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기 지은이: 투르게네프 출판사: 범우사 연기 1 때는 1862년 8월 10일 오후 4시, 바덴바덴의 유명한 청담장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들끊 고 있었다. 날씨는 매우 좋았으며, 사방의 온갖 사물들-푸르게 서있는 나무들, 아늑한 도시 의 훤칠한 집들, 첩첩이 이어진 산줄기- 도 휴일 기분에 흠씬 젖어 자애로운 햇빛 아래 더 할 나위 없이 좋다는 듯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삼라만상이 눈을 감은 듯, 모든 것을 내맡긴 듯 상냥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도 조금은 멍청 해 보이면서도 즐거운 빛이 확연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눈썹을 새카맣 게 그리고 분으로 매흙질을 한 파리 여상의 모습까지도 다른 날과는 달리 기쁨에 들뜬 이날 의 기분을 망치기는커녕 그들의 모자나 베일에 나부끼는 형형색색의 리본이나 갓, 그리고 금빛 강철빛의 번득임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봄꽃을, 그리고 오색 영롱한 새들의 가벼운 날개짓을 불현듯 상기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주위가 좁다는 듯이 지껄여대는 그 사회 특유 의 앙칼진 프랑스어의 물기 없는, 목에 걸린 듯한 재잘거림만은 참새의 지저귀는 소리로 들 을 수도 또 그것에 비유할 수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모든 일은 준례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다. 육각형의 음악당에서는 오케스트라 가 아 트라비아타 의 혼성곡이라든지 슈트라우스(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지휘자. 왈츠의 아 버지 라고 불림. 1804-1849)의 왈츠, 혹은 악장이 손수 기악에 맞춰 편곡한 <고하라, 그녀 에게>라는 러시아 민요 등을 끊임없이 연주하고 있었다. 도박장에는 녹색 테이블을 둘러싼 낯익은 패들이 서로 밀고 밀치는 성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멍청해 보이면서 도 허욕으로 잔뜩 바람이 들어간 얼굴에, 입은 벌린 것도 어금니를 드러낸 것도 아닌, 탐욕 바로 그 자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결국 도박이라는 열병의 결과로, 이것에 걸리기 만 하면 아무리 귀족적인 체면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영락없이 그렇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번에도 또 근사하게 차려 입은 그 뚱뚱한 땀보프의 지주가 전례에 따라 늘 하던 버릇대 로, 마치 경련이라도 일으킨 듯 허겁지겁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가슴은 테이블 가까이에 들이대며, 도박장 종업원들의 싸늘한 웃음에도 아랑곳없이 이제 마지막 한 판 이라는 선고 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마지막 선고가 떨어짐과 동시에 흠뻑 땀에 젖은 손으로 룰레트대의 구석구석에 눈부신 금화 20프랑을 휙 뿌리고는 어쩌면 요행히 맞아 이득을 거둘 수도 있는 희망을 방정맞게 허사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한편 코코 공 작 부인의 살롱에서, 더구나 황제가 함께 자리한 석상에서 아주 그럴듯하게 아니 부인, 러 시아의 토지제도는 퍽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라고 한마디로 잘라 말한 인물이다. 러시아의 나무 - 이른바 라르브르 뤼스 -주위에는 관례대로 우리 친애하는 조국의 신사 숙녀들이 모여 있다. 화려한 옷차림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제법 유행의 물결을 타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서로가 인사를 나누고 있는 중인데, 그 태도들이 장중하면서도 탁 트여 과연 현대식 교양의 최고 수준에 이르는 무리들이로군 하고 수긍이 갈 정도다. 그런데 막상 함께 자리에 앉으면 이들은 서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어야 좋을지 몰라 마치 빈 통에 또 다른 빈 통을 계속 채우는 것처럼 아무 반응도 없는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들은 한때는 문학인 가운데의 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이미 한 물 간 어느 프랑스 인의 진부하면서도 매우 시시한 엉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여 기 이 남자는 보기 흉한 발에 유태인이 신는 것 같은 아주 작은 단화를 신고, 바싹 야윈 얼 굴에 흉측한 염소 수염을 기른, 희극배우도 따를 수 없는, 인상이 아주 고약한 재변쟁이다. 그는 러시아 귀족들을 상대로 <<샤리바리>>라든가 <<텐타마르>> 같은 수십 년 전의 풍 자잡지에서 닥치는 대로 가당치도 않은 구절을 끌어다가 아야기를 펼쳐놓은 것이다. 한편 그 러시시아의 귀족 무리들이 점잔을 빼며 껄걸 웃어대는 모습은 마치 이 외국인 재간꾼의 압도적인 우월성을, 또 뭣 하나 재미있고 우스꽝스러운 화제를 생각해내지 못하는 자기들의 철저한 무능마저도 인정하는 듯한 그런 광경이다. 더욱이 이곳에는 이 나라 사교계의 명화 도, 일류 귀족들과 유행의 표본들도 거의 빠짐없이 함께 자리해 있는 것이다. 우선X백작을 보자. 이 사람은 대단한 예술 애호가로, 음악에 대한 취미가 매우 깊다고 일컬어지며, 민요를 이야기하는 품 은 그 운치가 천하일품이긴 하지만 사실은 손가락으로 건반을 연습삼아 두드려보지 않고서는 단 두 음부도 만족하게 칠 수 없는 그런 솜씨였다. 그의 노래부르는 모습은 마치 서투른 집시 같기도 하고 파리의 이발사 같기도 한 그런 느낌 을 주었다. 또 이곳에는 모든 사람들을 황홀하게 하는 Z남작도 있다. 이 사람은 문학이나 정치, 연설, 또 어떠한 도박이든 모르는 것이 거의 없는 팔방미인이다. 또 Y공작도 있다. 이 사람은 종교와 백성의 좋은 벗으로, 그 시대... 즉 주류 일수판매가 한창이던 무렵 환각초를 섞은 소주를 팔아 백만장자가 된 인물이다. 또 위풍이 대단한 XX장군도 있다. 이 사람은 전 에 어느 지역인가를 정복하고 진압하기도 했던 사나이인데, 그러나 지금은 처지가 딱하게 되어 자기를 소개할 말조차 궁한 처지다. 또 P.P씨도 있다. 이 사람은 소탈한 성격의 뚱뚱보 로, 비록 그는 자기 자신을 소개할 적에 재주 있는 남자가 병이 잦다며 호소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황소처럼 건강하고 그루터기처럼 노둔한 사람이었다... 이 P.P씨야말로 그 40년대...즉 <현대의 영웅>.레몬토프의 낭만주의 소설 )과 보로트인스카야 백작부인 시대의 인기인들의 유풍을 아직까지도 거의 지니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발꿈치에 중심을 두고 어슬렁거리며 걷는 걸음걸이도, 포즈의 예배 (이것은 러시아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하다)도,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느릿느릿한 동작도, 화라도 난 듯 까딱도 않는 얼굴에 스치는 졸린 듯한 거만한 표정도, 남이 이야기를 할 때 하품을 하거나 손가락이나 손톱을 열심히 들여다본다든가, 아 니면 코끝으로 킁하고 웃는다든가 혹은 갑자기 모자를 푹 눌러 쓰거나 하는 따 위의 버릇도 빠짐없이 보존하고 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국정에 종사하는 대관, 외교관, 유럽식 이름이 역력한 사람들, 나라 의 지혜 주머니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까지도 있다. 이 무리들은 황금문서 는 로마 법왕이 발표한 것, 영국의 빈민세 는 가난뱅이에게 부과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 더 말할 가치도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등 내시 누님들에게 연연한 정을 품고 있는 패거리들이 있다. 이들은 사교계에 새로 등장한 화려한 무리로 뒷머리를 빗자국도 선명하게 갈라붙이고 멋진 구레나룻에 진짜 런던제 양복을 입고 있다. 따라서 이 허영에 들뜬 청년들이야말로 그 허수아비 프랑스 재변쟁이 못지 않게 속악의 근원으로서 의 영예를 자행해도 좋을 법한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지라 아무튼 우리 사회에는 국산품이 별로 인기가 없는 것 이다. 말보다도 실제가 중요한 것. 우선 S백작 부인에 대해 말하자면 그녀는 유행과 취미가 고상하다는 이름있는 집안의 태생으로, 버릇없는 장안 아이들로부터 꿀벌의 여왕 이라든가, 모자를 쓴 여괴 라고 불리고 있다. 이 부인 역시 이야기 상대에게서 재변적 기질이 보이지 않으면 차라리 그 주위에서 서성거리는 이탈리아인이나 몰다비아인, 혹은 강신술에 미쳐 있 는 외국 대.공사관의 엄숙한 서기관 무리, 그것도 아니면 차라리 여자처럼 조심스러운 표정 을 하고 있는 독일 태생의 사람들을 상대로 이야기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다. 또 바베트라는 공작 부인도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쇼팽이 그녀의 두 팡에 안겨 죽 었다고 한다(그러나 유럽에는 그가 자기 팔에 안겨 숨을 거두엇다고 주장하는 부인이 천 명 도 넘는다.)또 안넷트 공작 부인은 용연향(향유고래로부터 채취하는 송진 비슷한 일종의 향 료)의 묘한 향기 가운데 양배추 냄새가 흘러들 듯 그녀의 미모에 갑자기 시골 세탁부의 천 박함이 튀어나와 유감이긴 하지만, 그 점만 아니라면, 그야말로 천하일색이라 해도 아깝지 않을 부인이다. 파셋트 공작 부인은 다행이히도 남편이 훌륭한 벼슬을 했는가 싶더니만, 갑 자기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사장님을 폭행하고 게다가 관금까지 2만 루블이나 써버렸다. 그밖에도 지지라 불리는 웃기 좋아하는 공작 영양, 조조라 불리는 울기 좋아하는 공작 영양 이 있는데,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국내 청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매정스럽게 구는 것이 다... 그러니 우리도 잠시 이 요조숙녀들을 무시하여, 많은 돈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소 검소 한 옷차림을 한 그들이 빙 둘러않아 있을 그 이름난 러시아의 나무 로부터 좀 물러나기로 하자. 하느님이시여, 원컨대 그들을 책망하는 지루함을 덜게 해주소서! 2 러시아의 나무 에서 조금 떨어진 베벨 카페 앞에 한 사나이가 조그마한 탁자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나이는 서른 살쯤 되어 보이며 중키에 약간 마른편인데, 피부는 좀 거무스름하 고 남자다운 얼굴에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다. 두 손을 지팡이에 의지하고 태연하게 버티고 앉아 있는 모습이 누구의 눈에 띄든 말든, 누군가를 만나게 되든 말든 그런 것은 조금도 염 두에 두지 않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다갈색에 황색이 섞인, 그 표정이 풍부한 동그란 눈 은 이따금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거나, 혹은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신 듯 실눈을 뜨기도 하면 서 기발한 옷차림을 하고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 가끔 거의 어린 아이 같은 쓴웃음이 그 엷은 콧수염이나 입술 또는 툭 튀어나온 아래턱에 재빨리 가냘프게 떠도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형의 품이 넉넉한 외투를 입고 있었으며 잿빛 소프트 모자로 튀어나온 이마를 반쯤 가리고 있었다. 한눈에 이 남자는 정직하고 유능하며 자신감도 약간 갖고 있는 청년, 즉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종족에 속해 있는 사람 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언뜻 보기에 그는 오랜 업무에 시달리다 이제는 휴양을 취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지금 이 순간 그의 생각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는 아주 동떨어진 전혀 다른 세계를 회전하 고 있으므로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광경을 한층 허심탄회하게 즐기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는 러시아인으로, 이름은 그리고리 미하일로비치 리토비노프라는 사나이 였다. 우리는 앞으로 이 사나이와 친숙한 사이가 되어야만 하겠기에 그의 과거를 간단히 소 개해두어야겠다. 과거라 하지만 사실 퍽 간단하고 밋밋한 것에 불과하다. 그의 부친은 상인 계습 출신으로서 지금은 퇴직하여 조용히 살고 있지만 한때는 근실하고 정직한 관리였다고 한다. 여러분은 그의 아들로 태어난 이 사나이가 도시에서 자랐을 것이라고 생각되겠지만, 사실 그가 자란 곳은 시골이다. 모친은 귀족 출신으로 사치스러운 기숙 여학교를 나왔으며 매우 감정이 풍부한, 선량하기 짝이 없는 여자였고, 성품도 무척 깔끔했다. 남편보다 스무살 이나 아래이면서도 남편을 제 손아귀에 넣어, 평범한 관리에서 버젓한 지주로 만들어놓는가 하면, 싸움이나 하고 사람 사귀기는 좋아하지 않는 그의 성격을 온순하게 만들어놓았다. 덕 분에 남편은 옷차림도 깔끔해졌고, 예의범절도 식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싸움이나 말다툼 같은 것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학자나 학문을 존경하게 되었으며- 그렇다고는 하지 만 여전히 책은 다 한 권도 손에 지니는 일이 없었다 - 또 자기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으려 고 여러 가지로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걸음걸이도 훨씬 조용해졌고, 이야기 할 적에도 음성을 낮추어 점차 고상한 화제를 고르려 애쓰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에게는 가 장 어려운 일이었다. 속으로는 에라! 집어치워라! 하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래요, 그 래요, 그야... 물론이지요. 정말 문제로군요 하고 말하는 것이다. 집안 준례에 있어서도 리토비노프의 모친은 모든 것을 유럽식으로 개량하여 하녀들에게도 당신 이란 호칭을 썼으면 저녁 식사를 할 적에도 졸릴 정도로 배부르게 먹는 것을 누구에게 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의 소유로 되어 있는 여지는 그녀 자신으로서도, 또 남편으로서도 어떻게 소능ㄹ 대야 할지 몰랐다. 벌써 오래전부터 그냥 버려둔 채로 있기는 하지만, 꽤 광 대한 토지로, 농장으로서의 여견도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삼림도 잇고 또 호수도 하나 있었다. 그 전에는 이 토지에 큰 공장이 하나 있엇다. 그것은 열성적이 고 배짱이 두둑한 어느 지주가 세운 것이었는데, 그 위에 어떤 교활한 상인의 손으로 넘어 가 한때 번창했으나 결국엔 정직한 독일인 청부인이 관리하게 되면서 완전히 파멸해버린 것 이다. 리토비노프 부인은 이젠 더 이상 그 재산을 깎아먹거나 빚을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 족하게 된 것이다. 불행히도 그녀는 건강이 좋지 못하여 아들이 모스크바 대학헤 입학하던 해에 폐병으로 세 상을 떴다. 아들은 여러 가지 사정(독자는 나중에 그 사정을 알게 될 것이다)으로 대학을 중 퇴하고 다시 시골로 되돌아와 이렇다 할 만한 직장도 없이, 이끌어줄 만한 연고도 없이, 친 구도 거의 없는 처지로 당분간 그곳에 묻혀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고을의 지주와 귀족 패 거리들은 아직 기권주의 의 폐해를 울리는 유럽의 이론에 완전히 빠져들진 않았어도 내 몸 만큼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 고 하는 자기 나라 고유의 신념에 사로잡혀 모두가 그를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1855년에 국민군으로 뽑혔고, 크리미아 반도에 서 장티푸스에 걸려 까딱하면 죽을 뻔했다. 그래서 그는 한 명의 우군 도 보지 못한 채 6개 월이라는 세월을 해안의 오두막에 처박혀 있는 신세가 되었다. 그후 그는 지방자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그곳에서 잠시 근무하게 되었는데, 물론 거기서 도 여러 가지 불쾌한 일은 따라다녔다. 그는 시골생활의 따분함에 싫증을 느끼고는 가옥 개 축에 열중하기로 했다. 그가 간파한 바에 의하면 모친의 소유지는 현재 연로한 부친의 서투 르고 허술한 관리로 말미암아 당연히 올라야 할 수입의 10분의 1도 올리지 못하고 있지만, 만약 이것을 경험있고 식견이 잇는 사람의 손으로 경영한다면 틀림없이 비싼 땅으로 변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기에게는 그 경영이나 지식이 결핍되어 있다는 사 실을 간파하였으므로 농학과 공학을 기초부터 배우기 위해 외국으로 떠났다. 그리하야 그는 4년 남짓을 메클렌부르크, 실레지아, 카를르스루에서 지냈고, 벨기에나 영국에도 갔으며, 착 실하게 공부하여 대체적인 지식을 습득했다. 그것은 꽤 힘든 일이었지만, 그는 그 시련에 시 종 잘 견디어냈으므로 이제는 자기 능력에도, 자신의 앞날에도, 또 자기가 비단 고향의 동료 들에게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자방 전체에까지 가져다줄 이익에도 자신만만해져 고향으로 돌 아가는 길이었다. 한편 고향의 부친은 농노해방 농경지의 할당이나 분배, 농노들의 불하계 약 등 한마디로 눈부신 새 체제로의 전환에 매우 당황하여 아들에게 편지를 띄워 필사적으 로 애원하다시피 아들이 귀향해줄 것을 재촉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그는 지금 바덴바덴 같은 곳에 와 있는 것일까? 그가 바덴바덴에 와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사촌 누이동생이기도 하고 또 약혼녀이 기도 한 타치야나 페트로브나 세스토바가 이곳에 오기를 학수고대학 있는 것이다. 그는 그 녀를 아주 어려서부터 알았으며, 금년에도 그는 봄과 여름을 드레스덴에서 숙모님과 한 집 에 살고 있는 그녀와 함께 지냈을 정도였다. 이 친척 처녀를 그는 진심으로 사랑했으면, 또 매우 존경학 있었다. 그는 이제 미래를 위한 공부를 끝내고 바야흐로 새 생활로 돌입하려 하고 있으며 관청 근무 따위의 시시산 일이 아닌, 현역의 독보적인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 이 마당에 그는 한 가지 큰 결심을 한 것이다. 즉 그녀에게 사랑하는 여성으로서, 반려자로 서, 기쁠 때나 슬플때나 일할 때나 쉴 때나 영국인의 말을 빌리자면, 좋을 때나 궂은 때나 그 생애를 자기 생애와 맺어줄 수 없겠느냐고 그녀에게 청혼한 것이다. 다행히 그녀가 이를 승낙했으므로 그는 책과 소지품과 서류가 있는 카를르스루에로 되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어찌하여 바덴바덴 같은 곳에 하고 여러분은 또다시 궁금해 할 것이다. 그가 바덴바덴에 있는 까닭은 역시 다름이 아니다. 타치야나의 숙모이자, 그녀를 이렇게까 지 키워준 은인인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 세스토바는 지금 쉰 다섯 살의 노처녀로 제법 성 미가 깔끔한, 곧이곧대로의 괴짜이며, 몸을 바치고 버리는 데에 열성적인 자유정신의 권화인 동시에 이른바 자유사상가였다(사실 숙모는 조카 몰래 슈트라우스(종교를 비판한 독일의 종 교철학자.1808~1874)를 읽고 있었다). 더욱이 민주주의 자로서 특히 상류사회나 귀족들에게 는 둘도 없는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이 여장부가 단 한번만이라도 바덴바덴과 같은 유행계의 중심지에서 상류사회라는 것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유혹을 정녕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테를 두른 종모양의 넓게 퍼진 치마는 결코 입지 않았으며 흰 머 리칼을 둥글게 빗어올린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사치라든가 호사 같은 것에 은근히 마음이 동하면서도 그런 것을 욕하거나 경멸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유괘하고 즐 거운 일처럼 보였다. 그러니 어찌 이 선량한 노부인을 위로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건 그렇고 리토비노프는 지금 보는 바와 같이 태연자약하게 아무 거리낌도 없이 앉아 자신만만한 시선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 그는 이제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자기 생 활을 전개할 것이고 자신의 운명도, 그가 그렇게도 자랑으로 여기고 마치 그것을 자기 손으 로 만들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만족하고 있는 그 운명도 확실히 결정된 것이다. 3 어! 자네 이상한 곳에 있군! 하고 갑자기 그의 뒤에서 쩌렁쩌렁한 음성이 들리더니, 분 듯한 두툼한 손이 탁하고 어깨를 쳤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모스크바 시대의 몇 안 되는 친구 중의 하나로, 반바에프라는 사나이였다. 그는 호인이긴 하지만 전혀 쓸모 없는 부류의 인간으로 이미 젊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에 마치 잘 익은 듯한 말랑말랑한 볼과 코, 기름으 로 끈적끈적해진 더부룩한 머리카락, 거기다가 긴장이 풀린 듯한 뚱뚱한 체격을 하고 있었 다. 그는 늘 무일푼이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들떠 있었다. 이로스치스라프 반바에프는 찢어지 는 듯한 소리를 질러대며 이렇다 할 목적도 없이 우리들의 참을성 많은 어머니인 대지 위를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이군 그래! 하고 그는 살이 쪄 지방 속에 푹 파묻힌 작은 두 눈을 동그랗 게 뜨고 두툼한 입술을 내밀면서 거듭 말했다. 그 입술에는 당황한 듯한 야릇한 느낌이 감 돌았고 그 주위에는 염색한 수염이 삐쭉 솟아 있었다. 역시 바덴바덴이로군! 진드기처럼 모 두 이리로 기어든단 말이야. 자네는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건가? 반바에프는 이 세상 누구를 막론하고 단연 자네, 나 로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엊그제 왔어. 어디서? 그건 알아서 뭘하려고? 뭘하느냐고! 아아, 그렇지, 자네는 모르겠지. 여기 또 누가 와 있는지를 말이야! 구바료프 가 와 있어! 그 바로 선생이 말이야! 그 사람이 와 있다고! 어제 하이델베르크로부터 왔지. 자네도 물론 그 사람과는 친구였겠지? 이름은 듣고 있지. 그뿐이었나? 아니 그럴 수가! 그럼, 곧장 자네를 그 사람한테 끌고 가기로 하지. 그런 인 물과 교제가 없었다니! 그렇군, 마침 잘됐어. 보로시로프도 와있네... 이런, 자네는 그럼 이 선생도 모르겠군? 그럼 나는 결국 자네에게 이 두 선생을 인사시킬 영광을 지닌 셈이군. 두 분 다 학자이시지. 게다가 이 분은 세상에 보기 드문 불사조 같은 분이시지. 자, 인사하게 나! 이렇게 말하고 반바에프는 옆에 서 있는 잘생긴 청년을 돌아보았다. 그는 생기 있는 장밋빛 의, 제법 점잖아 보이는 얼굴을 한 청년이었다. 리토비노프는 일어나 물론 키스 같은 것은 하지 않았지만 그 불사조 선생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상대는 그 새침한 태도로 보아 아마도 이 뜻하지 않은 인사를 그다지 반갑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 불사조 라고 말했는데 이 표현은 취소하지 않겠네. 반바에프는 말을 계속했다. 페테르스부르크에 가서 XX유년학교에 걸려 있는 그 황금판을 한번 보게나. 누구의 이름이 첫 번째로 나와 있다고 생각하나? 바로 이 보로시로프 세미욘 야코레비치야! 하지만 구바료 프, 그렇지, 그 구바료프에 대해서 말인데, 이보게! 자네는 만사를 제쳐놓고 그 사람한테 달 려가야만 해! 나는 단연코 그 인물을 숭배하고 있네. 그리고 말이야, 그 사람은 지금 굉장한 것을 집필중인데, 그 주제가 그...뭔가...그... 무슨 주제인데? 리토비노프가 물었다. 아니, 모든 것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네. 그 사람은 말이야, 마치 버클(영국의 역사가. 과 학적 문명사관을 바탕으로 <<영국의 문명사>> 2권을 썼음. 1821~1862)과도 같아... 다만 훨 씬 더 깊을 뿐이야... 그 저술이 일단 완성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천명될 정도지. 자네가 직접 읽어보았나, 그 저술을? 아니, 읽지 않았어. 그뿐인가, 아직은 경솔하게 입밖에 내서도 안될 비밀중의 비밀인걸, 하 지만 그 구바료프에게 모든 것을 기대해도 좋을 걸세. 모든 것을 말이야! 그렇고 말고! 반 바에프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팔짱을 꼈다. 정말 그렇다니까. 그런 위대한 두뇌가 우 리 러시아에 두어 명쯤 더 나타난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질텐데! 다만 한 가지 자네에 게 말해두겠는데 말이야, 리토비노프 군, 자네가 지금 어떤 방면의 연구를 하고 있든 말일세 - 사실 나는 자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 또 자네가 어떤 신념을 품고 있든 말일세 - 이것 역시 내가 알 턱이 없지만 - 그러나 어쨌든 그 구바료프를 만나보면 반드시 뭔가 얻는 바가 있을거야. 애석한 일은 그 사람은 그리 오래 체재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일세.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반드시 만나보도록 하게. 가세, 자 가세! 때마침 불그레한 고수머리에 파란 리본이 달린 납작모자를 쓰고 지나가던 약삭빠른 젊은 이가 이쪽을 흘끗 돌아보는가 싶더니, 독살스러운 미소를 띄며 외알 안경 너머로 반바에프 를 쳐다보았다. 리토비노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뭘 그렇게 서두르는 건가? 하고 그는 말했다. 사냥개를 몰아 짐승을 쫓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나는 아직 저녁도 먹지 않았네. 그게 어쨌다는 건가? 지금 곧 이 베벨에서 먹으면 되지 않나...셋이서 말이야...이거 괜찮은 데! 내 몫까지 계산할 만한 돈은 있겠지? 하고 그는 나직이 덧붙였다. 그야 있긴 하지만, 실은 난 좀 그... 제발 괜찮으니까 체면 차리는 짓은 그만두게나. 자네는 나중에 반드시 내게 고마워하게 될 걸세. 게다가 저 사람도 기뻐할 테고 말이야. 이거 꽤 괜찮은 일인데! 반바에프는 기고 만장했다. 저것 봐, 에루나니 의 피날레를 하고있지 않은가. 가슴이 다 녹아드는군!...아, 소 무...모 카쿠로라... 하지만 나도 묘한 녀석이지! 금방 이렇게 눈물이 글썽해지니. 자, 세미욘 군! 아니, 자, 보로시로프 선생! 들어가지 않겠는가? 보로시로프는 늘 하던 버릇대로 약간 거만스럽고 새침한 태도를 유지한 채 여전히 날씬하 고 맵시 있는 자세로 늠름하게 서 있다가 다소 의미심장하게 눈을 내리깔며 눈썹을 찌푸리 고는 무슨 말인지 중얼거렸으나...그렇다고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리토비노프는 좋아! 그것 도 괜찮겠는데, 다행히 시간은 넉넉하니까 하고 생각했다. 반바에프는 그러는 그의 팔을 끼 고는 카페로 발을 옮기면서 집게손가락을 세우고 이자베라라는 경마클럽의 유명한 꽃팔이 소녀에게 까딱거리며 손짓을 했다. 꽃다발을 하나 사주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체격이 좋은 그 꽃팔이 소녀는 본 체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로서는 장갑도 끼지 않고 때가 묻은 프라시텐의 짧은 웃저고리에 얼룩얼룩한 넥타이를 메고, 닳아빠진 장화를 신은, 파리의 뒷골 목에서조차도 본 적이 없는 그런 모습의 신사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 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보로시로프가 역시 집게손가락을 세우고 그녀에게 손짓했다. 그에게는 호응하여 다가왔으므로 그는 꽃바구니 속에서 겨우 제비꽃 한다발을 고르고는 그 루우덴 은화 한 닢을 던져주었다. 그런데 소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그가 등을 돌리자마자 꼭 다문 입술을 비웃는 듯 삐쭉거리는 것이었다. 보로시로프의 옷차림은 매우 단정해서 때는 벗었다고 몰 수 있지만 파리소녀의 기름진 눈에는 이내 그의 화장한 모 습이나 눈에 띄지 않게 입은 속옷, 꽤 일찍부터 군대에서 길들여진 흔적을 남기고 있는 걸 음걸이로 인해 세련된 맛이 부족하다는 것을 금방 알아냈던 것이다. 베벨 카페에 자리를 잡고 저녁식사를 주문한 다음 이들은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반바에프 는 열정에 가득찬 소리로 구바료프의 숭고하기 그지없는 진가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는데, 이윽고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숨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고기를 물어뜯는 등 열심히 그릇을 비우기 시작했다. 보로시로프는 기분이 내키지 않는 모양으로, 그다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리토비노프에게 지금 연구하고 있는 것의 종류를 물어보고 나서 천천히 자기 의견을 제시하 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그 연구의 주제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반적인 여러 가지 문제 에 대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활기를 띠더니, 나중에는 마치 분마와 같은 기세 로 졸업시험을 앞둔 유년학교 어린이처럼 한 마디 한 마디 한 음절 한 음절을 위세있고 날 카롭게 발음하면서, 두 손을 힘차게 그러나 우스꽝스럽게 휘둘러대기까지 하면서 도도하게 일장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요행히 아무도 그의 말을 가로막는 자가 없었으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점점 더 신이 나서 웅변조로 떠들어댔다. 마치 박사 논문이나 강연 원고라도 읽어내려가는 것 같았다. 최근의 학자들 이름을 들먹이며 그들이 태어난 연도와 사망한 연 도, 거기다가 최근에 간행된 잡지명까지 덧붙여 그에 필요한 이름, 이름, 또 이름이 사정없 이 그의 혀끝에서 쏟아져나왔는데, 그것이 본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쾌감을 가져다주고 있 음은 그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보로시로프는 분명 모든 진부 한 것들을 경멸하고 문화 겉면의 크림만을, 학문의 가장 새롭고 첨단적인 정점만을 배움의 핵심으로 떠받들고 있었다. 설사 화제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쨌든 사우엘벵겔 박사같은 분의 펜실베니아 주의 감옥에 관한 저서라든지 <<아시아 시보>>의 어제 날짜로 나온 바라문 성전 이나 인도 고전 에 대한 기사라든지(그는 영어도 모르는 주제에 시보를 쥬나르라 하지 않고 저널이라 발음하고 있었다) 하는 것 등을 언급하는 것이 그로서는 진정 으로 기뻤고 진정으로 행복했던 것이다. 리토비노프는 잠자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 었으나, 대체 그의 전공이 무엇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현재 겔트족의 역사상의 역할 에 대해 말하다가 갑자기 태고적 세계로 화재를 바꾸어 다도해 여러 섬의 대리석 조각을 논 하기 시작하는가 하면 피디아스(고대 그리스의 조각가. 그리스 최성기 신상조각의 제일인자 로, 아테네 여신상 및 올림피아의 제우스상은 그중 걸작임. B.C. 488?~B.C. 443?) 이전에 살 고있던 조각가 오나다스에 대하여 뽐내며 이야기하다 말고 갑자기 오나다스가 요나단(유대 제1대 왕 사울의 맏아들)으로 둔갑하여 그 때문에 그의 말 전체가 삽시간에 성서 냄새와 미 국 냄새가 섞여 분간키 어려운 묘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또 갑자기 화제는 경제학으로 일전하여 저 바스디아를 바보라느니 장승이라느니 욕하며 그저 아담 스미스(영 국의 경제학자.윤리학자. 저서로는<<국부론>>, <<도덕 정조론>> 등이 있음. 1723~1790)나 중농주의자들보다 낫지도 못하지도 않다... 는 등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중농주의자라니! 반바에프가 앵무새처럼 투덜댔다. 그건 귀족을 말하는 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보로시로프는 다름 아닌 그 반바에프의 얼굴에까지 놀라는 빛 을 띠게 하였다. 무심코 입을 잘못 놀려 마콜리(영국의 역사가.작가.정치가. 저서로는 <<영 국사>>와 <<수상록>> 등이 있음. 1800~1859)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논객에 지나지 않는다, 요즈음의 학문은 벌써 그를 추월하고 있다는 식으로 극단적으로 말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나이스트(독일의 공법학자.정치가. 저서로는 <<현대 영국 헌법 및 행정법>>. <<영국 헌법사>> 등이 있음. 1816~1895)와 리루에 대해서는 그런 이름은 언급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단언하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자 반바에프도 지지 않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런, 세상에. 이 모든 이야기를 단번에, 아무 이 유도 없이, 그것도 이런 카페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함부로 지껄여대다니 하고 리토비 노프는 이 새로운 친구의 노랑색 머리와 맑은 눈동자, 흰 이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특히 그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그 각설탕처럼 두꺼운 이와 느닷없이 휘둘러대는 손짓이었다.) 게다가 단 한 번도 웃는 일이 없잖은가. 이 모든 점을 종합해보건대 필경 이 녀석은 형편 없는 철부지에 순진한 풋내기임에 틀림없다... 이윽고 보로시로프가 잠잠해졌다. 그 햇병아리처럼 삐약삐약 울어대던, 기묘하게 쉰 목소 리가 잠시 끊겼는가 싶더니... 때가 왔다는 듯이 이번에는 반바에프가 시 낭송을 하기 시작 하였다. 시 낭송을 그럴 듯하게 하느라 잔뜩 울상이 된 그의 얼굴은 옆 테이블에 자리잡고 있는 영국인 가족의 얼굴에 이 무슨 추태냐 하는 듯한 경멸의 표정을 떠올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테이블에선 손님들이 킥킥 웃음을 참지 못하는 소동을 빚었다. 그 테이블에 는 두 멋쟁이 여자가 갈색 가발을 뒤집어 쓴 나이 든 도련님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던 것 이다. 보이가 계산서를 가지고 오자 두 친구가 돈을 지불했다. 자, 그럼. 반바에프가 육중한 몸을 간신히 의자에서 일으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커피나 한 잔 얻어 마시고 그러고는 전진이다! 그런데 잠깐만, 저기 저 여자는 우리 러시아 여자인 것 같은데. 그는 출입구에 멈춰 서서 감개무량한 듯 자신의 부드럽고 고운 손으로 보로시로프와 리토비노프에게 손짓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어때, 응? 그렇군, 러시아 여자로군. 리토비노프는 생각했다. 보로시로프는 그 사이에 재빨리 얼굴에 처음의 그 균형 잡힌 표정을 되찾았는데, 그 여자를 보자 빙긋 웃어 보이며 두 발꿈치를 가 볍게 맞붙였다. 5분 뒤 그들 세 사람은 한패가 되어 스테판 니콜라예비치 구바료프가 묵고 있는 호텔의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때 키가 큰 날씬한 부인이 짧은 검정색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쓰 고 서두르는 발걸음으로 그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는데 리토비노프를 보자 갑자기 그를 돌아 보며 멈춰 섰다. 무척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확 달아오르더니 이내 레이스의 가 는 그물 속에서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리토비노프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고, 부인은 그 대로 전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폭이 넓은 그 층계를 뛰어내려갔다. 4 이 사람은 그리고리 리토비노프 군입니다. 무척 사랑스럽고 훌륭한 이 러시아 친구를 소 개해 드립니다. 반바에프가 째지는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리토비노프를 소개했는데, 상대방 남자는 땅딸막한 지주 같은 풍채에 칼라를 풀어제친 꽉 끼는 짧은 웃저고리를 입고, 잿빛 바지에 슬리퍼를 신은 채 잘 꾸며놓은 밝은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쪽은, 그는 리토비노프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그분일세. 알겠지? 구바료프씨일세. 리토비노프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번 봐서는 그에게서 무엇하나 비범한 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가 지금 본 사람은, 역시 덕망있는 품격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웬지 좀 둔한 듯한, 이마는 넓고 눈은 퀭하고 두꺼운 입술에 수염은 더부룩하며, 목은 굵고 비스듬히 내리 깔아보는 듯한 눈을 가진 신사였다. 그 신사는 빙긋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흠...역시...좋아요... 이거 무척 반갑습니다... 하고 말하고는 얼굴에 한 손을 대고 그대로 돌아서서 리토비노프에게 등을 돌린 채 마치 잠자리라도 잡으려는 듯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두어 걸음 융단 위를 걸었다. 구바료프는 길고 딱딱한 손톱 끝으로 수염을 잡아당기거나 쓰다듬거나 하면서 쉴새없이 방안을 왔다갔다하는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방안에는 구바료프 외에도 꽤 낡은 비단옷을 입은 나이가 50세쯤 되어 보이는 한 부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레몬처럼 노랗고 매우 무표정한 얼굴에 코밑에는 거무스름하게 털이 나 있었으며, 구석에는 어깨가 떡벌어진 한 사나이가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다. 자, 그럼, 마토료나 세묘노브나, 구바료프는 그 부인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으나 그녀를 리토비노프에게 인사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까 시작했던 얘기는 어떤 것이었지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 부인(이름은 마토료나 세묘노브나 스한치코바라 하며 아이가 없는 과부로, 재산도 기울었는데 벌써 2년 남짓 이곳저곳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종의 특별하고도 맹렬한 열띤 어조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남자는 공작 앞으로 나가 이렇게 말했다는군요. 각하, 당신 같은 고관대작의 신분으로선 제 불운을 가볍게 해주는 것쯤이야 누워서 떡먹기가 아닙니까? 하고 말예요. 그러고는 또 당신은 제 순수한 신념을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고 말했대요. 그리고 또 도대체 오늘날 이 시대에 신념을 박해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하고 말했다는군요. 그런데 말예요, 이 교양 있고 지위도 매우 높으신 공작께서 과연 어떻게 했다고 생각하세요? 흠, 글쎄 어떻게 했을까요? 구바료프는 깊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부인은 허리를 쭉 펴더니 심줄이 튀어나온 오른손을 집게손가락만 따로 세워 쓱 앞으로 내밀면서 공작은 하인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이봐, 지금 곧 이 녀석의 프록 코트를 벗겨서 네놈이 입어라. 내가 그 옷을 네놈에게 주겠다! 하고요. 그래, 하인이 진짜로 벗겼나요? 반바에프가 손뼉을 치며 물었다. 벗겨서 자기가 입었대요. 어쩌면 그런 짓을, 그 바르나로프 공작이라는 분이 - 세상이 다 아는 재산가이며 다시없는 권력가께서, 정치계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한 그분이 글세 그랬다는 거예요. 이런 지독한 짓이 또 어디 있을까요! 스한치코바 부인의 바싹 마른 몸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얼굴에는 경련이 살짝 스쳤고 늙어 볼품없는 가슴은 판판한 코르셋 밑에서 불룩불룩 물결쳤다. 두 눈은 말할 것도 없이 튀어나올 듯 움직였다. 사실 그 눈은 이야기를 할 적마다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개탄해 마지않을 사건이군요! 반바에프가 탄성을 올렸다. 그에 마땅한 형벌이 없을 정도입니다! 흠...흠...웃물부터 아랫물까지 철저히 부패되어 있군. 구바료프가 한마디 더 덧붙였으나, 그러나 언성은 높이지 않았다. 이쯤 되면 형벌로선 안 되지...이쯤 되면 이젠...다른 수를 쓰지 않으면 안 돼. 아니, 그것은 그렇다 치고 사실입니까, 그것이? 리토비노프가 물었다. 사실이냐고요? 스한치코바가 말을 받았다. 물론 눈곱만큼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예요. 눈곱만큼도...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상체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나는 그 얘기를, 가장 믿을 수 있는 어떤 분한테서 몇 번이나 들었어요. 구바료프, 당신도 저 카피톤 에리스토라 토프를 알고 계시겠죠. 그분이 이 일을 그 장소에 있던, 즉 그 흉측스러운 장면을 목격한 사람한테서 직접 들으셨다는 거예요. 에리스토라토프라면 구바료프가 되물었다. 카잔에 있던 그 사람인가요? 예, 그분 말예요. 그런데 구바료프, 나도 그분이 거기서 청부업자인지 양조업자인지한테서 뇌물을 받았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대체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렸다고 생각하세요? 바로 페리카노프예요! 그런데 페리카노프의 말을 믿을 수가 있나요? 세상이 다 알고 있는걸요, 뭐 그분이 그러니까 스파이라는 것쯤은! 아니, 미안합니다만 부인, 하고 반바에프가 나섰다. 저는 페리카노프와는 친구인데요, 어째서 그 사나이가 스파이란 말인가요? 그야 스파이지요! 잠깐만, 그건 가당치도 않은... 스파이지요, 스파이예요! 하고 스한치코바가 우겨댔다. 천만에,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텐테레예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반바에프는 목청이 터져라 하고 소리쳤다. 스한치코바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영감 일이라면 저도 확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다시 점잖게 말을 계속했다. 제3분에서 호출이 있었을 때 그 영감은 브라젠크란프 백작 부인의 발밑에 이마를 조아리며 살려주십시오. 너그럽게 보아주십시오! 하고 사정했습니다. 그러나 페리카노프만큼은 그런 비열한 짓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흠, 텐테레예프가... 구바료프가 나직이 말했다. 그렇다면 기억해둬야겠는데. 스한치코바는 비웃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두 분 다 굉장한 분이지요. 그녀는 말문을 열었다. 나는 텐테레예프에 대해서라면 더욱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고 있어요. 그분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다시피, 자기 농노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고 무도한 폭군이면서도 겉으로는 남들처럼 농노해방론자인 체 가장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파리에서 아는 사람 옆에 앉아 있노라니, 거기에 갑자기 비처 스토(미국의 여류작가. 그리스교도적인 인도주의의 입장에서 흑인 노예의 참상을 그린 작품을 써서 노예해방을 주장함. 1811~1896)여사가 나타났더군요 - 아시죠, 저 <엉클 톰스 캐빈>을 쓰신 분 말예요. 텐테레예프는 징그럽게 낯가죽이 두꺼운 사람이라 자기를 좀 소개해달라고 주인에게 부탁했다는군요. 그런데 여사는 그분의 성함을 듣기가 무섭게 뭐라고요? 하고 말하더니 톰 아저씨의 작가와 알고 지내고 싶다는 거예요? 하며 그분의 볼에 불이 번쩍 나도록 따귀를 한 대 갈기고는 나가줘요, 빨리! 라고 했대요. 자, 어떻게 됐겠어요? 텐테레예프는 모자를 집어들고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버렸다는 겁니다. 아니, 없는 말까지 꼬리를 달아 말씀하시는군요. 반바에프가 쏘아붙였다. 분명히 여사는 나가줘요! 라고 말한 건 사실이지만, 불이 번쩍 나게 후려치진 않았단 말입니다. 때렸어요, 한 대 갈겼다고요! 하고 스한치코바가 부르르 치를 떨면서 대꾸했다. 내가 어째서 당치도 않은 말을 하겠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그런 패거리들과 친구시군요! 좀 참아주십시오, 부인. 저는 제가 텐테레예프와 가까이 지낸다고 말한 기억은 없습니다. 제가 말한 것은 페리카노프에 대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텐테레예프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도 좋아요. 저 미프네프는 어때요? 그가 무슨 일을 저질렀다는 겁니까? 듣기도 전에 겁을 집어먹은 반바에프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요? 정말 시치미를 떼시는군요. 보즈네센스키의 큰 거리에서, 그것도 여러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에서 자유주의 녀석들은 모조리 감옥에 처넣어야만 한다고 떠들어댔잖아요. 또 돈이 궁한 기숙사 시절의 옛친구 한 명이 찾아와서 저녁 식사에 좀 초대해주겠나? 하고 말했더니, 그분 말씀이 안 되겠네. 오늘은 백작 두 분이 저녁 식사를 하러 오게 되어 있어서 말일세... 나타나지 말아주게! 하고 대답했다잖아요! 그건 중상입니다. 이거 야단이군! 반바에프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중상? ...중상이라고요? 또 그 바프르시킨 공작이 역시 그 미프네프 댁의 저녁 식사 초대를 받고... 바프르시킨 공작이라면? 구바료프가 험악한 어조로 참견했다. 제 사촌 동생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 아이의 출입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그 아이를 증인으로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또 스한치코바는 구바료프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저 브라스코비야 야코브레브나한테서 직접 들었어요. 이런, 굉장한 증인이 나오는군요! 그 부인과 또 저 살키조프는 거짓말쟁이 중에서도 알아주는 거짓말쟁이예요. 미안합니다. 그야 살키조프는 확실히 거짓말쟁이예요. 그분이 돌아가신 아버님의 관에 걸려 있던 금란 덮개를 몰래 슬쩍 했다는 것은 나도 인정해요. 그렇지만 브라스코비야 야코브레브나는 그런 사람과는 비교가 안 돼요! 좀 생각해보세요, 그분이 남편과 이혼했을 때의 그 훌륭했던 태도를! 그런데 당신이라는 사람은 언제나 남의 말꼬리를... 나는 환히 잘 알고 있어요. 아니, 부인, 이제 그만둡시다. 반바에프가 가로막았다. 이제 말다툼은 그만두고 고상한 문제로 뛰어들지 않으시렵니까? 저 역시 나이를 먹었다고는 하지만 혈기는 있는 편이니까요. 드 라 칸다니 양의 작품을 읽으셨습니까? 훌륭하더군요! 당신의 주의 주장과도 딱 들어맞고 말입니다! 난 이제 소설을 읽지 않아요. 스한치코바는 무뚝뚝하게 잘라 대답하였다. 어째서요? 그럴 겨를이 없어요. 지금 내 머릿속은 미싱에 관한 단 한 가지 문제로 가득 찼는걸요. 미싱이라고요? 리토비노프가 물었다. 재봉하는 미싱 말이에요. 여자는 모름지기 누구나 미싱을 배워 일치단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가는 모두 자기 힘으로 생활비를 벌어 언제든지 독립할 수가 있어요. 이 방법을 제외하고는 여자가 해방되는 길은 결코 없습니다. 이것은 중대한, 실로 중대한 사회문제예요. 나는 이 일에 관해 보레스라프 스타드니스키와 결론을 내렸어요. 보레스라프 스타드니스키는 매우 훌륭한 인물이지만 이런 문제 관해서는 꽤 경솔한 견해를 갖고 있더군요. 그저 웃고만 있는 거예요... 바보 천치예요, 그분은! 아니, 인간은 누구나 마침내는 인과응보의 이치를 피하지 못하게 되나니 하고 교사의 말투도 아니고 예언자의 말투도 아닌 이상한 어조로 구바료프가 천천히 말했다. 그래요, 그렇고 말고요. 반바에프가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인과응보지요, 정말 인과응 보고 말고요. 그런데 구바료프. 이번에는 목소리를 낮추어 덧붙였다. 저술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자료를 수집하는 중입니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구바료프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이내 몸을 돌려, 보지도 듣지도 못한 무리들의 이름과 정신 없이 오고가는 터무니 없는 욕설로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한 리토비노프에게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리토비노프는 상대의 호기심을 만족시켰다. 그래요! 자연과학이로군요. 그건 정말 학문으로서는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학문으로서지 목적으로서가 아닙니다. 목적은 이제는 당연히... 은, 그... 의당 다른 데 있어야겠지요. 실례지만 당신은 어떤 견해를 갖고 있습니까? 어떤 견해라니요? 이를테면 그, 결국 그 당신의 정치적인 신념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어깨가 떡벌어진 그 남자가 이 말을 듣더니 머리를 번쩍 쳐들고 가만히 리토비노프를 노려보았다. 그건 또 왜요? 이상하리만큼 부드러운 어조로 구바료프는 말했다. 아직 깊이 파고들어 생각해보지 않은 겁니까, 그렇잖으면 벌써 지쳐버린 겁니까? 거, 뭐라고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다만 저로서는 우리들 러시아인은 정치적인 신 념을 갖는다거나 혹은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 다. 참고 삼아 말씀드리자면 제가 정치적 이라는 말에 부여하고 있는 의미는 그저 정당하게 소속되어 있는 의미일뿐으로 따라서... 허허! 아직 사상이 무르익지 못하셨군. 여전히 부드러운 어조로 구바료프는 그의 말을 가 로막고는, 다음엔 보로시로프 옆으로 다가가 자기가 준 팜플렛을 읽었느냐고 물었다. 보로시로프는 리토비노프가 의아하게 생각했을 정도로 이곳에 도착한 뒤로 이제까지 한 마 디 말도 없이 다만 이맛살을 찌푸리고 의미 있은 듯한 시선을 옮기고 있었는데(그는 대체로 일장연설을 늘어놓거나 아니면 완전히 입다물고 있거나 하는 그런 기질이었다)이제 이런 질 문을 받자, 그는 군대식으로 가슴을 쓱 내밀고 구두 뒤축을 딱 맞추고는 머리를 앞뒤고 끄 덕여 보였다. 그래, 어떻던가요? 마음에 흡족하던가요? 중요한 논거에 있어서는 하나하나에 만족했습니다만 결론을 내리는 방법에 있어 납득이 가지 않는 데가 좀 있었습니다. 흠, 안드레이 이바느비치는 분명 그 팜플렛을 칭찬해주었는데요. 나중에 당신의 의문점을 다시 들어보기로 하지요. 문장 형식으로 말입니까? 구바료프는 확실히 당황했다. 거짓말을 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잠깐 생각하 고 나서 이렇게 대다했다. 그래요, 글로 써주시오, 덧붙여 말씀드리지만 당신의 주장도 염 려하지 말고 써주시오... 그... 즉 그 조합에 대해서 말이오. 랏사르식의 조합 말입니까, 아니면 슈르스 데리치식의 것 말입니까? 흠,... 둘 다 부탁합니다. 그 문제로 말할 것 같으면, 알겠습니까, 우리들 러시아인에게 있 어서 특히 중요한 것은 재정적인 면입니다. 그리고 또 협동조합에 대해서도... 새싹을 지닌 낟알로서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남김없이 모두 고려할 여지가 있습니다.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그 밖에도 농민에 대한 토지분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구바료프, 지적의 분배는 몇 정보쯤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목소리에 은근 한 경의를 품고 보로시로프가 물었다. 흠,... 그러나 토지 공유제는 하고 구바료프는 자못 의미심장한 어투로 말하고는 수염을 한줌 입에 물고 테이블 다리를 노려보았다. 토지 공유제... 아시지요? 이것은 위대한 단어입 니다! 그리고 또 그 빈번한 화제는...그리고 또 주일 학교나 독서실이나 신문 잡지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또 지주와 저의 농노와의 관계에 관한 조 례 에 농민이 서명을 거절하는 것은? 또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폴란드 사태는? 이러한 모든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그것이 당신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제야말 로... 흠... 우리들은 민중과 하나가 되어 에... 직접 민중의 생각을 알아야만 할 때라는 것이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까? 구바료프는 갑자기 괴로운 듯한, 거의 저주스러운 흥분에 들떠 얼굴빛은 암갈색을 띠고 숨소리도 가빠졌지만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로 수염을 깨물며 또 이것도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까? 하고 말했다. 에프세노프는 철면피예요! 갑자기 스한치코바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 과부를 상대로 반 바에프는 이 집 주인에 대한 경의로 뭔가를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바료프 는 발뒤꿈치로 빙글 돌아서더니 또다시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한 사람 한 사람씩 새로운 방문객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밤이 이슥해지자 꽤 많은 인원이 모였다. 그 가운데에는 방금 스한치코바가 지독하게 욕을 했던 에프세노프도 있었는 데, 그녀는 이 인물과 매우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돌아갈 때에는 숙소까지 데려다 달 라고까지 하였다. 피시차르킨인가 하는 남자도 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정말 이상적인 농업 조정 관리로서, 아마도 현재 러시아가 필요로 하고 있는 인물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이는 이 남자가 비록 지식에 있어서는 천부적 소질이 없는 둔재이긴 했어도, 성실하고 참을 성이 뛰어난 결백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담당하는 지역의 주민들은 거의 그를 우 러러볼 정도였으며, 그 자신도 또한 그러한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는 자부 심이 대단했다. 장교도 몇 명 찾아 왔는데, 이들은 물론 연대장 각하의 신중함을 항상 염두 에 두고 몸조심을 하고는 있었지만, 잠시 단기 휴가를 얻어 유럽으로 나와 이러한 총명한 인사 -설사 그것이 소수의 위험 인물일지라도 - 들의 무리에 끼여 하루 저녁을 마음 편히 쉴 기회를 얻었다는 것을 흔쾌히 여기는 무리들이었다. 몸이 매우 마른 하이델베르크의 대 학생도 두 명 와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경멸하는 듯한 표정으로 쉴새없이 주의를 둘러 보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얼굴이 조여드는 듯 웃고만 있었는데... 요컨대 두 사람 모두 열없었던 것이다. 이 두 사람에 이어 프랑스인이 한 사람 끼여들었다. 이 사람은 약간 꾀죄 죄한 가난뱅이 몸차림을 한 아둔해 보이는 사나이로 이른바 풋내기였는데, 그럼에도 러시아 의 백작 부인에게 홀딱 반했다는 말이 있어 동료인 출장판매원들 사이에는 꽤 평판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오늘 공짜 밤참을 얻어먹는다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런 생각 도 없었다. 맨 나중에 나타난 사람은 치토빈다소프라고 하는 보기에도 유별난 사나이로 독 일의 대학에 적을 두고는 있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고리대금업이었고, 입으로는 테러리스트 라 떠들면서도 하는 짓은 구의 경찰서장 노릇이었으며, 게다가 러시아의 상인 여편네들이나 파리에서 온 신분이 애매한 여인들과 매우 사이가 좋은, 대머리에 이가 다 빠진 대주객이었 다. 지독하게 새빨간 그 흉측한 얼굴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저 베나젯트의 사기꾼 녀석 에게 걸려들어 마지막 한푼까지 다 털렸다고 투덜거렸지만, 실제로 그는 16그루우덴이나 따고 있 었다... 어쨌든 이 자리에는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정 말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 방문객들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구바료프에 대하여 마치 스승이 나 우두머리에게 대하는 것 같은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스승 앞에 자신 의 의문을 진술하고 그 판결을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스승은 그에 대답함에 있어... 음매 하고 소처럼 소리를 내기도 하고 쏙 수염을 잡아당기기도 하며, 혹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 도 하고 별의미도 없는 몇 마디 말을 띄엄띄엄 내뱉기도 하는 것이었는데, 그 몇 마디가 삽 시간에 날개라도 돋친 듯 줄지어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는 모습은 성인군자의 금언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장본인인 구바료프는 여간해서 토론에 끼여들지 않는 데 비해 다른 무리들은 가슴이 오므라들 정도로 열렬히 토론했다. 때로는 서너 사람이 한꺼번에 10 분 남짓을 계속 토론하는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일동은 만족해하며 변사가 하고자 하는 바 를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12시가 지나도록 계속되었는데, 그 특징은 으레 그렇듯이 화제가 풍부하고 다양 한 데에 있었다. 스한치코바의 화제는 가리바르디에 관한 것을 비롯하여 자기 하인들로부터 뭇매를 맞은 바 있는 카를르 이바느비치라는 남자에 대한 것, 나폴레옹 3세에 대한 것, 부인 노동에 관한 것, 고의적으로 12명이나 되는 여공으로 하여금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하여 그 공로로 공익상 이라 새겨진 상패를 받았다는 프레스카초라는 상인에 대한 것, 프롤레타리아 에 대한 것, 자기 아내를 대포로 사살한 구르쟈의 공작 쥬크체우리제프에 대한 것, 그리고 러시아의 장래에 관한 것, 이런 등등의 각 방면에 걸친 것들이었다. 피시차르킨도 러시아의 장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또 주류의 일수판매 문제라든지, 국내 제민족의 중요성이라든지, 또 그가 가장 증오하는 속악 등등에 대하여 떠들어댔다. 보로시로프는 갑자기 제방을 터뜨 린 기세로 숨도 쉬지 않고 목이 콱 막힐 만큼 빠른 말투로 드레바, 피르호프, 쉐르그노프, 비샤, 헤름호룻, 스타, 스토우르, 레이몬드, 생리학자 요한 뮐러, 역사가 요한 뮐러(물론 이 두 사람을 혼동하면서), 테느, 루난, 시쟈포프, 게다가 토마스, 낫시, 피르, 그린... 등등의 그 가 좋아하는 명부를 펼쳐 놓았다. 그건 또 누군가? 하고 짜증이 난 반바에프가 투덜거렸 다. 세익스피어의 선구자들로서 몽블랑에 대한 알프스 지맥과 같은 관계에 있는 분들입니 다! 하고 보로시로프는 힘차게 말하고 그 역시 러시아의 장래에 대하여 언급했다. 반바에프 도 또한 러시아의 장래에 대해 말하고 마치 무지개와 같은 낙관론을 떠들어대다가 특히 러 시아 음악에 대해 소감을 말하는 마당에 이르러 그의 열띤 모습은 절정에 달하여 오오! 위 대한 것이 있다 고 말하며 그 증거로서 바라모프의 <로멘스> 1절을 읊조려댔지만 야, 저 녀석이 토로바토레의 <미제레레>를 노래하고 있군. 게다가 순 엉터리야 하는 여러 사람들 의 야유로 말미암아 안타깝게도 눈물을 머금고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젊은 장교 한 사람은 혼잡한 틈을 타서 러시아 문학을 헐뜯었고 또 한 사람은 <<불꽃>>에 실려 있 는 짧은 시를 읊었다. 치토 빈다소프에 이르자 이야기는 한층 더 간단명료해졌다. 즉 그런 사기꾼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이빨을 부러뜨려야만 한다! 하는 것인데, 도대체가 누가 사 기꾼이라는 것인지 그 점은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담배 연기가 숨막힐 정도로 가득 찼다. 모두들 후텁지근한 더위에 완전히 지쳤고, 목소리는 쉬고 눈은 희미해졌으며 땀은 방울져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흐르고 있었다. 차가운 맥주가 이따금 들어왔으나 삽시간에 비워졌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지? 하고 한 사람이 물으면 어, 그러는 나는 대체 누 구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던가? 하고 또 한 사람이 묻는 식이었다. 이러한 소란과 사람 들 사이에 입김과 담배 연기 속을 수염을 잡아당기며 피로도 잊은 채 여전히 휘청거리며 걸 어 다니는 구바료프는 누군가의 의논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잠깐 몇 마디 거들어주기도 했다. 그래서 일동은 싫든 좋든간에 구바료프야말로 최후의 으뜸패로 여기고 그 자리의 주 인일 뿐만 아니라 실로 맹주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형편이었다. 10시쯤 되자 리토비노프는 지독하게 두통이 나기 시작하여 때마침 일동이 왁자지껄해진 틈을 타서 아무도 모르게 슬며시 꽁무니를 뺐다. 마침 스한치코바가 바르나로프 공작의 패 륜부덕했던 모습을 또 한 번 얘기함에 이르러 누군가의 귀를 물어뜯으라고 명령할 뻔했다느 니 아니라느니 하고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쾌한 밤 기운이 리토비노프의 상기된 얼굴을 스치고 향기로운 바람이 그의 메마른 입술 로 흘러들어왔다. 대체 무엇 때문에 하고 그는 어두운 가로수길을 걸으면서 생각했다. 무 엇 때문에 나는 그런 자리에 얼굴을 내밀었던가? 그 패거리들은 무슨 일로 그렇게 모인 것 일까? 왜 그렇게 아우성치고 욕지거리를 하며 죽느니 사느니 떠들어대는 것일까? 대체 뭘 어쩌겠다는 것일까? 리토비노프는 어깨를 움츠리고 베벨 카페로 가서 신문을 펴들고는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신문은 로마 문제를 논하고 있었고, 아이스크림은 수저를 대보니 지독하게 딱딱했다. 이윽고 숙소로 돌아가려고 일어서려는데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쓴 처음 보는 사나이가 거침없이 다가 와서는 러시아어로 실례합니다 하고 말하면서 그의 맞은편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그제야 비로소 리토비노프는 주의하여 처음 보는 듯한 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는데, 자세 히 보니 그는 아까 구바료프 집에 있었던 어깨가 떡벌어진 체격의 그 신사였다. 즉 그 방의 한편 구석에 앉아서 이야기가 정치상의 신념에 대한 것에 이르렀을 때 그를 흘긋 쳐다보던 바로 그 남자였다. 저녁 내내 입을 열지 않고 있던 이 신사는 이제 리토비노프의 옆에 자리 를 차지하자, 모자를 벗고 아주 친밀한 사이인 듯 약간 허둥거리는 눈초리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5 실은 오늘 구바료프의 집에서 뵈었습니다만 하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 분이 소개해주 니까 실례를 무릅쓰고 내 소개를 하겠습니다. 나는 포토우긴이라 하는 퇴직 7등관으로, 전에 상크토 페테르스부르크의 재무부에서 봉직하고 있었습니다. 제발 이상한 놈이라고는 생각지 말아주십시오... 나 역시 누군가를 이렇게 갑자기 사귄다는 것이 평소의 습관에는 없는 일이 지만... 당신하고만은... 이쯤 말하고 나서 포토우긴은 더즘거리며 보이에게 앵두 술을 한 잔 주문했다. 기운을 내기 위한 술입죠 하고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리토비노프는 오늘 뜻밖에 만나게 되었던 새로운 얼굴, 얼굴, 얼굴들 중에서 마지막 얼굴 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상대를 몇 배나 주의하면서 바라보았는데, 그는 곧 이렇게 생각하 게 되었다 - 이 사람은, 그 패거리들과는 다르다. 정말 그러했다. 지금 그의 앞에 앉아 강마른 작은 두 손으로 테이블의 모서리를 후비고 있 는 이 사나이는 떡벌어진 어깨에 다르는 짧았으나 튼튼한 상체를 갖고 있었다. 그는 고수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짙은 눈썹 밑에선 매우 영리해 보이는 듯한, 그러나 조금은 슬 픈 듯한 작은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고, 반듯하게 달린 큰 입은 더러운 이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으며 코는 하지감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그 전형적인 러시아 코를 하고 있었다. 그는 못생긴, 아니 오히려 비천에 가까운 인품이었지만, 그러난 확실히 이 사람은 도매값으로 넘 길 만한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옷차림도 수수하여 구식 프록 코트는 자루 모양으로 넉넉하 게 컸으며, 넥타이는 옆으로 비뚤어져 있었다. 이와 같은 그가 보여주고 있는 믿음직스러운 정표는 리토비노프에게는 뻔뻔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의 마음을 은 근히 달콤하게 간지럽히는 것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뻔뻔스럽게 달라붙는 그런 나 쁜 버릇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토비노프는 이 사나이에게서 기 묘한 인상으르 받았다. 이 사나이는 그로 하여금 존경과 공명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동시에 웬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연민의 정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럼, 실례가 되진 않겠지요? 그는 상냥스럽게 약간 쉰 듯한 가느다란 목소리로 되풀이 했는데, 그것은 그의 풍모 전체에 더할 나위 없이 딱 어울리고 있었다. 천만에요. 리토비노프는 대답했다. 오히려 매우 반갑습니다. 정말인가요? 그야 나 역시 반갑습니다. 나는 당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소문을 듣고 있 습니다. 당신이 연구하고 계시는 일도, 당신의 포부에 대해서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정말 장한 일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오늘 잠자코 계신 거지요. 당신도 역시 거의 입을 열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리토비노프가 이렇게 지적했다. 포토우긴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른 사람들이 하도 떠들어대는 바람에 그만 나는 듣고만 있 었던 겁니다. 그래, 어떻던가요? 하고 그는 잠깐 입을 다물고 짓궂게 눈썹을 추켜세우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의 바벨탑 건설은 마음에 드시던가요? 정말 바벨탑이더군요. 참 멋있는 말씀이십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보고 싶어 못 견 디겠더군요. 무얼 그렇게 초조하게 구느냐고 말입니다. 포토우긴은 또 한숨을 내쉬더니 바 로 그겁니다. 그들 자신은 그것을 모르니 말입니다. 옛날이었다면 그 패거리들을 가리켜 지 상 명령의 맹목적인 도구 라고 말했을 테지요. 지금은 사실 더 신랄한 표현도 쓰긴 하지만, 본래 나는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사실 그들은 모두가... 거의 다 훌륭한 사람 들이지요. 가령 저 스한치코바 부인으로 말하더라도 그녀에겐 장점이 많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요. 그 부인은 자기 돈을 한푼도 남김없이 가난한 두 조카딸에게 주어버렸습니다. 설사 그때 다소 허세를 부리고 싶은, 세상에 자기를 한 번 내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 더라도, 당신도 이의가 없을 줄 알지만, 풍족지 못한 부인의 처지로서는 그것만으로도 훌륭 한 희생이었지요. 피시차르킨 씨의 경우는 두말할 나위가 없어요. 필경 조만간에 그 사람의 관할 구역에 사는 농부들은 수박 모양의 은잔을, 아니 어쩌면 그 이름의 성자를 그린 성상 까지도 그에게 선물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나로서는 과분한 명예입니다 하고 말 할 테지만 그것은 지나친 겸손일 뿐 아니라 그 사람은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지 요. 그리고 당신은 친구인 반바에프 씨는 뛰어난 정신력을 갖고 있어요. 그 사람은 책 앞에 단정히 앉아 빵 대신에 물을 마시면서 즐거운 찬가를 노래했다는 시인 야지코프처럼 걷잡을 수 없는 감격에 넘쳐 있지만, 감격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감격이거든요. 그리고 보로시로프 도 좋은 사람이지요. 그 사람은 유년학교 출신들, 그러니까 황금판에 이름이 나와 있는 수재 들과 마찬가지로 그야말로 학술의 전령이요 문명의 전령이지요. 잠자코 있을 때조차도 웅변 을 토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거든요. 아무튼 그만한 젊은 나이에 대단해요! 그러나 이렇게 모두들 훌륭한 사람들만 모였는데도 성과는 아무것도 없군요. 이를테면 재료는 일등품인데 일단 접시에 담게 되면 도저히 입으로 가져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리토비노프는 놀라면서 포토우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여유 있고 자신만만한 그 의 변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뛰어난 말솜씨와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 사나이의 성품을 곧 입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토우긴은 사실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또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짓밟혀 자 존심을 뿌리째 뽑혀버린 사람이 으레 그렇듯이 그는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할 만한 상대를 만나게 되는 날을 마치 철학자처럼 평온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 원 벌써. 그는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병적이진 않지만 다소 독특하면서도 침울한 유머를 띤 어투였다. 이거 참 기묘하기 짝이 없구려. 그렇지만 여기 주목해야 할 점이 있어 요. 예컨데 영국인이 열 사람 모였다면 그들은 곧 해저전신이나 지세나 쥐가죽 다루는 법과 같은 분명한 형태를 지닌 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눌거요. 만일 독일인이 열 사람 모이면 - 그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실레스비히 호른쉬타인과 독일 통일문제가 화제로 등장할테고, 프 랑스인이 열 사람 모이면 -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건 결국은 음담으로 낙착되지 않을 수 없을 거요. 그런데 러시아인이 열 사람 모이면 입에 곧 오르는 화제란 - 오늘 당신도 이 기 회에 절실히 느끼게 되었겠지만 - 러시아의 존재 의의니 겨우 그런 정도의 화제로, 게다가 그것도 막연한 일반론으로서 레다의 말대로 아무 논거도 없고 또 이렇다 할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그 말이 그 말이 되어버리기가 일쑤지요. 마치 어린 아이가 고무 조각을 뒤죽박죽 으로 만들어 버리듯이, 그들은 그 까다로운 문제를 곤죽으로 만들어 달콤한 진액도 좋은 의 견도 얻지 못하고 결국 포기하고 말지요. 물론 그러한 겨우에 알량한 금기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요. 젠장! 이놈에게 한 번 걸려들기만 하면 금세 손발이 묶여버리거든. 이 서구라는 것 - 그리고 부패하는 것에 말이오. 그것도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멸시한다면 좋겠지만 하 고 포토우긴은 말을 계속했다. 그렇지 않으면 공염불의 거짓말이 되어 버리거든요. 하긴 우 리는 이 서구라는 놈에게 곧잘 욕설을 퍼부어대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결국은 그놈에게 으레 고개를 숙이고 말거든요. 단적으로 말하자면 파라의 바보 천치들의 의견에 꼼짝 못하 고 굽신거리더라 이 말씀예요. 내가 아는 어떤 사나이는 한 집안을 거느리는 어엿한 아버지 요, 분수를 지킬 줄 아는 사나이지요. 그 친구가 며칠간 얼굴이 개지 않고 있어요. 그 이유 는 파라의 모 요릿집에 가서 감자가 곁들인 비프스테이크 한 접시를 주문하고 있었는데, 그 때 진짜 프랑스 사람이 느닷없이 여보게, 그거 감자 스테이크가 아닌가 하고 말했대요. 내 친구는 그만 부끄러워 얼굴을 둘 곳을 몰랐다는 거예요! 한데 그 후로는 어딜 가나 감자 스테이크 로 바꿔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타이르고 있더군요. 그뿐인 줄 알아요? 닳 고닳은 파리의 매춘부들도 어리둥절한가봐요 - 우리 나라 시골뜨기 청년들의 가슴을 두근 거리며 여자들의 퀴퀴한 방에 들어설 때의 꼬락서니라니... 아니, 저 안나 데리온을 찾아왔 군! 하고 생각하는 판이거든요. 한마디 묻겠는데요. 리토비노프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 구바료프가 어중이떠중이들 을 꼼짝 못하게 하는 큰 힘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그 사나이의 타고 난 천성에서 나오나요, 아니면 실력의 소치인가요? 천만에, 절대로 그렇지는 않아요. 그런 것은 그 사나이에게서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어 요... 그럼 인덕이라도 있다는 건가요? 