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황제 지은이:톨스토이 출판사:오늘의 책 옮긴이의 글 선과악의 경계는 어디인가? `전쟁과 평화`라는 대작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톨스토이는 어떤의미에서는 현대의 작 가들 처럼 시대의 아픔을 어렵게 써내려 가는 소설가라기 보다 귀에 익은 민담이나 교훈을 쉬운 이야기로 펼쳐보이는 설교자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톨스토이를 판단하게 되는 근거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이글에서 미래의 예술가는 부자들을 잠시동 안 즐겁게 해주었다 곧 잊혀지고 마는 그런 소설이나 그림이나 음악을 만들기 보다는 다양 한 세대와 다양한 계층의 뭇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그런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꾸미기 위해 세웠던 원칙은 세가지 였다. 첫째는 톨스토이의 예술론에 어긋나지 않는 글, 누구나 쉽게 읽고 그 뜻을 생각해 볼수 있는 글이어야 했다. 그러나 동화처럼 단 선적인 글보다는 조금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면 더욱 좋았다. 둘째는 지금 까지 우리에게 소개되지 않은 글이어야 했다. 마지막 셋째로는 소위 IMF 체제라는 힘든 상 황에서 우리에게 삶의 교훈을 주면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글이어야 했다. 다행이도 이 책에서 선별된 글들은 이런 원칙들에 충실했다. 적어도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서점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국내 에서 번역된 톨스토이 작품 중에 이 책에서 소개된글은 없었다. 또한 글의 수준도 중고등학 생이면 충분히 이해할수 있는 글들이었다. 물론 IMF라는 괴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인들에게도 `극복과 인내`라는 교훈을 전해 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빈부의 격차가 커지 고 중산층이 소멸되어 가는 우리의 현실에서 가진자와 갖지 못한자,달리 말하면 부자와 가 난한 자의 삶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이라는 점이다. 톨스토이는 `죄인은 없다`에서 부자의 편도 아니고 가난한자의 편도 아닌 중립적인 입장 에서 글을 쓰려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부자들에게 가난한사람들의 편을 든다고 불평을 불러 일으키지 않고, 가난하고 학대 받은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온전한 진실 만을 글로 옮기겠다고 말한다. 이런점에서 `젊은 황제`는 권력이든 제물이든 가진자의 역 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왜곡된 사회적 현상을 계속유지 할 때,세상은 필연적으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세상을 그들이 원하는 데로 만 들어 갈수 있다는 헛된 야망은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황폐하게 만들고, 미래를 짊어질 젊 은 세대가 병들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글에서 톨스토이는 젊은 황제의 선택을 물음표로 남긴다. 하지만 가진자들의 희생이 없 을 때, 그결과가 어떠한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확인할수 있었다. 그러나 `무도회가 끝난뒤` 는 선과악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숙고를 요구한다. 가진자는 무조건 악의 편인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우연히 목격한 악의 모습에서 평소에 정중했던 모습까지 위선으 로 비춰진다. 과연 선과악의 경계는 어디이고, 우리의 삶에서 환경이란 요소는 어떤 힘을 갖는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한순간이 삶 전체에 영향을 미 칠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어는 한순간도 타락을 꿈꾸어서는 안된다. `악 마`는 이런 점에서 보편적 진리가 개인적 판단에 우선함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 타락을 선택하지만, 스스로는 언제든지 극복할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타락의 길에는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깊은 수렁이 기다리고 있다. 타락은 자기와의 싸움에서의 패배이다. 이글에서 톨스토이는 과거 텔레비젼 코메디 프로그램`인생극장`에서 처럼 두가지 선택의 길을 보여준다. 그러나 타락후에는 어떤 길을 선택하든 비극만이 남는다. 타락은 한순간의 한풀이일 따름이다. `세죽음`에서 우리는 세 가지 형태의 죽음을 보게 된다. 하나는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가난한 마부의 죽음이며, 다 른 하나는 가족 모두의 슬픔을 강요하는 부잣집 마님의 죽음이다. 마지막하나는 묘석을 위 해서 베어지는 나무의 죽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세형태의 죽음을 통해서 세가지 유형 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가난이 자랑이 아니며 풍요가 자랑인 것은 아니다. 결국 가난한 사 람이라고 선의 편이 아니며 부자라고 해서 악의 편은 아니다. 진정으러 선한사람은 묘석으로 쓰이기 위해 베어지는 나무와도 같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누가 악이고 누가 선일까? `죄인은 없다`는 이런 의문에 추상적인 대답을 던져준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모두가 자기는 선이라 주장하며, 모든 행위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사람의 눈에만 악으로 보일 따름이다. 이 런 점에서 세상의 누구도 죄인은 아니다. 그러나 남의눈에는 모두가 죄인이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톨스토이도 작품 마지막에 이런 의문을 남겨 놓는다. 이 책에서 소개된 여섯 편의 글은 결코 어려운 글이 아니다. `젊은 황제`,`악마`,`세죽음`,`악은 유혹하지만 선은 참고 기다린다.`는 쉽게 읽어 내려갈 수 있는 글이다. 또한 줄거리가 있기 때문에 읽기도 편하 다. 다만 톨스토이는 어른의 입장에서 자기 생각을 간혹 글 속에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은 강요가 아니다. 작가 의견의 피력일 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받아들여도 좋고 그렇지 않아 도 좋다. 독자 나름의 생각을 그 부분에 집어넣어도 상관없다. 그런 글쓰기 덕분에, 하얀 턱수염을 기른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톨스토이가 마치 우리 앞에서 옛날 이야기를 해 주는 것처럼 편하고 실감나게 읽어내려 갈 수 있다.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종교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사랑과 희생`,그리고 `극복과 인내`가 작은 부분일지라도 우리 삶의 한 부분 을 차지할 때,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또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가진자의 나눔이 있을 때 사람과 희생이 꽃피울 터전이 마련될 것이며, 그렇게 할 때 극복 과 인내의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생극에서 강주헌씀. 젊은 황제 피곤에 지친황제는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잠깐 잠이 든다. 낯선 남자의 손길에 이끌려 나라 곳곳을 가보게 되는 데. 젊은 황제가 막 왕위에 올랐다. 그는 예전의 황제들 처럼 5 주동안 단 하루도 쉴 틈없이 일해야 했다. 황제는 매일 보고회에 참석하고, 서류에 서명하 고, 그를 찾아온 대사들과 고위 공직자들을 접견하고, 군대를 열병해야 했다. 황제는 피곤 했다. 지루한 행로와 갈증에 지친 여행자가 물 한 모금과 잠시의 휴식을 갈망하듯이, 황제 도 접견과 연설과 열병에서 벗어나 단 하루만이라도 쉴수 있기를 고대했다. 아니,단 몇 시 간만이라도 바로 한 달 전에 결혼한 아름답고 영리한 젊은 아내와 단 둘이서 평범한 사람처 럼 지낼수 있기를 열망했다. 어느덧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었다. 젊은 황제는 그 날 저녁만큼은 마음 편히 쉴수 있도록 모든 일을 철저히 매듭지어 두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황제는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국무 위원들이 그에게 검토하라고 남겨 두고 간 서류들을 밤늦게 까지 살펴보아야 했다. 다음 날 아침 황제는 데 데움과 군 열병식에 참석했고, 오후에는 공식적인 외국 방분객들을 접견했 다. 그 후 황제는 세 장관의 보고를 들어야 했고, 많은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윤허를 내려 야 했다. 재무성 장관과의 회의에서는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인상시키려는 법안에 동의해 줌으로써 앞으로의 국가 수입에 수백만 루블이 추가될 것으로 예상 되었다. 또 크라운 시의 러시아 각 지역에서의 브랜디 판매를 인가했고, 마을마다 상점에서 주류를 판매하는 것을 허용하는 칙령에 서명했다. 이렇게 영혼을 팔아먹는 조치를 통해서도 국가의 주수입이 상당히 증가될 전망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금융 협상을 위해 필요한 새로운 국채 발행을 허가했다. 법무성장관은 스나 이더 남작의 승계권을 둘러싼 복잡한 소송 사건을 보고했고, 젊은 황제는 서명으로 그 사건 을 종결지은 다음, 부랑자를 처벌하기 위한 형법 1830조의 적용에 관련된 새로운 조례를 승 인했다. 내무성 장관과의 회의에서는 연체되고 있는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명령을 비준했으 며, 국교를 반대하는 파벌주의자들의 박해에 관련하여 일련의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내용 이 담긴 명령서에 서명했다. 또한 계엄령이 예전부터 시행되고 있는 지방들에 대해 계속적 으로 계엄령을 시행한다는 법안에도 서명했다. 국방성 장관과는 징병을 활성화하고, 훈련을 위반했을 경우의 처벌을 강화하기 위해서 새 참모총장을 임명할 계획을 세웠다. 계속되는 업무 때문에 젊은 황제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 진솔한 대화는 있을 수 없었고, 단지 의례적인 대 화들만 오고 갔다. 마침내 피곤한 만찬이 끝나고 손님들이 모두 떠났다. 젊은 황제는 안도 의 한숨을 내쉬며 기지개를 활짝 폈다. 온갖 훈장과 장식이 달린 요란한 황제복을 벗고, 왕 위를 계승받기 전 입곤했던 자켓으로 갈아입으러 궁전으로 돌아갔다. 젊은 왕비도 야회복을 벗고 마침내 황제와 단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만찬 자리에서 물러 나왔다. 황제는 일렬로 나열해 꼿꼿이 서있는 하인들 앞을 지나 침실로 들어섰다. 무거운 황제복을 벗어 던지고 가벼운 자켓으로 갈아입자,젊은 황제는 일에서 벗어난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 다. 자유, 즐겁고 건강한 청춘의 삶, 그리고 사랑의 의식에서 용솟음치는 온화한 감정이 황 제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황제는 소파에 털썩 주저 앉으며 다리를 쭉 뻗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는 램프의 은은한 그림자의 눈길을 던졌다. 어렸을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기 분 잠자리에 들고 픈 야릇한 즐거움,이겨 낼수 없을 것 같은 졸음 이 갑자기 그에게 휘몰아 쳤다. 그런 기분에서도 황제는 생각했다. `곧 아내가 침실로 오겠지. 내가 잠든 것을 본다 면... 안돼, 지금 잠들수는 없어.` 황제는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손바닥으로 뺨을 감싸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너무 행복했다. 이 처럼 즐거운 상태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을 따름 이었다. 그 때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현상이 그에게 일어났다. 언제, 어떻게인지 알 수 없 는 사이에 황제는 잠이 들고 말았다. 황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또 전혀 바라지도 않았는데 현실의 행복을 아쉬워할 틈도 없이 꿈나라로 들어갔다. 황제는 죽음과도 같은 깊 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동안이나 잠이 들어 있었는지 황제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어깨를 살며시 건드리는 촉감에 황제는 깜짝놀라 잠에서 깨었다. 그 때 황제는 생각했다. `사랑하는 아내인가? 틀림 없이 그녀일거야. 깜박졸다니 정말 부끄럽군!` 그러나 눈앞에 서있는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 다. 황제는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불빛에 눈이 부셔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기대하던 아 름답고 매력적인 신의 창조물이던 왕비가 아니었다.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젊은 황제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남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낯선 사람이었지만 황제는 놀라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이고 좋아했던 사람인 것 같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이고 좋아했던 사람인 것 같았다. 게다가 황제가 자신을 믿는 만큼이나 그 남자를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황제는 사랑하는 아내를 기대했지만 아내 대신에 그 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낯선 남자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젊은 황제는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았고 놀라지도 않았다. 오 히려 그 남자의 출현이 너무도 당연할 뿐 아니라 꼭 일어나야 했던 일처럼 느껴졌다. 낯선 남자가 말했다. `가시죠!` 젊은 황제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지만 낯선 남자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죠 갑시다.` 그러나 곧 황제가 물었다.`그런데 어떻게 가 지?` `이렇게 하면 갈 수 있습니다.` 낯선 남자는 황제의 이마에 손을 댔다. 그러나 황제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황제는 얼마 동안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의 식을 되찾았을 때 황제는 자신이 이상한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마 주친 것은 질식할 것 같은 지독한 오물 냄새였다. 황제가 서 있던 곳은 넓은 통로로, 두 개 의 희미한 등불이 붉은 빛으로 밝혀 주고 있었다. 통로 한쪽으로는 두 터운 벽이 늘어서 있었고 간혹 철 틀에 끼인 창문이 보였다. 맞은 편 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들이 있었다. 통로에는 군인들이 벽에 기대 선 채 잠들어 있었다. 숨을 죽여 말하는 듯한 목소리가 문 쪽에서 들려 왔다. 그소리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여 러 사람의 것 이었다. 낯선 남자는 여전히 젊은 황제의 곁에 서서,부드러운 손으로 황제의 어깨를 누르며 첫 번째 문 쪽으로 밀었다. 보초는 그 두사람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젊은 황제는 낯선 남자의 손길에 굴복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 같았다. 황제는 첫 번 째 문으로 다가섰다. 놀랍게도 보초는 그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지만,그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보초가 황제 앞에서 차려 자세를 취하지도 않았고 경례를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 다. 문에는 조그만 구멍이 있었다. 황제는 어깨를 누르는 손의 재촉에 따라 문에 좀더 가까 이 접근해, 작은 구멍에 눈을 가져 갔다.문 가까이 다가 서자 질식할 것 같은 고약한 냄새 가 더 짙어 졌다. 젊은 황제는 그 자리에서 머뭇거렸다. 하지만 낯선 남자의 손은 계속 황제를 몰아 세웠 다. 황제는 몸을 앞으로 굽히고 구멍에 눈을 댔다. 갑자기 냄새가 사라진 것 같았다. 황제 의 눈앞에 펼쳐진 모습이 후각을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길이가 10야드,폭이 6야드는 됨직 한 커다란 방에는 발목까지 오는 긴 잿빛 코트를 입은 여섯 명이 벽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 하고 있었다. 그 중 몇몇은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맨발이었다. 그 방에는 모 두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 황제의 눈에는 한결같은 보폭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만이 보였다. 서로 마주치며 끊임없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잽싸게 발걸음을 내딛고, 벽에 다다르면 급히 방향을 선회하는 그들의 모습은 보기에도 끔찍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오로지 자기 생각에만 열중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 다. 젊은 황제는 언젠가 이와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동물원의 호랑이가 꼬리를 흔 들면서 소리 없이 우리 속을 서성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때 호랑이도 창살 앞에 이르면 조용히 방향을 바꾸었고,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 었다. 그 사람들 중에 농부로 보이는 젊은이가 있었다. 곱슬머리에 핼쑥한 안색과 인간이 없이 사악해 보이고 골몰한 듯한 눈빛만 아니면 꽤 잘생긴 얼굴이었다. 또 한 사람은 유태 인으로 몸에 털이 많았고 우울해 보였다. 세 번째 사람은 대머리에 홀쭉한 노인으로 그곳에 갇힌 이후로 길렀는지 철사 같은 수염이 얼굴에 뻗어 있었다. 네 번째 사람은 무척이나 거 구였고 잘발달된 근육과 약간 함몰된 이마와 납작한 코를 가지고 있었다. 다섯 번째 사람은 어린 아이와 다름없었다. 키가 크기는 했지만 피골이 상접한 것이 폐병환자 처럼 보였다. 여섯 번째 사람은 작은 체구에 피부가 검었고, 신경질 적이고 성급해 보였다. 걷는다기 보 다는 거의 뜀박질하는 수준이었고 계속해서 무엇이라 중얼대고 있었다. 젊은 황제가 들여 다 보고 있던 구멍앞을 지나 그들 모두가 빠른 걸음으로 이리저리 걷고 있었다.황제는 그들 의 얼굴과 걸음걸이를 관심 있게 지켜 보았다. 그들을 세밀히 지켜보던 황제는 마침내 방한 구석에 상당수의 다른 사람들도 있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들은 둥그렇게 옹기종기 모여있거나, 침대로 사용되는 선반위에 누워 있었 다. 문앞에 바싹 붙어 서 있던 황제의 눈에 양동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견디기 힘든 악 취는 바로 그양동이에서 풍겨나오는 것이었다. 선반위에는 약 10 명정도의 사람이 외투로 온몸을 완전히 가린채 잠자고 있었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빨간 머리카락의 사내는 셔 트를 벗어들고 현관턱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벗은 셔츠를 등불에 비추어가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틀림없이 벼룩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머리카락이 눈 처럼 하얗게 샌 늙은이도 눈에 띄었다. 그 노인은 문에서 비스듬한 방향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몸을 구 부리고 가슴에 성호를 그리면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기도에 깊이 몰입하여 주변 모든 것 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젊은 황제는 생각했다. `이 곳은 감옥이야. 정말 불쌍한 생각이 들어. 끔찍한 생활이야. 그러나 어쩔수 없는 거야. 전적으로 그들 잘못이니까.` 그러나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 자 안내역을 맡았던 낯선 사람이 즉시 그런 생각에 응답을 보내왔다. `이들은 모두 당신의 명령에 의해 여기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들 모두가 당신의 이름으로 선고를 받았습니다. 비록 당신의 인간적 판단에 따라 지금과 같은 처지에 빠져 있지만, 이들 대다수가 당신이나 이들을 재판하고 지키고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낯선 남자는 잘생긴 곱슬 머리의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친구는 살인자입니다. 하지만 저사람이 전쟁이나 결투 에서 상대를 죽이고 그무훈으로 포상을 받는 사람보다 죄가 많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 는 교육을 전혀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도둑들과 술주정뱅이들 속에서 살 아야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죄가 경감될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살인이라는 죄를 저질렀스니 다. 그는 한 장사꾼을 죽이고 물건을 훔쳤습니다. 그리고 저 유태인은 도둑입니다. 도둑떼 의 일원이었지요. 저눈에 띄게 몸집이 거대한 사내는 말을 훔친죄로 이 곳에 끌려 왔지만 다른 죄수들에 비하면 죄인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자 보십시오!` 갑자기 젊은 황제의 눈 앞에 광활한 국경지대가 나타났다. 오른쪽으로 감자밭이 있었다. 나무들이 뿌리채 뽑혀 산 더미 처럼 늘어지고 서리맞아 검게 변해 있어다. 한 필지 건너마다 겨울 밀이 줄을 지어 심 어져 있었다. 저멀리 마을의 기와로 덮인 지붕들이 보였다. 왼쪽으로는 겨울 밀밭과 수확을 끝낸 그루터기가 있었다. 국경지대의 초소에 검어 보이는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방에서 사람의 모습이란건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총을 등 뒤에 걸쳐 매고 있었다. 개한마리가 그 의 발밑에 쪼그리로 앉아 있었다. 젊은 황제가 서 있던 바로 그지점에, 모자에 푸른 띠를 맨 젊은 러시아 군인 하나가 거의 황제의 발 밑에 앉아 있었다. 그는 어깨 위에 총을 걸쳐 놓고 담배를 피려는 지 종이를 말 고 있었다. 그는 젊은 황제와 낯선 남자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그들의 대화마저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황제가 그의 바로 앞에 서서`여기가 어딘가?`라고 물었을 때, 두리 번 거리기는 했지만 정작 대답한 사람은 낯선 남자였다.`프러시아의 국경지대입니다.` 그때 그들에게서 꽤 떨어진 곳에서 총성이 들렸다. 젊은 러시아 군인은 벌떡 일어섰다. 두 남자 가 몸을 바싹 굽힌 자세로 뛰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황급히 담배를 주머니에 쑤셔 넣 고, 그들 중 하나를 뒤쫓아 가며 소리쳤다. `서라! 서지 않으면 쏘겠다.!` 그러나 탈주자 는 뒤돌아 볼 뿐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무언가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놈!` 군인은 이렇게 욕을 해대면서 한 발을 약간 앞으로 내딛고 총에 얼굴을 대고는 ,오른손을 들어 올 리며 무언가를 조절한 후 목표물을 겨냥했다. 곧 탈주자가 뛰어가던 방향으로 총을 조준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총은 틀림없이 발사 되었다. 황제는 `아,연기가 나지 않는 화약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탈주자는 비틀거리 며 앞으로 몇걸음 더 내디 뎠지만 몸이 점점 앞으로 숙여지며 마침내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 았다. 그러나 손과 무릎으로 기어가려 안간힘을 썼다. 결국 그는 땅바닥에 엎어진 채 움직 이지 않았다. 그보다 앞서 뛰던 또 한명의 탈주자가 뒤돌아 보았다. 그는 땅바닥에 엎어져 있던 동료에게로 되돌아 왔다. 그는 동료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 했지만 곧 포기 하고 달아 나기 시작했다. 황제가 물었다. `대체 이런 모습을 왜 나에게 보여 주는 거지요?` `이들은 법을 집행하려고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입니다. 저 남자는 국가의 수입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살해당했습니다.` `저 남자가 정말로 죽었소?` 낯선 남자는 다시 젊은 황제의 이마에 손을 댔다. 또다시 황제는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번에는 작은 방에 있었다. 세관이었다. 한 남자의 시체가 바닥에 눞여 져 있었다. 희끗희끗한 수염, 매부리 코, 길게 찢어진 눈, 그러나 눈꺼풀은 굳게 닫혀져 있 었다. 두팔은 축 늘어져 있었고, 신발은 벗겨져 있었다. 뭉툭한 더러운 발가락은 똑바로 위 로 향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었다. 옆구리에 큰 상처가 보였다. 누더기로 변해 버린 겉 옻과 푸른색 셔츠는 피로 얼룩져 있었다. 여기저기 붉은 선혈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대부 분이 검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한 여인이 벽에 붙어 숄로 얼굴을 감싼채 울먹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시체로 변한 남자의 매부리코 ,위로 치켜선 발가락, 그리고 돌출된 안구를 응시 하고 있었다. 흐느끼고 한숨을 내쉬고 눈물을 훔쳐내는 동작을 일정한 간격으로 되풀이 했다.13세 정도 돼 보이는 예쁘장한 계집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크게 벌린채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8세 된 사내아이는 어머니의 치마 끝을 붙잡고, 죽은 아버지를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문이 여리면서 관리,장교,의사, 그리고 서류를 든 기록원이 들 어왔다. 그들 뒤를 따라 군인이 들어왔다. 그 남자를 쏘았던 군인 이었다. 그는 상관들 뒤 에 기운 차게 멈추어 섰다. 그러나 시체를 보는 순간 그는 창백해 지면서 온몸을 부들 부들 떨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떨구고 조용히 서 있었다. 관리는 시체로 변한 남자가 국경을 넘 어 탈출하던 사람이냐고, 또 그를 향해 총을 쏘았냐고 물었다. 군인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 했다. 입술이 떨렸다. 얼굴마저 일그러 졌다. `마..` 하지만 그는 차마 대답할수 없었다. ` 맞습니다.` 관리들은 얼굴을 마주대고 상의한 끝에 무언가를 써내려 갔다. `황제께서는 이런제도의 좋은 점도 보시게 될것입니다. 이번에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방 에서 두 남자가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한 사람은 머리카락이 잿빛이 된 늙은 노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젊은 유태인이었다. 젊은 유태인은 한 손에 은행 어음책을 쥐고, 노인과 흥 정하고 있었다. 그는 밀수품을 사고 있는 중이었다.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아주 싼값에 산 거요..` `압니다. 하지만 위험이..` 젊은 황제가 말했다. `정말 끔찍한 일 이로구만 .하지만 어쩔수 없어요.이런 제도는 필요한 것이요.` 낯선 남자는 황제의 푸념에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했다. `계속 보도록 하시지요.` 낯선 남자는 다시 황제의 이마에 손을 댔다. 황제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이번에는 어둑한 등불로 불을 밝힌 방에 서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여인이 재봉틀에 앉아 있었다. 여덟살박이 사내아이는 책상에 몸을 숙인 채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학생으로 보이는 소 년은 큰소리로 책을 읽고 있었다. 그 때 아버지와 딸이 시끄럽게 떠들며 방으로 들어왔다. 낯선 남자가 황제에게 말했다. `황제께서 영혼을 팔아먹는 조치에 서명한 결과를 보게 될것 입니다.` 여인이 말했다. `무슨 일이예요?` `아무래도 그 친구는 오래 살 것 같지가 않아.` `그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그 친구는 하루종일 술에 취해 살아 . 여인이 소리쳤 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정말이야. 겨우 아홉 살난 꼬마녀석도 그렇고 불쌍한 바 니아 모로쉬킨.` 아내가 물었다. `당신은 그분을 구하려고 무슨 일을 했ㅈ나요?` `할수 있 는 일은 모두 다 했어. 구토제도 주었고 겨자연고도 발라 주었지. 하지만 알콜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다구.` 딸이 말했다. `놀라운 일도 아니예요. 그집 식구는 모두 술꾼이예요. 아시 니아가 그중 나은 편이지요. 하지만 아니시아도 가끔은 취해 있어요.` 동생이 누이에게 물었다.`누나가 다니는 금주협 회는 어때?` `그런 사람들이 술을 마실 기회가 도처에 널려 있는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잇 겠니? 아버지는 술집 문을 닫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법이 그렇지 않은데 어떡하겠어? 게다가 나도 바실리 에르밀린에게 술집을 운영하는 것은 사람들을 술로 망치는 것이라고 설 득해 보았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망신을 주면서 도도하게 떠들어 댔어. `나는 황 제의 허가를 얻었다구. 내 사업에 잘못된 것이 있다면 , 황제 께서 술집을 허용하는 칙령을 내리시지도 않았을 거야 `라고 말이야. 끔찍한 일 아니니? 마을 전체가 지난 사흘 동안 술 에 취해 있었어. 잔칫날만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야. 술이 어떤 경우에도 이롭지 못 하다는 것은 이미 증명 되었다. 언제나 피해를 끼칠뿐이야. 결국 술은 치명적인 독이란 것 이 증명된 셈이지. 게다가 전 세계 범죄의 99퍼센트가 술 때문에 저질러 지고 있어. 음주가 금지된 나라에서는 도덕과 복지의 수준이 눈에 띄게 향상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어. 예를 들어 스웨덴이나 핀란드 같은 나라를 보면 알잖아. 민중을 도덕적으로 계몽시키면 음주를 금지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그런 계몽적 역할을 해줄 집단, 가 령 정부와 사제와 관리들이 음주를 부추기고 있는 셈이야. 하긴 정부의 주 수입원이 국민들 이 마셔 대는 술에서 나오니까. 결국 그들은 스스로 파멸하고 있는 거지. 국민의 건강을 빨 아 먹고 있으니까. 사제들 도 마셔대고,주교들도 마셔 대니까.` 다시 낯선 남자가 젊은 황 제의 머리를 만졌고, 황제는 정신을 잃었다. 이번에는 한 농부의 오두막으로 옳려 갔다. 농 부는 40대로 보였는데, 얼굴은 벌갰고 눈은 충혈 되어 있었다. 농부는 몹시도 화를 내며 늙 은 노인의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노인은 필사적으로 주먹을 피해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장 년의 농부는 노인의 수염을 잡고 세게 잡아당겼다. `창피해 죽겠어. 아버지를 때리다니.` ` 상관하지 마. 죽여버리고 말겠어! 시베리아로 끌려가도 좋아. 상관하지 말라구!`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술 취한 경찰들이 오두막으로 몰려들어와 아버지와 아들을 떼어 놓았다. 아 버지는 팔이 부러졌고, 아들의 수염은 뜯겨나가고 없었다. 대문간에서는 술에 취한 딸이 정 신 없이 취한 늙은 농부와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젊은 황제가 말했다. `동물과 다름없어!` 다시 낯선 남자의 손이 황제의 머리를 만졌고, 황제는 전혀 새로운 곳에서 정신을 되찾았다. 법정 안이었다. 뚱뚱하고 머리가 벗겨지고, 아래턱이 늘어지고, 거기다가 어울리지 않게 목걸이를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난 큰소리로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많은 농부들이 쇠창살 뒤에 서 있었다. 그런데 유독 누더기를 걸 친 한 여인만은 일어나지 않았다. 간수가 그녀를 밀쳤다. `자지마! 일어서라고 했잖아!` 여 자가 일어났다. 재판관이 판결문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위대하신 황제의 칙령에 따라....` 바로 그여자가 관련된 판결이었다. 그 여자가 지주의 탈곡장을 지나면서 반 다발 정도의 귀 리를 훔쳤기 때문이었다. 재판관은 그녀에게 두 달간의 금고형을 선고했다. 귀리를 도난당 했던 지주도 법정에 나와 있었다.재판관이 재판을 휴정하자. 지주가 재판관에게 다가가 악 수를 청하고 둘은 곧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음 판결은 사모바르 도난 사건이었다.또 통나무를 잘못 재단해 지주에게 손해를 입힌 사건의 재판도 있었다. 젊은 황제는 다시 정신 을 잃었다. 정신을 되찾았을 때 황제는 마을 한 가운데 있었다. 과로에 지친 지방경찰을 공격했던 남 자의 아내와 여섯 자녀가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시 새로운 장면이 펼쳐졌다. 시베리 아에서 한 부랑자가 채찍질을 당하고 있었다. 법무성 장관이 공포한 명령이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장면이 지워지고 다른 장면이 황제의 눈앞에 펼쳐졌다. 시계공인 유태인이 가족 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이유로 추방령을 받았다. 아이들은 울고 있고, 이삭의 후손인 유태 인은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 마침내 그들에게 타협점이 주어지고, 임시 움막에서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경찰서장이 뇌물을 받는다. 지방 기관장도 비밀리에 뇌물을 받는다. 세금이 걷혀진다. 암소가 팔려나가고, 공장 주인은 경감에게 뇌물을 주고 세금을 착복한다. 다시 마을 법정 장면이다. 판결이 집행된다. 채찍질이 시작된다. `일리아 바실리에비치. 나 를 용서해 줄 수 없겠나?` ` 안 돼!` 농부는 눈물을 터뜨린다. `알았어. 예수께서 고통받았 듯이. 그분께서는 너에게 고통받으라 말씀하셨어.` 또 다른 장면들이 펼쳐진다. 쉬튼데스트 가 해산되고 뿔뿔이 흩어진다. 결혼을 거부했고 성도의 매장을 반대하던 교파였다. 황실의 철로의 통행에 관련된 칙령이 선포된다. 군인들은 진흙탕속에 앉아 있다. 춥고 배가 고파 저주를 내뱉는다. 마리 왕비 재단에서 설립할 교육기관에 대한 칙령이 선포된다. 고아원 운영에는 부패가 마연되어있다. 쓸데없이 기념비가 세워진다. 성직자들 중에는 도둑까지 끼어있다. 정치 경찰의 힘은 더욱 강해진다. 한여인이 추적을 당한다. 국외추방을 판결받은 죄수용 감방이 세워진다. 가게 점원을 살인 했다는 죄목으로 한 남자가 교수형 당한다. 군사 훈련장이다.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훈련 에 조소를 보낸다. 집시들의 집단이다. 한 백만장자의 아들은 의무임에도 병역을 면제 받았 다. 대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 외아들은 징집당했다. 대학을 살펴본다. 교수는 병역을 면제 받았지만,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음악가들은 병역의 의무를 다해야만 한다. 병사들은 주색에 빠져 흥청망청하고 있다. 질병이 만연되어 있다. 탈영을 시도하던 병사가 있다. 그가 재판 을 받고 있다. 또 장교를 구타했다는 죄목으로 또 한 명의 병사가 재판을 받는다. 장교가 자신의 어머니를 모욕했던 까닭에 그랬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사형에 처해진다. 다시 많은 병사들이 사격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는다. 탈영을 시도하던 병사는 징계 부대에 보내지고, 죽도롤 채찍질당한다. 또 다른 병 사는 죄가 없음에도 채찍질 당하고, 상처에 소금이 뿌려진다. 결국 죽음을 맞는다. 장교하 나가 병사들의 돈을 훔친다. 장교들의 세계는 술잔치,주색잡기,도박,그리고 오만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백성들의 대체적 상황의 눈앞에 펼쳐진다. 아이들은 굶주려 점점 약해져 간다. 집에는 온갖 벌레로 가득하다. 노동과 복종, 그리고 슬픔이 쳇 바퀴 돌 듯 계속된다. 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 탐욕스럽고, 야망에 들떠 있고, 허영으로 가득한 장관들과 지방 기관장들은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려 안달이다. `대체 인간적인 심성을 가진 사 람은 어디에 있단 말이오?` `그런 사람이 있는 곳으로 안내 하겠습니다.` 슬루셀부르그에 외로이 갇혀 있는 여자용 감방이다. 한여자가 미쳐가고 있다.또 다른 여인 (여인이라기 보 다는 소녀이다)도 눈에 띈다. 그녀는 군인들에게 강간당해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이다. 유배형에 처해진 한 남자는 혼 자 괴로움을 씹으며 반쯤은 죽어있다. 중노동에 처해진 죄수들의 감옥, 여자들이 채찍질 당 한다. 너무도 많은 수 이다. 수십만의 선량한 백성들이 감옥에 갇히고, 왜곡된 교육으로 파 멸되어 간다. 자신들이 원하는 데로 백성을 길어낼 수 있다는 헛된 야망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황폐화될 뿐이다. 그러나 그 생각은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성 공은 있을 수 없고,예상했던 대로 파멸의 길을 걷는다. 그것은 옥수수 싹에서 이삭을 잘라 내 메밀을 만들려 했던 망상과도 유사하다. 옥수수마저 망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옥수수를 메밀로 바꿀수는 없는 법이다. 이렇게 이세상의 모든 젊은이, 젊은 세대들이 파멸되어 간다. 그러나 이 젊은이들을 파멸 시키는 사람들에게 재앙이 있으리라!` 당신이 그들 하나라도 파멸시킨다면 당신에게 재앙이 있으리라! 그러나 당신의 이름으로 파멸시켜왔던 수많은 사람들, 당신의 권력에 좌우되어 왔던 무수한 사람들이 당신의영혼에 목숨을 걸고 있다.젊은 황제가 절망에 싸여 소리쳤다. `대체 날보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는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고 싶지 않고, 채찍질하고 싶 지도 않고,타락시키고 싶지도 않고,죽이고 싶지도 않아. 나는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랄뿐이 야. 내 자신의 행복을 열망하듯이 나는 온 세상이 행복할 수 있기를 원해. 내이름으로 행해 진 모든 일이 전부 내책임이란 말인가? 난 도데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책임에서 벗어 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대체 무엇을 할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이 내 책임이 란 것을 인정할 수가 없어. 이 모든 것에 대해 내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면,나는 당 장 이 자리에서 자살해야 할거야. 진정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살아갈 자신마저 없어. 하지만 이 모든 사악한 현실을 어떻 게 하면 끝장 낼수 있을까? 국가의 존립 자체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데. 그래, 나는 이 나 라의 황제야! 나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자살이라도 할까? 아니면 퇴위해 버릴까? 그런 짓은 내 의무를 포기하는 거야. 오, 하나님. 하나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황제는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 났다. 황제는 처음에 `정말 꿈이어서 다행이야`라고 생각했 다. 그러나 꿈에서 보았던 숱한 장면들을 떠올리며 현실과 비교해보기 시작하자, 꿈에서 재 시되었던 문제들이 현실에서도 중요하고 해결되지 않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자 황제는 그 의 양어깨에 걸린 무거운 책임을 의식하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젊은 왕비와 그 날 저녁기대했던 행복에 맴돌지 않았다. 그에게 떠맡겨진 해결되지 않은 의문,` 무슨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집중되어 있었다. 황제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일어나 옆방으로 건너 갔다. 선왕의 협력자이자 친구였던 늙은 간신이 젊은 왕비와 방 한 가운데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왕비는 남편인 황제 를 찾아오던 길이었다. 황제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늙은 간신에게 꿈에서 보았던 것을 말해 주었고,꿈이 그의 마음에 남겨 놓은 것이 무슨 의미인지 물었다. 늙은 간신이 대답했다. ` 아주 고귀하신 생각입니다. 폐하께서 드물게 선량하심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용 서해 주신다면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께서는 황제가 되기에 너무도 마음이 착하십 니다. 폐하의 책임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현실은 폐하께서 상상하고 계시는 것과는 다릅니다. 백성들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모두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그들 개인의 잘못 때문에 가난한 것입니다. 오직 죄인 만이 처벌을 받을 따름이며, 비록 피할 수 없는 실수가 간혹 있기는 하지만, 그정도의 실수는 벼락과도 같이 우발적인 사고이거나 하나님의 뜻일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오로지 한 가지 책임 밖에 없습니다. 폐하의 임무를 용기 있게 실행에 옮기고, 폐하에게 주 어진 권력을 지키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백성들에게 최고의 황제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폐하께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하나님 께 용서를 빌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폐하를 인도 하시고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지금까지 용서를 바랄 어떤 잘못도 행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꺼이 폐 하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게다가 폐하의 선왕이셨던 폐하의 아버님 만큼이나 뛰어난 재능을 지니셨던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저 저희가 폐하께 바 라는 것은 부디 장수하시면서 저희의 끝없는 충성을 받아 주시고 총애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할 권리조차 없는 무뢰한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젊 은 황제가 왕비에게 물었다. `왕비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러나 자유로운 나라에서 교육 을 받았던 현명한 왕비는 간신과는 다른 대답을 했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폐하께서 그 런 꿈을 꾸셔서 저는 정말로 기쁩니다. 폐하께 무거운 책임이 지워져 있다는 폐하의 생각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저는 아 주 걱정스럽게 그 문제를 종종 생각해 보았습니다. 폐하께서 짊어질 수 없는 책임중 전부는 아닐지라도 조금은 벗어 던질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폐하께서 부담스 러워할 정도로 집중되어 있는 권력을 상당 부분 백성들에게, 백성들의 대표에게 위임 하는 것입니다. 폐하에게는 최고의 통치권만을 남겨두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국가 중대사의 전반적인 방향을 결정하는 권한 만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왕비는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내놓았다. 그러자 늙은 간신이 왕비의 의견에 반박하기 시작했다. 둘은 예절을 갗추었지만 무척이나 열띤 토론을 벌였다. 젊은 황제는 한참동안 둘의 논쟁을 지켜 보았다. 그러나 둘 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사라지고, 꿈속에서 안내해 주었던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오로지 황제의 마음 속에만 들려 오는 목소리 였다.`당신은 황제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이기도 합니다. 황제 당신도 인간입니다. 지금 늙은 간신이 떠들어 대고 있는 황제로서의 의무이외에도, 당신에게는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더 긴박한 의무가 있습니다. 신하들에 대한 황제로서의 의무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할 뿐, 인간으로서의 의무는 영원한 의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과의 관계에서 한 인간이 짊어 져야할 의무 입니다.또 당신 영혼을 향한 의무이기도 합니 다.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도 필요한 임무입니다. 당신은 과거의 관례와 앞으로 예상되는 것에서 행동의 지침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의무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황제는 눈을 떴다. 왕비 가 그를 깨우고 있었다. 젊은 황제가 세 방향 중 어느 길을 택했는지는 50년 후에야 밝혀 질 것이다. 세죽음 가을이었다. 대로를 사륜마차 두 대가 경쾌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앞선 마차에는 두 여인이 타고 있었다. 한 여인은 차림새로 보아 귀부인 처럼 보였는데 호리호리한 몸매에 창 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한 여인은 귀부인이 몸종으로 불그스레한 얼굴에 윤기가 흘렀고 뚱뚱한 편이었다. 하녀의 색 바랜 모자 아래로 엿보이는 짧고 마른 머리카락이 흘러 내렸다. 해진 장갑 아래로 엿보이는 붉은 손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렸 다. 