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지은이:톨스토이/이철 옮김 출판사:중앙미디어 봉사자:강순분, 최수경 제1부 1 아무리 많은 사람이 조그마한 땅덩어리인 지구 어느 한구석에 몰려서 일부러 기름진 땅을 못 쓰게 하려고 해도, 또 땅 위에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게 돌을 깔아 덮어 씌운다 해도, 또한 그 돌 틈새로 비집고 싹트는 풀을 깡그리 뽑아 버린다 해도, 아니면 석탄이나 석유의 매연으로 그 땅 위의 공기를 탁하게 오염시킨다 해도, 그러고도 모자라 온갖 나무를 모조리 잘라내고 거기 깃들인 새나 짐승을 샅샅이 찾아낸다 해도-북적거리는 도시 한복판에서도 역시 봄은 봄일 수밖에 없다. 싹튼 초목이 정말 송두리째 뽑혀 버리지 않는 곳이면 햇볕이 따사로이 비쳐서, 가로수 옆 잔디밭이 있는 좁은 길은 물론 보도에 깔린 포석 사이사이에 파릇파릇 싹이 돋아 마냥 푸르렀다. 자작나무와 포플러, 야생 벚나무에도 향기롭고 촉촉한 새잎이 트고, 보리수에도 이제 막 순이 튼 새잎을 한껏 부풀리고 있었다. 까치와 참새, 비둘 기도 정녕 즐거운 듯 봄맞이 준비로 벌써부터 둥지를 틀기 시작하고, 봄볕을 받아 따스한 벽에는 파리까지 윙윙거렸다. 이처럼 산천 초목도, 새와 짐승, 곤충까지도, 그리고 천진한 아이들마저도 저마다 봄빛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어른들-여전히 자기 자신을, 또는 서로 남을 속이거나 괴롭히기만 했다. 사람들에게 신성하고도 중요한 것은 화사한 봄날 아침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를 위해 베푸신 조물주의 아름다운 은혜-평화와 친목과 사랑으로 마음을 바치는 미덕- 를 거역하는 일투성이였다. 오직 그들에게는 서로 상대를 지배하기 위해 어떤 생각을 궁리 해 내느냐 하는 것이 신성하고 중요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현청 소재지의 교도소 사무실 안에서도 신성하고 중요한 일로 치부되는 것은 모 든 생명, 동물이나 인간에게 새봄의 감동과 환희에 있는 것이 아니라, 4월 28일 오전 9시까 지 현재 예심중인 미결수 3명-2명의 여죄수와 1명의 남자 죄수를 법정에 출정시키라는 내 용의 날인된 통고서가 전날 밤에 접수됐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주범으로 몰린 여 죄수 1명은 따로 특별 호송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 명령에 따라 4월 28일 오전 8시, 악취 가 물씬 풍기는 어두컴컴한 여죄수 감방 복도로 간수장이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희끗희끗 한 곱슬머리에다 수척하고 소매에 금빛몰을 두른 재킷을 입고, 가장자리에 푸른 파이핑 장 식이 달린 허리띠를 맨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여간수였다. "마슬로바에게 용무가 있으십니까?" 복도 쪽으로 난 감방문 중의 하나로 당직 간수와 함 께 걸어가면서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간수장은 덜거덕거리면서 자물쇠를 풀고 감방문을 열었다. 복도보다 더욱 심한 악취가 풍 겨나왔다. 그는 곧바로 호명했다. "마슬로바 출정!" 그러고는 다시 문을 닫고 그녀가 안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비록 교도소이기는 하나 바깥 뜰에는 시내로부터 바람에 실려온 상쾌하고 싱그러운 들판 의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복도에는 분뇨와 콜타르와 부패물 따위의 속이 뒤집힐 것 같은 악취가 배어 장티푸스균이 득실거릴 것 같은 공기가 가득 차 있어서 처음 들어오는 사 람이면 누구라도 우울하고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평소 이런 악취에 젖어 있을 여간수조차 밖에서 들어오면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복도에 들어서자 갑자기 피로가 느껴지면서 졸 음이 밀려오는 듯했다. 감방 안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것은 여죄수들이 요란하게 떠드는 소리와 발 구르는 소리였다. "마슬로바, 빨리빨리 하란 말이야!" 