그런 것도 없어요. 다만 그사나이는 의지가 강하지요. 우리네 슬라브인은 아시는 바와 같 이 대체로 보물을 별고 소유하지 못하고 있어 그것과 겨루게 되면 깨끗이 무릎을 꿇게 마련 이거든요. 그래서 모두들 그 사나이를 우두머리로 모시는 거예요. 그 외엔 아무것도 없어요. 정부는 우리를 농노제도의 사슬에서 풀어주었어요. 복도 많지요. 그런대 우린 모두 노예 근 성에 깊숙이 젖어 있어 짧은 시일에 거기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우리는 무슨 일에나, 또 어딜 가나 우두머리를 필요로 해요. 우리는 육신을 가진 인간이지만 때로는 뭐랄 까, 소위 어떤 경향이라는 것이 우리의 지배자가 되는 수도 있지요. 가령 현재 우리는 누구 나 자연과학의 노예가 된 꼴이거든요... 어찌하여 무슨 까닭에 우리는 노예가 되고 싶어하는 걸까요? - 이건 매운 까다로운 문제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것이 우리의 천성인가봐요. 요컨 데 문제는 우리가 우두머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데 있어요. 그런데 지금 그 우두머리가 우 리에게 나타난다면 곧 그것이 우리의 산 신이 되어 그 밖의 것에는 모두 침을 뱉게 되지요! 이만하면 훌륭한 노예가 아니겠어요! 교만한 것이 노예적이라면 비굴한 것 역시 분명 노예 적이지 않겠어요? 그런데 일단 새 우두머리가 나타나게 되면 전에 받들어온 우두머리와는 깨끗이 하직을 하지요! 어제는 야코프, 오늘은 시도르라는 식으로 말예요. 야코프의 귀를 쥐 어 팽개쳐버리고 시도르의 발밑에 끓어앉는 거지요! 생각해보시오. 이따위 소동이 우리들 주위에서 얼마나 흔히 일어나고 있는가를! 우리는 이와 같은 부정적인 경향을 마치 우리의 장점이나 되는 듯이 이야기하지만, 같은 부정이라도 우리의 그것은 악마의 칼을 휘두르는 자유인의 그것이 아니라 고작해야 주먹을 휘둘러 돈이나 빼앗는 마차꾼의 그것으로, 그나마 주인의 명령으로 그렇게 하는 거지요. 하지만 우리는 온순한 국민이긴 해요. 우리를 손아귀 에 넣는다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지요. 현재 구바료프 선생 역시 그러한 수법으로 우두머리 가 되었거든요. 한 길말 파고들어 끝내 구멍을 뚫게 된 거지요. 다른 놈팡이들의 눈에 비친 선생의 모습은 스스로를 큰 인물이라 자부하는 사나이로, 자신만만하니까 명령도 내리는 거 죠. 특히 이 명령을 내린다 는 점이 중요해요. 그러고 보니 그 사나이가 옳아요. 그쯤 되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지요. 종교의 풍토를 보더라도 우리 나라의 오누프리파니 아크니라파니 하고 분리된 교단은 바로 이런 수법이로 이루어진 거죠. 요컨대 먼저 지팡이 를 잡고 휘두르는 자가 대장이 되는 거지요. 포토우긴의 뺨은 불그레하게 상기되었고 눈은 흐리멍덩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 주변만은 신랄하다 못해 독설에 가까웠고 그러면서도 그 어조는 거만하지 않고 오히려 더 욱 서글프게 그리고 깊은 비애를 머금고 울려왔다. 당신이 구바료프를 알게 된 경위는 어떻습니까? 하고 리토비노프가 물었다. 그 사나이에 대해서는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 유의해야 할 기묘한 일이 우리들 사이에 있어요. 가령 여기 어떤 훌륭한 저술가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 사나이 가 일생 동안 때로는 시로, 때로는 산문으로써 술을 마시거나 판매하는 폐단을 비난했다고 칩시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그 사나이가 어느 날 갑자기 양조장을 두 개나 사들 이고 술집을 백 군데나 낸다고 하더라도 어느 누구 하나 그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즉 다른 사람이었다면 금방 세상에서 매장되었겠지만 그 사나이는 욕 한 마디 먹지 않지요. 현재 저 구바료프 선생도 마찬가지예요. 그 사나이는 국수파요, 민주주의자요, 사회주의자요, 그 밖에 무슨 일에나 선봉을 서지만 그 영역을 오래 관리해왔고 또 현재에도 관리하고 있는 아우라 는 자는 옛날의 지주이자 치고의사라는 존칭을 받고 있는 불량배이기도 하거든요. 게다가 저 스한치코바 부인까지도 비처 스토 여사로 하여금 텐테레예프의 뺨을 후려 갈기게 할 정 도로 막강한 주먹을 갖고 있으면서도 구바료프 앞에서는 오금을 펴지 못하는 형편이거든요. 아무튼 그 사나이의 일이란 다만 재미있는 책을 열심히 읽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 지요. 그의 말재주가 어느 정도인지는 당신도 잘 알 테지요. 그나마 그 사람이 거의 입을 열 지 않고 위축되어 잠자코 있는 것만이라도 신의 은총이라고 해야겠지요. 만일 그 사람 이 신이 나서 마구 지껄여댄다면 아무리 나 같은 참을성 있는 사나이라도 견디지 못할 거예요. 사람을 희롱하는가 하면 비열한 얘기로 열을 올리거든요 - 그래요, 우리의 구바료프 선생은 이 방면의 대가로서 끊임없이 지껄이며 해죽거리지요.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참을성 있는 사람이라 자부하시는군요. 리토비노프가 말했다. 나 는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그렇고 실례지만 당신 이름과 부친의 존함은 어떻게 되지요? 포토우긴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내 이름은 소존토... 소존토 이바느이치라고 해요. 이 멋진 이름은 친척 중에 관장(한 종파를 관리하는 우두머리)으로 계시는 어떤 분에게 부탁해 서 지은 것이지요. 내가 그 분의 신세를 진 것은 이것뿐예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승려의 혈 통을 이어 받았어요. 그리고 당신은 방금 전에 내 인내력에 대해 의심을 품었던 모양인데, 그건 공연한 일이지요. 실제로 나는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니까요. 22년 동안 4등관이신 큰아 버지 이리날프 포토우긴 밑에서 줄곧 일해왔을 정도거든요. 혹시 그 분을 알고 계신가요? 모르겠는데요. 그렇군요. 어쨌든 나는 참을성만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봐요 동지, 저 불에 구 운 승려 아바우쿰의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닌 사실로 인정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나 는 우리 동포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졌어요. 모두가 어두운 얼굴들은 하고 있거든요. 모두들 허약하여 기운 없어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모두들 헛된 희망에 부풀어 누가 조금만 뭐라고 해도 곧 흥분하지요. 지금 저 구바료프 선생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국수파들이 바로 그렇지요. 모두들 훌륭한 인물이긴 한데, 이들도 역시 절망과 혈기의 혼혈아로 미래 란 낱말 하나에 만 의지하여 살아가는 거지요. 저마다 내일만큼은, 내일이야말로 라는 말로 일관되어 있거 든요. 현실적으로는 이렇다 할만한 것하나 없이 말예요. 러시아는 실로 10세기에 걸친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행정에 있어서도 그렇고, 재판에 있어서도 그러하며, 학술이나 예술, 심지어는 수공업에 있어서까지도 그래요... 조금 만 참으면 모든 일이 잘되어 나갈거라는 식이지요. 그런데 무슨 수로 잘되어 나가느냐고 다 르쳐 물으면 그 대답은 다름 아닌 우리네 교양 있는 인사들은 모두가 건달이지만 반면에 국 민들은 위대하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저 국민들을 보라, 모든 것이 그들로부터 비롯된다 , 다른 우상들은 모조리 무너뜨렸으니 이제는 국민을 믿어야 한다. 이런 식이거든요. 그런데 만일 그 국민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면? 천만에, 그들은 국민이 우리를 배신할 리 없다면서 곧 항의하지요. 크하노프스카야 여사의 소설을 읽어보세요. 눈이 돌 정도지요. 내가 만일 화 가라면 이런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교양 있는 한 사나이가 국민들 앞에서 이마가 땅에 닿 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도와주시오, 나는 병으로 죽을 지경이요 하고 말하는 거예요. 그 런가 하면 한편 국민들은 교양 있는 사나이를 향해 큰절을 하면서 나리, 가르쳐주십시오. 나도 까막눈이라 죽을 지경입네다 하고 말하지요. 두말할 것도 없이 쌍방이 다 막다른 골목 에 처해 꼼짝할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까 요컨데 입으로만 떠들게 아니라 침착하게 잘 생각 해봐야 해요.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우리보다 현명하게 생각해낸 선진국으로부터 잠시 빌려 다 쓰면 돼요! 이봐 보이, 여기 술 한 잔 더 줘! 술고래라고는 생각지 말아주세요. 알콜이 들어 가면 혀가 한결 잘 돌아가거든요.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하고 리토비노프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어느 파에 속하며 유 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충분히 잘 알겠어요. 그런데 한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 어요. 지금 당신은 선진국에서 빌려오면 된다, 모방하면 된다고 말했는데, 기후나 풍토 조건, 지역이나 민족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어떻게 모방할 수 있단 말인가요? 지금도 잘 기억 하고 있지만, 부친이 한 번은 브테노프 형제 상회에서 쇠로 된, 좋다고 소문이 난 풍구 하나 를 사온 적이 있어요. 그 풍구는 매우 멋있게 만들어지긴 했지만, 쓸모가 없었어요. 그래서 5년 동안이나 곳간에 처박아 두었는데 결국엔 나무로 만든 미국제로 바꿔버렸어요. 대체로 미국 제품은, 특히 이 목제 풍구는 우리 나라 습성에 잘 어울리지요. 포투우긴 씨, 섣불리 남의 흉내를 내서 좋을 것은 없어요. 포토우긴은 얼굴을 쳐들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그런 당치 않은 항의를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리토비노프 씨. 그는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다시 계속했다. 누가 남의 것을 모방하라고 했나요? 남의 것을 취하는 까닭은 그것이 남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쓸모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 러니 이것 저것 비교해보고 필요한 것만을 선택하는 거지요.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 은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방금 말한 대로 그 지역과 풍토, 또는 그 밖의 조건에 따라서 결과 는 자연히 독자성을 띠게 되니까요. 저쪽에선 다만 좋은 음식을 제공할 뿐이고, 그 결과는 그 나라 국민의 밥통이 제대로 소화하는가에 달렸지요. 그리하여 체력이 생기는 만큼 자기 나름의 효력을 보이는 거지요. 가령 우리 나라의 언어를 예로 들어봅시다. 표트르 대제(러시 아의 황제. 도읍 페테르스부르크를 건설, 발트 해. 카스피 해 연안에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서구 문명의 이입에 노력하였음. 1672∼1725)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할 것 없이 수천 개의 외국어를 수입하여 우리 국어에 큰 홍수를 일으켰어요. 그 언어들은 각각 러시아 국민들이 알아둘 필 요가 있는 관념을 나타내고 있었어요. 표트르 대제는 그 말들을 무작정 자기 몸에 퍼넣었던 거지요. 그러자 처음엔 혼란이 없지 않았지만 곧 방금 말한 그 소화작용이 일어났지요. 즉 여러 가지 관념들이 차차 뿌리를 내려 우리의 것이 되었던 거예요. 생소한 느낌이 점차 사 라지고 국어는 태내에서 생리에 맞는 형태를 갖추게 되어 오늘에 와서는 당신들의 충복이라 할 수 있는 평범한 문장가들도, 헤겔의 어는 페이지도 - 그렇지요, 바로 그 헤겔 말입니다 - 슬라브어에 속하지 않는 언어는 한 마디도 사용하지 않고도 번역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 처럼 언어에 있어서 나타난 현상이 당연히 다른 영역에서도 일어날 수 있으리라 기대해도 무방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요컨대 국민성이 과연 얼마나 강건한가에 달려 있어요. 그런 데 우리 국민성으로는 그것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어요. 이보다 더 큰 시련을 몇 번이나 겪 어왔거든요. 자기의 건강이나 자립성을 걱정할 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은 대체로 신경질적이 고 병적인, 한 마디로 대가 약한 국민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러시아인이다 하고 괜히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며으스대는 사람은 오히려 보잘것없는 건달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나는 내 건강에 대해 꽤 조심하는 편이긴 하지만, 나 자신이 건강체라고 해서 으스대지는 않아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부끄러운 일이거든요. 모두가 지당한 말씀이지만, 포토우긴 씨 하고 이번에는 리토비로프가 입을 열었다. 그 런데도 우리는 대체 어찌하여 이런 시련을 당해야하는 걸까요? 당신도 방금 처음에는 혼란 이 일어난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만일 그 혼란이 그대로 뿌리를 내리면 어떻게 되지요? 실 제로 그것이 그대로 뿌리를 내린 적이 있다는 사실은 당신도 아실 테지요. 그러나 언어에는 그런 폐단이 없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지요. 그리고 우리 국민을 만든 것 은 내가 아니거든요. 우리 국민이 그런 시련을 겪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고 해도 그것은 내 탓은 아니죠. 독일 국민은 올바로 발전하게 해다오! 라고 말하지만 이건 무리한 주문이 아닐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민족의 최초의 역사적인 행위 - 즉 바다 건너에서 왕후를 불러들여 나라를 통치하게 한 것부터가 이미 옳지 못하고 정상적이지 못한 처사의 첫걸음이 며, 그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되풀이되고 있거든요. 우리는 누 구나, 적어도 일생에 한 번쯤은 어떤 이국적인 것을 향해 와서 내 위에 군림하라! 고 뇌까 린 기억이 있지요 - 나는 외국의 중요한 점을 내 몸에 섭취하기 이전에 그 섭취하려는 대 상이 한 조각의 빵인가, 아니면 한줌의 독인가를 미리 확인할 수 없음을 되도록 인정하려 하지만 -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악에서 선에 이르는 길은 결코 점점 나아지는 과정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한결 나쁜 길로만 가고 있는 것이 상례가 아닐까요 - 독약이 때로는 의술에 유효한 약재로 쓰일 경우가 있지 않아요. 농노를 해방시켜 주었더니 백성들이 오히 려 더 가난해졌다거나, 술을 팔지 못하게 금지했더니, 백성들의 음주량이 오히려 더 늘어났 다고 떠들어대는 것은 건달패와 무지한 자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요! 악을 거쳐 선 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포토우긴은 한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고 나서 당신은 유럽에 대 한 나의 견해를 물었지요? 하고 입을 열었다. 나는 유럽에 대하여 경탄하고 있고, 또 그 근본원리에도 탄복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감출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나는 훨씬 이전부 터... 아니 최근 ... 얼마 전부터 나의 신념을 표명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어 요... 아니, 당신도 당신의 견해를 구바료프 씨 앞에서 당당히 표명하더군요. 나도 다행히 함 께 이야기하는 상대방의 관념이나 사고방식, 그리고 그의 성격 같은 것에 신경을 쓰지 않기 로 했어요. 사실 나는 쓸데없는 염려나 비열한 추종처럼 고약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 때문데, 자 보십시오, 우리 나라의 어떤 고관은 보잘것없는 외국 유학생에게까지 아첨 을 떨고 심지어는 교태까지 부리지 앖습니까. 한 걸음 양보하여 고관이 그렇게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기전술이라고 쳐요. 그러나 우리 평민들이 그들에게 꼬리를 칠 필요가 어디 있느냔 말이에요.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내가 그들에게 탄복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교양 -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한낱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저 교양 - 즉 문명 - 그래그래, 이 말이 더 잘 어울리는군 - 이지요. 나는 그것을 진심으로 아끼고 또 믿음직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뿐, 그 밖에 다른 것은 없어요. 이것은 아마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거요. 아, 이 말 - 치이... 빌...리... 자치야(포토우긴은 우절에 힘을 주어 분명히 말했다)는 실로 알기 쉽고 순수하 고 신성해요. 이 말과 비교하면 다른 말은 모두,가령 국민 정신이나 영광 같은 말에서는 비 린내가 나요... 이런 건 언제 보았더냐라는 식이지요! 그럼 러시아는 어때요? 포토우긴 씨, 당신은 조국을 사랑하고 있나요? 리토비노프는 어 깨를 한 번 쓱 쓸어올리더니 다시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물론 깊지만 포토우긴 씨, 하지만 이렇다 하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잖아요. 그래서요!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런 일로 놀라시다니! 내세울 것이 없다! 차라리 나는 그게 더 좋다고 봐요. 가령 말입니다, 당신의 사고방식에 따른다면 우리 나라 안에서와 같은 관료들의 독선과 난맥상을 이대로 두어도 무방하다는 말인가요? 그리고 또 현재 만천 하의 청년들의 머리를 크게 자극하고 있는 문구 - 파렴치한 부르주아지, 주권재민, 노동의 권리... 이런 것들도 실은 다 평범한 것이 아닐까요? 사랑과 마움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 라는 말은... 바이런의 경향을 따르시는군요. 리토비노프가 반박했다. 그건 30대의 로맨티시즘이지 요. 천만에, 실례지만 그건 잘못 아신 겁니다. 그런 감정의 혼합물을 제일 처음 지적한 사람 은 바로 카툴로스(로마의 서정시인. B. C. 84?∼B. C. 54)2000년 전의 로마 시인 카툴루스거든 요. 나는 그것을 그분의 책에서 읽었어요. 나는 말하자면 승려의 혈통을 이어받았지요. 또 라틴어도 좀 알아요. 나는 나의 조국 러시아를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해요. 괴짜이지 만 정다운, 더러우면서도 고귀한 나의 조국을 말예요. 그런 내가 지금 이렇게 조국을 떠난 것은 20년 동안이나 관청건물에서 책상 앞에 앉아 일해온 사람으로서 바람을 좀 쐴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지요. 러시아를 떠나 이곳에 오니 무척 즐거워요. 그러나 곧 귀국해야 할 것 같아요. 들이 기름지기는 하지만... 딸기를 기르기에는 적당치 않거든요. 당신은 지금 매우 즐겁다, 유쾌하다고 말했는데, 나 역시 이곳을 좋아합니다. 리토비노 프가 말했다. 나는 본래 공부하러 온 것이긴 하지만, 저기 저 사람들을 보고 눈요기를 해서 는 안 된다는 법도 없지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화려한 옷차림으로 자기 곁을 지나는 두 여자를 가리켰다. 여자들 의 주위에는 경마구락부에 있는 몇 명의 사내들이 프랑스어를 나직이 건네면서 짐짓 점잔을 빼고 있었다. 그는 도박장 쪽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는데, 거기에는 밤이 깊었는데도 대 만원의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아니, 내가 저런 것에 눈이 먼 줄 아십니까? 하고 포토우긴 은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렇게 말하면 좀 뭣하지만, 지금 당신이 그런 식으로 농 담을 하니 한 가지 생각나는 게 있군요. 크림 전쟁(1853∼1856년에 크림 반도를 싸움터로 한 러 시아와 영국.프랑스.터키.사르디니아 등과의 전쟁) 때 <<타임즈>>지가 영국 군부의 결함을 지적 하자 우리네 멍텅구리 저널리스트가 귀신의 모가지라도 딴 듯이 떠들어댔던 그 사건 말예 요. 나는 낙천주의자가 아니라서 우리의 생활 전반 - 즉 비극으로 끝날 이 희극 전체가 장 밋빛으로 보이지는 않아요. 그러나 어쩌면 인간의 본질에 뿌리박고 있을지도 모르는 약점까 지도 유럽의 탓으로 돌릴 필요가 어디 있겠어요? 저 도박장은 분명 추악한 곳이기는 하지 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나라 재래의 놀음인 골패는 과연 그보다 깨끗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 친애하는 리토비노프 씨, 우리는 좀더 겸허하고 냉정해져야 하지 않겠습니 까. 훌륭한 학생은 선생의 허물을 보아도 잠자코 있지요. 그런 허물은 학생에게 좋은 약이 되며,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유럽의 부패상에 대해 꼭 떠들어대고 싶으면 - 아니, 저기 코코 공작께서 말을 타고서둘러 지나가고 있군요. 저분 은 분명 순식간에 150세대의 농부들로부터 짜낸 피와 땀의 결정이라 할 수 있는 소작료를 깨끗이 삼켜버리고는 지금 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거요. 게다가 오늘 나는 마르크스 상 점에서 저 사람이 바이요(프랑스의 왕당파 저널리스트)의 팜플렛을 뒤적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 지요... 당신에게는 이상적인 말 상대가 될 거요! 천만에요, 그건 곤란해요. 리토비노프는 포토우긴이 자리를 뜨려는 것을 보고 다급히 말 했다. 나는 코코 공작과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이고 또 나는 이렇게 당신과 함께 이 야기하는 것이 더 좋아요. 고맙군요 하고 포토우긴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가로막 았다. 그러나 나는 당신과 이미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하긴 나 혼자 떠벌리 긴 했지만. 아마 당신도 스스로 느꼈을 거예요. 인간은 많이 떠들고 나면 으레 언짢고 창피 한 느낌을 갖게 마련이지요. 특히 혼자 떠들었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또 첫 대면일 때에는 더욱더 그렇고요. 나는 왜 이 모양일까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럼 또 만납시다... 거 듭 말하지만 당신과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포토우긴 씨. 당신의 숙소나 알아둡시다. 그리고 당분간 이곳에 머물러 계실 예정인지 알고 싶군요. 포토우긴은 좀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네, 한 주일쯤 바덴바덴에 머물러 있으려고 해요. 그건 그렇고 피차에 이 베벨이나 홀은 마르크스 상점에서 뵐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뭣하면 내가 숙소로 찾아가도록 하지요. 그래도 거처를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래요, 그런데 실은 나는 혼자가 아니라 서. 부인과 함께 오셨나요? 리토비노프가 급히 물었다. 천만에... 당치 않은 말씀을... 다만 계집아이가 하나 딸려 있지요. 아하! 자못 미안한 듯이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리토비노프는 눈을 슬쩍 감았다. 이제 겨우 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어요. 포토우긴은 말을 이었다. 고아지요... 어느 부 인... 나와 친한 어느 부인의 딸이에요. 그러니 여기서 뵙는 것이 좋겠다는 겁니다. 그럼 안 녕히 계시오. 그는 고수머리에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어디론가 멀리 사라졌다. 그 뒷 모습은 리히텐 타르 가로수 길을 희미하게 비추는 가스등 행렬 아래 두어 번 힐끔 보였다. 나는 미워하고 사랑한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당신은 물을테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느끼고 또 고민한다. 카툴루스 제86가 6 괴상한 사나이로군... 하고 리토비노프는 자기가 묵고 있는 호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서 생각했다. 괴상한 사나이야! 내가 꼼짝 못하도록 만들어야지. 그가 방으로 들어서니 테이블 위에 한 통의 편지가 눈에 띄었다. 아, 타냐(타치야나의 애칭)가 보냈군! 그는 편지를 손에 집어들기도 전에 기뻐 어쩔 줄을 몰랐 다. 나 편지는 시골 부친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리토비노프는 가문 표지가 그려진 봉투를 뜯 고 천히 읽어내려 가려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강렬한 향취가 풍겨왔다. 언젠가 맡아본 적이 있 는듯한 상쾌한 향취였다. 뒤돌아보니 창틀 위에 물을 넣어둔 컵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 커다 랗고 싱싱한 헬리오트로프(지치과에 속하는 다년생 풀. 페루 원산으로 앞은 긴 타원형임. 여름과 가을에 황자색의 꽃이 수상으로 되고 방향이 있음)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리토비노프는 신기한 생각 이 들어 그 꽃 가까이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건드려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했다... 갑자기 어떤 기억이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그것은 자신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그 무엇과도 같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는 벨을 울려 호텔 보이를 불렀다. 그에게 이 꽃의 출처를 물으니 그의 대답인즉, 그것 은 어떤 부인이 가져왔는데 이름은 밝히려 들지 않고 다만 즈루이텐호프(리토비노프를 독일인 보이가 더듬거리며 부른 이름) 씨가 이 꽃을 보면 자기가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차릴 것이라고 만 말했다고 하였다. 리토비노프는 또다시 어떤 생각이 떠오로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그 부인 이 어떻게 생겼더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부인은 키가 후리후리하고 옷을 잘 입었으며 얼굴에는 베일을 썼다고 했다. 아마도 러시아의 백작 부인을 겁니다. 소년은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하고 리토비노프가 물었다. 그루우덴 은화를 두 개나 주셨으니까요. 소년은 대답하고 해죽이 웃었다. 리토비노프는 소년을 보내놓고는 오랫동안 창문 앞에 서서 생각에 자멱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한쪽 손을 한 번 휘젓고는 시골에서 온 편지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부친은 여느 때 와 마찬가지로 하소연만 잔뜩 늘어놓고 불경기가 심하여 곡식은 거저 가져가라고 해도 거들 떠보는 사람 하나 없다느니, 농부들은 잊제 무슨 일을 시켜도 완전히 귓등으로 흘려버린다 느니, 이대로 가다가는 곧 말세가 될 것이라느니 그런 내용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생각 좀 해보아라. 그는 이렇게 적고 있었다. 내게도 카르미크라는 젊은 마부가 하나 있다. 알고 있니? 그런데 그 사나이가 어떤 사람의 저주를 받아 병상에 누워 있구나. 그대로 두면 목숨을 잃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제 마차도 제대로 타지 못할 형편이었는데, 다행 히 어느 친절한 사람이 이 젊은 마부를 랴잔의 승려한테 보내라고 권유하는 것이었다. 그 승려는 신유의 은총을 입은 사람으로 유명하고, 병자들도 곧잘 고쳤다는구나. 그 증거로 여 기 승려의 편지를 함께 넣어 보낸다. 리토비노프는 호기심에 이끌려 그 편지를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하인 니카노르 드미트리에프가 의술로는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습니다. 그 병은 악인의 저 주로 생긴 것이지만, 사실 진짜 원인은 니카노르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여자와 약속을 했었는데 그가 그 약속을 어겨 그 여자가 분풀이로 사람들에게 이를 발설하여그를 난처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힘이 되어 주지 않았으면 아마도 그는 저 호배추에 달라 붙은 애벌레처럼 매장될 판이었어요. 그러나 내가 전능하신 하느님의 가호로 그의 지주가 되어주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비밀이라 말할 수는 없지 만, 단지 당신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그 여자가 앞으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도록 당부해달라는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약간의 위협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여자가 또다시 그에게 행패를 부릴지 모르니까요. 이 편지를 읽고 나서 리토비노프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초원 의 입김과 곰팡이가 낀, 생활의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의 입김을 피부로 느끼는 심 정으로, 이런 편지를 하필 이곳 바덴바덴에서 읽은 것이 마치 기묘한 인연이나 되는 듯이 생각되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시간은 이미 12시를 한참 지나고 있었다. 리토비노 프는 잠자리로 들어가 촛불을 불어 껐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 본 이 얼굴 저 얼 굴들, 오늘 들은 이 얘기 저 얘기가 이상하게도 마음에 얽혀들면서 담배 연기에 휩싸여 상 기된 그의 머리를 언제까지나 맴돌고 있었다. 가바료프의 마치 황소 울음 같은 목소리와 함께 둔하고 고집스러운 듯한 시선을 애써 감 추고 있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런가 하면 갑자기 그 두 눈이 번쩍거리며 불타 오르면서 퉁겨나온다. 아, 이번에는 저 스한치코바의 차례로군 하고 그는 생각한다. 암, 갈 겨주었고 말고요., 찰싹 뺨을 갈겨줬지 뭐예요 라고 말하는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무 의식중에 그는 낮은 소리로 되뇌어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다시 포투우긴의 침울한 모습 이 불쑥나타나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머릿속에 연달아 떠오른 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치 새로 지어 입은 군복처럼 꼭 맞는 훌륭한 외투를 걸친 보로시로 프가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장난감 인형처럼 불쑥 튀어나오는가 하면, 다음에는 피시차르킨 이 방금 곱게 깍은 얌전한 머리를 영리한 사람처럼 의젓하게 끄덕인다. 그리고 빈다소프는 힘껏 목청을 뽑아 고함을 지르고, 반바에프는 감격하여 눈물을 찔끔거린다... 그러나 아무튼 그 향기 - 그 끈질기게 따라 다니는 달작지근한 향기가 그의 마음을 부드 럽게 해줄 수는 없었다. 그 향기는 더욱 강하게 어둠 속에 차고 넘쳐 점점 더 짐요하게 무 엇인가를 그에게 상기시켰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다... 리토비노프는 문득 한밤의 침실에선 꽃향기가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 생각나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어둠 속을 더듬어 꽃을 찾아내어서는 다른 방으로 옮겨놓았다. 그러나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거추장스러운 향기가 베갯머리와 담요 밑까지 마구 스며들어 그는 잠자리에서 할일없이 엎치락 뒤치락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차츰 머리가 뜨거워지면서 눈앞이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주문으로 마귀를 몰아내는 명수 인 승려가 구레나룻을 기른 머리를 아래로 내리빗고는 토끼처럼 총총히 앞길을 두 번이나 가로질러 갔다(이것은 흔히 나 쁜 징조라는 미신이있다.) 그런가 하면 보로시로프가 장군들이 몸에 걸치는 기다란 날개깃 속 에 마치 나무 숲에 몸을 숨긴 종달새와 같은 모습으로 그의 눈앞에서 지껄여댔다... 그 순간 갑자기 그는 침상에서 상반신을 벌떡 일으키고 두 손을 모으며 외쳤다. 설마 그 여자는 아닐 테지, 그럴 리는 없어! 그러나 리토비노프의 이 외침을 해명하기 위해 독자들은 이제부터 우리와 함께 몇 해 전 의 일로 되돌아가보도록 하자... 7 50년대 초 모스크바에는 가난으로 허덕이는 딱한 처지에 놓인 오시닌 공작의 대가족이 살 고 있었다. 그들은 타타르나 그루지아 출신이 아니라 혈통이 좋은 순수한 뤼리크의 후예였 다. 그들의 이름은 러시아의 국토를 통일한 초기의 모스크바 대공들의 연대기에 더러 나와 있으며, 넓은 세습영지와 많은 봉지를 갖고 여러 차례 충성과 유혈과 상이 로 말미암아 황 제의 특전을 누려 귀족회의에도 참여했는데, 그 중의 어떤 사람은 ..비치 의 칭호가 허용될 만큼 영화를 누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가 요술의 마약 을 사용한다는 어느 정적의 모략 으로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한 가문이 모두 무정하게도 모조리 재산을 몰수당하고 훈 장과 작위도 빼앗긴 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벽촌으로 추방되었다. 이리하여 오시닌 일가는 맥없이 붕괴되어 재기할 힘도 없이 권세를 되찾지 못하고 있었 다. 그러다가 얼마 후 황제의 노여움이 풀려 모스크바의 허술한 저택 과 잡동사니 도구 까지도 되찾게 되긴 했지만, 그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들의 가문은 가난으로 꼬 리가 메말라 표트르 대제 때나 에카테리나 여제 때에도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점점 기울어, 어느 새 일족 가운데에는 남의 영의 관리인이나 술도가의 지배인 또는 구의 경찰서장 따위 로 전락하는 자도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앞서 말한 오시닌 일가는 다섯 아이들을 데리고 개 훈련장 근처의 작은 목조 건물 에 살고 있었다. 여러 가지 무늬와 색깔로 장식된 현관은 한길에 면해 있었고, 문기둥에는 푸른 색 사자를 한 쌍 그려 넣는 등 여러 모로 귀족으로서의 체통을 살릴 궁리를 하고 있기 는 했지만 실은 그날그날을 겨우 연명하는 형편이었으며, 야채 장수와 외상 거래도 하고 겨 울에는 장작도 초도없이 가족들이 모두 추위에 달달 떠는 경우도 있었다. 공작은 무기력한 게으름뱅이였지만, 그래도 한때는 상당한 미남으로 인정받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 혀 볼품없는 꼴이 된 그는 가문의 덕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여관출신인 아내 덕에 모스크바 의 관청에서 일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서 받는 봉급이란 참새 눈물 방울 정도였다. 또한 관 직의 명칭이 그럴싸한 것에 비해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따라서 그는 아무 일에도 참견하 지 않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옷 차림으로 앉아 깊은 한숨을 토하면서 담배만 피워대고 있 었다. 그의 아내는 신병으로 신경질이 심하기는 했으나, 언제나 집안 살림과 아이들을 관립 학교에 넣는 일, 페테르부르크의 권력층과의 유대 등에 관심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현재의 처지에도, 궁정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에도 결코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리모비노프의 부친은 모스크바에 있을 때 오시닌 일가와 가까이 알게 되어 때로는 힘이 되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300루블이라는 돈을 융통해주기도 했다. 대학생이던 그의 아들도 가끔 그 집에 놀러가곤 했는데 그것은 그의 하숙집이 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 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 집의 궁색한 살림을 잠자코 바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오시닌가에 자주 드나들게 된 진짜 이유는 그 집 딸인 이리나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그 당시 나이는 만 열 일곱 살로, 기숙 여학교를 퇴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여자 교장과 물의를 일으켜 딸을 학교에서 빼내왔던 것이다. 그 물의 란 이리나가 공식 식전에서 장학관을 환영하는 시를 프랑스어로 낭독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식이 열리기 직전에 다른 학생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학생은 돈이 많은 술도가 집 딸이었다. 공작 부인은 이 수치를 참을 수 없었으며, 당사자인 이리나도 교장 선 생의 이러한 편파적인 처사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벌써 자기가 명예로운 식장에서 여러 사람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아가며 환영사를 낭독하는 장면이라든지, 나중에 모스크바 전체가 자기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할 것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그렇지 않아도 모스크바 전체가 이리나의 이야기로 떠들썩할 참이었다. 그녀는 날씬한 미모의 소녀로, 가슴 한가운데가 오목하게 파였으며 싱싱한 어깨는 갸름하 였다. 그 나이에 보기 드문 창백한 살결은 사기 그릇처럼 윤기가 흘러 투명했으며, 머리는 숱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체적인 얼굴 모양은 단정했으며 순박하다기보 다는 매우 세련되어 보였고 그러면서도 소녀 시절 특유의 순진한 표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늘고 아름다운 목과 주저주저하거나 마음을 놓아서 혹은 노곤해서 짓는 것이 아닌 미소를 지을 때, 거기에는 다소 신경이 예민한 영양의 모습이 분명히 드러나보이는 것 이었다. 뿐만 아니라 희미하게 미소 지을 듯한 입술이며 다소 긴장한 매부리코에는 일종의 고집과 혈기 - 즉 다른 사람에게나 그녀 자신에게도 어쩐지 위험해 보이는 징후가 나타나 있었다. 특히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것은 그녀의 눈이었다. 푸른빛이 도는 짙은 잿빛 눈으로, 마치 이집트의 여신상에서나 볼 수 있는 듯한 길쭉한 눈매였는데, 방사형의 눈썹에 쌓인 속 눈썹은 기운차게 위로 뻗어 있었다. 실로 그녀의 눈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가만 히, 조심스럽게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어딘가 헤아릴 수 없는 멀고 깊은 곳에서 바라보고 있 는 듯한 눈이었다. 이리나는 여학교에서 지력도 재능도 우수한 학생 중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었지만 또 한편 으로는 변덕스럽고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기를 좋아하는, 다루기 힘든 아이라는 평도 들었 다. 담임 여교사는 그녀에게 그녀의 과격한 성격이 신세를 그르치는 원인이 될 것이라고까 지 예언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여교사는 그녀의 냉정함과 박정함을 탓하여 인정 머리 없는 계집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리나의 친구들은 그녀를 가리켜 거만하고 정을 나눌 수 없는 계집애라고 여기고 있었으며, 동생들은 그녀를 좀 답답하게 여기는가하면 어 머니는 그녀를 신용하지 않았으며, 아버지는 그녀가 그 이상한 눈으로 자기를 바라볼 적마 다 좀 열없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존재를 부지불식간에 부모로 하여금 일종의 어 떤 경의를 느끼게 하였다. 그것은 그녀의 장점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양친의 가슴에 어떤 막연한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았지만. 두고봐요, 프라코비야 다니로브나. 노공작은 기다란 파이프를 입에서 떼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저 이리나가 우리를 또다시 세상에 드러내 보여 줄거야. 공작 부인은 새침하여 당신은 듣기 거북한 소리만 한다 면서 남편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더듬더듬 남편에게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하긴 그래요... 저 애가 그렇게만 해준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리나는 양친의 보호 아래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특별히 귀여움을 받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좀 경계하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탓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 녀로서는 자기 집이 그야말로 안식처였다... 하긴 때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거북 한 처지에 놓일 때도 있었다. 어느 소매 상인이 찾아와서 집안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소 리를 치며 외상값 받으러 오기도 진저리가 난다고 을러대거나 하인들이 주인 면전에서 배 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는 주제에 공작이면 뭘해! 하고 쑤근거리는 소리를 들어도 이리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어두운 얼굴에 쓴웃음을 지어 보이곤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그녀의 그 쓴웃음이 다른 어떤 비난보다도 괴로웠으며, 나면서부터 부귀와 영화와 존경을 한 몸에 지닐 권리를 갖고 있는 듯이 보이는 딸자식에 대하여 미안하다 - 별로 못할짓을 한 것은 아니지만 어쨋든 미안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리토비노프는 이리나에게 첫눈에 반하였다. (그는 그녀보다 세 살 위였다.) 그러나 오랫동 안 그는 그녀의 연인이 되기는커녕 그녀의 마음 속에 그림자조차 비치지 못하였다. 그에 대 한 그녀의 태도에는 어떤 적의마저 엿보였다. 마치 그가 그녀의 비위를 건드리는 어떤 일이 라도 저질러 그녀가 그에게 심한 원망을 품고 언제까지나 용서하지 않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것같이 보였다. 아무튼 그 당시에는 그도 너무 젊고 소심하였으므로 그 적의라고도 할 수 있는, 거의 경멸에 가까운 몰인정 속에 대체 어떤 감정이 감춰져 있는지를 헤아릴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가의나 노트 필기 같은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저 오시닌가의 침침한 객실에 가 만히 걸터앉아 이리나의 얼굴만 힐끔힐끔 훔쳐보곤 하였다. 그는 점점 더 심한 고뇌에 사로 잡혀 안절부절못했으며,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위압으로 고통스러워하였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화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또는 몹시 권태로운 듯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안 을 왔다갔다하다가는 마치 테이블이나 의자를 바라보는 듯한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힐끔 쳐 다보는가 하면 어깨를 으쓱거리기도 하고 팔짱을 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리토비노프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에서도 일부러 단 한 번도 그와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는 데, 마치 그런 은총은 베풀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읽지도 않을 책을 펴들고서 다만 페이지만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가 양미간 을 찌푸리거나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혹은 갑자기 아버지나 동생을 향해 인내를 독일어로 뭐라고 하지? 하고 큰 소리로 묻는 것이었다. 리토비노프는 이 마법의 그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써본 적도 있었다. 사실 그는 그물에 걸린 새처럼 버둥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주일쯤 모스크바를 떠나 있기도 했으나 너 무나도 쓸쓸하고 외로운 마음에 미칠 것만 같아 결국은 바짝 야위어 거의 병자가 다 된 꼴 로 오시닌가로 되돌아오곤 하였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리나 역시 그 며칠 사이에 눈에 뜨일 정도로 핼쑥해져서 얼굴빛도 누렇게 뜨고 뺨에는 생기가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 나 여전히 그녀는 전보다도 더욱 싸늘한, 사뭇 고소하다는 듯한 무뚝뚝한 태도로 그를 맞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언젠가 그가 그녀에게 주었던 은밀한 모멸을, 지금 자기가 더욱 크게 당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질 정도였다. 그녀는 두 달 동안 이렇게 그를 괴롭혔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루 아침에 완전히 변하였다. 마치 불길이 활활 타오르듯, 먹장구름이 밀어닥치듯 사랑이 덮쳐온 것이다. 하루는 - 그 날은 그에게 있어 오랫동안 잊혀질 수 없는 날이 되었지만 - 그 날도 역시 그는 오시닌가의 객실 창가에 앉아 우두커니 한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화가 치미는 듯 한 욕구불만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면서도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창 아래로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면 공포에 떨면서도 아무 미련 없이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이리나는 그에게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침묵을 지킨 채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녀는 최근 며칠 동안 그와 전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 에게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팔을 괴고 앉아 있다가 때때로 천천히 주위를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리토비노프는 그녀의 싸늘한 괴로움을 성인답게 끈질기게 참 아내지 못하고 결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모자를 찾기 시작했다. 좀더 계세요! 하고 갑자기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리토비노프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이리나의 목소리라고는 얼 른 믿어지지 않았다. 뭔지 모를, 지금까지 없었던 무언가가 그 한 마디 속에 깃들여 있었던 것이다. 그는 멈춰 서서 고개를 들었다. 이리나가 상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좀더 앉아 계세요! 그녀는 되풀이하여 말했다. 가지 마세요,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이어서 다시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 말아요... 부탁이예요. 그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두 손을 내밀었 다... 그녀는 곧 그의 손에 자기의 두 손을 쥐어주고 살포시 웃었는데, 금세 귀뿌리까지 빨갛 게 물들자 슬쩍 옆으로 돌아 여전히 눈웃음을 치며 방에서 나가버렸다.. 얼마 후 그녀는 여 동생과 함께 돌아와 다시 그를 부드러운 눈길로 한참 동안 지그시 바라보고 나서 그를 자기 옆에 앉게 했다... 처음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한숨을 길게 내쉬거나 얼굴을 붉힐 뿐이었으나, 이윽고 다소 더듬거리는 어조로 전에는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는 그의 학 교 일에 대해 자세히 묻기 시작했다. 그날 밤 그녀는 지금까지는 그를 잘못 알았다고 몇 번이나 사과하면서 이제는 자기도 눈 을 뜨게 되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단호하게 말할 뿐만 아니라 당돌하게 공화주의자 같은 말까지 하여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 무렵 로베스피에르[프랑스의 혁명 정치 가. 자코뱅 당의 지도자로서 와정을 폐지 하였으며, 1793년 공안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공 포정치를 행하였으나 1794년 테르미도르의 쿠테타로 처형되었음.1758∼1794]의 숭배자로서, 큰 소리로 마라[프랑스 혁명의 지도자. 의사 출신인데 신문<<인민의 벗>>을 발행하여 파 리 민중의 혁명적 민주주의를 옹호함. 1743∼1793]를 비난할 마음이 일지 않았던 것이다.) 그후 일주일이 지나서야 그는 그녀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그 맨 첫날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후로 계속된 며칠 사이의 일 - 여전히 믿어지지 않아 의심은 하면서도 뜻하지 않은 작은 행복이 겨우 싹트기 시작했다고 기뻐하는 동안 그것이 점점 커져 그의 앞길에 놓인 모든 것을 모조리 삼켜버리 고는 드디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기까지의 경위도, 거의 두려움에 가까운 환희로 금 방이라도 숨이 막힐 듯한 행복감도, 분명히 눈앞에 실현된 며칠 동안의 사건들도 역시 잊을 수가 없었다. 첫사랑의 찬란한 한때가 찾아온 것이다. 그것은 어느 한 생애에 두 번 다시 되 풀이될 수 없는, 또 되풀이되어서도 안 될 영묘한 한때였다. 이리나는 갑자기 어린 양처럼 온순해졌다. 명주처럼 부드럽고 한없이 상냥해졌다. 그녀는 동생들의 공부도 돌봐주었는데, 음악은 서툴렀으므로 - 피아노는 그렇지 않지만 - 주로 프 랑스어와 영어를 도와주었다. 동생들에게 <<리더>>를 읽어줄 뿐만 아니라 집안 일까지 돕 기 시작했다. 모든 것에 그녀가 흥미를 느끼고 몰둘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쉴새없이 떠들어대는가 하면 갑자기 잠자코 무언의 감동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여러 가 지 계획도 세웠다. 앞으로 자기가 리토비노프 부인이 되어(두 사람 모두 자기들의 결혼이 성사되리라는 것을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둘이서만 살게 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자고 끊임없이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열심히 라고 리토비노프가 말문을 열면 그럼요, 열심히 말예요 하고 이리나가 받아서 책도 읽고.. 그렇지만 꼭 해야 할 것 은 여행이예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로서는 무엇보다도 하루 속히 모스크바를 떠나고 싶었으므로 리토비노프가 자기는 아 직 대학을 마치지 못했으므로 더 머물러야 한다고 말할 적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해보고는, 공부는 베를린이나 그 밖의 어디서나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이리나는 자기 감정을 별로 꺼리지 않고 노출시키는 성미였으므로 리노비노프에 대한 자기의 마음을 공작이나 공작 부인에게 감추려 들지 않았다. 부모님은 물론 별고 기뻐할 리가 없었으나, 그 렇다고 여러 가지 처지를 따져볼 때 그들로선 거부권을 행사할 형편도 못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리토비노프는 재산이 상당힌 많은 편이었다. .. 그렇지만 가문이 별로.. 하고 공작 부인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야 그렇지, 집안이 좀 그렇긴 해. 공작이 대답한다. 하지만 아무튼 그 사람도 평민은 아니잖아.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리나가 내 말을 들어 줄 아이가 아니라는 거요. 일단 하 겠다고 작정한 일을 그 애가 제 맘대로 하지 낳고 그냥 넘어간 적이 있었어? 그 애의 고집 은 우리가 보아온 그대로야! 그리고 아직은 확실하게 결정된 것도 아니잖아. 공작은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렇게 또 덧붙여 말하는 것이었다. 리토비노프 부인이 된다? - 흥, 겨우 그 정도밖에 되지 못하나? 이건 좀 기대에 어긋나 는걸. 이리나는 미래의 신랑감을 완전히 자기 손에 넣었으며, 그 장본인인 리토비노프 쪽에서도 자진해서 그녕게 마음을 주었다. 그로서는, 이를테면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자기를 잃어버린 꼴이었다. 그는 어쩐지 두렵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으나 아무런 후회도, 전혀 아까울 것도 없 었다. 부부의 의미나 의무에 대해서, 그리고 이렇게까지 송두리째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자기는 과연 훌륭한 남편이 될 수 있을까. 또는 이리나는 과연 어떤 아내가 되어줄 것인가, 두 사람의 관계는 이것으로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고 여러 모로 생각해보았지만 그로 서는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피는 끓어오르고,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 길은 하나밖 에 없었다. 그녀를 따라 그녀와 함께 가는데까지 가고 볼 일이다! 그 뒤에는 될 대로 하라! 그런데 리토비노프 쪽에서도 전혀 거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리나도 득을 일시에 무너뜨 린 것 같은 과격한 애정을 쏟고는 있으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역시 얼마간의 오해와 충 돌도 없지 않았다. 하루는 그가 학교에서 곧장 낡은 프록 코트 차림으로 두손에는 잉크가 잔뜩 묻은 채 그녀의 집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상냥하고 애교 있게 그를 맞으러 뛰어나왔는데, 나오다 말고 갑자기 멈춰 섰다. 아니, 장갑도 끼지 않고. 그녀 는 일부러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곧 다시 계속했다. 세상에! 역시 당신은 별 수 업는.. 대학생 이로군요! 이리나는 신경이 너무 예민하군! 리토비노프가 이렇게 반박했다. 당신은.. 한마디로 학생 티를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어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본 받을 만한 점이라곤 거의 없지 뭐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재빨리 등을 돌려 방에서 나가버렸다. 한 시간쯤 지나자 그녀는 두 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하면서 그에게 사과했다... 그녀는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솔직히 그에게 용서를 비는 그런 성미였다. 다만 우스운 것은 그녀는 자기가 갖고 있지도 않은 어 떤 버릇을 실제로 갖고 있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고 울상이 되어 자기 자신을 탓하지만, 실 제로 갖고 있는 진짜 결점은 완강하게 부인하는 바로 그 점이었다. 한 번은 그녀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린 채 흐느껴 울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겁이 덜컥 나서 뭐가 그리 슬프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잠자코 자기의 가슴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리토비노프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순간 폐병이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 같이 떠올라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쥐고 당신, 병에 걸렸단 말이야?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두 사람은 벌써 허물없이 말하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 내가 곧 의사를 불러올게.. 그러나 이리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고 분한 듯 발을 구르더니 병은 무슨 병이에요... 다만 이 옷.. 당신은 모르겠어요? 아니.. 그 옷이 어떻다는 거요? 그는 어물어물 물어보았다. 어떠냐고요? 전 이 옷 한 벌뿐이에요. 이렇게 낡아빠진 옷밖에 없다고요. 매일같이 이 옷 만 입어야 해요... 당신이 찾아와도... 이러다가는 별 수 없이.. 결국엔 당신도 제가 보기 싫어 질 거예요. 이런 단조로운 모양을 하고 있으니까요! 아니 이리나,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그 옷도 멌있어 보이는데 뭘... 내가 이 리나를 처음 보았을 때에도 그 옷을 입고 있지 않았느냔 말이야. 그래서 나는 그 옷이 더욱 마음에 들어. 그러자 이리나는 금세 얼굴이 빨개져서는 제발 그리고리 미하일로비치, 그 후로 계속 제 겐 갈아입을 옷도 없었다는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게 해줘요. 그렇지만 내가 보증하지, 이리나 파블로브나, 그 옷은 당신에게 아주 잘 어울린단 말이 야. 거짓말 말아요. 전 이 옷 꼴도 보기 싫단 말예요. 그녀는 부드러운 긴 머리를 귀찮은 듯 쥐어뜯으면서 뒤풀이했다. 아, 이 가난, 이 가난뱅이 생활, 캄캄하기만 해요! 어떻게 하 면 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 암흑에서 해방될 수 있겠느냔 말예 요! 리토비노프는 말문이 막혀 얼굴을 돌렸다. 이리나는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그래도 당신은 저를 사랑하고 계시죠? 그렇죠? 하며 자기 얼굴을 그에게로 가까이 대며 말했다. 아직 눈물이 가득 고인 그 눈은 행복한 기쁨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렇게 보기 싫은 옷을 입고 있어도 당신은 역시 저를 사랑해주시는 거죠? 리토비노프는 갑자기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 날 사랑해줘요, 사랑해 줘. 나의 소중한 구세주! 그녀는 그에게 기대며 소곤거렸다. 이리하여 하루, 하루, 한 주일 한 주일이 꼬리를 물고 흘러갔다. 그러나 아직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정식으로 주고받지 않았다. 리토비노프는 물론 본의에서가 아니라 이리나의 제안 을 존중하기 위해서(왜냐하면 언젠가 갑자기 그녀가 우리는 아직 둘 다 너무 어리니 단 몇 주일만이라도 더 큰 후에 생각해보자고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촉하는듯한 말은 일 절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만사가 경사스러운 결과를 향해 접근하면서 가까운 장래의 모습이 시시각각으로 훤히 드러나 보였다. 그런데 이때 뜻하지 않은 사건이 생기는 바람에 모처럼 세운 예정이나 계획이 길바닥에 버려진 티끌처럼 고스란히 날아가 버리고 만 것이 다. 8 그 해 겨울에 황제가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여러 가지 축하연이 계속해서 개최되었고, 귀족회관에서는 전례대로 대무도회가 열릴 참 이었다. 이 무도회의 통고는, 실은<<관보>>에 실린 공고를 통해서이긴 했지만 개 훈련장 근처에 자리잡은 공작의 이 작은 단층집에도 배달되었다. 제일 먼저 수선을 피운 사람은 공작이었 다. 황제 폐하 내외분을 뵐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불찰이며, 더구나 자기 같은 유서 깊은 귀족으로서는 그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이 일종의 의무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공작은 여느 때의 침착한 태도와는 달리 열을 올리며 이 의사를 고집했다. 공작 부인도 어느 정도까지는 남편의 의견에 찬성하였지만, 그래도 역시 한숨이 나오는 것은 비 용 때문이었다. 그런데 단호히 반대하고 나선 사람은 이리나였다. 쓸데없는 짓이에요. 전 안 가요. 부모가 아무리 애써 타일러도 그녀의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너무 완강히 고집을 부렸으므로 노공작은 결국 리토비노프에게 부탁하여 딸을 설득하기도 했다. 반드시 출석할 필요가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특히 처녀로서 사교계를 외면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런 경헙도 해두는 것 이 좋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 애는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못하 고 만다.., 이렇게 타일러 달라는 것이었다. 리토비노프는 그와같은 도리 를 열거하여 그녀를 설득했다. 이리나는 그의 얼굴을 뚫어 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초리가 너무 날카로워 그는 그만 기가 죽을 정도였다. 그녀는 혁 대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더니 이윽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것을 바라고 있나요, 당신이? 그렇지.. 나도 이런... 리토비노프는 약간 더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나 역시 당신 아버님 의 의견에 찬성해. 가서 나쁠 건 없잖아? ...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릴 수도 있지 않아? 그는 히죽 웃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들과 어울려요?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좋아요. 가겠어요... 단 잊어서는 안 돼요. 어디까지나 당신이 원하신 일이라는 것을 말예요. 그러니까 나로서는... 리토비노프가 말했다. 당신 스스로가 원하신 거예요 하고 그녀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조건이 하나 더 있어요. 당신은 그 무도회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네? 그건 왜? 그렇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리토비노프는 두 손을 펴고 말했다. 그렇게 하지...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성장 한 모습을 보면 나는 무척 기쁠 텐데. 당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는 모습을 내 눈으 로 직접 본다면.. 나는 얼마나 콧대가 높아질까! 리토비노프는 한숨을 지었다. 이리나는 살짝 눈웃음을 치면서 성장이라야 고작 흰옷이나 입을 뿐일 텐데 감명은 무슨 감명이겠어요... 그래도 감명을 받는다면 고마운 일이지요. 이리나, 화났어? 이리나는 또 미소를 지으며 천만에요! 왜 화가 나요? 다만 당신이(그녀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애매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하긴 어쩌면 그 렇게 될는지도 모르죠. 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덧붙였다. 그렇지만 이리나, 날 사랑하고 있지? 네, 사랑하고 있어요. 그녀는 엄숙하리만큼 무거운 어조로 대답하고는 남자처럼 힘을 주 어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 후로 이리나는 날마다 정성껏 화장을 하고 머리 매무새에 신경을 썼다. 무도회 전날이 되자 그녀는 까닭 없이 기분이 언짢아 한군데에 앉아 있지를 못하고 두 번이나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 엉엉 울었다. 그러나 리토비노프는 앞에서는 전과 같은 단조로운 미소만 지어 보 였다... 그에 대한 태도에는 여전히 애정이 깃들여 있었으나, 왠지 다소 건성으로 하는 듯해 보였으며 언제나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춰보는 데 열중해 있었다. 무도회가 열리는 당일이 되자 그녀는 유난히 시무룩해져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태 도는 오히려 침착하였다. 밤 여덟 시가 지나 리토비노프는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는 기다리 고 있는 그의 눈앞에, 흰 면포 옷을 입고, 다소 치켜올려 빗은 머리에 파란 꽃가지를 꽂은 그녀가 나타났을 때, 그는 무의식 중에 앗! 하고 소리를 질렸다. 그만큼 그녀는 아름다웠으 며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당당하게 보였던 것이다. 오늘 아침 잠깐 사이에 완전히 어른이 되었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너무나 멋 져! 역시 타고난 바탕이 좋아야 해! 이리나는 두 손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미소도 짓지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점잔을 빼지 도 않는 태도로 그의 앞에 서서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가 아닌 먼 곳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 었다. 당신, 마치 전설에 나오는 여왕 같아. 잠시 후 리토비노프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보다 도 출전하기 전의, 그러니까 승리를 거두기 전의 사령관이라고나 할까... 당신은 오늘 밤 내 가 무도회에 함께 가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지만.. 하고 그는 말을 계속했으나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또 다 른 마음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내 꽃다발을 받는 것까지 마 다하진 않겠지? 그는 헬리오트로프 꽃다발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리토비노프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며 한쪽 손을 내밀더니 재빨리 머리를 장식한 꽃 가지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이거 갖고 싶지 않으세요? 그렇다고 한 마디만 하시면, 전 이런 것 다 뽑아버리고 그냥 집에 있겠어요. 리토비노프의 가슴은 이상하리만큼 크게 뛰었다. 이리나의 손은 이미 꽃가지를 빼버리려 하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왜 그런 짓을 하고 그는 솟구치는 감사와 관용에 앞뒤를 돌보지 않고 다 급히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에고이스트가 아니야. 다른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다 니... 더구나 난 잘 알고 있어, 당신의 마음을... 그렇게 기대면 안 돼요, 옷이 구겨져요. 그녀는 급히 말했다. 리토비노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꽃다발은 받아주겠지? 그는 물었다. 물론이에요. 참 아름답네요. 전 이 향기를 무척 좋아해요. 고마워요!.. 기념으로 간직하겠 어요. 당신이 첫 무대를 위해서 하고 리토비노프는 덧붙였다. 당신의 첫 무대의 승리를 위해 서. 이리나는 상체를 살짝 들어 어깨 너머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리토비노프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녀는 칭찬했다. 그러나 이리나는 이미 그의 말을 듣 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꽃다발을 얼굴에 가까이 대면서 다시 그 일종의 미묘한, 마치 앞이 흐려 크게 부릅뜬 것 같은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한 기류에 흔들리는 가느다 란 리본 끝이 그녀의 어깨 뒤에서 날개처럼 파닥이고 있었다. 공작이 나왔다. 고수머리에 흰 넥타이를 맨 자줏빛 예복 차림새로, 귀족 가문인 브라지미 르 훈장을 단춧구멍에 꽂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나온 공작 부인은 고풍스러운 비단옷을 입 고, 흔히 세상 어머니들의 마음의 동요를 감추는 방편으로 삼는 그 엄격한 표정으로 딸의 옷주름을 슬쩍 매만져주고 있었다. 커다란 4인용 대절 마차가 털이 긴 두 마리의 여읜 말에 이끌려, 아직 녹지 않은 눈덩어 리에 바퀴를 비벼대며 현관에 와 닿았다. 그러자 괴상한 작업복 차림새의 강마른 하인이 방 에서 뛰어나와, 귀찮다는 듯이 마차 준비가 다 되었다고 말했다... 뒤에 남은 아이들에게 밤 의 축복을 해주고, 가죽 외투에 몸을 싼 공작 내외는 마차를 행해 걸어갔다. 이리나는 약간 얇은, 품이 꼭 맞는 외투를 입고, 속으로는 계속 이 외투에 수없이 저주를 퍼부으며 - 묵묵 히 양친의 뒤를 따랐다. 리토비노프는 그들을 뒤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마차에 몸을 실었다. 밤이 깊어지자 그는 귀족회관의 창문 아래를 서성거려 보았다. 커다란 샹들리에의 무수한 촛불들이 새빨간 커튼을 통해 밝은 점을 이루며 빛났고, 마차로 가득 찬 광장에서는 슈트라 우스의 왈츠가 자못 축제 기분을 자아내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튿날 열두 시가 지나 리토비노프는 오시난가로 갔다. 방 안에 공작이 혼자 앉아 있다가 이리나는 두통으로 누워 있는데 저녁 때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긴 그녀로 선 무도회는 처음이었으니 이정도의 몸살쯤은 별로 놀라울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당연하지, 처녀들로서는 하고 공작은 프랑스어로 말했다. 리토비노프는 약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세히 보니 공작은 잠옷 차림새가 아니라, 프로 코트를 단정히 입고 있었다. 게다가, 공작은 덧붙여 말했다. 어제 저녁에 그렇게 소란을 피워댔으니, 그 애가 잠에 곯아떨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소란이라니요? 리토비노프가 중얼거렸다. 굉장했었지. 자네는 아나 상상도 못할 걸세. 리토비노프, 그 애가 얼마나 인기였는 줄 아 나! 황실에서도 모두들 그 애만 눈여겨보더군. 알렉산드로 표도로비치 공작은이렇게까지 말 하더군. 저 애를 이곳에 버려두기는 아까어요, 저 애에게선 데븐시르스카야 백작 부인의 모 습이 엿보이는군 하고 말이네. 왜, 알고 있겠지?.. 저 유명한... 그리고 브란젠크란프 노인은 말이야, 여러 사람들이 듣는 앞에서 이리나야말로 무도회의 여왕이라고 하지 않겠나. 그리고 한다는 소리가, 자기를 그 애에게 소개해달라는 거야. 그러더니 이 늙은이가 나한테까지 자 기 소개를 하지 않겠나. 그는 기병대에 있을 때 나를 본 기억이 있다면서 지금 어디에 근무 하고 있느냐고 묻더군. 그 노백작은 여간 재미있는 분이 아니야, 소문난 여성 숭배자거든. 내정신 좀 봐! 이야깃거리를 하나 빼먹을 뻔했어. 우리 집 공작 부인 말이네. 그 사람이 또 이만저만한 인기가 아니었단 말이야. 나타리아 니키치시나까지도 친절히 그 사람에게 말을 건넬 정도였네... 더 바랄 나위 없겠지. 이리나는 권세 있는 사내들과 번갈아 춤을 췄는데, 그 친구들이 이번엔 줄을 이어 내게 접근해오지 않겠나...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네. 실로 거짓말 같은 이야기네만, 저마다 우리 주위에서 떠나려 하질 않았단 말이네. 마주르카 를 출 때에는 모두들 앞을 다투어 그 애에게만 춤을 신청하지 않겠나. 어느 외국인 외교관 은 그 애가 모스크바 태생이라는 것을 알고 폐하께 말하는 것이었네. 폐하, 뭐니 뭐니 해도 귀국의 중심은 모스크바입니다 그려.. 그리고 또 다른 외교관은 이렇게 덧붙여 말했네. 이 거야말로 혁명이 아닐까요, 폐하! 혁명이라던가, 계시라던가.. 어쨋든 그런 의미의 말이었네. 그래.. 참.. 즉.. 그 ..이렇게 말하기는 좀 뭣하지만, 정말 이만저만한 소란이 아니었지. 그래서 이리나 자신은 어떠했나요? 공작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동안 손발이 싸늘해진 리토비노프가 이렇게 물었다. 즐거운 기분이었나요? 만족스러워했나요? 물론 즐거워했지. 어떻게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었겠어. 하긴 자네도 잘 알다시피 그 애 의 심정은 얼른 알아내기는 어렵지만 말이네. 어제 저녁에는 모두들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 - 참 신기한 일이군요. 누가 보더라도 댁의 따님은 처음 무도회에 나온 것 같아 보이질 않 아요. 그리고 레이젠바프 백작은.. 자네도 그 부은 알고 있을 테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어요. 