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문학 시리즈 7 문명의 열매 지은이: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옮긴이:한국외국어 연구소 펴낸곳:청암미디어 차례 어둠의 힘 문명의 열매 러시아의 영원한 연인 톨스토이 Tolstoi, Lev Nikolaevich:1828__1910 모스크바 남쪽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명문 귀족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6세에 카잔 대학에 입학했으나 루소의 영향을 받아 중퇴하고 귀향했다. 20세에 페제르부르그 대학의 학사시험에 합격, 법학사의 칭호를 받았다. 24세에 현대지에 "유년시절", "소년시절"을 발표하여 문단에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31세에 "세바스토폴리 3부"를 발표. 이때부터 사회의 불합리를 동감하고 개량에 뜻을 두어 교육 사업과 계몽사업에 열중했다. 1862년 (34세) 이후 "전쟁과 평화". "안나카레리나" 집필시기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무상함을 절감하고 종교에 의지한다. 이후 정신적 위기가 닥쳐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방황하던 중. 폐렴에 걸려 시골의 간이역에서 눈을 감았다. 실사적인 수법으로 광범위한 표현과 깊은 심리해부가 뛰어났다. 그가 남긴 불후의 명작으로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부활", "참회록", "인생록", "예술록", 등이 있다. 책을 내면서 현대 문학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되풀이 되고 있는 '인간들의 이야기', 호머에서부터 계속되어 온 사랑과 명예, 허영심, 욕망, 행동으로 말로, 자신의 속성을 때로는 과장되게 드러내고, 때로는 거짓되게 감추는 그런 인간들의 이야기. 이것은 톨스토이의 글이기도 하다. 톨스토이의 글은 읽는 이를 지루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다 읽고 나면 누군가에게 꼭 권하게 되는 책이다.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감동을 지닌 명작, 누가 권하지 않더라도 한번쯤 읽을 결심을 하게 되는 책이다. 생의 감동, 사상의 영향, 감정의 깊이 등, 톨스토이만의 향기가 있다. 이 책은 청암이 만든 톨스토이 문학시리즈 중 일곱번째 책입니다. 톨스토이는 민화, 단편소설, 중편소설, 장편소설, 희곡, 인생론, 종교론 등등 많은 분야에서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이 책은 그 중 톨스토이의 대표적인 희곡 두 편을 실었습니다. 이 책을 찾은 독자들께 감사드리며 감동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1994년 3월 어둠의 힘 발톱 하나만 걸려 들어도 새의 목숨은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인과 간음한 것이다. 네 오른눈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마태복음 5장 28, 29절) 등장인물 표트르:유복한 농부, 42세의 재혼한 병약자이다. 아니시야:표트르의 아내, 32세, 바람기가 있다. 아쿨리나:표트르와 전처 사이에 태어난 딸, 귀가 먼 데다가 약간 멍청한 편이다. 아뉴트카:둘째딸, 10세, 아니시야의 딸. 니키타:머슴, 25세, 바람기가 있다. 아킴:니키타의 아버지, 50세 마트료나:아킴의 아내, 50세 마리나:고아인 처녀, 22세 마리나의 남편 미트리치:늙은 머슴 신랑 아버지, 신랑 어머니 처녀1, 처녀2 순경, 마부, 아쿨리나의 신랑, 이장, 제대군인 손님들, 아낙네들, 처녀들, 이웃 여자, 마을 사람들 때는 가을 장소는 표트르의 널찍한 집 안 어느 큰 마을에서 일어난 일 제1막 표트르는 걸상에 앉아 말의 굴레를 손질하고 있다. 아니시야와 아쿨리나는 실을 뽑으며 흥얼거리고 있다. 제1장 표트르:(창밖을 내다보며) 또 말들이 어디로 나가버렸군. 그러다간 망아지를 모두 죽이고 말겠어. (큰소리로) 이봐, 니키타, 니키타, 거기 없나! 귀라도 먹었냐! (잠깐 귀를 기울이다가 여자들에게) 야, 그만해. 어디 들을 수가 있어야지! 니키타:(목소리만 뒷문 밖에서) 왜 그러세요? 표트르:말들을 몰아 넣어야지. 니키타:(목소리만) 예,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몰아넣을 테니. 표트르:(고개를 저으며) 머슴 부려먹기도 힘들군! 내 몸만 성하면 저런 것들을 집에 둬둘 필요도 없으련만. 머슴 둬서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으니... (일어났다가 다시 앉는다) 니키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제기랄, 차라리 너희가 가는 게 낫겠다. 아쿨리나, 네가 가서 몰아넣고 오렴. 아쿨리나:말을 몰아넣으라구요? 표트르:그럼, 말 말고 또 뭐가 있니? 아쿨리나:네, 알았어요.(퇴장) 제2장 표트르:저 녀석 정말 게을러빠져서 큰일이야... 도대체 뭘 시켜도 제대로 하는 일이 없거든. 아니시야:(비웃듯이) 그런 소리 하는 당신은 참 부지런하군요! 페치카와 걸상 사이만 오락가락하는 주제에. 그러면서도 식구들한테 잔소리만 하고 앉았으니, 내 참! 표트르:내가 이런 잔소리조차 안했다간 일 년도 못 가서 집도 남아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어디 가만있을 수가 있어야지! 아니시야:한꺼번에 열 가지, 스무 가지 일을 시키고는 욕지거리만 하고 있으니... 페치카 위에 뒹굴면서 남한테 시키기만 하는 것쯤 누군들 못하겠어요! 표트르:(탄식하면서) 아아, 내가 이렇게 병에 걸리지만 않았던들 단 하루도 그냥 놔두지 않을 텐데. 무대 뒤에서 말을 모는 아쿨리나의 목소리. 망아지 울음소리, 말떼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발굽소리. 뒤이어 삐걱삐걱 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표트르:저 녀석은 입 나불대는 재주밖엔 없는 놈이야. 정말이지 집에 둬둘 만한 놈이 아니라니까. 아니시야:(그대로 흉내내며) 집에 둬둘 만한 놈이 아니라니까... 흥, 당신이 몸을 좀 움직이기라도 하면서 그런 소리 했으면 좋겠수. 제3장 아쿨리나:(등장) 간신히 몰아넣었어요. 언제나 그놈의 얼룩말이... 표트르:니키타는 어디 있니? 아쿨리나:니키타요? 한길에 서 있어요 표트르:거기서 뭘 하고 있어? 아쿨리나:뭘 하느냐구요? 길 모퉁이에 서서 지껄이고 있어요. 표트르:원 저렇게 말 귀를 못 알아듣는데서야... 누구하고 지껄이고 있느냐 말야? 아쿨리나:(잘 알아듣지 못하고) 네? 표트르, 입맛이 쓰다는 듯이 아쿨리나를 향해 한 손을 내젓는다. 아쿨리나는 다시 앉아서 실을 뽑기 시작한다. 제4장 아뉴트카:(달려 들어와서 어머니에게) 니키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왔어요. 니키타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겠데요. 좀 쉬는 게 좋겠다구요. 아니시야:거짓말 말아! 아뉴트카:정말예요! 거짓말이면 당장 벼락을 맞아도 좋아요! (웃는다) 내가 옆을 지나가니까, 니키타가 '아뉴트카, 이젠 너하고도 이별이구나! 내가 장가갈 때 꼭 놀러 오너라. 난 이젠 너희 집에서 나가야겠다.' 이렇게 말하면서 웃었어요. 아니시야:(남편에게) 니키타는 당신 밑에서 일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요. 자기 쪽에서 먼저 나가겠다는 걸 보니... 그런데도 당신은 뭐 내쫓아야겠다구요? 표트르:어서 나가라지. 그 녀석 아니면 세상에 사람이 없나? 아니시야:하지만 미리 준 돈은 어떡하죠? 아뉴트카, 방문으로 다가가 귀기울이고 듣다가 퇴장. 제5장 표트르:(미간을 모으며) 돈은 여름에 날품삯으로 청산하라고 해야지. 아니시야:흥, 당신은 머슴 내보내게 돼서 좋겠수. 식구가 하나 줄어드는 셈이니까. 그리고 겨우내 나룰 소나 말처럼 부려먹을 작정이죠? 큰 딸년은 일이라곤 하려 들지 않지요, 당신은 페치카 위에 뒹굴기만 하지요. 그러니 나만 혼자 죽어나는 거지. 난 이제 당신의 속셈을 다 알았어! 표트르:아직 분명한 얘길 들은 것도 아닌데 공연히 입을 놀리는 게 아니야. 아니시야:울타리 안은 가축으로 가득 찼는데도 소 한 마리 팔 생각 않고, 양떼도 겨우내 그대로 놔둘 모양이니, 먹이며 물을 어떻게 주겠다는 건지, 그런데도 머슴을 내보내겠다니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유? 난 사내들이 해야 할 그런 일은 못하겠수! 나도 당신처럼 페치카 위에서 뒹굴기나 할 테니 그리 알아요. 어서 당신 맘대로 하란 말예요. 집안 일이 어떻게 되든 난 상관 안 할 테니! 표트르:(아쿨리나) 가서 먹이 주고 오너라, 늦겠다. 아쿨리나:먹일 주라구요? 알았어요. (외투를 입고 새끼줄을 집어든다) 아니시야:(갑자기 미친 듯이 소리친다) 난 이젠 당신 일은 안 하겠단 말이야! 죽어도 안 할 테야! 그러니 당신 일은 당신이 하란 말예요! 표트르:이젠 그만해. 왜 이리 야단이야? 꼭 미친 양새끼같이... 아니시야:(표트르에게 손가락질하며) 당신은 미친개야! 자긴 일도 안하고, 남한테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안 해주면서 그저 못 살게만 구니, 그게 미친개가 아니고 뭐냔 말야! 표트르:퉷! 제기랄! (침을 뱉고 웃옷을 입는다) 하나님, 용서하시옵소서! 아무튼 가서 자세한 얘길 들어봐야지. 아니시야:(등 뒤에다 대고) 늙어빠진 마귀! 코 문드러진 문둥이! 제6장 아쿨리나:(아니시야에게) 뭣 때문에 아버지한테 욕하는 거야? 아니시야:이 바보야, 닥치지 못해! 아쿨리나:흥, 뭣 때문에 욕을 하는지 난 다 알고 있어. 나보고 바보라구? 개만도 못한 것이! 누가 자길 무서워할 줄 알구! 아니시야:아니 저년이! (튀어 일어나서 손에 잡히는 게 없나 찾는다) 부젓가락으로 매를 맞아 봐야 알겠니? 아쿨리나:(문을 열고서) 개야, 악마야, 당신은! 개란 말야, 개, 개, 악마! (달려나간다) 제7장 아니시야:(생각에 잠기며) 뭐, 내가 장가갈 때 꼭 놀러오라구?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서 그러는 걸까? 장갈 가겠다구? 두고 보자, 니키타. 그게 정말 네 생각이라면 나도 가만 놔두진 않을 테니... 난 너 없인 못 살아. 내가 널 놓아 줄 것 같으냐! 제8장 니키타:(두리번거리며 등장. 아니시야가 혼자 있는 것을 보고 얼른 그녀에게 다가간다. 작은 소리로) 이거 참 난처하게 됐는 걸. 아버지가 와서, 이젠 머슴살이 그만두고 집에 가자는군. 장가들어 집에서 살라고 하면서 막무가내야. 아니시야: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장가들면 그만 아냐!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구! 니키타:호오, 그래요? 난 어떻게 해서든지 잘 좀 해결해 보려고 그러는데, 당신은 '장가들면 그만 아냐'라구? 대체 어찌된 거야? (눈을 깜박거려 보이면서)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아니시야:어서 장가 들라니까, 누가 말릴 줄 알구! 니키타:뭣 때문에 그렇게 화만 내는 거야? 좀 어루만져 주려 했더니 곁도 주지 않는군... 대체 왜 그래? 아니시야:뭐가 왜 그러구 말구야. 이젠 날 버리려는 거지? 네가 그렇다면 나도 너 같은 건 필요없다 그말이야! 니키타:이러지 말아요, 아니시야. 내가 어떻게 당신을 잊을 수 있겠어? 세상 없는 일이 있어도 난 당신을 버릴 수 없어. 그래서 난 이렇게 하면 어떨까 생각하는데... 결혼식이 끝나면 곧 당신에게 돌아올 생각이야. 집으로 다시 끌려가지만 않으면 말야. 아니시야:색시 있는 남잘 누가 반길 줄 알구! 니키타:그렇지만 아버지 명령인데 거역할 순 없잖아. 아니시야:공연히 아버지 핑계만 대고 있지만, 실은 네 마음이 그렇게 돌아버린 거야. 벌써 오래 전부터 그 마리나인가 뭔가하는 년하고 좋아지내는 걸 누가 모를 줄 알구. 그년이 너를 그렇게 꾀었겠지. 요전에 그년이 여기 온 것도, 이제 보니 그 때문이었어. 니키타:마리나가? 그깐 년은 보기도 싫어! 나한테 꼬리 흔드는 계집애가 어디 그년 하나뿐인가... 아니시야:그럼, 아버진 왜 왔어? 네가 오라고 했으니까 왔지! 넌 나를 속여 왔어!...(흐느껴 운다) 니키타:아니시야! 난 정말 꿈에도 모르는 일이야, 이건 하나님도 알고 있어. 이 일은 처음부터 우리 영감님이 혼자서 생각해 낸 일이라니까! 아니시야:본인이 싫다는 걸 강제로 끌고 갈 순 없잖아! 나귀 새끼라면 또 몰라도. 니키타:하지만 아버지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잖냐 말야... 어쨌든 난 장가 같은 건 들고 싶지도 않아. 아니시야:그럼, 싫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 될 게 아니야? 니키타:얼마 전에도 어떤 청년이 그렇게 고집을 부렸는데 결국은 마을 회의에서 호되게 얻어맞았어. 뻔한 일이지. 그런 꼴 당하고 싶지도 않고... 아주 녹초가 될 만큼 매질을 한다는군. 아니시야:쓸데없는 소린 그만둬. 그보다도 니키타, 네가 만일 마리나하고 결혼하면, 그 땐 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난 죽어 버릴 테야! 어차피 난 큰 죄를 지은 년이니까. 이젠 돌이킬 수도 없는 몸이야. 네가 만약 가 버리면 난 정말 죽고 말 테니까... 니키타:내가 가긴 어딜 가? 갈 생각이 있었으면 난 벌써 옛날에 갔을 거야. 요전에도 이반 세묘느이치가 자기 집 마부로 오라고 했지만... 거기 가면 놀고 먹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 데도 난 가지 않았어. 허긴 그래서 누구나가 다 날 좋아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만약에 당신이 날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그때는 나도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문제지만 말이야. 아니시야:(애절한 태도로 변하여) 그러니 내 말 들어봐. 우리 영감이라는 건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형편 아니냐 말야. 영감이 죽으면 모든 죄는 다 덮어 버릴 수 있어. 우린 정식으로 결혼을 하고, 그러면 네가 이 집 주인이 되고... 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니키타:그런 수수께끼 같은 소린 그만둬. 난 이 집일을 자신의 일처럼 열심히 하고 있어. 그러니 주인 영감도 날 귀여워해 주는 거야. 하지만 여자들이 날 좋아하는 게 내 잘못이라 할 순 없지 않느냐 이거야. 아니시야:그럼, 앞으로도 날 사랑해 줄 테야? (교태를 부린다) 니키타:(여자를 포옹하며) 자, 이렇게! 내 마음 속엔 언제나 당신이 있었지. 제9장 마트료나 등장, 한참 동안 성상 앞에서 성호를 긋는다. 니키타와 아니시야, 화들짝 놀라 떨어진다. 마트료나:(아니시야를 향해) 보고도 못 본 체, 듣고도 못 들은 체하라는 말이 있잖아요? 젊은 나이에 재미 좀 본다기로서니 탓할 건 없겠죠. 송아지 새끼도 저렇게 재미를 보는데, 그래선 안 된다는 법도 없겠죠? 젊은 나이니까요. (몸을 돌려 니키타에게) 그런데 얘야, 밖에서 주인 어른이 부르신다. 니키타:(변명하듯 급하게) 실은 도끼를 가지러 들어왔던 거예요. 마트료나:오냐, 오냐, 알고 있다. 어떻게 생긴 도끼를 가지러 왔는지 다 안다. 그 도끼는 으레 여자 옆에 있기 마련이니까. 니키타:(허리를 굽혀 도끼를 집는다) 어머니, 정말로 꼭 장갈 보낼 셈인가요? 내 생각 같아선 안 될 일인 것 같아요. 난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요. 마트료나:무엇 때문에 억지로 장가를 보내겠니!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 그만이지. 그건 네 아버지 혼자서 생각하는 일이야. 자, 어서 나가 봐라. 네가 없는 데서 네 마님께 좀 의논드릴 일이 있으니. 니키타: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군. 금방 장가 가라고 했다가, 또 금방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퇴장) 제10장 아니시야:어떻게 된 거예요. 마트료나 아주머니, 정말로 장가를 들일 참인가요? 마트료나:장갈 어떻게 들이겠어요? 우리 집 살림살이가 어떻다는 건 마님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우리 영감님이 그저 공연히 장가를 들라고 우기고 있을 뿐이죠. 헌데 말이죠, '귀리 옆에서 떠나는 말 없고, 복단지를 떠나서 복 찾을 수 없다' 는 속담을 들어보셨어요? 이 일 역시 마찬가지죠.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 건지, 내가 그걸 모를 줄 아세요? (눈을 깜박거려 보인다) 아니시야:마트료나 아주머니, 당신한테 숨겨 봐야 소용없겠군요, 벌써 다 알고 있는 모양이니까, 난 큰 죄를 지었어요. 당신 아들을 좋아하게 됐지 뭐예요? 마트료나:거, 새삼스럽게 무슨 말씀을! 그래 이 마트료나 아주머니가 그것도 모르는 줄 아셨수? 나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파란 말예요. 땅 속 석자쯤은 환히 들여다 볼 수 있다우. 뭐든지 다 알고 있어요! 젊은 아낙네들한테 왜 잠자는 약이 필요한지도 알고 있구요. (보자기를 끄르고 종이에 싼 가루약을 꺼낸다) 필요치 않은 건 하나도 모르지만, 필요한 건 다 알고 있지요. 마트료나 아주머니도 젊었을 때가 있었거든요. 바보 영감과 함께 살아도 이 세상 살아 나갈 줄은 알아야 할 게 아니겠어요? 난 이젠 이 세상 일이라면 모르는 것 없이 다 안답니다. 보아하니 댁의 영감님도 이젠 아주 시들어 버리셨군요. 그래 가지고 어떻게 아직도 살아 계신지? 갈퀴로 찔러 봐야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가 않군요. 아마 내년 봄까지 살기도 어려울 거예요. 그러면 누구든 맞아들이셔야 할 텐데, 우리 아들놈도 남의 축에 빠지는 사내는 아니잖습니까? 그렇다면 나도 아들놈을 이런 복단지 옆에서 억지로 떼어 놓을 수는 없쟎겠느냐 말예요? 나도 자기 아들이 잘 되길 바라기는 매한가지니까요. 아니시야:그저 이 집에서 나가지만 않으면 좋으련만. 마트료나:나가기는 그애가 왜 나갑니까! 그저 쓸데없는 소리예요. 그저 우리 영감님이 공연히 고집을 부리는 것뿐이죠. 다 늙은 주제에 뭘 한 가지 생각하면 끝까지 고집을 부리려 드니 탈이죠. 아니시야:그러면 이번 얘기는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죠? 마트료나:다름 아니라, 마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 아들놈은 원래가 미끈하게 생긴 데다가 사내다운 데가 있어 계집애들이 잘 따르거든요. 그래서 그애가 전에 철도국에 있을 때 거기 식당에서 일하던 고아 처녀 하나가 그애 꽁무니를 쫓아다니게 되었다 그 얘기예요. 아니시야:마리나 말인가요? 마트료나:바로 그 계집애지요. 그런 년은 중풍에나 걸려 꼼짝 못하게 되어야 하는 건데. 그 계집애와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어쨌든 그 얘기가 영감님 귀에 들어갔단 말예요. 누구한테 들었는지, 아니면 그년이 직접 영감한테 호소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아니시야:원 저런 뻔뻔스런 년 봤나! 마트료나:그래서 바보 같은 우리 영감님이 떠들어대기 시작한 거죠. 결혼을 시켜야 된다, 결혼을 시켜서 속죄를 하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니키타 놈을 집에 데려와서 장가를 보내야겠다고 계속 우기지 않겠어요? 나도 옆에서 여러 가지로 말려 보았지만 어디 귓등으로나 들어야지! 그래서 나는 생각했죠. 그렇담 좋다. 다른 수를 써서라도 뒤집어 엎을밖에! 그런 바보 영감을 다루는 데는 이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나도 영감님 주장에 따르는 체했죠. 그러다가 끝판에 가서 이쪽 생각대로 홱 뒤집어 놓을려구요. 여자라는 건 페치카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도 일흔 일곱 가지 생각을 하는 법인데, 사내들이 어찌 그 속을 알겠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하지만 아들한테 가서, 주인 어른 말씀도 들어보고 잘 의논해서 결정하는 게 좋겠군요.' 이렇게 말해서, 함께 여기 오게 된 거랍니다. 아니시야:그렇지만 아주머니, 일이 정말 그렇게 수월할까요? 만약에 영감님이 끝까지 우긴다면 어떡하죠? 마트료나:끝까지 우긴다구요? 그 따위 영감이 우긴다고 누가 까딱이나 할 줄 아세요! 마님께선 하나도 걱정할 것 없어요. 이 혼담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내가 이제 곧 이 댁 주인 어른과 만나서 잘 얘기만 하면 문제 없이 해결될 테니 두고 보세요. 내가 오늘 우리 영감님을 데리고 여기 온 건 다 생각이 있어서 한 일이랍니다. 아니, 내 아들이 이 댁에서 이렇게 잘 지내고 있고, 앞으로도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뭣 때문에 그런 거지 같은 계집을 억지로 아들한테 붙여 줍니까? 난 그렇게 어리석은 노파가 아니란 말예요. 아니시야:그 년이 글쎄 여기까지 니키타를 만나러 쫓아오지 않았겠어요! 그 마리나년 말예요. 정말이지 아주머니, 니키타가 장가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칼로 가슴을 푹 찔린 것 같았어요. 하지만 니키타는 아직도 그 계집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마트료나:원, 천만의 말씀! 그래, 우리 아들놈이 그렇게 바본 줄 아시우? 그애가 집도 없는 거지계집을 좋아할 까닭이 어디 있겠어요. 니키타가 바보가 아니라는 건 마님도 잘 아실 텐데 그러시네요. 그애는 누굴 사랑해야 좋을지 잘 알고 있어요. 그런 걱정일랑 아예 마십시오. 절대 집으로 데려가진 않을 테니까. 물론 장가도 보내지 않을 것이고, 돈만 주신다면 그애는 그냥 댁에 있게 하겠어요. 아니시야:니키타가 가 버리면 난 정말 죽은 몸이나 매한가지예요. 마트료나:그야 물론 마님 같은 젊은 여자가 저런 헌신짝 같은 영감님과 함께 살자니 오죽하겠수! 아니시야:정말예요, 아주머니. 난 저 문드러진 늙은개가 싫어서 죽을 지경이에요. 이젠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걸요. 마트료나:하긴 그것도 당연한 일이죠. 자, 이걸 좀 보시우. (주위를 둘러보며 작은 소리로) 당신도 잘 아는 그 영감님한테 가서 이 약을 얻어 왔어요. 이렇게 두 가지 약을 주더군요. 그런데 그 영감님이 말하기를 이건 잠자는 약이다, 이걸 조금만 먹이면 짓밟고 다녀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들어 버린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또 이쪽 약은 냄새도 맛도 없지만 굉장한 효력이 있어서, 이걸 조금씩 일곱 번만 먹이면 마님은 곧 자유의 몸이 될 거라고 하더라니까요. 아니시야:도대체 그게 뭔데요? 마트료나:(답답한 듯이) 전혀 못 알아 듣는 것 같으시네. 난 이걸 일 루블어치 사 왔죠. 그 영감님도 이걸 구하느라고 무척 애를 썼다나요. 약값은 내가 대신 주고 왔지요. 틀림없이 마님이 약을 사실 것으로 생각해서 말예요. 아니시야:(두려운 듯이 눈을 크게 뜬다) 아아! 혹시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요? 마트료나:큰일은 무슨 큰일입니까? 주인 어른이 건강한 분이라면 또 몰라도, 살아있다는 건 말뿐이지 이미 저승에 간 사람이나 다름없잖아요.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는 일이라는 걸 모르시우? 아니시야:하지만 어떡하면 좋을까? 아주머니, 정말 아무 일도 없을까요? 어쩐지 겁이 나는군요. 아아,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마트료나:그럼 도로 가져가지, 뭐. (약을 도로 챙겨 넣는 시늉을 한다.) 아나시야:(결심한 듯이) 이것 역시 물에 타는 약인가요? 마트료나:차 속에 넣으면 된다더군요. 눈으로 봐서 다른 점은 하나도 없고, 냄새도 전혀 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영감님은 굉장히 영리한 사람이거든요. 아니시야:(가루약을 받아 들고) 아아, 어쩌면 좋담! 정말이지. 내가 이 징역살이 같은 생활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을 텐데. 마트료나:그럼, 약값 일 루블을 잊지 마세요. 아니시야:잘 알았어요. (궤짝 있는 데로 가서 가루약을 감춘다) 마트료나:그보다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잘 간수하셔야 합니다. 어쩌다 잘못해서 남의 눈에 띄는 날이면 그야말로 큰일이죠. 속담에 벽에도 귀가 있다고...(일 루블 지폐를 받는다.) 벽에도 귀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갑자기 말을 끊는다.) 제11장 무대 중앙에 아니시야와 마트료나. 표트르가 둘러 앉아 있다. 표트르:그럼, 어떡하는 게 좋겠소, 아킴 영감? 아킴:뭐, 그... 좋도록 해야죠. 순리를 따라서 좋도록 해야 할게 아니겠어요! 너무 제멋대로 살게 해서도 안될 일이고 해서... 데려가다 일도 좀 시키고... 그러나 주인 어른께서 원하신다면 그냥 놔둬도 무방하지만요, 어쨌든 좋도록... 표트르:알겠소, 알겠어. 자, 앉아서 천천히 의논합시다. (아킴, 앉는다) 그래, 어떡하겠다는 거요? 장가를 들이겠다는 건가? 마트료나:(급하게 끼어들며) 장가 들이는 건 뒤로 미루어도 됩니다요. 아시다시피 가난한 살림살이에 어떻게 장가를 들이겠어요. 우리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처지에 어떻게 혼례를 올릴 수 있겠어요! 표트르:아무튼 잘 생각해서 결정하시오. 마트료나:장가들이는 건 하나도 서두를 필요가 없어요. 일생의 중대사니까요. 나무열매처럼 따지 않으면 떨어져 버리는 것도 아니구요. 표트르:하지만 장가를 들이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아킴:실은 내 생각에도 그렇게 하는 게 좋을 듯 싶어서... 게다가 요즘 나도 그... 시내에서 마땅한 일거리가 생겼기 때문에... 마트료나:흥, 그것도 일거리라고! 실은 남의 집 변소치는 일이랍니다. 엊그제 집에 돌아올 때 보니 어찌나 구린내가 풍기는지, 난 구역질이 나서 혼이 났지 뭡니까? 아킴:그야 처음엔 코가 못 견디지만, 습관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아요. 냄새가 나는 건 사실이지만... 어디 우리가 그런 걸 불평할 처진가요. 옷만 갈아입으면 되는 걸 가지고 말입니다. 그래서 니키타를 집에 데려다가 집안 일을 좀 시킬까 하는 생각입죠. 그애가 집안 일을 하면, 나는 시내에 나가서 벌이를 할 수 있으니까요... 표트르:아들을 집에 데려가겠다는 건 당연한 얘기요. 하지만 선금으로 받은 돈은 어떻게 할 작정이오? 받은 돈을 다시 돌려 주지 못하겠다면 계약 기간이 끝날 때까지 일을 해야 할 테고... 아킴:그건 어디까지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일단 머슴살이로 들어간 이상, 이를테면, 그 몸을 판 거나 마찬가지니까 기한이 끝날 때까지는 일을 해 드리는 게 옳지요. 그... 그러니까 장가만 들이고는 곧 돌려보내겠습니다요. 표트르:그렇다면야 안 될 것도 없지. 마트료나:이 일에 대해선 우리 두 사람의 의견이 서로 다르답니다. 난 하나님 앞에 나간 셈 치고 주인 어른께 죄다 말씀드릴 테니 영감 생각이 옳은지 내 생각이 옳은지 주인 어른께서 판결을 내려주세요. 저 영감은 입버릇처럼 장갈 보내야 한다, 장갈 보내야 한다고 말하지만, 도대체 그 색시라는 게 누구냐고 한번 물어 보십시오! 그것이 흠잡을 데 없는 색시라면야 나도 아들을 위해 기꺼이 찬성하겠지만, 그렇지가 못하고 행실이 아주 나쁜 계집애를 가지고 그러니, 어떻게... 아킴:또 쓸데없는 소리! 그 색시를 그렇게 헐뜯는 게 아니래두. 그 색신 말하자면 그... 우리 아들놈이 욕을 보인 게 아니냔 말야. 표트르:욕을 보이다니? 아킴:말하자면, 그... 우리 아들 니키타와... 니키타와... 마트료나:여보, 당신은 좀 잠자코 있어요. 내 혀가 당신 혀보다는 부드러울 테니까 내가 얘기하죠. 우리 아들놈은 아시다시피 여기 오기 전에 철도국에서 일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인부 조합 식당에 부엌데기로 있던 마리나라는 계집애가 우리 아이의 꽁무니를 쫓아다녔다는군요. 바로 그 계집애가 공연히 트집을 잡아 가지고 마치 니키타가 자기를 유혹한 것 같이 말하고 있답니다. 표트르:흐음, 그건 좋지 않군. 마트료나:게다가, 그 계집은 행실이 아주 좋지 않아서 이놈 저놈 닥치는 대로 들어붙는 더러운 년이라니까요. 아킴:여보, 마누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거짓말은 하는 게 아니래두. 당신은 언제나 그... 그... 마트료나:저 영감은 말끝마다 그, 그 소리만 하지만, 뭐가 그, 근지는 자기도 모른단 말씀이에요. 그 색시에 대해선 주인 어른께서도 사람들한테 물어 보세요, 누구나 다 똑같은 말을 할 테니. 정말이지, 갈보나 다름없는 떠돌이 계집이라니까요. 표트르:(아킴에게) 어떻소, 영감? 그렇다면 그런 색시를 며느리로 맞을 순 없을 게 아니오. 한번 혼인을 시키면 짚신 모양 훌렁 벗어 던질 수도 없는 일이니까. 아킴:(몹시 흥분하여) 여보 마누라, 그 따위 거짓말이 어디 있어. 그... 그 색신 절대 그런 여자가 아니야. 굉장히 착한 색시지. 난 그 색시가 가엾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 그 색시가 불쌍하다는 거야. 마트료나:흥, 당신은 옛날 얘기에 나오는 마레미야마 성인보다 더 하구료. 집 안에서는 굶고들 앉아 있는데, 자긴 온 세상 사람 걱정을 도맡아 하고... 남의 집 처녀는 가엾고 자기 집 아들은 가엾지 않단 말이우? 차라리 그 계집을 당신 모가지에 매달고 함께 구걸이라도 하러 나서구료. 그런 허튼 소리는 하지도 말라구요! 아킴:허튼 소리라니! 마트료나:당신은 입 다물고 있어요, 내가 얘기할 테니. 아킴:(말을 가로막으며) 이건 절대 허튼 소리가 아내야. 당신은 뭐든지 제멋대로 결정을 내려 버린다니까. 말하자면, 그, 그... 색시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뭐든지 제멋대로 결정을 내려 버린단 말야. 하지만 하나님께선 자기 듯대로 결정을 내리신다는 걸 알아야지. 암, 그렇구말구. 마트료나:당신하고 말을 하다가는 혀가 닳아 떨어지겠수. 아킴:그 처년 일도 잘하는 참한 색시야. 하나도 흠잡을 데 없는 색시지. 말하자면, 그... 우리네 같은 가난뱅이한테는 일손이 하나 느는 셈이거든. 그리고 혼례를 올린다 해도 그리 비용이 많이 들지는 않을 게고. 그리고 혼례를 올린다 해도 그리 비용이 많이 들지는 않을 게고. 그보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 아들놈이 그 색시한테 욕을 보였다는 점이지. 그 색시를 고아야, 고아한테 욕을 보였으면 마땅히... 마트료나:어이구, 답답해. 저렇게 똑같은 소리만 한다니까. 아니시야:이봐요. 아킴 영감님, 아주머니 말도 들어 봐야 할 게 아니겠어요? 아주머니가 알아들을 만큼 다 얘기할 거예요. 아킴:그럼 하나님은,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아? (마트료나를 향해) 그래 그 색신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그 색시도 하나님 눈으로 볼 땐 역시 똑같은 인간이야. 마트료나:내 참, 바보는 할 수 없군! 표트르: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아킴 영감? 사실이지 그런 처녀는 믿기 어려우니, 니키타를 이 자리에 불러서 그게 사실인가 아닌가 물어 보면 될 게 아니오? 니키타도 설마 있는 일을 없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니키타를 부릅시다! (아니시야, 일어선다.) 여보, 니키타더러 아버지가 부른다고 오라 하구료. (아니시야, 퇴장) 제12장 마트료나:거 보시구료, 주인 어른께서 옳게 판단을 내려주시잖았수! 무엇보다 아들 말을 들어 보는 게 제일이지. 요즘 세상에 억지로 색시를 붙여 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 역시 본인 얘길 들어 봐야죠. 아마 그런 계집한텐 죽어도 장가 들 수 없다고 할 테니 두고 보구료. 그보다도 주인 어른, 아들놈은 댁에 그냥 있게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여름에도 집에 데려갈 필요는 없을 거예요. 집의 일은 품을 사서 하면 될 테니까요. 그 대신에 우리한테 십 루블만 주세요. 아들놈은 그냥 댁에 놔두기로 할 테니. 표트르:그건 나중에 얘기합시다. 한 가지씩 차례대로 결정을 지어야 하니까. 아킴:주인 어른,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말하자면 그... 흔히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만, 사람은 흔히 자기 생각만 하고 하나님에 대해선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뭐든지 자기한테만 좋도록, 자기한테 편리하게만 생각하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모가지에 올가미를 씌운 격이 되고 말지요. 자기는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해도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오히려 나쁜 결과가 오게 마련입니다. 표트르:그야 물론이지!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쓰나? 아킴:정말이지 오히려 나쁜 결과가 오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대로, 그러니까 그... 하나님 말씀대로만 하고 있으면 언제나 마음 속이 평안하거든요. 그래서 나도 아들은 하나님 법대로 집에서 살고, 나는 시내에 나가서 일을 할 생각이지요. 그 일도 정말 마땅한 일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오히려 훌륭한 일이지요. 그리고 그 고아 처녀를 위해서도 이건 좋은 일입니다. 지난 여름에 상인을 속여 먹은 점원이 있었지요. 아주 감쪽같이 속여 먹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상인은 속여도 하나님만은 못 속입니다! 그래서 그 놈은... 제13장 니키타와 아뉴트카 등장. 니키타:부르셨어요? (앉아서 담배를 꺼낸다) 표트르:(타이르듯 낮은 소리로) 넌 예의도 모르니? 아버지다 부르시는데 앉아서 담배를 피우려 들다니, 지나친 것 같구나. 자 이쪽에 서 있어. 니키타, 히죽히죽 웃으며 탁자 옆에 선다. 아킴:니키타, 너 때문에 지금 나한테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 니키타:호소를 하다니, 누굽니까? 아킴:처녀야, 그... 고아 처녀가 나한테 호소하더라. 그러니까 그... 그... 너 때문에 호소를 하더란 말이다. 그 마리나라는 처녀가... 니키타:(껄껄 웃으며) 그것 참 이상한데요. 대체 뭘 호소한단 말입니까! 그래, 그 여자가 직접 아버지한테 말하던가요? 아킴:내가 지금 묻는 말에 똑똑히 대답해라. 너는 그 처녀와 가까이 지낸 일이 있느냐, 없느냐? 니키타:뭘 묻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아킴:그러니까, 그... 어리석은 짓을 한 일이 있느냐 말이다. 니키타:그야 있다면 있지요. 심심풀이로 그 부엌데기와 농담을 주고 받은 일도 있고, 내가 치는 손풍금에 맞춰 그 여자가 춤을 춘 일도 있고요. 어리석은 짓이라는 건 대체 뭡니까? 표트르:니키타, 그렇게 시치미 떼는 게 아니야. 아버지가 묻는 말에 똑똑히 대답해야지. 아킴:(엄숙한 어조로) 니키타!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 눈을 못 속이는 법이야. 공연히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그 처녀는 고아야. 그러니까 쉽게 욕을 보일 수도 있었을 거란 말이야. 좀더 분명히 대답하지 못할까! 니키타:뭘 분명히 말하라는 거죠?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는데요. (열을 올리며) 그 여잔 무슨 소리든지 다 지껄일 수 있는 여자란 말예요. 어서 실컷 지껄이라죠. 그래, 요즘 세상에 농담 몇 마디 주고 받을 수도 없단 말인가요? 그리고 그 여잔 터무니없는 소릴 지껄여도 괜찮단 말인가요? 아킴:니키타, 조심해라! 거짓은 자연히 드러나는 법이야.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니, 없었니? 니키타:(혼자 소리로) 제기랄, 어지간히 귀찮게 구는군. (아킴에게) 나와 그 여자 사이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화를 내며) 예수 그리스도님, 이 말이 거짓말이라면 여기서 한 발을 떼기 전에 내 목숨을 끊어 주시옵소서.(성호를 긋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니까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더욱 열을 올리며 계속 한다) 그런데 뭣 때문에 아버진 나를 그런 여자한테 장가 보내려는 겁니까? 그건 정말 얼토당토않은 짓이에요. 도대체 요즘 세상에 강제로 장가를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나는 지금 예수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았느냐 말예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마트료나:(남편에게) 그것 보란 말예요. 그런 계집애의 거짓말을 곧이 듣는 당신이 바보지. 공연히 아들의 비위만 상하게 했지 뭐예요? 그러니 니키타를 지금처럼 그냥 이 댁에 놔두기로 합시다. 주인 어른께서 우리의 궁한 형편을 보시고 십 루블을 돌려주실 테니까요. 표트르:그럼 어떡하겠소, 아킴 영감? 아킴:(혀끝을 차며 아들에게) 잘 듣거라, 니키타. 욕을 본 사람의 눈물은 딴 곳으로 흐르지 않는다. 반드시 나쁜 짓을 한 그 자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법이야.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니키타:뭘 조심하라는 거죠? 아버지나 조심하세요. 아뉴트카:가서 엄마한테 알려 줘야지. (달려 나간다) 제14장 마트료나:(표트르에게) 덕분에 쉽게 결말이 났습니다요, 주인 어른. 우리 영감은 고집이 세어서 뭐든지 한 번 그렇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그야말로 요지부동이거든요. 공연히 주인 어른한테까지 수고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그럼 아들놈은 그냥 댁에 둬두시고 일을 하게 해주세요. 표트르:(아킴을 쳐다보며) 그럼 어떡하겠소, 아킴 영감? 아킴:나야 뭐, 아들놈의 자유를 억압할 생각은 없지만, 그저 그... 어떻게 해서든지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마트료나:여보, 또 무슨 소릴 중얼거리는 거예요! 자기도 알지 못하는 소리를. (표트르에게) 주인 어른, 어서 그렇게 하십시오. 아들놈도 댁에서 나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니. 그리고 그애를 집에 데려가면 또 뭘 합니까? 집의 일은 우리 손으로 해 나갈 수 있으니까요. 표트르:하지만 아킴 영감, 혹시 여름에 데려 갈 거라면 우리도 겨울 동안 둬둘 필요가 없단 말이오. 둬두려면 아주 1년으로 약속해 줘야겠소. 마트료나:네, 어서 1년으로 하십시오. 우리 집에선 바쁠 때 품을 좀 사서 일을 시키면 되니까요. 아들놈은 그냥 댁에 둬둘 테니 십 루블만 더... 표트르:그럼 1년 더 둬두겠소? 아킴:(한숨을 내쉬며) 하는 수 없군요. 그렇다면 그... 그렇게 할 수밖에... 마트료나:그럼 1년 더. 드미트리 축일인 토요일부터 세기로 하죠. 머슴삯은 잘 좀 부탁합니다. 그리고 우선 십 루블만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일어나서 절을 한다) 제15장 표트르:어떻소? 그럼, 그렇게 결정한 걸로 하고 선술집에라도 가서 뭘 좀 먹어야지. 자, 아킴 영감. 우리 가서 워드카나 한 잔 합시다. 아킴:난 안 합니다, 술은 하지 않아요. 표트르:그럼, 차라도 마셔야지. 아킴:차라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표트르:그럼, 여자들도 함께 가서 차를 마셔야지. 니키타, 양떼를 몰아넣고 밀집도 거둬들여라. 니키타:네, 알았어요. 니키타를 제외하고 모두 퇴장. 해가 지기 시작한다. 제16장 니키타 혼자 서 있다. 니키타:(담배를 피워 문다) 계집애하고 재미 좀 본 것을 말하라고 귀찮게 구니 , 내 참! 그런 걸 일일이 말하려다가는 한이 없지. 그 계집애하고 결혼하라고 하지만 관계가 있는 여자하고 모두 결혼을 하다가는 마누라의 수를 셀 수도 없을 거야. 흥, 장가를 가서 뭘 해. 마누라 가진 놈보다 내가 더 재미있게 살고 있는데 말야. 그래서 모두들 날 부러워하고 있는 판이데... 하지만 성상 앞에서 성호를 그을 땐 흡사 누가 옆구리를 쿡 찌르는 느낌이던 걸. 아무튼 얘기가 잘 마무리 되어 다행이야. 거짓 맹세를 하면 벌을 받는다고들 하지만, 그건 다 쓸데없는 소리야. 그저 말뿐이지. 겁낼 건 하나도 없어. 제17장 아쿨리나:(외투를 입고 등장, 새끼줄 뭉치를 내려놓고 외투를 벗고서 광 쪽으로 간다) 불이라도 켜 놓지 않고... 니키타:왜, 네 얼굴 좀 봐 달라구? 그렇쟎아도 잘 보인다, 잘 보여. 아쿨리나:뭐가 어째? 제18장 아뉴트카:(달려 들어와서 니키타에게 소곤거린다) 빨리 나가봐, 니키타. 누가 와서 부르고 있어, 정말이야. 니키타:누구야? 아뉴트카:철도국에 있는 마리나야. 집 뒤에 서 있어. 니키타:거짓말마. 아뉴트카:정말이라니까. 니키타:왜 왔대? 아뉴트카:니키타를 좀 불러 달래. 니키타한테 꼭 한마디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거야. 무슨 일이냐고 내가 묻는데도 대답을 안 해. 니키타가 너희 집에서 정말 나가느냐고 나한테 묻지 않겠어? 그래서 나는 영감님은 집에 데려가서 장가 보내겠다고 했지만, 니키타가 싫다고 해서 우리 집에 일 년 더 있기로 했다고 대답했지. 그랬더니 꼭 한마디 해야 할 말이 있다고 제발 니키타를 꼭 좀 불러내 달라는 거야. 벌써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어. 어서 나가 봐. 니키타:기다리고 싶으면 기다리라지. 내가 알 게 뭐야! 아뉴트카:니키타가 나오지 않으면 자기가 직접 집 안으로 찾아 들어오겠다고 했어. 정말이야, 그렇게 말했다니까? 니키타:좀 기다리다가 가 버리겠지. 아뉴트카:어쩌면 아쿨리나와 결혼시키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하던데? 아쿨리나:(물레를 가지러 니키타 쪽으로 가까이 간다) 뭐라구? 누굴 아쿨리나와 결혼시켜? 아뉴트카:니키타를 말이야. 아쿨리나:어림도 없는 소리! 누가 그 따위 소릴 하던? 니키타:아마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모양이군. (아쿨리나를 보고 웃는다) 아쿨리나, 너 나하고 결혼하지 않을래? 아쿨리나:너하고? 전에는 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젠 안 돼. 니키타:왜 안돼? 아쿨리나:너는 날 귀여워해 주지 못할 테니까. 니키타:왜 귀여워해 주지 못해? 아쿨리나:귀여워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니키타:(웃는다) 그게 누구야? 아쿨리나:계모지, 누구야. 밤낮 신경질을 부리면서, 너만 지켜보고 있다니까. 니키타:(흡족한 듯이 웃는다) 못하는 소리가 없군! 하지만 너도 제법 눈치가 빠르구나. 아쿨리나:내가? 눈치가 빠르고 뭐고가 어디 있어, 소경이 아닌 다음에야 다 알 수 있지. 오늘도 아버지한테 공연히 시비를 걸잖아. 뚱보 마귀 할멈 같으니! (광으로 들어간다) 아뉴트카:니키타, 저기 봐! (창 밖을 내다본다) 온다니까, 마리나가 정말 이리 오고 있어. 난 나가 버려야지. (퇴장) 제19장 마리나:(등장) 너 날 어떡할 작정이지? 니키타:어떡하긴? 내가 뭘 어떡한다는 거야? 마리나:날 버리려는 거지? 니키타:(벌떡 일어서며) 이봐, 도대체 뭣하러 왔어? 마리나:아아, 니키타! 니키타:참 알 수가 없군. 뭣 때문에 왔느냐 말야. 마리나:니키타! 니키타:니키타가 어쨌다는 거야? 니키타는 여기 있어. 무슨 용무야? 일 없으니 어서 돌아가라구! 마리나:그럼 날 버리겠단 말이지? 날 잊어버리겠단 말이지? 니키타:잊어버리고 말고 할 것도 없잖아? 네가 집 뒤에 와서 아뉴트카를 시켜 나를 불렀지만, 난 안나갔어. 그러면 벌써 알게 아니냔 말이야. 난 너를 만날 필요도 없다 이거야. 그러니 어서 돌아가라구. 마리나:필요없다구? 이젠 만날 필요도 없다구? 난 네가 언제까지나 사랑해줄 것이라고 믿었어. 그런데 너는 나와 헤어져 있는 사이에 벌써 필요없어졌단 말이지? 니키타:그런 소린 해 봤자 소용없어. 넌 우리 아버지한테까지 가서 말했다면서? 제발 이젠 돌아가란 말이야! 마리나:내가 너 한 사람만을 사랑했다는 건 너도 알잖아? 난 네가 나와 결혼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야. 그게 원통하다는 건 아니란 말야. 다만 난 잘못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어째서 넌 내가 싫어졌는지 그것이 알고 싶을 뿐이야. 니키타:너 같은 것하곤 아무리 말해 봐야 소용없어. 어서 가버리란 말야! 참 답답한 것 다 봤군! 마리나:난 네가 결혼하겠다고 약속하고는 날 속인 게 분하다는 건 아니야. 왜 내가 싫어졌는지, 그게 분해. 아니, 싫어진 것까지도 좋아, 나 대신에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게 분하다는 거야. (소리친다) 난 그게 누군지 알아! 니키타:(성이 나서 여자한테 다가간다) 제기랄! 너 같은 계집하곤 백 번 말해 봐야 마찬가지야. 빨리 꺼지지 못해! 꺼지지 않으면 재미없다! 마리나:재미없다구? 때리겠다는 건가? 때리려거든 어서 때려! 왜 얼굴을 돌리지. 응 니키타! 니키타:사람들이 오면 재미없을 건 뻔한 일 아냐? 도대체 어쩌자고 이렇게 넋두리를 늘어 놓는 거야! 마리나:그러니까 이것으로 마지막이란 말이지? 모든 걸 물에 흘려 보내고 잊으라는 건가? 그렇지만 니키타, 잘 들어 둬. 나는 여자의 정조라는 걸 눈알보다도 더 소중히 여겨 왔지만, 넌 아무 잘못도 없는 내 일생을 망치고 나를 속였어. 고아인 나를 (울면서) 헌신짝처럼 버렸어. 넌 나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나 난 원한 같은 건 품지 않을 테야. 잘 살라구. 좋은 여자 만나거든 잊어버리고, 못난 여자 만나거든 날 생각해 줘, 니키타! 그럼 안녕. 정말이지 난 너를 사랑했어.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안아줘! ( 두 손으로 니키타의 머리를 잡으며 포옹하려 한다) 니키타:(뿌리치며) 난 더 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다니까! 네가 가지 않겠다면 내가 나갈 테야. 어디 여기 남아 있으라구! 마리나:(악을 쓰며) 넌 짐승이야! (문지방에서) 너 같은 사람한테는 하나님도 절대 행복을 내려주지 않을 거야! (울면서 퇴장) 제20장 아쿨리나:(니키타와 마리나의 이야기를 다 듣고 광에서 나온다) 니키타, 넌 개야, 개! 니키타:어째서? 아쿨리나:그렇게 우는 걸 보고도 불쌍하지도 않아? 니키타: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지? 아쿨리나:무슨 상관이냐구? 넌 그 여자 신세를 망쳐놓지 않았느냐 말야... 아마 나까지도 그런 꼴을 만들려 하겠지... 넌 개야. (다시 광으로 들어간다) 제21장 니키타:(잠자코 있다가 혼잣말로)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군. 난 여자라면 사탕보다 더 좋아하지만, 그것도 너무 집어 먹으니 역시 후환이 있게 마련인가! 제2막 무대는 표트르네 집과 그 앞의 한길. 왼편으로 농가가 있고, 중앙의 층계와 현관이 농가를 좌우로 가르고 있다. 오른편으로는 대문과 안뜰 일부가 보인다. 안뜰 구석에서 아니시야가 아마를 다듬고 있다. 제1막으로부터 여섯달 후. 제1장 아니시야:(일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또 뭐라고 투덜거리고 있군. 페치카에서 내려온 모양이지? 제2장 아쿨리나, 물지게를 지고 등장한다. 아니시야:또 부르는가 보다. 어서 아버지한테 가봐라. 저렇게 고함을 지르고 있잖니? 아쿨리나:(쀼루퉁한 얼굴로) 자기가 가면 안 되나? 아니시야:아니, 빨리 가지 못해? 아쿨리나, 집 안으로 들어간다. 제3장 아니시야:저놈의 영감 때문에 속상해 죽겠군. 돈을 어디다 두었는지 영 말하지를 않으니, 이 일을 어쩌지? 엊그제 현관 복도에서 서성댄 걸 보면 필시 거기다 감춰둔 것 같은데. 그렇지만 지금은 또 어디다 옮겨 놓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하긴 그래도 돈을 딴 사람에게 맡기지 않은 것만은 다행이지. 어쨌든 집 안에 있는 건 틀림없으니까. 아무튼 그 돈을 찾아내야 하겠는데... 어제 보니 몸에 지니고 있는 것 같지는 않던데. 하지만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놈의 영감, 참 어지간히도 애를 먹이는군. 제4장 아쿨리나, 머릿수건을 동여매며 나온다. 아니시야:어딜 가는 거냐? 아쿨리나:어디 가느냐구? 아버지가 마르파 고모를 불러 오래요. 이제 곧 죽을 것 같으니 고모한테 뭘 한 가지 꼭 말해둬야겠다구요. 아니시야:(혼자 소리로) 자기 누이를 불러 오라구? 아아, 이걸 어쩌지? 필시 자기 누이한테 돈을 맡기려는 모양인데, 아아, 이거 큰일났다! (아쿨리나에게) 넌 가지 마라! 어딜 가니? 아쿨리나:고모를 부르러요. 아니시야:가지 말라지 않니! 내가 갔다올 테니 넌 개울에 빨래나 하러 가거라. 지금 하지 않으면 밤중까지도 다 못할 거야. 아쿨리나:그렇지만, 아버지가 나보고 갔다 오랬는데? 아니시야:내가 가라는 데나 가! 마르파한테는 내가 갈 테니. 울타리에 걸린 속옷가지부터 거둬라. 아쿨리나:(혼잣말처럼) 속옷을 거두라구? 그러구선 가지 않으려는 게 분명해? 아버지가 내게 갔다 오라고 단단히 일렀는데. 아니시야:내가 갔다온다는 데도 그러는구나. 아뉴트카는 어디 있니? 아쿨리나:아뉴트카? 그앤 송아지를 지키고 있어요. 아니시야:그앨 이리 불러 오너라. 송아지가 도망치진 않을 테니. 아쿨리나, 울타리에서 속옷들을 거둬 가지고 퇴장. 제5장 아니시야:(혼자 소리로) 가지 않으면 안 갔다고 야단을 칠 것이고, 갔다가는 시누이한테 돈을 뺏길 것이고... 까딱하다간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갈 텐데, 이를 어쩌면 좋담?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 돼서 갈피를 못 잡겠군. (하던 일을 계속한다) 제6장 마트료나, 먼길을 떠날 때처럼 지팡이와 보따리를 들고 등장. 마트료나:안녕하십니까! 아니시야:(뒤를 돌아본다. 일감을 내던지고,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손뼉을 친다) 어머나, 아주머니 아니세요! 하나님께서 때를 맞춰 아주머니를 보내주셨군요. 마트료나:무슨 일이라도 있었수? 아니시야:난 정말 미칠 것 같아. 큰일났어요! 마트료나:(작은 목소리로)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거요? 아니시야:말도 마세요. 이건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마트료나:돈을 누구한테 맡기진 않았수? 아니시야:지금 자기 누이 마르파를 불러 오라는 걸 보니, 아마 돈 얘긴 것 같아요. 마트료나:그럴 테죠. 헌데 누구 딴 사람한테 벌써 돈을 준 건 아니겠죠? 아니시야:그건 아녜요. 내가 독수리처럼 지키고 있으니까. 마트료나:그래, 돈은 지금 어디 있수? 아니시야:말을 해야 알죠. 아무래도 짐작조차 할 수 없군요. 