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지은이:투르게네프 옮긴이:이 철 출판사:범우사 1 1859년 5월 20일, XXX거리에 있는 한 여인숙에서의 일이었다. "어떻게 됐어,피오트로? 아 직도 보이지 않는가?" 높지 않은 현관에 모자도 쓰지 않은 채 안으로부터 나타난, 약간 짧 고 먼지 투성이가 된 외투에 바둑 줄무늬의 양복바지를 입은 40쯤 되어 보이는 한 신사가 자기 하인에게 이렇게 물었다. 하인은 턱에 허연 솜털이 났으며, 작고 흐리멍덩한 눈초리의 오동통한 젊은 사나이였다. 하인은 한쪽 귀에 단 터키옥의 작은 귀걸이, 포마드를 바른 군데군데 빛깔이 다른 머리털, 은근한 몸짓 등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것이 가장 새로운, 진보한 세대의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큰길 쪽을 거드름을 피우며 바라보고 나서 대답했다. "아니요, 나타나시지 않으셨습니다." "보이지 않는가?" 주인은 거듭 물었다. "나타나지 않 으셨습니다." 하고 하인은 또 한 번 대답했다. 주인은 한숨을 쉬고 조그마한 벤치에 걸터앉 았다. 그가 다리를 포개고 생각에 잠긴 듯이 주위를 둘러보며 벤치에 앉아있는 동안,독자에 게 그를 소개해 두겠다. 그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라 불리고 있다. 그는 이 여인 숙에서 15마장쯤 떨어진 곳에 농노 200명을 거느린 훌륭한 토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한 편 농민들과의 사이에 토지의 경계선을 정하여 농장을 만든 이후로 면적 2000정보의 소유지 라 불리기도 한다. 그의 아버지는 1812년(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침공해 들어온 해)에 용맹을 떨친 장군으로 별로 읽고 쓸 줄도 몰랐으며, 버릇도 없었지만, 악의가 없는 러시아의 사나이였다. 그의 일 생은 각고정려의 연속이었으며, 처음에는 여단장이었다가 나중에는 사단장이 되었는데 줄곧 지방에서만 살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자신의 계급 덕분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 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의 형 파벨(이분에 대해서는 뒤에 나온다)과 마찬가지로 러 시아의 남부에서 태어났으며, 14세가 될 때까지 엉터리 가정교사들이나 버릇은 없지만 아첨 하기를 잘하는 부관들, 그 밖의 연대 참모부에 있던 자들에게 둘러싸여 집에서 자랐다. 거의 어머니는 콜랴진 집안 태생으로 처녀시절에는 아가타라고 불리었으나 장군 부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자신의 이름 옆에 다른 이름이 붙어 아가포클레야 쿠지미니시나 키르사노 프라 불리게 되었다. 그녀는 화려한 모자를 쓰고, 비단옥으로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며, 교회 에서는 맨 먼저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고, 큰 소리로 잘 떠들어댔으며, 아침에는 자식들을 불 러 손에 입을 맞추도록 시켰고, 밤에는 자식들을 축복해주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극히 만 족하게 살고 있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유난히 용기가 없을 뿐 아니라 겁쟁이라는 별 명까지 붙었지만, 형 파벨과 마찬가지로 군무에 종사해야만 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입대 통지서가 와 있던 바로 그날, 그는 한쪽 다리에 골절상을 입어 두 달 동안 침대에 눕게 되 더니, 그만 평생을 절름발이로 지내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에 대한 일을 단념하고 문관으로 만들기로 하였다. 아버지는 그가 열 여덟이 되자 곧 페테르스부르크로 데려가서 대학에 넣 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그의 형은 그 무렵 근위연대의 사관이 되어 있었다. 젊은 두 사람은 외가로 아저씨가 되는, 일리야 콜랴진이라는 고관으로부터 어딘지 모르게 감시를 받 으면서, 한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자기 사단과 아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분방한 서기식의 필적으로 가득 채워 쓴 사절지의 회색 종이를 아들에게 부쳐줄 뿐이었다. 이 사절지 한구석에는 육군소장 피오트로 키르사노프라는 글자가 매우 공들인 듯 한 소용돌이 무늬에 둘러싸여 화사하게 쓰여 있었다. 1835년에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학사 로서 대학을 졸업했고, 같은 해에 아버지 키르사노프 장군은 사열에 실격했다는 이유로 퇴 역하게 되어 아내와 함께 페테르스부르크로 집을 옮겼다. 장군은 타브리체스키 공원 옆에 집을 얻어 살며, 영국 클럽(부자로 바탕이 좋은 지주나 고관만을 회원으로 하였음)에도 가입 할 만큼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졸도하여 죽고 말았다. 아내도 이어 그 뒤를 따랐다. 그것은 외로운 도시생활에 융화될 수 없었고 퇴역생활의 슬픔이 그를 좀먹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양친이 살아 있을 때부터 두 사람을 꽤나 심려시키고 슬프게 했는데, 그것은 그가 전에 있던 하숙집 주인 프레폴로벤스키라는 관리의 딸을 사랑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쁘장하며, 이른바 현대 여성으로서 여러 잡지의 과학란에 실린 진 지한 논문을 읽곤 했었다. 그는 부모상을 마치자 곧바로 그녀와 결혼하고, 돌아가신 아버지 의 연고로 취직했던 황실영지성을 그만두고 처음에는 산림학교 근처의 별장에서, 나중에는 시내로 나와 계단도 있고 좀 추워 보이는, 응접실이 있는 어느 조촐하고 아담한 집에서 사 랑하는 마샤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맨 나중에는 농촌에 거처를 정하고 거기서 얼 마 안 되어 아들 아프카디를 낳았다. 부부는 지극히 만족하며 평온하게 살고 있었다. 두 사 람은 언제나 떨어지는 일이 없이, 원앙새처럼 함께 무엇이든 읽거나 함께 피아노를 치거나 이중창을 부르곤 하였다. 그는 꽃을 가꾸고 새장을 돌보기도 하며 가끔 사냥을 나가거나 농 장 관리를 하기도 했다. 아르카디도 점점 자랐고, 그도 또한 만족해하며 평온하였다. 10년이 꿈처럼 흘렀다. 1847년에 키르사노프의 아내가 세상을 떴다. 남편은 간신히 그 타 격을 이겨냈으나 수주일 동안에 머리가 희어버렸다. 조금이라도 울적한 기분을 풀기 위하여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려 했지만... 이미 1848년이 다가왔다(프랑스에서 1848년 2월과 6월에 혁명이 일어났고, 그때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국민의 외유를 금지했음). 그는 할 수 없이 시골로 돌아와서 꽤 오랫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가 농장관리의 개선에 손을 댔 다. 1855년에 그는 아들을 대학에 넣었다. 아들과 세 차례의 겨울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지 냈고 거의 아무 데도 나가지 않았으나 아르카디의 젊은 친구들과는 친해보려고 애썼다. 마 지막 겨울에도 그는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금 이 1859년 5월에 이미 백발이 되었고 뚱뚱하게 몸이 불었으며, 약간 등이 굽은 그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찍이 그 자 신이 그랬던 것처럼 학사 학위를 받은 아들을 그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태양은 이글거리 고 있었다. 하인은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또는 아마도 주인의 눈에 띄는 곳에 있는 게 거북한지, 출입문 쪽으로 들어가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고개를 푹 숙이고 현관의 낡은 계단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통통한 얼룩배기 병아리 한 마 리가 그 커다란 노란 발로 껑충껑충 소리를 내면서, 한 발 한 발 계단 위를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한 마리의 때묻은 고양이가 계단의 난간 위에 거드름을 피우는 양 웅크리고 앉아서 그 병아리를 밉살스러운 듯이 쏘아보고 있었다. 여인숙의 어둠침침한 현관 입구에는 따뜻한 호밀빵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우리의 니콜 라이 페트로비치는 공상에 잠겨 있었다. 아들녀석이... 학사... 아르카디가...하고 그의 머릿속 에서는 끊임없이 이런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이든 다른 생각을 해보려 해도 또다 시 같은 생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죽은 아내를 생각하였다. "조금만 기다려주었 더라면 좋았을텐데!"하고 그는 중얼중얼 투덜거렸다. 토실토실한 흰 비둘기 한 마리가 길바 닥에 날아와 앉더니 아장아장 샘 옆의 웅덩이로 물을 마시러 갔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그쪼긍ㄹ 가만히 바라보았을 때 이미 그의 귀에는 가까워오는 마 차 바퀴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오시는 것 같습니다"하고 출입문 쪽에서 급히 내달아오며 하인이 이렇게 말했다. 세 필의 역마를 단 여행마차가 나타났다. 마차 안에서는 학생모의 테 와 그리운 얼굴의 눈에 익은 윤곽이 언뜻 보였다 "아르카디, 아르카디"하고 키르사노프는 큰 소리로 외치면서 뛰어나가 두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이미 그의 입술은 아직 수 염이 하나도 나지 않은, 먼지가 뿌옇게 앉고 볕에 그은 젊은 학사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있었 다. 2 "아버지, 먼지를 털게 해주세요"하고 아르카디는 여독으로 얼마쯤 쉰 듯하였지만 아버지 의 포옹을 들뜬 기분으로 맞으면서, 청년다운 낭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아버지 에게 먼지를 묻혀드리고 있잖아요." "괜찮다, 괜찮아"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다정한 미 소를 띄면서 거듭 말하고 아들의 외투 깃과 자신의 외투를 두어 번 손으로 털었다. "네가 정말 보고 싶었다, 보고 싶었어"하며 옆으로 비켜서면서 이렇게 말하더니, 곧장 빠른 걸음으 로 연인숙 쪽을 향해 걸어가면서 "어서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너라, 말을 빨리 준비하고"하 고 말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자기 아들보다도 훨씬 흥분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는 약간 도 가 지나쳐 침착성을 잃은 것 같았다. 아르카디는 아버지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버지" 하고 느는 말했다. "제 친구 바자로프를 소개하겠어요. 제가 가끔 편지에 썼던 그 사나이입 니다. 우리 집에서 잠시 머무르는 것을 쾌히 응해주었어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급히 돌 아서서 여행마차에서 방금 내려선, 술이 달린 길고 헐렁헐렁한 웃옷을 입은 키 큰 사나이에 게 다가가면서, 그 장갑을 끼지 않은 붉은 손을 꼭 쥐었다. 그러나 아들의 친구는 약간 마지 못해 손을 내밀었다. "진정으로 기쁘게 여기오"하고 그는 말을 꺼냈다. "이런 누추한 곳에 와준 호의에 감사하 오. 실례지만... 자네 이름과 부칭(러시아인에게는 성명 외에, 아버지 이름에 일정한 어미를 붙인 부칭이 있으며 이름과 부칭을 함께 부르는 것이 예의로 되어 있음)은 뭐라 하오?" "예 브게니 바실리예비치입니다"하고 바자로프는 나른하긴 하지만 사나이다운 목소리로 대답하 고 나서, 웃옷의 깃을 접어 젖히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쪽으로 그 얼굴을 활짝 드러냈다. 길고 홀쭉한 얼굴에다 이마는 넓고, 코는 위쪽으로 펀펀하고 아래쪽은 오똑 솟아 있었다. 푸 른빛이 도는 큰 눈에다 모랫빛 구레나룻을 기르고 생기 있는 얼굴에 점잖은 미소를 띄고 있 는 품이 자신과 지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제발 우리들 집에서 지루하지 않게 보내주기 바라오"하고 니콜 라이 페트로비치는 말을 이었다. 바자로프는 얇은 입술을 약간 움직였으나 아무 대답도 없 이 학생모를 조금 들어올려 인사했을 뿐이다. 그의 담갈색 머리는 길고 숱이 많았지만, 유난 히 크고 울퉁불퉁한 머리통을 가리지는 못했다. "아르카디, 그럼 어떻게 할까?"하고 아들을 돌아보면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또 말을 꺼냈다. "지금 곧 말을 준비할까? 그렇잖으면 좀 쉬었다 가겠느냐?" "아버지, 집에 가서 쉬지요, 말을 준비시켜 주세요." "지금 곧, 바로 지금 말이지"하고 아버지는 말을 받았다. "이봐 피오트로, 들었지? 서둘러서 준비해야 돼." 현대적인 하인 중의 하나인 피오트로는 젊은 주인의 손에 입맞추러 가지 않고 다만 떨어져 서 머리를 숙였을 뿐 다시 출입문 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넌 여기 오는데 포장마차로 왔지 만, 네 여행마차에 매달 세 필의 말도 준비됐다"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그러는 동안 아르카디는 여인숙 안주인이 가져온 양철 국자의 물을 마셨고 바자로프는 파이프 담 배를 피우면서 역마를 풀고 있는 마부 쪽으로 다가갔다. "여행마차로 가도록 하죠"하고 아르카디는 나직이 말했다. "제발 저 친구를 너무 어렵게 생각지 마세요, 겪어보면 아시겠지 만, 수더분한 친구로 조금도 잘난 체하거나 하는 점이 없어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의 마 부가 말들을 끌고 왔다. "이봐, 빨리 하게, 털보 영감"하고 바자로프가 마부에게 말을 걸었 다. "여보게 미츄하"하고 양가죽 코트의 뒤쪽 벌어진 곳에다 두 손을 쑤셔 넣고 서 있던 다른 마부가 끼여들었다. "도련님이 자네를 뭐라 부르셨지? 그러고 보니 정말 털보로군." 미 츄하는 다만 모자를 흔들었을 뿐, 잠자코 땀에 흠뻑 젖은 세 필 중 가운데 말의 고삐를 잡 아당겼다. "자, 빨리빨리 해라, 있는 힘을 다해서"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소리를 질렀 다. "술 한턱 낼 테니" 몇 분만에 말들이 매어졌다. 아버지와 아들은 포장마차 속에 자리를 잡았다. 하인인 피오 트르는 마부석에 올랐다. 바자로프는 여행마차에 뛰어오르더니 머리를 가죽 베개 속에다 묻 었다. 그리고 두 대의 마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3 "이제 마침내 너도 학사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구나"하고 아르카디의 어깨며 무릎을 만져 보며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드디어 돌아왔어" "큰아버지께서는 어떠세요? 안녕하 신가요?"하고 아르카디가 물었다.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마치 어린 아이 같은 기쁨에 벅 차면서도, 두 사람의 대화로 흥분한 기분을 되도록 빨리 가라앉히고 싶었던 것이다. "별고 없으시다. 형님도 나와 함께 너를 마중하러 나오고 싶어하셨었는데 다른 일이 생겨 서." "저를 오래 기다리셨나요?"하고 아르카디가 물었다. "그랬지, 다섯 시간쯤." "아버지가 최고야" 아르카디는 재빨리 아버지 쪽으로 돌아앉아 그 볼에 소리를 내어 입을 맞췄다. 니 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가만히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주 훌륭한 말을, 널 주려고 준비해놓았다"하고 아버지는 말을 꺼냈다. "집에 가거든 보 려무나, 네 방도 도배를 해놓았단다." "바자로프에게도 방이 있습니까?" "그 사람에게도 쓸 만한 방이 있을 것 같다." "아버지, 제발 그 친구에게 친절히 대해주세요. 제가 그 친구와의 우정을 얼마나 끔찍이 생각하고 있는지 아버지에게는 다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넌 그 사 람과 사귄 지가 오래되지 않았느냐?" "얼마 안돼요." "그래서 지난 겨울에는 그 사람을 볼 수가 없었구나. 그 사람은 무얼 하는 사람이냐?" "전공은 자연과학입니다. 정말 뭐든지 다 알고 있어요. 내년에는 의사 시험을 보고 싶다는가봐요." "아아, 의과로군"하고 니콜라이 페 트로비치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피오트르"하고 부르며 한 손을 들어 가리켰다. "저기 우리 농부들이 가고 있는 것 같은데?" 피오트르는 주인이 가리킨 옆쪽으로 눈을 돌렸다. 재갈을 벗긴 말들이 끄는 사륜마차 몇 대가 좁은 시골길을 매우 급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다른 짐마차에도 양가죽 코트의 앞자락 을 열어 젖힌 농군들이 한 사람씩 혹은 두 사람씩 타고 있었다. "그렇습니다"하고 피오트르 가 대답했다. "도대체 저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읍으로 나가는 길인가?" "아마도 읍 쪽일 겁니다. 술집에 가는 길이겠죠"하고 하인은 얕잡아 말하며, 동의를 구하기라도 하는 듯 마부가 있는 쪽으로 약간 몸을 기울였다. 그러나 상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우직한 구식 남자로 최싡의 사고방식에는 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올해는 나도 농부들 때문에 속썩는 일이 많았었다."하고 아들을 바라보면서 니콜라이 페 트로비치는 말을 이었다. "소작료를 내지 않는단 말이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버 지, 머슴들은 마음에 드십니까?" "응"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완고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부추김을 당하고 있으니 난처한 노릇이지. 진정으로 노력하겠다는 생각이 아직 없는 거야. 그놈들은 농기구만 망가뜨리고 있어. 그래도 밭갈이만은 그럭저럭 제대로 마치긴 했 다. 고생이 있으면 낙도 있는데 말이야. 그런데 너는 농업에 취미를 가지게 되었느냐?" "아 버지 농장에는 그늘이 없어서 그게 유감이에요"하고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아르카디가 말 했다. "북쪽 발코니에다 차양을 만들어 붙였다. 이제는 바깥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게 되었 단다"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말했다. "마치 무슨 별장 같겠군요... 그러나 그런 건 대 단한 게 아니에요. 그 대신 여기는 공기가 아주 썩 좋잖아요. 냄새도 아주 향기롭고요. 정말 이 지방처럼 좋은 냄새를 풍기는 곳은 세계 어디를 가도 없을 거예요. 정말 여기에선 하늘 도..." 아르카디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뒤를 흘긋 돌아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지"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너는 여기서 태어났으니까 여기 것은 뭐든지 특별하게 생각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렇지만 아버지, 인간이 어느 곳에 태어나 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그렇지만 말이다." "아닙니다, 그런 건 정말 아무래도 좋은 거예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옆에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포장마차가 반마장도 채 가지 못한 동안에 두 사람의 대화는 다시 시작되었다. "네게 편지로 알렸던가 생각나지 않지만"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을 꺼냈다. "네 유모였던 예고로브나가 세상을 떴다." "정말입니까? 불쌍한 할머니. 그런데 프로코피치는 아 직 살아있습니까?" "살아있지. 그리고 조금도 변함없이. 노상 툴툭거리고 있단다. 마리노 마 을에서는 별다른 변화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집의 관리인도 그냥 그대로입니까?" "변했다면 관리인을 바꾼 것뿐일 게다. 자유로운 신분이 된 전의 농노들은 더 이상 고용 하지 않을 작정이다. 적어도 어떤 책임 있는 걸 맡기지 않겠다고 결심했단다. (아르카디는 눈으로 피오트르 쪽을 가리켰다.) 저 사람도 실은 해방된 농노란다"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 치는 나직이 말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저 녀석은 하인이니까. 지금 집에는 상인 출신의 관리인이 있는데 제법 일을 할 만한 사나이 같더라. 나는 그자에게 매년 250루블씩 주기로 작정했단다. 그런데 말이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속으로 망설이고 있을 때 언제나 그러 듯이, 한손으로 이마와 눈썹을 문지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아까 마리노 마을에는 눈 에 띄는 변화는 없을 거라고 네게 말했지만... 그건 전혀 당치도 않은 말이란다. 나는 네게 사전에 이야기해 두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는 잠시 말을 더듬었지만, 곧 프랑스어로 말을 계속했다. "엄격한 도학자라면 내 속직함 이 부도덕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첫째로 이런 건 숨겨둘 수가 없으며, 둘째로는 너 도 잘 알다시피 나는 언제난 부자간의 관계에 있어서의 문제에 대해서는 내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있단다. 그렇다하더라도 물론 넌 나를 비난할 권리가 있다. 이 나이에... 한 마디로 말해서, 그건... 그 처녀 말이다. 너도 어쩌면 벌써 들었을는지 모르지만..." "페치니카 말입니까?"하고 아르카디는 거침없이 물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얼굴이 빨개졌다. "제발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지 말아다오, 그렇단다... 그녀는 지금 내 집에서 살 고 있단다. 나는 그녀를 우리 집에 있게 했지... 쓰지 않는 작은 방이 두 개 있어서 말이다. 그러나 물론 그런 건 모두 언제든 바꿀 수 있는거니까." "무슨 말씀을, 아버지, 어째서 그러 시는 겁니까?" "네 친구가 우리와 함께 지내게 되면... 거북할 테니까..." "바자로프 일이라면 제발 신경 쓰지 마세요. 저 친구는 그런 건 모두 초월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너도 역시"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덧붙였다. "딴채가 허술해서... 걱정이구나." "아버지,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하고 아르카디가 말을 받았다. "마치 용서를 비는 것 같으신 데요. 남이 보 면 우습게 생각하겠어요." "물론 나는 남의 웃음을 사게 되어 있다."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 치는 더욱 얼굴이 붉어지면서 대답했다. "그만두세요, 아버지, 제발 그러시지 마세요. 부탁입니다."하고 아르카디는 상냥하게 웃음 을 지었다. "무엇을 저다지도 미안해하실까?"하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선량하고 친절한 아버지에 대한 너그러운 애정이 남모르는 우월감과 뒤섞이어 그에게 가슴 뿌듯한 느 낌을 주었다. "제발 그러시지 마세요"하고 그는 자기 자신의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무의식중 에 뿌듯해하며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자기 이마를 문지르고 있는 손가락 사이로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무언가 가슴을 찌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 나 그는 곧바로 자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여길 봐라, 여기서부턴 벌써 우리 밭이란다"하고 오랜 침묵 끝에 아버지는 이야기를 꺼 냈다. "저 앞에 보이는 건 우리 숲이지요?"하고 아르카디가 물었다. "그렇지, 우리 것이었지. 그러나 얼마 전에 팔아버렸다. 올해는 목재로 쓰려고 베어 가겠지." "어째서 팔아버리셨어 요?" "돈이 필요했었지. 게다가 그 토지는 농부들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어서." "소작료를 내 지 않는 그 농부들 말입니까?" "그건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러나 언젠가는 지불할 테지." "숲을 팔다니 아까운 일인데요."하고 아르카디는 말하고 나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바라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지나가고 있는 곳은 그림처럼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밭 너머 밭이 있으며, 족므 높아지는가 하면 다시 낮아지면서 지평선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여기저기에 그다지 크지 않은 숲이 눈에 뜨이고 또 듬성듬성 낮은 관목이 흩어져 나 있으며, 좁은 골짜기가 꼬불꼬 불 이어져 있었다. 그러한 풍경은 두 사람의 눈에 마치 에카테리나 여왕(러시아의 여제. 독 일 태생으로 남편인 표트로 3세를 죽이고 즉위하였음. 농노제를 강화하고, 폴란드를 분할하 였으며 계몽 전제 군주로 알려짐)시대의 옛날 지도 속에 그려진 풍경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었다. 험한 언덕의 양쪽에 둘러친 작은 시내와 제방이 헐기 시작한 몇 군덴가의 조그만 못 과 대개는 반쯤 바람에 날려버린 어둠침침한 지붕밑에 나지막한 농가가 늘어선 한 촌락이 나타났다. 마른 가지로 엮은 벽이 기울기 시작한, 보리 타작하는 헛간의 커다란 문은 텅 빈 곡물 창고 옆에 빠끔히 큰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벽이 헐어 떨어진 벽돌집 교회 당이 있는가 하면, 십자가는 기울고 묘지 목책은 낡아 쓰러진 것이 가는 길에 나타났다. 아르카디의 가슴은 조금씩 죄어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이 마주친 농부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헌 누더기를 걸치고 바짝 여의 말을 타고 있었다. 누더기를 걸친 거지처럼 껍데기가 벗겨지고 가지가 꺾여진 버들이 마을길을 따라 늘어서 있 었다. 말라붙어서, 마치 물어뜯기라도 한 것처럼 털이 꺼칠꺼칠하고 빼빼 마른 암소들이 시 궁창 옆에 있는 풀을 걸신들린 양 뜯어먹고 있었다. 소들은 무엇인지 아주 무서운,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독아에서 이제 방금 뿌리치고 뛰어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는 화창한 봄날의 불쌍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치 눈발이 휘날리는 엄동설한을 수반하 는, 아무 즐거움도 없고 끝도 없는 겨울의 흰 환영이 눈앞에 나타나기라도 할 것 같았다. "아니다"하고 아르카디는 생각했다. "이 지방은 풍요롭지가 못한 것이다. 만족이라든가 근면 이라든가 하고 떠들어보았댔자 쓸데없는 짓이야. 안 되니, 이런 꼴로 가만 놔둬서는 안되지. 어떻게 해서라도 개조해야 돼... 그러나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어떻게 손을 대면 된단 말인가?" 아르카디는 이러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봄은 그 호사함을 되찾고 주위의 모든 것을 금빛 찬란한 푸른빛으로 되어 있었다. 나무들도, 관목도, 풀도, 모 든 것들이 다사로운 미풍의 고요한 입김 아래 물결치듯 나부끼며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끝없이 철철 흐르는 시냇물처럼 종달새들이 소리 높이 노래하고 있었다. 방울 새들은 풀밭 위를 맴돌며 날아다니면서 울어대는가 하면 군데군데 쌓여 있는 흙 위를 깡충 깡충 뛰어다니고 있었다. 또 키가 낮은, 봄에 씨뿌린 곡식의 부드러운 푸르름 속에서는 선명 한 까만 빛을 번득이며 까마귀들이 한가로이 날고 있었다. 까마귀들은 벌써 약간 흰빛이 도 는 호밀밭 속으로 그 모습을 숨기고, 다만 그 조그마한 머리를 몇 개 호밀밭의 희부연 속에 드러낼 뿐이었다. 아르카디는 가만히 쏘아보고 있었으나 이내 그의 사색은 엷어지다가 사라 져버렸다. 그는 자기 외투를 벗어제치고 매우 유쾌한 듯이, 마치 어린 사내아이처럼 아버지 를 쳐다보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를 다시 끌어안을 정도였다. "자, 이제 거의 다 왔다"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입을 열었다. "이제 이 언덕을 오르 기만 하면 집이 보일 게다. 이제부터 함께 재미있게 살자꾸나, 만일 괜찮다면 농사일을 도와 다오, 우리들은 이제부터 사이좋게 지내면서 서로를 잘 이해해주어야 할 게 아니냐?" "물론 그렇습니다"하고 아르카디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아주 날씨가 좋군요" "그건 네가 돌아왔기 때문이지. 정말 눈이 부시는 봄 날씨로구나. 하지만 나는 푸슈킨(러 시아의 시인. 작가. 러시아 근대문학의 개척자로서 러시아의 리얼리즘의 기초를 확립. 러시 아 국민문학을 쌓아올렸음. 대표작으로는 에프게니 오네긴이 있음)의 시에 동감이다. 기억하 고 있겠지. 에프게니 오네긴 가운데에 이런 구절이 있지 않느냐. 네가 찾아오면 왜 이다지도 슬프냐, 봄이여 봄이여 사랑의 계절이여. 무엇이... "아르카디"하고 여행마차에서 바자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로 성냥을 보내주게. 파이프에 불을 붙이지 못하고 있단 마리야."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 르카디는 아버지의 시 낭송에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급 히 주머니에서 은제 성냥갑을 꺼내어 피오트르를 시켜 바자로프에게 건냈다. "궐련을 줄 까?"하고 또다시 바자로프가 외쳤다. "보내주게나"하고 아르카디가 대답했다. 피오트르는 포장마차로 돌아와서 성냥갑과 함께 굵직하고 검은 궐련을 건넸다. 아르카디 는 그것을 천천히 피우면서 몹시 강하고 독한 냄새를 주위에 풍겼다. 그런데 그 냄새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지금껏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에겐, 아들에게 무안을 주지 않기 위해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이긴 하지만, 무의식중에 코를 옆으로 돌렸을 정도였다. 25분쯤 지나 두 대의 마차는 붉음 함석지붕에 회색 칠을 한 목조건물의 현관 앞 에 멈춰 섰다. 여기가 이른바 마리노 마을, 일명 노바야 슬로보드카(새로운 자유농민의 마 을)또는 농민들이 부른 이름으로는 보브일리후토르(소작인의 마을)였다. 4 많은 하인들이 주인을 마중하러 현관으로 몰려든 건 아니었다. 열 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혼자 모습을 나타냈을 뿐으로, 그 뒤를 이어 집안에서 나온 것은 피오트르와 아주 흡사한 젊은 친구였다. 그는 가문 표지가 새겨진 흰 단추가 달린 회색 제복을 입은, 파벨 페 트로비치 키르사노프의 하인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포장마차의 작은 문을 열고 또 여행 마차의 덮개를 벗겼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아들과 바자로프와 함께 어둠침침하고 거의 텅빈 대청을 빠져나가 제법 현대적으로 꾸며진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때 대청문 뒤에서 젊 은 여자의 얼굴이 언뜻 눈에 띄었다. "이제야 집에 도착했구나"하고 모자를 벗고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니콜라이 페트로 비치가 입을 열었다. "뭣보다도 먼저 저녁을 먹고 푹 쉬는 게 제일이야." "먹는 건 확실히 나쁘지 않은 일이지요." 바자로프는 손과 발을 쭉 뻗으며 얘기하고 나서 소파에 걸터앉았다. "암, 그래그래, 저녁을 가져오너라. 빨리 저녁을 먹어야겠어"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 럴 만한 이유가 아무 것도 없는데 말을 굴렀다. "아, 마치 프로코피치도 저기 오는군." 머리가 하얗고 여위었으며, 가무잡잡한 얼굴에 구리 단추가 달린 연미복을 입고 목에 장 밋빛 목도리를 한 60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노인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싱끗 웃 곤 이내 아르카디에게로 다가가서 그 손에 입을 맞추고, 손님에게 머리를 숙인 다음 문 쪽 으로 물러나 뒷짐을 지고 섰다. "이봐, 프로코피치, 저 애가 마침내 집에 돌아왔어... 어때, 저 애를 어떻게 생각하나?"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을 꺼냈다. "매우 훌륭해 보이십니다"하고 노인은 말하며 또다시 싱끗 웃었으나, 이내 그의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저녁식사 준비를 시키시는 겁니까?"하고 그는 새삼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암, 그래그래, 부탁이야. 그런데 바자로프, 먼저 자네 방으 로 가보겠나?"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제발 염려하시지 마십시오. 다만 제 변변치 못한 가방 과 그리고 헌 의복을 그리로 갖다 놓도록 말씀해주십시오."하고 바자로프는 자기 웃옷을 벗 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하지. 프로코피치, 이분 외투를 들여다놓게. (프로코피치는 조심스럽 게 두 손으로 바자로프의 헌 옷을 받아들고 그것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더니, 발꿈치를 들 고 방을 나갔다) 그런데 아르카디, 잠깐 네 방에 가보지 않겠느냐?" "예, 몸을 씻어야겠어요." 아르카디가 대답하고 문 쪽으로 갔을 때 중키의 남자가 응접실 로 들어왔다. 새카만 영국제 조끼가 딸린 양복에 요즘 유행하는 넥타이를 나지막하게 매고 니스 칠을 한 반장화를 신은 파벨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였다. 언뜻 그는 45세쯤 되어 보였 다. 그 짧게 깎은 회색 머리에는 거친 은처럼 검은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상아 빛이고 주름살이 없어 마치 얄팍한 칼이나 무엇인가로 다듬기라도 한 것처럼 단정감과 청결 감을 주었으며, 젊었을 때의 대단했던 아름다움의 흔적이 엿보였다. 맑고도 까만 그의 가느 다란 눈은 그 중에서도 특히 아름답게 보였다. 이 아르카디의 큰아버지의 풍채는 귀족적으 로 우아했으며, 청년과 같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20세가 지나면 사 라지게 마련인, 높은 곳을 지향하는 고매한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장밋빛 손톱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손을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조카에 게 내밀었다. 그 손은 커다란 오팔 단추로 채운 눈같이 흰 커프스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보 였다. 우선 유럽식으로 악수를 한 다음에 그는 세 번, 러시아 식으로 조카에게 입을 맞추었 다. 즉 조카의 뺨에 자기의 향수 냄새가 나는 콧수염을 서너 번쯤 가볍게 갖다댄 것이다. 그 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잘 돌아왔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를 바자로프에게 소개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 날씬한 몸을 약간 굽히고 조금 미소를 띄었으나 손을 내밀지 않았다.e 오히려 그는 손을 도로 주머니 속 에 넣었다. "오늘은 네가 돌아오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하고 그는 상냥스럽게 몸을 흔들 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아름다운 흰 이를 드러내 보이면서, 반가운 듯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는 도중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아무 일도 없었어요"하고 아르카디는 대답했다. "다만 좀 꾸물거렸던 거예요. 그 대신 우리들은 지금 늑대처럼 배가 고파요, 아버지, 프로코 피치에게 좀 서두르라고 해주세요. 전 잠깐 밖에 나갔다 올 테니까요." "기다려주게, 나도 함께 가겠네"하고 갑자기 바자로프가 소파에서 일어나면서 소리쳐 말했다. 두 젊은이는 밖 으로 나갔다. "저 사람은 누구냐?"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물었다. "아르카디 친군데, 그 애 말로는 매 우 영리한 사나이랍니다." "그 사람도 우리와 함께 지내게 되는 건가?" "그래요" "저 털보 녀석이?" "그렇다니까" 파벨 페트로비치는 손톱으로 탁자를 톡톡 때렸다. "아르카디는 제법 세련되어진 것 같은데"하고 그는 말했다. "그 애가 돌아와서 기쁘군."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은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바자로프는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음식만 먹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자신의 이른바 농장생활에서 일어 났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가까운 장래에 행해질 정부 시책이라든지, 여러 위원회 라든지, 의원들이라든지, 기계 설비에 필요한 점 등에 대해서 역설하기도 했다. 파벨 페트로 비치는 식당 안을 천천히 서성거리면서(그는 전혀 식사를 하지 않았다), 가끔가다 붉은 포도 주가 담긴 작은 글라스의 술을 맛보거나, 또는 아주 간간이 아아, 응, 흠 하는 식으로 어떤 의견을 말한다기보다는 차라리 감탄하는 듯한 소리를 내곤 했다. 아르카디는 페테르스부르 크의 소식을 몇 가지 들려주면서도 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젊은 사람이 이제 겨 우 어린 티를 벗어나서, 자신을 어랜애로 보아오던 사람들에게 돌아왔을 때에 느끼는 그러 한 어색함이었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자기 이야기를 길게 끌기도 하고, 아버지라는 말을 피하고 한번은 아버님이라는 말로 바꾸려고까지 했으나 그것도 실제로는 입안에서 우 물쭈물 얼버무릴 정도였다. 또는 지나치게 세련된 태도로 자기가 마시고 싶은 양보다도 훨 씬 많은 양보다도 훨씬 많은 양의 포도주를 단숨에 비워버리기도 했다. 프로코피치는 그한 테서 눈을 떼지 않고 다만 입술만을 깨물 뿐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모두들 흩어져 갔 다. "자네 큰아버지는 좀 괴짜신데"하고 바자로프는 느슨한 웃저고리를 입은 채 아르카디의 침대 한구석에 걸터앉아 짤막한 파이프를 피우며 말했다. "시골에서 저런 멋진 모습을 해보 았댔자 소용없잖은가. 게다가 그 손톰, 손톰은 전람회에라도 내보냈으면 좋겠어" "그건 자네 가 모르는 탓이야"하고 아르카디가 대답했다. "정말 예전에 우리 큰아버지는 인기가 대단한 분이셨어. 언젠가 자네에게 큰아버지 이야기를 해주겠네. 정말 미남자로 여자들을 홀딱 반하 게 만드셨다네." "응, 역시. 결국 옛날 추억 때문이란 말이군. 여기선 아무리 뇌쇄시키려 해도, 유감스럽게 도 아무도 없지 않은가. 나는 유심히 보았는데, 그 분의 칼라는 정말 놀랍더군. 마치 돌처럼 딱딱해서 아무리 봐도 이상하고 게다가 턱을 그렇게 들어올리고 있는 모양하며, 아르카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정말 우습지 않은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정말로 큰아버지는 호인이셔." "봉건적인 현상이야. 그러나 자 네 아버지는 좋은 분이시더군. 그분이 시를 읽는다든지 하는 건 쓸데없는 일 같지만. 농사일 도 제대로 아시지 못하면서 말이야. 그러나 착한 분이시더군." "아버지는 나에겐 귀중한 분 이시네." "그분이 조심스러워하는 것을 자네도 눈치챘겠지?" 아르카디는 자기는 몰랐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놀랍더군"하고 바자로프는 말을 이었다. "그건 낡아빠진 낭만주의야. 그들은 감정에 완전히 압도될 만큼 자신의 신경조직을 자극시키고 있으나 말이야... 그래서 균형이 깨지는 거지. 그러나 이제 실례해야겠어. 내 방에는 영국식 세면대가 있기는 하지만 문에 자물통이 잠기지를 않아. 어쨌든 영국식 세면대는 장려할 만한 것이지. 곧 진보를 의미하니까 말이 야." 바자로프는 밖으로 나갔다. 아르카디는 즐거운 기분에 싸였다. 자기가 태어난 집에서, 낯 익은 침대 위에서, 그리운 손, 분명 유모의 상냥하고 어진, 쉴 줄 모르는 손으로 부지런히 다듬질했을 이부자리에 파묻혀 잠을 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인 것이다. 아르카디는 예고 로브나를 생각하자 이내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저 세상에 있을 유모를 위하여 편안히 천당 으로 가 주기를 빌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았다. 그와 바자로프는 곧 잠이 들었지만, 한집안의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자지 않았다. 아들의 귀가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의 마음을 흥분시켰다. 그는 침대에 드러눕기는 했지만 촛불을 끄지 않고 팔베개를 한 채로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형은 자정이 지났으나 서 재에서 함브스(프랑스 출신으로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유행가구를 제작하던 사람)제 안락의자 에 앉아, 석탄 불이 가물거리는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옷도 벗지 않 고 다만 니스 칠한 반장화를 뒷굽 없는 빨간 중국식 슬리퍼로 갈아 신었을 뿐이다. 그는 갈 리냐니(파리에서 발행되고 있던 영자신문)지의 최근호를 손에 들고 있었으나, 읽고 있는 것 은 아니었다. 그는 가만히 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로에서는 파란 불꽃이 가물거리다가는 갑자기 타오르곤 하였다. 그의 생각이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다만 지나간 일에 대해서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긴장되고 엄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은 추억에만 잠겨 있는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표정이다. 뒤쪽 작은 방에는 하늘색 조끼를 입고 까만 머리에 흰 모자를 쓴 한 젊은 여인이 대형 트렁크 위에 걸 터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페니치카였다. 그녀는 무엇에 귀를 기울이는가 하면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혹은 열어놓은 문 쪽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그 문 뒤로는 어린이용 작은 침대 가 눈에 뜨이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갓난아이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5 다음날 아침, 바자로프는 누구보다도 일찍 깨어나서 집 밖으로 나갔다. "이런"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그는 생각했다. "여긴 형편없는 곳이로군"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자기 소작 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했을 때, 그는 아주 평평한 불모지를 4정보쯤 새 저택의 부지로 떼어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집과 부속 건물과 농장을 건설하고, 정원을 만들고, 못은 한 군데, 우 물은 두 군데 팠다. 그런데 어린 나무들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못에는 겨우 조금밖에 물 이 괴지 않았으며, 우물은 둘 다 약간씩 염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라일락과 아카시 아로 꾸며놓은 정자만이 제법 무성하게 자랐기 때문에, 거기서 가끔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거나 하였던 것이다. 바자로프는 잠시 동안 정원의 샛길이란 샛길은 모두 돌아다니며 가 축의 우리나 마구간을 기웃거려 보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농장의 두 사내아이를 발견하곤 곧 친해져서 그 아이들과 함께 저택에서 한 마장쯤 떨어진 곳에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늪 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갔다. "개구리는 잡아서 뭣에 쓰나요?" 한 사내아이가 그에게 물었다. "뭣에 쓰냐하면"하고 바자 로프가 대답했다. 그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는 결코 관대하지 않았고 또 매우 무뚝뚝하 게 굴었으나, 그들의 신뢰를 자신에게 모으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개구리 배를 좍 갈라서, 그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려고 하는 것이다. 너나 나노, 다만 두 발로 걸 어다닌다는 것만 다르지 개구리와 똑같으므로, 우리들 뱃속이 어떻게 생격는지도 알게 되는 거란다." "그래서 그런 걸 뭣에 쓰나요?" "실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네가 병이 들었을 때, 내가 너를 고치게 될 때 말이다." "그럼 나리께서는 의사시군요?" "그렇단다." "바시카, 너 들었지? 이 나리께서 말씀하셨어, 너나 나나 개구리와 똑같다고 말이야, 참 신기하지" "난 무서워, 개구리란 것이" 바시카가 말했다. 그 소년은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로 담황색 머리에다 높은 칼라가 달려 있는 헐렁한 회색 웃옷을 입었는데, 발은 맨발이었다. "뭐가 무섭다고 그래? 개구리가 물지도 않는데?" "자, 물에 들어가는 거다, 이 어린 철학 자들아"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그 사이에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눈을 뜨고 아르카디 방 으로 찾아갔다. 그는 벌써 옷을 다 입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테라스로 나가서 그늘진 차양 안으로 들어갔다. 난간 옆에 있는 탁자 위에서는 아카시아 꽃이 우거진 사이에서 벌써 찻주전자의 물이 한 소녀가 거기에 나타났다. 어제 도착한 사람들을 제일 먼저 현관 앞에서 마중했던 그 아이였다. 소녀는 가늘고 야무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페도시야 니콜라예브나는 몸이 좀 불편하셔서 나오실 수가 없으십니다. 손수 차를 따라 드시겠는지, 그렇잖으면 두냐샤를 보내드려야 할는지, 여쭤 보고 오라 하셨습니다." "내가 따르지, 내가 손수"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황급히 말을 받았다. "아르카디, 넌 차에 무 얼 넣어서 마시겠느냐, 크림을 넣겠니, 아니면 레몬을 치겠니?" "크림을 넣어주세요"하고 아 르카디는 대답하고 잠시 잠자코 있다가 "아버지?"하고 불렀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어리 둥절하여 아들을 바라보았다. "뭐냐?"하고 그는 말했다. 아르카디는 눈을 내리깔았다. "용서 해주십시오, 아버지. 제 질문이 괴로움을 끼쳐드리게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하고 그는 이 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도 어제 숨기는 일없이 말씀하셨으므로 저도 숨김없이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노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이야기해보렴" "아버지께서 저한테 이런 걸 물어볼 용기를 주셨으니 여쭙겠는데요... 대 체 페니... 그분이 여기에 차를 따르러 나오지 않는 것은 제가 여기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시선을 슬쩍 피하며 말했다. "그 사람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거야. 부끄러운 게지..." "부끄러워할 게 없지 않아요. 첫째 제 사고방식은 아버지께서도 잘 아시는 터이며,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르카디로서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둘째로 제가 아버지의 생 활이나 습관을 조금이라도 구속하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게다가 저는 믿습니다만 아버지께서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실 리가 없습니다. 함께 한 지붕 밑에서 살게 하고 있는 한 그분에게도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재판관은 아닙 니다. 특히 저는 말씀예요, 특히 아버지처럼 언제든지, 뭐든지 제 자유를 구속한 적이 없는 분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아르카디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관대한 인간이라 느끼고 그와 동시에 자기가 아버지에 대해 무슨 교훈 비슷한 말을 지껄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의 말이 한 사람의 인간에게 강한 영향을 주는 것이므로 아르카디는 마지막 말 을 분명하게 효과가 나타나도록 말했다. "고맙다, 아르카디"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분 명치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가락은 또다시 눈썹과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네 생 각은 정말 맞다. 물론 그 사람이 그만한 가치가 없었더라면... 이건 결코 경솔하게 넘어가 f 일은 아니다. 너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색하구나. 그러나 너도 짐작하겠지만, 그 사 람은 네가 있는 곳에, 더욱이 네가 도착한 바로 다음날에 나타나는 것이 거북한 거다." "그럼 제가 그분한테로 가겠습니다"하고 아르카디는 관대한 마음이 새삼스러이 치밀어 오 름을 느끼면서 큰 소리로 외치고 벌떡 일어섰다. "저를 부끄러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그분에게 설명하고 오겠습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르카디"하고 말을 꺼냈다. "제발 부탁이다... 어쩌면 좋을까... 거기에는... 네게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아르카디는 벌써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테라스에서 뛰어나갔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당혹스러운 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자신과 아들 사이에 장차 기묘한 관계가 불가피 하게 따르리라는 생각을 하였는지, 또는 그가 이 문제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면 아르카디 가 좀더 그를 존경하게 되리라고 의식하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의 나약함을 비난 하였는지 그것은 간단히 말할 수가 없다. 이런 기분은 그의 가슴 속에 있었던 것이지만 감 각으로써 그것도 막연하게 느꼈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고 가슴은 세 차게 뛰고 있었다. "아버지, 우리는 가까워졌어요"하고 그는 제법 상냥하고 득의만면한 선량한 표정으로 이 렇게 외쳤다. "페도시야 니콜라예브나는 확실히, 오늘은 몸이 좀 불편해서 나중에 온답니다. 그런데 어째서 아버지는 제게 동생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젯밤에 동 생에게 입을 맞출 수 있었을텐데요. 지금 막 입을 맞추고 오는 길이에요." 니콜라이 페트로 비치는 무슨 말을 할 듯이 일어서더니, 두 손을 벌리고 아들을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자 아 르카디가 아버지의 목을 덥석 끌어안았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아직도 끌어안고 있는 건 가?"하고 두 사람 뒤에서 파벨 페트로비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그가 나타난 것은 아 버지와 아들을 다 같이 기쁘게 했다. 아무리 감동적인 상태에 있을지라도 거기서 한시바삐 벗어나고 싶어지는 때가 있는 법이다. "무얼 그렇게 놀라는 겁니까?"하고 들뜬 표정으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대꾸했다. "학 수고대하던 끝에 겨우 아르카디를 만나기는 했는데... 나는 어제부터 이 애를 실컷 볼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어"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했다. "나도 이 애를 안아 주고 싶은걸." 아르카디는 큰아버지한테로 다가가서 또다시 자기 볼에 그의 향수 냄새가 나는 콧수염이 가볍게 닿는 것을 느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탁자 앞에 걸터앉았다. 그는 우아한 영국식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에 쓰고 있는 검은 술이 달린 붉은 색 작은 터 키 모자가 아름다웠다. 이 터키 모자와 아무렇게나 맨 넥타이가 시골 생활의 자유스러움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아침의 옷차림에는 노상 그러하듯이, 역시 희지는 않지만 탈색한 루바시 카(러시아 특유의 품이 넓은 남자용셔츠)의 거북스러워 보이는 옷깃이 깨끗이 면도를 한 턱 을 어색하게 떠받치고 있었다. "네 새 친구는 어디 있느냐?"하고 아르카디에게 물었다. "그 친구는 집안에 있지 않습니 다. 그는 늘 일찍 일어나서 아무 데나 쏘다니죠. 그 친구에게 신경 쓰지 마세요. 딱딱한 예 의범절 같은 걸 좋아하지 않는 친구예요." "그래 그건 알고 있다."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천천히 빵에다 버터를 바르면서 말했다. "그 사람은 우리 집에 오래 머무를 거니?" "그때 가봐야 알아요. 아버지에게 가는 길에 여기 들른 거예요." "그의 아버지는 어디 사시는데?" "우리와 같은 현으로, 여기서 80마장쯤 되는 곳이에요. 거기에 약간의 소유지가 있대요. 전 에는 연대의 군의관이었고요." "그래그래... 그거야, 바로 그거란 말이다. 바자로프라는 성을 어디서 들은 것 같아서 내내 머리를 짜내고 있던 참이야... 니콜라이, 우리 아버님 사단에 바 자로프라는 의사가 있었지?" "있었던 것 같아요." "옳아, 맞았어. 그렇다면 그 의사가 저 사 람의 아버지란 말이군. 흠"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콧수염을 만졌다. "그런데 그 바자로프라 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하고 그는 잠시 사이를 두고 물었다. "바자로프가 어떤 사람이냐고요?"하고 아르카디는 엷은 미소를 띄었다. "원하신다면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가 말씀드리겠어요." "그래 부탁한다, 얘야." "그 친구는 니힐리스트예 요." "뭐라구?"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물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나이프 끝에다 한 점 의 버터를 찍은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 친구는 니힐리스트예요"하고 아르카디는 거듭 말했다. "니힐리스트라면"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을 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러시아 어로 허무라는 뜻인 라틴어 니힐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그러한 인간은... 아무것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인간을 뜻하는 것일테지?" "아무것도 존경하지 않는 인간이라 하는 편 이 좋겠지"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참견을 하고는 이내 버터를 바르기 시작하였다.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하고 아르카디가 말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아니지요, 아무래도 좋 은 건 아니지요. 니힐리스트란 어떠한 원리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인간입니다. 그 원리가 어 떠한 존경에 둘러싸여 있더라도 조금도 믿으려 들지 않는 인간이지죠." "그래서 어떻단 말 이냐, 그게 좋다는 말이냐?"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물었다. "그건 사람 나름이에요, 큰아버 지. 어떤 사람에게는 그래도 좋을 것이며, 어떤 사람에겐 아주 나쁠 거예요." "글세, 그런가. 그러나 그건 우리들과는 아주 딴판이로구나. 구세대의 우리들은 생각하기 를 원리 없이는 네가 말하는 이른바, 그 믿을 수 없는 원리 없이는 한 발짝도 걸을 수가 없 으며, 숨도 쉴 수가 없단 말이다. 너희들은 완전히 돌았어. 제발 오래 살아서 하느님께서 너 희들에게 장군 계급장이라도 내려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들은 다만 너희들을 주목하고 만 있기로 하지. 알았나, 다들... 어허, 참 뭐라 했더라?" "니힐리스트입니다"하고 아르카디는 똑똑하게 말했다. "그렇지, 예전에는 헤겔 학파라는 게 있었는데, 지금은 니힐리스트로군. 너 희들이 그 공허 속에서, 진공 속에서 어떻게 존재해나갈 것인가 두고보겠다. 그러면 니콜라 이 페트로비치, 제발 지금 곧 벨을 울려주게. 내가 코코아를 마실 시간이야." 니콜라이 페트 로비치는 초인종을 울리고"두냐샤"하고 목청을 높여 불렀다. 그러나 두냐샤 대신 페니치카 자신이 테라스에 나타났다. 그녀는 나이가 스물 셋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로, 살결은 희고 부드러우며, 새까만 머리와 눈, 붉은 입술은 어린애처럼 도톰하게 부풀고, 조그만 손은 가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산뜻하고 정교한 무늬의 옷을 입 고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코코아 잔을 가지고 왔는데, 그것을 파벨 페트로비치 앞에 놓으면 서 몹시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예쁘장한 얼굴에는 뜨거운 피가 섬세한 피부 속에 서 진홍색 물결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탁자 가장자리르 짚은 채 멈춰 서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이 곳에 온 것이 부끄러운 듯하였으나, 그러면서도 이곳에 나올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엄 하게 눈썹을 찌푸렸으며,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당황한 듯 쳐다봤다. "페니치카, 잘 잤소?"하고 그는 잇새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하고 그녀는 높지는 않지만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하고, 자기에게 상냥하게 미소짓는 아르카디를 곁눈질로 흘긋 바라보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가볍게 몸을 흔들면서 걸어갔는데, 그 것이 도리어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테라스에는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파벨 페트로비치 는 코코아를 마시다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기 니힐리스트 군이 오시는군"하고 그는 나직이 말했다. 정말 꽃밭 사이를 누비면서 바자로프가 뜰을 걸어오고 있었다. 삼베 웃 옷과 아랫바지가 흙탕물에 젖어 있었다. 찐득찐득 달라붙는 늪지대의 식물이 그의 낡은 둥 근 모자에 뒤엉켜 매달려 있었다. 그는 오른손에 그리 크지 않은 자루를 들고 있었다. 자루 속에는 뭔지 살아 있는 것이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테라스로 다가와서 꾸 벅 인사를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차를 마시는 시간에 늦어 서 죄송합니다. 이내 돌아오겠습니다. 이 포로들을 어떻게 해줘야만 하거든요" "자네는 무얼 들고 있나, 두꺼비인가?"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물었다. "아닙니다. 개구리 입니다." "그걸 먹는 건가, 아니면 기르는 건가?" "실험용입니다"하고 그는 거침없이 말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렇다면 저걸 해부하려는 거로구나"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원리는 믿지 않으면서 다만 개구리는 믿는다는 거로군." 아르카디는 유감스러운 듯이 큰아버지를 바라보았으며,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살며시 어 깨를 움츠렸다. 파벨 페트로비치 자신도 재치 있는 말을 한다는 게 잘 되지 않은 걸 느끼고, 농사일에 대한 것이라든지 새 토지 관리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 관리인이 엊그제 그에게 찾아와서 머슴인 포마가 몰래 도망치기를 잘해서 다루기가 힘들다며 호소를 했던 것이다. "그 녀석은 얼토당토않은 영문 모를 소리를 씨부리는 놈이라서요"하고 지배인 은 말했다. "어디를 가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쁜 평판을 자청하고 다닌단 말씀이예요. 잠시 동안은 얌전히 있다가 또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고 나가버리니 말입니다." 6 바자로프는 돌아와서 식탁 앞에 앉더니 서둘러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형제는 잠자코 그 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르카디는 슬며시 아버지 쪽을 살피다가 또 큰아버지 쪽을 살피는 것이었다. "예서 멀리 나갔었던가?"하고 드디어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물었다. "저 새로 개 간한 숲 옆에 댁의 늪이 있지요. 거기서 저는 도요새를 다섯 마리쯤 날려버렸습니다. 아르카 디, 자네라면 쏘아 떨러뜨렸을 텐데." "자네는 사냥은 하지 않는가?" "하지 않습니다." "자네 느 물리학을 전공하는가?"하고 이번에는 파벨 페트로비치가 물었다. "물리학, 그렇지요. 자 연과학 전체입니다." "게르만인은 최근에 이 방면에 꽤 성공하고 있다는데." "그렇습니다. 독 일은 이 점에서는 우리들의 선생입니다"하고 바자로프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파벨 페트로비 치는 비꼬기 위해 일부러 독일인 대신에 게르만인이라고 했는데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 했다. "자네는 독일인을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가?"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점잖으면서도 신중한 말투로 말했다. 그는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오름을 느끼고 있었다. 바자로프의 전혀 거리낌 없는 태도가 그의 귀족적인 기질에 분노를 일으킨 것이다. 이 의사 아들은 굽실거리거나 하 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답조차 띄엄띄엄 귀찮다는 듯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음성은 심 술궂을 뿐만 아니라 어딘지 무례한 데마저 있었다. "그곳 학자는 유능한 사람들입니다." "흥, 흐으 그렇다면 러시아의 학자에 대해서는 아마도 그만큼 칭찬할 기분이 나지 않겠군 그래." "아마 그럴 겁니다." "이건 정말 칭찬할 만한 겸손의 미덕이로군"하고 파벨 페트로비 치는 몸을 쭉 뻗으면서 머리를 약간 뒤로 젖히고 이렇게 내뱉었다. "그런데 아까, 아르카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이야기해준 바에 의하면, 자네는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더 군. 권위를 믿지 못한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무엇 때문에 제가 그런 걸 인정해야 합니까? 그리고 제가 무엇을 믿어야 좋 단 말씀입니까? 이야기가 이치에 맞으면 나는 동의한다 다만 그것뿐입니다." "그럼 독일인 은 모든 면에서 이치에 맞는 말만 하고 있다는 건가?"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그의 얼굴은 마치 구름 저쪽 높은 곳으로 두둥실 흘러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관심하고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든 것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바자로프는 하품을 억누르면서 이렇 게 대답을 했는데, 그는 분명히 논쟁을 계속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아르카디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질렸어, 네 친구는 정말 예의범절이 바르군 그래 하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나 자신으로 말하자면"하고 그는 약간 애쓰는 기색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좋은 일은 못 되나, 나는 독일인을 역성들지는 않지. 러시아의 독일인에 대해서는, 그건 물론 논의할 것도 못 되는 정말 보잘것없는 것들이지. 그러나 독일의 독일인도 나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 거든. 그래도 옛날 한때는 독일인 중에도 저 실러라든가 괴테라든가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여기 있는 내 동생도 그들에겐 특별한 호의를 지니고 있지만... 지금은 화학자라든가 유물론 자라든가 하는 패들만이 판을 치고 있단 말이야..." "훌륭한 화학자는 어떠한 시인보다 스무 배나 더 쓸모가 있습니다"하고 바자로프가 말을 가로챘다. "호호, 그래"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그는 마치 졸고 있는 듯이 눈썹을 조금 추켜세웠다. "자네는 예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로군." "돈 버는 예술이라든가, 치질 을 고치는 예술은 말입니다"하고 바자로프는 얕보는 듯한 냉소를 띄면서 언성을 높여 말했 다. "흥, 그래그래, 그건 설마 농담이겠지. 그렇다면 자네는 모든 걸 부정하는거로군? 그건 그렇다 하고 결국 과학만을 믿는다는 말이지?" "저는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무것도 믿 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과학이란 대체 뭡니까? 과학 일반 말씀입니다. 각종 직업에 칭호 가 있듯이 과학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과학 일반이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 니다." "정말 옳은 말씀이여. 그럼 그 밖의 인간생황에 사용되고 있는 법률 따위에 대해서도 이 러한 부정적 태도를 취하고 있겠군?" "아니, 이건 신문입니까?"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 파 벨 페트로비치의 안색이 약간 창백해졌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끼 어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여보게,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자네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기로 하세. 그리고 자네 의견도 자세히 들어 보고 내 의견도 말함세. 나는 자네가 자연과학을 하고 있다는 것이 대단히 기쁘다네. 내가 듣기에는 리비히(독일의 화학자. 유기화합물을 분자 구조 연구로 유기 구조화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안식향산기, 에틸기를 발견하여 근설을 확립하였음)가 전답의 비료에 대해 놀랄 만한 발명을 했다더군. 제발 내 농사에 대하여 지도해줄 수는 없겠는가? 무슨 좋 은 도움을 받을 수는 없겠는가?" "무슨 일이든 분부해주십시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그러 나 우리들은 아직 리비히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우선 알파벳을 익히고 나서 책을 읽어야 하는데, 우리들은 아직 그 초고도 읽은 적이 없습니다." 역시 이 녀석은 정말 니힐리스트다 운데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생각했다. "어쨌든 기회가 있으면 자네에게 부탁하겠네"하 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형님, 우리들은 이제부터 토지 관리인을 만나보러 가야겠군요." 파 벨 페트로비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래야지"하고 그는 아무도 바라보지 않고 입을 열었 다. "위대한 지식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나와, 이런 시골에 5년간이나 처박혀 산다는 것은 불행한 노릇이야. 아주 바보처럼 되니 말이야. 배운 걸 잊지 않으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문 득 그런 것은 모두가 허사라는 것을 알게 돼. 그리고 사물의 이치를 아는 인간은 그런 시시 한 짓은 하지 않는 거다, 너 같은 것을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늙은이라는 거다 하는 평이 돌게 마련이지. 정말 큰일이야. 젊은이들이 우리들보다 현명한 것 같아." 파벨 페트로비치는 천천히 발꿈치를 돌려 조용히 걸어나갔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도 그 뒤를 따라나갔다. "어찌된 거야, 저분은 언제나 저러신가?"하고 형제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마자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에게 냉정하게 물었다. "예브게니, 자네가 지나치게 말대꾸를 한 거야"하고 아르카디가 말했다. "자네는 그분을 노하게 한 거야." "자네 말이 옳아. 내가 그런 사람들을, 그런 시골뜨기 귀족들의 응석을 보고만 있겠는가 말이야. 정말 그런 것은 모두 자 만심이야, 우쭐거리는 나쁜 버릇이야. 진부한 재담꾼 기질이야. 그러나 그분이 그게 취미 시 라면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더 활약하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만 그런 분은 멋대로 하 게 내버려두는 거야. 나는 꽤 보기 드문 물방개를 잡았어. 디티스쿠스 마르기나투스라는 건 데, 알겠지? 그걸 자네에게 보여주겠네" "나는 자네에게 그분의 이야기를 해주기로 약속했었지"하고 아르카디는 입을 열었다. "물 방개 이야기 말인가?" "아니, 그건 그만두게, 예브게니. 내 큰아버지 내력 말일세. 우리 큰아 버지는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조롱의 대상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동정이 갈 만한 분이지." "나는 구태여 말리진 않겠네. 그런데 어째서 자네는 그토록 그분에게 흥미를 갖고 있지?" "공정해야 되니까 말일세, 예브게니." "무슨 뜻으로 하 는 말인가?" "그러지 말고 들어주게..." 그리고 아르카디는 자기 큰아버지의 내력을 친구에 게 들려주었다. 독자들은 그 내력을 다음 장에서 알게 될 것이다. 7 파벨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는 그 아우 니콜라이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자기 집에서 다 음에는 중앙 유년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그 두드러지게 뛰어난 용모 로 인하여 남의 이목을 끌었다. 게다가 그는 매우 자신만만하였고 약간 남을 깔보는 버릇이 있었으며, 더구나 그의 해학적인 행동 때문에 누구한테서나 귀염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는 사관이 되자 여기저기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사고 있었으므로 장난을 치기도 하고, 거드름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짓조차도 그한테는 어울렸다. 여자들은 그에게 반해서 미칠 지경이었으며, 남자들은 그를 멋쟁이라고 부르긴 했 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그를 부러워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아우와 한집에 살며, 또 한 조금도 아우와는 닮은 점이 없는데도 아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아우인 니콜라 이 페트로비치는 약간 절름발이였다. 이목구비는 좀 작은 편인데도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으 며, 약간 수심을 띤 그다지 크지 않는 검은 눈과 부드러운 가는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그는 게으름을 잘 피웠지만, 책은 즐겨 읽었으며, 세상과의 접촉을 꺼려했다. 형인 파벨 페트로비치는 하룻밤도 집에서 지낸 적이 없으며, 그 과감성과 기민성은 유명했었다. 그는 사교계의 청년들 사이에 체조를 보급시키려 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읽은 것이라고는 겨우 대여섯 권의 프랑스어 책뿐이었다. 28세에 그는 벌써 대위가 되어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찬 란한 출세의 길이 열려 있었다. 그럴 즈음에 모든 것이 바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무렵 페테르스부르크의 사교계에 P공작 부인이라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부인이 가 끔가다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에게는 가정교육을 잘 받아서 예의는 바르지만 머리가 좀 모 자라는 남편이 있었는데, 자식은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외국으로 떠나는가 하면, 또 갑자기 러시아로 돌아오는 등 대체로 이상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불성실한 바람둥이 여자 라는 평판이 나 있었으며 열심히 온갖 종류의 쾌락에 빠져 있었다. 또 젊은 사내들과 지칠 정도로 춤을 추었고, 또 소리 높이 깔깔거리고 웃었으며 농담을 했다. 또 식사 전에 응접실 의 어두컴컴한 곳에서 젊은이들과 만나곤 했다. 그런가 하면 밤이면 눈물을 흘리거나 아무 데도 마음을 달래줄 곳을 찾을 수 없다는 듯이 기도를 드리곤 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가끔 날이 샐 때까지 자기 방에서 괴로워하며 손을 비틀어대며 방안을 서성거리기도 하고, 또 어 떤 때는 앉아서 파리하게 싸늘한 표정을 짓고 성서의 시편을 읽기도 했다. 그러다가 해가 뜨면 그녀를 부르는 곳으로 달려가 웃고, 담소하고 하면서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 는 것이 있으면 무엇에든지간에 자기 자신을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매우 훌륭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 내려뜨린 머리는 금빛으로 황금처럼 무겁 게 무릎 밑까지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미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 의 얼굴 전체에서 예쁜 곳이라고는 다만 눈뿐이었다. 그것도 그다지 크지 않은 잿빛 눈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눈의 표정이었다. 재빠르면서 예리하고, 대담하리만큼 태연자약하며, 또 우울할 정도로 생각에 잠기는 수수께끼와 같은 그 눈의 표정이었다. 그녀가 혀꼬부라진 소 리로 뭔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일 때에도 그 눈의 표정에는 뭔지 수상쩍은 빛이 번뜩 이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옷차림에 신경을 썼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어느 무도회에서 그 녀를 만나게 되어 함께 마주르카(폴란드의 민속 무용곡. 또 거기에 맞추어서 추는 댄스. 음 악은 4분의 3또는 8분의 3박자로 왈츠보다 느리나 활발한 느낌이 듦)를 계속 추었는데, 그 동안 그녀는 한 마디도 분별 있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 다. 이성을 꾀어 차지하는 데 익숙한 그는 이번에도 역시 자기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의 열 정을 만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는 더욱더 괴로웠고 한층 강하게 그 여자에게 끌려 들어갔다. 그녀는 완전히 몸을 내맡기고 있을 때라도 여전히 더 이상 깊이 아무도 들어가 볼 수 없는, 뭔가 비밀스러운, 근접하기 어려운 것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 영혼 속에는 무 엇이 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녀는 어떤 불가사의한, 자기 자신도 모를 힘에 지배당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힘은 뜻대로 그녀를 농락하는데 그녀의 대단치 않은 머리로는 그 힘에 의한 순간적인 충동을 어찌할 수가 없는 듯했다. 