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밤 투르게네프 지음 1 1853년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쿤초보에서 멀지 않은 모스크바 강의 커다란 보리수 그늘 아래의 풀밭에 두 젊은이가 누워 있었다. 한 사람은 스물 세 살쯤 되어 보이며, 키가 크고 얼굴이 가무잡잡했다. 약간 구부러진 뽀족한 코에 잘생긴 이마, 그리고 두툼한 입술 언저리에 신중한 미소가 감돌고 있는 그는, 드러누워 깊은 생각에 잠겨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지 않은 잿빛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다른 한 사람은 두 손으로 금발 고수머리를 괸 채 엎드려 있었는데, 그 역시 어딘가 먼 곳으로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 친구보다 나이가 세 살이나 더 많았지만 훨씬 어려 보였다. 콧수염은 겨우 돋기 시작했고, 턱에는 솜털이 보송보송 나 있었다. 둥근 얼굴에 생기 있는 표정, 부드러운 갈색 눈, 아름답고 선명한 입술과 흰 손에서는 어린애 같은 귀여움이,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끄는 우아함이 엿보였다. 그의 몸 전체가 건강이 가져다 주는 행복과 쾌활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젊음이 갖는 무사 태평함과, 자신만만하여 버릇없는, 그리고 매력적인 기운이 넘쳐 있었다. 그는 두 눈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미소를 띠기도 하며, 또 팔로 머리를 괴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기를 기꺼워한다는 것을 아는 소년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블라우스 같은 헐렁한 흰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그의 가느다란 목에는 하늘색 스카프가 감겨 있었고, 그의 곁 풀밭에는 찌그러진 밀짚모자가 뒹굴고 있었다. 그에 비해 그의 친구는 나이가 훨씬 들어 보였다. 그의 울퉁불퉁한 얼굴을 보면서, 그가 지금 즐기고 있고 그의 마음이 편안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불편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위로는 넓고 아래로는 좁은 커다란 머리통이 기다란 목에 거북살스럽게 붙어 있었다. 바로 그의 팔의 자세에서, 짤막한 검정 플록 코트가 꼭 끼는 그의 몸통에서, 그리고 잠자리 뒷다리처럼 무릎을 세운 긴 다리의 자세에서도 그런 거북함은 드러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직'하다는 인상이 그의 둔한 몸집 전체에서 풍겨 나왔다. 그리고 잘생기지 않은, 조금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그의 얼굴은 사색하는 습관을, 또 선량함을 나타냈다. 그의 이름은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베르셰네프였고, 그의 친구인 금발 청년은 파벨야코블레비치였다. "왜 자넨 나처럼 엎드리지 않나?" 슈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러는 게 훨씬 좋아. 특히 다리를 들어 발뒤꿈치를 서로 부딪치면, 이렇게 말이야, 바로 코 밑이 풀밭이니까, 경치를 바라보는 데 싫증이나면 풀잎 위를 디어다니는 올챙이 배를 한 장수풍뎅이를 보거나, 아니면 분주한 개미를 봐. 정말 그게 나아. 그렇게 되면, 자넨 고전적인 느낌이 드는 포즈를 취하게 되는 걸세. 발레리나가 마분지로 만든 바위에 팔꿈치를 기대는 포즈 그대로지. 자네는 지금 휴식할 충분한 권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농담이 아닐세. 쉬십시오, 나리. 긴장을 푸시고, 팔다리를 쭉 뻗고 말입니다!" 슈빈은 이 말들을 반쯤은 권태롭고 반쯤은 농담조의 코맹맹이 소리로 했다(장난꾸러기들이 과자를 가져온 친구들한테 그렇게 얘기하듯). 그리고는 대답을 기다릴 사이도 없이 말을 계속했다. "개미니, 딱정벌레니, 다른 여러 곤충들에게서 내가 특히 감동한 것은 그들의 놀랄 만한 성실성이야. 그들은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뛰고 있지. 마치 그들의 생명도 어떤 의미를 지닉 있다는 듯이! 창조주이자 만물의 영장인 인간ㅇㄴ 그들을 쳐다보는데, 그들은 인간을 쳐다볼 시간조차 없다는 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더욱 심한 것은 아마 어떤 파리가 창조주의 콧잔등에 앉아 그걸 먹이로 삼는다는 것일 걸. 이건 모욕이지.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보다 못한 게 뭐가 있겠나? 만일 우리가 우쭐해도 좋다면, 그들은 어째서 잘난 체하면 안 되는가? 자, 철학가 선생, 내게 이 문제 좀 풀어 주겠나! 왜 가만 있나, 응?" "뭐라고 했지?" 베르셰네프가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듯 말했다. "뭐라고 했느냐고!" 하고 슈빈이 되받았다. "자네 친구가 자네 앞에서 심오한 사상을 피력하는데 듣지도 않고 있었단 말이지." "난 경치에 넋을 잃고 있었네. 저 들판들이 햇볕에 뜨겁게 타오르는 걸 좀 보게나!" 베르셰네프는 약간 혀 짧은 소리를 냈다. "굉장한 색채가 일렁거리고 있군." 슈빈이 말했다. "자네를 위한 자연이지!" 베르셰네프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것들엔 나보다 자네가 더 감동을 받아야지. 이건 자네 분야이니까. 자넨 예술가잖아." "아닐세. 이건 내 분야가 아니야." 슈빈은 이의를 말하면서 모자를 뒤통수에 얹었다. "난 백정이야.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살, 살을 찧어 어깨며 다리며 팔이며를 만드는 거지. 여기엔 형체도 없고 완성도 없어. 사방으로 흩어져‥‥가서 붙잡으라구!" "하지만 거기에도 앎다움은 있잖아." 베르셰네프가 말했다. "그런데 자네, 그 양각은 끝냈나?" "무슨?" "어린애와 산양 말이야." "제기랄! 빌어먹을! 말도 말아!" 슈빈이 노래라도 부르듯 소리쳤다. "심물도 보았고, 노대가들의 작품이나 고대 미술품도 보았어. 그래서 내 졸작은 때려부숴 버렸지. 자넨 내게 자연을 가리키면서 '저기에도 아름다움이 있어.' 라고 말했지. 물론, 어느 것에나 아름다움은 있어. 자네 코에조차 아름다움은 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모든 아름다움을다 쫓을 수는 없어. 노대가들, 그들은 아름다움의 뒤를 쫓지 않아. 아름다움이 스스로 그들 창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어디서 왔는지는 신만이 알지. 하늘에서 내려왔는지도 몰라. 온 세상이 그들의 것이었으니까, 너무나 넓어 우린 펼칠 수가 없어. 팔이 짧거든. 우리는 한 지점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가만히 기다리는 거지. 걸리면 좋은 거구! 하지만 걸리지 않으면‥‥" 슈빈이 혀를 쑥 내밀었다. 베르셰네프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건 역설이야. 만일 자네가 아름다움에 공가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만나든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아름다움은 자네에게도 또 자네 예술에도 아무것도 주지 못해. 만일 아름다운 경치가, 감미로운 음악이 자네 가슴에 아무런 이야기도 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건, 만일 자네가 그것들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말이야‥‥" "오, 공감자 선생!" 슈빈이 새로 지어 낸 말로 빈정거리고 웃기 시작했지만 베르셰네프는 생각에 잠겼다. "아니네, 여보게." 하며 슈빈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넨 수재야. 철학가고, 모스크바 대학을 삼등으로 졸업한 학사지. 자네와 논쟁을 한다는 건 두려운 일이야. 특히 대학을 중퇴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러나 나는 자네에게 이런 말은 할 수가 있어. 내 예술 외에도 나는 여인의 아름다움만은 사랑한다고.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 말이야. 하긴 이런 일도 불과 얼마 전부터의 일이지만‥‥" 그는 몸을 뒤집어 두 손으로 뒤통수에 깍지를 끼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몹시도 뜨거운 정오의 정적이 졸린 듯한 빛나는 대지 위에 깔리고 있었다. "여자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나 말이지만." 다시금 슈빈이 말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아무도 그 스타호프 영감을 손아귀에 넣지 못하는 거지? 자네, 그 영감을 모스크바에서 만나본 적이 있나?" "아니." "그 영감쟁이 아주 정신이 나갔나 봐. 온종일 아브구스치나 흐리스ㅡ치아노브나 곁에 앉아 있어. 지독히 사모하나 보지. 그냥 앉아 있기만 할뿐이야. 서로 ㄴ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니까, 바보같이‥‥쳐다보기도 싫어. 한 번 생각해 보게나!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게 얼마나 훌륭한 가정을 내려 주셨나. 아니야, 아브구스치나 흐리스치아노브나가 있어야 돼. 그 여자의 오리처럼 생긴 낯짝보다 더 꼴보기 싫은 건 없다니깐! 얼마 전엔 그녀의 우승ㄴ 얼굴을 조각했었지. 단탄식으로. 그리 나쁘진 않더군. 내 보여 줄게." "그런데 옐레나 니콜라예브나의 반신상은 잘 되어 가고 있나?" 베르셰네프가 물었다. "아니, 여보게, 잘 되고 있지 않아. 그 얼굴을 보면 실망하게 될 걸세. 언뜻 보면 깨끗하고 엄격한 직선이라 유사점을 포착하기가 어렵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게 영 쉽지가 않아서‥‥손 안에 든 보물ㅊ럼 빠져나간단 말이야. 자네 그 여자가 귀기울여 듣는 걸 본 적이 있나? 얼굴에는 전혀 변화가 없고 눈의 표정만이 끊임없이 변하는데, 이 때문에 얼굴 표정 전체가 변하지. 이런 경우 자넨 조각ㅈ가에게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겠나? 그것도 훌륭하지 못한 조각가에게 말이야. 놀라운 사람‥‥무서운 사람이야." 하고 그는 잠시 쉬었다가 덧붙였다. "그래. 그녀는 놀라운 처녀지." 베르셰네프가 그의 말을 받아 되뇌었다. "그런데 그녀가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스타호프의 딸이라니! 이런 판에 ㅎㅇ이니 가계니 따지겠나. 우스운 것은 그녀가 바로 그의 딸이며 그를 닮았는데다, 어머니 안나 바실리예브나도 닮았다는 거야. 난 안나 바실리예브나를 진심으로 존경하지. 그녀는 나의 은인이니까. 하지만 그 여잔 암탉에 불과해. 옐레나의 그런 영혼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누가 그 불꽃에 불을 붙였을까? 자, 여기에 또 자네 숙제가 있군, 철학가!" 그러나 철학가는 조금 전처럼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베르셰네프는 전혀 수다스러운 편이 못되었다. 그리고 그가 말이라도 할라치면, 쓸데없는 손짓까지 해 가며 어색하게 더듬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떤 특별한 적막감이 그의 마음에 찾아든 것이었다. 피로감 같기도 하고 ㅇ수 같기도 한 적막감이. 그는 하루에 몇 시간씩이나 빼앗긷ㄴ 장기간의 어려운 연구를 끝내고 시외로 옮겨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무위의 생활, 부드럽고 깨끗한 공기, 목적을 달성했다는 의식, 친구와의두서없는 이런저런 이야기들, 갑자기 떠오르는 정다운 사람의 모습, 이 각각 다르고 동시에 웬지 유사한 인상들이 그의 마음 속에서 한 가지 공통된 감정으로 용해되어 그를 안심시켜 주기도 하고, 흥분시키기도 하며, 또 힘이 빠지게도 했다‥‥그는 신경이 몹시 예민한 청년이었다. 보리수 밑은 시원하고 조용했다. 그 그늘 주위로 날아든 파리와 벌들도 좀 덜 시끄럽게 윙윙거리는 듯했다. 금빛 광택을 발하지 않는 에메랄드 빛의 깨긋하고 가려진 풀잎은 꼼작도 하지 않았다. 길다란 줄기들이 마술에라도 걸린 듯, 서 있는 것이었다. 보리수의 낮은 가지에는 작고 노란 꽃송이가 역시 마술에라도 걸린 듯 가만히 매달려 있었다. 숨을 쉴때마다 달콤한 향기가 가슴 저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으며, 또 가슴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강 건너 멀리 지평선에는 모든 것이 빤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간혹 가다 미풍이 불면 그 반짝임은 부스러졌다가는 다시 더 심해지는 것이었다. 땅 위에선 눈부신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아른거리고 있었다. 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새들도 한낮의 폭염 속에선 노래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메뚜기들이 사방에서 울어대고 있었는데, 시원한 곳에 편안하게 앉아서 그처럼 열렬한 생명의 소리를 듣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고 있노라면, 졸음이 찾아들고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어떤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에 주의해본 적이 있나?" 손짓으로 자신의 말을 보충해 가며 베르셰네프가 불쑥 말을 꺼냈다. "자연 속에서는 모든 게 너무나 완전하고 분명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건, 너무 자기 만족에 취해 있단 말이지. 우리는 그걸 알고 있고 또 그걸 즐기기도 하지. 동시에 자연은, 적어도 내게는 늘 어떤 불안감을, 공포를, 그리고 슬픔까지도 불러일으켜. 이건 무슨 의미지? 우리가 자연앞에 섰을 때, 자연과 직면했을 때 우리의 불안전함을, 우리의 불분명함을 더욱 강하게 의식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자연을 만족시키는 그 만족감만으론 우리에게 불충분하고, 다른 것, 즉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 우리가 자연이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원하기 때문인가?" "흠, 내가 말해 주지,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이야."하고 슈빈이 말했다. "자네가 말한 것은, 살아 있지는 않으나 바라보기만 하면서 망연자실해지는 외로운 인간의 느낌일세. 바라만 보았자 무얼 하나? 사나이다운 생활을 해야지. 자네가 아무리 여러 번 자연의 문을 두드려도 자연은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네. 자연은 벙어리거든. 현처럼 소리를 내며 울기는 하겠지만, 노래는 기대하지 말게나, 살아 있는 영혼, 그것이 응답을 하지, 주로 여자의 영혼이. 나의 고결한 친구시여, 내가 자네에게 진정한 여자 친구를 구하라고 충고하는 건 이 때문일세. 그러면 자네의 ㅇ울한 감정들은 죄다 사라질 거야. 자네가 말한 대로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바로 이걸세. 그 불안감이니 슬픔이니 하는 건 일종의 굶주림일뿐이지. 위에 진짜 음식ㅁㄹ을 주어 보게. 그럼 금방 만사가 형통하리니. 여보게나, 자네의 자리를 공간에다 마련하게. 육체로 말일세. 대체 자연이 무엇이며,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자네, 들어보게. 사랑‥‥이 얼마나 강렬하고 뜨거운 말인가! 자연‥‥이 얼마나 차갑고 교과서적인 표현인가! 그러니까(슈빈은 노래라도 부르는 듯했다) '마리야 페트로브나 만세!' 아니지."하고 그가 덧붙였다. "마리야 페트로브나가 아니지, 아무렴 어떨까! 내 말을 알아듣겠지?" 베르셰네프는 몸을 반쯤 일으키고 두 손을 포갱 턱을 받쳤다. "왜 비웃는 건가?" 그는 자기 친구 쪽을 보지 않으면서 말했다. "어째서 조롱하는 거야? 그래 자네가 옳아. 사랑은 위대한 언어이고 위대한 감정이지. 하지만 자네가 이야기하는 것은 대체 어떤 종류의 사랑인가?" 슈빈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떤 종류의 사랑이냐고? 어떤 것이든 상관없네. 단지 사랑이기만하면 돼. 자네에게 고백하겠는데, 내 생각으로는 말이야, 사랑의 종류는 결코 다양하지 않아. 만일 자네가 사라을 한다면‥‥" "진심으로 말이지." 베르셰네프가 말을 받았다. "그럼 물론이지. 마음은 사과가 아니니까 그걸 쪼갤 순 없어. 만일 자네가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잘못될 리가 없지. 난 비웃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네. 지금 내 마음은 부드럽기 그지없어. 너무 평온해. 단지 내가 설명하고 싶은 건 어째서 자네가 자연이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해서일 뿐이야. 그건 자연은 우리에게 사랑의 필요성을 일깨어 주면서도 그런 걸 만족시킬 만한 힘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지. 자연은 우리를 다른 활기 있는 품 안으로 가만히 몰아내 주지만, 우리는 그걸 알지 못한 채 자연 자체로부터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겆. 아, 안드레이, 안드레이, 이 태양, 이 하늘,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 주위의 것 모두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데도 자넨 비관만 하고 있다니. 하지만 만일 이 순간 자네가 사랑하는 여이느이 손을 잡고 있다면, 만일 그 손과 그 여자가 온통 자네 것이라면, 또 만일 그녀의 눈길과 마주친다면, 안드레이, 자연은 자네에게 슬픔도 걱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걸세. 자넨 자연의 ㅇ름다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자연은 기뻐하며 노래를 부를 테고, 자네의 찬가를 따라 부를 거란 말이야. 왜냐 하면 자네가 자연에게, 말 못한ㄴ 자연에게 혀를 넣어 주었으니까!" 슈빈은 벌떡 일어나더니 왔다갔다 했다. 베르셰네프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난 자네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하지 않네."하고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항상 자연이 우링게 암시하는 건 아니거든, 사랑을(그는 이 단얼ㄹ 금방 내뱉지 않았다). 자연은 또한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 자연은 무시무시한, 그래, 불가사의한 신비를 기억하게 해. 자연은 우리를 지어 삼키지 않으면 안 되기라도 하듯 끊임없이 우릴 집어삼키고 있지 않은가 말일세. 자연 속에는 생명도 있고 죽음도 있지. 죽음ㄷ 자연 속에서는 생명만큼이나 그렇게 우렁차게 말하고 이쓴 거야." "사람에게도 생명과 죽음이 있지."하고 슈빈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니까요." 베르셰네프가 이야기를 계석했다. "예를 들자면, 내가 봄날 숲 속에, 푸르름이 무르익은 곳에 서 있을때, 내게 오벨론(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요정)의 로맨틱한 뿔피리 소리가 들려온다면(베르셰네프는 이 말을 할 때 약간 수줍은 듯했다) 정말 그것은‥‥" "사랑에 대한 갈증, 행복에 대한 갈망,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야!"하고 슈빈이 말을 가로챘다. "나는 그런 소리를 알아. 깊은 숲 속의 그늘 밑이나, 저녁 무렵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수풀 너머 강 위로 안개가 서려올 때, 황량한 들판에서 마음에 찾아드는 감동과 기대감을 나도 안다구. 하지만 숲에서도, 강에서도, 대지에서도, 하늘에서도, 한 점의 구름에서도, 풀 한 포기에서도 난 행복을 기대해. 행복을 원해. 난 모든 것에서 행복이 다가옴을 느끼고, 그것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네! '나의 신은 광명과 환희의 신.' 난 이렇게 시 한 수를 읊은 적도 있지. 고백하겠는데, 첫 구절은 훌륭했지만, 둘째 번 구절을 이을 수가 없었어. 행복! 목숨이 이어지는한, 팔다리를 움직일 힘이 있는 한, 우리가 산을 오를 수 있는 한은 행복이지! 제기랄!" 슈빈은 갑작스레 발작하듯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젊어. 불구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야. 우린 행복을 손아귀에 쥐어야 한다구!" 그는 고수머리를 흔들면서 자신만만하게, 거의 도전이라도 하듯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베르셰네프는 그를 향해 눈을 들었다. "행복보다 나은 건 없는 것일까?" 그가 가만히 말했다. "예를 든다면?" 슈빈은 물으면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래. 자, 예를 들어 나와 자네는, 자네가 애기한 대로, 젊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가정해 보세. 우리는 둘 다 자신의 행복을 원하지. 그런데 '행복'이라는 이 말은 우리들을 함께 묶고 고무시켜 서로 손을 맞잡게 하는 것일까? 이기적인 말은 아닐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것이 이간시키는 말은 아닐까 하는 거야." "그러면 자넨 결합시키는 그런 말들을 알고 있나?" "그럼, 그런 말들도 적지 않지. 자네도 알고 있을 걸세." "그래? 어떤 말들인데?" "예술이라는 말이 있지, 자넨 예술가니까. 조국, 과학, 자유, 정의." '사랑은?" 슈빈이 물었다. "사랑도 결합시키는 말이지. 하지만 지금 자네가 갈망하는 그런 사랑은 아니야. 쾌락적인 사랑이 아니라, 희생적인 사랑을 말하는 거네." 슈빈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건 독일 사람들에게나 가당한 일이지. 난 나 자신을 위해 사랑하고 싶어. 첫째가 되고 싶은 거야." "첫째ㄹ." 하고 베르셰네프가 되뇌었다. "하지만 자신을 둘째에 놓는 게 우리 인생의 직분이지." "만일 모두 자네의 충고대로 행동하게 된다면." 슈빈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땅 위의 그 누구도 파인애플을 먹지 않을 걸. 모두들 다른 사람더러 먹으라고 남겨 둘 테니까." "글쎄, 파인애플은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게 아니니까. 어쨌든 걱정할건 없네. 남의 입에 든 빵도 빼앗아 먹는 자는 항상 있는 법이니까." 두 친구는 입을 다물었다. "며칠 전 인사로프를 다시 만났어." 베르셰네프가 말했다. "우리 집에 초대를 했지. 난 꼭 그와 자네가 만나 봤으면 싶어‥‥그리고 스타호프 일가와도." "인사로프가 누군데? 아, 그래, 자네가 내게 얘기했던 세르비아 사람인지 불가리아 사람인지 하는 친구 말이군? 그 애국자? 이 모든 철학적인 생각을 자네한테 넣어 준 사람이 그 사람 아닌가?" "아마도." "그 사람 범상하지 않은 인물이겠군, 그렇지?" "그래." "현명한가? 재주가 비상한가?" "현명하냐구?‥‥그럼. 재주가 비상하냐구? 모르겠어, 아닐 거야." "아니라구? 그럼. 재주가 비상하냐구? 모르겠어, 아닐 거야." "그건 자네가 만나 보면 알 테지. 자, 이젠 우리가 돌아가야 할 시간이됐다고 생각하는데.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차를 준비하고 있을 걸세. 몇시나 됐나?" "두 시. 가세. 너무 후텁지근하군! 이런 대화는 내 피를 끓어오르게해. 자네도 이런 때가 있었지. 난 전혀 쓸모없는 예술가는 아니야. 다눈치챘다구. 고백하게나, 마음에 둔 여자가 있지?" 슈빈이 베르셰네프의 얼굴을 쳐다보려고 했으나 그는 얼굴을 돌리고 보리수 그늘 밑을 나섰다. 슈빈은 조그만 두 발을 우아하게 떼어 놓으면서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베르셰네프는 발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어깨를 추어 올리고 목을 쑥 뽑고서 느릿느릿 걸어갔다. 그러나 그것이 슈빈보다 그가 더 지체 높은 가문 출신임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만일 이 말이 우리에게 제대로으 의미를 가진다면, 그가 더욱 신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두 젊은이는 모스크바 강가로 내려가, 그 기슭을 따라 걸었다. 강 쪽에서 시원한 바라이 불어왔고, 찰랑거리는 잔물결 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목욕이라도 했으면." 슈빈이 말했다. "그렇지만 늦을까 봐 걱정이 되는걸. 저 강 좀 보게. 우릴 손짓하는 것만 같지. 고대 그리스 인들은 저기서 요정을 보았을 거야.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 인이 아니야. 오! 요정이여! 우린 감각이 둔한 스키타이인(기원전 6∼3세기에 흑해 북안 초원 지대에 강대한 유목 국가를 건설한 민족)이라구." "우리에겐 루살카(인어와 비슷한 모습을 한, 고대 슬라브 전선에 나오는 숲과 물의 요정)가 있지 않나?" 베르셰네프가 지적했다. "자네나 누살카한테 가게! 그러나 나 같은 조각가에게 칠흑 같은 겨울밤, 숨이 턱턱 막히는 오두막에서 생겨난, 겁에 질리고 싸늘하기 짝이없는 환상의 산물인 루살카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내게 필요한건 광선, 공간, 이런 거라네. 하느님, 전 언제 이탈리아로 가게 되는 겁니까? 언제나‥‥" "언제 우크라이나로 가게 되느냐는 말이렷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자네는 나의 경솔한 어리석음을 책망하려 드는데, 그건 자네 수치일 뿐이야. 그렇잖아도 내가 이처럼 뼈아프게 뉘우치고 있는데 말이야. 하긴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지. 너무도 착한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이탈리아 여행을 할 돈을 주었는데도, 난 우크라이나 사람들한테로 가 경단이나 얻어 먹고 있었으니, 그리고‥‥" "제발, 그만 하게나." 베르셰네프가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네, 다 말해 버리겠네. 그 돈을 쓸데없이 허비해 버린 건 아니니까. 거기서 훌륭한 유형들을 보았거든, 특히 여자들을‥‥ 물론, 나도 알고 있어. 이탈리아 이외에는 구제란 있을 수 없다는 걸!" "자네가 이탈리아로 간다고 한들 별수가 있겠나?" 베르셰네프는 그를 돌아다보지도 않으면서 말했다. "자네가 아무리 활개짓을 해도 날지는 못해. 우리가 자네를 모르겠나!" "스타바세르(19세기 러시아의 조각가)는 날았지 않은가. 그리고 날은 사람은 스타바세르뿐만이 아니지. 하지만 난 날지 않을 거야. 날개 없는 펭귄새니까. 나는 이 고장에서 숨이 막힐 지경이야. 이탈리아로 가고 싶어. 거기엔 태양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하고 슈빈은 말을 이었다. 그 때,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장미빛 파라솔을 어깨에 받친 한처녀가, 이들 두 친구가 내려가고 있는 오솔길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어, 저게 누구야? 여기서도 저런 미인이 우릴 맞으러 오다니! 매력적인 조야 아가씨에게 비천한 예술가가 삼가 인사를 드리나이다!" 슈빈이 모자를 연극조로 흔들어대면서 느닷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이 외침 소리에 처녀는 걸음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위협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녀는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자 은방울이 구르는 듯한 약간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두 분께서는 점심 식사를 하러 오시지 않는 거죠? 식사 준비가 다 되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슈빈이 짐짓 깜짝 놀란 척 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매혹적인 조야 아가씨께서 이 뙤약볕에 우리를 찾아 나설 결심을 했다? 이 의미심장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설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아니, 잠자코 계시는 편이 더 좋겠지요. 순식간에 후회가 날죽여 버릴 테니까." "아휴, 그만두세요, 파벨 야코블레비치."하고 처녀가 반박했는데, 별로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어째 당신은 나한테 한 번도 진지한 얘기를 하지 않는 거죠? 약이 올라 죽겠어요." 그녀는 애교 있게 살짝 찡그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나의 이상이신 조야 니키치시나께서 나한테 화를 내다니요. 날 암울한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싶은 건 아니시겠죠. 난 진지한 이야기를 할 줄 모른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진지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처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베르셰네프 쪽으로 돌아섰다. "이 분은 항상 이런다니까. 날 어린애 취급을 한단 말이야. 벌써 열여덟 살이란 말이에요. 이젠 어른이 다 되었다구요." "오, 맙소사!" 슈빈은 신음하듯 눈동자를 아래위로 굴리며 말했다. 베르셰네프는 잠자코 웃기만 했다. 처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파벨 야코블레비치! 나 그럼 화낼 거예요! 옐레나도 나와 같이 오다가 정원에 남았어요."하고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뙤약볕이 무섭대요. 그렇지만 난 뙤약볕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아요. 자, 가요." 그녀가 오솔길을 앞장서 내려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호리호리한 몸집을 약간씩 흔들며, 검은 장갑을 낀 매끈한 손으로 부드러운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곤 하면서. 두 친구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슈빈은 두 손으로 조용히 가슴을 누르기도 하고 머리를 위로 쳐들기도 하였다). 이윽고 그들은 쿤초보 부근에 있는 수많은 별장 가운데 한 집에 다다랐다. 장미빛 페인트칠을 한 조그마한 2층 목조집이 한 채, 정원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푸르른 나무들속에서 빠끔히 내다보이는 이 집은 어딘가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앞장을 서 가던 조야가 사립문을 열고 정원으로 뛰어들며, "방랑자들을 데려왔어요!"하고 소리질렀다. 창백하나 표정이 풍부한 얼굴을 가진 젊은 처녀가 길가에 있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집 문지방에 연보랏빛 명주옷을 입은 부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햇볕을 가리기 위해 수가 놓인 삼베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서, 우울하고 맥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3 결혼 전의 성이 슈비나였던 안나 바살리예브나 스타호프는 일곱살 때 고아가 됨과 동시에 막대한 재산 상속인이 되었다. 그녀에게는 아주 부유한 친척도 있었으나 아주 가난한 친척도 있었다. 아버지 쪽의 친척들은 가난했지만, 어머니 쪽의 친척들은 부자였던 것이다. 볼긴 원로원 의원, 치쿠라소프 공작 등. 그녀의 후견인이 된 아르달리온 치쿠라소프 공작은 그녀를 모스크바에서 제일 좋은 기숙 학교에 보냈으며, 학교를 마치자 곧 자기 집에 데려다 함께 살았다. 그는 자주 손님들을 초대했고 겨울철에는 종종 무도회를 열곤 했다. 후에 안나 바실리예브나의 남편이 된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스타호프는 이 무도회에서 그녀를 손아귀에 넣었던 것이다. 그 때 그녀는 '멋진 야회복을 입고 작은 장미 꽃송이로 만든 머리 장식'을 달고 있었다. 그녀는 이 장식을 오래도록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 때 부상을 입고 바로 제대해서 페테르부르그에 좋은 직장을 얻은 퇴역 대위의 아들인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스타호프는 열여섯 살에 사관 학교에 들어가 근위대에 배속되었다. 그는 용모가 뛰어나고 체격이 당당한 데다 사교 댄스의 명수여서, 그가 주로 드나들던 중류층 야히에서 인기가 대단하였다. 그는 상류층의 사교계에는 출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젊었을 적부터 두가지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 하나는 시종 무관이 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략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첫째 번 야망은 이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때문에 그는 둘째 번 야망이라도 꼭 관철하려고 더욱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가 겨울이면 모스크바로 나간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스타호프는 프랑스 말을 유창하게 구사했고, 방탕하지 않아 철학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는 소위에 임관된 후부터 논쟁을 하게 되면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예컨대, 사람이 일생 동안 세계를 한 바퀴 돌 수 있는가, 혹은 바다 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 토론하기를 즐겼던 것인데, 언제나 불가능하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었다. 니콜라이 스타호프가 안나 바실리예브나를 '얻은' 것은 스물 다섯 살되던 해의 일이었다. 그는 퇴역하여 영지를 관리하기 위해 시골로 떠났다. 그러나 시골 생활에는 이내 싫증이 났고, 영지도 소작을 주었기 때문에 따로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처가에 정주하게 되었다. 젊었을 때에는 전혀 노름을 하지 않았으나 요즘에 와서는 로토(도박의 일종. 자루 속에서 번호가 붙은 공을 꺼내어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카드와 일치하는 번호의 말을 얹어 먼저 일렬로 나란히 한 자가 이기게 된다)게임에 열중했다. 그러나 로토 게임이 금지되자 이번에는 에라라시 게임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는 집에서는 시가늘 보내기가 무척 지루했는데, 근래에는 독일계 미망인과 가까워져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녀의 집에서 보내는 것이었다. 1853년 여름에는 쿤초보에 가지않았다. 온천 요법을 한다는 핑계로 모스크바에 남아 있었는데, 실은 미망인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그는 미망인과 만나도 별로 이야기를 건네지는 않았다. 대개는 사람이 일기를 예보할 수 있갰느냐하는 뛰위의 논쟁으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보통 트집쟁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그 별명을 대단히 마음에 들어 했다. "암, 난 쉽사리 만족하지 않지. 아무도 날 속이지는 못해."라고 흐뭇한 마음으로 입언저리를 씰룩거리고, 몸을 흔들흔들하면서 생각하는 것이었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의 회의적인 태도는, '신경'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도대체 신경이란 무엇인가?"라든가, 누가 천문학의 발들을 깨우쳐 주기라도 하면 "당신은 천문학을 믿고 있소?"하고 대들 정도였다. 그는 논쟁에서 상대방을 결정적으로 누르고 싶어할 때엔 "그것 말장난에 불과해."하고 무찔러 버리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대답이 논박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지금까지도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애인 아브구스치나 흐리스치아노브나가 그녀의 종자매 페오도린다 페체르질리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를 '마인 핀젤헨(우리의 멍청이)'라고 쓰고 있는 줄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의 아내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근심과 슬픔이 감도는, 작고 섬세한 얼굴을 가진 가냘픈 여자였다. 기숙 학교에서는 음악을 전공하고 소설을 탐독하였으나, 후에 다 집어치우고 말았다. 고운 옷으로 몸치장을 하다가 그것도 그만두어 버렸다. 그녀는 딸의 교육도 맡았었으나 힘에 벅차 여자 가정 교사에게 넘겼다. 무얼 시작하자마자 곧 슬픔에 젖어 신경질을 부리는 걸로 끝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옐레나 니콜라예브나를 낳은 후로 건강이 좋지 않아 더 이상 아이를 갖기 못하였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아브구스치나 흐리스치아노브나와의 교제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런 사정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었다. 남편의 배신은 안나 바실리예브나를 무척이나 괴롭혔다. 특히, 그가 독일 여자에게, 안나 바실리예브나의 소유인 목장에 있던 잿빛 털을 가진 말 두 필을 주었을 때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안나는 남편을 맞대어 놓고 비난한 적은 없지만, 집 안의 아무나 붙들고는 슬며시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심지어 딸한까지도.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외출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손님이 찾아와서 말상대가 되어 주면 여간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혼자 남게 되면 이내 맥이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매우 깊은 애정과 부드러운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금방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파벨 야코블레비치 슈빈은 그녀의 재종질뻘이 되었다. 슈빈의 아버지는 모스크바에서 관리직을 지냈다. 그의 형들은 모두 육군 유년 학교에 들어갔으나, 막내로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해 온 유약한 체질의 그는 그냥 집에 남게 되었다.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어렵사리 고등 학교에 다니던 그는 일찍부터 조각에 소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 번은 뚱뚱한 원로원 의원 볼긴이 슈빈이 만든(그 때 그는 열여섯 살이었다)조그만 동상을 안나의 집에서 보고, 어린 천재를 위해 후견인이 되겠노라고 나섰다. 슈빈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은 청년의 장래ㅡ 백 팔십 도로 바꾸어 놓았다. 천재의 후견인인 원로원 의원이 슈빈에게 제공해 준 것은 호머의 석고상뿐이었다. 그러나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경제적으로 많이 도와 주어서 열 아홉 살 때 겨우 대학 의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파벨은 의학에 전혀 취미가 없었다. 의과를 택하게 된 것은, 그 당시 실시되던 학생 정원제에 따라, 다른 과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밖에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해부학에 대하여 상당한 흥미를 가지고 있어서였다. 그러나 그는 해부학 공부를 하지 않았다. 2학년 때 시험을 포기하고 대학을 그만두어 버렸다. 오로지 자신의 천직에만 전념하기 위해서. 그는 열심히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그것을 꾸준히 계속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내키면 미친 듯이 매달리는 발작적인 것이었다. 그는 모스크바 변두리를 돌아다니면서 농사꾼 소녀들의 초상을 빚기도 하고 그리기도 했다. 또 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고 여러 사람을 사귀기도 하였다. 그 중에는 이탈리아의 조각가도, 러시아의 화가들도 끼어 있었다. 그는 미술 대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도 않았고, 어떤 교수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의 재능은 의심할 바가 없어, 모스크바에서 금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는 선량하고 현명한 여자로, 파리의 명문 출신이었다. 그녀는 아들에게 프랑스 어를 직접 가르쳤고, 밤낮으로 아들 걱정을 했다. 또 그를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는데, 폐병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면서 안나 바실리예브나에게 아들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 때 파벨은 벌써 스물 한 살이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슈빈은 별장의 조그만한 방 하나를 얻어 들게 된 것이다. 4 "자, 어서들 식사하러 갑시다. 가요."하고 안나 부인이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식당으로 갔다. "조야, 내 곁에 앉으렴. 그리고 옐레나, 넌 손님들 시중을 들어라. 파벨은 조야를 그만 좀 못 살게 굴고‥‥오늘 난 머리가 아파." 슈빈이 두 눈을 치켜 떠 보였다. 조야가 웃을 듯 말 듯한 얼굴로 그에게 응답해 주었다. 조야는,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서 조야 니키치시가 뮐러는 귀엽게 생긴 러시아계 독일 소녀로, 약간 사팔뜨기에 금발머리이며 통통한 편이었다. 그녀는 끝이 좀 갈라진 코와 아주 작은 붉은 입술을 가졌다. 그녀는 러시아 로망스를 곧잘 불렀고, 때로는 경쾌하고 때로는 감상적인, 여러 가지 곡들을 피아노로 연주했다. 옷차림은 그녀의 고상한 취미를 말해 ㅈ고 있는데, 어딘가 앳되고 너무나 청초해 보였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조야를 딸의 친구로 데려왔으나, 거의 언제나 자기 곁에 붙어 있게 하였다. 옐레나도 이 점에 대하여 별로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옐레나가 조야와 단둘이 남아 있을 때 도무지 말머리를 쉽게 찾아 내지 못하기도 한 때문이었다. 식사는 꽤나 오래 계속 되었다. 베르셰네프는 옐레나와 대학 생횔과 장래의 포부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슈빈은 말없이 듣기만 하면서 짐짓 허기가 진 듯이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러다가는 이따금 조야에게 침울한 눈초리를 보내는 것이었다. 식사가 끝난 후 옐레나와 베르셰네프, 그리고 슈빈은 정원으로 나갔다. 조야는 한동안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곧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피아노 앞에 가 앉았다. "왜 너도 산책 나가지 않고서?"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말했다. 그리고는 상대방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덧붙여 말했다. "내게 아주 슬픈 곡조를 좀 쳐 주렴‥‥" "베버의 <최초의 상념>을 들려 드릴까요?" 조야가 물었다. "아, 그러렴, 베버를."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안락의자에 푹 파묻히면서 대답하였는데, 그녀의 속눈썹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괴어 있었다. 이러는 동안 옐레나는 두 친구를 아카시아 향기가 나는 정원으로 데려갔다. 한복판에는 탁자가, 그 주위에는 벤치가 둘러 놓여 있었다. 슈빈이 뒤를 돌아보면서 몇 번 팔짝팔짝 뛰더니, "잠깐만 기다려!" 하고 속삭이듯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달음질쳐 갔다. 이윽고 그는 진흙덩이를 가지고 와 조야의 형상을 빚기 시작했다. 사뭇 머리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뭐라 지껄이기도 하고 또 낄낄거리기도 하면서. "또, 옛날 자안이군요." 옐레나가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베르셰네프를 향해, 아까 식사할 때 주고받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옛날 장난이라." 슈빈이 그 말을 되씹었다. "이런 일은 쉽사리 끝나는 것이 아니죠. 그녀가 오늘은 특히 날 참지 못하게 하는데요." "그건 왜죠?" 옐레나가 물었ㄷ. "마치 심술궂은 불쾌한 노파 이야기라도 하는 것 같군요. 예쁘고 젊은 아가씨를‥‥  "그야 물론이지요." 슈빈이 말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예쁘죠. 예쁘고 말구요. 지나가던 사람은 누구나 그녀를 보면서 반드시 이런 생각을 하리라는 걸 난 확신해요. '폴카 한 번 같이 춰 봤으면' 하고. 그리고 그녀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그걸 즐기고 있다는 것도요. 그러면서도 그 부끄러운 듯한 찌푸림은, 그 겸손은 무엇때문이죠?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슈빈은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경멸에 찬 어조로 덧붙였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지금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잖아요?" 그리고서 슈빈은 조야의 형상을 부숴 버리고는 성급하게, 그리고 마치 화라도 난 듯이 다시 진흙을 주물러 무엇인가 빚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학 교수가 되고 싶으신 거예요?" 옐레나가 베르셰네프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베르셰네프는 불그레한 손을 무릎 사이에 끼면서 대답했다. "그것이 제가 가장 즐겨 하는 공상이죠. 전 물론 그런 훌륭한 인물이 되기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하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지만, 외국 유학을 떠날 수 있는 허가를 얻어 두고 싶다는 겁니다. 필요하다면 삼사 년쯤 그 곳에 눌러 있을까 해요. 그런 다음에‥‥" 그는 말을 멈추고 눈을 내리깔더니 금방 눈을 치켜 떴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베르셰네프는 여자와 이야기할 때면, 말은 더욱 느려지고 발음이 분명치 않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시다면 역사 교수가 되려고 하시나요?" 옐레나가 물었다. "그래요. 그렇지 않으면 철학 교수."하고 그는 목소리를 한결 낮추어 대답했다. "이 친구는 철학에 대해선 지금도 환하지요."하고 슈빈이 진흙에 손톱으로 깊은 흠을 파면서 말했다. "그런데 구태여 외국 유학을 갈 필요가 뭐 있겠소?"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당신의 직업에 충분히 만족하게 될까요?" 옐레나가 팔꿈치로 턱을 괴고서 베르셰네프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 보고 물었다. "충분히,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충분히 만족할 겁니다. 그보다 더 좋은 천직이 어디 있을까요? 당치도 않죠. 치모페이 니콜라예비치(모스크바 대학의 역사학 교수)교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그런 걸 생각만 해도 전 기쁨과 당혹감으로 가득 차죠. 그래요‥‥당혹감이에요, 제 자신의 무능을 인식하는 데서 일어나는. 고인이 되신 아버지께서는 저의 이런 목표를 한껏 성원해 주셨답니다. 전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아버님께선 이번 겨울에 돌아가셨지요?" "그렇습니다, 2월이었지요." "아버님께서는 훌륭한 저서의 원고를 남기셨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옐레나가 말을 이었다. "그래요, 남기셨죠. 그 어른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지요. 만나 보셨더라면 좋아하게 되셨을 겁니다,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그랬을 테지요. 그 저서의 내용은 무엇이죠?"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저서의 내용을 당신께 한 마디로 잘라서 말씀드리기는 좀 어렵습니다. 아버진 셸링(독일의 철학자. 객관과 주관과의 무차별이 철학의 원리가 되는 동일 철학을 확립)파 학자여서 가끔 모호한 표현을 하셨으니까요."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옐레나가 그의 말을 막았다. "저의 무지를 용서하세요. 셸링파라는 게 무슨 뜻이죠?" 베르셰네프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셸링파란, 독일 철학자 셸링의 추종자라는 뜻이지요. 셸링의 학설이 무엇이냐 하면‥‥"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갑자기 슈빈이 소리질렀다. "제발 그만두게나! 자네, 옐레나 니콜라예브나에게까지 셸링을 가의할 생각은 설마 아니겠지? 좀 봐 주게." "강의가 아니야." 베르셰네프가 더듬거리더니 얼굴을 붉혔다. "내 말은, 저‥‥" "강의해서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어요?" 옐레나가 말을 받았다. "나나 당신은 강의를 좀 들을 필요가 있어요, 파벨 야코블레비치." 슈빈이 한동안 옐레나를 응시하더니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죠?" 그녀가 싸늘하고 날카로울 정도의 목소리로 물었다. 슈빈은 잠자코 있었다. "자, 됐어요. 화낼 건 없어요."하고 그가 조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했소. 하지만 사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이런 나무 그늘에 앉아서 철학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아요? 차라리 꾀꼬리나 장미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편이 낫죠. 아니면, 젊은 눈망울과 미소를 화제로 삼아도 좋구요." "그럼요. 프랑스 소설과 여자들 유행에 관한 것도 좋겠지요." 옐레나가 비아냥거리듯이 말을 받았다. "왜 여자들의 유행은 화제가 될 수 없나요?" 슈빈이 반박했다. "아름답기만 하다면야‥‥" "이야깃거리가 안 된다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가 유행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싫어한다면요? 당신은 자신을 자유 분방한 예술가라 내세우면서, 어째 남의 자유는 침해하겠다는 거죠? 한 가지 묻겠는데요, 만일 당신 생각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조야를 비난하는 거예요? 그 애야말로 유행과 장미를 놓고 토론을 즐길 만한 상대로 가장 안성맞춤일 텐데요." 슈빈이 얼굴을 붉히면서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그런가요?" 그가 불확실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무슨 암시를 하고 있느지 알겠소.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당신은 나를 그 아가씨한테로 쫓아 보내고 싶은 거죠. 다시 말해서, 난 자리에 필요 없는 존재라는 거지요?" "가라고 하지는 않았어요." "당신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죠." 슈빈은 화가 치밀어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 아가씨하고나 어울리는 게 알맞다구요? 그 밖의 어떤 사람과도 사귈 수 없다는 거 아니오? 난 그 달콤한 독일 아가씨처럼 머리가 텅 비어 있고, 어리석고 천박하다는 거 아닙니까?" 옐레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조야에 대하여 늘 그렇게 말하지는 않잖아요, 파벨 야코블레비치." "아하, 날 비난하고 계시군! 지금 날 비난하고 계셔!"하고 슈빈이 소리를 버럭 지렀다. "자, 그럼 나도 솔직히 말하지. 사람이란 살다 보면 이런 때도 있지. 그 싱싱하고 평범한 뺨에‥‥하지만 만일 내가 당신에게 복수하듯 그 비난을 되갚아 상기시키자면‥‥그럼 미안."하더니 불쑥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나한테서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가 튀어나올지도 몰라." 그러더니 사람의 모양으로 빚은 진흙을 손으로 내리쳐 부수어 버리고는 정원을 빠져나가 자기 방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꼭 어린애 같아."하고 그의 뒷모습을 지켜 보다가 옐레나가 한 마디 했다. "예술가죠."하고 베르셰네프가 말했다. "예술가는 다 저래요. 그들의 변덕은 용서해 줘야 해요. 그건 그들의 특권이니까요." "그런가 봐요. 하지만." 옐레나가 이의를 말하였다. "파벨은 지금까지 그와 같은 권리를 내세우지 않았어요. 그가 지금껏한 일이 무엇이에요? 제 팔을 잡으세요. 가로수 길을 따라 산책이나 하게요. 그가 우리를 괜히 방해했지 뭐예요. 당신 아버님의 저서에 대해이야기했었죠." 베르셰네프는 옐레나의 팔을 잡고 함께 거닐었다. 그러나 아까 끊겼던 화제는 다시 시작되지 않았다. 베르셰네프는 대학 교수하는 직책과, 자기 자신의 장래 계획에 대하여 몇 마디 했을 뿐이다. 그는 그녀의 곁에 바짝 붙어 서서 조용히 발걸음을 떼어 놓고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자연스럽지 못하였다. 그는 옐레나의 팔을 어색하게 잡고 있었고, 이따금씩 그의 어깨가 그녀의 어깨와 맞부딪치곤 하였다. 그리고 한 번도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말소리만은 결코 유창하지는 못했으나 낭랑하였다. 그는 간단 명료한 표현을 했다. 나무 줄기와 모래밭과 풀들을 천천히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눈망울 속에는 조용한 감동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대변하고 있었다. 옐레나는 그의 이야기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몸을 절반쯤이나 상대방에게 돌리고, 약간 창백한 듯한 얼굴과 친절하고 온순한 그 두 눈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옐레나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녀의 영혼은 활짝 열려, 무엇인가 부드럽고 진실하며 좋은 것이 그녀의 마음 속에 스며들어 차츰 자라나는 것만 같았다. 5 슈빈은 밤이 되도록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밖은 이미 어두워서 초승달이 하늘 높이 솟아 있고, 은하수가 부옇게 반짝였다. 별들도 아른아른 반짝였다. 안나와 옐레나, 그리고 조야와 헤어진 베르셰네프는 친구의 방문 쪽으로 다가갔다. 방문이 잠겨 있는 걸 알자 그는 문을 두드렸다. "누구야?" 슈빈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날세." 베르셰네프가 대답했다. "무슨 일인가?" "들어가게 해 주게나, 파벨. 이제 그만 심술부리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심술부리는 게 아니야. 잠을 자고 있는 거지. 조야의 꿈을 꾸면서 말이네." "그만 좀 해 둬. 자넨 어린애가 아니지 않나. 들어가게 해 줘. 꼭 할말이 있으니까." "옐레나와 할 말은 다 했을 터인데?" "그만, 됐다니까. 그만, 됐어. 날 좀 들여보내 줘!" 슈빈은 거짓으로 코를 고는 소리를 냈다. 베르셰네프는 어깨를 한 번 으쓱 추어 오리고 나서 발길을 돌렸다. 밤 공기는 훈훈했고,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주위의 모든 것이 귀기울여 그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 어둠에 포위당한 베르셰네프는 부지중에 멈춰 서서 자기도 귀를 기울이며 주위를 살폈다. 여인의 옷자락이 스치는 듯한 사락사락하는 가벼운 소리가 가까이 있는 나무 꼭대기에서 일어, 베르셰네프에게 감미로운 동시에 스산한 느낌을, 그리고 반쯤 공포에 가까운 느낌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뺨에 소름이 돋고, 눈에는 별안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어디라할 것 없이 조용히 발길을 옮겨 자기 자신을 감추어 버리고 싶었다. 싸늘한 바람이 옆에서 불어닥쳤다. 그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이 우두커니 멈춰 섰다. 