자꾸 장소를 바꿔가며 감춰두는 모양인데... 게다가 나한테 아쿨리나가 붙어 있으니 더욱 곤란해요. 바보는 바보지만 그래도 줄곧 날 감시하고 있거든요. 아아, 어떡하면 좋을지! 나도 이젠 지쳐 버렸어요. 마트료나:이봐요. 아니시야, 만약에 그 돈이 딴 사람 손에 넘어가는 날엔, 한 평생 눈물로 지내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해요. 그야말로 알몸뚱이가 되어 한길로 쫓겨날거란 말예요. 십 년을 하루같이 보기 싫은 영감쟁이와 사노라고 죽을 고생을 하고 나서, 결국은 과부가 되어 동냥 주머니를 차고 나서야 한다면 그처럼 원통한 일이 또 어디 있겠수? 아니시야:아주머니,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그렇잖아도 속이 상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의논할 사람도 없고... 니키타한테 말해 봤지만, 겁부터 집어먹고 이 일에는 아예 참견하려 들지도 않는군요. 겨우 어제서야 나한테 돈은 마루 밑에 있다고 한마디 했을 뿐예요. 마트료나:그래서 찾아봤나요? 아니시야:찾기는 어떻게 찾아요! 영감이 거기 있는데. 내가 보기엔 영감은 돈을 감추었다가는 다시 꺼내어 자기 몸에 지니고, 그러다가 또 감추고 그러는 것 같아요. 마트료나:하지만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한 번 잘못 했다가는 한평생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테니까요. (귓속말로) 헌데 그때 준 그 약을 먹여 보았나요? 아니시야:오오! (대답하려다가 이웃 여자가 나타난 것을 보고 입을 다문다) 이웃 여자:(집 앞을 지나가다가 집 안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아니시야를 보고) 이봐요, 아니시야! 아니시야! 댁의 영감님이 고함을 지르고 있군요. 아니시야:그이는 기침하는 소리가 그렇답니다. 이젠 병세가 아주 기울어졌어요. 이웃 여자:(마트료나에게 다가가며)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어디서 오는 길이죠? 마트료나:집에서 오는 길이라우. 아들놈을 좀 보려구요. 속옷도 갖다 줄 겸해서 왔지요. 어미 마음엔 제자식밖엔 없답니다. 이웃 여자:그야 당연하죠 뭐. (아니시야에게) 난 아마을 바랄까 했는데, 아직 때가 안 된 모양이죠? 아무도 시작하지 않는 걸 보니. 아니시야:그렇게 서두를 거야 없지 않수. 마트료나:그보다도 주인 어른께선 성찬을 받으셨나요? 아니시야:아직 받진 않았지만, 어제 신부님이 다녀갔어요. 이웃 여자:나도 어제 좀 들여다봤지만, 그래 가지고 용케 살아 계시는구나 싶더군요. 뼈만 앙상하게 남은 게, 아주 말이 아니더라니까요. (마트료나를 보며) 요전엔 말예요, 아주머니, 정말로 숨이 넘어가는 것 같아서 우린 아주 돌아가시는 줄 알았지 뭡니까? 그래서 모두들 울면서 시신을 씻길 물까지 준비했었다니까요. 아니시야:그러다가 다시 살아나서는 또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지 않겠어요! 마트료나:그래 아직 종부성사는 안 받았나요? 아니시야:모두들 받게 하라고 권하고 있으니, 내일이라도 신부님을 모셔올 생각이에요. 이웃 여자:아아, 아니시야, 당신도 어지간히 애를 먹는군요. 앓는 사람보다 병구완하는 사람이 더 죽을 지경이라는 말도 있는데. 아니시야:애를 먹고 말고가 있나요. 하지만 이제는 그저 하루 빨리... 이웃 여자:그야 그렇겠죠. 벌써 일 년 동안을 오늘 내일하고 있으니, 어디 당신도 그게 수월한 일인가요. 두 손을 묶인 거나 마찬가지지. 마트료나:하지만 과부 신세도 처량하죠. 젊을 때는 그래도 괜찮지만, 늙어 버리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지 뭡니까? 늙으면 정말 서글퍼져요. 나를 보시구료. 그리 먼 길도 아닌데 이렇게 다리가 빳빳해지는군요. 그런데 우리 아들놈은 어디 있죠? 아니시야:밭갈이 하러 나갔어요. 자, 어서 앉아요. 차라도 끓여낼 테니. 마트료나:(앉는다) 아아, 정말 고단하군! 아무튼 종부성사는 꼭 받게 해야 합니다. 영혼이 편안해진다고 하니까. 아니시야:내일은 꼭 신부님을 불러올 생각이에요. 마트료나:잘 생각하셨수. 그런데 우리 마을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어요. 이웃 여자:어쩌자고 봄에 혼례를 올리죠? 마트료나:'가난뱅이가 혼례를 올리면 밤이 짧다' 는 속담이 옳은 말이더군요. 세묜 마트베예비치가 마리나를 얻었답니다. 아니시야:마리나도 결국은 제 짝을 만났는가 보군요! 이웃 여자:그 사람은 홀아비예요. 아마 아이들도 있을 걸요. 마트료나:넷이나 있지요. 흠 없는 처녀가 어디 그런 자리로 가겠답니까! 그래서 마리나를 얻기로 한 거요. 그 여자도 만족이죠, 뭐. 술을 마시려다 술잔이 단단하질 못해 쏟아뜨렸다는 말이 있는데, 마리나도 바로 그런 여자거든요. 이웃 여자:그래요? 마리나한테 그런 소문이 있었나요? 헌데 남편은 살림이 넉넉한 사람인가요? 마트료나:뭐, 살만은 하죠. 이웃 여자:하긴 그렇지. 아이들까지 있는데 살림조차 넉넉하지 못하면 누가 가겠어요... 우리 마을의 미하일로 역시... 사내 목소리:여보, 마누라. 어디 가서 뭘하는 거야! 빨리 와서 소를 몰아넣으라고! 이웃 여자, 퇴장한다. 제7장 마트료나:(이웃 여자가 가버릴 때까지는 같은 어조로 말을 계속한다) 이젠 그 계집도 시집을 갔으니, 우리 바보 영감도 니키타 얘긴 꺼내지 않게 되었지요. (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소곤거린다) 가버렸군! 그래, 그 약을 차에 타서 먹였소? 아니시야:그 얘긴 제발 그만둬요. 차라리 저절로 죽어 버렸으면 좋으련만. 약을 먹었는데도 죽지를 않으니 공연히 죄만 지었지 뭡니까? 아아, 어쩌면 좋담! 왜 아주머닌 나한테 그런 약을 주었죠? 마트료나:그 약이라뇨? 그건 잠 오는 약인데 나쁠 건 하나도 없잖아요? 그건 조금도 몸에 해롭지 않아요. 아니시야:(한숨을 쉬며) 알아요, 그렇지만 무서운 걸 어떡하죠. 나도 이젠 저 영감이라면 지긋지긋해요. 마트료나:그래, 약은 여러 번 먹였수? 아니시야:두 번 주었어요. 마트료나:눈치 챈 것 같진 않던가요? 아니시야:내가 직접 혀끝을 대보니까 좀 쓴 것 같았어요. 영감도 차를 마시더니,'나는 이젠 차맛까지 써졌군'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나는 앓는 사람 입엔 뭐든지 다 쓴 법이라고 말했죠. 하지만 자꾸 무서운 생각이 들어 혼났어요. 마트료나:생각을 하지 마세요. 생각하면 할수록 좋지 않으니까. 아니시야:아주머니가 그런 것만 내게 주지 않았어도 그런 무서운 죄를 짓지는 않았을 텐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는군요. 무엇 때문에 그런 걸 나한테 주었죠? 마트료나: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오, 하나님 맙소사. 이젠 아주 나한테 뒤집어 씌우려는군요! 이거 봐요. 혹시 일이 잘못 되더라도 나하곤 상관없어요. 나는 하나도 모르는 일이니까.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맹세하겠어요. 댁이 말하는 그런 가루약 같은 건 준 일도 없거니와 본 일도 없다고. 그 따위 가루약이 있는지 없는지 들은 일조차 없다고 말예요. 한 번 생각해보면 알 게 아닙니까! 며칠 전에도 우린 댁의 얘기를 한 일이 있어요. 가엾게도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다고. 의붓딸은 바보천치이고, 남편이라는 건 송장이나 다름없는 노인이니, 그런 처지를 당하면 무슨 짓이든 못할까 보냐고 말예요. 아니시야:하긴 나도 그렇지 않다고 우길 생각은 없어요. 사실이지 나 같은 처지에 있으면 그보다 더한 짓이라도 할 수 있어요. 차라리 목을 매 자살해 버리든가, 영감의 목을 졸라 죽여 버리든가 하고 싶을 지경이죠. 그래, 이게 사람 사는 거라 할 수 있느냐 말예요! 마트료나:누가 아니래요! 그러니까 멍청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거죠. 어떻게 해서든 빨리 돈을 찾아내야 하고 영감님에겐 그것을 탄 차를 먹여야 한단 말예요. 아니시야:아아, 어쩌면 좋아! 나는 더 이상 할 수가 없어. 자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그냥 자기가 죽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난 더 이상 죄를 짓고 싶지 않아... 마트료나:(성을 내며) 그럼, 영감님이 돈 감춘 곳을 끝내 말하지 않으면 어떡하죠? 그냥 저승으로 가버리면 어떡하죠? 그래서 아무도 그 돈을 받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느냐 말예요? 그게 과연 잘하는 일일까요? 그렇게 큰 돈이 그냥 헛되게 사라져 버려도 좋을까요? 그건 죄가 안되느냐 말예요? 지금 영감님한테 무슨 꿍꿍이 속이 있을 거예요. 그걸 그저 멍청히 바라보고만 있겠다는 건가요? 아니시야:난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저 영감 때문에 십 년은 감수했을 거예요. 마트료나:알고 모르고가 어디 있어요, 뻔한 일을 가지고! 지금 잘못하면 한평생 후회하게 된다는 걸 몰라서 그러세요? 가만 놔두면 그 돈은 시누이한테 넘어가고 말아요. 아니시야:아, 참 시누이를 불러 오라고 했지. 가봐야겠어요. 마트료나:거기 가는 건 급하지 않아요. 우선 차를 끓여서 영감님한테 먹이고, 둘이서 함께 돈을 찾읍시다. 아마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아니시야:아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좋으련만! 마트료나:그렇다고 그냥 앉아서 보고만 있겠다는 거유? 눈 앞에 있는 돈을 놓쳐 버리면 어떡하느냐 말예요? 어서 잽싸게 움직여야죠. 아니시야:그럼, 가서 치를 끓이겠어요. 마트료나:어서 가세요.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잘해야 합니다. 아, 참. 마트료나:한 가지 말해 둬야 할 게 있어요. 이 일에 대해선 니키타한테 말하지 마세요. 그애는 순진해 빠져서, 가루약 얘길 들으면 펄쩍 뛸 테니까요. 원래 마음이 약해서 닭 한 마리 제 손으로 잡지 못하는 아이거든요. 그러니 그애한테 말하지 말아요. 그애가 이 일을 알았다가는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흠칫 놀라서 말을 끊는다. 문간에 어느새 표트르가 나타난다) 제8장 표트르, 벽에 몸을 의지하며 현관 앞 층계 위로 천천히 나온다. 그리고 약한 소리로 부른다. 표트르:아무리 불러도 오지를 않으니,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아쿨리나, 아니시야, 거기 누구 없나? (의자에 주저앉는다) 아니시야:(구석에서 나오며) 뭣하러 기어 나왔어요? 가만히 누워 있지 않고. 표트르:그애는 마르파한테 갔나, 안 갔나? 아아, 이렇게 괴로울 바에야 차라리 빨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 아니시야:그앤 지금 바빠요. 개울에 빨래하러 보냈어요. 내가 일 끝내고 갔다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표트르:그럼, 아뉴트카를 보내주구료. 그앤 어디 있지? 아이구, 곧 죽을 것 같다! 아니시야:그래서 나도 그앨 부르러 보냈어요. 표트르:아아, 그년은 어딜 갔어? 아니시야:어디 갔는지 알 게 뭐유. 빌어먹을 년 같으니! 표트르:아이구, 죽겠다. 뱃속이 타는 것 같아. 송곳 끝으로 긁어대는 것 같다니까. 어쩌자고 너희들은 나를 개새끼처럼 내버려 두지?... 물 한 모금 먹여주는 사람 없으니...아아... 아뉴트카를 빨리 불러와. 아니시야:저기 오네요. 얘, 아뉴트카, 아버지가 부른다. 제9장 아뉴트카, 달려 들어온다. 아니시야는 구석으로 물러난다. 표트르:얘, 너... 얼른... 아이구... 마르파 고모한테 가서, 아버지가 부른다고 곧 오라고 해라. 아뉴트카:갔다 올께요. 표트르:잠깐만! 급히 와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금방 죽을 것 같다고... 아이구... 아뉴트카:그렇지만 머릿수건 좀 갖고 나오겠어요. 곧 갈께요. (달려간다) 제10장 마트료나:(눈짓을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죠? 어서 집 안에 들어가서 샅샅이 찾아보세요. 개가 벼룩을 찾듯이 찾아보란 말예요. 난 지금 영감님의 몸을 뒤져 볼 테니. 아니시야:(마트료나에게) 알았어요. 아주머니가 옆에 붙어 있으니까 마음이 한결 든든한 것 같아요. (층계로 다가가서 표트르에게) 차라도 한 잔 끓여 낼까요? 마트료나 아주머니가 아들을 만나러 왔는데, 당신도 함께 마시도록 하세요. 표트르:그럼, 어서 끓이지 그래. 아니시야, 현관 안으로 퇴장한다. 제11장 마트료나, 층계 앞으로 다가간다. 표트르:오랫만이오. 마트료나:안녕하세요, 주인 어른!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으신 것 같군요... 우리 집 영감도 무척 걱정을 하면서, 나더러 가서 문병을 하고 오라고 해서 이렇게 왔습니다요. 자기 대신 인사를 드리라고요. (또 한 번 절을 한다) 표트르:이젠 죽게 되었어요. 마트료나:병이란 역시 사람을 못 쓰게 만드는가 보죠. 어찌나 얼굴이 야위셨는지 보기에도 가슴이 아플 지경이군요. 병이란 정말 사람의 모습까지 변하게 하는가 봅니다. 표트르:죽을 때가 되었어요. 마트료나: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맡길 수밖에 없겠죠. 성찬도 받으셨다니, 이번에 종부성사를 받으셔야지. 다행히 부인께서 똑똑하시니까 장례식도 훌륭히 치르실 겁니다. 그리고 우리 아들놈도 무슨 일이든 도와드릴 테니까요. 표트르:집안일을 맡아서 돌볼 사람이 있어야지! 마누라는 착실치가 못한 여자라서 바보짓만 하고 있어요. 난 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고 말고... 그리고 딸년은 좀 멍청한 데다가 아직 나이가 어리고... 내가 애써서 이만큼이나마 재산을 만들었건만, 이걸 지켜 나갈 사람이 없단 말이오. 난 그게 유감이라는 거요.(훌쩍거리며 운다) 마트료나:하지만 돈이나 재산은 잘 간수할 수 있겠죠 뭐... 표트르:(현관 안을 향해 아니시야에게) 아뉴트카는 갔나? 마트료나:(현관 안에서) 아까 갔어요. 자, 이젠 집 안으로 들어와요. 내가 부축해 줄 테니. 표트르:아니야,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여기 앉아 있겠어. 집 안은 숨이 막혀서... 가슴이 타버리는 것 같군... 차라리 빨리 죽기라도 했으면... 마트료나:하나님이 영혼을 뽑아 내주시기 전엔 영혼이 제멋대로 떠나갈 수는 없으니까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린 거예요. 그러니 꼭 죽는다고 해도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죠. 죽는 줄 알았던 사람이 일어나는 수도 얼마든지 있거든요. 마을의 농부 하나도 거의 다 죽게 되었었는데... 표트르:아니, 난 오늘 죽을 거라는 예감이 들어요. 틀림없을 거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는다) 제12장 아니시야:(등장) 아니, 뭘 하는 거예요? 들어가겠어요, 안 들어가겠어요? 당신 기다리다 눈 빠지겠수, 여보! 아니, 여보! 마트료나:(멀찌감치 물러나서 손가락으로 아니시야를 부르고 나서, 소리내지 않고 입모양으로 묻는다) 어떻게 됐어요? 아니시야:(층계를 내려가서 마트료나에게 다가간다) 없어요. 마트료나:샅샅이 잘 찾아봤어요? 마루 밑에도 없구요? 아니시야:마루 밑에도 없어요. 어쩌면 광 속인지도 모르겠어요. 어제 그리로 기어들어갔었거든요. 마트료나:더 찾아봐요. 혓바닥으로 핥듯이 구석구석 다 찾아봐야 해요. 내가 보기엔 오늘 안으로 죽을 것 같수. 손톱도 자줏빛이 되었고, 얼굴도 흑색이 되었더군요. 그래, 차는 끓였수? 아니시야:지금 막 끓고 있어요. 제13장 니키타, 대문 쪽에서 등장. 표트르를 미처 보지 못한 모양이다. 니키타:(어머니에게) 어머니, 오래간만이군요. 집에는 다들 무고하신가요? 마트료나:하나님 덕분에 다 무고하고, 밥도 하루 세 끼씩 먹고 있다. 니키타:그래, 주인 어른은 어때요? 마트료나:쉿! 저기 앉아 있어. (현관 쪽을 가리킨다) 니키타:저기 앉아 있으면 앉아 있었지, 그게 어쨌다는 거죠? 표트르:(눈을 뜬다. 그제서야 니키타가 온 걸 알고) 니키타, 이봐, 니키타! 이리 좀 오너라! 니키타, 다가간다. 아니시야는 마트료나와 서로 소곤거린다. 표트르: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느냐? 니키타:다 갈았어요. 표트르:다리 건너에 있는 기다란 밭도 갈았어? 니키타:거긴 너무 멀어서요. 표트르:멀다구? 집에선 더 멀지. 나간 김에 아주 그 밭까지 갈고 오지 않고? 아니시야, 앞으로 나서지 않고 귀를 기울인다. 마트료나:(니키타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얘야, 어째서 몸을 아끼려 드느냐? 주인 어른께선 몸이 불편하셔서 너만 믿고 계시니까, 친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건 내가 언제나 너한테 하는 말 아니더냐? 표트르:그리고 또... 아이구... 움에서 감자를 꺼내서 안식구들한테 고르라고 해라. 아니시야:(혼자 소리로) 흥, 나까지 나가라고 하는구나. 또 모두 쫓으려는 거야. 지금 돈을 몸에 지니고 있으니까 그걸 어디다 감추려는 게 분명해. 표트르: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구!... 이제 곧 심어야 할 텐데 다 잊어버린다. 아아, 정말 못 참겠다!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마트료나:(층계를 달려 올라가 표트르를 부축한다) 집 안으로 모실까요? 표트르:좀 부축해 주시오. (걸음을 멈추고) 니키타! 니키타:(퉁명스럽게) 또 뭡니까? 표트르:이제 다시는 너를 못 볼 거야... 오늘은 아무래도 죽을 것 같다... 나를 용서해 다오. 내가 너한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모두 용서해 다오... 말로나 행동으로 너한테 죄지은 게 있다면... 아니, 여러 가지 잘못한 일이 있을 거야. 용서해 다오. 니키타:용서하고 말고가 있겠어요! 오히려 우리가 용서를 빌어야죠. 마트료나:(니키타를 향해 짐짓 타이르듯이) 얘야, 깊이 명심해야 한다. 표트르:제발 용서해 다오. (갑자기 흐느껴 운다) 니키타:(코를 훌쩍거리며)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겁니다, 주인님. 그렇지만 난 주인님한테서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보다도 내가 용서를 빌어야 할 거예요. 오히려 내가 주인님한테 나쁜 짓을 했는지도 모르니까요. (니키타 감정이 격해지며 소리내어 운다. 표트르 역시 흐느껴 울며 퇴장. 마트료나가 그를 부축한다) 제14장 아니시야:아아, 이 일을 어쩌면 좋아! 반드시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런 말을 했을 거야. 아무래도 무슨 눈치를 챈 것 같아. (니키타한테 다가가서) 마루 밑에 돈이 있다고 해서 찾아봤는데, 거긴 아무것도 없어. 니키타:(대답을 하지 않고 울기만 한다. 혼잣말로) 나는 주인 어른한테 억울한 일이라곤 한 번도 당해보지 않았어. 언제나 나한테 좋게 대해 주셨지. 그런데도 나는 그런 짓을 하다니! 아니시야:그런 소린 그만둬. 그보다도 돈은 어디 있지? 니키타:(화를 내며) 내가 그런 거 알게 뭐야! 자기가 직접 찾아보면 될 게 아냐? 아니시야:언제부터 그렇게 인정이 많아졌지? 니키타:난 주인 어른이 가엾어! 가엾어서 죽을 지경이야! 아아, 울면서 그렇게 말할 때 나는 정말... 아니시야:어디서 갑자기 그런 동정심이 생겼지. 정말로 동정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 거야! 저 영감쟁이는 너를 개보다도 못하게 생각했어. 조금 전에도 너를 쫓아 버리라고 했단 말야. 그보다도 네가 동정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야, 나! 니키타:뭣 때문에 동정해야 하지? 아니시야:돈을 감춘 채로 죽어버리면 난 어떡하지? 니키타:아마 감추지는 않았을 거야... 아니시야:니키타! 영감쟁이가 지금 자기 누이를 불렀단 말야. 누이한테 돈을 맡기려는 게 틀림없어. 그렇게 되면 우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지? 나는 이 집에서 쫓겨나고 말 거야! 날 도와줄 사람은 너밖에 없어. 어제 영감이 광에 들어가는 걸 보았다고 했지? 니키타:난 주인 어른이 거기서 나오는 걸 보았을 뿐이지 어디다 감췄는지는 몰라. 아니시야:아아, 어쩌면 좋아? 그래도 거기 가서 찾아봐야지. 제15장 마트료나, 집에서 나와 아니시야와 니키타한테로 다가간다. 마트료나:(작은 소리로) 거긴 가보나마나예요. 돈은 영감님이 몸에 지니고 있으니까. 내가 몸을 더듬어 보았더니, 옷 속에 지니고 있더라니까. 아니시야:그래요? 마트료나:지금 우물쭈물하다가는 나중에 무슨 짓을 해봐야 소용없어요. 누이가 오면 그 땐 마지막이에요. 아니시야:이제 곧 올 거예요. 오면 돈을 누이한테 줄 거야. 아아, 정말 어쩌면 좋아? 마트료나:어쩌면 좋으냐구요? 잘 들어봐요. 차가 끓고 있으니 얼른 들어가서 영감님한테 먹이세요. (속삭인다) 그 가루약을 한 봉지 다 타 가지고 먹여야 해요. 이렇게 지껄이고만 있을 때가 아니란 말예요. 아니시야:난 무서워요. 마트료나:그런 소리는 하지도 말도, 어서 빨리 움직이세요. 난 만일의 경우를 위해 영감님의 누이가 오는 걸 지키고 있을 테니, 단단히 정신을 차려서 실수하지 않도록 하세요. 그리고 돈을 꺼내서 곧 이리로 가져오셔야 해요. 니키타한테 맡기면 되니까. 아니시야:아아, 어떻게 손을 대나?... 그리고 또... (망설이며 갈등하는 빛이 역력하다) 마트료나:그런 소린 하지 말고, 그저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요. 얘야, 니키타! 니키타:왜 그래요? 마트료나:넌 여기 앉아서 좀 기다리고 있거라.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네가 필요할 테니까. 니키타:(한 손을 내저으며)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거예요? 이러다간 나까지 말려들어가겠어. 어서 맘대로들 하라지. 난 가서 감자나 꺼낼 테니까. 마트료나:(아들의 손을 붙잡으며) 니키타! 가만 좀 있으라니까! 제16장 아니시야:어떻게 됐니? 아뉴트카:고모는 채소밭에 있어요. 곧 오겠대요. 아니시야:(마트료나에게) 시누이가 오면 어떡하죠? 마트료나:아직 늦지 않았으니, 내가 하라는 대로 어서 하세요. 아니시야:난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라니까요. 아뉴트카! 너 얼른 외양간에 가봐라. 송아지가 달아났는지 모르겠다. 아뉴트카, 퇴장. 아니시야:아무래도 제대로 해낼 것 같지가 않아요. (울상을 짓는다) 마트료나:(단호하게) 빨리 가봐요. 차는 아까부터 끓고 있다면서, 뭘 우물쭈물하고 있어요. 아니시야:아아! 어떻게 하지? (퇴장) 제17장 마트료나:(아들 옆으로 다가가면서) 얘, 니키타. (니키타와 나란히 앉아 타이르듯이) 네 자신의 일도 잘 생각해봐야 한다. 될 대로 되겠지 해선 안 돼. 니키타:무슨 일인데요? 마트료나:네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하는 것 말이다. 니키타:어떻게 살아 가다뇨? 남들이 사는 것처럼 나도 살면 그만이죠. 마트료나:주인 영감은 오늘 중으로 죽을 거야. 니키타:죽으면 천당이나 가라죠 뭐.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죠? 마트료나:(말을 하면서도 연방 현관 쪽을 돌아다본다) 얘야,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하는 법이야. 그러자면 여러 가지로 머리를 서야 하는 거야. 넌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네 일 때문에 발바닥이 닳아서 떨어지도록 싸돌아다니며 애를 썼어. 알겠니? 이 어미를 넌 잊으면 안된다. 니키타: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애쓰고 돌아다녔죠? 마트료나:너 때문이지, 누구 때문이겠니. 이건 네 일생을 결정하는 문제거든. 미리 손을 쓰지 않으면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간단 말이다. 넌 이반 모세이치라는 사람 알지? 나와 아주 가까이 지내는 똑똑한 사람이야. 나도 그이를 위해 한 번 수고를 한 적이 있지. 그이한테 가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다가 기회를 보아 나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이반 모세이치, 이런 일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다름이 아니라, 어느 홀아비가 새마누라를 얻었는데 딸이 둘 있어요. 하나는 전처 소생이고, 또 하나는 그 후처의 소생이지요. 만약에 남편이 죽으면 과부가 된 여자한테 다른 남자가 남편이 되어 들어갈 수 있는지요? 그리고 그 남자가 두 딸을 시집 보내고 그 집의 주인이 될 수 있는지요?' 라고 물어 보았더니, '그렇게 할 수 있기는 하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예요. 돈만 있으면야 세상에 되지 않는 일이 없지만, 돈이 없으면 아예 단념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라고 하지 않겠니? 니키타:(코웃음치며) 그야 들으나마나한 소리죠. 뭐든지 돈만 내놓으라는 세상이니까. 돈 싫어하는 사람 어디 있나요. 마트료나:그래서 말이다, 나는 그이한테 죄다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그이는 '무엇보다 먼저 댁의 아들을 그 마을의 호적에 넣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돈이 들어요. 노인네들한테 한턱 내야 하니까요. 그렇게 한턱 잘내고 나면 모두들 잘 도와줄 겁니다. 아무튼 머리를 잘 써야 합니다' 라고 하더라. 이것 좀 봐라. (보따리 속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낸다) 이걸 써 주더라. 어디 읽어봐라. 너는 글자를 아니까. (니키타가 소리내어 읽고, 마트료나는 귀기울여 듣는다) 니키타:이건 신청서예요. 머리를 쓰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거예요. 마트료나:그러면서 이반 모세이치는 이렇게 말하더라. '무엇보다도 영감님의 돈을 놓치지 말아야 해요. 그 후처라는 여자가 돈을 놓쳐 버리면 새 남편이고 뭐고 얻기는 틀린 일입니다. 돈 없이는 무슨 일이건 되는 일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니키타, 지금이 가장 중요한 고비란 말이다. 니키타:내가 무슨 상관이에요! 돈은 그 여자 것이니까 그 여자가 알아서 하겠죠. 마트료나:얘, 그게 무슨 소리냐! 여편네라는 건 속이 막혀서 아무것도 못해. 설령 그 여자가 돈을 손에 쥔다 하더라도 제 힘으론 아무것도 못할 거야. 여편네가 생각을 하면 얼마나 하겠니? 하지만 넌 어쨌든 사내가 아니냐? 역시 무슨 일이건 계집보다는 사내가 영리하게 처리하는 법이야. 니키타:도대체 여자들 생각이란 하나도 이치에 맞는 게 없어요. 마트료나:뭐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거냐? 네가 돈만 손에 거머쥐어 봐라. 여자는 결국 네 손 안에 들어오고 마는 거야. 혹시 뭐라고 투덜거리기라도 하면, 그 때는 주먹다짐이라도 할 수가 있거든. 니키타: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군. 난 가보겠어요. 제18장 아니시야, 파랗게 질린 얼굴로 집에서 달려나와 마트료나한테 간다. 아니시야:역시 몸에 지니고 있더군요. 이것 보세요. (앞치마 밑으로 보여준다) 마트료나:그 돈은 니키타한테 맡기세요. 저애가 잘 간수할 테니까. 얘, 니키타! 네가 받아서 어디다 잘 간수해라. 니키타:그럼, 이리 줘. 아니시야:아아, 어쩌면 좋지! 그보다는 차라리 내 손으로 어디다가... (대문 쪽으로 간다) 마트료나:(아니시야의 손을 붙잡으며) 아니, 어딜 가는 거유? 남이 눈치채면 어떡하려구, 이제 곧 시누이가 올텐데, 어서 저애한테 줘요! 저애가 알아서 할 거예요.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을까! 아니시야:(망설이듯 멈춰 선다) 아아, 어떡한다지? 니키타:뭘 그래, 어서 이리 줘요. 내가 잘 감춰 둘 테니. 아니시야:어디다 감출 거야? 니키타:왜 겁이 나나? (웃는다) 제19장 아쿨리나, 어느새 빨래한 속옷가지를 들고 등장한다. 아니시야:아아, 난 모르겠어! (돈을 준다) 니키타, 잘 해야 해! 니키타:그렇게 걱정할 건 없어. 나도 찾아낼 수 없을 만한 데다가 감출 테니. (퇴장) 제20장 아니시야:(겁 먹은 얼굴로 서 있다) 아이 무서워!... 마트료나:그래, 죽었나요? 아니시야:아마 죽었나 봐요. 내가 돈을 꺼내는 데도 꼼짝 안했으니까. 마트료나:그럼, 집 안으로 들어갑시다. 아, 저기 아쿨리나가 오는군. 아니시야:나는 큰 죄를 짓고 말었어요. 그런데도 니키타는 돈을 뺏아 가지고... 마트료나: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저기 시누이도 오는군요. 아니시야:(혼잣말로) 아아, 나는 니키타를 믿고 주었는데, 정말 괜찮을까 몰라. (퇴장) 제21장 마르파는 오른쪽에서, 아쿨리나는 왼쪽에서 등장. 마르파:(아쿨리나에게) 그래, 아버진 어떠냐? 아쿨리나야, 돌아가실 것 같더냐? 아쿨리나:(세탁물을 내려놓고) 내가 알 게 뭐예요. 난 개울에 가 있었는데요 뭐. 마르파:(마트료나를 가리키며) 저 사람은 누구냐? 마트료나:(마르파에게) 난 주예프 마을에 사는 니키타의 어멈이에요. 안녕하세요. 오라버님께서 병세가 대단하셔서 무척 걱정이 되시겠습니다요. 아까 이리로 나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빨리 누이를 불러 오너라, 난 이젠...' 아아, 벌써 돌아가신거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22장 아니시야:(비명을 지르며 집에서 달려나와 기둥에 매달려 통곡하기 시작한다) 아아, 아이구, 불쌍한 년을 혼자 남겨두고... 무정하게 눈을 감아버리다니... 아이구... 제23장 이웃 여자와 마트료나가 아니시야한테 달려가서 그녀를 부축해준다. 아쿨리나와 마르파는 집 안으로 들어간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 마을 사람들:(목소리만) 시체를 손질하게 할머니들을 불러와야지. 마트료나:(팔소매를 걷어 올린다) 솥에 더운 물이 있는가 몰라. 찻주전자엔 끓는 물이 있겠지. 어디 내가 나서 볼까. 제3막 표트르네 집, 겨울. 제2막으로부터 9개월 후. 아니시야,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있다. 아뉴트카, 페치카 위에 앉아 있다. 늙은 머슴 미트리치, 천천히 들어와서 외투를 벗는다. 제1장 미트리치:오오, 하나님,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아직 주인 양반은 돌아오지 않았나요? 아니시야:뭐라구요? 미트리치:니키타님은 아직도 시내에서 돌아오지 않았느냐구요. 아니시야:안 돌아왔어요. 미트리치:또 흥청거리고 있는 모양이군. 오오, 하나님! 아니시야:탈곡장은 치웠나요? 미트리치:예, 예, 말끔히 치웠어요. 다 치우고 짚을 덮어두었어요. 난 무슨 일이건 아무렇게나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오오, 하나님! 자비로우신 니콜라이님! (손에 박힌 못을 문지르며) 하지만 이젠 돌아올 때가 됐는데... 아니시야:(냉소적으로) 서둘러서 집에 돌아올 이유가 없쟎겠어요. 호주머니에 돈 있겠다, 계집애까지 데리고 갔겠다... 미트리치:돈을 지니고 있으면 아무래도 흥청거리게 마련이지. 헌데 아쿨리나는 뭣하러 시내에 들어갔죠? 아니시야:그년한테 영감이 직접 물어 보구료. 뭣하러 졸랑졸랑 따라 나섰는지. 미트리치:시내엔 대체 무엇하러 갔을까? 하긴 돈만 있으면 시내엔 없는 것이 없으니까. 오오, 하나님. 아뉴트카:엄마, 내가 들었는데요, '너한테 목도리를 사주마' 라고 아버지가 말했어요. 정말예요. ' 내 하나 사줄 테니, 네가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려무나' 라고 언니한테 말했다니까요. 언닌 아주 모양을 내고 갔어요. 빌로드 망토를 입고, 외국산 스카프를 쓰고... 아니시야:처녀의 부끄럼도 문턱까지란 말이 맞는군. 한걸음 문턱을 넘어서기만 하면, 수치도 뭐고 까맣게 잊어버린다니까. 뻔뻔스런 년 같으니! 미트리치:뭐 부끄러워할 것도 없지 않소? 돈이 있으니 흥청거리며 노는 건데. 오오, 하나님! 아직 저녁 먹을 때가 안됐나? (아니시야, 잠자코 있다) 그럼, 몸이나 좀 녹일까. (페치카 위로 기어 올라간다) 오오, 하나님, 성모 마리아님. 고마우신 니콜라이님! 제2장 이웃 여자:(등장) 바깥 어른은 아직 안 돌아왔나 보죠? 아니시야:안 돌아왔어요. 이웃 여자: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혹시 마을 술집에 들른 건 아닐까요? 내 동생 표클라가 그러는데, 술집 앞에 시내에서 돌아오는 썰매들이 여러 대 서 있더라더군요. 아니시야:아뉴트카! 얘, 아뉴트카! 아뉴트카:왜요? 아니시야:너 얼른 술집에 달려가서, 아버지가 취해 가지고 거기 들르지 않았나 좀 보고 오너라. 아뉴트카:(페치카에서 뛰어내려 외투를 입는다) 네. 곧 갔다 올께요. 이웃 여자:아쿨리나도 데리고 갔나요? 아니시야:그년 아니면 시내에 갈 일이 있나요! 모든 게 그년 때문이죠. 뭐 은행에서 이자가 나왔다나요. 하지만 그건 핑계고, 그년이 니키타를 꾀어 낸 거예요. 이웃 여자:(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정말 곤란한 일이군요. 침묵. 아뉴트카:(문 밖으로 나가다가) 거기 있으면 뭐라고 말할까요? 아니시야:거기 있는지 없는지 그냥 보고만 와. 아뉴트카:그럼, 내 얼른 뛰어갔다 올게. (퇴장) 제3장 오랜 침묵. 미트리치:(신음하듯) 오오, 하나님. 자비로운 니콜라이님! 이웃 여자:아이구, 깜짝이야! 저건 누구죠? 아니시야:우리집 머슴 미트리치예요. 이웃 여자:무슨 목소리가 그 모양이람! 난 깜박 잊고 있었지. 아 참, 아쿨리나한테 혼담이 있다고 하던데 어떻게 됐죠? 아니시야:(베틀에서 내려와 탁자 앞에 앉는다) 제들로프 마을 사람한테서 얘기가 있었죠. 하지만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얘기가 좀 있다가 그 후론 감감 소식이군요. 하긴 그런 년을 좋아서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이웃 여자:주예프 마을의 리주노프네 아들하고도 얘기가 있었다던데? 아니시야:얘기가 있었지만 역시 틀어지고 말았어요. 니키타가 상대도 하지 않으려 들거든요. 이웃 여자:그래도 이젠 빨리 출가를 시켜야 할 텐데. 아니시야:누가 아니랍니까? 어떻게 해서든 빨리 집에서 쫓아내야겠는데 그게 뜻대로 되질 않는군요. 첫째 니키타가 말을 안 듣는 데다가, 그년 역시 마찬가지거든요. 아직도 그 지지리 못난 계집애를 놓아 주기가 싫은가 보죠! 이웃 여자:원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겠어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그애한텐 어쨌든 아버지나 다름 없는 사람 아니냐 말예요. 아니시야:말도 마세요, 이젠 둘이서 짜고 날 꼼짝도 못하게 하는군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무턱대고 니키타를 남편으로 맞아들인 내가 바보였죠. 난 꿈에도 몰랐었지만, 둘은 벌써 전부터 눈이 맞았던 거예요. 이웃 여자:그게. 글쎄,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지 않겠어요! 요즘은 둘이서 내 눈을 속이기 시작했단 말예요. 난 이젠 사는 게 지겨워졌어요! 아아, 내가 어쩌자고 그런 사내한테 마음을 주었을까! 이웃 여자: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하면 뭘해요! 아니시야:내가 니키타한테 이런 꼴을 당하다니 정말 분하고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이웃 여자:게다가 요즘은 손찌검까지 한다면서요? 아니시야:글쎄, 그렇다니까요. 전에는 술이 취해도 아주 얌전했고, 간혹 툭툭 건드리는 일은 있어도 역시 나를 사랑해 주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만 뭣해도 그냥 막 달려들어 발길질을 하려 들지 않겠어요! 엊그제도 머리채를 움켜쥐고 덤비는 걸 간신히 빠져 나왔어요. 그보다도 그년의 계집애는 뱀보다 더 흉악해요. 어쩌다 세상에 그런 흉악한 년이 태어났는지... 이웃 여자:정말 그러구 보니 댁도 몰라보게 얼굴이 수척했군요! 그래, 그 꼴을 보고 어떻게 참겠수! 거지나 다름없는 걸 주인으로 들어앉혀 살게 해주었는데, 이젠 도리어 이쪽을 깔보고 덤비다니, 그런 건 단단히 혼을 내주어 버릇을 고쳐 주어야 하는 건데. 아니시야:날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요. 하지만 내 마음을 내 맘대로 할 수 없으니 탈이죠. 죽은 영감님은 잔소린 심했지만, 그래도 나는 내 맘대로 살며 영감님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안 된단 말예요. 니키타의 얼굴만 보아도 기가 푹 죽고 말아요. 도무지 맞설 용기가 나지 않으니 어떡하죠. 그 사람 앞에 나가기만 하면 꼭 시궁창에 빠진 암탉처럼 되어 버린다니까요. 이웃 여자:그건 아무래도 무엇으로 댁을 홀린 것 같군요. 마트료나 할멈이 무당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틀림없이 그 할멈이 무엇으로 댁을 홀려 놓았을 거예요. 아니시야: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너무 원통하고 분해서 이놈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말겠다고 다짐하다가도, 그 얼굴만 보면 맥이 쑥 빠지고 말거든요. 이웃 여자:그러니까 틀림없이 무엇에 홀렸다는 거죠. 사람 하나 꼼짝 못하게 홀려 놓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라지 않아요? 댁의 얼굴을 보면, 정말 옛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게 됐어요! 아니시야:이젠 두 다리가 꼬창꼬창한 막대기처럼 말라 버렸지 뭡니까? 그런데 저 바보 아쿨리나 년을 보세요. 글쎄, 그 더러운 더벅머리 계집애가 요즘은 몰라보게 활짝 피지 않았느냐 마예요. 게다가 니키타가 옷이다 뭐다 몸치장을 시키는 바람에 마치 물위의 거품처럼 부풀어 올라 가지고 으스대는군요. 바본 바보지만 그 주제에 아주 엉뚱한 생각을 한답니다. '내가 이집의 안주인이야. 이 집도 내집이고, 아버진 그 사람을 내 남편으로 맞을 생각이었어' 라는 거예요. 표독하기란 도 얼마나 표독하구요! 화가 나면 지붕을 이은 밀짚까지 마구 들춰버린다니까요. 이웃 여자:아아, 댁의 신세도 정말, 기가 막히군요. 그래도 세상에선 돈 많은 부자라고 부러워하고 있답니다. 그러고보니, '황금 속에도 눈물은 흐른다' 는 속담이 맞기는 맞는가 보죠? 아니시야:부러워할 게 뭐가 있겠어요! 재산이라는 것도 얼마 안 가서 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텐데. 돈을 그야말로 물쓰듯 하는 판이니, 며칠이나 가겠어요? 이웃 여자:그렇지만 어쩌자고 그걸 그대로 내버려두는지 모르겠군요. 돈은 댁의 돈이 아니냔 말예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아니시야:요즘 세상에선 그런 것쯤 모두 대수롭게 여기지 않게 되었거든요. 이웃 여자:아아, 댁도 이젠 아주 기가 죽어 버렸군요! 아니시야:정말 기가 죽어 버렸어요. 그 사람한테 너무 혼이 나서,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아아, 불쌍한 내 신세야! 이웃 여자:가만! 누가 왔나 봐요. (귀를 기울인다. 문이 열리고 니키타의 아버지 아킴이 등장한다) 제4장 아킴:(성호를 긋고, 짚신의 흙을 턴 다음, 외투를 벗는다) 잘 있었느냐, 뭐 별고는 없는가? 아니시야:어서 오세요, 아버님. 집에서 바로 오시는 길인가요? 아킴:실은 아들한테 좀 들러 보려고, 좀 들러서 만나보고 가려고 왔지. 점심을 먹고 나서 떠났더니 이렇게 늦었구나. 도중에 눈이 많이 쌓여서 무척 애를 먹었지. 헌데 아들은 집에 있냐? 니키타는 집에 있어? 아니시야:없어요. 시내에 나가서 아직 안 돌아왔어요. 아킴:(걸상에 앉는다) 실은 그애한테 볼일이 있어서... 요전에도 잠깐 얘기했었지만, 좀 어려운 부탁이 있어서 왔어. 우리집의 말이 갑자기 죽어버려서... 아무렇게나 한 필 새로 사야 할 형편이라, 그래서 이렇게 또 찾아왔지. 아니시야:니키타도 그런 말 하더군요. 돌아오면 잘 의논해 보세요. (일어나서 페치카 쪽으로 간다) 이제 곧 돌아오겠죠. 우선 저녁이나 잡수세요. 미트리치, 이봐요. 미트리치, 내려와서 저녁 먹어요! 미트리치:오오, 하나님, 자비로운 니콜라이님! 아니시야:내려와서 저녁 먹으라니까! 이웃 여자:난 이젠 가보겠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퇴장) 제5장 미트리치:(페치카에서 내려오며) 그새 그만 잠이 들었었군. 오오,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이구, 어서 오시오, 아킴 아저씨! 아킴:아니, 자네 미트리치 아닌가! 그러고 보니 자넨 이 집에?... 미트리치:그렇소, 당신 아들 니키타 밑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수다. 아킴:그래? 내 아들 집에서 머슴살이를 한다고? 이것 참 뜻밖인걸! 미트리치:전엔 시내의 상인네 집에 있었는데, 다 마셔버리고 말았죠. 그래서 마을로 돌아왔지만 몸담을 곳도 없고 해서 이렇게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 중이죠. 아킴:그렇담 니키타는 대체 뭘 하고 있는가? 무슨 다른 일리라도 있어서 머슴을 둬야 할 형편이라도 되었다는 건가? 아니시야:다른 일이 있을 리가 있어요? 그래도 전에는 집안일을 직접 돌보더니, 요즘엔 그런 건 염두에도 없어요. 그래서 머슴을 두었죠. 미트리치:돈 있는데 구태여 고생스럽게 일할 건 없쟎겠소? 아킴:아니, 그건 좋지 않아, 그건 절대 좋지 않은 일이야.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건 타락이야. 아니시야:니키타는 아주 타락해 버렸어요. 정말 큰일이에요. 아킴:얼핏 생각하면 형편이 좋아진 것 같지만, 정말은 더 나빠진 거야. 돈이 있으면 사람은 타락하기 쉽거든. 미트리치:너무 잘 먹어 비계살이 붙으면 개도 미치기 마련이니까요. 배가 부르면 놀아나는 것도 당연하쟎소. 나도 전에 살림이 넉넉할 땐 잘 놀았지. 3주 동안 계속해서 흥청망청 술을 먹어댔으니까. 이상 마실 게 없어서 하는 수 없이 그만두었단 말예요. 이젠 아주 끊어 버렸수다. 그까짓 것 문제가 아니예요! 아킴:그래, 자네 마누란 지금 어디 있나? 미트리치:그 할망구는 자기한테 안성마춤인 데로 들어갔지요. 시내 음식점에 나가 있지요. 굉장한 미인이랍니다. 한쪽 눈은 애꾸인데다가 다른 한쪽 눈엔 시퍼렇게 멍이 들고, 얼굴이 한편으로 찌그러졌거든요. 그 주제에 한시도 술 냄새를 피우지 않을 때가 없으니, 정말 처치 곤란한 할망구예요. 아킴:어허, 거참 안 됐구먼! 미트리치:뭐, 퇴작한 병정의 마누라가 어딜 가겠소? 제격에 맞는 일자리를 찾았달 수밖에! (침묵) 아킴:(아니시야에게) 그럼, 니키타는 시내에 뭘 싣고 갔나? 이를테면 뭘 팔러 갔나? 아니시야:(식탁에 상보를 씌우고 식사를 내놓는다) 빈손으로 갔어요. 돈 받으러 갔거든요. 은행에 돈 찾으러 갔어요. 아킴:(식사를 하며) 그럼, 그 돈을 찾아서 어디 딴 데다가 돌리려는 건가? 아니시야:아뇨, 우린 그 돈엔 손대지 않아요. 그저 2, 3십 루블만 받아오려는 거죠. 받아와야 할 일이 생겨서요. 아킴:받아와야 할 일이 생겼다구? 어디다 쓰려구? 오늘도 받아오고 내일도 받아오고, 자꾸 그렇게 받아다 쓰다간 나중엔 한푼도 안 남게? 아킴:고스란히 그대로 있다니? 어떻게 그대로 있나? 자꾸 찾아다가 쓰는 데도 그대로 있어? 가령 밀가루를 광에다 넣어 두고 조금씩 꺼내다 먹었다고 한다면, 그래도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을까? 그건 아마 네가 속고 있는 걸 거야. 잘 알아보지 않으면 니키타 녀석한테 속아 넘어갈 테니 조심해야지. 어떻게 그대로 남아 있나? 자꾸 찾아다 쓰는 데, 정말 그대로 남아 있어? 아니시야:나도 잘 모르겠지만요, 그 때 이반 모세이치가 그렇게 하라고 일러주던 걸요. '돈은 은행에 맡기는 게 제일이다. 그렇게 하면, 없어질 염려도 없고 이자까지 받을 수 있다' 고 말예요. 미트리치:(식사를 끝낸다) 그건 옳은 말이오. 난 상인네 집에 있었기 때문에 잘 알아요. 거기서들은 모두 그렇게 하고 있더군요. 돈은 맡겨 놓고 자기는 페치카 위에 누워 있으면서 이자를 꼬박꼬박 받아먹거든요. 아킴:자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꼬박꼬박 받아먹는다니 도대체 누가 그 돈을 준단 말인가? 아니시야:은행에서 준다니까요! 미트리치:그건 하나도 이상할 게 없어요. 아니, 이런 건 여자가 설명할 수는 없는 거요.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설명할 테니, 이쪽을 보시오. 예를 들면, 당신한테 돈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나는 봄이 되었는데도 밭에 뿌릴 씨앗도 없고 나라에 바칠 돈도 없다고 하잔 말입니다. 그러면 나는 당신한테 가서, '붉은 지전(십 루블 지폐) 한 장만 꿔주시오. 가을에 추수를 하면 틀림없이 원금을 갚고 사례조로 일 루블을 드리리다' 이렇게 말한단 말이오. 그럼 당신은, 내가 말이건 소건 저당될 만한 걸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아니까, '꿔주긴 꿔주되 이 루블이나 삼 루블을 사례조로 다오. 그럭하지 않으면 못 주겠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쯤되면 나는 목에 굴레를 쓴 것이나 다름없는 형편이어서, '그렇담 할 수 없군요, 그렇게 하죠' 하고 십 루블을 꿀 수밖엔 없죠. 가을이 되면 나는 원금의 십 루블에 사례금 3루블을 얹어서 당신한테 갚는단 말이오. 아킴:그건 이를테면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이나 하는 짓이지. 어쨌든 그렇게 해서는 안 돼. 미트리치:안 되는지 좀더 얘길 들어 보시오. 가령 당신이 그런 짓을 했다고 합시다. 즉 그렇게 해서 내 피를 빨아먹었다고 하잔 말예요. 그런데 아니시야한테 남아 돌아가는 돈이 있지만, 그 돈을 어떻게 굴려야 할 지 몰라서, 당신한테 와서, ' 내 돈으로 무슨 벌이가 될 만한 일은 없을까요' 하고 의논한다 이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야 있구말구, 조금만 기다려라' 라고 대답합니다. 여름이 되어 내가 또 당신한테 찾아가서 '붉은 지전 한 장만 또 꿔주시오. 이자를 붙여서 갚을 테니' 하고 부탁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만약에 내 피가 아직도 짜낼 만큼 남아 있기만 하다면, 아니시야가 맡긴 돈을 나한테 꿔줄 게 아니냔 말예요. 하기는 거꾸로 들고 흔들어 봐야 코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다고 판단하면, 그때는 '어디 딴 데나 가보게' 하고 나를 쫓아 보내고는, 피를 짜낼 수 있을 만한 다른 사람한테 아니시야의 돈을 꿔주겠죠.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게 은행이란 말이오. 그렇게해서 돈을 자꾸 굴리지요. 누가 생각해냈는지 참 그럴듯한 생각이에요! 아킴:(흥분된 어조로) 그게 무슨 짓이야? 요컨대 더럽기 짝이 없는 짓이지! 하기는 농부들도 다 그런 짓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농부들은 그게 죄되는 짓이라는 건 알고 있어. 그건 하나님의 계율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어쨌든 그건 더러운 짓이야. 그런데 학문이 있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짓을... 미트리치:하지만 그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일이 바로 그거란 말이오. 제 힘으로 돈을 굴릴 수 없는 바보 녀석들과 여자들이 돈을 은행에 갖다 맡기지요. 그러면 은행에선 그 사람들 입에다 사탕 한 알쯤 넣어 주고는, 그 돈을 제 돈처럼 굴리며 세상 사람들의 생피를 빨아낸다 그겁니다. 참 희한한 장사도 다 있쟎습니까? 아킴:(탄식조로) 으음, 그러고 보니 돈이 없는 것도 탈이지만, 돈이 남아도는 건 더욱 나쁘군, 그래.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일을 하라고 명령하셨는데, 돈을 은행에 맡겨 놓고 빈둥빈둥 놀면서 공짜로 밥을 먹다니, 그건 나쁜 짓이야. 이를테면 하나님의 계율에 어긋나는 짓이지. 미트리치:계율에 어긋난다구요? 요즘 세상에 그런 걸 따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보다도 어떡하면 좀 더 짜낼 수 있을까, 그것만을 생각고 있는 판인데. 아킴:(탄식하며) 하긴 세상이 이제는 그렇게 되어 버린 것 같아. 변소와 다를 게 없어 내가 시내에서 본 변소와 똑같다니까? 겉은 번드르르하게 무슨 요리집처럼 훌륭히 꾸며 놓고 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아무 소용도 없지. 요컨대 모두들 하나님을 잊어버린 거야. 하나님을 잊지 않고서야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어어, 많이 먹었군. (식탁에서 물러 앉는다. 미트리치는 페치카 위로 올라간다) 아니시야:(그릇을 한쪽으로 치우고 자기도 식사를 한다.) 이럴 때 아버님이라도 옆에서 좀 타일러 주시면 좋으련만, 부끄러워서 차마 말씀드릴 수도 없고... 아킴:뭐라고? 아니시야:아니, 혼자 소리를 한 것뿐예요. 제6장 아뉴트카, 등장. 아킴:오호, 아뉴트카냐? 언제나 부지런히 일하고 있구나! 밖은 꽤 춥지? 아뉴트카:굉장히 추워요. 안녕하셔요, 할아버지! 아니시야:그래, 거기 있더냐? 아뉴트카:없었어요. 안드리얀이 시내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렸다는데요. 그 사람 말이, 아버지와 언니는 아직 시내 음식점에 있을 거래요. 아버지 아주 곤드레만드레 취해 있더래요. 아니시야:뭐 좀 먹지 안으련? 이리 오너라. 아뉴트카:(페치카로 다가간다) 그보다도 추워 죽겠어요. 손이 꽁꽁 얼어 버렸어요. 아킴, 짚신을 벗는다. 아니시야:(그릇을 씻으며) 아버님! 아킴:왜? 아니시야:미린카는 잘 살고 있나요? 아킴:음, 괜찮게 살고 있지, 원래가 똑똑하고 얌전한 색시여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양이야. 상냥하고 일 잘하고 얌전한 여자니까 잘 살 거야. 아니시야:그런데 소문을 들으니, 아버님 마을에 사는 마린카의 친척 되는 집에서 아루 아쿨리나를 며느리로 데려가고 싶어 한다는데, 혹시 아버님은 그런 얘기를 듣지 못하셨나요? 아킴:미로노프네 말인가? 하긴 여자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귀담아 듣질 않아서 잘 모르겠군. 우리 할멈도 그런 얘길하는 것 같았는데, 난 기억력이 나빠서 금방 잊어버리곤 하거든. 하지만 미로노프는 꽤 착실한 사람이야. 아니시야:난 어떻게 해서든지 그애를 빨리 치워버리고 싶어서 하는 말이에요. 아킴:그건 왜? 아뉴트카:(귀를 기울인다) 이제야 돌아오는가 봐요. 제7장 술취한 니키타, 보자기와 종이에 싼 물건을 들고 등장한다. 열린 문을 잡고 그 자리에 서 있다. 아니시야:오건 말건 내버려둬라. (문이 열리는데도 돌아보지 않고 설겆이만 계속한다) 니키타:이봐, 아니시야! 여기 돌아온 사람이 누군지 알아? 니키타:(위협하듯) 누구냐구, 지금 여기 돌아온 양반이? 아니시야:공연히 쓸데없는 소리 그만두고, 어서 들어오기나 해요. 니키타:(더 한층 을러댄다) 여기 이 어른이 누구냐니까? 아니시야:(그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는다) 누구긴, 누구야. 주인 어른이지! 자, 어서 들어와요. 니키타:(버티면서) 암, 주인어른이시지. 하지만 주인 어른의 성함이 뭐야? 똑똑히 대봐! 아니시야:이 사람이 왜 이럴까... 