습니다. 조시마라고 하는데 매우 유순한 사람이므로 대번에 식을 올려줄 겁니다." 마리안나는 남몰래 살짝 미소를 지었다. 네지다노프는 다시 한 번 솔로민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이런 질문을 했다. "그런데 당신의 주인인 공장주가 뭐라고 항의하진 않을까요? 당신에게 혹시 불쾌한 일이라도 생기지 않을는지요?" 솔로민은 네지다노프를 흘끗 곁눈질해 보았다. "나에 대한 근심은 말아줘요. 그건 전혀 쓸데없는 근심입니다. 공장주는 공장만 제대로 돌아가면 그만이지, 그 밖의 일엔 아무 관심도 없단 말이오. 당신이나 또 당신의 귀여운 아가씨나 주인에게 불쾌한 느낌을 줄 리는 만무합니다. 그리고 직공들도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그저 언제쯤 당신들을 기다리면 좋을지, 그것만 좀 미리 알려주었으면 좋겠군요." 네지다노프와 마리안나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모레 아침 일찍이 아니면 그 다음날." 네지다노프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이젠 더 이상 꾸물거릴 수가 없어요. 내일이라도 당장 쫓겨날지도 모르니까." "그럼." 솔로민은 이렇게 말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침마다 당신들을 기다 리도록 하죠. 일주일 내내 전 집을 비우지 않겠습니다. 필요한 대로 모든 준비 도 갖추겠습니다." 마리안나는 솔로민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문 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안녕히 계세요, 칠절하고 선량하신 바실리 페토트이치. 당신의 이름이 맞나 요?" "맞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니, 내일 또 만나 뵙겠어요!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귀여운 아가씨!" "그럼, 네지다노프씨. 당신도 안녕! 내일 또."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마리안나는 재빨리 방에서 나가버렸다. 두 젊은이는 얼마 동안 그대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두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네지다노프" 솔로민이 드디어 입을 열었으나 곧 다시 멈추었다. "네지다노 프"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처녀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시오. 당신이 말할 수 있는 데까지. 그 여자의 지금까지의 생활은 어땠어요? 그 여잔 어떤 사람이 오? 그리고 그 여잔 왜 이 집에 있는 거죠?" 네지다노프는 자기가 아는 데까지 그녀에 대하여 짤막하게 솔로민에게 얘기 해 주었다. "네지다노프!" 솔로민이 끝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그 처녀를 소중히 돌 봐줘야 할 거요.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 죄악이 될 테니까, 그럼, 안녕." 솔로민은 방을 나가버렸다. 네지다노프는 방 한복판에 잠시 서 있었다. "아아, 생각하지 않는 게 낫지!" 하고 네지다노프는 중얼거리고 침대에 엎드 리고 말았다. 마리안나는 자기 방으로 돌아오자, 탁자 위에서 조그만 쪽지 한 장을 발견했 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난 당신이 불쌍합니다. 당신은 스스로 자기의 몸을 망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세요. 당신은 스스로 눈을 가리고 무서운 심연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건 누구 때문이고 또 무엇 때문인가요? 방안에는 유달리 상쾌하고도 향긋한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발렌치나 미하일 로브나가 방금 이 방에서 나간 것이 분명했다. 마리안나는 펜을 들어 그 밑에 이렇게 덧붙였다. 제발 저를 불쌍히 여기지 말아주세요. 우리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동정을 받아야 하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다만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당신과 같은 입장에 놓이고 싶지 않다는 것뿐입니다. M. 그녀는 그 쪽지를 그대로 탁자 위에 놓아두었다. 그녀는 이 답장이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의 손으로 들어가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솔로민은 네지다노프와 잠시 만난 뒤 시퍄긴 공장으로의 전임 권유를 단호히 거절하고는 자기 집으로 떠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솔로민은 줄곧 어떤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에게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는 마 차가 흔들리면 으레 가벼운 잠에 빠지는 것이 상례였던 것이다. 그는 마리안나 의 일을 생각하고 네지다노프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만일 자기도 사랑을 하게 된다면 표정과 말투, 눈매가 모두 달라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럴 경우 내 얼굴빛이 어 떻게 달라질는지 나도 알 수가 없거든.' 그는 아일랜드의 한 처녀를 상기해 냈다. 어느 상점의 계산대에서 꼭 한 번 본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까무잡잡한 멋진 머리카락이며 짙은 속눈썹이 생생히 솔로민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여자가 애원하는 듯한 슬픈 눈으로 자기 를 바라보던 일과 그 후 오랫동안 그녀의 창문 앞 한길을 거닐고 또 거닐며, 그 여자와 사귈 것인가 말 것인가를 자문하며 흥분하던 일까지도 생각났다. 이것은 솔로민이 잠시 런던에 체재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솔로민은 보호자의 부탁으 로 물건을 사러 갔었기 때문에 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 돈을 보호자에게 되돌려 보내고 그대로 런던에 주저앉고 싶었을 만큼 아름다운 폴리 -그는 그녀 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한 여점원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가 그에 게 준 인상은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자기 의 보호자한테로 돌아갔다. 폴리는 마리안나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러나 마리안 나도 역시 폴리처럼 애원하는 듯한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러시 아인이다. "아니, 내가 왜 이럴까?" 솔로민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의 애인 일에 신경을 다 쓰다니!" 쓸데없는 갖가지 상념들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는 듯, 그는 외투 깃을 한 번 치켜올렸다. 때마침 마차는 어느새 공장으로 들어서고 있 었고, 그의 집 문지방에는 그의 충실한 부하 파벨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26 솔로민의 거절은 시퍄긴에게 적지않은 모욕을 주었다. 그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그 러시아식 스티븐슨은 그다지 대수로운 기사가 아니며, 별로 허세를 부리지는 않는다 해도 밑바닥 평민으로서는 너무 거드름을 피운다고 말했다. ' 그컨 족속의 러시아인들은 인정해 주며 조금이라도 떠받들기가 무섭게 곧 본성 을 드러내고 말거든! Anfond(사실), 칼로메이체프 말이야!' 이런 불쾌하고 짜증 어린 감정의 영향을 받아, 장래의 위정자는 더욱 피상적이고 무관심한 눈으로 네지다노프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시퍄긴은 폴랴에게, 이제부턴 혼자 서 공부하 는 습관을 들여야 하므로 오늘은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 다...그러나 네지다노프의 기대와는 달리 시퍄긴은 당장 그를 내쫓지는 않았다. 주인은 계속해서 그를 무사할 따름이었다! 반면에 발랜치나 미하일로브나는 마 리안나를 무시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여인 사이에는 마침내 무서운 파 국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식사하기 두 시간 전쯤 두 사람을 우연히 함께 응접실 에 남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퍼치 못할 충돌의 시기가 다가온 것을 직감했음 인지 잠시 망설안 끝에 상대방 쪽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는 가벼운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마리안나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까는 방을 가로지르며 방안의 이쪽저쪽을 바라보다가 재라늄 잎사귀 하나를 잡아뜯었다... 마리안나의 눈은 미소를 머금고 다가오는 숙모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시퍄긴 부인이 먼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손끝으로 의자 등을 두들겼다.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 그녀는 느릿느릿 말하기 시박했다. "우린 서로 편지 교환을 하게 된 것 같은데... 한 지붕 밑에 살면서 그런 짓을 하다니 어쩐지 쫌 이상한 생각이 드네요. 당신도 내가 이상한 짓을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쯤은 말 고 있을 텐데." "그런 편지질을 시작한 것은 제가 아녜요,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네... 당신 말이 맞군요. 이번에 일어난 기묘한 사건의 책임은 제게 있어요. 그렇지만 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낼 수가 멀었어요. 당신에게 어떤 느낌을 일깨 워주기 위해서였죠...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당신의 마음에...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사양하지 마세요. 저를 모욕 해도 좋으니 기탄 없이 말씀해 주세요." "결국... 체면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발렌치나 미하일오브나는 입을 다물었다. 방에는 의자 등을 두들기는 그녀의 손가락 소리만이 또닥또닥 물려 퍼지고 있었다. "어떤 점에서 제가 체면을 지키지 않았다고 보시는 거죠?" 마리안나가 이렇 게 물었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어깨를 흠칫했다. "Ma chere,vous n'etes plus un enfant(이봐요, 당신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니) 내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거 예요. 글쎄 당신의 그러한 행동이 나나 안나 자하로브나나 우리 온 집안 식구에 게 언제까지나 비밀로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하긴 당신은 그걸 비 밀로 해두려고 그렇게까지 애쓰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만. 당신은 오히려 그것을 과시하는 것 같더군요. 단지 보리스 안드레애비치만이 아마 그런 것에 관심을 돌리지 않았을 테죠... 그분은 보다 관심 있는, 보다 중요한 사업 관계로 바빴으 니까요. 하지만 그분을 제외하곤 모든 사람이 당신의 행동을 다 알고 있어요. 모든 사람이 다!" 마리안나의 얼굴이 점점 더 파리해 갔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좀더 명백히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도대체 당 신의 불만은 무엇인가요?" L'insolents(뻔뻔스러운 년 같으니)!' 시퍄긴 부인은 이렇게 생각했으나 그 대로 참기로 했다. "내 불만이 무엇인지 그걸 알겠다는 거죠, 마리안나? 좋아요! 당신이 젊은 사 내와 계속해서 밀회를 하고 있는 게 불만이에요. 그 사람은 출신으로 보나 교육 적 사회적인 지위로 보나 당신과는 너무릭 차이가 있지 않냐 이 말이에요. 난 불만이에요... 아니, 그런 표현으콘 너무 약해요! 난 분개하고 있어요... 당신이 밤눈게 그런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것에 분개하고 있단 말이에요. 게다가 거기 가 어디죠? 내 지붕 밑이 아니냔 말예요! 그런데도 당신은 그것을 당연한 처사 처럼 생각하면서, 당신의 경솔한 행동을 옹호라도 하는 듯이 나더러 가만히 보 고만 있으라는 건가요? 난 결백한 부인으로서... Oui,mademoiselle, je l'ai ete, je le suis et le serai touiours (그래요, 지금까지도 그랬거니와 앞으로도 영원 히 변치 않을 거예요)!-난 분노를 참을 수 없단 말이에요!"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북받치는 분노를 참아내지 못하겠다는 듯 안락의자 위로 몸을 던졌다. 마리안나는 처음으로 빙긋이 미소를지었다. "전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있어서의 당신의 결백상을 의심하진 않다요." 이번 엔 마리안나가 입을 열었다. "전 마음속으로부터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지 만 당신은 공연히 분개하고 있어요. 전 이 집에 대해 조금도 수치스럽겐 안 할 테니까요. 당신이 말씀하시는 그 젊은이 말예요... 그래요, 전 정말... 그분을 사 랑하고 있어요... "당신이 네지다노프를 사랑한다구요?" "그분을 사랑해요. " 발렌치바 미하일로브나는 안락의자 위에서 '몸을 곧추세웠다.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마리안나! 그 사람은 집도 없고 신분도 미천할 일개 학생이 아니냔 말예요. 그 사람은 당신보다도 손아래가 아니예요? (이 마 지막 말에는 심술궂은 조소가 어려 있었다. ) 아니 그래서 뭐가 된다고 생각해 요?당신과 같이 똑똑한 여자가 그런 아람에게서 도대체 무엇을 보았길래? 그 사람이야말로 한낱 보잘것없는 어린애가 아니냔 말예요. " "그러나 당신만 하더라도 그 사람을 언제나 그렇게만 생각하진 않았을 텐데 요,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제발 나 같은 건 젖혀 놔줘요... 그렇게 똑똑한 체하지도 말고요, 제발, 지금은 당신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의 장래의 일 말예요.; 잘 생각해 봐요! 그 사람의 어디가 당신과 어울린단 말예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발랜치나 미하일로브나. 전 그런 문제에 대해선 생각 해 보지도 않았어요. " "아니 뭐라고요?그게 무슨 뜻이죠?설령 당신이 정에 끌려 그렇게 줬다 하더 라도‥‥‥ 결국 나중에는 결혼을 하게 마련 아니예요?" "몰라요... 그런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으니까. "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니! 제 정신이 아니군요!" 마리안나는 약간 얼굴을 돌렸다. "이런 얘기는 그만둬요,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을 거예요. 어차피 우린 사로 이해할 수 없는 입장이니까요." "난 그만둘 수 없어요. 또 그만둘 수 있는 성질의 이야기도 아니고요! 이건 너무나 중대한 얘기예요... 난 당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어요... 여기서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하느님 앞에'라고 말하려다가 잠시 머뭇거 린 후 '온 세상 앞에!'라고 말했다. "그런 미치광이 같은 말을 듣고도 내가 가만 히 있을 순 없어요! 그리고 어째서 당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거죠? 정말이지, 요즘 젊은이들의 거만이란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요! 아니예요! 난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마다요-당신은 이른마 신사상때 젖어버린 채, 파멸의 구 렁텅이로 끌려가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러나 그것을 깨달았 을 땐 이미 늦는다는 걸 알아야 해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믿어주세요. 우린 파멸하더라도 우릴 구해 달라고 손가락 카나 내밀지 않을 테니까요!" "또 그런 거만한 소릴, 지독히 거만스러운 소리만 하는군! 자, 내 말 좀 들어 요, 마리안나. 제발 좀 들어줘요." 그녀는 갑자기 어조를 바꾸면서 이렇게 말했 다... 그녀는 마리안나를 자기 옆으로 끌어당기려고 했으나, 마리안나는 흠칫 뒤 로 물러섰다. "Ecoutez-moi,je vous en eonjure(제발 내 말 좀 들어줘요)! 나도 이야기가 통하지 않을 단큼 그렇게 늙지도 않았거니와 또 그렇게까지 바보도 아니란 말 예요! je on sus pas tone encmutfe(난 그 정도로 우둔하진 않아요). 젊었을 땐 그래도 공화당이란 말까지 들을 정도였어요. 당신에 못지않게 말예요. 아시 겠 어요? 솔직히 말하겠는데, 난 당신에 대해서 지금까지 어머니다운 정을 느낀 적 은 한 번도 없었어요. 당신 역시 자신의 성격으로 봐서 그걸 애석히 여기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내겐 당신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또 지 금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난 그 의무를 다하려고 언제나 노력해 왔어요. 어쩌면 내가 공상하고 있던 혼담은 당신의 이상과는 딱 맞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그러 나 나나 보리스 안드래예비치나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난 마음속으로부터... 마리안나는 물끄러미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아름다운 눈과 엷게 입술 연지를 바른 장밋빛 입술, 반지로 장식된 손가락을 가볍게 벌린 채 비단옷 허리에 품위 있게 얹어놓은 새하얀 손을...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상대방의 말들 가로채며 이렇게 말했다. 혼담이라뇨,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당신의 혼담이라는 건, 그 멍청이 같은 당신의 친구 칼 로메이체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건가요?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가 허리에서 손을 뗏다. "그래요,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 난 칼로메이체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 예요-그 교양 있는 훌륭한 청변에 대해서 말예요. 그 사람은 자기 아내를 행복 하게 해줄 수 있는 분이에요.그런 혼담을 거절한다는 건 미친 여자뿐일 테죠! 미친 여자고말고요!" "할 수 없어요, ma tante(아주머니)! 전 아마 그런 여잔가보죠! "그 사람을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가 뭐죠?" "아니예요. 아무 이유도 없어요! 전 그 사람을 멸시해요... 그것뿐이에요?" 발렌치나 미하일로뜨나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는 다시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 사람 말은 집어치웁시다. Revenons a nos moutons(우리 먼저 얘기로 돌 아가요). 그래, 당신은 네지다노프씨를 사랑한다는 전가요?" "그래요. "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할 작정인가요... 그 사람과의 밀죄를?" "그럴 작정이에요. " "만일 내가 그걸 금지시킨다면?" "전 당신 말을 뜯지 않갰어묘. "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라고요! 내 말을 듣지 않겠다구요! 아니, 저런...그게 내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인가요. 그게 내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처녀의 말툰가 요... 내게 그런 말을 하다니..." "부정한 아버지의 딸이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실 테죠." 마리안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어서'말씀하시죠, 사양 마시고!" "Ce n'eat pas moi qui le fait dive, mademokeIBe(내가 언제 그런 말을 하던 가요, 아가씨) 그러나 어쪘든 그런 전 조금도 자랑할 것이 못돼요! 내 빵을 먹 고있는 처녀가..." "제발 당신의 빵으로 절 핀잔하진 마세요, 발켄치나 미하일로브나! 만일 콜랴 에게 프랑스인 가정교사를 고용했다면 비용이 다 돌었을 거예요...콜랴에게 프랑 스어를 가르치고 있는 건 저니까요!" 한쪽 모퉁이에 횐 실로 크게 머리글자를 수놓은, '일랑그 일랑그'의 향수 냄 새가 물씬거리는 모시 손수간을 손에 쥔 채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살며시 그 손을 올리며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마리안나는 그녀에게 틈을 주지 않으 며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당신이 열거하신 거짓 은총이나 희생 대신에 '내가 사랑해 준 그 처녀 가...' 라고 말씀하셨다면 그야말로 수천 배 더 나았을 거에요. 그렇게 말하셨어 도 상관없었을 태죠... 하지만 당신은 너무나 결백하신 분이 돼서 그런 거짓말을 하실 순 없었던 것 같군요!" 마리안나는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었다. "당신은 언제나 절 미워했어요. 당신은 조금 전만 해도 마음속으로부터라고 말하셨지만, 지금이야말로 그 깊은 마음속으로부터 기뻐하고 계실 테죠-제가 수 치를 당하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걸 말이에요. 그리고 평상시의 당신의 예언이 들어맞은 데 대해서도 기뻐하고 계실 테죠. 다만 그 수치의 일부분이 당 신의 그 귀족적인 '결백한' 집에 떨어진다는 것이 불쾌할 '따름일 테죠. " "당신은 날 모욕하고 있어요."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속삭이는 소리로 말 했다. "제발 여기서 나가줘요!" 그러나 이미 마리안나는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아까 온 집안 식구 모두, 안나 자하로브나까지도 저의 일을 알고 있 다고 말씀하셨죠! 뜨리고 모두가 놀라움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다고요... 하지 만 당신이나 그 모든 집안 식구에게 제가 무슨 부정을 했다는 거죠? 아니, 그런 사람들의 의견을 제가 존중하리라 믿으셨나요? 과연 당신의 빵은 제게 쓰지 않 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구차한 생활이라도 이런 사치스러운 생활보다 는 훨씬 더 나을 거예요. 처와 이 집 사이에는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깊은 심연이 있다는 것을 모르신단 말씀인가요? 현명한 여자라는 당신이 그런 것도 느끼지 못하셨나요? 당신이 저에게 중오감을 느끼고 계시다 면, 저도 당신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것쯤은 아셨을 텐데요. 제가 그 감정을 구태여 말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죠. " "Sortez, Sortez, vows dis-je ...(나가줘요, 나가달라너까요 ‥‥‥ ) . " 발랜 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이렇게 되풀이하면서 그 아름답고 조그만 발로 마루를 쿵 하고 굴렀다. 마리얀냐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옳겼다. "이제 곧 나가드리죠. 그렇지만 아십니까,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 (바야제트) 에 나오는 라셀(프랑스척배우)조차도 'Sortez(나가줘요)!만은 실패하곤 했는데, 하물며 당신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아까 당신이 뭐라고 말 씀하셨더라... Je suis tone homete femme, je 1'ai j또, je le skis et le serai toujours(난 결백한 부인으로서, 지금까지도 그랬거니와 앞으로도 영원히 변치 않을 거다)라고 하셨던가요? 그렇지만 알아두세요, 당신보단 제가 휠씬 더 결백 하다는 걸 전 믿어 의십치 않는단 말예요! 안녕히 계세요!" 마리안나는 황급히 걸어 나갔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안락의자에서 일어 나, 뭐라고 외치고도 싶고 울고도 싶었다‥‥‥ 그러나 뭐라고 외쳐야 할 지 알 수가 업었다. 또한 눈물도 그녀의 뜻대로 나와주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손수건으로 부채질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그 수건에서 발 산되는 향기는 그녀의 신경을 더욱 날카롭게 자극시켜 줄 뿐이었다... 그녀는 자 기가 모욕받은 불행한 여자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방금 들은 이야기 중 몇 가 지의 진실만은 자기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렇 게도 당돌하게 자기를 비난할 수 있었을까? '난 정말 그렇게 나쁜 여자일까?'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차기 맞은편 창뭍 사이에 걸려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 았다. 거을 속에는-군데군데 빨간 반점으로 얼룩지고 약간 일그러지기는 했으 나, 그래도 여전히 매력적인 요염한 얼굴과 밸뱃처럼 부드러운 아름다운 눈이 반사되고 있었다. '내가?내가 나쁜 여자라고? 그녀는 다시 이렇게 생각했다. '이 런 눈을 하고 있는데도? 그러나 카로 이 순간, 그녀의 남편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또다시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니, 당신 왜 그래?" 시퍄긴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지,발 랴?'(그는 이 짤막한 이름을 아내를 위해 생각해 냈지만, 그것은 단둘이 있을 때, 그것도 주로 시골에 왔을 때에 한해서만 사용하기로 죄머 있었다. ) 그녀는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얼버무리려 했으나... 결국 아름답고우아 하게 의자에서 몸을 돌리고 남편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그는 아내 쪽으로 몸 을 굽히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고는 조끼 앞설에 얼굴을 파묻으며 모든 이야 기를 털어놓았다. 그녀는 어떤 교활한 생각이나 저의 없이 마리안나를 그냥 용 서하려고 했다. 아니, 용서차기보다는 어느 정도 마리얀나를 보호하려고까지 애 썼다. 그녀는 마리안나의 모든 죄가 그녀의 젊은 나이와 과격한 성격, 어릴 때 의 교육 부족에서 기인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어느 정도는 -역시 아무 저의 없이 자기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했다. "만일 그녀가 제 딸이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내버려두진 않았을 거예요!" 시퍄긴은 관대하고도 동정적인, 그러면서도 엄격한 표정으로 끝까지 이야기를 다 들었다. 그리고 아내가 두 손을 어깨에서 내리고 얼굴을 돌릴 때까지 허리를 구부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시퍄긴은 아내를 천사라고 부르면서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자키 역할이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지 이제야 알았다고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갔다. 그것은 마치 불쾌한 일이기는 하 나 필요한 의문를 수행하고자 하는, 인자하면서도 정력적인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그러한 표정이었다... 일곱 시가 지났을 무렵, 식사를 마친 네지다노프는 자기 방에 앉아서 친구 실 린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나의 벗, 불라지미드여! 나는 자기 생애의 결정적인 전환기에 즈음해서 자네 에게편지를 쓰기로 했네. 나는 이 집에서 거절당했으므로 여길 떠나려고 한다 네. 그거야 무슨 문제이겠나만... 여기를 떠나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란 말일세. 언젠가 자네에게 편지로 알린 바 있는 그 처녀가 나를 따라가게 되어 있지, 우 리 두 나람은 모든 점에서 서로 결합되고 있어-비슷한 운명, 동일한 신념과 목 적, 게다가 상호간의 감정까지도 서로 일치하고 있으니 말이야. 우리는 서로 사 랑하고 있어. 적어도 나 자신은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외의 다른 어떠한 형태의 사랑도 경험 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바야. 그러나 내가 마음속으로 아무런 공포도 느끼 지 않는 다고 말한다면, 난 자네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될 테지. 난 어떤 이상한 마음 외 고통까지 느끼고 있으니 말이야... 우리 앞에는 캄캄한 암흑이 있을 뿐이야 -우리는 둘이 함께 고 암흑 속으로 뛰어들려는 거지. 우리가 나아 가는 목표가 무엇이며 또 우리가 택한 활동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는, 지금 새 삼스레 설명할 필요도 없을 거야. 나와 마리안나는 행복을 찾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쾌락을 원하는 것도 아니지. 우린 서로서로 의지하며, 둘이 함애 투쟁 을 하려는 거야. 우리의 목적은 명백하지만 우린 아직 어느 길이 그 목적에 다 가가는 길인지를 모르고 있어 가령 동정이나 원조가 아니더라도 활동의 가능성 만이라도 찾을 수 있을는지! 마리안나는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일세. 만일 우리에게 파멸의 운명이 지워져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녀를 유흑했다는 뉘우침 때문에 나 자신을 책망하는 일 은 없을 걸세. 왜냐하면 그녀에게 있어서 그 밖의 다른 길이란 달리 있을 수 없 었기 때문이지. 그러나 볼라지미드, 블라지미드! 나를 괴롭허고 있는 거야, 물론 그녀에 대한 나 자신의 감정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모를 의흑이! 하 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지... 이미 때는 늦었으니까. 제발 멀리서 나마 우리에게 두 손을 뻗쳐주게-그리고 인내와 자기 희생과 사랑의 힘을 기원 해 주게나... 그 무엇보다도 사랑의 힘을. 아아, 그대 러시아의 민중이여, 우리의 전존재와 우리 가슴의 모든 피를 다 바쳐 사랑하는, 그러나 아직도 미지인 러시 아 민중이여, 너무 우릴 싸늘하게 대하진 말아다오. 그리고 무엇을 그대에게서 기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오! 그럼 안녕히, 블라지미드, 안녕! 이 짤막한 편지를 쓴 다음, 네지다노프는 마을 쪽으로 떠났다. 다음날 새벽 아 침놀이 조금씩 벗쳐지기 시작할 무렵에는 그는 벌써 시퍄긴의 정원에서 그리 머지않은 자작나무 숲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그 조금 뒤에는 재갈을 물리지 않 은 두 필의 시골말을 단 농군 마차가 파랗게 뒤엉킨 넓은 호도나무 덩굴 사이 로 간신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백발의 한 늙은 농부가 새끼로 엮은 그물 아래서 더덕터덕 기운 저고리를 머리에 덮고 건초 다발 위에 잠들어 있었다. 네지다노프는 정원 옆의 버드나무 숲과 한길을 뚫어질 듯 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주위에는 고요한 잿빛 어둠이 깔려 있고, 텅 빈 하늘의 심연 속 에 잊혀진 듯이 남아 있는 별들이 서로 경쟁하듯 약하게 반짝 이고 있었다. 길 게 뻗은 비구름의 둥그스름한 동쪽 끝이 희미한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하자, 새벽의 첫 한기가 그쪽으로부터 휘몰아쳤다. 잠자기 네지다노프는 부르르 몸을 떨며 바싹 귀를 기울였다-어디선가 가까운 곳에서 먼저 삐걱 하고 문 여는 소 리가 나더니 곧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머플러를 쓴 조그만 여자의 모습이 움직이지 않는 버드나무 그늘로부터 가볍게 먼지 나는 한길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벌거숭이 손에는 조그만,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비스듬히 한길을 가로지르자, 발끝으로 걷는 듯한 걸음걸이로 숲을 향해 오고 있었다. 네 지다노프는 그녀 쪽으로 달려갔다. "마리안나!" 네지다노프가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다. "저예요!" 머플러 밑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빨리 날 따라와요" 꾸러미를 든 그녀의 손을 되는대로 붙잡으며 네지다노프 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추위를 느끼는 듯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마리안나를 마차 쪽으 로 안내하고 농군을 깨웠다. 농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마부 자리로 옮겨앉 아 저고리를 입은 다음 새끼로 만든 고삐를 잡았다. 말들이 꿈틀거렸다. 농군은 곤히 잔 뒤라 약간 쉰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진정시켰다. 네지다노 프는 새끼로 엮은 그물 의자 위에 먼저 외투를 간 다음 그 위에 마리안나를 앉 히고, 그녀의 발을 담요로 감싸주었다. (마차 밑에 간 건초는 젖어 있었다. ) 네 지다노프는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는 마부 쪽으로 몸을 굽히며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자, 갑시다. 어디로 가는지 알죠?' 농군이 고삐를 당겼다. 그러자 말은 히힝거리고 꿈틀거리면서 숲을 빠져나갔 다 -. 이윽고 마차는 낡은 바쥐를 덜컹거리며 한길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네지다노 프는 한 손으로 마리안나의 몸을 부축하고 있었다. 그녀는 싸늘한 손가락으로 머플러를 들어올리고는 그네게로 얼굴을 돌리고 방긋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상쾌하고 좋아요, 알로샤!" "그렇습니다. " 농부가 대답했다. "이슬이 심할 겁니다. " 이미 이슬은 많이 내려 있었다. 마차 바퀴갸 길가의 키 큰 잡초 끝에 걸릴때 마다 차디찬 물방울이 우르르 쏟아져내렸다. 그리고 파릇파릇하던 풀도 푸르스 름한 잿빛으로 변해 보였다. 마리안나는 또다시 추위에 몸을 웅크렸다. "상쾌하군요, 너무나 상쾌해요." 그녀는 즐저운 목소리로 이렇게 되풀이했다. "게다가 자유인걸요, 알로샤. 이젠 자유예요!" 28 솔로민은 자기에게 달려온 심부름꾼으로부터 어떤 남자와 여자가 마차를 타 고 와 면회를 요청한다는 보고를 받자, 곧 공장 문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손님 에게 인사도 없이, 그저 몇 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마부에게 마차를 마당 으로 들여보내라고 일렀다. 그리고 솔로민은 마차를 곧장 자기 거처인 곁채까 지 몰고 가게 한 다음, 마리안나를 마차에서 부축해 내렸다. 네지다노프도 그 녀 뒤에서 뛰어내렸다. 솔로민은 어둡고 좁은 복도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그 들은 곁채의 뒤 층계를 거쳐 2층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그는 나직한 방문을 열 었다-세 사람은 두 개의 창문이 달린, 제법 말쑥하게 정돈된 조그만 방안으로 들어갔다. "잘 오셨습니다!"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으만서 솔로민이 말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어느 때보다도 더 밝고 더 상냥해 보였다. "이 방이 당신들이 거처할 곳입니다. 이 빵과 옆에 또 하나의 방지 있습니 다. 방 꼴이 말이 아닙니다만, 그럭저럭 사는 데는 불편이 없을 겁니다. 게다 가 여기라면 누구한테도 들킬 염려가 없거든요. 그 창문 밑에 주인이 말하는 이른바 화원이 있지만, 제 생각으론 채마밭과 다를 것이 없저요. 그것이 담장 까지 이어졌고 좌우 양쪽엔 울타리가 있습니다. 한적한 곳이죠! 자, 다시 한 번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귀여운 아가씨, 그리고 네지다노프, 참 잘 와주었 소!" 그는 두 사람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외투도 벗지 않고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들은 놀람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흥분의 빛을 띠면서 말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들 그러고 있죠?" 솔로민이 다시 이렇케 말했다. "외투를 벗으세요! 짐은 어떤 것들이죠?" 마리안나는 보자기에 싼 꾸러미를 보였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그것을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이다. "짐은 이것뿐이에요. " "제짐은 가방과 자룬데, 마차에 놓고 왔습니다. 제가 곧..." "가만히 계세요, 가만히 계세요." 솔로민은 문을 열었다. "파벨!" 그는 어 두운 층계를 향해 외쳤다. "이봐. 좀 뛰어갔다 오게...마차 속에 짐이 있으 니... 그걸 가져다 줘. " "곧 가죠!" 한시도 주인 엷에서 떠날 줄 모르던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솥로민은 마리안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머플러를 벗고 코트의 단추 를 풀고 있었다. "모든 일이 무사히 잘됐습니까?" 솔로민은 이렇게 물었다. "네, 모든 일이 ‥‥‥ 아무도 우릴 보지 못했어요. 시퍄긴씨에겐 편지를 남 겨두고 왔고요. 그런데 바실리 페토트이치, 전 옷이나 내의 같은 것은 가져오 질 않았어요. 당신이 우릴 어디로든 보내주시리라 믿고요... (마리안나는 어쩐 지 '민중 속으로'라고 덧붙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 하긴 마찬가질 테죠. 아 무 데도 쓸모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돈은 있어요, 필요한 물건을 살만큼은. " "그건 우리 나중에 상의하도록 합시다... 그런데." 네지다노프의 짐을 들고 들어오는 파벨을 가리키면서 솔로민이 이렇게 말했다. "이 공장에서 나와 가장 친한 친구를 소개하죠. 이 사람이라면 완전히 믿어도 좋습니다... 나를 믿듯이 말이오. 이봐, 타치야나에게 사모바르를 끓이라고 말했나?" 그는 나직한 목소 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곧 준비될 겁니다. " 파벨이 대답했다. "크림이건 뭐건 모두." 타치야나는 이 사람의 처올시다. " 솔로민이 말을 이었다. "이 사람과 마찬 가지로 역시 틀림없는 여자죠. 당신이... 이곳 생활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 여 자가 당신의 시중을 들어줄 겁니다, 아가씨." 마리안나는 방구석에 놓여 있는 가죽 소파 위로 자기의 코트를 집저 던졌다. "바실리 좨토트이치, 저를 마리안나라고 불러주세요-전 아가씨란 말을 듣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절 도와주는 사람도 필요 없구요... 제가 그 집 을 나온 것은 하녀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예요. 내 옷 같은 데 신경을 쓰지 말아 주세요. 제겐 다른 옷이 없었던 거예요. 이런 것도 모두 바꿔버리지 않으면 안 될 테죠. " 갈맥 드라데담(엷은 모직물 이름)으로 만든 그 옷은 매우 단조로운 것이긴 했으나 페태르부르크의 재단사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마리안나의 어깨와 몸 에 아름답게 들어맞아 전체적으로 보아 유행풍의 의상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럼 하녀가 아니라 조수라고 해두죠, 미국식으로. 그러나 어쨌든 차는 마 셔두시지요. 지금은 아직도 이른 시각이고 게다가 두 분 다 피로하실 테터까 요. 난 이제 공장 일로 가봐야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만나 뵙도록 하죠. 뭐든 지 필요한 게 있으면 파벨이나 타치야나에게 말해 주세요." 마리안나는 불쑥 솔로민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바실리 폐토트이치, 뭐라고 당신에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감격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솔로민은 살그머니 그녀의 한 손을 어루만 져 주었다. "감사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거짓말이 될 테죠. 그러 니 당신의 감사는 내게 대단한 만족을 주었다고 말해 두는 편이 좋겠군요. 자, 이젠 피차 마찬가집니다. 그럼 안녕! 파벨, 가보시오." 마리안나와 네지다노프는 단둘이 남았다. 그녀는 네지다노프에게 와락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솔로민을 보았을 때와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 눈 은 더 기쁘고 더욱 감격적이었으며 더욱 빛나 보였다. "오오, 알로샤!" 그녀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헨다. "우린 새 생활을 시작하는 거예요... 드디어, 드디어! 이 가난한 집을 그 저주스러운 궁전과 비교할 때 얼마나 정답고 따스하게 느껴지는지 당신은 아마 모르실 거에요! 비록 며칠밖 에 못 있을 집이긴 하지만요. 어때요-당신도 기쁘세요? 네지다노프는 그녀의 두 손을 잡고 자기의 가슴에 꼭 눌렀다. "마리안나, 난 행복해. 이러한 새 생활을 당신과 함께 시작하니 말이야! 당 신은 내 길을 인도하는 별이야, 내 기둥이야, 내 용기야... " "사랑하는 알로샤! 잠간만 기다려요-먼지라도 좀 털고, 옷차림도 고쳐야겠어 요. 전 제 방에 갈 테니... 당신은 여기 남아 계세요. 곧 다녀올게요. " 마리안나는 다음 방으로 가서 문을 잠갔다. 일분쯤 지나 그녀는 문을 반쯤열 고는 머리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솔로민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그러고는 다시 문을 닫았다-곧 이어 찰칵 하고 자물쇠를 잠그는 소리가 들렸 다. 네지다노프는 창문으로 다가가 정원을 바라보았다... 한 그루의 늙은 사과나 무가 어쩐지 유달리 그의 주의를 끌었다. 그는 부르르 몸을 한번 떨고는 기지 개를 켜고, 자기 가방을 열었다-그러나 거기서 아무것도 꺼내지 않았다. 그는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15분쯤 지나서 파리안나가 들야왔다. 활가 찬 싱싱한 얼굴이었고, 몹시 유쾌 하고 명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다음 얼마 안 있어 파벨의 처 타치야나가 사모바르와 찻잔, 횐 빵, 크림 등을 들고 나타났다. 집시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자기 남편과는 달리 그녀는 순수한 러시아 여자 로서 아마빛 머리카락을 크게, 탄탄히 틀어올리고 거기에 뿔로 만든 빗을 꽃고 있었다. 뚱뚱한 몸집에 얼굴 윤곽도 큼직하고 기분 좋은, 무척 선량해 보이는 잿빛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소 색이 바래기는 했으나 말쑥한 옥양목 옷 을 입고 있었다. 손은 크긴 했으나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정중히 인사 를 하고는 절도 있는 분명한 목소리로, "안녕들 하세요" 하고 말했다. 그것은 노래하는 듯한 끄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러시아의 시골 여인들은 노래하듯 목소 리를 끄는 것이 상례이다). 그녀는 사모바르와 찻잔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마리안나는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저, 타처야나. 저도 돕겠어요. 냅킨이라 도 이리 좀 주세요." "괜찮아요, 아가씨. 우런 이런 일에 익숙하니까요. 바실리 페토트미치한타 서 들었어요. 뭣이든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사양 마시고 일러주세요. 기꺼이 도와드리 겠어요. " "타치야나, 제발 저를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아요... 전 귀족처럼 옷을 입고 는 있습니다만 그래도 전 전혀..." 타치야나의 주의 깊고 예리한 눈이 마리안나를 어리둥절케 했다. 그녀는 입 을 다물었다. "당신은 어떤 분이시죠?" 타키야나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 다. "알고 싶으세요? ...전 사실... 귀족 출신이에요. 하지만 전 그런 것을 모두 버리고 싶은 거예요-그래서 다른 사람들처럼... 보통 여자들처럼 되고 싶은 거 예요. " "아, 그러시군요! 이젠 저도 알겠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벌거숭이가 되려고 하는 사람 중의 하나군요. 요즘 그런 사람들아 왜 많아졌어요." "당신 자금 뭐라셨죠, 타치야나? 벌거숭이가 된다구요?" "네... 그런 말이 요사이 유행하고 있답니다. 결국 평민들과 같아진다는 뜻 이죠. 벌거숭이가 된다는 건. 그죠주 좋은 일이죠 농군들에게 현명한 지혜를 가르쳐주는 거니까요. 하지만 힘들지요. 암 힘들다마다요! 제발 잘되시길 빌겠 어요?" "벌거숭이가 된다두요!" 마리안나는 되풀이했다. "알로샤, 들었어요? 우린 지금 벌거숭이가 된 거예요!" "벌거숭이가 된다! 벌거숭이가 된 사람!" "그런태 이 사람은 누구시죠, 남편이신가요-아러면 형제인가요?" 크고 날렵 한 손길로 죠심스럽게 찻잔을 닦으면서 타치야나는 이랗게 물었다. 그녀는 상 냥향 미소를 머금은 채 네지다노프와 마리안나들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니예요," 마리안나는 이렇계 대답했다. "남편도, 형제도 아sP요." 타치야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자유 의사에 따라 사시는 거군요? 요 샌 그런 일도 자주 있습죠. 지금까진 주로 본'리파 교도들께게만 있던 일이지 만, 요즘은 일반 사람페게도 퍼지고 있어요. 그저 하느님의 축복만 받으시고 화목하게 살아만 가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승려도 필요 없구요. 우리 공장 에도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결코 나쁜 샤람들은 아니란 말예요." "당신은 정말 좋은 말씀을 해주셨어요. 타치야나... 자유 의사라고요... 그 말이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그런데 저... 타치야나,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요. 실은 옷을 좀 맞추든지, 사든지 해야겠어요. 당신이 입구 있는 그런 것이나 좀 더 평범한 것으로 말에요. 구두, 양말, 머플러 모두 당신 같은 것으로 하고 싶 어요. 그만한 돈은 있으니까요. " "네, 아가씨. 그렇게 하시죠... 저런, 또 아가씨라고 했네요. 제발 노하지 마세요-앞으론 아가씨라 부르지 않을게요. 그렇지만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 죠?" "마리안나. " "부칭은 어멓게 되시고요?" "부칭 같은 건 알아서 뭣해요? 그냥 마리안나라고 불러 주세요. 저도 당신을 타치야나라고 부르는데요, 뭐. " "그럴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죠. 그래도 말씀하 주셨으면 좋겠어 요. " "그럼, 저희 아버지는 비켄치이라고 했어요. 당신 아버지는?" "오시프라고 했죠. " "그럼, 전 당신을 타치야나 오시포브나라고 부르겠어요. " "저도 당신을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라고 부르겠습니다. 이젠 제대로 줬군 !" "어때요, 타치야나 오시포브나. 우리와 함께 차라도 드시는 것이?" "처음이니 괜찮겠죠,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 한 잔만 들도록 하겠어요.! 그 러잖으면 예고르이치한테 욕을 먹거든요." "예고르이치 란 누구죠?" "제 남편 파벨 말예요." "앉으세요, 타치야나 오시포브나. " 타치야나는 의자에 앉아서 알사탕을 씹으면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끝으로 연방 설탕 조각을 돌리면서 한 번씩 깨물 때마다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마리안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타치 야나는 거리낌없이 묻는 말에 대답을 했고, 자기 쪽에서도 풔라고 묻기도 하고 어떤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녀는 솔로민을 하느님처럼 숭상하고 있었고 다음으로는 자기의 남편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공장 생활이 괴로 운 것 같았다 "여긴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니지요... 만일 바실리 폐토트이치가 계시지 않았다면 한 시간도 견디어낼 수 없을 겁니다!" 마리안파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한쪽에 자리잡은 네지다노 프는 자기의 여자 친구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녀의 관심사에는 조금 도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마리안나에게는 그러한 모든 것이 신기할는지 몰 랐으나 네지다노프 자신은 타치야나 같은 여자를 수없이 보아왔고, 또 그런 여 자와 이야디한 것만도 수백 번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자, 타치야나 오시포브나." 마리안나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 렇게 생각하실 테죠. 우리가 농민들을 가르치려 한다고요. 하지만 그렇지가 않 아요. 우린 그들에게 봉사하길 원하는 거랍니다. " "아니, 어떻게 봉사하신다는 거죠?그들을 가르쳐주세요. 그게 결국 봉사가 되는 거죠. 제 경우를 한번 예를 들어볼까요? 제가 예고르이치한테 시집 올 당 시만 해도 전 읽고 쓸 줄을 몰랐답니다. 그렇지만 바실리 페토트이치의 덕분으 로 이젠 알게 됐거든요. 그분이 직접 가르쳐주신 게 아니라, 어느 노인에게 돈 을 지불하고 가르치게 한 거죠. 그래서 결국 배우게 된 거랍니다. 전 이렇게 몸집이 커서 그렇지 사실은 아직도 젊어요." 마리안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저 말에요, 타치야나 오시포브나."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손으로 할 수 있는 무슨 일이든 배우고 싶은데... 네, 이 문제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말 씀드리도록 하죠. 전 재봉이 서투르니까 요리라도 배워서... 남의 집 요리사로 라도 갔으면. " 타치야나는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요리사로 가신다는 거죠? 요리사는 부잣 집이나 상인 집에 있는 거예요. 가난한 사람들은 손수 음식을 만드는 법이죠. 노동자의 취사부라도 되시겠어요? ‥‥‥하지만 그건 정말 밑바닥 일이죠!" "가령 부잣집에서 살다라도 가난한 사람들과 사귈 수만 있다면 좋아요. 그렇 지만 어떻게 해야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이렇게 당신과 만난 것 처 럼, 언제나 이런 기회가 있는 건 아닐 태니까요." 타치야나는 빈 찻잔을 접시 위에 엎어놓았다. "역시 좀 힘든 일일 겁니다. " 그녀는 마침내 한숨과 더블어 이렇게 말한다. "마음대론 되는 일이 아니거든 요.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진 도와드리겠습니다만, 저 자신도 별로 아는 게 없 으니까요. 예고르이치와 상의를 해봐야죠. 그 사람은 어떤지 글세요? 글쎄, 무 슨 책이든 못 읽는 책이 없다니까요! 그리고 무엇이든지 손에 닿기가 무섭게 척척 풀어주거든요." 이때 그녀는 담배를 말고 있는 마리안나를 바라보았다. "저 말예요, 마리안나 비잰치애브나. 실례지만 장말로 벌거숭이가 되고 싶으시 다면, 그런 건 끊으tu야 할 겁니다. " 그녀는 담배를 가리켰다. "왜냐하면 그 런 신분으로선, 즉 부엌데기의 신분으로선 그런 짓은 할 수 없으니까요. 곧 누 구든지 '저 여잔 귀족 출신이구나' 하고 알아차릴 거란 말예요. 그렇고 말고 요. 마리안나는 담배를 창밖으로 내던졌다. "전 담배를 끊겠어요... 쉽게 끊을 수 있을 거예요. 평민 여자들이 피우지 않는다면 저도 의당 피우지 말아야지 요. " "그건 옳은 말씀이세요, 마리안나 비켄치애브나. 남성들은 그걸 도락으로 삼 고 있지만 우리 여성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건 사실이죠. 아! 바실리 페토트 이치께서 이리 오시는 것 같네요. 이건 그분 발소리예요. 그분에게 물어보도록 하세요. 모든 것을 당장 해결해 주실 테니까요-그것도 가장 좋은 방법으로요. " 그녀의 말대로 문밖에서 솔로민의 목소리가 물려 퍼졌다. "들어가도 좋습니까?" "들어오세요, 들어오세요!" 마리안나가 외쳤다. "이건 영국식 습관이죠." 솔로민은 방으로 들어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 기분들이 어떠세요? 아직도 지루하지 않으십니까? 보아하니 당신들은 타치야나 와 차를 마시는사보군요. 이 여자 말을 들어보세요-왜 똑똑한 여자랍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늘 공장주가 찾아온다는군요! 식사까지 하고 간다는 거예 요. 할 수 없는 일이죠! 이게 바로 공장주라는 겁니다. " :도대체 어떤 사람이죠?" 구석에서 걸어나오며 네지다노프가 이렇게 물었다. "그저 그래요... 걸레를 빨아먹을 정도로 무식하진 않죠. 새 사람 중의 하난 데 굉장히 정중해요-커프스까지 달고 다니죠. 그러나 눈이 세일하기란 옛날 사 람에 못지않거든요. 사람의 가죽을 벗겨먹는 주제에 말만은 이렇게 한답니다. '저, 미안합니다만 이쪽으로 좀 돌려주실까요. 여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곳 이 있군요... 깨끗이 벗겨야 하잖아요!' 그러나 저한테만은 곰살갑게 대해 주 고 있어요. 제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래,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아무래도 오 늘은 만나 뵙지 못할 것 같아 미리 그걸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식사는 이 리 가지고 올 겁니다. 그리고 정원으로 얼굴을 내밀진 말아주세요. 마리안나, 어떻게 생각하세요, 시퍄긴이 당신을 찾을까요?당신 뒤를쫓을까요?" "전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마리안나가 대답했다. "하지만 전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 " 네지다노프가 말했다. "하긴 마찬가지 일이죠." 솔로민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처음 얼마 동안은 조심을 해야 하니까요. 그러는 동안에 잘될 겁니다. " "그래요, 하지만,"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마르켈로프에게만은 제 주 소를 알려야 해요-제 주소를 알려주어야 해요. " "어째서죠?" "그럴 수밖에 없어요. 우리의 사업을 위해서. 그 사람은 언제나 제 주소를 알 의무가 있거든요. 이미 약속한 일이니아요. 그리고 그 사람이라면 지껄일 염려도 없어요!" "그럼 좋습니다. 파벨을 보내도록 하죠. " "제 옷은 준비되겠습니까?" 네지다노프가 이렇게 물었다. "그 양복 말입니까? 걱정 말아요... 해드릴 테니. 가장 무도회라도 하는것 같군요... 다행히 비싸진 않으니까.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푹 좀 쉬세요. 타 치야나, 자 갑시다. " 마리안나와 네지다노프는 또다시 단둘이 되었다. 28 처음 그들은 다시 힘껏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잠시 후 마리안나가 "잠깐만, 당신 방의 정리를 제가 거들어드릴게요" 하고는 가방과 자우에서 그의 짐을 끄 집어내기 시작했다. 네지다노프는 그녀를 도우려 했다. 그러나 마리안 나는 자 기 혼자 하겠다고 고집했다. "봉사라는 습관을 길러 둬야 하니까요." 그리고 실재로 마리안나는 자기 손으로 옷가지들을 못 위에 걸어놓았다. 못은 탁자 서 랍에서 찾은 것으로 망치 대신 옷솔 등으로 손수 벽에 박은 것이었다.세탁물은 창문과 창문 사이에 놓여 있는 낡은 장롱 속에 넣었다. "이건 뭐죠?" 그녀가 이렇게 물었다. "권총?총알이 든 거예요? 이런 건 무엇 때문에 가지고 있죠? "총알은 안 들었어... 어쨌든 이리 줘요.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오?우리와 같은 입장에서 권총이 없어서야 되겠소?" 그녀는 웃었다. 그러고는 물건을 하나하나 털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두들기기 도 하면서 자기 일을 계속했다. 두 켤레의 장화까지 소파 밑에 정돈해 넣었다. 몇 권의 책과 한 뭉치의 서류, 시를 쓴 조그만 수첩은 빵구석의 삼각 책상 위 에 정중히 모셔 놓았다. 그들은 이 책상을 필기용 및 작업용 탁자라 부르고, 그와 대조적으로 둥근 또 하나의 탁자는 차와 식사용 탁자라고 불렀다. 이윽고 그녀는 두 손으로 시가 적힌 수첩을 얼굴 높이 쳐들고 그 사이로 네지다노프를 바라보며 미소를 띄운 채 이렇게 말했다. "일이 좀 한가할 때면 우리 이걸 읽도록 해요! 네쿤" "그 수첩을 이리 걸요. 태워버리게!" 네지다노프가 외쳤다. "아무 쓸모도 없 는 거니까!" "그렇다면 왜 여기까지 가져왔죠? 안 돼요, 이걸 태우라고 주진 않겠어요. 하긴 작가들은 그렇게 위협만 할 뿐, 결코 자기 작품을 태운 적은 없지만 말예 요. 아무튼 전 이걸 제 방에 갖다 놓겠어요!" 네지다노프는 항의를 하려고 했으나, 마리안나는 수첩을 가진 채 자기 방으 로 뛰어들어갔다-그러고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네찌다노프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곧 다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 아직 제 방에 못 가보셨죠? 가보시겠어요? 당신 방보다 못하지 않아 요. 자, 가보세요. 보여드릴 테니." 네지다노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리안나의 뒤를 따랐다. 마리안나 가 말하는 자기 방이란 그의 방보다 종 작기는 했으나 방안의 가구는 좀더 깨 끗하고 내로워 보였다. 창가에는 유리 꽃병이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철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분은 정말 상냥한 분이세요, 솔로민은!" 마리안나는 이렇게 외쳤다. "하 지만 우리 일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해선 안 되겠죠... 이런 집이 항상 얻어지 지는 않을 테니까요. 전 이런 생각을 해봐요. 우리 두 사람이 서로 떨어지지 않고 어떤 일자리를 구해서 정착된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러나 어려을 거예요."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나중에 잘 생각해 보도록 해요, 어쨌든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실 생각 은 아니 시겠죠?" "례테르부르크로 돌아가서 뭣하겠소? 학교에 다니며 가정교사를 하란 말이 오? 그런 건 아무 소용도 없어요. " "글쩨 솔로민이 뭐라고 하실는지," 마리안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잘 결정해 주실 테죠.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요." 두 사함은 다시 처음 방으로 돌아와서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솔로민 과 타치야나, 파벨을 칭찬하기도 하고 시퍄긴의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까 지의 생활이 갑자기 먼 곳으로 사라져버려 마치 안개로 뒤덮인 듯이 느껴진다 고 말하기도 했다. 그 다음 두 사람은 다시 손을 맞잡고 기쁨이 넘치는 시선을 교환했다. 계속해서 그들은 어떤 사회 층으로 뚫고 들어가야 하며, 남의 의심 을사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의논했다. 네지다노프는 될 수 있는 대로 그런 것을 생각하지 탈고 되도록 평범하게 행 동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이죠!" 마리안나가 말했다. "타치야나의 말대로 우린 벌거숭이가 되려 는거니까요. ""난 그런 뜻에서 말하는 게 아니오." 네지다노프가 말했다. "내 가 말하고자 한 것은 행동이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거요... 마리안나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전 말예요, 알노샤. 우리보고 벌거숭이가 됐다고 한 그 여자의 말이 생각났 던 거예요!" 네지다노프도 덩달아 웃으면서 "벌거숭이가 된 사람!" 하고 자꾸 되풀이했 다. 그러나 그는 곧 생각에 잠겼다. 마리안나도 함께 생각에 잠겨버렸다. "알로샤!" 잠시 후 그녀가 이렇게 불렀다. "응?" "이렇게 단둘이 있으니 어쩐지 좀 멋적은 생각이 들어요. 젊은 des noilveaux maries(신혼 부부)가,"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신혼 여행 첫날에 느끼는 기분이 아마 이럴 테죠. 말할 수 없이 행복하고... 기쁘면서도... 어쩐 지 멋쩍을 거예요. " 네지다노프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미소였다. "하지만 마리안나, 우리가 그런 뜻의 젊은 부부가 아니란 건 당신도 알잖소. " 마리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네지다노프 앞에 마주섰다. "그건 당신에게 달렸어요." "그렇다면?" "알로샤, 당신도 아시겠죠. 성실한 사람으로서 제게 그 말을 해주신다면 전 당신을 믿을 거예요. 당신은 정말 성실한 분이니까요. 당신이 그러한 사랑으로 절 사랑한다고 말해 주신다면... 즉 남의 일생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하는 그러 한 사랑 말예요... 만일 당신이 그 말을 해주신다면 그땐 전 당신 거예요. "내가 그 말을 한다면..." "네, 그땐! 그러나 당신 자신도 아시잖아요, 지금은 당신이 그런 말을 하실 수 없다는 걸... 네, 그래요. 알로샤, 당신은 정말 성실한 분이세요. 자, 우리 좀더 중요한 얘기를 하도록 해요. " "하지만 난 당신을 사랑하는 걸, 마리안나!" "저도 그건 의심하지 않아요... 그러기에 기다리는 거죠. 잠깐만, 전 아직 당신의 책상 정리를 다 마치지 못했어요. 여기 뭔가 포장된 것이 있네요. 아주 딱딱한 건데..." 네지다노프는 벌떡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건 그대로 놔둬요, 마리얀나... 그건... 제발 그대로 놔두라니까" 마리안나는 어깨 너머로 그에게 머리를 돌리고는 놀란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건-비밀?비밀이에요?당신에게 비밀이 있나요?" "그래요... 그래요." 네지다노프가 말했다. 그러고는 몹시 낭패한 표정으로 변명이라도 하듯 이렇게 덧붙였다. "그건... 초상화요." 엉겁결에 그는 이렇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사실 마리안나가 들고 있는 포장 지 안에는 마르켈로프에게서 받은 그녀의 초상화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초상화... 그녀는 끄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건가요?" 그녀는 포장된 꾸러미를 네지다노프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꾸러미를 잘 못 받는 바람에 하마터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뜨릴 뻔했다-그리고 그 순간 포장 지가 벗겨지고 말았다. "아니, 이건... 제 초상화군요!" 마리안나는 활기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제 초상화니 제가 가질 권리가 있어요." 그녀는 네지다노프의 손에서 초상화 를 낚아챘다. "당신이 그리신 거예요?" "아니... 내가 아니요. " "도대채 누구죠? 마르켈로프?" "맞혔군... 그 사람이오. " "그런데 어떻게 해서 당신 손에 있는 거죠?" "그 사람이 내게 주더군. " "언제요?" 네지다노프는 언제 어떻게 해서 그 초상화를 받게 되었는지 그녀에개 얘기해 주었다. 그가 말하고 있는 동안 마리안나는 그의 얼굴과 초상화를 번갈아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러고 네지다노프와 그녀 두 사람의 머리 속에는 똑같은 상념이 번쩍이고 있었다. '만일 그가 이 방에 와 있었탈면, 그는 이 초상화를 요구할 권리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안나도, 네지다노프도 자기 생각을 입밖 에 내지는 않았다... 아마 두 사람 모두 상대방에게서 그러한 상념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마리안나는 조용히 초상화를 다시 포장한 다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좋은 분이에요!" 그녀는 이렇게 속삭였다.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시죠?" "어디라니?... 자기 집에 있겠지! 난 내일이나 모레쯤 그 사람한테 가렵니 다. 책과 팜플렛을 가지러. 내게 준다고 해놓고 출발 때에 아마 잊은 것 같소. " "알로샤,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분은 이 초상화를 당신께 넘겨줄 때 모든 걸 단념했을까요... 완전히, 모든 걸 다?" "내겐 그렇게 생각되는군. " "당신은 그분이 집에 있으리라 생각하세요?" "물론. " "아!" 마리안나는 눈을 내리깔고 맥없이 두 손을 떨어뜨렸다. "저런, 타치야 나가 식사를 날라오네요! 갑자기 그녀는 이렇게 외쳤다. "정말 착한 여자예 요!" 타치야나가 식사며 냅킨,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식사 준비를 하면서 공장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공장주가 모스크바에서 기차를 타고 올라와서 말예요! 마치 미친 사람처럼 각 층마다 뛰어다니고 있어요. 실상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본보기를 보인답시고 괜히 겉으로만 허세를 부리는 거죠. 바실리 페토트이치는 주인을 마치 어린애 다루듯 취급하고 있고 주인이 뭐라고 싫은 소리라도 하면 당장 모든 것을 집어 치우겠다고 따지고 들죠. 그러면 주인은 당장 쑥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지금 함께 식사를 하시는 중이에요. 주인을 어떤 친구 한 분을 데리고 왔는데... 그 사람은 시종 모든 것에 놀라기만 하더군요. 아마 그 사람은 부자임에 틀림없어 요. 한마디도 말을 않고 노상 머리만 흔들고 있다니까요. 게다가 뚱뚱하기란 말할 수도 없어요. 모스크바의 갑부일 테죠! 옛날의 속담에 이르듯이 '모스크 바는 러시아의 산밑, 모든 것이 그 속으로 굴러든다'고 한말이 옳은가봐요. " "당신은 정말 세심하시군요!" 마리안나가 이렇게 말했다. "좀 세심한 편이죠." 타치야나는 이렇게 말을 받았다. "자, 식사 준비가 다 됐습니다. 많이들 드세요. 전 여기 앉아서 당신들의 식 사하는 모습이나 바라보죠. " 마리안나와 네지다노프는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타치야나는 창문턱에 기대 앉아서는 한 손으소 턱을 괴었다. "여기서 이렇게 바라보니," 그녀는 말을 이었다. "당신 두 사람은 너무나 젊 고 연약해 보여요... 이렇게 바라보긴 좋지만 어쩐지 측은한 생각까지 드는군 요! 에그, 당신들은 힘에 겨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요! 정부 관리들은 당신 같은 사람들을 얼씨구나 하고 감옥 속에 처넣을 테죠!" "괜찮아요, 아주머니. 우릴 겁먹게 하진 말아요." 네지다노프가 말했다. "이 런 속담을 아시죠. '버섯이라 불리는 이상 광주리 속에 들어가게 마련이다'라 구요. " "알고 있습죠...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요즈음 감옥은 비좁은데다가 빠져 나 오기도 힘들단 말예요..." "당신, 아이가 있나요?" 마리안나가 화제를 바꾸기 위해 이렇게 물었다. "있어요. 사내자식이 하나. 이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계집애도 하나 있었는데 아깝게도 죽고 말았지요! 재난을 당한 거죠, 차에 치여 죽었으니까 요. 차라리 당장 죽어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글쎄, 오랫동안 시달리다 죽었답니 다. 그때부터 전 울적한 여자가 되어버렸답니다. 그땐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어 요. 목석과도 다를 게 없었지요!" "그럼 당신은 남편인 파벨 예고르이치에 대해서는 별로 사랑을 느끼지 못하 셨나요?" "아니! 그건 또 얘기가 다르죠. 이건 딸애의 얘기구요. 자, 당신만 하더라도 어때요? 이분을 사랑하고 계실 테죠, 안 그래요?" "사랑해요. " "많이 사랑하세요?" "많이. " "그런데... 타치야나는 네지다노프와 마리안나를 바라보았으나 아무 말도 덧 붙이지 않았다. 마리안나는 또다시 화제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타치야나에게 담배를 끊었다고 말했다. 타치야나는 찰했다고 그녀를 칭찬해 주었다. 그 다음 마리안나는'다시 한 번 자기 옷에 대한 부탁을 하고, 요리를 가르쳐주겠다고 한 타치야나의 약속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참, 또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발 이 굵은 실을 좀 얻을 추 없을까요? 양말을 뜨려고요... 막 신을 수 있는 양말 을 뜨려는 거예요. " 타치야나는 원하는 대로 모두 해주겠다고 약속하고는 식탁을 정돈한 후 침착 하고 차분한 걸음걸이로 방에서 나가버렸다. "자, 이재부터 뭣을 할까요?" 마리안나가 내지다노프에게 물었다. 그러고는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러면 어때요?진짜 사업은 내일 부터 시작되는 거니까, 오늘밤만은 문학에 바치도록 하는 거예요. 당신의 시를 다시 읽어요! 제가 엄한 비평가가 될게요." 네지다노프는 한참 동안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에 가선 양보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수첩을 들고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마리안나는 그 가 시를 낭독하는 동만 그의 옆에 바싹 다가앉아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안나의 말은 옳았다-그녀는 엄한 비평가였다. 그녀의 마음에 드는 시는 그 다지 많지가 않았다. 마리안나는 이른바 교훈적인 시보다는 순수하고 서정적인 짤막한 시를 좋아했다. 네지다노프의 낭독 솜씨는 별로 좋은 편 이 아니었다. 그는 낭송조로 읊을 만산 용기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맥빠진 어조로 낭독하기도 싫었으므로 결국엔 머리도 꼬리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마리안나는 갑자기 그의 낭독을 가로채곤, '이내 몸 죽는 것은 슬프저 않지만'이라는 구절로 시작 되는 도브롤류보프의 멋진 시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곧 그 시를 암송했 으나 그녀의 낭송 역시 좋지는 못했다. 어딘지 모르게 어린애다운 데가 있는 듯했다. 네지다노프는 그 이상 슬프고 괴로운 시는 없을 것이라고 평하고, 자기는 그 런 시를 쓰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왜냐하면 무덤 위의 눈물을 두려워 할 필요는 조금도 없으며... 또 그럴 사람도 자기에게는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있을 거예요, 만일 제가 더 오래 산다면." 마리안나는 느릿느릿 이렇게 말 했다. 그러고는 눈을 천정으로 올리고 잠시 말이 없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한 소 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내 초상화를 그렸을까요? 기억을 더듬어서 그린 걸까요?" 네지다노프는 홱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렇소, 기억을 더듬어 그린 거요." 마리안나는 그의 대답을 듣고 깜짝놀랐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홀로 자문했다 고 생각한 것이다. "이상하네요... 그녀는 여전히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에겐 그 림 그리는 소질이 없었는데... 참,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그녀는 큰소리 로 이렇게 덧붙였다. "아, 그렇죠! 도브롤류보프의 시에 대해서였군요. 시를 쓰려면 푸슈킨이나 도브를류보프처럼 써야 해요. 이건 시가 아녜요... 그렇지 만 이 시에 뒤지지 않을 만큼 좋은 데도 있어요." "그러니 내 시 같은 건," 네지다노프가 물었다. "도대체 쓸 필요도 없다는거 군, 그렇지?" "당신이 쓴 시는 당신의 친구들 마음에나 들 테죠. 그것은 시가 썩 잘됐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신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에요-이 시도 당신을 닮았어요. " 네지다노프는 미소를 자었다. "드디어 당신은 그 시를 매장해 버렸군-겸해서 나까지도!" 마리안나는 그의 손을 때리면서 심술궂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몹시 피곤하니 가서 자야겠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참." 숱이 많은 짧은 머리카락을 한번 흔들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전 137루블을 가지고 있어요. 당신은?" "98루블. " "저런! 우린 부자네요... 벌거숭이가 된 사람으로선. 그럼 내일 또 만나요!" 그녀는 가버렸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의 문이 빠끔히 열리고 그 문틈으로 "안녕!"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음에는 좀더 낮은 소리로 "안녕!"하 고 말했다. 뒤이어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지다노프는 소파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윽고 그는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문 쪽으로 다가가 급히 노크를 하기 시작했다. "왜 그러시죠?" 그녀와 목소리가 방안에서 울려 퍼졌다. "마리안나, '내일 또'가 아니라... 그냥 '내일'이라고 해요!" "내일!" 나직한 목소리가 이렇게 대꾸했다. 29 이튿날 아침, 네지다노프는 다시 마리안파의 방을 노크했다. "나요." 누구냐고 묻는 그녀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리 좀 나올 수 있소?" "잠깐만 기다리세요... 곧 나갈게요. " 그녀는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깜짝 놀라며 비명을지르고 말았다. 그녀는 처음 한순간 네지다노프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조그만 단추가 달리고 허 리통이 긴, 다 닳아빠진 누르스씀한 남경산 무명 카프탄을 입고 있었다. 머리 는 러시아식으로 가운데 가리마를 타고 목에는 하늘빛 손수건을 감았으며, 차 양이 부서진 벙거지를 손에 들고 발에는 더러운 소가죽 장화를 신고 있었다. "어머나!" 마리안나가 외쳤다. "어쩌면 이렇게도... 꼴불견이죠? 그러나 그 녀는 재빨리 그를 껴안고는 날쌔게 키스를 해주었다. "어쩌자고 그런 옷차림을 하셨죠? 아주 초라한 거리의 서민 같기도 하고... 행상인이나 고참 하인 같기 도 해요. 왜 그런 카프탄 같은 걸 입었어요? 흔히 입는 농군 외투나 가벼운 저 고리 쪽이 나을 탠데." "바로 그거란 말이오!" 네지다노프가 말했다. 그런 옷차림을 하고 보니 네지 다노프는 서민 출신의 초라한 어물상 같아 고였다. 그 자신도 이것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은근히 마음속으로 짜증이 나고 거북살스러운 마음이 돌기도했다. 그는 어쩌나 거북살스러웠던지 마치 먼지라도 털듯이 양손의 손가락을 펼치고 는 연방 가슴 언저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파벨의 의견에 의하면, 농군의 외 투나 소매 없는 저고리를 입으면 당장 발각되고 만다는 거요. 그의 말에 의하 면 이 옷차림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므로 발각될 리가 없다는 거지. 사실 말이지 이건 내 자존심을 그다지 만쪽시켜 주는 건 아니지만. " "당신, 지금 떠나려는 건가요?... 시작할 생각이세요?" 마리안나가 활기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소, 해볼 생각이오. 그런데... 정말이지... " "행복해 보여요!" 마리안나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저, 파벨이란 자는 좀 이상한 데가 있단 말이오." 네지다노프는 말을 이었 다. "남의 뱃속을 환히 꿰뚫어보듯이 속속들이 다 알고 있으면서도, 어떤 때에 는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곤 하거든. 마치 자기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말이오! 자기 스스로 일을 도와주면서도, 한편으론 모든 걸 비웃 고 있단 말이오. 그 친구가 마르켈로프한테서 책을 가져왔어요. 마르켈로프를 알고 있어서, 그는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라고 존대까지 하더군. 아 마 솔로민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거요. " "타치야나도 마찬가지예요." 마리안나가 말했다. "어째서 모두들 그 사람한 테는 그렇게 헌신적일까요?" 네지다오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파밸이 가져 온 건 어떤 책이죠?" 마리안나가 이렇게 물었다. "그저... 그렇고 그런 거요. (4형제의 이야기) 그리고 저... 다 아는 흔해빠 진 책들이죠. 하긴 이번 것은 좀 낫다고 할는지." 마리안나는 안타까운 표정으 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터, 타치야나는 어떻게 된 걸까? 곧 오겠다고 약속하고선... " "자, 타치야바가 왔소이다. " 손에 꾸러미를 든 타치야나가 방으로 들어오면 서 말했다. 그녀는 문밖에 서서 마리안나의 말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아직도 시간은 충분해요... 어쩌면 이렇게도 성급하실까?" 마리안나는 재빨 리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가져왔죠?" "여기 전부... 갖추어왔습죠. 이제 겨냥만 해보면 돼요... 그 다음엔 이멋진 옷을입고 나가셔서 민중을 놀라자만 하면 되는 거예요!" "자 가요, 타치야나 오사포브나. 어서 가요..." 아리안나는 그녀를 자기 방 으로 끌고 들어갔다. 혼자 남은 네지다노프는 이상한 종종걸음으로 두어 번 가 량 방안을 왔다갔다 해보았다. 어쩐지 그는 서민의 걸음걸이란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는 저고리의 소매와 벙거지 안의 냄새를 맡아보고 얼굴 을 찡그렸다. 또 그는 창문 곁에 걸려 있는 조그만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는 설 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던 것이다. '하지 만 이 편이 더 낫겠지.'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 다음 그는 팜플렛 몇 권을 꺼내서 뒷주머니에 쑤셔넣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해 로았다. "아니... 왜 그 래. 이봐... 괜찮다니까. 왜냐면 말야... 그럴싸하군.' 그는 다시 이렇게 생각 했다. '그런데 뭣 때문에 그런 연기까지 할 필요가 있담? 이 옷차림이 충분히 날 보호해 줄 텐데.' 이때 네지다노프는 어느 독일인 유형수의 이야기를 상기 해 냈다. 그 독일인은 전러시아를 가로질러 도망을 쳐야 했는데, 러시아어를 잘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를 거리에서 고양이 가죽테를 두른 상인용 모자를 산 덕분에 어디를 가도 상인 취급을 받았다. 결국 그는 무사히 국외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때 솔로민이 방으로 들어왔다. "아하!" 그는 이렇게 외쳤다. "영락없이 닳았군그래! 용서하게. 자네, 그런 옷차림을 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당신'이란 존대어가 안 나오네그려," "마음대로 불러줘... 제발... 나도 자네에게 그걸 부탁하고 싶었던 참이니 까. " "그런데 너무 이른 것 같군. 하긴 차차 익숙해질 테니까 그래도 괜찮겠지. 그러나 어떻든 좀 기다려줘야겠어. 공장주가 아직 떠나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지금 자고 있거든. " "난 조금 더 있다 나가겠네." 네지다노프가 대답했다. "어떤 명령을 받을때 까지 이 근처나 좀 돌아보려고 말이야." "그것도 일리가 있군! 그런데 이봐 알렉세이... 이렇게 불러도 괜찮겠지, 알 렉세이라구? "괜찮고말고. 만일 원한다면 릭세이(농사꾼들의 사투리)라고 불러도 좋고." 네지다노프는 웃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아니, 너무 지나칠 필요는 없지. 이봐, 약속은 돈보가 중하다기에 미리 말 해 두겠는데 말야. 자넨 팜플랫을 가지고 있는 모양인데, 그걸 누구한테 나누 어 주건 그건 자네 마음대로겠지만, 제발 이 공장 안에서만은 삼갔으면 하네!" "그건 또 왜 그렇지?" "첫째 그건 자네 자신을 위해서도 위험할 뿐더러 둘째 난 그런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주인에게 약속했거든. 뭐니뭐니해도 공장은 역시 그의 것이니까 말이 야. 그리고 셋째로 이 공장에서 시작되고 있는 학교니 뭐니 하는 것들을... 자 네한테 파괴당하고 싶지 않다는 걸세. 자넨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고 마 음대로 행동하게. 난 그걸 방해하진 않겠지만 내 공장 직공에게만은 손을 대지 말아달라는 거네." "만사 조심하는게 상책이라... 그 말씀이로군!" 반쯤 조소 어린 쓴웃음을 지 으면서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솔로민은 언제나처럼 ,만면에 미소를 띄 우면서 말했다. "자네 말데로야, 알렉세이 조심한다고 손해 나는 일은 없으니까. 아니 저 사 람은 또 누구지?" 이 마지막 외침은 바로 그때 문지방에 나타난 마리안나에게 돌려진 것이었다. 그녀는 여러 번 세탁을 한 얼륙무의의 옥양목 옷을 입고 있 었고, 양어깨에는 노란 수건을, 머리에는 빨간 수건을 등여매고 있었다. 타치 야나는 그녀의 모습에 반하기라도 한 듯,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등뒤에서 바라 보고 있었다. 간소한.옷차림을 한 마리안나는 전보다 더욱 싱싱하고 젊어 보였 다. 그녀의 옷은 네지다노프의 기다란 카프탄보다 휠신 몸에 잘 어울려 보였던 것이 다. "바실리 페토트이치, 제발 웃지 말아줘요." 마리안나는 애원하듯이 이렇게 말라고는 양귀비처럼 얼굴을 붉혔다. , "아, 드디어 한 쌍의 부부가 탄생했군묘?" 타치야나도 이렇계 외치며 손뼉을 쳤다. "하지만 젊은 양반, 언짢게 생각지 마세요. 당신도 잘되긴 했지만, 내 젊은 신부한텐 못 당해요. 당신은 모양이 나질 않는 걸요." '정말 마러안나는 잘 어울리는군.'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오오! 난 얼마나 그녀를 사 랑하고j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잣 호세요.," 타치야나가 말을 지었다. "우린 반지까지 바꿔 꼈단 말예요. 저분은 제게 금반지를 주시고 ,그 대산 제게서 은반지를 가져가셨어 요." "평민의 딸이 금반지를 낄 리는 없거든요." 마리안나가 말했다. 타치야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잘 보관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알아요." "자, 앉으세요. 두 사람 다 앉아요." 갸우뚱하게 머리를 기울인 채 마리안나 만을 바라보고 있던 솔로민이 이렇게 말했다. 아시겠지만, 옛날엔 누가 여행을 떠날 때면 모두 함께 앉곤 했답니다. 당신들도 괴롭고 긴 여행을 목전에 두고 있으니까. " 마리안나는 여전히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네지다 노프도 앉고 솔로민도 안았다... 끝으로 타치야나도 거기에 세워둔 굵은 장작 개비 위에 자리를 잡았다. 솔로민은 방안의 사람들을 차례차례 들러보았다. "뒤로 물러나 바라봐야지. 얼마나 잘들 앉았는지를... 그는 살짝 실눈을 만 들며 이렇게 말하고는 큰소리로 껄껄 웃어댔다. 그 웃는 모습은 너무나 호탕했 으므로 아무도 화를 낸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유쾌 한 기분을 느끼게 했을 정도였다. 그러자 네지다노프가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갸보겠소." 그가 말했다. "지금 곧. 그런데 이건 참 재미있는 착상이야. 광대 같은 분장이 좀 뭣하긴 하지만. 제발 근심하지 말아줘." 그는 솔로민에게 말했다. "자네 직공들에겐 손을 대지 않을 테니까. 이 근처를 좀 산책하고 오 겠네-마리안나, 당신에게도 다 모험담을 들려주리다. 물론 이야기 할만한 건더 기가 생기면 말이오. 자, 행운의 악수나 해주게!" "우선 차라도 드시고 가셨으면. " 타치야나가 말했다. "아뇨, 차는 무슨 차요! 정 마시고 싶으면 음식점에라도 들르죠. 그러잖으면 곧장 선술집에라도 가든지." 타치야나는 고개를 저었다. "요즈뜸 큰길가란 길가에는 마치 모피 외투에 벼룩이라도 끓듯이, 음식점이 자꾸 불어나고 있더군요. 마을이 자꾸 커지고 있퍼요. 이를테면 그 발마소보만 하더라도. " "자, 안녕! 다녀오겠소이다... 앉아 말씀들 나누세요!" 드디어 거리의 서민 행세를 시작하면서 네지다노프는 힘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복도로부터 파벨의 모습이 나타났 다. 그는 네지다노프에게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나선형으로 판, 가늘고 긴 지팡 이를 내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 이걸 받으세요.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이걸 짚고 가세요. 이 지팡 이는 멀리 내짚으면 짚을수록 기분이 좋답니다. " 네지다로프는 말없이 지팡이를 받아들고 방에서 나갔다. 파벨도 그의 뒤를 따랐다. 타치야나도 나가려고 챘으나 마리안나가 일여서며 그녀를 만류했다. "기다리세요, 타치야나 오시포브나. 아직 일이 남아 있어요." "곧 돌아오겠습니다, 사모바르도 가져올 겸. 당신 친구는 차도 안 드시고 나 가는 걸 보니 무척 바쁘신가 보군요... 하지만 당신이야 뭣 때문에 자진해서 고생을 하시겠어요? 좀더 두고 보세요. 그러는 사이에 형편도 나아질 테니." 타치야나는 나가버렸다. 솔로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리안나는 그에게 등 을 돌리고 서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에게로 몸을 돌렸을 때-그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그의 시선과 얼굴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이상한 표정을 읽었다. 그것은 불안하면서도 의문 어린, 호기심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녀는 어리등절한 나머지 다시 얼굴 을 붉혔다. 한편 솔로민도 자기의 표정을 읽힌 것이 겸연쩍라도 한 듯 여느 때 보다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자아, 마리안나... 드디어 당신들도 일을 시작할 셈이군요." "어떤 일을 시작했다는 거예요, 바실리 페토트이치! 그런 것도 시작이라고 할 수 있나요? 전 왜 그런지 갑자기 멋쩍은 기분이 들어요. 알렉세이의 말대로 우린 어떤 희곡이라도 하는 것 같단 말예요." 솔로민은 다시 걸상에 앉았다. "저, 실례지만 마리안나... 도대체 당신은 그 시작한다는 뜻을 어떻게 상상 하고 계시는 겁니까? 설마 깃발을 올린 바리케이드라도 쌓고-공화국 만세! 하 고 부르짖는다는 건 아니실 테죠. 그런 전 여자들이 할 일이 아니니까요. 하지 만 오늘이라도 루케리야니 뭐니 하는 피골 여인에게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가르친다고 합시다. 그야 물론 힘든 일일 테죠. 루케리야는 좀처럼 알아듣지 못할 뿐더러 당신을 경원시하고 게다가 당신이 가르쳐주려고 하는 것이 조금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 3주일 후엔 또 다른 루케 리야와 씨름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는 사이사이에 갓난애의 목욕을 시켜주 거나 알파벳을 가르쳐주거나 환자에게 약을 주기도 해야죠... 결국 이런 것들 이 당신에겐 일의 시작이랄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런 건 간호원이나 하는 일이 아니겠어요, 바실리 례토트이치! 무 엇 때문에 제가... 그런 것까지 죄다?" 마리안나는 자기 몸과 자기 몸의 주위를 애매하게 손짓해 보였다. "제가 공 상했던 건 좀더 다른 것이었어요. " "당신은 자기 몸을 희생하고 싶으셨던 거죠?" 마리안나의 두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래요... 그래요... 바로 그거예요!" "그럼 네지다노프는?" 마리안나는 어깨를 흠칫했다. "네지다노프도 그렇죠! 우린 함께 나가는 거예요... 만일의 경우 전 혼자라 도 나갈 테예요. " 솔로민은 뚫저질 듯이 마리안나를 바라보았다. "아시겠어요, 마리안나... 제 불손한 표현을 용서해 주세요... 제 생각으론 버짐 난 소년의 머리를 빗겨준다는 것도 희생입니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훌륭한 희생이에요." "저도 그걸 싫다고 하는 건 아네요, 페토트이치. " "당신이 싫어하지 않는다는 건 저도 압니다! 그래요, 당신이라면 그것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니 당분간은-그런 일을 하도록 하세요. 그러고 나면 또 다른 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하려면 타치야나한테 배워야겠군요!" "그렇게 하세요... 배우도록 하시죠. 검정투성이가 되어 항아리를 닦고 닭털 을 잡아뜯는 거예요... 그러는 사이에 또 알아요, 혹시 조국이 구원될는지도!" "저를 비웃고 계시군요, 바킬리 페토트이치." 솔로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오오, 귀여운 마리안나. 제 말을 믿어줘 요. 제가 어떻게 당신을 비웃겠어요. 제가 말하는 건 단순한 진리올시다. 지금 현재만 해도 당신은, 모든 당신네 러시아의 여성들은 우리 남자들보다 훨씬 실 제적이고 고상하니까요. " 마리안나는 내리깔았던 눈을 다시 쳐돌었다. "전 낭신의 기대를 입증해 보이고 싶어요, 솔로민...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 도!" 솔로민은 일어났다. "아니 사셔야죠... 사셔야 해요! 무엇보다도 그게 중요하니까요. 그건 그렇 고 당신의 가출에 대해 지금쯤 집에서 어떻게들 하고 있는지 아시고 싶지 않으 세요? 무슨 방도를 강구하고 있지 않을까요? 파벨에게 한마디만 속삭이면 당당 모든 걸 알아다 줄 거예요. " 마리안나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군요. " "그렇죠... 왜 놀랄 만한 사내죠. 그리고 당신이 알렉세이와 결헌하고 싶으 시다면, 역시 그 사내가 조시마를 데려다 줄 겁니다... 기억하세요? 그런 승려 가 있다고 제가 한 말을... 그러나 당분간은 그럴 필요가 없으실 테죠.없으시 죠?" "필요 없어요. " "그러시다면 -없었던 것으로 해두죠." 솔로민은 네지다노프와 마리안나의 방을 갈라놓고 있는 방문으로 다가가 자 물쇠 쪽으로 몸을 굽혔다. "무엇을 보시는 거죠?" 마리안나가 물었다. "자물쇠가 듣나 해서. " "들어요." 마리안나가 이렇게 속삭였다. 솔로민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눈을들지 않았다. "그럼 별로 알아볼 필욘 없겠군요. 시퍄긴 부부의 동태를. " 그는 유쾌한 어 조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으시죠?" 솔로민은 나가려고 했다. "바실리 페토트이치..." "왜 그러시죠?" "제발 말씀해 주세요. 당신은 별로 말이 없으신 분인데, 왜 저에게는 그렇게 말을 잘해 주시죠?전 그것이 얼마나 기쁜지, 당신은 아마모르실 거예요." "왜냐구요?" 솔로민은 크고 거친 손으로 그녀의 보드랍고 조그만 두 손을 잡 았다. "왜냐구요? 그건, 아마 당신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일 테죠. 안녕히 계시 오. " 그는 나가버렸다... 마리안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 에 잠겼다. 잠시 후 그녀는 아직도 사모바르를 가져오지 않고 있는 타치야나를 찾아갔다. 거기서 그녀는 차를 마시던 더러운 항아리를 닦거나 닭털을 뽑기도 하고 어떤 사내아이의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주기까지 했다. 식사시간이 되자 그녀는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네지다노프는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다. 그는 녹초가 된 먼지투성이 몸으로 돌아와서는 털썩 소파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황급히 그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래 어땟어요, 어땟어요? 어서 말해 줘요!" "마리안나, 당신 이런 시 기억하오?' 그는 힘없는 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이토록 슬프지만 않았어도 그 모든 것은 우습게 보였으련만 ·. "기억해요?" "물론 기억하고말고요. " "바로 이 시가 내 첫번째 원정에 딱 들어맞는단 말이오. 아니, 그렇잖지! 사 실은 우스운 요소가 더 많았다고 볼 수 있을 거요. 첫개로 난 연기처럼 쉬운 일이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소. 아무도 나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거든. 그러나 단 한 가지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 있었지. 난 미리부터 얘깃거리를 꾸며 놨어야 했던 거요... 어디서 왔느냐? 하고 물었을 때, 내겐 아무런 준비도 없 었단 말이오. 하긴 그나마 거의 소용 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그저 술집에서 보 드카 한 잔을 권하며, 생각나는 대로 거짓말을 늘어놓으면 됐으니까 말이오. " "그래, 당신... 거짓말을 했나요?" 마리안나가 이렇게 물었다. "거짓말을 한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둘쩨로 나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 은 모두 한결같이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그 불만의 해결 방법에 대해서는 아 무도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단 말이오! 그러나 좀처럼 선전은 잘 먹혀들어가지 않더군. 팜플렛 두 권을 살그머니 방안에 남겨놓고, 다른 하나는 마차 속에 쑤 셔넣고 왔을 뿐이니까... 그것이 어떻게 될지는-하느님만이 아실 테지. 네 사 람에게 팜플렛을 권했더니, 한 사람은 이거 하느님의 책인가? 하고 묻고는 받 지 않았고 또 한 사람은 글을 모르지만 애들에게 갖다 주겠다 고 하며 받더군- 편지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일 데지. 