그녀의 행동은 모두가 모순투성이였다. 이를테면 그녀의 남편에게 가장 의심을 품게 할 유일한 단서라고 할 수 있는 그런 편지를 그녀는 자기가 거 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써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슬픔의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웃지도 않았고 자기가 선택한 남자와 농담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난처한 듯이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대개의 경우 때때로 이 난처함은 갑자기 싸늘한 공포로 바뀌는 바람에 그녀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기 괴망측한 표정으로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럴 때 그녀는 자기 침실에 자물쇠를 채우고 틀 어박혀 있는데 하녀가 문틈에 귀를 대고 엿들어보면 그녀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이었다. 달콤한 밀회를 끝내고 자기 집으로 돌아오면서 키르사노프는 완전한 실패 뒤에 오 는 씁쓸한 괴로움에 정신이 황폐해지는 것을 마음 깊이 느끼는 것이었다. 나는 또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하고 그는 자문을 하면서도 마음은 아프기만 했다. 그는 어느 날 보석 에 스핑크스가 새겨져 있는 반지를 그녀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이게 뭐예요?"하고 그녀는 물었다. "스핑크스예요?" "그렇습니다. 그 스핑크스는 바로 당 신입니다." "저요?"하고 그녀는 묻고 나서 수수께끼 같은 눈을 서서히 그에게로 돌렸다. "정 말 영광이로군요"하고 그녀는 엷은 미소를 띄면서 덧붙였지만, 두 눈은 여전히 불가사의한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P공작 부인이 자기를 사랑해주고 있을 동안에도 파벨 페트로비치의 마음은 무겁고 괴로웠다. 그렇지만 그녀의 그에 대한 관심이 식었을 때, 그건 생각보다 꽤 빨리 닥친 결과이지만, 그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괴로워하고 질투하며 그녀를 귀찮 게 굴고 어디든지 그녀 뒤를 따라다녔다. 그녀는 그가 그처럼 집요하게 따라 다니는 것이 지겨워서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그는 친구들의 간청이나 상관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장교직에서 물러나 공작 부인의 뒤 를 따라나섰다. 그녀의 뒤를 쫓아 돌아다니기도 하고 애써 그녀를 잊으려고 애쓰기도 하면 서 타국에서 4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신의 나약함에 화가 치밀었지만...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불가사의한, 거의 부조리라고도 할 수 있 는, 그러면서도 매력이 넘치는 그녀의 모습은 그의 마음 속에서 너무도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던 것이다. 바덴(서독 서남부의 프랑스와 스위스에 인접한 지방)에서 그는 어떻게 된 셈인지 또다시 그녀와 친밀하게 되었다. 그녀는 한 번도 그를 그렇게까지 열렬하게 사랑했던 적이 없으리 라고 생각될 만큼 그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한 달 후 모든 것은 막을 내렸다. 불꽃이 마지막 으로 한 번 튀는가 싶더니 영원히 꺼져버린 것이다. 이별이 피치 못하다는 것을 예감한 그 는 이와 같은 여자와의 우정이 가능하기라도 한 듯이 그녀의 친구로 머물러 있기를 갈망했 다... 그러나 그녀는 슬며시 바덴을 빠져나가 그 후로는 줄곧 그를 피해 다녔다. 그는 러시아 로 돌아와서 전과 같은 생활을 다시 계속하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이미 그전의 궤도에 오를 수는 없었다. 그는 마치 무엇에 중독된 인간처럼 각 지방을 떠돌아다녔다. 그는 다시 사교계 에 나타났고, 사교계 신사로서의 관습을 모조리 익혔으며, 둘이나 셋쯤의 새로운 사랑의 정 복을 자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 스스로도, 또는 타인으로부터도 아무것도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 않 았으며, 또 자기 자신 아무 일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나이가 들어 백발이 되었다. 밤마 다 클럽에 자리를 차지하고 괴로운 듯이 울적해 있거나 독신자들과 어울려 토론하기를 일삼 게 되었는데,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나쁜 징조였다. 물론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었었다. 이렇게 해서 아무런 결심도 맺지 못하고 유수같이 그야말로 유수같이 10년이 흘러갔다. 어디에서도 러시아에서처럼 이토록 시간이 빨리 흐르지는 않을 것이다. 교도소에 서는 더한층 빨리 흐른다고들 하지만 어느 날 클럽에서 식사가 끝난 다음, 파벨 페트로비치 는 P공장 부인이 세상을 떴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광란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파리에 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패들의 곁에 못박인 듯 이 서 있기도 하고 클럽의 방이란 방을 모두 기웃거리며 돌아다니기도 했으나 여느 날처럼 일찍 집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몇 시간 후 그는 자기 앞으로 온 소포 한 개를 받아들 었다. 그 속에는 그가 공작 부인에게 선물한 반지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스핑크스에 십자형 의 표시를 해 놓고, 이 십자형이야말로 수수께끼의 해답이라고 그에게 전하도록 시켰던 것 이다. 이것은 1848년이 시작될 무렵의 일로, 마침 그때 아우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상처를 당하고 페테르스부르크로 돌아와 있던 때였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아우가 농촌에다 거처를 정하고 난 이후로 아우와 만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결혼한 것은 파 벨 페트로비치가 공작 부인과 사귀기 시작한 바로 그 무렵이었다. 외국에서 돌아왔을 때 형 은 아우네 집에서 두어 달쯤 신세를 지며 그 행복한 모습을 보려고 아우의 집으로 갔던 것 이나 거기서 겨우 일주일을 머물렀을 뿐이다. 형제의 처지가 너무나도 크게 달랐기 때문이 다. 그러나 1848년에는 그 차이가 좁혀져 있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상처를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자신의 추억을 단념했다. 공작 부인이 죽은 후로 그는 애써 그녀에 대한 생각 을 지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니콜라이에게는 그럭저럭 후회 없는 생활을 해왔다는 뿌 듯함이 남아 있었으며, 아들이 그의 슬하에서 자라고 있었다. 파벨은 그와 반대로 불안한 황 혼기에 처한 외로운 독신자로서, 청춘은 지나가 버렸지만 노령에는 아직 접어들지 않았다는 희망 비슷한 비애, 비애 비슷한 희망의 시기에 있었다. 이때는 파벨 페트로비치에게 있어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가슴 아픈 시기였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함께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저는 이제 형님을 마리노에 초대하지 않겠어 요"하고 하루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형에게 말했다. 그는 죽은 아내인 마리아를 기념해 서 자기 마을을 이렇게 명명하였던 것이다. "형님께선 아내가 살아있을 때에도 마을에 오시 면 그토록 지루하게 지내셨는데 이제는 울적한 심정에 돌아가실까 두렵습니다." "그 당시에 다는 어리석었고 안절부절 못했지"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대답했다. "그 뒤 로 나의 마음은 가라앉았어. 현명해지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지금은 그와 반대로 너만 용서 해준다면 너한테 가서 영원히 살아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 대답 대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형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파벨 페트로비치가 자기 생각 을 실천에 옮기려고 결심하기까지에는, 이런 대화가 있은 지 반년이 지난 후였다. 그 대신 한번 마을에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그는 마을을 버리지 않았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아들 과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지낸 세 번의 겨울 동안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독서를 시작했는 데, 그것은 영어로 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대체로 자기의 모든 생활을 영국식으로 영위 하고, 근처 사람들과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다만 선거 때에만 외출했는데 거기서도 대부분 침묵을 지켰으며, 다만 이따금 자신의 자쥬주의적인 언행으로 구식 지주들을 골려주거나 깜 짝 놀라게 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새 시대의 대표적 인물들과는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그런 식이었다. 구식 지주나 새 시대의 대표적 인물들은 모두가 그를 거만한 사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모두가 그 의 완벽한 귀족적인 태도 때문에, 또는 그가 여자가 반할 남자라는 평판 때문에 그를 존경 했던 것이다. 그가 존경을 받게 된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복장을 하고 언제나 일류 여관의 일등실에 머물렀다는 것, 그가 음식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으며, 한번은 루이 필립 (프랑스의 왕. 대혁명 초기의 자유주의적인 귀족. 7월 혁명으로 왕이 되었으나, 금권정치에 의한 부패로 다시 2월 혁명에 의해 왕좌에서 쫓겨났음) 궁정에서 웰링턴(영국의군인. 정치 가. 1815년 나폴레옹군을 워털루에서 격파하여 크게 신망을 얻었으며, 뒤에 토리당의 당수로 수상이 되었음)과 함께 식사를 한 일까지 있었다는 것, 그는 뭔지 보통이 아닌 논랄 만큼의 고급 향수 냄새를 풍겼다는 것, 그는 어디를 가든지 진짜 은으로 만든 여행용 화장도구 케 이스와 여행용 목욕통을 들고 다녔다는 것, 그는 능숙하게 휘스트(네 사람이 하는 카드놀이) 를 즐겼는데, 실제로는 솜씨가 좋으면서 노상 지기만 했다는 것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 고 마지막으로 그 흠잡을 데 없는 그의 성실성 때문이기도 했다. 부인들은 그를 두고 반하 기 안성맞춤인 우울증이 있는 사나이로 여기고 있었으나, 그는 그들과 교제하려 들지 않았 던 것이다. "알겠지, 예브게니"하고 자기 이야기를 마치면서 아르카디는 말했다. "자네가 큰아버지에 대해서 그릇 판단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 더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큰아버지는 몇 번이 나 우리 아버지의 다급한 사정을 구해 주셨고 당신 돈을 전부 주시기도 했어. 소유지는 말 일세, 자네는 아마 짐작이 가지 않겠지만, 두 분은 나눠갖지를 않으셨어. 하지만 큰아버진 누구든지 기꺼이 도와주시며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언제든지 농부들을 감싸주고 계 신 거야. 하긴 농부들과 이야기하실 때면 큰아버지는 얼굴을 찌푸리시고 향수 냄새를 맡고 계시긴 하지만 말일세..." "알 만해, 그토록 신경이 예민하시니"하고 바자로프는 말을 가로챘다. "그럴싸한 말이야. 하지만 큰아버지의 마음씨는 유달리 착하셔. 그리고 결코 바보는 아니야. 나에게 여러 모로 유익한 충고를 해주시기도 했지... 특히... 특히 여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말이야." "하하, 뜨거운 맛에 경을 치고는 날 것을 불어댄다는 바로 그거로군. 그야 뻔한 일이지" "글세 한 마디로 말해서"하고 아르카디는 계속했다. "큰아버지는 심각하게 불행하셔. 나를 믿어주게. 그분을 멸시하는 건 좋지 않아." "누가 그분을 멸시한댔나?"하고 바자로프가 응수했다. "그러나 역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네. 남자가 자기의 모든 생활을 여자의 사랑이라는 카드 한 장에 걸었다가 막판에 가서 그 카드에 실패했을 때 녹초가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타락한다면, 그런 남자는 사내 대장부라고, 아니 수컷이라고 말할 수 없단 말이야. 자네는 그분이 불행하다고 했으며 그분 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분은 아직도 어리석은 생각을 아주 버리지는 못한 거 야. 나는 확신하지만, 그분은 정말 자신이 꼭 필요한 존재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아. 그 불쾌 한 가리냐니지 같은 걸 읽고, 한 달에 한 번 농부들의 체형을 면제헤주기도 하니 말일세." "하지만 큰아버지가 받은 교육이나 그분이 살아온 시대를 고려해보아 주게." "교육이라니?" 하고 바자로프가 말을 받았다. "어느 누구나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교육해 야만 하는 거야. 이를테면 나처럼 말일세...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라는 것에 대해서 는, 왜 내가 시대에 의존해야 하지? 시대 같은 건 내게 의존시키는 편이 오히려 나을거야. 아니 이런 건 모두 무의미한 생각일세. 그리고 남녀간의 신비한 관계라니, 뭘 말하는 건가? 우리 같은 생리학자는 그것이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알고 있는 거야. 자네, 눈의 구조라도 연 구해보게나. 자네가 말한 수수께끼 같은 눈의 표정이란 건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오는 건가. 그런 건 모두 로맨틱한 헛소리이고, 진부한 미학일세. 자, 물방개라도 보러 가지 않겠나?" 그러고 나서 두 친구는 방으로 건너갔다. 그 방에서는 이미 값싼 담배 냄새와 뒤범벅이 된 무슨 외과 수술용 냄새가 자욱하게 풍기고 있었다. 8 파벨 페트로비치는 아우와 토지 관리인이 이야기하는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다. 관리인은 키가 크고 마른 남자로 폐병환자처럼 나직한 음성에 간사스런 눈을 하고 있었는 데,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아무리 의견을 내세워도 "당치도 않은 말씀을, 더 말하실 것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하며 농부들을 주정뱅이나 도둑놈으로 만들어버리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최근에 새로운 방식으로 개혁된 농장경영은 기름을 치지 않은 마차바퀴처럼 삐걱거렸으며, 생나무로 만든 수제가구처럼 째지는 소리를 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절망을 한 것은 아니지만 몇 번이고 한숨을 짓거나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그는 돈 없이는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는 이제 돈이 거의 다 떨어진 형편이었다. 아르카디의 말은 사실이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몇 차례나 자기 아우를 도와주 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잘 타개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고 골치를 앓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면서 파벨 페트로비치는 주머니에 두 손을 쑤셔 넣은 채 창가로 천천히 다가갔다. 내 가 돈을 주마하고 입안에서 우물우물 말한 다음 여느 때처럼 동생에게 돈을 내주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자신도 돈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경영상의 번거로움이 그의 기분을 우울하게 했던 것이다. 게다가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꽤 열심이며 부지런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대로 일을 순조롭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견딜 수가 없었다. 실제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어떤 점에서 잘못하고 있는 가를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그도 정확히 지적해낼 수는 없었다. 아우는 실무적인 일엔 소질 이 없어. 속고 있는 거야 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니콜라이 페르토비치는 그와 반대 로 파벨 페트로비치의 능력을 높이 사서 노상 그의 충고를 요청했다. "저는 억지도 쓸 줄 모르고 머리도 좋지 않아 일생을 시골구석에서 보내고 말았지만, 형 님은 꽤 오랫동안 세상 사람들과 사귀셔서 사람들을 잘 다루십니다. 매처럼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계시고요"하고 그는 늘 말했던 것이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이 말에 그저 외면만 할 뿐이었으나, 그러면서도 자기에 대한 동생의 신뢰를 배신하지는 않았다. 니콜라이 페트로비 치를 서재에 남겨둔 채 그는 집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가르고 있는 복도를 따랄 걸었다. 지 붕이 매우 낮은 문 앞에 다다르자 주저하는 듯이 멈춰 서서 콧수염을 한 번 쓱 쓰다듬고는 그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들어오세요"하는 페니치카의 음성이 들려왔다. "납니다"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한 다음 문을 열었다. 페니치카는 갓난아이를 안고 앉아 있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소녀에게 갓난 아이를 안겨주며 밖으로 내보낸 다음, 서둘러 머릿수건을 고쳐 맸다. "폐가 된다면 미안한 데"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녀 쪽을 쳐다보지 않고 말을 꺼냈다. "뭐 잠깐 부탁할 게 있 어서... 오늘 시장으로 사람을 보낼 때... 녹차를 사다 주도록 일러줘요." "알겠습니다"하고 페니치카는 대답했다. "얼마나 사오도록 시킬까요?" "글쎄요, 반 파운드면 충분할 겁니다. 그런데 이 방도 좀 바뀐 것 같군요"하고 주위를 재빨리 둘러보고 페니치카의 얼굴을 슬쩍 살핀 다음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저 커튼 말입니다" 그녀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자 그는나직한 음성으로 말한 것이다. "예, 커튼 말씀이시로군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께서 제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벌써 오래 되었는걸요." "그래요. 나도 여기에 꽤 오랫동안 오지 않았지요. 이제 이곳도 꽤 좋아 보이 는군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덕분이에요"하고 페니치카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전의 별채보다도 여기가 좋지요?"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정중하게 물었지만 웃음기는 띄지 않았 다. "말할 수 없이 좋아요." "세탁부가 들어 있어요." "흠" 파벨 페트로비치는 입을 다물었 다. 이제 나가겠지 하고 페니치카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나가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 는 긴장한 채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못박ㅇ니 듯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왜 아기를 데리고 나가라고 했나요?" 마침내 페트로비치가 말했다. "난 어린애를 좋아해 요. 내게 그 애를 보여줄 수 없겠소?" 페니치카는 당황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파벨 페트로비치를 두려워했으며, 그도 그녀에게 이제껏 거의 말을 걸지 않았던 것이다. "두냐샤"하고 페니치카가 소리질렀다. "미짜를 데려와주세요" 페니치카는 집 안 사람들 누구에게나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니,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옷을 갈아 입혀야 하니까." 페니치카는 문 있는 곳으로 돌아섰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요"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페니치카는 재빨리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혼자 남아서 이번에는 찬찬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가 있는 천장이 낮은 그다지 크지 않은 방은 매우 깨끗했으며 아늑했다. 방안은 최근에 새로 바른 벽지 냄 새와 향수 냄새가 뒤섞여 풍기고 있었다. 벽쪽에는 등이 굽은 의자가 몇 개 세워져 있었다. 그것은 지금은 돌아가신 키르사노프 장군이 원정했을 때 폴란드에서 사온 것이었다. 한쪽 구석에는 모슬린의 휘장이 달린 작은 침대가 둥근 뚜껑이 달리고 철제 죔쇠가 있는 트렁크 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반대편 구석에는 영검이 뚜렷한 성 니콜라이의 커다란 검은 성 상이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다. 매우 작은 자기로 만든 채색 달걀 하나가 붉은 리본에 매달려 성인의 가슴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창가에는 작년에 만든 잼을 넣은 원통형의 병이 몇 개 정성껏 봉해져 있었는데, 파란빛이 투명하게 보였다. 그 봉한 종이에 페니치카가 쓴 잼 이라는 굵은 글자가 눈에 띄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이 잼을 매우 좋아했다. 천장 밑으로는 길고 가느다란 끈에 꼬리가 짧은 방울새의 새장이 매달려 있었다. 방울새 가 쉴새없이 지저귀고 팔딱거려 새장은 줄곧 흔들리고 있었다. 삼씨 몇 개가 부슬부슬 방바 닥으로 떨어졌다. 두 창문 사이에 놓인 그다지 크지 않은 장롱 위쪽 벽에는 갖가지 포즈를 위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의 꽤 오래된 사진이 몇 장 걸려 있었다. 그것은 엉터리 사진사가 찍은 것이었다. 같은 장소에 페니치카 자신의 사진도 한 장 걸려 있었는데 그것은 촬영이 아주 엉망이었다. 어쩐지 눈이 없는 것 같은 얼굴이 검은 액자 속에서 억지로 웃으려 애쓰 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인데, 그 외에는 뭐가 뭔지 분별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이 페니치카 의 사진 위에는 예르몰로프(러시아의 장군)장군이 산양 가죽 망토를 걸치고 멀리 카프카즈 산줄기를 자못 위엄 있게 얼굴을 찌푸리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이마 위에는 비단으로 싼 장화 모양의 바늘꽂이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늘어져 있었다. 5분쯤 지났다. 옆방에서 옷 스치는 소리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장롱 위에서 손때가 묻어 다 뜯어진 한 권의 책, 즉 마살스키의 친위별들(1830년대 러시아 의 역사소설)을 집어들어 몇 페이지 넘겼다. 그때 문이 열리고 페니치카가 미짜를 안고 들 어왔다. 그녀는 깃에 수를 놓은 빨간색의 깜찍한 루바시카를 아기에게 입히고, 머리도 빗겨 주고 얼굴도 닦아주고 있었다. 갓난아이는 건강한 아기들이 모두 그렇듯이 힘겹게 숨을 몰 아 쉬며 몸을 이리저리 뒤치면서 조그마한 두 손을 내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푹신한 루바시 카는 갓난아이에게 효과가 있었는지, 그 오동통하고 보들보들한 아기는 만족한 빛을 띠고 있었가. 페니치카는 머리도 단정히 빗고 머릿수건도 맵시 있게 고쳐 썼지만, 있는 그대로도 좋았다. 사실 건강한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어머니보다 더 매력 있는 것이 이 세상에 또 있겠는가? "고놈 꽤 토실토실하군"하고 제법 너그럽게 말하며 파벨 페트로비치는 미짜의 두 겹진 턱 을 집게손가락의 긴 손톱으로 간질였다. 갓난아이는 방울새 쪽으로 눈을 돌린 채 웃기 시작 했다. "큰아버지시다"하고 페니치카는 아기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가만히 흔들면서 말 했다. 그러는 동안 두냐샤는 동전을 밑에 깔고, 불붙인 향을 살며시 창가에 놓았다. "그런데 이 아이는 몇 개월 되지요?"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물었다. "6개월 되었어요. 이제 열 하루 부터는 7개월이 됩니다.." "8개월이 아닌가요, 페도시야 니콜라예브나"하고 조심스럽게 두냐 샤가 참견했다. "아니야, 7개월이야, 당찮은 소릴" 갓난아이는 또다시 웃기 시작하는가 했더 니, 트렁크 쪽으로 눈을 돌렸다가 이번에는 갑자기 다섯 손가락으로 모두 어머니의 코와 입 술을 움켜쥐었다. "요 장난꾸러기"하고 그 손가락을 얼굴에서 떼어낼 생각도 하지 않고 페니치카는 말했다. "이 아이는 동생을 닮았군요"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했다. 그럼 이 애가 누구를 닮겠어 요하고 페니치카는 생각했다. "그래"하고 혼잣말이라도 하듯이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을 이 었다. "틀림없이 꼭 닮았는데" 그는 거의 슬픈 듯이 조심스럽게 페니치카를 바라보았다. "큰 아버지시다"하고 그녀는 되풀이했지만 이번에는 속삭이듯 하였다. "아아, 형님, 여기에 계셨 군요" 갑자기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의 음성이 들려왔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급히 뒤돌아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동생이 매우 기쁜 듯이, 매 우 고맙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으므로 그도 미소를 띄고 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기가 참 귀엽구나"하고 그는 말하고 시계를 보았다. "난 차를 부탁하려고 여기에 잠깐 들렀 단다." 그리고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방에서 나갔다. "형님이 스스로 오셨댔나"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페니치카에게 물었다. "당신이 직접 문을 두드리시고 들어오셨어요." "그럼 아르카디는 그 후론 오지 않았었나?" "오시지 않았어요. 저 다시 별채 로 옮기면 안 될까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그건 또 왜?" "얼마 동안은 거기가 좋을 것 같아요." "아...니야"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더듬거리면서 말하고는 이마를 닦았다. "이제 와 서, 지금은 안 돼... 안녕, 꼬마야." 갑자기 활기를 띠어 말하고는 아기에게 다가가서 그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약간 엎드리듯 하여, 미짜의 빨간 루바시카 위에 놓인 우 유처럼 흰 페니치카의 손에 입을 갖다댔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이 양반이 무얼 하시는 거예요?"하고 그녀는 속삭이면서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살며시 들었다. 그녀가 눈까풀 아 래로 눈을 살짝 흘기면서 부드럽게, 약간 바보스럽게 웃음을 띄고 있을 때 그녀의 표정은 매력적이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페니치카를 다음과 같은 인연으로 서로 알게 되었다. 3년쯤 전의 어느 날, 그는 멀리 읍에 있는 한 여인숙에서 잔 일이 있었다. 그가 안내 받은 방의 말끔함 이나 침구의 홑이불 등의 깨끗함에 그는 깜짝 놀랄 만큼 기분이 좋았다. 여기 안주인은 독 일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안주인은 러시아인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50세쯤 되어 보이는, 옷을 깨끗하게 차려 입은 여인이었는데 이목구비가 잘 생기고 지혜로워 보였으며 말소리도 또박또박하였다. 그는 차를 마시며 그녀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가 꽤 마음에 들게 되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 무렵 이제 막 새로운 저택으로 옮겼을 때였는데 농노 신분의 사람들을 자기 집안에 두는 것을 꺼려 새로운 고용인을 찾고 있었다. 안주인은 이 읍을 찾아오는 손님이 적다는 것, 살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것을 투덜거 리고 있었다. 그는 가정부로서 자기 집에 입주하면 어떻겠느냐고 그녀에게 넌지시 말해보았 다. 그녀는 승낙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페니치카라는 딸 하나만을 그녀에게 남겨놓고 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 다. 2주일쯤 지나서 아리나 사비시나(이것은 새 가정부의 이름이었다)는 딸과 함께 마리노 마을로 들어와서 별채에 살게 되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의 선택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 다. 아리나는 집안 일을 깔끔하게 정돈했다. 그때 벌써 열 일곱 살이었던 페니치카에 대해서 는 아무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없었으며 어쩌다가 한번 눈에 띌 정도였다. 그녀는 조용히 아 주 소박하게 살고 있었고 다만 일요일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교회당의 어딘가 한구석 에서 그녀의 창백하고 섬세한 옆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여 일년 남짓이 지 났다. 어느 날 아침, 아리나는 서재에 있는 그에게 찾아와 여느 때처럼 허리를 굽혀 인사한 다 음, 딸의 눈에 난로의 불티가 들어갔는데 보아줄 수 없겠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니콜라이 페 트로비치는 집에만 있는 사람들이 몯 그렇듯이 웬만한 상처 정도는 치료할 수 있으며, 가정 상비 약상자까지도 갖춰놓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즉시 환자를 데려오도록 아리나에게 일렀 다. 주인이 자기를 부르고 있다는 걸 알자 페니치카는 두려운 생각이 앞섰지만, 어머니의 뒤 를 따라나섰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녀를 창가로 데리고 가서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 를 붙들었다. 그 빨갛게 부어 염증을 일으킨 한 쪽 눈을 살펴본 다음, 그는 그녀에게 바르는 물약을 처방해서 그 자리에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자기 손수건을 몇 갈래로 찢어서 찜질 하는 방법을 그녀에게 가르쳐주었다. 페니치카는 그의 말을 귀담아 듣고는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나리의 손에 키스해야지, 바보 같으니"하고 아리나는 딸에게 말했다. 니콜라이 페크로비 치는 그녀에게 자기 손을 내밀지 않고, 약간 망설이다가 그녀의 숙인 머리의 가르마에다 입 을 맞추었다. 페니치카의 눈은 이내 나았다. 그러나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에게 준 그녀의 인 상은 금방 가셔지지 않았다. 그 깨끗하고 상냥스러우면서도 두려운 듯이 쳐들던 얼굴이 노 상 그의 눈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손바닥에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털을 느끼고 있 었다. 약간 벌어진 틈새로 진주알 같은 이들이 햇빛에 반짝반짝 윤을 내고 있는, 그녀의 천 진난만한 입술이 눈에 선하였다. 그는 교회에서는 한층 주의깊게 그녀 쪽을 바라보게 되었 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와 말을 하려고 애를 썼다. 처음 한동안 그녀는 그를 피하였다. 하루는 해질녘 보행자가 밟아서 다져진 호밀밭의 좁다란 샛길에서 그와 마주치자, 페니치카 는 그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쑥과 들국화가 우거져 있는, 키가 훤칠하게 자란 호밀밭 속으 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누런 호밀 이삭 사이로 조그마한 짐승처럼 이쪽을 엿보고 있는 그 녀의 작은 머리를 보고 부드럽게 그녀에게 소리쳤다. "안녕, 페티치카. 난 물어뜯진 않아요." "안녕하세요"하고 그녀는 자기가 숨어 있는 곳에서 나오려고도 하지 않고 속삭였다. 그 후로 그녀는 조금씩 그에게 낯이 익어갔지만 여전히 그 가 있는 곳에서는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어머니인 아리나가 콜레 라로 죽어버렸다. 페니치카는 어디에 몸을 의지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자기 어머니를 닮 아서 깔끔한 것을 좋아했으며, 생각이 깊고 마음이 곧았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도 어렸으며 아무 데에도 몸붙일 곳이 없었다. 그런데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너무나 선량하고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므로... 그 후의 일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형님이 스스로 당신을 보러 여기엘 들어오셨단 말이지?" "그래요" "그건 정말 잘된 일이야. 미짜를 좀 흔들어줄까?" 그러고 나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거의 천장까지 닿을 만큼 갓난아이를 높이 들어올려 어르기 시작했다. 아이는 매우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 었지만 어머니는 매우 조마조마하여 아이가 들어올려질 적마다 그 드러나 있는 작은 발쪽으 로 자기 두 손을 내뻗치는 것이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자기의 훌륭한 서재로 돌아왔다. 그 벽에는 잿빛이 도는 아름다운 벽 지가 바래져 있었고, 알록달록한 페르시아 융단 위에는 무기가 죽 걸려 있었다. 호두나무 가 구는 검푸른 빛깔의 비로드로 씌워져 있었고, 거기에는 떡갈나무 고목으로 만든 르네상스식 책장과 훌륭한 책상 위에는 청동으로 만든 작은 조각품들이 몇 점 놓여 있었으며, 그 옆에 는 벽난로가 있었다. 그는 소파에 몸을 내던지고 두 손을 머리 뒤로 돌린 채 거의 절망적인 모습으로 천장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 을 벽에게까지 숨기고 싶어서였는지, 또는 무슨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는지, 어쨌든 그는 자 리에서 일어나 창에 걸려 있는 묵직한 커튼을 치고 나서 또다시 소파에 몸을 내던졌다. 9 바로 그날 바자로프도 페티치카와 알게 되었다. 그는 아르카디와 함께 뜰을 거닐면서 몇 몇의 나무들이, 그 중에서도 특히 떡갈나무가 왜 뿌리르 내리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 고 있었다. "이곳에는 백양을 좀더 심어야겠네. 전나무도, 혹은 보리수도 좋겠지. 진흙을 섞 어 넣어주면 좋을 거야. 저쪽 정자 옆에 있는 나무들은 잘 자라고 있군"하고 그는 덧붙였다. "아카시아나 라일락 같은 건 잘 자라거든, 돌봐줄 필요가 없지. 아니, 저쪽에 누가 있는 것 같군." 정자에는 페니치카와 두냐샤가 미짜와 함께 걸터앉아 있었다. 바자로프가 멈춰 서 있 는 동안 아르카디는 아주 오래 사구니 친구이기라도 한 듯이 페니치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 사람은 누군가?"하고 바자로프는 그들 곁은 지나치자마자 그에게 물었다. "정말 미인이군" "누군 말인가?" "뻔하지 않나, 미인은 하나뿐이었는걸" 아르카디는 다소 망설이면 서 페니치카가 어떤 여자인가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알겠네"하고 바자로프는 말했다. "자네 아버지의 눈이 보통 높으신 게 아니군. 난 맘에 들었어, 자네 아버지가 말이야. 정말일세. 멋있지 않은가. 그건 그렇고 인사라도 드려야 하지 않겠나"하고 그는 덧붙여 말하고는 정자 쪽으로 되돌아갔다. "예브게니" 아르카디는 깜짝 놀라며 뒤에서 외쳤다. "제발 조심하게, 부탁일세" "걱정하지 말게"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우린 온갖 경험을 다 해본 사람들 아닌가. 그런 거 이해 못할 시골뜨기도 아니고." 그는 페 니치카 쪽으로 다가가면서 모자를 벗었다. "처음 보비겠습니다" 바자로프는 공손히 인사하 면서 말문을 열었다. "아르카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의 친구입니다. 이래봬도 나쁜 사람은 아니니 염려 마십시도." 페니치카는 벤치에서 일어나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아기가 정말 예쁘군요"하고 바자로프는 말을 이었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추어 올림으로써 당신을 흘리려는 수작은 아니니까요. 아기 볼이 어쩌면 이렇게 빨갛습니까? 이 는 나기 시작했나요?" "네"하고 페니치카가 말했다. "벌써 이가 네 개나 났는데, 이번에 또 잇몸이 좀 붓기 시작하는군요." "어디 좀 볼까요... 아니,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의사니 까요." 바자로프는 두 손으로 아기를 받아들었는데, 놀랍게도 아이가 전혀 떼쓰지도 낯을 가 리지도 않았으므로 페니치카와 두냐샤는 어리둥절해했다. "과연 그렇군. 대수롭지는 않습니 다. 정상적으로 다 잘되어가고 있으니까요. 튼튼한 이가 될 겁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그런데 당신은 건강에 자신 있으십니까?" "괜찮아요, 덕분에." "다행이로군 요. 무엇보다도 건강이 최고지요. 그런데 당신은?"하고 바자로프는 두냐샤 쪽을 돌아보며 또 물었다. 두냐샤는 집안에서는 꽤 얌전한 소녀였지만 일단 문밖에만 나오면 웃기를 잘했으므로 대 답 대신 다만 소리내어 킬킬거릴 뿐이었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자, 부인의 장군님을 돌려 드리지요." 페니치카는 아기를 두 손으로 받아 안았다. "어쩜 그렇게 얌전히 안겨 있었을까" 하고 그녀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느 아기나 제게 안기면 얌전해진답니다"하고 바자 로프는 대답했다. "전 그 비결을 알고 있으니까요." "아기는 자기를 귀여워해 주는 사람을 알아보는 거예요"하고 두냐샤가 참견했다. "네 말이 맞아"하고 페니치카는 수긍했다. "미짜 도 어떤 사람에게는 절대로 안기려 들지 않으니 말이야." "그렇지만 저에게는 오겠지요?"하 고 아르카디가 물었다. 그는 그 동안 저 만큼에 떨어져 서 있다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미짜를 안으려고 팔을 내밀었지만 미짜가 머리를 뒤로 젖히고 앙앙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꽤나 당황했다. "다음에 낯을 더 익히면 그떄 안아 주지"하고 아르카디는 너그럽게 말했다. 그리고 두 친구는 그곳을 떠났다. " 그 여자 이름이 뭐랬지?"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 "페니치카... 아니 페도시야일세"하고 아르카디가 대답했다. "그럼 부칭은? 그것도 알아둬야 하지 않겠나." "니콜라예브나일세." "좋아. 나는 그 여자가 내 앞에서 그다지 피하거나 거북스러워하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 어. 어떤 사람은 어쩌면 그 여자의 그런 점을 나쁘게 말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어리석 은 생각이야. 무엇 때문에 그녀가 불편해해야 한단 말인가. 그 여자는 아기 어머니야. 그녀 의 태도는 충분히 정당하다고." "그야 물론 정당하지"하고 아르카디가 참견했다. "그렇지만 우리 아버지는..." "자네 아버지도 역시 정당하시지"하고 바자로프가 말을 가로챘다. "아니야, 난 그렇게 생 각지 않아." "물론 누구든지 뜻밖의 상속자 같은 건 반갑지 않겠지?" "나를 그따위로 생각하 다니, 자네 부끄럽지도 않은가"하고 말을 받아 아르카디는 열을 올려 말했다. "나는 그런 뜻 에서 아버지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아냐. 나는 아버지가 그 여자와 정식으로 결혼해야 만 한다고 생각하는 거라고." "아, 그렇군"하고 바자로프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들도 참 어지간히 관대하군. 그러니까 자네는 아직도 결혼의 의의 같은 것에 연연해하고 있단 말이지. 나는 자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 두 친구는 입을 다문 채 몇 걸음 나아갔다. "나는 자네 아버지의 농장 시설을 다 돌아봤 는데 말이야"하고 바자로프는 또다시 말을 꺼냈다. "가축은 빈약하고 말들은 지쳐 있었어. 건물도 허술하고 고용인들은 낙인찍힌 게으름뱅이처럼 보였어. 또 토지 관리인은 바보 아니 면 사기꾼이더군. 어느 쪽인지 아직 분간되진 않지만 말이야." "자네 오늘은 꽤 비판적이군,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그리고 아무리 선량한 농부들이라 해도 자네 아버질 반드시 속이 고 말 걸세. 러시아 농부들은 하느님도 잡아먹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난 큰아버지의 의견에 동의해." 아르카디가 말했다. "자넨 틀림없이 우리 러시아인에 대해 좋지 않은 견해 를 갖고 있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러시아인의 단 하나 장점은 자기 자신을 낮추어 평 가하는 겸손함이야. 둘을 곱하면 넷이라는 사실만 중요하지, 나머지 것은 모두가 하찮은 거 야." "그럼 자연도 하찮은 것인가?"하고 아르카디는 이미 중천에 떠 있는 태양의 아름답고 부 드러운 빛을 받아 여러 빛깔로 물든 들판을 생각에 잠긴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자네 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로는 자연도 하찮은 것이지. 자연은 신전이 아니라 일터인 것이며, 인간도 거기서는 일꾼에 지나지 않지." 바로 그때 길게 끄는 첼로 소리가 집안으로 부터 흘러나왔다. 썩 좋은 솜씨는 아니었지만 감정을 넣어 누군가가 슈베르트의 기대를 켜 고 있었다. 달콤한 멜로디가 꿈결처럼 바람을 타고 두루 퍼져나가고 있었다. "저건 또 뭔가"하고 바자로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버지께서 켜시는 거야." "자네 아 버지가 첼로를 다 켤 줄 아시나?" "그렇다네" " 자네 아버지의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데?" "마흔 넷이지" 바자로프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어쨰서 웃는 건가?" "생각 좀 해보게. 마흔 네 살의 사내가 말이야, 그것도 한 집안의 어른이 말일세, 이런 시골에서 첼로를 켜다 니." 바자로프는 계속해서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러나 아르카디는 평소에 이 친구를 자기의 현명하고 성실한 조언자로서 존경은 하고 있으면서도 이번만은 따라 웃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10 거의 2주일이 지났다. 마리노 마을에서의 생활을 별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르카디 는 즐기면서 지냈으며, 바자로프는 일을 했다. 온 집안 사람들은 그의 그 조심성 없는 태도 와 다소 무뚝뚝하고 퉁명스런 말투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 중에서도 페니치카는 그와 아주 친해져서 한번은 한밤중에 그를 깨우러 갔을 정도였다. 미짜가 경련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 는 노상 하는 버릇대로 반은 농담조로, 반은 하품을 하면서 그녀 방에서 두 시간 남짓 버티 고 앉아 아기를 간호한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파벨 페트로비치는 바자로프를 몹시 미워했 다. 그는 바자로프를 거만하고 낯가죽이 두꺼운 녀석, 남을 빈정거리기나 하는 속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바자로프가 자기를, 즉 파벨 키르사노프라고 하는 자기를 존경 하지 않고 도리어 경멸하려 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젊은 니힐리스 트를 다소 두려워하며 아르카디에게 미칠 그의 영향이 유익한가 어떤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물리화학의 실험에도 즐겨 자리를 함 께 하기도 했다. 바자로프는 현미경을 가지고 와서는 몇 시간이고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었 다. 하인들도 그한테 놀림을 받으면서도 그를 따랐다. 그들은 그래도 그가 자기들의 동료이지 주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냐샤 는 즐겨 그와 함께 장난을 치고, 메추라기 암컷처럼 교태를 부리며 슬쩍 지나치면서 흘긋흘 긋 관심 있는 듯이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지독하게 허영심이 강하고 우둔한 피오트로, 노 상 눈살을 찌푸리고 있고, 남에게 예의 바른 것처럼 행동하며, 글자를 더듬더듬 읽을 수 있 고, 자기 연미복에 종종 솔질을 한다는 것, 고작 그런 것이 장점인 이 사나이도 바자로프가 눈에 띄면 이내 히죽히죽 웃고는 얼굴이 환해지는 것이었다. 하인들의 자녀들도 이 의사 뒤 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다만 늙은 프로코피치만이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식탁에 앉아 있는 그에게 불쾌한 얼굴로 식사를 내주곤 했으며, 그를 두고 흉물스러운 놈 또는 사 기꾼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가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는 모습은 숲속에 숨어 있는 진짜 돼지 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프로코피치는 제 나름대로 파벨 페티로비치에 못지 않은 귀족주 의자였다. 일년 중에서 가장 좋은 계절인 6월초가 다가왔다.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사실 머릴서 부터 콜레라가 또다시 전염해올지도 모른다고 위협하기는 했지만, XXX현의 주민들은 이제 그런 것엔 익숙해져 있었다. 바자로프는 매우 일찍 일어나서 2마장이나 3마장쯤 되는 곳까 지 나갔는데, 산책하는 것은 아니고, 그는 목적 없는 산책 따위는 질색이었다, 풀이나 곤충 따위를 채집하는 것이었다. 때때로 그는 아르카디를 데리고 갔다. 돌아오는 길에는 두 사람 이 언제나 반드시 논쟁을 벌이곤 했다. 그런데 아르카디는 자기 친구보다도 훨씬 더 말을 많이 하는데도 불구하고 결국은 항상 지고 마는 것이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어찌 된 일인지 돌아오는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뜰까지 두 사람을 마중 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자 있는 곳까지 갔을 때 갑자기 젊은이들의 재빠른 발소리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정자의 반대쪽 을 걷고 있어서 그를 보지 못했다. "자네는 아직도 내 아버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 는 거야"하고 아르카디가 말하고 있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숨을 죽였다. "자네 아버지 는 좋은 분이셔"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하지만 그분은 이제 구시대의 인물이고 인생의 황금기는 이미 지나가 버렸어."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청각을 더 세워 귀를 기울였다. 아르 카디는 아무 말이 없었다. 구시대의 인물은 2분쯤 숨을 죽이고 서 있다가 어정어정 집 쪽으 로 걸어갔다. "그저께 내가 보니까, 그분은 푸슈킨을 읽고 계시더군"하고 그 동안에 바자로프는 계속 말하였다. "제발 설명을 해드리게. 그런 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걸 말일세. 그분은 어린애가 아니잖은가. 그런 부질없는 짓은 그만둘 때란 말일세. 요즈음 세상에 로맨티시스트가 되시려 는 건가. 그만두셔야 해. 조금이라도 유익한 걸 읽으시도록 권해드려." "어떤 걸 읽으시도록 하면 좋을까?"하고 아르카디가 물었다. "글쎄, 우선 첫걸음으로 비히너(독일의 유물론 철학 자)의 물질과 힘(독일의 원명 힘과 물질을 작가가 이렇게 잘못 뒤바꿔 놓았다)은 어떨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하고 아르카디는 찬성하는 뜻을 나타냈다. "그 물질과 힘은 대체로 쉬 운 말로 쓰여 있으니까 말이야." 그날 점심 식사 뒤에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자기형의 서재에 들어가 앉으면서 형에게 이 렇게 말하였다. "형님, 형님이나 저나 시대에 뒤진 인간이 되어버렸고 우리들의 인생은 이미 다 끝나버렸다고 하는군요. 그래요, 바자로프가 옳아요. 그러나 정말 저는 단 한 가지 괴로 운 게 있어요. 그건 앞으로 아르카디와 굳게 손잡고 친밀하게 되어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 는데, 저는 뒤에 처지게 되었고 그 애는 저 앞을 다릴게 되어 서로 이해하고 지낼 수가 없 게 된 점이에요." "그런데 어째서 그 애가 저 앞으로 달려가 버린 거지? 그리고 어째서 그 애와 우리들 사이에 그렇게 지독한 차이가 생겨버렸단 말이냐?"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참 을 수 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것은 순전히 니힐리스트인가 뭔가 하는 그 녀석이 우리 애 머리에 그런 생각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란 말이야. 나는 그 의사 놈이 꼴 보기 싫어. 내가 생각하기엔 그 녀석은 그저 그런 사기꾼에 지나지 않아. 개구리 같은 걸 잔뜩 잡아다 가 무슨 수로 그 녀석이 물리에 도움이 되는 짓을 할 수 있겠어?" "아닙니다, 형님. 그런 말 씀을 하시면. 바자로프는 현명하고 뭐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놈의 자존심은 아주 비위에 거슬린단 말일세"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또다시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래요"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인정했다. "그 사람은 자존심이 강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존심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다만 아무래도 미심쩍은 일이 있습니다. 시대에 뒤지지 않기 위하여 저는 모든 짓을 다 해왔다고 생각합니 다. 농부들을 관대하게 대하기도 하고 농장을 새로 만들기도 하여 온 마을에서 저를 급진 과격파라고 여길 정도였습니다. 또 책도 읽고 공부도 했으며, 여러 모로 시대적인 요구에 뒤 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제 일생이 종막을 고했다고 그들이 말하는 게 아닙니까. 그 런데 형님, 어쩐지 저 자신도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어째서 또 그런 말을?" "실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오늘 제가 의자에 앉아서 푸슈킨을 읽고 있노라니... 마침 집시 (푸슈킨의 서사시)를 읽어나가고 있을 때라고 생각되는데... 갑자기 아르카디가 아무 말 없이 제게로 다가와서 애정과 연민이 어린 표정으로, 마치 어린아이에게라도 하듯이 제게서 살며 시 책을 빼앗아 들더니, 제 앞으로 독일어로 쓴 다른 책 한권을 내놓는 거예요... 그러고는 슬며시 웃으며 나가버리더군요. 푸슈킨도 가지고 가버렸고요." "이런, 세상에. 도대체 그 애 가 어떤 책을 갖다놓던가?" "바로 이겁니다." 그리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프록 코트의 뒷주머니에서 평판 높은 비히너의 9판째 팜플렛을 꺼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것을 두 손으로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흠"하고 그는 신음했다. "아르카디가 아비의 교육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군 그래. 그래서 좀 읽어보았나?" "읽어봤 어요." "그래, 어떻던가?" " 제가 무식한 건지, 이 책이 엉터리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무식한 거겠지요." "난 자네가 독일어를 잊어버렸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하고 파벨 페트로비치 는 물었다. "독일어는 기억하고 있어요."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 책을 되돌려주고 나서 동생 을 의심스러운 듯이 흘긋 보았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아, 참"하고 화제를 바꾸고 싶어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콜랴진 에게서 편지를 받았어요." "마트베이 일리이치한테서 말인가?" "그래요. 이번에 도시르  ㅣ 찰하기 위해서 XXX에 온 겁니다. 그 사람은 이제 거물이 되었다는데, 친척의 정분으로 우 리를 만나고 싶다는 겁니다. 저와 형님과 아르카디를 읍으로 초대한다고 써 있더군요." "넌 갈 생각이냐?"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물었다. "아니요, 형님은?" "나도 안 가. 50마장이나 되는 곳엘 가다니 그럴 바보가 어디 있겠냐? 마트베이는 자기의 위세 당당한 모습을 우리에 게 보이고 싶은 거야. 멋대로 굴라지. 그 사람에겐 아첨꾼들이 실컷 아첨해줄 테니까, 우리 가 없더라도 상관없을 거야. 대단한 벼슬을 한 것도 아니잖아. 그까짓 문관 3등이 아닌가. 만일 내가 매우 고된 일을 계속 근무했더라면 지금쯤은 시종무관장이 됐을 거야. 어쨌든 너 나 나나 구시대의 인물인 건 사실이다." "그래요, 형님. 이제 관을 준비하고 가슴에다 손을 얹을 때가 왔나봐요"하고 한숨을 내쉬 며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아니야, 나는 그렇게 일찍 단념하지는 않겠어"하고 형은 투덜거렸다. "나는 또 그 의사와 입씨름을 한바탕 하게 될 거야. 그런 예감이 들어." 바로 그날 저녁 차를 들 때, 그 입씨름이 한바탕 벌어졌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이미 전투 태세를 갖추고 민감하고 단호한 태도로 응접실에 들어왔다. 그는 적을 물고늘어질 구실만을 노리고 있었으나 그 구실을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바자로프는 결코 키르사노프 댁의 늙은이(그는 두 형제를 이렇게 불렀다)가 있는 앞에서는 그다지 많이 지껄이지를 않았는데, 그날 따라 그는 기분이 상해서 입을 다문 채 차만 계속해서 몇 잔씩 마시고 있었다. 파벨 페트로비치 는 조바심에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의 기대는 실현되었다. 화제는 이웃 마을에 사는 어느 지주에 관한 것이었다. "건달입니다. 형편없는 귀족입니다"하고 바자로프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는 페테르부르크 에서 그 지주와 알고 지냈던 것이다. "잠깐 물어보겠는데"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은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자네는 건달과 귀족이 같은 의미라고 생각 하는가?" "저는 형편없는 귀족이라고 했습니다."하고 바자로프는 성가시다는 듯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대꾸했다. "확실히 그랬네. 그러나 내가 짐작하기엔, 자네는 진짜 귀족에 대 해서도 형편없는 귀족에 대해서와 같은 의견을 가진 듯하군.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다는 걸 자네에게 말해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네. 여기서 말해두겠네만, 누구나 다 나를 자 유주의적이며 진보적인 인간으로 알고 있네,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나는 귀족을 진짜 귀족 을 존경하는 바일세. 생각해 보게, 선생(이런 말을 하자 바자로프는 파벨 페트로비치 쪽을 쳐다보았다). 생각해보게, 선생"하고 그는 매섭게 되풀이했다. "영국의 귀족들은 말일세, 그 들은 자신의 권리를 손톱만큼도 양도하지 않으며, 또 그러기 때문에 남의 권리도 존경하는 걸세. 그들은 타인에 대해서 의무의 수행을 요구하며, 또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도 의무를 수행하는 걸세. 귀족 계급은 영국에게 자유를 주었고 또한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세." "그런 이야기는 귀가 아프도록 수없이 들었습니다"하고 바자로프가 대꾸했다. "그런데 당 신께서는 그것으로 뭘 입증하시려는 겁니까?" "선생, 내가 요것으로 증명하고 싶은 것은(파 벨 페트로비치는 이런 말이 어법 상으로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도 화가 났을 때 에는 습관적으로 요것으로라든가 요것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 것이다. 이런 이상한 습관에 서 알렉산더시대의 유산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귀족들은 모국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 았는데, 이따금씩 모국어로 이야기할 때에는 요것이라든가 요놈이란 말을 쓰고 있었다. 즉 우리 순수한 러시아인은 동시에 고관 귀족이기 때문에 학교의 규칙 같은 건 무시해도 괜찮 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요것으로 증명하고 싶은 것은 자존심이 없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존경심이 없이는, 귀족에게는 이런 기분이 발달해 있긴 하지만, 사회의 ... 사회 복지... 사회구조에 있어 아무런 기반도 마련할 수 없는 것일세. 선생, 개성이야말로 요긴한 것일세. 인간의 개성은 반석처럼 견고해야만 되는 것일세. 왜냐하면 그것을 기초로 해서 모 든 것이 세워지기 때문일세. 나는 모든 걸 다 짐작하고 있네. 이를테면 자네는 내 습관도, 내 몸단장도, 나아가서는 내 깔끔한까지도 우습게 여기고 있는 모양인데, 이것은 모두가 자 존심에서, 의무감에서, 그렇지, 의무감에서 그러는 걸세. 나는 농촌에서, 촌구석에서 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나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은 없네. 나는 인간다운 존재로서 나 자신을 존 경하고 있는 것일세." "잠깐 실례입니다만, 파벨 페트로비치 씨"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그런 당신은 자신을 존경하신다면서 팔짱을 끼고 앉아 계십니다. 그렇게 하고 계신다면 사회복지를 위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자신을 존경하지 않으셨더라도 그와 같이 하셨을 것입니다." 파 벨 페트로비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건 아주 딴 문제일세. 왜 내가 자네 말대로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가, 그걸 지금 분명히 밝힐 필요는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네. 다만 내가 말하 고 싶은 건 귀족주의는 하나의 원리이며, 현대에 있어 원리 없이는 패륜이나 무뢰한들도 살 아나기가 어렵다는 걸세. 나는 아르카디가 도착한 그 이튿날 그 애에게도 이런 말을 했네만 지금 자네에게도 거듭 강조해두겠네. 니콜라이, 그렇지 않은가?"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에 바자로프가 말했다. "귀족주의, 자유 주의, 진보, 원리, 그야말로 여러 가지로 외국의 쓸모도 없는 단어들뿐이로군요. 러시아인에 게는 그런 건 거저 준대도 필요없습니다." "그럼 뭐가 필요하다는 건가? 자네 말을 듣고 있 으니 우리는 인류의 테두리 밖에, 그 법칙의 테두리밖에 놓여 있는 것 같군. 역사의 논리가 요구하는 것은..." "하지만 그런 논리가 우리들에게 무슨 쓸모가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들은 그런 게 없더라도 문제없이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뻔하지 않습니까. 당신께서는 배가 고플 때 한 조각의 빵을 자신의 입에 넣기 위해 논리를 필요로 하십니까? 그런 추상적인 논리들이 과연 우리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파벨 페트로비치는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을 하다니, 나는 정말 자네란 사람을 이해할 수 없군. 자네는 러시아 국민을 모독 하고 있어. 원리라든가 규칙 같은 걸 어쨰 인정할 수 없다는 건가. 난 도무지 모르겠네. 도 대체 자네는 무엇에 의하여 행동하고 있는 건가?" "큰아버지, 제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 이, 우리는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하고 아르카디가 참견했다. "우리는 자신에 게 유익하다고 인정되는 것에 의해 행동하는 것입니다"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지금 단계 에서는 무엇보다도 부정이 가장 유익한 것이므로 우리는 부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걸 말 인가?" "예, 모든 걸 말입니다." "어떻게? 예술이나 시뿐만 아니라... 그리고 또 ... 입밖에 내 기도 무서운 노릇이군..." "모든 걸 말입니다"하고 말할 수 없이 침착한 태도로 바자로프는 거듭 말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에게로 가만히 눈을 돌렸다. 이런 일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 다. 그러나 아르카디는 매우 만족하여 얼굴이 약간 붉어졌을 정도였다. "그렇지만"하고 니콜 라이 페트로비치가 참견했다. "자네는 모든 걸 부정하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자네는 모든 걸 파괴하고 있는데... 그러나 건설이라는 것도 필요한 게 아닌가?" "그런 건 우리들의 할 일이 아닙니다. 우선은 터가 깨끗하게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현시대의 상황 속에 서 국민 모두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하고 아르카디가 점잖게 말했다. "우리는 그 요 구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이기주의의 만족에 젖어 있을 권리를 가 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마지막 구절은 어쩐지 바자로프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구절에서는 철학, 즉 로맨티 시즘의 냄새가 풍기는 것이었다. 바자로프는 철학을 로맨티시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러 나 그는 이 젊은 제자를 반박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다. "아니야, 그렇지가 않아"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갑자기 격렬하게 소리 높여 말했다. "나는 자네들이 러시아 국민을 정당하게 알고 있다고도, 또 자네들이 국민의 요구나 갈망의 대표자라고도 보고 싶지가 않네. 아니, 러시아 국민의 실상은 자네들의 상상과는 전혀 다르단 말일세. 그들은 전통을 신성한 것으 로 존중하고 가부장제에 의거하며, 신앙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국민일세" "그 말씀에 대해 서는 부정하고 싶지가 않습니다"하고 바자로프가 말을 가로챘다. "그 점에 있어서는 당신의 말에 동의할 용의마저 있습니다." "만약 내가 옳다면..."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아무것도 증 명하고 있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는 거예요"하고 아르카디는 틀림없이 위험 하리라 생각되는 상대방의 수를 이미 간파하고 있는 숙련된 체스 선수 같은 표정으로 이렇 게 되풀이했다. "어째서 아무것도 증명하고 있지 않다는 게지?" 깜짝 놀란 파벨 페트로비치가 중얼거렸 다. "그래서 자네들은 자기 국민에게 반대 행동을 취하는 건가?" "그것이 뭐가 어떻다는 말 입니까?"하고 바자로프는 언성을 높여 말했다. "국민은 천둥소리를 듣고 이건 예언자 엘리 야(기원전 9세기경의 이스라엘 선지자)가 눈부신 마차를 타고 하늘을 달리고 있는 소리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될 말입니까. 제가 국민에게 동의해야만 합니까? 그리고 제가 그에 반대한다고 해서 국민은 러시아인이고, 저 자신은 러시아인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아니, 그런 말을 하는 자네를 어떻게 러시아인이라 볼 수 있겠는가. 나는 자네를 러시아 인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네." "우리 조부님은 땅을 경작하셨습니다"하고 오만한 자부심을 가지고 바자로프는 말했다. "당신의 농부 중 누구라도 좋으니, 당신과 저 우리 두 사람 중에 서 누가 더 같은 국민처럼 느껴지는가 물어보시지요. 당신은 농부들과 이야기하시는 것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자네는 농부들과 이야기는 하면서도 농부들을 경멸하고 있는 거 로군" "그야 물론 농부가 경멸을 받을 만하면 말입니다. 당신은 제 사상 경향을 비난하시는 데, 그것이 길에서 우연히 주운 것이라든가, 누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하던가요?" "물론. 니 힐리스트 같은 것도 매우 필요한 것일세." "그것이 필요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는 우 리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당신도 자신을 쓸모 없는 존재라고는 생각지 않으시잖습니까." "여러분, 여러분, 제발 개인적인 공격은 하지 마십시오"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소리치 면서 벌떡 일어섰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미소를 지으면서 아우의 어깨에 한 손을 얹으며 그 를 다시 앉혔다. "염려 말게"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이성을 잃거나 하지는 않아. 내겐, 말하자면 이 의 사... 이 의사 선생께서 그토록 저주하시는 바로 그 자기 존중의식이란 게 있으니까 말이야. 실례하네"하고 그는 바자로프 쪽으로 돌아앉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자네는 혹시 자기 학설 을 새로운 학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오산일세. 자네가 옹호하 는 그 실리주의는 벌써 몇 번이나 거듭 유행했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비난 속에서 소멸되 고 말았으니까..." "또 외국어를 쓰시는군요" 바자로프가 말을 가로챘다. 그는 화가 나기 시 작해서 얼굴이 구릿빛으로 거칠게 변했다. "첫쨰 우리는 아무것도 옹호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건 우리들의 양식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우리가 하고 있는 건 이런 것입니다. 저번에, 바로 며칠 전의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나라 관리들이 뇌물을 받고 있다는 것, 우리 나라에는 도로다운 도로도, 상업도, 정당한 재판도 없다는 이 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 알겠네. 자네들은, 이런 표현이 꼭 어울린다고 생각하네만, 고발 자들이로군 그래. 자네들이 고발하는 것의 대부분에는 나도 찬성하는 바이지만..." "그때 우린 아무리 우리 나라의 병폐에 대해서 떠들어댄다 해도 다만 떠들어대기만 한다 면 그것은 그저 속된 공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나라 안에서 그 토록 똑똑한 체하는 패들이, 이른바 선각자나 고발자라는 분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우 리들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술이라든가, 무의식적 창조라든 가, 의회 정치라든가, 변호사 제도라든가, 뭔지 뜻도 모르는 걸 우리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동안에도 우리는 나날의 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걱정해야 합니다. 또 말할 수 없이 지저분한 미신이 우리를 질식시키려 들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모든 주식회사가 오로지 정직한 인간의 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파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기를 쓰고 있는, 다름 아닌 농민의 자유 문제도 역시 우리에겐 아무런 이익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 면 우리 농부들은 술집에서 흠뻑 취하기 위해서 그들 스스로가 약탈하는 따위의 짓도 즐겨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을 가로챘다. "그래, 자네들은 그런 걸 잘 알면서도 자 신은 손톱만큼도 진지한 일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단 말이지?" "손톱만큼도 하지 않기로 결 심했습니다"하고 볼멘소리로 바자로프는 거듭 말했다. 어째서 자기가 이렇게 상류계급 인사 앞에서 자발적으로 이야기를 했던가 하고 그는 갑자기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럼 욕 설이나 하고 마는 건가?" "욕설이나 할뿐입니다." "그게 니힐리스트라는 건가?" "그게 니힐 리스트라는 겁니다"하고 바자로프는 되풀이했지만, 이번에는 한층 더 무뚝뚝한 태도였다. 파 벨 페트로비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 그렇군" 그는 이상스러우리 만큼 점잖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니힐리스트는 모 든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으면 안 돼. 자네들은 우리의 구세주이며 영웅인 셈이군. 그 런데도 어쨰서 자네들은 자신과 같은 고발자이기도 한 다른 사람들을 욕하는 건가? 자네들 도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떠들어대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다른 죄라면 몰라도 그 점에 관해서라면 우린 죄를 짓지 않고 있습니다."하고 바자로프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렇 다면 뭔가? 자네들은 실천하고 있는 건가? 실천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바자로프는 아 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가볍게 몸을 떨었으나 이내 다시 자제했다. "흠... 실행하고 파괴한다..."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무 까닭도 모르고서 왜 그와 같은 짓을 한단 말인가?" "우리가 파괴하는 건 우리가 바로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하고 아르카 디가 참견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조카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렇습니다. 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변명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하고 아르카디는 잘라 말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변변치 못한 자식"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호통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는 그 잘난 신념을 가지고 러시아에서 무얼 지지하겠다는 것인지 생각 좀 해보는 게 좋겠다. 아니, 이쯤 되면 천사라도 화를 낼 게다. 힘이라. 야만적인 칼믹 족(서몽고족의 총칭. 유목생활을 하며 라마교를 신봉함)이나 몽고인 일지라도 힘은 있다. 그 러나 그런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우리에게 귀중한 것은 문명이란 말이 다. 그렇지, 그렇고 말고. 선생, 우리에게 귀중한 것은 그 문명의 성과인 걸세. 그런 성과 같 은 건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하지 말게. 삼류작가, 즉 엉터리 작가, 또는 하루 저녁에 5코페 이카(러시아의 동화. 100분의 1루블)를 받는 떠돌이 피아니스트, 그런 패거리일지라도 자네 들보다는 가치가 있을 걸세. 어쨰서 그러냐 하면 그들은 문명의 대표자로서 천한 몽고인적 인 힘의 대표자가 아니기 때문일세. 자네들은 자신을 선각자라 자처하고 있지만, 차라리 칼 믹족의 천막 속에라도 들어가 있는 게 어울릴 걸세. 힘이라. 그러나 마지막으로 힘이 있는 자네들 생각들 좀 해보게. 자네들은 기껏해야 네 사람 반쯤 되겠지만, 반면에 나머지 패들은 수백 만이나 있어, 자네들에게 자기들의 신성한 신앙을 짓밟히기는커녕 자네들을 짓밟아버 릴 것일세." "짓밟히게 된다면 할 수 없지요"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그러나 두고봐야 알 일입니다. 우리는 당신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것처럼 그렇게 적은 숫자가 아니니까요." "뭐라고? 자네 들은 국민을 자네들의 뜻에 수비게 따르도록 해나갈 수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1코페이카의 초로 모스크바가 다 타버릴 수도 있으니 까요"하고 바자로프는 대답했다. "흠, 그래, 처음엔 사탄처럼 거만하게 굴더니 이젠 우롱하려고 덤벼드는군. 젊은 녀석들이 이런 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니, 코를 질질 흘리는 풋내기들의 마음이 이런 것들에 게 순종하고 있다니. 저걸, 저 꼬락서니를 좀 보게. (아르카디는 외면한 채 얼굴을 잔뜩 찌 푸렸다) 게다가 이 전염병은 벌써 멀리까지 퍼져버리고 말았어.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우 리 나라의 화가들은 로마에 가도 바티칸(로마 시에 있는 교황의 궁전. 미술적으로 세계 제1 의 궁전인데, 예배당 및 크고 작은 방이 1400개나 되며, 대부분은 도서관, 미술관, 문서관 등 으로 사용되고 있음)에는 그림자도 나타내지 않는다는 거야. 라파엘로(이탈리아 르네상스기 의 화가, 건축가. 교황의 청으로 바티칸궁의 벽화 등 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특히 초상 화 등에 우미, 전아한 수완을 발휘하여 미술사에 독자적인 자리를 차지함) 같은 건 거의 바 보 취급을 당하고 있고 말이야. 왜냐하면 그가 권위자라는 것 때문이라고 하더군. 그러면서 도 자기들은 너무나 무력하고 무능하여, 성과 같은 건 있을 턱이 없지. 자기들의 창작력이라 면 기껏해야 샘터의 처녀가 고작이면서도 노력하려 들지를 않지. 게다가 처녀를 그린 그 꼬 락서니란. 그래, 자네 생각대로라면 그들이 훌륭한 작자들이라는 게 아니오?" "제 생각으로 는"하고 바자로프가 대꾸했다. "라파엘로 따위는 반 코페이카의 가치도 없죠. 그러나 나머지 패들이 라파엘로보다 낫다고 할 순 없습니다." "브라보, 브라보. 잘 들어둬라, 아르카디... 요즘의 젊은이들이 말을 어떻게 둘러대는가를 말이다. 생각해보게. 어떻게 그들이 자네들 뒤를 따르지 않고 배겨낼 수 있겠는가. 예전의 젊은이들은 공부를 해야만 했지. 무식쟁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어. 그러기 때문에 싫더라도 공부를 해야만 했던 거야. 그런데 지금의 이 패거리들은 세상의 모든 것은 엉터리 다 하고만 말하면 모든 게 해결되니 말이야. 젊은이들은 그저 기쁠 수밖에. 옛날엔 그저 순 한 양들이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갑자기 니힐리스트로 되어버렸단 말이야." "그토록 침이 마르도록 추어올리던 자기존엄의식이라는 것을 이젠 단념하신 것 같군요"하 고 바자로프는 냉담하게 말했다. 그러는 동안 아르카디는 얼굴을 붉힌 채 눈을 번뜩이고 있 었다. "우리들의 논쟁이 너무 길어진 것 같습니다... 이제는 끝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러 나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당신에게 동의할 용의가 있습니다"하고 그는 일어나면서 덧붙였 다. "그것은, 현재 우리 나라의 생활, 다시 말해 가정적이거나 사회적인 생활 중에서 완전무 결하게 부정을 모면할 만한 제도를 단 한 가지라도 저에게 제시해 주실 경우입니다." "그런 제도라면 몇백만이라도 보여드릴 수 있지"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언성을 높여 말했다. "몇 백만이라도 말일세. 그렇지, 이를테면 농업조합만 보더라도." 