잠자던 딱정벌레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길바닥에 부딪치는 소릴ㄹ 내었다. 그는 "아!"하고 나지막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러다가 옐레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런 순간적인 느낌들이 일시에 사라지고 말았다. 밤의 신선함과 밤 산책의 생생한 인상만이 남았다. 젊은 처녀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온통 차지해 버렸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걸으면서 조금 전에 옐레나가 한 말과 질문들을 떠올렸다. 그 때 뒤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귀를 곧추 세웠다. 누가 뛰어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를 쫓아오고 있는 것이다. 숨을 헐떡이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키가 큰 나무가 던지는 시커먼 그림자 속에서 모자도 쓰지 않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드러낸채, 달빛을 받아 온통 파리한 슈빈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네가 이 길로 가고 있어서 다행이군."하고 그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자넬 붙잡지 못했더라면 나는 밤새 한잠도 이루질 못했을 걸세, 팔을 잡으세. 자넨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지?" "그래." "내, 함께 가겠네." "괜찮아. 난 넥타이도 풀어 버린 걸. 이젠 상당히 푸근하군." 두 친구는 몇 발자국 걸음을 떼어 놓았다. "오늘 내가 너무 어리석었지, 그렇지?" 슈빈이 불쑥 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래. 난 자넬 이해할 수가 없어. 자네가 그러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야.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를 냈나?그런 하찮은 일을 가지고." "흠."하고 슈빈이 소 울음 소리 같은 걸 냈다. "자넨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한텐 하찮은 일이 아니야. 자네도 알다시피."하고 그가 말을 이었다. "자네에겐 이야기해야겠는데, 난, 나는 말이야‥‥자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난‥‥그래! 난 옐레나를 사랑하고 있다네!" "자네가 옐레나를 사랑하고 있다고!"하고 베르셰네프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더니 우뚝 멈춰 섰다. "그래!" 슈빈이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양 이야기를 계속했다. "왜, 내 말에 놀랐나? 말할 게 더 있어. 오늘 밤까지만 해도 난 시간이 흐르면 그녀 역시 날 사랑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네. 그러나 난 오늘 비로소 절망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다른 사람이라니? 누굴 말인가?" "누구냐구? 자넬세!"하고 슈빈이 소리를 치며 베르셰네프의 어깨를 두드렸다. "날?" "자넬."하고 슈빈은 같은 대답을 되풀이하였다. 베르셰네프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더니, 화석처럼 우뚝 멈춰 섰다. 슈빈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왜, 또 한 번 놀랐나? 자넨 온순한 청년이야. 그녀는 자네를 사랑하고 있어. 그 점에 대해서는 마음을 놓아도 좋으 걸세." "쓸데없는 소리 말아!" 이윽고 베르셰네프가 고통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야. 그런데 우린 왜 이렇게 서 있지? 앞으로 가세. 걷는 편이 더 나아. 난 그녀를 전부터 알고 있네. 그녀를 잘 알고 있다구. 내 눈은 틀림없어. 자네가 그녀 마음에 들었단 말일세. 그녀가 날 좋아하던 시절도 있긴 했지. 하지만, 첫째로 난 그녀에게 너무 경솔한 청년으로 비쳤어. 거기에 비하면 자넨 진지한 인물이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 아닌가. 자넨‥‥가만, 내말 아직 끝나지 않았네. 자네는 아주 성실한 감격파인데다가, 러시아의 중류 계급이 그렇게도 과시하고 있는 전형적인 과학의 신봉자란 말일세. 둘째로, 전에 언젠가 내가 조야의 손에 키스를 하는 장면을 옐레나가 목격했거든!" "조야에게?" "그래. 조야의 손에 말이야. 자네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나? 조야의 어깨는 정말 멋지거든‥‥" "어깨라구?" "그래, 어깨고 팔이고 결국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식사를 마치고 나서 마음놓고 수작하는 꼴을 옐레나가 목격했던 걸세. 그런데 나는 식사하기 전에 그녀 앞에서 조야의 험담을 마구 해 댔었거든. 유감스럽게도 옐레나는 그런 모순이 매우 자연스런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그때 바로 자네가 나타난 걸세. 자넨 이상주의자이고, 믿는 사람이 아닌가?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지만 말이야. 신앙이라도 좋아. 자네는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는가 하면, 실러(영국의 철학자로 프래그머티즘의 주창자)니, 셸링이니 하며 열을 내지. 옐레나는 자네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런 위대한 사람을 찾고 있느 걸세. 자네가 사랑에 승리하게 된 건 그 때문이라구. 자네와는 달리, 나처럼 불행한 친구는 농담이나 하려 들고‥‥그런데 저‥‥" 슈빈은 별안간 울음을 터뜨리더니 옆으로 비켜 서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었다. 베르셰네프가 그에게 다가갔다. "파벨."하고 그가 입을 열었다. "이 무슨 어린애 같은 짓인가? 진정하게나? 자네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자네가 어떤 헛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신은 알고 있다네. 그런데 자네 울고 있구만. 사실 내겐 자네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슈빈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달빛을 받아 그 두 뺨에서 반짝이고 있긴 했으나, 그의 얼굴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하고 그가 말했다. "나에 대해서 자네 마음대로 생각할 수는 있어. 내가 지금 신경질적이라는 것도 인정해. 그러나 분명한 건 난 옐레나를 사랑하고, 옐레나는 자넬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하지만 내가 자넬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약속했으니 그 약속을 지키겠네." 그가 일어섰다. "얼마나 멋진 밤인가! 은빛과 같은 검은빛이 뒤섞인 젊으니의 밤!이런 때 누굴 사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 사람은 얼마나 기쁠까? 자넨 잠을 잘 건가,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베르셰네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빨리 했다. "자넨 어딜 그렇게 급히 가려고 하나?"하며 슈빈이 얘기를 계속했다. "내 말을 믿어, 자네 일생에 이런 밤은 두번 다시 없을 테니. 하지만 셸링이 집에서 자넬 기다리고 있을 테지. 오늘 그가 자네에게 큰일을 해준 것도 사실이지. 그렇다고 서두를 필요는 없잖아. 할 줄 안다면 노래를 부르게나. 우렁차게 불러. 부를 줄 모르면 모자를 벗고 머리를 뒤로 젖혀 별들에게 미소를 보내게. 별은 모두 자네를 내려다보고 있어. 자네만을 보고 있단 말이야. 별들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만 내려다보고 있다구. 그래서 별들은 저렇게 아름다운 거지. 자넨 사랑에 빠져 있지 않나,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대답하지 않는군‥‥무엇 때문에 대답하지 않나?" 슈빈은 또다시 말했다. "오, 만일 자네가 자신을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침묵을 지키게! 침묵을 지켜! 난 불운의 사나이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요술쟁이에 예술가에 어릿광대이기 때문에 수다를 떨고 있는 거야. 그러나 누가 날 사랑하는 걸 알았다면, 난 이런 밤의 흐름에, 이런 별들아래서, 이런 다이아몬드들 아래에서 얼마나 말없이 환희에 차 있을까! 베르셰네프, 자네는 행복하지?" 베르셰네프는 아까처럼 아무 말 없이 조용한 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양쪽의 나뭇가지 사이로, 그가 살고 있는 마음의 불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마을에는 크지 않은 별장이 열 채쯤 모여 있을 뿐이었다. 마을 어귀의 한길 오른쪽에 서 있는 우거진 두 그루의 자작나무아래 조그만 가게가 자리잡고 있었다. 가게 창문은 이미 모두 닫혀 있었으나, 열린 문을 통해 굵은 빛줄기가 짓밟힌 잔디 위에 부채 모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희끄무레한 무성한 잎사귀 속과 나무 꼭대기를 강렬히 비추었다. 하녀 같은 차림새를 한 처녀가 가게 안에서 문을 등지고 주인과 물건을 흥정하고 있었다. 머리에 둘러쓴 수건 밑으로 그녀의 토실토실한 뺨과 가느다란 목이 보일락마락했다. 그녀는 맨손을 턱에 갖다 대곤 했다. 두 젊은이가 빛줄기 아래로 들어섰다. 슈빈이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더니 멈춰 서서 "안뉴시카!"하고 소리를 질렀다. 처녀가 몸을 홱 돌렸다. 즐거운 듯한 갈색 눈과 검은 눈썹을 가진, 약간 납작하나 귀엽고 생기에 찬 얼굴이었다. "안뉴시카!"하고 슈빈이 다시 한 번 불렀다. 처녀는 그를 보자 놀라 당황해하였다. 그녀는 물건 사는 걸 끝내지도 않은 채 층계를 뛰어내리더니, 쏜살같이 두 사람 곁을 스쳐 길 왼쪽으로 뛰어갔다. 간간이 뒤를 돌아보면서. 시골 소상인들이 다 그러하듯이, 뚱뚱하고 세상 만사에 무관심한 가게 주인은 그녀 뒤에다 대고 소리치다가 하품을 했다. 슈빈은 베르셰네프 쪽으로 몸을 돌려 이렇게 말했다. "이건‥‥보다시피 이건‥‥내가 잘 아는 가족이 여기 와 있다는 걸 말해 주는 거야. 저 앤 그들의, 자네 다른 생각은 말게‥‥" 그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가 버린 처녀의 뒤를 쫓았다. "눈물이나 닦고 가게." 베르셰네프가 그의 등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왔을 때는 그의 얼굴에 즐거운 표정이 사리지고 더 이상 웃지도 않았다. 그는 한동안 슈빈이 한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은 여간 큰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파벨이 날 놀린 거야.'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여자도 언젠가는 사랑을 하게 될 테지‥‥그게 누굴까?' 베르셰네프의 방에는, 아주 깨끗한 건 아니지만, 부드럽고 경쾌한 음색을 가진 조그마한 낡은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었다. 베르셰네프는 피안 앞에 앉아 협화음을 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귀족들이 거의 다 그렇듯이 그도 어려서 음악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으레 그러하듯, 그의 연주는 매우 서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에 대한 그의 열의는 대단했다. 좀더 옳게 말한다면, 그가 좋아하는 건 음악의 표현 기술이나 형식이 아니라(그는 심포니라든가 소나타 또는 오페라 같은 것에 흥미가 없었다.), 음악의 자연스런 힘이었다. 음의 결합과 교류에 의해 마음 속에 불러일으켜지는 막연하고도 감미로운, 추상적이면서도 전체를 감싸는 듯한 느낌을 좋아했다. 그는 같은 협화음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치기도 하고, 함부로 새로운 협화음을 찾기도 하면서, 또 단조 칠음에서 멈추기도 하면서, 한 시간 이상을 피아노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가슴이 아리고 두 눈에 눈물이 그득 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부끄럽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렸으니까. '파벨이 옳아!'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 예감이 들어. 오늘과 같은 밤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마침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을 켜고, 실내복으로 갈아입고는 서가에서 라우머(독일의 고전 학자로 역사, 문학사, 법률, 경제 분야의 명저가 많음)의 <호헨시타우펜사> 제2권을 꺼냈다. 그리고는 두어 번 한숨을 쉬고 나서 부지런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엘레나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열려 있는 창가에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매일 저녁 자기 방 창가에서 십오 분 가량 보내는 것이 그녀의 버릇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 시간에 자신과 대화를 하면서 그날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다시 생각해 보곤 했다. 그녀는 스무 살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키는 큰 편이었고, 얼굴은 창백하고 가무잡잡했다. 둥그런 눈썹 밑의 조그만 주근깨가 둘러싸고 있는 큰 잿빛 눈, 반듯한 이마, 오똑한 코, 꼭 다문 입과 꽤 날카로운 턱을 가졌다. 짙은 아마빛 머리카락이 가느다란 목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에겐 모든 것이 긴장되어 있는 듯했다. 주의 깊고 약간 겁먹은 듯한 얼굴 표정, 맑기는 하나 변하기 쉬운 눈초리, 긴장한 것 같은 미소, 조용하면서도 고르지 못한 목소리에는 신경질적이면서도 전율케 하는, 충동적이면서 성말라 보이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누구나 좋아할 수 없고, 좋지 않은 감정을 일으키게조차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손가락이 기다란 그녀의 두 손은 가늘고 장미빛이었으며, 두 다리도 가늘었다. 그녀는 몸을 약간 앞으로 구부정하게 하고는 거의 돌진하다시피 빨리 걸었다. 그녀는 아주 이상하게 성장했다. 처음엔 아버지를 매우 좋아했으나, 나중에는 지나치게 어머니한테 애착을 가졌다. 그러다가는 두 사람에 대한 애정이 식어 버렸다. 아버지에 대해선 특히 그러했다. 그리고 요즈음 어머니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마치 앓아 누워 있는 노파를 대하는 것과 같았다. 자기 딸이 보통 아이가 아니라고 자랑하고 다니던 아버지는 딸이 성장함에 따라 딸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를 가리켜 열렬한 공화당원이라고 부르면서, '그 앤 누굴 닮았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라고 말하며 다녔다. 인간의 약점은 그녀를 격분케 했고, 인간의 어리석음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 거짓말은 '영원히'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적이 없었고, 기도를 올릴 때에는 불평을 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누구나 오래지 않아 엘레나의 존경을 잃곤 하였다. 그녀는 사람을 판단하는데에도 성급했다. 때로는 지나치게 성급해서, 상대방이 즉시 그녀의 눈밖에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받는 인상은 모두 그녀의 마음 속에 깊이 박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인생이란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딸의 교육을 맡긴 여자 가정 교사는(생활에 권태를 느낀 이 귀부인은 처음부터 딸의 교육에 관여하지 않았다) 뇌물을 먹고 파면된 관리의 딸로서, 러시아 기숙 여학교 출신이었다. 그녀는 아주 감상적이고 친절했으나 정직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 사람 저 사람과 연애를 한 다음, 1850년(옐레나가 열여덟 살 되던 해이다) 어떤 장교와 결혼했으나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이 가정 교사는 문학을 몹시 좋아하여 자신이 시 나부랭이를 끄적거리기도 하였다. 그녀는 엘레나에게 독서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자 해 보았다. 하지만 독서만으론 그녀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활동을, 선행을 갈구해 왔던 것이다. 헐벗은 자, 배고픈 자, 고통받는 자들은 그녀의 관심거리였으며, 그녀의 정신적 고통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꿈까지 꿀 정도였으며, 아는 사람 누구한테나 그들에 대해 묻곤 하였다. 그녀는 신중하게 희사물을 주곤 했는데, 거기엔 거의 흥분에 가까운 무의식적인 자만심이 섞여 있었다. 짓밟히는 동물이라는 동물은 모두 다, 말라 빠진 개라든지, 잡혀 죽을 고양이, 둥지에서 떨어진 참새, 곤충류와 파충류까지도 옐레나의 비호와 보호를 받았다. 그녀가 직접 그들에게 먹이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기피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녀의 이런 행동에 참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한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의 저속한 애정 때문에 몹시 화를 내었다. 그리고 개나 고양이 따위를 집 안 어디에도 들여와서는 안된다고 선언했다. "레노치카"하고 그는 그녀에게 소리지르곤 했다. "어서 와 봐, 거미가 파리를 빨아 먹고 있구나. 불쌍한 것을 구해 주렴!" 그러면 레노치카는 온통 걱정이 되어 달려와서는, 파리를 구해 주고 다리에 감긴 거미줄을 풀어 주곤 해싸. "자 만일 네가 그렇게 친절하다면, 이제 네 피를 빨아먹도록 해 주려무나." 하고 아버지가 빈정거리듯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열 살 나던 해에 옐레나는 카챠라는 거지 소녀를 알게 되었다. 남 몰래 뜰로 가 그녀를 만나곤 했는데, 사탕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손수건과 카페이카짜리 은화를 주기도 했다. 카챠는 장난감만은 받지 않았다. 쐐기풀 덤불 뒤, 인적 드문 마른 땅 위에 나란히 앉아, 옐레나는 카챠의 딱딱한 빵을 즐겨 먹으며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카챠에게는 마음씨 고약한 늙은 아주머미가 있었는데, 자주 그녀를 때렸다. 카챠는 그 아주머니를 싫어하여 늘 아주머니한테서 도망쳐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옐레나는 존경심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그 신기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카챠를 뚫어져라 쳐다보곤 했다. 그럴 때면 그녀의 모든 것이, 그녀의 날카롭고 새까만, 거의 짐승에 가까운 눈과, 햇볕에 그을은 손이며, 거친 목소리며 심지어 그녀의 해진 옷까지도 옐레나에게는 거의 성스럽기까지 한 특별한 것으로 여겨졌다. 옐레나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오래도록 거지 소녀와 하느님의 뜻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호도나무로 지팡이를 깎아 만들고 짚고, 주머니를 차고, 카챠와 함께 돌아 다니는 것을 상상했다. 들국화로 만든 화환을 쓰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에 누가 방에 들어오기라도 하면 그녀는 몹시 싫어했으며, 무뚝뚝한 태도를 취했다. 한 번은 비가 오는데, 카챠를 만나러 갔다가 옷을 흠뻑 적셔 가지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아버지가 그녀를 보고 더러운 농사꾼 딸이라고 야단을 쳤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졌고, 그녀의 가슴은 놀라움과 기묘함으로 가득 찼다. 카챠는 종종 반쯤 야만적인 군인들의 노래를 불렀는데, 옐레나는 그녀에게서 그 노래를 배워 불렀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딸이 부르는 노래를 듣더니, 벌컥 화를 내었다. "너 어디서 그런 흉측한 노래를 얻어 들었니?" 그녀가 딸을 꾸짖었다. 옐레나는 어머니를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느니 오히려 자신이 갈기갈기 찢기는 편이 낫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러자 그녀의 가슴은 다시 무섭기도 하고 감미롭기도 했다. 그런, 카챠와의 사귐은 그리 오래 이어지질 못했다. 가엾은 소녀가 열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며칠 후에 죽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카챠의 죽음을 알고서 옐레나는 몹시도 슬퍼하였고, 밤마다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거지 소녀의 마지막 말들이 그녀의 귀에 끊임없이 울렸고, 그녀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아서였다..... 세월이 흐르고 흘렀다. 눈 밑으로 물이 흐르듯 그렇게 빠르고 간단없이 옐레나의 소녀 시절은 흘러갔다. 겉보기에는 하는 일 없는 무위의 생활인 듯 보였지만, 내면적으로는 투쟁과 불안의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녀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스타호프가를 드나드는 처녀들 가운데 어느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부모의 권유에 기가 죽은 일이 결코 없었으므로, 옐레나는 열 여섯 살이 되면서부터는 거의 완전히 독립된 생활을 했다. 그녀는 자기 나름대로의 생활을 영위해 갔으나, 고독한 생활이었다.그녀의 영혼은 불타올랐다가는 외롭게 사그라들곤 했다. 그녀는 새장 속의 새처럼 버둥거렸지만, 새장은 있지도 않았다. 아무도 그녀를 압박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녀를 억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버둥거리며 괴로워했다. 아따금 그녀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자기 자신이 두렵기조차 하였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거나 불가해한 것처럼 여겨졌다. '사랑 없이 어떻게 산담. 하지만 사랑할 사람이 있어야지!'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런 생각이 그런 느낌이 무서워졌다. 열여덟 살 때 그녀는 심한 열병에 걸려 죽을 뻔했다. 그녀는 원래 건강하고 튼튼한 몸이긴 했으나, 뿌리까지 뒤흔들린 그녀의 온몸은 좀처럼 회복되질 않았다. 마침내 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옐레나 니콜라예브나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녀의 신경에 대해 분개하여 말하였다. 아따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 그 누구도 원하지 않고, 러시아를 통틀어 그 누고 도 생각지 않는 그 무엇을 자신이 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자 마음이 가라앉아 스스로를 비웃을 수도 있게 되었다. 무사 안일하게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녀가 어떻게도 제어할 수 없는 원인 모를 강한 무엇인가가 갑자기 그녀의 내부에서 끓어올라 밖으로 터져 나오려고 하였다. 푹풍우는 지나가고 날아 보지도 못한 지친 날래는 접어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러한 발작이 그녀에게서 일어난 일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흥분된 마음의 우수는 그녀의 외면의 평온함 속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면 그녀의 부모는, 그녀의 '이상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놀라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했다.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된 날, 옐레나는 여느 날보다 더 오래도록 창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베르셰네프와 그와 나눈 대화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녀는 그가 좋았다. 그녀는 그의 감정의 따뜻함을, 그의 의도의 순수성을 믿었다. 그는 여지껏 이 날 저녁처럼 그렇게 그녀와 이야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그의 은근한 눈의 표정과, 그의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자신도 미소를 지으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미 그에 대한 생각이 아니었다. 그녀는 열린 창을 통해 '밤'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래도록 낮게 내려앉은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짓으로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리고는 자신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하늘을 향해 싸늘해진 맨팔을 내뻗었다. 그러나 곧 팔을 떨어뜨리고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는 배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로 밀려드는 감정에 굴하지 않으려는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이해할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튿날 열 한 시쯤, 베르셰네프는 돌아가는 마차를 잡아 타고 우체국에서 돈을 찾아 책 몇 권을 산 다음, 모스크바를 향해 출발했다. 인사로프를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었다. 며칠 전 슈빈과 이야기할 때 부터, 베르셰네프는 인사로프를 자기 별장에 초대하고 싶은 생각이 떠올랐었다. 하지만 그를 금방 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전에 살던 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곳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 집은 아르바트가와 포바르스카야가 사이에 페테르부르그 풍으로 지어진 볼품 없는 석조 건물의 뒤뜰에 자리잡고 있었다. 베르셰네프는 이집 저집 더러운 현관을 기웃거리기도하고, 문지기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보기도 했으나 허사였다. 페테르부르그에서도 문지기들이 방문객을 외면하려 하지만, 모스크바에서는 더욱 심했다. 베르셰네프의 물음에 대답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호기심 많은 재단사만이 조끼바람에 회색 실타래를 어깨에 걸치고서, 눈에는 타박상을 입고 면도도 하지 않는 시커먼 얼굴을 높다란 통풍창 너머로 말없이 내밀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거름더니 위에 올라서 있던, 뿔이 없느 까만 산양 한 마리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애처로이 울더니 전보다 더 빠르게 되새김질을 했다. 마침내, 낡은 외투를 입고 굽이 닳아빠진 장화를 신은 어떤 부인이 베르셰네프를 딱하게 여겼던지 그에게 인사로프의 집을 가르쳐 주었다. 이리하여 베르셰네프는 그를 만날 수가 있었다. 그는 길을 헤매며 쩔쩔매는 사람을 통풍창 너머로 그렇게 무심하게 내다보던 바로 그 재단사의 방에 세들고 있었다. 거의 텅 비다시피 한 커다란 방이었는데, 짙은 녹색 빛의 벽들과 세 개의 장방형 창문들, 그리고 한쪽 구석엔 조그만 침대가 놓여 있었고, 다른 쪽 구석에는 가죽 소파가, 그리고 천장 바로 밑에는 커다란 새장이 매달려 있었는데, 전에는 꾀꼬리가 살고 있었다. 인사로프는 다만 문턱을 넘는 것만으로 베르셰네프를 맞았다. "아, 자네로군!" 하거나 "아, 하느님! 무슨 일인가"하고 소리지르기도, "안영한가"하는 말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의 손을 꽉 쥐고 그를 방안에 놓여 있는 하나뿐인 의자로 데려갔다. "앉게."하고 말하면서 그 자신은 테이블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보시다시피, 내 방은 아직도 이렇게 어수선하네." 하고 바닥에 널러져 있는 종이와 책들을 가리키면서 인사로프가 덧붙였다. "아직 정리를 하지 못했어, 시간이 있어야지." 인사로프는 단어 하나하나를 강하고 분명하게 발음하면서, 아주 정확한 러시아 어로 말했다. 그것은 듣기 좋기는 했으나 그이 목구멍 소리는 어쩐지 러시아 어가 아닌 것처럼 들렸다. 인사로프가 외국 태생임은 그의 외모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는 스물다섯 살 가량의 마르고 힘줄이 두드러진 젊은이로, 움푹 들어간 가슴과 매듭이 굵은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날카로웠는데, 매부리코에 푸른빛을 띤 검은 말총 머리, 좁은 이마, 꿰뚫어 보는 듯 깊이 팬 크지 않은 눈과 짙은 눈썹을 하고 있었다. 그가 웃을 때면 지나치게 선이 또렷한 얇은 두 입술 사이로 아름다운 흰 치아가 살짝 드러나 보였다. 그는 낡기는 했지만 꼭대기까지 단추가 채워진 산뜻한 플록코트를 입고 있었다. "어째서 전에 있던 집에서 떠났나?" 베르셰네프가 그에게 물었다. "이 집이 값이 좀 싸거든. 학교도 가깝고." "하지만 지금은 방학이 아닌가. 이런 무더운 여름에 시내에 묻혀 있다니! 이사할 생각이었다면, 별장에 세 얻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인사로프는 이런 책망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채, "미안하네, 궐련도 시가도 없어서." 라고 중럴거리면서 베르셰네프에게 파이프를 권했다. 베르셰네프는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난" 그가 얘기를 계속하였다. "쿤초보 부근의 조그마한 집에 세를 들었어. 아주 값이 싸고 살기도 썩 편해. 2층에 남은 방이 하나 있는데." 인사로프는 또다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베르셰네프는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았다. "나는 이런 생각까지 했다네." 하고 담배 연기를 가느다랗게 내뿜으며 그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만일,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있다면, 이를테면 자네 같은 사람이 말이야. 난 그런 생각을 했어..... 그 사람이 원한다면..... 그 사람이 우리 2층을 쓸 것을 동의한다면 말이야, 그거 얼마나 좋을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드미트리 니카노르이치?" 인사로프가 그의 작은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자네, 나에게 자네네 별장에서 살 것을 권하는 건가?" "대단히 고맙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하지만 내 생각으로 내 형편이 그걸 허락지 않을 걸세." "대관절 뭘 허락지 않는단 말인가?" "별장에서 사는 걸 허락지 않는다구. 난 집을 둘씩이나 쓸 수가 없단 말일세." "하지만 난...." 베르셰네프가 말을 꺼내다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것 때문에 자네가 더 지출할 것은 하나도 없어." 라고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 집은 자네를 위해 그냥 놔 두어도 돼. 거기선 모든 게 아주 값이 싸. 만사가 다 잘 될 수 있어. 이를 테면 식사를 함께 할 수도 있고 말이야." 인사로프는 잠자코 있었다. 베르셰네프는 머쓱해졌다. "최소한 들르기라도 하게나. 언제든지." 그는 말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두어 발짝 떨어진 곳에 자네한테 꼭 소개해 주고 싶은 가족이 살고 있다네. 그 집엔 아주 훌륭한 처녀가 있지, 인사로프, 자네가 그녀를 알게 된다면! 그 집엔 또 내 절친한 친구 하나가 살고 있는데, 재주가 비상한 친구지. 자네와 그가 잘 맞을 거라는 걸 난 확신하네.(러시아 사람은 자기가 아는 사람을 접대하기를 좋아한다) 정말, 한 번 오게나. 우리에게로 옮겨 오면 더 좋고. 정말이야.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독서하고 할 수 있다면...., 내가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건 자네도 알지. 모든 게 자네한테 재미있을 거야. 난 책도 많이 가지고 있어." 인사로프는 일어나더니 방 안을 왔다갔다했다. "자네 별장 세를 얼마나 내는지 알려 주겠나?" 한찬 만에 그가 물었다. "은화로 백 루불" "방이 전부 해서 몇 갠데?" "다섯" "계산하면 방 하나에 20루불이 되겠군." "계산하면.. 하지만 그 방은 내게 필요가 없어. 그냥 비어 있어." "그럴 테지. 하지만 들어 보게." 인사로프는 단호하면서도 동시에 솔직한 고갯짓을 하면서 덧붙였다. "이런 경우에라야만 자네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겠네. 만일 자제가 내게서 계산대로 돈을 받는 데 동의한다면 말이야. 나도 20루불쯤은 낼 힘이 있으니까. 더구나 자네 말대로라면, 난 그곳에선 그 밖의 모든 것에서 절약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물론이지. 하지만 그렇게 하진 좀 떨떠름한걸." "달리는 안되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그래, 그게 자네가 원하는 것이면, 자네 고집이 어지간해야 말이지!" 인사로프는 또다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두 청년은 인사로프가 이사 할 날짜를 정하고 주인을 불렀다. 주인은 자기 딸을 먼저 들여보냈다. 머리에 얼룩덜룩한 커다란 수건을 쓴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소녀는 거의 공포에 가까울 정도의 표정으로 주의 깊게 인사로프가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아무 말 없이 나갔다. 뒤따라 임신중인 소녀의 어머니가 나타났는데, 그녀 또한 머리에 수건을, 다만 좀 작은 수건을 쓰고 있었다. 인사로프는 그녀에게 설명을 하였다. 그가 쿤초보 부근의 별장으로 이사 가는데, 방은 이대로 놓아 둘 터이니 짐들을 잘 부탁한다고. 재단시 부인 역시 놀라워하며 물러갔다. 마침내 주인이 왔다. 이 사람은 처음에는 마치 다 이해하는 것처럼, "쿤초보 부근이라고요?" 하고 생각에 잠긴 듯 말할 뿐이었다. 그러더니 벌컥 문을 열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 방을 그대로 쓰겠다는 거죠?" 인사로프는 그를 진정시켰다. "확실히 알아 둬야만 하니까요." 라고 재단사는 단호한 어조로 되풀이하더니 사라졌다. 베르셰네프는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것에 아주 만족해서 자기의 집을 향해 떠났다. 인사로프는 러시아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은근한 태도로 그를 친절하게 문간까지 배웅해 주었다. 그리곤 혼자 남게 되자 조심스럽게 플록코트를 벗고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날 저녁,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응접실에 앉아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 외에도 방에는 그녀의 남편 스타호프와,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의 먼 아저씨뻘 되는 우바르이바노비치 스타호프라는 사람이 있었다. 예순 살쯤 되어 보이는 퇴역기병 소위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뚱뚱한 사람이었다. 누르께한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조그마한 황색 눈은 졸리는 듯했으며, 두툼한 입술은 핏기가 없었다. 그느 퇴역하던 날부터 지금까지, 상인이었던 아내가 남겨 준 얼마 되지 않은 자본에서 나오는 이자로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었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그건 자신의 일에 대해 머리를 쓰는 것이었다. 일생에 단 한 번 그가 흥분해서 행동을 한 적이 있었다. 즉, 런던에서 열린 미국 박람회에 전시된 새악기 '반저음 나팔'에 관한 기사를 읽고, 그 악기를 주문하고자하여 문의까지 했었던 때였다. 어떤 사무소를 통해 어디로 어디로 송금을 할 것인가?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담배 색깔을 플록코트를 헐렁하게 걸치고, 목에는 흰 목도리를 감고 다녔다. 그리고 자주, 많이 먹고, 곤란한 경우, 즉 그가 어떤 견해를 표명할 일이 있을 때면 매번 오른쪽 손가락들을 공중에다 경련하듯 흔들어 대는 것이었다. 처음엔 엄지손가락에서부터 새끼손가락 쪽으로, 그 다음엔 새끼손가락에서 엄지손가락 쪽으로 흔드는 것이었다. "실인즉 내 말은.... 글세, 뭐랄까..." 하고 어렵사리 말하면서, 우바르 이바노비치ㅡ 창가에 있는 소파에 푹 파묻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고,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 방안을 큰 걸음걸이로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그는 매우 불만스런 눈치였다. 마침내 그가 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 하고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 땐 젊은이들 가르치는 방법이 전혀 달랐어. 당시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들한테 불손하지 않았단 말이야. 그러나 요즘엔 난 그냥 바라보면서 놀랄 뿐이지. 어쩌면 내가 틀렸고 그들이 옳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세상을 보는 눈이 있거든. 나도 멍텅구리로 태어나진 않았단 말이야. 우바르 이바노비치, 이 점에 대해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그를 흘끗 보았을 뿐, 손가락을 흔들어 댔다. "예를 들어, 옐레나 니콜라예브나를." 하고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말을 이었다. "난 옐레나 니콜라예브나를 이해할 수가 없어. 정확히 내가 그 애 수준까지 올라갈 수가 없거든. 그 애는 워낙 담이 커서 모든 자연계를 포함하려 든단 말이야. 아주 작은 바퀴버레니 개구리에 이르기까지, 한 마디로 친애비를 제외한 모든걸 말이야. 그래 훌륭해. 나도 그걸 알아. 그래서 이젠 서운해하지도 않아. 신경질에다, 박학에다, 독불장군이니, 우리가 알바가 아니야. 그런데 슈빈은.... 그가 놀랄 만큼 범상치 않은 예술가라 칩시다. 난 이 점에 대해 논쟁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손윗사람에게 불손하게 구는 꼴이란. 그것도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말이야. 고백하겠는데, 내 단순한 상식으로는 그런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어. 난 원래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참는 데도 한도가 있는 거야."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흥분해 가지고 벨을 울렸다. 카자흐인 소년 하나가 들어왔다. "왜 파벨 야코블레비치가 오지 않는 거지?" 그녀가 말했다. "내가 부르는데도 어째서 오지 않는 거야?"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아니, 그 애를 불러 어쩌겠단 말이오? 난 그런 것 요구한 적이 없는데. 바란 적도 없고." "어쩌다니요,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그 애기 당신을 걱정시켰잖아요. 당신의 치료를 방해했조. 난 그 애하고 예기하고 싶어요. 무엇으로 그 애가 당신을 화나게 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군요." "거듭 말하지만, 난 그런 것 요구한 적이 없소. 뭣 때문에 그런 쓸데 없는 짓을... 하인들 앞에서."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얼굴을 약간 붉혔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당신이 그런 말을 해 봤자 소용 없어요.난 결코... 하인들 앞에서. 페쥬시카, 가서 파벨 야코블레비치를 이리로 데리고 와라." 카자흐 소년이 나갔다. "그럴 필요 전혀 없다니까."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이빨 새로 말하고는 또다시 방 안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난 그 사람한테 할 말이 하나도 없어." "당치도 않아. 뭣 때문에 그가 내게 용서를 빌어? 그리고 용서라는 게 또 무슨 소용이오? 다 빈말뿐이지 않아." "무슨 소용이라뇨? 좀 가르쳐 줘야만 해요." "당신이 몸소 가르치구려. 당신 말을 더 잘 들을테니. 난 그 사람한테 불만 같은 거 품고 있지 않아." "아니에요.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당신은 오늘 여기 온 순간부터 기분이 나빠 있었어요. 내 눈엔 당신 요즈음 수척해 보여요. 치료가 당신한테 도움이 안 되지 않나 걱정되는 군요." "치료는 괜찮은데."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말했다. "간장이 좋지 않은 것 같애." 이 때 슈빈이 들어왔다. 그는 피곤해 보였다. 보일 듯 말 듯한 가벼운 냉소가 그의 입가에 어려 있었다. "절 부르셨습니까. 안나 바실리예브나?" 그가 말했다. "그래, 물론 내가 불렀지. 그럴 수가 있느냐, 파벨. 그건 무서운 일이야. 난 너에게 아주 불만이다. 어떻게 네가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한테 불손하게 굴 수가 있지?"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당신에게 내가 못마땅하다고 말씀하셨나보죠?" 하고 슈빈이 물으며, 여전히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스타호프를 바라 보았다. 스타호프는 외면을 한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래, 그랬어. 어떻게 네가 그한테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만, 지금 당장 사과해야 해. 그의 건강이 요즘 많이 상해 있잖니. 게다가 젊은 시절엔 자기 은인을 공경해야 하는 법이야." '아이구 , 대단한 논리군!' 슈빈은 스타호프 쪽으로 몸을 돌리며 생각했다.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그가 공손히 반쯤 몸을 구부리면서 말했다. "만일, 제가 조금이라도 노엽게 해 드렸다면 말입니다." "전혀, 전혀, 그런 일 없어."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조금 전처럼 슈빈의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아무튼 난 자네를 기꺼이 용서하겠네. 왜냐하면, 자네도 알다시피 난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거든." "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죠!" 슈빈이 말했다. "하지만 저의 호기심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잘못이 무엇인지 안나 바실리예브나께서 알고 계신지요?" "아니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 라고 말하면서 안나 바실리예부나는 목을 쑥 뽑았다. "오 맙소사."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성급히 소리를 질렀다. "내가 몇 번이나 부탁하고 간청해야 하는 거냐, 몇 번이나 말해야 하는 거냐고. 그런 변명이니 소동이니 하는 것들은 죄다 내게 거슬린다고 말이야! 자넨 전에도 쉬려고 집에 들르면, 가족관계니, 렝테리외르니 하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더니만, 집안 식구가 되니까 이젠 소란스럽게 불유쾌한 일만 일으키니 편안할 때가 없어. 하는 수 없이 클럽이든, 아니면 어디로든 갈 수밖에 없는게지. 육체를 가진 산 사람에게 어찌 육체적인 욕구가 없겠는가, 하지만..." 그리고는 꺼낸 말을 끝맺기도 않은채, 밖으로 휑하니 나가면서 문을 꽝 하고 닫아 버렸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클럽으로?" 그녀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클럽에 가는 게 아냐, 난봉꾼! 클럽엔 내 마구간 말을 선사할 만한 상대가 아무도 없어. 그것도 회색 말을! 내가 좋아하는 빛깔인데. 원참 경솔하 양반." 하고 그녀가 소리를 높여 덧붙였다. "클럽으로 가는게 아니라구. 그런데 파벨, 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녀가 말을 이었다. "부끄럽지도 않니? 이젠 어린애도 아닌데. 지금 또 두통이 나는구나. 조야가 어디 있는지 모르니?" "2층 자기 방에 있을 걸요. 그 약아빠진 꼬마 여우는 이런 날씨면 언제나 제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있거든요." "그럼, 제발 좀!" 하며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자기 주위를 살폈다. "생강즙을 담은 내 잔 못 보았니? 파벨, 좀 찾아보렴. 앞으로 날 화나게 하지 말아라." "제가 왜 화나게 하겠습니까? 키스하게 손을 좀 주세요. 생강은 서재의 작은 테이블 위에서 보았는데요." "다리야는 그럴 늘 아무데나 내버려 두고 다닌단 말이야." 라고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중얼거리고 나서 사라졌다. 비단 옷자락을 사락사락 끌면서. 슈빈은 그녀를 뒤따라 나가려 했으나 우바르 이바노비치의 느릿한 목소리를 듣고는 멈춰 섰다. "그러는 게 아냐, 풋나기야. 복종해야 해." 하고 이번엔 퇴역 기병 소위가 말했다. 슈빈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대체 무엇 때문에 날더러 순종하라는 겁니까. 존경하옵는 우바르 이바노비치씨?" "무엇 때문이냐고? 넌 어려. 어른을 존경할 줄 알아야 한다구, 암." "누구를 말입니까?" "누구냐고? 누군지 알지 않나. 비웃을지 몰라도." 슈빈은 팔짱을 끼었다. "아이구, 당신은 원시 합창단의 대표자이시군요." 라고 그가 소리쳤다. "당신은 무한한 생활력의 상징이며, 사회 건설의 주춧돌이십니다요!" 우바르 이바노비치가 손가락을 흔들어 댔다. "여보게, 됐네. 그만해 두게나." "하지만, 자." 슈빈은 말을 계속했다. "젊은 양반 같지는 않은데, 마음 속에 아직도 얼마나 행복한 어린애 같은 신념을 품고 있는가! 공경하라구요? 그래 원시 시대 사람인 당신께선 무엇 때문에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나한테 화를 내는지 아시기나 합니까? 나는 오늘 아침 내내 그와 함께 독일 여자 집에서 보냈죠. 오늘 우리는 '내 곁을 떠나지 마'라는 노래를 3중창으로 부르기도 했어요. 잘 들어 보세요. 아마 짚이는 데가 있을 겁니다. 어쨌든 우리는 노래를 계속해 불렀어요. 그런데 마침내 그것도 싫증이 났지요. 옳지 못한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아주 달콤한 느낌을 가졌답니다. 나는 그들 두 사람을 놀려 대기 시작했죠. 곧 효과가 나더군요. 처음엔 그 여자가 내게 화를 내더니만, 그 다음에는 그에게 화를 내는 거예요. 그러자 그가 그 여자에게 화를 내며 말했죠. 그는 집에서만 행복하고, 그 곳 자기 집이 낙원이라고요. 그러니까 그녀는 그가 예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내가 그녀에게 독일어로 "아이구!"하고 말했죠. 그가 나가 버리자 나만 남았어요. 그는 이리로, 즉 낙원으로 왔죠. 하지만 낙원도 싫어진 거예요. 그래서 투덜거리기 시작한 거라구요. 자, 이제 당신 생각으로는 누가 잘못한 것 같습니까?" "물론, 자네지?" 우바르 이바노비치가 대꾸했다. 슈빈은 그를 쏘아보았다. "당신에게 감히 한 말씀 여쭈어 보겠습니다, 존경하옵는 용사님." 하고 그가 비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기이한 말씀은 당신 자신의 사고 능력으로 생각한 끝에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소리라고 불리는 공기 중의 진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순간적인 욕구의 영감에 의해 하시는 겁니까?" "놀리지 말게!" 우바르 이바노비치가 신음하듯 말했다. 슈빈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밖으로 뛰어 나갔다. "야!" 십오분쯤 지나자 우바르 이바노비치가 소리쳤다. "저 보드카 한잔." 카자흐 소년이 보드카와 안주를 쟁반에 받쳐 가지고 왔다. 이바노비치는 쟁반에서 가만히 술잔을 들더니, 긴장된 눈초리로 그걸 오래도록 쏘아보았다. 마치 그의 손에 들고 있는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이. 그러더니 카자흐 소년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이것의 이름이 바시카인가 하고, 그런 다음, 슬픈 표정을 띠면서 보드카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안주를 집어 먹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찾았다. 카자흐 소년은 벌써 쟁반과 병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는 먹다 남은 청어를 다 먹어 치운 뒤 나리의 외투에 기대어 기분 좋게 졸았다.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손가락을 뻗치고는 그 위에 손수건을 건 채, 그 긴장된 시선으로 창문과 바닥과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슈빈은 자기 방으로 돌아와 책을 폈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의 시종이 그의 방으로 가만히 들어와, 그에게 쪽지 한 장을 건네 주었다. 쪽지는 세 겹으로 접혀진 데다가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나는 바라네.' 이렇게 그쪽지에는 적혀 있었다. '정직한 사람인 자네가 오늘 아침에 이야기했던 어음 건을 약속대로 이행해 줄 것을 믿어 마지않네. 자네는 나의 교제와 나의 처세 방법, 또 자네 몫이 적다는 것과 그 밖의 여러 사정을 잘 알고 있을 걸세. 또 존중해야 할 가정의 비밀이 있는 것이며, 쓸개빠진 사람만이 무시할 수 있는 가정의 평화가 있는것인데, 나는 자네가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네! 이 쪽지는 돌려 보내 주게. 슈빈은 그 쪽지 아래에다 연필로 썼다. '염려 마십시오. 저는 아직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끄집어 내지는 않으니까요.' 쪽지를 집사에게 돌려 보내고 그는 다시 책을 붙잡았다. 그러나 책은 이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그는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 하늘과, 다른 나무들로부터 떨어져 서 있느 두 그루의 싱싱한 어린 소나무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낮에는 푸르스름한 빛을 띠더니, 저녁이 되니까 아주 그럴싸한 초록빛이군.' 그리고는 정원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거기서 옐레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서.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눈앞 관목들 사이의 길에 그녀의 옷자락이 비쳤던 것이다. 그는 그녀를 뒤쫓아갔다. 그리고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말했다. "내 쪽을 보지 말아요. 난 그럴 만한 값어치도 없으니까." 그녀는 그를 흘끗 보고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띤채 더 멀리 정원 깊숙이 걸어갔다. 슈빈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날 쳐다보지 말라고 부탁해 놓고는." 하고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말을 걸고 있다니. 이런 기막힌 모순이 어디 있담! 하지만 어차피 마찬가지지. 난 이번이 처음도 아닌 걸 뭐. 어제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마땅히 당신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건데 내가 잊었군요. 나한테 화가 난 건 아니겠죠,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으나 그에게 곧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화가 나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생각이 딴 데 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예요." 한참 만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난 조금도 화나지 않았어요." 슈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나 근심스런, 그리고 얼마나 무심한 얼굴인가! 라고 그는 중얼거렸다.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하고 그는 목소리를 높여 말을 계속했다. "내가 당신한테 조그만 우스갯소리 하나 하게 해 주십시오. 나한테 찬구가 하나 있는데, 그 친구한테 또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는 술을 안먹었을 땐 더할 나위 없이 얌전한 사람인데, 술만 들어갔다하면 그저....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일찍 내 친구가 길에서 그 사람을 만났어요. 그들은 벌써 절교한 사이라는 걸 염두에 두세요. 그가 술에 취한 상태라는 걸 알고서는 내 친구는 얼른 외면했죠. 그러나 그 사람이 다가오더니 말하는 거예요. '인사를 안하는 것쯤은 화를 내지 않겠지만, 뭣 때문에 고개를 돌리는 거야? 아마, 이건 내가 슬퍼서 하는 말일 테지만, 나의 영혼이여, 고이 잠드소서! 라고요." 슈빈이 입을 다물었다. "그것뿐이에요?" 옐레나가 물었다. "그것뿐입니다." "난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무얼 암시하는 거죠? 당신 쪽을 쳐다보지 말라고 말해 놓고선." "그래요, 하지만 난 지금 당신한테 외면한다는게 얼마나 나쁜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럼 정말 내가..." 옐레나가 말했다. "아니란 말입니까?" 옐레나는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슈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 손을 꽉 쥐었다. "당신은 마치 내가 좋지 못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얘기하는군요." 옐레나가 말했다. "그러나 당신의 의심은 옳지 않아요. 난 당신을 피할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었는걸요." "그럼 그렇다고 해 둡시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당신 머릿속에는 갖가지 생각이 뒤엉켜 있는데, 그 중 한가지도 내게 털어놓지 않았다는 건 인정해야 합니다. 어때요, 내 말이 틀리지 않죠?"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그건 무슨 이유에서지요? 무엇 때문입니까?" "내 생각들은 나 자신에게도 분명치 못해요." 옐레나가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그것들을 다른 사람한테 털어놓을때가 아닙니까?" 슈빈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무슨 일인가 내가 말해 주지요. 당신은 나에 대해 좋지 못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요?" "그래요. 당신이. 당신은 생각할 테죠. 나는 예술가니까, 내 말과 행동은 절반쯤은 거짓일 거라고요. 난 무엇 하나 제대로 해 내는 일이란 없다고요. 아마도 이 점에선 당신이 옳을 겁니다. 