셋쨋번 사내는 "그으래, 그으 래..." 하며 처음에는 맞장구를 치더니 나중에는 별안간 상상도 못 할 욕설을 마구 퍼붓고는 역시 받지 않더군. 넷쨋번 사내는 책을 받은 다음 열심히 사의 를 표시하가까지 했지만, 내가 한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어. 게 다가 한 마리의 개가 내 발을 물지 않겠어. 한 여자는 자기 집 문지방에서 쇠 갈퀴를 흔들며 '예잇, 이 더러운 자식! 모스크바의 악당 같으니! 너 같은 놈은 당장 뒈져버려!' 하고 위협을 하지 않나 말이야. 그리고 또 무기 휴가로 돌아 와 있는 병사 한 사람은 노상 내 등 뒤에서 '이봐, 좀 기다려! 한번 본때를 보 여줄 테니!' 하고 외쳐대지를 않나, 글쎄 그 자는 내 돈으로 술을 마시려고도 했단 말이오!" "그 다음엔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됐느냐고? 발에 물집이 생겨버렸지. 한쪽 장화가 너무 커서 말이 오. 난 지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오. 게다가 술 때문에 머리는 빠개지는 것 같구. " "아니, 많이 마셨나요?" "아냐, 그저 본보기로 약간 마셨을 뿐이오. 하지만 다섯 집이나 돌아다녔으 니, 정말이지 난 진저리가 날 정도로 보드카가 싫단 말이오. 그런데 농군들은 무엇 때문에 그런 걸 마시는지 통 알 수가 있어야지! 만일 벌거숭이가 되기위 해서 보드카를 마셔야만 한다면, 난 손을 들 수밖에!" "그래 아무도 당신을 의심하진 않았나요?" "아무도 없었지. 단 한 사람, 이렇게 뚱뚱한 몸집에 창백한 얼굴을 한 어느 술집 주인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수상쩍게 나를 바라보긴 하더군. 그 친구는 자 기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하더군. '이봐 저 빨강 머리의... 사팔뜨기를 잘감시 해, (난 그때까지만 해도 나 자신이 사팔뜨기라는 사실을 몰랐단 말이오.) 저 놈은 사기꾼이야. 저것 봐. 저렇게 멋을 부리며 마시는 꼴을!' 이때 '멋을 부 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무래도 칭찬하는 말은 아닌 것 같더군. 아마 고골리식 모베톤(저속한 인간) 같은 걸 거요. 기억하겠지만, <검 찰관>에 나오는 그런 거 말이오. 그렇잖으면 내가 보드카를 슬그머니 탁자 밑 으로 쏟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한 말일지도 모르지. 아아, 힘든 노릇이야. 유 미파가 현실 생활과 접촉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거든!" "다음번에는 좀더 나아질 테지요." 마리안나는 이렇게 네지다노프를 위로했 다. "하지만 당신이 자기의 첫 시도를 그렇게 유머러스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저도 기쁘군요... 하긴 정말 그렇게 지루했던 것은 아니죠?" "아니, 지루하기는커녕 오히려 재미있기까지 했소.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시 생각한다면 아마 혐오감을 느끼고 슬픈 생각까지 들 거요." "안 돼요, 안 돼요! 제가 생각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 제가 무슨 일을 했는 지를 말씀드릴게요. 이제 식사를 날라오겠죠. 그전데 말예요, 타치야나가 배추 국을 끓인 항아리를 제가 애쁘게 닦았란 말예요. 재가 말씀해 드릴게요, 모 두... 하나하나, 죄다. " 그녀는 자기가 한 일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네지다노프는 그녀의 이야기 에 귀를 기울이면서 뚫어질 듯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선지 그녀는 여러 번 이야기를 멈추고, 왜 그토록 자기를 바라보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다음, 그녀는 쇼펜하워의 책을 읽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페이지도 읽기 전에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발 밑에 털썩 몸을 던졌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무릎을 껴안으면서 열렬하고도 분별 없는 자포자기의 말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는 죽고 싶다고 했다. 그는 자기가 곧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도 했다... 그 녀는 몸을 움직이지도, 저항하지도 않았다. 발작적인 사내의 포옹에 고요히 몸을 내맡긴 채 그녀는 침착하고도 애정 어린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의 옷주름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이 침착한 태도는 그를 떠밀친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냈 다. 네지다노프는 몸을 일으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용서해 줘, 마리안나. 어제 의 일도 오늘의 일도. 그러고 다시 한 번 말해 줘. 내가 당신을 사랑할 만한 능력이 생길 때까지 나를 기다려주겠다고-그리고 날 용서해 줘." "전 당신에게 맹세했어요... 제 마음은 변할 리 없어요." "아, 고마워. 그럼 안녕." 네지다노프는 방에서 나갔다. 마리안나는 자기 방문을 잠갔다. 30 그로부터 두 주일 후 네지다노프는 자기의 방안에서 삼각 책상에 몸을 굽히 고 친구 블라지미드 실린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한 자루의 기 름 초가 가물거리며 타고 있었다. (이미 한밤도 훨씬 지났을 때였다. 성급히 벗은 진흙투성이 옷들이 소파며 마루 위에 너저분하게 뒹굴고 있었다. 계속해 서 내리는 보슬비가 살며시 창문의 유리를 두드리고, 포근하고 다사로운 비바 람이 큰 한숨 소리처럼 지붕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 친애하는 블라지미드! 나는 일부러 주소를 쓰지 않고 자네에게 편지를 쓰네, 뿐만 아니라 이 편지는 일부러 먼 우체국까지 가서 부쳐질 것일세. 그것은 내가 있는 장소가 비밀이기 때문이지 이 비밀을 밝힌다는 것은 결국 파멸을 뜻하는 것이고, 게다가 나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야. 자넨 그저 지난 2주일 동안 내가 마리안나와 함께 어 느 큰 공장 에서 살고 있다는 것만 알면 될 걸세. 우리 두 사람은 자네에게 편 지를 쓴 바로 그 날 시퍄긴 집에서 도망쳐 나왔지. 한 친구가 우리에게 숨을 곳을 제공해 주었는데, 그의 이름은 바실리라고 부르겠네. 그 사람은 이곳의 우두머리로 말할 수 없이 훌륭한 인물이지. 우리의 공장 체재는 까디까지나 임 시적인 것이야. 행동의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여기 머무르기로 한 거니까. 하 긴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판단해 볼 때 그 시기가 언제 올는지는 전혀 알 수 없 지만! 불라지미드, 나는 정말 괴로운 심정에 놓여 있어. 무엇보다도 먼저 자네 에게 말해 둬야 하겠지만, 나와 마리안나는 함께 집을 나오기는 했지만 우리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남매와 같이 지내고 있단 말이네.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지... 그리고 만일 나 자신이... 그것을 그녀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자 부할 때면 언제든지 내 것이 되어주겠다고 그녀는 약속하고 있는 걸세. 그런데 블라지미드, 나는 그 권리를 자신할 수 없을 것 같네! 그녀는 나를 믿고 있어. 나의 결백성을 믿고 있는 거지. 그러나 나도 그녀를 기만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야. 나는 그녀 이외외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고, 또 앞으로 도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 (이건 아마 틀림없는 사실일 거야.)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이야. 그녀의 운명을 어떻게 영원히 나와 결합시킬 수 있겠나! 나는 송장은 아니더라도 반쯤 죽어가고 있는 사람과 다름없으니 말이 야! 도대체 양심이란 어디에 있는 거지? 자넨 아마 이렇게 말할 테지. 열렬한 애정만 있다면 양심 같은 건 침묵을 지킬 것이라고. 그러나 문제는 내가 송장 이라는 데 있는 거야. 아니 원한다면 정직하고 마음씨 고운 송장이라고 해도 괜찮겠지. 제발 부탁이니 내가 언제나 과장만 한다고 외치진 말아줘...지금 내 가 말하는 것은 진실이야! 진실이고말고! 마리안나는 매우 참을성 있는 여자로 서 지금도 자기가 믿는 사업에 전력을 차하고 있지만... 그런데 나는! 그러나 연애니 개인적인 행복이니 그런 건 모두 집어치우기로 하세. 지금까 지 벌써 2주일 동안이나 나는 이른바 '민중 속'에 들어가 일하고 있지만, 사실 말이지 그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걸세. 물론 죄는 내게 있고 일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슬라브주의자가 아니므로 민중에 의해서, 민중과의 접촉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치료하는 그러한 사람은 아니야. 마치 플 란텔의 복대처럼 자기의 아픈 배에다가 민중을 갖다 대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나는 스스로 민중에게 영향을 주고 싶은 거야. 그러나 어떻게 그 일 을 행하지? 실제로 민중을 대할 때면 나는 그저 민중 속으로 끼여들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뿐, 정작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처지가 되면 그야말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마니 말야! 나 자신도 틀렸다고 느끼곤 하지. 마치 서투른 배우가 남의 역을 하듯이 말이야. 그리고 쓸데없는 양심과 회의. 게다가 초라 하기 그지없는 유머까지 자가에게 돌리고 싶어지니 말이야... 그런 건 사실 말 이지 한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것들이지!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쁘거든. 지금 내가 입고 있는 누더기를 보기만 해도 진저리가 난단 말이야-바실리의 말마따 나, 가면극을 하는 거지 뭐냔 말이야!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먼저 민중의 말 을 배우고 그 풍속이며 습성을 익혀야 한다고 하지만 그건 넋두리야! 모두 넋 두리란 말이야! 우선 자기가 하는 말을 믿어야 해. 그러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말할 수 있는 거지! 언젠가 나는 분리파 예언자의 설교 비슷한 걸 들은 적이 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더군. 교회어와 문어와 속어가 뒤 범벅이 된데다가-설상가상으로 러시아어가 아닌 이상스러운 백러시아어였으니 말이야, '쩨베'를 '쪼베'라 하코, '예스찌'를 '이스찌'라 하는가 하면,'J'를 'Y'처럼 발음하더군. 그러고는 "성령이 강림했도다... 성령이 강림했도다... 하고 꿩처럼 자꾸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거야. 그러나 그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 등글게 퍼져 나가는 우렁찬 목소리, 욜끈 쥔 주먹으로 온몸이 하나의 무쇠 덩어리 같더군! 청중은 그 뜻을 모르면서도 그를 하느님처덤 숭상하며 그의 뒤 를 따르는 거야! 그런데 나는 입을 열 때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용 서라도 비는 듯한 식이니 말이야. 차라리 분리파 교도라도 되었으면 좋겠어. 정말이야. 그들의 교의는 그다지 대수로운 것이 아니거든... 그렇지만 어디서 신념을 찾을 수 있겠나, 신념을! 마리안나는 신념이 있어, 타치야나와 함께 아 침부터 열심히 일을 하고 있어-여기 그런 여자가 한 사람 있는데, 아주 선량하 고 영리한 부인이지. 겸해서 말해 두지만 그 여자는 우리더러 벌거숭이가 되고 싫어한다고 말하면서, 우릴 '벌거숭이가 된 사람'이라 부르고 있다네. 마리안 나는 이 여자와 함에 한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걸세. 그야말로 개미서럼 말이야! 그녀는 손이 빨개지고 거칠거칠하게 튼 것을 기뻐하면서, 필 요하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교수대에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암, 교수 대 같은 건 문제도 아니지! 그녀는 구두까지 벗으려고 한 적이 있다네. 언젠가 맨발로 나갔다가 맨발로 돌아온 적이 있었지. 이윽고 오랫동안 발을 씻는 소리 가 나더군. 그리고 조심조심 발을 옳겨 딛는 것이 아니겠어-맨발에 익숙지 않아 발이 아팠던 모양이야, 그러나 그 얼 굴은 햇빛을 받아 빛나듯 온통 기쁨에 넘친 명랑한 표정이었어. 마치 무슨 보 물이라도 찾아낸 듯이 말이야! 그렇지, 마리안나는 훌륭한 여자야! 그녀에게 내 감정을 이야기할 때면 나도 모르게 자꾸 부끄러운 생각이 앞선단 말이야. 마치 남의 것에 손을 대기라도 하는 듯이. 둘째로 그 눈초리... 오오, 조금도 저항의 빛이 없는 믿음에 찬 그 무서운 눈초리... 전 당신 거예요. 그러나... 아시잖아요! 그리고 실상 그럴 필요가 또 있을까요?" 결국 바꿔 말하자면 "그 냄새 나는 카프탄을 입고 민중 속으로 나가세요..." 하는 듯한 눈초리란 말이 야. 결국 이렇게 되어 나는 그 민중 속으로 나가게 되는 걸세... 아아, 그럴 때면 나는 자신의 신경질과 애민한 감수성, 까다로운 성격을 얼 마나 저주했던지... 이건 모두 아버지의 귀족적인 유산 때문이었지! 내가 살아 야 하는 사회 환경과는 조금도 일치하지 않는 생리적 기관들을 내게 부여해 준 다음, 대뜸 그런 생활 속에 나를 처박아놓다니. 도대체 아버지는 무슨 권리가 있길래, 이런 짓 을 할 수 있었느냔 말이야. 새를 부화해 놓고 그 새를 물속에 집어넣을 수 있느냔 말이야. 유미파를 진흙 속에 처박은 것도 같은 이치지! 그 저주스러운 술-그 '파란 술'의 냄새만 맡아도 메스꺼워 구역질이 날 정도로 민 중파이니 말이야, 그런 민주주의이니 말이야... 결국 나는 아버지를 모록하는 데까지 이르고만 셈이군! 하긴, 민주주의자가 된 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러까 아버지를 탓할 것은_아무것도 업지. 그러나 불라지미드, 난 괴롭기만 하네, 어째선지 기분 나쁜 우울한 상념이 자꾸 찾아드니 말이야! 이렇게 말하만 자넨 나한테 반문할 테지-도대체 지난 2 주일 동안 아무것도 기쁜 일이라곤 없었단 말인가? 일자 무식이라도 선량하고 활기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단 말인가? -자, 뭐라고 말해야 좋을는지? 그 비 슷한 사람을 만나긴 했지... 한 번은 그야말로 좋은 사람을 만났는데, 아주 호 탕하고 원기 있는 젊은이였지. 그러나 내가 아무리 설득을 해도 나 자신이나 내 팜플렛 같은 것엔 전혀 관심이 없었단 말일세-결국 그것으로 끝나고 만 거 지! 이 공장에 파벨이라는 사내가 있는데(바설리의 오른팔격으로 굉장히 영리 하고 교활한 사람인테, 미래의 우두머리 감이지... 이 사내에 대해선 이미 자 네에게도 알린 바 있다고 생각하네.) 그 사내에겐 에르자르라는 농민 출신의 친구가 있다네. 역시 명석한 두뇌와 무엇에든 굴할 줄 모르는 자유 분방한 정 신의 소유자지. 그런데 그 자와 접촉을 할 때면 마치 우리 두사람 사이에 무슨 담벽이라도 있는 듯야 느껴지거든! 시종부정적인 눈으로만 바라보니 말이야! 그리고 또 이런 사람과도 만났지... 무척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는데, "이봐 요, 나리" 하고 말하더군. "그렇게 애매한 말만하지 말고 딱 잘라 말해 주시오 -당신이 가진 땅을 몽땅 내줄 수 있겠소, 없겠소?" 그래서 나는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내가 나리라니!" 하고 대답해 주었지. (그때 나는 "당치도 않 은 소리!"라고 덧붙였던 것 같아.) 그랬더니 "만일 당신이 평민출신이라면, 당 신과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제발 날 그대로 놔둬요!" 하지 않 겠냔 말이야.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다네. 나의 관찰에 의하면, 지나치게 순순히 말을 듣 고 당장 팜플렛을 받아드는 자라면 으레 하나도 믿을 것이 못 되는 졸장부란 말일세. 때에 따라선 이른바 교양이 있고 말솜씨가 능란한 사람을 만날 때도 있지만, 그런 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말만을 자꾸 되풀이하는 버릇이 있단 말이 야. 이를테면 그런것으로 나를 애태운 사람이 있었는데 그 자는 '산물!'이란 말밖에는 모르는 사내였지. 그에게 무슨 말을 하든 간에 그 자는 "결국 그런 산물이로군요!" 하고 나온단 말일세. 정말 아니꼬워서 못 볼 지경이었어!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해두지... 자네도 기억하고 있겠지만, 언젠가 오래 전에 '잉여 인간'이니 '햄럿'이니 하면서 떠들썩하던 때가 있었잖나 말이야. 그런데 어떤지 알겠나? 이젠 농민 사이에서도 그런 잉여 인간을 자주 만나게 되었단 말일세! 물론 색다른 뉘앙스를 띠고 있고... 게다가 대부분이 결핵성 체질의 사나이들이지. 재미있는 사람들이라 기꺼이 우리한테도 찾아오지만 역시 옛날 의 그 햄릿과 마찬가지로 실제 일과는 거리가 멀더군. 자, 이러니 무슨 일을 하느냔 말이야. 비밀 인쇄소라도 만들란 말인가? 그러나 팜플렛이라면 그런 것 이 없이도 현재 남아 돌아가는 형편이거든... "성호를 굿고 도끼를 잡아라", "그저 도끼를 잡아라" 하는 책들이 수두룩하니 말이야. 그럼, 알찬 농민 소설 이라도 쓰면 어떤가. 아마 그런 건 인쇄도 해주지 않을테지. 그렇다면 정말 도 끼를 잡으면 어때? ... 그렇지만 누구를 향해, 누구와 함께 또 무엇을 위해 나 가느냔 말야? 정부군 병사의 관제 총에 쓰러지기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그건 너무나 복잡한 자살 방법이 아니냔 말이야! 그보다는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는 편이 훨씬 나을 테지. 적어도 언제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쯤은 알 뿐 더러 어 디에 총을 쏠지, 자기 스스로 그곳을 택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사실 말이지, 지금 어디선가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나는 당장 그곳으로 달 려갈것만 같아. 그러나 그것은 남을 자유릅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자기 나라의 국민조차 자유롭지 뭇한데, 남의 나라 국민을 자유롭게 하다니!) 나 자신을 청 산하기 위해서일 테지... 여기서 우리를 돌봐주고 있는 친구인 바실리는 행복한 사내지-그도 우리 진 영에 속하고는 있지만, 놀랄 만큼 고요한 사내거든. 그 친구는 서두를 때가 없 단 말이야. 다른 사람 같으면 나도 한바랑 욕설을 퍼부었겠지만... 이 친구에 게만은 그럴 수가 없다네. 그러고 보면 본질적인 것은 신념에 있는 것이 아니 라 성격에 ,있는 것 같기도 해, 바실리는 남이 범접할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 야. 그래서 결국 언제나 정당화되는 거지. 그는 우리와 함께, 특히 마리안나와 함께 자주 얘기를 나누곤 한다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고, 그녀도 나를 사랑하고 있지만 (자네가 이 구절을 읽으면서 웃으리라는 것은 나도 아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니 어떻게 하겠나!) 나와 그녀와는 별 로 얘기가 없단 말이야. 그러나 솔로민과는 의논도 하고 설명도 하며 그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단 말이거든, 그렇다고 내가 그를 질투하는 것은 아닐 세. 그는 마리안나를 다른 곳으로 이주시킬 생각을 하고 있어-적어도 그녀 쪽에 서 그걸 원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나는 괴로운 생각만 드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좀 해보게 -만일 내가 용기를 내어 결혼 말을 꺼낸다 면 그녀는 당장 동의해 줄 것이고, 그 다음 조사마 장로가 무대에 나타나 "이 사야여, 기뻐할지어다!" 등등으로 모든 것은 격식대로 진행이 되겠지. 그러나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내 마음이 가벼워질 리는 없지 않나말이야-우리의 환 경은 조금도 그전과 다를 것이 없을 테니 말야... 어디로 가든 빠져나갈 구멍 은 없어! 블라지미드, 자네도 기억하겠지, 우리와 안면이 있던 주정쟁이 재단 사가 자기 마누라에게 불평하던 말을-이놈의 세상이 나를 잘못 재단해 놓은 걸 세. 하지만 이런 상태도 오래 계속될 것 같진 않네그려. 무슨 일이 준비되고 있 는 듯 한 느낌이 드니 말이야... 하긴 '착수'의 필요성을 요구하며 입증했던 것은 나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이런 식으로 그것을 착수하 려는 거라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시퍄긴 집에 친척뻘 되는 가무족족한 또 한 사람의 친 구에대해 자네에게 말했는지 모르겠군! 아마 그 친구라면, 이만저만한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을 걸세. 벌써 아까부터 이 편지를 마치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안 되네그려! 아무리 참 으려 해도 자꾸 시가 쓰고 싶어지니 말이야, 마리안나에게는 시를 읽아주지 않 는다네. 그녀는 시에 대해선 무자비하단 말이야. 그런데 자네는 가끔 칭찬까지 해주거든.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마운 것은 결코 아무에게도 지껄이지 않는다는 거지, 나는 러시아적인 하나의 공통적인 현상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네... 자, 어쨌든 내 시를 한 번 봐주게. 장 나는 오랫동안 고향 마을을 떠나 있었다. 그러나 논에 띄는 변화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여전히 죽음과도 같은 무의미한 정체 지붕 없는 집, 허물어진 담 여전한 진창, 악취, 궁핍 그리고 우울! 여전히 불손하고 침울한 그 노예의 눈초리... 우리의 농민은 자유를 찾았다지만 그 자유로운 손은 시들어 빠진 버드나무 가지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다. 모든 것,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다 ... 그리고 단 하나 유럽도, 아시아도, 전세계도 우리를 따르지 못하는 것이 있다... 아아! 내 사랑하는 동포들이 이토록 무섭게 잠든 적은 여태껏 없었다! 주위의 모든 젓이 잠자고 있다-마을에도, 거리에도 마차 위에도, 썰매 위에도, 낮에도, 밤에도, 앉아서도, 서서도... 상인도, 관리도 자고, 보초병도 자고 있다. 눈 오는 혹한에도, 찌는 듯한 염서에도! 피고도 자고 법관도 코를 곤다. 농군들도 죽은 듯이 자오 있다. 곡식을 거두고 밭을 갈면서도 자고 있다. 방 아를 찧으면서도 역시 -자고 있다. 아버지도 자소 어머니도 자고 온 집안이 자고 있다. 누구나가 다 자고 있다! 때리는 자도, 얻어맞는 자도! 그러나 황제의 술집만은-눈을 감을 줄 모른다. 다셧 손가락으로 술병을 움켜잡고 이마는 북극, 뒤꿈치는 카프카즈에 기댄 채 깊이 잠들고 있는 내 조국, 성스러운 러시아여! 제발 용서해 주게, 이렇게 우울한 편지를 자네에게 보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 라네. 적어도 마지막만은 자네를 웃기고 싶었는데 말이야. (자넨 아마 몇몇 무 리한 운을 느꼈을 걸세. 이를테면 '몰로차트-콜로차트...' 같은 것이 적지않으 니 말이야!) 다음 편지는 언제쯤이나 쓰게 될까? 글쎄, 편지를 또 쓰게 될는지 도 모르겠군!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네만은 나를 잊지 않으리라 믿 네. 자네의 성실한 친구 A.N. 추신-그렇지, 우리나라의 민중은 잠자고 있어... 그렇지만 만일 누군가가 그 들의 잠을 깨운다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결과가 일어날 것 같 은 생각이 든단 말이야... 마지막 줄을 쓴 네지다노프는 펜을 던지고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자, 엉터리 시 인. 이런 어리석은 생각일랑 잊어버리고 빨리 잠이나 자도록 해!' 그는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오랫동안 잠을 이를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마리안나가 타치야나에게로 가다가 네지다노프의 방을 가로지르면서 그를 깨웠다. 그리고 그가 막 옷을 갈아입을까 말까 했을 때, 그녀는 다시 그의 방으로 왔다. 그 녀의 얼굴은 기쁨과 불만이 엇갈려 있었다. 그녀는 흥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말예요, 알로샤. 벌써 T군에선 시작했다는군요. 여기서 멀지 않대요!" "아니, 뭐가 시 작됐다는 거요? 누가 그럽디까?" "파벨이 그래요.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는 거예요.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여기저기 모여 있대요." "당신이 직접 들었소?" "타치야나가 제게 말하더군요. 아, 저기 파벨이 오네요. 저 사람에게 물어 보세요. " 파벨 은 방으로 들어오자 마리안나가 한 말을 뒷받침해 주었다. "T군이 소란하다는 건 사실이에요!" 턱수염을 혼들며 반짝이는 까만 눈을 가늘게 뜨면 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께서 하신 일이 틀림없어요. 벌써 닷새째나 집을 비우고 계시니까요." 네지다노프는 모자를 들었다. "어디 가시죠?" 마리안나가 물었다. "거기 …… 그곳으로 ……‥ 그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이마에 주름을 모은 채 이렇게 대답했다. "T군으로……‥." "저도 함께 가겠어요. 데리고 가주시겠죠? 큰 수건을 쓸 테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 " 그건 여자가 할 일이 아니오!" "당신이 가시기로 한 건, 잘하신 일이에요. 그렇잖으면 마르켈로프가 당신을 겁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요 …… 저도 당신과 함께 갈 테예요. " "난 겁쟁이가 아니오." 네지다노프는 여전히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분이 우리 두 사람을 겁쟁이로 취급하는지도 모른다는 거죠. 저도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마리안나는 수건을 가지러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파벨은 공기라도 빨아들이듯 "에구구!" 하고 입속으로 나직이 말하고는 곧 사라져버렸다. 솔로민에게 이 일을 알려주려는 것이었다. 마리안나가 채 나타나기도 전에, 솔로민이 네지다노프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네지다노프 는 창문아 손을 얹고 그 위에 이마를 대고서 밖을 향해 서있었다. 솔로민은 네지다노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는 홱 몸을 돌렸다. 헝클어진 머리에 세수 도 하지 않은 네지다노프는 이상하리만큼 거칠어 보였다. 하긴 솔로민의 모습도 최근에 와 선 좀 달라지고 있었다. 얼굴이 길어지고 노래졌으며 윗니가 좀 드러나 보이니까 했다…… 그 역시 불안해 보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균형 잡힌' 마음의 한도 내에서의 불안 이었다. "마르켈로프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가보군." 솔로민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마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지. 첫째 그 자신에게는 물론 …… 또 다른 사람에게도. " "그 곳 사정이 어떤지, 한번 가보고 싶어서 ……‥ 네지다노프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저도." 문지방에 모습을 나타내며 마리안나가 말했다. 솔로민은 천천히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당신은 좀 삼가주셨으면 좋겠군요, 마리안나. 당신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뿐 아니라 우 리까지 걸려들게 할는지도 모르니까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될 수 있는 거예요. 네지다노 프가 가기를 원한다면 잠깐 냄새라도 맡을 겸 다녀오라고 하세요……그것도 잠깐 동안입니 다만. 도대체 당신은 무엇 때문에 가시겠다는 거죠?" "전 저 사람에게 뒤지기 싫은 거예요." "당신은 오히려 그 사람을 속박할 뿐입니다. " 마리안나는 네지다노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우울한 표정으로 옴쭉 달싹 않고 서 있었다. "하지만 위험한 일이라도 있으면?"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솔로민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근심하지 마세요…… 위험이 있다면 보내드리죠." 마리 안나는 말없이 수건을 벗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솔로민이 네지다노프에게 말했다. "이봐, 정말이지 조금만 보고 오도록 하게. 어쩌면 과장된 소문일지도 모르지. 제발 부탁 이니 조심스럽게만 해줘. 아무튼 길잡이는 딸려 보내겠네. 되도록 빨리 돌아오게. 약속하겠 지, 네지다노프? 약속하는 거지?" "그래." "좋아, 꼭이야." "여기에 있는 사람은 모두 자네의 말에 복종하도록 되어 있잖나 말야! 마리안나를 위시해 서 모두!" 네지다노프는 작별인사도 없이 훌쩍 복도로 나가버렸다. 어둠 속에서 파벨이 나 타나더니 장화의 징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층계를 따라 앞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그가 네지 다노프의 안내역을 맡았던 것이다. 솔로민은 마리안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당신, 네지다노프의 마지막 말을 들었습니까?" "네, 제가 그 사람보다 당신 말을 더 잘 들으니까 화를 내는 거예요. 그리고 그건 사실이구 요. 전 그분을 사랑하고는 있지만, 당신 말을 따르고 있으니까요. 그분은 제게 소중한 사람 이죠, 하지만 당신은 가까운 분이시구요." 솔로민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은 어루만졌다. "이번 사건은, 매우 불쾌한 일이에요." 그 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만일 마르켈로프가 그 일에 관련되어 있다면 그는 파멸이니까 요." 마리안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파멸이라뇨?"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어중간한 일을 하지 않을 뿐더러, 남의 뒤에 숨지도 않을 테니까 요." "파멸!" 마리안나는 또다시 이렇게 속삭였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아, 바실리 페토로이치, 전 그분이 가엾어 죽겠어요. 왜 그분은 승리를 거 둘수 없는거죠? 왜 꼭 파멸을 해야만 하는 거예요?" "마리안나, 그런 일에서는 언제나 일선에 서는 사람은 파멸하게 마련인 겁니다. 비록 그들 이 성공한다 할지라도 말예요, 그러나 그 사람이 계획한 이번 사업은 제1선, 제2선뿐만 아 니라 제 10, 제20선에 서 있는 사람까지도 파멸할지 모르죠……‥." "그럼 우리도 마지막까지 지탱해 나갈 수가 없을까요?" "당신이 생각하고 계시는 그것 말입니까? 도저히 불가능하죠-우리의 눈으론 그걸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신적인 눈이라 면…… 문제가 다르죠. 지금 당장이라도 그걸 바라볼 수 있어요. 거기엔 아무 제한도 없으니 까요. " "그렇다면 솔로민씨, 당신은 왜 ……‥." "뭐죠?" "당신은 왜 이런 길을 걷고 계시는 거죠?"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목적으로 보자면 마르켈로프나 나나 마찬가지지만 길 이 서로 다를 뿐이죠. " "불쌍한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마리안나는 침통하게 말했다. 솔로민은 또다시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 "자, 그만해 둡시다. 아직도 확실한 건 모르니까요. 파벨이 어떤 소식을 가져오는지 두고 봅시다. 우리의 …… 처지로선 마음가 짐이 단단해야 해요. 영국 사람들은 '죽음을 논하지 마라'고 하지만 좋은 속담이죠. '재난이 오거든 문을 열어라!' 하는 러시아의 속담보다는 훨씬 낫거든요. 미리부터 슬퍼할 필은 없 으니까요." 솔로민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게 알선해 주시겠다던 일자리는 어떻게 됐죠?" 마리안나가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그 녀의 두 볼에는 아직도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으나 이미 눈에는 슬픈 빛이 가신 뒤였다. 솔로민은 다시 앉았다. "아니, 당신은 그렇게 빨리 여길 떠나고 싶으세요?" "오 아녜요! 하루속히 유익한 인간이 되고 싶어 그러는 거예요." "마리안나, 당신은 여기서도 매우 유익 해요. 우릴 버리지 말고 좀더 기다려주세요. 무슨 일이죠?" 방으로 들어온 타치야나를 보고 솔로민은 이렇게 물었다. (솔로민은 파벨에 대해서만 존칭어를 쓰지 않고 있었다. 어쩌다 갑 자기 그에게 경어를 쓰게 되면 파벨이 무척 실망하기 때문이었다. ) "글쎄, 어떤 여자 분이 나타나서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를 만나고 싶다는거예요." 두 손을 벌리고 웃으면서 타 치야나가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 그런 사람은 없어요. 그런 사람은 정말 없다고◎ 하고 말 해 주었어요. 그런 이름은 금시초문이라고 말예요. 그러더니 그분이 ……‥." "도대체 누 구예요, 그분이란?" "바로 그 여자 분 말예요. 글쎄 그분은 이 종이에 자기 이름을 적더니, 이걸 보여주면 자 길 들여보내 줄 거라는 거예요. 정말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가 집안에 안 계시다면, 잠시 기다려도 괜찮다고 하면서요." 종이에는 큰 글귀로 마슈리나라고 쓰여 있었다. "들여보내세요." 솔로민이 이렇게 말했다. "마리안나, 그 여자가 여기 들어와도 상관없 으시겠죠? 그 여자 역시 우리 동지이니까요." "물론, 괜찮고 말고요. " 얼마 후 마슈리나의 모습이 문지방 위에 나타났다. 그녀는 서두 에서 말한 복장 그대로였다. 31 "네지다노프 씨는 집에 안 계세요?" 마슈리나가 이렇게 물었다. 그 다음 솔로민을 보자, 그녀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솔로민씨!" 그리고 마리안나에게 는 슬쩍 곁눈질만 했을 뿐이었다. "곧 돌아올 겁니다. " 솔로민이 대답했다. "그런데 실례지만 누구한테 들으셨나요 ……." "마르켈로프한테 서요. 그렇지만 이 사실은 기미 거리에서도…… 두서너 사람에게 알려져 있더군요." "정말이오?" "네, 어떤 사람이 지껄인 거겠죠.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네지다노프의 변장도 드러났다 는 거예요. " "드디어 그 변장이 들통이 났군 그래!" 솔로민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소개하 겠습니다. " 그는 큰 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시네츠카야양 그리고 마슈리나양! 자 앉으 시죠." 마슈리나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전 네지다노프 씨에게 전할 편지를 가져왔어요. 그리고 솔로민씨, 당신에게는 전언을 부탁 받았어요. " "어떤 전언이 죠? 누구한테 서요?" "당신이 잘 아는 사람입니다…… 어때요, 이쪽은……준비가 다 됐나요?" "아무것도 준 비된 거라곤 없습니다. " 마슈리나는 그 조그만 눈을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뜨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무것 도, " "아니, 정말 아무것도?" "정 말 아무것도. " "이렇게 말해도 괜찮은 가요?" "네, 말하세요. " 마슈리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끄집어냈다. "불좀 빌릴 수 있을까 요?" "자, 여기 성냥이 있습니다. " 마슈리나는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분들'은 좀더 다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는 말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주위의 동태도 여기 같지는 않거든요. 하긴 이곳은 어디 까지나 당신 자신의 일이니까……‥ 전 잠깐 여기 들렀다 가려고 온 거예요, 네지다노프 씨 를 만나서 이 편지만 전하면 되니까 요. " "도대체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여기서 먼 곳이죠." (사실은 제네바로 떠나게 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솔로민에게 그 말 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는 솔로민을 완전히 신임할 수 없었을 뿐더러 옆에 모르는 여 자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어도 제대로 모르는 마슈리나를 제네바로 파견키로 한 것은 그녀도 모르는 어떤 사람에게 포 도 덩굴을 그린 반 장의 마분지와 279루블의 은화를 직접 전해 주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 "참, 오스트로두모프는 어디 있습니까? 당신과 함 께 있나요?" "아녜요. 이 근처에 머무르고 있어요. 하지만 그분은 자진해서 일을 해낼 사 람이죠. 피멘은 결코 파멸하지 않을 테니 근심하지 마세요." "당신은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죠?" "농군 마차를 타고 왔죠.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한 번 더 성냥을 빌려주세요." 솔로민 은 성냥에 불을 댕겼다. "바실리 페토트이치!" 갑자기 문밖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렇게 속삭였다. "좀 나와주세 요!" "제발 나와주세요." 바깥의 목소리는 애원하는 어조로 끈덕지게 되풀이되고 있었다. " 저기, 다른 직공들이 찾아와서 뭐라고 말하는데, 파벨 예고르이치가 없으니 ……‥." 솔 로민은 실례한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마슈리나는 물끄러미 마리안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어 마리안나가 멋쩍을 정도였다. "실례입니다만," 갑자기 마슈리나는 토막토막 끊기는 거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전 평민이라서, 그렇게 …… 점잖게 말할 줄은 몰라요. 제발 언짢게 생각지 마시고, 원하신다면 제 물음에 대답해 주세요. 당신이 시파긴 집에서 나왔다는 그분이신가요?" 마리안나는 다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래도 대답은 했다. "네, 그래요." "골지다 노프씨와 함께?" "네, 맞아요." "자, 어서 ……제게 손을 주세요. 제발 저를 용서해 주시구요. 그분이 사랑하는 사람이라 면 틀림없이 좋은 분일 테니까요. " 마리안나는 마슈리나의 손을 잡았다. "당빈, 네지다노프를 잘 아세요?" "네, 알죠. 페테 르부르크에서 자주 만나 뵈었어요. 그러니까 이런 말도 하는 거죠.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도 제게 말하더군요……‥." "아니, 마르켈로프가요! 최근에 그분을 만났었나요?" "네, 얼마 전에요. 지금은 떠나 고 없어요." "어디로?" "명령받은 곳으로 ……‥." 마리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마슈리나양, 그분의 앞날이 두려워요. " "우선 저 보고 '양'이라고 부르지 말아줘요! 그런 습성은 버려야 해요. 둘째로 당신은 '두렵다'고 하 셨는데, 그것도 역시 필요 없는 말이에요. 자기 자신에게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나의 일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요. 자기 자산에 대한 생각이나 근심 같은 건 일절 말 아야 해요. 하긴……지금 막 떠오른 생각입니다만 저 같으면, 표클라 마슈리나 같은 여자라 면 쉽사리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겠죠. 전 못생긴 여자니까요. 그런데 당신은…… 당신은 미인이거든요. 그러니 당신은 아마 더 힘이 들 거예요. (마리안나는 눌을 내리깔고 얼굴을 돌렸다. )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가 제게 말하더군요 ‥‥ 그분은 제가 네지다노프에게 굴 편지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 그 래,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공장에 가지 말아요. 편지를 가져가면 안 돼요. 그곳 생활을 온 통 뒤흔들어놓을 테니까. 그만둬요! 두 사람은 지금 거기서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 그 대로 놔두는 게 좋아요! 방해하면 안 돼요!'라고요. 사실 저도 방해하고 싶진 않은데…… 이 편지를 어떻게 하면 좋죠7" "편지는 꼭 전해 줘야 해요." 마리안나가 대답했다. "그런 데 정말 그렇게까지 마음이 착할 수 있을까요?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말예요! 정말 그분은 죽게 되는 건가요, 네 마슈리나……그렇잖으면 시베리아 행일까요?" "아무려면 어때요? 시베리아라고 해서 도망치지 못하는 건 아니잖겠어요? 그리고 목숨 을 버린다는 멋이 뭐가 아깝죠? 인생이란 어떤 사람에게는 달지만 어떤 사람에겐 쓴 거예 요. 구분의 인생 역시 단 것은 못 되니까요." 마슈리나는 또다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뚫어질 듯이 마리안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정 말 아름답군요." 마슈리나는 마침내 이렇게 외쳤다. "마치 예쁜 새 같아요! 그런데 알렉세이 는 곧 돌아올 것 같지 않군요…… 당신에게 이 편지를 맡기도록 할까요? 기다려도 소용 없 으니 !" "제가 전해 드리죠. 믿으셔도 좋을 거예요." 마슈리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데요," 이윽고 마슈리나 가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당신은 마음속으로부터 그분을 사랑하시나요?" "네." 마슈리나는 육중한 머리채를 한 번 흔들었다. "그렇다면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는지에 대 해선 물어볼 필요도 없겠군요! 그러나저러나 전 이제 가봐야겠어요. 그렇잖으면 늦을 것 같군요. 그분께 전해 주세요. 제가 여기 와서 안부를 전하더라구요. 마슈리나가 왔었다고 말하세요. 제 이름을 잊지 않으 시겠죠, 네? 마슈리나예요. 그런데 편지는…… 가만있자, 내가 어디더라?" 마슈리나는 자 리에서 일어나 돌아서더니 사방의 주머니를 뒤지는 척하면서 조그맣게 접은 종잇조각을 재 빨리 입으로 가져다 꿀꺽 삼켜버리고 말았다. "아아, 큰일났군! 이런 바보짓을 하다니 그걸 떨어뜨렸나봐요. 떨어뜨린 것이 틀림없어. 아아 어떡하지! 그걸 주운 사람이 없어야 할 텐데…… 없어요, 아무 데도 없어요. 결국 세르 게이 미하일로비치가 원하던 대로 되고 말았군!" "좀더 찾아보세요." 마리안나가 속삭였다. "아니에요. 찾을 것도 없어요! 잃어버린 걸요!" 마리안나는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럼, 제게 키스해 주세요!" 마슈리나는 덥석 그녀 를 안더니 사내같이 억센 힘으로 꼭 자기 품에 껴안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짓은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마슈리나는 들릴락 말락 한 목소 리로 말했다. "양심에 거역되는 일인 걸요…… 생전 처음이에요! 제발 조심하라고 그분에게 일러주세 요…… 그리고 당신 두요. 두고 보세요! 곧 이곳 사람들도 모두 재난을 쥐게 될 거예요, 큰 재난을. 그러니 두 사람 모두 떠나도록 하세요. 어서 ……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큰 소리로 똑똑히 이렇게 덧붙였다. "아, 그리고 한 가지만…… 그분께 말해 주세요 ……아니, 말할 필요 없겠군요. 됐어요." 마슈리나는 문을 황 닫고 나가버렸다. 마리안나는 깊은 생 각에 잠긴 채 방 한복판에 서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마침내 마리안나는 이렇게 흔잣말을 했다. "내가 그분을 사 랑하는 것보다 그 여자의 사랑 쪽이 훨씬 더 큰 것이 아닐까! 게다가 그녀의 암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또 솔로민은 왜 갑자기 여기서 다음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 그녀 는 방안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공포와 울분과 경악이 뒤섞인 이상한 감정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다. 왜 자기는 네지다노프와 함께 떠나지 않았을까? 솔로민이 말렸던 것이 다…… 그렇지만 그 솔로민은 지금 어디 있는 걸까? 그리고 주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마슈리나가 그 위험한 편지를 자기에게 주지 않은 것은 물론 네지다노프에 대한 동정 때문이었으리라…… 그렇지만 왜 그녀는 그런 반항적인 행위를 결심하게 되었을까? 도대체 무슨 권리가 있길래? 그리고 또 왜 자기는 그녀의 그러한 행위에 그토록 감동했던 것일까? 아니, 정말 자기는 감동했던 것일까? 못생긴 여자가 젊은 사내에게 관심을 갖는다 는 것은…… 사실상 조금도 놀랄 만한 일은 못 되지 않는가 말이다. 그리고 왜 마슈리나는 네지다노프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의무감보다 강하리라고 상상을 했을까? 어쩌면 자신은 전 혀 그런 회생을 요구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도대체 그 편지에는 무엇이 적혀 있 었을까? 즉각 행동에 옮기라는 명령은 아닐는지? 그렇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마르켈로프는? 그분은 지금 위태로운 상태에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마르켈로프는 우리 두 사람을 용서하고 우리에게 행복의 가능성을 주기 위해 우릴 메 놓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이건 또 무엇일까? 역시 관대한 마음에서일까 …… 아니면 멸시감에서일까? 도대체 우리 두 사람이 그 지긋지긋한 집을 도망쳐 나온 것은 둘만 이 비둘기처럼 달콤한 말을 주고받기 위해서였을까? 마리안나는 이런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짜증 어린 그녀 의 울분은 더욱더 강해만 갔다. 게다가 그녀는 자존심까지 상했던 것이다. 왜 모두 자길 버리고 가는 것일까-모두 다. 그 '뚱뚱한' 여자는 자기더러 '예쁜 새'라고도 하고 미인이라 고도 했다…… 차라리 인형이라고 하지 않은 게 이상하다. 그리고 왜 네지다노프는 혼자 가지 않고 파벨을 데리고 간 것일까? 마치 보호자가 없인 안 되기라도 하는 듯이! 그리고 솔로민의 신념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는 결코 혁명가는 아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한 자 기의 태도가 심각하지 않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 모든 상념들 이 서로 엎치락뒤치락 뒤엉키면서 마리안나의 열띤 머리 속에서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고 남자처럼 팔짱을 긴 마리안나는 마침내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곤 그녀는 의자 등에 기댈 생각도 않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긴장될 대로 긴장된 그녀의 모습 은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 일어날 것만 같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타치 야나한테 가서 일한다는 것도 마음 내키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기다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녀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울화가 치밀 정도로 끈기 있게. 가끔 그녀는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어쩠든 매일밤 이었다! 한순간은 이 모든 것 이 질투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초라한 마슈리나의 모습을 상기하 고는 그저 어깨를 흠칫하고 손을 흔들었을 뿐이다……그것도 실제 그렇게 한 것이 아니 라, 그런 몸짓에 상응한 움직임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았을 뿐이었다. 마리안나는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층계를 올라오는 두 사람의 구듯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시선이 문으로 쏠렸다…… 점점 발걸음이 가까이 다가왔다. 문이 열렸다- 그러자 파벨에게 한 팔을 부축 받은 네지다노프가 문지방에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죽은 사 람처럼 핏기가 없었다. 모자도 쓰지 않은 채 축축이 젖은 머리카락은 이마 위로 흘러내리고 두 눈은 멍청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벨은 그를 부축한 채 방을 가로질러 (네지다노프 의 발은 부정확하고 약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 소파 위에 앉혔다. 마리안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무슨 일이에요? 어디 아 픈 가요??" 그러나 네지다노프를 앉히고 있던 파벨은 반쯤 몸을 돌리고 어깨 너머로 미소 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곧 나을 테니까요…… 그런 일에 익숙하지 가 않아서." "도대체 저렇게 된 거예요?" 마리안나가 끈덕지게 되물었다. "좀 취했을 뿐입니다. 공복에 마셨기 때문에 그만 이렇게!" 마리안나는 네지다노프에 게로 몸을 굽혔다. 그는 소파 위에 비스듬히 반쯤 몸을 눕히고, 가슴 위에 머리를 떨어뜨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보드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완전히 취해 있었던 것이다. "알렉세이!" 마리안나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이 새어나왔다. 네지다노프는 가까스로 무거운 눈꺼풀을 열고 빙긋 웃으려고 했다. "아아, 마리안나!" 그는 돌아가지 않는 혀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언제나 벌‥ 벌 거‥ 벌거숭이가 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난 지금 정말로 벌거숭이가 된 거요. 왜냐 하면 러시아의 민중은 언제나 취해 있으니까, 결국. "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 다음 영문 모를 말을 뭐라고 지껄이더니 눈을 감고 잠들어버렸 다. 파벨은 정성껏 그를 소파 위에 눕혔다. "근심하지 마세요,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 파벨은 이렇게 되풀이했다. "한 두어 시간 자고 나면 다시 거뜬히 일어날 겁니다. " 마리안나는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자기의 질눈이 파벨을 더 붙잡는 결 과가 될 것 같았다. 그녀는 혼자 있고 싶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면전에서 파벨에게 더 이상 그의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창문 쪽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파 벨은 곧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리고는 카프탄 자락으로 네지다노프의 발을 정중히 감싸고 머리 밑에 베개를 괴고는, 다시 단 번 "괜찮아요!" 하고 말한 다음 발끝으로 걸어 나갔다. 마리안나는 뒤돌아보았다. 네지다노프의 머리는 베개 속에 푹 파묻혀 있었다. 파리한 그 의 얼굴에서는 중환자에게서와 같은 부동의 긴장감을 엿볼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그녀는 생각했다. 32 네지다노프가 이렇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카벨과 함께 농군 마차에 탈 때부터 네지다노프는 무서운 흥분 상태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마차가 공장 뜰에서 한길로 나와 T군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하자, 그는 곧 지나가는 농군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그들을 멈춰 세워서는 영문 모를 짤막한 말들 을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다. "왜 너 회들은 잠을 자고 있느냐? 일어나라! 때가 왔다! 세금을 거부해라! 지주를 타도해라!" 어떤 농군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농군은 그의 외침에는 아랑곳없이 그대로 그의 옆을 지나쳤다. 모두 그를 주정쟁이로 보았던 것이 다. 한 농군은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서는 도중에서 어떤 프랑스인을 만났는데 도무지 영문 모를 말만 외쳐대더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네디다노프도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짓이 어리 석고 무의미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나, 이윽고 점점 흥분해 감에 따라 나중에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조차 분별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파벨은 그를 진정시키려고 애쓰면 서, 제발 그러지 말고 이제 곧 T군 경계에 있는 큰 마을-바비 클류치에 도착하니, 거기서 동태를 살펴보면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네지다노프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 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은 거의 절망에 가까운 비통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건장한 목덜 미에 갈기를 짧게 깎은 원기 왕성한 말이 그들의 마차를 끌고 있었다. 말은 마치 급한 용건 으로 필요한 인물을 나르기라도 하는 듯 끊임없이 고삐를 내두르고 힘나게 네발을 옮겨 다 니며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바비 클류치에 이르기 전, 네지다노프는 한길 옆의 열려진 곡 물 창고 앞에 여덟 명 가량의 농군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황급히 마차에서 띄어 내려 그들 쪽으로 달려가더니 두 팔을 휘두르기도 하고 값지기 외쳐대기도 하면서 성급한 어조로 5분 가량 지껄였다. 수없이 지껄이는 분명치 않은 말 가운데서도 "자유를 위해서! 앞으로! 가슴으로 밀고 나가자!"하는 목쉰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농군들이 창고 앞에 모 인 것은 비록 겉치레만이라도 (창고는 마을의 공유물이었기 때문에 텅 비어 있었다. ) 다시 한번 창고를 채울 수는 없을까 하는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농군들은 뚫어지게 레지다 노프를 바라보면서 자못 흥미 있게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듯했으나, 무슨 말인지 그 뜻을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네지다노프가 마지막으로 "자유다1" 하고 외치고 그들 옆을 떠나 마차로 달려가자, 그들 중에서 가장 눈치가 빨라 보이는 한 농군은 깊이 생각 하는 듯이 머리를 흔들고는 "굉장히 까다로운 양찬이군!" 하고 말하는가 하면, 또 한 사람은 "필경 어느 상관임에 틀림없어1" 하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다른 한 눈치 빠른 농군 은 "뻔하지 뭐야, 그렇잖곤 그렇게 핏대를 올릴 리 없거든. 이번엔 우리 돈을 갚아줄 것 같 군!" 하고 말했다. 한편 네지다노프는 농군 마차에 올라 파벨 옆에 앉으면서 마음속으로 이 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아!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냐! 그러나 민중에게 폭동을 일으 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우리들 중 아무도 얼지 않는가. 아 니,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지. 이것저것 궁리할 시간이 어디 있느냔 말이야! 그 대로 나가는 거다! 마음이 괴로워도 …… 내버려두는 거다!' 그들의 마차는 거리로 접어 들었다. 거키 한복판의 어느 술집 앞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파벨은 네지다노프를 말리려고 했으나, 그는 재빨리 몸을 비켜 마차에서 뛰어내려 "형제들!" 하고 울부짖으며 군중속으로 뚫고 들어갔다……사람들이 그에게 조금씩 길을 비켜주었다. 네지다 노프는 아무도 바라보지 않고 성난, 울먹이는 목소리로 또다시 선전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 나 이번에는 창고 앞에서와는 달리 엉뚱한 결과가 일어났다. 기름 투성이의 짧은 반코트에 높다란 장화를 신고 양피 모자를 쓴, 그리고 턱수염은 업어도 몹시 사납게 생긴 엄청나게 큰 청년이 뚜벅뚜벅 네지다노프에게로 다가오더니, 그의 어깨를 힘껏 내리치며 이렇게 말했 다. "됐어, 젊은이!" 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잠깐만 기다려! 마른 숟가락에 입이 찢어진다는 말 알고 있겠지? 이리 와! 여기서 말하는 게 훨씬 편할 테니." 그는 이렇게 말 하고 네지다노프를 술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나머지 사람들도 우르르 그들의 뒤를 따랐다. "미혜이치!" 그 젊은이가 외쳤다. "자, 10카페이카짜릴 줘! 내가 좋아하는 그 잔 말야! 친구를 대접하려는 걸세.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어떤 집안의 어떤 종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담하게 지주를 욕하고 있으니 말이야. 자, 마셔" 술이 바깥으로 흘러내려 땀투성이가 된 듯 젖어버린 철철 넘치는 무거운 술잔을 내리면서, 그는 네지다노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 가 정말 우리 일을 근심해 준다면 이걸 마디란 말이야!" "어서 마셔라!" 주위의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네지다노프는 술잔을 잡자 (그는 탄산가스에라도 취한 듯했다) "여러분의 건강을 위해서!" 하고 외치고는 단숨에 죽 들이켰 다. 오오! 마치 억수처럼 퍼붓는 폭탄 속이나 총검의 대열 속으로 뛰어드는 듯한 필사적인 각오로 술을 마신 것이다…… 그러 나 그 후 어떻게 되었던가. 네지다노프는 무엇엔지는 모 르지만 등골에서 발끝까지 호되게 두들겨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목구멍도 가슴도 모두 타 버린 것 같았다. 눈에서는 눈물이 솟아났다…… 혐오의 경련이 온몸을 스쳐갔다. 그는 가까 스로 그것을 가라앉혔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가라앉히기 위 해 그는 목청을 다해 외쳐댔던 것이다. 어두컴컴한 술집 안은 갑자기 무덥고 답답하고 끈적끈적해 왔다.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는 것 같았다. 네지다노프는 말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열심히 지껄였 다. 격노한 듯이 맹렬히 외쳐 대기도 하고, 넓은 나무 판자 같은 손바닥을 두들기고 누군가의 끈적끈적한 수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반코트를 입은 몸집이 큰 젊은이 역시 네지다노 프와 키스를 했지만, 그때 네지다노프의 늑골은 으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청년은 무뢰한인 것이 분명했다. "목구멍을 찢어놓겠다!" 그는 이렇게 으르렁거렸다. "우리 동료에게 못된 짓을 하는 놈 은 누구든지 간에 목구멍을 찢어놓고 말 테다! 그렇잖으면 대갈통을 까부수든지 …… 단단 히 흔을 내줄 테다! 내가 누군지나 알아? 난 백정이었으니 그런 일엔 능숙한 말이야." 이렇 게 말하면서 그는 주근깨투성이의 커다란 주먹을 보여주었다……그런데 놀랍게도 또다시 어 떤 사람이 호통을 쳤다. "자, 마셔!" 네지다노프는 또다시 그 저주스러운 독배를 들이켰다. 그러나 이 두번째의 술은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마치 무딘 갈고리로 오장 육부를 할퀴어 놓는 것만 같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파란 동그라미가 어른거렸다. 소음이 높아지고 왁자지 껄하니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오, 무서운 일이다. 세번째의 술잔이 나왔다…… 과연 그 잔을 들이킬 것인가? 불그죽죽한 코며 먼지투성이의 머리, 햇볕에 그을린 목덜미, 어망 처럼 주름 잡힌 뒤통수가 서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투박한 손이 그를 잡았다. "자, 기운을 내봐!" 거친 목소리들이 외쳐댔다. "얘기를 해! 그저께도 곡 너처럼 생긴 타 고장 놈이 잘난 듯이 떠들어댔단 말이다. 자 해봐, 무슨 말이든!" 네지다노프는 발밑의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자기 목소리마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이것이 죽음이라는 것일까? 그 다음 갑자기 ‥‥ 그는 신선한 공기의 감촉을 얼굴에 느꼈다-그곳에는 이미 혼잡도, 술에 취한 붉은 얼굴도 없었고, 술기며 양피, 타르, 가죽 냄새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파벨과 나란히 농군 마차 위에 앉아 있었다. 처음엔 그도 몸을 꿈틀거리며 "어디 가는 거야? 멈춰! 난 아직 아무것도 그들에게 말하지 못했단 말이야. 자세히 납득을 시켜야 해……‥ 하고 외쳐댔으나 이윽고 그는 이렇게 덧붙 였다. "에잇, 망할 것 이봐, 능글맞은 친구. 자네 생각은 어때?" 파벨은 이에 대해 "그야 지주들이 없어지고 땅이 모두 우리 것이 된다면 좋지요-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 요?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포고는 안나왔으니까요" 하고 대꾸했다. 그러고는 살그머니 말을 뒤로 돌리고 갑자기 채찍으로 말 잔등을 내리쳤다. 마차는 소란하고 시끄러운 술집을 뒤로 하고 공장을 향해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네지다노프는 꾸벅꾸벅 졸면서 마차에 흔들리고 있었다. 상쾌한 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구질구질한 상념들을 쫓아주었다……‥ 다만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다하지 못한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또다시 상쾌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가라앉혀 주었다. 그 다음 네지다노프에게는 마리안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른거리면서 찌르는 듯한 굴 욕감이 스치고 지나갔으나 곧 죽음과도 같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이것은 모두 나중에 파벨이 솔로민에게 말한 것이다. 파벨은 자기가 네지다노프의 폭음 을 말리지 않았다는 것까지 숨기지 않았다……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그를 술집에 서 끌어내 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놓아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완전히 그분이 녹초가 되었을 때 저는 절을 하며 간청을 했습죠. '여러분!' 제발 이 젊은이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보다시피 이렇게 젊으니까요……‥ 했더니 놓아주더군요. 그러나 벌금으로 50카페이카를 내라고 하길래 하는 수 없이 주고 왔습죠. " "그거 잘했군." 솔로민은 그를 칭찬했다. 네지다노프는 자고 있었다. 그리고 마리안나는 창가에 앉아서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네띠다노프와 파벨이 돌아오기 전까지 그녀를 흥분시켰던 분노 에 가까운 불쾌한 감정과 상념이 이젠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네지다노프의 그 러한 모습도 결코 불쾌하거나 언짢게 생각되지 않았다-그녀는 네지다노프를 가엾게 여길 뿐이었다. 그가 탕아도, 주정뱅이도 아니라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네지다노프가 눈을 떴을 때 그에게 할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수치스러워하거나 후회 를 하지 않도록, 어디까지나 정답게 말을 걸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재난을 당하게 된 경위를 자기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잘 이끌어 줘야겠다. ' 그녀는 흥분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몹시 슬펐다…… 말할 수 없이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기가 동경 하는 세계로부터 참된 냄새를 맡은 듯이 느셔졌다. 그리고 그 거칠고 암담한 현실에 전율 을 금할 수 없었다. 도대체 자기는 어떤 마력의 희생이 되려는 것인가? 그렇지만,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고 곧 지나가게 마련이다. 순간적인 인상에 지나지 않 는다. 너무나 뜻밖이었기 때문에 놀랐을 뿐인 것이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네지다노프가 누워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그녀는 잠들었는데 도 괴롭도록 파리한 그의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아주고 머리카락을 의로 넘겨주었다…… 그 녀는 또다시 네지다노프가 측은히 여겨졌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가 병든 아이를 근심하는 거나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다소 언짢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문을 잠그지 않은 채 슬그머니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또다시 여러 가지 상념이 그녀를 엄습했다. 시간이 흘러서 1분 1분 사라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것이 유쾌하기까지 했다.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그녀는 다시금 무엇인가를 기다 리기 시작했다. '솔로민은 어디 잤을까!' 삐걱 하고 문이 열리면서 타치야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로군 거의 짜증스런 목소리로 마리안나가 물었다.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 나직한 소리로 타치야나가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뭘 그렇게 시무룩해 계세요. 흔히 있는 일인데요, 뭐. 그래도 다행히." "제가 뭐 시무룩하다고 그러세요, 타치야나 오시포브나." 마리안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 챘다. "알렉세이 드미트리치는 건강이 좀 나쁠 뿐 대단하진 않아요 ……." "그러시다면 됐어요! 전 또 마리안나 비젠치예브나께서 오시지 않길래, 흑시 무슨 일이라도 있지 않는 가 해서요. 그러나 이런 경우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놔두는 게 상책이란 길이 있기 때문에 저도 여기 오려곤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가 공장에 나타나질 않았 겠어요. 요렇게 키가 작은데다가 절름발이란 말예요. 글쎄 다짜고짜 알렉세이 드미트리치를 만나겠다는 거예요!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오늘 아침에도 그 절름발이가 왔었지요. 만일 알 렉세이 드미트리치가 안 계시다면 바실리 페토트이치를 만나게 해달라! 매우 중대한 용건 때문에 왔으니, 만나지 않고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거예요. 전 아침의 그 여자와 마찬가 지로 그를 내쫓으려고 했어요. 바실리페토트이치도 안 계시다…… 어디 나가셨다고 말했습 니다만, 그 절름발이는 돌아갈 순 없다, 밤까지라도 기다리겠다…… 하면서 뜰을 거닐고 있 는 거예요. 자, 이리, 복도로 나와보세요. 창문으로 그 사람을 볼 수 있을 테니 …… 어떤 사 람인지 아실 수 있겠는지 ……‥." 마리안나는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네지다노프 옆을 지나쳐야만 했다. 그리고 또다시 병적으로 찡그린 이마를 보고, 그녀는 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었다. 뽀얗게 먼지 긴 유리창 을 통해 그녀는 타치야나가 말해 준 방문객을 보았다. 자기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바로 이 때 집 모퉁이로부터 솔로민이 나타났다. 조그만 절름발이 사내는 재빨리 그에게로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솔로민은 그의 손을 잡았다. 사내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발소리가 층계로부터 들려왔다. 이 방으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 마리안나는 재빨리 자기 방으로 돌아와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방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녀는 무서웠다…… 그러나 무엇이 무서운지는 그녀 자신도 알수 없었다. 솔로민의 머리가 문에 나타났다.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 당신 방으로 좀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당신이 꼭 만나봐야 할 사람을 데리고 왔으니까요. " 마리안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솔로민 뒤에 나타난 사람은 바로 파클린이었다. 33 "전 주인 되시는 분의 친구올시다. " 겁에 질린 불안한 얼굴을 감추기라도 하는 듯 고 개를 푹 속여 마리안나에게 인사를 하면서 파클린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바실리 페토 트이치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알렉세이 드미트리치는 자고 있군요. 듣자니 몸이 불편하다고요. 그런데 저는 유감스럽게도 좋지 않은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일부 소식은 이미 바실리 페토트이치에게도 알려드렸습니 다만, 아무튼 무슨 단호한 조치를 취하셔야 할 겁니다. " 파클린의 목소리는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중간중간 자꾸 끊어지곤 했다. 그가 가져 온 소씩은 그야말로 흥보였다. 마르켈로프는 농군들에 에게 체포되어 시내로 보내졌고 골루 시킨은 바보 같은 관리인의 밀고로 체포되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골루시킨도 자기의 동지들 을 배반하고 다시 정교회로 개종하겠다는 의견을 표명하는가 하면, 필라레드 대주교의 초상 화를 중학교에 기부하겠다고 말하고 '상이 용가' 구호금으로 5천 루블을 내놓기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네지다노프의 이름을 불었으리라는 건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언제 어느 때 경찰이 공장을 습격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또한 바실리 페토트이치에게도 역시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긴 저만 해도," 파클린은 이렇게 덧붙였다. "아직까지 이렇게 자유로이 걸어다니고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지요. 비록 저 자신 직접 정치에 관계하거나 어떤 계획에 참여한 적 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긴 합니다만! 그래서 저는 경찰의 건망증이랄까, 혹은 부주의를 이 용하여 당신들에게 이 사실을 경고하러 온 겁니다. 그리고 이 모든 불쾌한 사실들을 모면 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강구해야 할지, 그것을 상의하고 싶었던 거지요." 마리안나는 파클린의 말을 끝까지 다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아니 었다-오히려 그녀는 침착하기까지 했다……그러나 어쨌든 무슨 방법이든 강구해 놓지 않으 면 안 된다! 그녀의 첫 동작은 솔로민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었다. 솔로민 역시 침착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다만 입술 근처의 근육이 약간 움직이고 있 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평상시의 그의 미소와는 다른 것이었다. 솔로민은 마리안나의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마리안나는 솔로민의 지시 대로 행동하기 위해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말이지, 제법 신중을 요하는 문제군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지다노프는 잠시 피신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그건 그렇고 그가 여기 온걸 당신은 어떻게 아셨죠, 파클린씨?" "어떤 사람한테서 들었어요. 네지다노프가 이 근처를 돌아다니며 선전하는걸 보았다더군요. 그 다음 추적을 한 거죠. 하긴 나쁜 목적에서 그런 건 아닐겁니다. 그 사람도 우릴 동정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니까요. 실례지만," 마리안나 쪽으로 몸을 돌리며 그는 이렇 게 덧붙였다. "사실 말이지, 네지다노프는 너무나…… 너무나도 조심성이 없었거든요." "이제 와서 그 사람을 나무란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솔로민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그 친구와 상의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지만, 내일까진 병도 나을 테지요. 그리고 경 찰이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민첩한건 아닙니다. 마리안나 비켄치예브나, 아마 당 신도 함께 떠나야 할 겁니다. " "그야 물론이죠." 나직한 목소리긴 했으나, 마리안나는 단 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지!" 솔로민은 말했다. "좀 생각을 해야겠군요-어딜 어떻게 갈지, 방법을 강구해야 겠으니. " "f, 실례지만, 제 의견을 하나 말씀드리지요." 파클린이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 오는 도중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에요. 미리 말씀드려 두지만 전 거리에서 타고 온 짐마차 를 여기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되돌려 보냈습니다. " "어떤 의견이죠?" 솔로민이 물었다. "바로 이런 거죠-지금 곧 제게 말을 주십시오…… 전 시퍄긴 집으로 달려 가겠습니다. " "시파긴 집으로요?" 마리안나가 되물었다. "무엇 때문이에요? "글쎄, 듣고 보세요. " "당신은 그 집을 아십니까?" "아뇨, 전혀! 하지만 제 말을 들어보세요. 그리고 제 의견을 잘 생각해 주세요. 저로서는 그야말로 기발한 착상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런데 마르켈로프는 시퍄긴의 처남이 아니겠어 요. 자기 마누라의 오라버니가 아니냔 말예요. 그렇잖아요? 과연 귀족 나리는 자기 처남을 구하기 위해 아무런 방법도 강구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네지다노프만 해도 그렇죠! 설령 시퍄긴씨가 그 사람에 대해 화를 내고 있다 할지라도 어떻든 네지다노프는 당신과 곁흔한 이상 그의 친척이 아니냔 말예요. 따라서 우리 친구 머리 위에 걸려 있는 위험은." "전 아직 결혼하지 않았어요." 마리안나가 말했다. 파클린은 깜짝 몰라 몸을 떨기까지 했다. "뭐라구요? 그동안 그럴 사이도 없었던가요? 하지만 괜찮아요."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거짓말을 할 수도 있는 거죠. 어차피 당신들은 곧 결흔을 할 테니까요. 정말이지 그 밖의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아요! 지금까지 당신들의 뒤를 쫓지 않았다는 점에 주의를 돌려주세요. 그것으로 미루어볼 쌔, 그 사람에게는 그래도 어느 정도…… 관대함이 있는 접니다. 당신은 제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본데, 그럼 어느 정도의 오만성이라고나 해둡시다. 글쎄 지금과 같은 경우, 그걸 이용해선 안된다는 법이 어 디 있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마리안나는 머리를 들고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파클린씨, 마르켈로프를 위해서나…… 혹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이용하시든 마음대로겠으나, 저와 알렉세이는 시파긴씨의 은총이나 보호를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회 들이 그 집을 버리고 나온 것은 그 집의 문을 두드리며 구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시파 긴 부부의 관대성이나 오만성 따위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건 정말 감탄할 만한 결심이시군요." 파클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론 '굉장한 여자로군! 한바탕 물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기분이군 그래 !' 하고 생각했다. ) "그 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아니, 전 당신의 의견에 복종할 용의가 있습니다. 마르 켈로프에 대해서만! 그렇지만 이것만은 말씀드려 두겠습니다. 그 사람은 시파긴으로 보자면 혈연 관계 아닙니까. 자기 아내 쪽으로니까요-하지만 당신으로 말하자면 ……‥." "파클 린씨, 제발 부탁이니 !"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수 없군요. 시 파긴은 굉장한 세력가가 아니냔 말예요. " "그런데 당신은 자기 몸에 대해선 조심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위급할 때, 자기 몸을 생각할 수 있나요!" 그는 자랑하듯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는 자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른바 선수를 치고 싶었던 것이다. '가련한 약자여! 시파긴에게 봉사를 해두면,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가 자기를 위해 한마디쯤 해주리라.'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자기도 사건에 관계가 있었다 -남의 말을 들었 을 뿐 아니라……자기 자신이 지껄이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당신의 생각은 서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 마침내 솔로민이 이렇게 말했다. "사실, 성공할 만한 요소는 적습니다만 어쨌든 해보는 건 괜찮겠죠. 실패하더라도-아무것도 손해볼 건 없으니까요. " "물론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장 최악의 경우를 상상해 제가 목덜미를 붙잡혀 내쫓긴다 해도……그게 무슨 재난이겠습니까!" "그건 재난이랄 수도 없는 거죠…… ('감사!' 파클린은 이렇게 생각했다. 솔로민이 말을 이었다. ) 지금 몇 시나 됐지? 네 시가 지났군. 꾸물거릴 필요가 없어요. 곧 마차 준비를 시 키겠습니다, 파벨!" 그러나 파벨 대신 문지방에는 네지다노프가 나타났다. 그는 한 손으로 기둥을 붙잡은 채 휘청거리는 다리로 서 있었다. 입은 힘없이 벌어지고 흐릿한 눈은 앞을 짜라보고 있었다. 그는 뭐가 뭔지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파클린이 맨 먼저 그에게로 다가갔다. "알로샤!" 파클린이 외쳤다. "그래도 날 알아볼 순 있겠지?" 네지다노프는 천천히 눈을 껌벅거리면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파클린인 가끔 그는 가까스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래 나야. 자네 몸이 많이 불편하군 그래?" "그래 …… 그런데 자넨 왜 여기에 와 있지?" "내가 왜 여기 있느냐구……‥." 그러나 그 순간 마리안나가 슬쩍 파클린의 팔꿈치를 건드렸다. 뒤돌아보니 마리안나가 그에게 눈짓을 하고 있었다 ……‥." "아아! 그렇지."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참! 알로샤, 보다시피," 그는 큰소 리로 덧붙였다. "난 어떤 중대한 용건으로 여기 왔지만 이제 곧 떠나야만 한다네 ‥‥ 자 세한 것은 솔로민이 말해 줄 걸세. 그리고 마리안나도…… 마리안나 비켄치예브 나도. 두 분 다 내 계획엔 완전히 찬성이니까. 사건은 우리 전체에 관련된 거라네. 아냐, 그렇지 않 아." 마리안나의 눈짓과 몸짓에 답하면서, 그는 황급히 이렇게 강조했다. "사건은 마르켈로프에 관련된 거야. 우리 모두의 친구인-마르젤로프 말일세. 그 친구에 게만 관련된 문제지, 자, 그럼 잘 있게! 일분도 소중하거든. 잘 있어 …… 나중에 다시 만나 세. 바실리 페토트이치, 저와 함께 가서 마차 준비를 시켜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마리안나, 전 당신에게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 럴 필요는 하나도 없군요. 당신이야말로 훌륭해요!" "아아, 그래요! 정말 그래요!" 파클린이 맞장구를 쳤다. "당신은 카토 시대의 로마 부인이 에요. 우차카의 카토 시대 말예요! 그럼 가보실까요, 바실리페토트이치. 갑시다. " "시간은 충분해요." 솔로민이 싱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네지다노프는 두 사람을 내보내기 위해 약간 옆으로 몸을 비켰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여전히 초점을 잃고 있었다. 그는 누 걸음쯤 앞으로 걸어나와 마리안나를 마주 보며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알렉세이," 마리안나가 네지다노프에게 말했다. "모든 것이 탄로났어요. 마르켈로프는 자 기가 선동한 농군들에게 체포되어 시내에 감금되어 있고, 당신과 함께 식사를 한 그 상인 도 역시 마찬가지 신세가 됐어요. 아마 우리한테도 곧 경찰이 올 테죠. 파클린은 시파긴 집 으로 떠났어요." "뭣 하러?" 간신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네지다노프가 속삭였다. 그러 나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빛나더니 평상시의 얼굴로 돌아왔다. 대번에 취기가 가시고 만 것 이었다. 네지다노프는 꼿꼿이 몸을 폈다……‥우리를 위해서?" "아니예요, 마르켈로프를 위해 서죠. 그분은 우리 일도 부탁하고 싶어했지만……제가 찬성하질 않잤어요. 잘한 거죠, 알렉 세이?" "잘했느냐구?"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되물었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은 채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했느냐구?" 그는 이렇게 되풀이하고는 그녀를 자기쪽으로 끌어당긴 후, 그녀의 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요, 네? 왜 그래요?" 마리안나가 이렇게 외쳤다. 언젠가 네지다노프파 갑자기 끓어오르는 욕정에 못 이겨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마리안나 앞에 무릎을 꿇었을때처럼, 이번에도 그녀는 들먹이는 사내의 머리 위에 두손을 얹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느끼는 감 정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때 그녀는 그에게 온몸을 내맡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그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그의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가엾게 생각될 뿐이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마음을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왜 그래요?" 그녀가 되풀이했다.. "왜 우시는 거예요? 집에 돌아왔을 때 좀…… 이상 한 꼴을 하고 온 것 때문인가요? 아니, 그럴 린 없겠죠! 아니면 마르켈로프가 불쌍해선가 요? 우리의 희망이 슬퍼선가요? 당신인들 모두 일이 기름 위를 미끄러지듯 잘돼 차가리라 고만 생각했던 것은 아니잖아요!" 네지다노프는 갑자기 머리를 들었다. "아니야, 마리안 나." 흐느끼던 울음을 갑자기 멈추고 나서 쉰 목소리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란 당신이나 내 몸의 장래가 두려운 게 아냐……그저 불쌍해서 그러는 거야." "누가요?" "당신 말이야, 마리안나!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과 일생의 운명을 결합시킨 당신이 불쌍해서야." "그건 왜죠?" "왜라니, 보다시피 이런 순간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내니 말이야!" "그건 당신이 우 는 게 아니예요. 당신의 신경이 우는 거예요!" "내 신경이나 나나 마찬가지지! 자, 내 말 좀 들어, 마리안나. 내 눈을 봐. 당신은 지금도 정말 내게 말할 수 있겠소?-후회하지 않는 다고……‥." "무엇을요?" "나와 합께 집을 나온 걸 !" "물론이죠!" "그럼 앞으로도 나를 따라주겠소? 어디든?" "네!" "정말? 마리안나…… 정말이오?" "정말이에요. 전 당신에게 손을 내밀었어요. 체가 사랑하던 그 사람으로 당신이 남아 있는 이상 전 그 손을 뿌리치진 않을 거예요. " 네지다노프는 여전히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마리안나는 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손은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고, 그녀의 두 손은 그의 양 어깨에 놓여 있었다. '그렇다, 아니다. ' 네지다노프는 생각했다. '그전 같으면 이렇게 껴안을 때 그녀의 몸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녀의 본 심이 아닐는지는 몰라도 슬그머니 내 옆을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다. 나는 지금 그것을 느끼 고 있는 거다!' 그는 자기 손을 풀었다…… 그러자 그의 생각대로 마리안나는 아주 약간 이긴 하나 뒤로 물러났다. "이러면 어떨까!" 네지다노프는 큰 소리로 말했다. "만일 우리가 경찰의 손에 붙잡히기 전에 …… 여길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된다면…… 차라리 그 전에 결혼을 해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조시마와 같이 우리 일을 돌봐줄 만한 신부도 다른 곳에선 구하기 힘들 테니까!" "전 언제라도?" 마리안나가 말했다. 네지다노프는 유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마 부인이군!" 어색한 미소를 띄우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의무감에선가!" 마리 안나는 한쪽 어깨를 흠칫했다. "솔로민에게 말해야죠." "그렇지 …… 솔로민에게 ……‥네 지다노프는 말을 끌었다. "그렇지만, 그 사람에게도 위험이 다가오고 있을걸. 경찰은 그 사람도 붙잡을 거야. 그 사람은 나보다도 더 많든 관련을 맺고,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 "그건 저도 몰 라요." 마리안나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선 한번도 말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나처럼 그렇지는 않다고 말하고 싶을 테지.' 네지다노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솔로민…… 솔로민!" 오랜 침묵 끝에 네지다노프가 이렇게 덧붙였다. "이봐요, 마리안 나. 당신이 자신의 일생의 반려마로 삼은 사람이 만일 솔로민 같은 사내라면…… 혹은 솔로 민 바로 그 사람이었다면, 나는 당신을 불쌍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거야. " 이번에는 마리안나가 네지다노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당신에겐 그런 말을 할 권리가 없어요." 마침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권리가 없다니! 그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좋지?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도대체 그런 문제엔 쌔가 관여할 수 없다는 뜻인지?' "그럴 권리가 없어요. " 마리안나는 되풀이했다. 네지다노프는 힘없이 머리를 떨어뜨렸다. "마리안나!" 다소 변한 목소리로 그가 이렇게 말했다. "네?" "만일 지금 내가…… 만일 내가 그 문제를 당신에게 제기한다면, 알잖아 ‥‥아냐, 아무 것도 안 묻겠어 ……그럼, 안녕."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마리안나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네지다노프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는 자기 자신의 상념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될수록 생각지 않으려고 했다. 그의 생각은 한 가지뿐이었다-그 어떤 땅 밑의 검은 손이 그의 몸의 뿌리를 움켜잡은 채 다시는 놓아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웃 방에 남겨두고 온 그 아름답고 고귀한 인간이 자기를 찾아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스스로 그쪽으로 찾아갈 만한 용기도 없었다. 그리고 또 뭐하러 간단 말인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빠르고도 믿음직스러운 걸음걸이가 그의 눈을 뜨게 했다. 솔로민이 그의 방을 가로질러 마리안나의 방을 노크한 다음 들어간 것이었다. "기꺼이 자리를 양보하마!" 네지다노프는 비통한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34 이미 밤 열 시였다. 알쟈노예 마을 지주의 응접실에서는 시퍄긴 부부와 칼로메이체프가 카드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때 하인이 들어와서 어떤 낮선 손님이 찾아왔다고 아뢰었다. 손님은 파클린이라는 사람으로서 긴급을 요하는 중요한 용건으로 보리스 안드레예비치를 만 파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늦게 !"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깜짝 놀랐다. "뭐라구?" 보리스 안드레예비치는 이렇게 묻고는 아름다운 콧등에 주름살을 지었다. "그 이름이 뭐랬지7" "파클린이라고 하십니다. " "파클린이라! 칼로메이체프는 이렇게 외쳤다. "정말 농사꾼 이름이군. 파클린(삼베 부스 러기라는 뜻)이니, 솔로민이니 …… De vraimentnuaux,hein(영락 없는 농사꾼 이름이죠, 안 그래요)? 여전히 코에 주름살을 모은 채 보리스 안드레예비치는 하인에게 말을 이었다. "중 대하고 긴급한 용건이라고 했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흠! 거지 아니면 사기꾼일 테지. ("양쪽 다 겸했을지도 모르죠." 칼로메이체프가 참견했 다. ) 그럴지도 모르지. 서재로 안내해." 그리고 보리스 안드레예비치는 일어났다. "여보, 잠깐 다녀올게 그동안 에카르트나 해요 …… 곧 다녀을 테니. " "우린 얘기나 할 테니, 다녀오세요!" 칼로메이체프가 말했다. 시파긴은 자기 서재로 들어갔다. 그리고 벽난로와 문 사이의 벽에 얌전히 몸을 기대로 서 있는 초라하고 허약한 파클린의 모습을 보자, 시파긴은 페테르부르크 고관들의 특색이 랄 수 있는 오만한 태도로 혐오감이 뒤섞인, 진정한 장관다운 관대한 감정에 휩쓸리고 말았 다. '아아! 정말 가련하기 그지없군!'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다리까지 저는 것 같으 니!' "앉으시죠." 시파긴은 뒤로 젖힌 머리를 기분 좋게 끄덕이면서 아주 점잖은 바리톤조 의 커다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손님보다 먼저 자리에 앉았다. "여행에 피로하시리 라 믿습니다. 자, 앉으십시오. 이렇게 늦게 찾아오실 정도로 중대한 용건이라니, 도대체 어떤 것인지 한번 설명을 들어볼 까요?" "각하," 조심스럽게 안락의자에 앉으면서 파클린이 입을 열었다. "제가 댁을 방문 하게 된 것은 ……‥." "잠깐만, 잠깐만." 시퍄긴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당신과는 초면이 아닌 것 같군요. 나 는 한 번이라도 만난 사람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으니까요. 죄다 기억하고 있답니다. 그런 데 …… 그런데……도대체 어디서 당신을 만났더라?" "각하, 말씀하신 대롭니다. 전 페테르부르크에서 각하를 만나본 영광을 가졌었습니다. …… 얼마 전부터 유감스럽게도 각하의 격분을 사고 있는 그 사람의 집에서 ……‥." 시 퍄긴은 안락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네지다노프씨댁에서였군요! 이제 생각납니다. 그럼 그 사람 일로 오신 건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각하. 그와는 반대로……전……‥." 시퍄긴은 다시 자리에 앉 았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만일 그 사람 일로 오셨다면 당장 돌아가 달라고 요청했을 겁니 다. 네지다노프씨와 저 사이엔 어떠한 조정자도 개입시킬 수 없습니다. 네지다노프씨는 도저 히 있을 수 없는 모욕을 제게 준 사람이니까요」…… 저는 복수 같은 건 초월하고 있습니다 만, 그 사람이나 그 처녀에 대해서라면 조금도 알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 처녀는 감정보다 는 오히려 두뇌 쪽이 타락해 있어요. (시퍄긴은 마리안나가 가출한 이래 이 말을 서른 번 이상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 출신도 모르는 부랑자의 정부가 되기 위해 은혜를 입은 집을 버리기로 결심한 처녀니까요!제가 그들을 잊은 것만 해도 그들에게는 과분할 정도지 요!" 이 마지막 말과 더불어 시파긴은 아래서 위로 손목을 치켜올렸다. "전 그 사람들을 잊고 있단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각하,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저는 그 사람들 일로 여기 찾아온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것만은 각하께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두 사람은 정식 결혼을 통해 영원히 결합되었습니다……‥‥제 기랄! 