집사람의 사촌 아우인데... 글쎄요. 부자이고 게다가 시종 직책을 맡고 있지. 페테르부르크에 살고 있네. 명성도 있고.. 리보 니아라면 우는 아이도 그치는 세도가지. 그가 어제까지는 우리 일가를 코끝으로 대해왔는 데.. 나는 그까짓 것에 개의치는 않아.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대범한 사람이라... 어쨌든 그런 사나인데 그가 이리나의 곁에 와 앉아 15분 동안이나 - 그 이상은 아니야 - 그 애와 이야 기를 나누더군. 나중에 집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더군. 누님의 딸은 진주예요. 완전무결해요. 좋은 조카딸을 두어서 부럽다고 모두들 축하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나중에 보니 그 사나 이는 어떤 훌륭한 양반과 무슨 이야기인가를 나누고 있는데 그 동안에도 줄곧 이리나를 힐 끔힐끔 훔쳐보지 않겠나... 게다가 그 훌륭한 양반 역시 그 애 쪽을 힐끔거리는 걸세... 그럼 결국 이리나는 오늘 하루 종일 자기 방에서 나오지 못하겠군요. 하고 리토비노프 가 또다시 물었다. 그렇지, 두통이 심하니까. 자네한테 잘 말해달라고 하더군. 그리고 저 꽃다발도 고맙다고. 아주 마음에 든다 고 하더군. 그 애는 좀 쉬어야 할걸세... 집사람은 양갓집을 방문하러 떠 났고.. 나도 실은... 공작은 기침을 하면서 다리를 안절부절못하였다.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리토비노프는 모자를 집어들고는 이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으니 나중에 다시 오겠노라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오시닌가에서 몇 발짝 떨어진 파출소 앞에 2인용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제복을 입은 호 사한 하인이 마부석에서 뛰어내리더니 에스토니아인 순경에게 파베르 바시리예비치 오시니 공작의 저택이 어디냐고 물었다. 리토비노프가 마차를 들여다보니 마차 안에는 중년의, 치질 이라도 않고 있는 듯한 체격에 이마에는 세로로 주름살이 그어진, 사나운 용모의 그리스 코 와 심술궂어 보이는 입을 가진 한 사나이가 혼자 앉아 있었다. 검은 족제비 털외투를 걸치 고 있는 그 사나이는 아무리 보아도 어떤 요직에 있는 고관인 듯 싶었다. 9 리토비노프는 나중에 또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 방문은 다음 날로 미루는 것 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튿날 정오쯤, 너무나 친근하게 느껴지는 그녀 의 집 객실에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공작의 어린 두 딸 - 비쿠토링카와 크레오파토링카 - 이 있었다. 그는 두 자매에게 인사하고 이리나는 다 나았느냐,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리나 언닌 어머니와 함께 나갔어요 하고 비쿠토링카가 대답했다. 이애는 슈 를 스 로 발음하는 버릇이 있긴 했지만 나머지 다른 여동생보다 쾌할한 편이었다. 뭐.. 나갔다고요? 리토비노프는 이렇게 되물었으나 가슴 속은 어쩐지 바르르 떨리고 있 었다. 그럴.. 그럴 리가.. 이런 시간에.. 아가씨들의 공부도 돌봐주지 않고요? 공부를 가르쳐 주지 않나요? 이리나 언닌 이제 우리 공부를 봐주지 않아요. 바쿠토링카가 대답했다. 그럼, 아버지는 계신가요? 하고 리토비노프가 물었다. 아버지는 외출중이신걸요. 비코토링카가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이리나 언니는 몸이 불 편해요. 밤새 울며 지샜어요... 울어요? 네, 울었대요... 에고로브나가 저한테 그랬어요. 언니의 눈이 새빨개져 퉁퉁 부어 있었대 요... 리토비노프는 오한이 나는 듯 약간 몸을 떨면서 방안을 두어 번 왔다갔다하다가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높은 탑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의 아찔한 같은 것이 느껴졌다. 마 음은 완전히 마비되어 가벼운 현기중이 일어났다. 둔한 통증과도 같은 의혹, 벙어리 같은 기 대, 그리고 기묘한, 거의 자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호기심, 목이 메는 눈물의 고통, 억지로 입가에 띄운 미소의 공허함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라는, 목적도 없는 무의미한 기도... 아,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참혹하며 자기 자신조차 정떨어질 만큼 추악한가! 이리나는 나와 만나고 싶지 않은 거다 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그의 뇌리를 맴돌았다. 그 것이 틀림없어. 하지만 대체 무엇 때문일까? 저 기분 나쁜 무도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 까? 어떻게 갑자기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갑자기.. (인간은 언제나 죽음 이 갑자기 찾아오는 것을 목격하고 있으면서도 그 갑자기 일어나는 일에 도저히 익숙지 못하여 그 때 문에 죽음을 부조리하게 여기는 것이다).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이렇게 숨기다니... 나리. 갑자기 어떤 긴장된 목소리가 그의 귀뿌리에서 들려왔다. 리토비노프는 가슴이 철렁했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늙은 하인이 한 통의 편지를 손에 쥐고 눈앞에 서 있었다. 그는 그것이 이리나의 필적임을 알아차렸다... 봉투를 뜯기 전부터 그는 미리 불행을 예감하고는 그 일격으로부터 몸을 피하기라도 하는 듯 머리를 가슴에 떨 어뜨리고 두 어깨를 치켜올렸다. 이윽고 마음을 굳게 먹고 봉투를 뜯었다. 조그마한 한 장의 편지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 가 적혀 있었다. 용서해주세요. 리토비노프 씨. 우리 사이는 모든 것이 끝났어요. 저는 페테르부르크로 떠납 니다. 마음은 내키지 않지만 일이 이렇게 결정되어버렸어요. 아무튼 제 운명은.. 아니, 새삼 변명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아요. 제 예감이 들어맞았어요. 용서해주세요. 전 당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입니다. 이리나 마음을 넓게 가지시고 저를 만날 생각은 하지 마세요. 리토비노프는 이 다섯 줄의 편지를 읽고 나더니 마치 누군가에 의해 가슴이 눌리기라도 한 듯 천천히 소파에 가라앉아 버렸다. 그는 떨어뜨린 편지를 주워 다시 한 번 훑어보고는 페테르부르크라 하고 중얼거리더니 이내 다시 편지를 떨어뜨리고 이번엔 주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 갑자기 적막이 찾아든 것 같기도 하였다. 그는 머리 뒤고 깍지낀 두 손 을 움직여 머리를 반듯하게 받쳤다. 치명상을 입은 사람은 허둥거리지 않는 법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날아온다, 그리고 날아간다... 모두가 자연이 하는 일이다. 내가 늘 예상하고 있던 일이 아닌가..(사실 그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은 한 번도 예 기치 못한 일이었다). 울고 있었어? ... 그녀가 울고 있었다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울고 있 었단 말인가? 나 같은 것은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그러나 하나하나가 당연한 결과이며, 그 여자의 성격에 맞는 일이다. 그 여자는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그렇다! (그는 쓴웃 음을 지었다.) 그 여자는 자기 안에 어떤 힘이 숨어 있는지 그녀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다. 그런데 일단 그 힘을 무도회에서 시험한 후로는 일개 대학생에 불과한 나 같은 것은 거 들떠보지도 않게 된 거지... 모두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애정 어린 말과 그 미소와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그 눈빛 - 그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금세 빛나기도 하고 멍하니 녹아드는 것 같기도 하던 그 눈빛이 떠올랐 다. 그리고 또 하나, 언젠가 두렵고 타는 듯한 느낌으로 재빨리 했던 꼭 한 번의 키스의 기 억도 떠올랐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찢어지는 듯한, 미칠 듯한, 독을 내뿜는 듯한 울음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팍 엎으러지더니 눈물에 젖어 헐 떡이면서 마치 자기 자신도, 주위의 모든 것도 다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주체하 지 못하는 듯, 광포한 쾌감에 굶주린 듯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베개를 질근 질근 씹는 것이었다... 전날 리토비노프가 보았던 마차 속의 신사는 오시닌 공작 부인의 사촌 동생으로, 부자이 며 시종의 지위에 있다는 바로 그 레이젠바프 백작이었다. 이리나가 그날 권세 있는 자들에 게 준 감명이 그에게 가져다줄 이득을 어느 정도의 정확성을 가지고 계산해본 백작은, 본 래 정력적이고 교제에도 능한 인물이 언제나 그렇듯이 재빨리 하나의 계획을 세웠다. 그는 나폴레옹 식으로 신속히 해치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저 뛰어난 처녀를 집으로 데려와야겠 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 페테르부르크로 말이야. 내 상속인으로 삼아도 좋지. 다만 전 재산을 양도할 필요는 없어. 마침 우리 집에는 지식도 없는데 그 애는 내 조카딸이고 마누 라도 혼자서 쓸쓸해하니까... 아무튼 객실에 아름다운 얼굴이 보인다는 것은 한결 흥겨운 일 이기도 하고... 그래, 바로 그것이다. 이건 좋은 아이디어야. 암, 좋은 아이디어고 말고! 그러 기 위해서는 우선 양친에게 미끼를 던져 허영심을 자극하여 허락을 받아 내야지.. 하루 세 끼도 걱정하는 자들이니 하고 백작은 어느 새 마차를 타고 개 훈련 광장으로 향하면서 궁 리하였다. 그런데 설마 고집 같은 건 부리지 않겠지. 하긴 그 부부는 신경이 그렇게 예민한 편도 아니니까 얼마간 쥐어주면 될 거야. 그런데 본인은 어떻게 나올까? 뭐 그 애도 그러죠! 하 고 허락할 테지. 꿀맛은 달콤하니까... 바로 엊저녁에 그것을 맛보았거든 비록 그것이 자기의 들뜬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긴해도. 한 번 그들에게 그것을 이용하게 하는 거야... 어차피 어 리석은 자들이니까. 나는 그 부부에게 말해야겠어 - 이러저러한 계획인데 어떠세요, 만일 의향이 없으시다면 다른아이를 양녀로 삼으려고 해요. 고아 말이죠 - 그러는 편이 나도 마 음 편하긴 해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24시간 내에 확답을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공작과 담판을 짓기로 한 것이다. 공작에게는 이미 전날 밤 무도회 석상에서, 오늘 방문하겠노라고 귀뜀해두었다. 이 방문의 결과에 대해서는 구태여 이 러니저러니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백작의 생각은 한치의 착오도 없었다. 공작 부처는 까 다롭게 굴지 않고 얼마간의 돈을 받았으며, 장본인 이리나도 지정된 기한 내에 승낙하였다. 그녀로서는 리토비노프와의 사이를 끊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진정 그를 사랑하고 있 었으므로 그에게 그런 편지를 쓴 후로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으며, 눈에서 눈물이 마르 지 않았고 점점 여위어 안색도 누렇게 되었다... 어쨌든 그리하여 한 달 후 공작 부인은 그 녀를 페테르부르크로 데려가 백작에게 입적시키고 백작 부인의 보호를 받게 하였다. 이 부 인은 매우 선량한 여자이긴 하지만 재치나 풍모에 있어서는 어설픔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한편 리토비노프는 대학을 중퇴하고 시골 고향으로 돌아왔다. 점차 사람의 상처는 아물어 가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전혀 이리나의 소식을 들을 수도 없었으며, 또 일부러 페테르부르 크나 그 사교계의 이야기는 피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그녀의 소식이 조금씩 바람을 타 고 전해져 왔다. 별로 상서롭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기묘한 소문으로, 요컨대 그녀가 세상 사람들의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시닌 공작 영양의 이름은 찬란한 광채에 쌍여 일종의 독특한 낙인이 찍힌 채 지방의 사 교계에서까지 날로 더욱 빈번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 이름이 호기심과 존 경과 선망의 대상으로 떠들썩하게 된 것은 일찍이 보로토인스카야 백작 부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을 때와 거의 비슷했다. 이윽고 그녀가 결혼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나 리토비노프는 이 마지막 뉴스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이미 타치야나와 약혼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제 독자들은 리토비노프가 설마! 하고 외쳤을 때 과연 무엇을 생각해냈기 때문 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바덴바덴으로 돌아가 도중에서 끊긴 이야기의 실마 리를 되찾아보기로 하자. 10 리토비노프는 한참 뒤에야 겨울 잠이 들었으나 그 잠도 오래 계속되지는 못하였다. 해가 떠오를 무렵에야 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문으로 보이는 어두운 산꼭대기는 맑은 하늘을 축축한 자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저쪽 나무 그늘은 꽤 서늘하겠지! 하고 그는 서둘러 옷을 주어 입으며, 하룻밤 사이에 한결 아름답게 피어오른 꽃송이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팡이를 집어들고 고성 깊숙이 있다는 유명한 바위밭 을 향해 걸어갔다. 상쾌한 아침 기운이 그 벅찬 애무의 힘으로 그를 에워쌌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힘차게 걸어갔다. 청춘의 건강미가 그의 핏줄 마다마디에서 약동하고 있었다. 대지마저도 그 의 경쾌한 발걸음 아래 갈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을 적마다 그는 점점 더 기운이 뻗어 기분이 상쾌해졌다. 이슬이 담뿍이 내린 나무 그늘 사이의 길을 그는 커다 란 자갈을 밟으며 걸어갔다. 양길 섶은 전나무 숲으로, 그 가지마다 새싹이 탐스럽게 돋아나 있었다. 정날 멋지군! 하고 그는 끊임없이 마음 속으로 되풀이하여 뇌까렸다. 문득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와서 앞을 바라보니, 저쪽에서 보로시로프와 반바에프가 걸 어오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뜨끔하여 마치 선생님을 피해 숨어버리는 학생처럼 길 옆 나무 숲에 몸을 가렸다... 하느님! 하고 그는 빌었다. 저 친구들이 무사히 지나가게 하소서! 이 두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 순간 아무리 많은 돈을 버린다 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그는 그들의 눈에 띄지 않고 그 순간을 그대로 넘겼다. 보로시로프는 유년학교 학생처럼 자신만만한 큰 소리로 반바에프를 향해 고딕 건축의 여 러 가지 발달단계 에 대해 떠들고 있었으나, 반바에프는 마치 황소처럼 음, 음 하며 맞장구 만 치고 있었다. 보아하니 오래 전부터 보로시로프가 발달단계 에 대해 계속 떠들어대는 바람에 이 고분고분한 감격가도 이젠 그에게서 차츰 정이 떨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리토비노프는 입술을 깨물며 목을 쑥 빼고는 멀어져가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열심히 가르쳐주려는 듯한 어투로 도도하게 늘어놓는 변설은 목구멍에 걸리기도 하고 콧소 리를 내기도 하며 끊임없이 힘차게 울려 왔으나, 이윽고 잠잠히 가라앉아 버렸다. 리토비노 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엎드린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는 세 시간쯤 산 속을 거닐었다. 일부러 길에서 벗어나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뛰어넘 기도 하고, 때로는 번들거리는 이끼에 발이 미끄러지기도 했다. 그리고 떡갈나무나 너도밤나 무 그늘 아래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고사리 숲으로 덮인 실개천의 끊임없는 지절거림과 나 무 잎사귀의 살랑거림, 그리고 무리를 벗어난 한 마리의 검은 깨똥지빠귀의 요란한 울음소 리를 따라 즐거운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다. 기분 좋은 졸음이 뒷골에 가볍게 스치듯 찾아와 몇차례 꾸벅꾸벅 졸다가는.. 갑자기 미소를 띄고 주위를 살펴보기도 했다. 숲이, 아니 소나무 의 푸른 잎이 눈을 가려 그는 또다시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는 동안 배가 고파왔으므로 그는 고성을 향해 걸었다. 거기서 그는 동전 몇 푼으로 커피가 든 고급 우유를 한 잔 마실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고성 앞 언덕에 놓인 흰 페인트 칠을 한 테이블 하나에 천천히 자리를 잡으려 하고 있을 때, 힘겨워하는 듯한 말들의 콧김 소리가 들려오더니 어디선가 세 대의 마차가 나타나 그 안에서 수많은 신사 숙녀들의 무리 를 쏟아놓았다... 저마다 프랑스어로 떠들어대고 있었는데.. 아니 오히려 프랑스어로 떠들고 있었기 때문에 리토비노프는 곧 그들이 러시아인들이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부인들의 온 정성을 다한 매무새는 실로 눈이 부셨다. 신사들은 방금 맞춰 입기는 했지만 지금은 별로 유행되지 않는, 몸에 꼭 끼고 뒤꽁무니가 째진 프록 코트에 재색 바지를 입고, 도시에서 흔히 볼수 있는 매우 품위 모자를 쓰고 있었다. 잘 맞는 검은 넥타이가 신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을 똑 졸라매고 있어 - 요컨대 그들의 당당한 위풍에는 어딘지 군인다운 데가 엿보였다. 하긴 실제로 그들은 군인이었다. 리토비노프는 우연히 소풍 가는 젊은 장군 들의 무리와 마주친 것이다. 그들은 상류사화에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명사라는 것은 그 거동 하나하나에 나타나 있었다. 손아랫사람들에게 인사할 때의 그 친절인지 혐오 의 표백인지 알 수 없는 말투에서도 그것이 엿보였다. 그 군인들의 얼굴은 윤기가 흐를 정 도로 잘 다듬어졌고, 머리는 단정하게 깎아 일종의 특수한 귀족적 근위장교적인 향기가 골 수에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그 향기는 최고급 잎담배 연기와 인도산 파츄리의 이상한 향기 가 하나로 녹아든 그런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손까지도 귀족적으로 희고 컸으며, 상아와도 같은 딱딱한 손톱을 갖고 있었다. 수염에서는 윤기가 흐르고 흰 이는 반짝였으며, 뺨의 부드 러운 피부는 불그레하고 턱은 유리 빛을 띠고 있었다. 이 젊은 장군들 중에는 명랑하게 떠드는 자도 있고 잠자코 생각에 잠긴 자도 있었지만, 그들이 훌륭한 예절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는 저마다 갖추고 있었다. 각자가 자신의 가치를 깊이 인식하고, 자신의 장래, 국가에 대한 중대한 사명들을 잘 인식하고 있는 듯이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외국 여행 중에 자연히 밖으로 드러나기 쉬운 여행에서 체면이 무슨 소용이냐 는 식의 기분에 가볍게 젖어들어, 적당히 엄격한 그리고 적당히 방자한 태도가 엿보이고 있 었다. 그들 무리는 떠들어대면서 각자 자리를 잡고 나더니, 사방에 분주히 돌아다니는 보이들을 불렀다. 리토비노프는 얼른 우유를 마셔버리고 값을 치른 다음,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소풍 나온 장군들의 곁을 빠져나가려는 참이었다... 리토비노프 씨 그때 웬 여자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저를 모르시겠어요? 그는 문득 멈춰 섰다. 그 목소리.. 그것을 어찌 잘못 들을 수가 있겠는가. 지난날 그토록 그의 심장을 뛰게 한 그 목소리를... 그는 돌아섰다. 저만치에 이리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테이블 옆으로 의자를 끌어다가 자리를 차지하고는 두 손을 뒤로 깍지낀 채 고개 를 갸우뚱거리며 애교 있게, 아니 진정 반가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리토비노프는 곧 그녀를 알아보았다. 10년 전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아닌게 아니라 그녀는 변해 있었다. 처녀에서 부인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호리호리한 몸매는 무르익어 활짝 피 어난 것 같았으며, 그전에는 갸름하게 봉우리졌던 어깨의 선도 지금은 이탈리아 고대 궁전 의 천장에 조각된 여신상을 연상하게 할 정도였다. 다만 눈만은 전과 다름없어, 그 모스크바 의 작은 집에 살던 당시의 눈길로 자기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리나 씨 아닙니까? ... 그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를 아시겠어요? 고마워요! 정말.. (그녀는 목청을 돋구어 이렇게 말하고 나서 뺨에 약 간 홍조를 띠며 똑바로 앉았다.) 마침 잘 만났네요 하고 그녀는 프랑스어로 말을 계속했다. 제 남편을 소개하겠어요, 바레리안, 이분은 리토비노프 씨라고 해요. 제 어렸을 적 친구예 요. 이쪽은 바레리안 브라디미로비치 라토미로프, 제 남편이예요. 젊은 장군들 중에서도 남달리 매무새가 눈에 띄는 한 사나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매우 정 중하게 리토비노프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자 다른 동료들은 눈살을 약간 찌푸리기도 하고 또는 눈살을 찌푸린다기보다는 군인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일절 미리 배격하려는 듯 자기 자신 속에 숨어버리려는 시늉을 하였다. 한편 소풍에 참가한 다른 부인들은 이 광경을 보고 눈을 가늘게 뜨고 가벼운 미소를 짓기도 하고, 아니 어쩌면 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 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은.. 당신은 오래 전부터 바덴바덴에 머물러 계셨습니까? 라토미로프 장군의 말투에 는 러시아어의 유난스러운 교만한 티가 풍겨나왔으며, 또 뜻밖에 아내의 어렸을 적 친구와 만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듯이 보이기도 했다. 바로 얼마 전에 왔습니다. 리토비노프는 대답했다. 그래, 줄곧 머물러 계실 예정입니까? 장군은 점잖게 물었다. 아직은 미정입니다. 아, 그래요... 장군은 입을 다물었다. 리토비노프도 잠자코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두 손으로 모자를 쥐고 허리를 앞으로 굽힌 채 일부러 웃음을 띄며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헌병 두 사람이 어느 일요일에.. 하고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곡조는 맞지 않았다 - 러시아의 귀족 치고 곡조를 제대로 맞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노래를 부르고 있는, 안색이 누런 이 장군은 자신의 용모에 계속 신경이 쓰여 못 견디겠다는 듯 쉴새 없이 안면 신경을 움직이고 눈을 연방 끔벅거리고 있었다. 함께 있 는 동료들 중에 장미꽃을 달지 않은 사람은 이 사람뿐이었다. 아니, 왜 앉지 않으세요, 리토비노프 씨 하고 얼마 후에 이리나가 참견했다. 리토비노프는 그녀의 말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어이, 바레리안, 불 좀 빌려주게 하고 또 한 사람이, 역시 젊고 뚱뚱한 한 장군이 이번 에는 영어로 말을 걸었다. 그는 마치 중유(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기간. 즉 49일)를 노려 보는 듯 눈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는데, 명주실 같은 자기의 짙은 구레나룻 속에 눈처럼 흰 다섯 손가락을 천천히 찔러넣고 있었다. 라토미로프는 그 사나이에게 은으로 된 성냥갑을 건네주었다. 성냥 갖고 계세요? 하고 혀가 잘 돌지 않는 목소리로 어떤 부인이 물었다. 네, 있어요, 백작 부인. 헌병 두 사람이 어느 일요일에.. 하고 눈을 끔벅거리는 아까 그 장군이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로 또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꼭 한 번 방문해주세요, 네? 그러는 동안에 이리나가 리토비노프에게 말했다. 우린 유 럽 호텔에 들어 있어요.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는 저도 호텔에 있을 거예요. 서로 정말 오래 간만이잖아요. 리토비노프는 이리나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이리나 씨. 참으로 오래간만입니다. 모스크바 이후 줄곧 못 만났으니까요. 그래요, 그 후로는 통 못 뵈었군요 하고 그녀는 그의 말을 끊으면서 되풀이했다. 꼭 오 셔서 여러 가지 옛날 아야기를 함깨 나누기로 해요. 그런데 리토비노프 씨, 당신은 별로 변 하지 않으셨군요. 그래요? 당신은 몰라볼 정도예요, 이리나 씨. 많이 늙었죠? 아니, 내 날은 그런 뜻이 아니라... 이레누 씨? 그 때 노랑머리 위에 역시 노란 모자를 쓴 부인이 옆에 앉아 있는 신사와 낮은 소리로 뭐라고 속삭이더니 후후 하고 입안으로 웃다가 묻는 투로 말꼬리를 올렸다. 이레누 씨? 늙었어요, 전. 이리나는 그 부인에게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둔한 이 장군은 유명한 이 노래를 첫줄밖에 알지 못했다. 요즘은 이따금씩 아파옵니까, 각하? 구레나룻을 기른 뚱뚱한 한 장군이 상류사회에 널 리 알려져 있는 재미있는 하나의 사건을 발설하는 듯한 어조로 일부러 O자를 크게 소리 내 어 말하고 나서, 잠깐 시시덕거리자 나머지 동료들도 따라 웃었다. 자네도 꽤 짓궂은 사람이군 그래, 보우리스. 라토미로프는 낮은 목소리로 그를 나무랐 다. 그는 보우리스라는 이름까지도 영어 식으로 발음했다. 이레누 씨? 노란 모자를 쓴 부인이 세 번째로 그녀를 불렀다. 이리나는 재빨리 그 부인 쪽을 돌아보았다. 네, 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요? 나중에 말할게요. 부인은 점잔을 빼며 이렇게 말했다. 매력이라고는 전혀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언제나 점잖만 빼는 여자였다. 어느 입버릇이 고약한 사람은 그녀를 평하여 공허 속의 허세 라고까지 말한 적이 있다. 이리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조바심이 나는 듯 한쪽 어깨를 추어올렸다. 그런데 베르디에 씨는 어떻게 된 걸까? 왜 아직도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거지? 하고 한 부인이 프랑스 사람이 들으면 듣기 거북할 정도의 발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악센트를 길게 끄는 것은 러시아 사람의 특유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정말 베르디에 씨는 이래서 탈이라니까. 또 다른 진짜 아르자마스 출신의 부인이 신음 하는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조용하세요, 여러분. 라토미로프가 참견하였다. 베르디에 씨는 약속했어요, 여러분 곁으 로 가겠다고요. 호호호! 부인들은 부채를 만지면서 웃어댔다. 보이가 맥주 컵을 날라왔다. 바이릿시 맥주(바이에르 맥주의 사투리)요? 구레나룻을 기른 장군이 놀라는 듯한 태도로 일부러 나지막하게 물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대체 어찌 된 거요? 파벨 백작은 아직 그쪽에 가 있나요? 하고 젊은 장군이 싸늘한 어 조로 또 다른 장군에게 물었다. 그렇다네 하고 그도 역시 싸늘한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세르쥬(세르게이의 프랑스 발음)가 후임이 된데요. 그래요! 먼저 장군이 내뱉듯이 말했다. 흐응! 나중 장군이 같은 어투로 말했다. 나는 알다가도 모르겠는걸 하고 노래를 부르던 장군이 입을 열었다. 거 참, 포오르(파벨의 프랑스 발음)가 어째서 그렇게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자기를 변호했 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그야 놈은 그 장사꾼을 잘 윽박질었지. 이를테면 한 대 먹인 셈 이야... 그런데 그것이 어쨌다는 건가? 놈도 상당한 각오가 서 있을 텐데. 그 사나이가 두려워하는 건.. 신문에 폭로되는 것일세 하고 누군가가 투덜거렸다. 성급한 장군은 발끈하였다. 뭐, 그건 말도 안돼! 신문에 내다니! 폭로를 하다니! 내 힘으 로 가능한 일이라면 그놈의 신문에는 고기와 빵의 시세나 가죽 외투와 장화 광고밖에는 싣 지 못하게 하겠어. 또 하나, 귀족 영지의 경매 광고도 말이지. 라토미로프가 입을 열어 말참견을 하였다. 그것도 어쩔 수 없겠지, 오늘의 시세라면 말이네... 그렇지만 무슨 소릴하고 있는 건가! 이 바덴바덴에서까지, 게다가 고성에까지 와서 말인가! 뭐, 전혀 상관없어요 하고 남달리 인상이 좋은, 마치 소녀 같은 얼굴을 한 장군이 입을 열었다. 이런 문제를 회피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가 바덴바덴이라고 해서.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점잖은 눈초리로 리토비노프를 힐끔 쳐다보고는 어서 편히 앉으시 죠 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 너그러운 웃음을 웃어 보였다. 신사는 언제 어떤 경우에나 자기의 신념을 굽혀서는 안 돼요. 안 그래요? 그야 물론이지 하고 성격이 급한 장군이 대답했는데, 그도 역시 리토비노프를 힐끔 바 라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 빈정거리는 듯한 어조로 하지만 지금 여기서까지 구태여.. 하 고 말했다. 아니, 그렇지만 말이죠. 여전히 점잖은 어조로 침착한 장군이 말을 막았다. 방금 당신 의 친구인 라토미로프가 귀족 영지가 팔려간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아무려면 어때요, 그렇다 고 사실과 다른 것도 아닌데. 하지만 지금은 팔 수도 없어요.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거든! 하고 성급한 장군이 큰 소리로 말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죠. 그러니까 그 사실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그 비극 적인 사실을. 한 발짝 때어놓을 적마다 말예요. 우리는 파산하였다 - 좋아요. 우리는 몸둘 곳이 없어서 - 이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네 대지주는 역시 하나의 근본 정신을.. 이른바 제1원리를 대표하고 있어요. 이 원리를 유지해나가는 것이, 곧 우리의 임무 거든요. 실례지만 마담, 손수건을 떨어뜨리셨군요..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사람들까지도 일종 의 혼미상태에 빠져 있는 오늘, 우리는 당연히 지적하지 않으면 안돼요. 반드시 지적해야지 요. (이렇게 말하면서 장군은 둘째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한 시민으로서 우리는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려는 심연을 손가락으로 가리켜주어야 해요. 그것도 단호한 태도로 되돌아가, 뒤로 물러서..! 하고 말해줘야지요.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점이에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뒤로 후퇴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 라토미로프는 걱정스러운 듯 이렇 게 말했다. 침착한 장군은 히죽 웃기만 하였으나 이윽고 언제까지나 줄곧 후퇴만 하는 거예요. 끝까 지, 뒤로 후퇴할수록 좋으니까요. 그 장군은 또다시 리토비노프에게 점잖은 시선을 던졌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렇다면 우리는 세미보야루시치나까지 되돌아가야 하나요, 각하? 하고 말했다. 그것도 좋지. 나는 내 의견을 솔직히 털어놓았네. 시정해야 해... 아무렴.. 종전의 것은 모 조리 고쳐야지. 그렇다면 2월 19일(1861년의 농노해방령의 발포가 있던 날)의 일도요? 그래요, 2월 19일의 일도 - 되도록이면 그렇지요. 우리는 결국 애국자이거나 아니거나 그 둘 중 하나거든요. 그럼 해방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묻겠지요. 아무튼 그들에게 물어보시오... 이 사람의 이름은 뭐지요? 하고 그 장군이 나지막한 소리로 라토미로프에게 물었다. 거기서 무엇을 의논하고 있나? 갑자기 뚱뚱한 장군이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이 사나이 는 이들 무리 중에서 희극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신문에 대한 이야기 인가? 잡문가의 이야기인가? 그럼 어디, 나도 한 번 잡문가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이 야기해볼까 - 아주 굉장했었지! 언젠가 어떤 잡문가가 나를 공격하고 있다고 누가 일러주지 않겠나. 나는 곧 그놈을 불러들였지. 놈이 끌려왔어. 이봐, 친애하는 잡문가 선생, 무엇 때 문에 남의 욕은 쓰는 거야? 그것도 애국심에선가? 내가 이렇게 물었네. 네, 애국심에 섭니 다 하고 그가 대답하더군. 좋아, 잡문가 선생. 그렇다면 자네 돈 좋아하나? 내가 물었네. 그럼요 하고 그는 대답했지. 그래서 나는 내 단장 손잡이를 그에게 냄새맡게 하고는 이것 도 금속이네. 자넨 이것도 좋아하지? 하고 말했네. 아니, 그건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디 마음껏 냄새 맡아보게. 내 손은 깨끗하니까. , 싫습니다. 그렇지만 이보게, 나는 이걸 무 척 좋아하네. 하지만 나는 내가 직접 이 냄새를 맡는 것은 싫어. 어때 선생,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나? , 네, 알겠습니다. , 그럼 앞으로는 얌전히 있게. 이봐, 은화 1루블이 야, 돌아가면 아침저녁으로 날 신처럼 모셔야 하네. 이리하여 잡문가 선생은 물러갔지. 그 장군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곁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따라 웃었지만 - 다만 이리나 만은 웃지 않고 어두운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힐끔 쳐다보았다. 너그러운 장군은 그 보우리스 씨의 살찐 어깨를 찰싹 때리고 나서 이 사람아, 그건 모두 자네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가... 자네가 지팡이로 사람을 위협하다니, 말도 안 되네... 첫째 로 자넨 지팡이 같은 건 갖고 있지도 않으니 말일세. 그야 부인네들을 웃기기 위해서겠지. 그래서 가볍게 몇 마디 해본 거겠지. 어쨌든 좋네. 내가 방금 한 말은 어디까지나 후퇴해야 한다는 걸세, 알아듣겠나?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진보라는 것의 적은 아니네. 그러나 일반 대학이나 신학교나 어느 초등학교, 그리고 저 우글거리는 대학생이나 승려들의 제자, 평민의 도련님들 - 이런 잡동사니들.. 아무튼 그런 자루 속의 침전물들과 같은, 무산계급보 다도 작은 영지... 하고 장군은 여자처럼, 거의 들릴까말까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내 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라네... 우린 그곳에 곧 멈춰 서야 하고, 또.. 그곳이야말로 사 람들을 멈춰 서게 해야만 하는 지점이라네. (그는 또 정답게 리토비노프의 얼굴을 바라보았 다.) 그렇지, 멈춰 서야 해요.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어느 누구도 무엇을 요 구하지도 또 탄원하지도 않는다는 거야. 예를 들어 자치제도를 보더라도 대체 누가 요구하 고 있는가? 자네가 요구하고 있나, 아니면 부인들인가? 혹은 자넨가, 또는 여기 있는 부인들 인가? 아니, 당신네 부인들은 이미 자기 자신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우리 남성들까지도 다 스리고 있거든요. (장군은 아름다운 얼굴을 자못 우습다는 듯 지어 보이는 미소로 더욱 빛 나고 있었다.) 여러분, 우리가 그들에게 머리를 숙일 필요가 어디 있어요? 민주주의는 당신 들에게 미소를 던지고 있어요. 그것은 당신들에게 아첨을 하고 당신들의 목적을 봉사하는 체하지만.. 실은 날이 양쪽에 달린 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러니 차라리 종전 그대로 의 방식으로 하는게 좋아요... 그 밖의 것은 잘못이지요.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멋대로 열을 올리게 해서는 안 돼요. 귀족계급을 믿어야지요. 귀족계급에게만 힘이 있거든요... 사실 그렇 게 하는 것이 상책이지요. 진실이라는 것이.. 나는 본래 진실에는 조금도 반대하지 않아요. 다만 변호사니, 배심원이니, 지방자치회의 임원이니 하는 자들만은 질색입니다 - 그리고 규 율에 대하여 말인데, 이 규율에 대해서만은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 돼요. 그 밖의 일이라면.. 다리를 놓거나 제방을 쌓거나 병원을 세우는 것 등은 좋아요. 한길에 가스들을 켜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페테르부르크는 지금 사방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네(민족해방운동을 가리킴). 이게 자네가 말하는 진보 라는 것이네! 하고 성급한 장군이 내뱉듯이 말했다. 자네는 심술이 사나워 탈이야 하고 뚱뚱한 장군이 의젓이 몸들 돌리면서 말했다. 자네는 검찰총장이나 했으면 좋겠군. 그러나 내가 보는 바에 의하면 지옥의 오리페우스(고대 그리스의 전설적 시인. 음악가. 오르페우스교의 창시자)와 함께 진보는 이제 마지막 비명을 올렸다네. 당신은 터무니없는 말만 하고 계시네요. 아르자마스 출신의 부인이 웃으면 말했다. 나는 말예요, 사모님, 터무니없는 말을 할 때가 제일 진지해요. 장군이 정색을 하며 말 했다. 그 말은 베르디에 씨가 몇 번씩이나 한 말이에요. 이리나가 작은 소리로 비꼬았다. 주먹과 행동! 하고 뚱뚱한 장군이 외쳤다. 특히 주먹. 이놈을 러시아말로 하면 점잖게, 쾅 하고 먹여라! 라는 뜻이 되지만. 이 장난꾸러기 좀 보게. 자넨 심술궂어서 탈이야! 하고 너그러운 장군이 말했다. 사모 님들, 저 사나이가 말할 땐 귀를 막으시오.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사나이거든요. 다만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요. 그렇지만 보우리스, 자네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네 하고 라토미로프는 아내를 힐끔 쳐 다보고 나서말했다. 장난꾸러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자네 말은 좀 지나치네. 진보란 - 사회 생활의 한 현상이라네. 그걸 잊어서는 안 되네. 하나의 길조니까 유의해야 하네.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뚱뚱한 장군이 이렇게 대답하고 코를 찡그렸다. 알고 있네. 자네가 인물이 되려고 노리고 있다는 것을... 천만에, 국가적인 인물이라니... 왜 또 그따위 말을 떠버리나! 다만 진실은 진실로서 인정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뿐이네. 보우리스 선생은 또다시 구레나룻에 손가락을 밀어 넣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회생활이란 매우 소중한 것이네. 민중의 발달이나 조국의 운명에도... 바레리안 하고 보우리스 선생은 암시적인 어투로 가로막았다. 여긴 사모님들이 있는 자리가 아닌가? 자네가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네. 자네 혹시 위원회라도 들어 갈 심산인가? 아니, 다행히 그곳은 길이 막혀버렸네 하고 성급한 장군이 옆에서 말을 가로챘다. 또다 시 헌병 두 사람이 일요일에... 하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라토미로프는 흰 손수건을 코에 대고 잠자코 있었다. 너그러운 장군은, 심술꾸러기! 심 술꾸러기! 하고 되풀이하였다. 보우리스 선생은 공허한 허세를 부리는 자 에게 표정을 바 꾸지도 않고 목소리를 낮추어 나는 자네에게 굴복하여 몹시 고민하고 있는데, 자네는 이 사랑의 불길에 언제 보답해 주려는가 하고 귀찮게 묻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리토비노프는 점점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거의 자부심... 순수한 평민 으로서의 긍지가 꺾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급 공무원의 아들인 자기와 이들 군복을 걸친 페 테르부르크의 귀족들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겠는가. 그는 그들이 미워하는 모든 것을 사 랑하며, 그들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미워한다. 그는 그것을 너무나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으 며 전신으로 통감하고 있었다. 그들의 농담은 아무래도 저속하며 이야기는 유치하기 짝이 없고, 일거일동이 허식으로 가득 차 보였다. 그들의 부드러운 말투까지도 불쾌하게 느껴졌고 혐오스러웠다. 그런데 그는 이들 앞에서, 이 원수들 앞에서 마치 떨고 있는 꼴이 아닌가...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놈들은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 나 를 우스운 놈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어째서 나는 이런 데에 앉아 있는 거지? 나가자, 당장 나가버리자. 그는 이리나와 함께 있어도 자기의 생각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을 고하였다. 벌써 가세요? 하고 이리나가 물었다. 그녀는 잠깐 생각하더니 굳이 만류하려 들지 않고 다만 그에게 자기를 꼭 한 번 방문해달라고 다짐을 받는 것이었다. 라토미로프 장군은 여전히 세련된 예의를 갖추어 그와 악수를 나누고는, 그를 문밖가지 전송하였다... 그런데 리토비노프가 첫 번째 모퉁이를 돌아서자 등 뒤에서 일제히 큰 웃음소 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이 웃음소리는 그를 향한 것이 아니라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던 베 르디에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티롤 모자를 쓰고 물빛 블라우스를 입었는데, 노 새를 타고 있었다. 순간 리토비노프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고 이내 분개했다. 그의 굳게 다 문 입술은 마치 쓴 쑥이라도씹는 듯 움찔했다. 괘씸한 속물들 같으니!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들과 자리를 같이한 몇 분 동안에는 자기가 그들을 이처럼 심하게 욕할 만한 근거가 충분치 않다는 것은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 다. 그런데 바로 그 사회에 이리나가, 옛날 그의 애인이었던 이리나가 빠져든 것이다! 그녀 역시 그 사회에서 돌아다니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데 길들여지고, 또 여왕처럼 군림하며 그 사회를 위해 자기의 품위를 완전히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당연한 결과였던 모양이 다. 그보다 더 나은 운명에 놓일 만한 여자가 못 되었던가 보다! 그가 현재 품고 있는 포부 에 대하여 그녀가 꼬치꼬치 물어오지 않는 것이 그로서는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었다. 그 놈들 앞에서, 그놈들에게 에워싸여 그는 자기 신조를 굽혀야 할 참이었다. 아니야,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하고 리토비노프는 중얼거리고는 선선한 공기를 가득 들이마시며 바덴바덴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는 약혼녀를, 그 귀엽고 선량하 고 성스러운 타치야나에 대해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소녀가 얼마나 정결하고 고귀하 고 성실한가를 생각했다! 그는 순수한 감동마저 느끼며 그 소녀의 얼굴과 말씨와 사소한 버 릇까지도 생각해냈다. 그러자 그녀가 찾아오기로 한 날이 못 견디게 기다려지는 것이었다. 그는 발길을 재촉하여 걸었더니 마음이 한결 진정되었다. 그는 하숙집으로 돌아와 테이블 에 앉아 책을 펴들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책을 아래로 떨어뜨리고는 온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하였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건만, 다만 이리나의 일... 이 리나의 일이... 자기가 그녀를 다시 알게 된 것이 갑자기 어떤 놀랍고 기묘한 일이나 되는 듯이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것이? 뜻밖에 그녀를 만나 그녀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게다가 그 족속들 하나하나에는 사교계의 도장이 그토록 진하게 찍혀 있었는데, 어찌하여 그녀에게서는 그것을 찾아볼 수 없었을까? 그녀가 지금은 자신의 환경에 싫증을 내고, 또 그것을 서글퍼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비록 그 족 속들에게 속해 있긴 하지만 결코 적은 아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다정하게 자기와 이야기를 나누게 했을 뿐 아니라 자기를 초대까지 하게 했을까? 리토비노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 오, 타냐, 타냐! 하고 그는 정신없이 소리쳤다. 너 는 나의 천사다. 언제까지나 변치 않고 사랑할... 나는 그 여자를 찾아가서는 안 된다. 깨끗 이 헤어지자! 그 여자는 장군들과 시시덕거리며 살아가면 그만이다! 리토비노프는 또다시 책을 펴들었다. 11 리토비노프는 책을 읽기 시작했으나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잠시 밖에 나 가 산책도 하고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가 하면 도박 구경도 하다가 자기 방으로 돌아와 다시 책을 읽어보았으나, 역시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헛되이 지나갔다. 농업지도원으로 있는 선량한 피시차르킨이 와서 세 시간쯤 앉아 있다가 돌아갔다. 그는 세상물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고 토론을 제기하여 문제점을 끄 집어내는가 하면 고귀한 일과 실용적인 일도 차례로 논하여, 마침내 가엾은 리토비노프가 비명을 지를 정도로 권태로운 공기를 방안 가득히 채워놓는 것이었다. 따분하고 싸늘한, 벗 어날 길 없는 절망적인 권태를 자아내는 기술에 있어서는 피시차르킨은 그 방면의 명인들 - 최고의 도학 선생들 가운데에서도 어깨를 겨룰 자가 없을 정도였다. 곱게 말아 올린 머리 며, 생기 없는 푸르스름한 눈이나 호인다운 코는 슬쩍 보기만 해도 질려버리는 것이었다. 그 리고 바리톤이라 착 가라앉은 잠꼬대 같은 목소리는 마치 둘에 곱하면 넷이지 다섯도 아니 고 셋도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개인으로서도 국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또 반대로 국가에 있어서도 개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금융에는 신용이 없어서는 안 된다 - 라는 금언을 확 실하고도 친절하게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점에도 불구 하고 그는 실로 훌륭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에서 태어난 자의 숙명적인 한계 로, 우리 나라에서는 훌륭한 사람은 권태로운 법이라고 못박여 있다. 피시차르킨이 물러가자 이번에는 빈다소프가 찾아와 배짱 좋게 100그루우덴만 꿔달라고 했다. 그는 돈을 주었다. 그는 빈다소프에게 전혀 흥미가 없을 뿐만 아니가 혐오감마저 갖고 있었으며, 그 돈인 결코 되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게다가 그 자신이 궁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였다. 그런데 어째서 돈을 주었느냐고 독자들은 묻고 싶을 것이다. 이유에 대해서는 운운할 여지가 없다! 이런 명에 있어서는 러시아 사람 도 훌륭한 것이다. 독자들도 가슴에 손을 얹고 한 번 생각해보라! 자기 생애에 일어난 많은 일들이 전혀 아무런 원인도 없이 이루어진 경우가 한 번이라도 있는가를. 그런데 빈나소프 는 리토비노프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펜탈라(바덴바덴산 포도주) 를 한 컵 들이마시고는, 입술도 닦지 않고 뚜벅뚜벅 장화 소리를 내며 사라져버렸다. 농민들 의 생피를 빨아먹고 살아가는 이 사나이를, 멀리 사라져가는 그의 붉은 목덜미를 바라보면 서 리토비노프는 얼마나 자기 자신이 못다땅하게 여겨졌던가! 저녁때쯤 되어 타이야나로부터 편지가 왔다. 숙모의 병세가 악화되어 앞으로 5, 6일 동안 은 바덴바덴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리토비노프는 이 소식을 듣고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 리하여 더욱 화가 나 착잡한 심정으로 그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리토비노프는 이튿날도 저날 못지 않게, 아니 한결 더 언짢았다. 아침부터 그의 방은 동포 들로 - 가득 찼다. 반바에프, 보로시로프, 피사차르킨, 두 명의 장교, 두 명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생 - 이런 얼굴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어 한참을 떠들다가 지쳐 권태로운 표정을 보이면 서도 오후 네 시경의 식사 때까지 그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가 있을 만한 데 가 없는 자들이라 일단 리토비노프의 방에 들어가자 소위 '뿌리를 박고' 주저앉았던 것이다. 처음엔 구바료프가 하이델베르크로 돌아갔으니 우리도 그의 뒤를 따라야한다는 이야기가 나 오더니, 이어서 다소 철학적인 문제를 주고받다가 폴란드 문제로 화제를 옮겨 마침내 이야 기는 도박과 매춘부로 번져, 염문과 추문이 엇갈려 입에 올랐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어디 에 어떤 장사가 있고 어떤 뚱뚱보가 있으며 또 어떤 대식가가 있는가 하는 데까지 화제가 미쳤다. 루킨에 관한 이야기, 내기를 하여 청어를 서른 세 마리나 먹어치운 시제보의 이야 기, 뚱뚱보로 유명한 기병대령 이즈에디노프 이야기, 쇠뼈를 자기 이마에 대고 힘들이지 않 고 부러뜨린 병사 이야기 등, 해묵은 일화들이 계속해서 입에 오르내리다가 이윽고는 모두 가 허풍 섞인 수다가 되어버렸다. 피시차르킨까지도 하품을 하면서 자기가 아는 어느 소러 시아의 시골 할머니는 죽을 당시에 27푸드와 몇 푼트를 갖고 있었다느니, 자기가 잘 아는 지주는 아침 식사에 거위 세 마리와 철갑상어 한 마리를 먹어치우는 것이 상례였다느니 하 는 이야기들을 하였다. 반바에프는 갑자기 흥분하면서 "나도 양 한 마리쯤은 먹어치운다, 물론 간을 맞춰서" 하 고 떠들어댔고, 브로시로프가 유년학교 동창으로 기운이 장사인 사나이가 있었다고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바람에, 그만 사람들은 김이 빠져 모두들 입을 다물고 그의 얼굴만 쳐다보다가 저마다 모자를 집어들고 자리를 뜨고 말았다. 혼자 남은 리토비노프는 책이나 읽으려고 했지만, 머리에 녹이라도 슨 것처럼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아 그날 밤도 헛되이 보내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늦게 그가 식사를 하고 있는데 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제기랄, 또 어제 그 놈팡이들 중의 하나가 찾아왔나 보군' 하고 리토비노프는 생각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 "들어오시오!" 문을 살짝 열고 얼굴을 디민 것은 포토우긴이었다. 리토비노프는 매우 반가웠다. "어서 오시오!" 그는 뜻밖에 찾아온 손님의 손을 힘주어 잡 으면서 말했다. "어서 오시오! 내가 먼저 찾아가야 하는 건데, 당신이 숙소를 가르쳐주지 않 아서... 그리 앉으시오!" 포토우긴은 리토비노프의 친절한 말에는 한 마디의 답변도 없이 다만 히죽거리며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리토비노프의 마음은 분명 알아챈 모양이었지만, 그 의 표정에는 어딘가 무뚝뚝한 데가 있었다. "저기 그... 좀 이야기가 다른데... " 하고 그는 약간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그야 물론 당신의 손님이 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실은 오늘 은 어느 분의 심부름으로 찾아왔어요." "그러니까 이를테면" 하고 리토비노프는 약간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자진해서 찾아올 마음은 없었단 말이지요?" "아니 천만에요! ... 나는... 다만 나는 다시 폐를 끼치러 오지는 않았을 테지요, 만일 부탁 을 받지 않았더라면 말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누구 부탁인데요? 어디 들어봅시다." "당신이 잘 아는 분이지요. 저 이리나 파불로브나 라토미로바 말입니다. 당신은 엊그제 그 분을 찾아가겠노라고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방문하지 않았나보던데..." "네 보시다시피..." "가까운 사인가요?" "네, 가까운 친구 사이라고 할 수 있겠죠." 리토비노프는 잠시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 다. "실례지만," 이윽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리나 씨가 왜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지 당신은 그 까닭을 알고 있나요?" 포토우긴은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요. 내가 알기로는 그분은 당신 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하고 옛날의 관계를 되찾고자 하는 모양입니다." "되찾아요?" 하고 리토비노프는 그의 말을 되받아 이렇게 덧붙였다. "미안하지만 한 가지 만 더 묻겠어요. 그 관계라는 것이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 당신을 알고 계십니까?" "실은 - 아니, 모릅니다.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하고 포토우긴은 갑자기 리토비노프 쪽을 친밀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바람직한 성질의 것이었으리라 생각하고 있 어요. 이리나 씨는 당신을 매우 칭찬하더군요. 그래 나도, 그렇다면 모시고 오지요 하고 약 속했어요. 같이 가주시겠지요?" "언제요?" "지금... 바로." 리토비노프는 두 손을 벌려 보였을 뿐이었다. "이리나 씨는" 하고 포토우긴이 말을 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뭐랄까요... 그 환 경이랄까, 즉 엊그저께 당신이 그분을 보았을 때의 그 분위기 말입니다. 그것이 특히 당신의 공명을 받을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분은 악마란 그림에서 보는 것만큼 그렇게 검 지만은 않다고, 그렇게 당신에게 전해달라고 했어요." "흠... 그 격언은 그러니까, 그... 환경에 적응될 수 있다는 건가요?" "그렇지요...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흠... 그래 포토우긴 씨, 당신은 악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내 생각으로는 리토비노프 씨, 어쨌든 놈은 그림에서 보는 것과 똑같지는 않다고 생각해 요. 그보다 나은지 못한지 그건 한 마디로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그림과 다르다 는 것만은 사실이 아니겠어요? 그럼 슬슬 나가보실까요?" "그 전에 우선 그리 좀 앉으십시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무엇이 이상하단 말씀입니까?" "어떻게 해서 당신은 이리나 씨와 친구가 되엇나요?" 이에 포토우긴은 새삼 자기 자신을 돌아보았다. "내 처지와 또 사회적인 지위로 보아 당 신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해요. 그렇지만 - 우리가 잘아는 셰익스피어도 말하고 있 어요. "하늘과 땅 사이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네. 그렇지 않은가, 호레이쇼?' (< 햄릿>제5장에 나옴)라고요. 인생이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지요. 이렇게 비유해서 말하면 어 떨까요? -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요. 바람 한 점 없어요. 그러니 아랫가지의 잎사귀가 어 떻게 윗가지의 잎사귀와 접촉할 수 있겠어요? 그건 도저히 안 될 일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폭풍이 불어오면 모든 잎새가 크게 흔들려 그 두 장의 잎사귀도 서로 접촉하게 되지요." "하하! 그럼 폭풍이 된 셈이군요." "물론이지요! 그런 일없이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나요." 리토비노프는 여전히 꾸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고 포토우긴은 얼굴을 찡그리며 외쳤다. "요즘 젊은이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는 걸! 모처럼 절세의 미인이 만나겠다고 사람까지 보내주었는데 이렇게 망설이다니! 부끄러운 일 이오, 선생.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알아야해요. 여기 당신의 모자가 있어요. 어서 쓰고 '전진!' 하시 오. 이 성급한 독일사람 말대로 말이오." 리토비노프는 생각에 잠긴채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었으나 드디어 모자를 들고 포토우긴과 함께 방을 나섰다. 12 두사람은 바덴바덴의 어느 일류 호텔의 현관을 올라가 라토미로프 장군부인의 방이 어디 냐고 물었다. 하인은 먼저 두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 곧 "공작부인은 방에 계십니다." 하고 말하고 두 사람을 안내하여 계단을 올라가 어느 방문 앞에 서더니 문을 노크하고 두 사람이 찾아온 것을 알렸다. 이른바 '공작부인' 은 곧 두 사람을 안으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남편은 명사의 한 사람인 모 고관이 기차로 그곳을 지나가게 되어 카를 루스루에까지 마중을 나가고 없었다. 포토우긴과 리토비노프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대 이리나는 마참 작은 테이블에 앉아 두꺼 운 천에 수를 놓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일손을 멈추고 테이블을 밀치면서 일어났다. 마음 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 그녀의 얼굴에 가득 넘쳤다. 그녀는 목에까지 꼭 끼는 실내복을 입 고 있었다. 어깨에서 빗어 올린 머리카락이 풀어져 갸름한 목 언저리에 늘어져 있었다. 이리 나는 포토우긴에게 "고마워요." 하고 속삭이고 나서, 리토비노프에게 손을 내밀고는 애교 있 게 그의 건망증을 탓하는 것이었다. "서로 옛친구 사이면서" 하고 그녀는 투덜거렸다. 리토비노프가 변명하려 들자 그녀는 "괜찮아요, 괜찮아요"하고 재빨리 말하고 나서, 애정 어린 표정으로 그의 모자를 벗기고 억지로 그를 의자에 앉혔다. 포토우긴도 따라서 앉았다 가 곧 일어나 실은 부득이한 볼 일이 있으니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시 오겠노라며 작별인사 를 하였다. 이리나는 다시 그를 힐끔 쳐다보고 나서 정답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뿐 별로 말리지도 않았다. 그의 그림자가 창문 커튼 뒤로 사라지자마자 그녀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람이 얼굴에 찾아볼 수 있는 생기발랄한 표정으로 리토비노프를 향해 돌아앉았다. "리토비노프 씨" 하고 그녀는 러시아말로, 천성적으로 타고난 부드럽고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겨우 단둘이 만나게 되었군요. 솔직히 말씀드려 오늘 뵙게 된 것을 무척 기 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신께 직접...(이리나는 그의 얼굴을 정면 으로 바라보았다.) 사과를 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리토비노프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이처럼 단도직입적으로 급습을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 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 쪽에서 먼저 옛날 이야기를 끄집어 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었다. "사과하다니... 뭘..."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리나는 얼굴을 붉히며 "뭐냐니요... 잘 알고 계시면서" 하고 말하고는 얼굴을 약간 돌렸 다. "전 당신께 죄를 지었어요. 리토비노프 씨... 하긴 그것이 제 운명이었지만. (리토비노프 는 그녀의 편지를 상기하였다.) 따라서 전 후회하지 않아요... 게다가 중요한 것은 이제는 모 든 것이 너무나 늦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뜻밖에 당신을 만나게 되어 제 자신에게 타일렀 어요 -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말예요...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전 말할 수 없이 괴로울 거예요... 그래서 저는 - 한시 바삐 당신과 만나 마지막으로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하여 결국엔 아무것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도 록 해야겠다, 조금도 꺼림직한 것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깨끗이, 단숨에 - 하고 생각했어 요. 제 말을 알아들으시겠어요. 리토비노프 씨? 그러니 제발 절 용서해주신다고 한 마디만 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당신이 아직도 절 원망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아 니 어쩌면 이건 제 터무니없는 속단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래도 좋아요. 어쨌든 말씀 해주세요, 절 용서해주신다고요." 이리나는 단숨에 이렇게 쏟아놓았다. 그리고 리토비노프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 틀림없는 눈물이었다. "천만에요, 이리나 씨." 그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사과한다느니, 용서해달라느니, 그게 무 슨 말씀입니까... 그건 벌써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일이 아닙니까? 나로서는 다만 뜻밖의 일로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현재 그토록 눈부신 후광에 싸여 있으면서 당신은 어째서 소녀시 절의 그 보잘 것 없는 친구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말이죠." "그게 뜻밖의 일이에요?" 하고 이리나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 "감동적이군요." 리토비노프는 그녀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꿈에도 그런 일을..." "그렇지만 당신이 아직 용서한다는 말을 보류하고 있는 것은." 이리나가 그의 말을 가로 막았다. "난 당신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해요, 이리나 씨. 이 세상의 모든 행복이 당신의 것이 되기를 나는 마음 속으로 빌고 있어요." "절 원망하진 않으세요?" "나는 다만 옛날 당신 덕분에 맛보았던 그 화려한 한때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을 뿐입 니다." 이리나는 두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리토보노프는 그 손을 움켜쥐고 좀처럼 놓지 않았다...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무엇인가 그 손의 부드러운 감촉으로 눈떠 마음 속에서 몰래 기 지개를 켰다. 이리나는 다시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옛날, 그처럼 그리워하던 그 의 모습을 다시 거기서 찾아내었다. 비범한 눈썹 아래 날카롭게 빛나는 깊은 눈동자며, 한쪽 뺨에 있는 작은 검은 점, 이마를 덮은 독특한 머리 모양, 입술을 삐죽이 일그러뜨리는 버릇, 그리고 눈썹을 약간 떠는 버릇까지도 모두 그대로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얼마 나 아름답게 변했는가! 여성의 싱싱한 육체에서 풍기는 매력, 얼마나 풍부한 힘인가! 그리고 그 투명한 얼굴은 연지도 미안수도 아이섀도도 분도 쓰지 않은, 그러니까 화장이라고는 전 혀 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렇다. 그녀야말로 진짜 미안이었다. 리토비노프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여전히 그녀를 바로보고는 있었으나 머릿속으로는 멀 리 과거를 더듬고 있었다... 이리나는 그것을 눈치챘다. "이제 됐어요!" 하고 그녀는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제 양심도 진정되었어요. 이번에는 제 호기심을 채워줄 차례예요..." "호기심?" 하고 리토비노프는 의아한 말투로 반문하였다. "네, 그래요... 꼭 알고 싶어요. 그 후로 줄곧 어떻게 지내셨으며, 또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 알고 싶어요. 언제 무엇을 어떻게, 모조리 들려주세요. 거짓말은 빼시고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전 당신을 줄곧 감시해 왔거든요... 제 눈이 닿는 데까지..." "줄곧 감시해왔다고요, 당신이... 그곳에서... 페테르부르크에서?" "그 눈부신 후광에 싸여 있으면서, 당신의 말을 흉내낸다면... 그래요, 감시했고 말고요. 그 후광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지금은 당신이 이야기하실 차례예요. 얼마든지 좋으니까 오랫동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무도 방해할 사람은 없어요. 들을 얘기가 많을 테니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이리나는 안락의자에 앉아 몸을 똑바로 하면서 들뜬 마음으로 활기에 넘쳐 이렇게 덧붙였다. "어서 시작하세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감사를 해야겠어요" 하고 리토비노프가 입을 열었다. "뭔데요?" "내 방에 가져다놓은 그 꽃말입니다." "꽃이라뇨? 저는 전혀 모르는 일인데요." "그래요?" "전혀 몰라요... 그보다 어서 이야기나 들려주세요... 아, 정말이지 저 포토우긴은 영리한 사람이에요, 당신을 데리고 왔으니 말예요!" 리토비노프는 귀를 기울였다. "당신은 저 포토우긴 씨와는 전부터 알고 있었나요?" "네, 오래 전부터예요... 그렇지만 이야기를." "잘 아는 사인가요?" "그럼요!" 하고 이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어요... 당신도 물 론 엘리자베리스카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셨겠지요 - 왜, 재작년에 참혹하게 죽은 그 사람 있잖아요... 전 그만 잊고 있었어요. 우리의 그 일을, 당신은 모르신다는 그 일을... 잘됐군요, 당신이 몰랐다니. 오,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몰라요! 그때 드디어 한 사람이 나타난 거예요.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일을 전혀 모르는 분이 말예요! 게다가 그 사람은 러시아말 도 할 줄 알았어요. 좀 서투르기는 했지만 아무튼 러시아말로 의사가 통했어요. 10년을 하루 같이 조금도 변치 않는 달착지근하고 메스꺼운 페테르부르크의 프랑스 말이 아니고요!" "그래서 포토우긴과 알게 되었군요. 그..." "그 일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파요" 하고 이리나가 말을 가로막았다. "엘리자는 여학교 때 저와 제일 친했던 친구였어요. 그후 페테르부르크에서도 늘 만났지요. 엘리자는 저에게 어떠한 비밀도 털어놓았어요. 불행한 아이로 고생도 많이 했지요. 포토우긴은 그 사건이 일 어났을 때 기사와도 같은 훌륭한 태도를 보여줬어요. 즉 자기 자신을 희생한 거예요.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분의 존재 가치를 알게 되었어요. 그건 그렇고, 또 이야기가 옆길로 흘렀군 요. 당신 이야기를, 어서요, 리토비노프 씨." "하지만 내 이야기는 조금도 재미없을텐데요, 이리나 씨." "그런 걱정일랑 마시고요." "생각해보시오, 이리나 씨. 우리는 10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어요. 꼭 10년이 되었죠. 꽤 오랜 세월이 흘러버렸어요." "세월뿐이 아녜요!" 그녀는일종의 침통한 얼굴로 되풀이하여 말했다. "그러니까 전 당신의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대체 어느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군요." "맨 처음부터요, 그때 당신이... 그러니까 제가 페테르부르크 가버리고 난 뒤부터. 당신은 그때 곧 모스크바를 떠나셨나요? ... 전 그 후로 모스크바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아, 그래요?" "처음에는 그럴 것 같지 않았는데, 결혼하고 나니까." "결혼한 지는 오래되셨나요?" "꼭 4년 돼요." "아기는요?" "없어요." 그녀는 무뚝뚝하게 잘라 말했다. 리토비노프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럼 결혼하실 때까진 줄곧 그 분의 집에... 가만 있자, 뭐라고 했더라, 그때 ... 레이젠바 프 백작 댁에?" 이리나는 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뭣 때문에 이런 것을 묻는지 분명히 밝혀내려는 듯이. "아아뇨..."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그럼 부모님은... 참, 내가 여태 그분들에 대해서는 물어보질 않았군요. 지금 뭘하고..." "두 분 다 잘 계세요." "역시 모스크바에 사시나요?" "네, 여전히 모스크바에 계세요." "동생들도요?" "모두 잘 있어요. 제가 뒤를 돌봐주었지요." "아!' 하고 리토비노프는 눈을 치뜨고 이리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실은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당신이지요. 다만 만일..." 그는 갑자기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이리나는 두 손을 얼굴 가까이에 대고, 약지에 낀 결혼반지를 약간 돌렸다. "좋아요, 마다하진 않겠어요" 하고 그녀가 말하였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아마 ...하지만 당 신 먼저 말씀하셔야죠... 그렇잖아요, 저는 당신의 동정을 줄곧 감시하고는 있었지만, 실은 당신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안 그래요? 어서 말씀해주세요." "그야 이리나 씨, 당신은 사교계에서 뚜렷한 지위를 차지했으니 소문의 주인공이 될 수밖 에 없겠지요... 그리고 내가 사는 시골에서는 어떤 소문이든 다 사실로 인정하거든요." "당신도 그래요? 어떤 소문이 나돌았는데요?" "실은 이리나 씨, 그런 소문이 내 귀에 들어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어요. 나는 세상을 버린 사람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어머, 왜요? 그런데 당신은 국민군에 들어가 크림 반도에 계셨지요?" "그것까지 알고 계셨나요?" "그럼요,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리토비노프는 또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데 구태여 내가 이야기해드릴 필요가 있을까요?" 하고 리 토비노프가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그건... 그러니까 제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서예요. 제가 이처럼 애원하다시피 하잖아요. 리토비노프 씨." 리토비노프는 머리를 숙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작하기는 했지만 좀 막연한 이야기로, 겨우 대충 윤곽을 잡아 자기가 걸어온 발자취를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가끔 이야기를 끊고 "이제 이만하면 되겠지요' 하고 반문하는 듯한 눈초리로 이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야기를 계속해다랄고 완강하게 애원하였다. 그녀는 늘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 기고 의자의 가로대에 팔꿈치를 괴고는 주의를 집중하여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열 심히 듣고 있었다. 그 모습을, 표정의 변화를 곁에서 관찰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그녀가 리토비노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기보다는 오히려 관찰에 열중하고 있음 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녀의 집요한 시선에 리토비노프는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지만, 그녀 가 열심히 관찰하고 았는 상대는 사실은 리토비노프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앞에 떠오른 것 은 전혀 다른 전 생애 - 그가 아닌, 그녀 자신의 생애였다. 