그리고 어떠한 참되고 심오한 감정조차 가지지 못하리라고요. 난 솔직히 털어놓고 울 수도 없고. 그래서 수다나 떨고 말장난이나 하고. 이 모든 게 다 내가 예술가이기 때문이죠. 우린 앞으로 신에게 버림받은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에게 맹세하건대, 나의 회개를 믿지 마십시오." "아니에요, 파벨 야코블레비치. 난 당신의 회개를 믿어요. 당신의 눈물을 믿어요.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회개를 즐기고 있어요. 눈물도 물론 그렇고요." 슈빈은 깜짝 놀랐다. "그래요, 나도 알고 있어요. 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그건 카수스 인쿠라 빌리스라는 거죠. 이젠 머리를 숙이고 복종하는 길만 남았을 따름이에요. 그런데 맙소사! 아름다운 영혼과 함께 살고 있으면서 자신과 이렇게 싸우는 게 정녕 사실이던가? 그 영혼 속으로 결코 꿰뚫고 들어갈 수도 없고, 어째서 그녀가 슬퍼하며 어째서 기뻐하며, 또 그녀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은 무엇이며, 그녀는 무엇을 원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결코 알 수 없으리라는 걸 아는 것은... 얘기해 주세요." 하고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당신은 결코 절대로, 어떠한 경우에도, 예술가를 사랑하지는 않을 테지요?" 옐레나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럴 생각 없어요, 파벨 야코블레비치, 없어요." "그럼 증거를 요구해야 할 텐데." 슈빈이 유머를 섞어 침울하게 말했다. "이젠, 당신의 고독한 산책길을 더 이상 방해하지 않는 게 예의인 듯 싶군요. 교수라면 당신한테 무슨 근거로 '없어요'하고 말하는지를 물었을 테지만, 난 교수가 아니에요. 난 당신의 말대로 어린아이인 걸요. 그러나 어린아이를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걸 기억해 두세요. 그럼 잘 있어요. 나의 영혼이여, 고이 잠드소서!" 옐레나는 그를 만류해 볼까 생각했으나 생각을 달리하고서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슈빈은 밖으로 나왔다. 그는 스타호프 가의 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베르셰네프를 만났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모자를 뒤로 젖혀 쓴채, 빠른 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슈빈이 큰 소리로 불렀다. 그가 멈춰 섰다. "아냐, 그냥 가게." 슈빈이 말을 계속했다. "한 번 불러 봤을 뿐이네. 자넬 지체시킬 생각은 아니야. 곧장 정원으로 가게나. 거기서 자넨 옐레나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녀는 자네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더군. 하여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 자네 이말의 위력을 이해할 수 있겠나?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 여보게, 얼마나 놀라운 상황인지 알겠나? 생각해 보게. 내가 그녀와 한 집에서 산지 벌써 2년이야. 그 동안 난 그녀를 연모해 왔어. 그러나 이 순간에야 비로소 겨우 그녀를 알 것 같네. 그래서 두 손 들었지. 그런 이상한 눈초리로 날 쳐다보지 말게나. 그런 표정은 자네의 침착한 용모와 어울리지 않아. 자넨 내게 안뉴시카를 생각나게 해 주는 구먼.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난 부인하지 않겠어. 안뉴시카는 우리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가. 자, 안뉴시카, 조야, 그리고 아브구스치나 흐리스치아노브 나에게 축복을! 자네는 옐레나에게로 어서 가 보게. 난 가겠네. 자넨 내가 안뉴시카한테 간다고 생각하겠지? 여보게 아니네, 그럼 차라리 낫게. 치쿠라소프 공작에게 가는 걸세. 볼긴처럼 카잔에서 본 타타르인후 원자지. 자네, 이 초대장의 글자가 보이나? 에르 에스 베 페(회답해 주십시오) 말일세. 시골에서도 난 한가하지 못하다구! 아듀(안녕)." 베르셰네프는 슈빈의 장광설을 잠자코 다 들어 주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약간 당황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다음 스타호프 가의 별장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슈빈은 정말로 치쿠라소프 공작에게로 갔다. 그에게 짐짓 아주 친절한 태도로, 그러나 가시 있는 무례한 말을 마구 해 댔다. 카잔에서 온 타타르 인 후원자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자, 후원자의 손님들 모두가 따라 웃었다. 하지만 실은 아무도 즐거운 것이 아니어서, 헤어질 때는 서로 기분이 좋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네프스키 가에서 서로 만난, 약간 안면이 있는 두 사나이가 서로 이빨을 드러내며 눈과 코와 뺨을 정다룬 듯 맞대기도 하지만, 서로 지나쳐 버리면 곧 이전의 무관심 하거나 침울한 대개는 치질이라도 앓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과 같았다. 옐레나는 친절하게 베르셰네프를 맞이하였는데, 그 곳은 이미 정원이 아니라 응접실이었다. 그리고는 거의 성급해 보일 정도로 어제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그녀는 혼자였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어디론가 슬그머니 숨어 버렸고,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젖은 수건을 머리에 얹고서 2층에 누워 있었다. 조야는 스커트를 단정히 펼치고 무릎에 두손을 얹고 그녀 곁에 앉아 있었다.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다락방에 있는 널따랗고 푹신한 소파에 파묻혀 졸고 있었다. 식구들은 그 소파를 '최면의자'라고 불렀다. 베르셰네프는 다시 자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는 그의 기억 속에 거룩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우리도 그에 대해 몇 마디 하자. 여든 두 명의 농노를 거느린 지주인 그는 죽기 전에 이들을 다 해방시켜 주었다. 계명 결사(1776년 독일의 종교적, 공화 정치적 비밀결사)당원이기도 한 그는, 옛 괴팅겐 대학의 학생이었고, <세상에서의 영혼의 현시나 예시>의 저자였다. 이 저서에는 셸링주의와 스웨덴 보르그주의, 그리고 공화주의가 아주 독창적인 방법으로 혼합되어 있다. 베르셰네프의 아버지는 베르셰네프가 아직 어렸을 때에 그를 모스크바로 데려갔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직후의 일이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직접 그의 교육을 담당했다. 그는 과목마다 준비를 해서 특별히 성심 성의껏 애를 썼으나 전혀 성과가 없었다. 그는 몽상가였고 책벌레였으며, 신비론자였던 것이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고, 많은 비유를 들어 가면서 애매하고 미묘한 표현을 했다. 그리고 굉장히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꺼렸다. 그가 가르칠 때, 아들은 두 눈만 깜박일 뿐 별로 진전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노인은(아주 늦게 결혼했기 때문에 그의 나이 50세에 가까웠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안드류샤를 기숙사에 넣었다. 안드류샤는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아버지의 감시를 벗어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그를 찾아와서는 훈계조의 이야기로 그를 지치게 하는 것이었다. 사감들도 이 불청객한테 괴롭힘을 당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난해한 교육서 따위를 그들에게 가지고 온다는 것이었다. 학생들까지도 노인의 가무잡잡하게 얽은 얼굴, 이상하게 지은 회색 연미복을 걸친 마른 모습을 보는 걸 거북해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그 때까지만해도 황새 같은 걸음걸이에 긴 코를 가진, 웃는 일이 결코 없는 이 침울한 신사가 그들 하나하나에게 대해서도 자기 아들에 대해서와 거의 똑같이 가슴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언젠가 한 번은, 그가 워싱턴에 관한 이야기를 할 요량으로, "젊은 학생 여러분" 하고 말을 꺼냈다. 그러나 그의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젊은 학생들은 달아나 버렸다. 이 정직한 괴팅겐파 학자는 장미 꽃밭에서 산 게 아니었다. 그는 항상 역사의 진행과 온갖 종류의 문제와 생각에 압도되어 있었다. 어린 베르셰네프가 대학에 입학하자, 그는 아들과 함께 강의를 받으러 다녔다. 그러나 이 땐 이미 건강이 말을 듣지 않았다. 1848년 7월의 프랑스 혁명 사건은 그를 뿌리까지 흔들어 놓아<저서를 전부 고쳐 써야 했던 것이다>, 1853년 겨울, 아들의 대학 졸업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미리 아들의 졸업을 축하해 주었고, 학문에 매진할 것을 당부해 두었다. "너에게 등불을 전한다."라고 그가 임종 두 시간 전에 말했다. "할 수 있는 한 나는 그 등불을 지켰다. 너도 그 등불을 끝까지 꺼뜨리지 말아라." 베르셰네프는 자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도록 옐레나에게 늘어놓았다. 그는 그녀 앞에서 느끼던 거북살스러움은 깨끗이 가시고, 말소리도 제법 유창하게 들렸다. 화제는 대학에 관한 것으로 옮아 갔다. "말씀해 주시겠어요?" 하고 옐레나가 그에게 청했다. "당신네 친구들 가운데 뛰어난 사람이 있나요?" 베르셰네프는 슈빈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니에요,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들 사이엔 뛰어난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천만에요! 모스크바 대학에 인재가 많았다고들 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이젠 대학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학교에 지나지 않아요. 저 친구들과는 힘들었어요." 목소리를 낮추며 그가 덧붙였다. "힘들었다구요?" 옐레나가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베르셰네프가 말을 계속했다. "내가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군요. 한 학생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는 나와 전공은 다르지만, 정말 훌륭한 사람이에요." "이름이 뭔데요?" 옐레나가 쾌활하게 물었다. "인사로프, 드미트리 니카노르이치. 불가리아 사람이죠." "러시아 사람이 아니구요?" "아니죠, 러시아 사람이 아니에요." "그럼 어째서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는 거죠?" "여기로 유학을 온 것이죠. 그런데 그가 무슨 목적으로 공부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에게는 자기 조국의 해방이라는 한 가지 목표가 있답니다. 그의 운명 또한 평범치 않아요. 그의 아버지는 트이르노프 태생으로 상당히 부유한 상인이었답니다. 트이르노프는 지금은 조그만 소도시지만, 불가리아가 독립된 왕국이었던 옛날에는 불가리아의 수도였지요. 그는 소피아에서 장사를 했고, 러시아와도 거래를 하고 있어요. 그의 누이, 그러니까 인사로프의 친고모가 되는 분은 지금까지도 키에프에 살고 있는데, 그 곳 중학교의 역사과 주임 선생과 결혼했죠. 1835년, 그러니까 18년 전에 지독히도 나쁜일이 일어나고 말았답니다. 인사로프의 어머니가 별안간에 행방불명이 된 거예요. 그런지 1주일 후에 참살된 시체로 발견되었죠." 옐레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베르셰네프는 잠시 이야기를 멈췄다. "어서 계속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터키 장군이 인사로프의 어머니를 유괴해서 살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어요. 남편, 즉 인사로프의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복수하려 했으나 단검으로 그 장군에게 부상만 입혔을 뿐, 총살당하고 말았어요." "총살을 당했다구요? 재판도 받지 않고서요?" "네, 그때 인사로프의 나이 일곱 살. 이웃 사람의 손에 맡겨졌죠. 누이가 오빠 가족의 비운을 알고 조카를 그녀의 집에 데려오기를 바랐어요. 그 때 그는 오데사를 거켜 키에프로 보내졌답니다. 키에프에서 그는 만 12년을 살았죠. 그래서 그가 러시아 말을 그렇게 잘하는 거랍니다." "그가 러시아 말을 하나요?" "나나 당신만큼이나. 그는 스무 살이 되자, 1848년 초의 일이지요, 조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어요. 소피아와 오데사를 비롯하여 불가리아 전체를 이리저리 두루 돌아다녔죠. 그 곳에서 2년 동안 지내면서 모국어를 다시 배우게 되었어요. 터키 정부가 그의 뒤를 밟았기 때문에 아마도 그는 그 2년 동안 커다란 위험도 여러 번 겪었을 겁니다. 언젠가 그의 목에 큼직한 흉터가 있는 걸 보았는데, 아마 그 때 입은 상처인가 봐요. 하지만 그는 그런 말은 입 밖에 내고 싶어하지를 않아요. 워낙 말이 없는 사람이거든요. 나는 그에게 물어 보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허사였어요. 아주 모호하게 대답하는 거예요. 그의 고집 또한 여가 아니지요. 1850년에 그는 다시 러시아, 즉 모스크바로 돌아왔죠. 충분히 교육받고 러시아 사람들과 가까워지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서. 그런 다음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그 땐 어떡하나요?" 옐레나가 말을 가로막았다. "누가 압니까. 장래를 예측하기란 어려운 일인 걸요." 옐레나는 오래도록 베르셰네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당신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제게 해 주셨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뭐라더라... 인사로프,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나요?"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내가 보기엔 괜찮은 편이에요. 당신이 직접 보시지요." "어떻게 그럴 수가?" "내가 그를 이리, 당신한테로 데려오지요. 모레 우리 마을로 이사와서 나랑 한집에서 살게 될 테니까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우리 집에 오려고 할까요?" "물론이죠! 몹시 기뻐할 겁니다." "자존심이 강한가요?" "그가요? 천만에요. 당신이 그걸 원한다면, 그는 자존심이 강하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당신이 알고 있는 그런 의미에서는 아니에요. 예를 들자면 그는 절대 누군한테서고 돈을 꾸는 일이 없지요." "그럼 가난한가요?" "그래요. 부자는 아니지요. 불가리아에서 가서 아버지 재산 가운데 남아 있는 것 모두를 정리해 가지고 왔고, 고모도 도움을 주고요. 하지만 그래 봐야 얼마 됩니까?" "아마도 성격이 강한 편인가 봐요." 옐레나가 말했다. "그렇죠. 강철 같은 사람이죠. 그러면서도 그에게는 어딘가 어린애 같고 솔직한 데가 있어요. 긴장감이 돌고 감추려 드는 게 있긴 하지만, 사실 그의 솔직함은 우리들의 비열한 솔직함과는 다르죠. 단호히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 사람의 솔직함, 바로 그것이거든요... 내가 당신에게 그를 데려올 테니, 기다리세요." "수줍어하지는 않나요?" 옐레나가 다시 물었다. "아니오, 수줍어하지는 않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만이 수줍어 하는 법이니까요." "그렇다면 당신은 자존심이 강하신가요?" 베르셰네프는 당황하여 두 팔을 벌려 보일 뿐이었다. "당신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군요." 옐레나가 말을 계속했다. "그래, 그 분은 그 터키 장군에게 복수하지 않았나요?" 베르셰네프는 미소를 지었다. "복소란 소설 속에서나 하는 거랍니다.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게다가 12년이나 지났으니 그 장군도 죽었을 거구요." "하지만 인사로프씨는 당신에게 그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나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소피아에는 무엇하러 갔죠?" "그의 아버지가 거기 살았으니까요." 옐레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기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하고 그녀가 말했다. "이런 말은 놀라움마저 일어나게 해요. 얼마나 위대한 말인지...." 이 때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방에 들어섰으므로 대화는 끊기고 말았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갔으 때 이상한 느낌이 베르셰네프를 흥분시켰다. 그는 인사로프에게 옐레나를 소개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젊은 불가리아 인에 관한 자기의 이야기가 그녀에게 불러 일으킨 깊은 인상을 아주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그런 인상을 더욱 강하게 하려고 애쓴 게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는 어둡고 은밀한 감정이 몰래 자리잡고 있었다. 좋지 못한 슬픔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슬픔은 그가 <호헨시타우펜사>를 붙잡고 전날 남겨 두었던 바로 그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하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이틀후, 인사로프는 약속대로 자기 짐을 꾸려 가지고 베르셰네프 집에 나타났다. 그는 하인을 두고 있지 않았으므로 아무런 도움 없이 자기 방을 정돈하고, 가구를 배치하고, 먼저를 털고 바닥을 닦고 하였다. 책상을 벽과 벽 사이에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놓는 데 특별히 오래 걸렸다. 드디어 인사로프는 자기가 마음먹은 것을 이룰 수가 있었다. 정리가 끝나자, 그는 베르셰네프를 불러 10루불을 미리 받으라고 주었다. 그리고 나서는 굵다란 막대기를 짚고서 자기의 새 주거지 주변을 둘러보러 나갔다. 그는 세 시간쯤이나 지나서 돌아와, 식사를 함께 나누자는 베르셰네프의 초대에 응했다. 그는 오늘만은 식사 초대에 응하겠으나, 이후로는 여주인과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으니까 자기 식사를 그녀한테서 대접받겠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음식이 형편없을 텐데." 하고 베르셰네프가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 아주머니는 요리를 전혀 할 줄 몰라. 왜 나와 함께 식사하는 게 싫은가? 식사비는 반반씩 내면 되잖나." "내 호주머니 사정이 자네처럼 잘 먹는 걸 허락지 않네."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로프가 대답했다. 그 미소에는 더 이상 고집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베르셰네프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뒤, 그는 인사로프에게 스타호프가에 가 볼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인사로프는 저녁 내내 불가리아 친구들한테 보낼 편지를 써야 하니, 스타호프 댁 방문은 다음날로 미루자고 청했다. 인사로프의 불요불굴의 의지는 이미 전부터 베르셰네프가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그와 한지붕 아래 살게 된 지금에서야 비로소 인사로프는 어떠한 자신의 약속도 절대 변경하지 않으며, 일단 약속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본토박이 러시아 인인 베르셰네프는 독일인보다도 더한 이러한 정확성이 처음엔 좀기이하기도 하고 약간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친구의 그러한 점에 곧 익숙해져 나중에는 그것이 존경할 것까지는 없지만, 적어도 대단히 편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사 온 다음날, 인사로프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쿤초보 주위를 거의 전부 둘러보고 강에서 목욕을 한 다음, 찬 우유 한 컵을 마시고는 일을 시작했다. 그에게는 할 일이 적지 않았다. 러시아 역사와 법률과 정치, 경제를 공부하고 있었고, 불가리아의 노래와 연대기를 번역하고 있었으며, 동방 문제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불가리아 인들을 위한 러시아 문법과 러시아 인들을 위한 불가리아 문법을 편집하고 있었다. 베르셰네프가 찾아와 그와 함께 포이어바흐(독일의 철학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사로프는 그의 이야기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 들으면서 아주 이따금씩 요령 있게 반론을 제기했다. 그의 반론으로, 그가 포이어바흐를 연구해야 할는지, 아니면 그냥 지나쳐도 되는지 하는 문제를 분명히 하고자 애쓰는 게 역력히 보였다. 베르셰네프는 인사로프의 일로 화제를 돌려, 그에게 뭣 좀 보여 줄 수 없는가고 물었다. 인사로프는 베르셰네프에게 지기가 번역한 불가리아 민요 두세편을 읊어 주고 그의 의견을 듣고자 하였다. 베르셰네프는 번역은 정확하나 활기가 불충분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인사로프는 그의 지적을 참고로 받아들였다. 베르셰네프는 화제를 민요에서 불라리아의 현황으로 옮겨 갔다. 이 때에 처음으로 자기 조국에 대한 말이 나왔는데, 인사로프에게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베르셰네프는 눈치챘다. 그의 얼굴이 붉어진다거나 목소리가 높아지는 건 아니었다. 그의 몸 전체가 생기에 차는 듯하고 앞으로 향해진 듯했으며, 입술 윤곽은 더욱 날카롭게,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눈동자 깊숙이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고 있었다. 인사로프는 자신의 조국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떠벌리는 건 좋아하지 않았으나, 불가리아에 대해서는 대개 아무하고나 기꺼이 이야기했다. 터기 인에 대해, 그들의 박해에 대해, 자기 동포들의 참상에 대해, 그들의 희망에 대해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서 오래 전부터 한 가지 정열로 모아진 생각이 엿보였다. '하긴 다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베르셰네프는 생각했다. '터키 장군이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였다는 이유로 그에게 보복을 당했을 수도.' 문이 열리고 문지방에 슈빈이 나타났기 때문에, 인사로프는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웬일인지 지나치게 태평하고 온순한 모습으로 방에 들어왔다. 그를 잘 알고 있는 베르셰네프는 무엇인가가 그를 불쾌하게 했다는 걸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기탄없이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슈빈이 밝고 솔직한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난 슈빈이라고 합니다. 여기 이 젊은 사람의 친구죠." 그가 베르셰네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당신은 인사로프 씨죠.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인사로프입니다." "악수를 합시다. 잘 지내 봅시다. 베르셰네프가 당신에게 나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당신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해 주었답니다. 여기서 지내시게 되었다고요? 잘 됐어요 내가 이렇게 당신을 뚫어져라 쳐다본다고 화를 내지는 마십시오. 내 천직이 조각가라, 조만간 당신의 머리를 조각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사 하고 부탁할 걸 예견하고 있는 거니까요." "좋을 대로 하십시오." 인사로프가 말했다. "오늘 무얼 한담, 응?" 나지막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쩍 벌린 무ㅍ을 두 팔로 짚으면서 슈빈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각하께옵서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온지요? 날씨는 청명하고, 건초와 마른 땅딸기 냄새가...마치 우유차를 마시듯 풍겨 오고. 뭣 좀 해 봐야 할 텐데. 쿤초보에 새로 이사 온 사람에게 쿤초보의 수없이 많은 아름다움을 몽땅 보여 주세 그려." '저 친구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군.' 하고 베르셰네프는 마음 속으로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자, 자넨 왜 잠자코 있나, 나의 친구 호레이쇼, 자네의 예언자다운 입을 열어 보게나. 우리 뭣 좀 할까, 아니면 그만둘까?" "인사로프가 어떤지 모르겠군." 하고 베르셰네프가 말했다. "그는 일을 하려던 참인 것 같은데." 슈빈이 의자 위에서 몸을 돌렸다. "일을 하려 하십니까?" 하고 그가 코맹맹이 소리로 물었다. "아닙니다." 인사로프가 대답했다. "오늘은 산책이나 하면서 소일하려고 합니다." "아" 하고 슈빈이 말했다. "그럼 됐어요. 나의 친구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자네의 현명한 머리를 모자로 덮고 기분 내키는 대로 가 보세. 우리의 눈은 젊으니까 멀리가지 볼 수 있을 거야. 허름한 주막을 알고 있는데, 거기에 가면 점심을 먹을 수 있을 걸세. 맛은 신통치 않지만, 우린 아주 즐거울 수 있을 거야. 가세나." 반 시간 후 세 사람은 모스크바 강둑을 따라 거닐고 있었다. 인사로프는 귀 있는 데가 축 늘어진, 챙 달린 꽤나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슈빈은 그 모자가 참으로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인사로프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며 숨을 들이마시기도 하고, 얘기도 하면서 조용히 미소짓기도 하였다. 그는 오늘을 만족스럽게 충분히 즐기는 것 같았다. "분별 있는 아이들이 일요일에 산책을 가는 것 같구먼." 하고 슈빈이 베르셰네프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슈빈 자신은 아주 바보 같은 짓을 하기도 하고, 앞으로 뛰어가 어떤 조각의 포즈를 취해 보이는가 하면, 풀밭에서 뒹굴기도 하였다. 인사로프의 조용한 태도가 그에게 갑갑증을 일으키게 했던지, 그는 어릿광대 노릇을 자청했다. "뭣 때문에 그렇게 날뛰는 건가, 프랑스 친구!" 하고 베르셰네프가 두어 번 그에게 언질을 주었다. "그래, 난 프랑스 인이야. 반은 프랑스 인이지." 하고 슈빈이 그에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어떤 웨이터가 말했던 대로, 농담과 진담 사이로 중용을 지키게." 젊은이들은 강둑을 돌아, 황금빛 보리가 양 옆으로 높다랗게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깊이 패인 좁다란 도랑을 따라 걸었다. 그 울타리가 담청색 그림자를 그들에게 드리우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보리 이삭 위를 미끄러져 가는 것 같았다. 종달새가 노래하고 메추라기가 울고 있었다. 따뜻한 바람이 불면 풀잎들이 일어나 도처에서 그 푸르름을 발하고, 꽃봉오리가 흔들흔들 춤추었다. 오래도록 이리저리 거닐기도 하고 쉬기도 하며 잡담을 나누기도 하던 끝에, 슈빈은 지나가는 이빨 빠진 농부를 붙잡아 말타기놀이까지 해 보였다. 농부는 나리가 자기와 함께 무엇을 했다는 걸 아주 즐거워했다. 세 젊은이는 '허름한'주막에 이르렀다. 심부름꾼은 그들을 거의 발길로 찰 뻔했고, 정말 형편없는 음식과 발칸 지방의 포도주가 나왔다. 그러나 슈빈이 미리 이야기했던 대로 이런 것은 그들이 마음껏 즐기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슈빈이 자신이 누구보다도 크게, 그리고 누구보다도 적게 즐거워했다. 그는 불분명하기는 하나 위대한 베네린을 위하여 축배를 들었고, 거의 아담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크롬인가 흐름인가, 흐름인가 하는 불가리아 왕을 위하여 축배를 들었다. "9세기이지요." 그의 말을 인사로프가 정정했다. "9세기라고요?" 슈빈이 소리질렀다. "오, 얼마나 행복스러운가!" 이렇게 장난치고 상식에 어긋난 언행을 하고 농담하는 사이에도 슈빈이 인사로프를 테스트하고 살피며 내심 흥분되어 있다는 걸 베르셰네프는 알아챘다. 하지만 인사로프는 시종일관 여전히 조용하고 분명했다. 마침내 그들은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그것은 아침부터의 즐거운 기분을 그대로 지닌채, 그날 저녁 스타호프 가를 찾아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슈빈이 그들의 방문을 알리러 먼저 달려갔다. "영웅 인사로프 씨가 지금 이리로 오고 있나이다!" 하고 스타호프 가의 응접실에 들어서면서 슈빈은 호들갑스레 소리쳤다. 그때 그곳엔 옐레나와 조야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누구라고요?" 조야가 독일어로 물었다. 그녀는 불시에 말을 할 때면 늘 모국어가 튀어나오곤 했다. 옐레나가 몸을 꼿꼿이 일으켜 세웠다. 슈빈이 입술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화가 났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들었죠? 인사로프 씨가 이리로 오고 있단 말입니다." 그가 다시 되풀이해 말했다. "들었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당신이 그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지 들었단 뜻이에요. 정말, 당신에게 질렸어요. 인사로프 씨가 아직 여기 발도 들여놓기 전에 짓궂게 굴려 들다니 말이에요." 슈빈이 움찔 놀라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이 옳아, 당신이 늘 옳다니까요,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하고 그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냥 한 번 해 본 것뿐이에요. 맹세코, 우리는 오늘 종일토록 함께 놀았어요. 내 당신한테 단언하겠는데, 그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난 그런 걸 당신한테 묻지 않았어요." 하고 말하고는 옐레나는 일어났다. "인사로프 씨는 젊은 분인가요?" 조야가 물었다. "백 마흔 네 살이지." 슈빈이 짓궂게 대꾸했다. 카자흐 아이가 두 친구의 도착을 알렸다. 그들이 방으로 들어섰다. 베르셰네프가 인사로프를 소개했다. 옐레나는 그들에게 자리를 권하고 자신도 앉았다. 조야는 안나 바실리예브나에게 알리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첫대면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다 그러하듯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화가 시작되었다. 슈빈은 구석에서 잠자코 관찰하고 있었는데, 특별히 뭘 주시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옐레나에게서 슈빈 자기에 대해 억제하고 있는 분개의 흔적을 눈치챘을 뿐, 그뿐이었다. 그는 베르셰네프와 인사로프를 번갈아보면서, 조각가로서 그들의 얼굴을 비교해 보았다. '두 사람 다 미남자는 아니야.'하고 그는 생각했다. '불가리아 사람의 얼굴은 특징이 있어서 조각하기에 알맞겠군. 지금 그 얼굴이 잘 비추어 지고 있군. 대 러시아 인의 얼굴은 회화에 알맞을 것 같고. 선은 없지만 특성이 있어. 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될 거야. 아직은 그렇지 않지만, 곧 베르셰네프를 사랑하게 될 걸.' 하고 그는 속으로 결정했다.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응접실에 나타나자, 화제는 완전히 '별장식'으로 옮아 갔다. '시골식'이 아니라 바로 '별장식'으로 말이다. 화제는 논의 대상이 풍부함으로하여 극히 다양했다. 하지만 짤막한, 꽤나 어색한 침묵이 3분마다 대화를 끊어 놓았다. 이렇게 말이 끊어질 때면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조야에게로 몸을 돌렸다. 슈빈은 그녀의 말없는 암시를 알아채고 상을 찡그렸다. 조야가 피아노 앞에 앉아 그녀의 레퍼터리를 치며 노래 불렀다. 우바르 이바노비치가 문 뒤에 나타났다가는, 손가락을 흔들며 물러가 버렸다. 차를 마신 다음, 모두들 정원으로 나갔다. 밖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고, 손님들은 떠나갔다. 인사로프는 사실 옐레나에게, 그녀가 기대했던 만큼의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그녀에게 그녀가 기대했던 그런 인상을 일으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솔직함과 스스럼없음이 좋았고, 그의 얼굴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조용한 결단력과 꾸밈없는 소박함을 가지고 있는 인사로프라는 사람은, 그녀가 베르셰네프의 이야기를 듣고 머릿속에 상상했던 형상과는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옐레나는 좀더 '숙명적인' 그 무엇인가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오늘 그는 아주 말이 적었어. 바로 내 잘못이야. 내가 그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으니까.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지. 그의 눈은 표정이 풍부한 정직한 눈이었어.' 그녀는 그를 숭배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에게 친절히 손을 내밀고 싶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인사로프와 같은 그런 사람들을 왜 '영웅'이라고 상상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영웅이라는 말은 슈빈을 연상케 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미 잠자리에 들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붉히며 분개했다.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이 자네 마음에 드는가?" 하고 돌아가는 길에 베르셰네프가 인사로프에게 물었다. "썩 맘에 드네." 인사로프가 대답했다. "특히 그딸이. 아마, 귀여운 처녀일 거야, 그녀는 흥분하고 있어. 하지만 그건 좋은 흥분이지." "자주 찾아갈 필요가 있을 것일세." 베르셰네프가 말했다. "암, 그래야지." 인사로프는 그렇게 말하고는, 집에 오자마자 곧 자기 방에 틀어박혔는데, 그의 방에는 밤늦도록 촛불이 켜져 있었다. 베르셰네프가 아직 라우머의 책을 한 페이지도 채 읽기 전에, 가는 모래 한 줌이 그의 창문의 유리창을 두드렸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일어나 창문을 열어 보았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슈빈이 거기 서있었다. "자네 참 시끄러운 친구로구먼! 나방 같은 친구야!" 베르셰네프가 입을 열었다. "쉿!" 슈빈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총각이 처녀를 찾아오듯 살며시 자네에게 온 거야. 내 꼭 자네한테 몰래 두어 마디 해야만 하겠기에 말이야." "그럼 방으로 들어오게."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슈빈은 거절하고 팔을 창가에 기대었다. "이러는 편이 더 재미있어. 이래야 한결 스페인 맛이 나거든. 우선 축하하네. 자네 주가가 오른 걸 말이야. 자네의 그 훙륭한 괴상한 친구는 낙제야. 내 자네한테 보증할 수 있네. 자네에게 공정한 판단을 내려 줄 테니 들어보게. 자, 여기 인사로프 씨의 이력서가 있네. 재주도 없고 시정도 없지만, 일에 대한 능력은 무한하고 기억력은 대단하지. 지능면에서 보면 깊이와 융통성이 부족하긴 하나 건전하고 생기가 있어. 뚝심과 힘이 있고 말재간도 있지. 그러나 우리들 사이에 그 지겨운 불가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이유가 뭐지? 뭐라구? 나넨 내가 공평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건가? 한 가지만 더. 자네와 그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어. 그 누구도 그와 친구가 될 수 없다네. 그가 예술가인 날 좋아할 리가 없지. 난 그게 자랑스러워. 뚝심, 뚝심이 있어서 우리 모두를 깨부술 수가 있다네. 그는 그의 조국 땅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어. 남들에게 아첨하기에 바쁜 우리의 텅 빈 용기와는 달라. 생명수가 우리에게 흘러들기나 바라는! 반면에 그의 과제는 좀더 가볍고 알기 쉬운 거야. 터키 인들을 쫓아내기만 하면돼. 얼마나 웃기는 얘긴가! 그런데 고맙게도, 여자들은 이런 점들을 좋아하지 않는단 말이야. 매력이 없다는 거지. 나나 자네는 그렇지 않은데 말이지." "어째서 나까지 끌고 들어간담?" 베르셰네프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머지 자네 말도 옳지 않아. 그 친구는 자넬 조금도 싫어하지 않을뿐더러 많은 자기 동포들을 친구로 가지고 있어....난 그걸 알아." "그건 다른 문제라네! 그들에게 그는 영웅이거든. 아, 솔직히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영웅은 다르지만 말이야. 영웅은 말재간이 필요 없거든. 영웅은 황소처럼 음매음매 소리지르며 뿔로 들이받으면 벽이 무너지고. 왜 그가 그러는지 그 자신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하는 거지. 그렇지만 아마 현대엔 다른 종류의 영웅이 요구될 걸세." "자넨 왜 그리 인사로프에게 관심이 많은가?" 베르셰네프가 물었다. "정말 자넨 내게 그 친구 성격을 이야기하려고 이리로 달려온 건가?" "내가 이리로 온건." 슈빈이 말을 시작했다. "집에선 너무 우울했기 때문이야." "아, 그런가! ㅇ 또 한 차례 울 일이 생겼군?" "얼마든지 비웃게나! 내가 여기 온 건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서 이고, 절망이, 분노와 질투가 나를 갉아먹어서이지." "질투라고? 누구한테?" "자네에게, 그에게, 모두에게, 만일 내가 일찌감치 그녀를 이해했더라면, 미리 알아서 그 일에 손을 대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날 괴롭힌다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담! 그녀의 말마따나, 난 남들을 웃기고 바보짓이나 하고 변덕이나 부리고 하다가, 돌연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걸로 끝낼 걸세." "아니, 자네가 목을 맬 수가 있을 줄 아나." 베르셰네프가 말했다. "물론, 이런 밤에는 안하지. 그러니 가을까지는 기다릴밖에. 이런 밤에는 사람들이 행복에 겨워 죽을 지경일 걸세. 아아, 행복! 길에 뻗쳐 있는 나무 그림자마다 지금 이렇게 속삭이고 있는 듯하네.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알아요.....말해 줄까요?'하고 . 자네한테 산책하러 가자고 청하고 싶지만, 지금 자네 꽤 산란한 것 같군. 잠이나 자게. 자면서 수학적인 숫자 꿈이나 꾸라구! 난 가슴이 터질 것만 같네. 여보게, 자네들은 웃기는 사람을 가볍다고 생각할 테지. 그러니까 자네들 생각으로는 말이야. 자네들은 어떤 사람이 모순된 짓을 한다면 그것을 지적할 수가 있지. 다시 말해 그가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말이야. 잘 있게나!" 슈빈이 재빠르게 창문에서 물러났다. "안뉴시카!"하고 그의 등에다 대고 베르셰네프는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사실은 슈빈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였지만, 2-3분쯤 지났을 때, 베르셰네프는 무슨 흐느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일어나 창문을 열어 보았으나 사방이 쥐죽은 듯 고요했다. 다만, 어딘가 멀리서 길을 지나가는 농부가 '모즈독 초원'을 노래하고 있을 뿐이었다. 인사로프가 쿤초보 부근으로 이사 온지 처음 두 주일 동안, 그가 스타호프 가로 찾아간 것은 고작해야 너댓 번밖에 되지 않았다. 베르셰네프는 하루 걸러 찾아갔다. 옐레나는 언제나 반가이 맞았고, 언제나 그와 그녀 사이에는 생기있고 흥미있는 대화가 오갔다. 그렇지만 그는 이따금 서글픈 얼굴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슈빈은 통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미친 듯한 열정으로 자기 예술에 몰두해 있었던 것이다. 자기 방에 갇혀 있다가 온통 진흙투성이인 작업복 차림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곤 했다. 혹은 모스크바에서 며칠씩 지내기도 했는데, 거기에 그의 아틀리에가 있어서 그의 친구이자 스승인 모델과 이탈리아 조각가들이 찾아오곤 했다. 옐레나는 인사로프와 이야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그러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가 없을 때에는 그에게 물어 볼 여러 가지 화제를 준비했으나, 그가 오면 자기가 준비한 것이 부끄러워졌다. 인사로프의 조용하기만 한 태도가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기는 그에게 이야기를 강요할 권리가 없으므로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의 방문이 잦아짐에 따라 그들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는 대수롭지 않는 것이었지만, 차츰 그녀는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그와 단둘이 있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람과 가까워지려면 한 번쯤은 일 대 일로 그와 이야기를 해 보아야 하는 법인데. 그녀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베르셰네프와는 많이 했다.베르셰네프는 인사로프가 옐레나의 상상을 뒤흔들어 놓았다는 걸 알았다. 따라서 슈빈이 단언했던 대로 그의 친구가 낙제하지 않았음을 그는 기뻤했다. 그는 열의를 다해 아주 세세한 데까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를 그녀에게 이야기해 주었다(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기를 바랄 때, 그와의 대화에서 우리의 친구를 칭찬해 댄다. 게다가 우리가 그 사람을 칭찬한다는 걸 거의 의심치 않으면서). 그리곤 옐레나의 창백한 두 뺨이, 이따금이긴 하지만 약간 불그스름해지고 두 눈이 빛을 발하며 커질 때면, 그가 이미 경험한 적이 있는 그 좋지 못한 슬픔이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어느 날 베르셰네프가 평소와는 달리, 즉 10시쯤 되어서 스타호프 가에 왔다. 옐레나가 홀로 나왔다. "생각해 보세요." 그는 자연스럽지 못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인사로프가 없어졌다는 것을." "없어지다뇨?" 옐레나가 말했다. "없어졌어요. 그저께 저녁에 어디론가 나가서는 지금껏 돌아오지 않아요." "어디로 간다고 당신한테 말하지 않았나요?" "하지 않았어요." 옐레나는 의자에 앉았다. "아마, 모스크바에 갔겠죠."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무관심한 듯이 보이려 애쓰면서, 또 동시에 자신이 무관심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베르셰네프는 이의를 말했다. "혼자 나가지 않았거든요." "그럼 누구하고 같이?" "그저께 식사 전에 어떤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아마 그의 동포들인 것 같았아요." "불가리아 인들이라구요? 왜 그렇게 생각했죠?" "그건, 그 사람들이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슬라브 어를 썼기 때문이죠.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당신은 인사로프에게 비밀스러운 점이 별로 없다고 늘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이런 방문보다 더 비밀스러운 게 무엇이 있겠어요. 그의 방으로 들어가 소리지르고 언쟁하고, 아주 야만적이고 악랄하게..... 이걸 상상해 보십시오. 그도 소리를 질렀어요." "그 사람도요?' "그도 그 사람들한테 소리를 질렀어요. 그들은 서로 불평을 말하는 것 같았어요. 당신이 그 방문객들을 한 번 보았더라면! 매부리코에 거무튀튀하고 광대뼈가 나온 듯한 얼굴이었죠. 두 사람 다 마흔 고개를 넘었음직한데, 먼지와 땀에 절은 초라한 옷을 입고 있었어요. 수공업자들같이 보였지만 수공업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사도 아니고......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겁니다." "그럼 그가 그들과 함께 떠났단 말인가요?" "그들과 함께 떠났죠. 그들에게 음식을 먹이더니 그들과 함께 나갔어요. 주인 아주머니 말에 의하면, 그 ㅅ들 둘이서 죽을 단지째 먹어치웠다는군요. 숭냥이들처럼 서로 다투듯이 삼키더래요." 옐레나가 힘없이 웃었다. "나중에 알고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일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제발! 당신이 그런 말을 한다 해도 소용이 없어요. 인사로프에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란 하나도 없어요. 슈빈도 그렇게 믿고 있지만...." "슈빈이라고요!" 하며 옐레나가 말을 가로막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죽을 게걸스럽게 먹은 사람들이라는 걸 염두에 두어야지요." "테미스토클레스(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이며 장군)도 살라미스해전(기원전 480년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그리스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를 살라미스 만에서 격파시킨 해전) 전날 밤,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었답니다." 베르셰네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다음날 전투가 있었지 않아요. 그건 그렇고, 그가 돌아오면 내게 알려 주세요." 옐레나는 그렇게 덧붙이고 화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맥이 빠져 버리고 말았다. 조야가 발돋움을 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아직 깨지 않았다는 걸 알려 주는 표시였다. 베르셰네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저녁, 옐레나는 그에게서 쪽지를 받았다. '그가 돌아왔습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햇볕에 그을고 온통 먼지에 뒤덮인 채로군요. 하지만 어디를 무엇하러 다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선 알아 낼 수 있지 않을는지요?' '당신은 알아 낼 수 있지 않겠느냐고?' 옐레나가 중얼거렸다. '과연 그 사람이 나한테 이야기를 할까?' 이튿날 1시쯤 되어서, 옐레나는 정원 안에 있는 조그만 개집 앞에 서 있었다. 그 집에는 집에서 기르는 개 두 마리가 길러지고 있었다. 정원사가 울타리 밑에 버려진 개들을 발견해 주인 아가씨에게 가져다 준 것인데, 주인 아가씨는 맹수건 가축이건 가리지 않고 동물이면 다 귀여워 한다고, 세탁소 여자가 그에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 그의 예측은 들어맞아, 옐레나는 그에게 25카페이카를 주었다. 그녀는 개집을 들여다보며 개들이 살아 있는지, 건강한지, 그리고 깨끗한 짚이 깔려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 돌아서다가 그녀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인사로프가 혼자서 가로수 길을 똑바로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그가 그녀에게 다가와 챙 달린 모자를 벗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그가 요 며칠 새에 몹시 햇볕에 그을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와 함께 여기 오려 했는데, 그가 웬지 우물쭈물 거려 혼자 출발했습니다. 댁에는 아무도 없더군요. 모두가 잠을 자거나 산책을 하나 봐요. 그래서 이리로 곧장 왔습니다." "당신은 흡사 사과를 하는 것 같군요." 하고 옐레나는 대답했다. "그럴 필요 전혀 없어요. 우리들 모두에게는 당신을 뵙는 것이 아주 반가우니까요.....여기 그늘 밑 벤치에 앉으세요." 그녀가 앉자, 인사로프는 그녀 곁에 자리잡았다. "요즈음 집에 안 계신 것 같던데요." 하고 그녀가 말을 꺼냈다. "그랬었지요." 하고 그가 대답했다. "떠났었죠..... 안드레이 페트로비치가 당신에게 말해 주던가요?" 인사로프는 그녀를 쳐다보며 미소를 짓더니, 챙 달린 모자를 가지고 장난질을 시작했다. 미소를 지으면서, 그는 두 눈을 깜박거리며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는데, 이와 같은 동작은 그가 아주 선량하다는 걸 말해 주는 것이었다. "아마,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는 내가 어떤 난폭한 사람들과 함께 나갔다고 당신에게 말씀드렸을 테지요."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옐레나는 약간 당황했으나 곧, 인사로프에게는 항상 사실대로 얘기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당신은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요?" 하고 그가 불쑥 그녀에게 물었다. 옐레나는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전 생각했죠. 당신은 언제나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으므로, 나쁜 짓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감사를 드려야겠군요. 실은 저, 옐례나콜라예브나." 하고 그가 상대방에게 확신을 주려는 듯 그녀 쪽으로 다가 앉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곳에 우리 동포들이 몇 사람 살고 있거든요. 그들 가운덴 교육을 조금밖에 받지 못한 자들이 있어요. 하지만 모두들 날 이해하고 또 날 믿고 있어요. 그래서 논쟁을 해결해 달라고 날 불렀던 거죠. 그래서 갔던 겁니다." "여기서 먼가요?" "차를 타고 60베르스타(미터법 시행전의 단위로, 1베르스타는 1.067킬로미터)쯤 떨어진 트로이츠키 촌에 갔었죠. 거기 수도원에도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습니다. 조금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사건을 잘 처리했으니까요." "힘드셨죠?" "힘들었어요. 한 사람이 내내 고집을 부려서. 돈을 갚지 않겠다지 뭡니까?" "뭐라구요? 돈 때문에 싸움이 벌어진 건가요?" "그래요. 그것도 많지도 않은 돈 때문이에요. 그럼 당신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럼 당신은 그런 사소한 일을 위해 60베르스타나 갔단 말이에요? 사흘씩이나 허비해 가면서요?" "그건 사소한 일이 아니랍니다,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자기 동포들이 관련된 일이라면 말입니다. 거절하는 건 죄가 되죠. 당신도 강아지까지 손수 돌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 이런 점을 높이 삽니다. 제가 시간을 잃어버린 건 별로 큰일이 아니랍니다. 시간은 나중에도 낼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하긴 시간인들 우리의 것이기나 한가요?" "그럼 누구의 것이에요?" "우리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지요. 제가 당신께 이런 말씀을 시시콜콜 다 드리는 것은 제가 당신의 의견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전 상상할 수 있어요. 안드레이 페트로비치가 당신을 얼마나 놀라게 해주었는지를!" "당신이 저의 의견을 존중하신다고요, 어째서죠?" 옐레나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인사로프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훌륭한 아가씨이고, 귀족 티가 나지 않고.... 그러니까, 그게 전부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드미트리 니카노르이치." 옐레나가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 솔직하신 게 처음이라는 걸 알고 계시는지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전 늘 당신에게 제가 생각한 전부를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전 이 점이 아주 기뻐요. 저는 당신께 흉금을 털어놓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겠어요?" 인사로프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마다요." "미리 말씀드려 두겠는데, 전 호기심이 무척 많아요." "상관없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는 제게 당신의 생활, 당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어떤 사건, 그 무시무시한 사건도 알고 있고.....당신이 나중에 고국에 다녀오신 것도 알고 있어요. 제 질문이 당신에게 무례하게 들렸다면, 제발, 아무 대답도 하지 마세요. 하지만 절 괴롭히는 한 가지 생각이 있는데, 당신과 그 사람이 만났는지를 얘기해 주셨으면...." 옐레나는 숨이 막혔다. 자신의 무례함이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인사로프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약간 찌푸린채, 손가락으로 턱을 어루만지면서.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는데, 옐레나는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더 가라앉아 있어서 놀랄 지경이었다. "당신이 지금 어떤 사람을 지적하고 있는지 알겠어요. 아니에요 전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전 그 사람을 찾지 않았답니다. 제 자신이 그 사람을 죽일 수가 있었을 테니까요. 민족 전체의 복수에 대한 일이 진행되고 있을 때 아니, 이런 말은 적당치가 않지....민족의 해방에 과난 일이 진행되고 있을 때, 개인적인 복수쯤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을 찾지 않은 겁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한테 방해가 되기도 하죠. 때가 오면, 때가 오기만 하면..." 하고 그가 되풀이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옐레나는 그를 곁눈질해 보았다. "당신은 조국을 무척 사랑하시는군요?" 그녀는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아직은 모릅니다." 그가 대답했다.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조국을 위해 죽을 때, 그 때는 그가 조국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만일 당신께서 불가리아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긴다면." 하고 옐레나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러시아에 있다는 게 몹시 견디기 어려울 테지요?" 인사로프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견딜 수 없을 것 같군요." 그가 말했다. "말씀해 주세요." 옐레나가 다시 말을 꺼냈다. "불가리아 말은 배우기가 어려운가요?" "조금도 어렵지 않아요. 러시아 사람이 불가리아 말을 모른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지요. 러시아 사람은 슬라브 방언쯤은 모두 다 알아야만 해요. 제가 불가리아 책을 몇 권 가져다 드릴까요? 그게 얼마나 쉬운지 직접 눈으로 보십시오. 우리는 얼마나 좋은 노래를 많이 가지고 있다구요! 세르비아보다 적지 않죠. 