니키타지 뭐예요. 니키타: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것 봤나, 부칭을 대야 할 게 아냐! 아니시야:아키므이치. 자, 들어와요! 니키타:(여전히 문에 선 채) 맞았어. 그럼 성은 뭐야? 말해봐! 아니시야:(웃으면서 손을 잡아 끈다) 칠리킨 씨에요. 왜 이렇게 거들먹거릴까! 니키타:맞았어. (문설주를 붙잡고) 하지만 칠리킨 씨가 어느 쪽 발부터 집 안에 들여 놓는지 그걸 말해봐! 아니시야:그만하고 들어와요. 방이 다 식어버린다니까? 니키타:아니야, 어느 쪽 발부터 들어가는지 말해봐, 그걸 말하지 않으면 난 안 들어가. 아니시야:(혼자 소리로) 정말 지긋지긋한 사내도 다 있군. 왼발부터 들어옵니다요! 이젠 들어와요. 니키타:그래, 맞았어. 아니시야:방 안에 누가 와 계신지 보기나 하고 이러는 거유? 니키타:아버지가 왔나? 난 아버질 소홀히 하는 놈은 아니야. 아버질 공대할 줄도 알지. 안녕하셨어요, 아버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며 손을 내민다) 삼가 문안을 드립니다. 아킴:(대답하지 않고) 술, 바로 그놈의 술이 사람을 망친다니까! 저게 무슨 꼴이람! 니키타:술이요? 한 잔했어요. 물론 내가 나빠요, 친구를 만나서 한 잔 했거든요. 아니시야:이젠 그만 가서 자요. 니키타:마누라, 내가 지금 어디 서 있지? 말해봐! 아니시야:그만하고 가서 자라니까? 니키타:아니, 아버지와 차를 한 잔 마셔야겠어. 차를 내놔요. 아쿨리나, 이리 오너라. 제8장 아쿨리나:(화려한 옷차림으로 등장. 시내에서 사온 물건들을 들고 니키타한데로 간다) 왜 이렇게 물건들을 뒤섞어 놓았죠? 실은 어디 있어요? 니키타:실 말이냐? 실은 저기 있다. 여봐, 미트리치! 어디 있어? 잠들었나? 나가서 말을 끌어들여야지! 아킴:(아쿨리나를 보지 못하고 아들을 바라보며) 얘, 그게 무슨 소리냐? 저 영감은 온종일 일을 해서 아주 지쳐 쓰러졌다. 그런데도 너는 거들먹거리며 말을 끌어들이라고 호통을 치는 거냐! 그래선 안 되는 거야! 미트리치:(페치카에서 내려와 방한화를 신는다) 오오, 자비로우신 하나님! 말은 마당에 있는가? 그놈도 눈길에 혼났겠군. 헌데 어쩌면 저렇게까지 곤드레가 되었을까. 오오, 하나님, 자비로운 니콜라이님. (외투를 입고 퇴장) 니키타:아버지, 미안합니다. 한 잔 마시긴 했지만 말예요. 하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닭까지도 마시는 세상인데, 그렇쟎아요? 아무튼 용서하세요. 그러나 미트리치에 대해선 염려할 것 없어요.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말을 끌어들이고 돌아올 겁니다. 아니시야:그래, 정말 차를 내놓으라는 건가? 니키타:내놓으라니까. 아버지가 오셨으니 함께 차라도 마시며 얘길하고 싶어. (아쿨리나에게) 아까 산 물건은 다 가져왔니? 아쿨리나:내 것은 다 가져왔지만, 나머지 것은 썰매 안에 그냥 놔두었어요. 아아, 이건 내 것이 아니야. (종이에 싼 물건을 탁자 위에 내던지고 자기 물건은 상자 안에다 넣는다. 아뉴트카가 그것을 보고 있다. 아킴은 아들을 보지 않고 각반과 짚신을 거둔다) 아니시야:(차를 가지러 나가며) 그렇쟎아도 상자가 가득 찼는데, 또 잔뜩 사가지고 왔군. 제9장 니키타:(안 취한 체하며) 아버지, 언짢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아버진 내가 몹시 취한 줄 아시겠지만, 난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어요. 술은 마시되 정신만을 잃지 말란 말 있잖아요. 난 지금 아버지와 무슨 얘기든지 다 할 수 있어요.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있지요. 말이 죽었기 때문에 돈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문제 없어요. 내가 다 해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많은 액수가 필요하시다면 좀 기다려 주셔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장에 해 드릴 수 있어요! 아킴:(여전히 짚신을 매만지며) 얘야, 이른 봄의 썰매길은 진짜 길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니키타:그건 무슨 뜻이죠? 취중에 하는 말은 믿을 수 없다는 뜻인가요? 염려 마십쇼. 차라도 한 잔씩 마십시다. 무슨 일이든 내가 다 해결해 드릴 수 있다니까요. 아킴:(고개를 저으며) 으음... 쯧쯧... 니키타:자, 돈은 여기 있습니다.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십 루블짜리 돈을 뽑아낸다) 이걸로 말을 사십시오. 자, 받으세요. 나는 아버지를 저버리진 않습니다.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를 저버리다니 말이 됩니까? 어서 받으십시오. 이런 것쯤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아킴한테 다가가서 돈을 내민다. 아킴은 받지 않는다) 니키타:(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받으시라니까! 한 번 준다고 말한 이상 절대 아까와하진 않을 테니까요. 아킴:이렇게 주는 돈은 받지 못하겠다. 너하곤 지금 말을 할 수가 없어. 너는 지금 인간다운 데라곤 조금도 없어. 니키타:아니, 받으라면 받아야 할 게 아니오! (아킴의 손에 억지로 돈을 쥐어준다) 제10장 아니시야:(등장. 걸음을 멈추고) 어서 받으세요, 아버님. 한 번 입 밖에 내면 끝까지 고집하는 성미니까. 아킴:(고개를 저으며 돈을 받는다) 술이 탈이군! 저 꼬락서니가 뭐람... 니키타:됐어요. 나중에 갚아도 좋고 안 갚아도 좋아요. 난 그런 것 따지지 않는 성미니까. (아쿨리나를 보고) 아쿨리나, 선물 좀 내보여라. 아쿨리나:뭐라구요? 니키타:선물 좀 내보이라구! 아쿨리나:선물요? 뭣 때문에요? 벌써 다 거둬 넣어 버렸는데. 니키타:내보이라면 내보여. 아뉴트카한테 보여주면 좋아할 거야. 목도리를 펼쳐서 보여주어라. 어서 이리 내놔! 아킴:쯧쯧...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군. (페치카 위로 올라간다) 아쿨리나:(꺼내서 탁자에 내놓는다) 자, 여기 있어요. 이걸 보면 뭘 안다고... 아뉴트카:아이, 예뻐라! 이건 스체파니다 것보다 못하지 않겠네. 아쿨리나:스체파니다 것보다? 스체파니다의 목도리 같은 건 이것과는 비교도 안 돼. (신이 나서 펼쳐 보이며) 자, 이걸 좀 봐, 천이 얼마나 좋다구 ... 이건 프랑스제야. 아뉴트카:레이스도 참 예쁘네요! 마슈트카도 이런 걸 가지고 있지만, 그건 빛깔이 더 연한 연두색이야. 이게 훨씬 더 좋아. 니키타:암, 좋구말구. 아니시야, 화가 나서 광으로 들어가, 탁자를 덮을 보자기를 가지고 나와서 탁자로 다가간다. 아니시야:뭣하러 이렇게 펼쳐놓고 야단들이냐! 니키타:이걸 좀 보라구. 아니시야:내가 보면 뭘 해! 그런 것 생전 구경도 못한 줄 아나? 얘, 이거 어서 치워. (목도리를 방바닥에 집어 던진다) 아쿨리나:왜 집어 던지죠? 던지고 싶거든 자기 물건이나 던질 것이다. (집는다) 니키타:아니시야! 조심하라구! 아니시야:뭘 조심해? 니키타:당신한테 아무것도 안 사온 줄 아는가 보군. 이걸 봐. (꾸러미를 보여주고는 그것을 갈고 앉는다) 이건 당신한테 줄 선물이야. 하지만 그냥 줄 수는 없어. 자, 내가 깔고 앉은 게 뭔지는 어디 알아맞혀봐! 아니시야:공연히 거들먹거리지 말란 말야. 누가 당신을 무서워 할 줄 알아? 도대체 당신은 누구 돈으로 저 계집애한테 비싼 선물을 사주며 흥청거리는 거야? 그게 다 내 돈이란 말야! 아쿨리나:어째서 당신 돈이야? 남의 돈을 가로채려 해도 그렇게 쉽게는 안 될 걸! 그보다도 이 집에서 나가란 말야! (저쪽으로 가려다가 아니시야와 부딪힌다) 아니시야:아니, 이년이 사람을 왜 떠밀지? 내가 네년을 쫓아내야겠다. 아쿨리나:쫓아내겠다구? 어디 한 번 쫓아내봐! (아니시야한테 달려든다) 니키타:계집년들이란 그저 이렇다니까! 그만 둬! (두 사람을 떼어놓는다) 아쿨리나:흥, 뒤가 켕기면 잠자코나 있지! 누가 모를 줄 알구? 아니시야:뭘 안다는 거야? 말해 봐, 뭘 아는지 말해보라니까? 아쿨리나: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안단 말야. 아니시야:남의 남편을 가로채는 화냥년 같으니? 아쿨리나:제 남편을 죽인 년이 무슨 큰소리야! 아니시야:(아쿨리나에게 달려든다) 이년이 정말 사람 잡겠네! 니키타:(제지하면서) 아니시야! 잊었어? 아니시야:너 같은 놈의 위협에 내가 까딱이나 할 줄 알아? 니키타:나가버려! (아니시야를 끌어내려 한다) 아니시야:어디로 나가라는 거야? 내가 내 집을 두고 어디로 나가? 니키타:나가라면 나가! 안 나가면 가만 안둘 테다. 아니시야:난 못 나가! (니키타, 떼민다. 아니시야, 문설주를 끌어안고 울며 소리친다) 내 집에서 나를 내쫓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악당놈 같으니, 네가 무사할 줄 아느냐? 두고 보자! 니키타:닥치지 못해! 아니시야:이장한테, 아니 순경한테 가서 고해 바칠 테야. 니키타:빨리 거져 버려! (떼민다) 아니시야:(방문 밖에서) 목매어 죽어버릴 테다! 제11장 니키타:흥, 맘대로 해. 아뉴트카:엄마아, 엄마아! (운다) 니키타:쳇, 누가 겁낼 줄 알구! 넌 왜 우냐? 곧 돌아올 거야. 가서 찻주전자나 보고 오렴. 아뉴트카 퇴장. 제12장 아쿨리나:(물건을 거둬 접으면서) 망할 년이 이렇게 더럽혀 놨구나! 어디 보자. 네 년의 외투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테니! 니키타:내가 밖으로 쫓아냈음 그만이지, 뭐가 또 불만이냐? 아쿨리나:새 목도리를 더럽혀 놨으니 그렇죠! 그년이 나갔기에 다행이지, 안 나갔으면 난 그년의 눈깔을 뽑아버렸을 거야! 니키타:이젠 그만해둬. 뭣 때문에 넌 그렇게 성을 내는 거냐? 내가 저년을 사랑하고 있다면 또 몰라도... 아쿨리나:사랑이라구? 저런 돼지 같은 뚱보를 사랑할 사람도 있나요? 그때 당신이 그년을 버렸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건데, 왜 쫓아내지 않았죠? 쫓아냈으면 집이고 뭐고 죄다 내 거란 말예요. 뭐, 그 주제에 자기가 이 집 안주인이라구? 흥, 제 남편을 어떡했느냐 말야! 남편을 독살한 년이! 이제 당신도 그렇게 죽일 거예요. 니키타:아아, 계집년들의 입은 마개로 틀어막을 수도 없군. 너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고 있는지 알기나 하고 그러니? 아쿨리나:알구말구요. 난 그년과 한 집에서 살기 싫단 말예요. 이 집에서 쫓아낼 테야. 그년과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어. 뭐, 자기가 안주인이라구? 감옥에 들어가야 할 암캐년이 이 집 안주인이야? 니키타:그만두라니까! 그년한테 신경 쓸 필요가 어디 있어? 그년을 보지 말고 나를 보고 살면 되쟎아. 내가 주인이야. 네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해 주마. 나는 이젠 너를 좋아해. 내가 좋은 쪽을 귀여워하는 건 당연하지. 그건 내 권리야. 그년은 내가 꼼짝 못하게 할 테니까. 아주 요렇게 만들어 버릴 테야. (발 밑을 가리킨다) 쳇, 손풍금이 있어야지! 페치카 위엔 둥근 빵, 선반 위엔 수우프. 우린 살기에 걱정 없지. 재미있게 흥겹게 살다가, 살다가 죽을 때가 오면, 조용히 죽으면 그만이지. 페치카 위엔 둥근 빵, 선반 위엔 수우프... 제13장 미트리치 등장, 외투를 벗고 페치카에 올라간다. 미트리치:또 한바탕 싸운 모양이군. 주먹질이라도 오고 갔는가? 오오, 하나님, 자비로운 니콜라이님. 아킴:(페치카 끝에 앉아서 각반과 짚신을 꺼내 길 떠날 채비를 한다) 자, 저쪽 안으로 들어가게. 미트리치:(안쪽으로 기어들어간다) 여전히 사이가 나쁜가보군. 오오, 하나님! 니키타:과실주를 꺼내 놔. 차에 타서 마시게. 제14장 아뉴트카:(등장, 아쿨리나에게) 언니, 차가 막 끓어. 니키타:엄마는 어디 있니? 아뉴트카:복도에 서서 울고 있어요. 니키타:그럴 테지. 엄마더러 차를 가져오라고 해라. 그리고 아쿨리나, 너는 찻잔을 내놓고. 아쿨리나:찻잔을 내놓으라구요? 네, 내놓겠어요. 니키타:(상자에서 과실주, 도나스, 청어 등을 꺼낸다) 이건 내 앞으로 산 거고, 이 실은 마누라한테 줄 거고, 그리고 석유는 복도에 놔두었고... 그리고 이건 돈이고... 가만 있자. (주판알을 집어든다) 한 번 셈을 맞혀 봐야지. (주판알을 튕긴다) 밀가루가 8십 코페이카, 콩기름이... 아버지한테 십 루블... 아버지! 와서 차를 드십시다. 침묵, 아킴은 페치카 위에 앉아서 짚신 끈을 동여 매고 있다. 제15장 아니시야:(찻주전자를 들고 등장) 어디다 놓을까요? 니키타:탁자 위에 놓구려. 그래, 이장한테 갔다 왔나?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릴 하지 말라는 거야. 공연히 화만 내지 말고 자, 앉아서 한 잔 마시라구. (잔에 술을 따라 준다) 이건 당신 주려고 사온 선물이야. (깔고 앉았던 꾸러미를 꺼내서 내민다. 아니시야,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없이 받는다) 아킴:(페치카에서 내려와 외투를 입는다. 탁자로 다가가서 그 위에다 돈을 내놓는다) 자, 이 돈은 도로 넣어 두어라. 니키타:(돈을 보지 못하고 ) 그렇게 옷을 입고 어딜 가려는 겁니까? 아킴:난 돌아가겠다. 잘들 있거라. (모자와 혁대를 집어든다) 니키타:뭐라구요? 아니, 이 밤중에 어딜 가겠다는 거예요? 아킴:난 이 집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잘 있거라. 니키타:모처럼 차를 내왔는데 어딜 가겠다는 거죠? 아킴:(혁대를 졸라매며) 난 돌아가겠다. 너의 집은 좋지가 않아. 니키타, 너의 집은 엉망이란 말이다. 너는 옳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어. 니키타, 너는 나쁜 길을 걷고 있어. 난 가겠다. 니키타:설교는 그만두고, 앉아서 차라도 드세요. 아니시야:그러시면 아버님, 세상 사람들 보기에도 부끄럽쟎아요. 무엇 때문에 화가 나셨는진 몰라도... 아킴:화를 낼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내가 보기엔, 아들놈이 몸을 망치고 있는 것 같아서... 내 아들이 구렁텅이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아서... 니키타:구렁텅이라니 무슨 뜻이죠?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하셔야지... 아킴:구렁텅이란 구렁텅이야. 너는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어. 지난 여름에 내가 너한테 뭐라고 말했지? 니키타:글쎄요, 어디 한두 가지만 말했어야죠. 아킴:그 고아 얘길 했어. 네가 몸을 망친 그 고아 얘길 했다. 마리나 말이다. 니키타:또 그 얘긴가요! 낡은 짚신 얘긴 다시 끄집어 내지 말란 말입니다. 그건 다 지나간 일 아닙니까... 아킴:(언성을 높이며) 지나간 일? 그건 지나간 일이 아니야. 하나의 죄가 도 다른 죄를 저지르게 하고 그것이 도 다른 죄를 저지르게 해서 언제까지나 죄악이 계속되는 거야. 니키타, 너는 죄악 속에 떨어졌다. 내가 보니 너는 죄악에 빠져 헤어나질 못하고 있어. 니키타:그런 얘긴 그만하고 앉아서 차나 마십시다. 아킴:차 같은 건 마시고 싶지도 않다. 너의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니 정말 마음이 슬퍼지는구나. 난 너 같은 놈과는 차도 마시고 싶지 않다. 니키타:쳇... 언제까지나 설교를 늘어놓을 셈인가요... 어서 이리 오시라니까! 아킴:너는 꼭 그물에 걸려든 것처럼 돈에 사로잡혀 있다. 그물에 걸려든 것과 같단 말이다. 니키타, 사람에겐 영혼이라는 게 필요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니키타:아버진 대체 무슨 권리가 있기에 내 집에 와서 나한테 잔소릴 하는 거요? 뭣 때문에 귀찮게 구느냐 말예요! 요즘 세상엔 그런 건 어림도 없다는 걸 아셔야지. 아킴:네 말이 맞다. 요즘은 자식 놈이 오히려 제 아비의 머리털을 잡아 휘두르는 세상이라니까. 결국 모든 게 파멸이지. 망조가 든 거야. 니키타:(성을 내며) 나는 이렇게 나대로 살면서 아버지한테 한 번도 손을 내밀지 않는데, 오히려 아버지야말로 나한테 손을 벌리러 오지 않았소! 아킴:돈 말이냐? 네 돈은 저기 있다. 비럭질을 해먹는 한이 있어도 네 돈은 받지 않겠다. 니키타:아버지,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러시면 모처럼의 자리가 깨어지지 않느냐 말예요. (손을 잡고 제지한다) 아킴:(소리를 빽 지르며) 놓아라. 난 여기서 자지 않겠다. 너의 이 더러운 집에서 자느니 차라리 뉘집 울타리 밑에서 밤을 새우겠다. 퉤! 아아, 하나님. 용서하십시오. (퇴장) 제16장 니키타:맘대로 하라지! 제17장 아킴:(문을 열고) 니키타, 정신을 차려라. 사람에겐 영혼이라는 게 필요한 거야. 제18장 아쿨리나:(찻주전자를 집어든다) 따를까요? (모두들 잠자코 있다) 미트리치:(신음하듯) 오오, 하나님. 죄 많은 나를 용서하옵소서! 모두들 흠칫 몸을 떤다. 니키타:(긴의자에 드러눕는다) 아아, 따분하다. 따분해. 아쿨리나! 손풍금은 어디 있니? 아쿨리나:손풍금이오? 수리하라고 갖다 주고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자, 따랐으니 마셔요! 니키타:싫다. 불을 꺼라... 아아, 왜 이렇게 따분할까! (운다) 제4막 가을 저녁, 날이 밝다. 안뜰. 무대 중앙에는 복도, 오른쪽에는 사람이 거처하는 방과 대문, 왼쪽에는 곳간으로 쓰는 냉방과 움. 방 안에 서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술취한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이웃 여자 2, 복도에서 나와 이웃 여자 1을 손짓해 부른다. 제1장 이웃 여자 2:왜 아쿨리나는 나오지 않지요? 이웃 여자 1:왜 안 나오느냐구요? 나오긴 싶긴 하지만, 어디 나올 수가 있어야죠. 신랑 아버지가 색시감 보러 왔는데, 그애는 저쪽 냉방에 누워서 코끝도 내밀지 못하고 있지 뭡니까? 이웃 여자 2:어찌된 일이죠? 이웃 여자 1:누가 어떻게 했는지 지금 배가 잔뜩 불러 있다는군요. 이웃 여자 2:아니 그게 정말이우? 이웃 여자 1:정말이구 말구요. (귀에 대고 속삭인다) 이웃 여자 2:그래요? 그런 흉칙스런 일이 어디 있담! 신랑 쪽 사람들이 알면 어쩌려구. 이웃 여자 1:알 게 뭐예요. 모두들 곤드레만드레 취해 버렸는데. 게다가 저쪽에 선 지참금과 혼수에 더 정신이 팔려 있거든요. 그애한테 딸려가는 게 어디 이만저만이라야 말이죠. 털가죽 외투가 두 벌에 비단 옷이 여섯 벌, 프랑스제 목도리 하나, 그밖에 베가 몇 필에다가 돈도 2백 루블이나 딸려 보낸다쟎아요. 이웃 여자 2:흥, 그 따위 돈 아무리 많아도 반가울 것 없겠수. 정말 망측한 일도 다 있구먼. 이웃 여자 1:쉿... 신랑 아버지가 나와요. (입을 다물고 복도로 들어간다) 제2장 신랑 아버지 혼자, 복도에서 나와 딸꾹질을 한다. 신랑 아버지:어어, 땀을 흠뻑 흘렸는 걸. 굉장히 덥군. 이러다간 감기 들겠다. (멈춰 서서, 푸우 숨을 내쉰다) 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뭔가 좀 이상해... 할멈한테 물어 봐야지... 제3장 마트료나:(복도에서 나온다) 이 영감님이 어딜 가셨나? 아아, 여기 계셨군. 어떠세요, 하나님 덕분에 모든 게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습니까, 영감님? 중매장이는 칭찬을 하지 말란 말도 있고, 나도 칭찬할 줄은 모르는 사람입니다만. 영감님, 참 좋은 자리를 골라 짚으셨습니다. 이 혼담이 이루어지면 아마 한 평생 고마와하실 겁니다. 색시감은 보기드문 얌전한 아가씨예요. 그만한 색시감은 이 근방에선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신랑 아버지:그야, 그렇지만, 돈 얘긴 틀림없는가요? 마트료나:돈 얘길랑 하실 필요도 없어요. 그애가 자기 아버지한테서 받은 걸 고스란히 가져가는 거니까요. 요즘 세상에 3백 5십 루블이라면 어디 적은 돈입니까? 신랑 아버지:그야 나도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자식의 일이니 좀 더 욕심을 내는 것도 당연하쟎소? 마트료나:이거 보세요. 영감님. 사실 말이지. 내가 중간에서 다리를 놔두지 않았다면 영감님 댁엔 차례도 가지 않았을 거예요. 코르밀린네 집에서도 말이 있는 것을 내가 이쪽으로 하자고 우겼기 때문에 이만큼이나 얘기가 되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하지만 돈에 대해선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돌아가신 그애 아버지는 아니시야더러 니키타한테 재가 하도록 유언했는데, 나는 아들한테 들어서 다 알고 있어요. 영감님이 아쿨리나한테 남기고 간 돈이 얼마나 되는지 잘 안단 말예요. 그 돈을 이번에 죄다 그애한테 주었지요. 다른 사람 같으면 제 욕심부터 채우려 들었겠지만, 우리 니키타는 아주 깨끗이 주어 버렸어요. 말이 그렇지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신랑 아버지:소문을 들으니 그애는 아버지한테서 더 많은 돈을 받았을 거라고들 하던데, 댁의 아들도 여간 내기가 아닌 모양이군요. 마트료나:원 당치도 않은 말씀을... 남의 손 안에 있는 건 커보이게 마련이랍니다. 그애가 받은 걸 고스란히 죄다 줄 테니까. 그런 염려는 아예 마시고 아주 결정을 내려 버리십시다. 신랑 아버지:그건 그렇지만, 한 가지 그애에 대해서 우리 여편네하고 좀 의심스럽게 생각한 게 있어요. 어째서 그애는 오늘 얼굴을 보이지 않지요? 혹시 병신이나 아닌가 해서 걱정이 되는군요. 마트료나:원 당치도 않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애가 병신이라뇨! 그애만큼 튼튼한 애는 아마 이 근방엔 없을 겁니다. 꼭 무쇠같이 단단해서 바늘 끝도 안 들어갈 아이죠. 영감님도 요전에 보시쟎았습니까? 일은 또 얼마나 잘한다구요. 하긴 귀가 좀 먼 건 사실이지만, 그거야 빛깔 좋은 사과엔 벌레 붙은 자국이 있는 것처럼 크게 흠잡을 건 못되지요. 오늘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건 그애를 미워하는 년이 주술을 써서 일어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에요. 나는 그게 어느 년의 짓인지 다 알고 있어요. 그애의 혼담이 결정된다는 얘길 듣고 그런 짓을 한 거예요. 내가 그걸 푸는 법을 알고 있으니까 내일이라도 곧 일어나게 할 테니 그건 염려마세요. 신랑 아버지:그렇다면 좋소. 혼담은 정해진 걸로 합시다. 마트료나:잘 생각하셨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하지만 나중에 딴 소릴랑 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무척 애썼다는 것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요. 설마 모른 체하시진 않겠지만... 신랑 어머니의 목소리:(복도 안에서) 여보, 돌아갈거면 어서 돌아갑시다. 거기서 뭘 하시우? 이리 와요. 신랑 아버지:응, 갑시다. (퇴장) 사람들, 복도 입구에서 웅성거리다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제4장 아뉴트카:(복도에서 달려나와 아니시야를 손짓해 부른다) 엄마! 아니시야:(복도 안에서) 왜 그러니? 아뉴트카:엄마, 이리 나와요. 남이 들을까봐 그래. (둘이 함께 헛간으로 들어간다) 아니시야:무슨 얘기냐? 아쿨리나는 어디 있니? 아뉴트카:언니는 저기 골방에 들어갔어. 그런데 금방 죽을 것처럼 야단이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면서 막 소리를 지르겠다고 해. 정말이야. 아니시야:조금만 더 참으라고 해라. 손님들을 보내야 하니까. 아뉴트카:엄마, 언니는 정말 아파서 죽겠는가봐. 막 화를 내면서 '내 혼담 때문에 술들을 먹고 그래 봐야 소용없다. 난 시집가지 않을 테니까. 난 죽어버리겠어'라고 말했어요. 언니가 죽어 버리면 어떡해! 난 무서워! 아니시야:죽긴 왜 죽는다는 거냐. 넌 언니한테 가지 말아. 이리 오너라. 아니시야와 아뉴트카의 퇴장. 제5장 마트리치:(혼자서 대문 쪽으로 등장. 흩어진 건초를 거둬 모은다) 오오, 하나님, 자비로운 니콜라이님! 흥, 어지간히들 마신 모양이로군. 여기까지 술냄새가 나는 걸 보니. 난 이젠 술이라면 냄새도 맡기 싫어. 아니, 이놈의 말들이 건초는 먹지 않고 흐트러뜨리기만 했군. 한 단은 실히 되겠는 걸. 아아, 이 술냄새! 코를 막 쑤시는 것 같구나. (하품을 한다) 이젠 잘 때가 됐는데 집 안엔 들어가기도 싫으니 어떡한다? 아아, 구역질나는 냄새! (마차 떠나는 소리가 들린다) 다들 떠나 버린 모양이군. 오오, 하나님, 자비로운 니콜라이님! 저 사람들 역시 제 욕심만 채우려고 서로 속임수를 쓰고들 있지만, 결국은 다 쓸데없는 짓이지. 제6장 니키타:(등장) 미트리치, 이젠 페치카에나 올라가지. 내가 치울 테니. 미트리치:그보다도 양에게 먹이나 주소. 이젠 다들 돌아갔는지? 니키타:돌아가긴 했지만 일이 몹시 난처하게 됐어.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군. 미트리치:뭐 난처할 건 하나도 없지. 이럴 때 소용되는 게 바로 양육원이라는 거 아니오? 거기선 누구든지 갖다 버리기만 하면 얼마든지 받아서 길러주니까. 돈만 조금 쥐어주면 군소린 일체 없어요. 오히려 유모로 들어가면 저쪽에서 돈을 주는 판이거든. 요즘 세상엔 그런 일쯤 문제가 아니예요. 니키타:이봐, 미트리치. 쓸데없는 소린 절대 지껄이면 안돼. 미트리치:내 걱정은 말고 당신 할 일이나 잘 처리하소. 아아, 이 술냄새! 그럼, 집에나 들어가 볼까. (하품을 하며 퇴장) 오오, 하나님! 제7장 니키타, 한참 동안 말이 없다. 썰매에 걸터 앉는다. 니키타:이 일을 어쩌면 좋담! 제8장 아니시야:(등장) 당신 어디 있수? 니키타:여기 있어. 아니시야:뭘 하고 앉아 있어요?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가 아니예요. 지금 곧 안고 나와야 해요. 니키타:어쩔 셈이야? 아니시야:당신은 내가 말한 대로 하기만 하면 돼요. 니키타:그보다도 양육원에 갖다주면 어떨까? 아니시야:갖다주고 싶거든 어서 갖다주구료. 계집질이라면 혹하면서도 뒷처리는 영 할 줄 모르니, 당신도 참 딱하구료. 니키타:그러니 어쩌라는 거야? 아니시야:움 속에다 구덩이를 파라고 하쟎았어요. 니키타:하지만 달리 어떻게 할 순 없을까? 아니시야:(그의 말투를 흉내내며) 달리 어떻게 할 순 없을까? 그렇겐 안 된다니까! 왜 진작 이런 일은 생각 못했수? 자, 어서 하라는 대로나 해요. 니키타:아아, 이거 야단났는 걸! 제9장 아뉴트카:(등장) 엄마, 할머니가 빨리 오래. 언니는 애기를 낳았는가봐. 지금 응아하고 우는 소리가 났어. 아니시야:요 망할 년이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그건 고양이 새끼가 우는 소리야. 빨리 들어가서 자거라. 말 안들으면 가만 놔두지 않는다... 아뉴트카:엄마, 정말이야, 정말이래두... 아니시야:(손을 들어 딸을 때리려 한다) 아니, 요년이! 얼른 꺼지지 못하겠니! 아뉴트카, 달아난다. 아니시야:(니키타에게) 빨리 가서 내가 하라는 대로 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도 생각이 있으니까?(퇴장) 제10장 나키타 혼자, 한참 동안 침묵한다. 니키타:이 일을 어쩌지? 여편네들이란 정말 처치 곤란이라니까! 왜 진작 이런 일을 생각 못했느냐구? 언제 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있었던가!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말야. 작년 여름엔 아니시야 제년이 나한테 치분거렸지만, 그 때도 난 어쩔 수 없었어. 수도승이 아닌 다음에야 별 수 있겠느냐 말야. 그러다가 주인이 죽어 버리는 바람에 나도 하는 수 없이 제년과 함께 살게 되었지. 그게 어디 내 잘못인가?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거든. 하지만 거기에 가루약이라는 게 끼어들었어. 그렇지만, 그건 내가 권한 게 아니잖아. 오히려 그때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그년을 때려 죽여 버렸을 거야. 암, 때려 죽이고 말고. 나를 이런 흉칙한 일에 끌어들인 건 그년이야. 망할 년의 마귀 할멈 같으니! 그때부터 난 그년이 싫어 졌어. 어머니한테 모든 얘길 들은 후부터는 그년의 얼굴만 보아도 구역질이 나는데. 그런 년과 어떻게 같이 살았단 말인가? 그래서 우리 사인 벌어지고 말았지. 하지만 그때 거기에서 그 계집애가 내 모가지에 매달리니, 나도 어쩔 수 없었을 게 아니냐 말야! 내가 손을 대지 않으면 다른 놈이 먼저 손을 댔을 게 아냐. 그러니 이번 일도 역시 내 탓이라곤 할 수 없지. 아아, 이일을 어쩐다? (생각에 잠긴다) 어쨌든 계집년들이란 간덩어리도 크군. 그런 짓을 생각해 내다니. 아니, 난 그런 짓을 할 순 없어. 제11장 마트료나, 괭이와 초롱불을 들고 급히 등장한다. 마트료나:얘, 너는 지금이 어느 때라고 홰 위의 닭처럼 멍청히 앉아 있는 거냐? 아니시야가 뭐라고 안했니, 빨리 서둘러야 할게 아니냐! 니키타:뭘 어떡하라는 겁니까? 마트료나:뭘 해야 하는지는 우리가 알고 있다. 넌 네가 할 일이나 하면 돼. 니키타:나까지 그 일에 끌어들이려는 건가요? 마트료나:뭐라구? 이제 와서 너만 꽁무닐 빼려는 거냐? 일을 이렇게 만든 건 누군데 꽁무닐 빼? 니키타:그렇지만 그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역시 생명이 있는 사람인데. 마트료나:뭐, 생명이 있는 사람이라구! 바보 같은 소리. 아직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게 무슨 사람이냐. 도대체 그걸 어디로 보내겠니? 설령 양육원에 보낸다 해도, 결국 죽어 버리기는 매 한가지 아니냐. 소문만 세상에 쫙 퍼질 뿐이지. 그렇게 되면 그애는 한 평생 우리가 떠맡을 수밖에 없잖니? 니키타:하지만 이 일을 남들이 알면 어떡하죠? 마트료나:내 집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한단 말이냐? 냄새도 안나게 감쪽같이 해치우면 되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 우린 아무래도 여자니까 남자 손이 필요해. 자, 이 괭이를 들고 움 속에 들어가서 잘해 보자. 내가 초롱불을 비춰줄 테니. 니키타:뭘 하라는 겁니까? 마트료나:(귓속말로) 구덩이를 파란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걸 안고 와서 얼른 처리해 버릴 테니까. 저것 봐, 아니시야가 부른다. 빨리 가 봐! 나도 가겠다. 니키타:그럼, 벌써 죽었나요? 마트료나:여태 살았을 리가 있니? 벌써 죽어버렸다. 하지만 빨리 처리해야 해. 이웃에서 아직 자지 않고들 있으니까 누가 보거나 듣거나 했다간 그야말로 큰일이다. 모두들 남의 약점만 캐내려 드는 판이니까. 게다가 어제는 순경이 왔다 가지 않았니? 그러니 넌 움 속에 내려가서 (괭이를 준다) 한쪽 구석에 구덩이를 파라. 흙이 다시 덮고 움바닥을 고르게 해 놓으면 그만이야. 흙은 아무한테도 말을 하지 않으니까. 마치 소가 혓바닥으로 한 번 핥은 것처럼 되어버린단 말이다. 자, 어서 내려가거라. 니키타:왜 나까지 끌어들이려는 거죠? 난 몰라요. 아니시야 하고 둘이서 맘대로 하세요. 난 가버릴 테니까. 제12장 아니시야:(문에서) 어찌 됐어요? 다 팠나요? 마트료나:거기 있지 않고 여긴 뭣하러 나올까! 그래, 그건 어디 놔뒀수? 아니시야:보자길 덮어 놨으니까, 아무 소리도 안 들릴 거예요. 구덩인 다 팠나요? 마트료나:글쎄, 싫다지 않겠수! 아니시야:(미친듯이 성을 내며 달려 나온다) 뭐, 싫다구? 그럼 감옥살이를 하고 싶다는 건가? 좋아, 당장 순경한테 가서 죄다 말해 버릴 테니까! 틀린 일이라면 어차피 매한가지야. 당장 모든 사람에게 말해 버리겠다. 니키타:(깜짝 놀라서) 뭘 말해? 아니시야:뭘 말하느냐구? 죄다 말해야지! 돈은 대체 누가 가졌지? 네가 아니냐! (니키나, 대답이 없다) 독약은 누가 먹였지? 그건 내가 먹였다. 하지만 넌 그걸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어. 난 너와 공모해서 했단 말이다! 마트료나:니키타, 뭘 어쩌자고 고집을 부리는 거냐? 이제 와서 어쩔 수 없잖니? 빨리 가서 수고 좀 해라. 아니시야:흥, 싫다구! 되게 깨끗한 체 하는군! 여태까진 나를 짓밟아 뭉갰지만, 이젠 어림도 없다. 난 참을 만큼 참아 왔어. 이젠 내 차례란 말이야. 빨리 들어가지 못하겠어! 말 안들으면 아주 끝장이 나는 줄 알아!... 자, 여기 괭이 있어! 빨리 들어가라니까! 니키타:왜 이렇게 귀찮게 굴어? (괭이를 집어들면서도 여전히 망설인다)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 난 안들어가겠어. 아니시야:안들어가겠어? (고함을 지르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 들으시오! 여러분! 마트료나:(그 입을 막으며) 아니, 정신이 돌았나! 지금 들어가요. 들어가... 얘, 빨리 들어가지 못하겠니! 아니시야:온 마을 사람을 다 부를 테다. 니키타:제기랄! 할 수 없군! 그럼, 빨리들 해요. 이렇게 되면 어차피 매한가지다.(움 쪽으로 간다) 마트료나: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잖니? 재미를 보았으면 뒤치다꺼리도 해야지. 아니시야:(여전히 흥분하여) 그 화냥년과 어울려 나를 구박했지만, 이젠 안 된다, 안 돼! 이번에도 나 혼자 도맡을 줄 아느냐. 너도 한 번 살인을 해보란 말이다. 기분이 어떤지 알게 될 테니. 마트료나:이봐요, 그렇게 큰소리를 지르며 성을 내면 안 돼요. 소리 없이 얼른 해 치워요. 그럼, 그애한테 들어가 봐요. 니키타는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초롱불을 들고 니키타를 따라 간다. 니키타, 움 속으로 내려간다) 아니시야:저 더러운 계집년까지 니키타 네 손으로 졸라 죽여 버리게 하고야 말 테니, 그런 줄 알아. (여전히 흥분한 채) 난 표트르를 죽였기 때문에 혼자서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몰라. 이번엔 너도 그 맛을 보란 말이다. 난 이젠 목숨 같은 건 아깝지도 않아! 니키타:(움 속에서) 불을 비춰줘야 할 게 아냐! 마트료나:(초롱불을 비춰주며 아니시야에게) 파고 있어요. 빨리 가서 안고 나와요. 아니시야:여기서 잘 지키고 있어야 해요. 지키지 않으면 달아나고 말 테니까. 그럼, 내 얼른 가서 안고 올게요. 마트료나:성호 긋는 걸 잊으면 안 돼요. 안고 나오면 그 다음은 내가 다 할 테니 염려 말아요. 십자가는 있는가? 아니시야:어디 있는지 아니까 꺼내 오겠어요. (퇴장) 이 장면 대신 118페이지의 "변형 장면"을 상연할 수 있음. 제13장 마트료나 혼자. 니키타는 움 속에 있다. 마트료나:저 여편네 눈초리가 어쩌면 그렇게 무서울까. 하긴 화가 날 만도 하겠지. 하지만 이번 일만 감쪽같이 덮어 버리고 아쿨리나를 무사히 시집 보내고 나면, 내 아들도 다리 쭉 뻗고 평안히 살 수 있겠지. 다행히 살림살이도 넉넉하니 이 어미도 모른 체는 안 할 거야. 사실 말이지, 이 마트료나 할멈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알 게 뭔가. 무엇 하나 저희들 힘으론 처리하지 못했을 테니까. (움 속을 향해) 얘, 다 됐니? 니키타:(기어나온다. 머리가 보인다) 뭣하고 있는 거요? 빨리 가져오지 않고! 제14장 마트료나, 복도 쪽으로 가서 아니시야를 맞는다. 아니시야, 헌옷에 싼 갓난아기를 안고 등장한다) 마트료나:그래, 성호는 그어 주었수? 아니시야:그어 주고말고요! 그년이 주려 하지 않는 걸 겨우 빼앗아 가지고 왔어요. (가까이 다가가서 니키타에게 건네준다) 니키타:(받지 않고) 제 손으로 들고 갈 것이지... 아니시야:자, 받아요! (그의 손에 갓난아기를 내던진다) 니키타:(받는다) 살아 있어! 아직 꿈틀거리고 있어. 분명히 살아 있어! 이걸 나더러 어떡하라는 거야. 아니시야:(그의 손에서 갓난아기를 낚어채어, 움 속에 던진다) 빨리 목을 졸라 버리면 살아 있지 않을 게 아냐! (니키타를 떼밀어 넣는다)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둬야지. 마트료나:(현관 층계에 앉는다) 저앤 마음이 약해서 탈이야. 가엾어서 차마 손을 댈 수 없는가 보지? 하지만 별 수 있나, 제가 저지른 일인 걸! (아니시야, 움 위에 서 있다. 마트료나, 현관 층계에 앉아서 그녀를 바라보며 혼자 소리처럼 말한다) 겁을 집어먹은 그 얼굴! 그렇다고해도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도대체 아기를 보낼 데가 있어야지. 생각해 보면, 세상엔 아기를 원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런 사람에겐 하나님이 주시지를 않거든. 언제나 죽은 아이를 낳기가 일쑤지. 우리 마을 보제네만 해도 그렇잖아... 그런데 이 집에선 필요도 없는 아이가 살아서 태어났으니, 참 모를 일이라니까. (움 쪽을 보며) 이젠 다 됐겠지. (아니시야에게) 뭘 하고 있는 거요? 아니시야:(움 속을 들여다보며) 널빤지를 덮고 그 위에 올라 앉았어요. 이젠 끝났겠죠. 마트료나:아아,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하지만 별 수 있어야지. 니키타:(기어나온다. 온몸을 떨며) 아직도 살아있어! 안 되겠어! 그냥 살아있다니까! 아니시야:아직 살아있다면서 어딜 가는 거야? (제지하려 한다) 니키타:(그녀에게 달려들며) 꺼져버려! 죽여버릴 테다! (그녀의 손을 움켜쥔다. 아니시야, 뿌리치고 달아난다. 니키타, 괭이를 들고 그 뒤를 쫓아간다. 마트료나, 달려와서 그의 앞을 막는다. 아니시야, 현관 층계를 뛰어 올라간다. 마트료나, 괭이를 뺏으러 한다. 니키타 이번엔 어머니한테 대든다) 꺼져! 어머니고 뭐고 다 죽여버릴 테야! (마트료나, 층계 위에 있는 아니시야한테로 도망친다. 니키타, 멈춰 선다) 죽인다, 죽여. 모두 다 죽여버릴 테다! 마트료나:너무 놀라서 저러는 거야. 조금 있으면 괜찮아지겠지. 니키타:어떻게 감히 이런 짓을 꾸몄을까! 어쩌자고 나한테까지 이런 일을 시키는 걸까! 아아, 저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내 발밑에서 바지직바지직 뼈부서지던 소리! 아아, 나한테 이런 참혹한 일을 시키다니... 그런데도 아직 살아있어, 정말 살아있어! (침묵. 귀를 기울인다) 울고 있구나... 아직도 울고 있어. (움 쪽으로 달려간다) 마트료나:(아니시야에게) 묻으러 가는가 보군요. 얘, 니키타, 불을 비춰 주랴? 니키타:(대답 않고 움 속에 귀를 기울인다) 들리지 않는군. 내 착각이었는지도 몰라. (물러나다가 멈춰선다) 내 발밑에서 뼈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었지. 바지직바지직... 아아, 나한테 이런 무참한 짓을 시키다니! (다시 귀를 기울인다) 또 울고 있다. 정말 울고 있어. 대체 어찌된 일일까? 어머니, 어머니! 마트료나:왜 그러느냐? 니키타:어머니,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난 이젠 안 되겠어요. 어머니, 내 생각도 좀 해 주세요. 마트료나:난 깜짝 놀랐다. 얘야. 그럼, 넌 가거라. 가서 술이라도 한 잔 마시면 기운이 날 거다. 니키타:어머니, 어쩌자고 나한테 이런 짓을 시켰죠? 바지직 뼈부스러지는 소리가 났어요. 그리고 저 울음소리! 어머니, 나한테 이런 짓을 시키다니, 어머니 너무 하십니다! (옆으로 물러나 썰매에 걸터 앉는다) 마트료나:자, 이젠 가서 한 잔 하거라. 하긴 밤중이라서 무서운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할 거야. 하지만 곧 날이 새고, 하루 이틀 지나면 그 땐 아무렇지도 않게 될 게다. 저 계집애도 시집 보내고 나면, 그때는 깨끗이 잊어버리게 될 테니까, 자, 넌 가서 한 잔 하거라, 내가 움 속에 내려가서 뒤처리를 하마. 니키타:(부르르 몸을 떨며) 집에 술이 남았던가? 그럼, 가서 한 잔 해야지! 그동안 쭉 복도 앞에 서 있던 아니시야, 말없이 비켜선다. 제15장 마트료나:그래, 어서 가거라. 나머지 일은 내가 다 할 테니까... 그럼, 내려가서 내 손으로 묻어야겠군. 얘가 괭이는 어디다 던져버렸나? (괭이를 찾아들고 반쯤 움 속에 내려가서) 아니시야, 이리 좀 와서 불 좀 비춰줘. 아니시야: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니키타는? 마트료나:아마 되게 질겁하도록 놀란 모양이야. 게다가 네가 너무 심하게 몰아치니까, 욱해서 덤벼든 거야. 그냥 내버려 둬야지. 곧 제정신으로 돌아오겠지. 그 대신 내가 뒤처리를 할 테니. 초롱불을 거기 내려 놓아요, 잘 보이니까. (움 속으로 아주 내려가 버린다) 아니시야:(니키타가 들어간 문 쪽을 향해) 흥, 이제 또 계집질을 할 테냐? 바람만 피우다가는 어떤 꼴이 되는지 이번엔 똑똑히 알았겠지. 제16장 (니키타, 복도에서 움 쪽으로 달려간다) 니키타:어머니, 어머니! 마트료나:(움에서 얼굴을 내민다) 왜 그러니? 니키타:(귀를 기울인다) 묻지 말아요, 살아 있어요. 저 소리가 안 들려요, 어머니? 살아 있어요! 저렇게 울고 있잖아요! 똑똑히 들려요... 마트료나:울기는 어떻게 운다는 거냐! 네가 아주 납작하게 만들어 버리지 않았니? 머리통이 박살이 나고 말았더구나. 니키타:그럼, 저건 무슨 소리지? (귀를 기울인다) 역시 울고 있어! 난 이젠 망했다, 망했어! 아아, 나한테 이런 무참한 짓을 시키다니! 이제 난 어디로 가야 하나? (현관 앞 층계에 걸터앉는다) "변형 장면" 112페이지 제13장 이하를 생략하고, 이 변형 장면을 대신 상연할 수 있다 무대:제1막과 같은 집의 내부 제1장 아뉴트카, 속옷바람으로 침상에 누워 이불 대신 외투를 덮는다. 미트리치, 벽 옆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미트리치:방 안이 온통 술냄새로군. 제기랄, 술 먹을 돈이 있으면 차라리 길바닥에 버리는 게 낫지 이게 뭐람. 담배를 피워도 고약한 술냄새가 코끝에서 달아나지 않는군. 오오, 하나님! 그럼, 이젠 잠이나 자 볼까. (램프로 다가가서 심지를 내리려 한다) 아뉴트카:(발딱 일어나 앉는다) 할아버지, 불을 끄지 말아요! 미트리치:왜 끄지 말아? 아뉴트카:뜰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어요. (귀를 기울인다) 저 소리 들리죠? 또 움 쪽으로 갔어요. 미트리치:누가 너더러 그런 것 상관하라더냐? 등잔 심지를 내릴 테니, 넌 어서 누워서 잠이나 자거라. (램프 심지를 틀어 불을 작게 한다) 아뉴트카:그렇지만 할아버지! 불을 아주 끄지는 말아요. 쥐꼬리만큼이라도 좋으니 켜 놔두세요, 네. 난 무서워서 그래요. 미트리치:(웃는다) 그래, 알았다. (아뉴트카 옆에 앉는다) 뭐가 무섭다는 거냐? 아뉴트카:무섭잖구요! 언니가 막 몸을 뒤틀며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었어요. 궤짝에다 머리를 쾅쾅 처박기까지 했는 걸요. (작은 소리로) 난 다 알아요... 언니는 아기를 낳으려고 그래요... 벌써 낳았는지도 몰라요. 미트리치:조그만 것이 별 걸 다 알고 그러는구나! 어서 누워서 자거라. (아뉴트카, 눕는다) 옳지, 옳지. (이불로 아뉴트카를 감싸주며) 이젠 됐다. 너무 많은 것을 알면 빨리 늙는 거야. 아뉴트카:할아버진 페치카에 가서 자요? 미트리치:그럼, 거기 말고 어디 잘 데가 있어야지. 넌 참 이상한 아이로구나. 뭐든지 꼬치꼬치 다 알려드니 말이다. (다시 이불을 잘 덮어주고 나서 일어난다) 자, 그럼 잘 자거라. (페치카 쪽으로 간다) 아뉴트카:한 번 우는 소리가 났는데, 그 다음엔 들리지 않아요. 미트리치:오오, 하나님, 자비로운 니콜라이님!... 뭐가 들리지 않는다구? 아뉴트카:갓난아기 말예요. 미트리치:없는 갓난아기 소리가 들릴 리가 있니? 아뉴트카:그래도 난 들었는 걸요. 정말 들었어요. 아주 가느다란 소리로 울었어요. 미트리치:못 듣는 소리가 없구나. 그럼, 이런 얘기도 들었니, 꼭 너 같은 계집애를 아기도둑이 자루 속에 넣어 가지고 막 두드려팬 얘기 말이다. 아뉴트카:아기도둑이 뭐예요? 미트리치:이렇게 아주 무섭게 생긴 놈이지. (페치카에 올라간다) 아아, 오늘은 참 페치카가 뜨뜻하군. 좋아! 오오, 하나님, 자비로운 니콜라이님! 아뉴트카:할아버지, 자요? 미트리치:자지 않으면 뭘 하니? 노래라도 부르련? 잠시 침묵 아뉴트카:할아버지, 할아버지! 파고 있어요! 정말 파고 있어요. 움 속에서 뭔가를 파고 있다니까요! 들리죠? 미트리치:너 참 별 걸 다 생각하는구나! 파기는 밤중에 뭘 파? 누가 파고 있단 말이냐? 소가 꼬리를 흔드는 소리를 가지고 그러는구나! 자, 어서 자거라. 안 자면 불을 꺼버리겠다. 아뉴트카:할아버지 불을 끄지 마세요. 네. 이젠 아무말도 안 할게요, 정말 안 할게요. 난 무서워서 그래요. 미트리치:무섭다구? 무섭지 않다고 생각하면 무섭지 않은 거야. 자꾸 무섭다고 생각하니까 그렇지. 넌 참 바보로구나. 잠시 침묵. 귀뚜라미 소리. 아뉴트카:(작은 소리로) 할아버지! 할아버지! 자요? 미트리치:응, 또 뭐냐? 아뉴트카:근데 그 아기도둑이란 건 뭣하는 놈이죠? 미트리치:그건 말이다, 너 같은 잠 안자는 애를 보면 얼른 자루를 갖고 와서는 그 계집애를 자루 속에 처넣는 거야. 그리고는 자기도 자루 속에 머리를 쑤셔 넣고, 그애의 궁둥이를 까고 찰싹찰싹 때려 주거든. 아뉴트카:뭘로 때려요? 미트리치:빗자루로 때리지. 아뉴트카:하지만 자루 속에선 잘 보이지 않을 텐데요? 미트리치:아니야, 잘 보일는지도 몰라. 아뉴트카:난 그런 놈은 꽉 깨물어 줄 테야. 미트리치:깨물긴 어떻게 깨물어! 아뉴트카:할아버지, 누가 와요! 누굴까? 아아, 어쩌면 좋아! 미트리치:오면 오는 거지. 너 왜 그러느냐? 아마 엄마겠지. 제2장 아니시야:(등장) 얘, 아뉴트카! 아뉴트카, 잠든 체하고 있다. 아니시야:미트리치! 미트리치:왜 그러시오? 아니시야:불을 왜 여태 켜 놓고 있지? 우린 저쪽에서 자는데. 미트리치:이제 막 잠잘 채비를 했어요. 불을 곧 끄리다. 아니시야:(궤짝 속을 뒤지며 중얼거린다) 정작 필요할 때는 눈에 띄지 않거든. 미트리치:뭘 찾으시우? 아니시야:십자가를 찾아요. 세례를 주려구요. 가엾게도 곧 죽어 버릴 것 같군요. 세례도 못 받고 죽게 해선 안 될 테니까요. 미트리치:암, 그렇구말구, 격식대로 해야죠... 그래 찾았소? 아니시야:여기 있군요. (퇴장) 제3장 미트리치:거 다행이군. 없으면 내 것이라도 빌려 주어야 했을 건데. 오오, 하나님! 아뉴트카:(벌떡 일어나서 몸을 떨며) 할아버지! 자지 말아요, 네, 할아버지! 무서워 죽겠어요! 미트리치:넌 뭐가 그렇게 무섭다는 거냐? 아뉴트카:갓난아기가 죽어 간다면서요? 아리나 아줌마네도 산파 할머니가 세례를 주었는데, 금방 죽어버렸어요. 미트리치:죽으면 갖다 묻어야지. 아뉴트카:어쩌면 죽지 않을는지도 몰라요. 마트료나 할머니가 와 있으니까. 난 할머니가 얘기하는 걸 들었거든요. 미트리치:뭘 들었다는 거냐? 어서 잠이나 자라니까! 이불을 머리서부터 푹 뒤집어쓰면 된다. 아뉴트카:죽지 않고 살면 내가 업어 줄 텐데. 미트리치:(신음하듯) 오오, 하나님! 아뉴트카:갓난아기는 어디로 보낼까? 미트리치:보내야 할 데, 보내겠지. 그런 건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서 잠이나 자라니까. 엄마가 또 오면 야단 맞는다! 잠시 침묵. 아뉴트카:할아버지! 아까 얘기하던 그 계집애는 죽지 않았나요? 미트리치:그 계집애 말이냐? 응,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아뉴트카:그앤 할아버지가 주워온 앤가요? 미트리치:응, 우리가 주워온 애였지. 아뉴트카:어디서 주웠죠? 얘기해주세요. 미트리치:어떤 집에서 주웠다. 우리 병정들이 마을에 들어가서 집집마다 뒤졌더니, 바로 그 계집애가 엎드려 자고 있지 않겠니? 모두들 그애를 때려주려고 했지만, 나는 어쩐지 가엾은 생각이 들어서 두 손으로 안아 올리려 했다. 그런데 어찌나 무거운지 꼼짝도 하지 않더라. 게다가 아무거나 손에 닿는 걸 움켜쥐고 놓지를 않아서 무척 애먹었다. 나는 그애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지. 그랬더니 좀 온순해지더구나. 그래서 건빵을 물에 축여 주었더니 굶주린 듯이 먹더라. 헌데 이애를 어쩌면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신통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내가 맡아서 기르기로 했다. 먹을 것을 주어 기르노라니까 그애도 점점 우리한테 익숙해져서, 행군 같은 데 함께 데리고 가면 먼데까지도 곧잘 따라오곤 했다. 정말 귀여운 아이였지. 아뉴트카:그앤 세례도 받지 않았나요? 미트리치:그걸 어떻게 아니? 정말은 받지 않았을 거라고들 하더라. 그도 그럴 것이, 그앤 우리 러시아 아이가 아니었거든. 아뉴트카:독일 아이였나요? 미트리치:독일 아이냐구? 아니다, 독일 아이가 아니라 아시아인이었다. 유대인과 마찬가지지만, 유대인은 아니야. 폴란드와 한패이지만, 역시 아시아인인 것만은 틀림없다. 크루들르라든가 크루글르라든가, 아무튼 그런 별명이 붙은 민족인데, 생각이 잘 나지 않는구나. 우린 그 계집애를 사쉬카라고 불렀지. 사쉬카, 참 좋은 아이였다. 지금 나는 옛날 일이라면 죄다 잊어버렸지만, 그애만은 지금도 눈 앞에 보이는 것 같다. 병정 생활 중에서 기억이 남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기합받은 일 정도인데, 그애 일만은 아직도 머리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곧잘 내 목에 매달리곤 해서 나는 그앨 안고 다니기도 했지. 어쨌든 참 얌전한 아이였다. 어디 좋은 데가 있으면 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좀처럼 그런 자리가 나타나지 않더구나. 결국 중대장 부인이 데려다가 양녀를 삼고 말았다. 그애를 위해선 참 잘된 일이지만, 그 대신 병정들은 무척 서운해 하더라. 아뉴트카:근데 할아버지, 난 우리 아버지가 죽을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어요. 할아버지가 우리집에 오시기 전인데, 아버지는 니키타를 불러서 '용서해라, 니키타' 하고 울었어요. (탄식한다) 정말 불쌍한 생각이 들더라니까요! 미트리치:음, 그야 그럴 테지... 아뉴트카:할아버지, 할아버지, 또 움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네요. 아아, 할아버지, 어쩌면 좋아! 아기를 어떻게 하려는가 봐요. 아기를 죽이려는가 봐요. 고렇게 조그만 것을... 아아!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운다) 미트리치:(귀를 기울인다) 정말로 무슨 못된 짓을 하고 있는가 보군. 천벌을 받을 것들 같으니라구! 아무튼 여편네들이 나빠. 사내도 물론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여편네들은 숲 속의 승냥이보다 더 하거든. 세상에 두려운 게 없다니까. 아뉴트카:(일어난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미트리치:또 뭐냐? 아뉴트카:요전에 지나가는 나그네가 우리집에서 자고 갔는데요. 그 사람 말이, 아기가 죽으면 그 영혼은 곧장 천당으로 간다던데 그게 정말인가요? 미트리치:그런 걸 어떻게 아니? 아마 그럴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냐? 아뉴트카:나도 죽었으면 좋겠어요. (훌쩍훌쩍 운다) 미트리치:죽으면 그만이야. 이 세상에서 영영 없어지고 마는 거지. 아뉴트카:열 살까지는 어린애니까 그 전에 죽으면 영혼이 하나님한테 갈 수 있을 거예요. 그렇잖고 더 살면 영혼이 더럽혀 진다면서요? 미트리치:암 더럽혀지고 말고! 여자라는 건 더럽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거야. 네가 본받을 사람이라는 게 대체 누구냐? 네가 보고 듣는 게 뭐냐? 결국은 좋지 않은 일뿐이지. 난 별로 배운 건 없어도 조금은 알고 있다. 아무렴, 내가 시골 여편네들 같겠니? 도대체 시골 여자들이 알고 있다는 게 뭐냐? 너 같은 여자가 이 러시아엔 몇 백 몇 천만이나 있지만 모두가 눈 먼 두더지야. 쥐뿔도 모른다니까. 기껏해야 피로 염병을 쫓는 법이라든가, 몸에 부적을 지닌다든가, 아이를 닭의 횃대 밑에 갖다 놓는다거나 하는 걸 알고 있을 뿐이지. 아뉴트카:엄마도 부적을 지니고 다녔어요? 미트리치:글쎄 그렇다니까. 여편네들이나 계집애들은 몇 백만 명이나 있어 봐야 모두가 하나 같은 것들이지. 숲속에 사는 짐승들과 뭐가 다르겠니? 그저 세상에 태어나서, 나이만 먹다가 죽는 것뿐이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해. 거기 비하면 사내들은 선술집에서나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간혹 도회지에 나갈 수도 있고, 또 경우에 따라선 나처럼 군대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보고 들을 수가 있거든. 