리토비노프는 이야기를 중단하고 잠자코 있었다. 가슴 속에 얽혀 있는 겸연쩍은 생각이 점점 고개를 들어 그 불쾌한 압박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야기를 재촉하지도 않았다. 사뭇 지친 듯이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리고 의자 뒤에 천천히 기대더니,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리토비노프는 잠시 기다려보았으나, 곧 이 방문도 이미 두 시간이 넘었다는 것을 깨닫고 는 모자를 집어들려고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옆방에서 뚜벅뚜벅하고 엷은 에나멜 칠을 한 장화 소리가 나더니 근위병 귀족 특유의 향취를 풍기며 바레리안 브라디미로비치 라토비로 프가 들어왔다. 리토비노프는 의자에서 일어나 풍채 좋은 이 장군과 인사를 나누었다. 한편 이리나는 별 로 당황해하는 기색도 없이 눈을 가린 손을 때고는 싸늘한 눈초리로 남편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프랑스어로 말하였다. "아니 벌써 오셨어요? 몇 신데요, 지금?" "네 시가 다됐소. 당신,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았소? 공작 부인을 기다리게 해서야 쓰나." 장군은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꽉 졸라맨 상체를 품위 있게 리토비노프 쪽으로 돌리더니, 그 사람 특유의 응석에 가까운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무튼, 친애하는 손님 덕분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나보군요." 여기서 잠시 라토미로프 장군에 대하여 몇 가지 예비 지식을 독자들에게 전하려 한다. 그 의 부친은 자연 그대로의 -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아니 그 추측도 사실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의 부친은 알렉산더 1세 시대의 유명한 고간과 눈이 맏은 프랑스 여배우 사이에 태어난 자연 그대로의 자식, 즉 사생아였다는 것이다. 고관은 그 아들을 출세시켜 주었지만 재산은 남겨 주지 못하였다. 그 아들(즉 지금 화제에 오른 인물의 부친)도 역시 부자가 될 만한 기회는 갖지 못하였다. 그는 계급으로 말하면 대령, 직무로는 시 경찰국장을 끝으로 세상을 떳다. 죽기 일년 전에 그는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과 결혼하였다. 그것은 우연한 인연으로, 그의 보 호를 받고 싶어하는 어느 부인과 연분을 맺게 된 것이다. 이 사람과 미망인 사이에 난 아들 이 바로 바레리안으로, 그를 이끌어준 사람 덕분에 중앙 유년학교에 입학하자 곧 상관의 눈 에 들었다. 그것은 학업성적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교련 받을 때의 자세가 단정하고 태 도가 얌전했으며 품행이 방정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에는 왕년의 국립 군사훈련소에서 배운 사람이면 누구나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온갖 방종에 휩쓸리기는 했지만.) 무난히 근위 대에 들어가자 그는 눈부시게 출세 가도를 달렸다. 성격이 겸손하면서도 쾌활했고 춤도 잘 추었으며, 열병식 때에는 전령으로서 말을 잘 달렸고(대부분은 남의 말을 빌려서 용무를 마 쳤지만), 그리고 끝으로 상관에 대해 솔직 담백하면서도 공손히 대하는 태도나 수심에 찬 듯하면서도 인상이 좋은 얼굴이라든지, 거의 고아와 같은 봉사를 하면서도 전체적으로 날개 와 같은 경쾌한 자유주의를 곁들인... 그와 같은 독특한 생활태도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 자 유주의도, 백러시아의 어느 부락에서 난동이 일어났을 때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된 그가 50명 의 농민을 태형에 처하는 데 저항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다. 그의 용모는 매우 매력적이고 남달리 젊어 보였다. 윤기가 흐르는 피부라든지 싱싱한 장 미를 연상시키는 피부색, 부드럽고 탄력 있는 태도 등은 특히 부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심 지어 신분이 높은 노파들까지도 그에게 눈독을 들이는 형편이었다. 오랜 습관으로 말미암아 조심성 있고 타산이 빠르고 말이 적은 라토미로프 장군은, 아무 리 보잘 것 없는 꽃에서도 꿀을 모아오는 부지런한 꿀벌 같은 태도로 늘 열심히 상류사회를 드나들고 있었다 - 그러나 도의심이 견고한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식견이 있는 것도 아니 면서도 실력가라는 평판과 사람을 꿰뚫어보는 능력과 정세 판단을 정확히 하는 재능, 특히 자신의 이득을 악착같이 추구하는 불굴의 신념에 의해서 그는 드디어 자기 눈앞에 온갖 영 달의 기회가 열려 있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었다. 리토비노프는 억지로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리나는 어깨를 으쓱 치켜 올렸다. "어떻게 되었어요?" 하고 그녀는 여전히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백작을 만나 뵈었어요?" "물론이지, 만나 뵀어. 당신에게 안부 전해달라더군." "어머, 그 사람 여전히 좀 모자라는군요, 당신의 그 소중한 패트런 말이에요?" 라토미로프 장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어내의 재치를 너그럽게 보아 넘긴다는 듯이 가볍게 코끝으로 웃었다. 소견인 넓은 어른은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에도 바로 그와 같이 웃 는얼굴로 답하는 법이다. "그럼요" 하고 이리나는 또 대꾸했다. "그 어리석은 백작에게는 아무튼 질렸어요. 전 진력 이 나도록 보아왔다니까요." "아니, 그 사람을 찾아가라고 말한 것은 바로 당신이 아니었소." 장군은 작은 소리로 내뱉 듯이 말하고 나서 리토비노프를 향해 러시아어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바덴바덴의 광천 을 마시고 계십니까?" "아뇨, 나는 덕분에 건강해서요" 하고 리토비노프는 대답하였다. "그거 다행이군요." 장군은 친절히 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대체로 바덴바덴을 찾 는 것은 요양을 위해서는 아니지만, 그 물은 병에도 잘 들어요. 적어도 분명히 효과가 있어 요. 그리고 예컨대 나같이 신경성 기침으로 시달리는 사람은..." 이리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뵙겠어요, 리토비노프 씨." 그녀는 사뭇 얕보는 듯이 남편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프랑스어로 말했다. "전 이제부터 옷을 갈아입어야 해요. 그 공작 할멈은 일년 내내 연회에만 쫓아다니지 뭐예요. 질렸어요. 가봤자 하품만 날텐데." "오늘은 누구에게나 바람이 좀 거세군" 하고 그녀의 남편은 중얼거리고 나서 슬쩍 빠져나 그듯 방에서 사라졌다. 리토비노프는 현관 쪽에서 발길을 돌렸으나 이리나가 불러세웠다. "당신은 모두 얘기해주셨지만" 하고 그녀는 말했다. "중요한 것을 숨기고 계세요." "뭔데요." "결혼하신다지요?" 리토보노프는 귀뿌리까지 빨개졌다... 사실 그는 일부러 타치야나의 이야기를 입박에 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리나의 말 한 마디로 그는 몹시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첫째는 이 리나가 그의 결혼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결혼을 그녀에게 숨기려 했던 본심을 들켰기 때문이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이리나는 그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 다. "네, 결혼할 생각이에요." 그는 잠시 후 이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라토미노프는 방으로 되돌아왔다. "아니, 왜 옷을 갈아입지 않지?" 하고 그는 물었다. "혼자 가세요. 머리가 아파서 그래요." "그렇지만 공작 부인이..." 이리나는 남편을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훑어보더니 훌쩍 등을 돌려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13 리토비노프는 심한 자기 혐오에 빠졌다. 마치 룰레트에 지거나 약속을 잘못 이행한 그런 심경이었다. 양심의 목소리는 그에게 "넌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다. 약혼녀까지 있는 훌륭한 어른이 호기심이나 추억의 유혹에 빠져서야 되겠는가' 하고 속삭였다. "어슬렁거리고 찾아가다니, 참 꼴 좋다!' 하고 그는 뉘우쳤다. "그 여자는 단지 교태를 부 리고 있는 것뿐이야. 일시적인 기분에 들떠서... 그 여자는 권태에 사로잡혀 있어. 이것저것 다 먹어보고 싫증이 나니까 나한테 손을 대보자는 거다... 맛있는 음식이 시들해져서 갑자기 검은 빵이 먹고 싶은...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나는 어쩌자고 꼬리를 흔들며 뛰어갔 을까? 대체 나는... 그 여자를 경멸하지 않고도 참을 수 있다는 건가?' 이 마지막 말을 그는 뱃속에서 겨우 뱉어내었다. "물론 위험같은 것은 전혀 없다. 또 있을리도 없고.' 그는 생각을 계속해나갔다. "나는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거든. 그렇지만 불장난을 해서는 안 돼... 다시는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지.' 그러나 리토비노프는 사실 이리나가 그의 눈에 얼마나 아름답게 비쳐졌으며 또 얼마나 심 하게 그의 감정을 흔들어놓았는가를 자기 자신에게 고백할 만한 용기도 기운도 없었던 것이 다. 그날도 역시 헛되이 무기력하게 지나갔다.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가 그는 콧수염을 단 풍채 좋은 신사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 사나이는 줄곧 입을 다문 채 숨을 헐떡이며 눈 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딸꾹질을 한 번 했는데 그러는 바람에 리토비노프는 그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딸꾹질 때문에 짜증이 났던지 그는 러시아어로 이렇게 중얼거렸던 것이다. "아무 말 말아야지, 참외 같은 걸 먹으니 이럴 수밖에!" 그날 밤도 역시 위로를 받을 만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빈다소프는 리토비노프가 보는 앞에서 꾸어간 돈의 네 골절이나 되는 돈을 룰레트로 땄는데도 돈을 갚기는커녕 그의 얼굴을 힐끔 노려보기까지 했던 것이다. 돈을 딴 현장을 목격했으니 빚 독촉을 할 경우 더 욱 가만두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이튿날 아침에 또다시 동포들로 구성된 그 패거리들이 들이닥쳤다. 리토비노프는 간신히 그들에게서 벗어나 산으로 갔다. 처음엔 이리나와 마주쳤으나 외면을 하고 지나갔다. 다음엔 포토우긴과 마주쳤다. 그는 포토우긴에게 말을 걸어보았으나 엉뚱한 대답만 할뿐이었다. 그 는 옷차림이 화려한 계집애의 손을 잡고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에 피부가 하얀, 고수머리 계 집애였다. 병자처럼 창백한 작은 얼굴에 커다란 검은색 눈을 하고 있었는데, 응석받이로 자 란 아이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종의 교만하고 신경질적인 태도가 엿보였다. 리토비노프는 산에서 두 시간쯤 보내고 나서 리히텐타르의 가로수 길을 천천히 걸어 되돌 아왔다. 물빛 베일을 쓴 부인이 벤치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자 세히 보니 그 여자는 이리나였다. "왜 저를 피하려 하는 거죠, 리토비노프 씨?" 하고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말하였다. 가슴 이 뒤끓는 사람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그런 목소리였다. 리토비노프는 가슴이 뜨끔했다. "당신을 피하다니요, 이리나 씨?" "그렇지 뭐예요, 당신은... 당신은..." 이리나는 흥분하고 있다기보다는 거의 격노에 가까운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건 오해예요, 사실..." "천만에요, 오해가 아녜요. 오늘 아침에 저와 - 저기서 마주쳤을 때 당신은 저를 분명히 알아보셨죠? 그걸 제가 모르 줄 아세요? 아니면 정말 저를 못 보았다고 우기실 생각이세 요?" "나는 거의... 이리나 씨..." "리토비노프 씨,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전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자, 어때요,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은 저를 알아보셨지요? 그런데 일부러 외면을 하셨지요? 리토비노프는 이리나의 얼굴을 힐끗 훔쳐보았다. 그녀의 눈은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으나 뺨과 입술은 창백하였다. 얼굴에도, 발작적인 낮은 목소리도 억제할 수 없는 비애와 애원이 깃들여 있었다. 리토비노프는 더 이상 잡아땔 수가 없었다. "실은... 알고 있었어요." 그는 다소 거북한 듯 말했다. 이리나는 가볍게 몸을 떨더니 두 손을 힘없이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런데 어째서 제게 가까이 오지 않으셨어요?" 하고 그녀가 속삭였다. "왜... 왜냐고요?" 리토비노프는 가로수 옆길로 걸어갔다. 이리나도 말없이 뒤를 따랐다. "왜냐고요?" 하고 그는 한번 더 되풀이하여 말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갑자기 상기되었 다. 원한에 가까운 감정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랐다.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물을 수 있습니까? 우리 사이에는 그런 과거가 있었는데! 물론 그건 지금의 일은 아니지요. 옛 날... 저...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일이지요."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미 합의를 본 일이 아닌가요? 당신도 약속해 주셨잖아요" 하 고 이리나는 말했다. "나는 약속한 기억이 없는데요. 이렇게 말하는 나를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단지 사실대로 말하라니까 하는 말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시지요. 대체 당신의 그... 뭐라고 할까요... 당신의 그 고집은 교태(솔직히 말해서 이건 나로서는 잘 모르는 일이기는 하지만)가 아닌 다른 무 엇으로, 그리고 이제 와서 아직도 당신이 나를 얼마나 지배할 수 있는가를 시험해보려는 기 분 이외의 무엇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요? 우리 둘이 걸어온 길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라 져버린 것이 아니겠어요?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어요. 고민거리가 되는 것은 옛날에 이미 모조리 없애버렸어요. 지금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당신은 결혼했고, 적어도 겉보 기에는 행복하며 사교계에서 남들인 부러워하는 위치에 있어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나 같 은 사람을 가까이하려는 거지요? 내가 당신에게 무슨 필요가 있나요? 그리고 당신이 내게 무슨 필요가 있나요? 이젠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조차 없게 되었어요. 우리 둘 사이에는 이젠 공통된 것이 전혀 없어요. 또 과거에도 현재와 마찬가지였어요. 특히... 특히 과거에는 말이죠!" 리토비노프는 고개도 까딱하지 않고 재빨리 더듬거리며 여기까지 말했다. 이리나는 잠자코 있었다. 다만 때때로 그에게 두 손을 약간 내미는 듯한 시늉을 할 뿐이 었다. 그것은 마치 그런 이야기는 접어두고 내 말도 일단 들어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보였 으나, 그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마치 날카로운 가시에 찔린 아픔을 애써 참는 듯 몰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리토비노프 씨!" 그녀는 꽤 침착한 소리로 말하고는 때때로 그 샛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더욱 후미진 곳으로 돌아 들어갔다. 이번에는 리토비노프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리토비노프 씨, 제 말을 믿어주세요. 만일 제가 지금 머리카락 한 오라기만큼이라도 당신 에게 지배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제가 먼저 당신을 피했을 거예요. 제가 그렇게 하지 않고, 게다가 그런... 미안한 짓을 과거에 저지르고서도 당신과 다시 교제하려고 결심하 게 된 것은 결국... 그..." "결국 무엇입니까?" 하고 윽박지르는 듯한 어조로 리토비노프가 말했다. "즉," 아리나는 갑자기 힘찬 목소리로 상대방의 말을 받았다.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 어요. 이 사교계 - 당신도 아까 말씀하신 "남들이 부러워하는' 이 지위에 있는 것이 숨막힐 듯하여 감당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제 앞에 나타난 것은 당신이라는 살아 있는 인간이었어요. 아, 생명만 있는 인형에 가까운 자들 - 그 견본을 당신도 엊그제 그 고성에서 구경했지요 - 그 인형들의 얼굴만 바라보면서 살아온 내가 당신을 만난 것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과 다름이 없었지요. 그런데 당신은 교태니 뭐니 운운하면서 저를 의심하시는군요. 옛날에 당신에게 못할 짓을 했다고 해서, 아니 그보다 더 고약한 짓을 제 자신에게 저질렀던 것을 구실로 저를 동댕이쳐 버리려고 하시는군요!" "그것은 예전에 당신이 스스로 뽑은 제비가 아닙니까, 이리나 씨." 여전히 얼굴도 돌리지 않은 채 리토비노프는 괴로운 듯이 말하였다. "하긴 그렇죠, 그저 제멋대로... 그러니 군소리는 하지 않겠어요. 그럴 권리가 제게는 없으 니까요." 하고 이리나는 재빨리 말하였다. 보아하니 리토비노프의 그 엄격한 태도를 오히려 마음 속으로는 기뻐하는 것 같았다. "당신에게 비난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쯤은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 변명은 하지 않겠어요. 다만 당신이 제 심경을 들어주셨으면 하고 바랄 뿐이 에요. 지금의 저로서는 교태를 운운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당신은 분명히 알아야 해요... 제 가 당신에게 교태를 부리다니,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디 있어요... 이번에 다시 이렇게 만 나게 되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젊은 시절의 가장 아름다웠던 나날들이 모두 제 안에 소생되 었어요... 제가 아직 이런 제비를 뽑기 이전의 일들이 10년이라는 세월을 격한, 어떤 밝은 빛 가운데 잠들어 있던 모든 추억들이..." "잠깐만요, 이리나 씨... 내가 보기엔 당신의 생애에서 밝은 빛은 나와 헤어진 후부터 비쳐 오기 시작한 것 같은데요?" 이리나는 손수건을 입을 막았다. "너무 잔인해요, 그렇게 말씀히시면. 리토비노프 씨, 전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녜요. 사실 그 시기는 밝은 빛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요. 전 모스크바 르 떠난 뒤에 행복 같은 것은 전혀 모르고 살았어요. 한시도 행복을 맛본 적이 없었거든요. 이것만은 믿어주세요. 어떤 소문이 귀에 들어갔다 해도 말예요... 만일 제가 행복했다면, 지 금 이런 이야기를 당신에게 할 수 있겠어요? 고집스러운 것 같지만 당신은 알고 계실 거예 요. 그들이 어떤 족속인가를... 그들은 털끝만한 재주도 지혜도 없는 표본과도 같아요. 그들 이 갖고 있는 것은 다만 교활함과 속임수뿐이에요. 음악이나 시, 미술 같은 것에는 전혀 문 외한이고요... 그렇게 말하는 너도 그 방면에는 무관심하지 않았느냐고 당신은 지적하고 싶 으시겠지만, 그렇지는 않아요! 지금 이렇게 당신 앞에 서 있는 제가 사교계의 여자가 아니 라는 것쯤은, 저를 조금이라도 유심히 보셨다면 곧 알아차릴 수 있으셨을 거예요. 더구나 저 는 암사자라는 엄청난 별명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렇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단지 가엾고 비참한, 그야말로 연민의 대상으로서의 여자일 뿐이에요.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놀라지 는 마세요... 지금 제겐 긍지도 체면도 있을 수 없어요! 전 당신 앞에 거지처럼 손을 내밀뿐 이에요. 어때요, 이쯤 말씀드리면 알 만하시겠죠? 전 지금 동정심에 호소하는 거예요." 여기 서 그녀는 일단 말을 끊었다가 갑자기 다시 이었다. 자제하려다가 참지 못하고 그만 입 밖 으로 쏟아진 것이다. "동정심에 호소하려고 하는데, 당신은..."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말을 계속하지 못하였다. 리토비노프는 얼굴을 들고 이리나를 쳐 다보니,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 입술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심장이 쿵쿵거리 며 뛰기 시작하면서 증오심도 사라져버렸다. "우리의 길이 이미 두 갈래로 갈라졌다고 당신은 말씀하시는군요" 하고 이리나는 말을 계 속하였다. "당신이 곧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할 거라는 것도, 일생의 계획이 이미 서 있다는 것도 저는 잘 알고 있어요. 그러기는 하지만 우리는 아주 남이 아니잖아요, 리토비노프 씨. 피차에 아직은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아니면 당신은 제가 완전히 시들어버렸다거나 저 시 궁창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하세요? 천만에요. 제발 그렇게는 생각지 말아주세요. 부탁이에요. 지난날의 일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으시다면,적어도 그 무렵의 추억을 위해서라도 제 마음을 좀 가라앉혀 주세요. 그러면 이번에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아주 헛된 일이 되어버 리진 않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어요. 안 그래도 이렇게 서로를 볼 수 있는 날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할 것 아니겠어요? 뭐라고 해야 할지 잘 표현할 수는 없지 만, 제 마음을 좀 아시겠지요? 제가 요구하는 것은 그리 사소한 것이니까요... 다만 제게 조 금이라도 동정을 베풀어주십사, 한 마디로 거절하시지 말고 이 숨통을 좀 열어주십사 하는 것뿐이에요..." 이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목소리는 눈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는 무엇을 찾는 듯한 눈짓으로 조심스럽게 리토비노프를 바라보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리토비노프는 천천히 그 손을 잡고 가볍게 감아 쥐었다. "사이좋게 지내기로 해요, 네?" 하고 이리나가 속삭였다. "그럽시다." 리토비노프는 걱정스러운 듯이 말하였다. "그래요, 가까이 지내요, 네... 그렇지만 만일 그것이 지나친 욕심이라면 하다못해 부담 없 는 친구라도 되기로 해요, 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예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리토비노프는 또다시 그녀의 말을 되풀이했다. "이리나 씨, 당신은 방금 만일 내가 지난날의 일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면... 이라고 말씀하셨지요? 만 일 내가 그것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면요?" 행복한 듯한 미소가 이라나의 얼굴을 재빨리 스쳐갔다. 그러나 그것을 곧 사라지고 걱정 스러운 듯한, 두려운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저처럼 하시면 돼요, 리토비노프 씨. 좋은 추억만을 취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중요한 일 만큼은 지금 여기서 약속해주셔야 해요... 굳게 약속하고..." "뭘요?" "저를 피하거나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을... 제 속을 태우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해주시겠 어요?" "약속하죠." "언짢은 생각일랑 모조리 머릿속에서 몰아내시겠어요?" "네... 그런데 당신의 심정은 이해하겠지만 그건 역시 무리한 일이 아닐까요?"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 하지만 조만간 알게 될 거예요. 그건 그렇고, 어때요, 약속해주시 는 거지요?" "내가 네 하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요?" "고마워요. 그런데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전 당신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버릇이 있어서요. 전 매일 당신을 기다리면서 숙소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지금은 일단 헤어지기로 하겠어요. 대공비께서 가로수 길을 산책하고 계세요... 저를 본 모양 인 그분 곁으로 가봐야겠어요. 그럼 또... 손을 주세요, 빨리... 어서요. 그럼 또." 이리나는 리토비노프의 손을 꼭 잡았다가 놓고 그 여인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중년의 당 당한 풍모를 지닌 부인으로, 자갈을 깐 오솔길을 귀찮다는 듯 걷고 있었다. 동반자로서는 두 명의 부인과 얼굴이 뛰어나게 아름다운 제복을 입은 종을 거느리고 있었다. "나는 또 누구라고, 안녕하세요, 부인!" 하고 그 대공비는 공손히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 는 이리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지내세요, 오늘은 나와 함께 지내기로 해요." "황송합니다" 하고 이리나는 고양이 같은 목소리고 말했다. 14 리토비노프는 대공비 일행을 지나쳐 가로수 길로 나갔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분명히 파 악할 수가 없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며 또 한편으로는 자존심의 만족도 느꼈다... 이리나의 뜻밖의 고백으로 그는 그야말로 기습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뜨거운 속삭임이 마치 소나기처럼 그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역시 사교계의 부인이라 보통 사람들 과는 다르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행동에 앞뒤의 연결이 전혀 없이... 그들을 진흙 구렁 에 몰아넣고 있는 것은 그 환경이다. 그 환경의 추악상을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런 곰팡내 나는 문구를 기계적으로 되풀이함으로써 더욱 감당하기 어려운 생각들로부터 벗어나려 하고 있을 뿐이었 다. 그는 진지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채찍질 하는 꼴이 될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일부러 걸음을 늦추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에 거의 억지로 주의를 집중시키면서 걷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벤치 앞으로 다가갔다. 거기에 어떤 사람의 다리가 보였으므로 그는 그 다리 를 따라 시선을 점차 위로 옮겨갔는데, 그 다리의 임자는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는 바로 포토우긴이었다. 리토비노프는 짧게 소리를 질렀다. 포토우긴은 신문을 무릎 위에 놓고, 미소도 짓지 않은 채 리토비노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쪽도 역시 묵묵히 포토우긴 을 바라보았다. "곁에 앉아도 좋을까요?" 하고 리토보니프가 얼마 후에 입을 열었다. "앉으시오, 어서. 미리 말해두지만,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어떤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라 면 내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화를 내지 마시오. 나는 지금 인간 혐오의 감정에 사로잡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역겨워 죽을 지경이니까요." "염려 마십시오, 포토우긴 씨." 리토비노프는 벤치에 앉으면서 말하였다. "오히려 잘 되었 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런 심정이 되었나요?" "실은 화낼 만한 특별한 이유는 별로 없어요?" 하고 포토우긴은 말을 이었다. "방금 신문 에서 "러시아 재판제도의 개혁안' 에 대하여 읽었는데, 이제 우리 나라 당국자들도 사리를 올바로 판단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기뻤지요. 왜냐하면 독립이니 자주니, 또는 국민성이 니 독창성이니 그런 타이틀 아래 명쾌한 유럽의 이론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는 거기에 고작 국산 꼬리 정도나 달아 놓는 - 그런 종전의 방식에서 벗어나 외국의 장점을 그대로 취하려 들고 있거든요. 양보는 농민문제민으로도 충분해요. 예를 들어 토지 공유제도를 청산해보시 오... 내가 괜히 흥분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불행하게도 어떤 러시아의 자칭 천재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틀림없이 혼자 잘난 체하는 그런 독학 선생들은 내가 무덤에 들어간 후에도 옆에 와서 떠들어댈 거요..." "누굽니까, 그 자칭 천재하는 사람이?" 하고 리토비노프가 물었다. "뭐,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음악의 천재로 자부하는 친구지요. 그 자의 주장은 이러해요. "나는 물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제로에 가까운 인간이지요. 학교를 나오지 못했거든요. 그러나 멜로디나 악상에 있어서느 마이어베르(독일의 가극 작곡가. 대표작에 <아프 리카의 여자>등이 있음. 1791∼1864) 같은 전문가 따윈 문제가 아니죠.' 그래, 내가 반문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왜 학교를 안 나왔지요? 그리고 구태여 마이어베르까지 내세울 것 없이, 독 일의 최하급 오케스트라에서 엉터리 플루트를 불고 있는 - 독일 사람이라도 우리 나라의 어느 자칭 천재보다는 스무 배나 악상이 풍부해요. 다만 그 플루트를 부는 자가 그것을 가 슴 속에 숨겨둔 채 모차르트나 하이든의 조국에 왈츠가 낭만을 약간 풍기기만 해도 곧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입을 삐죽거리며, 흥! 난 천재야 하고 으스대는 거요. 화가도, 그 밖의 다른 치들도 마찬가지지요. 이제 이 자칭 천재라는 자에게는 손을 들었어요! 그런 족 속을 추어올려 떠받드는 것은 피와 살이 되는 진정한 과학이나 예술이 없는 나라에서나 찾 아볼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다 아는 사실이거든요. 아무튼 이런 자기 나라 자랑이나 하는 속된 딴따라패들은, 우리 러시아에서는 굶어 주근 싸람은 하나도 없다느니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가 세계에서 제일이라느니 하는, 그들이 지껄이는 터무니없는 말과 함께 곳간 속에 처넣는 것이 상책이 아닐까요? 그들은 러시아 기질의 천재성이니, 천재적인 본능이니, 사실이 입증한다느니, 저 크리빈을 보라느니 하고 귀찮게 떠들어대지요... 그러나 그 천재성 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요컨대 눈을 거슴츠레 뜨고 하는 잠꼬대이거나 반 동물적인 육감에 서 나오는 소리지요. 본능! 참 자랑스러운 언어의 씨앗을 찾아냈군요! 산 속에서 개미를 잡 아 개미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보시오. 반드시 집을 찾아 돌아갈 거요. 인간으로서는 흉내도 못 낼 일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개미보다 못한가요? 본능이 설사 전지전능하 다 하더라도 결코 그것은 인간의 자랑이 될 수 없어요. 상식 -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재산이며, 또 자랑이지요. 상식은 절대로 지금 말한 그런 터무니없는 짓은 하지 않아요. 그 러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일에 토대가 되는 거요. 그런데 크리빈으로 말하면 기계학에 대해 서는 전혀 백지인데도 손끝을 교묘히 놀려 보기 흉한 시계 하나를 만들어냈어요. 나 같으면 그 시계를 광장 한 모퉁이에 걸어놓겠어요. "여러분, 잘 보시오.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돼요!' 하고 말이오. 이 경우에 잘못은 크리빈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 자체가 틀려먹 은 거요. 테루시킨(지붕을 올리는 기술자로 1830년 페테르부르크의 대사원과 해군성의 첨탑 장식을 발판 없이 수리한 것으로 유명해졌음)이 해군선의 첨탑에 올랐다고요! 좋아요. 그 용기와 솜씨 는 칭찬할 만해요. 어떻게 칭찬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나이가 독을 건축 기사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놈들은 아무 쓸모도 없다, 다만 돈이나 우려낸 다... 하고 떠벌려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그 사나이가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할 수는 없거든요. 지금 일이 끝난 후에 첨탑 주위에 발판을 만들고 다시 수리하지 않을 수 없 게 되었어요. 우리 러시아에서는 배우지 않아도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은 제발 버려야 해요. 아니, 아무리 머리가 좋더라도 공부 공부, 하나에서 열까지 공부를 해야지요! 그것이 싫으면 엉덩이를 깔고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해요! 휴! 상당히 더워오는데요!" 포토우긴은 모자를 벗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었다. "러시아의 예술" 하고 그는 또 시작하였다. "러시아의 예술은 말예요... 나는 러시아의 장 점과단점을 모두 알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러시아의 예술은 한 번도 본 일이 없어요. 20년 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브률로프(러시아의 화가. 아카데믹한 수법으로 종료화.역사화.초상화를 그 림. 작품으로는 <폼페이 최후의 날>등이 있음. 투르게네프는 강렬한 효과를 노린 그의 화풍을 싫어하 였음. 1799∼1852)인가 뭔가 하는 풋내기에게 고개도 못 들고 "아, 이제 우리 나라에 겨우 한 유파가 생겨났다, 이것은 좀 돋보일 것이다' 하고 공상이나 하고 있을 판이거든요... 러시아 의 예술이 말예요. 하하... 후후..." "그건 그렇다 치고, 실례지만 포토우긴 씨." 리토비노프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린카도 인정하지 않겠군요?" 포토우긴은 잠시 귓 등을 긁적거렸다. "아시다시피 예외는 법칙을 입증할 뿐이지요. 게다가 이 경우에도 우리는 커다란 보자기 를 펴지 않을 수 없었어요. 가령 이렇게 말하면 아무도 이의가 없겠지요 - 그린카는 실로 훌륭한 음악가였지만 내외의 정세로 인하여 끝내 러시아 가극의 창시자가 되지 못하였다고 말이오. 그런데 웬걸,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노릇이라 대뜸 그를 악단의 대장, 아니 원수로 추켜세우고, 나아가서는 외국의 음악가를 공격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했지요. 이만한 거물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거든요. 이라하여 눈 깜짝할 사이에 국산 천재가 등장하게 되 는데, 그 업적을 놓고 보면 사실 외국의 2류는커녕 보잘 것 없는 모방에 지나지 않지요 - 바로 2류의 모방이란 말이오. 그 편이 흉내내기 쉬우니까요. 이만한 거물은 없다고요? 참으 로 비참할 정도의 야만인들이지요. 그들의 눈에는 예술의 전통 같은 건 있으나마나하고, 예 술가라는 것도 장사 라포와 같은 자에 지나지 않게 보여요. 그 이방인은 한 손으로 6푸드를 들었을 뿐이지만, 이쪽에는 12푸드나 드는 자가 있다는 거죠. 이만한 거물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한 가지 더 말하겠는데, 실은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추억이 하나 있어요. 올 봄에 나는 런던 교외의 수정궁에 가보았는데, 그 궁전에는 아시다시피 인류가 백과전서라고나 할 까요. 그래 나는 그런 기계와 도구와 위대한 발명가들의 초상이 늘어선 앞을 걸어 지나갔어 요. 그때 나는 생각했어요. 어떤 한 민족이 이 지사에서 사라져버린다면, 그리고 동시에 그 민족이 창안한 모든 것ㅇ르 수정궁에서 철거하라는 명령이 내린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요. 그 경우에 설사 우리의 모국, 신성한 정교의 나라 러시아가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회장은 바늘 하나 꼼짝하지 않을 거요. 모든 것이 제자리에 그냥 남아 있을 거요. 물 주 전자나 나무 껍질로 만든 나막신, 말 멍에, 회초리 등은 모두가 우리 나라에서 만든 유명한 상품이지만, 이것들을 샌드위치 군도의 토인들도 당하지 않은 일이에요. 그들은 통나무 배나 창을 만들어냈어요. 내가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아마 비난이 너무 심하다고 말할 테지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요. 첫째로 나는 비둘기 같은 소리로는 남을 비난할 줄 모르는 사 람이라는 것과 둘째로 우리가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는 것은 악사의 얼굴뿐만 아니라 자기 얼굴도 마찬가지이며, 또 우리 나라에서는 아이들만이 자장가를 들으면서 잠들기를 좋 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요. 우리 나라에서 이루어진 오랜 발명품은 실상 동양에서 들어온 것이며, 근년의 그것은 유럽에서 억지로 들여온 것들일 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러시아의 독특한 예술 운운하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어요! 그들 중에는 용기 있는 사람도 있어 러시아의 독자적인 과학까지도 찾아내는 형편이지요. 우리 나라에도 둘에다 둘을 곱하 면 넷이 되기는 하지만 어쩐지 남달이 경기가 좋다는 거지요." "그렇지만 잠깐 포토우긴 씨." 리토비노프가 큰 소리로 말하였다. "잠깐만요! 우리도 현재 만국박람회에 출품을 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유럽에서도 우리 나라에서 수입하는 것이 있지 않아요?" "그야 그렇지요, 원료나 미가공품 따위를 수입해가지요. 그러나 유의햐야 할 것은 우리 나 라 원료의 대부분이 질이 좋다는 호평을 받는 원인이 오히려 다른 여러 가지 추악한 사정에 있다는 사실이오. 가령 우리 나라의 칫솔을 털이 굵고 딱딱한 것은 돼지의 영양 부족 때문 이지요. 쇠가죽이 튼튼하고 두꺼운 것은 소가 말라 있기 때문이고, 쇠기름에 지방분이 많은 이유는 그것을 쇠고기와 반반씩 나누어 삶기 때문이지요... 하긴 당신에게 굳이 이런 말까지 늘어놓다니! 당신은 공과 계통이라, 이런 일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테지요. "러시아인은 발명에 재능이 있다!' 고들 말하지요. 그러나 우리 지주님들은 울상이 되어 손 해를 보면서도 참아나가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만족스러운 곡물 건조기가 아직 없어 여 전히 옛날과 마찬가지로 곡식 단들을 건조창고에 쌓아두어야 할 형편이거든요. 이 건조창고 라는 것은 저 나무 껍질로 만든 짚북데기나 짚멍석 못지 않게 매우 비경제적인 것으로, 자 주 화재를 내고 있어요. 지주들은 불평을 늘어놓지만, 곡물 건조기는 여전히 구경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지요. 왜냐하면 독일인들에게는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들은 곡물을 그대로 탈곡 하기 때문에 발명에 근심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는...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어요. 그래요. 할 수 없어요! 화가 나면 해보라죠! 오늘부터 나는 약속하짐나, 자칭 천재나 독학 선생이 눈앞 에 나타나면 "잠깐만, 선생! 곡물 건조기는 어떻게 되었나? 어디 좀 보여주게!' 하고 말해주 려고 해요. 그런 놈팡이들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거요! 옛날엔 산 시몬이나 포리에가 신다 버린 헌 신발을 주워 그것을 공손히 머리에 얹고 마치 성스러운 물건이나 되는 것처럼 받들고 다녔다는데 - 그런 일이라면 우리도 할 수 있지요. 그렇지 않으면 프랑스 주요 도시 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현대적인 의의에 관한 논문을 추켜드는 거요 - 그런 일 역 시도 할 수 있어요. 하긴 언젠가 나는 그와 같은 부류의 어떤 저술가나 경제학자라는 사나 이 - 말하자면 그 보로시로프 선생 같은 사람 말예요 - 에게 다름 아닌 프랑스의 도시를 스무 개쯤 들어보라고 했어요. 그 결과 어찌 되었는지 아세요? 그 경제학자는 궁여지책으로 나중에는 몽페르메르까지 프랑스의 도시로 집어넣더군요. 아마도 포르드 코크의 소설(<몽페 르메르의 방앗간>을 가리킴)을 상기했을 테지요. 그래 나는 전에 내가 겪은 일화 하나가 생각 났어요. 언젠가 내가 어깨에 총을 메고 사냥개를 데리고 숲을 헤쳐나갔더니..." "당신은 사냥도 할 줄 아세요?" 하고 리토비노프가 물었다. "조금은 하지요. 나는 도요새를 잡으려고 늪으로 갔어요. 그 늪에 대해서는 사냥을 즐기는 친구들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있었어요. 앞을 바로보니, 숲속 공지에 세운 오두막 앞에 장사꾼에게 고용된 점원 같은 사나이가 한 명 앉아 있더군요. 혈색이 좋은, 마치 갓 벗겨낸 호두알을 연상케 하는 사나이였는데, 그자는 앉아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이 근처에 늪이 있다는데 어디지요? 그곳엔 도요새가 많나요?' 하고 물었지요. '있고 말고 요' 하고 그는 곧 노래하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어요. 마치 나한테서 1루블쯤 받아내려는 듯 한 어조였지요. '자랑이 아니라, 저 늪은 일급품입니다. 들새라면 무엇이든지 있어요. 벌써 저기 우글거리고 있는 걸요.' 가보니 들새는 커녕 늪은 이미 옛날에 말라버렸지 않았겠어요. 한 가지 묻고 싶은데, 어찌하여 러시아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말을 곧잘 하는 걸까요? 그 경 제학자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또 이 들새에 관한 것 역시 그렇지 않은가요?" 리토비노프는 그의 말에 동감하였으므로 아무 대담도 하지 않고 숨만 내쉬고 있었다. "아까 말한 그런 경제학자를 상대로." 포토우긴은 말을 계속했다. "사회과학의 까다로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시오. 다만 사실을 떠난 일반론으로서 말예요... 내 이야기 상대는 오 늘날 우리 나라의 소위 '젊은이' 의 한 사람이었어요. 나는 그와 여러 가지 이야기, 즉 그의 말을 빌려 표현 하자면 '여러 가지 문제' 를 얘기한 셈이지요. 그자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열을 올려 떠들었어요. 특히 결혼제도를 아이들처럼 핏대를 올리면 마구 부정해버리 더군요. 내쪽에서도 이런저런 이론을 적당히 늘어놓았지만, 그야말로 콩알총으로 벽을 쏘는 격이었어요! 이 녀석은 어디를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군 -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묘안이 떠올랐어요. '한마디 하겠는데' 하고 나는 입을 열었지요. 젊은이와 이야기할 때에는 공손해야 하니까요 - '나는 실은 당신에게 경탄하고 있었어요. 당신은 자연과학을 연구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어요. 다름이 아니라 모든 맹수나 맹금들은 자 신을 위해서나 또 새끼를 위해서 먹이를 구하러 나서야 하는데... 당신은 아마도 인간을 이 런 부류의 동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군요.' 이에 '물론입니다' 하고 젊은이 는 대답했지요. '인간은 요컨대 육식동물의 일종에 지나지 않아요.' , '맹수의 일종이란 말이 죠?' 하고 내가 덧붙여 되물었더니 '네, 맹수의 일종입니다' 하고 그쪽에서 확인해주었어요. '잘 말했어요' 하고 내쪽에서도 못을 박아놓고 말을 계속했지요. '놀라운 점은 이런 동물은 모두가 일부일처제를 지키고 있는데 당신은 왜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가 하는 거요.' 젊은 이는 눈을 크게 뜨고 '뭐가 어떻다고요?' 하고 묻더군요. 그래서, '그렇지 않고 뭐요? 사자, 늑대, 여우, 솔개, 매... 등을 생각해봐요, 그들은 일부일처제를 지키고 있지 않아요? 그들은 자기들 사이에서 난 새끼를 기르는 것만으로도 쩔쩔매거든요?' 젊은이는 한참 생각에 잠겼 다가 입을 열었어요. '아니죠, 이 경우에 짐승을 인간의 표본으로 삼을 수는 없죠.' 그래 내 가 그에게 이상주의자라는 레테르를 붙여주었더니 기가 죽더군요! 거의 울상이 되었어요.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를 달래주고, 당신의 친구들에게는 아무 말도 입밖에 내지 않겠다고 약속했지요. 이상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은 큰일이거든요. 문제는 결국 오늘날 젊은이들이 계 산을 잘못하는 데 있어요.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요 - 즉 전과 같은 어두운 지하에서 활동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두더지처럼 땅을 파는 일은. 늙은 아버지의 시대에는 그대로 적 용되었지만 우리에게는 굴욕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눈부시게 활약해야 한다, 푸른 하늘 아 래 뛰어야 한다... 하고 말이죠. 참 귀여운 친구들이지요! 그러나 그들의 자식 세대에도 그들 이 눈부신 활약을 하리라고 기대하기는 무리겠지요. 그보다 차라리 굴 속으로라도 숨어버리 는 편이 어떨까요? 어버지를 본받아 굴 속으로 말예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포토우긴이 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문명의 혜택을 받 고 있는 것은 비단 지식이나 기술, 법률 분야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적 감각이나 시 적 감정까지도 역시 문명의 영향을 받아 발달하고 또 약동하는 것으로, 이른바 민족적이고 소박하고 무의식적인 창조란 터무니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예요. 이미 저 호 메로스에게도 세련되고 풍부한 문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고, 연애도 문명에 의해 고상하 게 승화되거든요. 만약에 슬라브파의 여러 사람들이 자부심이 많지 않았던들 이런 이론을 제기한 나 같은 것은 일찌감치 사형에 처해버렸을 테지요. 그래도 나는 내 주장을 고집하려 고 해요. 크하노프스카야 부인의 저술이나 <꿀벌의 휴식>을 아무리 입에 침이 마르도록 권 유한다 해도, 나는 저 러시아 농부들의 진한 엑스 냄새만은 맡고 싶지 않아요. 미안하지만 나는 상류사회의 인간이 아니거든요 그들은 자기가 아직 완전히 프랑스화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로 가끔 양심을 위로할 필요가 있을 것이며, 저 돼먹지 않은 가죽으로 싼 러시아의 책 들은, 실은 그런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쓴 것이지요. 가령 저 <꿀벌의 휴식>중에서 가장 그릇된, 그리고 제일 서민적인 대목을 대중에게 - 그것도 진짜라야 하지만, 읽어준다면 어 떻게 될까요? 되풀이 말하지만 문명이 없으면 시도 없어요. 미개시대의 러시아 사람들의 시 적 이상을 분명히 목격하고 싶으면 우리 나라의 구비문학이나 전설을 살펴보면 돼요. 거기 나오는 연애는 언제나 요술이나 마법의 결과이거나 실개천 물을 마셔 생기는 것이라, 때로 는 '마음의 갈증'이니 '마음의 얼음장' 이라고까지 불리는 것은 새삼 말하지 않아도 알거요. 그리고 우리 나라의 소위 서사시 문학이라는 것이 유럽이나 아시아에 있는 나라들의 그와 같은 문학 속에서 유일하게 예외가 되어 있다는 것 (방카 당카의 이야기는 다르지만) - 즉 서로 사랑하는 남녀의 전형적인 모습을 전혀 묘사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지금은 논외로 간 주해요. 아무튼 신성한 러시아의 용사가 미래의 신부와 처음으로 연분을 맺는 것은 '여자가 오동통하다' 고 해서, 그 눈같이 흰 살결에 무작정 매혹되는 데에서 시작되었던 거요... 그런 데 이런 일은 불문에 부치기로 하고, 반드시 당신이 유의해주었으면 하는 것은 원시적인 슬 라브 민족의 상상에 묘사된 젊은이의 모습이지요. 잘 보시오, 저쪽에서 그 젊은이가 걸어와 요. 기다란 담비 외투를 걸치고 있는데, 솔기는 모조리 감쳐놓은 특제품이며 일곱 겹 명주 허리띠를 겨드랑이 밑 가슴께까지 질끈 동여매고, 열 손가락은 기다란 소매에 가려 보이지 않아요. 외투 깃은 머리 위로 높이 치솟아 앞에서 보면 연꽃의 모가지가 골짜기에 파묻힌 것을 연상케 하고, 모자는 옆으로 비스듬히 눌러 써서 한쪽 귀를 덮고 있지요. 또 발에 신은 장화는 그 끝이 커다란 송곳처럼 뾰족하고 발뒤축 또한 매우 날카로워 - 발끝을 싸고 능히 달걀도 굴릴 수 있을 정도이며, 뒤축을 통해 능히 참새가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다 - 고 말 할 정도요. 그런데 그 용사가 잔걸음으로 재빨리 걸어오고 있소. 그야말로 우리 나라의 알키 비아데스(아테네의 정치가. 군인. 그 용모와 지용이 겸비된 자질은 모든 아테네인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음. B.C 450? ∼B.C 404) 라고도 할 수 있는 저 추리로 프렌코비치는 얼굴이 쪼글쪼글한 할머니에서부터 젊은 처녀에 이르기까지 고민에 빠뜨려 상사병으로 죽게 하여 거의 의사와 약과 같은 효능을 발휘한 그 유명한 발자국 소리지요. 이 발자국 소리는 오늘날에도 아직 우리 나라의 여관 보이들이 관절로 늘어난 다리를 약간 움직여 전혀 모방을 불허하는 솜씨 로(아니 발장난이라고나 할까) 묘기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들이야말로 바로 러시아식 허영의 정수요 정화이며 러시아 취미의 초고봉이라 할 수 있겠지요. 나는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예요. 멍청하기까지 한 이런 순수한 모습 - 이것이 러시아 예술의 이상이거 든요. 어때요, 이래도 그림이나 조각에 풍부한 소재를 제공할 수 있을까요? 한편 젊은이를 매혹하는 미녀들은 '토끼처럼 얼굴빛을 붉히며' 하는 표현으로 정해져 있어요. 어때요? 그런 데 당신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는 모양이군요." 리토비노프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사실 포토우긴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는 열심히 이리나의 일을, 방금 전에 그녀와 만났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실례지만, 포토우긴 씨" 하고 그는 입을 열었다. "실은 아무래도 당신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라토미로프 부인의 일인데요." 포토우긴은 신문을 접어 주머니 속에 넣었다. "내가 그분과 알게 된 경위 말씀인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당신의 생각으로... 그분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수 행했다는 그 역할에 대해서예요. 단적으로 말해서 그건 어떤 역할이었지요?" "나도 사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리토비노프 씨. 나는 라토미로프 부인과 는 상당히 가까이 지내게 되었는데... 그것도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고, 그다지 오래 계속된 것도 아니었어요. 내가 그분의 세계를 들여다 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어요. 다만 약간의 소문 정도는 그 정도에 내 앞에서 떠들어대 는 수다쟁이들 덕분에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험담은 아시는 바와 같은 민주적인 서클의 전 매특허는 아니지 않겠어요. 더군다나 나는 호기심도 별로 나지 않았어요. 그건 그렇고 보아 하니" 하고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덧붙였다. "당신은 그 여자에게 흥미가 있으신 모양인데..." "네, 두어 번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저 여자가 과연 성실한가 하는 것이요." 포토우긴은 눈을 가만히 감았다. "무슨 일이나 열을 올릴 때에는 성실하지만, 하긴 정열적 인 여자는 다 그렇긴 하지만, 교만이라는 것이 때로는 거짓말을 방해하지요." "그 여자가 교만한가요? 나는 오히려 - 기분파라고 생각했는데..." "악마처럼 교만해요. 조금도 신경 쓸 것은 없어요." "때때로 그 여자는 사물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것도 상관없어요. 성실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당신은 진심을 찾는 상대를 다소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 사회의 부인들은 아무리 바탕이 선량하다 해도 뼛속까지 썩 어 있게 마련이거든요." "그러나 포토우긴 씨, 잊으셨군요, 그 여자의 친구라고 말한 것은 바로 당신이었잖아요. 나를 이끌다시피 하여 그 여자에게 데리고 간 것도 당신이 아니었나요?" "그런데 그게 잘못되었다는 건가요? 나는 그 여자로부터 당신을 데려와 달라는 부탁을 받 았어요. 나는 그것을 거절할 수 없었어요. 또 그럴 필요도 없었고요. 누가 뭐래도 나는 그 여자의 친구거든요. 그 여자에게도 좋은 점이 없지 않아요. 매우 친절해요. 그러니까 선심을 잘 쓴다는 말이지요. 자기에게 필요 없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다 줘버려요. 하긴 당신도 내가 아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10년 전의 이리나 씨라면 나도 모르지는 앉지만, 그 후로..." "아니 리토비노프 씨, 당신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사람의 성격이 그렇게 쉽사리 변할 수 있나요? 요람에 있던 모습 그대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마련이지요. 그렇지 않다 면 혹시..." 포토우긴은 몸을 더욱 앞으로 숙이고 말을 계속했다. "혹시 당신은 그 여자의 손 아귀에 들어가게 될까봐 그것을 두려워하는 건 아닌가요? 바로 그렇지요? ... 누구든 언젠가 는 악마의 손아귀를 면할 수 없게 되지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요, 면할 수 없지요. 남자는 약하고 여자는 강하거든요. 섹스의 힘은 절대적인 거요. 섹스가 없는 생활에 만족하기는 어려운 일이며, 자기 자신을 완전히 망각하는 것도 불가능 한 일이지요... 거기에 아름다움과 공감이 생겨나고 온기와 빛이 흘러들지요 - 어찌 저항할 수 있겠어요? 그래, 유모를 찾아낸 어린아이처럼 뛰어들어 품에 안기지요. 그러나 물론 이윽 고 냉각과 암흑이 찾아와요. 공허도 느끼고요...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그때까지의 습관이 완 전히 사라져 무슨 일이든 이해할 수 없게 되지요. 어떻게 해서 연애가 성립되는지 알 수 없 지요. 그리고 나중에는 어떻게 해서 살아가게 되는 지도 모르게 되고요." 리토비노프는 포토우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그처럼 고독하고 그처럼 버림받고 그처럼 불행해 보이는 인간을 만나본 적이 엇는 듯이 생각되었다. 그는 지금은 두려움도 이 미 느끼지 않고 격식을 위한 사양도 하지 않았다. 힘없이 앉아 창백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가슴에 파묻은 채, 두 손을 무릎위에 올려놓고 조용히 앉아 다만 피곤해 보이는 미소만을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리토비토프는 이 가련한 담즙질 사나이가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이리나 씨가 이야기 끝에 내게 말한 것인데" 하고 리토비노프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분에겐 친한 여자 친구가 있나봐요. 이름은 베리스카야라던가 도시스카야라고 하던가..." 포토우긴은 그 서글픈 듯한 시선으로 리토비노프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아!" 하고 그는 얼빠진 사람처럼 말했다.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군요... 그런데 그것 이 어쨌다는 거요? 아니, 그건 그렇고" 하고 그는 부자연스런 하품을 하고 나서 덧붙였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지 - 저녁 식사시간이니. 그럼 실례하겠어요." 그는 벤치에서 일어나 리토비노프에게는 말할 기회는 주지 않고 총총히 사라졌다. 리토비 노프는 동정하는 마음 대신 분노가 치솟았다. 그 분노는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아무튼 그의 무례한 행동은 비위에 맞지 않았다. 그는 포토우긴에게 동정을 표하려고 하였 으나, 그것은 어찌 된 일인지 불손하고 빈정거리는 태도로 변하였다. 그는 은근히 불만을 품 고 숙소로 돌아왔다. '뼛속까지 썩어 있다.' 얼마 후 그의 머릿속에는 포토우긴의 이 말이 떠올랐다. '악마처럼 교만하다! 그 여자가 - 내 앞에 무릎 꿇는 시늉을 하던 그 여자가 거만하다고? 변덕이 아니 라 교만이라?' 리토비노프는 이리나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고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 다. 그의 머릿속에 약혼녀의 모습이 떠오리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오늘은 이 모습이 그대로 도사리고 앉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 이상 신 경을 쓰게 되지 않을 것이며, 이 기묘한 수수께끼는 조만간에 완전히 풀릴 것이고, 곧 이 문 제는 쌍방에게 개운치 않은 느낌을 남기지 않는, 매우 자연스러운 생태가 되리라고 믿어 의 심치 앉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이리나 의 모습과 더불어 그녀가 했던 이런저런 말들이었다. 독일인 보이가 그에게 편지를 전해주었다. 이리나가 보낸 것이었다. 오늘밤에 시간이 나면 와주시지 않겠어요? 나는 손님들은 초대했어요 - 당신은 우리들, 우리 사회를 좀더 여실히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그들을 보여들리고 싶어요. 그들은 자기들의 모습 을 낱낱이 당신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내가 어떤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지 당신은 아셔야 해요. 와주 세요, 네? 당신이 와주신다면 얼마나 반가울까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당신도 '권대' 롭지는 않을 것 아니겠어요.(러시아어에 익숙지 못한 이리나는 권태를 권대라고 썼다). 우리들의 솔직한 고백이 우리 사이에 있었던 오해의 씨를 깨끗이 일소해버렸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세요, 안녕! 리토비노프는 연미복에 흰 넥타이를 매고 이리나의 집으로 향했다. '이런 일은 별로 태연할 게 없는데' 하고 그는 길을 가면서 마음 속으로 되풀이하였다. '그 들을 관찰한다! 그것도 괜찮지 않은가? 그것도 재미있는 일이지.' 며칠 전에는 그들이 그의 마음 속에 전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즉 그들은 그에게 분노를 자아냈었다. 그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긴장된 미소를 입술에 띄면서 재빨리 걸아갔다. 베벨 카페 앞에 서 있던 반바에프가 멀리서 보로시로프와 피시차르킨에게 그의 모습을 가리켜 보이며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보이나, 저 사나이가? ... 저 녀석은 돌이야! 바위야! 화강암이라고!" 15 리토비노프가 이리나의 객실에 들어가보니 이미 상당히 많은 손님들이 와 있었다. 한쪽 구석에 놓인 카드놀이 탁자 쪽으로는 며칠 전의 그 소풍하던 무리에 끼여 있던 세 사람의 장군이 앉아 있었다. 즉 뚱뚱한 각하, 성급한 각하, 너그러운 각하, 이 세 사람이었다. 이들 은 호이스트(네 사람이 하는 카드놀이)를 하나가 모자라는 인원수로 하고 있었다. 카드 짝을 나눠주거나 상대방의 것을 취하기도 하며 클럽이나 다이아몬드가 나올 때에는 몹시 흐뭇해 하였는데, 그 표정이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 마치 국정을 논의하는 대 인물의 위풍마저 지니고 있었다! 카드놀이에 으레 따르게 마련인 군소리나 익살은 평민이나 상인들에게나 맡겨버리라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장군들은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입 밖에 내 지 않았다. 그러나 때때로 뚱뚱한 각하는 다음 카드 짝이 배부되는 동안에 "쳇! 스페이드의 포인트라!" 하고 내뱉기도 하였다. 리토비노프는 거기에 온 부인들 중에서 그날의 소풍에 참가했던 얼굴들을 발견했으나, 몇 몇 낯선 얼굴들도 눈에 띄었다. 그 중의 한 부인은 금세 바스라지기라도 할 것 같이 매우 늙은 노파로, 살을 드러낸 징그러운 짙은 쥐색 어깨를 흔들면서 부채로 입술을 가린 채 생 기 잃은 눈동자로 피로한 듯 라토미로프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라토미로프는 이 할멈에게 아첨을 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부인은 에카테리나 여제의 여관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살아 남은 사람으로서 상류계급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창가에는 '봄의 여왕벌' 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백작 부인이 양치는 여자의 복장을 하고 서 젊은 신사들에게 에워싸여 앉아 있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사람은 유명한 부자 에 미남이기도 한 피니코프로, 그 거만한 태도나 넓은 이마, 브라하 국의 임금이나 로마 폭 군 헤리오가바루스(B. C. 3세기의 로마 황제로, 음탕한 폭군으로 알려졌음)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 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야수적인 표정은 분명히 주목할 만하였다. 그 밖의 또 다른 백작 부인은 리즈라는 간단한 이름의 여자로, 그녀는 연한 빛깔의 머리 를 하나로 묶은, 안색이 좋지 않은 어느 술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역시 창백한 얼굴을 한 장발의 신사로, 그는 때때로 의미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신사도 강신술의 신자였지만, 그 밖에 예언에도 관심이 많아 묵시록 이나 유태 경전을 토대로 하여 놀란운 사실들을 마구 예언하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런 사건들은 한 번도 들어맞은 적이 없었는데도 그는 태연스럽게 여전히 예언을 계속하고 있었 다. 피아노를 향해 앉은 자는 포토우긴으로 하여금 그토록 분개를 일으키게 한 그 자칭 천 재로, 그는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서 한 손가락으로 화음을 내며 멍청하게 주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나는 소파에 앉은 코코 공작과 H부인 사이에 앉아 있었다. 이 H부인은 옛날에는 러 시아 제일의 미인이었지만 지금은 시든 버섯처럼 쪼그라들어, 머릿기름 냄새와 김빠진 독약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이리나는 리토비노프를 보자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자기 곁으로 다가오기 를 기다렸다가, 그의 손을 힘주어 잡고 악수를 나누었다. 그녀는 검은 크레이프로 만든 의상 을 걸치고 금으로 된 액세서리를 달고 있었다. 드러난 어깨는 뽀얀 진주조개처럼 희었고, 창 백한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물든 파도 아래 자랑스러운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비단 얼굴의 아름다움뿐만 거의 조서에 가까운 숨겨진 기쁨의 표정도 반쯤 감은 눈동자 속 에서 빛나고 있었으며, 입술과 코언저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라토미로프가 리토비노프에게 다가와 여는 때와 같은 태도로 인사를 나누었다. 다만 전의 그 장난기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몇몇 부인에게 리토비노프를 소개하였다. 쓸쓸한 페허와도 같은 그 노부인과 '봄의 여왕벌' 과 백작 부인 리즈, 이 세 부인이었다... 세 사람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리토비노프는 물론 이 집단의 한 구성원은 아니었지만... 그 용모가 오히려 어느 누구보다 돋보였으며, 그 젊고 싱싱한 얼굴의 표정이 풍부한 눈과 코는 그들의 주목을 끌었다. 다만 그는 모처럼 끌게 된 이 주의를 자기 자신에게 확고히 못박아둘 만한 솜씨는 없었다. 아무튼 사교계와는 낯이 설어 모든 행동이 거북했을 뿐만 아니라, 그 뚱뚱한 장군이 그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흥! 평민인 주제에! 자유사상의 앞잡이같으니 라고!' 하고 그 묵직한 시선이 말하고 있는 듯했다. '은근 슬쩍 우리 집단에 끼여들어 손을 내밀다니!' 그때 마침 이리나가 나타났다. 그로서는 하나의 구세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복잡한 자리를 교묘히 헤치고 창문에서 가까운 한구석,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 약간 뒤쪽에 그의 자 리를 마련해주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면 그녀는 번번이 뒤를 돌아봐야만 했으므로 그는 그때마다 그녀의 눈부신 목놀림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고, 그녀 머리의 달콤한 향취를 들이 마실 수 있었다. 깊은 감사의 빛이 그녀의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눈웃음이 나 눈짓이 고마음을 나타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그 자신도 그와 비슷한 고마운 마음을 가슴에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달콤한 듯하면서도 괴로운, 묘한 느낌 이 들었다... 그런가 하면 그녀는 '이 속물들의 꼴을 좀 보세요. 감상이 어떠세요?' 하고 언제 나 반문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이었다. 이 소리 없는 물음은 좌중에서 누군가가 어 떤 추악한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이면 유난히 리토보노프의 귀에 또렷이 들려왔으며, 그와 같은 순간은 그날 밤 여러 차례나 있었다. 한 번은 그녀도 참지 못하여 큰 소리로 웃어댈 정도였다. 백작 부인 리즈는 매우 미신적인 사람이라 무슨 일이든 비범한 것을 좋아하는 성미였는 데, 그 머리를 묶은 술가를 상대로 흄에 대해서나 자동장치가 되어 있는 테이블에 대하여, 또 제바람에 소리를 내는 손풍금 등에 대하여 떠들고 난 다음, 과연 최면술에 걸리는 동물 이 있을까 하고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런 동물이 한 마리 있는 것만은 사실이지요." 하고 저만치 앉아 있던 코코 공 작이 그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저 미리바노프스키를 알고 있지요? 그 사나이는 내 최면술 에 걸려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지 않겠어요? 사실입니다." "어머, 입버릇이 고약하시네요, 공작님. 제가 말하는 건 진짜 동물이란 말이에요," 이렇게 말하고 리즈는 같은 말을 프랑스어로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부인, 나 역시 한 마리의 짐승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요.." "아니, 진짜 동물이 있어요." 술가가 입을 열었다. "가령 새우의 경우가 그렇지요. 그놈은 신경질이 몹시 나면 곧 전신이 빳빳이 굳어비리거든요." 백작 부인은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요? 새우가요? 정말예요? 어머, 정말 재미있는 사실이군요! 내 눈으로 한 번 봤으 면! 루 진씨." 그녀는 마치 방금 사온 인형처럼 빳빳이 굳은 얼굴에 역시 빳빳한 칼라를 단 젊은 청년 신사에게 말을 건네었다. 이 사나이는 나이아가라 폭포와 누비아의 나일강에서 그 얼굴과 칼라를 적셔 온 것으로 유명해졌지만, 그 엄청난 여행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으며, 다만 러시아인 특유의 입술을 가볍게 놀리는 데에만 능하였다. "루진씨, 미안하지만 새우 한 마리만 갖다줘요." 루진은 히죽 웃었다. "살아서 뛰는 놈 말입니까, 아니면 단지 살아 있기만 한 놈 말입니 까?" 하고 그는 물었다. 백작 부인은 그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요, 새우 말예요" 하고 그녀는 되풀이 해 말하였다. "새우 한 마리요." "뭐, 뭐요? 새우? 새우라고요?" 여왕벌 백작 부인이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베르디에가 보이지를 않아 그녀의 태도는 또 신경질적이었다. 어째서 이리나는 프랑스 사람 중에서 제 일 멋진 그 사나이를 초대하지 않은 것인지, 그녀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이 많은 백 작 부인은 벌써부터 완전히 분별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귀까지고 들리지 않았으므로, 고 개를 약간 흔들 뿐이었다. "그래요, 그래. 잠자코 보고만 있으세요. 루진씨, 어서요..." 젊은 여해가는 절을 하고 나갔다가 곧 되돌아왔다. 그 뒤로 독일인 보이가 큰 입을 벌리 고 히죽거리며 커다란 검은 새우가 담긴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가져왔어요, 마담" 하고 루진이 외쳤다. "이제 새우를 수술하시겠군요, 하하하(자기가 말 한 익살에 먼저 웃는 것은 러시아 사람들의 버릇이다)!" "허, 허, 허..." 하고 국산품이라면 무엇이든 애호하는 애국자로서 코코 공작이 너그럽게 맞장구를 쳤다. (독자들은 비위상해하거나 화내지 말기 바란다. 알렉산더 극장의 아래층에서 장내의 공기에 휩쓸렸을 때, 이보다 더 볼품없는 장면에 자기는 박수를 보낸 적이 없노라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고마워요, 고마워요" 하고 백작 부인이 말하였다. "어 서 폭스 씨, 그걸 보여주세요." 보이는 접시를 둥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손님들 사이에 약간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더니 대여 섯 명의 사람들이 목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카드놀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장군만이 태연하게 위풍 있는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술가는 머리를 흩뜨리고 얼굴을 찡그 리더니, 천천히 테이블 가까이 다가가 두 손을 쳐들고 하늘을 휘젓기 시작했다. 새우는 껍질 을 곤두세우고 뒷걸음질을 치면서 집게발을 들어올렸다. 술가의 이와 같은 작동은 점점 속 도가 빨라졌다. 새우는 여전히 껍질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어떻게 되어야 하는 거예요?" 하고 백작 부인이 물었다. "가만히 잠자코 있다가 꽁무니로 서게 되는 거죠" 하고 미국식의 강한 악센트로 폭스가 대답하고 나서, 열 손가락을 접시 위에 얹고 다시 부르르 떨었으나 최면은 좀처럼 걸리지 않고 새우는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술가는,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선언하고 불만스러운 얼굴로 테이블울 떠났다. 백작 부인은 저 유명한 흄 선생도 때로는 이런 실패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코코 공작도 맞장구를 쳤다. 묵시록과 유태 경전의 이 대가는 가만히 테 이블에 다가가 다시 새우를 향해 다섯 손가락을 불쑥불쑥 내미는 시늉을 하며 운수를 시험 해보았으나, 역시 전신이 빳빳이 굳어지는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보이를 불 러 새우를 가져가라고 일렀다. 보이는 다시 큰 입을 벌리고 히죽히죽 웃으면서 명령대로 했 으나, 그가 나가자 문밖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얼마 후 부엌에서도 그 러시아인 패거리들을 크게 비웃었던 것이다. 새우를 상대로 실험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자칭 천재는 여전히 화음을 울리고 있었다. 그 것도 주로 단조의 가락으로 한정한 것은 이 경우에 어떤 곡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짐작이 잘 가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 그 자칭 천재는 이미 10년을 하루같이 왈츠를 쳐서 물론 여러 사람들의 절찬을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맹렬한 경쟁심에 사로잡힌 X백작(이 비범한 딜레탕 트에 대한 설명은 1장에 나와 있다)은 오펜바하(독일 출생의 프랑스 가극 작곡가. 