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샤 투르게네프 지음 1 그 때 나는 스물 다섯 살이었습니다. 하고 N씨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 훨씬 전의 일이지요. 나는 간신히 자유로운 몸이 되어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 흔히 말하던 '교육의 완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세상일을 보고 싶다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 때만해도 건강하고, 젊고, 돈푼이나 있고, 아직 근심이라는 것을 모르던 시절이었으므로, 나는 되는 대로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말하자면 한창 꽃다운 시절이었답니다. 인간이란 초목과 달라서 오랫동안 꽃을 피울 수는 없는 법인데, 그 무렵에는 물론 그런 생각 같은 것은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금박 종이로 싼 과자를 먹으며 그것이 매일의 양식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잉꼬 때가 오면 한 조각의 빵이라도 그리워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는 아무 목적도 계획도 없이 여행을 했습니다. 나는 여기저기 마음에 드는 곳에 머무르고, 새로운 얼굴--다름아닌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으면 금방 다른 곳으로 떠나곤 했습니다.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사람밖에 없엇습니다. 나는 진귀한 기념물이라든지 훌륭한 수집품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론라카이 같은 건 보기만 해도 우울한 혐오감을 일으키게 했고, 드레스덴의 '그류네 게블베'에선 하마터면 정신이나갈 지경이었습니다. 자연에는 무척이나 감동하는 편이었지만, 소위 자연미라든지, 신기한 산이라든지, 바위라든가 폭포 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었습니다. 자연이 사람을 놓아 주지 않든가, 방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얼굴, 산 사람의 얼굴, 사람들의 이야기, 움직임, 웃음--바로 이런 것들이 내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 끼어 있노라면, 나는 언제나 유달리 홀가분하면서도 즐거운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가고, 사람들이 외칠 때 외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외치는 것을 보기도 좋아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아니, 관찰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다만 무엇인지 기쁘고 탐욕스러운 호기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저런, 또 말이 빗나갔군요. 그리하여 나는 약 20년 전, 라인강 왼쪽 기슭에 있는 Z라는 조그만 독일 거리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나는 고독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 어느 온천장에서 사귄 젊은 미망인한테 가슴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는 굉장한 미인인데다가 영리하기도해서 누구에게나 아양을 떨었습니다.--나도 거기에 걸려든 한 사람이었는데, 처음에 제법 마음을 주는 체하더니, 그 후 볼이 빨간 어느 바바리아의 대위 때문에 희생을 당하고, 그만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마음의 상처는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만, 나는 잠시 동안이나마 슬픔과 고독 속에 잠겨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젊을 때는 무엇으로든지 위로가 되는 법입니다!--Z에 머무르게된 것입니다. 이 거리는 두 개의 높은 언덕 기슭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 풍경도 좋았거니와 낡아빠진 성벽이며, 탑이며, 몇백 년 묵은 듯한 보리수며, 라인 강으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 위에 걸려 있는 가파른 다리며, 특히 그고장에서 나는 맛있는 포도주 때문에 더욱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녁때 해가 지면 곧--그 때는 6월이었습니다--귀엽게 생긴 금발의 독일 아가씨들이 좁다란 거리를 거닐면서, 외국인을 만나면 명랑한 목소리로 Guten Abend!(저녁 인사)라고 크게 말합니다. 그 중에는 낡은 뽀족 지붕 뒤에서 환히 달이 솟아오르고, 길가의 조약돌이 고요한 달빛 속에 뚜렷이 자기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나는 거리를 거닐기를 좋아했습니다. 달은 맑게 갠 하늘에서 물끄러미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거리도 달의 눈길을 느끼고, 그 고요하고 동시에 마음 설레게 하는 달빛을 가득 받으면서 평화롭고 아늑한 기분으로 누워 있습니다. 높은 고딕식 종루 위에 매달려 있는 황금 닭은 파리한 금빛으로 빛나는가 하면, 검은빛이 감도는 시냇물에도 그와 같은 금빛이 흘러내립니다. 가느다란 양초가--독일인은 검소하기 때문에--돌지붕 밑의 좁다란 창문 안에서 수줍은 듯 가물거립니다. 포도 줄기는 돌담 너머로 둘둘 말린 덩굴을 살며시 내놓고 있습니다. 삼각 광장의 낡은 우물가에서는 무엇인가가 어둠 속을 달리는가하면, 갑자기 야경꾼의 졸린 듯한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양순한 개도 나직이 으르릉거립니다. 공기는 그렇게도 살며시 얼굴을 어루만지고, 보리수꽃은 말할 수 없이 향기로운 냄새를 풍겨 주어서, 가슴은 저도 모르게 점점 부풀어올라 Gretechen(독일 여자의 대표적인 이름)이라는 말이--감탄도 의문도 아닌 어조로--저절로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고 합니다. Z거리는 라인 강까지 2베르스타(약 2킬로미터)되는 곳에 있습니다. 나는 자주 그 웅장한 강을 바라보러 가서는, 앙큼스러운 미망인의 일을 다소 긴장된 기분으로 공상하면서 커다란 외돌토리 오리나무 아래에 놓여 있는 벤치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몇 시간씩 앉아 있곤 했습니다. 그 오리나무 가지 사이로는 어린애다운 앳된 얼굴을 하고, 가슴에 몇 자루의 칼이 꽃혀 빨간 심장을 한 마돈나의 조그만 조상이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강기슭 저쪽에는 L거리가 보입니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거리보다 조금 더 큰 거리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내가 좋아하는 벤치에 앉아서 강이며 하늘이며 포도밭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눈앞에서는 아마빛 머리를 한 어린아이들이 강변으로 끌어올려져서 거꾸로 뉘어 있는 수지를 칠한 양 보트의 옆으로 기어올라가 놀고 있었습니다. 몇 척의 자그마한 배가 돛에 가벼운 바람을 안고 천천히 미끄러지고, 파란 파도는 찰싹찰싹 잔잔히 물결치며 그 옆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가벼운 음악 소리가 들려와서 나는 귀를 기울였습니다. L거리에서 왈츠를 연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따금씩 콘트라베이스의 둔한 소리가 들려오는가 하면, 바이올린은 가냘픈 소리를 내고, 통소는 힘있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저건 무엇입니까?" 옆으로 다가온, 벨벳 조끼에 쇠고리가 달린 단화를 신은 노인에게 나는 물었습니다. "저건."노인은 담배 파이프를 오른쪽 입에서 왼쪽으로 옮겨 물며 대답했습니다. "대학생들이 B거리에서 콤메르쉬를 하러 온 겁니다." 그 콤메르쉬라는 걸 보도록 하자. 마침 L거리에는 가 본 적이 없으니 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2 콤메르쉬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이것은 같은 고향 출신의 대학생 조합이 베푸는 성대한 연회를 말합니다. 이 콤메르쉬에 참가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예로부터 제정되어 있는 독일 대학생의 복작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헝가리식 웃옷을 입고, 커다란 장화를 신고, 정해진 색의 차양의 조그마한 모자를 씁니다. 학생들은 으레 세뇨르라고 불리는 조합장의 지도 아래 만찬에 모여, 날이 샐 때까지 연회를 베풀어 술을 마시기도 하고, '국부'라든가 '기뻐하세'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며, 속된 사람들에 대한 욕설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오케스트라를 불러올 때도 있습니다. 바로 이 콤메르쉬가 L거리의 태양이라는 간판을 내건 자그마한 여관앞 한길가 정원에서 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관의 지붕과 정원에는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대학생들은 다듬어진 보리수 아래에 놓인 여러 개의 탁자 앞에 앉아 있었고, 어느 탁자 밑에는 커다란 불독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 옆의 월계수로 만든 정자 안에는 악사들이 자리잡고 앉아 쉴새없이 맥주로 원기를 북돋우면서 열심히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나직한 울타리 밖의 한길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L거리의 선량한 시민들은 다른 곳에서 온 귀한 손님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도 관중들 속에 끼엇습니다. 대학생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유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포옹, 외침, 젊은이다운 천진난만한 애교, 타는 듯한 눈, 이유 없는 웃음--세상에서 이렇게 유쾌한 웃음은 없겠지요--이와 같이 젊고 신선하고 기쁨에넘친 삶의 활기, 앞으로 앞으로, 어디건 단지 앞으로 돌진하려는 정열, 선량한 생명력의 넘침, 나는 나도 모르게 감동되어 마음 속이 타는 듯했습니다. 차라리 그들 속에 끼어들어갈까 하고 자문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아샤, 이젠 됐지?" 갑자기 내 뒤에서 러시아 어로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조금만 더‥‥"역시 러시아 어로 대답하는 여자의 목소리였습니다. 나는 황급히 뒤돌아봤습니다. 차양 달린 모자를 쓰고, 큼직한 재킷을 입은 아름다운 청년이 눈에 띄었습니다. 청년은 그다지 키가 크지 않은 처녀와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밀짚모자가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러시아 인입니까?" 나는 얼떨결에 이렇게 묻고 말았습니다. 청년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러시아 인입니다." "참 뜻밖의 일이군요. 이런 시골에서‥‥" 나는 이렇게 말을 꺼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내 말을 가로채며 "정말 뜻밖입니다. 어쨌든 반갑군요.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가긴이라고 하고, 이 애는 제‥‥" 하고는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제 여동생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이름은?" 나는 이름을 말했습니다. 이렇게 돼서 우리는 곧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가긴은 나와 마찬가지로 마음내키는 대로 여행을 하다가, 약 1주일 전 L거리에 도착한 후 지금까지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말이지만, 나는 외국에서 러시아 인을 만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러시아 인은 그 걸음걸이며, 옷 모양이며, 특히 무엇보다도 얼굴 표정을 보면 멀리서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자만심과 멸시에 찬, 때로는 명령적으로 되는 표정이, 별안간 조심스럽고 겁을 집어먹는 듯한 표정으로 변하는 것입니다‥‥갑자기 사람 전체가 조심성을 띠게 되고, 눈을 불안스럽게 껌벅입니다.--"아이구! 내가 무슨 실없는 말을 지껄이지나 않았을까, 사람들이 나를 비웃고 있지나 않을까?" 이리저리 살피는 눈초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간 갑자기 다시 거만스러운 표정으로 ㄷㄹ아와서, 때로는 우둔한 의혹으로 바뀌곤 합니다. 그래서 나는 러시아 인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긴은 단번에 내 마음에 들고 말았습니다. 세상에는 행복스러운 얼굴을 한 사람도 있어서, 그를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기분이 좋아집니다. 마치 마음 속을 따뜻하게 데워 주는 듯하고 어루만져 주는 것 같은 얼굴 말입니다. 바로 가긴의 얼굴도 이와 같아서 그 큼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눈, 곱슬곱슬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정답고 사랑스러운 얼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할 때에는 그 얼굴을 보지 않고 목소리만 들어도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가긴이 여동생이라고 말한 처녀는 첫눈에 벌써 무척 귀여운 인상을 주었습니다. 약간 거무스름한 둥근 얼굴이며, 자그마하면서도 날이 선코, 거의 어린애 같은 볼, 반짝이는 눈, 이러한 그녀의 얼굴 속에는 무엇인지 모를 독특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몸매는 아름다웠습니다만,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자기 오빠와는 조금도 닮은 데가 없엇습니다. "우리 집에 들르시지 않겠습니까?" 가긴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실컷 독일인을 구경했을 테니까요. 사실 우리 나라 사람 같으면 유리를 깨고 의자를 부술 텐데, 이 고장 사람들은 너무 점잖단 말입니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아샤? 이젠 가도 좋겠지?" 처녀는 동의하는 듯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우리는 교외에다 방을 얻어 두었습니다." 가긴은 말을 이었습니다. "포도밭 가운데 있는 독채로, 지대가 높습니다. 참 좋은 곳이니 한 번와 보십시오. 주인 아주머니가 시원한 우유를 만들어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곧 어두워질 테니, 당신은 달이 떠오른 다음에 라인 강을 건너는 편이 좋을 겁니다." 우리는 함께 걸어갔습니다. 나직한 성문을 지나--작은 돌을 쌓아올려 만든 성벽이 사방에서 거리를 둘러싸고 있었느데, 아직 총안까지 부서지지 않고 남아 있었습니다.--우리는 들판으로 나섯습니다. 돌담을 따라 백 걸음쯤 가자, 비좁고 조그마한 문 앞에서 멈춰 섯습니다. 가긴은 문을 열고, 산으로 나 있는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 우리를 안내했습니다. 길 양쪽에는 포도밭이 층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방금 해가 져서 가느다랗고 빨간빛이 푸른 포도 덩굴 위에도, 높다란 울타리에도, 크고 작은 판석으로 촘ㅊㅁ하게 뒤덮인 메마른 길 위에도, 우리들이 올라가고 있는 산꼭대기의 오두막집 담벽에도 반사된 빛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 집은 검은 대들보들이 비스듬히 건너질러져 있었고, 네 개의 조그마한 창문이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자, 이것이 우리들의 숙소입니다!" 우리들이 집으로 다가갔을 때, 가긴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 주인 아주머니가 우유를 나르고 있군요. 안녕하십니까, 부인! 곧 식사를 합시다. 그러나 그 전에." 하고 그는 덧붙였습니다. "한 번 둘러보십시오. 이 경치가 어떻습니까?" 정말 훌륭한 경치였습니다. 눈앞에는 파란 강변 사이를 은빛 라인 강이 흐르고, 어떤 곳은 석양을 받아 발그스름한 금빛으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강변으로 모여든 거리는 모든 집과 모든 한길을 고스란히 드러내보이고, 언덕과 들판은 사방으로 줄달음치고 있습니다. 눈 아래 경치도 좋았지만, 위의 경치는 더욱 좋았습니다. 투명한 공기 속에 빛나는 맑고 깊은 하늘은 내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서늘하고 가벼운 공기는 마치 높은 곳에 있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잔잔히 흔들리며 이리저리 물결치고 있었습니다. "훌륭한 숙소를 마련하셨군요."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이건 아샤가 발견한 거랍니다." 가긴이 대답했습니다. "자, 아샤." 그는 말을 이었습니다. "모든 이리 가져오라고 부탁해줘. 저녁은 밖에서 들도록 합시다. 여기라면 음악도 잘 들리니까. 당신은 아십니까?"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어떤 왈츠는 가까운데서 들으면 속되고 조잡한 소리가 나서 귀찮을 정도지만, 먼 곳에서 들으면 아주 멋있단 말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는 로맨틱한 현을 모조리 흔들어 놓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겁니다." 아샤--그녀의 본디 이름은 안나였지만 가긴은 아샤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아샤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주인 아주머니와 함께 나왔습니다. 두 사람은 우유병과 접시와 스푼과 설탕, 딸기, 빵 등을 올려놓은 커다란 쟁반을 날라왔습니다. 우리는 자리잡고 식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샤는 모자를 벗었습니다. 사내아이처럼 짤막하게 자른 검은 머리카락이 커다랗게 원을 그리면서 목덜미와 귀 위로 늘어져 있었습니다. 아샤가 매우 쑥스러워하자, 가긴은 동생에게 말했습니다. "아샤, 그렇게 겁낼 것 없어! 이분이 너를 물어뜯진 않을 테니." 아샤는 방긋 미소를 짓더니, 잠시 후에는 자기편에서 나에게 이야기를 걸어 왔습니다. 나는 이 처녀같이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사람은 본적이 없습니다. 한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는가 하면 다시 달려나오고, 작은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가 하면 까르르 웃어대기도 했는데, 그 웃는 것이 또 묘했습니다. 그것은 듣는 것이 우스워서 웃는 게 아니라, 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웃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커다란 눈은 아무 거리낌 없이 똑바로 맑게 사물을 바라보곤 했으나, 가끔 눈을 살며시 내리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녀의 눈초리는 갑자기 깊어지고 부드러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두 시간 가량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날이 저문 지도 오래였고, 처음엔 온통 불꽃을 뒤집어쓴 듯하던 저녁 경치는 차츰 맑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다가 나중에는 파르스름하게 흐려지면서 고요히 밤 경치 속으로 녹아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이야기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처럼 아늑하고 부드럽게 계속되었습니다. 가긴은 라인 포도주를 한병 가져오라고 햇습니다. 우리는 천천히 그것을 마셨습니다. 음악은 여전히 우리들 귀에 들려오고 있었는데, 그 음향은 아까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감미롭게 들렸습니다. 