잠깐 계세요. 제가 노래 하나 해석해 드릴께요.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가 하면......그런데 당신은 우리 역사를 좀 알고 계신가요?" "아녜요, 조금도 몰라요." 옐레나가 대답했다. "기다리십시오. 제가 책을 가져다 드릴 테니까요. 그 책에서 중요한 사실을 아시게 될 겁니다. 노래도 들어 보시겠어요? 하지만, 번역된 걸 갖다 드리는 편이 낫겠군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게 되리라는 걸 전 확신합니다. 당신은 억압받는 것은 모두 사랑하니까요. 우리 불가리아가 얼마나 큰 하늘의 은혜를 받은 나라인지 만일 당신이 아신다면! 그런데 그들이 불가리아를 짓밟고 괴롭히고 있어요."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말을 이었는데, 그의 얼굴은 어두워져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어요.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권리와 우리의 땅을. 더러운 터키 놈들이 우리를 짐승처럼 내쫓고 우리를 살상하고..." "드리트리 니카노르이치!" 옐레나가 소리를 질렀다. 그는 말을 멈추었다. "절 용서하십시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냉담하게 지껄일 순 없는 것인데. 당신이 제게 방금 물으셨기에. 조국을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하고요. 섹상에 그밖에 사랑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변함이 없고 갖은 의혹을 풀어 주고, 신 다음으로 믿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 조국이 널 부르면......기억해 두십시오. 불가리아에서는 농부 한명, 거지 한 명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한 가지, 같은 걸 바라고 있다느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는 한 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얼마나 큰 신뢰와 힘을 주는지 모르실 겁니다!" 인사로프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불가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옐레나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빨려들 듯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마저 어려 있었다. 그가 이야기를 끝마치자, 그녀는 다시 한 번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께서는 결코 러시아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겠군요?" 그가 떠나자, 그녀는 오래도록 그의 뒤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그날 그녀에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비쳤다. 그녀가 배웅한 그 사람은 두시간 전에 그녀가 만났던 그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날 이후로 그는 차츰 자주 드나들게 되었고, 베르셰네프의 발길은 차츰 뜸해지게 되었다. 두 친구 사이에는 이상한 무엇이 싹텄다. 두 사람 다 느껴 알고 있지만 무엇이라 이름지을 수 없었고, 설명하는 것도 두려운 어떤 것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이미 독자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집에 있는 걸 좋아했다. 그러나 아따금, 전혀 예기치 않게, 그녀에게는 어떤 이상스럽고 놀라운, 여행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곤 했다. 그 여행이 힘들며 힘들수록, 여행이 더 준비를 요하면 요할수록, 안나 바실리예브나 자신이 흥분하면 할수록 그녀는 더 즐거운 것이었다. 그녀에게 이 기분이 겨울에 일어나면 특별석을 두셋 나란히 예약해 놓도록 이르고는, 아는 이들을 불러 모아, 극장으로 혹은 가장 무도회까지도 가리지 않고 떠나는 것이었다. 여름에는 교외로, 좀 먼 곳으로 차를 타고 나갔다. 그런 이튿날이면 머리가 아프다고 우는 소리를 하며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두어 달 지나면, 그녀에게 다시 이상스런 욕망이 솟구치는 것이다. 이번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그녀 있는 데서 차리츠이노의 절경을 이야기하자,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선언했다. 모레 차리츠이노를 가 보겠노라고. 집 안은 온통 야단법석이었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를 부르러 일부러 사람을 보냈고, 집사는 포도주와 파이, 그 밖의 음식들을 사러 뛰어 다녔다. 슈빈은 역의 사륜 마차를 빌려 언제든 쓸 수 있게 말을 준비해 두라는 지시를 받았다. 마차 한 대로는 부족하지만. 카자흐 소년은 두 번씩이나 베르셰네프와 인사로프에게 달려와 두장의 초대장을 꺼내 놓았다. 처음 것은 러시아 어로, 다음 것은 프랑스 어로 조야가 직접 쓴 초대장이었다. 안나 바실리예브나 자신은 처녀들의 여행복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여행 계획이 거의 틀어질 뻔했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불만으로 가득 찬 기분으로 돌아왔는데(그는 아브구스치나 흐리스치아노브 나에게 차츰 더 빠져들었던 것이다) 무슨 일인지를 알게 되자, 그는 가지 않겠노라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쿤초보에서 모스크바로 가서, 모스크바에서 차리츠이노로, 차리츠이노에서 다시 모스크바로, 그리고 또다시 모스크바에서 쿤초보로 가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지구의 한 지점에서 노는 게 다른 지점에서 노는 것보다 더 즐거울 수 있다는 걸 먼저 내게 증명해 준다면 가겠노라고. 아무도 그걸 증명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런 믿음직한 기사가 없기 때문에,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이미 여행을 포기할 작정을 했다. 그리고는 우바르 이바노비치를 생각해 내곤 그를 부르러 보냈다. '물에 빠진 자는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는다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사람들이 그를 깨웠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잠자코 안나 바실리예브나의 제의에 귀를 기울이더니, 손가락을 흔들어대며 놀랍게도 찬성의 뜻을 표했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며 고마운 분이라고 되뇌었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경멸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켈부르드(이런 엉터리 좀 봐)." 하고 말했다. (그는 이럴 때 '멋진' 프랑스 어를 쓰는 걸 좋아했다) 다음날 아침 일곱 시에, 꼭대기까지 가득짐을 실은 포장 마차 한 대와 사륜 마차 한 대가 스타호프 가의 별장 뜰을 떠났다. 포장 마차 속에는 여자들과 하녀와 베르셰네프가 앉아 있었고, 인사로프는 마부 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사륜 마차에는 우바르 이바노비치와 슈빈이 타고 있었다. 우바르 이바노비치가 손가락을 까닥거려 슈빈에게 자기 곁으로 오라고 불러들인 것이었다. 그는 슈빈이 도중에 줄곧 자기를 괴롭힐 것을 알았지만, '무한한 생활력'과 젊은 예술가 사이에는 어떤 미표한 관계와 싸우기 좋아하는 솔직함이 있었다. 그런데 슈빈은 어찌된 셈인지 그의 뚱뚱한 친구를 가만히 편안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는 말이 없고 부드러워 정신이 나간 듯해 보였다. 두 대의 마차가, 한낮에도 우울함과 무시무시함을 자아내는 자리츠이노 폐성을 돌아가고 있을 때, 해는 벌써 구름 한 점 없는 창공에 높다랗게 떠 있었다. 일행은 전원 풀밭에 내리자마자 곧 공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옐레나와 조야가 인사로프와 함께 앞장을 서 갔다.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얼굴에 행복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우바르 이바노비치의 팔짱을 끼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숨을 헐떡이며 뒤뚱거렸는데, 새 밀짚모자가 이마를 찌르고, 두 발은 장화 속에서 타는 듯 화끈거렸지만, 그도 좋은 모양이었다. 슈빈과 베르셰네프는 행렬의 맨 끝에 따라갔다. "여보게, 우린 노병처럼 뒷전일세." 라고 슈빈은 베르셰네프에게 소곤거렸다. "저긴 지금 불가리아야." 하고 그는 두 눈썹으로 옐레나 쪽을 가리키면서 덧붙였다. 날씨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주위에는 꽃이 만발하고, 곤충들이 앵앵거리고 새들은 노래했다. 멀리 연못 물이 반짝거렸다. 명절날 같은 명랑한 기분에 잠겨 모두 즐거워들 했다. "아아, 훌륭해! 정말 훌륭해!" 하고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그녀의 감탄사에 화답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했는데, 한 번은 "말이 무색할 지경인 걸!" 하고 말하기까지 했다. 옐레나는 이따금 인사로프와 말을 주고 받았다. 조야는 챙이 넓은 모자ㄹ 끝을 손가락 두 개로 붙잡고서, 장미빛 얇은 비단옷 밑으로 자기의 조그만 두 발을 애교 있게 옮기고 있었다. 그 두 발에는 두툼한 양말에 밝은 잿빛 구두가 신겨져 있었다. 그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앗!" 하고 슈빈이 별안간 낮은 소리로 외쳤다. "조야 니키치시나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을 거야. 난 그녀에게나 가 보겠네. 옐레나 니콜라예브나는 지금 날 경멸하고 있어. 하지만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자네는 존경하고 있지. 가겠네, 친구. 자넨 식물을 채집할 연구나 하라고 충고하겠네. 자네 처지엔 그게, 자네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 가운데 제일 나아. 과학적인 측면에서도 유용하고 말이야. 안녕!" 슈빈은 조야에게로 달려가 팔을 구부렸다. "아가씨, 당신의 팔을."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의 팔을 끼고 앞으로 걸어갔다. 옐레나가 걸음을 멈추고 베르셰네프를 부르더니 그의 팔을 끼었으나, 인사로프와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그녀는 그에게 불가리아 말로 은방울꽃, 단풍, 참나무, 보리수 등을 뭐라고 부르는지를 물었다. '불가리아!'하고 불쌍한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는 생각했다. 별안간 앞에서 외마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조야가 슈빈의 담뱃갑을 숲으로 내던진 것이었다. "두고 봐, 내 너한테 복수하고야 말 테니!" 하고 소리치며 슈빈은 숲을 기다시피하며 담뱃갑을 찾아 조야에게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그녀 가까이 갈 수가 없었는데, 그의 담뱃갑이 또 다시 길 너머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이러 장난이 대여섯 번이나 되풀이 되었다. 그는 시종 껄껄거리며 위협해 댔고, 조야는 가만히 미소지으며 새끼고양이처럼 움츠렸다. 마침내 그가 그녀의 손가락을 잡아 눌렀다. 그녀는 꽥 소리를 지르더니, 한참 동안 손을 후후 불며 짐짓 화난 척했다. 슈빈은 그녀의 귀에다 대고 뭐라 속닥거렸다. "젊은이들은 장난꾸러기들이라니까." 하고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우바르 이바노비치에게 즐거운 듯이 속삭였다.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손가락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조야 니키치시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베르셰네프가 옐레나에게 물었다. "슈빈은요?"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에 일행은 밀로비도바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원정에 다다라, 차리츠이노 호수의 장관을 즐기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호수들은 여러 베르스타에 걸쳐 서로 잇대어 뻗어 있었는데, 호수 너머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었다. 중심 호수까지 온 산비탈을 뒤덮은 약초는 물 위에 아주 선명한 에메랄드 빛을 던져 주었다. 호수의 기슭에는 물결 하나 일지 않았으며, 하얗게 거품이 부서지지도 않았다. 수면에도 역시 잔 물결조차 일지 않았다. 얼어붙은 듯한 수면은 마치 커다란 성수반 속에 무겁게 반짝이며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하늘도 그 수면 밑바닥에 내려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하늘도 그 수면 밑바닥에 내려 앉고, 구불구불한 나무들도 수면의 투명한 품에 안겨 움직이지 않는 듯이 보였다. 모두들 오래도록 말없이 장관을 즐겼다. 슈빈까지도 잠잠했으며, 조야도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이 뱃놀이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슈빈과 인사로프와 베르셰네프가 풀밭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그들은 칠이 칠해져 있는 커다란 보트를 찾아 냈고, 두 사람의 사공을 찾아 내 여자들을 불렀다. 여자들이 그들에게 내려왔다.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조심스레 여자들 뒤를 따라 내려왔다. 그가 보트에 올라 자리를 잡는 동안 여러 번 웃음보가 터졌다. "나리, 우리를 물 속에 빠뜨리지 않게 조심해 주십쇼." 하고 사공 가운데 하나가 말했는데, 알렉산드리아 셔츠를 입은 안장 모양으로 콧등이 잘룩한 사내였다. "암, 그렇고말고, 기분파 양반!" 하고 우바르 이바노비치가 말했다. 보트가 출발했다. 젊은 사람들이 노를 잡았으나, 그들 가운데 인사로프만이 노를 저을 줄 알았다. 슈빈이 러시아 노래를 함께 부르자고 제의하면서, 자신이 '우리의 어머니 볼가강을 내려가며.....'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베르셰네프, 조야, 그리고 안나 바실리예브나까지 따라 불렀다. 인사로프는 노래를 부를 줄 몰랐다. 하지만 화음이 맞지 않아 3절에서는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베르셰네프 혼자만이 '물결 사이에 보이는 것 없고'를 저음으로 계속했다. 그러나 그 역시 곧 당황해서 그만두어 버리고 말았다. 두 사공이 서로 눈짓하며 말없이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왜요? 우리 노래가 서툴러서 그러는 거요?' 슈빈이 그들에게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알렉산드리아 셔츠를 입은 작은 사공이 머리를 저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기다려요, 안장코 양반, 우리가 보여 줄 테니." 하고 슈빈이 항의했다. "조야 니키치시나, 우리에게 니더마이어의 <호수>를 불러 줘요. 노젓는 걸 멈추고, 당신들은!" 물에 젖은 노들이 날개처럼 공중으로 들어올려졌다가,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멈추었다. 보트는 조금 더 떠다니다가, 백조처럼 물 위를 빙글빙글 돌더니 멈춰 섰다. 조야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자, 어서!" 하고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친절히 말하자 조야는 모자를 벗고, "오 라크 라네 아 페느 아 피니사 카리에(오 호수여! 세월은 이제야 겨우 그 달음질을 마치고)......" 라고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크지는 않지만 맑은 그녀의 목소리는 거울 같은 수면을 따라 내달려 멀리 숲 속으로 가서 다시 메아리쳐 되돌아왔다. 마치 거기에서도 누군가가 분명하고 신비스런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상 인간의 소리 같지 않은 목소리로 조야가 노래를 끝마치자, 연안에 있는 여름 별장 쪽에서 우렁찬 브라보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거기서 얼굴이 빨개진 독일인 몇 명이 뛰어나왔다. 차리츠이노에 술잔치를 벌이러 왔던 그들 가운데는 웃옷을 입지 않은 사람도 있었고, 넥타이를 매지 않은 사람, 조끼를 입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우뢰같이 앙코르를 외쳤다. 안나 바실리예부나가 다른 쪽으로 빨리 가자고 일렀다. 그런데 보트가 기슭에 닿기 전에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일행을 한 번 더 놀라게 만들었다. 숲의 어떤 장소에서는 메아리가 특별히 더 잘 울려 온다는 것을 안 그가 별안간 메추라기 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모두 깜짝 놀랐지만, 곧 진정한 만족감을 느끼게 되었다. 우바르 이바노비치의 흉내가 보다 정확하고 실감이 날수록 더욱 흥겨워졌다. 그러자 그는 의기양양하여 고양이 소리를 흉내 내었다. 하지만 고양이 소리는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한 번 더 메추라기 소리를 내고는 일행을 바라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슈빈이 키스하려고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그는 슈빈을 밀어 냈다. 바로 그때 보트가 기슭에 닿아 모두들 배에서 내렸다. 그러는 동안 마부가 하인, 하녀와 함께 마차에서 짐을 가져다가 오래된 보리수 밑 풀밭 위에 점심 준비를 해 놓았다. 모두들 펼쳐진 테이블보 주위에 둘러앉아 파이와 다른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모두 식욕이 왕성했는데도,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이렇게 공기 좋은 곳에서는 많이 먹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하면서, 손님들더러 더 많이 먹으라고 자꾸 권했다. 그녀는 우바르 이바노비치에게도 그런 말을 했다. "염려 마시오." 하고 그가 입에 음식을 가득 넣은 채 볼멘 소리를 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좋은 날씨를 주시다니!" 하는 말을 그녀는 수없이 되뇌었다. 이럴 때의 그녀는 스무 살쯤 더 젊어 보인다는 걸 그녀 자신은 알지 못했다. 베르셰네프가 그녀에게 그걸 가르쳐 주었다. "네,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나도 한창 때는 굉장했었죠. 그때 날 만났더라면, 열이면 열 다 날 놓아 주지 않았을 거예요." 슈빈은 조야 곁에 앉아 그녀에게 포도주를 계속 따라 주곤 했다. 그녀가 이를 거절하면, 권하는 체하다가 자기가 잔을 훌쩍 마신 뒤에 다시 권하곤 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우려 했지만, 그녀는 결코 '그러한 큰 자유'를 그에게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옐레나는 가장 엄숙해 보였지만, 그녀의 가슴 속에는 그녀가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놀라운 안정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한없이 선량한 듯이 느껴져 인사로프뿐 아니라 베르셰네프도 자기 곁에 있기를 원했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는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막연히나마 눈치채고 혼자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흘러 저녁 무렵이 되었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깜짝 놀랐다. "아이구 맙소사. 너무 늦었군." 그녀가 말했다. "실컷 먹고 실컷 마셨으니 이제 돌아갈 때예요." 그녀가 서두르기 시작하자 모두들 바삐 서둘러 일어나 마차들이 있는 성 쪽으로 갔다. 호수를 지나치면서, 모두들 차리츠이노를 마지막으로 즐기려고 걸음을 멈추었다. 아름다운 저녁놀이 사방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아른아른 빛을 내었다. 멀리 떨어진 곳의 물은 불붙은 금덩어리처럼 흘러 가고 있었다. 정원에 흩어져 있는 붉은 색조의 탑이나 별장들은 짙푸른 나무들과 심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잘 있거라, 차리츠이노. 우리는 오늘의 나들이를 잊지 못할 게다!"하고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말하고 있는데, 바로 이때 그녀의 마지막 말을 확인시켜 주려는 듯, 정말 쉽게 잊을 수 없는 기이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인즉,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차리츠이노에 고별사를 채 끝내기도 전에, 그녀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키가 큰 라일락 숲에서 별안간 왁자지껄한 부르짖음과 웃음소리, 고함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머리털이 흐트러진 한 떼의 사내들이 한길로 밀려 나왔다. 아까 조야에게 갈채를 보내던 바로 그 노래 애호가들이었다. 그들은 심하게 취한 것 같았다. 여자들을 보고는 우뚝 멈춰 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키가 크고 황소 같은 벌건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기 동료들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절을 하고 몸을 비틀거리면서, 놀라움에 돌처럼 굳어 버린 안나 바실리예브나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부인." 하고 그가 목쉰 소리로 말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우리 일행이 앙코르, 브라보를 연방 외쳐댔는데, 어째서 앙코르를 거절했죠?" 하고 그 거인이 서투른 러시아 말로 계속했다. "그래, 그래. 어째서죠?" 하고 일행들이 뒤에서 소리질렀다. 인사로프가 앞으로 걸어 나갔으나, 슈빈이 그를 제지하고 자신이 직접 안나 바실리예브나를 가로막고 나섰다. "존경하옵는 낯선 양반, 당신의 행동이 우리 모두를 얼마나 놀라게 했는지 아시오?" 하고 말을 꺼냈다. "내 판단으로는 당신은 코카시아 족의 색슨계에 속하는 모양인데, 인간이 지켜야 할 예의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어찌 생면부지의 부인에게 그런 언동을 할 수 있단 말이오? 다음에 당신과 조용히 만나고 싶소. 내가 당신에게서 그 우람한 근육, 이두근, 삼두근, 그리고 삼각근을 보았기 때문이오. 조각가로서 난 당신을 모델로 할 수 있게 된 걸 진짜 행운으로 생각하오. 하지만 지금은 우릴 그냥 내버려 두시오." '존경하옵는 낯선 양반'은, 멸시하듯 고개를 한쪽으로 삐딱하게 틀고 양손으로 옆구리를 짚은 후, 슈빈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었다.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난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군."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를 구두장이나 시계 수선공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요! 여보시오! 이래봬도 난 장교요. 관리란 말이외다. 암 그렇고말고." "나도 그 점은 의심치 않소." 슈빈이 대꾸했다. "저 말이오." 낯선 양반이, 작은 나뭇가지라도 휘어잡듯 힘센 팔로 슈빈을 길섶으로 밀쳐 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 얘기하겠는데, 어째서 우리가 앙코르를 외치는데도 앙코르를 부르지 않았소? 지금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지만, 단 요구가 있소. 이 부인이 아니면 이 아가씨들이라도 상관없소. 이 아가씨나 저 아가씨가 내게 독일말로 말해 '아이넨 쿠스'즉 뽀뽀를 해 달란 말이오. 음, 어떻소?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야." 하는 소리가 또다시 일행에게서 들려왔다. "이! 저 괴짜 녀석." 하고 벌써 완전히 취한 독일인 하나가 웃음이 나서 참을 수 없다는 듯 킬킬거리며 말했다. 조야가 인사로프의 팔을 붙잡았지만, 그는 그녀의 팔을 뿌리치고 장대 같은 파렴치한 앞에 다가섰다. "썩 꺼지지 못해!' 인사로프가 그 사람에게 낮으나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독일인이 둔중한 소리로 껄껄거렸다. "뭐 꺼지라고? 이것 봐라, 잘 걸렸다! 그래 난 발걸음도 떼어 놓을 줄 모르는 놈 같으냐? 뭐, 꺼지라고? 뭣 때문에 꺼져?" "너희들이 부인께 실수를 했으니 말이다." 인사로프는 그렇게 말하면서 별안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너희들이 술에 취했기 때문이야." "어째? 내가 취했다고? 회렌 지 다스, 헤르 프로비소르(듣고 있소, 약제사 양반). 난 장교야, 장교는 무엇이든 할 수가 있어. 난 지금 만족을 요구한단 말이야! 아이넨 쿠스 빌 이히(난 키스를 원해)!" "만일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내디디면." 인사로프가 말했다. "그래? 그럼 어쩔 테야?" "널 물 속에 처박아 버릴 테다." "물 속에? 헤르 예(흥)! 겨우 그거야? 자, 한 번 해 보시ㅈ, 그거 아주 재미있겠군. 어디 물 속에..." 장교라고 하던 작자가 두 팔을 쳐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별안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그 사내가 비명을 지르더니, 그의 육중한 몸통이 온통 흔들흔들하며 하늘로 치솟아 허공에서 발버둥을 쳤다. 다음 순간, 여자들이 미처 소리를 지를 새도 없이, 어떻게하여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장교 양반의 몸뚱이는 첨벙 소리를 내며 물 속에 빠져 소용돌이에 금방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앗!" 여자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마인 고트(어이쿠)!" 하는 소리가 다른 쪽에서 들렸다. 잠시후, 머리카락이 온통 젖은 둥근 머리가 물 위로 나타났다. 그 머리는 거품이 일고 있었고, 두 팔은 입술께로 경련하듯 바둥거렸다. "익사하겠네, 구해 줘요, 구해 줘!' 하고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다리를 양쪽으로 쩍 벌리고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기슭에 서 있는 인사로프를 향해 소리쳤다. "헤엄쳐 나오겠죠." 그는 멸시하듯, 박정할 만큼 무심하게 말했다. "갑시다" 하고 그는 안나 바실리예브나의 팔을 붙잡으며 덧붙였다. "가십시다, 우바르 이바노비치,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아....아....오....오...." 그때 기슭의 갈대를 가까스로 움켜쥔 불쌍한 독일인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모두들 인사로프의 뒤를 따라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바로 그 '일행'의 곁을 지나쳐 가게 되었으나, 자기네 두목을 잃은 그들은 숨을 죽인 채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들 가운데 가장 용감한 사람 하나만이 머리를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제기랄, 이게 무슨 꼴이람." 다른 한 사람은 모자를 벗었다. 그들에게는 인사로프가 굉장히 무섭게 보였는데, 그건 이유가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적의 같은 위험한 그 무엇이 어려 있었던 것이다. 독일인들은 자기네 동료를 끄집어 내려고 달려갔는데, 막 마른 땅으로 기어 올라온 그 사람은, "그 러시아 사기꾼들." 하고 울음을 ㅅ삼키며 뒤에서 욕지거리를 해 댔다. 그리고는 키제리츠 백작 각하께 가서, 고소하겠다고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러시아 사기꾼들'은 그의 외치는 소리에 관심조차 돌리지 않고 가능한 한 성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뜰을 지나가는 동안 모두들 잠자코 있었는데, 안나 바실리예브나만이 가벼이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들이 마차 가까이 이르러 멈추었을 때, 호머의 천인이 터뜨렸음직한 억제할 길 없는 웃음이 끊이지 않고 터져 나왔다. 맨처음, 슈빈이 미친 듯이 낄낄거리며 웃어댔고, 그 뒤를 이어 베르셰네프가 완두콩 구르는 소리를, 뒤이어 조야가 가느다른 구슬 흩어지느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옐레나까지도 미소짓지 않을 수 없었고, 인사로프마저 결국 가만 있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크게, 가장 오래, 가장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바로 우바르 이바노비치였다. 그는 옆구리가 결리고, 재채기가 나고, 숨이 막힐 정도로 웃어댔던 것이다. 조금 진정이 되자 눈물을 흘리면서, "난 생각했지....그게 무슨 소린가 하고 말이야....그런데 그건....그 녀석이.....납작...." 경련을 하듯 마지막 말을 뱉는 것과 동시에 새로이 웃음이 터져 그의 온몸을 뒤흔들어 놓았다. 조야가 한 술 더 떠 그를 부추겼다. "두 다리가 허공에 버둥거리던 꼴이란."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래. 맞아." 하고 우바르 이바노비치가 말을 받았다. "두 다리, 두 다리가.... 그때 꽝! 그가 나압작!" "그런데 어떻게 그런 꾀를 내었을까, 그 독일인은 몸집이 세 배나 되던데요?" 하고 조야가 물었다. "내 말해 주지." 우바르 이바노비치가 눈을 문지르면서 대꾸했다. "난 봤거든. 한 팔로 허리를 잡고 다리를 거는가 싶더니, 꽝! 난 듣고, 이게 뭔가?...했더니, 그건 그 녀석이 납작...." 벌써 아까부터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이미 차리츠이노 성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으나,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내내 진정할 수가 없었다. 또다시 그와 함께 사륜 마차에 오른 슈빈이 결국엔 무안을 주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사로프 자신은 부끄러웠다. 그는 마차에 옐레나와 마주앉아 있었는데(베르셰네프는 마부석에 앉았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잠자코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비난하리라 생각했다. 처음에 그녀는 몹시 놀랐었다. 그런 다음 그의 얼굴 표정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고 난 뒤엔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그녀 자신에게도 분명치 않았다. 그녀가 그 날 하루 동안 경험한 감정은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그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 감정은 그녀가 여지껏 알지 못한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파르티 드 플레지르(즐거운 놀이)가 너무 오래 계속된 탓으로, 저녁은 어느 새 밤으로 변해 있었다. 마차는 무더운 공기 속을, 곡식이 무르익어 가는 향기 넘치는 밭을 따라, 또 넓은 목초지를 따라 마구 내달렸다. 그 목초지의 신선한 공기가 돌연 가벼운 물결이 되어 얼굴을 때렸다. 하늘은 지평선에 걸려 있었다. 이윽고 불그스름한 달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졸고 있었고, 조야는 상체를 창문 밖으로 내밀고서 도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옐레나는 비로소, 그녀가 한 시간 이상이나 인사로프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았다는 사실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가 몇 마디 사소한 질문을 그에게 던지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대꾸를 하였다. 이 때 어떤 불명료한 소리가 들려왔는데, 멀리서 수천 개의 목소리가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스크바가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눈앞에 불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하자, 차츰 그 불빛의 숫자는 늘어났다. 드디어 마차 바퀴가 포석 위를 구르는 소리를 들렸다.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잠에서 깨어났고, 모두들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포장 도로가, 두 대의 마차와 서른 두 개의 말발굽 소리 아래 너무 심하게 울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쿤초보까지의 여정은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여기저기 구석에 머리를 대고 모두들 잠을 자거나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옐레나만이 눈을 뜨고 있었는데, 그녀는 어둠 속에서 인사로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슈빈은 슬픔에 빠져 있었다. 가벼운 미풍이 불어와 그의 눈을 스쳤다. 외투깃을 끌어올리고 나니, 하마터면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우바르이바노비치는 이리저리 흔들면서, 기분좋게 코를 골았다. 이윽고 마차가 멎자, 하인 두 명이 안나 바실리예브나를 마차 밖으로 부축해 내렸다. 그녀는 몹시 지쳐 있어, 동행자들과 헤어지면서, 겨우 살았다고 말했다. 그들이 그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도, 그녀는 "겨우 살았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옐레나는 인사로프와 악수를 했다. 그와 처음으로 하는 악수였다. 그녀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옷도 벗지 않은 채 오래도록 창가에 앉아 있었다. 슈빈은 떠나는 베르셰네프에게 속삭일 기회를 포착했다. "그래, 영웅이 아니란 말인가, 술취한 독일놈을 물 속에 던졌는데!" "하지만 자넨 그러지도 못했잖나." 베르셰네프는 반박하고 인사로프와 함께 집을 떠났다. 두 친구가 그들 숙소로 돌아왔을 땐 이미 동이 트고 있었다. 아직 태양은 떠오르지 않아 냉기가 감돌았고, 풀에는 잿빛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리고 어슴푸레한 하늘 높은 곳에서는 첫 종달새가 노래 부르고 있었고, 커다란 마지막 별이 고독한 눈동자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옐레나는 인사로프와 알게 된 직후부터(다섯 번인가 여섯 번째이다)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다음은 그 일기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유월,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는 내게 책들을 가져다 주지만, 난 그 책들을 읽을 수가 없다. 그가 이 사실을 안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다. 책을 돌려 주면서 다 읽었노라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는 슬퍼할 것이다. 그는 늘 날 질책한다. 그는 내게 몹시 끌리고 있는 것 같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난 이토록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한가? 무엇 때문에 난 날아 다니는 새들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는가? 그들과 함께 날아가 버리고 싶다. 어디로 날아갈는지 모르지만, 다만 멀리, 여기서 먼 곳으로. 이런 소망은 죄악이 아닐는지? 여기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고, 가족이 있는데. 정말 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걸까? 하긴, 내가 사랑하고 싶은 만큼 그렇게 그들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다. 이런 말을 입밖에 내기가 두렵지만, 이건 사실이다. 아마도 난 큰 죄인인가 보다. 그래서 이렇게 슬프고, 그래서 이렇게 안정을 찾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손이 내게 놓여 있어 날 억누르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마치 감옥 안에 갇혀 있어, 당장이라도 사방의 벽이 내게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어째서 다른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갖지 않는 것일까? 나 자신에게 이렇게 냉담할진대, 대체 누굴 사랑할 수가 있을 것인가? 아버지 말씀이 옳은 것 같다. 난 개와 고양이만 사랑한다고 꾸짖으신 말씀이. 이 점에 대해 생각해 봐야겠다. 난 기도조차 잘 하지 않았다. 기도해야 할 텐데... 하지만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아! ...난 아직도 천천히, 인사로프를 만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웬일인지 모르겠다. 어린애가 아니고, 그는 아직 소박하고 선량한데. 이따금 그는 몹시 심각한 표정을 짓기는 하지만. 아마 그는 우리와는 다를 것이다. 나는 이런 느낌을 갖기 때문에 그에게서 시간을 빼앗는 것이 부끄럽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와는 문제가 다르다. 그와는 만약 필요하다면 온종일이라도 이야기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도 줄곧 인사로프에 대한 이야기만 내게 해 준다. 어쩌면 그렇게 무시무시할 정도로 상세히 해 준담! 난 어젯밤 꿈에, 손에 단검을 든 그를 보았다. '널 죽이고 나도 죽겠다.'라고 내게 말하는 듯했다. 얼마나 어리석은 꿈인가! ....오, 만일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면, '이건 네가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다!'라고 착하다는 것, 이게 전부는 아니지만, 착한 일을 하는 것은.....그래,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착한 일을 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아, 나 자신을 자제할 수가 있었으면! 어찌하여 나는 이다지도 자주 인사로프를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가 곁에 와 앉아 귀를 기울일 때 말을 하려고 애쓰지도, 덤비지도 않는 그를 바라보는 것이 즐겁다. 그것뿐이다. 그런데 그가 떠나고 나면 나는 그가 한 말을 줄곧 떠올리며 자신에게 분개하기도 하니 웬일인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는 프랑스 어가 서투르지만,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점이 마음에 든다. 그런데 난 늘 새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그와 이야기하면서, 나는 우리 집 집사로 있던 바실 리가 불현 듯 떠오른다. 그는 불이 난 농가에서 한쪽 다리가 없는 늙은이를 구출해 내고 가까스로 살아났었다. 아버지는 그를 용감한 사내라고 불렀고, 어머니는 그에게 5루블을 주었다. 난 그의 발 밑에 무릎을 꿇고 싶었었다. 그렇지만 그의 얼굴은 단순하고 어리석어 보이기조차 했다. 나중에 그는 술주정뱅이가 되어 버렸다. ....내가 오늘 어떤 여자 거지에게 동전 한 닢을 주었더니,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느냐고. 그런데 난 내가 슬픈 표정을 짓는다는 건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었다. 이는 아마, 내가 혼자, 늘 혼자 나의 선과 함께, 나의 악과 함께 있기에 생겨나는 것이리라. 손을 뻗칠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내게 다가오는 사람은 필요가 없고, 내가 원했던 사람은 스쳐 지나가 버린다. ...오늘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뒤죽박죽되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용서를 간구하고 싶다. 누군지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날 죽일 것만 같아 마음 속으로 소리지르며 분개하고 있다. 난 울며불며, 기만 있을 수가 없어....하느님! 하느님이시여! 내 마음 속의 충동을 가라앉혀 주사이다! 당신만이 하실 수 있나이다. 다른 건 모두 무력하나이다. 적선도 공부도, 그 밖의 어느것도 내게 도움이 될 수가 없다. 멀리 어딘가로 하녀로 나가 버리는 편이 옳을 게다 . 훨씬 더 마음 편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청춘이 무슨 소용이며, 나는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 것인가? 어째서 난 영혼을 갖게 되었으며, 이 고통은 모두 어째서인가? ...인사로프, 인사로프가, ____사실, 난 어떻게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___내 마음을 다 차지하고 있다. 그의 마음은 어떨까? 알고 싶다. 그는 아주 솔직하고 허심 탄회한 것 같은데, 난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이따금 그는 주의깊은 시건으로 날 쳐다보지만, 어쩌면 그것은 나의 환상에 불과할는지도? 파벨은 줄곧 날 약올려 난 파벨에게 화를 낸다. 그는 무엇이 필요한 걸까? 그는 날 사랑하지만, 난 그의 사랑이 필요치 않다. 그는 조야도 사랑한다. 나는 그에게 불공평한지도 모른다. 어제 그가 내게 말했다. 내가 똑같이 공평하지 못하다고...그건 사실이다. 그건 아주 나쁜 결점이다. 아, 인간에겐 불행이나 가난이나 고통 같은 게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교만해질 테니 말이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는 무엇 때문에 오늘 내게 그 두 불가리아 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을까! 그는 이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내게 한 것 같다. 인사로프가 내게 무엇이길래? 안드레이 페트로비치에게도 화가 난다. ...펜은 잡았으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가 오늘 정원에서 나와 이야기를 한 건 얼마나 뜻밖인가! 그는 얼마나 친절하고 믿음직스러웠던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이루어졌는지! 흡사 우리는 오래오래 사귀어 온 친구 같았으며, 금방 서로를 알게 된 것 같았다. 지금껏 나는 어째서 그를 이해하지 못하였을까! 지금 그는 내게 얼마나 가깝게 느껴지는지! 지금 마음이 훨씬 편안해지는 건 놀라운 일이다. 어제 안드레이 페트로비치한테, 그리고 그한테, 난 그를 인사로프라고 까지 불렀다. 화를 낸 것이 우습다. 그런데 오늘은...아무튼 그는 정직한 사람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만난 사람 가운데 거짓말을 하지 않는 최초의 사람인 것이다. 다른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다정하고 선량한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어찌 내가 당신을 모욕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가 그 사람보다 더 학식이 많을는지도, 그 사람보다 더 현명할는지도...하지만 어쩐지 그 사람 앞에선 아주 스케일이 작아 보인다. 그사람이 자기 조국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그는 차차 커지고, 그의 얼굴은 한층 환해지고 목소리는 강철 같아진다. 그럴 때면 난 생각한다. 이 세상에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 낼 그런 사람은 없다고. 그는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했고, 앞으로도 행동할 것이다. 그에게 물어 봐야지....왜 별안간 날 돌아다보며 내게 미소를 지었는지를 ! 형제들만이 그렇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아, 난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그가 처름 우리 집에 왔을 때, 우리가 이렇게 빨리 가까워지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이제 와선 처음엔 무관심했던 것조차 마음에 드니...무관심! 과연 이젠 무관심하지 않는 걸까? ....난 오래도록 이러한 마음의 평정을 느껴 보지 못했었다. 내 마음은 너무나 조용하다. 너무나 고요해서 쓸 게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를 종종 만나고, 이게 전부다. 더 이상 무얼 쓰겠는가? 파벨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고,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는 우리 집을 찾는 횟수가 차츰 줄어들고 있다. 가엾은 사람! 내게는 그가....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난 안드레이 페트로비치와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하는 법 없이 늘 사무적이고 유익한 이야기를 한다. 슈빈과는 다르다. 슈빈은 나비처럼 멋이나 부리고 자신의 복장에 도취되어 있곤 한다. 그런 짓은 나비들도 하지 않는데, 그렇지만 슈빈도,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도... 내가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난 알고 있다. ...그는 우리 집에 오는 게 즐거운 모양이다. 어째서일까? 그는 내게서 어떤 점을 발견했을까? 사실, 우린 취미가 비슷하다. 그도 나도, 우리 두 사람은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둘은 예술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보다도 훨씬 낫다! 그는 침착한데, 난 항상 불안에 떨고 있다. 그에게는 길이 있고 목표가 있지만, 난, 난 어디로 가야 하나? 내 안식처는 어디일까? 조용하기만 하나, 그의 생각은 온통 멀리 가 있다. 때가 오면 그는 우리를 영원히 버리고 바다 건너 그곳, 자기네 동포들이 있는 곳으로 가 버릴 것이다. 어쩌지? 신의 가호가 그에게 내리시길!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여기에 있는 동안이나마 그를 알고 지내게 된 것이 난 기쁘다. 왜 그는 러시아 인이 아닐까? 아니야, 아니지. 그는 러시아 인이 될 수 없어. 어머니도 그를 좋아한다. 어머니는 그가 겸손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착하신 어머니! 어머니는 그를 이해하시지 못한다. 그의 암시를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 파벨은 숫제 입을 다물고 산다. 하지만 그는 인사로프를 질투하고 있다. 나쁜 사람! 무슨 권리로? 내 언제 한 번.... 이 무슨 쓸데없는 생각들이람! 어째서 이런 생각들이 내 머리에 떠오를까? ....그렇지만 내가 지금껏,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싸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데(드미트리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 그를 데라고 부르기도 했다)의 마음이 그리도 밝은 이유는 그가 자신의 일에, 자신의 일에 몰두하기 때문인 것처럼 나에겐 생각된다. 그에게는 무슨 걱정이 있을까? 몰두하는 사람은 누구나, 모두 다, 슬픔 같은 건 적은 법이다. 조바심할 필요가 없으니까. 난 원치 않는데, 그는 원하는 것이다. 말하는 김에 하는 말이지만, 그와 나, 우리는 같은 꽃들을 좋아한다. 오늘 내가 장미꽃 한 송이를 꺾었는데, 꽃잎 하나가 땅에 떨어지자 그가 그걸 주워 주었다. 난 그 장미꽃을 그에게 주었다. 언제부터인가 난 이상한 꿈을 꾸곤 한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데는 우리 집에 자주 찾아온다. 어제는 저녁 내내 우리와 함께 지냈다. 그는 내게 불가리아 어를 가르쳐 주고 싶어한다. 그와 함께 있으면 편안하다. 아니, 편안한 것 이상이다. ...세월은 빠르기도 하여라..난 좋기도하고, 웬지 무섭기도 하다.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눈물은 멀어져 갔다. 오, 따라ㅅ고 화창한 날들이여! ...난 전보다 더 마음이 편하고, 간혹 아주 간혹 약간 우울하다. 난 행복하다. 난 정말 행복한가? ....어제의 피크닉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이상하고 새로운, 무시무시한 인상이던가! 그가 그 거인을 공이라도 던지듯 물속에 집어던졌을 땐 난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날 놀라게 했다. 그리고 나서 잔인하리만큼 무시무시한 그 얼굴이라니! 그가 말했었지. 헤엄쳐 나올 테지! 라고. 이 말은 내 생각을 변하게 하였다, 그러니까 난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리고 나도 따라 웃었을 때, 난 그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던가! 그는 부끄러워했고 난 그걸 느꼈다. 그는 내게 부끄러웠던 것이다. 나중에 컴컴한 마차 안에서 그가 이런 말을 내게 해 주었다. 그 때 난 그가 두려우면서도, 애써 그의 얼굴을 바라보려고 했다. 그래 그와는 농담은 안 된다. 그래도 그는 자기 편을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악의는, 그 입술의 떨림은, 그 눈의 독기는 무엇 때문일까? 아니면, 달리 어찌 할 수 없어서일는지? 사나이가 투사가 될 수가 없어서 온화하고 부두러운 채 남아 있는 것인지? 삶은 가혹한 것이라고 얼마 전에 그가 내게 말했다. 내가 이 말을 안드레이 페트로비치에게 했는데, 그는 데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 누가 옳은가? 오늘은 어떻게 시작되었던가! 그와 나란히 걷는 게 난 너무 좋다. 아무 말도 주고 받지 않더라도....하지만 난 어제 일어났던 일이 기쁘다. 당연하 일일 테지만. ....또다시 안절부절. 도무지 마음에 평정이 깃들지 않는다. ....난 요즈음 계속 이 노트에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것 모두를 쓰고 싶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럼 내 마음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나는 그와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고, 그는 내게 많은 걸 드러내 보였다. 자신의 앞으로의 계획도 이야기해 주었다.(그래서 그의 목에 난 흉터의 연유를 이제 알게 되었고...맙소사! 사형 선고를 받고 가까스로 구출될 때 생긴 상처인 모양이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데, 차라리 전재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난 그렇게도 슬픈 표정을 그에게서 본 적이 결코 없었다. 그는 무엇을 ... 무엇을 슬퍼할 수 있는 것일까. 아버지가 시내에서 돌아오시다가 우리 두사람을 목격하시고 웬지 이상한 눈초리를 우리에게 던지셨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가 찾아왔다. 그가 몹시 야위고 창백해진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지나치게 냉담하게, 또 너무 함부로 슈빈을 대하는 것 같다고 비난했다. 그러고 보니 난 파벨을 완전히 잊고 있었나 보다. 그를 만나면 사과를 해야지. 요즈음은 그에 대해, 세상의 그 누구에 대해서도 생각할 여유가 없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는 나와 이야기를 하는데, 내게 어떤 유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뜻일까? 어찌하여 내 주변과 내 마음 속은 이렇게 어둡기만 할까? 내 안팎에서 뭔가 수수께끼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어, 그 적당한 말을 찾아 내야만 할 것 같은데... ....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머리가 아프다. 글은 서서 무엇하랴? 오늘 그는 너무 일찍 가 버렸다. 난 그와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는 날 피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 그는 날 피하는 거야. ...적당한 말을 찾아 냈다. 불빛이 일 듯이 내 머리속에 떠올랐다. 하느님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전 사랑에 빠졌나이다. 옐레나가 이 마지막 숙명적인 말을 일기장에 써 넣은 바로 그날, 인사로프는 베르셰네프의 방에 앉아 있었다. 베르셰네프는 당혹한 표정으로 그 앞에 서 있었다. 인사로프가 내일 모스크바로 옮겨 가겠노라는 자신의 의사를 방금 베르셰네프에게 알렸던 것이다. "당치도 않아!" 베르셰네프가 소리쳤다. "이제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들어섰지 않은가. 모스크바에서 무얼 하겠다는 건가? 뭣 때문에 그런 갑작스런 결정을! 자네 혹 무슨 소식을 받았나?" "아무 소식도 받지 못했네." 인사로프가 대답했다. "내 사정상 여기 눌러 있을 수가 없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인사로프가 말했다. "내버려 두게, 고집부리지 말고. 제발 부탁이네. 나도 자네와 헤어지는게 여간 섭섭하지 않아. 그렇지만 어쩔 도리가 없네." 베르셰네프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자넬 설득시킬 수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네." 그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래 그게 결정적인가?" "아주 결정적이라네." 인사로프는 이렇게 대답하고 일어나 나갔다. 베르셰네프는 방 안을 왔다갔다하다가 모자를 쥐고서 스타호프 가로 향했다. "제게 무엇인가를 알려 주려고 오셨군요." 옐레나가 그들 둘만이 남게 되자 그에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 말씀해 주세요. 무슨 일이죠?" 베르셰네프는 그녀에게 인사로프의 결심을 전해 주었다. 옐레나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녀는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베르셰네프가 말했다. "드미트리 니카노르이치는 자신의 행동에 주석을 붙이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앉으세요,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어디 편찮으신 것 같군요...이렇게 갑작스레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듯하기는 합니다만." "무슨, 이유죠?" 옐레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차가운 손으로 베르셰네프의 손을 덥석 쥐면서 되풀이하여 물었다. "참, 이걸 당신께 어떻게 설명해야 할는지?" 베르셰네프가 서글픈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지난 봄, 그러니까 내가 인사로프를 알게 된 당시로 되돌아야겠군요. 난 그때 그를 어느 친척 집에서 만났습니다. 친척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아주 예뻤어요.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내가 그에게 그런 말을 했었죠. 그랬더니 그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내가 틀렸다고, 자기는 애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내게 대꾸했어요. 만일 그에게 그 비슷한 감정이라도 싹튼다면 그는 즉시 떠날 거라는 겁니다. 이건 그 자신의 말인데, 자기는 개인적 감정의 만족을 위해 자신의 임무와 의무를 저버리고 싶지는 않다는 거죠. '나는 불가리아 인이야.'라고 말했지요. '러시아 여인의 사랑은 필요치 않아...'라고요." "그럼 ...무엇 때문에 지금 그는..." 