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개가 투르게네프 지음 다음 이야기는 내가 이탈리아의 옛 기록에서 읽은 것이다. 1 16세기 중엽 무렵, 이탈리아의 페르라라--그 때 이 도시는 문학과 예술 애호가인 유명한 공후들의 통치 아래 번영하고 있었다--에 파비와 무츠이라는 두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나이가 비슷한데다 가까운 친척 사이인 그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다. 진정한 우정은 어릴 때부터 그들을 결속시켜 주었다. 그리고 동일한 운명은 그 결속을 한층 더 굳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면뭉가에 태어난 재산가로, 남의 구속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유로운 젊은이들이었고, 게다가 그들에게는 가족이라는 연줄이 없었다. 그리고 취미, 환경마자 비슷했다. 무츠이는 음악을 공부하고, 파비는 그림을 그렸다. 그리하여 두 청년은 궁전, 사회, 도시의 비할 바 없는 총아로서 모든 페르라라 시민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두 청년은 균형잡힌 미남자로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서로의 용모만은 많이 달랐다. 파비는 후리후리한 키에 얼굴이 희고 머리카락은 아마빛이었으며, 파란 눈을 하고 있었다. 무츠이는 그와 달리 거무스름한 얼굴에 까만 머리카락으로, 그의 암갈색 눈에는 파비에게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즐거움이 없었고, 그의 입술에는 상냥한 미소도 없었다. 게다가 좁다란 눈까풀을 뒤덮을 듯한 눈썹은 깨끗하고 넓은 이마에 가느다란 반원을 그린 파비의 금빛 눈썹과 조금도 닮지 않았다. 이야기할 때에도 무츠이는 그다지 활기가 없었다. 그렇지만 두 청년은 기사도의 겸손과 호사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모두 한결같이 귀부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 당시, 같은 페르라라 시에 발레리야라는 한 처녀가 살고 있었다. 그 처녀는 교회에 갈 때에만 외출하고, 대제가 와야 산책을 할 정도로 무척 고독한 생활을 즐기는 여자였다. 그래서 사람 눈에 띄는 일이 거의 없었으나, 도시에서는 그 처녀가 뛰어난 미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미망인으로 그다지 부자는 아니었지만 훌륭한 가문의 출신이었고, 발레리야는 그녀의 외딸이었다. 발레리야를 만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자기도 모르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문득 부러운 존경심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마음에 두는 기색이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겸손한 처녀였다. 물론 어떤 사람은 그녀의 얼굴빛이 약간 창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살며시 내리깐 그녀의 시선은 그 어떤 내적인 성격이라기보다는 뭔가 두려움을 말해 주는 것같았다. 이따금 그녀의 입술이 방긋 웃을 때가 있지만, 그것도 살짝 짓는 웃음일 뿐이며,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아름답다는 소문만은 떠돌고 있었다. 이른 아침 온 도시 사람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을 때, 그녀는 자물쇠를 채운 방에 홀로 들어앉아서 칠현금을 켜며 옛 노래를 부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었다. 발레리야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그녀의 몸에서는 건강이 넘쳐흘렀다. 그래서 노인들까지도 그녀를 보면, "아, 사람 손이 닿지 않은 꽃봉오리, 이것을 꺾는 젊은이는 얼마나 행복하랴!" 하고 감탄을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2 파비와 무츠이가 처음으로 발레리야를 본 것은 호화로운 대제전 때였다. 이 제전은 유명한 루크레츠이 보르지아의 아들인, 그 무렵의 페르라라 공후 에르코르의 명령에 의해서 베풀어진 것으로, 그것은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왕녀인 에프코르 공후 부인의 초대에 따라 멀리 파리에서 도착하는 유명한 귀족들을 환영하기 위해서였다. 팔라지에 의해서 페르라라 대광장에는 화려한 귀부인석이 마련되었는데, 발레리야는 어머니와 나란히 그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두 젊은이--파비와 무츠이--는 바로 그 날부터 발레리야에게 반하고 말았다. 두 젊은이는 서로 아무것도 감추는 일이 없었으므로, 곧 상대편 마음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두 청년은 함께 발레리야를 사귀도록 애써서 만일 그녀가 두 사람 중 누구 하나를 택한다면, 다른 한 사람은 아무 이의 없이 그 선택에 따르기로 하자고 서로 약속을 했다. 몇 주일 지난 후 두 청년은 정당한 바업으로 얻은 어떤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잘 들여보내 주지 않는 미망인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딸을 방문해도 좋다고 허락했던 것이다. 그 때부터 그들은 매일같이 발레리야를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두 청년의 가슴속에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은 날이 갈수록 창츰 더해 갈 뿐이었다. 발레리야도 그들의 방문을 꺼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무츠이와 함께 음악을 즐기기는 했으나, 파비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다시말해서, 파비에게는 더 많은 것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두 청년은 각자의 최후 운명을 알기로 결심하고, 발레리야에게 편지를 보냈다. 거기에는 누구의 청혼을 받아들일 것인지 하루 바삐 말해 주기 부탁한다고 씌어 있었다. 발레리야는 그 편지를 어머니에게 보이고, 자기는 언제까지나 처녀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반드시 시집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누구든지 어머니의 마음에 드는 분하고 결혼하겠다고 덧붙였다. 마음이 어진 미망인은 사랑하는 딸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잠시 눈물에 젖었다. 그렇다고 해서 구혼자들을 거절할 만한 구실도 없었다. 그것도 두 젊은이가 모두 사윗감으로서는 적당한 인물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파비 쪽을 좋아하여, 그 젊은이라면 발레리야도 무척 마음에 들리라 생각하고 결국 어머니는 파비를 선택해 주었다. 이튿날 파비는 그 기쁜 소식을 받았다. 한편, 무츠이는 약속에 따라 그 선고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약속대로 했다. 하지만 무츠이는 자기 경쟁자의 승리를 눈앞에 보면서 그 증이느로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재빨리 대부분의 재산을 정리하여 수천 두카트(이탈리아에서 사용되던 금화)를 만들어서는 먼 동쪽 나라를 향하여 기나긴 여정에 올랐다. 무츠이는 파비하고 헤어지면서, 자기 정열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졌다고 느끼기 전에는 절대로 귀국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어릴 때부터 청년 시절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는 친구와 헤어진다는 것은 파비로서도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가까운 행운에 대한 즐거운 기대는 순식간에 다른 모든 감정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그는 성공한 사람의 기쁨 속에 온몸에 내맡겼던 것이다. 