거리에도, 강 위에도 불빛이 가물거립니다. 아샤는 문득 그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눈을 가릴 정도로 머리를 숙이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한숨을 몰아쉬었습니다. 그리고는 졸립다고 말하고서는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촛불도 켜지 않고 오ㄹ동안 닫혀진 창문 뒤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드디어 달이 솟아올라 라인 강 위에 넘실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만물이 환히 비춰지며 거무스름한 윤곽이 나타나고, 경치가 일변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마시고 있는 술잔 속의 포도주까지도 이상한 빛을 내며 반짝거렸습니다. 바람은 날개라도 잡은 듯 잠잠해지고, 대지에서는 향기롭고 다사로운 밤 공기가 풍겨 오고 있었습니다. "갈 때가 됐군요!" 하고 나는 외쳤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룻배를 못 찾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군요." 가긴은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우리는 오솔길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갑자기 뒤에서 조약돌이 굴러 떨어졌습니다. 아샤가 달려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너 아직도 자지 않고 있었니?" 하고 오빠가 물었으나, 아샤는 아무대답도 없이 우리 옆을 지나서 뛰어 내려갔습니다. 여관 뜰에는 대학생들이 붙여 놓은 마지막 횃불들이 아직 타다 남은채로 있어 나뭇가지 위의 나뭇잎들을 밝게 비춰 주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또한 축제일 같은 환상적인 인상을 돋워 주었습니다. 아샤는 강변에서서 뱃사공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배에 뛰어올라 새로 사귄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가긴은 내일 나를 찾아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나는 그와 악수하고, 아샤에게도 손을 내밀었지만 아샤는 나를 바라보며 머리를 저을 뿐이었습니다. 배는 강변을 떠나 급류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기운 센 노인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힘차게 노를 저었습니다. "당신은 달 속에 들어가서 달을 부숴 버렸어요." 하고 아샤가 내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는 아래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배 옆에서 물결이 넘실거렸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아샤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왔습니다. "내일 또 만납시다!" 하고 가긴이 그녀의 뒤를 이어 소리 질렀습니다. 배가 기슭에 닿았습니다. 나는 배에서 내려 뒤돌아보았습니다. 이미 맞은편 강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달빛 기둥은 또다시 황금 다리처럼 넓은 강 위에 뻗쳐 있었습니다. 란데르 왈츠의 옛 곡조가 마치 이별이라도 고하는 듯 흘러나왔습니다. 가긴의 말은 옳았습니다. 나는 마음 속의 현들이 한 줄 한 줄 뒤흔들리며 ㅇ달픈 멜로디에 대답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향기로운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시면서 나는 어두컴컴한 들판을 지나 집으로 향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집에 돌아왔을 때는 허전하면서도 한없는 기대를 느끼며 달콤한 피로 속에 전신이 녹아드는 것같았습니다. 나는 자신이 행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무엇 때문에 행복했을까요?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는데‥‥그래도 난 행복했습니다. 나는 너무 즐겁고 유쾌한 나머지 저절로 웃음이 나오려고 했습니다. 나는 침대 속으로 들어가서 눈을 감으려고 했는데, 문득 생각해 보니 오늘밤 그 괘씸한 미망인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나는 자문해 보았습니다. 내가 아샤에게 반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런 자문을 떨쳐 버리고 나는 요람 속의 어린애처럼 금방 잠들어 버린 것 같습니다. 3 이튿날 아침--나는 이미 눈은 뜨고 있었으ㄴ, 아직 자리에선 일어나지 않았을 때입니다.--문 밑을 지팡이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는 자는가? 기타 소리로 그대를 깨우겠노라‥‥ 하는 노래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곧 가긴의 목소리라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황급히 문을 열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가긴은 들어오며 말했습니다. "좀 일찍 깨운 것 같지만, 그러나 보십시오, 얼마나 좋은 아침입니까? 이 신선함, 이 이슬, 그리고 종달새가 노래하고‥‥" 그렇게 말하ㅡ 가긴 자신도 빛나는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드러난 목덜미, 그리고 불그스름한 장미빛 볼을 하고 있어서, 이 아침같이 신선해 보였습니다. 나는 옷을 입고 함께 밖으로 나가서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커피를 가져오게 하고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가긴은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했는데,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무에게도 의지하고 싶지 않으며, 일생을 그림 공부에 바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단지 생각을 늦게 해서 오랫동안 허송세월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도 자신의 계획을 말하고, 덧붙여서 내 불행한 연애의 비밀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동정하는 태도로 내 말을 듣고 있었지만, 내가 보는 바로는 그다지 큰 동정을 얻은 것 같지는 안았습니다. 그는 내가 한숨을 짓자 그 뒤를 이어 두어 번 가량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자기의 스케치를 보여 줄 테니 자기 집으로 가자고 말했습니다. 나는 선뜻 응낙했습니다. 집에 가니 아샤는 없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성터'에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L거리에서 2베르스타 가량 떨어진 곳에, 봉건 시대 때의 성터가 있었습니다. 가긴은 자기의 그림책을 모조리 펼쳐보여 주었습니다. 그 스케치 속에는 제법 생명과 진실이 깃들어 이어서 무엇인지 자유롭고 광활한 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도 완성된것 없이 제멋대로 그려져 있어서 명확해 봉지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하고 가긴은 한숨을 몰아쉬며 내 말에 동의했습니다. "당신 말이 옳습니다. 모두 조잡하고 미숙한 그림들이죠.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고, 게다가 슬라브적 방탕에 빠지고 말았으니까요. 일에 대해서 공상할 동안은 독수리가 하늘을 나는 기분으로 땅덩어리라도 움직일 듯한 기세지만, 정작 실행으로 들어가면 금방 식어서 지치고 만답니다." 나는 용기를 북돋워 주려고 했으나, 가긴은 손을 흔들며 그림통들을 한 아름에 안아 긴 의자에다 던져 버렸습니다. "참을성만 있다면 나도 어떻게 되겠지만." 하고 그는 잇새로 내뱉듯이 말했습니다. "그것이 모자란다면 나는 귀족의 도련님으로 일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자, 우리 아샤나 찾으러 갑시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4 성터로 가는 길은 숲에 싸인 좁은 계곡의 언덕을 따라 구불구불 굽이져 있었습니다. 그 계곡 밑에는 한 줄기 냇물이 흘러서 돌에 부딪치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뚝 솟아 있는 어두운 능선 뒤에서 고요히 반짝이고 있는 대하로 합류하려고 서두르고 있는 듯 느겨졌습니다. 가긴은 광선을 받아서 풍치가 달라진 몇 군데의 장소를 나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의 말 속엔 화가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예술가다운 인상을 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곧 성터가 보였습니다. 앙상한 바위 꼭대기에 네모진 탑이 서 있었습니다. 탑 전체가 새까맣고 세로로 금이 가 있었지만, 그래도 튼튼해 보였습니다. 이끼투성이인 성벽이 탑 옆에 있엇습니다. 여기저기에 담쟁이덩굴이 뻗고, 구부러진 나무가 낡은 총안이며 허물어진 지붕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돌투성이의 오솔길은 허물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성문으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문 근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우리 앞에 여자의 모습이 어른거리더니 여러 가지 파편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위를 재빨리 달려가서 바로 절벽 위의 가파르게 튀어나온 성벽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아, 저건 아샤다!" 하고 가긴은 외쳤습니다. "저 애가 미쳤나!" 우리는 성문 쪽으로 들어가서 사과나무와 쐐기풀로 반쯤 뒤덮인 자그마한 빈터에 섰습니다. 가파르게 튀어나온 성벽 위에 앉아 있는 것은 아샤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녀는 우리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웃어댔지만, 그 자리를 떠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가긴은 한 손가락을 쳐들어 위협을 하고, 나는 큰 소리로 그녀의 부주의를 나무랐습니다. "내버려 두십시오." 가긴은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애를 놀리지 마십시오. 당신은 그 애의 성질을 잘 모르겠지만, 자칫 탑 위까지 올라갈지도 모릅니다. 그것보다는 이 고장 사람들의 현명함에 놀라는 편이 나을 겁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한쪽 구석에 기대 세운 자그마한 판자집에 한 노파가 앉아 양말을 뜨면서 안경 너머로 흘낏흘낏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노파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맥주며 생과자며 젤리가 든 음료수를 팔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서 주석으로 만든 묵직한 잔으로 제법 차가운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아샤는 얇은 비단 스카프로 머리를 감싹 두다리를 아래로 늘어뜨린 채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균형잡힌 그녀의 얼굴은 맑게 갠 하늘에 아름답게 뚜렷이 떠올라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불캐한 감정을 느끼면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벌써 전날 밤부터 나는 이 처녀에게서 뭔가 긴장되고 자연스럽지 못한 그 무엇인가를 느꼈던 것입니다. 아샤는 우리를 놀라게 할 생각이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왜 그럴까? 무슨 어린애 짓일까? 내 생각을 짐작했음인지, 그녀는 뚫어질듯이 나를 바라보고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깡충깡충 두 번에 걸쳐 성벽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는 노파에게로 다가가서 물을 한 잔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빠는 내가 물을 마시려는 줄 아시지요?" 하고 그녀는 가긴에게로 돌아서며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성벽 위에 꽃이 피어 있는데, 물을 줘야겠어요." 가긴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아샤는 손에 컵을 든 채 허리를 굽히고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따금씩 발을 멈추고서는 우스울 만큼 조심스러운 태도로 몇 방울의 물을 흘렸습니다. 그러자 그 물방울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무척 귀엽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가 밉살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의 경쾌하고 민첩한 동작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끌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위험한 장소에 이르자, 그녀는 일부러 큰 소리로 외치고는 명랑하게 웃어대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차츰 더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아니, 산양처럼 저런 델 오르다니." 잠시 뜨개질에서 눈을 돌린 노파는 코막힌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이윽고 아샤는 컵의 물을 비우고 나서 어리광을 피우듯 이리저리 몸을 흔들면서 우리 있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의 눈섭이며 콧구멍이며 입술은 이상한 미소 때문에 바르르 떨리고, 가늘게 뜬 새까만 두 눈은 거만하면서도 즐거운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내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실지 모르지만, 그러나 괜찮아요. 당신이 나한테 반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고 그녀의 얼굴은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샤, 장하다, 장해." 가긴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샤는 갑자기 부끄럽기라도 한 듯 길다란 속눈썹을 살며시 내리깔고 죄진 사람처럼 살그머니 내 옆에 자리잡았습니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변하기 쉬운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잠시 후 그 얼굴은 차츰 창백해지고 슬픔이 깃ㄷㄴ 긴장된 표정으로 변해 갔습니다. 얼굴의 윤곽까지도 크고 엄숙하며 단순하게 된 듯이 느껴졌습니다. 아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터를 한 바퀴 돌고--아샤도 뒤쫓아 왔ㅅㅂ니다.--이곳 저곳의 경치를 구경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점심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가긴은 노파에게 셈을 치르고 다시 맥주를 한 잔 청하고 나서 내게로 몸을 돌리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능청스럽게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지배하는 부인의 건강을 위해서!" "아니, 당신ㅇ게--당신에게 그런 부인이 있었나요?" 문득 아샤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누구한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 하고 가긴은 대꾸했습니다. 아샤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다시 한 번 변해서 도전하는 듯한 거만한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돌아오는 길에서 아샤는 더욱 깔깔대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기다란 나뭇가지를 꺾어 총처럼 어깨에 메고, 머리를 스카프로 동여맸습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우리는 블론드 머리를 하고 점잔빼는 영국인 대가족과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슨 주문에라도 걸린 듯 싸늘한 놀라움에 사로잡혀 얼빠진 눈으로 아샤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샤는 짓궂게도 커다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 그녀는 곧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가 식사 때에야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도 잘 손질하고, 허리를 잘록하게 졸라매고, 장갑까지 끼고 있었습니다. 식탁에 앉아서도 ㅁ척 얌전하고 점잔이라도 빼듯 음식에도 거의 손을 대지 않았으며, 물도 자그마한 잔으로 마셨습니다. 확실히 내 앞에서 새로운 역할--예절 있는 훌륭한 아가씨 역할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았습니다. 가긴도 그것을 방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보건대 그는 모든 일에서 아샤를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다만, 때때로 선량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한쪽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는데, 그 모습은 '저 애는 어린애니까 관대히 봐 주십시오.'하고 말하는 듯한 눈치였습니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아샤는 일어나서 우리에게 크닉센(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것)을 하고는 모자를 쓰면서 루이제 부인한테 가도 좋으냐고 가긴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언제부터 내게 물어보기로 했니?" 가긴은 태연스러우면서도 약간 당황한 듯한 미소를 띠면서 대답했습니다. "우리와 같이 있으면 지루하니?" "아니에요. 그렇지만 어제 루이제 부인한테 놀러 가겠다고 약속했거든요. 게다가 두 분만 앉아 계시는 것이 편할 것 같기도 해서요. N씨가--그녀는 나를 가리켰다--무엇인지 또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 주실 테죠." 그녀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루이제 부인은." 하고 가긴은 내 시선을 피하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곳 전 시장의 부인이어는데 지금은 미망인으로, 사람은 좋지만 머리가 텅 빈 노파입니다. 노파는 아샤를 무척 귀여워해 줍니다. 그리고 아샤는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하고 사귀기를 좋아한답니다. 이런 것도 그 애가 거만한 탓이겠죠. 당신도 보다시피 그 애는 너무 어리광을 피워서‥‥"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할 도리가 있어야죠. 저는 아무에게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성격인데다가 그 애한테는 더욱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제게는 그애를 관대히 보살펴 줄 의무가 있으니까요." 내가 잠자코 있었으므로 가긴은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나는 곧 그의 성격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순수한 러시아 인이었습니다. 정직하고 결백하며 단순한 사람이었습니다만, 가엾게도 마음 약하고, 인내력도, 내적 정열도 없었습니다. 