하고 옐레나는 어떤 충격이라도 기다리는 사람처럼 자신도 몰래 고개를 돌리고서 중얼거렸다. 여전히 베르셰네프의 손을 잡은 채였다. "내 생각에는" 하고 말하며 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때 내가 막연히 예상했던 일이 이제 와서 실제로 들어맞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당신 생각엔... 날 괴롭히지 마세요!" 하고 말이 별안간 옐레나에게서 터져 나왔다. "제 생각으로는." 베르셰네프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지금 인사로프는 어떤 러시아 처녀를 사랑하게 되어, 자신의 약속대로 도망갈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옐레나는 자신의 온 얼굴과 목에 불길처럼 타오른 부끄러운 홍조를 남의 시선으로부터 감추려는 듯, 베르셰네프의 손을 더욱더 꼭 쥐었고, 고개를 더욱더 낮게 수그렸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당신은 천사처럼 착하시군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작별 인사는 하러 오겠지요?" "그럼요, 떠나고 싶지 않을 테니 아마 올 겁니다..." "그에게 말해 주세요, 말해 주세요..." 그러나 이때 가련한 처녀는 더 이상 참아 내지를 못했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방에서 뛰쳐나갔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야'하고 베르셰네프는 집으로 천천히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난 이걸 기대한 건 아닌데. 벌써 이렇게 심각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어. 내가 착하다고 그녀가 말했지.'하고 그는 자신의 생각을 계속하였다. '내가 어떤 감정, 무슨 의도로 그 모든 걸 옐레나에게 전했는지 누가 알랴? 그건 선량해서가 아니야. 선량해서가 아니라구, 정말로 상처에 단검이 꽂혔는지, 어떤지 확인하기가 두려웠던 것인가?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난 그들을 도와 주는 걸로 만족해야만 해. 미래의 과학과 러시아 군중 사이의 중매자...슈빈이 날 그렇게 일컬었듯이. 아마도 난 어쩔수 없는 중매쟁이로 태어난 모양이야. 하지만 만일 내가 잘못 짚은 것이라면? 아니지, 잘못 짚었을 리가 없어.' 안드레이 페트로비치의 마음은 비참했다. 그래서 라우머의 책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튿날 한 시쯤 되어서, 인사로프가 스타호프 가에 나타났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각에 안나 바실리예브나의 응접실에 여자 손님 한 사람이 와 있었다. 이웃에 사는 목사 부인으로 존경받는 아주 훌륭한 여자였는데, 경찰과 약간 말썽이 나 있었다. 한창 불볕 더위일 때, 고위 장성 가족이 종종 차를 타고 지나는 한길 가까이 있는 냇가에서 그녀가 목욕을 했다는 것이었다. 인사로프의 발걸음 소리를 듣자 옐레나의 얼굴에는 핏기가 싹 가셔 버렸다. 그러나 마침 다른 손님이 와 있어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가 그녀와 따로 얘기도 하지 않고 그냥 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당황해하는 것 같았고,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 눈치였다. '지금 당장 인사하고 가겠다는 건 아닌가?'하고 옐레나는 생각했다. 정말, 인사로프는 안나 바실리예브나에게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옐레나는 벌떡 일어나 그를 한쪽으로, 창문가로 불러냈다. 목사 부인은 놀라 몸을 돌리려 했으나, 코르셋을 너무 꽉 졸라매서 움직일 적마다 소리가 났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 있었다. "저 좀 보세요." 옐레나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왜 오셨는지 전 알고 있어요. 안드레이 페트로비치가 제게 당신의 의향을 전해 주었거든요. 하지만 부탁이에요. 오늘은 우리와 작별 인사를 하지 말아 주시고, 내일 일찍 열한 시쯤에 이리로 와 주시길 바래요. 당신께 말씀드릴 게 좀 있으니까요." 인사로프는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당신을 붙들지는 않을 테니까요. 약속해 주실 수 있죠?" 인사로프는 다시 고개를 숙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노치카, 이리 온."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말했다. "엄마가 얼마나 좋은 핸드백을 가지고 있는지 좀 보렴." "제가 직접 수를 놓았답니다." 목사 부인이 말했다. 옐레나는 창가에서 물러났다. 인사로프는 스타호프 가에 15분도 채 머무르지 않았다. 옐레나는 남몰래 가만히 그를 살펴보았다. 그는 예전처럼 눈 둘 곳을 몰라 안절부절 하더니 허둥지둥 갑작스레 떠나 버렸다. 흡사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옐레나에게는 그 날이 아주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기나긴 밤은 더욱 더 느리게 흘렀다. 옐레나는 두 팔로 무릎을 끌어안고 거기에 머리를 파묻은 채 침대에 앉아 있기도 하고, 창가로 가 뜨거운 이마를 차가운 유리에 대고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똑같은 한 가지 생각 때문인지 극도로 피로해졌다. 그녀의 심장은 화석이 된 것도 같았고, 가슴 속에서 아주 사라져 버린 것도 같았다. 그녀는 그걸 느끼지 못했지만, 머릿속에서는 혈관이 맹렬히 뛰고 있었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불에 단 것 같았으며,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그는 올 거야. 엄마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는 정녕 사실을 이야기한 걸까? 그럴 리가 없어. 말로만 오겠노라 약속한 건 아닐 거야. 정녕 난 그와 영원히 헤어져야만 하는 걸까? 이런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이런 생각들은 밀려왔다가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안개처럼 떠돌고 있었다. '그가 날 사랑한다!'이런 생각이 그녀의 온 몬에서 불쑥 솟아나, 그녀는 어둠 속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에 보일락말락 감도는 은근한 미소를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그러나 그녀는 이내 머리를 흔들며 깍지낀 손을 뒤통수에 갖다 댔다. 그러자 조금 전의 생각들이 다시금 안개처럼 그녀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거의 새벽ㄴ이 되어서야 그녀는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침내 붉은 아침의 첫햇살이 방 안으로 비쳐들었다. "아, 만일 그가 날 사랑한다면!" 하고 별안간 소리지르며 그녀는 비쳐든 햇살 속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포옹이라도 하듯 두 팔을 벌렸다. 그녀는 일어나 옷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에는 아직 아무도 일어나 있지 않았다. 그녀는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 안은 너무도 조용하고 푸르렀고 상쾌했으며, 새들은 재재거리고, 꽃들은 즐거이 바라다보고들 있었다. 그녀는 오싹 한기를 느꼈다. '아!'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나보다 더 행복한 꽃은 하나도 없을 거야.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 그녀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그녀가 옷을 반쯤 입다 말고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데, 차를 마시러 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딸의 얼굴이 몹시 창백한 것을 눈치챘으나, "너 오늘 아주 매력적이구나." 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면서, "그 옷이 네게 썩 잘 어울리는구나. 어떤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은 생각이 있을 때면, 늘 그걸 입도록 해라." 하고 덧붙였다. 옐레나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한구석에 가 앉았다. 시계가 9시를 쳤다. 11시까지는 아직 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옐레나는 책을 펴들었다가 바느질감을 붙잡았다가 다시 책을 펴들었다. 그런 다음, 가로수 길을 따라 백 번을 왔다갔다하기로 마음먹고 그렇게 했다. 그녀는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카드놀이를 하는 걸 오래도록 들여다보기도 하고, 시계를 힐끔 쳐다보기도 했다. 아직 10시도 되지 않았다. 슈빈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그와 이야기를 해 보려 했으나, 그에게 사과만 하게 되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한채, 말 한 마디 한 마디 하기가 힘이 들어서가 아니라, 그녀 자체 내에서 어떤 의혹감이 일어나서였다. 슈빈이 그녀 쪽으로 몸을 기대 왔다. 그녀는 농담을 rlo하고 눈을 들었는데, 눈앞의 어린 상대방의 얼굴은 슬프고도 우정 어린것이었다. 그녀는 그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슈빈도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나가 버렸다. 그녀는 그를 붙잡고 싶었으나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는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마침내 시계가 11시를 쳤다. 그녀는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귀를 기울였다. 이미 그녀는 아무것고 할 수가 없어, 생각하는 것조차 멈추었다. 심장이 되살아나 차츰 크게 고동치기 시작했고, 이상한 일은 시간이 더욱더 빨리 달리는 것 같은 것이었다. 15분이 흐르고, 30분이 흐르고, 옐레나의 생각으로는 몇 분이 더 흐른 것 같았는데, 그녀는 별안간 깜짝 놀랐다. 시계가 12시를 치는 게 아니라 1시를 치는 것이었다. '그는 오지 않는거야. 떠나 버렸어,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서....'이런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자 피가 솟구치는 것 같았다. 숨이 막히고 눈물이 막 쏟아질 것만 같아, 그녀는 자기 방으로 뛰어가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는 30분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눈물이 그녀의 순가락을 통해 베개로 흘러내렸다. 그러다가 그녀는 별안간 얼굴을 쳐들고 일어나 앉았다. 이상한 무엇인가가 그녀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변화가 생기고, 축축이 적은 두 눈은 저절로 말라 빛났고, 두 눈썹이 옴지락거렸으며, 입술은 꼭 다물어져 있었다. 다시 30분이 흘렀다. 옐레나는 마지막으로 귀를 기울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녀에게 날아들지 않나 하고. 그녀는 일어나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어깨에 망토를 걸치고서, 살그머니 집을 빠져나와 베르셰네프이 집 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발길을 재촉했다. 옐레나는 머리를 숙이고 시선을 줄곧 땅에다 보내며 걸어갔다. 두려울 것도 없었고,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 오직 한 번 더 인사로프를 만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무겁게 드리워진 검은 구름 사이로 태양이 숨은지 오래되었다는 것도, 바람이 나무들 사이에서 발작하듯 회오리쳐 그녀의 옷자락을 휘날리는 것도, 갑작스레 먼지를 일으켜 길을 따라 휩쓰는 것도 알지 못한 채 그녀는 걸어가고 있었다. 커다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는데도 그녀는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비는 차츰 세차져 번개가 번쩍거리고 천둥이 우르릉 꽝꽝거리기 시작했다. 옐레나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그녀가 뇌우를 만난 곳에서 멀지않은 곳에 허물어진 우물을 끼고 버려진, 오래 된 작은 예배당이 서 있었다. 그녀는 그 곳으로 달려가 야트막한 처마 밑으로 들어섰다. 비는 억수같이 퍼붓고,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옐레나는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심정으로 총총한 발을 드리운 듯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인사로프를 만날 수 있으리라던 마지막 희망은 사라져 버렸다. 거지 노파 한 사람이 예배당으로 들어와 빗방울을 털어 내고, "비 때문이로군요, 아가씨." 하고 인사를 했다. 그리곤 신음에 가까운 한숨을 쉬며 우물가에 걸터 앉았다. 옐레나가 손을 주머니에 넣자, 노파는 이 거동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주름살투성이의 누렇게 뜬 얼굴, 하지만 한때는 예뻤음직한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고맙습니다, 친절한 아가씨." 하고 그녀가 말했다. 옐레나의 주머니에는 지갑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노파는 벌써 손을 내밀고 있었다. "돈이 없네요. 할머니." 옐레나가 말했다. "이거라도 받아 두세요,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노파에게 자신의 손수건을 주었다. "오, 오, 어여쁜 아가씨." 거지 노파가 말했다. "하지만 내게 손수건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오라, 손녀년이 시집 갈 때 주면 되겠군. 아가씨의 그 친절하심에 하느님이 은총을 내리시길!" 천둥 소리가 났다. "하나님이시여, 예수 그리스도시여." 거지 노파는 중얼거리며 성호를 세 번 그었다. "그런데 아가씨를 뵌 적이 있는 듯한데요." 노파는 잠시 기다렸다가 덧붙였다. "내게 동냥을 준 적이 있지요?" 옐레나가 노파를 찬찬히 뜯어보더니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래요, 할머니." 그녀가 대답했다.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느냐고 내게 물었었죠?" "그래요, 아가씨, 맞아요. 그래서 내가 아가씨를 알아본 거요. 이 손수건도 아가씨 눈물에 젖은 걸 거요. 아, 당신네[ 젊은이들에겐 한 가지 슬픔뿐이지, 커다란 슬픔이란!" "어떤 슬픔인데요, 할머니?" "어떤 슬픔이냐고? 에고, 착안 아가씨, 나 같은 늙은 것을 속일 수는 없어요. 난 아가씨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지 알고 있어요. 아가씨만이 겪는 슬픔이 아니니까요. 사랑스런 아가씨, 나도 젊은 시절이 있었거든요. 나도 그런 고통을 다 겪었답니다. 그래요, 아가씨가 친절하니까 내말해 두겠는데, 바람둥이가 아닌 좋은 사람을 만나면 꼭 잡으세요. 목숨을 걸고 꼭 잡아야 해요. 그렇게 될 거요. 하느님이 점지하신 걸. 그럼요, 왜 놀라죠? 난 점도 치는 걸요. 아가씨의 슬픔을 내가 몽땅 아가씨의 손수건에 사 가져갈까요? 내가 가져가죠. 이젠 됐어요. 비가 좀 뜸해졌군요. 아가씨는 좀더 기다리세요. 난 그냥 가겠어요. 비에 적는 것쯤 처음이 아니니까요. 잊지 말아요. 아가씨, 슬픔은 있다가도 곧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걸,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거지 노파는 우물가에서 일어나, 예배당에서 나가더니 느릿느릿 자기의 길을 걸어갔다. 옐레나는 놀라워하며 노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뜻일까?'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빗줄기는 차츰 가늘어지더니, 잠시 후에 해가 났다. 옐레나가 막 자신의 피난처를 떠나려고 하는데, 별안간 그녀는 예배당에서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 있는 인사로프를 보았다. 망토를 걸친 그는 옐레나가 왔던 바로 그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급히 집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손으로 허물어진 계단 난간을 짚고 서서 그를 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인사로프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벌써 지나쳐 가고 있었다. "드리트리 니카노르이치!"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인사로프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는데, 처음에는 옐레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으나, 금방 그녕에게로 다가왔다. "당신! 당신이 여기 있다니!" 그락 소리질렀다. 그녀는 잠자코 예배당 안으로 들어섰다. 인사로프는 옐레나를 뒤따라 왔다. "당신이 여기 있다니요?" 그가 되풀이 했다. 그녀는 여전히 입을 다문채, 부드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우리 집에서 오시는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아니오, 당신 집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라구요?" 옐레나는 되물으며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그게 당신 약속을 지키는 건가요? 난 아침부터 당신을 기다렸는데."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난 어제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요." 옐레나는 다시금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얼굴도 손도 몹시 창백했다. "우리한테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려 하셨군요?" "그렇습니다." 인사로프는 잘라 대답했다. "뭐라구요? 우리가 알게 되고,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그래서...그러니까 만일 내가 여기서 당신을 우연히 만나지 못했더라면." 옐레나의 목소리가 쾅쾅 울렸다. 그녀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냥 그렇게 떠나 버려, 마지막 악수도 못 나누더라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지요?" 인사로프가 고개를 돌렸다.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난 즐겁지 못해요. 믿어 주세요. 이런 결심을 하기까지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는 것을, 만일 당신이 그걸 안다면..." "난 알고 싶지 않아요." 옐레나는 깜짝 놀라 인사로프의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이 왜 떠나는지는....아마, 그럴 필요가 있기 때문이겠죠. 우리는 헤어져야만 하나 보죠. 하릴 없이 당신의 친구들을 괴롭히고 싶진 않을 테죠. 하지만 정말 이런 식으로 친구들과 헤어져야 하나요? 나와 당신은 친구잖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아니죠." 하고 인사로프가 말했다. "뭐라구요?" 옐레나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두 뺨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난 바로 우리가 친구가 아니기 때문에 떠나는 겁니다. 내가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 얘기하지 않은 것을 말하도록 강요하지 말아 주제요." "전엔 저한테 솔직하셨잖아요." 옐레나는 가볍게 질책하듯이 말했다. "기억하시죠?" "그 땐 솔직할 수가 있었죠. 그 땐 숨길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하지만 지금은 뭔가요?" 옐레나가 물었다. "하지만 지금은.....지금은 멀어져야 해요. 안녕히." 만일 그 순간 인사로프가 옐레나 쪽으로 눈을 들었더라면, 그 자신의 얼굴은 차차 찡그려지고 어두워지는 반면, 그녀의 얼굴은 차츰 밝아지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집스레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드미트리 니카노르이치, 안녕히 가세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났으니, 적어도 악수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아니오, 그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인사로프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할 수 없다고요?" "할 수 없습니다. 안녕히!" 하고 그는 예배당의 문간으로 나갔다. "잠깐만 기다려요." 옐레나가 말했다. "당신은 저를 두려워하는 것 같군요. 하지만 전 당신보다는 더 용기가 있어요." 그녀는 갑작스레 온몸을 부르르 떨며 덧붙였다. "전 당신께 말할 수 있어요. 할까요? .... 어째서 당신이 절 이 곳에서 만났는지를? 제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알기나 하세요?" 인사로프는 놀라 옐레나를 바라보았다. "전 당신에게 가는 길이었어요." "나에게?" 옐레나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당신은 제 입으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도록 제게 강요하고 싶은 거지요?"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자, 전 말했어요." "옐레나!" 인사로프가 부르짖었다. 그녀는 얼굴에서 손을 떼고 그를 바라보더니, 그의 가슴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그녀를 꼬옥 껴안고는 가만히 있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 한 마디 부르짖음으로, 그 순간적인 전환으로, 그녀가 그렇게 믿음직스레 안겨 있는 그 가슴의 고동 소리로, 그의 손가락 끝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와 닿는 감촉으로, 옐레나는 그녀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녀에게는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여기 있고 그가 날 사랑하는데, 더 바랄 게 무엇이겠는가?' 축복의 적막, 목적을 이룬 고요한 평정의 적막, 죽음마저도 의미와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그 천상의 적막이 신의 물결처럼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모든 걸 다 소유하였기에 바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 나의 오빠, 나의 친구, 나의 임이여!" 그녀의 입술은 이렇게 속삭였다. 이 심장이 그의 것인지, 그녀의 것인지, 너무나 달콤하게 고동치며 그녀 가슴으로 스며들었기에, 그녀 스스로는 알 수 없었다. 그느 자기에게 내맡겨진 그 젊은 생명을 굳게 껴안은 채 움직일 줄 모르고 서 있었다. 그는 가슴에 새로운, 그리고 말할 수 없이 감미로운 짐을 느꼈다. 감동이, 설명하기 어려운 감사의 감정이 그의 단단한 마음을 부수어 놓았다. 게다가 결코 전에는 흘려 보지 못한 눈물이 그의 눈에 괴었다. 옐레나 역시 울지 않았다. '오, 나의 친구, 오, 나의 오빠!'라는 말만을 되뇔 뿐이었다. "어디든지 날 따라올 수 있겠소?" 15분쯤 지났을 때,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여전히 그녀를 꽉 껴안은 채로. "어디든지, 세상 끝이라도, 당신이 계신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어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니오? 부모님께서 우리 결혼을 반대하시리라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난 자신을 속이지 않아요. 난 그걸 알아요." "내가 거의 거지에 가까운 가난뱅이라는 것도 알고 있소?" "알고 있어요." "내가 러시아 인이 아니라는 것도, 난 러시아에서 살 운명이 아니라는 것도, 조국과 부모와의 인연을 끊게 된다는 것도?" "알아요, 알고 있어요." "내가 보수도 없는 어려운 일에 자신을 바치고 있다는 것도, 난, 우린, 위험뿐만 아니라 궁핍도 굴욕도 격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소?" "알아요, 다 알아요. 전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모든 관습에서 벗어나야만 하고, 낯선 사람들 틈에 끼어 일을 해야 될지도 모르고...." 그녀가 그의 입술에 손을 갖다 댔다. "전 당신을 사랑해요, 드미트리." 그는 그녀의 가느다란 장미빛 손에 열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옐레나는 그의 입술에서 손을 떼지 않고, 어린애같이 즐거운 호기심에 차 미소지으ㅕ 그가 그녀의 손에, 손가락에 키스를 퍼붓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낯을 붉히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치켜올리고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그럼, 잘 있소. 신과 인간 앞에 맹세하는 나의 신부여!" 하고 그는 말했다. 옐레나는 한 시간후, 한손엔 모자를 들고 다른 손엔 망토를 든 채 별장 응접실로 살그머니 들어섰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조금 흩어지고, 양볼에 상기된 빛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거슴추레한 눈에는 기쁨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몸이 노곤하여 간신히 발걸음을 떼어 놓았는데, 그 노곤함이 기분 좋았다. 하긴 그녀는 모든 것이 다 기분 좋았다. 모든 것이 다 정답고 친절하게 여겨졌다. 우바르 이바노비치가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조금 기지개를 켜다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웃기 시작했다. "왜 그래?" 그가 놀라 물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녀는 우바르 이바노비치에게 키스해 주고 싶었다. "납작해졌죠!" 그녀는 한참 있다가 말했다. 그러나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눈썹을 치켜올린 채 놀라서 옐레나를 계속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있는 자리에다 망토와 모자를 떨어뜨렸다. "정다운 우바르 이바노비치." 그녀가 말했다. "전 졸려 죽겠어요. 지쳤거든요." "흥" 우라르 이바노비치는 이렇게 소리치더니 손가락을 흔들어댔다. "이건 필시, 그래..." 옐레나는 자기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난 곧 이 모든 것들과 헤어져야만 해. 그런데 이상한 일이야. 공포감도, 의혹도, 후회도 일어나지 않으니 말이야....하지마 어머니가 안 됐어!'그리곤 다시 그녀 앞에 예배당이 떠오르고 인사로프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것만 같고, 그의 팔이 자기 몸에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녀의 가슴은 즐겁긴 하나 약하게 고동쳤다. 가슴도 행복에 지친 모양이었다. 거지 노파가 떠올랐다. '마치 그녀가 내 슬픔을 다 가져간 것 같군.'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오, 난 얼마나 과분한지! 이렇게나 빨리!' 그녀가 자신을 조금만 더 풀어 놓았더라면, 그녀에게선 달콤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으리라. 그녀는 웃음으로써 억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어떠한 입장에 처한들 더 좋은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잠재워 줄 것같이, 그녀의 모든 행동은 느리면서도 부드러웠다. 옐레나는 조야의 얼굴이 한결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했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도 들어왔다. 옐레나는 일순 고통을 느꼈으나, 그녀는 자기의 선량한 어머니를 부드럽게 껴안고 그녀 이마에 키스를 했다. 어느 새 어머니의 머리카락이 희끗희끗 세어 있다니! 그런 다음 그녀는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 방의 모든 것이 그녀에게 미소를 짓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침대에, 불과 세 시간 전에 그렇게도 괴로운 순간을 보냈던 바로 그 침대에 어떤 부끄러운 승리감과 차분한 감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가 날 사랑한다는 걸 난 그 때도 알고 있었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전에도...아, 아니야! 아니야! 이건 죄악이야.' "당신의 나의 신부...." 하고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중얼거리더니 무릎을 끌어안았다. 저녁 무렵이 되자 그녀는 좀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곧 인사로프를 만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우울해졌다. 의심을 사지 않고 그가 베르셰네프 집에 남아 있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와 옐레나는 이렇게 계획을 세웠다. 인사로프는 모스크바로 돌아가 가을이 될 때까지 두어 차례 찾아오기로 하고, 그녀는 그에게 편지를 쓰기로. 그리고 만일 가능하다면 쿤초조 근처에서 만날 것을 정하기로 약속했다. 차 마시는 시간이 되어서야 그녀는 응접실로 내려가 자기 가족들 모두와 슈빈을 만났다. 슈빈은 그녀가 나타나자마자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전처럼 친근하게 그에게 얘기를 건네고 싶었지만, 그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두려웠고, 자기 자신이 두려웠다. 그가 그녀를 두 주일 이상이나 그냥 내버려 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 듯했다. 이윽고 베르셰네프가 와서 안나 바실리예브나에게 인사로프의 인사를 전했다.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지 못하고 모스크바로 돌아가게 된 데 대한 그의 용서를 구하는 말과 함께. 인사로프의 이름이 그 날 처음 옐레나 앞에서 오르내리자,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그 순간, 그렇게 좋은 친구가 갑작스레 떠난 데 대한 유감을 표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만,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 그냥 움직이지도 않고 잠자코 앉아 있었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한숨을 쉬며 탄식까지 했다. 옐레나는 베르셰네프 곁에 있기를 원했다. 그가 그녀의 비밀을 다소 알고 있다 해도 그녀는 그가 두렵지 않았다. 베르셰네프의 곁에 있음으로써 여전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슈빈의 눈초리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웃는 듯한 눈초리가 아니라 관찰하는 듯한 눈초리였다. 베르셰네프도 저녁 내내 의아한 모양이었다. 그는 좀더 슬퍼하는 옐레나를 보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와 슈빈 사이에 예술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어, 그녀는 자리를 옮겨 꿈결에서처럼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차츰 그들뿐만 아니라 온 방안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마치 꿈 속처럼 여겨졌다. 모든 것이, 식탁 위의 사모바르(러시아 가정에서 흔히 사용되는, 구리로 만든 차 끓이는 기구)도, 우바르 이바노비치의 짤막한 조끼도, 조야의 매끈한 손톱도, 벽에 걸린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의 유화 초상화도 모든 것이 사라져 갔고, 모든 것이 연기에 뒤덮였으며, 모든 것이 존재하기를 그쳤다. 그녀는 그들 모두가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저들은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걸일까?'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졸리니, 레노치카?" 어머니가 물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묻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반쯤은 옳은 시사라는 게지?" 슈빈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 말은 별안간 옐레나의 주의를 일깨웠다. "천만에." 하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바로 이런 말에 멋이 있는 거야. 올바른 시사는 권태를 일으킨다. 이건 기독교적이 아니고, 옳지 못한 시사는 사람을 무관심하게 만든다, 이것은 어리석은 수작이고, 반쯤 옳은 시사는 분노와 초조감을 느끼게 하지. 예를 들어, 옐레나 니콜라예브나는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이건 어떤 종류의 시사이겠는가 말이야?" "아이, 파벨." 옐레나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당신한테 보여 주고 싶군요.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너무 피곤하거든요." "왜 그럼 자리에 들지 않니?"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말했다. 그녀는 저녁이면 늘 자신이 졸립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잠자리에 들게 하는 것이 즐거웠다. "나한테 키스하고 하늘 나라로 가려므나.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도 양해해 주실 게다." 옐레나는 어머니에게 키스를 하고,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자리를 떠났다. 슈빈이 문까지 그녀를 따라 나왔다.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그는 문지방에서 그녀에게 속삭였다. "당신은 파벨을 짓밟았소. 그를 무자비하게 짓밟았단 말이오. 하지만 파벨은 당신을, 당신의 작은 발까지도, 당신의 발에 신는 구두까지도, 당신 구두의 신창까지도 축복하오." 옐레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인사로프가 키스했던 그 손이 아닌 다른 손을. 그리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옷을 벗고 자리에 들어 깊은 잠에 빠졌다. 그녀는 깊은 단잠을 잤는데, 어린애들도 그렇게 깊은 단잠은 자지 못할 것이다. 병이 나은 어린 아이만이 어머니가 그의 요람 곁에 앉아 바라보며 숨소리를 듣고 있을 때 그런 단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내 방으로 잠깐 오게나." 베르셰네프가 안나 바실리예브나한테 작별 인사를 하자 곧 슈빈이 베르셰네프에게 말했다. "자네에게 보여 줄 게 좀 있네." 베르셰네프는 슈빈이 거처하고 있는 별채로 갔다. 젖은 수건으로 덮어 방 구석구석에 놓아 둔 소립상, 반신상 등 아틀리에 안의 많은 작품들이 그를 놀라게 했다. "자네 일 굉장히 많이 했군." 그가 슈빈에게 말했다. "해야 할 일이 있네." 슈빈이 대답했다. "한가지 일에 운이 없으면, 다른 일을 시도해야 돼. 그런데 난 코르시카 인처럼, 순수 예술보다 처절한 복수에 더 골몰하는 편이지. 놀랄지어다, 비잔틴이여!' "자넬 이해할 수가 없군." 베르셰네프가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게. 내 복수 제 1호를 보게 해 줄 테니, 나의 사랑하는 친구이자 은인이시여." 슈빈이 한 조각품에서 수건을 벗기자 베르셰네프의 눈앞에는 인사로프를 꼭 닮은 훌륭한 반신상이 나타났다. 얼굴의 특징은 슈빈에 의해 아주 세밀한 데까지 정확하게 파악도어져 있었다. 그는 거기에 영예로운 표정, 정직하고 고귀하며 용맹스런 표정을 부여하고 있었다. 베르셰네프는 황홀해졌다. "이거 정말 걸작인데!" 그가 소리질렀다. "축하하네. 전람회에 출품했으면 좋겠군! 왜 그런 훌륭한 작품을 복수라고 이름을 붙였나?" "옐레나 니콜라예브나의 명명일에 그걸, 자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훌륭한 작품'을 그녀에게 갖다 줄 작정이었기 때문이지.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우리가 장님이 아닌 이상, 주위에서 벌러지고 있는 일을 모를 리가 있나? 하지만 우린 신사니깐 신사답게 복수해야지. 자, 여길 보게." 다른 조각품의 덮개를 벗기면서 슈빈이 이렇게 덧붙였다. "새로운 미학론에 따르면, 예술가는 자기 내부의 온갖 추악한 면을 구현시켜 그들의 창작품을 진주로 만들어 내는 부러운 권리를 향유하고 있다는 거야. 그래서 그 진주, 즉 제2호를 만들어 낼 때, 우리는 이제 결코 신사적이 아니라 그냥 악당처럼 복수하는 거지." 그가 재빠른 솜씨로 천을 벗겨 내리자, 베르셰네프의 시야에 단탄식으로 만든 또 하나의 인사로프 소립상이 들어왔다. 더할 나위 없이 악랄하고 해학적이었다. 젊은 불가리아 인은 달려들 것처럼 뒷다리를 들고 뿔을 숙이고 있는 양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털을 잘 깎은 숫양'의 얼굴에 새겨져 있는 우둔함, 열정, 고집, 거북스러움, 좁은 시야 등이 의심할 여지없이 꼭 닮아 있어, 베르셰네프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때? 재미있나?" 슈빈이 말했다. "모델이 누구라는 건 알아보겠나? 이것 역시 전람회에 출품하라고 권하겠나? 이건, 여보게, 내 명명일에 내게 선물할 거라네...각하, 농담 한 마디 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더니 슈빈은 자기 뒤를 발바닥으로 차면서, 서너 번 껑충껑충 뛰는 것이었다. 베르셰네프는 바닥에서 천을 집어 소립상을 덮었다. "오, 자네는 관대하군." 슈빈이 말했다. "역사상 가장 관대한 인물로 누굴 치지? 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자, 이제." 하고 그는 의기양양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꽤 커다란 진흙덩이의 세 번째 작품을 벗기면서 말을 계속했다. "자네는 자네 친구의 현명한 겸손과 명민함을 증명해 주는 작품을 보게 될 걸세. 순수 예술가로서 그가 자신을 비방할 필요와 효용을 느낀다는 사실을 자네는 확신하게 될 거야. 두고 보게나!" 천이 들어올려졌고, 베르셰네프는 흡사 함께 자란 듯 나란히 붙어 있는 두 개의 머리를 보았다. 그는 처음에는 금방 알아보지는 못했으나 찬찬히 뜯어보고는, 그 두 개의 머리 가운데 하나는 안뉴시카의 것이고, 다른 ksk는 슈빈의 자신의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초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희화에 가까웠다. 안뉴시카는 이마가 좁고 퉁방울 눈에 코가 상큼 들어올려져 있은 통통한 예쁜 처녀로 나타나 있었다. 그녀의 두툼한 입술은 뻔뻔스레 코웃음을 치고 있어, 얼굴은 전체적으로 육감적인 면과 무사 태평함과 대담성, 그리고 착한 마음씨까지도 나타나 있었다. 슈빈 자신은 훌쭉하게 야윈 난봉꾼으로 묘출 되어 있었는데, 두 볼은 움폭 패여 있었고, 성긴 머리털이 힘없이 변발 모양으로 매달려 있었으며, 가물가물 꺼져 가는 두 눈엔 무기력한 표정이 스며 있었고, 코는 죽은 사람의 것처럼 뾰족했다. 베르셰네프는 혐오감에 차서 몸을 홱 돌렸다. "여보게, 근사한 짝이잖아?" 슈빈이 말했다. "적당한 표제나 하나 붙여 주지 않겠나? 처음 두 작품엔 벌써 내가 표제를 생각해 두었다네. 반신상에는 '조국을 구하려는 영웅'이라 붙일거고, 소립상에는 '독일놈들이여, 조심하라!'로 붙일 거라네. 이 작품엔 '예술가, 파벨 야코블레비치 슈빈의 미래'라고 붙이면 어떻겠나? 괜찮은가?" "집어치워" 베르셰네프가 대꾸했다. "그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다니...." 그는 적당한 말을 금방 찾아 내지 못했다. "비열하다고 말하고 싶을 테지. 아니야, 용서하게. 전람회에 출품하려면 이 군상을 내놔야 할 테니 말이야." "정말 비열하군." 베르셰네프가 되풀이했다. "거 무슨 헛소리인가? 불행하게도 우리의 예술가들이 지금껏 누려 온 그런 흔적이 자네에겐 전혀 없어. 자넨 단지 자신을 비방하고 있을 뿐이야."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나?" 슈빈이 음울하게 말했다. "지금까지는 내게 그런 흔적은 없었는데...만일 앞으로 내게 그런게 나타나면 그건 어떤 여자의 잘못이야. 내가 벌써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걸 자네 알고 있나?" 그가 눈썹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거짓말 말게." "마시기 시작했다고! 맹세코." 하고 슈빈은 대답하더니, 별안간 이를 드러내 보이고 웃으면서 명랑해졌다. "그런데 여보게, 맛이 없어. 처음엔 목구멍이 아프더니 나중엔 골이 마구 쑤시더군. 위대한 루시치힌, 모스크바 장안에서 제일 가는 술고래 하르람피 루시치힌이 말하기를, 내겐 소용이 없다는 거야. 그의 말인즉, 술병이 나와는 인연이 없다는 거지." 베르셰네프가 그 군상을 부수어 버릴 듯이 손을 쳐들자 슈빈이 그를 말렸다. "그만두게, 부수지 말라구, 여보게, 그건 교육상 쓸모가 있어. 허수아비로서 말이야." 베르셰네프가 웃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자네 허수아비를 살려 두지."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럼 영원하고 순수한 예술을 위해 건배!" "예술을 위해서!" 슈빈도 따라 말했다. "좋은 일은 더욱 좋게 해 주고 나쁜 불행은 사라지게 하는 예술을 위해!" 두 친구는 굳은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잠이 깨었을 때, 옐레나의 첫 느낌은 즐거운 경이였다. '그게 사실일까? 과연 그게 사실일 수 있을까? 라고 그녀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녀는 어제의 기억들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런 다음 다시 환희에 찬 행복한 정적이 그녀는 찾아들었다. 그러나 아침 시간이 지나갈수록 차츰 불안감이 옐레나를 사로잡더니, 이튿날부터는 고통스럽고 지루해졌다. 사실, 이제야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잊을 수 없는 그 만남이 그녀를 과거의 생활 궤도로부터 영원히 떼어 놓았다. 만사가 평상시대로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모든 것이 순서대로 진행되어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은데도, 그녀는 이미 과거의 생활 궤도 안에 있지 않았고, 그 과거의 생활 궤도는 그녀와는 멀리 동떨어진 것이었다. 예전의 생활은 예전처럼 옐레나의 참여와 협력을 기대하면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는 인사로프에게 편지를 쓰려 했으나 그것도 잘 되지 않았다. 종이 위에 나타나는 말들은 생명이 없거나 헛된 빈말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일기를 끝맺으면서, 마지막 줄에 굵은 밑줄을 그어 놓았다. 그것은 과거의 일이며, 이제는 그녀의 모든 생각, 그녀의 존재 모두는 미래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괴로웠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어머니와 함께 앉아, 어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대꾸하고 이야기하고 하는 일이 옐레나에겐 뭔가 죄를 짓는 듯이 여겨졌다. 그녀는 자신이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부끄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자신에게 화가 났다. 결과야 어떻게 되든, 모든 걸 숨김없이 다 털어놓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그녀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째서 드미트리는 그 때 그 예배당에서 날 어디든 데려가지 않았을까?'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그의 아내라고 신 앞에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날 여기에 놓아 둘까?' 그녀는 별안간 모든 사람이, 우바르 이바노비치가지도 꺼려졌다.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전보다 더 어쩔 줄 몰라하며 손가락을 흔들어대는 것 같았다. 주위의 모든 것이 그녀에겐 이미 친절하지도, 정답지도, 꿈같이도 느껴지지 않았다. 악몽처럼 그녀의 가슴을 움직일 수 없는 무거운 짐이 되어 억누르는 것이었다. 마치 그녀를 비난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며 그녀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았으며, 넌 아직 우리의 것이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직접 기르던 가엾은 새와 짐승들까지도 그녀를 의혹과 적개심에 찬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녀에겐 그렇게 생각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이건 내집, 나의 가족, 나의 조국이잖아.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니야, 이건 더 이상 네 조국, 네 가족이 아니야.'라고 다른 목소리가 되뇌었다. 공포가 그녀를 엄습해 왔고, 그녀는 자신의 소심함에 화가 났다. 고난이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자신은 벌서 인내심을 잃고 있으니...이것이 자신이 그에게 약속한 것이더란 말인가. 그녀가 자신을 억제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한 주일이 지나자 달라졌다. 옐레나는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었고, 자신이 새로운 입장에도 익숙해졌다. 그녀는 인사로프에게 두 번이나 짤막한 메모를 써 가지고 직접 우체국에 가지고 갔다. 수치심과 자존심 때문에 절대 하녀에게 맡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벌써 그가 왔으면 하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떤 맑게 갠 날 아침, 인사로프 대신에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왔다. 퇴역 근위대 육군 중위 스타호프 가의 집 안 식구들은 그 날처럼 그가 그토록 시무룩하면서도 또 동시에 그토록 자신만만하고 엄숙한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쓴 채 응접실에 들어섰다. 다리를 쩍 벌리고 신발 뒤꿈치로 쿵쿵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들어섰던 것이다. 그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 가만히 머리를 흔들기도 하고 입술을 깨물기도 하면서 자신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흥분과 기쁨을 감추지 못한 태도로 그를 맞았다(그녀가 그를 맞을 때는 언제나 그랬다). 그는 모자도 벗지 않은 채, 그녀에게 인사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의 양피 장갑 낀 손에 옐레나로 하여금 키스하게 하였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그에게 병의 치료를 어떻게 했는가 물었으나,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바르 이바노비치가 나타나자, 그는 우바르를 흘끗 쳐다보고 "여!"라고 말했다. 그는 대체로 우바르 이바노비치를 깔보는 듯 냉정하게 대했다. 우바르에게서 '진짜 스타호프가 혈통의 흔적'을 인정하면서도. 거의 모든 믿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모양'의 코, 또는 누구누구는 '어떤 풍'의 뒤통수를 가졌다는 식의 풍설을 듣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조야가 들어와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앞에 앉았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소파에 푹 파묻히더니, 커피를 가져오라 이르고 나서 그제서야 모자를 벗었다. 커피를 가져오자, 단숨에 들이키고는 모두들 한 사람 한 사람씩 훑어보고 나서 볼멘 소리로 말했다. "좀 나가들 주시오." 그리고 그는 이어서 아내를 향해, "그러나 당신은 좀 남아 있어요."하고 말했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를 빼고 모두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머리는 흥분으로 떨고 있었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의 의기양양한 태도가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이다. 그녀는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했다. "무슨 일이에요!" 문이 닫히자마자 곧 그녀가 이렇게 소리질렀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안나 바실리예브나에게 무심한 눈길을 던졌다. "별일은 아니오. 당신은 어째 곧 희생이라도 할 듯한 태도를 취하는 거요?" 괜스레 말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입술 끝을 밑으로 내리뜨리곤 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 "난 다만 오늘 저녁 식사에 새 손님이 올 거라는 걸 당신에게 미리 알려 주려는 것뿐이오." "그게 누군데요?" "쿠르나토프스키, 예고르 안드레예비치. 당신은 모를 거요. 원로원 서기장이지." "그 사람이 오늘 저녁 식사에 온다고요?" "그렇소." "고작 그 말을 하려고 모두 밖으로 쫓아 냈어요?"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다시 안나 바실리예브나에게 눈길을 던졌는데, 이번엔 비웃는 듯한 눈초리였다. "그게 당신을 놀라게 했소? 놀랄 일은 따로 있소." 그는 입을 다물었고 안나 바실리예브나 역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했으면 싶은데요."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날 언제나 '부도덕한'인간으로 여기고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소." 니콜아리 아르쵸미예비치가 불쑥 말을 꺼내며 안나의 말을 막았다. "제가요?"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놀란 듯 중얼거렸다. "아마 당신이 옳을 거요. 사실 내가 당신으로 하여금 이따금 불만을 느껴도 마땅할 근거를 주었다는 걸 부정하고 싶진 않소." '회색 말!'이 안나 바실리예브나의 뇌리를 스쳤다. "비록 당신 자신이 당신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서 동의해 줄 줄 믿고는 있다 하더라도..." "그래요, 당신을 비난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나 자신을 변명하려는 건 아니오. 시간이 흐르면 밝혀질 테니. 하지만 난 나의 의무를 알고 있으며 내게 맡겨진... 내게 맡겨진 가족의 이익에 대해 마음을 쓸 줄 안다는 걸 당신에게 단언하는 게 내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소." '이건 또 무슨 뜻인가?'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생각했다. 전날 밤 잉글리시 클럽의 흡연실 구석에서, 러시아 인은 요령 있게 연설을 할 줄 모른다는 문제로 토론이 벌어졌다는 걸 그녀는 알지 못했다. "우리들 가운데 누가 연설을 할 수 있을까? 누구를 지명하지?" 하고 토론자 가운데 한 사람이 소리쳤다. "예컨대 스타호프 같은 사람일 테지."라고 다른 한 사람이 말을 받자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기쁨에 겨워 소리까지 지를 뻔했었다. "예를 들어, 우리 딸 옐레나 문제를 두고 볼 때." 하고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말을 이었다. "마침내 그 애가 인생의 길로 확고한 걸음을 내디딛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지...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 애가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말이오. 사색적인 생활도, 박애 정신도 다 좋아요. 하지만 그건 어느 정도이고, 어느 나이까지지. 이제 불투명한 것들은 버릴 때가 된거요. 예술가니, 학생이니, 몬테네그로 인이니 하는 데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할 때가 온 거란 말이오." "당신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 거죠?" 하고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물었다. "잘 들어 봐요."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여전히 입술을 아래로 내리뜨리면서 대답했다. "당신에게 숨김없이 솔직히 말하리라. 쿠르나토프스키라는 젊은이를 알게 됐는데, 내 사위로 삼았으면하여 가까워졌단 말이오. 그 사람을 한 번 만나고 나면 나의 편애나 경솔한 판단을 책망하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장담하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웅변술에 스스로 도취되었다. "그 사람은 훌륭한 교육을 받은 법률가로, 아주 예절 바르다오. 나이는 33세이고, 서기장에 육등관, 그리고 스타니슬라프 훈장도 탔소. 그렇다고 날 계급에만 열중하는, 코미디에 나오는 그 아버지들의 부류에 넣지 말아 주길 바라오. 당신도 말하지 않았소. 옐레나 니콜라예브나는 능력 있는 적극적인 사람을 좋아한다고. 예고르 안드레예비치는 자신의 분야에서 첫째 가는 실무가라오. 다른 한편, 내 딸은 너그러운 행동에 마음이 끌릴 테고. 예고르 안드레예비치는 자기 수입으로 생활을 꾸릴 수 있게 되자, 곧 자기 아버지가 보내 주던 연금도 동생들을 위해 거절했다는구료." "아버지가 누군데요?"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물었다. "그 사람 아버지 말이오? 아버지도 꽤 유명한 분이지. 아주 덕망이 높은 엥 브래 스토이솅(진실한 스토익파 사람)인데, 퇴역 소령으로 백작의 영지를 관리하고 있는 모양이오." "아!"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한숨 같은 것을 내뱉었다. "왜 '아!' 하는 거요?"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말을 받았다. "당신도 무슨 이야기 들은 게 있구려?" "제가 뭐라고 했나요?"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말했다. "아니, 당신이 '아!'하고 했지 않소? 아무튼, 난 당신한테 내 생각을 미리 알려 둘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오. 쿠르나토프스키 씨가 대환영을 받았으면 싶소. 몬테네그로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오." "물론이겠죠. 요리사 발카를 불러 요리를 좀 넉넉하게 만들라고 일러야겠군요." "그런 일이야 내 참견할 바가 아니고."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말을 마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쓰더니 휘파람을 불면서(누군가에게서 휘파람은 자기 별장이나 승마 연습장에서나 부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정원으로 산책하러 나가싸. 슈빈이 자기 방 창문을 통하여 그를 내다보고는 혀를 쑥 내밀었다. 4시 10분 전에 역마차 한 대가 스타호프 가 별장 입구에 와 서더니, 검소하지만 말쑥하게 차려 입은 단정한 외모의 젊은이가 마차에서 내려 가지 이름을 주인에게 전하게 했다. 이 사람이 예고르 안드레예비치 쿠르나토프스키였다. 이튿날 옐레나는 인사로프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운 드미트리, 절 축하해 주세요. 