주단 숄로 감싼 하녀의 넉넉한 가슴은 건강하게 들썩거렸다. 창 밖으로 스쳐 가는 벌판 을 쏘아보던 날카로운 검은 눈매가 여주인에게 머물렀다가, 곧 마차 구석구석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살펴보았다. 선반 위에 놓인 여주인의 모자가 하녀의 얼굴 앞에서 흔들렸다. 하녀의 무릎 위에는 강아 지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두발을 마차 바닥에 놓인 짐 꾸러미 위에 올려 놓았다. 두발이 짐 꾸러미와 부딪히는 소리가 스프링이 삐걱대는 소리와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뚫고 북 소리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여주인은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 놓고 두 눈을 감 고 있었다. 등받이 방석에 맡긴 몸이 가볍게 흔들렸고, 보일 듯 말 듯 상을 찌푸리며 기침 을 참으려 애썼다. 그녀는 하얀 나이트 캡을 쓰고 있었고, 핏기 없이 가는 목에는 푸른 머 플러가 둘러져 있었다. 기름을 발라 매끄러운 금발의 머리카락은 양쪽으로 똑바로 나누어져 모자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눈처럼 하얀 얼굴색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엿볼수 있었다. 병색 이 완연한 창백한 안색은 그녀의 품위있고 아름다운 자태마저 앗아가 버린 것 같았다. 뺨과 광대뼈는 결핵 때문에 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입술은 바싹 말라 들떠 있었다. 얇은 속눈썹은 그윤곽마저 사라져 버렸고, 여행용 외투로 움푹 꺼진 가슴을 덮고 있었다. 비록 두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는 피로감과 신경질, 그리고 만성 질환의 고통을 읽어 낼수 있었다. 하인은 마부석에서 등을 기댄채 졸 고 있었다. 임시로 고용한 마부는 경쾌한 목소리로 땀투성이의 말들을 재촉하며, 뒤에 따라 오며 소리치는 바루슈의 마부를 이따금씩 살펴 보았다. 일정한 속도로 달려가는 두 대의 마 차는 석회가 섞인 진흙길에 평행한 자국을 남겨 놓았다. 하늘은 잿빛으로 쌀쌀하게 느껴졌 다. 축축하게 젖은 안개가 들판과 길에 떨어지고 있었다. 마차 안은 화장수 냄새와 먼지 냄 새가 뒤섞여 숨이 막혔다. 환자가 마차에 머리를 기대어 살며시 눈을 떴다. 그녀의 커다란 두 눈이 반짝 거렸다. 짙은 눈빛이 너무도 아름 다웠다. `또 그래` 그녀는 이렇게 말하 며, 간혹 그녀의 다리를 건드리는 하녀의 외투 끝자락을 신경질적으로 밀어냈다. 손이 가늘 고 예뻤다. 그녀의 입이 고통으로 일그려 졌다. 마트리오샤는 두손으로 외투를 끌어 올렸 다. 그리고 힘차게 엉덩이를 끌어 올리며 여주인에게서 좀더 멀리 떨어져 앉았다. 그녀의 건강한 얼굴이 밝은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환자의 아름답고 짙은 눈이 하녀의 몸짓을 집요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두손으로 좌석을 움켜쥐고 살짝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힘이 부족해 일어날 수가 없었 다. 다시 그녀의 입이 일그려졌다. 그녀의 얼굴에는 체념에서 오는 분노의 빛이 역력했다. `나를 좀 도와 주겠어... 아,아니야. 필요없어. 혼자 해 보겠어. 이 쿠션들만이라도 등 뒤 에 받쳐 두지 않으면 좋겠어.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으면 이 쿠션들만이라도 건드리지 말아 줘!` 여주인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며 하녀를 쏘아 보았다. 마트리오샤 도 여주인을 쳐다 보았다. 아랫입술이 빨갛게 되도록 꼭 깨물었다. 깊은 한숨이 여주인의 가슴에서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 한숨으로 끝나지 않았다. 곧 발작적인 기침이 터져 나왔 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옆으로 돌려 버렸다.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 쥐고 있었다. 발작성 기침이 멈추자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리로 꼼짝하지 않았다. 두 대의 마차가 마을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마트리오샤는 포동포동 한 손을 숄 아래에서 꺼내며 가슴에 성호를 그렸다. 귀부인이 물었다. `무슨일이지?` `휴 게소예요,마님.` `그런데 왜 성호를 그었지?` ` 교회가 있어요, 마님.` 환자인 여주인이 창 밖을 내다 보았다. 그녀는 때마침 바로 앞을 지나고 있던 커다란 마을 교회를 온 눈으로 응 시 하며, 가슴에 천천히 성호를 긋기 시작했다. 두 대의 마차가 휴게소 앞에 거의 동시에 멈추어 섰다. 환자인 귀부인의 남편과 의사가 바루슈에서 뛰어내린 후, 곧바로 사륜마차쪽 으로 달려왔다. 의사가 귀부인의 맥박을 재어 보며 프랑스어로 물었다. `기분은 어떻습니 까? ` 남편도 프랑스어로 물었다. `여보, 피곤하지 않아요? 잠깐 마차에서 내리겠소?` 마트 리오샤는 짐꾸러기를 한쪽으로 모은 다음, 구석 쪽으로 당겨 앉았다.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 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환자가 대답했다. `걱정 말아요 어떻게 하나 똑같아요. 나는 내리고 싶지 않아요.` 남편 은 마차 곁에 잠시 있은 후 휴게실로 들어갔다. 마트리오샤도 마차에서 뛰어내려, 발끝으로 진흙길을 건너 울타리 안으로 들어 갔다. 아픈 여주인은 아직 마차 옆을 떠나고 있지 않던 의사에세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내가 아프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아침 식 사를 안 할 이유는 없지요.` 의사가 천천히 그녀에게서 떨어져서 휴게소 계단으로 서둘러 뛰어 가자,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 거렸다. `내 건강이야 그들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겠지. 그들은 모두 건강해. 그들에게는 어떻게 하든 똑같을 테니까.오 ,하나님!` 남편은 휴게소 안으로 들어서는 의사를 보자 말했다. `여기야,에두아드로 이바노비치. 내 여행 가방을 가 져오도록 했네. 그렇게 하면 집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의사는 밝은 미소를 띄고 두 손을 비벼 대며 대답했다. `충분히 고려해 볼 가치가 있어.` 남편이 한숨과 함께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 그런데 집사람은 어떤가?` `자네에게 여러 번 말했듯이, 지금 상태로는 이탈리아는 고사하고 모스크바까지도 가지 못할거야. 특히 이런 날씨에는 더 그렇지.` `그 럼 어찌해야 하는가? 오, 하나님!` 남편은 손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여행가방을 옮겨오 는 하인이 눈에 띄자 소리쳤다. `이쪽으로 가져 오게.` 의사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 했다. `도중 어디선가에서 멈추어야만 할 거야.` 남편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내가 더 이 상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나? 집사람을 말리려고 해 보지 않은 말이 없을 거야. 우리 재력에 대해서도 말해 보았고, 집에 남겨 두어야 했던 자식들에 대해서도 말해 보았고, 심지어는 내 사업에 대해서도 말해 보았네. 하지만 집사람은 요지 부동이었어. 그저 외국에서 살려느 계획만을 세워 두었지. 마치 건강한 사람처럼 말이야. 하지만 집사람에게 자신이 어떤 병에 걸려 있는 지 사실대로 말해 주면 그것 때문에 죽고 말거야.` `자네 집사람은 지금도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그렇게 알고 있는 편이 더 나을 거야, 바실리 드미트리히. 사람은 폐 없이 살 수 없어. 게다가 폐를 다시 자라게 하는 방법도 없어. 슬프고 힘든 일인 것은 알아. 하지만 어떻하겠 나? 그녀가 마지막 날까지 편하게 살고 가도록 해 주는 것이 내 책임이고 자네 책임이야. 지금 필요한 사람은 고해 신부야.` `오 하나님! 집사람이 마지막 유언을 할 때 내 기분이 어떨지 짐작이라도 해 보았나. 갈 데까지 가 보자구 하지만 나는 진실을 말 해 줄 수는 없 어. 자네도 지금 집사람 기분이 어떤지 아고 있잖아.` 의사는 고개를 의미 심장하게 저으며 말했다. `적어도 그녀에게 길이 얼어붙을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설득해보게. 어쩌면 여행중 에 일이 닥칠지도 몰라.` 관리인 딸이 외투를 머리부터 뒤집어 쓰면서 소리쳤다. `악시우 사,악시우사!` 관리인 딸은 발 끝으로 진창인 뒷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따라와. 쉬르킨 스카야 부인을 보러 가자. 그분이 폐병에 걸리셨대. 그래서 그분을 모시고 가나 봐. 나는 아직 폐병에 걸린 사람을 한 번도 본적이 없거든. `악시우샤도 문지방에서 뛰어내렸다. 두 소녀는 손을 잡고 문 밖으로 뛰어 내렸다. 두 소 녀는 손을 잡고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들은 살금 살금 마차 곁으로 다가갔다.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 보았다. 환자가 그들에게 얼굴을 살짝 숙여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호기심 어 린 표정에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외면 해 버렸다. 관리인 딸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 했다. `어머, 저런 . 저분이 얼마나 아름다우셨는데. 지금은 너무나 변하셨어! 너무 끔찍한 일이야! 너도 보았지? 악시우샤, 너도 봤지?` 악시우샤도 맞장구 쳤다. `그래, 너무 말랐 어! 다시 한번 가 보자. 우물에 가는 척하면서 슬쩍 보는 거야. 너도 보았지? 그분이 우리 를 외면하려 했지만 나는 똑똑히 보았어. 마샤, 너무 안됐지 않니?` 마샤가 대답했다. `그 래. 하지만 진창길이 지겨워!` 결국 둘은 집안으로 돌아갔다. 병색이 완연한 귀부인은 혼 자 생각했다. `그래, 내가 추악하게 변한 것이 틀림없어. 그러니까 서둘러야 해. 서둘러 해 외로 나가야만 해. 해외에 가면 건강이 금방 회복될거야.` 남편이 입에 무언가를 가득 담은 채 다가오며 물었다. `여보,기분이 어때요?` 아내는 못 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항상 똑같은 질문이야. 게다가 입에다 먹을 것을 가득 담고 말이 야!` 그녀는 이를 악물고 투덜대며 대답했다. `별일 없어요` `하지만 여보, 이런 날씨에 여행을 계속하다 당신 건강만 악화될까 걱정이야. 에두아르드 이바노비치도 같은 생각이야. 우리 돌아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녀는 분노의 침묵만을 지켰다. `앞으로 날씨가 좋아 지면 길도 좋아질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당신에게도 훨씬 나을 거야. 그 때가 되면 우리 모두가 함께 떠날 수 있을 거야.` `미안하군요. 만약 당신 말을 듣지 않고 진작에 출발했 더라면 지금쯤엔 베를린에 있었을 것이고,건강도 완전히 회복됐을 거예요.` `여보, 대체 어쩌자는 거요? 당신도 알다시피 그 전에 출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잖아. 하지만 앞 으로 한 달만 기다리면 당신도 훨씬 괜찮아질 거야. 내 사업도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럼 아이들도 데리고 떠날 수 있을 텐데...` `아이들은 건강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해요.` `하지만 현실을 생각해 보라구.이런 날씨에 만에 하나라도 당신건강이 길에서 악화된다면.. 한달만 연기 하면 적어도 우리는 집에 있을 수 있잖소.` 귀부인이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집에 있어 보았자 무슨 소용이에요? 집에서 죽으라구요?` 그러나 `죽음`이란 낱말에 그녀 스스로 놀라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애원하고 미심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남편은 눈을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병색 이 짙은 귀부인의 입이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찌푸려졌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남편은 손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없이 마차에서 멀어졌다. 아내가 소리쳤다. `나는 꼭 갈거예요` 그녀느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두손을 꼭 쥐고 낮은 소리로 끝없이 기도하기 시 작했다. `오,하나님! 어찌 이러실수 있습니까?`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오랫동안 열정적으로 기도했다. 하지만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은 멈추지 않았 다.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늘과 들판과 길마저도 잿빛으로 우울해 보였다. 가 을 안개는 더 짙어지지도, 더 옅어지지도 않았다. 질척대는 대로와 지붕과 마차와 마부의 양가죽 외투 위에 한결같은 모습으로 단조롭게 떨어져 내릴 뿐이었다. 그러나 마부들만을 무심하게도 크로 명랑한 목소리로 떠들어 대면서 마차를 손질하며 기름칠 하고 있었다. 2 마차는 떠날 준비를 끝냈다. 그러나 마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부는 이즈바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즈바안은 따뜻했고 후덥지근 했으며 어두 웠다. 게다가 사람들 냄새와 빵 굽는 냄새, 양배추 냄새, 양가죽 옷 냄새가 뒤섞여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서너명의 마부가 이즈바안에 있었다. 요리사는 화덕 옆에서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화덕 위에는 양가죽으 로 온몸을 가린 환자 하나가 누워 있었다. 허리에 가죽 채찍을 매단 젊은 마부가 이즈바로 들어오며 소리쳤다. `크베오도르 아저씨! 크베오도르 아저씨!` 마부하나가 물었다. `왜 그 러니 수다쟁이야? 무엇 때문에 페드카를 찾는 거야? 네 마차에서는 벌써 너를 기다리고 있 던데.` 젊은 마부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벙어리 장갑을 고쳐 끼며 대답했 다. `아저씨 장화를 좀 빌리고 싶어서요. 내것은 다 닳았거든요. 왜, 아저씨가 잠들었나요? 아저씨, 크베오도르 아저씨!` 그 소리에 가냘픈 목소리가 대답했다. 창백한 얼굴이 화덕 위로 보였다. `무슨일이냐?` 말라빠진 넓적한 손이 외투를 걷어 내 고 있었다. 외투 아래로 뼈만 남은 어깨를 덮고 있는 더러운 셔츠가 보였다. 얼굴에는 핏기 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덥수룩하게 털이 자라 있었다. `마실 것 좀 갖다 주렴. 그래, 무슨 일이냐?` 젊은이는 그에게 조그만 물접시를 건네 주었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말했다. `페드 카 아저씨, 제 생각에 아저씨는 지금 새 장화가 필요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제게 좀 빌려 주시겠어요? 아저씨 한테는 더 이상 필요없잖아요.` 환자는 지친 표정이 역력한 얼굴 을 옻칠한 물접시로 떨구고 안간힘을 다해 조금씩 마셨다. 그 때문에 헝클어진 콧수염까지 구정물에 적실 정도 였다. 마구 엉킨 턱수염도 깔끔하지 못했다. 움푹 꺼지고 흐릿한 눈동 자가 힘들게 젊은 마부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그는 물을 마시고 난 후 손을 들어 젖은 입술을 닦아 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는 아무말 없이 어렵게 코로 숨을 내뿜었다. 그리고 젊은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남은 힘을 끌어모으려 애썼다. 젊은 마부가 말했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주기로 약속이라도 했나요?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그런데 불행이도 밖은 온통 젖어 있고, 저는 일을 나가야만 해요. 그래서 혼자 `페드카 아저씨에게 장화를 부탁해야겠구나. 아저씨 한테는 지금 장화가 필요 없을 테니까.` 하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저씨에게도 장화가 필요할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제 뜻은..` 갑자기 환자의 가슴에게 부글부글 끓는 소리와 울렁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 했다. 그는 몸을 구부리고 목에서 끓어 나오는 기침을 요란하게 해 대기 시작했다. 그 때 요리사가 전혀 예상치 못하게 뛰쳐나오면서 방안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래, 나도 저 사람에게 과연 장화가 어디에 필요한지 알고 싶어요. 저 사람이 화덕위에서 꼼짝못하고 기어 내려오지도 못한 것이 벌써 두 달째라구요 저사람은 지금 완전 히 망가졌어요! 저사람 가슴속이 얼마나 상했는지 분명히 들었잖아요. 그런데 장화가 어디 에 필요하겠어요? 저 사람하고 새 장화를 같이 땅에 묻혀줄 생각은 아니겠지요! 하나님도 이렇게 말하는 내 죄를 용서해 주실 거예요. 아니, 아주 오래 전에 용서하셨어요. 저 사람 은 지금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어요. 여기에서 다른 방이나 아예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해 요. 도시에 있는 병원 같은 곳으로 말이예요. 당신들,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저 사람이 이 방 전체를 차지하고 있어요. 이건 너무 지나쳐요. 하지만 옮겨갈 마땅한 다른 방도 없어요. 하지만 당신들도 이 곳이 깨끗해지기를 원하잖아요.` 그 때 휴게소의 관리 소장이 이즈바 안으로 들어오며 소리쳤다. `헤이, 세르요하. 빨리 나가 봐!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어.` 세르요하는 환자의 대답을 기다릴 새고 없이 뛰쳐나갈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환자는 기침을 하던 와중에도 그의 뜻을 눈빛으로 알려 주었다. 마침내 그가 기침을 억누르고 숨을 가늘게 내쉬면서 말했다. `세르 요하, 장화를 가져가도록 하거라.` 그리고 가르랑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대신, 내가 죽 으면 묘석이라도 세워 주겠니? ` `고마워요, 아저씨. 장화를 가져가도록 하겠어요. 대신 비 석, 예,묘석은 절대 있지 않겠어요.` 환자가 다시 힘들여 말했다. `자네들, 자네들이 증 인이야.` 그리고 다시 몸을 구부리며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마부 하나가 말했다. `그래, 우리모두 들었어. 자, 세르요하. 서두르게, 너도 알겠지만 쉬르킨스카야 부인께서 편찮으시 니까.` 세르요하는 보기 흉하게 낡아빠진 장화를 잽싸게 벗어, 나무 의자 밑으로 던져 놓 았다. 페드카 아저씨의 장화는 놀랍게도 그의 말에 딱 맞았다. 젊은 마부는 마차로 뛰어가 면서도 새 장화에서 눈을 뗄수가 없었다. 세르요하는 마부석에 올라 고삐를 고르기 시작하자, 다른 마부가 손에 기름통을 든채 소 리쳤다. `정말 멋진 장화인데! 여기 기름이 좀 있어. 그 장화를 공짜로 얻었어?` 세르요하 는 외투 끝자락을 다리 뒤쪽으로 걷어내고, 장화를 신은 두발을 번쩍 들어 보이며 소리쳤 다. `왜, 샘나나?` 그리고 세르요하는 채찍을 휙 소리나게 휘두르며 말들에게도 소리쳤다. `물론 너희들도 샘이 나겠지` 마침내 두 대의 사륜마차는 손님과 여행 가방과 짐 꾸러미를 싣고 짙은 가을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마차는 젖은 길을 뚫고 쏜살같이 달려 갔다. 한편 병에 걸린 마부는 숨막힐 것 같은 화덕 위에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가래를 뱉어 낼 힘 조 차 남아 있지 않았다. 있는 힘을 다해서 반대편으로 돌아 눕자 기침이 멈추었다. 저녁이 될 때까지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며 음식을 먹었지만, 누구도 환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밤 이 되자 요리사는 화덕위로 기어올라가 양가죽 겉옷을 환자의 다리 아래로 걷어 주었다. 환 자가 힘들게 말했다. `나스타샤, 화내지 말아 줘. 곧 이 방을 떠날 테니까.` 여자가 대답했 다. `괜찮아요, 괜찮아. 별일 아니에요. 하지만 대체 무슨 병인지 내게라도 말해 보세요.` `가슴이 갉아 먹히고 있는 것 같아. 무슨 병인지 하나님은 아시겠지!` `기침할 때 보면, 목구멍에 상처가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환자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몸 전체가 망가졌어. 죽음이 코앞에 이 르렀다구.` 나스타샤는 외투를 곱게 펴 환자의 몸을 가지런히 덮어 주며 말했다. `다리는 건초로 이렇게 덮어 보세요.` 그리고 나스타샤는 화덕에서 내려왔다. 밤새 이즈바는 초롱불 하나만이 밝혀져 어두컴컴했다. 나스타샤와 대여섯명의 마부들이 바닥과 나무의자에 흩어져 커다랗게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오직 환자만이 가냘픈 기침소리를 내고 간혹 가래를 뱉 으며, 화덕 위에서 몸부림치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침이 되자 그에게서 아무런 소리도 들 려오지 않았다. 요리사는 다음 날 아침 여명이 밝자 크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어제 멋 진 꿈을 꾸었어요. 크베오드르 아저씨가 화덕에서 내려와 땔감 하러 가는 꿈이었어요. 아저 씨는 `이리와 봐라. 나스타샤, 널 좀 도와 줘야 겠구나`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내가 `나무 를 무슨 힘으로 쪼갤려구요?` 라고 물었지만 아저씨는 도끼를 잡고 무척이나 빨리 나무를 쪼개더라구요. 너무 빨라 부스러기 하나 날리지 않았어요. 내가 `아니, 아저씨 아프지 않아요?` 라고 물 었더니, `다 나았어.`라고 말하면서 도끼 같은 것을 높이 쳐들어, 나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지요. 그리고는 잠에서 깼어요. 아저씨가 죽은 것은 아니겠죠? .. 크베오도르 아저씨! 아저씨!` 그러나 페드카는 움직이지 않았다. 잠에서 막 깨어난 마부하나가 말했다. `글세, 그 사람 죽은 건 아닐 거야, 그렇지?` 그 때 불그스레한 털로 덮인 메마른 손이 화덕에서 떨어져 내렸다. 차갑고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부가 소리쳤다. `빨리가서 관리인에 게 알려! 죽은 것 같아.` 페드카에게는 친척이 없었다. 그는 다른 지방 사람이었다. 다음 날 , 마부들은 묘지 뒤의 새 매장터에 그를 묻어 주었다. 나스타샤는 꿈에서 보았던 환상과 페드카 아저씨가 죽은 것을 처음에 어떻게 발견했는지 며칠을 두고 사람들에게 떠들어 댔 다. 3 봄이 왔다. 도시의 젖은 길을 따라 개울들도 얼음덩이 사이를 빠른 속도로 파문을 일 으키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황급히 오가는 행인들의 옷색깔과 목소리도 한층 밝아졌다.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에도 새싹들이 움을 틔우기 시작했고, 산뜻한 산들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정겨운 소리를 만들어 냈다. 온갖 곳에서 맑은 물방울이 맺히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 다. 참새들이 쉴새 없이 지저귀며 작은 날갯짓을 하며 날아다녔다. 양지바른곳, 담, 집, 나무 등 모든 곳이 활력과 광채로 가득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들의 가슴에도 젊음과 기쁨이 넘쳐흘렀다. 간선도로와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장원 앞에도 깨끗한 밀짚이 쌓여 있 었다. 바로 그 저택에 회외로 서둘러 떠나려 했던 귀부인이 누워 있었다. 그부인의 병세는 더욱 깊어졌다. 부인의 방문은 닫혀 있었다. 문 옆에는 부인의 남편과 나이가 들었지만 건 강해 보이는 부인이 서 있었다. 긴 의자에는 고해 신부가 고개를 숙인 채, 스톨로 무언가를 감싸안고 앉아 있었다. 한 구석에는 한 노부인이 언제라고 쓸 수 있도록 준비해 둔 것이었다. 또 한 명의 하녀는 노부인의 관자놀이를 비벼주고, 모자 아래로 흘러 내리는 잿빛 머리 칼을 쓸어 올려 주고 있었다. 남편이 그의 곁에 서 있던 중년의 부인에게 말했다. `예수님께서 누이와 함께 해 주실 거예요. 집사람은 누이를 무척이나 믿어요. 누이는 집사람과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해 야 할지 알고 있잖아요. 잠깐만이라도 집사람과 이야기를 나눠 주세요. 누님, 제발요!` 그 는 누이를 위해 문을 열어 주려 했다. 그러나 누이는 그를 제지 했다. 고개를 저으며 손수 건으로 몇 번이고 눈가를 훔쳤다. 마침내 그녀가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 `이 정 도면 내가 울고 있었다는 걸 모르겠지.` 남편은 너무 흥분해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노부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걸음 떼지 않고 되돌아섰다. 불안한 표정으 로 방 안을 서성댔다. 마침내 신부에게 다가 갔다. 신부가 그를 쳐다 보았다. 눈썹을 치켜 세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뻣뻣해 보이는 잿빛 수염마저 움찔거렸다. 남편이 흐느끼며 말했다. `하나님, 하나님, 어찌해야 합니까?` 고해 신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이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수염과 눈썹이 다시 움찔거렸다. 남편은 거의 절망에 싸여 소리 쳤다. `장모님마저 저기에 계십니다! 그분은 이 슬픔을 견뎌 내지 못할거예요. 신부님도 아 시겠지만 장모님은 집사람을 너무도 사랑하셨습니다. 그 누구보다 사랑하셨다구요. 그런데 집사람이... 모르겠습니다. 신부님, 장모님을 좀 달래 주십시오. 제발 장모님을 설득해서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 주십시오.` 고해신부는 일어나 노부인에게로 갔다. `사실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하지만 인정많으신 하나님 이십니다.` 노부인의 얼굴이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발작적으로 흐느꼈다. 잠시 후 노부인이 조금 은 안정된 모습을 보이자 신부가 되풀이해 말했다. `인정 많으신 하나님입니다. 한 가지 말 씀드릴까요? 제 교구에 환자가 한 분 계셨습니다. 마리아 드미트리에브나 보다 더 심한 상 태였습니다. 비록 장사꾼에 불과 했지만 그느 아주 짧은 시간 만에 회복 되었습니다. 약초 덕분이었지요. 바로 그 장사꾼이 지금 모스크바에 있습니다. 바실리 드미트리에비치에게도 그 장사꾼 이 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한번 실험해 보도록 하지요. 어쨌든 환자에게는 도움이 될 것입니 다. 하나님이 같이 하신다면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노부인이 말했다. ` 아니에요. 내 딸은 회복되지 못할 거예요. 왜 하나님은 내가 아니라 그 아이를 데려가시려는 걸까요?` 다 시 발작적인 흐느낌이 이어졌다.결국 노부인은 기절하고 말았다. 환자의 남편은 얼굴을 두 손에 묻고 방을 뛰쳐나갔다. 복도에서 처음으로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여섯 살 난 꼬마 였다. 꼬마는 있는 힘을 다해서 여동생을 쫒아가고 있었다. 유모가 물었다. `아이들을 할머 니께 데려다 놓을 까요?` `아니야. 그분은 아이들과 같이 있고 싶어하지 않을 거야. 정신 없다고 불평하실거야.` 꼬마가 아버지 앞에 멈추어 섰다. 한참동안 아버지의 얼굴을 뚫어지 게 쳐다보더니, 아버지 다리에 매달려 까불거렸다. 그리고 환호성을 내지르며 달려가다가 여동생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빠, 지금 말 놀이를 하고 있어요.` 한편 옆방에서는 남자 의 사촌누이가 환자 곁에 의자를 끌어다놓고 있었다. 그녀는 앞뒤의 쿠션에 몸을 의지한 채 사촌을 물끄러미 바라다 보았다. 갑자기 사촌의 말 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제발,그만둬요! 나한테 죽음을 가르치려 하지 말아요. 제발 나를 이런 어린애 취급하지 말아줘요! 나도 하나님을 믿어요. 나도 죽음이 뭔지 다 안다구요. 내 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정도는 알아요. 남편이 조금이라도 나를 존중해 주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몸이 회복되었을지도 몰라요. 모든 사람이 남편에게 나를 외국에 보내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말했어요. 하지만 어떻게 됐나요? 그래요, 하나님이 합당하다고 보신 그대로 예요. 우리 모두가 죄를 지었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로 모든 것이 용서되기를 바래요. 꼭 용 서 받고 싶어요. 내 자신도 마음의 소리를 들어 보려 노력했어요. 나는 많은 죄를 지었다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죄 값으로 너무 심한 고통을 받고 있어요! 이런 고통을 참고 견뎌 보 려 노력했었어요....` 사촌이 말했다. `그럼 고해 신부님을 들어오라 할까요? 용서를 받 고 나면 마음이 훨씬 편해질 테니까요.` 환자는 고개를 떨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기도했다. `오, 하나님. 죄인을 용서 해 주소서.` 사촌이 밖으로 나와 고해 신부에게 손짓을 해 보 였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환자의 남편에게 말했다. `그녀는 천사예요. ` 남편도 울었 다. 신부가 환자의 방으로 들어 갔다. 노부인은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방 안 에는 정적 만이 흘렀다. 잠시 후 고해 신부가 나왔다. 스톨을 벗으며 머리를 매만졌다. 신 부가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제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두분을 만나 보고 싶어합니 다.` 사촌과 남편이 환자 방을 들어 갔다. 환자는 가볍게 흐느끼며 성화를 쳐다보고 있었 다. 남편이 말했다. `좋아 보이는 군` `고마워요. 지금은 기분이 아주 죻아요. 날아갈 듯이 즐거운 마음이예요.` 희미한 미소가 환자의 얇은 입술가에 번졌다. 환자의 얇은 입술가에 번졌다. 환자의 말이 계속 되었다.`하나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에요. 그분이 존재하지 않는 다구요? 천만에요. 그분은 사랑이시고 전능하신 분이에요.` 그녀는 눈물이 가득한 눈을 다 시 한 번 성화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간절한 기도를 시작했다. 그녀에게 갑자기 어떤 생각 이 떠오른 것 같았다. 그녀는 남편을 손짓해 불렀다. 그리고 가냘픈 목소리로 투덜대며 말했다. `당신을 한 번 도 내가 바라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해 주지 않았어요.` 남편은 목을 쭉 내밀어 보이며 고 분고분 아내의 말을 들어 주었다.`그래, 무엇을 원하오?` `의사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당 신에게 얼마나 많이 이야기 했는지 몰라요. 여의사들이 있어요. 그들이면 치료할수 있을 거 예요. 신부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장사꾼.. . 그사람을 찾아 주세요.` `누구를 찾아 달라구? 죽어가는 여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세상에 당신은 정말 내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군요.` 그리고 그녀는 두눈을 감아버렸다. 의사가 환자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맥 박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의사는 남편에게 신호를 보냈다. 환자도 의사의 손짓을 알아보 고 깜짝놀라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사촌은 얼굴을 돌리며 눈물을 감추었다. 환자가 말했 다. `울지 말아요. 나 때문에 괴로워 하지 말아요. 그러시면 내 마지막 평안마저 빼앗는 거 예요.` 사촌은 그녀의 손에 입맞춤하며 소리쳤다. `당신은 정말 천사예요!` `아니예요. 여 기에 입맞춤을 해 주세요. 죽은 사람이나 손에 입맞춤하는 거예요. 오, 하나님!` 그날 저녁 환자는 세상을 떠났다. 관에 넣어진 시체는 저택의 응접실에 안치 되었다. 거대한 방에는 모든 문이 닫힌채 신부 혼자만 앉아 있었다. 신부는 콧소리를 섞어 이상한 목소리로 다웟의 시편을 읽어내려 갔다. 나뭇가지 모양의 은촛대에 꼿힌 양초의 밝은 불빛이 사자의 흰 눈썹과 밀랍처럼 새하얀 두 손과 수의의 빳빳이 접힌 곳을 비춰 주었다. 수의 때문에 무릎과 발이 섬뜩할 정도로 도드 라져 보였다. 신부는 한결같은 어조로 쉬지 않고 성경을 읽어주고 있었다. 정적한 죽음의 방에서, 신부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사라지고 이었다. 때때로 멀리서 아이들이 까불며 장난 치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네 얼굴을 가리라. 그러면 그들이 알지 못하리라. 네가 그들의 숨을 빼앗으라. 그러면 그들이 사망하고 먼지로 돌아가리라. 너는 성령을 찾으러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만들어지고, 너는 지상의 진실을 새롭게 하리라.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히 함께 하리라....` 사자의 얼굴은 위엄 있고 준엄해 보였다. 그러나 너무도 차갑게 보이는 눈썹과 굳게 다문 입술에는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그녀는 똑바로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 준엄한 성경의 말씀을 깨달았을까? 4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사자의 무덤위에 묘석이 세워 졌다. 그러나 마부의 무덤위 에는 아직 묘석이 없었다. 오직 새파랗게 올라온 잡초만이 한 남자가 과거에 살았다는 유일 한 증거로 남겨 놓은 무덤 위에 솟아나고 있었다. 어느날 휴게소의 요리사가 말했다. `세 르요하, 크베오도르 아저씨를 위해 묘석을 마련해 주지 않은 것은 죄악이고 부끄러운 일이 야. 너느 계속해서` 겨울에 해 줄 거야`라고 말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약속을 지키지 못 하는 이유가 뭐야? 나도 다 들었어. 어쩌면 아저씨가 너한테 그 이유를 물으려고 벌써 저승 에서 돌아왔을지도 몰라. 네가 묘석을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아저씨가 다시 돌아와서 네 숨 통을 끊어 놓을 거야.` 세르요하가 말했다. `알았어. 내가 해 주지 않겠다고 말한 적은 없 잖아! 약속한 대로 조만간 묘석을 마련할 생각이야. 1루블 반이면 묘석을 마련할 수 있어. 절대 잊지 않고 있다구. 조만간에 묘석을 세워 줄 거야. 읍내에 가게 되면 그 때 가서 꼭 사오도록 하겠어.` 늙은 마부가 거들고 나섰다. `너는 십자가라도 세워 주어야 했다. 네가 꼭 했어야 할 일이었어. 결코 옳은 일이 아니야. 너는 지금도 그 장화를 신고 있잖니.` `그래요 하지만 십자가를 어디에서 구할 수 있겠어요? 아저씨는 썩은 나뭇가지로 십자가를 만들라는 것은 아니겠지 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썩은 나뭇가지로 십자가를 만들다니? 절대 안된다. 조그마한 성의라도 보이거라. 평소보다 조금만 일찍 일어나서 도끼를 들고 숲으로 가서, 적당한 나무 한 그루만 베어 오면 된다. 큰 나무도 필요없다. 작은 것이면 십자가를 충분히 만들 수 있 을 거야. 그 나무를 베어내기 위해서 경비원에게 보드카를 뇌물로 줄것도 없다. 그까짓 사 소한 일로 보드카를 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어제 나는 차축이 부러졌어. 그래 서 숲에 가서 생나무 한 그루를 베어 냈지. 그런데도 참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다 음 날 아침 일찍, 동이 트기 전에 세르요하는 도끼를 들고 숲으로 갔다. 섬뜩한 기분을 자 아내는 안개가 모든 것을 덮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의 어슴프레 한 빛은 여전히 옅은 구름 에 가려 있었다. 땅에서는 잡초 잎새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고, 하늘로 우뚝솟은 나무 꼭대기의 잎사귀마저 도 꿈쩍하지 않았다. 때때로 덤불 속에서 새들의 날개짓 소리가 들려 올 뿐이었고, 옷자락 스치는 소리만이 정적한 숲속에 울려 퍼졌다. 갑자리 이상한 소리가 숲 끝에서 들리면서 곧 사라졌다. 그런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 였다.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꿈쩍 도 않는 늙은 나무 밑에서 그 이상한 소리가 단조롭게 계속해서 들려 왔다. 나무 꼭대기가 이상한 모양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잎새들이 무어라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던 작은 새가 두 번씩이나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곧 꼬리를 흔들어 대면 서 다른 나무를 찾아가 앉았다. 도끼 소리가 점점 자주 울렸다. 수액이 묻은 하얀 부스러 기가 이슬 맺힌 풀 위로 흩어졌다. 도끼를 내려 칠때마다 조금씩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가 흔들리며 옆으로 기울어 졌다. 그러나 곧 똑바로 세워지고 뿌리부터 흔들렸다. 잠 시 정적이 흘렀다. 다시 나무가 기울어 졌다. 나무 줄기에 가해지는 도끼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나무는 덤불을 할퀴며 축축한 땅위로 쓰러져 내렸다. 도끼 소리와 발자국 소리도 멈추었다. 작은 새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 며 하늘 높이 날아갔다. 새의 날개에 걸렸던 나뭇가지가 잠시 흔들렸지만 곧 다른 가지들 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나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운 마음으로 안개 속에 마련된 새로 운 공간을 향해 가지를 뻗고 있었다. 이윽고 햇살이 구름을 뚫고 하늘에서 비춰오기 시작했 다. 땅과 하늘 모두가 환해 졌다. 안개가 큰 파도 처럼 골짜기를 따라 떠내려 가지 시작했 다. 반짝이던 이슬도 푸른 잎새 위를 굴러다녔다. 속이 비칠 듯이 새하얀 구름도 하늘의 길 을 따라 흘러 갔다. 새들이 덤불 사이를 날아 다녔다. 저절로 행복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수액으로 가득한 잎새도 나무 꼭대기에서 즐겁고 만족한 듯 살랑거렸다. 살아있 는 나무의 가지들도 죽어 쓰러진 나무 위에서 천천히 위엄어린 모습으로 흔들리기 시작했 다. 무도회가 끝난 뒤 `... 그러니까 자네는 사람이 스스로는 선과 악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구만. 결국 문제는 환경. 다시 말해서 사람을 파멸의 길로 이끌어 가는 원인은 환경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이 순전히 우연에 다름 아니라고 믿고 있어. 내 경우를 예로 들어 보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의 변화 없이는 사람의 성격도 개조할 수 없다는 열띤 대화가 끝난 뒤, 우리의 자랑스런 친구 이반 바실리에 비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선과 악을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을 수 없다고 똑 부러지게 말한 사람은 없었다. 다만 이반 바실리에비치는 대화중에 그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그런 식으로 정리하고, 삶을 살아오면 서 직접 경험했던 것을 이야기 함으로써 그런 생각을 분명히 하는 버릇이 있었다. 게다가 그는 이야기를 하던 중에도 그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종종 망각 하였지만, 언제나 아주 신중하고 감동적인 자세로 이야기 했다 그는 그 날도 마찬가지 였다. `내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구. 내 삶은 환경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전혀 다른 것에 의해 변화 되었지.` 우리가 물었다. ` 그게 뭔데?` `이야기가 길어질 거야. 자네들을 이해시키려면 꽤 많은 것을 이야기 해야만 하니까.` `좋아. 해 보게` 이반 바실리에비치는 잠시 생각한 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인생은 단 하룻밤, 아니 하루 아침에 바뀌어 버렸지.` 우리중 하나가 물었다. `왜, 무슨일 때문에?` `내가 사랑에 깊이 빠졌기 때문이야. 물론 그 전에도 여러번 사랑에 빠졌었지만 그 때는 정말 심각했어.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이지만. 게디가 그녀에게는 지금 결혼한 딸까 지 있지. 그녀의 이름은 바린카B야.` 이반 바실리에비치는 성만을 언급했다. `지금은 50 대지만 여전히 눈에 띄게 아름다워. 젊었을 때, 정확히 18세 때에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조차 없었지. 훤칠한 키, 날씬한 몸매에다 우아하고 품위가 있었어. 그래 품위라는 표현이 적당해. 그녀는 언제나 허리를 세우고 똑바른 자세였어. 말하자면 본능처럼 말이야. 머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는 아름다운 용모와 훤칠한 키에 어울려 마치 여왕같은 분위기를 풍겨 주 지. 호리호리 한 몸매 (아니, 말랐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거야) 는 문제가 되지 않았어. 언제나 즐겁고 온화해 보였던 미소, 두눈의 매혹적인 빛, 젊음이 발산하는 정겨움이 없었 더라면, 정말 나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을 거야.` `이반 바실리에비치, 우리 넋을 잃게 만드는 묘사로군 그래!` `묘사, 그래 바로 그거야! 솔직히 자네들이 그녀를 제대로 평가하 도록 묘사할 능력이 내게는 없어.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자네들에게 이야기 하 려는 것은 내가 40년 전에 겪었던 일이야. 그 때 나는 지방 대학에 다니고 있었지. 지금 생 각해도 좋은 것 이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 우리 대학에서는 정치 동아리나 이 념 동아리가 없었어. 우리는 그때 젊었고 젊은이들답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면서 말이야. 나도 무척이나 쾌활하고, 생기 있고, 걱정이라곤 없이 살았어. 게다 가 돈도 부족하지 않았어. 멋진 말도 있었고 젊은 아가씨들과 썰매를 타러 다니기도 했어. 당시만 해도 스케이트는 유행이 아니었으니까. 친구들과 어울려 술잔치도 벌였지. 그 때 나는 샴페인밖에 마시지 않았어. 당시 학생들이 즐겨 마시던 보드카는 절대 마시지 않았어. 저녁 파티나 무도회는 내가 가장 즐겨찾던 오락 거리였지. 나는 춤도 꽤 잘추었고 그렇게 못생긴 얼굴도 아니잖아.`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부인이 끼어 들었다. `그렇게 겸손해 할 것 없어요. 당신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못 생겼 다니요! 상당히 풍채가 좋던데요.` `풍채가 좋다? 어쨌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 녀를 향한 내 사랑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축제 마지막 날, 나는 지방 귀족의 무도회에 참석 했지. 아주 성격이 좋은 노인으로 부자이면서도 너그러웠지. 황실 고관을 지낸 분이기도 했 어. 그분의 부인도 남편에게 버금갈 만큼 좋은 분이기도 했어. 그날 손님들은 모두 부인의 환대를 받았지. 부인은 자갈색 벨벳 드레스를 입고, 다이아몬드가 박힌 왕관을 쓰고 있었 지. 약간 살이 오른 어깨와 가슴은 피터 대제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초상화처럼 거 의 드러내고 있었어. 정말 즐거운 무도회였어. 멋진 밤이었지. 음악을 사랑하던 한 지주의 농노들로 구성된, 당시 꽤 이름을 날렸던 오케스트라를 위한 특별석까지 마련되어 있었어. 음식도 훌륭했고 샴페인은 강물처럼 넘쳐흘렀지. 비록 내가 샴페인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날 밤은 마시지 않 았지. 사랑으로 잔뜩 취해 있었기 때문이야. 대신 왈츠와 폴카를 추면서 바린카와 춤출 기 회를 계속 엿보았어. 바린카는 핑크빛 장식띠를 단 하얀 드레스를 입고, 하얀신을 신고,하 얀 염소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어. 그래서 뽀족한 팔꿈치까지는 올라오지는 않았지. 아니시 모프라는 꼴도 보기 싫은 기술자 녀석이 그녀와 마주르카를 출 기회를 빼앗아 가 버렸어. 오늘까지도 그녀석을 용서 할수 없어. 그녀가 무도장에 들어서자 곧장 춤을 청한 거야. 그 래서 그녀와 마주르카를 출수 없었어. 하지만 예전부터 점찍어 두었던 독일 아가씨와 춤을 췄지. 그날 저녁 그녀에게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 그녀에게 거의 말도 걸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았거든. 내 눈에는 핑크빛 장식을 단 흰 드레스 속의 훤칠하고 날씬한 아가씨밖에 보이지 않았으 니까. 발그스레 빛나고 보조개가 패인 얼굴, 온화하고 다정한 눈동자. 그것만으로도 나는 외롭지 않았어. 모두의 시선은 그녀에게 집중되었어. 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여자까지 말이 야. 그녀는 단연 눈에 띄었어.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구. 내가 그녀의 마주 르카 파트너로 처음부터 정식 지명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날 무도회에서 나는 마주르카 곡 이 흐르던 내내 당연한 것처럼 그녀를 독차지 했었지. 그녀는 대담하게도 무도장을 가로질 러 내가 있던 쪽으로 다가왔지. 꼭 나를 선택해 줄 기분이었어. 나는 선택받을 때까지 기다 리지 못하고 그녀를 향해 단숨에 뛰어갔지. 그녀는 내 직관을 미소로 답해 주는 것 같았어. 내가 다른 어떤 남자와 그녀에게 다가서자, 그녀는 잘못 생각했는지 내가아닌 다른 남자의 손을 잡으며 가냘픈 어깨를 살짝 낮추며 인사했어. 나에게는 아쉽다는 미소만을 지어 보이 고. 하지만 마주르카 곡에 왈츠 풍의 음악이 흐를 때마다 나는 그녀와 오랫동안 왈츠를 추 었지.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 쉬고 미소를 지어 보이며,`다시 한 번`이라고 말했지. 나는 계속해서 왈츠를 추었어. 육체라는 존재를 의식할 수도 없었어. `한 젊은이가 참견하고 나섰다. `저런, 당신 팔이 그 여자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을 텐데, 육체를 의식하지 않을수 있었을까요? 틀림없이 당신의 존재만이 아니라 그 여자의 육체까지 의식하고 있었을 거예요.` 이반 바실리에비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화가 치밀어오른 것 같았다. `요즘 젊은이라면 그랬겠지. 현대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요즘 자네들은 육 체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더군. 우리 시대는 달랐어. 그녀를 사랑하게 될수록 내 눈에 그녀는 육욕의 대상으로 보이지 않았어. 요즘 젊은이들이 다리를 섞는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런 것이 무엇인지 몰라. 자네들은 사랑하는 여인의 옷을 벗기지. 하지만 내 생각에 는, 알폰스 카르(그는 훌륭한 작가야)가 말한대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언제나 청동의 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는 표현이 너무 적절해. 