아무려면 어때!' 파클린은 생각했다. '거짓말을 하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정말 거 짓말을 하고 말았군. 될 대로 되라지 !' 시퍄긴은 의자 등에 기댄 뒤통수를 잠시 좌우로 움직였다. "그런 이야기엔 조금도 흥미 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결혼이 이 세상에 또 하나 늘었다-그것뿐이지요. 그리고 당신이 찾아오신 연유를 듣고 싶은데 중대한 용건이라는건 도대체 뭐죠? '정말 아니꼬운 국장 티를 내는군!' 다시 파클린은 이렇게 생각했다. '거드름은 그만 피 우지, 영국놈의 상판대기 같으니!' "실은 각하의 처남인,"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마르켈로프씨가 농군들을 선동하다가 오 히려 그들에게 붙잡혀 지금 현 지사댁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시퍄긴은 다시 한 번 의자에 서 뛰쳐 일어났다. "뭐요……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죠?" 그는 이렇게 말했으나 이미 그 목소리는 장관급의 바리톤이 아닌, 뭔가 목구멍에 걸린 듯 거북살스러운 목소리였다. "각하의 처남이 체포되어 감금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각 하께 알려드리려고 곧 마차를 잡아타고 돈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하나 그 불행한 사 람에게 다소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해서요!" "매우 감사합니다. " 여전히 맥라진 목소리로 시파긴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버섯 모 양의 초인종을 힘껏 손바닥으로 내리치면서 온 집안을 금속성의 음색으로 넘치게 했다. "매 우 감사합니다. " 이번에는 다소 야무진 목소리로 그는 이렇게 되풀이했다. "그렇지만 이것 만은 알아두십시오. 신과 인간의 모든 법칙을 유린한 인간은, 비록 아무리 가까운 친척일지 라도 제 눈으로 보자면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범죄자예요!" 하인이 서재로 뛰어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마차를 준비해! 지금 곧 네 필짜리 마차를! 시내로 나갈 테니. 필프와 스테판을 동반한 다!" 하인은 즉시 뛰어나갔다. "그렇습니다, 손님. 제 처남은 죄인입니다. 따라서 제가 지금 거리로 가는것도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암, 천만에요!" "그렇지만 각하 ……‥." "이것이 제 주의올시다. 그러니 쓸데없는 항변으로 제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아주십시오!" 시퍄긴은 서재 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파클린은 눈을 휘둥그래 뜨고 바라볼 뿐이었다. ' 쳇, 망할 것' 하고 그는 생각했다. '자유파라는 소문과는 다르군 그래! 사자처럼 짖기만 하 니 말이야!' 문이 활짝 열리면서 두 사람이 걸어왔다.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가 앞장 서 고 칼로메이체프가 그녀를 뒤따르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예요, 보리스? 마차를 준비시켰다면서요? 시내로 가시는 건가요? 무슨 일인데요?" 시퍄긴은 아내 곁으로 다가가서 오른손의 팔꿈치와 팔목 사이를 잡았다. "당신, 마음을 단단히 가져야 하오. 오라버니가 체포됐소. " "오빠가요? 세르게이가? 무엇 때문에요?" "농군들에게 사회주의 이론을 선전했다는 거요!(이때 칼로메이체프는 가냘픈 비명을 질 렀다. ) 그렇소, 오빠는 혁명을 선전한 거요. 선동을 한 거라니까! 그러나 농군들은 당신 오 빠를 체포하여 당국에 넘겨버렸단 말이오. 오빠는 지금 시내에 감금되어 있소." "정신 나 갔군요! 그런데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했어요?" "바로 이, 이, 뭐랬더라…… 그래, 이 코노 파친씨가 그 소식을 알려준 거요. "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파클린을 바라보았다. 파클 린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정말 멋진 여자구나!' 그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곤란한 순간에조차도…… 아아, 여자의 아름다움에는 사족을 못 쓰는 파클린이었던 것이다. ) "그래, 지금 시내로 가시려는 거예요, 이렇게 늦게?" "아직 지사는 자지 않을 거요. " "그러길래 제가 늘 말했던 거죠. 그런 일은 이렇게 끝나게 마련이라구요." 칼로메이체프 가 끼여들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러나 우리 러시아의 농민은 얼마나 믿 음직스럽습니까, 멋있어요! 용서하세요, 부인. 당신의 오빠 일입니다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진리가 제일이니까요!" "보랴(보리스의 애칭), 당신 정말 떠날 생각이세요?" 발렌치나 미 하일로브나가 물었다. "저는 확신합니다. " 칼로메이체프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 사람, 그 가정교사 네지다 노프씨도 역시 이 일에 관련돼 있을 거라구요. 제 손에 불을 놔도 좋습니다, 모두 한패거든 요! 그 사람은 잡히지 않았나요? 그건 모르세요?" 시파긴은 또다시 손목을 움직였다. "알게 뭐요, 또 알고 싶지도 않고요! 그런데……‥ 그는 아내 쪽으로 몸을 돌리며 이렇게 덧붙였다. 두 사람은 결혼했다는군." "누가 그런 말 을 했어요? 역시 이분?"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는 또다시 파클린을 바라보았으나, 이번에는 약간 실눈을 하고 있었다. "그래, 역시 이분이오." "그렇다면……‥ 칼로메이체프가 말을 받았다. "이분은 반드시 그 두 사람의 거처를 알 고 있을 겁니다.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아시죠? 그들의 거처를 알고 계시죠, 네? 그렇죠, 알 고 계시죠?" 파클린은 전혀 도망칠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는데도 칼로메이체프는 길을 가 로막기라도 하는 듯 상대방의 눈앞을 빠른 걸음으로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자, 말해 주시 오! 대답해 주시오! 네, 아시죠, 알고 계시죠?" "설령 알고 있다 해도," 파클린이 짜증스러 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드디어 그의 뱃속에서 분노가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그의 두 눈도 빛 을 발하기 시작했다. "설령 알고 있다 해도, 당신에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오오…… 오오…… 오오……‥ 칼로메이체프가 중얼거렸다. "들으셨죠‥‥들으셨죠! 사 람도 역시 그 일당임에 틀림없어요!" "마차 준비가 다 췄습니다. " 하인이 들어와서 큰소리로 외쳤다. 시퍄긴은 맵시 있게 사뿐히 모자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가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라고 그를 간곡히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 밖은 캄캄한 밤이며 거리는 모두 잠들어 있어 고요할 것이고, 당신의 신경을 흐트러뜨리기 쉽고 감기에 걸리기 도 쉽다는 따위의 납득이 갈 만한 이유를 내세웠으므로 마침내 시퍄긴도 그녀의 의견에 찬 성하고 말았다. "마차를 풀도록 해!" 그는 하인에게 호령했다. "그러나 내일 아침엔 정각 여섯 시에 차 차 준비를 갖추어놓도록, 알겠나? 가도 좋아! 아참, 기다려! 손님의 마차는…… 이 손님의 마차는 보내 버리도록! 마부에겐 돈을 지불하고. 네? 코노파친씨! 뭐라고 말씀하실 테지만, 내일 제가 모셔다 드리죠, 코노파친씨! 뭐요? 잘 안 들리는군요…… 보드카라도 드시겠어 요? 코노파친씨에게 보드카를 갖다 드려! 싫다구요? 마시지 않습니까? 그러시차면…… 표 도르, 이분을 녹색의 방으로 안내해 드려라!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코노……‥." 파클린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파클린입니다!" 그가 외쳤다. "제 성은 파클린이에요!" "아, 그렇죠. 그러나 어느 쪽이 면 어때요, 비슷한 걸요. 그건 그렇고 그렇게 마른체격에 비하면 꽤 목소리가 크시군요! 안 녕히 주무세요, 파클린씨‥‥ 이번엔 틀리지 않았죠? 세묜, 당신도 함께 가주시겠죠?" "물론이죠!" 파클린은 녹색의 방트로 안내되었다. 문에는 자물쇠까지 채워졌다. 그는 침대 속으로 들 어가면서 영국식 자물쇠가 찰깍 채워지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그 '천 재적인' 착상에 실컷 욕설을 퍼붓고는 매우 언짢은 기분으로 잠들어버렸다. 이튿날 아침 다섯 시 반에 하인이 그를 깨웠다. 그리고 커피가 나왔다. 그가 커피를 마 시고 있을 동난, 얼룩무늬 견장을 단 하인은 쟁반을 손에 든 채 제자리걸음을 하며 기다리 고 있었다. 마치 '빨리 마셔, 주인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는 아래로 안내되었다. 집 앞에는 벌써 마차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칼로메이체프의 포장마차도 있었다. 시퍄긴의, 등근 깃 달린 낙타 외투가 현관에 나타났다. 그런 식의 외투 는 시퍄긴이 봉사하려고 애쓰며 열심히 흉내내고 있는 한 고관을 제외하곤, 이미 오래 전부 터 입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중요한 공무에 임할 때에만 그는 이 외투를 착용하 고 있었다. 시파긴은 제법 정답게 파클린에게 인사를 하고는 정력적인 손짓으로 마차를 가리키면서 그에게 권했다. "파클린씨, 저와 함께 갑시다. 파클린씨! 파클린의 손가방은 마부대에 놓으세요. 제가 파 클린씨를 모셔다 드릴 테니," 파클린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특히 A자에 힘을 주면서 시퍄긴 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마치 네 자신이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이름 한 번 잘 못 불렀다고 화를 내다니! 자, 얼마든지 불러주마, 실컷 처먹어라! 목에 걸릴 정도로 처먹 어!' 하고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리하여 '파클린씨, 파클린씨' 하는 불온한 이름은 신선 한 아침 공기 속에 소리 높이 울려 퍼졌던 것이다. 아침 공기가 얼마나 쌀쌀했는지 시퍄긴 을 뒤따라 나온 칼로메이체프는 여러 차례 "으스스하다!" 하고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포장이 내려진 화려한 마차에 오르면서 단단히 외투를 여미였다. (가련한 그의 친구- 세르비야의 공작 미하일 오브레노비치는 칼로메이체프의 이 마차를 보고, 이와 꼭같은 마 차를 벤데르에서 샀던 것이다. "아십니까? 벤데르를, 샹젤리제 거리의 유명한 마차상을?" 그는 곧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반쯤 열린 침실의 덧문 너머로 나이트 캡을 쓴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가 바깥을 내다보 고 있었다. 시파긴은 마차에 오른 다음,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파클린씨, 불편한 건 없으시죠? 자, 출발!" "오빠 일을 부탁해요. 그를 용서해 주세요!" 하는 발렌치나 미하일로브나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염려 마세요!" 모자의 차양 밑으로 그녀를 쳐다보면서 칼로메이체프가 이렇게 외쳤다. 그 모÷◎는 칼로메이체프 자신이 고안해서 만든 것으로서 거기에는 휘장까지 달려 있었 다…… "정말로 잡아넣어야 할 놈은 다른 사람이에요!" "자 출발!" 시파긴이 되풀이했다. "파클린씨, 앉으시오. 자, 출발!" 두 대의 마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 10분 동안은 시파긴도 파클린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더러운 외투에 구겨진 모자를 쓴 불운한 마부 실루슈카는 마차 내부를 뒤덮은 화려 한 암청색 비단풀 배경으로 더욱더 초라하게 보였다. 용수철에 손이 닿기만 해도 두르르 위 로 말려 올라가는 화려한 청색 커튼 이며, 보드라운 백양 가죽으로 만든 걸상, 전면에 붙어 있는 마호가니 상자들을 파클린은 말없이 둘러보고 있었다. 그 상자에는 자유로이 뺐다 넣 었다 할수 있는 필기용 판자와 조그만 책꽂이까지 달려 있었다. (또리스 안드레예비치는 실제로 일을 좋아했다기보다는 여행 중에도, 프랑스의 정치가 티에르처럼 마차 속에서 일 하기 좋아한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 파클린은 겁에 질린 듯한 불안감 을 느끼고 있었다. 시파긴은 번지르르 면도를 한 자기 볼 너머로 두어 번 가량 그를 바라보 았다. 그리고 그는 슬라르식의 꽃무늬 약자가 새겨진 은제 담배 케이스를 정중한 태도로 느릿느릿 옆주머니에서 꺼내 상대방에게 권했다. 영국제 노란 개가죽 장갑을 낀 집게손가락 과 가운뎃손가락 사이에 한 대의 시가가 가볍게 끼워진 채로 파클린 앞에 내밀어졌던 것이 다. "전 담배를 안 피웁니다. " 파클린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세요!" 시파긴은 이렇게 대답하고, 자기가 그 시가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최고 급의 레가리야였다. "파클린씨 …… 당신에게 꼭 말씀드려 둘 말이 있습니다. " 가늘게 피어오르는 향기 높 은 담배 연기를 점잖게 내뿜으면서 시파긴은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사실 말이지 …… 당신에게…… 무척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제 제가 취한 태도는…… 다소 쌀쌀해 보였 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제 본래의 성격이 아닙니다. (시파긴은 일부러 불규칙적으로 띄엄띄 엄 말을 끊었다. ) 그점에서라면 맹세해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파클린씨! 제발 제 입장이 …… 한 번돼 보세요. (시퍄긴은 입술 한쪽 끝으로 다른 쪽으로 시가를 옮겨 물었다. 제가 차비하고 있는 위치 때문에 …… 그렇지 않아도 남의 눈에 띄기가 쉬운데, 글쎄 느닷없이 …… 제 처남이 그런 어리석은 일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제 얼굴에 흙칠을 했다는 것 은…… 어때요, 파클린씨! 당신은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되실 테죠?" "저는 그런 건 생각지도 않습니다, 각하. " "당신, 모르십니까? 도대체 어떻게 …… 그리고 어디서 처남이 체포되었는지7" "T…… 군에서라고 들었습니다만." "누구한테서 들으셨죠?" "어떤 …… 사람한테 서요." "물론 날아가는 새한테 들으신 건 아니실 테죠.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현지서 비 서의 어느 조수한테서 들었습니다. " "이름이 뭐죠?" '비서 말씀인가요?" "아니, 조수 말입니다. " "그 사람은 …… 그 사람은 올리야세비치라는, 아주 훌륭한 관리올시다. 각하, 그 소식을 듣자마자 전 급히 댁으로 달려간 겁니다. " "아, 그렇군요, 그렇군요!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전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 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미치광이 짓이 어디 있습니까? 미치광이 짓이 아니란 말입니까, 네? 파클린씨, 아닌가요?" "정말 미친 짓이죠!" 파클린은 이렇게 외쳤으나, 그의 등에는 뜨거운 땀방울이 뱀처럼 굽이져 내리고 있었다. "그건 다시 말해서," 파클린이 말을 이었 다. "러시아의 농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증거지요. 마르켈로프 씨는 제가 아는 한 매 우 선량하고 고결한 마음의 소유자이지만, 그분은 러시아의 농민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파클린은 시파긴 쪽으로 몸을 약간 돌리고는 적의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 도 어지간히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 러시아의 농민을 움직이려면 가령 그들에 게 폭동을 일으킬 경우라도, 최고 권력체인 황실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가짜 왕 드미트리를 생각해 보세요-빨갛게 단 동전이라도 좋으니, 뭔가 황실의 표지를 가슴에 달아 보여야 한단 말입니다." "아, 그렇죠, 그렇죠. 푸카초프(16세기 말 러시아의 반란군 두목)처럼 말이군요. 시퍄긴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것은 마치 '우린 아직 역사를 잊어버리지 않았으니…… 그렇게 떠벌리지는 말게!' 하고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건 미친 짓입니다! 미친 짓이에 요!" 그는 이렇게 덧붙이고는 시가 끝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의 흐름만을 골골히 바라보고 있었다. "각하!" 파클린은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했다. "저는 방금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실은 피웁니다. 당신의 담배가 말할 수 없이 향기 로워서 ……‥." "아니 뭐요? 뭐라구요?" 시퍄긴은 잠에서라도 잰 듯 이렇게 말했다. 그 러고는 파클린에게 자기의 요구를 되풀이할 겨를도 주지 않고, 열려진 담배 케이스를 그 에게 내밀었다. 그는 상대방의 말을 똑똑히 알아들었으면서도 단지 자기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그러한 질문을 되풀이한 데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자기 행동으로 명백히 입증해 주었 던 것이다. 파클린은 황송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편리한 기회나 온 것 같다'고 파클린은 생각했다. 그러나 시퍄긴이 먼저 선수를 쳤다. "당신은 아까 말씀하셨죠." 시파긴은 내뱉듯이 이렇게 말하고는, 자기의 시가를 바라보 기도 하고 뒤통수에서 이마로 모자를 옮겨놓기도 하면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까 말씀하 셨죠…… 네? 말하잖았어요. 거기 대해서 …… 제…… 조카딸과 결혼한 당신의 친구에 대해 서 말이포. 당신은 그 사람을 만납니까?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그들은 있을 테죠? '에그!' 파클린은 생각했다. '실루슈카, 조심해라!' 단 한 번 그들을 만났을 뿐입니다, 각하! 사실 그 두 사람은……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론 알고 계시겠습니다만," 시퍄긴은 여전히 같은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이미 당신에게도 선언한 바와 같이 저는 그 경박한 처녀나 당신의 친구에게 더 이상 아무런 홍미 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천만에요! 제겐 편견이란 것이 없습니다. 아마 당신도 동의하시겠지만, 이건 너무나 도리에 어긋난 일이에요.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어요. 게다가 그 두 사람은 어떤 감정에 의해서 결 합되었다고 봅니다 …… 정치적빈 목적에서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어깨를 흠칫했다. "저도 그령게 생각합니다, 각하." "그래요, 네지다노프씨는 완전한 빨갱이였어요. 하지만 자기 의견을 숨기려 하지 않는 데 대해서만은 나도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네지다노프는," 파클린은 모험을 시도했다. "아마 너무 열중한 탓일 테죠. 하지만 그 사 람의 마음은……‥." "컨량해요." 시퍄긴이 말을 받았다. "물론이죠…… 물론이죠. 마르켈로프처럼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선량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아마 그 사람도 이번 사건에 관련되었을 테니, 역시 걸려들게 마련이겠군…… 그 사람에 대해서도 한번 힘을 써볼 필요가 있을까!" 파클린은 가슴에 두손을 모았다. "아아, 제발 각하! 그 사람에게 보호를 베풀어주십시오! 사실…… 그 사람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냅니다. 당신의 동정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 "흠, 당신은 그렇게 생각합니까? "게다가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당신의 조카딸과 그녀의 배우자를 위해서도!" '아니 저런!' 파클린은 생각했다. 내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지!' 시퍄긴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가 보기에 매우 우정이 깊 은 사람 같군요. 그건 좋은 일입니다. 감탄할만한 일이죠, 젊은양반. 그래 당신의 말에 의하 면 그들은 여기서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거군요?" "네, 각하, 어느 큰 공장에 ……‥." 여기까지 말한 파클린은 자기 혀를 깨물었다. "쳇, 쳇, 쳇…… 솔로민의 공장이군! 바로 거기야! 하긴 전부터 알고 있었지요. 사람들이 말하더군요. 소문을 들었어요…… 그렇죠?"(시퍄긴은 그것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누구 하나 그에게 그 런 말을 해준 사람도 없었다. 단지 그는 솔로민의 방문과 두 사람의 밤중 회견을 상기하고, 넌지시 그물을 던져보았던 것인데 …… 파클린은 대번에 거기에 걸려들고 만 것이었다. ) "만일 그걸 아신다면……‥ 파클린은 이렇게 말하다가 다시 한 번 혀를 깨물었다…… 그 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자기에게 던져진 시파긴의 눈초리만 보아도 자신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시종 농락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령지만 각하." 가련한 파클린은 허등지등 발뺌을 하려고 애썼다. "확실히 말씀드려 두지만 사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 "그러니까 저도 묻지를 않는 겁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아니, 왜 그러시죠? 도 대체 절 누구라고 생각하지요, 또 자신은 누구라고 생각하고요?" 시퍄긴은 또만하게 이령게 말하고는 곧 장관급의 높이로 을라가 버리고 말았다. 파클린은 또다시 올가미에 걸린 자기 자신의 비참하고 왜소한 모습을 실감했다…… 그 때까지 그는 시파긴과는 반대쪽 입술에 시가를 물고 넌지시 담배연기를 옆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담배를 빨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아, 큰일났구나!' 그는 마음속으로 울투짖었다. 뜨거운 땀방울이 아까보다도 더 세게 온몸으로 흘러내렸다. '난 무슨 일을 한 걸까! 난 모든 것을 팔아버렸구나…… 고급 시가 한 대에 매수당한 거다. 머리가 흔미해진 거다! 난 밀고자야! 어떻게 하면 이 실수를 돌이킬 수 있을까! 아아, 아 아……‥."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었다. 시퍄긴은 고급 외투에 몸을 감싼 채 역시 장관다쿤 거만한 태도로 의젓하게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15 분도 채 지나기 전에 두 대의 마차는 지사 저택앞에 이르렀다. 35 S시의 현지사는 선량하고도 낙천적인, 사교계에 익숙한 장군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런 종류의 장군들은 놀랄 만큼 잘 닦여진 단정한 용모와 또 그 정도로 정결한 마음씨의 소유 자로서, 명문에서 태어나 훌릉한 교육을 받은 이른바 소수의 천택된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인민의 목자'가 되려는 준비 같은 것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굉장히 뛰어난 행정적인 수완을 발휘하곤 한다. 그리고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끊임없이 페테르부르크를 동경하며 애쁘장한 귀부인들의 꽁무니만 좇으면서도, 자기 현에는 의심할 수 없는 이익을 가져다 주 고 자기 자신에뻬는 훌릉한 추억을 남겨놓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방금 침대에서 일어나 비단 가운에 단추도 채우지 않은 채 화장대 앞에 앉았다. 그리고 먼저 성상(팰49)과 몸에 지닌 장신구들을 한 묶음 풀어놓고는 오 드 콜로뉴를 탄 물로 얼굴과 목을 썬고 있었다. 바로 이때 시파긴과 칼로메이체프가 중요하고 급한 용건으 로 내방했다는 런갈이 들어왔다. 그와 시퍄긴과는 매우 절친한 사이로서 너, 나' 하는 사이 였다. 두 사람은 어릴때부터 알고 있었고 노상 페테르부르크의 옹접실에서 얼굴을 맞대곤 했지만, 최근에 이르러 지사는 시파긴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마치 미래의 대정치가를 대 하기라도 하룻 존경에 넘친 '아아!'하는 탄성을 마음속으로부어 그의 이름에 덧붙이게 되 었다. 칼로메이체프와는 물론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또 얼마 전부터 그에 대한 '좋지 않은' 불평이 지사 귀에 들려오고 있었으므로 존경의 도가 시퍄긴에게보다 훨씬 덜했다. 그 러나 어쨌든 지사는 그 사람도 '출세한 인간' 으로 대해 주고 있었다. 지사는 손님을 서재로 안내하라고 이르고는 겨전히 비단 가운을 걸친 채 환급히 손님 앞으로 나왔다. 지사는 이런 비공식적인 옷차림으로 손님을 맞는데 대해서는 한마디 사과 도 하지 않은 채 정답게 그들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물론 지사의 서재에는 시파긴과 칼로 메이체프뿐이었다. 파글린은 웅접실에 남아 있었다. 그는 마차에서 내릴 때 집에 일이 있다 고 중얼거리면서 그 자리를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시파긴이 정중하고도 엄하게 그를 붙잡 아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칼로메이체프는 시과긴에게 달려와서 귀엣말로 이렇게 속삭였다. "그놈을 놓아주지 마세요! 망할 자식 같으니!" 그리하여 시퍄긴은 파클린을 지사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정중하고도 엄한 어조로 자기가 부를 때까지 긍접실에서 기다리라고 명했던 것이다. 파클린은 여기서도 슬그머니 도망치려고 했으나…… 이미 칼로매이체프에게 주의를 받은 건장한 헌병이 문전에 나타났으므로 하는 수 없이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볼테마른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지, 자넨 아마 짐작이 갈 테지?" 시파긴이 먼 저 입을 열었다. "아니, 난 모르겠는걸." 귀여운 향칵주의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상냥한 그의 미소는 장 밋빛 두 볼을 등글게 부풀렸고 비단결 같은 수염으로 반쯤 가려진, 눈부시게 반짝이는 하 얀 이를 드러내 주었다. "뭐라구? 아니, 그럼 마르켈로프가?" "마르켈로프가 도대체 누군데?" 지사는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되풀이했다. 그는 첫째로 어제 체포한 사람의 이름이 마르켈로프라뜬 것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 했고, 둘째로 시파긴 부인이 그런 성으로 불리는 형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왜 이렇게 서 있는 거지, 보리스? 앉게, 차라도 내을까?" 그러나 시파긴은 차를 마실 심정이 아니었다. 마침내 시파긴이 사건의 경위와 칼로메이체프와 함께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자, 그때야 지사픈 괴로운 듯이 소리를 지르고는 자기 이마를 탁 쳤다. 그의 얼굴은 잠자기 슬픈 표정 으로 바꿔었다. "그래 …… 그래 …… 그래!" 지사는 되풀이했다.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그 사람은 지 금 내 집에 있어, 그것도 오늘까지만, 자네도 알다시퍼 나는 그런 자들을 하룻밤 이상 내 집 에 두지 않는다네. 그런데 헌병 대장이 시내에 없는 관계로, 자네 처남도 여기 걸려든 걸 세…… 하지만 내일은 호송하게 어 있다네. 정말이지 안췄군그래! 자네 처가 얼마나 상심 하겠나! 그래, 자네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거지?" "난 여기, 자네 앞에서 처남과 면회하고 싶어. 만일 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이봐,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법은 자네 같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게 아냐. 난 진심으로 자네를 동정 하네 …… 이건 무서운 일비거든, 정말!" 그는 특이한 방식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곧 부관이 나타났다. "이봐, 남작. 제발 좀 잘 조치해 주게," 지사는 그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했다. 남작은 곧 사라졌다. "글쎄, 생각 좀 해보게. 그 사람은 하마터면 농군들에게 맞아 죽을 뻔한 걸세. 그리고 등 뒤로 결박을 한 다음 농군 마차에 싣고 끌고 왔더군그래! 그런데 그 사잠은, 글쎄 생각 좀 해봐! 농군들에게 조금도 화를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분개하지도 않더군. 이건 정말이 야! 도대체 그렇게 침착할 수가 있을까…… 나도 깜짝 놀랐네! 자, 이제 두고 보면 알 걸세, 광신자이긴 하지만 침착한 사람이더군. " "그런 자가 더 악질이거든요." 칼로메이체프가 아는 체하며 이령게 말했다. 지사가 칼로메이에프를 올려다보았다. "아참, 당신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욘 페트로비치." "무엇인데요?" "그저 그런 건데, 좋은 일은 아니예요." "도대체 뭔데요?" "당신의 채무자 말에요. 내게 탄원하러 왔던 그 농군 말입니다……‥." "그래서요?" "그 사람이 목을 매 죽었다는 거예요." "언제요?" "언제가 무슨 상관입니까?그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뿐이죠." 칼코메이체프는 어깨를 흠칫하고는 거드름을 피우며 몸을 흔들며 창문 쪽으로 물러났다. 바로 이때 부관이 마르켈 로프를 데리고 들어왔다. 지사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마르켈로프는 놀랄 만큼 태연자약했 다. 그의 얼굴에서는 평상시의 음울한 표정마저 찾아볼 수 없었고, 그 대신 일종의 무관심 한 피로의 빛을 띠고 있넜다. 그의 얼굴은 매부를 보았을 때에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독일인 부관 쪽으로 던진 시선속에서만 그런 종류의 인간에 대한 옛날부터의 증오의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번쩍 빛났을 뿐이었다. 외투는 두어 군데 찢겨져 있었는데 임시 변통 으로 두꺼운 실로 꿰매져 있었다. 거기에 피가 말라 붙어 있었다. 그는 양쪽 손을 깊숙이 소매통에 쑤셔넣은 채 문 옆에 멈추어 섰다. 그의 숨소리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시퍄긴은 흥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그는 두 걸음쯤 다 가서며 오른손을 내밀었으나, 그것은 칼로메이구프가 앞으로 걸어나을 경우 그를 멈추게 하거나 그를 건드리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내가 여기 온 것은 우 리의 놀라움이나 클픔을 표명하기 위해서가 아닐세. 그건 자네도 의심하진 않겠지. 자넨 스 스로 파멸하길 원했던 거야! 그리고 실제로 파멸을 한 거지, 그러나 난 자네가 보고 싶었 네. 자네에게 말해 주고 싶었어. 저 …… 저 …… 전하고 싶었던 거야. 즉 올바른 분별과 명예와 우정의 목소리를 들을 가능성을 자네에게 주고 싶었던 거야! 아직도 자넨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네. 제발 나를 믿어주게. 나는 내가 할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할 걸세1 여기 계시는 존경하는 지사께서도 자네에게 그걸 입증해 주실 걸세." 여기서 시퍄긴은 목소 리를 높였다. "자네가 그 잘못든 길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필요한 경우 조금도 숨김 없이 모든 걸 다 고 백한다면." "각하," 마르켈로프가 돌연 지사 쪽으로 몸을 돌리며 이령게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저를 부르신 것은 다시 한 번 신문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만 시퍄긴씨의 회망에 의해서 저를 이리로 불러냈다면, 제발 부탁이니 절 돌려보내 주십시오. 우린 서로를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저 사람이 말하는 것은 제게 있어서는 라틴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 "뭐라구요 …… 라틴어라니 !" 칼로메이체프가 째지는 븟한 오만한 목소 리로 끼여들었다. "아니, 그럼 농민을 선동하는 건 라틴어가 아닙니까? 라틴어가 아녜요, 네? 라틴어가 아니란 말인가요?" "각하, 저 사람은 누굽니까? 비밀 경찰의 관리자라도 되나요? 굉장히 열심이군요." 마르켈로프는 이렇게 물었다. 파리한 그의 입술에 회미한 만족 의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칼로메이체프는 씨근턱거리여 발을 굴렀다…… 그러나 현지사가 그를 제지했다. "그건 당신 잘못이에요, 세욘 페트로비치, 자기 일도 아닌데 왜 끼여듭니까?" "제 일이 아니라뇨…… 제 일이 아니라구요? 이건 우리 모든 귀족에게 있어 공동의 문제라고 생각합 니다. " 마르켈로프는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듯 칼로메이체프에게 천천히 싸늘한 시선을 던지고 는 시퍄긴 쪽으로 약간 몸을 돌렸다. "매부, 만일 당신이 내 사상에 대한 설령을 듣고 싶다면 지금 말할 테니 들어보시오. 내가 한 말이 농군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그들은 나를 체포해서 인도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이건 나도 인정합니다. 그건 그들의 자유올시다. 사실 내가 그들한테 간 거 지 그들이 나한테 온 것은 아니니까요. 정부도 마찬가집니다. 만일 정부가 나를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낸다 해도 난 불평하지 않을 겁니다. 그령다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정부는 자기 할 일을 하는 것이고 또 그러기에 방어가 되는 거죠. 자 이만하면 충분합니까?" 시퍄긴은 높이 두 손을 치켜들었다. "충분하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람! 정부가 어떻게 하건, 그런 건 지금 우러가 논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 이봐요, 세르게이. 당신, 아니 자네가 (시파긴은 마음의 금선을 건드 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 자신의 분별 없는 광적인 행위를 자인하고 있는지, 자기 행동에 대한 뉘우침을 입증할 각오가 서 있는지, 또 내가 자넬 보증할 수 있을지 그리고 어느 정도 까지 보증할수 있는지 바로 이 점을 나는 알고 싶다쓴 걸세, 세르게이!" 마르켈로프의 짙은 두 눈샙이 찌푸려졌다. "전 할 말을 다했어요 …… 다시 되풀이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나 후회는? 후회는 어떻게 됐지?" 마르켈로프는 갑자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제발 당신의 그 '후회' 같은 건 집어치워 요! 당신은 내 마음속으로 기어들 작정인가요? 그런 건 나 자신에게 맡겨두란 말이오. " 시퍄긴은 어깨를 흠칫했다. "자넨 언제나 그래서 탈이거든, 이성의 말께 귀를 기울이고 싶어하지 않으니 말야! 조 용히, 점잖게 해결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아직 있지 않나 말이야." "조용히 점잖게……‥ 마르켈로프가 우울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우린 그 말을 얄고 있지! 남에게 비열한 일을 권할 때 당신들이 쓰곤 하는 상습적인 말투라는 걸. 이게 바로 그 말의 참뜻이란 말이오!" "우린 자네들 동정하고 있는데," 시파긴은 계속 그를 타일렀 다. "자넨 우릴 증오하고 있군. " "동정이라고요! 우릴 시베리아 유형지로 보내는 것이- 당신들의 동정이란 말이지요! 아아, 집머치워요……제발 집어치우란 말이오!" 마르켈로프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겉으로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마음속으로 는 무척 혼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무벗보다도 가슴 아프고 괴로웠던 것은 배신당했다 는 사실이었다-그런데 그 배신자는 누군가? 다름아닌 골로플료츠키 예레메이였다. 그가 그 토록 맹목적으로 믿고 있었던 예레메이였던 것이다! 멘델레이 두치크가 그를 따라오지 않은 것은 실제로 놀랄만한 일이 못 되었다…… 멘델레이는 술에 철한데다가 겁쟁이였으니까. 그 러나 예레메이아 그럴 줄이야! 마르켈로프에게 있어서 예레메이는 러시아 인민의 권화와도 같았다. 그러던 그가 마르켈로프를 배신하다니! 그렇다면 지금까지 마르켈로프가 애써온 것 은 모두 허망한 일이었을까? 그리고 키슬랴코프도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바실리 니콜라예 비치의 명령도 난센스였단 말인가? 한 자 한 자마다 확고부동한 진리처럼 딛어온 사회주의 와 사상가들의 논문과 책, 기술이 하나같이 모두 허무맹랑한 쓰레기였단 말인가?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 란테스의 일침만을 기다리고 있는 무르익은 종기라는 그 멋진 비유도 역시 공 염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 다. 그러자 그 청동 같던 두 볼에 어렴풋이 벽돌빛의 홍조가 스쳐 지나갔다. '아니다, 그 건 모두 진실이다. 모든 잘못은 내게있는 거다. 내 방법이 틀렸던 거다. 내가 말을 잘못한 거다. 착수의 방법이 틀렸던 거다! 덮어놓고 명령만 하면 되었던 거다. 그리고 만일 방해를 하거나 고집을 부리는 놈이 있다면 그놈의 이마빼기에 총알을 쑤셔넣 기만 하면 되었던 거다!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떤 거다. 우리와 함께 전진하지 않는 놈은 이 세상에서 살 권리가 없는 자다…… 간첩이란 놈들은 모두 개죽음을 당하는 거다. 아니, 개보다 더 비참하게 죽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자 마르켈로프의 머리에는 자기가 체포당할 때의 광경이 생생히 떠올랐다. 처음에 는 모두 말없이 눈짓만 하고 있었으나 이윽고 됫줄에서 뭐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 고는 한 농군이 인사라도 하는 듯 비스듬띠 옆으로 다가왔다. 그 다음 그 뜻하지 않은 소 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여러분, 여러분…… 왜들 이러시 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소리쳤다. "허리띠를 가져와! 묶어버려!……‥ 뼈가 부서지는 것 같있다……‥ 무력한 분노, 입과 콧구멍으로 스며드는 싸한 먼지 냄새……‥쑤셔넣어, 쑤 셔넣어 ……달구지 속으로." 누군가아 큰 소리로 웃어댔다…… '아아, 그령게 하는 것이 아니었어 ……내 방법이 틀렸던 거야……‥.' 그를 괴롭히고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기가 바퀴 밑으로 들어간 것은 자기 흔자만의 재난이니까, 공동 사업에는 아 무런 관계도 없다. 또 극복하지 못할 만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예레메이는! 예레메이는 …… 마르켈로프가 가츰에 머리를 떨군 채 서 있을 동안, 시파긴은 지사를 옆으로 데리고 가서는 두 손을 벌려 가볍게 손짓을 하면서 나직한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 손가 락으로 이마를 또닥거리고 있었는데, 마치 그것은 저 불행한 사람이 아무래도 여기가 좀 이상해진 것 같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것 같았다. 적어도 시파긴은 미치광미 같은 처남에 대해서 동정이 아니라면 관대한 마음만이라도 상대방에게 불러일으키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지사는 두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눈을 치뜨기도 하고 흑은 내리뜨기도 하면 서 자기의 무력함을 탓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결국에 가선 뭐라고 약속을 했다. ……‥ 가능 한 한 모든 힘을 쓰겠네 …… 가능한 한 꼭 김을 쓰겠네 ……." 향수 냄새가 물씬거리는 콧 수염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말들이 분명치는 않았으나 기분 좋게 들려왔다. "그렇 지만 자네도 아시다시피 법은 법이니 말이야!" "물론 법이야 어길 수 없지1" 시파긴은 그의 말에 엄숙히 복종하듯이 이렇게 말을 받았 다. 두 사람이 한쪽 구석에서 이런 말을 주고받고 있을 동싼, 칼로메이체프는 도저히 한자 리에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던지, 그는 앞뒤로 걸음을 옮기면서 가볍게 혀를 차고 혹은 신음을 하기도 하면서 온갖 초조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시파긴 쪽으로 다가가 서 황급히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또 한 사람에 대해서 잊고 계십니다!" "아, 그령군!" 시퍄긴은 큰소리로 말했다. 고맙네, 그 사람에 때한 걸 상기시켜 걸서). 전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각하께 말씀드려야겠습니다. " 그는 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가 자기 친구 볼테마르에게 이렇듯 존칭을 쓴 것은, 반역자 앞에서 권력의 위신을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심산에서였다. ) "추측컨대 제 처남의 무모한 계획에는 몇 명의 끄나불이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끄나불 중 하나, 즉 혐의자 중의 한 사람이 이 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이리 불러오도록 일러주십시오." 시퍄긴은 나직한 소리로 덧붙였다. "저기 자네 웅접실에 한 사람이 있다네 …… 내가 데려온 걸세." 지사는 시파긴을 바라보며 존 경 어린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 훌릉한 친구거든!' 이윽고 명령이 내려졌다. 잠시 후 실라 파클린이란 인간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실라 파클린은 먼저 지사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였으나, 마르켈로프의 모습을 보자 인사 를 하다 말고 엉거주춤 허리를 구부린 채 두 손으로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마르잴로프는 멍청히 파클린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를 알아보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또다시 깊은 사 색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이 자따가 끄나불인가요?" 터키 보석으로 장식된 크고 하얀 손가락으로 파클린을 가리 키면서 지사가 물었다. "아니, 천만에요!" 시파긴은 반쯤 웃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잠시 생 각하고 나서 이령게 덧붙였다. "저, 각하." 또다시 그는 큰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각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파클린씨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페테르 부르크 사람으로서 전에 우리집에 가정교사로 있던 그 사람과는 친구 사이입니다. 그 가정 교사는 정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씀드립니다만 내 친척뻘이 되는 젊은 처녀를 꾀어내서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 "아니! 저런, 저런!" 지사는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설레설 레 저었다. "나도 들은 적이 있어요. 백작 부인이 그말을 하더군요." 시퍄긴은 목소리를 높였다. "바로 네지다노프라는 인물인데, 내가 보기에도 불온 사상의 혐의가 농후합니다." "뼛 속까지 빨간 놈이죠." 칼로메이체프가 끼여들었다. "……‥불온 사상의 혐의가 농후해요." 시퍄긴은 다시 한 번 명백히 잘라 말했다. "그러 니 이번의 선동 운동에도 물론 관계차 없지 않을 겁니다. 파클린씨가 내게 말한 바에 의하 면 그는 상인 팔레예프 공장에 숨어 있다는 겁니다." '내게 말한 바에 의하면' 이라는 말을 들은 마르켈로프는 두번째로 파클린에게 시선을 던졌으나, 다만 무표정하게 싱그레 웃어 보였을 뿐이었다. "저, 실례지만, 각하." 파클린이 외쳤다. "그리고 시퍄긴씨, 제가 언제……언제 ……‥." "상인 팔케예프 공장이란 말이지?" 지사는 시퍄긴에게 물었다. 그리고 파클린에게는 '조용 히 해. 이봐, 조용히 해' 하는 듯이 손가락만 움직여 보였을 뿐이었다. "도대체 그 자들은, 그 존경할 만한 틸보 녀석들은 어떻게 된 걸까? 어제도 한 사람 붙잡혔다네, 같은 일로 말 이야. 자네도 그 자 이름을 들었을 걸세. 골루시킨이라는 부호지. 하지만 그턴 자는 혁명을 못 하겠더군. 글쎄 무릎을 꿇고 기어다니고 있지 않겠나 말이야." "상인 팔레예프는 아무 관련도 없는 걸세." 시퍄긴은 명백히 딱 잘라 말했다. "그 사람 의 견해는 나도 잘 모르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파클린씨의 말에 따르면 지금 내 지다노프꺼가 그의 공장에 숨어 있다는 것뿐이야." "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치다!" 파클린이 기어이 비명을 질렀다. "그건 당신이 하신 말씀이에요!" "실례지만 파클린씨." 시퍄긴은 여전히 냉혹한 어조로 명백하게 잘라 말했 다. "당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부정하게 하는 그 우정에 나는 경의를 표합니다.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때 지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 그러나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당신은 내 마음속에 있는 육친에 대한 감정이 당신의 우정만큼 강하 지 못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여기엔 보다 강한 또 하나의 감정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 의 모든 행동과 말을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감정, 즉 의무감입니다1" "의무감입니다." 칼로메이체프가 이렇게 되풀이했다. 그때 마르켈로프가 방금 말한 두 사람의 얼굴을 흘낏 훌어보았다. "지사 각하!" 마르켈로프가 말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만, 제발 저 사람들 옆에서 저를 떠나게 해주십시오. 절 데려가라고 명령해 주세요." 그러나 지사도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마르켈로프씨 !" 하고 그는 외쳤다. "당신에게 한마디 충고하지만, 당신과 같은 입장이다면 좀더 말을 조심하고 웃사람에겐 존경을 표시할 줄 알아야 해요. 특히 당신의 매부가 지금 말한 바와 같은 그런 애국적인 감정을 표현할 때에는 더욱 그렇단 말이오! 여보게 보리슨" 시파긴에게 돌아서며 지사는 이 렇게 덧붙였다. "나는 자네의 그 고결 한 태도를 장관에게 알릴 수 있는 것을 참으로 영 광으로 생각하네. 느런데 그 네지다노프라는 사람이 도대체 공장 어디에 있다는 건가?" 시퍄긴은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파클린씨의 말에 의하면 그곳의 기사장으로 있는 솔로민인가 하는 사람의 집애 있는 모양이야." 시퍄긴은 가련한 파클린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일종의 특이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가 마차에서 권한 시가며 그에게 베푼 정중하고도 친근한 대접, 심지어 어 느 정도 장단을 맞춰주기까지 했던 자기의 태도를 이제 와서 하나하나 복수하고 있었던 것 이다. "그 솔로민이라는 자도," 칼로메이체프가 말을 받았다. "틀림없이 과격파고 공화주의자올 시다. 그러니 각하, 그 사람에게도 역시 주의를 돌리는 것이 좋을 겁니다. " "당신은 그 사람들…… 솔로민이니 …… 뭐랬더라…… 네지다노프니 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까?" 다 소 상관다운 어조에 콧소리를 섞어가며 지사가 마르켈로프에게 물었다. "그럼, 각하, 당신은 공자나 리비우스(고대 로마의 역사가)를 아심니까?" 지사는 얼굴 을 돌려버렸다. "이 사람과는 도대체 말을 못 하겠군." 지사는 어깨를 흠칫가며 이렇게 말했다. "남작, 이리 오게나." 부관이 지사의 옆으로 달려왔다. 파클린은 틈을 봐서 절뚝절뚝 다리를 절면서 시파긴 옆 으로 다가섰다. "도대체 당신은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파클린이 속삭였다. "당신은 왜 조카딸을 파 멸시키려는 거예요? 조카딸은 그 사람과 네지다노프와 결합하고 있지 않은가 말예요!" " 나는 아무도 파멸시키진 않습니다, 파클린씨." 시퍄긴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양심의 명령대로 하고 있을 뿐이고……‥." "그리고 여편네의 …… 내 동생의 명령대로 하고 있을 테지. 당신은 여편네 궁등이에 깔 려 사는 신세니까." 마르켈로프도 그에 못지않게 큰 소리로 이에 응수했다. 시퍄긴은 흔히 말하는 대로 눈깹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너 무나도 추잡한 말이었던 것이다! "제 말 좀 들어주세요." 파클린은 계속해서 속삭였다. 그의 온몸은 흥분한 나머지 바르 르 떨리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겁에 질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증오에 빛나는 눈에 선 눈물이 솟구쳐올랐다-그것은 동료들에 대한 연민의 눈물인 동시에 자기 자친에 대한 불 만의 눈물이기도 했다. "제발 들어 주세요. 전 아까 당신에게 조카딸이 결혼했다고 말씀드 렸습니다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제가 거짓말을 한 거예요! 그러나 이 결혼은 마땅히 성 립되게 마련인 것이므로 만일 당신이 그것을 방해하신다면, 그곳으로 경찰을 보내신다면 당신은 무엇으로도 썬을 수 없는 오텀을 남기게 될 겁니다. 그리고 당신 은……‥." "당신이 전해 준 정보에 대해서는," 시퍄긴은 아까보다도 더 큰 소리로 그의 말을 가로 챘다. "의심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합니다만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고 할 경우 그것은 내가 취하려던 조치를 촉진시켜 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양심의 순결성에 대해서는 제발 근심하지 찰아달라고 부탁하고 싶군요. " "그 양심은 번깩번잭 빛나고 있거든." 또다시 마르켈로프가 참견을 했다. "페테르부르크 의 와니스를 칠하고 있으니까, 어떠한 액체도 그걸 침범할 수는는 없겠지! 그리고 이봐, 파 클린군. 마음대로 실컷 속삭여보게나. 아무리 속삭여도 소용 없을 테니, 더러운 자식!" 지 사는 이 모든 논쟁을 적절히 중피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분께서는," 지사는 말하기 시작했다. "그만하면 충분한 의견 토로가 이루어졌으리라 고 믿습니다. 자, 그러니 남작, 마르젤로프씨를 저쪽으로 데려가도록 해요. 그령잖나, 보리스. 자네도 더 이상은 필 필요 없겠지?" 시퍄긴은 두 손을 벌렸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다했어 !" "그럼 좋아……자, 남작!" 부관은 마르켈로프 쪽으로 다가가 박차를 한 번 잘카닥 울리고는 손을 수평으로 올렸 다……‥자, 어서!' 하는 뜻이었다. 마르켈로프는 빙그르 몸을 돌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파 클린은 마음속으로긴 하나 쓰라린 동정과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공장엔 팔팔한 젊은이들을 보내도록 하겠네" 하고 지사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보미 스, 이 선생이 (그는 파클린을 턱으로 가리켰다. ) 자네의 조카딸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 것 같던데…… 그 처녀가 지금 공장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처녀만은 체포하지 말게."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시퍄긴이 이 령게 말했다. "흑시 생각을 고쳐먹고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자네만 허락한다면 그 애에데 몇 자 적어 보 내고 싶네만." "제발, 그령게 해주게. 그리고 전적으로 믿어주길 바라네…… 그 사내는 체 포하겠네, 그러나 우린 부인에 대해서만은 예절을 지킨다네. 하물며 그 처녀야 더 말할 필 요가 있겠나!" "그런데 당신들은 솔로민에 대해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입니까?" 시파긴과 현지사의 짤막한 사담을 놓치지 않느려고 시종 그쪽으로 귀를 기을이고 있던 칼 로메이체프가 붓평 어린 목소리로 이령게 외쳤다. "난 확신합니다. 그놈이 총책임자라는 걸! 그런 면에선 나도 왜 냄새를 잘 맡습니다……보통이 아니란 말예요!" "너무 열을 내지 말아요 , 세욘 페트로비치." 지사는 웃으면서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할 레이란(프랑스의 저명한 외교관)끌 상기해 봐요! 만일 그렇더라도 우리 손을 빠져나갈 순 없을 테니까 말이오. 당신은 그보다도 자기의 …… 이런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좋을 거요!" 지사는 자기 목에 손을 대고 목을 죄는 시능을 해보였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말이지 만,' 그는 다시 시퍄파긴에게 말을 걸었다. 이 젊은 친구는" 그는 또다시 파클린을 턱으로 가리켰다. "어떻에 하지? 보건대 그다지 놀랄 만한 존재도 아닌 것 같은데." 그는 어쩐지 이 말이 괴테의 게츠 폰 베를리힌켄에 나오는 문장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젊은 양반, 당신은 가도 좋습니다. " 지사가 큰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당신에겐 일이 없으니까, 안녕히 가시오." 파클린은 일동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온몸이 부서지고 박살난 듯한 느낌씨었 다. 아아, 아아! 그는 모멸감에서 도저히 헤어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형 용할 수 없는 절망에 사로잡힌 채, 그는 이얼게 생각했다. '나는 겁쟁이에 밀고자란 말인 가? 아니, 천만에…… 여러분, 나는 결백한 인간입니다. 내게도 전혀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니 니까요.' 그러나 지사의 현관 충계에 우뚝 선 채 핀잔 어린 음울한 눈으로 파클린을 노려 보고 있는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디서 본 듯한 얼굴(…… 아아, 그것은 마르 켈로프의 노복이었다. 그는 주인을 따라 시내에 온것이 분명했고, 가령 주인이 감옥에 가더 라도 그 옆을 떠나지 않으려는 심산인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저렇게 파클린을 노려보 는 것일까? 그가 마르켈로프를 판 것은 아니잖는가! '나는 무엇 재문에 나와는 아무 관계 도 없는 이런 곳에 얼굴을 들이민 것일까?' 그는 다시 절망적인 생각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난 가게에 얌전히 앉아 있질 못했을까? 이제 나는 모든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겠구 나, 아마 누군가는 글도 쓰리라-파클린이란 놈이 모든 것을 다 분 다음, 자기 친구까지도 …… 원수에게 팔아먹었다고.' 이때 문득 파클린에게 카르켈로프가 던진 시선과 그의 마지막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 아무리 속삭여도 소용 없을 테니, 더러운 자식!' 그리고 늙은 머슴의 음울하고도 비통한 그 눈초리! 그는 성서의 말대로, '고통의 눈물에 젖으면서' 포무슈카와 피무슈카, 스난둘리야 가 있는 자기의 오아시스를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겼다. 36 바로 그닐 아침, 마리안나가 자기 방에서 나와 보니 네지다노프는 이미 옷을 입픈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의 한 손은 머리를 괴고, 또 한손은 힘없이 무릎 위에 얹혀져 있었 다. 그녀는 네지다노프 쪽으로 다가갔다. "안녕히 주무겼어요, 알렉세이 …… 당신, 옷을 벗지 않았었군요? 주무시지 않았나요?어 머나, 얼굴이 창백해요." 그의 무거운 눈꺼풀이 서서히 위로 올려졌다. "난 옷을 벗지 않았소, 자지를 않았으시. " "당신, 어디 불편하세요? 그렇잖으면 어제의 여파인가요?" 네지다노프는 설레설레 고개 를 흔들었다. "난 솔로민이 당신 방으로 들어간후부터 잠을 잘 수 없었다오. " "언제요?' "어젯밤. " "알렉세이, 당신 질투하세요? 어이가 없군요! 아니 지금이 질투나 하고 있을 땐가요? 그 분은 고작 15분밖에 제 방에 있질 않았어요…… 게다가 우리는 그분의 사촌형인 사제에 대 한 말을 했던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결혼식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상의했 어요." "그 사람이 15분 가량밖에 있지 않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 그 사람이 나가는 걸 보았으니까. 그리고 난 질투하는 것은 아니오. 천만에. 그령지만 어쩠든 난 그때부터 잠 을 잘 수 없었던 거요. " "어째서요?" 네지다노프는 잠시 말이 없다가 느릿하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밤새껏 생각하고 …… 생각하고 …… 또 생각해 봤소!" "무엇올요?" "당신과 …… 그 사람과 ……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 " "그래, 도대체 무엇을 생각 해 내셨죠?" "말해줄까, 마리안나?" "말해 주세요. " '난 나 자신이 훼방을 놓고 있다고 생각한 거야. 당신에게나…… 그 사람에게 …… 그리 고 나 자신에게도. " "제게도죠? 그 사람에게도요? 당신은 질투하지 않는다고 장담하고 계시지만, 당신이 무 슨 말을 하시려는지 전 짐작이 가요. 그령지만 '나 자신에게도'라는 건?" "마리안나, 지금 내 내부에는 두 인간이 살고 있는데-제각기 서로서로의 생존을 방해하고 있단 말이오. 그래 서 차라리 둘 다의 생명을 끊어버리는 게 좋을 것처럼 생각되거든. " "아, 그만해 두세묘, 알렉세이! 제발. 무엇 때문에 자기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는 거예요?그리고 저까지도. 우린 지금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그걸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우릴 그대로 내버려둘 리 없으니까요." 네지다노프는 정답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 옆에 앉아요, 마리안나. 지금 시간이 있을 때 우리 정답게 얘기나 합시다. 이리 손을 겪요. 저로 해명을 해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으니까. 하긴 해명이란 대개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게 마련이라지만 말이오. 그러나 당신 은 영리하고 착한 여자니까 모든 걸 잘 이해할 테지. 내가 미처 말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당신은 생각해 낼수 있는사람이오. 자, 앉아요." 네지다노프의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했다. 그리고 마리안나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그의 두 눈에는 그 어떤 우정과도 같은 상냥함과 애원이 깃들여 있었다. 그녀는 냉큼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네지다노프의 손을 잡있 다. "아, 고맙소, 마리안나-내 말을 좀 들어줘요. 그다지 오래 걸리진 않을테니. 난 지난밤에, 당신에게 해둘 말을 모두 머리 속에 준비해 두었다오. 자, 들어봐요. 어제의 사건이 나를 무 척 당황하게 냈다고는 생각지 말아요. 아마 내 꼴이 무척 우습고 흥하게 보이긴 했을 테지. 하지만 당신은 물른 나를 조금도 흥하다거나 초라하다곤 보지 않았을 것이오…… 당신은 나 라는 인간을 잘 알고 있으니까. 난 어제의 사건이 나를 당황케 하지는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오. 그건 헛소리란 말이오…… 사실 그건 나를 당황 했소. 그러나 그것은 내가 술에 취애 집으로 끌려왔기 때문이 아니라, 그일로 해서 내 완전히 입증되었기 때문이 었소! 그러나 모든 러시아인들이 다 마시는 것을 내가 마실 수 없다는 그런 문제는 아니 오. 이건 전체적인 문제란 말이오, 전체적인. 마리안나, 난 당신에게 말해 둘 의무가 있소. 우리 두 사람을 결합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그 집을 뛰쳐나오게 한 그 사업을 난 이미 믿지 않고 있소. 솔직지 말해서, 당신의 그 마음의 불길이 나를 뜨겁게 하면서 불타기 시작했을 그때부터, 난 이미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던 거요. 난 믿지 않소! 믿지 않는단 말이오!" 그는 한쪽 손을 눈 위에 얹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리안나도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 고 말았다. 그녀는 네지다노프의 말이 자기에게 있어서 조금도 새로을 것피 없다고 느꼈다. "나는 그전엔 이렇게 생각했었소." 네지다노프는 눈에서 손을 태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 나 이미 마리안나 쪽은 바라보럭고도 하지 않았다. "그 사업 자체는 믿을 수 있으나, 나 자 신은 믿을 수 없다고. 난 자신의 힘이나 능력을 의심했거든. 자기 재능은 신념과는 일치하 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지.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따로따로 분리할 수 없을 것 같소. 게다가 자기 자신을 기만할 필요가 있겠소? 그렇소. 난 그 사업 자체를 믿지 않는 거요. 그래 당신 은 믿고 있소, 마리안나? 마리안나는 몸을 똑바로 펴고 머리를 들었다. "네, 믿고 있어요, 알렉세이. 전 마음으로부터 믿고 있어요. 전 이 사업에 제 생명을 바칠 테예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네지다노프는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리며 감격과 선망에 찬 눈으로 그녀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눈여겨보았다. "바로 그것이오. 난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소. 자, 당신도 보다시피 이젠 우리 두 사 람이 함께 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단 말이오. 당신 자신이 우리의 관계를 단번에 끊어놓 고 말았으니까. " 마리안나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 솔로민은," 네지다노프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하긴 그 사람도 믿고 있진 않지만……." "뭐라구요?" "믿질 않아요! 그 사람도 믿질 않는단 말이오 그러나 그 사람에겐 그런 것은 문제가 되 질 않아요. 그 사람은 조용히 앞으로 전진하고 있을 뿐이니까. 한길을 따라 도시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은, 그 도시의 존재 여부 같은 것엔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는단 말이오. 그저 걷고 또 걸을 따름이죠. 그 밖엔 아무것도 필요싸 없어요. 그런데 나는…… 앞으로 나갈 수도 없 거니와 뒤로 물러나기도 싫고. 그렇다고 한 곳에 머물러 있자니 괴롭기만 하고…… 이런 형 편에 도대체 누구더러 내 동반자가 되어달라고 감히 청할 수 있겠느냔 말이오. '두 사람이 몽등이의 양쪽 끝을 붙잡으면 짐이 훨씬 가벼워진다'는 속담을 당신도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중 한 사람이 짐즐 나를 수가 없다면 나머지 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알렉세이," 마리안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 이령게 말했다. "당신은 너무 일을 과장해서 생각하시 는 것 같아요. 우린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나요?" 네지다노프는 깊이 한숨을 몰아 쉬었다. "마리안나, 난 당신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소. 그리고 당신은 나를 동정하고 있는 거요. 우리 두 사람은 각자의 성실성을 서로 믿고 있지.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오! 그러나 우리 사 이에 사랑이라는 건 없거든," "하지만 알렉세이,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오늘 당장이라도 추격대가 우릴 붙잡 으러 오지 않겠느냔 말이에요……우린 함께 떠나야 해요, 혜어 질 때가 이니예요 ……‥." "그렇지. 조시마 승려를 찾아가터 솔로민의 제안대로 결혼식을 올리자는 거겠지. 그러나 당신의 눈으로 보면, 이 결혼은 일종의 여행 면허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 소. 경찰의 까다로운 검문을 퍼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오…… 그러나 어썼든 그건 어느 정도는 당신을 속박하게 될 것이오. 둘이 함께 살아야 하니까…… 그리고 만일 녹박하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함께 살 수 있다는 회망을 예상할 수는 있겠지. " "그건 도대체 무슨 뜻이죠, 알렉세이? 당신은 여기 남으실 작정이세요?" 네지다노프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소' 하고 말하려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이렇게 대답했다. "아, 아 …… 아니오. " "그럼 당신은 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실 생각이세요?" 네지다노프는 그녀의 손을 꼭 그러쥐었다. 그녀의 손은 그때까지 그의 손에 그대로 얹혀져 있었다. "보호자나 후견인 없이 당신을 혼자 매버려두는 건 최악이 될 테니까, 내가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그령게는 하지 않을 것이오. 당신에겐 보호자가 있게 될 것이오. 그 점은 근심하 지 말아요!" 마리안나는 네지다노프 쪽으로 몸을 굽혔다. 그러고는 근심 어린 빛으로 자기 얼굴을 그 의 얼굴로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그의 눈을, 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당신 왜 그러시죠, 알켁세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죠? 말해 줘요! 근심이 되어 죽겠어요. 당신의 말이 너무나 수수께끼 같고 너무나 이상스러워서 …… 게다가 당신의 얼 굴빛까지! 전 당신의 그런 표정을 아직 한 번도본 적이 없어요!" 네지다노프는 살그머니 그녀를 밀어젖히고 그녀의 손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아. 이번에는 그녀도 뿌리치려 하지 않 았다. 그리고 웃지도 않았다. 그저 근심 어린 불안한 눈으로 네지다노프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발 근심하지 말아줘! 여기엔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으니까, 내가 괴로워하는 건 바 로 이런 것 때문이오. 소문에 의하면 마르켈로프가 농군들에게 얻어맞았다더군. 그 사담은 농군들의 주먹맛을 본 거지. 두들겨 맞았으니까 …… 난 얻어맞진 않았소. 오히려 그들은 나 와 함께 술을 마시고 내 건강을 축복해 주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내 마음을 두 들겨 펀 거요. 나는 마르켈로프보다 더욱 호되게 그들애게 맞은 셈이지. 난 처음부터 비틀려 진 인간으로 태어났었소…… 난 그걸 고치려고 했으다 오히려 더 심하게 비틀려 버렸단 말 이오. 당신이 내 얼굴에서 느긴다는 것도 실은 이런 것일 거요." 네지다노프는 두 손을 마 주잡았다. "마리안나, 당신은 내 모든 존재를 손에 젼 듯이 환히 례뚫어보고 있소. 그래서 미리 말 해 두지만, 내가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당신은 조금도 놀라지 않을 거요!" 마리안나는 그 말의 해명을 요구하모 싶었으나 물어보지 않았다…… 게다가 바로 이때, 솔로민이 방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의 동작은 평상시보다 민첩하고 긴장되어 있었다. 가늘게 뜬 두 눈, 굳게 다문 널은 입 술 그리고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흐르는 솔로민의 얼굴에서는 메마르고 딱딱한, 다소 거친 표정까지 엿보였다. "여러분!" 솔로민은 이혈게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온 건 꾸물거리고 있을때가 아니라;I 걸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어서 준비하세요.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한 시간 후엔 모든 준비가 갖추어져 있어랴 합니다.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떠나야 하니까요. 파클린에게서는 아 무 연락도 없습니다. 그 사람의 마차는 우선 알쟈노예에서 억류되었다가 다시 이리 되돌아 왔습니다…… 파클린은 그 집에 머무른 겁니다. 아마 시내로 데려갔을 테죠. 물론 그 사람은 밀고 같은 건 안 하겠지만, 글쎄 알 수 없는 일이죠. 혹시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도. 하핀 그 마차만 봐도 짐작은 할 수 있지만요. 종형한테는 미리 말해 뒸습니다. 파벨이 함께 따라가서 증인이 되어줄 겁니다. " "그럼 당신은…… 자넨?" 하고 네지다노프가 물었다. "자넨 떠나지 않는건가? 자네도 여 행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는 솔로민이 신고있는 목이 긴 소택용 장화를 눈 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건 그저 …… 마당이 질어서. " "그러나 우리 때문에 책임을 지게 되는 건 아닐 테지?" "그렇진 않겠지 …… 어쨌든 그건 내 문제니까. 자, 그럼 한 시간 후에. 마리안나, 타치야나가 당신을 만나보고 싶어하더 군요. 저기서 뭔가 준비하고 있습니다. " "아참! 저도 그 여자한테 가려던 참이었어요." 마리안나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네지다노프의 떨굴에는 뭔가 이상한 표정이 깃들였다. 그것은 두려움과 우수에 가까운 이상 야룻한 표정이었다. "마리안나, 당신 가는 거요?" 별안간 맥빠진 소리로 네지다노프가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30분 후에 돌아오겠어요. 짐은 곧 꾸려질테니까요. " " 그럴 테지. 하지만 이리 좀 와요……." "그러죠. 무슨 일인데요?" "난 다시 한 번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은 거요." 그는 오랫동안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 았다. "잘있어, 잘있어, 마리안나!" 그녀는 이 말에 깜짝 놀랐다. "아니, 저런……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지껄인 것이오. 당신 제달 훌면 돌아오는 거지, 응?" "물론이죠. " "아, 그렇지 …… 그령지 …… 용서해 줘. 잠을 못 자서 머리가 혼미해지는군. 나도 곧 짐을 꾸릴게. " 마리안나는 방에서 나갔다. 솔로민도 뒤따라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네지다노프가 그를 불러 세웠다. "솔로민!" "왜 그러지?" "손을 빌려우게. 자네의 호의에 감사해야겠어." 솔로민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별 엉뚱한 말을 다 생각해 내는군!" 그러면서도 그는 네 지다노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네지다노프는 말을 이었다. "만일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자네에게 기대를 걸어도 좋겠지. 자넨 마리안나를 버리지는 않겠지?" "자네의 미래의 처 말인가?" "그래, 마리안나 말이네. " "첫째로 난 자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확신하네. 둘째로 자넨 안심해 도 좋아. 자네에게 마리안나가 소중하듯이 내게도 역시 소중한 사람이니 말이야. " "오오! 난 그걸 알고 있었네…… 알고 있었어 …… 알고 있고말고! 그령다면 뤘어. 고맙네. 그럼 한 시간 후지?" "한 시간 후. " "그캐까지 준비해 두겠네. 그럼 안녕!" 솔로민은 밖으로 나가 층계에서 마리안나를 따라잡았다. 그는 그녀에게 네지다노프에 대 해 뭐라고 말할 생각이었으나 그대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한편 마리안나도 자기대로 솔 로민이 네지다노프에 대해서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하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말이 없었다. 솔로민이 방에서 나가자 네지다노프는 곧 소파에서 일어나 이쪽 구석에서 저쪽 구석으로 두 번 가량 왔다갔다하더니 방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돌처 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부르르 몸을 떨더니 황급히 자기의 '가장 무도회복'을 벗 어서 발로 걷어차 한쪽 구석으로 밀어젖힌 다음, 예전의 자기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다음 삼각 테이블로 다가가 서랍 속에서 두 통의 봉함 편지와 조그만 물건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는 조그만 물건은 주머니에 넣고 두 통의 편지는 책상 위에 그대로 남겨놓았다. 그 다음 그는 난로 앞에 웅크리고 앉아 통풍구를 열었다. 난로 속에는 수북이 재가 쌓여 있었다. 그 것은 네지다노프의 비밀수첩을 비롯해 그가 쓴 모든 것의 혼적이었다. 그는 지난밤에 그것 을 모두 태워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켈로프에게서 받은 마리안나의 초상화만은 한쪽 벽 에 걸려 있었다. 아마 그 초상화까지 태워버릴 만한 용기는 없었던 모양이다. 네지다노프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메어 봉함 편지와 나란히 책상 위에 을려놓았다. 이윽고 그은 단호한 동 작으로 모자를 낚아채고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옳기려 했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고 마리안 나의 방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1분 가량 그곳에 서서 주위를 둘러본 다음 그녀의 좁다란 침 대로 다가가서 그 위에 몸을 굽혔다. 그리고 소리 없이 흐느끼며 침대에 입을 맞추었다. 그 러나 그것은 머리맡이 아닌 발치 쪽이었다…… 그 다음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모자를 이마 까지 푹 눌러쓰고 그대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네지다노프는 복도, 층계, 또 아래층에서도 누구 한 사람 만나지 않았다. 그는 정원 속으 로 들어갔다. 하늘이 낮게 내려앉은 찌푸린 날이었다. 촉촉한 바람을 받아 풀끝이 하늘거리 고, 나뭇잎이 흔들리고 있었다. 공장의 기계소리와 소음은 평상시보다 조용했다. 공장 뜰에 서는 석탄이며 타르, 기름 냄새가 풍겨왔다. 네지다노프는 수상쩍은 눈으로 흘굣 주위를 살 펴보고는 사과나무 고목을 향해서 귿장 걸음을 옳겼다. 그것은 그가 공장에 도착한 바로 그 날 처음으로 창밖을 내다보았을 때 그의 관심을 끌었던 나무였다. 사과나무 줄기는 메마른 이끼로 귀덮여 있었다. 군데군데 불그죽죽한 나뭇잎이 남아 있는 앙상하고 거친 나뭇가지들 은 팔꿈치를 구부리고 기도를 드리는 노인의 손처럼 구불구불 위로 휘어져 있었다. 네지다 노프는 사과나무 밑등을 둘러싸고 있는 흑토 위에 힘있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까 호 주머니에 넣었던 그 조그만 물건을 끄집어냈다. 그 다음 그는 다른 건룰의 창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만일 이 순간 누군가가 나를 본다면,'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마 지연시 키게 될지도 모르지 ……‥ 그러나 아무 데도 사람의 그림자라곤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죽어 없어지고 모든 것이 그에게 등을 돌리고, 그를 운명의 손에 내맡긴 채 영원히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공장만이 연속적인 무딘 작동음을 내면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바늘처럼 찌르는 차가운 빗방울이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네지다노프는 머리 위의 구부러진 나뭇가지 사이로 축축한 잿빛 하늘을 무심히 을려다보았 다. 그리고 그는 하품을 하며 흠칫 몸을 떨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밖의 다른 빵법은 없지 않은가. 이제 와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 감옥에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고……‥ 그 는 모자를 집어 턴지고 미리부터 그 어떤 달콤하고도 강한 번민을 온몸에 느끼면서 가슴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그 순간 무언가가 그를 떠밀친 것 같았다. 별로 강하게 떠민 것 같지는 알았다. 하지만 이미 그는 땅 뒤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왜 지금 타치야 나의 얼굴이 보인 것일까…… ?'라는 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는 타치야나의 이름을 부 르고, '아아, 필요 없어요!' 하고 말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마비되어 있었 고, 그의 머리, 눈, 이마, 머리 속에는 흐리멍덩한 초록빛 회오리바람이 맴돌기 시작갰다-그 리고 뭔가 무섭게, 평평하고 묵직한 것이 영원히 그를 땅바닥에 눌러버리고 말았다. 타치야나가 네지다노프의 눈에 띈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긴 순간 타치야나가 사과나무 밑에 서 있는 그를 발견했던 것이다. '아니, 왜 이런 날씨에 모자도 안 쓰고 사과나무 밑에 서 있을까?' 그녀가 미처 이런 생삭을 할 겨를도 없이, 네지다노프는 짚단처럼 뒤로 나자빠졌다. 그녀는 총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너무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곧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으므로 쏜살같이 뛰어 내려가서 정원으로 향했다. 그 녀는 네지다노프가 있는 곳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알렉세이 드미트리애비치, 왜 그러시죠?" 그러나 그때는 이미 암혹이 그를 쉽쓴 뒤였다. 타치야나는 그에게 몸을 굽혔다. 그는 피 를 흘리고 있었다. "파벨!"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파벨!" 몇 초 후 마리안나와 솔로민, 파벨 그리고 두 명의 공장 직공이 정원으로 왔다. 네지다노 프는 사람들에게 들려 곁채로 운반되었다. 그는 자기가 마지막 밤을 보냈던 바로 그 소파 위체 내려졌다. 핏기 없는 얼굴에, 움직이지 않는 눈을 반쯤 감은 채 그는 반듯이 누워 있었다. 목이 잠 기는지 그는 때때로 혹흑 느끼면서 괴롭고도 거칠게 숨을 헐떡 거리고 있었다. 생명은 아직 도 그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마리안나와 솔로민은 소파 양 옆에 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네지다노프에 못지않을 만큼 피리한 얼술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특히 마리안나는 심 한 충격과 자극 때문인지 어리벙벙해 했으나, 그래도 놀라지는 않았다. '어째서 우린 이것을 예견하지 못했을까?' 그들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었으나, 그와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 우리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을 예견했던 것이다. ' 네지다노프가 마리안나에게, "미리 말 때 두지만, 내가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당신은 조금도 놀라지 않을 거요"라고 했을 때-그리 고 그의 내부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의 생존을 방해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그녀는 과 연 어떤 막연한 예감 같은 것을 마음속으로부터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그녀는 왜 그때 당 장 주의를 돌리지 않았던 것일까?그녀는 왜 그 말과 그 예감을 곰곰이 되씹어 보지 않았던 것일까? 왜 그녀는 지금 솔로민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걸까?어째서 솔로민이 자기의 공범자처럼 느껴지는 걸까?....왜 솔로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듯이 보여질까? 절망에 가까운 끝없는 연민을 네지다노프에게서 느끼면서도 무겁고 기분 나쁜 수치감이 드는 것은 어째서 일까? 그클 구하는 것은 그녀의 마음 하나에 달렸던 것이 아니었을까?어째서 그를 두 사람 은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는 걸까? 거의 숨을 죽이다시피 하고,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기 다리고 있는 걸까? 아아! 물론 아무 회망도 없었지만, 솔로민은 의사를 부르러 보냈다. 이미 거무튀튀하게 색이 변 한, 피도 더 이상 흐르지 않는 네지다노프의 상처 위에, 타치야나는 찬물에 적신 해면을 갖 다대고 초를 탄 냉수로 머리카락을 적셔주고 있었다. 잠시 후 네지다노프의 가쁜 숨소리가 별안간 그치더니 약간 몸이 꿈틀거렸다. "정신이 든 거요." 솔로민이 속삭였다. 다리안나는 소파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때까지 네지다노프의 두 는은 죽은 사람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던 것이다. "난 아직... 살아 있군." 들릴락말락 한 소리로 그가 말했다. "이번에도 실수를 해서 자 네들 신세를 지는군. " "알로샤. " 마리안나가 신음하듯 말했다. "아, 그래... 지금... 기억하오, 마리안나? 내...시중에...'나를 꽃으로 덮어다오... 하는 시가 있었지...그런데 꽃은 어디 있소? 그러나 그 대신 당신이 내 옆에 있구려... 저기 내 편지 속 에...." 별안간 그의 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오오, 자, 여기... 두 사람 다... 서로 손을 잡아요... 내 앞에서...자, 빨리...잡아." 솔로민은 마리안나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네지다노프의 상처 위에 고개를 떨군 채 소파에 몸을 기대 고 있었다. 솔로민은 밤처럼 음울안 얼굴로 꼿꼿이 몸을 펴고 엄숙히 서 있었다. "이젠... 됐어... 이젠...." 네지다노프는 또다시 혹혹 느끼기 시작했으나, 이미 보통때의 흐느낌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앞가슴이 들려지고 양 옆구리가 움푹 들어가 있었다…… 분명히 그는 서로 맞잡 은 두 사람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고 싶어하는 눈치였으나 그의 손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 름이 없었다. "마지막이에요." 문에 서 있던 타치야나가 이령게 속삭이고는 성호를 그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뜸해지고 짧아졌다…… 그는 여전히 마리안나를 눈으로 찾고 있었 으나‥‥ 이미 그의 눈에는 그 어떤 무서운, 회부연 적막이 덮여져 가고 있었다. "뤘어 ……‥."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솔로린과 마리안나가 맞잡은 두 손은 여전히 네지 다노프의 가슴 위에 얹혀져 있었다. 그가 남긴 짤막한 두 통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적혀 있었다. 한통은 실린 앞으 로 쓴 것으로 전부 합해야 몇 줄 안 되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잘 있게, 사랑하는 친구여, 잘 있게! 자네가 이 종잇조각을 받아쥘 때면 이미 나는 이 세 상에 없을 걸세. 동기나 이유는 묻지 말게. 그리고 나를 애석히 여길 필요도 업네. 나는 오 히려 지금이 더 기분 좋다는 것을 이해해 주게나. 자넨 우리의 불멸의 시인 푸슈킨의 책을 들고 (에프게니 오네긴)속의 렌스키의 마지막 장면을 읽어보는 것이 좋을 걸세. 기억하겠지 - '백묵으로 칠해진 하얀 창문들, 주인은 없다' 등등. 이게 전부네. 자떼에게 할 말이라곤 아무것도 없군그래. 아니, 할 말은 태산같이 많지만 시간이 없기 때문일새. 그러나 나는 자 네에게 아무 말도 않고 떠나가고 싶지는 않았다네. 그렇지 않으면 자덴 날 산 사람으로 생 각할 테고 그리고 나는 우리 두 사람의 우정 앞에 죄를 짓게 될 테니까. 잘 있게. 부디 오래 살아 살아줘. 자네의 친구 AN 또 한 통의 편지는 약간 긴 것이펐다. 그것은 솔로민과 마리안나 앞으로 쓴 것이었다. 거 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내 어린 벗들이여! (이 말 바로 뒤에는 공백이 있었다. 뭔가 지운 것 같기도 하지만, 아 마 눈물이 떨어져 얼룩진 것 같았다. ) 내가 이렇게 부르는 것을 자네들은 아마 이상하게 생각할 테지. 나 자신 어린애와 다름없 고-자네, 솔로민은 물론 나보까는 손위니까, 그러나 나는 죽음을 앞에둔 인생의 종점에 서 서 자기 자신을 노인처럼 바라보고 있는 걸세. 나는 자네 두사람에게, 특히 마리안나에게 무 척 죄스럽게 생각하네, 이런 슬픔을 안겨준데다가 (마리안나, 당신이 슬퍼하리라는 것을 나 는 알고 있소.) 여러 가지로 심려를 끼쳐 주었으니 말이야. 그러나 어떻게 하겠나? 달리 출 구를 발견할 수 없었으니, 나는 벌거숭이가 될 수는 없었던 거야. 그러니 자기 자신을 청산 할 수밖에. 마리안나, 나는 나 자신에게나 당신에게 있어서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요. 당신은 관대한 여자니까 그 짐마저 새로운 희생으로서 기뻐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당신에게 그러한 회생을 짊어지게 할 권리는 내게 없었턴 거요. 당신은 보다 크고 보다 훌 릉한 사업을 가지고 있소. 내 어린 벗들이여, 이른바 저승의 손으로 자네들을 결합시키는 나 를 용서해 주게나. 자네 두 사람은 행복한 한 쌍이 될 걸새. 마리안나, 당신도 결국에는 솔 로민을 사랑하게 될 거요-그런데 그는…… 그는 시퍄긴 집에서 당신을 만난 이후부터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턴 거요. 우린 그로부터 며칠 후 함께 집을 빠져나왔지만, 그 사실은 내게 있어 너무나 영백한 것이었소. 아아, 그날 아침은 얼마나 보람 있고 상쾌하고 젊음에 찬 아침이었던가! 지금 나는 자네 두 사람의 생활-당신과 솔로민의 생활의 상징으로서, 표 상으로서 그날 아침을 머리에 그리고 있는 거요. 나는 그때 우연히 그의 위치를 차지한 데 불과했던 것이오. 그러나 붓을 놓을 때가 뤘군, 마리안나, 난 당신을 슬크게 하고 싶진 않소 …… 나는 그저 자신을 변명하고 싶을 뿐이오. 내일이면 매우 견디기 힘든 몇 분간이 찾아 을 테지 …… 그러나 어떻게 하겠소? 달리 출구가 없으니! 잘 있어요, 마리안나. 내 귀여운, 결백한 처녀여! 잘 있게, 솔로민! 자네에게 그녀를 맡기네. 행복하게 살아줘. 남의 도움이 되 게 살아주게. 마리안나, 당신은 그저 행복할 내만 나를 회상해 주오. 역시 결백하고 좋은 사 람이었지만, 어쩐지 삶보다도 죽음 쪽이 더 어울렸던 사람으로서 나를 상기해 주오.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이 진정한 것이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여, 이것만은 알고 있소. 나는 그보다 강한 감정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던 거요. 그리고 만일 그와 같든 감정을 무덤에 지니고 가치 않는다면 죽음은 래게 있어 더욱더 무섭게 여겨졌을 것이 오. 마리안나! 만일 언젠가 마슈리나라는 처녀를 만나게 되면(솔로민은 그 여자를 알고 있 소. 하긴 당신도 아마 그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을 거요)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해 주오. 내 가 죽기 얼마 전에 감사의 마음과 더불어 그녀를 떠올켰다고……그렇게 말하면 그 여자는 알아들을 것이오. 아, 이젠 붓을 놓을 때가 된 것 같소. 지금 창밖을 내다보니 쏜살같이 달리는 비구름 사 이에 아름답게 반짝이는 별 하나가 떠 있소. 구름이 제아무리 빨리 달리더라도 별은 당신을 생각케 했소. 바로 그 순간, 당신의 방문으로 다가가서 귀를 기울였소. 그러자 당신의 그 순 결하고 평온한 숨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였소 …… 그럼 안녕! 잘들 있어요. 나의 어린 벗 들이여, 나의 벗들이여!- 당신의 A로부터 저런, 저런! 죽음을 앞둔 이 편지에서 나는 어쩌자고 우리의 위대한 사업에 대해선 한마 디도 말하지 않는 걸까. 아마 죽음을 앞에 놓고 새삼스레 거짓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일지 도 모르지 …… 마리안나, 이 추신을 용서해 줘 …… 허위는 내 속에 있었던 게요-당신이 믿고 있는 그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니오!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마리안나, 당신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소 그 사람은 감옥에 들어갈 것이 분명하므로, 감옥이 무서운 나머지 그것을 피하기 위해 그러한 방법을 쓴 것이라고. 그러나 그령지는 않소1 감옥은 조금도 무서을 게 없소. 그러나 자기가 믿지도 않는 사업 때문에 감옥에 들어간다-이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느냔 말이오. 결국 그러 기에 나는 죽음을 택한 거지만, 결코 감옥이 무서워서는 아니오. 그럼 잘 있어요, 마리안나! 잘 있어요, 그지없이 순결한 나의 사랑이여! 마리안나와 솔로민은 교대로 이 편지를 읽었다. 그 다음 그녀는 두 통의 편지를 호주머 니 속에 넣고 자기 초상화를 든채 움직일 줄 모르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때 솔로민이 그녀에게 말했다. "마리안나, 준비는 다 뤘소. 갑시다, 그의 의지를 수행해 야죠." 마리안나는 네지다노프 쪽으로 다가가 이미 싸늘하게 식은 그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그 리고 솔로민 쪽으로 뒤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가지요. "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즌 방을 나갔다. 몇 시간 후, 경관들이 공장을 습격했을 때, 그들은 물를 네지다노프를 찾아내긴 했으나, 그는 이미 시체로 변한 뒤였다. 타치야나는 말끔히 그의 읏을 정돈하고 머리 밑에는 하얀 베개를 괴고 두 손을 포개놓은 다음, 옆의 탁자위에는 꽃다발까지 마련해 놓았다. 미리 필요 한 모든 지시를 받은 파벨은 극히 정중하면서도 조소 어린 태도로 경찰을 맞이했다. 그래서 경관들은 그에게 감사를 해야 할지 흑은 그도 함께 체포해야 할지 도대체 갈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파벨은 자살이 이루어진 상황을 이야기한 다음 경관들에게 스위스제 치즈와 마데라 주를 대접했다. 그러나 바실리 페토트이치와 처녀의 행방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고 잡아뗐다. 그리고 바실리 페토트이치는 바쁜 몸이라 결코 오랫동안 공장을 비우는 일이 없으니까 틀림없디 오늘이나 내일중으로 돌아을 것이고 그때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알려 주겠다는 확약 정도로 그쳤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그는 놀랄 만큼 정확한 사내였던 것이 다. 이렇게 되어 경관들은 시체 감시인만을 남기고, 나중에 예심 판사를 보내겠다고 한 후 아무 소득 없이 그대로 철수하고 말았다. 38 이런 사건이 있은 이틀 후, '풍배 좋은' 승려 조시마댁 마당 안으로 한 대의 농군 마차가 들이닥쳤다. 그 속에는 한 쌍의 남녀가 타고 있었다. 그 두사람은 도착한 다음날, 결혼식을 마쳤다. 그 다음 두 사람은 곧 자취를 감추었지만 선량한 조시마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솔로민이 버리고 간 공장에서, 주인 앞으로 쓰여진 한 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파벨에 의해서 주인에게 전해진 그 편지 속에는 완전 무결한 공장의 사 업보고가 들어 있었고, (사업 성적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 3개뭘의 휴가원이 함께 있었다. 이 편지는 네지다노프가 죽기 이틀 전에 쓰여진 것이었다. 이 사실로 미루어, 솔로민은 이미 그때부터 네지다노프와 마리안나와 함께 공장을 피해 몸을 숨띨 필요가 있다고 보았던 것이 분명했다. 자살 사건에 대한 예심이 행해졌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시체는 매장되었다. 그 리고 시파긴은 조카딸의 수색을 완전히 단념했다. 그로부터 9개월 후 마르켈로프의 공판이 열렸다. 그의 태도는 현지사 앞에서와 마찬가지 로 법정에서도 태연자약했다. 다소 의기소침한 감도 없지 않았으나, 침착성과 위엄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평상시의 과격한 기질은 누그러졌다고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그가 소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보다 고상한 다른 감정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변명하지 않 았거니와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았다. 또한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고 동료의 이름을 팔지도 않았다. 핼쑥하게 여윈 얼출에 빛을 잃은 그의 두 눈이 운명에 대한 복종과 단호한 결심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간결하면서도 기탄 없는, 정직한 그의 대답은 재판관들 사이에서 마저 동정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를 체포하고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농군들 까지도 그의 그러한 감정을 알아차리고는, 그는 소박하고 선량한 나리라고 중언하기까지 했 다. 그러나 그의 범죄는 너무나 명백했으므로 형벌을 퍼할 수는 없었다. 그치고 그 자신도 그러한 형벌을 당연하다고 보는 것 같았다. 몇 명 안 되는 그 밖의 공범자들, 즉 마슈리나는 자취를 감추어버렸고 오스트로두모프는 한 평민에게 폭동을 선동하다가 그만 상대방이 잘못 떠밀치는 바람에 그대로 숨지고 말았다. 