싸늘한 미소가 바자로프의 입술을 스쳐갔다. "아니, 농업조합에 대해서는"하고 그는 말했 다. "당신 동생분과 이야기 해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동생 분께서는 지금 농업조합이라든 가, 연대보증이라든가, 금주라든가, 그와 유사한 여러 가지 것들이 대체 어떤 것인가를 실제 로 경험하고 계시는 중인 모양이니까요." "그렇다면 가족은 어떤가. 우리 나라의 농민들에게 도 가족이라는 게 존재하고 있으니까." 파벨 페트로비치는 언성을 높여 외쳤다. "이 문제도 역시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는 편이 당신 자신을 위해서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신도 아마 며느리와 관계하고 있는 시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셨겠지요? 파벨 페트로비치 씨, 한 이틀쯤 생각할 여유를 가져보시는 게 어떨까요. 당장에 무언가를 발견해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말씀예요. 우리 나라의 모든 사회층을 샅샅이 조사하여 그 하나하나르 ㄹ잘 생각 해주십시오. 그 동안에 저는 아르카디와 함께 잠깐 나갔다가 오겠습니다." "모든 걸 우롱하 겠다는 거로군"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개구리를 해부하려는 겁니 다. 자, 가세, 아르카디. 안녕히 계십시오." 두 친구는 밖으로 나갔다. 형제는 마주앉아 아무 말 없이 그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렇다니까" 이윽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을 꺼냈다. "저게 요즘의 젊은이 들이야. 저런 녀석들이 우리의 후계자란 말이야." "후계자라..."하고 낙담한 듯 한숨을 쉬면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되뇌었다. 그는 논쟁을 하고 있는 동안 줄곧 불안한 모습으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애처로운 눈빛으로 아르카디 를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언젠가 돌아가신 어머 니와 말다툼을 한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께선 역정을 내시며 제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 셨어요. 저는 마침내 어머니께 말씀드렸지요. 당신은 저를 이해 못하신다고요. 저와 당신은 각기 다른 세대에 속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예요. 어머님은 무섭게 화를 내셨지만 저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환약은 쓰지만 먹지 않으면 안 되지요. 그런데 이번엔 우리들 차 례가 되어서 우리의 후계자들이 당신들은 우리와 세대가 다릅니다. 그러니까 환약을 드셔야 합니다 하고우리들에게 말하는 거예요." "이봐, 넌 너무 온순하고 지나치게 소극적이야."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대꾸했다. "나는 반대로 이렇게 확신하고 있어. 너나 나나 좀 구식으로 말하기도 하고 또 저런 뻔뻔스런 자 긍심은 갖고 있지 않지만, 우리들이 그들보다 훨씬 옳다고 생각한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왜 저렇게 거만을 떠는건지. 붉은 것과 흰 것, 당신은 어느 포도주가 좋으냐고 한 녀석에게 물 어보면 나는 붉은 쪽을 선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고 나직이 대답하고 나서 마치 그 순간 우주 전체가 자기를 우러러보기라도 하는 양으로 거드름을 피우는 거야." "차를 들여가도 좋겠습니까?" 페니치카가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며 조용히 물었다. 그 녀는 응접실에서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동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찻주전자를 물리도록 일러줄 수 없겠나?"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대답하 고 그녀를 바라보며 일어섰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잘 쉬게"하고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자기 서재로 물러갔다. 11 반시간 뒤에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정원에 있는, 평소 자기가 좋아하던 정자로 나갔다. 그는 슬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비로소 그는 아들과 자신 사이의 거리감을 확실히 의식했다. 거리감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뚜렷하게 커져갈 것이라는 것을 그는 예감하고 있었다. 이젠 그가 겨우내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최신 서적들을 읽으며 지낸 일도 허사가 되고 말았다. 젊 은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열띤 토론에 자기 의견도 제법 한몫 낄 수가 있다고 기뻐한 그였는데 그것도 역시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형님은 우리가 옳다고 말했지 하고 그 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존심 같은 것은 제쳐놓고라도 나는 그들이 우리보다 진리로부터 멀 리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그 무엇인가를, 이쪽 에 대한 어떤 우월감 같은 것을 갖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젊기 때문일까? 아니, 단지 젊 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 우월감은 그들이 우리보다 지주 기질의 흔적이 적다는 점에서 나온 건 아닐까?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머리를 푹 숙이고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 렸다. 하지만 시를 부정한다는 건 하고 그는 또다시 생각했다. 예술이나 자연에 공감하지 못 한다는 건?... 그리고 그는 어떻게 자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를 이해하려 애쓰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태양은 정원에서 반 마장쯤 떨어진 곳에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사시나무 숲 뒤로 숨어 버리고 말았다. 그 숲의 그림자는 고요한 들 판을 가로질러 끝없이 뻗쳐 있었다. 한 농부가 그 숲 옆의 어둑어둑한 좁은 길을 따라 흰말 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어둠 속을 달리고 있는데도 그 농부의 모습이 모두 어때 언저리의 이음새까지도 뚜렷이 보였으며, 말의 발놀림도 아주 또렷하게 눈에 띄었다. 석양 빛은 숲속 으로 들어가, 그 무성한 숲을 헤치며 포플러 나무 줄기에 따뜻한 빛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 에 그 줄기는 마치 소나무 줄기처럼 보였다. 또한 그 우거진 잎들은 거의 검푸른 빛을 띠었 고 그 위로 저녁놀로 어슴푸레 붉어진 희부연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제비 몇 마리가 하늘 높이 떠서 날고 있었다. 바람은 아주 잔잔히 불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늑장을 부리고 있는 꿀벌들은 라일락 꽃 속에서 졸린 듯 천천히 윙윙거리고 있었다. 유일하게 혼자 삐쭉 뻗쳐 있는 한 가지 위에는 모기떼가 왱왱거리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감탄하다가 하 마터면 좋아하는 시 구절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그러나 그는 아르카디를, 그리고 물질과 힘을 생각해내곤 침울해졌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거기에 앉아 자기만의 슬픈 위로 속에 잠 겨 있었다. 그는 공상하기를 좋아했다. 시골에서의 생활은 그의 이런 성향을 발달시켰다. 그 가 여인숙에서 아들을 기다리면서 이와 같은 공상에 잠겨 있었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 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때는 명료치 못했던 부자간의 관계가 명백해 졌다. 그런데 그 결과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또 저승으로 가버린 아내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가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살아온 동반자로서의 아내도, 선량하고 근검 절약한 가정 주부로서의 아내도 아닌, 날씬한 몸매에 호기심 어린 청순한 눈을 가진, 소녀처럼 가느다란 목 위에 머리채를 단단히 감아 올린 젊은 처녀의 모습이었다. 그는 그녀와의 첫 만남을 생각해냈다. 그때 그는 아직 학생이었다. 그는 그 당시에 살고 있던 자기 집 계단 앞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만 실수로 그녀와 부딪친 그는 뒤돌아서 용서 를 빌려고 했으나 "미안합니다"라는 말만 겨우 중얼거렸을 뿐이다. 그녀는 머리를 숙인 채 잠시 미소를 짓고 나서 갑자기 놀란 토끼처럼 달아나 버렸다. 그러고는 계단 아래 모퉁이에 서 그를 흘긋 보곤 의미 있는 표정으로 낯을 붉혔다. 그 후로 처음 한동안은 수줍은 방문, 불완전한 말, 반웃음, 한숨, 근심, 충격, 그리고 마침내 그 숨찬 기쁨...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다 어디로 사라져버렸단 말인가? 그녀는 그의 아내가 되었고, 그는 세상에서 흔치 않은 행 복에 젖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처음의 그 달콤했던 순간, 그 순간은 어째서 영원히 죽음이 없는 생명으로 이어질 수 없는 것일까? 그는 자기 생각을 자기 자 신에게 분명히 하려고 애쓰지는 않았지만, 그 행복했던 시절을 추억보다 좀더 강한 무엇인 가로 잡아매 두고 싶었다. 다시 한번 마샤와 가까이서 있고 싶었고 그 따스함과 숨결을 느 끼고 싶었다. 그러자 그때 마치 그의 이런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그의 바로 곁에서 페니치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계세요?" 그는 몸을 떨었다. 가슴 아픈 생각도 부끄러운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페니치카와 비교할 수 있다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지만, 페니치카로 하여금 자기를 찾아 나서게 한 것이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불현듯 그에게 자신의 백발을, 자신의 늙음 을... 자신의 현실을 생각나게 하였다. 그가 오랫동안 잠겨 있던 마법의 세계는, 과거의 너울 거리는 희미한 안개 속에서 나타났던 그 세계는 살며시 흔들리는가 했더니 꺼져버리고 말았 다. "여기 있소" 그는 대답했다. "곧 갈 테니, 가 있어요." 이게 바로 지주 기질의 흔적이라 는 거야.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떠올랐다. 페니치카는 말없이 정자에 있는 그를 훔쳐보고는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그는 깜 짝 놀랐다. 공상에 잠겨 있는 동안 어느 새 캄캄한 밤이 되었던 것이다. 주위는 아주 어둡고 조용했으며, 매우 창백하고 조그만 페니치카의 얼굴이 그의 앞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그는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감상은 쉽게 가라앉 지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에 잠긴 듯이 자기 발밑을 골똘히 내려다보는가 하면, 이미 별 이 돋아나 반짝이고 있는 하늘로 눈을 들어올리기도 하면서 천천히 정원을 거닐기 시작했 다. 그는 거의 지칠 정도로 많이 거닐었으나 그의 마음 속에 있는 불안, 막연하고 우울한 어 떤 열망은 여전히 가라앉을 줄 몰랐다. 아아, 만일 그때 그의 마음 속에 일어난 변화를 바자로프가 알았더라면 그를 얼마나 비웃 을 것인가. 아르카디 역시 그를 비난할 것이다. 농장주에다 지주인 마흔 네 살의 사나이의 눈에 눈물이, 까닭 모를 눈물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이것은 첼로를 켜는 것보다도 백 배나 더 나쁜 일이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계속 거닐었다. 등불이 비치는 창문들이 그를 기꺼 이 지켜보고 있는 저 집안의 평화스럽고 아늑한 잠자리 속으로 들어갈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는 어둠과 정원, 얼굴을 스치는 신선한 공기의 감촉과 울적함, 그 가슴 설레임과 이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작은 길모퉁이에서 그는 파벨 페트로비치와 마주쳤다. "어떻게 된 거 냐?"하고 그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에게 물었다. "유령처럼 얼굴이 새파랗군. 기분이 나쁜 게로구나, 왜 쉬지 않지?"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에게 자기의 심리상태를 간단히 설명하 고 나서 발걸음을 옮겼다. 파벨 페트로비치도 정원의 끄트머리 쪽을 향해 거닐면서 그와 마 찬가지로 생각에 잠겨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운 검은 눈에는 별빛 외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그는 천성적으로 로맨티시스트가 아니었으므로, 열정 적인 마음과 프랑스식으로 말하는 인간 혐오의 정신이 있으면서도 공상 따위는 할 수가 없 었던 것이다. "들어보겠나?"하고 바로 그날 밤,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에게 이야기했다. "굉장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어. 오늘 자네 아버지는 자네의 저 귀하신 친척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고 하 셨지. 자네 아버지는 안 가신다고 했으니 우리 둘이서 XXX로 가보지 않겠나. 사실 그 권력 자는 자네를 부르고 있는 거야. 마침 날씨도 매우 좋아졌으니 함께 읍내 구경도 좀 하자고. 대엿새쯤 돌아다니면 충분할 거야." "그런데 자네는 거기서 이리로 다시 돌아올 생각인가?" "아니, 아버지한테 가봐야만 해. 자네도 알다시피 아버지는 XXX에서 30마장쯤 되는 곳에 계셔. 오랫동안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어. 늙으신 부모님을 위로해드리지 않으면 안 돼. 우리 부모님은 좋은 분들이야. 아버지는 더욱 그러시지. 재미있는 분들이셔. 나는 그분들 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고" "그래, 자네는 부모님 곁에 오래 있을 작정인가?" "그럴 생각은 없어. 이마도 지루할 테니 까." "그럼 돌아가는 길에 여길 다시 들러가겠는가?" "모르겠어... 생각해보지. 그런데 어떻게 하겠나? 가보지 않겠나?" "글쎄"하고 아르카디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속으로 이 친구의 제안을 무척 기뻐했으나 자기 기분을 숨기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가 니힐리스트가 된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이튿날 그는 바자로프와 함께 XXX로 떠났다. 마리노 마을의 젊은이들은 두 사람의 출발을 매우 섭섭히 여겼고, 두 냐샤는 눈물까지 흘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노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12 이들 두 친구가 찾아간 XXX시는, 어느 신진 현지사의 관할에 속해 있었다. 지사는 러시 아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진보주의자이면서도 또한 전제주의자였다. 그는 자기가 통치하기 시작한 지 한 해 동안에 손님 대접하길 좋아하는 귀족 단장(퇴역한 근위기병 2등 대위로, 사육 목장 주이기도 했다)뿐만 아니라 자기 부하 직원들과도 싸움이 잦았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분쟁은 마침내 페테르스부르크 본청에서도 모든 걸 현지에서 심사할 것을 위임 한 대리자를 파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를 만큼 널리 파급됐던 것이다. 당국에서 선출한 사람은 일찍이 키르사노프 형제의 후견이었던 저 콜랴진의 아들, 마트베이 일리이치 콜랴진이었다. 그도 또 신진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얼마 전에 겨우 만 40세가 되었을 뿐인 데 벌써 대정치가의 지위를 노리고 있었으며, 가슴 양쪽에는 별 모양의 훈장을 하나씩 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의 하나는 외국 것으로 별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조사를 받 은 현지사와 마찬가지로 진보주의자로 여기고 있었고, 벌써 중요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는 자신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의 허영심은 끝가는 줄 몰랐지만 태도만큼은 소박했고, 남의 의견에 자못 찬동하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너그럽게 귀를 기울이고, 제법 호인답게 껄껄 웃어댔으므로 처음 한동안 은 유쾌하고 좋은 사람이다 란 평판마저 들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중요한 때에 가서는 이야 기를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때면 곧잘 "에너지는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하고 말했던 것이다. 에너지는 정치가의 제일 가는 특질입니다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바보 취급을 당했으며 조금이라도 경험이 있는 관리라면 누구든 지 마음대로 그를 우롱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마트베이 일리이치는 대단한 존경심을 가지 고 기조(프랑스의 정치가, 역사가. 자유주의자로서 부르봉 왕조의 정치에 반대하였고, 1840 년에는 수상이 되었음. 저서 중에서는 영국혁명사, 프랑스 문명사 등이 유명하며 소위 역사 학파의 시초를 이루었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자기는 구습을 지키는 관리나 시대에 뒤떨 어진 관료주의자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자기는 사회생활의 중대한 현상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또는 한 사람 한사람에게 불어넣으려고 애썼던 것이다... 이에 관련된 말이면 그는 뭐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현대문학의 발달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늘 까보는 듯한 오 만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어른이 길에서 장난꾸러기 애들을 만나 잠깐 놀아주는 것 같은 그런 식이었다. 사 실은 마트베이 일리이치는 옛날에 페테르스부르크에 살고 있었던 스베치나(신비적 유파의 여류 작가)부인의 야회에 가기 위한 준비로, 아침 일찍 콩디약(프랑스의 철학자. 감각론의 대표자. 주요 저서로는 인간의 인식의 기원에 관한 시론, 감각론 등이 있음)의 책을 한 페이 지쯤 읽는 버릇이 있었던 알렉산더 시대의 정치가들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 도만은 그렇지가 않아 한층 현대적이었다. 그는 빈틈없는 관리요 매우 교활한 사람으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물의 이치를 분별하지도 못했고 지혜도 없었지만 오직 자기 의 재산상의 일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만은 재간이 있었다. 이 점에서는 아무도 그를 무시 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었던 것이다. 마트베이 일리이치는 교양이 있는 고관이 으레 그러하듯, 아주 선량한 태도로, 아니 그렇 다기보다는 차라리 지나치게 명랑한 태도로 아르카디를 응대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가 초 대한 친척 두 사람이 시골집에 그냥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자네 아 버지는 언제나 이상한 사람이었으니까"하고 그는 자기의 비로드로 만든 호사스런, 품이 넓 은 실내복의 술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제복의 단추를 단정하게 채워 입은, 마음씨가 좋아 보이는 젊은 부하 직원 쪽을 바라보더니 뭔가 마음에 걸리는 듯 한 얼굴 표정으로 "어떻게 된 거야"하고 언성을 높여 말했다.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입술이 맞붙어버린 듯한 젊은 사람이 일어서서 이상하 다는 듯이 자기의 상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부하를 어리둥절케 한 마트베이 일리이치는 더 이상 그쪽에는 눈도 주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고관들은 어쨌든 부하들을 어리둥절케 하 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빌려 쓴 수법은 가지각색이었다. 그 중 많이 사용된 것은, 즉 영국식으로 말해서 꽤나 좋아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수법이다. 즉 고관은 가장 간단한 말까지도 갑자기 시치미를 떼고 귀머거리가 된 체하는 것이다. 이를테 면 그는, 오늘은 무슨 요일인가? 하고 묻는다. 그러면 부하는 그에 대하여 공손한 태도로 대 답한다. "오늘은 금요일입니다, 가... 각... 하." "응? 뭐라고? 무슨 말인가? 자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하고 고관은 긴장된 표정으로 되풀이한다. "오늘은 금요일입니다, 가... 각... 하." "아니, 뭐? 금요일이라고? 어떤 금요일인가?" "금요일입니다, 가... 각... 하, 일주일 가운 데의 하루입니다." "아니 자네는 그런 것까지 가르치려 드는 건가?" 마트베이 일리이치도 자유주의자라는 평판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고관이었던 것이다. "나는 자네에게 현지사를 찾아 뵙고 오도록 권하고 싶은데 괜찮겠나?" 그는 아르카디에게 말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이걸 권하는 것은 권력자에게 굽실굽실하러 갈 필요가 있다 는 구식 관념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만 지사가 훌륭한 인물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자네도 또 이곳 사교계를 가까이 하고 싶겠지. 자네도 시골뜨기는 아니지 않은가? 지사는 모레 큰 무도회를 열기로 되어 있어" "아저씨께서도 그 무도회에 가십니까?"하고 아르카디가 물었 다. "지사는 나를 위해서 그 무도회를 열어주시는 거야"하고 마트베이 일리이치는 제법 동 정해 마지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자네 춤출 줄 아나?" "출 줄은 알지만 서투릅니다." "그거 안됐군. 그곳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으니까 말이야. 젊은 사람이 춤출 줄 모르면 수치야. 그 렇다고 해서 나는 구식 관념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야. 나는 인간의 지혜가 두 다리에 달려 있다는 따위의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바이런주의 (낭만파 시인 중 가장 저명한 영국 시인 바이런의 인생관을 말함)는 우스꽝스럽지. 그런 시대는 지나가 버렸어." "그러나 아저씨, 저는 조금도 바이런주의 같은 것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주 의 같은 건..." "나는 자네를 그곳 아가씨들에게 소개해주려고 하는 거야. 자네를 내 갈개 밑 에 넣어주지"하고 마트베이 일리이치는 말하고 자기 혼자 자못 만족스러운 듯이 껄껄댔다. "자네는 아주 따스해질 것이네." 하인이 들어와서 지방 세무 관리의 도착을 보고했다. 그 관 리는 주름살 투성이인 입술에 부드러운 눈을 가진, 매우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한 마리 한 마리의 작은 꿀벌들이 한 송이 한 송이의 작은 꽃에서 예쁜 꽃가 루를 따내고 있는 여름날이 가장 좋다는 것이었다. 아르카디는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자기들이 묵고 있는 음식점 겸 여관에서 바자로프를 만났다. 그에게 함께 현지사를 방문하자고 설득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할 수 없는 일이지" 이윽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엎질러진 물이니까. 어차피 지주들을 보러 온 거니까, 그들을 보러 가기로 하자." 현지사는 젊은이들을 상냥하게 맞이했지만,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앉지 않았다. 그는 노상 안절부절 못하며 바쁜 체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거북스러운 제복과 매우 어색한 넥타이를 매고, 차분히 앉아서 먹을 시간도, 마실 시간도 없이 모든 일 을 처리해나가고 있었다. 그는 고을 안에서 부르달루(프랑스의 설교가)라는 별명이 붙어 있 었는데, 그것은 그 유명한 프랑스의 설교가를 가리켜서 말하는 게 아니라 부르다(값싼 술)라 는 술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키르사노프와 바자로프를 자기가 여는 무도회에 이미 초 대해놓고서 단 2분도 못 되어 다시 두 사람을 초대한다고 되뇌었으며, 그때는 이미 두 사람 을 형제로 여겨 카이자로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들이 현지사의 집에서 나와 자기들 숙소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들 곁을 지나치던 한 사 륜마차에서 갑자기 슬라브식의 상의를 입은, 키가 그다지 크지 않은 한 남자가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하고 외치며 바자로프에게로 달려왔다. "아, 자네로군, 시 트니코프"하고 인도를 걸으면서 바자로프는 말했다. "여기엔 웬일인가?" "이거 정말로 우연입니다"하고 상대는 대답하고 나서 마차 쪽을 돌아보고 다섯 번쯤 손을 흔들며 이렇게 소리쳤다. "내 뒤를 천천히 따라와야 해요, 따라오라고. 아버지가 여기서 일 을 하고 계십니다"하고 도랑을 건너뛰면서 그는 계속했다. "그래서 나를 이리로 오라는 분 부가 있었어요. 나는 오늘 당신이 여기 왔다는 걸 알고 벌써 당신 숙소에 다녀왔어요. (실제 로 두 친구가 숙소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거기서 한쪽에는 프랑스어 다른 한쪽에는 슬라브 식으로 조합시킨 글자로 시트니코르라는 이름이 인쇄되어 있는, 양 귀퉁이가 접힌 명함 한 장을 발견했다.) 당신은 설마 현지사를 방문하고 오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가 아닐세. 우 리는 방금 그분한테서 돌아오는 길인걸." "아아, 그렇다면 나도 그분한테 가겠어요. 예브게 니 바실리예비치, 나를 당신의 ... 이분에게 소개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쪽은 시트니코 프이고 이쪽은 키르사노프야"하고 바자로프는 계속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대단히 영광입니다" 옆으로 다가와서 웃음을 띄고, 그 너무나도 고상한 장갑을 서둘러 벗으면서 시트니코프는 말을 꺼냈다. "성함은 많이 듣고 있었습니다. 나는 예브게니 바실리 예비치를 옛날부터 알고 있었으며, 말하자면 그의 제잡니다. 이분 덕택으로 나는 다른 사람 이 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아르카디는 바자로프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작지만 상냥한 인상 을 주는 매끈한 얼굴에 불안하고 좀 둔한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마치 안 으로 쑤셔 넣은 듯한 두 눈은 가만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는 가 끔씩 어색하게 웃는 것이었다. "정말입니다"하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처음으로 내 앞에서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가 권 위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몹시 감격했습니다. 마치 갑자기 눈이 뜨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는 이제야 인간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브게니 바시릴예 비치, 이곳에 있는 어떤 부인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만나보셔야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부인은 당신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부인에게도 당신이 찾아주시는 게 정 말 즐거운 한때가 될 것이고요. 부인에 대한 소문은 들었을 줄 아는데요?" "도대체 누굴 말하는 건가?"하고 바자로프는 성가시다는 듯 말하였다. "쿠크신 부인입니 다. 그야말로 훌륭한 천성을 가진 분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방된 여자입니다. 부인은 선각자이시지요. 어떻습니까? 이제부터 다들 부인한테로 갑시다. 부인은 바로 이 근처에 살 고 있습니다. 거기서 아침을 들도록 합시다. 아직 아침을 드시지 않았지요?" "응, 아직." "그 럼, 마침 잘됐어요. 부인은 말예요, 남편과 헤어져 있으니까 아무도 꺼려할 사람이 없어요." "미인인가?"하고 바자로프가 말을 가로챘다. "아...닙니다. 그렇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그 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를 부인한테 데려가려고 하는 건가?" "무슨 농담을 그렇게...부 인은 우리에게 샴페인을 낼 겁니다." "허허 그런가. 자넨 정말 처세에 밝군. 그런데 자네 아 버지는 아직도 일수판매를 맡아 하시고 계신가?" "예, 그래요" 하고 시트니코르는 성급하게 말하며 껄걸 웃어댔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좋겠지요?" "어떻게 할까?" "자네는 온갖 사람을 다 복 싶어하시지 않는가, 가보세"하고 아르카디가 나직이 말했다. "함께 가시죠, 키르사노프 씨? 당신이 빠지면 곤란한데요." "하지만 이렇게 여럿이 몰려가도 괜찮겠는가?" "괜찮아요. 쿠크신은 좋은 부인인 걸요." "샴페인이 한 병은 나온 댔지?"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 "세 병입니다"하고 시트니코프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건 내가 보증하죠." "무얼 걸겠나?" "내 목이라도 걸지요." "자네 아버지의 지갑을 거는 게 좋겠군... 어쨌든 가보세." 13 아브도치야(또는 예브도크시아) 쿠크신이 거주하고 있는 모스크바 귀족풍의 그다지 크지 않은 집은 XXX시의 최근 화재가 났던 어느 거리에 있었다. (우리 나라 현청 소재지의 도시 가 5년마다 불탄다는 건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현관 입구에는 쭈그러진 명함이 꽂혀 있고 그 위쪽에 초인종 줄이 걸려 있었다. 현관문을 열러주러 나온, 실내모를 쓴 여자는 하 녀도 아니고 말벗도 아닌 것 같아 보였는데, 이런 점에서 여주인의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뚜 렷이 엿볼 수 있었다. 시트니코프는 아브도치야 니키치시나가 집에 계시냐고 물어보았다. "당신이군, 빅토르?"하고 옆방에서 가늘고 깐깐한음성이 들려왔다."들어와요." 실내모를 쓴 여자는 이내 들어가 버렸다. "저 혼자가 아닙니다"하고 시트니코프는 나직이 말하면서 상의 를 재빨리 벗었다. 그러자 잠옷 같기도 하고 짧은 웃저고리 같기도 한 것이 나타났다. 그는 아르카디와바자로프에게 기민한 시선을 던졌다. "상관없어요, 들어와요." 젊은이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간 방은 응접실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작업실 같았다. 종이와 편지들, 그리고 대부분은 펴보지도 않은 몇 권의 두꺼 운 잡지들이 먼지투성이인 책상 위에 뒹굴고 있었다. 그 언저리에는 내던져진 궐련 꽁초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가죽 소파에는 젊은 금발 여인이 반쯤 누워 있었다. 약간 헝클어진 머리에, 그다지 깨끗지 않은 비단옷을 입고, 짧은 두 팔에 커다란 팔찌를 끼고, 머리에는 레 이스가 달린 머릿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누런 담비 모피로 장식한 짧은 비로드 외투를 자기 어꺠에 아무렇게나 걸치면서 졸린 듯한 나직한 목소리로 "안녕하 세요, 빅토르"하고 인사하며 시트니코프의 손을 잡았다. "이쪽은 바자로프이고 이쪽은 키르 사노프입니다"하고 시트니코프는 바자로프를 흉내내어 짤막하게 소개했다. "어서들 오세요"하고 쿠크신은 대답하고, 그 둥근 눈으로 바자로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둥근 눈 사이로는 작은 들창코가 고독한 듯이 붙어 있었다. "당신을 알고 있어요"하 고 말하며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다. 바자로프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 개방된 부인의 자그마 하고 평범한 얼굴에는 분명 못생긴 곳이라곤 아무 데도 없었지만, 그 얼굴 표정은 왠지 보 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무의식중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시장하신가요? 그렇잖으면 심심하신가요? 그렇잖으면 소심하신가요? 왜 그렇게 불안해하시나요? 하고 물 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도 시트니포크처럼 노상 걱정스러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막역한 사이처럼 말을 하거나 행동하는가 하면, 동시에 또 서먹서먹하게 굴기 도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마 자기 자신을 선량하고 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실제로 그녀가 하는 행동은 애초에 그녀가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의 반대되는 행 동이었다. 그녀가 하는 말은 어린아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고의적이었다. 즉 자연스럽지가 못 했다. "그래그래, 나는 당신을 알고 있어요, 바자로프 씨"하고 그녀는 거듭 말했다. (지방이나 모 스크바의 부인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그녀에게도 처음부터 상대방 남성을 이렇게 성으로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 "담배 피우시겠어요?" "담배도 담배지만"하고 시트니코프가 말으 받 았는데, 그는 안락의자에 축 늘어져 기대어 한 발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우리들에게 아침을 좀 주지 않겠습니까. 지독하게 배가 고파서요. 그리고 샴페인도 한 병 곁들이도록 말 좀 해 주세요." "요 곰팡이"하고 소리치고 나서는 예브도크시아는 소리내어 웃었다.(그녀가 웃자 윗잇몸이 완전히 드러나 보였다) "안그래요, 바자로프 씨, 이 분은 곰팡이지요?" "저는 안락 한 생활을 좋아하는 것뿐입니다"하고 시트니코프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 서 제가 자유주의자라는 데에 지장은 없을 겁니다." "아녜요, 지장이 있어요. 지장이 있고 말고요."하고 예브도크시아는 큰 소리로 말하면서 하인에게 아침 식사와 샴페인을 준비하도록 일렀다. "이 점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 요?"하고 바자로프를 돌아보면서 그녀는 덧붙였다. "물론 내 의견에 동의해주시겠지요?" "아닙니다"하고 바자로프가 대꾸했다. "고기 한 점은 빵 한 쪽보다도 나은 겁니다. 화학적 견지에서 보더라도 말입니다." "당신은 화학에 흥미를 가지고 계시나요? 그건 내가 매우 좋 아하는 거예요. 나는 내 스스로 새로운 접합제를 발명해내기까지 했는걸요." "접합제를? 당 신이?" "그래요, 내가 말예요. 무엇 때문일까 생각하시겠죠? 인형의 머리를 만드는 데 그것이 깨 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예요. 난 정말 실용적인 사람이에요. 하지만 아직 다 완성된 건 아니 에요. 또 리비히를 읽지 않으면 안돼요. 그런데 모스크바 통보(지주, 승려 층의 신문)의 부인 노동에 대한 키슬랴코프의 논문을 읽어보셨나요? 제발 읽어보시도록 하세요. 당신도 부인 문제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계시지요? 또 학교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요? 당신 친 구는 무슨 일을 하시는 분예요? 성함은요?" 쿠크신 부인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참을성 없 이 연방 자기 질문만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지나치게 귀염을 받은 어린애가 자 기 유모에게 하는 식이었다. "저는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 키르사노프라 합니다"하고 아르카디가 말했다. "전 아무 일 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브도크시아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멋지군요. 어때 요, 피우시지 않겠어요? 그런데 빅토르, 난 당신 때문에 화가 났다는 걸 알고나 계세요?" "어째서요?" "당신이, 내가 들은 바로는, 조르주 상드(프랑스의 여류작가, 남성적인 필명으로 처녀작 앵디아나를 발표한 이래 마의 늪 등 100편 이상의 소설을 냈음. 뮈세, 쇼팽 등과의 연애는 유명함)를 칭찬하기 시작했다더군요. 그 여자는 시대에 뒤떨어진 여자로, 그 이상 아 무것도 아녜요. 그 여자와 에머슨(미국의 사상가. 시인. 소위 초절주의 운동에 참가하여 청 교도주의 및 독일 이상주의의 정신을 고취했음. 저서로는 논문집, 대표적 인물론, 자연론 등 이 있음)을 비교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 여자는 교육에 대해서도, 생리학에 대 해서도, 어느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 여자는 태생학에 대해서 는 들은 적도 없을 것 같은데, 요즈음 세상에 도대체 그걸 모르고도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 세요? (예브도크시아는 두 손을 펼쳐 보이기까지 했다.) 아아, 이 문제에 대해서 옐리세비치 가 얼마나 멋진 논문을 썼는지. 천재적인 분이에요. (예브도크시아는 언제나 사람 이라고 하 는 대신에 분 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바자로프 씨, 내 옆 소파에 앉아주세요. 아마 모르실 테지만 나는 당신을 무척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건 왜죠? 들어보고 싶군요" "당신은 위험한 분이에요. 지독한 비평가인 걸요. 아아, 무 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내 자신도 우스꽝스러워요. 난 마치 어느 장원의 조용한 여자 영주 처럼 말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난 정말 시골 영주예요. 내가 직접 영지를 관리하고 있고, 게 다가 말씀예요, 토지 관리인인 예로페이가 나를 돌보아주고 있어요. 마치 쿠퍼(미국의 작가. 평론가. 사슴 사냥꾼, 모히칸족의 최후, 길을 여는 사람, 개척자, 대평원 등의 5부작으로 명 성을 떨침)의 소설에 나오는 개척자 같은 멋진 표본이에요. 어딘가 마음내키는 대로 행하는 데가 있어요. 나는 완전히 이곳에 뿌리를 박아버리고 말았어요. 살기 힘든 곳이에요, 그렇잖 아요? 하지만 할 수 없어요." "도시는 다 마찬가집니다"하고 바자로프가 냉담하게 대꾸했다. "이해관계란 모두 하찮은 것뿐이어서 그게 무서운 거예요. 전에 나는 겨울이 되면 모스크바에서 지내곤 했었어요. 하 지만 지금은 제 남편이, 쿠크신 씨가 살고 있어요. 게다가 모스크바도 지금은 ... 잘은 모르 지만 아마 전혀 딴판이 되어 있을 거예요. 난 외국으로 갈 예정이에요. 작년에는 어쩌면 갈 뻔도 했었지요." "물론 파리시겠군요?"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 "파리와 하이델베르크에 말 예요." "하이델베르크엔 어째서?" "그건요, 거기에는 분젠(독일의 화학자. 스펙트럼 분석 연 구에 의해 루비듐, 세슘을 발견하고 그 밖의 분젠 등, 분젠 전지 등을 발명하였음)이 있거든 요." 이에 대해서 바자로프는 아무런 대답도 하려 들지 않았다. "피에르 사포지니코프는 말예요... 당신은 그분을 아시나요?" "아니, 모릅니다." "피에르 사 포지니코프를 모르다니요. 그분은 아직 리디아 호스타토바네 집을 드나든다는군요." "나는 그 여자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분이 갑자기 내게 동행해주겠다고 말하는 거예요. 다행히도 나는 자유로운 몸이며 애들도 없어요. 다행히 라고?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예브도크시아는 담배로 노랗게 물든 손가락으로 담배를 한 대 말아서, 그 이음매를 혀로 핥아 붙여 빨아보고는 불을 붙였다. 하녀가 쟁반을 들고 들 어왔다. "자, 아침상이 들어왔어요. 수프를 들기 전에 요리부터 먼저 드실까요? 빅토르, 병마개를 따주세요. 그건 당신이 전문이시죠." "전문이고 말고요, 전문이지요"하고 시트니코프는 중얼 거리고 나서 또다시 껄걸 웃었다. "이곳에도 예쁜 여자들이 있습니까?"하고 석 잔 째의 글 라스를 홀짝 마시면서 바자로프가 물었다. "있고 말고요"하고 예브도크시아가 대답했다. "하 지만 정말 머리가 텅 빈 여자들뿐이에요. 이를테면 내 친구 오딘초바 같은 사람은 나쁘지 않아요. 유감스러운 건 그분 평판이 어쩐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하더라도 독립적인 견 해 같은 것도 없고, 이해의 폭도 넓지 못하며 어쨌든 그런 비슷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 예요. 교육제도를 완전히 고쳐야만 돼요. 난 이것에 대해 일찍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우리 나라 여자들은 교육을 잘못 받은 거예요." "그런 무리들은 손을 쓸 수가 없지요"하고 시트니코프가 말을 받았다."그런 무리들은 경 멸해야 합니다. 저도 경멸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철저히 말입니다. (남을 경멸하고 그 경멸 을 말로써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시트니코프에게 있어 가장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는 특히 부인들을 공격했는데, 수개월 뒤에 두르돌레오소프 공작 집안 태생의 영양이라는 이유만으 로 자기 아내 앞에서 엎드려 빌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다.) 그들 중의 어느 한 사람도 우리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도 우리와 같은 진실한 남성 들의 화제에 오르기에 족한 여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대화를 이해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고 있지 않을 겁니다"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당신은 누굴 말씀하시는 거예요?"하고 예브도크시아가 참견했다. "예쁜 여자들 말입니다." "뭐라고요? 그렇다면 당신은 프루동(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가, 무정부주의자, 유명한 재 산이란 무엇인가에서 소유권은 도둑질이라 하고, 일체의 사유재산을 배격, 정치적 권위를 부 인하고, 자유로운 개인의 계약에 의한 사회조직의 실현을 역설하며 연합주의를 제창함, 또한 남녀평등을 반대함)의 의견에 찬성하시는 거로군요?" 바자로프는 거만스레 버티고 앉아 있 었다. "나는 어떤 의견에도 찬성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 다." "권위를 타도하라."하고 시트니코프는 자신이 비굴할 정도로 숭배하고 있는 사람 앞에 서마음대로 격한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소리쳤다. "그렇지만 마콜리(영국의 역사가, 작가, 정치가. 저서로는 영국사 수상록 등이 있음)라는 분은..."하고 쿠크신은 말을 꺼내려 했다. "마콜리를 타도하라"하고 시트니코프가 또 떠들어 댔다. "당신은 어리석은 여자들을 편드시는 겁니까?" "어리석은 여자들이 아니라 여성의 권 리를 편드는 거예요. 나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그걸 지키려고 마음 먹었어요." "타도하 라" 그러나 여기서 시트니코프는 그 말을 하다 말고 "그야 물론 저도 그 권리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하고 말했다. "아니에요. 내가 보기엔 당신은 슬라브주의자(슬라브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으로서, 슬라브주의란 19세기 중엽의 러시아의 지식계급의 일파가 주장하던 주의, 사상 을 말함. 내셔널리즘의 풍조와 독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유럽 문명의 결함을 지적하고, 그리 스 정교에 의거한 러시아의 장점을 주장하였고, 서구주의자와 대립하여 러시아 전래의 공동 체에 따른 독자적인 발견의 길을 강조하고, 한편으로는 농노제를 지지하였음)예요." "아닙니다. 전 슬라브주의자가 아닙니다. 그야 물론..." "아니에요, 아니에요. 당신은 슬라브 주의자예요. 당신은 가정훈(16세기의 러시아 승려 시리베스 스르가 지음)의 추종자예요. 당 신은 손에 회초리라도 쥐는 게 좋겠어요." "회초리는 좋은 겁니다"하고 바자로프가 참견했 다. "그런데 우리는 마지막 한 방울에 이르렀습니다." "무엇에요?"하고 예브도크시아가 말을 받았다. "샴페인에 말입니다. 최고로 존경하는 아브도치야 니키치시나, 당신의 피가 아니라 샴페인에 말입니다." "여자들이 공격당하고 있을 때 나는 잠자코 들을 수만은 없어요"하고 예브도크시아는 계속했다. "그건 몸서리쳐지는 일이에요, 소름이 끼쳐요. 여자를 공격하는 것보다는 사랑에 대해서라는 미슐레(프랑스의 역사가. 민중을 주역으로 한 이상주의적 역사 의 서술가. 주요 저서로는 프랑스사. 프랑스 혁명사 등이 있음)의 책을 읽는 편이 나아요, 그건 굉장한 거예요. 어때요, 연애 이야기라도 하지 않겠어요?"하고 소파의 구김살투성이인 쿠션에 괴로운 듯이 한 손을 떨어뜨리며 예브도크시아가 이렇게 덧붙였다.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아니 어째서 연애 이야기 같은 걸 하자는 겁니까?"하고 바자로프 는 말했다. "아까 당신은 오딘초바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아마 그런 이름이었죠? 그 부인 은 어떤 분입니까?" "매력적이에요. 정말 매력적인 분이에요"하고 시트니코프가 열을 내며 말했다. "제가 소개해드리겠어요. 현명한 여자로 돈 많은 과부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분은 아직 충분히 깨지 못한 데가 있습니다. 그분이라면 우리 예브도크시아와 더욱 가까 이할 필요가 있죠. 예브도크시아, 당신의 건강을 위하여 잔을 듭시다. 쟁강, 쟁강, 쟁그렁. 쟁 강, 쟁그렁, 쟁그렁" "빅토르, 당신은 장난꾸러기로군요." 아침 식사는 오래 계속되었다. 샴페인은 처음 한 병에 이어서 또 한 병, 그리고 세 병째, 네 병째까지 나왔다. 예브도크시아는 쉴새없이 지껄여댔다. 시트니코프는 그녀에게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들은 결혼이란 대체 무엇인가. 편견인가, 그렇잖으면 죄악인가? 사람이 태어 날 때에는 어떠할까. 평등할까, 그렇지 않을까? 또 본래 개성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등에 관 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브도크시아는 들이켠 포도주로 얼굴이 빨 갛게 되어 음정도 맞지 않는 피아노 건반을 납작한 손톱으로 두드리면서 쉰 목청으로 처음 엔 집시의 노래를, 다음에는 세이므로 시프의 발라드 그라나다는 꿈꾸며 졸고 있네를 부르 기 시작했다. 또 시트니코르는 머리에 머플러를 두르고 "그대 입술과 내 입술은... 뜨거운 키 스로 맺어지도다..."라는 가사에 맞추어 기절초풍할 만큼의 연인 역할을 연출했다. 아르카디 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여러분, 이거 점점 정신병원을 닮아가는군요."하고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바자로프는 오로지 샴페인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가끔은 좌중의 대화에 비꼬는 듯한 몇 마디를 던지곤 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는 큰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켜고 일 어서더니 여주인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아르카디와 함께 밖으로 나가버렸다. 시 트니코프도 역시 두 사람 뒤를 따라 뛰어나갔다. "그래, 저 여자 어때요?"하고 그는 그들에 게 들러붙어 따라오면서 물었다. "제가 말한 대로 정말 대단한 인물이지요? 그런 여자가 좀 더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그분은 어느 의미에선 고상한 도덕적 현상입니다." "그 렇다면 당신 아버지의 사업체도 역시 도덕적 현상인가?"하고 마침 그때 지나치고 있던 선술 집을 가리키면서 바자로프가 말했다. 시트니코프는 또다시 새된 소리로 웃었다. 그는 자기 출신을 몹시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바자로프한테서 당신이라는 칭호를 듣 고 그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렇잖으면 성을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14 며칠 뒤 현지사 댁에서 무도회가 열렸다. 마트베이 일리이치는 사실상 이 축제의 주인공 이었다. 현의 귀족 단장은 "본인은 사실 이분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참석한 것입니다" 하고 축제에 참석한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지사는 무도회 석상에서도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앉아서 지시만 내리고 있었다. 마트베이 일리이치의 부드 러운 태도는 다만 그 위엄에 의해서만 가까스로 그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사 람들을 상냥하게 대했지만, 이따금씩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소 싫은 표정을 어떤 사람들에게 는 존경의 빛을 보였다. 즉 부인들 앞에서는 진짜 프랑스 기사처럼 겉치레 인사말을 늘어놓 았으며, 고관들이 언제나 그러하듯이 굵직하고 잘 울리는 목청으로 쉴새없이 웃어대고 있었 다. 그는 아르카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큰 소리로 조카라 불렀다. 낡은 연미복을 입은 바자로프에겐 마음에도 없는 너그러운 시선으로 흘긋 바라보며, 애매하기는 하지만 꽤 상냥 스럽게 우물쭈물 말을 걸어주었다. 그러나 다만 "나는..."이라든가 "매우"라든가 하는 말만 알아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또 시트니코프에게는 손가락 하나를 펴 보이면서 빙긋 웃는가 싶으면 어느 새 머리를 돌려 외면해버리곤 했다. 무도복 같은 건 입지도 않고 때묻은 장갑 을 끼고 극락조처럼 머리를 꾸미고 무도회에 나타난 쿠크신에게까지 그는 "반갑습니다"하고 말했다.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춤추는 남자 상대도 모자라지 않았다. 문관들은 대개가 벽 가까이에 서 웅성거리고 있었지만, 군인들은 열심히 춤추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파리에 6주일쯤 체재 하여 거기서 "알았다니까", "아아, 이건 정말", "이봐, 이봐, 잠깐만" 따위의 여러 가지 위세 있는 감탄사를 배워온 어떤 한 사람이 더욱더 그러했다. 그는 그런 말들을 파리의 토박이 같은 투로 정확히 발음했지만, 때로는 "만일 내가 가졌더라면"을, 그리고 "절대로" 대신에 "반드시"를 쓰기도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저 대러시아적 프랑스어로 말한 것이다. 즉 우리 동포들한테서 "천사처럼 프랑스어를 잘 하시는군요"라는 말을 듣기 위해선 필요하지만, 프 랑스인들은 그런 말들을 아주 우스꽝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아르카디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춤 솜씨가 서툴렀고 바자로프는 전혀 추지 않았다. 그들 두 사람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윽고 그들에게 시트니코프가 끼 여들었다. 그는 얼굴에 경멸의 조소를 띄고 밉살스럽다는 듯한 눈초리로 거리낌없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지만, 제법 그것에 재미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그의 얼굴빛이 변했다. 아르카디 쪽을 돌아보더니 다소 당황한 목소리로 "오딘초바 부인이 왔어요"하고 말 했다. 아르카디는 두리번거리다가 문 가까이에 서 있는, 검은 색 옷을 입은 키가 큰 한 부인 을 발견했다. 그녀의 당당한 인품은 아르카디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녀의 드러난 두 팔은 균형 잡힌 몸에 아름답게 늘어져 있고, 반들거리는 머리에는 가느다란 푸크시아꽃 가지가 꽂혀 있는데, 둥근 어깨 위로 자칫하면 떨어질 듯이 아름답게 걸려 있었다. 밝게 빛나는 두 눈은 도톰하게 튀어나온 하얀 이마 밑에서 조용히 총명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고 입술에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상냥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엄숙 한 맛이 감돌고 있었다. "당신은 저분과 잘 아십니까?"하고 아르카디는 시트니코프에게 물었다. "아주 잘 알지요. 원하신다면 소개해드릴까요?" "부탁합니다. 저 4인조 무용이 끝나거든." 바자로프도 또한 오 딘초바 부인을 관심 있게 바라보았다. "놀라운 모습인데"하고 그는 말했다. "다른 여자들과 는 전혀 딴판이군." 4인조 무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시트니코프는 아르카디를 오딘초바 부인에게 데리고 갔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그녀와 친밀한 사이는 아닌 듯하였다. 그녀가 놀 란 듯 그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도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을 더듬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르카디의 성을 들었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반가운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니콜라 이 페트로비치의 아드님이 아니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 아버님을 두 번 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한 소식은 가끔 듣지요"하고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당신을 알게 되어 매우 기뻐요." 그때 어떤 부관이 그 녀에게로 뛰어와서 4인조 무용을 청했다. 그녀는 승낙했다. "정말로 춤을 추시려는 겁니까?" 하고 아르카디가 공손히 물었다. "그래요. 그런데 어째서 내가 춤을 추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거지요? 내가 너무 늙어 보이나요?" "천만에요. 왜 그런 생각을... 그러나 그러시다면 당신에 게 마주르카를 청해도 괜찮겠습니까?" 오딘초바 부인은 너그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 아요"하고 말하면서 그녀는 아르카디를 바라보았는데, 그것은 아랫사람을 무시하는 표정이 아니라 시집간 누이가 아직 어린 동생을 바라보는 그런 표정이었다. 오딘초바 부인은 아르카디보다 약간 연상으로 29세였는데도, 그는 그녀 앞에서 자신이 국 민학생이나 어린 제자인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두 사람 사이의 연령차는 실제보다 훨씬 뚜 렷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마트베이 일리이치는 위엄이 있는 표정을 하고 비위를 맞추는 듯 한 언사를 쓰면서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아르카디는 옆으로 비켜서기는 했지만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는 없었다. 그는 4인조 무용을 추면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상대에게도 고관에게 그런 것처럼 막역한 태도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머리나 눈을 가볍게 움직이며 두 번쯤 조용히 웃었다. 그녀의 코는 대개의 러시아인과 마찬 가지로 약간 두꺼웠으며, 피부 색깔도 완전히 투명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그런데도 아르 카디는 이제껏 이렇게 매력 있는 부인을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의 음성은 그의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옷주름까지도 다른 여자와는 달리 한층 맵시가 있고 여 유가 있는 듯이 생각되었으며, 그 몸짓도 놀랄 만큼 경쾌하고 자연스러웠다. 마주르카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아르카디는 자기의 춤 상대인 그 부인 옆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는데, 왠지 서먹서먹한 느낌이 들어 이야기를 걸려고 애썼으나 그저 잠깐 머리 에 손을 대거나 했을 뿐 단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를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지루하게 서먹서먹해하거나 가슴만 졸이고 있지만은 않았다. 오딘초바 부인의 침착성이 그한테도 전 파된 것이다. 15분도 채 못 가서 벌써 그는 자기 아버지나 큰아버지에 대해서, 페테르스부르 크나 시골생활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오딘초바 부인은 부채를 약간 폈다 오므렸다 하면서 그때그때 고개를 얌전히 끄덕이며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남자들이 그녀에게 춤을 청하러 올 때마다 그의 이야기는 중단되었다. 그때 시트니코프도 두 번인가 그녀에게 춤을 청했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아 부채를 손에 들었지만 그녀의 가슴은 전혀 숨차 보이지 않았다. 아르카디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그녀 옆에 가까이 앉아서 그 눈을, 다시없이 아름다운 그 이마를, 사랑스러운 가운데에도 위엄이 있는 총명한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한다는 행복감에 흠뻑 젖어들었다. 그녀 자신은 그다지 이야기를 많이 하 지 않았지만. 가끔 하는 그 말 속에는 경험적 지식이 엿보였다. 아르카디는 그녀의 몇 가지 의견에 의하여 이 젊은 부인은 이미 여러 가지 감정으 ㄹ체험하고 깊은 명상을 해왔다고 결 론을 내렸다. "당신과 함께 서 있던 분은 누구지요?"하고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시트니코 르가 당신을 내 옆으로 데려왔을 때 말예요." "그럼 그 사람을 보셨군요?"하고 이번에는 아 르카디가 물었다. "정말 잘 생겼지요? 그는 바자로프라 하는 제 친굽니다." 아르카디는 자기 친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친구에 대하여 너무 자세하게 열광적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오딘초바 부인이 그가 있는 쪽을 돌아보며 찬찬히 뜯어보았 을 정도였다. 그러는 동안 마주르카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아르카디는 이 부인과 헤어지 는 것이 섭섭했다. 그는 약 한 시간쯤 그녀와 즐겁게 보낸 것이다. 사실 그는 그 동안에 그 녀가 얼마나 자기에게 너그러운 태도를 취해주고 있었던가, 자신은 얼마나 그녀에게 감사하 지 않으면 안 될 것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러나 대개의 젊은이들의 마음은 그러한 감 정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마련이다. 음악은 그쳤다. "고마워요"하고 오딘초바 부인은 일어서면서 말했다. "당신은 나를 찾아주 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친구도 함께 데리고 와주세요. 난 아무것도 믿지 않을 용기를 지닌 분 을 꼭 만나보고 싶군요." 현지사가 오딘초바 부인에게로 걸어와서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 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곳을 떠나면서 그녀는 뒤를 돌아보고는 아 르카디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방긋 웃어 보였다. 그는 나직이 인사를 하고 그녀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검정에 잿빛을 띤 비단옷에 싸인 그녀의 몸매는 얼마나 날씬해 보였던가) 이 순간에 벌써 그분은 나의 존재 같은 건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고 생각하곤 이때 가슴 속에 뭔가 우아한 겸손함 같은 것을 느꼈다. "어떻던가?"하고 아르카디가 한쪽 구석의 자기 자리로 돌아오자 바자로프가 그에게 물었 다. "충분히 즐겼는가? 아까 어느 지주가 그 여자를 보고 저런, 저런 하고 말했는데, 그래, 자네 보기엔 그분은 어떻던가? 그 말대로 저런, 저런, 저런 이던가?" "자네가 무슨 말을 하 는 건지 난 전혀 이해할 수가 없군 그래"하고 아르카디가 대답했다. "오, 저런 저렇게 순진 하다니까?" "그렇다면 난 그 지주를 이해할 수가 없어. 오딘초바 부인은 무척 매력적이야. 그렇지만 그분은 냉정하고 엄한 태도를 위하고 있어서..." "잔잔한 연못일수록... 이라는 말을 자네는 알고 있겠지?"하고 바자로프가 말을 받았다. "자네는 그분이 냉정하다고 말하지만 거기에 진짜 매력이 있는 거야. 자네도 왜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않는가." "그렇긴 하지"하 고 아르카디는 말했다. "나는 그런 걸 판단할 수가 없어. 그분은 자네를 한번 만나보고 싶어 하더군. 자네를 데리고 오라고 내게 부탁했어." "자네가 나에 대해 얼마나 떠들어댔을지 짐작할 만해. 하지만 잘했어. 나를 데려가 주게. 그분이 단순히 시골 사교계의 인기인인가, 그렇지 않으면 쿠크신처럼 개방된 여인인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어째든 그분은 내가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좋은 어깨를 가지고 있더군." 아르카디는 바자로프의 냉소적인 태도에 불쾌함을 느꼈으나(흔히 그러하듯이) 결국 자기 불만에 직접적인 원인이 아닌 다른 이유로 그 친구를 비난하려고 했다... "어째서 자네는 여성의 사상적 자유를 허용하려 들지 않는건가?"하고 그는 나직이 말했 다. "왜냐하면 말일세, 내가 관찰해본 결과 자유로운 사상을 논하는 여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괴물들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야." 대화는 여기서 중단됐다. 두 젊은이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곳을 떠났다. 쿠크신은 신경질적으로, 그러나 약간 겁을 먹은 태도로 두 사람의 뒤 에서 조소를 퍼부었다. 두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여 주지 않았으므 로 그녀의 자존심은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더 늦게까지, 심야의 새벽 세 시가 지날때까지 시트니코프와 폴카, 마주프카를 파리식으로 추어댔다. 이 교훈적인 광경 으로써 현지사 주최의 축제는 막을 내렸다. 15 "그 부인이 어떤 종류의 포유류에 속하는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하고 이튿날 오딘초 바 부인이 머루므로 있는 여관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바자로프가 아르카디에게 말했다. "어 쩐지 수상쩍은 냄새가 나는걸." "놀랍군"하고 아르카디가 큰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바라로프, 자네가 그런 좁은 윤리관 에 집착하더니, 그런 건..." "자네한테 놀라겠는걸"하고 바자로프는 태연스럽게 가로챘다. "자 넨 정말 모르고 있는가? 우리 동료들 사이에서 '수상쩍다'고 하는 것은 '수상쩍지 않다'는 걸 뜻하는 거야. 말하자면 소득이 있다는 뜻이야. 그분은 야릇한 결혼을 택했다고 자네 자신이 오늘 말했잖은가? 돈 많은 노인에게 시집가는 것은 조금도 야릇할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오 히려 분별 있는 짓이라고 생각해. 나는 동네의 소문 같은 걸 믿지는 않지만, 우리 교양 있는 현지사 말대로 소문이 틀리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아르카디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방문을 두드렸다. 제복을 입은 젊은 하인이 두 친구를 커다란 방으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러시아의 어느 여관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낡은 가구들 이 놓여 있었으나 방안은 꽃으로 가득 꾸며져 있었다. 잠시 후에 간소하게 아침 옷을 차려 입은 오딘초바 부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봄의 햇빛 속에서 더한층 젊어 보였다. 아르카디는 그녀에게 바자로프를 소개했는데, 오딘초바 부인은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침착한데 비해 바 자로프가 당황해하는 것을 눈치채고 은근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세상에, 여자한테 놀라다니'하고 그는 생각하고 시트니코프처럼 안락의자에 축 늘어져 기대어 앉아, 지나치리 만큼 대범한 태도로 지껄이기 시작했는데, 오딘초바 부인은 그 맑은 두 눈을 그에게서 떼려 고 하지 않았다. 안나 세르게예보나 오딘초바는 이름난 미남자에 투기사며 노름꾼인 세르게이 니콜라예비 치 로크쩨프의 여식으로 태어났다. 이 사나이는 페테르스부르크나 모스크바에서 15년쯤 줄 곤 경기가 좋아 부유하게 살았었는데, 결국엔 무일푼의 신세가 되어 시골로 옮겨 살지 않으 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후 그는 자기의 두 딸, 20세가 되는 안나와 12세가 되는 카 샤에게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남긴 채 죽고 말았다. 두 딸의 어머니는 어는 몰락한 공작 가 문의 태생이었는데, 그 남편이 아직 한창 활동할 무렵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세상을 떴다. 아 버지가 죽자 안나의 처지는 매우 어려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받은 화려한 교육은 농장일이나 집안일과 같은 적막한 농촌생활을 이겨낼 수 있도록 그녀를 도와 주지 못했다. 그녀의 이웃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함께 상의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웃사람들과의 교제를 피하려고 애썼고 그들을 경멸했으며,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아버지를 경멸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낙담하지 않고 곧장 돌아가신 어머 니의 언니뻘이 되는 아브도치야 스쩨파노브나 모 공작 따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왔다. 그분 은 마음씨가 고약한 거만스러운 노파로 조카딸의 집으로 옮겨오자 제일 좋은 방을 전부 자 기가 차지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투덜투덜 노상 잔소리를 하며, 뜰을 산책할 때마져도 그녀 에게 딸린 단 한 명의 농노를 동반하지 않으면 나가지 않았다. 그 농노는 하늘색 리본으로 장식을 한 낡은 황록색 제복을 입고 삼각모를 쓴 음흉스러운 하인이었다. 안나는 이모의 어 떤 변덕에도 참을성 있게 견뎌내고 동생의 교육도 조금씩 시키면서, 이젠 이 시골구석에서 묻혀 살기로 체념한 것 같았다...그러나 운명은 그녀에게 다른 걸 약속했다. 오딘초바라고 하 는, 나이가 46세쯤 되는 괴상한 우울증 환자에다 뚱뚱하고 우둔하며 늘 벌레 씹은 듯한 얼 굴이긴 하되 바보도 아니고 악인도 아닌 돈 많은 사나이가 우연히 그녀를 만나, 그녀에게 홀딱 반하여 결혼을 신청한 것이다. 그녀는 그의 아내가 될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그 녀와 결혼한 지 6년이 되던 해에 자기의 전 재산을 그녀의 것으로 해주고 저승으로 가버렸 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남편이 죽은 후 일년쯤 두문불출하다가 이윽고 동생과 함께 외국 으로 떠났는데, 다만 독일만 방문했을 뿐 이내 지루해져서 XXX시에서 40마장쯤 되는 곳에 있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니콜스코예 마을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그녀 소유의 호화로운 집과 온실이 딸린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 죽은 오딘초바는 자기가 탐나는 것은 무엇이고 다 손에 넣으려고 했던 것이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어쩌다가 한 번 대개는 볼일이 있어, 그것도 잠깐 동안만 도회지에 모습을 나타냈을 뿐이었다. 동네에서 그녀의 평판은 좋지 못 했으며, 오딘초바와의 결혼에 대해서는 지독한 비난이 따랐다. 그녀에 대한 터무니없는 소문 들이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그녀가 아버지의 사기 도박에 꼭두가시 노릇을 했다는 등, 그녀가 외국에 갔던 것도 까닭이 있었으며, 불행한 결과를 숨길 필요가 있어서였다고 소 문이 자자했다..."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분개한 수다쟁이들은 늘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리 는 것이다. 또 "그 여자는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라고요"하며 그녀에 대해서 수군거렸다. 동 네에서는 이름난 일부 독설가들은 "물불을가리비 않는다고요"하고 언제나 과장해서 말했다. 이러한 소문은 모두 그녀의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는 꽤 과단성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 던 것이다. 오딘초바 부인은 소파에 기대않아 있었다. 그리고 손에 포개고 바자로프의 아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평소와는 달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듣는 상대의 흥미를 끌려고 노골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또 아르카디를 놀라게 했다. 아르카디는 바자로프가 자기 목적을 달성했는가 어떤가 판단이 가지 않았다. 안나 세르게예 브나의 얼굴을 보아도 그녀가 바자로프로부터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도무지 알아내기가 어 려웠다. 그녀의 얼굴은 시종 상냥스러우면서도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은 상대를 주목하면서 빛나고 있었지만, 그것은 잔잔한 시선이었다. 처음에는 바자로프의 잘난 체하는 태도가 악취나 삐걱거리는 소리처럼 그녀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그가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그것이 그녀를 만족스럽게 하였다. 다만 바자로 프의 속된 나쁜 버릇만이 그녀에게 혐오감을 일으켰으나 그런 점에 있어서는 아무도 바자로 프를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아르카디는 그날 시종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바자로프가 오딘초바 부인처럼 현명한 여자에게 자기 신념이나 견해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것을 고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 대신에 바자로프는 의학이라든가 동종요법이라든가 식물학 같 은 것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녀는 몇 권의 좋은 책을 읽고 있었으며, 정확한 러시아어로 의사표현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화제를 음악에 대한 것으로 돌리려고 했으나 바자로프가 예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고, 아르카디가 민요의 가락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 려 했음에도 이야기를 슬쩍 식물학으로 돌렸다. 오딘초바 부인은 전과 다름없이, 아르카디를 동생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단지 그의 선량함과 순박함을 인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화는 서두름 없이 각양각색의 소재로 활발하게 세 시간 남짓 계속되었다. 이윽고 두 친구는 일어나서 작별인사를 하였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두 사람을 상냥하게 바라보며 아름답고 흰 손을 내밀고는 잠깐 생각하더니 주저하는 빛으로, 그러나 빙긋 웃으 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루하지 않으시다면, 두 분 니콜스코예 마을에 있는 저희 집에 들러주세요." "무슨 말씀 을 그렇게 하십니까"하고 아르카디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저로선 분에 넘치는 기쁨입니다..." "그럼 당신은 어떠세요, 바자로프 씨?" 바자로프는 다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을 뿐이었으 나 아르카디는 깜짝 놀랐다. 그는 바자로프가 얼굴을 붉히는 걸 보았던 것이다."어떤가?"하 고 그는 거리로 나서자 친구에게 말했다. "자네는 아직도 그분을 '저런,저런,저런'이라고 하 던 그 의견에 찬성하는가?" "알게 뭐야, 지독하게도 차분하더군"하고 바자로프는 대꾸하고 잠시 잠자코 있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왕비야, 여왕이야, 다만 뒤로 긴 옷을 질질 끌거나 머리에 왕관을 쓰지만 않았을 뿐이야." "우리나라 왕비는 그런 식으로 러시아어를 말하지는 않아"하고 아르카디가 말했다. "글세, 그건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우리와 같은 빵을 먹었기 때문일 거야." "하지만 그 여자 대단 하던데"하고 아르카디가 말했다. "기막히게 풍만한 육체더군"하고 바자로프가 계속했다. "당 장이라도 해부대에 올려놓고 싶을 정도야." "아니, 화내지마, 이 멍청이야, 일등품이라는 뜻 이야. 그 여자한테 가지 않고는 못 배기겠어." "언제?" "글세, 모레가 어떻겠어? 우리가 여기 서 할 게 뭐가 있어. 쿠크신과 샴페인을 마신다? 자네 친척인 자유주의 고관한테서 이야기 를 듣는다?...모레 당장 떠나자고,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초라한 집도 거기서 멀지 않거든.니 콜스코예 마을이 XXX가도에 있지?" "응" "멋지다.꾸물거릴 필요 없어, 꾸물거리는 건 밥보 천지나 하는 짓이야. 여보게, 정말이지.풍만한 육체더군" 사흘 뒤에 두 친구는 니콜스코예 마을을 향하여 가도를 따라 마차를 달리고 있었다. 날씨 는 맑았으나 그다지 덥지는 않았다. 살이 통통하게 찐 역마들은 그 꼬부라져 뒤엉킨 꼬리를 가볍게 흔들면서 사이좋게 뛰고 있었다. 아르카디는 가도를 한번 바라보고는 자신도 모를 미소를 지었다. "나를 축복해주게나"하고 바자로프가 갑자기 큰 소리를 질렀다. "오늘 6월 23일은 내 영명축일이야, 성자가 어떤 식으로 나를 돌보아줄는지 두고보게. 오늘 우리 집에 선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리고 그는 음성을 낮추고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쳇, 기 다리라지.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16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살고 있는 저택은 노란 석조 교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약간 경사진, 훤히 트인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 교회는 녹색 지붕에 희고 둥근 기둥이 줄지어 서 있었고, 중앙의 입구에는 이탈리아식으로 그리스도 부활을 그린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특히 그 둥그런 윤곽을 두드러지게 한 것은 끝이 뾰족한 투구를 쓴, 전면에 크게 그 려진 거무칙칙한 무사였다. 교회 맞은편에는 길쭉길쭉한 마을의 농가가 두 줄로 이어져 있 었고 여기저기에 초가지붕의 굴뚝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었다. 세르게예브나의 저택은 교 회와 마찬가지로 알렉산더 시대의 양식이라는, 러시아에서는 유명한 양식으로 세워져 있었 다. 이 집도 역시 노랗게 칠해져 있고 녹색 지붕에 희고 둥근 기둥과 가문의 표지를 새긴 박공들을 볼 수 있었다. 교회와 이 집은 죽은 오딘초바의 동의를 얻어 현청의 한 건축기사 가 세운 것이었는데, 고인의 말을 빌리면 쓸데없는 독선적인 혁신 같은 건 아주 참을 수가 없었던 그였지만 이 두 건물을 세우는 것만큼은 동의했던 것이다. 이 집에는 양쪽으로 옛날 정원의 울창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고, 지금은 잘려진 전나무 가로수 길이 현관 입구까지 통하고 있었다. 