대표작으 로는 <호프만의 이야기>가 있음. 1819∼1880)를 그대로 모방한 이른바 자작의 샹송을 한 번 흥얼거렸다. 그 중에서도 '어느 달걀? 어느 소?' 라는 괴상한 후렴은 부인들의 고개를 감 동으로 끄덕이게 하였다. 그 중 한 부인은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낼 정도였으며, 이 경우에 반드시 필요한 '좋아! 좋아!' 하는 탄성도 사나운 나비처럼 부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 다. 이리나는 리토비노프에게 눈짓을 하였다. 그 입술에는 또다시 가볍게 비웃는 듯한 표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표정은 더욱 심하게 파도치기 시작하여 사뭇 기분이 좋은 듯 기쁨마저 감돌았다. 왜냐하면 - 코코 공작이, 즉 귀족의 대표자요 옹호자인 이분이 술가로 하여금 자기의 견해를 말하게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러시아에서 소유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비판하는 명문구가 계속해서 튀어나온 것은 물론이고 그 여파가 당연히 민주주의 자들에게도 미치게 되었으므로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술가의 가슴에서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미국의 붉은 피가 솟아나 그가 그만 공작에게 대들었던 것이다. 공작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이유나 이론 같은 것은 귀찮다는 듯 이 "그런 엉터리네! 몰상식해도 분수가 있지!" 하며 우격다짐으로 나왔다. 부자인 피니코프 는 아무에게나 마구 폭언을 퍼부었다. 유태 경전의 선생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 했고, 여왕벌 백작 부인까지 한몫 거들어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소동이 벌어졌다... 요컨대 저 구바료프의 집에서와 비슷한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다만 그쪽과 다른 점은 이곳에는 맥 주도 담배 연기도 없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좀 낫다는 것뿐이었다. 라토미로프는 분위기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장교들이 불만을 표명하고, 보우리스 선생 같 은 사람은 "제기랄, 또 정치론인가!" 하고 볼멘 소리로 외치는 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의 조정작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모여 앉은 사람들 중에 날카롭게 생긴 고관 한 사람이 문제의 요점을 간략하게 이 야기하려 했으나 그것도 신통치가 않았다. 더듬거리며 이야기를 얼버무리는 듯한 말투라든 가, 상대방의 반론을 듣거나 이해하는 데에도 능하지 못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명히 그 자신의 문제의 핵심이 어디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 이야기의 성립을 불가능 하게 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리나가 상대방을 은근히 비난하면서 기를 죽이고는 번번이 리토비노프를 돌아보 면서 가볍게 끄덕여 보이는 판이었다. 그러나 리토비노프는 당당하게 도사리고 앉은 채 잡 소리에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고 다만 그녀의 섬세한 눈길이 다시 자기를 향해 반짝이는 그 순간만을 - 그녀의 창백하고 상냥한, 짓궂으면서도 우아한 얼굴이 다시 자기를 쳐다봐주기 만을 고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은 부인들까지 가담하여 논쟁을 그만둘 것을 요구하고 나서자, 그 논쟁은 간신히 결말을 보게 되었다. 리토비노프는 딜레탕트 백작을 설득하여 그 샹송을 연주하게 하고, 이 자칭 천재는 새삼 그 왈츠를 반주하였다. 리토비노프는 열두 시가 넘도록 앉아 있다가 맨 나중에 그곳을 떠났다. 그날 밤의 화재로 여러 가지 문제가 언급되었으나, 조금이라도 흥미 있는 문제는 조심스럽게 회피하였다. 장군 들은 위풍 당당하게 카드놀이의 승부를 마치자 역시 위풍당당하게 이야기에 뛰어들었다. 이들 국가의 거물들의 영향은 곧 눈에 띄었다. 이야기는 돌변하여 파리 화류계의 현황으 로 옮겨가, 이름난 여자의 이름이나 그 솜씨에 관해서는 자중의 신사들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 밖에 사르두(프랑스의 극작가. 작품으로는 <조국>, <상젠 부인> 등이 있음. 1831∼ 1908)의 최근 희곡 작품이나 아부(프랑스의 작가. 1808∼1885)소설에 대한 이야기며 <토라 비아타>를 노래 한 파티(이탈리아의 오페라 가수. 1843∼1919)가 입에 오른 끝에, 누군가가 '비서놀이' 를 하자고제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문법적으로도 맞지 않는 엉터리 답안이 수두룩하였기 때문이다. 뚱뚱한 장교는 언젠가 자기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산증이 심장으로 올라간 것' 이라고 대답했다면서 혼자 터무니없이 껄껄 웃어댔다. 늙은 백작 부인은 부채로 각하의 손을 힘껏 때렸는데, 그 반작용으로 그녀의 이마에서 분딱지 하나가 떨어졌다. 쭈그러든 버 섯 같은 H부인은, 옛날 슬라브 후국이 군립했을 당시의 일이며, 도나우 강 저쪽까지 정교를 전도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전혀 반응이 없자 몇 마디 투덜거리고나서 어디론 지 사라져버렸다. 결국 가장 많은 사람의 화제가 된 것은 흄에 대해서였다. '봄의 여왕벌' 마저도 언젠가 누 군가의 두 손이 자기 몸을 더듬은 적이 있어,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 한쪽 손에 자기 반지를 끼워주기까지 했다고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이리나의 계획은 완전히 들어맞은 셈이다. 설사 리토비노프가 주위에서 떠드는 소 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그들의 두서없는 김빠진 이야기들 속에서 단 한 마디도 성실한 말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며, 단 한 개의 유용한 생각이나 단 한 가지의 새 로운 사실도 찾아내지 못했을 터이니 말이다. 이들이 아무리 핏대를 올리며 떠들어보아야 거기서는 단 한 조각의 감격도 얻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비난하는 목소리에까지 정열이 깃 들여있지 않았다. 다만 때때로 한 시민으로서의 분개나 조소하기 위한 냉담 등의 가면 아래, 앞으로 자기들에게 올지도 모르는 손해가 두려워 울상이 되어 떠드는 소리나 대대로 잊을 수 없는 몇 사람의 이름을 자못 원망스러운 듯 이를 갈며 떠벌리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 다... 그런 먼지나 휴지 조각들만이 가득 떠도는 아래로 깨끗한 물줄기가 하나만이라도 발견 될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얼마나 엄청난 폐물들과 얼마나 쓸데없는 잠꼬대와 얼마나 보잘 것없는 잡동사니들이 이 패거리들의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현 상은 이날 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또 사교장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가 정에 있을 때나 어디에 있을 때나 어느 날에나, 요컨대 그들의 생활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얼마나 무지몽매한 일인가! 인간생활을 구성하고 있는 그 다채로운 면모에 대한 엄청난 몰이해를 보라! 리토비노프는 이리나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다시 그의 손을 꼭 잡고 의미심장하 게 속삭였다. "어때요? 흡족하세요? 실컷 보셨죠? 이래서야 되겠어요?"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 숙여 인사할 뿐이었다. 남편과 단둘이 남은 이리나는 자기 침실로 들어가려는데, 남편이 말을 걸어 왔다. "오늘 밤 당신이 보여준 언동에는 감탄할 뿐이오." 남편은 담뱃불을 붙이고 벽난로에 기 대면서 말을 이었다. "우린 당신에게 완전히 당한 꼴이었소." "그렇지만 여는 때와 별로 다 를 게 없었잖아요." 하고 그녀는 시치미를 떼고 대답했다. "그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하고 라토미로프는 물었다. "좋을 대로 하세요." "음, 잘 알겠어." 라토미로프는 고양이가 앞발을 끌어당기듯 조심스럽게 새끼손가락의 기다란 손톱 끝으로 담뱃재를 떨어버리고는 말했다. "그래그래, 잊어버리기 전에 물어봐야지. 당신의 그 새로운 친구 - 그래... 리토비노프 군인가 하는 - 그자는 사람들 사이에 영리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 고 있나보지?" 이리나는 리토비노프라는 이름이 남편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그제야 그쪽으로 돌아앉았다. "그건 무슨 뜻에서 묻는 거예요?" 장군은 히죽 웃어 보였다. "그 사람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데... 그건 속이 드러날까봐 염려해서가 아니겠소?" 이리나도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남편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웃음이었다.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잠자코 있는 편이 나은 것 같으니까 그랬겠죠... 그런 사람들과 같 이 떠들어대느니, 차라리 그 편이 낫다고 생각했겠죠, 뭐." "한방 먹었군 그래!" 하고 라토미로프는 항복이라도 하는 듯한 어조로 말을이었다. "아니 야, 농담은 그만두고... 그나저나 그 친구 꽤 미남이더군 그래. 이렇게... 정신을 집중시킨 듯 한 표정을 하고서... 대체적으로 풍체도 좋고... 말이야." 장군은 넥타이를 매만지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콧수염을 거울에 비쳐 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그 친구는 공화주의자 같아. 당신의 또 다른 친구인 포토우긴처럼 말이야. 그 선생도 역시 침묵 속의 지자이긴 하지만." 이리나는 커다랗게 뜬 맑은 눈동자 위로 눈썹을 쭈뼛하게 치켜오리더니, 입술을 굳게 다 물고 약간 삐죽거렸다. "뭣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녀는 남편을 측은히 여기는 듯한 어조로 달랬 다. "그건 그저 공포를 쏘아대는 것밖에는 되지 않아요... 이곳은 러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그 런 말씀은 해보았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아요." 라토미로프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건 나 한 사람만의 의견이 아니야." 그는 갑자기 목이 쉰 듯한 소리로 말하였다. "다른 친구들도 역시 그 사나이는 아무래도 카르보나리(숯 굽는 사람이란 뜻. 19세기 초에 나폴리에서 조직된 이탈리아의 급진 공화주의자들의 비밀결사. 오스트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공화정을 수립할 것 을 목적으로 하여 스페인 혁명·프랑스 7월 혁명 등의 기회를 타서 혁명 운동을 일으켜 이탈리아 통 일의 기운을 조성했음. 초기의 당원들이 몸을 숨기기 위하여 숯 굽는 사람으로 변장하고 산속에서 비 밀회합을 가진 데에서 나온 이름임) 냄새가 난다는 거야! "정말이에요? 다른 친구들이라니, 누구 말예요?" "저, 보우리스 같은 사람도 그랬지, 예를 들자면 말이야..." "뭐라고요? 그런 사람조차도 자기 의견을 말할 때가 있어요?" 이리나는 오한이라도 나는 듯 어깨를 움츠리고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매만졌다. "그런 사람... 그, 그런 사람... 조차도 뭐랄까, 아마도 당신은 화를 내고 있나보군. 하지만 실은 누가 화를 내고 있는 건지, 당신은 알고 있을텐테..." "아니, 제가 화를 내고 있다고요? 뭣 때문에 화를 내요?" "어쩌면 내 말이 당신 귀에 거슬리는지도 모르지. 그 어떤 친구에 대한 말이..." 라토미로프는 더듬거렸다. "어떤 친구요?" 이리나는 반문하듯 되풀이했다. "제발 돌려서 말하지 말고 솔직히 말씀하 세요. 전 피곤해서 자고 싶단 말예요." 그녀는 테이블에서 촛대를 집어들었다. "어떤 친구냐 니까요?" "그건 저 리토비노프 군 말이오. 당신이 그 사람한테 관심이 많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까..." 이리나는 촛대를 든 손을 위로 올렸다 - 불빛이 남편의 얼굴과 같은 높이를 유지하도록 - 그리고 조용히, 자못 신기하다는 듯이 남편의 눈을 들여다보았으나 이내 소리내어 웃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라토비로프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물었다. 이리나는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잖아?" 그는 발을 올리면서 되풀이하여 물었다. 그는 모욕을 당하고 상처까지 입었다고 느끼면서도 바로 눈앞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스럽게 서 있는 이 여자의 아름다움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고문을 당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아내의 매력을 모조리 간파하고 있 었다. 빛 바랜 무거운 청동 촛대를 꽉 움켜잡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 끝의 아름다운 손톱 이 장밋빛으로 빛나는 것까지도 - 그는 간과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노 가 가슴 속까지 파고들고 있음을 느꼈다. 이리나는 또 웃었다. "참, 당신도! 당신, 질투하고 계세요?" 그녀는 겨우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남편에게 등을 돌 리고 방에서 나갔다. "저분이 질투를 다 하시다니!" 하는 소리가 문 저쪽에서 들리더니 다시 웃음 소리가 크게 울려펴졌다. 라토미로프는 어두운 시선으로 아내의 뒷모습을 전송하였다. 실은 그때에도 그녀의 날씬 한 몸매나 매끈한 동작의 넘칠 듯한 매력에 눈길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 그 뒷모습 이 사라지자, 그는 벽난로의 대리석 대에 담배를 아무렇게나 동댕이쳐 부러진 토막을 주어 밑으로 홱 던져버렸다. 거의 뺨은 갑자기 창백해졌고 턱밑에는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다. 두 눈이 짐승처럼 멍청하게 마루 위를 헤매는 모습은 무슨 물건이라도 찾는 듯이 보였다... 우 아한 것이 모두 그의 얼굴에서 사라졌다. 그가 언젠가 백러시아 농민들에게 회초리를 휘둘 렀을 때 필경 이런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한편 리토비노프는 자기 숙소로 돌아와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머 리를 움켜잡은 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의자에서 일어난 그는 상자 뚜껑을 열 고 가방을 꺼내어 그 속에서 타치야나의 사진을 꺼냈다. 사진 속의 그녀는 흔히 있는 일이 지만,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져 늙어 보였고, 서글픈 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토비노프의 약혼녀는 대러시아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처녀로, 아마빛 머리에 다소 통통 한 편이며 얼굴은 약간 둔하게 생겼다. 영리해 보이는 갈새 눈에는 매우 선량하고 부드러운 표정이 감돌고 있으며, 그 희고 얌전한 이마에는 언제나 햇살이 비치고 있는 듯했다. 리노비 노프는 오랫동안 그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았지만, 이윽고 저만치 밀어놓고는 다시 두 손을 머리를 움켜 잡았다. "모든 것이 끝장이야!" 하고 그는 드디어 중얼거렸다. "이리나! 이리나!" 그는 그제야 비로 소 자기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고성에서 그녀를 처음 본 그날부터 싹텄으며, 그 후로 잠시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만일 지금으로부터 불과 몇 시간 전에 누군가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웃어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타냐, 타냐, 어쩌면 좋으냐! 타냐! 타냐!" 하고 그는 괴로운 나머지 그녀의 이름을 하염없이 불러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나의 모습은 여전히 상복 같은 검은 옷을 걸치 고 대리석처럼 흰 얼굴에 조용한 승리의 서광을 띤 채 그의 눈앞에 뚜렷이 서 있었다. 16 리토비노프는 밤새 한잠도 자지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 그는 정직하고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라 책임감과 의무의 신성함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자기 자심을 속이거나 자기 의 약점 혹은 과실을 적당히 눈감고 넘어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머릿속이 희미하여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절반쯤 잠든 상태에 서 감각은 몽롱하게 뒤얽혀 어두운 중압감으로부터 도저히 벗아날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 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자기의 장래, 이제는 대항세력이 거의 정복된 자기의 장래가 다시 금 어둠에 싸이고 자기 집, 겨우 쌓아올린 견고한 집이 갑자기 와르르 무녀졌다고 생각되었 기 때문이다... 그는 가차없는 자책의 회초리를 자기 자신에게 휘두르기 시작했으나 곧 스스 로 그 충동을 억제하였다. '마음이 이렇게 약해서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은 나 자신을 탓할 때가 아니다. 곧 실천에 옮길 때다. 타냐는 내 약혼녀다. 나의 사랑, 나의 성실을 믿노라고 언약한 아가씨다. 우리 두 사람은 영원히 결합되었으므로 헤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업고 또 있어서도 안 된 다!' 그는 타치야나의 장점을 일일이 분명하게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는 그것을 하나하나 마 음 속에서 골라내어 세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 속에 감동이나 애정을 불러일으키려고 무척 애를 썼다. '남은 수단은 하나밖에 없다' 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것은 뛰어나오는 일이다. 그녀가 이곳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 먼 저 그녀를 맞으러 뛰어나가야 한다. 아, 타냐와 함께 괴로운 생각을 해야 하다니, 따분한 나 날을 보내야만 하다니 -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 어쨌든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지거나 검토할 형편이 못 된다. 어쨌든 지금은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 후에는 어찌 되든지간에!' '그런데 네게는 그 여자를 속일 권리가 없다' 하고 또 하나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너는 네 감정속에 일어난 변화를 그 여자에게 감출 권리가 없다. 만일 네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여자는 네 아내가 되기를 거부할지도 모르지 않은가?' '뭐라고? 그건 터무니없는 일이야!' 하고 그는 마음 속에 다짐했다. '그건 궤변이다. 부끄러 워해야 할 간계, 외형적인 성실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일단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아도 무 방하다는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그것뿐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그렇다면 나는 이곳을 떠 나야만 한다 - 그 여자는 만나지 말고 말이다.' 그러나 그때 리토비노프는 가슴이 꽉 죄어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몸이 으스스 추워왔 으나 그것은 생리적인 추위였다. 순간적으로 몸이 떨리면서 이가 가볍게 부딪쳤다. 그는 열 병에 걸린 사람처럼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했다. 방금 마음 속에 떠오른 생각에는 더 이상 구애받지 말고 차라리 그 생각까지도 뭉개버리고 나서, 그 생각을 아주 잊은 채 그는 자기 자신을 새삼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체 어째서 그는 다시... 이런 사교계의 타락한 여자에게 - 보기만 해도 진절머리나는 환 경에 에워싸여 있는 사랑을 느끼게 되었을까? 그는 자기 마음을 향해 '이만저만 어리석지 않군. 너는 진정 그 여자를 사랑하느냐? 하고 반문하려 했으나 다만 한쪽 손을 한 번 내저 었을 뿐이다. 그리고 안개 속에서 빠져나온 듯 매력이 넘치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빛을 발하는 듯한 눈썹이 서서히 부각되고 황홀한 눈동자가 조용히 그의 심장을 찌르는 것이었 다. 달콤한 목소리가 명랑하게 울려퍼지고 윤기가 흐르는 어깨 - 젊은 여왕의 그 어깨는 싱 싱하고도 요염한 모습으로 뜨겁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날이 밝아올 무렵 리토보노프의 가슴 속에는 하나의 결의가 생겼다. 그는 그날 중으로 타 치야나를 맞으러 떠나기로 결심한 동시에, 그 전에 이리나와 마지막으로 만나 일이 여의치 않으면 모든 진실을 털어놓고 - 깨끗이 그녀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소지품을 정리하여 짐을 꾸렸다. 열두시가 되기를 기다려 그녀를 찾아갔다. 그러나 커튼이 절반쯤 걷힌 그녀의 방 창문을 바라보자 리토비노프는 갑자기 마음이 약해져... 호텔 방을 노크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리히텐타르의 가로수 길을 두서너 번 왔다갔다하였 다. "여! 리토비노프 군, 잘 있었소!" 하고 달려가는 수렵용 마차 위에서 갑자기 조롱하는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토비노프가 쳐다보니 목소리의 주인공은 라토미로프 장군으로, 유 명한 운동 선수이기도 하고 영국 마차나 말의 애호가이기도 한 M공작과 함께 마차를 타고 가면서 거드름을 부리는 참이었다. 공작이 고삐를 쥐고 있었고, 그는 옆으로 상반신을 내밀 고 모자를 머리 위로 높이 올려 쓰고는 이를 드러내어 웃고 있었다. 리토비노프는 인사를 나누고 곧 마음 속의 명령에 따라 이리나의 숙소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방에 있었다. 현관에서 안내를 의뢰하여 곧 위로 올라갔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섰 을 때, 그녀는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옷소매가 넓은 실내 옷인 불라우스를 걸치고 있었 으며, 얼굴은 여전히 어젯밤처럼 희었다. 그러나 어젯밤과는 달리 싱싱한 맛은 사라지고 피 곤해 보였다. 그녀가 억지로 미소를 띠며 그를 맞는 모습에서 그 피고의 기색은 한결 더해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 상냥하게 손을 내밀었으나 그를 힐끗 쳐다보는 눈빛은 어쩐지 건성 으로 대하는 것 같았다. "잘 오셨어요" 하고 그녀는 힘없이 말하고 나서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오늘은 기분 이 별고 안 좋아요. 어젯밤에 잠을 설쳐서 그런가봐요. 그건 그렇고 어젯밤의 감상은 어떠세 요? 제가 말한 그대로죠?" 리토비노프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실은 내가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것은, 이리나 씨" 하고 그는 입을 열었다. 그녀는 상반신 을 벌떡 일으키고 그와 마주앉았다. 그녀의 눈이 리토비노프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 무슨 일이세요?" 하고 그녀는 큰 소리로 말했다. "마치 송장처럼 얼굴이 새파랗군 요. 어디가 아프세요?" 리토비노프는 침착성을 잃었다. "내가요, 이리나 씨?" "무슨 언짢은 편지라도 받았나요? 어떤 불행한 일이라도 일어났나요? 어서 말씀해주세요, 어서요 ..." 이번에는 리토비노프가 이리나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나쁜 편지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하고 그는 어물어물 말을 이었다. "불행하다면 분명 불 행하다고 할 만한 일이 일어난 건 사실입니다. 그것도 아주 큰 불행이 말입니다... 그 때문에 이렇게 찾아왔어요." "불행이라니요? 대체 어떤 불행인데요?" "그것은... 결국..." 리토보노프는 말을 계속하려고 했으나... 차마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다만 두 손을 움켜쥐었을 뿐, 그 바람에 손가락 마디가 우두둑 하고 소리가 날 정도였다. 이리나는 화석이라도 된 양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드디어 이 말 한 마디가 공허한 신음소리처럼 리토비노프의 가슴 속으로부터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는 얼굴을 숨기고 싶은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니, 리토비노프 씨, 당신이..." 이리나도 끝까지 말을 맺지 못하고 의자 등받이에 상반신을 기댄 채 두 손으로 눈을 가렸 다. "당신이 저를 사랑한다고요?" "그래... 그래요... 그럼요" 하고 그는 마치 혐오스러운 듯한 어조로 되풀이해서 말하고 다 시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방안은 조용해졌다. 날아들어온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커튼과 창문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리토비노프였다. "이리나 씨" 하고 그는말을 시작했다. "이 사실이 나를 무척 괴롭히고 있어요... 불행한 일 입니다. 만일 내가 그 당시처럼, 즉 모스크바 시절처럼 당장 폭포에라도 뛰어들지 않는 이상 나는 마땅히 이 불행을 미리 예상하고 몸을 살짝 피했어야 했을 겁니다... 그런데 운명은 또 다시 나를 붙잡아 옛날과 똑같이 당신이라는 인간을 통해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될 저 고뇌 를 내게 맛보게 하려는 것이오... 나는 물론 반항했지요... 반항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난 결 국 뜻대로 도지 않더군요. 내가 당신에게 이 사실을 모조리 털어놓는 것은 하루라고 빨리... 이 희비극의 막을 내리고 싶기 때문이오." 그는 북받쳐오르는 혐오와 수치심을 간신히 억제 하고 이렇게 말한 뒤 입을 다물었다. 나비는 여전히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었다. 이리나는 두 손을 얼굴에서 떼지 않았다. "당신은 감정에 속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하는 그녀의 속삭임이 피가 통하지 않는 듯한 새 하얀 두 손 아래에서 새어나왔다. "속고 있다니요?" 하고 리토비노프가 대꾸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것도 일 찍이 당신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쏟은 적이 없는 크나큰 애정을 말입니다. 나는 당신을 탓하고 싶진 않아요. 그건 너무 이기적인 처사이니까요. 만일 당신이 내게 태도를 달리 취해 주었던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새삼 원망할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잘못은 내게 있으며, 내가 나 자신을 너무 믿었기 때문에 결국 나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겁니다. 그 러나 나는 당연한 벌을 받았을 뿐, 당신으로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테지요... 또 만일 당신이 자신의 죄를(물론 내게 범했다고 혼자서 속단하고 있는 데 불과한 그 죄를) 그처럼 통절히 느끼지 않고 또 보상하려고도 들지 않았더라면 그 편이 나 로서는 훨씬 안전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테지요...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은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나는 다만 내 입장을 당신에게 분명히 밝히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대로 있어도 실로 괴로운 입장이지만... 이렇게 털어놓으면 적어도 당신이 말하 는 오해만은 받지 않을 것이며, 또 이와 같은 나의 솔직한 고백이 부담을 느끼고 있을 당신 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줄 수 있다면 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리토비노프는 상대방을 쳐다보지도 않고 여기까지 단숨에 말했지만, 설사 그가 이리나의 얼굴을 눈여겨보았다 하더라도 그녀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두 손을 얼굴에서 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녀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 랐을 것이다. 그것은 공포와 환희, 그리고 행복에 취한 듯한 허탈감과 갑자기 당한 기습으로 부터 오는 혼란상태를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그시 감긴 두 눈이 약간 깜박거리고, 끊 어질 듯한 긴 숨결이 메마른 입술을 조금씩 식히고 있었다... 리토비노프는 잠시 침묵을 지키면서 그녀의 대답을,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에게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어요" 하고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고장을 떠날 생각 입니다. 그래서 작별하러 온 겁니다." 이리나는 두 손을 천천히 무릎 위로 내렸다. "하지만 리토비노프 씨, 제가 기억하기로는" 하고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분이, 언젠가 당신이 말한 그분이 이곳에 찾아오기로 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분을 기다리고 계신 것이 아닌가요?" "네, 그렇지만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느 중간 지점에서... 그러니까 하이델 베르크쯤에서 기다리고 있겠지요." "아, 그래요. 하이델베르크 말씀이죠? ... 그래 ... 거기라면 좋겠군요. 그렇지만 그렇게 되 면 모처럼 세운 당신의 계획이 틀어지잖아요. 괜찮겠어요. 리토비노프 씨? 당신은 일을 너무 크게 생각하고 계시는 게 아닐까요? 물새가 날아가는 소리에 놀란 것이 아니라고 말할 자신 이 있으세요?" 이리나는 작은 소리로 냉담할 정도로 침착하게, 말과 말 사이에 조금씩 사이를 두어가면 서 창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리토비노프는 그녀의 마지막 물음에 응하지 않았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뿐이에요. 당신은 아까 제가 기분 나빠할 것이라느니 하고 말 씀하셨지요?"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기분이 나쁘다나요..., 천만에요. 설사 우리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에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역시 당신이 아네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은 그 당시를 생각해보세요. 잘못은 당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날 거예요." "나는 당신의 너그러운 마음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은 없지만" 하고 리토비노프는 잇새로 무리하게 밀어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일단 물어보고 싶군요. 당신은 내 생각 에 찬성해주시겠습니까?" "이 고장을 떠난다는 것 말씀예요?" "네." 이리나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 말씀하실 때 전 당신이 속단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당신 말을 다시 잘 생각해보니... 그것이 당시의 착각이 아닌 한 역시 이 고장을 떠나는 게 옳다고 생각되는군 요. 그러는 편이 나을 테죠...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도." 이리나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그 말은 수시고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곤 했다. "라토미로프 장군께서도 이미 눈치채셨는지도 모르고..." 하고 리토비노프가 말했다. 이리나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알 수 없는 표정이 입술에 스쳤다. "그렇지 않아요, 전 다른 의미에서 그렇게 말한 거예요" 하고 그녀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 다. "전 그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아니예요.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그분이 눈치채고 채 지 않고는 문제될 수 없어요. 거듭 말하지만, 우리 두 사람을 위해 헤어지는게 좋다는 거예 요." 리토비노프는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집어들었다. '모든 게 끝났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제 떠나야지!' "그럼 이젠 작별인사만이 남았군요, 이리나 씨." 그는 큰 소리로 말했으나 갑자기 가슴이 죄어드는 것으르 느꼈다. 마치 스스로 자신의 판결문을 읽으려하는 심정이었다. "날 나쁘게 생각지 말아주시오. 그것 하나만 부탁하겠어요... 그리고 만일 우리가 언젠가..." 이리나는 다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리토비노프 씨, 지금 작별인사를 나누는 건 너무 성급한 일이에요." 리토비노프의 마음 속에 동요가 일더니 곧 이어서 가슴을 쥐어뜯는 아픔이 느껴졌다. "아 니죠, 이렇게 지체하고 있을 수는 없어요!" 하고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무엇 때문에 디 괴로움을 다시 겪어야 합니까?" "아직은 작별인사를 하지 말아주세요" 하고 이리나는 거듭 말했다. "전 당신과 한 번 더 만나고 싶어요. 또다시 저 모스크바 시절처럼 말없이 헤어져야 하나요? 전 싫어요. 오늘은 그냥 돌아가셔도 좋지만 약속해주세요,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만나주신다고요." "그것이 소원이세요?" "이건 제 요구예요. 만일 당신이 저와 작별인사도 나누지 않고 떠나버리신다면 전 절대로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해도...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하고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겼다. "전 지금 바덴바덴에 있는 것 같지가 않아요... 마치 모스크바에 있는 기분이에요... 그럼 또 오세요, 네!" 리토비노프는 일어났다. "이리나 씨!" 하고 그는 말하였다. "손을." 이리나는 손을 내밀려다 말고 리토비노프의 말을 듣고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다시 손 을 감춰버렸다. "아녜요, 안 돼요!" 그녀가 소곤거렸다. "지금은 손을 줄 수가 없어요... 안 돼요, 한 번 더 오셔야 해요!" 리토비노프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이리나가 왜 친구로서의 마지막 악수를 거절했 는지 그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대체 무엇을 망설이고 있었는지, 거기까지는 생 각이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이리나는 다시 안락의자에 파묻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17 리토비노프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산으로 가 숲을 헤치고 땅바닥에 벌렁 드러 누운 채 한 시간쯤 가만히 있었다. 몸부림치지도 울지도 않았다. 어쩐지 몸이 무겁고 노곤한 것 같아 멍하니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그는 전에는 좀처럼 이런 기분을 경험한 적이 없었 다. 그것은 덧없는 죄책감과 공허감으로, 자기 자신의 내부뿐만 아니라 주위에까지도 널리 퍼져 있었다... 이리나의 일도 타치야나의 일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 도끼로 크게 얻어맞고 몸도 마음도 어떤 정체 모를 무언가에 빼앗겨 무 작정 앞으로 끌려가는... 그런 심정이었다. 때로는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그의 날개가 심하게 퍼덕이는 것 같은 느낌이 절실히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대 로 바덴바덴에 머물러 있는다는 것...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마음 속으로는 이 미 이 고장을 떠나 있었던 것이다. 칙칙폭폭 하고 연기를 뿜으며 달려가는 기차를 잡아타고 벙어리처럼 묵묵히 생기 없는 먼 곳을 향해 갈 뿐이었다... 이윽고 그는 벌떡 일어나 나무 그루터기에 머리를 기대고 잠자코 있었다. 다만 한쪽 손을 움직여 무의식적으로 고사리의 잎사귀를 붙잡고 박자를 맞추듯이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에 그는 무아지경으로부터 깨어났다. 숯 굽는 일꾼 두 사람이 커다란 보자기를 어깨에 메고 험 한 산길을 헤치며 걸어오고 있었다. "때가 되었다!" 하고 리토비노프는 중얼거리며 그들의 뒤를 따라 거리로 내려가 정거장 쪽에서 길을 돌아 타치야나의 숙모인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 앞으로 전보를 쳐서, 자기는 곧 이 고장을 떠나겠으니 하이델베르크의 시리델 호텔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어차피 청산해야 할 문제라면 한꺼번에 해치워야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구태여 내일까 지 미룰 필요가 없다.' 그는 도박장에 들러 승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 두세 사람의 얼굴을 멍하니 호기심에 찬 눈 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멀찍이 빈다소프의 흉한 뒤통수나 피치차르킨의 균형잡힌 얼굴을 찾 아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한동안 기둥이 늘어선 복도에 서 있었으나, 이윽고 천천히 이리 나의 숙소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가 이리나를 찾으려고 한 것은 갑자기 무의식중에 어떤 힘에 끌려서가 아니었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이상, 아까 약속한 대로 한 번 더 만나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수위 몰래 호텔에 들어가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가 노크도 없 이 기계적으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같은 안락의자에 같은 옷차림으로 세 시간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자세로 이리나가 앉아 있었다... 아까부터 줄곧 거기 움직이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조용히 얼굴을 들고 리토비노프를 보자 온몸을 크 게 흔들며 의자를 붙잡았다. "어머나, 깜짝 놀랐어요!" 하고 그녀는 속삭였다. 리토비노프는 놀란 나머지 말도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바로 보고 있었다. 그 얼굴 표정 - 흐릿한 눈동자에 그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이리나는 애써 살짝 웃어 보이고는 흩어진 머리 를 단정히 매만졌다. "괜찮아요... 너무 멍청하게 앉아 있었나봐요... 깜박 잠이 든 거예요." "미안하군요, 이리나 씨!" 하고 리토비노프는 입을 열었다. "노크도 없이 들어와서... 나는 다 만 당신이 내게 요구한 것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이렇게 다시 온 것 뿐입니다. 실은 오늘 이곳을 떠나게 되어... 전보를 쳤거든요." "어머! 급히 서두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셨나보군요. 그래, 언제 떠나세요? 몇 시 차예 요?" "일곱시 차요!" "어머, 일곱시! 그래, 작별하러 오셨군요." "그래요, 작별하러... 이리나 씨." 이리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고마워요, 리토비노프 씨, 여기까지 오신다는 것이 여간 정성으로는 안 되는 일일텐데..." "네, 이리나 씨. 그건, 그건 그래요." 이리나는 또다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기는 듯이 보였다. "이렇게 찾아준 것으로 당신은 우정을 입증하신 셈이군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한시 바삐 깨끗이 결말을 내고 싶어하는 당신이 생각에 저도 찬성이에요... 어물어물하다가는... 이번에는 제 가... 아양을 떤다고 당신께 책망을 듣거나, 연극을 하는 거라고 핀잔을 들을 테니 - 분명히 당신은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이리나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안낙의자에 옮겨 앉아 앞으로 몸을 굽히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면서 테이블 한 끝에 몸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요..." 하고 그녀는 깍지낀 손가락을 통하여 속삭였다. 리토비노프는 누군가로부터 가슴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하였다. 이리나는 이번 엔 자기가 얼굴을 감추고 싶었던지 서글픈 듯 고개를 돌리고 테이블 위에 웅크렸다. "네,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은 그걸 알고 계세요?" "내가 그걸 아느냐고요?" 하고 리토비노프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내가?" "이제야 알게 되셨군요" 하고 이리나는 말을 계속했다. "꼭 떠나셔야만 하는 까닭을, 어물어물할 수 없는 이유를... 당신이나 저나 연기하는 것은 금물이에요. 그건 위험한 일이니까요, 또 무서운 일 이기도 하고요... 그럼 안녕!" 그녀는 말을 마치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녕!" 그녀는 방문 쪽으로 대여섯 발짝 걸어가 한쪽 손을 등뒤로 돌리고 마구 흔들어댔다. 그것 은 마치 리토비노프의 손을 더듬어 잡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 못박인 듯 서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안녕... 잊어주세요" 하고 말하고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방에서 휙 나가버렸다. 리토비노프는 혼자 방안에 남았으나 여전히 제정신을 가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얼른 정 신을 차리고는 재빨리 뛰어나가 이리나를 불렀다. 그녀는 이미 출입문 손잡이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때 호텔의 현관 쪽에서 라토미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토보노프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계단 앞에 이르렀다. 호사스러운 복장을 한 라토 미로프장군이 관리인에게 서투른 독일어로 내일 하루 마차를 대절하라고 고섭을 벌이고 있 었다. 리토비노프를 보자 그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모자를 높이 쳐들고, 또다시 그 경의를 표하였다. 이쪽으르 비웃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리토비노프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라토미로프에게 인사를 건네는 둥 마는 둥 숙소롤 돌아와 짐을 꾸린 뒤 뚜껑을 닫은 트렁크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심장은 마치 현악기의 줄처럼 떨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었다. 그렇다. 그것이 아무리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사실 그는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이 그로 하여금 제정신을 잃게 했으나 아무튼 예상은 하고 있었으 며, 다만 그것을 의식할 만한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머리가 뒤죽바죽이 되어 그는 생각을 정리할 실마리 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모스크바의 일을 상기하였다. 그때에도 '그것' 은 갑자기 폭풍처 럼 닥쳐왔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커다란 기쁨 - 그러나 위로도 희망도 없는 기 쁨이 그의 가슴을 내리눌러 갈기갈기 찢는 것이었다. 이리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실은 그 녀의 본심이 아니었다 -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결코 인정치 않았을 것 이다. 그런데 이제 새삼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일단 마음먹은 일을 번복한다는 것은 그녀의 말 대로 역시 불가은한 일이었다. 리토비노프는 사실 사물을 판단할 실마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의지의 힘은 남아 있으므로 자기 자신을 미처 충실한 부하처럼 마음대로 부릴 수는 있다. 그느 벨을 울려 보이에게 계산서를 가져오라 말하고는 저녁 합승마차의 자리를 마련하게 하였다. 그는 일부러 모든 퇴로를 막아버린 것이다. "그 후에는 죽든 살든." 그는 잠 못 이루던 그날 밤처럼 이렇게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이 표현이 유난히 그의 비위에 맞았던 것이다. "그 후에는 죽든 살든." 그는 이 말을 되풀 이하면서 천천히 방안을 왔다갔다하다가 그 말 - 그 이리나의 말이 갑자기 가슴에 되살아 나 불타오를 적마다 부지불식간에 눈을 감고 숨을 헐떡이는 것이었다. '사랑이란 두 번 되풀이 할 수는 없는 것인가보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네 안에 다른 생 명이 들어온 것이다, 네가 그것을 불러들인 것이다 - 너는 이제 한평생 그 여독에서 풀려날 수 없다, 그 사슬을 끊지 못한다. 그건 그렇고 그것이 대체 무엇을 입증해준다느 것인가? 행 복인가? ... 대체 행복이라는 것이 있을 수는 있는 것인가? 설사 네가 그 여자를 사랑하고... 그 여자도... 그 여자도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다시 의식적으로 마음의 고삐를 졸라 매었다. 어둠 속을 가는 길손은 앞을 비추기 위해 등불을 켜들고, 혹 길을 잘못 들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잠시도 등불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리토비노프 역시 자신의 주의력을 언 제나 한 점에 - 하나의 목표에 집중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약혼자에게로 가는 것이다. 아니, 약혼자에게 간다기보다는(그는 타치야나를 생각지 않으 려고 했다) 하이델베르크 호텔의 한 객실로 찾아가는 것 - 이것이 곧 그의 앞길을 인도하는 등불이었다. 거기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그는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젠 후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후에는 죽든 살 든" 하고 그는 열번째 되풀이해 말하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6시 15분! 아직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만 하는가! 그는 다시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태양은 차차 가라앉고 있었으며 수풀 위로는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기다란 창문을 통 해 어두컴컴해진 방안으로 희미한 핏빛 고아선이 비쳐들었다. 갑자기 리토비노프는 뒷문이 재빨리 열렸다가 다시 재빨리 닫히는 기미를 알아차렸다... 그는 뒤돌아보았다. 문 뒤에 검은 케이프로 몸을 싼 한 부인이 서 있었다. "이리나..." 하고 그는 외치고 나서 두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의 가슴에 와 안겼다. 두 시간 후 그는 자기 방 소파에 앉아 있었다. 트렁크는 뚜껑이 열리고 속은 텅 빈 채 한 쪽 구석에 뒹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일상용품들이 난잡하게 흩어져 있고 그 가운데에 방금 도착한 편지가 한 통 놓여 있었다. 그 편지에는, 숙모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었으므로 예정을 앞당겨 드레스덴을 떠나기로 했으며, 도중에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한 두 사람은 내 일 정오경에 바덴바덴에 도착할 터이니 정거장까지 마중을 나와 달라 - 고 씌어 있었다. 리토비노프는 자기가 머물러 있는 호텔에 두 사람의 방을 마련해두었다. 그날 밤 그는 이리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이튿날 그녀로부터 답장이 왔다. 하루 이르거나 늦는 차이는 있을망정 결국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어요. 저로서는 어제 저 녁에 한 말을 한 번 더 되풀이할 뿐이에요 - 제 생명은 당신의 손에 맡겨졌어요. 그러니 마 음대로 하세요. 당신의 자유를 구속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만일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버리 고 땅끝까지라고 당신을 따라가고 싶어요. 내일은 만나뵐 수 있겠지요. 당신의 이리나 마지막 서명은 큰 글씨로 갈겨 씌어져 있었다. 18 8월 18일 정오쯤 정거장 플랫폼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에는 리토비노프의 모습도 보였다. 방금 전에 그는 이리나를 만났다. 그녀는 지붕 없는 마차를 타고 남편과 나이가 지긋한 또 한 신사와 함께 있었다. 리토비노프는 그녀가 자기를 알아보았음을 느꼈다. 어떤 검은 그림 자가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리자 그녀는 곧 파라솔로 얼굴을 가렸다. 어제부터 그에게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변화는 그의 모습이나 동작, 얼굴 표 정 등 그 밖의 어디에나 나타나 있었다. 자기 자신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이 들 정도 였다. 자신감도 침착성도 심지어 자존심까지도 사라져버렸다. 지금까지의 기질이나 마음가짐 의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최근에 아로새겨진 씻을 수 없는 어떤 미묘한 감각 - 가련 하고 감미로우면서도 도리에 어긋나는 것만 같은 감각이 갑자기 생겨났다. 정체를 알 수 없 는 손님이 마음의 신전에 잠입하여 그곳을 점령하고, 마치 새집을 마련한 주인처럼 의젓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었다. 리토비노프는 이미 자제력을 잃고 있었다. 그 대신 비겁해지면서 한편 자포가기로부터 오는 담력이 솟아났다. 무언가에 의해 정복되고 포로가 되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의 혼합된 상태를 알고 있을 것이다. 처음으로 도 둑질을 해온 도둑의 심정도 알 것이다. 그런데 리토보니프 역시 무언가에 의행 정복된 것이 다... 그런데 대체 성실은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기차는 5, 6분 연착이 되었다. 리토비노프의 마음은 우울에서 덧없는 상심으로 변했다. 그 는 한군데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으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군중들 사이를 무작정 서성거 렸다. '아, 단 하루만이라도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이리나를 흘끗 바라보았고 그녀 역시 이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것이 바로 그의 공포의 대상이었고, 한시 바삐 벗어나야만 하는 난관이었다... 그 뒤는? 그 뒤는 - 될 대로 되라! ... 이제 와서 그는 결심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질 수 없었던 것이다. 어제부터 이 상하게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그 문구가 또다시 병적으로 떠올랐다... 그는 이런 심정으로 이제 타냐를 맞으려는 것이다... 이윽고 기적소리가 길게 꼬리를 끌고, 칙칙폭폭하는 육중한 소리가 점차 크게 들려오면서 선로의 커브를 서서히 꺾으며 기관차가 나타났다. 군중들이 그 기관차를 맞으러 일제히 움 직이기 시작하자 리토비노프도 그 뒤를 따랐는데, 무거운 다리를 이끌며 가는 그의 모습은 마치 유죄판결을 받은 죄수와도 같았다. 사람들의 얼굴, 부인들의 모자가 차창에 보이기 시 작했고 한 차창에서 흰 손수건이 나부끼기 시작하였다...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가 흔드는 손수건이었다. 만사가 끝났다! 그녀는 리토비노프를 발견했고 이쪽에서도 그녀를 알아보았 다. 기차가 멈추었다. 리토비노프는 승강대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타치야나는 숙모 곁에 서 서 밝은 웃음을 띄고 손을 내밀었다. 그는 두 사람을 부축해 내려주고 안부를 묻는 등 이야기를 시작했으나 그것도 적당히 도 중에서 그만두고 부지런히 잔일들을 도와주었다. 차료를 꺼내게 하고 짐이며 걸상 등을 정 돈하는 가 하면 인부와 마차를 부르러 뛰어가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부산을 떨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어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고맙게 생각되었다. 타치야나는 옆에 조금 떨어져 여전히 미소를 띄고 그의 분주한 활동이 끝나기 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그와 반대로 이제 드디어 바덴바덴 으로 왔다는 사실이 아직 믿어지지 않는 듯 한군에에 잠자코 있지를 못하였다. 갑자기 그녀 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양산이... 타냐, 양산이 어디 갔지?" 그녀는 양산을 두 개 다 자기 겨드랑이에 끼고 있으면서도 그걸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바덴바덴까지 오 는 도중에 찻간에서 알게 되었다는 부인과 큰 소리로 오랫동안 작별인사를 하였다. 이 부인 은 우리에게는 낯익은 스한치코바 부인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구마료프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일부러 그곳 하이델베르크까지 가서 여러 가지 지시를 받고 돌아온 것이다.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상당히 기묘하게 생긴 얼룩 무늬의 케이프를 걸치고 버섯 모양의 둥그스름한 여행 모자를 썼는데, 그 아래 짧게 깎은 백발이 드러나 보였다. 키가 작고 마른 그녀는 여행으로 피로하여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는데, 그녀 는 노래 부르는 듯한 요란한 소리로 리시아 말을 떠벌리고 있었다... 그녀는 곧 사람들의 주 목을 끌었다. 리토비노프는 간신히 숙모와 타치야나를 마차에 태우고 자기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금 새삼스러운 악수, 서로 나누는 웃음 띈 얼굴, 날씨를 소 재로 한 인사. 리토비노프는 이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첫 번째 절차가 무사히 끝났기 때문이다. 그의 태도에는 전혀 타냐를 놀라게 하거나 의아하게 생각할 만한 점이 보이지 않았던 모 양이다. 그녀는 여전히 명랑하고 신뢰에 찬 눈빛을 그에게 던지며 귀엽게 얼굴을 붉히고 방 싯방싯 웃고 있었다. 그제야 리토보노프도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부드러운 표정은 준엄한 질책이 되어 그의 가슴에 울려왔다. '자 - 드디어 왔군 그래, 가엾은 아가씨!'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내가 그토록 기다려왔고 그래서 불러들인 그대. 내가 일생을 끝까지 함께 보내려고 했던 그대. 바로 그대가 왔군 그 래. 내 말을 그대로 믿고서 말이야... 그런데 나는... 그런데 이 나라는 위인은...' 리토비노프 는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그러나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그가 생각에 잠기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 게 소나기처럼 질문을 퍼부었다. "저 둥근 기둥이 죽 늘어선 건물은 뭐지요? 도박장은 어딘 가요? 저기 걸어가는 사람은 누구예요? 타냐, 타냐, 저것 좀 봐. 어쩌면 저렇게 치마가 빳빳 할 수가 있니! 저건 무슨 모자일까? 여긴 파리의 물건들이 다 갖춰져 있겠지? 그렇지만 꽤 비쌀거야, 그렇지? 나는 얼마나 훌륭하고 현면한 부인과 알게 되었는지 몰라! 그 부인을 당 신도 알고 있나요, 리토비노프 씨? 그 부인의 말에 의하면 당신과 만난 것은 역시 매우 현 명한 어느 러시아 사람의 집에서였다지요? 그분은 우릴 찾아오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분이 귀족들을 구슬려대는 솜씨는 실로 볼 만해요! 저 턱수염이 희끗희끗한 신사는 누구예요? 아, 프러시아의 왕이라고요? 타냐, 타냐, 봐, 저기 저분이 프러시아의 임금이시래. 아니라고? 그래, 프러시아의 임금이 아니란 말이야? 그럼 네덜란드의 공사? 안 들려, 기차소리가 너무 시끄러어서. 어머, 저건 정말 너무 멋진 나무로구나!" "그렇군요, 숙모님, 참 멋있어요" 하고 타치야나가 맞장구를 치고 나서 말을 이었다. "여 긴 어디나 나무가 울창하고 사람들도 명랑하네요! 안 그래요, 리토비노프 씨?..." "명랑하지요..." 하고 그는 잇새로부터 밀어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마차는 이윽고 호텔 앞에 멈춰 섰다. 리토비노프는 두 여행자를 위해 미리 예약해둔 방으로 그들은 안내하고, 한 시간 후에 다시 오겠노라고 약속한 뒤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 한동안 잠잠했던 괴상한 유혹에 다시 사로잡혔다. 이 방에는 어제부터 이리나가 도사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녀를 위하여 속삭이고 있었 다. 공기까지도 그녀의 은밀한 향취를 풍기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리토비노프는 다시 자기가 그녀의 노예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는 품속에 숨겨두었던 그 녀의 손수건을 꺼내어 살짝 대었다. 그러자 전신이 녹아 버릴 듯한 뜨거운 추억이 신묘한 독기를 뿜어 그의 피를 뛰게 하였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선택의 여지도 없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깨달았다. 타치야나가 불러일으킨 어두운 감동은 불 속에 던져진 눈처럼 녹아버려 회한의 생각은 마비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이미 그는 마음의 동요조차 느끼지 않 고 있었다. 깨끗한 사람을 속이는 위선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불신감이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 으나, 그것도 그다지 그의 신경을 자극하지는 못했다... 사랑... 이리나의 사랑 - 이것이야말 로 그의 진실이 되고, 법도가 되고, 그의 양심이 되었다... 선견지명도 있고 분별력도 있는 리토비노프였지만, 어떻게 하면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전혀 생 각해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두렵고 추악한 현재의 상황을 마치 옆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는 사람처럼 일종의 태평스러움마저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보이가 오더니 방금 도착한 부인들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하였다. 그가 보이를 뒤 쫓아가보니, 두 사람은 벌써 외출 준비를 마치고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날씨도 좋으니 지금 곧 바덴바덴 구경을 가고 싶다고 하였다. 특히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잠시 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서둘러댔다. 유명한 청담장 앞에 최신 유행 옷차림의 패거리들이 모여드는 시간은 아직 멀었다고 그가 말하자, 그녀는 다소 맥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리토비 노프가 그녀의 팔을 끼고 - 이리하여 공식 산책이 시작되었다. 타치야나는 숙모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면서, 침착하고 호기심에 찬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여전히 질문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룰레트가 빙빙 돌아가는 모습이며 풍채가 당당한 수위들의 모습 - 만일 다른 장소에서 그들을 만났다면 아마도 장관쯤 되는 줄로 알 았을 것이다 - 초록색 나사 위의 금화와 은화 더미, 그것을 재빨리 긁어모으는 갈퀴의 움직 임, 승부에 열중하고 있는 노부부들의 모습, 울긋불긋하게 짙은 화장을 한 매춘부들의 천한 모습... 이 모든 광경은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를 입도 벌리지 못할 만큼 흥분시켰다.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이 모름지기 분개해야 할 것들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다만 눈이 휘둥그레져 사방을 두리번거릴 뿐, 때때로 수위가 승부의 결과를 큰 소리로 알릴 적마다 얼른 몸을 돌 리는 것이었다... 룰레트의 안쪽에서 상아로 만든 공이 탕탕 튀는 소리가 들릴 적마다 그 소 리는 그녀의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한참 후 상쾌한 바깥 공 기를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는 겨우 기운을 회복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도박이라 는 것은 귀족계급이 생각해낸 부도덕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리토 비노프의 입술에는 쓴웃음이 감돌았다. 그의 말투는 토막토막 끊어졌고, 그의 태도는 귀찮은 듯, 마치 화를 내거나 권태에 사로잡혀 있는 듯해 보였다. 그러나 문득 타치야나를 뒤돌아본 그는 은근히 당황하였다. 자기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그 표정은 마치 내가 저 사람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을까 하고 자문하고 있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 덕여 보이자 그녀는 윙크를 했는데, 이어서 곧 무슨 말인지 묻고 싶은 듯한 눈길을 그에게 던졌다. 그 눈길은 마치 그가 실제로 있는 현재의 위치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기나 한 것 처럼 다소 긴장되어 있었다. 리토비노프는 부인들을 인도하여 청담장에서 나왔다. 그들은 러시아의 숙녀들이 모여 있 는 '러시아의 나무' 곁을 지나, 리히덴타르 가로수 길을 향해 걸어갔다. 그 가로수 길로 가는 도중에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걷고 있는 이리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남편과 포토우긴과 함께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리토비노프는 마치 흰 손수건 처럼 얼굴이 창백해졌으나,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녀와 스쳐지나치려는 순간 그저 고개를 숙여 인사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애교 있는, 그러나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타치야 나를 힐끔 쳐다 본 후 그냥 지나가버렸다... 라토미로프는 모자를 높이 들어올렸고 포토우긴 은 뭐라고 어물어물 입을 놀렸다. "저 부인은 누구죠?" 하고 갑자기 타치야나가 물었다. 그녀는 그때까지 거의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저 부인?" 하고 리토비노프는 앵무새처럼 되풀이해 말하였다. "저 부인 말입니까? 라토 미로프 부인입니다." "러시아 사람인가요?" "네." "당신, 그분과는 이곳에서 알게 되었나요?" "아니,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참 미인이네요!" "그분의 옷 보았니?" 하고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가 입을 열었다. "그 옷에 걸친 금붙이 만으로도 열 가구의 식구가 일년 동안은 넉넉히 살 수 있겠더라... 함께 있던 사람은 남편인 가요?" 하고 그녀는 이번에는 리토비노프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습니다." "굉장한 부자인가보지요?" "잘 모르겠어요. 그다지 큰 부자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어요." "어느 관직에 있는데?" "장군입니다." "그 사모님, 눈이 참 날카로우시더군요!" 하고 타치야나가 말했다. "그리고 그 눈빛도 보 통이 아니던데요. 생각에 잠긴 듯한, 그러면서도 쏘아보는 듯한... 전 그런 눈은 처음 보았어 요." 리토비노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자기에게 뭐라고 말할듯한 타치야나 의 시선을 느꼈으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으로, 그녀는 발 밑의 자갈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다. "어머... 저 도깨비는 누구지?" 하고 갑자기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가 외쳤다. 그녀가 가리 키는 곳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샤라반이라는 지붕이 낮은 사륜마차에 불그스름한 머리를 한 들창코 여자가 번쩍거리는 옷에 연보랏빛 스타킹을 신고 버젓이 도사리고 있었다. "도깨비라고요! 천만에요, 저분은 유명한 코라 양입니다." "누구라고요!" "코라 양이에요... 파리의... 명사지요." "뭐? 저 귀신 같은 여자가? 하지만 저런 추물이 또 어디 있담?" "그것과 이것은 다르지요."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구미가 떨어진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세상에, 당신이 사시는 바덴바덴이라는 고장은!" 하고 그녀는 얼마 후에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저 벤치 에 좀 앉아도 괜찮을까요? 피로한데." "물론이지요,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 앉아서 쉬기 위한 벤치니까요." "그렇지만 모르지! 파리의 가로수 길에도 벤치는 놓여 있지만 거기에 앉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는데 말이야." 리토비노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이 순간, 여기서 불과 두어 발짝 떨어진 저쪽에서 자기와 이리나가 마음을 털어놓았으며, 그것도 모든 것을 결정해버렸음을 상기하 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 스쳐지나간 그녀의 한쪽 뺨에 떠올랐던 조그마한 장밋 빛 홍조를 생각하고 있었다...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가 벤치에 앉자 타치야나도 따라서 옆 에 앉았으며, 리토비노프는 좁은 길에 그대로 서 있었다. 타치야나와의 사이에는 - 이것이 다만 그 혼자만의 기분인지는 몰라도 - 분명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점점 더... "아니야, 그 여자는 도깨비야, 요물단지야!" 하고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측은해하는 듯 고개를 옆으로 흔들면서 말했다. "그 여자의 옷을 팔면 열 가구가 아니라 백 가구의 식구라 도 넉넉히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더군. 그 모자 밑으로 드러나 부스스한 빨간 머리에 다이 아몬드가 번쩍이던 것 봤어? 대낮에도 다이아몬드를 달고 다니다니... 그러기도 하나?" "그 부인은 원래 머리칼이 붉지 않아요" 하고 리토비노프가 주의를 주었다. "붉게 염색을 한 거지요. 요즘 유행이거든요."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또다시 두 손을 들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지만 말이지" 하고 이윽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우리 드레스덴에서는 아직 이런 추 태는 부리지 않는데... 그만큼 파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기 때문인가봐. 당신 생각은 어때 요, 리토비노프 씨?" "저요?" 하고 리토비노프는 대답했으나, 마음 속으로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하고 생각 하는 것이었다. "저요? 물론... 그거야..." 그런데 그때 발소리가 점차 크게 들리더니 누군가가 벤치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포토우 긴이었다. "안녕하세요, 리토비노프 씨!" 하고 그는 명랑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리토비노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포토우긴 씨. 방금 분명히 당신과 마주친 것 같은데요. 저기 저... 아니, 저 가로수 길에서." "그래요. 바로 나였어요." 포토우긴은 앉아 있는 부인들에게 점잖게 인사를 하였다. "그럼 포토우긴 씨, 소개해드릴까요? 이분들은 내 친척되는 부인들로, 방금전에 이곳 바덴 바덴에 도착하셨어요. 이쪽은 포토우긴 씨. 이름은 소존토 이바느이치. 우리와 같은 나라 사 람으로 역시 바덴바덴에 머물러 있어요." 두 여자는 일어나 허리를 약간 굽혔다. 포토우긴은 다시 고개 숙여 그들에게 인사했다. "이곳은 너무나 번잡해서 마치 박람회 구경이라도 하는 것 같군요" 하고 가느다란 목소리 로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가 말했다. 마음씨가 좋은 이 늙은 부인은 소심하긴 하지만 체면 을 유지하기 위해 조심하고 있었다. "여러분은 이곳에 오는 것을 마치 즐거운 의무처럼 생 각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바덴바덴은 분명 살기 좋은 고장입니다" 하고 포토우긴은 슬쩍 타치야나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매우 살기 좋은 고장이지요, 이곳 바덴바덴은." "옳은 말씀입니다. 다만 내가 보기에는 좀 지나치게 귀족적이 아닌가 싶군요. 나는 이 아 이와 함께 계속 드레스덴에서 살아왔어요... 그곳은 매우 운치가 있는 도시지요. 그런데 이곳 은 완전히 박람회 같은 기분이군요." '그멋진 표현이 마음에 들었나보군' 하고 포토우긴은 속으로 생각했다. "바로 말씀대로입니다" 하고 그는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대신 자연 이 매우 아름답고 입지조건만 보더라도 다른 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유리하지요. 함께 오신 아가씨께서는 무엇보다도 그 점이 마음에 드실 테지요. 그렇지 않으세요, 아가 씨?"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타치야나를 향해 정면으로 돌아서면서 덧붙여 말하였다. 타치야나 는 그 맑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포토우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어쩐지 의아스럽다는 듯 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이들은 대체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무엇 때 문에 리토비노프는 이제 막 낯선 고장에 도착한 우리에게, 그것도 대낮에 이런 정체 모를 사나이를 소개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이분은 현명해 보이면서도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고, 나를 바라보는 눈가에는 어쩐지 친밀감 같은 것이 서려있군... "네" 하고 얼마 후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매우 좋은 곳이에요." "무엇보다도 고성에 꼭 가보아야 해요" 하고 포토우긴은 말을 이었다. "특히 권유해드리 고 싶은 것은 이브르그를 한 번 찾아가보시라는 겁니다." "삭소니아의 스위스란 말씀이지요..." 