그리고 골 루시킨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뉘우침' 으로(그는 공포와 번민 때쑨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 가벼운 형벌에 처해졌다. 키슬랴코 프는 한 달쯤 구속된 후 곧 풀려 나와 다시 현을 싸돌아다니기 시작했으나, 당국도 그에 대 해서만은 별로 방해하지 않았다. 또한 네지다노프는 죽음으로 모든 것을 청산했다. 솔로민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약간의 혐의를 받은 채 그대로 방치되었다 (어쩠든 그는 재판 을 피하지 알고 기일 안에 출두했던 것이다). 마리안나에 대해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파플린은 여기서 완전히 빠져나갔다. 그에겐 아무도 특별한 주의를 돌리지 않았던 것이다. 일년 반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1870년 겨울이 다가왔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3등관에 시 종을 겸한 시파긴이 중대한 역할을 다기 위한 준비에 바빴다. 그는 모든 예술의 보호자로서 음악의 밤을 개최하는가 하면 간이식당을 설치하기도 했다. 칼로메이체프는 부내(친천)에서 도 가장 유망한 관리 중의 한 사람으 로 지목되고 있었다-바로 이런 페테르부르크에서, 고양이 털 깃을 단 허술한 외투를 입은 조그마한 사내가 가볍게 몸을 휘청거리면버 절뚝절뚝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어느 거리를 걸 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파클린이었다. 최근에 와서 그의 모습도 많이 변해 있었다. 털모자 밑으로 나온 관자놀이 끝에서는 몇 오라기의 백발마저 엿보였다. 그의 맞은편 보도를 따라, 제법 뚱뚱하고 키가 큰 한 부인이 검정 외투에 단단히 몸을 감싼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 었다. 파클린은 흘끗 그녀를 바라보고는 그대로 지나쳤으나……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생각 에 잠기면서 두 손을 펼쳤다-그리고 홱 몸을 돌려 그녀를 따라잡아 모자 밑의 그녀의 얼굴 을 들여다 보았다. "마슈리나 아니세요?"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부인은 위엄 있는 태도로 그를 한 번 훌어보고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앞으로 걸음을 옮 겼다. "마슈리나양, 당신을 알아봤단 말이에요." 파클린은 부인과 나란히 걸으면서 말을 이었 다. "제말 두려워하지 마세요. 밀고하진 않을 테니. 당신을 만나니 정말 기쁘군요! 전 파클린 이에요, 실라 똬클린올시다. 아시죠? 네지다노프의 친구인‥‥ 제 집에 들러주세요. 바로 엎 어지면 코 닿을 곳이니까요‥‥ 자 어서." "이오 소노 콘페사 로카 디 산토피우메(이탈리아어로 '난 산토피우메의 로카 백작 부인 이에요'라는 말)!" 부인은 나직한 목고리로 이렇게 말했지만, 그것은 놀랄 만큼 순수한 러시 아식 발음이었다. "백작 부인이라뇨…… 아니, 무슨 그런 말을 하세요…… 자, 저회 집으로 가서 얘기나 하 십시다……‥ "어디 사시는데요?" 이탈리아 백작 부인은 마침내 러시아어로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전 짬이 업어요." "저는 여기, 바로 이 거리에 살고 있습니다. 저기 보이는 3층집이 제 집이올시다. 당신은 정말 마음이 착하시군요. 더 이상 제게 숨기려 하지 않으니 말이에요! 자, 손을 내주세요. 함께 가십시다. 여기 오신 지 오래 되셨나요? 그런데 왜 백작 부인이라는 거죠?이탈리아 백 작과 결혼이라도 하셨나요?" 마슈리나는 백작과 결혼을 한 적이 없었다. 다만 그녀는 최근에 사망한 산토퍼우메의 로 카 백작 부인의 명의로 발급된 여권을 손에 넣었으므로, 이탈리아 어라고는 한마디도 모르 고 게다가 영락없는 러시아인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태연히 그 여권을 가지고 러시아로 온 것이었다. 파클린은 자기의 검소한 집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함께 살고 있는 곱사등이 여동생이 조 그만 부엌과 역시 자그마한 현관을 격리시키고 있는 칸막이 뒤에서 나오며 손님을 맞았다. "자 스난둘리야," 파클린이 말했다. "소개하지. 이분은 내 막역한 친구야. 자, 빨리 차를 가져오도록." 파클린이 네지다노프의 이름을 상기시키지 않았다면 마슈리나는 그의 집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모자를 벗고 사내같이 투박한 손으로, 전과 다름없이 짧게 깎은 머리카락을 매만지고는 인사를 하고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조금도 변한 데라고는 없었다. 입고 있는 옷까지도 2년 전의 바로 그옷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에는 그 어떤 움직이지 않는 슬픔이 어려 있었으므로, 그녀의 평범하고 무뚝뚝한 얼굴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로부터는 뭔가 심금을 울리는 듯한 야릇한 느낌이 풍겨나고 있었다. 스난둘리야는 사모바르를 준비하려고 밖으로 나갔고 파클린은 마슈리나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채 상대방의 무릎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는 말을 '꺼내기에 앞서 우 선 헛기침을 해야 했다. 그의 목소리는 토막토막 끊어졌고,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반짝였 다. 마슈리나는 의자 등에 기댈 생각도 않고 꼿꼿이 앉아 있었고 시종 음울하게 다른 곳만 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죠, 그렇죠." 이윽고 파클린이 말문을 열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죠! 당신을 보니 생 각나는군요……‥여러 가지 일이며 여러 사람들이 …… 죽은 사람들과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 앵무새 노부부도 세상을 떠났답니다. 그렇지, 당신은 그 노인들을 모르시겠군요 …… 제 가 예언했던 대로 그 두 사람은 같은 날에 죽었답니다. 네지다노프는…… 불쌍한 네지다노 프는…… 당신도 아실 테죠? "네, 알고 있어요." 마슈리나는 여전히 그를 외면한 채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오스트로두모프에 대해서도 아십니까?" 마슈리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녀는 파클린이 네지다노프에 대한 이야기 를 계속해 주기를 은근히 바랐으나 그렇다고 그에 대해 물어 볼만한 용기가 선뜻 나진 않았 다. 그러나 파클린이 상대방의 눈치를 재빨리 알아차렸다. "그 사람이 남긴 유서 속에 당신에 대한 말이 써 있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사실인 가요?" "사실이에요." 그녀는 마침내 이렇게 대답했다. "멋있는 사내였습죠! 다만 자기 생리에 맞지도 않는 일에 빠졌던 게 잘못이었던 거죠! 그 사람도 저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혁명가였으니까요! 그 사람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당신 은 아십니까? 사실주의적인 낭만주의자였던 거예요! 제 말뜻을 아시겠습니까?" 마슈리나 는 흘끗 파클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파클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의 말을 알아들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녀는 파클린이 염치 좋게도 자기 자신을 네지다노프와 비교하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고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됐다. 그렇지만 그녀는 '마음대로 자기 자랑을 하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기 자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오히려 그의 생각에 의하면, 그는 자기 자신을 비하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 "실린이라는 사내가 여길 찾아왔었죠." 파클린이 말을 이었다. "네지다노프는 죽기 전에 그 사람한테도 편지를 썼다더군요. 바로 그 실린이 혹시 고인의 유고 같은 것을 찾을 수 없 을까 하고 묻는 거예요. 그러나 알로샤의 물건은 모두 봉인이 되어버렸고…… 게다가 종이 한 장 남은 것이 없었거든요. 죄다 불태워버렸으니까요. 자기 시까지도. 그 사람이 시를 썼다는 건 아마 당신도 모르셨을 테죠? 저는 그게 아깝다즌 거예요. 그중에는 왜 좋은 시도 있었을 테니까요. 그 모든 것이 그 사람 과 함께 사라지고 만 겁니다. 동일한 소용돌이에 휘말린 채 영원히 끝장이 난 거죠! 그저 친구들 사이에 추억으로만 남았지만 그나마도 친구들까지 죽어버리면 그만이지요!" 파클 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 "그 대신 시파긴 부부는,"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생각하세요, 그 겸손한 체하면서도 거 만하고 혐오감을 주는 고관 말입니다-그 자들은 권력과 영광의 정상에 올라 있답니다!" 마슈리나는 시파긴 부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파클린은 그 두 사람을 너무나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에(특히 시파긴을 더 증오했다. ) 그 사람들을 혹평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도 싶지 않았던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그 사람의 집에는 고상한 분위기가 넘쳐 흐른다는 거예요! 언제나 선덕 의 얘기만 한다는군요. 하지만 제 관찰에 의하면 지나치게 선덕에 대해서 지껄인다는 것은 환자가 있는 병실에 마구 향을 퍼우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필경 그러기에 앞서 무슨 나쁜 짓이라도 몰래 꾸몄을 겁니다. 아무래도 수상하거든요! 불쌍한 알힉세이를 파멸시킨 것도 그놈들이죠. 그 시파긴 부부란 말입니다!" "솔로민은 어떻게 됬나요?" 마슈리나가 물었다. 그녀는 갑자기 이 사내한테서 네지다노 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생각이 가시고 말았다. "솔로민 말인가요!" 파클린이 외쳤다. "그 사람은 훌릉한 사내죠. 멋지게 빠져버렸서든요. 그전의 공장을 그만두고 쟁쟁한 직공들을 빼냈답니다. 거기에 한 사람 머리가 잘 도는 약삭 빠른 사람이 있었다나봐요! 그 사람은 파벨이라고 하는데…… 그 파벨도 데려갔다는 거예 요. 지금은 저 어디, 페르미 근처에서 조그마한 자기 공장을 세워 협동조합 형식으로 운영해 나가고 있답니다. 그 사내는 자기 일을 멈추는 사람이 아닙니다! 꾸준히 구멍을 파나가는 사람이니까요! 부리는 가느다랗지만, 그 대신 단단하거든요. 정말 흘릉한 사람이죠! 무엇보 다도 중요한 것은 병든 사회악을 일시에 뿌리뽑으려 들지 않는 다는 겁니다. 우리 러시아인 들이 도대체 어떤 국민입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무엇인가가 흑은 누군가가 찾아와서 구리를 단번에 고쳐줄 테지, 우리의 모든 상처를 아물게 해줄 테지, 우리의 모든 질환을 마치 앓는 이를 빼듯이 뿌리째 뽑아버려 줄 테지 하고 이제나저제나 노상 기다리고만 있는 민족이 아 닙니까? 하지만 도대체 그러한 마법사는 무엇이겠습니까? 다윈주의일까요? 농촌일까요? 아 르힌 페레펜지예프일까요? 무엇이든 좋은 거죠! 그저 앓는 이만 빼주면 되는 거니까! 모든 것이 이렇게 게으르고 무기력하고 분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솔로민은 그렇지가 않거든요. 그 사람은 이 같은 건 잡아 빼지도 않으니까요. 정말 훌륭한 사람이죠!" 마슈리나는 손짓 을 해보였다. 그것은 마치 '그런 사람은 상대도 할 필요가 없다' 고 말하려는 듯한 눈치였 다. "그럼, 그 처녀는?" 하고 그녀는 물었다. "그 여자의 이름을 잊었군요. 그때 네지다노프와 같이 있던, 집을 나온 여자 말예요!" "마리안나 말인가요? 그 여자는 바로 그 솔로민의 아내가 됐죠. 결혼한 지 벌써 일년이 넘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명색뿐이었지만, 이젠 정말 아내가 되었다더군요. 그래요. " 마슈 리나는 또다시 아까워 같은 손짓을 했다. 한때 그녀는 네지다노프 일로 마리안나에게 질투를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죽 은 이의 추억을 배반할 수 있었던 그녀에 대해서 다만 울분을 느끼게 되었다. "이젠 애기도 있겠군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저도 모르니까, 아니, 어디 가시는 겁니까, 어디로?" 그녀가 모자를 집 어드는 것을 보고 파클린은 이렇게 덧붙였다.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이제 곧 스난둘리야가 차를 내올 테니까요." 그는 정말로 마슈리나를 붙잡아두고 싶었다기보다는 자기 마음속에 쌓이고 쌓인 울적한 심정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파클린은 페테르부르크 로 돌아온 후부터 극치 드물게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고 특히 젊은이들과는 더욱 그랬다. 네 지다노프의 사건 이후로 공포를 느낀그는 매우 조심스러워졌으며 사회와의 접촉도 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젊은이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파클린을 의심적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 사 내는 눈앞에 맞대놓고 밀고자라는 욕설을 퍼붓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파클린은 노인 들과 가까워지기도 싫었다. 그래서 그는 가끔 몇 주일씩 침묵을 지킬 때도 있었다. 그는 자 기 여동생 앞에서도 마음속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동생에게는 자신의 말을 이 해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오오, 천만에! 그는 오히려 동생의 지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생 앞에서는 완전히 이치에 들어맞는 신중한 말을 해야만 했 다. 그가 '실없는 말'이나 '황당무계한 말'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그녀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동정 어린 야릇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는 부끄러운 생각이 앞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말이지 가벼운 농담도 지껄일 수 없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실없는 말이라도 내뱉을 수밖에 ……이렇듯 페테르부르크의 생활은 파클린에게 혐오감을 주었다. 그는 이미 모스크바에라도 옳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여러 가 지 계획과 사색, 공상, 혹은 우습고 혹은 심술궂은 말들이 물길을 막은 물방앗간의 물처럼 그의 마음속에 자꾸만 불거만 갔다…… 물길을 틀 수가 없었으므로 물은 한 곳에 머무른 채 식어갈 뿐이었다. 바로 이때 마슈리나가 나타난 것이었다……그는 드디어 물길을 텄고, 쌓 이고 쌓인 말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페테르부르크며 페테르부르크의 생활 등 러시아 전체가 두들겨 맞았다. 누구에 대해서건 또 무엇에 대해서건 그는 추호의 용서나 없었다. 물론 마슈리나는 그런 그의 얘기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아무 대꾸도 않고 그의 말을 가로막지도 않았다…… 한편 파클린에게 있어서는 그 이상은 요구할 것이 없었다. "그렇습니다"하고 파클린은 말했다. "정말이지 재미있는 세상이 된 겁니다! 사회는 완전 히 침체되어 있고 모든 사람이 지옥과 같은 권태에 헐떡거리고 있습니다. 가령 젊은 전위적 비평가가 '암탉은 알을 낳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자 할 때, 그 위대한 진리를 서술 하기 위해서는 20페이지를 실히 메운다 해도 여전히 부족감을 느낀단 말예요! 글쎄 새털 이 불처럼 부풀어오른 데다가, 물에 축인 빵처럼 분명치가 않아서,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어대 지만 하나도 새로울 게 없단 말입니다! 과학은 어떻습니까…… 하, 하, 우리 나라에도 락식 한 칸트(칸트는 러시아어로 상품이라는 뜻)가 있습니다만, 문자 그대로 기술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죠! 예술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오늘이라도 한번 음악회에 가보세 요. 국민적인 가수 아그레만트스키의 노래를 들으실 수가 있습니다 ‥‥ 대단히 인기를 얻 고 있죠 ‥‥ 그러나 만일 죽을 먹는 잉어에게, 아시겠어요, '죽을 먹는 잉어'에게 목소리가 주어진다면, 아마 그와 똑같이 노랠 불렀을 겁니다! 그런데 그 스코로피힌은 아시겠어요, 러 시아의 고대 아리스타르쿠스(고대 그리스의 비평가)를. 그 선생까지도 그 자를 칭찬하는 거 예요! 이건 서구의 예술과는 다르다고 하면서 말이오! 그는 러시아의 엉터리 화가까지도 칭 찬한답니다! 그 사람의 말에 의하면 '나 자신도 예전에는 유럽이나 이탈리아에 대해서 감탄 을 금할 수 없었으나 이젠 롯시니의 오페라를 들어도 (에, 에)로, 라파엘로의 작품을 보아도 (에, 에! …… )로'랍니다. 그래서 러시아의 청년들에게는 이 '에, 에!'가 아주 유행어처럼 되 었던 겁니다. 즉 청년들은 스코조퍼힌을 따라 '에, 에!'만 되풀이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거 기에 만족하고 있는 형편이고요. 그러나 이와 동시에 국민은 극도의 빈곤에 허덕이고 있고, 과중한 조세 때문에 완전히 영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개혁이 이루어졌다고는 하 나 모든 농군들이 벙거지를 쓰고 시골 여인들이 머릿수건을 벗어버렸다는 것밖엔 변화가 없거든요……여전한 굶주림! 음주! 부농!" 그러나 이때 마슈리나가 하품을 했다-그리하여 파클린도 이젠 화제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당신은 아직도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죠?" 파클린이 그녀에게 말했다. "지난 2년 동안 당신은 어디 계셨고 또 여기 오신 지는 얼마나 되었으며 무슨 일을 했고 어떻게 해서 이탈리아인으로 변하신 겁니까?" "당신이 그런 걸 알 필은 없어요." 마슈리나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무엇 때문에 그것을 알려고 하는 거죠? 그건 이미 당신이 참견할 만한 일이 아니잖아요?" 파클린은 무엇엔가 찔린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자기의 당황한 표정을 조금이나마 감추려는 듯 짤막하게 너털 웃음을 웃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파클린이 말했다. "현세대의 눈으로 보자면 전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 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 말마따나, 전 이미…… 그 대열 속에 낄 수는 없으니까 요……‥ 그는 자기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아, 스난둘리야가 차를 내오는군요. 차라도 한잔 마시며 제말을 들어주세요. 제 말 속에도 뭔가 재미있는 것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마슈리나는 찻잔을 들고, 각설탕을 씹으며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파클린은 아까와는 달리 거리낌없이 큰소리로 웃어댔다. "여기에 경찰이 없는 것이 다행 한 일이지만, 이탈리아의 백작 부인이라니 ……뭐라고 하셨죠?" "로카 디 산토피우메." 뜨 거운 차를 들이키면서 마슈리나는 조금도 동요의 빛 없이 의젓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로카 디 산토피우메라……‥ 하고 파클린이 되풀이했다. "그렇게 설탕을 씹으며 차를 마시는 당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군요! 곧 경찰의 혐의를 받게 될 겁니다. " "하긴 국경에서도," 마슈리나가 말했다. "제복을 입은 이상한 사내가 자꾸 늘어붙으며 꼬 치꼬치 캐묻길래, 그만 참을 수가 없어 '제발 부탁이니 귀찮게 굴지 마세요!' 하고 말해 줬 죠." "이 탈리아어로요?" "아뇨, 러시아어로. " "그래 그 사람이 어떻게 하던가요?" "어떻게 하다뇨? 전하죠, 뭐. 가버리더군요!" "거 참 멋지군요!" 하고 파클린이 외쳤다. "정말 백작 부인답습니다! 자, 한잔 더 드세요! 그런데 전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당신은 아까 솔로민을 대수롭지 않게 보시는 것 같 았습니다만, 제 말 좀 들어보세요. 그 사람과 같은 그런 인간들이야말로 진짜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단번에 멸망하는 일이 없어요. 프들이야말로 진짜 인간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는 그들에게 속해 있는 겁니다. 그들은 영웅은 아닙니다. 그리고 영국인 인지 미국인인지 어떤 괴짜가 우리 같은 가난뱅이를 위한 교훈으로 노동 영웅에 대한 책을 쓴 바 있습니다만, 그들은 그런 '노동 영웅'조차 못 된다 이 말입니다. 그들은 건강하고 평 범하고 단조로운 민중 출신의 인간들입니다. 요즘 세상에선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거 예요! 자, 솔로민을 보세요. 대낮처럼 총명하고 생선처럼 건강합니다…… 이게 기적이 아니 고 뭐겠습니까! 지금까지 우리 러시아에서는 과연 어떠했습니까? 감정과 의식을 가진 인간 이라면, 반드시 병자가 되지 알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민은 분명히 우리와 똑같이 가 슴을 앓고 또 우리가 증오하는 것을 증오하면서도, 그의 신경은 침묵을 지키고 그의 온몸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겁니다……결국 이 점이 훌륭하다는 거죠! 자, 생각해 보세요. 이성을 가졌으면서도 말이 없고, 교육이 있으면서도 민중 출신이고, 단순하면서도 분별이 있 으니 말예요……그 밖에 또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실엔 관심을 돌릴 필요도 없습니다" 파클린은 점점 더 열을 올리 며 말을 이었다. 마슈리나가 이미 오자 전부터 자신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또다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 러시아에는 슬라브주의자니 관리니 서민, 대장군,쾌락주의자, 모방자, 변태자 따위의 각양각색의 사람들 이 들끓고 있지만, 그런 사실엔 그다지 관심을 돌릴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하브로니야 포 르이시초바라는 한 부인을 알고 있었는데, 그 부인은 갑자기 프랑스 정통파의 신자가 되더 니 자기가 죽고 나서 시체를 해부하면-자신의 심장 위에 헨리 5세의 이름이 새겨져 있 을 거라고, 모든 사람들을 설득하더군요…… 그것이 하브로니야 포르이시초바의 심장에 쓰여 있다니 말예요!) 제발 당신은 이런 모든 일에 관심을 돌리지 마세요. 그저 옛날부터의 참된 우리의 길은 솔로민과 같은 인간-평범하고 단순하면서도 교활한 솔로민과 같은 인간 이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아시면 되는 겁니다1 제가 이 말을 하고 있는 때를 기억해 주 세요-1870년 겨울, 마침 독일이 프랑스를 유린하려고 하는 이때, 그리고." "실루슈카." 파클린의 등뒤에서 스난둘리야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는 미래에 대한 얘기를 하실 때면 우리의 종교와 그것의 영향을 잊으시는 것 같아요. 게다가," 그녀는 재빨리 이렇게 덧붙였다. "마슈리나 여사에겐 지금 차라리 한잔 더 권하시는 쪽이 나을 것 같군요." 파클린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참, 그렇군. 정말 한잔 더 드시도록 하시죠." 그러나 마슈리나는 자기의 까만 눈으로 천천히 파클린을 바라보고는 생각에 잠긴 듯 이렇게 말했 다. "파클린씨, 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었는데요, 혹시 당신에게 네지다노프의 기록이나 그의 사진 같은 던 없으신 가요?" "사진이 있습니다…… 사진이 있어요. 왜 잘 찍힌 사진인 것 같습니다만‥‥책상 안에 있을 거예요. 제가 곧 찾아드리죠." 파클린은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편 스난둘리야는 마슈리나 곁으로 다가와서 오랫동안 동정 어린 눈으로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고는, 마치 자기의 동료를 대하기라도 하는 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 여기 있었군! 찾았어요!" 파클린이 이렇게 외치며 사진을 넘겨주었다. 마슈리나는 제 대로 사진을 보지도 않고 또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흥당무처럼 얼굴을 붉히면서 재빨리 그 사진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모자를 집어들고 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가시는 겁니까7" 파클린이 물었다. "어디 사시는지, 그것만이라도· "닥치는 대로 죠. " "알겠습니다. 제게 주소를 알리고 싶지 않으신 거군요. 그렇지만 한 가지만 더 물어볼 테니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은 아직도 바실리 니콜라예비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겁니까?" "무엇 때문에 그런 걸 알려고 하세요?" "그렇잖으면 흑시 딴 사람, 시도르 시도르이치 같은 분의?" 마슈리나는 대답하지 않 았다. "혹시 이름 없는 사람의 지시라도?" 마슈리나는 이미 문지방을 넘어서고 있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그녀는 쾅하고 문을 닫았다. 파클린은 닫혀진 문앞에 오랫동안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이름 없는 러시아여!" 마침내 그는 이렇게 말했다. * 고요한 여름날 아침이었다. 태양은 맑게 갠 하늘에 벌써 왜 높이 솟아 있었지만, 들판은 아직도 이슬로 반짝였고 방금 잠을 깬 골짜기에서는 서늘한 향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아 직 이슬에 젖어 움직일 줄 모르는 숲속에서는 새들이 즐겁게 조잘거리며 노래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이삭이 피기 시작한 쌀보리로 뒤덮인 비탈진 언덕 위로 조그만 마을이 보였다. 바로 이 마을을 향해서 좁다만 시골길을 걸어가는 한 젊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하얀 모 슬린천으로 된 옷에 둥근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손에는 파라솔을 들고 있었다. 그 뒤를 카자흐식 옷차림을 한 머슴애가 멀리 떨어져서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산책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걸음을 천천히 옳기고 있었다. 바람이 키 크고 흐느 적거리는 쌀보리 위를 은록팩과 붉은 색으로 잔잔히 물들이면서, 부드러운 소음과 더불어 기다란 파도를 이루며 넘실넘실 물결쳐 지나갔다. 중천에서는 종달새의 노랫소리가 낭랑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젊은 여인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마을에서 불과 1킬로미터도 떨 어지지 않은 앞마을로 가는 길이었다. 그녀는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리피나라는 미망인으 로 자식은 없었고 왜 부유한 편이었으며, 동생인 퇴펴 이등 대위 세르게이 파블르이치 볼르 인체프와 함께 살고 있었다. 동생은 아직 독신으로 누이의 영지를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는 마을에 이르자 그 끝에 자리잡은 무척 낡고 나지막한 오두막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머슴애를 불러서 집안에 들어가 안주인의 용태를 물어보 라고 일렀다. 잠시 후 머슴애는 하얀 턱수염을 기른 늙은 농군을 데리고 나왔다. "그래, 어떻든?"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가 물었다. "아직 숨을 거두지는 않았습니다 "들어가도 괜찮은 가요?" "아무렴요. 어서 들어오시죠."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좁고 답답하였으며 연기가 자옥히 끼여 있었다…… 누군가가 페치카 뒤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며 신음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후에야 어두침침한 방안에서, 바둑무늬 수건을 동여 맨 오글쪼글하고 싯누런 노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노파는 투박한 농군 외투를 가슴까 지 덮고는, 앙상히 여윈 손가락을 힘없이 펼치면서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는 노파에게로 다가가서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 머리 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좀 어떠우, 마트료나? 그녀는 침대 위로 몸을 굽히며 물었다. "어이구1" 노파는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를 보자 신음하듯 말했다. "틀렸어요, 틀렸어요, 마님! 이젠 죽을 때가 되었나봐요!" "하느님은 자비로우셔, 마트 료나. 이제 회복될 써야. 내가 보내준 약은 먹었수?" 노파는 애타게 신음할 뿐 대답이 업 었다.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가 묻는 말을 노파는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먹었습니다" 하고 문가에 서 있던 노인이 대답했다. 알렉산드라는 노인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환자를 간호하는 사람은 노인밖에 없소? " 저 사람의 손녀딸이 있긴 합니다만, 잠시도 붙어 있질 못해요. 워낙 참을성이 없는 애가 돼 서 노상 자리를 비운답니다. 할머니한테 물을 드시게 하는 것조차 싫다한단 말씀입니다. 게다가 저도 이렇게 늙고 보니 무슨 소용이 있어야죠?" "우리 마을 병원에 입원시키면 어 떨까요?" "아닙니다! 입원해서 뭘 합니까, 어차피 죽긴 마찬가지지요. 이젠 살 만큼 살았으니까 하 느님께서 데려갈 때가 됬나보죠.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오지도 못하는 주제에 병원에 간다고 소용이 있겠어요. 침대에서 일으켜라도 보세요, 당장 죽고 말 테니." "어이구" 하고 환자 가 신음했다. "자비로우신 마님, 의지할 곳 없는 제 손녀딸을 버리지 말아주세요. 우리 주인 댁은 멀리 있지만, 마님은……‥ 노파는 이내 말을 멈추었다. 이젠 말하는 것조차 몹시 힘겨 웠던 덧이다. "걱정하지 말아요."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가 말했다. "모든 것이 다 원하는 대로 될 테 니까. 자, 여기 차와 설탕을 가져왔으니 마시고 싶을 때 언제든지 마시도록 해요……‥ 집에 사모바르는 있겠지?" 그녀는 노인 쪽을 바라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사모바르요? 우리집엔 없습니다만, 빌려 올 순 있습니다. " "그럼 빌려 오든지, 뭐타 면 내가 보내줘도 좋구. 그리고 손녀딸에겐 자리를 뜨지 말라고 잘 일러줘요. 부끄럽지도 않 느냐고 말해 주세요."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차와 설탕 꾸러미만은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그럼 잘 있어요, 마트료나!"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가 말했다. 다시 올테니까, 기운 차리 고 꼬박꼬박 약을 먹도록 해요 ……‥." 노파는 약간 머리를 쳐들고 얼굴을 앞으로 내밀더니, "마님, 손을 좀 주세요" 하고 잘 돌 아가지 않는 혀로 말했다.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는 손을 내미는 대신 몸을 굽혀서 노파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잘 돌봐줘요" 하고 그녀는 집을 나서며 노인에게 당부했다. "처방대로 꼬박꼬박 약을 먹 도록 해주세요…… 그라고 차도 많이 마시게 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 노인은 이 때도 아무 말 없이 머리만 숙였을 뿐이었다.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는 밖으로 나와 상쾌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한결 마음속이 후련해졌다. 그녀가 파라솔을 펼쳐들고 막 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갑자기 오두막 모퉁이로부 터 경주용 마차 한 대가 달려 나왔다. 나직한 마차 위에는 낡든 회색 아마 외투에 역시 같 은 천으로 만든 모자를 쓴 30세 가량의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그는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를 보자, 즉시 마차를 멈추고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연한 콧수염 그리고 핏기 없는 넓 은 얼굴이 그의 옷빛과 너무나 잘 어울려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히죽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이런 곳에서 뭘 하십니 까?' "환자를 돌보고 오는 길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어디서 오는 길이세요, 미하일로 미하 일르이치?"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라고 불린 이 사나이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고는 또 한 번 히죽 웃었다. "거참, 기특하십니다, 환자를 찾아보시다니."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차라리 병원에 입원시키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너무 중태에 빠져서 움직일 수가 없는걸요." "한데 댁의 병원을 부숴버릴 작정은 아니실 테죠?" "부숴버리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그저." "이상한 말씀도 다 하시는군요! 어깨서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그것은 당신이 늘 라순스카야 부인과 어울려 다니니까 필시 그녀에게서 많은 감화를 받았으리라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죠. 그녀의 말을 빌린다면, 병원이나 학교 같은 것은 모두 쓸데없는 곳이고 불필요 한 허구라는 거예요. 자선은 개인적으로 해야 한다, 교육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정신적 사업이기 때문이다……은 식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더군요. 도대체 어디서 그런 이론을 받아들였는지 한번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 알렉산드라 파욜 로브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다리아 미하일로브나는 현명한 분이세요. 나는 그분을 무척 좋아하고 또 존경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분이라고 해서 잘못이 없다고 할 순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나도 그분의 말을 일일이 다 믿는 건 아니랍니다. " "그렇 다면 좋습니다" 하고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가 마차에 그대로 앉은 채 말을 받았다. "그 도 그럴 것이, 그녀 자신도 자기 말을 믿고 있지 않으니까요. 어쨌든 이렇게 만나게 돼서 무척 반갑습니다. "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그저 인사말이죠! 그러고 보니 만나 뵈어 즐겁지 않은 때라도 있는 것같이 되었군요! 하지만 오늘은 유달리 신선하고 아름답습키다, 마치 이 아침처럼."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아니, 왜 웃으십니까?" "왜냐구요? 당신의 얼굴을 지금 당신이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군요. 그렇게 시름 없고 싸늘한 얼굴로 그런 인사말이 잘도 나오니 말이에요! 마지막 말이 하품과 함께 나오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네요." "싸늘한 얼굴이라…… 당신은 언제나 불을 원하고 있지만 불이라는 건 아무 소용도 없는 겁니다. 확 타올라서 무럭무럭 연기를 내다가는 금세 꺼지고 마니까요. " "그래도 따사롭 게 해줍니다" 하고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가 말을 받았다. "그야 그렇죠 …… 그러나 그 대신 잘못하다가는 화상을 입습니다. " "어때요, 그까짓 화상쯤! 그런 건 아무것도 아녜요, 오히려 그쪽이 나을 거예요. 뭐하기보다는 ……‥." "좋습니다. 어디 두고 봅시다. 한번 따끔하게 화상을 입고 나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는 쀼루퉁한 어조로 그녀의 말을 가로채어 이령게 말하고 는 채찍으로 말을 후려갈겼다. "그럼, 실례합니다!"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 잠깐만!"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가 이렇게 외쳤다. "언제 우리 집에 오시겠어요?" "내일 가죠. 동생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 그러고는 마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는 그의 됫모습을 바라보고 있 었다. '마치 부대 같군!'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등을 구부리고,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 쓴데다가 뒤로 젖혀 쓴 모자 밑에서 노란 머리카락이 엉클어져 있는 그 모습은 그야 말로 커다란 밀가루 부대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는 집을 향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살포시 눈을 내리깔고 걸어 가고 있는데 가까운 곳에서 또다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 맞은편에서 동생이 느릿느릿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동생과 나란히 자그마한 키의 청년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는 여름 저고리 단추를 풀어헤치고 산뜻한 넥타이에, 역시 산뜻한 쥐색 모자를 쓰고 손에는 지 팡이를 들고 있었다. 청년은 벌써 저쪽에서부터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가 주위에는 관심도 없이 생각에 잠겨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녀에게 연방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자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옆으로 다가가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상냥하 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안녕하세요!" "어마, 콘스탄친 지오미드이치. 안녕하세요!"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지금 다리아 미하일로브나에게서 오는 길 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 청년은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다리아 미하일로브나의 부탁 으로 왔습죠. 다리아 지하일로브나가 댁에 들러보라 하시더군요. 그래서 전 걷기로 했습니 다…… 이렇게 좋은 아침인데다가 4베르스타밖에 안 되니까요. 댁에 가보니 안 계시더군요. 동생께 여쭤보니 서요노프카에 가셨다고 했는데, 마침 동생께서도 밭을 돌아보러 나가시려 는 참이어서 나도 함께 마중 나오게 된 겁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청년은 순수하고 정확한 러시아어로 말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외국어 냄새가 풍겼다. 그러 나 어느 나라 말과 비슷하다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그의 얼굴은 아시아인 다운 데가 있어 보였다. 기다란 매부리코, 불룩 튀어나온, 움직일 줄 모르는 커다란 눈, 두툼하고 빨간 입술, 비스듬한 이마,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이 모든 것이 그가 어느 모로 보나 동양인이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콘스탄친 지오미드이치 판달레프스키라고 자칭하고 있었으며, 자기의 고향은 오데사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어느 백러시아의 마음씨 좋은 부자인 과부한테서 신세를 지며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또한 어느 미망인의 주 선으로 직장에 취직한 적도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년 부인들이 자진해서 이 콘스탄친 지오미드이치를 돌보아준 셈인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들을 구슬릴 수 있는 재간과 그들 속에 파고 들어가는 수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만 해도 그는 다리아 미하일 로브나 라순스카야라는 유복한 여지주 집에서 양자인지 식객인지 모를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척 상냥하고 고분고분하며 몹시 감정이 예민한 데다가 은근한 호색한 이었는데, 목소리도 좋거니와 피아노도 곧잘 칠 줄 알고, 남과 이야기할 때에는 뚫어질 듯 상대방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말쑥하게 옷을 입고 옷 간수도 남달리 잘했 으며, 넓은 턱은 언제나 매끈하게 면도질이 되어 있었고 머리는 단정히 빗어 넘기고 있었다.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는 그의 말을 다듣고 나자 동생 쪽을 향하여 말했다. "오늘은 정말 사람들 만나는 날인가봐. 방금은 레디네프와 얘기를 했단다." "아, 그 친 구 하고요! 어딜 가는 중이던가요7" "그런가 보더라. 그런데 생각 좀 해봐, 경주용 마차를 타고 마치 부대 같은 묘한 아마복 을 입고, 차다가 온통 먼지투성이를 하고 말이야…… 정말 괴상한 사람이야!" "예, 그럴지 도 모르죠. 하지만 좋은 사람임엔 틀림없어요." "누구 말씀입니까? 레디네프씨 말입니까?" 하고 판달데프스키가 자못 놀란 듯한 어조로 물었다. "예,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 레디네프 말입니다" 하고 볼르인체프가 대꾸했다. "그러면 누님, 전 먼저 실례하겠어요. 들에 나가봐야 하니까. 지금 메밀 씨를 뿌리고 있어요. 누님은 판달레프스키씨가 집까지 바래다 줄 겁니다." 그러고는 볼르인체프는 말을 몰고 달려가 버렸다. "이거 정말 영광스럽군요!" 판달레프스키는 이렇게 외치고,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녀도 자기의 팔을 내주고, 두 사람은 그녀의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라와 팔을 끼고 간다는 것이 판달레프스키로서는 무척 만족스러운듯, 가만가만 걸음을 옮기면서도 시종 미소를 감추지 못하였고 동양 특유의 눈에는 기쁜 나머지 눈물까지 괴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별로 신기한 것이 못 되었다. 판달레프스키에게는 하찮은 일에 도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는 버릇 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날씬한 미인과 팔을 끼고 걷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기분 나쁠 리가 없었다. 알렉산드라가 뛰어난 미인이라는 것은 현내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인정하 고 있는 바였고, 또한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벨벳 같은 눈이며 금빛으로 반짝이는 아마빛 머리카락, 동그란 볼에 오목 패인 보조개, 그 밖의 많은 점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이 살짝 위로 치켜진 단정한 콧날만으로도 그녀는 뭇 남성을 뇌쇄할 만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 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매력은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 표정이었다. 남을 의심할 줄 모르 는, 선량하면서도 상냥스러운 그 표정은 사람의 마음을 끌고도 남음이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애들처럼 순진한 눈으로 바라보고 애들 처럼 웃곤 했다. 그러므로 현내의 부인들은 그녀를 명랑한 여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 이런 형편이고 보니, 그 이상 또 무엇을 바랄 수 있겠 는가. "당신은 다리아 미하일로브나의 심부름으로 오겼다고 했죠?" 하고 그녀는 판달레프스키 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 그는 '스'를 영어의 th처럼 발음하며 대답했다. "오늘 저녁 식사에 꼭 참 석하여 주십사고 신신당부하시더군요…… 그분들(판달레프스키는 제삼자, 특히 귀부인에 대 해 말할 때면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서 언제나 복수형을 쓰고 있다)은 오늘 새로운 손님을 한 분 초대했는데, 그분을 당신에게 꼭 소개하고 싶다는 말씀이었습니다. " "그분이 누군데요?" "무펠리라는 남작인데, 페테르부르크에서 시종으로 근무하시는가 봅니다. 다리아 미하일 로브나께서 얼마 전 가린 공작댁에서 사귀게 되었나 본데, 젊은 분인데도 친절하고 교양 있 는 사람이라고 여간 칭찬하시지 않더군요. 그 남작도 역시 문학을 하고 계신 모양인데, 아니 문학이라기보다는…… 아, 저 나비를 좀 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문학이라기보다 는 경제학을 전공하시는 것 같더군요. 무엇인가 굉장하고 재미있는 주제의 논문을 썼는데 다리아 미하일로브나에게 비평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 "경제학 논문을요?" "아니, 문장을 봐달라는 겁니다, 알렛산드라 파블로브나. 문장만 봐주십사 하는 거죠. 당 신도 알고 계시리라고 믿습니다만, 문장이라면 다리아 미하일로브나도 상당한 솜씨를 가진 분이니까요. 주코프소키(러시아의 유명한 시인. 1783∼1852)도 마님한테 조언을 구한 적이 있으며, 또 제 은인으로 오데사에 살고 있는 르크솔란 매지아로비치 크산드르이카라븐 훌륭 한 노인도 …… 당신도 이분의 이름온 알고 계실 테죠?" "금시 초문인데요. " "그런 분의 이름도 모르시다뇨? 정말 놀랄 일이군요! 어쨌든 르크솔란 메지아로비치 크 산드르이카께서도 늘 다리아 미하일로브나의 문장력에 대해서는 매우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 "학자 냄새를 풍기는 사람은 아닌가요, 그 남작이란 분은?" 알렉산드라가 물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다리아 미하일로브나의 말씀에 의하면, 그와는 반대로 첫눈에 벌써 사교에 능숙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베토벤의 이야기를 하는데 있어서도 얼마나 말주변이 좋았는지, 늙은 공작까지도 황홀경에 빠지고 말다는 거예요……사실, 저도 한번 듣고 싶었습 니다. 베토벤이라면 제 전공 분야니까요. 그건 그렇고, 이 아름다운 꽃들을 당신께 선사하겠 습니다. " 알렉산드라는 논을 받아들었으나, 몇 걸음 걸어가다가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제 그녀의 집까지는 2백 보도 남지 않았다. 얼마 전에 새로 지은 하얀 저택은 오래 묵은 보리 수며 단풍나무의 울창한 푸르름 속에서 널고 밝은 창문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럼, 다리아 미하일로브나에게 뭐라고 말씀드릴까요?" 자기가 준 꽃이 받은 푸대접 때 문에 은근히 모욕을 느낀 판달레프스키가 이렇게 말갰다. "식사에 참석해 주시겠어요? 동생 께도 잘 말씀드리라고 하시던 데요." "예, 같이 가도록 하겠어요, 틀림없이. 그런데 나타리아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나 타리아 알렉세브나는 덕분에 건강합니다…… 저런, 어느새 다리아 부인의 영지로 돌아가는 갈림길을 지나고 말았군요. 그럼 여기서 실례하게 해주십시오. " 알렉산드라 아블로브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우리집에 안 들르시겠어요7" 하고 그녀는 탐탁치 않은 듯한 어조로 물었다. "들르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습니다만, 늦을까봐 그럽니다. 다리아 미하일 로브나께서 탈 리베르그의 신곡을 듣고 싶어하시므로, 손도 풀 겸 좀 연습을 해둬야겠어요.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저 같은 말상대로서는 위안이 되실지 어떨지도 알 수 없으니까요. " "아니, 그럴 리가 있겠어요……왜 그런 말을……‥." 판달레프스키는 한숨을 짓고 생각에 잠긴 듯 눈 을 내리깔았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령게 말하며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알렉산드라는 빙그르르 몸을 돌리고는 자기 집으로 걸어갔다. 판달레프스키도 자기 갈길 을 서둘렀다. 지금까지 달콤했던 표정은 순식간에 그의 얼굴에서 사라지고, 자신만만하고 거 친 표정으로 변했다. 그리고 걸음걸이마저 돌변해서 이제는 큰 폭으로 성큼성큼 발을 옳기 고 있었다. 거만스럽게 지팡이를 흔들며 2베르스타쯤 왔을 때, 그는 갑자기 다시 빙그레 미 소를 지었다. 귀리밭으로부터 송아지를 내쫓고 있는 예쁘장한 시골 처녀를 한 길가에서 발 견했기 때문이었다. 론달레프스키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처녀 곁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처녀는 처음에는 아무 말 없이 낮을 붉히면서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 있었으나, 드디어 옷소 매로 입을 가리고는 외면을 한 채 이렇게 말했다. "저리 비키세요, 나리. 정말……‥ 판달레프스키는 손가락으로 그녀를 위협하고는 들국화를 꺾어오라고 명령했다. "들국화는 뭘 하시려구요? 화환이라도 만들 작정이세요?" 처녀는 이렇게 대꾸했다. "정 말 이러지 말고 저리 비키시라니까요……‥." "자, 내 말 좀 들어봐, 귀여운 아가씨!" 하고 판달레프스키가 계속 말하려고 했으나 ……‥ "저리 가라니까요" 하고 처녀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저기 도련님이 오세요." 판달레 프스키는 뒤를 돌아보았다. 처녀의 말대로 다리아 부인의 아들들-바냐와 페차-이 한길을 달려오고 그 뒤를 가정교사가 따라오고 있었다. 이제 막 대학을 마친 바시스토프라는 스물 두 살의 이 청년은 커다란 몸집에 평범한 얼굴을 한 사나이였는데, 두꺼운 입술이며 커다란 코며 돼지 같은 눈초리 등 어쨌든 지지리 못난 추남임에는 틀림없었으나 그 대신 선량하고 정직하며 솔직 담백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되는대로 옷을 입고 머리도 깎지 않았는 데, 그것은 일부러 멋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게으름 때문이었다. 그가 좋아 하는 것이라곤 먹고 자는 것뿐이었는데, 좋은 책이나 열변을 토하는 것도 싫어하지는 않 았다. 다만 판달레프스키에 대해서만은 마음속으로부터 증오하고 있었다. 다리아 부인의 아이들은 바시스토프를 잘 따라서 조금도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집안 식구들과도 다정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여주인은 그것을 그다지 달갑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다리아 부인은 누구에게나 편견이란 있을수 없다고 장담하고 있 는 것이었다. "안녕하슈, 도련님"하고 판달레프스키가 외쳤다. "오늘은 정말 일찌감치 산책을 나오셨군 요! 그런데 난." 하고 그는 바시스토프 쪽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벌써 나온지 오랩니다. 자 연을 즐기는 것이 내 도락이니까요." "당신이 자연을 즐기시는 장면을 지금 보았지요." 바시스토프는 나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유물론자니까 필시 무슨 엉뚱한 생각을!" 판달레프스키는 바시스토프라든지 그러한 종류의 사람과 말할때면, 다소 깔보는 듯한 의 미에서 'S'를 똑똑히 발음할 뿐만 아니라 마치 휘파람을 불 듯이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도대체 저 처녀에게 무슨 볼일이 있었습니끼? 길이라도 물었습니끼?"하고 바시스토프는 눈을 좌우로 굴리면서 말했다. 그는 판달레프스키가 뚫어질 듯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끼고, 몹시 기분이 나빴 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은 유물론자일뿐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오. 당신은 언제나 사물을 보 는데 있어서 속된 면만을 보려 하니." "자, 이것 봐요!" 갑자기 바시스토프가 애들에게 호령을 했다. "저기 풀밭에 버드나무가 보이죠? 저 나무까지 누가 먼저 가나 경주를 합시다, 하나, 둘, 셋!" 애들은 있는 힘을 다 해 달리기 시작했다. 바시스토프도 그 뒤를 따라 갔다. '농사꾼 같은 녀석!' 판달레프스키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저놈이 애들을 망쳐놓는 군, 농사꾼도 진짜 농사꾼이라니까!' 그러고는 그는 말쑥하게 차려 입은 자기 모습을 자랑스러운 눈초리로 훑어보고 손가락을 펼쳐 한두 번 웃저고리의 소매를 매만지며 칼라를 턴 다음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그는 낡은 실내복으로 갈아 입고 근심 어린 표정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 다. 2 다리아 미하일로브나 라순스카야의 저택은 N현에서도 1,2 등을 다투는 훌륭한 집이었다. 라스트렐리(1떼기의 유명한 건축가. 1700∼1771)의 설계에 의해서 18세기 식으로 건립된 이 석조 건물은 언덕 위에 그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우뚝 솟아 있고, 그 밑으론 중부 러시아 에서도 대하라고 일컫는 유명한 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다리아 미하일로브나는 가문 좋은 유복한 귀부인이었고, 3등관의 미망인이었다. 판달레프스키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는 전 유럽을 알고 있으며, 또 유럽에서도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지만, 사실 유럽에 서 그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드물었고 페테르부르크에서조차도 그녀의 역할은 눈에 띄지 않았다. 프 대신 모스크바에서는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녀의 집을 드나드는 사람 도 많았다. 그녀는 상류 사회에 속해 있었으며 약간 이상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뿐더러 그다지 친절하다고도 할수 없었으나, 뛰어나게 총명한 부인이라는 정평을 받고 있었다. 젊었 을 때의 그녀는 보기 드문 미인이어서, 시인들이 시를 바치는가 하면 청년들은 사랑을 호소 하기도 하고 고관들까지도 그녀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 다니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벌써 25년 내지 3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옛날의 아름답던 그녀의 모습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처음 그녀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렇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다지 늙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여위고 누렇게 시든 뾰족 코의 여인이 정말 그전 에는 미인으로 평판이 높았던 것일까? 과연 이 여자가 시와 노래로 칭찬 받던 바로 그 여자 란 말인가?' 그러고는 누구나 마음속으로 인생의 무상함을 한탄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판달 레프스키만은 그녀의 아름다운 눈이 아직도 그 옛날의 아름다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고 말 하지만, 유럽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허풍을 떠는 그 사람이고 보면 그 말도 믿 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리아 미하일로브나는 매년 여름이면 애들-열일곱 살인 딸과 아흡 살과 열 살 짜리 사 내아이, 모두 3남매였다-을 데리고 시골 영지로 와서는 개방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이 말해서 그녀는 남자 손님, 특히 독신자들을 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골 여자들과는 사귀 기를 무척 싫어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시골 부인들의 평판은 몹시 나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다리아 미하일로브나는 거만하고 품행이 나쁘며 게다가 횡포하기 짝없고, 특히 경우 가 없는 것은 이야기 도중 깜짝 놀랄 만한 칼들을 태연스레 지껄인다는 것이었다. 사실 다 리아 부인은 시골에까지 와서 답답한 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수도의 암사자와 같 은 그 자유분망한 행동 속에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족속들에 대한 가벼운 멸시감이 엿보이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기는 도시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원래가 무뚝뚝한 편이었으므로 상대방을 비웃는 일이 있었으나, 그래도 멸시하는 일은 없었 던 것이다. 얘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덧붙여 두지만,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지? 자 기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윗사람 앞에 나가면 옴짝달싹 못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일까? 물론 이런 의문을 던져보았댔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긴 하지만, 판달레프스키가 간신히 탈리베르그의 연습곡을 익히고 난 뒤 오밀조밀하게 꾸며진 깨끗한 자기 방에서 응접실로 내려와 보니 거기에는 벌써 집안 사람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벌써 '사론'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주인은 침대 겸용 소 파에 다리를 오그리고 앉아서 프랑스의 팜플렛을 손으로 돌돌 말고 있었다. 창문 곁에는 자 수대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다리아 부인의 딸 나타리아가 자리잡고, 맞은편에는 가정교사 마드모아젤 봉크루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까만 가발을 얹은 머리에 알록달록한 수건을 쓰 고 양쪽 귀에는 솜을 틀어막은, 예순 살 안밖의 시들대로 시든 노처녀였다. 방구석 문가에는 바시스토프가 자리잡고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페차와 바냐가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헝클어진 회끗회끗한 머리에 거무죽죽한 얼굴을 하고 까만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난로 옆에 뒷짐을 지고 기대서 있는 작달막한 신사가 있었는데, 그는 아 프리칸 세묘느이디 피가소프라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이상한 인물이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 모든 사람에게 항상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특히 여자와는 상극이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욕설만 퍼붓고 있기 일쑤였고, 어떤 때에는 무척 사리에 맞는 이론을 전개하다가다 어떤 때에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지껄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 자신은 항상 기분이 좋아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의 분노는 어 린애의 짜증과 같아서 그의 웃음소리에서 음성, 그의 존재에까지 이러한 짜증이 속속들이 배어있는 것 같았다. 다리아 부인이 그를 환영하고 있는 것도 그의 기발한 언행이 위안거리 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확실히 좌석의 흥을 돋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사물 을 과장해서 말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그가 있는 자리에서 무슨 불행한 사건-벼 락이 떨어져 마을이 몽땅 타버렸다거나 홍수가 방앗간을 삼켜버린-이라도 화제에 오르게 되면 그는 언제나 온몸이 분노에 쉽싸여 "그 여자의 이름은 뭐죠?" 하고 묻는다. 다시 말해 서 그 재난의 원인이 된 여자가 누구냐는 뜻인데, 그의 확신에 의하면 모든 재난은 반드시 여자가 원인이 되기 때문에 그 여자가 누구라는 것을 똑똑히 규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 다. 어느 날 어떤 부인이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그를 초대하자 그는 그다지 안면도 없는 그 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는 얼굴에는 분노의 빛을 띠고 있으면서도 눈물 어린 어조로 "제발 그것만은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당신에게 별로 실례된 일을 한 기억도 없으며, 이후론 두 번 다시 댁의 문턱을 밟지도 않겠습니다" 하고 애원했다. 그리고 한 번은 다리아 부인의 세 탁부를 태운 말이 비탈길을 달리다가 그녀를 도랑 속으로 떨어뜨려서 하마터면 생명까지 위 태롭게 만든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 피가소프는 언제나 츠 말을 '명마', '준마 '라고 부르고 그 비탈길과 도랑을 천하의 절경이라고 칭찬하는 것이었다. 피가소프는 무척 운이 나쁜 사나이였지만 그는 조금도 거기에 대해서는 구애를 받지 않 았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이것저것 잡일에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겨우 읽고 쓸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었고 자식의 교육 같은 것엔 통 관심이 없었다. 그저 먹이고 입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머니는 그를 귀여워했으나 곧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피가소프는 자기가 벌어서 마을의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다음에는 중학교까지 진학하여 프랑스어, 독일 어는 물론 라틴어까지 습득했다. 우등생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데르프트로 가서 가난 과 끊임없이 싸우면서도 3년의 대학 과정을 마쳤다. 재능면으로 본다면 그다지 뛰어난 편은 못 되었지만, 인내와 끈기에 있어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 고 있었던 것은 남달리 강한 허영심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상류 사회에 진출하고 싶다, 짓 궂은 운명에 대한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라도 남에게 뒤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야심에 그는 불타고 있었다. 그가 부지런히 공부를 한 것도, 데르프트 대학에 들어간 것도 모두 이 허영 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그의 마음속에서 울분을 불러일으켰고 관찰력 과 교활한 지혜를 발달시켰다. 그는 말재주도 능란했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일종의 독특하 고도 성급한 독설이 그 바탕을 이루었다. 머리는 그다지 뛰어난 편이 못 되었지만, 그의 말 을 들어보면 그저 똑똑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비범한 사람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피가소프는 학사 후보의 자격을 얻자 학문 연구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다른 방면 으로 진출해도 도저히 자기 동료들을 따라갈 수 없으리아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친구들을 상류 사회에서 골랐고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으 므로 노상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그들의 마음에 들 수 있었다. ) 그러나 간단히 말해서 그에 게는 기초 지식이 모자랐다. 원래부터 학문이 좋아서 공부한 것은 아닌 독학자 피가소프는 사실 너무나 지식이 빈약했다. 학술 논문 심사에 있어서도, 그가 언제나 조소하고 있던 한방 의 동급생들은 그다지 머리가 좋지 않았으나 정규적으로 착실한 교육을 받은 덕택으로 무난 히 합격한 데 반해서 피가소프는 무참하게도 낙제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이 실패는 피가 소프를 격분케 했다. 그는 책이며 노트를 모조리 불속에 던져버린 다음 관계에 몸을 맡기기 로 했다. 처음 한동안은 일이 잘 진행되었다. 그는 사무 처리에는 그다지 익숙치 못했으나 대신 극히 자신만만하고 만사에 민첩한 관리로서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너무 출세를 서둘렀기 때문에 급기야는 발을 잘못 딛고 고꾸라졌고 마침내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다행히 조그만 마을을 사둔 것이 있어서 거기서 3년쯤 지내다가 잠자기 돈 많은 여지주와 결혼을 했다. 그는 자기 특유의 뻔뻔스러우면서도 남을 조소하는 듯한 태도를 미끼로 별로 교육받지 못한 여지주를 낚았던 것이다. 그러나 피가소 프의 성질은 이미 너무나 거칠어졌고 자포자기해 있었으므로 가정 생활에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그의 아내는 수년간 동거 생활을 청산하고 살그머니 모스크바로 가 서, 피가소프가 방금 저택을 신축한 그 영지를 투기인에게 팔아 넘겼다. 이 마지막 타격에 완전히 절망하다시피 한 피가소프는 아내를 상대로 고소를 제기하였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 그때부터 그는 혼자서 쓸쓸히 여생을 보냈고, 이웃집을 돌아다니며 소일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없는 데서는 물론이고 상대방 앞에서도 욕설을 퍼부었지만, 상대편에서는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고 다만 어딘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아들이는 것이었다. 또한 피 가소프는 한 번도 책을 보는일이 없었다. 한편 그에게는 백명 가량의 농노가 있었는데, 그의 영지 관리 방법이 괜찮았는지 농노들도 그다지 가난하게 살고 있지는 않았다. "아아, 콘스탄친!" 다리아 부인은 판달레프스키가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프랑스식으로 이렇게 말했다. "알렉산드라는 오신대?"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는 쾌히 승낙하시면서, 마님께 잘 말씀드려 달라고 하셨습니다. " 판달레프스키는 손톱을 세모꼴로 깎은 회고 살진 손으로 멋지게 빗어올린 머리를 매만지 고, 정다운 표정으로 주위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볼르인체프씨도 오신대요?" "예, 그분도 오신답니다. " "자, 그럼 얘기를 계속합시다, 아프리칸 세묘느이치." 다리아 부인은 피가소프 쪽을 바라 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말에 의하면, 이 세상의 젊은 여자들은 모두 부자연스럽다는 거 군요?" 피가소프의 입술이 옆으로 길룩 일그러졌다. 그리고 한쪽 팔꿈치를 신경질적으로 움직이 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는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언제나 화가 절정에 달할 때 면 침착하면서도 명료하게 말하는 것이 그의 습성이었다. "내 의견은 이렇습니다. 일반적으 로 젊은 아가씨란 분들은, 그러나 물론 이 자리에 계시는 분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겠습 니다……‥." "그령지만 여기 있는 아가씨들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건 아니실 테죠?" 하고 다 리아 부인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이 자리에 계시는 분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겠습니다" 하고 피가소프는 되풀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가씨들은 부자연스럽기 짝없습니다. 자기 감정을 표현함에 있어서 부자 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일에 놀라거나 기뻐하거나 슬퍼할 때면, 아가씨들은 반 드시 이렇게 자기 몸을 멋들어지게 꼬면서 (이때 피가소프는 몰골사납게 자기 몸을 비비 로 고는 두 손을 벌렸다.) 아아! 하고 비명을 지르거나 웃음을 터뜨리거나 아니면 눈물을 흘리 게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나는 단 한 번(여기서 피가소프는 빙그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부자연스럽기 짝없는 어떤 아가씨에게서 거짓 없는 진실 그대로의 감정 토로를 들을수가 있 었지요!" "그건 또 어떻게요?" 피가소프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뒤에서 그 처녀의 옆구리를 사시나무 몽등이로 후려갈긴 것입니다. 그녀는 '아야야!' 하 고 비명을 지르지 않겠어요. 그래서 나는 '브라보! 브라보!' 해줬지요. 그러고는 '그 비명이 야말로 자연의 외침이며 허식 업는 진실한 내부의 외침이오…… 앞으로도 언제나 그런 식으 로 행동하시오' 하고 말해 줬던 것입니다. " 방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도 곧잘 그런 실없는 소릴 하시는군요, 아프리칸 세묘느이치!" 하고 다리아 부인이 말했다. "내가 곧이 들을줄 아시나요, 당신이 몽등이로 처녀의 옆구리를 때렸다는 걸 !" "아니, 정말입니다. 그녀를 몽등이로 때렸습니다. 그것도 이렇게 굵직한, 요새 방어용 몽등이 비슷한 걸로 말입니다. " "아니, 어쩌면 그렇게 무서운 말을 하실까." 마드모아젤 봉크루는 이렇게 외치고는, 깔 깔거리며 웃어대는 애들을 향해 눈을 흘겼다. "이분의 말을 곧이들으면 안 돼요" 하고 다리아 부인이 말했다. "이 사람이 어떤 분이라 는 건 마시잖아요?" 그러나 이 프랑스인 가정교사는 분통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오랫동안 흥분을 가라앉히 지 못한 채 시종 입속으로 무슨 소린지 중얼거리고 있었다. "곧이듣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만" 하고 피가소프는 태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러나 나는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만은 단언해 둡니다. 나 자신이 한 일인데 나 이외에 누가 그걸 이러니저러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고 보면 아마 이것도 믿어주지 않으실는 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이웃에 사는에레나 안토노프나 체푸조바라는 여자는 자기의 친조 카를 죽였습니다, 아시겠어요? 그 여자가 직접 내게 말해 준 겁니다. " "또 저런 터무니 없는 소릴!" "아니 끝까지 들은 다음에 판단해 주세요. 미리 말씀드려 두지만 나는 그 여자를 비방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여자를 좋아하고 있는 형편이니까요. 그렇다고 뭐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 여자의 집에는 책이라고는 달력 이외에 한 권도 없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어도 음독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책을 읽으면 흠뻑 땀에 젖고 나중에는 눈 알이 튀어나온다고 불평하는 형편이죠……‥ 한마디로 말해서 마음씨가 무던한 부인이죠. 그리고 그 집의 하녀들은 뚱뚱하게 살이 쪘어요. 내가 무엇 때문에 그녀를 중상할 필요가 있겠어요?" "저런!" 다리아 부인이 참견을 했다. "아프리칸 세묘느이치가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군. 이렇게 되면 밤중까지 멈추지 않을 거야." "수다를 떤다구요…… 그러나 여자에게는 그런 수다가 세 가지나 된다는걸 모르십니까? 게다가 잘 때를 제외하곤 노상 그칠 때가 없단 말씀입니다. " "그 세 가지 수다라는 게 어떤 건데요?" "비난, 암시, 험담," "이봐요, 아프리칸 세묘느이치." 다리아 부인이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공연히 여자를 증오하고 있지만 거기엔 무슨 곡절이 있을 테죠. 당신은 아마 어떤 여자한테서 ……‥." "모욕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려는 거죠?" 피가소프가 다리아 부인의 말을 가로챘다. 다리아 부인은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가소프의 불행했던 결혼을 상기했기 때 문이다……그래서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가 어떤 여자한테서 모욕을 당한 건 사실입니다" 하고 피가소프는 말했다. "마음씨가 좋은, 정말 선량한 분이었습니다만……‥." "그 사람은 누군데요? "제 어머니올시다. " 피가소프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의 어머니라고요? 도대체 어머니한테서 무슨 모욕을 당했나요?' "나를 이 세상 에 낳아준 모욕이죠……‥." 다리아 부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얘기가 싱거워지는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콘스탄친, 탈리베르그의 새로운 연습곡이라도 좀 들려줘요…… 음악이라도 들으면 아 프리칸 세묘느이치도 마음이 풀어질지 모르니까요. 오르페우스는 자기 음악으로 야수까지 진정시켰다지 않아요. " 판달레프스키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정말 멋지게 연습곡을 쳤다. 나타리아는 처음에는 조심스럽데 이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이윽고 다시 일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정말 좋군요" 하고 다리아 부인이 말했다. "난 탈리베르그를 좋아해요. 정말 세련된 작곡가예요. 아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프리칸 세묘느이치?' "내 생각으 론" 하고 피가소프가 느릿느릿 말하기 시작했다. "이기주의자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봅니다. 자기 자신이 이기적인 생활을 하는 동시에 남에게도 이러한 생활을 시키는 사람과 자기 자신은 좋은 일을 하면서 남에게는 시키지 않는 사람, 그리고 자기도 하지 않거니와 남에게도 시키지 않는 사람……여자란 대부분 이 셋쨌번 이기주의자에 속하고 있습니다. " "정말 친절하시군요! 그런데 아프리칸 세묘느이치, 사물을 판단할 때의 당신의 그 자신 만만한 태도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군요. 마치 절대 진리인 것처럼 말씀하시니 말이에 요." "천만에요! 나도 틀릴 때가 있습니다. 남자라고 언제나 옳은 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남자들의 과오와 여자들의 과오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아십니까? 모르시지요? 그럼 말씀드리죠. 남자는 2곱하기 2는 4가 아니라, 2곱하기 2는 5흑은 2곱하기 2는 3.5라고 틀릴 우려성은 있습니다만 여자들은 2곱하기 2는 스테아린초(스테아린산이 주원료인 초)라 고 해버린단 말씀입니다. " "그 말은 전에도 한 번 들은 것 같군요…… 그보다는 지금 당신이 들은 음악과 지금 말 씀하신 세 가지 유형의 이기주의자 사이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듣고 싶군요. " "아무 관 계고 없습니다. 게다가 나는 음악을 듣지도 않았으니까요. " "정말 '그대의 고집은 도저 히 두드려 고칠 수도 없구나'라고 해야겠군요." 다리아 부인은 그리보에도프의 말(러시아 극작가. 그의 희곡 (지혜의 슬픔)에 나오는 말)을 끌어대며 약간 비꼬듯이 대꾸했다. "음악 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면 도대체 무엇을 좋아하세요? 문학을 좋아하시나요?" "문학은 좋아하죠. 그러나 그것도 현대의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 "어째서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요전에 나는 어떤 신사와 함께 나룻배를 타고 오카강을 건넌 적이 있습니다. 배가 닿은 곳은 가파른 언덕이었으므로, 배에서 언덕까지 마차를 끌어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사의 마차는 지독히 큰 포장마차였습니다. 그래서 뱃사공들이 있는 힘을 다해 마차를 강가에 올리고 있는 동안 신사는 나룻배 안에 버티고 선 채 끙끙 힘을 쓰는 소리만 내고 있지 않겠어요? 남이 보기에도 민망스러울 정도로 말입니다…… 여기서 나는 '과연 이것은 분업 제도의 새로운 적용 법이로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현대 문학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남이 무거운 짐을 나르 며 노동을 하고 있는 동안 문학은 그 옆에서 공연히 끙끙거리고만 있는 셈입니다. " 다리아 미하일로브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그것은 현대 풍속의 재현이라거니," 피가소프는 흥에 겨워 말을 이었다. "사회 문제에 대한 깊은 동정이라거니 하고 이러쿵저러쿵 여러 가지로 불리고 있습니다만, 정말이 지 그런 어마어마한 소리엔 딱 질색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정도로 맹렬히 공격하는 여자들은 적어도 그령게 어마어마한 말은 사 용하지 않습니다. " 피가소프는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말을 쓸 줄 모르니까 못 쓰는 거죠. " 다리아 부인은 살며시 낮을 붉혔다. "점점 말이 거칠어지는군요, 아프리칸 세묘느치치!"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띄우면서 이렇게 타일렀다. 방안에는 침묵이 깃들였다. "저, 졸로토노샤는 어디 있어요? 갑자기 한 사내아이가 바시스토프에게 이런 질문을 했 다. "폴타바현에 있어요, 도련님" 하고 피가소프가 말을 받았다(그는 화제를 바꿀 기회를 얻 어 무척 반가웠던 것이다). "그런데 문학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도 여분의 돈이 있 으면 곧 소러시아의 시인이 될 수 있습니다. "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시인이라니, 말이 좋군요!" 하고 다리아 부인이 대꾸했다. " 그런데 당신이 소러시아어를 아시던가요?" "전혀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건 알 필요도 없어요." "왜 필요가 없나요?" "암. 필요 다만 종이 한 장 들고 와서 그 위에 (민요)라고 쓰고는 그 다음부터 '오오, 나의 운명, 덧없는 운명이여!' 흑은 '카자흐의 아들 날리바이코, 능 위에 앉았도다!'라고 하 든지 아니면 '푸른 산 기슭에 까마귀 우는 소리, 까욱 까욱!' 하는 식으로 써내려 갑니다. 그러면 시는 완성되는 거예요. 탁음에 남은 일이란 인쇄해서 출판하는 것뿐입니다. 소러시아 인들이 그걸 읽으면 반드시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훌쩍훌쩍 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 은 워낙 감상적인 사람들이라서요!" "무슨 말씀이세요!" 하고 바시스토프가 외쳤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정 말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나는 소러시아에서 산 적이 있고, 그곳을 좋아하고 말도 알고 있습니다만……‥까마귀, 우는 소리 까욱 까욱' 이라니, 도대체 그 속에 무슨 뜻이 있습니 까?" "그야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어쨌든 소러시아인은 울 겁니다. 당신은 그 고장 말을 안다고 하지만 과연 소러시아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습니까? 나는 언젠가 소러시아인에게 당장 눈에 띄는 어떤 구절을 소러시아어로 번역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그건 '문 법은 올바르게 읽고 쓰는 기술이다'라는 문구였습니다만, 그걸 어떻게 번역했는지 아십니 까? '몬버븐 오르게 일그고 시이는 기수리다' 라고 쓰는 거예요……‥어떻습니까, 이래도 당신 귀에는 말로 들립니까? 독자적인 말로 말이오. 그것에 찬성하기보다는 차라리 절실한 친구를 절구에 넣고 찧어 죽이는 편이 나을 거요……‥" 바시스토프는 대들려고 했지만 "그만두세요" 하고 다리아 부인이 그녀를 말렸다. "이 사람은 역설밖에 모른다는 걸 당신도 아시잖아요." 피가소프는 독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이때 머슴이 들어와서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와 그의 동생이 도착했다고 알렸다. 다리아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으러 나갔다. "안녕하세요, 알렉산드라!" 하고 그녀는 손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정말 와주어서 고마워요…… 안녕하세요, 세르게이 파블르이치!" 볼르인체프는 다리아 부인의 손을 잡았다 놓은 다음, 그녀의 딸 나타리아쪽으로 다가갔 다. "그런데 새로 사귀게 되셨다는 남작은 오늘 오시는 겁니까?' 하고 피가소프가 물었다. "예, 오늘 오시게 되어 있어요." "듣건대, 그 사람은 굉장한 철학가라더군요. 말끝마다 헤겔을 끌어대며 우쭐거린다던 데 요. " 다리아 부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를 소파에 앉힌 다음 자기 도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철학이라…… 하고 피가소프가 말을 이었다. "최고의 관점이라! 그 최고의 관점이라는 것이 내겐 역시 질색이란 말씀입니다. 도대체 높은 데서 무엇이 보인단 말입니까? 가령 말 을 사고 싶을 때 망루에서 내려다본댔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 남작은 댁으로 무 슨 논문인가를 가지고 오신댔죠?"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가 물었다. "예, 논문을 가져온다고 했어요" 하고 다리아 부인은 일부러 태연한 척 대답했다. "러시 아의 상공업을 취급한 논문이래요…… 그러나 뭐 겁내진 마세요, 이 자리에서 읽진 않을 테 니까요…… 그리고 그런 목적에서 당신을 초대한 것도 아니구요. 남작은 학문이 있을 뿐더 러 무척 친절한 분이에요. 러시아어도 잘하죠! 그야말로 청산유수지요 …… 당신도 반하고 말 거예요, " "남들이 프랑스어로 칭찬할 만큼 러시아어를 잘하는군요" 하고 피가소프가 혼잣소리처 럼 빈정거렸다. "얼마든지 지껄이세요, 아프리칸 세묘느이치. 얼마든지 …… 당신의 엉클어진 머리에는 안성맞춤이니까…… 그런데 왜 아직도 오시지 않을까? 자, 여러분" 하고 다리아 부인이 주 위를 둘러보며 덧붙였다. 정원에라도 나가보실까요 …… 저녁식사까진 아직 한 시간 가량 남아 있고 날씨도 좋으니 ……‥모두 일제히 일어나서 정원으로 향했다. 다리아 미하일로브 나의 정원은 바로 강변까지 뻗어 있었다. 거기에는 황금빛과 검은 빛으로 얼룩진 향기 높은 보리수 가로수 길이 여기저기 나 있었는데, 나무들 우측은 햇빛을 받아 에메랄드처럼 빛나 고 있었다. 아카시아와 라일락으로 만든 정자도 여러 개 눈에 띄었다. 볼르인체프는 나타리아와 마드모아젤 봉크루를 데리고 정원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헤치 고 들어갔다. 볼르인체프는 나타리아와 나란히 걸음을 옮기고 봉크루는 조금 떨어져서 그들 뒤를 따랐다. "당신은 오늘 무슨 일을 하셨지요? 볼르인체프는 멋지게 생긴 까만 아마빛 콧수염 끝을 비비면서 간신히 이렇게 물었다. 그의 얼굴 윤곽은 자기 누이와 무척 흡사했으나 그 표정에는 활기나 생기가 없고, 아름 답고 상냥스러운 눈에도 어쩐지 이상한 애수가 깃들여 있었다. "뭐, 별로……‥ 하고 나타리아가 대답했다. "피가소프의 험담을 듣기도 하고 자수를 놓 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 "무슨 책을 읽으셨어요?" "저 …… 십자군의 역사를 읽었어요" 하고 나타리아가 약간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볼르인체프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하!" 그는 한참만에 이렇게 말했다. "그건 재미있을 거예요." 그는 나뭇가지를 꺾어 서 그것을 공중에 휘두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스무걸음쯤 더 걸어갔다. "댁의 어머님께서 친하시다는 남작은 어떤 분입니까?" 볼르인체프가 다시 물었다. "신종인데 지금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래요. 어머니는 그분을 무척 칭찬하고 계세요. " "어머니께서는 누구에게든지 열중하시는 성격이시니까. " "그만큼 마음이 젊다는 증거겠지 요" 하고 나타리아가 자기 의견을 말했다 "그렇겠죠. 그리고 당신의 말은 곧 보내드리겠 습니다. 이젠 거의 다 길들여 놨습니다만, 첫발을 떼어놓을 때부터 곧장 내달을 수 있게 하 고 싶어서. 곧 그렇게 만들어 뵙겠습니다. " "고마워요 …… 그렇지만 미안해서 …… 당신 이 직접 길들이시는 거죠? 매우 위험한 일이라던 데요 ……‥."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당신께 조금이라도 만족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저는 …… 저는 …… 그런 사소한 일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라도 ……‥ 볼르인체프는 말을 더듬었다. 나타리아는 다정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다시 한 번 'Merci' 하고 말했다. "저," 볼르인체프는 오랜 끝에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의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 아 니,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그러지 않아도 당신은 제 심정을 잘 알고 계실 텐데." 이때 저택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 식사 종이에요!" 하고 봉크루가 말했다. "돌아갑시다. " 프랑스인 노처녀는 볼르 인체프와 나타리아의 뒤를 따라 발코니의 층계를 오르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 이 멋진 청년이 저렇게도 대화에 고통을 받다니, 정말 유감 천만이군……,' 이것을 러시아 어로 옮기면 "젊은 분, 당신은 귀여운 분시지만 머리가 잘 돌지 않는군요"라고나 할는지. 남작은 식사때가 되어도 도착하지 않았다. 반 시간을 더 기다렸다. 식탁에서의 대화도 흥 이 나지 않았다. 볼르인체프는 옆에 앉아 있는 나타리아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그녀의 컵에 부지런히 물을 따라주고 있었다. 판달레프스키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알렉산드라 파블노브 나의 마음을 끌려고 열심히 아양을 떨고 있었으나, 그녀는 하품이라도 할 듯한 태도다. 바시 스토프는 빵으로 알약 제조에 여념이 없다. 피가소프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다리아 부 인이 그를 보고 "당신은 오늘밤 유달리 시무룩하군요" 하고 말하자 피가소프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내가 언제 상냥스러울 때가 있었습니까? 나는 그런 걸 모릅니다" 하고 대꾸했다. 그러고는 쓴웃음을 입가에 지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나는 크바스니카 (러시아 사람들이 애용하는 음료수)요. 흔하기 짝없는 러시아산 크바스니카요. 당신이 학수 고대하시는 그 시종하곤 ……‥." "브라보" 하고 다리아 부인이 외쳤다. "피가소프가 질투를 하는군요. 장본인이 나타나기 도 전에 미리부터 질투를 하고 계세요!" 그러나 피가소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곁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시계는 일곱 시를 알렸다. 이윽고 모두들 다시 응접실에 모여 앉았다. "아무래도 오시지 않을 것 같군요" 하고 다리아 부인이 말했다. 그런데 이때 마찻소리가 들리더니 조그만 마차 한 대가 저택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하인이 객실로 들어와서 은쟁반에 얹은 편지를 여주인에게 내주었다. 다리아 부인 은 끝까지 편지를 읽고 머슴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 이 편지를 가져오신 분은 어디 계시냐?" "마차 안에 계십니다. 들어오시라고 할까요? "들어오시라고 해라. " 하인은 돌아나갔다. "정말 유감스럽군요" 하고 다리아 부인이 말을 이었다. "남작은 급히 페테르부르크로 돌 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논문을 루딘이라는 자기 친구 편에 보내왔어 요. 남작은 그 사람을 내게 소개하고 싶다는군요, 매우 칭찬을 하시면서. 하지만 정말 유감 스럽군요! 나는 남작이 좀더 묵으실 줄 알았는데 ……‥." "드미트리 니콜라이디 루딘께 서 드십니다!" 하고 하인이 아뢰었다. 3 들어온 사람은 서른 댓쯤 되어 보이는, 키가 후리후리한 사나이였는데 등은 구부정하고 머리카락은 곱슬곱슬하였으며 까무잡잡한 얼굴은 단정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표정이 풍부 하고 총명해 보였다. 생기가 도는 검푸른 눈에는 부드러운 빛이 넘쳐 흐르고 콧날이 선 큼 직한 코와 윤곽이 뚜렷한 아름다운 입술을 하고 있었다. 입고 있는 허술한 옷은 품이 하도 좁아서 마치 그 속에서 손발이 비어져 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는 성큼성큼 다리아 부인 곁으로 다가가서 가볍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그전부 터 찾아뵙고 싶었고 자기 친구인 남작이 직접 작별인사를 못 드리고 가는 것을 몹시 서운해 하더라는 말을 전했다. 루딘의 그 가냘픈 목소리는 그의 후리후리한 키와 넓은 가슴에 조금 도 어울리지 않았다. "앉으세요…… 무척 반갑습니다" 하고 대답하고 다리아 부인은 루딘에게 방안의 사람들 을 모두 소개한 다음 그에게 이 고장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왔는지를 물었다. "제 영지는 T현에 있는데" 하고 루딘은 모자를 무릎 위에 얹은 채 대답했다. "얼마 전에 여기 오게 되었습니다. 실은 어떤 용무로 오게 되었습니다만, 당분간 이곳 군청 소재지에 머 무르게 된 셈이지요." "어느 댁에?" "의사 댁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대학 시절의 옛친구가 돼서." "그령군요! 의사 댁에 ‥‥ 평판이 좋은 분이죠. 아주 명의라는 소문이 자자해요……그런데 남작과는 오래 전부 터 아시는 사인가요?" "지난 겨울 모스크바에서 알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그분 댁에서 일주일 가량 신세를 졌 지요." "매우 머리가 좋으신 분이시더군요, 남작은. " "예, 현명타지요. " 다리아 부인은 오 드 롤로뉴 향수를 뿌린 손수건 매듭을 코로 가져갔다. "어디 근무하시나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누구 말입니까? 저 말입니까?" "예." "아니요 ……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다시 좌석의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실례지만" 하고 피가소프가 루딘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남작께서 쓰셨다는 그 논문 내용을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 "그 논문은 러시아의 상업 관계…… 아니 그게 아니라, 상업과 공업의 관계를 다룬 것이 던가요?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다리아 미하일로브나?" "그래요, 그런 논문이더 군요……‥ 다리아 부인은 이렇게 대답하고는 한손을 이마로 가져갔다. "나는 물론 그런 문제를 비판할 자격이 없는 인간이지만" 하고 피가소프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 논문의 제목 자체가 몹시…… 어떻게 말씀드려야 좋을까? 몹 시 애매하고 착잡한 듯한 느낌을 주는군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되시죠?" 루딘이 물었다. 피가소프는 빙긋이 미소를 짓고는 흘긋 다리아 부인의 안색을 살폈다. "그럼, 당신에겐 분명하신가요?" 또다시 여우 같은 얼굴을 루딘 쪽으로 돌리며 피가소프 가 이렇개 물었다. "저 말입니까? 명백하지요. " "음 …… 그야 물론 당신은 우리보다 박식하실 테니까. " "머리가 아프세요?" 알렉산드 라가 다리아 부인에게 물었다. "아너요, 그저 ……신경이 좀." "이런 질문을 해서 미안합니다만" 하고 피가소프가 다시 코맹맹이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 다. '당신의 친구인 무펠리 남작…… 확실히 그렇던가요, 그분의 이름이?" "예, 맞습니다. " "무펠리 남작은 전문적으로 경제학을 연구하고 계시나요, 그렇지 않으면 공무와 사교계 의 여가를 틈타서 흥미 본위로 학문에 종사하고 계시나요?" 루딘은 뚫어질 듯이 피가소프 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작은 이 방면에서 권위자라 할 순 없습니다" 하고 그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 논문에는 정당하면서도 흥미있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 "나는 논문을 읽지 않았으니까 당신과 토론할 순 없습니다만…… 그러나 실례를 무릅쓰 고 물어보겠는데, 당신의 친구인 무펠리 남작의 연구 논문은 필시 사실보다는 오히려 일반 론에 치중판 논문일 테죠?" "그 속에는 사실도 있거니와 사실에 입각한 논평도 있습니다. " "그럴실 테죠. 그렇지 만 솔직히 제 의견을 말씀드린다면…… 이래봬도 저는 경우에 따라선 저의 의견을 토로할 줄도 안답니다. 