우리의 두 친구는 현관에서 제복을 입은 두 명의 키가 큰 하인의 영접을 받았다. 그 중 한 사람은 즉시 집사를 부르러 뛰어갔다. 집사는 검은 연미복을 입은 뚱뚱한 사나이로 잠시 후에 모습을 나타내더니 융단이 깔린 계단을 지나 손님을 특별실로 안내했다. 그 방안에는 화장 도구가 빠짐없이 갖추어진 두 개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집안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 었다. 모든 것이 청결하고 마치 장관의 용접실처럼 사방에서 고상한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께서 30분 후에 들어오시라는 분부이십니다"하고 집사는 전했다. '그 동 안에 무슨 분부하실 게 없으십니까?" "별로"하고 바자로프는 대답했다. "그저 보트카를 한잔 가져다주실 수 없겠습니까?" "알겠습니다"하고 말하고 약간 의아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집사는 구두소리를 삐걱거리 며 밖으로 나갔다. "지독하게 으리으리한 집안이로군"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자네 표현대 로 하자면 '왕비,바로 그 자체야.'" "훌륭한 왕비가 아닌가?"하고 아르카디가 되받아쳤다. "처 음부터 나나 자네 같은 유력한 귀족을 자기 집에 초대했으니 말일세" "더군다나 나를, 미래 의 의사를, 의사의 아들을, 천한 중놈의 손자를 말이야... 내가 천한 중놈의 손자라는 걸 자 넨 알고 있는가?...마치 스페란스키(러시아의 정치가, 알렉산더 1세의 신임을 얻어 자유주의 적인 국가 개혁안을 작성, 그 일부를 실현했음.1772-1839)처럼 말이야"하고 잠시 입을 다물 고 있다가 입을 씰룩하면서 바자로프는 이렇게 덧붙였다. "어쨌든 이 귀부인은 너무 자아도 취에 빠져있군. 지독한 자아도취에 빠져있어. 우리도 연미복을 입고 왔어야 하는 게 아닐 까?" 아르카디는 그저 어깨를 움츠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도 약간 당황해하였다. 반시간 뒤에 바자로프와 아르카디는 응접실로 내려갔다. 그곳은 천장이 높은 널따란 방으 로 꽤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는데, 어떤 특별한 취향은 찾아볼 수 없었다. 육중한 고급 가구 들이 금빛 당초무늬가 든 갈색 벽지를 바른 벽을 따라 흔히 볼 수 있는 격식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죽은 오딘초바가 중개인이면서 술집을 내고 있던 자기 친구의 손을 빌려 모스크바 로부터 사들인 것들이다. 중앙에 있는 안락의자 바로 위에는 피부가 축 늘어진 금발의 남자 초상이 걸려 있는데, 그는 못마땅한 듯 손님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남편임에 틀림없어"하고 바자로프가 아르카디에게 소곤거리고 콧등을 찡긋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도망쳐버릴까?" 그러나 그 순간 여주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하늘하늘한 얇은 옷 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귀 뒤로 매끈하게 빗어 넘긴 머리는 생기가 도는 그녀의 얼굴에 소 녀 같은 인상을 더해주고 있었다. "약속을 지켜주셔서 고마워요."하고 그녀는 이야기하기 시 작했다. "우리 집에서 천천히 쉬다 가세요. 여기는 꽤 좋은 곳이에요. 여러분에게 제 동생을 소개해드리지요. 피아노를 잘 친답니다. 바자로프씨께서는 별로 관심이 없으시겠지만, 키르 사노프씨, 당신은 음악을 좋아하실 것 같군요. 집에는 동생외에 늙으신 이모님이 한 분 살고 계시고, 또 이웃집 아저씨께서 가끔 카드놀이를 하러 와주시지요. 이게 전부에요. 자, 앉으세 요." 오딘초바 부인은 마치 암송이라도 하는 듯 분명한 어조로 이 짤막한 연설을 단숨에 말했 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아르카디에게 이야기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르카디의 어머니와 친 분이 깊어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에 대한 사랑을 털어놓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아르카디는 죽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했다. 그러는 동안 바자로프는 앨범을 찬 찬히 뒤져보기 시작했다. '나도 참 점잖아졌군'하고 그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하늘색 목걸 이를 두른 한 마리의 예쁘고 흰 보르조이(러시아산으로 사냥개이나 지금은 집 지키는 개가 되었음)개가 발톱으로 타박타박 방바닥을 찧으며 응접실로 달려들어왔고, 그 뒤를 18세쯤 되어 보이는 처녀가 따라 들어왔다. 그녀의 머리는 검고 살갗은 가무잡잡하며, 약간 둥근 듯 한 보기 좋은 얼굴에 그다지 크지 않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꽃이 가득 들어 있는 광 주리를 두 손으로 들고 있었다. "이 애가 동생 카샤에요"하고 그쪽으로 머리를 기울여 보이며 오딘초바 부인이 말했다. 카샤는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는 언니 곁에 걸터앉아서 꽃을 추리기 시작했다. 피피라 부르는 이 보르조이 개는 꼬리를 치면서 두 사람 쪽으로 차례차례 다가가 한 사람, 한 사람 의 손에 제 차가운 꼬리를 비벼댔다. "이걸 다 네가 꺾었니?"하고 오딘초바 부인이 물었다. "그래요"하고 카샤가 대답했다. "이모님은 차를 드시러 오신댔니?" "오신댔어요" 카샤는 귀 엽게 미소를 지으며 조금은 부끄러운 듯, 그러나 꾸밈없는 태도로 살며시 눈을 아래로부터 위로 치떠보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아직 온통 풋내가 풍겼다. 음성도, 얼굴에 가득 돋아난 솜털도, 손바닥에 손금이 둥글둥글한 무늬처럼 나 있는 장밋빛 손도, 약간 오목하게 패인 듯 한 어깨도...그녀는 여전히 얼굴을 붉히고는 계속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오딘초바 부인은 바자로프에게 말했다. "당신은 체면상 마지못해 사진을 보고 계시는군 요"하고 그녀는 말을 꺼냈다. "이런 건 당신의 흥미를 끌 수 없을 거예요. 더 이쪽으로 다가 오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뭔가 토론을 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바자로프는 가까이 다가앉 았다. "어떤 토론을 원하십니까?"하고 그는 말했다. "무엇이든 좋아하시는 걸로 합시다. 미 리 말해두지만 나는 토론을 퍽 좋아해요" "당신이 말씀입니까?" "그래요, 꽤 놀라신 것 같군 요. 어째서지요?" "왜냐하면 제가 짐작한 바로는 당신은 침착하고 냉정한 기질이신 것 같은 데, 토론에는 어느 정도의 흥분이라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나 라는 사람을 그렇게 빨리 단정해버리시는 거예요? 나는 첫째로 성질이 급하고 완고하답니 다. 카샤에게 물어보시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둘째로 나는 무언가에 아주 쉽게 빠져버 리는 성미예요." 바자로프는 안나 세르게예브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실 지도 모르지요. 자기 자신이 더 잘 아실 테니까. 그럼 토론해도 괜찮겠지요?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앨범에 있는 작센(독일의 옛 지방명. 본래 게르만게의 작센족이 살던 현재의 서독 니더작센 주를 중심으 로 한 지방을 말했으나. 현재는 동독의 작센 주를 말함)의 풍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제 흥미를 끌 리가 없다고 당신은 말씀하셨지요. 당신이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저에게 예술적인 이해력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입니다. 저에게는 실 제로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풍경은 지질학적 견지에서 제 흥미를 끌더군요." "실 례지만 지질학적로서라면 차라리 서적에서, 전문서적에서 찾아보시는 편이 좋을텐데요. 그림 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거예요." "책으로 그야말로 수십 페이지나 읽어야 알 수 있는 걸 그 림으로는 한눈에 확실히 알 수 있지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래, 당신에게는 예술적인 이해 같은 건 조 금도 없단 말이지요?"하고 그녀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짚으며 말했다. 그렇게 몸을 움직임으 로써 그녀는 바자로프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이죠?" "그럼 무엇 때문에 그런 게 필요한지 말씀해주시지요." "그건 적어도 인간을 잘 이해하고 연구할 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해요." 바자로프는 엷은 웃음을 띄었다. "그런 것을 위해서라면 첫째로 인생 체험이란 게 있습니다. 둘째로 개개인의 개성을 연구 하는 것은 노력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결같이 육체도 마음도 닮았으며, 우 리들 개개인은 뇌수도 비장도 심장도 폐도 다 똑같이 갖춰져 있습니다. 이른바 정신적 특질 이라는 것도 모두가 똑같습니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표본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인간은 숲속 의 나무들과 같은 겁니다. 어떤 식물학자도 자작나무를 하나하나 연구하지는 않을 겁니다." 천천히 꽃을 고르고 있건 카샤는 의아스럽다는 듯이 바자로프 쪽을 올려다 보았으나, 그 의 재빠르고 거림낌없는 시선에 마주치자 귀뿌리까지 새빨개졌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머 리를 흔들었다. "숲속의 나무들이라고요?" 하고 그녀는 되받아서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바 보와 영리한 사람, 선인과 악인과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말이에요?" "아니지요, 있 습니다. 병자와 건강한 사람과의 차이처럼 말입니다. 폐병 환자의 폐는 저나 당신의 것과 그 상태가 같지 않습니다. 비록 똑같이 같추어져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어째서 육체 적 질환이 생기는지 대강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질병은 잘못된 교육에 의하여, 어 릴 적부터 인간의 머릿속에 주입되어 온 온갖 시시한 것들에 의하여, 한마디로 말해 추악한 사회상태에 의하여 생기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사회를 개조하면 그런 병은 없어질 겁니다." 바자로프는 이렇게 말하는 동안 줄곧 마음 속으로는 나를 믿거나 말거나 그런 건 조금도 상관하지 않겠다 라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분하게 그 긴 손가락으로 구레나룻을 쓰다듬기도 하고, 혹은 눈으로 온 방안을 샅샅이 둘러보기도 했다. "그럼 당신생각으로는"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말했다. "사회가 바뀌는 날엔 어리석은 자도, 악인도 없어질 것이라는 말이군요?" "적어도 사회가 바른 체제하에 있다면 인간이 어 리석거나 영리하거나 악인이거나 아무런 차별없이 모두가 완전히 평등해질 것입니다." "예, 알겠어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비장을 갖게 된다는 말이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부인"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아르카디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당신 의견은 어때요, 아르카디 니 콜라예비치?" "저는 에브게니의 말에 동의합니다."하고 그는 대답했다. 카샤가 그를 흘긋 쳐 다보았다. "난 정말 당신들에게 놀랐어요"하고 오딘초바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나중에 또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지요, 이제 곧 이모님이 차를 드시러 오실 모양이니 우리는 그분의 기분을 맞춰드리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이모라는 공작 따님은 움켜쥔 작은 주먹 같은 얼굴에 흰 가발을 쓰 고 못박은 듯 움직이지 않는 혐상궂은 눈을 한, 꼬챙이같이 작고 마른 몸집의 노파였다. 그 녀는 들어오자 손님들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자기 외에는 아무도 앉을 권리가 없는 넓은 비로드 안락의자에 걸터앉았다. 카샤는 이모 발밑에 긴 의자를 놓아드렸다. 노부인은 카샤에게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녀 쪽을 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 꼬챙이 같은 몸을 둘러싸고 있는 노란 쇼올 밑에서 다만 두 손을 조금 움직였을 뿐이다. 이 공작 따님은 노란 색을 좋 아하여, 그가 쓰고 있는 모자에도 선명한 황색 리본이 달려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모님?"하고 음성을 높여 오딘초바 부인이 물었다. "저놈의 개가 또 이곳에"하고 노부인은 대답 대신 중얼거렸는데, 피피가 자기에게로 머뭇거리며 몇 발짝쯤 다가오는 걸 보자 "저리 비켜"하고 날카롭게 고함을 쳤다. 카샤는 문을 열어 피피를 밖으로 내보냈다. 피피는 주인이 산책에 데려가 주는 것으로 착 각하고 펄펄 뛰며 밖으로 나갔지만, 저 혼자 문 밖에 내버려졌으므로 발톱으로 문을 득득 긁어대면서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공작 따님은 눈살을 찌푸렸고 카샤는 금방이라도 나가고 싶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제 차 준비가 다 됐을 거예요"하고 오딘초바 부인이 말 했다. '자, 여러분, 가십시다. 이모님, 차를 드시러 가시지요." 공작 따님은 잠자코 안락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앞장서서 응접실을 나갔다. 나머지 사람들 은 그 뒤를 따라 식당으로 갔다. 코작풍의 복장을 한 사동들이 몇 겹으로 쿠션을 깐, 아주 훌륭한 안락의자를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테이블로부터 좀 떼어놓자, 공작 따님은 그 위에 걸터앉았다. 식탁에 앉은 사람들의 찻잔에 차를 다 따른 카샤는 고급 가문의 표지를 넣은 장식이 있는 찻잔을 이모에게 제일 먼저 내밀었다. 노부인은 자기잔에 꿀을 탔다(그녀는 무 엇에든 자기 돈은 한푼도 들이는 일이 없으면서도 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것은 건강에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돈도 더 많이 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쉰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이반 공작은 뭐라 써 보냈더냐?" 그러나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바자로프와 아르카디는 잠시 뒤에 모두가 그녀를 정중히 대하기는 해도 누구 하나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그녀 가 귀족 출신이기 때문에, 공장 따님이기 때문에 그들은 참고 견디는 것이다 하고 바자로프 는 생각했다. 차를 마신 뒤에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산책을 나가자고 권유했으나 비가 주룩 주룩 내리고 있었으므로 공작 따님을 제하고는 모두들 응접실로 돌아갔다. 카드놀이를 좋 아한다는 포르피리 플라토니치라는 이웃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가늘고 긴 다리에 몸은 뚱 뚱한 백발의 사나이로, 매우 정중하면서도 익살맞은 사람이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주로 바자로프를 상대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프레페란스라는 옛날 식 카드놀이를 함께 하지 않겠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앞으로 군청에 의사로 근무하려면 사 전 준비로도 필요하다면서 바자로프는 그에 동의했다. "조심하세요"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 는 주의시켰다. "나와 프로피리 플라토니치와 한패가 되어 당신을 이겨 보이겠어요. 그리고 카샤, 너는"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에게 피아노를 쳐드려. 이분은 음 악을 좋아하시니까. 그리고 우리도 같이 들을 겸." 카샤는 마지못해 피아노 쪽으로 다가갔다. 아르카디도 역시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긴 했지 만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오딘초바 부인이 자기를 멀리하고 있 는 것 같은 느낌에 그의 가슴은 그런 나이의 여느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불길한 예 감과도 같은 뭔가 어슴푸레한 괴로운 느낌으로 가득 찼다. 카샤는 피아노 뚜껑을 들어올리 고 아르카디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나직하게 말했다. "뭘 칠까요?" "당신이 좋아하는 걸로" 하고 아르카디는 성의 없이 대답했다. "어떤 음악을 좋아하시나요?" 꼼짝도 하지 않고 카샤 는 다시 물었다. "고전음악을 좋아합니다."하고 똑같은 어조로 아르카디는 대답했다. "모차 르트를 좋아하시나요?" "좋아합니다." 카샤는 모차르트의 C단조 소나타 환상곡을 펼쳤다. 그녀의 연주는 다소 기계적이고 무미 건조한 감을 주긴 했으나 그래도 정말 훌륭한 솜씨였다. 그녀는 악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똑바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곡이 끝날 무렵에는 그 얼굴이 홍조를 띠 었으며 몇 가닥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검은 눈썹 위에 늘어져 있었다. 곡의 마지막 부분이 특히 아르카디에게 감명적이었는데, 그 부분에서는 자유로운 가락이 주 는 매혹적이고 상쾌한 느낌 가운데에 느닷없이 몹시 비통한, 거의 비극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비애의 충동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음악이 불러일으킨 그의 상념 은 카샤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에 관해서는 단지 '피아노를 꽤 잘 치고 얼굴도 그 다지 밉지 않은'아가씨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곡을 다 치고 나서 카샤는 건반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이제 그만 쳐도 되겠지요?"하고 물었다. 아르카디는 거 이상 그녀에게 수고를 끼칠수는 없다고 말하고는 그녀와 모차르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이 이곡을 선택했느냐, 그렇지않으면 누가 권유 하더냐고 물었다. 그러나 카샤는 짤막하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자기만의 생각에 잠겨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 그녀는 여간해서 자신의 세계 밖으로 나가 려 들지 않았다. 이럴 때에는 그녀의 얼굴까지도 거의 완고하면서도 무감각한 표정을 띠는 것이다. 그녀는 소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의심이 많았고 자기를 양육해준 언니에게 어느 정 도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런 일은 물론 언니쪽에서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르카디는 다시 방으로 들어온 피피를 불러서는 다정하게 미소를 띄면서 그 머리를 쓰다듬 어 주며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카샤는 다시 꽃을 고르기 시작했다. 한편 바자로프는 카드놀이에 번번이 지고 있었다. 안 나 세르게예브나는 카드놀이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으며, 포르피리 플라토니치도 역시 자기 몫만큼은 지킬 수 있는 실력이었다. 바자로프는 결국 지고 말았다. 비록 대단한 액수는 아니 었지만 어쨌든 그에게 있어서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저녁 식사 때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또 다시 식물학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내일 아침 일직 함께 산책을 나가시지요"하고 그녀 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야생식물의 라틴어 명칭이나 그 특성 같은 걸 배우고 싶어요" "뭣 때문에, 라틴어 명칭은 알아서 무엇하려고 그러십니까?"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무엇이 든 명확히 해두고 싶어서요"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정말 멋진 부인이야"방으로 안내되어 단둘이 있게되자 아르카디는 감탄하며 말했다. "정말 그래"하고 바자로프는 대답했다. "머리가 있는 여자야, 경험도 꽤 쌓았고." "어떤 의미로 그렇게 말하는 건가,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좋은 의미에서야, 좋 은 의미에서,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 내가 보증하네만 그분은 자기 영지를 훌륭하게 운영하 고 있는게 틀림없어, 그러나 사실 멋진 건 그분이 아니라 그 동생이야." "어째서? 그 가무잡 잡한 처녀가 말인가?" "그래, 그 가무잡잡한 처녀 말일세. 그 애는 맑고 깨끗하고 수줍음이 많고 조용하고 그밖에도 좋은 점이 많아. 그 처녀라면 누구든 자기 생각대로 어떻게 해 볼 수 있겠지만, 그 언니라는 여자는 늙은 너구리야." 아르카디는 바자로프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다른 생각에 잠겨 잠자리에 들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도 그날 밤은 내내 자기 손님들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자로프 의 가식 없는 태도나 신랄한 비판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바자로프에게서 지금까 지 보지 못한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본래 호기심이 강한 여자였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조금 유별난 여자였다. 어떠한 선입견에도 얽매이지 않았고, 어떤 깊 은 신앙심 같은 것도 없었으며, 무슨 일에서든 양보하지 않았고, 자기의 길을 벗어나지도 않 았다. 그녀는 여러 가지의 것에 대해 확실한 주관을 갖고 있고 또 많은 것에 흥미를 갖고 있었으나 어느 것도 그녀를 충분히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녀는 충분한 만족 같은 건 바라고 있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녀의 두뇌는 호기심으로 가득 찬 동시에 전혀 무관심 하기도 했다. 그녀의 의혹은 결코 잊어버릴 정도로 가라앉았던 적이 없었으며, 또 결코 불안 할 정도로 커지는 일도 없었다. 그녀가 부자가 아니었고 또 독립해있지도 않았더라면 인생 의 투쟁에 몸을 내던져 정열을 맛보는 여자가 됐을지도 모른다...그러나 그녀는 때로 지루하 기는 해도 편안히 지낼수 있었다. 무지개 같은 공상이 불현 듯 그녀 눈앞에서 이글거렸던 적도 있었지만, 그것이 꺼져버렸을 때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별로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의 상상은 일반적인 윤리법칙의 계율로 허용되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 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그녀의 피는 매혹적으로 균형 잡힌 침착한 육체 속을 변함없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때때로 그녀는 좋은 향기가 풍기는 욕조에서 나와 후끈 달 아오른 온몸에 나른한 기분을 느끼면서 삶의 허무함에 대하여 그 슬픔과 노동과 악에 대하 여 공상에 잠기기도 했다...그러노라면 불현 듯 그녀 마음에 대담한 그 무엇이 가득 넘쳐흘 러서 고귀한 갈망이 용솟음쳐 나온다. 하지만 반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오면 안나 세 르게예브나는 전신을 움츠리고 투덜거리며 성을 벌컥낸다. 그 순간에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이 얄미운 바람이 자기에게 불어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뿐이다. 사랑이 빠져본 적이 없는 모든 여자와 마찬가지로 그녀 자신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모든 걸 바라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아무것도 바라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끔찍이도 싫은. 지금은 죽은 오딘초바를 간신 히 참고 견뎌냈으므로(그녀는 재산이 탐나서 그와 결혼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를 선량한 남 자라 여기지 않았더라면 그의 아내가 되기를 아마 거절했을 것이다.) 모든 남성을 단정치 못한데다가 서투르고 우둔한가 하면, 무기력하고 남을 귀찮게 구는 존재, 이런 식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모든 남성에 대해 은근히 혐오감을 품게되었던 것이다. 한번은 그 녀가 외국의 어딘가에서 한 젊은 스웨덴 사람과 마주친 일이 있었다. 얼굴에 기사다운 표정 을 띠고 넓은 이마 밑에는 성실한 인상을 주는 파란 눈이 빛나는 미남 청년이었다. 그가 그 녀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러시아로 돌아오는 것을 망설이게 하지는 않았다. '참 별난 사람이야, 그 의사는'하고 자기의 호화로운 침대의 레이스 베개를 베고 가벼운 비단 이불을 덮고 누우면서 그녀는 생각하였다...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어느 정도 아버지의 사치스러움을 이어받고 있었다. 그녀는 죄는 많지만 선량한 자기 아버지를 매우 사랑했고, 아버지 역시 딸을 지극히 사랑하여 허물없이 장난도 쳤으며, 무엇이고 숨김없이 털어놓고 이야기하며 상의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는 거의 기억할 수가 없었다. '정말 별 난 사람이야, 그 의사는'하고 그녀는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그녀는 손발을 쭉 뻗고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머리 뒤로 돌렸다. 그러고서 시시한 프랑스 소설을 두 페이지쯤 읽고는 그 책을 손에서 떨어뜨리고 잠이 들었다. 깨끗하고 싸늘한 육체를 깨끗하고 향기로운 속옷으로 감싼 채. 다음날 아침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바자로프와 식물채집을 나 갔다가 점심 식사 직전에 돌아왔다. 아르카디는 아무 데에도 나가지 않고 한 시간쯤 카샤와 함께 보냈다. 그는 그녀와 있으면 지루하지가 않았으며, 그녀 자신도 자진하여 그에게 어제 의 그 곡을 다신 한 번 쳐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때 오딘초바 부인이 돌아왔다. 아르카 디는 그녀를 보자 가슴이 순간 죄어드는 것을 느겼다...그녀는 좀 피로한 걸음걸이로 뜰을 거닐고 있었다. 그녀의 볼은 새빨개졌고 두 눈은 둥근 밀짚모자 밑에서 평소보다 더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들꽃의 가느다란 줄기를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고 있었다. 그녀의 팔꿈치 부 분은 케이프로 가볍게 덮여 있었고 모자의 넓은 잿빛 리본이 그 가슴 위에 착 달라붙어 있 었다. 바자로프는 그녀의 뒤를 평소와 마찬가지로 자신만만한 태도로 태연스럽게 걷고 있었 는데, 그 표정은 매우 들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정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는데, 이는 아르카 디에게는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잘 잤나"하고 입안으로 우물우물 말하고 바자로 프는 자기 방으로 향했고 오딘초바 부인은 무심결에 아르카디와 악수를 하더니, 그녀 또한 그의 곁을 지나쳐버렸다. '잘 잤나라니...'하고 아르카디는 생각했다. '마치 오늘 처음 만난 사 람처럼 말하는군' 17 시간이라는 것은(다 아는 사실이지만) 어느 대는 새처럼 날고 어느 때는 벌레처럼 기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 인간은 시간의 빠르고 느린 속도 감각을 모르고 그냥 지나칠 때가 오 히려 좋은 것이다. 아르카디와 바자로프는 이런 식으로 보름 동안을 오딘초바 부인 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여기서 도움이 된 것은 그녀가 손수 자기 저택의 생활속에 정해놓은 질서였 다. 그녀는 이 질서를 엄격히 지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에 따르도록 지시했다. 하루동안 의 모든 일은 정해진 시간에 따라 행하였다. 정확히 여덟 시에 모두는 아침 차를 마시러 모 였다. 차를 마시고 난 후 아침 식사 전까지는 각자가 하고 싶은 일을 하였으며, 여주인 자 신도 토지 관리인(영지는 소작제도였다.)이나 집사나 또는 하녀 장을 상대했다. 점심 식사 전에 모두는 또 이야기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하기 위해 모였다. 밤 시간은 산책이나 카드 놀이나 음악으로 보냈다. 열시 반이 되면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다음날 의 지시를 한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비자로프는 자로 잰 듯한 다소 위엄이 있는 규칙에 얽 매인 일상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철길을 달리는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제복을 입 은 하인들이나 예의범절이 바른 집사들은 그의 민주적인 기분을 상하게 했다. 정말로 그런 식으로 하길 원한다면 영국식으로 연미복에 흰 넥타이를 메고 식사를 해야만 되리라 생각했 다. 그는 언젠가 안나 세르게예브나와 이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녀는 누구 든지 주저없이 그녀 앞에서 의견을 털어놓도록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의견을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 견해에서 보면 당신 말씀도 옳아요. 아마 내가 너무 귀부인 티를 내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시골에서는 무질서하게 살아서는 안 돼요. 지루하게 돼버리거 든요." 그리고 그녀는 그 후로도 계속 자기 생각대로 실행했다. 바자로프는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나 아르카디가 오딘초바 부인 댁에서 제법 마음 편하게 지낼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저택 에서는 모든 일이 '철길 위를 달리듯'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젊은이에 게는 니콜스코예 마을에 머물기 시작할 무렵부터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바자로프에게는 여 간해서 의견일치를 보이지 않는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자기에게 호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이 그에게 왠지 불안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쉽게 화를 냈고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 못 귀찮다는 듯 사나운 눈초리로 마치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한 곳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아르카디의 경우에는 자신은 오딘초바 부인에게 아주 홀딱 반해 있다고 단 정해버리고는 조용히 침잠한 기분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기분이 그가 카 샤와 친해지는 것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도리어 그가 그녀와 절친한 사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다. '그분은 날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상관없어...여기 이 상냥한 아가씨는 날 거절하지 않을 테니'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럴 때면 그의 마음은 다시 너그러워 지고 마음이 달콤한 만족에 빠지게 되는 것이었다. 카샤는 그가 자기와의 교제로 뭔가 위안을 찾고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 으므로 조금은 부끄러우면서도 흉허물없는 우정으로써 순수한 기쁨을 그에게나 자기 자신에 게나 거절하려 들지 않았다.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있는 곳에서는 두 사람은 서로가 말하는 것을 꺼려했다. 카샤는 노상 언니의 예민한 시선 앞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었으며, 아르카디 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늘 그러듯이, 자기 사랑하는 상대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에도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카샤와 단둘이 있을 때에는 기분이 좋았다. 그는 자신이 오딘 초바 부인의 마음을 끌수없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녀와 마주 대하고 있을 때에는 침착성 을 잃어 얼떨떨해졌으며, 그녀 역시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어색해했다. 그는 그녀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젊었던 것이다. 그와 반대로 카샤와 대할 때의 아르카디의 마음 은 편했다. 그는 그녀에게 너그럽게 대해주었고 그녀가 음악이나 소설, 시를 읽을 때 혹은 그 밖의 온갖 시시한 것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잠자코 들어주었다. 그리 고 자신이 그런 시시한 것들에게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도 인식하지도 못했다. 카 샤는 그의 고뇌를 방해하지 않았다. 아르카디는 카샤와 함께 있으면, 그리고 오딘초바 부인 은 바자로프와 함께 있으면 행복했다. 따라서 이 두 쌍이 잠시 함께 있다가도 각각 자기 짝 을 찾아 헤어져가는 일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특히 산책할 때 그러했다. 카샤는 자연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고 아르카디도 감히 그렇다고 고백하지는 못하지만 마찬가지로 자연을 사랑하고 있었다. 오딘초바 부인은 자연에 대해서 거의 무관심했으며 바자로프도 역시 마찬 가지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두 친구가 거의 언제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결과 를 낳았다. 즉 두 사람의 관계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와는 오딘초바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그녀의 '귀족적인 버릇'에 대해 욕하는 일마저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카샤를 전과 같이 칭찬하고 오직 그녀의 감상적인 버릇을 자세하 도록 충고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칭찬하는 말은 기계적이었고, 충고 역시 무뚝뚝했으며 대 체적으로 그는 아르카디와 나누는 말수가 전보다 훨씬 적어졌다. 그는 마치 친구를 피하고 있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아르카디와 이러한 분위기를 모두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그저 가슴 속에 간직해 두었다. 이러한 모든 변화의 근본 원인은 오딘초바 부인이 바자로프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감정 이었다. 그 감정은 그를 몹시 괴롭혔고 거의 미칠 지경으로 만들었으나, 혹 누군가가 그의 마음속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 넌지시 떠보기라도 할라치면 그는 그 자리에서 경멸하는 듯이 큰 소리로 웃으며 비꼬는 말을 늘어놓아 그 감정을 부정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바자로프는 여성이나 여성미에 대한 열광적인 추종자였지만, 이상적인 의미에서의 그가 말하는 이른바 로맨틱한 의미에서의 사랑 같은 것은 바보 같은 것, 용서치 못할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 고 있었다. 기사적 감정 따위도 뭔가 왜곡된, 또는 병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또 어째서 토겐부 르크(독일의 시인 실러의 시 기사 토겐부르크의 주인공, 애인이 있는 수도원 옆에서 몇 해 를 지냈다)를 모든 연애 시인이나 편력 시인들과 함께 정신병원에 처넣지 않는 것일까 하고 놀라움을 표시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여자가 되도록 요령 있게 노력해야 하네. 그 러나 노력해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관계를 끊어버리면 그만이야. 사랑은 세상 도처에 있는 법이니까."그는 오딘초바 부인이 마음에 들었다. 여러 가지로 퍼져 있는 그녀의 소문, 그 사 고방식의 자유성과 자주성, 그에 대한 그녀의 의심할 여지도 없는 호의-그러한 모든 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유리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곧 그녀와는 '요령있게 잘할 수 없 다'는 것을, 놀랍게도 그녀와 관계를 끊는 것이 이젠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j 를 생각하면 금세 자기피가 뜨겁게 타올랐으나 쉽게 가라앉힐 수가 있었다. 그러나 뭔가 다 른 것이 그의 마음에 깃들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이고 항 상 무시해오던 것이었으므로, 그의 자만심을 몹시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 와 이야기할 때에는 그는 모든 로맨틱한 것에 대해 냉담한 경멸의 말을 전보다 더 퍼부었으 나, 혼자 있을 때에는 자기 자신 속에서 로맨틱한 기질을 인식하고는 분개해 마지않는 것이 다. 그럴 때면 그는 숲속으로 들어가 늘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꺾어 짓이기면서, 또 그녀와 자신까지도 나직이 저주하면서 성큼성큼 그 근방 일대를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또는 건초를 넣어두는 헛간으로 기어 들어가서 두 눈을 감고 잠들어보려고도 했지만, 물론 언제나 잘 되 지는 않았다. 불현 듯 그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은 그 하얀 두 팔이 언젠가는 자기 목에 감기고, 그 거만한 입술이 그의 키스에 응해주며, 그 지적인 눈이 애정이 깃든 표정으로-그 렇다. 애정이 깃든 표정으로-그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현기증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망각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러나 곧 마음 속의 분노가 고개를 쳐든다. 그는 마치 악마가 그를 홀리기라도 한 듯이 온갖 '부끄러워해야 할 만한'생각에 잠기고 있는 자기 자신 을 문득 의식한다. 그는 때때로 오딘초바 부인에게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그녀 얼굴에도 뭔 가 색다른 빛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 아마도...어쩌면...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럴 때면 그는 언제나 발을 구르거나 이를 부드득 갈거나 주먹을 불끈 쥐면 자신을 위협하려 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 바자로프가 전혀 잘못 상상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오딘초바 부인 의 상상력에 강한 자극을 주었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그녀로 하여금 그에 대해 수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녀는 그가 없다고 해서 지루해하지만은 않았고 또 내내 그를 기다리는 것만도 아니었으나, 그가 나타나면 갑자기 활기를 띠는 것이었다. 그녀 는 자진해서 그와 마주앉아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그녀를 성내게 하고 그녀의 취 미나 우아한 습관을 헐뜯을 때에도 그러했다. 그녀는 마치 그를 시험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 의 심리도 분석하고 싶어하는 듯했다. 어느 날 그는 그녀와 뜰을 산책하다가 갑자기 퉁명스럽게 가까운 시일 내에 시골 자기 아 버지한테로 떠날 생각이라고 말했다...그녀는 마치 뭔가 날카로운 것으로 자기 심장을 찔리 기라도 한 것처럼 파리해졌는데 그 아픔은 그녀도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로 지독했고, 그 뒤 로 오랫동안 대체 이것이 뭘 의미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을 정도였다. 바자로프는 그 녀의 반응을 떠보려고 자신의 생각을 그녀에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 번도 '음모를 꾸미는' 따위의 일은 해보지 않았다. 그날 아침에 그는 아버지의 토지 관리인으로 있는, 전 에 자기를 키워주었던 치모페이치와 만났던 것이다. 이 치모페이치는 마른 체격에 행동이 꽤 기민한 작달만한 노인으로, 색이 바랜 노란 머리에 세파에 찌든 듯한 불그레한 얼굴을 하고 쪼그라든 두 눈에는 눈물이 찔끔 괴어 있었다. 그는 잿빛으로 바랜 파란색의 두꺼운 나사로 지은 짤막한 외투를 입고 가죽띠를 매고 타르를 칠한 장화를 신고는 바자로프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어아,할아범, 잘 있었소"하고 바자로프는 소리쳤다. "안녕하셨습니까, 예브게니 바실리예 비치 도련님"노인은 입을 열고 기쁜 듯이 웃었으므로 그의 얼굴은 온통 주름투성이가 되었 다. "무슨 일로 오셨소? 날 데리러 왔나요?" "천만의 말씀을, 도련님, 어떻게 그건 짓을"하고 치모페이티는 떠듬떠듬 말을 꺼냈다.(그는 집을 떠날 때 주인으로부터 받은 엄한 분부를 생 각해낸 것이다) "나라의 분부로 읍에 나왔다가 도련님 소식을 듣고서 도중에 잠시 들른 거 죠. 도련님이 보고 싶어져서...그렇지 않다면 뭣 때문에 이렇게 폐를 끼치겠습니까." "거짓말 하면 안 돼요."하고 바자로프는 말했다. "아니, 여기가 읍으로 나가는 길이란 말이오?" 치모 페이치는 주저하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안녕하신가?" "덕택으로" "어머님께서도?" "어리나 불라시예브나께서도 하나님 의 은총으로" "나를 퍽 기다리시겠지?" 노인은 그 작은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아아, 예브 게니 바실리예비치 도련님, 어떻게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맹세합니다만, 도련님, 두 분을 뵐 적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응, 좋아, 좋아요. 너무 과장해서 말하지는 말아요, 곧 돌아갈 테니, 그렇게 말씀드려줘요""알겠습니다"하고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면서 치모페이치가 대답했다. 저택으로 나가자 그는 두 손으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문 옆에 세워 두었던 초라한 사륜마차에 기어오르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읍으로 나가는 방향 은 아니었다. 바로 그날 밤 오딘초바 부인은 자기 방에서 바자로프와 앉아 있었다. 아르카디는 넓은 방 안을 왔다갔다하면서 카샤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었다. 늙은 공작 따님은 이층 자기 방으 로 가버렸다. 그녀는 대체로 손님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이러 한 바보 같은 풋내기'들은 더욱 참을 수 없어했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내내 뿌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자기 방에 돌아가서는 몸종에게 이유 없이 화를 벌컥벌컥 내어 그 때문 에 머리 위의 모자가 머리털과 함께 튀어오를 정도였다. 오딘초바 부인은 이런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어째서 당신은 여기를 떠나려고 하시는 거예요?"하고 그녀는 말을 꺼냈다. "그럼 당신의 약속은?" 바자로프는 깜짝 놀랐다. "무슨?" "잊으셨나요? 내게 화학 강의를 해 주신다고 했었잖아요."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더 이상 시 간을 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펠루즈와 프레미(두 사람 모두 프랑스 화학자)가 쓴 <화학개론>을 읽으시면 됩니다. 좋은 책이고 알기 쉽게 쓰여 있습니다. 그 책 속에 필요한 것이 다 있을 겁니다." "하지만 기억학 계시는지요? 책 같은 것으로는 뭐라셨더라...어쨌든 그것을 대신할수 없다고 내게 똑 똑히 말씀하셨잖아요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는 잊었지만, 내가 말하려는 뜻은 아시겠지요... 기억하고 계시나요?"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고 바자로프는 거듭 말했다. "왜 떠나시는 거 예요?" 하고 음성을 낮추어 오딘초바 부인이 물었다. 그는 그녀를 흘끗 보았다. 그녀는 안락 의자의 등에다 머리를 기대고 팔꿈치까지 드러난 팔을 가슴에 얹고 있었다. 그녀는 조각 무 늬의 종이갓을 씌운 단 하나뿐인 램프 빛을 받고 있었는데 여느때보다 창백해 보였다. 품이 넓은 흰옷은 그 부드러운 주름으로 그녀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고 포갠 발끝은 좀 드러나 있 었다. "그럼, 왜 남아 있어야 합니까?" 하고 바자로프가 대답했다. 오딘초바 부인은 머리를 약간 돌렸다. "어째서 왜라는 거예요?" 우리집은 즐겁지가 못하 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잖으면 여기에는 당신과 정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나는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도 나는 당신의 그 말을 믿지 않아요. 그 것이 진심일 리가 없어요." 바라로프는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어 째서 잠자코 계시는 거예요?"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본래 인간 따위는 헤어진다고 해 서 서운해할 가치가 전혀없는 겁니다. 하물며 저 같은 것은 말입니다." "그건 어째서지 요?" "저는 실리적이고 멋이라곤 없는 인간입니다. 대화를 재미있게 이끌어갈 재간도 없고 요." "지나친 겸손이시군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전 그런 건 할줄 모릅니다. 생활의 우 아한면, 당신이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는 그 면은 제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아실텐데요?" "좋도록 생각하세요. 하지만 당신이 가버리면 나는 따분해질거예요." "아르카 디가 남아 있는데도요?"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오딘초바 부인은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나는 당신이 보고 싶어질 거예요"하고 그녀는 되뇌었다. "정말 입니까? 하지만 어찌 됐 든 당신이 저를 보고 싶어하는 것도 그렇게 오래가지 않을 겁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것은 당신의 질서가 깨졌을때에만 따분하다고 당신 자신이 제게 말 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생활을 아주 틀림없이 정확하게 설계하고 계시니까 거 기엔 지루함도, 우울함도...어떠한 혼란스러운 감정도 끼여들 여지가 없을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내가...결국 내가 자신의 생활을 그토록 틀림없이 바르게 설계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게예요?" "물론입니다. 이를테면 말입니다, 이제 몇분이 지나면 열 시를 치겠지 요. 그럼 저는 당신이 곧 저를 내쫓으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할수 있죠." "아니예요, 내쫓지 않겠어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남아 있어도 좋아요. 저 창문을 좀 열어 주시겠어요...어쩐 지 가슴이 답답해서." 바자로프는 일어나서 창문을 밀었다. 창문을 약간 밀었는데 활짝 열려버렸다... 이렇게 손 쉽게 창문이 열릴 줄은 미처몰랐다. 그래서 그의 손이 조금 떨렸다. 어둡고 부드러운 밤이 거의 새까만 하늘과 바스락거리며 가볍게 흔들리는 나무들과 바깥 공기의 신선한 냄새와 함 께 방안을 기웃거렸다. "커튼을 내리고 앉아 주세요" 하고 오딘초바 부인은 말했다. "당신이 떠나기전에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자신에 대한 것은 무엇이라도 좋으니 이야기해 주 세요. 당신은 한 번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저는 유익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안나세르게예브나." "당신은 너무 겸손하세요... 그러 나 나는 당신에 대해서, 당신의 가족에 대해서, 당신으로 하여금 우리를 버리고 떠나게 하신 당신의 아버지에 대한 것들을 알고 싶어요." '왜 이 여자가 이런 말을 하는 걸까?' 하고 바 자로프는 생각했다. "그런 건 조금도 흥미 있는 것이 못 됩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특히 당신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한태생이라..." "그럼, 나는 당신이 생각하시 기에 귀족이란 말씀이에요?" 바자로프는 눈을 들어 오딘초바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하고 그는 거만할 정도로 딱 짤라 말했다. 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 은 나를 아직 잘 모시는군요. 하긴 모든 인간은 서로 비슷비슷해서 따로 연구할 가치가 없 다고 생각하지만 말예요. 난 언젠가는 내 생활을 당신에게 이야기하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먼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세요." "저는 당신을 잘 모릅니다"하고 바자로프는 되뇌었 다. "어쩌면 당신 말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실제로 모든 인간은 수수께끼인지도 모릅 니다. 이를테면 당신만 해도 사람들과의 교제를 피하고 그것을 고민하고 있으면서도 사람들 과의 교제를 피하고 그것을 고민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집에 학생을 둘씩이나 초대하셨습 니다. 어째서 당신은 그만한 재능과 미모를 가지셨는데도 이런 시골에 살고 계시는 겁니 까?" "뭐라고요? 뭐라고 하셨어요?"하고 오딘초바 부인은 생기 있는 목소리로 끼여들었다. "그만한... 미모라고요?" 바자로프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째서 당 신이 시골에 계시는가, 그 이 유를 정확히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모 르시는 군요...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그 이유를 생각하고 계시겠지요?" "그렇습니다...제가 생각하기에 당신이 변함없이 한곳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자신을 너무 편한 것에만 길들였기 때문입니다. 안락이라든가 쾌락만을 너무 좋아해서 그 밖의 모든 것에는 전혀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오딘초바 부인은 또다시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사물에 열중할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전혀 믿지 못하시는군요?" 바자로프는 눈을 치켜 뜨고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그저 호기심으로 그러하실 겁니다. 다른 이유는 없을 겁니다." "정말이예요? 그렇다면 나와 당신이 서로 마음이 맞는 이유를 지금에야 알았어요. 당신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군요." "마음이 맞는다..." 하고 바자로프는 맥빠진 소리로 말했다. "그래요!...저런, 당신이 떠나실 거라는 사실을 아주 잊고 있었군요." 바자로프는 일어섰다. 램프는 희미해져 가고 있었는데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외딴방 한복판을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다. 어쩌다가 흔들리는 커튼너 머로 초조한 듯 불고 있는 심야의 상쾌한 공기가 흘러들고 밤의 신비로운 속삭임이 들려오 고 있었다. 오딘초바 부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으나 맘 모를 흥분은 그는 불현 듯 자기가 젊고 그지 없이 아름다운 여자와 마주 앉아 있다는 걸 느꼈다.... "당신은 어디로 가실 생각 이에요?" 하고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 렇다면 당신은 나를 조용하면서도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종한 여자라고 생각하시는거예요?" 하고 그녀는 창문에서 눈을 떼지 않고 똑같은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 그렇지만 난 자 신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나는 불행한 여자예요." "당신이 불행하다고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설마 당신은 그 근거 없는 소문에 기분을 상 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오딘초바 부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자기의 말을 그런식으 로 받아들인 것에 화가 났다. "그런 소문 같은 건 내겐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브게니 바실리 예비치. 그런것에 신경 쓰기엔 난 너무나 자존심이 강한여자예요. 내가 불쌍하다는 건 다른 뜻이 아니에요... 난 살고 십지 않은 거예요. 당신은 나를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계시는 군요. 레이스 옷으로 온통 몸을 감싸고 비로드 안락 의자에 앉아 있는 '귀부인' 이 저런 말 을 하고 있구나하고 당신은 이상스럽게 생각하고 계시겠지요. 난 숨길 생각은 없어요. 당신 말씀대로 편한 것을 좋아 하지만, 한편으론 그다지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없는 거예요. 이 모 순을 좋으실 대로 해석하세요. 하지만 이런건 모두 당신의 견지로는 로맨티시즘이겠지요." 바자로프는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은 건강하고 독립할 능력도 있고 부자입니다.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뭘 더 하고 싶다는 겁니까?" "뭘 하고 싶냐고요?" 하고 오딘초바 부인은 되뇌며 한숨을 내쉬었 다. "난 무척 지쳐 있고 이젠 나이도 먹었어요"하고 자신의 드러난 팔에 소매 없는 짧은 외 투를 살짝 덮으며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녀의 눈이 바자로프의 눈과 마주치자 그녀는 약간 붉혔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무척 많은 추억이 있어요. 페테르스부르크에 서의 생활,넉넉한 살림, 가난, 아버지의 죽음, 결혼생활, 그리고 늘 하게 마련인 외국 여행... 등 추억은 많지만 모두가 시시한 것들 뿐이에요. 그리고 앞날에는, 내 앞날에는 멀고먼 길이 있지만 목적은 없어요... 난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어요,. "당신은 그토록 좌절에 빠져봤으면 하는 거예요..." "당신은 사랑을 하고 싶은 겁니다." 하 고 바자로보프가 말을 가로챘다. "그러나 당신은 사랑 같은 하실 수 벗는 겁니다. 그런 점에 서 당신은 불행한 겁니다." 오딘초바 부인은 자신의 외투의 소맷자락을 여기저기 들여다보 기 시작했다. "내가 사랑을 하지 못할 거라고요?" 하고 그녀는 중얼 거리 듯이 말했다. "아 마 안 될 겁니다! 하지만 제가 불행하다고 한 것은 부당한 말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런짓을 한사람이야 말로동정 받아야 마땅할것입니다." "어떤짓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사랑하는 것 말입니다." "들어서 알지요" 하고 바자로프는 성난 음성으로 대꾸했다. '당신은 교태를 부리 고 있는 거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당신은 할 일이 없으니까 심심해서 나를 애타게하고 있 는 거다. 그런데도 나는... 사실 그의 시장은 당장이라도 찢어질 것만 같았다. "게다가 당신은 욕심 이 너무 지나친지도 모릅니다" 하고 몸을 앞으로 굽혀 안락의자에 장식된 술을 만지작거리 며 그는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난 전부를 얻지 못하면 차라리 아무것도 원하지 않 아요. 목숨에는 목숨을 거는거예요. 만일 당신이 내 목숨을 빼앗으면 당신도 당신 목숨을 내 주셔야 해요. 그렇게 되면 그땐 후회할것도 없고 뒤로 물러서는 일도 없어요. 그렇지 못하면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아요." "그렇습니다."하고 바자로프는 대꾸했다."그런 공평 한 조건이군요. 그러나 제가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어째서 당신이 지금까지... 원하시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셨나 하는 겁니다." "그럼 당신은 어떤 것에든 간에 몰입하는 일이 쉬운 일이 라고 생각하시나요?" "너무 깊이 생각하거나 기회만을 기다리거나 자기 자신에게 값을 매기 거나, 말하자면 자존심을 너무 내세우게되면 그건 쉬운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아무것도 개의 치 않고 자신을 내맡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자신을 존중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만일 내가 아무 가치도 없다면 나 자신을 맡 겨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건 뭐 제가 알 바 아닙니다. 자신의 가치가 어떠니 하고 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가장 긴요한 것은 나 자신을 바칠수가 있는냐하는 겁니다." 오딘초바 부인은 안락의자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당신 말씀을 듣고 있으니" 하고 그녀 는 말했다. "마치 그런걸 모두 경험하신 분 같군요." "아니에요, 그걸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 입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건 제전공이 아닙니다." "그럼 당신이라면 당신 자신을 선뜻 바칠수가 있겠어요?" "그건 모릅겠습니다. 자만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오딘초바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바자로프도 잠자코 있었다. 피아노소리가 응접실로부터 두사람이 있는 곳까지 들려 왔다. "어째서 카샤는 이렇게 늦은 밤에 피아노를 치고 있는 걸까?" 하고 오딘초바 부인이 말했다. 바자로프는 일어섰다. "그렇군요, 정말 늦었군요, 당신도 쉬셔야죠." "잠깐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두르시는 거 예요... 난 당신에게 한마디만 더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떤 말씀입니까?" "잠깐만 기다리세 요"하고 오딘초바 부인은 속삭였다. 그녀의 눈은 바자로프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그를 주의 깊이 살펴보려 하는 듯했다. 그는 방안을 한바퀴 돌더니 갑자기 그녀에게로 다가가서 재빨리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인사하고는 상대가 비명을 지를 정도로 세게 그녀의 손을 쥐었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는 맞붙어 버린 것 같은 손가락을 입에다 갖다대 고 호호 불더니, 갑자기 발작적인 안락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재빨리 문쪽으로 다가갔다. 마 치 바자로프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하는 것 처럼... 그때 하녀가 은쟁반에 목이 긴 유리병을 담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오딘초바 부인은 멈춰 서서 하녀에게 나가라고 이르고는 다 시 의자에 앉아무슨 생각인가에 잠기는 것이었다. 그녀의 머리는 헝클어져서 검은 뱀처럼 어깨위에 늘어져 있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방에는 램프가 켜져 있었 다. 한참을 그녀는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는데, 다만 가끔씩 밤의 한기를 느끼고 드러난 팔을 손가락으로 문지를 뿐이었다. 한편 바자로프는 두어시간쯤 지나서 밤이슬에 젖은 장화를 신고 머리는 헝클어진 채 우울 한 표정으로 자기 침실로 돌아왔다. 거기에는 아르카디가 목밑까지 달린 단추가 달린 프록 코트를 입고 책을 손에 든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자네 아직 안자고 있었는가?" 하고 하고 그는 괴로운 듯이 말했다. "자네는 오늘 꽤 늦게 까지 안나세르게예브나와 함께 있더 군" 하고 친구의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아르카디가 말했다. "그랬어. 나는 줄곧 그분과 같이 있었는데, 그 동안 자네는 캬샤와 피아노를 치고 있더군." "나는 치지 않았어..." 하고 아르카디는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으나, 친구 앞에 는 울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18 다음날 오딘초바 부인이 차를 마시러 나타났을 때, 바자로프는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자기 찻잔만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마 치 비자로프가 그렇게 시키기라도 한 듯이 그가 있는 쪽으로 고쳐 앉았는데, 그녀의 얼굴은 하룻밤 사이에 좀 창백해진 듯이 보였다. 그녀는 잠깐 동안 앉아 있다가 자기방으로 돌아 갔고 겨우 점심 식사에나 나타났을 뿐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어서 산책을 할수 가 없었다. 모두가 응접실에 모였다. 아르카디는 최신간의 잡지를 읽고 있었다. 늙은 공작 따님은 늘 그랬듯이, 그가 무슨 버릇없는 짓을 계획하고라도 있다는 듯이, 처음엔 놀라는 표정을 보이 다가 이윽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지만 그는 그쪽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예브게니 바실 리예비치"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불렀다. "내 방으로 가시지요...당신에게 물어볼 게 있어 요...당신이 어제 책이름을 가르쳐주셨죠?" 그녀는 일어나서 문쪽으로 다가갔다. 늙은 공작 따님은 '잘한다,저러니 내가 놀랄수밖에'라는 듯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리고 다 시 아르카디 쪽으로 가만히 눈을 주었지만, 그는 옆에 걸터앉은 카샤와 서로 눈짓을 하며 계속 소리 높여 책을 읽어나갈 뿐이었다. 오딘초바 부인은 빠른 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늙은 공작 따님은 '잘한다, 저러니 내가 놀랄 수밖에'라는 듯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리고 다시 아르카디 쪽으로 가 만히 눈을 주었지만, 그는 옆에 걸터앉은 카샤와 서로 눈짓을 하며 계속 소리 높여 책을 읽 어나갈 뿐이었다. 오딘초바 부인은 빠른 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바자로프는 고개를 숙인채 다만 자기 앞을 미끄러져가는 가는 비단 옷 스치는 소리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이면 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오딘초바 부인은 어젯밤에 앉았던 그 안락의자에 앉았고 비자로 프 역시 어젯밤의 그 자리를 잡았다. "그래, 그 책이름이 뭐라고 하셨지요?" 하고 잠자코 있던 그녀가 말을 꺼냈다. "펠루즈와 프레미가 같이 쓴 <화학개론>입니다"하고 바자로프가 대답했다. "그리고 또 하나, 가노가 지은<실험 물리학의 초보>도 당신에게 권합니다. 그 책에는 삽화가 무척 깨끗하게 되어 있 고 대체로 그책은..." 오딘초바 부인은 악수를 청했다.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미안해요. 내 가 당신을 이곳으로 부른 것은 책을 권해달라고 하기 위해서가 아녜요. 어젯밤의 그 이야기 를 다시 한번 해보고 싶어서예요. 당신이 그렇게 갑자기 나가셨기 때문에...그런데 이런 이야 기가 지루하진 않으세요?" "워든지 말씀하십시오, 안나 세르게예브나. 그런데 우리가 어제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요?" 오딘초바 부인은 비자로프에게 눈을 흘겼다. "우리는 아마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거예 요. 난 당신에게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행복'이란 말을 꺼냈으니 답변좀 해주세요. 어째서 우리들이 음악이라든가 아름다운 저녁이라든가, 뜻이 맞는 동지들끼리 이 야기를 즐기고 있을 때 마저도 그런 것들이 모두 현실적인 행복과는 다른,우리들 자신이 소 유하고 있는 그런 행복과는 다른, 어딘지 딴세상의 어딘가에 있는 행복을 암시 받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니 어째서 일까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혹 당신도 이 같은 느낌을 가져본 적 이 있으신가요?" "당신은 '행복은 우리가 살고있는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속담 을 아실테지요."하고 바자로프가 대꾸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만족하고 있지 않다고 어제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제 머릿속엔 그런 생각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런걸 아마 우습게 생각하시겠지요?" "천만에요, 그저 그런 건 제 머릿속엔 떠오르지 않을 뿐입니다." "어째섭니까? 전 당신이 말씀하시는 뜻을 모르겠습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난 오래 전부터 당신과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워보고 싶었어요. 이런 말은 할 필요도 없지만,당신도 당신 자신이 결코 평범한 분은 아니 라는 걸 잘 아실 거예요.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예요. 당신은 무얼하려 하고 있나요? 어떤 앞 날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나요? 어쭈어 보겠는데, 당신은 어떤 희망을 이루고자하는 거예요? 어떤 길로 나서려는 거예요? 당신은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한 마디로 말해서 당신 은 누구죠? 당신은 무얼하는 사람이죠?" "사람을 놀라게 하시는 군요, 안나 세르게예브나. 아시다시피 전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있 는 학생이며, 제가 어떤 인간이냐하는 것은..." "그래요, 당신은 어떤 사람이죠?" "전에 말씀 드린대로 저는 미래의 시골의사입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초조한 눈치였다. "어째서 당 신은 그런 말씀을 하시는거예요. 당신 자신도 속으로는 그걸 믿지 않으시겠죠. 아르카디라면 그런 대답을 할수있겠지만 당신은 그럴 수 없어요." "그런데 아르카디는 왜..." "그만둬요! 당신은 그런 평범한 일에 만족하실 리가 없어요. 또 당신 자신에겐 의학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건 누구예요. 그토록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시골의사라니! 당신은 나를 조금도 믿지않기 때문에 나를 떨쳐버리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러나 정말,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나라면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도 당신처럼 가 난했었고 자존심도 강했을 뿐만 아니라 당신과 비슷한 시련을 겪어 왔다고 할 수 있을 거예 요." "그것 참 잘된일입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 하지만 미안합니다...저는 본래 말재주도 없고 게다가 당신과 저 사이엔 큰 거리가..." "무슨 거리가 있다는 거예요? 당신은 또 내가 귀족 부인이라고 말씀하시려는 거예요? 이젠 제발 그런 생각은 하지마세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 치. 이미 당신께 증명해 보였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러나 그뿐 아닙니다."하고 바자로프가 말을 가로챘다. "미래에 대해 너무 깊이 이야기하거나 생각하거나 하는건 그만 두는게 좋습 니다. 그런건 대부분이 우리들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모르겠지만, 그 렇지 않더라도 미리부터 이러니저러니 지껄여대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것입니다." "당 신은 친구끼리의 친밀한 대화를 '지껄여댄다'고 말씀하시는 군요...그렇잖으면 내가 여자라서 당신이 신뢰할 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생각하시는지도 모르지요. 당신은 우리 여자들을 너무 얕보고 계세요!" "당신을 얕보지는 않습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 당신은 그걸 잘 아실텐데요." "아녜요. 나 는 아무것도 몰라요...당신이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싫어하신다는 것은 알겠지만, 지금 당신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요!" 하고 바자로프는 되받았다. "마치 내가 무슨 국가나 사회라도 되는 것 같군요! 어쨌든 그건 전혀 호기심을 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항상 큰소리로 털어놓는 사 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마음에 있는 생각을 털어 놓아선 안되는 이유를 난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하실 수 있습니까? 하고 바자로프는 물었다. "할수 있어요"하고 잠시 주저하다가 안나 세르세예브나가 대답했다. "당신은 나보다 행복하 군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의아하다는 등이 그를 바라보았다. "좋으실 대로 해석하세요" 하고 그녀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들이 서 로 마음이 맞는다는 건 확실한 사실이고 앞으로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고,어쩐지 그 런 기분이 들어요. 난 당신의 그런점이 뭐랄까, 당신의 긴장감이나 자제심 같은 것은 조만간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어요.""그렇다면 당신은 제 자제심을...당신 말씀대로라면... 긴장간을 눈치채셨다는 겁니까?" "그래요" 비자로프는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갔다. "그래서 당신은 이 긴장간의 원인을 알고 싶으시다는거군요? 당신은 제 가슴속에 무슨 변화가 일어 나고 있는지를 모르셨다는 겁니까?" "그래요" 하고 오딘초바 부인은 왠지 자신도 납득이 가 지 않는 듯한 놀란 심정으로 거듭 대답했다. "그러면 화를 내지 않으시겠습니까?" "안 내겠어요." "안내시겠다고요?"비자로프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서 있었다. "그럼 말씀 드리지요. 전 당신을 어리석으리 만큼 미칠 지경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그것으로 당신은 목적 달성을 강요하셨군요." 오딘 초바 부인은 두손을 앞으로 내밀었지만, 비자로프는 유리 창에다 이마를 갖다대었다. 그는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그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젊은이다운 수줍음에서 오는 전율도 아니었고, 첫 고백의 달콤한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강렬하고 육중하며 적개심과도 흡사한, 거의 그것 에 가까운 정열이 몸부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렬하고 육중하며, 적개심과도 흡사 한 정열이었다...오딘초바 부인은 한편으로는 그가 무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엽게도 여겨 졌다.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하고 그녀가 불렀는데,그 음성에는 무의식적인 다정함이 깃들여 있었다. 그는 재빨리 돌아서서 그녀를 뚫어질 듯 바라보더니 ...그녀의 두 손을 잡고 느닷없 이 그녀를 자기 가슴으로 끌여 당겼다. 그녀는 그의 포옹으로부터 곧 벗어나려 하지 않았 지만, 잠시 후 그녀는 한쪽구석에 서서 바자로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달려들 려고 했다.... "당신은 나를 잘못 아셨어요."하고 그녀는 놀란 음성으로 재빨리 속삭였다. 그 가 한 발짝이라도 내디뎠으면 그녀는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바자로프는 입술을 깨 물고 밖으로 나갔다. 30분 후 하녀가 안나 세르게예브나에게 바자로프의 쪽지를 건네 주었 다. 거기에는 "나는 오늘 떠나야 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내일까지 남아도 좋겠습니까?" 하 는 단 한줄의 글이 적혀 있었다. "어째서 떠나려는 거예요? 나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셨던 거예요"라고 안나 세르게예브 나는 답장을 썼으나 속으로는 '나도 자신을 너무 몰랐어'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점심때까 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줄곧 두 손으로 뒷짐을 진 채 방안을 왔다 갔다 서성거리다가 이 따금씩 창가에 서기도하고 또 거울 앞에 멈춰서기도 했다. 그리고 천천히 물수건으로 목을 닦았다. 뜨거운 키스 자국이 남아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무엇 때문에 자기는 바자로프에게 사랑의 고백 을, 그의 말을 빌리자면 목적 달성을 '강요'했을까, 또 자기는 정말 아무것도 상상하지 못 하고 있었던 것일까? 하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잘못했어"하고 그녀는 소리내 어 말했다. "하지만 전혀 예상 밖이었는걸."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문득 바자로프 가 자기한테 덤벼들 때의 그 짐승 같은 얼굴이 떠오르자 이내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이었다. "차라리?"하고 그녀는 갑자기 이렇게 말하고 멈춰 서서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녀 는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뒤로 젖힌 머리, 반쯤 감은 듯한 눈과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입술, 이 모든 것은 그녀 자신도 놀랄 만한 그 무엇인가를 그 녀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아니야'하고 그녀는 마침내 마음을 굳게 다졌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그런 짓은 함부로 해선 안돼. 역시 이 세상에 안정된 삶보다 더 좋은 것은 없어.' 