우리는 결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 오히려 노아의 착한 아들이 그랬듯이 그녀의 나신을 가려 주고 싶었어. 자네들은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다시 한 젊은이가 말했다. `저 친구에게 신경쓰지 마세요. 계속 이야기해 주세요.` `나는 거의 그녀하고만 춤을 추 었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어. 오케스트라도 같은 마주르카 곡을 연이어 연주하 느라 완전히 지친 모습이었어. 자네들도 무도회가 끝날 때쯤이면 어떤지 잘 알잖아. 부모들 은 카드 테이블에서 일어나 응접실에서 야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하인들은 먹을 것을 준비하느라 이리저리 바삐 뛰어다니고 있었지. 거의 새벽 3시가 되었을 거야. 하지만 나는 최후의 순간까지 헛되이 보낼 수 없었어. 나는 마주르카 곡에 다시 한 번 그녀를 파트 너로 택했어. 우리는 지치도록 무도장을 휩쓸며 춤을 추었지. 춤이 끝나고 나는 그녀를 자 리로 데려다 주며 말했지. `야참이 끝난 후 카드릴에서도 파트너가 되어 주십시오.` 그녀가 미소를 잃지 않으며 대답했어.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물론이에요.` `당신을 절대 포기할 수 없어요.` 그녀가 대답했지. `어쨋든 제 부채를 집어 주시겠어요?` 나는 싸구려로 보이는 하얀 부채를 그녀에게 건네 주며 말했어.` `유감이지만 이놈을 버리고 싶은데요.` `당신을 위로해 줄것이 있지요.`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부채에서 깃털하나를 뽑아 내어, 나에게 주었지. 나는 그 깃털을 받아들었지. 그 때의 황홀감과 고마운 마음을 눈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더라구. 나는 말할 수 없이 기뻤어. 한 없이 행복하고 즐거웠어. 너무 좋았지. 내가 내 자신이 아닌 것 같더라 구. 이 세상에 서 있다는 기분이 아닐 정도 였어. 전혀 불길한 생각은 들지 않았어. 나는 깃털을 장갑속에 감추었지. 그녀에게서 한 걸음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어. 그 때 그녀는 훤칠하고 위엄있는 풍채를 한 그녀의 아버지를 가리키며 말했어. `저기좀 보세요. 사람들이 아버지께 춤을 추라고 재촉하고 있군요.` 그녀의 아버지는 연대장으로 은빛 견장을 자랑하 며, 무도장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몇몇 부인들과 어울려 서 있더라구. 그 때 여주인, 그러 니까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어깨를 드러내고 다이아몬드 왕관을 쓴 부인이 큰 소리로 그녀를 불렀어. `바린카, 이리 오너라!` 바린카는 출입구 쪽으로 달려갔지. 물론 당연히 나도 따라 갔어. 여주인이 연대장을 가리키며 말했어. `바린카, 네 아버지가 마주르카를 추는 모습을 보고 싶구나. 어떻게 좀 설득해 보아라. 피터 발디슬라보비치, 제발 부탁 좀 들어줘요.` 바린카의 아버지는 정말 멋지게 생긴 분 이었어.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어. 혈색도 좋았고 콧수염은 니콜라스 1세를 연상시켰어. 하 얀 구렛나룻이 콧수염까지 이어져 있었으니까. 곱게 빗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렸고 입술과 눈가의 밝은 미소는 딸의 그것과 다름 없었지. 체격도 정말 좋았어. 군인 답게 넓은 가슴을 가졌고 그 가슴에는 훈장이 번쩍거렸지. 강인해 보이는 어깨와 쭉뻗은 다리는 니콜라스 1세 황제가 공들여 키워놓은 모범적인 군인상 이었어. 우리가 출입구에 이르렀을 때에도 그녀 의 아버지는 스텝을 벌써 잊었다며 춤추기를 거절하고 계셨지. 하지만 우리를 보자 마자 밝 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팔을 왼쪽으로 우아하게 돌리며, 칼집에서 칼을 꺼내 옆에서 재촉 하던 젊은이에게 넘겨주고, 오른손에 끼고 있던 수에드 가죽장갑을 매만졌어. 그리고 미소 를 지으며 말했어. `모든 것은 규칙에 따르기 마련이지.` 그의 딸의 손을 잡고 4분의 1 정 도 몸을 돌려 서서 음악이 나오기를 기다렸어. 마주르카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그는 한 발을 힘차게 구른 다음, 다른 발을 앞으로 내밀었어. 처음에는 천천히 매끄럽게 시작 되었지만, 점차 발 구르는 소리와 부츠가 맞부딪치는 소 리와 더불어 힘차고 격렬하게 바뀌어 갔어. 그의 훤칠하고 위엄 있는 풍채가 방 전체를 휩 쓸고 다녔어. 바린카도 짧고 길게 스텝을 밟으며 아버지에 맞추어 우아한 율동을 보여 주었 지. 그 때 나는 주단 덧신 속에 감추어진 그녀의 앙증맞은 발을 보았지. 무도회장의 모든 사람이 두 부녀의 춤에 매료되어 있었어. 나 역시 그들이 너무 부러워 황홀한 기분으로 바라 보았지. 특히 노신사의 부츠에 깊은 감명을 받았어. 요즘 것처럼 앞 이 뽀족한 부츠가 아니었지. 싼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고 앞이 뭉특했어. 틀림없이 연대의 수선공이 만든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 딸이 무도회에 입고 나갈 드레스를 사주기 위해서 유 행하는 부츠를 사지 않고, 수선공을 시켜 만든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 그 때문에 앞이 뭉특 한 부츠가 나에게 너무도 깊은 감동을 주었던 거야. 그가 춤추는 것을 보고 젊었을 때에는 상당한 솜씨 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하지만 그 때는 몸이 상당히 무거워 보였고 우아하 게 내딛으려는 스텝에도 힘이 부족해 보였어. 그래도 이럭저럭 무도장을 두 번씩이나 돌아 내는 집념을 보였지. 춤이 끝났을 때 벌리고 있던 두 다리를 갑자기 딱 소리가 나도록 부딪치더니 한쪽 무릅을 꿇었어. 조금은 힘들어 보이더라구. 그러저 딸을 미소 띤 얼굴로 치맛자락 끝을 살짝 잡고 아버지 주위를 우아한 자태로 한 바퀴 돌았지. 무도장 전체가 박수 소리로 요란했지. 연대 장은 힘들게 몸을 일으키고는 두손으로 딸의 얼굴을 감싸주었어. 그는 딸의 이마에 입맞춤 해 주고 나에게 그녀를 건네 주더라구. 마주르카에선 내가 그녀의 파트너라는 뜻으로 받아 들였지. 하지만 나는 사양할 수 밖에 없었어. 그러자 그가 칼을 다시 칼집속에 넣고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어. `걱정할 것 없네. 거서 내 딸과 춤을 추도록 하게.` 첫 방울 이 흘러 나오면 병 전체의 내용물도 쉽게 흘러나오는 법이지. 바란카를 향한 내 사랑이, 내 몸속에 숨겨져 있던 사랑의 힘을 완전히 풀어놓은 것 같았어. 그 사랑이 그녀 곁을 맴돌면 서 온 세상을 껴 안는 것 같았어. 다이아몬드 왕관을 쓰고 엘리자베스 여왕 처럼 어깨를 드 러낸 여주인과 그녀의 남편, 그리고 초대된 모든 손님과 하인들, 심지어는 내 기분을 역겹 게 만들었던 아니시모프까지도 좋아졌어. 군에서 만든 부츠를 신고 딸과 너무도 닮은 미소를 지닌 바린카의 아버지에게도 다정함이 느껴졌지. 거의 황홀감이었어. 야참이 끝난후 나는 약속한 대로 그녀와 카드릴을 추었어. 전에도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매 순간 마다 행복이 더해 가는 기분이 었지. 우 리는 사랑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어. 그녀에게나 나 자신에게나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지 확 인해 보지 않았어.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으로 충분했어. 단 한가지 두려움이 있었지. 내 커다란 기쁨을 무언가가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었어. 집에 돌아와서 웃옷을 벗 기 시작했지. 잠을 자야 했으니까. 고민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어. 내 손에는 그녀가 부채 에서 뽑아 준 작은 깃털이 있었고 그녀 어머니를 따라 마차에 오르는 그녀를 부축해 주었을 때 그녀가 살며시 건네 준 장갑 하나도 있었으니까. 그 물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 지. 눈을 감지 않아도 그녀가 내 눈앞에 있는 것 같았어. 파트너를 선택하려 내 앞에 다가 오던 그녀의 모습이었어. 그녀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상상해 보는 것 같았어. 그녀가 달콤 한 목소리로 `자부심으로 가득한 남자, 맞지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 그리고 그녀가 해 맑은 얼굴로 나에게 손을 내밀었어. 야참이 끝나고 그녀는 내 샴페인 잔을 빼앗아 들고, 은근한 눈빛으로 유리잔 건너로 나를 바라보며 샴페인을 홀짝 거렸지. 나는 아버지와 미끄러지듯 춤을 추면서,부러워하는 손님들 을 자부심과 행복에 겨워 바라보던 그녀의 모습에서 순수함을 찾아볼수 있었지. 두 부녀는 내 마음속에세 하나가 되어 물밀듯한 감동을 안겨 주었어. 그 때 나는 지금은 운명을 달리 한 형과 함께 살고 있었지. 형은 외출하기를 즐기지 않았어. 특히 무도회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어. 게다가 대학에서 마지막 시험을 준비하느라 바빴고 너무도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어. 그 때 형은 잠들어 있었어. 형을 바라보았지. 얼굴을 베개에 묻고 이불로 얼 굴을 반쯤 덮은 모습이었어. 갑자기 형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누리고 있던 말 할수 없는 행복을 모르고 사는 형이 불쌍했어. 하인 페트루샤의 졸린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 카락에 너무도 측은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나는 발 끝으로 살금 살금 걸어 내방으로 건너가서 침대에 걸터 앉았어. 나는 너무 행복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 게다가 방이 너무 덥기도 했어. 나는 옷을 벗지 않고 조용히 현관으로 나 갔어. 다시 외투를 입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지. 무도회장을 떠났을 때가 거의 4시쯤 되 었을 거야. 집으로 돌아가서 머문 시간을 모두 더하면 두 시간 정도 흘렀을 거야. 그래서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동이 트려 하고 있었어. 축제날의 전형적인 날씨였어. 안개가 자욱했지. 도로는 물을 먹어 녹기 시작해 질퍽했고, 잎새에서는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고 있 었어. 바린카 가족은 넓은 들이 있는 변두리에 살고 있었어. 들 한편으로는 연병장이 있었 고 반대편으로는 여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가 자리잡고 있었지. 나는 텅 빈 좁은 길을 따라 계속 걸었어. 마침내 간선도로가 나타나더군. 도중에 나처럼 무작정 걷는 사람도 만났고 나 무를 가득 실은 썰매를 보기도 했지. 썰매는 도로에 깊은 자국을 남기며 달렸어. 말들도 마 구를 번쩍이며 일정한 보폭으로 힘차게 달렸어. 비록 등은 밀짚 매트로 가리고 있었지만 갈 기는 비에 젖은 모양이더군. 마부들은 큰 장화를 신은 탓인지 진흙을 썰매에 튀기면서도 말 을 재촉했어. 그래도 많은 생각에 잠긴 모습의 말들은 나에게 무척이나 자극적이고 매력적 으로 보였어. 그녀의 집이 있던 들판 가까이 다가서자 연병장 쪽의 들판 끝에 무척이나 크 고 검은 물체가 보이더군. 고적대 소리가 그 물체에서 들려 오는 것 같았어. 내 가슴도 노 래로 가득 차는 기분 이었어. 머릿속으로 마주르카 곡이 들려오는 기분이었어. 하지만 매우 조잡한 연주였어. 갑자기 기분까지 나빠졌어. 그 때 나는 `대체 뭐지?` 하는 궁금증이 생겼어. 들판 한 가 운데로 미끄러운 길을 피해 가며 고적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걸었어. 백 걸음쯤 걸어갔 을 때, 안개를 뚫고 검은 물체가 무엇인지 구별 할 수 있게 되었어. 군인들이 모여 있었던 거야. 나는 `아마 훈련을 받는 모양이군` 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나는 그 방향으로 계속 걸었어. 내 앞에는 더러운 외투를 입고 허리에 앞치마를 두른 대장장이가 걸어가고 있었지. 그는 뭔가를 잔뜩 짊어지고 있었어. 마침내 군인들이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어. 군인들은 총 을 내려놓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본 자세로 두 열로 서 있었지. 완전히 부동자세이더군. 그들 뒤에는 고적대가 도열해서 기분 나쁜 음악을 계속해서 울려 대고 있었지. 내 곁에 멈추어 서 있던 대장장이에게 물었지. `지금 뭐 하는 걸까요?` 대장장이는 화가 난 목소리로 대답 했어. `타타르인 하나가 탈영을 시도한 죄로 집단 구타를 당하고 있는 중이오` 그의 눈이 대열 끝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더군. 그래서 나도 그 쪽을 쳐다 보았지. 대열 사이로 흉칙 하게 생긴 뭔가가 나를 행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어. 그것은 바로 사람이었어. 허리 위로는 발가벗겨져 있었고, 그를 몰아세우던 두 군인의 총 끝에 연결된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어. 그의 옆에는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쓴 장교가 걸어오고 있더군.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낯익은 것 같아 보였어. 죄수는 양쪽에서 비오듯 가해지는 주먹질 을 받으며 앞으로 기어왔어.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두 다리는 눈밭에서 질질 끌리고 있었지. 그때 그가 뒤로 나동그라졌어. 그러자 그를 몰아세우던 두 군인들이 앞쪽으로 밀어냈어. 이 번에는 앞으로 나뒹굴더군. 두 군인이 그를 일으켜 세웠어. 그의 옆에는 키가 큰 장교가 한 결같은 자세로 따라 오고 있었지. 단호했지만 신경질적인 보폭이었어. 바로 바린카의 아버 지였어. 불그스레한 얼굴과 하얀 콧수염으로 금방 알아보았지. 타격이 가해질 때 마다 불쌍 한 죄수는 놀란 듯이 타격이 가해진 방향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고통에 찬 표정을 짓더라 구. 하얀 이를 드러내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떠벌리고 있었어. 하지만 그 소리가 무엇인지는 그가 아주 가까이 와서야 알 수 있었지. 그건 그냥 말이 아니였어. 흐느낌이었어. `형제들, 나에게 인정을 베풀어 줘! 형제들, 나에게 인정을 베풀어 줘!` 그러나 형제들은 인정사정이 없었어. 행렬이 나에게 가까이 왔을 때, 내 맞은편에 있던 순인이 앞으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으며 휙 소리가 나도록 몽둥이를 들어올리고는 죄수의 등을 세게 내리쳤어. 죄수는 앞으로 나뒹굴었어. 하지만 두 군인이 다시 그를 짐짝처럼 일으켜 세우자 반대 방 향에서 또다시 몽둥이가 날아왔어. 그리고 사방에서 몽둥이질이 시작되었지. 대령은 죄수의 곁을 떠나지 않았어. 대령은 한참 자기 발 끝을 쳐다보더니 죄수의 뺨에 침을 뱉고 다시 죄 수의 퉁퉁 부어오른 입술에도 뱉어 냈어. 그들이 내가 서 있던 곳을 지나갈 때 나는 두 대 열 사이로 집단 구타를 당하고 있던 죄수의 등을 힐끗 볼 수 있었지. 붉은 피와 푸른 멍으 로 뒤덮여 도저히 인간의 몸이라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어. 대장장이도 하나님을 찾으며 투 덜대더군. 어쨌든 행렬은 점점 멀어져 갔어. 하지만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죄수에게 빗발 치는 구타는 계속되로 있었어. 피리 소리는 내 피를 얼어붙게 했고 북 소리는 내 심장을 두 근 거리게 만들었어. 위엄으로 가득한 연대장의 모습은 여전히 죄수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 어. 그 때 갑자기 연대장이 발걸음을 멈추고, 대열 속의 죄수를 향해 잽싼 걸음으로 다가가 더군. 그의 노기에 찬 목소리가 들렸어. `너희들에게 부드럽게 때려주는 방법을 가르쳐 주도록 하겠다. 이런 식으로 애무나 해댈 거야?` 그리고 수에드 가죽장갑을 낀 그의 강한 주먹이 두려움으로 하얗게 질려버리니 군인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을 보았어. 타타르 죄수의 붉은 목을 몽둥이로 강하게 내려치지 않은 때문 이었지. 그는 `새 몽둥이를 가져와!` 라고 소리 치고는, 주위를 둘러보다 나와 눈이 맞추쳤지.나를 알아보지 못한 척하려는지 화가 나고 찌 푸린 얼굴을 황급히 돌려 버리더군. 나도 무척이나 부끄러웠어.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더군. 마치 불순한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어. 나는 땅만 쳐다보며 황급 히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어. 도중에도 북 소리와 피리 소리가 내 귀를 떠나지 않았어. `형 제들, 나에게 인정을 베풀어 줘!`, `이런 식으로 애무나 해댈 거야?` 라는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어. 속까지 메스꺼웠어.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어. 실제로 구역질이 올라오 는 느낌 때문에 집으로 오는 도중에 몇 번이나 쉬어야 했어. 어떻게 집에 와서 내 방으로 들어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아. 하지만 막 잠이 들려는 순간 그 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고, 그 장면이 다시 눈앞에 떠올랐어. 나는 벌떡 일어나야만 했어. 그 때 나는 대령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 `그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거야.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나도 알게 된다면, 조금 전 내가 보았던 그 끔찍한 장면을 이해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된다면 이렇게 고통스러워하지 않 아도 되겠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는 대령이 아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어. 나 는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 들었고, 깨어나자 마자 친구를 찾아가 취하도록 술을 마셨 어. 자네들은 내가 그 때의 행위를 악이라고 결론지었다고 생각하나? 천만의 말씀이야. 그 행위도 어떤 확신을 가지고 행해진 거야. 그들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거야. 그들 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거야. 그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몇번이고 생각하면서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지. 하지만 성과가 없었어.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그 행위를 도저히 이해할수 없었기 때문에 나 는 꿈에도 그리던 봉사직을 포기하고 말았어. 단순히 병역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야. 공무원 자리마저도 포기해 버렸어. 그래서 자네 들도 알다시피, 나는 전혀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지.` 우리중 하나가 말했다. `그래, 자네가 쓸모 없는 존재라는 것은 우리도 잘 알아. 하지만 자네가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 람들이 쓸모 있다고 말할수 있을 까? 이반 바실리에비치는 정말로 난처한듯 말했다. `말도 안돼는 소리야.` `어쨌든 사랑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나?` `내사랑? 그 날이후로 내 사랑도 식어 버렸어. 물론 가끔은 그 녀가 꿈 속과 상상 속에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 때마다 나는 연병장에서 보았던 연대장을 기억에 떠 올렸지. 그럼 어색하고 불편한 기분이 들어서 그녀 를 만날기회를 가지지 않으려고 애썼지. 그렇게 내 사랑은 실패로 끝난 거야.` 그리고 그는 결론 짓듯 말했다. `맞아, 우연한 기회에 그런 행운이 찾아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변화 시키고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버릴수 있어.` 악마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음욕의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미 마음 속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을 네 오른 눈이 음욕을 일으키게 하거든 빼 내 버려라. 몸의 한 부분이 못 쓰게 되더라도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낫다. 또 만 일 네 오른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던져 버려라. 몸의 한 부분이 못 쓰게 되더 라도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 (마태복음 5장 28,29,30절) 1 유제니 이르테네프는 눈부신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 한 모든 것을 지닌 사람이었다. 집에서도 훌륭한 가정 교육을 받았고, 페테르스부르그 대학 법학부를 놀라운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최근에 돌아가신 아버지 덕분에 최상류층과도 교류 가 있었다. 또한 정부의 한 부서에서 장관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근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게다가 재산도 넉넉했다. 비록 불안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엄청난 재산이었다. 그의 아버지 는 생전에 주로 해외와 페테르스부르그에서 보냈으며 두 아들 유제니와 앤드류에게 연간 6 천루블의 돈을 보내 주면서도 어머니와 함께 많은 돈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는 여름 두 달 동안에만 대농장을 찾았을 뿐, 농장의 경영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파렴치한 관리인에게 맡 겨 두고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관리인은 제대로 농장 경영을 해내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두 형제가 재산을 나누기 시작했 을 때, 너무나 많은 부채가 드러나 변호사까지도 재산 상속을 포기 하고, 할머니가 그들에게 남겨 준 토지만을 물려받으라고 충고할 정도 였다. 사실 그 토지만으로도 10만 루블의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고인이 된 이르테네프와 거래 를 하고 있던, 달리 말해서 아버지가 발행한 약속어음을 가지고 페데르스프르그로 찾아온 이웃에 살던 땅주인이 `두 형제중 하나가 고향에 정착해서 농장관리에 전념하면서 지혜롭고 경제적으로 경영한다면 부채문제를 해결하고 막대한 재산을 지켜 낼 수 있다`고 말해 주었 다. 그래서 유제니는 봄에 농장을 찾아와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머니와 고향에 내려와 정착하여 가문의 재산을 지킬 생각으로 정부관리직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언제나 무척이나 다감한 성격이었던 앤드류 형과도 상의 한 끝에,매년 4천 루블을 보내 주거나 상 속 몫을 유제니에게 양도할 경우에는 매년 4천루블을 보내 주거나 상속 몫을 유제니에게 양 도할 경우에는 매년 8천루블 상당액을 보내 주기로 했다. 이렇게 문제를 정리하고 어머니와 함께 시골의 저택에 내려온 유제니는 열정을 다해서,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농장을 관리 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나이 많은 사람이 보수적인 반면에 젊은 사람은 변화를 추구하는 성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선입견을 상당히 옳지 못한 것이다. 젊은 사람도 보편적으 로 보수적인 경향을 띤다. 특히 열심히 살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본적 이 없거나, 생각해 볼 시간이 없어서 주변에서 보았던 생활 방식을 자신의 모델로 받아들이 는 젊은이들이 특히 그렇다. 유제니도 그런 젊은이였다. 시골에 정착한 후 그의 목표와 이상 은 아버지 시대가 아니라 할아버지 시대의 생활방식을 되살리려는 것이었다. 그는 할아버지 시대의 정신과 집과 농장 관리에 부활시키려 애썼다. 물론 모든 부분에 시대의 변화에 걸맞 는 변화를 폭넓게 꾀함으로써 모두가 만족할수 있는 질서와 방법을 도입하기로 했다. 그러 나 그런 일을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채무자들과 은행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어야 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토지를 팔아야 했고, 채무 갱신을 위한 협상이 있어야 했다. 또 한 4천 에이커에 달하는 밭과 사탕 수수 가공 공장과 더불어 세미노프 가문의 토지 경작을 관리하는 데에도 돈을 얻어야 했고, 과수원이 황폐해지거나 소홀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데도 돈이 필요했다. 할일이 산더미같이 많았지만 유제니는 정신력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했다. 스물여섯 살이었고 적당한 키에,체조 로 단련된 근육에 보기 좋은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치아와 입술도 밝은 색이었고, 머리카락은 보드랍고 곱슬 곱슬하고 강해 보였지만 굵지는 않았다. 신체상의 유일한 약점은 근시라는 점이었다. 안경을 쓰는 게 버릇이 되어 코안경없이는 아무것도 할수 없었고, 콧등 에는 이미 안경 자국까지 깊게 패여 있었다. 신체적인 면은 그랬다. 정신적인 면에서도 유 제니는 그를 알게 될수록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그를 한결같이 사랑해 주었고, 남편이 죽은 후로는 삶 자체를 유제니에게 의지하여 온 사랑 을 쏟아 주었다. 그의 어머니만이 그를 그렇게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시절의 친구 들도 모두 그를 무척이나 좋아했으며 심지어는 그를 존경하는 친구도 있었다. 이처럼 그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고, 그처럼 해 맑고 정직한 얼굴과 그런 특별한 눈을 가진 사람에게서 어떤 거짓이나 기만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반적으로 그의 이런 면들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거절하고도 남았을 채무자들도 유제니는 믿어 주었다. 정부 관리, 마을 이장, 혹은 다른사람에게는 비겁한 속임수를 썼거나 사기를 치려 했을 농부도, 그처럼 친절 하고 상냥하며 무엇보다도 솔직한 유제니와 교제하면서는 저절고 즐거워지는 마음에 속일 생각을 잊는 것 같았다. 때는 5월 말이었다. 유제니는 저당에 잡히지 않은 공한지를 어렵게 구해서 한 상인에게 팔았다. 그리고 말과 황소와 수레를 구입해 가축과 비품을 보충했다. 특 히 반드시 필요했던 농가를 짓기 위해서 그 상인에게서 돈을 빌렸다. 이럭저럭 문제가 해결 되자, 목재들이 실려 왔고 목수들도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경작지에 뿌릴 거름이 무 려 수레로 80대분이나 실려오고 있었다.그러나 아직도 모든 것이 풍전등화처럼 아슬아슬했 다. 2 이렇게 모든 일이 조심스레 진행되던 중에, 비록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유 제니를 몹시도 괴롭게 만든 일이 일어났다. 그도 젊은 혈기가 있었던 꺼닭에 다른 건강한 젊은이들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유제니도 꽤 다양한 종류의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비록 자연연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 자신의 표현대로 성직자도 안 니었다. 그러나 유제니는 육체적인 건강을 위해서 필요한 경우에만, 그의 버릇과도 같은 표 현에 따르면 마음 속의 부담을 덜어버리기 위해서만 여자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런 습관은 그가 16세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상당히 만족스럽게 계속되고 있었다. 결코 여색에 몰 두한 적이 없었고, 한번도 여자에게 깊이 빠진 적이 없었고, 결코 성병에 걸린 적도 없었다 는 점에서 만족스런 것이었다. 첫 경험은 페테르스부르그에서 가정부와 치렀는데 그 후 가 정부가 건방지게 굴자 유제니는 곧 다른 여자를 찾게 되었다. 그의 이런 면은 너무도 비밀 스런 것이어서 여자문제로 골치를 썩힌 적은 없었다. 그러나 시골 생활이 두 달째로 접어들 면서 유제니는 무엇으로 소일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의무적인 자제심이 그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육체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정말 읍내로 나가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디로 가 야 하나? 그 다음은 어떻게? 그를 혼돈으로 몰아넣은 유일한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러나 유제니는 그런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그 자신도 그것을 필요로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결국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유제니는 무언가에 자신이 억눌려 있고, 두 눈이 무의식적으로 젊은 여인을 따라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하 지만 유제니는 유부녀나 같은 마을 처녀와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유제니도 소문을 통 해서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같은 시대의 다른 땅주인들과 적어도 그런 점에서 상당히 달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분은 고향에서는 결코 농부의 아내들과 불미스런 짓을 저 지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유제니도 두 분을 본받아 그렇게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자를 향한 강박감이 깊어 가는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유제니는 이웃 마을에서 자신이 여자와 관계를 가졌을 경우에 그에게 닥칠지도 모를 일들을 두렵게 생각하게 되었다. 또 농노의 시대도 이제는 끝났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유제니는 같은 마 을에서도 그것을 할 수 있으리라 결론을 내렸다. 다만 그 행위는 단지 육체적 갈증을 해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위 삼아 말하듯이 건강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치러져야만 했다. 이렇게 결정을 내리고 나자 유제니는 더욱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 마을 이장이나 농부들이나 목수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화제 를 여자 이야기로 돌렸다. 게다가 화제가 여자 이야기로 돌려지면 그 문제에 대해 입에 침 이 튀도록 떠들어 댔다. 그리고 여자들을 더욱 눈여겨보게 되었다. 3 여자 문제를 마음 속으로 결정하는 것과 그런 결정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유제니의 처지에서 직접 여자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떤 여자에게? 어디에서? 등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다른 누군가를 통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고백 을 과연 누구에게 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있었다. 어느 날 유제니는 숲을 지나다가 물을 얻어 마시러 산림 감시인의 집을 들르게 되었다. 산림 감시인은 유제니 아버지의 사냥개를 돌보아 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유제니는 그와 한참 동안 험담을 나누었다. 그 때 산림 감시 인은 사냥하던 중에 일어난 이상한 이야기들을 해주기 시작했다. 순간 유제니는 그 문제를 이 집이나 숲속에서 해결하는 것이 편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다만 그 문제를 어떻게 처 리하고, 늙은 삼림 감시인 다니엘이 여자를 구해 오는 책임을 떠맡아 줄 것인지가 미지수였 다. 유제니는 산림 감시인 다니엘의 사냥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내 제안에 겁 을 먹을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자존심만 구기는 것이 되는데.. 하지만 아주 쉽게 내 제안을 받아 줄지도 몰라.` 그 때 마침 다니엘은 변두리 지역의 밭에 있던 교회 문지기의 아내의 집에 들렀을 때, 여자 하나를 페도르 자카리치 프랴니쉬니코프를 위해 어떻게 구해 주었는 지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순간 유제니는 생각했다. `나를 위해서도 여자를 구 해 줄 수 있겠는데!` 그 때 유제니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런데 지금은 하늘 나라에 계신 자네 아버지는 한 번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장난에는 낀 적 이 없었지.` `이제 틀렸군.` 유제니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시험 삼아 말해 보았다. `당 신을 그런 몹쓸 짓에 어떤 식으로 끼어들게 되었나요?` `왜 그런 짓이 몹쓸 짓이라 생각하 지? 여자도 좋아했어. 물론 페도르 자카리치도 만족해 했지, 무척이나 만족해 했다구. 덕분 에 나는 1루블을 받아 챙길 수 있었어. 그래, 그 사람이 무엇을 했을 것 같아? 그 사람은 지 금도 정말 지독한 난봉꾼이야. 자,포도주를 좀 마셔.` `좋아, 한번 말해 보는 거야.` 유제니는 이렇게 생각하고 즉시 행동에 옮길 준비를 갖추었다. `다니엘 어저씨는 아세요? 정말 그것을 어떻게 참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말해 놓 고 유제니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니엘이 미소로 답해 주었다. `나는 성직자가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그것이 습관이 돼 버렸구요.` 유제니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까지 했다고 생각했지만 다니엘이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 주자 그래도 즐거웠다. 다니엘이 대답했 다. `물론이야. 그런 문제가 있었다면 진작에 나에게 말하지 그랬어. 내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 네가 어떤 여자를 원하는지 말만해.` `어떤 여자나 좋아요. 물론 못생긴 여자는 아 니지만. 건강하기만 하면 돼요.` 다니엘이 간단하게 대답해 주었다. `알았다!` 그리고 그는 잠시 생가하더니 입을 열었다. `됐어! 정말 입에 딱 맞는 여자가 있어!` 유제니는 얼굴이 다 시 빨개졌다. `입에 딱 맞는 여자야. 작년 겨울에 결혼한 여자야.` 다니엘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편 녀석도 아직 그 여자랑 아무 짓도 못 해 보았을 거야. 그러니까 그것을 원 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제공해 준다고 생각하라구!` 유제니는 부끄러워 얼굴이 찌푸려질 정 도였다. `안 돼요, 안 돼! 그런 유부녀는 절대 원하지 않아요. 반대로, 아니 내가 원하는 여자는 건강해야만 해요. 공연히 소동을 일으킬 여자는 안 돼 요. 남편이 군대나 그런 일로 외지에 나가 있는 여자라면..` `알았어. 내가 자네에게 스테파 니다를 데려다 주지. 그 여자의 남편은 도회지에 나가 있거든. 군인이나 다를 바 없어. 아주 멋지고 깔끔한 여자야. 틀림없이 만족하게 될 거고. 사실 그 여자에게 한 번 떠본 적도 있었 어. 네가 가야 돼. 그 여자는 오기 힘들거야.` `그럼 언제로 할까요?` `너만 좋다면 내일이라 도 괜찮아. 내가 미리 담배를 좀 가져가서 드러 볼 테니까. 그럼 점심 시간에 이리로 와. 아 니면 채마밭 뒤에 있는 목욕실로 오든지. 그 때쯤 부근엔 아무도 없을 거야. 점심 식사후에 는 모두 낮잠을 자니까.` `좋아요, 그럼.` 유제니는 돌아오면서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여자는 어떻게 생겼을까? 만약 끔찍하게 못 생겼으면 어떻게 하지? 아 니야,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돼. 멋있게 생겼을 거야.` 유제니는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그 동안 보아 두었던 여자들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처음에 뭐라 말을 붙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유제니는 그 날 하루 종일 마 음이 들떠 있었다. 다음 날 정오쯤 되어 유제니는 산림 감시인의 집으로 찾아갔다. 다니엘은 문 앞에 서서, 아무 말없이 그러나 의미심장하게 고갯짓으로 숲을 가리켰다. 유제니의 가슴 에서 피가 끓어올랐다. 유제니는 뜨거워지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채마 밭으로 다가갔다. 거기 에는 아무도 없었다. 목욕탕으로 갔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목욕탕 문을 열고 들여다 보았다가 다시 나왔다. 그 때 갑자기 나뭇가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유제니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녀가 작은 계곡 너머의 관목 숲에 서 있었다. 그는 계곡을 뛰어 넘어 그녀에 게로 달려갔다.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쐐기풀 같은 것이 유제니를 찔렀다. 코안경이 떨어졌 다. 유제니는 개의치 않고 반대편 기슭의 비탈면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자수가 새겨진 하얀 앞치마와 적갈색 셔츠를 입고, 선홍빛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 었다. 맨발이었지만 신선한 건강미를 풍겼다. 게다가 예쁘기도 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저쪽으로 돌아오는 오솔길이 있어요. 저쪽으로 돌아와야만 해요. 저는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 어요.` 유제니는 그녀에게로 달려 올라갔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껴안아 보았다. 그리고 15분 후 그들은 헤어졌다. 유제니는 코안경을 찾아 쓰고 다니엘을 만나러 숲속의 오두막에 들렀다. 다니엘이 `어때, 만족했나?` 하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 대신에 1루블을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유제니는 만족스러웠다. 처음에는 부끄러웠지만, 수치심은 곧 사라졌다. 그 후 모 든 일이 잘 풀려 나갔다. 물론 최고의 성과는 유제니가 이제는 편안함을 느끼면서 마음이 안정되고 기운을 되찾았다는 것이었다. 유제니는 그녀의 얼굴마저도 정확히 기억할수 없었 다. 다만 깔끔하고 신선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고, 못생겼다기보다는 화장을 하지 않은 수 수한 얼굴이었다는 기억 밖에 없었다. 유제니는 혼자 생각해 보았다. `그 여자는 누구 부인일까? 다니엘 말로는 페치니코프의 부인이라 하던데. 그런 어떤 페치니코프일까? 이 마을에는 그런 성을 가진 집안이 둘인데. 어쩌면 늙은 미카엘의 며느리 일지도 몰라. 그래, 틀림없을 거야. 지금 그 아들은 모스크바 에서 살고 있거든. 언제가 다니엘에게 확실히 물어 봐야 되겠어.` 성적 욕구의 문제가 해결 되고부터 전에는 짜증스레 여겨졌던 시골 생활의 불리함이 씻겨졌다. 유제니는 다시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고 편안하게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유제니가 떠맡고 있던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골칫거리 하나를 완전히 해결하기도 전에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곳에서 새로운 골칫거리가 생겨났다. 그 때문에 유제니는 농장 경영을 완벽하게 해낼수 없 을지도 모르며, 어쩌면 농장 경영이 결국엔 재산 전부를 팔아치우는 것으로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때때로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의 온갖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그가 떠맡았던 책임을 결국엔 완수하지 못하게 될것이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유제 니는 결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아버지가 감추어 두었던 부채가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쯤 여기저기에서 생각 없이 돈을 빌렸던 것이 틀림없었다. 유제니는 5월쯤 고향에 자리를 잡으면서, 적어도 아버지의 부채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한 여름이 되었을 때 유제니는 느닷없이 날아온 편지 한통을 받게 되 었다. 미망인 에시포바 부인에게 아직도 1만 2천루블이란 부채가 남아 있다는 내용 이었다. 그 증거가 약속어음이 아니라 보통 차용증에 불과한 것이어서 변호사는 유제니에게 지불을 거절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류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의 부채를 갚지 않는 다는 생각은 유제니의 성격에 받아들일 수 가 없었다. 다만 그는 그런 막대한 부채가 실제로 있었는지 확실히 알고 싶을 따름 이었다. 유제니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와 함 께 점심을 먹으면서 물었다. `어머니, 칼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에시포바란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에시포바? 네 할아버지와 관계있는 여자인데, 왜 그러니?` 유제니는 그 편지에 대 해 어머니에게 말했다. `저런, 그런 요구를 하다니 너무 뻔뻔스럽구나. 네 아버지가 그 여자 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데.` `하지만 우리가 그 여자에게 그만한 돈을 빌렸나요?` `글 세, 내가 어떻게 그걸 알 수 있겠니? 하지만 그건 빚이 아니야. 네 아버지가 주책없을 정도 로 관대해서 그만...` `알겠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빚이라 생각했을까요?` `내가 어떻 게 말할 수 있겠니. 나는 모르겠다. 그 돈을 갚으려면 네가 너무 힘들 것이란 생각 밖에 들지 않는 구나.` 유 제니는 어머니인 마리 파블로브나에게 분명한 의견을 듣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그렇게 받아들여 졌다. `어머니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그 돈을 갚아야 될 것 같군요. 제가 내일 그 여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 겠어요. 그리고 갚는 시기를 연기할 수 있 을지도 알아보고요.` `정말 너에게 미안하구나. 하지만 최선의 방법은 뒤로 미루는 거야. 그 여자에게 조그만 기다려 달라고 이야기해 봐라.` 마리 파블로브나는 아들의 결정이 믿음직 한 듯 한결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유제니는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가 그의 입장을 전혀 이해해 주지 못해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호화롭게 살던 버릇을 버 리지 못했고, 전혀 아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돈문제가 터지게 되 면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결국엔 모든 것을 팔아치워야 한다는 것과 아들이 버는 돈, 넉넉히 잡아서 1천 루블 남짓한 돈으로 생계를 꾸려갈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을 전혀 고 려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전반적으로 생활하는데 드는 비용을 줄임으로써 그런 곤경을 헤쳐나갈수 있다는 사실마저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유제니가 아주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정원사와 마부와 하인들의 임금, 심지어는 먹는 것까지 조목 조목 따지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대부분의 미망인들이 그렇듯 이 유제니의 어머니도 남편과 함께 지냈던 동안 지녔던 감정과는 무척이나 다른 헌신적인 마음으로 고인이 된 남편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고인이 생전에 잘못 행했거 나 약속했던 일들에 대해 어느 것 하나 그것을 변경해야 한다는 생각을 인정하지 않았다. 유제니느 두 정원사와 힘을 합해 정원과 온실을 어떻게든 유지하고, 두 마부와는 마구간을 꾸려 가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럼에도 마리 파블로브나는 늙은 요리사가 마련해 주는 음 식에 불평하지 않고, 정원길이 깨끗이 쓸려 있지 않은 것이나 정식 하인들 대신에 어린 소 년 하나만을 심부름하는 아이로 데리고 있다는 것을 불평하지 않는 것으로 아들을 위해 희 생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 어머니로서 할 도리를 다하는 것이란 순진한 생각을 버리지 못했 다. 그런 까닭에 유제니는 농장 경영에 막대한 타격이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던 새로운 빚에 대해서도, 마리 파블로브나는 유제니의 따뜻한 마음을 드러내 보여 주는 가벼운 사고 정도 로만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는 유제니의 입장에 대해서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 들이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줄정도로 괜찮은 여자와 결혼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유제니 정도라면 그런 호화찬란한 결혼을 기대할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유제니라면 기꺼이 내 딸을 내어 줄 집안을 열 군데 이상 알고 있었고, 가능한 한 빠른 기 간내에 아들의 결혼 문제를 매듭짓고 싶어했다. 4 유제니 자신도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같은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결혼을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는 생각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 는 사랑으로 맺어진 올바른 결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길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여자와 그 가 평소에 알고 있던 여자들을 눈여겨 관찰하면서, 그 자신과 견주어 보았다. 그러나 결정을 쉽게 내릴 수는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스테파니다와의 관계 는 계속되었고, 점차 정기적인 관계로 이어졌다. 