데르프트 대학에서 3년간이나 학술을 연구한 바가 있으니까요…… 어쩠든 일반적으로 불리는 개론이라든지 가설이라든지 체계라는 것은…… 워낙 시골놈이라 생각 나는 대로막 지껄여서 미안합니다만…… 그런 건 조금도 소용이 없습니다. 요컨대 그런 건 공리공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세상 사람들을 현혹시키는데 불과합니다. 따라서 누구나 진실 그대로를 권하라는 거예요. 그것만으로 충분하단 말입니다. " "그건 옳은 말씀입니 다!" 하고 루딘이 말을 받았다. "하지만 진실이란 어떤것인가 하는 그 의의를 전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요?" "도대체 그 일반론이라는 것은……‥." 피가소프는 상대방의 이의같은건 아랑곳없이 자 기 말을 계속했다. "그 일반론이니 개론이니 결론이니 하는 것은 듣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돕니다. 그러것은 모두 이른바 신념이란 것에 입각한 것인데, 어중이 떠중이, 너나 할것없 이 자기의 신념이란 것을 들고나와 떠벌리뗘 게다가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요구하기까지 하는 판이니, 정말 진절머리가 납니다 ……‥." 이렇게 말하며 피가소프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바람에 판달레프스키는 웃음을 터뜨 리고 말았다. "거참, 그럴 듯한 말씀입니다!" 하고 루딘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댁의 의견에 의하면, 신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단 말씀이군요?" "없지요,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 "그것이 당신의 신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신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십니까? 벌써 당신 자신에게 이렇게 하나의 신 념이 있지 않습니까?" 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니 가만히 계십시오. 그건……‥." 하고 피가소프가 황급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리아 부인은 손뼉을 치며 "브라보, 브라보, 피가소프씨가 졌어요! 하고 외치고 는 살며시 루딘의 손에서 모자를 빼앗아 들었다. "아직 기뻐하실 필은 없습니다, 마님. 너무 빨라요!" 하고 피가소프는 화를 내며 말했다. "거드름을 퍼우며 재치 있는 말을 한마디 했다고 해서 다 되는건 아닙니다. 확증을 듣고 논 파하지 않으면 안 돼요…… 우리는 논쟁의 대상에서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 "좋습니다" 하고 루딘이 냉정하게 웅수했다. "문제는 간단합니다. 어쨌든 당신은 일반론의 유익성도 믿 지 않거니와 신념이라는 것도 믿지 않으신단 말인데 ……‥."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아 요. 어떤 것이든 믿지 않습니다. " "좋습니다. 그렇다면 회의론자로군요. " "그런 학술어까지 끌어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하여튼……‥." "공연히 남의 말을 꺾으려 들지 마세요!" 하고 다리아 부인이 참견을 했다. "자,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판달레프스키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며 이령게 말하 고는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었다. "그렇지만 그 말이 나의 사상을 적절히 표현해 줄 뿐더러" 하고 루딘은 말을 이었다. "당 신도 그 말을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그 말을 사용해선 안 된단 말씀입니까? 하여튼 당신은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왜 믿는 거지요?" "왜라리요? 그것 참, 멋있는 질문이군요! 사실이란 명백한 것으로, 누구든지 사실이 무엇이란 것쯤은 알고 있 습니다…… 나는 경험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감각에 의해서 그것을 판단합니다. " "그렇지만 그 감각이 당신을 배반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감각에 의하면, 태 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코페르니쿠스의 설을 믿지 않는단 말씀입니까? 지동설을 믿지 않습니까?" 또다시 모든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스쳐갔고, 눈이란 눈은 모두 루딘 쪽으로 쏠렸다. 그 리고 '거, 만만찮은 친구로군!' 하고 제각기 생각했다. "당신은 농담을 하시는군요" 하고 피가소프가 말했다. "물론 그 말은 아주 기발한 착상임 에는 틀림없으나, 우리들의 문제와는 거리가 먼 말입니다. " "지금까지 내가 한 말에는" 하고 루딘이 대꾸했다. "유감스럽게도 기발한 점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옛날 부터 주지되어 온 사실로서 천번이고 만 번이고 되풀이된 말들입니다. 문제는 그런 점에 있 는 것이 아니라." "그럼 어떤 데 있다는 겁니까?" 하고 피가소프가 퉁명스러운 어조로 되물었다. 논쟁을 할 때면 언제나 먼저 상대편을 야유하지만, 이윽고 점점 말이 거칠어지고 나중에 는 잔뜩 부어서 아무 말도 않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고 루딘이 말을 이었다. "나는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현명하다는 사람들이 공격을 하는 데 있어서 ……‥." "학술 체계를 말하는 겁니까?" 하고 피가소프가 말을 가로앴다. "예, 체계라고 해도 좋습니다. 도대체 그 말의 무엇이 그렇게 무섭습니까? 모든 학술 체 계는 생명의 원리, 즉 근본 법칙의 궤적 위에 입각한 것으로서." "그러나 그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발견할 수도 없구요……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잠간만 기다리세요. 물론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게다가 인간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과오를 피할 수 없습니 다. 예를 들어 뉴턴이, 일부분이이긴 하지만 어쨌든 기본 법칙을 발견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름지기 당신도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는 천재였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나 천재의 발견 이라는 것은 그 발견이 만인의 소유가 되기 때문에 비로소 위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개개의 현상 속에서 공통적인 기본 법칙을 발견하겠다는 의욕은 인간 정신의 근본적인 특질의 하 나로서, 우리의 모든 교양도……‥." "굉장한 데로 끌고 가는군요!" 하고 피가소프가 말 꼬리를 끌며 루딘의 말을 가로챘다. "나는 실제적인 인간이 돼서 그런 형이상학적인 문제 엔 파고들지도 않거니와 파고들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 "좋습니다! 그건 당신 자유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인간이 되고 싶다는 당 신의 그 강력한 회망 자체가 벌써 일종의 사상 체계인 동시에 이론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 까요?" "교양이라고 당신은 말씀하시지만," 피가소프가 말을 받았다. "또 그런 말로 남을 골탕 먹일 심산이군요! 당신이 극구 칭찬하는 그런 교양 같은 건 조금도 달갑지 않습니다! 그런 교양은 한푼어치의 가치도 없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프피칸 세묘느이치, 당신의 토론 방법은 아름답다고 할 수 없군요!" 하고 그에 게 핀잔을 주면서 다리아 부인은 속으론 새로운 손님의 침착성과 정중한 태도에 몹시 만족 해하고 있었다.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군.' 그녀는 호의에 찬 눈으로 루딘의 얼굴을 바라보 고, 마음속으로 이렇개 생각했다. '좀더 정답게 대해 줘야지,' 이 마지막 말은 러시아어로 생 각했던 것이다. "나는 구태여 교양을 변호하려고는 생각지 알습니다. " 루딘은 잠시 침묵을 지키고 나서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것은 나의 변호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교양을 싫 어하시는 것 같지만……사람의 마음은 십인십색이니까 할 수 없는 일이죠. 게다가 그런 문 제까지 논의하자면 점점 본제에서 멀어지고 마니까요. 속담에 '주퍼터여, 그대는 노했노라. 따라서 그대에게 잘못이 있느니라'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고, 내가 말하고 싶 은 것은, 사상 체계라든지 일반론 같은 것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경향은 정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체계와 함께 일반적인 지식이나 과학에 대한 신뢰까지도 부 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과 자기 힘의 신뢰까지도 부정하는 것 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겐 이 신뢰가 필요한 것으로서, 단순한 인상만으로 살아 갈 수는 없습니다. 사상을 두려워하거나 믿지 않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회의론은 항상 무성 과와 무력을 특징으로 삼고 있어서 ……‥." "그건 모두 탁상공론이에요!" 하고 피가소프가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실례지만, 우리는 '그건 모두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 함으로써 실은 탁상공론이 아닌, 그 어떤 것 보다 실질적인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경 을 곧잘 얼버무려 버리는 버릇이 있죠." "뭐라고요?" 피가소프는 이렇게 묻고는 실눈을 만들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당신도 알았으리라 믿습니다" 하고 루딘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참으면서 대꾸했다. "되풀이해서 말씀드리지만, 만일 인간에게 그가 신뢰하는 확고한 기 초가 없고 튼튼히 서 있을 기반이 없다면 어떻게 자기 국민의 욕구며 미래를 이해할 수 있 겠습니까? 어떻게 자기 자신의 할 일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만일 ……‥." "자, 그만하면 됐으니 좀 쉬시죠." 피가소프는 토막토막 끊어지는 목소리로 이령게 말하고 고개를 한 번 끄떡이더니 아무도 바라보지 않으며 옆으로 물러갔다. "아하! 드디어 꽁무니를 빼는군요!" 하고 다리아 부인이 루딘에게 말했다. "제발 언짢게 생각하지 마세요, 드미트리 ……아, 실례했어요." 그녀는 정다운 미소를 띄우며 덧붙였다. "당신의 부칭은 뭐라 하셨죠?' "나쁘게 생각하 지 마세요, 드미트리 니꼴라이치! 우린 으레 그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요. 저 사 람은 더 이상 토론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보이려고 하지만……실은 당신과는 토론할 수 없 다고 느낀 거예요. 자, 좀더 이 쪽으로 다가앉으세요. 이야기라도 좀 합시다. " 루딘은 자기 의자를 끌어당겼다. "어떻게 돼서 우린 서로 모르고 지냈을까요?' 하고 다리아 부인은 말을 이었다. "이상한 일이군요…… 당신은 이 책을 읽으셨나요? 토크빌이 쓴 건데, 아시나요?" 이렇게 말하고 다 리아 부인은 프랑스어로 쓰인 팜플렛을 루딘에게 주었다. 루딘은 얄팍한 책을 손에 들고, 서너너덧 페이지 들추어 보고는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려 놓았다. 그러고는 토크빌의 이 책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으나, 그가 다룬 문제에 대해서는 자 주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되어 다시 그의 말문이 열렸다. 루딘은 처음 얼 마 동안은 어느 정도 당황하는 빛으로, 결단성 있게 말하기를 주저하며 제대로 말을 고르지 도 못했으나, 말이 오고감에 따라 점점 열중해서 나중에는 웅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15분 가 량 지나자, 방안에는 그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의 주위에 모여 앉게 되었다. 피가소프만은 구석에 떨어져서 난로 옆에 있었다. 루딘은 열띤 어조로 재치 있게 차근차근 말하면서, 자신의 박식과 다독을 증명했다. 그가 기처럼 비범한 인물일 줄은 누구에게나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옷차림도 극히 평범할 뿐 더러 그에 대해서는 소문조차 없지 않았던가? 어떻게 해서 이런 시골에 갑자기 현인이 나타 나게 된것일까? 좌중의 사람들에겐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 신기하기 짝없는 일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다리아 부인을 위시한 방안의 모든 사람을 더욱 놀라게 하고 매혹시켰 을는지도 모른다…… 다리아 부인은 자기의 새로운 '발견'에 득의양양해서, 벌써부터 루딘을 사교계에 끌어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남에게서 받은 첫인상 속에는 자신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어린애다운 감정이 많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는 솔직 히 말해 루딘의 말 가운데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으나, 그래도 감탄을 아끼지 않고 기뻐했다. 동생 볼르인체프도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판달레프스키는 다리아 부인이 만족해하는 모 양을 보고 마음속으로 루딘을 부러워했다. 피가소프는 '5백루블만 내면 더 잘 지저귀는 꾀 꼬리를 얼마든지 살 수 있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바시스토 프와 나타리아였다. 바시스토프는 거의 숨이 막힐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입을 벌리고 눈 을 크게 뜬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치 생전 처음으로 사람의 말을 듣는 것처럼 넋을 잃고 있었다. 한편 나타리아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는데, 뚫어질 듯이 루딘을 바라 보는 그 눈초리는 금세 흐려지는가 하면 갑자기 빛나기도 했다. "저 눈은 정말 멋있군요!" 하고 볼르인체프가 나타리아의 귀에 속삭였다 "예, 정말 좋 아요. " "다만 손이 크고 붉은 것이 홈이군," 나타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나왔다. 서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으나, 루딘이 입을 열 때마다 일제히 입을 다 물고 말았다. 이것만 봐도 그가 준 인상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었 다. 다리아 부인은 불현듯 피가소프를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의 옆으로 다 가가서 나직한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왜 그렇게 시무룩해서 쓴웃음만 짓고 계세요? 또 한 번 저 사람과 맞붙어보세요." 그러고는 그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이번에는 루딘을 손 짓으로 불렀다. "당신은 이분에 대해서 또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어요." 다리아 부인은 피가소프를 가 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분은 지독히 여자를 싫어하는 사람이 돼서 걸핏하면 여자를 공격 하신답니다. 제발 이 사람을 바른길로 인도해 주세요. " 루딘은 피가소프를 내려다보았 다…… 위에서 내려다보게 된 것은 자기의 키가 피가소프보다 머리 두 개만큼 컸기 때문에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었다. 피가소프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담즙성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 고 말았다. "다리아 미하일로브나, 그건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하고 그는 성난 어조로 말했다. "나 는 여자만을 공격하는 건 아닙니다. 도대체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단 말예요. " "어째서 인 간을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십니까?" 하고 루딘이 물었다. 피가소프는 뚫어질 듯이 루딘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마 자기 자신의 마음을 연구한 탓 일 테죠. 날이 가면 갈수록 자꾸만 더러운 것을 발견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 마 음을 기준 삼아 다른 사람을 판단하죠. 물론 이러한 방법이 틀렸을지도 모르고, 또 나 자신 이 남보다 훨씬 열등한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습관이 니까요. !" "당신의 뜻은 충분히 이해하겠고, 또 나도 동감입니다. 고결한 마음의 소유자로서는 반드 시 자기 비하를 느끼지 않을수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꽉 막힌 상태에 머물러 있으라는 법은 없지요." "내 마음에다 고결한 딱지를 붙여주시니 황송합니다만," 피가소프는 지려고 하지 않았다. "내 마음의 상태는 지극히 평온합니다. 그래서 그 속으로부터 빠져나가는 출구가 있다손 치 더라도 내겐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그런 것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실례되는 말씀인지는 모르나, 자존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진리 속에 살겠다는 희망 을 저버리는 셈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야 물론이죠!" 하고 피가소프가 외쳤다. " 자존심, 그것은 나도 압니다. 물론 당신도 아실 것이고, 누구든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 리라고 하면, 아니 도대체 진리라는 게 무엇입니까? 그 진리라는 건 도대체 어디 있습니 까?" "한마디 주의해 두지만, 당신은 자꾸 한 말을 되풀이하고 있군요" 하고 다리아 부인이 일침을 놓았다. 피가소프는 어깨를 쳐들었다. "그렇다고 뭐가 나쁩니까? 나는 진리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철학자들도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어요. 칸트가 진리는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말하면, 헤겔은 아니다, 그것 은 거짓말이다, 진리라는 건 이런 것이다라고 한단 말입니다. " "헤겔이 진리에 대해서 한 말을 아십니까?" 하고 루딘은 음성을 높이지 않고 태연히 물었다. "다시 한 번 말해 두지만," 하고 피가소프는 흥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진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 생각으론,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있는 것은 진리라는 그 말뿐이고,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단 말씀입니다. " "아니, 저런!" 하고 다리아 부인이 외쳤다. "그런 말을 나고서도 부끄럽지 않으세요? 제 발 나이 값을 하세요! 진리가 없다구요? 그렬다면 무슨 목적으로 사시는 거예요?" "아니,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리아 미하일로브나" 하고 피가소프는 성난 어조로 대꾸했다. "어 쨌든 댁에서는 요리사 없이 살기보다는 진리 없이 사는 훨씬 편하실 거라고요. 사실 그 요 리사 스테판은 수프를 만드는 솜씨가 그만이니까요. 그건 그렇고 진리 같은 건 찾아서 뭘 하시렵니까? 어디 좀 말씀해 보세요. 설마 진리로 모자를 뜰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농담은 결코 논박이 될 수는 없는 거예요" 하고 다리아 부인은 핀잔을 주었다. "하물며 그런 중상적인 성질을 띤 농담으로는." "진리는 어떤지 모르지만, 바른말은 귀가 아픈 법입니다" 하고 피가소프는 성난 표정으 로 투덜거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한편 루딘은 자존심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는데, 무척 조리 있게 이야기 전개시켜 나갔 다. 자존심이 없는 사람은 인간의 가치가 없다, 자존심이라는 것은 대지를 움직일 수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지레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기사처럼 자존심을 억제할 수 있 는 사람, 자신의 생명을 사회의 복지를 위해 회생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어야만 비로 소 인간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논제의 중심이었다. "자기 만족에 사로잡히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마 치 혼자 고립되어 있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나무와도 같아서 자연히 시들어 죽고 맙니다. 그러나 완성을 향해 부단히 전진하는 자존심은 모든 위대한 것의 원천인 것입니다…… 그렇 습니다! 인간은 정당한 자존심을 구현시키기 위해서는 완고한 개인적 이기주의를 분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잠깐 연필을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피가소프가 바시스토프에게 말했다. 바시스토프는 피가소프의 말을 당장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필은 뭘 하시려우?" 그는 드디어 이렇게 물었다. "지금 루딘씨가 한 마지막 말을 좀 적어두려구요. 적어둬야지, 자칫하면 잊어버릴 우려가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말은 '섰다'의 장면과 같아서 좀처림 들을 수 없는 말 이거든요." "농담과 조소에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어요, 아프리칸 세묘느이치!" 바시스토프는 이 렇게 쏘아붙이고는 외면하고 말았다. 그 동안 루딘은 나타리아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일어섰다. 그 얼굴에는 당황하는 빛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볼르인체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아노가 있군요" 하고 루딘은 여행중의 왕자처럼 부드럽고 다정한 어조로 말을 건넸 다. "치실 줄 아실 테죠?' "예, 칠 줄은 압니다만" 하고 나타리아가 대답했다. "잘 치지는 못해요. 저보다는 콘스탄 친 지오미드이치 판달레프스키가 훨씬 잘 치지요." 판달레프스키는 얼굴을 내밀고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공연히 그런 말씀 마세요,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나보다 못하시지도 않으면서." "저 슈 베르트의 (마왕)을 아시는지요?" 하고 루딘이 물었다. "압니다, 알아요!" 다리아 부인이 말을 받았다. "콘스탄친, 한번 쳐보세요‥‥음악을 좋아 하시나요, 드미트리 니콜라이치?" 루딘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제부터 음악을 감상하려는 듯이 한 손으로 머리를 매 만졌다…… 판달레프스키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나타리아는 루딘을 마주 바라보며 피 아노 옆에 섰다. 피아노의 음향이 울려 퍼지자 루딘의 얼굴에는 아름다운 표정이 감돌기 시 작했다. 그의 검푸른 눈은 생각에 잠긴 듯 방황하다가는 때때로 나타리아 위에 멎기도 했다. 판달레프스키는 연주를 마쳤다. 루딘은 아무 말 없이 열려진 창가로 다가갔다. 향기로운 밤안개가 하늘거리는 천처럼 정 원 위를 덮고 있었다. 가까이 있는 나무들은 몽롱한 냉기를 호흡하고, 별들은 조용히 반짝이 고 있었다. 감미로운 여름밤은 꿈속으로 젖어들면서 사람의 마음까지도 황흘경에 빠지게 하 는 것이었다. 루딘은 어두운 정원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밤에 음악을 들으니" 하고 그는 말문을 열었다. "독일에서의 학창 생활이 생각나는군요. 동료들끼리의 집회며 세 레나데가……‥" "독일에서 유학하셨나요?" 하고 다리아 부인이 물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일년, 베를린에서도 일년 가까이 있었지요." "그럼 학생복을 입고 계셨겠군요? 그곳 학생들은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다던데요?" "하이델베르크에서는 나도 박차가 달린 장화를 신고 술이 달린 헝가리식 저고리를 입고 머리는 어깨까지 기르고 있었 지요…… 그러나 베를린의 대학생은 일반인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학창 생활의 뭐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좀 들려주세요." 하고 알렉산드라는 말했다. 루딘은 이야기를 시작했으나 그다지 재미있게 전개되지는 못했다. 그의 묘사에는 색채가 부족했기 때문에 청중을 웃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루딘은 외국 유학 당시의 체험담에서 화 제를 바꾸어 학술 문화의 의의라든지 대학, 대학 내의 학생 생활 같은 일반론으로 옮겨갔다. 그는 용감하게 큰 대상을 잡고 광범한 정경을 묘사해 나갔다. 사람들은 열심히 귀를 기울였 다…… 그의 화술은 기묘하고도 매력적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좀 애매한 데가 있었다 …… 그러나 그 애매한 점이 한층 더 그의 말에 매력을 더해 주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풍부 한 사상이 도리어 루딘의 정확하고 명료한 표현을 방해하고 있었다. 형상은 형상으로 바뀌 어지고 비유는 비유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비유는 예기치 않게 대담한 것도 있거니와 놀랄 만큼 정확한 것도 있었다.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시인의 즉흥시와 다름없는 그의 웅변은 말 재주 능란한 변사의 독선적인 기교와는 다르게 순수한 영감으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는 말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자유롭게 슬슬 흘러나와서 마치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속 으로부터 흘러나오듯 뜨거운 신념에 불타고 있었다. 루딘은 최고의 비결이라 할 수 있는 웅 변의 음악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음의 금선을 한두 줄 건드리기만 하면 나머지 모든 금선까지도 바르르 떨리게 하고 울려 퍼지게 하는 수완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사람 가운데는 내용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도 있었지만, 비록 그 런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가슴이 크게 들먹거리고 눈앞에 드리워졌던 장막이 걷혀면서 자기 앞에 빛나는 세계가 펼쳐지는 듯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루딘의 사상은 모두가 미래로 컁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이것이 또한 청중에게 정열에 찬 젊음의 기백을 불러일으켜 주는 것이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특히 어느 누구에게도 눈길을 돌리지 않고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밤, 특히 젊은 여성들 앞에서 모든 사 람의 공감과 관심을 한몸에 집중시킨 그는, 자기 감정의 흐름에 매혹된 채 열변을 토했다. 그의 말은 웅변으로 변하고 시로까지 고조되어 갔다…… 고요하면서도 힘있는 그의 음성은 매력을 더해 주기에 충분했고, 그 자신도 뜻하지 않은 어떤 고상한 사상이 그의 입을 통하 여 홀러나오는 것만 같았다……루딘은 덧없는 인생에 영원한 의의를 부여해 주는 것은 무엇 인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나는 스칸디나비아의 어떤 전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고 그는 결론을 맺기 시작했 다. "어느 임금님이 무사들과 함께 어두컴컴한 긴 동굴 속에서 불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습 니다. 그것은 겨울밤의 일이었습니다. 갑자기 조그만 새 한 마리가 열려진 문으로 날아 들어 와서는 다른 문으로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임금님은 그것을 보시고 '저 새야말로 덧없는 인 생과 같은 것이다. 어둠 속에서 날아와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따스하고 밝은 데에 있는 것도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무사 가운데 가장 나 이 많은 사람이 말을 받아서 '임금님, 저 새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저러다가 마침내는 자기 등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고 말씀드렸지요. 바로 이 말과 같 이 우리의 생애는 아침 이슬과 다름없이 덧없는 것이지만, 위대한 모든 것은 인간을 통하여 비로소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러한 최고 능력의 도구가 된다는 의식은 다른 어 떤 기쁨보다도 인간을 위로해 줍니다. 따라서 죽음 속에서도 인간은 자기 생명을, 자기 등지 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루딘은 여기서 말을 멈추고, 자기도 모르게 어리등절한 미소를 띄우며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은 시인이군요" 하고 다리아 부인이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물른 피가소프만은 예외 였다. 그는 루딘의 장황한 연설이 끝나기도 전에 슬그머니 모자를 들고 밖으로 나가면서, 문 가에 서 있던 판달레프스키에게 분노에 찬 어조로 이렇게 소곤거렸다. "저렇게 똑똑한 체하는 놈은 질색이야! 좀더 우둔한 친구들이나 찾아가 봐야지 !" 그러 나 아무도 그를 만류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가 자리에서 없어진 것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인이 밤참을 날라왔다. 이윽고 기분 후에는 모두들 흩어지기 시작했다. 다리아 부인은 간곡히 만류하며 루딘을 자기 집에 묵도록 했다. 알렉산드라는 동생과 함께 마차를 타고 집 으로 돌아가면서도 몇 번이나 탄성을 올리며 루딘의 뛰어난 머리에 감탄했다. 볼르인체프는 누이의 말에 동감하면서도, 루딘의 말 속에는 가끔 애매한 점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충 분히 납득하지 못하는 점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분명히 자기 생 각을 밝혀두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나, 그의 얼굴은 우울한 빛으로 흐려지고 마차 한구석에 못 박힌 눈초리도 수심에 가득 차 있는 듯이 보였다. 판달레프스키는 잠자리에 들려고 멜빵을 끄르면서, "정말 재치 있는 사람이야!" 하고 무 심결에 입밖에 내어 말하고는, 문득 자기 방에 딸린 하인을 보자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며 물러가라고 명령했다. 바시스토프는 밤새껏 한잠도 자지 못하고 옷도 벗지 않은 채 모스크 바의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나타리아는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긴 했으나 역시 잠을 이를 수 없었고 눈을 감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 손을 머리 밑에 괴고 물끄러미 어둠 속 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맥박은 열병을 앓는 양 고동치고 때때로 무거운 한숨이 그녀의 가슴 을 물결치게 하는 것이었다. 4 이튿날 아침 루딘이 옷을 입자마자 다리아 부인이 하인을 보내, 서재에서 함께 차를 마 시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루딘이 서재에 들어서니 여주인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무척 다정한 태도로 아침 인사를 하고, 어젯밤은 잘주무셨냐고 묻고 손수 차를 따르고 설탕은 적 지 않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담배를 권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떻게 돼서 지금까지 모르고 지냈는지 알 수 없다고 두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루딘은 그녀와 좀 떨어진 곳에 앉 으려 했으나, 다리아 부인은 자기 소파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루딘쪽으로 가 볍게 몸을 굽히면서, 그의 가정이며 장래의 포부며 계획 등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다리아 부인은 거리낌없이 지껄이고 상대방의 말을 무관심한 표정으로 듣고 있는 듯했으나, 루딘은 이 주인 마님이 자기 마음을 사려고 아양을 떨다시피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아침부터 둘이서 이야길할 기회를 만든 것이라든지, 산뜻하 면서도 레까미에 부인식의 우아한 복장을 하고 있는 것도 모두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던 것 이다. 이윽고 다리아 부인은 묻는 것을 그만두고, 이번에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젊었을 때 의 일이며 자기가 아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루딘은 그녀의 공담을 정성껏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다리아 부인이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어라 도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것은 언제나 그녀 혼자뿐이었고 화제의 주인공은 자기도 모르는 사 이에 혼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 대신 루딘은 다리아 부인이 유명한 고관에게 어떤 말을 했고, 흑은 어느 유명한 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다든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다리아 부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최근 25년 동안 저명한 인사들 은 한결같이 어떻게 하면 그녀를 만나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녀의 마음에 들 수 있을 까 하는 것만을 바라고 있었다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런 사람들의 얘기를 마치 자기 동료들의 얘기를 하듯이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면서, 그다지 감탄도 하지 않거 니와 칭찬도 하지 않았다. 그중 어떤 사람은 괴짜라는 말 한마디로 간단히 돌려버리기도 했 다. 이런 말투이고 보니, 그들 저명한 인사들 이름은 마치 보석을 둘러싼 화려한 테두리처 럼, 다리아 미하일로브나라는 중심 인물을 두드러지게 내세우기 위한 빛나는 장식품에 지나 지 않는 것이었다……‥ 루딘은 담배를 태우면서 묵묵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쉴 새 없이 지껄여대는 여주인 의 말에 가끔 한두 마디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는 말솜씨도 좋았거니와 남과 얘기하기도 좋아했다. 그러나 남의 말에 참견하기를 꺼려했고 그 대신 남의 말을 잘 들어줄 수 있는 아 량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부터 겁을 집어먹지만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의 앞에서 마 음놓고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놓았다. 그만큼 그는 자진해서 상대방의 말에 동의하며 귀담 아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선량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그것은 자기가 남보 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그러한 특수한 호의인 것이다. 그 러나 막상 논쟁이 일어나면, 상대편에겐 거의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준엄하면서도 정열적인 변증법으로 상대방을 물리치고 마는 것이었다. 다리아 부인은 러시아어로 말을 했다. 모국어에 통달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눈치 였으나, 프랑스식의 말투며 프랑스어가 자주 튀어나왔다. 그녀는 일부러 소박한 민족풍의 말 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격에 맞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루딘은 다리아 부인의 입에서 나오는 흔혈어를 들으면서도 그다지 불쾌한 느낌을 가지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도 그것을 불쾌하게 느낄 수 있을만한 귀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다리아 부인은 이야기에 지쳐서 소파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루딘 쪽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이젠 저도 알겠습니다" 하고 루딘이 느릿느릿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여름마다 이 시골 로 오시는 거군요. 당신은 휴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시 생활에 시달리고 난 후 전원의 정 적은 당신의 심신을 씻어주고 굳건하게 해줄테니까요. 당신은 반드시 자연미에 공명하실 거 라고 저는 믿습니다만……‥" 다리아 부인은 눈으로 루딘을 바라보았다. "자연이라구요…… 예, 예 …… 그야 물론 무척 좋아하죠. 그런데 어때요, 드미트리 니콜 라이치. 아무리 시골이라도 친구가 없어서는 안 되잖겠어요. 그런데 여긴 친구라곤 아무도 없단 말이에요. 여기선 피가소프가 그래도 제일 똑똑한 사람이니까요." "어젯밤의 성난 노 인 말씀인가요?" 하고 루딘이 물었다. "예, 그 사람이에요. 그러나 시골에선 그런 사람이라도 쓸모가 있어요. 가끔 사람을 웃겨 주니까요. " "그 사람은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하고 루딘은 말을 받았다. "그저 길을 잘못 들었을 뿐 이죠. 마님, 당신은 동의해 주실지 어떨지 모르지만 대체로 부정 속에는, 그것도 완전 무결 한 부정 속에는 결코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부정해 버리면 곧잘 똑똑하다는 평판을 받게 마련이죠. 흔히들 그런 얕은 수를 쓰고 있습니다. 마음씨 좋은 사람들은 곧 그 수에 넘어가서 부정당하는 사람보다는 부정하는 사람이 훌륭하다고 결정해 버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번번이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첫째로 무엇이든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것은 없는 법이고, 둘째로 그 비난이 아무리 조리가 서 있다 하더라도 역시 본인에게는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부정만 일삼는 두뇌는 빈약해져서 시들어버리 고 맙니다. 자기 만족에만 도취되고 있는 사이에 인생 관조의 진실한 향락을 잃고 마는 것 입니다. 생명 -생명의 본질이 천박하고 성급한 관찰로 미끌어 떨어져서 결국엔 욕설을 하거 나 쌈을 웃기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상례지요. 따라서 비난하거나 욕설할 수 있는 권 리를 가진것은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인간에 한해서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 "저런, 피가 소프가 엉망이 되는군요" 하고 다리아 부인이 말했다. "정말 당신은 인물 비평의 대가로군 요! 그러나 피가소프씨는 당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그분은 자기 자신밖에 사 랑하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을 욕하는 것은 남을 욕하기 위한 권리를 얻기 위해서지요" 하고 루딘이 말을 받았다. 다리아 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병에 걸린 사람은 자기 병을…… 뭐라고 하더라‥‥ 자기 병을 남에게도 옮겨주고 싶어하는 법이라고 하던가요? 그건 그렇고 남작에 대해선 어 떻게 생각하세요?" "남작 말씀입니까? 좋은 분이죠. 마음씨 착하고 견문이 넓고…… 그러나 그분에겐 그 어 떤 뚜렷한 성격이란 것이 없어요…… 그래서 그분은 일생을 학자도 아니고 사교인도 아닌 딜레탕트로 끝내게 될 겁니다. 더욱 솔직히 말한다면 무로 끝날 거란 말입니다 …… 애석한 일이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바고 다리아 부인이 대답했다. "그분의 논문을 읽었습니다만 …… Enuenous …… cola …… a …… assez peu de fond(우리들끼리 말이지만……그다지 심각하진 않더군요)." 잠시 침묵을 지키고 나서 "그 밖에 이곳에는 또 어떤 분들이 계십니까?" 하고 루딘이 물었다. 다리아 부인은 새끼손가락으로 담뱃재를 떨었다. "예, 그 밖엔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니예요. 어젯밤 만나본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는 그저 그렇고, 그 남동생은 몹시 좋은 사람이에요. 그야말로 정직한 분이죠. 가린 공작은 이미 알고 계시죠. 그저 그 정도예요. 그 밖에도 이웃에 두서너 사람 있긴 있습니다만 전혀 말 상대가 못 됩니다. 지독히 콧대가 높 아 거만을 부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수줍어서 얼굴을 들지도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례한 행동을 하는 등 이런 사람들뿐이니까요. 보시는 바와 같이 이웃 의 부인들과는 교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 한 사람 더 있군요. 평판에 의하면 무척 많은 교육을 받아서 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고 하지만, 굉장히 괴벽한 사람으로 공상 가예요. 알렉산드라가 잘 알고 있는데, 좀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봐요……저, 드미트리 니콜 라이치. 당신 알렉산드라와 한번 교제해 보세요. 정말 귀여운 여자예요. 그저 좀더 어른으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만, 그래요, 좀더 어른으로 만들어야 할 거예요!" "정말 인상이 좋은 분이더군요" 하고 루딘이 말했다. "어린애와 다름없어요, 드미트리 니콜라이치. 정말 갓난아이예요. 한 번 결혼하긴 했으나, 조금도 변한 데가 없어요. 만일 내가 남자라면 그런 여자에게 반하고 말 거예요. " "그 정 돈가요?" "정말이에요, 그런 부인은 적어도 신선하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신선하다는 것은 흉내를 낸다고 해서 되는 계 아니니까요." "그러시다면 다른 것은 모두 흉내낼 수 있단 말씀인가요?" 루딘은 이렇게 묻고는 웃었 다. 그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웃음이었다. 그가 웃을 때에는 눈이 가늘어지고 코에 주름살이 모여서, 노인 같은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알렉산드라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그 괴벽한 사람은 누구지요?"하고 그가 물 었다.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 레디네프라고 하는 이 지방 지주예요." 루딘은 깜짝 놀라며 머리를 쳐들었다. "레디네프라고요.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 그는 이렇게 물었다. "아니 그 사람이 이 근처에 살고 있단 말씀인가요?" "그래요. 그 사람을 아십니까?" 루딘은 잠시 말이 없더니, "그전엔 아는 사이였지요…… 오래 전의 일입니다. 그 사람은 부자였다고 기억하는데요?" 하고 한 손으로 소파에 달린 술을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덧붙였 다. "예, 부자래요. 그런데도 그는 허술한 옷을 입고, 마치 뉘집 영지 관리인처럼 경주용 마 차 같은 걸 몰고 다닌답니다. 머리가 좋다는 소문이 돌아서 한번 집으로 초대하려고 생각하 는 중입니다. 또한 그분과 의논할 일도 있고,……당신은 모르실지 모르지만 이래봬도 난 직 접 영지를 관리하고 있답니다. 루딘은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요, 내가 직접 관리하고 있죠." 다리아 부인이 말을 이었다. "나는 바보 같은 외국식 관리 방법을 적용하지 않고 순전히 우리 러시아식으로 영지를 관리하고 있습니다만, 그럭저 럭 잘돼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한 손으로 원을 그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언제나 이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고 루딘이 공손하게 말했다. "여성에게 실무 적인 머리가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은 큰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말이죠. " 다리아 부인은 즐거운 듯 미소 지었다. "당신은 무척 관대하시군요." 그는 말했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더라, 우린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었죠? 아 그렇지! 레디네프씨에 대한 이야기였군 요. 영지의 경계선 문제로 그분과 의논할 일이 있어요. 벌써 여러 번 들러달라고 부탁을 해 서 오늘이라도 오지 않을까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워낙 괴벽한 사람이 돼서 오지 않을지 도 모르죠!" 그때 문앞의 커튼이 조용히 들리더니 집사가 들어왔다. 백발이 거진 다 빠진 키가 큰 사 내였는데, 검정 연미복에 하얀 조끼를 입고 횐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다리아 부인은 이렇게 묻고 나서, 루딘 쪽으로 약간 몸을 돌리더니 나직 한 소리로 덧붙였다. "N'est ce pas comme il ressemble Canning(어때요, 카닝을 닮았죠) ?"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 레디네프씨가 오셨습니다. " 집사가 보고했다. "들어오시라고 할 까요?" "아니, 저런!" 하고 다리아 부인이 외쳤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들여보내세 요!" 집사가 나갔다. "그 괴짜가 드디어 나타났군요. 그것도 하필이면 이렇게 기회가 나쁠 때를 골라서. 우리 들의 귀중한 이야기를 끊게 하니 말예요." 루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다리아 부인은 그를 만류했다. "어디 가세요? 당신이 계셔도 우리 이야기엔 상관이 없어요. 그리고 저 사람도 피가소프 씨처럼 정의를 내려주세요. 당신의 말을 들으면, Vous graves comme avec un burin(마치 끌로 조각하듯 선명해집니다). 그대로 앉아 계세요. " 루딘은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었으나 잠시 생각하고 나서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미하일 로 미하일르이치-독자들은 이미 그를 알고 있을 것이다-가 서재로 들어왔다. 여느 때와 다 름없이 회색 외투를 입고 햇볕에 탄 손에는 역시 낡은 모자를 들고 있었다. 그는 침착한 태 도로 다리아 부인에게 인사를 하고 탁자로 다가갔다. "드디어 와주셨군요, 레디네프!" 하고 다리아 부인이 입을 열었다. "어서 앉으세요. 지금 얘기를 들으니 두 분이 서로 아시는 사이더군요." 루딘을 가리키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레디네프는 흘끗 루딘을 바라보고 어떤 뜻에서인지 야룻한 미소를 지었다. "루딘씨와는 아는 사이지요." 그는 살짝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린 같은 대학에 있었어요." 루딘은 나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내리깔았다. 다리아 부인은 약간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레디네프에게 자리 를 권했다. 그는 자리에 앉았다. "저를 만나보시겠다고 하셨다기에" 하고 레디네프가 말하기 시작했다. "경계선 때문이신 가요?" "예, 경계선 때문이긴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우린 서로 가 까운 이웃이라 친척과 다름없이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예, 감사합니다" 하고 레디 네프가 대답했다. "그런데 경계선 문제라면 이미 댁의 관리인과 완전히 합의를 보았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제안에 모두 동의 했으니까요. " "그건 나도 알고 있습니다. " "다만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당신을 직접 만나 뵌 다음에나 서류에 서명을 할 수 있다 더군요. " "예, 그건 우리집의 규칙이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요, 댁의 농사꾼들은 모 두 소작농이라더군요. " "예, 말씀대롭니다. " "그런데도 직접 경계선까지 근심하시나요? 감탄할 만한 일이군요." "자, 이렇게 당신을 만나 뵈러 왔으니 ……‥ 하고 그는 재촉하는 듯이 말했다. 다리아 부인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우리집에 오셨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 우리집에 오시기가 무척 싫으셨던 모양이군요. " "저는 아무 데도 다니지 않는 성격이 돼서" 하고 레디네프가 냉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무 데도 다니시지 않는다고요? 그래도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댁엔 자주 가시잖아요?" "그분의 동생과는 옛날부터 친구니까요." "아, 동생과요! 아무튼 전 아무에게도 강요하는 짓은 하지 않아요…… 그러나 실례지만,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 제가 나이를 더 많이 먹었으니까 잔소리 좀 해도 괜찮겠죠? 당신은 도대체 무엇이 좋아서 그렇게 우울한 생활을 하시는 거예요? 또한 우리집이 그렇게도 마음 에 들지 않으시나요? 저라는 인간이 싫어서 그러시나요?" "다리아 미하일로브나, 저는 부 인을 잘 모르기 때문에 좋으니 싫으니 말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댁의 저택은 훌륭합 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저는 구속받는 생활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겠죠. 우선 제게는 입을 만한 연미복도 없으며 장갑도 없는 형편이지까요. 게다가 당신들의 그룹에도 속해 있지 않으니까요." "출신으로 보나 교육으로 보나 당신은 우리 그룹에 속해 있는 거예요,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 Vous etes des notres. (당신은 우리 그룹이에요) . " "출 신이나 교양 같은 말은 그만둡시다, 다리아 미하일로브나!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 라……‥" "인간은 인간과 함께 살아야 해요, 미하일로 미하일르키치! 디오게네스처럼 통 속에 들어 박혀 살면 뭐하자는 거예요?" "우선 더오게네스는 통 속의 생활이 무척 좋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내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니, 그건 무슨 뜻에서 하는 말씀인가요?" 다리아 부인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말이 아니예요! 당신이 교제하시는 사람들 속에 내가 한몫 끼이지 못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할 뿐이라는 거죠. " "레디네프는," 루딘이 끼여들었다. "자유를 사랑 한다는 극히 찬양할 만한 감정을 너무 과장하고 있는 것 같군요. " 레디네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루딘을 한 번 훑어보았을 뿐이었다. 잠시 동안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그럼," 레디네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우리들의 용무는 끝났으니 댁의 관리인 에게 서류를 보내달라고 부탁해도 좋겠죠?" "그렇게 하세요……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당신은 너무 무뚝뚝해서…… 거절하고 싶 은 생각까지 드는군요. " "하지만 이번의 경계선 문제는 저보다 댁이 더 유리하게 됐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 다리아 부인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당신은 우리집에서 조반을 드시는 것까지 싫으신 가 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저는 조반이란 걸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집에도 빨리 가봐야겠고 요. " 다리아 부인이 일어섰다. "그러시다면 붙잡지 않겠습니다. "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며 말 했다. "붙잡는 것이 오히려 실례가 될 테니까요." 레디네프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세요, 레디네프씨! 근심을 끼쳐드려서 미안해요." "천만에요, 그런 말씀은 그 만두십시오." 레디네프는 이렇게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어때요?" 다리아 부인이 루딘에게 말했다. "그전부터 괴벽한 사람이란 말은 들어왔습니 다만, 저 정도라면 도저히 당해 낼 도리가 없군요!" "저 사람도 피가소프와 같은 병에 걸려 있습니다" 하고 루딘이 말문을 열었다. "다시 말 해서 남보다 뛰어난 인간이 되어보겠다는 병이지요. 저쪽은 메피스토펠레스를 가장하고, 이 쪽은 노골주의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만심과 이기주의가 넘쳐 흐르고 있고 진 실과 애정이란 거의 없습니다. 요컨대 이것은 모두 일종의 타산에서 나온 것이어서 자칫하 면 '저렇게 재능이 있는 사람이 그냥 썩어버린다는 건 아까운 일이야!' 하고 생각하는 사람 이 없지도 않을 거란 말씀입니다. 즉 이런 생각에서 그들은 무관심과 나태의 가면을 쓰고 있는데, 그러나 자세히 바라보면 재능이란 재 자도 없으니 탈이거든요." "Et de deux(벌써 두 사람째예요)" 하고 다리아 부인이 말했다. "당신은 굉장한 감정사로군요. 당신 눈에는 당해 낼 사람이 없겠어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루딘이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말을 이었다. "사실 말씀 이지 나는 레디네프의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을 겁니다. 나는 그를 친구로서 사랑하고 있었 으니까요…… 그러나 그 후 여러 가지 오해 때문에 그만 ……‥" "서로 다투기라도 하셨 나?" "아니요, 그저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마 영원히 헤어졌을는지도 모르죠." "어쩐지 나 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분이 계실 동안 당신은 줄곧 기분이 언짢아 보이더군요…… 어쨌든 오늘 아침은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에 아주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 그럼 오늘 아침은 이 정도로 해둡시다. 식사 때까지 해방시켜 드리겠어요. 그리고 나도 이 제부터 일을 해야 하니까요. 티서가 무척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당신도 보셨죠? 그 콘스 탄친이란 사람이 내 비서예요. 말씀드려 두지만 무척 친절하고 마음씨 좋은 청년으로 당신 에겐 완전히 탄복하고 있답니다. 그럼 조금 후에 다시 만나요, 드미트리 니콜라이치! 난 마 음으로부터 남작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당신같이 훌륭한 분을 소개시켜 주었으니 말예요!" 이렇게 말하고 다리아 부인은 루딘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딘은 그 손에 키스를 한 다음 홀을 거쳐 테라스로 나갔다. 테라스에서 그는 나타리아를 만났다. 5 다리아 부인의 딸 나타리아 알렉세브나는 첫눈에 마음에 들 만한 처녀는 아니었다. 그 녀는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도 않았고, 훌쭉 여위었고 가무잡잡했으며 등이 약간 굽어 있었 다. 그러나 얼굴 윤곽은 열 일곱 살의 처녀로선 좀 큰 편이긴 해도 아름답고 단정했다. 그중 에서도 특히 아름다운 것은 가운데서 꺾어진 듯한 가느다란 눈썹 위에 펼쳐지고 있는 깨끗 하고 매끄러운 이마였다. 그녀는 말이 적은 대신에 주의 깊게 남의 말을 들었으며 사물을 볼 때에도 뚫어질 듯이 바라보는 습관이 있어서 마치 무엇이든지 똑똑히 이해하고야 말겠다 는 욕망에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곧잘 옴짝달싹 않고 앉아서 두손을 늘어뜨린 채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는 여러 가지 상념의 내면적인 움직임이 떠오르 는 것이었다…… 보일 듯 말 듯한 가느다란 미소가 살짝 입가를 스치는가 마면, 크고 까만 눈동자가 살며시 위로 들려졌다……‥Qu'avez-vous(왜 그러시죠)7" 하고, 마드모아젤 봉쿠 르는 젊은 처녀가 생각에 잠겨서 멍청한 표정을 짓는 것은 꼴불견이라고 핀잔을 주곤 했다. 그러나 나타리아는 멍청하기는커녕 공부도 잘하고 독서나 일에도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 녀는 남달리 깊고 강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을 마음속 깊이 숨기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다지 우는 편은 아니었으나, 요즈음에 와서는 한숨짓는 것조차 드물었고 무슨 슬 픈 일이라도 있으면 약간 얼굴이 파리해질 뿐이었다. 어머니는 정숙하고 착한 딸이라고 생 각하고, 농담 삼아 자기 딸을 "ma petite et honnete fille(내 귀엽고 정직한 딸)"이라고 말하 고 있었으나, 지능 면에서는 그다지 높이 평가하고 있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 집 나타리아는 냉정해서,"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를 닮지 는 않았지만……그것이 오히려 낫겠지, 저 앤 행복해질 거야." 그러나 이것은 다리아 부인의 착오였다. 하긴 자기 딸을 잘 이해하는 어머니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나타리아는 어머니 다리아 미하일로브나를 사랑하고는 있었으나 완전히 신임하고 있지는 않았다. "너는 내게 무엇이든 숨겨서는 안 된다. " 언젠가 다리아 부인은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 성미로 봐선 마음을 틸어놓고 싶지 않을 거야. 혼자 마음에 간직해 두는 성격이 돼서 ……‥" 나타리아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간직해 두는 것이 뭐가 나빠요?' 하고 생각했다. 루딘이 테라스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에는, 그녀는 모자를 쓰고 정원에 나갈 생각으로 마 드모아젤 봉크루와 함께 방으로 들어가는 참이었다. 아침 공부가 끝난 것이었다. 이제 나타 리아는 소녀 취급을 받지 않게 되었으므로 봉크루도 이미 오래 전부터 신화나 지리 수업은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나타리아는 매일 아침 그녀 앞에서 역사책이나 여행기, 그 밖의 교양 서적들을 읽어야했다. 그 책을 선택한 것은 어머니인 다리아 부인이었는데, 그녀는 무 슨 독특한 방식을 견지하고 있는 듯했으나 실은 페테르부르크의 프랑스 서적상이 보내주는 책을 그대로 딸에게 넘겨주는 데 지나지 않았다. 물론 뒤마 피스와 콤프의 소설만은 예외였 다. 이런 것은 다리아 부인이 직접 읽고 있었다. 봉크루는 나타리아가 역사책을 읽을 때면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리고는 안경 너머로 노려보았다. 이 프랑스인 노처녀의 말에 의하면, 역사라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은 어찌 된 셈인지 영웅 호걸 중에서도 캄뷔세스(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왕) 한 사람밖에 몰랐고 근 대에서는 루이 14세와 나폴레옹을 알고 있을 뿐이었는데, 게다가 나폴레옹을 죽도록 싫어했 다. 그러나 나타리아는 봉크루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책을 읽고 있었으며 푸슈킨의 시는 모 조리 암송하고 있었다……‥. 루딘을 만나자 나타리아는 살며시 낮을 붉혔다. "산보하러 가시는 길입니까?" 하고 루딘이 물었다. "예, 정원에 나가요." "함께 가도 괜찮겠습니까?" 나타리아는 봉크루를 카라보았다. "Mais certainment monsieur, avec plaisir(그야 물론 좋고말고요)" 하고 노처녀는 황급히 대답했다. 루딘은 모자를 들고 그들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나타리아는 루딘과 좁다란 길을 나란히 걸어가는 것이 처음에는 어쩐지 어색했지만,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 점점 마음이 가벼워져 갔다. 루딘은 나타리아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 시골 생찰이 마음에 드느냐 는 등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느 정도 겁에 질린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래도 흔히 볼 수 있 는 그러한 수줍음이나 당황한 빛은 보이지 않았고 솔직히 대답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방망이질을 하듯 울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시골 생활이 답답하지 않습니까? 루딘은 곁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 다. "답답할 리가 있겠어요? 전 여기 온 걸 무척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요. 시골 생활은 아주 행복스러운 걸요. " "행복하시다구요……그것 참 멋있는 말이군요. 하긴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젊으니 까요." 루딘의 마지막 이 말은 부러워하는 것도, 애처로워하는 것도 아닌, 어쩐지 이상야룻한 어 조를 띠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청춘이죠!" 하고 그는 덧붙였다. "과학의 목적이란 청춘에겐 그냥 주어진 것을 의식적으로 얻으려는 데 불과하니까요. " 나타리아는 루딘의 얼굴을 빤 히 쳐다보았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 아침 한참 동안 당신의 어머님과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하고 루딘은 말을 이었다. "어머님은 훌륭하신 분이더군요. 시인들이 어머님과의 친교를 자랑으로 삼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느껴집니다. 그런데 당신도 시를 좋아하십니까?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분은 나를 시험하고 있구나.' 나타리아는 이렇게 생각하고, "예, 좋아해요. " 하고 대 답했다. "시는 신의 말입니다. 나도 시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시는 운문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 니지요. 시는 도처에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넘치고 있어요…… 저 나무들을 보십시 오. 저 하늘을 보십시오. 어디서나 아름다움과 생명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미와 생명이 있는 옷, 거기에는 또 시가 있게 마련이지요. " "이 벤치에 앉읍시다" 하고 그는 말했다. "아, 좋군요. 그런데 난 어쩐지 이런 생각이 듭 니다. 당신들만 내게 익숙해진다면(여기서 그는 미소를 띄우고 나타리아의 얼굴을 바라보았 다. )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분은 나 를 어린애로 생각하나봐.' 나타리아는 다시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뭐라고 대 답해야 좋을지 몰랐으므로 시골에 오래 묵을 작정이냐고 물었다. "여름과 가을 그리고 사정에 따라서는 겨울까지 묵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보다시피 매우 가난한 사람입니다. 사업이란 사업은 모두 엉망이 되고, 게다가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것도 싫증이 났으니 이젠 좀 쉴 때도 됐죠." 나타리아는 놀란 표정으로 "정말 쉴 때가 됐다고 생각하시나요?" 하고 머뭇머뭇하며 물 었다. 루딘은 나타리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건 무슨 뜻이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하고 그녀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휴식을 취해도 괜찮겠 습니다만, 당신은……당신은 일하지 않으면 안돼요. 당신 같은 분이 일하지 않고 누가 일하 겠어요……?" "그렇게 까지 생각해 주시니 황송합니다." 루딘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유익한 인물이 된다!" 그는 다시 되풀이 했다. "가령 내가 어떻게 하면 유익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고 또한 자신의 역량을 믿고 있다 할지라도 도대체 어디 서 성실한 마음을 가진 동조자를 구할수 있겠습니까?" 루딘은 이렇게 말하고는 가망이 없다는 듯 한 손을 흔들고 슬픔 어린 표정으로 머리를 숙였으므로, 나타리아는 어젯밤 환희에 불타고 희망에 넘친 웅변을 토로한 장본인이 바로 이 사람이었던가 하고 스스로 질문을 했을 정도였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갑자기 그는 사자의 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흔들고는 이렇게 덧 붙였다. "그런 건 공연한 수작입니다.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감사합 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타리아는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감사해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 다.) 당신의 말 한마디가 내게 자신의 의무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내가 나갈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게 재능이 있다면 그걸 숨겨두 어선 안 됩니다. 자신의 역량을 공리공론에, 공허하고 무익한 잡담에만 낭비해선 안 됩니 다.……." 그의 말은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그는 박약한 의지와 나태는 수치스러운 현상이며, 누구든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선명하게 열과 신념을 기울여서 논했다. 그는 자기자신에게 비난을 퍼붓고, 하고싶은일을 착수하기도 전에 이러쿵저러쿵 논의하는 것은 마치 무르익어 가는 과실을 송곳으로 찌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해한 것이며, 그것은 다만 힘과 생명을 낭비하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고상한 사상으로 남의 공감을 얻지 못할만한 것은 없으며, 남을 이해시키지 못한 채 끝나고 마는 인간은 자기 자신이 무 엇을 구하고 있는지를 모르거나 아니면 남에게 이해를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단 언했다. 그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계속한 끝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나타리아에게 감사를 하고는, 덥석 그녀의 손을 움켜잡으며 "당신은 아름답고 고상한 분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무례한 행동은 봉크루를 깜짝 놀라게 했다. 러시아에 산 지 벌써 4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직까지 러시아어를 잘 몰랐기 때문에, 다만 루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의 아름다움과 유창함에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루딘이 음악가나 배우 비슷하게 보였으므로, 그런 종류의 인간에게 예절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옷을 매만지고는, 이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 었을 뿐더러 볼린소프(그녀는 홀르인체프를 이렇게 부르고 있었다)씨가 아침식사때 오신다 고 약속했다고 하며 나타리아를 재촉했다. "저기 마침 오시는군요!" 저택으로 통한 가로수 길을 바라보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볼르인체프가 가까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주저하는 듯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더니, 멀찍이 에서 이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병적인 표정을 띠면서 나타리아에게 말했다. "아아! 산보중이시군요?" "예" 하고 나타리아가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러세요!" 볼르인 체프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같이 가시죠!" 이윽고 일행은 집으로 향했다. "누님은 어떠신가요7" 루딘은 몹시 다정한 어조로 볼르인체프에게 물었다. 그는 어젯밤 에도 볼르인체프에게는 무척 친절했었다. "예, 감사합니다. 덕분에 무사합니다. 오늘도 여기 오실지 모르겠어요. 당신들은 서로 무 슨 의논을 하고 계시는 것 같던데, 내가 이리로 걸어을 때 말이오. " "예, 나타리아 알렉 세브나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요. 그중에서도 이분께서 하신 말 한마디가 무척 나를 감동시켰기 때문에……‥" 볼르인체프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모두들 깊은 침묵에 잠긴 채 다리 아 부인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저녁식사 전에 다시 '집회'가 열렸으나 피가소프는 나타나지 않았다. 루딘도 마음이 내키 지 않아서 판달레프스키에서 연거푸 베토벤의 곡을 치게 하고 있었다. 볼르인체프는 묵묵히 마루만 바라보고 있었고 나타리아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으며 멍청히 생각에 잠기기도 하 고 혹은 수를 놓기도 했다. 바시 스토프는 루딘에게서 한시도 눈을 메지 않으며 무슨 명언 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조바심을 치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세 시간 가량이 싱겁게 홀러가고 말았다. 알렉산드리아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볼르인체프는 식탁에서 일어나 즉 시 마차를 준비시키고는 아무에게도 인사를 하지 않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볼르인체프는 가슴은 무거웠다. 그는 오래 전부터 나타리아를 사랑해 왔으며 지금까지 구혼할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나타리아도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 으나 그녀의 마음은 잔잔히 가라앉아 있었다. 볼르인체프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나타리아의 가슴에 그 이상의 달콤한 감정을 불어넣기를 원하지 않았고, 다만 그녀 쪽에서 완전히 자기에게 익숙해지고 가까워질 때만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 을까? 요 이틀 사이에 그는 어떠한 변화를 느꼈던 것일까? 나타리아가 그를 대하는 태도는 그전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는 데……그의 마음속에 '나는 지금까지 나타리아의 기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나의 상상으로 먼 존재인지도 모른다'는 의흑이 싹트기 시작 한 것일까?…… 아니면 질투심이 눈을 뜬 것일까? 그렇지도 않으면 막연하게 어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것일까? ……그러나 그는 아무리 자기 자신을 설득시켜 보아도 괴로운 번 민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가 누님 방에 들어서자, 그녀의 옆에는 레디네프가 와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니?' 하고 알렉산드리아가 물었다. "그저 따분해서 !" "루딘씨도 계시든?" "계십니다. " 볼르인체프는 모자를 벗어 던지고 자리에 앉았다. 알렉산드라는 활기가 넘치는 얼굴로 동생을 바라보며, "저 세료잔(세르게이의 애칭), 루딘씨가 뛰어나게 머리가 좋은 웅변가라는 걸(레디네프를 가리키며)믿어주지 않는구나. 자, 부탁이니 네가 좀 납득을 시켜주렴." 볼르 인체프는 무슨 말인가를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난 다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하고 레디네프가 입을 열었다. "루딘씨가 현 명한 웅변가라는 건 나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그 사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뿐입니다. " "아니, 자넨 그분을 만나 봤나?" 볼르인체프가 물었다. "오늘 아침 만나 봤다네. 다리아 미하일로브나댁에서. 그 친구, 여주인댁에서 나리 행세 를 하고 있더군, 하지만 두고 봐. 그 집에서 쫓겨날 날도 머잖을테니. 그 부인과 혜어지지 못하는 건 판달레프스키 하나밖에 없다니까. 좌우간 지금은 그 자가 임금처럼 군림하고 있 는 건 사실이야. 글쎄 만나 보니 어땠는지 아나! 그 친구가 앉아 있는 앞에서 여주인은 나 를 가리키며 '자, 좀 보세요. 이 고장엔 이런 괴짜들이 살고 있답니다' 하는 눈치란 말이야. 내가 사육장의 말이 아닌 이상 누구에게 선을 보이러 끌려 나갈 순 없지 않냐 말이야. 그래 서 이내 그 자리를 빠져나오고 말았지." "그런데 무슨 일로 거기 갔었나?" "경계선 측정 때문이야. 그러나 그건 구실에 지나지 않고 실은 마님께서 내 상통을 한 번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지. 귀부인들이란 뻔하지 뭐야!" "당신은 그분이 훌륭하니까 공연 히 배가 아파서 그러는 거예요. 어때요, 맞죠!" 하고 알렉산드라가 열띤 어조로 말했다. "당 신은 그걸 참지 못하는 거예요. 하지만 나는 확실히 이렇게 생각해요. 그분은 머리만 좋은 것이 아니라 필경 마음도 훌륭할 거라고요. 당신, 그분의 눈을 한 번 바라보세요. 그분이 저…… ." "'고결한 긍지를 말할 때……‥ 말이죠?" 하고 레디네프가 받았다. "실컷 약을 올리세요. 난 울고 말 테예요. 오늘 내가 다리아 부인댁에 가지않고 당신 상 대를 하게 된 걸 마음속으로부터 후회하고 있어요. 당신에겐 그럴 만한 자격이 없어요. 당신 에겐 자격이 없어요. 더 이상 나를 놀리지 마세요." 하고 그녀는 원망하는 어조로 덧붙였다. "그보단 그분의 청년 시절에 관한 이야기나 들려주세요. " "루딘의 청년 시절 말입니까?" "예, 그래요. 당신은 그분과 옛친구가 돼서 잘 안다고 하잖았어요?" 레디네프는 자리에 서 일어나 방안을 한바퀴 돌았다. "그렇습니다. " 그는 말하기 시작했다. "잘 알고 있죠. 그 사람의 청년 시절을 얘기해 달라는 거죠? 알겠습니다. 그 친구는 T현의 가난한 지주의 아 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루딘은 편모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지요. 그의 어머니는 말할 수 없이 선량한 여자로 오직 아들 하나만을 믿고 살았습니다. 다시 말 해서 자기는 귀리 가루만 먹으면서도 나머지 돈을 모조리 아들을 위해 바쳤습니다. 루딘은 모스크바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어느 아저씨한테 학비를 보조받고 있었으나, 그 후 성장하여 사람꼴이 된 다음부터는 어느 부유한 공작을 구슬려서…… 아, 실례했습니다. 이런 표현은 삼가는 게 좋겠군요…… 어느 공작과 친해져서 그 사람이 돈을 대줬지요. 그 후 그는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에서 나는 그 친구와 알게 되었고, 우린 무척 친하게 지 냈습니다. 당시의 우리 두 사람의 생활에 대해서는 앞으로 기회를 봐서 이야기 하도록 하죠. 지금은 안 됩니다. 그 후 그 친구는 외국으로 떠났는데……‥ 레디네프는 계속해서 방안 을 오락가락했고, 알렉산드라는 눈으로 그 뒤를 좇고 있었다. "외국에 간 다음," 레디네프는 말을 이었다. "루딘은 거의 편지라고는 하지도 않았고, 단 한 번 고향에 돌아왔을 뿐인데 그것도 열흘 가량 묵었을 뿐입니다……결국 늙으신 어머니는 그가 없을 때 남의 팔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만,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아들의 사진에서 눈을 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T현에 있을 때 자주 그의 노모를 찾아 뵙곤 했죠. 정말 마음씨가 곱고 손님을 좋아하는 부인이어서 내가 가면 언제나 버찌 잼을 내주시곤 했답니 다. 루딘에 대한 자랑은 이루 형용할 수도 없었지요. 페초린(레르몬토프 작 (현대의영웅)의 주인공)파에 속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스스로 사랑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언제는 사랑하는 법이다'고 말할 것이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요. '어머니란 슬하에 없는 자식을 더욱 사 랑하게 마련이다'고요. 그 후 나는 외국에서 루딘을 만났습니다. 거기서는 어떤 부인과 사이 좋게 지내고 있더군요. 역시 러시아 여잔데, '푸른 양말' 족속의 젊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 은 부인이었습니다. 하긴 '푸른 양말'이라면 대개가 그런 여자지만. 루딘은 왜 오랫동안 그 부인과 붙어 다녔으나 결국엔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 실례했습니다. 사실은 여자 쪽에 서 루딘을 버린 것입너다. 그리고 나도 그때 그를 버리게 된 거죠. 자, 이것이 전부입니다. " 레디네프는 입을 다물고 한 손으로 이마를 쓰다듬고는 피곤간 듯 소파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 알렉산드라가 말했다. "당신은 짓궂은 사람이군요. 확실 히 피가소프 못지 않을 거예요. 당신의 말이 조금도 허구가 아닌 진실이라는 것은 나도 믿 겠어요. 그러나 어쪘든 무슨 원한이 있길래 그것을 모조리 늘어놓는 거예요! 그 가엾은 노 모가 어떻다느니, 자식에 대한 애정이니, 남의 팔에서 숨을 거두었다느니 그리고 어떤 부인 과 관계……도대체 그런 말은 무엇 때문에 하시는 거예요? ……당신도 아시잖아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의 생활이라도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아무것도 덧붙이지 않는다 하더라도-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하게 할 거예요! 그것도 역시 일종의 중상과 다를 것이 없어 요!" 레디네프는 일어나서 다시 방안을 돌기 시작했다. "나는 결코 당신을 겁줄 생각에서 이 야기를 한 것이 아니예요,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그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중상 가가 아니니까요. 하여튼," 그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의 말에도 약간 의 진리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나는 루딘을 중상하진 않았지만, 그러나 누가 알겠어요? 흑 시 그 이후 사람이 달라졌는지도 모르니까요. 그렇다면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공평하지 않 았을는지도 모르죠." "거 보세요! ……그러니 그분과의 친교를 다시 부활시켜 잘 관찰하신 다음 당신의 최종 적인 의견을 들려주시겠다고 제게 약속해 주세요." "좋습니다…… 그런데 자넨 왜 그렇게 잠자코만 있나, 세르게이 파블르이치!" 볼르인체 프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흠칫 몸을 떨고 머리를 들었다. "내가 무슨 할 말이 있 겠나? 그 사람을 모르는데. 게다가 오늘은 머리가 아파서……‥." "그러고 보니 어쩐지 안 색이 좋지 않은 것 같구나……‥ 하고 알렉산드라가 말했다. "어디 불편하니?" "그냥 머리가 아파서 그래요. " 볼르인체프는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알렉산드라와 레디네프는 그의 됫모습을 바라보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볼르인채 프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을 빤히 들여다 볼수 있었던 것이다. 6 두달 남짓한 세월이 흘렸다. 그동안 루딘은 거의 다리아 미하일로브나의 집에서 밖으로 나가지를 않았다. 한편 다리아 부인도 루딘 없이는 못살 정도로 가까워졌다. 루딘을 붙잡고 자기의 신세 타령을 하거나 그의 의견을 듣는 것이 다리아 부인에게는 둘도 없는 욕구가 되 어버리고 말았다. 어느 날 루딘이 "주머니에 돈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떠나려고 하자, 다리 아 부인은 그에게 5백 루블의 돈을 주기까지 했다. 루딘은 그 밖에 볼르인체프에게서도 2백 루블 가량을 빌려쓰고 있었다. 피가소프의 방문은 그전보다 훨씬 뜸해졌다. 루딘의 존재에 압도당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압도당한 것은 비단 피가소프 한 사람만이 아니었 다. "나는 그 애송이 현인이 마음에 들지 않거든." 피가소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말의 표현이 부자연스럽고 마치 러시아 소설에 나오는 인물과 조금도 다름없는 얼굴로 '나는' 하 고 말을 시작하는가 하면, 잠시 흥분해 사로잡혔다가 다시 '나는 말입니다, 나는……‥ 하고 시작한단 말이야. 그리고 언제나 기다란 낱말만을 사용하고, 남이 재채기를 하면 그 녀석은 곧 어째서 기침을 하지 않고 재채기를 하게 뤘는가를 증명하려 든단 말이야……사람을 칭찬 하는 데도 마치 관등을 올려주기라도 하는 듯한 말투고…… 그러다가 자기 자신에게 마구 욕설을 퍼부을 때도 있어서 이젠 두번 다시 사람 앞에 얼굴을 내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웬걸! 독한 보드카라도 들이킨 사람처럼 도리어 기분이 더 좋아져 우쭐거린단 말이 야." 판달레프스키는 다소 루딘을 무서워하고 있는지, 조심스럽게 그의 기분을 맞추어주고 있 었다. 볼르인체프와 루딘의 관계는 이상야룻한 것이었다. 루딘은 그가 있건 없건 볼르인체프 를 기사라고 추켜세우며 칭찬하고 있었으나 볼르인체프는 그를 좋아할 수가 없었고, 루딘이 볼르인체프를 앞에 두고 그의 장점을 열거할 때면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나고 기분이 언짢아 지는 것이었다. '이 자는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 그의 마음속 은 적의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이었다. 볼르인체프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려고 애썼으 나 루딘과 나타리아의 사이를 질투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편 루딘 자신도 언제나 떠들썩하게 볼르인체프를 환영하고 그를 기사라 부르며 돈을 빌려쓰기까지 했으나, 그다지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고는 말할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이 친구처럼 서로 악수를 나누거나 얼 굴을 마주 보거나 할 때 과연 이들의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싹트고 있었을까, 아마 딱 잘라 말하기가 힘들 것이다. 바시스토프는 여전히 루딘을 숭배하면서 그의 말이라면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 고 있었으나, 루딘은 그에게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어느 날 루딘은 가정교사와 함 께 아침나절을 보내면서, 가장 중대한 세계적 문제며 과업에 대해서 말해 줌으로써 청년의 마음속에 생생한 환희를 불러일으켜 주었으나, 그 이후론 두 번 다시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 다…… 이것으로 미루어보건대, 그가 순수하고 헌신적인 인물을 찾고 있다는 것은 순전히 말뿐인 것 같았다. 한편 레디네프도 다리아 부인의 집에 드나들기 시작했으나, 루딘은 마침 그를 피하기라도 하는 듯 그와는 논의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레디네프는 여전히 그에 대 해서 냉랭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루딘에 대한 최종적인 의견을 말해 주지 않았으므로 알렉 산드라 파블로브나는 몹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루딘을 숭배하고 있을 뿐만 아 니라 레디네브도 신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리아 부인의 집안 사람은 모두 루딘의 의견을 따르고 있었다. 그의 희망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실현되었고, 또 그날그날의 일과는 루딘의 의사 여하에 따라 달라지곤 했 다. 어떤 놀음이라도 루딘 없이 계획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갑자기 생각해 내는 피크닉이나 모임 같은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마치 어른이 애들 장난에 끼는 것 처럼 다정해 보이면사도 다소 지루해하는 듯한 호의로 대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는 무슨 일에든지 참견했다. 다리아 부인을 상대로 영지 관리며 애들의 교육, 집안일, 그의 일반적인 용무들을 의논하기도 하고, 부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가 하면 사소한 일이라도 싫어하는 빛이 없이 여러 가지 개혁과 새로운 계획을 제의하기도 했다. 다리아 부인은 말로는 그의 의견에 감탄하면서도 그것은 그 자리에서 뿐이고 실지 운영면에서는 자기 지배인의 의견을 따르고 있었다. 지배인은 마음씨가 좋으면서도 교활한 데가 있는 중년 소러시아인으로 애꾸 눈이었다. "늙은 것은 기름이 많고 젊은 것은 맛이 덜하죠." 그는 애꾸눈을 끔벅거리고 부드 러운 미소를 띄우면서 곧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루딘이 다리아 부인 다음으로 누구보다도 자주, 오랫동안 이야기한 사람은 나타리아였다. 그는 남몰래 그녀에게 책을 빌려주기도 하고 자기 계획을 토로하기도 했으며 방금 쓰기 시 작한 논문이며 작품의 서두를 읽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나타리아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딘은 그녀의 이해력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 았고 그저 자기 말을 들어주기만 하면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그가 나타리아에게 접근하는 것은 다리아 부인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고 부인은 생각했다. '시골에 있으니까 그 애도 말상대가 필요 하겠지. 그 앤 소녀다운 면으로 그분을 즐겁게 해줄 수 있을 거야. 그다지 근심할 필은 없어. 저애도 다소 똑똑해질 거고……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서 모두 고쳐주면 되지……‥' 그러나 다리아 부인의 이런 생각은 들어맞지 않았다. 나타리아가 루딘과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소녀다 운 기분에서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열심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 의미를 이해하려 고 애쓰고 있었턴 것이다. 그녀는 자기 생각이며 의혹을 일일이 그의 판정에 맡기고 있었 으므로, 말하자면 루딘 은 그녀의 스숭인 동시에 지도자이기도 했다. 지금 현재로서는 그녀는 머리만 달아오르고 있는 데 불과하지만…… 젊은이란 언제까지나 머리만 달아오르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정원의 벤치에 앉아서 엷게 스며드는 물푸레나무 그늘을 받으면서, 루딘은 괴테의 (파우스 트)며 호프만 혹은 벳지나의 편지, 노발리스 등을 읽어주면서 가끔 낭독을 멈추고는 애매한 부분을 나타리아에게 설명해 주었다. 아따, 그때, 그가 애매한 부분을 자기에게 설명해 줄 때, 아아, 나타리아는 얼마나 감미로운 기분에 휩싸였던 것일까! 그녀는 대부분의 아가씨들 이 그렇듯이 독일어를 말하는 것은 서툴렀으나 알아듣는 데는 부자유를 느끼지 않았다. 한 편 루딘은 독일의 시, 독일의 낭만주의, 독일의 철학 세계에 흠뻑 젖어 있었으므로 마침내는 나타리아까지도 그 금단의 나라로 빠져들어가고 말았다. 미지의 아름다운 금단의 나라가 그 녀의 조심스러운 시선 앞에 서서히 펼쳐지기 시작하고, 루딘이 들고 있는 책으로부터는 신 기한 형상이며 새롭고 빛나는 사상들이 콸콸 흐르는 물줄기처럼 그녀의 마음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리고 위대한 감정과 숭고한 기쁨에 뒤혼들려진 마음속에는 성스러운 감격의 불 꽃이 조용히 점화되어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녀는 창가의 자수대에 앉아서 루딘에게 이렇게 물었다. "저, 드미트리 니콜라이치, 당신도 겨울엔 페테르부르크로 가시나요?" "모르겠습니다" 하고 루딘은 뒤적거리고 있던 책을 무릎 위에 놓고 대답했다. "여비가 마련되면 가겠습니다. " 그의 말에는 힘이 없었다. 아침부터 피곤해서 아무 일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신이 여비를 마련하지 못하리라곤 생각되지 않아요." "당신에겐 그렇게 생각될 테 죠!" 이렇게 말하고 루딘은 의미심장하게 옆을 바라보았다. 나타리아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저걸 보십시오." 루딘은 손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저 사과나무를 보세요. 저 나무는 열 매가 너무 많아 그 무게 때문에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저 나무야 말로 천재의 상징이군 요……‥." "저건 지주가 없어서 부러진 거예요." 하고 나타리아가 항의했다. "그건 나도 압니다,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그러나 인간의 경우 저런 지주를 얻는다는 것 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 "그렇지만 전 이렇게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의 동정만 얻는다면…… 아무래도…… 혼자 선……‥ 나타리아는 다소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럼 겨울 동안 시골에 서 무슨 일을 하시겠어요?" 그녀는 황급히 이렇게 덧붙였다. "무슨 일을 하겠냐구요? 그 기다란 논문을 완성하겠습니다-생활과 예술에 있어서의 비극 적 요소-바로 그끄저께 이야기한 그 논문 말입니다. 완성되면 당신께 보내드리죠." "출판 하시나요? "아니요. " "왜 출판하지 않는 거죠?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그런 노력을 하시는 거예요?" "뭐, 당 신을 위해서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 나타리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제겐 너무 과분해요, 드미트리 니콜라이치." "실례지만, 무슨 논문입니까?" 좀 떨어져 앉아 있던 바시끄토프가 정중한 어조로 이렇게 물었다. "생활과 예술에 있어서의 비극적 요소" 하고 루딘은 되풀이했다. "그렇군요, 바시스토프 씨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 근본적인 사상 처리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습 니다. 아직까지 사랑의 비극적인 의의를 나 자신이 뚜렷하게 느끼고 있지 못하니까요." 루 딘은 곧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봉크 루는 나팔소리를 들은 늙은 군마처럼 부르르 몸부림을 치고 귀를 솔깃했지만, 이윽고 점 점 익숙해지자 다만 입술을 오므리고 천천히 사이를 두고 코담배를 맡을 정도로 태연해졌 다. "제 생각으론" 하고 나타리아가 자신 없는 어조로 말했다. "사장에 있어서의 비극적 요소 라면 불행으로 끝난 사랑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루딘이 부정했다. "그건 오히려 사랑의 회극적인 면이라 할 수 있죠. 이 문제는 전혀 다른 각도로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좀더 깊이 파고들어가지 않으면 안 돼요……사랑!" 하고 루딘은 말을 이었다. "여기에는 온갖 비밀이 다 깃들여 있습 니다. 사랑이 어떻게 찾아오고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소멸하느냐 이것은 모두 수수께끼올시다. 때로는 대 낮처럼 밝은 환희에 찬 모습으로 별안간 나타날 때도 있거니와, 재 밑에 깔린 불덩이처렁 언제까지나 죽 지 않고 있다가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비로소 불길처럼 확 타오르는 것도 있습니 다. 그런가 하면 뱀처럼 슬금슬금 가슴 속으로 기어들어 올 경우도 있으며 또 잠자기 밖으 로 빠져나갈 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중대한 문제올시다. 도대체 요즈음 누가 사랑을 하겠습니까? 사랑에 빠지는 바보가 어디 있겠어요?" 이렇게 말하고 루딘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볼르인체프씨는 왜 오랫동안 보이니 않을까요? 