제게 구혼자가 생겼답니다. 어제 우리 집에서 저녁 식사를 했는데 아버지가 잉글리시 클럽에서 그 사람을 알게 되어 초대한 모양이에요. 물론, 어젠 구혼자의 자격으로 온 건 아니었어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희망을 말했는데, 친절한 어머니가 제게 어떤 손님인지 귀띔해 주셨어요. 이름은 예고르 안드레예비치 쿠르나토프스키이고, 직책은 원로원 서기장이래요, 우선 그의 외모부터 적겠어요.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당신보다는 작았지만 체격은 좋았어요. 정돈된 이목구비에 머리는 짧게 깎았고, 구레나룻이 길게 났더군요. 눈은 작고 날카롭고 갈색이었으며, 입술은 평평하고 두터웠어요. 눈과 입술에는 흡사 만사를 경계하고 있는 듯한 무미건조한 미소가 늘 어려 있었어요. 그는 몹시 솔직하게 처신했고, 이야기는 또렷이 했으며, 매사에 분명했어요. 걸음걸이, 웃는 폼, 먹는 폼이 다 사무적이었죠. '잘도 관찰했군'하고 당신은 생각하실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요, 하지만 그건 당신께 상세히 써 보내드리기 위해서였어요! 게다가 자기한테 구혼할 남자를 요모조모 뜯어보지 말란 법이 있나요! 그에게는 강철 같은, 둔하기도 하고 텅 비기도 한 동시에 정직한 그 무엇이 있어요. 아주 정직한 사람이라고들 하더군요. 당신도 같철 같은 분이지만, 그 사람과는 달라요. 식사 때 그가 제 곁에 앉았는데, 우리 맞은편에는 슈빈이 앉았어요. 처음엔 상업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어요. 그 사람은 그 방면에 능통해 있어서, 큰 공장을 입수하기 위해 자신의 직책을 버릴 뻔했다고들 하더군요. 그걸 이루지 못했다니! 다음에 슈빈이 극장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쿠르나토프스키 씨는, "이것만은 고백해야 하겠군요." 하며 거짓 없이 겸손하게 예술에 대해선 전혀 문외한임을 선언했어요. '아니야, 나와 드미트리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와는 격이 달라.'라고요. 그 사람은 이런 말을 하고 싶어 한느 것 같았어요. "나는 예술을 이해하지만, 자리가 잡힌 나라에서나 허용될까, 예술은 불필요한 것입니다."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상한 건, 그가 페테르부르그 생활과 그 곳의 예의 바른 사회에 퍽 무관심하다는 점이에요. 그는 한 번 자신을 프롤레타리아라고까지 불렀어요. "우리는 노동자들입니다."하고 그가 말했어요. 전 이렇게 생각했죠. '만일 드미트리가 이런 말을 했다면 싫었겠지만, 멋대로 지껄이라지! 허풍을 떨려면 떨라지!'그는 저에게 아주 깍듯했지만, 관대한 장관이 저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이 여겨졌답니다. 그가 누군가를 칭찬하고 싶을 때면, "아무개는 원칙을 가지고 있어."(이것이 그가 즐겨 하는 말입니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는 자신만만하고 부지런하며 자기를 희생할 수도(제가 공정하다는 건 당신도 알고 계시죠), 말하자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할 수도 있는 반면에, 굉장한 폭군일 수도 있는 사람이었어요. 이런 사람의 손아귀에 잡힌다는 건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요! 식사중에 뇌물에 대한 논란도 벌어졌어요. 그러자 그는, "뇌물을 받아먹은 사람 중 대부분의 경우는 죄가 없다는 걸 전 이해합니다."라고 말했어요. "달리 어쩌는 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잡혔을 땐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요." 제가 소리질렀어요. "죄 없는 사람을 벌한단 말인가요!" "네, 원칙상 그렇습니다." "어떤 원칙인데요?" 슈빈이 물었어요. 쿠르나토프스키는 당황하고 놀라 이렇게 말했어요. "그런 건 설명할 필요도 없지요."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 같은 아버지가 "필요 없고 말고." 하고 맞장구를 쳐, 유감스럽게도 그 이야기는 거기서 그치고 말았답니다. 저녁에는 베르셰네프가 찾아와 한바탕 그와 논쟁을 벌였어요. 전 여태껏 우리의 착안 안드레이 페트로비치가 그렇게 흥분한 모습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어요. 쿠르나토프스키 씨는 과학이니 대학이니 하는 것들의 효용성을 아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전 안드레이 페트로비치가 분개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 사람은 그것들을 모두 체조 정도로 보는 것이었어요. 식사가 끝난 뒤에 슈빈이 제게로 다가와 이렇게 말했어요. "여기 이 사람과 다른 누군가를(그는 당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어요), 두 사람 다 현실적인 사람들이지만, 어떠 차이가 있나 한 번 비교해 봐요. 그 사람은 진정 살아 있는 이상을 생활화하고 있는데 반해, 여기 이 사람은 의무감도 없이, 다만 사무적인 정직성과 내용도 없는 실용적인 능력을 가졌을 뿐이오." 슈빈은 옳았어요. 그래 전 당신을 위해 그가 한 말을 다 기억해 두었답니다.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어떻게 당신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아 낼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당신은 신념이 있지만, 그 사람에겐 신념이 없거든요. 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는 늦게서야 저희 집을 떠났어요. 어머닌 제가 그의 마음에 들어, 아버지가 좋아 어쩔 줄 몰라 하신다는 걸 제게 알려 주셨는데, 혹 저도 원칙이 있는 사람이라고 저에 대해 얘기한 건 아닐까요? 전 하마터면, 어머니에게 몹시 유감스런 일이지만, 제겐 남편감이 있다고 대답할 뻔했어요. 어째서 아버지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으실까요? 나만 같아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있는 텐데... 오 나의 그리운 임이여! 제가 당신께 그 사람에 관해 이렇게 자세히 적어 보내는 건 저의 슬픔을 없애기 위해서랍니다. 전 당신 없이 살 수가 없어요. 전 언제나 당신을 보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집에서뿐만 아니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힘겹고 거북살스러운지를! 제가 당신께 편지를 쓰고 있는 곳이 어딘지 아시나요, 바로 그 수풀이랍니다....오, 그리운 이여!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쿠르나토프스키의 첫 방문이 있은 지 3주일 가량 지난 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모스크바로, 프레치스첸카 근처에 있는 자기의 커다란 목조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옐레나는 여간 기쁘지 않았다. 창문마다 둥근 기둥이 늘어서 있고, 하얀 하프와 꽃다발로 장식되어 있는 그 집은 일층과 이층 사이의 중간층과 별채들과 조그만 정원들, 그리고 커다란 잔디밭이 딸려 있었고, 마당에는 우물이, 우물 곁에는 개집이 있었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그렇게 일찍 별장을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금년에 유난히 추취가 일찍 찾아와 잇몸의 염증이 심해졌던 것이다. 한편,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치료를 끝마치고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브구스치가 흐리스치아노브나가 레벨에 있는 종자매를 찾아 떠났던 것이다. 어느 외국인 일가족이 조형 미술품을 전시하러 모스크바에 왔다는 '모스크바 통보'의 기사가 안나 바실리예브나의 호기심을 자극시킨 것도 또 하나의 이유였다. 한 마디로, 더 이상 별장에 머무른 다는 것은 불편할뿐더러,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의 말에 따른다면, 그의 '계획'수행과 어긋나는 일이었다. 별장에서 보내는 마지막 두 주일이 옐레나에게는 너무나 길게 여겨졌다. 쿠르나토프스키는 일요일을 틈타 두 번 찾아왔다. 다른 날에는 바빴던 것이다. 그는 본디 옐레나를 만나러 온 것이었지만 그를 몹시 마음에 들어하는 조야와 더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분이야말로 남자야!' 그의 거무스름하고 남자다운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의 자신만만하고 관대한 말씨에 귀를 기울이면서, 조야는 혼자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누구도 그렇게 훌륭한 목소리를 가지지 못했고, 아무도 "영-광이겠습니다"라든가, "전 매우 만족스럽습니다."라는 말을 그렇게 명료하게 발음할 수가 없었다. 인사로프는 스타호프 가를 찾아오지 않았으나, 옐레나는 그녀가 약속 장소로 지정해 주었던 모스크바 강가의 조그만 숲 속에서 몰래 그를 한 번 만났다. 그들은 겨우 몇 마디를 서로 나눌 수 있었다. 슈빈은 안나 바실리예브나와 함께 모스크바로 돌아왔으나 베르셰네프는 며칠 뒤에 왔다. 인사로프는 자기 방에서 불가리아로부터 인편으로 전해 온 편지를 세 번째 읽고 있었다. 편지를 우편으로 보내기에는 안심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는 편지 때문에 심한 불안에 싸여 있었다. 사태는 동양으로 급속히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 군대가 공국들을 점령했다는 소식은 민심을 온통 동요시켰다. 위난이 차차 커지고, 피랄 수 없는 전쟁이 가까워지는 기미가 엿보였다.도처에 화재가 있었는데, 그 불길이 어떤 방향으로 퍼져 다가 어디서 멈출는지 아무도 점칠 수 없었다. 쌓이고 쌓인 분노와 숙원, 모든 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인사로프의 가슴은 세차게 뛰었다. 그의 소망도 실현될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이르지 않은가? 일이 헛되지 않을까?'하고 그는 주먹을 꽉 쥐면서 생각했다. '우리는 준비가 덜 되어 있는데, 그러나 할 수 없어! 떠나야지.' 문 밖에서 무슨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오더니, 문이 활짝 열리고 이어 옐레나가 방으로 들어섰다. 인사로프는 몸을 부르르 떨며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 앞에 무릎을 끓고 그녀의 몸을 껴안으로 머리를 파묻었다. "절 기다리지 않았나요?'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그녀는 계단을 급히 뛰어올라왔던 것이다) "그리운 사람! 사랑하는 이여!" 그녀는 그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 여기가 당신이 사시는 곳이에요? 금방 찾았어요. 주인 집 딸이 데려다 주었어요. 우린 사흘 전에 옮겨 왔어요. 편지를 쓰려고 했지만, 직접 찾아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한 십오 분쯤은 함께 있을 수 있어요. 일어나, 문을 잠그세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문을 잠그곤 그녀에게로 돌아와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그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기쁨으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녀는 미소를 띠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는데, 그 눈 속에는 더없는 행복이 어려 있어 그녀는 부끄러워졌다. "잠깐만요." 그에게서 살며시 손을 빼면서 그녀가 말했다. "모자를 벗을게요." 그녀는 모자의 리본을 풀어 벗어 던지고, 망토를 어깨에서 벗어 내리고는 머리카락을 매만진 뒤, 낡은 조그만 소파 위에 앉았다. 인사로프는 황홀경에 빠진 듯 움직이지도 않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앉으세요." 그녀는 그에게로 눈을 들지 않은 채, 그에게 자기 옆자리에 앉으라고 가리키면서 말했다. 인사로프는 앉긴 앉았으나, 소파 위가 아닌 바닥, 그녀의 발 밑에 앉았다. "그럼 장갑을 벗겨 주세요." 그녀가 고르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먼저 단추를 풀으고, 한쪽 장갑을 벗겨 내리다 말고 장갑아래 드러난 희고 부드럽고 가느다란 손목에 뜨거운 입술을 갖다 대었다. 옐레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다른 한쪽 손으로 그를 막으려 했으나 그는 그 다른 한손에마저 키스를 퍼부었다. 옐레나가 손을 빼내자, 그가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몸을 굽혔다. 그들의 입술과 입술이 포개어졌다.... 한 순간이 지나자... 그녀가 먼저 뿌리치고 일어났다. "안돼요, 안돼." 하고 속삭였다. 그리고는 재빨리 책상으로 다가갔다. "전 이 집 안주인이에요, 그러니 저한테 비밀이 있어서는 안돼요." 그녀는 일부러 태연해 보이려 애쓰면서 그에게 들을 돌린 채 말했다. "웬 서류가 이렇게 많담! 이건 무슨 편지에요?" 인사로프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 편지들 말이오?" 그가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한 번 읽어 보구료." 옐레나는 손에서 편지를 뒤집었다. "편지는 이렇게 많은데 글씨가 너무 작네요. 전 곧 가야 하는데..... 그만두죠, 뭘! 라이벌에게서 온 것은 아니겠죠? 그런데 러시아 어로 씌어진 게 아니로군요." 그녀가 얇은 종이를 가리키면서 덧붙였다. 인사로프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어루만졌다. 그녀는 그에게로 몸을 홱 돌려 그에게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 편지는 불가리아에서 온 것이오, 옐레나. 날 오라고 친구들이 써 보낸 거요." "지금? 그 곳으로요?" "그래요, 지금. 아직 시간이 있으니 갈 수가 있을 거요." 별안간 그녀가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절 데려가시는 거죠?" 그는 그녀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오, 나의 사랑하는 아가씨, 오, 나의 히로인. 당신이 그런 말을 할줄이야! 하지만 집도 절도 없는 내가 당신을 데려간다는 건 옳지 않은, 지각없는 일이지 않소? 그리고 간다 한들 어디로?' 그녀가 그의 입을 막았다. "쉿... 제가 화나면 다신 오지도 않아요. 만사가 해결되지 않았나요, 우리 사이엔? 모든 일이 다 매듭지어지지 않았나 말예요? 전 당신의 아내가 아녜요? 아내가 남편과 떨어져 있어야 되는 건가요?" "아내들은 전쟁터에 가지 않는 거요."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건 그들이 남아 있을 때죠. 하지만 제가 과연 여기 남아 있을 수가 있을까요?" "옐레나 당신은 천사요!...그러나 생각해 보오. 난 두 주일 내로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대학 강의도, 하던 일을 끝내는 것도 이젠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오." "무엇 때문이죠?" 옐레나가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은 왜 그렇게 일찍 떠나야만 하죠? 하지만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저는 지금, 이 순간이라도 곧 여기 남아 영원토록 당신과 함께 있겠어요.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고요, 그럴까요? 지금 당장 떠나실래요, 그러실래요?" 인사로프는 더욱 힘을 주어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이 날 벌하실 거요." 하고 그는 외쳤다. "내가 나쁜 짓이라도 한다면! 오늘부터 우리는 서로가 영원히 결합된 거요." "남아 있을까요?" 옐레나가 물었다. "아니오, 나의 순진 무구한 아가씨, 아니오. 나의 보물,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시오. 그렇지만 준비는 하고 있도록 하오. 이건 이 자리에서 당장 결정할 문제가 아니오. 만사를 신중히 생각해야지. 돈이나 여권 같은 것도 필요하고..." "돈은 제게 있어요." 옐레나가 말을 가로막았다. "팔십 루불" "그건 많은 돈이 아니오" 인사로프가 말했다. "하지만 소용이 안 되지는 않을 거요." "돈은 더 마련할 수 있어요. 꾸든지, 어머니한테 부탁하든지...아니, 어머니한테는 부탁하지 않겠어요. 시계를 팔아도 되고요, 귀걸이도 있고, 팔지도 두 개... 레이스도 있거든요." "돈이 문제가 아니오, 옐레나, 여권, 당신의 여권, 그걸 어떻게 마련한단 말이오?" "그렇군요, 그걸 어떻게 마련하죠? 그런데 여권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건가요?" "말할 나위도 없지." 옐레나가 미소를 지었다. "제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제가 아직 어렸을 때라고 기억되는데, 우리 집에서 도망친 하녀가 하나 있었어요. 붙들려서 용서를 받고 우리 집에서 오래도록 살았는데....그렇지만 모두들 그녀를 '도망친 타치야나'라고 불렀어요. 그때 전, 저도 그녀처럼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옐레나, 부끄럽지도 않소!" "왜요, 물론 여권을 가지고 가는게 좋겠죠, 하지만 안 될 땐..." "그건 나중에, 후에 해결합시다. 조금만 기다려요." 인사로프가 말했다. "내게 시간을 좀 주시오. 생각 좀 해 보게. 정당한 방법을 생각해 보고 상의합시다. 돈은 내게도 있소." 옐레나가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오, 드미트리! 우리 둘이 여행하다니, 얼마나 즐거울까요!" "암" 인사로프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하는 그 곳은..." "뭐라고요?" 옐레나가 말을 가로막았다. "둘이서 죽는 것도 즐겁지 않아요? 하지만 죽긴 왜 죽어요? 우린 살거예요. 우린 젊어요. 당신 몇 살이죠? 스물 여섯?" "스믈 여섯." "전 스물이예요. 시간은 앞으로 얼마든지 있어요! 아! 당신은 제게서 도망하려 하셨죠? 불가리아 인인 당신에겐 러시아 인의 사랑은 필요없다는 거였죠! 한 번 생각해 봐요. 당신은 어떻게 제게서 벗어날 생각을 하셨는지! 만일 그 때 제가 당신께 가지 않았더라면 우린 어떻게 되었을까!" "옐레나, 어떤 힘이 날 멀리 떠나게 했는지 당신은 알 거요." "알아요. 당신은 사랑에 빠졌어요. 그래서 무서워진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정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어요?" "맹세코 옐레나, 눈치채지 못했소." 별안간 그녀가 재빠르게 그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에요. 그럼 안녕히." "좀더 있으면 안 되오?" 인사로프가 물었다. "아니에요, 드미트리, 전들 돌아가고 싶은 줄 아세요? 벌써 십오 분이 지난 걸요." 그녀는 망토를 걸치고 모자를 썼다. "내일 저녁 우리 집에 오세요. 아니, 모레 오세요. 힘들고 지루하겠지만 할 수 없어요. 어쨌든 만나게 되는 거니까. 안녕, 절 그만 놓아 주세요." 그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껴안았다. "아이! 이것 좀 보세요. 당신이 제 시계줄을 망가뜨렸어요. 아, 난 이렇게 재치가 없담! 하지만 괜찮아요. 잘 고칠 수 있으니까요. 쿠즈네츠키 다리를 지나는 길에 수리해 달라고 맡기지요. 만일 누가 물으면, 쿠즈네츠키 다리에 다녀왔다고 말하겠어요." 그녀는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참, 한가지 일러 드릴 것을 잊었군요. 아마, 쿠르나토프스키 씨가 며칠 사이에 제게 청혼을 할 거예요. 그럼 전 그에게, 이렇게 해 줄 작정이랍니다." 그녀가 왼손 엄지손가락을 코 끝에 대고 나머지 손가락들을 공중에다 흔들어 보였다. "안녕, 안녕히 계세요, 이젠 길도 알아요. 그러니까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옐레나는 문을 살짝 열고 귀를 곧추 세운채, 인사로프를 향해 고개를 까닥해 보이고는 방에서 살그머니 나갔다. 한동안 인사로프는 닫혀진 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마당 쪽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는 소파로 다가가 앉아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에겐 아직 한 번도 이 비슷한 일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내가 이런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게 꿈은 아닌가?' 그러나 옐레나는 그의 누추하고 어두컴컴한 방에 남겨 놓은 레제다(물푸레나무과에 속하는 식물의 이름)의 희미한 향기로 그녀가 왔다 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 향기와 함께, 젊은 목소리와 가벼운 발걸음 소리, 그리고 젊은 처녀의 몸에서 나는 온기와 싱싱함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인사로프는 좀더 결정적인 소식을 기다리기로 결심하는 한편, 출발준비를 시작했다. 그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혼자라면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권만 하나 신청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옐레나를 어떻게 한다? 합법적인 방법으로 옐레나의 여권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와 비밀리에 결혼한 다음, 부모에게 나타난다...그렇게 되면 그들도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겠지'하고 그는 생각했다. '만약 내버려 두지 않는다면? 그렇지만 우린 떠날 게 아닌가. 만일 그들이 고소를 한다면... 만일... 아니야, 어떻게든 여권을 얻도록 하는 편이 나아.' 그는 친지 가운데 하나인, 퇴직한 것인지 해직된 것인지 아리송한 검사(물론, 그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의 조언을 받기로 결심했다. 그는 나이가 지긋하고, 또 여러 가지 비공식적인 일에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 존경스런 사람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인사로프는 마차를 타고 터덜터덜 한 시간씩이나 달려가야 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의 보람도 없이 그는 집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몸이 흠뻑 젖었다. 이튿날 아침 인사로프는 머리가 지끈지끈 쑤시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퇴직 검사를 찾아갔다. 퇴직 검사는 풍만한 가슴을 가진 님프 그림이 장식된 담배통에서 담배 냄새를 맡으며, 또 담배빛이 감도는 교활한 작은 눈으로 방문객을 곁눈질해 보면서 그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 다 듣고 나자 그는 '사실을 좀더 명확히 설명해 달라.'고 했다. 인사로프가 자세히 말하기를 꺼리는 눈치를 알고서(인사로프는 마지못해 그에게 온 것이었다) 그는 우선 '노자'만 마련하라고 충고로 그쳤다. 그리고는 다음에 다시 한 번 들러 달라고 했다. "당신에게서 불신감이 없어지고 날 믿게 될 때" 하고 그가 뚜껑 열린 상자에서 담배 냄새를 맡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여권은" 하고 혼자말을 하듯 그는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인간이 하는 일인데 못할 것도 없잖소. 당신이 누구하고 가든, 예컨대, 마리야 브레지히나든 카로리나 포겔메이에르든(둘다 창녀들이 흔히 쓰는 이름)누가 알겠소?" 인사로프는 혐오감이 와락 치밀었으나, 검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며칠 내로 다시 들르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저녁, 그는 스타호프 가를 찾아갔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그를 친절히 맞았다. 그가 그들을 아주 잊어버린 줄 알았다고 꾸짖지까지 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창백한 것을 보고는 건강이 어떠냐고 물었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그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않고 무관심한 체하며 호기심을 가지고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슈빈은 그에게 냉정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옐레나였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위하여 그들이 처음 예배당에서 만났던 그 날 입었던 옷을 입고서.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 조용히 그를 맞았고, 너무나 친절하고 명랑해서,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 어느 누구도 그 처녀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어떤 은밀하고 행복한 사랑의 인식이 그녀의 얼굴에 생기를 주고,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경쾌함과 매력을 부여한다는 것도. 그녀는 조야대신 차를 따르기도 하고 농담도 하면서 줄곧 지껄였다. 그녀는 슈빈이 자기의 거둥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인사로프가 가면을 쓸 줄 몰라 무심한 척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미리 방어선을 친 것이었다. 그녀의 생각은 들어맞았다. 슈빈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인사로프는 입을 꼭 다물고 저녁 내내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옐레나의 행복감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를 골려 주고 싶어졌다. "그녀 계획은 어떻게 되어 가고 계신가요?" 그녀는 불쑥 이렇게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인사로프는 당황하였다. "무슨 계획 말입니까?" 하고 그는 말하였다. "잊어버리셨어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고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 혼자만이 그 행복한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러시아 인들을 위한 당신의 불가리아 선문 독본 말이에요?" "무슨 짓들이야."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조야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옐레나는 남들이 알아볼 수 없게 어깨를 으쓱하고 나서 인사로프에게 문 쪽을 눈짓해 보였다. 그에게 집으로 가라는 듯. 그런 다음 그녀는, 적당한 간격을 두고 두 번 탁자를 손가락으로 치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긍게 이틀 후에 만나자고 한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가 눈치를 알아챈 것을 알고 가만히 미소를 보냈다. 인사로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침 그때 쿠르나토프스키가 나타났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뛰어오를 듯이 몸을 일으키더니, 오른손을 머리보다 더 높이 올렸다가 서기장의 손바닥에 부드럽게 얹었다. 인사로프는 자기의 경쟁자를 보기 위해 조금 더 지체했다. 옐레나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고, 주인이 그들을 서로 소개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같아, 인사로프는 옐레나와 마지막으로 시선을 주고받고 나서 그 집을 떠났다. 슈빈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쿠르나토프스키와 법률 문제를 놓고 공방전을 벌였다. 인사로프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서 아침엔 기분이 좋지 못했다. 그러나 서류를 정리하고, 편지도 몇 통 썼다. 머리가 무겁고 웬지 어찔어찔했다. 점심땐 열이 나 전혀 먹을 수가 없었다. 저녁때가 되자 열이 더 심해지더니 사지가 쑤시고 머리가 깨지는 듯했다. 인사로프는 며칠 전에 옐레나가 앉았던 바로 그 소파에 누워 있었다. '나는 벌을 받아야 마땅해. 어쩌자고 그 늙은 협잡꾼을 찾아갔담.'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는 잠을 이루려 애를 썼으나 이미 병색이 그를 엄습해 들었다. 혈관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고, 피가 뜨겁게 타올랐으며, 생각들은 새들이 맴돌 듯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는 인사불성이 되었다. 암살당한 것처럼 그의 얼굴을 위로 한 채 똑바로 누워 있었는데, 누군가가 자기 머리맡에서 조용히 웃으며 속삭이는 것 같은 착각이 별안간 그에게 일었다. 그가 가까스로 눈을 뜨자, 타던 촛불의 빛이 칼처럼 그의 눈을 찌르는 것이었다. 이게 뭐지? 전날 밤 그가 보았던 대로 명주띠를 허리에 두르고 타르마람풍의 헐렁하고 긴 동양풍의 상의를 입은 늙은 검사가 그 앞에서 있었다. "카로리나 포겔메이에르." 하고 이빨 빠진 입이 중얼거렸다. 인사로프가 바라보자, 노인은 차츰 넓어지고 부풀고 커져, 이젠 사람이 아니라 나무로 변해 인사로프는 가파른 나뭇가지를 기어올라야만 했다. 그는 간신히 나뭇가지에 매달렸다가 그만 뾰족한 돌에 떨어져 가슴을 다치고 말았다. 카로리나 포겔메이에르는 장사치의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피로그(러시아식 만두)요, 피로그, 피로그." 라고 지껄여대고 있었다. 저쪽에선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고, 칼날들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번쩍이고 있었으며...옐레나! ...그러다 모든 것이 검붉은 혼돈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대장장이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자가 찾아와 뵙겠다는뎁쇼." 하고 다음날 저녁 그의 하인이 베르셰네프에게 말했다. 이 하인은 주인을 대하는 엄격한 태도와 의심 많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들여보내." 베르셰네프가 말했다. '대장장이'가 들어왔다. 베르셰네프는 그가 인사로프가 살고 있는 집주인인 재단사임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그는 재단사에게 물었다. "도와 주십사 하고요." 재단사는 입을 열었다. 천천히 다리를 이쪽 저쪽으로 옮기면서, 또 이따금 끝 손가락 세 개로 붙잡은 소매깃과 함께 오른 손을 흔들면서, "우리 집에 하숙하고 있는 분ㅇ, 성함은 모르겠지만, 굉장히 앓고 계십니다." "인사로프가?" "네 바로 그분입니다. 글쎄, 어제 아침만 해도 멀쩡하던 분이 저녁에 마실 것을 좀 달라기에 우리 안 사람이 물을 갖다 드렸지요. 그런데 밤이 되자 헛소리를 하지 뭡니까.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우리에게 다 들리지요. 오늘 아침에는 이미 말도 못하고 실신 상태에 빠져 있는데, 그 열은 또 맙소사! 제 소견으로는 그 분이 돌아가실 것만 같아서, 경찰서에라도 알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답니다. 그 분은 혼자 몸이시잖아요. 그런데 안사람이 '별장에 함께 세들어 있던 그 분을 찾아가 봐요. 아마 무슨 방도를 일러 주거나, 아니면 직접 올지도 몰라요'하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제게 도움을 청하러 이렇게 왔습니다. 우리는 어쩔 도리가 없어서, 말하자면..." 베르셰네프는 모자를 집어들고, 재단사의 손에 1루블을 쥐어 주고는 곧 그와 함께 인사로프의 하숙으로 마차를 몰았다. 그는 옷을 입은 채 의식을 잃고 소파에 드러누워 있는 인사로프를 발견했다. 인사로프의 얼굴은 무섭게 변해 있었다. 베르셰네프는 즉시 하숙집 주인 내외에게 그의 옷을 벗겨 침대로 옮겨 눕히라고 이르고, 자신은 의사를 부르러 뛰어나갔다. 의사는 곧 방혈에 쓰는 의료용 거머리, 고약, 그리고 감홍(설사약)을 처방해 주고, 방혈을 하도록 지시했다. "위독합니까?" 베르셰네프가 물었다. "네, 대단합니다." 의사가 대답했다. "악성 폐렴이에요. 염증이 급속히 퍼져, 어쩌면 뇌에까지 침범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젊은 사람이니까 환자의 기력이 병을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진작 의사를 부를 일이지, 좀 늦은 감이 있습니다. 아무튼 과학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지요." 의사 자신도 아직 젊어서 과학을 신봉하고 있었다. 베르셰네프는 밤새 인사로프의 곁에 있었다. 주인 내외도 선량하고 민첩한 사람들이어서,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척척 해 냈다. 조수가 오자 치료가 시작되었다. 아침녘에 인사로프는 잠깐 정신이 들어 베르셰네프를 알아보고는, "내가 어디 아픈가?" 하고 물었다. 그리고는 빛을 잃고 흐릿한 눈을 들어 의혹감을 가지고 주변을 힘들게 둘러보더니, 다시 의식을 잃었다. 베르셰네프는 집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책 몇 권을 꾸려 인사로프의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적어도 처음 얼마 동안은 인사로프의 집에 머믈 작정이었다. 그는 인사로프의 침대를 병풍으로 둘러 막고, 소파 곁에 자신이 앉을 만큼의 자리를 잡았다. 날은 지루하고 더디게 갔다. 베르셰네프는 식사할 때에만 자리를 떴다. 저녁이 되었다. 그는 갓 쒸운 데에 촛불을 켜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벽 하나 사이에 둔 주인 내외의 방에서 조심스런 속삭임 소리, 하품 소리, 한숨 소리 등이 들려왔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재채기를 하자 낮은 소리로 나무라기도 했다. 병풍 뒤에선 무겁고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들려왔는데, 간혹 가다 짤막한 신음 소리와 베개 위에서 힘들게 머리를 돌려 눕는 소리 때문에 끊기기도 하였다. 베르셰네프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옐레나가 되어, 사랑하는 (그는 이걸 알고 있었다)사람의 방에 와 있는데, 그 사람의 목숨이 위기일발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그는 슈빈이 그를 쫓아와 그녀가 그를, 베르셰네프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선언을 하였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은....'이제 어떻게 한다?'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옐레나에게 그가 아프다는 걸 알려야 하나, 아니면 좀더 기다려 볼까? 이건 언젠가 내가 그녀에게 알렸던 것보다 더 슬픈 소식인데. 운명은 나를 그들 사이의 제삼자로 세웠다. 이 얼마나 야릇한가! 그는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고 결정했다. 그의 눈길이 서류더미로 덮여 있는 책상에 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시행할 수 있을는지? 베르셰네프는 생각했다. '만사가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그러자 꺼져 가는 생명이 애처롭게 여겨졌다. 그래서 그는 그 생명을 구하리라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하룻밤을 지내기는 여간 고통스런 일이 아니었다. 환자는 여러 번 잠고대를 해 댔다. 베르셰네프는 소파에서 몇 번이고 일어나 발끝으로 침대 곁에 다가가서 슬픈 마음으로 더듬거리는 그의 헛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한 번은 인사로프가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발음했다. "난 바라지 않소. 바리지 않으니 당신이 그런 짓을 해서는 절대 안되오..." 베르셰네프는 몸을 부를 떨며 인사로프를 바라보았다. 고통스럽고 죽은 듯이 창백한 그의 얼굴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고, 두 팔은 축 늘어져 있었다. "난 원치 않아." 그는 들릴락말락하게 되풀이했다. 아침 일찍 의사가 왔는데, 그는 머리를 흔드러 보이면서 새로운 약을 처방해 주었다. "위험한 고비를 넘기려면 아직 멀었소." 의사는 모자를 쓰며 말했다.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요?" 베르셰네프가 물었다. "위험한 고비가 지나면요? 두 가지 결과가 있을 수 있겠죠. 황제가 아니면 무가 되겠지요." 의사는 떠났다. 베르셰네프는 몇 번이나 거리를 왔다갔다했다. 그에게도 신선한 공기가 필요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돌아와 책을 붙들었다. 라우머는 벌써 오래 전에 끝내고 지금은 그로우트(그리스 역사)를 쓴 영국의 역사가를 연구하는 중이었다. 별안간 문이 조용히 삐걱거리더니, 여느때처럼 두꺼운 수건을 쓴 주인집 딸의 조그마한 머리통이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이밀어졌다. "여기" 소녀가 목소리를 낮추어 가만히 말했다. "전에 내게 십 카페이카를 주었던 그 아줌마가 왔어요." 주인 집 딸의 머리가 갑자기 사라지더니, 그 자리에 대신 옐레나의 모습이 나타났다. 베르셰네프는 무엇에 찔리기나 한 듯이 벌덕 일어났다. 그러나 옐레나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이 멈춰 서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단 번에 모든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려 병풍 쪽으로 다가가 뒤를 넘겨다보더니 깜짝 놀라며 한동안 돌처럼 굳어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가 인사로프에게 달려들었으므로 베르셰네프는 그녀를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슨 짓입니까?"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가만히 말했다. "죽이고 싶으세요." 그녀는 머뭇머뭇 뒤로 물러섰다. 그는 그녀를 소파로 데리고 가 앉혔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그의 눈길을 피해,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그이는 죽나요?" 그녀가 너무도 냉정하고 침착하게 물어서, 베르셰네프는 흠칫 몸소리를 쳤다. "어쩌면....옐레나 니콜라에브나." 하고 그가 말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가 아픈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퍽 위험합니다...하지만 우리는 그를 구해 낼 겁니다. 이건 제가 당신께 보증할 수 있습니다." "의식이 없나요?" 그녀는 처음과 똑같은 어조로 물었다. "그래요, 지금 그는 의식을 잃고 있어요. 이런 병의 초기에는 으레 그렇답니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제가 장담하죠. 물 좀 마시지요." 그녀가 그를 향해 눈을 들었다. 그제서야 그녀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만일 그가 죽는다면." 그녀는 여전히 아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역시 죽을 겁니다." 그 때 인사로프가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자기 머리를 감싸 쥔 다음, 모자의 리본을 풀기 시작했다. "뭘 하시려고 그럽니까?" 베르셰네프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뭘 하시렵니까?" 그가 되풀이했다. "제가 여기 남아 있겠어요." "얼마나...오래도록?" "모르겠어요, 하루 종일일 수도, 하룻밤 내내일 수도, 아니면 영원일는지도... 몰라요." "제발,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정신을 차리십시오. 물론, 전 여기서 당신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아무튼, 잠깐 들르실 작정으로 여기 오신 거겠죠. 집에서 당신을 붙잡으려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셔야지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을 찾을 것이고, 당신을 찾아 내면..." "그러면요?"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당신은 아실 겁니다. 그는 지금 당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손수건을 입술로 가져다 댔다. 그러자 경련과 같은 흐느낌이 놀랄 만한 힘을 가지고 그녀의 가슴에서 갑자기 내뿜어졌다. 그녀의 얼굴을 소파에 파묻고 진정하려고 애썼지만, 그녀의 몸은 온통 들먹거리고 있었다. 마치 막 붙잡힌 새처럼.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제발...." 하고 베르세네프는 그녀에게 되뇌고 있었다. "응? 뭐라구?" 별안간 인사로프의 목소리가 울렸다. 옐레나는 꼿꼿이 몸을 일으켜 세웠고, 베르셰네프는 못박힌 듯이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침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인사로프의 머리는 조금 전과 다름없이 힘없이 베개에 뉘어 있었고, 두 눈은 감겨 있었다.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나요?" 옐레나가 속삭였다. "그런 모양입니다." 베르셰네프가 대답했다. "하지만 괜찮아요. 자주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만일 특별히..." "언젠부터 앓았나요?" 옐레나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저께부터요. 전 어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제게 맡겨 주십시오.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제가 그를 그냥 놓아 두겠습니까?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해 볼 겁니다. 필요하다면 다시 의사를 부를 거고요." "제가 없으면 저 분은 죽을지도 몰라요." 그녀는 두 손을 비비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병의 경과는 매일 알려드릴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정말로 위독해지면." "그 땐 밤이건 낮이건 상관없이 곧 사람을 보내 주세요. 제게 직접 쪽지를 써 보내 주시면....전 이제 아무래도 좋아요. 제 말 듣고 계신가요? 약속해 주시겠어요?" "약속하리다, 하느님 앞에." "맹세하세요." "맹세합니다." 별안간 그녀는 그의 손을 붙잡고, 그가 마치 손을 빼기 전에 입을 맞추었다.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는 더듬거렸다. "아니, 아니....안돼." 인사로프가 이렇게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더니 깊은 숨을 내쉬었다. 옐레나는 병풍 있는 데로 다가가 입에 손수건을 문채, 오래오래 환자를 지켜보았다. 눈물이 그녀의 뺨을 소리없이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베르세네프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는 곧 의식을 되찾아 당신을 알아볼 겁니다. 그게 좋은 징조인지 어떤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테지만, 게다가 전 지금 의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옐레나는 소파에서 모자를 집어 머리에 쓰고는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이 방 안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 품이, 기억에 새겨 두려는 눈치 같았다. "전 갈 수 없어요." 그녀가 한참 만에 이렇게 중얼거렸다. "힘을 내십시오." 그가 말했다. "진정하세요. 그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오늘 저녁 댁으로 찾아가 뵙겠습니다." 옐레나는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오, 나의 선량한 친구!" 하고 말하고는 흐느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베르셰네프는 문간에 기대어 섰다. 어떤 묘안 위안감 같은 게 남아 있는 슬프고도 괴로운 감정이 그의 가슴을 눌렀다. '나의 선량한 친구!'그는 이런 생각을 하고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거기 있는게 누구야?" 하는 인사로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베르셰네프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날세, 드미트리 니카노르이치. 왜 그러는가? 기분은 좀 어떤가?" "혼자인가?" 환자가 물었다. "혼자지." "그녀는" "그녀라니 누구 말인가?" 베르셰네프는 거의 놀라다시피 말했다. 인사로프는 가만히 있었다. "레제다 말이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두 눈이 다시 감겼다. 인사로프는 여드레 동안 생과 사의 갈림길을 헤매었다. 의사는 계속 해서 와 주었다. 젊은 사람이라 오히려 난치 환자에게 흥미가 있는 듯했다. 슈빈은 인사로프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 인사로프의 동포들, 불가리아 인들도 얼굴을 내밀었다. 그 중에는, 뜻하지 않게 별장으로 찾아와 베르셰네프를 놀라게 했던 두 험상궂은 사나이도 섞여 있었다. 모두들 진심으로 동정을 표했고, 어떠 이들은 베르셰네프 대신 자기들이 자리를 지키겠다는 제의까지 했다. 그러나 베르셰네프는 옐레나에게 한 약속을 떠올리고 이 제의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같이 은밀하게 그녀를 만나 병세를 아주 상세히 전해 주었다. 때로는 말로, 또 때로는 조그만 쪽지에 적어. 그녀는 얼마나 가슴 졸이며 그를 기다렸고, 얼마나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질문하고 하였던가! 그녀는 자신이 인사로프 곁에 있겠노라고 애원했으나 베르셰네프는 번번이 이를 말리곤 했다. 인사로프가 혼자 있는 일은 드물었다. 그녀는 인사로프가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첫날, 그녀 자신도 하마터면 아플 뻔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버렸다. 저녁 식사 시간이라고 불러 식당에 내려갔더니,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그녀를 침대에 눕히려고 했다. 그러나 옐레나는 자신을 이겨 낼 수가 있었다. '만일 그가 죽는다면'하고 그녀는 되뇌었다. '나도 죽을 거야'이렇게 생각하자 그녀에겐 그 누구도 그녀를 별로 걱정하질 않았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치염증을 앓고 있었고, 슈빈은 미친 듯이 일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야는 우울증에 빠져 <베르테르>를 읽으며, 위안을 삼으려 했고,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학자'의 잦은 방문이 몹시 불만이었다. 더구나 쿠르나토프스키에 관한 그의 '계획'이 별 진척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인 서기장은 의혹을 품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옐레나는 베르셰네프조차 고맙지가 않았다. 고맙다고 하기가 무섭고 부끄러울 만큼의 친절이었다. 딱 한 번, 그와 네 번째 만났을 때(인사로프가 밤새 몹시 상태가 좋지 않아 의사가 계속 지켜보았음을 암시했다)그녀는 그에게 그가 한 맹세를 깨우쳐 주었을 뿐이었다. "자, 그렇다면 같이 가시죠." 하고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가 일어나 옷을 입으러 가려 하자, "아닙니다. 내일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고 그는 말했다. 저녁 무렵, 인사로프의 병세는 약간 차도가 있어 보였다. 여드레 동아 그런 고통이 계속되었다. 옐레나는 한시름 놓은 듯했으나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고, 밤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팔다리가 몹시 쑤시고, 메마르고 뜨거운 김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우리 아가씨는 초처럼 녹아 없어지려나봐." 하녀가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마침내 아흐레째 되던 날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옐레나는 응접실에서 안나 바실리예브나에게 '모스크바 통보'를 읽어 주고 있었다. 베르셰네프가 들어섰다. 옐레나는 그를 한 번 흘끗 보고는 (그녀가 매번 그에게 던지는 첫 시선은 얼마나 재빠르고 수줍고 통찰력이 있으며 걱정스러운 눈초리였던가) 그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고개를 약간 끄덕여 보였다. 그녀는 그를 맞으러 몸을 일으켰다. "의식을 회복했어요. 위험한 고비는 넘긴 거죠. 일주일만 지나면 완쾌될 겁니다."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옐레나는 충격을 막으려는 듯, 두 팔을 뻗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고, 그녀의 온 얼굴에 선홍색이 넘펴 흘렀다. 베르셰네프가 안나 바실리예브나에게 말을 건네자, 옐레나는 자기 방으로 올라와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가볍고 밝은 눈물이 눈에서 흘러내렸다. 그녀는 별안간 자신이 극도로 지쳐 있다고 느껴져 베개에 머리를 뉘면서, "가엾은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금방, 속눈썹과 뺨이 젖은 채로 잠이 들어 버렸다. 그녀는 오래간만에 잠도 자고, 울 수도 있었던 것이다. 베르셰네프의 말은 일부분만 들어맞았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나 인사로프의 건강은 더디게 회복되었다. 의사는 그가 전체적으로 매우 심하게 쇠약해져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침대를 버려 두고 방 안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베르셰네프는 자기 집으로 옮겨 갔으나, 아직 기력을 찾지 못한 친구에게 매일같이 들렀고, 또 전처럼 매일같이 그의 건강 상태에 대해 옐레나에게 알려 주곤 했다. 인사로프는 그녀에게 편지를 쓸 수가 없어, 베르셰네프는 짐짓 무관심한 척하면서, 그에게 자기가 스타호프 가를 방문한 이야기를 해 주곤 하였다. 옐레나는 깊은 비탄에 잠겼으나, 이젠 안정을 찾았다는 것을 그에게 암시해 주려고 애썼다. 옐레나는 역시 인사호프에게 편지를 쓰지는 않았다. 그녀는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베르셰네프가 즐거운 얼굴로 그녀에게, 의사가 인사로프에게 커틀릿을 먹어도 좋다고 허락했으며, 이제 곧 외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해 주자, 그녀는 생각에 잠겨 눈을 내리까는 것이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하실 수 있으신가요?" 그녀가 말했다. 베르셰네프는 당황했다.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는 시선을 한쪽으로 보내면서 대답했다. "그를 만나려 한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거겠지요." 옐레나는 얼굴을 붉히며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그렇게 하죠, 뭐. 제 생각으론 그건 당신에게 아주 쉬운 일입니다." '아! 내 가슴 속엔 얼마나 추악한 감정이 들어 있는가!' "당신은 제가 이미 거기 가 본 적이 있다는 말씀을 하고 싶은 게죠." 옐레나가 말했다. "하지만 전 두려워요. 지금 그는 혼자 있는 적이 드물다고 당신이 말씀하셨잖아요." "그건 어렵지 않게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베르셰네프는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물론 제가 그에게 예고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제게 편지를 주세요. 당신이 잘 아는 사람인 그에게 쓰는 걸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라면 관여할 수 있으시겠어요? 비난받을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에게 날짜를 알려 주십시오. 당신이 언제 갈 것인가를 그에게 쓰시라는 겁니다." "부끄럽군요." 옐레나가 속삭였다. "편지를 주세요. 제가 갖다 주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제가 당신께 부탁드리고 싶은 건, 제게 화내시지는 마세요.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내일 그에게 가시지 말아 줬으면 하는 것입니다." 베르셰네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 네,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렇게." 그리고는 두어 마디 덧붙이고 나서는 곧 그 집을 물러나오고 말았다. 잘 됐어. 그 편이 나아.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면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새로운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잘 되었어. 남의 둥지 주변을 빙빙 돌아보았자 무슨 낙이 있겠는가? 후회랄 건 하나도 없다. 양심이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그러나 이젠 그만두어야지. 그들에게 맡겨 놓아야지! 아버지 말씀이 옳았어. 얘야, 우리는 시발리스 사람도, 귀족도, 운명과 자연의 총아도 아니다. 그렇다고 순교자는 더욱 아니다. 우린 노동자, 노동자, 노동자일 따름이다. 노동자여, 가죽으로 된 앞치마를 두르고, 컴컴한 제작소의 현장 노동자가 되어라. 태양은 다른 사람에게나 비치게 하자! 우리 같은 응달진 인생에도 자부심과 행복이 있느니라!' 이튿날 아침, 인사로프는 시내 우편으로 짤막한 편지를 받았다. '절 기다려 주세요.'하고 옐레나가 그에게 쓰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거절해 주세요.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는 오지 않을 거예요.' 인사로프는 옐레나의 편지를 읽고 곧 자기 방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주인 집 여자더러 약병들을 치워 달라고 부탁하고 나서 헐렁한 실내복을 벗고 플록코트를 입었다. 기쁨으로, 또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어서 머리가 아찔아찔하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소파에 푹 파묻혀 시계를 쳐다보았다. 지금이 11시 45분 하고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12시 건에는 보지 못할 테니, 15분 동안 다른 일을 생각해 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난 견뎌 내지 못할 거야. 절대 12시 전에는 올 수 없을 테니....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더니 얇은 실크 원피스를 입은 옐레나가 뛰어들어왔다. 생기를 잃지 않은, 젊음과 행복이 넘쳐 흐르고, 그녀는 가냘픈 기쁨의 환성을 지르며 그의 가슴에 안겼다. "살아나셨군요. 당신은 제 것이에요." 그의 머리를 껴안고 애무하면서 그녀는 이렇게 되뇌었다. 그는 그녀의 손이 자기 몸에 닿자 행복감으로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의 곁에 앉아 그에게 몸을 기대고 사랑하는 여인의 눈에서만 빛날 수 있는 그런 부드러운 미소를 띤 눈길로 그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굴이 갑자기 흐려졌다. "너무 야위셨군요. 가엾은 드미트리." 그녀는 손으로 그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수염도 이렇게 자라고!" "당신도 야위었군, 가엾은 옐레나!" 그는 그녀의 손가락에 키스를 하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쾌활하게 고수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건 상관없어요. 두고 보세요. 우린 곧 회복될 테니! 우리가 예배당에서 만났던 그 날처럼 폭풍우는 왔다가 지나가 버렸어요. 이제 우린 살아난 거예요!" 