청춘의 힘이 샘처럼 끓어오르지 못하고 잔잔히 빛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무척 정답고 현명하지만, 이 사람이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될지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화가가 된다 해도 쓰라리고 부단한 노력 없이는 쉽지 않은 일인데‥‥ 노력한다. 나는 그의 부드러운 얼굴을 바라보고 온순한 말소리를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니다! 자넨 노력할 수 없어, 참을 수 없어. 그런데도 나는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네 시간 가량 단둘이 지냈습니다. 긴 의자에 앉아 있기도 하고 집 앞을 천천히 거닐기도 하면서, 네 시간 동안에 우리는 완전히 가까워지고 말았습니다. 해가 저물어 내가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샤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정말 어찌나 버릇없는 앤지!" 하고 가긴은 말했습니다. "내가 바래다 드릴까요? 가는 길에 루이제 부인의 집에 들러봅시다.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도 물어 볼 겸. 그다지 먼 길도 아니니까요." 우리는 거리로 내려갔습니다. 구불구불하고 좁다란 골목으로 돌아, 옆과 위에 창문이 두 개 나 있는 4층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2층은 1층보다 많이 거리로 튀어나와 있었고, 3층과 4층은 2층보다도 더 많이 나와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에 낡아빠진 조각들이 새겨져 있고, 밑창은 두꺼운 기둥 두 개로 받쳐져 있었습니다. 위에는 뽀족한 기와 지붕을 얹고, 지붕 밑 방에는 주둥이처럼 권양기가 튀어나와 있어, 집 전체가 마치 웅크려 앉은 커다란 새와도 같았습니다. "아샤!" 하고 가긴은 외쳤습니다. "너 거기 있니?" 등불이 켜진 3층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아샤의 검은 머리가 보였습니다. 그 뒤에는 이가 빠지고 눈에 생기기 없는 독일인 노파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네, 여기 있어요." 아샤는 아양을 떨면서 문턱에 팔꿈치를 괴고 말했습니다. "나는 여기가 좋아요. 자, 이걸 드릴 테니 받으세요." 가긴에게 제라늄꽃 한 송이를 던지면서 그녀는 덧붙였습니다. "나를 오빠가 생각하는 애인이라고 여기세요." 루이제 부인은 웃었습니다. "N씨가 가신대." 하고 가긴은 말했습니다. "네게 인사를 하시겠단다." "정말?" 아샤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꽃을 그 분에게 드리세요. 저는 곧 돌아가겠어요." 이렇게 말하고 문을 닫았는데, 그녀는 루이제 부인에게 키스를 하는것 같았습니다. 가긴은 말없이 내게 꽃을 주었습니다. 나는 묵묵히 꽃을 받아 주머니에 꽂고, 나루터까지 와서 강을 건넜습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이상한 괴로움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문득 코에 익은, 그러나 독일에서는 좀처럼 맡아 볼 수 없는 강렬한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니 길가에 조그마한 삼밭이 있었습니다. 그 광야의 냄새는 불현듯 나에게 고향을 연상케 하고, 강렬한 향수를 마음 속에 불러일으켰습니다. 나는 러시아의 공기를 호흡하고, 러시아의 땅이 밟고 싶어졌습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낯선 타국에서 방랑하고 있는가?" 하고 나는 외쳤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마음 속에 느꼈던 암담한 괴로움이 갑자기 쓰라리고 타는 듯한 흥분으로 변해 갔습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어젯밤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화가치밀어서 오ㄹ동안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나 자신도 모를 울분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이윽고 자리에 앉아 그 앙큼한 미망인의 일을 생각하고--그 여성을 공식적으로 회상하는 것이 내 일과의 마지막이 되어 있었습니다--그녀에게서 받은 한 통의 편지를 끄집어 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펼쳐 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의 흐름은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갔습니다.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샤의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가긴이 이야기하는 도중에 러시아로 돌아가는 데는 그의 귀국을 방해하는 어떤 곤란한 사정이 있다고 나에게 암시했던 것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습니다.‥‥"될 대로 돼라, 그의 동생인지 뭔지!" 하고 나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한 시간 후에는 다시 일어나서 베개 위에 팔꿈치를 괴고, 또다시 그 '부자연스럽게 깔깔대는 변덕스러운 아가씨'의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처녀는 라파엘로의 파르네진 속에 나오는 갈레테야의 축소판이야." 하고 나는 중얼거렸습니다. "그렇다, 아샤는 그의 동생이 아니다‥‥" 한편 미망인의 편지는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면서 마루 위에 조용히 놓여 있었습니다. 5 이튿날 아침 나는 다시 L거리로 갔습니다. 나는 가긴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나 자신에게 다짐하고 있었습니다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아샤가 어떤 일을 하려는지, 또 어젯밤처럼 '기묘한 행동'을 하지나 않으려는지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가 보니 두 사람은 응접실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내가 어젯밤과 오늘 아침에 무척 러시아에 마음이 끌리고 있었던 탓인지는 모르지만--아샤는 완전히 러시아의 처녀같이 보였습니다. 게다가 소박한 처녀, 아니 하녀와도 같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허름한 옷을 입고 머리칼을 귓전으로 빗어 넘긴 그녀는 다소곳이 창가에 앉아서 얌전하게 조용히 수를 놓고 있었습니다. 마치 일생 동안 그 일밖에는 아무것ㄷ 한 일이 없다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녀는 거의 아무 말도 없이 침착하게 자기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조금도 뛰어난 점이 없는 평범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우리 러시아 태생의 카쟈라든가 마샤라는 처녀를 연상했을 정도입니다. 그 유사함을 더욱 완전히 하기라도 하듯 아샤는 '아, 그리운 어머니여'를 나직한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노르스름하고 볼이 꺼진 듯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어젯밤의 공상을 상기하고 어쩐지 아쉬운 듯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날은 매우 화창한 날씨였으므로, 가긴은 자연을 스케치하러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따라가도 좋은지, 방해가 되지 않을는지 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천만에요." 그는 대답했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제게 좋은 충고를 해줄 수 있을 겁니다." 가긴은 반 다이크식의 동그란 모자를 쓰고 블르자(웃옷 이름)를 걸치고, 스케치북을 겨드랑이에 끼고 떠났습니다. 나는 그 뒤를 딸라갔습니다. 아샤는 집에 남았는데, 가긴은 떠나면서 수프가 너무 묽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일렀습니다. 아샤는 자주 부엌에 나가 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가긴은 눈익은 골짜기에 다다르자, 바위 위에 자리잡고 앉아서 가지가 많이 뻗고 둥그렇게 구멍이 뚫린 참나무 고목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풀 위에 누워서 책을 펼쳐 보았지만 두 페이지도 못 읽었으며, 가긴은 종이 한 장만을 버렸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로 토론을 많이 했는데, 내가 판단하는 바에 의하면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피해야 하는가, 어떤 문제에 대해 제법 현명하고 자세하게 고찰했습니다. 이윽고 가긴은 오늘은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나하고 나란히 누워 버렸습니다. 그러자 우리들의 젊음에 찬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와서, 혹은 열렬하게, 혹은 생각에 잠겨, 혹은 감격에 넘쳐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애매한 이야기뿐이었습니다. 러시아 사람은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곧잘 웅변을 토하는 법입니다. 배가 꺼지도록 지껄이고 나서, 마치 무슨 일이라도 한듯한 만족감을 느끼면서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보니, 아샤는 우리들이 떠날 때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리 애써서 살펴보아도 애교스러운 기색도 없거니와,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 눈치도 없었습니다. 이번만은 부자연스럽다고 핀잔을 줄 수도 없었습니다. "아하!" 하고 가긴이 말했습니다. "정진과 참회를 하려고 결심한 거로군요." 저녁때가 되자, 아샤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여러 번 하품을 하고는 일찍 자기 방으로 가 버렸습니다. 나는 이내 가긴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만, 이제는 이미 아무것도 공상하지 않았습니다. 이 날 하루는 건전한 기분으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잊혀지지도 않습니다만, 자리에 누우려 하면서 나는 문득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말 카멜레온 같은 여자다!" 그리고 잠깐 생각한 후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아샤는 그의 동생이 아니야." 6 만 2주일이 지났습니다. 나는 매일같이 가긴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아샤는 나를 피하는 듯한 눈치였으며, 우리들이 처음 알게 된 며칠 동안에 그토록 나를 놀라게 하던 나쁜 장난도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습니다. 보건대 마음 속에 무슨 슬픈 일이나, 그렇지 않으면 어떤 난처한 일이라도 간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전같이 잘 웃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호기심을 가지고 그녀의 모습을 관찰했습니다. 아샤는 프랑스 어와 영어를 제법 유창하게 했습니다만, 여러 점으로 봐서 어릴 때부터 여자의 손에 자라지 않았으며, 가긴하고도 조금도 공통점이 없는 기묘하고 특수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가긴은 반 다이크식 모자와 블르자를 걸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몸 전체에서 부드럽고 연약한 대 러시아의 귀족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는데, 아샤는 조금도 숙녀 같은 기분이 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동작에서 무엇인지 불안스러운 느낌을 주었습니다. 이 야생의 나무는 바로 조금 전에 접목되었을 뿐으로, 술로 치면 아직 발효중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천성이 수줍음을 타고난 겁쟁이인데다가 그녀는 자신의 수줍음에 화를 내고, 화가 치민 나머지 억지로 무례하고 대담한 태도를 취하려 했지만, 그것이 언제나 잘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여러 번 아샤에게 그녀가 러시아에 있을 때의 생활이며, 그녀의 지난 일에 대해서 물어 보았으나, 아샤는 내 질문에 대답하기를 꺼리는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오랫동안 시골에 살고 있었다는 것만은 알아 냈습니다. 한 번은 그녀가 혼자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손가락을 머리카락 깊숙이 집어넣은 채 열심히 읽어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브라보!" 나는 그녀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습니다. "매우 열심이군요." 그녀는 머리를 들고 엄숙하고 교만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은 제가 웃는 것밖엔 아무것도 못하리라고 생각하시나요?" 하고 그녀는 일어나서 나가려고 했습니다. 나는 얼른 책 제목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어떤 프랑스 소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책 선택에는 찬성할 수가 없군요."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럼 무엇을 읽어야 하나요!" 하고 외치고는 그녀는 책을 탁자 위에 내동댕이치며 덧붙였습니다. "그렇다면 밖에 나가 장난을 치는 편이 낫겠군요." 그녀는 뜰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날 밤, 나는 가긴에게 <헤르만과 도로테아>를 읽어 주었습니다. 아샤는 처음엔 줄곧 우리 옆을 왔다갔다하고 있더니만, 문득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더니 살며시 내 옆에 앉아서 끝까지 낭독을 들었습니다. 이튿날, 나는 또다시 그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 머리에 떠올라습니다. 그녀는 도로테아처럼 엄숙하고 침착한 여자가 되어 보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그녀는 내 눈에 반쯤 수수께끼와도 같은 존재로 나타난 셈입니다. 말할 수 없이 강한 그녀의 자존심이 내 마음을 끌었습니다. 내게 화를 내고 있을 때조차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더 확신을 굳게 해 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녀가 가긴의 동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긴이 아샤를 대하는 태도는 오누이 같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상냥하고 너무나 관대한데다가 약간 부자연스러운 면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기묘한 기회가 내 의혹을 풀어 주었습니다. 어느 날 밤 가긴이 살고 있는 포도밭으로 다가갔을 때, 나는 사립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별다른 생각도 없이 나는 그 전에 이미 보아 두었던 부서진 울타리로 가서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거기서 멀지않은 오솔길 옆에 아카시아로 만든 자그마한 정자가 있었습니다. 내가 그 곳까지 가서 거의 지나치려 할 때‥‥갑자기 아샤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울먹이는 듯한 흥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당신 이외에는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당신 혼자만을 사랑하고 싶어요. 언제까지나‥‥" "됐어, 아샤, 진정해." 하고 가긴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도 알고 있겠지, 내가 너를 믿는다는 것을."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정자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성글게 뒤엉켜 있는 나뭇가지 사이를 통해서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당신, 당신 혼자만을." 아샤는 되풀이하면서 가긴의 목에 달려들어 경련적으로 흐느끼며 키스를 하고,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됐어, 됐어." 하고 가긴은 그녀의 머리칼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되풀이했습니다. 잠시 동안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습니다만‥‥불현듯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들한테로 가 볼까?‥‥아니, 무엇 때문에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나는 재빨리 울타리로 걸어와서는 단번에 뛰어넘어 한길로 나와서, 거의 뛰다시피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혼자 미소짓기도 하고 손을 비비기도 하면서 별안간 내 상상을 확신시켜 준 우연이라는 것에 놀랐습니다(나는 한시도 그들의 진심을 의심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내 가슴 속은 몹시 쓰렸습니다. 그런데 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 두 사람이 그렇게 가장할 수 있다니! 그러나 무엇 때문일까? 어째서 내 눈을 속이려고 할까? 가긴이 그런 일을 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느데‥‥그리고 그녀를 믿는다는 말은? 7 나는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므로, 이튿날 아침엔 일찍이 일어나 등에 배낭을 짊어지고, 주인 아주머니한테는 오늘밤 기다리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남긴 다음, Z거리에 흐르고 있는 강 상류로 올라가 산을 향해 걸었습니다. 이 산은 개의 잔등이라고 불리는 산맥의 줄기로, 지질학적으로 매우 재미있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규칙적인 순수한 현무암층은 볼 만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지질학을 관찰하고 있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내 마음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알수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가긴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감정만은 분명했습니다. 갑자기 그 오누이를 싫어하게 된 유일한 원인은 그들의 교활함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오누이들처럼 행세하려는 걸까? 그렇지만 나는 될 수 있는 한 그들의 일을 생각지 않기로 했습니다. 천천히 산이며 골짜기를 돌아다니다가는 시골 음식점에서 쉬면서, 주인이나 손님들과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평평하고 따스한 바위 위에 누워서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멍청히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좋은 날씨가 계속해 주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사흘을 지내보았습니다만,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습니다.--가끔 마음이 쓰릴 때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 지방의 고요한 자연에 알맞는 심정이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고요한 마음으로 우연의 장난과 눈앞에 어른거리는 인상에 온몸을 내맡겼습니다. 