그는 느닷없이 이렇게 물었 다. 나타리아는 흥당무처럼 빨개지며 자수대 쪽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모르겠어요. " 그녀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훌륭하고 고결한 사람이더군요!" 루딘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분이야말로 현 대 러시아 귀족의 전형이라 할 뛰어난 사람 중의 한 사람일 겁니다……‥." 봉크루는 프랑스인 특유의 조그만 눈으로 루딘을 곁눈질해 보았다. 루딘은 방안을 한바퀴 돌고 나서 "저,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하고 뒤꿈치로 날쌔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참나무를 아시죠? 참나무는 단단한 나무지만 새로운 잎이 움트기 시작할 때 비로소 낡은 잎이 땅으로 떨어 지는 겁니다. " "예, 저도 알고 있어요." 나타리아가 느릿느릿 대답했다. "마음속에 자리잡은 옛사랑의 경우도 이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옛날의 사랑 은 이미 시들어버렸는데도 여전히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새로운 사랑만이 그 낡은 사랑을 제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나타리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건 무슨 뜻일까?' 하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생 각했다. 루딘은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머리를 흔들고 어디론가 나가버렸다. 나타리아는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오랫동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침대 위에 앉 아서 루딘의 마지막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가 갑자기 두 손을 맞잡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엇이 슬퍼서 우는지 그것은 신만이 아는 일이었다. 그녀 자신도 왜 이렇게 갑자기 눈물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저 씻고 또 씻어도, 마치 오랫동안 괴었던 샘물에서 물이 흐르듯 걷잡을 수 없이 자꾸만 눈물이 흐를 뿐이었다. 바로 같은 날에 알렉산드리아와 레디네프 사이에는 루딘의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처 음에는 레디네프가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라가 그의 침묵을 깨뜨리기로 결 심했다. "내가 보기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여전히 루딘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것 같군 요. 나는 지금까지 일부러 물어보지 않았습니다만, 그분이 옛날과 달라졌는지 어떤지 이잰 당신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어째서 그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가를 해명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좋습니다. " 레디네프는 여전히 냉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당신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으 시다면 말씀해 드리죠. 그러나 성은 내지 말아주십시오……‥." "좋아요. 자, 말씀하세요." "그리고 끝까지 제 말을 들어주시기를." "예, 좋아요. 말씀하세요." "그럼 말씀드리죠." 레디네프는 천천히 소파에 걸터앉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말이 지 루딘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 친구는 똑똑하긴 하지만……." "그건 나도 알아요!" "지독히 똑똑한 사람이지만 속은 텅 비어 있습니다. " "아주 태연하게 그런 말을 하시 는군요!" "속이 텅 비어 있습니다" 하고 레디네프는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건 대단한 것이 아닙니 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텅 빈 사람들이니까요……그뿐만 아니라 그 사내가 마음의 폭군인 동시에 게으름뱅이이고 그다지 학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를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 다……‥." 알렉산드라는 갑자기 손뼉을 치고는 "학식이 없다구요! 루딘씨가?" 하고 외쳤다. "별로 학식이 없습니다" 하고 레디네프는 여전히 냉담한 어조로 되풀이했다. "남의 돈으 로 살기를 좋아하며 곧잘 연극배우 같은 언동을 하는 등 일일이 결점을 들추자면 한이 없지 만…… 이런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사실로서 그다지 나무랄 건 못 됩니다. 다만 나쁜 것은 그 사내가 얼음처럼 냉혹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 "그렇게 정열적인 사람을 냉혹하다고요!" 알렉산드라가 말을 가로챘다. "그렇습니다. 얼음처럼 냉혹합니다. 자기도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정열적인 사람으로 가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하고 레디네프는 점점 활기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그 친구가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험하다곤 하지만, 물론 그 친구 에겐 조금도 위험할 것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은 돈 한푼, 머리카락 한 오라기 걸고 있지 않 으니까요. 그러나 상대방은 생명을 걸고 있습니다……‥ ." "도대체 누구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난 당신이 하시는 밀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하고 알렉산드라가 말했다. "결백하지 못한 것이 나쁘단 말입니다. 그 자도 현명한 인간이니까 자기의 가치쯤은 의 당 알고 있을 텐데, 마치 자기 말이 무슨 큰 가치라도 있는 듯이 떠벌린단 말이에요…… 그 가 웅변가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웅변은 러시아적인 웅변이 아닙 니다. 게다가 젊은 사람이라면 그런 웅변을 묵과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나이에 자기 말에 도취된다고 하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렇게 거만스러운 태도가 꼴불견이란 말입 니다!" "하지만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 청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하는 사람이 거만스럽건 거 만스럽지 않건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실례지만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떤 사람 말은 남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을 수가 있지 만, 똑같은 말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하더라도 남의 귀를 솔깃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 는 것입니다. 이건 왜 그렇죠?" "그건 다시 말해서 당신의 귀가 솔깃해질 수 없다는 뜻일 테죠." 알렉산드라가 이렇게 그의 말을 가로챘다. "물론 내 귀는 꼼짝도 않지요" 하고 레디네프는 말을 받았다. "비록 내가 유달리 큰 귀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문제는, 루딘은 단지 말뿐이고, 조금도 행동으로 옮기리 못 하는 데 있습니다. 게다가 더욱 나쁜 것은 공허한 말이 젊은 사람의 마음을 흘려서 파멸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젊은 사람이라니, 도대체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죠?" 레디네프는 잠시 입을 다물 었다.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이냐구요? 나타리아 알렉세브나를 두고 하는 말이지요. " 그 순간 알렉산드라는 흠칫 놀라는 듯했으나 곧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언제나 그런 엉뚱한 생각만 하시는군요! 나타리아는 아직 어린애예요. 그리고 또 설마 그런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다리아 미하일로브나가 그런걸 ……‥." "다리아 미하일 로브나는, 첫째 이기주의자가 돼서 자기 만족만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그 부인은 자식들의 교육면에 있어서도 자만심에 빠져 있어서 그런 근심 같은 건 머 리에 떠올리지도 않을 겁니다. 천만에, 어림도 없지! 한 번 손짓만 하고 한 번 의젓이 바라 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실을 조종하 듯 자유자재로 된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 부인은 자신을 예술의 옹호자니 귀부인이니 현부(賢婦)니 뭐니 하며 자만하고 있지만, 까놓고 말하 면 평범한 노파에 지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나타리아는 결코 어린애가 아니예요. 사 실 그녀는 우리보다 더욱 치밀하고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정직하고 정열적이고 열렬한 성격을 가진 처녀가 그런 망나니 광대에게 걸려 들었으니, 생각할 만한 일이죠! 하 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망나니라구요? 아니, 그분을 망나니라고 부르시는 거예요?" "물론입니다…… 글쎄 좀 생각해 보시오,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그 자가 지금 다리아 부인 댁에서 어떤 역할을 하 고 있는지 아십니까? 집안의 우상,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영지의 관리로부터 사소한 집안 일 에까지 간섭하고 있습니다. 자, 이게 남자들이 할 일일까요?" 알렉산드라는 깜짝 놀란 표 정으로 레디네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게 빨갛게 흥분하시는 걸 보니 필경 여기엔 무슨 곡절이 있을 거예요……‥." "바로 그것이 탈이란 말입니다! 이쪽은 신념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여자들은 무슨 시시한 원한이라도 있 는 듯이 생각해 버리고 마니." 알렉산드라는 참다못해 화를 내고 말았다. "대단하시네요, 레디네프씨! 당신도 피가소프 씨 못지않게 여자를 공격하기 시작했군요. 하긴 당신도 마음대로 겠지만, 당신이 아무리 총 명한 눈을 가지고 계신다 하더라도 그렇게 짧은 기간에 모든 것을 보고 이해했다고는 도저 히 믿을 수 없어요. 내 생각으론 당신이 옳지 않다고 봐요. 그래 당신의 말에 의하면, 루딘 씨는 타라추프(몰리에르 희곡의 주인공, 여기선 위선자의 뜻)와 다름없다는 거죠?" "문제 는 그겁니다. 그 자는 타라추프도 아닙니다. 타라추프는 적어도 자신의 욕구만은 알고 있었 습니다만, 이 루딘이란 사람은 그만큼 영리한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럼 어 떤 사람이라는 거예요? 빨리 결론을 내리세요. 당신은 정말 마음이 비뚤어진 심술쟁이로군 요!" 레디네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알렉산드라 파블로나" 하고 그는 말하기 시작했다. "비뚤어진 건 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제가 루딘을 나쁘게 평했다고 해서 당신은 제게 심술을 부리고 있습니다만 저에게는 그 사람을 나쁘게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혹은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그 권 리를 샀는지도 모르죠. 전 루딘을 잘 압니다. 오랫동안 함께 살았으니까. 기억하십니까, 언젠가 제가 루딘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지내던 일을 이야기 해 드리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죠? 아무래도 그 약속을 이행할 때가 온 것같군요. 그러나 끝까지 제 얘기를 들어주실 용의가 있으신지?" "이야기하세요, 어서. " "그럼 하지요. " 레디네프는 천천히 방안을 거닐더니 때때로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앞으로 숙이듯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도 아실 테지만, 아니 아직, 모르실지도 모르겠군요. 전 양친을 일 젝 여의고 열일곱 살이 되면서부터는 저에게 윗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숱니다. 저는 모스크 바의 아주머니댁에서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고 지냈습니다. 그때 저는 맹랑하 게 자존심이 강한 젊은이로서 거드름을 피우며 뽐내기를 좋아했지요.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초등학교 학생처럼 멋대로 행동해서 당장 어떤 사건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얘긴 그만둡시다. 자랑거리가 못 되니까요. 결국 전 거짓말을 했던 겁니다. 그것도 아주 더 러운 거짓말을 했죠…… 그런데 그것이 폭로되고 증거까지 제시되어 톡톡히 망신을 당했습 니다…… 거기서 전 당황한 나머지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지요. 이것은 어느 아 는 집에서 일어났던 일인데, 그 옆에는 동료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모두들 통쾌하게 저 를 비웃었지만 그중에 단 한 사람 웃지 않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내가 완 강히 버티면서 잘못을 고백하지 않았을 땐 좌중의 누구보다도 날 날카롭게 나를 공격했던 학생이었으나 내가 측은해 보였던지 내 팔을 붙잡고 자기 하숙집으로 데려가 주었습니다." "그 학생이 루딘씨였나요?" 하고 알렉산드라가 물었다. "아니오, 루딘이 아닙니다…… 그건…… 그 사람은 이미 저승에 가고 없습니다만…… 정 말 비범한 사내였습니다. 성은 포코르스키라고 했죠. 이 사람을 묘사하자면 도저히 간단한 말로써는 불가능한 일이고, 또 일단 말을 시작하면 다른사람의 말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 습니다. 고상하고 순결한 마음씨의 소유자로서, 아직까지 전 그렇게 머리 좋은 사람은 못 보 았습니다. 포코르스키는 낡은 목조 건물의, 천정이 낮은 조그만 2층 방에서 살고 있었습니 다. 말할 수 없이 가난해서 그럭저럭 품팔이를 해가며 그날그날을 넘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손님에게 차 한 잔 대접하지 못할 때도 많았으며, 방안의 하나밖에 없는 긴 의자도 가운데 가 움푹 내려앉아서 마치 보트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구차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에 모여들었습니다. 모두들 그를 사랑했던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 의 마음에 끌려갔던 것일테죠. 그의 구차한 방안에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유쾌하고 즐거웠 는지,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 하실 것입니다! 이 포코르스키 방에서 저는 루딘을 만나게 됐 죠. 그 당시 그는 이미 언젠가 내가 말씀드린 그 공작과는 헤어진 뒤였습니다. " "그 포코 르스키라는 사람은 어디가 그렇게 특출했나요?" 하고 알렉산드라가 물었다. "글쎄,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요? 시정과 진실성-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따르게 한 원인일 테죠. 명확하고 박식한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갓난아이처럼 귀엽고 사랑스럽습 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그의 맑은 웃음 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그에게는 이런 점도 있었지요. 거룩한 선 앞에 한밤중 등잔불마냥 타오르는 그대여…… 이것은 우리 서클에 속해 있던 상냥스럽기 이를 데 없는 반미치광이 시인이 그를 읊은 시의 한 토막입니다. " "그분의 말솜씨는 어땠어요?" 하고 알렉산드라가 물었다. "기분이 좋을 때에는 좋았지만 그러나 놀라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루딘은 그때도 포코 르스키보다는 열 배 스무 배가 웅변을 잘했지요. " 레디네프는 걸음을 멈추고 팔짱을 쪘다. "포코르스키와 루딘은 서로 닮은 데가 없었습니 다. 루딘 쪽이 훨씬 화려하게 빛났고 곧잘 호통을 쳤으며 따라서 말이 많았습니다. 아마 정 열도 많았을 겁니다. 얼핏 보기엔 루딘 쪽이 포르스키보다 훨씬 많은 천분을 타고난 듯이 보였습니다만, 실제에 있어서 고인에 비하면 루딘의 사상은 빈곤하기 짝없었습니다. 루딘은 어떤 사상이라도 선명하게 발전시켰고 논쟁을 하는 데도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자기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남의 사상, 특히 포코르스키에게서 빌린 것이 많았습니 다. 포코르스키는 겉으로 보기엔 조용하고 부드러워서 약골처럼 보이기까지 했으나, 여자를 무척 좋아했고 술도 보통이 아니었으며 모욕이라도 받으면 상대가 누구든 간에 결코 가만있 지 않는 성격이었습니다. 루딘은 정열과 용기와 생명이 넘쳐 흐르는 듯이 보이면서도 마음 속은 싸늘했고, 거의 겁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하긴 자존심을 상하게 했 을 때에는 예외로, 그럴 땐 상대에게 마구 미친 듯이 달려들곤 했지요. 그는 동료들을 굴복 시키려고 갖은애를 다 썼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원칙이니 이념이니 하는 간판으로 동료들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으므로 그런 점에서 확실히 많은 동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서나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죠. 그를 좋아한 사람은 아마 나 혼자뿐 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 모두 그의 압제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요. 그 대신 루딘은 만나는 누구에게나 설명을 하거나 논쟁을 거는 것을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루딘은 독서를 아주 많 이 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포코르스키나 우리들보다는 훨씬 많이 했었던 것만은 사 실입니다. 게다가 종합적인 두뇌와 놀랄 만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젊은 이들을 몹시 감동시켰던 거지요! 젊은이들에겐 결론이나 총괄을 제시해 주지 않으면 안 됩 니다. 비록 틀리는 한이 있더라도 어쨌든 총괄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그러나 정말로 양심적인 인간이라면 그것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어디 한 번 젊은이들에게 자신 완전한 진 리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여러분에게도 전할 수 없다'고 말해 보세 요…… 그들은 다음부터 귀를 기울일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젊은이 들을 기만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느 정도나마 진리를 파악하고 있다' 고 스스로 확신할 필요가 생기는 겁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루딘은 우리 동료들 속에 강력한 영향 을 미칠수 있었던 거지요.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는 대단한 독서가는 아니었습니다만, 꽤 많은 철학 서적을 읽었고 게다가 머리도 잘 짜여져 있었으므로, 읽은 책으로부터 곧 보 편적인 것을 끄집어내거나 근본적인 것을 붙잡아서는 거기서부터 명확하고 올바른 사상의 거미줄을 사면팔방으로 뻗쳐가며 정신적인 전망을 발견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들의 서클은 솔직한 말로 어린아이들의 모임, 그것도 정기적인 교육을 다 마치지 못한 어린 아이들의 집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철학이며 예술이며 과학이며 인생 그 자체, 이런 모든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다만 말에 지나지 않았다기보다는 차리리 관념이었을는지 도 모릅니다. 매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그러나 뿔뿔이 흩어진 보잘 것 없는 관념에 지나지 않았지요. 이들 관념의 전체적인 종합이라든지 일반적 법칙에 대해서는 동료들끼리 막연히 논하기도 하고 이해하려고 애쓰기도 했으나, 그것을 의식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질을 규명할수는 없었던 거죠…… 그런데 루딘의 말을 들으면, 우선 그 전체적인 종합을 붙잡는 듯한 생각이 들고 드디어 그 신비로웠던 장막이 걷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 니다. 비록 그의 말이 남의 사상을 빌린 것이라 할지라도 그런건 문제가 아니었지요! 일단 그가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들이 알고 있던 모든 지식에 정연한 질서가 세워지고 뿔뿔이 흩 어졌던 것이 갑자기 결합되고 조직되어 마치 빌딩처럼 눈앞에 우뚝 솟아오르며, 모든 것이 찬란히 빛나고 도처에 생기가 넘칩니다…… 무의미하거나 우연한 것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업 고, 합리적인 필연성과 아름다움이 만물 속에 깃들여 모든 것이 명료하면서도 신비로운 의 미를 띠게 됩니다. 그리고 개개의 인생 형상은 모조리 화음을 울리고 우리들 자신도 영원의 진리를 담은 산 그릇이 된 듯한, 무언가 위대한 사명을 띤 진리의 무기로 화한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 어떤 성스러운 공포와 감미로운 마음의 동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당신에겐 이런 말이 모두 우스꽝스럽게 들릴 테죠?" "아니요, 조금도" 하고 알렉산드라가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 당신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순 없습니다만, 그래도 우습지는 않아요. " "우리는 그 후 물 론 조금씩 철이 들기 시작했지요" 하고 레디네프는 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 어린아이 장난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그러나 되풀이해서 말씀드리지만, 그 당시 우리 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루딘에게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포코프르스키는 정신적인 면에서 그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지요.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포코르스키는 우리 일동에 게 정열과 힘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만, 때에 따라선 마음이 해이해져서 묵묵히 시름에 잠 길 때도 있습니다. 신경질적인데다가 건강도 좋은 편이 아니었으니까요. 그 빼신 그가 한 번 날개를 펼치기만 하면 그야말로 어디까지 날아갈지 몰랐습니다. 파란 하늘의 심연 끝까 지 날아가지 않곤 못 배겼으니까요! 그러나 루딘은 균형 잡힌 미남 자이긴 했지만, 무척 잘고 치사스러운 데가 많았습니다. 하물며 남의 험담까지 하고 다녔으니까요. 무엇에든 참견 하고, 무엇이든지 정의를 내리고 절명하는 것이 그의 병이었지요. 그의 이러한 부산한 활 동은 한시도 그칠 새가 없었습니다…… 정치가적인 습성이라고나 할는지요! 나는 그 당시 의 모습 그대로를 당신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루딘은 조금도 변한 데가 없습니다. 자기의 신념에 있어서도 변화가 없습니다…… 서른다섯 살이나 되었는데 도…… 자기 자신의 신념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닙니다. " "좀 앉으 세요" 하고 알렉산드라가 말한다. "왜 시계추처럼 자꾸만 방안을 왔다갔다하시죠?" "이쪽이 편합니다" 하고 레디네프가 대답했다. "그런데 포코르스키의 서클에 들어간 후부 터 나는 딴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이건 사실이에요. 아주 온순해 지고 이것저것 질문도 하고 공부도 하고 기쁨과 존경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 한마디로 말해 서 절에라도 들어간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당시의 모임을 회상해 보면 정말 좋은 점도 많았거니와 감동할 만한 점도 많았습니다. 한번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대여섯 명의 청년들이 모여 있고 시름초가 한 자루 외롭게 타고 있습니다. 거기에 씁쓸한 차와 퀴 퀴한 건빵이 나옵니다. 자, 그때의 우리들의 얼굴을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우리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세요! 각자의 눈은 환희에 빛나고 두 볼은 빨갛게 달아오르며 가슴은 세차게 들먹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이며 진리며 인류의 장래며 시에 대해서 말합니다. 때 로는 실없는 소리도 하고 보잘것없는 말에 감탄하는 일도 있으나, 그런 건 문제가 아닙니 다…… 포코르스키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창백한 얼굴을 한 손으로 괴고 있으나 그 눈 은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루딘은 방 한복판에 서서 열변을 토합니다. 그 멋있는 웅변, 마 치 아우성치는 바닷가에 서 있는 젊은 데모스테네스와 똑같습니다. 머리를 헝클어뜨린 시인 수보친은 가끔 잠꼬대처럼 외마디 탄성을 지르는가 하면, 독일인 목사의 아들로서 40대의 대학생인 셀레르는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침묵으로 해서 우리들 사이에서는 심오한 사 상가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이럴 때에는 유달리 장중한 침묵을 지키고 있는 듯했습니다. 우 리 서클의 아리스토파네스 역을 담담하고 있던 명랑하기 그지없는 슈치토프 까지도 조용히 앉아서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고, 두세 명의 신입 회원들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 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밤은 날개라도 펼친 듯이 조용히 날아가 버리고 어느새 희끄무레한 아침이 찾아들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각자의 감격을 가슴에 안 고 결백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알코올 기라곤 조금도 없이-그 당시 우리는 술 같은 건 생각 지도 않았습니다-그 어떤 달콤한 피로를 마음속에 느끼면서 헤어지곤 했던 것입니다……지 금도 생각나지만, 감격에 넘친 기분으로 인적 없는 거리를 가고 있노라면 하늘의 별까지도 가깝게 친해진 듯하고 어쩐지 믿음직스럽게 보이곤 했지요…… 아아! 정말 좋은 시절이었지 요, 그때는. 나는 그것이 덧없이 사라지고 말았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리고 또 실 제로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후 생활에 속화된 친구들에게조차도 결코 사라져버린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런 옛날 친구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마치 짐승 처럼 되어버린 인간들일지라도, 일단 그 앞에서 포코르스키의 이름을 입에 담기만 하면 아 직도 마음에 남아 있는 고상한 감정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더럽고 캄캄한 방안에서 까마득한 옛날부터 있었던 향수병을 열기라도 하는 듯이……." 레디네프 는 입을 다물었다. 파리한 그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런데 루딘씨와는 왜 싸우셨지요?" 하고 알렉산드라가 의아스럽다는 표정으로 레디네 프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는 싸움을 한 것이 아닙니다. 외국에 있을 때 그 친구의 정체를 잘 알기 때문에, 그 저 헤어지고 만 것뿐이죠. 하긴 모스크바에 있을 때 싸울 만한 요소는 있었습니다만. 그때 루딘은 내게 괘씸한 짓을 했단 말입니다. " "무슨 일인데요? "다른 것이 아니라…… 자,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요…… 내 체격엔 어울리지 않는 일이 지만……워낙 사랑에 빠지기를 좋아하는 성격이 돼서." "당신이요?" "그렇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그러나 그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 나는 그때 어떤 예쁘장한 처녀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왜 그렇게 내 얼굴을 바라보시죠? 사 랑에 관한 거라면 더욱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지요." "어떤 이야긴데요, 듣고 싶군요." "예를 들면 이런 일도 있었지요. 모스크바 시절의 이야기지만, 저는 밤마다 애인을 만나 러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상대가 누군지 아십니까? 우리 집 정원 한구석에 있던 어 린 보리수였습니다. 그 호리호리하고 날씬한 나무 줄기를 얼싸안으면, 마치 자연 전체를 포 옹하는 듯한 생각이 들고 가슴이 부풀어 올라 마치 우주 전체가 마음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듯한 황흘감에 도취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라는 인간은 바로 이런 사람이지요…… 어떻습 니까! 그리고 당신은 내가 시 같은 건 써보지도 못했으리라 생각하시겠죠? 그러나 썼습니 다. 더욱이 '만프레드'를 모방해서 한 편의 비극까지 쓴 적이 있지요. 그 등장 인물 속에는 가슴을 피로 물들인 유령이 나오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기 피가 아닌 인류 전체의 피였습니 다…… 아니, 뭐 그렇게 놀랄 것까진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우리 연애 이야기나 계속합시 다. 난 어떤 처녀와 알게 됐는데……‥." "보리수와의 밀회는 그만두셨나요?" 하고 알렉산드라가 물었다. "그만두었지요. 그 처녀는 아름다운 용모에 마음씨가 곱고 명랑하고 밝은 눈에 방을 같 은 목소리를 가진 여자였습니다. " "표현이 멋지군요" 하고 알렉산드라는 엷은 미소를 띄우면서 말했다. "그렇게 남의 말을 비웃지 마십시오." 레디네프가 반박했다. "그런데 그 처녀는 늙은 아 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러나 너무 자세한 이야기는 그만두겠습니다. 다만 한 가 지 말씀드려 둘 것은 이 처녀의 마음씨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아서 차를 반잔만 따라 달라고 해도 언제나 4분의 3까지 따라주곤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녀와 만난 지 사흘 만에 벌써 몸이 달기 시작했고 이레 만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루딘에게 모두 고백하고 말았습 니다. 사랑에 빠진 젊은 남자들이란 반드시 고백하지 않곤 못 배기는 것처럼 나도 그만 루 딘에게 고백하고만 것 입니다. 하긴 그때만 해도 나는 루딘의 영향밑에 놓여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솔직한 말로 그의 감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는 솔선해서 나의 시중을 들어주고 이끌어주었던 것입니다. 나는 포코르스키에게 열렬한 사랑 을 바치고 있었으나, 그의 정신적 순결성에 어느 정도 공포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루 딘에게 더욱 친근미를 느꼈던 것입니다. 내가 사랑에 빠진 걸 알자, 루딘은 말할 수 없이 기 뻐하며 나를 껴안고 축복해 주었으며 곧 설교를 시작하면서, 나의 새로운 입장의 중요성을 설명했습니다. 나는 유심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게다가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 의 웅변은 보통이 아니니까요. 그의 말은 이상한 힘으로 내게 파고들었습니다. 갑자기 나는 놀랄 만한 자존심을 갖게 되었고 얼굴 표정도 심각해져서 내 얼굴에서는 웃음까지도 사라지 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생각나지만 걸음걸이까지도 조심스러워져서, 마치 가슴속에 귀중한 액체를 담은 그릇이라도 들어 있는 듯 그것을 엎지를까봐 살금살금 걸음을 옮기는 형편이었 습니다. 나는 무척 행복했습니다. 게다가 상대편도 분명히 호의를 가지고 나를 대해 주고 있 었으니까요. 그런데 루딘이 어느 날 나의 애인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긴 내 쪽에서 먼저 그녀를 소개하고 싶다고 주장한 거나 다름없는 일이지만. " "아아, 알겠어요.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군요" 하고 알렉산드라가 그의 말을 막았다. "그러니까 루딘이 당신의 애인 을 가로챈 거군요. 그래서 당신은 지금까지도 그에게 원한을 품고 계시는 거예요…… 틀림 없어요, 어디 내기라도 할까요?" "내기를 한다면 당신이 졌습니다, 알렉산드라 파블로브 타. 당신의 예상은 틀렸어요. 루딘은 내 애인을 가로채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로채려고도 하지 않았구요. 그러나 어쨌든 그는 나의 행복을 파괴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하긴 냉정히 판단해 보면, 지금도 도리어 그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형편이지만요. 그러나 그때의 나의 심 정이란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루딘은 나의 행동을 깨뜨릴 생각은 염두에도 없었습니다. 오 히려 그 반대였지요! 그러나 자타(自他)의 생활 동태에 대해서 일일이 정의를 내리면서, 마 치 나비를 핀으로 꽃아 놓듯이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 저주받을 습성 때문에, 그는 우리 들 자신의 성격이며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회들은 여차여차 행 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시하는가 하면 마치 전제 군주 같은 태도로 우리들의 감정이며 사상을 고백시키면서 칭찬도 하고 핀잔을 주기도 하고, 나중에는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 두 사람에게 편지를 써보내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우리 두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처녀와 결혼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 하지 않았으나 (그만한 상식은 아직 남아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우리 두 사람은 적어도 수 개월 동안은 포올과 비르지니 같은 달콤한 세월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러나 이때 여러 가지 오해와 긴장, 한마디로 말해서 터무니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지요. 결국 루딘은 어느 날 아침, 아무래도 이 모든 것을 노부에게 알려주는 것이 친구로서의 거 룩한 의무라고 확신하기에 이른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실행했습니다. " "아니 정말이에요?" 하고 알렉산드라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시겠어요, 루딘은 내 승낙을 받고 한 것이랍니다. 정말 해괴한 일 이죠! ……그 당시 내 머리의 혼돈 상태는 지금까지도 잊을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빙글 빙글 돌아서 마치 사진기를 들여다보듯이 거꾸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즉 횐 것이 검게 보 이고 검은 것이 회게, 거짓이 진실로, 망상이 의무로 생각되었습니다…… 아아! 지금 생각해 도 부끄럽군요! 그런데 루딘은 전과 조금도 다름없었습니다……‥ 조금도! 마치 제비가 못 위를 날아다니듯이 온갖 오해와 분규 속에서도 태연히 활보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 처녀와 혜어졌나요?" 알렉산드라는 머리를 갸우뚱하고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이렇게 물었 다. "헤어졌지요…… 그나마 좋지 않은 이별이었습니다. 상대방을 모욕할 정도로 어설픈, 공 공연한 이별이었지요. 실은 그렇게 쌀쌀하게 헤어질 필요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나도 울 고 처녀도 울고,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분간할수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고르지예프의 실마 리(도저히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라는 뜻) 같은 것이 생겨서 어차피 한칼로 짤라버려야 했 던 겁니다. 정말 괴로운 일이었어요! 그러나 이 세상의 일은 모두 잘되게 마련인가봅니다. 그녀는 훌륭한 사람에게 시집가서 지금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그 렇지만 솔직히 말씀하세요. 당신은 루딘씨에게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테죠……‥ 하고 알렉산드라가 말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하고 레디네프가 모녀의 말을 가로챘다. "루딘을 외국으로 떠나 보내면서 나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그때 벌 써 내 마음속에는 씨가 뿌려졌던 것이었겠지요. 그래서 그 후 외국에서 다시 그를 만났을 때-나도 그땐 꽤 나이를 먹었을 때니 까-루딘은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만 셈이죠. " "도대체 그분에게서 무엇을 발견했다는 건가요?" "즉 한 시간 전부터 이야기한 그 모든 것을 말입니다. 아무튼 그 친구에 대해서는 그쯤 해둡시다. 혹시 아무 사고 없이 무사할는지도 모르니까요. 내가 루딘을 혹평하는 것은 나 자 신 그라는 인간을 몰라서가 아니라는 점을 당신께 설명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나타리아 알렉세므나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하죠. 그러나 당신 동생에 대해서는 주의하 셔야 할 겁니다. " "내 동생이라뇨! 그건 또 왜요?" "좀 자세히 바라보세요. 정말 눈치채지 못하셨나요?" 알렉산드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 예, 당신 말이 옳아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정말…… 요즘 동생은 사람이 달라졌어 요…… 하지만 당신 생각으론 "조용히! 이리 오는 것 같습니다. " 레디네프는 소곤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나타리아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내 말을 믿으세요. 다만 불행한 것은 애들처럼 경험이 없다는 거죠. 이제 두고 보세요. 우릴 깜짝 놀라게 할 테니." "그건 또 어떻게요?" "어떻게라뇨…… 그걸 모르세요. 그런 성격의 처녀들이 곧잘 물에 몸을 던진다거나 독약 을 마신다거나 하는 일을 저지르는 법입니다. 나타리아를 온순한 처녀로 보았다간 큰일나죠. 내부의 정열은 강렬하고 그 성격도 이만저만하지 않으니까요!" "저런, 당신 벌써 시상으로 접어들고 있는 거 아녜요? 당신처럼 냉정한 분에겐 아마 나 같은 사람도 화산처럼 생각될 테죠. " "아니, 천만에요!" 하고 레디네프는 미소를 띄우면서 대답했다. "성격을 가지고 한다면, 다행히도 당신에겐 그런 성격이 전혀 없어서." "또 그런 실례의 말씀을!" "그 말이 실례라구요? 천만에요, 그건 최대의 찬사올시다……‥." 볼르인체프가 방으 로 들어와서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레디네프와 누이를 바라보았다. 요 며칠 사이에 확실히 그의 얼굴은 핼쑥하게 여위어 있었다. 두 사람은 그에게 말을 걸었으나 볼르인체프는 그들 의 농담에 마지못해 가벼운 미소로 대답할 뿐, 언젠가 피가소프가 평한 것처럼 우울증에 걸린 토끼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아마 적어도 생애에 한 번쯤 은 이렇게 비통한 얼굴을 경험해 보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볼르인체프는 나타리아가 자기 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것을 느끼고, 발밑의 대지까지 그를 피해 도망가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7 이튿날은 일요일이었으므로 나타리아는 자리에서 늦게 일어났다. 전날은 잠자리에 들어 갈 때까지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가 그 처럼 눈물을 흘린 것이 마음속 으로부터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밤에도 제대로 잠을 이를 수가 얼었다. 그래서 반쯤 옷을 걸친 모습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서 봉크루가 눈을 뜰까봐 들릴락말락 낮은 소리로 화 음을 울리기도 하고 싸늘한 건반에 이마를 얹고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기도 했다.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것은 루딘에 대한 생각이라기보다는 루딘이 한 말을 상기하면서 자기 자신의 상념에 젖어 있었다는 것이 옳으리라. 그는 가끔 볼르인체프의 생 각도 하곤 했다. 그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나타리아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녀의 상념은 이내 볼르인체프의 영상을 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이상스러운 마음의 동요를 느꼈 던 것이다. 아침이 되자 그녀는 황급히 옷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어머니에게 아침 인 사를 드린 다음, 기회를 봐서 정원으로 빠져나갔다……‥. 이따금 비가 내리는데도 밝은 햇빛이 넘쳐 흘러 날씨가 무더웠다. 맑은 하늘에서는 연기 같은 낮은 비구름이 태양을 드러낸 채 미끄러지듯 헤엄치고 때때로 여우비가 확확 들판을 때리며 지나갔다. 반짝반짝 빛나는 굵직한 빗방울이 다이아몬드라도 뿌리듯 소리를 내며 후 두둑 떨어졌다. 태양은 반짝이는 빗방울의 장막 속에서 즐겁게 뛰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도 바람에 나부끼던 풀은 흠뻑 수분을 들이마신 채 움직일 줄 모르고, 축축이 젖은 나무는 힘없이 잎을 너울거리고 있었다. 새들이 끊임없이 지저귀고 있었는데 여우비의 상쾌한 소음 속에서 그 재잘거리는 노랫소리를 듣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먼지투성이 한길은 자 주 내리치는 빗방울로 보일 듯 말 듯 먼지를 일으키며 여기저기 얼룩 자국을 남겼다. 그러 나 어느새 비구름이 사라지고 미풍이 춤을 추기 시작하자 들판의 풀은 에메랄드와 금빛으로 물결쳤다…… 나뭇잎들은 서로서로 달라붙어서 군데군데 파란 하늘을 내보이고 있었다. 여 기 저기서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타리아가 정원으로 나왔을 때에는 하늘은 이미 맑게 개어 있었고 상쾌한 정적이 감돌 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에게 남모를 공명심과 막연한 기대 속에 달콤한 번민을 불러일으키 는, 그러한 부드럽고 행복에 찬 정적이었다. 나타리아는 연못가를 따라 은빛으로 빛나는 키 큰 포플러 가로수 길을 걷고 있었다. 그 런데 갑자기 마치 땅속에서라도 솟은 듯이 루딘의 모습이 그녀 앞에 우뚝 나타났다.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루딘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혼자 나오셨습니까? 라고 물었다. "예, 혼자예요" 하고 나타리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으니까…… 이 젠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 " "저기까지 바래다 드리지요." 이렇게 말하고 루딘은 그녀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당신은 어쩐지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것 같군요" 하고 그는 말했다. "제가요? ……전 또 저대로 당신의 기분이 언짢아 보인다고 말씀드리려던 참이었는데 요?" "그럴지도 모르죠. 가끔 있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전 괜찮습니다만, 당신이 그래 선……‥." "왜요? 저 같은 건 슬퍼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당신 같은 나이엔 인생을 향락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 나타리아는 몇 걸음 발을 옮기다, "드미트리 니콜 라이치!" 하고 입을 열었다. "예?" "기억하고 계세요? ……어제 말씀하신 비유를…… 기억하세요?…… 저 참나무 말씀 말이 에요." "아아, 기억하지요. 그것이 어쨌단 말씀입니까?" 나타리아는 살짝 루딘의 표정 을 살피고는 "어째서 당신은…… 그런 비유로 무슨 말을 하시려 한 거예요?" 루딘은 머리를 떨구고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하고 루딘은 감정을 억제하는 듯한 자기 특유의 의미심장한 표 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루딘의 마음속에 집약되고 있는 사 상 중 10분의 1도 말로 표현하지 않고 있는 듯이 느끼게 하는 그런 표정인 것이다.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당신도 느쪘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선 잘 말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속에는 조금도 건드리고 싶지 않은 몇 줄의 금선이 자리잡고 있습 니다. 내 마음……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거룩한 것의 모독이라고 늘 생각해 왔습니 다. 그러나 당신에게만은 내 마음속을 열도록 하겠어요. 당신은 어쩐지 신뢰감을 불러일으켜 주니까요. 따라서 당신에게만은 숨기지 않겠습니다. 나도 누구처럼 사랑도 하고 번민도 했습 니다…… 언제 어떻게 했건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업겠으나 어쨌든 내 가슴은 많은 슬픔을 맛 보았지요……‥." 루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제 당신께 말씀드린 것은"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어느 정도 내게, 지금의 내 심정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말할 가치는 없 습니다. 인생의 그런 면은 이미 내게서 사라진지 오래니까요.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초라한 시골 마차에 흔들리면서 뜨거운 먼지투성이 한길을 따라 이 마을 저 마을로 방랑하는 길밖 에 없습니다……간신히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에는, 아니 확실히 도달할지 어떨지도 모르는 일이죠……자, 이런 말은 그만두고 당신의 얘기나 들읍시다. " "그렇다면 드미트리 니콜 라이치" 하고 나타리아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당신은 이 인생에서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 이 없단 말씀인가요?" "오, 아닙니다! 나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건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결코 활동과 활동의 기쁨을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향락은 거절해 왔습니다. 나의 희망, 나의 공상-이것과 나 자신의 행복과는 전혀 공통점이 없습니 다. 사랑……(이렇게 말하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 사랑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 니다. 나는……‥ 사랑할 가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전부를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만, 나는 이미 전부를 바칠 수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여성의 마음에 든다는 건 젊을 때의 일이지 이렇게 나이를 먹은 다음은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어떻게 내가 남의 머리를 빙빙 돌게 해줄 수 있겠어요? 그저 내머리라도 무사히 어께 위에 붙어 있어주면 족 할 뿐이지요!" "당신의 마음은 알겠어요" 하고 나타리아가 말을 받았다. "위대한 목적을 향해 돌진하는 사람온 이미 자기 자신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그렇지만 여자라고 해서 그런 사람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순 없쟎아요? 그와는 반대로 여자는 도리어 이기주 의파를 싫어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 당신이 말씀하시는 젊은이들은 모두 이 기주의자란 말이에요. 사항하고 있을 때조차 자기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지요. 그려나 여자는 자기 회생이라는 것을 알 뿐더러 스스로 자신을 회생할 숱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아셔야 해요." 나타리아의 두 볼이 발그레하게 홍조를 띠고 그눈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만일 루 딘을 알지 못했던들 그녀는 이렇게 긴 말을 이렇게 열렬한 어조로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 다. "지금까지 누차 여자의 사명이란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으니까" 하고 루딘은 겸손한 미 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당신도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잔다르크는 혼자서 프랑스의 위기 를 구해 낼 수 있었지요……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난 지금 당신의 말을 하고 싶 어요. 당신은 지금 인생의 문턱에 서 계시니까…… 당신의 장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유쾌 하기도 하고 유익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가 당신의 친구라는 건 인정해 주시겠죠. 따 라서 나는 당신의 일을 집안 식구와 다름없이 근심하고 있는 거예요…… 또 그러기 때문에 내가 물어보는 말에 대해서도 언짢게 생각하자는 않으시리라 믿습니다만, 당신은 지금까지 마음의 혼란을 경험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까?" 나타리아는 홍당무처럼 얼굴을 붉힐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루딘은 걸음을 멈추었 다. 그러자 나타리아도 멈추었다. "혹시 노하시지 않으셨나요?" 하고 그가 물었다. "아뇨"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다만 너무 뜻밖의 질문이라서……‥." "그렇지만" 하고 루딘이 말을 이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요. " 나타리아는 거의 놀란 표정으로 루딘을 쳐다보았다. "그렇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나는 당신이 누구를 좋아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 고 꼭 한마디 해두고 싶은 것은-그보다 좋은 사람을 고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흠 잡을 데 없는 인물이죠. 그 사람이라면 당신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인생에 시달리지 않았으므로 순진하고 밝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당 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적격자올시다. " "누구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드미트리 니콜라이치?" "왜 모른 체하십니까? 물 론 볼르인체프에 대해서죠. 어때요, 내 말이 틀립니까7" 나타리아는 살며시 루딘에게서 얼 굴을 돌렸다. 그녀는 완연히 시름에 잠긴 모습이었다. "아니,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단 말씀인가요? 천만에요! 그분은 한시도 당신으로부 터 눈을 메지 않으며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랑이라는 건 결코 숨길 수 있는 게 못 됩니다! 그리고 당신도 그분에게 호의를 품고 있는 건 사실이겠죠?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어머니의 마음에도 드신 모양이오. 당신의 선택은……‥." "드미트리 니졸라 이치!" 하며 나타리아는 겸연쩍은 나머지 자기 옆의 관목에 손을 뻗치면서 그의 말을 가로 챘다. "저는 사실 이런 말을 하긴 싫습니다만, 어쨌든 분명히 말해 두겠어요. 그건 당신이 잘못 아신 거예요." "내가 잘못 알았다고요?" 하고 루딘은 되풀이했다. "그렇지 않을 겁니다. 비록 당신과 사 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난 당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요즈음 당신에게서 볼 수 있는 그 뚜렷한 변화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과연 지금의 당신은, 여섯 주일 전에 내가 처음 봤던 그때의 당신과 같을 까요?……아닙니다,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당신의 마음 은 확실히 평온하지가 않아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고 나타리아는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지 만 역시 당신의 생각은 틀렸어요." "그러시다면?" 하고 루딘은 물었다. "제발 내버려두세요, 더 묻지 말아주세요!" 이렇게 말하고는 나타리아는 빨리 집으로 걸 음을 옮겼다. 갑자기 자기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이 그녀 자신을 무섭게 했던 것이다. 루딘이 뒤따라가서 그녀를 불러 세웠다.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그는 말했다. "이 말은 이대로 끝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못 됩니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도 너무나 중대한 것이니 까요…… 지금 말씀하신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요?" "제발 내버려두세요!" 하고 나타리아는 되풀이했다.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제발 부탁입니다!" 루딘의 얼굴에는 흥분의 빛이 어리고 파랗게 질리기까지 했다. "당신은 무엇이든지 모르는 것이 없으니, 제 마음인들 모르실 리가 없어요!" 나타리아는 이렇게 말하고는 루딘의 손을 뿌리치며 뒤돌아보지도 성큼성큼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한마디만이라도!" 하고 루딘이 뒤에서 소리쳤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으나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당신은 아까 무슨 뜻에서 그런 비유를 했느냐고 물으셨지요? 말씀드리죠. 당신을 속이 고 싶진 않으니까요. 그건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나 자신의 과거와 그리고 당신 에 대해서 말입니다. " "예? 저에 대해서요?" "그렇습니다. 당신에 대해서입니다. 다시금 되풀이하지만, 난 당신을 속이고 싶진 않습니 다…… 그때 어떤 감정을, 어떤 새로운 감정을 이야기했는지 이젠 당신도 아셨으리라 믿습 니다…… 실은 오늘까지만 해도 절대 입밖에 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만……‥." 나타리아 는 별안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저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루딘과의 뜻하 지 않았던 대화 때문에 완전히 마음이 뒤흔들려서, 자기가 볼르인체프의 옆을 달려갔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볼르인체프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 는 15분쯤 전에 다리아 부인댁으로 와서 응접실에 있는 부인과 두서너 마디 이야기를 나눈 후 나타리아를 찾으려고 살그머니 저택을 빠져나와 정원으로 향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 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직감에 이끌려 바로 정원으로 나오자, 그는 곧 나타리아아와 루딘을 발견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그때는 그녀가 루딘으로부터 손을 뿌리치는 바로 그 순간이 었다. 볼르인체프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는 나타리아를 눈으로 전송하고 나무에서 몸을 뗀 후 정신없이 한두 걸음 발을 옮겼다. 루딘은 볼르인체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야 비로 소 볼르인체프임을 알았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묵묵히 인사를 나눈 뒤 헤 어졌다. '이 문제는 비대로 끝나지 않으리라.' 두 사람은 제각기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 다. 볼르인체프는 정원의 마지막 구석까지 다다랐다. 그의 가슴은 아파서 메어지는 것 같았 다. 가슴속에는 납덩어리가 들어앉는 것 같고, 때때로 온몸의 피가 부글부글 머리 위로 솟구 쳐 올랐다. 또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루딘은 자기 방으로 돌아왔으나 그 역시 마 음이 평온하지는 않았다. 머리 속에서는 가지가지의 상념이 회오리바람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순진한 젊은 처녀에게 느닷없이 마음을 뒤흔들리고 말았으니 어찌 마음이 평온할 리가 있겠는가……‥. 식사 때도 어쩐지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타리아는 창백한 얼굴로 간신히 의자 위 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볼르인체프는 여느 때처럼 그녀 옆에 자리 를 잡고 이따금 마지못해 그녀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이날은 오래간만에 피가소프가 이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식사 도중 누구보다도 많이 지껄였다. 무슨 말끝엔가 그 는, 인간은 개와 마찬 가지로 꼬리가 짧은 것과 긴것으로 나뉘어진다고 논증하기 시작했다. "꼬리가 짧은 인간은," 하고 피가소프는 말하기 시작했다. "날 때부터 짧은 것과 자기 탓으로 짧아진 것,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꼬리가 짧은 인간은 초라하기 짝없지요. 무 슨 일을 해도 실패만 거듭합니다. 즉 자신이 없기 때문이죠. 그와 반대로 길고 북슬북슬한 꼬리를 가진 인간은 행복합니다. 하긴 꼬리 짧은 인간보다 못나고 빈약한 자들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자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기양양하게 꼬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모습에 반하고 말지요. 자,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꼬리는 도무지 불필요한 인체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아서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것엔 여러분들도 이의가 없으실 테죠?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그 꼬리로 상대편의 가치를 판단해 버린단 말입니다. " "나 는" 하고 피가소프는 한숨을 섞어가며 덧붙였다. "꼬리 짧은 인간에 속합니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유감스런 것은 나 자신이 꼬리를 잘라버렸다는 거지요. " "결국 당신이 말씀하시 고자 하는 것은," 하고 루딘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당신보다 훨씬 전에 이미 라 로슈푸코(프랑스혁명 시대의 귀족)가 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를 믿어라, 그러면 남 들도 그대를 믿을지니' 하는 말일 테죠? 그런데 무엇 때문에 꼬리 얘기 같은 걸 여기에서 끄집어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 "사람에겐 누구나 자기 생각이라는 것이 있으니 까" 하고 볼르인체프가 날카로운 어조로 참견을 했다.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각 자 생각한대로 말하게 해두십시오. 요즈음 전제주의에 대한 비난이 많지만……내 생각으론 이른바 현자(賢者)의 전제주의처럼 나쁜 건 없다고 봅니다. 그런 건 모두 뒈져버려야 해요!" 모두들 볼르인체프의 뜻하지 않은 폭언에 깜짝 놀라서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루딘은 볼스인체프의 얼굴을 바라보려다가 그의 시선에 압도당하고는 이내 외면한 채 빙긋 이 미소지을 뿐 대꾸는 하지 않았다. '호! 저자도 꽤 꼬리가 짧은 편이군!' 하고 피가소프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한편 나타리아는 무서운 나머지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다리아 부인은 어리등절한 눈 으로 오랫동안 볼르인체프를 응시하고 있다가 드디어 침묵을 깨뜨리고 자기 친구인 N.N. 장관이 가지고 있던 신기한 개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볼르인체프는 식사 후 자리를 떴다. 그는 나타리아와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끝내 자기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그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당신은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십니까? 마치 무슨 죄라도 지은 듯이. 당신은 누구한테든지 나쁜 짓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니잖아 요…… !" 나타리아는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면서 그저 그의 뒷모습을 전송할 따름이었다. 차가 나 오기 전에 루딘은 그녀 옆으로 다가와서 탁자 위에 몸을 굽히고 신문을 고르는 체하면서 이 렇게 속삭였다. "어쩐지 모든 것이 꿈만 같군요, 그렇지요? 당신과 단둘이 이야기해야 할 말이 있는데 요……단 일분이라도." 여기서 그는 봉크루에게 몸을 돌리고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당신이 찾고 있던 평론 기사." 그러고는 다시 나타리아 쪽으로 몸을 굽히고는 속삭이는 듯 한 소리로 덧붙였다. "열 시경에 테라스 근처의 라일락 정자로 나와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 다……‥ ." 이날 저녁의 주인공은 피가소프였다. 루딘도 오늘은 무대를 양보했다. 피가소프는 다리아 부인을 무척 많이 웃겼다. 먼저 어느 이웃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 사내는 30년 동 안이나 마누라 궁둥이에 깔려 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완전히 여자가 되어 피가 소프가 보는 앞에서도 조그만 물구 덩이를 건널 때 여자가 스커트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듯이 프록코트를 옆으로 들어올리더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 피가소프는 어떤 지주에게로 화제를 옮겼다. 그 지주는 처음에는 마손파 의 신도였는데 다음에는 우울증 환자가 되고, 나중에는 은행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 이었다. "필리프 스체파느이치,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마손 신자가 됐었나요?" 하고 자기 가 물으니 "다 아는 일이 아닙니까, 나는 그때 새끼손가락의 손톱을 길게 기르고 있었으니 까요"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다리아 부인을 웃긴 것은 피가소프의 연애론이었다. 그가 단언하 는 바에 의하면 그도 여자에게 사랑의 번민을 준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열렬한 독일 여자는 피가소프를 가리켜 "깨물어 먹고 싶은 아프리칸 치크"니, "흐리푼 치크(목쉰 귀여운 사람)"니 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는 것이었다. 다리아 부인은 배를 끌어안고 웃어댔으나, 그는 결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여성에 대한 승리를 자랑할 만한 권리 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이렇게도 역설했다. 상대가 누구든 여자를 반하게 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으니, 다만 여자에게 당신의 입술은 천국이고 눈은 행복의 극치. 당신에 비하면 다른 여자는 모두 걸레 조각과 다름없다고 열흘 동안 계속해서 되풀이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열하루째에는 여자 쪽에서 먼저 "내 입술은 천국이고 눈은 행복의 극치죠"라고 말하면서 이 쪽에 반해 버리고 만다고 했다. 하기는 천태만상의 세상이고 보니, 어쩌면 피가소프의 이 말도 맞을는지 모르겠다. 아홉 시 반경 루딘은 벌써 라일락 정자에 나와 있었다. 멀리 파르스름하게 보이는 하늘 의 심연 속에서 한 둘 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서쪽 하늘은 저녁놀에 불타고 있어서 지평 선까지도 말갛게 투명해 보였다. 보름달이 검은 자작나무 가지 사이에서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밖에 무수한 나뭇잎 사이를 눈알처럼 빛내며 우울한 거인처럼 우뚝 솟아 있는 나무와 시꺼먼 덩어리로 어둠 속에 녹아내리는 나무도 있었다. 나뭇잎 하나 까딱하지 않았 다. 라일락과 아카시아 우죽은 무슨 소리도 엿듣는 듯이 따스한 밤 공기 속에 삐죽삐죽 곤 두서 있었다. 가까운 곳에 저택이 거뭇거뭇 솟아 있고, 불 켜진 기다린 창문이 붉은 반점을 이루며 그림처럼 떠올라 있었다. 아늑하고 고요한 밤, 그렇지만 이 정적 속에는 억제하는 듯 한 가쁜, 정열적인 숨결이 느껴졌다. 루딘은 팔짱을 끼고 서서 긴장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가슴은 방망이질을 치 듯 울렁거렸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드디어 가볍고 민첩한 발소리가 들리고 정 자 속으로 나타리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루딘은 달려나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얼 음처럼 찼다.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내일까지 기다릴 순 없었어요. 나는 지금까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바로 오늘 아침까지도 노 르고 있던 것을 당신께 고백해야겠습니다.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타리아의 손 이 그의 손바닥 속에서 바르르 떨렸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고 그는 되풀이했다. "어째서 지금까지 자신을 기만해 왔 을까요. 어째서 좀더 빨리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 런데 당신은?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당신은 어떻습니까? 말씀해 주세요!" 나타리아는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전 여기 있어요." 마침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지 마시고 분명히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도 나를 사랑하고 계십니까?" "저도…… 그런 것 같아요……‥." 하고 그녀는 속삭였다. 루딘은 더욱 세차게 그녀의 손을 쥐며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했다…… 나타리아는 재빨리 주위를 돌아보았다. "놓아주세요. 전 무서워요. 누가 엿듣는 것만 같아서……제발 부탁이니 조심해 주세요. 볼르인체프씨도 눈치채고 계시니." "그 사람이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도 보셨을 테죠. 내가 오늘 그 사람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않던 것을…… 아아,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정말 난 행복합니다! 이제 아무도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진 못할 거예요!" 나타리아는 살짝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놓아주세요" 하고 그녀는 속삭였다. "집에 돌아 가야 해요. " "조금만 더" 하고 루딘이 말했다……. "안돼요, 놔주세요. 놔주세요……‥." "당신은 저를 무서워하시는 것 같군요!" "아니에요, 전 돌아가야 해요……‥." "그렇지만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세요……‥ ." "당신은 지금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죠?" 하고 나타리아가 물었다. "나 말입니까? 이 세상에 나보다 행복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은 그걸 의심 하시나요?" 나타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신비로운 정자 그늘에서, 밤하늘의 회미한 달빛을 받은 그녀 의 기품 있는 파리한 얼굴, 젊음과 흥분이 뒤섞인 그 얼굴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이었 다. "그럼 말씀드리죠." 그녀는 말했다. "이제부터 전 당신 거예요." "오오, 신이여!" 하고 루딘은 외쳤다. 그러나 나타리아는 그 자리를 퍼해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루딘은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이윽고 천천히 정자에 나왔다. 달빛이 환히 그의 얼굴을 비춰주었다. 그 입술에는 미 소가 감돌고 있었다. "난 행복하다" 하고 그는 나직이 말했다. "아아, 나는 행복해." 마치 자신에게 납득시키기 라도 하는 듯 그는 다시 한 번 이렇게 되풀이했다. 꼿꼿이 몸을 폈다. 그리고 고수머리를 한 번 흔들고 나서 힘있게 두 팔을 내저으며 재빨리 정원 쪽으로 되돌아갔다. 얼마 후 라일락 정자를 에워싸고 있는 덤불 숲이 살그머니 헤쳐지더니 거기서 판달레프 스키가 나타났다. 그는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고 머리를 흔들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저 이렇다니까! 곧 마님께 일러바쳐야지" 하고 중얼거리 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8 집에 돌아와서도 볼르인체프는 여전히 침울하고 기운이 없었다. 누이가 무슨 말을 물어 도 제대로 대답도 하지 않고 곧 자기 서재에 틀어박혔으므로, 알렉산드라는 급히 하인을 보 내 레디네프를 불러오라고 했다. 그녀는 곤란한 일이 생기면 언제나 레디네프에게 구원을 청하는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레디네 프로부터는 내일 들르겠다는 회답이 왔다. 볼르인체프의 표정은 이튿날 아침이 되어도 풀리지 않았다. 그는 차를 마신 후 일터로 나갈 채비를 하다가 그대로 긴 의자에 눌러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가 책을 읽는다 는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볼르인체프는 문학에 대한 취미가 없었고 특히 시 같 은 것에는 겁을 집어먹기까지 했다. "이 건 시처럼 이해할 수 없군." 그는 곧잘 이렇게 말하 곤 했다. 그리고 자기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언제나 시인 아이블라트의 다음과 같은 시구 를 인용했다. 비통한 나날이 끝날 때까지 자랑스러운 경험도, 지혜도 피에 물든 삶의 물망초를 그대 손으로 문지르진 못하리 알렉산드라는 근심 어린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꼬치꼬치 캐물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마차 한 대가 현관에 닿았다. '아아, 드디어 레디네프씨가 오시는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하인이 들어와서 루딘이 왔다고 알렸다. 볼르인체프는 책을 마룻바닥에 동댕이치고 머리를 들었다. "누가 왔다고?"하고 그는 물 었다. "루딘씨, 드미트리 니꼴라이치올시다. " 하인은 되풀이했다. 볼르인체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리 모셔라" 하고 말한 그는 "그런데 누님, 자 리를 좀 비켜주세요" 하고 알렉산드라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아니, 왜 그래?" 알렉산드라가 물었다. "하여튼 좀." 그는 성급히 누이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제발 부탁이니……‥ ." 루딘 이 들어왔다. 볼르인체프는 방 한복판에 버티고 선 채 냉정하게 인사할뿐, 손을 내밀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을 테죠?" 루딘은 이렇게 말하고 모자를 창턱에 얹었다. 그의 입술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어쩐지 겸연쩍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음의 동요를 감추려고 애쓰고 있었다. "정말 뜻밖이군요" 하고 볼르인체프가 대답했다. "하긴 어제 일로 봐서 누군가 다른 사람 이 오리라고는 생각했지요. 당신의 위임을 받은 사람(결투의 신청인을 암시함) 말입니다. " "당신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하고 루딘은 자리에 앉으며 말을 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솔직히 말씀해 주시니 더욱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 편이 훨씬 좋으니까요. 나도 당신을 훌륭 한 신사라고 믿기 때문에 찾아온 것입니다. " "서론을 빼고 말씀해 주실 순 없을까요?' 하고 볼르인체프가 쏘아붙였다. "나는 댁을 방문하게 된 이유를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 "우리는 서로 아는 사이인 데, 당신이 우리집을 방문했다고 해서 뭐가 이상하겠습니까? 게다가 오늘 처음 오시는 것 도 아닐 텐데. " "나는 오늘 고결한 인간으로서 역시 고결한 마음씨의 소유자인 당신을 찾아뵈러 온 것 입니다" 하고 루딘은 되풀이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당신의 판단에 따르려고 생각하고 있 습니다…… 당신을 절대로 신임하고 있으니까요……‥ ."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하고 볼르인체프카 물었다. 그는 여전히 한자리에 버티고 선 채 때때로 콧수염 끝을 실룩거리면 서 시무룩한 얼굴로 루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내가 여기 온 것은 물론 해명을 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아무튼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순 없으므로……‥ ." "왜 잘라 말할 수 없다는 건가요?" "이 문제에는 제삼자가 개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제삼자란 누군 데요?" "세르베이 파블르이치, 당신도 아실 텐데요." "드미트리 니롤라이치, 전혀 모르겠습니다. " "당신이 원하는 건……‥ ." "내가 원하는 건 수식어를 빼고 솔직하게 말씀해 달라는 겁니다!" 하고 볼르인체프가 대 꾸했다. "좋습니다…… 여긴 우리 둘뿐이니까…… 말씀드리기로 하죠. 하긴 당신도 아마 짐작하 고 있으리라 믿습니다만 (이때 볼르인체프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 록 당 신께 말씀드려야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나타리아 알켁세브나를 사랑하고 있고, 동시에 그 여자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낄 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 볼르인체프는 파랗게 질린 채 아무런 말도 없이 창가로 물러서서 등을 돌렸다. "당신은 이해하실 테죠, 세르게이 파블르비치?" 루딘의 말이 계속되었다. "만일 내가 그 런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 "좋아요!" 하고 볼르인체프는 성급히 그의 말을 가로챘다. "난 조금도 의심 하지 않습니 다……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다만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따위 소식을 가지고 나를 찾아오게 되었는지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도대체 나와 무슨 관계가 있 단 말입니까? 당신이 누굴 사랑하고 또 누구한테서 사랑을 받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닙니다.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군요." 볼르인체프는 여전히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힘 없이 울려 퍼졌다. 루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말씀드리죠, 세르게이 파블르이치. 왜 나는 당신을 찾 아오기로 결심했을까요, 왜 우리 두 사람의 사랑……우리 두 사람의 공통된 입장을 당신에 게 숨길 순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당신을 깊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 온 겁니다……‥‥우리 두 사람은 당신 앞에서 희극을 상 연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나도 나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 대신 그녀의 마음을 차지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이렇게 될 운 명이라면 잔재주를 부리고 기만을 하고 가면을 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 가지 오 해가 일어나고, 아니 어젯밤 식사때 일어났던 것과 같은 어색한 장면이 일어날 가능성, 그런 가능성을 그대로 방치해 둬도 좋을까요? 세르게이 파블르이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볼 르인체프는 자기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는 듯 가슴 위로 팔짱을 꼈다. "세르게이 파블르이치!" 하고 루딘이 말을 계속했다. 난 당신께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이해해 주십시오……우리들의 존경을 표시할 길은 달리 없었습니다. 당신의 정직하고 고결한 인격에 탄복하고 있다는 것을 달리 입증할 수 있 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씀드린다는 것이 다른 사람에겐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당신에게만은 의무로 생각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비밀이 당신 수중에 달려 있다는 걸 도리어 기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볼르인체프는 일부러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렇게 믿어주시니 고맙군요!"하고 그는 외쳤 다. "그러나 미리 말씀드려 두지만, 난 당신의 비밀을 알고 싶지도 않거니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마치 그것을 자기의 소유물처럼 마음대로 다루고 있군요. 그리고 실례지만, 당신은 아까부터 두 사람의 입장을 대신한 듯이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나타리아 알렉세브나도 당신의 이 방문과 방문의 목적을 알고 있다고 봐도 괜찮을 까요?" 루딘은 다소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닙니다. 난 나타리아 알렉세브나에게 여기 온다는 걸 말하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녀의 생각도 내 생각과 같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그것 참 좋군요." 잠시 말이 없다가 볼르인체프는 이렇게 말하고는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퉁겼다. "그러나 솔직히, 나로서는 당신의 존경을 받지 않는 편이 훨씬 더 고마웠을 것입니다. 사실 말이지 당신의 존경 같은 건 털끝만큼도 필요 없단 말입니다. 도대체 당신은 내게서 무엇 을 원하는 겁니까?" "난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아니 있습니다. 단 한 가지 원하는 것이 있지요. 다른 것이 아니라 제발 나를 간사하고 교활한 놈이라고 생각하진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 해서 나라는 인간을 이해해 달라는 거지요. 이젠 당신도 나의 성의를 의심하진 않으시겠죠. 세르게이 파블르이치, 난 서로 친구로서 헤어지고 싶습니다. 그전처럼 내손을 잡아주길 바라 는 거예요……‥ ." 이렇게 말하고 루딘은 콜르인체프의 곁으로 다가갔다. "미안하지만 그건 못 하겠습니다. " 볼르인체프는 몸을 돌리면서 이렇게 말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도 당신의 생각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용의는 있습니다. 모두 훌륭하 군요. 혹은 고상한 정신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을 테죠. 그러나 우리는 속인입니다. 그래서 그림에 그린 떡을 먹을 순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과 같은 위대한 두뇌의 소유자를 따라갈 순 엄단 말입니다…… 당신에게 성심성의로 보이는 것이 우리에겐 시끄럽고 무례하게 느껴 집니다…… 당신에겐 단순 명료하게 생각되는 것도 우리 눈에는 애매하고 어둡게 보인단 말 입니다. 우리라면 감춰두고 싶은 것을 당신은 자랑삼아 이야기 합니다. 자, 그러니 어떻게 우리 같은 속인이 당신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나는 당신을 친구로 생각할 수도 없고 당신에게 손을 내밀 수도 없습니다. 소견 좁은 탓인지도 모르지요. 원래가 소견머리 없는 사람이니까요. " 루딘은 창턱에서 모자를 집었다. "세르게이 파블르이치" 하고 그는 비통한 표정으로 말 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내 기대는 비참하게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정말 이상한 방문이 되고 말았군요. 그러나 나는 회망을 걸고 당신에게 (볼르인체프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움직였다. )……아, 미안합니다. 이젠 그런 말은 집어치웁시다. 그럭저 럭 생각해 보니 나도 알겠습니다. 당신의 말도 옳았어요. 당신으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안녕히 계십시오. 제발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내 생각엔 조금도 다른 뜻 이 없었다는 걸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겸손한 인격에 대해선 나도 확신하는 바이니 까요……‥ ." "그런 말은 집어치우세요." 볼르인체프는 이렇게 외치고 격분한 나머지 와들와들 몸을 걸었다. "난 조금도 당신의 신용을 바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나더러 겸손한 사 람이니 뭐니 하고 말할 권리가 없단 말이오!" 루딘은 무슨 말인가 더 하려다가 그만두고, 두 손을 벌려 보이고 머리를 끄덕인 후 나가 버렸다. 볼르인체프는 털썩 긴의자에 몸을 내던지고 벽쪽으로 몸을 돌렸다. "들어가도 좋으냐?" 하는 알렉산드라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볼르인체프는 이내 대답하지 않고 슬며시 얼굴을 한번 쓰다듬고 나서 "안돼요, 누님" 하 고 다소 변질된 어조로 대답했다. "조금 더 기다려 주세요. 30분쯤 지나서 알렉산드라가 다시 찾아왔다. "레디네프씨가 오셨어" 하고 그녀가 말했다. "만나보겠니?" "만나고 싶군요." 볼르인체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리 보내주세요." 레디네프가 들어 왔다. "왜 그래? 어디 편찮은가?" 그는 긴 의자 옆의 소파에 앉으며 이렇게 물었다. 볼르인체프는 몸을 일으켜 팔꿈치를 괴고는 한참 동안 덤덤히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더니 이윽고 조금 전에 있었던 루딘과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남김 없이 그에 게 털어놓았다. 그는 레다네프가 나타리아에 자신의 감정을 눈치채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면 서도 아직까지 한 번도 자기 감정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거참, 놀랄 만한 이야기로군." 볼르인체프가 이야기를 마치자 레디네프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굉장히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정말 뜻밖인데…… 하지만 그 자라 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 "농담은 마! 하고 볼르인체프가 흥분한 어조로 외쳤다. "사람을 바보 취급해도 분수가 있 지! 난 정말이지 당장 그 잘 창밖으로 집어던지고 싶었어. 대체 그 자식은 나한테 자랑하러 온 걸까, 아니면 겁이 나서 온 걸까?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단 말이야! 어떻게 그런 일을 가 지고 남의 집에 어슬렁어슬렁 찾아올 생각을 했을까……." 볼르인체프는 두 손을 머리 뒤로 얹고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그건 그렇지 않아." 레디네프가 침착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자넨 내 말을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순진한 의도에서 나온 거야…… 이건 사실이야. 확실히 그 방법은 고상하고 정직한 것이지 않나? 게다가 웅변을 발휘할 기회가 생겨서 자기 마음대로 미사 여 구를 구사할수 있거든. 바로 이것이 중요한 점이지. 그 자는 이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 어‥‥사실 혀는-그의 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거야……또한 그 혀는 그 자의 충실한 머 슴이기도 하지." "그자가 얼마나 거드름을 부리며 들어와서 이야기를 했는지 자넨 도저히 상상도 못 할 거야……!" "아무튼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니 할 수 없지, 그 자는 연미복의 단추를 끼우면서 도 마치 거룩한 의무라도 수행하는 듯한 얼굴을 한단 말이야. 그 녀석을 무인도에 데려다 놓고 거기서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래 한번 바라보고 싶을 정도야. 그런 주제에 노상 솔직담 백을 설교하고 있으니 가소로운 일이지 뭔가!" "그런데 여보게, 좀 설명해 주게" 하고 볼르인체프가 물었다. "그것도 일종의 철학이라는 건가?" "글쎄,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일종의 철학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면으로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네. 실없는 수작들을 모두 철학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 볼르인 체프는 레디네프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서 "그 자식, 거짓말 한 게 아닐까?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아니야, 거짓말은 아닐 거야. 그런데 어때? 우리 그런 말을 집어치우고 한대 피우기로 하세, 그리고 자네 누님도 좀 불러오고…… 자에 누님만 있으면 말하기도 좋고 가만히 있어 도 좋단 말이야. 또 차라도 대접해 주실 게 아닌가?" "그렇게 하지" 하고 볼르인체프는 대답하고 "누님, 들어오세요!" 하고 외쳤다. 알렉산드라가 들어왔다. 볼르인체프는 누이의 손을 잡고 힘껏 자기 입술에 가져다 댔다. 루딘은 꺼림칙한 기분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경거 망동과 어린아이 같은 단순성이 마음을 찔렀다. 사실 누구의 말인지는 모르나 바보짓을 한 다음 그것을 의식할 때처럼 괴로운 일은 없었다. 후회심이 갈기갈기 가 슴을 찢었다. "제기랄!" 루딘은 이 사이로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무엇 때문에 그 지주댁에 가게 됐을 까! 얼토당토않은 생각이지! 망신하러 간 것이나 다름없게 되지 않았는가……!" 다리아 부 인댁의 분위기도 어쩐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여주인은 오전중 한번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 고, 점심때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여주인 방에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판달레프 스키의 말에 의하면, 부인은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나타리아의 모습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봉크루와 함께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이다……식당에서 한 번 마주치긴 했으나 그녀는 말할 수 없이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므로, 루딘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 을 정도였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어제부터 무슨 불행에라도 시달리고 있는 듯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막연한 예감이 루딘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기분 을 풀려고 바시스토프를 상대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이 청년이 감격에 넘치 는 회망과 아직 더럽혀지지 않은 신앙을 가진, 열정적이고 활발한 청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녁녘에 다리아 부인은 두 시간쯤 응접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루딘한테는 여전히 다정하게 대하고 있었으나 어쩐지 거리를 두는 듯한 태도였고 어색한 미소를 짓는가 하면 갑자기 눈썹을 찌푸리기도 했다. 콧소리로 하는 그녀의 어조 속에는 이상한 암시까지 깃들 여 있어서……마치 궁중에서 일을 보는 귀부인 같은 인상을 풍기는 것이었다. 확실히 요 며칠 사이 루딘에 대해서 좀 쌀쌀해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그는 뒤로 젖혀진 여주인의 목덜미를 곁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날 밤 열 한 시 조금 지 나서 루딘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캄캄한 복도를 지나고 있으려니까, 느닷없이 어떤 사 람이 그의 손에 종이쪽을 쥐어주었다. 뒤돌아보니 총총 벌음으로 사라져가는 처녀의 뒷모습 이 눈에 띄었다. 나타리아의 몸종 인 듯싶었다. 루딘은 자기 방으로 돌아와 하인을 물리치고 쪽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나타리아가 직접 쓴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적혀 있었다. 내일 아침, 늦어도 일곱 시까지는 참나무 숲 뒤의 아브주힌 연못으로 나와주세요. 그 밖의 시간엔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마지막 상봉이 될지도 모르겠고, 경 우에 따라선 모든 것이 이 대로 끝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꼭 나와주세요. 빨리 결심 을 해야 하니까요……‥. 추신-만일 제가 못 나가게 된다면 그 이상은 만나 뵐 수 없는 것으로 아세요. 그때엔 따로 소식을 드리겠습니다만…… 루딘은 쪽지를 빙빙 돌리면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그것을 베개 밑에 간직하고는 옷을 벗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이내 잠들 수가 없었다. 그는 자는 등 마는 등 눈을 붙였 다가 다섯 시가 되기 전에 눈을 뜨고 말았다. 9 나타리아가 밀회 장소로 정한 아브주힌이라는 연못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구실을 하지 못 하고 있는 곳이었다. 