그런데 여편네들은 어떠냐 말이다. 하나님이 뭔지 모르는 건 고사하고라도, 금요일이 뭣하는 날인지도 모른다니까. 금요일은 금요일이지만, 대체 뭣하는 날이냐고 한 번 물어 보렴. 알 턱이 없지. 꼭 눈먼 개새끼처럼 이리저리 기어다니며 쇠똥 속에 코끝을 처박는 게 고작이지. 계집들이란 바보같이 에헤야디야 노래를 부르는 것밖엔 모르거든. 하지만 뭐가 에헤야디야냐고 물으면, 꿀먹은 벙어리처럼 대답을 못해. 아뉴트카:그렇지만 할아버지, 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요'를 반이나 알고 있어요. 미트리치:허, 그 꽤 많이 알고 있구나! 하지만 너희들한텐 책임이라는 게 없어. 도대체 너희를 가르치는 게 누구냐? 주정뱅이 농부가 이따금 주먹을 휘두르며 가르치는 게 고작 아니냐. 너희들의 교육이라는 건 그거야. 도대체 누가 너희들에 대해 책임을 지지만, 계집애들에 대해선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거든. 지키는 사람 없는 더러운 가축이나 매한가지지. 정말이지 계집애란 속이 텅 빈 어리석은 동물이야. 아뉴트카:그럼, 어떡해야 하죠? 미트리치:어떡하고 뭐고 없어... 머리서부터 이불을 풀 뒤집어 쓰고 자면 되지. 오오, 하나님! 잠시 침묵. 귀뚜라미 소리 아뉴트카:(벌떡 일어나며) 할아버지, 누군지 고함을 지르고 있어요.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는가 봐요! 저것 보세요, 정말 고함을 지르고 있어요. 할아버지, 이리 오세요. 미트리치:그러니까, 이불을 푹 뒤집어 쓰라고 하지 않니! 제4장 니키타:(등장) 나한테 이런 짓을 시키다니! 아아, 나한테 이런 일을 시키다니! 마트료나:자, 술이라도 한 잔 마시렴. 너 왜 그러니? (술을 꺼내 놓는다) 니키타:주세요. 마셔야죠! 마트료나:쉿! 아직들 잠들지 않았다. 자, 마셔라. 니키타:아아, 어쩌자고 그런 짓을 생각해냈죠? 차라리 어디다 갖다 버리지 않고. 마트료나:(작은 소리로) 얘, 가만 앉아 있거라, 여기 가만 앉아 있어. 한 잔 더 하렴. 술이 싫거든 담배라도 피우든가. 그럼, 마음이 가라앉을 게다. 니키타:아아, 어머니, 이젠 아마 내 차례가 왔는가 봐요. 그 애처러운 울음소리, 바지직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 아아, 난 사람임이 아니야. 마트료나:쯧쯧, 쓸데없는 소리 하지도 말아! 하긴 밤중이라서 기분이 좀 나쁠지는 모르지만, 이제 날이 밝고 하루 이틀 지나면 죄다 잊어버리게 될 테니 염려할 것 없다. (니키타한테 다가가서 그 어깨에 손을 얹는다) 니키타:저리 가요! 어쩌자고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느냐 말예요? 마트료나:얘야, 너 정말 왜 이러느냐? (그의 손을 잡는다) 니키타:빨리 꺼지라니까! 안 꺼지면 죽여버리겠어! 이제부턴 어머니도 뭐도 아니야. 죽여 버리겠어! 마트료나:아이구머니나! 자, 그러지 말고 가서 잠이나 자렴. 니키타:내가 갈 데가 어디야? 난 이젠 망했어! 마트료나:(고개를 저으며) 아아, 아아! 어서 가서 말끔히 치워야겠군. 좀 앉아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을 테지. (퇴장) 제5장 니키타:(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앉아 있다. 미트리치와 아뉴트카, 숨을 죽이고 누워 있다) 아아, 울고 있다, 정말 울고 있어. 저기 저 소리... 똑똑히 들린다... 아 흙을 덮는 모양이로군. 틀림없어, 흙을 덮으면 안 돼, 아기는 아직 살아있어... 제6장 마트료나:(돌아온다. 작은 목소리로) 원 별소릴 다하는 구나! 살아있기는 어떻게 살아있단 말이냐! 뼈가 죄다 박살이 났는데 살아 있을 리가 있니? 니키타:술이나 더 줘! (마신다) 마트료나:얘야, 넌 저리 가서 자거라. 한잠 자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니키타:(일어서서 귀를 기울인다) 살아있다. 여전히 살아서 울고 있다... 아, 저것봐, 저 소리가 들리지 않아? 마트료나:(음성을 낮추어) 그렇지 않대두! 니키타:아아, 어머니! 난 내 일생을 영영 망쳐 버렸어. 어쩌자고 나한테 그런 짓을 시켰소? (방에서 달려나간다. 마트료나, 그 뒤를 쫓아 나간다) 제7장 아뉴트카:할아버지, 어쩌면 좋아! 아기를 죽여버렸나 봐요. 미트리치:(버럭 성을 내며) 자라는데 왜 자지 않는 거냐! 빗자루로 매 좀 맞아 보겠니? 빨리 자래두! 아뉴트카:할아버지, 누가 내 어깨를 붙잡는 것 같아요. 정말이에요, 누가 내 어깨를 움켜잡고 끌고 가려해요. 할아버지, 나도 페치카에 올라갈래요. 아아, 난 잡혀 가요, 잡혀 가요... (페치카 쪽으로 달려간다) 미트리치:망할 것들 같으니, 어린것까지 이렇게 겁을 집어먹게 하다니! 자, 올라오너라. 아뉴트카:(페치카에 올라가며) 할아버지, 어디 가면 안 돼, 응! 미트리치:내가 어딜 간다는 거냐? 자, 어서 올라와. 오오, 하나님, 자비로운 니콜라이님, 고마우신 카진의 성모 마리아님... 가엾게도 겁에 아주 질려 버렸구나. (아뉴트카에게 이불을 덮어준다) 너는 바보야, 바보... 하지만 어린것을 이렇게까지 놀라게 하다니, 천벌을 받을 것들 같으니. 제5막 1. 탈곡장.무대 정면에 건초더미. 왼쪽에는 곡물 창고, 오른쪽에는 문이 열린 헛간. 문 앞엔 밀짚이 흩어져 있다. 무대 뒤편에 뜰이 보이고, 노랫소리와 북소리가 들려온다. 두 처녀가 헛간 앞을 지나 길을 따라서 안채 쪽으로 들어간다. 제1장 처녀 2:어마, 이것 봐. 신발이 엉망이네. 저기까진 괜찮았는데, 마을에 들어오니까 오히려 길이 이렇게 더럽다니까... (멈춰서서 짚으로 신발을 닦는다) 처녀 1:(건초더미 속에 눈을 주다가 문득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 얘, 저건 뭐니? 처녀 2:(들여다 본다) 이 집 머슴 미트리치야. 곤드레가 되어 쓰러진 모양인데. 처녀 1:그 영감은 술 안 먹잖니? 처녀 2:사람들이 자꾸 권했겠지. 처녀 1:아마, 건초를 가지러 왔다가 쓰러져 잠이 들었나 봐, 손에 새끼를 쥐고 있어. 처녀 2:(귀를 기울인다) 아직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 보니 식이 끝나지 않았는가 봐. 아쿨리나는 통 울려고도 하지 않는다면서? (마을 전통상 시집갈 때 색시는 울게 되어 있다) 처녀 1: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아쿨리나는 가기 싫은 시집을 억지로 가는 거래. 의붓아버지가 을러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가기로 했다는구나 글쎄. 그렇잖았으면 죽어도 가지 않았을 거래. 별별 소문이 다 떠돌고 있거든! 제2장 마리나:(처녀들을 뒤쫓아와서) 아가씨들, 오랜만이군! 처녀들:안녕하세요! 마리나:잔치 구경 오는 길인가? 처녀 1:네, 이제 막 시작했는가 봐요. 구경 좀 하려구요. 마리나:우리 영감님 좀 불러주지 않겠어? 주얘프 마을의 세묜말야, 알지? 처녀 1:네, 잘 알아요. 아마 신랑댁 친척이죠? 마리나:응, 신랑이 우리 영감님의 조카뻘 되지. 처녀 2:그럼, 왜 들어가시잖고 여기서 아저씰 불러 내죠? 친척인데 잔치에 참석하러 온 게 아니고, 읍내 귀리를 싣고 가는 길인데, 말에 먹이를 주려고 잠깐 들렸더니, 우리 영감님을 끌고 들어가 버렸구먼. 처녀 1:마차는 어디 있죠? 표도르이치네 주막인가요? 마리나:응, 거기야. 난 여기 서 있을 테니 들어가서 영감님을 불러 내줘. 내가 이젠 떠나자고 한다고... 다른 사람들은 벌써 마차에 말을 다 매고 떠나려 하고 있다고 전해줘. 처녀 1:알았어요. 직접 들어가시기가 거북하다면 우리가 그렇게 전하죠. 두 처녀, 안채 쪽으로 들어간다. 노랫소리와 북소리 들려온다. 제3장 마리나:(생각에 잠기며) 들어가도 괜찮긴 하지만 아무래도 거북해. 그 사람이 나를 버린 후로는 한 번도 못 만났으니까. 벌써 2년이나 되었군. 그 사람이 요즘 아니시야하고 어떻게 사는지 좀 보고 싶기도 하지만... 소문을 들으니,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한 모양이던데. 성미가 거칠고 고집이 센 여자니까 그렇기도 하겠지. 간혹 내 생각이 나기도 했을 거야. 편한 생활에 혹해서 나를 버리더니만... 하긴 그 사람이 어떻게 되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 난 누구한테 원한을 품지는 못하는 성미니까. 하지만 그 때는 정말 분했어. 아아, 얼마나 가슴이 쓰라렸는지 몰라. 이제는 다 잊어버렸지만, 그러나 그 사람 얼굴을 한 번 보고 싶군... (뜰 안을 들여다보다가 니키타를 발견하고) 아아, 저기 오는구나. 그 처녀들이 뭐라고 말했나? 뭣하러 손님들을 놔두고 나오지? 난 가야겠군. 제4장 니키타, 고개를 떨구고 등장. 두 손을 내저으며 중얼거린다. 마리나:왜 저렇게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을까! 니키타:(마리나를 알아본다) 마리나! 아아, 마리누쉬카! 어쩐 일이야? 마리나:우리 영감님을 부르러 왔어요. 니키타:왜 혼인 잔치엔 오지 않지? 와서 구경하며 나를 실컷 비웃지 않고! 마리나:내가 뭣 때문에 비웃어요? 난 우리 영감님을 부르러 왔어요. 니키타:아아, 마리누쉬카! (포옹하려 한다) 마리나:(화난 듯이 몸을 피한다) 왜 이렇게 덤벼들죠? 그건 다 지나간 일이에요. 난 우리 영감님을 부르러 왔어요. 그이는 여기 와 있죠? 니키타:그러니까 뭐야, 옛날 일은 들추지 말잔 말인가? 마리나:새삼스레 옛날 일은 뭣하러 들춰요? 그건 다 지나간 일인데. 니키타:이젠 돌이킬 수 없다는 건가? 마리나:돌이킬 수 없구말구요. 그보다도 여긴 왜 나왔죠? 주인이 혼례식 자리를 떠나면 되나요. 니키타:(짚 위에 앉는다) 왜 나왔느냐구? 아아, 그걸 당신이 안다면... 난 살고 싶지 않아. 마리누쉬카, 난 모든 게 다 싫어졌어. 차라리 이 눈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면 좋겠어. 그래서 슬쩍 자리를 빠져 나와버렸지. 손님들을 피해서 나온 거야. 아무도 보고 싶지가 않아. 마리나:(그의 곁으로 다가간다) 왜 그러죠? 니키타:왜 그러구 뭐구, 밥을 먹어도, 술을 마셔도, 잠을 자도, 한시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일이 있기 때문이야. 아아, 나는 괴로와, 정말 괴로와! 그리고 마리누쉬카, 이 고민거리를 아무 한테도 털어 놓을 수 없는 것이 나는 무엇보다 괴로와. 마리나:그야 세상을 사노라면 괴로움도 있게 마련이죠. 나도 한 때는 괴로와서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이젠 그것도 다 옛일이 되어 버렸어요. 니키타:아마 나하고의 얘기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당신은 다 옛일이 되어 버렸지만, 나는 이제야 벌을 받을 차례가 되었나봐! 마리나: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니키타:난 지금의 생활이 싫어졌어. 난 나 자신이 싫어졌어. 아아, 마리나. 왜, 그때 당신은 나를 꼭 붙잡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나 당신이나 둘이다 일생을 망치고 만 거야! 도대체 이게 인간의 생활이라 할 수 있을까? 마리나:(헛간 옆에 서서 운다. 그러나 곧 자기 자신을 억제하고) 니키타, 난 내 생활에 불만이 없어요. 나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잘 살고 있으니까요. 나는 정말 아무것도 불평하지 않아요. 나는 그때 우리 영감님한테 모든 걸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어요. 그이는 아무 말 않고 용서해 주더군요. 난 내 생활을 고되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우리 영감님은 착한 분이라서 나를 귀여워해 주거든요. 그래서 나도 그이의 아이들을 잘 보살펴주죠. 그이는 나를 무척 아껴주어요. 난 하나도 불만이 없어요. 이것이 하나님 뜻인가 봐요. 당신은 어떻게 지내고 있죠? 물론 넉넉한 살림이라 편히 지내고 있겠지만... 니키타:어떻게 지내느냐구? 혼례 잔치에 소동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간신히 참고는 있지만, 그렇잖다면 당장 새끼줄이라도 가지고, 여기 이 새끼줄이라도 가지고 (짚 속에서 새끼줄을 집어든다) 저 대들보에다가 올가미를 만들어 거기다 모가지를 매달고 싶을 지경이야. 이게 내 생활이지. 마리나:그런 끔찍한 소린 하지 말아요! 니키타:내가 농담을 하는 줄 아나? 당신은 내가 술주정이라도 하는 줄 아는 모양이지? 난 가슴이 답답해 죽을 지경이야. 뭘 봐도 재미가 없어! 아아, 마리누쉬카, 당신과 만나던 그 시절이 정말 그리워. 기억하겠지, 철도국에 있을 때 둘이 함께 밤을 새우곤 하던 일을? 마리나:니키타, 묵은 상처를 건드리지 말아요. 나는 하나님의 법대로 했어요. 당신도 마찬가지죠. 내 죄는 이미 용서받았으니까. 새삼스레 옛일을 들추지 말아주었으면 좋겠어요... 니키타:그럼, 난 내 마음을 어떡하면 좋다? 내가 마음과 몸을 둘 곳은 대체 어디지? 마리나:할 수 없죠. 뭐, 당신한테 아내가 있잖느냐 말예요. 그러니 딴 여자한테 한눈 팔지 말고 자기 아내를 소중히 여기세요. 당신은 아니시야가 좋아서 부부가 되었으니까 끝까지 사랑해 주어야죠. 니키타:흥, 저 아니시야는 나한테 하나도 달가울 게 없는 여자야. 무슨 못된 덩굴처럼 내 발을 꼼짝 못하게 감고 늘어진다니까! 마리나:아무리 그렇더라도 역시 딴 사람 아닌 자기 안사람이니까... 무조건 아껴주어야죠! 그 보다도 어서 손님들한테 들어가 보세요. 우리 영감님도 좀 불러주고. 니키타:아아, 당신이 만일 내 기막힌 사정을 죄다 안다면... 하지만 그런 소린 할 필요도 없겠군. 제5장 마리나의 남편:(얼굴이 빨갛게 취해 가지고 안뜰 쪽에서 나온다) 마리나! 여보! 마누라, 당신 어디 있어? 니키타:저기 당신 남편이 오는군. 당신을 부르고 있어. 어서 가봐. 마리나:당신은 어떡하겠어요? 니키타:나 말이야? 난 여기 좀 누워 있겠어. (밀짚더미 속에 드러 눕는다) 마리나의 남편: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아뉴트카:아, 저기 있어요. 아저씨, 헛간 옆에요. 마리나의 남편:뭘 하고 서 있어? 어서 혼례식에 들어가 봐요! 이 집 사람들이 들어와서 인사도 하지 않느냐는군. 식도 이제 곧 끝날 테니까, 끝난 다음에 떠나면 돼. 마리나:(남편 쪽으로 다가가며) 들어가고 싶지가 않아서 그래요. 마리나의 남편:아니야, 들어가 봐야 해. 한 잔 마시고, 그 장난꾸러기 페트루쉬카 녀석의 결혼을 축하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섭섭해 할 거야. 그리고 나서 떠나도 늦지는 않을 테니까. (마리나를 껴안고 비틀거리며 함께 퇴장) 제6장 니키타:(밀짚 위에 일어나 앉는다) 마리나를 만나고 나니 더욱 가슴이 답답하군. 그 여자와 함께 지내던 시절이 제일 좋았어. 아아, 나는 어리석게도 내 일생을 망쳐 버렸어, 나 자신을 파멸시킨 거야! (눕는다) 이제 내가 몸 둘 곳은 어딘가? 차라리 이 땅덩어리가 두 쪽으로 확 갈라져 그 속에 떨어져 버렸으며! 아뉴트카:(니키타를 발견하고 그에게로 달려간다) 아버지, 아버지! 모두들 아버질 찾고 있어요. 교부님도 언니를 축복해 주었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축복해 주었어요. 그런데도 아버지가 안 보인다고 막 야단들이에요. 니키타:(혼자 소리로) 이제 나는 어디다 몸을 두어야 하나? 아뉴트카:뭐라구요? 아버지, 그게 무슨 말예요? 니키타:난 아무 말도 안했다. 왜 이리 귀찮게 구는 거냐? 아뉴트카:아버지, 빨리 들어가요. 네! (니키타, 잠자코 있다. 아뉴트카, 그의 손을 잡아 끈다) 아버지, 빨리 가서 축복을 하세요! 정말 모두들 화를 내고 있어요. 니키타:(손을 뿌리치며) 저리 가거라! 아뉴트카:어서 들어가요, 네! 니키타:(새끼줄을 치켜 들고 때릴 듯이 위협하며) 저리 가라니까! 안 가면 가만 안 놔둔다! 아뉴트카:그럼, 난 엄마를 내보낼 테야. (달려 들어간다) 제7장 니키타:(일어난다) 내가 어떻게 그 자리에 들어간단 말인가? 어떻게 이 더러운 손으로 성상을 잡는단 말인가? 어떻게 이 눈으로 아쿨리나의 얼굴을 본단 말인가? (다시 드러눕는다) 아아, 땅에 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버리고 싶다. 사람들이 나를 볼 수도 없거니와 나 역시 아무도 보지 않게 될 테니까. (다시 일어나 앉는다) 어쨌든 난 그 자리에 나갈 수 없어... 누가 뭐라고 해도 난 나갈 수 없어. (신발을 벗는다. 새끼줄로 올가미를 만들어 목에 걸어 본다) 이렇게 하면 그만이지! 제8장 니키타, 어머니를 보자 목에서 올가미를 벗고 다시 드러눕는다. 마트료나:(황급히 나간다) 니키타! 얘, 니키타! 너 여기서 찍소리도 않고 뭘 하고 있는 거냐? 왜 그래, 응? 취해서 그러니? 자, 가자, 모두들 기다리고 있다. 니키타:아아, 어쩌자고 나를 이 꼴로 만들었죠? 난 이제 인간이 아니예요. 마트료나:그게 무슨 소리냐? 빨리 들어가서 격식대로 축복을 하거라. 그것만 하면 일은 끝나는 거야. 모두들 기다리고 있다잖니! 니키타:내가 어떻게 축복을 한단 말이오? 마트료나:어떻게 축복을 하다니,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니키타:축복하는 법은 알고 있지만, 도대체 누구를 축복하라는 거요? 그런 일까지 있었는데 어떻게 내가 그애를 축복할 수 있겠어요? 마트료나:그런 일이라니? 다 지나간 일을 새삼스레 끄집어 내는구나! 그건 아무도 몰라. 고양이 새끼 한 마리도 모르는 일이야. 더욱이 그애도 자진해서 시집을 가겠다는데, 지금 그 일이 무슨 상관이냐? 니키타:자진해서 간다구요? 마트료나:하기야 안 가면 혼날까 겁이 나서 가는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제 입으로 가겠다고 하잖았니? 자기도 이젠 어쩔 수 없게 되었지. 그때만 해도 좀 생각할 여지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 와서 고집을 부릴 수는 없는 일이거든. 사돈집에서도 불만은 없을 거야. 그애를 두 번씩이나 보았고, 게다가 지참금까지 붙어 있으니까. 어쨌든 이젠 다 깨끗이 결말이 났어. 니키타:그럼, 움 속엔 뭐가 있죠? 마트료나:(웃으며) 움 속엔 양배추와 버섯과 감자가 있지, 또 뭐가 있겠니? 뭣 때문에 넌 지나간 일을 끄집어내는 거냐? 니키나:끄집어내지 않아도 된다면 나도 기쁘겠지만, 끄집어내지 않을 수가 있어야죠. 그 일을 생각하기만 하면 자꾸만 그때 그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걸 어떡합니까!... 아아, 어쩌자고 나한테 그런 일을 시켰죠? 마트료나:정말 너 무엇 때문에 자꾸 그러는 거냐? 니키타:(몸을 뒤집어 배를 깔고 엎드리며) 어머니! 제발 날 괴롭히지 마세요. 이제 난 망했단 말예요! 마트료나:어쨌든 축복을 해야 한다. 그러잖아도 말 많은 세상에, 의붓아비가 갑자기 없어져서 돌아오지 않는다, 축복을 꺼리고 있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되면, 당장에 꼬리며 지느러미까지 붙여서 떠들어 댈게 아니냐. 네가 떳떳하게 나서질 못하면 금방 눈치들을 채고 만다. 가슴 펴고 대로를 걸으면, 아무도 도둑놈으로 보지는 않는 법이야. 잘못하다가는 늑대를 피해 곰이 굴로 기어 들어가는 격이 된다. 첫째 시치미를 뚝 떼야 한다. 망설이는 것같이 보여서는 안 된단 말이다. 그러다간 대번에 눈치들을 챌 테니까. 니키타:아아, 그런 일에 왜 나까지 끌어들였어요, 어머니? 마트료나:또 그 소리구나! 자, 가자. 가서 축복을 해야 한다. 격식대로 떳떳이 하고 나면 그것으로 만사는 끝나는 거야. 니키타:(엎드린 채) 난 못해요! 마트료나:(혼자 소리로) 어쩌다가 이렇게 됐담? 여태까지 아무일 없이 잘되어 갔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다니, 정말 모를 일이로군. 니키타, 일어나거라! 저기 아니시야가 손님들을 버려두고 나오는구나. 제9장 아니시야:(화려한 복장. 술기운에 얼굴이 새빨갛다) 어머니, 그만하면 잘된 혼례식이죠? 하나에서 열까지 다 잘됐어요! 손님들도 모두 흡족한 모양이고... 그 사람은 어디 있죠? 마트료나:여기 있다. 짚 위에 드러누워서 도무지 일어나려 하질 않는구나. 니키타:(아내를 바라보며) 흥, 어지간히 취한 모양이군.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니까. 저런 여편네하고 어떻게 함께 산단 말인가? (홱 돌아눕는다) 언젠가는 내 손으로 저 여편네를 죽이게 될 거야. 날이 갈수록 더 싫어지기만 하니... 아니시야:아니, 밀짚 속엔 뭣하러 기어들었지? 취해서 속이 거북한가 보군. (웃는다) 나도 거기 들어가 함께 눕고 싶지만, 지금은 어디 그럴 겨를이 있어야지. 자, 내가 손을 잡아 줄 테니 어서 들어갑시다. 집 안에선 한창 흥겨운 판이 벌어지고 있어. 손풍금에 맞춰 아낙네들까지 춤을 추고 있다니까! 모두들 얼큰히 취해 가지고... 얼마나 좋은지 몰라! 니키타:뭐가 그렇게 좋아? 아니시야:혼례식이 좋지 뭐가 좋아! 이렇게 흥겨운 혼례식 잔치는 좀처럼 볼 수 없다고 칭찬들이 대단해요. 정말이지, 격식대로 아주 훌륭한 식을 치렀거든요. 자, 나하고 함께 들어갑시다... 나도 한 잔 마셨어요. 내가 손을 잡아줄 게요. (손을 잡는다) 니키타:(혐오의 빛을 띄우며 손을 뿌리친다) 혼자 가라구. 난 나중에 갈 테니. 아니시야:왜 그렇게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지? 골칫거리는 하나하나 다 쫓아 버리고, 방해물도 이젠 쫓아 버리게 됐으니, 이젠 우리도 재미있게 살아봅시다요. 모든 일이 다 흠잡을 데 없이 잘 해결되었어. 나는 어찌나 기쁜지 당신과 또 한 번 혼례식이라도 올리는 것 같은 기분이야. 구경꾼들도 모두 대만족이고... 모두들 칭찬이 대단하다니까. 손님들 모두 좋은 분들이야. 이반 모세이치도 오셨고, 순경나리도 오셔서, 다른 사람들처럼 진심으로 축하해주셨어. 니키타:그럼, 사람들하고 같이 앉아 있지 않고 뭣하러 나왔어? 아니시야:그러니까 당신도 들어가잔 말예요. 주인이 손님들을 내버려두고 없어지다니, 어디 그게 경우에 닿는 일인가요? 손님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뿐인데. 니키타:(일어나서 지푸라기를 턴다) 당신이 먼저 들어가구료. 곧 뒤따라 들어갈 테니까. 마트료나:내가 말할 때는 꼼짝 않더니 마누라가 말하니까 얼른 따라 들어가겠다는군. (마트료나와 아니시야, 안으로 들어간다) 그래, 곧 들어오겠니? 니키타:곧 들어간다니까요. 먼저 들어가세요. 나도 들어가서 축복을 할 테니까. 여자들, 걸음을 멈춘다. 니키타:어서 들어가요. 뒤따라 들어간다니까요. 여자들 퇴장. 니키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제10장 니키타:(혼자 앉아서 장화를 벗는다) 그럼, 나도 내 갈 길을 가볼까! 흥, 안 되지, 안 돼! 나를 찾아봐야 어림도 없지! 날 찾으려면 대들보에서나 찾아보렴. 올가미를 목에 걸고 대들보 위에서 뛰어내릴 테니, 그때나 찾아보란 말이다. 마침 여기 새끼줄도 있겠다... (생각에 잠긴다) 공연히 더 살아봐야 고통만 더 당할 뿐이야. 고통이라는 건 이 가슴 속에 있는 것이니까 떼어내버릴 수도 없거든. (안뜰 쪽으로 눈을 준다) 또 부르러 나올는지도 몰라. 뭐, 나도 거기 들어가 함께 눕고 싶지만 겨를이 없다구? 흥, 뻔뻔스런 여편네 같으니! 이 대들보에 매달린 다음에 어서 실컷 끌어안아 보라지. 내가 갈 길은 죽음뿐이야. (새끼줄을 잡아 당긴다) 미트리치:(술에 취해 일어나 앉는다. 새끼줄 한쪽 끝을 잡고 있다) 안 된다, 아무도 못 가져간다. 이 새끼줄은 내가 쓸 거야. 밀짚을 가져가겠다고 했으니 가져가야지. 니키타, 당신이군? (웃는다) 밀짚 가지러 왔소? 니키타:새끼줄 이리 줘. 미트리치:아니, 잠깐 기다리시오. 구경꾼들이 밀짚을 가져오라 했으니 어서 갖다 주어야지... (일어서며 짚을 거둬 모으기 시작한다. 비틀거리다가 끝내 쓰러지고 만다) 술이 이겼군. 내가 졌다, 졌어... 니키타:안준다면 안주는 거요. 아아, 니키타, 당신은 바보야, 돼지 배꼽이란 말이오. (웃는다) 난 당신이 좋아! 그러나 당신은 바보야. 당신은 내가 술을 먹었다고 눈을 부릅뜨고 있군. 하지만 난 꿈쩍도 안해. 나를 똑똑히 보라구. 난 하사야! 난 근위 제1연대 하사야. 황제 폐하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쳤단 말이오. 하지만 지금 나는 무엇일까? 당신은 나를 군인이라 생각하고? 아니, 나는 군인이 아니야. 나는 인간의 쓰레기, 사고무친의 떠돌이야. 나는 금주를 맹세하고도 오늘 또 술을 마셨어... 내가 당신을 두려워하는 줄로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천만에! 난 아무도 두렵지 않아. 일단 마시기 시작했으면 끝까지 마시는 거야! 이번엔 한 보름쯤 계속해서 마셔야지. 십자가건 모자건 다 마셔버려야지. 주민등록증까지도 잡히고 마셔버릴 테다. 난 아무도 두렵지 않아. 연대에 있을 때 술을 너무 마신다고 기합도 많이 받았지. 철썩철썩 갈기며 '어떠냐, 이래도 또 마실 테냐?' 고 묻기에, 나는 '마시겠다' 라고 대답해 주었지. 겁날 건 하나도 없어, 난 이런 인간이야. 일단 술을 끊겠다고 맹세했으니까 여태까지 입에 대지도 않았어. 하지만, 이번엔 마시기 시작했으니까 끝까지 마시는 거야! 겁날 건 하나도 없어. 왜냐하면, 나는 거짓말 같은 건 절대 안하는 솔직한 인간이니까... 뭣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어! 난 이런 인간이야! 어느 신부가 나한테 한 말이 있어. '악마란 놈은 거짓말이다' 인간이란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곧 겁장이가 되는데,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무서워 하기 시작하면 곧 그 악마란 놈이 그 인간을 휘어잡아 자기 맘대로 끌고 간다는 거야. 그러나 난 아무도 무섭지 않아. 언제나 태평하지. 그놈의 악마 따위는 문제가 아니야. 어디 한 번 나를 휘어잡아 보라지. 흥, 어림도 없지, 어림도 없어! 니키타:(성호를 긋고) 나는 대체 뭔가? (새끼줄을 던진다) 미트리치:뭐라구? 니키타:(일어선다) 그럼, 아무도 무섭지 않단 말이오? 미트리치:무서워할 게 따로 있지 인간을 무서워해? 목욕탕에 가서 인간들을 보란 말이오. 모두가 같은 반죽에서 나온 것들이지. 배때기가 큰 것과 작은 것이 다를 뿐이다. 도대체 무서워 할 이유가 있어야지! 제11장 마트료나:(앞뜰에서 나온다) 아아니, 왜 여태 안 들어오는 거냐? 니키타:아, 그렇다! 그렇게 하는 편이 낫겠다. 지금 들어갑니다! (앞뜰 쪽으로 간다) 2. 제1막과 같은 집. 식탁에 앉은 사람, 서 있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상좌에는 아쿨리나와 신랑이 나란히 앉아 있다. 식탁 우에는 성상들과 빵이 놓여 있다. 손님들 중에는 마리나와 그녀의 남편, 순경 등이 보인다. 여자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니시야, 손님들에게 술을 따라 준다. 노랫소리가 멎는다. 제1장 마부:떠날 거면 빨리 떠나야 할 게 아니오. 교회당이나 가까우면 또 몰라도. 신랑 후행:조금만 더 기다리게, 색시 아버지가 축복을 해야 하니까. 근데 어디 가서 이렇게 안올까? 아니시야:옵니다, 곧 와요. 자, 여러분, 한 잔씩만 더 드세요. 안 드시면 섭섭합니다요. 신랑 어머니:뭘 하노라고 이렇게 꾸물거릴까? 벌써 한나절은 기다렸군. 아니시야:곧 와요, 곧 온다니까요. 그보다도 어서들 드세요. (술을 권한다) 이제 곧 올 테니까. 그리고 그 사이에 아가씨들 노래나 한 곡 더 들읍시다. 마부:기다리는 동안에 벌써 노래라는 노래는 다 들은 걸요. 여자들,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노래 중간에 니키타와 아킴 노인 등장한다. 제2장 니키타:(아킴의 손을 잡고 앞으로 끌어낸다) 아버지, 이리 오세요. 이 자리에 아버지가 빠져서야 되나요. 아킴:난 그 뭐...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니키타:(여자들에게) 노래는 이젠 그만하시오. (좌중을 들러본다) 음, 마리나, 당신도 여기 있군. 신랑 어머니:어서 성상을 집어 들고 축복을 하셔야지요. 니키타:잠깐만 기다리시오.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쿨리나, 너도 여기 있구나. 신랑 어머니:뭣 때문에 이름은 하나하나 부르는 거요? 그애가 여기 있지 않고 어디 있겠소? 참 이상한 사람이군... 아니시야:아니, 여보! 당신 신발은 어디다 벗어 팽개쳤수? 니키타:아버지, 아버지도 여기 있군요! 나를 보세요! 그리스도 정교회의 여러분, 모두들 여기 이 자리에 있군요! 나도 여기 있어요! 자, 나는 이런 인간이오! (무릎을 꿇는다) 아니시야:니키타, 당신 왜 이러는 거요? 아아, 이게 무슨 꼴이람! 신랑 어머니:아아니, 저 양반이!... 마트료나:아무것도 아니예요, 프랑스 술을 너무 마시더니 저렇게 취했군요. 니키타, 정신 좀 차려라. (여럿이 그를 일으키려 한다) 니키타:(아무에게도 주의를 돌리지 않고 앞만 바라보며) 그리스도 정교회의 여러분! 나는 죄 많은 놈이오. 나는 참회를 하려는 거예요. 마트료나:(그의 어깨를 잡아 끌며) 아니, 너 미쳤니? 여러분, 아무래도 머리가 좀 돈 것 같으니 저리 데려가 주세요. 니키타:(어머니의 손을 뿌리치며) 비켜요! 아버지, 들어주세요, 이건 옳은 일이니까. 그리고 마리나, 이쪽을 보라구. (그녀의 발밑에 부복했다가 몸을 일으킨다) 난 당신한테 죄가 있어.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당신을 유혹한 후에 당신을 버렸어. 제발 나를 용서해 줘. (다시 그녀의 발밑에 엎드린다) 아니시야:이게 무슨 짓이야? 아무도 묻지 않는 소리를 뇌까릴 필요가 어디 있어? 일어나요! 이런 창피가 어디 있담! 마트료나:아무래도 너, 무엇에 홀린 모양이로구나? 이게 무슨 꼴이람! 아주 머리가 돌아 버렸어. 빨리 일어나지 못하겠니! (그를 잡아 끈다) 니키타:(고개를 젓는다) 저리 비켜요! 마리나, 용서해 줘. 내가 죽을 죄를 지었으니 제발 용서해줘. 마리나,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말이 없다. 아니시야:일어나라니까! 이게 무슨 창피냐 말야! 느닷없이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니, 정말 미쳐버린 모양이군. 아아, 이 일을 어쩌면 좋아! 니키타:(아내를 떼밀어내고 아쿨리나를 향해) 아쿨리나, 이번에 너한테 해야 할 말이 있다. 그리스도 정교회의 여러분, 들으시오! 나는 아주 못된 놈이오! 아쿨리나! 나는 너한테도 큰 죄를 저질렀다. 너의 아버지는 제 명에 죽은 게 아니야. 독약을 먹고 죽었어. 아니시야:(비명을 올리며) 아이구머니나! 저게 무슨 소리야! 마트료나:아주 완전히 미쳤군. 빨리 저리로 끌고 가세요. (사람들, 모여들어 그를 끌고 가려 한다) 아킴:(두 손으로 사람들을 밀어내며) 잠깐만! 여러분, 잠깐만 기다려요! 니키타:아쿨리나, 너의 아버진 내가 독약을 먹여 죽였다. 죽을 죄를 지었으니 제발 용서해 다오. 아쿨리나:(튀어 일어나며) 거짓말예요! 난 누가 죽였는지 알아요. 신랑 어머니:너는 왜 그래? 앉아 있거라. 아킴:오오, 하나님, 이런 끔찍한 죄가 어디 있담! 순경:저놈을 체포해라! 이장과 증인을 불러와. 조서를 꾸며야겠다. 니키타, 일어서라. 이리와! 아킴:(순경에게) 순경 나리. 잠깐만 기다리시오. 끝까지 다 말할 수 있게 잠깐만 기다리시오. 순경:(아킴에게) 영감님, 방해를 하면 안 돼요. 나는 조서를 꾸며야겠소. 아킴:잠깐만 기다려 달라지 않소. 그까짓 조서 같은 건 문제가 아니예요. 이건 하나님에 대한 거예요... 인간 하나가 옳은 길을 찾아 자기 죄를 회개하려는 마당에서 그까짓 조서 같은 게 무슨 대수란 말이오? 순경:어서 이장을 불러라! 아킴:아무튼 하나님에 대한 회개가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 주시오. 그 다음엔 나리 맘대로 하시구료. 니키타:그것만이 아니야, 아쿨리나, 나는 너한테도 큰 죄가 있다. 나는 순진한 너를 유혹했어. 제발 용서해다오! (그녀의 발 밑에 엎드린다) 아쿨리나:(제자리를 떠나며) 놓아줘요, 난 시집가지 않을 테야. 니키타가 가라고 해서 마지 못해 가겠다고 했지만, 이젠 가지 않을 테야. 순경:방금 한 말을 또 한 번 해 봐. 니키타:순경 나리, 끝까지 다 말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아킴:(환희에 찬 목소리로) 오냐, 어서 말해라, 아들아, 죄다 말해라. 마음이 한결 편해질 게다. 인간을 두려위할 건 없다. 하나님께 회개하면 되는 거야. 하나님께, 하나님께! 하나님은 바로 여기 계시다! 니키타:나는 아버지를 독살한 후 그 딸까지 몸을 망친 수캐 같은 놈이오. 나는 그 딸을 손아귀에 넣어 일생을 망쳤을 뿐만 아니라, 생겨난 갓난애까지 죽여버렸소. 아쿨리나:그건 정말이에요. 그건 정말이에요. 니키타:움 속에서 갓난아기를 널빤지로 눌러 죽였소. 널빤지 위에 올라앉아서... 깔아 뭉갰단 말요... 뼈가 바지직바지직 부러지더군요. (운다) 나는 죽은 아기를 움 속에 묻어버렸소. 이건 모두 내가 한 짓이오. 나 혼자서 한 짓이오! 아쿨리나:거짓말예요. 그건 내가 시켜서 한 짓이에요. 니키타:나를 두둔하지 말아. 난 이젠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그리스도 정교회의 여러분, 나를 용서해주시오! (땅에 이마가 닿도록 절을 한다) 잠시 침묵 순경:저 놈을 포박해라. 이 혼례식은 깨진 것 같소. 사람들 끈을 가지고 다가간다. 니키타:잠깐만 기다려두시오. (아버지 발밑에 엎드린다) 아버지, 이 저주받은 놈을 용서해주세요! 처음에 내가 저 더러운 구렁텅이에 발을 내디뎠을 때, 아버지는 나를 붙잡고 '발톱 하나만 걸려 들어도 새의 목숨은 끝나는 것이다' 라고 말하셨는데,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는 이 꼴이 되고 말았어요. 제발 나를 용서해주세요. 아킴:(뛸듯이 기뻐하며) 아들아,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신다. (포옹한다) 이게 너는 네 몸을 아끼지 않고 내던졌으니, 하나님께서 기꺼이 용서해주실 게다. 그 하나님은 바로 이 자리에 계시다!... 제3장 이장:(등장) 증인은 여기 얼마든지 있어요. 순경:지금 곧 심문을 시작하자. 사람들이 니키타를 포박한다. 아쿨리나:(다가와서 니키타 옆에 나란히 선다) 내가 사실대로 말하겠어요. 나도 심문해 주세요. 니키타:(포박당한 채) 뭐 심문할 필요도 없어요.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나 혼자서 한 짓이니까. 내가 꾸며 가지고 내 손으로 한 짓이오. 자, 어디로든 어서 끌고 가시오.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겠소. 문명의 열매 등장인물 레오니드 표도로비치 즈베즈진체프:퇴직 근위 기병 중위. 지방 여기저기에 걸쳐 7천 2백만 평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60세 전후의 온건하고 유쾌한 신사이다. 강신술을 믿으며, 기발한 이야기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를 좋아한다. 안나 파블로브나 즈베즈진체바:그의 아내 젊게 차려 입기를 좋아하는 풍만한 체구의 귀부인이다. 허영심이 강하여 사교 생활에 열중이다. 자기 남편을 멸시하고, 의사를 맹목적으로 믿는다. 걸핏하면 짜증을 낸다. 베시:레오니드와 안나의 딸. 20세 안팎의 사교를 좋아하는 아가씨. 남자들처럼 언동이 무척 개방적이다. 안경을 끼고 있으며, 교태스럽고 잘 웃는 편이다. 외국인들처럼 입술을 오므리며 빠른 소리로 그러나 아주 명확하게 말한다. 바실리 레오니도비치:레오니드와 안나의 아들로 25세이다. 법학을 전공했지만, 일정한 직업이 없고, 자전거 써클, 경마 협회, 보르조이엽견 협회 등의 회원이다. 확고한 자신을 가진 무척 건강한 청년으로 굵은 목소리로 뚝뚝 끊어서 말을 한다. 때로는 몹시 심각해져서 침울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흥겹게 떠들며 웃어대기도 한다. 알렉세이 블라지미로비치 크루고스베틀로프:대학 교수로 50세 전후의 학자이다. 침착하고 유쾌하고 자신 있는 태도로 노래 부르듯 천천히 말을 하는, 대체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자기 주장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에겐 약간 멸시하듯 가볍게 응수한다. 담배를 많이 피운다. 몸이 여윈 대신 동작이 민첩한 편이다. 의사:40세 전후의 얼굴이 불그스름한 건장한 체구의 인물로 목소리는 우렁차지만, 대체로 무뚝뚝한 편이다. 항상 입가에 자기 만족의 미소를 띄우고 있다. 마리야 콘스탄치노브나:20세 가량 된 아가씨. 음악 학교 출신의 음악교사로,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고 단발형의 앞머리를 이마에 늘어뜨리고 있다. 아첨을 잘하며, 일부러 수줍게 보이려고 애쓴다. 패트리시체프:28세 가량의 언어학 전공 문학가. 항상 활동 무대를 찾아, 바실리와 마찬가지로 각종 써클 협회의 회원이 되어 있지만, 그밖에도 '무명옷 무도회(이 무도회에 참가하는 여성은 반드시 무명옷을 입어야 한다)'의 회원이기도 하다. 대머리에 말할 때의 동작은 성급한 편이지만 점잖은 태도를 잃지 않는다. 남작 부인:50대의 거드름이 가득찬 귀부인. 신경은 무딘 편이다. 억양이 전혀 없는 어조로 말을 한다. 공작 부인:상류 사회의 귀부인. 손님이다. 공작의 딸:상류 사회의 아가씨. 얼굴을 찡그리는 버릇이 있다. 손님이다. 백작 부인:동작이 둔한 늙은 귀부인. 가발에 의치를 끼고 있다. 그로스만:머리털과 살갗이 거므스름하고 신경질적이지만, 동작이 무척 민첩한 사나이다. 굉장히 큰소리로 말한다. 뚱뚱한 부인:마리야 바실리여브나 톨부히나. 권세 있고 부유한 귀부인으로 사람은 좋은 편이다. 유명한 사람들과 친분이 많은 편이다. 굉장히 뚱뚱한 몸집. 빠른 소리로 지껄여대며 자기의견을 강요한다. 담배를 피운다. 클린겐 남작(코코):페제르부르그 대학 출신으로 대사관 무관인, 더할 나위 없이 예의 바르고 침착하면서도 쾌활한 사람이다. 사하토프:세르게이 이바노비치, 50세 전후의 전직 차관으로 유럽식 교육을 받은 고상한 신사이다. 일정한 직업은 없으나, 무슨 일에나 흥미와 관심을 가진다. 지나칠 만큼 의젓해서 약간 딱딱한 느낌을 준다. 표도르 이바노비치:즈베즈진체프 집안의 집사. 나이는 60세 가량으로 교양있는 노인이다. 무엇보다도 교양을 존중한다. 제멋에 손잡이 안경을 쓰곤 하며, 손수건을 천천히 펼쳐 드는 버릇이 있다. 정치에 관심을 가진 현명하고 선량한 사나이다. 그리고리:26세로 하인이며 바람기가 있는 미남자다. 질투심이 강하고 건방지다. 야코프:40세 전후의 주방장. 극성스러운 호인이나 시골에 있는 자기집 생각만 하고 있다. 세묜:주방의 접시닦기 하인이며 20세 안팎. 건강하고 청순한 시골 청년. 아직 수염이 자라지 않았다. 늘 미소를 띄운 얼굴에 얌전한 성격을 지녔다. 마부:35세 가량. 콧수염 기른 멋쟁이다. 무뚝뚝한 대신 할 말은 서슴지 않고 하는 성격이다. 늙은 요리사:45세 가량. 더벅머리에 면도하지 않는 누런 얼굴을 하고, 남루한 무명 외투에 더러운 바지, 낡은 장화를 신고 있다. 언제나 몸을 떨고 있다. 목쉰소리로 말을 하는데, 그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장애물을 뛰어넘듯 입 속에서 튀어나온다. 식모:수다스런 30세 전후의 여자로 항상 불평 불만이다. 문지기:제대 군인. 타냐:타쟈나 마르코브나, 잔심부름하는 하녀로 16세이며, 생기 발랄하고 명랑한 처녀지만 좀 변덕이 있다. 기쁘거나 좋을 때는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를 지른다. 농부 1:60세 가량. 조합장을 지낸 적이 있다. 귀족, 지주계급을 다루는 법을 터득했다고 자인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좋아한다. 농부 2:세묜의 아버지로 45세, 말수가 적고 성격이 강직하다. 농부 3:70세 가량. 나무 가죽신을 신고 다닌다. 언제나 불안한 듯 무슨 일에나 덤비기를 잘한다. 몹시 소심한 성격이지만, 입으로 자기의 소심을 숨기려 한다. 하인 1:백작 부인을 모시고 있는 옛날식 늙은 하인. 하인임을 자랑으로 알고 있다. 하인 2:몸집이 건장하고 무뚝뚝하다. 점원:깨끗하고 불그레한 얼굴. 푸른 망토를 입고 있다. 지나칠 만큼 분명한 어조로 한마디 한마디 끊어가며 말한다.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즈베즈진체프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제1막 무대는 모스크바의 부유한 저택의 현관 홀. 세 개의 문, 정면에 문이 하나 보이고, 주인 레오니드의 서재로 통하는 문이 보인다. 층계는 위층 침실로 통하고, 층계 뒤의 통로는 식당으로 통한다. 제1장 그리고리 혼자, 거울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그리고리:콧수염이 없는 게 유감이군! 하인은 수염을 길러선 안 된다, 이거지만, 흥, 왜 안된다는 거야? 결국 하인은 하인처럼 보여야 한다는 거겠지. 흐흣! 주인 마님이 애지중지하는 아드님보다는 내가 더 훌륭하게 보였다간 큰일이라는 건가? 하지만 훌륭하게 안 보일 수가 있느냐 말야. 콧수염 같은 건 없어도, 그깟 도련님 따윈 문제가 아니지... (싱글싱글 웃으며 거울을 들여다본다) 내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귀찮게 구는 계집이 어디 한둘이라야지! 그렇긴 하지만, 고 타냐년만큼 쓸 만한 계집애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단 말이야. 남의 집 하녀밖엔 안 되지만, 웬만한 귀족집 아가씨보다는 훨씬 예쁘거든. (히죽 웃는다) 어쩌면 고렇게 귀여울 수가 있을까! (귀를 기울인다) 아, 그애가 오는가 보다! (히죽 웃는다) 틀림없어. 또각또각 구둣소리로 귀엽게 걸어 나오시는군... 글쎄, 틀림없다니까! 제2장 타냐, 털가죽 외투에 구두를 신고 있다. 그리고리:어서 오십쇼. 타쟈나 마르코브나 아가씨! 타냐:만날 거울만 들여다보고 있네요! 당신 눈엔 썩 잘생긴 얼굴로 보이는가 보죠? 그리고리:그럼 뭐야, 흉하게 생겼다는 건가? 타냐:글쎄요... 썩 잘생긴 얼굴도 아니고 흉한 얼굴도 아니고, 그 중간쯤이겠죠, 뭐! 그보다도 왜 외투들은 저렇게 그냥 걸어 놔두고 있죠? 그리고리:네, 아가씨, 지금 치우고 있는 중이올씨다! (털가죽 외투 하나를 벗겨 타냐에게 덮여 씌우며 끌어 안는다) 이봐, 타냐, 내 말 좀 들어 보라구... 타냐:이런 짓하면 가만 안 놔둘 테야! 왜 이렇게 지분거리죠? (화를 내며 뿌리친다) 저리 비켜요! 그리고리:(주위를 둘러보며) 그러지 말고 키스 한번 해! 타냐:정말 왜 이렇게 귀찮게 굴까! 당신 같은 사람한테 요런 키스가 알맞지... (때리려고 손을 치켜든다) 바실리:(무대 뒤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뒤이어 그의 고함소리) 그리고리! 타냐:빨리 가봐요, 도련님이 부르시는데. 그리고리:좀 기다리시라지. 이제야 겨우 눈을 떴을 테니까. 이봐, 타냐, 왜 나를 좋아하지 않지? 타냐:좋아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난 그런 거 몰라요. 그리고리:거짓말 마! 세묜 녀석을 좋아하고 있으면서... 헝, 기껏 골라잡았다는 게 겨우 구린내 나는 시골뜨기 접시닦기야? 타냐:별 걱정을 다 하네. 당신은 어쩌니저쩌니 그 사람 흉을 보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그 사람을 질투하고 있는 건 뭐죠? 바실리:(무대 뒤에서) 그리고리! 그리고리:예, 갑니다!... (타냐에게) 흥, 내가 그깟 녀석을 질투해? 그보다도 넌 요즘 겨우 때를 벗기 시작했는데, 그런 녀석하고 붙었다간 신세 망친다. 망쳐! 차라리 나를 좋아해 보라구, 그런 녀석하곤 비교가 안될 테니... 타냐:(발칵 화를 내며) 백 번 말해도 마찬가지야. 당신 같은 건 상대도 안해! 바실리:(무대 뒤에서) 야, 그리고리! 그리고리:흥, 되게 딱딱하게 구는군. 바실리:(무대 뒤에서, 똑같은 어조로 계속해서 고함을 지른다) 그리고리! 야, 그리고리! 그리고리! 타냐와 그리고리, 웃는다. 그리고리:이래봬도 나한테 반한 처녀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지. 초인종이 울린다. 타냐:그럼, 그 처녀들한테 가면 되잖아요. 나 그만 귀찮게 굴고. 그리고리:내가 보기에 타냐 넌 바보야, 나는 세묜 따위와는 격이 다르단 말이야. 타냐:세묜은 정식으로 결혼할 생각이에요. 당신 같은 바람둥이가 아니란 말예요. 제3장 양복점 점원이 양복을 넣은 커다란 종이 상자를 들고 등장한다. 점원:안녕하시오! 그리고리:예, 안녕하시오! 어디서 왔죠? 점원:부르제 상점에서 옷을 가지고 왔습니다. 여기 마님한테 전할 편지도 갖고 왔어요. 타냐:(편지를 받는다) 여기서 좀 기다리세요. 내가 전하고 올 테니까요. (퇴장) 제4장 바실리, 셔츠에 슬리퍼 바람으로 문 틈으로 얼굴을 내민다. 바실리:그리고리! 그리고리:예, 지금 갑니다! 바실리:그리고리, 자네 귀가 먹었나? 그리고리:예, 방금 이리로 들어왔기 때문에... 바실리:더운 물과 차를 가져와. 그리고리:세묜이 곧 가져옵니다. 바실리:저건 누구야? 부르제 상점에서 왔나? 점원:예, 그렇습니다. 바실리와 그리고리 퇴장. 초인종이 울린다. 제5장 타냐, 초인종 소리를 듣고 달려 나와서 정면의 문을 연다. 타냐:(점원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점원:예, 예, 기다리겠습니다. 제6장 전직 차관인 사하토프, 정면에 있는 문으로 등장한다. 타냐:미안합니다. 손님을 안내하는 하인이 지금 잠깐 자리를 비우고 안에 들어갔습니다만, 곧 나올 거예요. 자, 그럼... (손님의 외투를 벗긴다) 사하토프:(옷 모양을 고치며) 레오니드 표도르비치는 댁에 계신가? 잠자리에서 일어나셨겠지? 초인종이 울린다. 타냐:그럼은요. 벌써 아까 일어나셨습니다 제7장 의사 등장한다. 의사:(두리번거리며 하인을 찾는다. 사하토프를 보자 허물없이 인사한다) 오, 안녕하십니까! 사하토프:(의사를 눈여겨 바라보다가) 의사시죠, 아마? 의사:외국에 가 계신 줄 알았는데 여기서 만나뵙게 되었군요! 레오니드 표도르비치를 만나러 오셨나요? 사하토프:그렇습니다만, 당신은 어떻게 오셨죠? 누구 앓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의사:(히죽히죽 웃으며) 뭐 앓는다고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만... 저런 마님은 참 난처합니다! 날마다 새벽 세 시경까지 트럼프놀이로 밤을 새우다시피 합니다. 게다가 술까지 한 잔 한단 말입니다. 뚱뚱한 몸집에 이제는 나이도 제법 잡수신 마님이 그 모양이거든요. 사하토프:그래, 당신의 그 진단 결과를 사실대로 안나 파블로브나한테 말씀드렸나요? 아마 좋아하진 않을 걸요. 의사:(웃으면서)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합니까. 이번엔 소화기 장애라느니, 이번엔 간장 압박이라느니, 또 이번엔 신경쇠약이라느니 하며, 당장 와서 치료해 달라고 사람을 보내곤 합니다. 정말 난처한 환자지요. (웃는다) 헌데 당신은? 당신 역시 강신술 신자십니까? 사하토프:나요? 나는 강신술 신자가 아닙니다... 그럼 실례하겠소! (나가려는 것을 의사가 제지한다) 의사:하긴 나도 역시 그 힘을 전적으로 부정하려는 건 아닙니다. 심지어는 크루고스베틀로프(알렉세이) 같은 분까지도 강신술을 믿고 있으니까요. 유럽에서 그처럼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 교수까지도 믿고 있는 걸 보면, 무조건 부정할 수만도 없을 것 같아요. 거기에는 반드시 뭔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 나도 한번 직접 구경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지만, 시간이 없어서 그게 잘 안 되는군요.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라야죠. 사하토프:그야 그럴 테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퇴장한다) 의사:(타냐에게) 마님은 일어나셨나? 타냐:아직 침실에 계십니다만, 어서 들어오시랍니다. 사하토프와 의사, 각각 다른 방향으로 퇴장. 제8장 재산관리인인 표도르가 손에 신문을 들고 등장한다. 표도르:(점원에게) 무슨 일로 왔소? 점원:부르제 상점에서 옷을 가지고 왔습니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라고 해서요. 표도르:음, 부르제 상점에서 온 사람인가! (타냐에게) 방금 온 손님은 누구냐? 타냐:사하토프씨와 의사 선생이 오셨어요. 여기서 잠깐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데, 역시 강신법 얘기더군요. 표도르:강신법이 아니라 강신술이야. 타냐:강신법이건 강신술이건 마찬가지죠 뭐. 표도르 이바노비치, 그 얘기 들으셨어요. 지난번엔 아주 대성공이었는데요. (웃는다) 톡톡 소리가 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물건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표도르:넌 그 얘기를 어디서 들었니? 타냐:주인댁 아가씨한테서 들었어요. 제9장 주방장 야코프, 쟁반에 찻잔을 받쳐들고 급히 등장한다. 야코프:(점원을 보고) 안녕하시오! 점원:(침울한 표정으로) 안녕하시오! 야코프, 바실리의 방문을 노크한다. 제10장 그리고리:이리 주시오. 야코프:어제 가져온 컵은 왜 하나도 돌려주지 않지? 게다가 도련님 방에 들여간 쟁반도 아직 그대로 있고. 그런데도 책임은 내가 져야 하니, 이거 어디 해먹겠나! 그리고리:쟁반엔 담배가 가득 담겨 있는 걸요. 야코프:그럼 담배를 딴 데다 옮겨 담으면 되잖아. 빨리 내보내 주지 않으면 나만 야단 맞네. 그리고리:예, 내오죠, 내와! 야코프:만날 입으로 내온다면서 내다준 적이 없잖나. 요전에도 쟁반이 없어서 차를 내오지 못했단 말야! 그리고리:내다준다는데 왜 이렇게 말이 많죠? 야코프:자넨 그렇게 한마디 해버리면 그만이겠지만, 나는 차를 세 번이나 내와야 하고, 조반상도 차려야 한단 말일세. 날이면 날마다 온종일 죽어라고 일을 해도 끝이 없어. 이 집에서 나만큼 일이 많은 놈은 아마 없을 거야. 그런데도 그걸 알아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거든. 그리고리:왜 알아주는 사람이 없겠어요! 모두들 칭찬이 대단한데... 타냐:당신 눈엔 누구나 다 못마땅하게만 보이는 모양이죠? 그리고리:(타냐에게) 누가 너더러 참견하랬어? (퇴장) 제11장 야코프:그렇다고 내가 화내는 건 절대 아니야. 그보다도 타냐, 마님께서 어제 일로 무슨 말씀이 없었나? 타냐:어제 일이라뇨? 램프 말인가요? 야코프:응, 그게 어떻게 내 손에서 떨어졌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난 그냥 램프를 닦으려고 했던 거야. 그런데 이쪽 손으로 옮기는 순간 어찌된 셈인지 쭈룩 미끄러져 박살이 나버리지 않겠어! 그건 다 내 처지가 처량하기 때문이야. 그리고리는 홀몸이니까 저렇게 태평할 수 있겠지만, 처자식이 있어 보라구. 아무래도 이것저것 그쪽으로 정신이 팔리게 마련이지. 첫째 먹여 살려야 하는 문제가 있잖느냐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내 몸 하나 고생하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야... 그럼, 마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단 말이지? 거참 다행이로군! 그건 그렇고, 표도르 이바노비치, 당신 방에 숟가락이 한 개 가 있죠? 아니, 두 개던가요? 표도르:한 개야, 한 개. (신문을 읽는다) 야코프 퇴장. 제12장 초인종 소리 울린다. 쟁반을 손에 든 그리고리와 문지기 등장. 문지기:(그리고리에게) 시골에서 농부들이 왔다고 주인 어른께 전해주게. 그리고리:(표도르를 가리키며) 저기 저 관리인 양반께 말씀드리게. 난 지금 바빠. (퇴장) 제13장 타냐:어디서 온 농부들이죠? 문지기:쿠르스크 지방에서 왔답니다. 타냐:어디서 온 농부들이죠? 문지기:쿠르스크 지방에서 왔답니다. 타냐:(반가와서 소리를 지르며) 그분들이 왔나봐요... 세묜의 아버지가 땅문제 때문에 오셨을 거야! 내가 나가서 맞아들여야지. 제14장 문지기:그럼, 어떻게 할까요? 이리로 들여보내도 괜찮을까요? 그 사람들은 '땅문제 때문에 왔는데, 나리님께서도 잘 아신다'라고 말하는데요. 표도르:응, 땅 흥정 문제로 만나뵙겠다는 거지. 그 말이 맞아. 하지만 지금 주인 어른한테 손님이 와 계시니까, 좀 기다리라고 하게나. 문지기:어디서 기다리게 할까요? 표도르:뜰 안에서 기다리게 하게. 이따가 내가 기별해 줄 테니. 제15장 타냐의 뒤를 따라 농부 세 사람이 등장한다. 타냐:오른쪽예요. 이쪽으로, 이쪽으로! 표도르:누가 이리 들여보내라고 했지? 그리고리:흥, 그것 봐! 타냐:그렇지만 괜찮지 않아요. 표도르 이바노비치! 구석에 서. 