그녀의 평온은 흔들 리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왠지 울적해져서 까닭 없이 눈물까지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모욕 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가 모욕을 당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자 기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막연한 감정, 삶이 흘러가 버린다는 의식, 신기한 것에 대한 욕구 등에 휩싸여 그녀는 자신을 강제로 어느 선까지 이르게 하고 그 선 너머를 엿보기도 했지만 (거기서 그녀가 본 것은 심연이 아니라 공허) 형체가 없는 혼돈이 었다. 19 오딘초바 부인이 아무리 자기 감정을 억제하고 모든 편견으로부터 초월해 있었다 할지라 도, 점심 식사 때가 되어 식당에 나타났을 때에는 서먹서먹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식사는 제법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포르피리 플라토니치가 찾아와 여러 가지 우스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방금 시내에서 돌아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의 말에 따르면 현지사 부르 달루는 자기 부하 관리들에게 박차를 달도록 명령했는데, 그것은 그가 부하들 을 어디론가 파견시킬 경우에 말에 박차를 달면 더 빨리 달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르카디는 카샤와 나직이 속삭이며 늙은 공작 따님을 친절하게 거들어주고 있었다. 바자로 프는 우울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오딘초바 부인은 두어번 (아주 똑바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못 엄숙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 하나하나가 경멸하는 듯한 결의가 엿보였으므로, 그녀는 '안돼, 안돼, 안돼'하고 생각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뜰로 나갔 는데, 바자로프가 자기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몇 걸음 옆으로 비켜 멈춰 섰다. 그는 그녀에게로 다가갔으나 여전히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당신에게 용서를 빌어야만 합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 당신으 저 때문에 화가 나셨 겠지요?" "아녜요, 난 화나지 않았어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하고 오딘초바 부인은 말했다. "단 지 난 슬픔에 잠겼을 뿐이예요." "그러시다면 더욱 곤란합니다. 어쨌든 저는 충분한 벌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입장은, 당신도 틀림없이 인정하실 테지만, 여간 어리석은 게 아닙니다. 당신은 제게 '왜 떠나시느 냐?'고 쓰셨지만 저는 더 이상 여기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또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전 내일 여길 떠날 겁니다."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어째서 당신은..." "왜 떠나느냐는 말씀이지요?" "아녜요, 난 그런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니예요."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 어차피 조만간 이렇게 되고 말 일 입니다. 그래서 저는 떠나는 겁니다. 제가 여기 남아 있을 수 있는 조건은 단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조건은 결코 이루어질 리가 없습니다. 무례한 말씀입니다만 당신은 저를 사랑하고 있지도 않을 테고, 또 앞으로도 결코 사랑해주지 않으실 테니까요." 바자로프 의 눈이 불현 듯 그의 눈썹 밑에서 빛났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난 이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다'라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럼, 안녕." 바자로프는 그녀의 생각을 짐작한 듯 이렇게 말하고 저택 쪽으로 향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그러고는 카샤를 자기 방으로 불러 그녀를 붙들고 밤늦게까지 곁에 있도록 했다. 그녀는 카드놀이도 하려 들지 않고 내내 웃고만 있었 는데, 그것은 그녀의 새파랗게 질린 당황한 듯한 얼굴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르카디는 이상하게 생각되어 젊은이들이 흔히 그러듯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즉 이 모든 것이 무엇 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혼자서 줄곧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자로프는 자기 방에만 틀어 박혀 있었는데 차를 드는 시간이 되자 되돌아왔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무언가 정다운 말 을 건네고 싶었으나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그때 뜻하지 않은 사건이 그녀를 그러한 당혹감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하인이 시트니 코프의 도착을 알린 것이다. 이 젊은 진보주의자가 방으로 뛰어들어왔을 때의 메추리 같은 모양은 말로써 표현하기 어 려울 정도였다. 겨우 조금 안면이 있는 정도라 여태까지 한 번도 초대받은 적이 없는 부인 댁이지만, 정보에 의하면 자기와 친밀한 저 똑똑한 친구들이 손님으로 가 있다가 본디 뻔뻔 스러운 그의 배짱으로 그녀가 사는 마을을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미리 외어둔 변명이나 인사말 대신 예브도크시아 쿠크신의 안부를 전하기 위해 왔다느니, 아르카니콜라예비치도 항상 그녀를 크게 찬양하고 있다느니 하는 엉뚱한 소리만 우물우물 지껄여댔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더듬거리고 침착성을 잃어 하마 터면 엉겁결에 그만 자기 모자를 깔고 앉을 뻔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쫓아내려 들지 않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도 그를 이모와 동생에게 소개까지 해주었으므로 그는 이윽고 원 기를 되찾아 제법 마음 놓고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시시한 이야기도 때로는 생활에 유익할 수가 있다. 그것은 지나치게 팽팽한 화시위를 늦추어 주고, 지나치게 자만심이 강하거나 혹 은 자기를 아주 잊어버린 상태에서 제정신을 일깨워주어 시시한 것들이나 그러한 정신상태 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시트니코프의 도착과 더불어 모든 것이 왠 지 더 둔하고 텅 비고 (단순해진 것 같았다). 모두들 저녁을 배불리 먹고 보통 때보다 30분 이나 일찍 흩어져 잠자리에 들었을 정도였다. "이번엔 내가 전에 자네에게 들었던 똑같은 말을 자네에게 해줄 차례로군." 하고 옷을 벗 고 누운 바자로프에게 아르카디가 자리에 누운 체로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언젠가 네게 '어째서 자네는 그렇게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건가? 필시 무슨 신성한 의무라고 마 친게 로군?' 하고 물은 적이 있었지?" 이 두 젊은이 사이에는 언제부터인가 꼬집어 말할 수 는 없지만 흉허물없이 말은 하면서 도 은근히 빈정거리는 듯한 경향이 엿보이게 되었는데, 이것은 언제나 내심의 불만이라든가 입밖에 내지 못할 의문이 있을 때 그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표시였던 것이다. "나는 내일 아버지한테 가기로 했어"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아르카디는 몸을 조금 일으켜 팔꿈치를 괴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웬지 기쁜 마음이 들었다. "아아"하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우울한 건가?" 바자로프는 하품을 했 다.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면 쉬 늙는 거야" "그래,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뭐라고 하던 가?"하고 아르카디는 잠자코 있지 못하고 이렇게 물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대체 어쨌 다는 건가?" "내가 궁금한 것은 과연 그분이 자네를 놓아주겠는가 하는 거야." "나는 그 여 자에게 고용되어 있는 것이 아니잖나?" 아르카디는 생각에 잠겼고 바자로프는 잠자리로 들 어가 벽을 향해 누웠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몇분이 지났다. "예브게니"하고 느닷없이 아르카디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응?" "나도 내일 자네와 함께 가 겠네." 바자로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야"하고 아르카디는 계속 말했다. "호홀로프스키 이민촌까지 함께 가서, 거기서 자네는 페도트한테 말을 빌리는게 좋을거야. 나도 자네 집안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지만 자제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네. 자네는 나중에 다시 우리 집으로 와주겠지?" "나는 자네 집에다 짐을 놓고 왔어" 하고 돌아보지도 않고 바자로프는 대꾸했다. '이 친구는 어째서 내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지 그 이유을 왜 묻지 않는 걸까? 자기 처럼 나 역시 갑작스럽게 꺼낸 말인데' 하고 아르카디는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나는 왜 돌 아거려는 것일까? 또 이 친구는 어째서 돌아가려는 걸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자 기 자신의 물음에 만족한 대답을 찾을 수는 없었으나, 그 마음은 뭔가 자극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아주 익숙해진 이곳 생활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혼자만 남는 것도 어쩐지 이상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게로군'하고 그 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친구가 떠나고 나면 나 혼자서 어떻게 그분 앞에 얼굴을 드 러낼 수가 있겠어? 나는 결국 그분을 싫증나게 해서 내 최후의 희망마저 잃어버리게 될거 야.' 그러나 나서 그는 안나세르게예브나를 마음에 떠올리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이 아름 다운 미망인의 모습을 통하여 다른 여러 얼굴들이 차차 떠올랐다. "카샤도 가엾어"하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아르카디는 중얼거렸는데 어느 사이 배개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갑자기 머리를 뒤로 젖히며 큰 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저 바보 같은 시트니코프는 왜 나타난 거야" 바자로프는 처음에는 침대에서 약간 몸을 움직 였으나 이윽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봐, 자네 아직 바보로군. 우리에겐 시트니코프 같은 자들이 절대로 필요한 거야. 적어 도 내게는 말일세, 알겠나? 내게는 그렇게 약간 모자라는 자들일 필요하다고. 하느님이 직접 벽돌을 구울 수는 없으니 말일세..." '흠...' 하고 아르카디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야 비로소 바닥 없는 깊은 늪과 같 은 바자로프의 자존심이 순간적으로나마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래, 우리가 하느님이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는 (자네는 하느님이고, 그 바보는 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 "그렇지." 바자로프는 침울하게 말했다. "자네는 아직 아무것도 몰라." 이튿날 아르카디가 바자로프와 함께 돌아가겠다고 말했을 때, 오딘초바 부인은 그다지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긴장이 풀려 지친 듯했다. 카샤는 말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늙은 공작 따님은 숄 밑으로 가슴에 성 호를 그었는데, 아르카디가 그것을 짐작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 시트니코프는 몹시 당황해하였다. 그는 이번에 슬라브식이 아닌 현대풍의 새 복장을 하고서 방금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온 것이다. 어젯밤에 겨우 자기가 가져온 엄청난 양의 린네르로 자기에게 딸린 하 인을 깜짝 놀라게 했을 뿐인데, 갑작 두 친구가 그를 홀로 남겨두고 가버리려 하는 것이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토끼처럼 초조한 듯 이리저리 거닐다가 짐짓 점잔을 빼고 있더 니 갑자기 자기도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오딘초바 부인은 그를 붙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 포장마차는 아주 편안하니까"하고 이 불행한 젊은이는 아르카디 쪽을 바라보며 이렇 게 덧붙였다. "당신을 태워드리지요. 그렇게 하면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는 당신의 여행마차 를 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는 편이 좋겠지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당신과는 길이 전혀 다르고, 또 우리 집까지는 꽤 멀거든요."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상관없지요. 난 시간이 충 분하고 게다가 그곳에 볼일도 있거든요." "사업에 관한 일인가요?" 하고 아르카디가 물었는 데, 그것은 그가 지나치게 깔보는 말투였다. 그러나 시트니코프는 지독한 절망상태에 빠져 있었으므로 여느 때처럼 웃어대지 않았다. "보증합니다만, 기막히게 편안한 포장마차랍니다"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자리도 넉넉하고 말예요." "거절하시면 시트니코프 씨에게 실례예요"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말했다. 아르카디는 그녀를 흘긋 바라보고는 의미 심장하게 머리를 숙였다. 손님들은 아침 식사가 끝나자 곧 출발하였다. 오딘초바 부인은 손을 내밀어 바자로프와 작별 인사를 나누며 이렇 게 말했다. "또 만날 수 있겠지요, 그렇죠?" "마음이 내키신다면"하고 바자로프는 대답했다. "그럼 또 만나도록 해요." 아르카디는 앞장서서 현관으로 나가 시트니코프의 마차에 올랐다. 토지 관리인이 공손히 그가 자리에 앉는 것을 도와주었지만, 그는 그를 때려주든가 아니면 소리 내어 울고라도 싶 은 심정이었다. 바자로프는 여행마차에 올라 자리를 잡았다. 호홀로프스키 이민촌에 도착한 뒤 아르카디는 여인숙 주인 페도트가 마구를 채워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윽고 여행마차 로 다가가 여느때처럼 미소를 지으며 바자로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브게니, 나도 함께 데 려가 주게. 자네 집으로 가고 싶어졌네." "타게"하고 바자로프는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시트니코프는 힘차게 휘파람을 불며 마차바 퀴 주위를 왔다갔다하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러나 아르카디 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자기 짐을 포장마차에서 끌어내어 바자로프 옆에 자리를 잡고는 지금 까지의 길동무에게 정중히 머리를 숙인 다음. "자, 출발"하고 외쳤다. 여행마차는 서둘러 출 발했고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시트니코프는 당황하여 자기 마부쪽을 바라보니 그는 부마의 꼬리 주위에서 채찍으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때 시트니코프는 포장마차에 뛰어오르면서 지나가는 두 농부에게 "모자를 써, 이 바보 녀석아"하고 호통을 치고는 시내 쪽으로 달렸다. 그는 매우 늦게 도착했는데, 이튿날 그는 쿠크신 댁에서 '징그렇고 거만하고 버릇없는' 그 두사람을 혹독히 비난했다. 여행마차에 바자로프와 나란히 앉아 아르카디는 그의 손을 꼭 쥔채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자로프는 맞잡은 손의 의미와 이 침묵을 이해하고 또 그 의의도 인정했다. 간밤에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벌써 며칠동안 담배도 일절 피우지 않았으며,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깊숙히 눌러 쓴 학생모 밑으로 그 야윈 옆얼굴이 침울하면서도 날카롭게 보였다. "이봐 아르카디"하고 그가 마침내 말을 건넸다. "담배 한 대만 주게나..그 리고 내 혀좀 봐주게. 어떤가, 누렇게 않은가?" "누렇군"하고 아르카디는 대답했다. "응, 그래.... 과연 담배도 맛이 없군. 기계의 용수철이 풀린 거야." "자네 요즈음 정말 변해버렸어" 하고 아르카디가 말했다. "괜찮아, 좋아질거야. 단 한가지 곤란한 건 우리 어머니는 쓸데없는 걱정을 너무 많이 하 시는 분이라는 것이네. 하루에 열 번쯤 식사하고 배불뚝이로 성장하지 않으면 몹시 서운해 하시는 그런 분이야.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네. 세상 어디에도 살아보지 않은 곳이 없 고,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맛보신 분이니까. 쳇, 단배도 피울 수 없군"하고 그는 덧붙여 말 하고는 담배를 길바닥의 먼지 속에 던져 버렸다. "자네 집까지 25마장이라고 했지?"하고 아르카디가 물었다. "그래, 옳지, 여기 이 똑똑한 사람한테 물어보게." 그는 마부석에 앉아 있는 페도트의 집 머슴인 농부를 손가락으로 가리 켰다. 그러나 그 똑똑한 자는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근방의 거리는 재어 보지 않았 는데요" 하고 대답하고는 세 필의 말들 중 가운데에 있는 말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그 것은 '머리로 차는 짓', 즉 머리를 자꾸 흔들어 댔기 때문이다. "그렇지, 그래"하고 바자로프는 입을 열었다. "이봐, 아르카디, 자네에겐 교훈이 될걸세. 일 종의 유익한 실례일세. 얼마나 헛된 일인가. 인간은 누구나 한낱 실오라기에 매달려 있는 거 야. 언제 자기 발밑에 깊은 늪이 펼쳐질는지 알수 없는 노릇이야.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 여러 가지 불쾌한 일을 생각해내서는 자신의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지." "아무것도. 우린 둘 다 지독한 바보였다는 것을 솔직히 말한 것뿐일세. 뻔한 노릇 아닌가. 그러나 내가 전에 대학 부속병원에서 깨달은 것은 자신의 고통을 끈덕지게 견디어내는 자는 반드시 그 병을 이겨내고야 만다는 것일세." "난 자네의 말을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하고 아르카디가 말했다. "자네에겐 신세타령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줄로 아는데" "자네가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니, 이렇게 말해 주지. 난 손끝만큼이라도 여자의 소유가 되느니 차라리 길가에서 돌을 깨는 편이 낫다는 말 일세. 그런건 모두가"하고 바자로프는 하마터면 자기가 즐겨 쓰는 '로맨티시즘'이라는 말을 입밖에 낼 뻔하다고 꾹 참고 이렇게 말했다. "어리석은 일일세. 자네는 이제 내 말을 믿지 않겠지만, 그래도 자네에게 일러두겠네. 자 네와 나는 한동안 여자의 세계에 뛰어들어 즐거웠지만 그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역시 무더운 찬물을 뒤집어 쓴 것만큼 좋은 일이란 말이야. 사나이는 그런 시시한 일에 신경 쓸 틈이 없는 걸세. '남자는 용맹해야만 한다'는 스페인의 훌륭한 속담도 그것을 말해주고 있잖 은가. 아직 자네로서도"하고 그는 마부석에 걸터앉아 있는 농부쪽을 바라보며 이렇게 덧붙 였다. "이봐, 똑똑한 친구, 자네도 마누라가 있나?" 농부는 고개를 돌려 멍한 눈으로 두 친구를 바라보았다. "마누라 말입니꺼? 있고 말고요. 마누라 없이 어찌 지냅니꺼?" "자네, 마누라를 때리는가?" "마누라를 말입니꺼? 때와 장소 에 따라서는 그러기도 하지요. 까닭도 없이 때릴수야 있는기요." "됐어. 그럼 마누라가 자네 를 때릴 때도 있는가?" 농부는 고삐를 잡아당겼다. "엉뚱한 말씀을 다 하십니더그려, 나리. 농담도..." 농부는 틀림없이 화가 난 것 같았다. "알겠나?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 그런데 자 네와 나는 한 대 얻어맞은 거야... 결국 그건 교육받은 인간이라는 것을 뜻하지." 아르카디는 일부러 어이없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지만, 바자로프는 외면한 채 남은 여정 내내 입을 아주 다물어 버렸다. 25마장의 거리가 아르카디에게는 50마장은 족히 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윽고 약간 완만하 게 경사진 비탈에 바자로프의 양친이 살고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과 나란히, 싱싱한 자작나무가 들어찬 가운데 초가로 된 조그마한 지주 저택이 보였다. 첫 번째 농가 옆에서 모자를 쓴 두 농부가 서로 욕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이 덩치만 큰 돼지 같은 놈"하고 한 사림이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사실은 새끼 돼지만도 못한 놈이지." "그러는 네 여편네는 마귀 할멈이야, 이놈아"하고 상대방이 대꾸했다. "저 모질지 못한 태도나"하고 바자로프가 아르카디에게 말했다. "또 제법 애교있는 말투 를 보아 우리 아버지의 소작인들은 구다지 학대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자네도 알 수 있을걸 세. 저기 좀 봐, 아버지가 몸소 현관 앞 계단까지 나와 계시네. 아마 방울소리를 들으신 모 양이야. 아버지이셔, 아버지. 저 모양새로 알 수 있어. 저런. 그런데 어쩌면 저렇게 백발이 되셨을까, 늙고 초라한 사나이가 되셨어" 20 바자로프는 밖으로 몸을 내밀고, 또 아르카디는 친구의 등뒤로 목을 길게 빼고 보니 조그 마한 지주 저택의 현관 앞 계단에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날카로운 매부리코를 한, 키가 크고 야윈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그는 단추도 채우지 않은 헌 군복을 입고는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긴 파이프를 빨고 있었는데 눈이 부신 듯 실눈을 뜨고 있었다. 말들이 멈춰 섰다. "드디어 돌아왔군"하고 바자로프의 아버지가 자기 손가락 사이에서 파이프가 떨어지려 흔 들거리는데도 여전히 담배를 피워대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 내려라, 어서 내려, 한번 안아 보자꾸나." 그는 아들을 품에 끌어 안았다...그러자 "예뉴샤, 예뉴샤"하는 여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 여왔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문지방에 흰 모자를 쓰고 짤은 얼룩 저고리를 입은, 통통한 노 부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입을 벌리고 잠시 비틀거렸는데 바자로프가 받쳐주지 않았 더라면 그 자리에 쓰러질 뻔 했다. 그 순간 그녀의 통통한 팔이 그의 목에 감기고 그녀는 머리를 그의 가슴에 비벼댔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가 이따금 씩 들릴 뿐이었다. 바자로프 노인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아까보다도 더 심하게 눈을 가늘게 떴다. "자, 그 만, 그만, 아리나. 그만하면 됐어요"하고 그는 아르카디와 눈이 마주치자 이렇게 말했다. 아 르카디는 여행마차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 광경은 마부석에 앉아 있던 농부까지도 얼 굴을 돌릴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자꾸 이러면 볼썽사납잖아요. 제발 그만해둬요" "아아, 바실리 이바느이치"하고 노부인은 불완전한 발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겨우 내 아들을, 귀여운 자식 예뉴센카를..."하고 팔은 여전히 풀지 않은 채 그녀는 눈물에 젖은 주름투성이인 자기 얼굴을 바자로프에게서 떼었다. 그리고 더없이 행복한 듯이 우스꽝스러 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또다시 그의 목에 매달렸다. "사실 당신이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말했다. "하지만 방 으로 들어가도록 합시다. 예브게니와 함께. 손님도 오셨고 하니 말이야. 미안하군요"하고 그 는 아르카디 쪽을 돌아보며 이렇게 덧붙였고 나서는 가볍게 발을 끌면서 걸음을 옮겼다. "당신도 잘 아시겠지만 여자는 연약한 데가 있어서, 아니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것은..."그러 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그 역시 입술과 눈썹에 경련이 일고 있었으며, 턱도 약간 떨리고 있 었다...그러나 그는 껏을 억누르고 간신히 냉정해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르카디는 머리 를 숙였다. "들어가세요, 어머니, 정말"하고 바자로프는 말하고 기운 없이 지친 노부인을 집안으로 모 시고 들어갔다. 어머니를 안락의자에 앉히고 그는 다시 한번 얼른 아버지를 끌어안고 나서 아르카디를 소개했다. "찾아줘서 정말 기뻐요" 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말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집은 모든 게 너무나 간소하고 군대식이라로...아리나, 진정해요. 제발 부 탁이야. 정말 마음이 약하군. 손님에게 실례가 되지 않소." "여보"하고 눈물어린 채로 노부 인이 말했다. "이름도 부칭도 물어보지 못했는데..."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야"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점잖은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미안해요" 숙여 양쪽 눈에서 눈물을 닦아냈다. "실례했어요. 정말 나는 이 귀...귀...귀여운 자식을 끝내 못보고 죽는 줄로만 알았기 때문에." "그러게 그것 봐요, 기다린 보람이 있지 않나. 여보, 그렇지 않소?" 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받아서 말했다. "타냐"하고 그는 문 뒤에서 두려운 듯 이쪽을 엿보고 있던 연분홍색 무명 옷을 입은 열 세 살 쯤되어 보이는 종 아리가 드러난 소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님께 물 한 그릇 떠다드려라. 쟁반에 받쳐서 말 이야, 알겠지? 자, 그럼 여러분." 하고 그는 이렇게 구식으로 꽤 명랑하게 덧붙였다. "부디 퇴역 고참병의 서재로 모시는 영광을 베풀어주십시오." "한 번만 더 안아보자, 예뉴세치카" 하고 아리나 블라시예브나가 신음하듯 말했다. 바자로 프는 어머니 쪽으로 몸을 굽혔다. "그런데 넌 굉장한 미남이 됐구나" "아냐, 미남은 둘째치고라도"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말했다. "사나이가 됐어. 이른바 훌륭한 사나이가 됐지. 그건 그렇고, 제발 부탁인데, 아리나 블라시예브나, 당신은 어머니로서 만족을 찾았으면 귀중한 손님도 만족을 찾으시도록 해야 지." 노부인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금방 식시 준비를 시키겠어요, 바실리 이바느이 치. 부엌으로 당장 달려가서 찻주전자를 들여오도록 이르겠어요. 뭐든지 다 내오겠어요. 정 말 3년동안 저애를 만나지도 못했고 먹이지도 못한 걸요. 오늘 같은 날이 어디 흔한 날인가 요?" "그럼, 여보, 정성껏 솜씨를 내어 우리 가문에 손색이 없도록 해줘요. 그리고 여러분은 내 뒤를 따라와주시오. 참, 치모페이치도 네게 인사하러 갔었다던데, 예브게니. 그 할아범도 틀 림없이 기뻤을 게다. 어때, 매우 기뻐했겠지? 자, 내뒤를 따라와요." 그리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닳아서 찌그러진 실내화를 질질 끌면서 바삐 앞장서 갔다. 그의 조그마한 저택에는 모두 여섯 개의 작은 방이 있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그 중에 서 서재라 불리른 작은 방으로 두 친구를 안내하였다. 오랫동안 쌓인 먼지로 마치 검게 그 은 듯이 보이는, 다리가 굵은 책상이 두 창문 사이의 공간은 온통 차지하고 있었고, 그 위에 서는 서류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벽이란 벽에는 온통 터기 총, 가죽 채찍, 긴칼, 두장의 지도, 어떤 해부도, 후펠란트 (독일의 의사, 병리학자, 1762년에서 1836년)의 초상화, 검은 테 속에 들어있는 털실로 짠 성명 머리글자, 유리 속에 끼운 면허장 등이 걸려 있었다. 여기저기 움푹 패인 낡은 소파 하나가 층층으로 쌓인 두 개의 자작나무 궤 사이에 놓여 있었다. 선반 위에는 서적과 작은 상자와 박제된 새와 둥글고 가는 유리병 등이 난잡하게 흩어져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고장난 전기 기계가 놓여 있었다. "모처럼 애써 찾아주셨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입을 열었다. "우리집 살림은 꼭 야영생활 같아서..." "이제 그만해 두세요. 변명할 필요는 없으세요."하고 바자로프가 가로막았다. "기르사노프도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우리가 큰 부자도 아니고 우리 집이 궁전도 아니라는 것을 말예요. 이 친구에게 어느 방을 주느냐 하는게 문제예요." "무슨 말을 하는거냐, 예브게니. 그래도 저 사랑채에는 좋은 방이 있어요. 거기라면 편안 히 쉴 수 있을게다." "아니, 우리 집에 사랑채도 지으셨어요?" "물론이지요. 목욕탕도 딸려 있답니다."하고 치모페이치가 참견했다. "그러니 목욕탕 바로 옆방으로 하자꾸나"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장황히 덧붙였다. "지 금은 여름철이고 하니 말이다... 내가 곧 그곳으로 달려가서 일러놓아야 겠다. 그리고 치모페 이치, 네게는 물론 내 서재를 맡기겠다. 각자 자기 것을." "어때. 아르카디, 꽤 재미있는 노인이시지. 다시없는 호인이란 말이야."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자 이내 바자로프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괴짜셔. 유형은 다르지 만 말이야. 아무튼 잔소리가 좀 심하시지." "자네 어머니도 꽤 좋으신 분 같던데." 하고 아르카디가 말했다. "응, 가식이 없으시지. 우 리에게 어떤 음식을 대접하시는지 두고보게." "도련님, 오늘 도련님들이 돌아오실 줄은 생각 지도 못하고 그만 쇠고기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학 바자로프의 트렁크를 질질 끌고 들어 온 치모페이치가 말했다. "쇠고기가 없어도 괜찮아. 소매가 없으면 스치지 않아 오히려 더 편한 법이지. 가난은 죄 악이 아니라고 하지 않나." "자네 아버지는 농부를 몇이나 데리고 있는가?"하고 갑자기 아 르카디가 물었다. "소유지는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것이야. 농부는 아마 열 다섯명이라지." "모두 스물 두 명입니다."하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치모페이치가 말했다. 실내화를 질질 끄는 소 리가 들리더니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다시 나타났다. "이제 몇 분 후면 당신이 묵을 방이 완벽하게 마련될 것이요."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투로 그가 말했다.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 틀림없이 그런 이름이었지? 이 사람을 당신의 몸종으 로 써 주시요"하고 그는 함께 데리고 온 머리를 짧게 깎은 소년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덧붙 였다. 소년은 팔꿈치에 구멍이 뚫린, 소매가 긴 푸른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는데 신고 있는 장화는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이 아이 이름은 페지카라 하네. 내 아들놈은 이런말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역시 대접이 시원찮아 미안하네. 그렇지만 이 아이도 파이프에 담배를 담는 것쯤은 할 수 있네. 자네, 담 배를 피우는가?" "주로 궐련을 피웁니다."하고 아르카디가 대답했다. "정말 생각 잘했네. 나도 궐련을 피웠 으면 싶지만 이런 시골에서는 그걸 손에 넣기가 여간 힘드는게 아니라..." "푸념은 그만하세 요"하고 바자로프가 또 가로막았다. "그보다는 여기 이 소파에 앉으셔서 얼굴이나 좀 보여 주세요."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소리내어 웃으며 앉았다. 그의 얼굴은 아들과 매우 흡사했다. 다만 그의 이마가 좀더 낮고 입이 좀 넓죽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조금도 움직이 지 않는데 비해 그는 노상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의복이 꼭 째어서 겨드랑이 밑이 죄어들 기라도 하는 듯, 어깨를 손으로 더듬거나 눈을 깜박거리거나 기침을 하거나 손가락을 움직 이거나 하였다. "푸념이라니" 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말을 받았다. "이봐, 예브게니, 우리가 이런 벽촌 에 살고 있다고 해서 내가 손님에게 동정을 사려 한다고는 여기지 마라, 그와 반대로 나는 사색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시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어. 적어도 나는 곰 팡이가 슬지 않도록, 시대에 뒤지지 않도록 힘쓰고 있단 말이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아르카디의 방에 들렀다 오는 도중에 용케 찾아낸 노란색 비단 손수 건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허공으로 휘저으면서 이야기를 계속 했다. "나는 말하자면 상당한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농부들을 소각제로 대우해 주고 또 수확의 반을 받는다는 약속으로 내 토지를 그들에게 빌려주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떠들어대고 싶진 않다. 나는 다만 그것이 내 의무라고 여겼던 거야. 그 경우 다름 아닌 분별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이 나로 하여금 그 렇게 하도록 명령하는 거다. 비록 다른 지주들은 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나는 과 학이나 교육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다." "그렇군요, 그래서 집에 1855년도 (건강의 벗, 의료기관지) 이름이 있는 거로군요"하고 바 자로프가 말했다. "옛친구가 우정의 표시로 보내준 거다" 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또다시 성급히 말했다. " 그런데 우린 골상학에 대한 개념도 알고 있지" 하고 그는 덧붙였는데, 그것은 틀림없이 아르카디를 상대로 한 말이었다. 그는 선반에 세워놓은 조그마한 석고 두개골을 가리켰다. 각각의 뇌에는 번호가 매겨져 네모꼴로 분할되어 있었다. "우리는 쉔라인(독링의 의사, 1793 년에서 1864년)이나 라데마헤르 (독일의 의사, 1771년에서 1850년)를 모르지 않네." "현내에서는 아직도 라데마헤르를 신회하고 있나요?"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 바실리 이 바느이치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현내에서는... 물론 자네들이 더 잘 알고 있겠지. 우리가 자네들을 따라 갈 도리는 없네. 사실 자네들을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러 온 것이니까. 우리 세대에도 시시한 체액병리설의 호프만 (독일의 의사, 1660년에서 1742년)이나 흥분상설의 브 라운 (영국의 의사, 1735년에서 1788년)같은 분들이 꽤 우습게 여겨졌던 건 사실이지만, 그 들도 역시 한때는 명성을 떨쳤던 분들이 아닌가. 새로운 누군가가 라데마헤르를 압도하면 자네들은 그 사람을 숭배하게 되겠지만, 그 사람도 역시 20년이 지나면 마찬가지로 비웃음 을 사게 될 것이네." "안심하세요"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우리는 지금 의학 전반을 비웃고 있을 뿐만 아니 라 아무에게도 복종하지 않아요." "그건 대체 무슨 말이냐? 너는 의사가 될 생각이 아니 냐?" "그럴 생각이에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타다만 재가 좀 남아 있는, 아직도 뜨거운 파이프를 가운뎃손가락으로 눌렀다.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몰라. 논쟁은 그만두자. 실제로 나는 뭐란 말이냐? 퇴역 군의다. 그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농장주가 되어 있다. 나는 자네 할아버지 여단에 근무했었지"하고 그는 다시 아르카디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래, 나도 일생동안 온갖 고 생을 다 해왔네. 어떤 모임에도 내가 끼지 않은 적이 없었고 어느 누구도 나와 교제하지 않 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 나는, 자네가 지금 눈앞에 보고 있는 바로 이 사람은 비트겐슈타 인 공작 (제정 러시아의 원수, 남방 제2군사령관, 1768년에서 1842년)과 주코프스키(러시아 의 시인이며 러시아 낭만파의 대표자, 1783년에서 1852년)의 진찰을 해준 적도 있었지. 14일 사건 (1825년 12월 14일의 12월당의 반란)으로 남군에 있던 사람들도, 자네도 잘 알겠지만 (이 대목에서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의미 심장하게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 이 모두 다 알고 있었어. 그러나 그건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었지. 나는 내 의료용 칼만 만질 줄 알면 그만이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자네 조부님은 매우 훌륭한 분이셨네. 군 인다운 군인이셨지.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상당히 아둔한 느림보였겠죠?"하고 바자로프가 느릿느릿 말했다. "아아, 예브게니,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당치도 않은... 물론 키르사노프 장군은 그 런 분이..." "아니예요,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세요"하고 바자로프가 가로막았다. "저는 처음 이 마을에 다다랐을 때 우리 집 자작나무 숲을 보고 무척 기뻤어요. 아주 잘 자랐더군요."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래, 우리집 뜰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를 좀 봐라. 내가 손수 나무들을 한 그루 한 그루 심었단다. 과일나무도, 딸기도, 온갖 약초들도 있 다. 여보게들, 젊은이들이 아무리 머리를 짜내보아도 결국 파라켈수스 (스위스의 의학자이며 의화학의 시조로 일컬어짐. 1493년에서 1541년)노인이 '풀과 언어와 돌에 의하여...'라고 한 것만이 신성한 진리지. 실제로 나는 의사의 실무에선 손을 떼고 있지만 일주일에 두 번 쯤은 젊음을 되찾는 기분이 든단다. 봐달라고 찾아오는 것을 목덜미를 잡아 끌어낼 수는 없으니 말이야, 가난뱅이들이 도움을 청하며 매달리는 때도 있단다. 더욱이 이곳에는 의사 가 전혀 없어. 그런데 우리 이웃에 퇴역한 소령 한 사람이 있는데, 신통하게도 그 사람도 역 시 치료를 해주고 있지. 내가 '저 사람은 의학 공부를 했다던가?' 하고 사람들에게 물어보 았더니 '아닙니다. 그분은 그런 공부는 하지 않았어요. 그분은 순전히 박애심으로 하는 거예 요...' 하고 대답하더구나. 하, 하, 하, 박애심이라고. 그걸 어떻게 생각하니? 하, 하, 하. "페지카. 내 파이프에 담배 좀 담아다오" 하고 바자로프가 거칠게 소리쳤다. "그런데 이곳 에 환자를 봐주러 오는 의사가 또 한 사람 있는데" 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이야기에 열 중하여 다시 계속하였다. "어떤 병자가 이미 '조상이 계신곳'으로 가버렸으므로, 하인이 ' 이제 용무가 없습니다'하고 그 의사를 안으로 들이려고 하지 않았다는구나. 의사는 그런 일은 뜻밖으라 주저주저하며 '어때, 주인은 돌아가지시 전에 딸꾹질을 많이 하시던가''많이 하셨습니다''아아, 그랬어, 그럼 됐어'하고 말하고는 황망히 되돌아갔다는군. 허허허..." 노인은 혼자 호탕하게 웃어댔다. 아르카디는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바자로프는 그대로 앉 아 담배 연기만 들이마시고 있었다.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한 시간쯤 계속되었다. 그동안 아 르카디는 자기 방에 가볼 수가 있었다. 그곳은 목욕탕의 탈의실 같았지만 매우 아늑하고 청 결하였다. 이윽고 타냐가 들어와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고 알렸다.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제 일 먼저 일어섰다. "자, 가세. 쓸데없는 이야기에 지루했다면 관대한 마음으로 제발 용서해 주게. 아마 우리 여주인은 나보다는 훨씬 더 자네들을 만족시켜 줄 걸세." 식사는 급히 서둘러 준비된 것이었는데도 제법 훌륭하고 푸짐했다. 그러나 술만큼은 별로 신통치가 못했다. 치모페이치가 시내에서 아는 상인으로부터 사온, 거의 새까만 셰리는 구리 같기도 하고 송진같기도 한 이상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파리도 꽤 귀찮게 굴었다. 여느 때라면 하인 방의 꼬마 녀석이 커다란 생나무 가지로 파리를 쫓아야 했겠지만, 이번만 은 젊은 세대들로부터의 비난이 두려운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꼬마 녀석을 심부름 보낸 것이 다. 블라시예브나는 맵시 있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비단 리본이 달린, 춤이 높은 모자와 당초 무늬가 있는 숄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 예뉴사를 보자 이내 또 울음을 터뜨렸 지만 남편이 또다시 충고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가 숄에 얼룩이 생길까봐 서둘러 눈물을 닦았기 때문이다. 식사는 두 젊은이만이 했을 뿐이다. 주인 내외는 이미 마친 뒤였다. 페지 카가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그의 길이 들지 않은 장화가 매우 거북스러워 보였다. 또 그를 거들고 있는 사람은 안피수시카라는 이름의 애꾸눈을 한 남자같은 인상의 여자였는데, 그녀 는 주로 하녀들을 감독하는 일과 새로 돌보는 일, 빨래를 맡아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그 들이 식사하는 동안 내내 방안을 서성거리며, 그지없이 행복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폴레 옹 3세의 정책이나 이탈리아 문제의 분규가 자신의 마음에 야기시킨 깊은 우려에 대하여 이 야기 하는 것이었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아르카디에게는 눈길도 주기 않고 식사도 권하 지 않았다. 그녀는 앵두빛의 그 두툼한 입술과 두 볼과 눈썹 위에 있는 몇 개의 까만 점이 매우 선량한 인상을 더해주고 있는 그 둥근 얼굴을 두 손으로 떠받친 채 아들에게서 눈을 들려 하지 않았으며, 시종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얼마동안 머무를 생각으로 돌아왔는지 애타게 알고 싶었으나, 그에게 물어보기가 두려웠다. '혹시라고 이틀쯤이라고 대 답한다면 어떻게 한담'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구운 고기가 나오고 나서 어쩐지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눈에 띄지 않는다 했더니, 마개를 딴 조그만 샴페 인 병을 들고 돌아왔다. "자" 하고 그는 소리쳤다. "우리가 비록 시골에 살고는 있을망정 기쁜 일이 있을 때 유쾌 하게 즐길 만한 것쯤은 가지고 있지" 그는 세 개의 샴페인 잔과 포도주 잔 하나에만 그것을 가득 따르고 나서 귀중한 손님의 건강을 축원한다며 군대식으로 자기 몫의 잔의 단숨에 쭉 들이켰다. 또 아리나 블라시예브 나에게도 포도주 잔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시게 했다. 잼을 먹을 차례가 되자 아르카 디는 단 것을 전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이제 막 만든 네 종류의 잼을 맛보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바자로프가 딱 잘라 거절하고 이내 궐련을 피우기 시작했으므로 더욱이 거절할 수가 없었다. 식탁에는 크림을 넣은 차와 버터와 빵이 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아름다운 저녁놀을 감상하기 위해 그들을 뜰로 안 내했다. 어떤 벤치를 지나치면서 그는 아르카디에게 속삭였다. "나는 이 벤치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며 철학적 사색에 잠기기를 좋아한다네. 나 같은 은둔자에게는 그럴 듯한 일이지. 그리고 좀 떨어진 저쪽에는 호라티우스(고대 로마의 시인. B.C 65에서 8)가 좋아하 는 나무를 몇 그루 심었네." "무슨 나무인데요?" 하고 듣고 있던 바자로프가 물었다. "그야 물론... 아카시아지." 바자로 프는 하품을 했다. "이제 여행자들이 모르페우스 (꿈의 신. 잠의 신 히프노스의 아들)에게 안길 시간이 된 것 같군"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말했다. "말하자면 이제 잘 시간이 되었 다 그 말씀이야"하고 바자로프가 말을 받았다. "맞아요. 정말 잘 시간이 됐어요"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면서 그는 어머니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어머니는 그를 꼭 껴 안은 다음 그의 등뒤에서 남 몰래 세 번 축복의 성호를 그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아르 카디를 그의 방으로 안내하고 '자기가 전에 그처럼 행복한 나이였을 적에 맛보았던, 저 하 늘의 달콤한 휴식'을 그에게도 기원했다. 그리고 실제로 아르카디는 그 목욕탕의 탈의실 같은 곳에서 기분 좋게 잠들었다. 방안에서 박하 냄새가 났고, 두 마리의 귀뚜라미가 난로 그늘에서 졸음을 재촉하는 듯한 소리로 다투어 울고 있었다. 바실리 아비느이치는 아르카 디의 방에서 자기 서재로 되돌아와 소파에 누워있는 아들 발밑에 쭈그리고 앉아 그와 이야 기를 나누려 했지만 바자로프는 졸립다면서 이내 아버지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바자로 프는 아침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눈을 크게 뜨고는 독살스럽게 어둠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 렸을 적의 추억은 그의 머릿속에 그다지 떠오르지 않았으며, 더욱이 그는 아직도 최근에 경 험한 그 쓰디쓴 기분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나서 오랫동안 안피수시카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안파수시카는 여 주인 옆에 못박인 듯이 서서 자기의 단 하나뿐인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예브게 비 바실리예비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제법 비밀스럽게 소곤거리고 있었다. 노부 인은 기쁨과 술과 궐련 연기로 머리가 아주 멍해져 버러 남편이 그녀에게 이야기를 걸려고 했으나 결국은 체념하고 말았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진짜 러시아의 구식 부인이었다. 그 녀는 200년 전의 모스크바시대에 살았어야만 할 인물이었다. 그녀는 믿음이 매우 깊고 감 수성이 풍부해서 모든 전조나 점, 주술, 꿈을 믿고 있었다. 또 주술에 의한 발병, 집에 사는 신령, 수풀 속의 요정, 불길한 해후, 악마의 눈, 민간약, 부활제 전 목요일의 군 소금 (이 소 금으로 부활제의 계란을 먹고, 또 이것을 추녀 밑에 저장했다가 만병통치약으로 썼음.), 세 상의 종말 등등을 믿고 있었다. 또 부활제의 일요일 밤에 기도드릴 적에 촛불이 꺼지면 메 밀이 잘 된다든가, 버섯은 사람 눈에 띄면 그때부터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든가 하는 것들 을 믿고 있었다. 또 악마는 축축한 곳을 좋아한다든가, 유태인은 모두 가슴에 피처럼 붉은 반점이 있다든가 하는 것도 믿고 있었다. 또 쥐, 뱀, 개구리, 참새, 거머리, 천둥, 찬물, 새어 드는 바람, 말, 염소, 붉은 털이 난 사람, 검은 고양이 등을 두려워했으며 귀뚜라미나 개를 부정한 동물로 여기고 있었다. 또 송아지 고기와 비둘기, 새우, 치즈, 아스파라거스, 돼지, 감자, 토끼, 그리고 수박을 먹지 않았다. 왜냐하면 썰어놓은 수박이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더욱이 조개나 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녀는 질겁을 하였다. 그 녀는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했으나 엄격히 음식을 가려 먹었다. 하루에 열 시간을 잤는데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머리가 아플 때에는 꼬박 날을 새우기도 했다. 책은 <알렉시스, 혹은 숲속의 오두막>(프랑스의 작가 쥬크리 쥬메니르의 감상적인 교훈소설) 이외에는 한권도 읽 지 않았다. 편지는 일년에 한 번이나 많아야 두 번밖에 쓰지 않았는데, 가사를 돌보는 일이 나 과일을 말리거나 찌는 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자기 스스로는 무엇하나 직접 손대지 않았으며 대체로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리나 블라 시예브나는 마음씨가 착간 여자였으나 그 나름대로 결코 바보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 세상 에는 명령을 내리는 주인과 그에 굴복해야 하는 농부들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 굴할 정도의 태도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하지만 손아랫사 람들에게는 친절하고 상냥하게 해주었고 한 명의 거지라도 동냥을 주지 않고 보내는 일은 없었으며, 또 절대로 누구의 욕을 하는 법도 없었다. 그러나 때로는 남의 소문을 떠들어대는 일도 없지 않았다. 젊었을 때 그녀는 무척 예뻤으며, 피아노도 치고 프랑스어도 조금은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한 후 남편과 함께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곳을 떠 돌아 다니는 사이에 몸은 뚱뚱해져 버렸으며 음악도 프랑스어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자기 아들을 말할 수 없이 사랑하고 있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기도 했 다. 소유지의 관리는 바실리 이바느이치에게 떠맡겨 버리고 이젠 아무것도 참견하려 들지 않았다. 남편이 앞으로의 개혁이나 자기 계획에 대해 말하려 들기라도 하면 이내 한숨을 내 쉬고 손수건을 내두르며 깜짝 놀란 듯 눈썹을 한층 높이 추켜 세우는 것이다. 그녀는 늘 걱 정에 싸여 사는 여자로, 언제나 뭔가 커다란 불행이 다가올 것만 같은 불안속에서 어떤 슬 픈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내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부인들은 이제 사라져가고 있다. 과연 이 사실을 기뻐해야 할는지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21 침대에서 일어난 아르카디는 창문을 열어젖혀뜨렸다. 그러자 맨 먼저 그의 눈에 띈 것은 바실리 이바느이치였다. 품이 넓은 잠옷을 입고 수건으로 허리를 두른 이 노인은 열심히 야 채밭을 일구고 있었다. 그는 이 젊은 손님을 보자 삽 자루에 몸을 기대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일찍 일어나셨군. 잘 주무셨소?" "정말 잘 잘습니다."하고 아르카디가 대답했다. "그런데 난 지금 자네가 보듯이 킨키나투스(로마가 위급할 때 부름을 받아 집정관이 되었 다가, 승리 후에는 다시 전원생활로 돌아갔다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 장군, B.C 519?년에서 439?년)라는 사람처럼 철 늦은 무를 심으려고 골을 내고 있네. 지금은 그런 시대가 됐으니 정말 고마운 일이야. 누구든 자기 손으로 자기가 먹을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지.다른 사람 에게 기대지 말고 자신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네. 장 자크 루소 (프랑스의 사상기, 작가, 대표작으로는 '인간 평등 기원론''신엘로이즈''에밀'등이 있음. 1712년에서 1778년)가 말한 대 로, 30분 전에 일어났더라면 자네는 나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늙은 한 아 낙네가 배가 아프다며 호소해 왔었지. 이것은 우리들 용어로는 이질이라고 하는데 나는...뭐 라 하면 좋을까... 어쨋든 아편주사 한 대를 놓아주었지. 또 한 여인은 이를 빼주었어. 그 여 인에게 마취약을 쓰자고 권했지만... 여간해서 듣지 않는거야. 나는 이런 일들을 모두 무료로 하지. 아마추어로서 말일세. 하지만 그것이 이상할 것은 없네. 사실 나는 평민이며 자수성가 한 사람으로, 내 아내처러 유서 깊은 가문의 출신은 못되니까...그런데 자네 이 그늘에 나와 차가 나올 때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는게 어떤가?" 아르카디는 밖으로 나갔다. "다시 한번 말하네만 정말 잘 와 주었네"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머리 위에 쓰고 있는 기름때 묻은 둥근 모자에 군대식으로 한 손을 갖다대며 이렇게 말했다. "자넨 호화롭고 만 족스러운 생활에 젖어 있겠지만, 이 세상의 위인들이라도 잠시 구차한 오두막집 지붕 밑에 서 지내는 것을 그렇게 꺼리지는 않을 걸세." "천만의 말씀을"하고 아르카디는 소리쳤다. "제가 무슨 위인입니까? 그리고 호화로운 세 상에 젖어 있지도 않습니다." "미안, 미안"하고 상냥하게 점잔을 빼면서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이렇게 대꾸했다. "나도 지금은 폐물이 되긴 했지만, 이래봬도 세상 출입을 좀 한사람으로서 하늘에 날아가는 것만 보고도 무슨 새인가를 금방 알아볼 수 있지. 나는 또 내 나름대로 심리학자이기도 하고 관 상학자이기도 하네. 주제넘은 말 같지만 이런 재능조차 없었더라면 나는 벌써 옛날에 고물 이 되었을 것이고, 나 같은 구차한 인간따위는 세상에 나설수도 없었을 걸세. 나는 자넥 우 리 아들과 사이가 좋은 것을 보니 진심으로 기쁘네. 방금 전에 그애를 만났는데, 그애는 자 네도 잘 알 테지만 노상하는 버릇대로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돌러 나갔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자네는 오래 전부터 우리 예브게니와 아는 사이였는가?" "이번 겨울부터입니다." "그렇군. 그럼 또 한가지 물어보겠는데 자, 잠깐 앉지 않겠는가? 아버지로서 모든 것을 솔 직히 묻겠는데, 우리 예브게니에 대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아드님은 제가 이 제껏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하고 아르카디가 활기있게 대 답했다. 바실리 아비느이치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볼을 약간 붉혔다. 삽이 그의 손으로 부터 미끄러져 나가 떨어졌다. "자네는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하고 그는 입을 열었다.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하고 아르카디는 말을 받았다. "아드님의 눈앞에는 위대한 미래 가 기다리고 있으며, 이제 곧 아버님의 이름을 빛낼 겁니다. 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것 을 확신했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단 말인가?" 하고 바실리 이바느이 치는 가까스로 이렇게 물었다. 환희에 찬 미소가 히죽이 벌린 그의 넓죽한 입술 사이에서 떠날줄을 몰랐다.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을 알고 싶으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대충이라도..." 아르카디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오딘초바 부인과 마주르카를 추었던 그날 밤보다도 더 열심히, 더 신이나서 바자로프에 대해 이야기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며 코를 풀기도 하고 두손으로 손수건을 돌돌 말거나 기침을 하는가 하면 머리카락을 쥐어 뜯기도 했다. 그러나 마침내 못 견디겠다는 듯이 아르카디 쪽으로 몸 을 굽혀 그의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자네는 날 아주 행복하게 해주었네"하고 여전히 미소를 띄면서 이렇게 말했다. "말해 두 겠네만, 우린 자식놈을 하느님처럼 떠받들고 있네. 우리 집 할멍에 대해선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어머니들이란 다 그런 거 아닌가. 그러나 나는 그애 앞에서 내 기분을 말할 수가 없 네. 그애가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지. 무엇이고 털어놓는 것을 그애는 무척 싫어 한다네. 그애는 너무 똑똑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애를 비난할 정도이고, 그것을 거만하다든가 냉혹한 태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러나 그런 인물은 평범한 자로 재서는 안되 는 거야. 그렇지 않은가? 그렇고 말고. 이를 테면 다른 사람이 그애 입장이었다면 벌써 자기 부모로부터 우려낼 수 있는 만큼 우려냈겠지만, 우리 애는, 믿을 수 있겠나, 태어나서 이제 까지 돈이라고는 1카페이카도 우려내지 않았네, 하느님께 맹세코." "그 친구는 욕심이 없고 정직힌 사람입니다."하고 아르카디는 말했다. "전혀 욕심이 없지. 그런데 나는 말이야,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 그애를 하느님처럼 받들 뿐만 아니라 그애를 자랑으로 삼고 있는 걸세. 내 욕심이라면 다만 그애의 전기에 이런 문구로가 씌어지기를 바 라는 것 뿐일세. 즉 '그의 부친은 평범한 군의였지만, 일찍이 자식의 앞날을 내다보고 그 자 식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일세." 노인의 목소리가 끊겼다. 아르카디는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잠 시 잠자코 있다가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물었다. "자네의 예언대로 그애가 유명해지는 것 의 학 방면에서는 아니겠지?" "물론 의학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 방면에서도 그 친구는 분명 일류 학자의 한 사람이 될 테지만요." "어떤 방면일까,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 "그건 지금 말씀드리기는 곤란하겠지만, 어쨋든 그 친구는 틀림없이 유명해 질 겁니다." "그애가 유명해 진다고?" 하고 노인은 되풀이 하고 는 생각에 잠겼다. "마님께서 차를 들러 오시라는데요"하고 빨갛게 익은 딸기도 수북이 담 긴 큰 접시를 손에 들고 지나가던 안피수시카가 말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깜짝 놀라 몸 을 떨었다. "그래 딸기에는 시원한 크림이 있어야 하는데?" "있습니다." "진짜 시원한 것으 로 말이야. 알겠지? 제발 체면 차리지 말아요.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 많이 들어요. 예브게 니가 오지 않는데 도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저 여기 있어요"하고 아르카디의 방으로부터 바자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실리 이 바느이치는 황급히 뒤돌아 보았다. "허허. 이제야 친구를 찾으러 왔군 그래. 하지만 이미 늦 었어. 나는 지금 이 친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지. 이제 차를 들러 가야 한단 다.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거야. 말이 났으니 말이지, 너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좀 있구나." "무슨 이야긴데요?" "여기 있는 농부 한 사람이 달병에 걸렸는데 말이야" "아, 황달 말씀 이군요" "그렇지, 만성으로 매우 심한 달병이야. 나는 그 처방으로 여러 가지 약초를 적어주 고 인삼도 먹으라고 말해주었고 또 소다도 주었다. 하지만 이건 모두가 일시적인 처방으로 뭔가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할 것 같구나. 너는 의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지 모르겠 지만, 너라면 틀림없이 효험있는 처방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다 음으로 미루자꾸나. 자, 차를 마시러 가자"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갑자기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로베르트, 독일의 가극, 작곡가 마이어베르가 작곡한 오페라 '악마 로베르트')의 한 구절을 읊기 시작했다. 규율, 규율, 우리 스스로 규율을 정하리. 기쁨...기쁨...기쁨에 살기위해. "기운이 대단하시군요"하고 창에서 물러나면서 바자로프가 말했다. 한낮이 되었다. 태양은 넓게 퍼져 있는 희끄무레한 구름의 장막 속으로부터 이글이글 내 리쬐고 있었다. 사방은 적막하고, 다만 마을 쪽에서 수탉이 앙칼진 소리로 서로 다투어 울어 대고 있어서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 졸음과 근심을 유발하는 야릇한 느낌을 줄 뿐이었다. 또 나무 위 높은 곳 어딘가에서는 한 마리의 어린 매가 슬픈 듯, 호소하는 듯, 삐이삐이하고 쉴 새없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르카디와 바자로프는 바스락 소리가 나는, 건조되긴 했지만 아직 푸른 빛깔이 남아 있는 향기로운 풀을 두 아름쯤 밑에 깔고 아담한 마른 풀더 미 그늘에 누워 있었다. "저 미루나무는"하고 바자로프는 말문을 열었다. "내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네. 저 나 무는 벽돌 가마 터에 남아 있는 구덩이 주위에 심어져 있어서 그 무렵 그 구덩이와 미루나 무는 무슨 특별한 마력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네. 그 옆에 있을 땐 난 조금도 지루 하질 않았었네. 어리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았었던 것인데 그때는 그것을 알 턱이 없었지. 그 러나 이젠 어른이라 마력 같은 건 효력이 없어졌지." "자네는 여기서 얼마나 살았나?" 하고 아르카디가 물었다. "한 2년쯤이야, 그리고는 방방 곡곡을 돌아다녔지. 방랑생활을 한 셈이지. 대개는 도시에서 도시로 떠돌아다녔지만 말이 야." "이집은 오래전부터 있었나?" "퍽 오래전부터지. 이미 외할아버지, 즉 우리 어머니의 아 버지 적에 세운것이니까." "자네 외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 "그런 걸 누가 알 수 있겠 나. 아마 2등 소좌인가 뭔가였다지. 수보로프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알프스를 넘은 러시아의 장군. 1729년에서 1800년)장군 밑에서 근무하셨다고는 하지만, 늘 알프스를 넘어 이동했다는 이야기만 하셨어. 틀림없이 거짓말일거야." "그래서 자네 집 응접실에 수보로프의 초상화가 걸려 있군. 나는 자네 집처럼 이렇게 아 담한 집을 좋아하네. 고풍스럽고 아늑하고 게다가 뭔가 독특한 냄새가 나고 말일세." "등잔 기름과 클로버 냄새야"하고 하품을 바자로프가 말했다. "그런데 이 사랑하는 집구석에 웬놈 의 파리가 이렇게 많을까... 굉장하군" "이봐"하고 아르카디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말을 꺼 냈다. "자네는 어렸을 적에 꾸지람을 들어본 적이 없나?" "우리 부모님이 어떻다는 것은 자 네도 보아서 잘 알겠지만 그렇게 엄격한 분들은 아닐세""자네는 그분들을 사랑하고 있는 가?""그야 물론 사랑하고 있지, 아르카디""그분들은 자네를 퍽 사랑하고 계시더군" 바자로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네는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나?"하고 머리 뒤 로 손을 돌려 팔베개를 하면서 바라자프가 입을 열었다. "모르겠는데, 뭘 생각하고 있나?" "나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네, 우리 부모님은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이 매우 즐거우신 것 같아. 아버지는 예순이나 되셨는데도 바쁘게 입을 하시고 '응급치료'에 필요한 약재에 대 해 논하시기도 하면서 환자들을 돌보시네. 농부들에게는 관대함을 보이고, 한마디로 즐거운 삶을 살고 계시네. 우리 어머니 역시 행복하시지. 하루하루 모든 일에 열중하시고 조그만 일 에 지나치게 감탄하시고 한숨을 지으시느라 당신 자신은 정신차릴 만한 틈도 없으실 정도일 세, 그런데 나는..." "그런데 자네는?" "그런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어. 나는 여기 이렇게 마른풀 더미 밑에 누워 있다....내가 차지하고 있는 그 좁은 장소는, 내가 없는, 또 내겐 아무 쓸모없는 그 나머 지 공간에 비하면 그야말로 극히 보잘 것 없는 것일세. 내가 살아나갈 수 있는 시간의 일부 분도 내가 없었던 과거의, 또 내가 있지 않을 미래의 영원한 시간의 흐름에 비하면 정말 보 잘 것 없는 것이지... 그런데 이 한 원자속에, 이 수학적 한 점 속에 피가 돌기도 하고 뇌수 가 작용하기도 하여, 역시 뭔가를 갈망하고 있으니 말이야... 이 무슨 꼴 불견이란 말인가. 이 얼마나 쓸데없는 생각인가" "하지만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은 일반적인 모든 사람에 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되는데..." "자네 말이 맞아" 하고 바자로프는 받았다. "내가 말 하고 싶은 것은 그분들에 대해서야. 즉 우리 부모님은 일에 쫓겨 당신들이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계시네. 그분들은 그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거야... 그런데 나는.. 나는 그저 권태와 증오를 느낄 뿐이라네." "증오라고?어째서 증오를 느낀다는 건가?" "어째서라니?자네는 벌써 잊어버렸나?" "나도 다 기억하고 있네. 하지만 나는 자네가 귀찮 아하거나 화를 낼만한 권리가 있다고는 인정할 수 없네... 자네는 불행한 인간이야. 그건 나 도 이해하겠지만, 그러나..." "뭐라고.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 자넨 요즈음 젊은이들과 똑같 은 사고방식으로 연애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군 그래. 즉 구구 구구 하고 암탉을 불러 놓고 는 암탉이 다가오면 이내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치는 식으로 말일세. 나는 그렇지 않아. 하지 만 이런 이야기는 이제 집어치우세.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일을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니까"하며 그는 돌아누웠다. "어. 이봐, 저기 영리한 개미 한 마리가 다 죽 어가는 파리를 끌어가는군. 어이, 끌어당겨, 끌어당기라고. 파리가 버틴다고 해서 가엾이 여 기면 안돼. 너는 동물이니까 동정심 따위는 갖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갖고 있으니 그걸 이 용하는 거야. 우리 인간들처럼 스스로 자기 가슴을 태우는 자들과는 다르단 말이야."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예브게니. 자네가 언제 가슴을 태웠단 말인가?" 바자로 프가 머리를 쳐들었다. "내가 자랑할 만한 것은 단지 이것뿐이야. 한번도 가슴을 태운 적이 없었네. 한낱 여자 때 문에 가슴을 태워서야 쓰겠는가. 아멘. 이것으로 끝이야. 이젠 앞으로 내게서 두 번 다시 그 런 말을 들을 수 없을 걸세" 두 친구는 잠시 입을 다문 채 누워 있었다. "하지만" 하고 바자로프가 입을 열었다. "인간이란 참 이상한 동물이야. 이곳 '아버지들' 이 보내고 있는 무미건조한 생활을 멀리 떨어져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먹고 마시면서, 가장 옳고 가장 분별 있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말이야.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 권태에 짓눌려 있는 것이지. 그래서 인간끼리 교류하 고 싶어지는 것이라네. 비록 서로 헐뜯을지라도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거야." "그 순간 순간이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생활하지 않으면 안되지"하고 아르카디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이지. 의미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참을 수는 있어.... 그런데 그 시시한 입씨름이라든가, 언쟁이라든가... 그런건 정말 참을 수가 없어." "시시한 입씨름이나 언쟁 같은 것은 인간에게는 존재할 수 없지. 만약에 그런 것을 인정 하려 들지 않는다면 말일세." "흠... 자네는 역설적인 진부한 문구를 쓰고 있군." "뭐라고? 자 넨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말하자면 '교육은 유익하다'고 하면 그건 진부한 문구지. 하지만 '교육은 유해하다'고 한 다면 그것은 역설적인 진부한 문구인 거야. 이 표현은 꽤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 같지만 실 제로는 똑같은 말이지." "그렇다면 진리는 어디에, 어느 쪽에 있는 건가?" "어디냐고? 나도 메아리 처럼 '어디에?' 라고 대답해야겠네." "자네 오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군, 예브게니." "내가? 아마 태양이 내 머리를 너무 뜨겁게 쬐었기 때문이겠지. 게다가 딸기를 이렇게 많 이 먹으면 안 되는데." "그래야 할 것 같군. 하지만 나를 보지 말아주게. 사람이란 누구나 잠잘 때의 얼굴은 바보처럼 보이니까." "그렇지만 자네는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건 아 무래도 상관하지 않잖나?" "뭐랄까, 참다운 인간은 그런 것에 마음을 쓰면 안되는 걸세. 참 다운 인간이란 사람들에게 이해해주기를 바라서도 안되고, 그저 복정 아니면 증오가 있을 뿐이지." "이상하군. 나는 어느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데"하고 잠깐 생각하고 나서 아르카디 는 말했다. "그런데 난 꽤 많아. 자네는 마음이 착하고 온유한 사람을 미워할 턱이 없지. 자 네는 좀 소심한 데가 있어. 그리고 자신감도 부족하지..." "그런데 자네는"하고 아르카디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자신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는 건가? 자네는 자기 자신을 평가하고 있느냔 말이야." 바자로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신념이 확고하여 내게 결코 굴하지 않는 인간을 만나면"하고 적당한 사이를 두었 다가 다시 바자로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나 자신의 생각을 바꿀 작정일세. 미워하는 거야. 이를테면 자네는 오늘 우리 마을 구장인 필리프네 오두막집을 지나치면서 '매우 훌 륭 하고 깨끗한 오두막집이로군'하고 말했었지. 또 자네는 '가난한 기층 농부들까지 이런 집을 갖게 되는 날 러시아는 완전한 것이 되리라.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도 말 했었지... 그런데 나는 필리프라든가 시도르라든가 하는 그 '가난한 기층 농부'들이 미워지기 시작했어. 그들 때문에 나는 뼈빠지게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도 그 들은 내게 고맘다는 인사 한마디 없거든... 더욱이 그따위 고맙다는 인사가 네게 무슨 소영 이 있겠는가? 제기랄 그들은 깨끗한 오두막집에서 살게 되겠지만, 그러는 사이에 내 몸뚱이 에서는 우엉이 자라고 있을 테지. 그 다음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만해두게, 예브게니... 오늘 자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원리가 없다고 우리를 비난하 는 사람들에게 나도 모르게 동의하고 싶어지는군." "자네는 자네 큰 아버지와 같은 말투를 쓰는군. 원리라는 건 본래 존재하지 않는거야. 자네는 아직도 그걸 모르고 있었나? 오로지 감각이 있을 뿐이야. 모든 것이 그 감각에 의해 일루어 지는 거지." "어째서 그런가?" "어쨌든 그런 거야. 이를 테면 나를 봐, 나는 부정적인 경향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감각의 결과이지. 나는 부정적인 것이 기분 좋거든. 내 뇌수가 그렇게 만 들어져 있는 것 같아. 다만 그뿐이야. 어째서 난 화학을 좋아하고, 어째서 자네는 사과를 좋 아하는 건가? 이것 역시 감각의 결과인 걸세. 모두가 다 마찬가지란 말이야. 인간은 그 이상 깊이 들어갈 수는 없는거야. 누구나 다 자네에게 이런말을 해주지는 않네. 나 역시 두 번 다 시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을거야." "그렇다면 성실이라는 것도 감각이란 말인가?" "물론이지" "예브게니"하고 아르카디는 슬픔에 가득 찬 음성으로 외쳤다. "왜? 왜 그래? 재매없나?"하고 바자로프가 대꾸했다. "자 네, 안되네, 무엇이든 베어 쓰러뜨리고자 결심한 이상에는 자기 발이라도 바치지 않으면 안 돼. 우린 너무 지나치게 철학적인 논의만 했군. '자연은 꿈의 침묵을 안겨준다'고 푸슈킨 은 말했지?" "절대로 그런 말은 하지 않았네"하고 아르카디가 말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 도 시인으로서 그런 말 정도는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응당 해야 했어. 말이 났으니 말이 지, 그 사람은 틀림없이 군대생활을 했을거야." "푸슈킨은 결코 군인은 아니었네." "천만에, 그의 작품에는 페이지마다 '싸움터로. 싸움터로. 러시아의 명예를 위하여'라고 씌 어 있던데" "자네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그건 정말 중상이야" "중상이라고. 꽤 심각한 소릴하는군. 날 놀라게 해주려고 갑자기 그런 말을 생각해낸 건 가? 인간은 아무리 중상을 받는다 해도 본질에 있어서는 그보다 스무 배나 더 나쁜 짓을 하 고 있는 법이야." "그만하고 이제 잠이나 자세"하고 화가 난 듯이 아르카디가 말했다. "대찬 성이야"하고 바라조프가 대답했다. 그러나 두사람은 다 잠을 청하지 못했다. 거의 적의에 가까운 감정이 두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5분쯤 지나서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뜨고 잠자코 서로 마주보았다. "저것 좀 보게나"하고 갑자기 아르카디가 말했다. "시든 단풍잎이 가지를 떠나 땅으로 떨어지고 있네. 그 떨어지는 모양이 마치 나비가 날아가는 것 같군. 이상하지 않은가. 죽음이라는 가장 슬픈 것이 살아있 는 가장 활기잔 것을 닮았으니 말일세." "여보게,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하고 바자로프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네. 제발 꾸민 듯한 말투는 쓰지 말아주게." "나는 단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야... 그런데 이건 정말 독재가 아닌가.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어째서 입밖에 내선 안된다는 건가?" "자네 말이 맞아. 그러니 나 역시 내 생각을 입밖에 낼 수 있 는 것 아닌가? 나는 가식적인 말을 쓰는 건 점잖지 못하다고 생각한단 말이네." "그럼 뭐가 점잖다는 말인가? 서로 욕질이나 하는 것 말인가?" "아하. 그래 자네는 훌륭한 자네의 큰 아버지를 따를 셈이군. 자네 이야기를 들으면 그 얼간이가 꽤 기뻐하겠어" "자네 지금 파벨 큰아버님을 뭐라고 불렀지?" "분명히 얼간이라 불렀지"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없군"하고 아 르카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허. 혈육의 정이 눈을 떴군"하고 바자로프는 침착한 어조 로 말했다. "나는 알고 있네, 혈육의 정이란 매우 완고하게 사람의 마음에 달라붙어 있다는 것을. 모 든 것을 부정하고 모든 편견을 뿌리칠 만한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일지라도 예컨대 남의 손 수건을 훔친 자기 동생을 도둑놈이라고 인정할 수는 자기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일세. 사실 말이지, 내 동생이 내 동생이 말이야 천재가 아니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 을 수 있겠어?" "나는 단지 정의감이 눈떴을 뿐이지 절대로 혈육의 정 때문이 아니란 말일 세"하고 아르카디는 화가 치미는 듯 말했다. "그러나 자네는 그런 감정을 이해하지도 못하 고, 또 그런 '감각'도 없기 때문에 그걸 판단할 수가 없는 것야" "다시 말해서 아르카디 키 르사노프는 너무나도 고상해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거로군...그렇다면 나는 머리를 수그리고 입을 다물어 버리겠네." "제발 이제 그만하게, 예브게니. 