유제니는 결코 여자를 탐하는 성격은 아니 었다. 따라서 유제니는 자신의 행동이 나쁘다고 생각했고, 비밀리에 행하기도 어렵다고 생각 하여 그 자신이 직접 그런 만남을 계획할 수 없었다. 그래서 스테파니다와 처음 관계를 맺 은 후에도 다시 그녀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에 느꼈 던 불안감이 또다시 그를 휩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불안감이 이번에는 아무런 여자하고 의 관계를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때와 같은 초롱초롱한 검은 눈과 `아주 오래전부 터` 라 말하던 깊은 목소리를 원하고 있었다. 신선하면서도 강인한 체취를 풍겼던 몸과 앞 치마의 가슴받이 위로 올라 와 있던 풍만한 가슴을 원했다. 개암나무와 단풍나무 숲에서 있었던 모든 것을 원했고 밝은 햇살 아래에서 발가 벗고 있 었던 그 때와 같은 것을 원했다. 유제니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니엘을 다시 찾아 갔다. 이번의 만남도 그 숲에서 정오로 정해졌다. 이번에 유제니는 그녀를 한층 눈여겨 보았다. 그 녀의 모든 것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유제니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남편에 대해 물었 다. 정말 그녀의 남편은 미카엘의 아들이었고 모스크바에서 마부 노릇을 하고 있었다. 유제 니는 무슨 이유로 남편에게 충실하지 못하고 외도를 꿈꾸게 되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 데, 왜 당신은..` 그녀가 물었다.` `왜라니요?` 그녀는 영리했고 눈치가 빨랐다. `왜 나를 만 나느냐구요?` 그녀가 명랑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남편도 틀림없이 다른 여자를 마나고 있 을 텐데 나라고 못할 이유가 뭐죠?` 그녀는 뻔뻔스럽고 염치없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오히 려 그런 면이 유제니에게는 매력있어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유제니는 다음에 만날 약속 을 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니엘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를 통하지 말고 직접 만나자고 말했지만, 유제니는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유제니는 이번의 만남이 마지막이 되기를 바랬다. 물론 유제니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 관계가 그에게는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고 그렇 게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영혼 깊은 곳에 도사린 보다 엄격한 도 덕심은 그런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번의 만남이 마지막이기를 바랐다. 아니 그렇게 바 라지는 않았더라도 어쨌든 유제니는 그런 관계를 다음에도 가지기 위한 약속을 미리 정해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 여름이 지나갔다. 그 동안 그들은 열번 이상의 만남을 가졌 고 언제나 다니엘의 도움을 받았다. 한번은 그녀의 남편이 갑작스레 고향을 찾는 바람에 그 녀가 약속장소에 못 나오기도 했다. 그 때 다니엘은 다른 여자를 권했지만 유제니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 후 남편이 다시 일을 떠나자 그들의 만남은 예전처럼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다 니엘을 통해서 만남을 가졌지만 나중에는 결국 유제니가 다음의 약속시간을 정하게 되었고 그녀는 프로코보바란 이름의 다른 여자를 데리고 나왔다. 시골 여자가 혼자서 돌아 다니는 것이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녀와 만나기로 했던 바로 그 시간에, 가족들이 마리 파블로브나를 찾아온 때가 있었다. 그 때 어머니가 유제니의 신부감으로 손꼽고 있던 여자도 함께 왔었다. 따라서 유제니는 도저 히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어쨌든 잠깐의 여유가 생기자 마자 유제니는 탈곡장을 가는 척 하면서 곧장 숲 속의 약속장소로 달려갔다. 그녀는 그 곳에 없었다. 그러나 항상 만나던 낯 익은 그 곳에는 손이 닿는 모든 것이 부러져 있었다. 검은 오리나무와 개암나무 가지 심지 어는 말뚝 굵기만한 어린 단풍까지 부러져 있었다. 그녀는 기다렸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흥 분하고 화가 치밀어 유제니에게 수선스런 기념물들을 남겨 놓은 것이었다. 그는 기다려 보 았다. 그리고 다니엘을 찾아가 그녀에게 다음 날 다시 만나고 싶다고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와 주었고 평소와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갔다. 그들의 만남은 언 제나 숲속의 그 장소였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단 한 번 그녀 집의 뒷마당에 세워진 헛간을 약속 장소로 가졌었다. 유제니의 머릿속에는 이런 관계가 그에세 어떤 중요성을 가진다느 생각은 없었다. 그녀에 대해서조차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제니는 그녀에게 대가로 돈을 주었을 뿐 그 이상 은 절대 아니었다. 처음에 그는 이런 관계가 마을에 알려지고 그 때문에 그녀가 마을 사람 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그녀의 친척들이 그녀에게서 돈을 얻는 재미에 그녀를 부추 기게 될것이란 사실을 알지도 못했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또한 돈의 힘과 그에 따른 가 족들의 암묵적인 동의에 의해 이어진 관계에 대해 그녀가 조금의 죄의식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는 사람들에게 부러움이 대상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행동이 옳은 것이 라 생각하는 듯했다. 유제니는 `그런 짓은 내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야. 물론 나도 그런 짓이 옳은 것은 아니라고 인정해. 아무도 말을 하진 않았지만 모두,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있어 . 그녀와 함께 오는 그 여자도 알고 있어. 틀림없이 그 여자가 다른 사람에게도 이야기 했을 거야. 그렇지만 어떻게 하자는 거야? 어쨌든 이런 관계기 오래 가지는 않을 거야` 라고 생각했다. 유제니를 가장 곤란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 녀 남편에 대한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유제니는 그 남편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일거라 생각했다. 그 리고 그런 생각으로 그의행동을 조금은 정당화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그녀의 남편 을 본 순간 유제니는 그 외모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너무 멋진 사내였다. 옷 까지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어 유제니 자신에게 결코 떨어지지 않아 보였다. 아니, 오히려 더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그 후 그녀와 만났을 때 유제니는 그녀에게 남편을 보았는 데 너무 멋진 사내여서 놀랐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 마을 에서 내 남편같은 사람은 또 없어요.` 그녀의 대답 역시 유제니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 후로 그녀 남편에 대한 생각은 유제니를 더울 힘들게 만들었다. 어느 날인가 유제니는 다니엘의 집을 찾았다. 유제니와 한참 동안을 얘기 하던 다니엘이 말했다. `미카엘이 언젠가 나에게 묻더군. 자네가 자기 마누라랑 놀아나는게 사실이냐구, 물론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했 어. 그리고는 `어쨌든 가난한 농부보다는 부잣집 도련님하고 노는 것이 낫잖아.`하고 말해 주었다. `그랬더니 그가 뭐라던가요?` '잠시만 기다리면 자기도 알게 될거라고 하면서, 자기 도 마누라에게 똑같은 짓을 할 거라더군.' '여하튼 그 남편이 여기로 돌아와 살게 되면 그 여자와 관계를 끊을 거예요.' 그러나 그 남편이 여기로 돌아와 살게 되면 그 여자와 관계를 끊을 거예요.' 그러나 그 남편은 여전히 도회지에서 살았고 그 덕분에 그들의 관계는 계속 되었다. 그래서 유제니는 생각했다. '때가 되면 이관계를 끊을 거야. 특별히 미련 가질건 전혀 없어.' 이런 생각은 유제니에게 거의 확 실한 것 같았다. 특히 여름내내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들로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새 농가를 지어야 했고, 수확을 거두어 들이고 집도 새로 지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부채를 청산하고, 미개간지를 파는 일로 골몰했다. 이런 모든일로 유제니는 한눈 팔 틈이 없 었다. 잠을 잘 때나 일을 할 때나 그 생각들은 떼어낼수 없었다. 게다가 그런 모든 것이 현 실이기도 했다. 스테파니다와의 관계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실 그녀를 보고 싶은 생각이 불현 듯 솟으면 다른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욕구가 오래 지속 되지는 않았다. 곧 그녀와의 만남이 이루어 졌고 그 후에는 그녀를 일주일이고 심지어는 한 달을 잊고 지냈다. 가을이 되었을 때 유제니는 종종 읍내로 나갔다. 그러면서 읍내에 살던 안네스카야 가문 사람들과 친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대학을 갓졸업한 딸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 파블로브나에게는 크나큰 슬픔이 닥쳤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유제니가 싼값에 자기를 팔아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유제니가 리자 아넨스카야와 사랑에 빠지 면서 청혼을 해 버린 것이었다. 그 때부터 유제니는 스테파니다와의 관계를 끊었다. 5 유제니가 왜 하필이면 리자 안네스카야를 선택했는지 설명하기란 어렵다. 사실 한 남 자가 저여자가 아니라 이 여자를 선택한 이유를 선택하기란 언제나 어려운 법이다. 물론 긍 정적이며서도 부정적인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한 가지 이유는 어머니가 바랐던 것처럼 큰 부잣집 상속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또 하나는 그녀가 순진하고 그녀 어머니와의 관계 에서 애처롭게 여겨졌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그녀가 모든 사람의 시선을 모을 만큼 미인 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못생긴 얼굴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된 이유는 유제니가 그녀를 알게 된 순간이 결혼을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이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유제니는 결혼이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리자 안네스카야를 처음 보았을 때 유제니는 그저 마음에 들었을 뿐이었지만, 막상 그녀를 아내로 맞이해야겠다고 결정한 다음부터 그녀를 향한 그의 감정은 더욱 깊어만 갔 다. 말 그대로 사랑에 빠졌다는 느낌이었다. 리자는 홀쩍한 키에 날씬했고 긴 머리카락을 지 니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것이 길었다. 얼굴도 길었고 코도 길었다. 또 손가락도 길었고 발 도 컸다. 얼굴색은 무척이나 부드러운 우윳빛을 띤 해맑은 색이었고, 약간 옅은 핑크빛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은 길고 부드러웠으며 곱슬 곱슬한 옅은 밤색이었다. 아름다운 눈은 맑 고 온화했고, 믿음을 보여 주었다. 바고 그 눈이 유제니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래서 리자 를 생각할 때면, 유제니는 언제나 맑고 온화하며 믿음을 주는 그 눈을 생각했다. 그녀의 신 체적 특징은 그랬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오직 두눈을 통해서만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 눈빛의 의미로 짐작해 본 그녀의 정신은 다음과 같 았다. 리자는 학교를 다니던 15세 때 만나면 활기를 주는 매력적인 남자들과 계속해서 사랑 에 빠지곤 했다. 그녀는 사랑을 할 때에만 행복을 느낄수 있었다. 학교를 졸업해서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그녀는 젊은 남자들과 여전히 사랑에 빠졌으며, 물론 유제니를 알게 되었을 때에도 그와 사랑에 빠졌다. 이런 사랑이 그녀의 두 눈에 특별한 마력을 주어 유제니를 사 로잡았던 것이다. 이미 그 해 겨울 그녀는 거의 같은 시기에 두 젊은 남자와 사랑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이 집에 찾아올 때만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이 입에 오른내릴때에도 그녀는 얼 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흥분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가 유제니 이르테네프도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해 주었을 때, 유제니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더욱 강해지면서 예전의 두남자에게는 거의 무관 심하게 되었다. 유제니 이르테네프가 무도회와 파티에 찾아오기 시작해서 다른 여자들보다 는 그녀와 춤을 추게 되었을 때, 그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마침내 고통의 단계에 이르고 말 았다. 그녀는 꿈속에도 유제니를 보았고, 캄캄한 방에 혼자 깨어있을 때에도 유제니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유제니 뿐이었다. 더욱이 유제니가 청혼을 하고 둘이 정식으로 결혼을 약속했을 때, 그리고 입맞춤을 나누고 장래를 약속한 약혼자가 되었 을 때, 그녀는 오로지 그만을 생각했고, 그와 함께 있으며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사랑받는 욕심 뿐이었다. 그녀는 유제니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또 그녀와 그녀 자신과의 사랑으로 인 한 감동을 이길수 없었고 그를 향한 사랑에 녹아들어 고통마저 느꼈다. 유제니도 그녀를 알게 될 수록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그런 사랑을 경험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기대한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그의 감정은 더욱 깊어져 갔다. 6 봄이 다가오면서 그는 세메노프스코에 있는 옥답의 관리 방향을 지시하기 위해 그 곳 을 둘러보았다. 특히 그가 결혼한 다음 살아가려 짓고 있는 집을 살펴보고 싶었다. 마르 파 블로브나는 아들의 선택에 불만스러워 했다. 며느리로 선택된 여자가 원했던 만큼의 부잣 집 딸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아들의 장모가 될 바바라 알렉세에브나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 문이었다. 며느리 감이 착한지 하는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 다만 리자가 훌륭한 가문 출신이 아니고,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요조숙녀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마리 퍼블로브나는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특히 그녀는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데 익숙해 있었고 유제니 역시 그런 문제에 예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가슴 아 파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이 결국엔 그 문제로 많은 번민을 겪게 될지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도 결국 리자를 마음에 들어했다. 무엇보다도 유제니가 리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를 좋아해 주었다. 이제 리자를 어쩔 수 없이라도 좋아해야 했기 때문에, 마리파 블로브나도 그렇게 할 각오를 조금씩 다져 가고 있었다. 그래서 유제니는 어머니도 만족해 하고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마리 파블로브나는 집 안의 모든 일을 차근 차근 정리하면서, 아들이 젊은 며느리를 맞이 하는 즉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제니느 어머니를 설득해서 당분간이라도 함 께 살자고 말했지만 장래를 분명하게 결정지을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저녁 마리 파블로브 나는 차를 마신 다음 혼자 카드 놀이를 하고 있었다. 유제니는 어머니 앞에 앉아 훈수를 해 주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며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이었다. 한 게임을 끝 내고 다시 게임을 준비하면서 그녀는 아들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조금은 머뭇대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말문을 열었다. '유제니, 네게 할말이 있구나. 물론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너에게 일종의 충고 같은 것을 해 주고 싶을 따름이다. 네게 독신 시절에 있었던 일들은 결 혼하기 전에 반드시 해결을 보도록 하거라. 그래야 너만이 아니라 네 아내 될 사람에게도 문제가 없을 테니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셨다. 내 말을 알아 듣겠 지?' 유제니는 마리 파블로브나가 스테파니다와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관계를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처럼 여겨졌다. 사실 혼자 사는 어 머니로서는 당연히 해 볼 수 있는 걱정이었다. 유제니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수치심 때문이라기 보다는 마음씨 착한 마리 파블로브나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이해할수도 없는 아들의 일로 괜시리 걱정하는 마음 때 문이었다. 유제니는 감출것이 남아 있지 않으며 어떤 것고 그들의 결혼에 방해가 되지 않도 록 언제나 조심스레 처신하고 있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마리 파블로브나는 한 시름을 놓은 듯 말했다. `잘했구나. 그런데 유제니... 제발 나를 힘들게 만들지 말아 다오.` 그 때 유제니는 어머니가 가슴에 담고 있던 말을 전부 다 꺼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가 없던 동안 페치니코프 가문에서 그녀에게 대모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고 말해 주었 을 때 그런 생각은 확신으로 변했다. 유제니는 다시 얼굴이 빨개 졌다. 이번에는 걱정이나 수치심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가 그에게 전해 준 말의 중요성을 이상할 정도로 의식하지 않 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단호했던 마음과는 상당히 모순되는 거의 무의식적인 반응 이었다. 염려 했던 일이 일어 났던 것이다. 마리 파블로브나는 마치 대화중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말처럼 그 해에는 남자아이들 만 태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바신 가문과 페치니코프 가문에서 며느리들이 첫아이를 낳았는 데 모두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마리 파블로브나는 꽤 조심스레 말을 꺼내고 있었지만, 아들 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안절부절못하면서 다리를 흔들고 코안경을 고쳐 쓰며 황급히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을 보자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곧 입을 닫아 버렸다. 유 제닌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어떤 식으로 깨야 할지 난감하기도 했다. 둘이 서로의 마음을 이해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마침내 어머니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중 요한 것은 이 마을에도 편견이 사라지고 정의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거다. 네 할아버지 시대처럼 말이다.` 유제니가 갑자기 말을 막으며 나섰다. `어머니,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하시 는 이유를 알고 있어요. 그런 일로 마음 쓰실 것 없어요. 제 장래의 가정이 저에게 너무도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불미스런 일로 제 가정을 어렵게 만드는 일은 없을 거예 요. 그 때문에 누구도 저에게 불평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그랬다니 안 심이구나. 네 감정에 속임이 없다는 것을 믿는다.` 유제니는 어머니의 말을 그에 대한 칭찬 으로 받아들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유제니는 말을 타고 읍내로 나갔다. 약혼녀를 생각했고 스테파니다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다짐을 의도적으로 다시 한번 확인해 두기 위해 교회를 찾아갔다. 교회에 는 오가는 사람이 꽤 있었다. 마트베이와 시몬을 만났고, 그 밖의 다른 남녀도 만났다. 그 때 두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 여자는 꽤 나이가 들었지만 다른 한 여자는 아주 눈에 익어 보였다. 멋지게 차려입고 밝은 밤색 수건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그 여자는 한 팔에 아 기를 안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씩씩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유제니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늙은 여자가 옛날식으로 허리를 깊숙히 숙이며 절을 했다. 그러나 아기를 안은 젊은 여자는 가볍 게 목만을 숙여 보였다. 수건 아래로 밝고 미소짓는 듯한 낯익은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랬다. 바로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와의 관계는 모든 것이 끝난 뒤였기 때문에 그녀를 쳐다볼 이유가 없었다. 순간 그의 머리에 `저 아이가 내 아이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스쳤다. 터무 니 없는 생각이었다! 그녀에게는 남편이 있었고, 비록 부정기적이었지만 남편과의 관계고 있었다. 유제니는 더 이상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 때의 관계는 순수하게 건강을 위 한 것이었다는 생각으로 굳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돈을 지불했었던 것이므로 더 이상 의 재론이 필요 없었다. 그들 둘 상이의 관계에는 어떤 문제도 없었고, 문제가 있을 수도 없 었다. 양심의 목소리를 억누를 이유도 없었다. 아니, 그의 양심에서도 아무런 의문을 제기 하지 않았다. 그런 우연적인 만남과 그녀 어머 니와의 의례적인 대화가 끝난후,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를 다시는 만 나지도 않았다. 유제니는 부활절을 지내고 다음주에 읍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젊은 아내를 데리고 즉시 고향의 영지로 떠났다. 젊은 부부를 위한 집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마리 파블로브나는 곧바로 떠나기를 원했지만 유제니는 계속 함께 지내자고 간곡히 애원했 다. 리자의 애원은 그 이상이었다. 결국 마리 파블로브나는 본채에 딸린 부속 건물로 이주하 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유제니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7 결혼 첫해는 유제니에게 너무도 힘든 시절이었다. 구혼 기간과 결혼식 이후로 간신히 미루어 두었던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부채를 벗어나기란 사실 불가능했 다. 변두리 지대의 땅을 팔아서 아쉬운 대로 급한 불은 마무리지을 수 있었지만 다른 문제 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돈이 남아 있지 않았다. 넓은 밭은 넉넉한 수입을 만들 어 주었지만 유제니는 형에게 돈을 보내야 했고, 그의 결혼을 위해서도 만만치 않은 돈을 지출해야 했었다. 그런 까닭에 준비된 돈이 없었고 급기야는 공장마저 가동을 멈추고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 되었다. 그런 난관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아내의 돈을 쓰는 길 뿐이었 다. 남편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던 리자는 스스로 그런 제안을 해왔다. 유제니는 비록 그 제 안을 받아들였으나 그의 이름으로 된 토지 절반을 아내 이름으로 변경하는 조건으로 받아들 였다. 물론 그런 조건은 아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장모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오히려 리자는 그런 제안을 언짢게 생각했다. 이렇게 성공과 실패의 반복은 결혼 첫해 유제니의 생활을 엉망으로 만드는 한 원인이 되었다. 다른 원인은 리자의 갑작스런 건강악화였다. 결 혼 첫해, 정확히 말해서 결혼식을 올린 후 7개월이 지났을 때 리자에게 불행이 찾아들었다. 리자는 읍내에서 돌아오던 유제니를 맞으러 마차를 타고 나왔다. 양순하기만 하던 말이 갑 자기 날뛰는 바람에 리자는 깜짝놀라 마차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고 마차에서 떨어진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잘못했으면 마차 바퀴에 끼일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때 리 자는 임신중이었다. 그 날 밤, 통증이 시작되면서 결국 유산하고 말았다. 유제니는 리자의 유산으로 인한 충격 에서 헤어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자식을 잃었고, 아내마저 병에 시달렸으며 게다가 사업도 부진했다. 무엇보다도 리자가 병에 걸리자 곧바로 달려온 장모의 존재는 그 해 유제니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결혼 첫해가 끝나갈 무렵 유제니는 차츰 기력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가장 큰이유는 상실했던 재 산을 되찾고 할아버지 시대의 생활 방식을 새로운 형태로 혁신시켜 되살리려 했던 소중한 희망이 비록 완만하고 어렵기는 하지만 전답을 모두 팔아야 할 위기가 완전히 해소 되었다. 비록 아내의 이름으로 옮겨지기는 했지만 가장 중요한 전답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사탕무 우가 풍작을 이루고 가격이 올라가기만 한다면, 다음 해 쯤에는 물리적인 궁핍과 정신적인 압박감을 떨쳐 버리고 번영의 길로 들어설 것 같았다. 그가 기력을 회복했던 한 가지 이유 가 바로 이것이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유제니는 아내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 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이었다. 사랑의 환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났더라도 무시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상당히 다른 성격의 것을 얻을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도 행복하고 즐거웠을 뿐 아니라 살아가는 그 자체가 한결 편안해진 것을 느꼈다. 유제니는 그런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어쩌면 결혼 직후 리자가 보여 준 마음가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리자는 유제니 이르테내프가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뛰어나며 현명 하고 훌륭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를 섬기고 그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 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그렇게 하도록 만들 수는 없기 때문에 그녀 자신만이라도 힘닿는 데까지 그렇게 하리라 다짐했고 또 그렇게 처신했다. 그녀는 남편이 좋아하는 것을 짐작으 로 알아 내는 데 온 마음을 쏟았고, 그것이 무엇이든 아무리 어려운 것이더라도 실행에 옮 기는 헌신을 보여 주었다.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성관계의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천부적 재능이 있었다. 또 남편을 향한 그녀의 직극한 사랑 덕분에 그녀는 남편의 영혼까지 파고들 수 있었다. 그녀는 유제니의 기분을 알아주었고, 우울해 하는 감정까지 알아 주었다. 유제니는 아내가 자신의 감정을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느낄때도 있었다. 그녀는 시의 적절하게 행동했지만 결코 유제니의 감정에 상처를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우울한 압 박감을 해소해 주었고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이렇게 그녀는 유제니의 감정만이 아니라 즐 거움까지 이해해 주었다. 그녀에게는 낯설었던 일들까지 그녀는 재빨리 터득하여 유제니와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 었을 뿐 아니라, 유제니의 표현대로 때로는 둘고 없이 지혜로운 조언자가 되어 주기도 했다. 그녀는 일과 사람, 즉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두 눈을 통해 직접 보고 느꼈다. 또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를 무척이나 사랑했지만, 유제니가 그들의 생활에 어머니가 끼여드는 것을 못 마땅해 하자 즉시 남편의 편에 서서 그녀의 어머니를 이겨 낼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이 런 모든 면들 이외에도 그녀에게는 뛰어난 심미안과 재치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놀라울 정 도로 침착했다. 그녀는 모든 일을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해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 녀가 해놓은 결과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달리 말해서 언제나 모든 것이 깔끔했고 정 연했으며 기품이 있었다. 리자는 남편이 꿈꾸는 이상적인 삶이 무엇인지 즉시 깨달았다. 그 녀는 집안의 정돈과 질서에서도 남편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내려 노력했다. 물론 그 때까지 자식이 없기는 했지만 자식에 대한 희망은 잃지 않았다. 겨울이 되었을 때 그녀는 페테르스 부르그까지 전문의사의 진찰을 받으로 갔다. 의사는 그들에게 리자가 아주 건강하며 언제라 도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안심시켜 주었다. 마침내 이 소망까지 이루어졌다.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 그녀가 다시 임신하게 된 것이었다. 치명적이라 말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들 의 행복을 위협하는 한가지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질투심이었다. 그녀느 질투심을 억누르고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녀 자신도 그런 질투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유제니가 다른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이세상에 그에게 어울 리는 여자란 없었기 때문에, 단 한명의 여자도 감히 그를 사랑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8 그들의 일상은 다음과 같았다. 유제니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농 장과 공장을 살펴보러 갔으며 때로는 들에 나가 보기도 했다. 10시경이 되면 커피를 마시러 돌아와, 베란다에 모여 앉아 있던 마리 파블로브나, 그들과 함께 살던 삼촌, 그리고 리자를 만났다. 그들은 커피를 마시면서 가끔은 열띤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대화를 나눈 후에는 점 심시간이 될 때까지 각자의 일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오후 2시경이면 그들은 점심식사를 했고, 식사가 끝나면 함께 산책을 하거나 마차를 타고 외출을 했다. 유제니가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저녁이면 함께 저녁 차를 마셨고, 리자가 일을 하고 있는 동안이면 유제니는 큰소 리로 책을 읽었다. 혹시 손님이라도 올 때면 함께 음악을 듣거나 이야기 꽃을 피웠다. 유제 니는 업무차 집을 떠나 있을 때에도 어김없이 리자에게 편지를 썼으며, 그도 역시 매일 리 자의 편지를 받아보았다. 가끔 리자가 유제니를 따라 나설 때면 둘은 특별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의 영명 축제일이나 그녀의 손님들이 몰려든 날이면, 많은 손님들이 오기를 잘 했 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녀가 모든 일은 무리 없이 꾸려 가는 것을 보는 것도 유제니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유제니는 손님들이 그녀를 젊고 영리한 안주인이라 칭찬하는 것을 보고 들었다. 이 때문 에 그는 아내를 더욱 사랑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리자도 임신 기간을 잘 견뎌 냈다. 그들은 한편으로 두려운 마음을 갖고서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교 육제도와 교육과정에 대해서는 유제니가 전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녀의 유일한 바람은 그 런 계획을 충실하게 실천에 옮기는 것이었다. 한편 유제니는 의학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아 이를 과학적으로 키우고자 했다. 물론 리자도 유제니의 모든 생각에 동의 했고, 따뜻한 배내 옷과 시원한 배내옷을 만들면서 착실히 준비했다. 물론 요람도 준비했다. 이렇게 그들 결혼 의 두 번째 시기가 시작되었고 두 번째 봄이 찾아왔다. 9 삼위일체 축제일 바로 전이었다. 리자는 임신 5개월째를 맞고 있었다. 비록 조심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활달했고 기운이 넘쳤다. 시어머니와 그녀의 어머니가 한 집에 머물 고 있었던 것은 부부간의 사소한 말다툼으로 그녀가 혹시라도 유산을 하게 될까 지켜보고 보호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유제니는 사탕무우의 재배에서 새로운 농법을 대대적으 로 도입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삼위일체 축제일 직전, 리자는 지난 부활절 이후로 하지 못했던 대청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루와 창문을 닦고, 가구와 카펫의 먼지를 털어 내고 다시 덮개를 씌우는 하인들의 일을 돕도록 두 여자를 고용했다. 두 여자는 아침 일찍 찾아와 큰 솥에 물을 데우고 일을 시작했다. 그 중 한 여자가 스테파니다 였다. 그녀는 아기의 젖을 막 떼어 낸 뒤였고, 그 즈음 그녀와 간통을 하고 있던 관리를 통해서 마루닦는 일을 얻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스테파니다는 새로 들어온 안주인을 가까이에서 만나 고 싶었다. 그녀의 남편은 여전히 도회지에 나가 있어, 그녀는 예전처럼 혼자 살면서 못된 짓을 계속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늙은 다니엘이 상대였고, 다음에는 그의 주인이던 유제니, 그리고 당시는 젊은 관리가 그녀의 상대였다. 스테파니다는 `그에게는 이제 부인이 있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제니에게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안주인을 만나 보고 집안을 둘러보는 것은 보람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모두가 하나같이 집 안이 갈끔하게 정돈되어 있다고 칭찬했기 때문이었다. 유제니는 아기를 안고 있던 그녀를 교회 앞에서 우연히 만난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길러야 할 아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외출을 할 수 없었기 때 문이었다. 또한 유제니도 마을을 지나다닌 적이 거의 없었다. 삼위일체 축제일 전날 아침, 유제니는 5시에 일어나 비료를 뿌리기로 되어 있던 휴한지로 말을 몰았다. 그래서 여자들이 집안을 돌아다니기 전에 유제니는 집을 떠났다. 그 때 스테파니다는 큰 솥에 불을 지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유제니는 아침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즐겁고 만족할 얼굴로 돌아왔다. 배가 고팠던지 대문에서 말을 멈추고 정원사에게 고삐를 넘겨 주었다. 채찍으로 길게 자란 풀들 을 튀겨 날리고, 누구나 가끔은 그렇듯이 뭐라고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집 안으로 걸어 들어 왔다. 그가 중얼거렸던 말은 `적당한 비료`였다. 하지만 유제니 자신은 무슨 말을 누구에게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생각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잔디밭에서 카펫의 먼지를 털어 내고 있었다. 가구들도 이미 밖으로 옮겨져 있었 다. 그것을 보고 유제니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되었구만! 리자가 대청소를 시작 한 거야! ...적당한 비료..., 리자는 둘도 없는 가정주부야! 맞아, 현명한 가정주부!` 유제니는 하얀 실내복을 입고 밝은 미소를 띠고 있을 아내의 얼굴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녀는 거의 언제나 그런 모습이었다. `그래, 신발을 바꿔 신어야 겠군. ... 적당한 비료.. ,거름 냄새가 신 발에 베었잖아. 아내는 이런 조건에서 현숙한 가정주부야. 그런데`이런 조건`이 뭐지? 맞아, 새로운 이르테네프가 바로 아내 뱃속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이지.` 이런 생각으로 미소를 떠올리며 유제니는 그의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나 문을 채 밀어 열기도 전에 문이 저 절로 열렸다. 그리고 유제니는 소매를 위로 걷어붙이고 양동이를 들고 맨발인 채로 그를 향 해 다가오는 여자와 얼굴을 마주치게 되었다. 유제니는 그녀가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 켜섰다. 그녀도 젖은 손을 수건으로 닦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계속하세요. 나는 들어가지 않을 테 니까...` 유제니는 미처 말을 끝낼 수 없었다. 스테파니다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눈 웃음을 지으며 유제니를 반가운 듯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치마를 끌어내리며 문을 빠져 나 가려 했다. 순간 유제니는 `말도 안돼!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을 찌푸리며 마치 파리를 쫓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녀를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 이 그녀를 알아보았고 그녀의 건강한 육체에서 눈을 뗄 수 없었고, 그녀의 활기찬 발걸음에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웠다. 그녀의 맨발에서, 그녀의 두 팔과 어깨에서, 위로 걷어붙인 셔츠에서, 하얀 허벅지가 드러나도록 야릇하게 말아올린 치마에 마음이 흔들렸다 는 사실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내리깔며 유제니는 혼자 중얼거렸다. `대체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어쨌든 방에 들어가서 다른 신발을 갖고 나와 야 해.` 그래서 유제니는 뒤로 돌아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채 다섯 걸음도 떼지 못 해 그녀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말았다. 그 자신도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도 막 모틍이를 돌아가며 그를 쳐다 보고 있었다. 유제니는 다시 자신을 책망했다.`대 체 뭘 하는 거야! 어쩌면 저 여자도 나를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 아니, 틀림없을 거야.` 그 는 젖은 방으로 들어갔다. 다른 여자가 있었다. 늙고 빼빼 마른 여자가 아직도 그의 방을 닦 아 내고 있었다. 유제니는 더러운 물로 젖어 있는 바닥을 발 끝으로 걸어서 신발을 넣어 둔 벽장까지 갔다. 유제니가 방을 나가려 할 때 그 여자는 이미 방을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유제니의 마음 속에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늙은 여자가 나갔으니 이제 스테파니다가 혼자 이 방으로 올 거야.` 하지만 곧 그런 생각을 후회했다. `하나님, 제가 지 금 생각하고 있는 것과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을 용서해 주소서!` 유제니는 신을 움켜쥐 며 복도로 뛰어나갔다. 신발을 복도에 내려놓고 직접 닦았다. 그리고 두 어머니가 이미 커피 를 마시고 있는 베란다로 나갔다. 리자도 그가 베란다로 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던지, 거의 동시에 반대편 문을 통해 베란다로 들어 왔다. `오, 하나님! 나를 너무도 자랑스럽고 순수하 며 깨끗한 남자라 생각하는 아내가... 만약 아내가 알기라도 한다면!` 리자는 평소처럼 환한 얼굴로 그를 맞아 주었다. 그러나 그 날 따라 유제니의 눈에는 리자의 얼굴이 유난히 창백 하고, 노랗고, 길고, 약하게만 보였다. 10 커피를 마시는 동안은 가끔 그랬듯이, 그 날도 여성 취향의 대화가 계속되었다. 논리 적인 귀결을 없었지만 나름대로 이야기가 연결되었기 때문에 대화는 중단 없이 이어졌다. 두 노파는 서로에게 데데한 심술을 부리고 있었고 리자는 둘 사이를 교묘하게 조절하고 있 었다. 리자가 남편인 유제니에게 말했다. `당신이 돌아오기 전에 당신 방 청소를 끝내지 못 해서 너무 죄송해요. 하지만 빠짐없이 정돈해 두고 싶어 제게 그렇게 했어요.` `괜찮아요. 그 런데 내가 일어난 후에도 잠은 잘 잤소?` `예. 잘 잤어요. 기분도 아주 좋아요.` 그 때 리 자의 어머니인 바바라 알렉세에브나가 끼어들었다. `창문이 동향이라 햇살이 견딜 수 없이 뜨겁게 내려쪼이는데 저런 몸의 여자가 어떻게 잘 잘 수 있겠어! 너희들 침실에는 블라인드 도 없고 차양도 없잖니. 나는 차양은 항상 달고 살았는데.` 마리 파블로브나가 대꾸하고 나 섰다. `우리 집에는 10시까지 햇살이 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그러나 바바라 알 렉세에브나는 사돈의 말이 방금 자신이 했던 말을 반박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또다시 나섰다. `그 때문에 열병이 생길지도 몰라요. 열병은 습기에서 오거든요. 내 주치의 는 환자의 환경을 모르면 병을 진단할 수 없다고 항상 말했어요. 그 사람이 절대 옳아요. 그는 뛰어난 내과의사 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그 의사를 찾을 때마다 한 번에 1백 루블씩 이나 지불하고 있답니다. 돌아가신 남편은 의사란 직업을 믿지 않았지만 나를 위해서는 아 무것도 아끼지 않았지요.` `어떻게 남자가 아내에게 아끼는 것이 있겠어요. 여자의 인생과 자식의 인생이 전적으로...` 바바라 알렉세에브나가 중간에 말을 막고 나섰다. `맞아요. 여 자에게도 재산이 있다면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필요가 없지요. 좋은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여자예요. 그런데 리자가 병치레를 한 다음부터는 너무 약해진 것 같아요.` `오, 아니에요. 어머니. 저는 건강해요. 그런데 하인들이 왜 끓인 크림을 가져오지 않을까요?` ` 아니다, 나는 됐다. 생크림이면 충분해.` 마리 파블로브나가 변명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내 가 네 어머니에게 내 것을 좀 주려고 했는데 거절하시더구나.` `됐다. 오늘은 끓인 크림을 먹고 싶지 않아.` 이렇게 말하며 바바라 알렉세에브나는 아량 있게 양보하여 불쾌한 대화를 끝맺으려는 듯 유제니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비료는 다 뿌렸나?` 리자가 크 림을 가지러 일어나자 마리 파블로브나가 말했다. `리자, 리자야, 천천히 걷거라. 그렇게 빨 리 걸으면 몸이 상할지도 몰라. 마음이 편하면 무엇 하나 해칠 것이 없는 법이다.` 그러자 바바라 알렉세에브나가 무언갈르 암시하려는 듯이 참견하고 나섰다. `아니다. 난 먹고 싶지 않아. 괜찮다고 했잖니.` 그러나 아무 의미 없는 말이란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리자가 크림을 가지고 들어 왔다. 유제니는 커피를 마시며 그들의 대화를 시무룩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도 그런 대 화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 날만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그런 대화가 이상하게 짜증스러웠 다. 그는 조금 전 방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들의 쓸데없는 대화 때문에 방 해받고 있었다. 바바라 알렉세에브나는 커피를 마신 후 기분이 상해 베란다를 나가 버렸다. 리자와 유제니와 마리 파블로브나는 계속 남아 편하고 즐거운 대화를 계속 나누었다. 그러 나 무척이나 예민한 성결이었던 리자는 유제니에게 고민스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금세 눈 치챘다. 