얼마 뒤에 파비는 발레리야와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했을 때 그는 비로소 자기 손에 들어온 부물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파비는 페르라라에서 가까운 곳에 녹음이 우거진 정원으로 둘러싸인 훌륭한 별장을 가직 있었다. 그는 아내와 장모와 함께 그 곳으로 옮겨 갔다. 그 때야말로 그들에게는 가장 즐거운 시절이었다. 신혼 생활의 새롭게 빛나는 광채속에서 발레리야는 많은 미덕들을 발휘했다. 파비는 저명한 화가가 되었다.--이미 단순한 애호가가 아니라 당당한 중진이 된 것이었다. 발레리야의 어머니는 두 사람의 행복스러운 배필을 보고 무척 기뻐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어느 새 4년이란 세월이 달콤한 꿈 속에 흘러가 버렸다. 만일 신혼 부부에게 한 가지의 부족, 한 가지의 슬픔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들 사이에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다‥‥그러나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4년째 마지막 고비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정말로 커다란 슬픔이 그들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발레리야의 어머니가 며칠 동안 앓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발레리야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녀는 한동안 이 불행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나자 생활은 다시 그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와서 예전의 물줄기를 따라 흘렀다. 그런데 어느 아름다운 여름날 저녁, 무츠이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살며시 페르라라로 돌아왔다. 3 페르리라를 떠난 지 5년 동안, 아무도 무츠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마치 땅 위에서 꺼지기라도 한 듯 그에 대한 소식은 뚝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파비는 페르라라의 어느 거리에서 옛 친구를 만났을 때, 처음에는 놀랐으나 너무 기쁜 나머지 하마터면 함성을 지를 뻔했다.--그는 즉시 무츠이를 자기 별장으로 초대했다. 별장 정원에는 따로 떨어진 별관이 있었다. 파비는 친구에게 이 별관을 숙소로 써 주기를 권했다. 무츠이는 친구의 호의를 달갑게 여겨, 그 날로 자기 하인을 데리고 그 곳으로 옮겨 왔다. 하인은 말레이시아 인인 벙어리로--벙어리이기는 했지만 귀머거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또렷또렷한 눈초리로 보아서 무척 영리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의 혀는 잘려 있었다. 무츠이는 수십 개의 트렁크를 가지고 왔는데, 그 속에는 여러 해를 여행하는 동안에 수집한 가지각색의 보물이 가득 차 있었다. 발레리야도 무츠이의 귀국을 기뻐했으며, 무츠이도 반갑고 다정한 인사를 했다. 그렇지만 무츠이의 태도는 매우 침착했다. 그리고 어느 모로 보나 파비와의 약속을 이행한 듯이 보였다. 그는 낮 동안에 하인과 함께 자기의 별관을 정리하고, 가지고 온 진기한 물건들을 정돈했다. 카펫, 비단, 찻잔, 접시, 에나멜을 칠한 쟁반, 진주와 보석을 박은 금은 장식품, 호박과 상아로 조각된 상자, 반짝반짝 빛나는 병, 향료, 약, 짐승 가죽, 이상한 새털,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있었지만, 어느 것이나 그 사용법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것들뿐이었다. 금은 보석 가운데 진주 목걸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어느 날 무츠이가 멋지고 신기한 재주를 보여 준데 대해서 페르시아 왕이 기증한 목걸이라고 했다. 그는 손수 목걸이를 발레리야의 목에 걸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목걸이는 묵직하면서도 그 어떤 이상한 온기가 스며 있는 듯이 느껴졌다‥‥이윽고 목걸이는 발레리야의 목에 걸려졌다. 점심을 마치고 저녁녘에 별장 테라스의 올레안도르와 계수나무 그늘에 앉아 무츠이는 마침내 자기의 여행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가 본 먼 나라들이며, 구름을 찌를 듯한 높은 산이며, 물 없는 사막, 바다와 같은 대하들을 말하고 나서 큰 건축물과 대사원들, 천 년 묵은 고목, 무지개빛과 새 이야기, 그리고는 자기가 찾아갔던 도시라는 도시며, 민족이란 민족을 일일이 세어 보이는 것이었다‥‥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어떤 동화 세계가 연상되었다. 무츠이는 동방에 있는 나라들을 ㄱ루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페르시아와 아라비아를 지나갔는데, 그 곳에서는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말을 가장 귀엽고 훌륭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인도의 내륙 지방으로 들어가니 거기에는 사람이 거목과 흡사했고, 그 다음 중국과 티베트 경계선에 이르니 그 곳에서는 달라이 라마라고 불리는 생불이 눈을 감고 묵상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살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한 이야기들이었다. 파비와 발레리야는 얼빠진 사람처럼 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무츠이의 용모 자체는 그다지 변한 것 같지 않았다. 다만, 어릴 때부터 거무스름하던 얼굴이 강한 햇볕에 그을려서 한층 더 검어지고, 눈이 예전보다 우묵 들어간 것같이 보일 정도였으나, 단 한 가지 그의 얼굴 표정만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빈틈없이 긴장되고 장중한 표정은 여러 가지 위험, 그 중에서도 캄캄한 밤에 호랑이의 으르렁대는 소리에 놀라고, 낮에는 한적한 산길에서 악신의 희생물로 삼기 위하여 길을 가는 나그네를 노리고 있는 산적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할 때에도 조금도 놀라운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단조로웠고, 손놀림을 비롯하여 온몸의 동작까지도 이탈리아 민족의 특유성을 잃고 있었다. 무츠이는 온순하고 민칩한 말레이상 하인의 도움으로 인도의 바라문한테서 배운 몇가지의 요술을 주인들에게 보여 주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그는 먼저 자기 몸을 휘장으로 가리자마자 갑자기 수직으로 세운 대나무 지팡이에 손ㄱ을 가볍게 의지하면서 공중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파비도 놀랐지만, 발레리야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저분은 마법사가 된 게 아닐까 하고 그녀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무츠이가 가느다란 퉁소를 불어 길든 뱀을 불러 냈을 때, 그리고 그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얼룩무늬 천 밑에서부터 까맣고 납작한 대가리를 도사렸을 때, 발레리야는 무서워서 그 기분 나쁜 뱀을 치워 달라고 무츠이에게 애원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무츠이는 목이 긴 둥근 병에 든 시라즈의 술을 파비 부부에게 대접했다. 