하고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가 말참견을 하였다. 그 때 찢어지는 듯한 나팔소리가 가로수 길에 울려퍼졌다. 그것은 라시타트(1862년 당시 라시 타트는 독일 연방의 요새였다)에서 온 프러시아의 군악대가 불어대는 나팔소리로, 이들은 주일마다 한 번씩 육각당에서 콘서트를 열고 있었다.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악 소리가 들려와요!" 하고 그녀가 말하였다. "청담장의 음악이로군요... 이제 가봐야지. 4시 가까이 되었죠? 이제 사교계의 패거리들이 모여들 시간이지요?" "그래요" 하고 포토우긴이 대답했다. "지금이 바로 사교계의 패들이 유행을 경쟁할 시각 이지요. 게다가 음악도 좋고요." "그럼 어물어물 지체할 수 없군요. 타냐, 가자!" "저도 함께 가고 싶은데, 괜찮겠어요?" 포토우긴이 이렇게 물었으므로, 리토비노프는 깜짝 놀랐다. 포토우긴을 보낸 것이 이리나였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좋아요, 저... 저... 포토우긴 씨" 하고 그녀가 말끝을 맺자 그는 곧 이 노처녀의 팔짱을 꼈다. 리토비노프도 타치야나의 팔을 끼고 두 쌍의 남녀는 청담장으로 향하였다. 포토우긴은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와 여전히 여러 가지의 것들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러 나 리토비노프는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고 잠자코 걷고 있었다. 다만 두어 번 싱겁 게 타치야나의 팔을 자기 쪽으로 살짝 끌어 당겼을 뿐이다. 그 동작에는 어딘가 가식이 엿 보였으나 그녀는 모른 체 하고 있었으며, 리토비노프 자신도 사실 그 가식을 의식하고 있었 다. 그 동작에는 이미 옛날처럼 서로를 용서하고 용서받는, 두 마음의 굳은 결합을 확인하는 열의가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 지금 그가 헛되이 찾고 있는 어떤 말의 대용품에 지 나지 않았다. 그들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기 시작한 그 무언의 틈은 점점 더 벌어졌고 그 정확성 또한 더해갔다. 타치야나는 또다시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와 같은 상태는 그들이 청담장에 와서 네 사람이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후에도 계 속되었다. 다만 다행인 것은 군중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떠들썩한 소리와 음악 소리 덕분 에 리토비노프의 침묵이 일단은 그럴 듯하게 보인 것이다.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흔히 말하는 '상기' 가 되어버렸다. 포토우긴까지도 맞장구를 치며 그녀의 그칠 줄 모르는 호기심 을 만족시키기 위해 땀을 빼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옆을 지나가던 군중들 틈에서 뜻밖에 스한치코바 부인의 마른 모습이 나타나, 언제나 두리번거리던 카피토리나 마 르코브나의 눈이 더욱 반짝 빛난 것이었다.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곧 부인을 자기 테이 블로 불러들여 의자에 앉게 하고는 - 또다시 이야기의 홍수를 쏟아부었다. 포토우긴은 이번에는 타치야나 쪽을 향해 고개를 약간 숙이고는 정다운 표정을 지으면서 부드러운 어조로 조용히 말을 꺼내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그녀는 가벼 운 마음으로 그의 묻는 말에 척척 답변하였다. 그녀는 이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이 즐거웠다. 한편 리토비노프는 여전히 조요히 앉아서 굳은 미소를 입술에 띄우고 있었다. 이윽고 저녁 식사 때가 되었다. 음악이 그치고 군중들은 많이 흩어졌다. 카피토리나 마르 코브나는 마치 친한 친구나 되는 듯 얼굴을 상기시키면서 스한치코바 부인과 작별인사를 나 누었다. 그녀는 이제야 이 부인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되었으면서도 나중에 조카딸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저 여자는 원한 덩어리 같은 사람이야. 그 대신 어느 누구의 일에 대해서 나 낱낱이 잘 알고 있어. 그러나저러나 재봉틀은 꼭 마련해야 하는 거니?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 말이다." 포토우긴도 작별인사를 하였고, 리토비노프는 두 여자를 숙소로 바래다주었다. 그는 호텔 입구에서 한 통의 편지를 받고 구석으로 가서 남의 눈을 피해 급히 봉투를 뜯었다. 고급 편 지지에는 연필로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오늘 밤 7시에 잠깐 들러주세요, 부탁이에요. 이리나 리토비노프는 그 편지를 주머니에 쑤셔넣고 얼른 뒤돌아보며 다시금 히죽히죽 웃었다...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타치야나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저녁 식사는 테이블에서 다른 손님들과 함께 나누었다. 리토비노프는 카피토리나 마리크 브나와 타치야나 사이에 앉아 이상스러우리만큼 떠들어대며 두사람을 상대로 이야기를 나누 기도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여 다른 사람들을 웃기기도 하면서 포도주를 자기 몫으로 따르 고 또 부인들에게도 따라주었다. 그가 너무 가볍게 거동을 취하므로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던 프랑스의 보병사관과 스트라스브르에서 왔다는, 나폴에옹 3세처럼 턱수염을 기른 한 사나이가 거침없이 이쪽이야기에 뛰어들더니, 나중에는 아름다운 모스크바 부인의 건강을 위해 축배까지 드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리토비노프는 두 여자를 방까지 바래다주고 나서 그대로 잠시 창가에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잠깐 볼 일이 있으니 밖에 나갔다가 저녁 늦게까지는 반드시 돌아오 겠다고 말했다. 타치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백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카피 토리나 마르코브나는 저녁 식사를 끝마치고 나서 한잠 자는 습관이 있었다. 숙모의 이 습관 은 리토비노프도 잘 알고 있을 터이므로 타치야나로서는 그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남아주기 를 바라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아직 한 번도 그와 조용히 마주앉아 차분 히 이야기를 나눈 기회가 없었으므로, 그녀로서는 이것이 당연한 기대이기고 했다. 그런데 그가 외출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리고 오늘 하루 동안의 그의 태도는... 리토비노프는 군말이 나오지 않도록 얼른 밖으로 나갔다.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소파 에 비스듬히 누어 후 하고 두어 번 한숨을 내쉬더니,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한편 타치야나는 한쪽 구석에 있는 안락의자에 걸터앉아 두 손을 들어올려 굳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19 리포비노프는 유럽호텔의 계단을 재빨리 올라갔다... 열 세 살쯤 되는 칼믹족 특유의 교활 한 얼굴을 한 소녀가 그의 내방을 감시하고 있었던지 그를 보고 러시아러로 "어서 이리 오 세요. 아주머니께서 곧 오실 거예요" 하고 말했다. 그는 의아한 눈초리로 그 소녀를 바라보 았다. 소녀는 샐쭉 웃고 나서 "어서 어서 이리로" 하고 되풀이해 말하고 나서 그를 이리나 의 침실 맞은편에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하였다. 그 방에는 여행 가방과 트렁크가 가득 쌓 여 있었다. 소녀는 문을 닫고 그대로 사라졌다. 리토비노프가 채 뒤돌아볼 사이도 없이 문이 찰칵 열리더니 장밋빛 야회복에 머리와 목 할 것 없이 온통 진주로 장식한 이리나가 나타났다. 그녀는 재빨리 그의 앞으로 다가가 두 손을 꼭 쥐고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눈은 반짝거리고 가슴은 이제 막 고개를 뛰어 오른 사람처럼 크게 고동치고 있었다. "그쪽엔 안 가기로 했어요" 하고 그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지금 만찬회에 가야 해요. 하지만 꼭 뵙고 싶었어요... 그분이 약혼녀지요? 아까 만났을 때 함께 있던 분 말 예요." "네, 그랬었지요." 리토비노프는 '었지요' 란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런데 꼭 만나 뵙고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당신은 이제 완전히 자유의 몸이라는 것 을 생각해달라는 거예요. 어제 있었던 일이 조금이라도 당신의 결심을 굽히게 하는 동기가 되어서는 안돼요..." "이리나!" 하고 리토비노프가 외쳤다. "뭣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거요?" 그는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 말에는 몸과 마음을 다 기울인 정열이 깃들여 있었다. 이리 나는 순간 몰래 눈을 감았다. "아아, 사랑스러운 분!" 하고 그녀는 작은 소리로, 억제할 길 없는 감동에 떨면서 속삭였 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당신은 몰라요. 그렇지만 어제 일은 단지 당신에 게 빚을 갚은 것뿐이었어요. 옛날에 저지른 죄값을 치른 것뿐이지요... 아! 전 아무리 몸부림 쳐도 이제 와서 나의 청춘을 당신에게 바칠 수는 없어요! 용서해주세요. 하지만 그 때문에 제가 당신에게 어떤 의무를 짊어지게 하려는 건 아녜요. 또 당신이 누구하고 맺은 약속이든 휴지로 만들어도 좋다고 말하려는 것은 더욱 아녜요.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요. 아시겠 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당신은 바람처럼 자유의 몸이에요, 아무 구속도 받을 필요가 없어 요. 아시겠죠, 그것을 분명히 아셔야 해요!" "하지만 나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요, 이리나!" 하고 이번에는 리토비노프가 나지막한 소리로 가로막았다. "나는 어제 이후로 영원히 당신의 것이 되었어요... 당신의 곁이 아니면 나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어요..."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 그녀의 두 손에 입술을 갖다대었다. 이리나는 몸을 구부리고 있는 이 사나이의 머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요? 그럼 좋아요" 하고 그녀는 말하였다. "실은 저도 각오가 단단히 되어 있어요. 누 가 어떻게 되든 알 게 뭐예요. 당신이 결단을 내리면 그대로 되는 거예요... 저도 이제부터 영원히 당신의 것이에요... 당신의 것."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살짝 문을 노크했다. 이리나는 허리를 굽혀 한 번 더 속삭였다. "당 신의 것이에요... 그럼 이만!" 리토비노프는 자기 머리에 여자의 뜨거운 입김과 여자의 입술이 닿는 것을 느꼈다.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 그녀의 모습은 이미 방안에서 사라지고 없었고 다만 그녀의 옷이 서걱거 리는 소리가 복도에서 멀리 사라져갈 뿐이었다. 그리고 멀리서 라토보로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웬일이야! 안 가는 거야?" 리토비노프는 높다란 트렁크에 걸터앉아 얼굴을 두 손으로 가 렸다. 여자의 냄새가 싱그럽게 코를 찔렀다... 이리나가 그의 두 손을 꼭 쥐고 있었기 때문이 다. '호화판이야... 너무 호화판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까 그 소녀가 들어와 그의 불안한 눈을 바라보며 또 생긋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어서 오세요, 이럴 때에..." 하고 말했다. 그는 일어나 호텔을 나왔다. 곧장 숙소로 돌아간다는 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어쨌든 침착해야 한다. 심장은 불규칙적으로 고동을 쳤다. 대지가 발 밑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리토비노프는 다시 리히테타르의 가로수 길로 발길을 돌렸다. 그 동안에 그는 점점 확신 하게 되었다. 드디어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과 이제 와서 연기하거나 숨기거 나 속일 수도 없는 노릇이며 타치야나에게 고백하지 않을 수도 업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는 것을... 그녀가 그 숙소에서 꼼짝 않고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자기가 그녀에게 어떻게 고백하리라는 것도 예상되었다. 그런데 첫마디를 어떻게 시 작해야 할까? 무슨 말부터 꺼내어 할까? 그는 이미 정돈되고 품격 있는 자기 자신의 미래 를 깨끗이 단념해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들여다보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심연에 거꾸로 곤두 박질치려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지만... 실은 그것이 그가 당황해하는 원인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해결된 것이고, 문제는 다만 어떻게 자기를 얽어매는 사람 앞에 나서느냐 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타치야나가 참된 재판관이 되어 - 활활 불타오르는 검을 휘두르는 천사 가 되어 눈앞에 나타나준다면 죄를 저지른 자기로서는 한결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도리어 자기가 손에 독이 묻은 칼을 들고 상대방을 푹 찔러야 하다니... 아, 이 얼마나 지독한 추태인가! 그럼 차라리 그녀에게로 돌아갈까? ...이리나를 단념하고 그녀가 허용한 자유, 그녀가 인정해준 자유를 행사하기로 할까? ...아니, 그렇게 하느니 죽어버리는 편이 낫다! 아니, 그런 파렴치한 자유는 질색이다... 그러느니 기꺼이 몸을 진흙탕에 던지고,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동자로 내려다보게 하는 편이... "리토비노프 씨!" 하고 누군가가 서글 픈 듯한 목소리로 부르더니 한 손으로 어깨를 슬쩍 건드렸다. 그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포토우긴이었다. "용서하시오, 리토비노프 씨" 하고 상대방 은 미안해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방해가 되었을는지도 모르겠군요, 멀리서 당신의 모습이 보이기에... 하긴 지금은 나 같은 사람과 상대하고 있을 때가 아닐는지 모르지만..." "천만에. 참 반갑군요" 하고 리토비노프는 잇새로 밀어내는 듯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포토우긴은 나란히 서서 걸으면서 "참 기분 좋은 밤이로군요" 하고 입을 열었다. "날씨가 상당히 누그러지고... 아까부터 산책하고 계셨나요?" "조금 전부터지요." "쓸데없는 걸 물었나보군요. 실은 당신이 유럽호텔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거든요." "그럼 뒤를 쫓아오셨군요?" "그렇지요." "뭐, 나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그래요" 하고 포토우긴은 들릴락말락한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리토비노프는 멈춰 서서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창백했고 눈동자는 두리번거리면서 침착성을 잃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두고 고생해 온 흔적이 그 이지러진 얼굴에 베어 있는 것 같았다. "내게 무슨 말을 하시려는 겁니까?" 하고 리토비노프는 천천히 말하며 걷기 시작했다. "아! 네, 이거 실례했습니다. 지금 잠깐, 만일 별로 지장이 없으시다면 - 이 벤치에 앉았 다 가지 않으시렵니까. 그것이 이야기하기에 편할 것 같은데."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있으신 모양이군요" 하고 리토비노프는 그 옆에 앉으면서 말하였 다. "무슨 중대한 이야기라도 하시려나 보군요, 포토우긴 씨!" "아닙니다. 별이야기가 아니 라... 그리고 비밀도 아니고요... 실은 당신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저 약혼녀 되시는 분... 그분은 당신과 약혼한 사이지요? ... 아니, 요컨대 말입니다. 아까 당신이 내게 소개해준 그 처녀 말이죠 - 그분으로부터 내가 받은 인상은 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나는 세 상에 나서 지금까지 그처럼 호감이 가는 여자는 본 적이 없어요. 그야말로 보배 같더군요. 정말이지 천사의 영혼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이렇게 찬사를 아끼지 않는 포토우긴의 얼굴은 몹시 침통해 보였으므로 리토비노프는 그 표정과 말 사이에 미묘한 모순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타치야나 양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정당합니다." 하고 리토비노프는 말했다. "다만 내가 놀랄 수 밖에 없는 것은, 첫째로 당신이 그 아가씨와 나와의 사이를 알고 있다는 것이고, 둘 째는 당신이 한눈에 그 가치를 간파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 은 바로 그 점에 대해서 입니까?" "그 아가씨의 진가는 금방 알 수 있어요" 하고 포토우긴은 상대방의 질문을 무시해버리려 는 듯이 말하였다. "그분의 눈을 한 번 바라보기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해요. 그분은 이 지상 의 모든 행복을 차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그 행복을 그분에게 가져다줄 남자야말 로 부럽기 짝이 없는 운명의 총아지요! 그가 그 운명에 어울리는 사나이가 되도록 빌지 않 을 수 없군요." 리토비노프는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실례지만, 포토우긴 씨" 하고 그는 말했다. "실은 나로서는 이 화제 자체가 상당히 상식 밖의 일로 생각됩니다... 한 가지 묻겠는데, 당신 말에 포함되어 있는 암시는 곧 나를 가리키 는 것이겠지요?" 포토우긴은 얼른 답변하지 못했다. 보아하니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모 양이었다. "리토비노프 씨" 하고 그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이라는 사람을 완전히 오해하 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진실한 소리에 귀기울이는 능력을 갖고 있 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더구나, 그 진실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또 아무리 외간상 형편없는 것이라도 말예요.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당신이 호텔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했어요" "그래요, 유럽호텔에서 말이죠. 그래 그것이 어쨌다는 거요?" "당신이 거기서 누구를 만났는지도 알고 있어요!" "뭐라고요?" "당신은 라토미로프 부인을 만났지요?" "그래요, 그래서요?" "그래서라고요? ...당신은 저 타치야나와 약혼한 사이면서 라토미로프 부인을 만나러 간거 요. 당신은 그 부인을 사랑하고... 그 부인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요?" 리토비노프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왈칵 솟아올랐다. "뭐요, 이게 무슨 짓이요?" 그는 증오심에 불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쓸데없는 농담인가요, 스파이 행위인가요? 어디 분명히 가려냅시다." 포토우긴은 그에게 피로한 시선을 던졌다. "피토비노프 씨, 내 말에 너무 화내지는 말아주시오. 그리고 내겐 다른 사람을 화내게 할 능력도 없어요. 결코 그런 의도로 이야기를 시작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지금의 나로서는 농담이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고요."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요. 당신의 의도에 전현 불순한 요소가 없다는 것은 나도 믿는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렇게 묻고 싶군요 - 대에 무슨 권리로 당신은 남의 사사로운 감정상의 문제까지 간섭하는 거요? 무슨 근거로 당신은 그 ... 멋대로의 상상을 자신있게 사 실로 간주하는 거요?" "멋대로의 상상이라고요? 만일 이것이 나 혼자만의 터무니없는 상상이라면 당신은 그렇게 화 낼 것도 없지 않아요! 그리고 권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물에 빠지려는 사람에게 손을 내 밀 권리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나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어요." "염려해주셔서 고맙군요" 하고 리토비노프는 발끈하여 비꼬았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런 염려는 일체 거절하고 싶군요. 뿐만 아니라 나는 사교계의 부인들이 순진한 청년을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린다느니, 상류사회는 썩어빠졌다느니 하는 말을 쓸데없는 소리라고 생각하 고 있고, 또 어느 의미에서는 배격해야 할 일이라고 봐요. 그러니 제발 구제의 손길 같은 것 을 뻗치는 수고는 하지마시고 나를 편안히 물에 빠지게 내버려두시오." 포토우긴은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리토비노프를 바라보았다. 숨이 가쁜 듯 입술을 삐죽거 리고 있었다. "내 얼굴을 잘 보시오. 누가 뭐래도 당신은 아직 젊어요." 이 한마디가 드디어 그의 입에 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의 가슴을 쾅 하고 쳤다. "대체 당신은 나를 흔히 굴러 다니 는 독선적인 도학자나 설교가쯤으로 밖에 생각지 않는단 말인가요? 중요한 포인트를 이해하 지 못하고 있나 본데, 설사 그것이 아무리 강한 것일지라도 그까짓 당신에 대한 한 가닥 동 정심만으로 내가 이런 일에 참견할 사람으로 보입니까? 그리고 내가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주제넘거나 낯짝이 두껍다는 이유로 당신에게 꼼짝없이 비난받을 짓을 할 그런 사람으로 보 입니까? 문제의 성질이 전혀 달라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지금 이렇게 당 신 앞에 있는 이 사나이는 당신과 같은 그 감정 때문에 무너지고 산산조각이 나 결국 완전 히 신세를 망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런 사나이가 그 감정이 두려운 결과로부터 당신을 미리 보호하려는 것 뿐이지요. 게다가... 게다가 그 상대가 같은 부인이기 때문이지 요!" 리토비노프는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설마... 대체 당신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당신은... 당신은, 포토우긴 씨? 그렇다면 베리스카야 부인이라는 사람은... 그리고 그 계집아이는..." "아니 그렇게 꼬치꼬치 물을 것이 아니라... 나를 믿어주시오! 이것은 무서운 이야기로, 여 기서 말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베리스카야라는 부인도 잘 모를 뿐만 아니라 그 소녀도 내 자식이 아닙니다. 다만 나로서는 모든 것을 혼자서 떠맡았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그러기를 원했거든요. 그 사람은 그럴 필요가 있었지요. 그렇지 않았다면야 내가 뭣 때문에 이 진절머리나는 바덴바덴에 와 있겠어요? 이래도 아직 당신은 내가 한 가닥 동정심에서 당 신에게 경고하고 있는 거라고 달콤하게만 생각하실건가요? 어떻게 단 1분일들 그와 같은 상 상을 하실 수 있겠어요? 하긴 그 선량하고 아름다운 아가씨, 그러니까 당신의 그 약혼녀가 불쌍해서 견딜 수 없는 건 사실에요. 그러나 당신들의 장래가 어떻게 되든... 당신들 두 사람 이 어떻게 되든 내가 참견할 계제는 아닙니다. 다만 내가 염려하는 것은 그분의 신상입니다. 그 분이 또 죄를..." "아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포오우긴 씨" 하고 리토비노프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당 신과 나는, 당신의 말에 의하면 둘 다 같은 입장에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지금 의 그 훈계를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지는 않습니까? 그런데도 내가 아직 당신의 걱정을 또 다른 감정의 수치로 돌려서는 안된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질투 때문이다 이 말씀이지요? 아, 젊은 사람이라 할 수 없군요. 그런 유치한 생각은 당신의 수치입니다. 지금 내 입에서 얼마나 쓰디쓴 경험담이 쏟아져나오고 있는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 수치입니다. 아니, 내 입장이 당신과 같다니요... 나는, 나는 이미 - 늙어빠진, 우스꽝스러운, 독으로도 약으로도 쓸 수 없는 얼빠진 놈에 지나지 않지만... 당신은 달라요! 그건 새삼 말할 나위도 없지요. 아마 당신이라면 이런 역할은 자밋 도 견뎌내지 못할 거요. 그런 것을 내가 연출하고 있는 거요. 기꺼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 오! 그런데도 질투라니! 털끝만한 소망도 없는 자는 질투조차도 할 수 없는 거요. 게다가 지 금과 같은 감정을 경험하는 것도 나로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나는 다만 두렵기만 해 요. 아주 뜻밖의 일이 되어버렸어요. 내가 처음에 그 여자로부터 당신을 속죄하고자 하는 그 녀의 감정이 결국 그녀를 여기까지 몰고 오게 되리라고는!" "그런데 실례지만 포토우긴 씨, 마치 당신은 우리들의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나 한 것 같은 말투로..." "난 아무것도 모르지만, 사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이제 와 서 그 여자를 제지시킬 수는 없어요. 그녀는 이미 던져진 돌처럼 수렁 밑바닥까지 굴러떨어 지기 전에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여자예요. 또 단순히 내 이야기만으로 당신이... 그 여자에 게 얽매여 있는 당신이... 곧 단념하리라고는 아무리 내가 바보라 해도 기대할 수는 없겠지 요.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하기로 하죠. 나잇살이나 먹은 사람이 자제하지 못하고 이렇게 떠 벌려 미안하군요. 하지만 결국 이런 사실을 알았으니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 겠지요. 또 어쩌면 내 이야기 중에 한 가지쯤은 당신의 심금을 울려 그 여자나 당신 자신도, 그리고 저 죄 없는 아름다운 아가씨도 파멸로 인도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생기지도 모르 고요... 아니, 그렇게 화낼 건 없어요. 땅바닥을 치지 마세요! 그런다고 내가 겁을 내거나 주 저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질투 때문이 아니며, 또 난 지금 주책을 부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원한다면 당신의 발 밑에 꿇어엎드려 손을 모아 애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뭐 걱정하 실 건 없어요. 모든 것을 비밀로 해둘 테니까요. 나는 당신을 보호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포토우긴은 가로수 길을 걸어 이미 주위에 퍼진 저녁 어스름 속으로 곧 사라져버렸다. 리 토비노프는 만류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무섭고 어두운 이야기...' 라고만 말했을 뿐 포토우긴은 리토비노프에게 더 이상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우리도 이에 대해 약간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의 일이다. 포토우긴은 재무부에 근무하던 당시 레이젠바프 백작에게 다녀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것은 여름의 일이었다. 포토우긴은 서류를 꺼내들고 백작의 별 장에 찾아가 며칠을 묵었다. 그 당시에 이리나는 백작의 집에 와 있었는데, 그녀는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고 해서 결코 내려다보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외면하거나 하지는 않았으므로, 백작 부인이 여러 차례 그녀의 지나친 모스크바풍의 정중하지 못한 태도를 꾸짖을 정도였 다. 그런데 이리나는 목까지 단추를 채운 제복 차림에 몸가짐이 단정한 이 하급관리가 실은 매우 총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진해서 때때로 그와 잡담을 나누었 는데... 그는... 이윽고 남 몰래 그녀를 뜨겁게 사모하게 되었다... 남 몰래 가슴에 품은 사모 -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이 지나갔다. 백작은 외부 인사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포토우긴은 이 리나를 보지 못하게 되었으나, 그 모습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 그 후 3년이 지난 어느 날 포토우긴은 얼굴도 잘 모르는 어떤 중년 부인으로부터 뜻밖의 초대를 받았다. 그 부인은 처음에는 말하기 좀 거북해하는 눈치였으나, 이윽고 그에게 지금 부터 자기가 하는 이야기를 혼자만 알고 있으라고 당부하더니... 어떤 처녀와 결혼하지 않겠 느냐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사교계에서 화려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꼭 결혼해야만 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 당사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암시만 주었을 뿐, 즉 시 포토우긴에게 돈을... 거액의 돈을 줄 것을 약속하였다. 포토우긴은 이 뜻밖의 일에 너무 나도 기가 막혀 화도 낼 수 없었다. 물론 그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부인은 그의 앞으 로 보내온 한 통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이리나가 보낸 것이었다. "당신은 인격이 높은 친절하신 분이에요" 하고 서두는 시작되고 있었다. 당신이라면 나를 위해 어떤 일이든지 해주시리라고 나는 믿어요. 이런 희생을 당신에게 부탁드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심으로써 당신은 내게 있어 소중한 어떤 사람을 구해주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여성을 구해주는 것은 바로 나를 구해주는 것이 되지요... 어째서냐고는 묻지 말아주십시오. 다른 사람에게는 이같은 소원을 감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지만, 당신에게만은 두 손을 내밀어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 나를 위해 소원 을 들어주세요. 포토우긴은 깊이 생각해보고는, 이윽고 이리나 양을 위해서라면 자기가 힘이 되어주겠다 고 말 하고는 다만 만일 가능하다면 직접 그 사람의 입으로 그 희망을 듣고 싶다고 덧붙여 말하였다. 그들은 당장 그날 밤에 만났다. 이야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그 부인 외에는 아무도 그런 모임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리나는 이미 레이젠바프 백작 의 집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어째서 당신은 하필 내게 이런 부탁을 하게 되었습니까?" 하고 포토우긴은 그녀에게 물 었다 그녀는 그의 장점과 호감이 가는 부분에 대해 이것저것 늘어놓다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역시" 하고 말을 돌렸다. "당신에게는 사실대로 말해야겠군요. 난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도 잘 알고 있어요 -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거예요." 이어서 그녀는 자초지종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엘리자 베리시카야는 고아였다. 친척들은 그녀를 냉대했으며 오로지 그 유산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녀는 일이 다급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녀를 구해냄으로써 이리나는 모 든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는 이 인물 - 현재 이리나와 매우 가까운 사이인 이 여인에게 성 의를 표시하려는 것이다... 포토우긴은 잠자코 오랫동안 이리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승낙하였다.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눈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로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도 눈물을 흘리기는 했지만 - 그 눈물의 성질은 다른 것이었다. 이미 몰래 성 사시키기로 한 이 결혼은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권위 있는 강한 손길로써 모든 장애를 배 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그 여인은 복통으로 소란을 피우더니... 그 자리에서 계집애 를 낳아놓고는... 독을 마시고 죽어버린 것이다. 그 계집애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포토우긴 은 그 계집아이를 그 여자의 손, 즉 이리나의 손에서 받아 자기기로 한 것이다. 무섭고 어두 운 이야기는... 몰래 덮어두기로 하자. 독자들이여, 그냥 이대로 덮어두기로 하자! 리토비노프가 숙소로 돌아가려고 마음먹은 것은 그후 한 시간이 훨씬 지나서였다. 이윽고 숙소 근처까지 왔을 때, 그는 갑자기 등뒤에서 발소리를 들었다. 누군가가 그의 뒤를 밟고 있는지, 그가 빨리 걸으면 저쪽에서도 걸음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가로등 아래까지 와서 리 토비노프가 홱 돌아보니 그 사람은 라토미로프 장군이었다. 흰 넥타이를 매고 값비싼 외투자락을 열어젖힌 채, 웃저고리의 단춧구멍에는 금줄로 별 모양의 십자 훈장을 달고 있는 이 장군은 만찬회에서 혼자 돌아오는 참이었다. 정면으로 리토비노프를 노려보는 그 시선은 노골적으로 멸시와 증오심을 나타내고 있었으 며, 또한 그 자세 하나하나는 완강하고 도전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으므로 리토비노프도 이를 악물고 그 도전에 대항하여 한바탕 겨루지 낳고서는 사나이로서의 체통이 서지 않을 듯 생각되었다. 그런데 장군이 리토비노프를 뒤쫓아와 어깨를 나란히하게 되자, 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확 달라졌다. 여는 때와 마찬가지로 그 장난기 어린 경쾌한 표정으로 변하여 연한 보랏빛 장갑을 낀 오른손으로 번쩍거리는 모자를 높이 들어올리는 것이었다. 리토비노프는 잠자코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그리고 각자 자기 길을 걸어갔다. '아마도 무언가를 눈치챈 모양이다!' 하고 리토비노프는 생각했다. '하다못해...좀더 나은 위 인이었다면!' 하고 장군은 장군대로 생각하였다. 리토비노프가 두 여자가 묵고 있는 방에 들어가보니 타치야나는 숙모와 함께 트럼프놀이 를 하고 있었다. "당신도 참 어지간하군요!" 하고 카리토리나 마르코브나는 큰 소리로 말하며 트럼프를 테 이블 위에 던졌다. "도착한 첫날부터 밤새 어딜 가셨었어요? 우린 기다리다 지쳐서 지금 막 욕을 퍼붓고 있는 참이었어요..." "전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요, 숙모님!" 하고 타치야나가 말 했다. "그야 넌 얌전한 아이니까! 그렇지만 좀 부끄러워할 줄도 알아야지, 약혼자 앞이 아니 냐!" 리토비노프는 몇 마디 사과를 하고는 테이블에 앉았다. "왜 트럼프를 그만두셨어요?" 하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리토비노프가 물었다. "나 원 기가 차서! 난 권태를 몰아내기 위해서 트럼프를 해요.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말예 요... 그런데 지금은 당신이 돌아왔으니 염려할 게 없잖아요." "만일 저녁 음악회에 가고 싶으시다면" 하고 리토비노프가 말하였다. "기꺼이 안내해들리 겠어요."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조카 딸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가보세요, 숙모님. 전 아무래도 좋아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이대로 호텔에 남 아 있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하긴 그래! 그럼 차나 마시기로 할까. 러시아풍에 모스크바류로 사모바르를 끓여서 말이 야. 그리고 그동안 지내온 이야기나 하자. 우린 아직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으니까." 리포비노프는 차를 가져오도록 일렀으나 이야기에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는 끊 임없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다라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 되었다. 그녀의 태도는 변함없이 여전히 자연스러웠으나... 다만 그 시선만은 한 번도 리토비 노프와 마주 치지 않고 그의 마음을 위로하듯 그저 얼굴 위로 스쳐갈 뿐이었다 - 그녀의 얼굴빛은 평소보다 한결 더 창백하였다.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두통이라도 일어난 게 아니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타치야나는 처음에는 '아녜요' 하고 대답하려고 했으나, 다시 생각하고 나서 "네, 약간" 하 고 대답했다. "여행으로 피로했던가 보죠" 하고 리토비노프가 말하였다. 그는 왠지 열없어 얼굴을 약간 붉혔다. "그런가봐요." 타치야나는 다시 이렇게 대답했으나 시선은 그의 얼굴을 훑어보고 있었다. "빨리 자도록 해라, 타냐." "네, 곧 자려고 해요, 숙모님." 테이블 위에 프랑스어로 된 여행안내 책자가 놓여 있었다. 리토비노프는 소리내어 바덴바 덴 부근의 기사를 읽어내려갔다. "모든 것이 다 그렇겠지만" 하고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가 가로막았다. "잊어서는 안 될 게 하나 있어. 여기는 생베 무척 싼 모양이더라. 혼수감으로 사가야겠 어." 타치야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아직 뭐 그럻게 서두를 것 없잖아요, 숙모님. 숙모님 자 신의 일은 조금도 생각지 않으시는가 보군요. 아무래도 숙모님 옷을 한 벌 맞추셔야겠어요. 보세요, 이곳 사람들의 옷차림이 얼마나 화려한가." "너, 그게 무슨 소리냐? 난 어디까지나 사치와는 담을 쌓은 사람인데! 그야 나도 그 사람 들처럼 잘 생기기나 했으면 모르지. 가만 있자, 뭐라고 했더라, 당신이 잘 아는 그 부인 말 예요, 리토비노프 씨. 이름이 뭐랬지요?" "잘 아는 부인이라니요?" "아, 오늘 만난 구분 말예요." "아, 그분 말입니까!" 리토비노프는 일부러 태연한 척 이렇게 말했으나, 속으로는 겸연쩍은 생각이 들었다. '아 니지!'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언제까지나 이럴 수만은 없지!' 그는 약혼녀의 곁에 있다. 그년에게서 한 자도 떨어져 있지 않은 자기 주머니 속에는 이 리나의 손수건이 들어 있다.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가 잠깐 일어나 옆방으로 갔다. "타냐... 하고 리토비노프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가 이와같은 애칭으로 그녀를 부른 것 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실은 나... 당신에게 중대한 말을 해야겠는데..." "어머나, 그래요? 언제요? 지금?" "아니, 내일." "그러세요! 내일. 네, 좋아요." 순간 불쌍하고 가엾다는 생각이 리토비노프의 가슴에 가득 찼다. 그는 타치야나의 손을 잡고 마치 죄인처럼 조용히 입을 맞췄다. 그녀는 어쩐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여 그 키스가 별로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 밤 1시가 좀 지나서 조카딸과 같은 방에서 자고 있던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가 갑자 기 고개를 쳐들고 귀를 기울였다. "타냐!" 하고 그녀는 소리쳤다. "너 울고 있니?" 타치야나는 한동안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뇨, 숙모님" 하고 이윽고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였다. "코감기에 걸 렸나봐요." 20 '나는 무엇 때문에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이튿날 아침 리토비노프는 자기 방 창가에 앉 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신경이 예민해져서 어깨를 잔뜩 추어올렸다. 그가 타치야나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은, 자기에게서 모든 퇴로를 끊어버리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창가에는 이리나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정오쯤 와달라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포토우긴은 말이 연달아 머릿속에 떠 올랐다. 그것은 희미하기는 하지만 불길한 예감으로 다가왔다. 그는 마음이 상하긴 했으나 그 목 소리에서 벗어날 수느 없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요?" 하고 리토비노프가 물었다. "마침 계시는군요. 문 좀 열어주시오!" 하고 빈다소프가 굵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대답했다. 손잡이가 찰칵거렸다. 리토비노프는 증오심이 북받쳐 얼굴이 창백해졌다. "난 지금 방에 없어요" 하고 그는 잘라 말했다. "뭐라고요, 방에 없다고요? 거 무슨 농담이오?" "방에 없다잖아요. 돌아가시오." "이거 괄시가 대단하구려. 돈 좀 꾸러 왔는데..." 하고 빈다소프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구두 뒤꿈치로 바닥을 차면서 서 있었다. 리토비노프는 하마터면 문을 열 고 뛰어나갈 뻔하였다. 이 뻔뻔스러운 사나이의 목을 비틀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요즘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로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는 거의 울상이 되어 냉수를 한 모금 마시고 무의식중에 가구의 서랍을 모두 자물쇠로 잠그고는 타치야나의 방으로 갔 다. 그녀는 혼자 있었다.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쇼핑하기 위해 상점을 둘러보러 나가고 없었다. 타치야나는 소파에 앉아 손에 조그마한 책을 펴들고 있었으나 별로 읽고 있지도 않았을 뿐만 아 니라, 실은 그 책이 무슨 책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심장은 크게 고동쳐, 흰 블라우스 깃이 분명히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규칙적인 리듬으로 떨고 있었다. 리토비노프는 멈칫했으나... 어쨋든 그녀의 옆에 걸터앉아 아침 인사를 나누고는 슬쩍 웃어 보 였다. 그녀도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가 방에 들어오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는데, 그 인 사는 매우 정중하긴 했지만 따뜻한 정은 엿보이지 않았으며, 그녀는 그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았 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싸늘한 손가락을 쥐어주고 나서 곧 손을 빼고 다시 책을 펴들었다. 리토비노프는 이런 분위기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인 화제를 꺼내어 이야기한다는 것은 타 치야나를 모욕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별로 이야기를 재촉하는 듯한 표정은 보이지 않 았지만, 그 일거일동은 시종일관 '기다리고 있어요. 무슨 말씀인가요?' 하고 묻고 있는 듯했다. 그 는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 어젯밤 줄곧 이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 입 밖에 낼 첫마디를 미리 생각해두지 않았으므로, 어떻게 이 잔인한 침묵을 깨뜨려버려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타냐" 하고 그는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어제 저녁에 내가 당신에게 중대한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지요. (그는 드레스덴에서 단둘이 마주앉았을 때부터 그녀를 '그대' 라고 부르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는 참인데, 미리 당부해두지만 제발 나를 원망하지 말고 당신에 대한 내 심정을 제발 믿어주시오..." 그는 일단 말을 중단하였다. 숨이 막혔던 것이다. 타치야나는 여전히 꼼짝하지 않고 그의 얼굴 을 외면하고 있었다. 다만 아까보다 책을 더욱 꼭 쥐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하고 리토비노프는 말을 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조금이라도 서로를 속이는 일 이 있어서는 안 될 줄 알아요. 난 당신을 매우 존경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을 속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난 당신의 고귀한 마음씨와 자유를 존중할 줄 아는 인간 이라는 거요. 그리고 설사 내가... 설사, 물론..." 리토비노프는 가슴이 뜨금하였다. "아니, 그런? ..." 그는 겨우 알아들을 만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소?...나로서는 전혀 그럴 만한 이유가..." "그럼 아니가요? 말씀해주세요, 어서요!" 타치야나는 몸을 돌려 리티보노프와 정면으로 마주앉았다. 머리를 뒤로 젖힌 그녀의 얼굴이 리 토비노프의 얼굴에 바싹 다가와, 지금까지 오랫동안 그를 외면하고 있던 그녀의 두 눈이 그의 눈 을 삼켜버릴 듯이 쏘아보고 있었다. "아녜요?" 하고 그녀는 되풀이하고 물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이렇다 할 변명도 하지 않았다. 가령 그녀가 그의 말을 곧이듣고, 그의 거짓말이 그녀를 구해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도 그는 그 순간 거짓말을 할 수 는 없었다. 지금의 그에게는 그녀의 시선으로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다. 리토비노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녀 역시 이젠 대답을 들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침묵 자체에서, 그리고 힘없이 감은 두 눈에서 그 답변을 듣고 있었다 - 이 윽고 그녀는 상반신을 일으켰는데 그만 손에 든 책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리토비노프는 문득 그 순간까지는 그녀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녀가 반신반의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 그의 수법은 얼마나 추하였던가! 추태 바로 그 자체였다. 그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타치야나!" 하고 그는 외쳤다. "당신은 알아줘야 해요 - 내가 이처럼 흉한 처지에서 당신을 만 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가를. 그것도 전적으로 나의, 오로지 내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두렵기 만 해요! 내 심장은 갈기갈기 찢어졌어요. 나도 나 자신을 알 수 없어요. 나도 당신도 모든 것을 잃어버렸어요... 모든 것이 끝장났어요. 타냐, 모든 것이! 난 꿈에도 생각지 않았어요 - 내가 ... 이 내가 당신에게 이와 같은 타격을 주리라고는! 바로 나의 둘도 없는 마음의 친구에게, 나를 수호하 는 천사에게...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 어제와 같은 그런 하루를 보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 각지 못했어요!" 타치야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그는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만류했 다. "아니, 내 말을 좀더 들어줘요. 나는 당신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고 있지만 당신의 용서를 빌기 위한 건 아니오 - 당신이 나를 용서한다는 건 있을 수도 없으며, 또 그래서도 안 되겠지요 - 당 신의 마음의 벗은 파멸됐어요. 그리고 그는 지금 지옥으로 떨어져가고 있는데, 거기에 당신을 끌 어들이고 싶지는 않아요... 나를 구할 수는 없어요. 설사 당신이 구하려 한다 하더라도 내가 당신 을 밀어낼 거요... 나는 파멸되었소, 타냐. 이제 끝장이 났소!" 타치야나는 리보비노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파멸이라고요!" 하고 그녀는 그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이 파멸되다 뇨?" "그렇소, 타치야나. 나는 파멸되었소. 과거의 모든 것, 소중했던 모든 것, 지금까지 내가 사는 보람으로 여기고 있던 모든 것이 - 나에게서 떠나버렸소. 모든 것은 무너져버리고 모든 것은 결 딴났어요... 당신은 방금 전에 이젠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건 그렇지 않아 요. 타치야나,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은 식은 게 아니오. 다만 다른 무서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감 정이 덮쳐와 나를 삼켜버린 거요. 힘이 닿는 데까지 저항은 해보았지만..." 타치야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썹이 한쪽으로 일그러졌다. 창백한 얼굴에 검은 그림 자가 서렸다. 리토비노프도 일어났다. "당신은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군요?" 하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게 누군지 저도 짐작이 가요... 아마도 어제 길에서 마주친 그분이겠지요. 안 그래요? 그럼 좋아요! 이렇게 된 이상 제게 남은 일은 이것뿐일 거예요. 저는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이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하겠다고 당신 입 으로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타치야나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아마 도 이 마지막 말을 리토비노프가 한쪽 귀로 흘려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아직 기대하고 있었겠지 만, 그는 아무말도 하지 낳았다.) 전 다만 당신에게 말씀드릴고 싶을 뿐이에요... 우리들의 약속을. (리토비노프는 머리를 숙였다. 당연히 맞아야 할 매를 묵묵히 맞고 있는 사람처럼.)" "당신이 화내는 것은 당연해요" 하고 그는 말했다. "비겁한... 거짓말쟁이라고 욕하는 것도 당연 하고요." 타치야나는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는 과거에도 당신을 욕한 적이 없고 지금도 욕하지 않아요, 리토비노프 씨. 오히려 전 찬성 하고 있어요. 아무리 쓰디쓴 진실이라 하더라도 어제의 일보다는 나아요. 앞으로 우리의 생활은 어떻게 되어갈까요..." '앞으로 우리의 생활은 어떻게 되어갈까요?' 이 말은 리토비노프의 가슴에 한결 비통하게 울렸다. 타치야나는 침실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잠시만 저 혼자 있게 해주세요, 리토비노프 씨 - 나중에 또 뵙고 더 이야기해요. 아무튼 너무 나 뜻밖의 일이라, 저에게는 기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해요... 혼자 있고 싶어요... 이것이 교만이 라면 너그럽게 용서해주세요. 또 뵙겠어요." 타치야나는 이렇게 말하고 재빨리 밖으로 나가 방문을 잠갔다. 리토비노프는 천천히 거리로 나왔다. 그는 정신이 몽롱하게 느껴졌다. 어둡고 육중한 무언가가 그의 가슴 깊숙이 가라앉아 도사리고 있었다. 살인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러한 심정을 알 것 이다. 그런데 그는 한편으로는 귀찮고 무거운 짐을 겨우 내려놓은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도 들었 다. 타치야나가 너그럽게 대해주었기 때문에 그는 더욱 크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는 자기가 잃 어버린 모든 것을 뼈아프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그는 후회가 되는 한편 화가 치밀어 가슴이 쥐어짜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 남아 있는 유일한 은신처인 이리나에게로 발길을 재촉하면서도 - 동시에 이 여자가 몹시 미웠다. 요 며칠째 리토비노프의 마음은 날로 더욱 심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갈등이 그를 괴롭히고 초조하게 만들었으며, 그는 그 혼돈 속에서 머 릿속이 텅 빈 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일만 갈망하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길이라고 좋으니, 그 길로 가고 싶었다. 이제 더 이상 어둠 속은 헤매고 싶지 않았다 - 본래 리토비노프와 같은 적극적인 인간은 정열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살아가는 의미 자체를 잃어버리게 하기 때문이 다... 그런데 자연은 이론 같은 것에는 맞장구를 쳐주지 않는 법이다. 자연에도 자연의 이론이 있 어, 우리는 그것이 수레바퀴처럼 우리를 짓누른다 해도 그것을 이해하거나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타치야나와 헤어져 숙소를 나온 리토비노프의 머릿속에는 오직 이리나를 만나고 싶은 생 각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의 발길은 자연히 그녀의 호텔 쪽을 향하였으나, 공교롭게도 집에는 장 군이 함께 있었다 - 확인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수위가 그렇게 일러준 것이다 - 그는 안으로 들 어가지 않았다. 그로서는 이제 와서 자기 감정을 속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 여 그는 천천히 청담장 쪽으로 걸어갔다. 리토비노프가 감정을 속이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는 것은 도중에 만남 보로시로프와 피시차르킨에 의해 더욱 확인되었다. 즉 보로시로프에게는, 자 네는 북처럼 속이 텅 비었다며 핀잔을 주었고 피시차르킨에게는, 자네의 권태에는 그만 졸도할 지경이라고 공박했던 것이다. 빈다소프와 마주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로 만일 그와 만 나게 되었더라면 '굉장한 소동'이 벌어졌을 것이다. 두 청년은 멍청해졌다. 특히 보로시로프는 장교로서의 체면을 내걸고 결투에 호소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자문할 정도 였다. 그러나 그는 고골리의 피로고프 중위처럼 카페에 들어가 샌드위치로 요기로 하였다. 리토비노프는 멀리서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의 모습을 보았다. 그 얼룩무늬의 케이프를 걸치고 그녀는 이 상점 저 상점을 쏘다니고 있었다. 그는 이 인정 많고 수다스럽고 고상한 할멈의 얼굴 을 차마 대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포토우긴을 생각하고 어제의 이야기를 상기하였다. 그런데 그때 그는 무엇이 슬쩍 불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정체를 파악할 수 없으면 서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설사 지상에 떨어진 그림자의 입김 같은 것이 전해왔다 해도 그처럼 느끼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곧 그것이 이리나라는 것을 직 감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불과 대여섯 발짝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한 부인과 함께 팔짱 을 끼고 나타났다. 두 사람의 눈은 곧 마주쳤다. 이리나는 아마도 리토비노프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간파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슈 발츠발트산의 작은 나무 시계를 가득 늘어놓은 상점 앞에 멈춰 서더니, 고개를 끄덕여 그를 부르 고는 그 시계 중의 하나를 가리키면서 "뒤쪽에 물감으로 뻐꾸기를 그린 예쁜 무낮판을 잘 보세 요, 멋있죠?" 하고 말하더니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고 이야기를 계속하듯이 이렇게 덧붙였다. (그 러는 편이 오히려 다른 사람의 주위를 덜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시간 후에 와 주에 요. 혼자 있으니까." 그런데 그때 마침 부인들에게 아첨 잘하기로 이름난 베르디에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옷이 매우 근사한 단풍빛깔 같다느니, 어깨까지 덮은 스페인풍의 야트막한 모자가 훌륭하다느니 하며 칭찬을 잔뜩 늘어놓는 것이었다. 리티보노프는 곧 인파에 파묻혀 사라졌다. 21 "그리고리... 두 시간 후 이리나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두 손을 그 의 어깨 위에 얹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지금 어서 말해보세요. 아무도 오지 않을 때." "내 이야기 말이오?" 하고 리토비노프가 말하였다. "나는 행복해요, 행복해! 그것뿐이오." 이리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긋 웃고 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답변이라고 할 수 없잖아요." 리토비노프는 생각에 잠겼다. "그럼 말하지요... 꼭 들어야겠다면 말이오. (이리나는 눈을 크게 뜨고 몸을 약간 세웠다.) 나는 오늘 내 약혼녀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해버렸어요." "다 말씀하시다니요? 제 이름까지도요?" 리토비노프는 불안한 것이 듯이 두 손을 모았다. "천만에요, 이리나. 왜 그런 것까지 말하겠어요, 내가..."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럼 대체 뭘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 지 않다고 말했지 뭐요." "그 까닭을 물었겠지요?" "나는 솔직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지요." "그래... 그래, 어떻게 되었어요? 그분이 승낙하던가요?" "아, 이리나! 그녀는 실로 얌전한 아가씨요! 헌신과 고결 - 그 자체의 처녀거든요." "그렇지만, 그렇긴 하지만... 그분으로서는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었나요?" "게다가 한 마다의 비난도, 한 마디의 원망도 말도 전혀 입 밖에 내지 않았어요. 현재 자기의 일생을 망쳐놓고 자기를 기만하다가 여지없이 버린 남자 앞에서 말이오..." 이리나는 손톱을 매만지고 있었다. "어때요, 그리고리... 그분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나요?" "그럼, 이리나. 사랑하고 있었지." 이리나는 잠자코 옷의 주름을 바로잡았다. "솔직히 말해서" 하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전 이해 가 잘 가지 않아요. 어떻게 당신이 그녀에게 고백할 용기가 났는지 말예요." "어떻게라니, 이리나! 설마 당신은 나에게 그녀 앞에서, 그 순진한 영혼 앞에서 거짓말이나 연 극을 하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아니면 당신 생각에는..." "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어요" 하고 이리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솔직히 그분에 대 한 생각 같은 건 별로 염두에 두지도 않았어요... 전 한꺼번에 두 사람씩이나 생각할 순 없거든 요." "그러니까 결국..." "그래 어떻게 됐어요? 그분은 이곳을 떠나나요? 그 순진한 영혼의 소유자 말예요?" 하고 또 다 시 이리나는 상대방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그것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고 리토비노프는 대답했다. "한번 더 만나서 이야기 하기로 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지 않겠지요." "아, 무사히 돌아가야죠!" "그래, 이곳을 곧 떠날테죠. 그런데 난 지금 그 여자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당신이 내게 한 말이오. 당신이 내게 한 약속 말이오." 이리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고마운 줄을 아셔야죠! 당신은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시는 거예요?" "물론 이리나, 만족하지 못해요. 당신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어요. 그러나 난 아직 불만이 적 지 않아요. 이런 내 심정을 당신은 잘 모를 거요." "그럼 제가..." "그래요, 당신도 알고 있잖소. 생각해봐요, 당신이 한 말을, 그리고 당신이 쓴 글을. 나를 정부 쯤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해요. 난 이런 숨어 있는 사나이의 비참한 역할은 질색이오. 나는 나 자신 의 목숨뿐만 아니라 또 한 사람의 목숨까지 당신의 발 밑에 던져버렸어요. 나는 모든 것을 버렸 어요. 모든 것을 산산조각으로, 의리도 인정도 없이 깨버렸어요. 그러나 그 대신 나는 믿어요. 굳 게 믿고 있어요 - 당신이 약속대로 나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리라는 것을..." "함께 도망치자는 거예요? 네, 언제든지(이 말을 듣자 리토비노프는 의기양양하여 그녀의 두 손 에 키스했다) 각오가 되어 있어요. 전 약속을 지키겠어요. 그러나 거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 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고 계세요?... 당신은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나요?" "나는 아직 무엇을 생각해볼 만한 여유도 준비할 시간도 없어요. 그러니 다만 한마디로 응함으 로써 나를 실천에 옮기게 해줘요. 그렇게 하면 한 달이 못 되어서..." "아니, 한 달요? 두 주일 후면 우린 이탈리아로 떠나요." "아니, 두 주일이면 충분해요. 그런데 이리나! 당신은 어쩐지 내 이야기를 하찮게 여기고 있는 것 같군요. 어쩌면 당신은 이것을 공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도 이젠 어린 아이가 아니고 또 지금에 와서 공상 운운할 때도 아니잖아요.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첫걸음이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요. 내가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지, 그것 역시 잘 알고 있고요. 그러나 나 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어요. 생각해봐요! 나는 어떤 한 가지만을 위해서 과거의 모든 연루를 영원 히 끊어버려야만 했어요. 그것은 당신 앞에 희생의 제물로 드린 그 여자의 눈에 내가 멸시해 마 땅한 허풍선이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도 그래요!" 이리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정색을 하였다.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머, 잘못 보셨군요, 리토비노프 씨! 만일 제가 당신과 함께 도망친다면, 당신은 저를 위해, 오로지 저 때문에 그 일을 단행한 사람에 그칠 뿐이에요. 혈관 속에 피 대신 젖물이 흐르는, 어떤 점액질 아가씨 앞에서 사나이의 체통을 잃고 싶지 않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사람의 일쯤이야 제가 알 게 뭐예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제가 호감을 갖고 있는 그분이 이렇게 가련한 존재로 비참한 역할을 하다니, 저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에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더욱 비참한 역할 을 알려드리지요 - 자기 마음에 무엇이 움트고 있는지 그것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의 역할 말예 요!" 이번에는 리토비노프가 발끈하였다. "이리나!" 하고 그는 소리쳤다. 그때 그녀는 갑자기 그의 가슴에 몸을 던지며 여자답지 않은 억센 힘으로 그를 껴안았다. "미 안해요, 용서하세요" 하고 그녀는 떨리는 소리로 말하였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리! 보세요, 전 이렇게 고약하고 질투심이 많은 나쁜 여자예요. 그러니까 아시겠죠 - 저에게는 역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당신이 아껴주지 않으면 안 돼요! 저를 구해주세요. 제가 아직 조금이라도 맥이 뛰고 있는 동안 이 밑이 없는 늪으로부터 건져주세요! 그래요, 도망쳐요. 그들에게서, 이런 사회에 서 빠져나가 어느 먼, 아름답고 자유로운 나라로 가버려요! 어쩌면 이 이리나는 당신이 지불한 여 러 가지 희생보다 더 값진 여자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화내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잊지 마세요 - 당신은 제 목숨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사양치 않고, 또 저 역시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여자라는 것을!" 리토비노프는 너무나도 기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리나는 전보다도 더 힘차게 그 싱싱한, 탄 력이 넘치는 전신으로 육박해왔다. 그는 마구 흐트러진 여자의 향기로운 머리 위에 몸을 굽히고, 감사의 법열에 넋을 잃은 채 그것을 손으로 애무하지도, 거기에 입술을 대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리나, 이리나" 하고 그는 거듭 불렀다. "나의 천사..." 그때 갑자기 그녀가 머리를 쳐들고는 "저건 제 남편의 발소리예요. 자기 방으로 들어갔나봐요" 하고 소곤거리고는 재빨리 안락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리토비노프는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어딜 가시는 거예요?" 하고 그녀는 여전히 나지막한 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냥 계세요. 어차 피 그 사람도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으니까요. 왜 제 남편이 두려우세요?" 그녀는 문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래요, 제 남편이에요. 곧 이리로 올 거예요. 무슨 말이든 좋으니 제게 말을 하세요." 리토비노프는 갑자기 아무런 생각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내일 극장 안 가실래요?" 하고 그녀는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한 컵의 물>을 공연하고 있 어요. 오래된 각본이긴 하지만, 프레시가 굉장한 활약을 하지요... 모두들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달달 떨게 된다나봐요." 그녀는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그나저나 잘 생각해보세요. 참, 잊어버리 기 전에 말해둬야지. 우리 돈은 전부 남편이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제겐 보석이 있어요. 스페인 으로 가시지 않겠어요, 어때요?" 그녀는 다시 커다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여자 배 우들은 모두들 그렇게 뚱뚱해지는지 몰라요. 그 마드레느 브로안도 그래요... 아무 얘기든지 좀 하 세요. 잠자코 계시지만 말고요. 좀 어지럽군요. 하지만 저를 믿으세요... 내일 만날 장소는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그런데 그 아가씨에게는 말하지 말걸 그랬어요... 그건 참으로 근사했어요!" 그녀는 갑자기 이렇게 외치더니 괴상하게 웃고 나서 손수건의 가장자리를 짝짝 찢어버리는 것 이었다. "들어가도 좋소?" 하고 옆방에서 라토미로프가 물었다. "어서요..., 어서요..." 문이 열리면서 장군이 방으로 들어왔다. 리토비노프를 보자 미간을 찌푸렸으나 마지못해 인사 만은 하였다. 즉 상체를 약간 흔들어 보였을 뿐이다. "손님이 계신 줄은 몰랐군" 하고 그는 말하였다. "실례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바덴바덴에서 톡 톡히 재미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저... 리토비노프 씨?" 라토미로프는 리토비노프의 성을 부를 때에는 으레 말이 잘 연결되지 않았다. 번번이 잊어버려 얼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이... 그것도 그렇지만 또 하나, 거리에서 만났을 때 모자를 높 이 들어 보이는 버릇도, 요컨대 그에 대한 혐오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네, 이곳 생활은 권태롭지 않군요, 장군." "그래요? 나는 바덴바덴이라면 이제 진저리가 나요. 우린 곧 이 고장을 떠날 생각이에요. 그렇 지, 이리나? 바덴바덴은 이제 냄새가 난단 말이야. 그건 그렇고 난 오늘 500프랑이나 땄어! 어때 신나지, 당신도?" 이리나는 아양이라도 부리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어디 있어요, 화장품을 좀 사야겠는데요." "나중에 주지, 나중에 말이야... 아니 벌써 가시게요, 저... ㄹ리토비노프 씨?" "네, 방금 전에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라토미로프는 또다시 상체를 흔들었다. "그럼 안녕히!" "안녕, 리토비노프 씨" 하고 이리나가 말하였다. "약속을 지키셔야 해요." "아니, 약속이라니?... 무슨 약속이오?" 남편이 물었다. 이리나는 생긋 웃어 보였다. "안 돼요, 이건... 비밀이니까요. 잠깐 여행에 관한 거예요... 그저 마 음내키는 대로 아무 데로나 말예요. 당신 알고계세요, 스타르 부인이 쓴 글?" "아, 그것 말이지? 알고 말고. 아주 멋진 삽화도 곁들여 있더군." 라토미로프는 아내와 사이가 원만한 듯, 흉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22 '이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하고 리토비노프는 거리를 거닐면서 생각하였다. 또 가 슴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듯했기 때문이다. '일은 매듭이 지어진 것이다. 그녀는 약속을 지킬 것이고, 나는 필요한 수단을 빈틈없이 강구하면 된다... 그런데 그녀는 아직 반신반의하는 데가 있 어...' 그는 머리를 한 번 흔들었다. 자기가 세운 계획이 자기 자신에게도 어딘가 기묘하게 비쳐 보였 다. 어쩐지 억지로 장단을 맞춘 듯한, 현실에서 동떨어진 일처럼 생각되었다. 인간은 언제까지나 한 가지 상념에서만 위안을 받는 게 아니라, 상념은 만화경의 색유리 조각처럼 점점 변모되어 가 는 것이다... 들여다보면 눈에 비쳐오는 모습은 전혀 다른 것이다. 강한 피로감이 리토비노프를 사 로잡았다. 단 한 시간만이라도 쉬고 싶었다. 그런데 타치야나는? 그는 홱 돌아서서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태연하게 호텔로 돌 아왔다. 다만 한 가지 머리에 떠오른 것은, 오늘 자기는 마치 공처럼 여자들의 손에서 손으로 계 속 넘겨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결말을 지어야 한다. 그는 호텔로 돌아오자, 총총걸음으로 아무 생각없이, 망설임이나 혼미도 느끼지 않고 곧장 타치야나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를 맞이한 것은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였다. 그녀를 보자 그는 곧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 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엾게도 할멈은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흩어진 백발이 지저 분하게 들러붙은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분노와 탄식과 놀라움이 뒤섞여 있었을 뿐 아니라 공포와 상심의 빛마저 띠고 있었다. 