그녀가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냐고 물었지만 유제니는 미처 그런 질문에 대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한참을 머뭇거리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대답은 리자를 더욱 생각하게 만들 뿐이었다. 무언가 그를 고민스럽게 무척이나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파리가 우유에 떨어진 것만큼이나 분명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남편 은 입을 굳게 다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일이 무엇일까? 11 아침식사가 끝난후 모두 자신의 일을 처리하러 뿔뿔이 흩어졌다. 유제니는 평소처럼 서재를 찾았다. 그러나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는 대신에 담배를 연속으로 피워 대며 생각에 잠겼다. 결혼 후에는 완전히 잊고 지내던 못된 감정이 마음 속에서 불현 듯 되살아나고 있 어 유제니 자신도 너무 놀랐고 혼란스러웠다. 결혼 이후로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감정을 느 낀적이 없었다. 그녀에게나 아내를 제외한 어떤여자에게도 그런 감정을 느껴보지 않았다. 그 래서 가끔은 그런 해방감에 즐겁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날 있었던 너무도 우연한 만남은 겉으로는 전혀 대단한 것 같지 않았지만 그가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 고 있었다. 그를 고민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그가 그런 감정에 굴복하여 그 여자를 원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감정이 다시 마음 속에서 되살아나면서 그에게 경각심을 일깨웠다는 점 이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답장 을 해 줄 편지가 있었다. 편지지를 꺼내고 책상 앞에 앉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를 쓰 고 나자 그를 괴롭혔던 생각을 상당히 잊을 수 있었다. 유제니는 밖으로 나와 마구간을 찾 아갔다. 그런데 불운인지 아니면 의도적이었는지는 몰라도 또 한차례의 악운이 그를 기다리 고 있었다. 유제니가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빨간 셔츠와 빨간 수건이 모퉁이에서 돌아 나왔다. 그녀는 두 팔과 온몸을 흔들며 유제니 앞을 지나갔다. 그의 앞을 지나갔을 뿐아니라. 마치 장난이라 도 걸 듯이 그를 지나쳐 짝을 지워 일하던 하인을 쫒아 달려갔다. 밝은 대낮, 쐐기풀, 다니 엘 집의 뒷마당, 나무 그늘 속에서 잎사귀를 씹고 있던 그녀의 웃는 얼굴이 다시 유제니의 상상속에 그려졌다. `안 돼. 그런 짓을 계속할 수는 없어.` 유제니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사무실로 향했다. 그 때는 점심 시간이었다. 유제니 는 사무장이 아직 자리에 있기를 바랐다. 다행히 사무장은 자리에 있었다. 점심 식사 후의 낮잠에서 막 깨어난 것 같았다. 그는 사무실에 서서 크게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면서, 가 축을 돌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제니는 사무장을 불렀다. `바실리 니콜라이 치는 가축을 돌보는 사람에게 말했다. `자네들 그걸 이리고 가져오지 않겠나?` `무척이나 무거운 건데요.` 유제니가 물었다. `뭔데?` `암초가 목초지에서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그래 서 즉시 마구를 준비하라고 지시해야 합니다. 니콜라스 리수크에게 큰 마차를 꺼내 주라고 말씀을 좀 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가축을 돌보는 사람은 사무실을 나갔다. 유제니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꺼 냈다.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자네는 내가 총각 시절에 약간 옆길 로 빠졌던 것을 알고 있지? ... 자네도 아마 소문을 들었을 거야.` 바실리 니콜라이치는 주인 에게 미안한 듯이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스테파니다와 관련된 소문 말입니까?` `그래. 제발 그 여자가 우리 집 일을 돕지 않도록 해 줘.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지. 나로서는 너무 거북하단 말이야.` `알았습니다. 틀림없이 관리로 있는 바냐 녀석이 그렇게 했을 겁니다.` 유제니는 심란함을 감추면서 말했다. `알았어. 제발 좀... 그럼데 남아 있는 비료도 마저 뿌 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그렇게 해 두었습니다. 방금 지켜보러 나가려던 참이었습니 다.` 그렇게 해서 그 문제는 끝이 날 것 같았다. 유제니는 그 여자를 보지 않고도 1년을 살았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 서 가슴을 쓸어 내렸다. `바실리 니콜라이치가 관리 녀석인 이반 바냐에게 말해 주겠지. 그 럼 이반이 그 여자에게 말할 것이고, 그럼 그 여자도 내가 원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 겠지.` 유제니는 이렇게 생각하며 창피를 무릅쓰고 바실리 니콜라이치에게 말하기를 잘했다 고 생각했다. 사실 그렇게 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맞아, 그렇게 해 둔 것이 한 순간에 창피를 당하는 것보다 낫지. 그럼, 훨씬 나은 거야.` 유제니는 마음속에 지은 죄를 생각하자 어깨가 오싹해졌다. 12 그가 창피를 무릅쓰고 바실리 니콜라이치에게 도움을 청했던 도덕적 노력 덕분에 유 제니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그에게는 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처럼 느껴졌다. 리자도 남편이 상당히 안정되었고, 예전보다 더 행복해 하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틀림없이 두 어머니가 서로에게 데데한 심술을 부리는 것에 마음이 상한 것이었어. 정말 두분은 철이 없어. 이처럼 예민하고 순진하기만한 그에게 말이야. 그처럼 심술 사납고 무례하기 짝이없는 대화를 매일 듣고 있어야 하는 그분에게는 여간 힘든일이 아닐거야` 라 고 생각했다. 다음날은 삼위일체 축제일이었다. 날씨는 화창했다. 여인내들은 꽃다발을 엮 으러 숲으로 가던 길에, 관습에 따라 먼저 땅주인의 집을 찾아와서 노래하며 춤을 추기 시 작했다. 마리 파블로브나와 바바라 알렉세에브나는 멋진 옷으로 갈아입고 양산을 받쳐들고 현관 밖에 나가, 둥그렇게 서서 노래를 부르는 여인네들에게 다가갔다. 중국산 비단 옷을 입 은 삼촌도 밖으로 나와 그들과 함께 했다. 삼촌은 백수 건달로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 그 해 여름을 유제니 집에서 보내고 있었다. 밝은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젊은 여인네와 소녀들이 서로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추었 다. 그들에게서 빠져나와 따로 조그만 원을 그리며 춤추던 소녀들도 마치 기다리고 있던 위 성처럼 사방에서 뛰어들었다. 새로 갈아입은 날염한 옷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사내아이들은 낄낄거리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짙은감색이나 검은 옷과 모자를 쓰고 빨 간 셔츠를 받쳐입은 어른들은 계속해서 해바라기 씨를 뱉어 내고 있었다. 하인들과 다른 사 람들은 한쪽에 비켜서서 그들의 춤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노파는 원무 가까이 서 있었으며, 리자느 옅은 푸른색 리본을 달고 있었고, 넓은 소매 아래로는 길고 하얀 팔과 각진 팔꿈치 가 엿보였다. 유제니는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숨어 있는 것도 우습게 느껴졌 다. 유제니도 담배를 피워 물고 현관 밖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편 여인네들은 목청껏 춤에 맞는 노래를 불렀고, 손뼉을 치면서 춤을 추었다. 그 때 한 어린애가 리자에게 다가와 말했다. `사람들이 주인님을 청하고 있습니다.` 리자는 유제니를 불러 춤을 보라고 청했다. 그리고 특별히 눈에 띄게 춤을 추는 한 여인을 가리켰 다. 바로 스테파니다 였다. 그녀는 노란 셔츠와 소매가 없는 벨벳자켓ㅇ르 입고 목에는 실크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대담하고, 힘과 건강이 넘치고, 즐거워 보였다. 그녀는 더할 나위없이 춤을 잘 추었다. 그러 나 유제니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리고 유제니는 자리를 뜨며 코안경을 고쳐 썼다. 그에게 `어쩌면 저 여자를 떼어 버릴 수 없을 것 같은 느 낌이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스테파니다에게 넘쳐흐르는 매력이 두려워 쳐다보고 싶 지 않았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힐끗보였던 그녀의 모습마저도 그에게는 특별히 며력적으 로 느껴졌다. 그뿐아니라. 그녀의 불꽃같은 눈빛에서 그녀가 그를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자신도 그녀를 원하고 있음을 숨길수 없었다. 유제니는 주인의 도리상 있어야 할 시간만큼 그 자리를 지켜 주었다. 그러나 바바라 알렉세에브나가 생각도 없이 눈치도 없 이 스테파니다를 칭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등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유제니는 그녀를 보지 않으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윗층에 올라가자 거의 본능적 으로 창문가로 향했다. 그 자신조차 그 이유를 알수 없었다. 여인네들이 현관 앞을 지나갈 때까지 유제니는 창문가에 서서 그녀를 쳐다보며 비밀스런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는 거의 뛰어 내려갔다. 그를 지켜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베란다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정원으로 내려와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뒤쫓아 갔다. 그는 오솔길을 따라 얼마 걷지 않아, 나무들 사이로 소매 없는 벨벳 자켓과 핑크색과 노란색이 섞인 셔츠, 그리고 빨간 목도리를 보았다. 그녀는 다른 한 여자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유제니는 `저 여자들이 어디로 가는 걸까?` 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억제 할 수 없 는 욕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그는 주변을 살펴보고 곧바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때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제니 이바니치, 유제니 이바 니치!` 우물을 파고 있는 늙은 사모킨이었다. 그제서야 유제니는 정신을 차리고 즉시 몸을 돌려 사모킨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늙은 사모킨과 이얏기를 나누면서도 그는 곁눈으로 그녀 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같이 온 여자와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틀림없이 우물을 찾아 가는 것이거나, 아니면 우물에 간다는 구실로 잠깐 동안 우물가에 머물렀다 다시 춤판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었다. 13 사모킨과 이야기를 나눈 후 유제니는 마치 큰 죄를 지은 심정으로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왔다. 먼저 그녀가 그의 심정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가 그녀를 보고 싶어한다고 확신하 는 것 같았고, 그녀 자신도 그것을 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 곁에 있던 여자, 안나 프 로코로바도 틀림없이 그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유제니는 자신이 그녀에게 압 도당해 자신의 마음마저도 다스릴 수 없어 다른 힘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으며, 다행히도 그 순간만을 행운이 찾아와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날은 아니더라도 다음 날 혹은 그 다음 날 이면 또다시 똑같은 타락을 겪게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맞아, 타락이야.` 유제니는 그 때의 감적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마을의 보잘것없은 한 여자 때문에 젊고 사랑스런 아내에게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타락일 뿐이었다. 철저한 타락이었 다. 그렇다면 그렇게는 살 수 없지 않은가! 그랬다.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유제니는 하나 님께 기도드렸다. `하나님, 하나님!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제가 이처럼 타락할 수 있는 겁 니까? 타락을 이겨내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겁니까? 하지만 무언가를 해야만 합니다. 그래, 그 여자를 생각하지 않는 거야!` 그는 이렇게 다짐했다. `그 여자를 생각하지 말자구!` 그러나 유제니의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며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느릅나무 그림자마저도 눈앞에 아른 거렸다. 유제니는 한 은둔자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은둔자는 치료를 위해서 손을 올려놓 아야 했던 여자에게 느꼈던 유혹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다른 손을 화로 속에 집어 넣어 손 가락 모두를 태워 버리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유제니는 그 이야기를 생각해 보았다. `그래, 나도 타락하기 보다는 손가락을 태울 각오를 해야 해.` 그는 방안을 둘러 보며 아무도 없다 는 것을 확인했다. 양초에 불을 붙이고, 그 불꽃에 손가락하나를 올려 놓으며, 스스로에게 빈정대듯 말했다. `자, 이제 그 여자를 생각해 보라구!` 촛불은 뜨거웠다. 그는 여기에 그을 린 손가락을 빼내며 성냥을 던져 버렸다. 그 자신이 부끄러웠다. 너무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런 짓은 결코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를 보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 해서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 자신이 도망가 버리거나 아니면 그 여자를 멀리 떠나 보내 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랬다. 그 여자를 떠나 보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녀 남편 에게 돈을 주어 도회지나 다른 마을로 이사 가도록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사 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그일로 입방아를 찧어 댈 것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어쨌든 그 방법이 위험을 감수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맞아, 그 렇게 해야겠어` 유제니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 때, 그녀의 모습이 정면으로 보였 다. 순간 그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저 여자가 어디로 가는 길이지?` 유제니의 생각에는 그녀도 창문 곁에 서 있던 그를 본 것 같았다. 그에게 눈길을 힐끗 주고는 옆여자의 손을 붙잡고 활달하게 팔을 흔들며 정원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유제니는 방금 전에 생각했던 것을 실천에 옮기려는 듯 본능적으로 사무실로 달려갔다. 축제옷을 입고 머리에 기름까지 바른 바실리 니콜라이치가 그의 아내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또 동양식 무늬의 목도리를 한 손님도 그들과 같이 있었다. `바실리 니콜라이치, 자네와 긴히 할 말이 있는데.` `말씀하십시 오. 저희는 볼일을 끝마쳤습니다.` `아니야, 나와 잠깐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어.` `곧 따 라가겠습니다. 모자만 쓰면 됩니다. 타냐, 사모바르를 치우도록 해요.` 바실리 니콜라이치는 이렇게 말하고 즐거운 발걸음으로 따라 나왔다. 유제니에게는 바실 리가 술을 꽤 마신 것처 럼 보였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그런 상태라면 곤경에 빠진 유제니와 더욱 쉽게 마음을 같 이해 줄 수도 있었다. 유제니가 말했다. `다시 똑같은 문젯거리를 말하러 찾아왔네, 바실리 니콜라이치. 그 때 말했던 여자 때문이야.` `그 여자 때문에 무슨 문제라도? 앞으로는 어떤 이유로라도 그 여자를 집 안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해 두었는데요.` `아니야, 나는 전반적 인 문제를 생각해 보았어. 그래서 자네의 조언을 받고 싶어. 그 여자를 멀리 이사 보낼 수는 없을까? 가족 모두를 멀리 보내는 거야.` 바실리 니콜라이치가 대답했다. `그들은 어디로 보 낼수 있을까요? ` 유제니에게는 바실리의 대답이 자기의 제안을 부인하고 빈정대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는데, 그들에게 돈을 주거나 아니면 콜토브스키에 있는 땅을 조 금 떼어 주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어. 그러면 그 여자가 더 이상 이 마을에 있지 못할 테니 까.` `하지만 그들을 어떤 방벅으로 쫓아 보낼수 있을까요? 고향을 떠나려 할까요? 그런 데 주인님은 왜 그런 일을 하려 하십니까? 그 여자 때문에 주인님에게 어떤 피해가 있습니 까?` `바실리 니콜라이치. 내 아내가 그 소문을 듣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정말 생각하 기도 싫어. 자네가 이해해 주어야만 하네.` `하지만 누가 안주인께 그런 이야기를 하겠습니 까? ` `그럼 날보고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면서 계속 살라는 이야기 인가? 그런 일이 있었 다는 자체가 나에게는 고통이야.`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 걱정을 하십니까? 그런 과거를 들추어 내는 놈이 있다면, 제가 그놈 두 눈을 뽑아 버리겠습니다. 속담에서처럼,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닌 사 람이 어디에 있고, 황제 앞에 비난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도 그 여자 가족이 모두 눈앞에서 사라져 주면 더 좋겠어. 자네가 그 여자 남편에게 말해 줄 수 없겠 나?` `그런 말을 해 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유제니 이바니치, 대체 문제가 무엇입니 까? 그 일은 과거일 뿐이고 잊혀진 일입니다. 그런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인님 에 대해 나쁜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마을 사람들 모두가 주인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발, 그 여자 남편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좀 해 보게.` `알았습니다. 여하 튼 이야기는 해 보겠습니다. ` 특별한 성과가 없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바실 리의 대답을 유제니를 어느 정도 안정시켜 주었다. 무엇보다도 흥분 때문에 그가 위험을 지 나치게 과장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약속에 따라 유제니가 그녀를 마나러 갔던 것이었을까? 절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정원을 산책하러 내려갔던 것이었고, 그녀는 우 연히도 같은 시간에 달려나왔던 것을 뿐이었다. 14 삼위일체 축제일 그 날, 점심 식사를 끝내고 리자는 정원에서 목초지까진 걸어가고 있었다. 유제니가 목초지에 피어 있는 클로버를 리자에게 보여주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그 런데 리자가 도랑을 건너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리자는 옆으로 살짝 넘어졌다. 그 러나 리나는 크게 비명을 질렀고, 유제니는 아내의 얼굴에서 두려움이 아닌 고통의 흔적을 엿볼수 있었다. 유제니는 황급히 팔을 내밀어 리자를 일으켜 주려 했지만 리자는 팔을 흔들 어 유제니를 제지 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잠깐만 기다려 줘요, 유제니. 발만 조금빠진 거예 요.` 그녀의 희미한 미소에서 유제니는 그녀가 죄스러워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바바라 알렉세에브나가 끼어들며 말했다. `내가 항상 말했잖아. 저 아이같이 임신한 사람이 도랑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겠어?` `아니에요, 어머니. 괜찮아요. 바로 일어 날수 있어요.` 리자는 유제니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곧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두려움이 질린 표정 이 되었다. `맞아요. 어머니. 몸이 좀 이상해요.` 그리고 리자는 바바라 알렉세에브나에게 뭐 라 낮은 소리로 말했다. 바바라 알렉세에브나가 소리쳤다. `오, 하나님. 대체 우리가 무슨 짓 을 한 거야! 너는 이런 곳에 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잖니. 기다려라. 내가 달려가서 하인들 을 불러오마. 지금 리자는 걸어서는 안 되네. 곧바로 리자를 옮겨야겠네!` 유제니가 말했다. `리자, 너 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을 안고 가겠어.` 그리고 유제니는 왼팔로 리자의 목을 감으 며 말했다. `리자, 내 목을 잡아요. 이렇게.` 유제니는 자세를 낮추며 오른팔을 리자의 무릎 아래로 넣어 들어올렸다. 그 후로도 유제니는 고통스러우면서도 행복해 하던 리자의 얼굴 표정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리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너무 무겁지요. 어머니 가 너무 빨리 뛰고 있는 것같아요. 어머니를 좀 말려 주세요.` 그리고 리자는 유제니의 얼굴 에 입마춤을 해 주었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유제니가 그녀를 옮겨 가고 있는지를 보 여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유제니는 바바라 알렉세에브나에게 서둘러 뛰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자기가 직접 리자를 집으로 옮겨 갈 것이라고도 말했다. 바바라 알렉세에브나는 멈 추어 서서 더 큰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다. `자네는 내 딸을 떨어뜨리고 말거야. 틀림없이 내 딸을 떨어뜨릴 거라구. 자네는 내 딸을 죽이고 싶을 거야. 자네는 양심이라곤 없는 사람 이야.`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아내를 너무도 잘 안고 있습니다.` `나는 자네 때문에 내 딸이 죽은 걸 보고 싶지 않아. 그런 것을 볼 수는 없다구!` 이렇게 소리치고, 바바라 알렉세 에브나는 오솔길 모퉁이를 돌아 뛰어갔다. 리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럼, 지난 번 같은 일만 일어나지 않는 다면.` `그런일은 없어요. 그런 말은 하는게 아니에요. 내몸은 괜찮아요. 어머니가 더 문제예요. 당신이 힘들어 질 것 같아요. 잠깐 쉬도록해요. 그러나 조금은 무겁게 느껴졌지만, 유제니는 아내를 자랑스럽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까지 그 렇게 안고 갔다. 바바라 알렉세에브나의 성화 때문에 그들을 마중 나왔던 하녀와 요리사에 게 아내를 넘겨주지 않고, 유제니는 아내를 침실까지 안고 가서 침대에 눕혀 주었다. 리자가 말했다. `이제 일 보러 가 보세요.` 그리고 리자는 그의 손을 당겨 입맞춤 해 주며 말했다. `아눈쉬카만 곁에 있어도 충분해요.` 마리 파블로브나도 별채에 딸린 그녀의 방에서 황급히 달려왔다. 그들은 리자의 옷을 벗기고 침대에 다시 눕혀 주었다. 유제니는 응접실에 앉아 한 손에 책을 들고 앉아 리자의 소식을 기다렸다. 바바라 알렉세에브나가 마치 책망이라도 하 듯이 우울한 표정으로 그를 찾아왔다. 유제니는 장모의 그런 표정에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되었냐구? 그렇게 물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 자네 가 리자에게 도랑을 건너게 했을 때, 이미 자네가 원했던 것 아닌가!` 유제니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장모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사람을 괴롭히고, 사람 인생 을 망치고 싶으시다면... ` 유제니는 `다른 곳에 가서나 그런 짓을 하십시오!`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꾹 눌러 참았다. `장모님에게도 좋을 것이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미 늦었네.` 그리고 그녀는 모자를 힘 있게 휘저으며 응접실 빠져 나갔다. 낙상은 정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리자의 발 이 심하게 비틀렸고, 또다시 유산될지도 모를 위험이 닥쳤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리자는 안정을 취하며 무작정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최선을 다해보기 위해 의 사를 불러 오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래서 유제니는`니콜라이 세메니치 씨, 당신은 언제나 우리 가족에게 친절하셨습니다. 부디 제 아내를 진찰하러 왕림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제 아내는... `등등의 내용으로 의사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고 나서 유제니는 말들과 마 차를 준비하러 마구간으로 갔다. 말들은 이미 의사를 데려올 준비를 끝낸 상태였고, 의사를 다시 데려다 줄 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 사실 재산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들 은 쉽게 결정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리자의 회복을 위해서는 충분히 고려해야만 했다. 이렇 게 모든 것을 챙겨 마부를 떠나 보내고, 유제니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9시가 넘어가 고 있었다. 리자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몸상태가 완전히 정상으로 회복되고 통증 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바라 알렉세에브나는 리자의 손에 들린 악복에 가린 등불 옆에 앉아 빨간 털실로 덧이불을 뜨개질하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태도는 그런 일이 있은 후에 가정의 평화란 불가능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자신은 의무를 다 할 것이란 단호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유제니도 그런 낌새를 눈치챌수 있었다. 그러나 유제니는 여전히 장모에 대해 불쾌한 심 정이었다. 따라서 그녀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태도에 대해 모른 척했다. 그는 즐겁고 침착 한 자세를 잃지 않으려 애쓰면서, 마차를 끌 말들을 어떻게 골랐고, 특히 암말인 카부쉬카를 삼두마차에서 가장 힘을 많이 써야 하는 왼쪽에 두어야 했던 이유까지 일부러 떠벌였다. 바바라 알렉세에브나는 코안경 아래로 뜨개질하던 것을 살펴보려는 듯 등불 가까이로 가져 가며 불쑥 한 마디 내뱉었다. `물론, 그렇겠지. 진작 써먹어야 할 시간에 말들을 훈련시키 고 있군. 이제 의사마저 도랑 속으로 내던져지겠어.` `하지만 장모님도 아시겠죠. 어떤 방법 으로든 의사를 데려와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이야. 하지만 자네 말들이 대문을 지 날 때마다 나를 어떻게 했는지 잘 기억하고 있네.` 바바라 알렉세에브나가 지겨울 정도로 써먹는 빈정거림이었다. 마침내 유제니는 침착성을 잃어버리고, 실제로는 그런 일이 없었다 고 떠져들고 말았다. 그러자 바바라 알렉세에브나가 말했다.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네. 진실되지 못하고 성실하지도 못한 사람과 같이 산다는 것이 세 상에서 가장힘든 일이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런 짓이 아니라면 어떤 짓이라도 참아 넘길 수 있네.` 유제니가 말했다. `만약 누군가 다른 사람보다 유별나게 괴로워한다면, 아마도 그건 틀림없이 나일.... 하지 만 장모님은...` `그래 틀림없어.` `뭐라구요?` `아무것도 아니네. 그저 땀 수를 세고 있을 뿐이야.` 그 때 유제니는 리자의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리자는 그를 쳐다보며 축축히 젖 은 손을 덧이불 밖으로 꺼내 그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그녀의 눈빛은 `제발 나를 위해서 도 참아 주세요. 내 어머니 때문에 우리 사랑을 방해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유제니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알았소. 다시 는 그러지 않겠소. 무의미한 일이니까.` 그리고 유제니는 아내의 젖은 긴 손에 입맞춤해 주 었고, 아내의 애정 어린 두 눈에도 입맞춤해 주었다. 유제니의 달콤한 입맞춤에 리자는 두 눈을 살며시 감았다. 유제니가 물었다.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당신 느낌은 어떻소?` `유산될지도 모른다고 말하기 조차 두려워요. 하지만 아기가 살아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느낌이에요.` 이렇게 말하며 리자는 자신의 배를 쳐다보았다. `무서워요. 생각 조차하기 무서워요.` 리자는 남편에게 계속해서 나가라고 고집했지만 유제니는 그녀와 밤 을 함께 지냈다.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고 언제까지나 아내 곁에서 간호해 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리자는 그 날 밤을 무사히 넘겼다. 만일 의사를 오도록 하지 않았다면 아침 일 찍 일어나 돌아다녔을 정도가 되었다. 점심 때가 되어서야 의사는 도착했다. 의사는 유산의 징후가 재발한다면 걱정해야 되겠지 만, 현재로써는 그런 징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안심시켜 주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 태가 나타날 수 도 있기 때문에 계속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계속 침 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고, 의사의 말대로 `임신중이라 약을 처방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가루약을 복용해야만 하고, 절대 안정`을 취해야만 했다. 그 밖에도 의사는 바바라 알렉 세에브나에게 여성의 신체구조에 대해 강의를 해 주었고, 강의 내내 그녀는 고개를 의미심 장하게 끄덕거렸다. 의사는 왕 진료를 평소처럼 손바닥 끝으로 받아 넣고 마차를 타고 돌아 갔다. 덕분에 환자는 1주일 동안이나 침대에 누워서 지내야 했다. 15 유제니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내 곁에서 보내며 이야기를 해 주거나 책을 읽어 주었 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을 바바라 알렉세에브나의 신랄한 냉소를 대꾸 없이 견뎌야 했던 것이고, 그런 냉소를 심지어는 우스개 소리로 받아넘겨야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유제니는 하루 종일 집에 있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리자의 성화 때문이었다. 그가 계속해서 그녀 곁에 있게 되면 그마저도 병에 걸린다고 밖으로 내몰았다. 두 번째 이유는 농장일은 매 단 계에서 그가 없으면 진행되기 어렵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제니는 집에만 머 물러 있을 수 없었다. 밭에도 나가 보아야 했고, 숲과 정원도 둘러보아야 했으며, 탈곡장을 살펴 보아야 했다. 그런데 어디를 가든지 스테파니다에 대한 생각과 생생한 환상이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물론 잠깐 동안은 그녀를 잊고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정도는 문제 가 되지 않았다. 그는 그런 감정을 충분히 억누를 수 있었다. 전에는 몇 달 동안이나 그 여 자를 보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았지만, 이제는 그 여자가 계속해서 눈에 띈다는 사실이 문제 였다. 그녀는 유제니가 과거의 관계를 되살리고 싶어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그래서 그가 즐겨 다니는 길에 모습을 드러내려 애썼다. 물론 유제니나 그 여자나 서로 말을 나눈적은 없었다. 그 때문인지 둘 중 누구도 옛날의 밀회 장소로 달려가지 않은 채, 만남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들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장소는 숲 속이었다. 그 곳은 여인네들이 소들에게 먹일 꼴을 장만하려고 자루를 메고 의심받지 않고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유제니 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그 곳엘 들러 보았다. 유제니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그 곳엘 들러 보았다. 유제니 자신은 그 곳에 절대 가지 않겠다고 매일 같이 다짐을 했지만, 결국 매일 숲을 향해 걸어가는 자신을 보아야 했다. 간혹 사람 목소리 라도 들리면 덤불 뒤에 숨어서 가슴을 졸이며 그녀가 그 곳에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녀가 그 곳에 있는지 알고 싶어했던 이유는 유제니 자신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만약 그 녀가 있었고, 혹여 환자 있었더라도, 그는 결코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고 오히려 달아 났을 것이다. 유제니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한번은 그녀를 본 적이 있 었다. 유제니가 숲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풀로 가득 채워 무거워 보이는 자루를 등에 메 고 다른 두 여인과 숲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좀더 일찍 왔더라면 숲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여자들이 같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그에게 되돌아 올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유제니는 다른 여자들의 눈길을 끌 게 될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한참동안이나 개암나무 뒤에서 기다려 보았다. 물론 그녀 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그 곳을 떠나지 않았다. 상상만으로도 그녀를 내 앞에 나타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기회는 한 번에서 끝나지 않았다. 대 여 섯 번이나 되었다. 그 때마다 유제니의 욕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녀가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였던 때가 없었고, 그가 그녀의 힘에 그렇게 완전히 빠져든 적도 없었다. 유제니는 자신 이 자제심을 잃고 있으며 거의 미치광이가 되어 버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엄격성마저도 숲을 향한 그의 발걸음을 말리지 못했다. 그런 욕망과 그런행동(숲을 찾 는 것도 하나의 행동이었기 때문이다)은 그 자신에게도 혐오스러웠다. 유제니는 만약 어둠 속 어디선가에서 그녀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면, 그리고 운이 좋아 그 녀를 만지게 된다면 결국 자신의 감정에 굴복하고 말 것 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런 짓이 사람들에게, 그녀에게 , 그리고 그를 억누르고 있는 그 자신에게도 부끄러운 짓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또 그는 그런 부끄러움이 분명하지 않은 어둠이나 어둠에 버금가는 조건 을 엿보았고, 동물적 욕망으로 수치심을 덮어 버릴수 있는 조건을 찾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 다. 따라서 유제니는 자신이 비뚤어진 죄인이며, 스스로를 경명하고 증오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유제니는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을 증오했다. 그는 하루도 빼지 않고 하 나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했고, 타락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했다. 오늘부터는 절대 그녀를 보 기 위해 한 걸음도 떼지 않겠으며, 그녀를 잊겠다고 매일같이 다짐했다. 그런 유혹에서 벗어 날 방법을 매일 새롭게 생각해 냈고, 그 방법들을 사용해 보았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었다. 쉬지않고 끝없이 일에 몰두하는 방법도 사용해 보았고, 땀이 나도록 육체노 동을 하기도 했고, 단식을 해 보기도 했다. 또 모든 사람, 아내와 장모, 그리고 주변 사람들 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감수해야 할 수치심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이런 방법은 써먹은 순간만은 유혹을 이겨 내는 것 같았지만, 정오가 되면 그는 어김없이 숲을 향해 걷 고 있었다. 고통스런 닷새가 그렇게 흘렀다. 그는 멀리서만 그녀를 지켜볼 뿐, 한 번도 그녀 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 16 리자는 점점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다. 이제는 움직일 수도 있게 되었다. 다만 남편에 게 일어난 조그만 변화에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리자는 남편이 변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바바라 알렉세에브나가 며칠 동안 집을 떠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유일한 식 객으로는 유제니의 삼촌만이 있었다. 마리 파블로브나는 평소처럼 별채에 머물고 있었다. 6 월에 천둥이 내려친후에는 가끔 그랬듯이 이틀 동안 비가 퍼부었다. 그 때 유제니는 거의 반쯤은 정신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비 때문에 모든 일이 중단되었다. 거름을 실어나르는 일 까지도 중단해야 했다. 거름이 젖고 지저분하게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농부들은 집에서 나 오지 않았지만, 가축을 돌보는 사람들은 가축을 몰고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암 소들과 염소들이 목초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느릿한 걸음으로 뛰어다녔다. 길을 따라서 온갖 곳에 물줄기가 만들어 졌고, 잎새와 풀은 물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또한 빗물받이 홈 통에서 웅덩이 까지 이어진 물줄기는 쉴새없이 빗물을 쏟아 내어, 웅덩이에는 거품까지 일 고 있었다. 유제니는 리자와 함께 집에 있었다. 리자는 그 날 따라 유난히 지루했다. 리자 는 유제니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짜증스레 대답할 뿐이었다. 리자는 결국 묻기를 포기했다. 그러나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들은 아침 식사를 끝내고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그들 곁에서는 삼촌이 사교계에 들락 거리면서 있었던 일들을 신물이 나도록 떠들어 대고 있었다. 리자는 자켓을 뜨개질하면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날씨를 불평하고 등 뒤에 약한 통증이 있다고 호소했다. 삼촌은 리자에 게 누워 있으라고 충고를 해 준 뒤, 보드카를 하인에게 청했다. 유제니는 집에 있는 것이 너 무도 따분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약해빠지고 권태롭게 여겨졌다. 그는 책을 읽고 잡지를 뒤적거리기도 했으나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밖에 나가서 어제 사온 사탕무우 가는 기계를 살펴보아야겠어요.` 이렇게 말하고 유제니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우 산을 가져 가도록 하세요.` `아니, 됐어요. 가죽 코트를 입을 거니까 괜찮아요. 보일러실까 지 만 다녀올 거요.` 유제니는 장화를 신고 가죽 코트를 입었다. 그리고 공장을 향해 걸었 다. 그러나 스무 걸음을 떼기도 전에 그를 향해 다가오는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치 마를 높이 말아 올려, 하얀 허벅지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숄로 머리와 어깨만을 가린 채 걸어오고 있었다. 유제니는 처음에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채 물었다. `어딜 가는 길이요?` 그녀를 알아보았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미소를 지으며 그를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송아지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매일 만나는 사람처 럼 허물없이 물었다. `그런데 이런 날씨에 어딜 가십니까?` `헛간에 가 보려구요.` 그는 무의식적으로 대답했 다. 어떻게 그런 대답을 했는지조차 알수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것 같은 기 분이었다. 그녀는 숄을 살짝 물어뜯으며 눈짓을 해 보였다. 그리고 정원에서 헛간 쪽으로 이어진 방향으로 달려갔다. 유제니는 공장쪽으로 길을 잡았지만, 라일락 덤불 너머에서 방향 을 돌려 그 곳으로 달려 갈 생각이었다. 그 때 뒤에서 그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 님, 부인께서 주인님을 찾고 계십니다. 빨리 돌아와 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 그는 유제니 의 남자 하인이던 미사였다. 순간 유제니는 `오 하나님, 당신이 저를 두 번씩이나 구해 주셨 습니다. `라고 생각하며 급히 되돌아 갔다. 리자는 유제니가 병듯 이웃 여자에게 점심 때 약 을 갖다주기로 약속했던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유제니가 약을 가져가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들이 약을 챙기는 동안 5분이란 시간이 흘렀다. 약을 가지고 집을 나왔다. 순간 유제니는 집에서 눈에 띄지 않도록 헛간으로 곧바로 달려갈까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집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자 마자, 곧장 방향을 바꾸어 헛간 쪽으로 달렸다. 그는 헛간에서 상큼한 미 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을 그녀를 이미 상상 속에서 만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곳 에 없었다. 그녀가 헛간을 다녀갔다는 흔적마저도 그 곳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유제니는 그녀가 오지 않았고 그의 말을 듣지도 않았고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도 못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했던 말을 이제 와서 그녀가 들을까 두려운 듯 콧소리만으로 중얼거려 보았 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아예 오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왜 그녀가 나에게 달려들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에게도 남편이 있어, 아내를 ,너무도 착한아내를 가진 내가 다 른 여자를 탐하다니, 나는 정말 뻔뻔스런 놈이야!` 유제니는 헛간에 주저 앉아 이렇게 생각 했다. 헛간의 초가 지붕에 새는 곳이 있는지 짚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가 와 주었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이 빗속에서 단 둘이서... 그녀를 다시 한번 끌어 안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여기에 왔었어. 발자국을 보 면 알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며 유제니는 헛간 부근에 땅과 풀이 웃자란 길을 살펴 보았 다. 선명한 맨발 자국이 눈에 띄었다. 발자국 하나는 미끌어진 흔적까지 뚜렷이 보여 주고 있었다. `맞아, 그녀는 틀림없이 여기에 왔었어. 그래 결심했어. 그녀를 어디에서 보든지 곧 바로 그녀에게 갈 거야. 밤에 그녀를 찾아가겠어.` 유제니는 한참 동안 헛간에 앉아 있었 다. 지치고 짓눌린 마음으로 헛간을 나왔다. 유제니는 약을 전해 주고 집으로 돌아와, 그의 방에 누워서 점심 식사를 기다렸다. 17 점심이 되기 전에 리자가 그를 찾아왔다. 유제니가 불만스러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걱정스러웠기 때문에, 리자는 출산을 위해 모스크바로 가려는 생각을 유제니가 마땅치 않게 생각할까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계속 집에 머물러 있기로 결정했으며, 출산을 핑계로 모스 크바에 갈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유제니는 리자가 출산 자체만이 아니라 건강한 아이를 낳 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제 니는 아내가 그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알고 감동받지 않을 수 없 었다. 사실 집 안의 모든 것들이 정결했고 즐겁고 깨끗했다. 오직 그의 영혼 속의 것만이 더 럽고, 비열했고, 구린내를 풍겼다. 자신의 유약함에 대한 진지한 반성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생각을 끊어 버리려는 단호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이면 똑같은 현상이 되풀이 되고 있다는 자괴감에 유제니는 저녁내내 시달려야 했다. 