술은 아주 향기 높고 짙었으며, 파르스름한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게다가 자그마한 벽옥으로 만든 잔에 부어서인지 더욱 이채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술맛은 유럽 술과 달리 몹시 달고 향기가 높아서, 천천히 몇 모금만 들이켜도 온몸이 달콤한 잠에 취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무츠이는 파비와 발레리야에게 다시 한 잔씩 권하고 자기도 마셨다. 그 때 무츠이는 발레리야의 잔으로 몸을 숙이고 손가락을 떨면서 무엇인지 중얼거렸다. 발레리야도 그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그의 태도와 행동이 전과는 너무도 달랐으므로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고, 이 분은 인도에서 어떤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인 게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그 곳의 풍속이 저런 것일까하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발레리야가 무츠이에게 물었다. "당신은 여행 도중에도 여전히 음악을 하셨나요?" 무츠이는 대답 대신 말레이사 인에게 인도의 바이올린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바이올린은 요즈음 것과 다름엇었다. 단지 현이 네 개가 아니라 셋이었고, 위에는 푸릇푸릇한 뱀가죽이 덮여 있었으며, 거기에 삼으로 만든 가늘고 긴 반원형 활이 다려 있고 그 끄트머리에 뽀족한 보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무츠이는 먼저 몇 개의 비곡을 켰다. 그의 말에 의하면 민요라는 것으로, 이탈리아 인의 귀에는 이상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조잡한 느낌을 주었다. 금속으로 만든 현의 음향은 나직하고 구슬펐다. 그러나 무츠이가 마지막 노래를 시작했을 때, 그 음향은 갑자기 높아져서 힘차게 울리기 시작했다. 힘있게 활을 올리고 내릴 때마다 그밑에서 타는 듯한 정열의 곡조가 흘러 나왔다. 그것이 마치 바이올린 가죽을 덮고 있는 뱀처럼 아름다운 굴곡을 보여 주어 한결 정서를 더해 주는 것이었다. 파비와 발레리야는 가슴이 벅차올라 눈에 눈물이 괴었다. 그만큼 이 멜로디는 정열과 환희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 무츠이는 아래로 몸을 굽혀 바이올린에다 머리를 가져다 댄 채 뺨은 차츰 파리해지고, 두 눈썹은 한일자로 굳게 굳어졌다. 그의 표정은 긴장될 대로 기장되어 한층 더 엄숙해 보였다. 활 끄트머리의 보석은 그 신기한 음악의 불길에 타오르기라도 하듯 시종 광선 모양의 불꽃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무츠이가 음악을 끝마치고 이어 바이올린을 턱과 어깨 사이로 힘있게 틀어넣으며 활을 쥐고 있는 손을 내렸을 때, "도대체 그건 뭔가? 자넨 무슨 곡을 켰나?" 하고 파비는 외쳤다. 발레리야는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역시 남편의 물음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츠이는 바이올린을 책상 위에 놓고 가볍게 머리를 흔들고 정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거 말인가? 이 곡은‥‥이 노래는 실론 섬에서 한 번 들은 일이있지. 그 곳에선 이 노래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사랑의 개가라고 해서 많이 유행되고 있다네." "한 번 더 들려 주게." 하고 파비는 속삭였다. "안돼, 이건 되풀이할 순 없는 거야. 벌써 늦었으니 발레리야께서도 주무셔야 할 거고, 나도 잘 때가 됐어. 몹시 고다하군." 하고 무츠이는 대답했다. 이 날 하루 동안 무츠이가 발레리야를 대하는 태도는, 다만 옛 친구로서 어디까지나 정중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헤어직 되었을 때, 그는 힘있게 발레리야의 손을 잡고 얼굴이 닿을 정도로 뚫어지듯 바라보면서 그녀의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꼭 눌러 주었다. 그 때 발레리야는 얼굴을 들수 없었지만 확 타오르는 자기 볼 근처에서 무츠이의 시선을 느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빼냈지만, 그래도 무츠이가 밖으로 나갔을 때 그녀는 그가 걸어나간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전에 무츠이가 얼마나 무서웠던가를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는 못 미더워하는 눈치였다. 무츠이는 자기 숙소를 돌아가고, 파비 부부는 그들의 침실로 들어갔다. 4 발레리야는 한참 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온몸의 피가 괴로움 속에 잔잔히 물결치고, 머릿속은 종이라도 울리듯 뒤흔들렸다. 이것은 발레리야가 추측한 대로 이상한 술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츠이의 이야기와 바이올린 연주도 어느 정도 그 원인이 된 듯싶었다. 결국 그녀는 새벽녘에야 잠들었는데, 곧 이상한 꿈을 꾸었다. 발레리야는 먼저, 자기가 천장이 나직하고 널찍한 방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방을 본 적이 없었다. 사방의 벽은 금빛풀이 자란 가느다란 청색 타일로 장식되고, 우아하게 조각된 석고 기둥은 대리석 천장을 떠받들고 있었따. 그 천장은 어렴풋이 투명해 보였다. 연한 분홍빛은 모든 사물을 같은 신비로움으로 물들이면서 사방에서 방 안에 비쳐 내리고 있었다. 거울같이 미끄러운 마루 한복판의 폭 좁은 카펫 위에는 비단 방석이 놓여 있었고, 방구석마다에는 괴물을 상징하는 커다란 향로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륵 있었다. 어디를 보나 창문이 없었다. 벨벳 커튼을 드리운 문은 우묵이 들어간 벽 위에서 말없이 검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커튼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움직이더니‥‥무츠이가 들어오지 않는가. 그는 인사를 하고 두 손을 벌리며 빙긋이 웃었다‥‥이윽고 그의 무쇠 같은 두손이 발레리야의 몸을 끌어안으며 메마른 입술로 그녀의 온몸을 더듬었다‥‥그리고 그녀는 방석 위로 쓰러졌다. 이 무서운 악몽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운 신음을 하다가 발레리야는 간신히 눈을 떴다. 그녀는 자기 몸이 어디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어서,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온몸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파비는 그녀 옆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는 잠들어 있었는데, 그의 얼굴은 마침 창문으로 비쳐드는 환한 달빛을 받아 죽은 사람같이 파리했다‥‥죽은 사람의 얼굴보다 더 슬퍼 보였다. 발레리야는 남편을 깨웠다. 잠을 깬 남편은 발레리야를 보자 곧, "왜 그러오?"하고 물었다. "저‥‥전 무서운 꿈을 꾸었어요." 아직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발레리야는 중얼거렸다. 그러자 이 때, 별관 쪽에서 힘찬 멜로디가 울려 나왔다. 그리고 두 사람--파비도 발레리야도--은 이것은 만족스러운 사랑의 개가라고 하면서 무츠이가 연주하던 그 곡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알았다. 파비는 이상한 듯 발레리야를 바라보았다‥‥발레리야는 눈을 감고 얼굴을 돌렸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이고 노래가 끝날 때까지 듣고 있었다. 마지막 선율이 끊어졌을 때, 달이 구름 속으로 기어들어 방 안은 갑자기 어두워졌다. 