약 40년 전 둑이 무너진 이래 지금까지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 서 지금은 끈적끈적한 점토로 뒤덮여 있는 편하고 매끄러운 골짜기 바닥과 무너진 채 남아 있는 제방으로 해서 간신히 못자리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전에는 이곳에 지 주 저택이었으나 까마득한 옛날에 이미 없어져버리고, 지금은 두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만 이 옛날을 회상하고 있을 뿐이었다. 소나무의 가느다란 잎들은 언제나 몰아치는 바람에 불 길한 소음을 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이 고장 사람들 사이에서는 바로 이 소나무 밑 에서 무서운 범죄가 일어났다는 해괴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소나무는 항상 넘어질 때마다 사람을 죽이곤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여기에 또 하나의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 역시 폭풍에 의해 넘어지면서 계집아이를 압사시켰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연못 주위는 불길한 장소로 알려져 있었다. 황량한 벌거숭이 인데다가 날씨 좋은 대낮에조차도 몹시 쓸쓸하고 음산했다. 게다가 이미 오래전부터 바삭바삭 말라 죽은 참나무 숲이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더욱 음침하고 쓸쓸한 기분을 돋우어주었다. 잿빛 해골 비슷한 큰 나무들이 낮은 관목 숲 위에 드문드문 솟아 있는 모습은 음울한 망령 과도 흡사했다.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심술궂은 노인들이 모여서 무엇인가 불길한 일을 꾸미고 있는 듯 오싹 소름이 끼쳤다. 또한 간신히 눈에 띄는 좁다란 오솔길이 한옆으로 꼬 불꼬불 굽이져 있었다. 그래서 특별한 용무다 없는 한 아무도 아브주힌 못가를 지나려고 생 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타리아는 일부러 이렇게 한적한 장소를 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 기는 집에서 반 베르스타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루딘이 아브주힌 못까지 왔을 때는 이미 해가 솟은 지 오래였으나 여전히 음산한 날씨였 다. 촘촘히 들어선 우윳빛 비구름이 하늘 전체를 뒤덮고, 세찬 바람이 아우성을 치며 그들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루딘은 몸에 달라붙는 덩굴이며 거무튀튀한 쐐기풀이 가득 자란 둑 위 를 이리저리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은 평온하지 않았다. 이러한 밀회의 새로운 감촉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지만 그를 설레게도 했던 것이다. 특히 어젯밤 편지를 받 고 난 후부터 그의 불안은 더했다. 그는 끝장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속으로 당황하 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굳은 결심을 한 듯이 가슴에 팔짱을 끼고 주위를 살피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본다면, 아무도 그가 당황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언젠가 피 가소프가 그를 중국의 우상처럼 머리통만 크다고 말한 것도 전하 무의미한 말은 아닌 성싶 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머리를 가졌더라도 그 머리만으로는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 는 일까지 샅샅이 알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그래서 투철한 통찰력과 현명한 머리를 가진 루딘조차도, 자기는 과연 나타리아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그 자신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 일까, 그녀와 헤어지면 고통스러울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명확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 던 것이다. 그렇다고 로블라스(영국 소설가 리처드슨 작 (클라리사 할로)의 주인공. 돈 환 유의 인물) 같은 태도를 취한 것도 아닌데-이 점에선 그의 성실성을 인정해 줘야 한다-왜 그는 가련한 처녀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말았을까? 그리고 왜 그는 지금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단 하나밖에 없다-냉정한 사람 일수록 남에게 매혹되기 쉽다고. 그는 둑 위를 거닐고 있었다. 이때 나타리아가 이슬 맺힌 풀을 헤치며 성급히 들판을 가 로질러 오는 것이 보였다. "아씨! 아씨! 발이 젖어요." 몸종인 마샤가 간신히 뒤쫓아오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타리아는 그 말엔 귀도 기울이지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으며 쏜살같이 달리기만 했다. "아아, 들키지 말아야 할 텐데!" 하고 마샤는 되풀이 했다. "집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만도 이상할 정도예요. 봉크루양이 눈을 뜨지 말았으면 좋을텐데…… 아, 이제 얼마 안 남 았어요…… 저런, 벌써 기다리고 계시네요." 문득 들 위에 그림처럼 서 있는 루딘을 발견하 고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저렇게 눈에 띄는 곳에 서 계시지 말고, 둑 밑에 내려가 계셨 으면 좋으련만." 나타리아는 걸음을 멈추었다. "마샤, 넌 여기서 기다려. 이 소나무 옆에서." 그녀는 이렇 게 말하고 못으로 내려갔다. 루딘은 그녀가 옆으로 다가가자, 깜짝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그런 표 정을 보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눈썹은 가운데로 쏠리고 입술은 꼭 다물어졌으며 두 눈 은 날카롭게 정면을 쏘아보고 있었다. "드미트리 니콜라이치" 하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린 지금 낭비할 시간이 없어요. 전 5분 후면 들어가야 하니까요. 먼저 말씀드려 두겠는데, 어머니 께선 우리의 관계를 모두 알 고 계세요. 판달레프스키가 그저께 밤에 우리들의 밀회를 엿보고 일러바친 거예요. 그는 지 금까지 언제나 어머니의 스파이였으 니까요. 그래서 전 어제 어머니한테 불려갔었어요." " 뭐요!" 하고 루딘이 외쳤다. "그거 큰일났군요…… 그래, 어머니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 별로 노하시지도 않고, 욕하시지도 않았어요. 그저 경솔한 짓이라고 꾸짖었을 뿐이에요. " "그뿐이 던가요?" "예, 그리고 당신에게 시집갈 정도라면 차라리 내 앞에서 죽어주는 편이 낫다고 하셨어 요. " "아니, 그런 말까지 하셨나요?" "예, 또 이런 말도 하셨어요. '그분 자신은 조금도 너와 결혼할 의사는 없고, 다만 지루 한 데서 오는 연애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그분이 그렇게 나을 줄은 몰랐다, 하긴 나 자신도 나빴다, 너희들을 자주 만나게 허락해 준 내가 나빴다…… 그래도 난 네 이성만을 믿고 있었는데 이렇게 날 놀라게 만들다니……‥' 아무튼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일일이 다 기억할 순 없어요." 나타리아는 이 모든 것을 조금도 굴곡이 없는, 거의 속삭이는 듯한 일관된 어조로 말해 버렸다. "그래, 당신은 뭐라고 대답하셨지요?" 루딘이 물었다. "제가 뭐라고 대답했냐구요?" 하고 나타리아가 되물었다. "아니, 그보다도 당신은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작정인가요?" "아아! 큰일이군요!" 하고 루딘은 말했다. 너무 참혹합니다! 이렇게 빨리!……이런 뜻밖의 타격을 받게 되다니! 어머니 가 그렇게까지 노하고 계셨나요?" "예 ……말할 수도 없었어요. 당신 말이라면 듣기도 싫 다더군요. " "그건 너무하군! 그렇다면 희망은 절대 없군요?" "없어요. " "어째서 우린 이렇게 불행할까요! 그 판달레프스키라는 자는 정말 비열 한이군요! ……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당신은 나더러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물으셨지요? 나는 지금 머리가 빙빙 돌아서 아무것도 생각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저 나 자신의 불행을 통감할 뿐입니 다……어떻게 당신은 그 정도로 냉정할 수 있습니까,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 "당신은 제 마음이 괴롭 않은줄 아시나요?" 하고 나타리아가 말했다. 루딘은 둑을 거닐기 시작했다. 나타리아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머니는 당신에게 여러 가지를 캐물었을 테죠?" "예, 물론이지요.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어떤지를," "그래서 당신은?" 나타리아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전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루딘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언제나 결백하고 고상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아, 처녀의 마음이란 정말 순금과 다름없군요!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우리들의 결혼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그렇게 딱 잘라 말씀하셨나요? "예,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어머니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당신에겐 결혼할 의사 가 전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계시는걸요." "그렇다면 어머니는 나를 사기꾼으로 생각하시는군요!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기에 그 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루딘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드미트리 니콜라이치!" 하고 나타리아가 말했다. "그런 말을 해봤자 시간만 허비할 뿐이 에요. 제가 당신을 만나는 것도 이것으로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세요. 제 가 여기 온 것은 울기 위해서도, 불평을 하기서도 아니예요-자, 제 얼굴을 보세요. 전 울지 않아요-전 당신의 지시를 받으려고 온 거예요. " "나타리아 알랙세브나, 내가 무슨 지시를 할 수 있겠소?" "무슨 지시냐구요? 당신은 남자예요. 전 지금까지 당신의 말을 믿어왔고 앞으로도 끝까지 믿을 작정이에요. 그러니까 말씀해 주세요, 당신의 생각을." "내 생각을요? 어머니는 아마도 나를 그대로 저택에 남게 하진 하지 않을거예요. " "그럴지도 몰라요. 어머니는 어제만 해도 당신과의 교제는 끊어 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러나 그건 제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니예요." "어떤 물음이죠?" "이제부터 우리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 거기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묻고 있는 거예요. "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 루딘이 대꾸했다. "어차피 단념하는 수밖에 없겠죠. " "단념 한다구요?" 나타리아는 천천히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녀의 입술이 점점 파랗게 질려갔다. "운명에 복종해야지요" 하고 루딘은 말을 이었다.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괴롭 고 슬프고 참을 수 없다는 것을 나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타리아 알렉 세브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난 가난합니다……물론 일해서 벌 순 있습니다만, 가령 내가 부자라 할지라도 강제로 가족과 인연을 끊고 어머니의 분노를 사면서까지 당신이 태연히 참 아 나갈 수 있다고 각하십니까? …… 안 됩니다.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그런 건 생각할 여지 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우린 결합될 수 없는 운명인가 봅니다. 따라서 내가 꿈속에 그리고 있던 행복도 결국은 공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나타리아는 갑자기 두 손에 얼굴 을 파묻고 혹혹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루딘이 그녀 옆으로 다가섰다.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사랑하는 나타리아!" 하고 그는 열띤 어조로 말했다. "울지 마세 요. 제발 날 괴롭히지 마십시오. 진정하세요……‥ ." 나타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저보고 진정하라는 건가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은 눈 물 때문에 반짝 빛났다. "전 당신과 같은 생각에서 우는 건 아니예요. 단념하는 것이 괴로워 서 우는 것이 아니예요. 전 당신을 잘못 봤다는 것이 괴로운 거예요…… 정말 분해요! 전 당신의 지시를 받으러 왔던 거예요. 게다가 이렇게 귀중한 순간에 만나자마자 단념…… 단 념이라 하시니! 당신이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자유니 희생이니 하는 것을 이런 데에 실 지로 적용시키는군요……." 그녀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그러나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하고 루딘이 당황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난 결코 자신의 주장을 꺾고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당신은 아까 물으셨죠?" 그녀는 새롭게 힘을 주면서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우리들의 결 혼에 동의하기보단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말했을 때 제가 뭐라고 대답했느냐고요? 그때 저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죽어버리고 말겠다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도 당신은 단념하라고만 하시니!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어요. 당신은 그저 심심풀이로 절 놀린 거나 다름없어요‥‥."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맹세합니다…… 결코 그렇진 않습니다……." 하고 루딘은 자꾸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나타리아는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왜 당신은 그때 자를 말리지 않 으셨지요? 왜 당신 쪽에서 먼저…… 아니, 당신은 이런 장해가 있으리라는 것을 예견하지 못하셨나요? 이런 말을 하기에는 제 낯이 뜨겁지만…… 어쨌든 모든 것은 끝나고 말았으니 까……‥."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우리 둘이서 잘 생각해 봅시다. 어떤 방법 이 있는지……." 하고 루딘이 말을 시작했다. "당신은 곧잘 자기 회생이라는 걸 말씀하셨죠?" 하고 그녀는 루딘의 말을 가로챘다. "그 렇지만 만일 오늘 이 순간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결정할 순 얼다, 미래를 보장할 힘도 없다, 하지만 내 말을 믿고 나를 따라와라' 고 말씀하셨다면, 아시겠어요? 그랬더라면 전 당신을 따라갔을 거예요. 아시겠어요? 전 어떤 회생이라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었던 거예요. 그러나 역시 말과 실천은 거리가 먼가 보군요. 당신은 사홀 전 식사때 볼르인체프씨 앞에서 겁에 질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겁에 질려 있는 거예요!" 루딘의 얼굴이 벌 겋게 달아올랐다. 뜻하지 않은 나타리아의 열변에도 놀랐거니와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가 그 의 자존심을 손상시켰던 것이다. "당신은 너무 흥분했습니다,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하고 루딘은 말했다. "당신이 나를 얼마나 모욕했는지, 당신 자신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내 태도가 옳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당신의 말마따라 아무 의무도 없는 이 행복을 저버려야 하는 나의 이 괴로움을 이해할 때가 오겠지요. 내 입장으 로 보면 당신의 안녕(安寧)이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이 행 복을 이용하게 된다면, 나는 가장 비굴한 인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그럴지도 몰라요." 나타리아는 다시 그의 말을 가로챘다. "당신 말씀이 옳을지도 몰라요. 전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그렇지만 건 지금까지 당신 을 신뢰했고 당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믿어왔어요……앞으론 제발 무슨 말을 하시려거든 먼저 잘 생각하셔서 제멋대로 지껄이지는 말아주세요.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전 벌써 그 말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어요. 전 어떤 난관이든 돌파할 각오 가 되어 있었어요……그러나 지금은 좋은 교훈을 주신 데 대해서 감사를 드리고 헤어지는 수밖에 없군요. " "제발 기다리세요,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부탁입니다. 난 맹세합니다만, 당신의 멸시를 받 을 만한 일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 한번 내 입장이 되어봐 주십시오. 나는 나 자신뿐만 아니 라 당신까지도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이 헌신적인 참된 사 랑이 아니었다면-그런 일이 있어서는 큰일이지만-당장 함께 도망가자고 당신께 말했을 것 입니다…… 하지만 조만간에 당신 어머니도 우릴 용서해 주실 테고…… 그땐 그러나 자기자 신의 행복을 생각하기에 앞서……‥." 그는 여기서 말을 멈추었다. 정면으로 쏘아보는 나타 리아의 야무진 시선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당신은 지금 자기가 결백한 사람이란 것을 입증하려고 애쓰고 있는 거죠, 드미트리 니 콜라이치?"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 점이라면 저도 의심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무슨 타산에 따라서 행동하진 않으니까요. 그러나 제가 확신하고자 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예요. 그런 것을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은 결코 아니란 말이에요……."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나타리 아 알렉세브나……‥." "아아! 이제 비로소 실토를 하시는군요! 확실히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예기치 못했던 거예요. 저라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걱정하진 마세 요……당선은 저를 사랑하지 않지만 저도 누구한테나 사랑을 강요하진 않으니까요. " " 전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루딘이 외쳤다. 나타리아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요? 전 당신이 하신 말을 모두 기억 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기억하시겠죠, 제게 이런 말을 하신 것을. 완전한 평등이 없이는 사 랑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당신은 너무 과분한 분이어서 제게는 어울리지 않아요. 그러니 까 전 당면한 벌을 받은 셈이죠. 당 신에겐 당신에게 어울리는 보다 고상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아무튼 전 오늘을 영원히 잊지 않을 거예요…… 안녕히 계세요……‥." "나타리아 알릭세브나, 가시는 겁니까? 이렇게 우리는 헤어지고 마는 건가요?" 그는 나타리아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나타리아는 걸음을 멈추었다. 애원 어린 그의 목소리다 그 녀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리라. "아니예요." 그녀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무너진 듯한 느낌 이 들어요…… 여기 을 때나 당신과 이야기할 때 전 열병에 걸린 사람과 같았어요. 그러니 이젠 정신을 차릴 때가 됐지요. 당신의 말마따라, 그건 있을 수 없는, 실현될 수 없는 허망 한 것들이에요. 아아, 전 여기에 오면서 마음속으로, 다정한 집이며 내 모든 과거에 작별을 고했었어요-그런데 어떻습니까? 제가 여기서 본 사람은 소심한 겁쟁이였습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어째서 제가 가정을 떠나선 못 살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당신 어머니가 찬 성하지 않으니…… 큰일났군요!' 이것이 당신 입에서 나온 말의 전부였습니다. 이것이 당신 이 하실 말씀이었던가요? 이것이 루딘씨의 말씀인가요? 역시 헤어져야 해요……아아,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저를 사랑하고 계신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전 그것을 느낄 수 있을 거예 요…… 아아, 틀렸어요. 우린 헤어져야 해요……‥." 그녀는 날쌔게 몸을 돌리고는 아까부터 근심스러운 듯이 손짓을 하고 있는 마샤 쪽으로 달려갔다. "겁쟁이는 당신이지 내가 아니예요!" 루딘은 나타리아 뒤에서 이렇게 외쳤다. 나타리아는 루딘을 아랑곳하지 않고 들판을 가로질러 집을 향해 걸음을 둘렀다. 그녀는 무사히 집까지 왔으나 침실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갑자기 힘이 빠지며 의식을 잃고 마샤 의 팔에 쓰러지고 말았다. 루딘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멍청히 둑 위에 서 있다가 이윽고 부르르 떨면서 어슬렁어슬 렁 오솔길까지 내려와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모욕감과 슬 픔으로 가슴이 메는 것 같았다……‥'무슨 여자가 그럴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열 여덟 살밖에 안 됐는데! ……아니, 잘못 봤어……정말 훌륭한 처녀야. 그 굳센 의지! 그녀의 말대 로, 그녀는 내가 느끼고 있던 그런 사랑으론 어울릴 수 없는 처녀야 ……아니, 내가 느끼고 있던 사랑이라니?' 하고 그는 자문했다. '그렇다면 난 벌써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 일까? 아아, 이 모든 것이 이렇게 덧없이 끝날 줄이야! 그녀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가련하 고 초라한 인간이 되고 말았는가!' 루딘은 문득 가벼운 경주 마찻소리에 눈을 들었다. 맞은편에서 레디네프가 마차를 몰고 오고 있었다. 루딘은 묵묵히 인사를 나누었으나, 갑자기 무슨 생각에 놀라기라도 한 듯 한길 을 벗어나 다리아 부인 집을 향해 재빨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레디네프는 그가 멀어질 때까지 유심히 그의 뒤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그도 잠시 생 각에 잠기더니 말머리를 돌려서 볼르인체프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어젯밤 볼르인체프 집 에서 묵고 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볼르인체프 집에 가보니 주인은 아직까지 자고 있었다. 그 는 하인에게 그를 깨우지 말라고 이르고는 차를 기다리는 동안 발코니에 앉아서 담배를 태 우기 시작했다. 10 볼르인체프는 아홉 시가 지나서야 일어나 레디네프가 발코니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깜짝 놀라며 방으로 모시라고 일렀다. "무슨 일이야?" 하고 그가 물었다.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잖나?" "그랬는데 돌아가는 길에 루딘을 만났어…… 혼자 들판을 걷고 있었는데, 몹시 우울한 표정이더군. 그때 갑자 기 돌아오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루딘을 만났기 때문에 돌아왔다고?" "아니, 사실은 나도 왜 돌아왔는지 잘 모르겠어. 아마 자네 생각을 했기 때문일 테지. 어 쩐지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져서 말이야. 집에 돌아가는 건 다음이라도 늦지 않으니 까." 볼르인체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젠 루딘을 생각하면 으레 내 생각을 하지 않곤 못 배기게 됐군 그래! ……거봐!" 하고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차 좀 가져와. " 두 친구는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레디네프는 영지의 경영법을 위시하여 곡물 창고를 종 이로 만드는 새로운 방법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때 갑자기 볼르인체프가 벌떡 자 리에서 일어나더니 찻잔과 접시가 울릴 정도로 힘껏 탁자를 내리쳤다. "안 되겠어!" 하고 그는 외쳤다. "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그놈에게 결투를 신청해서 그놈의 손에 내가 죽든지, 아니면 그 똑똑한 체하는 이마빼기에 한방 쑤셔넣어 주든지 결판 을 내야겠어!" "아니, 자네 왜 그러나!" 하고 레디네프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 이 어디 있어? 덕택에 파이프를 떨어뜨렸다네…… 도대체 어떻게 됐다는 거야?" "난 얌전 히 그놈의 이름을 듣고 있을 수가 없단 말이야. 온몸의 피가 끓어 올라서." "그만두게, 그 만둬! 자넨 부끄럽지도 않은가!" 하고 레디네프는 마루에서 파이프를 집어 올리며 대꾸했 다. "그까짓 놈은 내버려두라니까……‥." "그놈은 날 모욕했어," 볼르인체프는 방안을 왔 다갔다하며 말을 이었다. "암, 나를 모욕하다마다. 자네도 그건 인정하지 않을 수 얼겠지. 처음 얼마 동안은 나도 어리둥절해서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어. 게다가 누가 그런 걸 짐작 이라도 했겠나 말이야, 그러나 이젠 그놈에게 본때를 보여줄 때가 왔어. 내가 농락당할 존 재가 아니라는 걸 입증해 줘야겠단 말이야……그 저주받을 철학가 녀석을 자고(꿩과에 속 하는 새)라도 쏘듯이 처치해 버려야지."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수라도 생길 줄 아나! 난 자네 누이에겐 이 일을 말하지 않으려네. 자넨 지금 정열의 도가니 속에 파묻혀 있으니 까…… 물론 누이 같은 건 염두에도 없겠지! 그러나 또 한 사람의 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 지야. 그 철학가 녀석을 쏴 죽인다고 해서 사태가 회복되리라고 생각하나?" 볼르인 체프는 안락의자에 털썩 몸을 던졌다. "그렇다면 멀리 여행이나 떠나지! 여기 있어봤자 가슴 이 아파서 못 살 거야. 우선 맘 붙일 곳이 없으니 말이야. " "멀리 떠난다……그렇다면 문젠 다르지! 그건 나도 찬성이야. 그럼 이렇게 해보면 어때? 나와 함께 떠나는 거야! 카프카즈나 혹은 가까운 소러시아에라도 가서 가루쉬키(소러시아의 유명한 음식명)라도 먹고 오지. 어때, 그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좋긴 한데, 누님은 누구 한테 맡기지?" "누님이라고 함께 떠나지 말라는 법은 없잖나? 그건 정말 멋질 거야. 누님의 시중이라면 내가 맡도록 하지! 아무것도 불편하게 하진 않을 걸세, 자네 누이만 원한다면, 매일 밤이라 도 창 밑에서 세레나데를 울리게 하고 마부들에겐 오 드 콜로뉴를 풍기게 하고 길가에 꽃까 지 심을 용의가 있다네. 우린 아마 완전히 딴 사람이 되고 말 걸세. 마음껏 즐긴 다음 잔뜩 배를 불리고 돌아 오면, 그땐 이미 어떤 사랑도 몸에 스며들지 않을 어란 말이야." "농담 은 그만둬 미샤(미하일로의 애칭)!" "이건 절대로 농담이 아니야. 자넨 정말 좋은 착상을 했어." "아니야! 실없는 생각이야" 하고 볼르인체프는 또다시 외쳤다. "난 결투를 하겠어 ! 그놈하고 결투를 하는 거야!" "또 그런 말올! 자넨 오늘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니로군……." 그때 하인이 편지를 들고 들어왔다. "어디서 온 것이냐?" 하고 레디네프가 물었다. "루딘씨, 드미트리 니콜라이치에게서 온 겁니다. 다리아 부인댁의 하인이 가지고 왔어요. " "루딘에게서?" 하고 볼르인체프가 되물었다. "누구 앞으로?" "나리 앞으로올시다. " "내 앞으로?……이리주게." 볼르인체프는 편지를 움켜쥐자, 재빨리 겉봉을 뜯고 읽기 시작했다. 레디네프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볼르인체프의 얼굴에는 거의 기쁨에 가까운 경악 의 빛이 나타났다. 그는 힘없이 손을 내렸다. "무슨 편진가?" 레디네프가 물었다. "읽어보게." 볼르인체프는 나직한 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편지를 내밀었다. 레디네프는 읽기 시작했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 친애하는 볼르인체프 형 ! 나는 오늘 다리아 미하일로브나의 집을 떠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한 작별일 것입 니다. 어제 같은 사건이 있은 후고 보니, 노형의 놀라움은 더욱 크실 것이라 사료됩니다. 무 엇 때문에 소생이 떠나야 하는가는 구태여 설명하고 싶지도 않습니다만, 어쨌든 떠나는 마 당에서 노형께 소식을 전하는 것이 소생의 의무라고 느껴집니다. 노형은 소생을 좋아하지도 않고, 심지어 소생을 악인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겠지만, 소생은 조금도 변명하고 싶은 생각 은 없으며, 오로지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고 믿을 뿐입니다. 편견을 가진 사람에게 그 편견의 부당성을 증명한다는 것은 무익한 일인 동시에 남자들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소생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소생을 용서해 줄 것이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거나 이해할 능력이 없는 자의 비난은 소생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소생은 노형을 잘못 이해했었습니다. 소생의 눈에 비치는 노형은 여전히 고결하고 순진한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만, 그래도 소생은 노형이 지금 성장하고 있는 환경을 초월해서 한층 더 높은 곳에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소생의 잘못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 겠습니까? 이것은 지금 처음 시작된 것도 아니고 또 마지막도 아닐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 립니다만, 소생은 노형의 행복을 바라며 떠나갑니다. 이것은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소생의 염 원키라는 것을 믿어주시기 바라며 노형도 앞으론 행복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소생에 대한 노형의 오해도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해소될 것입니다. 앞으로 다시 한 번 만나 게 될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이쨌든 소생의 노형을 존경하는 마음은 영원토록 변치 않을 것입니다. D. R. 추신-노형한테 빌려 쓴 2백 루블은 고향인 T현에 닿는 대로 송금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리마 미하일로브나에게는 이 편지 내용을 말씀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재추신-또 한 가지 마지막으로 중요한 부탁이 있습니다. 소생은 이미 떠나는 몸이 되 었으니 어제 노형댁을 방문했던 건에 대해서는 나타리아 알렉세브나예게 말하지 마시기를 겸해서 부탁드립니다……." "자, 어때?" 레디네프가 편지를 읽고 나자, 볼르인체프가 이렇게 물었다. "할 말이 없군!" 하고 레디네프가 대답했다. "동양식으로 '알라의 신이여! 알라의 신이 여'라고 외치며 입속에 손가락을 틀어박고 놀라는 수밖에 없군 그래! 그 자가 떠나간다…… 암, 갈 자는 가야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자가 이 편지를 의무로 생각하고 썼다는 거 야. 아마 자네를 찾아온 것도 이 의무감에 쫓겨서 온 것임에 틀림없어…… 그런 작자들은 자나깨나 의무란 말이야, 노상 의무지. 자, 여기에도 의무가 있군그래" 하고 레디네프는 추 신을 가리키며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무슨 말투가 이런가!" 볼르인체프가 외쳤다. "소생은 노형을 잘못 이해했다, 소 생은 노형이 환경을 초월해서 좀더 높은 곳에 서 있으리라 믿었다…… 아니 이거, 무슨 잠 꼬대 같은 소린가. 정말 이건 시보다도 더 까다롭군. " 레디네프는 아무 대답도 없이 눈웃 음만 치고 있을 뿐이었다. 볼르인체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다리아 미하일로브나에게 갔다 오겠네" 하고 볼르인체프가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어서……‥." "좀더 기다려. 그 자가 떠난 다음에 가도 늦지 않아. 그리고 이제 그놈과 마주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가 스스로 떠나간다는데, 자넨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어? 그보다 침실에 가서 한잠 자는 편이 훨씬 날 걸세. 어젯밤은 한잠도 못 자고 뒤척이기만 했으니. 그럭저럭 자네 일도 잘되어 가는군……‥." "무엇으로 그런 결론을 내리는 건가?" "아니, 그저 그런 생각이 들 뿐이야. 자, 한잠 자게, 난 이제부터 자네 누님한테 가서 한 바탕 지껄이고 올 테니." "잠이 안 오는데 어떻게 자란 말이야? …… 오히려 밖에 나가 밭을 돌보는 편이 낫겠 네." 볼르인체프는 외투 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도 좋겠군. 어서 가서 밭이나 돌아보고 오게……‥." 레디네프는 알렉산드라의 방 으로 향했다. 그녀는 응접실에 앉아 있었는데, 정답게 그를 맞아주었다. 그녀는 언제나 레 디네프의 방문을 기뻐했으나 오늘 따라 그녀의 얼굴은 수심에 가득 차 있었다. 어제 루딘의 방문이 그녀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동생한테서 오시는 길이에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오늘은 좀 어때요?" "괜찮습니 다. 지금 밭을 보러 나갔어요. " 알렉산드라는 말이 없었다. "저, 부탁이니 말씀해 주세요." 이윽고 그녀는 물끄러미 손수 건 가장자리를 바라보며 말을 시작했다. "당신은 아시죠, 무슨 일로……‥." "무슨 일로 루 딘이 왔느냐 말이죠?" 하고 레디네프가 말을 받았다. "알지요, 그는 작별하러 온 거예요." 알렉산드라는 머리를 들었다. "뭐요? 작별이라구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모르셨던가 요? 그 사람은 다리아 부인댁을 떠나는 겁니다. " "떠나다니요?" "예, 영원히. 어쩠든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아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군요. 그렇게 환대받고 있었는데 ……‥." "그것과는 문제가 다르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건 사실입니다. 틀림없이 무슨 사건이 있었을 거예요. 현을 너무 팽팽히 죄었기 때문에 끊어졌을 테죠. "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 하고 알렉산드라는 말했다. "전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어요. 당신이 자꾸 절 놀리는 것만 같아서……‥."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루딘은 떠나는 거예요. 게다가 그것을 친구에게 편지 로 알리고 다니는 형편이랍니다. 구태여 말씀드릴 것까진 없습니다만, 그건 어떤 면으로 보 면 오히려 잘된 일일 겁니다. 그건 그렇고 그 사람의 출발이 어떤 놀랄 만한 계획을 망쳐놓 고 말았어요. 방금 동생과도 그 계획을 의논하고 있던 참이었지만요." "뭔데요, 그 계획이 라는 건?" "다른것이 아닙니다. 전 동생에게 기분을 풀 겸 어디 여행이라도 가자고 권유했던 거예 요. 그리고 당신도 모시고 가자구요. 당신의 시중은 제가 도맡기로 하고. " "그것 참 좋군 요!" 하고 알렉산드라가 외쳤다. "당신이 제 시중을 들어주신다니, 가히 짐작할 수 있겠어요. 어차피 굶주림에 시달리게 할 것이 뻔하니까요. "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당신은 나라는 인간을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시는거예요. 당신은 저를 목석과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계시 죠. 인정이라는 것이 없는 목석, 다시 말해서 나무토막과 다름없이 생각하고 계실 테지만, 이래봬도 설탕처럼 녹을 줄도 알고, 며칠이고 무릎을 꿇고 지낼 수도 있다는 걸 아셔야 해 요. " "저런, 그런 장면을 한 번 보고 싶군요!" 레디네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와 결혼해 주세요,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언제라도 그걸 보실 수 있을 테니까요. " 알렉산드라는 귀밑까지 빨개졌다. "아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미하일로 미하일르이 치7" "저는 말입니다" 하고 레디네프가 대답했다. "그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말을 입밖에 냈을 뿐입니다. 드디어 말을 꺼내고 말았으니 이젠 당신 마음대로 결정해 주십시오. 제가 있으면 거북하실 테니 나가죠. 만일 당신이 제 아내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전 이대로 돌아 가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싫지 않으시다면 절 불러주세요. 그것으로 전 가부를 결정지을 테니까요. " 알렉산드라는 레디네프를 말리려고 했으나, 그는 재빨리 방을 빠져나와 모자도 쓰지 않 은 채 정원으로 나가서는 사립문에 몸을 기대고 선 채 멍청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 그의 뒤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님에게 가보세요. 불러오시라는 분부였어요."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는 몸을 돌리자 갑자기 두 손으로 하녀의 머리를 붙잡고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그러고는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하녀를 남겨둔 채 알렉산드라 파블로 브나의 방으로 되돌아갔다. 11 레디네프와 마주친 후 바로 집으로 돌아온 루딘은 자기 방에 들어앉아 두통의 편지를 깼 다. 하나는 이미 독자들이 알고 있는 볼르인체프 앞으로 쓴 것이고, 또 하나는 나타리아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두 번째 편지는 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많은 부분을 지우고 고쳐 쓴 다음 다시 엷은 편지지에 정중히 옮겨 적고, 될 수 있는 대로 작게 접어서 호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는 비애에 잠긴 표정으로 방안을 오락가락하다가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아 팔꿈치 를 괴었다.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한 방을 살며시 흘러나왔다…… 그는 자리에 일어나 저고 리 단추를 끼우고 하인을 불러 다리아 부인을 만나 뵐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일렀다. 잠시 후 하인이 돌아와서 다리아 부인께서 기다리신다고 말을 전했다. 루딘은 여주인 방 으로 향했다. 다리아 부인은 두 달 전 처음으로 그를 맞이할 때와 마찬가지로 서재에서 기 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산뜻하고 단정한 복 장에 감격 어린 표정을 한 판달레프스키가 여주인 옆에 공손히 자리잡고 있었다. 다리아 부인은 루딘을 정답게 맞아주었다. 루딘도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러나 다소라도 인생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두 사람의 미소짓는 얼굴을 보는 순간, 서로 말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두 사람 사이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쉽사리 추측할 수 있었 을 것이다. 루딘은 다리아 부인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여주인도 상대방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판달레프스키의 밀고는 그녀의 마음을 무척 언짢게 했었다. 상류 사회의 거만한 본능이 고개를 쳐들었던 것이다. 관등도 없는 가난한 일개 무명서생 루딘이 자기 딸, 아니 다리아 미하일로브나 라순스카야의 딸에게 감히 밀회를 요청하다니 ! "비록 그 사람이 굉장한 천 재라 할지라도 말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다고 그런 짓을 묵과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누구나 다 내 사위가 되길 바랄 거예요. " "전 한참 동안 제 눈을 의 심했습니다" 하고 판달레브스키가 말을 받았다. "자기 신분을 몰라도 분수가 있지, 그런 놈 이 어디 있습니까!" 다리아 부인의 흥분은 굉장한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나타리아도 어머니에게 꾸지람을 듣게 된 것이다. 다리아 부인은 루딘에게 자리를 권했다. 루딘은 자리에 앉긴 했으나 이미 이 집의 주인 과 다름없었던 그전의 루딘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한 지인도 아니고 다만 하나의 손님, 그것도 가까운 손님이랄 수도 없는 서먹서먹한 손님에 불과했다. 이 모든 변화는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었다……마치 물이 별안간 얼음으로 변하듯이…… "다리아 미하일로브나, 오늘 제가 마님을 찾아뵈려고 한 것은," 하고 루딘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 지 신세 진 것을 사례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은 늘 시골에서 편지가 왔는데 오늘중으로 꼭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기 때문에……‥." 다리아 부인은 뚫어질 듯이 루딘의 얼 굴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선수를 쓰는군. 미리 눈치를 채고서.'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렇 게 생각했다. '덕분에 괴로운 변명을 듣지 않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한 일이지. 과연 똑 똑한 사람이라 다르군!' "어머, 그래요?" 하고 그녀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거 참, 안됐군 요! 그러나 할 수 없지요! 올 겨을 모스크바메서 만나 뵙겠군요. 우리도 곧 여길 떠나니까 요. " "다리아 미하일로브나, 지금 같아선 모스크바에 가게 될지 어떨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허락하는 한 꼭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 '아하, 꼴 좋군!' 판달레프스키는 자기대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집에서 나리 행 세를 하던 것이 언젠데 어느새 저 모양이 됐으니.' "그렇다면 무슨 불길한 소식이라도 받으신 거로군요?" 하고 판달레프스키가 언제나처럼 띄엄띄엄 사이를 두며 말했다. "그래요" 하고 루딘은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흉작이라도?" "아니……다른일입니다…… 저, 다리아 미하일로브나" 하고 루딘이 덧붙였다. "전 댁에서 보낸 즐거웠던 시간을 영원토록 잊지 않을 것입니다. " "드미트리 니콜라이치, 우리도 당 신과 사귀게 된 것을 기쁨과 더불어 늘 회상할 거예요……그런데 언제 떠나시나요?" "오늘 식사를 마치고 떠날까 합니다. " "아니, 그렇게 빨리요! ……그럼, 여행중 무사하기를 빌겠어요. 그러나 그쪽 일이 빨리 끝 나면 다시 여기서 만나 뵐 수도 있겠군요." "그건 아마 힘들 것 같습니다." 루딘은 이렇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한 가지 미안한 말씀이지만," 그는 말을 이었다. "마님에게 빌려 쓴 돈은 지금 갚을 수가 없으 므로, 고향에 도착하는 대로 즉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세요, 드미트리 니콜라이치!" 하고 다리아 부인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런 말을 하시다니, 부끄 럽지도 않으세요! 그런데 지금 몇 시나 됐을까?" 하고 부인이 물었다. 판달레프스키는 조끼 주머니에서 칠보 장식이 달린 금시계를 꺼내서 장밋빛 볼을 빳빳한 횐 칼라에 살며시 대면서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2시 12분이올시다" 하고 대답했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군요." 다리아 부인이 말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드미트리 니콜 라이치 !" 루딘은 일어섰다. 그와 다리아 부인 사이에 오고간 대화는 시종 어떤 이상스러운 음영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배우가 자기 배역을 연습하고 있는것 같기도 하고, 회의석상의 외교관 이 미리 준비한 말들을 되풀이하고 있는것 같기도 했다. 루딘은 방을 나섰다. 그는 지금까지 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사교계의 인사들이 자기에게 불필요해진 사람을 버리는 것은 마치 무도회가 끝난 다음 장갑이나 과자의 포장, 혹은 들어맞지 않은 복권 쪽지와 같이, 버 린다기보다는 차라리 떨어뜨리고 간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는 빨리 짐을 꾸려놓고는 출발 시간이 되기만을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 사람들은 그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 모두 어리둥절했다. 머슴들까지도 이상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시스토프는 자기의 슬픔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나타리아는 분명히 루딘을 피하고 있는 듯한 눈초리였고 될 수있는대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루딘은 자기 편지를 나타리아의 손에 쥐어줄 수 있었다. 식사때 다리아 부인 은 다시 한 번,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에 만나 뵙고 싶다고 말했으나 루딘은 이에 아무 대답 도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말을 많이 건 사람은 판달레프스키였다. 루딘은 당장 그에게 달 려들어 그 반지르르한 장밋빛 얼굴을 마음껏 후려갈기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으나 꾹 참았 다. 봉크루는 눈가에 능글맞은 이상한 표정을 치고 흘금흘금 루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 먹은 영리한 사냥 개에게서 이따금 이런 표정을 볼 수가 있다……‥'아하! 그것 봐요!' 그녀 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드디어 여섯 시 종이 울리고, 루딘의 여행 마차가 현관으로 들어왔다. 그는 급히 집안 식 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마치 쫓겨나는 듯 이런 꼴로 이 집을 떠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왜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두른 것일까? 그러나 결국은 마찬가지 일이다. ' 그는 마음에도 없는 미소 를 짓고 이 사람 저 사람과 인사를 나누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나타리아에게 눈 을 돌렸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의 눈은 작별을 비난하는 슬픈 표정을 담고 물끄러미 그 를 지켜보고 있었다. 루딘은 총총걸음으로 층계를 내려가서 여행 마차에 올랐다. 바시스토프 가 다음 정거장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하며 함께 마차에 올랐다. "저, 기억하십니까." 마차가 저택을 빠져나와 좌우 편에 전나무를 심은 넓은 한길로 접어 들자 루딘은 이렇게 말했다. "돈키호테가 공작 부인의 집을 떠날 때 자기 부하에게 한 말을 기억하고 있나요? '얘, 산초, 자유라는 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귀중한 보물 중의 하나다. 따라서 남의 동정을 받지 않고 그날그날의 양식을 얻을 수 있는 자는 행복한 거야!' 돈키호 테가 느낀 그때의 감정을 나는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선량한 바시스토프씨, 당 신도 언젠가는 이 기분을 느낄 때가 있을 거예요." 바시스토프는 루딘의 손을 꼭 쥐었다. 정직한 청년의 심장이 감격에 떠는 가슴속에서 세 차게 고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정거장에 도착할 때까지 루딘은 인간의 가치며 진정한 자유 의 의의에 대해 말했다. 그 말은 열렬하고 고상하고 진실미가 넘쳐 있었다. 드디어 헤어질 순간이 다가오자, 바시스토프는 더 이상 참지못하고 그의 목에 와락 달려들어서는 루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루딘 자신도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바시 스토프와의 이별이 서러워서가 아니라 자기 신세를 한탄한 눈물이었다. 나타리아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루딘의 편지를 읽었다. 사랑하는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나는 이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겐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떠나달라고 분명 히 말씀하시기 전에 스스로 물러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내가 떠남으로써 모든 오해는 풀 어지겠지만, 나를 애석히 여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기다리겠습니 까? 모은 것은 제대로 됐습니다. 그런데 나는 무엇 때문에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일까요? 아마 이것이 당신과의 영원한 작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기치 못했던 나쁜 추억을 당신 이 가슴에 남기고 떠나는 나의 심경은 너무나도 괴롭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드리는 것도 결국은 그 때문입니다. 나는 변명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나 이외의 누구를 책망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가능한 대로 당신께 나의 사정을 해명해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아무튼 지난 며칠 동안의 사건은 너무나 뜻밖이었고 당돌한 것뿐이었으니까요……‥ 오늘 아 침의 상봉은 내게 영원한 교훈으로 남을 것입니다. 당신의 말은 정말 옳았습니다. 나는 당 신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니, 모르면서도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요! 지금 까지의 생애를 통해서 나는 가지각색의 인간과 관계를 맺고, 수많은 여성들과 교제를 해왔 습니다만, 당신처럼 순결하고 정직한 마음씨를 가진 여성을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마음씨에 익숙하지 못한 나로서 당신을 옳게 평가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을 처음 알게 된 그날부터 나는 당신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꼈습니다-그건 당신도 눈치챘으리라 믿습니다. 나는 몇 시간씩이나 당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당신이라는 사람을 모르고 지냈 습니다.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그러면서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혼자 느 꼈던 것이지요! 그 죄 때문에 지금 나는 가혹한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전에도 한 여성을 사랑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쪽도 나를 사랑했습니다……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은 나에 대한 그녀의 감정과 마찬가지로 매우 복잡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이 단순한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 당시 나의 눈에는 진실한 면이 반영되지 못했던 거지요…… 이번에도 내 앞에 진실이 나 타났을 때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그 진실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늦었던 거지요. 지나간 것을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의 생명은 하나로 융합될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영원히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한 사랑-사상으로서가 아니라 마음속으 로부터의 사랑을 가지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지 나 자신도 분명히 알 수 없는 입장이고 보 니 어제 내가 그런 사랑을 가지고 당신을 사랑할 수 있다고 보증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 는 타고난 재질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나 자신도 의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쓸데없는 수치 심 때문에 당신 앞에 겸손을 부릴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처럼 괴롭고 수치스 러운 순간이고 보니 더욱 그렇게 생각되는군요…… 그렇습니다. 확실히 나에게는 많은 재 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내 힘에 어울리는 것을 하나도 완성해 놓지 못한 채 덧없 이 죽어가고 말 것입니다. 그 수많은 천분도 고스란히 시들고 말 것입니다. 나는 자신이 뿌린 씨의 열매를 보지 뭇하고 일생을 마칠 것입니다. 내게 부족한 것은-나 자신도 내게 무 엇이 부족한지 모르고 있는 형편이지만-아마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여성의 마음을 붙 잡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그 무엇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두뇌만을 지배한다는 것은 오 래 가지도 않거니와 또 무익한 일이기도 합니다. 겨의 희극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기묘한 나의 분명, 나는 탐욕스럽게 온몸을 바쳐 사물에 열중하면서도 끝까지 몰두하지 못하는 성 격입니다. 결국에 가선 자신이 믿지도 않는 보잘것없는 일에 나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일 생을 마치게 될 테죠…… 아아, 서른 다섯 살이나 되어 가지고도 여전히 무슨 일을 해야 할 지도 모르고 있으니까요! 나는 누구 앞에서도 이런 고백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나의 참회올시다. 그러나 나에 관해서는 이만 해두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에게 몇 마디 충고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이미 그 밖엔 아무것도 소용 없게 되었으니까요…… 당신은 아직 젊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얼마를 사시든 간에, 항상 마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결코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지혜에 굴복해서는 안 뇝니다. 제발 내말을 믿어주십시오. 생활의 범위는 단순하고 좁을수록 좋습니다. 그것은 생활 속에서 새로운 면을 발견할수 있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모든 생활의 변동은 기회를 얻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청춘 시절에 젊었던 사람은 행복하 니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 충고는 당신을 위해서라기보다 오히려 나 자신에게 적합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지요, 고백합니다만, 나타리아 알렉세브나, 나 는 지금 정말 괴롭습니다. 당신 어머니를 대하던 내 감정에는 조금의 위선도 없었습니다. 그 리고 잠시나마 휴식할 수 있는 장소를 발견한 것을 마음속으로부터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만…… 이젠 또다시 세상을 방랑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신 옆에서 당신의 이야기 를 듣던 그 기분, 당신의 주의 깊고 현명한 그 눈초리-아아, 앞으로 그 무엇이 그것들을 대신해 줄 수 있을까요? ……물론 나 자신의 잘못임에는 틀림없습니다만, 그래도 운명은 일 부러 우리 두 사람을 조롱하고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당신도 이 말엔 동의하실테죠, 바로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저께 밤 정원에서 처음으로 당신의 말을 들었을 때……그러나 그때 당신이 하신 말을 여기서 되풀이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는 지 금 이곳을 떠나는 몸입니다. 당신과의 비참한 해명이 있은 후 아무런 희망도 없이 멍든 가 슴을 안고 떠나가려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에 대해서 얼마나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는지, 당신은 아직 모르실 것입니다…… 나는 일종의 우둔한 노출증과 다변증을 가지고 있어 서…… 그러나 이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쨌든 나는 영원히 떠나가는 몸이 니까요. 여기서 루딘은 볼르인체프댁을 방문했던 일을 나타리아에게 전하려고 했으나, 생각을 바 꿔서 그 부분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볼르인체프 앞으로 보내는 편지에 '재추신'을 덧붙였던 것이다. 나는 오늘 아침에 당신이 잔혹한 냉소를 띄우고 말씀하셨듯이, 무언가 다른, 보다 나 자신에 어울리는 사업에 몸을 바치기 위해 이 땅에 고독한 자가 되렵니다. 아아! 실제로 그 런 사업에 몰두해서 마침내 나 자신의 나태성을 정복할 수가 있다면…… 그러나 그것은 어 차피 불가능합니다! 나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미완성의 인간으로 남을 것이 분명합니다. 첫번째 장애에 산산조각이 나고 마는 인간이니까요. 하긴 당신과의 사건이 벌써 이것을 입 증한 셈입니다. 만일 자신의 사랑을 미래의 사업을 위해, 위해, 천직을 위해 희생한 것이라 면 또 별문제겠으나, 나는 그렇지 못하고 다만 내 몸 위로 떨어지려는 책임을 두려워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더욱 당신과 어울릴 수 없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당신에게 집을 버려달라고 말할 만큼 가치 있는 존재는 못 된단 말입니 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들의 후일을 위해 좋은 경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련 의 덕택으로 나도 보다 순수하고 굳센 인간으로 재기할지도 모르니까요. 끝까지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때때로 나라는 인간도 회상해 주 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소식은 앞으로도 들으실 기회가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루딘 올림 나타리아는 루딘의 편지를 무릎 위에 놓고는 멍청히 마룻바닥만 바라보면서 오랫동안 꼼 짝 않고 앉아 있었다. 오늘 아침 루딘과 헤어질 때 "당신은 저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요!"라 고 엉겁결에 외친 그녀의 말이 정당했다는 것은, 다른 어떤 증거보다도 이 편지가 명백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그녀의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 다. 옴짝달싹 않고 앉아 있으려니까 어떤 검은 파도가 소리도 없이 머리 위를 내리덮어서, 그녀의 몸은 싸늘하게 굳어지면서 자주만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지 최초의 환멸은 쓰라린 것이지만, 경솔이나 과장을 모르고 자기 자신 을 기만하려 하지 않는 진실한 마음씨의 소유자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참을수 없이 괴로운 것이다. 문득 나타리아 는 자기의 유년 시절을 상기했다. 그녀는 저녁녘에 산책을 할 때면, 어두운 방향을 싫어했으 므로 언제나 저녁놀이 타고 있는 밝은 하늘 끝을 향해 걸어가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앞길은 암담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광명을 등지고 만 것이다……‥ 나타리아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눈물은 반드시 구원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눈물이 즐거운 위로가 되는 것은, 오랫동안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던 끝에 드디어 출구를 찾아 흘러내릴 때인 것이다. 처음에는 힘이 들지만 이윽고 점점 가볍게, 점점 달콤하 게 흘러내려서, 말 못하던 마음의 번민도 그것으로 녹아내리고 만다. 그러나 그 밖에 싸늘 한 눈물이라는 것이 있다.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눈물로서, 움직이지 않는 무거운 바위처럼 마음을 억압하는 슬픔이 한 방을 한 방울씩 가슴으로부터 짜내어지는 눈물이 그것이다. 이 러한 눈물은 시원하지도 않거니와 위로를 주지도 않는다. 이것은 그야말로 난처한 입장에 빠졌을 때에 흘리는 눈물인데, 이러한 눈물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아직 불행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나타리아는 바로 이날 이러한 눈물을 맛보았던 것이다. 두 시간 가량 지났다. 나타리아는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나서, 눈물을 닦고 촛불을 켰다. 그러고는 루딘의 편지를 끝까지 태우고 재를 창밖으로 내던졌다. 그 다음 그녀는 푸슈킨의 시집을 꺼내 닥치는 대로 펼쳐서 맨 처음으로 눈에 띄는 구절을 읽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 렇게 점을 치는 습관이 있었다. )그 구절은 이러했다. 사랑하는 자를 괴롭히는 돌아오지 않는 지난날의 환영이여 이미 매혹을 모르는 이 내몸 추억의 뱀, 후회의 마음만이 그대의 가슴을 찢누나……‥ 그녀는 잠시 그대로 서서 싸늘한 미소를 띄운 채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다 가 이윽고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아래층 응접실로 내려갔다. 다리아 부인은 나타리아 를 보자 곧 자기 서재로 데리고 가서 자기 옆에 앉혔다. 그리고 상냥스럽게 볼을 두들겨주 면서, 호기심 어린 조심스러운 눈초리로 딸의 눈을 바라보았다. 다리아 부인은 기이한 의혹 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기는 나타리아의 마음을 실제로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 하는 의혹 이 생전 처음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자기 딸이 루딘과 밀회를 한다는 말을 판달 레프스키로부터 들었을 때, 그녀는 화를 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사려 깊은 나타리아가 어째서 그런 당돌한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하고 경악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나타리아를 불 러놓고 욕설을 퍼부었을 때-그것도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부인에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굉장히 시끄럽고 지저분한 욕설이었지만-그녀의 확고부동한 대답이며, 결심 어린 눈초리와 행동은 다리아 부인을 깜짝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급작스러운 루딘의 출발은 그녀의 가슴에서 커다란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긴 했으나, 그래도 딸의 눈물과 히스테릭한 발작 정도는 각오하고 있 었다…… 그런데 나타리아의 태연한 태도는 또다시 그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래, 얘야" 하고 다리아 부인은 말문을 열었다. "오늘 기분은 어떠냐?" 나타리아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가 좋아하는 분이…… 떠나갔으니 말이다. 왜 그렇게 급작스레 떠나게 됐는지 너도 모르느냐?" "어머니!" 하고 나타리아가 나직한 소리로 잘했다. "맹세합니다만, 어머니께서 그분의 말 씀을 하지 않으신다면, 저도 그분에 대해선 결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요. " "그러고 보 니 너도 잘못했다고 자인하는 모양이로구나?" 나타리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같은 말을 되 풀이했다. "전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요." "그것 봐라!" 다리아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너를 믿는가. 사흘전의 일을 너 도 기억하겠지, 네가 어떻게 말했는지…… 그러나 그만두자. 지나간 일이니 깨끗이 씻어버리 고 말자꾸나, 그렇지 않니? 이젠 너도 다시 예전의 나타리아로 돌아왔지만, 난 정말이지 어 처구니가 없었단다. 자, 귀여운 나타리아, 나에게 키스해 다오……!" 나타리아는 어머니 손 에 키스를 하고 다리아 부인은 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언제나 내 말만 들으면 된다. 그리고 라순스카야 집안의 딸이라는 것을 명심하도록 해" 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내 말대로만 하면 넌 행복해질 거야. 자, 이젠 가봐라. " 나타리아 는 묵묵히 방에서 물러 나왔다. 다리아 부인은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 저애도 나를 닮아서 사랑에 빠지기 쉬울 거야. 그래도 나보다는 조심스러울 테지.' 그러고 나서 다리아 부인은 지난날의 추억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까마득한 옛날 일들을. 이윽고 그녀는 봉크루를 불러오라고 이르고 오랫동안 단둘이 마주앉아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봉크루를 물러가게 한 다음 이번에는 판달레프스키를 불렀다. 그녀는 루딘이 떠나게 된 이유를 꼭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판달레프스키는 교묘히 다리아 부인의 기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것은 판달레프스키의 의무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다음날 볼르인체프는 누이와 함께 다리아 부인댁 식사에 초대되었다. 부인은 언제나 그들을 상냥하게 맞아주었으나, 오늘은 유달리 그들에게 다정히 대했다. 나타리아는 참을 수 없이 마음이 괴로웠으나, 볼르인체프가 무척 정중한 태도로 수줍은 듯이 말을 걸어왔으므로 그녀도 마음속으론 그 섬세한 마음씨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용히 그러나 무척 지루 하게 하루가 지났으나,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모두가 느낀 것은, 이제 겨우 옛 생활의 안정 된 궤도로 들어섰다는 안도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 의미 심장한 말이 었다. 확실히 모든 것은 옛 생활대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나타리아만은 예외였다. 드디어 혼자가 된 그녀는 가까스로 침대까지 가서는 지칠 대로 지친 피곤한 몸을 침대에 내던지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말았다. 그녀는 살아간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롭고 싫고 더러운 듯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 자신이나 사랑, 슬픔, 이 모든 것이 말할 수 없이 부끄럽게 생각되어, 이 순간이라면 죽음도 불사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아직도 그녀 앞에는 괴로운 나날과 잠 못 이루는 밤과 가슴 을 에는 번민들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러나 나타리아는 젊었다. 이재 겨우 생활이 시작된 그 녀이고 보면 머지않아 생활이 마지막 승리를 거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인간은 아무리 심한 타격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날 중으로, 아니 넉넉잡아서 그 다음날까지는-좀 뭣한 말 같지만-수저를 들게 마련이고, 이것이 또한 위로의 제일보 구실을 하게 마련인 것이다 나타리아의 괴로움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녀로서는 처음 받은 괴로움이었다……그러나 다 행히도 첫번째 고민은 첫사랑과 마찬가지로 두 번 다시 반복되지는 않는 법이다.! 12 그럭저럭 2년의 세월이 흘렀다. 5월이 다가왔다.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는 자기 집 발코 니에 앉아 있었으나, 그녀는 이제 리퍼나가 아닌 레디네프 부인이었다. 레디네프에게 시집온 지도 벌써 일년이 넘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며 요즈음에 와서 약간 살이 쪘을 뿐이 었다. 발코니에서 정원까지는 층계가 있었는데, 발코니 앞에서는 유모가 하얀 망토에 횐 방 울이 달린 모자를 쓴, 볼이 빨간 갓난아이를 안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알렉산드 라는 계속해서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갓난아이는 울지도 않고, 의젓하게 손가락을 빨면서 조용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의 아들로서 부끄럽지 않을 의 젓한 풍모가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발코니에는 알렉산드라와 나란히 우리의 옛 친구 피가소프 노인이 앉아 있었다. 2년 전 에 비해 횐 머리가 현저히 늘었고 등도 구부덩해지고 여위었으며, 앞니 하나가 빠졌기 때문 에 말할 때에는 그곳으로 바람이 쉭쉭 새어나왔다. 이 쉭쉭 소리 때문에 그의 말은 더욱 독 기를 떤 듯이 생각되었다…… 나 이를 먹으면서도 그의 독설은 조금도 시들 줄을 몰랐으나 날카로운 성격은 다소 누그러졌으 며, 그전에 비해 한 말을 자꾸 되씹게 되었다. 레디네프는 집에 없었다. 그가 돌아오면 함께 차를 마시려고 모두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미 해는 저물어 서쪽 하늘에는 노르스름한 레몬 빛 줄무늬가 한 줄 길게 지평선을 따라 뻗쳐 있었고 동쪽 하늘에는 아래쪽으로는 연푸른 빛을 떤 줄무늬가, 위로는 적자색을 떤 줄무늬가 있었다. 그리고 가벼운 비구름이 중천에서 녹아 내리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좋은 날씨를 예고해 주고 있었다. 갑자기 피가소프가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우스우세요, 아프리칸 세묘느이치?" 하고 알렉산드라가 물었다. "아니, 그저…… 어제 어떤 농군이 자기 마누라에게 하던 말이 생각이 나서…… 마누라 가 너무 지껄이니까 농군이 '나불거리지 마!' 하고 호통을 쳤는데…… 그 말이 무척 내 마 음에 들더란 말입니다. 나불거리지 마! 정말이지, 여자가 무엇을 안단 말입니까? 당신도 아 시다시피 난 결코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 성격이니까 안심하시도록. 그건 그 렇고 옛날 사람들은 우리보다 확실히 현명했습니다. 러시아의 옛말에도 있지 않아요. '미녀 가 창가에 앉아 있었는데, 이마에는 별을 달고 있으면서도 한마디 말이 없습니다' 하고요. 여잔 이래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즈음은 어떻습니까, 그저께만 해도 마을의 귀족 단장 부 인이 마치 내 이마에다 권총이라도 쏘듯이 난 당신의 경향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하고 말 하지 않겠어요! 글쎄 경향이라니! 차라리 고마운 하늘의 섭리라도 내려서 갑자기 그 여자의 혀를 쓰지 못하세 한다면, 정말 본인을 위해서나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 얼마나 다행한 일이 겠습니까?" "당신은 여전하시군요, 아프리칸 세묘느이치. 언제나 아무 죄도 없는 우리 여성들만 공격 하고 계시니……그것도 역시 일종의 불행이라 할 수 있을 거예요. 이건 정말이에요. 전 당신 이 가여워 죽겠어요." "불행이라뇨?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첫째로 내 생각에 의하면 불행이란 것은 이 세상에 세 가지밖에는 없습니다. 겨울에 냉방에서 산다는 것과 여름에 답답한 장화를 신고 다니는 것, 구충제를 뿌려주고 싶을 정도로 시끄럽게 울어대는 갓난아이와 한방에 잔다는 것, 이 세 가지뿐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나도 요즈음 왜 점잖아졌다는 것입니다. 모범이 될 만하죠! 보시는 바와같이 도의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훌륭하게 행동하신다니, 할 말이 없군요! 어제만 해도 엘레나 안토노브나가 당신에 대해서 여간 불평 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요! 도대체 뭐라고 합디까? 한번 듣고 싶군요." "당신은 엘레나와 함께 아침나절 을 보내면서 그녀가 무슨 말을 물어도 그저 '뭐요? 뭐라고요?'라고 말할 뿐이었는데 그것도 마지못해 째지는 듯한 소리로 말씀하시더라는 거예요. " 피가소프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요, 잘한 일이죠. 그렇잖아요,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참 잘하셨군요! 그래, 여자에게 그런 무례한 짓을 하셔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나요, 아프리 칸 세묘느이치?" "뭐라고요? 당신은 엘레나 안토노브나를 여자라고 생각하십니까7" "그럼 당신은 뭐라 고 생각하세요?" "여자가 아니라 북입니다, 아시겠어요? 혼히 볼 수 있는 북이란 말입니다. 저 몽둥이로 두드리는……‥." "아참, 그렇지요!" 하고 알렉산드라가 화제를 바꾸려고 말을 가로챘다. "소문에 의하면, 당신은 한턱 내실 만하더군요." "뭔데요?" "소송이 끝났다는 뜻에서요. 글리노프 초원이 당신 소유로 돌아왔다면서요?" "예, 내 소유가 됐습니다" 하고 피가소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러 해 동안 애쓴 끝에 목적을 달성하셨는데 왜 아직까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계 세요?" "그렇지만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하고 피가소프가 느릿느릿 말했다. 너무 늦게 찾아온 행복처럼 모욕적이고 나쁜 것은 없답니라. 제대로 만족도 주지 못하면서 귀중한 권리를 박 탈하고 마니까요. 욕설을 하거나 운명을 저주하는 권리를 말이오. 정말이지 철늦은 행복이란 고통과 치욕의 대가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 알렉산드라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다. "저, 할멈" 하고 그녀가 외쳤다. "미샤가 잘 시간이 된 것 같군요. 애를 이리 줘요." 알렉산드라는 갓난아이를 돌보았 다. 피가소프는 무슨 말을 입속에서 중얼거리면서 발코니 저쪽 구석으로 자버렸다. 잠자기 정원으로 나 있는 가까운 한길에 경주 마차를 몰고 오는 레디네프의 모습이 나타났다. 두 마리의 큰 개가 마차 앞을 달려왔다. 한 마리는 노랗고 또 한 마리는 회색이었는데, 모두 최근에 사들인 개들이다. 그들은 노상 서로 물어뜯는 것이 일이었으나 한시도 떨어질 수 없을 만큼 다정하게 지내고 있었다. 두 마리의 개를 맞이하려고 문안으로부터 늙은 삽살개 한 마리가 뛰쳐나갔다. 삽살개는 짖기라도 하려는 듯 넓죽 입을 벌렸으나, 결국 하품을 했을 뿐 다정하게 꼬리를 치면서 되돌아오고 말았다. "여보, 사샤(알렉산드라의 애칭)?" 레디네프가 멀리서 자기 아내에게 소리쳤다. "누굴 데려 오는지 알겠소?" 알렉산드라는 남편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이내 알 수가 없었다. "그래, 그래" 하고 레디네프가 대답했다. "그런데 굉장한 소식을 가져왔다우. 잠깐만 기다려요, 곧 알게 될 테니." 이윽고 그는 저택 안으로 마차를 몰고 들어왔다. 잠시 후 그는 바시스토프를 데리고 발 코니에 나타나서는 "만세!" 하고 외치며 아내를 끌어안았다. "세료잔이 결혼한대 !" "누구 와요?" 알렉산드라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렇게 물었다. "물론 나타리아지…… 이 바시스토프군이 모스크바로부터 기쁜 소식을 가져온 거야. 자, 당신한테 온 편지…… 임마, 들었어, 미슈크?" 그는 아들의 두 손을 움켜쥐고 이렇게 덧 붙였다. "네 외삼촌이 장가든단 말이야……! 아니, 이 녀석, 능청맞게 모른 체하는군! 이렇게 기쁜 소식을 듣고도 눈만 깜박 거리고 있으니!" "잠이 와서 그래요" 하고 유모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하고 바시스토프는 알렉산드라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전 오늘 모스크 바에서 왔습니다. 주인 마님의 분부로 영지의 회계를 검사하려고요. 그것이 마님께 드리라는 편지올시다. " 알렉산드라는 성급히 동생의 편지를 뜯었다. 편지 내용은 네댓 줄밖에 안되 었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누이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었는데, 나타리아에게 구혼을 했더니 그녀는 물론이고 다리아 부인의 승낙까지 얻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또한 상세한 소식을 다음으로 미루겠으며, 멀리서 일동에게 키스와 포옹을 보낸다고 끝맺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황홀감에 도취되어 쓴 흔적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었다. 차가 나왔다. 바시스토프도 의자에 앉았다. 여러 가지 질문이 바시스토프에게 퍼부어졌 다. 그가 전하는 소식은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주고, 특히 피가소프까지도 기쁘게 만들었다. "그런데 한마디 물어보겠는데," 여러 말이 오가던 중, 레디네프가 이렇게 물었다. "코르차 긴이라는 사람의 소문이 우리 귀에까지 들려왔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그건 실없는 소문이었 군요?" (코르차긴은 지독히 거만하고 점잔을 빼는 미남자로서, 사교계의 사자로 자처하 고 있다. 그는 너무 거드름을 피우기 때문에 마치 산 인간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기부금 으로 건립된 그 자신의 동상과 같은 느낌을 주는 사나이다.) "아니, 그것도 뜬소문만은 아닙니다. " 바시스토프는 미소를 머금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 주인 마님은 무척 호감을 가지고 대하고 계셨습니다만, 나타리아 아씨께서 그분의 이름이자 면 듣기도 싫다고 하시기에……‥." "그 사람이라면 나도 알고 있지만" 하고 피가소프가 말을 받았다. "말도 못할 바보지요. 그야말로 손도 댈 수 없는 바보란 말입니다…… 이건 정말입니다! 만일 세상 사람들이 모 두 그 녀석 같다면, 듬뿍 돈이라도 받지 않는 한 도저히 살아 나갈 맛이 없을 거예 요…… 정말이지 한심스러운 작자지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 바시스토프가 동의 했다. "그렇지만 사교계에선 왜 이름이 알려져 있답니다. "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알 렉산드라가 외쳤다. "그런 사람 될 대로 되라죠! 그보다 전 동생을 생각하니 몹시 기뻐요! ……그래, 나타리아도 기뻐하나요, 행복해해요?" "예, 아씨는 언제 나처럼 침착하십니다. 그녀의 성격은 잘 아실 테지만, 어쨌든 만족해하시는 눈치더군요. " . 그날 저녁은 명랑하고 즐거운 담소 속에 흘러가고 이윽고 모두들 밤참 식탁에 자리를 잡 았다. "아참," 하고 레디네프가 바시스토프에게 고급 포도주를 따라 주면서 물었다. "당신 모르 십니까, 루딘이 어디 있는지?" "지금은 저도 모르습니다. 지난 겨울 잠시 동안 모스크바에 들렀습니다만, 그 후 어느 가족과 함께 심비르스크로 떠나갔어요. 저와는 얼마간 편지 연락이 있었는데 마지막 편지에 의하면, 심비르스크를 떠난다고 써 있었어요 -그러나 어디로 간다고는 알리지 않았으므로- 그 이후론 저도 통 소식을 모르고 있습니다. " "괜찮아요, 뒈지진 않을 테니!" 하고 피가소프가 말했다. "또 어느 곳엔가 들어앉다서 한 참 설교를 하고 있을 거요. 그 사람에겐 언제나 두서너 사람의 숭배자가 있어서, 입을 쩍 벌리고 그의 말을 듣는가 하면 돈도 빌려준단 말입니다. 자, 두고 보십시오, 그 자는 결국 차레보코크샤이스코나 추흘롬에서 일 생을 마치고 말 거예요. 그 자를 세계에서 제일가는 천재라고 생각하는 늙어빠진 노파의 팔에 안겨서 말요……‥." "당신의 말투는 너무 지나치십니다" 하고 바시스토프가 불평 어린 어조로 나직이 말했 다. "조금도 지나친 데가 없습니다!" 하고 피가소프가 항의했다. "그야말로 공평한 말이죠. 내 생각에 의하면 그는 아첨꾼에 지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아, 깜박 잊었군요." 피가소프는 레디네프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체롤라호프와 알게 됐답니다. 루딘과 함께 외국 여 행을 했다는 사람 말이에요. 알겠어요? 이건 정말입니다! 그 자가 루딘에 대해서 뭐라고 말 했는지, 당신들은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할 겁니다. 그야말로 웃음거리더군요! 어쨌든 루딘의 친구나 숭배자들은 모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적이 되고 있다는 건 주목할만한 사실입 니다. " "제발 저만은 그런 친구 속에서 제외시켜 주십시오!" 하고 바시스토프가 열띤 어조로 그 의 말을 가로챘다. "도대체 그 체를라호프라는 사람은 무슨 말을 하던가요?" 하고 알렉산드라가 물었다. "그야 여러 가지 이야길 했습니다,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만큼.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일화는 이것일 것입니다. 루딘은 부단히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사 이에…… 어쨌든 그런 분들은 조금도 쉬지 않고 발달하고 있으니까요. 가령 보통 사람이라 면 그저 자고 먹으면 그뿐이지만,그분들은 수면 흑은 식물 섭취의 발달 과정을 따르고 있 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시스토프군? (바시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 결국 이렇 게 부단이 발전해 가던 중, 루딘은 철학적으로 고찰한 결과 연애를 해봐야겠다는 결론에 도 달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놀랄 만한 결론에 어울릴 대상을 물색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운명의 여신이 그에게 미소를 던졌습니다. 부인 모자를 전문으로 하는 무척 예쁜 프랑스 여인과 사귀게 된 것이지요. 게다가 그 무대가 독일의 라인 강변이고 보니, 얼마나 멋있었겠 습니까! 루딘은 그 여자 집을 드나들면서 각종 책을 가져다 주는가 하면 자연을 논하기도 하고 헤겔의 철학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자, 그러니 그 말을 듣던 프랑스 여인의 입장은 어 떠했겠습니까? 그 여자는 루딘을 천문학자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분도 아시 다시피, 그는 얼굴 생김새도 괜찮은데다가 외국에 와 있는 러시아 신사고, 그 여자도 홀딱 반하게 된 거죠. 자, 드디어 밀회를 할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것도 곤돌라를 강에 띄운 아 주 시적인 밀회였습니다. 프랑스 여자도 루딘 말에 선뜻 동의해서, 멋지게 옷을 차려 입고 함께 곤돌라를 탔습니다. 이렇게 두 시간 가량 배를 타고 다녔는데 루딘은 그동안 무슨 짓 을 하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프랑스 여인의 머리를 쓸어주고 생각에 잠긴 듯이 하늘을 쳐 다보면서 '나는 당신에게 아버지 같은 애정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는 거예요. 프랑스 여인은 잔뜩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와 나중에 체를라호프에게 죄다 이야 기했다는 것입니다. 자, 어때요. 이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피가소프는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당신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짓궂군요!" 하고 알렉산드라가 핀잔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하지만 저는 루딘씨에 대해서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조차도 그의 결점을 하나도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될 뿐이에요. " "결점을 하나도 찾아내지 못한다구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그럼 사시사철 남의 호주 머니를 믿고 살며, 빛만 지고 다니는 것은 뭔가요? 저,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 ! 그 자는 아 마 당신에게도 빛을 졌을 테죠?" "아프리칸 세묘느이치!" 하고 레디네프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내 말을 좀 들어주십시오. 나는 최근에 루딘을 그다지 좋다하지 않았고, 또 가끔 그 친구를 비난하기까 지 했다는 것은 당신도 아시고 집안 사람들도 잘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레디네프는 잔이란 잔에 모두 샴폐인을 따랐다. ) 나는 여러분께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친애하는 동생과 그 신부의 건강을 위해서 축배를 들었습니다만, 이번에는 드비트리 니콜라이치 루딘의 건강을 위해서 축배를 드는 것이 어떨까요!" 알렉산드라와 피가소프는 놀란 눈초리로 레디네프를 바라보았다. 바시스토프는 부르르 몸을 떨며 기쁜 나머지 낮을 붉히고 눈을 두리번거렸다. "난 그 친구를 잘 알고 있습니다. " 레디네프가 말을 이었다. "따라서 그의 결점도 많고 알고 있습니다. 그 결점은 그가 소인이 아니기 때문에 더 잘 눈에 됩니다. " "루딘씨는 천 재적인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고 바시스토프가 말을 받았다. "물론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고 레디네프는 대꾸하고 나서 "그러나 개성 면에서, 그친구가 불행을 면하지 못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개성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건 이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다 가지고 있는 좋은 점, 그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좋은 점을 말하려는 겁니다. 그에게는 감격성이 있습니다. 이 것이야말로 현시대에서 가장 존경해야 할 성질인 것입니다. 나처럼 열이 없는 냉혈 인간이 이렇게 말하는 거니까, 믿어주셔도 괜찮을 겁니다. 우리는 지금 말할 수 없이 까다로워지고 사물에 무관심해지고 해이해졌습니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냉각되고 말았습니 다. 따라서 다만 한순간만이라도 우리를 흔들어주고 마음을 따사롭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 면,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미 그때는 다가온 것입니다! 사샤, 당신 기억하고 있소? 언젠가 루딘 얘기를 했을 때, 내가 그 친구를 냉정한 인간이라고 비난하던 걸. 그때 내가 말 한 것은 옳았다고도 할 수 있고 틀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오. 그 친구의 냉담은 핏속에 있는 것이지-이건 그 자신의 죄는 아니지만-결코 머리 속에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때 나는 그를 광대라고 말했지만, 그는 결코 광대가 아니거니와 사기꾼도, 악당도 아닙니다. 그 가 남의 호주머니를 믿고 살고 있는 것도 약삭빠른 무위도식 근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갓난아이 같은 순진성에서 나온 겁니다……‥ 아니 농담이 아니라, 그 사람은 처참한 빈궁 속에서 일생을 마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돌을 던져도 좋은 것일까요? 그에게는 개성과 뜨거운 퍼가 없기 때문에 아무 일도 성취하지 못할 겁니다. 그 렇지만 그 사람이 이익을 주지 못했다거나 또 앞으로도 줄 수 없으리라고 그 우가 감히 장 담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그는 벌써 이익을 주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은 젊은이들-그 사람처럼 활동력과 계획 수행의 능력을 현실에서 거절하지 않는 젊은이들-의 영혼 속에 선량한 씨를 뿌리지 않았다고 그 누가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이렇게 말하 고 있는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에 루딘이 내게 어떤 역할을 해주었느냐 하는 것은 내 아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루딘의 말은 남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없다고 단언했던 것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현 재의 나 같은 연배의 인간, 다시 말해서 이미 인생의 맛을 알고 세상에 시달릴 대로 시달 린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다. 우리 같은 인간에겐 말속에 거짓말이-·하나라도 섞이면 당장 전체의 하모니가 깨지고 말지만 다행히 젊은 사람들의 귀는 아직 그 정도까지 세련되지 못하고 사치스럽지도 않아서, 말의 내용만 훌륭하다고 생각하면 말하는 음조 같은 것은 문 제가 안 된단 말입니다! 음조 같은 건 자기 마음속에서 발견하고 마니까요. " "브라보! 브라보!" 하고 바시스토프가 외쳤다. "정말 공정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루딘 씨의 감화력에 대해선데, 전 맹세합니다만 그분은 우리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을 뿐만 아 니라 앞으로 떠미는 추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 던 거지요.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뒤집어놓고 거기에 불을 질러놓았던 것입니다!" "지금 말을 듣고 있습니까?" 하고 레디네프가 피가소프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습니까? 당신은 곧잘 철학이란 것을 공격하고, 철학에 대해서라 면 아무리 욕설을 퍼부어도 모자라는 듯이 생각하십니다. 하긴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그다지 철학을 좋아하지 않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커다란 불행이 철학 에서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야 물론 철학적인 복잡다단한 사고 방식이라든지 잠 꼬대 같은 이론이 우리 러시아인에게 어울리는 건 아닙니다. 러시아인은 너무나 풍부한 양 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철학이란 이름 밑에 진리와 자각을 위해 돌진하는 정 직한 노력까지도 모조리 공격한다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루딘의 불행은 러시아 를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러시아 는 우리 중 누가 없어도 태연할 수 있지만, 우리는 아무도 러시아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 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실 제로 러시아를 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계주의라는 것은 잠꼬대와 다름없습니다. 세계 주의자들이란 제로, 아니 제로 이하올시다. 민족성을 떠나서 무슨 예술이 있고 진리와 성찰 이 있겠습니까? 각자의 얼굴에 특징이란 것이 없으면, 이상적인 얼굴이 없는 것과 같은 이 치지요. 하긴 저속한 얼굴이라면 개성적인 특징 같은 것은 없어도 무방하겠지만, 그러나 누 누이 말씀드리지만 이건 루딘의 죄가 아닙니다. 