타냐:신발을 잘 닦았으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나중에 내가 또 청소하면 되죠 뭐. (농부에게) 그럼, 이리 들어와서 좀 기다리세요. 농부들, 들어온다. 손에는 과자, 달걀, 수건 등, 토산물을 무명 보자기에 싸서 들고 있다. 성상을 향해 성호를 긋고 나서, 표도르에게 절을 하고 한쪽 옆에 늘어선다. 그리고리:(표도르에게) 표도르 이바노비치, 피로네 상점의 각반은 아주 멋지다고들 하던데요. 그보다는 오히려 저 사람들이 감고 있는 각반이 훨씬 보기 좋은 것 같군요. (농부 3의 모직 각반을 가리킨다) 표도르:자넨 남을 놀리는 걸 취미로 삼고 있는가 보군. 그리고리 퇴장. 제16장 표도르:(일어서 농부들한테 다가간다) 쿠르스크 지방에서 온 분들이라고 들었는데, 그런가요? 땅을 매수하고 싶다는 얘기였죠? 농부 1:예,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이렇게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실은... 그... 토지를 꼭 매수하고 싶어서요. 나리님께 그렇게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표도르:압니다, 잘 알아요. 그럼, 잠시 여기서 기다리시오. 내가 들어가서 그렇게 여쭐 테니. (퇴장) 제17장 바실리는 무대 뒤에 있다. 농부들은 가져온 토산물을 어디다 놓을지 몰라서 두리번거린다. 농부 1:어떡하면 좋을까. 뭣이라 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걸 얹을 무슨 그릇 같은 것이 있어야겠는데... 뭐, 그, 그래 쟁반 같은 건 없는가? 타냐:네, 네, 곧 가져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우선 여기다가 놓아 두시죠. (가져온 토산물들을 긴의자 위에 놓는다) 농부 1:헌데 방금 여기 계시던 그 어른은 뭘 하시는 분이신지? 타냐:그분은 이 댁의 관리인이에요. 농부 1:관리인이라... 흠, 그럼, 그분도 역시 이 댁에서 고용살이를 하고 있군 그래? 그럼 색시도 역시 이 댁에서 일을 하고 있나? 타냐:난 잔심부름하는 하녀예요. 실은 나도 제메노 마을에서 왔거든요. 난 아저씰 알아요, 이 아저씨도 알구요. 이 아저씨만은 모르지만. (농부 3을 가리킨다) 농부 3:이 두 사람만 알고 나는 모른다는 건가? 타냐:(농부 1에게) 아저씬 예핌 안토느이치시죠? 농부 1:호오, 이것 참 놀랐는 걸. 타냐:그리고 아저씬 세묜의 아버지 되시는 자하르 트리포느이치시죠? 농부 2:맞았어! 농부 3:그럼, 내 이름을 가르쳐 줄까. 나는 미트리 칠리킨이야. 이젠 알았나? 타냐:그럼, 이젠 아저씨하고도 아는 사이가 된 셈이군요. 농부 2:근데 색시는 뉘 집 처자지? 타냐:난 아니시야의 딸이에요. 아버진 병정이었는데 돌아가시고 안 계셔요. 농부 1과 3:(몹시 놀라며) 엉? 그래?... 농부 2:음, 속담에도 '두 냥 주고 돼지 새끼 사서 귀리밭에 던져두기만 하면 절로 탐스럽게 자란다'란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옳기는 옳군. 농부 1:정말 옳은 말이야! 꼭 공주님 같군, 그래! 농부 3:누가 아니래! 정말 놀랍군! 바실리:(무대 뒤에서 초인종을 울리다가, 또다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야, 그리고리! 그리고리! 농부 1:아니, 저건 누군데 저렇게 악을 쓰지? 타냐:이 댁 도련님이에요. 농부 3:이거 야단났군. 그러게 내가 뭐라 했나, 밖에서 기다리자고 하잖았어! 잠시 침묵. 농부 2:우리 세묜이 장가들고 싶다고 한 아가씨가 바로 색시였군, 그래? 타냐:어머나, 벌써 그런 말까지 편지에 써 보냈나요? (앞치마로 얼굴을 가린다) 농부 2:그런 소릴 써 보냈더군. 하지만 그 녀석이 잘못 생각한 건 아닐까? 공연히 우쭐해 가지고... 타냐:(황급히)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이리 나오라고 할까요? 농부 2:뭐, 일부러 부를 것까진 없어. 아직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서두를 건 하나 없지. 바실리:(무대 뒤에서, 다시 악을 쓴다) 그리고리! 망할 녀석, 귀신이 물어갔냐? 제18장 바실리, 셔츠 바람으로 문에서 나온다. 안경을 쓰고 있다. 바실리:모두들 죽어버렸나, 어찌된 거야? 타냐:그리고리는 여기 없어요, 도련님... 제가 곧 불러올게요. (문쪽으로 간다) 바실리:방금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던데? 저 허수아비 같은 사람들은 뭐야? 타냐:도련님, 이분들은 쿠르스크에서 온 사람들이에요. 바실리:(양복점 점원에게) 그럼, 이 사람은 누구야? 아 참, 부르제에서 왔다고 했지? 농부들, 절을 한다. 바실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리고리, 문 앞에서 타냐와 마주친다. 타냐, 멈춰 선다. 제19장 바실리:(그리고리에게) 내가 다른 구두를 내놓으라고 했는데, 어찌된 거야? 이따위 구두를 어떻게 신고 다녀? 그리고리:예, 다른 구두는 저기 내놓았습니다. 바실리:뭐? 저기? 저기가 어디야? 그리고리:예, 저기 말입니다. 바실리:거짓말 말아! 그리고리:정말입니다. 저기 가서 보십시오. 바실리와 그리고리 퇴장. 제20장 농부 3:아무래도 여기 이러고 있는 게 좋지 않을 것 같구먼. 주막집으로라도 물러가서 기다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타냐:아녜요, 괜찮아요. 그냥 거기서 기다리세요. 제가 곧 쟁반을 내올게요. (퇴장) 제21장 사하토프, 주인 레오니드, 표도르가 함께 등장한다. 농부들, 토산물을 손에 들고 자세를 바로잡는다. 레오니드:(농부들에게)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주게. (점원을 보고) 이건 누구야? 점원:부르제 상점에서 왔습니다. 레오니드:오 그래, 부르제에서 왔나? 사하토프:(웃으며) 물론 나는 그걸 부정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실지로 그걸 보지 못한 우리로서는 좀처럼 믿을 수가 없다는 점을 이해하실 줄 압니다. 레오니드:그러니까, 당신은 믿을 수 없다, 그겁니까? 물론 우리는 억지로 그것을 믿어달라는 건 아닙니다. 다만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보라는 겁니다. 어쨌든 나로서는 이 반지를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반지는 바로 거기서 나한테 주어진 거니까요. 사하토프:거기서? 거기서라뇨? 레오니드:저승 말입니다. 저승에서 온 반지란 말예요. 사하토프:(빙그레 웃으면서) 거 참 재미있군요! 정말 재미있어요! 레오니드:당신은 나를 무엇에 홀려 머리가 좀 돌아버린 사람으로 생각하고 모양이군. 하지만 알렉세이 블라지미로비치 크루고스베틀로프 같은 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고 유명한 대학 교수예요. 그런 대학 교수까지도 그걸 사실이라고 믿고 있지 않느냐 말입니다. 아니, 그분만이 아닙니다. 크루크스 씨도 그렇고, 발라스 씨도 믿는단 말입니다! 사하토프:아니, 나도 굳이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무척 흥미있다고 말했을 뿐이니까요. 내 생각은 다시 말해서 크루고스배틀로프 씨가 어떤 해석을 내리고 있는지, 그게 흥미있다는 겁니다. 레오니드:그분은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이론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저녁에 오지 않으시렵니까? 그분도 꼭 올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로스만이 맨 먼저 실험을 해보일 겁니다... 그 유명한 독심술의 대가 말입니다. 물론 당신도 아시겠죠? 사하토프:성함을 들어서 알곤 있지만, 아직 한 번도 만난 일은 없습니다. 레오니드:그렇다면 꼭 오십시오. 처음에 그로스만, 다음엔 카프치치한테 시키겠습니다. 우리의 강신술은 매개자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표도르에게) 카프치치한테 심부름 간 사람은 돌아왔나? 표도르: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하토프:그럼, 난 어떡하면 좋을까요? 표도르:아니,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꼭 오십시오. 카프치치가 오지 않더라도 매개자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마리야 이그나치 예브나도 매개자로서 훌륭합니다. 하긴 카프치치만큼 강력하진 않습니다만, 그러나.... 제22장 타냐, 토산물을 담을 쟁반을 가지고 등장.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사하토프:(웃으면서) 흠, 그렇겠군요,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어째서 매개자는 카프치치나 마리야 이그나치예브나 같은 소위 인텔리 층에서만 나오느냐 하는 점입니다. 만약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한다면, 일반 대중 속에서도, 평범한 농부들 가운데서도 그런 것이 나와야 할 게 아닙니까? 레오니드:아니, 나오고 있어요.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현상이지요. 우리집에 있는 농촌 출신 하인 하나도 영혼의 매개자로서 손색이 없음이 드러났습니다. 이삼 일 전의 일이었는데, 실험도중에 그 하인을 불렀어요. 소파를 옮겨 놓아야 할 일이 생겨서요, 그러나 우리는 그 하인의 존재 같은 건 잊고 있었습니다. 아마 구석에서 졸고 있었겠죠. 그런데 실험이 끝나서 카프치치가 눈을 뜨기 시작했을 때, 저쪽 구석 하인의 주위에서 갑자기 매개 현상이 나타나더란 말입니다. 테이블이 움직이며 걸어가기 시작하지 않겠어요! 타냐:(혼잣소리로) 저런, 요전에 내가 테이블 밑에서 기어 나왔을 때 얘길하고 있네! 레오니드:그것으로 보아 그 하인 역시 매개자임이 명백합니다. 더욱이 그 사내는 영국의 실증주의 철학가 흄과 얼굴이 흡사하거든요. 흄을 기억하십니까? 아마빛 머리털을 가진 순진한 인물이죠... 사하토프:(어깨를 흠칫해 보이며) 그래요? 그것 참 재미있군요! 그럼, 그 사내도 실험해보면 좋지 않습니까? 레오니드:물론 실험할 작정입니다. 뭐 그 사내 하나만은 아닙니다. 매개자가 될 만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바로 며칠 전에도 병약한 노파가 글쎄 벽돌벽을 움직였다니까요! 사하토프:벽돌벽을 움직였다구요? 레오니드:예, 그렇습니다. 그 노파는 병들어 누워 있었는데, 자기가 영혼의 매개자인 줄은 전혀 물랐던 거예요. 그런데도 한 번 손으로 벽을 짚으니, 그 벽이 뒤로 물러나더란 말입니다! 사하토프:그래서 어찌 됐습니까, 벽은 무너지지 않았나요? 레오니드:예, 무너지진 않았어요. 사하토프:그것 참 이상하군요! 그럼, 나도 오늘 저녁에 꼭 오겠습니다. 레오니드:오십시오, 꼭 오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실험은 꼭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하토프, 외투를 입는다. 레오니드, 그를 배웅한다. 사하토프 퇴장. 제23장 점원:(타냐에게) 마님한테 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좀 여쭈어 주시오. 이렇게 밤중까지 기다리라는 건 아니겠죠? 타냐: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마님께선 지금 아가씨와 외출할 채비를 하고 계시니까. 곧 이리로 나오실 거예요. (퇴장) 제24장 레오니드:(농부들에게 다가간다. 농부들 그에게 절을 하고, 갖고 온 토산물을 바친다) 이런 건 뭣하러 들고 왔나? 농부 1:(싱글싱글 웃으며) 이건 이를테면 저희들의 의무니까요. 그리고 맨손으로 가선 안 된다는 협동조합분들의 당부도 있고 해서... 농부 2:받아주세요. 으레 그렇게 해야 하는 걸로 되어 있는 일인데요 뭐. 농부 3:그러니 여러 말씀 마시고 거두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희 아버지들은 나리님의 아버님을 모셨으니까, 저희들도 성심껏 나리님을 모시려는 것뿐이지요. 뭐 다른 뜻은 절대로 없습니다... (허리를 굽힌다.) 레오니드:그래, 자네들은 무슨 일로 왔나? 뭘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다는 건가? 농부 1:예, 그저 나리님의 자비심에 매달려 볼까 해서 온 것뿐입니다. 제25장 패트리시체프, 외투를 입은 채 급히 등장. 패트리시체프:바실리 레오니도비치는 일어났는가요? (바실리의 아버지 레오니드를 보고 가볍게 고개만 숙여 인사를 한다.) 레오니드:바실리를 찾아왔나? 패트리시체프:나 말입니까? 예, 잠깐 만나보려구요. 레오니드:그럼, 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게. 패트리시체프, 외투를 벗고 급히 들어간다. 제26장 레오니드:(농부들에게) 음, 그래, 용무는 뭔가? 농부 2:아무튼 가져온 물건부터 거두어 주십시오. 농부 1:(웃는 얼굴로) 그저 촌놈들의 성의의 표시라고 생각하십시오. 농부 3:뭐, 변변치 않은 물건입니다. 제발 사양하지 마시고 거두어 주십시오. 저희들은 나리님을 친부모와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는데, 너무 사양하시면 오히려 섭섭합니다. 레오니드:알겠네, 알겠어! 그럼 표도르, 그걸 받아두게. 표도르:(농부들에게) 그럼, 그걸 이리 주시오. (토산물들을 받는다) 레오니드:그래, 용건은 뭔가? 농부 1:실은 나리님의 자비심에 매달리려구요... 레오니드:그건 알아. 하지만 대체 용건이 뭔지 말을 해야 할 게 아닌가? 농부 1:다름 아니라, 토지 매수 건을 매듭짓고 오라고 해서... 레오니드:그러니까, 자네들은 땅을 사겠다는 건가? 농부 1:예, 바로 그겁니다. 다시 말해서, 토지 소유권을 아주 매수했으면 해서요. 협동조합에서 저희들을 대표로 내세워 일을 처리하고 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즉 규정대로 국립은행을 통해서 소정의 인지를 첨부하여 정식으로 수속을 밟고 오라는 거예요. 레오니드:그러니까, 은행을 통해서 토지를 매수하겠다, 그 말인가? 농부 1:예, 그렇습니다. 지난 여름에 나리님께서 제시하신 조건대로 매수하기로 했습니다. 토지 소유권 매수 대금은 합계 3만 2천 8백 6십 4루블로 정했었지요, 아마? 레오니드:그건 그렇지만, 지불 방법은 어떻게 할 작정인가? 농부1:대금 지불 방법은 역시 지난 여름에 말씀드린 것처럼 몇 차례로 분할해서 지불하도록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때 약속대로 우선 현금으로 4천 루블을 나리님께서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농부 2:그렇습니다, 우선 이 자리에서 4천 루블을 받아 주시고, 잔금은 나중에 갚게 해주십사 하는 겁니다. 농부 3:(돈꾸러미를 풀며) 나머지 돈은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은 몸뚱이를 저당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그 돈만은 틀림없이 갚아드릴 테니까요. 세상에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갚겠습니다. 암, 갚구말구요. 레오니드:이봐, 전액을 일시불로 하지 않는 한 절대로 응할 수 없노라고 내가 써보낸 편지를, 자네들은 받지 못했단 말인가? 농부 1:물론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야 저희들도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도저히 그렇게 할 형편이 못되어서 말씀드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레오니드:그럼, 대체 어떡하겠다는 건가? 농부 1:저희 조합원들은, 작년 여름에 나리님께서 대금을 분할해서 지불해도 괜찮다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레오니드:그건 작년 얘기 아닌가? 그땐 응낙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안 되겠네. 농부 2: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흰 나리님의 말씀만 믿고, 서류를 만들고 돈까지 거둬 가지고 왔는데요! 농부 3:나리님, 제발 부탁입니다! 저희들은 가진 거라곤 손바닥만한 땅밖에 없습니다. 소나 말은 고사하고, 닭 한 마리 기를 만한 여유도 없어요. (절을 한다) 그러니 나리님, 저희를 너그러이 보시고 정말 작년에 말씀하신 대로 매매를 해주십시오! 레오니드:하긴 내가 작년에 분할 지불의 방법으로 땅을 넘겨주겠다고 한 건 사실일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런 방법으로는 곤란하다는 거야. 농부 2:하지만 저희들은 그 땅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농부 1:그렇습니다, 나리님. 그 땅을 사지 못하면 저희들은 점점 살기가 궁색해져서 나중엔 아주 망하고 맙니다! 농부 3:(절을 하며) 나리님, 저희들은 손톱만한 땅밖엔 가진 것이 없습니다. 소나 말은 고사하고, 닭 한 마리 기를 만한 장소도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나리님,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제발 이 돈을 받아주십시오! 레오니드:(서류를 들춰보며) 알았네. 나로서는 가능한 한 좋도록 해결하고 싶지만, 잠깐만 기다려 주게. 30분쯤 기다리면, 되든 안되든 분명한 대답을 할 테니. 그럼 표도르! 누가 와도 만나지 않는다고 말해 주게. 표도르:예, 알았습니다. 레오니드 퇴장. 제27장 농부들 낙심한 표정. 농부 2:헛, 일이 이상하게 됐는 걸! 전액을 한꺼번에 지불하라니, 대체 어디서 그런 큰 돈을 마련한단 말인가? 농부 1:그럴 거라면 작년 여름에 우리들한테 그런 언질이나 주지 말았어야 할 게 아닌가! 그때 그 말만 철석같이 믿고 있던 우리한테, 이제 와서 어떡하라는 거지? 농부 3:이것 참 낭패인 걸! 공연히 미리 돈꾸러미부터 풀어 놓았지 뭔가! (다시 돈을 묶는다) 그러니 이젠 어쩌면 좋지? 표도르:뭐가 그렇게 낭패라는 거요? 농부 1:다름 아니라, 작년 여름에 이 댁 나리님께서 저희들에게 약속하시기를, 토지 대금은 몇 번으로 나누어 물어도 좋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우리 협동조합에서는 토지를 매수하기로 하고 우리 세 사람에게 이 일을 위임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나리님께서는 토지 대금 전액을 일시에 지불하라고 하시니, 우린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표도르:그래, 가져온 돈은 얼마나 되오? 농부 1:첫번 상환금으로 4천 루블이죠. 표도르:그럼, 좀 더 거둬보면 어떨까? 농부 1:이 돈을 거두는 데도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도대체 능력이 이것뿐인 걸 어떡합니까! 농부 2:거꾸로 쥐고 흔들어 봐도 이젠 동전 한 푼 나오지 않을 겁니다. 농부 3:더 거둘 수만 있다면 우린들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 돈을 걷는 데도 빗자루로 박박 쓸 듯해서 겨우 거둬 모았거든요. 제28장 바실리와 패트리시체프, 둘 다 담배를 피워 문 채, 문을 열고 등장한다. 바실리:글쎄 내가 말하지 않았나, 힘 자라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일단 그렇게 말한 이상 힘껏 노력하겠네, 노력하겠어. 헌데 뭔가? 패트리시체프:만약에 자네가 마련하지 못하면 정말 일이 난처하게 된단 말일세, 알겠나? 바실리:그러기에, 내가 힘 자라는 데까지 노력하겠다고 말하지 않느냐 말야. 그런데 또 뭐 할 말이 있나? 패트리시체프:아니야. 다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마련해야 한다는 거지, 알았나? 그럼 기다리겠네. (문을 닫고 퇴장) 제29장 바실리:(한 손을 내저으며) 흥, 제기랄! (농부들, 절을 한다. 바실리, 양복점 점원을 발견하고 표도르에게) 부르제에서 온 저 친구는 왜 아직 돌려보내지 않았지? 이 집에서 함께 살게 할 작정인가? 보라구, 아주 태평스럽게 잠이 들어버렸어! 표도르:예, 하지만 편지를 갖고 왔는데, 마님께서 내려오실 때까지 기다리라는 분부가 있어서... 바실리:(농부들을 보다가 돈꾸러미를 발견한다) 아니, 그건 뭔가? 돈 아냐? 누구한테 갖고 온 돈이지? 우리집에 갖고 왔나? (표도르에게) 이건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 표도르:쿠르스크 지방에서 올라온 농부들인데, 토지를 매수하겠답니다. 바실리:그래서 벌써 팔아 버렸나? 표도르:아니올시다. 아직 계약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인색하게 구는 바람에... 바실리:그래? 그럼, 알아들을 만큼 타일러줘야겠군. (농부들에게) 그래, 자네들이 토지를 매수하겠다는 건가? 농부 1: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토지 소유권을 매수하고 싶어서요. 바실리:그렇담, 너무 인색하게 굴면 안 되지. 농민에게 토지 이상으로 필요한 것은 없을 테니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 토지 이상으로 필요한 건 없겠지? 농부 1:그렇구말구요. 농민에겐 토지가 무엇보다도 필요하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바실리:그럼, 왜 인색하게 굴지? 생각해 보게. 토지란 뭔가? 첫째 밀을 심을 수 있잖나! 만약 심었다고 치면 3000평에서 적어도 열 여섯 섬의 밀을 거들 수 있지. 가령 한 말에 1루블 한다면, 160루블을 벌게 되지 않느냐 말야! 그렇잖은가? 그런데 그보다도 박하를 심어 보게. 박하를 심으면 3000평의 토지에서 천 루블쯤은 문제 없을 거야. 농부 1:옳은 말씀입니다. 농사만 제대로 지을 줄 알면, 무엇이든 다 심을 수 있지요. 바실리:뭐니뭐니해도 박하가 제일이야. 꼭 박하 농사를 짓도록 하게! 박하에 대해선 나도 좀 알고 있지. 책에도 씌어 있어. 자네들한테 그 책을 보여 줄 수도 있네. 농부 1:그렇겠지요. 책에는 무엇이든 다 씌어 있을 테니까요. 그게 학문이라는 게 아닙니까? 바실리:그러니까 토지를 꼭 사야지. 인색하게 굴지 말고 마땅한 대가의 돈을 내고 사란 말일세. (표도르에게) 아버진 어디 계시지? 표도르:예, 집에 계십니다. 하지만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바실리:아마 땅을 팔아야 할 건지, 팔지 말아야 할 건지 신령한테 물어보고 있겠지. 어때, 그렇잖아? 표도르:글쎄요,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바실리:이봐요, 영감, 아버진 지금 돈을 갖고 있을까? 영감 생각엔 어때? 표도르: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없기가 쉬울 겁니다. 하지만 그건 왜 물으십니까? 도련님께선 바로 일주일 전에 카아드놀이로 적지 않은 돈을 따셨다고 들었는데요. 바실리:그 돈은 개 때문에 다 없어져 버리지 않았나! 그리고 이번엔 우린 새로운 모임을 하나 만들었거든. 패트리시체프도 그 모임의 간사로 선출되었지. 그런데 나는 패트리시체프한테서 꾼 돈이 있기 때문에, 내 회비와 그 녀석 회비를 다 내가 물어야 한단 말일세. 표도르:그 새로운 모임은 무얼 하는 모임입니까? 자전거 써클 같은 건가요? 바실리:아니, 그런 게 아니야. 앞으로 자네한테도 가르쳐 주겠지만, 전혀 새로운 모임이지. 아주 유익하고 중요한 모임이야. 그 모임의 회장이 누군지 아나? 표도르:글쎄올씨다. 그보다도 이번 모임이 취지는 어떤 것입니까? 바실리:순러시아 견번식 장려협회라는 거야, 알겠나? 실은 오늘 이 협회의 첫 회합이 있는데, 함께 회식을 할 예정이거든. 하지만 지금 내 수중엔 한푼도 없으니 어떡하나? 아버지한테서 좀 뜯어낼 수밖에. 알았나? (문으로 해서 퇴장) 제30장 농부 1:(표도르에게) 저분은 누굽니까? 표도르:(빙그레 웃으며) 이 댁 도련님이죠. 농부 3:그래요? 그러니까 바로 나리님의 뒤를 이으실 분이로군요! (돈을 거둬 넣으며) 그럼, 이 돈을 감춰 갖고 있는 게 좋을 같군. 농부 1:이 댁 도련님은 기병대에 복무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표도르:아니, 도련님은 외아들이기 때문에 병역은 면제 받았소. 농부 3:그러니까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집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거군요. 하긴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겠죠. 농부 2:(고개를 가로 저으며) 저분이라면 아마 훌륭하게 부모님을 봉양할 거야! 흐흣! 암 봉양하구말구! 농부 3:오, 하나님 맙소사! 제31장 바실리 등장, 그 뒤를 따라 레오니드, 문으로 나타난다. 바실리:흥, 언제나 이렇다니까! 맨날 빈둥빈둥 놀기만 한다고 잔소리를 하면서도, 정작 내가 일거리를 찾아 가지고 활동을 개시하여, 고상한 목적을 가진 협회를 창립하는 단계에 이르면, 기껏 3백 루블 정도의 돈도 아까와서 내놓으려 하지 않거든!... 레오니드: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설령 주고 싶더라도, 줄 돈이 없다! 바실리:하지만 땅을 팔지 않았습니까! 레오니드:땅은 아직 팔지 않았어. 그보다도 제발 귀찮게 굴지 말아 다오. 난 바쁘단 말이다! (문을 쾅 닫고 퇴장) 제32장 표도르:그러기에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들어가시지 말라고. 바실리:그러기에, 나도 난처하게 됐다고 말하지 않아! 그럼, 어머니한테 가 보는 수밖에 없군. 아버진 강신술인가 뭔가에 미쳐서 다른 일은 생각하려 하지도 않는다니까! (위층으로 올라간다) 표도르, 곧 신문을 펼쳐 들고 읽기 시작한다. 제33장 위층에서 베시와 마리야 콘스탄치노브나가 내려온다. 그 뒤를 따라 그리고리 등장한다. 베시:마차 준비는 되었나? 그리고리:예, 지금 곧 떠날 수 있습니다. 베시:(마리야에게) 얘, 우리 들어가 보자. 응! 그이가 틀림없어. 내가 보았는 걸. 마리야:그이가 누구지? 베시:잘 알면서 그러네. 패트리시체프지 누구야. 마리야:그래, 그이가 지금 어디에 있다는 거냐? 베시:오빠 방에 있을 거야. 들어가면 만날 수 있어. 마리야:하지만 혹시 그이가 아니면 어떡하지? 농부들과 점원,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베시:(점원에게) 당신이 부르제 상점에서 왔나요, 옷을 가지고? 점원:예, 예, 그렇습니다. 이젠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베시:난 몰라요. 엄마한테 물어 보세요. 점원:어느 분한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알 수가 없군요. 옷을 갖다 드리고 돈을 받아 오라고 해서 왔는데요. 베시:그러니까, 좀더 기다리라고 하잖았어요! 마리야:그건 잔치에 입고 나갈 옷이니? 베시:응, 참 멋진 옷이야. 그런데도 엄마는 그걸 받으려 하지 않는구나. 돈도 지불하려 하지 않고 말야. 마리야:왜 그러실까? 베시:왜 그러는지 우리 엄마한테 물어보렴. 오빠가 손을 내밀면 개 한 마리에 5백 루블도 아까와하지 않고 내주면서, 내가 입을 옷 한 벌에 백 루블은 너무 비싸다는 거야. 하지만 난 허수아비 같은 꼴을 하고 거기 나갈 수는 없어! (농부들을 가리키며) 저 사람들은 뭐지! 그리고리:시골에서 온 농부들입니다. 토지를 사겠다고 올라온 모양이더군요. 베시:그래? 난 사냥꾼들인 줄로만 알았지. 당신네들은 사냥꾼이 아닌가요? 농부 1:원 당치도 않은 말씀을 하십니다. 저희들은 토지 매수 계약을 하려고 이 댁 나리님을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베시:이상한데요. 우리 오빠는 사냥꾼들을 기다리고 있거든요. 오늘 오게 되어 있대요. 그럼 당신네들은 정말 사냥꾼이 아니란 말이죠? 농부들 대답이 없다. 베시:정말 멍청한 사람들도 다 있군! (바실리의 방문으로 다가가서) 오빠, 있어요? (큰소리로 웃는다) 마리야:방금 윗층에서 만나지 않았니! 베시:그런 걱정하느니 넌 네 걱정이나 하렴!... (문에다 대고) 오빠, 있어요. 없어요? 제34장 패트리시체프:(등장) 안녕하시오, 오빠는 없어요. 하지만 내가 오빠 대신 무슨 일이든 다 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오오, 안녕하시오, 마리야 콘스탄치노브나! (처음엔 베시의 손을, 다음엔 마리야의 손을 잡고 한참 동안 세차게 흔들어 댄다) 농부 2:꼭 펌프로 물을 길어 올리는 것같이 악수를 하는군. 베시:당신은 오빠를 대신할 수 없어요. 하긴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높은 소리로 웃어댄다) 그런데 요즘 우리 오빠와 무슨 일을 하고 계시죠? 패트리시체프:무슨 일이냐구요? 우리들이 하는 일은 피난스예요. 이를테면 피이(휘파람 흉내를 내면서)와 난스지요. 그밖에 재정에 관한 일도 합니다만. 베시:난스라는건 뭐예요? 패트리시체프:그게 문젭니다! 즉 난센스란 뜻이거든요. 그러니 이거야말로 정말 난세스지 뭡니까! 베시:틀렸어요, 하나도 기발하지 못해요. (큰소리로 웃는다) 패트리시체프:언제나 번번이 히트를 칠 수는 없는 게 아닙니까? 말하자면 제비뽑기 같은 것이어서, 몇 번 껍데기를 뽑다 보면 나중엔 그야말로 히트를 치는 수가 있는 법이죠. 표도르, 레오니드의 방으로 퇴장. 제35장 베시:그러니까 지금 한 우스개 소리도 결국 히트는 못된다. 그 말인가요? 그건 그렇고, 엊저녁에 메르가소프네 집에 가셨던 가요? 패트리시체프:아니, 메르(프랑스어로 어머니) 가소프네라기보다는 뻬르(프랑스어로 아버지) 가소프네 집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죠..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피스(프랑스어로 아들) 가소프네 집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베시:당신은 그런 우스개 소리를 안 하고는 못 배기시는가 보군요. 그것도 일종의 병이에요. 그래, 집시들도 왔었겠죠? (웃는다) 패트리시체프:(노래한다) 앞치마 자락엔 수탉이... 황금빛 볏이 달린 수탉이... 베시:정말 재미있는 분이셔! 우린 어제 포포네 집에 갔다가 따분해서 혼났어요. 패트리시체프:(노래를 계속한다) 아가씨는 맹세했네... 나한테는 꼭 오겠노라고... 그 다음은 뭐더라! 마리야 콘스탄치노브나, 그 다음은 뭐죠! 마리야:나를 보러 잠깐 오겠노라고... 패트리시체프:뭐라구요! 마리야 콘스탄지노브나, 뭐라구요! 베시:집어 치우세요, 그걸 노래라고 하시는 거예요! 패트리시체프:집어 치우세요, 거둬 치우세요, 먹어치우세요... 베시:당신의 엉터리 농담을 듣지 않으려면 노래를 시키는 수밖엔 없군요. 그럼, 오빠 방으로 들어갑시다. 거긴 기타도 있을 거예요. 자, 들어가자, 마리야, 어서 들어가자니까! 베시, 마리야, 패트리시체프, 바실리의 방으로 들어간다. 제36장 농부 1:저분들은 누굽니까? 그리고리:한 분은 이 댁 따님이고, 또 한 분은 음악 선생님이랍니다. 농부 1:그러니까 학문을 하시는 분이로군요, 헌데 어쩌면 그렇게 어여쁘실까! 꼭 그림 속의 미녀 같군 그래! 농부 2:왜 시집을 보내지 않지요? 벌써 나이가 지났을 텐데, 그렇잖아요? 그리고리:당신네들처럼 열 댓 살이면 벌써 시집을 보내는 줄 아시오? 농부 1:그럼, 그 남자 분도 딴따라 하시는 분인가요? 그리고리:(그래도 말투를 흉내내며) 딴따라 하시는 분이라!... 정말 당신네들은 무식이 이만저만이 아니로군! 농부 1:사실 우리야 알짜 무식장이들이죠. 이를테면 청맹과니들이니까요. 농부 3:오오, 하나님 맙소사! 바실리의 방에서 기타 반주로 집시 노래가 들려온다. 제37장 세묜 뒤를 따라 타냐 등장. 타냐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면을 지켜본다. 그리고리:(세묜에게) 넌 뭐냐? 세묜:카프치치 씨 댁에 심부름 갔다 오는 길이야. 그리고리:그래서 어떻게 됐어? 세묜:오늘 저녁엔 참석할 수 없다는 거야. 그리고리:좋아. 그럼, 내가 들어가서 그렇게 전하지. (퇴장) 제38장 세묜:(아버지에게) 아버지 오셨군요, 안녕하세요! 에핌 아저씨도, 미트리 아저씨도 오셨군요, 안녕하셨어요! 집에서들은 다 잘 있나요? 농부 2:그래, 너도 잘 있었니? 농부 1:잘 있었느냐? 농부 3:그래 지내기가 어떠냐? 세묜:(미소지으며) 가서 차라도 한 잔 하시죠. 농부 2:용무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다오. 지금 그럴 겨를이 없다는 건 너도 알지 않느냐? 세묜:알겠어요. 그럼, 현관 앞에서 기다릴 게요. (퇴장하려 한다) 타냐:(뒤를 쫓아가며) 이봐요, 왜 나한텐 아무 말도 안 하죠? 세묜:여럿이 있는 데서 어떻게 말하라는 거야? 이따가 차 마시러 가서 얘기할께. (퇴장) 제39장 표도르 등장하여, 신문을 들고 창가에 가서 앉는다. 농부 1:(표도르에게) 저어, 우리들의 일은 어떻게 되어 가는지요? 표도르:조금만 더 기다리시오. 이제 곧 나오실 거요. 거의 다 끝나가고 있으니까. 타냐:(표도르에게) 그렇지만 표도르 이바노비치, 거의 끝나간다는 걸 어떻게 아시죠? 표도르:그야 알 수 있지. 나리님께서 물어볼 걸 다 묻고 나면, 질문과 대답을 소리 내어 다시 한 번 반복하시거든. 타냐:접시 따위를 사이에 두고 신령님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그게 과연 정말일까요? 표도르:글쎄... 정말인 것 같기도 하고. 타냐:그럼, 신령님께서 토지를 파는 데 서명하라 하시면 나리님은 서명하실까요? 표도르:그야 물론 서명하시겠지. 타냐:그렇지만 신령님은 입으로 말을 하시는 건 아니겠죠? 표도르:음, 글자로 말을 하시지. 접시가 글자에 가서 멎으면, 나리님은 그 글자를 적었다가 나중에 읽는 거야. 타냐:그럼, 만약에 강신술의 모임에서... 제40장 레오니드 등장한다. 레오니드: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네! 나도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주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구먼. 대금을 전액 마련해 가지고 온다면 별문제지만 말이야. 농부 1:그야 물론 저희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야 오죽 좋겠습니까. 그러나 저희들 같은 가난뱅이들이 어떻게 그 돈을 전액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레오니드:그렇담 할 수 없는 일이지. 나도 양보할 수는 없으니까. 자, 여기 자네들의 서류가 있네. 나는 서명할 수 없으니 그냥 가져가게. 농부 3:이 보십시오, 나리님. 제발 저희들을 가엾게 여겨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농부 2:어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그건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레오니드:내가 너무한 게 뭔가! 지난 여름에 난 자네들한테, 사려면 사라고 했어. 그런데 자네들은 사지 않았잖나. 그러나 지금은 내 쪽에서 팔 수 없다는 것뿐이야. 농부 3:이 보십시오, 나리님. 제발 저희들을 살려주십시오. 앞으로 저희들은 정말 살아나갈 길이 막막합니다. 쥐꼬리만한 땅 덩어리 가지고는 소나 말은 고사하고 닭 한 마리 기를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레오니드, 들어가려다가 문 앞에서 멈춰선다. 제41장 안나 부인과 의사가 위층에서 내려온다. 그 뒤를 바실리가 싱글벙글 웃으며 흥겨운 기분으로 따라 내려오며 돈을 지갑에 넣고 있다. 안나 부인:(몸에 꼭 끼는 의상과 모자를 쓰고 있다) 그럼, 그걸 마시면 되겠군요? 의사:그런 증상이 또 나타나면, 꼭 그 약을 복용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일상 생활에서 좀더 조심하시는 게 중요합니다. 부인께선 이를테면 가느다란 모세관에다 걸쭉한 시럽을 통과시키는 격입니다. 게다가 그 모세관을 누르고 있으니까, 이건 아무래도 곤란한 문젭니다. 담즙의 통로 역시 마찬가지죠. 안나 부인:네,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의사:그 '알았어요'가 안 된단 말입니다. 입으로만 그렇게 말씀하시고 전혀 몸조심을 안 하시면, 조금도 나아지질 않는단 말예요. 그럼,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안나 부인:부디 안녕히가 아녜요! 이따가 또 뵙겠습니다 라고 하셔야지. 오늘 저녁엔 꼭 와주셔야 해요. 당신 없이는 난 도저히 결정을 내릴 수가 없으니까요. 의사:예, 예, 알겠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또 들르죠. (퇴장) 제42장 안나 부인:(농부들을 보고) 저건 뭐야? 아니, 저건 뭐지? 뭐하는 사람들이야? 농부들,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표도르:쿠르스크 지방에서 올라온 농부들입니다. 땅을 사겠다고 주인 어른을 찾아왔습니다. 안나 부인:농부들이라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대체 누가 저 사람들을 집 안에 들여 놓았지? 표도르:주인 어른께서 들여보내라 해서... 방금 이 사람들과 토지 매매 건으로 여기서 말씀을 하셨어요. 안나 부인:뭘 매매한다는 거지? 아무것도 팔 필요가 없을 텐데? 그보다도 어쩌자고 함부로 한길에서 사람들을 집 안에 들여 놓았을까? 어디서 잠을 자고 왔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들여 놓으면 곤란하잖느냐 말이야! (더욱 흥분하며) 저 옷의 주름 사이사이에 병균이 득실거리고 있을 거야. 성홍열균, 천연두균, 디프테리아균! 더욱이 저 사람들은 쿠르스크 지방에서 왔다면서? 거긴 지금 디프테리아가 유행하고 있다는데... 오오, 의사! 의사! 빨리 쫓아가서 의사를 다시 불러와! 레오니드는 문을 닫고 퇴장한다. 그리고리는 의사를 부르러 달려나간다. 제43장 바실리:(농부들한테 담배 연기를 뿜는다) 어머니, 걱정하실 것 없어요. 내가 이 사람들한테 담배 연기를 듬뿍 뿜어줄 게요. 병균이 죄다 죽어 버리게. 그렇게 할까요? (안나 부인, 의사가 되돌아오길 기다리며 입을 봉하고 있다. 바실리, 농부에게) 자네들은 돼지를 기르고 있나? 꽤 수지가 맞을 거야! 농부 1:옳은 말씀입니다. 저희들도 더러 돼지를 기릅니다만. 바실리:이런 소릴 내지?... 꿀꿀, 꿀꿀! (돼지 새끼 울음소리를 흉내낸다) 안나 부인:얘, 바실리, 그만해라! 바실리:어때, 비슷하지 않나? 농부 1:아주 똑같습니다. 안나 부인:바실리, 그만두라니까! 농부 2:뭣 때문에 저런 소릴 내는 걸까? 농부 3:그러기에 내가 뭐랬어! 주막집에 물러가서 기다리자고 하잖았는가 말야. 제44장 의사를 부르러 갔던 그리고리가 의사와 함께 등장한다. 의사:또 무슨 일입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안나 부인:당신은 나더러 흥분하지 말라고 말하시지만, 이런 판국에 어떻게 태연할 수 있겠어요? 나는 지난 두 달 동안 내 동생조차 만나기를 꺼려 할 만큼 수상한 방문객들은 일일이 조심해왔어요. 그런데 저 사람들은 디프테리아가 유행하고 있는 쿠르스크 지방에서 올라와 곧장 이 집안에 깊숙이 기어들지 않았겠어요! 의사:흠, 바로 이 사람들 말인가요? 안나 부인:그렇다니까요! 디프테리아가 유행하는 지방에서 곧장 안나 부인:아니, 나더러 조심하라고 한 건 누군데 그렇게 말씀하시죠? 의사:예,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렇다고 그처럼 흥분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나 부인:그건 또 무슨 말씀이에요. 당장 집안을 완전히 소독해야 해요. 의사:뭐, 완전 소독을 할 것까진 없습니다! 그렇게 하자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듭니다. 아마 3백 루블 이상 먹힐 겁니다. 그보다도 내가 싸게 먹히면서도 효과가 큰 방법을 가르쳐 드리죠. 우선 큰 유리병에다 물을 넣은 다음... 안나 부인:끓인 물이라야죠. 의사:아니, 아무 물이나 괜찮습니다. 하지만 끓인 물이면 더욱 좋겠죠... 어쨌든 물을 가득 담은 병에다 살리실산을 두 숟갈 넣어 가지고, 그 용액으로 이 사람들의 손이 닿은 물건을 모조리 씻으면 됩니다. 물론 이 사람들을 여기서 내보내야겠죠. 그렇게만 하면 아주 안전합니다. 아, 참, 그 다음에 그 용액을 두서너 컵 가량 분무기로 공중에 분무하십쇼. 그렇게 하기만 하면 절대 안전합니다. 안나 부인:타냐! 타냐는 어디 있지? 타냐를 불러요! 제45장 타냐 등장한다. 타냐:부르셨어요. 안나 부인:오냐, 내 화장실에 커다란 유리병 있지. 타냐:어제 마나님께서 세탁장이한테 물을 끼얹으신 그 병 말씀이신가요? 안나 부인:그 병 말고 어디 또 있더냐! 어서 그 병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우선 그 사람이 서 있던 곳을 비누로 씻고, 그 다음에... 타냐:예, 그렇게 하겠어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가 잘 알아요. 안나 부인:그리고 분무기도 가져오너라... 아니, 그건 내가 돌아와서 직접하겠다. 의사: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튼 너무 걱정하실 건 없어요! 그럼, 이따 저녁에 또 뵙겠습니다. (퇴장) 제46장 안나 부인:어서 저 사람들을 쫓아내야지. 냄새가 배기 전에 얼른 쫓아내야 해. 자 빨리 나가줘요! 나가라는 데 뭘 멍청히 보고들 있는 거예요. 농부 1:원래가 저흰 무식한 놈들이라 그만 염치 좋게... 그리고리:(농부들을 몰아내며) 자, 어서들 나가시오. 농부 2:선물을 싸온 내 보자기라도 돌려주시오! 농부 3:오오, 하나님 맙소사! 그러기에 내가 말하지 않던가, 아까부터 일단 주막집에 돌아가자고. 그리고리, 그들을 밀어낸다. 농부들 퇴장. 제47장 점원:(몇 번이나 주저주저 입을 열려고 하다가) 저어, 돌아가서 어떻게 전하면 좋을는지요. 안나 부인:오오, 당신 부르제 상점에서 온 사람이에요? (짜증 섞인 어조로) 아무것도 전할 말 없어요! 그걸 도로 갖고 돌아가세요. 난 그런 옷은 주문한 일도 없거니와 그걸 내 딸한테 입힐 수도 없다고 당신네 주인한테 이미 말했단 말예요. 점원: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심부름을 왔을 뿐이니까요... 안나 부인:어쨌든 돌아가세요, 돌아가란 말예요! 그걸 도로 갖고 돌아가세요. 내가 직접 가게에 들를 테니까. 바실리:(거드름을 피우며) 여보세요. 부르제 상점의 점원 양반! 이젠 돌아가시오! 점원:그러면 그렇다고 진작 말해 줄 것이지, 다섯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고서는... 바실리:이거 봐요, 부르제 상점 점원 양반! 어서 꺼지시란 말요! 안나 부인:얘, 제발 넌 좀 가만 있거라! 점원 퇴장. 제48장 안나 부인:베시! 그 앤 또 어딜 갔나? 언제나 기다리게 한다니까! 바실리:(커다란 소리로) 베시! 패트리시체프! 빨리 와, 빨리, 빨리! 제49장 패트리시체프, 베시, 마리야 등장한다. 안나 부인:넌 언제나 나를 기다리게 만드는구나! 베시:어머나, 기다린 건 오히려 나예요. 패트리시체프, 고개를 끄덕해 보이고 부인의 손에 키스한다. 안나 부인:안녕하세요. (베시에게) 넌 언제나 말대답이구나! 베시:엄마가 기분이 좋지 않다면 난 함께 가지 않는 편이 나을 거야. 안나 부인:그래, 정말 안 갈 테냐. 어떡하겠어? 베시:할 수 없군요. 가야죠 뭐. 안나 부인:너 봤니? 부르제에서 보내온 옷 말이다. 베시:네, 보았는데 아주 마음에 들어요. 내가 맞춘 옷이니까, 엄마가 옷값을 지불해 주시면 입고 다니겠어요. 안나 부인:난 지불하지 않겠다. 그 따위 야한 옷은 못 입는다. 베시:어디가 야하다는 거죠? 전엔 고상하다고 하시더니. 갑자기 엄마가 굉장히 고상해지셨나 보군요. 안나 부인:무슨 소릴 하는 거냐! 어쨌든 허리께를 죄다 고친다면 몰라도, 그렇잖으면 안 된다. 베시:엄마, 고치긴 어떻게 고친단 말예요. 안나 부인:군소리 말고 빨리 나갈 채비나 해라. 두 사람, 앉는다. 그리고리가 외출용 구두를 신겨준다. 바실리:마리야 콘스탄치노브나! 이 방이 텅 빈 것 같지 않아요? 마리야:왜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웃기부터 한다) 바실리:부르제의 점원 녀석이 나가 버렸으니 말예요! 그렇잖아요? (큰소리로 웃어댄다) 안나 부인:자, 나가자. (문 밖으로 나갔다고 곧 되돌아온다) 타냐! 타냐:네에! 안나 부인:내가 없는 사이에 피프카가 감기 들지 않도록 해라. 혹시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거든, 노란 외투를 꼭 입혀 줘야 한다. 아직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으니까. 타냐:네, 알겠습니다. 안나 부인, 베시, 마리야, 그리고리 퇴장. 제50장 패트리시체프:(바실리에게) 어찌 됐어, 마련했나? 바실리:응, 겨우 마련했네. 처음에 아버지한테 말을 꺼냈다가 밑천도 못 찾고 쫓겨 나왔어. 그래서 어머니한테 가서 기어코 뜯어내고 말았지. 여기 있어! (호주머니를 툭툭 친다) 난 한 번 마음만 먹으면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 붙어 떨어지지 않거든... 어떤가? 그건 그렇고, 오늘은 내 볼코다프(승냥이처럼 사나운 개의 종류)를 데려오기로 되어 있다는 거 알지. 패트리시체프와 바실리는 외투를 입고 퇴장한다. 그들 뒤를 따라 타냐도 퇴장한다. 제51장 표도르:(혼잣소리로) 흠, 날이면 날마다 눈꼴사나운 일들 뿐이니, 어디 견딜 수가 있어야지! 어째서 이 집 사람들은 서로 화목하게 살지를 못할까? 하긴, 바른 대로 말해서,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옛날하곤 딴판이거든. 그보다도, 여자들의 활개치는 꼴은 정말 어이없을 지경이라니까! 아까도 주인 어른은 농부들한테 다시 좋은 말로 변명하려는 눈치였는데, 마님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걸 보자, 그냥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거든. 사실 주인 어른만큼 착한 양반들도 흔하지 않을 거야... 아니, 저건 또 뭐야. 타냐가 또 그 친구들을 끌고 오는군! 제52장 타냐:들어오세요. 아저씨들, 어서 들어오세요. 괜찮아요. 표도르:얘, 왜 또 끌어들이는 거냐? 타냐:아까 그 문제 말예요, 어떻게 해서든지 이분들을 도와 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나중에 내가 한꺼번에 싹 씻을 테니까. 그건 염려할 것 없구요. 표도르:하지만 내가 보기에, 아까 그 문제는 잘 해결되긴 틀린 것 같다. 농부 1:여보십시오, 우린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을 좋게 해결을 보아야만 한단 말입니다. 당신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줄 수는 없겠습니까? 그렇게 해주시면 우리 조합에서 사례는 충분히 할 겁니다. 농부 3:제발 좀 부탁합니다요! 그 땅이 없으면 우린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손바닥만도 못한 땅덩어리로는, 소나 말은 고사하고 닭 새끼 한 마리 기를 수 없는 형편입니다! (절을 한다) 표도르:글쎄, 나도 당신네들을 동정하긴 하지만, 어떡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구료. 당신네들의 입장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나리님께서 그렇게 거절하신 이상 이젠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오? 게다가 마님께서도 반대하고 계시니까, 일은 더욱 어렵게 됐단 말이오. 하지만 그 서류를 이리 주시오. 내가 직접 여쭈어 볼 테니. 제53장 타냐와 세 농부 한숨을 내쉰다. 타냐: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죠. 어서요, 아저씨들? 나한테 말해주세요. 농부 1:뭐 그저 나리님의 서명만 받으면 되는 건데... 타냐:그러니까 나리님께서 그 서류에 서명만 하시면 된다, 그 말인가요? 농부 1:그렇다니까. 서류에 서명하시고 돈만 받아주시면 그것으로 일은 끝나는 거지. 농부 3:나리님께서 자기 이름만 거기다 써 주시면 되는 거야. 조합 농부들이 바라고 있는 건, 즉 내가 바라고 있는 건 그것뿐이지. 타냐:이름만 거기다 쓰면 된다 이거죠? 정말 나리님께서 그 서류에다 서명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다 해결된다, 그 말이죠? (생각에 잠긴다) 농부 1:글쎄, 그렇다니까! 우리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야. 서명만 해주시면 더 이상 바랄 게 아무것도 없어. 타냐:어쨌든 표도르 이바노비치가 나와서 결과를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세요. 만약에 나리님께서 표도르 이바노비치의 말도 듣지 않으시면, 그때는 내가 일을 한 번 꾸며 보겠어요. 농부 1:나리님을 속여 넘기겠다는 건가! 타냐:아무튼 한 번 해보겠어요. 농부 3:호오, 색시가 한 번 힘써 보겠다구? 잘만하면 마을 사람들이 색시를 한평생 먹여 살릴 거야. 암, 그렇구말구! 농부 1:먹여 살리다 뿐인가! 정말로 이 일만 성공시켜 주면, 색시를 금방석에 앉힐 수도 있어. 농부 2:그야 물론이지! 타냐:글쎄요, 자신 있게 약속할 수는 없지만, 속담에도 밑져야 본전이란 말이 있잖아요. 농부 1:옳은 말이야. 해봐야 나쁠 건 하나도 없지. 제54장 표도르 등장한다. 표도르:안 되겠소. 아무리 말씀드려도 나리님께서 고개를 가로 저으시니, 어쩔 도리가 없구먼! 자, 이 서류를 받으시오. 그리고 이젠 돌아들 가시오! 농부 1:(서류를 받아 타냐에게 주며) 이젠 색시밖엔 희망을 걸데가 없구먼. 잘 좀 해보라구! 타냐:네, 곧 해보겠어요. 아저씨들은 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계세요. 내가 이내 달려 나가서 결과를 말씀드릴 테니까요. 제55장 타냐:저어, 표도르 이바노비치, 표도르 아저씨, 나리님한테 내가 좀 뵙고 싶다고 이리로 좀 나와 주십사고 여쭈어 주세요, 네! 나리님한테 좀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표도르:호오, 네가 나리님께 말씀드릴 것이 있다구? 타냐:네, 꼭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어요. 그러니까 아저씨가 제발 만나주시도록 잘 여쭈어 주세요. 네! 절대로 나쁜 일은 아니니까요. 그 점은 안심하시고... 표도르:하지만 대체 그게 무슨 일이냐? 타냐:딴 사람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에요. 아저씨한텐 나중에 얘기할 테니, 우선 나리님한테 그렇게 여쭈어 주세요. 표도르:(미소 지으며) 도대체 무슨 일을 가지고 그러는지 알 수가 없군. 아무튼 들어가서 그렇게 여쭈어 보겠다.(퇴장) 제56장 타냐:한 번 일을 꾸며 봐야겠다! 나리님 자신이 세묜에게 신령의 힘이 깃들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까, 난 그걸 이용해 보자는 거지... 요전에도 나를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 이번엔 세묜에게 미리 잘 가르쳐 주어야지. 설령 실패한대도 그리 큰 사건이 될 것도 없잖아. 죄가 될 만한 일도 아니니. 제57장 레오니드와 표도르 등장한다. 레오니드:(미소 띄운 얼굴로) 호오, 귀여운 처녀가 나한테 할 말이 있다구? 그래, 용건은 뭔가? 타냐:저어, 나리님 딴 사람에겐 알리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나리님한테만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레오니드:무슨 일인데 그러지? 그럼 표도르, 잠깐 자리를 비켜주게. 제58장 타냐:나리님, 저는 어릴 때부터 이 댁에서 자란 몸입니다. 모든 게 다 나리님 덕분이죠. 그래서 저는 나리님을 친아버지처럼 생각해서 숨김없이 말씀드리려는 거예요. 다름 아니라, 이 댁에서 일하고 있는 세묜이 저와 결혼을 하자고 조르고 있습니다. 