두 부부는 말없이 베개 위에 누었다.--그리고 누가 먼저 잠들었는지 모르게 두 사람은 잠들어 버렸다. 5 다음날 아침 무츠이는 아침 식사를 하러 왔다. 그는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발레리야에게 즐겁게 인사했다. 발레리야는 말을 더듬으며 그에게 대답하고 살짝 무츠이를 훔쳐보았다--그 만족스러운 얼굴이며 날카로운 호기심에 찬 눈초리가 그녀에게 어쩐지 두려움을 주었다. 무츠이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파비가 곧 그의 말을 가로챘다. "잠자리가 바뀌어 자넨 자지 못한 것 같더군 그래? 나는 아내와 함께 어젯밤 자네가 연주하는 노래를 들었다네." "그래? 자네도 듣고 있었나?" 하고 무츠이는 중얼거렸다. "나는 그곡을 켰어. 그러나 그 전에 한잠 자다가 굉장한 꿈을 꾸었다네." 발레리야는 솔깃하여 귀를 기울였다. "어떤 꿈이었나?" 파비가 물었다. "이런 꿈을 꾸었어." 무츠이는 발레리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먼저 내가 천장이 낮은 동양식으로 꾸며진 넓은 방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게. 조각된 기둥이 천장을 떠받들고 벽은 타일로 붙여졌으며, 창문도 등불도 없었지만, 장미빛 광선이 방 전체에 넘쳐 흘러서 그 방은 마치 투명석으로라도 만든 것 가았어. 방 구석구석에는 중국향로가 놓이고, 마루 위에는 비단 방석이 폭 좁은 카펫 위에 놓여 있었지. 나는 커튼을 드리운 문을 통해 들어갔지. 그러자 다른 문에서도 갑자기 나를 향하여 부인 한 사람이 걸어오지 않겠나. 그 부인은 한때 내가 사랑했던 여자로, 아주 미인이었어. 나도 예전의 사랑이 불타올랐을 정도였다네." 무츠이는 의미심장하게 입을 다물었다. 발레리야는 옴쭉달싹 않고 앉아 차츰 파랗게 질려 갈 뿐이었다. "그 때."하고 무츠이는 말을 이었다. "나는 잠을 깨어서 그 곡을 켠거라네." "그 부인이 누구냐고? 어느 인도인의 마누라야. 나는 그 부인과 델리에서 만났었지. 그런데 그 여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죽고 말았다네." "그러면 남편은?" 파비는 까닭도 없이 물었다. "소문에 의하면, 남편ㄷ 역시 죽었다더군. 두 사람 다 너무 빨리 죽고만 거야." "이상한데!" 파비는 외쳤다. "내 아내도 어젯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더군." 그 때 무츠이는 뚫어질 듯이 발레리야를 바라보았다.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하고 파비는 덧붙였다. 이 때 발레리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무츠이도 아침 식사를 마치고 페르라라까지 가야 할 일이 있어서 밤에야 돌아오겠다고 말하고는 나가 버렸다. 6 무츠이가 돌아오기 몇 주일 전, 파비는 성녀 체치리야의 형식으로 아내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재능은 현저하게 나아졌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문하생으로, 유명한 화가인 루이니는 자주 파비를 찾아 페르라라로 와서는 개인적인 조언으로 파비를 도와 주면서 대선생의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초상화는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으나, 다만 얼굴 몇 군데만이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이 그림만 완성되는 날이면 파비는 정당하게 자기의 재능을 자랑할 수가 있으리라. 파비는 무츠이를 페르라라로 떠나 보내고, 자기 화실로 발을 옮겼다. 거기에서 언제나 발레리야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그는 발레리야를 찾을 수가 없었다. 소리쳐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 그는 이상한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는 발레리야를 찾기 시작했다. 집에는 없었다. 파비는 정원으로 뛰어나갔다--그리고 멀리 떨어진 가로수 길에서 발레리야를 찾아 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가슴 위로 늘어뜨리고, 두 손을 열십자 모양으로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채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녀 뒤에서는 험상궂은 비웃음으로 얼굴을 찡그린 대리석 괴물이 암록색의 기파리스(녹색 식물의 일종)속에서 튀어나와, 그 까부라진 입술을 갈대 피리에 갖다 대고 있었다. 발레리야는 남편을 보고 무척 기뻐했다. 그리고 남편의 장황한 질문에 대해서 머리가 좀 아프기는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고는 화실로 가고싶다고 대답했다. 파비는 그녀를 화실ㄹ 데려다가 앉힌 다음 붓을 들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기가 바라는 대로의 얼굴을 완성시킬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얼굴이 조금 파리하고 피곤해 보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그렇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예전에 마음에 들어했던 얼굴, 그로 하여금 성ㄴ 체치리야의 모습으로 표현해 보겠다는 마음을 일으키게 했던 그 깨끗하고 거룩한 표정을 그는 오늘 발레리야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결국 붓을 던지고, 그림을 그릴 기분이나지 않는다면서, 발레리야에게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자리에 누워서 쉬는 게 좋겠다고 마했다.--그리고 나서 그는 초상화를 벽 위에 다 세워 놓았다. 발레리야는 쉬도록 하라는 남편의 의견을 쫓아서, 정말 머리가 아프다고 되풀이 말하고는 침실로 사라졌다. 파비는 혼자 화실에 남았다. 자기 자신도 모를 이상한 동요가 느겨졌다. 파비는 자진해서 무츠이를 자기 집에 머무르게 했지만, 이제 와서는 오히려 화근이 되고 말았다. 그는 질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발레리야에게 질투할 수 있으랴. 그러나 그는 자기의 친구가 예전의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무츠이가 머나먼 나라에서 가지고 온 여러 가지 신기한 것, 알지 못할 것--그의 피와 살에 깊이 아로새겨진 것--그러한 모든 요술, 가곡, 이상한 술, 벙어리 말레이시아인, 게다가 무츠이의 옷이며 머리카락이며, 숨을 쉴 때 내뿜는 향기--이 모든 것은 파비의 마음에 의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안스러운 감정을 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어째서 말레이시아 인은 책상 뒤에서 일하면서 그렇게도 불쾌한 눈초리로 자길ㄹ 노려보는 것일까? 물론 다른 사람은 그가 이탈리아 어를 이해한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르리라. 무츠이가 말한 바에 의하면, 이 말레이시아 인은 혀를 대가로 해서 막대한 희생을 치렀으며, 그 때문에 지금은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떤 힘으로, 또 어떻게 그는 혀의 대가로 그것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 점이 매우 이상했다! 정말 모를 일이었다! 파비는 아내의 침실로 갔다. 발레리야는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그러나 자고 있지는 않았다. 파비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그녀는 모믈 떨었으나, 곧 정원에서 만났을 때와 같이 기뻐했다. 파비는 침대 밑에 앉아 발레리야의 손을 잡은 채,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물었다. "어젯밤의 이상한 꿈이 몹시 당신을 놀라게 한 모양이구료. 