간수장이 감방문을 향해 소리쳤다. 약 2분쯤 지났을 때, 하얀 웃옷과 스커트 위에 회색 죄수복을 입은, 그다지 키는 크지 않 으나, 가슴이 풍만한 젊은 여자가 활달한 걸음걸이로 나와서 휙하고 재빨리 몸을 돌리더니 간수장 곁에 와 섰다. 발에는 삼베로 만든 긴 양말에다 죄수용 장화를 신었으며, 머리는 흰 수건으로 싸고 있었으나, 그 밑으로 멋을 내기 위해 일부러 그런 듯싶은 곱슬곱슬한 새까만 머리칼이 삐죽 나와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오랫동안 햇빛을 못 보고 지낸 사람들에게서 흔 히 볼 수 있는 움 속의 감자싹을 연상케 하는 유달리 창백한 모습이었다. 조그맣고 도톰한 손도, 죄수복의 높은 깃 사이로 드러난 희고 포동포동한 목덜미도 역시 창백한 빛이었다. 그 얼굴에서 유달리 반짝이는 새까만 두 눈동자는 비록 눈두덩이 약간 부어오른 듯했어도 유난 히 생기가 있어 보였고, 한쪽 눈이 약간 사팔뜨기였지만 윤기 없는 창백한 살결과는 두드러 지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풍만한 가슴을 앞으로 내밀다시피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복도로 나오자, 그녀는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고 명령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다는 듯한 자세로 간수장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 옆에 섰다. 간수장이 감방문을 닫으 려고 할 때, 갑자기 안에서 허옇게 센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창백하고 깡마른 주름투성이 인 노파의 얼굴이 불쑥 나타나더니 마스로바에게 뭐라고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간 수장이 문짝으로 노파를 밀어넣는 바람에 노파의 머리는 안으로 사라졌다. 감방 안쪽에서 한 여자가 큰 소리로 웃어 댔다. 마슬로바도 따라 우승며 감방문에 달려 있는 조그마한 쇠 창살문 쪽을 돌아보았다. 맞은편에서 있던 노파는 그 창살에 들어붙어 쉰 목소리로 그녀에 게 말했다. "쓸데없는 말을 하면 못써. 그게 무엇보다도 중요해. 그저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면 된다 고." "어떻게든지 결판이 났으면 좋겠어요.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없을 테니까요." 마슬로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결판은 한쪽이지, 두 가지일 리가 있나?" 간수장은 자기의 재치있는 말을 자랑하듯 관리 답게 내뱉었다. "자 따라와, 어서!" 쇠창살문으로 내다보고 있던 노파의 눈은 사라지고, 마슬로바는 감방 복도 한가운데로 나 와 총총걸음으로 간수장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돌층계를 내려와 여자 감방보다 더욱 냄새가 고약하고 소란스런 남자 감방 옆을 지났는데, 모든 쇠창살문에서 많은 죄수들의 눈 이 두 사람을 뚫어지게 좇고 있었다. 그들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앉아 있던 서기는 담배 연 기가 밴 서류를 한 병사에게 건네주고, 여죄수를 가리키며 "데리고 가!"하고 말했다. 병사는 곰보에다 벌건 얼굴을 한 니주니노브고로드 출신의 농부였는데 그는 그 서류를 두 툼한 외투 소매에다 쑤셔넣고 여죄수를 흘끗 훔쳐보면서 광대뼈가 튀어나온 핀란드 태생의 동료에게 넌지시 눈짓을 해 보였다. 두 사람의 병사는 여죄수의 양 옆에 서서 층계를 내려 가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정문은 조그마한 샛문만 열려 있었다. 샛문의 문턱을 넘어서 밖으 로 나온 두 병사는 여죄수와 함께 시내의 포장된 도로 한복판을 걸어갔다. 마부, 장사치, 요리사, 노동자, 관리들이 호기심에 찬 눈으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 았다. 그 중에서 고개를 흔들며, '행실이 나쁘면 저런 꼴이 된다고. 우리와는 딴판이지.'