그들은 천천히 변하면서 내 마음 속을 흘러내리고, 나중에는 하나의 공통적인 감정을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감정이란 내가 이 사흘 동안에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숲 속에서 풍기는 미묘한 송진 냄새와 딱다구리가 나무 쪼는 소리며, 우는 소리, 모래 깔린 바다에 오가는 알록달록한 송어를 비춰 주는 맑은 냇물의 끊임없는 조잘거림,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산과 산의 윤곽, 험상궂은 바위, 성스러운 느낌을 주는 낡은 교회며, 나무들이 우거진 아담한 마을, 풀밭에 내려앉은 황새, 물레방아가 재빨리 돌아가는 아늑한 제분소, 마을 사람들의 순박한 얼굴, 그들이 입고 있는 파란 재킷이며 회색 양말, 피둥피둥 살찐 말, 때로는 소에게 매달려 삐걱거리며 느릿느릿 끌려가는 손수레, 사과나무와 배나무를 심은 깨끗한 한길을 걸어가는, 머리가 덥수룩한 젊은 방랑객‥‥이와 같은 모든 것이 융합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인상을 회상하면 마음이 즐거워집니다. 단순한 만족에 살며, 일은 빠르지 않아도 가는 곳마다 끈기있고 부지런한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독일 땅의 소박한 한구석, 나는 여기에 작별 인사를 고했습니다--잘 있거라 평화로운 마을이여! 사흘째로 접어든 저녁녘에 나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만, 나는 가긴 오누이에게 화가 난 나머지 그 무정한 미망인의 모습을 떠올려 보려고 애를 썼으나 그 노력도 허사였습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한 번은 그 미망인의 일을 생각하리라 마음먹고 있으려니, 얼굴이 둥그스름한 다섯 살 가량의 시골 계집애가 천진난만한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내 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애는 어린애다운 순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는 그애의 깨끗한 눈초리를 받고 부끄러운 마음이 앞섰습니다. 그 애 앞에서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곧 예전의 미망인과 깨끗이, 영원히 이별을 고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가긴의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급작스러운 내 생각에 놀랐다며, 어째서 자기를 데리고 가지 않았느냐고 핀잔을 하고, 돌아오는 대로 곧 자기들에게 와 달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나는 언짢은 기분으로 이 편지를 읽었습니다만, 그러나 그 이튿날엔 이미 L거리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8 가긴은 사뭇 정답게 나를 맞이하면서 상냥하게 핀잔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아샤는 나를 보자 아무런 이유도 없이 깔깔거리고는 그 전처럼 황급히 도망가 버렸습니다. 가긴은 어쩔 줄을 몰라하며 아샤가 나간 뒤에, 그 아이는 미치광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나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나는 아샤가 몹시 기분에 거슬렸습니다. 이미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언짢은데다 또다시 부자연스럽게 웃어대며 이상한 행동을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하고, 내 짧은 여행을 상세히 가긴에게 말했습니다. 가긴은 내가 없었을 때 한일을 들려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이야기는 서먹서먹했습니다. 아샤는 방 안에 들어왔다가는 다시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이윽고 나는 급한 일이 있어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가긴은 처음엔 말리려고 했지만,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는 바래다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현관까지 나오니 갑자기 아샤가 내 옆으로 다가와서 내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나는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고 약간 머리를 숙였습니다. 내가 가긴과 함께 라인 강을 건너서 마돈나의 조상이 있는, 내가 좋아하는 오리나무옆을 지나가려 할 때, 우리 두 사람은 경치를 바라보기 위해서 벤치에 앉았습니다. 이 때 우리 사이엔 기묘한 얘기들이 오고갔습니다. 처음 우리는 몇 마디 얘기를 나누다가, 반짝거리는 강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가긴은 상냥하게 미소를 띠며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아샤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틀림없이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실테죠?" "그렇습니다." 나는 약간 의아심을 느끼면서 대답했습니다. 가긴이 먼저 아샤의 일을 말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애를 비평하시려면 먼저 그 애의 됨됨이를 알아야 합니다." 하고 가긴은 말했습니다. "그 애는 마음씨는 무척 곱습니다만, 너무 머리가 영리해서 도무지 다룰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앨 욕할 수도 없고요. 당신도 만일 그 애의 과거를 아신다면‥‥" "그 애의 과거라니요?" 하고 나는 말을 가로챘습니다. "그렇다면 아샤는 당신의 동생이 아니란 말씀인가요?" "아니, 당신은 그 애가 제 동생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천만에요." 그는 나의 당황한 모습에는 주의를 돌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습니다. "그 애는 제 동생입니다. 제 아버지의 딸이지요. 자, 들어 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믿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털어놓겠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매우 선량하고 현명하고 교양 있는 분이었지만, 행복하진 못했습니다. 운명이란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보다 유달리 아버지에게만 가혹하게 부딪쳤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운명의 첫 타격을 견뎌 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젊을 때 연애 결혼을 했는데, 그의 아내, 즉 제 어머니는 아주 빨리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난 지 6개월 되던 때입니다. 아버지는 저를 데리고 시골로 가서 만 12년 동안 줄곧 시골에서만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손수 저를 교육시키셨는데, 만일 이 때 아버지의 형인 제 삼촌이 시골 집으로 오지 않았던들 저는 아버지하고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삼촌은 언제나 페테르부르그에서 사셨고 지위도 꽤 높았습니다. 삼촌은 저를 맡아 기르겠다고 아버지를 설득시켰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무리 말해도 시골을 떠나는 데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삼촌은 아버지에게 내 나이 또래의 소년이 이러한 고독 속에 산다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같이 언제나 우울하고 말이 없는 성생에게 붙어 있으면 필경 같은 나이의 아이들보다 뒤떨어질 것은 당연한 일이고, 게다가 아이의 성질마저 나빠질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삼촌의 권고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만, 결국에는 양보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목놓아 울었습니다.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에서 미소라는 걸 찾아보지도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아버지가 좋았습니다.‥‥그러나 페테르부르그를 나오고 보니 어두컴컴하고 쓸쓸했던 보금자리는 곧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사관 학교에 입학했고, 거기서 근위 연대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해마다 몇 주일씩 시골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차츰 더 우울하고 심각해져서 겁에 질린 사람처럼 시름에 잠겨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교회에 다니셨는데, 말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이미 스무 살이 지났을 때입니다--열 살 가량의 여위고 눈이 까만 계집애, 즉 아샤가 집에 있는 것을 처음으로 봤습니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고아이기 때문에 우리가 맡아 기르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전 그애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진 않았습니다. 그 애는 짐승새끼처럼 사람을 싫어했으며, 민첩하고 말이 없었습니다. 제가 아버지가 사랑하는 음침하고 커다란 방으로 들어가면--어머니가 돌아가신 방으로, 낮에도 촛불이 켜져 있었습니다--그 애는 금방 아버지의 볼리체르식 안락의자 밑이 아니면 책상 뒤에 숨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3, 4년간, 저는 근무상의 사정으로 시골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아버지한테서는 매달 짤막한 편지를 한 장씩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샤의 이야기를 쓰는 일은 드물었고, 쓴다 해도 간단히 몇 마디 적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벌써 오십 고개를 넘었습니다만 그래도 아직 젊은 사람같이 건강했습니다. 그런데 제 놀라움을 상상해 보십시오. 별안간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저는 관리인한테서 편지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아버지가 위독하니 마지막 이별을 고하고 싶으면 빨리 돌아와 달라는 사연이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부랴부랴 달려가서 살아 계신 아버지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만, 이미 마지막 숨을 거두려는 찰나였습니다. 아버지는 무척이나 기뻐하시며 그 여윈 손으로 저를 끌어안고 무엇인가를 살피는 듯한, 용서를 비는 듯한 눈초리로 한참 동안 제 얼굴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임종 때의 부탁을 실행하겠다는 맹세를 제게서 받고 나서야, 아버지는 늙은 하인에게 아샤를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아샤는 간신히 서있을 정도로 온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습니다. "자." 아버지는 간신히 입을 열었습니다. "내 딸을, 네 동생을 너에게 맡긴다. 모든 일은 이 야코프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 거다." 하고 아버지는 하인을 가리켰습니다. 아샤는 목놓아 울면서 침대머리에 얼굴을 파묻었습니다‥‥아버지는 반 시간 후에 운명하시고 말았습니다. 그 후 저는 아샤의 사연을 알았습니다. 아샤는 제 아버지와 예전에 어머니의 몸종이었던 타치야나 사이에 태어난 딸이었습니다. 저는 그 타치야나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날씬하고 균형잡힌 모습이며, 품위있고 날카롭고 영리한 얼굴이며, 그 커다란 눈 등을. 그녀는 가까이할 수 없는 거만한 처녀였습니다.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말 끝을 흐리며 말하는 야코프 노인의 이야기로 추측하건대, 어머니가 돌아가신 몇 년 후에 나치야나와 관계를 맺은 것 같았습니다. 그 때 타치야나는 이미 주인댁에 있지 않고 가축들을 돌보는 시집 간 언니집에 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타치야나를 몹시 사랑해서 제가 시골에서 나와 버린 다음 결혼까지 하려고 원했습니다만, 그녀는 아버지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아내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돌아가신 타치야나 바실리예프나는." 하고 야코프 노인은 뒷짐을 지고 문 옆에 서서 말했습니다. "만사에 분별 있는 분으로, 아버님에게 수치가 되는 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어떻게 당신의 아내가 된단 말이예요? 어떻게 귀부인 행세를 할 수 있어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앞에서 말입니다." 타치야나는 저택으로 이사 오는 것까지 원하지 않아서 아샤와 함께 언니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 가끔 타치야나를 보곤 했느데, 일요일마다 교회에서나 볼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까만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노란 숄을 어깨에 걸치고서 사람들 틈에 끼어 창가에 서 있었으며, 그녀의 단정한 옆모습이 투명해 보이는 유리창에 뚜렷이 떠올라 있었습니다. 그녀는 옛날식으로 깊숙이 허리를 굽히며 공손하고 엄숙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삼촌께서 저를 데리고 가시던 해 아샤는 겨우 두 살이었으며, 그녀는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타치야나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는 아샤를 저택으로 데려오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전부터 그 애를 자신의 슬하로 데려오고 싶어하셨지만 타치야나는 그것마저 거절했던 것입니다. 아샤가 처음으로 저택에 오게 되었을 때, 그 애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겠는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 애는 처음으로 비단옷을 입고, 모든 사람한테서 조그마한 손에 키스받던 일을 지금도 잊어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타치야나가 살아있을 적엔 매우 엄하게 자랐지만, 아버지한테 오고 나서는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 됐으니까요. 아버지는 그 애의 선생이었고, 그 밖에 다른 사람이라곤 보지도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그 애를 애지중지 귀여워했던것은 아닙니다. 즉, 그 애에게 특별히 관심을 두진 않았으나 무척 사랑하고 있어서, 그 애가 하는 짓아라면 하나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마음 속에 그 애에 대한 미안한 생각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안 있어 아샤는 자기가 이 집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버지가 주인 나리라는 것도 알았습니다만, 자기의 위치가 떳떳하지 못하다는것도 이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애 마음 속엔 자만심과 의혹심도 많이 자라났습니다. 나쁜 습관이 몸에 배게 되고, 단순함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샤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의 출신을 잊어버리게 하고 싶었습니다--그 애 자신이 어느 날 제게 그것을 고백했습니다. 자기 어머니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동시에, 그 부끄러움을 수치스럽게 여기다가 결국 어머니를 자랑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당신도 보다시피 그 애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애 나이로선 알아서 안 될 것까지도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과연 그 애의 잘못일까요? 청춘의 힘이 그 애의 몸 속에서 용솟음치고 피가 끓고 있는데, 그 애를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해 줄 이가 한 사람도 없으니 말입니다. 완전히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것을 지고 나간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 애는 다른 처녀들한테 지지 않으려고 책에 달라붙었습니다. 이런 것으로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변태적으로 시작된 생활은 역시 변태적으로 굳어지고 말았지만, 그러나 마음만은 나빠지지 않았고 두뇌도 그대로 무사했습니다. 자, 그래서 스무 살밖에 안된 제가 열 세 살 된 계집애를 길러 나가게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몇 달 동안은 제 목소리를 듣기만해도 그 애는 열을 내곤 했습니다. 제가 귀여워해 주면 그 애는 수심에 잠겼었습니다만, 간신히 조금씩 조금씩 그 애도 저를 따르게 됐습니다. 사실 그 후 제가 그 애를 친동생으로 여기고 친동생처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자, 그 애는 열렬하게 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애의 감정에는 무엇이든 미적지근한 것이 없으니까요. 저는 그 애를 데리고 페테르부르그로 나왔ㅅ브니다. 그 애하고 헤어진다는 것이 몹시도 고통스러웠지만, 아무래도 그 애하고 같이 살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그 애를 가장 좋은 기숙사에 넣었습니다. 아샤도 어쨌든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그 때부터 앓기 시작해서 하마터면 생명이 위태로웠을 정도였습니다. 이윽고 그 애는 차츰차츰 익숙해져 그 기숙사에서 4년 동안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제 기대와는 반대로, 아샤는 그 전과 달라진 데가 없었습니다. 사감은 자주 아샹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애는 벌을 줄 수도 없고." 하고 사감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귀여워해도 말을 듣질 않으니‥‥" 아샤는 비상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었고, 공부도 잘하여 학급에서 1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일반 수준에 가까워지려 하지 않고 고집만 부리면서 늘 새침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저도 너무 그 애를 책망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애 입장에서는 누구의 종노릇을 하든지 사람을 피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많은 친구들 가운데에서도 아샤하고 친한 아이는 얼굴이 못생기고 남한테서 놀림을 받는 가난한 처녀 하나뿐이었습니다. 아샤와 같이 배운 나머지 처녀들은 대개 좋은 집안 출신이었는데, 모두 그 애를 싫어해서 기회 있는 대로 독설을 퍼붓고 놀려댔습니다. 그렇지만 아샤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신학 시간에 선생이 익덕이라는 말을 끄집어 냈을 때, "추종과 비겁은 가장 나쁜 악덕입니다." 하고 아샤는 커다란 소리로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그애는 그 전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가지 태도만은 좋아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밖의 점에서도 커다란 진보를 했던 것은 아닙니다. 