그래, 그꿈은 무츠이가 이야기한 것과 같은 것이었소?" 발레리야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중얼거렸다. "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제가 본 것은‥‥어떤 이상한 괴물이 저를 잡아 먹으려고 한 것이었어요." "괴물이라니? 그건 사람의 탈을 쓰고 있었소?" 파비는 물었다. "아니에요, 짐승‥‥짐승이었어요." 발레리야는 대답하고 나서 갑자기 돌아 눕더니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베개 속에 파묻었다. 파비는 잠시동안 아내의 손을 잡고 있다가 말없이 그 손을 자기 입술에 갖다 대고는 밖으로 나갔다. 두 부부는 불쾌한 기분으로 이 날 하루를 보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갑자기 무엇인지 검은 것이 걸려 있는 듯이 느껴졌다‥‥그렇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마치 어떤 위험이 그들을 위협하기라도 하듯이.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파비는 초상화를 그려 보기도ㅗ 하고, 요즈음 페르라라에서 출판되어 이미 온 이탈리아를 휩쓴 아리오스토의 서사시를 읽어 보려고도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무츠이는 밤늦게 저녁식사를 할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7 무츠이는 변함 없이 침착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다.--그러나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았다. 그는 파비에게 옛 친구들 소식이며, 독일 원정이며, 대제의 일들을 물어 보았다. 그런가 하면 신임 교황알현하기 위해서 로마로 가고 싶다는 자기의 희망을 말하기도 했다. 무츠이는 또다시 시라즈의 술을 발레리야에게 권했지만, 그녀로부터 거절당하자 "이젠 필요가 없군."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파비는 아내와 함께 침실로 돌아와서 잠시 뒤 잠들어 버렸다. 한 시간 가량 지나서 눈을 떠 보니, 자기 옆에 아무도 누워 있지 않았다. 발레리야가 없었던 것이다. 파비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바로 그 순간, 잠옷 차림인 발레리야가 정원 쪽에서 방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보슬비가 내리는 것 같았으나, 이미 달이 환희 빛나고 있었다. 발레리야는 눈을 내리깔고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는 얼굴에 이상한 공포의 빛을 떠올리면서 침대로 다가왔다. 그녀는 앞으로 소늘 내밀어 침댈ㄹ 더듬더니 털썩 침대 위에 누워 버린 채 말이 없었다. 파비는 그녀에게 한두 마디 질문을 던졌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마 잠든 듯싶었다. 파비는 그녀를 만져 보았다.--그녀의 잠옷이며 머리카락은 빗방울에 젖고, 맨발의 발바닥에는 모래가 묻어 있었다. 깜짝 놀란 파비는 벌떡 일어나 반쯤 열린 문을 박차고 정원으로 달려갔다. 무서울 정도로 밝은 달빛이 만물을 비춰 주고 있었다. 파비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순간 좁다란 모랫길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한 사람은 맨발이었다. 그 발자국을 따라가니, 그 곳은 별관과 본관과의 중간쯤 되는 재스민이 가득한 정자였다. 파비는 어리둥절하여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갑자기 어젯밤 들은 것과 같은 곡이 다시 울려 나오지 않는가! 파비는 부르르 몸을 떨고는 별관 안으로 뛰어들었다. 무츠이는 방 한복판에 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파비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자네 정원에 나갔었지, 밖에 나갔었지? 자네 옷은 비에 젖어 있어." "아니, 모르겠는데‥‥나가지 않은 것 같은데‥‥" 파비의 뜻하지 않은 방문과 그의 흥분에 놀란 무츠이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파비는 그의 한쪽 손을 잡으면서 물었다. "왜 자넨 그 곡을 켜고 있지? 또, 그 꿈을 꾸었나?" 무츠이는 여전히 놀라움에 사로잡혀 파비를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자, 대답해!" 달은 방패처럼 둥글고 강은 별처럼 반짝이노라. 친구는 눈뜨고 적은 잠잔다. 독수리는 병아리를 낚아챈다. 살펴 다오! 무츠이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느릿느릿 중얼거렸다. 파비는 두어걸음 물러나서, 무츠이를 뚫어질 듯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침실로 뒤돌아왔다. 발레리야는 머리채를 어깨 위에 늘러뜨리고, 힘없이 두 손을 벌린 채 괴로운 꿈 속에 잠겨 있었다. 파비는 잠시 뒤 그녀를 깨웠다. 파비의 모습을 보자 그녀는 남편의 가슴에 몸을 던지고 힘껏 파비의 목을 끌어안았는데,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니, 당신 왜 그러오!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파비는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두 번 되풀이해서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파비의 가슴에 안긴 채 차츰 정신을 잃어가는 것이었다. "아, 굉장히 무서운 꿈을 꾸었어요." 그녀는 파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파비는 그녀에게 물어 보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발레리야가 파비의 팔에 안겨 간신히 잠들 수 있었을 때는 이미 아침 놀에 창문이 빨갛게 물들 무렵이었다. 8 이튿날 무츠이는 아침부터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발레리야는 이웃 수도원에 다녀오겠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그 수도원에는 그녀의 교부로서, 예전부터 그녀가 매우 존경하고 있는 근엄한 사제가 살고 있었다. 파비의 질문에 대해 그녀는 이 기회에 모든 것을 교부에게 고백하고, 요즈음 이상한 인상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마음의 무거운 짐을 털어 내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파비는 아내의 수척해진 얼굴과 목멘 소리를 듣고는 잔진해서 아내의 의견을 승낙해 주었다. 특히 존경하는 교부 로렌초라면 그녀에게 유익한 충고를 해 줄 것이며, 그녀의 의심을 풀어 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발레리야는 네 사람의 하인을 거느리고 수도원으로 떠났다. 한편, 파비는 혼자 집에 남았다. 그는 발레리야가 돌아올 때까지 정원을 거닐면서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끈기 있게 생각해 보았다. 그러노라니 여느때의 공포와 분노가 치밀어오르기도 하고, 그 어떤 것을 의심하는 고통도 느껴졌다. 그는 여러 번 별관에 들러 보았으나 무츠이는 돌아와 있지 않았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인 하인은 우상에게라도 비는 듯 비굴하게 머리를 숙이고--파비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청동색 얼굴에 능글맞은 비웃음을 띠며 멀리서 파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동안 발레리야는 부끄럽다기보다는, 오히려 공포에 떨면서 모든것을 숨기지 않고 교부에게 고백했다. 교부는 주의깊게 그것을 듣고는 그녀를 축복하고,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 죄를 용서해 주었다. 