그는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틀림없이 이겨 낼 방법이 있을 거야. 하나 님!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 그 때 아주 낯선 사람처럼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 다. 유제니는 삼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들어오세요.` 삼촌이었다. 삼촌은 리자의 특명을 받은 사람처럼 당당하게 들어왔다. `지금 너에게 무슨 변화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다. 리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그 때문에 리자가 무척이나 괴로워하는 것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네가 너무 멋지게 시작했던 일들을 네가 그만둔다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네가 원하는 것이 뭐니? 나로서는 어디론가 멀리 다녀오라 고 충고해 주고 싶구나. 그렇게 하면 너뿐만 아니라 네 아내에게도 효과가 있을 거다. 크리 미아에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니? 그곳 기후는 말할 수 없이 좋고 능력있는 산파도 있으니 까. 포도가 익을 계절이면 되돌아 올 수 있을 거다.` 유제니가 갑자기 큰소리를 질렀다. `삼 촌, 비밀을 지켜 줄 수 있나요? 정말 엄청난 비밀이에요. 부끄럽기도 한 비밀이구요.` `자 말 해 보거라. 설마 나를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유제니가 대답했다. `삼촌, 삼촌은 저를 도와 줄수 있을 거예요. 저를 도와 주고 구해 주어야 해요.` 전혀 존경하지도 않던 삼촌에게 비 밀을 털어놓는다는 생각, 최악의 것에 자신을 드러내 놓고 삼촌 앞에서 체면을 잃어야 한다 는 생각이 유제니에게는 오히려 즐거웠다. 그는 비열한 죄인으로 전락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 자신에게 엄한 벌을 내리고 싶었다. 삼촌이 말했다. `유제니, 말해 보아라. 내가 널 얼마 나 좋아하는지 알잖니!` 삼촌은 유제니에게 비밀이 있고, 게다가 수치스런 비밀이며, 그 비밀이 자기에게 전해지 며, 어쩌면 그 비밀을 써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만족해 하는 표정이었다. `나라는 놈은 정말 뻔뻔스럽고 쓸모없는 건달이에요. 그래요, 정말 뻔뻔스런 무뢰한이라구요!` 삼촌 은 비위가 거슬린 듯 유제니의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네 이야기는... ` `아니에요! 리자의 남편이었을 때에는 절대 뻔뻔스런 인간이 아니었어요 그녀는 한없이 순수하고 나를 사랑하 고 있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그런 여자의 남편인 나는 다른 천한 여자 때문에 아내에게 성 실하지 못했어요.` `무슨 말이냐? 리자에게 충실하지 못하고 부정한 짓을 했다고 말하는 이유가 뭐냐?` `그래요, 적어도 성실하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제 힘으로는 어쩔수 없었어요. 그 여자에게 언제라도 달려들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기회가 있었을 때마다 방 해를 받았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 자, 진정 해라.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해 보거라.` `간단한 이야기에요. 총각 시절에 어 리석게도 이 마을에 사는 한 여자와 관계를 가졌었어요. 말하자면 그 여자와 숲속에서 들판 에서 여러 번 만나 관계를 맺었던 거예요.` 삼촌이 물었다 `그 여자는 예쁘냐?` 유제니는 삼촌의 그런 질문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외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기에 유제니는 못 들은 척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는 그저 심심풀이 정도로만 생각해서, 어제든지 그런 관계를 끝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요. 게다가 실제로 결혼하기 전에 그 관계를 청산했어요. 최근 일 년 간 그 여자를 보지 않 았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어요.` 유제니 자신에게도 이렇게 하소연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 이 너무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갑자기 그 여자를 보게 되었어요. 그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사람들의 마법의 힘을 때때로 믿는 모양입니다. 벌레 한 마리가 제 심장 속으로 기어들어온 기분이에요. 내 자신을 책망해 보기도 했지만.... 제 자신의 행동이 한 없 이 두려웠어요. 말하자면 제가 어떤 순간에 저지를지도 모를 행동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두 려웠어요. 하지만 제 자신은 그 여자를 향하고 있어요. 제가 지금까지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저는 공장으로 가던 길에 그 여자를 만났어요. 그런데 마침 리자가 나를 찾으로 미샤를 보낸 덕분에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아니. 그 빗속에 말이냐?` ` 예.삼촌, 이제 저는 지쳤어요. 그래서 삼촌에게 고백하고 도움을 청하려는 거예요.` `잘 했다. 하지만 네 땅에서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바 람직하지 않아. 사람들이 금방 알게 될테니까. 게다가 리자의 몸이 약하니 리자에게 해가 가 도록 해서는 안된다. 하필이면 이마을 여자를 건드렸냐?` 유제니는 삼촌의 말에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삼촌, 제발 저를 구해 주세요. 삼촌 께서 해결해 주셔야 해요. 오늘만 해도 하나님 덕분에 그 짓을 피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내일, 또 그 다음 날 그 때 에도 제가 구원을 받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어요. 이제 그 여자도 알고 있어요. 제발 저를 그 냥 내버려두지 말아주세요.` 삼촌이 말했다. `알았다. 하지만 정말 그 여자를 그렇게 사랑하 는 거냐?` `아니에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사랑이 아니에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힘으 로 저를 붙잡고는 놓아주지 않아요.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어요. 그것을 극복할 힘 이 내게 생긴다면 그 때는 ...` 삼촌이 말했다. `됐다. 내가 말했던 대로 하자꾸나. 당장 크리 미아로 떠나도록 하자.` `그래요. 우리 당장 떠나요. 하지만 떠나기 전까지 항상 제 곁에 있 어주세요. 제 말동무가 되어 주세요.` 18 유제니가 삼촌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는 사실, 그리고 비가 줄기차게 쏟아지던 날 이 후에 유제니가 겪었던 양심의 가책과 수치심은 그를 한층 침착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들은 1주일 후에 크리미아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유제니는 여행비를 마련 하기 위해 읍내를 다녀왔고, 농장 경영에 관련된 여러 가지 것들을 사무실 직원들과 집안 하인들에게 지시해 두었다. 유제니는 다시 명랑한 기운을 되찾았고 아내와도 즐겁게 지내게 되었으며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비가 오던 날 이후로 스테파니다를 한번도 보지 않고, 유제니는 아내와 함께 크리미아로 떠날수 있었다. 그 곳에서 유제니는 2 개월이란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 새로운 기분을 마음껏 받아들이면서 과거를 그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 버린 것 같았다. 크리미아에서 그들은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났고 그들과 더욱 친하게 되었다. 물론 새로운 친구들도 얻었다. 크리미아에서의 생활은 유제니에게 매일이 휴 일과도 같았다.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유익한 휴가였다. 그 곳에서 그들은 같은 마을 출신의 귀족으 로 옛 궁전 대신을 지낸 사람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지혜롭고 자유주의적사고를 지닌 그는 유제니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하면서 많은 조언을 해 주었고, 결국에는 유제니를 그가 몸 담고 있던 정당으로 끌어들였다. 8월이 지나갈 무렵 리자는 예쁘고 건강한 딸아이를 출산 했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쉽게 아기를 낳았다. 그들은 9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 올 때에는 모두 네사람이었다. 아기와 유모가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리자가 혼자 아기를 돌 볼수 없었기 때문에 유모를 두어야 했다. 유제니는 과거의 두려움을 훌훌 털어버리고 너무 도 편안한 마음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완전히 새롭고 행복에 젖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내 가 아이를 낳았을 때 남편으로서 겪어야 했던 모든 것을 겪은 뒤로, 유제니는 아내를 어느 때보다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아기를 품 안에 안았을 때 전해 오는 느낌은 너무도 새롭 고 자극적이며 즐거운 것이었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이었다. 그의 생활에 또 하 나의 새로운 것이 덧붙여 졌다. 농장 관리라는 일거리외에, 전국의회 의원과의 친분 덕분에 새로운 관심사가 그를 바쁘게 만들었다. 젬스트보에 대한 관심이었다. 부분적으로느 개인적인 야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0월에 임시회의가 열릴 예정이었고, 그 때 유제니도 젬스트보 의 회원으로 선출될 예정이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후에도 유제니는 전국의회 의원을 만 나러 여러 번 읍내를 다녀와야 했다. 유제니는 유혹의 고통이나 몸부림을 완전히 잊고 지냈 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다. 과거에 그거 겪었던 고통이 마치 정신착란에서 비롯된 광기와도 같은 것처럼 느껴졌다. 유제니는 과거의 몸부림에서 완전히 벗어난 기분이었다. 그래서 바실리 니콜라이치와 단 둘이 있게 되었을 때, 전혀 아무 렇지도 않게 그 여자에 대해 물어 볼 수 있었다. 그 문제데 대해서는 전에도 그에게 이야기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유제니는 수치심을 잊고 질문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도르 페치 니코프는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나?` `예. 그 사람은 아직 도회지에 있습니다.` `그럼 그 부인은?` `그 여자는 정말 못 말릴 여잡니다. 요즘은 제노비와 놀아나고 있습니다. 정 말 못 말리는 바람둥이입니다. ` 유제니는 그 대답에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잘 되었군. 이제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나도 이제는 완전히 변했다구!` 19 유제니가 오랫동안 바랐던 것이 실현되고 있었다. 그는 많은 재산을 얻었고 공장도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 또한 사탕무우도 풍작이어서 막대한 수입을 보장받고 있었다. 그의 아내도 건강하게 아기를 낳았고, 장모는 멀리 떠나가 버렸으며, 게다가 젬스트보에도 만장일 치로 선출되었다. 자치회원으로 선출된 후 유제니는 집으로 돌아왔다. 자치회원으로 선출되 자 많은 축하를 받았고 답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다른 회원들과 점심을 같이 했고, 다섯 잔의 샴페인까지 마셨다. 이제 새로운 인생설계가 그의 앞에 펼쳐지게 되었다. 유제니는 집 으로 돌아오면 새로운 삶을 설계할 계획이었다. 초겨울이었지만 따뜻했다. 길도 좋았고 따사 로운 햇살이 내리쪼였다. 집이 가까워질 때까지 유제니는 젬스트보의 회원으로 선출됨으로 써 지금까지 꿈꾸어 오던 자리를 주변 사람들과 어떻게 꾸려갈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 제 일자리를 주변 사람들과 어떻게 꾸려갈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생산 활동을 창출할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영향력을 지닌 인물로서 그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유제니는 자신의 농장에 속한 농부들과 다른 농부들이 지난 3년 동안 그를 어떻게 생각해 왔을지 상상해 보았다. 이런 생각에 몰두하여 유제니는 마을 한 복판을 지낙 있었다. 그 때 그의 앞에서 한 농부가 커다란 물통을 지고 한 여자와 길을 건너고 있었다. 그들은 유제니 의 마차가 지나 갈수 있도록 비켜 서 주었다. 농부는 늙은 페치니코프였고 여자는 스테파니 다였다. 유제니는 그녀를 보았고 또 바로 알아보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느낄수 없어 기뻤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게 보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유제니의 마음에 동요가 있지는 않았다. 유제니는 집으로 마차를 몰았다. 삼촌이 말했다. `우리가 너를 축하해 주어도 될 까?` `그럼요. 선출되었어요.` `잘 되었구나! 그럼 축배를 마셔야지!` 다음날 유제니는 그 동안 소홀했던 농장을 둘러보러 나갔다. 외곽지대의 농장에서는 새로 들어온 탈곡기가 한 창 돌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제니는 여인네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탈곡장 안으로 들어갔다. 꽤조심하기는 했지만 짚단을 나르고 있던 스테파니다의 검은 눈동 자와 빨간 수건과 마주쳤다. 유제니는 남몰래 곁눈질로 그녀를 훔쳐보자 무언가 심상치 않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변화가 무엇이라고 꼭 집어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다음 날 에도 유제니는 다시 탈곡장을 살펴보러 나가서 그 젊은 여자의 허물없고 건강한 몸매를 두 눈으로 계속해서 지켜보면서 공연히 2시간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도저히 이겨 낼 수 없는 패배감이었다. 또 다시 그 때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 때의 두려움과 공포심이 다시 일었 다. 이번에는 이겨 낼 자신이 전혀 없었다. 그가 예상했던 일이 마침내 일어나고 말았다. 다음 날 저녁, 유제니는 저절로 발에이끌린 듯 그녀의 뒷마당까지 오고 말았다. 옛날에 그들 이 은밀한 만남을 가졌던 헛간 옆이었다. 산책하는 척하면서 그는 그곳에 멈추어 서서 담배 에 불을 붙였다. 그 때 한 이웃 여자의 눈에 띄고 말았다. 유제니는 곧 바로 뒤로돌아 얼굴 을 감추었지만 그 여자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 봐. 그분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정말이야. 그 분이 저기에 계신다구. 빨리 가봐!` 유제니는 한 여자가 헛간으로 달려 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유제니는 한 농부와 만나는 바람에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집 으로 돌아와야 했다. 20 응접실로 들어갔다. 모든 것이 이상하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 날 아침 기운차게 일어나며 ,그런 생각을 멀리 떨쳐 버리고 완전히 잊어버리고 다시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 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이유는 분명치 않았지만 유제니는 그 날 아침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녀 생각을 떨쳐 버리려 애쓰지도 않았다. 그를 즐겁게 해 주었고 소중하게 생각되었던 것들마저도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일에서 벗어나려 몸부림 쳤다.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와 함께 있을 방법을 꾸미기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만 할것 같 았다. 그는 온갖 일을 내팽개치고,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혼자만 있게 되자 곧 그는 정원과 숲을 배회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곳이 그를 사 로잡고 있던 기억으로 더럽혀 졌다. 그는 정원을 걷고 있고 무언가 중요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미친 듯이 그녀만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 그가 그녀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깨닫고 곧바로 이곳으로 달 려와, 아무도 볼수 없는 곳으로 숨어들어가는 상상을 해 보았다. 달도 없고 누구도 앞을 볼 수 없는 깜깜한 밤에, 그들 자신까지 볼 수 없는 그런 깜깜한 밤에 그녀가 찾아와 주고, 그 가 그녀의 몸을 매만지는 그러 꿈을 꾸었다... 유제니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진정으로 원할 때 그 관계를 끊는 거야. 맞아, 내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깨끗하고 건강한 여 자를 가지려는 거야! 이런 식으로 그녀와 즐기는 것이 아니야. 지금껏 내가 그녀를 취했다 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여자가 나를 취한 거였어. 나를 붙잡고는 놓아주지 않아. 나는 자 유롭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자유롭지 못했어. 행복했던 결혼 시절에도 내 자신을 속이고 있 었던 거야. 위선이었어. 그녀와 관계한 후 부터 나는 새로운 느낌을 받았어. 남편이 되었다 는 진정한 감정이었어. 그래, 그녀와 결혼해야 했었어.` 그의 생각은 계속되었다. `이제 두 가지 삶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해. 우선 리자와 시작했던 생활이 있어. 남들을 위한 봉사, 농 장 경영, 자식을 위한 삶이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수 있는 삶이야. 그런 삶을 선택하게 된 다면 스테파니다는 없어져야만 해. 전에도 말했듯이 그 여자가 멀리 떠나야만 해. 아니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도록 만들어 야만 해. 하지만 다른 삶도 있어. 그녀를 남편과 헤어지게 만드는 거야. 그녀남편에게 돈을 쥐어주고 그녀를 포기하게 만드는 거야. 그렇게 해서 까지 그녀와 함께 살려면 수치심과 불 명예를 감수해야 겠지. 하지만 그럴경우, 리자가 사라져 주어야만 해. 미미까지도 아니야, 그 럴 수는 없어. 아기는 문제가 안 돼. 그러나 리자만은 없어져야 해. 리자가 멀리 떠나주어야 해. 리자가 이런 사실들을 미리 알고, 나를 저주하면서 떠나가 버리는 거야. 내가 자기 대신 에 보잘것 없는 시골 여자를 선택했다는 걸 말게 된다면! 내가 거짓말쟁이이고 위선자라는 걸 알게 된다면! 아니야, 너무 끔찍할 거야. 그럴 수는 없어. 만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리 자가 병에 걸려서 죽을 수도 있을 거야. 죽음 그래, 그럼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야.` 유제 니의 생각은 계속 꼬리를 물었다. `죽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아니야, 둘 중하나가 죽어 야 한다면 스테파니다가 죽어야해. 그 여자가 죽어도 문제는 해결될수 있어. 맞아, 남자들 이 아내나 정부를 독살하거나 살해하는 방법을 써먹는 거야. 리볼버를 꺼내 들고 그녀를 불 러 내는 거야. 그리고는 껴안아 주는 척하면서 가슴에 총을 쏘는 거야. 그럼, 모든 것이 끝 나, 정말. 그 여자는 악마야. 맞아, 악마야. 그 여자는 내 의지마저 빼앗고 나를 완전히 차지 해 버렸어. 죽여? 맞아, 죽이는 거야. 역시 두 가지 선택이 있어. 아내를 죽일 건가 아니면 그 여자를 죽일 건가. 지금 처럼 살 수는 없어.` 악마의 결론을 위한 두 가지 다른 선택 선택 1 `그럴 수는 없어. 이 문제는 좀더 심각하게 생각해 보고 해결책을 찾아야만 해. 모든 것을 지금처럼 덮어 둔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지 짐작할 수도 없어. 이런 삶을 바라지도 않고, 그 녀를 떼어 내야 한다거 거듭해서 다짐하고는 있지만, 계속해서 말뿐이었어. 오늘 밤이라도 당장 그녀의 뒤마당으로 달려 갈지도 몰라. 그녀도 알게 되고 나를 만나러 나오겠지. 그럼 모두가 알게 되어 아내에게 고자질 할거야. 아니면 내가 직접 아내에게 사실을 털어 놓게 된다면... , 거짓말하기는 싫어, 지금처럼 살수 는 없게 되겠지. 그래, 지금처럼 살수는 없어. 사람들이 알게되고, 떠벌이 대장장이를 비롯해 모두가 알게 될거야. 그런데도 지금처럼 살 수 있을까? 안 돼! 이제 두가지 방법밖에 남지 않았어. 아내를 죽이든지 그여자를 주여야 해. 맞아, 그런데.... 아, 세번째 방법이 있었어. 자살하는 거야.` 이런 생각에 유제니는 온몸 에 전율이 느껴졌다. `맞아, 자살하는 거야. 그럼 두 여자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어.` 유제니는 오직 자살만이 유 일한 방법이란 생각에 소름이 돋아왔다. 그에게는 리볼버가 있었다. `정말 자살할 수 있을 까?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방법인데.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그는 서재로 돌아갔다. 리볼버를 넣어 두었던 서랍을 열었다. 그러나 상자에서 리볼버를 꺼내려 하자, 아내가 서재 로 들어왔다. 그는 총상자를 신문으로 덮어 감추었다. 아내가 그의 표정을 보더니 깜짝 놀라 며 말했다. `또 그 증세가 나타나는 군요!` `그 증세라니?` `예전과 똑같아요. 그 때도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어요. 여보, 나에게 솔직히 말해 보세요. 당신이 괴로워하고 있는 것 을 알아요. 나에게 털어 놓고 나면 한결 편안해질 거예요. 그게 어떤 일이든지 간에, 털어 놓고 나면 지금처럼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예요. 혹시 내가 모르는 나쁜 일이라 도 일어났나요?` `당신이 모르는 일? 글쎄....` `말해보세요. 제발 말을 해 주세요. 말해 주 지 않으면 이방에서 나가지 않겠어요.` 유제니는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내가.... 아 니요. 당신에게 할 말은 없어요.` 어쩌면 아내에게 털어놓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유모가 서재로 들어와, 아내 에게 아기를 산책시킬 시간이 되었다고 말했다. 리자는 아기의 옷을 입히러 가야 했다. `당 신, 나에게 꼭 말해 줄 거지요? 금방 돌아오겠어요.` `알았어요. 어쩌면...` 리자는 유제니의 씁스레한 미소를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서재를 나갔다. 유제니는 도둑처럼 잽싸게 리볼버 를 쥐고 상자에서 꺼내들었다. 리볼버는 장전되어 있었다. 탄실은 하나만이 비어 있었다. ` 이제 어떻게 될까?` 유제니는 관자놀이에 리볼버를 갖다 댔다. 조금은 망설여졌다. 그러나 스테파니다를 머리에 떠올리자 그녀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결심, 몸부림, 유혹, 타락, 그리 고 되풀이되는 몸부림, 공포로 온몸이 떨렸다. `아니야, 이 방법이 최선이야.` 그리고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발코니에서 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리자는 총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서재로 뛰어들어 왔다. 유제니는 바닥에 엎드려 누워 있었다. 검붉은 따뜻한 피가 상처에서 펑펑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시신은 비틀려 있었다. 경찰의 심문이 있었다. 누구도 유 제니의 자살을 이해할 수 없었고 설명할 수 없었다. 삼촌마저도 자살의 이유가 두 달 전 유 제니가 고백했던 것과 관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바바라 알렉세에브나는 이미 그런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유제니가 평소하던 말을 생각해 보면 자살한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리자도 마 리 파블로브나도 자살의 이유를 전혀 이해할수 없었다. 게다가 의사들의 말은 더욱 믿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유제니에게 정신적으로 착란 증세가 있었다. 쉽게 말해서 정신병자 라 는 의사들의 진단은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의사의 진단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유제 니가 그 어떤 사람들 보다도 건전하게 살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만약 유제니 이프테네프 가 정신질환자 였다면 이세상 모든 사람들이 정신병자이어야 했다. 사실 정신적으로 가장 문제가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서는 인지하지 못하는 정신 착란적 증세를 다른 사람들에서 발견하는 사람들이다. 선택 2 `안돼 ! 이제 두 가지 방법밖에 남지 않았어. 아내를 죽이든지 그 여자를 죽여야 해. 더이 상 이런 식으로는 살수 없어.` 유제니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책상으로 다가가 리볼버를 꺼 냈다. 리볼버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탄실 하나가 비어 있었다. 유제니는 리볼버를 바지 주 머니에 넣었다. `오, 하나님! 제가 지금 무얼 하려는 것입니까?` 그는 이렇게 소리치며 무 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오, 하나님! 저를 도와 주시고 구원해 주십시오! 당신께 서는 제가 악을 원치 않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 힘 만으로는 악을 이겨 낼수 없 습니다. 제발 도와 주십시오!` 유제니는 이렇게 절규하며, 성모상 앞에서 성호를 그렸다. ` 그래, 나도 이겨 낼수 있을 거야. 밖으로 나가 산책 하면서 생각해 보자.` 그는 현관으로 나가 코트를 입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정원을 지났고, 들판길을 따라 외곽 지대의 농장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탈곡기는 쉴새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사내들 이 외쳐대는 소리가 들렸다. 유제니는 헛간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그는 그녀 를 금새 찾아 냈다. 그녀는 옥수수를 긁어 모으고 있었다. 유제니와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 을 보냈고, 경쾌하고 날렵한 발걸음으로 뛰어다니며 흩어진 옥수수를 긁어 모았다. 유제니 는 의지와는 전혀 달리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을수 없었다. 유제니는 그녀가 눈에 띄지 않았던 때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일꾼하나가 그 때까지 수확한 옥수수의 탈곡이 끝나가고 있으며, 그 때문에 일의 진척이 느리고 탈곡량이 줄어들었다고 알려 주었다. 유제니는 탈곡기를 살펴보았다. 옥수수 다발이 고르게 지나가지 않을 때마다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냈기 때문이었다. 유제니는 일꾼에게 수 확된 옥수수 다발이 어느 정도나 되느냐고 물었다. `다섯수레 정도는 될 겁니다.` `그럼 여 길 보게...` 그러나 유제니는 말을 끝낼수 없었다. 그녀가 탈곡기 앞까지 다가와서 밑에 떨어 진 옥수수를 긁어모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웃음 짓는 눈빛으로 그의 가슴 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 눈빛은 그들끼리만의 즐겁고 분방했던 사랑을 의미했고, 유제니 가 그녀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옛날의 그 헛간으로 찾아와 준다면 , 어떤 조건 이나 결과에도 상관하지 않고 그와 즐거운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유제 니는 그녀의 유혹적인 힘에 빨려드는 기분이었으나 굴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제니는 주기 도문을 떠올렸고 주기도문을 반복해서 되뇌어 모았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단 한 가지 생각 만이 그를 완전히 사로 잡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녀와 단 둘이서만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 때 일꾼이 물었다. `오늘 이 몫을 끝내면, 내일 수확한 낟가리를 시작해도 될까요?` `그럼, 그럼` 유제니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두 눈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쫓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잔뜩 쌓인 옥수수 더미 옆에서 흩어진 낟알을 긁어 모으고 있었다. 유제니는 생각 해 보았다. `정말 내 자신을 이겨 낼 수 없는 것일까? 내가 정말 그렇게 타락 한 것일까? 오, 하나님! 하지만 하나님을 없어. 오직 악마만이 있을뿐이야. 저 여자가 바로 악마야. 저 여자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어.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인정할 수 없다구! 악마 야. 그래, 바로 악마야!` 유제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주머니에서 리볼버를 꺼냈다. 그리고 그녀를 쏘았다. 한번, 두번, 세 번 등뒤를 쏘았다. 그녀는 몇걸음 물러서더니, 옥수수 더미 위로 쓰러졌다. 여자들이 소리쳤다. `저런, 저럴수가! 대체 무슨일 이십니까?` 유제니가 소리 쳤다. `사고가 아니었오. 내가 일부러 이 여자를 쏘아 죽였소. 빨리 경찰을 불러 오시오.` 그리고 그는 집으로 돌 아갔다. 서재로 들어가, 문을 잠궈 버렸다. 아내에게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문을 잠근 채 안에서 아내에게 소리쳤다. `나를 재촉하지 말아요. 잠시 후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요.` 1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른후, 유제니는 벨을 눌러 하인에게 명령했다. `가서, 스테파 니다가 살아 있는지 알아 보고 오게.` 하인은 이미 그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유제니에게 스테파니다는 이미 1시간 전에 죽었다고 말해 주었다. `잘 됐군. 이제 나를 혼자 내버려 두 게. 경찰이나 치안 검사가 오면 알려 주게.` 경찰과 치안 검사는 다음 날 아침에 찾아왔다. 유제니는 아내와 아기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끌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유제니는 재판 을 받았다. 배심원들의 심판도 받았다. 판결은 일시적인 정신착란이었다. 덕분에 그에게는 교회에서 참회하는 판결이 내려졌다. 유제니는 9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고, 그 후 한 달 동안 수도원에 유폐되어 있어야 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수도원에서도 술을 끊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허약해 지고 치유되기 힘든 주정뱅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바바라 알렉세 에브나는 이미 그런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유제니가 평소하던 말을 생각해 보 면 자살한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리자도 마리 파블로브나도 자살의 이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의사들의 말은 더욱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의사의 진단을 도저 히 인정할 수 없었다. 유제니가 그 어떤 사람보다도 건전하게 살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유제니 이르테네프가 정신질환자 였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정신 병자이어야 했다. 사실 정신적으로 가장 문제가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인지 하지 못하는 정신 착란적 증세 를 다른 사람들에서 발견하는 사람들이다. 악은 유혹하지만 선을 참고 견딘다. 옛날에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 세상의 물건들이 넘치도록 많았 고 많은 하인들도 있었다. 하인들은 한결같이 그런 주인을 섬기는 것에 긍지를 가지고 자랑 스레 말했다. `이 태양 아래 우리 주인님보다 착하신 분은 없어. 그 분은 우리에게 먹을 것 과 입을 것을 충분하도록 나누어 주시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일거리를 맡기실 뿐이야. 악의라고는 없으신 분이어서 누구에게라도 상냥하게 대해 주시지. 그 분은 하인을 마치 가축다루듯 하면서 이유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벌을 주고 다정한 말 한 마디 건네지 않는 다른 주인들과는 달라. 그 분은 언제나 우리가 잘지내기를 바라고, 친절하게 대해 주시 고,따뜻하게 말씀해 주신다구.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이렇게 하인들은 그 사람을 칭송하고 다녔다. 하인이 주인과 그처럼 서로 사랑하며 조화롭게 지내는 것에 악마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아 렙이란 이름의 하인을 데려다 악마를 씌워서, 다른 하인들을 유혹하도록 만들었다. 어느 날 하인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쉬면서 주인의 친절함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그 때 아렙이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우리 주인이 친절하다고 그렇게 떠들어 댈 것은 없어. 어리석은 짓이야. 악마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 주면 너희에게 친절하게 해 줄 거야. 우리는 주인을 제대로 잘 섬기고 있고, 모든 점에서 주인의 비위를 잘 맞추어 주고 있 잖아.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자마자 곧바로 해내고, 심지어는 주인이 바라는 것을 미리 해내 기도 하잖아. 그런데 어떻게 주인이 우리에게 친절하게 않을 수 있겠어?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실험해 보아도 좋아. 주인의 비위를 맞춰주는 대신에 약간 손해를 가해 보자구. 그럼 틀림없이 다른 주인들과 똑같이 행동할 거야. 고약한 주인들처럼 악을 악으로 갚을 거라구.` 다른 하인들은 아렙의 말을 부인하고 나섰다. 마침내 그들은 아렙과 내기를 하기로 했다. 물론 아렙이 주인을 화나게 만드는 역할을 맡 기로 했다. 만약 아렙이 진다면, 아렙은 나들이옷을 내놓아야 했다. 대신 아렙이 이긴다면 다른 하인들이 모두 나들이 옷을 아렙에게 주기로 했다. 또한 다른 하인들은 주인의 반대편 에서 아렙을 위해 변호해 주기로 약속했고, 만일 아렙이 사슬로 묶이거나 감옥에 들어갈 경 우에는 석방시켜 주기로도 약속했다. 이렇게 내기가 결정된 후 , 아렙은 다음 날 아침 주인 을 화나게 만들기로 했다. 아렙은 목동으로 주인이 무척이나 아끼는 값비싼 순수 혈통의 양들을 돌보는 일을 맡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주인이 소중한 양들은 보여 주려고 몇 명의 손님을 데리고 우리를 찾아왔다. 그 때 아렙은 친구들에게 의미심장한 눈짓을 해 보였다. 마 치 `두고 봐! 내가 우리 주인을 어떻게 화나게 만드는지` 라도 말하는 것 같았다. 하인들이 모두 쪽문과 울타리 뒤에 숨어 지켜 보았다. 악마도 그의 종이 어떻게 일처리를 하는 지 지켜보려고 부근의 나무 위로 기어올라갔다. 주인은 우리 주변을 돌아다니며 손님들에게 암 양과 새끼양을 구경시켜 주었다. 주인은 갑자기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숫양을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기 있는 모든 양들이 비싼 것들이기는 하지만, 제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녀석이 있습니다. 뿔이 아주 희한한 모습으로 꼬여 있지요. 값을 매길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저는 그 녀석을 제 눈동자처럼 아낀답니다.` 낮선 사람들의 갑작스런 출현에 깜짝놀란 양들이 우리 안을 미친 듯이 날 뛰어 다녔다. 그래서 손님들은 어떤 양이 주인이 자랑하는 양인지 도대체 식별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주인이 아렙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렙아, 나를 위해서 우리가 제일 사랑하는 숫양을 좀 잡아 주겠니? 뿔이 희한하게 꼬인 녀석 말이다. 제발 조심 조심해서 잡고 있거라. 잠시 동안만 조용히 잡고 있으면 되겠다.` 주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렙은 사차처럼 양들에게로 뛰어들어 문제의 양을 움켜 잡았다. 양의 털을 힘껏 잡 은 다음, 한 손으로 왼쪽 뒷다리를 잡았다. 그리고 주인이 보는 앞에서 아렙은 마른 나뭇가 지를 다루듯이 양을 머리 위까지 들어올린 다음 힘껏 내던졌다. 양은 다리가 부러져 무릎이 꺾인 채 울어 댔다. 아렙이 다시 오른쪽 뒷다리를 움켜쥐고 들어올리자, 양의 왼쪽다리가 심 하게 꼬인채 힘없이 늘어졌다. 손님들과 하인들이 모두 놀라 비명을 질러 댔다. 그러나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악마는 아 렙이 너무 영리하게 일을 해내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주인의 얼굴도 벼락만큼 이나 화난 얼굴이 되었다. 눈쌀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님들과 하인들도 곧 닥칠 끔찍한 일을 생각하며 말없이 기다렸다. 한참 동안 침묵이 계속 된 후, 주인은 무거운 짐이라도 벗어 던진 듯 몸을 부르르 떨어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런 자세로 잠시 꼼짝하지 않았다. 얼굴에는 짜증스런 주름마저 사라지 고 보이지 않았다. 주인은 미소 띤 얼굴로 아렙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렙아, 아렙아. 네 주 인이 널보고 나를 화나게 만들라고 했던 모양이구나. 하지만 내 주인이 네 주인보다 더 강 하단다. 나는 너에게 화를 내지 않을 거다. 하지만 네 주인을 좀 화나게 만들어야 되겠구나. 혹시 내가 너에게 벌을 내릴까 걱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는 오래 전부터 자유로운 몸 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느냐. 그래, 아렙아. 너를 벌하지는 않을거다. 오히려 네가 바라던 대 로 자유의 몸으로 풀어 주마. 내 손님들 앞에서 너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 주겠다. 자,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거라. 네 나들이옷도 가져가도록 하여라.` 그리고 착한 주인은 손님들과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이를 갈던 악마는 나무에서 떨어졌고, 땅 속 깊이 파 묻혀 버렸다. 죄인은 없다. 1 내 운명은 남다른 것이다. 부자들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학대와 경멸에서 내가 부당 함과 잔인함과 공포심을 절감하듯이, 혹은 지금과 같은 세상을 있게 해 준 진정한 생산자인 육체 노동자들 대부분이 겪고 있는 가혹한 굴욕과 궁핍을 내가 분명히 인식하고 있듯이, 부 자들의 쾌락과 학대에서 무언가를 통렬하게 깨닫고 있는 비참한 거지는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런 현실을 절감해 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느낌은 더욱 굳 어졌고, 마침내는 궁극점에 다다르게 되었다. 지금도 그런 느낌을 분명히 간직하고 있지만, 나는 타락하고 죄 많은 부자들의 세계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나는 부자들 곁을 떠날수 없다. 그럴 힘도 없고 그만한 지혜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신분에서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죄의식이나 수치심 없이 내 물리적욕구 음식, 수면, 의복, 여행 을 만족시키면서 내 삶을 변화시킬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지도 못하다. 물론 내 의식 세계와는 화합되지 않는 내 신분에 변화를 주려노력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러나 과거와 내 가족, 그리고 나에 대한 가족의 요구 등에 의해 조성된 조건들은 너무도 복 합적이어서, 나는 도저히 그런 조건에서 벗아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내 자신에게서 조 차도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나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이제 여든을 넘기면서 신체적으로 나 정신적으로 약해졌기 때문에, 나는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노력마저도 포기해 버렸다. 이상 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약해질수록 내 신분에 잘못이 있음을 더욱 통렬히 깨닫고 있으며 그 런 현실에 나는 더욱 견디기 힘들어 졌다. 내가 현재의 신분을 까닭없이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속죄하고, 내가 너무도 분명 히 보고 있는 것에 눈을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만 이 아니라 자신마저도 기만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기존의 조건 하에서는 육체적으로나 정 신적으로 고통받을 수 밖에 없는 무수한 사람들의 짐을 가볍게 해 주도록, 나의 진실한 감 정을 털어놓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현재 차지하고 있는 신분 덕분에,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짓되고 범죄적인 관계를 폭로하는 특별한 재능을 지닐 수 있게 된 것 같다. 달리 말해서 내 자신을 변명하려 함으로써 초점을 흐리지 않고, 부자들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또 가난하고 학대 받는 사람들에게 억압받고 있다는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온전한 진실만을 말할수 있는 특별한 재능이 나에게 주어진 것 같다. 내 입장은 너무도 확고하기 때문에 내 자신을 변명 할 욕심은 전혀 없다. 오히려 내가 더불어 살고 있지만 너무도 부끄러워하는 집단, 다시 말 해서 내 자신의 운명을 그들의 운명에서 결코 떼어 놓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가난 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태도 때문에 내 영혼 전체로 혐오하는 집단의 사악함을 과장하지 않으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마저 평등론자의 오류를 답습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평등론자들은 학대받고 노 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실패와 실수를 깨닫지 못하고, 과거로 부터 물려받은 실수와 그럼으로써 유발된 장애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상류계급의 책임이 오히려 어느정도 줄어드는 모순을 낳았기 때문이다. 자기 변명이란 욕구에서 벗어 나서, 자유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학대받는 사람이 학대하는 사람에게 품고 있는 증오심과 시기심에서 벗어나서 , 나는 진실을 보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최선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의 위치에 놓았던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섭리를 펼쳐 보일 것이다. 2 알렉산더 이바노비치 볼긴은 독신으로 모스크바 은행의 행원이었다. 연간 8천 루블의 봉급을 받았고 , 직장 내에서 나름대로 존경을 받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한 시골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집 주인은 상당히 부자인 대지주로 , 2천 5백 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 고 볼긴의 사촌과 결혼한 사람이었다. 볼긴은 사촌들의 식구들과 작은 내기로 카드 놀이를 하면서 저녁시간을 보내 ,피곤해 하며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먼저 하얀 천으로 덮인 작은 테이블 위에 시계, 은장 담배 케이스, 수첩, 큰 가죽 지갑, 주머니 솔과 빗을 내려놓았 다. 다음에는 겉옷, 조끼, 셔츠, 바지와 속내의, 그리고 실크 양말과 영국제 부츠를 차례로 벗었다. 그런 다음 잠옷과 가운을 입었다. 그의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볼긴은 담 배 한 대를 피웠다. 침대에 엎드려 잠깐 동안 그 날의 느낌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촛불을 불어 끄고, 옆으로 돌아누워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1시경에 잠이 들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8시에 잠에서 깨어나 슬리퍼와 가운을 입고 벨을 눌렀다. 늙은 집사장인 스테판은 한 가정의 아버지 였고, 여섯 손자를 둔 할아버지로 그 집에서 30년 동안 봉사한 충실한 하인이었다. 스테판은 볼긴이 어젯밤 벗어둔 부츠를 깨끗이 닦아 광을 내어 들고 왔고,잘 손질된 양복과 깨끗한 셔츠 한 벌도 가져왔다. 볼긴은 그에게 고맙 다고 말한 후 , 날씨가 어떠냐고 물었다. 그리고 주인 부부도 잘 주무셨냐고 물었다. 그는 시계를 힐끗 보았고 , 곧 얼굴을 씻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물은 준비되어 있었다. 세면대와 화장대위에도 모든 것이 사용하기 편하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비누, 칫솔, 머리 빗는 솔, 손 톱깎이와 손톱줄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손과 얼굴을 천천히 씻고, 손톱을 깨끗이 정 리하고 매니큐어를 칠한 후, 수건으로 몸을 밀고, 스펀지로 희고 강건한 몸뚱이를 머리부터 발 끝까지 닦아 냈다. 