드디어 그 애는 만 17세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기숙사에 남아 있을수도 없었으므로 저는 무척 곤란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즉, 퇴직을 하고 1, 2년 동안 아샤와 함께 외국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생각대로 실행되어 지금 우리는 라인 강변에 머무르며 저는 애써 그림 공부를 하고 있고, 그 애는‥‥변함없이 장난을 치며 기묘한 행동으로 소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젠 당신도 심하게 그애를 비평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그 애는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는듯 꾸며 보이고 있습니다만, 모든 사람의 의견, 특히 당신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을 맺으며 가긴은 얼굴에 상냥한 미소를 띠었습니다. 나는 가긴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하고 가긴은 다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애 때문에 야단났습니다. 정말 화약 같은 아이이니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어느 누구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만일 누구든지 사랑하게 된다면 큰일입니다.! 저는 이따금씩 그 애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를때가 있습니다. 요전만 해도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 애는 갑자기 오빠는 내게 전보다 냉정해지셨지만 나는 오빠만을 사랑하고 일생 동안 오빠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고 맹세를 했지요. 게다가 그렇게 말하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거참‥‥"하고 나는 말하려 했으나 혀를 깨물며 참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고 나는 가긴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이왕 허물없는 사이가 됐으니 물어 보겠습니다만, 아샤가 지금까지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다는 건 사실인가요? 페테르부르그에선 많은 청년들을 보았을 텐데요." "그 애 마음에 드는 청년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니, 아샤가 바라고 있는 건 영웅이든가 특수한 사람, 그렇지 않으면 그림 속에 나오는 산골짜기의 목인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을 붙들어 놓고 너무 많이 지껄인 것 같군요." 하고 가긴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습니다. "저, 당신 댁으로 돌아갑시다. 저도 집으로 가기는 싫군요."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럼, 당신 일은?"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긴은 빙그레 정다운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윽고 우리는 L거릴 되돌아왔습니다. 낯익은 포도밭과 산마루에 서 있는 하얀 집을 보고 나는 어떤 달콤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마치 가슴 속에 살며시 꿀이라도 부어 넣은 듯한 감미로운 느낌이었습니다. 가긴의 말을 듣고 나는 가슴 속이 후련해졌던 것입니다. 9 아샤는 문 앞에서 우리를 맞아 주었습니다. 나는 이번에도 간드러지게 아샤가 웃어대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간드러지게 아샤가 웃어대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창백한 얼굴로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나왔습니다. "자, 또 왔다. " 하고 가긴은 말했습니다. "N씨 쪽에서 먼저 돌아가자고 하길래‥‥" 아샤는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아샤에게 손을 내밀고, 이번에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꼭 쥐어 주었습니다. 나는 아샤가 가엾어졌습니다. 그 전에 나를 당황케 하던 여러 가지 일을--마음 속의 불안이며, 버릇없는 행동이며, 점잖아지려는 경향을 지금에 와선 똑똑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처녀의 마음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남 모르는 마음의 압박이 끊임없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러ㅅ 경험 없는 자존심이 불안스럽게 뒤엉키고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만, 그녀는 전체적으로 봐서 진실을 찾으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이 기묘한 처녀에게 어째서 마음이 끌리고 있었는지 나는 그제야 겨우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날씬한 몸 전체에 흐르고 있는 반야성적인 아름다움, 단지 그것만이 나를 끌어당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넋이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가긴은 자기의 스케치를 들추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아샤에게 포도밭을 산책하자고 권했습니다. 그녀는 즐거운 표정으로, 이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쾌히 승낙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산중턱까지 내려가서 평평한 돌 위에 앉았습니다. "당신은 여행하는 동안 우리들이 없어서 적적하시지 않았어요?" 아샤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럼, 당신은 제가 없어서 적적했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습니다. 아샤는 곁눈질로 나를 보며 대답했습니다. "그럼요. 그런데 산은 좋았나요?" 그리고는 곧 덧붙였습니다. "높은 산인가요? 구름보다 높았어요? 보신 것을 이야기해 주세요. 오빠한테 말씀하셨지만, 저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으니까요." "그건 당신이 마음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으니까 그렇죠."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제가 나간 것은‥‥그건‥‥그렇지만 이젠 보시는 것처럼 아무 데도안 나갈 거예요." 그녀는 확실하고도 상냥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당신은 오늘 성화가 나셨지요?" "제가요?" "네." "어째서요, 그렇지 않은데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오늘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화난 채로 돌아가셨잖아요! 당신이 그렇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저는 몹시 기분이 언짢았어요. 그래도 돌아와 주셨으니 정말 기뻐요." "저도 돌아온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아샤는 어린애들이 기분 좋을 때 하는 버릇처럼 어깨를 으쓱해 보였습니다. "그런데요, 전 사람의 마음을 추측할 줄 안답니다."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습니다. "그 전에도 다른 방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기침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저를 만족스럽게 여기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었거든요." 그 때까지 아샤는 아버지에 대해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므로, 나는 적이 놀랐습니다. "당신은 아버지를 좋아하셨나요?" 하고 나는 물었습니다만,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라서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습니다. 아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역시 얼굴을 붉혔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말이 없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라인 강 위를 기선 한 척이 연기를 뿜으며 달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말슴을 안하시죠?" 하고 아샤는 소곤거렸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오늘 저를 보고 웃으셨지요?" 하고 나는 되물었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때때로 울고 싶을 때 웃어대곤 해요. 하지만 당신은 저에게 핀잔을 주셔선 안 돼요.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말에요. 아 참, 저 로렐라이 이야기는 어떠세요! 저기 보이는 것이 그 바위죠! 사람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로렐라이는 사람들을 물에 빠뜨리게 했지만,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자 자기 스스로 몸을 던져 버렸다더군요. 저는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요. 루이제 부인은 제게 여러 가지 얘기를 들려 준답니다. 루이제 부인의 집에는 노란 눈을 한 검은 고양이가 있어요‥‥" 아샤는 머리를 들어 곱슬머리를 흔들며 "아, 기분 좋아." 하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 때 단조로운 음향이 띄엄띄엄 사이를 두고 들려왔습니다. 수백 명의 목소리가 일제히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서 찬송가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순례자 무리가 십자가와 성기를 ㄷ 한길을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저 사람들과 함께 가고 싶어요." 차츰 멀어져 가는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아샤는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과 함께 가고 싶어요." 차츰 멀어져 가는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아샤는 말했습니다. "아니, 당신은 그렇게 마음이 깊은가요?" "어딘지 멀리 가고만 싶어요. 기도를 드리며 고행을 하러." 그녀는 말을 이었습니다. "그렇게ㄹ 하지 않으면, 세월이 흘러서 인생이 다 가 버린 다음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어요?" "당신은 명예심이 강하군요."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당신은 일생을 헛되이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 겁니다. 무엇인지 뒤에 남기고 싶어하니까요‥‥" "그럼 그것이 불가능하단 말씀이신가요?" "불가능합니다." 나는 하마터면 이렇게 대답할 뻔했으나, 그녀의 밝은 눈을 보자 "해 보십시오." 하고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저." 아샤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습니다. 그 동안 창백해지기 시작한 그녀의 얼굴에 한 줄기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당신은 그 여자를 무척 좋아하시죠?‥‥생각나세요, 우리들이 친하게 된 다음날, 오빠가 성터에서 그 분의 건강을 위하여 축배를 들던 일말예요." 나는 웃었습니다. "그건 오빠가 농담을 한 겁니다. 저는 어떤 여자건 좋아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떤 여자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여자의 어떤 점이 좋으세요?" 하고 아샤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천진난만한 호기심을 얼굴에 떠올리면서 물었습니다. "그건 이상한 질문인데요!" 하고 나는 외쳤습니다. 아샤는 약간 당황하면서 대답했습니다. "그런 질문은 하는 것이 아니었군요, 그렇죠? 용서하세요. 전 무엇이든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버릇이 있어요. 그래서 전 말하는 것이 두렵답니다." "부디 무엇이든 말해 주십시오. 두려워할 건 없습니다." 하고 나는 맞장구를 쳤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당신도 저를 꺼리지 않게 되어서 몹시 기쁩니다." 아샤는 눈을 내리깔고 방긋이 웃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웃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저, 얘기해 주세요." 아직도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 있으려는 듯이 그녀는 옷자락을 당겨 발을 감싸며 말을 이었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든 읊어 주세요. 저, 기억하고 계세요? 언젠가<예브게니 오네긴>의 한 절을 읊어 주시던 일 말예요." 그녀는 갑자기 생각에 잠기더니 나의 불행한 어머니 무덤 지금은 어디 있는가 그 십자가와 나무 숲이여! 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읊었습니다. "푸슈킨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주의를 주었습니다. "전 타치야나가 되고 싶어요." 하고 아샤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말을 이었습니다. "무엇이든 들려 주세요." 아샤는 쾌활한 어조로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야기하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습니다--맑은 햇빛을 가득히 안은 침착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모습을. 우리들의 주위도, 우리들의 위도 아래도--하늘도 땅도 물도, 모든 것이 기쁨에 빛나고 있었습니다. 공기까지도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습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좋습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참 좋군요!" 아샤는 나를 보지 않고 역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새라면 하늘 높이 올라가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을 텐데‥‥저 푸른 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말 텐데‥‥그러나 우린 새가 아녜요."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날개가 돋을 수 있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어떻게요?" "좀더 지나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가질 때가 있을 테니까요. 근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에게도 날개가 생길 테니까." "그럼, 당신은 날개를 가진 적이 있었나요?"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요‥‥ 저도 아직가지 날아 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만." 아샤는 또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나는 살며시 아샤 쪽으로 몸을 기댔습니다. 그러자 아샤는, "당신은 왈츠를 출 줄 아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네." 나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럼, 가세요, 가세요.‥‥오빠에게 왈츠를 켜 달라고 부탁하겠어요. 우리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 돼 봐요." 아샤는 집으로 달려갔ㅅㅂ니다. 나도 그 뒤를 달려가서, 잠시 후 우리 두 사람은 좁다란 방 안에서 란데르 왈츠의 달콤한 멜로디에 맞춰 빙글빙글 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훌륭하게, 그러나 정신없이 왈츠를 추었습니다. 감자기 무엇인지 모를 부드러운 여성적인 느낌이 그녀의 처녀다운 단정한 용모 속에서 풍겨 나왔습니다. 그 후에도 오ㄹ동안 내 손은 그녀의 몸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고, 가쁘게 새근거리는 그녀의 숨결은 귓전에서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늘어뜨려진, 창백하긴 하지만 활기 있는 얼굴에 움직일 줄 모르는, 거의 감겨지다시피한 까만 눈이 그 후에도 오랫동안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었습니다. 10 이날 하루는 정말 유쾌하게 보냈습니다. 우리는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허물없이 놀았습니다. 아샤는 무척 귀엽고 순진했습니다. 가긴도 그녀의 모습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나는 밤 늦게 그 집을 나섰습니다. 라인 강 중간쯤까지 왔을 때, 나는 사공에게 배를 물결 가는 대로 내버려두라고 부탁했습니다. 늙은 사공이 노를 걷어올리자, 배는 장엄한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갔습니다. 주위를 살피며 귀기울이고 생각에 잠겨 있노라니, 문득 마음에 까닭 모를 불안이 느껴졌습니다. 눈을 하늘로 돌렸습니다.--그러나 하늘에도 안정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사방에 별들이 가득해서 하늘 전체가 움직이며 떨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강물로 몸을 굽히자 이번에는 여기에도, 캄캄하고 차디찬 심연 속에서도 역시 별들이 흔들리며 떨고 있었습니다. 불안스러운 기분이 곳곳에서 느껴졌습니다. 따라서 내 마음 속의 불안도 커져 갔습니다. 나는 뱃전에다 팔꿈치를 괴었습니다. 귀를 간지럽히는 바람의 속삭임과 배 후미를 씻어 주는 잔잔한 물소리가 내 마음을 들뜨게 했으며, 서늘한 강바람도 나를 진정시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강변에서 꾀꼬리가 울기 시작했습니다만, 그 울음 소리마저 달콤한 독처럼 내 마음을 자극했습니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에 감격해서 흘리는 눈물은 아니었습니다. 그 때 내가 느낀 것은 바로 조금 전까지 경험하고 있던, 모든 것을 포옹하려 하는 그런 막연한 감각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넓어지고, 가슴이 들먹이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사랑하는 듯한 기분‥‥그럴 때 느끼는 기분과는 달랐습니다. 아니, 내 마음 속엔 행복의 갈망이 불타고 있었습니다만--행복, 싫증이 날 정도의 행복--나는 바로 그것을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나는 고민했던 것입니다!‥‥배는 쉬지 않고 흘러내려가고, 늙은 사공은 노에 기대어 앉아 졸고 있었습니다. 11 다음날, 가긴의 집으로 가면서도 나는 아샤에게 반했는지 어떤지 자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일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녀의 운명이 내 흥미를 끌었던 것입니다. 아샤와 뜻하지 않게 가까워진 것을 나는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겨우 어제에 와서야 비로소 나는 그녀를 안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녀는 나를 피해 다니기만 했으나, 일단 내게 마음을 열어 주자 그녀의 모습은 더욱 매력적인 빛으로 충만되고, 그 모습 자체가 내 눈에는 신선하게 보였으며, 뭐라 말할 수 없는 겸손한 매력이 그 속에서 엿보였습니다. 