그는 대답 대신 그냥 웃기만 했다. "아, 그 날들이란, 드미트리, 얼마나 잔인한 날들이었던가요! 사람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얼마나 걱정하는 걸까요? 전 매번 안드레이 페트로비치가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미리 알았는데, 들어맞았어요. 저의 목숨은 당신에게 달려 있었으니까요. 안녕하세요, 드미트리!" 그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끓고 싶었다. "제가 알아챈 건 더 있어요."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 말을 계속했다. "한가로울 때에 전 여러 가지 비난을 했어요. 사람이 아주 불행할 때에는 아주 어리석은 관심을 가지고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시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맞아요. 전 이따금 파리를 들여다보곤 했는데, 그럴때면 마음이 얼마나 차갑고 무서워지던지! 하지ㅏ 그런건 다 흘러갔어요. 그렇지 않아요? 앞으로는 모든 게 밝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내 앞엔 당신만이 있을 뿐이오." 이사로프가 대답했다. "내게는 당신만이 밝을 뿐이오." "저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당신 방에 마지막으로 왔던 그 때를 기억하시는지요? 아니 마지막이 아니고." 하고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면서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제가, 그 이유는 저 자신도 모르겠지만, 죽음에 대한 말을 했었죠. 그 땐 저도 죽음이 우리를 지키고 있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었는데. 하지만 이제 당신은 다 나았지요?" "훨씬 좋아졌소. 거의 다 나았어요." "당신은 다 나으셨어요, 당신은 죽지 않았어요. 오, 난 얼마나 행복한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옐레나." 인사로프가 그녀를 불렀다. "왜요, 드미트리?" "내가 병에 걸린 것이 우리에게 내려진 형벌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소?" 옐레나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한 번 힐끗 쳐다보았다. "그런 생각은 저도 한 적 있어요. 드미트리, 하지만 전 생각했어요. 무엇 때문에 제가 벌을 받아야 하는가고요? 제가 무슨 빚을 졌단 말인가, 법을 어겼단 말인가? 아마, 제 양심이 다른 사람의 것 같지가 않은지 아무 말이 없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아마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던가요? 제가 당신을 방해했으니까요. 제가 당신을 말렸으니까...." "당신이 날 말린 게 아니오, 옐레나. 우린 함께 가는 거요." "그래요, 드미트리, 우리 함께 가요. 전 당신의 뒤를 따르겠어요.... 그게 제 의무예요. 전 당신을 사랑해요. 그 밖의 다른 의무 같은 건 전 몰라요." "오, 옐레나!" 인사로프가 말했다. "당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날 사슬로 꽁꽁 묶어 놓고 있소!" "어째서 사슬이라는 말을 하시는 거죠?" 그녀가 말을 받았다. "당신과 전 자유인이에요. 그래요." 그녀는 생각에 잠겨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한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전요, 근래에 많은 걸 느꼈어요.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을 말예요! 만일 제가, 좋은 교육을 받은 처녀가, 이것저것 핑계를 꾸며대고 혼자 집을 나와 젊은 남자의 하숙집에 갈 거라고 누군가가 예언했다면 얼마나 화를 냈을까요. 그런데 이제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전혀 화가 나질 않아요. 맹세코!" 그녀는 그렇게 덧붙이고는 인사로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너무나 존경의 빛이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그의 머리에서 그의 눈으로 손을 가만히 내렸다. "드미트리"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제가 저기 저 무시무시한 침대에 있는 당신을 보았다는 걸. 전 당신이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는 걸 보았어요." "당신이 날 보았다고?" "네" 그는 잠시 침묵하였다. "베르셰네프도 여기 있었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로프는 그녀에게 몸을 기대었다. "오, 옐레나!" 하고 그는 속삭였다. "당신을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소." "왜요?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는 아주 선량한 사람이에요! 전 그 사람을 꺼리지 않았어요. 제가 꺼릴 게 무어 있겠어요? 제가 당신 것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공표할 준비가 된 걸요. 저는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를 형제처럼 믿고 있어요." "그가 날 구했다오!" 인사로프가 소리질렀다. "그는 누구보다도 고결하고 선량한 사람이오!" "네...제가 그 사람한테 얼마나 많은 신세를 졌는지 아실는지요? 당신이 절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제게 처음으로 전해 준 사람도 바로 그라는 건 모르셨죠? 모든 걸 다 털어놓을 수 있었으면...그래요, 그는 가장 고결한 사람이에요." 인사로프는 옐레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는 거요, 그렇지 않소?" 옐레나는 눈길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는 절 사랑했었어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인사로프는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오, 당신들 러시아 인들은." 그가 말했다. "황금 같은 마음씨를 지녔소! 그는 날 간호해 주었소. 밤에 잠도 자지 않고... 그리고 당신, 당신의 나의 천사요. 비난하거나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이 모든 게 내겐, 내게는..." "네, 그래요. 그건 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아, 드미트리! 참 이상도 하지요! 전에도 이런 말을 한 기억이 있는데, 하지만 상관 없어요. 전 되풀이하는 게 즐겁고, 당신도 듣기가 즐거울 테니까. 제가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아니, 당신 울고 있지 않소?" 인사로프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제가요? 눈물을요?"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오, 어리석기도! 행복하기 때문에도 운다는 걸 남자들은 몰라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거예요. 제가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전 당신에게서 특별한 점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정마이에요. 제 기억으로는, 처음엔 슈빈이 훨씬 더 맘에 들었어요. 그를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말에요. 그리고 안드레이 페트로비치에 관해선. 오! 바로 그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렇지만...잠시 후...잠시 후...당신은 제 가슴을 두 팔로 감싸고 말았으니!" "날 용서하오." 인사로프가 말했다. 그는 일어서려 했으나 이내 소파에 주저앉고 말았다. "왜 그러세요?" 옐레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그저 아직 기력이 회복되지 않은 모양이오. 이 행복이 나의 힘에 너무 벅찬 게지." "그렇다면 가만히 앉아 계세요. 움직이지 마시고. 결코 흥분해서는 안돼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에게 위협하는 시늉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실내복은 왜 벗어 버리셨어요? 아직 그런 데에 신경을 쓰긴 일러요! 앉아만 계세요. 이야기는 제가 할 테니까. 아무 말씀도 말고 그냥 듣기만 하세요. 앓고 난 후에 말을 많이 하는 건 해로운 일이에요." 그녀는 그에게 슈빈이 관한 이야기며 쿠르나토프스키에 관한 이야기, 지난 두 주일 동안 그녀가 무슨 일을 했었나 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또, 신문 보도에 따르면 전쟁은 불가피하므로, 그가 완쾌되면 지체없이 곧 출발할 방도를 강구하자는 말도 했다. 그녀는 그 모든 이야기를 그와 나란히 앉아서 그의 어깨에 기댄 채 하였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때로는 창백해지기도 하고 붉어지기도 하며 들었다. 몇 번이고 그녀의 이야기를 중단시키려고 하다가는 별안간 자세를 바로잡곤 했다. "옐레나" 하고 그는 이상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날 이대로 내버려 두고 떠나 주오." "뭐라구?" 그녀는 깜짝 놀라 이렇게 말했다. "당신 기분이 언짢으신가요?' 그녀는 이어 덧붙였다. "아니오. 내 기분은 괜찮소. 하지만, 제발 날 좀 내버려 두시오."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당신이 절 내쫓다니요? 무슨 짓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거의 엎드리다시피하고 그녀의 발에 키스했다. "이러지 말아요, 드미트리, 드미트리." 그는 일어났다. "날 그냥 내버려 두란 말이오! 옐레나, 당신도 알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앓을 때 금방 의식을 잃은 건 아니었소. 내가 파멸로 이르고 있다는 걸 알았소. 열이 올라 헛소리를 하면서도 죽음이 내게로 오고 있다는 걸 막연히 느껴, 인생과 당신과 그 밖의 모든 것에 작별을 고하고, 희망과도 결별하고...그런데 별안간 재생의 희망을 되찾았어요. 암흑 뒤에 찾아온 이 광명, 당신, 당신이....내 곁에 있소. 당신의 목소리가, 당신의 숨결이 내 귓가에 있으니.... 이건 내게 너무 벅차오! 내가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소. 당신이 스스로 자신을 내 것이라고 부르는 말까지 듣고도, 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그러니 그만 가 주오!" "드미트리!" 옐레나는 속삭이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다. 그녀는 이제서야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옐레나"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을 사랑하오.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을 거요. 하지만, 이처럼 몸이 쇠약하고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는 지금, 나의 피가 온통 들끓고 있는 지금, 어째 당신은 내게 왔소? 당신은 당신이 내 것이라고 말하였소.... 당신이, 당신이 날 사랑한다고도..." "드미트리." 그녀는 이 말만을 되풀이하며 얼굴이 온통 붉어지면서 몸을 그에게 더욱 가까이 밀착시켰다. "옐레나, 날 가엾게 생각하여 떠나가 주오. 난 죽을 것만 같소. 이런 충동을 참아 낼 수가 없소. 내 마음은 온통 당신에게로 향해 있소....생각해 보오. 죽음조차도 우리를 갈라 놓지 못하지 않았소? 지금 당신은 여기 내 팔에 안겨 있소, 옐레나...." 그녀는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럼 절 가지세요."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속삭였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자기 서재를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슈빈은 두 다리를 포개고 창가에 앉아 조용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제발, 이 구석 저 구석 걸어 다니는 것 좀 그만두시죠." 그가 담뱃재를 털어 내면서 말했다. "무슨 말씀이 있으실 줄 알고 지금까지 기다리며 아저씨 뒤만 쫓았더니 목이 다 아픕니다. 게다가 아저씨가 걸어다니시는 품이 어딘가 긴장되어 있고, 멜로드라마 같은데가 있단 말예요." "자넨 늘 익살맞은 소리만 해 대는군."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대답했다. "자넨 내 입장에 처하고 싶지 않을 걸세. 나는 그 여자에게 습관이 된 나머지, 그녀에게 애착을 느끼고 있어. 그녀가 가고 없으면 얼마나 괴로울지 난 알고 싶지도 않을 거야. 벌써 시월이니, 겨울도 곧 앞에 닥쳤고....레벨에 가서 무얼 하겠단 얘긴지?" "아마, 자기 양말이나 뜨겠죠. 아저씨 양말이 아닌 자기 양말을 말입니다." "비웃어도 좋아. 마음껏 비웃게나. 난 그런 여자를 본 적이 없어. 그 정직함, 그 사심 없음..." "그 여자가 어음 지불 요구 소송이라도 냈나요?" 슈빈이 물었다. "그 사심 없음은." 목소리를 낮추며,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되풀이했다. "놀랄 정도야. 사람들은 내게 말하겠지. 세상엔 다른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그럼 난 이렇게 말할 거야. 그 여자들을 내게 보여 줘, 그 여자들을 내게 보여 달라고 말이야. 그 여자들을 내게 보여 달라! 그런데 편지 한 장 없으니, 이건 생사람을 잡는 거야!" "아저씨는 피타고라스 만큼이나 능변이군요." 슈빈이 한 마디 퉁겨 주었다. "그런데, 저 제가 충고 한 말씀드릴까요?' "무슨?" "아브구스치나 흐리스치아노브나가 돌아오면....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시겠어요?" "그래, 뭔가?" "그 여자를 만나시거든...제 생각의 전개를 주시하고 있는 거죠?' "그럼, 그럼." "때려 주세요. 그럼 어떻게 될까요."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화가 나서 몸을 홱 돌렸다. "정말로 쓸모 있는 충고를 해 주려나 생각했더니,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원칙도 없는 에술가한테 말이야...." "원칙이 없다니요! 그래, 아저씨가 총애하는 쿠르나토프스키 씨는 원칙이 있는 사람이라서 어제 아저씨한테서 은화 백 루블을 따 갔나요? 그건 점잖은 짓이 아니에요. 동의하시겠죠?" "뭐라구? 노름이란 돈을 딸 목적으로 하는 거야. 물론 다른 걸 기대할 수도 있지만...아무튼 이 집에서는 그 사람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너무 적어." "하긴, 그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하고 슈빈이 말을 받았다. "괜찮아! 장인이 될지 안 될지는 아직 운명이라는 상자 속에 감추어져 있는 걸. 하지만 뇌물을 먹지 않는 사람에게 백 루블이라는 돈은 큰 거야." "장인! 빌어먹을, 내가 장인이라고? 여보게, 자네 잠꼬대를 하고 있군. 물론 다른 처녀들 같으면 그런 구혼자를 즐겨 받아들이겠지. 자네도 좀 생각해 보게. 민첩하겠다, 똑똑하겠다, 자수 성가했겠다, 게다가 현청 두 군데에서나 일을 보고 있고." "무슨 현에선가는 지사를 손아귀에 넣고 흔든다던데요." 슈빈이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러고도 남지. 그건 절대 필요한 일이야. 실천가요, 사업가니까." "게다가 카드 놀이도 잘하죠." 슈빈이 다시 한 번 거들었다. "암, 카드 놀이도 잘하지. 그런데 옐레나 니콜라예브나는...어떻게 해야 그 앨 알 수 있지? 그 애가 원하는 게 무언지 알아 낼 만한 자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 명랑하다가는 금방 지루해하고, 별안간 형편없이 야위더니 이제는 싹 나아 버렸으니, 무슨 까닭인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볼썽사납게 생긴 하인이 커피잔과 크림, 건빵을 쟁반에 받쳐들고 들어왔다. "구혼자가 아버지 마음에 들면." 하고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건빵을 부서뜨리면서 말을 이었다. "딸들은 이런 일에 상관이 없었지! 그건, 옛날 가부장적 시대가 좋았어.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다 변해 버리고 말았어. 만사가 변하고 말았어. 요새 아가씨들은 마음에 드는 누구하고도 이야기를 나누고, 읽고 싶은 책은 무엇이든지 다 읽는단 말이야. 파리에서처럼 모스크바에서도 하인이나 하녀도 안 데리고 혼자 나다니고. 이런 게 다 받아들여지다니. 며칠 전에 내가 물었지. 옐레나 니콜라예브나가 어디 있느냐고. 그랬더니 나가고 없다고들 하더군. 어디 갔느냐니까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이게 뭔가, 제도라는 건가?" "잔을 받아 드시고 하인을 내보내세요." 슈빈이 말했다. "하인들 앞에서 그래선 안 된다고 아저씨기 말씀하셨잖아요." 그 목소리를 낮추어 이렇게 말했다. 하인이 눈을 치켜뜨고 슈빈을 흘겨보았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커피 잔을 들어 크림을 친 다음, 건빵을 한 움큼 집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인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집에서 내 권위가 전혀 서 있지 않다는 점이야. 모든 문제가 여기에 있어. 요새는 모두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 버린단 말이야. 머리통이 텅텅 빈 바보 같은 사람이라도 잘난 체만 하면 존경을 받는 거지. 그런 반면에 재주, 희한한 재주를 가졌더라도 겸손하면...." "니콜렌카, 아저씨는 정치가인가요?" 슈빈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어리석은 수작 그만둬!"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잊으셨군! 이게 바로 내가 이 집에서 전혀 권위가 서 있지 않다는 새로운 증거지, 그렇고 말고!"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아저씨를 학대하다니....가엾어라!" 슈빈은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에이,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아저씨, 우리가 잘못한 거예요! 아저씨는 안나 바실리예브나에게 줄 선물이라도 하나 준비하는 게 좋겠어요. 며칠 후면 아주머니 생신이니까요. 아저씨 편에서 조금만 관심을 표해도 얼마만한 효과를 발휘하는지 아저씨도 아실 테죠." "그래, 그래."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황급히 대답했다. "그런 걸 다 일깨워 주다니, 참으로 고맙구나. 물론, 물론, 내 반드시. 사실은 여기 조그마한 선물을 갖고 있어. 목걸이야. 며칠 전 로젠슈트라우흐에서 산 거지. 하지만 맞을까 몰라?" "레벨에 가 있는 그 여자를 주려고 산 거죠?" "말하자면...그래...그럴 생각으로." "그렇담 아마 맞을 거예요." 슈빈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우리 오늘 저녁엔 어디를 갈까, 파벨 야코블레비치?"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클럽에 가실 것 아닙니까?" "클럽이 끝난 다음, 끝난 다음에 말이야." 슈빈이 또다시 기지개를 켰다. "아니에요,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아저씨, 전 내일 일을 해야 해요. 다음에 가지요."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방 안을 두어 번 왔다갔다하더니 탁자에서 벨벳으로 싼 '목걸이'함을 꺼내 한참 들여다보고는 부드러운 손수건 천으로 조심스레 문질렀다. 그런 다음, 거울 앞에 앉아 숱이 많은 새까만 머리를 열심히 빗기 시작했다. 얼굴에는 교만하고 잘나 척하는 빛을 띠고서, 고개를 이리 갸우뚱 저리 갸우뚱하기도 하고, 혀를 뺨에 갖다 대기도 하면서 가리마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기침을 하기에 돌아다보았더니, 커피를 갖다 주었던 하인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는 하인에게 물었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문지기는 자못 의기양양한 투로 말했다. "당신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요!" "알아,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저에게 화내지 말아 주십시오. 전 다만, 어렷을 때부터 주인님을 정성껏 섬겨 왔습니다. 주인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그래 무슨 일이냐?" 하인은 잠시 우물쭈물 머뭇거렸다. "아까 말씀하셨었죠." 하고 그는 말을 꺼냈다. "옐레나 니콜라예브나가 어디에 가셨는지 모르시겠다고요? 제가 아가씨 행방을 알고 있다 이 말씀입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이 멍청아!" "그럼 좋을 대로 하십시오. 전 다만 사흘 전에 아가씨가 어떤 집으로 들어가시는 걸 보았단 말입니다." "어딜? 뭐라고? 어떤 집으로?" "포바르스카야 가 부근의 어떤 골목으로요. 여기서 멀지 않죠. 제가 문지기에게 물어 봤습죠. 그 곳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느냐고요.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입 닥쳐, 이 게으름뱅이야! 어떻게 네가 감히?....그렇게 착안 옐레나 니콜라예브나가 그런 가난뱅이들을 찾아가다니! 너 정말....썩꺼져, 멍청이 같은 자식!" 겁에 질린 하인은 문 있는 데로 뒷걸음질쳐 물러났다. "거기 서!"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소리쳤다. "문지기가 너한테 뭐라고 그러더냐?" "네, 저...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학생, 대학생이 있다고 그러더군요." "그만둬, 이 게으름뱅이야! 파렴치한아, 잘 들어 둬. 만일 네가 이 말을 꿈 속에서라도 입 밖에 냈다가는...." "천만에요..." "입 닥쳐! 만일 네가 입을 뻥끗 했다 하는 날이면, 그래 누군가가, 그래서 내가 알게 되면, 넌 뼈도 못 추릴 거야! 알아듣겠어? 그럼 썩 나가!" 하인은 물러갔다. '하느님 맙소사! 이게 무슨 소리지?' 혼자 남자,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생각했다. '그 바보가 내게 무슨 말을 한 거지? 응? 하지만 그 집이 어떤 집인지, 거기 누가 살고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직접 가 봐야지. 원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담!...하인 녀석이! 무슨 창피람! 하인 녀석이!' 큰 소리로 한 번 더 되풀이하고 나서,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목걸이를 탁자 속에 넣고 열쇨르 채운 다음, 안나 바실리예브나에게로 갔다. 그는 그녀가 얼굴에 붕대를 감고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가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은 그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그만 그녀를 울려 놓고야 말았다. 그러는 사이 동양을 뒤덮고 있던 뇌우가 터지고 말았다. 터키가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한 것이다. 각 공국의 철수 기간은 이미 지나가 버렸고, 시노프(터키의 항구 이름)학살의 날도 마침내 목전에 다가왔다. 인사로프가 받은 최근의 편지들은 그를 조국으로 끈덕지게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몸이 쇠약한 데다 기침을 하고 열이 오르내리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는 속이 타서 아픈 데 신경을 쓸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는 매일같이 모스크바 시내로 가 여러 사람들과 몰래 만났다. 그리고 밤새껏 편지를 쓰기도 하고 온종일 집을 비우기도 하였다. 그는 주인에게 곧 떠나게 될 것이라고 일러 두고, 자기가 쓰던 가구를 미리 주어 버렸다. 옐레나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어느 저녁, 그녀가 자기 방에 앉아 손수건 가장자리를 감치면서 우울한 마음으로 바람 소리를 듣고 있는데 하녀가 들어와, 어머니 침실에서 아버지가 그녀를 부르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어머니께선 울고 계세요." 하고 옐레나의 뒤를 따라오며 하녀가 속삭여 댔다. "아버지께서는 화가 나 계시고요...." 옐레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바실리예브나의 침실로 들어 갔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의 양순한 처는 흔들의자에 몸을 반쯤 기댄 채 향수가 뿌려진 손수건으로 코를 풀고 있었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자신은 단추를 다 채우고, 빳빳하게 풀을 먹인 칼라 위에 넥타이를 바짝 죄어 매고 벽난로 가에 서 있었는데, 그 당당한 풍채가 국회의 변사를 연상케 했다. 그는 변사처럼 손을 움직여 자기 딸에게 의자를 가리켰다. 그러나 딸이 그의 동작을 알아채지 못하고 의아스런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위엄 있는 목소리로, "좀 앉으시지." 하고 말했다. 옐레나는 자리에 앉았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코를 풀었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오른손을 플록코트 가슴 부분에 쑤셔 넣었다.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너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아니, 이렇게 이야기하는 편이 낫겠군, 너에게 해명을 얻으려고 불렀다." 그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못마땅해. 아니 이건 너무나 온건한 표현이구나. 너의 행동은 나를, 나와 너의 어머니를 ...여기 앉아 있는 네 어머니를 화나게 하고 속이 상하도록 만들었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낮은 목소리를 말했다. 옐레나는 입을 다문채, 아버지를, 다음엔 안나 바실리예브나를 쳐다보다가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딸자식들이 자기 부모를 얕보지 못하던 때가 있었지."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부모의 권위가, 아무리 반항심이 강한 자식이라도 꼼짝 못하게 만들던 때가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시절은 지났어.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단다. 하지만, 아직 법률은 존재하고 있어. 요컨대 얕보는 걸 허용치 않는, 금하는 그런 법률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명심하거라. 법률이 존재하고 있다는 이 점에 관심을 돌려 주기 바란다." "그렇지만, 아버지." 하고 옐레나는 말을 하려 했다. "내 말을 가로막지 말아 다오. 잠시 옛날 일을 생각해 보자. 나나 네 어머니는 할 일을 다한 사람이다. 나나 네 어머닌 네 교육을 위해선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다. 돈도, 배려도 아끼지 않았단 말이다. 그 모든 배려와 비용에서 네가 무슨 이득을 얻었나 하는 건 별개의 문제야. 하지만 난 적어도 외동딸인 네게 우리가 가르쳐 준 그 도덕률을 네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할 권리는 가졌다고 본다.... 나와 네 어머니는 그런 권리쯤은 가지고 있단 말이다. 어떤 신식 '시상'도, 말하자면 이 성스러운 보배를 범치 못하게 할 권리를 가졌다구.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난 지금 너만한 나이에 있음직한 경솔한 짓을 나무라려는 건 아니다...하지만 네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망각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아버지" 하고 옐레나가 말했다.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지 알겠어요." "아니다, 넌 몰라.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국회 의원 같은 당당한 태도와 유창한 연설조를 갑자기 바꿔 낮은 목소리로 버럭 고함을 쳤다. "네가 뭘 알아, 이 건방진 계집애야!" "제발 그러지 말아요, 니콜라스."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더듬더듬 말했다. "절 죽이려고 그러세요?" "내가 당신을 죽이려 하다니, 내게 그러 말 하지 말아요, 안나 바실리예브나! 당신이 지금 들을 이야기는 당신이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요. 미리 경고해 두지만, 최악의 경우에나 대비하시지!"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아니야." 하고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옐레나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너도 몰라,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제가 아버지, 어머니께 죄를 지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오, 고작 그거냐!" "제가 잘못했어요." 옐레나는 말을 계속했다. "진작 말씀드려야 하는 건데...." "그래 넌 알기나 하니?"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딸의 말을 가로챘다. "내 말 한 마디로 널 파멸시킬 수 있다는 걸." 옐레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말 한 마디로! 쳐다볼 것 없어!(그는 팔짱을 꼈다) 너에게 물어 보아야겠다 . 포바르스카야 근처에 있는 어느 골목의 어떤 집을 알고 있는지, 어떤지를 ? 너 그 집에 찾아간 적이 있니?(그가 발을 굴렀다) 이 망할 계집애야, 대답해 봐, 속일 생각일랑 말고! 사람들, 사람들이, 하인들이, 천한 하인들 말이다. 널, 네가 거기로 들어가는 걸 보았단 말이다!" 옐레나의 얼굴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그녀의 두 눈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속일 이유가 없어요." 그녀는 말했다. "그래요, 난 그 집에 갔었어요." "그래 잘한 짓이냐! 듣고 있소, 안나 바실리예브나? 듣고 있소? 설마 그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는 알고 있을 테지." "네 알아요. 제 남편이...."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라고? 너의...." "저의 남편입니다." 옐레나가 되풀이하였다. "전 드미트리 니카노르이치 인사로프와 결혼했습니다." "네가?....결혼했다고?"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간신히 이 말을 입 밖에 냈을 뿐이었다. "네, 어머니.....절 용서해 주세요. 두 주일 전에 몰래 결혼했어요."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등의자에서 뒤로 넘어갈 뻔했고,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결혼했다! 그 가난뱅이 몬테네그로 녀석하고! 지체 높은 귀족 니콜라이 스타호프의 딸이 부랑인에게, 가난뱅이 지식인에게 시집을 갔다니! 부모의 축복도 없이! 그래 내가 그냥 내버려 둘 성싶으냐? 불평을 안할 성싶어? 내 널....너를....그냥 ....널 수도원에 집어넣어 버리겠어. 그리고 그 녀석은 죄수들과 같이 강제 노동을 보내야겠군! 안나 바실리예브나, 당신도 지금 당장 선언해 버리구려, 재산 상속권을 박탈해 버리겠노라고."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제발 진정하세요."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신음하듯 말했다. "언제,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담? 누가 너와 결혼을 했다고? 어디서? 어떻게? 오, 하느님 맙소사! 친지들이, 온 세상이 이제 뭐라 말할까! 이 뻔뻔스런 위선자 같으니! 그래 넌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부모와 한지붕 아래서 살아갈 수가 있더냐! 넌 두렵지도 않았어? 하늘의 진노가?" "아버지" 옐레나가 말했다. 그녀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덜덜 떨고 있었지만, 목소리만은 분명하고 또렷했다. "아버지 좋으실 대로 절 처분해 주세요. 하지만 절 뻔뻔스럽다느니 위선자라느니 하고 비난하지는 말아 주셔야 해요. 전 원치 않았던 거예요.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미리 괴롭혀 드리고 싶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어차피 며칠 새에 여길 떠나기로 되어 있어서요." "떠난다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그이의 나라, 불가리아로요." "터키로!"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이렇게 소리치더니, 그만 기절해 버렸다. 옐레나가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 "저리 가!"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꽥 소리를 지르며 딸의 팔을 낚아챘다. "저리 가, 이 몹쓸 것 같으니!" 바로 이때 침실 문이 열리더니 두 눈만 반짝거리는 창백한 머리통이 보였다. 그것은 슈빈의 머리였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그가 한껏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아브구스치나 흐리스치아노브나가 찾아와 뵙자고 합니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난폭스레 몸을 돌려 슈빈에게 주먹질을 해 보였다. 그리고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쏜살같이 방에서 나가 버렸다. 옐레나는 어머니의 발치에 쓰러지면서 어머니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커프스가 커다랗게 달린 칼라 없는 셔츠가 그의 퉁퉁한 목을 에워싸고 있었고, 넓고 느슨한 주름이 거의 여자 같은 가슴 위에 퍼져 있어, 노송으로 만든 십자가와 향대만이 엿보일 뿐이었다. 가벼운 담요가 그의 기다란 사지를 덮고 있었다. 탁자 위에서 희미하게 타고 있는 촛불 곁에 크바스 잔이 놓여 있었으며, 침대 발치에는 슈빈이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요." 그의 깊은 생각에 잠겨 이야기했다. "옐레나는 결혼해서 떠날 참이래요. 당신 조카는 집이 떠나가라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어요. 비밀이 새어 나갈까 봐 침실 문을 꼭꼭 걸어 잠궜지만, 하인, 하녀들뿐만 아니라 마부들까지도 모두 그가 하는 말을 다 들을 수가 있었죠! 아직까지도 뒷생각 없이 성을 내고 있어. 하마터면 나까지 얻어맞을 뻔했지 뭐예요. 나무 토막을 가진 곰처럼 아버지의 권위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에게 무슨 힘이 있겠어요.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절망감에 빠져 있는데, 딸이 결혼했다는 사실보다 멀리 떠난다는 사실이 훨씬 더 마음 아픈 모양이에요."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손가락을 흔들어 댔다. "그 애 어머니는." 그가 말했다. "조카님은." 하고 슈빈이 말을 계속하였다. "대주교와 현지사, 대신들한테 탄원하겠노라고 위협하고 있지만, 옐레나가 떠나 버리면 끝나는 거 아닙니까. 어느 누가 자기 친딸을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 있겠어요. 한껏 기세 등등하지만, 기가 꺽일 겁니다." "무슨...권리로."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말을 하고는 잔을 들어 크바스 한 모금을 들이켰다. "암, 그렇죠. 하지만 모스크바 시내에 비난이며 욕설이며 소문들이 얼마나 많이 퍼질는지! 물론 옐레나는 그런 것 따위는 무섭지 않을 테죠....그런 것쯤은 초월한 거지요. 그녀가 떠난다-----어디로 가는지 상상하기조차 두려워요! 얼마나 멀리 떨어진 벽지인지! 거기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무엇인가? 나는 그녀가 보이는 것 같아요. 그녀가 눈보라치는 영하 30도의 추위 속에서 여인숙을 나서서 밤길을 떠나는 게 말입니다. 조국과 가족을 떠난다-----난 그녀를 이해할 수 있어요. 그녀가 여기에 내버리고 가는 사람은 누군가요? 쿠르나토프스키와 베르셰네프와 또 우리 같은 사람, 하지만 이런 건 더 나아요. 후회할 게 무어 있겠어요? 한 가지 나쁜 것은 그녀의 남편-----이 말을 하는데 어쩐지 혀가 잘 돌아가지 않는군요----인사로프가 각혈을 한다는 거예요. 정말 안 된 일이지요. 며칠 전에 그를 만났는데, 얼굴이, 그의 얼굴을 모델로 해서 부르투스 상을 조각할 수 있을 정도더군요...부르투스가 누군 줄 아시기나 하세요, 우바르 이바노비치 아저씨?" "알아 뭣하나? 사람이겠지?" "바로 맞췄어요. 그는 사람이었죠. 그래요 얼굴은 잘생겼으나 병색이었죠. 병색이 아주 심했어요." "전쟁을 하는데, 아무렴 어때."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말하였다. "싸우는데 아무렴 어떠냐, 정확하시네요. 오늘은 꽤나 옳은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살아가자면 아무래도 괜찮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더구나 옐레나가 그와 함께 살려고 하니." "청춘이니까." 우바르 이바노비치가 대꾸했다. "그래요, 영광스럽고 용맹스런 청춘이죠. 죽음, 삶, 투쟁, 패배, 승리, 사랑, 자유, 조국....좋아, 좋아. 신은 누구에게나 이런 것들을 주시니까! 진흙탕 속에 거꾸로 빠져 괜찮은 척해 보이려 애쓰는 것과는 다르지요. 그 땐 정말 괜찮은 거니까. 그리고 그 곳에서는 현이 당겨져 온 세상에 울리거나 끊어져 버리거나 둘 중에 하나지!" 슈빈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래." 하고 그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이었다. "인사로프는 옐레나에게 필요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얼마나 웃기는 일인지! 아무도 옐레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없었다니, 인사로프, 인사로프....무엇 때문에 겸손을 가장하는지? 자, 그가 용기 있는 사람이고, 여태껏 잘 처신해 왔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우리, 죄 많은 우리들은 아주 몹쓸 비열한이란 말입니까? 난 정말 비열한입니까. 우바르 이바노비치 아저씨? 정말 신은 내게 그토록 노여워하고 있는 건가요? 나에겐 어떠한 능력도, 아무런 재능도 주지를 않았단 말인가요? 혹 파벨 슈빈이라는 이름이 훗날 영광스런 이름이 될는지 누가 압니까? 저기 테이블 위에 구리 동전이 놓여 있군요. 누가 혹시 알겠어요? 한 백 년쯤 뒤에 저 구리가 후세 사람들이 파벨 슈빈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는 동상에 들어갈는지 말이에요."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팔꿈치를 괸 채, 격분한 예술가를 지켜보았다. "먼 훗날 이야기지." 이윽고 그는 습관대로 손가락을 흔들어대며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넌, 너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오, 러시아 땅의 위대한 철학가시여!" 슈빈이 소리질렀다. "하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순금이십니다. 내 동상을 세우는게 아니라 아저씨 동상을 세워야겠군요. 내 곧 착수하겠어요. 지금 거기 누워 계시는 포즈 그대로를 조각해야겠어요. 그 포즈에는 힘이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군요. 내가 꼭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은 포즈에요. 아저씨가 나의 이기심과 자존심을 얼마나 잘 일깨워 주셨는지! 그래! 맞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뽐낼 게 하나도 없다고요. 우리 주위엔 어디를 보나 참사람이 없어요. 모두가 쥐새끼나 토끼새끼 아니면, 햄릿형 인간들이거나 사모예드 족(소련의 북극 해안 지방에 사는 몽고 인종 계통의 여러 부족을 통틀어 이름. 대개는 순록을 가축으로 기름)들뿐이죠. 그렇지 않으면 어둠과 암흑뿐이거나, 속이 텅 빈 피리와 북채뿐이니! 그럼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겠어요. 수치스러울 만큼 자기 자신을 자세히 연구하고, 자신의 느낌 하나하나를 맥을 짚어 보고서 자신에게 보고하게 될 겁니다. 내가 느낀 것은 이것이고, 내가 생각한 것은 저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유용하고 합리적인 일이지요! 아니야, 만일 우리들 가운데 분별있는 사람이 있었던들, 그 처녀는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 민감한 아가씬느 물고기가 물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듯 빠져들지는 않았을 텐데! 대체 이게 웬일입니까, 우바르 이바노비치 아저씨? 우리의 시대는 대체 언제 오는 겁니까? 참사람은 언제쯤 우리에게 나타난단 말입니까?" "기다리게."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대답했다. "나타나긴 나타날 거니까." "나타난다고요? 대지! 검은 대지의 정령이여!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죠? 두고 봅시다. 아저씨 말씀을 적어 두겠어요. 그런데 촛불은 왜 끄시는 거지요?" "자고 싶어. 잘 자게나!" 슈빈의 말은 맞았다. 옐레나가 결혼했다는 뜻하지 않은 소식은 안나 바실리예브나에게 치명상을 안겨 주었다. 그녀는 자리에 눕고 말았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옐레나가 그녀 눈앞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라고 일렀다. 마치 그는 자신이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 집주인이며, 가장임을 한껏 과시하는 기회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쉴새없이 하인들에게 소리를 질러 댔다. 언제나 "내가 어떠 사람인지 너희들에게 보여 주마. 기다려!"하고 말하면서. 그가 집에 있는 동안엔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옐레나를 보지 않고 조야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조야는 아주 성심껏 그녀를 섬겼지만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인사로프 다위를 좋아하다니---저런' 하지만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집을 비우기만 하면 곧(이런 일이 꽤 자주 있었는데, 그것은 아브구스치나 흐리스치아노브나가 돌아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옐레나는 어머니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딸을 오래오래 지켜보는 것이었다. 이 무언의 질책은 그 무엇보다도 깊이 옐레나의 가슴을 찔렀다. 이럴 때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후회는 아니었지만, 후회에 가까운 끝없는 깊은 연민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 그녀는 어머니의 손에 입을 맞추면서 되뇌었다. "어떡하면 좋아요? 내 잘못은 아니에요. 그이를 사랑하는 걸요.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운명을 탓해 주세요. 아버지가 싫어하는 사람, 어머니한테서 날 떼어 데려갈 사람을 만나게 한 것도 운명이잖아요." "오!" 하고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아라. 네가 떠날 거라는 것을 생각만 하면 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구나!" "사랑하는 어머니." 옐레나가 대답했다. "더 나쁘게 되지 않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으세요. 죽을 뻔했잖아요." "하지만 이제 널 보지 못할 걸 생각하면 그저.....그 곳 어느 초막 같은 데서 네가 죽어 버린다거나(안나 바실리예브나는 불가리아를 시베리아 동토대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면 내가 이별을 참아 내지 못한다거나 하면...." "그런 말씀 마세요, 착한 어머니. 우린 틀림없이 다시 만날 거예요. 그리고 불가리아에서도 여기와 같은 도시가 얼마든지 있어요." "거기에 무슨 도시가 있다고! 그 곳에선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잖아. 지금 그 곳에선 어디를 가나 대포 소리가 꽝꽝 울리고 있을 테고...곧 떠날 참이냐?" "곧, 만일 아버지만...아버지는 고소하려고 하세요. 우리를 떼어 놓으려고 위협하시는 거죠."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눈을 치켜 떴다. "아니다, 레노치카. 고소는 하지 않으실 게다. 나 자신도 그런 결혼에는 결코 찬성할 수 없지만, 그러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나올 거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인 걸 어떡하겠니? 내 딸 얼굴에 먹칠을 할 수는 없잖아." 그렇게 며칠이 또 지나갔다. 이윽고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기운을 차려, 어느 날 저녁 남편과 단둘이 남아 침실 문을 잠궜다. 집 안 식구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처음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니, 잠시 후에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고, 이어 말다툼이 시작되었다. 고함 소리도 났고 탄식 소리까지도 난 것 같았다. 슈빈은 벌서부터 하녀들과 조야와 함께, 여차 하면 방으로 뛰어들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침실에서 차츰 소리가 약해지더니 두 내외가 소곤소곤 주고 받는 이야기 소리가 새어 나왔으나, 그 소리도 곧 그치고 말았다. 간혹 가다 가느다란 흐느낌 소리만이 들려오더니 그것도 멎어 버렸다. 열쇠 꾸러미 소리가 나더니 장농 여는 소리가 들리고, 마침내 방문이 열리고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나왔다. 그는 거기에 있던 사람들을 엄한 눈초리로 둘러보고는 클럽으로 떠났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옐레나를 불러들였다. 그녀는 딸을 꼬옥 부둥켜안고 통곡을 하더니, 이렇게 입을 열었다. "모든 게 다 잘 되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시끄럽게 굴지 않으시기로 했단다. 이제 네가 떠나는 걸, 네가 우리를 버리는 걸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어머니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도록 불러 올까요?" 어머니가 조금 진정하는 것 같자 엘레나는 말했다. "그만두어라, 아가, 난 우리를 갈라 놓은 사람을 지금 볼 수가 없구나. 떠나기 전에 만나볼 수 있지 않겠니." "그럼 떠나기 전에." 옐레나는 슬프게 되풀이하였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더 이상 시끄럽게 굴지 않겠다는 데 동의 하였다. 그렇지만 그러기에 어떤 대가를 치르기로 했는지를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딸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의 빚을 전부 갚아 주기로 하고, 은화로 1000루블을 넘겨 주었다는 사실ㅇ르 옐레나에게는 이야기ㅏ지 않은 것이다. 그러고도 그는 인사로프를 계속 몬테네그로 인이라고 부르면서. 그리고는 클럽에 도착하자, 그의 카드놀이 상대인 퇴역 공병 대장을 붙잡고 쓸데없이 옐레나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당신도 들었죠?" 하고 그는 짐짓 태연한 척하였다. "아주 정신이 나갔지. 어떤 대학생 녀석과 결혼했다는걸." 퇴역 공병 대장은 안경 너머로 그를 쳐다보더니 "흠" 하고 소리지르고는, 무슨 카드놀이를 하겠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출발 날짜가 다가왔다. 11월은 이미 지나가고 마지막 기한이 닥쳤다. 인사로프는 벌써부터 준비를 모두 마치고, 조금이라도 빨리 모스크바를 떠나고 싶은 열망에 마음을 태우고 있었다. 의사도 그에게 되도록 속히 떠날 것을 권유했다. "당신에게는 따뜻한 기후가 필요합니다." 하고 의사는 그에게 말했다. "여기선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옐레나는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다. 인사로프의 핼쑥해진 모습이 그녀를 불안하게 하였다. 그녀는 자주 변한 그의 모습을 자신도 모르게 놀라 쳐다보곤 하였다. 집에서의 그녀의 처지는 심히 난처했다. 어머니는 딸이 죽기나 한 듯 슬퍼했고, 아버지는 멸시하듯 냉담하게 그녀를 대했다. 이별이 가까워 오는 게 은근히 그를 괴롭혔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과 약점을 숨기는 게 자신의 의무요, 모욕당한 아버지의 의무라 여겼던 것이다. 마침내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인사로프를 만나보기를 원했다. 뒷문을 통해 가만히 그를 그녀에게로 데려갔다. 그가 그녀의 방에 들어서자 그녀는 오래도록 입조차 떼지 못했다. 아니,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는 그녀의 안락 의자 곁에 서서 공손히 그녀의 첫마디가 떨어 지기를 기다렸다. 옐레나도 거기 앉아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한참 만에 눈을 들어 이렇게 말했다. "드미트리 니카노르이치, 당신을 심판하실 분은 하느님밖에 안 계십니다...." 그리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 위에 비난의 표정이 떠올랐다가는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몸이 편찮은가 본데." 하고 그녀가 소리질렀다. "옐레나, 네 남편이 어디 아픈가 보다!" "네, 몹시 앓았었습니다, 안나 바실리예브나." 하고 인사로프가 대답했다. "지금도 완전히 나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조국의 공기가 절 완전히 회복시켜 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 불가리아는!" 하고 안나 바실리예브나느 중얼거리더니 생각에 잠겼다. '하느님 맙소사. 목소리는 맺힌 데가 없고, 눈은 퀭하니 뚫리고, 피골이 상접해 남의 플록코트를 걸친 듯한 데다, 얼굴빛이 싯누런 저 죽어가는 불가리아 인이 내 딸의 남편이라니. 저 애가 그를 사랑하다니... 아, 이게 무슨 악몽 같은 일이람' 그러나 그녀는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드미트리 니카노르이치, 꼭...가야만 하나요?" 그녀가 말했다. "네,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안나 바실리예브나."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그를 쳐다보앗다. "오, 드미트리 니카노르이치, 내가 당하고 있는 괴로움을 하느님깨서 당신은 당하지 않게 했으면....저 애를 잘 돌보 주고, 사랑해 주겠다고 내게 약속해 줘요...내가 살아 있는 한 궁핍하지는 않을 거요!' 눈물이 그녀의 목소리를 약하게 하였다. 그녀가 두 팔을 벌리자, 옐레나도 인사로프도 그녀에게로 무너져 내렸다. 마침내 운명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옐레나는 집에서 부모에게 하직인ㅅ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사로프의 하숙에서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출발 시각은 12시로 정해졌다. 15분 전에 베르셰네프가 왔다. 베르셰네프는 인사로프의 집에서 인사로프를 데려가려는 그의 동포들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앞서 떠나고 없었다. 독자들도 알고 있는, 전에 왔던 그 이상한 두 사나이도 먼저 떠났다.(그 두 사람은 인사로프의 결혼식의 증인을 서기도 했다) 재단사는 '친절한 나리'에게 깍듯이 절을 하며 맞았다. 그는 이별의 슬픔 때문인지, 아니면 가구를 얻는다는 기쁨 때문인지 몹시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마누라가 곧 그를 끌고 가 버렸다. 방은 아주 깨끗이 치워져 있었고, 끈으로 묶여진 트렁크가 하나 마루에 놓여 있었다. 베르셰네프는 생각에 잠겼다. 온갖 상념이 그의 마음 속으 스쳐 지나갔다. 12시를 친 지는 한참 되었고, 마부는 벌써 마차를 대기하고 있는데 '젊은 사람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윽고 층계를 오르는 성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옐레나가 인사로프와 슈빈과 같이 들어섰다. 옐레나의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기절한 어머니를 두고 온 것이다. 헤어진다는 건 너무도 가슴아픈 일이었다. 옐레나는 거의 한 주일 이상이나 베르셰네프를 만나지 못했었다. 최근에 그는 스타호프 가를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만나게 되리라곤 기대도 하지 못했었다. "당신이! 고마워요!" 하고 소리지르며 그녀는 그의 목에 매달렸다. 인사로프도 그를 끌어 안아싸.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 세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으며, 이 세 사람의 가슴은 무얼 느낄 것인가? 슈빈은 이 침묵을 깨뜨릴 만한 말을, 생기 있는 소리를 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여기 삼총사가 다시 모였군." 하고 그는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운명이 명하는 대로 따릅시다. 과거는 아름다웠던 것으로 기억하고요. 새로운 생활에 하느님이 함께 하시길! '먼 길에 하느님의 가호가 있으시기를'." 슈빈은 노래르 하다가 그쳤다. 갑자기 브끄럽고 어색해졌던 것이다.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사람이 있는데서 노래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그 방안에서 그가 언급했던 과거는, 그 방에 모였던 과거 사람들은 죽어 갔다. 그것은 새로운 생활을 재생시키려고 죽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죽어 갔다. "자, 옐레나." 아내에게 몸을 돌리면서 인사로프가 말했다. "다 된 것 같지 않소? 모두들 만나 뵙고, 꾸릴 것 다 꾸렸으니 말이오. 저 트렁크를 끌고 가는 것만 남았군. 주인!" 주인이 마누라와 딸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약간 비틀거리면서 인사로프의 지시를 귀담아 듣고는 트렁크를 어깨에 메었다. 그리고는 쿵쾅거리며 쏜살같이 층계를 뛰어내려가는 것이었다. "이제, 러시아의 풍속에 따라 앉아야겠군요." 인사로프가 말했다. 모두들 자리에 앉았다. 베르셰네프는 조그마한 낡은 소파에 자리했고, 옐레나는 그 곁에 앉았으며, 하숙집 마누라와 딸은 문지방에 웅크리고 앉았다. 모두들 잠자코 있었다. 모두 굳은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자신이 왜 미소를 짓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저마다 뭐라고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러한 순간에 입에서 흘러 나오는 말이란 으레 쓸데없는 것뿐임을 다들 잘 알고 있었다(물론 하숙집 마누라와 딸은 제외하고, 그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 의미심장하다거나, 지혜롭다거나, 아니면 진심에서 우러나온 어떠한 말도 적당치 못한, 거의 거짓에 가까운 것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말이다. 인사로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 성호를 그었고, "잘 있거라, 정들었던 나의 방아!" 하고 소리쳤다. 서로 키스를 나누었다. 이 싸늘한 키스는, 아무 말 없이 헤어지길 원하는 희망이었고, 편지하겠다는 약속이었으며, 마지막 작별의 언어였다. 온통 눈물에 젖은 엘레나가 마차에 올라탔다. 