이러다간 정말 나중에 싸 우고 말겠네" "아아. 아르카디. 제발 부탁이니 한 번 끝까지 싸워보지 않으려나? 철저히 말 일세. 서로가 아무 말 못할 때까지" "그런데 정말 이런식으로 나가다간, 혹 나중에는..." "주 먹질을 하게 된단 말인가?"하고 바자로프가 말을 받았다. "괜찮지 않나?여기 이 마른풀 위 에서라면 목가적인 풍경으로 말이야, 세상이나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니 나 쁘지 않겠는데, 하지만 자네는 나를 이길 수는 없을 걸세. 나는 곧장 자네 멱살을 틀어쥐 고..." 바자로프는 자신의 길고 투박한 손가락을 확 폈다. 아르카디는 몸을 홱 돌리고 장난처럼 맞서는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의 얼굴은 몹시 기분 나쁜 듯이 보였으며, 그의 입 술의 일그러진 미소에도, 번쩍이는 두 눈에도 전혀 장난기가 아닌 진짜 위협이 어려 있었으 므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섬뜩함을 느꼈을 정도였다.... "아아. 자네들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군"하고 그 순간 바실리 이바느이치의 음성이 들렸다. 그리고 손으로 짠 린네르 저고리를 입고 또 역시 손으로 짠 밀짚모자를 쓴 노군의가 젊은 두 친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네들을 한참 찾았네. 무척 찾았지... 그런데 자네들은 좋 은 장소를 발견해 내어 근사한 일에 열중해 있었군. '대지'에 벌렁 누워 '하늘'을 우러러 본 다... 알겠는가, 거기에는 뭔가 각별한 의미가 있는 거라네" "제가 하늘을 쳐다보는 것은 다만 재채기가 하고 싶을 때뿐이예요"하고 바자로프는 대꾸 하고 아르카디 쪽을 돌아보더니 나직이 이렇게 덧붙였다. "방해를 받아 유감인데" "아니야, 그만하면 됐어"하고 아르카디는 속삭이고는 친구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어떤 우정이라도 그와 같은 충돌을 오래 지탱할 수는 없는 거야" "그렇게 속삭이고 있는 젊은 그대들을 보고 있노라니"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잡이 대신 터키인의 모습을 새긴 묘하게 비틀어진 수제 지팡이에 깍지 낀 두 손을 얹은 채 이렇게 말했다. "황홀해지는군. 그대들은 한창 꽃피우는 힘과 젊음과 능력과 재간이 얼마나 풍부히 넘쳐흐르고 있는가 말이야. 정말... 카스토르와 폴룩스 (그리고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와 레다의 아들인 쌍둥이 신. 형제애로 유명함)같군 그래." "아. 이번엔 이야기를 신화로 이끌어가시는군요"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전에는 라틴어 도 잘 하셨다는 걸 금방 알 수 있겠네요. 그런데 아버지는 라틴어로 글을 지어 은메달을 받 으신 적이 있으셨지요, 그렇지요?" "디오스쿠로이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총칭)야, 디오스쿠로이"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되 풀이 했다. "하지만 이제 됐어요, 아버지.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오래간만이니 한 번쯤은 괜찮지 않겠느냐"하고 노인은 말했다. "그렇지만 말이야, 내가 자네들을 찾은 건 이런 말을 위해서 가 아니라 첫째는 곧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고, 둘재는 예브게니, 네게 미 리 일러둘 말이 있기 때문이다... 너는 현명해서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고, 여자라는 것도 잘 알고 있을거야. 따라서 용서해 줄 것이라 생각하는데.. 네 어머니가 네가 돌아온 것 을 기회로 감사의 기도식을 갖고 싶다는 구나. 그 기도식에 참석하라고 너를 부르러 온 것 이라고는 생각지 마라. 이미 그건 끝났으니까. 그런데 알렉세이 신부가..." "주교 말씀인가요?" "응, 그래 사제란다. 그분이 우리 집에서 말이다... 식사를 하시게 되 었단 말이다... 나는 그런 건 전혀 생각지도 않았고 권하지도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구나... 그 분이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야... 하지만 제 어머니가 말이야... 게다가 그분은 매우 지각있는 훌륭한 분이시란다." "설마 그분이 제 몫까지 먹어치우시지는 않겠지요?" 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웃음을 터뜨렸다. "천만에, 어째 너는""그렇다면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어요. 전 어떤 사람하고라도 식사를 같이할 용이가 있으니까요." 바실이 이바느이치는 모자를 고쳐 썼다. "나는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다." 하고 그는 말했다. "너는 모든 편견을 초월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리 나이를 먹고 예순 두 살이 나 됐어도 나역시 편견만큼은 가지고 있지 않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그 자신이 감사의 기도식을 갖기 원했다고는 차마 자백할 수가 없었다... 그도 아내 못지않게 신앙심이 깊었던 것이다.) 그런데 알렉세이 신부가 너를 만나보고 싶다고 조르기에 그만... 너도 그분이 마음 에 들거다.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그분은 카드놀이도 좋아하시고, 게다가... 이건 우리 끼리 이야기지만... 담배까지도 피우신단다." "좋습니다. 식사후에 카드놀이를 하지요. 제가 그분을 참패시키겠어요." "허, 허, 허, 어디 보자꾸나. 그건 장담할 수 없지." "그래, 어떻습니까? 옛날 솜씨를 좀 보여주시겠습니까?"하고 바자로프는 이상하게 강조하 여 말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의 구릿빛 두 볼이 살짝 붉어졌다. "너는 그런 말을 하고도 창 피하다고 생각지 않느냐, 예브게니... 과거는 묻지 않는 법이다. 그래,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 야. 이 사람 앞에서 자백하겠는데, 젊었을 때에는 거기에 아주 빠졌던 적도 있었어. 그건 사 실이야. 그리고 마침내 그 죄를 받은 거지. 그건 그렇고, 이거 무척 덥군. 옆에 앉아도 방해 가 되지 않겠지?" "그럼요"하고 아르카디는 대답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끙끙거리면서 마른풀 위에 주저 앉았다. "자네들의 지금 이 잠자리는"하고 그는 말을 꺼냈다. "내 군대생활의 야영이나 야전 병원을 생각나게 하는군. 이런 마른풀 더미 옆이었는데, 그래도 여기보다는 좀 나은 편이었 지"하고 그는 한숨지었다. "나는 일생동안 그야말로 많은 것을 경험했지. 자네들이 좋다면 베사라비아 (동유럽 우쿠라이나의 드네스트르 강 이남 루마니아와의 국경지방)에 유행했던 페스트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주겠네" "아버지께서 블라미디르 훈장을 타신 그 이야기 말씀이시죠?"하고 바자로프가 말을 받았 다.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어째서 그걸 달지 않으세요?" "네게 말하지 않았더냐, 나는 편견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이다"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투덜거리더니 (사실 그 는 바로 어젯저녁 저고리에서 훈장의 붉은 리본을 떼도록 일렀었다.)페스트에 얽힌 에피소 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 녀석은 어느새 잠들어버렸군"하고 그는 갑자기 바자 로프 쪽을 가리키면서 아르카디에게 소곤거리고는 호인답게 눈을 끔뻑거렸다. "예브게니. 일 어나라"하고 그는 큰 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자, 식사하러 가자..." 알렉세이 신부는 풍채가 좋은 뚱뚱한 사나이로, 숱이 많은 머리를 정성껏 빗어넘기고 보 라색 비단 제의에 수놓은 띠를 매었으며, 빈틈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기지에 넘친 사람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르카디나 바자로프가 그의 축복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 는다는 것을 미리 짐작이라도 한 듯, 자진해서 두 사람의 손을 시종 부드러운 태도로 대했 다. 그는 또 지나치게 겸손해하지도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화 도중 적절한 기회에 신학교의 라틴어를 비웃기도 하고 자기의 직속 주교 를 옹호하기도 하였다. 술은 두잔까지는 마셨지만 석 잔째는 거절했다. 또한 그는 아르카디 에게도 담배를 얻긴 했지만 집에 가지고 가겠노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피우려 들지 않았 다. 다만 그가 하는 행동 중에서 그다지 좋지 않은 느낌을 주었던 것은 자기 얼굴에 앉은 파리를 잡으려고 쉴새없이 느릿느릿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이따금 파리를 때려잡는 일이었 다.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파란천을 깐 카드놀이 탁자 앞아 앉아 있었는데 결국 바자로프 를 이기고 2루블 50카페이카의 지폐를 따내고 말았다. 아리나 글라시예브나의 집에서는 은 화로 계산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니콜라이 1세의 지폐가 남발한 결과임) 그녀는 여전히 아들 옆에 앉아서 (그녀는 결코 카드놀이를 하지 않았다.) 주 먹으로 두 볼을 받치고 있다가는 뭔가 새 요리를 내오도록 이를 때에만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녀는 바자로프에게 애정을 표시하는 두렵게 여기고 있었다. 바자로프도 그녀에게 애무를 하고 싶은 자극을 주고 않았고 요구도 하지 않았다. 더욱이 바실리 이바느이치도 아들을 너 무 '귀찮게 굴면' 안된다고 그녀에게 충고했던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그러는 것을 좋아하 지 않아요"하고 그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그날의 식사가 어떠했는가는 말할 나 위도 없다. 치모페이치는 자기가 손수 새벽녘부터 뛰어다니면서 맛이 특별하다는 체르카스 (우크라이나 지명)산 쇠고기를 입수했다. 소작인 농부도 다 마을로 나가 명태와 도미와 새우 를 구해왔다. 버섯 값만으로도 농가 여인들에게 42카페이카나 지불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 나 아리나 블라시예브나의 눈은 끈질기게 바자로프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에는 그저 헌신적인 애정만이 깃들여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눈에는 호기심과 공포가 뒤섞인 비애도 였보였으며, 어떤 작은 비난의 빛도 엿보였다. 그러나 바자로프는 자기 어머니의 눈이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알아볼 기분에 처해 있 지 않았다. 그는 이따금 그녀 쪽을 돌아보았으나 무언가를 아주 간단히 물어보는 정도였다. 단 한 번 그는 '행운을 얻기 위해' 그녀의 손을 더듬었다. 그녀는 자기의 부드러운 손을 거 칠고 큰 아들의 손바닥에 살며 얹었다. "어떠니?"하고 잠시 후에 그녀는 물었다. "효험이 있니?" "더 나빠졌어요"하고 그는 장승처럼 엷은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모허이 너무 지나 치군"하고 동정하듯 알렉세이 신부는 말하면서 자기의 아름다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나폴레옹의 전술이에요, 그건 나폴레옹 식이지요"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말을 받으며 1의 패를 털썩 내려놓았다. "그것 때문에 세인트헬레나 섬까지 가게 되었지요"하고 알렉세 이 신부는 말하고 그 1의 패를 으뜸패로 눌렀다. "에뉴센카, 과일즙을 좀 들지 않으련?" 하 고 아리나 블라시예브나가 물었다. 바자로프는 다만 어깨를 움추렸을 뿐이다. "이젠 싫증이 나는데"하고 이튿날 그는 아르카디에게 말했다. "나는 내일 여길 떠나겠네. 지루해서 말이야. 일을 하고 싶어도 여기서는 할 수가 없어. 자네 마을로 다시 가겠네. 거기 에도 내 실험 재료들을 모두 두고 왔으니까. 자네 집이라면 적어도 틀어박혀 있을 수는 있 을거야. 여기선 아버지가 '내 서재를 네 마음대로 써라. 아무도 너를 방해하지 않을 테니' 하 며 노상 되풀이 하시면서도, 실제로는 내 곁에서 떠나려 들지 않으시거든. 그런데도 양심상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고, 그야 물론 어미니도 마찬가지네. 어머니가 문밖에서 한숨 쉬는 소 리를 들으면 난 곧 어머니 곁으로 가긴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할 말이 없다네." "어머님께서 퍽 서운하실텐데"하고 아르카디가 말했다. "그야 아버님도 마찬가지시겠지 만." "다시 돌아올텐데, 뭘" "언제" "글세, 페테르스부르크로 갈 때쯤이겠지." "어째서? 어머 님이 자네에게 딸기를 대접했기 때문인가?" 아르카디는 눈을 내리깔았다. "자네는 자네 어 머니를 잘 몰라서 그러는 걸세, 예브게니. 그분은 훌륭하실 뿐만 아니라 매우 현명한 분일 세. 오늘 아침 자네 어머니는 내게 한 30분쯤 이야기 하셨는데, 매우 요령있고 재미있게 말 씀하시더군." "틀림없이 내 이야기를 다 털어놓으셨겠지." "자네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건 아닐세" "그럴 지도 모르지, 자네는 제3자의 입장이니까 더 잘 이해하겠지. 여자가 30분이나 이야기를 중닪 지 않고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좋은 징조라 말할 수 있지. 하지만 난 역시 떠나겠지." "자네가 그 생각을 그분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걸세. 그분 들은 우리들이 2주일 후에 무엇을 할 것이냐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계시니까" "쉬운일은 아 니지. 나는 오늘 어쩌다가 아버지와 말다툼을 하고 좀 노하시게 해드렸네. 사실은 말일세, 아버지께서 며칠 전에 당신 소작인 한 사람을 매질하라고 분부하신 일이 있었어. 그건 정말 잘한 일이었지. 그래, 그래, 그런 무서운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주게. 당연한 일을 한 거니 까. 그녀석은 다시없이 지독한 도둑놈에다 주정뱅이니까 말일세. 다만 아버지는 이 일을 내 가 알았다는 듯이 전혀 뜻밖이셨던 모양이야. 아버지는 퍽 당황해하시는 것 같았어. 그런데 이번엔 또 언짢게 해 드려야 하니... 하지만 신경 쓸 것 없어. 곧 나이지시겠지. 바자로프는 '신경 쓸 것 없어'하고 말은 했지만 자기 생각을 바실리 이바느이치에게 알 리 기로 결심하기까지에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마침내 그가 서재에서 아버지에게 이제 그만 쉬시라고 권하며, 일부러 그러는 듯 기재개를 켜면서 이렇게 말했다. "참... 하마터면 잊을 뻔했군요... 내일 퍼도트한테 역마를 준비하도록 일러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깜짝 놀랐다. "키르사노프가 우리 집에서 떠난다더냐?" "네, 그리고 저도 함께 가려고 합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비틀거리며 말했다. "너도 가겠다고?" "네... 가지 않으면 안돼요. 제발 말을 준비시켜 주십시오" "좋다" 하고 노인은 더듬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역마를 준비시켜 달라고... 좋아...하지만...하지만 왜 떠난다는 거냐?" "그 친구네 집에 잠깐 다녀와야겠어요. 하지만 저는 곧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겁니다." "그래. 잠깐 동안이랬지... 좋아" 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면서 거의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몸을 굽혔다. "좋아, 그러게...일러두겠다. 나는 네가 이젠 집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었다. 좀더 오래... 그런데 사흘이라니...3년만인데 이건 너무 짧구나. 짧단 말이 야, 예브게니" "그래서 저도 곧 돌아오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꼭 가야만 하거든요." "꼭 가야 한단 말이지... 할수 없지. 무엇보다도 먼저 의무를 수행해야만 하니까... 그럼 말을 준비해 놓아야 겠구니. 좋아. 나도 물론이지만, 아리나도 이렇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네 어머니는 말이다, 이웃집에 부탁하여 꽃을 얻어다가 네 방을 꾸미려고까지 생각 하고 있었단다. (바실리 이바노이치는 매일 아침, 날이 새기가 무섭게 맨발에 덧신을 신은 채로 나가 치모페이치와 상의 하여 떨리는 손으로 찢어진 지폐를 한 장 한 장 넘겨주면서 그에게 장보아 올 각종 물건들을 부탁하고 그 중에서도 여러 가지 식료품이나 젊은 두 친구 가 좋아할 성싶은 붉은 포도주를 입수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던 터였지만, 그런 것에 대 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중요한 것은 '자유'란 것이지, 이게 내 주장이란 다.. 속박해선 안되는 거지, 안되는 거야..."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리고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곧 다시 만날 거예요. 아버지, 정말..." 그러나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돌아보지도 않고 다만 손을 내저을 뿐 밖으로 나가버 렸다. 그가 침실로 돌아와보니 아내는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그는 아내가 잠에서 깨나지 않 도록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떴다. "당신이에요, 바실리 이바느이 치?" 하고 그녀는 물었다. "그래, 나야, 여보" "당신, 에뉴사한테 갔다 오시는 길이죠, 네? 걱 정이군요. 그애가 소파에서 편히 잘 수 있을까요? 나는 당신이 행군할 때 쓰시던, 짚으로 된 이불과 새베개를 그애에게 마련해주도록 안피수시카에게 일렀어요. 난 그애에게 우리가 쓰 던 깃털로 된 이불을 주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애는 푹신하게 자는 걸 전부터 싫어하는 것 같아서." "괜찮아요, 여보. 걱정하지 말아요. 그애는 만족하고 있어요. 하느님, 죄 많은 우리를 용서 하소서"하고 그는 나직이 하던 기도를 계속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늙은 아내가 가엾게 여겨졌다. 그는 어떤 슬픔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해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그녀에 게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튿날 바자로프와 아르카디는 그곳을 떠났다. 아침부터 온 집안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안피수시카는 접시를 손에서 떨어뜨렸고, 페지카도 내내 이해 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있다가 나중엔 장화를 벗어던졌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여느 때보다도 한층 더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그는 겉으로는 힘을 내어 큰 소리로 지껄이며 발소리를 내어 걸어다니고 있었 지만, 그 얼굴은 바싹 야위어버렸고 시선은 줄곧 아들에게서 떠나지를 않았다. 아리나 블라 시예브나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날 아침 일찍 남편에게서 두 시간 동안 줄곧 타이름을 받지 않았다면 분명 체면 불구하고 소란을 피웠을 것이다. 바자로프는 한 달 내에 반드시 돌아오겠노라고 거듭 약속한 뒤에야 그를 만류하고 있던 포옹에서 간신하 빠져나와 여행마 차에 자리잡고 앉을 수 있었다. 말들이 움직이고, 방울소리가 울리고, 바퀴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젠 전송하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먼지도 가라앉았다. 치모페이치도 허리 를 잔뜩 구부리고 비틀거미려 자기의 조그만 방으로 간신히 돌아왔다. 마치 그들 자신의 모 습처럼 갑자기 쪼그라들고 낡아버린 듯이 느껴지는 집안에 노부부만이 남았다. 방금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현관 입구에서 힘차게 손수건을 흔들고 있던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이제는 의 자에 깊숙이 앉아 머리를 가슴까지 푹 떨어뜨리고 있었다. "우릴 버리고 간거야. 그애는 우리와 함께 있는 게 지루한 거야. 이제 난 외토리가 되었 어. 이 손가락처럼 외토리가 된 거야."하고 그는 몇번이나 거듭 말하면서, 그때마다 집게서 손가락만 세운 한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저라 아리나 블라시예브나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자기의 백발을 남편의 백발에 기대면서 이렇게 말했다. "할 수 없는 노릇이에요. 바샤 자식 이라는 것은 잘려진 빵조각과 같은 거예요. 그애는 마치 매와 같아서, 오고 싶으면 날아오고 가고 싶으면 훌쩍 날아가버리는 거예요. 하지만 나나 당신은 마치 나구구멍에 난 버섯처럼 나란히 앉아 꼼작도 않지요. 다만 나만이 당신을 위해서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남아 있을 것 이고 당신도 또 나를 위해 그러실 거예요"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얼굴에서 두 손을 떼고 아내 자기 평생의 친구를 껴안았다. 그것은 젊었을 적에도 그래본 적이 없었을 만큼 힘찬 포옹이었다. 그녀가 그의 슬픔을 위로해 준 것이다. 22 어쩌다가 한 번씩 잠깐 몇 마디 말을 나눌 뿐 계속 입을 다문채 두 친구는 페도트가 있는 곳까지 마차를 타고 갔다. 바자로프 자신으로서도 그다지 흡족하지가 못했다. 아르카디도 바 자로프에게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다만 젊은이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까 닭 모를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마부는 말을 바꿔 달고 마부석에 오르더니, 오른쪽 길과 왼 쪽 길 중 어느쪽으로 가야 할지를 물었다. 아르카디는 몸을 부를 떨었다. 오른쪽 길은 시내로 통해 있고 거기서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다. 왼쪽 길은 오딘초바 부인의 집과 통해 있었다. 그는 바자로프 쪽을 흘낏 보았다. "예브게니"하고 그가 입을 열었다. "왼쪽으로 가겠나?" 바자로프는 외면해 버렸다. "무슨 바보같은 소릴?" 하고 그는 투덜거렸다. "바보 같은 짓이 라는 것은 알고 있네" 하고 아르카디는 대답했다. "하지만 곤란할 게 아무것도 없지 않은 가? 우린 처음이 아니잖나?" 바자로프는 학생모를 이마에 푹 덮어썼다. "아무렇게나, 좋을대 로"하고 마침내 그는 말했다. "왼쪽을 가자"하고 아르카디는 외쳤다. 여행마차는 니콜스코예 마을 쪽으로 서둘러 떠났다. 그런데 바보같은 짓을 하기로 결심한 뒤로 두 친구는 전보다 더 입을 꽉 다문채, 마치 화라도 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오딘초바 부인 댁 바깥 현관에서 하인의 마중을 받으며 두 친구는 자기들이 갑자기 생각 해낸 공상에 넘어가 분별없는 짓을 했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그들은 아마도 별로 반가운 손님은 아니었을 것이다. 두 친구는 꽤 오랬동안 멍청한 얼굴로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마침 내 오딘초바 부인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여느때처럼 상냥하게 인사는 했지만, 그들 이 이토록 빨리 돌아 온 데에 깜짝 놀란 듯했으며, 어쩐지 마음 내키지 않는 다는 듯한 몸 짓이나 이야기하는 거동으로 보아 그들이 찾아온 것에 대해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 같 았다. 두 친구는 다만 도중에 잠시 들른 것 뿐이라 네 시간쯤 후에는 다시 시내로 나가야 한다고 황급히 말하였다. 그녀는 가볍게 감탄하는 것으로 그쳤으며, 아버지께 안부를 전해달 라고 아르카디에게 부탁하고 나서 이모를 모셔오도록 일렀다. 늙은 공작 따님은 마치 자다 깬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그 때문에 그 주름살투성이의 얼굴 표정이 더한층 심술궂 게 보였다. 카샤는 기분이 울적하다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르카디는 갑자기 안나 세르 게예브나와 마찬가지로 카샤 역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 저것 시시한 뜬 소문을 주고받는 사이에 네 시간이 흘러가벼렸다. 안나 세르게예브 나는 굳은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이야기하기도 했으나 막상 헤어질 무렵이 되자 그제야 전의 우정이 마음 속에 솟아난 것 같았다. "지금 나는 우울증에 걸려 있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마음쓰지 마시고 또 와주세요. 조금만 더 지나면 두 분에 게 말씀드리겠지만요." 바자로프와 아르카디는 대답 대신 잠자코 인사를 하고는 마차에 올랐다. 그러고는 아무 데에도 드르지 않고 곧장 집으로, 마리노 마을을 향하여 말을 달려 이튿날 저녁에 무사히 도착했다. 오는 동안 내내 그 어느쪽도 오딘초바 부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특히 바자로프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어쩐지 매우 긴장한 표정으로 길 건너편만 바라보고 있 는 것 같았다. 마리노 마을에서는 모두가 그들을 극진히 반겨주었다. 오랫동안 아들이 집을 비운사이 니 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줄곧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따라서 페니치카가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로 뛰어들어와 '도련님들'이 도착했다고 알렸을 때 그는 외마다 소리를 지르고 다리를 후 들 거리며 소파위로 뛰어올랐을 정도였다. 파벨 페트로비치까지도 까닭없이 흥분을 느끼며 돌 아와준 방랑자들의 손을 잡아 흔들면서 너그럽게 껄껄거리는 것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소 문에 대한 이야기와 갖가지 의문점을 나누었는데, 특히 밤참 때에는 아르카디가 가장 많이 지껄였고, 식사는 자정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얼마 전에 모스크바에 서 사들인 영국산 흑맥주를 몇 병 내놓도록 이르고 자기도 얼굴이 빨개지도록 마셨다. 그는 시종일관 어딘지 모르게 어린아니 같기도 하고 신경질적인 것 같기도 한 소리로 웃고 있었 다. 모든 활기는 하인들에게까지 번졌다. 두나샤는 미친 듯이 앞뒤로 뛰어다니며 쉴새없이 문소리를 내고 있었다. 또 피오트르는 새벽 2시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기타로 카자흐의 왈츠 를 쳐보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기타 연주는 잠잠한 공기속에서 구슬프고도 기분좋게 울려 퍼졌지만 겨우 첫머리의 장식 악구외에는, 이 교양있는 하인한테서는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었다. 자연은 그밖의 모든 것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음악적 재능에 있어서도 그를 거절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실 마리노 마을에서의 생활은 그다지 잘 돼나가지 못했다. 가엾은 니콜라이 페 트로비치는 비참한 꼴을 당하고 있었다. 농장 일로 날마다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긋지긋하고 의미없는 분쟁이었다. 고용인들과의 분쟁은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떤 자들 은 임금 청산이라든가 증액을 요구하는가 하면, 또 어떤 자들은 착수금을 움켜쥐고 자취를 감추기도 하였다. 말들은 병이 들고 마구는 곧잘 망그러졌으며, 일은 제멋대로 되었다. 모스 크바로부터 사들은 탈곡기는 너무 무거워 쓸목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나마 한 대는 처음 부터 못 쓰게 돼버렸다. 가축의 막사도 반이나 타버렸는데, 그것은 눈먼 하인 노파가 바람 부는 날, 타다 남은 재로 자기의 암소 꼬리를 지지러 장작을 들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밤색 암소의 꼬리를 지지면 가축의 전염병을 막는 미신이 있었다.) 그 노파의 주장에 의하면 이 런 재난이 일어난 것도 모두가 주인께서 생전 보지도 못한 치즈니 우유 제품이니 하는 것들 을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토지관리인도 갑자기 게으로 버릇이 생겨서, '편한 벌이'를 하고 있는 러시아인이 다 그러하듯이 그도 살이 찌기 시작했다. 니콜라이 페 트로비치의 모습이 멀리서부터 어른거리기만 하면 그는 부지런히 일하는 척하기 위해 옆에 서 뛰어 다니는 돼지 새끼에게 나무토막을 던지거나 거의 벌거벗은 사내아이들을 을러대기 도 했지만, 대개는 낮잠 자는 시간이 많았다. 소작제로 논밭을 갈아먹고 사는 농민들은 기한 이 되어도 돈을 지불하지 않았으며, 삼림의 나무까지 도발하고 있었다. 거의 매일 밤 야경꾼 들은 농장의 초원에서 농민들의 말을 붙잡았으며, 때로는 무력으로 빼았기도 하였다. 니콜라 이 페트로비치는 가축이 전답을 망쳐버린 피해에 대하여 벌금을 부과하려고 한 적도 있었지 만, 결국은 늘 하루나 이틀쯤 지주댁의 사료를 축낸 다음에 말들을 그 임자에게 되돌려 보 내는 것으로 해결을 보았다. 게다가 농민들은 저희들끼리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형제들끼리 재산분배를 요구하거나, 그들의 마누라들끼리 한집에서 서루 다투거나 했다. 또 갑자기 싸움 이 시작되면 모두가 일제히 일어나 사무실 현관으로 웅성웅성 모여들었다. 그러고는 상처투 성이의 추한 얼굴이 되거나 녹초가 되도록 취해 주인을 귀찮게 붇어다니며 판결이나 제재를 요구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또 떠들어 대거나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사나이의 호통소리에 섞인 여자의 비명소리도 주위에서 시끄럽게 들려왔다. 어차피 공정한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쌍방은 서로의 편의를 해결하기 위해 트쟁해야만 했고 니콜 라이 페트로비치 역시 목이 쉬도록 외쳐야만 했다. 또 수확 때에는 일손이 모자랐다. 매우 점잖은 얼굴을 한 근처의 소지주 한 사림이 1제샤치나 (약 1헥타르)당 2루블로 일꾼을 소개 해 준다는 조건을 정하고 있으면서도 아주 비양심적인 방법으로 기만하는 것이다. 소유지의 농부 부녀자들까지 여태껏 듣지도 못한 만큼의 임금을 요구했다. 그러는 동안 어느 새 곡식 낟알은 밭으로 흩어져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수확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거기다가 후견 회의소 (모스크바 양육원을 후견으로 하는 기관으로, 관하에 융자취급소가 있었다.)에 서는 지체없이 이자를 지불하라고 을러대며 요구해왔다. "이젠 지쳤어"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몇 번이나 절망적으로 소리질렀다. "내가 직접 우격다짐을 할 수도 없고 경찰을 부른다는 것도 내 신조가 용서칠 않아. 하지만 징벌로써 협박하지 않으면 무엇 하나 해결할 수가 없으니." "침착해야 한다. 침착해야 해"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에게 대꾸하지만 그 자신은 목에 서 이상한 소리르 내며 얼굴을 찌푸리고 콧수염만 잡아당기고 있을 뿐이었다. 바자로프는 이러한 '시시한 마찰'에서 멀리 떠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손님으로서 남의 일 에 참견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마리노 마을에 도착한 그 이튿날, 그는 개구리와 적충류와 화학 성분의 연구에 착수하고 그런 것들에 그의 시간을 전부 보내고 있었다. 아르카디는 그 와 반대로, 비록 아버지를 돕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언제든지 도울 용의가 있다는 태도를 취 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버지의 말에 참을성 있게 귀를 기울였으며 한 번은 조언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자기의 주장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동정심의 한 표현 이었다. 농업 경영은 그에게 싫증을 일으키게 하지는 않았다. 그는 농업 기술자로서의 활동 을 즐겨 꿈꾸기는 했지만 그 무렵의 그의 머릿속은 다른 여러 가지 생각으로 들끊고 있었 다. 아르카디 자신도 놀란 일이지만, 그는 쉴새없이 니콜스코예 마을에 대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전 같았으면, 만약 누군가가 그에게 바자로프와 한지붕 아래 있으니, 게다가 자기 집에 서 함께 살고 있으니 얼마나 귄태롭겠느냐고 물으면 그는 다만 어깨를 움츠렸을 따름이었으 리라. 그런데 그는 이젠 정말 지루함을 느꼈고 그의 마음은 멀리 있는 다른 것에 이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녹초가 되도록 산책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하루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는 아주 오래 전에 오딘초바 부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한테 쓴 꽤 흥미 있는 편지를 아버지가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뒤었다. 그래서 그는 그 편지를 손에 넣을 때까지 아버지 곁에서 떠나려 들지 않았으 므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30여 개나 되는 궤와 트렁크를 뒤적거리며 그것을 찾아야만 했 다. 반쯤 곰팡이가 난 그 종이쪽을 자기 손에 넣고 나니 아르카디는 마치 자기가 나아갈 목 표를 눈앞에 본 듯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들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 는 이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부인이 먼저 그렇게 덧붙이지 않았는가. 가야 지, 가겠어. 주저할 게 뭐 있는가' 그러나 그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의 차디찬 응대 라 든지 그전의 겸연쩍었던 일을 생각하고는 두려운 마음으로 가득 차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 국 '요행'을 바라는 젊은이다운 기분과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맛 보 고 싶다. 혼자서 자기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은근한 바람이 그를 눌러버렸다. 마리노 마 을로 돌아온 지 열흘도 못되어 그는 주일학교의 운영을 연구한다는 구실로 또다시 마치를 몰고 시내로 나가 거기서 니콜스코예 마을로 향한 것이다. 쉴새없이 마부를 몰아세우면서 그는 마치 싸움커로 달려가는 젊은 장교처럼 마을을 향하여 질주했다. 그는 두렵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했으며, 그의 가슴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조바심은 그를 숨막히게 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 거다'라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거듭 타일렀다. 마침 그 가 탄 마차의 마부는 위세 있는 사나이로, 선술집 앞을 지날 적마다 마차를 세우고는 "한잔 하시렵니까?" 하든가, "한 잔해도 좋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지만, 그 대신 집의 뾰족한 지붕이 나타났다... '나는 대체 뭘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아르카디의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만둘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삼두마차는 발맞추어 질주하고 있 었다. 마부는 소리를 내지르기도 하고 휘파람을 불어대기도 했다. 어느 새 작은 다리가 말발 굽과 바퀴 밑에서 덜컹거리기 시작하더니 베어버린 단풍나무 가로수 길이 나타났다... 짙은 초록 속으로 장밋빛 여자 옷이 언뜻 보였고 이윽고 싱싱한 얼굴이 양산의 가벼운 술장식 밑 으로 이쪽을 내다보았다... 그녀는 카샤였다. 그녀도 역시 그를 알아보았다. 아르카디는 달리 고 있던 말을 멈추도록 마부에게 이르고 마차에서 뛰어내려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어머나, 당신이었군요" 하고 그녀는 말하고 얼굴을 살짝 붉혔다. "언니한테 가시지요, 언 니는 저쪽 끝에 계세요. 언니도 당신을 보면 기뻐하실 테니까요." 카샤는 아르카디를 뜰로 데리고 갔다. 카새와 만난 것이 그에게는 특히 행운의 전조인 양 생각되었다. 그는 마치 친 척이라도 만난 듯이 그녀가 반갑게 느껴졌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하인도 나 오지 않았거니와 안내도 필요없었다. 샛길 모퉁이에서 그는 안나 세르게예브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는데 발소리를 듣고 조용히 뒤돌아보았다. 아르카디는 또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지만 그녀가 그에게 던진 첫마디가 그를 이내 안심 기켰다. "잘 왔어요, 도망자님"하고 그녀는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미소를 띄 며 햇빛과 바람 때문에 실눈을 뜨면서 그를 맞아주었던 것이다. "어디서 이분을 만났니, 카 샤?" "안나 세르게예브나, 난 당신에게"하고 그는 말을 꺼냈다. "정말 생각할 수조차 없는 뜻밖의 물건을 가지고 왔어요..." "당신은 당신 자신을 가지고 오셨어요. 그게 무엇보다도 좋아요." 23 바라로프는 빈정거리는 듯한 동정의 빛으로 아르카디를 전송하면서, 그가 떠나는 확고한 목적에 대해서는 결코 속지 않으리라고 암시해두고는 완전히 고독 속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는 갑자기 열병에라도 걸린 듯이 연구욕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는 이제 파벨 페트로비치 와는 말다툼도 하지 않았다. 상대는 그의 앞에서 극단적으로 귀족 티를 보이며, 자신의 의견 을 말로써보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나타내려 들었기 때문에 논쟁을 더욱 불가능했 다. 단 한 번 파벨 페트로비치가 당시 유행하고 있던 발틱 연안의 귀족들의 권리가 어떠느 니 하는 문제로 이 허무주의자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으나 자기 쪽에서 먼저 황급히 그만 두어 버리고 냉정하고도 은근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서로를 이해 할 수 없을 것 같군.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영광을 조금도 지니지 못했소." "그러실 테죠." 하고 바자로프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인간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가령 에테르가 어떻게 떨고 있고, 태양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까지 도 말입니다. 하지만 어째서 다른 사람이 자기와 다른 방법으로 코를 푸는가 하는 것은 도 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뭐라고, 그것도 재치하고 생각하는가?"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미심쩍은 듯한 얼굴로 말하고는 저쪽으로 가버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따금 바자로프에게 실험하는 것을 보여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있었다. 한번은 값비싼 화장품으로 말끔히 씻고 향수를 듬뿍 바른 자기 얼굴을 현미경에 갖다대고는 투명한 적충류가 녹색의 가느다란 먼지를 어떻게 해서 삼키며, 떠 그것을 목구멍 옆에 있는 뭔가 매우 날카로운 이 같은 것으로 바삐 씹고 있는 것을 관찰한 일까지 있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형보다도 더 자주 바자로프를 찾았다. 그는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날마다라도 농업경영 쪽의 일을 가지고 그의 말대로 '공부'하로 찾아갔을 것이다. 그는 이 젊은 자연 연 구자를 곤란케 하는 일은 없었다. 방의 한쪽 구석에 걸터앉아 어쩌다가 한 번씩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양해를 구하면서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점심 때나 밤참을 먹을 때 그는 화제 를 물리학이나 지질학, 혹은 화학 방면으로 이끌어가려고 애썼다. 그것은 그 밖의 다른 화제 는, 정치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농업경영 문제마저도 충돌 내지는 상호 불만을 초래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짐작한 바로는 바자로프에 대한 그의 형의 증오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다른 많은 사건들 중에서도 거의 문제가 되지 않을 만한 하나의 우연한 사건이 그의 짐작을 활실케 했다. 이 지방 여기 저기에 콜레라가 발생하기 시작하여 마리로 마을에서도 두 명의 농부를 데려가 버렸던 것이다. 어느 날 밤 파벨 페트로비치는 심한 발짝을 일으켰다. 그는 새벽녘까지 줄곧 신음했지만, 바자로프의 의료 기술에는 결코 의지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이틑날 그와 만났을 때 "왜 저를 부르러 보내지 않으셨습니 까?" 하고 묻는 바자로프에게 아직도 좀 핼쑥한 얼굴로, 그러면서도 어느 새 머리를 단정히 빗고 수염도 말끔히 깎은 그는 "자네 자신도 의학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지 않았는 가?" 하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바자로프는 침울한 얼굴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러는 동안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댁에는 그의 심중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정도는 아니더라도 기꺼이 대화 상대는 되어줄 만한 한 사람이 있었다... 페니치카였다. 바자로프는 대개 아침 일찍 정원이나 혹은 뒤뜰에서 그녀와 만났다. 그가 그녀의 방에 들 르는 일은 없었으며, 그녀 역시 단 한 번 미짜를 목욕시켜도 좋을지 어떨지를 물으러 그의 방근처까지 갔던 적이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그를 아주 신용했고 무서워하지도 않았을 뿐 만 아니라, 그의 앞에 있을 때가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와 함께 있을 때보다 한층 더 자유스 럽고 마음이 푹 놓이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운 일었지만, 어쩌면 그녀가 바자로프에게는 귀족적인 것, 즉 자신이 이끌리기도 하고 두려워하 고 있기도 한 그 고급스러운 면이 전혀 없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느끼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눈에 비친 그는 뛰어난 의사이며 소탈한 인간이었다. 그녀는 그가 옆에 있을 때에는 별로 거리낌 없이 자기 아이를 돌보았다. 한번은 그녀가 갑자기 현기증이 일고 두통 이 일어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의 손에 의해 직접 약 한 숟가락을 받아먹기까지 했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의 앞에서는 웬일인지 그녀는 바자로프를 본체만체했다. 숨기려는 마음 에서가 아니라 하나의 예의 범절로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파벨 페트로비치만큼은 전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감시하게 되었고, 그 조끼가 딸린 양복을 입고는 노려보는 눈초리로 두 손을 주머니에 찌른 체 마치 지면에 우뚝 솟아나기라 고 한 것처럼 그녀 등뒤로 불쑥 나타나곤 하는 것이었다. "소름이 오싹 끼쳐" 하고 페니치 카는 두냐샤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한숨만 내쉬고는 또 다른 '무정한 사나이'를 생 각하고 있었다. 바자로프는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 소녀의 마음에 '잔인한 폭군'으로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페니치카는 바자로프를 좋아했고, 그도 역시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의 그의 얼굴 표정까지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그 얼굴은 밝고 거의 선량함에 가까운 표정 으로, 여느때와 마찬가지고 태연한 태도에 뭔가 장난기 비슷한 것이 뒤섞이는 것이었다. 페 니치카는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졌다. 젊은 여성의 일생 가운데에는 여름 장미처럼 갑자기 꽃피우고 찬란해지는 시기가 있는데, 페니치카가 바로 그러한 시기를 맞은 것이다. 모든 것 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북돋워주었으며, 그 무렵 계속되었던 7월의 더위마저 그것을 부채질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얇은 흰옷을 입고 있으면 그녀는 한층 더 희고 가뿐하게 보였다. 햇볕 에 타는 것은 그녀에게 별지장을 주지 않았지만 무더위 만큼은 그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 어, 그녀의 볼이나 귀를 불그레하게 물들이고 몸 전체에 나른함을 불어넣어 그 아름다운 눈 에 졸린 듯한 피로함을 나타내게 했다. 그녀는 거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두 팔은 걸핏하면 무릎위로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그녀는 걸음도 간신히 걸었으며, 노상 헉헉거리면 서 우스꽝스러우리만큼 지친 모습으로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여보, 찬물에 목욕을 하면 좀 어떨까?"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 러고는 그다지 물이 잦아들지 않는 못 하나에 삼베로 둘러친 커다란 목욕장을 만들어주었 다. "아아,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하지만 못에 다다르기도 전에 죽어버릴 거예요. 아니면 돌아 오는 사이에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정말이지 뜰에는 그늘 하나 없다니까요." "정말 그렇군, 그늘이 없지"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대답하고는 눈썹을 비벼댔다. 어느 날 아침 여섯 시가 지나 산책에서 돌아오던 바자로프는, 이미 꽃철은 지났지만 아직 도 파랗게 무성한 라일락 정자에 않아 있는 페니치카를 발견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흰 수건을 머리에 쓰고 벤치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아직 이슬에 젖어 있는 희불그레한 커다란 꽃 다발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인사했다. "아아,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하고 그녀는 말하고 그를 보기 위해 머릿수건의 한 끝을 조금 들어올렸는데, 그러는 바람에 그녀의 한쪽 팔이 팔꿈치께까지 드러나 보였다. "대체 요기서 뭘하고 계십니까?" 하고 그녀 옆에 앉으면서 바자로프는 말했다. "꽃다발을 만들고 계시는군요." "예, 아침 식사 테이블에 놓을까 해서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좋아하시는 꽃이거든 요." "하지만 아침 식사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충분합니다. 꽃이 정말 많군요." "지금 막 꺾은 거예요. 좀더 있으면 더워져서 밖에 나올 수가 없는 걸요. 그래도 지금 당장은 숨을 쉴 수 있으니까요. 전 이 더위에 그만 지쳐버렸어요. 병이나 나지 않을까 정말 걱정이예요." "무슨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맥을 좀 짚어볼까요" 하고 바자로프는 그녀의 손을 잡고 정상적으로 뛰고 있는 맥을 찾아냈지만, 그 맥박수를 세워보려고는 하지 않았다. "백 년쯤은 사시겠습니다" 하고 그는 그녀의 손을 놓으면서 말했다. "아아, 그건 지겨운 일이에요" 하고 그녀는 큰 소리로 외쳤다. "어째서요? 당신은 오래 살고 싶지 않습니까?" "하지만 백 년이라니요. 집에 여든 다섯 살 되신 할머니가 계셨는데 그야말로 대단한 고 통이었어요. 피부는 새카매지고 귀는 먹고 등은 굽고, 노상 기침을 하셨는데, 당신 자신은 오직 괴로워하실 뿐이었어요. 그렇게 살면 뭘해요?" "그렇다면 젊은 쪽이 더 좋으십니까?" "그야 물론이죠." "젊은 것이 왜 좋습니까? 말씀해보십시오" "왜냐고요? 보세요, 전 지금 젊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잖아요. 갈 수도 올 수도 있고 또 물건을 운반하는 것도 누구한테 의지하지 않아도 되지요... 이보다 좋은 게 또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저 같은 사람은 젊었거나 늙었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마찬가지라니요? 그럴 수는 없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 는 거예요?"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페도시야 니콜라예브나. 젊음 따위가 제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 까? 전 외로운 가난뱅이인데요..." "그런 건 얼마든지 당신 자신의 힘으로 극복될 수 있는 거예요." "그게 말입니다, 제 나름대로 되질 않더군요. 하다못래 누군가가 저를 불쌍히 여겨주기하 도 했으면 좋겠는데요." 페니치가는 바자로프를 쳐다보았으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작조 계신 그건 무슨 책이예요?"하고 잠시 후 그녀가 물었다. "이거 말입니까? 학술 서적입 니다. 매우 복잡한 책이지요." "당신은 언제나 공무만 하고 계시는 군요. 지루하지 않으세 요? 당신은 이제 뭐든지 다 알고 계시잖아요?" "뭐든지라고 말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하지 요. 좀 읽어보십시오" "하지만 전 그런건 하나도 몰라요. 당신의 책은 러시아어로 되어 있 나요?" 하고 묵직하게 제본된 책을 두 손으로 받아들면서 페니치카가 물었다. "무척 두껍군 요" "러시아어로 된 책입니다." "그래도 역시 전 아무것도 모를 거예요" "저 역시 당신이 그 것을 이해하시기를 바라고 드리진 않았습니다. 전 단지 당신이 어떤 모습으로 읽는지 그것 이 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책을 읽고있는 동안 당신의 코끝이 매우 예쁘게 움직이니까요" 페니치카는 마침 펼처진 '크레오소트'에 관한 곳을 나직이 읽기 시작하다가 웃음을 터뜨 리 고는 책을 내던지고 말았다... 책음 벤치에서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당신은 웃을 때도 보기가 좋습니다." 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그만하세요" "당신은 말할 때도 보기 좋습니다. 마치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것 같아요" 페니치카는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당신 참 이상한 사람이군요"하고 손가락으로 꽃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말했다. "제가 지껄이는 소리 따위 는 들어서 뭘해요? 당신은 꽤 현명한 귀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잖아요" "아, 페도이 샤 니콜라예브나, 제 말을 믿어 주세요. 온 세상 귀부인들을 전부 합쳐서 당신의 팔꿈치만큼 의 값어치도 안 될 겁니다. " "또 그런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 군요"하고 페니치카는 속삭이 고 두 손을 꼭 쥐었다. 바자로프는 땅에서 책을 주워올렸다. "이건 의학책입니다. 어째서 당 신은 내 던지는 겁니까?" "의학책이라고요?" 하고 페니치카는 되풀이하고 나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말 예요, 정말 당신이 그 물약을 주신 후로는,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미짜가 무척 잘 자요, 당신에게 뭐라고 감사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무척 훌륭한 분이에요. 정말" "사실 의사들은 마땅히 그 대가를 지불받아야 하는 것인데 말이죠" 하고 엷은 웃음을 띄 면서 바자로프가 말했다. "의사들은 당신다 아시다시피 욕심이 꽤 많은 사람들이나까요." 페니치카는 바자로프 쪽으로 얼굴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이 그녀의 얼굴 위로 내리쬐는 햇빛에 반사되어 한층 어둡게 보였다. 그의 말이 농담인지 아닌지 그녀로서는 알 수 가 없었다. "당신만 좋으시다면 기꺼이... 제가 니콜라이 피트로비치에게 여쭈어 볼수는 있지만요..." "제가 돈을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하고 바자로프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천 만에. 전 당신에게 돈 따위를 요구하는게 아닙니다." "그럼 뭘?" 하고 페니치키가 말했다. "뭐냐고요?"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 "맞혀보십시오" "전 수수께끼를 잘 풀지 못해요" "그럼 제가 말씀드리지요. 전 이걸 바랍니다.... 이 장미 한 송이를" 페니치카는 손뼉까지 치며 웃음을 터뜨렷다. 그만큼 바자로프의 소원이 그녀에게 재미있 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는 웃고 나서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바자로프는 그녀를 가만히 바 라보았다. "아, 그러죠" 하고 그녀는 간신하 말하고는 벤치에 엎드려서 장미를 고르기 시작했다. "어 떤게 좋을까요? 붉은 것으로 할까요, 아니면 흰 것으로?" "붉은 것으로, 너무 크지 않은 것 으로 부탁합니다." 그녀는 허리를 똑바로 폈다. "자, 받으세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다가 내밀었던 손을 도로 움츠렸다. 그러고는 입 술을 살짝 깨물며, 정자 입구를 흘긋보고 나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왜 그러십니까?"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십니까?" "아니예요... 그분은 밭에 나가셨어요... 그리고 전 그분은 무섭지 않아요... 하지만 파벨 페 트로비치는...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뭐라고요?" "그분은 저기서 걷고 있는 것 같았어요. 아니예요..., 아무도 없어요"하고 페니치카는 바자 로프에게 장미를 건네주었다. "어째서 당신은 파벨 페트로비치를 두려워하십니까?" "그분은 언제나 저를 위협하고 계세요. 말씀은 안하시지만 매우 이상한 눈초리로 저를 바 라보세요. 당신도 그분을 좋아하지 않으시더군요. 당신은 전에 항상 그분과 언쟁을 하셨지 요. 무슨 언쟁인지 저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당신은 그분을 이런 식으로, 마음대로 하신다 는 걸 알았어요. 이런 식으로 말예요..." 페니치카는 바자로프가 파벨 페트로비츠를 뜻대로 눌러버리는 모습을 두 손으로 시늉해 보였다. 바자로프는 미소를 지었다. "만일 그분이 저를 이길 것 같으면 당신은 제 편을 들어주시겠습니까?" 하고 그는 물었 다. "저 같은 것이 어떻게 당신 편을 들 수 있겠어요? 게다가 어느 누구도 당신을 굴복시킬 순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저를 때려눕힐 수 있는 손가락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어느 손가락인데요?" "그럴 모르신다는 말씀입니까? 자, 맡아보십시오, 당신이 주신 장미의 향기가 무척 좋군 요." 페니치카는 목을 빼고 꽃 가까이에 얼굴을 댔다... 그녀의 머리에 썼던 수건이 어깨로 미 끄러져 내리자 약간 헝클어진, 윤기가 흐르고 검고 부드러운 머리 다발이 드러났다. "잠깐만, 저도 당신과 함깨 맡고 싶군요." 바자로프는 이렇게 말하면서 몸을 굽혀 그녀의 벌어진 입술에 힘껏 키스했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그의 가슴을 밀어냈으나, 밀어내는 힘이 약했으므로 그는 다시 한 번 입을 맞출 수가 있었다. 라일락 그늘 속에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페니치카는 황급히 벤치의 저쪽 끝으로 옮겨 앉았다. 파벨 페트로비치가 모습을 드러내고 가볍게 인사하더니, 악의에 찬 싸늘한 말투로 "당신, 여기 있었군"하고 말하곤 저쪽으로 가버렸다. 페니치카는 곧 장미꽃을 전부 주워모아 정자 밖으로 나가버렸다. "당신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그녀는 나가면서 이렇게 속삭였다. 그녀의 속삭임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비난이 담겨 있었다. 바자로프는 최근에 있었던 또 하나의 장면을 떠올리면서,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경멸해주고 싶도록 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곧 머리를 저으면서 '이제 정식으로 뻔뻔스러운 바람둥이들 속에 끼여들었군'하고 냉소적으로 자기 자신을 자 랑 그러워하면서 그의 방으로 향했다. 한편 파벨 페트로비치는 정원 밖으로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잡목숲 가까이에까지 왔 다. 그는 오랫동안 거기 멈춰 서 있었다. 그가 아침 식사를 할러 돌아오니, 니콜라이 페트로 비치가 그에게 몸이 불편한 게 아니냐고 염려스럽게 물었다. 그토록 그의 얼굴이 어둡게 보 였던 것이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가끔 황달로 고생하잖나"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침착한 어조로 그에게 대답했다. 24 두 시간쯤 지나 그는 바자로프의 방문을 두드렸다. "자네의 공부를 방해하게 되어 미안하네." 그는 창가의 의자에 앉으면서 상아꼭지가 달린 아름다운 지팡이(그는 평소에는 지팡이를 짚는 일이 없었다)에 두 손을 얹고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게 5분만 할애해주도록 부득이 부탁하는 바이네... 기껏해야 5분일세." "좋으실 대로 하시죠"하고 바자로프는 대답했다. 파벨 페트로비치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바자로프의 얼굴에는 경련이 일었다. "5분이면 충분하네. 자네에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어서 말이야." "물어보신다고요? 뭡니까?" "들어보게, 자네 가 내 아우네 집에 머무르기 위해 처음 왔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자네와 이야기하는 것을 기쁘게 여겼었네. 또 많은 문제에 대한 자네의 의견을 들을 기회도 가질 수 있었지.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나 혹은 여럿이 함께 이야기 하는 가운데에서 결투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 같네. 이 문제에 대해 서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네." 바자로프는 바벨 페트로비츠를 맞으러 일어서려다가 다시 책상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는 팔짱을 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이론적으로 볼 때 결투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 역시 생각해볼 문제지요." "결국 자네는 결투에 대한 자네의 이론적 견해와는 상관없이 실제에 있어서는 자네 자신 이 모욕을 당할 경우 그 배상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로군 그래?" "정확히 제 의중을 꿰뚫어보셨군요." "아주 잘됐네. 자네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대단히 기쁘네. 자네의 그 말은 애매한 상태 로부터 나를 끌어내주었네."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태로부터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거겠지요?" "어느 쪽이든 상관없네. 나는 남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고 있는 거니까. 또 나는... 신 학교의 사동은 아니니까. 어쨌든 자네의 말은 어떤 필연적인 슬픔으로부터 나를 구출해주었 어. 나는 자네와 결투하기로 결심했네." 바자로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하고 말씀입니까?" "분명 자네하고 말일세." "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엉뚱하게." "그 이유는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네만"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을 꺼냈다. "하지만 차라리 잠자코 있는 편이 나을 줄로 생각하네. 내 생각엔 자네는 이 집안에 필요 없는 사람 일세. 나는 자네를 용서할 수가 없어. 자네를 경멸해. 그래도 충분치 못하다면..." 파벨 페트로비치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바자로프의 눈도 갑자기 타 올랐다. "그렇다면 좋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없습니다. 당신은 저를 빌 미 삼아 자신의 기사도 정신을 시험해보려고 하시는 모양이군요. 저는 당신의 그런 요구를 거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젠 어찌 되든 상관 않겠습니다" "충심으로 자네에게 감사하네"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대답했다. "그럼 내 청을 받아들 이는 것으로 생각해도 되겠지? 폭력적인 수단을 쓰지 않더라도 말이야." "그러니까 그 지팡이로 말인가요?" 하고 바자로프는 차갑게 말했다. "옳은 생각입니다. 저 를 모욕하실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전혀 위험하지 않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당신도 이제 신사 체면을 지키실 수 있을 겁니다. 저 역시 신사답게 당신의 청을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훌륭하네." 파벨 페트로비치는 이렇게 말하고는 지팡이를 한쪽 구석에 세워 놓았다. "그럼 즉시 우리들의 결투 조건을 두어 가지 상의하세. 그런데 우선 물 어보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자네는 내 청에 대한 구실이 될 만한 약간의 언쟁의 형식이 필요 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그런 형식 따위는 없는 것이 좋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우리가 서로 충돌하게 된 근본 원인을 너무 길이 캐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못 된다고 생각하네. 우리는 서로가 미워하거 있지 않은가? 그 이상 뭐가 필요하 겠나?"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하고 바자로프는 비꼬는 투로 그를 흉내내어 말했다. "결투 조건 그 자체에 대해서 말인데, 우리는 서로 입회인들이 없으니 대체 어디서 그들 을 구해올 수 있겠나?" "정말 어디서 구해오지요?" "그럼 자네에게 한가지 제안해도 되겠지? 결투는 내일 아침 일찍, 가령 여섯시로 해두세. 숲 저쪽에서, 무기는 권총으로 하세. 그리고 거리는 열 발짝..." "열 발짝이라고요? 그렇게 하지요. 그 정도의 거리라면 우린 충분히 서로 미워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여덟 발짝도 좋네"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했다. "좋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사격은 두 번일세. 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각자 자기 주머니에 편지를 넣어두도록 하지. 거기에다 자기가 죽은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고 써서 말일세." "그건 찬성하고 싶지 않은데요"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어쩐지 좀 프랑스 소설 같군요. 현실성이 없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자네도 동의하겠지만, 살인 혐의를 받는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잖나."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불쾌한 비난을 피할 수 있는 방도가 있긴 있습니다. 우린 입회 인들은 없어도 증인은 둘 수 있습니다." "그게 대체 누구란 말인가?" "피오트르입니다." "피오트르라니, 그게 누군가?" "당신 동생의 하인 말입니다. 그는 현대 교육을 충분히 받은 사람이라 이런 경우에 필요 한 모든 조치를 강구하여 자기 역할을 완전 무결하게 해낼 것입니다." "자네, 농담하고 있는 건가?" "절대 농담이 아닙니다. 제 제안을 잘 생각해보시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상식적이며 간편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진리는 스스로 드러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제가 피오 트르로 하여금 그만한 각오를 하게 하고 사격 장소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자네는 여전히 농담을 하고 있는 것 같군." 하고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파벨 페트로비치 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이토록 친절하게 준비를 해주니 내 어찌 불평을 말할 수 있겠 나... 그럼 다 됐군 그래... 그런데 자네는 권총을 갖고 있나?" "어디서 권총 같은 것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파벨 페트로비치씨? 전 군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 것을 쓰도록 하게. 믿어도 좋을 걸세, 그것을 쓰지 않은 지가 5년이나 됐으 니까." "그거 참 반가운 소리군요." 파벨 페트로비치는 지팡이를 손에 들었다. "그럼 이제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자네가 다시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이곳을 떠나는 것만이 남았군. 그럼 이만 실례하겠네." "그럼 다음에 꼭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겠습니다"하고 손님을 배웅하면서 바자로프는 말 했다. 파벨 페트로비치가 나가자 바자로프는 문 앞에 서 있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흥, 빌어 먹을. 어쩌면 그렇게 점잖은 말투로 그런 바보 같은 소릴 한담. 우리는 얼마나 우스운 짓을 했는가. 마치 재주를 익힌 개들이 멋들어지게 뒷발로 춤을 추듯이. 하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어. 그랬다면...(바자로프는 생각만 해도 얼굴이 새파래지고 자존심이 극도로 상해 불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랬다면 나는 그 녀석을 고양이 새끼처럼 목 졸라 죽였을거야." 그는 다시 현미경 쪽으로 돌아왔지만 그 마음의 고동은 그치지 않아, 관찰하는 데 없어서 는 안 될 침착성이 사라져버렸다. '그 녀석이 오늘 우릴 본 것임에 틀림없어'하고 그는 생각 했다. '그런데 그 녀석은 정말로 제 아우를 위해 이토록 감싸주는 것일까? 게다가 키스쯤 이 야 뭐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 분명 뭔가 다른 문제가 있을거야. 흥, 그렇겠지. 역시 그 자신 이 그녀에게 반한 걸거야. 그거야 뻔한 노릇이지. 어쩌다가 이런 딱한 처지가 되었을까, 어 쩌다가? 정말 더럽군.' 마침내 그는 결심했다. '더럽게 됐어, 어느 모로 보더라도. 무엇보다 도 탄알에 이마가 뚫려야만 하니. 어쨌든 여기서 떠나야만 해. 그런데 여긴 아르카디와... 그 호 인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참 더럽게 됐군, 더럽게 됐어.' 그날 하루는 어쩐지 꾸물거리며 조용히 저물어 갔다. 페니치카는 마치 이 세상에 없는 듯 했다. 그녀는 마치 쥐구멍 속의 쥐새끼처럼 자기의 작은 방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다. 니콜라 이 페트로비치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특히 기대를 걸고 있었던 밀밭에 깜 부기가 생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 기분 나쁜 정중한 태 도로 모두를, 마침내는 프로코피치까지도 놀라게 하고 있었다. 바자로프는 아버지에게 편지 를 쓰다 말고 그것을 찢어 책상 밑에 던져버렸다. '내가 죽는다면' 하고 그는 생각했다. ' 결 국 모두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는다. 아니, 나는 이제부터 이 세상에 오래오 래 살 것이다.' 그는 피오트르에게 중요한 용무가 있으니 내일 새벽에 자기에게 와주도록 일 렀다. 피오트르는 그가 자가를 페테르부르크로 함께 데려가 주는 줄로만 여기고 있었다. 바 자로프는 늦게야 잠이 들었는데, 밤새껏 어수선한 꿈으로 시달렸다... 오딘초바 부인이 눈앞 에서 빙글빙글 돌고, 그녀가 자기 어머니가 되는가 하면 그 뒤에 검은 새끼 고양이가 걸어 가기도 하고, 그 새끼 고양이가 페니치카로 보이기도 했다. 파벨 페느로비치가 자기 앞에 커 다란 숲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쨌든 그는 꿈에서도 그 작자와 결투를 해야만 했다. 피오트르는 네 시경에 그를 깨웠다. 그는 곧장 옷을 주워 입고 그 뒤를 따라 나섰다. 상쾌하게 느껴지는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맑은 유리빛 하늘에 조그만 얼룩 구름이 드문 드문 희부연 양떼처럼 떠 있었다. 잔이슬이 나뭇잎이나 풀 위에 맺혀 있었고 거미줄 위의 이슬 방울들은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눅눅한 대지는 붉은 빛 아침놀을 아직도 머금고 있 는 것 같았다. 하늘에선 온통 종달새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바자로프는 숲 가까 이에 이르자 그 어귀에 있는 나무 그늘에 앉아, 그제야 비로소 피오트르에게 그가 어떠한 임무를 맡아야 하는지를 털어 놓았다. 이 교양 있는 하인은 깜짝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바자로프는 단지 멀리 서서 지켜보는 일 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다는 것과 또 그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것을 확신시키면서 하인을 다독거렸다. "그렇지만 말이야"하고 그는 덧붙였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인가를 잊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피오트로는 두 손을 좌우로 벌리고 눈은 내리깔고, 얼굴은 흙빛이 되어 자작나무에 기대 어 섰다. 마리노 마을로 통하는 길이 이 작은 숲 주위를 따라 이어져 있었다. 어제 이후로 아직 차 바퀴나 사람 발자국이 지나간 흔적이 없는 가벼운 먼지가 그 길 위를 덮고 있었다. 바자로 프는 자기도 모르게 그 길을 따라 보면서 풀을 뽑아 이로 씹고 있었는데, 마음속으로는 '참, 어쩌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줄곧 뇌까리고 있었다. 아침의 찬 공기가 그를 두어 번 후들후들 떨게 했다. 피오트르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그를 흘긋 바라보았으나, 바자로프는 다 만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띌 뿐 겁을 집어먹고 있지는 않았다. 말발굽소리가 길 쪽에서 들려왔다... 한 농부가 나무 뒤에서 나타났다. 농부는 발을 묶은 두 마리의 말을 앞세워 몰고 있었다. 그리고 바자로프 옆을 지나치면서 모자도 벗지 않은 채 어쩐지 이상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것이 좋지 못한 전조로서 피오트르를 당 황케 한 것 같았다. '저 사나이도 퍽 일찍 일어났군'하고 바자로프는 생각했다. '그러나 저 사람은 적어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우리는...' "오신 것 같습니다"하고 갑자기 피오트르가 속삭였다. 바자로프는 고개를 들어 파벨 페트로비치를 보았다. 얇은 바둑판 무늬의 저고리에 눈처럼 흰 바지를 입고서 그는 바쁜 걸음으로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겨드랑이 밑에 녹색 나 사로 싼 상자 하나를 끼고 있었다. "미안하네. 자네를 오래 기다리게 한 모양이군"하고 그는 말하고 비로소 바자로프와 피오 트르에게 인사를 했는데, 그것은 이 하인을 증인으로 대우하여 경의를 표한 것이었다. "되도 록 하인을 깨우고 싶지가 않아서." "괜찮습니다"하고 바자로프가 대답했다. "우리도 방금 전에 왔는 걸요." "아아. 그거 잘됐 군." 파벨 페트로비치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안 보이는군. 방해 할 사람은 아무도 없네... 그럼 시작할까?" "그러지요." "새삼스럽게 설명을 요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자네가 손수 탄알을 장전하겠나?"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상자에서 권총을 꺼내면서 물 었다. "아닙니다. 직접 장전하여 주십시오. 전 거리를 재기로 하겠습니다. 제 발이 더 긴 것 같 으니까요" 하고 엷은 웃음을 띄면서 바자로프는 덧붙였다. "하나, 둘, 셋..."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하고 피오트르가 간신히 한마디 했다. (그는 열병에라도 걸린 것 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뭐라 말씀하시든 저는 저쪽에 가 있으렵니다." "넷... 다섯... 그쪽에 가 있어도 돼. 나무 그늘에 서서 귀는 막아도 좋지만 눈만은 감지 말 아주게. 그리고 누구든 쓰러지거든 달려와서 일으키는 거야. 여섯... 일곱... 여덟" 하고 바자 로프는 멈춰 섰다. "이만하면 되겠습니까?" 그는 파벨 페트로비치를 돌아보며 이렇게 물었 다. "두 걸음 더 나아갈까요?" "마음대로"하고 두 발의 탄알을 재면서 그는 말했다. "그럼 두 걸음 더 나아가기로 하겠습니다" 하고 그는 구두 끝으로 선을 그었다. "여기가 경계선입니다. 그런데 경계선에서 각자 몇 걸음씩 떨어집니까? 이것도 역시 중요한 문제입 니다. 어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았군요." "나는 열 걸음이 좋다고 생각하네"하고 바자로프에게 권총 두 자루를 모두 건네주면서 파 벨 페트로비치는 이렇게 대답했다.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잡게."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당신도 잘 아시겠지만, 우리들의 결투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좀 별나군요. 피오트로의 표정을 좀 보십시오." "자넨 늘 우스갯소리만 하는군"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대답했다. "나는 우리들의 결투가 사실 우스꽝그럽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네. 하지만 나는 지금 목숨을 걸고 자네와 싸우 고 있다는 것을 자네에게 미리 말해두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되는군. '영리한 사람은 한 마디만 하면 안다'라고들 하니 말일세" "아, 저도 우리가 서로 죽일 결심을 했다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유익한 것' 과 '유쾌한 것'을 결부시켜서... 웃어서는 안 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정말 어째서 그런가 요? 당신이 제게 프랑스어로 말씀하시니, 저도 당신에게 라틴어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나는 목숨을 걸고 싸울 작정일세." 파벨 페트로비치는 이렇게 되뇌고 자기 자리로 향했 다. 바자로프도 경계선에서 열 걸음을 세고 멈춰 섰다. "준비는 다 됐는가?"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물었다. "다 됐습니다." "그럼 결판을 내세." 바자로프는 서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왼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총구를 천천히 들어올리면서 바자로프를 향해 나아갔다... '저 작자는 정확히 내 코를 겨냥하고 있군 그래'하고 바자로프는 생각했다. '실눈을 뜨 고 노려보고 있군, 강도같은 녀석. 나는 저자의 가슴에 매달린 시계줄을 노려야지...' 뭔가가 바 자로프의 한쪽 귀를 휙 하고 쓰쳐갔다. 그러자 그 순간 총을 발사하는 소리가 울렸다. '총소 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로군'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그의 뇌 르 를 스쳤다. 그는 또 한 걸음 내디뎌 조준도 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가볍게 몸을 떨더니 한 손으로 넓적다리를 꽉 잡았다. 