레오니드:호오, 그래? 타냐:저는 나리님을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사정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저는 고아나 다름없는 몸이라, 아무리 의논할 사람이 없거든요. 레오니드:그거야 뭐 안 될 것도 없는 일 아니냐! 신랑감으로 괜찮은 청년 같던데. 타냐:네, 그래요. 그만하면 괜찮은 편이죠,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서요. 그래서 나리님께 여쭈어 보려고... 실은 그 사람에겐 좀 이상한 데가 있는데, 전 아무래도 알 수가 없어요. 무슨 나쁜 징조나 아닌지 걱정이 되는군요. 레오니드:뭔데 그래? 술이라도 마시는가? 레오니드:너도 그런 거 알고 있었니? 타냐:알고 말고요! 하기는 다른 하인들은 모두 의심이 많아서, 그런 걸 모르지만... 레오니드: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냐? 타냐:실은 세묜이 염려가 돼서 그래요. 그 사람한테 그런 일이 가끔 일어나곤 하거든요. 레오니드:아니, 뭐가 일어난다구? 타냐:네, 신령이 내리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난단 말씀예요. 다른 하인들한테 물어 보시면 아시겠지만요, 그 사람이 식탁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면, 글쎄 식탁이 흔들거리면서 타각타각 소리를 내지 않겠어요! 그 자리에 있던 하인들은 모두 그 소리를 들었어요. 레오니드:호오, 그건 내가 오늘 아침에 세르게이 이바노비치한테 얘기한 것과 똑같군 그래. 흠, 그래서? 타냐:그리고... 또... 언젠가는... 아, 참, 지난 수요일이었어요. 저희들이 저녁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아 있는데 그 사람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식탁에 앉자마자, 글쎄 스푼이 획 올라가서 그 사람 손에 저절로 쥐어지지 않겠어요! 레오니드:그래? 그것 참 재미있군! 스푼이 저절로 올라가서 손에 쥐어지더란 말이지? 그럼, 세묜이 그때 졸고 있었나? 타냐:똑똑히 보진 못했지만, 아마 졸고 있었을 거예요. 레오니드:흠, 그래서? 타냐:저는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녜요. 그래서 나리님께 여쭈어 보려구요. 그건 나쁜 게 아닐까요? 한평생 함께 살아야 할 사람한테 그런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까요? 레오니드:(미소지으며) 아니, 걱정할 거 없다. 나쁠 건 하나도 없으니까. 그런 현상은 다만 그가 영혼의 매개자라는 증거일 뿐이야. 나는 벌써부터 세묜이 매개자임에 틀림없다고 점찍어 놓고 있었다. 타냐:그래요?... 그렇다면 더욱 걱정이 되네요! 레오니드:아니, 걱정될 거 하나도 없다니까. (혼잣소리) 이것 참 잘 됐군! 카프치치가 오지 않는다면, 오늘 저녁엔 세묜을 실험해 봐야겠다... (타냐에게) 걱정하지 말아. 세묜이라면 좋은 남편이 될 거다. 그건 일종의 독특한 힘인데, 누구에게나 다 있는 거야. 다만 어떤 사람에겐 약하고, 어떤 사람에겐 강하다뿐이지. 타냐:감사합니다, 나리님. 그럼, 이젠 그런 건 걱정하지 않기로 하겠어요. 공연한 걱정을 여태껏 했군요... 저희들처럼 무식한 것들은 할 수 없다니까요! 레오니드:아무튼 조금도 걱정할 건 없으니까 안심해라... 여보게, 표도르! 제59장 표도르 등장한다. 레오니드:난 잠깐 외출하겠네. 오늘 저녁 모임 준비를 해 놓게. 표도르:예, 하지만 카프치치 씨는 오시지 못할 모양인데요. 레오니드:그건 상관없어, 아무나 마찬가지니까.(외투를 입는다) 우리집에 있는 매개자를 써서 실험을 할 생각이야.(퇴장, 표도르도 뒤따라 나간다) 제60장 타냐:(혼잣소리로) 흐흐흣, 속았군, 속았어! (손뼉을 칠 듯이 좋아하며 깡충깡충 뛴다) 내 말을 그냥 곧이 들었다니까! 이제부터 내 수완을 보여줘야지. 다만 세묜이 서투른 짓만 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제61장 표도르 돌아온다. 표도르:그래, 무슨 비밀 얘기라도 했느냐? 타냐:뭐 대단한 비밀은 아니예요. 아저씨한테는 요담에 얘기할게요... 그보다도 실은 아저씨한테도 청이 있어요. 표도르:나한테 청이 있다니, 대체 뭔데? 타냐:(얼굴을 붉히며) 아저씬 내 두 번째 아버지나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기분으로 아저씨한테 털어 놓고 말하겠어요. 표도르:얘, 그런 아첨은 집어치우고 어서 할 말이나 하려무나. 타냐:다음 아니라... 세묜이 나와 결혼하고 싶대요. 표도르:결국 그렇게 됐군! 내 그럴 줄 알았어. 타냐:그러니까, 털어 놓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아저씬 이곳 도시 사람들의 버릇을 잘 아시겠지만요, 내가 고아라서 깔보고 그러는지, 모두들 귀찮게 들러붙지 않겠어요. 그리고리만 해도 그렇죠... 마음놓고 그 사람 옆을 지나다닐 수가 없다니까요... 아니, 그 사람만이 아니라 누구나 다 그래요... 아저씨도 아시죠? 그 사람들은 나 같은 건 영혼도 없는 줄 아는 가봐요. 그저 그 사람들의 노리개가 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계집쯤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표도르:기특한 생각이야. 넌 참 영리하구나! 그래서? 타냐:그래서 세묜이 고향 아버지한테 내 얘길 써 보냈거든요. 그런데 그 아버지가 오늘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 녀석이 공연히 우쭐해 하는 모양이군' 자기 아들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죠... 표도르 아저씨, (타냐, 절을 한다) 제발 부탁이니, 내 아버지 대신 세묜의 아버지와 얘기를 좀 해주세요. 내가 그 사람들을 부엌으로 데려올 테니, 아저씨도 그리로 가서 그 노인을 만나 결말을 지어 달란 말예요. 표도르:(미소 지으며) 그러니까, 나더러 중매장이가 되어 달라는 건가? 좋아,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타냐:표도르 아저씨, 제발 내 아버지 노릇을 해주세요. 나는 한평생 아저씨의 행복을 하나님께 빌겠어요. 표도르:좋아, 좋아! 내 꼭 만나보지. 약속은 틀림없이 지키는 성미지만. 타냐:내 두 번째 아버지가 되어 주세요. 표도르:응, 알겠다. 알겠어. 타냐:그럼, 아저씨만 믿겠어요... (퇴장) 제62장 표도르:(고개를 끄덕이며) 참 기특하고 상냥한 아이야! 저렇게 귀여운 계집아이들이 얼마나 많이 타락의 길을 걷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지경이지! 한 번 발을 잘못 내딛기만 하면, 이놈의 손에서 저놈의 손으로 전전하다가 영영 시궁창 속에 빠져들고 말거든. 그렇게 되면, 다시는 햇빛을 못 보게 되는 거지. 그 가엾은 나탈리야도 결국 그렇게 되고 말지 않았어. 그애도 타냐처럼 상냥하고 착한 처녀였는데... 제어미가 고생하며 애지중지 키워 놓으면, 결국은 그렇게 되고 마니... (또 신문을 접어든다) 그건 그렇고, 우리의 주인공 페르지난드는 어떻게 되었나? 용케 난관을 극복했는지 모르겠군. 제2막 같은 날 저녁, 하인들이 모여 있는 부엌의 내부. 농부들은 웃옷을 벗고, 식탁에 앉아서 땀을 흘리며 차를 마시고 있다. 표도르는 맞은편에 앉아서 궐련을 피우고 있다. 페치카 위에는 늙은 요리사가 누워 있다. 제1장 표도르:그러니까 내 말대로 아들의 뜻을 받아들여라, 그거예요! 아들도 원하고 색시 쪽에서도 원한다면, 짝을 지어주는 게 당연하잖소. 참, 정직하고 좋은 처녀요. 모양을 낸다고 해서 흠이 될 건 하나도 없어요. 그게 도회지의 풍속이니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단 말이오. 아무튼 영리한 처녀요. 농부 2:그야 물론 아들놈이 좋다면야 할 수 있는 일이죠. 장가를 드는 건 그애지 내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지나치게 말쑥한 것 같아서 말이죠. 그런 색시를 어떻게 우리네 오막살이 집에서 살게 할 수 있겠어요? 첫째 그 색시는 우리 할멈이 손을 쓰다듬어 주는 것도 싫어할 거예요. 표도르:그런 건 말쑥하게 생겼느니 못생겼느니 하는 데 달린 게 아니라, 마음씨가 어떠냐 하는 데 달린 거요. 마음씨만 착하다면 어른들도 잘 받들게 아니겠소? 농부 2:아들놈이 그 색시가 아니면 안 되겠다고 우긴다면, 며느리로 맞아들여야겠죠. 사실이지 싫은 여자하고 한평생 산다는 것도 이만저만한 불행이 아니니까요. 할멈한테는 내가 잘 말하기로 하고, 그 다음은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하겠죠! 표도르:그럼, 이것으로 아주 정혼이 된 걸로 알겠소. 농부 2:예, 나도 그렇게 된 걸로 알겠습니다. 농부 1:여보게, 자하르, 자넨 참 땡 잡았군. 그래! 다른 일 때문에 왔다고 공주님 못지 않은 미인을 며느리로 얻게 됐으니 말이야! 아무래도 한 잔 사야 하겠는 걸. 표도르:아니, 그럴 필요는 없소 (어색한 침묵) 나도 당신네 농민들의 생활 형편을 잘 알고 있으니까. 실은 나도 적당한 곳에다가 땅을 조금 샀으면 하고 있는 중이오. 거기다가 조그만 집이라도 한 채 짓고 농사나 지어볼까 하는 생각인데... 당신네들의 고장도 괜찮지... 농부 2:그것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농부 1:사실 말이지, 돈만 있으면 시골에서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살 수 있지요! 농부 3:그야 물론이지! 시골 생활은 어쨌든 여유가 있어 좋아요. 도시 생활 같은 건 비교할 수도 없지요. 표도르:그럼, 내가 시골로 내려가면 당신네들의 조합에 한 몫 끼워주겠소? 농부 2:그거야 문제없지요. 노인들한테 한 잔 사기만 하면 당장 넣어 줍니다! 농부 1:그보다도 뭡니까, 술집이라든가 요리점 같은 걸하면 아주 넉넉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아무 걱정 없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지요, 정말이에요! 표도르:그도 그럴 듯한 얘기로군. 아무튼 나는 노후를 조용하게 살고 싶어서 그러는 거요. 하긴 여기서의 생활도 편하기는 무척 편해서 그만두기가 아까울 지경이지만... 이 댁 나리님은 보기 드물게 착한 분이라서... 농부 1:그렇겠군요. 그건 그렇고, 우리들 문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냥 그대로 결말을 내지 않고 돌려 보낼 작정이신가요? 표도르:나리님은 가능하면 당신네들의 희망을 받아들이고 싶은 의향이신데... 농부 2:마님을 두려워하고 계신가요? 표도르:별로 두려워하고 계신 건 아니지만, 아무튼 두 분 사이에 의견이 맞질 않거든요. 농부 3:제발 당신이 힘을 좀 써주십시오! 그게 해결되지 않으면 우린 살아갈 수가 없어요. 손바닥만한 땅덩어리밖엔 없으니...어떻게... 표도르:아무튼 그 일은 타냐가 맡고 나섰으니까. 어떻게 하는지 결과를 두고 봅시다. 농부 3:(차를 한 모금 마시고)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린 쥐꼬리만한 땅밖엔 없습니다. 소나 말은 고사하고, 닭 한 마리 기를 수 없는 형편이니까요. 표도르:그 문제가 전적으로 나한테 달렸다면야 기꺼이 청을 들어주겠지만, 그렇지가 못하니 곤란하단 말이오. (농부에게) 그럼, 우리 둘이서 세묜과 타냐를 짝지어 주기로 합시다. 이 문제는 아주 결정된 걸로 알겠소. 농부 2:내 입으로 일단 말한 이상, 비록 축하주를 나누지는 않았어도 나중에 내가 딴소리는 하지 않을 테니 염려 마십시오. 그보다도 땅 문제가 잘 해결되어야 할 텐데! 제2장 식모 등장하여 페치카 위를 쳐다보고 눈짓을 한다. 그러고는 곧 표도르를 상대로 수다스럽게 지껄이기 시작한다. 식모:방금 세묜이 주방에서 위층으로 올라갔는데요, 나리님과 또 한 사람, 그 왜 강신술인가 뭔가를 한다는 대머리 신사 말예요. 그 사람이 세묜을 앉히고 카프치치 씨 대신에 그걸 하라고 말했다지 않겠어요! 표도르:그런 허튼소리가 어딨어! 식모:정말이에요, 야코프가 방금 타냐한테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는데요. 표도르:허, 참! 제3장 마부 등장한다. 표도르:자넨 또 뭔가! 마부:(표도르에게) 이렇게 말씀드려 줄 수 없을까요. 난 개새끼들과 함께 살려고 이 댁에 고용된 게 아니라고 말예요! 개들과 동거하는 건, 하고 싶은 놈한테 시키라고 하세요. 난 개들과 한방에 사는 건 질색이니까요. 표도르:개라니, 무슨 개가 어찌됐다는 건가? 마부:바실리 도련님이 우리 마부 방에다 개를 세 마리나 갖다 놓았단 말예요! 방 안을 온통 뒤집어 놓는가 하면, 고약한 냄새를 피우지 않나, 듣기 싫게 으르렁거리질 않나, 게다가 아무한테나 닥치는 대로 덤벼들어 물려고 해서, 가까이 갈 수도 없어요! 아저씨도 한 번 가서 얼씬거려 보세요, 당장 물어뜯길 테니. 못된 놈의 개새끼들, 장작개비로 모조리 때려 죽여 버리면 시원하련만. 표도르:개는 언제 데려왔나? 마부:오늘 개 전람회에서 끌고 왔어요. 값이 엄청나다는 복슬개인데, 무슨 종류의 개라든가, 아무튼 이상한 이름이라 기억할 수도 없군요. 도대체 마부 방이라는 건, 우리가 사는 방인지 개새끼들이 사는 방인지 아저씨가 가서 따져 주셔야겠어요. 표도르:흠, 그건 안 될 일이지. 내가 가서 물어 봐야겠군. 마부:그 개들을 여기 이 루케리야한테 데려오면 어떨까요? 식모:(펄쩍 뛰며) 이봐요, 여긴 사람이 식사를 하는 데예요! 그런데 당신은 여기다 개를 몰아 넣을 생각인가요? 그렇잖아도... 마부:우리 방은 외투며, 마차 탈 때 쓰는 무릎가리개며, 마구 따위가 가득 있는데, 모두 깨끗이 해야 하는 것들이란 말이요. 그렇담 문지기방으로 데려가야겠군. 표도르:이건 바실리 도련님에게 따져 봐야겠는 걸. 마부:(퉁명스럽게) 그 개새끼들을 자기 목에다 매달고 다니면 될 게 아닌가! 자기 자신은 말을 타고 돌아다니길 좋아하면서 말이야. 내 참! 게다가 탔다하면 그 좋은 말들을 아주 못쓰게 만들어 버린다니까! 참 좋은 말이었는데... 제기랄 놈의! (문을 쾅 닫고 퇴장) 제4장 표도르:흠, 좋지 않아, 정말 좋지 않은 일이야! (농부들에게) 그럼 여러분, 난 그렇게 알고 이만 실례하겠소. 농부들:안녕히 가십시오! 표도르 퇴장. 제5장 표도르가 나가자마자 페치카 위에서 헛기침 소리가 난다. 농부 2:저분들은 얼굴이 번들번들한 게 꼭 장군님 같구먼. 식모:누가 아니랍니까! 자기 혼자 독방을 쓰고, 세탁이건 차건 설탕이건 죄다 나리님이 대줄 뿐만 아니라, 식사까지도 나리님과 한 식탁에서 한답니다. 늙은 요리사:말할 수 없는 악당놈이지. 그렇게 마구 주인 돈을 속여 먹으니, 잘못 살 까닭이 있나! 농부 2:저기 페치카 위에 있는 사람은 뉘시오? 식모:누구긴 누구예요. 그저 사람이 하나 거기 누워 있는 거죠. 농부 1:그런데 말이오, 난 아까 여기서 당신네가 먹는 음식을 보았는데, 굉장히 잘들 먹더구먼. 식모:네, 먹는 건 불만이 없어요. 마님은 거기 대해선 인색하지 않거든요. 일요일마다 흰 빵을 먹고, 육식을 금하는 날엔 생선을 먹는데, 고기도 먹고 싶으면 먹을 수 있어요. 농부 2:아니, 육식을 금하는 날에도 고기를 먹을 수 있소! 식모:있구말구요. 여기선 거의 다 먹어요. 금식을 지키는 건, 늙은 마부와 세묜과 나, 그리고 하녀 책임자뿐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다들 고기를 먹는답니다. 농부 2:호오! 그럼, 나리님은? 식모:나리님은, 뭐 금식하는 날 같은 건 잊어버린 지 옛날일 거예요. 농부 3:어이구, 하나님 맙소사! 농부 1:나리님들은 그런 법이야. 책에 그렇게 씌어 있겠지. 원래가 유식한 분들이니까! 농부 3:하지만 보통 땐 밀과 귀리를 섞어서 만든 거친 빵을 잡수시겠지? 식모:거친 빵이라구요! 그런 건 아마 구경도 한 적이 없을 거예요! 어떤 음식을 잡수시는지 한 번 보면, 아마 놀라 자빠질 거예요! 정말이지 굉장하답니다. 농부 1:나리님들의 식사는 정말 굉장할 거야. 식모:물론이죠. 굉장해도 이만저만 굉장한 게 아니랍니다. 그리고 잡숫기도 많이 잡숫구요. 농부 1:그러니까 뭐요, 굉장히 식성이 좋다. 그 말인가? 식모:반주를 하니까 그렇죠. 여러 가지 맛있는 포도주며, 블랜디며, 거품이 일어나는 리큐르며, 그런 술을 음식 접시가 바뀔 때마다 바꿔 가며 마시거든요. 그러니까 먹고는 마시고, 마시고는 먹고 하는 식이죠. 농부 1:이를테면 술이 음식물을 잘 소화시킨다, 그 말이로군. 식모:잡수셔도 이만저만 잡숫는 게 아니랍니다! 앉아서, 먹고, 그 다음엔 성호를 긋고 일어나는, 그런 식이 아니라니까요! 온종일 쉴 새 없이 먹기만 하고 있거든요. 농부 2; 돼지처럼 먹이통 속에 늘 한쪽 발을 담가 놓고 있는가 보군! 농부들 웃는다. 식모:참 기막힌 팔자죠! 아침에 눈을 뜨기가 무섭게 차를 가져오라지요. 차다, 커피다, 초콜렛이다 해서, 찻주전자에 물을 두 차례나 넣게 하고는, 그것도 모자라 세 번째로 물을 채워 넣게 하죠. 그 다음엔 점심, 그리고 또 커피. 그 다음엔 또 과자니 잼이니 해서 간식을 먹고, 다시 커피. 잠자리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쩝쩝 입을 놀리고 있다니까요! 농부 3:호오, 그래요! (큰소리로 웃는다) 농부 1과 2:자네 뭐가 우스운가? 농부 3:단 하루라도 좋으니 그런 식으로 한 번 살아보고 싶구먼! 농부 2:그럼, 나리님들은 언제 일을 하시오? 식모:일이오? 뭐 할 일이 있어야죠. 트럼프놀이와 피아노가 일이라고 할까요. 주인 아가씨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아선 딩동딩동하기 시작하거든요! 그런데 이 댁에 있는 또 다른 아가씨가, 피아노 선생이라는 아가씬데, 바로 옆에 앉아 피아노 소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인 아가씨가 끝나면, 이내 바꿔 앉아서 다라라라 다라라라 하기 시작하죠. 어떤 때는 피아노 두 대를 나란히 놓고 둘이서 네 손으로 콰르릉콰르릉 두드려 대기도 하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요란한지 여기까지 들려 온답니다. 농부 3:오오, 하나님 맙소사! 식모:일이라고 해봐야 고작 피아노와 트럼프라니까요. 사람이 몇 모이기만 하면 트럼프에, 술에, 담배에, 그것으로 밤새껏 시간을 보내고,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무섭게 또 먹어대는 거예요! 제6장 세묜 등장한다. 세묜:많이들 드십시오! 농부 1:어서 오게. 자, 여기 와 앉지. 세묜:(식탁에 다가가며) 예, 고맙습니다. 농부 1 세묜에게 차를 따라 준다. 농부 2:어디 가 있었니? 세묜:2층에 가 있었어요. 농부 2:무슨 일인데? 세묜:아버진 이해하지 못하실 거예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실은 나도 알 수가 없군요. 농부 2: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세묜:글쎄, 뭐라고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니까요. 내가 지니고 있는 무슨 힘을 실험한다고 하는데, 난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타냐가 나더러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그렇게 하면 고향 마을 사람들이 땅을 갖게 될 테니까요. 나리님께서 땅을 팔아 주실 거예요'라고 하는 바람에... 농부 2:대체 그 색시는 어쩔 속셈이더냐? 세묜:설명을 해주지 않으니, 어디 알 수가 있어야죠.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거예요. 농부 2:그래서 무얼 어떻게 했니? 세묜:뭐 아직은 별 것 아녜요. 그저 앉으라고 하더니, 불을 끄고는 나더러 잠을 자라고 하더군요. 타냐는 거기 숨어 버렸는데, 나리님들한테 안 보여도 나한테 잘 보였어요. 농부 2:그건 또 뭣 때문에? 세묜:알 게 뭡니까.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더러니까요. 농부 1:흐음, 그거야 심심풀이로 그러는 거겠지. 농부 2:하기는 그런 건 우리들하곤 상관이 없는 일이지. 그건 그렇고, 넌 돈 좀 모았느냐? 세묜:그게 뜻대로 안 되는군요. 이제 겨우 28루블 가량이나 될까요. 농부 2:그만하면 됐다. 그런데 이번에 원하는 땅을 사게 되면, 나는 너를 시골로 데려갈 생각인데, 어떠냐? 세묜:나도 시골로 내려가고 싶어요. 농부 2:하지만 너는 그 동안 도회지 물을 먹어서 이젠 땅 파먹고 살기가 싫어지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세묜:농사일 말인가요? 지금이라도 시켜만 보세요! 어릴 때부터 배운 풀베기라든가 밭갈이 따위 일은 아무리 오래 되어도 잊지 않는 법예요. 농부 1:말은 그렇게 하지만, 도회지 생활을 하고 나면 그리 마음이 내키진 않을 걸세. 세묜:뭐 그렇지도 않아요. 시골 생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농부 1:하지만 여기 이 미트리 아저씨는 벌써 자네 대신에 이 댁에 들어와야겠다고 생각할는지도 몰라. 좀 편하게 살아 보려고 말이야. 세묜:아니, 미트리 아저씨도 곧 싫증이 나고 말 겁니다. 겉 보기엔 아주 편한 것 같아도, 주인의 시중들기에 줄곧 쫓기다 보면 여간 고달픈 게 아니랍니다. 식모:여보세요, 미트리 아저씨, 당신이 만약 나리님들의 무도회라는 걸 한 번 보면, 아마 놀라 자빠질 거예요! 농부 3:그것도 역시 연방 먹어대는 건가? 식모:그런 게 아녜요. 무엇 하는 건지는 직접 보아야 알 수 있죠. 난 표도르 아저씨 덕분에 한 번 구경한 적이 있는데요, 부인네들의 꼴이란 정말 굉장하더군요. 울긋불긋 눈부시게 차려 입은 것 정도는 그래도 괜찮지만, 글세 여기저기 몸뚱이를 드러내고 있다니까요! 팔에서 어깻죽지까지는 온통 드러내놓고 말예요. 농부 3:아이구, 맙소사! 농부 2:저런 망측한 일 봤나! 농부 1:하지만 이런 날씨에 추워서 어떻게 몸을 드러내 놓지? 식모:그래도 내가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거든요! 그 망측한 꼴이란 말이 아녜요! 모두가 다 벌거숭이나 마찬가지라니까요! 아저씨들은 곧이듣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늙은 여자들까지 그렇게 몸을 드러내 놓고 있어요. 이 댁 마님만 해도 벌써 손자까지 있는 나이인데도, 그런 꼴을 하고 있더군요. 농부 3:오오, 하나님! 식모:그리고 그 다음엔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악대가 비바비바 소리를 내기 시작하니까, 나리님들이 각기 상대가 되는 여자한테로 가더니, 그 여자를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지 않겠어요! 농부 2:늙은 여자들도? 식모:그럼은요. 늙은 여자들도 마찬가지죠. 세묜:아니예요. 늙은 여자들은 가만 앉아 있어요. 식모:그렇잖아. 내가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대두! 세묜:내 말이 맞아요. 늙은 요리사:(페치카 위에서 얼굴을 내밀며 목쉰소리로) 그건 폴카, 마주르카라는 거야.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다니! 서로 끌어 안고 춤을 추는 거야... 식모:흥, 정말 춤이라도 출 줄 아는 것같이 말하는군. 당신은 잠자코 있으란 말예요! 저기 또 누가 오는군. 제7장 그리고리 등장한다. 늙은 요리사, 급히 숨어 버린다. 그리고리:(식모에게) 양배추절임을 좀 주소. 식모:난 방금 움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또 거길 기어들어가란 말인가? 그건 누가 가져오라는 거요? 그리고리:아가씨들이 가져오라는 거예요. 난 지금 시간이 없으니, 세묜을 시켜서 얼른 들여 보내시오. 식모:흥, 달콤한 것을 실컷 먹어 싫증이 나니까, 이번엔 또 양배추절임을 가져오라, 그 말씀이군! 농부 1:그러니까, 그걸로 입가심을 하겠다는 거로군. 식모:맞았어요. 그러고서, 뱃속이 조금만 비면 또 먹기 시작하거든요. (쟁반을 들고 퇴장) 제8장 그리고리:(농부들에게) 아니, 여기 아주 주저앉기로 했나요? 조심들 하세요! 주인 마님한테 들키는 날에는 또 한바탕 야단을 맞을 테니! (웃으며 퇴장) 제9장 농부 1:정말 아까는 주인 마님의 기세가 굉장하더군! 당장 큰일나는 줄 알았지. 농부 2:그때 주인 나리님은 우리들을 위해 변명을 하려 했던 모양인데, 마님이 서슬이 시퍼래 가지고 야단치는 바람에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리시더군. '어서 맘대로 해 봐라' 하는 듯이 말이야. 농부 3:(한 손을 내저으며) 어디나 다 마찬가지지. 우리집 마누라도 그 꼴을 해 가지고 이따금 악을 쓰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를 때가 있으니까. 그럴 땐 난 얼른 피해서 집 밖으로 나와 버리지. 실컷 떠들라고 내버려 두는 수밖에! 우물쭈물하다가는 부젓가락으로 한 대 얻어맞을는지도 모르거든. 오오, 하나님! 제10장 야코프가 처방전을 들고 급히 등장한다. 야코프:이봐, 세묜, 얼른 약방에 가서 마님의 약을 지어 오게. 세묜:하지만 난 나갈 수 없어요. 나리님이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야코프:괜찮아. 자네는 손님들이 차를 들고 난 다음에야 필요하니까, 아직 시간이 있어... 아, 여러분, 많이들 드시오! 농부 1:예, 함께 한 잔 드시지요. 세묜 퇴장. 제11장 야코프:아니, 난 바빠서... 하지만 모처럼 권하는 것이니, 한 잔만 먹겠수다. 농부 1:지금 우리들끼리 말하고 있던 참인데, 아까 아침에 이 댁 마님은 굉장히 딱딱거리더군요. 야코프:예, 우리 주인 마님은 히스테리랍니다! 무섭게 성미가 급해서, 한 번 흥분하면 앞뒤를 가리지 못할 지경이지요. 어떤 땐 막 엉엉 울기까지 하거든요. 농부 1:그보다도 당신한테 한 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소. 아까 마님이 우리들을 보고 군을 가지고 왔다고 야단을 치셨는데, 도대체 그 군이라는 게 뭐요? 야코프:군이 아니고 균 얘기겠지, 병균 말이오, 마님 얘길 들으면, 그런 무슨 벌레 같은 게 있는데, 병이라는 병은 모두 그 벌레에서 생겨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님 말씀은, 당신네들이 그 균이라는 걸 붙여 가지고 왔을 테니까, 당신네들을 내보낸 후 당신네들이 서 있던 자리를 깨끗이 씻고 소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죠. 그런 벌레를 죽이는 강한 약이 있다는군요. 농부 2:하지만 그런 벌레가 우리 몸 어디에 붙어 있다는 거요? 야코프:(차를 마시며) 그 벌레라는 게 어찌나 작은지 화경을 대고 봐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농부 2:그럼, 우리들한테 그 따위 벌레가 붙어 있는지 어떤지 마님이 어떻게 알지요? 흥, 어쩌면 우리보다 마님한테 더 많이 붙어 있는지도 모르잖소. 야코프:그럼, 가서 마님한테 직접 물어 보시구료! 농부 2:내 생각으론, 벌레니 뭐니 하는 건 아무래도 허튼 소리 같소. 야코프:그야 물론 허튼 소리죠. 의사라는 건 그 따위 허튼 소릴 생각해 내야만 하거든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돈을 낼 사람이 없을 테니 말이오. 이 댁에도 날마다 의사가 하나 오곤 하는데, 와서 몇 마디 지껄이고는 꼬박꼬박 십 루블씩 받아 넣고 간다니까요! 농부 2:설마하니 십 루블씩이나?... 야코프:십 루블은... 백 루블씩 받아낸 의사도 있답니다. 농부 1:뭐요? 백 루블이라구요? 야코프:뭐, 그렇게 놀랄 건 없어요. 좀 떨어진 시외에 왕진을 가게 되면, 천 루블쯤 받는 건 보통이니까요. '천 루블 내라, 내지 못하겠거든 죽건 말건 난 모르겠다' 이거예요. 농부 3:아아, 하나님 맙소사! 농부 2:그럼, 의사는 무슨 마술 같은 거라도 알고 있는 게 아니오? 야코프:아마 그럴 거요. 전에 나는 모스크바 시외의 어느 장군댁에 있었는데, 그 장군님으로 말하면 굉장히 위엄이 있고 무서운 양반이었어요. 그런데 한 번은 그 댁 아가씨가 병에 걸려서 의사를 모시려 가지 않았겠소. 그랬더니 의사가 하는 말이, '천 루블만 주면 가겠다' 라는 거예요. 아무튼 흥정이 성립되어 집에까지 오기는 왔는데, 그 의사 선생 뭐가 못마땅했는지 마구 화를 내며 장군님한테 맞대 놓고 호통을 치지 않겠소! '그래, 당신은 나를 이렇게 대접하기요? 그렇다면 난 진찰을 할 수 없소!' 라고 말이오. 그런데 어찌 된지 아시오? 그 장군님은 여느 때의 위엄 같은 건 아예 내동댕이치고 비위를 맞추기에 진땀을 빼더란 말이오. '선생님, 제발 부탁입니다. 저희들을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라고. 농부 1:그래서 천 루블을 주었나요? 야코프:그야 물론이죠! 농부 2:돈도 흔해 빠졌군? 그만한 돈이 있으면, 우리 농사꾼은 무슨 일이든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을 텐데! 농부 3:아무튼 의사란 믿을 것이 못 돼요. 나도 다리가 부어올라 꽤 오랫동안 의사한테 다녔는데, 5루블 이상이나 돈을 썼는데도 영 낫지 않더군요. 그래서 의사한테 다니는 걸 그만두었지요. 그런데도 결국 다리는 저절로 낫고 말았거든요. 늙은 요리사, 페치카 위에서 쿨룩쿨룩 기침을 한다. 야코프:저 영감 또 왔군! 농부 1:저건 누구요? 뭣하는 사람이오? 야코프:전에 이 댁 나리님의 요리사로 있던 사람인데, 요즘은 여기 식모로 있는 루케리야를 찾아오곤 한답니다. 농부 1:그러니까 주방장 격이구요. 그래서 요즘은 여기서 살고 있나요? 야코프:아니... 여긴 들여 놓지 말라는 분부가 내렸지만요... 여기서 하루, 저기서 하루, 그런 식으로 지내고 있지요. 어쩌다 몇 푼 생기면 주막집에 가서 자기도 하고, 있는 걸 죄다 털어 술을 마셔 버리면 다시 이리로 찾아오곤 한답니다. 농부 2:어째서 그런 식으로 살지요? 야코프:그거야 마음 속의 태엽이 완전히 풀려 버렸기 때문이죠. 한때는 흡사 귀족같이 금시계까지 차고 거들먹거리며 살던 사람인데... 그때는 월급을 40루블씩이나 받았거든요. 그러던 것이 지금은 저 꼴이 되고 말았어요. 루케리야가 없었던들, 벌써 오래 전에 굶어 죽었을 겁니다. 제12장 식모 양배추절임을 들고 등장한다. 야코프:(루케리야에게) 파벨 페트로비치가 또 찾아온 모양이군? 식모:여기 말고 또 어디 갈 데가 있겠어요! 그 사람이 길가에 쓰러져 죽기를 바라서 하는 소린가요? 농부 3:아아, 술이란 정말 사람을 망쳐 놓는 물건이군! 아아... (가엾다는 듯이 혀끝을 찬다) 농부 2:그렇고 말구, 인간이란 강할 때는 돌처럼 강하지만, 약해지면 물보다 더 약하거든. 늙은 요리사:(팔다리를 떨며 페치카에서 기어내려온다) 루케리야! 제발 부탁이야, 딱 한 잔만 줘! 식모:아니, 어디까지 기어내려오는 거요! 정말로 눈깔이 튀어나오게 한 방 먹여 드릴까? 늙은 요리사:하나님한테 벌받을 소린 하지 말라구! 난 금세 죽을 것만 같아. 아아, 형제들, 5코페이카짜리 한 닢이라도 좋으니, 제발... 식모:페치카 위로 올라가지 못하겠어요! 늙은 요리사:반 잔만이라도 좋으니 선심을 써 줘, 루케리야! 부탁이야, 응! 이렇게 두 손 모아 부탁이야! 식모:어서 올라가요! 차를 드릴 테니. 늙은 요리사:뭐 차를 주겠다구? 차라는 게 뭐야? 그 따위 맹물 같은 건 필요없어... 술을 줘, 술을. 단 한 모금이라도 좋아. 루케리야, 부탁이야! 농부 3:아아, 가엾게시리... 무척 괴로운가 보군. 농부 2:좀 주지 그래. 식모:(선반에서 조그만 술잔을 꺼내 술을 따른다) 그럼, 요것만 마시고 더 달라는 소린 말아요. 늙은 요리사:(낚아채듯 잔을 받아, 온몸을 떨며 꿀꺽꿀꺽 마신다) 루케리야, 내가 이걸 마시긴 마시지만 말야... 식모:자, 쓸데없는 소린 그만두고, 어서 페치카 위로 올라가요! 이젠 당신 숨소리도 듣기 싫다니까! 늙은 요리사, 순순히 페치카 위로 기어올라 가면서도, 연방 뭐라고 투덜거린다. 농부 2:인간도 저쯤 되면 마지막이군! 농부 1:사실이지 인간이란 약한 동물이야. 농부 3:그야 새삼스레 말할 것도 없지. 늙은 요리사는 페치카 위에 웅크리고 누워서도 여전히 투덜거린다. 침묵. 농부 2:근데 한 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다름 아니라 우리 고장에서 처녀가 하나 올라와서, 바로 아니시야네 딸인데, 이 댁에 살고 있어요. 그래 그 처녀애가 어떤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러니까 정직하게 잘 일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요. 야코프:참 좋은 처녀지요. 정말 칭찬할 만한 아이예요. 식모:이봐요, 아저씨. 내가 바른 대로 말해 드릴까요? 난 여기 사정은 속속들이 다 알고 있지만요, 타냐를 며느리로 삼으려거든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손을 쓰는 게 좋을 거예요. 그 애가 몸을 버리기 전에 말예요. 언젠가는 반드시 몸을 버리게 마련이니까. 야코프:그건 옳은 말이야. 좀 오래 된 얘기지만, 이 댁에 나탈리야라는 처녀가 있었지요. 역시 상냥하고 얌전한 처녀였는데, 어쩌다 그만 몸을 망치고 타락해 버렸어요... (늙은 요리사를 가리키며) 저기 있는 저 사람처럼 말이오! 식모:정말 그렇다니까요! 여기 이 집에 있다가 일생을 망친 여자가 얼마나 많다구요? 모두들 편한 생활이니, 맛있는 음식이니 하는 데 끌려서 넘어가 버린답니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가는, 금방 길을 잘못 들게 되거든요. 일단 길을 잘못 들기만 하면, 벌써 그런 여잔 필요가 없어져서 이내 쫓겨나고 말지요. 그리고 그 자리엔 아직 더럽혀지지 않은 순진한 처녀가 대신 들어앉게 되지요. 나탈리야도 그런 식으로 한 발 잘못 내디뎠다가 이내 쫓겨나고 말았답니다. 게다가 아이까지 낳고, 못된 병에 걸리고, 결국 작년 봄에 병원에서 죽고 말았어요. 참 얌전한 처녀였는데. 농부 3:아아, 하나님! 인간이란 참으로 약한 동물이야. 그런 사람들은 잘 보살펴 줘야 해. 늙은 요리사:뭐라구? 누가 누굴 보살펴 준다는 거야? 제기랄 놈의! (페치카에서 다리를 늘어뜨린다) 난 39년 동안이나 화덕 옆에 붙어서 일을 했지만, 일단 쓸데가 없어지니까 마치 개새끼처럼 쫓겨나고 말았어. 어서 나가 뒈지라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지... 흥! 보살펴 줘야 한다구? 농부 1:그건 사실이야. 세상 인심이란 그런 거니까. 농부 2:먹고 마시는 동안은, 예쁘다 예쁘다 칭찬하다가도, 먹을 것 다 먹고 마실 것 다 마시고 나면, 너 같은 것 언제 봤냐고 걷어오는 격이지. 농부 3:오오, 하나님! 늙은 요리사:당신, 아는 게 많구먼. 그럼, '소테 알 라 바묜'이 뭔지 아시오? '바바사리'가 뭔지 알아요? 나는 이래봬도 못 하는 거라곤 없었소. 황제 폐하도 내가 만든 요리를 잡수셨단 말이오! 그런데 지금은 뭣 같은 것들조차 나를 상대하려 하지 않는군요. 흥, 내가 이대로 그냥 고꾸라질 줄 알아! 식모:또 저렇게 지껄이기 시작하는군! 누구한테 들키기 전에 얼른 구석에 처박혀 있지 못해요1 그러다가 혹시 표도르 이바노비치나 누구 딴 사람이라도 들어오는 날엔, 당신뿐 아니라 나까지 쫓겨난단 말예요. 침묵 야코프:그럼, 우리 고향 마을도 알겠군요? 난 보즈네첸스코예 마을에서 왔어요. 농부 1:알다뿐입니까! 우리 마을에서 4, 5십리밖엔 안 돼요. 여울을 건너면 훨씬 더 가깝지요. 그래, 그 마을에 땅을 가지고 있소? 야코프:형님이 맡아 가지고 있지요. 난 지금 여기서 살고 있지만, 죽을 땐 역시 고향 집에서 죽고 싶어요. 농부 1:그야 물론 그렇겠죠. 농부 2:그럼, 아킴이 당신 형님이오? 야코프:네, 친형님이에요. 마을 어귀에 살고 있어요. 농부 2:잘 압니다, 잘 알아요. 바로 세 번째 집이죠, 아마? 제13장 타냐, 뛰어들어온다. 타냐:야코프 이바노비치! 여기서 한가하게 뭘 하고 있어요? 마님이 부르셔요! 야코프:알았어. 뭣 때문에 부른다지? 타냐:피프카에 짖어대고 있어요. 배가 고파 짖는 거래요. 마님은 화가 나서 마구 당신을 욕하고 있어요 '그런 무정한 사내가 어디 있담. 가엾다는 생각은 꿈에도 할 줄 모르니. 피프카의 식사 시간이 지난 지가 오랬는데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욕을 하고 있다니까요. (웃는다) 야코프:(나가려 한다) 뭐, 화가 났다구? 또 무슨 벼락이나 떨어지지 않으면 좋으련만! 식모:(야코프에게) 양배추절임을 갖고 가요. 야코프:갖고 갈 테니 이리 줘. (양배추절임을 들고 퇴장) 제14장 농부 1:이 시간에 누가 식사를 하신다는 건가? 타냐:개예요. 마님이 기르시는 개 말예요. (앉아서 주전자를 집어든다) 차는 아직 남았나요? 내가 또 갖고 왔는데. (주전자에 차를 넣는다) 농부 2:개한테 식사를 대접한다, 그 말인가? 타냐:네, 그래요. 너무 기름기가 많으면 안 된다고 해서, 따로 특별히 요리를 만들어 줘요. 난 개의 세탁까지 해 준답니다. 개가 입는 옷 말예요. 농부 3:오오, 하나님 맙소사! 타냐:말하자면, '개의 장례식을 치른 나리님'과 마찬가지죠 뭐. 농부 2:그건 또 무슨 뜻이지? 타냐:누구한테 들은 이야긴데요. 어느 나리님이 기르던 개가 죽었대요. 겨울인데 그 나리님은 몸소 썰매를 타고 개의 장례식을 치르러 갔다는 거예요. 그리고 개를 매장하고 나서, 나리님은 울며불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대요. 굉장히 추운 날씨여서, 마부는 자꾸만 콧물이 흘러나와 연방 훌쩍거렸지요... 자, 차를 한잔씩 더 따라 드릴까요... (차를 따른다) 마부가 연방 코를 훌쩍거렸더니, 나리님이 말하기를, '너는 또 무엇 때문에 그렇게 우느냐?' 그러자 마부는 '나리님, 어찌 울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좋은 개가 죽었는데' 라고 대답했다는군요. (웃는다) 농부 2:하지만 마음 속으론, 설령 당신의 장례식이라도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걸 하고 생각했을 테지. (웃는다) 늙은 요리사:(페치카 위에서) 그야 그럴 테지. 옳은 말이야. 타냐:그래서 그 나리님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자기 부인한테 가서, '우리집 마부는 참으로 기특한 사내야. 드루쥬크가 가엾다고, 돌아오는 길에 쭉 울고 있더라니까. 마부를 이리 불러 드리시오... 음, 왔나, 자, 한잔 들게. 자네 마음씨가 하도 기특해서 주는 것이니. 자, 여기 1루블을 받아 두게' 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건, 우리 마님이 자기 개한테 밥을 안 주었다해서 야코프를 무정하다고 욕하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니냐 말예요. 농부들, 껄껄거리며 웃는다. 농부 1:그 나리님이나 이 댁 마님이나 마찬가지다. 그 말이군! 농부 2:음, 그런 뜻이었군 그래! 농부 3:색시는 우스운 얘기도 잘하는구먼. 타냐:(또 차를 따르며) 한 잔씩 더 드세요!... 여기 생활도 때로는 좋은 것 같기도 하지만, 주인네 치다꺼리를 하다 보면 어떤 땐 정말 구역질이 날 지경이에요. 시골에서 사는 편이 훨씬 낫지요. (농부들, 찻잔을 옆으로 밀어낸다. 타냐가 얼른 또 차를 따른다) 예핌 아저씨, 한 잔만 더 드세요. 그리고 미트리 아저씨도! 농부 3:그럼, 조금만 더 따라 주시오! 농부 1:그런데 색시, 우리 문젠 어떻게 돼 가고 있소? 타냐:아아, 그것 말예요? 잘 돼 가고 있어요. 농부 1:세묜의 말을 들으니... 타냐:(빠른 소리로) 세묜이 무슨 말을 하던가요? 농부 2:그런데 그애 말로는 통 이해가 가지 않더구먼. 타냐:지금은 자세히 설명해 드릴 수 없지만요, 힘 자라는 데까지 애쓰고 있어요. 보세요, 여기 그 서류가 있죠? (앞치마 밑에서 서류를 내보인다) 지금 제가 꾸미고 있는 그 일만 제대로 되면 좋을 텐데... 아아,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농부 2:그 서류를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돈을 지불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타냐:염려 마세요. 이 서류에 서명만 받으면 되는 거죠? 농부 3:서명만 받는다면야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소! (찻잔을 밀어내며) 차는 이젠 실컷 마셨구먼! 타냐:(혼잣소리로) 내 기어이 서명을 받고야 말 테니 두고들 보세요... 자, 한 잔 더 드세요! (차를 따른다) 농부 1:색시가 만일 토지 문제만 해결해 준다면, 시집갈 준비는 우리 조합에서 죄다 맡아서 하지. (차를 사양한다) 타냐:(차를 따라서 내밀며) 그러지 마시고 한 잔 더 드세요. 농부 3:이번 일만 잘 해결해주면 혼수건 뭐건 우리가 죄다 마련해줄 것이고, 잔칫날엔 내가 한바탕 춤을 춰 보이지. 내 생전에 춤이라곤 한 번도 춰 보지 않은 놈이지만, 그때만은 꼭 춰 보일 테요. 타냐:(웃으며) 그래요? 지금부터 기대해야겠네요. 침묵 농부 2; (타냐를 훑어 보며)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보기에 색시는 아무래도 농사일을 해낼 것 같지가 않구먼. 타냐:누가요? 제가요? 제가 그렇게 약하게 보이나요? 제가 이댁 마님을 죄는 것을 보여 드리고 싶군요. 남자 하인들도 아마 저만큼 바싹 죌 수는 없을 거예요. 농부 2:마님을 죄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타냐:뼈로 만든 딱딱한 조끼 같은 게 있는데요, 그걸 끈으로 바싹 죄어 묶는 거예요. 아저씨들이 말에 안장을 얹을 때처럼 말예요... 손에 침을 딱 뱉아 가지고 끈을 죄는 바로 그 식이죠. 농부 2:그러니까 말 허리띠를 졸라매는 식이란 말이지? 타냐:네, 그래요, 그렇게 하는 거예요. 하지만 마님 몸에 발을 걸고 죌 수는 없으니까, 더 어렵지요. (웃는다) 농부 2:뭣 때문에 마님은 그런 짓을 시킬까? 타냐:그럴 필요가 있거든요. 농부 2:그럴 필요가 있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지? 타냐:몸매를 맵시있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뭐. 농부 2; 흠, 그러니까 맵시있게 보이려고 배를 졸라맨다, 그 말이군. 타냐:네,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나는 마님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바싹 죄는 거예요. 그래도 마님은 '좀더, 좀더' 하시죠, 그러면 나는 손바닥이 뜨거워질 만큼 힘껏 죄죠. 그런데도 날 보고 약하다고 하실 수 있어요? 농부들, 고개를 내저으며 웃어댄다. 타냐:내가 너무 지껄인 것 같군요. (웃으며 퇴장) 농부 3:거참 재미있는 색시군. 농부 1:그러면서도 상당히 착실한 처녀 같은데. 농부 2:음, 괜찮은 처녀야. 제15장 사하토프와 바실리 등장한다. 사하토프는 손에 찻숟가락을 들고 있다. 바실리:하기는 정식은 아니었지만 점심으론 아주 그만이었어요. 새끼 돼지고기로 만든 햄까지 곁들여 나왔는데, 그 맛이 희한하단 말입니다! '룰리예'의 요리는 보통 이상이에요. 난 지금 거기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농부들을 보고) 아니, 저 사람들이 또 왔나? 사하토프:그것 참 좋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린 지금 그걸 감추러 왔어요. 대체 어디다 감추면 좋을까요? 바실리:잠깐만 실례하겠습니다. (식모에게) 내 개들은 어디 있지? 식모:마부들의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여기 부엌에다 둬둘 수도 없고 해서... 바실리:마부 방이라구? 알았어. 사하토프:난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오? 바실리:예, 예, 실례했습니다. 감춘다구요? 아, 그렇군요.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사하토프 씨? 저 농부들 중에 아무나 한 사람 골라서, 그 호주머니 속에 넣으시죠. 저 친구는 어떻습니까? 여보, 당신 호주머니 어디 있소? 농부 3:내 호주머니요? 내 호주머닐 어떡하시겠다는 거요? 여긴 돈이 들어 있어요! 바실리:그럼, 돈주머닌 어디 있지? 농부 3:아니, 그건 알아서 어쩌겠다는 거야? 식모:이봐요, 말 조심해요! 이분은 이 댁 도련님이세요! 바실리:(껄껄 웃으며 사하토프에게) 저 친구가 왜 저렇게 겁을 내는지 아세요? 돈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러는 겁니다. 사하토프:흠, 그래요? 그럼, 저 사람들하고 얘길 좀 하시오. 그 사이에 제가 저 주머니에 슬쩍 감출 테니, 그렇게 하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게 아닙니까? 설마 저 친구를 지목하지는 못할 테니까요. 자, 그럼, 어서 얘기를 시작하시오. 바실리:예, 예, 곧 시작하겠습니다! (농부들에게) 여보시오, 아까 그 토지 문젠 어찌 되었소? 사게 되었소? 농부 1:예, 살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만, 아직 조금도 진전이 있는 것 같지가 않군요. 바실리:너무 인색하게 굴지들 마시오! 땅이란 건 무엇보다 필요한 물건 아니오? 아까도 내가 가르쳐 준 것처럼 박하를 심으시오. 박하가 싫으면 잎담배를 심어도 좋고... 농부 1:옳은 말씀이십니다. 저희들은 무엇이든 다 심을 수 있습니다만... 농부 3:그러니까 도련님, 제발 나리님께 잘 좀 말씀드려 주십시오. 땅을 못 사게 되면, 저희들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쥐꼬리만한 땅 가지고는, 소나 말은 고사하고 닭 한 마리 놓아 기를 수 없는 형편이지요. 사하토프:(농부 3의 주머니 속에 숟가락을 넣고) 자, 이젠 됐소. 갑시다. (퇴장) 바실리:내 말대로 땅값 가지고 너무 째째하게 굴지 말란 말이오! 알아들었소? 그럼, 잘들 해보시오. (퇴장) 제16장 농부 3:그러기에 내가 말하지 않던가, 어디 딴 데다 숙소를 잡자고... 한 사람 앞으로 십 코페이카씩만 내면 두 다리 쭉 뻗고 쉴 수 있었을 텐데, 공연히 여기 남아 가지고 별꼴을 다 당하지 않느냐 말야... 돈주머닌 어디 있느냐구? 뭣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지? 농부 2:아마 술을 마시고 왔던가 봐. (농부들, 찻잔을 엎어 놓고 일어서서 성호를 긋는다) 농부 1:우리더러 뭘 심으라고 했는지 기억하나? 글세 박하를 심으라지 않나, 박하를! 농부 2:흥, 박하를 심으라구! 허리가 끊어지도록 열심히 박하농사 한 번 지어 보라지! 그건 그렇고, 우린 대체 어디서 자야 한다지? 식모:한 사람은 페치카에 올라가고, 두 사람은 거기 그 나무 걸상에 누우세요. 농부 3:예, 예, 그렇게 하겠소이다. (기도를 올린다) 농부 1:아무쪼록 하나님 덕분에 땅문제가 잘 해결되면 좋으련만! (눕는다) 그래서 내일은 점심 먹고 곧 기차를 타고서 화요일까진 집에 돌아가게 되었으면... 농부 2:불을 꺼야 하오? 식모:아니, 끄면 안 돼요. 이 집에선 연방 사람이 드나들며, 이걸 다오, 저걸 가져오너라, 하니까요... 어서 누우세요. 내가 등잔 심지를 내려 놓을 테니. 농부 2:손바닥만한 땅덩어리 가지고 이렇게 산단 말인고? 올해는 성탄절 때부터 여태까지 곡식을 사먹지 않았느냐 말이야. 제발 그 3000평짜리 땅만 내것이 된다면, 세묜 녀석도 집에 데려갈 수 있으련만. 농부 1:자넨 처 자식이 있으니까 그럴 테지. 땅만 사게 되면 자네도 아무 걱정 없이 살아 나갈 수 있을 거야... 어쨌든 이번의 이 땅문제가 잘 해결되어야 할 텐데! 농부 3:하늘에 계신 성모 마리아님께 기도드리는 수밖에 없지. 어쩌면 우리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실는지 몰라. 제17장 침묵. 한숨소리. 이윽고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와 말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활짝 열린다. 눈을 가리운 그로스만이 사하토프한테 손을 잡혀 등장한다. 그 뒤로 교수, 의사, 뚱뚱한 귀부인, 레오니드, 베시, 패트리시체프, 바실리, 마리야, 안나 부인, 남작 부인, 표도르, 타냐 등장. 농부들, 벌떡 일어난다. 그로스만,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서 멈춰 선다. 뚱뚱한 귀부인:여러분, 염려 마십시오, 내가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요. 내가 엄중히 감시하겠어요! 사하토프 씨, 당신은 이분을 이끌어 드리지 않으시겠죠? 사하토프:물론 그런 건 안 합니다. 뚱뚱한 귀부인:이끌어 드리지 말고 그냥 놔 두세요. 또한 이분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세요. (레오니드에게) 이런 실험은 나도 잘 알고 있답니다. 나 자신이 해본 일도 있으니까요. 무언가 힘이 충만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그리고 그렇게 느끼자마자... 레오니드:실례지만 철저하게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뚱뚱한 귀부인:네, 네, 잘 압니다. 나 자신 직접 실험해본 일이 있으니까요. 조금이라도 주의력이 산만해지면, 벌써 안 되거든요... 레오니드:쉿! 사람들,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농부 1과 농부 2의 주위를 찾아보다가 이윽고 농부 3에게로 다가간다. 그로스만, 걸상에 걸려서 넘어질 뻔했다. 남작 부인:혹시 저 사람 돈이라도 받고 저런 짓을 하는 건 아닐까요? 안나 부인:글쎄요, 나로서는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군요. 남작 부인:하지만 저 사람 귀족이겠죠? 안나 부인:그야 물론이죠. 남작 부인:참말 이상하군요, 그렇잖아요? 대체 어떻게 해서 찾아낸다는 걸까요? 안나 부인:나로서는 말씀드릴 수 없군요. 저의 주인이 설명해 드릴 겁니다. (농부들이 있는 것을 보고 좌우를 둘러보다가 식모를 발견한다) 잠깐만 실례하겠습니다... (식모에게) 아니, 어찌된 거야? 남작 부인, 다른 사람들한테로 간다. 안나 부인:누가 농부들을 또 끌어들였지? 식모:야코프가 데려왔어요. 안나 부인:(레오니드에게) 여봇! 레오니드는 무엇을 찾기에 열중하여 부인이 부르는 것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쉿, 쉿, 소리만 연발한다. 안나 부인:표도르 이바노비치! 도대체 이건 뭐요? 아까 내가 현관홀을 소독하게 한 걸 당신도 보았을 게 아녜요? 그런데 이번엔 또 여기다 저 사람들을 끌여들였으니, 부엌이 온통 병균투성이가 되지 않느냐 말예요! 흑빵이건 청량 음료건 죄다... 표도르:전 여기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요. 주인 어른께 용무가 있어서 온 사람들인 데다가, 이 댁 토지가 있는 시골 마을에서 올라들 왔기 때문에... 안나 부인:그러니까, 더욱 안 된단 말예요! 쿠르스크 마을은 지금 디프테리아가 돌아, 사람들이 파리 새끼처럼 쓰러져 간다잖아요. 그보다도 내가 아까 저 사람들을 쫓아내라고 한 말을 들었어요 못 들었어요? 그것부터 대답해봐요! (농부들, 주위에 모인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조심들 하세요. 이 사람들한테 손을 대면 큰일입니다! 디프테리아균이 가득 묻어 있을 테니까요! 아무도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안나 부인, 거만스런운 태도로 물러난다. 그리고 한 자리에 서서 기다린다. 패트리시체프:(코를 킁킁거리며) 디프테리아균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무슨 다른 전염병균이 이 공중에 떠돌고 있는 것 같군요. 어때요, 그렇잖습니까? 베시:바보 같은 소리 그만두세요! (오빠에게) 오빠, 어느 주머니에 들어 있죠? 바실리:저기야, 저기! 점점 다가오고 있다! 패트리시체프:저 속에 뭐가 들어 있다는 거요? 신령이 들어 있는가, 망령이 들어 있는가? 베시:당신이 담배 피우기에 꼭 알맞는 때예요. 피우세요, 어서! 내 옆으로 좀더 가까이 와서. 패트리시체프, 베시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면서 담배를 피운다. 바실리:틀림없이 그걸 찾아낼 거야. 저것 봐! 그로스만:(흥분한 듯이 농부 3의 주위를 더듬는다) 여깁니다, 여기예요! 여기라는 게 느껴집니다. 뚱뚱한 귀부인:힘이 충만되는 것 같은 느낌이지요? 그로스만, 머리를 굽혀 주머니 속에서 숟가락을 꺼낸다. 일동:브라보! 바실리:아니, 우리집 숟갈이 그런 데 들어가 있었나? (농부에게) 아하, 그렇고 보니 당신이 슬쩍했던 모양이군? 농부 3:슬쩍했다는 건 무슨 뜻이오? 당신에 숟갈 같은 건 집어넣은 기억이 없어요. 공연히 생사람 잡으려 들지 마시오. 난 절대 숟가락을 집어 놓은 일이 없단 말이오! 