그러나 교부는 마법, 요술‥‥이런 것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마음속으로 느끼고, 발레리야와 함께 그녀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마 끝가지 발레리야를 안심시키고 위로해 주기 위해서였으리라.--파비는 교부를 보자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경험이 많은 노사제는 파비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 파비와 단둘이 되어서도 그는 물론 발레리야가 고백한 비밀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초대한 손님을 멀리하라는 충고를 주었다. 그 손님의 이야기며, 노래며, 그 밖의 여러 가지 행위로써 발레리야의 상상이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노사제의 생각에 의하면, 무츠이는 예전부터 신앙이 건실하지 못한데다가 오랫동안 그리스도 교의 빛을 받지 못하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서 가지각색의 이단 사설의 병독을 가져올 수도 있고, 마법의 도를 닦았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오랜 우정을 끊기는 힘들지만, 총명한 이성은 이별이 불가피 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는 것이었다. 파비는 존경하는 교부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고, 발레리야도 남편에게서 교부의 권고를 듣고 무척 기뻐했다. 이윽고 로렌초 교부는 두 부부로부터 수도원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많은 선물과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축복을 받으며 별장을 떠났다. 파비는 저녁 식사가 끝나면 곧 무츠이에게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이상한 손님은 저녁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파비는 무츠이하고의 이야기를 내이로 밀기로 하고, 두 사람은 침실로 들어갔다. 9 발레리야는 눕자마자 잠들어 버렸으나, 파비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보고 느낀 모든 것이 고요한 밤의 정적을 통해서 생생하게 머리에 떠올라 왔다. 그는 아직까지 대답을 얻을 수 없었던 여러 가지 문제를 다시 한 번 끈기 있게 자신에게 물어 보고 있었다. 무츠이는 정말로 마법사가 된 것일까? 그가 벌써 발레리야를 해치지나 않았을까? 발레리야는 앓고 있다. 그런데 어떤 병일까? 파비가 머리에 손을 얹고 거친 호흡을 억제하며 괴로운 사색에 잠겨 있는 사이에 달은 다시 맑게 갠 하늘 위에 떠올라 왔다. 그리고 달빛과 함께 반투명 한 창문을 통하여 향기 높은 흐름과도 같은 숨결이 별관 쪽에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아니, 파비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거기다가 시끄러운 정열의 속삭임까지 들려오지 않는가. 바로 그 순간, 파비는 발레리야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보고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세히 바라보니, 발레리야는 반쯤 몸을 일으키고, 먼저 오른쪽 다리, 다음엔 왼쪽 다리를 침대에서 내려놓았다. 그리고 몽유병자와 같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면서, 두 손을 뻗친 채 정원으로 나가는 문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었다. 파비는 재빨리 침실의 다른 문으로 뛰어나가 날쌔게 집 모퉁이를 돌아가서 정원으로 나가는 문을 밖에서 잠가 버렸다. 그리고 그가 간신히 자물쇠를 채우고 나니, 누군가가 안에서 문을 열려고 애쓰는 기색이 느껴졌다. 계속해서 문을 떠미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떨리는 신음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런데 무츠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까? 얼른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파비는 별관으로 달음질쳤다. 이 때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달빛을 가득 안은 정운 길을, 파비 쪽을 향하여 역시 몽유병자와 같이 두 손을 앞으로 뻗친 채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것은 바로 그 무츠이가 아니겠는가‥‥파비는 무츠이 쪽으로 달려갔으나 무츠이는 파비를 알아보지 못하고 한 걸음 두 걸음 절도 있게 발을 옮기고 있었다. 달빛을 받은 그의 움직이지 않는 얼굴은 말레이시아 인과 마찬가지로 웃고 있었다. 파비는 소리쳐서 그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자기 뒤의 집 안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뒤돌아보았다. 침실의 창문이 아래에서 위까지 활짝 열려 있었다.--그리고 발레리야는 문턱을 넘어서 창문 안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은 마치 무츠이를 부르는 듯‥‥그녀의 온몸은 무츠이에게로 끌리고 있었다. 말할 수 없는 분노의 불길은 별안간 휘몰아친 파도처럼 파비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 저주받을 마법사 녀석!" 그는 미친 듯이 외쳤다. 그리고는 한손으로 무츠이의 목덜미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허리띠에서 단검을 더듬어서 바로 칼손잡이까지 무츠이의 옆구리를 찔렀다. 무츠이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올리며 손바닥으로 상처를 누르고는 비틀거리며 별관 쪽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무츠이를 찌른 바로 그 순간, 발레리야도 역시 째지는 듯한 처참한 소리를 지르며 나뭇단처럼 털썩 땅위로 쓰러지는 것이었다. 파비는 달려가서 그녀를 일으켜 침대로 안고 갔다. 그리고 그녀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으나 잠시 뒤 눈을 덧다. 그녀는 피할 수 없는 죽음에서 방금 깨어난 사람처럼 반색하며 거칠게 한숨을 내쉬었다.--이윽고 남편이라는 것을 알자 두 손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남편의 가슴에 안겼다. "여보, 여보, 여보‥‥"그녀는 말했다. 차츰 그녀의 팔에서 힘이 빠지고 머리가 뒤로 늘어졌다. 그리고 행복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덕분에 이제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하지만 무척 고단해요."하고 소곤거리며 그녀는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괴로운 꿈은 아니었다. 10 파비는 그녀의 침대맡에 앉아서 파리하게 여윈, 그러나 지금은 안도의 빛이 감도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그뿐만이 아니라, 무츠이를 어떻게 처리해야할 것인가? 만일 무츠이를 죽였다면‥‥칼날이 얼마나 깊이 들어갔는지를 상기하고, 그는 이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만일 무츠이를 죽였다면‥‥도저히 숨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공후와 재판관에게 신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렇게 괴이한 사건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파비는 자기 집에서, 자기의 친척이며 자기의 둘도 없는 친구를 죽였다! 무엇 때문에? 어떤 동기에서?‥‥라고 질문하리라. 