한 줄기 피가 그의 흰 바지 위로 흘렀다. 바자로프는 권총을 집어던지고 적수에게로 다가갔다. "다치셨어요?" 하고 그가 물었다. "자네는 나를 경계선까지 오게 할 권리가 있었던 걸세"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하지난 이만한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네. 약속대로 하면 각자가 또 한 번씩 쏠 수 있잖은 가?" "미안하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룹시다" 하고 바자로프는 대답하고 창백해지기 시작하는 파 벨 페트로비치를 끌어안았다. "이제부터 저는 결투자가 아니라 의사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의 상처를 보아야겠습니다. 피오트르. 이리 와요, 피오트르. 어디 숨어 있는 거야?" "이까짓 상처는 하찮은 것일세... 나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네"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떠듬떠듬 말했다. "그리고... 해야지... 다시 한번..." 그는 자기 콧수염을 잡아당기려 했지만, 손에 힘이 풀리고 현기증이 일어나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니, 이런. 기절해버렸군. 웬일이지?"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를 풀 밭에 내려놓으면서 자 기도 모르게 바자로프는 큰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살펴봐야겠군." 그는 손수건을 꺼내어 피를 닦고는 상처 주위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뼈는 괜찮은데"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탄알은 그다지 깊이 박히진 않았어. 다만 바깥 대퇴근을 스쳤을 뿐이야. 3주일 만 지나면 춤이라도 출 수 있어. 그런데 기절을 하다니. 아아, 정말 지나치게 예민한 인간이 로군. 어쩌면 피부가 이렇게도 얇을까?" "돌아가셨습니까?" 하고 등뒤에서 피오트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바자로프가 돌아보며 말했다. "이봐, 물을 좀 가져오게. 이분은 나나 자네보다도 더 오래 사실거야." 그러나 꽤 개화되었다는 이 하인은 어쩐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그 자리에서 움직 이려 들지 않았다. 파벨 페트로비치가 천천히 눈을 떴다. "돌아가실 겁니다." 하고 피오트르는 중얼거리며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자네 말이 맞 아... 거 무슨 바보 같은 표정인가."하고 부상당한 신사는 어색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 했다. "이봐, 물을 좀 떠오라니까, 맹추야." 하고 바자로프가 외쳤다. "필요없네... 그저 일시적인 현기증이었을 뿐이네... 일어나 앉겠으니 손을 좀 잡아주게... 약간 긁힌 상처쯤은 그저 뭘로 좀 묶어매면 그만이야. 집까지 걸어갈 수도 있네. 아니면 마 차를 좀 불러주던가. 결투는 자네가 만일 더 원치 않는다면 이 이상 하지 말기로 하세. 자네 의 훌륭했네... 오늘만큼은 말일세. 오늘만은 그렇단 말이야, 알겠는가?" "지난 일은 생각할 것 없습니다."하고 바자로프가 말을 받았다. "또 미래에 대해서도 역시 지나치게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곧 이곳을 떠날 생각이니까요, 자, 그럼 이제 당신 다리에 붕대를 감아드려야 겠군요. 당신의 상처는... 그렇게 위험하진 않지만, 역 시 피를 멈추게 하는 편이 나으나까요. 그런데 우선 이 녀석부터 정신차리게 해야 겠군요." 바자로프는 피오트르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는 마차를 부르러 보냈다. "아우가 놀라지 않 도록 주의해야 한다."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에게 말했다. "그에게 알려서는 안돼" 피오트르는 곧자아 달려갔다. 그가 마차를 부르러 뛰어가고 있는 동안, 두 적수는 잠자코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바자로프 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역시 화해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거대한 태도와 패배가 부끄러웠고 자신 이 계획한 사건 자체도 부끄럽게 여겨졌다. 더욱이 사건이 이보다 더 좋게 매듭지어질 수는 없으리라고 그 역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자는 더 이상 이곳에 얼굴을 들고 머 물로 있지는 못 할거야'하고 그는 자위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 참을 수 없는 무 거운 침묵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좋은 기분일 수는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가 상대방의 마음을 떠보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친구들끼리라면 이러한 의식이 유 쾌하겠지만 원수끼리는 실로 불쾌한 것이다. 특히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도, 헤어질 수도 없 는 처지에서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다리를 너무 단단히 졸라멘 게 아닐까요?" 하고 마침 내 바자로프가 입을 열었다. "아니, 괜찮네"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대답하고 나서 잠시 후에 이렇게 덧붙였다. "아우 를 속일 수는 없네. 우리 정치문제로 말다툼을 했다는 정도라도 그에게 말해야만 할걸세."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하고 바자로프는 말했다. "제가 모든 영국 숭배자들을 철저히 조 소했노라고 말씀하여도 좋습니다." "알겠네. 그런데 자네는 저 사람이 지금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한 농부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그는 결투하기 바로 몇 분전에 발이 묶인 말들을 몰고 바자로프의 옆을 지나가단 그 사람이 었는데, 그가 이번엔 같은 길을 되돌아오면서 그들을 보자 길을 비켜서며 모자를 벗었던 것 이다. "알게 뭡니까"하고 바자로픈 대답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것입 니다. 러시아의 농부들이란 일찍이 래드클리프 (영국의 여류작가. 대표작은 유돌포의 괴기, 시칠리아 이야기, 숲의 로맨스등을 써서 공포소설을 유행시켰음. 1764년에서 1823년) 부인도 여러 번 언급했듯이 극히 알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누가 알겠습니까? 저 사람 자신도 자기를 모를텐데요" "아아,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는군"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을 꺼내다가 갑자기 소리를 높여 이렇게 말했다. "저봐, 저 바보 녀석 피오트르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인 모양이군. 아우 가 마차를 타고 이리로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바자로프가 뒤돌아보니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새파랗게 질려 사륜마차를 타고 오는 모습 이 보였다. 그는 마차가 채 멈추지도 전에 뛰어내려 형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하고 그는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이게 왠일인가?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아무것도 아니야"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대답했다. "넌 지나차게 염려하고 있는거야. 난 바자로프 군과 언젱을 좀 했을 뿐이고, 그 때문에 좀 앙갚음을 당한 것뿐이야." "하지만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신 겁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말씀 좀 해보세요" "글세 뭐 랄까, 바자로프 군이 로버트 피르 (영국의 정치가, 1789년에서 1850년)경에 대해 무례한 비 평을 했기 때문이야. 또 이번 일은 모두 내게 잘못이 있는 것이고, 바자로프의 태도는 훌륭 했어. 내가 이 사람을 불러낸거야." "하지만 형님, 피가 흐르고 있다고요. 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럼, 넌 내 혈관에는 물이라도 흐르고 있는 줄 알았더냐? 이렇게 피를 흘리는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한 일인지 도 몰라. 그렇지 않은가, 의사 선생? 제발 나를 마차에 태워주게. 그리고 제발 우울해하지 말게. 나는 이제 곧 건강해질 테지. 그래, 그런 식으로. 이제 됐어. 자, 마부, 그만 가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마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자로프는 뒤에 처지려고 했다. "자네가 형님을 좀 보살펴 주었으면 좋겠네"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에게 말했다. "그동안 나는 시내에서 다른 의사를 데려오도록 할 테니" 바자로프는 잠자코 머리를 숙였다. 한 시간쯤 후에는 파벨 페트로비치는 이미 발에 붕대 를 솜씨있게 감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온 집안이 떠들썩해서 페니치카는 현기중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근심에 잠겨 남 몰래 손을 쥐어짜고 있었는데, 파벨 페 트로비치는 특히 바자로프와어울려 웃기도 하고 농담을 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얇은 린네르 루바시카에 짦은 저고리를 입고 터키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커튼을 내리지 못하 게 하고, 또 음식을 절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에 대해 농담식으로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 다. 그러나 밤이 되자 그는 열이 나고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시내에서 의사가 도착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츠는 형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바자로프 자신도 그렇게 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바자로프는 하루 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얼굴이 아주 누렇게 떠 있었 으며, 환자의 방에는 아주 잠깐씩 들를 뿐이었다. 두 번쯤 페니치카와 마주칠 기회가 있었으 나, 그녀는 두려운 듯이 움찔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새로 온 의사는 그에게 찬 음식을 권하며 별로 위험할 것은 없다고 말함으로써 바자로프의 증언을 확인해 주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형은 자신의 부주의로 다친 것이라고 말하자 그 말에 의사는 흠 하고 미심쩍 어했으나 곧 그가 은화 25루블을 건네주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그렇군요. 그런일 은 흔히 있는 일이지요" 온 집안 사람들은 누구 하나 자려고 들지 않았고 옷을 벗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니콜라 이 페트로비치는 쉴새없이 발뒤꿈치를 들고 형의 방으로 들어갔다가는 다시 발뒤꿈치를 들 고 살짝 나왔다. 환자는 의식을 잃기도하고 가볍게 한숨을 쉬기도 하는가 하면 아우에게 프 랑스어로 '자거라'하고 말 하기도 하고 또 물을 마시고 싶다고도 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는 페니치카에게 레몬수가 든 컵을 가져가게 했다. 그는 그녀를 넌지시 바라보고는 그것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셔버렸다. 아침녘에는 열이 좀더 오르더니 가벼운 헛소리까지 했다. 처음에 파벨 페트로비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는데, 이윽고 그는 갑자기 눈 을 크게 뜨더니 침대 옆에서 걱정 스러운 얼굴로 들여다보고 있는 아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은가, 니콜라이. 페니치카는 어딘가 넬리를 닮은 데가 있지?" "넬리라니, 누구말입니까, 형님?" "누구냐니? P공작 부인 말이야... 특히 얼굴 윗부분이 '같 은 혈통일거야'"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내심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한번 스쳐 지나간 감정이 이다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런 때에 떠 오르나다니'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아, 그렇게 하찮은 여자를 나는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슬 른 듯이 두 손을 머리 뛰로 깍지를 끼며 신음소리를 냈다. "갑자기 나타난 무례한 녀석이 감히 손을 대는 것을 난 참을수가 없었어..." 하고 몇 분뒤에 그는 간신히 말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저 한숨만 내쉴 따름이었다. 그는 형님이 대체 누구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튿날 여덟시경에 바자로프가 그의 방으로 찾아왔다. 바자로프는 이미 짐을 모두 꾸려놓 고 개구리와 온갖 곤충과 새들을 다 놓아주고 난 뒤였다. "작별 인사를 하러 왔나?"하고 그 를 맞기 위해 일어서면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나도 자네의 기분을 모르는 게 아니니 자네의 의사에 전적으로 찬성하네 물론 우리 가엾은 형님에게 잘못이 있네. 따라서 형님은 벌을 받은 것일세. 형님 자신도 자 네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자네를 부추긴 것이라고 말하고 있네. 자네로서는 이 결 투를 피할 수 없었으리라고 나는 믿고 있네. 그건...그건...어느 정도까지는 자네와 형님 상호 간의 견해가 항시 대립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 걸세 (니콜라이 페트로비 치는 말이 혼란되기 시작했다.) 우리 형님은 구식이라 성미가 까다롭고 완고하시네... 고맙게 도 그 정도로 그쳤으니 다행이야. 나는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모두 강구해두 었네..." "문제가 생길 경우에 대비해서 제 주소를 남기고 가겠습니다."하고 바자로프는 거침없이 말했다. "나는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네, 예브게니 바실리예비... 자네가 우리 집에 머물러 있어 주었는데, 이런... 이런 결과를 보게 되어 매우 유감일세. 게다가 더 유감스러운 것은 아르카디가..." "저는 틀림없이 그와 만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만."하고 바자로프는 대꾸했는데, 그는 언 제나 모든 종류의 '변명'이나 '해명'에는 참을 수 없는 혐오를 느끼는 것이다. "그렇지 못 할 경우에라도 제발 말씀 좀 잘 전해주시고 또 제 유감의 뜻도 표해 주십시오." "나 역시 잘..." 하고 인사를 나누면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대답했다. 그러나 바자로프 는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가버렸다. 바자로프가 떠난다는 것을 알고 파벨 페트로 비치는 그를 방으로 불러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러나 바자로프는 언제나처럼 냉담했다. 그 는 파벨 페트로비치가 자못 관대한 체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페니 치카와는 작별 인사를 나눌 수가 없었다. 다만 창문으로 통하여 그녀와 서로 눈인사를 주고 받았을 뿐이다. 그녀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틀림없이 저 여자는 저대로 묻혀버릴 것이다' 하 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빠져나올지도 모르지' 반면 피오트르는 매우 슬퍼하여 그 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을 정도였으므로 바자로프가 "자네, 울보로군?"하고 말하며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혀주기까지 했다. 또 두냐샤는 슬픔을 감추기 우해 숲으로 달아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슬픔의 원인이 된 이 사나이는 마차에 올라 담배를 피 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4마장쯤 되는 곳에 있는 모퉁잇길에서, 한 줄로 펼쳐져 있는 키르사 노프 댁의 택지나 그 신축한 주인집이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왔을 때에는 그는 다만 침을 한 번 퉤 하고 뱉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저주받을 귀족들같으니"하고 혼자 중얼거리고는, 더한 층 외투 속으로 깊숙이 파묻혀버렸다. 파벨 페트로비치의 건강은 얼마 안 가서 좋아졌다. 그러나 아직도 일주일쯤 더 자리에 누 워 있어야만 했다. 그는 자기표현에 의하면 포로생활에 꽤 참을성있게 견뎌내고 있었으나, 단 화장에 대해서만은 그야말로 법석을 떨었으며 늘 향수 냄새를 피우고 있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에게 잡지등을 읽어주었고 페니치카는 종전 대로 육즙이나 레몬수, 달걀 반 숙, 차 등을 날아왔다. 그러나 그의 방에 들어설 적마다 남 모르는 공포가 그녀를 사로잡곤 했다. 파벨 페트로비치의 뜻하지 않은 행위는 온 집안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누구보다도 놀란 사람은 그녀였다. 다만 프로코비치만큼은 당황해하는 내색도 없이 "내가 젊었을 때에 는 나리들이 흔히 결투를 하곤 했는데 그것을 다만 기품있는 나리들끼리의 행위로, 저런 사 기꾼 따위가 버릇없이 흉내를 내면 그 벌로서 마구간에서 실컷 두들겨 패도록 분부하셨다." 하고 설명했다. 페니치카는 거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파벨 페트로비 치가 매우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 시선은 그녀가 그에게 등을 돌리 고 있을 때에도 등뒤로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끊임없는 불안으로 다 소 야위기는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욱더 예쁘게 보였다. 하루는 (아침이었다) 파벨 페트로비치가 기분이 좋아져서 침대에서 소파로 옮겨 앉았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의 용태를 묻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곡식 창고로 나갔다. 페니 치카는 차 한잔을 들고와 그것을 조그마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파벨 페트로비치가 그녀를 말류했다. "무얼 그렇게 서두르는 거요, 페도이샤 니콜라예브나"하고 그는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 라고 있나요?" "아니예요...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도 차를 따라 주어야 하기 때문에." "당신이 아니더라 도 그런 일은 두냐샤가 할 거예요. 잠깐이라도 아픈 사람 옆에 있어줘요. 그리고 당신에게 하고 싶은 얘기도 있고 하니." 페니치카는 입을 다문채 안락의자에 걸터앉았다. "다른 게 아니라"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하고 콧수염을 잡아당겼다. "나는 전부터 당 신에게 묻고 싶었는데, 당신은 어쩐지 나를 무서워하는 것 같더군요?" "제가요?" "그래요, 당신이 말이예요. 당신은 한 번도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 적이 없는데, 무슨 양심의 가책 을 받을 만한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페니치카는 얼굴을 붉히면서 파벨 페트로비치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어쩐지 낯설게 여겨져 그녀의 가슴은 조용히 뛰기 시작했다. "정말로 당신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까?"하고 그는 물었다. "어째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겠어요?"하고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어째서냐고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그 건 그렇고, 당신은 누군가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게 아닙니까? 나에 대해섭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있을 것 같지도 않군요. 이 집 안에 있는 다른 누군가에 대해섭니까? 그 것 역시 아닌 것 같군요. 설마 아우에 대해서? 그러나 당신은 그사람을 사랑하고 있겠지 요?" "사랑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예,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습니 다." "정말인가요? 나를 똑바로 바라보세요, 페니치카 (그는 처음으로 그녀를 이렇게 불렀 다.)... 당신도 알겠지만 거짓말처럼 큰 죄악은 또 없어요" "전 거짓말 같은 것 하지 않습니 다. 파벨 페트로비치.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살아 있을 필요조차 없습니 다. " "그럼 아우를 누구와도 바꿀 수 없다는 말이군요?" "그분을 대체 누구와 바꿀 수가 있 겠습니까?" "누구라니요, 상대는 얼마든지 있잖아요. 얼마 전에 떠난 그 신사하고라도." 페니치카는 벌떡 일어났다. "어째서 그런 말씀일. 파벨 페트로비치, 무엇 때문에 저를 이 토록 괴롭히는 겁니까? 제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단 말씀입니까?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 ..." "페니치카"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언짢은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보았다는 것을 당신 도 알잖소..." "당신이 뭘 보셨다는 겁니까?" "왜, 그... 정자 안에서." 페니치카는 머리끝에서 부터 귓불까지 새빨개 졌다. "하지만 대체 제가 무슨 죄가 있단 말씀이에요?"하고 그녀는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몸을 약간 일으켰다. "당신에겐 죄가 없단 말입니까? 과연 없을까요, 조금도?" "저는 이 세상에서 오직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한 분만을 사랑하고 있으며, 또 평 생토록 사랑할 생각이에요" 그녀는 흐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어 이렇게 말했다. "최 후의 심판날에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그 일이라면 저에겐 죄가 없습니다. 아니 없었 습니다. 그 일로 의심을 받는다면 차라리 지금 당장 죽는 편이 나아요. 그것은 은인이신 니 콜라이 페트로비치에 대하여..."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는 파벨 페트로비치가 자기 의 손을 꼭 쥐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고 갑자기 화석처럼 굳어져버렸다. 그의 얼굴은 전보다 한층 창백해 졌다. 그의 눈은 번쩍번쩍 빛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커다란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페니치카" 그는 어찌된 영문인지 기묘한 속삭임으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랑해주 시오, 아우를 사랑해줘요. 어느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말아요. 생각 좀 해봐요. 누군가 를 사랑하면서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어요. 저 가엾은 니콜라이 페트 로비치를 결코 버리지 말아줘요." 이제 페니치카의 눈에서는 눈물이 말라 있었고 두려움도 지나가버렸다. 그만큼 그녀의 놀 라움은 컸던 것이다. 그러나 파벨 페트로비치가, 다른 사람도 아닌 파벨ㄹ 페트로비치 그 사 람이 그녀의 손에 자기 입술을 갖다댄 채 그렇다고 그녀에게 입을 맞추는 것도 아니고 다만 이따금씩 경련하듯 한숨을 내쉬고만 있을 때 그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아'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혹시 발작이라도 일어난 건 아닐까?...' 그러나 그순간 그의 흘러간 전생애가 그의 마음 속에서 전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단이 삐걱 하는 소리를 내더니 서둘러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녀를 자기 곁에서 밀쳐내고는 베개에 머리를 얹었다. 문이 열리고 즐거운 듯 생기가 도는 니콜라이 페 트로비치가 붉은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와 차찬가지로 생기가 도는 발그레한 얼굴 을 한 미짜가 조그마한 루바시카만을 한 겹 걸친 채 아버지의 시골식 외투의 커다란 단추에 다 작은 맨발을 올려놓고는, 그 가슴에서 파악거리고 있었다. 페니치카는 갑자기 그에게 달려들어 그와 자기 아들을 두 팔로 감싸안고는 머리를 그의 어깨에 파묻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깜짝 놀랐다. 페니치카는 언제나 행동이 조심스럽고 얌전해서 다 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결코 애정 표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보, 어떻게 된 거요?" 하고 그는 말하고는 형을 바라보며 미짜를 그녀에게 안겨주었다. "형님, 혹시 기분이 언짢으신 건 아닙니까?"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에게 다가가면서 그는 물 었다. 형은 린네르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니, 전혀... 오히려 난 기분이 훨씬 좋아졌어." "갑자기 소파로 옮긴 게 잘못이었군요. 아니, 당신 어딜 가는 거야?"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는 페니치카 쪽을 돌아보며 이렇게 덧붙였지만, 그녀는 이미 문을 찰칵 닫고 나가버린 뒤였 다. "전 형님에게 우리집 대장부를 보여 드리려고 데리고 왔어요. 그녀석이 제 큰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해서요. 그런데 왜 그 사람은 아이를 데리가 버렸담? 한데 형님, 어떻게 된 거 예요?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닙니까?" "동생"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점잔을 빼며 말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뜨끔했다. 그는 어쩐지 기분이 언짢아졌는데, 자기로서도 그 이유 를 알 수가 없었다. "동생"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되풀이했다. "단 하나밖에 없는 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해주게." "무슨 소원입니까? 말씀해보세요." "이건 매우 중요한 일이야. 난, 네 일생의 행복이 모두 그것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 나는 지금 네게 말하려고 하는 이 일에 대해서 요즈음 줄곧 여러 모로 생각해왔어... 동생, 자네의 의무를, 성실하고 고결한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주게. 비범한 인간인 자네가 보여주고 있 는 유혹이나 바람직하지 못한 짓은 이제 그만두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형님?" "페니치카와 결혼해주게... 그녀는 널 사랑하고 있어. 그녀는 네 아들의 어머니야."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깜짝 놀라 뒤로 한발 물러서며 두 손을 쳐들었다. "형님, 형님이 그런 결혼을 절대로 반대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는군요. 하지만 형님이 제 의무라고 말씀하신 그것을 제가 아직까지 실행하지 않고 있었던 이유는 다만 한 가지, 형님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다는 걸 모르시나요." "그런 경우에 나를 존경하는 따위의 짓은 쓸데없는 짓이야" 하고 서글픈 미소를 띄며 파 벨 페트로비치는 말을 받았다. "나는 나보고 귀족주의라고 비난한 바자로프의 말이 옳았다 는 것을 느끼게 됐어. 그러니 동생, 우리들은 이제 체면이나 차리고,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나 하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도록 하세. 우리는 이제 나이든 사람들이니 그저 점잖게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우린 이제 모든 허영심을 떨쳐버려야만 해. 즉 네가 말 한 대로 우리들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돼. 두고보게나,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행 복도 손에 넣을 수 있게 될 테니."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형을 끌어안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형님은 제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하고 그는 소리 높여 말했다. "형님이야말로 이 세 상에서 가장 선량하고 현명한 분이라고 제가 항시 주장해온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 예요. 저는 이제 형님이 얼마나 분별있고 관대한 분이신가를 알게 되었어요." "가만, 가만"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너의 분별있는 형의 다리를 자극하지 않도록 해다오. 쉰이 다 된 나이에 소위처럼 결투를 하였으니 말이야. 그럼, 이 문 제는 결정됐군. 페니치카는 내... '계수씨'가 되는 거지?" "아, 파벨 형님. 하지만 아르카디가 뭐라고 할까요?" "아르카디라니? 그애도 매우 기뻐할거야. 결혼은 그애의 원칙에는 없는 것이지만, 그 대신 평등감이 그애를 만족시켜 줄거야. 게다가 실제로 19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신분 따위가 무 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아아, 파벨, 파벨 형님. 다시 한 번 제게 키스해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조심할 테니까 요." 형제는 서로 껴안았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네 생각을 지금 당장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아도 되겠니?" 하고 파 벨 페트로비치는 물었다. "왜 그렇게 서두르시는 겁니까."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말을 받았다. "형님과 무슨 이야기라도 있었습니까?" "이야기? 우리들 사이에? 별소릴 다 하는 구나." "아니, 그럼 됐어요. 무엇보다도 먼저 완쾌하셔야죠.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도망가지는 않 을 테니까요. 잘 생각해봐야죠, 좀더 검토해보고요..." "그런데 너 정말 결심한 거지?" "물론이죠. 형님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요. 이제 형님 혼자 있게 해드릴 테니 형님은 좀 쉬 세요. 어떤 일에든 흥분하는 것은 해로우니까요... 다음에 또 이야기를 나누기로 해요. 제발 형님, 쉬세요. 건강을 되찾도록 말예요." '아우는 왜 그토록 내게 고마워하는 걸까?' 하고 혼자 남게 되자 파벨 페트로비치는 생 각 했다. '마차 그것이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그러 나 나는 아우가 결혼하면 곧 어디론가 멀리, 드레스덴이나 플로렌스에라도 가서 죽을 때까 지 거기서 살아야겠어.' 파벨 펜트로비치는 이마에 향수를 좀 뿌리고 낫 눈을 감았다. 선명한 햇빛에 비친 그의 아름다운 머리는 마치 죽은 사람의 그것처럼 흰 베개 위에 놓여 있었다... 그만큼 그는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25 니콜스코예 마을 정원에 있는 키가 훤칠한 물푸레나무 그늘 밑, 잔디밭 벤치에 카샤와 아 르카디가 앉아 있었다. 그들 옆에는 피피가 사냥꾼들 사이에 '잠자는 잿빛 토끼의 모습'이라 고 칭송되는 그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땅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아르카디와 카샤는 둘 다 잠자코 있었는데 그는 두 손에 잔쯤 펼쳐진 책을 들고 있었으며, 그녀는 바구니 속에 남 아 있는 흰 빵 부스러기를 꺼내어 몇 마리의 참새들에게 던져주고 있었다. 참새들은 그들 특유의 겁먹은 태도로, 그러나 다소 뻔뻔스럽게 그녀의 발 바로 밑까지 날아와서는 짹짹거 리고 있었다. 산들바람은 물푸레나무 이파리를 가볍게 흔들면서 그늘진 작은 길과 피피의 누런 등에 있는 엷은 금빛 반점을 조용히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고르게 퍼진 그림자가 아 르카디와 카샤를 덮고 있었다. 다만 이따금 선명한 햇살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밝게 내리비 칠 뿐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앉아 있었지만, 그 침묵 속에는, 둘이 나란히 앉아 있다는 그 자체에는 서로의 마음을 탁 터놓은 친금감이 나타나 있었다. 어느 쪽도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옆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은근히 기뻐하 고들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도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르카디는 전보다 침착해 보이 고 카샤는 생기가 돌아 대담해진 듯했다.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까?" 하고 아르카디는 입을 열었다. "러시아어로 '물푸레나무'란 정 말 잘 지은 이름입니다. 물푸레나무 '야세니'는 '야스느이'라는 형용사에서 나온 말로 맑다, 밝 다 라는 뜻을 가짐) 어떤 나무도 이 나무처럼 가볍고 '맑게' 공중에 비쳐 보이지는 않으니 까 요." 카샤는 위를 올려다보며 "그렇군요"하고 말했는데, 아르카디는 '그로고 보니 이 여자는 내 가 미사여구를 늘어놓았다고 해서 나를 비난하지도 않는군 그래' 하고 생각했다. "전 하이네를 좋아하지 않아요"하고 카샤는 아르카디가 두 손에 들고 있는 책을 눈으로 가리키면서 말을 꺼냈다. "그분이 웃고 있을 때에도, 울고 있을 때에도 말예요. 전 그저 그 분이 깊은 생각에 잠겨 슬픈 표정을 짓고 있을 때가 좋아요." "하지만 나는 그분이 웃을 때가 좋더군요."하고 아르카디는 말했다. "그건 당신에게 아직 도 옛날의 풍자적인 경향이 남아있기 때문이에요..." '옛날의 풍자적 경향이라' 하고 아르카디는 생각했다. '바자로프가 이 말을 들었다면' "기다려 주세요, 우리가 당신을 새 사람으로 만들어드릴 테니." "누군 누구예요, 언니 말 이죠. 당신이 이젠 말다툼을 하지 않게 된 포르피리 플라토니치도 말예요. 또 당신이 엊그제 교회에 모시고 갔던 이모님도 말씀예요." "하지만 나는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또 안나 세르게예브나에 대해서 말씀 드리자면, 그분 은 당신도 기억하시겠지만, 여러 가지로 내가 아닌 바자로프와 의견이 맞았어요." "그때는 언니도 그분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거예요. 꼭 당신처럼 말예요." "나처럼이라고 요. 그렇다면 내가 이제 그 사나이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당신도 짐작하 셨단 말입니까?" 카샤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난 알고 있어요" 하고 아르카디는 말을 계속했다. "그 친구는 한번도 당신 마음에 든 적 이 없었어요." "전 그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가 없어요." "이봐요, 카쩨리나 세르게 예브나, 나는 아무래도 그런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인간은 없 는 겁니다. 그건 다면 변명에 불과하지요." "그럼, 말씀드리겠어요. 그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저와는 인연이 먼 사람이 라고 느끼고 있는 거예요. 저 역시 그분에겐 낯선 사람이지요... 그리고 당신도 구분과는 공 통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뭐랄까... 그분이 맹수라면 당신은 잘 길들여진 짐승이 라고나 할까요?" "나 역시 길들여진 짐승이란 말입니까?" 카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카디는 귀 뒤를 긁적거렸다. "이봐요, 카쩨리나 세르게예브나, 그 말은 솔직히 나를 아주 화나게 하는데요." "당신은 맹수라도 되고 싶으시다는 말씀인가요?" "맹수까지는 아니 더라도 강하고 정력적인 것이고 싶단 말입니다." "그러기를 바란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 어요... 당신 친구분은 바라지 않아도 그분 자신안에 그걸 가지고 계세요." "흠. 당신은 그러 게 생각하시는군요. 그 친구가 안나 세르게예브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요?" "어째서 당 신은 그렇게 생각합니까?" "언니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분예요... 전 이걸 말씀드리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언니는 자신의 독립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거든요."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아르카디는 물었으나 머릿속으로는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일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카샤 역시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하 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정한 젊은이들 사이에는 흔히 이렇게 똑같은 생각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아르카디는 미소를 띄고 카샤 쪽으로 몸을 살짝 기대며 속삭이듯 이렇게 말했다. "바른대 로 말씀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녀가 두려운 거죠?" "누구 말예요?" "그녀 말입니다."하고 아 르카디는 의미심장하게 대꾸했다. "그럼 당신은요?"하고 이번엔 카샤가 물었다. "나도 그렇습니다. 알겠어요, 나도 그렇다고 했어요" 카샤는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 그를 위협하는 듯한 시늉을 했다. "참 이상해요"하고 그녀는 말을 꺼냈다. "언니가 이번만큼 당신에게 호감을 가진 적이 없었어요. 당신이 여기 처음 왔을 때보다 훨씬 그래요." "허허. 그래요" "당신은 그런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어요? 당신은 그것이 기쁘지 않으세요?" 아르카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내가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당신 어머니의 편지를 가지고 왔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 이유도 있을 테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지요. 하지만 그 이유를 당신에게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그건 어째서죠?" "말할 수 없어요" "아아. 알겠어요. 당신은 매우 고집이 세 군요." "그래요" "게다가 관찰력도 있으시고." 카샤는 아르카디를 흘겨보았다. "그럴지도 몰라요. 그것이 당신을 화나게 했나요? 지금 무 엇을 생각하고 계시는 거예요?" "난 지금 과연 당신의 그 관찰력이 어디에서 왔나 하고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당신은 무척 겁이 많고 의심도 많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만남도 피하고 있는데... "저는 줄곧 혼자 살았어요. 어쩔 수 없이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지요. 하지만 제가 사람들을 모두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르카디는 고맙다는 듯한 눈길로 카샤를 바라보았다. "그건 다 좋아요"하고 그는 그녀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당신 같은 경우, 다시 말해서 당 신 정도의 신분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런 재능을 지닌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건 그런 사 람들에게는 황제가 진리에 도달하는 것만큼이나 매우 어려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난 부자가 아닌 걸요." 아르카디는 깜짝 놀라 처음에는 카샤의 말뜻을 금방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실 소유 지 는 모두가 언니의 것이지.'하는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이 생각은 그에게 별로 불쾌 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말씀 잘 하셨어요."하고 그는 말했다. "뭘요?" "잘 말씀해주셨다고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아주 시원스럽게 말입니다.말이 나왔으니 말 이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가난하다는 것을 일부러 이야기하거나 하는 그런 인 간의 내부에는 틀림없이 뭔가 특별한, 일종의 허영심 같은 것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말입니 다." "저는 언니 덕분에 그런 경험은 전혀 해보질 못했어요. 제가 제 신분에 대해 이야기한 것 은 다만 이야기가 나와 생각났기 때문이에요." "좋아요. 그러나 바른 대로 말씀해주십시오. 당신에게는 지금 내가 말한 그 허영심이라는 게 눈곱만큼도 없다는 말입니까?" "예를 들면 설마 당신은 실례되는 질문입니다만 당신은 부잣집 남자와는 결혼하지 않겠지 요?" "만일 제가 그 사람을 매우 사랑하고 있다면... 아니예요, 그럴 경우에라도 아마 가지 않을 거예요." "아아. 그것 보십시오" 하고 아르카디는 소리 높여 말하고는 잠시 있다가 이렇게 덧붙였 다. "어째서 당신은 부자와는 결혼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왜냐고요?" '어울리지 않는 사람 ' 이라는 말은 노래 가사에도 나오잖아요. "당신은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으며..." "아니에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어떻게 그런 짓을? 반대로 전 복종할 각오가 되어 있어요. 다만 평등치 못한 것만은 곤란해요. 자기에 대한 존경심을 가진 후에 타인에게 복종 하는 것,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이것이 행복이라는 거예요. 하지만 예속된 생존이라는 것 은... 아니예요, 지금 이대로가 더 좋아요." "지금 이대로가 더 좋다고요?" 하고 가샤의 말을 받아 아르카디가 대꾸했다. "그렇군요" 하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역시 안나 세르게예브나와 같은 혈통이군요. 당신 역시 그분 못지않게 독립심이 강하지만 당신은 다만 그것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는 것뿐입니다. 내가 확신하는 바로는, 당신은 결코 자기가 먼저 자기 감정을 말하여 들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강하고 신성한 느낌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아요?" 하고 카샤가 되물었다. "당신은 언니와 같이 현명합니다. 당신의 기질도 언니 못지않습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 도 모르지요..." "제발 저를 언니와 비교하지 말아주세요" 하고 카샤는 성급히 가로막았다. "그건 제게 너 무나 불리해요. 언니는 미인이고 영리한 여자라는 것을 당신은 잊으셨나 보군요. 게다가...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 당신은 그렇게 말해선 안 돼요. 그런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 말예 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게다가 당신은'이라니요? 어째서 당신은 내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단정하려 드는 겁니까?" "물론 당신은 농담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내가 하는 말에 내가 확신을 가지고 있다 면요? 또 말재주가 없어서 분명히 표현하지 못한 것뿐이라고 내가 한다면요?" "당신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정말입니까? 이제야 알겠습니다. 내가 당신의 관찰력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군요." "뭐라고요?" 아르카디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고, 카샤는 바구니 속에서 약간의 빵 부스러기를 찾아내어 참새들에게 던져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힘을 주어 던지는 바 람에 참새들은 쪼아먹지 않고 저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카쩨리나 세르게예브나." 하고 갑자기 아르카디가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이 일이 어쩌 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여겨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시겠습니까, 나는 당신을 당신의 언니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어느 누구와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마치 자기 입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이 말에 깜짝 놀라기라도 한 듯 재 빨리 저쪽으로 가버렸다. 카샤는 바구니를 든 채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고개를 숙이고는 오랫동안 아르카디의 뒷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그녀의 볼은 약간 붉어졌으나 미소를 띄지는 않았다. 검은 눈동자에는 망설이는 빛과 또 그것과는 조금 다른, 어쩐지 아직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느낌을 나타내고 있었다. "너 혼자 있었니?" 하고 그녀 옆에서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음성이 들렸다. "난 네가 틀림 없이 아르카디와 함께 뜰로 나온 줄로 알았는데." 카샤는 별로 서두르지도 않고 눈을 들어 언니를 바라보며(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게 옷을 차려 입고 길가에 선 채 활짝 편 양산 끝으로 피피의 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이렇게 말했다. "나 혼자예요." "그건 알고 있어" 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웃음을 띄면서 대답했다. "그분이 방으로 들 어가버린 모양이로구나?" "예." "둘이서 함께 책을 읽고 있었잖니?" "그래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카샤의 턱을 손으로 살짝 쥐고는 그녀의 얼굴을 좀 쳐들었다. "혹시 싸운 건 아니겠지?" "아니예요" 카샤는 이렇게 말하고 살그머니 언니의 손을 밀었다. "그렇게 시치미뗄건 뭐 있니? 난 그분이 여기 계시면 함께 산책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그 분이 그러고 싶다고 늘 내게 말하셨거든. 시내에서 네 구두가 도착됐다. 가서 신어봐. 네 구 두가 다 닳았다는 것을 어제야 알았어. 대체 넌 그런데 너무 신경을 쓰지 않더라. 그렇게 예 쁜 발을 갖고 있으면서도 말이야. 넌 손도 예뻐... 좀 크긴 하지만. 그러니 이 발을 잘 보여 야 해. 그런데 넌 몸치장도 할 줄 모르더라."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그 예쁜 옷자락을 스치면서 좁은 길을 따라 먼저 걸어 내려갔다. 카 샤도 벤치에서 일어나 하이네의 책을 집어들고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구두를 신어보려고 간 것은 아니었다. '예쁜 발'하고 카샤는 햇볕을 쬐어 몹시 뜨거워진 테라스의 돌층계를 천천히 사뿐사뿐 올 라가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예쁜 발이라고 했지... 그래, 이제 곧 그분이 이 발밑에 꿇어앉 게 될거야.' 그러나 그녀는 이내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재빨리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아르카디는 복 도를 따라 자기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하인이 뒤따라와 바자로프씨가 방에 와 있다고 알렸 다. "예브게니가." 아르카디는 흠칫하며 소리쳤다. "오신 지 오래됐나?" "이제 방금 오셨습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에겐 알리지 말고 직접 당신 방으로 안내해달 라고 하셨습니다." '집에 무슨 일아리도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아르카디는 생각하고 부지런히 계단을 뛰 어 올라 물을 활짝 열었다. 바자로프의 표정이 곧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좀더 노련한 눈이었 더라면 이 뜻하지 않은 손님의, 체격은 말랐어도 여전히 원기왕성한 용모 속에 내면적인 흥 분의 징후가 숨겨져 있음을 아마도 포착했을 것이다. 먼지투성이인 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머리에는 학생모를 쓴 바자로프가 창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르카디가 소란스럽 게 외치며 그의 목에 매달렸을 때에도 그는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거 뜻밖인데. 무슨 바람이 불었나." 하며 아르카디는 방안을 두루 서성거리며 이렇게 되풀이 하였는데, 그것은 기쁨에 넘치기 때문이라고 자신도 믿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 게 보이고 싶어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우리 집은 만사가 잘 되어가고 있겠지? 다들 안녕하신가?" "다 잘되어 가고 있긴 하지만, 모두가 안녕하시진 않네" 하고 바자로프는 말했다. "그런데 자네 수다만 떨지 말고 크바스 (보리와 엿기름으로 만든 맥주)를 좀 내오도록 일러주게. 그 리고 차분히 앉아 내 말좀 들어보게. 나는 이제부터 자네에게 인상에 남는 짤막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네." 아르카디는 침착해졌다. 바자로프는 파벨 페트로비치와의 결투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 다. 아르카디는 매우 놀랐고 마음이 괴로웠지만, 그것을 겉으로 나타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 했다. 그는 다만 큰아버지의 상처가 정말로 대단치 않느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상 처는 의학적인 견해에서가 아닌 다른 견해에서 볼 때 흥미진진한 것이라는 답변을 듣고 웃 음을 지어보이기까지 했으나, 속으로는 기분이 나쁘고 어쩐지 수치스럽게 느껴지기조차 했 다. 바자로프는 그의 그런 기색을 짐작한 것 같았다. "그러니 여보게"하고 그는 말했다. "봉건주의자들과 함께 살면 이런 일도 생기는 법일세. 자기도 봉건주의자들 틈에 끼여 기사들의 경기에 참가한다는 격이지. 그래서 나는 부모님이 계신곳으로 가는 길이었는데"하고 바자로프는 다음과 같이 말을 맺었다. "가는 길에 잠깐 들른 것일세..이 이야기를 전해주려고. 만일 내가 쓸데없는 거짓말을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 각지 않는다면 말일세, 아니, 내가 여기 들른 것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어. 사실 인간은 이 따금 자신의 앞머리를 움켜쥐고, 밭에서 무를 잡아뽑듯이 자신을 내던져 볼 필요가 있는 걸 세. 나는 며칠 전에 이미 그렇게 해버렸었네... 그러나 나는 일단 나와 헤어진 것이, 즉 나 자신이 묻혀 있었던 그 밭이 다시 한번 보고 싶어진 것일세." "그 말이 나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니겠지?"하고 아르카디는 흥분된 어조로 그의 말을 받았 다. "자네는 나와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바자로프는 가만히, 거의 뚫어질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내 말이 자네를 매우 슬프게 한 것 같군. 하지만 자네는 이미 나와 헤어졌다고 생각되는데. 자네는 이제 제법 생기에 넘쳐 보이고 깔끔해졌을 뿐만 아니라... 안나 세르게예브나와의 일도 틀립없이 잘되어 가고 있겠 지." "안나 세르게예브나와의 일이라니, 무슨 일인가?" "자네가 시내에서 여기까지 온 것은 그녀 때문이 아닌가, 요 어린애 같은 양반아. 그런데 그 주일학교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그래 자네는 그녀에게 반하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 면 이제 자넨 겸손해도 될 만한 단계에 이르렀단 말인가?" "예브게니,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언제나 무슨 일이든 자네에게 털어놓았었네. 자네에게 단언하지만, 하느님께 맹세코 자넨 잘못 알고 있는 걸세." "흠. 새로운 사실이로군" 하고 바 자로프는 나직이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그런 일로 그렇게 흥분할 것까지는 없네. 난 그런 건 어찌 됐든 상관하지 않네. 로맨티시스트라면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지고 있음을 서로가 느끼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은 이제 서로에게 신물이 난 것이라고 생각하네" "예브게니..." "여보게, 어건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네. 이 세상에는 진절머리나는 일 들이 이런일 말고도 얼마든지 있네. 이제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네. 나는 여기 온후 로 매우 언잖은 기분이 드네. 마치 칼루가 현지사 부인에게 보낸 고골리 (러시아의 소설가, 극작가, 주로 하급관리의 비참한 생활이나 몰락지주 계급을 현실적으로 그렸는데, 통렬한 풍 자와 견실한 수법이 러시아 리얼리즘의 창시자의 하나로 꼽히게 하였음. 1809년에서 1852 년)의 편지 (1846년 6월 6일자의 편지로, 종교적.도덕적 완성이라는 것을 부르짖고, 자신의 그때까지의 전작품을 부정했다)라도 수없이 읽고 났을 때처럼 말일세. 말이 났으니 말이지, 나는 마차에서 말을 풀지도 않았네" "천만에, 그렇 수는 없네" "어째서?" "난 별로 상관없지만, 안나 세르게예브나에게는 큰 실례가 되네. 그녀는 틀림없이 자네를 만나고 싶어할 거야." "아니, 그건 자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걸세." "하지만 나는 내 짐작이 옳다고 확신하네"하고 아르카디가 대꾸했다. "그런데 왜 자네는 가면을 쓰고 있는 건가? 이렇게 된 이상 자네가 여기에 온 이유가 그녀 때문이라 는 것을 밝혀도 좋지 않은가?" "그야 물론 구실은 될지 모르지만, 어쨋든 자넨 잘못 짚었 네" 그러나 아르카디의 추측은 옳았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바자로프를 만나고 싶어했고 집사를 통해 그를 자기 방으로 초청했다. 바자로프는 그녀를 만나기 전에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쉽게 찾아낼 수 있도록 새옷을 따로 챙겨두었던 것이다. 오딘초바 부인은 그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그 방이 아닌 응접실에서 그를 맞아 상 냥하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무의식중에 긴장하는 빛이 나타나 있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하고 바자로프는 숨가쁘게 말했다. "우선 당신을 안심시켜 드리지 않 으면 안 될 것 같군요. 당신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이젠 정신을 차렸으며 저 자신의 우스꽝 스러웠던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잊어주길 바라고 있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제 영원 히 여기 오는 일이 없을 것이고, 설사 제가 유순한 성질의 사람은 아니라 할지라도 당신에 게 싫은 사람으로서 의 추억만을 남기고 떠난다는 것은 저로서도 유쾌한 일은 못되니까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이제 막 높은 산에 오른 사람처럼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으나, 그 얼굴은 생기있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바자로프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악수 에 응했다. "지난 일은 깨끗이 다 잊어버리기로 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교태라고 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쨋든 내게도 잘못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한마디만 더 말씀드리 겠는데, 우리 전처럼 친구가 되기로 해요. 그때의 일은 꿈이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꿈 따위 를 기억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요." "누가 꿈 같은 것을 기억하겠습니까? 게다가 사랑 따위 야... 정말 가식적인 감정이니까요." "정말이에요?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기뻐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그런 식으로 말했고 바 자로프는 이런 투로 말을 받았다. 그리고 둘 다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 나 두 사람의 말은 정말로 진실이었을까. 그것은 두 사람 자신도 알지 못했으니, 하물며 작 자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두사람이 서로 완전히 믿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시작되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이야기 도중에 키르사노프 댁에서는 무얼 하고 지냈느냐고 바자로프 에게 물었다. 그는 하마터면 파벨 페트로비치와의 결투에 대해 이야기할 뻔했다. 그러나 혹 그녀의 마음을 끄는 이야기만 하고 있다고 오해받지나 않을까 싶어 그 이야기는 그만두고 그 동안 줄곧 연구하며 지냈다고 대답했다. "어찌 된 일인지"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말했다. "처음에 난 너무나 기분이 울적해 외 국에라도 나가볼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곧 그런 기분은 사 라지고 게다가 친구이신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가 와주셔서 나는 다시 나의 궤도로 돌아론 거예요. 나의 참된 역할로 말예요" "어떤 역할 말입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아주머니나 교사, 어머니의 역할이라고나 할까 요. 좋을 대로 불러주세요. 그런데 말씀예요. 난 전에는 당신과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와의 친분을 잘 몰랐었어요. 그분은 별로 신통치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이번에 자 세히 알고 보지 현명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게다가 중요한 것은 그분은 젊다는 거예 요... 나나 당신과는 달리 말씀예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그 친구는 여전히 당신 앞에 나서면 서먹서먹해합니까?"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 "정말 로..."안날 세르게예브나는 무슨 말을 꺼내려다가 잠시 생각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지 금은 그 분도 전보다는 마음이 놓이는지 저하고도 이야기를 잘해요. 전에는 저를 피하셨어 요. 그리고 저 역시 그분과의 교제를 원하지도 않았고요. 그분은 카샤와 사이가 매우 좋아 요." 바자로프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여자란 어쩔 수 없는 여우로구나'하고 그는 생각했 다. "당신은 그 친구가 당신을 피했다고 하시지만"하고 그는 싸늘한 미소를 띄면서 이렇게 말했 다. "그 친구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셨을리는 없겠지요." "뭐라고요? 그 사람도?"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입에서 뜻밖에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 사람도 말씀입니다."하고 바자로프는 허리를 굽히며 대꾸했다. "당신은 짐작도 못하고 계셨던 그 사실을 제가 전한 셈이 되었군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이 잘못 보신 거예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전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 그랬나봅니다." 하고 그는 말하고는, 속으로 '이봐요, 앞 으 로는 그런 여우 같은 짓은 하지 않는게 좋겠어'하고 덧붙였다. "왜 이야기해선 안 된다는 거지요? 내 생각엔, 당신은 이런 일에 있어서 순간적인 인상에 너무 지나치게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아요. 당신은 과장하는 버릇이 있는게 아닌가 의심스럽 군요." "이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안나 세르게예브나?" "어째서요?" 하고 그녀는 반문하고 나서 자기가 먼저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노 라고 말했고, 또 그녀 자신도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는 바자로 프와 함께 있는 것이 어색했다.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농담을 하면서도 두려움 이 은근히 압박해옴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건 마치 바다에서 기선을 타고 있는 사람들 이 안전한 지상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제법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웃기도 하 지만, 배가 잠시라도 정지하거나 조금이라도 이상한 눈치가 보이면 삽시간에 그들의 얼굴에 부단한 위험을 의식하는 특유의 불안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안나 세르게예브나와 바자로프의 대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 의미없는 대답만 계속하다가 나중에는 객실로 나가자고 제의했다. 그곳에는 늙은 공작 따님과 카샤가 있었다.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는 어디 계시니?" 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묻고 나서, 그가 벌 써 한 시간 남짓이나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를 찾으러 보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정원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 팔짱 낀 양손위에 턱을 얹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것은, 그 사색은 심각하고 중대한 것이었으나 슬픈 것은 아니었 다. 그는 안나 세르게예븐가 바자로프와 마주앉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전처럼 질투심을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은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에 놀란 것 같기도 하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또 무언가를 결심한 듯해 보이기도 했다. 26 세상을 떠난 오딘초바 부인의 남편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성미는 아니었지만 '어떤 고 상한 취미의 놀이'는 몹시 좋아했으므로 자기 저택 정원의 온실과 연못 사이에 러시아 벽돌 로 그리스의 주랑과 흡사한 건물을 세웠다. 그리고 이 주랑 또는 회랑의 뒷벽에는 그가 외 국에 직접 주문하여 마련한 조상을 놓기위한 벽감 (장식품을 두기 위하여 만든 벽의 오목하 게 들어간 곳)이 여섯 군데 패어 있었다. 그 조상들은 은둔, 침묵, 사색, 우울, 치욕, 감상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했다. 그 중의 하나인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있는 침묵의 여신은 도착하 자마자 이내 안치될 판이었는데, 그만 하인방의 어린애들이 여신의 코를 망가뜨리고 말았다. 그래서 근처의 조각가가 '처음보다 두 배나 더 훌륭하게' 그 코를 만들어 붙이려고 착수했 지 만, 오딘초바 씨가 그냥 치워버리라고 일렀다. 그래서 그 여신은 타작 헛간 한쪽 구석에 팽 개쳐진 채 여인들의 미신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거기 오랫동안 세워져 있었다. 주랑 정 면에는 꽤 오래전부터 관목림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다만 원주의 머리만이 푸르름 속에 우뚝 솟아 보일 뿐이다. 그 주랑 안은 대낮에도 서늘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언젠가 거기 서 뱀을 본 뒤로는 그곳을 찾는 일을 꺼림직해했지만, 카샤는 이따금씩 찾아와 한 벽감 밑 에 높여있는 커다란 돌 벤치에 앉곤 했다. 서늘한 공기와 그늘에 싸여 책을 읽거나 일을 하 기도 했으며, 또는 완전한 적막감에 도취되기도 했다. 그러한 기분은아마도 누구나 경험한 바가 있을 것이며, 그 매력은 우리의 주위나 우리들 자신 속에 쉴새없이 흐르고 있는 광활 한 생명의 물결을 어렴풋이 의식하면서 묵묵히 지켜보는데 있는 것이다. 바자로프가 도착한 이튿날 카샤는 자기가 좋아하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르카디 역시 그녀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함께 주랑 쪽으로 가자고 간청한 것이다. 아침 식사 때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쯤 남아 있었다. 이슬이 많이 내린 아침은 이미 이글거리는 낮으로 바뀌려 하고 있었다. 아르카디의 얼굴은 어제의 표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으며, 카샤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를 마신후 언니는 곧 그녀를 자기 방으로 불러 늘 그렇듯이 카샤가 다소 놀랄만큼 먼저 그녀에게 부드럽게 대한 다음, 아르카디를 대하는 데 있어서는 좀더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느니, 특히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그분과 이야기 하는 것을 피하라느니 하며 그녀에게 충고했다. 이모나 집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 라는 것이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이미 전날 밤부터 다른 일로 기분이 언짢았으며, 게다가 카샤 자신도 마치 자신의 죄를 의식이라도 하고 있는 듯 당혹감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아 르카디의 청을 들어주면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카쩨리나 세르게예브나"하고 그는 다소 소극적이면서도 허물없는 투로 입을 열었다. "나 는 행복하게도 당신과 한집에 지내게 되면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여전히 아직 손을 대지 않은 문제...나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 어제 내 가 이곳에 온 뒤로 변화되었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의문에 찬 카샤의 시선에 주목하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난 여러면에서 변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당 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당신으로 인한 변화였으니까요" "저요? 저로 인한 것이라고요?" 하고 카샤가 말했다. "난 이제, 여기 처음 왔을 때의 그 거만한 철부지가 아닙니다."하고 아르카디는 말을 계속 했다. "스물 셋이라는 나이를 헛 먹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유익한 인간이 되고 싶 은 열망을 갖고 있으며, 내 온 힘을 진리를 위해 바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 이상을 더 이 상 전에 탐구하던 방식으로 탐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젠 내게... 훨씬 가까이 있 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제까지 나는 나 자신을 알지 못했던 겁니다. 나는 너무나도 어려운 임무를 나 자신에게 과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 눈은 어떤 감정으로 인해 이제야 크게 떠졌습니다. 나는 말재주는 별로 없습니다만 당신은 틀림없이 내 말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 다. " 카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아르카디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말입니다."하고 제법 흥분된 목소리로 그는 또다시 말을 꺼냈다. 그의 머리위의 우거진 자작나무가지 속에서 멋 쟁이 새 한 마리가 목청을 가다듬어 한가로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실한 인간이라면 모두 사람들에게... 다시 말해서 자기와 친하게 지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숨김없이 속마음을 털어놓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 생각으로는..." 그런데 여기서 아르카디의 웅변은 주제에서 빗나가고 말았다.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더둠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잠시후 다시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카샤는 줄곧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녀는 어째서 그가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으며,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치이기도 했다. "내 말이 당신을 당황하게 하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만"하고 또다시 용기를 내어 아르카디 는 말을 꺼냈다. "이 감정은 어느 정도... 어느정도 당신과 관계가 되는 일이니까요. 당신은 어제 내겐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난하셨죠?"하고 아르카디는 늪에 빠진 사람이 한 발 더 깊이 빠져 들어감을 느끼면서도 되도록 빨리 건너가버리려고 서두를 때의 표정으로 이렇 게 말을 이었다. "그런 비난은 이따금... 젊은 사람들에게 돌려 집니다.... 때로는 무작정 퍼부 어지지요. 그런 비난을 받을 까닭이 없을때조차도 말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내게 좀더 자신 이 있다면... ('제발 나를 좀 도와주시오, 좀 도와달란 말이오.' 하고 아르카디는 마음속으로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지만, 카샤는 여전히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만약에 내가 믿어도 좋 다면..." "만약에 당신이 하신 말씀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때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또렷한 음성이 울려왔다. 그 순간 아르카디는 입을 다물었고 카샤는 새파랗게 질렸다. 주랑을 덮고 있는 관목림 옆 에 한 가닥 좁은 길이 통해 있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바자로프를 따라 그 길을 걷도 있 었다. 카샤와 아르카디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말 한 마디 한마디, 옷 스치는 소리, 심지어는 숨소리까지도 들을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몇 발짝 걷더니, 마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는 듯이 주랑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렇지 않아요?"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계속하여 말했다. "우린 둘 다 잘못을 저지른 거에요. 우린 이제 이미 나이를 먹었어요. 특히 난 더해요. 우린 인생살이에 지쳐 있는 거예 요. 둘 다 솔직히 말해서 현명한 인간들이지요. 처음에는 우린 서로에게 흥미를 느끼고 호기 심도 가졌었지요. 그런데... 그 후로는..." "그런데 우리 사이를 벌어지게 한 원인은 아니잖아요. 어쨋든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것이 중요한 거예요. 우리는 너무나도...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공통점이 많았어요. 우린 그걸 즉시 깨닫지 못했던 거예요. 반대로 아르카디는..." "당신은 그 친구를 필요로 하고 계십니까?" 하고 바자로프는 말했다. "그만두세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그가 내게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당신도 말 씀하셨지만, 나 자신도 그가 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생각은 해왔어요. 난 그의 아주머니 노릇쯤은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아요. 하지만 이제 당신에게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군요. 사실 난 전보다 자주 그를 생각하게 됐어요. 그 젊디젊은 싱싱한 감정 속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런 경우 일반적으로 매력이라는 말이 통용되지요"하고 바자로프는 받았다. 침착하면서 도 공허한 그 음성은 울화가 치밀고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아르카디는 어제 내게 뭔가 숨 기는 듯 했어요. 당신과 당신 동생에 대해서도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습니다.... 알말한 징조 이지요" "그와 카샤는 꼭 남매간 같아요"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말했다. "그의 그런 점 역시 마음에 들어요. 어쩌면 그 두 사람을 그렇게 가까이 지내도록 내버려두지 말았어야 했 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언니로서 하시는 말씀이겠죠?" 하고 말꼬리를 끌면서 바자로프가 말했다. "물론이죠... 그런데 우리가 왜 여기 서 있지요? 왜 우리가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 을까요? 그렇잖아요? 당신과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난 당신을 두려 워하고 있는 거예요.. 동시에 난 당신을 믿고 있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정말 착한 분이기 때 문이에요." "첫째로 나는 조금도 착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나는 당신에 대한 모든 의미를 잃 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내게 착하다고 하시니... 