흥, 그러고 보니 아까 당신이 여기 온 것도 까닭이 있었군. '돈주머닌 어디 있냐' 고 엉뚱한 소리를 하더니만... 아무튼 난 숟가락 같은 건 몰라요. 하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성호를 긋는다) 난 정말 몰라요! 젊은 사람들, 농부 3을 둘러싸고 웃고 있다. 레오니드:(아들에게 성을 내며) 넌 어째서 그렇게 바보 같은 소리만 하느냐! (농부 3에게) 아니, 염려할 것 없어, 자네가 집어넣지 않았다는 건 우리가 다 알고 있으니까. 이건 간단한 실험이었을 뿐이야. 그로스만:(눈가리개를 벗고, 이제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물을 좀 마실 수 없을까요... 모두들 그를 에워싸고 바삐 시중을 든다. 바실리:자, 그럼, 우린 이제부터 마부들의 방으로 가십시다. 아주 좋은 개를 한 마리 보여 드리죠. 정말이지 눈이 뒤집힐 만큼 멋진 물건이에요! 베시:좀 점잖게 말할 수 없어요? 그냥 개라고 하면 될 것을! 바실리:아니, 그냥 개라고 해서는 안 되지. 예컨대, 베시는 눈이 뒤집힐 만큼 멋진 물건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게 아니냐? 젊은 영애라든가 아가씨라고 해야지. 그것과 똑같은 이치야. 그렇잖아요. 마리야 콘스탄치노브나? 그렇죠, 네? (잠깐 웃는다) 마리야:그럼, 가십시다. 마리야, 베시, 패트리시체프, 바실리 퇴장. 제18장 뚱뚱한 귀부인:(그로스만에게) 그래, 어떠세요? 이젠 숨을 돌리셨나요? (그로스만이 대답을 하지 않으니까 이번엔 사하토프에게) 사하토프 씨, 힘이 충만되는 느낌이 들지 않던가요? 사하토프: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던데요. 하지만 아주 잘 됐어요. 그야말로 성공적입니다! 남작 부인:참 놀랍군요! 하지만 그분은 괴롭지 않을까요? 레오니드:뭐 괜찮을 겁니다. 교수:(그로스만에게) 부탁합니다. (체온계를 내준다) 실험을 시작할 때는 3도 2부였어요. (의사에게) 그렇죠, 아마? 수고스럽지만 맥박을 재 주십시오. 에너지의 소모는 필연적이니까요. 의사:(그로스만에게) 자, 그럼, 맥을 좀 짚어봅시다. 예, 지금 곧 보기로 하죠. (시계를 꺼내 들고 한 손으로는 그로스만의 손을 잡는다) 뚱뚱한 귀부인:(그로스만에게) 실례지만, 당신의 현재의 상태는 수면 상태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로스만:(피곤한 듯이) 최면 상태라고 해야겠죠. 사하토프:그럼 자기 체면에 빠졌다고 해석해야 할까요? 그로스만:예, 이를테면 그런 것입니다. 최면 상태라는 건 외부의 작용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고, 예컨대 샤르코씨의 학설처럼, 둥둥 울리는 북소리 같은 것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고, 최면 구역에 발을 들여 놓는 것만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사하토프:그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최면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좀 더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을까요? 교수:최면이란 하나의 에너지가 또 하나의 에너지로 바뀌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로스만:샤르코 씨의 정의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하토프:아니, 잠깐만! 당신은 그렇게 정의하시지만, 리보 씨가 직접 나한테 말한 바에 의하면... 의사:(그로스만의 맥박을 재어보고 나서) 좋습니다. 좋아요. 그럼, 체온은 어떻게 되었나 보십시다. 뚱뚱한 귀부인:(대화에 끼어들며) 실례지만, 나는 교수님의 의견에 찬성이에요.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를 말씀드리죠. 내가 중병을 앓고 나서 거의 인사불성으로 누워 있었을 때의 일인데요. 무슨 소리든 자꾸만 지껄이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꼈어요. 평소에는 말수가 적은 편인데, 그때는 어쩐 일인지 자꾸만 말을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쉴 새 없이 지껄여 댔지요. 나중에 들으니 모두들 무척 놀랐던가 봐요. (사하토프에게) 아니, 내가 말씀하시는 걸 방해한 것 같군요. 사하토프:(위엄있게) 천만에. 어서 계속하십시오. 의사:맥박은 82, 체온은 3부가 높아졌습니다. 교수:그러면 그렇겠지! 그것이 바로 증거요! 하긴 이건 당연한 현상이지만. (수첩을 꺼내서 기입한다) 82라고 했죠? 그리고 37도 5부. 최면상태에 들어가자마자 심장의 활동이 증대하는 건 필연적 현상입니다. 의사:예, 나는 의사로서 말씀드립니다만, 교수님의 예언이 사실로서 증명되었음을 인정합니다. 교수:(사하토프에게) 당신도 아마 그렇게 말씀하셨죠? 사하토프:아니, 내가 말하려 한 것은, 이건 리보 씨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인데, 최면 상태란 신체의 어떤 변화로서, 암시를 받기 쉽게 된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말하려 했던 것입니다. 교수:그건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평균력의 법칙이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로스만:뿐만 아니라, 리보 씨는 아직도 학계의 권위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샤르코 씨로 말하면, 모든 면에서 깊이 연구를 거듭한 끝에 최종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니까요. 샤르코 씨에 의하면, 최면상태란 일종의 타박상 같은 외상에 의하여 일어나며... 그로스만의 말이 계속되는 동시에 사하토프와 교수도 열심히 자기 얘기를 한다. 사하토프:나도 샤르코 씨의 연구를 전적으로 부정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분하고는 나도 아는 사이지만, 나는 다만 리보 씨한테서 들은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뿐입니다. 그로스만:(흥분하며) 살베트리에르 대학 병원엔 3천 명의 환자가 있는데, 나는 거기서 전 과정을 이수했단 말입니다. 교수:이거 보시오, 그런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뚱뚱한 귀부인:잠깐만, 나한테도 한마디만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우리 주인이 앓아 누웠을 때 의사들은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레오니드:자, 여러분, 이젠 이층으로 올라들 가십시다... 남작 부인께서도 올라가시지요! 모두들 제멋대로 떠들어대면 퇴장한다. 제19장 안나 부인:(레오니드의 팔소매를 잡아 그를 제지한다) 집안일에 대해선 제발 간섭하지 말아 달라고 내가 벌써 당신한테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요. 당신은 그 바보 같은 일에만 정신이 팔려서, 집안일은 전적으로 나한테 일임하고 있으니 하는 말에요. 어쩌자고 당신은 집안 식구에게 병을 전염시키는 짓을 했죠? 레오니드:대체 내가 뭘 어떻게 했다는 거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소. 안나 부인:아아니, 뭐라구요? 디프테리아 환자들이 이 부엌에서 자기 있지 않느냐 말에요! 안채와 내왕이 제일 많은 이 부엌에서! 레오니드:하지만 나는... 안나 부인:나는, 나는, 나는 이 어쨌다는 거죠? 레오니드: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야. 안나 부인:당신이 이 집 가장이라면 그런 것쯤 알고 있어야 할 게 아니냐 말에요! 레오니드:하지만 난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서... 안나 부인:그 따위 변명은 듣기도 싫어요! 레오니드, 아무 대꾸도 없다. 안나 부인:(표도르에게) 당장 내쫓아요! 부엌에다 저런 사람을 들여 놓다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니까요. 누구 하나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일부러 짓궂게 굴기만 하니... 내가 저기서 쫓아내니까 이번엔 또 이리로 집어 넣고... (더욱더 흥분하여 금세 울기라도 할 것 같은 목소리로) 아아, 어째서 모두들 나한테 맞서려고만 드는 걸까! 그렇잖아도 나는 병을 앓고 있는 몸인데... 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 아아, 의사 선생님까지 나가버렸군! (마침내 울음으로 터트리며 퇴장) 제20장 세 농부, 타냐, 표도르, 식모, 늙은 요리사. 모두들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다. 농부 3:이거 큰일났는 걸! 까딱하다간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될는지 몰라. 나는 이 세상에 나온 후 여태 한 번도 법에 걸려든 적이 없는데... 자, 이러고들 있을 게 아니라 어서 주막집으로 가세! 표도르:(타냐에게) 어쩌면 좋을까? 타냐:표도르 아저씨, 걱정할 것 없어요. 여기가 안 된다면, 마부들의 방에서 자게 하죠 뭐. 표도르:마부들의 방은 안 돼. 그렇잖아도 거기다 개들을 가득 넣었다고, 아까 마부가 와서 투덜거리고 갔는데. 타냐:그럼, 문지기 방으로 안내하죠. 표도르:그랬다가 또 들키면 어쩌려구? 타냐:괜찮아요, 거긴 절대로 들키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밤이 깊었는데, 어떻게 저분들을 내쫓겠어요! 이 시간에 거리로 나가봐야 주막집도 찾지 못할 텐데요. 표도르:그럼, 네가 알아서 하려무나. 어쨌든 여기서만 나가면 될 테니까. 제21장 농부들, 보따리를 챙겨든다. 늙은 요리사:에이, 저주받을 것들 같으니! 비곗살이 퉁퉁 쪄 가지고... 망할 놈의 것들! 식모:닥치고 있어요! 들키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알 것이지... 타냐:그럼, 아저씨들은 나하고 같이 문지기 방으로 가십시다. 농부 1:그보다도 우리 일은 어떻게 되었소? 그러니까 서명은 받게 되는 건지 어떤지... 타냐:한 시간만 더 있으면 다 알게 될 거예요. 농부 2:속임수를 쓰려는 건가? 타냐:(웃는다) 모든 걸 운에 맡기는 거죠 뭐. 제3막 같은 날 밤. 레오니드가 언제나 실험을 하곤 하는 조그만 객실. 제1장 레오니드:그럼, 우리집에 있는 새 매개인을 사용하여 한 번 실험을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교수:좋아요. 그 청년은 강력한 매개인임이 틀림없으니까요. 그럼, 오늘 밤 이 자리에서 곧 매개에 의한 강신술 실험회를 열기로 합시다. 그로스만은 반드시 매개 에너지의 반응을 받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 현상의 상호 관계와 그 통일 상태가 보다 명백해질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매개인이 요전처럼 강력하기만 하면, 그로스만은 후들후들 떨기 시작할 테니까요. 레오니드:그럼, 곧 세묜을 불러 오도록 하고, 출석 희망자들을 이리로 초대합시다. 교수:예, 그렇게 하십시오. 나는 잠깐 노트에 기록을 하겠습니다. (노트를 꺼내서 무언가 적어 넣는다) 제2장 사하토프 등장한다. 사하토프:지금 저쪽 안나 부인 방에서 카아드 놀이가 시작되었지만, 난 그런 건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실은 당신네들의 실험에 더 흥미가 있어서 이리로 왔습니다... 실험을 하시는 겁니까? 레오니드:물론 합니다! 사하토프:그럼, 카프치치 씨의 매개력을 빌지 않고 한단 말씀입니까? 레오니드:그게 일이 제대로 되느라고 또다른 매개자가 나타나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아침에 얘기한 우리집 하인 말입니다, 바로 그 하인이 또 아주 훌륭한 매개자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사하토프:그래요? 거 참 흥미있군요! 레오니드:그렇습니다. 우린 점심 식사 후에 그 하인을 불러서 간단히 예비적인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사하토프:그래서 결과가 좋았습니까? 확신을 얻으셨어요? 레오니드:물론이죠! 아주 유력한 매개자라는 걸 알았습니다. 사하토프:(믿기 어렵다는 듯이) 그래요? 레오니드:하인들 사이에서는 벌써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한 번은 그 하인이 식탁에 와서 앉자마자 숟가락이 저절로 그의 손 안에 날아들더라는 겁니다! (교수에게) 당신은 그 얘길 들으셨습니까? 교수:아니, 그런 얘긴 못 들었습니다. 사하토프:(교수에게) 그보다도, 선생께선 그런 현상이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수:어떤 현상 말입니까? 사하토프:이를테면, 강신술이라든가, 영매술이라든가 하는...이런 초자연적인 현상 말입니다... 교수:하지만 그것은 첫째 무엇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인정하느냐가 문제 아니겠습니까?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돌멩이가 못을 끌어당겼을 때, 그것을 처음 본 사람은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느꼈을까요, 아니면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느꼈을까요? 사하토프:그건 그렇습니다만, 자석이 철물을 끌어당기는 것 같은 현상은 얼마든지 반복되는 게 아닙니까? 교수:그러니까 이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니냐 말입니다. 현상은 반복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연구할 수도 있고, 실험할 수도 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자기가 연구하고 있는 이 현상을 다른 현상과 공통된 법칙에 응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현상이 초자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건, 매개인 자신이 그런 현상을 일으키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 종류의 현상은 매개자 자신이 일으키는 게 아니라, 매개자를 통해 영적 에너지가 활동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기에 커다란 차이가 있겠지요. 모든 물질은 균형의 법칙에 지배를 받고 있으니까요. 사하토프: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러나... 제3장 타냐, 등장하여 커튼 뒤에 숨는다. 레오니드:한 가지만 말씀드려 두겠는데요. 이 매개자가 흄이나 카프치치처럼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나타낼는지 어떻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따라서 실패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쩌면 완전히 영혼이 나타날는지도 모릅니다. 사하토프:영혼까지도 나타난단 말씀입니까? 그게 대체 무슨 뜻입니까? 레오니드:그건 무슨 뜻인고 하니, 예컨대 당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나, 이미 고인이 된 분이 나타나서, 당신의 손을 잡든가, 혹은 무슨 물건을 당신에게 주든가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 우리집에서 이 교수님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만, 살아있는 인간의 몸이 갑자기 공중에 던져지기도 한단 말입니다. 교수: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런 현상은 분석 해석하여 일반적인 법칙에 해당되는지 여부를 가려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제4장 뚱뚱한 귀부인, 등장한다. 뚱뚱한 귀부인:안나 부인께서 허락해 주셔서 나도 이리로 왔습니다. 레오니드:아, 어서 오십시오! 뚱뚱한 귀부인:그런데 그로스만 씨는 굉장히 피로를 느끼는 모양이더군요. 찻잔조차 제대로 쥐고 있지 못하더라니까요! (교수에게) 아까 그 사람이 주머니 옆으로 다가갈 때의 그 창백한 얼굴빛을 보셨나요? 난 대번에 그걸 알아채고 안나 부인한테 말했었지요. 교수:그렇게 되는 게 당연하죠. 생명의 에너지의 소모니까요. 뚱뚱한 귀부인:그래서 나는 그걸 남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죠. 당신도 아시겠지만, 내 친구 베로치카 콘쉬나한테 최면술 선생이 최면을 걸지 않았겠어요. 담배를 끊게 하려고 말예요. 그랬더니 글세 베로치카는 어깨를 앓기 시작하더라니까요... 교수:(자기 말을 계속하려고) 체온과 맥박의 변화에 의해 그것은 명백히... 뚱뚱한 귀부인:실례지만 잠깐만... 그래서 나는 베로치카한테 말했죠. 그렇게 신경통으로 고생할 바에야 차라리 담배를 끊지 않는 편이 나을 거라고 말예요. 그야 물론 흡연은 건강에 해롭겠죠. 그래서 나도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지 뭡니까! 하긴 한 번 끊어 보았는데, 한두어 주일 지나니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더군요. 교수:(또다시 말을 계속하려 한다) 그것은 명백히 증명되고 있어요... 뚱뚱한 귀부인:아니, 한 마디만 더 하게 해주세요! 방금 에너지의 소모라고 말씀하셨는데, 실은 나도 그것을 말하려던 거예요. 다름 아니라, 내가 언젠가 역마차로 여행했을 때의 일인데... 그 당시의 도로란 그야말로 형편없었거든요.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실지 모르지만, 나는 그 당시를 회상하고 있어요. 그래서 한 가지 깨달은 일이 있지요.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의 신경쇠약은 전적으로 철도라는 것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말예요. 예를 들어, 나는 기차 여행 중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자지 않으면 죽인다고 해도 잘 수가 없단 말예요! 교수:(또다시 말을 시작한다. 그러나 뚱뚱한 귀부인이 가로 막는다) 에너지의 소모는... 사하토프:(빙그레 웃으며) 예, 예, 알겠습니다. 레오니드, 초인종을 울린다. 뚱뚱한 귀부인:하룻 밤, 이틀 밤, 아니 사흘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새워도, 영 잠이 들지 않지 뭡니까! 제5장 그리고리, 등장한다. 레오니드:표도르한테 실험할 준비를 완전히 해 놓으라고 이르게. 그리고 세묜을 이리로 부르게. 식당에서 일하는 세묜 말이야, 알겠나? 그리고리:예, 알겠습니다! (퇴장) 제6장 교수:(사하토프에게) 체온과 맥박의 검사로써 생명의 에너지 소모가 증명된 셈이지요. 강신술에 있어서의 매개자의 현상에서도 역시 그것이 증명될 겁니다. 에너지 불멸의 법칙이란... 뚱뚱한 귀부인:그야 그렇죠. 하지만 내가 한마디만 더 말씀드리겠는데요. 다름 아니라, 소박한 농촌 출신 하인이 영혼의 매개자가 되었다니, 그것 참 반가운 일이군요.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범슬라브주의자들은... 레오니드:잠깐, 저쪽 객실로 나갑시다. 뚱뚱한 귀부인:가만 계세요, 한마디만 더 하게 해 주세요... 범슬라브주의자들의 주장은 옳아요. 그러나 내가 늘 우리 바깥양반한테 하는 말이지만, 무엇이든 너무 과장해서 말하는 건 좋지 않아요! 중용이라는 게 중요하죠. 농민들 속에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좋다고 단정할 수는 없잖아요? 나도 직접 보아서 잘 알았지만요... 레오니드:객실로 나가시지 않겠습니까? 뚱뚱한 귀부인:글쎄, 요만한 사내아이가 벌써 술을 마시고 있더라니까요! 나는 당장 호되게 꾸짖어 주었죠. 나중에 그애는 나를 고맙게 여기더군요. 농민이란 어린아이와 같은 거예요. 어린아이들에겐 애정과 엄격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나는 늘 말하고 있지요... 일동, 말을 계속하며 퇴장. 제7장 타냐 혼자, 커튼 뒤에서 나온다. 타냐:아아, 제발 일이 제대로 되어 줬으면 좋으련만! (실은 매고 있다) 제8장 베시, 급히 등장한다. 베시:아빠, 계셔요? (타냐를 눈여겨 바라보며) 아니, 너 거기서 뭘 하니? 타냐:예, 아가씨, 그저 좀... 뭘 하려고... 아니, 그 저 좀 들어온 것뿐이에요... (당황한다) 베시:여기서 곧 실험을 한다던데? (타냐가 실을 감고 있는 걸 눈치채고 유심히 보고 있다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린다) 얘, 그러고 보니 그게 다 네 짓이었구나! 난 못속인다! 요전에도 네가 한 짓이지? 틀림없어, 네가 한 짓이야. 타냐:아가씨, 제발 부탁입니다. 베시:(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하, 하, 하, 그것 참 재미있구나! 그런 것도 모르고, 근데 뭐 때문에 그런 짓을 하지? 타냐:아가씨, 제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주세요! 베시:그래, 절대 말하지 않을 게! 아아, 재미있어! 그렇지만 대체 어떻게 해서 속임수를 쓰는 거니? 타냐:네, 그건 이렇게 하면 되죠. 처음엔 가만히 숨어 있다가, 불이 꺼진 다음에 기어나와서 하는 거예요. 베시:(실을 가리키며) 그럼 저건 뭐에 쓰지? 아니,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네가 저걸 잡아당기는 거겠지... 타냐:아가씨, 아가씨한테만 모든 걸 다 말씀드리겠어요. 전엔 그저 장난삼아 해봤을 뿐이에요. 그러나 오늘은 한 가지 일을 성사시켜 볼 작정이에요. 베시:뭐라구? 일이라니, 무슨 일? 타냐:다름이 아니라, 아가씨도 아시겠지만, 오늘 아침에 시골에서 농부들이 땅을 사려고 올라왔는데, 나리님께서 팔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서명을 거부하고 서류를 되돌려 주셨거든요. 표도르 아저씨 말로는, 성령이 '팔지 마라' 고 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죠... 베시:아아, 알겠다! 넌 참 머리가 좋구나! 잘 해봐.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니? 타냐:불이 꺼지면 곧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고 또 닥치는 대로 물건을 던지기도 하고, 실로 사람들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다가, 나중에 그 토지 매매 서류를 테이블 위에 던지는 거예요. 그 서류는 내가 여기 갖고 있거든요. 베시:그럼, 어떻게 되지? 타냐:어떻게 되긴요! 모두들 깜짝 놀라겠죠. 농부들이 갖고 있어야 할 서류가 느닷없이 튀어나오니, 안 놀랄 수 있겠어요? 그때 내가 신호를 하면... 베시:아 참, 오늘은 세묜이 매개자가 된다고 했지. 타냐:그러니까 내가 세묜한테 신호를 하면...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억지로 참으며) 세묜은 아무나 옆에 있는 사람의 목을 사정 없이 조르는 거예요. 하지만, 나리님의 목이야 어떻게 조르겠어요? 나리님께서 서류에 서명하실 때까지 아무나 딴 사람의 목을 조르는 거죠. 베시:(웃는다) 그렇지만, 매개자 자신은 아무것도 안 하는 법이야. 타냐:아무려면 어때요. 아마 제대로 될 거예요. 제9장 표도르, 등장. 베시는 타냐에게 눈짓을 하며 퇴장한다. 표도르:(타냐에게) 너 여기서 뭘 하는 거냐? 타냐:표도르 아저씨, 실은 아저씨한테 좀 여쭈어 볼 일이 있어서... 표도르:뭔데? 타냐:내가 부탁드린 일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요. 표도르:(웃으며) 그 얘기 말인가? 그 얘긴 잘 됐어. 혼담이 아주 성립된 거나 마찬가지야. 약혼주를 나누지 안았을 뿐이지. 타냐:(좋아서 어쩔 줄 모르며) 정말예요? 거짓말 아니죠? 표도르:내가 왜 거짓말을 해? 영감님 '마누라한테 얘기만 하면 된다' 고 했어. 타냐: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환성을 올린다) 표도르 아저씨, 아저씨 은혜는 일생동안 잊지 않겠어요! 표도르:응, 좋아, 좋아. 그보다도 난 지금 강신술 실험을 할 채비를 해야 해. 타냐:그럼, 내가 도와 드리죠. 어떡하면 되죠? 표도르:뭐, 그저 방 한가운데다 테이블을 내놓고, 의자와 기타와 손풍금을 준비하면 되지. 램프는 필요없어, 촛불을 켤 테니까. 타냐:(표도르를 도와 도구를 올려 놓으며) 이렇게 하면 되나요? 기타는 여기 놓고, 잉크병은 이쪽에 놓고... 이렇게 하면 됐죠? 표도르:근데, 세묜을 이리 불러다가 실험대에 앉힌다는 건 정말일까? 타냐:정말일 거예요. 아까도 데려다가 앉혔었는 걸요. 표도르:그것 참 놀라 자빠질 일이로군! (안경을 쓴다) 하지만 세묜이 몸이나 더럽지 않을지 모르겠군? 타냐: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표도르:그러니까 하는 말인데... 타냐:뭐 말이죠? 표도르:그러니까, 네가 손톱깎이와 세숫비누를 가져오렴. 내 방의 것이라도 좋으니, 가져다가 손톱도 잘라 주고 손도 깨끗이 씻어 주어라. 타냐:그런 거야.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해야죠. 표도르:그럼, 세묜에게 그렇게 일러라. 셔츠도 좀 깨끗한 것으로 입으라고 말이다. 타냐:네, 그렇게 말하겠어요. (퇴장) 제10장 표도르 혼자, 안락의자에 앉는다. 표도르:그 사람들은 모두 굉장히 유식한 양반들이고, 선생님이신데, 그래도 가끔 괴상한 짓들을 하거든. 가난뱅이들 사이에 성행하는 요술이나 마술이나 귀신이니 무당이니 하는 건 미신이라 해서 배척하고들 있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이나 이것이나 미신이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타나서 말을 하고 기타를 치고 한다니, 그게 과연 정말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누군가가 그분들을 속이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그분들 자신이 머리가 좀 돌아버린 탓이겠지. 이제 곧 세묜을 매개자로 내세워 실험을 할 모양이지만, 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니까! (앨범을 들여다본다) 이게 강신술 사진첩인가! 영혼을 사진으로 찍다니, 도대체 그게 가능한 일일까? 여기 이 사진은 나리님과 터키 사람이 나란히 앉아서 찍은 건데... 아아, 인간은 참 이상한 결점을 지니고 있거든! 제11장 레오니드, 등장한다. 레오니드:(들어오며) 준비는 다 됐나? 표도르:(천천히 일어나며) 예, 다 됐습니다. (빙긋이 웃으면서) 그런데 나리님, 오늘 새로 쓰시기로 한 매개자 말입니다만, 혹시 그 녀석이 창피한 꼴을 보이지나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레오니드:아니, 문제없어. 아까 알렉세이 블라지미로비치와 둘이서 미리 실험을 해봤거든. 그 하인은 아주 강력한 매개자야! 표도르:거기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녀석의 꼬락서니가 너무 불결하지는 않을는지요? 그 녀석한테 손을 씻으라고 이르시지 않은 모양인데, 그 꼴을 하고 나타나면 아무래도 좀 뭣 할 것 같군요. 레오니드:손을 씻으라구? 음, 그렇군. 그다지 깨끗하지는 못하다, 그 말이지? 표도르:예, 시골 출신 하인이라서... 더욱이 손님들 중에는 숙녀들도 계시고 또 주인 마님께서도 참석하실 게 아닙니까? 레오니드:뭐 괜찮겠지. 표도르: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요... 다름 아니라, 마부로 있는 치모페이가 불만을 호소하고 있어요. 개들 때문에 방을 깨끗이 할 수가 없다구요. 레오니드:(무엇에 정신이 팔린 것 같은 표정으로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정돈하며) 개들이라니? 표도르:실은 오늘 도련님이 사냥개 세 마리를 끌고 오셔서 마부들 방에다 넣으셨거든요. 레오니드:(귀찮다는 듯이) 그런 일은 마누라한테나 말하게! 마누라가 좋도록 처리할 테니까. 난 그런 문제까지 정신을 쓸 겨를이 없어. 표도르:하지만 아시다시피 마님께서 도련님이라면 무조건 감싸고돌려 하시기 때문에... 레오니드:그러니까, 마누라가 좋도록 처리하라는 거 아닌가! 그 녀석은 언제나 나한테 불쾌한 짓만 하고 있다니까. 아무튼 난 지금 시간이 없어. 제12장 세묜, 소매 없는 농민용 외투를 입고 싱글싱글 웃으며 등장한다. 세묜:부르셨습니까? 레오니드:음, 불렀어. 어디 손 좀 보세. 됐어, 이만하면 됐어. 자, 그럼, 아까처럼 해줘야겠네. 가만히 앉아서 감각에 몸을 떠맡기고만 있으면 되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게. 세묜:생각할 필요가 어디 있겠어요? 생각하면 할수록 잘 안 되게 마련이죠. 레오니드:맞았어. 그 말이 옳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그만큼 매개력이 강해지는 법이니까. 아무 생각 말고 그저 기분에? 따라가면 되는 거야. 졸리면 자고, 걷고 싶으면 걷고, 그런 식으로 하면 되네, 알겠나? 세묜:예, 알구말구요! 복잡할 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레오니드:그리고 이건 특히 중요한 점인데, 절대 당황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날는지도 모르니까.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라는 것이 바로 우리 옆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네. 표도르:(레오니드의 말을 정정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이 말일세, 알아듣겠나? 세묜:(미소를 띄우며) 왜 못 알아듣겠어요! 나리님께선 아주 쉽게 설명해 주시니까 다 알아들을 수 있어요. 레오니드:혹시 공중으로 몸이 붕 뜬다든가, 또 무슨 이상한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그래도 절대 겁을 집어먹어서는 안되네. 세묜:겁을 집어먹긴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문제 없습니다. 레오니드:그럼, 내가 가서 손님들을 불러 오겠네. 준비는 다 됐겠지? 표도르:예, 다 된 것 같습니다. 레오니드:헌데 석반은 어찌 됐나? 표도르:아래층에 있습니다. 곧 가져오겠습니다. (퇴장) 제13장 레오니드:흠, 좋아, 그럼, 자네 절대 당황해서는 안 되네. 마음 턱 놓고 있으면 되는 거야. 세묜:이 외투는 벗는 게 어떨까요? 벗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레오니드:외투 말인가? 아니, 뭐 벗을 것까진 없어. (퇴장) 제14장 세묜:타냐는 또 아까처럼 하라고 했지... 자기는 또 마구 물건을 던질 작정인가? 겁나지도 않은가 보지. 제15장 타냐, 신을 벗고 양말만 신고 등장. 벽지와 같은 빛깔의 옷을 입고 있다. 세묜, 큰소리로 웃는다. 타냐:(제지한다) 쉿! 남들이 들으면 어쩌려구! 자, 이 성냥개비를 아까처럼 손가락에 붙여야 해요. (성냥개비를 손가락에 붙여 준다) 하나도 잊어버리진 않았겠죠? 세묜:(손가락을 하나씩 꼬부리며) 우선 성냥을 적셔서 손을 흔든다, 이것이 첫째고. 다음에 이를 부드득부드득 간다, 이것이 둘째... 그리고 셋째는 뭐더라? 잊었는 걸. 타냐:셋째가 제일 중요하단 말예요. 잘 기억하세요. 서류가 테이블 위에 떨어지면 내가 곧 방울을 울릴 테니까, 당신은 이렇게 팔을 활짝 벌리는 거예요. 그러고는 아무나 옆에 있는 사람을 붙잡고 그 사람을 사정없이 조르세요! (웃는다) 신사건 귀부인이건 덮어놓고 죽어라고 조르면서, 절대 놓아주지 말아야 해요. 마치 꿈을 꾸면서 하는 것같이 하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를 부드득부드득 갈면서 으르렁거리세요. 이렇게 말예요... (으르렁거린다) 그러다가 내가 기타를 치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퍼뜩 잠이 깬 것처럼 기지개를 켜세요. 알았죠? 그 때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온 체하는 거예요. 이젠 다 기억하시겠죠? 세묜:응, 잘 알았어. 하지만 너무 우스꽝스러운 걸. 타냐:그렇다고 웃음을 터뜨리면 안 돼요. 하긴 좀 웃더라도 문제될 건 없을 거예요. 잠을 자면서 웃는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불이 꺼진 다음에 정말로 잠이 들어버렸다간 큰일이에요. 세묜:염려 마. 잠들지 않게 귓구멍을 후비고 있을 테니까. 타냐:그럼, 조심해서 잘해야 해요. 그렇다고 겁을 먹지는 말고... 꼭 서명을 받게 될 테니, 두고 보세요. 아, 저기들 오네요... (소파 밑으로 기어들어간다) 제16장 그로스만, 교수, 레오니드, 뚱뚱한 귀부인, 의사 ,사하토프, 안나 부인이 함께 등장한다. 세묜은 문 옆에 서 있다. 레오니드:자, 의혹을 느끼시는 여러분, 어서 들어오십시오! 오늘 저녁은 우연히 발견된 새 매개자를 쓰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주 주목할 만한 현상이 나타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하토프:그것 참 흥미있군요! 뚱뚱한 귀부인:(세묜을 가리키며) 생각했던 것보다는 멀쩡한 청년이군요. 안나 부인:네, 식당 하인 치고는 그렇겠죠. 그러나... 사하토프:아내된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남편의 하는 일을 믿지 않는 법인데, 부인께서도 역시 이런 일을 전혀 믿지 않으십니까? 안나 부인:물론 믿지 않아요. 하지만 카프치치 씨는 어딘가 좀 색다른 데가 있었어요. 그런데 저 하인의 꼬락서닌 뭡니까! 어이가 없어 말을 할 수 없군요. 뚱뚱한 귀부인:실례지만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에요. 나는 결혼하기 전에 정말 멋진 꿈을 꾼 일이 있었어요. 꿈이라는 건 아시다시피 밑도 끝도 없는 경우가 많거든요. 내가 그때 꾼 꿈도 그런 것이었지만요... 제17장 바실리와 패트리시체프 등장한다. 뚱뚱한 귀부인:나는 그 꿈에서 많은 암시를 받았답니다. 저분들 같은 (바실리와 패트리시체프를 가리키며) 젊은 양반들은 무턱대고 무엇이든 부정하려 들지만요... 바실리:하지만 난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제18장 베시와 마리야 등장하여, 패트리시체프와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뚱뚱한 귀부인:어떻게 초자연적인 것을 부정할 수 있겠어요? 이성에 위배된다고들 곧잘 말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이성이야말로 더없이 어리석은 것인지도 모르잖습니까? 아시겠어요? 요즘도 사도바야 거리에 밤마다 이상한 것이 나타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기는 저의 남편의 형님이, 남편의 형님을 뭐라고 하는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아무튼 제 남편의 형님이 사흘 밤이나 계속해서 거기 가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군요. 그래서 난 이렇게 말해 주었답니다... 그건... 레오니드:그럼, 여기 남아 계실 분은 누구십니까? 뚱뚱한 귀부인:네, 내가 남겠어요. 사하토프:나도 남겠습니다. 안나 부인:(의사에게) 설마 당신은 여기 남지 않으시겠죠? 의사:아니, 저 교수님이 무엇을 발견하는지 한 번쯤 봐둘 필요가 있어요. 증거도 없이 무턱대고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안나 부인:그럼, 오늘 저녁엔 꼭 먹어야 하겠죠? 의사:무엇을 말입니까? 아아, 가루약 말인가요? 글쎄 올시다, 잡수시는 편이 좋겠죠. 아니, 잡수십시오, 잡수세요... 그럼, 이따가 다시 부인 방에 들르겠습니다. 안나 부인:네, 꼭 들러 주세요. (큰소리로) 여러분, 실험이 끝나거든 저의 방에 오셔서 쉬도록 하세요. 그리고 아까 하던 트럼프놀이도 승부를 짓도록 하셔야죠. 뚱뚱한 귀부인:네, 들르고말고요. 사하토프:예, 예, 고맙습니다. 안나 부인, 퇴장. 제19장 베시:(패트리시체프에게) 여기 그냥 남아 계세요. 틀림없이 굉장한 일이 일어날 테니까. 내기를 해도 좋아요. 마리야:그럼, 그걸 믿는단 말인가요? 베시:오늘 저녁만은 믿어요. 마리야:(패트리시체프에게) 당신도 믿으세요? 패트리시체프:천만의 말씀을! 나는 절대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베시 양의 명령이라면 여기 남아 있겠습니다. 바실리:마리야 콘스탄치노브나, 우리도 남아 있기로 합시다 난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생각났어요. 마리야:하지만 너무 웃기지는 마세요. 난 참지 못하거든요. 바실리:(커다란 소리로) 나도 남겠습니다. 레오니드:(엄격한 어조로) 여기 남은 사람들은 농담을 하거나 비웃거나 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엄숙한 실험이니까요. 패트리시체프:(바실리에게) 자네, 들었나? 우리도 남기로 하세. 자, 여기 앉게. 너무 겁을 집어먹진 말고. 베시:그렇게 웃고들 있지만 두고 보세요.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바실리:뭐라구? 그럼,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건가? 패트리시체프:(장난으로 후들후들 떨며) 아아, 어쩐지 무시무시한 걸! 마리야 콘스탄치노브나, 난 다리가 마구 떨려 옵니다! 베시:(웃으며) 쉿! 일동, 자리에 앉는다. 레오니드:여러분, 앉으십시오, 앉으세요! 세묜, 자네도 거기 앉게. 세묜:예. (걸상 끝에 걸터 앉는다) 레오니드:편히 앉게. 교수:의자 한가운데 편하게 자리 잡고 안게. (세묜을 편한 자세로 앉힌다) 베시, 마리야, 바실리 소리를 내어 웃는다. 레오니드:(언성을 높여) 여기 남은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진지한 태도로 구경하시기 바랍니다. 장난스런 태도를 취하면 혹시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는지도 모르니까요. 이봐, 바실리, 알았느냐? 조용히 하지 않으려거든 여기서 나가거라. 바실리:조심하겠습니다! (뚱뚱한 귀부인 뒤에 숨는다) 레오니드:크루고스베틀로프 교수, 그럼 최면술을 걸어 보십시오. 교수:아닙니다. 그로스만 씨가 여기 계신데 나 같은 게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나보다는 훨씬 경험도 많고 역량도 지니고 계신 그로스만 씨가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로스만:여러분, 솔직히 말해서 나는 강신술사가 아닙니다. 다만 최면술을 연구했을 뿐입니다. 최면술이라면 그 분야의 모든 현상을 다 연구했습니다만, 강신술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주체를 최면 상태에 빠지게 함으로써 혼수상태라든가, 사고력 장애상태, 마비상태, 무감각상태라든가, 온몸을 경직되게, 또는 암시를 받기 쉬운 상태로 하는 여러 가지 현상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 현상들은 나한테 이미 생소한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오늘 저녁 실험에 있어서는 그런 것과는 다른 현상이 연구 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되므로, 이제부터 일어날 현상이 과연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는지, 그것을 나는 알고 싶습니다. 사하토프:그로스만 씨의 의견을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교수님께서 그 점을 설명해 주시면 좋겠군요. 교수:좋습니다. 여러분께서 희망하신다면 설명해 드리죠. (의사에게) 수고스럽지만 체온과 맥박을 재 주실까요? 하지만 내 설명은 간략한 것이 될 수밖엔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레오니드:좋습니다. 되도록 간단명료하게 해주십시오. 의사:예, 곧 하겠습니다. (체온계를 집어 세묜에게 건네준다) 자, 체온을 재 보세. 세묜:예. 교수:(일어나서 뚱뚱한 귀부인에게 목례를 하고 다시 앉는다) 그럼 여러분, 오늘 저녁에 우리가 연구하려는 현상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아주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자연의 모든 조건을 초월한 불가사의한 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양쪽 다 옳은 견해가 아닙니다. 이 현상은 하나도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 세계만큼이나 오래 된 것입니다. 또한 초자연적인 것도 아닐 뿐더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영원한 법칙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현상은, 일반적으로 '심령의 세계와 서로 통하는 것' 이라는 정의가 내려지고 있지만, 이 정의 역시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심령의 세계는 물질의 세계와 대립하는 것처럼 해석되지만, 이것은 커다란 잘못이며, 그와 같은 대립은 도대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심령과 물질의 세계는 너무나도 밀접한 관계에 있으므로, 그것을 분리하는 한계선 따위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물질을 분자로 이루어져 있다고들 말하지만... 패트리시체프:어디까지나 따분한 이야기로군! 수군거리는 소리, 웃음소리. 교수:(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계속한다) 분자는 원자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원자란 확대성을 지니지 못하는, 이를테면 힘이 가해지는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니, 좀더 엄밀히 말한다면, 힘이라기보다는 에너지입니다. 물질과 마찬가지로 유일 불멸의 에너지란 말입니다. 물질은 유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형태를 띠고 있는데, 에너지 역시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네 가지 종류의 에너지, 즉 동력, 열력, 전력, 화학력이라는 에너지가 서로 상이한 형태로 변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에너지의 여러 가지 다양한 현상은 결코 위의 네 가지 형태 뿐만은 아닙니다. 에너지가 나타내는 형태는 실로 무한합니다. 그 에너지의 새로운 미지의 형상의 하나를 지금 우리는 연구하려는 것입니다. 다름 아니라 나는 강신술적 에너지를 말하는 겁니다. 다시 수군거리는 소리와 킥킥 웃는 소리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교수:(말을 끊고 근엄한 표정으로 장내를 둘러보고 나서, 또 계속한다.) 강신술적 에너지는 옛날부터 우리 인류 사이에서 알려져 온 것입니다. 예언, 예감, 환각 등, 이러한 모든 것이 강신술적 에너지의 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에너지가 나타내는 현상은 오랜 옛날부터 인류에게 알려져 온 것입니다. 그러나 에너지 자체는 최근까지도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즉 영매자라는 것이 있어서, 그 진동에 의해 강신술적 에너지의 현상이 생긴다는 것이 판명되기까지는 인정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빛의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 에테르라는 무게 없는 물질의 존재가 인정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에테르의 미립자 사이에는, 삼차원의 법칙에 해당되지 않은 더욱 미묘한 물질이 존재한다는 진리가 오늘날에는 이미 명백한 사실이 되었습니다만, 이 진리가 인정되기까지는 강신술의 현상도 전혀 불가사의 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던 것입니다. 다시금 수근거리는 소리, 또 킥킥 웃는 소리. 교수:(이번에도 엄격한 눈초리로 그쪽을 둘러본다) 수학적 계산에 의하여, 빛이나 전기의 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무게 없는 에테르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명확히 증명됐습니다만, 그와 마찬가지로, 헤르만 슈미트나 이오스프 슈마트펜 같은 천재들의 빛나는 일련의 실현 결과, 이 우주에는 정신적 에테르라고 부를 수 있는 물질의 존재 역시 정확히 증명된 것입니다. 뚱뚱한 귀부인:네, 그렇게 설명해 주시니까 나도 이젠 알겠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교수님... 레오니드: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교수님, 좀 간단히 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교수:(그 말에는 대꾸도 않고) 그리하여 수많은 엄밀한 과학적 실험 및 연구 결과, 강신술적 현상의 법칙이 밝혀지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보고 할 수 있는 영광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즉 그 실험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밝혀냈습니다. 어떤 개체가 최면 상태에 빠지면, 그것이 어떠한 개체이건 간에 반드시 정신적 에테르에 그 어떤 동요가 생깁니다. 이 동요는 고체가 액체 속에 가라앉을 때 생기는 그 동요와 똑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동요는 바로 우리가 강신술적 현상이라 부르는 것으로... 웃음소리, 수군거리는 소리. 사하토프:그 점은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만약에 영매자가 최면상태에 빠져서 정신적 에테르의 동요를 일으키는 것이라면, 어째서 그러한 동요가 죽은 사람의 영혼에만 주로 작용을 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여태까지의 강신술 실험에서는 늘 그랬었으니 말입니다만. 교수:그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정신적 에테르의 미립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의 영혼입니다. 따라서 정신적 에테르의 진동은 반드시 그 구성 분자를 진동시킬 것입니다. 더욱이 그 구성 분자라는 것은 바로 이 운동에 의해 서로 교류하는 인간의 영혼들이니까요. 뚱뚱한 귀부인:(사하토프에게) 저만큼 분명하게 설명해 주시는데, 아직도 뭘 이해 못하겠다는 거죠?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레오니드:이상으로 모든 것이 명백해졌으리라 믿습니다. 자, 그럼 시작하기로 합시다. 의사:이 청년은 완전한 정상 상태에 있습니다. 체온 37도 2부, 맥박 74. 교수:(노트를 꺼내 적어 넣는다) 방금 내가 설명한 대로, 영매자가 최면 상태에 빠지면 반드시 체온과 맥박이 증가합니다. 이제 곧 알게 되시리라 믿습니다. 레오니드:예, 옳은 말씀입니다. 이번엔 내가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사하토프 씨의 질문에 대해 설명하려는 겁니다. 우리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사이의 교류를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하는 뜻인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실험에서 나타나는 영혼이 자기는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나타났는가를, 그리고 자기는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를 솔직하고도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 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 실시한 실험에서도, 스페인 사람인 도 카스토로가 나타나서 여러 가지 얘기를 자세하게 해 주었습니다 자기는 누구인데 언제 죽었다는 거며, 종교재판을 받았을 때는 참으로 괴로웠다는 거며, 그러한 얘기를 여러 가지로 자세히 들려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와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에 일어난 사건까지 얘기해 주었으니까요. 즉 우리와 대화를 하고 있는 도중에 또 다시 지상에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제 곧 그러한 현상을 직접 보게 될 겁니다... 뚱뚱한 귀부인:(말을 가로채서) 그것, 참 흥미있군요! 그럼, 그 스페인 사람은 우리집에서 다시 태어나 지금은 어린애가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레오니드:그럴는지도 모르지요. 교수:그럼, 이젠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레오니드:내가 한마디만 더... 교수:아니, 시간이 늦었어요. 레오니드:좋습니다. 그럼 시작합시다. 그로스만 씨, 우선 영매자를 잠들게 해주십시오. 그로스만:어떤 방법으로 이 주체를 잠들게 할까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브레드식도 있고, 이집트식도 있고, 샤르코식도 있습니다만. 레오니드:(교수에게) 어느 방법이건 매한가지 아닐까요? 교수:매한가지죠. 그로스만:그럼, 나 자신의 방법을 취하기로 하겠습니다. 오데사에서 증명한 그 방법 말입니다. 레오니드:부탁합니다! 그로스만, 세묜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세묜, 눈을 감고 기지개를 켠다. 그로스만:(세묜을 응시한다) 아, 잠이 듭니다!... 잠이 들었어요!... 이렇게 빨리 최면술에 걸리는 건 드문 일입니다. 이 주체는 이미 혼수 상태에 빠졌음이 틀림없습니다. 정말 희귀할이만치 민감한 주체입니다. 상당히 흥미있는 실험을 실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앉았다가 일어난다. 다시 앉는다) 이쯤 되면 이 청년의 팔에 바늘을 푹 찔러 넣어도 문제없습니다. 원하신다면... 교수:(레오니드에게) 저것 보세요, 영매자가 최면 상태에 빠지자마자, 그것이 그로스만 씨에게 저렇게 작용하고 있잖습니까! 보세요, 온 몸을 떨기 시작합니다. 레오니드:아, 그렇군요... 그럼, 불을 끌까요? 사하토프:무엇 때문에 어둡게 해야만 합니까? 교수:왜 어두워야 하느냐구요? 그건 어둠이 강신술적 에너지가 나타나는 데 필요한 하나의 조건이기 때문이죠. 