그녀는 리토비노프에게 달려들 기세였으나 간신히 자제하고 나서,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은 그에게 애원하는 듯, 그를 죽여버리고 싶은 듯, 혹은 이것은 다 꿈이다, 있 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고 자기 자신에게 설득하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이제야 당신은... 겨우 돌아왔군요..." 하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때 저쪽 방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 투명할 정도로 창백한, 그러면서도 침착한 얼굴을 한 타 치야나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한쪽 팔로 숙모를 살짝 껴안 듯이 하여 자기 옆에 앉혔다. "당신도 그리 앉으세요, 리토비노프 씨" 하고 그녀는 넋나간 사람처럼 문어귀에 서 있는 리토비 노프에게 말하였다. "또 뵙게 되어 반갑군요. 숙모님께 당신의 결심을,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의 결심을 얘기했어요. 숙모님도 동감하시고 잘됐다고 하셨어요... 서로에 대한 사랑없이 행복을 바랄 수는 없으니까요. 서로 존경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해요. (이 존경이라는 말에 리토비노프는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하느니 일찌감치 헤어지는 편이 나아요. 안 그래요, 숙모 님?" "그야 그렇지" 하고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입을 열었다. "물론 그래, 타뉴시카. 네 가치도 몰 라주고... 그런 결심을 하는 사람과는..." "숙모님..." 하고 타치야나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잊지 마세요. 약속하신 것 말예요. 숙모 님 자신이 언제나 제게 말씀하셨잖아요 - 타냐, 무엇보다도 소중한 건 진실과 자유다 하고요. 그 러나 진실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한건 아니예요. 자유도 마찬가지고요. 그렇지 않다면 인간에게는 아무 공로도 없게 될 게 아녜요?" 그녀는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의 흰머리에 가볍게 키스하고 리토비노프를 향해 말을 계속하였 다. "전 숙모님과 함께 바덴바덴을 떠나기로 했어요... 그렇게 하는 편이 우리 마음이 홀가분할 테 니까요." "언제 떠날 생각인데요?" 리토비노프는 건성으로 이렇게 물었다. 그는 이와 비슷한 말을 아까 이리나에게도 했음을 상기 하였다.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앞으로 나서려고 했으나 타치야나가 상냥하게 그 어깨에 손을 대어 만류하였다. "되도록 빨리요." "실례지만, 어디로 가실 생각인가요?" 리토비노프는 또다시 건성으로 물었다. "먼저 드레스덴으로 갔다가 다음에는 아마 러시아로 가게 될 거예요." "그런 것을 새삼스레 물 어서 어쩌자는 거예요, 리토비노프 씨..." 하고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가 외쳤다. "숙모님, 저 좀 보세요, 숙모님!" 타치야나가 입을 열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타치야나" 하고 리토비노프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알아주시겠지요 - 내가 지금 살을 도려내 는 듯한 괴로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타치야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토비노프 씨"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두기로 해요... 당신을 위해서라고 말해서 안 된다면 저를 위해서 부탁이에요. 제가 당신과 어제 오늘 사귄 것도 아니잖아요. 지금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일부러 그런 이야기를 해서 상 처를 더욱 긁어댈 필요가 어디 있겠어요... (그녀는 말을 멈췄다. 보아하니 고조된 흥분에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삼키려 애쓰고 있는 듯하였다. 그것은 성공하였다.) 그럴 필요가 없지요. 아물 수 없는 상처 말예요, 그건 시간의 손에 맡기기로 해요. 그건 그렇고 부탁이 하나 있어요, 리토비노 프 씨. 미안하지만, 지금 편지를 가져올 테니 우체국에 가서 좀 부쳐주세요 꽤 중요한 편지예요. 지금 숙모님이나 저는 그럴 짬이 없어요. 부탁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곧 가져올 테니까요..." 타치야나는 걱정스러운 듯이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눈썹을 찡그 리고 입술을 꽉 깨문 채 험상궂은 표정으로 위풍있게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타치야나는 다만 방긋 웃어 보이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런데 타치야나가 나가고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험상궂은 표정이 싹 가시면서 벌떡 일어서더니, 발끝으로 리토비노프에게 재빨리 다가가 전신을 굽혀 그의 눈을 노려보면서 흐느끼는 목소리노 나지막하게 말하였다. "아, 이게 무슨 꼴이람!"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이봐요, 리토비노프 씨,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무슨 악몽이라도 꾸는 게 아닌가 모르 겠군. 당신이 타냐를 버리다니, 그애를 내동댕이치다니, 약속을 휴지조각으로 만들다니! 당신이 어 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소, 리토비노프 씨. 우리가 돌담처럼 믿고 있던 당신이! 당신이! 당신! 당 신이! 그래, 옛날 이름으로 부르지. 그리샤(그리고리의 애칭), 당신이...?"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잠깐 숨을 돌렸다. "당신은 그애를 죽인 거예요, 리토비노프 씨?" 하고 그녀는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눈물이 두 뺨에서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그애가 지금은 허세를 부려 참고 있어요. 당신은 그걸 모른 체하고 있고요. 그에는 본래 성미가 그래요. 그애는 절대로 우는 소릴 하지 않지요. 절대로 자기 자신을 동정하는 애가 아니거든요. '숙모님, 우린 체면을 잃지 말아야 해요!' 하고 말예요. 그렇지만 체면이고 뭐고 알 게 뭐예요. 눈앞에 파멸이, 죽음이 닥쳐왔는데... 타치야나가 옆방에서 의자를 달가닥거렸다. "그래요, 죽음이 눈앞에 닥쳐왔어요" 하고 노파는 한결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대체 어쩌다가 이 꼴이 되었어요? 당신, 마술에라도 걸린 거예요? 당신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애정이 가득 담긴 편지를 그애한테 써보내지 않았나요? 더군다나 당신 같은 결백한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요? 난 아시다시피 낡은 편견에 물들어 있지 않아요. 난 자유주의자예요. 또 타냐도 그렇게 교육 시켰고요. 그애도 자유정신을 갖고 있어요..." "숙모님!" 하고 옆방에서 타치야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일단 맹세한 일은 - 신성한 의무예요, 리토비노프 씨. 더구나 당신이나 또 나와 같은 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에겐 말예요! 만일 우리가 의무를 인정치 않는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의무를 저버려서는 안 돼요 - 더구나 자기의 마음가짐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작용할지에 대해 생각지 않다니, 될 말인가요! 그건 철면피예요... 그래요 - 죄악이에요! 그걸 어떻게 자유라 할 수 있겠어요!" "숙모님, 이리 좀 와주세요, 네" 하고 옆방에서 또다시 티치야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갈게, 그래 곧..."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는 리토비노프의 한 손을 잡았다. "아니 화나셨어요, 리토비노프 씨...? ('제가요? 화가 났느냐고요?' 하고 그는 외치려 했으나 혀 가 돌아가지 않았다.) 난 당신의 비위를 건드리기 위해 말한 거 아녜요. 천만에요! 그럴 여유가 어디 있어요! 오히려 당신에게 부탁하겠어요 -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마음을 돌리세요. 그애를 생으로 죽이지 말고, 또 당신 자신의 행복도 짓밟지 마시고요. 아직은 그애가 당신을 믿어요, 그 리샤. 그애는 당신을 믿고 말고요. 아직 깨진 건 하나도 없어요. 그애는 당신을 무척 사랑하고 있 고 또 앞으로도 그애만큼 당신을 사랑하는 여자는 아마 없을 거예요! 이런 고약한 바덴바덴 따위 는 내동댕이쳐버리고 우리 함께 떠나도록 해요. 다만 잠깐 동안만 그 마법에서 빠져나오면 돼요. 그리고 중요한 건 사람의 딱한 사정을 알아주는 거예요. 딱한 사정을..." "숙모님은..." 하고 타치야나가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 는 들은 체도 않았다. "단 한 마디 '네' 하고만 말해주세요" 하고 그녀는 리토비노프에게 졸라댔 다. "뒷일은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고개를 조금 끄덕여 보이기만 해도 좋아요! 그 고개를 조금만. 한 번 봐요, 이렇게!" 리토비노프느 이 순간 죽으라면 기꺼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네!' 라는 대답은 입에서 나오지 않았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타치야나가 편지를 들고 나왔다. "아까 말씀드린 편지... 곧 부치러 가주시겠어요?" 리토비노프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여인은 분명 자기를 얽어매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타치야나가 평소보다 훨씬 더 후리후리하고 날씬해 보였다. 일찍이 본 일이 없을 만큼 아 름다움에 빛나는 그 얼굴은 마치 조각처럼 장엄한 석상인 양 보였다. 가슴도 파도치지 않았으며, 키톤(고대 그리스의 하의)처럼 꼭 맞는 단색 의상은 대리석에 아로새긴 직물처럼 똑바로 기다란 주 름이 잡혀 발끝까지 덮여 있었다. 타치야나는 눈앞에 있는 리토비노프만을 정면으로 지고시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 냉정한 눈길 은 역시 조각의 그것이었다. 그는 그 눈길 속에서 자기에게 내려진 판결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자기 앞에 내민 그녀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말없이 방에서 나왔다. 카피토리나 마르토브나는 타치야나의 곁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그러나 타치야나는 그녀의 포옹 을 뿌리치려다 눈물을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얼굴은 금세 붉게 물들었으나 "자, 서두르세요!" 하고 말하고 나서 침실로 들어갔다.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도 고개를 숙이고 그 뒤를 따랐다. 리토비노프의 손에 맡겨진 타치야나의 편지는 드레스덴에 사는 친지인 어느 부인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 부인은 가구가 딸린 아담한 셋집을 몇 채 갖고 있었다. 리토비노프는 그 편지를 우 체통에 넣자 그 조그마한 종이와 함께 자기의 모든 과거, 모든 생애를 무덤 속에 던져넣은 것 같 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교외로 나가 포도밭 사이의 오솔길을 오랫동안 정처없이 거닐었다. 마치 한여름에 붕붕거 리며 날아 다니는 파리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감이 따라다녀 아무리 몰아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이 마지막 만남의 자리에서 그가 연출한 역할은 너무나 한심스러웠다. 그는 호텔로 돌아와, 얼마 후 호텔 보이에게 두 여자의 동태에 대해 물어보았다. 보이의 답변에 의하면 그들은 그가 나가자 곧 마차로 정거장으로 가서 우편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났다고 했 다. 짐을 꾸리고 숙박비를 지불하는 것은 이미 아침 나절에 마쳤다는 것이다. 타치야나가 리토비 노프에게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쳐달라고 부탁한 것도 그를 멀리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는 혹시나 해서 수위에게, 그 여자들이 무슨 쪽지라도 남겨놓고 가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다. 수위는 없다고 대답하고는 오히려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 주일 동안 머물러 있을 예정 으로 빌린 방을 이처럼 갑자기 내어주고 떠난 것이 이 사나이로서는 이상하게 생각되었던가보다. 리토비노프는 얼른 돌아서서 자기 방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은 거의 책상 앞에 앉아 썼다가 는 찢고, 또 썼다가는 찢는 일을 되풀이하였다... 그가 겨우 일을 마쳤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 일이란 이리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23 그가 이리나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내 약혼녀는 어제 떠났소. 다시는 만나지 못할 테지요...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그것조차 나는 모르고 있어요. 지금까지 내가 그리워하고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을 그녀는 함께 가지고 가버린 것입니다. 내 예정도 계획도 속셈도 다 그녀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나의 노력 자체도 남김없이 수 포로 돌아가고, 오랫동안에 걸친 노력도, 나의 모든 연구도 지금에 와서는 아무 의의도 용도도 없 어졌습니다. 그것들은 모조리 죽어버렸습니다. 나의 자아, 지금까지의 나를 어제 날짜로 매장해버 렸습니다. 나는 그것을 분명히 느끼고 이 눈으로 보며, 또 가슴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깝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 는 것은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리나 씨!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 다. 그와 같이 사멸해버린 과거의 일체, 이제는 연기처럼 사라져 티끌이 되어버린 일체의 시도나 희망 속에 오직 하나, 생명을 지닌 영원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바치는 나의 사 랑이오. 이 사랑 이외에 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을 나의 유일무이한 보물 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해요. 나의 모든 것은 이 사랑 속에 있고, 이 사랑이 곧 나의 전부이며, 그 속에 내 미래도 사명도, 성스러운 것, 내 고향, 그 밖의 모든 것이 깃들여 있습니다! 당신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지요, 이리나. 내가 온갖 미사여구에 친숙하지 못하며, 오히 려 그것과는 적이라는 것도 당신은 알고 있을 테지요. 그러니 지금 내가 나의 감정을 나타내려고 애쓰는 나머지, 때때는 강한 문구를 사용한다손치더라도, 당신은 그 진심을 의삼하거나그것을 과 장으로 간주하지는 않겠지요. 이것은 한 소년이 덧없는 한때의 정열을 못 이겨 되는 대로의 맹세 를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주절주절 늘어놓는 따위가 아니라, 이미 세월의 시련을 거친 한 사나 이가 문자 그대로 틀림없는 진실이라고 인정한 것을 솔직히, 거의 두려움에 가까운 심정으로 표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당신의 사랑은 나를 위한 모든 것과 바꾸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모든 것. 그렇지요, 모든 것과! 생각해보시오. 나로서 그 모든 것을 다른 남자의 손에 넘겨줄 수 있을까요? 당신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권리를 그 남자에게 허용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 당신이 앞으로도 그 남자의 것이라면 나의 모든 존재, 내 심장의 피 한 방울까지도 모조리 그 남자의 것 이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나라는 인간은...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한단 말입니까? 뒤로 물러나 방관자가 되라는 건가요... 자기 생활의 방관자가! 아니, 그건 불가능해요. 성립될 수 없는 이야기 요! 그것 없이는 이 세상에서 숨쉴 보람이 없는, 그런 소중한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눠갖거나, 그저 남 몰래 한 부분만을 취해야 하다니... 그야말로 허위요, 죽음이요, 나에게는 그런 권리가 전혀 없 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희생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남 을 희생시켜도 괜찮다는 권리는 대체 누가 맡겨줄 수 있는 것일까요? 내가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결코 에고이즘에서가 아니오. 에고이스트였다면 이런 문제는 처 음부터 끄집어내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것이 한결 마음이 가벼울 테니까. 분명 내 요구는 부담스 러운 것이 사실이며, 그것을 보고 당신이 어처구니없어해도 나는 이해할 수 있소 - 당신은 현재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놈팡이들을 미워하고 싫어해요. 당신은 머리를 장식해준 화관을 밟아 버린 후에 세상 풍문, 즉 당신이 싫어하는 자들의 견해를 상대로 싸울 만한 힘이 과연 당신에게 있을까요? 그것을 당신 자신에게 잘 물어보시오. 난 이제 와서 당신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만은 잊지 말아주시오. 당신은 이미 한 번 영화의 유혹에 항거하지 못한 적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잃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서 조금밖에는 줄 수 없는 사나이오! 그럼, 나의 마지막 말을 잘 들어보시오 - 만일 당신이 조만간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라나설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 아시겠소, 난 대담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오. 나 자신은 전혀 도외시하고 - 당신이 만일 장래의 불안이나 몸에 배인 환경과 인연을 끊거나 고독, 혹은 세상의 손가락질 등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면, 요컨대 당신에게 자신이 없다면 서슴지 말고 곧 그렇다 고 말해주시오. 그러면 나는 떠나겠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기야 하겠지만, 진실을 속이지 않 는 당신에게 축복이 있기를 빌면서 떠나겠소. 그러나 만일 당신이, 나의 빛나는 아름다운 여왕인 당신이 나 같은 보잘것없는 사나이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참으로 운명을 같이할 각오가 되어 있다 면 - 함께 손을 잡고 가시밭길을 떠나도록 합시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내 결심은 불변이오. 전부 가 아니면 무지요! 이건 참 미친 짓이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어요. 이리나, 나는 당 신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소. 당신의 G. L 이 편지는 리토비노프로서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을 그다지 충분히 그 리고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과장되어 있거나 어느 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 는 흔한 문구가 많고 아무래도 어색한 대몰이 더러 있어, 그가 찢어버린 다른 몇 통의 편지보다 낫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으로 완성된 편지로, 어쨌든 요점은 표시되어 있으며 - 이제 기진맥진한 리토비노프로서는 또다시 다른 한 통의 편지를 머리로 짜낼 만한 기력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기 생각을 문학적으로 표현할 능력도 갖고 있지 못하고, 이런 글에 서투른 자들이 늘 그 렇듯이 문체에 무척 고심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 쓴 편지가 제일 잘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마음 속에서 더욱 뜨겁게 우러나온 글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리토비노프는 이 편지를 이리나에 게 전해주었다. 곤 그녀로부터 짤막하게 갈겨쓴 쪽지가 왔다. '오늘 오세요' 하고 그녀는 서두에 쓰고 있었다. 그이는 오늘 하루 종일 외출하기로 되어 있어요. 당신 편지를 읽고 마음이 몹시 설레고 있어요. 너무 오랫동안 생각하고 생각한 나머지... 머리가 어지러워요. 무척 괴롭긴 하지만, 당신이 사랑해 주신다니 기뻐요. 당신의 I 리토비노프가 찾아갔을 때 그녀는 자기 방에 앉아 있었다. 그를 안내해준 것은 어제 저녁 계단 에서 기다리던 그 열 세 살짜리 소녀였다. 이리나 앞의 테이블에는 레이스가 가득 담긴 반원형 종이 상자가 뚜껑이 열린 채 놓여 있었고, 그녀는 한 손으로 그것을 고르는 체하고 있었다. 그리 고 다른 손에는 리토비노프의 편지를 들고 있었다. 방금 울음을 그쳤는지 눈썹은 촉촉했고 눈두 덩은 부어 있었다. 뺨에는 아직 닦아내지 않은 눈물 흔적이 남아 있었다. 리토비노프는 문지방에 멈춰 섰다. 그녀는 그가 방에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울고 있었소?" 그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녀는 얼른 몸을 돌려 한 손으로 머리를 매만지고 나서 방끗 웃었다. "왜 울었소?" 하고 리토비노프는 다시 물었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편지를 가리켰다. "그래, 그 편지 때문에..." 그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잘라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리 좀 앉으세요" 하고 그녀가 말하였다. "자, 손을요! 네, 저 울고 있었어요... 왜 그렇게 놀라 세요? 그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요?" 그녀는 편지를 내밀었다. 리토비노프는 걸터앉았다.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아요, 이리나. 그래서 편지에도 그렇게 쓰지 않았소... 나도 당신의 입장을 잘 알아요. 그러나 만일 당신이 내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믿고, 또 내가 그 편지에 쓴 것을 솔직히 이해한다면 당신의 눈물을 본 내가 어떤 심정일지 당신은 잘 알 거요. 나는 여기 피고로서 출두했어요. 그리고 나에게 내릴 선고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 죽느냐, 사느냐? 당신의 답변이 모든 것을 결정할 거요. 그런 눈길로 나를 바라보지 말아요... 옛날 모스크 바 시절의 눈이 떠오르니까." 이리나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녀 자신도 자기 눈길이 심상치 않은 것으 로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리?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제 답변 을 듣고 싶으시다니... 설마 제 답변을 의심하고 계신 건 아닐테죠! 제가 울고 있었다고 해서 애를 태우시나본데... 당신은 이 눈물의 의미를 모르고 계세요. 전 당신의 편지를 읽고 깊이 생각해 봤 어요. 당신은 이렇게 쓰셨더군요 - '당신의 사랑이 나의 모든 것을 점령해버렸다, 당신의 사랑이 내가 해온 연구까지도 전혀 쓸모없이 만들어버렸다' 고 말예요. 그렇지만 전 묻고 싶어요. 남자가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나중에는 싫증이 나서 일에 열중하고 싶어질 테고, 자기가 일을 소홀히하게 된 것이 누구 때문이냐고 짜증을 부리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 전 무서워 져요. 제가 걱정하는 건 그거예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요." 리토비노프는 이리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리나도 그를 주목하였다. 그것은 마치 서로 상대 방의 마음을 더욱 깊숙이 - 말이 도달하여 표현할 수 있는 고보다 더욱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 보 려는 듯하였다. "그건 괜한 걱정이오" 하고 리토비노프가 말하였다. "내 글이 서툴렀던가보지 - 싫증이 난다고 요? 무료해서 못 견딘다고? 당신의 사랑이 내게 새로운 힘을 가득 불어넣는데도? 무슨 소리요, 이리나. 나에게 있어서는 전세계가 당신의 사랑 가운데에 있소 - 그걸 믿어요. 그 세계에서 앞으 로 무엇이 싹틀지, 그건 나도 잘 모를 정도요!" 이리나는 생각했다. "우린 어디로 갈 겨죠?" 그녀가 속삭였다. "어디? 그건 나중 이야기지. 그런데 그렇다면 즉... 당신은 동의한다, 이말이죠? 동의하죠? 이봐 요, 이리나!" 그녀는 리토비노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으로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나요?" "물론, 아리나!" "나중에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으시겠어요? 언제까지나?" 그녀는 상자 쪽으로 몸을 굽히고 또다시 레에스 조각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화내지 마세요, 그리고리. 이런 상황에서 괜한 말을 해서 정말 미안해요... 전 어느 부인의 무 도회에 가야 해요. 그런데 방금 상자를 보내왔으니 오늘중으로 골라둬야 해요. 귀찮아 죽을 지경 이에요!" 그녀는 갑자기 이렇게 외치더니, 얼굴을 상자에 갖다대었다. 눈물이 또다시 두 눈에서 흘러내렸 다... 그녀는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레이스를 적실 뻔했기 때문이다. "이리나, 당신 또 우는군..." 하고 리토비노프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하였다. "네, 또요" 하고 이리나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 그리고리, 저를 괴롭히지 말아줘요! 그리 고 당신 자신도 괴롭히지 마시고요... 자유로운 사람이 되세요! 제가 울면 어때요? 그런데 무엇 때 문에 이처럼 눈물이 쏟아지는지 알 수가 없군요. 제 결심이야 당신이 이미 그 귀로 들어서 알고 계실 테고, 또 그 결심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가 그... 저, 뭐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래그래, '전부가 아니면 무' 에서 찬성한 것도 당신은 굳게 믿고 계실 거예요... 그 밖에 또 무엇이 필요한 가요? 피차 자유롭게 되리로 해요! 무엇 때문에 사슬에 얽매인단 말예요? 우린 지금 이렇게 단둘 이 있어요. 당신은 저를 사랑하시고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런데 우린 서로 상대방의 마음을 탐 지하는 것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다는 거예요? 자, 제 얼굴을 잘 보세요 - 전 당신 앞에서 두 마 음을 품고 저 자신을 감추거나 또 아내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 을 한 마디도 말한 적이 없고..., 그렇다고 나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있는 것만도 아녜요. 오히려 제가 죄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고, 그 사람에게 저를 죽일 권리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 지만 그러면 어때요! 그러니까 자유로운 인간이 되자는 거 아녜요. 우리들의 이 하루는 우리들의 한평생이거든요." 그녀는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리토비노프를 내려다보았다. 가벼운 미소를 띄고 눈을 가늘게 뜬 채 팔뚝께까지 드러나 보이는 한쪽 팔로 눈물이 몇 방울 반짝이는, 한 무더기의 머리칼을 얼굴에 서 제쳤다. 화려한 레이스 목도리가 테이블에서 미끄러져 이라나의 발밑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성가신 듯 입술을 삐쭉거리며 그것을 밟아버렸다. "혹시 오늘의 제 모습이 마음에 덜 드시나요? 어제보다 얼굴이 초아한가요? 말씀해보세요, 이보다 더 예쁜 손을 본 적이 있나요? 어 디 이 머리칼은 어때요? 어때요, 당신은 절 좋아하세요?" 그녀는 사나이를 두 팔로 껴안고 그의 머리를 자기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여자의 머리빗이 달 그락하고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부스스 풀어진 머리카락이 향기롭고 부드럽게 파도치며 그에게 흘러내렸다. 24 리토비노프는 걱정스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고 숙소의 자기 방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에게 당면 한 문제는 이제 이론을 실천으로 옮겨 낯선 고장으로 도망치기 위한 자금이나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그와 같은 자금 마련에 머리를 쓰기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그처럼 열 렬히 강조하던 그 결심이 참으로 굳어버렸느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후회를 불허하는 결정적인 말을 했는가? 아까 이리나는 헤어질 때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일을 지체없이 추진하세요, 지체없어요! 그리고 준비가 다 되면 알려주세요, 네!" 이것으로 매듭지어진 것이다! 의혹은 모두 멀리 사라지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리토비노프는 - 우선 대충 생각해보았다. 먼저 앞서야 하는 것은 돈이다. 리토비노프의 주머니 엔 1,328그루우덴이 있다. 이 돈을 프랑스화로 환산하면 2,855프랑이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당분 간의 비용으로 쓰기에는 충분하다. 현지에 가서 부친에게 편지를 써 돈을 보내달라고 해야지. 산 림을 팔거나 땅도 일부를 축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무슨 구실로? ...뭐 구실쯤이야 찾아낼 수 있 겠지. 이리나는 자깅게 보석이 있다고 했지만 절대로 그런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건 부득이 한 경우를 위해 대비해두어야 한다. 그 밖의 현물로서 준크로노미터격인 제네바제 고급 회중시계 가 있는데... 그걸 팔면 400프랑은 넉넉히 받을 것이다. 리토비노프는 은행가에게 가서 필요한 경우에 돈을 대출할 수 있는가 하고 은근히 떠보았다. 그런데 바덴바덴의 은행가들은 산불을 만남 너구리처럼 조심스러운 자들뿐이라 그런 귀띔을 듣고 곧 얼굴을 찌푸리는 모양이 마치 낫으로 밑둥을 베어낸 들꽃을 연상케 하였다. 그들 중에는 상대 방이 순진한 농담에 맞대고 호탕하게 폭소를 터뜨리는 자도 있었다. 리토비노프는 생각만 해도 창피할 정도이지만 급기야는 룰레트 운수까지 쳐보았다. 그런데 오, 운이 없게도! - 자기 나이에 해당하는 30번에 1타렐밖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이것을 시도한 것은 현재 손에 갖고 있 는 자금을 조금이라도 늘려 모갯 돈을 만들고 싶어서였는데, 결과는 비록 크게 늘리지는 못했지 만 끝자리의 28그루우덴을 제해버리고 꼬리 달리지 않은 액수로 자금을 만들 가망은 있었다. 다음 문제는 이것 역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즉 여권 문제였다. 그런데 부인의 경우에는 여권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며, 전혀 불필요한 나라도 있었다. 벨기에가 그렇고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또 급하면 러시아인이 아닌 다른 여권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해 리토비노프는 매우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이 결심은 견고하여 조금도 흔들리 지 않았으나 그의 의지에 반하여, 그의 의지의 눈을 피해 어떤 불성실한, 거의 익살에 가까운 전 혀 다른 마음이 일어나 그의 생각을 엇갈리게 했다. 마치 그의 계획 자체가 연극처럼 생각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남녀가 도망친 예는 이 세상 아무 데에도 없었고, 다만 희극이나 소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이며 그렇지 않으면 고작해야 어느 시골 - 어느 여행사가 단언하는, 즉 사람들이 권태에 사로잡힌 나머지 때때로 구토를 일으킨다는 저체프롬 군이나 스이즈란 군과 같은 고장에 서나 일어나는 일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리토비노픈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그의 친구 중의 한 사람인 바츠오프라는 퇴역 기 병 소위가 방울 달린 역마차로 상인의 딸을 유괴했던 일이었다. 사전에 미리 양친은 물론 장본인 인 아가씨에게까지도 술을 마냥 먹인 뒤에 벌인 일이었지만, 나중에 판명된 바에 의하면 피해자 는 다름 아닌 본인 자신으로, 실컷 뭇매만 얻어맞았다고 한다. 리토비노프는 그런 망측한 회상에 끌린 자기 자신에게 몹시 분개하였으나 불현 듯 타치야나의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출발, 그에 따르는 엄청난 비탄과 고뇌, 수치 - 그것을 상기하면 그가 지금 이렇게 추진하고 있는 일이 결코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절실히 느껴지는 것이었다. 체 면을 위해서도 달리 취할 길이 없다고 이리나에게도 말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리고 이 이리나 라는 이름이 머리에 스치기만 해도 금세 달아오르는 감정이 달콤한 아픔을 동반하여 그의 심장을 들쑤셔 얼어붙게 하는 것이었다. 말발굽소리가 뒤에서 들여왔다... 그는 옆으로 몸을 피하였다... 말을 탄 이리나가 그를 앞질러갔 다. 말은 나란히 타고 온 것은 그 뚱뚱한 장군이었다. 그녀는 리토비노프를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으나, 말 옆구리를 한 번 걷어차더니 갑자기 쏜살같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검 은 베일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렇게 달리지 마시오! 아니 이거... 그렇게 달리지 말라니까!" 장군은 쇳소리를 내면서 힘껏 뒤쫓아 달려갔다. 25 이튿날 아침 리토비노프는 다시 은행가를 찾아가, 우리 나라 증권 시세는 변동 많아 탈이네, 외 국에 송금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등등의 이야기를 한 차례 되풀이한 뒤 숙소로 돌 아와 수위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건네받았다. 그는 첫눈에 이리나의 필적임을 알아보았으나 봉투 를 뜯지 않고 - 웬일인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편지 내용(편 지는 프랑스어로 씌어 있었다.)은 이러했다. 그리운 나의 사람! 저는 밤새 당신의 제의를 생각해보았어요... 이제 변명은 하지 않겠어요. 당 신은 흉금을 타놓고 말씀해주셨어요. 저도 그렇게 하겠어요. 전 함께 도망칠 수 없어요. 그건 제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이에요. 제가 당신에게 얼마나 죄 많 은 여자인가 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이번에 저지른 저의 죄는 전보다 더욱 큰 죄로, 저 는 제 자신에게, 어처구니없는 제 자신에게 정떨어져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역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어요. 전 당신의 행복을 파괴했어요. 이제 당신은 저를 경박한 아양이나 떠 는 여자로 간주하실 권리가 있어요. 아무리 내쪽에서 자진해서 제의했다, 나 스스로가 엄숙히 약 속했다... 하고 제 마음에 증거를 내세워 따져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전 저 자신이 무섭고 또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요. 변명은 하지 않겠어요. 제가 정신없이 당신에게 빠져들었다고 구실을 붙이지도 않겠어요... 이제 와서는 쓸데없는 넋두리 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다만 한 가지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것은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하고 싶은 말이지만 - 전 당신의 것이니, 언제까지나 당신의 것이니 언제든지 또 어떻게든지 마음대로 아무 걱정도 근 심도 없이 저를 마음대로 요리하세요, 저는 당신의 이리나예요... 라는 말이예요. 그렇지만 도망친 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도저히 안 되겠어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나를 구해주세 요 하고 저는 당신에게 부탁했었어요. 또 저는 모든 것을 매장해버리자,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자 하고 얼마나 애썼는지 몰라요... 그러나 결국 제겐 구원의 길이 없는가봐요. 독이 몸 속에 너무나 깊이 스며들어 버렸나봐요. 이쪽 공기를 오랫동안 마셔온 형벌이겠지요! 전 이 편지를 당신에게 쓸까말까 하고 오랫동안 망설였지요. 당신이 어떤 결심을 내리게 될지 는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지만, 이젠 그저 저를 아껴주시는 당신의 사랑에 소망을 걸 뿐이에요. 당신에게 본심을 털어놓지 않는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마도 당신은 이미 우리들의 계획을 실천에 옳길 첫발을 내디디셨겠지요. 그러나 저로서는 더욱 송구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사실 그것은 아름다운 계획이었지만 실천할 수는 없는 것이었어요. 그리운 그리고리, 저를 천박하고 연약한 여자로 여기고 멸시해주세요. 다만 저를 버리지만은 말 아주세요. 당신의 이리나를요... 전 이 사회로부터 빠져나갈 힘도 없지만, 당신 없이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도 없어요. 우리 부부는 얼마 후에 페테르스부르크로 떠날 예정이니, 당신도 함께 가서 그곳에서 살아주세요. 당신의 일자리는 우리가 알아볼게요. 그렇게 되면 당신의 지금까지의 연구 도 헛되지 않을 것이고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을 거예요. 다만 서로 가까이 살면서 저를 사랑해 주세요 - 이처럼 약점과 결점투성이인 여자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저 자신을. 그리고 제발 잊지 마세요 - 당신의 이리나만큼 당신에게 진실한 사랑을 바칠 여자는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사실 을... 한시 바삐 와주세요. 얼굴을 대하지 않고서는 조금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요. 진심으로 당신의 것인 I 리토비노프는 갑자기 피가 머리로 솟구쳤으나, 이윽고 심장을 무섭게 압박하면서 그대로 돌덩 이처럼 굳어버렸다. 그는 이리나의 편지를 한 번 더 읽고, 모스크바에서의 그때처럼 힘없이 소파 에 쓰러져 꼼짝하지 않았다. 끝없는 어둠이 갑자기 그를 겹겹이 에워싸고, 그는 그 무의미한 절망 적인 눈으로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또다시 배신인가. 아니, 어쩌면 배신보다도 더 고약한 - 거짓과 사악의 덩어리다 - 생활도 이것으로 완전히 깨져버렸다. 이것저것 송두리째 뿌 리가 뽑혀, 그래도 아직은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것 최후의 지주까지도 끝장나버렸다. '우리 뒤를 따라 페케르스부르크로 와달라!' 그는 속으로도 쓴웃음을 지었다. '일자리는 우리가 구해준다!' ...내게 높은 자리라도 안겨주겠다 이 말인가? 그런데 이 우리란 대체 누군가? 그렇다, 이럴 때 그 여자의 과거가 탄로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모르고 있던 비밀과 사악의 쓰레 기통으로, 그 여자가 매장해버리자, 불살라버리자고 한 것도 결국은 바로 그것이다! 음모와 밀통 이며 베리스카야니 도리스카야니 하는 추문으로 충만한 바로 그 세계다... 거기 무슨 장래가, 어떤 훌륭한 역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그 여자와 가까이 살면서, 때때로 문안 인사차 찾아 가 유한마담의 구역질나는 우울병의 상대가 되는 것이 고작이다. 아무튼 그녀는 사교계에 권태를 느껴 못견뎌 하면서도 그 테두리 밖에선 살아갈 수 없는 여자이니까. 그건 그렇고 그 여자의 가 정에 친구가 된다는 것은 곧 그 각하에게 곱게 보이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나마... 그 여자가 변 덕을 부리지 않을 동안만, 그러니까 나 같은 평민 남자 친구의 자극이지속되는 동안뿐이다. 이윽 고 뚱뚱보 각하나 아니면 피니코프 선생 차례가 되는 것이다 - 이건 있을 법한 일로, 유쾌하기도 하고 또 어쩌면 유익하기도 할 것이다. 하긴 그 여자는 내 재능의 유익한 용도에 대해 거론했었 지? 그러면서도 우리들의 계획은 실천에 옮길 수 없다고 했지. 실천 불가능이라고...' 리토비노프의 마음 속에 소나기가 퍼붓기 직전의 폭풍처럼 갑자기 미칠 듯한 충동이 일어났 다... 이리나의 편지에 적혀 있던 이 핑계 하나하나가 그의 비위를 건드리기 시작하여, 그녀가 자 기의 애정을 받아들이지 않은 대목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울화가 치밀어 이가 갈길 지경이었다.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어!" 마침내 그는 이렇게 외쳤다. "그따위 여자가 이토록 내 생명을 우 롱하는 걸 보고만 있다니..." 리토비노프는 벌떡 일어나 모자를 손에 들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달려 가 그 여자를 만나보겠다는 건가? 그 편지에 답장을 쓰겠다는 건가? 그는 멈춰 서서 힘없이 두 팔을 떨어뜨렸다. 아 참, 무엇을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 여자에게 숙명적인 양자택일을 제의한 것은 바로 그가 아니었던가? 그 선택이 그의 기대에 어긋나는 결과가 되었으니... 무릇 선택에는 이와 같은 불운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녀는 일단 정한 자기의 결심을 변명하였다. 그건 사실이다. 처음에 그녀는 자기편에서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고 그 를 따라나서겠다고 선언했었다. 그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 녀는 솔직히 자기를 약한 여자라고 자칭하고 있다. 그녀는 그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 터 배신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그녀는 속이거나 변 명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조금도 감추지 않고 무자비할 정도로 털어놓고 있다. 즉시 본심을 열어보이라고 그 여자에게 강요한 적은 없었다. 그를 여러 가지 약속으로 달래놓고 출발 할 때까지... 남편과 함께 이탈리아로 떠나기 직전까지 모든 것을 불투명하게 끌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데, 그건 그러핟 치더라도 그녀는 그의 생명을 짓밟아버렸다. 아니, 두 생명을 파멸시킨 것이다! ... 앞으로 또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데 사실 타치야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여자가 아니라 그 자신, 리토비노프 한 사람이 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목에 멍에처럼 얹혀 있는 죄의 책임을 모면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권리가 남아 있단 말인가? 그는 다시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또다시 허망하게, 흔적도 없이, 마치 불길이 퍼지는 듯 한 속도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정말 그 여자의 말대로 해서는 안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그 여자는 나를 사랑하고 있고, 그녀 입으로 직접 자기는 나의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하긴 우리 가 서로에게 끌리는 이 감정 속에 그 정열 속에는 이를테면 자연의 법칙 같은, 피할 수도 항거할 수도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산다는 것도... 그런 입장에 놓인다고 해서, 세상에 그런 꼴로 사는 사람이 내가 처음은 아닐 것이다. 둘이서 도망친다고 해야 어디로 가겠는가? 그는 이렇게도 생각했다. 그러자 이리나의 얼굴이 그의 마지막 추억으로, 영원히 아로새겨진 그 대로의 모습으로 조용히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극히 잠깐뿐이었다... 그는 제정신 으로 돌아오자 또다시 새로운 분노가 치밀어 그 추억도 아름다운 얼굴도 머릿속에서 마구 몰아내 버렸다. "너는 그 황금 술잔을 내게 내민다." 그는 외쳤다. "그런데 그 술에는 독이 약혼녀를, 그 처녀를 쫓아낸 이상... 이건 부끄러운 일이다. 파렴치한 일이다!" 그는 비통한 생각에 사로잡혀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또 하나의 얼굴이 잠자코 고뇌의 빛을 띤 채 이별의 눈동자에 말 못할 원한을 품고 깊은 어둠속에서 나타났다. 이리하여 리토비노프는 오랫동안 시달림을 받았다. 생각이 천 갈래로 흩어져 마치 중환자처럼 한참을 엎치락뒤치락하였다. 이윽고 그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드디어 마음을 결정한 것이다... 처 음부터 그는 이 결심을 예감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 그것은 내심의 선풍과 어둠 속의 투쟁 가 운데, 보일락말락한 멀리 있는 하나의 점으로 살짝 나타나 점차 이쪽으로 접근해오더니 나중에는 얼음 같은 칼날이 되어 그의 심장을 찌른 것이다. 리토비노프는 방구석에서 다시 트렁크를 꺼내어 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모자라는 사람처럼 꼼꼼한 일면도 곁들여 소지품을 모두 챙겨넣고 호텔 보이를 불러 계산을 마쳤다. 그리 고 이리낭게 러시아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 그때보다도 이번이 나에 대한 당신의 죄가 더 큰지 어떤지 나로서는 알 수 없군요.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이번의 타격이 매우 컸다는 것이요. 이로써 모든 것은 끝났어요. 당신을 '할 수 없다' 고 말했지요. 나도 앵무새처럼, 당신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다' 고 똑같이 말해야겠어요. 둘어줄 수도 없고, 또 들어주고 싶지도 않군요. 내가 받다들일 수 있는 답변은 오직 하나뿐인데, 당신은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사람이오. 나는 내일 아침 첫차로 떠나오. 안녕, 행복을 빌겠소... 우린 앞으 로 다시는 만나지 않게 되겠지요. 리토비노프는 날이 밝을 때까지 방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것은 오직 신만이 알고 계실 것이다! 밤 일곱시쯤 검은 케이프르 걸치고 얼굴에 베일을 쓴 부인 이 두 번이나 그의 숙소의 현관 쪽으로 다가오다가 그만 발길을 돌리곤 하였다. 그리고 약간 옆 으로 몸을 피하는가 싶더니 먼 곳을 한참이나 바라보닥 갑자기 결심한 듯 한쪽 손을 흔들더니 세 번째로 다시 현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딜 가세요, 부인?" 하고 등뒤에서 다급히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덜미라도 잡힌 듯이 재빨리 뒤돌아보았다... 포토우긴이 급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녀도 멈춰 서며 잠깐 생각하다가, 그대로 그를 향해 달려가 그의 팔을 잡고는 옆으로 끌고갔 다. "데려다줘요, 날 데려다주세요."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 이 말을 되풀이했다. "어떻게 된 거요, 부인?" 그는 영문을 몰라 중얼거렸다. "날 데려다주세요." 그녀는 어조를 한결 높여 되풀이했다. "만일 내가 아주... 가버리는 게 싫으시다면!" 포토우긴은 점잖게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은 급히 그곳을 떠났다. 이튿날 아침 일찍 리토비노프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리토비노프 역시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모두 어두운 얼굴을 하고서 억지로 웃어 보이려 애썼다. "여행길에 무사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 찾아왔어요?" 포토우긴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오늘 떠난다는 것은?" 리토비노프가 물었다. 포토우긴은 주위의 방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자연히 알게 되었어요..., 보시다시피 우리가 지난번에 주고받은 이야기가 드디어 이 같은 뜻밖 의 결과를 가져왔군요... 난 헤어지기 전에 진심으로 유감의 뜻을 당신에게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지금에 와서 동정해주신다... 떠날 시각에 와서?" 포토우긴은 서글픈 눈길로 리토비노프를 쳐다보았다. "천만에, 리토비노프 씨." 그는 짤막한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지금 비꼬거나 입씨름 같은 것을 하고 있을 형편이 못 돼요. 당신은 보아하니 조국의 문학에 대해 상 당히 냉잠한 것 같은데, 그러니 바시카 브스라에프에 대해서도 아마 모르고 계시겠지요?" "누구요?" "바시카 브스라에프 말입니다,. 노브고로드의 용사지요... 키르샤 다니로프가 수집한 이야기 속 에 있는..." "그 브스라에프가 어떻다는 거요?" 리토비노프는 화제가 다른 방향으로 흩렀으므로 다소 어안 이 벙벙하여 말했다. "뭐 별로 대단한 건 아녜요. 다만 나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에 한 번 유의해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지요. 바시카 브스라에프는 같은 노브고르드의 무리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순례를 떠났는데, 그는 본래 재채기나 꿈이나 까마귀의 울음소리 같은 그런 전조는 믿지 않는 사나이라, 동료들이 놀라서 허둥지둥하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발가벗고 성스러운 요단강에서 목욕을 했지요. 그런데 그 이론은 좋아하는 바시카 브스라에프가 타보르의 산에 올라갔더니 - 그 꼭대기에는 커다란 바 위가 있고,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이 그 산을 정복하려다가 모두 실패했다는 거요 - 바시카도 목 숨을 걸고 이 산을 한 번 올라 보기로 결심했는데, 도중에 죽은 사람의 머리가 발길에 채이더래 요. 해골이었지여요. 그는 그것을 발길로 걷어찼어요. 그러자 그 해골 바가지가 하는 말이 '왜 걷 어차는 거야? 난 살아나려면 살아날 수도 있고, 이렇게 먼지 구덩이 속에 처박혀 있으려면 또 그 렇게 할 수도 있어. 내일은 네 차례라는 걸 알아야해.' 바시카는 기겁을 하며 그 자리를 피해 겨 우 바위를 넘어서려는데, 발꿈치가 걸리면서 머리가 깨져버렸대요. 여기에 덧붙여 한마디 하고 싶 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 우리네 친애하는 슬라브파 친구들은 여러 가지 해골이나 부패한 민족을 걷어차는 것을 좋아하는데, 때로는 이와 같은 옛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것 이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거요?" 리토비노프는 드디어 참다못해 상대방의 이 야기를 가로막았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어요. 이만 실례..." "그건 말예요" 하고 포토우긴은 대답했는데, 그 눈은 지금까지 리토비노프로서는 이 사나이에게 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깊은 우정을 드러내 보이며 반짝거렸다. "그건 결국 당신은 죽은 사람의 머리를 걷어차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 선한 바탕 때문에 아마도 당신은 운명의 바 위를 무난히 뛰어넘게 될 거요.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지체시키지 않겠어요. 다만 헤어지는 마당에 포옹하는 것만은 허락해주시오." "나는 구태여 그런 바위를 뛰어넘으려 하지는 않을 거요" 하고 리토비노프는 포토우긴과 세 번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 그러자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던 비애가 순식간에 이 고독하고 불우 한 자의 동정과 뒤섞여버렸다. 그러나 이제는 가야 한다. 가야 해. 그는 서둘기 시작했다. "뭐 들어다드릴 것이 있나요?" 포토우긴이 거들어줄 의사를 비쳤다. "아니, 괜찮아요, 걱정마시오. 내가 할 테니까요..." 그는 모자를 쓰고 짐을 들어올렸다. "그런데 저..." 그는 문지방에 서서 물었다. "그 여자를 만나셨나요?" "네, 만났어요." "그래... 그녀가 뭐라고 하던가요?" 포토우긴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분은 어제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늘도 기다리고 있을 테지요." "아! 그럼 그 여자에게 이렇게 전해주시오... 아니, 그만두시오, 할 말이 없으니까. 그럼 안녕히 계시오!" "안녕히 가시오, 리토비노프 씨... 한 마디만 더 하고 싶군요. 아직은 내 이야기에 귀기울일 시 간이 있으니까요. 기차가 떠나려면 30분도 더 기다려야해요. 당신은 러시아로 떠나시니까... 그리 고 가서... 다시 서서히... 활동하게 되겠지요... 그래, 이 늙은 말동무가 - 유감스럽게도 나는 말동 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 작별하는 마당에 충고 한 마디 하려고 하니 허락해주시오. 당 신이 일을 시작하게 되면, 그때마다 이렇게 자문하는 것이 좋을 거요 - 나  고연 문명(엄정한 의미에서 말이오) - 에 이바지하려고 하는가? 그 이상의 하나를 실행하고 있는가? 내가 하는 일 은 과연 우리 나라의 현실에 유익하고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저 계몽적이며 서구적인 그렇게 하 면 그 일은 올바르게 될 것이고, 당신의 사업은 - 행운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고맙게도 당신과 같은 사람은 지금 하나뿐이 아닙니다. 당신은 '사막에 씨뿌리는 사람(푸시킨의 시에서 따온 말)' 이 되지는 않을 테지요. 우리 나라에도 차츰 이마에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이... 개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나 당신은 이런 화제의 주인공 이상입니다 - 안녕, 날 잊지 말아주 시오!" 리토비노프는 계단을 내려가 마차를 잡아타고 생활의 가지가지 그림자를 남기고 있는 거리를 돌아보지도 않고 정거장으로 향하였다... 그는 마치 파도에 몸을 내맡긴 사람 같았다. 파도는 그를 에워싸고 밀어내며 흘려보냈으나, 그는 결코 물결에 저항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그는 그 밖의 모 든 의사 표시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가 막 객차에 발을 올려놓으려 할 때였다. "리토비노프 씨... 그리고리..." 등뒤에서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가슴이 찡하였다... 설마 이리나가? 바로 그녀였다. 숄로 몸을 감싸고 자리에서 일어난 매 무새 그대로 흩어진 머리에 여행 모자를 쓴 그녀가 플랫폼에 서서 생기없는 눈빛으로 그를 지켜 보고 있었다. '돌아가요. 네, 돌아가세요, 당신을 데리러 왔어요.' 그녀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 다. 어떠한 약속도 거부하지 않는 눈이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말 한 마디 던질 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모든 것이, 흩어진 옷 매무새까지도 용서를 빌고 있는 듯이 보였다. 리토비노프는 그녀에게로 달려갈 뻔했으나 간신힌 두 발을 움직이고 않고 버티었다... 그러나 결국 승부는 그가 몸을 맡긴 파도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는 객차에 뛰어올라 이내 돌아서서 이 리나에게 자기 옆자리를 가리켜 보였다. 그녀는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었 다. 불과한 걸음, 몸을 약간만 움직였어도 영원힌 결합될 두 개의 생명은 미지의 먼 곳을 향해 줄 달음쳤을 것이다... 그녀가 망설이고 있는 동안 우렁찬 기적소리가 들리면서 기차는 출발했다. 리토비노프는 뒤로 기우뚱하였다. 한편 이리나는 비틀거리며 정거장 벤치로 다가가더니 그 위에 쓰러져버렸다. 우연히 정거장에 나온 외교관보는 깜짝 놀랐다. 그는 이리나와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꽤 관심을 갖고 있었으 므로, 그녀가 실신한 듯 쓰러지는 것을 보고 '신경의 발작' 이라 단정하고는 그녀를 간호하는 것 이 자기의 의무 - 의협심이 강한 기사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더욱 놀란 것은 다름이 아니 라 - 그가 옆으로 다가가 말을 걸자마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 그가 내민 손을 뿌리치고 거리로 뛰 어 달아나더니, 금세 슈발츠발츠의 초가을 기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짙은 안개의 수증기 속 으로 그 모습을 감춰버린 것이다. 26 언젠가 우리는 방금 사랑하는 외아들을 잃은 시골 여자의 오두막집에 우연히 들어간 적이 있 다. 거기서 몹시 놀란 것은 그 여자의 침착하고도 명랑한 태도였다. 우리가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던지, 옆에 있던 그녀의 남편이 말하였다. "뭐, 내버려두시오. 지금 마누라는 뼈만 남아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까." 리토비노프도 그와 마찬가지로 '뼈만 남은' 꼴이었다. 그리고 역시 마찬가지로 침착한 마음이 발차한 후 몇 시간 동안 그를 찾아왔다. 여전히 희망을 모두 잃은 불행한 그였지만, 홀가분한 마 음으로 그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한 주일 동한 끊임없는 번민과 뼈를 깎는 듯한 가책을 느 낀 뒤에 - 그리고 머리를 세게 얻어맞는 여러 가지 아픔을 겪은 뒤에 간신히 맞게 된 휴식이었 다. 그는 본래 그와 같은 풍파에 잘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라서 그 타격의 강도는 더욱 크게 느껴 졌다. 이제 와서 그는 소망을 걸어볼 것이 아무것도 희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지금 그는 러시아로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선 어딘가 몸둘 곳을 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느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전혀 계획을 세우고 있지 않았다. 자기가 마치 낯선 타인처럼 생각되었다.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는 이 자아라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는 때때로 마 치 자신의 시체를 운반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며, 다만 아물 길 없는 마음의 상처가 가 끔씩 찌르고 쑤실 때마다 간신히 자기가 아직은 목숨이 붙어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 리고 때로는, 소위 사내 대장부가 - 그렇다, 이 사내 대장부가 대체 어찌하여 여자의 힘, 사랑의 힘에 이렇게까지 순순히 끌려다니고 있는 것인지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하였다. "이 수치스러운 나약함!" 하고 그는 중얼거리고 나서 외투를 위로 치켜 올려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똑바로 앉았다. 이제 과거는 끝났다. 지금부터 새출발을 해야한다고 다짐이라도 하는 듯한 기세였으나... 일 분도 채 되지 않아 히죽히죽 쓴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 자신도 그러한 자 기의 심정을 알수가 없었다. 그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잿빛으로 흐린 축축한 날씨였다. 비가 오진 않았으나,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아 구름이 나지막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바람이 기차를 향해 정면으로 불고 있었다. 희 부연 증기 덩어리가 때로는 홀로, 때로는 거무스름한 연기와 어울려 리토비노프가 앉아 있는 차 창을 스쳐 연달아 사라졌다. 그는 그 중기와 연기를 전송하였다. 끊임없이 엉기며 치솟아오르는가 하면, 땅을 기어다니면서 마치 익살이라도 부리는 듯 품에 엉기기도 하며, 관목에 걸리기도 하며 길게 하품을 하거나 스르 르 풀어지기도 하면서 증기의 덩어리는 연달아 모습을 바꾸어 언제 보아도 같은... 단조롭고 조급 하고 권태로운 희롱을 계속하고 있었다. 때때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이 변하기도 하고 선로가 휘거나 하면 - 연기의 덩어리는 갑자기 사라져 곧 반대쪽 창문에 나타났다. 이윽고 또다시 그 커다란 꼬리를 끌면서 라인 강변의 넓은 평원의 조망을 리토비노프의 눈앞에서 감춰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한참을 싫증도 내지 않고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러자 기묘한 감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창가에 혼자 앉아 있었으므로 아무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연기다, 연기' 하고 그는 몇 번이나 되풀이하였다. 그의 생활도, 러시아의 생활도 - 인간 세계 의 모든 것이, 특히 러시아의 모든 것이... '모두가 연기다, 증기다'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어디를 보아도 새로운 모습과 형태로 현상을 좇아 뛰어다니고 있지만, 실은 모두 여전하다. 모든 것이 분주히, 어디론가 분주히 가고 있으나 - 결국 손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반 대쪽으로 몰려, 거기서 또 여전히 지칠 줄 모르는 소란스러운, 그리고 무익한 유희가 시작되는 것 이다.' 이 몇 해 동안 그의 눈앞에 벌어졌던 이 일 저 일들이 떠올랐다. "연기다" 하고 그는 중얼거렸 다. "연기다!" 그리고 그는 구바료프를 비롯하여, 그 밖의 늙고 젊은 병사들 사이에 주고 받은 격렬한 논쟁과 설법과 절규가 생각났다... "연기다" 하고 그는 되풀이 하였다. "연기다, 증기다!" 나중에는 그 호화로운 소풍에 대해서도, 또 그 밖의 국가적인 거물들의 토론이나 연설, 나아가 서는 포토우긴의 주장까지도 머리에 떠올랐다... 연기다, 연기다,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 면 자신의 염원이나 감정, 시도나 공상은? 그는 묵묵히 숨을 한 번 내쉴 뿐이었다. 그 동안에도 기차는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기차는 벌써 라시타트도, 카를루스루에도, 부 르프자르도 지났다. 선로의 오른쪽 산맥은 처음에는 길을 피하기라도 하는 듯 한결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이윽고 또다시 가까이 다가왔고, 이제는 그다지 높아 보이지도 않았으며 산을 덮은 나 무숲도 드문드문하였다. 기차가 방향을 크게 바꾸자... 어느 새 하이델베르크에 이르렀다. 기차 한 칸 한 칸이 정거장을 가로지른 지붕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금세 물건 파는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가지가지의 신문과 잡지, 심지어 러시아의 것까지도 팔고 있었다. 여객들은 각자 제자리 에서 수런거리다가 이윽고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리토비노프는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고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쳐다보니 빈다소프의 그 대머리가 창가에 쓱 나타났고 그 뒤로는 - 어쩌면 다만 그런 기분이 든 것뿐이었는지 - 아니, 정말로 바덴바덴의 무리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스한치코바의 얼굴도 보였다. 보로시로프도 있었고 반바에프도 있었다. 그들이 창 가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빈다소프가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이봐, 피시차르킨은 어디 있어? 우린 그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하지만 누구든 상관없지. 내려오게, 도련님. 모두들 구바료프에게로 가야지." "암, 그래야지, 이 사람아, 구바료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네" 하고 반바에프가 앞장서서 맞장구 를 쳤다. "내려오라니까!" 리토비노프는 무거운 돌이 송장처럼 마음 속에 가라앉는 듯싶어 화를 낼 뻔하였다. 그는 빈다 소프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소리 없이 얼굴을 돌렸다. "구바료프 씨가 와 있다잖아요" 하고 스한치코바까지도 호통을 쳤다.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기 세였다. 리토비노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좀 들어봐, 리토비노프." 드디어 반바에프가 말했다. "여기에는 구바료프만이 와 있는 것이 아 니네. 러시아를 구해낸 젊은 수재와 재사들이 한 연대나 와 있다네. 그들은 모두가 자연과학도로 서 저마다 고매한 신념의 소유자들이지. 그들을 위해서라도 지네는 이곳에 얼굴을 내밀어야 해. 여기에는 가령 저... 저... 이름을 잊었군 그래! 어쨌든 그 사나이는 천재라네!" "그냥 둬요, 저런 사람은 그대로 둬요." 스한치코바가 말참견을 하였다. "내버려두라니가 그러네! 저 사람의 친척들은 모두가 그렇다니까. 저 사람의 처숙모가 될 사람 이라나 뭐라나 하는 여자는 처음에는 좀 센스가 있어 보이더니, 엊그제 이곳까지 기차를 함께 타 고 어면서 보자니까 - 아, 그래그래, 바로 2, 3일 전에도 바덴바덴에 왔었는데, 어떻게 했는 줄 아 세요? - 어쨌든 함께 탔기에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건네봤더니... 정이 뚝 떨어지더군요. 거만하게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는 거예요. 귀족티를 무척이나 내더군요." 가엾은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가 - 귀족티를 내는 여자라니? 이런 욕을 그 장본인은 예상이나 했을까? 그러나 리토비노프는 침묵을 일관하며 고개를 돌려 이내 모자를 깊숙이 눌러 썼다. 겨우 기차 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헤어지면서 인사 한 마디도 없나, 이 돌대가리야!" 반바에프가 소리를 질렀다. "너무 하지 않 나!" "벽창호같으니!" 빈다소프가 고함을 질렀다. 기차가 점점 빨리 달리고 있었으므로 그는 그들이 아무리 욕설을 퍼부어도 겁날 것이 없었다. "구두쇠, 달팽이, 거지 발싸개같이 얼빠진 놈!" 이 마지막 욕설은 빈다소프의 즉석 발명이었는지 아니면 남의 흉내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거기 함께 있던 자연과학 전공의 고매한 두 청년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 증거고, 그후 2, 3일이 지나서 당시 하이델베르크에서 간행된 <<나는 어떤 자도 배격한 다!>>, 즉 <<신이 버리면 돼지가 먹는다>>는 제목의 러시아의 정기 간행물에 그 표현이 나타난 것이다. '연기다, 연기다, 연기다!' 그리고 그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 '현재 이 하이델베르크에는 러시아 유학생이 100명이 넘는다. 그들은 거의가 물리나 화학, 생물학을 전공하며 다른 것은 귀담아 들으 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앞으로 5, 6년쯤 뒤에는 같은 교수의 강의에 출석하는 사람은 불과 열 다섯 명도 안 될 것이다... 바람의 방향이 달라지면 연기는 그쪽으로 불 게 마련이다... 연기 다... 연기다... 연기다!' 그는 한밤중에 캇셀을 지났다. 어두워질수록 감당할 수 없는 애수가 매처럼 매섭게 달려들었다. 그는 차창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눈물을 찔끔거렸다. 그는 오랫동안 울었지만, 그의 가슴은 가벼워지기는커녕 오히려 가슴을 찢는 듯한 아픔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때 캇셀의 어느 여관에서는 열병에 걸린 타치야나가 병상에 누워 있었다. 카피토리나 마르코 브나는 그녀의 옆에 앉아 있었다. "타냐," 그녀는 말했다. "제발 리토비노프 씨에게 전보를 치게 해줘. 괜찮겠지, 타냐?" "안 돼요, 숙모님." 그녀는 대답했다. "걱정 마시고 물이나 좀 주세요. 곧 나을 거예요." 타치야나는 일주일 후에나 건강을 회복하여 조카딸과 숙모는 다시 기차여행을 계속했다. 27 리토비노프는 페테르스부르크와 모스크바에도 들르지 않고 자기 아버지가 있는 영지로 돌아왔 다. 부친의 모습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말도 못할 만큼 노쇠하여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아들의 귀향을, 죽을 날이 가까운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쁜 표정으로 기꺼이 맞아주었다. 그 리하여 곧 엉망이 된 집안 일 모두를 아들에게 맡기고, 몇 주일을 더 신음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 났다. 홀로 남은 리토보니포는 주인이 거처하도록 마련된 낡은 별채에 멍하니 앉아, 무거운 마음으로 희망도 열의도 돈도 없는 영지의 관리에 착수하였다. 러시아에서의 영지관리가 얼마나 보람없는 일인가 하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리토비노프에게도 그것이 얼마나 번거롭게 느껴졌는가에 대해서는 여기서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개혁이니 혁신이니 하는 것은 물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외국에서 배워온 새로운 지식을 응용하는 것은 무기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처지가 처지이니만큼 하루살이와 같은 태도로 그날그 날을 보내면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양보를 참아가야 했다. 새로운 것은 받아들일 태 세가 되어 있지 않았고, 낡은 것은 완전히 그 효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무능과 비양심이 짝을 이루고 있었다. 뿌리가 흔들리는 생활양식은 늪가의 진흙처럼 물렁하고, 다만 자유라는 위대한 말만이 마치 신의 입김처럼 그 탁한 강 위에 떠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인 내가 필요했다. 그것도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완강한, 때로는 눈을 감아주기도 하고 때로는 교활하게 처신하기도 해야 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라야만 했다. 그러나 리토비노로서는 현 재의 무거운 기분만으로도 갑절의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살고 싶은 의욕이 거의 없었다... 대체 이마에 땀 흘리며 일할 의욕이 어디서 생길 수 있겠는가? 그래도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 3년째의 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농노해방의 위대한 사상도 조 금씩 실현되어 피가 되고 살이 되기 시작하였다. 심어놓은 씨앗에서 새싹이 움터, 그것은 공공연 한 적이든 숨은 적이든 이제 와서 짓밟아버릴 수는 없게 되었다. 리토비노프 자신도 결국은 토지 의 대부분을 농민들이 절반씩 차지하는 격이 되어 결국은 가난한 원시적인 세대가 되어버리기는 했으나, 이것저것 조금씩 성공을 거둔 것도 있었다. 제조장을 재건하기도 하고, 자유계약에 의해 일꾼을 다섯 사람 고용하여 - 한때는 40명이나 된 적도 있었지만 - 조그마한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으며, 또 개인 명의로 된 빚도 거의 갚아버린 것이다... 정신도 어느 정도 차리게 되어 본래의 리토비노프의 모습에 가까워졌다. 하긴 쓸쓸한 감정은 언제나 떠나지 않고 가슴 깊이 숨겨둔 채 젊은 나이를 조용히 살면서 옛날 의 낯익은 얼굴들과는 일체 교제를 끊고 이웃끼리만 내왕하는 정도이긴 했지만... 그래도 거의 죽 은 사람이나 다름없던 무관심은 어느 새 사라져, 그는 다시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살아 있는 사 람들고 어울려 움직이기도 하고 일도 하게 되었다. 그를 붙잡고 놓지 않았던 그 마술의 마지막 그림자도 사라져버렸다. 