그리고 머리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거울 앞에 서서, 그는 조금씩 잿빛 으로 변하기 시작한 수염을 중앙에서 나누어지도록 먼저 영국제 솔 두개로 매만졌다. 그런 다음, 벌써 점점 가늘어지는 징조를 보이고 있는 머리카락을 커다란 거북껍질로 만든 빗으 로 빗어 내렸다. 속내의, 양말, 부츠, 바지 와 조끼를 입은후, 그는 겉옷을 입지 않은 채 편 한 의자에 앉아 옷을 입은 후의 휴식을 즐겼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날 아침 어디로 산책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원으로 갈까아니면 리틀 포트로 갈까? 그는 리틀포트로 산책하기로 결정했다. 산책을 다녀오면 시몬 니콜라에비치의 편지에 답장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시간을 넉넉했다. 모든 일정을 결정한 듯한 태도로 의자에서 일어서며 그는 시계를 꺼내 보았다. 다시 시계와 지갑 을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바지 주머니에는 담배 케이스와 전기 라이터를 넣었고, 겉옷 주머 니에는 깨끗한 손수건을 한 장씩 넣었다. 그리고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방을 뒤로 하고 나 왔다. 그 정리는 이미 쉰 살을 넘긴 스테판의 차지 였다. 스테판은 평소에도 그런 일을 해 왔기 때문에 조금의 반감도 품지 않았다. 다만 불길이 조그만 `보상`을 해 주기를 바랐다. 볼긴은 거울을 쳐다보고 자신의 외모에 흡족해 하면서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에는 하녀와 하인, 그리고 집사의 수고 덕분에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얼룩 하나 없는 하얀 식탁 보 위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며 끓고 있는 사모바르, 커피포트, 뜨거운 우유, 크림, 버터, 그리 고 각가지 종류의 흰 빵과 비스킷이 준비되어 있었다.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은 그 집의 둘째 아들과 그의 가정교사 그리고 비서였다. 지방자치 회의 현역 의원이면서 대 농장주였던 집주인은 이미 집을 나선 뒤였다. 자치회의에 참석하 기 위해 8시에 집을 나섰던 까닭이었다. 볼긴은 커피를 마시면서 대학생과 비서에게 날씨 에 대해서, 그리고 어젯밤의 카드놀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또한 어젯밤 별것도 아닌 이유 로 아버지에게 무례하게 대들었던 테오도리트의 괴상한 행동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 다. 테오도리트는 그 집의 장남으로 결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테오 도르였지만 누군가 그를 약올려 줄 생각으로 장난 삼아 그를 테오도리트라 부른 적이 있었 다. 그 이름이 재미있었는지, 그의 행실이 조금도 흥미롭지 못한 나이가 된 이후에도 그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는 대학에 다니기도 했지만 2학년에 그 만두고 근위기병 연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포기했고 지금은 시골에서 살면서 아무일도 하지 않으며, 남의 결점이나 트집잡으면서 온갖 것에 불만을 터뜨렸다. 테오도리트 는 아직 침대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집안 식구중 남은 사람은 안나 미카일로브나, 그녀의 몸종, 장군의 미망인인 그 녀의 언니, 그리고 그 집의 식객으로 살고 있는 풍경 화가였다. 볼긴은 현관 옆 테이블에서 파나마 모자와 조각된 상아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를 꺼내들고 밖으로 나갔다. 꽃들이 만발 한 베란다를 건너 화원으로 가로 질러 걸었다. 화원 한가운데에는 둥근 화단이 불룩 솟아 있었다. 빨갛고, 희고, 푸른색의 꽃들이 가장자리를 수놓고 있었고, 중앙에는 안주인 이름의 첫 문자로 꽃밭을 이루고 있었다. 화원을 벗어난 볼긴은 수백년은 됨직한 보리수 길로 들어 섰다. 시골 처녀들이 가래와 비로 길을 쓸어 내며 깨끗이 하고 있었다. 정원사는 측량하는데 바빴다. 한 소년이 수레에 무언가를 싣고 끌어 오고 있었다. 볼긴은 이들을 지나 적어도 1백 25에이커는 될 듯 한 정원으로 들어갔다. 곧게 뻗은 오래된 나무들로 가득했고, 잘 정돈된 길들이 거미줄 처럼 연결되어 있는 정원이었다. 볼긴은 정원 길을 산책하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여름집을 지나 들판 너머로 연결되는 길을 택했다. 볼긴이 즐겨 걸었던 길로 정원에 서 가장 쾌적한 길이었지만 들판에는 훨씬 멋진 길이 있었다. 오른쪽으로 감자를 캐고 있던 몇몇 여인네들의 모습이 붉고 하얀 덩어리 처럼 보였고, 왼 쪽으로는 밀밭과 초원, 그리고 풀을 뜯는 소들이 보였다. 그리고 앞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리 틀 포트란 이름의 어둑한 참나무 숲이 있었다. 볼긴은 숨을 깊이 들이 마셨다. 살아 있다는 사실, 특히 사촌의 집이 있는 이 곳에서 철저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시 골에 사는 사람들은 축복받은 거야. 사실, 이 집주인은 농장경영이다 지방자치회 일이다 하 여 시골에서도 그렇게 편안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런 것이 그의 일이기도 하지.` 볼긴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둔해 보이는 영국제 부츠를 번쩍이며 힘차 게 걸어나갔다. 하지만 곧 그의 앞에 닥쳐올 은행에서의 힘든 겨울 업무를 생각하기 시작했 다. `곧 매일같이 아침 10시부터 오후 2시, 때로는 5시 까지 은행에 있어야 하겠지. 게다가 이사회, 고객과의 개별적인 면담, 의회에의 출석, 하지만 이곳에선... 모든 것이 즐거워. 물론 약간은 단조롭기도 하지. 하지만 오랫동안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는 미소를 지었다. 리틀 포트에서 산책한 후, 그는 휴한지를 똑바로 가로 질러 돌아왔다. 휴한지는 쟁기질이 한창이었다. 마을 공동체의 공동 재산이었던 암소, 염소, 양, 돼지 등이 그 곳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정원으로 돌아가는 지름길은 그 동물들을 뚫고 자나가는 방법 이었다. 그 때문에 양들이 놀랄 달아나기 시작했고 곧 돼지들이 그 뒤를쫓아 뛰었다. 그 중 작은 돼지 두 마리가 떡 버티고 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양치기 소년이 양들은 불러들이려고 채찍을 휙 울렸다. 볼긴은 휴가를 해외에서 보냈던 때가 기억에 떠올랐다. `우리는 유럽에 비해 너무 뒤떨어져 있어. 유럽 어디에서도 저런 식으로 키워지는 암소는 단 한 마리도 없 을 거야.` 그리고 볼긴은 그 때 걷고 있던 길이 어디 쯤에서 갈라지는 지 알고 싶어 마치 가축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 소년에게 소리쳤다. ` 그 가축은 누구의 것이냐?` 소년은 볼긴 의 모자와 잘 정돈된 수염, 특히 금으로 테를 두른 안경을 보고 두렵기도 했지만 너무 놀라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볼긴이 다시 물었다. 그 때서야 소년은 정신을 차린 듯 대답했다. ` 저희 것입니다.` 볼긴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너희가 누구냐?` 소년은 자작나무 껍질을 엮어 만든 신발을 신었고, 바지는 아마포 띠로 묶 었고, 어깨에는 누더기로 변해 버린 셔츠를 걸쳤고, 윗 부분이 떨어져 나간 모자를 쓰고 있 었다. `너희가 누구지?` `피로그브 마을의 가축입니다.` `넌 나이가 몇이냐?` `모르겠습니다.` `글은 읽을 줄 아느냐?` `아니요, 모릅니다.` `학 교에는 다니지 않았느냐?` `아닙니다.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읽기를 배우지 않았 지?` `배우지 않았습니다.` `저 길은 어디로 연결되느냐?` 소년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볼 긴은 집을 향해 걸으며, 니콜라스 페트로비치에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을 학교의 개 탄스런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 주어야 할지 생각했다. 집이 가까워지자 볼긴은 시계를 보았다. 벌써 11시가 지나 있었다. 그는 니콜라스 페트로비치가 근처 도시에 갈 예정이라는 것을 생각해 냈다. 게다가 볼긴은 모스크바로 부칠 편지를 그에게 부쳐 달라 부탁하기로 했 었다. 그러나 그 편지를 아직 쓰지 못했다. 그 편지는 한 친구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편지였 다. 그 친구에게 곧 경매에 붙여질 성모 마리아 그림을 그를 대신해 입찰하도록 부탁할 생 각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현관에는 잘 먹여 기름이 번지르르하고 마구를 잘 갖추어진 순혈 종의 커다란 말 네 마리가 마차에 매여 있었다. 검은 색으로 옻칠된 마차가 햇볕에 반짝거렸다. 마부는 카프탄을 입고 은색 벨트를 하고 마부석 위에 앉아 있었다. 말들이 간혹 은종을 딸랑딸랑 울렸다.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 은 맨발의 농부가 누더기 같은 카프탄을 입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볼긴을 보자 꾸벅 절을 했다. 볼긴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방금 니콜라스 페트로비치 씨를 뵙고 나왔습니 다.` `무슨 일로?` `저는 지금 아주 곤란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제 말이 죽었습니다.` 볼긴은 그에게 여러 가지 것을 묻기 시작했다. 농부는 그가 처해있던 상황을 볼긴에게 자세 히 늘어 놓았다. 그에게는 다섯 자식이 있었고 죽은 말은 그에게 유일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죽어 버렸던 것이다.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적선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볼긴이 일어나라고 해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네 이름이 뭐냐?` 농부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대답했다. `미트리 수다리코프입니다.` 볼긴은 지갑에서 3루블을 꺼내 농부에게 주었다. 그러자 농부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고맙다고 말했다. 볼긴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 집주인이 현관에 서 있었다. 그가 볼긴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편지는 어디에 있나? 나는 곧 출발해야 하는데.` `저런 미안하구만. 금방 쓸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겠나? 깜박 잊고 있었어. 이 곳이 너무 마음에 들어 몽땅 잊고 지낸단 말일세.` ` 알았네. 하지만 서두르게. 마차가 벌써 15분 전부터 기다리고 있네. 파리들이 극성스레 물어 뜯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는 마부에게 소리쳤다. `아르센티, 기다릴 수 있겠나?` 마부가 대 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부자들은 준비도 끝내지 않고, 왜 말을 불러 내는 거야? 덕분에 하인들이나 나 같은 사람은 그저 서서 파리들한테 뜯겨야 하잖아.` `금방 다녀오겠네.` 볼긴은 그의 방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곧 다시 돌아와 적선을 청하던 농부에 대해 니콜라스 페트로비치에게 물어 보았다. `자네도 그를 보았나? 술 주정 뱅이야. 하지만 무척 불쌍한 사람이야. 자, 어서 서두르게!` 볼긴은 필기도구가 모두 들어 있는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편지를 쓰고 180루블짜리 수표를 작성한 다음, 봉투에 넣고 봉 인하여 니콜라스 페트로비치에게 주었다. `다녀오게.` 볼긴은 점심 시간이 될 때까지 신문을 읽었다. 그는 진보계열의 신문, 러시안 가제트나 스피치 때로는 러시안 위드만을 읽었다. 집 주인이 구독해 보는 뉴 타임즈는 건드 리지도 않았다. 볼긴은 평안한 마음으로 정치소식, 황제의 동정, 총리와 각료들의 근황, 그 리고 의회의 결정사항에 대해서 훑어보았다. 그리고 일반적인 소식, 연극, 과학, 살인, 콜레 라 등에 대한 소식면으로 넘어 가려는 순간, 점심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열 명이 상 의 노고 덕분으로 식탁에는 8인분의 식사가 눈부시게 차려져 있었다. 은제 물주전자, 술 병, 쿠와스 맥주, 포도주, 광천수, 조각한 유리 그릇, 깨끗한 냅킨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두 명의 하인이 계속해서 들락거리며 먹을 것을 갖고 들어와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전채요리 와 찬음식과 더운 음식이 차례로 들어왔다. 안주인은 그 동안 자신이 행동했고, 생각했고, 말했던 것들에 대해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그녀는 자기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이 모두 완벽하기 때문에, 바보가 아닌 사람이라면 그런 것들에 즐거워하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볼긴은 그녀가 떠들어 대는 말들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결코 내색하지 않고 그녀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테오도리트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대학 생은 때때로 미망인과 몇 마디 나누었다. 간혹 대화가 끊어지기도 했다. 그러면 테오도리트 가 끼어들어 모두의 기분을 비참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럴 때마다 안주인은 아직 나오지 않은 요리를 청했고, 하인은 부리나케 부엌으로 뛰어들어가 요리를 들고 허겁지겁 돌아왔다. 물론 누구도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거나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 억지로 먹으면서 대화를 계속되었다. 말이 죽었다는 이유로 적선을 청했던 농부의 이름은 미트리 수다리코프였다. 그는 죽은 말을 잊고 일터로 다시 나가는 데 꼬박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 는 가장 먼저 근처 마을에 사는 도살업자 사닌을 찾아갔다. 하지만 도살업자가 외출하고 없 어 기다려야 했다. 그런 다음 그의 말을 들판에 매장하기 위해서 이웃의 말을 빌려야 했다. 왜냐하면 죽은 동물을 마을 인근에 묻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안은 감 자를 수확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빌려 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테판은 미트리를 불쌍 히 생각해, 그만 그의 간청에 넘어가고 말았다. 게다가 죽은 말을 수레에 싣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미트리는 앞발에서 말굽을 떼어내 아내에게 건네 주었다. 하나는 깨어졌지만 다른 하나는 말짱했다. 미트리가 무디기 이를 데 없는 삽으로 무덤을 파고 있을 때, 도살업자가 찾아와 가죽을 벗겼다. 마침내 말 시체가 구 멍속에 던져 지고 메워졌다. 미트리는 피곤했다. 마트레나의 오두막을 찾아가 사닌과 보드 카 반병을 나누어 마시며 마음의 위로를 삼았다. 그리고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내와 한 바탕 말싸움을 벌이고 건초 더미 위에서 곧바로 잠을 청했다. 옷도 벗지 않은 채 였다. 그러 나 그는 평소에도 그런 식으로 누더기 같은 외투를 이불 삼아 잠을 잤다. 아내는 딸들과 함께 오두막에 있었다. 미트리는 평소처럼 새벽에 일어났다. 지난날의 괴로운 생각을 떠올리 며 투덜댔다. 말이 몸부림치면서 결국에 쓰러지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그에게는 말이 없 었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말가죽값, 4루블 80 코펙뿐이었다. 벌떡 일어나 각대를 질끈 동 여맸다. 그리고 마당을 지나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한 손으로 아기를 가슴에 끌어 안은 채, 다른 손으로는 난로에 밀짚을 넣고 있었다. 아기는 아내의 더러운 속옷에 거의 매 달려 있었다. 미트리는 가슴에 세 번 성호를 긋고 구석에 매달려 있는 성모상을 향했다. 그리고 그가 기도라 부르는 뜻도 없는 말을 삼위일체 신께, 성모님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하나 님 아버지에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물 좀 있소?` `금방 딸애가 물을 길러 갔어요. 차는 조금 있어요. 오늘 추수밭에 나갈 거예요?` `그래야지. 그게 낫겠어.` 난로에서 피어오른 연 기 때문에 그는 기침이 나왔다. 그는 나무의자에서 누더기를 집어들고 현관문으로 나갔다. 딸이 물을 길어 돌아오던 참이었다. 미트리는 양동이째로 한 모금 가득 물을 들이 킨 다음, 손바닥 위로 뱉어 냈다. 얼굴을 씻을 물은 아직 그의 입속에 남아 있었다. 그는 누더기로 대 충 닦은 다음,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쓱쓱 문질렀다. 그리고 집을 나섰다. 길에서 더러운 셔츠 말고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열 살 정도의 계집애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미 트리 아저씨, 탈곡하러 사는 길이군요.` 미트리가 대답했다. `그렇다.` 미트리는 지난 주에 쿠무쉬키르를 도와 주었던 것을 떠올리며 이제는 자신이 보답받을 차례라고 생각했다. 쿠무 쉬르키르도 미트리 만큼이나 가난한 사람으로, 말 한 마리가 끄는 기계로 옥수수를 탈곡하 는 것을 미트리가 도와 주었던 적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내가 곧 갈 거라고 전해 다오. 점심 시간에는 갈수 있을 거라고 나는 먼저 우구루미에게 가 보아야 한단다.` 미트리는 오두막으로 다시 돌아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신발로 바꿔 신고 각대 끈을 바꿔 맸다. 그리고 일터를 향해 출발했다. 어제 그는 볼긴에게 3루블, 니콜라스 페트로비치에게 3루블을 적선받은 후,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그 돈을 건 네 주고는 곧바로 이웃을 찾아갔다. 탈곡기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탈곡기를 돌리던 사람은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 댔다. 빼빼 여윈 말들이 보조를 맞추어 금방이라도 쓰 러질 듯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탈곡기를 돌리던 사람은 단조로운 어조로 계속 소리쳤 다. `자, 자, 그만, 돌고.... , 잘 한다.!` 어떤 여인네들은 옥수수 다발을 풀고 있었고, 어떤 여 인네들은 흩어진 지푸라기와 옥수수 낟알을 갈퀴로 긁어 모으고 있었다. 또 한 아름씩 옥수 수 다발을 끌어안고 남정네들에게 건네주는 여인네도 있었다. 그러면 남정네들은 옥수수 다 발을 탈곡기에 집어 넣었다. 일이 눈코뜰새없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미트리가 지나가야 만 했던 부엌 밭에서는 긴 셔츠 만을 걸쳐 입은 한 계집애가 감자를 캐어 바구니에 담고 있 었다. 미트리가 물었다. `네 할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니?` `헛간에 계세요.` 미트리는 헛간으로 가서 즉시 일을 시 작했다. 여든을 넘긴 노인은 미트리의 고민을 알고 있었다. 미트리에게 아침인사를 하고 , 노인은 탈곡기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 주었다. 미트리는 누더기 같은 옷을 겉옷을 벗어 울타리 근처의 길바닥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옥수수 다발을 끌어 모아, 탈곡기 안에 집어던져 놓았다. 그리고 옥수수 다발을 끌어모아, 탈곡기 안에 집어 던지며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일은 점심 시간이 될 때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수탉의 울음소리를 믿지 못해 서가 아니라, 탈곡기가 돌아가는 시끄러운 소리에 수탉의 울음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기 때 문이다. 마침내 지주의 증기 탈곡기가 경적 소리로 3마일 밖의 신호음을 보냈다. 그리고 주 인이 헛간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는 80대의 꼿꼿한 노인이었다. `이제 그만 쉬어야지. 식 사를 할 시간이야.` 일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힘을 내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지푸라기가 말 끔히 치워졌다. 탈곡된 옥수수 알들은 짚과 분리되어 들여졌고, 일꾼들은 식당으로 들어갔 다. 식당은 연기로 자욱했다. 난로에 굴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깨끗이 정돈 되어 있었고, 일하던 사람들이 앉 을 수 있도록 나무 의자들이 식탁 둘레에 마련되어 있었다. 일꾼들은 주인 가족을 제외하고 모두 아홉이었다. 빵, 수프, 끓인 감자, 그리고 쿠와스 맥주가 식탁위에 놓여 있었다. 식사를 하던 중, 목발을 짚은 외팔이 늙은 거지가 어깨에 가방을 둘러메고 들어왔다. `이 집안에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들, 맛있게 드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으로 저에게도 먹을 것을 적선 해 주십시오.` 주인의 며느리로 벌써 초로에 접어든 여자가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 게도 먹을 것을 드릴 것입니다.` 그 땐 문 옆에 서 있던 주인 노인이 말했다. `우리를 노 엽게 생각지는 마시오. 이 자에게 빵 한덩이를 주거라, 마르타. 어떻게 지내시오?` `우리도 부자가 될 수 있을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잘못된 생각이오. 마르타,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라 하셨다. 이 노인에게 빵을 좀 나누어 주거라.` 마르타는 시아버지 의 말에 따랐다. 거지는 곧 사라졌다. 탈곡기를 돌리던 남자가 일어나 신의 은총을 빌고, 주 인 가족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잠시 쉬러 갔다. 미트리는 누워 쉬지 않았다. 가게로 달려 가 감자를 약간 샀다. 그는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데멘스크에서 왔다는 남자와 잡담을 나누었 다. 미트리는 소를 팔지 않고는 집을 꾸려나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소 값을 물어 보러 갔다. 다시 일터로 돌아왔을 때, 다른 일꾼들은 이미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은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학대받고 착취당하고 기만당하는 사람들은 과도한 노동으로 사기 마저 꺾이고, 영양 부족으로 조금씩 죽음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물론 그 들 중에도 스 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기독교나 그 보다 뛰어나 보이는 또 다른 종교에의 구원마저 포기해 버린 잘난 체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부자들의 추 악하고 나태한 삶은 이런 노예들의 인간 한계를 벗어난 과도한 노동으로 뒷받침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사모바르, 은제 접시,마차,기계,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용품들을 만들어 내려고 공장에서 뼈빠지게 일하는 수백만의 노예들은 재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부자들은 노예들 의 증오 속에서 살아갈 따름이다. 그런 증오를 깨닫는 부자도 있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부자도 있다. 비록 그들의 마음 속에는 종종 따뜻한 온정이 솟겠지만, 가난한 아이들은 여전 히 정신적 무지 속에서 키워지면서 나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중년의 독신자가 있다. 그리고 수천 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고, 나태하고 탐욕적이 며, 과도한 탐닉에 빠진 삶은 영위하며, 뉴타임즈를 즐겨 읽고, 정부가 유태인에게도 대학 입학을 허락한 것은 너무도 현명하지 못한 짓이라 비난을 일삼는 부자가 있다. 또 그의 식 객으로 전에 지방 청장을 지냈던 사람도 있다. 지금은 많은 녹을 받는 의원이 되어, 법률가 협회가 사형제도를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에 만족해 하며 신문을 읽고 있다. 이들의 적 인 국민 당원들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신문을 읽는다. 그들은 러시아 국민연맹의 결성을 허용한 정부의 근시안적 태도를 동의하지 않는다. 여기에 다정하고 온화한 어머니도 있다.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여우이야기와 토끼를 불구로 만들어 놓은 개 이야기를 읽어 준다. 어린 딸이 혼자서 이리저리 걸어 다닌다. 그 동안 어머니는 다른 아이들을 살펴본다. 맨발의 아이들은 배가 고픈지 나무에서 떨어진 덜 익은 사과를 집어 든다. 어머니는 이미 그런 모 습에 익숙해져 있다. 어머니에게는 그 아이들이 무작정 아이로만 보이지 않는다. 일상적 환 경의 일부일 뿐이다. 가족의 풍경인 셈이다. 무슨 까닭일까? 해설 참사랑을 노래하라.. 박덕규 나는 세계적인 대문호라거나 불후의 명작이라거나 하는 것에 유달리 관심을 갖는 편은 아 니다. 전쟁과 평화, 부활 등의 명작을 남긴 톨스토이 또한 다른 많은 뛰어난 문학가들처럼 엇비슷한 무게로 내 성장기를 거쳐갔다. 물론 세계명작들 중 어떤 작품들은 다른 어떤 것들 보다 더욱 인상깊게 내게 각인된 것도 있고, 내 인생, 특히 문학적 인생에 큰 영향을 준 것 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한 인간이 무수한 세계명작의 상당수를 읽을 때마다 감동 받을 수 있겠는가.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마다 개인적인 편차도 있겠지만, 유명한 것의 대개가 그렇 듯이 `이건 정말 뛰어난 작품입니다.`라는 오래 공인된 평가나 풍문이상으로 그 개인의 내면 을 움직이는 경우는 아마도 소수일 것이다. 나도 그런 개인중 한 사람이다. 나는 한국 밖의 존재에 유난히 둔감해서 많은 세계 명작 들 중 일부만을 대부분 조악한 번역본을 둔감해서 많은 세계 명작들 중 일부만을 대부분 조 약한 번역본을 통해 읽었으며, 게다가 그 중에서도 몇몇 작품만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편이다. 즉 내게 톨스토이는 알려진 세계 명작, 그 이상의 존재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성장기를 지나도 한참을 지난 내게 톨스토이가 또 다가왔다. 이번에는 그를 대 표하는 흔한 세계 명작이 아니었다. 조금 `덜` 세계적이라 볼 수 있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 는가` 나 `바보 이반` 등의 러시아 만화에 거점을 둔 것으로 보이는. 비교적 소품에 가까운 작품들이 그것이었다. 이것들은 톨스토이의 이력에 따라 짐작해 보면, 1881년 `사람은 무엇 으로 사는가` 의 발표 무렵부터 만년에 이르는 동안의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여기 소개되는 작품들은 대개 기독교의 가르침을 표면에 드러내는 것들이었 다. 예를 들어, `음욕의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미 마음 속으로 그 여자 와 간음한 것이다.` 라는 마태복음의 경구를 앞세운 소설 `악마`는 말할것도 없고, 남을 위 해 사는 삶은 진정 어떠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젊은황제` , 선과 악의 가름을 문제 삼으면 서 선으로서의 삶의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일러 주는 `악은 유혹하지만 선은 참고 견딘다.` `세 죽음` `죄인은 없다.` `무도회가 끝난 뒤` 등에서 기독교 사상을 드러내는 톨스 토이의 내면을 잘 읽을 수 있다. 이 작품들이 내게 남다르게 여겨진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문학을 가르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나의 신념과 관련이 있다. 다른 하나는, 문학의 주제라 볼수 있는 그 가르침의 내용 때문이다. 나는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은 재미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서사성, 드라마적 구성, 문체의 탄력성 등을 적절히 활용해야 한 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때의 `재미`란 독자들이 그 작품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드 는 외적 요소란 점을 잊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사탕발림이요 선의의 거짓말이 곧 그것이다. 나는 우리 나라 소설, 특히 아주 거창한 사회적 진실을 문제 삼는 소설이 바로 이 점을 받 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래서 인지 내가 쓰는 소설에는 재미를 위한 기법이 자주 동원된다. 때로는 조금 과장돼 보일 정도로 통속적인 드라마 구조를 활용하기 까지 한다. 톨스토이에게도 이런 면이 없는 게 아니다. 가령,`젊은 황제`는 우화성, 혹은 알레고리 방법으로 하나의 가상 드라마를 만들 어 놓은 경우다. 도는 `악은 유혹하지만 선은 참고 견딘다.`는 코믹한 엽편소설이다. 그러나 나는 소설을 재미있게 읽히게 하는 많은 요소들 때문에 속에 든 알맹이가 왜곡돼 보이는 것 을 오래 견디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가르쳐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가 치관이 너무도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져 있어서, 자신과 남을 동시에 아끼는 방법도, 정신도 잃어가고 있다. 이것을 개선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도 가르치는 것, 그게 내 문학적 신념이 다. 내 소설이 때로는 웃기고 때로는 자극적이고 또 때로는 피비린내가 진동하지만, 어딘지 복잡하고 무겁고 어렵다는 느낌을 가지는 독자가 있다면, 작품을 통해 가르쳐 보겠다는 내 신념이 남다르게 내재되어 있기 때문으로 이해하면 된다. 내 판단으로는 톨스토이 또한 더 말할 것도 없이 `문학은 학교다`라고 믿었던 사람이다. 그는 실제로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농장 경영을 하면서 학교를 세워 농민의 자녀를 모으기 도 했고,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 때 주로 성경ㅇ르 바탕에 둔 많은 교육소설을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내가 최근에 읽은 것 중에는 이때의 것으로 보이는 작품들이 많다. 더 큰 문제는 그 가르침의 내용이 어떤가에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나 는 최근에 읽은 톨스토이의 소품들에서 확인하고 배우는 바 크다. 소위 톨스토이즘이라는 것이 있다. 그 중심에 놓이는 다섯가지 사상을 약술하면 이렇다. 첫째, 노하지 말라. 둘째, 간음하지 말라. 셋째, 맹세하지 말라. 넷째, 악에 대하여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 다섯째, 모 든 사람을 사랑하라. 이는 물론 기독교 사상에 깊이 연루된 것임을 당장 알 수 있다. 톨스 토이의 특이함은 그 기독교적인 사상을 `실천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그 문학을 실천적 가르 침의 단계로 이끌고 갔다는 데 있다. 톨스토이는 소설이라는 구체적 환경에 놓인 인물들의 생생한 조건들을 부각시킴으로써, 자칫 명제화되는 것만으로 끝날 수 있는 사상을 실천 가 능한 자리로 옮겨 제시해 놓았다. 게다가 소설의 그 구체적 환경을 ,한 인간이 선과 악을 의지적으로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당위론적 공간으로 설정한 게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큰 관심을 요한다. 여기서는 참과 거짓 에 대한 이분법적인 가름이나 단순논리가 톨스토이 소설에서 왜 비판되는지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다. 편리와 타락과 간음이 유혹하는 세상에서 고민하는 인간을 그 신분에 관계없 이 드러내면서, 그들이 어떻게 근로와 금욕과 절제를 통해 참사랑을 깨달아 가는가에 초점 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내 관심은 내가 숨쉬고 있는 이 땅의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남을 용인하지 않고 자기 안에만 갇혀 버린 그사람들을 만남과 대화의 장, 사랑의 장으로 이끌자면 단순한 종교적 명제 이상의 보다 실천적인 지침을 가져야 한다 고 생각해 온 터이다.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자탄하고 이웃을 향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 라고 말하는 그 결론만이 문학의 가르침이 아니다. 사랑이고 선이고 믿음이라는 말만을 그럴듯하게 내세우기보다. 그것을 찾기 위해 고뇌하 고 애쓰는 과정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 지 알 수 없게 된 세상에서 이게 참이라고 쉽사리 말할 게 아니라 선과 악의 경계, 말뿐인 사랑과 참사랑의 경계에서서 갈등하고 번민하는 과정을 통해 한 걸음 더 높은 정신의 경지 를 향해 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 때 비로소 말뿐인 사랑이 아닌 참사 랑이 얻어진다. 참사랑을 노래하라. 내가 이번에 톨스토이에게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이것 이었다. 악마의 결론을 위한 두 가지 다른 선택 선택 1 `그럴 수는 없어. 이 문제는 좀더 심각하게 생각해 보고 해결책을 찾아야만 해. 모든 것을 지금처럼 덮어 둔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지 짐작할 수도 없어. 이런 삶을 바라지도 않고, 그 녀를 떼어 내야 한다거 거듭해서 다짐하고는 있지만, 계속해서 말뿐이었어. 오늘 밤이라도 당장 그녀의 뒤마당으로 달려 갈지도 몰라. 그녀도 알게 되고 나를 만나러 나오겠지. 그럼 모두가 알게 되어 아내에게 고자질 할거야. 아니면 내가 직접 아내에게 사실을 털어 놓게 된다면... , 거짓말하기는 싫어, 지금처럼 살수 는 없게 되겠지. 그래, 지금처럼 살수는 없어. 사람들이 알게되고, 떠벌이 대장장이를 비롯해 모두가 알게 될거야. 그런데도 지금처럼 살 수 있을까? 안 돼! 이제 두가지 방법밖에 남지 않았어. 아내를 죽이든지 그여자를 주여야 해. 맞아, 그런데.... 아, 세번째 방법이 있었어. 자살하는 거야.` 이런 생각에 유제니는 온몸 에 전율이 느껴졌다. `맞아, 자살하는 거야. 그럼 두 여자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어.` 유제니는 오직 자살만이 유 일한 방법이란 생각에 소름이 돋아왔다. 그에게는 리볼버가 있었다. `정말 자살할 수 있을 까?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방법인데.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그는 서재로 돌아갔다. 리볼버를 넣어 두었던 서랍을 열었다. 그러나 상자에서 리볼버를 꺼내려 하자, 아내가 서재 로 들어왔다. 그는 총상자를 신문으로 덮어 감추었다. 아내가 그의 표정을 보더니 깜짝 놀라 며 말했다. `또 그 증세가 나타나는 군요!` `그 증세라니?` `예전과 똑같아요. 그 때도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어요. 여보, 나에게 솔직히 말해 보세요. 당신이 괴로워하고 있는 것 을 알아요. 나에게 털어 놓고 나면 한결 편안해질 거예요. 그게 어떤 일이든지 간에, 털어 놓고 나면 지금처럼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예요. 혹시 내가 모르는 나쁜 일이라 도 일어났나요?` `당신이 모르는 일? 글쎄....` `말해보세요. 제발 말을 해 주세요. 말해 주 지 않으면 이방에서 나가지 않겠어요.` 유제니는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내가.... 아 니요. 당신에게 할 말은 없어요.` 어쩌면 아내에게 털어놓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유모가 서재로 들어와, 아내 에게 아기를 산책시킬 시간이 되었다고 말했다. 리자는 아기의 옷을 입히러 가야 했다. `당 신, 나에게 꼭 말해 줄 거지요? 금방 돌아오겠어요.` `알았어요. 어쩌면...` 리자는 유제니의 씁스레한 미소를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서재를 나갔다. 유제니는 도둑처럼 잽싸게 리볼버 를 쥐고 상자에서 꺼내들었다. 리볼버는 장전되어 있었다. 탄실은 하나만이 비어 있었다. ` 이제 어떻게 될까?` 유제니는 관자놀이에 리볼버를 갖다 댔다. 조금은 망설여졌다. 그러나 스테파니다를 머리에 떠올리자 그녀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결심, 몸부림, 유혹, 타락, 그리 고 되풀이되는 몸부림, 공포로 온몸이 떨렸다. `아니야, 이 방법이 최선이야.` 그리고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발코니에서 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리자는 총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서재로 뛰어들어 왔다. 유제니는 바닥에 엎드려 누워 있었다. 검붉은 따뜻한 피가 상처에서 펑펑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시신은 비틀려 있었다. 경찰의 심문이 있었다. 누구도 유 제니의 자살을 이해할 수 없었고 설명할 수 없었다. 삼촌마저도 자살의 이유가 두 달 전 유 제니가 고백했던 것과 관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바바라 알렉세에브나는 이미 그런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유제니가 평소하던 말을 생각해 보면 자살한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리자도 마 리 파블로브나도 자살의 이유를 전혀 이해할수 없었다. 게다가 의사들의 말은 더욱 믿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유제니에게 정신적으로 착란 증세가 있었다. 쉽게 말해서 정신병자 라 는 의사들의 진단은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의사의 진단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유제 니가 그 어떤 사람들 보다도 건전하게 살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만약 유제니 이프테네프 가 정신질환자 였다면 이세상 모든 사람들이 정신병자이어야 했다. 사실 정신적으로 가장 문제가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서는 인지하지 못하는 정신 착란적 증세를 다른 사람들에서 발견하는 사람들이다. 선택 2 `안돼 ! 이제 두 가지 방법밖에 남지 않았어. 아내를 죽이든지 그 여자를 죽여야 해. 더이 상 이런 식으로는 살수 없어.` 유제니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책상으로 다가가 리볼버를 꺼 냈다. 리볼버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탄실 하나가 비어 있었다. 유제니는 리볼버를 바지 주 머니에 넣었다. `오, 하나님! 제가 지금 무얼 하려는 것입니까?` 그는 이렇게 소리치며 무 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오, 하나님! 저를 도와 주시고 구원해 주십시오! 당신께 서는 제가 악을 원치 않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 힘 만으로는 악을 이겨 낼수 없 습니다. 제발 도와 주십시오!` 유제니는 이렇게 절규하며, 성모상 앞에서 성호를 그렸다. ` 그래, 나도 이겨 낼수 있을 거야. 밖으로 나가 산책 하면서 생각해 보자.` 그는 현관으로 나가 코트를 입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정원을 지났고, 들판길을 따라 외곽 지대의 농장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탈곡기는 쉴새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사내들 이 외쳐대는 소리가 들렸다. 유제니는 헛간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그는 그녀 를 금새 찾아 냈다. 그녀는 옥수수를 긁어 모으고 있었다. 유제니와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 을 보냈고, 경쾌하고 날렵한 발걸음으로 뛰어다니며 흩어진 옥수수를 긁어 모았다. 유제니 는 의지와는 전혀 달리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을수 없었다. 유제니는 그녀가 눈에 띄지 않았던 때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일꾼하나가 그 때까지 수확한 옥수수의 탈곡이 끝나가고 있으며, 그 때문에 일의 진척이 느리고 탈곡량이 줄어들었다고 알려 주었다. 유제니는 탈곡기를 살펴보았다. 옥수수 다발이 고르게 지나가지 않을 때마다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냈기 때문이었다. 유제니는 일꾼에게 수 확된 옥수수 다발이 어느 정도나 되느냐고 물었다. `다섯수레 정도는 될 겁니다.` `그럼 여 길 보게...` 그러나 유제니는 말을 끝낼수 없었다. 그녀가 탈곡기 앞까지 다가와서 밑에 떨어 진 옥수수를 긁어모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웃음 짓는 눈빛으로 그의 가슴 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 눈빛은 그들끼리만의 즐겁고 분방했던 사랑을 의미했고, 유제니 가 그녀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옛날의 그 헛간으로 찾아와 준다면 , 어떤 조건 이나 결과에도 상관하지 않고 그와 즐거운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유제 니는 그녀의 유혹적인 힘에 빨려드는 기분이었으나 굴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제니는 주기 도문을 떠올렸고 주기도문을 반복해서 되뇌어 모았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단 한 가지 생각 만이 그를 완전히 사로 잡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녀와 단 둘이서만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 때 일꾼이 물었다. `오늘 이 몫을 끝내면, 내일 수확한 낟가리를 시작해도 될까요?` `그럼, 그럼` 유제니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두 눈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쫓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잔뜩 쌓인 옥수수 더미 옆에서 흩어진 낟알을 긁어 모으고 있었다. 유제니는 생각 해 보았다. `정말 내 자신을 이겨 낼 수 없는 것일까? 내가 정말 그렇게 타락 한 것일까? 오, 하나님! 하지만 하나님을 없어. 오직 악마만이 있을뿐이야. 저 여자가 바로 악마야. 저 여자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어.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인정할 수 없다구! 악마 야. 그래, 바로 악마야!` 유제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주머니에서 리볼버를 꺼냈다. 그리고 그녀를 쏘았다. 한번, 두번, 세 번 등뒤를 쏘았다. 그녀는 몇걸음 물러서더니, 옥수수 더미 위로 쓰러졌다. 여자들이 소리쳤다. `저런, 저럴수가! 대체 무슨일 이십니까?` 유제니가 소리 쳤다. `사고가 아니었오. 내가 일부러 이 여자를 쏘아 죽였소. 빨리 경찰을 불러 오시오.` 그리고 그는 집으로 돌 아갔다. 서재로 들어가, 문을 잠궈 버렸다. 아내에게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문을 잠근 채 안에서 아내에게 소리쳤다. `나를 재촉하지 말아요. 잠시 후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요.` 1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른후, 유제니는 벨을 눌러 하인에게 명령했다. `가서, 스테파 니다가 살아 있는지 알아 보고 오게.` 하인은 이미 그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유제니에게 스테파니다는 이미 1시간 전에 죽었다고 말해 주었다. `잘 됐군. 이제 나를 혼자 내버려 두 게. 경찰이나 치안 검사가 오면 알려 주게.` 경찰과 치안 검사는 다음 날 아침에 찾아왔다. 유제니는 아내와 아기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끌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유제니는 재판 을 받았다. 배심원들의 심판도 받았다. 판결은 일시적인 정신착란이었다. 덕분에 그에게는 교회에서 참회하는 판결이 내려졌다. 유제니는 9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고, 그 후 한 달 동안 수도원에 유폐되어 있어야 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수도원에서도 술을 끊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허약해 지고 치유되기 힘든 주정뱅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바바라 알렉세 에브나는 이미 그런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유제니가 평소하던 말을 생각해 보 면 자살한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리자도 마리 파블로브나도 자살의 이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의사들의 말은 더욱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의사의 진단을 도저 히 인정할 수 없었다. 유제니가 그 어떤 사람보다도 건전하게 살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유제니 이르테네프가 정신질환자 였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정신 병자이어야 했다. 사실 정신적으로 가장 문제가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인지 하지 못하는 정신 착란적 증세 를 다른 사람들에서 발견하는 사람들이다. 악은 유혹하지만 선을 참고 견딘다. 옛날에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 세상의 물건들이 넘치도록 많았 고 많은 하인들도 있었다. 하인들은 한결같이 그런 주인을 섬기는 것에 긍지를 가지고 자랑 스레 말했다. `이 태양 아래 우리 주인님보다 착하신 분은 없어. 그 분은 우리에게 먹을 것 과 입을 것을 충분하도록 나누어 주시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일거리를 맡기실 뿐이야. 악의라고는 없으신 분이어서 누구에게라도 상냥하게 대해 주시지. 그 분은 하인을 마치 가축다루듯 하면서 이유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벌을 주고 다정한 말 한 마디 건네지 않는 다른 주인들과는 달라. 