멀리 하얗게 빛나는 집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나는 낯익은 길을 힘차게 걸어갔습니다. 나는 미래의 일뿐만 아니라--내일의 일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나는 기분이 좋았던 것입니다. 내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아샤는 얼굴을 붉혔습니다. 나는 아샤가 오늘도 옷치장을 했음을 눈치챘습니다만, 그녀의 표정은 그 화려한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이 어려 있었습니다. 내가 그렇게도 즐거운 기분을 안고 찾아왔는데도! 내가 보건대 아샤는 전처럼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으나 억지로 자기 몸을 지탱하며 머물러 있는 듯했습니다. 가긴은 그 때 예술가다운 열정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딜레탕트들이, 소위 그들이 말하는 '자연의 꼬리를 잡았다'고 생각되었을 때, 별안간 그들을 휩쓰는 일종의 발작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온통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온몸이 페인트투성이가된 채 아마 포로 된 캔버스 앞에 서서는 커다랗게 붓을 놀리면서, 거의 험악한 얼굴로 나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약간 그림으로부터 물러나서 실눈을 하고 바라보더니, 다시 자기 그림에 달라붙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가긴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아샤 옆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녀의 까만 눈이 천천히 내게로 향했습니다. "당신은 어제와 다르군요." 그녀의 입술에 미소를 불러일으키려고 애써 보았으나 그다지 효력이 없었으므로, 나는 이윽고 말했습니다. "네, 달라요." 하고 아샤는 힘없는 투로 느리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아요. 어젯밤엔 잠을 잘 자지 못했는 걸요. 밤새껏 생각했답니다." " 무엇을요?" "아, 여러 가지 일을 생각했어요. 이건 어릴 때부터의 습관이에요. 그전에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을 무렵부터‥‥" 그녀는 힘들여 이 말을 하고 다시 한 번 되풀이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을 때‥‥ 저는 이런 걸 생각했어요. 어째서 사람은 자기의 앞날을 모르는 것일까, 그리고 이따금씩 재난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어째서 그것을 피할 수가 없을까, 또 어째서 진실을 모두 얘기해선 안 되는 것일까 하고요. 그 다음 저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제 교육은 몹시 불충분해서 다시 교육을 받아야 할 거예요. 저는 피아노도 칠 줄 모르고, 그림도 못그리고, 수놓는 것조차 서투르답니다. 제겐 아무런 재능도 없기 때문에 저 같은 걸 상대하면 몹시 답답할 거예요." "당신은 자신을 부당하게 평가하고 계십니다."하고 나는 대꾸했습니다. "당신은 책도 많이 읽으셨고, 교육도 받았고, 또 당신만큼 똑똑하면‥‥" "제가 똑똑하다고요?" 하고 아샤는 아주 순진한 호기심을 가지고 물었으므로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오빠, 제가 똑똑해요?" 하고 아샤는 가긴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가긴은 그 말엔 아무 대답도 없이 계속 붓을 바꾸어서는 손을 높이 쳐들면서 열심히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전 제 머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를 때가 있어요." 하고 아샤는 여전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을 이었습니다. "전 자신이 무서울 때가 있어요, 정말이에요. 참, 저 물어 보고 싶은데요‥‥여자는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선 안 된다는데, 그게 사실이에요?" "그렇게 많이 읽을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네, 가르쳐 주세요. 전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말씀해 주세요. 당신이 말씀하시ㅡ 거라면 뭐든지 하겠어요." 하고 아샤는 순진하고 신뢰하는 표정으로 내게 물어 보았습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얼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저하고 같이 있는 것이 지루하지 않으세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아, 고마워라!" 하고 아샤는 대답해습니다. "저는 몹시 지루하시리라 생각되었어요." 그녀의 조그마한 뜨거운 손이 힘있게 내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N씨!" 그 순간 가긴이 외쳤습니다. "이 배경이 너무 어둡지 않을까요?" 나는 가긴 곁으로 걸어가고, 아샤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12 아샤는 한 시간 후에 돌아와서, 문턱에 선 채 손짓을 하여 나를 불렀습니다. "저 말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만일 제가 죽는다면 당신은 저를 가엾게 여겨 주시겠어요?" "당신은 오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나는 외쳤습니다. "전 얼마 안 있어서 죽을 것만 같아요. 가끔 저는 주위의 모든 것이 제게 이별을 고하고 있는 듯이 느껴지는데, 이렇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나을 거예요‥‥아, 저를 그렇게 바라보지 마세요. 전 거짓말하고 있는 게 아녜요. 그러시면 또다시 당신을 두려워하게 된답니다." "아니, 당신은 저를 두려워했었나요?" "제가 그렇게 이상한 여자라면 그건 제 탓이 아녜요, 정말이에요." 하고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보세요, 전 이미 웃을 수가 없어요‥‥" 아샤는 날이 저물어도 여전히 불안하고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변화가 그녀의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눈초리는 자주 내게로 쏠렸습니다. 그 신비로운 시선을 받으면 내 심장은 나도 모르게 오므라들었습니다.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 듯 보였으나,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제발 흥분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황홀한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파리한 얼굴이며, 생기 없는 느릿느릿한 움직임 속에서 감명깊은 매력을 느껴졌습니다.--그런데 아샤는 어째서인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저." 헤어지기 조금 전에 그녀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저를 경솔한 여자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몹시 괴로워요. 이제부턴 언제나 제가 말하는 걸 진짤 믿어 주세요. 그리고 당신도 제게 숨겨서는 안 돼요. 전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겠어요. 맹세해요‥‥" 이 '맹세'라는 말이 나를 또 웃게 했습니다. "어머나, 웃지 마세요." 하고 아샤는 대들었습니다. "그러시다면 저도 어제 당신이 제게 말씀하신 대로 말하겠어요. '어째서 당신은 오늘저를 보고 웃으셨지요?'라고요!" 그녀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기억하고 계세요? 당신은 어제 날개에 대해서 말씀하셨죠‥‥전 날개가 났어요--그런데 날아갈 데가 있어야지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당신의 앞길은 모두 활짝 열려 있습니다." 아샤는 뚫어질 듯이 똑바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은 오늘 저를 나쁘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제가 나ㅃ 생각한다고요? 당신을!" "아니, 왜 물벼락 맞은 사람처럼 기운들이 없어." 하고 가긴이 내 말을 가로챘습니다. "어제처럼 왈츠를 켜 줄까? 원한다면 말이야."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샤는 말하며 두 손을 꽉 쥐었습니다. "오늘은 싫어요!" "억지로 하라는 건 아니야, 안심해‥‥" "싫어요." 하고 아샤는 창백해지면서 이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정말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검은 강물이 세차게 흐르는 라인 강가로 다가가며 나는 생각했습니다. 13 정말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이튿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자문했습니다. 나는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모습, '일부러 웃음을 짓는 처녀'의 모습이 내 마음 속으로 뚫고 들어와서 어지간해선 떨쳐 버리기 힘들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L거리로 가서 하루 종일 앉아 있었지만, 아샤의 모습은 잠깐 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머리가 아파서 기분이 언짢다는 것이었습니다. 머리를 동여매고 잠깐 내려왔었으나, 그 얼굴은 창백하게 야위고 눈은 거의 내리감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기운 없이 웃으며 "곧 나을 거예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곧 낫겠죠, 그렇죠?" 하고 말하고는 나가 버렸습니다. 나는 지루하고, 어쩐지 우울하면서도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밤늦게까지 있다가 돌아왔습니다만, 더이상 아샤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은 꿈꾸는 듯이 흐리멍덩한 의식 속에서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일을 해 보려 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으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거리를 거닐고 나서 집으로 들어왔다가는 다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당신이 N씨인가요?" 갑자기 앳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습니다. 돌아보니 어떤 소년이 서 있었습니다. "이걸 아네트 양이 당신께 전해 드리래요." 한 통의 편지를 건네 주면서 소년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펼쳐 보니, 서두르며 급히 갈겨 쓴 듯한 아샤의 필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꼭 당신을 만나뵈야겠습니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오늘 4시에 성터 근처의 길가에 있는 예배당까지 나와 주세요. 전 오늘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어요. 제발 부탁이니 와 주세요. 모든 것을 알수 있을 겁니다‥‥심부름 간 애에게 나오신다고 말씀해 주세요.' "전하실 말씀은요?" 하고 소년은 물었습니다. "가겠다고 말해 줘." 하고 내가 대답하자 소년은 달려가 버렸습니다. 14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가슴이 세차게 울렁거렸습니다. 여러 번 아샤의 편지를 되풀이하여 읽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아직 12시도 채 안 되었습니다. 문이 열리고, 가긴이 들어왔습니다. 그 얼굴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가긴은 내 손을 힘있게 움켜쥐었습니다. 그는 몹시 흥분한 것 같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고 나는 물어습니다. 가긴은 의자를 끌어와 내 옆에 앉았습니다. "그끄저께." 하고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내가 한 이야기가 당신을 놀라게 했겠지만, 오늘은 더 놀라운 얘기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아마 이렇게 마주앉아서‥‥얘기할 용기가 나지 않았을 테지만‥‥그러나 당신은 결백한 사람이고, 또 저의 친구니까‥‥그렇죠? 실은 제 동생 아샤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의자에서 벌떡 일으켰습니다. "당신 동생이‥‥"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하고 가긴은 내 말을 가로챘습니다. "당신에게 말하지만, 그 애는 미치광이입니다. 그리고 나까지 미치광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애는 거짓말을 할 줄 몰라서, 무엇이든지 내게 고백한단 말입니다. 아, 그 애는 정말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애는 자기 몸을 망치고 말 겁니다. 틀림없이 그래요." "그건 당신 생각이 틀렸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아니오, 틀리지 않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 앤 어제 종일 누워만 있었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어디다 아프다고도 말하지 않았지요. 하긴 언제나 불평이라는 걸 모르는 애니까요. 저녁녘에 약간 열이 올랐지만, 저는 그다지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밤 2시경에 주인 아주머니가 저를 깨웠습니다. '동생한테 가 보세요. 어쩐지 이상해요.'라고 말했지요. 달려가 보니, 아샤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서 오한으로 전신을 떨며, 그 눈엔 눈물이 글썽하게 맺혀 있었습니다. 머리는 불같이 뜨거웠고, 이를 악물고 딱딱 소리를 냈습니다. '왜 그러니, 아프냐?' 하고 물어보니, 그 애는 별안간 내 목에 매달려선, 만일 오빠가 저를 죽이고 싶지 않다면 하루속히 저와 함께 떠나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영문을 모른 채 그 애를 안정시키려고 애썼습니다. 동생의 흐느낌은 차츰 더 심해져 갔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흐느낌 속에서 무슨 말인가를 들었습니다. 그저 한 마디로 말해서, 동생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당신과 저같이 분별 있는 사람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애는 사물을 깊게 느낄 줄 알며, 그리고 그 감정은 상상도 못할 만큼 놀라운 힘으로 표현되곤 한답니다. 게다가 그것은 벼락이라도 떨어지듯 피할 수 없는 힘으로 순식간에 그 애를 사로잡고 말 거든요. 당신은 정말 상냥한 사람입니다." 하고 가긴은 말을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 애가 그 정도까지 당신을 사랑하게 됐는지,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로선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 애의 말에 의하면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애가 며칠 전에 저 이외엔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울었던 것이지요. 그 애는 당신이 자기 신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멸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애는 당신에게 신상을 말하지 않았느냐고 제게 물어 보았습니다. 저는 물론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만, 그 애는 눈치가 아주 빠릅니다. 다만 빨리 떠나 버리자고, 그것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날이 샐 때까지 그 애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동생은 내일이라도 여기를 떠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야 금방 잠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곰곰히 생각한 끝에 당신에게 얘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 생각으론 아샤의 말도 지당한 것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 두 사람이 여기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 애를 데리고 떠나려 했습니다만, 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리에 떠올라서 그것이 저를 주저앉게 했습니다. 혹시‥‥당신도 제 동생이 마음에 들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 애를 데리고 떠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이런 뜻에서 온갖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당신을 찾아온 것입니다. 게다가 저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것이 있기 때문에 당신의 의향을 들어 보기로‥‥결심한 거랍니다‥‥" 가련하게도 가긴은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그는 덧붙였습니다. "저는 이런 일에 경험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굳센 어조로 말했습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의 동생을 사랑하는지 알고 싶으시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저는 그녀를 사랑합니다." 가긴은 흘끗 쳐다보더니 더듬거리며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애와 결혼할 생각은 없으시겠죠?" "아니, 그런 질문에 대답하라는 겁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당장 할 수 있겠는가‥‥"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하고 가긴은 되풀이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대답을 요구할 아무 권리도 없습니다. 게다가 제 질문은 천부당 만부당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불장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아샤를 모르시겠지만, 그 애는 앓아 눕든가, 집을 나가든가, 당신에게 만나 달라고 약속을 받든가,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다른 여자라면 마음 속에 감추고 시기를 기다릴 수도 있을 텐데, 그애는 틀립니다. 이건 그 애로서 처음 겪는 일이어서--이 점이 곤란한 겁니다! 오늘 아침 제 발 밑에서 흐느끼는 것을 보았더라면 당신도 제가 근심하는 것을 알아 주실 겁니다." 나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만나 달라고 약속을 받는다'고 한 가긴의 말이 내 가슴을 찔렀습니다. 상대편이 정직하게 고백하는 데 대해서 같이 정직하게 대답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드디어 나는 말했습니다. "당신 말이 옳습니다. 한 시간 전에 저는 동생한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그 편지입니다." 가긴은 편지를 받아들고 재빨리 뜯어보고 나서는, 두 손을 무릎 위로 떨어뜨렸습니다. 그 얼굴에 나타난 놀라운 빛이 몹시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러나 나는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당신은 결백한 사람입니다." 하고 가긴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앤 스스로 떠나자고 하면서도 당신에게 이런 편지를 전하고, 자기 자신의 경솔을 책망하고 있을 것입니다‥‥그런데 언제 이런 편지를 썼을까요? 