이건 그의 운명, 비통하고 괴로운 그의 숙 명이므로 그것을 방패로 그를 공격하지는 맙시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나라에는 루딘과 같 은 인물이 출현하게 되었을까요? 이렇게 자꾸 캐고 들어가다간 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점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고 그를 위해 축배를 드는 것이 어 떻겠습니까? 이편이 그를 불공평하게 대하기보다는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 에 대해 공평성을 잃고 있었으니까요. 그를 벌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가 아니고 또 그럴 필 요도 없습니다. 루딘은 자기가 받을 대가 이상으로 가혹하게 자기 자신을 벌하고 있으니 까…… 제발 불행이 그에게서 모든 나쁜 요소들을 제거해 주고, 훌륭한 것만을 남겨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는 루딘의 건강을 위해 잔을 듭니다! 젊은 날의 친구의 건강을 위해서, 나의 청춘과 그 회망, 그 의욕을 위해서 그리고 그 믿음직스러운 영예를 위해서, 약관 30세 의 가슴을 들먹이게 한 모든 것을 위해서, 그보다 나은 것은 알지도 못했소 또 앞으로도 알 수 없을 선량한 모든 것을 위해서 잔을 듭니다…… 그리운 황금 시대여, 난 너를 위해 축배를 드노라! 여러분, 함께 루딘의 건강을 위해 축배를 듭시다!" 모두 레디네프와 잔을 마주쳤다. 바시스토프는 열광한 나머지 하마터면 잔을 깨뜨릴 뻔 했으나, 단숨에 잔을 비웠다. 알렉산드라는 남편의 손을 녹 쥐었다. "미하킬로 미하일르이치, 당신이 이런 웅변가일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고 피가소프가 말했다. "그만하면 루딘보다 못할 것이 없군요. 나까지도 감명을 받았으니 말입 니다. " "내가 무슨 웅변가란 말입니까?" 하고 레디네프가 점잖게 대꾸했다. "하지만 당신 을 감명시키기도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군요. 아무튼 루딘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우리 다 른 얘기나 시작합시다……그런데……저 뭐라고 했더라?……그래, 그래. 판달레프스키는 여전 히 다리아 미하일로브나댁에 잘 있나요?" 하고 레디네프가 바시스토프를 바라보며 덧붙였 다. "물론이죠, 여전합니다! 주인 마님께서 매우 좋은 자리를 주선해 주셨습니다." 레디네 프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 친구는 굶어 죽는 일은 없을 거야. 아마 그건 장담해도 좋 을 테지. " 저녁식사가 끝났다. 손님들이 흩어져 갔다. 남편과 단둘이 된 알렉산드라는 미소를 띄우 고 남편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 당신의 태도는 정말 멋있었어요, 미샤!" 그녀는 남편의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이렇 게 말했다. "정말 재치 있고 훌륭한 말솜씨였어요! 하지만 고백하세요, 오늘은 너무 루딘을 추켜올린 셈이죠? 그전에 지나치게 깎아내리던 것처럼 ……‥." "쓰러진 자를 때릴 필은 없거든……그리고 그땐 당신이 루딘에게 반할까봐 은근히 근심 했단 말이야. " "천만에요" 하고 알렉산드라는 태연하게 대꾸하고 나서 "그분은 너무 학자 냄새가 풍기 는 것 같아서 어쩐지 두려운 생각이 들었어요. 전 그분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어요. 하지만 피가소프씨는 오늘밤 루딘씨를 너무 조롱하시더군요. 당신도 그렇 게 생각하셨죠?" "피가소프 말이야?" 하고 레디네프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렇 게까지 기를 쓰고 루딘 편을 든 것도 결국은 피가소프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어. 그 영감, 염치도 없이 루딘을 아첨꾼이라 하지 않았느냔 말이야! 내 생각으론 피가소프의 역 할이 백배 천배 더 나쁘다고 보거든. 어지간히 재산도 가지고 있으면서 닥치는 대로 남을 조롱하지만, 세력가나 부호 앞에선 찰떡같이 달라붙는단 말이야!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렇 게 닥치는 대로 무엇에나 독설을 퍼붓고, 철학이건 여자건 마구 욕설을 하는 그 피가소프 가 말이야, 알겠어, 관청에 근무할 때 뇌물을 받았단 말이야. 게다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나 쁜 짓을 했다는 거야! 어때, 놀랄 만한 일 아닌가!" "어머, 그래요?" 하고 알렉산드라가 외쳤다. "정말 뜻밖이군요! ……저, 미샤." 잠시 말이 없다가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세요?" "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동생은 나타리아와 결흔해서 행복해질까요?" "글쎄 뭐라 고 말해야 좋을까…… 행복해지리라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니까‥‥그러나 나타리아 쪽이 더 셀 거야. 우리들 사이엔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겠기에 솔직히 말하는데, 나타리아 쪽 이 동생보다 똑똑한 건 사실이지. 하지만 볼르인체프도 호남아고 게다가 나타리아를 사랑 하고 있으니 무슨 문제가 있겠소? 무리들도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행복하지 않느냔 말이 야. 그렇잖소?" 알렉산드라는 빙긋이 미소를 띄우며 남편의 손을 꼭 잡았다. 알렉산드라 집에서 이와 같은 일이 있은 바로 그날, 거적으로 지붕을 씌운 초라한 마차가 세 필의 말 에 끌려 러시아의 외진 어느 현의 국도를 따라 찌는 듯한 더위 속을 굴러가고 있었다. 마부 석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외투를 걸친 머리가 희끗희끗한 농부가 두 발로 비스듬히 횡목을 밟고 앉아서 쉴새 없이 고삐를 당기기도 하고 채찍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 뒤에는 차양에 달린 모자에 먼지투성이가 된 낡은 망토를 걸친 키 큰 사내가 허술한 트렁크를 깔고 앉아 있었다. 다름 아닌 루딘이었다. 그는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었 다. 마차가 덜커덕거릴 때마다 그의 몸은 전후 좌우로 마구 흔들렸다. 마치 졸고 있기라도 한 듯 무감각한 사람처럼 보였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쳐들며 몸을 폈다. "다음 역관에 언제 닿게 되는 건가?" 하고 루딘은 마부석에 앉아 있는 농부에게 물었 다. "얼마 안 남았어요, 나리" 하고 대답하며 농부는 더욱 힘을 주어 고삐를 잡아챘다. "이 고개만 넘어서면 2베르스타 가량밖엔 안 되지요…… 한데 이놈의 말이 뭘 하는 거야! …… 맛을 봐야 알겠나……‥ 마부는 우측 보조 마에게 사정 없이 채찍질을 했다. "아무래도 자넨 말을 모는 솜씨가 서투른가 보군." 루딘이 말했다. "이른 아침에 떠나왔 는데도 여태껏 다음 역관에 닿지 못했으니 말이야. 차라리 심심하지 않게 무슨 노래라도 불 렀으면 좋으련만." "넌들 어쩝니까, 나리, 보시다시피 말들은 기진맥진한 데다가 이렇게 더위까지 심하니 어디 별수 있어야죠. 노래를 부르라고 하십니다만, 우린 그런거 모릅니다. 전 역관 마부가 아니니까요…… 야, 이 얼빠진 놈아!" 하고 농부는 마침 옆을 지나가고 있 는, 다갈색 낡은 외투에 다 떨어진 짚신을 신은 사내를보고 갑자기 이렇게 고함쳤다. "썩 비켜나지 못하겠니!" "뭣이 어째? ……잘난 체하지 마." 길을 가던 사내는 뒤에서 중얼거리며 걸음을 멈추었 다. "이 모스크바의 개뼈다귀야!" 아니꼽다는 어조로 이렇게 덧붙이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다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아니, 이놈이 어느 쪽으로 가려는 거야!" 하고 농부는 가운데 말의 고삐를 낚아채듯 하 며 띄엄띄엄 뇌까렸다. "정말 요놈이 죄만 부리려 드는구나! 망할 놈의." 지칠 대로 지친 말들은 그래도 그럭저럭 다음 역관에 도착했다. 루딘은 마차에서 내렸다. 농부에게 찻삯을 주고 나서 (농부는 고맙다는 인사도 업이 한참 동안이나 그에게서 받은 돈을 손바닥 위에 서 굴리고 있었다. 술값이 적다는 것이다. ) 손수 트렁크를 들고 역관으로 들어갔다. 젊었을 때 아시아 각지를 두루 여행한 일이 있는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만일 역 관의 벽에 '카프카즈의 포로' 중의 어떤 장면을 그린 그림이나 러시아 장군들의 초상화 따 위가 걸려 있으면 곧 역마를 구할 수 있지만, 거기 걸린 그림들이 유명한 도박사 조르주 드 제르마니의 생애를 그린 것들이라면 오래 지체하게 되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나그네는 이 도박사의 젊은 시절의 모습, 즉 닭의 볏처럼 높다랗게 빗어 올린 앞머 리며 앞을 풀어헤친 횐 조끼, 가랑이가 굉장히 좁고 짧은 바지 그리고 또 그가 늙은 다음에 천장이 기울어진 지붕밑 방에서 의자를 번쩍 들어 자기 아들을 쳐죽이려 는 무서운 장면들 을 진저리가 나도록 자라보고 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루딘이 들어간 역관의 대합실에 도 바로 이 (30년), (도박사의 일생)이라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누구 없느냐고 커다란 소 리로 부르자, 잠이 덜 갠 역관지기가 눈을 비비며 어슬렁어슬렁 나오더니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시골 역관지기치고 잠이 덜 갠 눈을 하지 않은 사람을 본 사람이 과연 있을 것인 가?) 루딘이 입을 열기도 전에 시무룩한 소리로 "말은 없수다" 하고 잘라 말했다. "말은 없수다라니 그게 무슨 말투요" 하고 루딘이 말했다. "내가 어디로 가려는지도 모 르면서7나는 역마로 온 것이 아니라 농가의 말을 세내 가지고 왔단 말이오. " "하여튼 말 은 구할 수 없습니다. " 역관지기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길이지요?" "00로 가는 길이오. " "아무튼 말은 없습니다. " 역관지기는 같은 말을 한 번 더 되풀이하고는 밖으로 나가버 렸다. 루딘은 괘씸하다는 얼굴로 창가로 다가서며 모자를 벗어 탁자 위에 획 내던졌다. 겉보 기에 그는 별로 변한 데가 없었지만, 최근 2년 동안 얼굴이 좀 누렇게 된 것 같았다. 기다란 고수머리에는 은실 샅은 백발이 군데군데 반짝였고, 여전히 아름다운 두 눈도 어쩐지 좀 흐 리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괴롭고도 불안한 상념의 흔적인 잔주름이 입술 언저리며 볼, 관자놀이에 나타나 있었다. 입고 있는 의복도 낡고 허술했으며 와이셔츠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분명히 화려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고, 정원지기의 말을 빌린다면 꽃이 시들 무렵이 된 것이다. 루딘은 벽에 붙은 게시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차를 기다리는 손님들의 심심풀 이였던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뻐걱하고 문이 열리더니 역관지기가 들어왔다. "00로 가는 말은 업어요. 아마 왜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 겁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하 지만 XXX로 가는 거라면 마침 돌아가는 말이 있습니다. " "XXX라고?" 루딘이 중얼거렸다. "그건 안 돼요! 방향이 전혀 다르니까. 나는 펜자 쪽으 로 가야 하는데, XXX라면 탐보프로 가는 길가에 있지 않소?" "아니, 괜찮습니다! 탐보프로 해서 돌아가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XXX에서 그쪽으 로 빠지는 길도 있으니까요. " 루딘은 잠시 생각해 보고는 "그럼 그렇게 하지" 하고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어서 마차 에 말을 매라고 하시오. 어차피 매일반이니까, 탐보프로 가겠소. " 얼마 후에 마차가 준비되었다. 루딘은 자기의 허술한 트렁크를 들고 농부들이 사용하는 초라한 마차에 올라 아까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앉았다. 등을 둥그렇게 구부리고 앉은 그 모습은 어쩐지 아무 데도 의지할 곳 없는 서글픈 인종의 그림자가 어려 있는 것같이 보였 다…… 이윽고 세 필의 말은 짤랑짤랑 방울소리를 울리며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에필로그 그로부터 다시 몇 해가 흘러갔다. 으스스하고 쌀쌀한 어느 가을날이었다. 현청 소재지 S 시의 일류 여관의 현관 앞에 한 대의 여행용 마차가 와 닿았다. 그 속에서 가볍게 기지개 를 켜고 헛기침을 하면서, 아직 나이가 지긋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른바 '품위와 위엄을 갖춘' 당당한 체구의 신사가 내렸다. 그는 층계를 밟고 2층으로 올라가 넓은 복도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아무도 자기 앞에 나타나지 않자 커다란 소리로 객실로 안내하라고 외쳤 다. 어디선가 방문이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낮은 칸막이 뒤에서 키가 호리호리한 급사가 튀어나왔다. 스는 번들거리는 잔등과 접어올린 소매 끝을 번쩍이며 어두컴컴한 복 도를 재빠른 게걸음으로 앞장서서 걸어 들어갔다. 손님은 방안에 들어가자마자 외투와 목도 리를 벗어 던지고 소파에 가서 앉더니 두 주먹으로 무릎을 짚고,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은 거슴츠레한 눈으로 우선 방안을 둘러본 다음 자기가 데리고 온 하인을 들여보내라고 했다. 급사는 허리를 굽실하고는 이내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이 손님은 바로 레디네프였다. 징병에 관한 용무로 마을에서 5시로 나온 것이었다. 레디네프의 하인이 들어왔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보기 좋게 곱슬거리고 두볼이 불그레 한, 귀엽게 생긴 청년이었다. 그는 잿빛 외투 위에 하늘빛 허리띠를 애고 부드러운 방한 장 화를 신고 있었다. "어떤가 여보게. 아무 일 없이 오지 않았나!" 하고 레디네프가 말했다. "자넨 마차 바 퀴의 쇠고리가 빠져나갈까봐 한시도 마음을 못 놨지, 응!" "예,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하인은 높이 세운 옷깃 속에서 억지로 미소를 지으 려고 애쓰며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어째서 그 쇠고리가 빠져 달아나지 않았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때 "여기 아무도 없느냐?" 하는 소리가 복도로부터 들려왔다. 레디네 프는 흠칫 몸을 떨며 소리 나는 쪽으로 바싹 귀를 기울였다. "누구 없느냐?" 하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레디네프는 벌떡 일어나 방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급히 문을 열었다. 그의 앞에는 거 의 반백이 된 머리에 등이 약간 굽은 키 큰 사나이가, 청동 단추가 달린 낡은 벨벳 상의를 걸치고 서 있었다. 순간 레디네프는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루딘!" 하고 레디네프는 가슴의 동요를 느끼면서 소리쳤다. 루딘은 이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레디네프가 광선 빛을 등지고 서 있었으므로 루딘은 그 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의아스러운 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소?" 하고 레디네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하일로 미하일르이치로군요!" 루딘은 이렇게 외치며 무의식중에 손을 내밀었으나 곧 당황한 듯 뒤로 빼려 했다. 레디네프는 두 손으로 얼른 그 손을 잡았다. "자, 들어오시오. 내 방으로 들어오시오!" 하며 그는 루딘을 자기 방으로 끌어들였다. "정말 몰라보게 변했군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가 래디체프는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낮추며 이렇게 말했다. "모두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하고 루딘은 이리저리 방안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이젠 나이가 나이니까…… 하지만 당신은 조금도 변한 것 같지 않군요. 알렉산드라…… (하고 부칭이 생각나지 않는 듯이) 부인께서도 안녕하십니까?" "덕택에 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돼서 여기까지 오셨는지?" "나 말입니까? 그걸 얘기하자면 상당히 길어집니다. 사실 내가 여기 온 것은 정말 우연한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친구를 찾아가는 길이지요. 하여튼 이렇게 만나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 다……‥." "식사는 어디서 하실 예정입니까?" "나 말입니까? 글쎄요…… 아무 데나 싸구려 음식점 같은 데서 하게 되겠지요. 오늘 중 으로 이곳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꼭 오늘 떠나야 합니까?" 루딘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엷은 미소를 띄웠다. "예, 오늘 중으로 떠나야만 합니다. 이번 에 영지에 돌아가서 정착하게 되었지요." "그럼 식사라도 함께 하시지요. " 루딘은 처음으로 레디네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식사를 함께 하잔 말씀입니까?" 하고 그는 반문했다. "그렇소. 옛날처럼 친구 사이로 돌아가 함께 합시다. 좋겠지요? 여기서 당신을 만난 것 은 정말 뜻밖의 일이고 또 앞으로 언제 다시 만나게 될는지 모르는데, 이대로 그냥 헤어질 수는 없지 않소!"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 레디네프는 루딘의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하인을 불러 식사를 주문한 다음 샴페인을 얼음에 채워놓으라고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레디네프와 루딘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대학 시절에 관한 얘기만을 하며 여러 가지 추억을 더듬었고, 살아 있는 사람과 이미 세상을 떠난 많은 사람들을 회상 했다. 처음에 루딘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한 말투였으나 술을 몇 잔 들이키자 차차 몸안의 피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이윽고 급사가 마지막 접시를 들고 나갔다. 레디네프는 자 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잠그고는 다시 돌아와 루딘과 마주 앉더니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럼 이젠" 하고 그는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헤어진 후부터 오늘까지 당신이 지내온 얘기를 모두 들려주시오. " 루딘은 레디네프를 바라보았다. '정말 몰라보게 변했어!' 하고 레디네프는 다시 생각했다. '가엾은 사람이야!' 루딘의 얼굴은 그가 어느 역관에 나타났던 그때부터 벌써 노쇠의 그림자가 엿보이기는 했지만 그 렇다고 특별히 변한 데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그 얼굴 표정은 전혀 달랐다. 그의 눈길도 전 과는 딴판이었다. 그의 몸 전체에서도, 느릿느릿하다가 별안간 아무 까닭도 없이 돌발적으로 변화를 일으키곤 하는 그 동작에서도 그리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어민지 금이 간 것 같은 그의 말소리에서도 지칠 대로 지쳐버린 피로와 마음속 깊이 숨겨진 고요한 애수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애수는, 크나큰 희망과 자만심에 넘치는 청년들이 으레 그렇듯 그도 한때 일종 의 멋으로 여기고 있던 가장된 우수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 동안 내가 지내온 얘기를 모두 하라는 겁니까?" 하고 루딘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모두 얘기할 수도 없으려니와 그럴 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나도 꽤 고생을 했지요. 정처 없 이 헤매 다니기도 했지만, 그것은 육체의 방랑일 뿐만 아니라 영혼의 방랑이었다고 할 수 도 있습니다. 사업에도 그리고 인간에게도 나는 얼마나 환멸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온갖 종 류의 사람들과 사귀어 보았지요,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레디네프가 일종의 동정 어린 눈으 로 자기 얼굴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 루딘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나 자신의 입에서 나 오는 말에 정말 구역질이 나도록 싫증을 느낀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나자신의 입에서 나을 때에는 말할 것도 없고, 나와 의견을 같이하는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것이 되풀이 될때에도 역시 구역질이 난단 말입니다! 걸핏하면 흥분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정신 상태로부 터 채찍으로 마구 얻어맞아도 꼬리 하나 까딱하지 않는 우둔한 말과 같은 무감각 상태로 대번에 옮아가는, 그러한 경험도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기쁨에 싸여 마음껏 희망의 날개를 펴는가 하면, 적의를 품고 다투기도 하고 굴욕의 구렁텅이 속 으로 빠져든 일도 역시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솔개처럼 의기양양하게 날아갔다가는 껍 데기가 깨진 달팽이처럼 기가 죽어 기어 돌아온 적도 또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 다! ……나는 길이라는 길은 모조리 걸어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거의 모두가 질벅질벅한 흙탕이었지요" 하고 루딘은 얼굴을 약간 옆으로 돌렸다. "아시다시피," 그는 다 시 말을 이었으나 "잠깐" 하고 레디네프가 가로챘다. "우리는 옛날에 서로 너나들이하는 사 이가 아니었나? 어떤가,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그렇게 대하면? 우리 그런 뜻에서 한잔 하세 !" 루딘은 흠칫하며 엉덩이를 쳐들었다. 그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번쩍 스쳐갔다. "흠, 그렇게 하세." 루딘은 말을 받았다. "고맙네, 자 그럼!" 레디네프와 루딘은 샴페 인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자넨 알고 있겠지." 루딘은 '자네'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며 미소를 띄우고는 다시 얘 기를 계속했다. "나의 내부에는 어떤 이상한 벌레가 들러붙어서 내 몸과 마음을 팔아먹으며 끝내 안정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는단 말일세. 이놈이 나를 부추겨 세상 사람들에게 부 딪히게 하는 거야. 그러나 그 사람들은 처음엔 나에게 감화되어 나를 숭배하는 것 같지만, 얼마 후엔……‥ 루딘은 한 손을 허공에 내저었다. "당신과…… 아니, 자네와 헤어진 후에 나는 별별일을 다 겪었네…… 무려 스무 번 이상이나 생활을 다시 시작하여 새로운 일에 착 수해 봤지만 그 결과도 보다시피 이 모양 이 꼴이란 말일세!" "자네에겐 끈덕진 데가 없 었어" 하고 레디네프가 흔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네 말마따라 나에겐 끈덕진 데가 없었어! ……무엇 한 가지 건설할 만한 능력이 없 었던 거야. 그도 그럴 것이 첫째 발판이라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무엇을 건설할 수 있겠나. 나 같은 놈은 우선 자기 자신의 발판, 즉 자기 자신의 토대부터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될 형 편이었으니까! 그동안 내가 걸어온 길, 아니 걸어온 길이라기보다는 나의 실패의 역사를 일 일이 얘기하는 것은 그만 두기로 하고, 그중에서두세가지만 얘기하기로 하겠네……그것은 다름 아닌 성공의 신이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던 경우,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성공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경우를 말하는 걸세-이 수 가지 경우는 반드시 동일하 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루딘은 이미 숱이 적어진 반백의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는데, 그 손의 동작만은 예전 에 숱이 많은 검은 고수머리를 쓸어 넘기던 때와 조금도 다름없었다. "그럼 들어주게" 하고 그는 얘기를 시작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어떤 괴상하기 짝없는 신사와 가까이 사귄 일이 있네. 그는 널따란 영지를 몇 개씩이나 가지고 있는 굉장한 부자 여서, 관청 같은 일자리는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지. 이 친구의 주요한, 아니 유일한 열 정은 학문, 학문 전반에 대한 사랑이었네. 어떻게 이런 친구에게 그런 열정이 솟아올랐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할수가 없네! 그것은 마치 암소 등에 말안장을 올려놓은 것만큼이나 그 친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본인은 최고 지식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엇을 지껄일 수 있는 재주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인간이어서, 그저 의미 심장하게 눈망울을 굴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모르는 위인이었지. 그만큼 천부의 재능을 갖지 못한 가엾은 인간은 아마 세상에 없을 걸세. 스몰렌스크현에 가면 그런 곳이 있지 않나-사면이 모래밭이고 그 밖엔 아무것도 없는, 군데군데 풀이 자라고 있긴 하 지만 그것조차 마소가 먹으려 하지 않는 불모지 말일세-바로 이 친구가 그러한 불모지와 같은 인간이었지, 무슨 일을 해봐도 뜻대로 되는 일이 없어. 마치 그 일이 이 친구의 손에 서 빠져 달아나는 느낌마저 들 지경이라니까. 게다가 무엇이든지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어렵게만 하려 드는 습성이 있거든. 만일 모든 것이 이 친구의 뜻대로 된다고 한다면, 아마 사람들은 발꿈치로 밥을 먹어야 했을 걸 세. 그야말로 끈덕지게 달라붙어 무엇을 쓰기도 하고 읽기도 하며 열심히 일했지. 학문에 봉사하는 그의 태도는 완고할 만큼 강했고 그 인내심으로 말하자면 정말 놀랄 만한 것이었 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굉장한 자만심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무쇠와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 으니까. 그는 줄곧 독신 생활을 했는데, 하여튼 괴상한 인간이란 평을 듣고 있었지, 나는 이 친구와 사귀게 되었지…… 말하자면 그의 마음에 들게 된 걸세. 솔직히 말하면 나는 얼 마 되지 않아 그의 됨됨이를 알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 열의에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 네. 뿐만 아니라 그는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선을 행할 수도, 사회에 기여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집에 함께 살 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와 더불어 그의 영지로 내려가게 되었네. 그때 내가 머리 속에 그렸 던 계획은 거창하기 짝없는 것이었지. 나는 여러 가지 새로운 시설이라든지 농촌의 개혁 같은 것을 꿈꾸고 있었단 말일세, " " 그건 다리아 부인의 집에 머물러 있을 때와 똑같군 그래. 자네도 그때 일이 생각나겠지?" 하고 레디네프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한마디 했다. "천만에! 다리아 부인 집에 있을 때에는, 내가 건의하는 말 가운데 무엇 한가지 이루어 지는 게 없으리라는 걸 나 자신 마음속으로부터 의식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이 친구 집에서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활동의 영역이 내눈앞에 펼쳐져 있었으니까. 나는 농업 관계 의 서적을 잔뜩 사가지고 내려가서…… 하기는 한 권도 마지막까지 읽어본 것은 없지 만…… 하여튼 일에 착수했지. 처음에는 뜻대로 되지 않았으나 차차 내가 기대했던 대로 되어가는 것 같더군. 나의 새로운 동지인 그 지주는 말없이 보고만 있을 뿐 방해하는 기색 은 없었네. 방해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야 물론 정도 문제지. 나의 제의를 받아들여 실천에 옮기기는 하지만 자기대로의 고집과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언제나 제멋대로 하 려 드는 경향이 있었지. 이 친구는 자기의 사상은 무엇이든지 아주 소중히 여기는 버릇이 있거든. 마치 딱정벌레가 풀줄기를 따라 간신히 꼭대기까지 기어오른 다음, 거기서 날개를 다듬고 금세 날아갈 듯한 기세를 보이다가도 잠자기 밑으로 굴러 떨어져서는, 또다시 기 어오르기 시작하는……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친구는 짜기의 사상에 기어올라간단 말일세. 얼토당토 않은 비유를 든다고 놀리지는 말게. 이건 그 당시 내 마음속에 줄곧 떠오르곤 하 던 생각이니까. 좌우간 이렇게 나는 2년 동안 분투 노력했네. 그러나 아무리 애써 봐도 그 결과는 시원치 못했거든. 나는 점점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고 친구인 지주도 내게 싫증을 느끼는 눈치였지. 내가 빈정거리기 시작하면 저쪽에서도 은근히 압력을 가해 왔고, 나를 반 신반의하는 마음은 짜증으로 변하여 양쪽이 다 불쾌한 심정에 쉽싸이게 되었지. 이렇게 되 면 벌써 말이 통할 리가 없지.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은근히 너 같은 녀석한테 감화를 받 을 내가 아니라고 배짱을 보이려고 애쓰며, 나의 제의 같은 건 아주 다른 방향으로 왜곡해 버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숫제 무시해 버리는 형편이었네…… 결국은 나도 내 이 지주님의 지적 훈련의 상대역을 함으로써 밥을 얻어먹고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 어, 공연히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지, 이번에도 또 기대에 어 긋나고 말았구나 하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이 처량해지더군. 그리고 거기서 물러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손실인지 나 자신 잘 알고 있었기에, 도저히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네. 어느 날 나는, 너무나 불쾌한 장면을 목격한 그 친구가 가장 큰 결점을 보이자 그와 대판 싸운 후 슬라브의 광야에서 나온 밀가루에 독일산 당밀을 버무려놓은 것 같은 그 '유식한' 지주 집을 박차고 나와버리고 말았네……‥." "다시 말하자면 그날그날의 양식을 버린 셈이로군." 레디네프는 이렇게 말하며 루딘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맞았어. 그리하여 또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자유롭고 광막한 공간에 서게 되었지. 어디 로든지 훨훨 날아갈 수 있는 처지가 된 거야…… 자, 한잔 드세!" "자네의 건강을 위해서!" 하며 레디네프는 몸을 일으켜 루딘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자 네의 건강을 위해 그리고 포코르스키를 생각하며…… 그 친구도 역시 가난을 즐길 줄 아픈 인간이었으니까. " "지금 얘기한 것이 이를테면 내가 겪은 일 가운데 제1막에 해당하는 것이야." 잠시 후 루딘은 말을 이었다. "어떤가, 그 다음을 계속할까?" "어서 계속해 주게." "아아, 이젠 더 얘기하고 싶은 생각도 업네, 혼자 너무 지껄여서 지쳐버린 모양이야. 하 지만 말이 나왔으니 할 수 없군. 계속하기로 하지. 아까 말한 그 지주 집을 나온 후에도 발 길 닿는 대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아참, 그렇군. 내가 어떤 점잖은 고관의 비서가 될 뻔한 일이 있었는데 결국은 그 일이 어떻게 돼서 틀어져 버렸는가 하는 걸 얘기할 수도 있 겠지만 그런 것까지 얘기하자면 너무 길어지니까 생략하기로 하고…… 하여튼 발길 닿는 대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나는 결심했지…… 제발 웃지는 말나주게, 나는 실무 가가 되려고, 다시 말하면 사업가가 되려고 결심했단 말일세, 그러한 기회가 있었지. 어떤 흥미있는 인물과 뜻이 맞아서 말이야……혹시 자네도 들은 적이 있을는지 모르겠군……쿠르 베예프라는 사람인데……자네, 모르겠나?" "그런 이름은 들은 일이 없는걸. 하지만 여보게, 자네만한 두뇌의 소유자가 어째서 그 걸 몰랐을까. 자네의 본업은, 비꼬는 말같이 들릴는지 모르겠네만, 사업가가 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 않 은가?" "그야 물론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지. 그렇지만 나의 본업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 가? ……어쨌든 그 쿠르베예프란 사내를 자네한테 한번 보여주고 싶네! 하찮은 수작이나 지껄이는 그런 친구라고는 아예 생각하지 말게. 나도 잿날에는 제법 웅변가란 말을 들었네 만, 이 사내 앞에서는 나 같은 건 그야말로 달 앞의 별이야. 정말 놀랄 만한 박식가인데다가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거든. 특히 상업이나 공업 방면에 독창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었네. 그 의 머리 속에는 굉장히 대담하고 엉뚱하기 짝없는 생각이 쉴 새 없이 떠오른단 말일세. 우 리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세상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공공 사업에 힘을 다하기로 결 심했네……‥." "그건 대체 어떤 사업이었나? 어서 얘기해 보게." 루딘은 눈을 내리깔았다. "자넨 아마 웃을 거야. " "웃긴 왜 웃어! 웃지 않을 테니 어서 얘기하게," "그 사업이란 다름 아닌 K현에 있는 강을 배가 오르내릴 수 있게 개수하자는 것이었 네." 루딘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 그럼 그 쿠르베예프란 사람은 자본가였던 모양이군?" "실은 나보다 더 가난뱅 이였지" 하고 루딘은 대답하며 반백이 된 머리를 조용히 떨어뜨렸다. 이 말에 레디네프는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웃음을 그치고 덥석 루딘의 손 을 잡았다. "용서해 주게, 응" 하고 그는 말했다. 너무 뜻밖이어서 그만 웃을 터뜨린 거니까. 그럼 그 사업도 결국 종잇장 위의 계획만으로 틀어지고 말았단 말인가?" "아니, 그런 것은 아니야. 일에 착수는 했으니까. 인부들을 고용해서 일을 시작했지. 그런 데 시작하자마자 여러 가지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닥치고 말았네. 첫째 물방앗간 주인들이 우리의 의도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게다가 우리도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물을 처리 할 수 없었는데 그 기계를 구입할 돈이 마련되어야지. 6개월 동안 간신히 목숨을 이어갔고, 나 역시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형편이었네. 하지만 나는 고 일을 후회하진 않아. 그 곳의 경치는 정말 놀랄 만큼 좋았으니까. 우리 두사람은 상인들을 설복한다, 여기 저기 편 지를 쓴다, 회문을 돌린다 하며 악전 고투했지만 결국 나는 이 사업에다 수중에 남아 있던 돈을 몽땅 털어버리고 그것으로 끝장이 나고 말았지. " "알 만하군!" 하고 레디네프가 한 마디 했다. "자네 수중의 돈을 몽땅 털어버리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진 않았을 테니까. " "시간을 필요로 하진 않았지. 그건 을은 말이야." 루딘은 방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 만 계획만은 정말 괜찮은 것이었어. 그것이 실현되었더라면 세상 사람들에게 굉장한 이익을 주었을 거야. " "그래 그 쿠르베예프란 사람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나?" "쿠르베예프 말인가? 지금 시베리아에서 노다지를 찾아다니고 있다더군. 이제 한밑천 크게 잡고 말 테 니까 두고 보게. 그 친구는 그냥 꺼져 없어질 인간이 아니야. " "그럴는지도 모르지. 그러 나 자네는 아마 한밑천 잡을 생각 같은 건 하지 못할 거야." "나 말인가? 할 수 없는 노 릇이지! 하긴 나라는 인간이 자네 눈에는 언제나 속이 텅 빈 인간으로 보였으리라는 건 나 도 잘 알고 있네." "자네가? 천만에! 사실 한때는 자네의 결점만이 눈에 띈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나도 자 에를 옳게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알아주게. 물론 자네는 돈을 모으지는 못할 거 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네를 좋아하는 게 아니겠나?" 루딘은 빙그레 웃었다. "그게 정말인가?" "정말이고 말고! 자네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자네를 존경하고 있는 거야!" 하고 레디네프가 대답했다. "내 마음을 알아주겠나?"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럼 제3막으로 넘어가 볼까?" 하고 루딘이 물었다. "응, 어서 얘기하게." "좋아. 그럼 제3막…… 이것이 마지막 장면이지, 방금 막이 내렸으니까. 그런데 자네, 내 얘기가 지루하지 않은가?" "아니, 어서 들려주게." "그럼 얘기하지" 하고 루딘은 시작했다. "하루는 하는 일 없이 앉아 있다가……하기는 언 제나 한가한 날이 많았지만…… 이런 생각을 했지. '나는 지식도 좨 있고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도 있다……‥ 한데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나의 내부에 잠재하는 선에 대한 욕 망을 부정하진 않겠지?" "그야 물론이지 !" "그러니까 다른 사업에서는 다소 실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지라도…… 교육가, 아니 좀더 평범하게 말한다면 선생 노릇이야 능히 할 수 있겠지…… 적어도 이렇게 무위도식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이런 생각을 했단 말일세." 루딘은 얘기를 중단하고 푸하고 한 숨을 내쉬었다. "무위도식하고 있느니 보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남에게 전하려고 노력하 는 편이 오히려 떳떳하지 않으냐, 어쩌면 그들은 나의 지식으로부터 어떠한 이익을 취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나도 재능이 없는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고 말주변으로 보더라도 남 만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는 이 새로운 사업에 헌신하기로 결심했 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리를 얻기가 용이하지 않더군. 개인 교수 노릇은 내편에서 하고 싶 지 않았고, 그렇다고 소학교 같은 데선 나 같은 인물은 할 일이 없을 것이고. 어찌어찌하여 간신히 이곳 중학교의 교원 자리 하나를 얻게 되었지. " "교원이라면, 무엇을 담당했나?" "러시아 문학 강의를 맡았지. 사실 나는 여태까지 그때만름 전심전력하여 일해 본 적은 없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네. 청년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는 3주 일 동안이나 강의의 서론을 쓰는 데 몰두했네. " "그 원고를 아직도 가지고 있나?" "아니, 어디로 갔는지 없어져버렸어. 하여튼 색 잘된 것만은 사실이야. 학생들에게도 인 기가 좋았지, 지금도 나는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얼굴이 눈에 선해. 선량하고도 싱싱한 젊음 이 넘치는 얼굴들, 그 얼굴들은 하나같이 솔직한 주의와 열의와 그리고 경악의 표정까지 띠고 있지 않겠는가! 나는 교단에 올라서자, 마치 열병에 널린 사람처럼 열띤 어조로 강의 를 했지. 한 시간 이상은 걸리리라 생각했던 강의가 10분 만에 끝나버리더군. 장학관-은테 안경을 쓰고 짧은 가발을 쓴 여윈 노인이었는데-도 참관하여 이따금 이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어. 내가 강의를 끝내고 안락의자에서 일어서자 장학관은 '훌륭했소, 너무 수 준이 높아서 좀 애매한 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과목의 주제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 명이 없었던 것 같소'라고 말하더군. 그렇지만 학생들은 존경 어린 눈으로 교실을 나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이건 사실이야. 이러한 면이 젊은이들의 귀중한 일면이라 할 수 있을거야! 두번째 강의도 원고를 준비해 가지고 갔고, 세번째도 역시 그렇게 했지만……그 후부터는 차차 원고 없이 즉석에서 지껄이곤 했지." "그래서 평판이 좋았나?" 하고 레디네프가 물었다. "인기가 그만이었지. 내 강의를 들으려고 앞을 다투어 몰려왔으니까. 나는 내 가슴속에 있는 것을 모두 전하려고 했어. 학생들 가운데 서너너댓 명은 정말 뛰어났으나 그 밖의 대 다수는 내가 지껄이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더군. 하기는 솔직히 말해서 똑똑하다는 학생들도 이따금은 얼토당토않은 질은 을 해서 나를 당황하게 했지만. 그래도 나는 결코 실 망하지 않았네. 하여튼 학생들은 모두 나를 따랐으니까. 나도 시험 때에는 학생들에게 모두 만점을 주곤 했지.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나를 잡아먹으려고 음모를 꾸미는 자가 나타났 네…… 나니, 음모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을 거야! 음모를 꾸미는 자가 나타났다기보다는, 내 가 공연히 쓸데없는 데까지 발을 들여놓았다는 말이 옳을거야. 모두들 나를 아니꼽게 여겼 고 이쪽에서도 그들에게 곱게 보일 짓은 하지 않았지. 나는 중학생들을 앞에 놓고, 대학생들 에게도 어떨까 싶은 강의를 하는 판이었으니까, 듣고 있는 학생들도 별로 얻는 게 없을 것 이고……나 자신도 구체적인 사실은 잘 모르는 형편이었으니까 말일세. 게다가 나는 내게 주어진 활동 범위 내에서만 만족할 수는 없었거든…… 자네도 알다시피 이것이 나의 결함이 라면 결함이지. 다시 말하면 나는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원하고 있었는데, 사실대로 말해서 그 개혁이야말로 아주 적절하고 실천 가능한 것이었네. 나는 그것을 교장을 통해서 실현하 려 했지. 교장은 선량하고 정직한 친구여서 처음에는 나의 건의에 귀가 솔깃한 것 같더군. 교장 부인까지 내편을 들어주었으니까. 교장 부인은 정말 보기 드문 여자였어. 나는 일생을 통하여 그런 여자를 별로 만나 본적이 없네. 벌써 사십 고개를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구 하고, 마치 열 대여섯 살밖엔 안 되는 처녀처럼 선이라는 것을 믿었고 모든 아름다운 것 을 사랑했으며 누구 앞에서나 거리낌없이 자기의 신념을 표명할 수 있는 여자였지. 그 여자 의 고결한 감격성과 순진한 마음씨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거야. 나는 교장 부인의 권 고를 받고 개혁안을 쓰기 시작했지……그런데 이때 내 발밑에 함정을 파는 놈들이 나타나 서, 나를 부인 앞에서 중상했단 말일세. 그중에서도 특히 앞장 선 놈은 수학 선생이었어. 남의 아픈 데를 곧잘 찌르는, 신경질적으로 생긴 작달막한 사내였지, 뭐라 할까, 피가소프와 비슷한 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피가소프보다는 훨씬 유능한 편이지…… 한데 피가소프는 어떻게 되었나, 아직 살아 있나?" "살아 있고 말고. 소시띤 출신의 여자와 결혼해서 사는데, 마누라한테 걸핏하면 얻어맞곤 한다더군. " "거 고소하게 됐군! 그건 그렇고 나타리아 알렉세브나는 잘 있나?" "잘 있 어, " "행복한가?" "행복하지. " 루딘은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하다 말았지? ……아 참, 수학 선생 얘기를 하고 있었지. 그놈은 무슨 원수라도 진 것처럼 나를 미워해서 내 강의 를 불꽃놀이에 비유하기도 하고 혹은 내 말에 조금이라도 모호한 데가 있으면 기다리고 있 었다는 듯이 말꼬리를 물고 늘어진단 말일세. 언젠가 한 번은 16세기의 대표적 작품인가 뭔 가 하는 것으로 나를 궁지에 몰아넣은 일조차 있었다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놈 이 내게 무슨 흉계나 있지 않은가 하고 의심했다는 거야. 덕분에 나의 마지막 비누방울은 바늘 끝같이 날카로운 그놈한테 걸려서 그만 덧없이 터져버리고 말았지. 처음부터 나와 잘 사귀지 못했던 장학관은 교장을 부추겨 나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마침내 소동이 벌어지고야 말았네. 나도 가만 있지 못하고 후끈 달아서 맞섰다가 그것이 상 부에 보고되어 결국 사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단 말일세. 나는 그냥 물러날 수 없어서, 나라는 인간을 그렇게 함부로 다를 수 없다는 것을 한 번 보여주려 했지만……그러나 역시 나는 상대방이 제멋대로 다를 수 있는 그런 인간이었어. 그래서 나는 지금 이곳을 떠나야 할 판국에 이른 걸세."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마주 앉아 있었다. 루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그렇군. 이젠 나도 콜리초프의 시구를 빌려 '아아, 젊은이여, 그처럼 그대는 나를 휘 몰고 휘몰더니, 이제 나는 아무 데도 몸둘 곳이 없구나……‥." 하고 개탄할 수 있게 되었 어. 그렇다고 나는 과연 아무 구실도 할 수 없는 인간이었을까? 내게 주어진 사업이라곤 정 말 이 세상에 한 가지도 없단 말인가? 나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해보곤 했지만, 그러나 아 무리 나 자신을 얕잡아보려 해도 나의 내부엔 누구에게나 흔히 있을 수 없는 그 어떤 능력 이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능력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마는 것일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자네와 함께 외국에 가 있을 때…… 자네 기억하겠지? 그때만 해도 나는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허풍만 떠는 인간이었어…… 사실 그때 나는 자 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도 분명히 의식하지 못하면서 자기의 언변에 도취되었고 자기의 환상을 믿고 있었지. 그러나 지금은 누구 앞에서나 거리낌없이 자기가 원하는 바를 커다란 소리로 표명할 수 있네. 이건 단언할 수 있어. 나는 남에게 숨겨야 할 것이라곤 한 가지도 없는 인간이야. 나는 그야말로 착한 마음씨를 가진 인간이야. 나는 겸허한 마음으로 주위 환 경에 순응하고 싶다, 거창한 뜻을 품지 않고 가까운 데 있는 조그만 일이라도 완성하여 비록 미미한 것일망정 세상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 싶다, 늘 이렇게 생각하고 노력했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단 말일세! 도대체 이건 어찌 된 노릇이까? 남들처럼 살고 활동하 고 싶다는 나를 방해하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지금 이 문제에만 골몰하고 있네. 간신히 그 어떤 활동분야를 얻어 어떤 거점에 서기가 무섭게 운명이 손을 뻗쳐 나를 거기서 끌어내리곤 하니…… 나는 정말 무서워졌네, 나 자신의 운명이…… 왜 그럴까. 이 수수께끼 를 자네가 풀어주게!" "수수께끼라고?" 레디네프가 말을 받았다. "하긴 자네 말이 을아. 자네는 내게 있어서도 언제나 수수께끼였으니까, 젊은 시절에 자네는 부질없는 엉뚱한 짓을 하고는 곧잘 가슴이 서늘해지는 소리를 뇌까리곤 했지. 그러고는 다시 부질없는 짓을 시작하고…… 그 시절에도 나는 자네를 이해할 수 없었더라……실은 그것 때문에 자네에게 싫증을 느끼게 된 것이지 만…… 하여튼 자네의 내부엔 넘칠 듯한 힘이 있었어. 이상에 대한 의욕도 억제할수 없을 만큼 왕성했고……‥ "말뿐이었어. 모든 것이 말뿐이었어! 실천된 것은 하나도 없었지" 하고 루딘이 가로채듯 말했다. "실천이 없었다고? 실천이란 어떤 걸 두고 하는 말인가?" "어떤 걸 두고 하는 말이냐 고? 자네도 기억하겠지, 그 프란체프란 친구……눈먼 노파와 그 가족을 자기의 노동으로 먹 여 살린……그것도 하나의 실천이 아닌가?" "음, 그러나 선한 말을 하는 것 역시 하나의 실천이라 할 수 있지." 루딘은 말없이 레디네프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레디네프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 내렸다. "그래, 지금 시골로 돌아가는 길인가?" "그래 . " "시골에 아직 자네의 영지가 남아 있는가?' "쥐꼬리만큼 남아 있네, 두세 명의 농노가 딸린 농지가 있으니까, 말하자면 뼈를 묻을 한 치의 땅은 있는 셈이지. 지금 이 순간 자네는 필시 '이런 판국에도 여전히 멋진 문구를 끌어대는구나!' 하고 생각하겠지. 사실 멋진 문구가 나를 파멸로 이끌었어. 그것이 나를 물 어뜯어 죽인 거야. 하지만 끝내 그것을 내동댕이칠 수가 없었어.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은 허튼 소리가 아니야. 나의 이 백발, 이 주름살은 결코 멋진 문구가 아니야. 이 해진 팔꿈치 는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고. 자네는 언제나 나에게 냉엄했어. 그러한 자네의 태도는 사실 공정한 것이었지.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린 이 판국에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등잔에 기름이 떨어지고 등잔 그 자체까지 다 부서져 심 지의 불이 금세라도 꺼질 듯 가물거리는 이 판국에 말이야…… 이제는 죽음이, 알겠나, 죽음 이 최후의 화해자 구실을 맡고 나서야 할 차례야……‥." 레디네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보게, 루딘!" 하고 그는 소리쳤다. "어째서 나한 테 그런 말을 하나? 나는 자네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어. 나를 무슨 재판관 같 은 인간으로 알았나? 자네의 그 움푹 패인 볼이며 이마의 주름살을 보면서 멋진 문구니 허 튼 소리니 하는 것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면, 나는 정말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놈이야! 자 네는 내가 자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어하는 거지? 좋아, 내 말하지!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네-여기 한 사람의 사내가 있다…… 이 사내는 자기가 원하기만 했다 면 어떠한 것이든지 능히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고, 지금쯤은 지상의 온갖 행복을 누리고 있을 인간이다! ……그런데 지금 굶주리고 지치고 몸둘 곳조차 없는 신세가 될 줄이야 ……‥." "자네 눈엔 내가 가엾게 보이는 모양이로군" 하고 루딘은 처량하게 뇌까렸다. "아니, 그건 잘못 생각했네. 오히려 나는 자네를 존경하고 있어. 이건 정말이야! 아까 자 네가 말한 그 지주 집에서도 자네가 몇 해 동안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것을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자네가 그 지주의 비위를 맞추려고만 들었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도 자네의 일생을 보장했을 거야. 그리고 또 어째서 자네는 중학교에 그냥 자리를 잡고 있지 못했을 까? 어째서 자네는-정말 이상한 인간이야! -무슨 계획을 세워 일을 시작하기만 하면 반드 시 자기 자신의 이익을 회생하고야 마는 것일까? 어째서 자네는 아무리 비옥한 땅이라도 일단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기다 뿌리를 박으려 하지 않는 것일까7" '나는 원래가 뿌리 없이 생겨난 풀이니까" 하고 루딘은 쓸쓸한 미소를 띄우며 말을 받았다. "그래서 어 디 한군데 눌러 붙을수가 없는 모양이야." "그건 옳아. 하지만 자네가 한군데 늘러붙을 수 없는 것은 자네 말마따라 그 어떤 벌레 가 내부에서 자네를 부추기기 때문은 아니야. 자네의 내부에 들어앉아 있는 것은 그 어떤 벌레도, 불안에 떠는 나태한 영혼도 아닌…… 진리에 대한 사랑의 불길이야. 그 불길이 자네 의 내부에서 타오르고 있는 거야. 비록 자네에게 여러 가지 결점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 자 신을 이기주의자가 아니라고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보다 그리고 자네를 음흉한 책사라고 부 르는 많은 사람들보다도 더욱 세차게 그 불길은 자네의 내부에서 타오르고 있는 거야. 나 만 하더라도, 만일 자네와 같은 입장에 놓여 있다면 벌써 오래 전에 그 벌레의 입을 틀어 막아 버리고 모든 사람과 타협했을 거야. 그런데 자네는 울화통을 터뜨리는 일도 없이, 마 치 젊은 청년과도 같은 의기를 가지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지금 이 자리에서도 다시 새 로운 일에 착수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렇다고 믿네," "아니 안 되겠어. 이젠 나도 지쳐버렸어" 하고 루딘은 말했다. "이 이상 아무 일도 못 할 거야. " "지쳐버렸다고? 하긴 그렇겠지. 다른 사람이라면 벌써 옛날에 죽어버렸을테니까. 죽음은 사람을 화해시킨다고 자네는 말했지만. 어떤가, 삶은 사람을 화해시키지 못할까? 이 세상에 서 삶을 누린 자로서 타인에게 관대할 수 없는 자는 타인으로부터 관대한 취급을 받을 수 없는 법일세. '나는 관대한 취급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는 없어. 자네는 가능한 한 모든 일을 했고, 힘 자라는 데까지 싸웠어…… 그 이상 또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우리 두 사람이 다른 길을 밟아온 건 사실이야." "아니, 자네는 나와 진로가 다를 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인간 이야" 하고 루딘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우리 두 사람은 각각 다른 길을 밟아왔어" 하고 레디네프가 계속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처해 있는 위치와 나의 냉정한 피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행복한 주위 환경에 기 인하는 것이겠지. 나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편안히 앉아서 수수방관 할수 있었지만, 자네는 들에 나가 팔 소매를 걷어붙이고 땀을 흘리며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 여기서 두 사람의 진로가 아주 달라지고 만 거야…… 그렇지만 말일세, 우리 두 사람은 이렇게 서 로 가까운 동지가 아닌가. 자네와 나는 거의 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암시 비슷한 한마디만 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같은 감정 속에서 성장해 온 인간들이야. 우리 들의 동료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자네나 나나 말하자면 마지막으로 남은 모히칸족(북 아메리카의 절종한 인디언족)이야! 아직도 전도가 양양한 생활이 펼쳐져 있던 옛날이라면 제각기 제멋대로의 코스를 택해도 무방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싸울 수도 있겠지만, 이 미 우리들의 대오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세대가 우리들과 다른 목적을 향해 우리를 앞질러 앞으로 앞으로 나가고 있는 오늘날에는, 우리는 서로 굳게 뭉쳐야 한다고 생각하네. 자, 그런 뜻에서 한잔 드세. 그리고 옛날에 하던 것처럼 대학생이 애창하는 청춘 의 찬가라도 부르세!" 두 사람의 친구는 서로 잔을 부딪치며 술을 들이킨 다음, 감격에 떨리는 러시아인 특유의 목소리로 가락이 잘 맞지 않는, 옛날에 부르던 학생의 노래를 불렀 다. "그런데 자넨 지금 시골로 돌아가는 길이라지만" 하고 레디네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내 생각 같아서는 아무래도 시골에 오래 들어앉아 있을 것 같지 않군. 하지만 어디 가서 무 엇을 하다가 어떻게 세상을 끝마칠는지, 그것도 나는 상상할 수 없어…… 그러나 이것만은 기억해 두게. 앞으로 자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자네에겐 언제나 돌아갈 곳이 있네. 자네가 능히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보금자리가 있네. 그것은 나의 집이야…… 알겠나? 사 상적인 면에서의 상이 군인도 있을 테니까 그들에게도 마땅히 교양원이 있어야 하지 않겠 나? 루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네" 하고 그는 말했다. "정말 고마워! 자네의 호의는 죽 어도 잊지 않겠네. 하지만 나는 요양원 같은 데 들어갈 자격이 없는 놈이야. 나는 자신의 일 생을 망쳤을 뿐만 아니라 사상적인 면에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으니까." "그 런 말은 그만두게!" 하고 레디네프가 말을 받았다. "누구나가 자연이 만들어준 그대로의 자기를 지키며 살아 나가는 법이야. 그 이상의 것을 인간에게 요구할 수는 없어! 자네는 ' 영원한 유태인'을 자처하고 있었지만……어쩌면 자네는 그렇게 영원히 방랑을 계속해야만 하게 되어 있는지도 모르지. 방랑을 계속하며 자기 자신도 모르는 그 어떤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야. 속담에 '우리가 어딜 가도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란 말이 있지만, 사실 그것은 무의미한 말이 아닌 것 같아…… 그럼 떠나려나?" 루딘이 모자를 집어드는 것 을 보고 레디네프는 이렇게 물었다. "하룻밤만 더 묵고 가지 않고?" "아니, 떠나야겠어! 그럼 잘 있게, 그처럼 나를 생각해 주니 정말 고맙네…… 하지만 나는 죽어도 곱게 죽지는 못할 걸세." "신이 아닌 이상 그걸 어떻게 알겠나……오늘중으로 꼭 떠나야만 하겠다는 건가?" "떠 나겠네. 부디 잘 있게. 그리고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주게." "자네도 나를…… 그리 고 지금 내가 한 말을 잊지 말아주게. 자, 그럼," 두사람은 서로 껴안고 이별의 인사를 했다. 루딘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레디네프는 오랫동안 방안을 오락가락하다가 창가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잠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가엾은 사내야!' 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책상에 앉아서 아내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갑자기 일기 시작한 바람이 유리창을 사정 없이 두드리고 마치 짐승의 울음소 리처럼 불길한 음향을 끌며 울부짖었다. 길고 긴 가을밤이 찾아들었다. 이러한 밤에 지붕 밑에 편안히 들어앉을 수 있는 사람은, 따뜻한 자기의 보금자리를 가진 사람은 행복하 다…… 신이여, 집 없이 헤매는 방랑자에게 도움을 주소서! 1848년 7월 26일 뜨거운 한낮, '인민 공장' 봉기도 거의 진압된 파리 교외 성 안토니구 (I)의 어느 좁다란 뒷골목에서는 상비군의 1개 대대가 바리케이드를 공격하고 있었다. 몇 발의 포탄이 바리케이드를 분쇄해 버렸고, 그것을 지키고 있던 투사들 중에 살아남은 자들 은 이미 자리를 버리고 자기 목숨을 건질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납작하게 된 마차의 동체를 쌓아올린 바리케이드 위로 갑자기 키 큰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낡은 웃옷 위로 붉은 허리띠를 동여매고 흐트러진 백발 위에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한손에는 붉은 기를 들고 다른 칸 손에는 구부러진 사벨을 쥐고 있었는데,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로 뭐라고 고함을 치며 깃발과 사벨을 휘두르면서 꼭대기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반센의 저격 병이 그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키 큰 사내는 깃발을 떨어뜨리더니, 마치 누구에게 경례라도 하듯이 허리를 굽히며 부대처렁 거꾸로 떨어져내렸다…… 탄알이 그의 심장을 꿰 뚫은 것이다. "저것 봐라!" 도망치던 폭도 중의 한 사람이 동료에게 말했다. "폴란드 인이 총알에 맞았다!" "제기랄!" 또 한 사람이 대답하고는 덧문이 모두 닫힌, 바람벽이 탄알과 포탄 자국으로 얼룩진 건물의 지하실로 뛰어들어갔다. 이 '폴란드인'은 다름 아닌 드미트리 니콜라이치 루딘이었다. 작품론 (처녀지)와 (루딘)을 중심으로 김학수(전 고려대교수 · 노어노문학) 1 이반 투르게네프는 러시아 작가들 중에서 가장 서구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다. 푸슈킨, 고골리, 레르몬토프는 러시아 문학의 창시자이긴 하지만 유럽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지 의 작가들이었다. 러시아 작가를 유럽에 전하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었던 언어라는 장벽을 깨뜨린 사람은 바로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투르게 네프는 다른 어느 작가보다도 먼저 유럽에 알려진 러시아 최초의 작가였다. 자기 생애의 태반을 유럽에서 보낸 투르게네프는 평생 서구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버리지 않으면서 자기 작품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완성했다. 사실 그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열 렬한 서구주의자였고 자기 조국 못지 않게 유럽을 사랑한 세계주의자였다. 특히 프랑스는 제2의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고 졸라, 플로베르, 모파상 같은 작가는 그의 둘 도없는 친구였다. 그러나 그 기나긴 외국 생활에도 불구하고 투르게네프가 당시의 서구문학의 영향을 거 의 받지 않았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그의 문 학이 유럽 사상과 예술에 크나큰 도움을 주었고, 그의 소설은 많은 유럽의 작가들에게 예술 적인 모범이 되었다. 투르게네프는 1836년 페테르부르크 대학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으로 가서 하이네, 바이런을 공부하고 그리스 고전을 연구했으며 헤겔 철학에 열중했다. 그 후 그는 주로 프 랑스 파리에 머물면서 창작 활동에 전념했다. 그가 프랑스에 머물게 된 주요 원인 중의 하 나는 비아르오라는 여가수였다. 투르게네프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음악 여행 도중 러시아 에 들렸을 때였지만, 그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순결한 사랑은 계속되었다. 비아르도 부인은 남편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으나 투르게네프는 그들 부부의 친구로서 끝까지 깨끗한 교제를 계속하면서 일생을 독신으로 마쳤던 것이다. 그의 문학의 특징을 이 루는 실연과 비련 그리고 애절한 고독감과 못 이룬 사랑은 바로 이러한 자전적인 요소와 깊 은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투르게네프는 1841년에 러시아로 돌아오자 한때 관직생활을 했으며 1843년에는 서사시 (파라샤)를 발표하여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중편소설과 몇 편의 희곡을 썼으나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투르게네프에게 확고 부동한 명성을 안겨준 것 은 역시 농노 제도의 실상과 농노의 인간미를 서정 어린 담담한 필치로 묘사한 단편집 (사 냥꾼의 수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47년 투르게네프는 (현대인)지에 최초의 단편 (호리와 랄리느이치)를 발표하여 열광적 인 환영을 받았다. 이 작품이 그 당시 독서계의 일치된 찬사를 받은 것은 작가 자신의 인 도주의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당시의 러시아 농민은 무지몽매하고 더러운 짐승처럼 간주되 고 있어서 감히 문학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투르게 네프는 농촌의 민중 속에 숨어 있는 훌륭한 지혜와 재능, 상냥한 감정, 순박한 인간미를 예 술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호리와 칼리느이치)의 빛나는 성공은 아직까지 자기의 재능을 의심하던 투르게네프에 게 작가적인 용기와 희망을 북돋워주었다. 이에 그는 어릴 때부터 축적해 온 체험과 관찰을 집중시켜, 마침내 1851년 파리 교외에서 (사냥꾼의 수기)라는 이름하에 25편의 주옥 같은 농 민 소설 시리즈를 완성했던 것이다. (사냥꾼의 수기)가 독서계에 준 영향은 굉장했다. 농노제에 대한 '예술적인 고발서'라고 말할 수 있는 이 농민 소설은 독자들에게 농노제의 가공할 만한 모순을 실감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양심적인 인텔리겐차들이 한결같이 희구해 오던 농노 해방의 실현을 위 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사냥꾼의 수기)에 의해 자연 시인으로서의 개화의 정점에 도달한 투르게네프는 계속해 서 (루딘) (귀족의 등지) (그 전날 밤) (아버지와 아들) (연기) (처녀지) 등의 문제작을 발 표하여 작가로서의 명성을 더욱 확고 부동하게 하였다. 2 (처녀지)는 1877년 (유럽 통보)에 발표된 투르게네프의 마지막 작품으로 그 당시, 즉 70 년대 러시아를 휩쓸었던 '나로드니키(민중파) 운동'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1861년 농노 해방령이 발표된 후 러시아 국내는 일대 혁신으로 들끓게 되었다. 낡은 귀 족 문화는 평민 문구에 자리를 양보하고 이상에 불타는 청년들은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을 일으켜 일제히 농촌으로 달려 가서 우매한 농민의 계몽에 앞장섰다. 70년대에 접어 들면서 '민중 속으로'의 운동은 그들의 유일한 슬로건이 되었고 실제로 농민 속으로 파고들 어가 농민과 침식을 같이하면서 그들을 이해하려고 애쓴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러한 운동은 농민의 계몽에만 그치지 않고 나중에는 농민 폭동을 선동하는 혁명 운동으로까 지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적 감각과 예술적인 조화를 남달리 중요시했던 투르게네프는 원래 사회 ·정치적인 테마에 깊이 관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 정신에 예민했던 그의 사실주 의적인 관찰력은 70년대의 젊은이를 매료시켰던 '민중파 운동'을 그대로 좌시하고 있을 수 만은 없게 했다. 투르게네프는 처음에 러시아 대학생들의 급진적인 혁명 운동을 다룬 이른바 계차예프 사건'을 작품의 주제로 삼을 생각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사건을 (악령)에서 다루었는 데, 비밀 조직에서 빠져나왔다고 해서 동료 대학생 이바노프를 살해한 네차예프의 급진적인 혁명 운동은 투르게네프에게도 적지않은 우려를 자아내게 했다. 그리하여 네차뎨프적인 활 동가에 대한 작가의 부정적인 태도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 (처녀지) 속에서도 여전히 사라 지지 않고 있다. 즉 끝까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바실리니콜라예비치의 지령을 무조건 실 행에 옮기는 광신자들의 무분별한 행동 그리고 그 심리적인 성격 묘사 속에서 우리는 그러 한 요소를 발견할 수있다. 그러나 케차예프 사건을 다루려던 최초의 구상은 점차 뒷전으로 물러가고, 70년대의 러 시아를 쉽쓸었던 '민중파 운동'이 그의 중심 테마가 되었다. 결국 (처녀지)는 지금까지의 투 르게네프의 소설과는 달리 사회 ·정치적인 색채가 농후한, 새로운 예술 형식의 새로운 탐 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소설에서 이야기의 중심이 되다시피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받고 있는 네지다노프는 러시아 문학에서 흔히 보는 '잉여 인간'의 유형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는 허위, 부정, 범 속과 타협할 수 없는 진실성과 결백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가끔 시상에 젖곤 하 는 감상적인 낭만주의자다. 네지다노프는 70년대의 물결을 타고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 해 헌신적으로 선전 사업에 몰두한다. 그러나 그는 농민을 계몽하는 과정에서 허위에 찬 자 신의 입장을 자각하고 고민하다가 나중에는 신념을 잃고 권총 자살을 하고 만다. 끝내 민 중과 동화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네지다노프는 자기가 믿지도 않는 공상적인 신념에 희생당한 70년대 러시아 인텔리겐차의 비극적인 전형이라 할 수 있지만, 근본적인 면에서 는 40년대의 '잉여 인간형'인 루딘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은 다같이 러시아의 현 실, 즉 민중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루딘이 미사 여구만 농락할 뿐 실지 행동과 는 거리가 먼 인물인 데 반해 네지다노프는 최소한 자기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직접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네지다노프는 루딘보다는 발전된 형상이라고 할 수 있 겠으나, 두 사람 모두 실생활에는 아무 기여도 하지 못한 잉여 인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다. 결국 네지다노프의 비극적인 결말은 그의 개인적인 특질에 원인이 있을뿐만 아니라, 그 가 몸담고 있던 사회적 ·역사적 정세에도 원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작품 속의 민중파 운동의 실패는 강인한 의지를 가진 귀족 출신인 마르젤로프에게조차도 비극적인 운명을 지 니게 하고 있다. 혁명적인 행동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불합리한 전술의 희생물처럼 묘사 되고 있다. 민중을 해방한다는 그들이 민중의 생활은 물론이고 민중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 을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민중 속에서 행동하고 어떻게 민중 의 불신을 사고 또 어떻게 민 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가를 작가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 솔로민은 평민 출신의 교육받은 기사로서, 두드러진 데라고 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소박하고 평범한, 실제적인 인물이다. 그는 영웅도, 추사도 아니 다. 그 당시 러시아의 인텔리겐차들은 모두 '민중 속으로!'라는 슬로건 밑에 열광적인 선전 운동에 몸을 바치고 있었지만, 솔로민은 가까운 장래의 혁명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 자신 민중 출신이고, 민중과 함께 괴로워하고 민중이 증오하는 것을 똑같이 증오하면서도 맹목 적인 혁명 운동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는다. 그는 묵묵히 자기 일만을 계속하면서 자기가 믿는 길을 침착하게 걸어갈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솔로민은 결코 겁쟁이가 아니거니와 편 협한 이기주의자도 물론 아니다. 오히려 그는 차분한 성격과 치밀한 통찰력 그리고 그지없 이 선량한 마음씨로 해서 주위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네지다 노프와 마르켈로프가 실현성이 없는 이상주의적인 낭만주의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따스한 우 정으로 그들을 대하고 끝까지 그들을 버리지 않는다. 결국 투르게네프는 이상을 가졌으면서 도 말이 없고, 교육을 받았지만 민중 출신이고, 소박하면서도 분별이 있는 이 솔로민에게 서 이 소설의 긍정적인 개념을 구현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주인공 마리안나는 투르게네프가 묘사한 여인상 중에서 그 이상주의적인 성격으로 해 서 가장 매력적인 여성이다. 투르게네프가 묘사하는 여주인공은 그 대부분이 독특한 용모 와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마리안나만큼 이채롭고 독특한 빛을 발하는 여성은 드물다. 그녀는 순결하고 총명하고 그러면서도 타는 듯한 정열과 적극성을 지니고 있다. 마 리안나는 결코 아름다운 여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불굴의 의지와 재능과 지성이 있다. 마리안나는 고아가 된 후 숙부 집에서 살면서 네지다노프의 사상과 신념에 감화되어 그를 사랑하게 된다. 결국 그녀는 사이비 자유주의자인 숙부 집에서 빠져나와 네지다노프 와 함께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그녀의 이러한 자기 희생적인 용감한 행위는 어떤 남 성에 대한 사랑을 원천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고상한 이상에 대한 확고 부동한 신념을 그 원동력으로 하고 있다. 게다가 그녀의 신념은 분별 없는 맹목적인 광신이 아니라 총명하면 서도 자유로운, 굳은 의지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물론 그녀도 사랑은 했지만 사랑은 그 녀에게 있어서 다른 여자에게서와 같은 독점적인 의의를 지니지는 못했다. 네지다노프와의 사랑은 처음부터 이상적인 사랑이었다기보다는 자기 이상으로 접근하기 위한 과정에서의 동지적인 사랑에 지나지 않았다. 마리안나의 형상을 통해 작가는 70년대 젊은이의 가장 적 극적인 여인상의 전형을 구상화했다고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이 작품에는 보수적인 귀족, 사이비 혁명가, 지주, 공장주, 자본가, 관리 등 70 년대 러시아의 사회적 단면을 제시해 주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마르켈로프는 강한 정신력과 신념을 가진 30대 중반의 혁명 투사다. 그는 마리안나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하는데, 작가는 그의 긍정적인 면을 그리는 한편 그의 결점도 남김 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다. 마리안나가 그에게서 호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인간적인 따사로움과 인정미를 느낄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선전 활동 때문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당한다. 결국 그는 강렬한 의지와 신념을 가졌으면서도 실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파멸하고 마는 패자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 다. 그리고 자유주의에 동정하는 체하면서도 권력에 아부하는 위선자 시파긴, 자기의 미모 로 네지다노프를 농락하려는 거만한 이기주의자인 발렌티나 미하일로브나, 야비할 정도로 편협하고 극단적인 보수파 관이 칼로메이체프, 무 지하면서도 교활하고 비굴한 자본가 골루 시킨 등은 풍자적인 수법으로 묘사되고 있다. 오스트로두모프와 마슈리나는 고결한 정신과 열렬한 자기 회생의 정신을 가졌으면서도 명석한 비판력을 결여한 우둔한 광신자들이고, 파 클린은 제법 날카로운 비판력을 지닌 선량한 마음씨의 소유자이친 해도 무엇 하나 도움을 주지 못하는 초라한 약자인 동시에 어릿광대다. (처녀지)의 발표는 보수 ·진보 양진영에 있어서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젊은 세대 들은 민중파 운동에 가담한 작중 인물들이 결단력이 부족한 회의파가 아니면 맹목적인 광 신자나 점쟁이로 희화화되었다고 비난했다. "투르게네프는 머무른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았 기 때문에 참된 러시아를 모른다. 러시아의 참된 청년을 이해하지 못한다. " 이것이 작가에 게 돌려진 비난의 요점이었다. 즉 그들에게는 네지다노프, 솔로민, 마리안나 등은 전형적인 인물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한편 보수주의자들은 국수주의와 구세대를 대표하 는 두 사람의 등장 인물인 시파긴과 칼로메이체프를 우롱했다고 비난의 화살을 던졌다. 사실 (처녀지)속에는, 부분적으론 검열의 탓도 있지만, 민중파 운동의 어두운 면만을 묘 사한 듯한 인상을 주는 점도 없지는 않다. 그러고 그의 작품 활동이 대부분 외국에서 행해 졌기 때문에 러시아를 보는 눈이 자칫하면 망원경적으로 되기 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 나 적어도 투르게네프가 민중파 운동을 일부러 어둡게 보진 않았다는 것은 파리에 망명중인 민중파 간행물 (전위)에 보조금까지 대주고 있었다는 사실로도 입증이 된다. 물론 투르게네 프 자신은 급진적인 혁명 이론에 공감하는 혁명가도, 동조자도 아니었다. 그는 (처녀지)를 발표한 후 스타슬레띠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장편에서 젊은 혁명가들이 그 결백한 마음씨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이 잘못되어 있었으므로, 즉 비현 실적이었으므로 실패로 끝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을 제시하려고 생각했다. " 결국 투르 게네프는 급진적인 개혁을 바라지 않는 '점진주의자'였음을 솔직히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도 그는 젊은 혁명가들을 조소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언제나 그들에게 인도주의적인 공감을 느끼며 관심을 가져왔던 것이다. 3 (루딘)(1855)은 투르게네프의 최초의 장편소설로서, 이 작품이 지니는 사회적 의의나 예 술적 가치로 보아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그리고 투르게네프로 하여금 당대의 제일급 작가로서의 명성과 지위를 갖게 해준 장편이라는 점에 서도 가장 의의 깊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루딘은 헤겔 철학에 정통한 1840년대 러시아의 양심적인 인텔리겐차 의 전형이다. 그는 만인을 움직일 수 있는 웅변술과 정의에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공익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인간만이 참다운 인간일 수 있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자유와 자기 희생 정신에 넘쳐 있었고, 그 모든 것은 희망에 불타는 미래로 돌려지고 있었다. 이것이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걷잡을 수 없는 흥분과 정열에 찬 젊음의 기백을 불러일으켜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딘은 일정한 거처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객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 다. 그는 농촌 개혁의 새로운 꿈을 안고 황무지 개간에 힘을 쏟기도 하고 배가 오르내릴 수 있도록 좁은 강을 확장하는 공사에 착수하기도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결실을 보지 못하고 좌절해 버리고 만다. 한때는 중학교에서 러시아 문학 강의를 맡아 열을 올리기도 하지만 그 것 역시 실패로 끝난다. 루딘은 이렇게 가난과 실의 속에 방랑을 거듭하면서 자기가 걸을 수 있는 길은 다 걷는다. 그것은 육체의 방랑일 뿐만 아니라 영혼의 방랑이기도 했다. 그러 나 그 길은 거의 모두가 질퍽질퍽한 진흙탕이었다. 그는 독수리처럼 의기양양하게 그 진흙 속에 뛰어들었다가는, 나올때에는 언제나 껄질이 깨진 달팽이처럼 풀이 죽어 기어나오곤 했다. 결국 그는 러시아에서는 끝내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정처 없는 유랑 생활 끝에 자기 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프랑스 혁명의 시가전에 무명의 희생자로서 일생을 마치고 만다. 그럼 루딘의 이 비극적인 최후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리고 루딘의 비극적인 생의 원인은 무엇일까? 루딘은 해박한 지식, 명석한 두뇌, 불타는 열정과 기백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단력이나 인 내력 그리고 의지력이 없었다. 그는 인간의 사명이며 회생에 대해서 영감 어린 열변을 토하 지만, 그 어느 하나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그는 또한 민중 속으로 뛰어들라고 역설을 하 면서도 기실 민중과는 거리가 멀었을 뿐만 아니라 민중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 고 있었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 바로 여기에 루딘의 비극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루딘의 자가 당착적인 모순은 여주인공 나타리와의 사랑에서도 여실히 입증된 다. 루딘에 의해서 계발된 나타리아가 자유와 정의를 위해 집을 뛰쳐 나가기로 결심하고 초연히 루딘 앞에 섰을 때, 루딘은 그녀에게 아무런 행동도 지시해 주지 못하는 초라한 공 론가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나타리아에 대한 그의 감정은 사랑도 아니었다. 인생을 참되 게 살기보다 인생을 논하기에 적합했던 루딘은 자신의 이상적인 정열로 남을 북돋워줄 수는 있었지만, 그 자신이 직접 사랑 속에 뛰어들 수 있는 인간적인 정열은 결핍하고 있었다. 다 시 말해서 나타리아에 대한 그의 감정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가공적인 이상에의 정열 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루딘의 친구이면서도 루딘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레디네프는 루딘에 대하여 다 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루딘의 불행은 러시아를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러시아는 우리 중 누가 없어도 태연할 수 있지만, 우리는 아무도 러시아 없이는 살아갈수 없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러나 그것보 다 더 불행한 사람은 실제로 러시아를 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계주의라는 것은 잠꼬 대와 다름없습니다. 세계주의자들이란 제로, 아니 제로 이하올시다. 민족성을 떠나서 무슨 예술이 있고 진리와 생활이 있겠습니까? 레디네프의 루딘에 대한 평가는 그 핵심을 명확히 찌른 말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이것 은 레디네프의 말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말인지도 모른다. 사실 루딘은 조국의 현실과는 너 무나 거리가 멀었다. 루딘은 이 소설 마지막 대목에서, "나는 원래가 뿌리 없이 생겨난 풀이니까, 어느 한군데 늘러붙을 수가 없는 모양이야"라고 말하지만, 그는 러시아의 땅에 뿌리를 내리기에는 너무 나도 순수했고 너무나도 이상이 높았던 것이다. 어쨌든 루딘은 러시아에 아무 도움도 주 지 못한 잉여 인간의 타입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영원한 방랑, 이것이 루딘의 숙명이었다. 그리고 끝없이 괴롭고 비통한 방랑 속에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사명을 수행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원래 루딘은 청년 시절의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을 모델로 한 것이지만, 웅변가·열정가로 서의 바쿠닌은 잘 묘사되어 있으나 그 사회적 ·정치적 신념과 거기에 따르는 특성이 결여 되어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또 어떤 평론은 루딘이 40년대의 지식 계급의 대표자로서 위대한 사회적 사명을 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연약하고 결단력 없는 존재로 묘사된 데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루딘은 단순히 미사 여구만을 농락하는 공론가는 아니었다. 더욱이 청년 남녀의 찬사와 숭배에 자존심을 만족시키는 타락한 도식객도 아니다. 그리고 선과 진리의 이상을 믿으며 빛나는 미래를 건설하겠다는 그의 정열도 결코 표면적인 넋두리에 불과한 것은 아니 었다. 만일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그리고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희구했다면, 그는 얼마든지 행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의와 범속과 타협할수 없는 진실성과 결백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에게 부여된 안식처를 뿌리치고 비참한 유랑 생활 끝에 비극적 인 일생을 마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루딘)은 1840년대 러시아의 과도기적 인텔리겐차의 비극적 전형을 묘사한 걸작 이지만,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루딘이 존재하고 있다. 영원한 불만 속에 현실과 상 극하는 현대인의 비극, 이는 곧 시대성을 초월한 루딘의 비극인 동시에 모든 인텔리겐차들 의 숙명적인 비극이기도 한 것이다. 4 투르게네프의 여섯 편의 장편 중에서 비평가측으로부터 일치된 찬사를 받은 것은 (귀 족의 등지)단 한 편뿐이었고 나머지 작품들은 모두 찬반의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모두 그 시대의 인심을 지배하고 있던 핵심 문제에 관련되어 있었던 탓으로, 비평가들은 단지 사상적인 각도에서 그 작품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투르게네프는 높 은 교양을 지닌 예술가로서, 일반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 조류에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따라 서 그는 자주 정치적이고도 사회적인 테마를 선택하곤 했다. 그러나 투르게네프는 거기에 앞서 시인이었고 예술가였기 때문에 그의 소설에 나타난 사회 문제는 불타는 듯한 정열을 결핍하고 있고, 오히려 냉정한 객관성과 비평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작품 전체의 경향이 생활 현상의 예술적 표현, 개개 인물의 심리 모사에 돌려지고 있어서 협의의 사회 문제는 유구한 인생의 한 현상으로서 전체 속에 용해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정신 활동의 종합적 산물인 그의 예술을 단순히 벌거벗은 사상적 관점에서 평가한다는 것은 지나친 모험 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투르게네프의 예술적 특징은 먼저 그 어조의 유연성과 우아한 필치 그리고 미에 대한 섬 세한 감각에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어떤 뛰어난 선도, 어떤 강렬한 색채도 찾아볼 수 없다. 늦은 봄 어스름 달빛 아래서 자연을 보는 듯한 부드럽고 윤택한 색조는 끝없는 우수에 잠겨 있는 중부 러시아의 하늘과 공기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작품에서 묘사되는 여러 사실은 갑 자기 우리 앞에 그 전체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미세한 집단이 되어 그 깊은 운영 과 함께 서서히 전개된다. 투르게네프를 모르는 사람은 러시아어의 아름다움을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사실 투르 게네프는 보기 드문 러시아의 문장가였다. 가령 톨스토이가 광범한 인생 문제의 파악에 뛰 어나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심각성과 독창성에서 탁월하다고 한다면, 투르게네프는'정녕 러시 아 제일의 문장가라고 할 수 있다. 투르게네프가 문장가로서 예술상 가장 뛰어났던 부분은 그의 작품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자연 묘사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묘사한 것은 주로 평 원의 자연이다. 그는 자기의 고향인 중앙 러시아의 평원과 숲을 즐겨 묘사했다. 넘실거리는 보리밭이며 고요한 평야를 따라 흐르는 냇물, 미풍, 석양, 그 밖의 온갖 풍경의 묘사에 있 어 그는 여전히 고금 독보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투르게네프는 인간을 사랑했고 당상 엄숙한 사실파였다. 또한 공평 무사한 태도와 진실 을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으로서의 투르게네프의 특성이기도 했다. 그는 자기 작품에서 언제 나 대활극을 피했다. 그의 소설 줄거리는 극히 단순하고 모두 일상 생활에서 재료를 얻고 있다. 그는 인물을 묘사함에 있어서 항상 객관적인 태도를 취했고, 외부에 나타나는 현상만 을 관찰하여 묘사했다. 즉 러시아 자연주의의 완성자로서 인생의 진리를 규명하려는 것이 그의 문학의 목표였던 것이다. 투르게네프는 또한 82편의 주옥 같은 산문시를 남기고 있다. 이것은 그의 만년의 작품 중에서도 특이한 것으로 이 속에는 그의 철학적인 사상과 다종 다양한 예술적 요소가 상징 적인 수법으로 집약되고 있다. 투르게네프는 산문시를 발표한 이듬해인 1883년 8월 파리의 교외에서 65세를 일기로 고 독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유해는 10월 초 러시아로 옮겨져 그의 유언에 따라 비평가 벨린 스키가 잠자는 페테르부르크의 보르코보 묘지에 안장되었다. 투르게네프는 생존시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가였지만 그의 사후에도 그것은 마 찬가지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슬라브주의적인 입장에서 서구적인 합리주의를 비난했고, 톨스토이는 그 의 무사상성을 힐난했다. 그러나 조국에서의 찬반 논쟁과는 달리 유럽 문단에서는 투르게 네프를 경이적인 천재로 받아들였다. 프랑스의 사상가 르낭은 투르게네프의 유해가 파리에 서 러시아로 운구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투르게네프처럼 한 인종 전체의 화신이 된 적은 없다. 수백 년 동안 잠자며 침묵하던 역대의 조상이 되살아나 그를 통해 입을 연것이다. 이와 같이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민족적인 상징으로서, 슬라브적인 지성의 권화로서 서구인들에게 크나큰 감명을 주었다. 미국에서는 이미 1870년대에 하우엘즈를 비롯한 일련 의 비평가들이 투르게네프를 '리얼리즘의 모범'으로 받아들였고, 영국의 비평가 조지 세인 츠버리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를 혹평하는 대신 투르게네프를 러시아 최대의 작가라고 극찬했다. 세인츠버리는 투르게네프의 고도의 예술성, 등장 인물의 사실성, 그 성격의 완벽 한 투영 그리고 그 우아한 문체를 높이 평가하면서 투르게네프를 세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위치에까지 올려놓았다. 한편 아일랜드 소설가 무어(George Moore)는 투르게네프를 '나사렛의 예수 같은 존재' 라고 평할 정도로 투르게네프에게 심취한 작가였다. 그는 1919년 (투르게네프와 톨스토 이)란 평론에서, 톨스토이의 도덕 ·설교적인 교화성을 비난하면서 투르게네프에 대해 다음 과 같이 말했다. 투르게네프는 그의 생전에는 많은 제자를 모을 수 얼었지만, 앞으로는 각 세대마다 반 드시 제자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백 년 후에는 과거 설교사에게 귀를 기울였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리라…… 아름다운 운율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미묘한 매력을 발휘하게 되지만 설교사의 조잡한 운율은 그저 한 세대의 흥미를 끄는 게 고작이고 또 어쩌면 한 새대도 계속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럽의 작가 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투르게네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는 제임 스였다. 그는 투르게네프를 '작가를 위한 작가'라고 부르면서 '가장 중요한 뿌리를 내린 예 술적인 영향력'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는 또한 톨스토이가 '국내적'이라면 투르게네프는 '국외적'이라고 평하면서 우아하면서도 간결한 표현력, 풍부한 사고력과 예민한 통찰력, 조 화에 넘친 완성미를 투르게네프의 예술적인 특징으로 들고 있다. 그 밖에도 매리메를 비롯하여 모건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의 투르게네프 숭배자는 수없 이 많다. 투르게네프가 자기 모국에서보다 서구에서 더 높이 평가받은 것은 러시아 작가들 의 통속적인 폐단, 즉 사상에의 광신적인 집착, 정열적인 야만성, 모랄의 극단성, 감정적인 비타협성, 장황한 기념비적인 서술 등을 투르게네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특징을 브란데스(Georg Brandes)는 (투르게네프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 고 있다. 투르게네프의 묘사는 객관적이고 비개성적이며, 서정시를 도입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전체로 보아 서정시의 인상을 풍긴다. 투르게테프는 결코 자기 감정에 빠지는 일이 없었고 오히려 억제함으로써 독자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고골 리의 우울적 절망에서 유래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와 같은 감정을 표시할 때에는 그의 마음이 학대받는 사람들, 특히 대죄인에 대한 동정으로 가득 찰 때다. 톨스토이의 우울은 그 기초를 종교적 숙명론에 두고 있다. 투르게네프만이 철학자다. 그는 인간을 사랑한다. 가령 그 인간을 존경하지 않고 또 그다지 신동하지 않을 때에도 그는 그 민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투르게네프가 세상을 떠난 지 백 년이 지났다. 그 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작 이 독서계를 정복하게 됨으로써 투르게네프의 이름이 그 빛을 잃은 듯한 느낌이 없지 않다. 물론 우리는 투르게네프의 작품에서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처럼 놀라움이 나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작품에 매혹될 따름이다. 그리고 그 우아한 예술 적인 향기, 미에 대한 섬세한 감각, 아름다운 자연묘사, 슬라브적인 우수와 슬픔으로 독자에 게 시적 감각과 미감을 불러일으키는 투르게네프는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받는 작가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