이건 마치 죽은자에게 화환을 걸어 주는 것과도 같군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우린 누구도 자기가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는 법이니..." 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말을 꺼냈는데, 휙 바람이 일며 나뭇잎을 흔들더니 이 내 그녀의 말을 앗아가고 말았다. "당신은 자유로운 몸이 아닙니까?"하고 잠시 후 바자로프가 말했다. 그 이상 아무말도 들 을 수가 없었다. 말소리는 점점 멀어져가고... 주위는 점점 고요해졌다. 아르카디는 카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줄곧 같은 자레소 앉아 있었는데, 다만 아 까보다 좀더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까쩨리나 세르게예브나"그는 손을 비틀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영원히, 그리고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당신 외엔 누구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난 당신에게 이 말씀 을 드리고 나서 청혼하려고 했습니다. 나는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각 오니까요..이제 내게 대답해주지 않으시렵니까? 당신은 나를 믿지 않으십니까? 당신은 내가 경솔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며칠 동안의 일을 기억해 보십시오. 당신은 이미 짐작하셨어야 하지 않습니까? 다른 모든 것은 나를 이해해주실 테죠 다른 모든 것은 하나에서 열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나를 좀 보시고... 내게 한마디만 말씀해주십시오...나는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발 나를 믿 어주십시오" 카샤는 진지하면서도 빛나는 눈으로 아르카디를 바라보았다. 그런 후에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엷은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예" 아르카디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라고요. 당신은 예라고 대답하셨죠, 카쩨리나 세 르게예브나. 그말은 무엇을 뜻하는 겁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당신이 나를 믿어 주신다는 겁니까... 그렇잖으면...그렇잖으면...나는 차마 말할 수 없군요" "예"하고 카샤는 되풀이 했다. 이번엔 그도 그녀의 말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녀의 커다란 아름다운 두 손을 잡아서 환희에 넘쳐 숨을 몰아쉬며 그손을 자기 가슴에 갖다댔다. 그는 간신히 두 발로 버티고 서서, 다만 "카샤, 카샤"하고 쉴새없이 되풀이할 뿐이었으나 그녀는 까닭없이 어린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조용 히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본적이 없는 사람은, 이 순간 이당위의 인간이 감사와 부끄러움 때문에 정신이 온통 아득해지면서 느끼는 행복감을 아마도 모를 것 이다. 이튿날 아침 일찍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바라로프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억지로 엷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접혀진 한 장의 편지를 건넸다. 그것은 아르카디가 쓴 편지로, 거 기에는 동생과의 결혼을 허락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바자로프는 재빨리 편지를 훓어보았는데, 그 순간 자기 가슴속에 벅차오르는 기쁨을 겉으 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자신을 겨우 억제하였다. "호호, 그렇습니까?"하고 그는 말했다. "당 신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 친구는 카쩨리나 세르게예브나와 남매와 같은 애정으로 사랑 하고 있다고 생각하셨지요?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당신이라면 내게 어떤 충고를 하시겠습니까?" 하고 여전히 웃으면서 안나 세르게예브나 는 물었다. "글쎄요, 제 상각으로는"하고 바자로프 역시 웃음을 띄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와는 달리 사실상 전혀 유쾌하지도 못했으며 전혀 웃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제 생각엔 두 젊은이를 축복해 주어야 할 것 같군요. 모든 면에서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키 르사노프 댁에는 상당한 재산도 있고, 그는 외아들인데다가 아버지는 호인이니 발대할 리가 없지요" 오딘초바 부인은 방안을 한바퀴 돌았다. 그녀의 얼굴빛은 계속해서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좋아요, 나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 요... 나는 카샤를 위해서도... 그리도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를 위해서도 기뻐요. 물론 아버 지의 허락을 기다릴 생각이에요. 아르카디를 직접 아버님께 보내겠어요. 그러고 보니 내가 어제 당신에게 한 말은 역시 옳았어요. 우린 이미 둘다 나이를 먹었다는 것 말예요... 어째서 난 그 점을 몰랐을까요? 이상해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또 웃기 시작했으나 이내 고개를 돌렸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꽤 능청스러워졌습니다."하고 바자로프는 말하고 그도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안녕히 계십시요"하고 잠시 잠자코 있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부디 당신이 이 문제를 무사히 풀어나갈 수 있기를 빕니다. 저도 멀리서나마 축원하지요" 오딘초바 부인 은 재빨리 그를 돌아보았다. "떠나시려는 겁니까? 어째서 이번에는 더 머무르지 않으시나 요? 머물러 주세요...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으면 즐거워요... 마치 벼랑 끝을 걷는 느낌이에 요. 처음엔 조심스럽지만 곧 어디선가 용기가 솟아나거든요. 좀더 머물러주세요." "말씀은 고맙습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 저와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기쁘시다니 정말 고맙 습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오랫동안 저와 인연이 없는 사회에 넘나든 것 같습니다. 날치라는 놈도 잠깐 동안은 공중에 떠 있을 수 있지만, 마침내는 물속으로 떨어지게 마련이니까요. 제 발 저도 제게 익숙한 무대로 뛰어들게 내버러 두십시오" 오딘초바 부인은 바자로프를 바라보았다. 쓰디쓴 엷은 웃음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일그러 뜨렸다. '이 사람은 나를 사랑했던 거야'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가엾 다 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동정어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 역시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렸다. "싫습니다."그는 이렇게 말하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전 가난한 인간이긴 하지만 아직까 지 남의 동정을 받은 일은 없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은 아니 겠지요?"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면서 말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수 없지요"하고 바자로프는 대답하고나서 인사를 하고는 나가버렸다. "그래 자네는 보금자로를 꾸미기로 작정한 건가?"그날 바자로프는 허리를 구부리고 여행 가방을 챙기면서 아르카디에게 말했다. "잘된 일이야. 다만 자네가 능청을 떨 필요는 없었는 데 말이야. 난 자네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어. 혹시 어쩌면 자 네 자신도 지쳐서 여우에 홀려버린 건지도 모르지." "자네 말대로야. 자네와 헤어졌을 때에는 나도 이렇게 될 줄 꿈에도 몰랐어"하고 아르카 디는 대답했다. "한데 자네는 능청스럽게 '잘된 일이다'라고 말하는 건가? 마치 내가 자네의 결혼관을 모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뭐라고"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지금 내가 뭘하고 있는가를 보고 있잖은가? 여행가방에 빈 곳이 생겨서 마른 풀로 그곳을 채우는 걸세. 우리들 인생 가방에도 이런 식으로 무엇이든 쑤셔넣어 빈 공간을 채우는 걸세. 제발 화내지 말아주게. 내가 평소 카쩨리나 세르게예브나에 대하여 어떤 견해 를 지니고 있었던가에 대해서는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다른 아가씨리면 그럴 듯한 한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도 현명하다는 평판이 날 수도 있겠지만, 자네의 카샤는 자기 자신을 챙길 줄 아는 아가씨야. 더욱이 자네 머리 꼭대기에라도 올라앉을 만큼 똑똑한 아가씨지. 사 실 마땅히 그래야만 할 처지지만" 하고 그는 가방뚜껑을 찰칵 닫고서 일어섰다. "그래, 지금 작별하는 마당에 거듭 말하지만 왜냐하면 속에 없는 말을 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테니 말일세. 우리는 이제 영원히 헤어지려 하고 있네. 자네 역시 그걸 느끼고 있겠지. 자네는 현 명한 짓을 했어. 자네는 나처럼 고통스럽고 지겨운 가난뱅이로 태어나질 않았네. 자네에게 배짱이나 심술궂은 면이 없고, 다만 앞뒤를 재지 않는 혈기만이 있을 뿐이네. 하지만 그런 건 우리에겐 아무 쓸모가 없네. 자네 귀족들은 고결한 겸손이나 고결한 마음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가 없으니 다 쓸데없는 것들이지. 이를테면 자네들은 싸움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훌륭한 인간으로 여기고 있지. 그런데 우리는 싸우고 싶어 싸우는 걸세. 그러니 어떻 게 되겠나? 우리가 일으키는 먼지가 자네들 눈으로 스며들 것이고 우리의 시궁창이 자네들 을 더럽힐 걸세. 정말 자네들은 우리를 따라오려면 아직도 멀었네.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모 습에 도취되고 자기 자신의 결점을 즐겨 찾고 있지.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건 지루한 일들 이야. 우리에게 새로운 희생자를 달라. 우린 다른 녀석들을 때려 눕혀야 한단 말이야. 자네 는 착한 녀석이야. 그러나 자네는 역시 온실에서 자라 자유주의에 물든 귀족의 아들에 불과 해 우리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저 그런 사람'이란 말일세" "영원히 이별할 작정인가, 예브게니?" 하고 아르카디가 서글픈 듯이 말했다. "내게 더 할 말은 없는가?" 바자로프는 뒷머리를 긁었다. "그야 물론 있지, 아르카디. 할말이 더 있고 말 고. 단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을 뿐이야. 왜냐하면 그건 로맨티시즘이니까. 염치없는 사람 이 되고 마니까. 그건 그렇고 자네는 빨리 결혼이나 하게. 둥지를 짓고 자식들을 많이 낳는 거야. 아이들은 나나 자네와는 달리 좋은 시기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도 벌써 영리해지는 걸세. 저런. 말 준비가 다 된 모양이야. 시간이 됐어. 나는 이미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네... 어때, 한번 안아볼까?" 아르카디는 자기의 지도자이지 친구였던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없이 흘러나왔다. "젊은이란 정말 소중한 것이야"하고 바자로프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카쩨리나 세르게예브나에게 기대가 크네. 두고보게, 그녀가 얼마나 훌륭히 자네를 위 로해주는지." "잘 있게"하고 어느 새 마차에 뛰어오른 그는 아르카디에게 말했다. 그리고 마구간 지붕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한 쌍의 까마귀를 가리키며 이렇게 덧붙였다. "저걸 좀 보게. 저기 자네가 잘 배워두어야 할 것이 있네" "그게 무슨 말인가?"하고 아르카디가 물었다. "무슨 말 이냐고? 자네는 어째 그렇게 생물학에 어두운가? 까마귀는 가장 존경할 만한 가족적인 새 가 아닌가? 자네에겐 좋은 본보기가 될거야. 잘 있게, 세뇨르 (이탈리아어로서 '자네'라 는 뜻) " 마차는 덩컬거리며 달려갔다. 바자로프의 말은 옳았다. 그날 밤 카샤와 이야기하는 동안 아르카디는 떠나버린 자기 지 도자에 대한 생각은 이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벌써 그녀의 말에 따르기 시작했고 카 샤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이튿날 마리노 마을의 아 버지에게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젊은 남녀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 지만 체면상 두 사람을 너무 오랫동안 붙어 있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공작 따님을 두 사람으로부터 멀리 있게 했는데, 이는 이모가 그들의 임박한 결혼 이야기를 듣고는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노했기 때문이다. 처음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두 사람의 행복 한 모습을 보면 혹 자기 마음이 좀 괴롭지 않을까 하여 염려되었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달랐 다. 그러한 처지는 그녀를 딱하게 만들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흥미를 끌었 고 결국에는 그녀를 감동시키기까지 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이 사실이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바자로프가 옳은 것 같아'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호기심인거야, 단순한 호 기 심에 불과해. 그리고 평온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기주위와...' "이봐, 과연 사랑이란 비현실적인 감정인가?"하고 그녀는 크게 소리켜 물었다. 그러나 카 샤와 아르카디는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실 두 사람은 그녀를 피하고 있었 다. 우연히 엿듣게 된 그때의 대화가 두 사람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곧 두 사람을 안심시켰다.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 마음이 평온해졌기 때문이다. 27 바자로프의 노부모는 에기치 않았던 아들의 귀향에 매우 기뻐했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 는 어쩔 줄 몰라하며 온 집안을 뛰어다녔으므로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그녀를 '작은 자고 새 ' 에다 비유했을 정도였다. 그녀의 얇고 짧은 웃저고리의 아랫단이 어쩐지 새를 연상케 한 것 이다. 바실리 이바느이치 자신은 그저 신음소리만을 내면서 호박으로 만든 긴 파이프를 비 스듬히 물고 손가락으로 목을 살짝 짚더니, 마치 머리가 몸뚱이에 옳게 붙어 있는가 어떤가 를 확인이라도 하는 듯이 머리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그러는가 하면 갑자기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없이 웃는 것이었다. "아버지, 전 여기서 약 6주일쯤 머무를 예정이에요" 하고 바자로프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네가 아비 얼굴을 잊어버릴 정도로 방해하지 않겠다."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대답했 다.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전처럼 아들에게 자신의 서재를 쓰도록 하고 그의 눈을 피했을 뿐만 아니라 아내가 지나친 애정의 표시를 하려는 것도 일체 단념시켰다. "여보"하고 그는 말했다. "지난번에 예브게니가 돌아왔을 때에는 우리가 그애를 너무 성가시게 했으니 이번 엔 좀 현명해집시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남편의 말에 동의는 했지만 그로 인한 이득은 별로 없었다. 왜냐 하면 아들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식사 때뿐이었으며, 그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겁을 먹 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뉴센카"하고 그녀는 말을 꺼내놓고는 아들이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벌써 손주머니 끈 을 만지작거리면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그저..."하고 더듬거리는 것이 었다. 그리고 바실리 이바느이치에게로 와서 손으로 턱을 받쳐 괴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었다. "여보, 오늘 저녁 식사는 시금치 수프가 좋겠어요, 무 수프가 좋겠어요? 예뉴센카는 어느 쪽을 더 좋아할까요?" "왜 그애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소?" "귀찮아할까봐 그래요" 그런데 바자로프는 얼마 안 가서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짓을 스스로 그만두었다. 일에 대한 열정이 갑자기 식어버리고, 그 대신 우울한 권태와 까닭 모를 불안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동작에는 이상한 피로감이 엿보였다. 건장하고 저돌적이고 대담하던 그 걸음걸이마저도 변해버렸다. 그는 혼 자서 산책을 하는 일을 그만두더니, 여러 사람과 어울릴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객실에서 차 를 마시거나 바실리 이바느이치와 채소밭을 거닐거나 그와 '말없이' 담배를 피우거나 했다. 때로는 알렉세이 신부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처음엔 이러한 변화를 기뻐했으나 그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예뉴센카가 걱정되는군" 하고 그는 아내에게 속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애는 무언가 불만이 있거나 화가 나서 저러는 게 아냐. 그렇다면 아 무 걱정도 없겠지만, 그애는 지금 고민하고 있어 그건 무서운 일이야. 차라리 당신이나 나에 게 화를 내면 좋으련만 늘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으니 문제야. 몸도 야위고 안색도 어쩐지 좋지 못해." "어쩌면 좋아요, 어쩌면 좋을까요"하고 노모는 속삭였다. "그애는 목에 부적이라도 달아주 고 싶은데 말을 들어야지요."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바자로프에게 그의 일이나 건강, 아르카디에 대해서 매우 조심스럽 게 몇 번이나 자세히 물어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바자로프는 달갑지 않게 되는 대로 대 답했을 뿐이며, 그러다가 한번은 그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아버지가 뭔가를 은근히 캐묻 고 있는 듯한 눈치를 채고는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무엇 때문에 늘 제 주위 를 발소리를 죽이며 살피시는 거예요? 그것은 전보다 더 나빠요." "아냐, 아냐, 아무것도 아니다." 가련한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황급히 대답했다. 정치문제를 꺼내봐도 마찬가지로 그저 그러했다. 또 한 번은 이제 곧 농노해방이 실현된다는 것과 진보 라는 주제를 꺼내어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아버지는 아들의 공명을 얻으려고 했지만, 아들은 덤덤하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제가 어제 담장 옆을 지나면서 들었는데, 여기 농부의 자녀들이 옛노래 대신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 있더군요. '정의의 시대는 찾아온다, 가슴은 사랑을 느끼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진보라는 것입니다." 이따금 바자로프는 마을로 나갔는데, 그때마다 그는 늘 빈정거리며 농부들과 이야기를 시 작하곤 했다. "이봐." 하고 그는 상대방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의 인생관을 한번 말해보게. 러시아의 국력과 미래는 모두 자네들에게 달려있는 게 아닌가? 역사의 새 시대도 자네들로 부터 시작되고 바로 자네들이 우리에게 진실한 언어와 법을 가져다준다지 않나?" 농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거나 혹은 다음과 같이 말하거나 했다. "그야 우리는 할 수 있지요... 역시 그건, 즉 그... 어쨌든 우리는 대개 뭐든지 만들어낼 수가 있으니까요." "자네들의 그 농민조합이라는 건 어떤 것인가? 내게 설명해줄 수 있나?" 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 "세 마리의 물고기 위에 놓여 있는 그 '세계'를 말하는 건가?" "물론입죠, 주인님. 땅바닥이 세 마리의 물고기 위에 놓여 있습죠." 순진하고 선량한 농부 는 노래하듯 타이르듯 이렇게 설명했다. "즉 우리 농민조합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 인님들의 뜻대로 되는 것입죠. 왜냐하면 나리들은 우리의 어버이시니까요. 주인님이 엄숙하 시면 엄숙하실수록 농민은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와 같은 말을 듣고 바자로프는 경멸하듯 어깨를 움츠리고 외면해버렸다. 그러자 농부는 어슬렁어슬렁 집으로 돌아갔다. "무슨 말을 지껄이던가?" 하고 바자로프와 이야기하던 것을 멀리 집안에서 지켜보던 또 한 사람의 중년 농부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 농부에게 물었다. "밀린 소작료 이야기던가?" "그런 게 아니야." 하고 처음의 그 농부가 대답했는데 그 음성에는 이미 순진하고 타이르 는 듯한 어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반대로 난폭한 어조가 섞여 있었다. "그저 이것저것 지껄였을 뿐이야. 쓸데없는 소릴 하고 싶었던 게지. 주인이란 놈들이 알게 뭐야." "그럼, 알 수 없지." 하고 다른 농부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모자를 한 번 휘두르고 허리띠를 내리더니 자기들의 일과 가난에 대 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아. 경멸하듯 어깨를 움츠려버린 바자로프, 그리고 자기 는 농부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고 장담하던 바자로프(그는 파벨 페트로비치와 언쟁할 때 이 것을 자랑했었다), 이 자신만만하던 바자로프 역시 농부들의 입장에서 보면 단지 한 사람의 광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꿈엔들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마침내 자기의 할 일을 발견했다. 어느 날 그의 앞에서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농부의 다친 발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는데, 늙은 아버지의 손은 떨려서 붕대를 잘 감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를 돕게 되었고, 그 후로 그 일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 와 동시에 그는 자기가 권장한 치료방법을 즉시 실행에 옮긴 아버지를 계속해서 조롱하였 다. 그러나 바자로프의 조롱은 바실리 이바느이치를 조금도 당혹하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 니라 도리어 그것이 그를 위안해주기까지 하였다. 자신의 기름때 묻은 실내복의 배 부위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올리기도 하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기도 하면서 바자로프가 하는 말을 즐거운 표정으로 들었다. 그리고 아들의 엉뚱한 언행에 더 많은 야유가 섞일수록 그 새까만 이를 있는 대로 드러내 보이면서, 행복에 젖은 이 아버지는 호인답게 큰 소리로 웃는 것이 었다. 그는 종종 아들이 하는 평범하고 무의미한 말들을 되뇌는 일조차 있었다. 예를 들면 며칠 동안을 전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니, 그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냐.' 하고 노상 뇌 까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만 그가 아침 기도에 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아들이 그렇게 말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우울증이 사라졌어" 하고 그는 아내에게 속삭였다. "그 녀석이 오늘 나를 꼼짝 못하게 해댄 건 정말 훌륭했어." 그는 자기가 이런 조수를 데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우쭐하고 자랑스러워 가슴이 뿌듯했다. "그래, 정말이지"하고 두터운 외투에 뿔이 돋친 벙거지를 쓴 어떤 농부의 아낙네에게 작은 물약병을 건네주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만 그가 아침 기도에 나간다 는 사실을 알고 아들이 그렇게 말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우울증이 사라졌어." 하고 그는 아내에게 속삭였다. "그 녀석이 오늘 나를 꼼짝 못하게 해댄 건 정말 훌륭했어." 그는 자기가 이런 조수를 데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우쭐하고 자랑스러워 가슴이 뿌듯했다. "그래, 정말이지" 하고 두터운 외투에 뿔이 돋친 벙거지를 쓴 어떤 농부의 아낙네에게 작은 물약병을 건네주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봐요, 알겠소? 내 아들이 집에 머물 러 있는 걸 하느님께 감사해야 하오. 가장 과학적이고 가장 새로운 방법으로 지금 당신을 치료하고 있으니까. 내 말 알아듣겠소?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일지라도 이보다 더 나은 의 사는 갖지 못했을 거란 말이야." '콕콕 쑤신다'고 호소해온 그 아낙네(이 말의 의미는 그녀 자신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는 다만 넙죽 절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을 따름이었다. 거기엔 손수건으로 싼 계란 네 개가 들 어 있었다. 한번은 바자로프가 떠돌아 다니는 피륙 행상인의 이를 한 대 빼준 일이 있었다. 그 이는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이었으나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그것이 희귀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 잘 보관하고 알렉세이 신부에게가지 보이면서 끝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걸 좀 보 십시오. 괴상한 뿌리지요. 예브게니는 이만큼 힘이 세답니다. 옷감 장수가 허공에 매달렸을 정도였다고요... 그만한 힘이라면 떡갈나무라도 뽑을 것 같던데요." "놀랍군요." 하고 알렉세이 신부는 겨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또 자식 자랑에 몰두하고 있는 이 노인을 어떻게 대해주어야 할지를 몰랐던 것이다. 어느 날 이웃 마을에 사는 농부가 장티푸스에 걸린 자기 아우를 데리고 바실리 이바느이 치를 찾아왔다. 불쌍한 사나이는 짚단 위에 엎드린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그 몸뚱이는 거뭇거 뭇한 반점으로 온통 뒤덮이고 이미 오래전부터 의식을 잃고 있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좀더 일찍 의사에게 보이지 않은 것이 유감이라고 혀를 차면서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고 선 언했다. 농부는 자기 아우를 집까지 데리고 갈 수가 없었으므로 병자는 그냥 짐마차 위에서 죽고 말았다. 그후 사흘쯤 지나 바자로프가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오더니 질산은을 가지고 있는가를 물 었다. "있지. 그런데 무엇에 쓰려고 그러니?" "좀 필요해서요... 상처를 지지려고요." "누구 상처를?" "제 상처를요." "네 상처라니.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무슨 상처냐? 어디 좀 보자." "바로 여깁니다. 손가락이에요. 저는 오늘 그 장티푸스에 걸린 농부가 살던 마을에 나갔었 어요. 어쩐지 시체를 해부해보고 싶어서요. 전 이 방면은 오랫동안 실습을 해보지 않아서..." "그래서?" "그래서 군 공의에게 부탁했지요. 그러다가 다쳤어요."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갑자기 새파랗게 질렸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서재로 뛰어가더니 질산은 부스러기를 들고 이내 돌아왔다. 바자로프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밖으로 나가려고 했 다. "제발, 그건" 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말했다. "내가 치료해주마." 바자로프는 미소를 지 었다. "실습을 퍽 좋아시히는군요." "제발 농담은 마라. 어디, 손가락을 좀 보자. 상처는 대 단치 않군. 자 아프진 않니?" "더 세게 눌러주세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요."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손을 멈추었다. "어떠냐, 예브게니. 불에 달군 쇠로 지지는 편이 낫지 않겠니?" "진작 했어야 했어요. 실은 이젠 질산은도 소용없어요. 만일 감염된 거라면 이미 늦었어 요." "뭐라고... 늦었다고..." 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간신히 말했다. "그럼요. 그 후로 네 시간이나 지났으니까요."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상처를 좀더 지졌다. "그런데 군 공의에겐 질산은이 없더냐?" "없었어요." "아니, 그럴 수가 있나. 의사라는 작자 가 그런 필수품도 갖고 있지 않다니" "그분의 란세트 (양발의 끝이 뾰족한 의료용 칼)를 보 셨더라면..." 하고 바자로프는 밖으로 나갔다. 그날 저녁 늦게까지, 그리고 이튿날 온종일 바 실리 아비느이치는 온갖 구실을 다 붙여 아들의 방에 들어갔다. 그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귀찮을 정도로 아들의 눈을 들여다보거나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보는 바람에 바자로프는 더 이상 참 을 수가 없어 나가버리겠다고 위협했을 정도였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이제 더 이상 걱정 하지 않겠노라고 아들에게 약속했다. 물론 남편에게서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아리나 블라시 예브나까지도 왜 당신은 자지 않느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면서 그를 성가시게 물고늘어졌 다. 그러고 나서 만 이틀 동안 그저 참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끊임없이 훔쳐보 던 자리에서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바자로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리에 앉은 채 한 술도 뜨지 않았다. "왜 먹지 않니, 예브게니?"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그 는 물었다. "음식이 아주 맛있게 된 것 같은데." "먹고 싶지가 않아요" "식욕이 없나보구나? 그럼 머리는"하고 그는 겁에 질린 소리로 물었다. "아프지 않느냐?" "아파요, 아프지 않을 리가 있겠어요?"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자세를 고쳐 앉더니 귀를 곤두세웠다. "제발 화내지 말아다오, 예 브게니"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말을 이었다. "내가 맥을 한 번 짚어볼까?" 바자로프는 벌떡 일어섰다. "맥을 짚어보시지 않아도 제 자신이 열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오한도 나니?" "네, 그래요. 저는 이만 가서 누울테니 라임 꽃 차나 좀 들여보내 주세여. 감기에 걸린 것이 틀림없어요." "그러고보니 나도 밤중에 네 기침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구 나"하고 아리나 블라시예브나가 말했다. "감기에 걸린 거예요"하고 바자로프는 되풀이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라임 꽃을 넣어 차를 달이기 시작했지만,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옆 방으로 들어가 잠자코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바자로프는 그날 일어나지 못하고 밤새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는 밤 열두시가 지나 간신 히 눈을 뜨고는 자기 바로 위에서 창백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아버지에게 제발 저쪽으 로 가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하라는 대로 했으나 이내 다시 살그머니 되돌아와 서는 옷장 문 뒤에 몸을 반쯤 숨긴채 눈을 떼지 않고 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리나 블라 시예브나 역시 자지 않고 있었다. 서재의 문을 살며시 열고 가까이 다가와서는 '예뉴센카의 숨소리는 어떤가?' 하고 귀를 기울여보기도 하고 바자로프의 안색을 살피기도 했다. 그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남편의 굽은 등밖에는 볼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이는 것이었다. 아침이 되자 바자로프는 일어나보려고 했지만 현기증이 나고 코피까지 터 져 그냥 다시 눕고 말았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잠자코 그를 간호했다. 아리나 블라시예브 나는 병실로 들어와 그에게 기분이 어떤가를 물었다. 그는 "좋은 편이에요" 하고 대답하고 는 벽을 향해 홱 돌아 누웠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아내에게 손짓을 했다. 그녀는 터져나오 는 울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꼭 깨문 채 밖으로 나갔다. 집안이 갑자기 온통 캄캄해진 듯하 였다. 하나같이 침통한 얼굴이었고, 집안 가득 이상한 적막이 흘렀다. 큰 소리로 꽥꽥거리던 수탉 한 마리가 뒤꼍에서 마을 쪽으로 옮겨졌고 바자로프는 벽을 뚥어지게 쏘아보며 종일 누워만 있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그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려고 했으나 그것이 바자로 프를 괴롭히는 일이 될 것 같아 노인은 그저 안락의자에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어쩌다 한 번씩 딱딱 소리가 나게 손가락을 꺾을 뿐이었다. 그는 잠시 동안 뜰에 나와 마치 어처구 니 없이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 우상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놀란 듯한 표정은 줄곧 그 의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내의 세세한 질문을 피하고자 다시 아들의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아내는 마침내 그의 손에 매달리더니 위협조로 재빨리 "그애가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하고 물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 대신 그녀에게 억지로 웃어 보이 려고 했다. 그런데 자신도 놀란 것은 어찌된 일인지 미소 대신에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온 것이다. 그는 아침 일찍 의사를 부르러 보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들이 화를 내지 않 도록 하기 위해 이 사실을 미리 알려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바자로프는 갑자기 침대에서 돌아눕더니, 멍한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며 물이 먹고 싶다 고 말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그에게 물을 먹여주고는 그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이마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버지"하고 바자로프가 쉰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 "병이 아주 심각해졌어요. 저는 감염된 거예요. 며칠 후면 제 장례를 치러야 할 거예요." 바 실리 이바느이치는 마치 누군가에게 다리를 걷어채인 듯 휘청거렸다. "예브게니"하고 그는 혀가 돌지 않은 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너 그게 무슨 소리냐. 당치도 않아. 감기에 걸린거 야..." "그만하세요" 하고 천천히 바자로프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의사는 그렇게 말하는게 아닙니다. 감염된 징조가 뚜렷해요. 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대체 어디에 그런 징조가 나 타났단 말이냐, 예브게니? 당치도 않은 말을..." "그럼, 이건 뭡니까?"하고 바자로프는 말하고 저고리 소매를 걷어올리더니 팔뚝에 있는 불길한 붉은 반점을 아버지에게 보였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깜짝 놀라 공포로 인해 소름 이 오싹 끼쳐짐을 느꼈다. "설사"하고 그는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설사...만일에... 만일에 뭔가 감염된 것... 같은 것 일지라도..." "농독증이란 말예요"하고 아들이 일러주었다. "그래 뭔가... 전염병 같은..." "농 독증이라니까요"하고 바자로프는 거친 소리로 똑똑히 되풀이 했다. "이젠 자신의 텍스트도 잊으신 겁니까?" "그래, 그래, 너 좋을대로 해석하렴... 그러나 어쨌든 난 너를 고쳐볼 테다." "아닙니다. 그건 바보 같은 짓입니다. 하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예요. 전 제가 이렇게 빨리 죽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이건 정말이지 예기치 못했던 일이에요. 솔직히 말해 서 정말 불쾌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제 그 깊은 신앙의 힘에 매달리셔야 합니다. 두 분 신앙을 시험해 보실 좋은 기회니까요." 하고 말하고 그는 또 물을 조금 마셨다. "그런데 아버지께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게 있습니다... 제 머리가 아직 제 통제하에 있는 동안에 말 입니다. 지금도 사실 제가 하고 있는 말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인지 어떤지, 별로 자신이 없어요. 아버지는 마치 산새를 발견한 사냥개처럼 저를 위에서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 처럼 여겨져요. 저는 마치 술에 취한 것 같고요. 제 말을 잘못 알아들으시겠지요?" "천만에, 예브게니. 너는 아주 정상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아버지 는 의사를 부러러 보냈다고 하셨는데, 그걸로 아버지는 소원을 푸신 셈이니까... 제 소원도 하나 들어주십시오. 급히 심부름을 좀 보내주세요."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한테 말이냐?"하 고 노인이 물었다.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라니, 누구 말씀이세요?" 바자로프는 생각이 잘 안난다는 듯 이렇 게 말했다. "아아, 그렇지. 그 애송이 말씀이시로군요. 아니, 그 친구는 그냥 놔두세요. 그 친 구는 이번에 까마귀 역할을 했으니까요. 놀라지 마세요, 이건 헛소리가 아니니까요. 급히 오 딘초바 부인에게, 안나 세르게예브나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주세요. 이 근방에 그런 여지주가 있습니다... 아시겠어요?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브게니 바자로프가 안부를 전하더라고 말입니다. 또 죽어가고 있노라고 전해주세요. 아버지, 그렇게 해주시겠지 요?" "그러지...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리 있겠니. 네가 죽다니, 예브게니 네가... 생각좀 해 보아라, 그럴 수가... 대체 정의는 어디에 있단 말이냐" "그런 건 몰라요. 어서 심부름꾼을 보내주세요" "이제 곧 보내마, 편지도 쓰겠다. " "그럴 필요는 없어요. 안부를 전하더라고 말하기만 하면 돼요.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필요없어요. 그 럼 저는 다시 개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참 이상해요. 저는 죽음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고 싶은데 잘 되질 않아요. 무슨 반점이 하나 보일 뿐.. 그 밖엔 아무것도 없 어요." 그는 또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바실리 아바느이치는 서재를 나와 아내의 침실에 당 도하자 갑자기 무너지듯 성상 앞에 무릎을 꾾었다. "기도해줘요, 아리나, 기도해줘요" 하고 그는 애원했다. "우리 아들이 죽어가고 있어" 의사가 도착했다. 그는 초산은을 가지고 있지 않던 그 군 공의였다. 그는 병자를 진찰하고 나서 장기 치료를 권유했고 또 자리에서 회복할 가망이 있다고 두어 마디 그럴 듯하게 덧붙 였다. "그런데 말예요, 나와 같은 상태에 있는 환자가 저승으로 가지 않은 예를 본 적이 있 습니까?"하고 바자로프는 묻고 나서, 침대 옆에 놓여 있던 육중한 책상의 다리를 잡고 흔들 어 그 자리를 옮겨 놓았다. "힘은, 힘은"하고 그는 말했다. "아직 이렇게 그대로 있는데 죽어야만 하다니... 혹시 노인 이라면 그래도 어쩌다가 산다는 걸 잊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죽음을 부정한다 해도 죽음이 나를 부정하면 그것으로 끝장이니. 누굽니까? 거기서 울고 있는 게?" 하고 그는 잠 시 있다가 덧붙였다. "어머니세요? 가엾은 어머니. 이젠 그 맛있는 수프를 누구에게 주시렵 니까? 그리고 아버지, 아버지도 울고 계시는 군요. 자, 그리스도교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철학자라도 되세요. 스토아 학파라도 말예요. 어때요? 아버지는 자신이 철학자라며 자랑하셨 잖아요?" "내가 무슨 철학자냐" 이렇게 말하는 바실리 이바느이치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볼 을 타고 흘러 내리고 있었다. 바자로프는 매시간 점점 더 나빠져 갔다. 병은 외과의 중독이 언제나 그렇듯이 급속도로 진행해갔다. 그는 아직 의식을 잃지 않고 있었으며, 자기에게 하는 말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헛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아"하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그건 바보 같은 짓이야" 그러고는 이내 또 "여덟에서 열을 빼면 얼마가 되지?"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면서 이 방법 저 방법을 생각해 보았으나 오직 할 수 있는 일은 아들의 발에 이불을 덮어주는 것뿐이었 다. "찬 시트로 몸을 감싸줘야 해. 토하는 약을 주고... 배에 겨자를 발라주고... 피를 뽑고"하 고 그는 긴장된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간청하여 머물러 있는 의사도 그에게 맞장구를 치면서 환자에게는 레몬수를 먹이고 자기에게는 파이프에 잴 담배라든가, 몸을 '따뜻하게 하고 힘이 나게 도와주는 것', 즉 보드 카 등을 달라고 했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문 옆에 있는 낮은 의자에 계속 앉아 있었는 데, 다만 이따금 기도하러 나갈 뿐이었다. 며칠 전에 손거울이 그녀의 손에서 떨어져 깨진 일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이 나쁜 징조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안피수시카 역시 그녀에게 한마디도 위로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치모페이치는 오딘초바 부인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날 밤은 바자로프의 병세가 좋지 않았다... 심한 열이 그를 괴롭혔다. 아침녘이 되자 좀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에 빗질을 해달라고 아리나 블라시예브나에게 부탁하고는, 그 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나서 차를 두어 모금 마셨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기운을 조금 차 렸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그는 되뇌었다. "위기가 다가왔었으나...위기 를 넘겼어" "뭐라고요?"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말이라는 건 역시 값어치가 있는 것이로군 요. 적당한 단어를 찾아내어 '위기'라고 하면 안심이 되니까 말이에요. 인간이 아직도 말을 믿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에요. 이를테면 바보라고 말하면 얻어맞지 않아도 슬퍼지고, 총명한 사람이라고 하면 돈을 받지 않아도 만족을 느끼니 말이에요" 바자로프의 이 짤막한 말은 그가 전에 하던 그 '엉뚱한 언행'을 생각나게 하여 바실리 이 바느이치를 감동시켰다. "브라보. 훌륭한 말을 하는군. 훌륭한 말을"하고 손뼉치는 시늉을 하면서 그는 갈채를 보냈다. 바자로프는 슬픈 듯이 미소를 띄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보시기엔 어떻습니까?"하고 그 는 말했다. "위기를 넘긴 겁니까, 그렇잖으면 위기가 다가선 겁니까?" "너는 좋아지고 있다. 나는 그걸 알고 기뻐하는 거야."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대답했다. "좋아요, 기뻐한다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니까요. 그런데 그녀에겐, 기억하시죠? 사람을 보내셨습니까?" "보냈 고 말고, 여부가 있나" 점점 좋아지던 이 변화도 오래 계속되진 못했다. 발작이 또 시작된 것이다. 바실리 이바느 이치는 바자로프 곁에 앉아 있었다. 뭔지 모를 괴로움이 이 노인을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았 다. 그는 몇 번이나 말을 꺼내려고 했으나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예브게니"하고 그는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내 아들, 내 귀여운 아들" 이 심상치 않은 외침은 바자로프에게 효과가 있었다... 그는 고개를 조금 돌리고 그를 억누르고 있던 혼수상 태의 중압으로부터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에 요. 아버지?" "예브기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말을 계속하면서 바자로프의 앞에 무릎을 꿇 었다. 그러나 아들은 눈을 뜨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예브게니, 너는 이 제 좋아지고 있어. 괜찮아, 회복할거야. 그러나 이순간을 잘 이용하여 나와 네 어미를 안심 시켜다오. 그리스도교의 의무를 다해다오. 네게 이런 말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 야. 그러나 더 괴로운 건... 정말 영원히, 예브게니... 생각해보아라, 얼마나...." 노인의 음성이 끊겼다. 그의 아들의 얼굴에는, 비록 그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 다고는 하지만 무엇인가 이상한 그림자가 스쳐갔다. "그것이 두 분의 소원이시라면 저도 싫다고는 않겠습니다."하고 그는 드디어 말했다. "그 러나 아직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는군요. 아버지께서도 제가 좋아지고 있다고 말씀하 였으니까요" "좋아졌다. 예브게니. 좋아졌어. 그러나 알 수는 없는거야. 이런 일은 모두 하느 님의 뜻에 달려 있는 거니까. 그렇지만 의무를 다해두면..." "조금만 더 기다려보겠습니다."하고 바자로프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저는 위기가 다가 왔다는 아버지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 짚었다 하더라도 상관없잖아요? 의식을 잃은 자도 성찬은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 소릴. 예브게니..." "기다려 보겠습니 다. 지금 저는 졸려요,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그는 고개를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렸 다. 노인은 일어나 안락의자에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는 손가락 끝을 깨물기 시작했다. 갑자기 스프링이 달린 마차의 덜컹 소리가, 이런 벽촌에서는 유난히 귀에 거슬리는 그 마 차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경쾌하게 달리는 바퀴소리가 차츰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말들의 콧바람소리까지도 들리게 되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 로 뛰어갔다. 그 집 바깥 뜰에 2인승 사두마차가 들어섰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그는 자기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으로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제복을 입은 하인이 마차 문을 열자, 검은 베일에 검은색 망토를 입은 부인이 그 안에서 나왔다... "제 이름은 오딘초바라고 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는 아직 살 아 계신가요? 당신이 아버님이십니까? 제가 의사를 모시고 왔습니다." "인정이 많은 분이시 군요."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이렇게 외쳤다. 그러고는 그녀의 한 손을 잡고 덜덜 떨면서 자 기 입술을 갖다댔다. 그 사이에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데리고 온, 안경을 쓴 작달막한 독일인 인 듯 한 의사가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 우리 예브게니는 살아 있습니다. 할멈. 할멈. 우리 집에 천사가... 천 국에서... " "아니 뭐라고요?" 하고 노부인은 응접실에서 뛰어나오며 외치고는 영문도 모른 채 현관 앞에서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발밑에 쓰러져 마치 미친 사람처럼 그녀의 옷자락에 키스를 퍼 부었다. "이러시면 안돼요. 이러시면 안돼요"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말했다. 그러나 아리 나 블라시예브나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다만 "천사님. 천사님"하 고 되풀이할 따름이었다. "환자는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다소 화가 난 듯 의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이쪽입니다, 이쪽. 제 뒤를 따라오세요, 존경 하는 동료"하고 그는 옛 기억을 더듬어 독일어로 말했다. "아하"하고 독일인은 이를 드러내 어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그를 서재로 안내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 오딘초바 부인이 모셔오신 선생님이시다."하고 그는 아들의 귓전에 대고 말했다. "그리고 그분도 오셨다." 바자로프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뭐라고 하셨어 요?" "안나 세르게예브나 오딘초바 부인이 오셨고, 또 그분이 이 선생님을 모시고 오셨단 다." 바자로프는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그분이 오셨다고요... 만나고 싶은데요" "조금 있으 면 뵐 수 있을거야, 예브게니. 그러나 먼저 이 의사 선생과 잠깐 이야기를 해야해. 시도르 시도르이치 (그것은 군 공의의 이름이다.)가 돌아갔으니 이분에게 네 병에 대해 죄다 말씀드 리고 좀 의논하고 싶어서 말이다." 바자로프는 독일인 쪽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럼 빨리 이 야기해주세요. 하지만 라틴어만은 안 돼요. 저도 '이제 죽어가고 있다'라는 뜻 쯤은 알고 있 으니까요" "이분은 독일어를 잘 하시는 모양기군요"하고 새로운 아스클레피오스 (그리스 신 화의 의술의 신)의 제자가 독일어로 바실리 이바느이치에게 말했다. "러시아어로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군요"하고 노인이 말했다. "아아, 아아, 그렇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 그리고 의논이 시작되었다. 반 시간쯤 지나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바실리 이바느이치의 안내를 받아 서재로 들어갔다. 의사는 틈을 보아 그녀에게 환자는 회복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귀뜸했다. 그녀는 바자로프 쪽을 보았다... 그리고 문턱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희미해진 눈동자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는, 발열하여 타는 듯한, 동시에 거의 죽어가고 있는 듯한 그의 얼굴이 그녀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놀라움은 단순히 소름끼치는 괴로운 충 격으로 인한 그런 놀라움이었다. 만약 그녀가 그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느끼 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쳤다. "고맙습니다."하고 그는 애써 입을 열었다. "이렇게 와주시리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우린 다시 만나게 되었군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매우 친절한 분이셔"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참견했다. "아버지, 잠깐만 자리를 비켜주십시오. 안나 세르게예브나, 그래도 괜찮겠지요? 아마 이번 만큼은..." 그는 쇠약해지고 무력한 자기 몸을 턱으로 기리켰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밖으로 나갔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바자로프는 되뇌었다. "마치 황제 같은 태도로군요. 황제도 역시 죽어가는 병자를 위문한다니까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난 아직 희망을 갖고 있어 요..." "아, 안나 세르게예브나, 우리 솔직히 이야기 합시다. 전 이제 끝장입니다. 차 바퀴에 깔려버렸습니다. 앞으로의 일 따위는 전혀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이란 어떻 게 보면 구식 농담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주 새삼스러운 것입니다. 전 아직은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혼수상태에 빠지면 만사는 끝장입니 다. (그는 힘없이 한쪽 팔을 흔들었다.) 자, 이제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요... 제가 당신을 사랑했었다고 말해야 할까요? 이 말은 전에도 아주 무의미한 말이었지만 지금에 와 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사랑은 형제인데 저 자신의 형체는 이미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있 는 것입니다. 그 보다는 이렇게 말하는게 좋겠지요. 당신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금 당 신은 거기 그렇게 서 계십니다. 너무도 아름답군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아니, 놀라지 마십시오, 걱정하실 필요 는 없습니다... 거기 앉아주십시오... 제 곁에 가까이 오시면 안됩니다. 제 병은 전염병이니까 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재빨리 방을 가로질러 바자로프가 누워있는 침대 곁으로 다가와 안락의자에 앉았다. "당신은 정말 친절하신 분이군요"하고 그는 속삭였다. "오오, 이렇게 가까이에, 젊고 신선 하고 청초한 당신이..., 이런 더러운 방안에 있다니... 그럼 안녕. 오래 오래 사십시오. 그것이 무엇보다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시간을 최대한 이용하는 겁니다. 보십시오, 이 추한 광경을. 거의 죽어가는 벌레가 어떻게든 살아 남으려고 기를 쓰고 있는 꼬락서닙니 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온갖 일을 다해봅테다, 허무하게 죽지는 않겠다. 내 겐 사명이 있다. 난 거인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거인의 사명은 어떻게 하면 흉측스럽지 않게 죽느냐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물론 그런 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 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습니다. 저는 누구에게 잘 보이려는 짓은 하지 않으니까 요." 바자로프는 입을 다물고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며 컵을 찾았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장 갑도 벗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며 그에게 물을 먹여주었다. "저 같은 것쯤이야 당신은 곧 잊어버릴 테지요?"하고 그는 또 말을 꺼냈다. "죽은 사람은 살아있는 인간의 친구가 될 수 없지요. 아버지께서는 당신에게, 지금 러시아는 어떤 인물 하 나를 잃어가고 있노라고 말씀하실지는 모르지만...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노 인의 환상을 깨뜨리지는 마십시오. 당신도 아시다시피 '어린이는 어떤 개구쟁이 짓을 하더라 도...'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친절히 대해주십시오. 정말 이 두분 같은 분은 당신들의 상류사회에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을 테니까요... 러시아는 나를 필요로 합 니다... 아닙니다. 어쩌면 필요치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필요합니까? 구두 수 선공이 필요합니다. 재봉사가 필요합니다. 푸주한은 고기를 판다. 푸주한은 아니, 잠깐만요. 엉망이 돼버렸어요. 저기 수풀이 있다..." 바자로프는 이마에 한 손을 얹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내가 여기 있어 요..." 바자로프는 곧 이마에서 손을 떼고 몸을 조금 일으켰다. "안녕"하고 그는 갑자기 힘주 어 말했다. 그의 눈은 마지막 광채를 띄고 있었다. "잘 있어요...그래... 그때 나는 당신엑 키 스를 하지 않았어요... 꺼져가는 불꽃에 입김을 불어주세요. 그러면 곧 꺼지게 됩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그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댔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하고 그는 말 하고 베개에 머리를 떨어뜨렸다. "이젠...어둠이야."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어떻습니까?"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속 삭이듯 그녀에게 물었다. "잠이 들었습니다."하고 그녀는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자로프는 이미 다시 깨날 운명이 아니었다. 저녁이 되자 그는 완전히 혼수상태 에 빠졌고 그 이튿날 그는 숨을 거두었다. 알렉세이 신부가 그에게 종교적인 의식을 올려 주었다. 그에게 성유식을 거행했을 때, 성유가 그의 가슴에 닿자 그는 한쪽 눈을 떳다. 그러 고는 제의를 입은 신부와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로와 성상 앞에 세워놓은 촛불을 보자 순간 어떤 공포와 전율과 같은 그림자가 죽어가는 그의 푸르스름한 얼굴에 가냘프게 떠올랐다. 마침내 그가 숨을 거두고 온 집안에 일제히 곡성이 터져나왔을 때,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갑 자기 미친 듯이 소리쳤다. "난 하늘을 저주하겠다고 말했다."하고 그는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찌푸리고서, 마치 누 군가를 위헙하듯 주먹을 허공으로 내휘두르며 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니 난 하늘을 저주 하겠다. 저주하겠어" 그러나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온통 눈물에 젖은 얼굴로 그의 목에 매 달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쓰러졌다. "그렇게"하고 잠시 후에 하녀 방에서 안피수시카는 이야기했다. "함께 나란히 머리를 숙 이고 있었어, 마치 한낮의 햇빛을 쬐고 있는 양들처럼 말이야..." 그러나 한낮의 폭염이 지나면 이윽고 저녁이 되고 밤이 찾아온다. 그리고 아늑한 안식처 로 돌아오면 마음 괴롭고 녹초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도 단잠이 찾아들게 마련이다.... 28 여섯 달이 지났다. 이미 하얀 겨울이 찾아와 있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는 엄동의 지독 스런 적막, 단단히 뭉쳐져 서걱거리는 눈, 나뭇가지마다 드리운 장밋빛 고드름, 뿌연 에메랄 드빛 하늘, 굴뚝마다 피어오르는 고리 모양의 연기, 열림 문으로 순간 쭉 빠져나가는 안개의 소용돌이, 마치 추위에 쏘이기라도 한 듯 붉은 빛이 선명한 사람들의 얼굴, 또 추위에 몸을 떠는 말들이 가볍게 땅을 차며 달려가는 소리, 이제 정월의 하루도 다 저물어가고 있었다. 저녁의 추위가 꼼짝않는 공기를 더욱더 꽁꽁 죄어매고 있었고, 핏빛 저녁놀도 점점 사라 져가고 있었다. 마리노 마을의 지주 저택의 창문에는 등불이 비치기 시작했다. 검은 연미복 차림에 흰 장갑을 낀 프로코비치는 유난히 점잖을 빼며 7인용 식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 주일쯤전에 그다지 크지 않은 교회에서 아르카디와 카샤, 그리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와 페 니치카 두쌍이 입회이도 없이 조용하게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또 오늘은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모스크바로 볼 일을 보러 떠나는 형을 위해 송 별회를 열기로 되어 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젊은 두 사람에게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 준 다음 결혼식이 끝나면 그녀 역시 곧 모스카바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정작 세 시가 되자 모두들 식탁으로 모여들었다. 미짜도 한몴 끼었다. 그를 돌보는 유모의 모습도 보였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카샤와 페니치카 사이에 앉아 있었다. 신랑들은 각자 신 부 곁에 앉아 있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 두 신랑은 이제 아주 변해 있었다. 두 사람 다 대 장부다워졌고 관록도 붙은 것 같았다. 오직 파벨 페트로비치만이 다소 쇠약해졌는데, 그것은 도리어 그 날씬한 몸매에 한층 더 우아하고 귀족적인 냄새를 풍기게 했다. 그리고 페니치카 도 역시 많이 달라졌다. 산뜻한 비단옷에 머리에는 넓은 비로드 리본을 달고, 목에는 금목걸 이를 하고서 그녀는 아주 품위있게 앉아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 는 모든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여러분, 용서하세요. 하지만 이건 제가 한 일은 아니예요'하고 말하기라도 하 는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모두가 마치 사죄라도 청 하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두들 좀 쑥스럽고 좀 서글픈 느낌도 들었지만, 사실은 말 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뭔가 악의 없는 희극을 연출하기 로 사전 합의라도 한 듯 서로 즐겁게 마음을 써가면서 식사를 권하고 있었다. 카샤는 누구 보다도 침착했다. 그녀는 붙임성 있는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그녀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식사각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들고 파벨 페트로비치를 향해 말했다. "당신은 우리에게서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형님. 당신은 우리를 버리 고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하고 그는 말을 꺼냈다. "물론 그렇게 오랜 기간은 아닐 테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전 형님께 한 말씀 드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즉 저는... 우리들 은...얼마나 저는, 얼마나 우리들은 이거 안되겠는데, 나는 말할 줄을 몰라서. 아르카디, 네가 말해봐라" "아니, 아버지, 전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아요." "나는 준비가 다 돼 있었는데 말이 다. 그럼 형님, 다만 형님을 포옹하고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하는 것으로 대신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될 수록 빨리 돌아와 주십시오." 파벨 페트로비치는 돌아다니며 모두에게 키스를 해주었다. 물론 미짜도 빼놓지 않았다. 그 리고 그는 페니치카도 손을 채 내밀기도 전에 그녀의 손에 키스했다. 그리고 두 번째 따른 술잔을 들이켜면서 깊이 탄식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여러분,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 히" 맨 나중에 한 이 영어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들 깊이 감동하였다. "바 자로프를 추념하는 뜻에서"하고 카샤는 남편의 귓전에 대고 속삭이고는 서로 술잔을 부딪쳤 다. 아르카디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꼭 잡았으나 이 건배를 큰 소리로 제안하지는 못했 다. 이것으로 이야기는 이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독자들 중에서는 지금까지 의 등장인물들이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되어 이제 그들을 만족시켜 주고자 한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얼마 전에 결혼했다. 그것은 연애가 아니라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상대는 장래 러시아의 일꾼의 한 사람이며 매우 현명한 사람으로, 정확하고 실제적인 이해 력과 굳센 의지와 훌륭한 말재주를 지닌 법률가로 아직 젊고 선량하며 얼음처럼 냉정한 인 물이다. 두 사람은 서로 매우 사이좋게 생활하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 낼 것이며 또 틀림없이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 늙은 공작 따님은 죽고 말았는데, 죽은 그날 로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잊혀졌다. 키르사노프 부자는 마리노촌에 정착했다. 두 사람의 사업은 점점 잘 되어가도 있다. 아르카디는 매우 착실한 경영자가 되어 그 '농장'은 벌써 꽤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농노해방의 조정자가 되어 분투하고 있다. 그는 늘 담당구역을 순회하면서 기나긴 연설을 하고 있다. (그는 농민들에겐 '이해시킬 필 요', 즉 그들이 지치도록 같은 말을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실제로는 언짢고도 우울한 말투로 '소유권의 양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교양있는 귀족들 이나 또 염치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욕하는 교양없는 귀족들, 그 어느 쪽도 충분히 만족시 키지는 못하고 있다. 어느 쪽을 막론하고 너무나 온순하다는 것이다. 카쩨리나 세르게예브나 에게는 아들 콜랴가 생겼고, 또 미쟈는 벌써 한창 개구쟁이로 뛰어다니며 무엇이든 자꾸 지 껄여 대고 있다. 페니치카, 즉 페도시야 니콜라예브나는 남편과 미짜 다음으로 누구보다도 더 며느리를 사랑해주고 있는 며느리, 즉 카샤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 때에는 하루종일이 라도 그 곁에서 떠나려 들지 않는다. 겸해서 하인 피오트르에 대해서는 한마디 해두고자 한 다. 그 역시 결혼해서 색시로부터 상당한 지참금을 받았다. 그녀는 시내의 채마밭 주인의 딸 로, 두 명의 훌륭한 구혼자들을 그들이 시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거절했다. 그 런데 이 피오트르는 시계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니스를 칠한 반장화까지 가지고 있 었던 것이다. 드레스덴의 부뤼레프 테라스에는 두 시에서 네시 사이, 즉 산책하기에 가장 좋은 시각에 나이가 쉰 살쯤 되는 노인이 가끔 눈에 뛴다. 백발이 성성하고 통풍에 걸린 듯한데, 아직 잘 생긴 용모를 유지하고 있고 옷차림도 깔끔한 데에서 오랫동안 상류사회의 물을 마셔온 사람 에게서만 볼 수 있는 그 독특한 기품을 엿볼 수 있다. 그가 바로 파벨 페트로비치다. 그는 건강 회복을 위해 모스크바에서 외국으로 떠났는데, 드레스덴에 거처를 정한후 그곳에서 주 로 영국이나 러시아 여행자들과 사귀고 있다. 그는 영국인들에게는 꾸밈없는 소탈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자기 품위만은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영국인들은 그 를 좀 따분한 사람이라 여기면서도 '완벽한 신사'라고 존경하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에겐 허 물없이 행동해서, 멋대로 화풀이를 해대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조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태도는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쾌하고 친근하게, 그러면서도 고상하 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는 슬라브주의적 견해를 굳게 지키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상류사 회에서는 그것을 정말 존경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어로 된 책을 전혀 읽지 않으나 그의 책상위에는 농민들의 짚신을 본따 만든 은제 재떨이가 놓여 있다. 러시아 의 관광객들은 그를 매우 만나고 싶어한다. 마트베이 일리이치 콜랴진은 한때 반대파의 입 장에 있었으나 보헤미아의 온천에 가는 길에 어마어마한 행차로 그를 찾아준 일도 있다. 그 지방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되도록 피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에 넣는 데 있어서 는 어느 누구도 '키르사노프 남작 각하'만큼 손쉽고 빠른 사람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선행 을 베풀고 있지만, 지금도 역시 이따금 세상이 떠들썩한 만한 행동을 하고 있다. 그에게는 일찍이 사교계의 인기를 끌었던 사나이다운 점이 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나가는 것이 괴롭 게 느껴졌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괴로운 것이다. 러시아 교회에서의 그 의 모습만으로도 그것을 알수 있다. 거기서 그는 한쪽 구석 벽에 몸을 기댄채 괴로운 듯 입 술을 꼭 깨물고 생각에 잠겨 오랫동안 꼼짝도 않고 있는데, 이윽고 제 정신이 돌아오면 남 몰래 성호를 긋기 시작하는 것이다. 쿠크신은 외국에 나가 있다. 그녀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이젠 자연과학이 아닌 건축학을 연 구하고 있다. 그녀의 말을 빌리면 자기는 그 방면의 새로운 법칙을 몇가지 발견했다는 것이 다. 그녀는 여전히 학생들과 사귀고 있는 특히 하이델베르크에 많이 모여 있는 물리나 화학 전공의 젊은 러시아인들과 교제한다. 그들은 처음엔 사물에 대한 그 성실한 의견으로 우직 한 독일인 교사들을 놀라게 하지만, 나중에는 그 완전한 무위와 절대적인 나태로 그 교수들 을 다시 한번 놀라게 하는 것이다. 시트니코프는 산소와 질소의 구별도 못하는 주제에 부정 의 정신과 자긍심에 찬 몇 명의 화학자와 위대한 옐리세비치와 더불어 자기도 위대한 인물 이 되고 싶어 페테르스부르크 시내를 헤매면서, 그가 단언하는 바에 의하면 자기가 바자로 프의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누군가가 최근 그를 구타했는데, 그는 잠자코 있지 않고 어느 정체 모를 잡지에 실린 수상쩍은 논문에도 자기를 구타한 자를 비겁 자라고 빈정거린 모양이다. 그는 이것을 아이러니라 말하였다. 부친은 여전히 그를 혹사하고 있으며, 아내는 그를 바보로 취급하기도 하고... 문학가라 생각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어느 시골 한 구석에 조그마한 마을 묘지가 있다. 거의 모든 묘지가 그러하듯 그것 역시 서글픈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주위를 둘러싼 도랑은 오래전부터 풀숲에 가리 워져 있었고, 잿빛 나무 십자가들은 옆으로 기운채 한때는 채색을 했던 적이 있는 그 지붕 밑에서 썩어가고 있었으며, 비석들은 마치 누군가가 밑에서 떠다민 것처럼 어느 것이나 다 삐딱하게 서 있다. 가지들이 많이 꺾인 나무 몇 그루가 가냘픈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양떼 가 제멋대로 그 위를 서성거리고 있다. 그러나 그 무덤들 사이에 단 하나, 사람의 손도 닿지 않고 짐승도 넘나들지 않은 무덤이 있다. 새들만이 그 위에 앉아 아침 노래를 부른다. 무덤 은 철책으로 둘러져 있고 조그마한 단풍나무 두 그루가 그 양쪽에 심어져 있다. 예브게니 바자로프가 이 무덤에 묻혀 있는 것이다. 이 무더에는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마을로부터 이제 늙을 대로 늙은 두 노인 한쌍의 노부부가 종종 찾아온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부축하면 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 올라온다. 철책 가까이 오면 그들은 엎드려 무릎을 꿇는다. 그리 고 오랫동안 비통하게 울고 나서 한참을 간절한 마음으로 말없이 우뚝 선 비석을 바라본다. 그 아래에 아들이 누워있는 것이다. 짤막하게 몇마디 말을 주고 받기도 하고, 비석에 앉은 먼지를 털어주기도 하고, 또다시 기도를 드리기도 하면서 이곳을 이내 떠나지를 못한다. 이 곳에 있으면 두사람은 마치 아들 곁에, 아들의 추억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과연 이 두사람의 기도는, 이 두 사람의 눈물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일까. 과연 사랑은, 성스럽고 끝없는 사랑은 전능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 그럴리는 없다. 아무리 열정적이고 죄 많은 반역적인 정신이 이 무덤속에 숨겨져 있을지라도 그 위에 피는 꽃들은 순결한 눈으로 우리를 잔잔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 꽃들은 단지 영원한 평화만을, '무관심한' 자연의 그 우 대한 정적만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 꽃들은 또 영원한 화해와 무한한 생명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1861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