그 앤 당신한테서 무얼 원하고 있을까요?" 나는 그를 안정시키고, 될 수 있는 대로 냉정하게 이제부터 무엇을 할것인가를 둘이서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습니다. 불행을 피하기 위해서 나는 아샤를 만나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고, 가긴은 집에 남아서 편지에 대해 아는 것 같은 눈치는 조금도 보이지 말 것, 그 다음 우리는 밤에 다시 만나기로 하자고 결정했습니다. "저는 당신을 굳게 믿겠습니다." 가긴은 말하며 내 손을 움켜잡았습니다. "그 애와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어쨌든 우린 내일 떠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어서면서 덧붙였습니다. "그건 당신이 아샤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녁때까지 시간을 주십시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건 좋지만, 그래도 결혼하시진 않을 테죠?" 가긴은 돌아갔습니다. 나는 긴 의자에 몸을 더지고 눈을 감았습니다. 너무나 많은 인상들이 단번에 밀려들어서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나는 가긴의 솔직함에도 화가 났지만 아샤에게도 화가 났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나를 기쁘게 했지만 당황하게도 만들었던 것입니다. 어째서 가긴에게 모든 것을 말해 버렸을까? 나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후 단번에 순간적인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나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열일곱 살 된, 게다가 그런 기분을 가진 처녀와 결혼을 한다. 그게 될 말인가!" 나는 일어나면서 외쳤습니다. 15 약속한 시간에 나는 라인 강을 거넜습니다. 맞은편 강변에서 맨 처음 만난 사람은 오늘 아침 우리 집에 왔던 그 소년이었습니다. 소년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습니다. "안네트 양께서." 하고 소년은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하고 다른 편지를 건네 주었습니다. 아샤는 우리들의 약속 장소가 변경되었다는 걸 알려 준 것입니다. 한시간 반 가량 지난 후, 예배당이 아니라 루이제 부인의 집을 찾아서 아래층 문을 두드리고 3층으로 올라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승낙인가요?" 하고 소년은 물었습니다. "승낙이다." 하고 나는 되풀이해서 대답하고는 라인 강변을 따라 걸음을 옮겼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도 없었고 거리를 거닐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교외의 성벽 밖에는 자그마한 공원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천개 밑에 구주희를 하고 놀 장소도 있고, 맥주 애호가들을 위한 탁자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이 지긋한 몇 명의 독일인들이 벌써 구주희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나무공이 데굴데굴 굴러가고, 때때로 칭찬의 함성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울어서 눈두덩이 부풀어오른 예쁘장한 하녀가 내게 맥주잔을 날라다 주었습니다. 내가 그녀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홱 돌아서서 저쪽으로 가 버렸습니다. "그래, 그래."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던, 볼이 빨간 뚱뚱보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한헨이 오늘 굉장히 슬퍼하고 있군. 약혼자가 군대에 나갔다고." 나는 여자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녀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한손으로 뺨을 괴고 있었는데, 구슬 같은 눈물이 연이어 손가락을 따라 흘러내렸습니다. 누군가가 맥주를 주문했으므로 그녀는 그 쪽으로 잔을 날라다 주고는 또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녀의 슬픔은 내게까지 감염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눈앞에 다가온 아샤와의 만남을 생각했습니다만,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근심스럽고 슬픈 생각뿐이었습니다. 나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아샤를 만나러 온 것입니다.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기쁨이 아니라 약속을 지킨다는 것, 곤란한 의무를 수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불장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했던 가긴의 말이 화살처럼 내 가슴 속에 와 박혔습니다. ‥‥그끄저께만 해도 물결에 흘러내리는 배 안에서 행복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가슴 태우지 않았던가? 그것이 가능한 일인데도, 나는 동요하고 있다. 나는 그 행복을 피하려고 한다. 그리고 피해야만 하는 것이다‥‥그러한 행복이 갑작스레 눈앞에 다가오자 나는 당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샤, 불덩이처럼 열정적인 머리를 가지고, 그러한 과거, 그러한 교육을 받은 아샤, 매혹적이면서도 어딘지 색다른 그녀의 존재--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협했습니다. 나의 마음 속에서는 한참 동안 두 가지의 감정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정해진 시각이 다가왔습니다. 나는 아샤와 결혼할 순 없다. 드디어 나는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나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는 못하리라. 나는 일어나서 가엾은 한헨의 손에 1탈레르를 쥐어 주고--그녀는 나에게 감사하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루이제 부이늬 집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대기 속엔 벌써 밤의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고, 어두컴컴한 한길 위에 보이는 한 폭의 좁다란 하늘은 저녁놀의 반사를 받아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내가 가만히 노크하자 곧 문이 열려습니다. 문지방을 넘어서니 안은 지척을 분간할 수 없도록 캄캄했습니다. "이리로!" 하는 노파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손을 더듬어 두어 걸음 걸어가니,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이 내 손을 잡았습니다. "당신이 루이제 부인입니까?" 나는 물었습니다. "그렇다오." 하고 같은 목소리가 대답했습니다. "나요, 젊은 미남자 양반." 노파는 나를 가파른 층계 위로 안내하여 3층 입구에서 발을 멈추었습니다. 조그마한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빛으로 나는 주름투성이인 시장 미망인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달콤하고 능글맞은 미소가 우묵들어간 노파의 입술을 늘어나게 하고, 흐릿한 눈을 오그라들게 했습니다. 노파는 나에게 자그마한 문을 가리켜 주었습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쾅 하고 닫아 버렸습니다. 16 내가 들어간 자그마한 방은 너무나 어두컴컴해서 금방 아샤의 모습을 발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기다란 숄로 몸을 감싼 그녀는 마치 겁에 질린 작은 새처럼 얼굴을 돌렸다기보다는 머리를 감추다시피하고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온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나는 말할 수 없이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옆으로 다가서니, 아샤는 더욱 얼굴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안나 니콜라예브나."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아샤는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며 나를 바라보려고 했으나--그녀는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아샤의 손을 잡았습니다. 죽은 듯이 싸늘한 그녀의 손은 내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전‥‥"아샤는 웃음을 띠려고 애쓰면서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창백한 입술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전 원했어요‥‥아녜요, 그럴 수 없어요." 하고 말하며 그녀는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디마디 끊어져 나왔습니다. 나는 아샤 옆에 앉았습니다. "안나 니콜라예브나." 하고 나는 되풀이했습니다만, 나 역시 아무 말도 덧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침묵이 흘렀습니다. 나는 여전히 아샤의 손을 잡은 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샤는 여전히 몸을 웅크리고 숨을 거칠게 내쉬며, 울지 않으려고 복받쳐오르는 눈을 억누르기 위해 아랫입술을 꼬깨물고 있었습니다.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만, 그 겁에 질려 움직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애처로울 정도로 가엾게 보였습니다. 마치 피로에 지쳐 간신히 의자까지 와서는 털썩 주저앉은 것 같았습니다. 나는 심장이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아샤." 나는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샤는 천천히 눈을 들었습니다. 오, 사랑하는 여자의 눈초리란--아무도 그 눈을 형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 눈은 바라보고 있었고, 믿고 있었습니다. 묻고 있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내맡기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매력에 항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줄기 가냘픈 불길이 따가운 바늘처럼 오놈의 혈관을 줄달음질쳤습니다. 나는 허리를 굽혀 아샤의 손에 입맞추었습니다. 숨막힐 듯한 거친 숨소리가 들리고, 나뭇잎처럼 바르르 떠는 손이 내머리 위에 닿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머리를 들어 아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 얼굴은 어느 새 그렇게 변했을까요! 공포의 빛은 사라지고 눈초리는 어딘지 먼 곳을 방황하면서 나까지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입술은 방긋이 열리고, 이마는 대리석처럼 창백하며, 머리카락은 마치 바람에 나부껴 흩어진 듯 뒤로 늘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잊어 버리고 그녀를 내 곁으로 끌어당겼습니다. 그녀의 손은 순순히 말을 들어 몸 전체가 그 손을 따라 쫓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숄이 어깨에서 벗겨지고 그녀의 머리는 살그머니 내 가슴 위, 내 뜨거운 입술 위에 기대어 졌습니다. "당신 거예요‥‥"하고 아샤는 나직한 목소리로 소곤거렸습니다. 이미 내 손은 그녀의 몸 위를 미끄러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가긴의 말이 번개처럼 내 가슴을 찔렀습니다. "우린 무엇을 하고 있지!" 나는 외치고 몸부림치며 뒤로 물러났씁니다. "당신 오빠는‥‥오빠는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여기서 만나는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아샤는 의자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일어서서 방 반대쪽 구석으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습니다. "오빠는 알고 계십니다. 전 그 분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요?" 하고 아샤는 분명치 않은 어조로 물었습니다. 그녀는 아직껏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아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똑똑히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냉정한 태도로 되풀이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 혼자만의 책임입니다. 당신 혼자만의 책임이란 말입니다. 당신은 어째서 자신의 비밀을 오빠한테 고백했습니까? 모든 것을 오빠한테 말해 버리라고 누가 강요하던가요? 그 분은 오늘 저를 찾아와서 당신하고 한 말을 제게 들려 주었습니다." 나는 아샤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커다란 걸음걸이로 방 안을 거닐었습니다. "이젠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모든 것이." 아샤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하고 나는 외쳤습니다. "제발 그대로 ㅇㅆ어 주십시오. 저는 결백한 사람입니다.--네, 결백하고말고요. 그런데 제발 부탁이니 말해 주십시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흥분하셨습니까? 혹시 제게서 무슨 변화라도 발견했던가요? 그러나 저는 당신 오빠가 집으로 찾아왔을 때, 저는 그 분 앞에서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철면피한 기만자다, 가긴은 밀회를 알고 있다. 모든 것은 틀려지고 폭로되고 말았다.--이러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오빠를 부른 것은 아녜요." 하고 겁에 질린 듯이 말하는 아샤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빠 자신이 온 거예요."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를." 나는 말을 이었습니다. "아샤, 당신은 이제 떠나실 작정이신가요?" "네, 떠나겠어요." 하고 그녀는 여전히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제가 당신을 이리로 오시라고 한 것도 다만 작별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어요." "아니, 당시는." 하고 나는 대꾸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간단히 당신과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시다면 어째서 오빠에게 말씀하셨어요?" 하고 아샤는 미덥지 못한 표정으로 물어 보았습니다. "제겐 그 밖의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만일 당신 쪽에서 먼저 얘기하시지 않았던들‥‥" "전 제 방에 열쇠를 잠가 두었어요." 하고 아샤는 순진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주인 아주머니가 다른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걸 미처 몰랐어요." 이 순간 그녀의 입을 통해서 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고백을 들었을 때, 나는 하마터면 화가 치밀어오를 뻔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한한 동감을 느끼면서 그 말을 회상하게 됩니다. 그만큼 아샤는 가련하고 순진한 어린아이였던 것입니다. "이젠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하고 나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이젠 우리도 헤어져야 하는군요." 그 때 살짝 아샤를 곁눈질해 보니‥‥그녀의 얼굴은 갑자기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을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 자신도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 듯 방 안을 거닐며 흥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습니다. "당신은 무르익어 가는 우리들의 감정을 죽여 버렸습니다. 당신은 스스로 우리들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당신은 저를 의심했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동안 아샤는 차츰 앞으로 몸을 숙이더니 갑자기 무릎 위에 쓰러져 두 손 위에 머리를 떨어뜨리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옆으로 달려가서 일으키려고 했으나 그녀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자의 눈물에는 아주 약한 편이어서, 우는 것을 보기만 하면 이내 어쩔 줄 모릅니다. "안나 니콜라예브나, 아샤." 나는 나직이 말했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그쳐 주십시오.‥‥"나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샤는 벌떡 일어나더니 번개처럼 문으로 달려나가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 루이제 부인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여전히 벼락맞은 사람처럼 멍청히 방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이 만남이 어째서 이렇듯 빨리, 이렇듯 덧없이 끝나 버렸느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자신이 원했던 것, 마땅히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을 백분의 1도 말하지 못하고, 또 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 스스로 아직알지 못하면서도 이대로 끝장을 보고 만 것이었습니다. "안네트 양은 돌아가셨나요?" 하고 루이제 부인은 샛노란 눈썹을 머리카락이 드리워진 이마 위까지 치켜올리며 물었습니다.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멍청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밖으로 나와 버렸습니다. 17 나는 거리에서 빠져나와 곧장 들로 향했습니다. 울분, 미칠 정도의 울분이 내 가슴을 짓눌렀습니다. 나는 자신을 꾸짖었습니다. 아샤가 우리들의 밀회 장소를 변경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까닭을 나는 어째서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고맙다고도 생각지 않았던 것인가? 그녀가 그 노파 집을 찾는데는 얼마만한 용기와 결심이 필요했을까? 어째서 나는 아샤를 붙잡지 않았을까? 그녀와 단둘이 그 어둠침침하고 으슥한 방 안에 있을 때는 힘과 용기가 넘쳐 흘러 그녀를 떨쳐 버리고 그녀에게 핀잔을 줄 수도 있었는데‥‥지금은 그녀의 모습이 나를 따라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 파리한 얼굴, 그 눈물어린 겁에 질린 눈, 기울어진 목덜미에 흩어진 머리카락, 살며시 내 가슴에 안겼던 그녀의 머리 등을 회상하니 내가슴은 타는 듯했습니다. "당신 거예요.‥‥"라고 말하던 그녀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양심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하고 나는 자신을 설복하려 했습니다만‥‥ 거짓말이다! 나는 정말 그러한 결말을 원했던 것일까? 