그 분은 언제나 우리가 잘지내기를 바라고, 친절하게 대해 주시 고,따뜻하게 말씀해 주신다구.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이렇게 하인들은 그 사람을 칭송하고 다녔다. 하인이 주인과 그처럼 서로 사랑하며 조화롭게 지내는 것에 악마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아 렙이란 이름의 하인을 데려다 악마를 씌워서, 다른 하인들을 유혹하도록 만들었다. 어느 날 하인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쉬면서 주인의 친절함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그 때 아렙이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우리 주인이 친절하다고 그렇게 떠들어 댈 것은 없어. 어리석은 짓이야. 악마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 주면 너희에게 친절하게 해 줄 거야. 우리는 주인을 제대로 잘 섬기고 있고, 모든 점에서 주인의 비위를 잘 맞추어 주고 있 잖아.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자마자 곧바로 해내고, 심지어는 주인이 바라는 것을 미리 해내 기도 하잖아. 그런데 어떻게 주인이 우리에게 친절하게 않을 수 있겠어?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실험해 보아도 좋아. 주인의 비위를 맞춰주는 대신에 약간 손해를 가해 보자구. 그럼 틀림없이 다른 주인들과 똑같이 행동할 거야. 고약한 주인들처럼 악을 악으로 갚을 거라구.` 다른 하인들은 아렙의 말을 부인하고 나섰다. 마침내 그들은 아렙과 내기를 하기로 했다. 물론 아렙이 주인을 화나게 만드는 역할을 맡 기로 했다. 만약 아렙이 진다면, 아렙은 나들이옷을 내놓아야 했다. 대신 아렙이 이긴다면 다른 하인들이 모두 나들이 옷을 아렙에게 주기로 했다. 또한 다른 하인들은 주인의 반대편 에서 아렙을 위해 변호해 주기로 약속했고, 만일 아렙이 사슬로 묶이거나 감옥에 들어갈 경 우에는 석방시켜 주기로도 약속했다. 이렇게 내기가 결정된 후 , 아렙은 다음 날 아침 주인 을 화나게 만들기로 했다. 아렙은 목동으로 주인이 무척이나 아끼는 값비싼 순수 혈통의 양들을 돌보는 일을 맡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주인이 소중한 양들은 보여 주려고 몇 명의 손님을 데리고 우리를 찾아왔다. 그 때 아렙은 친구들에게 의미심장한 눈짓을 해 보였다. 마 치 `두고 봐! 내가 우리 주인을 어떻게 화나게 만드는지` 라도 말하는 것 같았다. 하인들이 모두 쪽문과 울타리 뒤에 숨어 지켜 보았다. 악마도 그의 종이 어떻게 일처리를 하는 지 지켜보려고 부근의 나무 위로 기어올라갔다. 주인은 우리 주변을 돌아다니며 손님들에게 암 양과 새끼양을 구경시켜 주었다. 주인은 갑자기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숫양을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기 있는 모든 양들이 비싼 것들이기는 하지만, 제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녀석이 있습니다. 뿔이 아주 희한한 모습으로 꼬여 있지요. 값을 매길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저는 그 녀석을 제 눈동자처럼 아낀답니다.` 낮선 사람들의 갑작스런 출현에 깜짝놀란 양들이 우리 안을 미친 듯이 날 뛰어 다녔다. 그래서 손님들은 어떤 양이 주인이 자랑하는 양인지 도대체 식별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주인이 아렙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렙아, 나를 위해서 우리가 제일 사랑하는 숫양을 좀 잡아 주겠니? 뿔이 희한하게 꼬인 녀석 말이다. 제발 조심 조심해서 잡고 있거라. 잠시 동안만 조용히 잡고 있으면 되겠다.` 주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렙은 사차처럼 양들에게로 뛰어들어 문제의 양을 움켜 잡았다. 양의 털을 힘껏 잡 은 다음, 한 손으로 왼쪽 뒷다리를 잡았다. 그리고 주인이 보는 앞에서 아렙은 마른 나뭇가 지를 다루듯이 양을 머리 위까지 들어올린 다음 힘껏 내던졌다. 양은 다리가 부러져 무릎이 꺾인 채 울어 댔다. 아렙이 다시 오른쪽 뒷다리를 움켜쥐고 들어올리자, 양의 왼쪽다리가 심 하게 꼬인채 힘없이 늘어졌다. 손님들과 하인들이 모두 놀라 비명을 질러 댔다. 그러나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악마는 아 렙이 너무 영리하게 일을 해내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주인의 얼굴도 벼락만큼 이나 화난 얼굴이 되었다. 눈쌀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님들과 하인들도 곧 닥칠 끔찍한 일을 생각하며 말없이 기다렸다. 한참 동안 침묵이 계속 된 후, 주인은 무거운 짐이라도 벗어 던진 듯 몸을 부르르 떨어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런 자세로 잠시 꼼짝하지 않았다. 얼굴에는 짜증스런 주름마저 사라지 고 보이지 않았다. 주인은 미소 띤 얼굴로 아렙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렙아, 아렙아. 네 주 인이 널보고 나를 화나게 만들라고 했던 모양이구나. 하지만 내 주인이 네 주인보다 더 강 하단다. 나는 너에게 화를 내지 않을 거다. 하지만 네 주인을 좀 화나게 만들어야 되겠구나. 혹시 내가 너에게 벌을 내릴까 걱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는 오래 전부터 자유로운 몸 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느냐. 그래, 아렙아. 너를 벌하지는 않을거다. 오히려 네가 바라던 대 로 자유의 몸으로 풀어 주마. 내 손님들 앞에서 너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 주겠다. 자,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거라. 네 나들이옷도 가져가도록 하여라.` 그리고 착한 주인은 손님들과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이를 갈던 악마는 나무에서 떨어졌고, 땅 속 깊이 파 묻혀 버렸다. 죄인은 없다. 1 내 운명은 남다른 것이다. 부자들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학대와 경멸에서 내가 부당 함과 잔인함과 공포심을 절감하듯이, 혹은 지금과 같은 세상을 있게 해 준 진정한 생산자인 육체 노동자들 대부분이 겪고 있는 가혹한 굴욕과 궁핍을 내가 분명히 인식하고 있듯이, 부 자들의 쾌락과 학대에서 무언가를 통렬하게 깨닫고 있는 비참한 거지는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런 현실을 절감해 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느낌은 더욱 굳 어졌고, 마침내는 궁극점에 다다르게 되었다. 지금도 그런 느낌을 분명히 간직하고 있지만, 나는 타락하고 죄 많은 부자들의 세계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나는 부자들 곁을 떠날수 없다. 그럴 힘도 없고 그만한 지혜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신분에서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죄의식이나 수치심 없이 내 물리적욕구 음식, 수면, 의복, 여행 을 만족시키면서 내 삶을 변화시킬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지도 못하다. 물론 내 의식 세계와는 화합되지 않는 내 신분에 변화를 주려노력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러나 과거와 내 가족, 그리고 나에 대한 가족의 요구 등에 의해 조성된 조건들은 너무도 복 합적이어서, 나는 도저히 그런 조건에서 벗아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내 자신에게서 조 차도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나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이제 여든을 넘기면서 신체적으로 나 정신적으로 약해졌기 때문에, 나는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노력마저도 포기해 버렸다. 이상 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약해질수록 내 신분에 잘못이 있음을 더욱 통렬히 깨닫고 있으며 그 런 현실에 나는 더욱 견디기 힘들어 졌다. 내가 현재의 신분을 까닭없이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속죄하고, 내가 너무도 분명 히 보고 있는 것에 눈을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만 이 아니라 자신마저도 기만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기존의 조건 하에서는 육체적으로나 정 신적으로 고통받을 수 밖에 없는 무수한 사람들의 짐을 가볍게 해 주도록, 나의 진실한 감 정을 털어놓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현재 차지하고 있는 신분 덕분에,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짓되고 범죄적인 관계를 폭로하는 특별한 재능을 지닐 수 있게 된 것 같다. 달리 말해서 내 자신을 변명하려 함으로써 초점을 흐리지 않고, 부자들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또 가난하고 학대 받는 사람들에게 억압받고 있다는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온전한 진실만을 말할수 있는 특별한 재능이 나에게 주어진 것 같다. 내 입장은 너무도 확고하기 때문에 내 자신을 변명 할 욕심은 전혀 없다. 오히려 내가 더불어 살고 있지만 너무도 부끄러워하는 집단, 다시 말 해서 내 자신의 운명을 그들의 운명에서 결코 떼어 놓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가난 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태도 때문에 내 영혼 전체로 혐오하는 집단의 사악함을 과장하지 않으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마저 평등론자의 오류를 답습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평등론자들은 학대받고 노 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실패와 실수를 깨닫지 못하고, 과거로 부터 물려받은 실수와 그럼으로써 유발된 장애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상류계급의 책임이 오히려 어느정도 줄어드는 모순을 낳았기 때문이다. 자기 변명이란 욕구에서 벗어 나서, 자유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학대받는 사람이 학대하는 사람에게 품고 있는 증오심과 시기심에서 벗어나서 , 나는 진실을 보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최선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의 위치에 놓았던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섭리를 펼쳐 보일 것이다. 2 알렉산더 이바노비치 볼긴은 독신으로 모스크바 은행의 행원이었다. 연간 8천 루블의 봉급을 받았고 , 직장 내에서 나름대로 존경을 받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한 시골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집 주인은 상당히 부자인 대지주로 , 2천 5백 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 고 볼긴의 사촌과 결혼한 사람이었다. 볼긴은 사촌들의 식구들과 작은 내기로 카드 놀이를 하면서 저녁시간을 보내 ,피곤해 하며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먼저 하얀 천으로 덮인 작은 테이블 위에 시계, 은장 담배 케이스, 수첩, 큰 가죽 지갑, 주머니 솔과 빗을 내려놓았 다. 다음에는 겉옷, 조끼, 셔츠, 바지와 속내의, 그리고 실크 양말과 영국제 부츠를 차례로 벗었다. 그런 다음 잠옷과 가운을 입었다. 그의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볼긴은 담 배 한 대를 피웠다. 침대에 엎드려 잠깐 동안 그 날의 느낌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촛불을 불어 끄고, 옆으로 돌아누워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1시경에 잠이 들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8시에 잠에서 깨어나 슬리퍼와 가운을 입고 벨을 눌렀다. 늙은 집사장인 스테판은 한 가정의 아버지 였고, 여섯 손자를 둔 할아버지로 그 집에서 30년 동안 봉사한 충실한 하인이었다. 스테판은 볼긴이 어젯밤 벗어둔 부츠를 깨끗이 닦아 광을 내어 들고 왔고,잘 손질된 양복과 깨끗한 셔츠 한 벌도 가져왔다. 볼긴은 그에게 고맙 다고 말한 후 , 날씨가 어떠냐고 물었다. 그리고 주인 부부도 잘 주무셨냐고 물었다. 그는 시계를 힐끗 보았고 , 곧 얼굴을 씻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물은 준비되어 있었다. 세면대와 화장대위에도 모든 것이 사용하기 편하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비누, 칫솔, 머리 빗는 솔, 손 톱깎이와 손톱줄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손과 얼굴을 천천히 씻고, 손톱을 깨끗이 정 리하고 매니큐어를 칠한 후, 수건으로 몸을 밀고, 스펀지로 희고 강건한 몸뚱이를 머리부터 발 끝까지 닦아 냈다. 그리고 머리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거울 앞에 서서, 그는 조금씩 잿빛 으로 변하기 시작한 수염을 중앙에서 나누어지도록 먼저 영국제 솔 두개로 매만졌다. 그런 다음, 벌써 점점 가늘어지는 징조를 보이고 있는 머리카락을 커다란 거북껍질로 만든 빗으 로 빗어 내렸다. 속내의, 양말, 부츠, 바지 와 조끼를 입은후, 그는 겉옷을 입지 않은 채 편 한 의자에 앉아 옷을 입은 후의 휴식을 즐겼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날 아침 어디로 산책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원으로 갈까아니면 리틀 포트로 갈까? 그는 리틀포트로 산책하기로 결정했다. 산책을 다녀오면 시몬 니콜라에비치의 편지에 답장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시간을 넉넉했다. 모든 일정을 결정한 듯한 태도로 의자에서 일어서며 그는 시계를 꺼내 보았다. 다시 시계와 지갑 을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바지 주머니에는 담배 케이스와 전기 라이터를 넣었고, 겉옷 주머 니에는 깨끗한 손수건을 한 장씩 넣었다. 그리고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방을 뒤로 하고 나 왔다. 그 정리는 이미 쉰 살을 넘긴 스테판의 차지 였다. 스테판은 평소에도 그런 일을 해 왔기 때문에 조금의 반감도 품지 않았다. 다만 불길이 조그만 `보상`을 해 주기를 바랐다. 볼긴은 거울을 쳐다보고 자신의 외모에 흡족해 하면서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에는 하녀와 하인, 그리고 집사의 수고 덕분에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얼룩 하나 없는 하얀 식탁 보 위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며 끓고 있는 사모바르, 커피포트, 뜨거운 우유, 크림, 버터, 그리 고 각가지 종류의 흰 빵과 비스킷이 준비되어 있었다.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은 그 집의 둘째 아들과 그의 가정교사 그리고 비서였다. 지방자치 회의 현역 의원이면서 대 농장주였던 집주인은 이미 집을 나선 뒤였다. 자치회의에 참석하 기 위해 8시에 집을 나섰던 까닭이었다. 볼긴은 커피를 마시면서 대학생과 비서에게 날씨 에 대해서, 그리고 어젯밤의 카드놀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또한 어젯밤 별것도 아닌 이유 로 아버지에게 무례하게 대들었던 테오도리트의 괴상한 행동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 다. 테오도리트는 그 집의 장남으로 결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테오 도르였지만 누군가 그를 약올려 줄 생각으로 장난 삼아 그를 테오도리트라 부른 적이 있었 다. 그 이름이 재미있었는지, 그의 행실이 조금도 흥미롭지 못한 나이가 된 이후에도 그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는 대학에 다니기도 했지만 2학년에 그 만두고 근위기병 연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포기했고 지금은 시골에서 살면서 아무일도 하지 않으며, 남의 결점이나 트집잡으면서 온갖 것에 불만을 터뜨렸다. 테오도리트 는 아직 침대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집안 식구중 남은 사람은 안나 미카일로브나, 그녀의 몸종, 장군의 미망인인 그 녀의 언니, 그리고 그 집의 식객으로 살고 있는 풍경 화가였다. 볼긴은 현관 옆 테이블에서 파나마 모자와 조각된 상아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를 꺼내들고 밖으로 나갔다. 꽃들이 만발 한 베란다를 건너 화원으로 가로 질러 걸었다. 화원 한가운데에는 둥근 화단이 불룩 솟아 있었다. 빨갛고, 희고, 푸른색의 꽃들이 가장자리를 수놓고 있었고, 중앙에는 안주인 이름의 첫 문자로 꽃밭을 이루고 있었다. 화원을 벗어난 볼긴은 수백년은 됨직한 보리수 길로 들어 섰다. 시골 처녀들이 가래와 비로 길을 쓸어 내며 깨끗이 하고 있었다. 정원사는 측량하는데 바빴다. 한 소년이 수레에 무언가를 싣고 끌어 오고 있었다. 볼긴은 이들을 지나 적어도 1백 25에이커는 될 듯 한 정원으로 들어갔다. 곧게 뻗은 오래된 나무들로 가득했고, 잘 정돈된 길들이 거미줄 처럼 연결되어 있는 정원이었다. 볼긴은 정원 길을 산책하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여름집을 지나 들판 너머로 연결되는 길을 택했다. 볼긴이 즐겨 걸었던 길로 정원에 서 가장 쾌적한 길이었지만 들판에는 훨씬 멋진 길이 있었다. 오른쪽으로 감자를 캐고 있던 몇몇 여인네들의 모습이 붉고 하얀 덩어리 처럼 보였고, 왼 쪽으로는 밀밭과 초원, 그리고 풀을 뜯는 소들이 보였다. 그리고 앞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리 틀 포트란 이름의 어둑한 참나무 숲이 있었다. 볼긴은 숨을 깊이 들이 마셨다. 살아 있다는 사실, 특히 사촌의 집이 있는 이 곳에서 철저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시 골에 사는 사람들은 축복받은 거야. 사실, 이 집주인은 농장경영이다 지방자치회 일이다 하 여 시골에서도 그렇게 편안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런 것이 그의 일이기도 하지.` 볼긴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둔해 보이는 영국제 부츠를 번쩍이며 힘차 게 걸어나갔다. 하지만 곧 그의 앞에 닥쳐올 은행에서의 힘든 겨울 업무를 생각하기 시작했 다. `곧 매일같이 아침 10시부터 오후 2시, 때로는 5시 까지 은행에 있어야 하겠지. 게다가 이사회, 고객과의 개별적인 면담, 의회에의 출석, 하지만 이곳에선... 모든 것이 즐거워. 물론 약간은 단조롭기도 하지. 하지만 오랫동안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는 미소를 지었다. 리틀 포트에서 산책한 후, 그는 휴한지를 똑바로 가로 질러 돌아왔다. 휴한지는 쟁기질이 한창이었다. 마을 공동체의 공동 재산이었던 암소, 염소, 양, 돼지 등이 그 곳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정원으로 돌아가는 지름길은 그 동물들을 뚫고 자나가는 방법 이었다. 그 때문에 양들이 놀랄 달아나기 시작했고 곧 돼지들이 그 뒤를쫓아 뛰었다. 그 중 작은 돼지 두 마리가 떡 버티고 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양치기 소년이 양들은 불러들이려고 채찍을 휙 울렸다. 볼긴은 휴가를 해외에서 보냈던 때가 기억에 떠올랐다. `우리는 유럽에 비해 너무 뒤떨어져 있어. 유럽 어디에서도 저런 식으로 키워지는 암소는 단 한 마리도 없 을 거야.` 그리고 볼긴은 그 때 걷고 있던 길이 어디 쯤에서 갈라지는 지 알고 싶어 마치 가축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 소년에게 소리쳤다. ` 그 가축은 누구의 것이냐?` 소년은 볼긴 의 모자와 잘 정돈된 수염, 특히 금으로 테를 두른 안경을 보고 두렵기도 했지만 너무 놀라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볼긴이 다시 물었다. 그 때서야 소년은 정신을 차린 듯 대답했다. ` 저희 것입니다.` 볼긴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너희가 누구냐?` 소년은 자작나무 껍질을 엮어 만든 신발을 신었고, 바지는 아마포 띠로 묶 었고, 어깨에는 누더기로 변해 버린 셔츠를 걸쳤고, 윗 부분이 떨어져 나간 모자를 쓰고 있 었다. `너희가 누구지?` `피로그브 마을의 가축입니다.` `넌 나이가 몇이냐?` `모르겠습니다.` `글은 읽을 줄 아느냐?` `아니요, 모릅니다.` `학 교에는 다니지 않았느냐?` `아닙니다.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읽기를 배우지 않았 지?` `배우지 않았습니다.` `저 길은 어디로 연결되느냐?` 소년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볼 긴은 집을 향해 걸으며, 니콜라스 페트로비치에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을 학교의 개 탄스런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 주어야 할지 생각했다. 집이 가까워지자 볼긴은 시계를 보았다. 벌써 11시가 지나 있었다. 그는 니콜라스 페트로비치가 근처 도시에 갈 예정이라는 것을 생각해 냈다. 게다가 볼긴은 모스크바로 부칠 편지를 그에게 부쳐 달라 부탁하기로 했 었다. 그러나 그 편지를 아직 쓰지 못했다. 그 편지는 한 친구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편지였 다. 그 친구에게 곧 경매에 붙여질 성모 마리아 그림을 그를 대신해 입찰하도록 부탁할 생 각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현관에는 잘 먹여 기름이 번지르르하고 마구를 잘 갖추어진 순혈 종의 커다란 말 네 마리가 마차에 매여 있었다. 검은 색으로 옻칠된 마차가 햇볕에 반짝거렸다. 마부는 카프탄을 입고 은색 벨트를 하고 마부석 위에 앉아 있었다. 말들이 간혹 은종을 딸랑딸랑 울렸다.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 은 맨발의 농부가 누더기 같은 카프탄을 입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볼긴을 보자 꾸벅 절을 했다. 볼긴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방금 니콜라스 페트로비치 씨를 뵙고 나왔습니 다.` `무슨 일로?` `저는 지금 아주 곤란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제 말이 죽었습니다.` 볼긴은 그에게 여러 가지 것을 묻기 시작했다. 농부는 그가 처해있던 상황을 볼긴에게 자세 히 늘어 놓았다. 그에게는 다섯 자식이 있었고 죽은 말은 그에게 유일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죽어 버렸던 것이다.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적선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볼긴이 일어나라고 해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네 이름이 뭐냐?` 농부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대답했다. `미트리 수다리코프입니다.` 볼긴은 지갑에서 3루블을 꺼내 농부에게 주었다. 그러자 농부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고맙다고 말했다. 볼긴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 집주인이 현관에 서 있었다. 그가 볼긴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편지는 어디에 있나? 나는 곧 출발해야 하는데.` `저런 미안하구만. 금방 쓸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겠나? 깜박 잊고 있었어. 이 곳이 너무 마음에 들어 몽땅 잊고 지낸단 말일세.` ` 알았네. 하지만 서두르게. 마차가 벌써 15분 전부터 기다리고 있네. 파리들이 극성스레 물어 뜯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는 마부에게 소리쳤다. `아르센티, 기다릴 수 있겠나?` 마부가 대 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부자들은 준비도 끝내지 않고, 왜 말을 불러 내는 거야? 덕분에 하인들이나 나 같은 사람은 그저 서서 파리들한테 뜯겨야 하잖아.` `금방 다녀오겠네.` 볼긴은 그의 방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곧 다시 돌아와 적선을 청하던 농부에 대해 니콜라스 페트로비치에게 물어 보았다. `자네도 그를 보았나? 술 주정 뱅이야. 하지만 무척 불쌍한 사람이야. 자, 어서 서두르게!` 볼긴은 필기도구가 모두 들어 있는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편지를 쓰고 180루블짜리 수표를 작성한 다음, 봉투에 넣고 봉 인하여 니콜라스 페트로비치에게 주었다. `다녀오게.` 볼긴은 점심 시간이 될 때까지 신문을 읽었다. 그는 진보계열의 신문, 러시안 가제트나 스피치 때로는 러시안 위드만을 읽었다. 집 주인이 구독해 보는 뉴 타임즈는 건드 리지도 않았다. 볼긴은 평안한 마음으로 정치소식, 황제의 동정, 총리와 각료들의 근황, 그 리고 의회의 결정사항에 대해서 훑어보았다. 그리고 일반적인 소식, 연극, 과학, 살인, 콜레 라 등에 대한 소식면으로 넘어 가려는 순간, 점심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열 명이 상 의 노고 덕분으로 식탁에는 8인분의 식사가 눈부시게 차려져 있었다. 은제 물주전자, 술 병, 쿠와스 맥주, 포도주, 광천수, 조각한 유리 그릇, 깨끗한 냅킨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두 명의 하인이 계속해서 들락거리며 먹을 것을 갖고 들어와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전채요리 와 찬음식과 더운 음식이 차례로 들어왔다. 안주인은 그 동안 자신이 행동했고, 생각했고, 말했던 것들에 대해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그녀는 자기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이 모두 완벽하기 때문에, 바보가 아닌 사람이라면 그런 것들에 즐거워하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볼긴은 그녀가 떠들어 대는 말들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결코 내색하지 않고 그녀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테오도리트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대학 생은 때때로 미망인과 몇 마디 나누었다. 간혹 대화가 끊어지기도 했다. 그러면 테오도리트 가 끼어들어 모두의 기분을 비참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럴 때마다 안주인은 아직 나오지 않은 요리를 청했고, 하인은 부리나케 부엌으로 뛰어들어가 요리를 들고 허겁지겁 돌아왔다. 물론 누구도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거나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 억지로 먹으면서 대화를 계속되었다. 말이 죽었다는 이유로 적선을 청했던 농부의 이름은 미트리 수다리코프였다. 그는 죽은 말을 잊고 일터로 다시 나가는 데 꼬박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 는 가장 먼저 근처 마을에 사는 도살업자 사닌을 찾아갔다. 하지만 도살업자가 외출하고 없 어 기다려야 했다. 그런 다음 그의 말을 들판에 매장하기 위해서 이웃의 말을 빌려야 했다. 왜냐하면 죽은 동물을 마을 인근에 묻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안은 감 자를 수확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빌려 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테판은 미트리를 불쌍 히 생각해, 그만 그의 간청에 넘어가고 말았다. 게다가 죽은 말을 수레에 싣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미트리는 앞발에서 말굽을 떼어내 아내에게 건네 주었다. 하나는 깨어졌지만 다른 하나는 말짱했다. 미트리가 무디기 이를 데 없는 삽으로 무덤을 파고 있을 때, 도살업자가 찾아와 가죽을 벗겼다. 마침내 말 시체가 구 멍속에 던져 지고 메워졌다. 미트리는 피곤했다. 마트레나의 오두막을 찾아가 사닌과 보드 카 반병을 나누어 마시며 마음의 위로를 삼았다. 그리고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내와 한 바탕 말싸움을 벌이고 건초 더미 위에서 곧바로 잠을 청했다. 옷도 벗지 않은 채 였다. 그러 나 그는 평소에도 그런 식으로 누더기 같은 외투를 이불 삼아 잠을 잤다. 아내는 딸들과 함께 오두막에 있었다. 미트리는 평소처럼 새벽에 일어났다. 지난날의 괴로운 생각을 떠올리 며 투덜댔다. 말이 몸부림치면서 결국에 쓰러지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그에게는 말이 없 었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말가죽값, 4루블 80 코펙뿐이었다. 벌떡 일어나 각대를 질끈 동 여맸다. 그리고 마당을 지나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한 손으로 아기를 가슴에 끌어 안은 채, 다른 손으로는 난로에 밀짚을 넣고 있었다. 아기는 아내의 더러운 속옷에 거의 매 달려 있었다. 미트리는 가슴에 세 번 성호를 긋고 구석에 매달려 있는 성모상을 향했다. 그리고 그가 기도라 부르는 뜻도 없는 말을 삼위일체 신께, 성모님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하나 님 아버지에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물 좀 있소?` `금방 딸애가 물을 길러 갔어요. 차는 조금 있어요. 오늘 추수밭에 나갈 거예요?` `그래야지. 그게 낫겠어.` 난로에서 피어오른 연 기 때문에 그는 기침이 나왔다. 그는 나무의자에서 누더기를 집어들고 현관문으로 나갔다. 딸이 물을 길어 돌아오던 참이었다. 미트리는 양동이째로 한 모금 가득 물을 들이 킨 다음, 손바닥 위로 뱉어 냈다. 얼굴을 씻을 물은 아직 그의 입속에 남아 있었다. 그는 누더기로 대 충 닦은 다음,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쓱쓱 문질렀다. 그리고 집을 나섰다. 길에서 더러운 셔츠 말고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열 살 정도의 계집애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미 트리 아저씨, 탈곡하러 사는 길이군요.` 미트리가 대답했다. `그렇다.` 미트리는 지난 주에 쿠무쉬키르를 도와 주었던 것을 떠올리며 이제는 자신이 보답받을 차례라고 생각했다. 쿠무 쉬르키르도 미트리 만큼이나 가난한 사람으로, 말 한 마리가 끄는 기계로 옥수수를 탈곡하 는 것을 미트리가 도와 주었던 적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내가 곧 갈 거라고 전해 다오. 점심 시간에는 갈수 있을 거라고 나는 먼저 우구루미에게 가 보아야 한단다.` 미트리는 오두막으로 다시 돌아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신발로 바꿔 신고 각대 끈을 바꿔 맸다. 그리고 일터를 향해 출발했다. 어제 그는 볼긴에게 3루블, 니콜라스 페트로비치에게 3루블을 적선받은 후,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그 돈을 건 네 주고는 곧바로 이웃을 찾아갔다. 탈곡기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탈곡기를 돌리던 사람은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 댔다. 빼빼 여윈 말들이 보조를 맞추어 금방이라도 쓰 러질 듯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탈곡기를 돌리던 사람은 단조로운 어조로 계속 소리쳤 다. `자, 자, 그만, 돌고.... , 잘 한다.!` 어떤 여인네들은 옥수수 다발을 풀고 있었고, 어떤 여 인네들은 흩어진 지푸라기와 옥수수 낟알을 갈퀴로 긁어 모으고 있었다. 또 한 아름씩 옥수 수 다발을 끌어안고 남정네들에게 건네주는 여인네도 있었다. 그러면 남정네들은 옥수수 다 발을 탈곡기에 집어 넣었다. 일이 눈코뜰새없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미트리가 지나가야 만 했던 부엌 밭에서는 긴 셔츠 만을 걸쳐 입은 한 계집애가 감자를 캐어 바구니에 담고 있 었다. 미트리가 물었다. `네 할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니?` `헛간에 계세요.` 미트리는 헛간으로 가서 즉시 일을 시 작했다. 여든을 넘긴 노인은 미트리의 고민을 알고 있었다. 미트리에게 아침인사를 하고 , 노인은 탈곡기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 주었다. 미트리는 누더기 같은 옷을 겉옷을 벗어 울타리 근처의 길바닥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옥수수 다발을 끌어 모아, 탈곡기 안에 집어던져 놓았다. 그리고 옥수수 다발을 끌어모아, 탈곡기 안에 집어 던지며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일은 점심 시간이 될 때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수탉의 울음소리를 믿지 못해 서가 아니라, 탈곡기가 돌아가는 시끄러운 소리에 수탉의 울음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기 때 문이다. 마침내 지주의 증기 탈곡기가 경적 소리로 3마일 밖의 신호음을 보냈다. 그리고 주 인이 헛간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는 80대의 꼿꼿한 노인이었다. `이제 그만 쉬어야지. 식 사를 할 시간이야.` 일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힘을 내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지푸라기가 말 끔히 치워졌다. 탈곡된 옥수수 알들은 짚과 분리되어 들여졌고, 일꾼들은 식당으로 들어갔 다. 식당은 연기로 자욱했다. 난로에 굴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깨끗이 정돈 되어 있었고, 일하던 사람들이 앉 을 수 있도록 나무 의자들이 식탁 둘레에 마련되어 있었다. 일꾼들은 주인 가족을 제외하고 모두 아홉이었다. 빵, 수프, 끓인 감자, 그리고 쿠와스 맥주가 식탁위에 놓여 있었다. 식사를 하던 중, 목발을 짚은 외팔이 늙은 거지가 어깨에 가방을 둘러메고 들어왔다. `이 집안에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들, 맛있게 드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으로 저에게도 먹을 것을 적선 해 주십시오.` 주인의 며느리로 벌써 초로에 접어든 여자가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 게도 먹을 것을 드릴 것입니다.` 그 땐 문 옆에 서 있던 주인 노인이 말했다. `우리를 노 엽게 생각지는 마시오. 이 자에게 빵 한덩이를 주거라, 마르타. 어떻게 지내시오?` `우리도 부자가 될 수 있을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잘못된 생각이오. 마르타,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라 하셨다. 이 노인에게 빵을 좀 나누어 주거라.` 마르타는 시아버지 의 말에 따랐다. 거지는 곧 사라졌다. 탈곡기를 돌리던 남자가 일어나 신의 은총을 빌고, 주 인 가족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잠시 쉬러 갔다. 미트리는 누워 쉬지 않았다. 가게로 달려 가 감자를 약간 샀다. 그는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데멘스크에서 왔다는 남자와 잡담을 나누었 다. 미트리는 소를 팔지 않고는 집을 꾸려나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소 값을 물어 보러 갔다. 다시 일터로 돌아왔을 때, 다른 일꾼들은 이미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은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학대받고 착취당하고 기만당하는 사람들은 과도한 노동으로 사기 마저 꺾이고, 영양 부족으로 조금씩 죽음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물론 그 들 중에도 스 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기독교나 그 보다 뛰어나 보이는 또 다른 종교에의 구원마저 포기해 버린 잘난 체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부자들의 추 악하고 나태한 삶은 이런 노예들의 인간 한계를 벗어난 과도한 노동으로 뒷받침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사모바르, 은제 접시,마차,기계,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용품들을 만들어 내려고 공장에서 뼈빠지게 일하는 수백만의 노예들은 재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부자들은 노예들 의 증오 속에서 살아갈 따름이다. 그런 증오를 깨닫는 부자도 있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부자도 있다. 비록 그들의 마음 속에는 종종 따뜻한 온정이 솟겠지만, 가난한 아이들은 여전 히 정신적 무지 속에서 키워지면서 나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중년의 독신자가 있다. 그리고 수천 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고, 나태하고 탐욕적이 며, 과도한 탐닉에 빠진 삶은 영위하며, 뉴타임즈를 즐겨 읽고, 정부가 유태인에게도 대학 입학을 허락한 것은 너무도 현명하지 못한 짓이라 비난을 일삼는 부자가 있다. 또 그의 식 객으로 전에 지방 청장을 지냈던 사람도 있다. 지금은 많은 녹을 받는 의원이 되어, 법률가 협회가 사형제도를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에 만족해 하며 신문을 읽고 있다. 이들의 적 인 국민 당원들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신문을 읽는다. 그들은 러시아 국민연맹의 결성을 허용한 정부의 근시안적 태도를 동의하지 않는다. 여기에 다정하고 온화한 어머니도 있다.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여우이야기와 토끼를 불구로 만들어 놓은 개 이야기를 읽어 준다. 어린 딸이 혼자서 이리저리 걸어 다닌다. 그 동안 어머니는 다른 아이들을 살펴본다. 맨발의 아이들은 배가 고픈지 나무에서 떨어진 덜 익은 사과를 집어 든다. 어머니는 이미 그런 모 습에 익숙해져 있다. 어머니에게는 그 아이들이 무작정 아이로만 보이지 않는다. 일상적 환 경의 일부일 뿐이다. 가족의 풍경인 셈이다. 무슨 까닭일까? 해설 참사랑을 노래하라.. 박덕규 나는 세계적인 대문호라거나 불후의 명작이라거나 하는 것에 유달리 관심을 갖는 편은 아 니다. 전쟁과 평화, 부활 등의 명작을 남긴 톨스토이 또한 다른 많은 뛰어난 문학가들처럼 엇비슷한 무게로 내 성장기를 거쳐갔다. 물론 세계명작들 중 어떤 작품들은 다른 어떤 것들 보다 더욱 인상깊게 내게 각인된 것도 있고, 내 인생, 특히 문학적 인생에 큰 영향을 준 것 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한 인간이 무수한 세계명작의 상당수를 읽을 때마다 감동 받을 수 있겠는가.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마다 개인적인 편차도 있겠지만, 유명한 것의 대개가 그렇 듯이 `이건 정말 뛰어난 작품입니다.`라는 오래 공인된 평가나 풍문이상으로 그 개인의 내면 을 움직이는 경우는 아마도 소수일 것이다. 나도 그런 개인중 한 사람이다. 나는 한국 밖의 존재에 유난히 둔감해서 많은 세계 명작 들 중 일부만을 대부분 조악한 번역본을 둔감해서 많은 세계 명작들 중 일부만을 대부분 조 약한 번역본을 통해 읽었으며, 게다가 그 중에서도 몇몇 작품만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편이다. 즉 내게 톨스토이는 알려진 세계 명작, 그 이상의 존재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성장기를 지나도 한참을 지난 내게 톨스토이가 또 다가왔다. 이번에는 그를 대 표하는 흔한 세계 명작이 아니었다. 조금 `덜` 세계적이라 볼 수 있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 는가` 나 `바보 이반` 등의 러시아 만화에 거점을 둔 것으로 보이는. 비교적 소품에 가까운 작품들이 그것이었다. 이것들은 톨스토이의 이력에 따라 짐작해 보면, 1881년 `사람은 무엇 으로 사는가` 의 발표 무렵부터 만년에 이르는 동안의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여기 소개되는 작품들은 대개 기독교의 가르침을 표면에 드러내는 것들이었 다. 예를 들어, `음욕의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미 마음 속으로 그 여자 와 간음한 것이다.` 라는 마태복음의 경구를 앞세운 소설 `악마`는 말할것도 없고, 남을 위 해 사는 삶은 진정 어떠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젊은황제` , 선과 악의 가름을 문제 삼으면 서 선으로서의 삶의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일러 주는 `악은 유혹하지만 선은 참고 견딘다.` `세 죽음` `죄인은 없다.` `무도회가 끝난 뒤` 등에서 기독교 사상을 드러내는 톨스 토이의 내면을 잘 읽을 수 있다. 이 작품들이 내게 남다르게 여겨진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문학을 가르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나의 신념과 관련이 있다. 다른 하나는, 문학의 주제라 볼수 있는 그 가르침의 내용 때문이다. 나는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은 재미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서사성, 드라마적 구성, 문체의 탄력성 등을 적절히 활용해야 한 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때의 `재미`란 독자들이 그 작품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드 는 외적 요소란 점을 잊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사탕발림이요 선의의 거짓말이 곧 그것이다. 나는 우리 나라 소설, 특히 아주 거창한 사회적 진실을 문제 삼는 소설이 바로 이 점을 받 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래서 인지 내가 쓰는 소설에는 재미를 위한 기법이 자주 동원된다. 때로는 조금 과장돼 보일 정도로 통속적인 드라마 구조를 활용하기 까지 한다. 톨스토이에게도 이런 면이 없는 게 아니다. 가령,`젊은 황제`는 우화성, 혹은 알레고리 방법으로 하나의 가상 드라마를 만들 어 놓은 경우다. 도는 `악은 유혹하지만 선은 참고 견딘다.`는 코믹한 엽편소설이다. 그러나 나는 소설을 재미있게 읽히게 하는 많은 요소들 때문에 속에 든 알맹이가 왜곡돼 보이는 것 을 오래 견디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가르쳐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가 치관이 너무도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져 있어서, 자신과 남을 동시에 아끼는 방법도, 정신도 잃어가고 있다. 이것을 개선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도 가르치는 것, 그게 내 문학적 신념이 다. 내 소설이 때로는 웃기고 때로는 자극적이고 또 때로는 피비린내가 진동하지만, 어딘지 복잡하고 무겁고 어렵다는 느낌을 가지는 독자가 있다면, 작품을 통해 가르쳐 보겠다는 내 신념이 남다르게 내재되어 있기 때문으로 이해하면 된다. 내 판단으로는 톨스토이 또한 더 말할 것도 없이 `문학은 학교다`라고 믿었던 사람이다. 그는 실제로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농장 경영을 하면서 학교를 세워 농민의 자녀를 모으기 도 했고,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 때 주로 성경ㅇ르 바탕에 둔 많은 교육소설을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내가 최근에 읽은 것 중에는 이때의 것으로 보이는 작품들이 많다. 더 큰 문제는 그 가르침의 내용이 어떤가에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나 는 최근에 읽은 톨스토이의 소품들에서 확인하고 배우는 바 크다. 소위 톨스토이즘이라는 것이 있다. 그 중심에 놓이는 다섯가지 사상을 약술하면 이렇다. 첫째, 노하지 말라. 둘째, 간음하지 말라. 셋째, 맹세하지 말라. 넷째, 악에 대하여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 다섯째, 모 든 사람을 사랑하라. 이는 물론 기독교 사상에 깊이 연루된 것임을 당장 알 수 있다. 톨스 토이의 특이함은 그 기독교적인 사상을 `실천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그 문학을 실천적 가르 침의 단계로 이끌고 갔다는 데 있다. 톨스토이는 소설이라는 구체적 환경에 놓인 인물들의 생생한 조건들을 부각시킴으로써, 자칫 명제화되는 것만으로 끝날 수 있는 사상을 실천 가 능한 자리로 옮겨 제시해 놓았다. 게다가 소설의 그 구체적 환경을 ,한 인간이 선과 악을 의지적으로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당위론적 공간으로 설정한 게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큰 관심을 요한다. 여기서는 참과 거짓 에 대한 이분법적인 가름이나 단순논리가 톨스토이 소설에서 왜 비판되는지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다. 편리와 타락과 간음이 유혹하는 세상에서 고민하는 인간을 그 신분에 관계없 이 드러내면서, 그들이 어떻게 근로와 금욕과 절제를 통해 참사랑을 깨달아 가는가에 초점 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내 관심은 내가 숨쉬고 있는 이 땅의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남을 용인하지 않고 자기 안에만 갇혀 버린 그사람들을 만남과 대화의 장, 사랑의 장으로 이끌자면 단순한 종교적 명제 이상의 보다 실천적인 지침을 가져야 한다 고 생각해 온 터이다.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자탄하고 이웃을 향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 라고 말하는 그 결론만이 문학의 가르침이 아니다. 사랑이고 선이고 믿음이라는 말만을 그럴듯하게 내세우기보다. 그것을 찾기 위해 고뇌하 고 애쓰는 과정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 지 알 수 없게 된 세상에서 이게 참이라고 쉽사리 말할 게 아니라 선과 악의 경계, 말뿐인 사랑과 참사랑의 경계에서서 갈등하고 번민하는 과정을 통해 한 걸음 더 높은 정신의 경지 를 향해 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 때 비로소 말뿐인 사랑이 아닌 참사 랑이 얻어진다. 참사랑을 노래하라. 내가 이번에 톨스토이에게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이것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