그러나 만일 무츠이가 죽지 않았다면? 어쨌든 파비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파비는 발레리야가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가만히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는 별관으로 향했다. 별관 안은 고요했다. 다만, 한개의 창문에서 불빛이 보일 뿐이었다. 파비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깥문을 열고--문 위에는 피붇은 손가락 자국이 있었고, 모래 깔린 길에는 핏방울이 검게 빛나고 있었다--캄캄한 첫번째 방을 지나자,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 문턱 위에 걸음을 멈추었다. 방 한복판의 페르시아 카펫 위에는 팔다리를 빳빳이 뻗은 무츠이가 비단 베개에 머리를 얹고 검은 테두리를 두른 폭넓은 빨간 숄로 덮고 누워 있었다. 눈은 내리감고, 눈거풀은 파랗게 색이 변한 채 황랍처럼 샛노란 얼굴은 천장을 향하고 있었고, 게다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아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그의 발 옆에는 역시 빨간 숄로 몸을 감싼 말레이시아 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말레이시아 인 하인은 양치류인 듯한 알지못할 식물의 가지를 왼손에 들고 약간 앞으로 몸을 숙인 채 열심히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루에 달린 자그마한 등잔불은 파르스름한 불길로 간신히 방 안을 비추고 있었으나 불길은 잔잔하고 연기도 나지 않았다. 말레이시아 인은 파비가 들어왔을 때 별로 움직이는 기색도 없이 흘끗 쳐다보았을 뿐 다시 무츠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따금씩 가지를 올렸다내렸다하면서 그것을 공중에서 흔들었다. 말없는 그의 입술은 슬금슬금 열려져서, 마치 소리없는 이야기를 중얼거리듯 씰룩거렸다. 말레이시아 인과 무츠이 사이의 마루 위에는 파비가 친구를 찌른 단검이 놓여 있었다. 말레이시아 인은 피묻은 칼날을 식물의 가지로 한 번 내리쳤다. 1분이 지났다. 그리고 또 1분‥‥파비는 말레이시아 인에게 다가서서 몸을 굽히고 나직한 목소리로 "죽었나?" 하고 물었다. 말레이시아 인은 아래위로 머리를 끄덕이고는 숄 밑에서 오른손을 꺼내 명령적으로 문을 가리켰다. 파비는 다시 한 번 물어 보고 싶었으나, 한 번 명령한 말레이시아 인의 손은 다시 그 운ㄷㅇ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파비는 한편 놀라고 화가 치밀어오르기도 했지만, 그의 명령대로 밖으로 나왔다. 발레리야는 침실에서 여전히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한층 안도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파비는 옷을 입은 채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다시 생각에 잠겼다. 훤히 밝은 아침 하늘에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이 그를 비춰 주었지만, 파비는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발레리야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11 파비는 발레리야가 일어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함께 페르라라로 떠나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침실문을 두드리는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가 보니 별장 관리인인 안토니오 노인이었다. "나리." 노인은 말했다. "방금 말레이시아 인이 와서 무츠이 나리께서 앓으시기 때문에 일단 가구와 함께 시내로 옮겨 각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짐을 나르기 위해 인부를 보내 달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정오까지는 짐 실을 말과 사람이 탈 말, 그리고 몇 사람의 안내인을 보내 달라고 하는데, 주인님의 의향은 어떠신지요?" "말레이시아 인이 그런 말을 하던가?" 파비는 물었다. "어떻게 말할 수 있어? 그는 벙어리인데." "이 종이를 보십시오, 나리! 그것은 이탈리아 어로 씌어 있는데, 하나도 틀린 데가 없습니다." "자네 무츠이가 앓는다고 말했지?" "네, 대단히 중환이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만나뵐 수도 없다고 하더군요." "의사를 부르러 보냈나?" "아니오, 말레이시아 인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 이건 확실히 말레이시아 인이 쓴 건가?" "네, 그 사람이 쓴 것입니다." 파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럼 도와 드리도록 해." 그는 마침내 말했다. 안토니오는 물러갔다. 파비는 이상한 눈길로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럼 죽지 않았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이런 경우에 기뻐해야 좋을지 슬퍼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앓는다니?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는 분명히 무츠이를 죽은 사람으로 보지 않았던가?' 파비는 발레리야에게로 돌아왔다. 그녀는 눈을 뜨고 머리를 들었다. 두 사람은 의미 깊은 눈초리로 서로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 분은 안 계세요?" 발레리야는 문득 물었다. 파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때요, 안 계세요? 여보, 그 분은 떠나셨어요?" 그녀는 계속 물었다. "아니, 아직 있소. 그러나 오늘 떠날 거요." 파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앞으로 저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 분을 만나지 못할 테지요?" "그렇소, 언제까지나!" "다시는 그 꿈도 꾸지 않겠죠?" "안 꿀 거요!" 발레리야는 기쁜 나머지 다시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행복스러운 미소가 다시 그녀의 입가에 떠올랐다. 그녀는 남편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우리도 이제부터는 그 분에 대해 절대로 말하지 않기로 해요. 네, 여보? 그리고 전 그 분이 떠날 때까지는 이 방에서 나가지 않겠어요. 제몸종을 이리 보내 주세요‥‥잠깐만! 여보, 저걸 집으세오."그녀는 무츠이에게서 받은,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진주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것을 빨리 깊은 우물 속에 던져 주세요! 여보, 저를 좀안아 줘요. 전 당신의 발레리야예요. 그리고 여보, 그 분이 떠날 때까지는 저한테 오시지 말아 주세요." 파비는 목걸이를 들고--그에게는 진주가 투명해 보이지 않았다--아내의 명령대로 실행했다. 그는 멀리서 별관 쪽을 바라보며 정원을 산책했다. 별관 주위에선 벌써 짐을 꾸리고 있었다. 짐을 나르는 하인도 있고, 마차에 말을 메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속에서 말레이시아 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파비의 억누르기 힘든 감정은 한 번더 별관 안의 상태를 살펴보고 싶어졌다. 그는 문득 정자 뒤에 비밀문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그 문을 지나면 오늘 아침 무츠이가 누워 있던 방으로 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파비는 살금살금 문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파비는 묵직한 커튼을 젖히고 겁에 질린 시선을 던졌다. 12 무츠이는 이미 카펫 위에 누워 있지 않았다. 