바보같으니 하고 울분에 싸여 마음 속으로 되뇌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밤이 다가와서, 나는 아샤가 살고 있는 집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습니다. 18 가긴이 마중을 나왔습니다. "동생을 만났습니까?" 하고 그는 멀리서부터 외쳤습니다. "아니, 집에 있지 않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습니다. "없습니다." "돌아오지 않았나요?" "돌아오지 않았는데요." 하며 가긴은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참을 수가 없어서, 우리들의 약속과는 어긋나지만 예배당까지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 앤 오지 않았던가요?" "동생은 예배당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 당신도 못 만났습니까?" 나는 만났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디서요?" "루이제 부인의 집에서요. 우린 한 시간 전에 헤어졌기 때문에." 하고 나는 덧붙였습니다. "동생은 돌아왔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기다립시다." 하고 가긴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집 안으로 들어가 서로 마주앉은 채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몹시도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우리는 연방 문쪽을 돌아보며 귀를 기울였습니다. 드디어 가긴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벌떡 일어서며 외쳤습니다. "무슨 애가 그럴까! 난 심장이 제자리에 붙어 있지 않습니다. 그 앤 저를 녹초로 만들지요, 정말입니다.‥‥우리 함께 찾으러 갑시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밖은 벌써 완전히 어둠에 잠겼습니다. "당신은 동생하고 무슨 말을 했습니까?" 하고 가긴은 모자를 눈 밑으로 내려쓰며 물었습니다. "제가 아샤하고 얘기한 것은 모두 합해서 5분밖에 안 됩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전 약속한 대로 얘기했습니다." "어떻겠습니까?" 하고 가긴은 물었습니다. "사로 갈라져서 찾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요. 그쪽이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만나든 못 만나든 한 시간 후에 이리로 와 주십시오." 19 나는 빠른 걸음으로 포도밭을 내려가서 거리로 내달았습니다. 순식간에 거리를 두루 돌아보고 이 곳 저 곳, 심지어 루이제 부인의 창문까지 들여다보고는 다시 라인 강으로 돌아와서 강변을 끼고 달려습니다. 때때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띄긴 했지만 아샤의 모습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정도를 넘어서 알지 못할 공포가 나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은 공포뿐이 아니었습니다.‥‥아니, 나는 후회와 타는 듯한 애련과, 그리고 애정을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없이 상냥스러운 애정이었습니다. 나는 손을 비틀며, 다가오는 밤의 어둠 속에서 아샤를 불렀습니다. 처음엔 작은 목소리였지만 다음엔 차츰 높아갔습니다. 나는 아샤를 사랑한다고 수없이 되풀이하고, 절대로 그녀와 헤어지지 않겠다고 나 자신에게 다짐했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싸늘한 손을 잡고, 다시 한 번 그 나직한 목소리를 듣고, 다시 한 번 그녀의 모습을 눈앞에 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의 어떤 것을 희생해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그렇게도 가까이 서있었다. 그녀는 확고한 결심을 안고서 천진난만한 심정으로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아직 누구의 손에도 더렵혀지지 않은 청춘을 맡기려고 온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를 내 품에 안아 주지도 않았다. 그 귀여운 얼굴이 고요한 환희와 기쁨 속에 꽃피는 모습을 바라볼 수도 있었는데, 나는 스스로 그 행복을 버리고 만것이다.‥‥이런 생각을 하니 나는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어떻게 된 것일까?" 나는 무력한 절망 속에서 애달프게 외쳐 보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인지 하얀 것이 갑자기 바로 강변에서 어른거렸습니다. 나는 그 장소를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는 17년 전에 익사한 사람의 무덕이 있고, 그 위에는 옛날의 비문이 새겨진 돌십자가가 반쯤 땅 속에 파묻힌 채 서 있는 곳입니다.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돌십자가 옆까지 달려가 보니 하얀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나는 "아샤!"하고 불렀습니다만 그 거친 목소리는 나 자신을 놀라게했을 뿐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는 가긴이 아샤를 찾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20 포도밭 오솔길을 서두르며 올라가고 있을 때, 나는 아샤의 방에 불이켜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내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습니다. 집으로 다가가니, 아랫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노크하자 아래층의 캄캄한 창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가긴의 머리가 나타났습니다. "찾았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습니다. "혼자서 돌아왔습니다."하고 가긴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자기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다행이군요!"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정말 다행이구요. 이젠 만사 해결입니다. 그런데 좀더 의논할 문제가 있습니다." "내일로 미룹시다." 하고 가긴은 창문을 닫으며 대답했습니다.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이만 헤어집시다." "그럼, 내일 다시 만납시다."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내일은 만사가 해결될 것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가긴은 문을 닫았습니다. 나는 문을 두드려서 지금 당장이라도 동생하고 결혼하겠다는 것을 가긴에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내일까지 기다리자. 내일이면 나도 행복해진다 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내일이면 나도 행복해진다! 그러나 행복에는 내일이란 것이 없습니다. 어제라는 것도 없습니다. 행복은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도 못하거니와 미래를 생각지도 않습니다. 행복에는 현재만이 있습니다.--그것도 오늘이 아니라 다만 순간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거리까지 왔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발이 나를 날라다 준 것도 아니고, 배가 건네 준 것도 아닙니다. 무언지 모를 커다란, 힘센 날개가 나를 날게 한 것입니다. 꾀꼬리가 울고 있는 관목 숲을 지나갈 때, 나는 걸음을 멈추고 오랫동안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건 마치 내 사랑과 내 행복을 노래하고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21 이튿날 아침 내가 낯익은 집으로 가까이 갔을 때, 한 가지 광경이 나를 놀라게 했습니다. 창문이라는 창문은 모두 열려져 있고, 현관문까지도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문지방 앞에는 조그만 종이조각들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비를 든 하녀가 문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는 하녀에게로 다가갔습니다. "떠나셨어요!" 내가 미처 물어 보기도 전에 하녀는 말했습니다. "떠났다고요?" 하고 나는 되받았습니다. "아니, 어디로?" "오늘 아침 6시에 떠나셨는데, 어디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잠깐 기다리세요. 당신은 N씨가 아니신가요?" "그렇소, N이오." "주인 마님이 당신에게 드릴 편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녀는 2층으로 올라가더니 편지를 한 통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이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어찌 된 영문일까?" 하고 나는 말하려 했습니다. 하녀는 흐릿한 눈초리로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ㅡ 편지를 펼쳤습니다. 그것은 가긴이 나에게 쓴 편지로서, 아샤로 부터는 한 마디도 씌어 있지 않았습니다. 가긴은 먼저, 제발 이 당돌한 출발에 화를 내지 말아 달라는 것, 그러나 잘 생각하시면 노형께서도 자기 결심에 찬성해 주실 것으로 확신한다며, 곤란하고 위태롭기까지 한이 상태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이 밖에 다른 방법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취지를 말하고, '어젯밤에 당신과 함께 말없이 아샤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저는 이 이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세상에는 저의 존경을 받는 선입감도 있는가 봅니다. 따라서 노형께서 아샤하고 결혼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알게 된 것입니다. 동생은 저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동생의 안정을 위해서는 저도 그 아이의 끈기 있는 강력한 청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라고 쓰고, 끝으로 서로의 교제가 이렇게 덧없이 끝나게 된 것을 몹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당신의 행복을 빌며 친우로서의 악수를 보니지만, 부디 우리를 찾으려는 생각은 하지 말아 달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선입감이란 건 뭐야?" 하고 나는 마치 상대편이 내 말을 듣기라도 하는 듯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에잇, 바보 자식! 그 엘 내게서 빼앗아 가다니, 도대체 누가 그런 권리를 줬어!" 나는 내 머리카락을 자아뜯었습니다. 하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주인 마님을 부르기 시작했으므로 그 소리에 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마음 속에 불타 올랐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오누이를 찾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 내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타격을 감수하고, 이러한 결과와 타협한다는 것은 도저히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두 사람이 아침 6시에 기선을 타고 라인 강을 내려갔다는 걸 알았습니다. 기선 사무소로 가서 물어 본즉 두사람은 퀼른가지 표를 끊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곧 짐을 꾸려서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배를 타기로 결심하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나는 루이제 부인의 집 옆을 지나가야 했는데‥‥갑자기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머리를 들어서 보니 어젯밤 아샤와 만난 그 방 창문에서 시장 미망인이 얼굴을 내밀고 그댈 지나가려 했습니다만, 노파는 내게 전할 것이 있다고 뒤에서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걸음을 멈추고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시 그 방을 보았을 때의 심정을 뭐라고 형용해야 좋을까요. "사실은." 하고 노파는 조그마한 쪽지를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찾아오지 않는다면 이것을 드리지 말라는 부탁이었습니다만, 당신이 하도 훌륭한 분이시기에 드리는 겁니다." 나는 쪽지를 받아들었습니다. 자그마한 종이조각에는 성급한 연필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우리는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할 거예요. 제가 떠나는 것은 거만한 기분에서가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게는 그 밖의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어제 제가 당신 앞에서 눈물을 흘렸을 때, 만일 당신께서 단 한마디도 말씀해 주셨더라면 저도 여기에 남아 있었을지 모르지만, 당신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짐작컨대 그것이 좋았던것 같기도 합니다‥‥그럼, 영원히 안녕히 계세요! 단 한마디‥‥아, 나는 바보다! 그 한 마디를‥‥나는 어젯밤 눈물을 머금으며 되풀이했고,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 보내지 않았던가. 공허한 벌판에서 외쳤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는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 숙병적인 방에서 그녀와 만났을 때, 내 마음 속에는 아직 뚜렷한 사람의 의식이 없었습니다. 가긴과 단둘이 무의미하고 괴로운 침묵 속에 앉아 있을 때조차도 그것은 아직 눈뜨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잠시 후, 혹시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사로잡혀 아샤의 이름을 외치며 그녀를 찾아헤맸을 때‥‥그 말은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불타올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던 것입니다. "아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하고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만--그것이 사실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만일 아샤에게 조금이라도 아양을 떨 기분이 있고, 그녀의 신분이 꺼림칙하지 않았던들, 그녀는 결코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여자라면 누구든지 참을 수 있었던 것을 그녀는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캄캄한 창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가긴과 만났을 때, 나의 좋지 않은 근성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고백을 가로막아 버렸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아직 잡으려면 잡을 수 있었던 마지막 줄이 내 손으로부터 미끄러져 나갔던 것입니다. 바로 그 날로 나는 트렁크에다 짐을 꾸리고, 거리로 돌아와서 배를 타고 쾰른으로 떠났습니다. 지금도 생각나지만, 기선이 강변을 막 떠나려고 할 때, 한평생 잊을 수 없는 거리들이며, 낯익은 모든 곳곳에 마음속으로 이별을 고하고 있노라니, 그 한헨의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녀는 강변의 돌 위에 앉아 있었는데, 그 얼굴은 파리하긴 했지만 슬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녀 옆엔 잘생긴 젊은 남자가 서서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에게 무슨 말을 들려 주고 있었습니다. 라인 강 저쪽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조그마한 마돈나가 늙은 오리나무의 짙은 녹음 속에서 여전히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22 쾰른에서 가긴 오누이의 소식을 알았습니다. 두 사람이 런던으로 간다고 들었으므로 나는 곧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런던에서 갖은 노력을 다해 봤지만 모두 헛수고였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단념하지 않고 꽤 고집을 부렸습니다만, 결국에는 그들을 찾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두번 다시 그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아샤를 보지 못했습니다. 가긴의 소식은 어렴풋이 풍문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아샤는 내게 있어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직 그녀가 살아 있는지 그것조차 모를 정도입니다. 몇 해가 지나서, 어느 날 나는 외국의 어느 기차 안에서 한 부인을 보았습니다. 그 얼굴은 잊을 수 없는 그녀의 얼굴과 너무나도 흡사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연히 그 비슷함에 속은 것일 겁니다. 아샤는 내 기억속에, 아직 내가 행복했던 시절에 알고 있던 처녀의 모습대로--나직한 나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던 그 마지막 모습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고백해야 할 것은, 나는 그 뒤 오랫동안 아샤의 일을 생각하며 슬퍼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운명이 나하고 아샤를 결합시키지 않은 것은 잘된 일이라고까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면 틀림없이 행복하게 될 수는 없었으리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그 땐 나도 젊었으며, 미래--그 짧은 번개처럼 빠른 미래가 한없이 긴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앞에 있었던 일, 뿐만 아니라 그것보다 더 좋고 멋있는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나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후 나는 많은 여자들을 알았습니다만--아샤에게서 느꼈던 타는 듯하면서도 부드럽고 깊은 감정은 이미 두번 다시 경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여자의 눈이건 언젠가 애정이 깃든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비할 수는 없었고, 그 누구가 내 가슴 위에 안겨도 내 가슴은 그렇게 기쁘고 숨막힐 듯한 달콤한 기분으로 뛴 적이 없습니다! 가족이 없는 쓸쓸한 고독의 운명을 지닌 나는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샤의 편지와 시들어 버린 제라늄 꽃, 언젠가 그녀가 창문에서 던져 준 그 꽃만은 귀하게 보존하고 있습니다. 꽃은 아직가지 희미한 향기를 풍겨 주지만, 그것을 내게 던져 준 손, 내가 단 한 번 입 맞출 수 있었던 손은 이미 오래 전에 무덤 속에서 썩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나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나라는 인간, 그 행복하고 어수선하던 시절, 날개가 돋친 듯한 그 희망과 동경, 이런 것에도 도대체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이렇게 보잘것없는 화초의 희미한 향기라도 인간의 온갖 기쁨과 슬픔보다는 수명이 깁니다.--인간 자신보다도 수명이 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