인사로프가 그녀의 다리에 담요를 조심스레 덮어 주었다. 슈빈, 베르셰네프, 하숙집 주인과 그의 아내, 그리고 머리에 수건을 쓴 딸, 문지기, 줄무늬 작업복을 걸친 낯선 일꾼---모두가 현관에 서 있는데, 별안간 날쌘 경주말을 매단 마차 한 대가 뜰 안으로 쏜살같이 달려들어왔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외투 깃에서 눈을 털어 내면서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다행히도 만났군 그래." 그는 소리치며 옆의 마차로 달려갔다. 그는 마차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플록코트 호주머니에서 벨벳 상자에 든 조그만 성상을 꺼내 그녀의 목에 걸어 주었다. 그녀는 흐느껴 울면서 아버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는 동안 마부가 샴페인 반 병과 잔 세 개를 마부석에 꺼내 놓았다. "자, 그럼!"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말했는데,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려 외투 깃에 떨어지고 있었다. "배웅해야 할 것 같아서...그러고 싶어서...." 그는 샴페인을 따랐는데, 그의 두 손이 덜덜 떨려 거품이 잔 위로 넘쳐 눈 위에 떨어졌다. 그는 잔 하나를 들고 다른 두 잔은 옐레나와 인사로프에게 하나씩 주었다. 인사로프는 벌써 옐레나 곁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희들을 축복해..." 하고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입을 떼었지만, 말을 다 끝맺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잔을 훌쩍 비웠다. 옐레나와 인사로프도 잔을 비웠다. "자, 자네들도 한 잔씩 마시게." 그가 슈빈과 베르셰네프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이 때 마부가 말을 몰기 시작했으므로,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마차를 따라가면서 띄엄띄엄 말했다. "조 심 해! 편지하고." 옐레나는 고개를 내밀고. "안녕히 계세요, 아버지,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파벨 야코블레비치, 모두 모두 안녕히 계세요. 안녕, 러시아여!" 하고 말하고는 몸을 마차 안으로 감추어 버렸다.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면서 휘파람을 불어댔다. 마차는 미끄럼쇠를 삐걱거리면서 오른쪽으로 돌아 사라져 갔다. 화창한 4월의 어느 날 오후, 베니스와 리도라고 불리는 좁다란 모래 밭 사이의 넓은 못을 따라 뱃머리가 뽀족한 곤돌라가 미끄러져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은 사공이 기다란 노를 저을 때마다 한 번씩 리드미컬하게 흔들리곤 했다. 곤돌라의 야트막한 지붕 아래에는 옐레나와 인사로프가 부드러운 가죽 쿠션 위에 앉아 있었다. 옐레나의 모습은 모스크바를 떠날 때보다 많이 변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표정은 달라져 있었다. 전보다 훨씬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고, 더욱 엄격해져 있었으며, 눈초리도 한결 대담해져 있었다. 그녀의 몸은 활짝 피었고, 더 북슬북슬해지고 숱이 많아진 것 같은 머리카락이 흰 이마와 싱싱한 두 볼을 따라 내려뜨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웃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면 입 언저리에, 눈에 보일락말락한 주름이 져 있어, 항상 남 모르는 걱정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한편, 인사로프의 얼굴 표정은 전이나 마찬가지였으나, 모습은 참혹하리만큼 변해 있었다. 그는 수척하고 창백하여 전보다 퍽 늙어 보였으며, 등은 구부정했다. 줄곧 짧고 밭은 기침을 해 대었으나, 움푹 팬 두 눈만은 이상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러시아를 떠난 이후로 인사로프는 약 두 달 동안이나 비엔나에서 앓아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3월 말이 되어서야 아내와 함께 베니스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는 여기서 자라를 거쳐 세르비아로, 거기서 다시 불가리아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다른 길은 다 막혀 있었다. 전쟁은 이미 다뉴브 강가에서 치열해져 가고,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하여 전 슬라브 국가들이 흥분하여 봉기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곤돌라가 리도의 안쪽 기슭에 닿았다. 옐레나와 인사로프는 병든 나무들이(이 나무들은 해마다 심는데 해마다 죽어 갔다) 쭉 심어져 있는 좁다란 모래밭길을 따라, 바다에 면한 리도의 바깥쪽 기슭을 향해 갔다. 그들은 해변을 따라 걸었다. 아드리아 해는 그들 앞에 검푸른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파도는 거품을 내뿜으며 소란스럽게 부딪치고 있었고, 무너져 내려앉으면서 자잘한 조개껍질과 해초 부스러기를 모래밭에 남겨 놓곤 하였다. "참 쓸쓸한 곳이군요!" 옐레나가 말했다. "여긴 당신에게 너무 춥지 않을까 걱정이 되네요. 하지만, 당신이 어째서 이리로 오려고 했는지는 알 만해요." "춥다고!" 인사로프는 잠깐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추위쯤이 두려워서야 내 어찌 훌륭한 병사가 되겠소? 내가 이리로 온 건, 그 이유를 말하리다. 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조국에 다 온 느낌이 들기 때문이오, 바로 저기요." 그는 동쪽을 가리켰다. "그쪽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군." "이 바람이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그 배를 몰고 오지나 않을까요?" 옐레나가 말했다. "저기 하얀 돛이 보이네요. 저게 그 배가 아닐까요?" 인사로프는 옐레나가 가리키는 바다 먼 곳을 바라보았다. "랜디치가 일 주일 내로 우리 모두를 자리잡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가 말했다. "그 사람은 믿을 만한 것 같은데....옐레나, 당신도 들었소?" 그는 갑자기 생기를 띠면서 덧붙였다. "가난한 달마치야 어부들이 자기네 어망을 희생시키고 있다는 이야기를 말이오. 그물 밑바닥에 깔려 있는 납으로 탄알을 만든다는 걸! 그들에겐 돈이 없고 생계를 고기잡이에만 의존하고 있는 형편인데도, 그들은 기꺼이 마지막 재산까지 내놓고 지금은 굶주리고 있다는 거요. 얼마나 기특한 백성들이오!" "조심해!" 하는 교만한 목소리가 그들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어 둔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짤막한 회색 겉 스커트를 걸치고, 챙 달린 녹색 모자를 쓴 오스트리아 장교가 그들 곁을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간신히 옆으로 비켜 설 수가 있었다. 인사로프는 시무룩한 얼굴로 그 장교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 사람 잘못이 아니에요." "여기 말고는 달리 기마 연습을 할 만한 곳이 없다는 건 당신도 아시잖아요." "저 녀석 잘못이 아니고말고." 인사로프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고함을 지르는 꼴이라든지. 콧수염을 기른 낯짝이라든지, 챙달린 모자라든지, 이런 모습들이 모두 내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군. 돌아 갑시다." "네, 돌아가요, 드미트리. 게다가 여긴 정말 바람도 세요. 당신은 모스크바에서 앓은 이후 통 자신을 돌보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비엔나에서도 그렇게 고생한 거예요. 이제 몸을 더욱 돌봐야 해요." 인사로프는 잠자코 있었다. 그의 입술에는 아까와 같은 쓴웃음이 어려 있을 뿐이었다. "대운하로 돌아서 가고 싶지 않아요?" 옐레나가 말을 이었다. "우린 여기에 오 후로 베니스 구경도 못했잖아요. 저녁때 극장에 가요. 특별석 표 두장이 있어요. 새 오페라를 한다나 봐요. 우리 오늘만은 자신들을 위해 지내도록 해요. 정치니 전쟁이니 하는 것은 다 잊어버리고, 우리가 살아 숨쉬고 있고, 함께 생각하고, 영원히 결합되어 있다는 것만을 알도록 해요....좋아요?" "옐레나, 당신이 그러길 원하는데." 인사로프는 대답했다. "난들 원치 않을 이유가 있겠소?" "저도 알아요." 옐레나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자, 가요." 그들은 곤돌라로 돌아와, 천천히 대운하를 돌아 되돌아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4월의 베니스를 보지 못한 사람은 이 마력의 도시의 말할 수 없는 매력을 가히 알지 못할 것이다. 눈부신 여름 햇살이 장엄한 제노바의 자랑거리이고, 가을의 황금빛과 자줏빛이 거대한 고도 로마의 자랑거리라면, 베니스의 자랑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봄에 있을 것이다. 베니스의 아름다움은 봄과 함께 전율케 하고 희망을 일으킨다. 그 아름다움은 기묘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으나, 은밀한 행복의 약속처럼 여린 가슴을 초조하게 하고 흥분시킨다. 베니스의 모든 것은 밝고 명백하며, 어떤 사랑스런 적막의 조는 듯한 연기를 빨아들이고 있다. 모든 것이 조용하면서도 모든 것을 기꺼이 맞아들인다. 그 이름부터 시작해서, 베니스의 모든 것은 여성적이다. '아름답다'라는 명칭이 붙을 만하다. 궁전과 교회의 웅대한 모습은 젊은 신의 조화로운 꿈처럼 날렵하고 아름다웠다. 녹회색의 번쩍임과 조용한 운하 물결의 비단 같은 썰물 속에는 거친 도시의 소음들----두드리는 소리, 우지직거리는 소리, 떠드는 소리가 없는 곤돌라의 고요한 움직임 속에는, 우화적인 절묘함이 있었다. 베니스의 주민들은 '베니스는 망해 가고 있다. 베니스는 황폐해졌다.'고들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아마도 아름다움이 한창인 오늘날의 매력은, 그 쇠망의 매력은, 과거에는 갖지 못한 것일 게다. 베니스를 보지 못한 사람은 베니스를 알지 못한다. 카날레토(베니스 출신의 화가)나 구와르디(베니스 출신의 화가)도 (현대 회화는 말할 것도 없고)공기의 그 은빛 부드러움을, 그 날아가는 듯한 가까운 원경을, 우아한 선과 혼합된 색채의 그 놀랄 만한 조화를 전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삶에 지친 패배한 인생은 베니스를 찾을 필요가 없다. 베니스는 그런 자에게 실현되지 못한 옛날의 꿈에 대한 기억과 같이 쓰디쓴 감회를 자아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힘이 넘치고 자신이 행보가다고 느끼는 자에게는 달콤한 것일 게다. 그는 자신의 행복을 황홀한 베니스의 하늘 아래 오게 한다. 아무리 그 행복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베니스는 그 행복에 사라지지 않는 빛을 던질 것이다. 인사로프와 옐레나가 타고 있느 곤돌라는 스키아보니 강과 총독궁과 피아제타를 조용히 지나서 대운하로 들어갔다. 양쪽에 대리석 궁전이 늘어서 있는 모양은 그 아름다움을 한껏 포용케 하고 깨닫게 해 주면서 스쳐 흘러가는 것 같았다. 옐레나는 깊은 행복감을 맛보았다. 그녀의 마음에 구름 한 점이 걸려 있긴 했으나, 그것도 곧 멀어져 갔다. 그 날 인사로프는 한결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리알토의 뾰족 아치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옐레나는 교회의 냉기가 인사로프에게 좋지 않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녀는 미술관이 머리에 떠올라 사공에게 그리로가 달라고 일렀다 그들이 그리 크지 않은 박물관의 전람회장 전체를 돌아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전문가도, 딜레탕트도 아니었으므로, 그림 한 점마다 굳이 멈춰 서야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두사람은 별안간 모든 것이 아주 재미있게 여겨졌는데, 그것은 그들이 기대한 것 이상이엇다(이런 감정은 어린아이들이 잘 알고 있다) 고통받는 노예를 구하기 위해 개구리가 물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으로 하늘에서 노예를 구하기 위해 개구리가 물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으로 하늘에서 뛰어내리는 틴토레토의 '성 마르크 화상'앞에서 옐레나가 눈물이 날 만큼 깔갈 웃어대자, 세 사람의 영국인 관람객은 몹시 분개하였다. 한편, 인사로프는 티샨의 '승천도'의 전경에서 서서 성모 마리아에게 내밀고 있는 길고 헐렁한 녹색 옷을 걸친 힘센 사나이의 등과 장딴지에 취해 황홀경에 빠져 이써싸. 그런데 침착하고 위엄 있는 표정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향해 솟구치려 하는 아름답고 강한 여성상----성모상은 인사로프와 옐레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노대가 치마 다 코날리아노가 그린 성화 또한 그들의 마음에 들었다. 전람회장을 나오면서 그들은 뒤따라 나오던, 토끼처럼 기다란 이빨을 하고 구레나룻이 늘어진 영국 사람들을 한 번 더 돌아다보고는 다시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짧은 재킷에 짧은 바지를 입고 있는, 자기네가 타고 있던 곤돌라의 사공을 보고는 또 웃어댔다. 행상하는 여자가 반백의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가는 모습을 보고는 아까보다는 더 웃어댔다. 드디어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웃음보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리고는 곤돌라에 올라 자리에 앉자마자 서로의 손을 꼬옥 쥐었다. 그들은 호텔로 돌아와 방으로 들어가는 길로 식사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그들은 여전히 즐거웠다. 그들은 서로 즐겼고, 모스크바에 있는 친구들을 위해 건배를 했으며, 맛있는 생선 요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보이를 칭찬하기도 하고, 그에게 싱싱한 식용 조개를 더 부탁하기도 했다. 보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발을 끌며 밖으로 나가서는, 고개를 흔들며 한숨까지 섞어 가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불쌍한 자들이로군." 식사를 마친 다음 그들은 극장으로 갔다. 극장에서는 베르디의 오페라가 상연되고 있었다. 꽤나 흔해빠진 것이었으나, 유럽의 각 무대에서 널리 성공을 거둔데다 러시아 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오페라(라 트라비아타-춘희)였다. 베니스에서도 한물간 가수들은 중간 수준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매회 목청껏 소리를 질러댈 뿐이었다. 비올레타의 역은 평판이 좋지 못한 여배우가 맡았는데 관중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판단해 보건대 별로 사랑받고 있지는 못하나, 그렇다고 해서 전혀 재주가 없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다지 예쁜 편은 아니었지만 검은 눈동자의 젊은 처녀로 깨지는 듯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어린애처럼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 맵시도 좋지 않았다. 빨간 그물이 그녀의 머리를 덮고 있었고, 색 바랜 푸른 공단 드레스가 그녀의 가슴을 꽉 쥐고 있었다. 그리고 두툼한 수웨덴 제 장갑은 뾰족한 팔꿈치까지 올라와 있었다. 하긴 베르가모 지방의 목부의 딸인 그녀가 파리의 유행을 어찌 알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무대 경험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연기에는 성실성이 있었고, 기교가 섞이지 않은 소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이탈리아 처녀 특유의 표정과 리듬의 정렬을 가지고 노래 불렀다. 옐레나와 인사로프는 무대 바로 곁 컴컴한 특별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카데미아 디 벨르 아르티에서 일어났던 유희 기분이 아직도 그들의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요부의 유혹에 빠진 불행한 청년의 아버지가 초록빛을 띤 카키색 연미복을 입고, 헝클어진 백발 가발을 쓰고 무대에 나타나, 당황한 나머지 입을 헤벌리고 침울한 저음 트레몰로를 시작하자, 그들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릴 뻔하였다. 하지만 비올레타의 연기는 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저 불쌍한 처녀에게 박수도 쳐 주지 않는군요." 하고 옐레나는 말했다. "난 거드름을 피우고 괜히 젠 체하는 우쭐한 이류 명사보단 그녀가 천배나 나은데요. 저 처녀는 기교를 부리지 않아요. 보세요, 관중을 의식하지 않죠?" 인사로프는 의자에 몸을 눕히면서 비올레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래, 저 처녀는 기교를 부리지 않는군." 하고 그는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죽음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옐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제 3막이 시작되었다. 막이 올라가자...옐레나는 침대며 드리워진 커튼이며 약병이며 그늘진 램프 등을 보고는 움찔 놀랐다. 얼마 전에 일어났었던 일이 그녀에게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또 현재는?'하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일부러 여배우의 헛기침에 응답이라도 하듯 컴컴한 특별석에서 인사로프의 진짜 기침이 터져 나와 옐레나는 그를 가만히 훔쳐보았다. 어느 새 그녀의 얼굴은 침착하고 차분한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인사로프는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고 빙긋이 웃어 보이면서 조금씩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비올레타의 연기가 차츰 익어가고 자유로워졌다. 그녀는 낯선 것 모두를, 불필요한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자신을 찾은 것이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얼마나 희귀한, 그리고 숭고한 행운인가! 그녀는 갑자기 뭐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움이 살아있는 한계선을 넘고 있었다. 관중들은 깜짝 놀랐다. 거친 목소리를 가진, 예쁘지도 않은 처녀가 관중을 손아귀에 넣고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미 가수의 목소리도 거친 것 같지 않게 들렸다. 그 소리는 차츰 열기를 더해 가고 기운이 넘쳐 갔다. 알프레도가 등장하자, 비올레타의 환희에 넘친 부르짖음은 파나티스모라는 이름의 질풍을 일으킬 뻔했는데, 이에 비하면 우리 북쪽 사람들의 환성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순간 관중들은 또다시 잠잠해졌다. 이 오페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중창이 시작되었는데, 작곡자는 여기에서 헛되이 보낸 청춘의 안타까움과 절망적이고 무력한 사랑의 마지막 투쟁을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중의 공명에 힘을 얻은 여가수는 예술적 환희와 실감나는 고통의 눈물을 두 눈에 그득 담고서 자신을 고조된 흥분 상태에 내맡겼다. 그녀는 얼굴까지 변해 있었으며, 갑자기 다가온 무서운 죽음의 환영 앞에서 하늘에까지라도 다다를 수 있을 만큼 열렬한 기도문이 그녀에게서 터져 나왔다. "날 사라게 해 주옵소서...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어가다니!" 그러자 극장 전체가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와 감격에 가득 찬 환성으로 떠나갈 듯하였다. 옐레나는 전신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자신의 손으로 인사로프의 손을 찾아 꼬옥 쥐었다. 그도 그녀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그러나 그녀도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으며, 그도 그녀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 악수는 몇 시간 전에 곤돌라 안에서 서로 마주잡았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그들은 다시 대운하를 따라 호텔 쪽으로 배를 저어 가게 하였다. 이미 밤이, 밝고 부드러운 밤이 찾아들었다. 아까의 그 궁전들이 그들 쪽으로 쭉 뻗어 있었는데, 아까와는 다른 것처럼 보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달빛이 비친 궁전들은 금빛을 띠고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 흰빛 속에서 창이나 발코니의 섬세한 장식과 윤곽이 사라져 가는 것만 같았다. 그것들은 얇은 안개와도 같은 그림자에 싸인 건물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뚜렷하게 보였다. 작고 붉은 등을 단 곤돌라들이 더욱 소리없이, 한층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것 같았다. 강철로 만든 뱃머리가 신비롭게 빛나고, 노는 은어인 양 출렁이는 물결 위를 신비롭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사공들이 나지막한 외마디 소리를 낼 뿐(그들은 이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다른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호텔에 도착하기 전에 그들은 곤돌라에서 내려 산마르코 광장 주위를, 줄지어 늘어 서 있는 조그만 카페 앞에 하릴없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아치 밑을 몇 차례나 거닐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역의 도시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를 거닌다는 것은 뭔가 색다른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무엇이나 아름답고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선이며 평화며 행복 같은 걸 모두에게 나누어 주고 싶은 법이다. 그러나 옐레나는 자신의 행복감에 무한정 도취되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조금전에 받은 감명에 흔들린 그녀의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총독궁 곁을 지나면서 인사로프가 야트막한 천장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오스트리아 대포의 포구를 말없이 가리켰다. 그리고는 모자를 눈두덩까지 푹 눌러 썼다. 그런 다음, 피로감을 느낀 그는 산마르크 사원에 마지막 일별을 던지고 아내와 함께 천천히 숙소로 돌아왔다. 푸른빛을 띤 사원의 둥근 지붕은 달빛을 받아 인광을 내뿜고 있었다. 그들의 방은 스키아보니 강에서 지우데카까지 뻗쳐 있는 넓은 개펄 쪽으로 창문이 나 있었다. 호텔의 맞은편에는 성게오르기 사원의 첨탑이 솟아 있었다. 오른편에는 도가나의 금빛 찬란한 공이 공중에 높다랗게 떠 번쩍이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사원인 팔라다에의 레덴토레가 아름답게 치장한 신부처럼 서 있었다. 왼편으로는 범선의 마스트와 돛대, 그리고 기선의 굴뚝들이 새까맣게 보였다. 어딘가에선 반쯤 펼쳐진 돛이 병든 날개처럼 드리워져 있었고, 돛대에 달린 깃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인사로프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옐레나는 그가 오래도록 경치를 즐기게 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는 열리 오르고 축 늘어지면서 힘이 빠져 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그를 침대에 눕히고 잠들기를 기다려 가만히 창가로 돌아왔다. 오, 밤은 얼마나 고요하고 부드러운가. 새파란 밤공기는 비둘기처럼 유순하게 숨쉬고 있었다. 모든 고통, 온갖 슬픔은 저 맑은 하늘 아래, 저 성스럽고 순수한 빛 아래 조용히 잠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오, 하느님!' 하고 옐레나는 생각했다. 어째서 죽음을, 어째서 이별과 눈물을 맛보아야 하나요? 만일 그렇다면, 이런 아름다움, 이런 달콤한 희망의 느낌은 어인 일인가요? 어찌하여 견고한 피난처 같은, 불변의 방어를 받는 것 같은, 불멸의 보호 아래 있는 것 같은 편안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요? 이렇게 미소를 머금고 축복을 보내는 듯한 하늘이며, 행복에 젖어 쉬고 있는 듯한 대지는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정녕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의 내부에만 존재할 뿐, 외부는 언제나 냉기와 침묵에 싸여 있는 것인가요, 정녕 우리는 동떨어진.... 동떨어진 존재인가요? 저기 그 도달하기 어려운 심연과 심처 곳곳에 있는 것은 모두 다 우리에겐 낯선 것인가요? 그렇다면 이 갈망, 이 기도의 즐거움은 무슨 까닭일까요? ('이렇게 젊은데 죽어야 하다니'하는 오페라의 노래 소리가 그녀의 가슴 속에 울려 퍼졌다) 정말 자비와 구원을 바라서는 안 되는 것인지...! 오, 하느님! 기적을 바라서는 안 될까요? 그녀는 불끈 쥔 두 손 위에 머리를 얹었다. '끝이란 말인가?'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정말 벌써 끝이란 말인가! 난 행복했어. 몇 분, 몇 시간, 며칠이 아니라 몇 주일간이나 계속 행복했지. 그런데 무슨 권리로?' 그녀는 자신의 행복이 두려워졌다. '만일 행복할 수 없다면?'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만일 행복이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면?'하지만 그건 하느님만이 결정하는 건데....우리 인간들은, 죄 많은 불쌍한 인간들은...이렇게 젊은데 죽어야 하다니...오, 시커먼 유령이여, 물러가라! 그이의 목숨을 필요로 하는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니야!' '하지만 만일 이게 벌이라면' 하고 그녀는 또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일 지금 우리가 지은 죄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라면? 내 양심은 아무렇지도 않고 고요하기만 한데. 하지만 과연 이게 내가 죄가 없는 증거가 될까? 오, 하느님. 정녕 우리는 죄인일까요! 이 밤을, 이 하늘을 창조하신 당신께선 정말 우리가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를 벌주시려 하는 겁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만일 그이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만일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하고 그녀는 자신도 몰래 걱정에 싸여 덧붙였다. '그렇다면 오, 하느님이시여, 이왕이면 여기 이 쓸쓸한 방에서가 아니라, 그이의 조국 땅에서 우리 두 사람이 영광스런 죽음을 맞게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가엾은 외로운 어머니의 슬픔은?' 그녀는 자신에게 이렇게 묻고는 깜짝 놀랐으나,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인간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을, 심지어는 인간의 이익과 편의 같은 것도, 조각이 받침대를 요구하듯, 다른 사람의 손해와 불편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옐레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렌디치!" 하고 인사로프가 잠꼬대를 하였다. 옐레나는 발끝으로 그에게로 걸어가, 몸을 구부리고 얼굴에 배어 나온 땀을 닦아 주었다. 그는 베개 위에서 머리를 몇 차례 뒤척이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그녀는 창가로 돌아와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자신을 달래고 자기 자신에게 확신시키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연약함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과연 위험한 것일까? 그는 좀 나아지지 않을 것인가?' 그녀는 중얼거렸다. '만일 우리가 오늘 극장에 가지 않았더라면 내 머리에 이런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을 텐데.' 그 순간 그녀는 흰 갈매기 한 마리가 물 위로 높다랗게 떠오르는 걸 보았다. 아마도 어떤 어부한테 놀라, 내릴 장소를 찾아 묵묵히 고르지 못한 비행을 하는 것일 게다.' '만일 저 갈매기가 이리로 날아온다면' 하고 옐레나는 생각 하였다. '그건 길조가 될 거야...'갈매기는 맴돌기 시작하더니 날개를 접고는, 총상이라도 입은 양 처량한 울음을 길게 내뿜으며 시커먼 배가 있는 뒤쪽 멀리 어딘가에 내려앉은 것이었다. 옐레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몸을 떨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옷도 벗지 않은 채 인사로프 곁에 드러누었다. 인사로프는 자주 무거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인사로프는 늦게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지끈지끈 쑤셨고,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이 나른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렌디치는 안 왔소?" 그가 처음으로 물은 말이었다. "아직 오지 않았어요." 옐레나는 대답하고, 그에게 '트리에스티노의 관찰자' 최근호를 건네 주었다. 거기에는 전쟁과 슬라브 제국과 공국들에 관한 기사가 잔뜩 실려 있었다. 인사로프는 신문을 읽기 시작했고, 옐레나는 그에게 줄 커피를 준비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렌디치겠지.' 두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문을 두드린 사람이 러시아 어로 이렇게 말하였다. "들어가도 좋습니까?" 옐레나와 인사로프가 의아한 얼굴로 서로 마주 쳐다보고 있는데 그들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서 멋쟁이 차림을 한 청년 한 사람이 방으로 들어섰다. 얼굴이 조그맣고 예리하며 눈매가 날카로웠다. 그는 방금 막대한 돈을 벌었거나, 아니면 신나는 뉴스라도 들은 사람처럼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인사로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를 잘 모르실 겁니다." 그 낯선 청년은 서슴치 않고 인사로프에게 다가가면서, 그리고 옐레나에겐 공손히 인사하면서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저는 루포야로프라고 합니다. 모스크바의 예의 집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이 나시는지요?" "그래, 예의 집에서." 하고 인사로프가 말했다. "물론, 물론이에요! 절 당신 부인께 소개시켜 주십시오, 부인, 저는 언제나 드미츠리 바실리예비치...(그가 정정했다) 니카노르 바실리예비치를 대단히 존경합니다. 이렇게 만나뵙는 영광을 가지다니, 전 아주 운이 좋군요. 생각해 보세요." 하고 그는 인사로프에게로 몸을 돌리고서 말을 이었다. "전 어제 저녁에야 비로소 당신이 여기 계시다는 걸 알았으니. 저도 이 호텔에 묵고 있는데 말입니다. 베니스는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예요.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한편의 시예요! 한가지 질색인 것은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빌어먹을 오스트리아 군인들과 부딪치는 거지요! 그 오스트리아 군인들은 그저! 그건 그렇고, 다뉴브 강에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는 얘기를 들으셨는지요. 터키 장교가 삼백 명이나 죽었다지 뭡니까. 실리스트리아는 점령되고, 세르비아는 독립을 선언했대요. 당신같은 애국자는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슬라브 인인 내 피가 이렇게 끓는데요! 그러나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조심하라는 겁니다. 제 생각으로는, 분명 두 분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여기 탐정들은 여간 무섭지 않아요! 어제는 어떤 수상한 사람이 내게 다가오더니, 러시아 사람이 아니냐고 묻더군요. 그래 전 덴마크 사람이라고 말했지요...그런데 건강이 좋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존경하옵는 니카노르 바실리예비치, 치료를 받아야겠군요. 부인, 남편의 건강을 잘 돌봐 드리십시오. 전 어제 미친 사람처럼 궁전이며 교회며 싸돌아 다녔답니다. 총독궁에 가 보셨겠지요? 가는 곳마다 그 풍요로움이란! 특히 그 커다란 홀이며, 마리노 파리에로의 초상화가 걸렸던 자리하며, 거기엔 '죄로 말미암아 목이 잘렸다.'라고 적혀 있더군요. 전 유명한 감옥에도 가 보았습니다. 거기서 전 아주 피가 끓는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당신도 기억하실 테지만, 전 언제나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귀족 계급에 대하여 반항해 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귀족 계급 지지자들을 그 감옥에 한 번 데려가고 싶어요. '베니스에 와서 탄식의 다리 위에 서 있도다'라고 한 바이런의 말은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그도 귀족이었긴 하지만요. 전 항상 진보를 주장하는 축입지요. 젊은 세대란 으레 그런 것 아닙니까. 영국과 프랑스 문제는 어떻습니까? 부스트라파(나폴레옹 3세의 별명)와 파머스턴(외상 16년, 쌍 8년을 역임한 영국의 정치가)이 얼마만큼이나 업적을 남기는가는 한 번쯤 두고 볼 만한 일이지요. 파머스턴이 수상이 된 건 알고 계신가요? 그렇다고 러시아 부농이 착실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죠. 부스트라파는 천하의 협잡꾼이죠! 빅토르 위고의 <정벌>을 갖다 드릴까요(위고는 망명중에 나폴레옹 3세를 통렬히 매도하는 <징벌>과 <소인 나폴레옹>을 썼음)? 얼마나 잘 되었다고요! '미래는 신의 섭리의 집행자.' 짤막하지만 힘이 있잖습니까? 비아젬스키 공작도 훌륭한 말을 했죠. 유럽은 되풀이 말한다. '바쉬-카딕-라르'라고. 그러나 시노프(흑해 연안의 도시 이름에서 눈을 떼지 않고서. 저는 시를 좋아합니다. 제겐 프루동(프랑스의 사회주의자)의 최근 저서를 비롯하여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본국으로 소환하라는 명령만 내려지지 않는다면, 여기를 떠나 플로렌스나 로마로 갈까 합니다. 프랑스에는 갈수가 없으니, 스페인에나 가 볼 생각입니다. 그 곳엔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고, 가난한 나라가 되어서 이도 많다고들 하더군요. 캘리포니아에도 가 보려고 합니다. 우리 러시아 인들에겐 불가능한 것이 없지요. 게다가 전 어떤 편집인에게 지중해 무역에 관한 문제를 상세히 연구하겠노라는 약속까지 한 걸요. 당신께선 재미없는 전문적인 문제라고 말씀했으니, 필요한 건 실제, 실제입지요...그런데 안색이 아주 좋지 않으시군요. 니카노르 바실리예비치, 아마도 제가 당신으 피곤하게 했나 보죠. 하지만 괜찮아요. 조금만 더 있다 갈 테니까..." 루포야로프는 그런 식으로 한참을 더 떠들어대더니, 방을 나가면서 가끔 찾아오겠노라는 약속을 하였다. 뜻밖의 방문에 지친 인사로프는 소파에 누웠다. "저게." 그는 옐레나를 힐끗 바라보고 나서 씁쓸하게 말했다. "저게 바로 당신네 러시아의 새로운 세대야! 우쭐해하고 잘난 체하기도 하지만, 그 속은 저 녀석처럼 텅 비어 있거든." 옐레나는 남편의 말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에겐 러시아 젊은 세대 전체의 입장보다 인사로프의 피로감이 훨씬 더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의 곁에 앉아 일가믈 들었다. 그는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무척 창백하고 야위어 있었다. 옐레나는 몹시도 수척해진 그의 옆 얼굴을, 그의 펼쳐진 두 손을 보았다. 갑작스런 공포감이 그녀의 가슴을 옥죄었다. "드미트리..." 하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가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렌디치가 왔다고?" "아녜요, 아직. 그런데 당신,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신에겐 열이 있어요. 그래요, 당신 몸이 불편한데, 의사를 부를까요?" "그 허풍쟁이는 당신을 놀라게만 할 걸. 필요 없어요. 조금 쉬면 피로가 풀리겠지. 저녁 식사 마치고 우리 또 나갑시다...어디든지." 두 시간이 흘렀고, 인사로프는 내내 소파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눈은 감았는데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옐레나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일감을 무릎에 놓은 채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왜 주무시지 않으세요?" 이윽고 그녀가 물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는 그녀의 손을 끌어다가 자기 머리 밑에 넣었다. "이제 됐어...됐어요. 렌디치가 오는 대로 바로 날 깨워 줘요. 만일 배가 준비되었다고 하면 우린 곧 출발해야 하오. 짐을 몽땅 꾸려야 해." "짐을 꾸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아요." 옐레나가 대답했다. "아까 그 녀석이 전쟁이 어떻고, 세르비아가 어떻고 하며 한참 떠들었었지." 인사로프가 잠시 후에 말했다. "필경 모두 꾸며 낸 얘기일 거요. 어쨌든 우린 가야 해요, 꼭. 낭비할 시간이 없어요... 준비해 둬요." 그가 잠이 들자. 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옐레나는 안락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오랫동안 창 밖을 내다보았다. 날씨가 바뀌어 바람이 일고 있었다. 흰 구름 떼가 하늘에 몰리고 있었고, 멀리서 가느다란 돛대가 흔들리고 있었으며, 붉은 십자가가 달린 기다란 깃발이 떠올랐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또다시 떠올르곤 했다. 낡은 벽시계의 추가 재깍거리며 둔중한 소리를 냈다. 옐레나는 눈을 감았다. 밤새 잠을 잘 자지 못해, 그녀도 차차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녀가 어떤 낯선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고 차리츠이노 호수를 건너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고, 아무도 노를 젓는 사람이 없는데 배가 저절로 움직였다. 옐레나는 무섭진 않았으나 지루했다. 그녀는 알고 싶었다. 그들이 어떠한 사람들이며, 어째서 그녀가 그들과 함께 있는가를. 그녀가 사방을 둘러보는데, 호수가 넓어지고 둑이 무너지더니, 이미 그건 호수가 아니라 망망 대해가 되었다. 거대한 푸른 파도가 아무 말 없이 배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포효하는 소리와 함께 밑바닥에서 무시무시한 괴물이 나타났다. 두 팔을 내두르곤 하였다....옐레나는 그제서야 그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그녀의 아버지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하얀 회오리바람이 파도에 부딪치더니, 모든 게 소용돌이치고 뒤섞이기 시작했다. 옐레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처럼 주위의 모든 게 하ㅇ다. 그러나 그건 눈, 눈 끝없는 눈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배를 타고 있는 게 아니라 마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떠나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 곁에는 낡아빠진 외투로 둘러싼 조그만 물체가 앉아 있었다. 옐레나가 쳐다보았더니 그건 그녀가 전에 알았던 불쌍한 거지 소녀 카챠였다. 옐레나는 무서워졌다. 저 애는 죽지 않았었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카챠,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카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 낡은 외투 속으로 더욱 움츠러들기만 하였다. 그녀의 몸은 싸늘했다. 옐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길을 바라보았다. 멀리 눈 먼지 속으로 도시가 보였다. 은빛 둥근 지붕이 달린 높다란 흰 탑들이...'카챠, 카챠, 저게 모스크바야? 아니야 저건 솔로베츠키 수도원이야, 하고 옐레나는 생각했다. 거기 벌집 속과도 같이 비좁은 지하실 속에, 숨이 막힐 만큼 좁아터진 그 곳에 드미트리가 갇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이를 풀어 주어야 해... 별안간 그녀 앞에 아가리를 벌린 희끄무레한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마차가 그리고 빠져들어갔고, 카챠가 깔깔거렸다. "옐레나, 옐레나!" 저 밑바닥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옐레나!" 그녀의 귓가에서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다가는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녀가 꿈 속에서 본 눈처럼 하얀 인사로프가 소파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 채 번쩍이는 두 눈을 커다랗게 부릅뜨고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마에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고, 두 입술은 묘하게 벌려져 있었다. 어떤 슬픈 감정과 뒤섞인 공포의 표정이 갑작스레 변한 그의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옐레나! 나 죽어." 하고 그는 말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무릎을 끓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다 끝났어." 인사로프가 되풀이하였다. "나는 죽어...잘 있으시오. 나의 가엾은 아내여! 잘 있거라, 나의 조국이여!" 그러더니 그는 소파 위에서 뒤로 벌렁 넘어가고 말았다. 옐레나는 방 밖으로 뛰어나가 도움을 청했다. 호텔 보이가 의사를 부르러 달려갔다. 옐레나는 인사로프를 부둥켜 안았다. 그때 어깨가 떡 벌어지고 햇빛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을 한 사나이가 문지방에 나타났다. 두터운 플란넬 외투를 입고 챙이 낮은 방수천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당황하여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렌디치! 당신이로군요." 하고 옐레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제발 좀 보세요. 그가 기절을 했어요! 무슨 일일까요? 하느님, 하느님 아버지시여! 어제는 외출도 하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게 이야기를 걸었는데..." 렌디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으로 비켜 섰다. 가발을 쓰고 안경을 낀 작달만한 사람이 그의 곁을 쏜살같이 스쳐 지나왔다. 마침 그 호텔에 묵고 있던 의사였다. 그가 인사로프에게 가까이 왔다. "부인" 얼마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외국 신사는 운명하셨습니다. 폐와 동맥류의 합병증이 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튿날 같은 방 창가에 렌디치가 서 있었다. 옐레나는 숄로 몸을 둘둘만 채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인사로프의 시체는 그 옆방에 놓여 있었다. 옐레나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산 사람의 표정 같지 않았다. 양미간에는 깊은 줄이 둘이나 패어 있어, 움직이지 않는 눈동자에 긴장된 표정을 더해 주고 있었다. 창가에 안나 바실리예브나의 편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는 딸에게, 단 한 달이라도 좋으니 모스크바에 왔다 가라고 편지를 한 것이었다. 자신의 외로움과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인사로프에게는 안부를 전하고, 그의 건강이 어떤가를 묻고 나서는, 단 한 달만이라도 좋으니 그의 처를 보내 달라고 간청하였다. 렌디치는 달마치야의 뱃사람이었다. 인사로프가 고국을 여행할 때 알게 된 인연으로, 베니스까지 온 것이었다. 그는 거칠고 우직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슬라브 민족 운동에 몸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는 터키 인을 경멸하고 오스트리아 인을 증오했다. "베니스에 얼마 동안이나 머무르시게 되나요?" 옐레나가 이탈리아 말로 그에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 또한 얼굴처럼 생기가 없었다. "짐 싣는 데 하루 걸리죠. 그 이상 눌러 있으면 의심을 받게 되어요. 곧장 자라로 갈 겁니다. 우리 동포들에게 얼마나 슬픈 소식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벌써부터 그 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분에게 큰 희망을 걸고 있었거든요." "그이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고요?" 옐레나는 기계적으로 되뇌었다. "장례식은 언제 치르시렵니까?" 렌디치가 물었다. 옐레나는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내일요." "내일이라고요? 그럼 저도 남아 있겠습니다. 그 분 무덤에 흙이라도 한 줌 뿌리고 싶습니다. 당신도 도와 드려할 테고요. 그런데 슬라브 땅에 묻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옐레나는 렌디치를 쳐다보았다. "선장님." 하고 그녀는 말했다. "절 그 분과 함께 바다 저 쪽에 데려다 주세요. 그럴 수 있죠?" 렌디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할 수는 있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골치 아프기 짝이 없는 이 곳 관리들이 귀찮게 굴 테니까요. 하지만 그건 우리가 어떻게든 해서 그 분을 거기에 묻었다고 치고, 부인을 어떻게 데려다 드립니까?" "절 데려다 주실 필요는 없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럼 어디에 머무르시겠다는 말씀인가요?" "제가 있을 곳을 찾아보겠어요. 우릴 그 곳으로만 데려다 주세요. 그렇게 해 주시기만 하면 돼요." 렌디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시다시피, 이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가서 한 번 애는 써 보지요. 여기서 두어 시간만 절 기다려 주십시오." 그가 방을 나갔다. 옐레나는 옆방으로 가 벽에 기대어 화석이라도 된양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는 무릎을 끓었으나, 기도할 수가 없었다. 마음 속에 원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 자비와 동정을 베풀지 않았으며, 왜 보호해 주지 않았느냐고, 비록 죄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그 죄보다 더 큰 벌을 내리시는가고 신께 감히 물을 용기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우리들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죄를 형성하는 것은 아닐는지.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라 할지라도, 살기를 희망하고, 또 살 권리가 있는 것인데....그러나 옐레나는 기도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날 밤, 대형 보트가 인사로프 부부가 들어 있던 호텔 앞을 떠났다. 보트 안에는 옐레나가 렌디치와 함께 앉아 있었고, 검은 천으로 덮은 기다란 관이 놓여 있었다. 그들은 한 시간쯤 노를 저어 갔다. 이윽고 돛대가 두 개인 조그만 범선에 닿았다. 그 배는 바로 항구의 입구에 정박해 있었다. 옐레나와 렌디치가 배에 오르자, 선원들이 관을 날라 왔다. 밤중에는 폭풍이 일기 시작했으나, 이튿날 아침에는 벌써 배가 리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날 종일토록 심한 폭풍이 일었다. '로이드'상사의 노련한 선원들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불길한 예감을 품고 있었다. 베니스, 트리에스테, 달마치야 연안 사이에 위치한 아드리아 해는 극히 위험한 곳이었던 것이다. 옐레나가 베니스를 떠난 지 3주일쯤 지난 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모스크바에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전 어머니, 아버지께 영원히 이별을 고합니다. 절 다시는 보지 못하실 겁니다. 어제 드미트리가 죽었습니다. 저로서는 모든 게 끝난 것입니다. 전 오늘 그의 시체와 함께 자라로 떠납니다. 그를 장사지내고 나서 저 자신은 어떻게 할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겐 이미 드미트리의 조국 외에 다른 조국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곳에선 봉기하여 전쟁할 채비를 하고 있답니다. 전 간호원이 되어 전상자들을 간호하렵니다. 제 앞에 어떠한 일이 닥쳐올는지 모르겠지만, 드미트리가 죽었다 하더라도 전 그의 추억 속에 살며, 그가 평생 하려 했던 일을 하겠습니다. 전 볼가리아 말과 세르비아 말을 베웠답니다. 이 모든 걸 제가 견디어 낼는지는 모르겠지만, 차차 나아질 테지요. 벼랑 끝까지 왔으니 떨어질 수밖에요. 운명이 우리를 결합시킨 것은 결코 헛되지 않았어요. 제가 그를 죽였는지도 몰라요. 그러니 이젠 그가 절 부를 차례지요. 전 행복을 찾았고, 아마 죽음도 찾은 게지요. 당연한 일일 거예요. 제가 죄를 지었으니까...하지만 죽음은 모든 걸 다 덮어 주고 화해시키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제가 어머니, 아버지를 슬프게 해 드린 것 다 용서해 주세요. 전들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요. 러시아로 돌아갈 이유가 없잖습니까? 러시아에서 제가 뭘 하겠습니까? 저의 마지막 키스와 축복을 보냅니다. 절 꾸짖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로부터 어언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으나, 옐레나에 대해선 더 이상 아무 소식도 전해져 오지 않았다. 여기저기 편지도 하고 조회도 해 보았으나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평화 조약 체결 이후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가 직접 베니스와 자라로 그녀를 찾으러 갔으나 허사였다. 베니스에서는 이미 독자들에게 알려진 사실만을 알아 냈을 뿐이고, 또 자라에서는 렌디치와 그가 빌렸다는 배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몇 년 전엔가 심한 폭풍우가 있은 다음, 해안에 관이 하나 밀려왔는데, 그 속에 남자의 시체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좀더 믿을 만한 다른 소식에 의하면, 해안에 관이 밀려온 일은 전혀 없고, 베니스에서 한 외국 부인이 관을 가져와 바닷가에 묻었다고도 하였다. 어떠 이들은, 게르쵸고비나에 집결해 있던 군대에 섞여 있는 부인을 보았다고도 했다. 그들은 그녀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은 옷을 걸치고 있더라고, 그녀의 복장에 대해서까지 말하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옐레나에 대한 기억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갔다. 그녀가 아직 살아 있는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아니면 이미 인생이라는 유희를 마쳤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가벼운 혼동이 끝나고 죽음의 순번이 돌아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잠자리에서 눈을 뜨면, 흔히 무의식중에 몸을 떨며 자문해 보곤 한다. 정말 내 나이가 벌써 삼십...사십...오십이란 말인가? 어쩌면 인생은 이렇게 쉽사리 흘러가 버릴 수 있을까? 어쩌면 죽음은 이렇게 가까워만 오는 것일까? 죽음이란, 고기를 자기의 그물 속에 잡아 놓고도 한동안 물 속에 그냥 놔 두는 어부와도 같은 것이다. 고기는 아직 헤엄을 치고 있으나, 고기한테는 그물이 씌워져 있다. 어부는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고기를 잡아 낸다. 이 이야기 속의 다른 인물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아직도 살아 있다. 그녀는 심한 타격을 받은 이후 폭삭 늙어 버렸고, 불평이 줄어든 대신에 섭섭해하는 일은 훨씬 늘어 났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역시 늙고, 머리가 허옇게 세었으며, 아브구스치나 흐리스치아노브나와도 헤어져 버려, 지금은 외국 것이라면 무조건 배격하고 있다. 그의 집 가정부는 나이가 30세쯤 된 아름다운 러시아 여자로, 명주옷을 입고 금반지와 금귀걸이를 번쩍이고 다녔다. 정력적인 검은 머리를 가진 사람으로서, 귀여운 금발을 좋아하는 성미인 쿠르나토프스키는 조야와 결혼했다. 남편을 대단히 충실히 섬기는 그녀는 독일식 사고 방식까지도 버리고 말았다. 베르셰네프는 하이델베르크에 있다. 그는 국비로 외국여행을 했다. 베를린과 파리에도 갔다왔고, 유능한 교수가 되고자 촌음을 아껴 공부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그가 발표한 두 편의 논문<형벌에 관한 독일 법률의 특성에 대하여>와 <문명 문제에 있어서 도시 기원의 의의에 대하여>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다만 유감스러운 점은, 두 논문이 모두 너무 어려운 말로 씌어 있는데다가 외국어가 남용되어 있다는 것이다. 슈빈은 로마에 있다. 그는 오직 예술에만 정진하여, 가장 뛰어나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조각가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엄격한 순수파들은 그가 고전을 충분히 연구하지 않아, 그의 작품에는 '스타일'이 없다고 지적하고, 그를 프랑스파로 간주하였다. 그에게는 또한 영국인과 미국인들에게서 주문이 쇄도하고 있었다. 최근엔 그의 <바커스 신의 제사>라는 작품이 호평을 받았다. 유명한 러시아의 부호 보보시킨 백작이 그걸 1천 스카디에 사겠다고 하다가, 봄의 정령에 안겨 사랑의 병을 앓는 시골 처녀를 묘사한 순 프랑스 혈통의 조각가에게 3천 스카디를 주는 쪽을 택해 버렸다. 슈빈은 이따금 우바르 이바노비치와 서신 교환을 한다.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지금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불행한 옐레나의 결혼 소식을 알게 된 그날 밤, 제가 당신 침대에 앉아 당신과 이야기하던 그날 밤에 당신이 제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슈빈은 얼마 전에 이런 편지를 띄웠다.'그때 제가 우리 러시아에 참사람이 나타날 것인가.'하고 당신께 물은 것 기억하시는지요? 당신은 제게, "나타날 거야"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오, 검은 대지의 정령이여! 전 지금, '아름다운 옛 추억'에 젖어 다시금 당신께 묻겠습니다. '자, 우바르 이바노비치, 어때요, 과연 나타날까요?' 우바르 이바노비치는 손가락을 흔들어 대면서 자신의 수수께끼 같은 눈길을 멀리 던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