그는 값비싼 옷을 입고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파비가 어제 보았을 때와 같이 무츠이는 송장과 다름없었다. 돌처럼 무거운 머리는 안락의자 뒤로 늘어뜨려지고, 손바닥을 위로 향하여 뻗은 노르스름한 두 손은 무릎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은 웅크린 채 들먹이지 않았다. 안락의자 주위며 마른풀이 흩어진 마루 위에는 액체가 든 몇 개의 납작한 잔이 놓여 있었다. 그 속에서 지독히 독한, 숨막힐 듯한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모든 잔마다 그 주위에는 자그마한 구릿빛 뱀이 때때로 금빛 눈을 반짝이며 돌돌 말려 있었다. 그리고 무츠이 앞에는 두어 걸음 가량 간격을 두고 말레이시아 인의 기다란 모습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알록달록한 비단가운 차림으로 뱀 꼬리로 허리띠를 묶고, 머리에는 뿌리가 ㄸ친 관 모양의 높다란 모자를 스고 있었다. 정중히 꿇어 엎드려 기도를 드리는가 하면, 다시 온몸을 꼿꼿이 일으켜 발굼치로 서기도 하고, 혹은 알맞게 손을 벌려서는 열심히 무츠이를 향해서 움직이기도 했다. 그리고는 위협하는 것인지 명령하는 것인지, 눈썹을 찌푸리고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동작은 굉장한 노력과 고통이 필요한 것 같았다. 말레이시아 인의 호흡은 거칠어지고, 그의 얼굴에서는 억수처럼 땀이 흘러내렸다. 별안간 그는 장승처럼 얼어붙더니 가슴 가득히 공기를 들이마시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고삐라도 쥔 듯이 힘있게 움켜잡은 손을 천천히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파비는 깜짝 놀랐다. 무츠이의 머리가 천천히 안락의자 등받이를 떠나 말레이시아인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끌려오지 않는가. 말레이시아 인이 손을 놓으니 무츠이의 머리는 덜컥 뒤로 자빠지고, 말레이시아 인이 다시 운동을 되풀이 하니 온순한 머리도 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잔 속의 검은 액체가 끓어오르고, 잔 그 자체도 가냘픈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릿빛 뱀들은 잔 주위에서 구불구불 물결쳤다. 그 때 말레이시아 인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눈썹을 높이 치켜올리고 눈을 크게 부릅드고는 무츠이의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죽은 사람의 눈까풀이 바르르 떨리면서 서서히 열려지고, 그 밑에서 납처럼 흐릿한 눈동자가 나타났다. 말레이시아 인의 얼굴은 개선 장군처럼 능글맞은 웃음으로 빛났다. 그는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길게 끄는 신음 소리를 간신히 목구멍 속에서 삼켜 버렸다. 무츠이의 입술도 같이 열려졌다. 그리고 짐승 같은 말레이시아 인의 외침에 따라 그의 입술에서는 약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파비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어떤 악마의 저주 속에 휩쓸려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파비도 같이 고함을 지르고는, 뒤돌아보지도 않고서 기도를 드리고 성호를 그으며 쏜살같이 집으로 도망쳐왔다. 13 약 세 시간 뒤 안ㅌ니오가 와서, 모든 준비가 끝나고 짐도 정리해서 무츠이 나리께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파비는 노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테라스로 나왔다. 짐을 실은 말이 몇 필 별관앞에 모여 있었고, 바로 현관 옆에는 건강한 검은 말이 두 사람을 태울만한 넓은 안장을 얹은 채 서 있었다. 거기에는 또한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몇 명의 하인들과 무장을 한 안내인도 서 있었다. 이윽고 별관 문이 열리고, 다시 평복으로 갈아입은 무츠이가 말레이시아 인의 부축을 받으며 이끌려 나왔다. 그의 얼굴은 죽은 사람과도 같았다. 그리고 손도 송장처럼 힘없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발을 옮겼다. 그리고 말에 올라 몸을 바로 세웠을 뿐만 아니라, 손을 더듬어 말고삐를 잡았다. 말레이시아 인은 그의 발을 발판에 괴고, 자기는 그의 안장 뒤로 뛰어올라 무츠이의 허리를 안았다.--이윽고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들이 걸음을 옮겨 바로 집 앞을 돌아가려 할 때, 파비는 무츠이의 까만 얼굴에서 두 개의 하얀 반점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틀림없이 무츠이가 그에게 눈동자를 돌린 것이리라‥‥말레이시아 인은 파비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여전히 비웃는 듯한 태도였다. 발레리야도 이 모든 광경을 보았을까? 그녀의 방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창문 뒤에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14 점심때 그녀는 식당으로 왔다. 아주 안정되고 명랑한 빛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피곤하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불안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지금껏 줄곧 느끼던 놀라움도 공포심도 없었다. 무츠이가 떠난 다음날 파비가 다시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을때, 그는 그녀의 모습에서 다시 순결한 표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한동안 그 모습을 잃어버려서 얼마나 괴로워했던가‥‥그런데 지금은 붓도 저절로 화포를 따라 가볍게 똑바로 달리는 것이었다. 두 부부는 다시 예전의 생활로 되돌아왔다. 무츠이는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리지고 말았다. 파비도 발레리야도 무츠이에 대해서 한 마디도 상기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의 장래의 운명에 대해서도 결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만 무츠이의 운명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도 비밀로 남아 있었다. 무츠이는 땅속으로 들어간 듯 사실 소명되고 만 것이다. 어느 날 파비는 그날 밤에 일어났던 숙명적인 사건을 발레리야에게 이야기해야 되겠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는 남편의 의향을 알았음인지 숨을 죽이고, 마치 무슨 타격이라도 기다리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래서 파비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결국 그 타격을 가하지 못하고 말았다. 어느 아름다운 가을밤, 파비는 성녀 채치리야의 초상화를 완성했다. 발레리야는 오르간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건반 위로 미끄러졌다. 그런데 문득 자기도 모르게 손 밑에서 언젠가 무츠이가 들려 주던 그 사랑의 개가가 울려 나왔다.--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결혼 후 처음으로 새롭게 눈드기 시작한 생명의 고동을 마음 속에 느겼다. 그녀는 몸부림치며 손을 멈추었다. "내가 왜 이럴까? 아니, 그렇다면‥‥" 기록은 이것으로 끝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