마치 화학적 또는 물리적 에너지가 나타남에 있어 일정한 온도가 가장 필요한 조건인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레오니드:그렇다고, 언제나 반드시 어두워야만 한다는 건 아닙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들도 보았습니다만, 촛불이나 햇빛 속에서도 이런 현상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교수:(말을 가로채듯) 그럼, 불을 끄도록 하죠? 레오니드:예, 끕시다. (불을 끈다) 여러분, 주의해서 보아 주십시오! 타냐, 소파 밑에서 기어나와 샨데리야에 맨 실을 손에 쥔다. 패트리시체프:나는 그 스페인 사람이 마음에 들었어요. 대화를 하다 말고 다시 지상에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러고 있을 수 없다는 대목 말이오. 베시:가만 계세요, 이제 곧 무슨 일이 일어날 테니까? 패트리시체프:한 가지 걱정되는 일이 있어요. 혹시 바실리군이 돼지 새끼처럼 꿀꿀거리기 시작하지나 않나 염려됩니다. 바실리:자넨 그걸 원하나? 원한다면 꿀꿀거릴 수도 있어. 레오니드:여러분! 조용하시기 바랍니다... 침묵. 세묜은 손가락에 붙인 성냥 유황을 핥곤 손가락 관절을 마찰하여 흔들기 시작한다. 레오니드:아, 빛이 나타났습니다! 빛이 보이죠, 여러분? 사하토프:예, 빛이군요. 보입니다. 그렇지만... 뚱뚱한 귀부인:어딥니까? 어디에요? 나는 안 보이는데요! 앗, 보입니다. 보여요... 교수:(레오니드에게 소곤거린다. 몸을 움직이고 있는 그로스만을 가리키며) 저것 보십쇼. 저렇게 떨고 있군요. 저건 곱절이나 되는 힘입니다. 다시 유황이 번쩍인다. 레오니드:(교수에게) 저게 바로 그 사람이죠? 사하토프:그 사람이라니, 누굽니까? 레오니드:그리이스 사람 니콜라이 말입니다. 저건 니콜라이의 빛입니다. 그렇잖습니까, 교수님? 교수:그리이스 사람으로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승려로 있던 사람인데, 요전에도 여기 나타났었습니다. 뚱뚱한 귀부인:그 사람이 어디 있다는 겁니까? 어디 있어요? 네? 난 안 보이는데요... 레오니드:아직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았습니다... 교수님, 그 사람은 당신한테 매우 호감을 가진 것 같으니, 한 번 말을 건네 보십시오. 교수:(좀 이상한 목소리로) 니콜라이, 당신이 왔소? 타냐, 벽을 톡톡 두드린다. 레오니드:(기쁜 어조로) 아, 니콜라이가 틀림없습니다. 뚱뚱한 귀부인:오오, 난 나가겠어요! 사하토프:그런데, 니콜라이라는 걸 어떻게 아시죠? 레오니드:두 번 톡톡 두드렸으니까요. 그것이 바로 긍정의 표시죠. 만일 니콜라이가 아니라면, 아무 대답도 없을 테니까요. 침묵. 젊은이들 사이에서 킥킥 웃는 소리가 들린다. 타냐, 램프갓이며 연필이며 그 밖의 물건들을 테이블 위에 던진다. 레오니드:(소곤거리듯) 여러분, 저것 보십시오. 램프갓과 그밖의 물건들이... 아, 연필입니다! 교수님, 연필이에요! 교수:좋습니다, 좋아요. 나는 저 청년과 그로스만 씨를 동시에 관찰하고 있습니다. 저것 보십시오! 그로스만, 벌떡 일어나서 테이블 위에 떨어진 물건들을 살펴본다. 사하토프:잠깐만 실례하겠습니다! 이건 모두 영매자 자신의 짓이 아닐까요? 한 번 확인해 보고 싶군요. 레오니드:당신을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럼, 저 청년의 옆에 앉아서 손을 꼭 붙잡고 있어 보십시오. 하지만 저 청년은 분명히 잠들어 있어요. 사하토프:(세묜에게 다가간다. 그 순간 타냐가 늘어뜨린 실에 머리가 걸려 질겁을 하며 머리를 숙인다) 흐음! 이건 참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세묜에게 다가가서 팔꿈치를 잡는다. 세묜, 신음소리를 낸다) 교수:(레오니드에게) 저것 보십시오. 그로스만 씨가 옆에 있기 때문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어요. 이건 새로운 현상입니다. 기록해 두어야겠습니다... (달려나가서 수첩에 적어 넣고 다시 들어온다) 레오니드:그렇군요... 하지만 니콜라이한테 대답도 않고 그냥 내버려둬서는 안 되잖습니까? 이젠 시작하십시오. 그로스만:(일어나서 세묜에게 다가간다. 그의 손을 잡고 쳐들었다가 내려놓는다) 경련의 실험을 해보면 재미있을 텐데요. 지금이 사람은 완전한 최면 상태에 있으니까요. 교수:(레오니드에게)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로스만:만약에 원하신다면... 의사:아니, 교수님께서 하시는 대로 놔두십시오. 지금 중요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니까. 교수:영매자는 벌써 헛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뚱뚱한 귀부인:난 여기 남기를 잘했어요! 그야 물론 무섭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척 기뻐요.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우리 주인 양반한테 이렇게 말하고 있거든요. 즉... 레오니드:조용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타냐, 뚱뚱한 귀부인의 머리를 실로 쓰다듬는다. 뚱뚱한 귀부인:아이구머니나! 레오니드: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세요? 뚱뚱한 귀부인:내 머리를 움켜잡은 것 같아요! 레오니드:(속삭이듯) 겁낼 것 없습니다. 손을 내주어 보십시오. 그 사람의 손은 찹니다만, 난 도리어 그걸 더 좋아합니다. 뚱뚱한 귀부인:(두 손을 등뒤로 돌리며) 안 돼요, 그건 안 돼요! 사하토프:흠, 아무래도 이상한 걸! 레오니드:그 사람은 지금 여기서 대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질문을 해 보십시오. 사하토프:그럼, 내가 한 가지 물어 보겠습니다. 교수:어서 물어 보십시오. 사하토프:나는 믿습니까, 믿지 않습니까? 타냐, 톡톡 두번 두드린다. 교수:믿는다는 대답입니다. 사하토프:그럼, 또 한가지만 묻겠습니다. 이 호주머니 속에 십루블짜리 돈이 들어 있습니까, 없습니까? 타냐, 몇 번 연거푸 두드리고, 사하토프의 머리를 실로 쓰다듬는다. 사하토프:으아! (실을 붙잡고 그것을 끊는다) 교수: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쓸데없는 질문이나 장난스러운 질문은 삼가 주십시오. 그 사람은 그런 걸 불쾌하게 여기니까요. 사하토프:아니, 잠깐만! 내 손엔 이렇게 실이 쥐어져 있습니다! 레오니드:실이오? 꼭 쥐고 계십시오. 흔히 있는 일이니까요. 실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비단 끈까지도 나타나는 수가 있어요. 아주 옛날 물건이 말입니다. 사하토프:아니, 그렇지만 이 실은 대체 어디서 나왔습니까? 타냐, 그에게 베개를 집어던진다. 사하토프:이것 보세요! 뭔가 푹신한 물건이 내 머리에 부딪혔습니다. 불을 켜 주십시오, 아무래도 뭔가 수상쩍습니다... 교수:영혼의 활동을 방해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뚱뚱한 귀부인:제발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내가 한 가지 질문해도 괜찮겠죠? 레오니드:좋습니다, 어서 하십시오. 뚱뚱한 귀부인:나는 소화가 잘 안 돼서 그러는데요, 무엇을 먹으면 좋을까요. 아코나이트가 좋을까요, 벨라돈나가 좋을까요? 침묵. 젊은이들 사이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바실리가 '으앙, 으앙! 소리를 낸다. 웃음소리. 아가씨들과 패트리시체프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입과 코를 틀어막고 달려나간다. 뜽뚱한 귀부인:오오, 정말로 그리이스 승려가 다시 태어난 모양이네요! 레오니드:(벌컥 화를 내며, 그러나 낮은 목소리) 얘, 바실리,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냐! 얌전하게 있지 못하겠으면 밖으로 나가라! 바실리 퇴장. 제20장 어둠, 침묵. 뚱뚱한 귀부인:아아, 정말 유감스럽군요! 이젠 아기로 다시 태어났으니,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게 됐지 뭡니까! 레오니드: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그건 아들 녀석의 장난이었어요. 그 사람은 아직 여기 있습니다. 어서 물어 보십시오. 교수:뭐, 그런 건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런 농담이나 장난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니까요. 그 사람은 아직 여기 있을 겁니다. 우리도 질문해 보기로 할까요? 레오니드 표도르비치, 당신이 한 번 질문해 보시지요. 레오니드:아니, 당신이 해 보십시오. 난 아들 녀석 때문에 지금 기분이 썩 좋지 못하니까.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 어디 있담!... 교수:그렇다면 좋습니다... 이봐요, 니콜라이! 당신은 아직 여기 있소? 타냐, 두 번 톡톡 두드리고 초인종을 흔든다. 세묜, 두 손을 벌 표도르비치, 자세히 관찰하십시오. 나는 지금 그럴 수 없는 상태에 있으니까요. 이것 보시오. 나를 마구 이렇게 조르잖습니까! 그로스만 씨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바싹 정신을 차려서 잘 관찰해야겠습니다. 타냐, 농부들의 서류를 테이블 위에 던진다. 레오니드:앗, 뭔가 테이블에 떨어졌습니다! 교수:무엇이 떨어졌는지 살펴보십시오. 레오니드:종이입니다! 접혀져 있군요. 타냐, 휴대용 잉크병을 던진다. 레오니드:오, 이번엔 잉크병입니다. 타냐, 펜을 던진다. 레오니드:펜입니다! 세묜, 으르렁거리며 더욱 세차게 조른다. 교수:(졸리우면서) 자, 자... 잠깐만... 이건 전혀 새로운 현상이군! 영매자의 에너지가 작용을 받는 게 아니고, 영매자 자신이 활동을 개시했어요! 빨리 잉크병을 열고, 펜을 종이 위에 놓으십시오! 영혼이 뭔가 쓸는지 모르니까. 타냐, 레오니드의 등 뒤로 돌아가, 기타로 그의 머리를 내리친다. 레오니드:앗, 내 머리를 때립니다! (테이블을 응시하면서) 펜은 아직 뭘 쓸 것 같지 않습니다. 종이도 접혀진 채 그대로 있고요. 교수:무슨 종이인지 어서 보십시오. 이건 분명히 그 영혼과 그로스만의 힘이 이중으로 작용하면서 혼란을 일으켰음이 분명합니다. 레오니드:(종이를 들고 문 밖으로 나갔다가 곧 되돌아온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군! 이건 농부들이 가져온 토지 매매 계약서인데, 오늘 아침에 내가 서명을 거절하고 농부들에게 되돌려 주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영혼이 여기에 서명하기를 요구하는 걸까요. 교수:물론 그럴 겁니다. 하지만 한 번 물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레오니드:니콜라이, 나더러 여기에 서명하라는 거요? 타냐, 두 번 톡톡 두드린다. 교수:거 보세요, 틀림없습니다! 레오니드는 종이와 펜을 들고 퇴장. 타냐는 닥치는 대로 두드리기도 하고, 기타를 튕기기도 하고, 손풍금을 치기도 하다가, 소파 밑으로 기어들어간다. 레오니드, 다시 등장. 세묜, 기지개를 켜고 헛기침을 한다. 레오니드:아, 눈을 떴습니다. 이젠 촛불을 켜도 상관없겠지요? 교수:(황급히) 의, 의, 의사 선생! 영매자의 맥박수와 체온을 재 주십시오! 틀림없이 양쪽이 다 상승했을 겁니다. 레오니드:(촛불을 켠다) 자, 여러분, 이만하면 누구나 믿지 않을 수 없겠죠? 의사:(세묜한테 다가가서 체온계를 끼워 주며) 그래 어떤가, 한잠 푹 잤나? 이걸 겨드랑이 밑에 끼우고, 손을 이리 내놓게. (시계를 본다) 사하토프:(어깨를 흠칫해 보이며) 지금 여기서 일어난 일은 영매자 혼자서 죄다 할 수는 없습니다. 이건 틀림없어요. 하지만 그 실은?... 그게 어떻게 된 실인지 설명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레오니드:실이오? 실도 실이지만, 그것보다 훨씬 중대한 현상을 우리는 보지 않았습니까! 사하토프:모르겠는데요. 아무튼 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건 사양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뚱뚱한 귀부인:(사하토프에게) 아니, 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걸 사양하신다는 거죠? 그럼, 당신은 잔등에 조금만 날개를 단 갓난아기를 못 보셨단 말씀인가요? 나도 처음엔 환상이 아닌가 싶었지만, 나중엔 아주 분명하게 보았어요. 꼭 산 사람 같더라니까요... 사하토프:나는 내 눈으로 본 것만을 말하는 겁니다. 난 그런 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건 보이지 않았어요. 뚱뚱한 귀부인: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처럼 똑똑히 보였는데! 검은 옷을 입은 승려가 왼쪽에서 그 아기를 굽어보고 있잖았느냐 말에요! 사하토프:(그녀의 곁에서 물러나며) 저런 터무니없는 소리가 어디 있담. 뚱뚱한 귀부인:(의사에게) 아마 당신은 보셨을 거예요. 당신이 앉아 계시던 쪽에서 나타났으니까. 의사는 그녀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열심히 맥박을 재고 있다. 뚱뚱한 귀부인:(그로스만에게) 그리고 그 빛, 아기의 주위가 환해지며, 특히 그 조그만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지 않았느냐 말예요! 그 상냥하고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표정, 그야말로 하늘 나라에서 내려온 게 분명했어요! (그녀 자신도 부드럽게 웃어 보인다) 그로스만:나는 인광과 여러 가지 물체가 위치를 바꾸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뚱뚱한 귀부인:그런 말은 하지도 마세요! 당신은 샤르코 학파의 학자여서 내세라는 걸 믿지 않으시니까 그렇죠. 그것뿐이에요! 아아, 나는 이제 이 세상의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내세에 대한 신앙을 절대 버릴 수 없어요! 그로스만, 그녀의 곁을 물러난다. 뚱뚱한 귀부인:암, 그렇구말구요! 당신네들이 무슨 말을 하시건, 방금 그것을 본 그 순간이야말로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사라사테의 바이얼린 연주를 들었을 때와, 지금 이 순간과... 네, 그래요!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녀는 세묜에게 다가간다) 이봐요, 어떤 느낌이 들었죠? 기분이 어때요? 힘들었죠? 세묜:(웃으며) 예, 그렇습니다. 뚱뚱한 귀부인:그래도 참을 수는 있죠? 세묜:예, 그렇습니다. (레오니드에게) 이젠 가도 되겠습니까? 레오니드:음, 좋아. 어서 가게. 의사:(교수에게) 맥박은 여전합니다만, 체온은 반대로 내려갔습니다. 교수:내려갔다구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이해가 간다는 듯이) 그건 당연합니다. 체온은 내려가게 마련이지요. 두 힘이 상호 작용을 일으키니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동, 제각기 동시에 지껄이며 퇴장한다. 레오니드:다만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영혼이 완전히 나타나 보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만... 아무튼 여러분, 객실로 자리를 옮기시기 바랍니다. 뚱뚱한 귀부인:날개를 흔들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로스만:(사하토프에게) 만약에 내가 끝까지 최면술을 계속했다면, 완전히 간질 발작 상태까지 이끌 수 있었을 겁니다. 그건 틀림없어요. 사하토프:이건 흥미있는 실험이긴 합니다만, 완전히 수긍할 수 있는 것은 못 됩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에요. 제21장 레오니드, 계약서를 들고 있다. 표도르 등장한다. 레오니드:표도르, 오늘 실험은 정말 기막히게 잘 되었어. 그런데 그 토지 건은 농부들이 제시한 조건대로 그들에게 양도해야 한다는군. 표도르:그래요? 레오니드:그래요가 뭔가! (서류를 보인다) 글세, 내가 되돌려준 이 서류가 느닷없이 테이블 위에 떨어져 내려오더라니까!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나는 거기에 서명할 수밖에! 표도르:어떻게 그게 거기 나타났을까요? 레오니드:아무튼 나타났으니 기이한 일이 아닌가 말야. (퇴장) 표도르도 그 뒤를 따라 퇴장. 제22장 타냐 혼자, 소파 밑에서 기어나와 웃는다. 타냐:아이, 좋아! 이렇게 일이 수월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하지만 그 사람이 실을 붙잡았을 때는 가슴이 철렁하는 걸! (기쁨에 넘쳐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결국 성공이야. 서명을 받고 말았으니까! 제23장 그리고리 등장한다. 그리고리:흥, 네가 사람들을 속여 넘겼구나! 타냐:그렇다면 당신이 어쩔 테야? 그리고리:너는 그런 짓을 하면 마님한테 칭찬을 받을 줄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어림도 없다, 어림도 없어! 이젠 넌 내 손아귀에 들어온 새야. 네가 만일 내 말을 안 들어주면, 난 네가 꾸민 속임수를 죄다 폭로해 버릴 테니까. 타냐:그런다고 누가 당신 말 따위를 들을 줄 알고! 나한테 손가락끝 하나 대지 못할 걸! 제4막 무대는 제1막과 같은 곳으로 저택의 현관 홀. 세 개의 문이 보인다. 정면에 문 하나가 있고, 주인 레오니드의 서재로 통하는 문이 보이고, 아들 바실리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층계는 위층 침실로 통하고 층계 뒤의 복도는 식당으로 통한다. 제1장 나들이 옷을 입은 하인 두 사람과 표도르, 그리고리가 있다. 하인 1:(흰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다) 오늘은 벌써 이 댁이 세 번째 집이랍니다. 접객일로 돼 있는 집들이 모두 같은 방향이라서 다행이지요. 이 댁은 아마 전에는 목요일이 접객일이었었죠? 표도르:목요일이던 걸 토요일로 바꾸었지. 골로브킨 댁이나 그라데 폰 그라베 댁과 같은 날이 좋겠다 해서... 하인 2:정말, 시체르바코프 댁에선 대접이 아주 좋아요. 무도회 때마다 주인을 모시고 간 하인들한테까지 음식 대접을 하거든요. 제2장 공작 부인과 공작의 딸이 베시의 안내를 받으며 위층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공작 부인, 수첩과 시계를 들여다보며 통 위에 걸터앉는다. 그리고리, 그녀에게 외출용 구두를 신겨준다. 공작의 딸:(베시에게) 꼭 와야 해요. 당신이 오잖으면 틀림없이 토토도 오지 않겠다고 할 테니까.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안 되고 마는 거예요. 베시:그렇지만 확답을 할 수는 없어요. 슈빈 씨 댁에는 꼭 가봐야 하고, 그 다음엔 피아노 레슨이 있고... 공작의 딸:잠깐 왔다 가는 것은 괜찮을 거예요. 제발 약속을 지켜 줘요. 페쟈도 코코도 다 올 테니까. 베시:코코 씨라면 난 이젠 보기도 싫어요. 공작의 딸:난 여기서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될 줄 알았어요. 그 사람은 언제나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틀림없이 나타나곤 하니까요. 베시:오기는 꼭 올 거예요. 공작의 딸:당신과 그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보면, 그 사람이 방금 당신에게 결혼 신청을 하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이제 곧 하려는 거나 아닌지, 이런 생각이 든다니까요. 베시:하긴 나도 반드시 그렇게 되이리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난 그게 죽도록 싫어요! 공작의 딸:코코 씨는 참 가엾군요! 그토록 당신을 사모하고 있는데! 베시:쉿, 레 쟌! (주:사람들이 들어요) 공작의 딸, 소파에 앉아서 소곤소곤 말한다. 그리고리, 공작의 딸에게 외출용 구두를 신겨 준다. 공작의 딸:그럼, 이따가 저녁에 만나요, 네! 베시:될 수 있는 대로 가도록 노력해 보겠어요. 공작 부인:그럼, 아버님한테 말해줘요. 난 그런 걸 믿을 수는 없지만, 새 영매자는 꼭 구경하고 싶으니 미리 알려 주십사, 라고요. 그럼, 베시, 잘 있어요! (베시에게 키스하고, 딸과 함께 퇴장) 베시, 위층으로 올라간다. 제3장 그리고리:늙은 여자한테 구두를 신기는 건 질색이야. 배가 툭 튀어나와서 신발이 보여야지. 그러니 신발이 제대로 들어갈 리가 있나. 하지만 젊은 아가씨의 경우는 손이 조금 발에 닿기만 해도 온 몸이 짜릿짜릿한다니까! 하인 2:호오! 자넨 그런 것까지 가리나? 하인 1:우리 처지에 좋고 나쁜 걸 가릴 수야 있나! 그리고리:어째서 가릴 수가 없어? 우린 사람이 아닌가! 하긴 저 사람들은 우릴 아무것도 모르는 보릿자루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더군. 지금도 저희들끼리 얘기를 하다가 흘끗 나를 보고는 '레 쟌'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말야! 하인 2:그건 도대체 무슨 뜻이지? 그리고리:그건 러시아말로 '알아들을라, 말하지 말아' 라는 뜻이지. 식사 때도 마찬가지야. 난 죄다 알아들을 수 있거든. 자네는, 저 사람들과 우리는 아예 인종이 다른 것같이 말하지만, 다르긴 뭐가 달라! 하인 1:그래도 사리를 분가하는 사람은 다르다는 걸 아는 법이야. 그리고리:하나도 다를 게 없어. 오늘은 내가 이렇게 하인 노릇을 하고 있지만, 내일은 저 사람들 못지 않게 살 수 있을는지 누가 아느냐 말이야. 하인과 결혼한 귀족 아가씨가 있다는 걸 자넨 모르나? 그보다도, 가서 담배나 한 대 피워야겠군. (퇴장) 제4장 하인 2:저 친구 참 대단하군요! 표도르:소갈머리 없는 녀석이어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오. 전에 관청에서 급사 노릇을 한 일이 있어서, 공연히 건방지기만 하거든. 저런 녀석을 집에 두는 건 좋지 않다고 말씀드렸지만, 마님의 눈에 들었으니 어쩔 수 있나. 미끈하게 생겨서 외출할 때 데리고 다니기 좋다는 거지. 하인 1:저 녀석을 우리 백작님한테 데려가면 단단히 버릇을 가르쳐 주련만. 우리 주인 어른은 저 따위 헐렁이를 제일 싫어하거든요. 하인이면 하인답게 자기 분수를 지켜야지, 저렇게 건방지게 굴어서야 쓰겠소! 제5장 패트리시체프, 위층에서 뛰어 내려와서 담배를 꺼낸다. 코코 클리겐(애칭=코코쉬카), 안경을 쓰고 등장. 패트리시체프와 마주친다 패트리시체프:(생각에 잠기는 듯) 그렇군, 그래... 둘째 글자 역시 '카'야, 카 르 토 쉬 카(감자). 여어, 코코쉬카, 카르토쉬카(감자)! 어디서 오는 길인가? 코코 클리겐:시체르바코프네 집에서 오는 길일세. 자넨 여전히 바보 같은 소리만 하고 있군 그래... 패트리시체프:바보 같은 소리만 하는 게 아니야. 지금 '말짓기'를 하고 있었는데, 첫째 글자가 '킨'이고 둘째 글자는 '카'야. 이 두 글자를 넣어서 송아지를 멀리 쫓는다 라는 뜻의 말을 만들어야 하거든. 코코:집어치우게. 그 따위 소리 듣고 있을 겨를이 없어. 패트리시체프:그럼, 자네 어디 또 가야 하나? 코코:어디로 가야 하느냐구? 이빈네 집에서 코러스가 있기 때문에 곧 가 봐야 해. 그 다음엔 슈빈네 집에 가야 하고, 또 그 다음엔 연극 연습에 참가해야 하거든. 자네도 가야 하지 않나? 패트리시체프:물론 가야지. 연극 연습이건 광대 연습이건 어디든지 가겠네. 난 처음엔 야만인 역이었는데, 이번엔 야만인과 장군 두 가지 역을 맡았어. 코코:그래? 그보다도 어제 강신술 실험회는 어떻든가? 패트리시체프:말도 말게, 희극도 이만저만한 희극이 아니야! 이 댁 젊은 하인이 영매자가 된 것부터 우스운 일이지만, 어둠 속에서 바실리가 갓난아기 울음소리를 냈더니, 교수님이 그걸 멋대로 해석하는가 하면, 마리야 바시리에브나가 그걸 다시 부연해서 지껄이기도 하고,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어! 자네가 오지 않은 게 유감천만이야. 코코:하지만 난 곤란해. 자넨 그렇게 멋대로 농담을 늘어 놓곤 하지만, 나는 뭐라고 한마디만 하면 그걸 곧 결혼 신청으로 오해할까봐 겁이 난다니까! 정말 난처한 일이야! 패트리시체프:그럼, 자넨 독신 선포를 하면 그만 아닌가. 자, 어서 바실리의 방으로 가세. 그 다음에 함께 연극 연습을 하러 가세나. 코코:어째서 자네가 그런 얼빠진 녀석과 어울려 다니는지 난 알 수가 없네. 정말 바보라도 이만저만한 바보가 아니야, 그 친구는! 패트리시체프:그래도 난 그 친구가 좋아... 난 보보(바실리)를 사랑해... 하지만 그것은 레르묜토프의 이른바 '참으로 기이한 애정'이라고나 할까... (말을 마치고 바실리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제6장 베시, 어느 귀부인을 배웅하며 등장. 코코, 의미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베시:(코코와 악수를 하면서도 그를 보지 않고 귀부인 쪽을 보며) 아직 서로 모르는 사이시든가요? 귀부인:네. 베시:클린겐 백작이세요. (코코에게) 왜 엊저녁엔 오시지 않았죠? 코코:오려 했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못 왔습니다. 베시:유감이로군요, 참 재미있었는데! (웃는다) 얼마나 굉장한 실험이 있었는지, 보셨더라면 졸았을 것을! 그건 그렇고, '말짓기'는 어떻게 됐죠? 코코:예, 가사 중의 제2절까지는 다 되었습니다. 니크가 가사를 짓고 내가 작곡을 했어요. 베시:어떻게 지으셨는데요? 어디 한 번 들려 주세요. 코코:가만 있자, 어떻게 시작되더라?... 아 참, 그렇지! 기사가 난나를 보고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노래한다) "어쩌면 이다지도 아름다울까, 보기만 해도 내 마음 설레이네. 난나, 난나! 나, 나, 나!" 귀부인:그럼, 제1절은 뭐죠? 코코:제1절은 '아레'즉 야만족의 여자 이름이죠. 베시:아레라는 건 자기가 사모하는 상대방 남자를 잡아 먹고 싶어하는 야만족 여자예요. (웃는다) 이리저리 혼자 돌아다니면서, 애타는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아아, 먹고 싶어라..." 코코:(가로채서) "한시도 참을 수 없어라..." 베시:(그것을 받아서) "누구든 물어 뜯고 싶어 미친 듯 헤매이지만..." 코코:"그림자도 보이지 않네" 베시:"누구를 물어뜯어야 할지..." 코코:"저 멀리 뗏목이 보인다..." 베시:"이 쪽으로 떠 내려 온다 뗏목 위에는 두 사람의 장군..." 코코:"우리 두 장군은 운명이 맺어준 사이 우리는 외딴 섬으로 흘러왔네..." 여기서 다시 되풀이 됩니다. "운명이 맺어준 사이 우리는 외딴 섬으로 흘러왔네... 귀부인:아이, 참 멋지네요! 베시:그렇지만, 무척 유치한 데가 있어요! 코코:말하자면 그 점이 매력이죠. 귀부인:그럼, 아레 역은 누가 맡기로 했나요? 베시:나예요. 그래서 새로 옷을 맞췄죠. 그랬더니 엄마는 '야하다'는 거예요. 사실 무도회 의상으로는 야할 게 없는데. 또 저는 아레 역까지 맡았잖아요. (표도르에게) 부르제에서 사람이 와 있죠? 표도르:예,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귀부인:그럼, 아레는 어떻게 되죠? 베시:이제 아시게 될 거예요. 미리 말씀드리면 재미가 없어질 테니까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귀부인:안녕! (퇴장) 베시:(코코에게) 엄마한테 갑시다. 베시와 코코, 위층으로 올라간다. 제7장 야코프, 차와 과자를 쟁반에 담아 들고 식당 쪽으로 등장하여 현관 홀을 통과하려 한다. 야코프:(하인들에게) 오오, 안녕들 하시오! 하인들 인사를 받는다. 야코프:(표도르에게) 그리고리한테 좀 거들어 주라고 일러 주세요. 나 혼자선 도저히 해낼 수가 없군요. (퇴장) 제8장 야코프만 퇴장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대로. 하인 1:저 사람 무척 부지런하군요. 표도르:참 좋은 친구요. 하지만, 마님께선 별로 탐탁하게 여기시지 않거든. 도대체 풍채가 없다는 거지요. 게다가 어제 농부들이 부엌에 들여 놓은 건 바로 저 친구라고 누가 고자질을 했으니, 까딱하다가는 쫓겨날는지도 몰라요. 정말 좋은 친군데... 하인 2:농부들이라니요? 표도르:이 댁 영지가 있는 쿠르스크에서 토지를 매수하려고 온 사람들인데, 이럭저럭 밤중이 되었고, 이 댁 영지에서 온 사람들인 데다가, 그 중에는 이 댁 하인의 아버지 되는 사람도 끼여 있고 해서 부엌으로 데리고 갔지요. 헌데, 마침 그때 독심술인가 뭔가 때문에 부엌에 감춘 무슨 물건을 찾으려고 주인 어른들과 손님들이 그리로 모두 오시잖았겠소. 그래서 그 농부들이 마님의 눈에 띄었단 말이오. 한바탕 대단한 소동이 벌어졌지요. 도대체 누가 저 농부들을 부엌에 넣었느냐, 병균이 붙어 있을지도 모르잖느냐, 왜 내 말은 듣지 않는 거냐 라고 야단을 치시는 거예요... 마님께서 그 병균인가 뭔가를 무엇보다 무서워하시거든. 제9장 그리고리 등장한다. 표도르; 여보게, 그리고리, 야코프한테 가서 좀 도와주게. 혼자선 일을 해낼 수가 없는 모양이야. 여긴 내가 혼자서 지키고 앉아 있을 테니까. 그리고리:굼벵이처럼 느리니까 그런 거예요. (퇴장) 제10장 하인 1:병균이 다 뭐다, 요즘은 정말 별별 괴상한 게 다 나오는군요! 그래, 이 댁 마님께선 그걸 무서워하시나요? 표도르:불보다도 더 무서워한다니까! 그래서 요즘 우리는 씻고 닦고 연기를 피우고 소독약을 뿌리고 하기에 바쁘다오. 하인 1:아항, 그래서 이렇게 숨이 막힐 것 같은 냄새가 나는군요. (활기를 띠며) 그 놈의 병균인가 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불쾌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까지도 잊어버리고 있는 형편이라니까요. 우리 주인 어른의 누이동생 되는 모솔로바 공작 부인 댁에서도, 아가씨의 임종 때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방에 들어가지 않으셨다지 뭡니까! 아가씨는 이 세상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울면서 부모를 불렀지만, 결국은 그냥 숨을 거두고 말았답니다. 의사 선생이 무슨 괴상한 이름의 병균을 발견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하지만 아가씨의 하녀와 간호원은 곁에 붙어서 병구완을 했는데도 아무렇지 않다잖겠어요. 두 사람 다 지금도 건강하게 살아 있으니까요. 제11장 바실리와 패트리시체프, 담배를 입에 물고 바실리의 방에서 나온다. 패트리시체프:그럼 가긴 가겠는데, 코코쉬카 카르토쉬카도 함께 데리고 가세. 바실리:코코쉬카 그 녀석은 형편없는 멍텅구리더군! 대갈통 속이 텅텅 비어 있는 바보 천치의 표본같은 친구라니까!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맨날 빙둥거리고만 있으니, 난 그런 녀석은 보기도 싫어! 패트리시체프:어쨌든 잠깐만 기다려 주게. 가서 '안녕'을 하고 와야 할 테니까. 바실리:좋아. 그 사이에 나도 마부 방에 가서 개들이 어떻게 하고 있나 보고 와야겠군. 마부가 그러는데, 그놈들 중에 아주 사나운 놈이 한 마리 있어서 하마터면 물려죽을 뻔했다는 거야. 패트리시체프:어느 쪽이 물려죽을 뻔했다는 거야? 개가 마부한테 물려죽을 뻔했다는 건 아닌가? 바실리:자넨 만날 그 따위 소리만... (외투를 입고 퇴장) 패트리시체프:(열심히 생각하면서) 마 킨 토쉬... 카르 토쉬 카... 음, 됐어. (위층에 올라간다) 제12장 야코프, 무대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으로 급히 통과한다. 표도르:(야코프에게) 또 뭔가? 야코프:샌드위치가 없다나요! (퇴장) 하인 2:우리 도련님이 아팠을 때도 그랬어요. 병이 나자마자 유모와 함께 병원에 보내 버렸는데, 결국 다시는 어머니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하인 1:도무지 천벌이라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니까요! 난 하나님을 떠나선 한시도 살 수 없다고 생각해요. 표도르:옳은 말이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야코프, 샌드위치를 들고 위층으로 달려 올라간다. 하인 1:그리고 말입니다, 그 놈의 병균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꺼리다가는 감옥 같은 벽 속에 언제나 혼자 들어박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제13장 타냐:(등장, 하인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안녕하세요! 하인들, 인사를 받는다. 타냐:표도르 아저씨, 좀 말씀 드릴 일이 있는데요. 표도르:응, 뭔데? 타냐:그 농부들이 또 왔어요... 표도르:왜? 서류는 벌써 세묜한테 전했는데. 타냐:네, 그 서류는 내가 그 사람들한테 주었어요. 좋아서 어쩔줄 모르더군요! 그래서 오늘은 돈을 받아 주셔야겠다는 거예요. 표도르:그 사람들이 지금 어디 와 있지? 타냐:저기 현관 앞에 기다리고 서 있어요. 표도르:좋아. 그럼, 내가 나리님께 가서 여쭈어야겠군. 타냐:그리고 표도르 아저씨한테 또 한가지 부탁이 있어요. 표도르:부탁이라니? 타냐:난 이젠 더 이상 이 댁에 있을 수가 없게 되었어요. 나를 보내 달라고 아저씨가 잘 말씀드려 주세요. 야코프 급히 등장. 표도르:(야코프에게) 또 뭔가? 야코프:찻주전자를 새로 내고 오렌지를 가져오라십니다. 표도르:식모한테 이르게나. 야코프, 급히 퇴장. 표도르:있을 수 없게 됐다니? 타냐:몰라서 물으시는 건가요? 이젠 세묜하고의 문제도 결정된 셈이니까... 야코프:(달려 들어오며) 오렌지가 몇 개 안 남았어요. 표도르:있는 대로 다 내놓게나. 야코프, 급히 퇴장. 표도르:(타냐에게) 하지만, 지금은 때가 적합치 못한 걸. 집안이 온통 이렇게 어수선하니 말이다. 타냐:언제 어수선하지 않은 때가 있었나요! 그러다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몰라요. 아저씨도 잘 아시겠지만, 나한테는 일생의 중대사니까요... 그러니, 아저씨가 좋은 기회를 잡아서 마님께 잘 여쭤 주세요. 까딱 잘못했다가는 마님의 비위를 건드려 여행 허가증도 못 받게 될지 모르니까요. 표도르:그렇지만 뭐 그렇게까지 급하게 서두를 건 없잖나? 타냐:이젠 완전히 결정됐으니 어서 서둘러야죠. 곧 시골로 가서 준비를 해야겠어요. 그래야 부활제 이후의 첫째 월요일에 식을 올릴 수 있거든요! 표도르 아저씨, 제발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세요. 부탁이에요! 표도르:어쨌든 저리 가 있거라. 여기선 지금 그런 얘기하고 있을 수 없으니까. 타냐, 퇴장. 제14장 위층에 중년 신사 한 사람이 내려와, 아무 말 없이 하인 2를 거느리고 퇴장. 야코프, 등장한다. 야코프:표도르 이바노비치,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마님께서 나를 곧 내보내겠다는군요. 너는 그릇을 깨뜨리기만 하고, 내 강아지 피프카를 돌보려 하지 않은 뿐 아니라 내 분부에 거역하여 농부들을 부엌에 끌어들이지 않았느냐!' 이렇게 마구 야단을 치십니다. 하지만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건 내 잘못이 아니잖습니까! 타냐가 부엌으로 데리고 가라고 해서 데리고 갔을 뿐, 그게 누구의 분부였는지는 알지도 못했으니까요. 표도르:그래 마님께서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인가? 야코프:방금 그렇게 말씀하시더라니까요. 표도르 이바노비치, 제발 어떻게 잘 좀 말씀드려 주십쇼. 이제야 겨우 고향 식구들 밥줄이나 먹게 되었는데, 여기서 쫓겨나게 되면 또 언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는지 막연합니다! 표도르 이바노비치, 부탁입니다! 제15장 안나 부인, 가발에 의치를 한 늙은 백작 부인을 배웅하며 등장한다. 하인 1이 백작 부인에게 외투를 입혀 준다. 안나 부인:그렇구말구요! 이렇게 찾아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백작 부인:내가 몸만 불편하지 않아도 좀더 자주 찾아 뵈올 건데요... 안나 부인:그러니까 표트르 페트로비치한테 치료를 받도록 해보세요. 좀 무뚝뚝한지는 몰라도, 그이만큼 환자를 안심시켜 주는 의사는 아마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주 솔직한 분이어서 모든 게 분명하거든요. 백작 부인: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역시 단골 의사한테 치료를 받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안나 부인:그래요? 그럼, 아무쪼록 몸조심하십시오. 백작 부인:네, 네, 고맙습니다. 제16장 그리고리, 몹시 흥분하여 숨을 헐떡이며 식당 쪽에서 달려나온다. 그 뒤로 세묜이 쫓아 나온다. 세묜:그래도 또 그애한테 지분거릴 테냐! 그리고리:망할 놈의 자식, 너 나한테 정말 혼 좀 나볼래? 안나 부인:왜들 이래? 여기가 선술집인 줄 알아, 응? 그리고리:저 버릇없는 머슴놈 때문에... 안나 부인:(버럭 성을 내며) 아니, 이 사람들이 미쳤나? 눈에 보이는 게 없어? (백작 부인에게)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그럼, 다음 화요일에! 백작 부인과 하인 퇴장. 제17장 안나 부인:(그리고리에게) 도대체 왜들 그러는 거냐? 그리고리:예, 저는 한낱 하잘 것 없는 하인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체면이라는 건 있습니다 저 따위 머슴놈이 집적거리는데, 죽었습니다 하고 있을 순 없잖습니까? 안나 부인:그래서 세묜이 어쨌다는 거냐? 그리고리:저 세묜이라는 놈이 말입니다, 저놈이 나리님들과 한자리에 앉았었다 해서 갑자기 간덩이가 커졌는지, 나한테 싸움을 걸어오지 않겠어요. 안나 부인:무엇 때문에 싸움을 걸지? 그리고리:그걸 누가 압니까! 안나 부인:(세묜에게) 도대체 어찌된 거야? 세묜:무엇 때문에 저 녀석은 그애 꽁무니만 쫓아다니며 귀찮게 구는지 모르겠습니다. 안나 부인:분명히 얘기하지 못할까! 세묜:(싱글벙글 웃으며) 예, 실은 저 녀석이 타냐한테 눈독을 들이고 만날 귀찮게 들어붙는데, 타냐 쪽에서 저 녀석을 싫어하거든요. 지금도 또 그 따위 짓을 하기에, 내가 좀 옆으로 떼어 놓았더니 저러는군요. 그저 손끝으로 조금 떠밀었을 뿐인데... 그리고리:흥, 조금 떠밀었을 뿐이라고? 갈비뼈가 부러질 뻔하고, 이 연미복이 이렇게 터졌는데도 조금이야? 글세 엊저녁처럼 힘이 솟구쳐 오른다면서 느닷없이 저의 목을 조르지 않겠어요! 안나 부인:(세묜에게) 내 집에서 감히 싸움질을 하다니! 표도르:제가 한마디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세묜은 전부터 타냐를 점 찍어 놓았었는데, 이번에 정식으로 약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리고리가... 이렇게 된 이상 사실대로 죄다 말씀드립니다만, 그리고리가 그애한테 흑심을 품고 좋지 못한 짓을 했기 때문에, 세묜이 화를 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리:그건 사실과 달라요! 실은 제가 놈들의 속임수를 폭로한 데 원한을 품고 그러는 겁니다! 안나 부인:속임수라니? 그리고리:강신술 실험 말입니다. 엊저녁의 그건 세묜이 한 짓이 아니고, 죄다 타냐가 한 짓이었습니다. 전 타냐가 소파 밑에서 기어나오는 걸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거든요. 안나 부인:뭐, 뭐, 뭐라구? 소파 밑에서 기어 나왔다구? 그리고리:예, 그렇습니다. 테이블 위에서 서류를 던진 것도 모두 그 계집애 짓입니다. 만약에 그 계집애만 없었다면, 나리님께서 서류에 서명하시지도 않았을 것이고, 농부들에게 토지를 파시지도 않았을 겁니다. 안나 부인:그러니까 그걸 네 눈으로 똑똑히 보았단 말이지? 그리고리:예, 똑똑히 보았다니까요, 그 계집애를 부르십시오. 이것이 거짓말이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할 겁니다. 안나 부인:그럼 그애를 불러 와. 그리고리 퇴장. 제18장 무대 뒤에서 떠들썩한 소리 들려온다. 문지기:(목소리만) 안 돼, 들어갈 수 없대두! 무대로 문지기의 모습이 나타나자마자, 세 농부가 그 옆으로 빠져 무대로 나온다. 맨 앞에 농부 2. 농부3은 발이 걸려 넘어져서 코를 움켜쥔다. 문지기:안 돼, 안 돼! 농부 2:무슨 나쁜 짓을 하러 온 것도 아닌데, 안 될 건 뭐람! 우린 돈만 지불하면 그만이니까. 농부 1:그 서류에 나리님께서 서명을 하신 이상 토지 매매는 성립되었으니까, 우린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돈을 지불해야 한단 말이오. 안나 부인 이봐요, 인사는 아직 빨라요. 그건 모두 사기였으니까! 따라서 아직 매매는 성립되지 않았단 말예요. 땅은 아직 팔지 않았으니까... 빨리 레오니드를! 아니, 나리님을 빨리 불러와요! 문지기 퇴장. 제19장 레오니드 등장. 그러나 안나 부인과 세 농부를 보자, 얼른 되돌아 들어가 버리려 한다. 안나 부인:안 돼요, 안 돼! 이리와요! 땅을 일시불이 아니면 팔아선 안 된다고 내가 그토록 말하지 않았느냐 말예요! 나만 그렇게 말한 게 아니고 딴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말했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바보같이 사기를 당하다니, 대체 정신이 있어요, 없어요? 레오니드:그건 무슨 소리요? 무슨 사기를 당했다는 건지 난 도무지 알 수가 없구먼. 안나 부인:수치라는 걸 아세요, 수치를! 머리가 허옇게 센 나이에 코흘리개처럼 호락호락 속임수에 넘어가 남의 웃음거리가 되다니, 창피하지도 않아요? 자기 아들이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필요한 3백 루블 정도의 돈마저 내놓기가 아까워 벌벌 떠는 주제에, 자기는 천치 바보처럼 사기나 당하고 있으니, 내가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나, 생각해보란 말예요! 레오니드:이봐요, 제발 좀 진정하라구! 농부 1:저희들은 그저 돈만 받아주시면 그것으로... 농부 3:(돈을 꺼내며) 어서 이 돈을 받으시고 일을 끝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나 부인:가만 좀 있어요! 제20장 그리고리와 타냐, 등장한다. 안나 부인:(타냐를 노려보며) 엊저녁 강신술 실험 때, 넌 그 방에 들어가 있었다면서? 타냐, 표도르와 레오니드와 세묜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리:속이려 해봐야 소용없어, 내가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안나 부인:그 방에 있었지? 바른대로 말해. 난 다 알고 있으니까, 자백하는 게 좋을 거야. 너를 어쩌자는 게 아니고, 다만 저이가, (레오니드를 가리키며) 나리님이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그러는 거니까... 테이블에다 서류를 던진 건 너지? 타냐: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보다도 한 가지 청이 있어요. 죄송한 말씀이오나 저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안나 부인:(레오니드에게) 보세요. 당신이 얼마나 바보 노릇을 했는지! 제21장 베시, 등장하여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서 있다. 타냐:제발 저를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마님! 안나 부인:그건 안 돼! 너는 우리한테 몇 천 루블이나 손해를 끼쳤어! 팔아서는 안 될 땅을 너 때문에 팔았으니까! 타냐:저를 고향을 돌아가게 해주세요, 마님! 안나 부인:안 된다니까!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하란 말야. 공연히 능청떨면 재판소에 넘겨 버릴 테야. 베시:(앞으로 나서며) 엄마, 타냐의 청을 들어줘요. 엄마가 타냐를 재판소에 고소하면, 나도 함께 재판을 받아야 해요! 엊저녁의 그 속임수는 타냐와 내가 둘이서 짜고 한 일이거든요. 안나 부인:흥, 네가 함께 꾸몄으니, 일이 그 모양으로 될 수밖에! 제22장 교수, 등장한다. 교수:안녕하십니까, 안나 부인! 아가씨도 안녕하시오! 레오니드 표도르비치, 시카고에서 거행된 제13회 강신술 정기 대회의 보고서를 갖고 왔습니다. 슈미트 씨의 경탄할 만한 연설문이 실려 있더군요. 레오니드:호오, 그것 참 흥미 있군요! 안나 부인: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흥미 있는 얘기를 내가 들려 드리죠. 선생님이나 저의 주인 양반이나 모두 저 계집애의 속임수에 넘어갔단 말예요. 베시는 자기도 함께 그 짓을 했노라고 우기지만, 그건 내 약을 올리려는 수작이고, 당신네들은 속여넘긴 건 어디까지나 저 무식한 계집애 혼자의 짓이에요. 당신네들은 아주 단단히 믿고 계시지만 엊저녁 강신술 실험에서는 아무런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던 거예요. 그건 모두 저애가(타냐를 가리키며) 한 짓이니까요? 교수:(외투를 벗으며) 그러니까 어찌됐다는 겁니까? 안나 부인:그러니까 엊저녁에 어둠 속에서 기타를 치기도 하고, 선생님의 머리를 두드리기도 하고, 또 그밖의 여러 가지 해괴한 짓을 한 건 바로 저애라는 거예요. 방금 자백을 했으니까요. 교수:(미소를 지으며) 호오, 그래요? 그래서 그것이 무엇을 입증한다는 거죠? 안나 부인:무엇을 입증하느냐구요? 당신네들의 그 강신술이란 게 실은 엉터리라는 걸 입증한 셈이죠! 교수:이 처녀가 속임수를 쓰려 했으니까 강신술이란 엉터리다, 그 말씀입니까? (웃는다) 하, 하, 하, 이건 참 괴상한 결론이로군요! 이 처녀가 우리를 속이려 했다. 그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처녀가 무슨 이상한 짓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 처녀가 한 짓은, 결국 이 처녀가 한 짓일 뿐, 강신술적 에너지의 발현은 어디까지나 강신술적 에너지의 발현이란 말입니다. 아니, 그보다도 이 처녀가 강신술적 에너지의 발현을 불러일으켰든지 유발했든지, 거기에 일정한 형태를 부여했는지도 모르잖습니까! 안나 부인:또 그 따분한 강의로군요!... 교수:(엄숙한 어조로) 부인께서는 이 처녀와 그리고 댁의 저 귀여운 아가씨가 둘이서 무슨 짓인가 했다고 말씀하십니다만, 그러나 우리들 모두가 본 그 불빛이라든가, 처음엔 내려갔다가 나중엔 올라간 체온 상태라든가, 그로스만 씨의 흥분과 전율, 이런 것들 역시 이 처녀의 속임수일까요? 아니, 이런 것들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부인, 이건 엄연한 사실이란 말이에요! 이 세상에는 깊이 연구하고 충분히 이해하기 전에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너무나도 중대한 현상이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레오니드:그리고 마리야 바실리에브나가 분명히 본 그 갓난아기, 하긴 나도 보았지만, 그 갓난아기를 어떻게 저 하녀가 끄집어 낼 수 있었겠느냐 말이오! 안나 부인:당신은 자신을 아주 현명한 인간인 것같이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형편없는 바보란 말예요! 레오니드:그럼, 난 이젠 들어가겠소... 교수님, 내 방으로 갑시다! (서재로 퇴장) 교수:(어깨를 흠칫거리며 그 뒤를 따른다) 흠, 유럽 나라들에 비하면, 아직도 우린 까맣게 뒤떨어져 있거든! 제23장 야코프, 등장한다. 안나 부인:(레오니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바보같이 속아 넘어가고서도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내 참 기가 막혀서! (야코프에게) 뭔가? 야코프:저어, 식탁엔 몇 분의 식사를 준비하면 될는지요? 안나 부인:몇 분이냐구?... 표도르 이바노비치, 저 사람한테 맡긴 은제 식기를 인계받도록 해요! 그리고 당장 이 집에서 내쫓아요. 모든 게 다 저 사람 탓이야! 그냥 놔두면 나중에 나를 무덤으로 끌고 갈지도 몰라. 엊저녁만 해도 그렇지, 아무 죄도 없는 가엾은 그 피프카를 굶겨죽일 뻔했다니까! 그것만으로 모자라서, 병균이 득실거리는 부엌에까지 끌어들이고... 그래서 또 여기 기어들 들어오지 않았느냐 말야! 이것도 저것도 모두가 저 사람 탓이라니까! 내보내요, 내보내! 당장 셈을 해줘요! (세묜에게) 너도 앞으로 한 번만 더 이 집에서 그 따위 짓을 했다간 가만 안 놔 둘 테니, 그리 알아. 더러운 촌놈 같으니! 농부 2:뭐라구요? 제 아들이 더러운 촌놈이라고요. 그래서 나쁘다면 더 이상 이 댁에 놔두실 필요가 없겠지요. 셈을 해주고 내보내면 될 게 아닙니까! 안나 부인:(그의 말을 들으며 농부 3을 흘끔흘끔 바라본다) 원 저런! 저것 좀 봐, 저 사람 코에 부스럼이 났잖아, 부스럼이야! 저건 환자야, 보균자야! 그러기에 내가 어제 뭐랬어! 저 사람들을 집안에 들여 놓지 말라고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오늘 또 들여 놓다니! 당장 내쫓아요, 내쫓아! 표도르:그럼, 돈을 받지 말까요? 안나 부인:돈이라니? 응, 돈은 받아요. 그러나 당장 내쫓아야 해요. 특히 저기 저 사람은! 벌써 썩어가고 있는 모양이니까. 농부 3:그건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마님, 당치도 않은 말씀이에요. 제가 썩어가고 있는지 아닌지, 저의 마누라한테 물어보십쇼. 전 유리알처럼 반질반질합니다요... 안나 부인:또 뭐라고 입을 놀리는군! 빨리 나가요, 나가! 아아, 모두들 나한테 짓궂게만 구니, 이래서야 내가 어떻게 산담!... 빨리 의사 선생을 불러줘! (울음을 터뜨리며 달음질쳐 퇴장) 야코프와 그리고리 퇴장. 제24장 타냐:(베시에게) 아가씨, 전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요? 베시:뭐 걱정할 것 없어. 저 사람들하고 함께 시골로 돌아가요. 뒷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퇴장) 제25장 농부 1:(표도르에게) 어서 돈을 받아주시면 고맙겠는데요. 농부 2:이젠 그만 돌아가게 해주십쇼. 농부 3:(돈을 들고 머뭇거리며) 이럴 줄 알았더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이번 일은 맡지 않았을 건데... 이건 정말 열병을 앓는 것보다 더 하군! 표도르:(문지기에게) 이 사람들을 내 방으로 안내하게. 내방엔 주판도 있으니까 거기서 돈을 받겠소. 자, 내방으로 가시오, 내 방으로! 문지기:그럼 갑시다. 표도르:무엇보다 타냐한테 감사해야 할 거요. 타냐가 없었더라면 당신네들은 땅을 매수할 수도 없었을 테니 말이오. 농부 1:그렇구말구요! 이 색시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요. 농부 3:타냐는 우릴 사람 구실하게 해주었어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린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처지였지요. 손바닥만한 땅 덩어리 가지고는, 소나 말은 고사하고 닭새끼 한 마리 기를 수 없는 형편이었으니까요! 그럼 색시, 잘 있소! 마을에 돌아오거든 꼭 우리집에 들르시오, 내 한턱 잘 낼 테니. 농부 2:집에 돌아가면 잔치에 쓸 술부터 담가야겠군. 될 수 있는대로 빨리 돌아오도록 해요! 타냐:네, 곧 돌아가겠어요! 돌아가구말구요! (환희에 찬 목소리로) 아아, 세묜! 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농부들 퇴장. 제26장 표도르:참 다행이로구나, 타냐! 네가 살림을 시작하면 나도 한 번 찾아가겠다. 환영해주겠니? 타냐:그럼은요, 표도르 아저씨. 친아버지 보다 더 극진히 대접할게요! (표도르를 포옹하고 키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