그 바덴바덴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마치 꿈의 베일을 통해 보는 것처럼 희미해졌다. 그런데 이리나에 대해서는... 그녀의 그림자 역시 희미하게 사라져버려, 그 모습을 에워싼 안개 속에서 어떤 위험성이 때때로 리토비 노프에게 막연히 느껴질 뿐이었다. 타치야나의 소식은 가끔 들려왔다. 소식에 의하면 그녀는 숙모 와 함께 그의 고향에서 500리쯤 떨어진 조그마한 영지로 옮겨 별로 외출도 하지 않고 손님도 거 의 만나지 않는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어쨋든 무사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5월의 맑게 갠 어느 날, 그가 서재에 앉아 페테르스부르크의 잡지 최근호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하인이 들어와 아저씨 한 분이 찾아왔다고 했다. 이 아저씨라는 사람은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의 사촌 오빠였으며, 최근 그녀를 방문하기도 했었다. 그는 리토비노프의 땅 바로 이웃에 영지를 구 입하고 그곳으로 가는 중이었다. 꼭 일주일 동안 그는 리토비노프의 집에 머물면서 타치야나의 일상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튿날 그가 떠난 후 리토비노프는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 다. 헤어진 후 처음으로 보내는 이 편지에서 그는 편지로나마 안부를 주고받았으면 한다고 간청하 고, 언젠가 다시 만날 생각을 영원히 버려야 하느냐며 그녀의 의향을 물었다. 답장을 기다리는 그 의 가슴은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답장이 왔다. 타치야나는 그의 문의에 애정이 담긴 반응을 보였다. "만일 우리를 찾아오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하고 그녀는 편지를 끝맺었다. "언제든지 오세요. 병자들도 떨어져 있기보다는 함께 있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하지 않아요."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도 안부를 전한다고 덧붙였다. 리토비노프는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였다. 오랫동안 그의 가슴이 그토록 고동친 적은 없었다. 그 는 갑자기 경쾌해지고 명랑해졌다... 마치 태양이 솟아 밤의 어둠을 몰아내고, 산들바람이 햇살을 타고 소생된 대지 위를 내달리는 심정이었다. 리토비노프는 이날만큼은 온종일 농장을 돌아보고 지시를 내릴 때에도 언제나 싱글벙글하였다. 그는 일찌감치 여행 떠날 준비를 마쳐놓고는 2주일 후에 타치야나를 찾아나섰다. 28 그는 마차를 타고 시골길을 천천히 달려갔다. 이렇다 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한 번 쇠로 된 뒷바퀴의 타이어가 끊어져 대장장이가 그것을 이어대느라 애쓰다가 결국은 타이어와 자기 자신에게 저주만 퍼붓고 일을 팽개쳐버렸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 나라에서는 부드러운 곳 - 즉 질퍽한 길은 끊어진 타이어로도 넉넉히 여행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강행군 덕분에 리토비노프는 두세 명의 상당히 흥미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어느 숙소에서 그는 농업조정을 위한 모임을 목격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피시차르킨도 끼어 있 었는데, 그는 리토비노프에게 마치 솔론(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로, 입법자.시인. 귀족과 평민을 조 정, 시민을 그 재산 정도에 따라 사분하고 여러 개혁을 하여 민주정치의 기초를 세웠음. B. C. 638?-B.C. 559?) 이나 솔로몬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의 변설은 그만큼 고매한 예지를 풍기고 있었으며, 지주나 농민들도 그에게 실로 최대의 경의를 아끼지 않았다... 피시차르킨은 풍채도 또한 고대의 현인과 비슷하였다. 머리끝이 둥글고 벗겨졌으며, 퉁퉁한 얼굴은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는 미덕 의 장엄한 결정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리토비노프의 도착을 환영하며 "오, 이게 누구시오, 모 처럼 내왕해주셔서..." 하고 호들갑을 떨었으나, 곧 선량한 사람답게 일종의 감격을 느꼈던지 마비 라도 된 듯 잠자코 있었다. 그는 겨우 친지에 대해서만 소식을 전해 주었다. 보로시로프에 대해서 였다. 유년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이 용사는 다시 군무에 종사하게 되어 재빨리 자기 연대의 장 교들 앞에서 '불교에 대하여' 라든가 '물체론' 이라든가, 피시차르킨도 역시 잘 기억하고 있지 못 했는데, 어쨌든 그런 까다로운 제목의 강연도 하였다는 것이다. 다음 숙소에서 리토비노프는 다음 마차를 끌 말의 교체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오래 기다리게 되었다. 때마침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으므로 - 그는 역마차 속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였다. 그 런데 갑자기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와 그의 잠을 깨웠다. 그는 눈을 떴다... 아니, 저기 서 있는 것은 구바료프 선생이 아닌가. 회색 양복 저고리에 축늘어진 잠옷 바지를 입고, 숙소의 현관에 서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아니 저 사람은 구바료프 선생이 아니다. 그런데 어쩌면 저렇게 놀랄 정도로 꼭 닮았을까. 다만 저 사람은 입이 좀더 크고 이도 더 큼직하게 생겼으며, 아래로 내리깐 눈초리도 한결 사나워 보 였다. 코도 더 큼직하고 턱수염도 더짙어 용모 전체가 보다 더 딱딱한 것이 점점 반감을 자아내 고 있었다. "돼지 같은 놈들, 돼지 같은 놈들!" 그는 그 늑대 같은 입을 떡 벌리고 천천히 흉측하게 되풀이 하였다. "더러운 놈들같으니... 이게 그... 그 유명한 자유라는 거냐... 돼지만도 못한 놈들... 돼지만 도!" "돼지 같은 놈들, 돼지 같은 놈들!" 하고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문 저쪽에서 들려오면서 현 관에 불쑥 나타난 것은 역시 잿빛 웃저고리에 축 늘어진 잠옷 바지를 걸친 - 진짜 구바료프로, 그러니까 스테판 니콜라예비치 구바료프였다. "더러운 놈들같으니!" 하고 그는 형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먼저 나온 사람은 그의 형이었 다. 그는 이도 손으로 뽑아낸다는 옛날의 '용사'로서 동생의 영지를 관리하고 있었다.) "놈들은 때려야 말을 들어. 귀싸대기를 한 대 갈겨줘야 한다고. 이게 바로 저놈들에게 어울리는 자유거든 - 한 대 갈겨주는 것이 말이야... 하긴 이게... 족장제도라는 건가!... 구린내가 나!... 그런 데 어떻게 된 거야, 로스톤 씨는?... 뭐 꾸물거리는 거야? 이건 어디까지나 저 쌀벌레들의 일이 아 닌가... 이런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건 말이야..." "그러니까 이건 내가 할 일이 아 니지 않나" 하고 형 구바료프가 말하였다. "그따위 녀석은 아무짝에도 못 써, 그야말로 쌀벌레밖 에 안 돼! 다만 네가 옛날 정의로... 로스톤 씨! 로스톤 씨! 어디로 도망쳤어?" "로스톤! 로스톤!" 아우인 위대한 구바료프가 외쳤다. "좀더 큰 소리로 불러봐요, 드리메돈트 니 콜라이치 형님!" "그래, 지금 부르고 있지 않니. 이렇게 부르고 있잖아 - 로스톤 씨!" "네, 여기 있어요. 바로 여기요!"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면서 오두막 그늘에서 뛰어나온 사람은 - 반바에프였다. 리토비노프는 앗 하고 소리쳤다. 이 불우한 정열가는 옷소매가 군데군데 찢겨진 헝가리풍의 다 떨어진 웃저고리를 걸치고 있었다. 그 웃저고리는 아침 바람에 나풀거리고, 얼굴 모습은 그다지 변하지는 않았으나 다소 일그러져 있었다. 공포에 떠는 그 조그마한 눈은 비굴해 보일 정도로 두 려움과 굶주림에 대한 굴종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염색한 콧수염만은 여전히 두터운 입술 위에 불룩 솟아 있었다. 구바료프 형제는 곧 소리를 모아 현관 계단에 서서 그에게 벼락치듯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그 바로 아래 진창 속에 염치없는 듯 구부정하게 서서 히히 웃으며 상대방의 동정을 사려고 애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테 없는 모자를 빨간 손가락으로 매만지거나 온몸을 비틀면서, 말은 곧 준비가 된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형제는 좀처럼 진정하지 않았는데, 이윽고 아우가 갑자기 리토비노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앞에 있는 사람을 알아본 것인지, 아니면 남의 앞이라 겸연쩍었던 것인지 아무튼 그는 갑자기 곰처럼 둔하게 발꿈치를 돌리더니 턱수염을 입에 물고 오두막으로 슬그머니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형도 곧 고함지르는 것을 중단하고 역시 곰처럼 휙 돌아서서 아우의 뒤를 따라 들어가버렸다. 위대한 구바료프 선생의 그 세력은 고국에 서도 여전한 것 같았다. 그 형제의 뒤를 따라가려는 반바에프를 리토비노프가 불러세웠다. 그는 뒤돌아서 찬찬히 바라 보더니 리토비노프를 알아보고는 두 손을 벌리며 그에게로 뛰어왔다. 그런데 마차 근처까지 오자 그는 문을 붙잡고 가슴을 비벼대며 엉엉 우는 것이었다. "그만둬. 그만두라니까, 반바에프" 하고 리토비노프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날 좀 봐... 나를 좀 보라고... 이 꼴을..." 그는 흐느끼면서 중얼거렸다. "반바에프!" 오두막 안에서 형제가 외쳤다. 반바에프는 고개를 들고 얼른 눈물을 닦았다. "잘 가게, 이 사람." 그는 작은 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잘 가게, 안녕!... 저렇게 부르고 있지 않나." "그런데 자넨 어떻게 해서 이런 데까지 오게 되었나?" 리토비노프가 물었다. "그리고 저들은 왜 저렇게 떠들고 있는 건가? 난 저들이 프랑스인을 부르고 있는 줄 알았어..." "나는 저 사람들의 묘지 관리인이거든." 반바에프는 대답하면서 오두막을 가리켰다. "내가 프랑 스 사람 행세를 하는 건 연극이지. 어떡하나, 할 수 없지. 먹을 건 없지, 돈은 한 푼도 안 남았지. 그러니 싫어도 이 짓을 해야 해. 비싸게 굴 처지가 아니지 않나." "그런데 저들은 오래전부터 러시아에 들어와 있었나? 무엇 때문에 옛날의 패거리들과는 헤어지 게 되었나?" "아니, 이 사람아, 이제 새삼 그런 말을 한들 무엇하나... 하늘의 사정이 달라졌는데... 스한치코 바 여사 같은 사람들은 덜미를 잡혀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네. 그 할멈은 비관하여 포르투갈로 줄행랑을 쳤지." "포르투갈엔 뭘하러? 싱겁게!" " 그렇지, 포르투갈로. 마토료나 당원 두 사람을 데리고 말이네." "누구?" "마토료나 당원 말일세. 그 여사를 추종하는 자들에 대한 존칭이지." "저 스한치코바가 당을 만들었다고? 당원은 많은가?" "방금 소리치던 저 두 사나이일세. 저자는 돌아온 지 그럭저럭 반년이나 되네. 다른 자들은 모 두 일망타진되었는데, 저 사람만은 아직 아무렇지도 않지. 요즘은 형과 함께 시골에서 살고 있다 네. 지금 그자가 무슨 허풍을 떨고 있는지 한 번 들어보게..." "아니, 반바에프!" "왜 그래, 리토비노프. 자네는 경기가 좋은데 그래. 인생을 즐기고 있으니 말이야. 그건 좋은 일 이지! 이제부터 어디로 가겠나? 이거 참 뜻밖인데... 바덴바덴을 기억하고 있나? 그 시절이 좋았 어! 저 빈다소프라는 자도 기억하나? 그자가 죽었다네. 세무서원이 되었는데 술집에서 싸움을 하 다가 당구채로 얻어맞아 골이 깨졌다네. 그만큼 시대가 고약해진 걸세! 그러나 나는 말하려네 - 오, 러시아... 기이한 나라, 러시아! 저 한 마리의 거위를 보라. 유럽을 다 뒤져도 이런 나라는 없 을 걸세! 이것이야말로 진짜 아르자마스산이란네!" 반바에프는 감격적인 목소리로 마지막 헌물을 바치고는 숙소로 뛰어갔다. 그곳에서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날 저녁에 리토비노프의 마차는 타치야나가 있을 마을 가까이에 다다랐다. 옛 약혼녀가 살고 있는 작은 집은 개천가 언덕 위에,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무들로 에워싸여 있었다. 새로 지은 집이 개천과 벌판 저쪽으로 바라보였다. 리토비노프의 눈에는 5리나 떨어진 곳에서도 지붕이 솟 아오른 2층과 저녁놀에 붉게 타오르는 창문이 보였다. 그는 마지막 숙소를 떠날 무렵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는데, 여기까지 오자 마구 두근거렸다. 그가 이처럼 가슴이 뛰는 이유는 물론 너무나 기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의 불안감 때문이기도 했다. '나를 어떻게 맞아줄까?'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나는 또 어떤 태도를 취해야 좋을까...?' 그는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마부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흰 턱수염을 기른 건장한 농부로, 60리 길을 가는데 80리분의 삯을 그에게서 받아내고 있었다. 그는 이 노인에게 여자주인 세스토바 일가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세스토바 말입네까? 알고 말고요! 그렇게 친절하신 분들은 세상에 또 없을 겁니다. 제 병까지 도 고쳐주셨지요. 정말예요, 두 분 다 훌륭한 의사이시거든요! 이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걸핏하면 모두 그 댁으로 뛰어가지요. 그러니 찾아오는 사람들로 늘 소란을 피울밖에요! 누가 병들었다거나 칼에 다쳤다거나, 그 밖에 뭐다 뭐다 해서 모두들 그곳으로 뛰어가거든요. 그러면 두 분은 물약이 나 가루약이나 고약으로 고쳐주지요 - 이런 약으로 금방 나아버리니까요. 약값은 안 받으시지요.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학교도 세우셨지요. 사실 그런 일은 전혀 실속 없 는 노릇이긴 하지만!" 마부가 떠벌리고 있는 동안에도 리토비노프는 그 집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갑자기 흰옷을 입 은 여자가 발코니에 나타났다. 그녀는 거기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안으로 사라졌다. '타치 야나가 아니었을까?' 그는 가슴이 더욱 크게 뛰었다. "좀더 빨리 달려줘! 좀더!" 그는 마부를 몰아세웠다. 마부는 말을 몰아세우고... 그후 몇 분이 지나... 마차는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에는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가 서 있었다. 그녀는 허겁지겁 두 손을 모으고는 큰 소리로 말하였다. "내 눈은 못 속인다니까. 내 가 제일 먼저 알아맞혔어. 역시 틀림없었군!... 내 눈이 정확해!" 리토비노프는 뛰어나온 카자흐 복장을 한 하인이 마차문을 열어줄 틈도 주지 않고 얼른 뛰어내 려 급히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를 포옹하고는 곧 안으로 들어가 응접실로 갔다... 눈앞에는 귀뿌 리까지 새빨개진 타치야나가 서 있었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친말한 눈으로 그를 살며시 바라보고는(얼굴은 약간 여윈 듯했으나 오히려 그녀에게는 그 편이 더욱 어울려 보였다) 그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그 손을 잡지 않고 갑자기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꿈에 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갑자기 말문이 막혀버렸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어리둥절해 했으나 얼굴은 기쁨으로 넘치고 있었다. "리토비노프 씨, 이게 무슨 짓이에요, 리토비노프 씨!" 하고 그녀는 말렸지만... 여전히 그는 그 녀의 치맛자락에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전에 바덴바덴에서도 이처럼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을 감개무량하게 회상하였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가! "타냐!" 그는 힘주어 말했다. "타냐! 날 용서해주겠어, 타냐?" "숙모님, 숙모님, 어떡하면 좋아요?" 타치야나는 마침 들어온 카피토리나 마르코브나에게 말했 다. "그냥 둬, 그냥... 타냐!" 선량한 할멈은 말하였다. "얘야, 그대로 내버려둬라, 참회하러 오신 거 니까." 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쳐도 괜찮을 것이다. 나는 이제 더 할 말이 없다. 나머지는 독자들이 잘 상상해보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이리나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녀는 나이가 서른 살이나 되었어도 여전히 아름답다. 그녀를 사랑하는 젊은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녀의 연인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다만... 만일 다만... 독자들이여! 가능하다면 우리 잠깐 이곳 페테르스부르크로 눈을 돌려 어느 일류 건물에 한 번 들어가보지 않으려는가? 보라, 여러분들의 눈앞에는 넓은 방이 하나 있다. 그 방의 장식은 호화롭 다 - 그것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으련다(그러는 것은 너무 저급하니까). 그것은 무게 있고 당당하며 범할 수 없는 형상을 갖추고 있다. 여러분은 혹시 두 손 모아 기도라도 드리고 싶은 충 동을 느끼지 않는가?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러분은 지금 성당에 들어온 것이니까. 그것은 지고 의 예절, 사랑에 충만한 미덕, 즉 '지상의 것이 아닌 것' 에 바친 성당이다. 어떤 신비로운 고요가 당신을 에워싼다. 입구와 창문에는 비로드 커튼을 치고, 마룻바닥에는 마치 구름을 밟는 듯한 푹 신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거친 소리나 과격한 오관의 작용을 완화하고 진정시키기 위해 마련된 것처럼 생각된다. 정성들여 만든 명주 갓을 씌운 램프불은 사람들에게 침착한 마음으 갖게 하고, 외부 세계와 두절된 공기에는 향취가 풍기고 있다. 탁상의 사모바르까 지도 끓어오르는 소리를 억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집의 여주인은 페케르스부루크의 사교계에 널리 알려진 귀부인으로, 지금 겨우 들릴락말락 하는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어투는 마치 이방에서는 무엇이든 항상 병들어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다른 부인들도 이 여주인들도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차를 따르고 있는 사람은 여주인의 동생으로, 그녀 역시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여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이 엄숙한 성당에 갑자기 들어와 그 여동생 앞에 앉은 한 청년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그런데 이 여동생은 이미 여섯 번이나 그에게 "차를 드시지 않겠어 요?" 하고 소곤거렸던 것이다. 그 한쪽 구석에는 젊은 남자의 미끈한 모습이 보인다. 그 눈동자에 는 은근히 아부하는 기미도 보인다. 얼굴에는 여주인의 비위를 맞추려는 속셈을 감추고, 끝내 조 용히 점잖게 앉아있다. 수많은 영예를 의마하는 표지가 가슴에 오색 무지개처럼 빛난다. 주고 받 는 말소리도 조용하다. 그 화제는 종교나 애국에 관한 것, F. M, 그링카의<신비의 물방울>(그링카 가 슬라브주의에 심취하고 있을 무렵에 쓴 종교적 서사시)에 대한 것, 동방 전도에 관한 것, 러시아의 수도원이나 교단의 문제 등이었다. 이따금 복장으로 위신을 살린 하인이 부드러운 양탄자를 소리 없이 밟으며 지나간다. 명주 양 말에 조여든 그 굵은 장딴지가 한 걸음 옮겨놓을 적마다 조용히 떨린다. 탐스러운 근육이 공손히 떨 때마다 만당의 장엄, 선의, 경건 등이 풍기는 감명은 한결 더 깊어갈 뿐이다... 여기는 성당이 다! 그야 말로 성당인 것이다. "당신 오늘 라토비노프 부인 이리나를 만나셨나요?" 하고 어느 부인이 조용히 묻는다. "오늘 리즈의 집에서 만나뵈었어요." 대답하는 여주인의 목소리는 아에오루스의 제금처럼 울린 다. "그분 참 가엾은 사람이에요... 머리가 좀 이상하지요... 신앙도 별로 없으시고요." "그래요, 옳은 말씀이에요." 그 부인이 맞장구를 쳤다. "그건 아마도 표토르 이바느이치 씨가 그 분을 평하여 하신 말씀이지요? 어쩌면 그렇게 한 마디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들어맞을까요! 그분 은... 그분은 정말 머리가 좀 이상한가봐요." "믿음도 형편없더군요." 여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향로의 연기가 솟아오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분의 영혼은 미궁을 헤매고 있어요. 머리가 좀 이상해요." "그래요, 머리가 좀..." 여동생이 말했다. 이것으로 여러분은 젊은이들이 반드시 다 이리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고는 볼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두려운 것이다. 그 '비정상적인 머리' 가 두려운 것이다. 아무튼 이 것이 그녀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관용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 관용어는 모든 경구가 다 그렇 듯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은 젊은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나이가 지 긋한 사람들도, 아니 고위 고관들까지도 두려워 떠는 것이었다. 확실히 그녀의 천박한 성격의 일 면을 이처럼 날카롭게 지적한 사람은 달리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귀에 달라붙어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이 한 마디의 말로써 그처럼 무자비하게 그녀를 낙인찍는 재능은 다른 어느 누구도 갖고 있 지 않다. 그리고 이 말은 향기로운 입을 통해 나왔다는 영광을 차지했기 때문에 더욱 신랄하게 들렸다. 그런 그 영혼의 밑바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지 못 한다. 어쨌든 그녀를 숭배하는 자들 중에는 날개가 돋친 자는 없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리나의 남편은 프랑스 사람들이 말하는, 이른바 출세가도를 줄달음치고 있다. 뚱뚱한 장군을 말에 채찍을 가하면서 그의 뒤를 바싹 쫓아와 앞지를 기세이나 어림도 없다. 이리나가 살고 있는 도시에 우리의 친애하는 소존토 포토우긴도 살고 있다. 그는 좀처럼 이리나를 만나는 일이 없으 며, 그녀 쪽에서도 종전의 관계를 그대로 유지해야할 특별한 까닭이 없다... 그가 맡아서 기르고 있던 그 계집아이가 얼마 전에 세상을 뜬 것이다. 작품론 농노해방 이후 러시아의 본질적 문제 이 철(한국외국어대 교수.러시아 문학) 1. 투르게네프와 그의 창작방법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1818∼1883)는 19세기 러시아 작가들 가운데에서 가장 서유럽적 인 작가라고 하겠다. 그것은 투르게네프만큼 많은 세월을 서유럽에서 보낸 작가가 없었기 때문이 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다른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일찍부터 서유럽인들에게 알려졌으며 서유럽의 지식인들과의 친분도 매우 두터웠다. 한편 그는 밝고 깨끗하고 산뜻한 프랑 스 문화를 사랑했고, 독일의 관념철학이나 포이에르 바하에 심취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숭 고한 문화적 유산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그 문학에는 슬라브적인 심각하고 극단적인 사고의 형식을 찾을 수가 없고, 모든 사상과 감정을 조화시키는 형식 속에서 통일을 추구하는 듯싶으며, 복잡한 이유나 설명보다 간결한 표현을 즐겨 사용한 것 같다. 그러나 투르게네프가 서유럽주의자라고 해서 그 이유를, 위에서 지적한 대로 그가 서유럽적 지 식과 취미를 몸에 지녔고 서유럽적인 생활을 좋아했으며 서유럽의 문화에 심취했다는 데에서 찾 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여기서 당시 러시아 문화계를 크게 뒤흔들었던 '서구파' 와 '슬라 브파' 의 논쟁의 본질을 상세하게 언급할 수는 없으나 어쨌든 투르게네프의 관점은 다음과 같다 고 말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러시아의 미래는 서유럽 여러 나라의 발전과정처럼 같은 방향의 역 사적 발전법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고, 표트르대제의 개혁은 결코 '슬라브파' 들의 지적처럼 러 시아를 불구로 만든 잘못된 서유럽화 정책이 아닌 정당한 개혁이며, 농노제의 폐지나 자유주의적 해방은 바로 이 같은 선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년의 그의 작품에 러시아 생활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것이 많다고 해서 그가 슬라브적 경향으 로 다가섰다는 견해는 매우 피상적인 관찰이라고 보겠다. 이 점은 장편 <연기>를 쓰게 된 투르 게네프의 의도를 알면 충분히 이해되리라 믿어진다. 투르게네프는 일찍부터 우리 나라에 소개되 었고 한국 문학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위대한 작가들이 소개됨으로써 다소 투르게네프의 광채는 흐려진 듯싶고 심지어는 아름다움과 통 속적인 사랑의 작가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마저 있다. 그러나 투르게네프에게 톨스토이나 도스토예 프스키의 특징인 탐구적 내지 고백적 경향은 전혀 없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이들과 다른, 그 나 름대로의 기본적 창작태도가 있었던 것이다. 투르게네프는 주인공의 대부분을 탐구하는 인물로 묘사하기보다는 이미 완성된 인물을 내세워 그 인물이 현실의 새로운 요구에 봉사할 수 있는 능 력을 갖추었느냐 하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것 같다. 탐구적 정신에 투철했던 톨스토이로서는 무엇 때문에 투르게네프가 <루딘>과 같은 작품을 썼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반면 투르 게네프로서는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을 이기주의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며, <전쟁과 평화>의 숙 명론에는 그야말로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투르게네프는 톨스토이 문학을 높이 평가하긴 했어도 되풀이되는 심리적 동기 부여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에 있었다. 톨스토이는 윤리적 감각을 지닌 '개성' 을 가지고 그 시대의 인물이나 사회적.경제적 제관계의 복잡한 기구를 비판할 수가 있었다. 또 도스토예프스키느 극히 과장된 '고독' 을 특징으로 하여 개성의 자유로운 윤리적 완성을 구할 수가 있었다. 이들은 작가인 동시에 윤리적.종교적 체계의 전도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투르게네프는 완전히 다른 방법을 선택하였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방관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적인 정열과 주관적인 감정의 불길을 간직한 인물을 묘사하면 서 전체적으로 객관성을 띤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그는 푸슈킨처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 하면서 주인공을 관찰하는 방법을 즐겼다. 그는 자신의 주인공들과 완전히 일치하는 법이 없었다. 이 점이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와의 다른 특징이다. 투르게네프의 작품에는 러시아 사회의 특정한 시기에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이념이 제게되어 있었고, 그의 장편은 문화적 계층의 여러 사람들에 대한 사회생활에 중요한 의미를 부 여하고 있다. 더욱이 철학적.심리적 탐구라는 기본적 이념이 명쾌하게 부각되어 있다. 이러한 창 작 태도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황한 이유 설명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므로, 그는 두 문호의 작품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발자크, 위고, 졸라의 창작방법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나타냈다. 반면에 플로베르의 문체를 사랑하고 모파상을 플로베르의 뛰어난 계승자로 보았다. 그는 '진실을 존중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미사여구를 혐오하고 사실주의의 극단 을 피하여 선택과 절도와 단정한 형식의 완성' 을 추구했던 것이다. 투르게네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지하생활자의 수기>보다 훨씬 이전에 내성적인 심리분석을 묘 사한<무용자의 수기>를 썼지만, 스스로 이러한 서술방법을 포기했다. 투르게네프느 인간의 본질 속에 깃들여 있는 어두운 측면을 충분히 이해하고는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날카로운 추구와 과장 된 평가는 좋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같은 방법이 주인공과 작가를 하나로 융합시켜 현실 의 일반적 상황을 왜곡하여 주관적 평가를 내리게 한다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는 이성적 인 인간이었다. 톨스토이는 그를 한평생 괴롭혔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생활철학을 창조하기에 이르렀으나 투르게네프는 이미 형성된, 그의 생활 속에서 발견되고 이해되었던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바로 여기서 투르게네프의 관조적 창작태도가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투르게네프가 생애의 대부분을 서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보낸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젊은 시절에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알게 된 유명한 오페라 가수 폴리나 비아르도 가르시 아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의 감정, 외동딸(농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을 비아르도의 가정에서 양육 하기로 한 일, 서유럽주의자로서 밝고 산뜻한 것을 좋아했던 그로서는 당시의 어두운 러시아 사 회의 분위기와 관헌들의 감시가 견디기 어려웠다는 것, 그래서 이러한 점들이 그로 하여금 한층 더 프랑스 문화에 이끌리게 했다고 여겨진다. 1883년 7월 투르게네프는 병상에서 그의 생애의 마지막 편지를 썼다. 그것은 당시 창작활동에 서 손을 떼고 있었던 레프 톨스토이에게 보낸 편지였다. 친애하는 레프 니콜라예비치, 오랫동안 적조했습니다. 실은 요즘 줄곧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이제 건강을 회복하기엔 틀렸습니다. 지금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올리는 것은 내 마지막 진심으 로의 소원을 부탁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의 벗이여, 제발 창작활동으로 되돌아와주길 바랍니 다. 아아, 만일 나의 소원이 당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나의 벗 이여, 러시아 대지의 위대한 벗이여,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죽음에 임박한 병자의, 연필로 씌어진 이 편지에는 러시아 문학에 대한 투르게네프의 한없는 사랑과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에 대한 진심으로의 기대와 우정과 석별의 정이 넘쳐흐르고 있다. 1883년 9월 3일 투르게네프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척추암이었다. 투르게네프는 페테르스부르크의 보르코보 묘지에 벨린스키와 나란히 매장해달라고 유언을 남겼고 그의 소원은 그대로 이루어졌 다. 황제 알렉산더 3세는 투르게네프의 죽음을 전해듣자 "니힐리스트(허무주의자)가 한 사람 줄어 들었군" 하고 말했다고 한다. 정부는 투르게네프 장례식에서의 정치적 데모를 저지하기 위해 온 갖 수단을 강구했다. 경무국장 프레베는 투르게네프의 유해를 맞는 데 있어서 성대한 출영이 되 지 않도록 특별한 조치를 취했다. 페테르스부르크의 신문들에 대해서도 유해의 매장에 임한 경찰 의 조치를 보도하지 못하도록 했다. 육군사관학교의 장교와 생도들에게는 장례식의 참석이 금지 되었다. 투르게네프의 유해는 10월 9일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했다. 역에서 묘지에 이르는 도로는 군대와 비밀경찰이 엄중하게 감시했고, 일반인에게는 묘지의 출입마저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위대한 작가의 유해는 영원히 땅에 묻혔다. 2. <아버지와 아들>의 주인공 바자로프 장편<아버지와 아들>은 1860년에 집필을 시작, 이듬해 7월에 완성되어 1862년 3월<<러시아 통보>>에 발표되었다. 장편의 중심은 <그 전날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사회활동가의 형상이었 다. 작품의 구상에 관해 투르게네프는<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회상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주요인물 바자로프의 기초에는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한 젊은 시골 의사가 있었다. 그는 1860년 직전에 죽었으나 이 주목할 만한 사나이에게 내가 느낀 바로는, 그 당시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니힐리즘이라고 불리게 되었던 그러한 개성이 있었던 것 같다. 이 개성이 나 에게 준 인상은 매우 강렬한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아주 선명한 것은 못 되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긴장하면서 나 자신의 감각이 어떻게 되지 않았 나 하고 주위를 살펴볼 따름이었다. 내가 놀란 것은 우리 나라의 문학작품 중에는 그 같은 인물 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느닷없이 의혹이 생겨났다. 나는 환상을 좇고 있는 것이 아닐 까? 주인공 바자로프의 원형 형성에 있어서 이 시골 의사 외에도 또 한 사람의 인물이 거론되고 있 다. 그는 투르게네프의 이웃으로, 역시 젊은 지방 의사인 야쿠쉰(1829∼1872)이다. 그는 소지주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의 모친은 농노였다. 주인공 바자로프와 마찬가지로 그의 조부님도 '땅을 경 작했다' 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페테르스부르크의 의학 아카데미를 졸업 한 뒤 의사로서 일하며 연구를 계속했다. 한편 민주주의자로 자처하면서도 당시의 진보적인 사회 운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야쿠쉰의 모습과 행동거지가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 다. 그는 개방적인 성격을 지닌데다가 성실하고 강인하며 순수한 이념의 소유자였다. 이런 저런 이유로해서 사람들에게 사랑과 친근감을 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1872)이<어버지와 아 들>의 집필시기와 시간적으로 매우 격차가 난다고 해서 바자로프의 인물 형성에서 제외되었다고 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두 세대에 관한 주제는 이미 1856년 톨스토이의<두사람의 경기병>이 라는 작품에서 다루어진 바 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 문제를 도덕적.윤리적 시각에서 서술한 반면 투르게네프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단절의 밑바작에 놓인 사회적 정치적 문제, 세계관의 문제를 고려하고 있다. 이를테면 두 세대에 관한 주제는 농노해방의 준비와 실행 시기에 씌어졌 기 때문에 자유주의자와 혁명적 민주주의자 사이의 격렬한 이데올로기적 투쟁이 나타나 있다. 여 기서 두 세대의 문제라 함은 40년대와 60년대의 사람들에 관한 문제이며, 그것은 농노제 폐지의 방법에 관해서 대립된 두 개의 사상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위로부터의 개혁' 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은 농민혁명을 기대하면서 그것을 준비하고 그 도래 를 촉구하고 있었다. 바로 이 같은 두 세대의 논쟁이 장편<아버지와 아들>을 쓰게 된 배경이었다. 투르게네프는 창 작에 임하면서 두 세대간의 논쟁뿐만 아니라 당시의 문학적.사회적 논쟁의 많은 부분도 생각하고 있었다. 잡계급 출신으로, 계몽적 민주주의자이며 새로운 유물론적 세계관의 소유자인 바자로프는 현실과 생활에 대하여 새로운 실제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 바자로프는 무신론자, 유물론자의 입장 에서 러시아의 전제적 농노제적 조직, 귀족문화, 관념철학 등을 부정하고 귀족과 자유주의를 증오 하면서 투쟁하고 있다. 투르게네프는 바자로프에게서 60년대 민주주의자들이 지닌 세계관의 전형 적 특징을 구상화하려고 노력했다. 즉 철학적.사회적.사상적 문제에서는 체르니셰프스키나 도브롤 류보프의 논문에 발표된 사상을 접목시켰다. 반면에 귀족 자유주의자들의 견해의 대표자로서는 파벨 키르사노프를 등장시켜 바자로프와 대치시켰다. <아버지와 아들>이 발표되자 격렬한 논쟁 이 야기되었다. 바자로프의 형상은 독자들의 눈에 모순투성이의 인물로 비쳤다. 보수파들은 구세 대를 조롱.조소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분개했다. <<동시대인>>의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잡계급 출신의 민주주의자들을 중상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유물론자인 바자로프는 인간의 의식과는 관계없는 객관적 현실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공리주의의 이론을 신봉하고 있었다. 즉 "이야기가 이치에 맞으면 나는 동의한다 - 다만 그것뿐입니다" 하고 말한다. 이는 '인간에게 유익 한 것만이 참된 선이다' 라는 체르니셰프스키의 이론과 가깝다. 그러나 바자로프의 사고의 모순은 의식을 과소평가하고 짐작을 최대평가하며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을 귀착해버리는 경향이라고 하겠다. "원리라는 건 본래 존재하지 않는거야 - 자네는 아직도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야. 모든 것이 그 감각에 의해 이루어지는 거지" 하고 바자로프는 말하고 있다. 또 그는 "어째서 난 화학을 좋아하고, 어째서 자네는 사과를 좋아하는 건가? - 이것 역시 감각의 결과인 걸세. 모두가 다 마찬가지란 말이야. 인간은 그 이상 깊이 들어갈 수는 없는거야." 이렇듯 바자로프는 감각을 절대시하고 있다. 또한 바자로프는 사회현상과 자연현상을 동일시하고 있다. "인간은 숲 속의 나무들과 같은 겁 니다. 어떤 식물학자도 각각의 자작나무를 하나하나 연구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러한 말들에서 어쩐지 속물화한 유물론자들의 견해가 풍겨오는 듯싶다. 사실 당시의 진보적인 인사들의 대부분 이 적든 많든간에 유물론과 속물적인 사고가 혼합된 형태로 현실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 인하지 못할 것 같다. 또한 투르게네프도 이 점에 관하여 명확힌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것은 사실 이다. 바자로프로서는 철학이란 감각하기 어려운 '원리' 이거나, 아니면 로맨티시즘과 같은 쓸데없 는 방해물이었다. 확실히 존재하는 것, 즉 사실, 경험, 감각만이 필요하고 철학 따위는 필요치 않 다고 여긴 것이다. 60년대 혁명운동은 아직 성숙되어 있지 않았고, 혁명가는 존재하지만 그들의 기반은 확고하지 못할 뿐 아니라 고립되어 있다고 투르게네프에게는 생각되었다. 따라서 그는 바자로프를 고립된 혁명가로서 묘사하려고 했었다. 바자로프의 정치적 견해에는 60년대의 민주주의 운동이 지도자들 에게 특유한, 당시 사회체제에 대한 전면적 부정, 자유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미래로 향한 길을 한사코 열고 말겠다는 의지 등이 있었다. 이러한 특색들이 바자로프를 새로운 유형의 인물 로 나타내주긴 했어도 그것은 60년대 혁명가들의 완전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투르게네프는 이 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잡계급 출신 민주주의자들의 형상은 이전의 '무용자' 들의 형상에 비하여 한결 더 복잡하고 모 순에 차 있다. 이 복잡성과 모순은 민중과 과학과 예술에 대한 바자로프의 견해에 잘 나타나 있 다. 그는 자신이 혈연적으로 민중과 결속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의 조부는 땅을 갈았고, 따라서 농부의 아이들에게 남다른 애착을 느꼈으며, 하인들은 마치 친구 대하듯이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민중을 경멸하는 듯싶었고 그들에 대해 빈정거리는 경항을 지니 고 있었다. "러시아 농민은 하느님마저 먹어치운다" , "우리 농부들은 술집에서 흠뻑 취하기 위해 서는 그들 스스로가 약탈하는 따위의 짓도 즐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자로프의 말이 다. 바자로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바자로프의 자애심과 긍지는 정신 적 고독과 정신적 불안의 비극적 감각과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농민해방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고독에 대한 의식, 인생은 짧고 허무하다는 것에 대한 반역의 의식이며, 그것이 그의 심리적인 복 잡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 하나의 원자속에, 이 수학적 일점속에 피가 흐르고 뇌가 활동하고 어떤 희망을 품고 있다니..." 미래의 영겁과 비교해볼 때 그의 한 점에 불과한 인새이란 그야말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투르게네프는 바자로프의 고독한 의식 속에 내성하는 개성, '무용자' 의 심리적 특성을 포함시키고 있다. 민중(농민)이 처해 있는 노예적 상태, 그런데도 이들 가운데에 아무런 혁명적인 의식도 찾을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고독함과 우울함, 이것은 50년대, 60년대 초의 러시아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공통된 괴로움이었다. 민중에 대한 거칠고 엄격한 태도, 그들을 한사코 계몽시켜야겠다는 욕구 속 에 민중에 대한 바자로프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다. 바자로프가 민중의 후진성과 소극성을 비판 한 것은 민중을 깨우치고 교화하고 이들을 노예적 상태에서 구출하려고 하는 잡계급 출신 민주주 의자들의 진실된 소망의 반영이라 하겠다. 그러나 바자로프에게는 민중이란 신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만 보였다. 죽음을 앞두고 바자로프는 생각한다. "러시아는 나를 필요로 합니다... 아닙니다. 어쩌면 필요치 않을지도 모릅니다 - 그럼 어떤 사람이 필요합니까?" 민중에 대한 바자로프의 회의적 태도는 투르게네프의 세계관에 있어 계급적 한계성에 의한 것 이었다. 본래 투르게네프는 귀족 출신의 자유주의적 점진주의자로서 그가 60년대 잡계급 출신 민 주주의자들의 혁명적인 진로를 충분히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바자로프처럼 이 길을 걷는 인물이 제아무리 총명하고 성실하고 매력적이라 할지라도 역사적이로는 어떤 비극적인 운명 을 걸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가 죽음에 임해서 새삼 자기를 재검토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바자로프의 형상은 러시아의 자연과학자로서의 유물론자의 형상을 작가 스스로가 고안한 것이 라고 하겠다. 60년대에는 자연과학과 유물론자들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령 바자로프의 철학적.정치적 견해가 체르니셰프스키나 도브롤류보프의 철학의 반영이라고 한다면, 주인공의 자연과학적 견해에는 유물론자였던 자연과학자들의 견해가 다분히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구리를 해부하는 바자로프의 학술적 실험도 작가의 단순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의 현실을 보편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 생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세 체노프는 60년대의 러시아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개구리 실험을 했었다. 그의 저서 <<신경 계통의 생리학>>은 개구리 뇌의 연구 결과로서 나온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바자로프는 실험주의자다. 그는 구체적인 경험에 의해 진리를 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추상 적.사변적철학에 반대한 것처럼 현실에서 유리된 과학도 반대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하고, 결 국 과학만을 믿는다는 말이지?" 하는 질문에 바자로프는 "저는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무것 도 믿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과학이란 대체 뭡니까 - 과학 일반 말씀입니다. 각종 직업에 칭호 가 있듯이 과학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과학일반이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바자로프는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과학을 변호한다. 그는 현실에 뒤떨어진 의학을 조소한다. 그는 죽은 듯이 침체된, 낡은 곰팡이가 낀 전통에서 과학사상을 해방하기 위하여 싸우 고 있다. 그는 '아버지' 의 의학을 조소함과 동시에 새로운 유물론적 교의에 입가한 의학을 받아 들인다. 바자로프는 예술을 부정하고 있다. 그것은 환상이 인간적인 의지를 이긴다고 해서라기보다는 어떤 유의 비평가들에 대한 작가의 도전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생각된다. 당시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할 국민적.정치적 긴요한 과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술을 그보다 상위에 내세우는 비 평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자로프로서는, 예술보다 더 긴요하고 중요한 분야가 존재하는 한 예술 을 상위에 내세울 수는 없었다. 이것은 예술을 극단으로 미화하려는 시도에 대한 젊은 세대의 자 연스러운 반발이었다고 한다. 푸슈킨에 대한 바자로프의 부정적인 태도가 그러했다. 벨린스키의 사상을 받아들인 시인이나 비평가들은 푸슈킨을 무엇보다도 자유를 사랑하는 시인, 현실적 생활 의 시인, <러시아의 백과사전>을 창조한 시인으로서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50년대에 이르러 푸 슈킨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예술을 위한 예술' 의 선구자였다. 순수예술의 옹호자들은 푸 슈킨의 작품을 유미주의적입장에서 이해했고,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은 그의 작품을 에워싼 유미적 이론을 반박하려고 했으나 현실적 생활의 시인으로서의 푸슈킨을 독자들 앞에 제시할 수가 없었 다. 그뿐만 아니라 이 논쟁에 열중한 나머지 도브롤류보프나 피사레프 같은 민주주의자들은 '순수 예술' 의 옹호자들에게 도전하면서 푸슈킨의 작품까지 공격했었다. 바자로프도 바로 이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는 "자연은 신전이 아니라 공장이다. 인간은 그 속 의 노동자인 것이다" 라고 말한다. 투르게네프도 바자로프의 미학적 원리의 결핌에 대해서 불만 과 더불어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는 듯싶다. 파벨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에게는, 60년대에 와서 이전의 자유주의적 환상에서 벗어나 점차 보수적인 입장으로 옮겨가는 귀족 인텔리겐치아의 전형이 제시되어 있다. 바자로프의 친구 아르 카디와 그의 아버지 니폴라이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는 중도파적 자유주의자의 한 전형이다. "바 자로프는 어떠한 원리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인간" 이라고 아르카디가 말하자 파벨 페트로비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믿을 수 없는 원리 없이는 한 발짝도 걸을 수가 없으며, 숨도 쉴 수 없 단 말이다." 또 그는 "원리는 믿지 않으면서 다만 개구리를 믿는다는 거로군" 하고 말한다. 파벨 페트로비치의 원리의 체계 속에는 중세적인 특권의 옹호, 오래된 귀족적 명예의 주장이 분명 깃 들여 있다. 어쨌든 투르게네프는 자유주의적 경향의 귀족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계급적 공감대를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고 여겨진다. <아버지와 아들>은 60년대의 러시아 사회사상을 뒤 흔들었던 크나큰 사회문제를 다룬 작품이며, 투르게네프의 다른 장편에 비해서 사회적 의미에서 나 예술적 의미에서 그 비중이 매우 크다. 특히 <아버지와 아들>의 구성은 특수성은 주인공의 성격묘사의 방법에 있다. 그는 곤차로프나 톨스토이와는 달리 무엇보다도 대화를 주로 선택하고 있다. 투프게네프의 주인공의 대화는 대가가 열띤 정치 및 철학에 관한 논쟁이다. <루딘>에서는 피가소프의 논쟁, <귀족의 둥지>에서는 라브레즈키와 판신의 논쟁이 있고, <아버지와 아들>에서 는 바자로프와 파벨 페트로비치의 격렬한 논쟁이 있다. 이 논쟁에서 바자로프는 파벨과는 달리 간결하고 경구에 가까운 정확한 내용이 담긴 말을 구사한다. 또<아버지와 아들>에서는 인물의 외형적 묘사도 큰 몫을 하고 있다. 귀밑털, 얼굴, 눈 등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거기에 개인적 특징 을 부여하고 있다. 1874년 9월, 진보적 여성 사회활동가인 피로소포바에게 보낸 서한에서 투르게네프는 다음과 같 이 쓰고 있다. "...바자로프는 변함없는 예언자로서 강력한 개성을 지녔고, 일정한 매력을 지닌 타 입입니다..." 또 1862년 4월 시인이며 비평가인 스르체프스키에게 보낸 서한에서, "나의 소설 전체 는 진보계급으로서의 귀족계급에게 바쳐진 것입니다" 하고 말한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은 혁명 적 민주주의자들의 사고방식과 많은 점에서 대립되고 있긴 해도 바자로프에 대한 작가의 찬미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1869년의 논문 <'아버지와 아들'에 관해서>에서 투르게네프는 "...진실을, 현실의 실제적인 사실 을 정확하고 힘차게 재현한다는 것은, 가령 이 진실이 자신이 공감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문학가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행복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투르게네프는 바자로프 일가와 키르사 노프 일가, 그리고 여지주 오딘초바를 묘사함에 있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각자의 입장 에 어느 정도의 정당성이 있다는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다. 키르사노프 일가에 대한 바자로프의 태도를 묘사함에 있어서나, 또 두 세대간의 갈등을 묘사함에 있어서 작가는 각자의 편에 서서 저 마다의 정당성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바라로프는 그의 목적을 실현하지 못한 채 죽어갔다. 투르게네프는 그의 주인공들이 싸우기 위 해서 생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격력한 싸움을 통해 그것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것은 그 같은 싸움이 아직 일반적 사실로서 사회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그 싸움의 승 리의 날도 아직은 요원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발표되자 <<러시아 통보>>의 발행인인 카트코프를 비롯한 반동적 비평가들은 '니힐리즘' 이라는 낱말을 빌미로 잡 아, 그 속에 60년대 잡계급 출신의 민주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 전체가 표현되어 있다고 비난했다. 카트로프는 처음 원고를 읽고 크게 놀라 바자로프의 성격묘사를 정정하도록 투르게네프에게 요구 했다. 당시 원고를 발표할 마땅한 잡지를 찾지 못하고 있던 투르게네프는 할 수 없이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로 인해 바자로프의 성격은 한결 더 조잡하고 강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단 행본으로 간행될 때에는 카트코프의 의견을 고려할 필요가 없게 되어 바자로프의 묘사는 작가의 의도대로 고쳐졌고 잡계급 출신의 민주주의자들의 형상이 더 강조되었다. 그런데 <<동시대인>>의 편집부도 이 작품에 대해서 적대적인 의견을 나타냈다. <아버지와 아 들>은 젊은 세대에 대한 중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혁신적인 젊은이들의 의견을 존중해왔던 투 르게네프로서는 그들의 부정적인 태도에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피사레프는 이 작품을 긍 정적으로 평가하고 바자로프의 형상 속에는 사고하는 리얼리스트, 민주주의자의 많은 특징들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60년대 말에 이르러 객관적인 비평이 나타나 바라로프에 의해 체현된 진리가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외교관이며 문예비평가였던 보롭스키는 1909년 <바자로프와 사닌>이라는 논문에서 다음 과 같이 쓰고 있다. 투르게네프가 몇 가지 섬세한 점에서 바자로프를 부정확하게 묘사했고, 또 그가 바로 그 부정 적인 특색을 과장하였다는 것을 인정한다손치더라도 단 한 가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근 10 년 동안 완전히 묻혀 있던 리얼한 사회적 전형의 참된 특징을 리얼리스트의 성격묘사의 밑바닥에 두었다는 사실이다. 3. 정신적 위기와 <연기> 장편 <연기>는 1862년 말에 계획되고 1865년 11월부터 1867년 1월에 완성될 때까지 독일의 바 덴바덴에서 오랫동안의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작품이다. 구상된 이후 작가는 여러 차례의 정신적 위기를 맞으면서 집필을 계속했고, 이 때까지의 투르게네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긴 세월이 소비되었다. "이 장편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말해서 - 적어도 나에게는 - 중 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연기>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톨스토이는 "경박하고 진실성이 결여되었으며... 시적 인 정취가 없다" 고 말했고, 게르첸과 피사레프도 불만을 표시했다. 다만 네크라소프만이 작품의 예술적 부분을 평가하고, 작품의 논쟁적.정치적 부분은 러시아인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 했다. 60년대 투르게네프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당시 그의 정신적 불안을 말해주는 몇 가지 내 용들이 있었다. 폴란드의 반란과 페테르스부르크의 대화재, 그리고 1866년의 알렉산더 2세의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한 그의 착잡하고 불안한 감정 등이었다. 페테르스부르크의 화재는 1862년 5월 28 일에서 30일까지 3일간 계속된 것으로 화재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은 채 경찰의 치밀한 계략 밑에 학생과 니힐리스트들이 불을 질렀다는 소문만 펴졌다. 정부는 이 화재의 주범을 폴란드인, 학생, 혁명가들에게 덮어씌우고 이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투르게네프는 파리에서 베를린을 거쳐 고향 스파스코예 마을로 가는 도중 화재 전날인 27일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하여 이 화재를 직접 목격했다. 이 같은 예기치 않았던 충격적인 사건에 당황한 투르게네프는 당시 복잡했던 그 자신의 대인관 계 속에서 자신의 내면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장편<연기>의 집필에 전력을 기울였다. 당시 투 르게네프는 '러시아는 장차 어느 길로 나아가야 하는가' 라는 러시아의 진로에 대하여 게르첸과 의견이 대립되고 있었다. 이것이<연기>의 구상의 하나가 되었다. 게르첸은 러시아 농민공동체에 기대를 걸고 그 속에서 미래의 사회주의의 시발점을 본 데 대하여 투르게네프는 그것은 농민으로 서는 짊어지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의존성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으로는 농민을 빈곤과 암우에서 구출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결코 밝은 미래의 시발점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투르게네프의 생각은 옳았고 그 자신은 점진주의적 입장을 취하 고 있었다. 그러나 게르첸과의 결렬은 러시아 민주주의자들과의 우정의 끈을 완전히 끊어버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후 투르게네프는 외국에서 지내는 일이 더욱더 많아졌다. 또 건강의 악화와 딸에 대한 마음 속의 괴로움도 그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딸 폴리나는 충분한 지참금을 가지고 파리 근교의 유리 공장주인 가스턴 브류엘과 결혼했다. 한 번도 가정의 행복을 맛본 적이 없었던 투르게네프로서는 딸의 행복을 그 무엇보다도 열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대는 빗나갔다. 가스턴 브류엘은 파산 하여 딸의 지참금까지 날려버렸던 것이다. 젊은 부부의 불화는 더욱 심해지고 결국 폴리나는 무 일푼으로 어린애들을 데리고 스위스로 도망쳐버렸다. 바덴바덴에는 치료 효과가 좋은 광천과 푸르름과 맑은 공기가 있었다. 평생의 우정을 나눴던 폴리나 비아르도는 오페라의 일선에서 물러나 부부가 함께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투 르게네프는 유럽의 많은 문화인들로부터 방문을 받았다. 겉으로는 화려한 생활을 보냈지만 속으 로는 고통스러운 긴장의 연속이었다. <연기>는 1867년 4월<<러시아 통보>>에 발표되었다. 이 소설은 그의 이전의 작품에 비해 뚜 렷하게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독자의 선입견에 따라 갖가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주 인공을 에워싼 애정문제와 사회문제가 혼연히 융합하고 있었던 종전의 작품과는 달리, 그러한 단 일성이 무너지고 몇 가지 커다란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부패한 상류사회에 혐오를 느끼면 서도 그 환경을 버리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이리나의 비극적인 요소, 진보적 인텔리겐치아를 자 처하는 구바료프 그룹의 사람들과 바덴바덴에서 생활하는 러시아의 장군들과 관료 귀족들을 풍자 적으로 묘사한 사회비판적인 요소, 그리고 이리나와 리토비노프 중간에 타치야나를 개입시킨 연 애적 요소 등이다. 투르게네프의 창작방법에 변화가 보인 것은, 그의 기본방법이 끊어졌다기보다는 새로운 소재를 작품 속에 묘사하기 위한 그의 대응책 때문이다. 그가 리토비노프를 중심으로 작품으로 쓰면서도 주변의 인물을 극히 선명하게 묘사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은 주의할 만한 점이라 하겠다. 이리나 와 그녀의 행동 범위인 환경은 리토비노프의 행동에 비해 보다 많이 부각되어 있지만, 그것은 결 국 리토비노프가 중심적 역할을 다하기 위한 보조적 조치에 불과하다. 리토비노프는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며, 많은 장이 "리토비노프는..." 하는 식으로 시작되고 있어 독자는 작가가 이 인물 을 중심으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다. <연기>는 전체적으로 보아 사회풍자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작가의 말은 어떻게 보면 비통한 메아리를 연상케 하고 있다. 당 시 러시아가 처해 있던 실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또한 주변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에 극도 의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 속에서의 인간의 우수를 작품 내에서 느끼게 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과연 러시아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 그것이 어렴풋이 주인공의 눈에 비치고, 아 울러 그에게 우수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우수와 고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리토비노프 는 인생의 패배자가 되지 않는다. 리토비노프의 진로는 단순히 실연한 사나이의 체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상류사회나 이리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해서 뭔가 긍정적인 힘이 솟고 있다. 투르게네프는 농노해방 이후 수년간에 걸친, 러시아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 다. 말하자면 철학적.윤리적 문제, 인생의 의의, 인간의 의무와 권리, 사랑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러시아의 본질적인 역사적 힘에 관한 문제 등이다. 그는 활동적인 인물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 니라 러시아 사회의 합리적인 개조와 사회적 정의의 확립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는 활력소를 찾 고 있다.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지만 황제에 위해서 주어진 자유는 농민을 빈곤과 고통에서 구해 낼 수 없었다. 해방된 농민들이 하는 수 없이 부농과 상인과 고리대금업자라는 새로운 착취자 때 문에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새로운 노예적 상황이 그들의 생활을 점점 더 비참하게 만들었 다. 투르게네프는 끈질긴 인내심을 가지고 이를 지켜보면서 괴로운 마음으로 그것으로부터의 출 구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것이 서서히 나아지리라고 막연히 믿는 도리밖에 없 었다. 투르게네프의 <연기>에서 그의 모든 예술적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 과장법, 조소, 정치적 풍자 등을 사용하여 마치 모든 정경이 독자의 눈앞에서 선명하게 전개되고 있는 듯싶다. 1862년의 원 인 불명의 페테르스부르크의 대화재, 테러리즘의 횡포, 슬라브파의 주간지<<제니>>의 발행 정 지,<<동시대인>>,<<러시아의 말>>의 발행 금지, 일요학교와 장기클럽의 폐쇄, 빈곤한 학생을 위한 구제기금의 몰수, 인쇄소의 엄중한 감시, 그리고 계속되는 무책임한 체포, 즉 러시아에서는 수군거리기조차 꺼려했던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났던 해인 "1862년 8월 10일 오후 4시 ..." 로부터 시작되는 이 소설은 그 서두부터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날 이 시각에 바덴 바덴에서는 본국 러시아에서의 고통스러운 정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군들과 관료들과 귀족들 은 이상야릇한 복장을 하고 당대 최고의 교양인답게 괴상한 외국어를 섞어가면서 거드름을 피우 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만족스러운 생활을 보내고 있는 집단으로서 작가의 풍자적 대상이 되었다. 투르게네프의 풍자의 대상이 되었던 또 하나의 집단은 바덴바덴과 하이델베르크의 망명 혁명가 들이었다. 작가는 이 장편을 계획하고 1862년에 하이델베르크로 떠난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전 년에 페테르부르크 대학이 폐쇄된 이후로 많은 러시아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게르첸에 심취하고 있었으며 특별히 러시아 독서실까지 설치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투르게네프는 큰 실망 을 안게 되었다. 그곳에서 바자로프(<아버지와 아들>의 주인공) 의 사업을 이을 만한 후계자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들이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강 건너 불을 바라보듯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스승만 맹목적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장편<연기>의 구상의 하나였던 런던의 망명자들에 대한 비판은 하이델베르크의 망명자들에 대 한 비판을 대신하고 있다. 런던의 망명자들과의 의견 차이가<연기>의 구성에 있어서 하나의 동 기가 되었을지언정 결국 그는 이들을 직접적으로 풍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게르첸 자신이 < 연기>를 그의 활동의 풍자적 묘사로서 받아들이고 있었고, 히이델비리크의 혁명가들의 묘사는 바 로 그 시대 러시아 망명자들의 취약한 측면을 올바르게 구상화시킨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투르게네프가 하이델베르크 망명자들의 지도적 인물인 구바료프의 서클을 묘사하였을 뿐 런던의 게르첸이나 오가료프를 완전히 여기서 제외시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다. 구바료프가 입버릇처럼 내뱉는 사회적.정치적 문제는 바로 게르첸과 오가료프의 말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며, 이들의 슬라브주의적 러시아의 사회주의사상도 구바료프에 의해서 전도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서구주의자인 포토우긴에 의해서 신랄하게 비판을 받고 있다. 포토우긴은 투르게네프의 장편에 나오는 인물로는 극히 특이한 전형이다. 그는 바덴바덴의 러 시아 상층계급과 하이델베르크의 젊은이들을 동시에 비판하고, 리토비노프를 계발하는 역할을 하 고 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투르게네프의 이념을 대변하고 있으며 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떠맡고 있다. 포토우긴 역시 투르게네프와 마찬가지로, 러시아를 살릴 수 있는 길을 무엇보다도 노동을 싫어하고 자신들의 천부적 재능을 과신하고 있는 러시아인을 비판하고 있다. 또 포토우긴 의 말 속에는 투르게네프와 게르첸이 철학적.정치적 논쟁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서유럽주의자의 입을 통하여 표현되 투르게네프의 사회적.정치적 신념이 아 무리 옳고 신랄하다고 해도 작품 전체로 볼 때 오히려 포토우긴의 요설은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결점이라 하겠다. 그가 너무 많은 말을 함으로써 작품의 예술적 균형은 무너지고 있는 듯싶다. 물 론 여기에는 게르첸에 대한 당시의 투르게네프의 의도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겠으나, 어쨌든 이 작품이 사랑의 갈등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투르게네프의 그 어느 작품보다도 뛰어났음에도 불구 하고 많은 비평가들의 찬사를 얻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랑의 갈등은 투르게네프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 회적 문제와의 관련성 속에서 그 의의가 더욱 큰 것이다. 이리나는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녀 는 학창시절부터 남다른 두뇌와 재능을 다녔지만, 성격면에서 보면 변뎍스럽고 제멋대로의 기질 을 가졌다. 어느 교사는 그녀를 "냉담하고 감정이 없다" 고 하였고, 친구들은 "거만하고 마음을 터놓지 않는다" 고 말했다. 그녀는 변덕스럽고 권세욕이 강한 성격에 비상한 머리를 지닌 소녀로 성장했다. 작가는 이리나가 사교계에 처음 나왔을 때의 그녀의 심리적 비밀을 교묘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 다. 자존심이 강한 여성의 일면을 묘사하면서도 순수한 소녀의 망설임과 불안이 교차하는, 내면적 인 복잡한 갈등을 보여준다. 이리나는 리토비노프가 준 꽃다발을 얼굴 가까이 가져가면서도 어딘 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사교계로의 첫 진출에 대한 리토비노프의 축복과 자신의 미모에 대한 상대방의 찬사에도 그녀는 이미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녀가 말없이 눈길을 보내고 있는 방향, 그 것은 당장 이 사내를 떨쳐버리고 자신의 화려한 첫 무대의 대성공을 향해 나아갈 그 방향이었다. 이 무도회르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다. 리토비노프의 신상에 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학과정을 마쳤고 크림 전쟁에도 참가했다. 농학과 공학을 배우기 위해 외국 유학의 길에도 올랐다. 그런데 농노해방 이후 토지 분할이나 매매계약 등으로 골치를 썩이 고 있던 부친의 요청으로 고향 마을로 가는 도중 바덴바덴에 들렀다. 여기서 그는 약혼녀인 타치 야나를 만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리토비노프는 우연히 이곳에서 이리나를 재회하게 된다. 지금 은 라토미로프 장군의 아내가 되어 있는 이리나는 예전보다 한결 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변해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연기>에서의 이 새로운 사랑의 묘사 야말로 예술적으로 극히 뛰어난 부분이라 하겠다. 투르게네프의 다른 장편과 마찬가지로 이리나의 형상은 주인공의 인생을 보다 분명하게 만들고 그를 평가하는 데 크나큰 도움을 주고 있다. 리토비노프는 투르게네프의 다른 귀족 출신의 주인 공과 비교하면 매우 확고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모친이 귀족 출신인데다가 부친이 상인 출신의 퇴직 관리라는 설정에 의해서 이미 암시되어 있다. 그는 이리나와 타치야나 사이의 선택 에서 동요하지만, 타치야나에 대한 배신행위는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이리나에 대 한 그의 불타오르는 정열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이리나의 편지로 해서 결단을 내릴 수가 있었다. "전 이 사회로부터 빠져나갈 힘도 없지만 당신 없이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도 없어요. 우 리 부부는 얼마 후에 페테르스부르크로 떠날 예정이니, 당신도 함께 가서 그곳에서 살아주세요. 당신의 일자리는 우리가 알아볼게요. 그렇게 되면 당신의 지금까지읜 연구도 헛되지 않을 것이고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을 거예요..." 리토비노프는 러시아의 영지로 되돌아가 몇 년 후 순수 러시아적 여성인 타치야나와 결혼한다. 이러한 결말 때문에, 투르게네프는 서유럽주의에서 벗어나 점차 러시아적인 것으로 복귀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연기>를 단순한 연대소설로 보는 시각도 있고, 이리나의 화려한 생활을 서유럽적이니 것으로 보고 이를 순수 러시아의 딸인 타치야나와 비교하려는 피상적인 견해도 있 다. 어쨌거나 투르게네프의 견해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의 리토비노프이 명상에서 찾아 야 할 것 같다. 차창 밖에 이어지는 검은 연기를 보면서 리토비노프는 모든 것이 마치 연기처럼 느껴졌다. 그 자신의 생활도, 러시아의 현실도, 최근 그가 겪은 여러 가지 사건도 모두가 연기처 럼 느껴졌다. 구바료프의 서클도, 바덴바덴의 러시아인의 상류사회도, 포토우긴의 장황한 이야기 도 모두가 연기처럼 생각되었다. 리토비노프의 이러한 생각이<연기>의 전반적인 개념을 해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 고 있다고 보겠다. 이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농노개혁 이후 수년간에 걸친 사회적.정치적 암흑기 속에서 작가가 느끼고 겪었던 침울하고 어두운 체험들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리토비노 프의 염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작품의 본질적인 이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투르게네프 자신은 러시아의 현실을 주인공 리토비노프의 눈으로 보고 있지 않 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극도의 불안과 혼란 속에서 주인공이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