하 고 생각하는 삶도 있었다. 아이들은 여죄수를 보고 무서워했으나, 그래도 두 사람의 병사가 뒤따르고 있었으므로 나쁜 짓을 못하려니 생각하고 가까스로 마음을 놓았다. 숯을 판 뒤, 선 술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시골서 온 농부는 여죄수 곁으로 다가와 성호를 긋고는 1코페이 카짜리 동전 하나를 건네주었다. 여죄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가 입 속으 로 중얼거렸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 쪽으로 쏠리고 있음을 느끼자, 그녀는 자기가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는 사실이 유쾌하기도 했다. 감옥 안과 비교해 볼 때 싱그 런 봄날의 대기는 그녀의 마음을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게 해주는 것이었지만, 오랫동안 걸 어보지 않은데다가, 딱딱한 죄수화를 신고 포도 위를 걷는다는 것이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 었다. 그래서 그녀는 발등만 내려다보며 될 수 있는 대로 가볍게 발을 옮겨놓도록 조심했 다. 어느 밀가루 가게 옆을 지날 때, 아무에게도 해를 입힌 일이 없었던 비둘기 몇 마리가 그 앞에서 아장아장 걸어다니고 있었는데 얼떨결에 하마터면 그 중 한 마리를 밟을 뻔했다. 암청색 비둘기는 푸드덕 날개를 치며 그녀의 귓전을 스치고 날아갔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 게 빙긋이 웃었으나 곧 자기의 처지를 생각하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2 여죄수 카추샤 마슬로바의 과거는 지극히 평범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예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시골에서 살고 있는 두 자매 지주의 소유인 영지에서 일하고 있는 농노의 딸이었 다. 결혼도 못한 이 여자는 남편도 없는 처지이면서도 해마다 아기를 낳았다. 그런데 보통 시골에서 그러하듯이 영세만은 받게 했다. 그러나 바라지도 않았는데 생긴 필요 없는 자식 이라 해서, 또 일에 방해나 되는 자식이라 해서 젖을 통 먹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내 굶어 죽곤 했다. 다섯 명의 어린애가 이렇게 해서 죽었다. 모두 영세는 받았으나 젖을 먹이지 않았기 때문 에 굶어 죽고 말았다. 그러던 중에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어떤 집시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번째 아기는 계집아이였다. 이 아이도 똑같은 운명에 빠질 뻔했으나, 때마침 지 주인 두 자매 중 한 여자가 농장에 들렀기 때문에 용케 살아났다. 우유에서 비린내가 난다 고 젖소를 돌보는 일꾼들을 야단치러 온 것이었다. 뜻밖에도 외양간에 귀엽고 튼튼해 보이 는 갓난아이를 안은 산모가 누워 있었던 것이다. 여지주는 우유에서 비린내가 나는 것과 외 양간에 산모를 들여놓은 것에 대해서 한 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은 다음, 그대로 돌아가려다 가 갓난아기의 얼굴이 눈에 띄자, 동정심이 우러나 자기가 그 갓난아기의 얼굴이 눈에 띄자, 동정심이 우러나 자기가 그 갓난아기의 대모가 되겠노라고 제의했다. 그녀는 이 갓난아기에 게 영세를 받게 한 후, 대녀가 된 그 아기가 차츰 불쌍하게 여겨져 산모에게 우유를 사 주 기도 하고 돈을 주기도 했으므로, 그 계집아이는 겨우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지주인 두 자매는 그 계집아이를 '스빠손나야(구원받은 아기라는 뜻)'라고 불러 주었다. 이 어린아이가 세 살 때, 그 어머니는 병을 앓다 죽고 말았다. 젖소를 돌보는 이 아이의 할머니에게는 손녀딸이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두 여인이 아이를 맡아 기르게 되었다. 까 만 눈의 이 아이는 점차 성장해 감에 따라 발랄하고 귀염성 있게 자라, 그 늙은 여자 지주 들의 마음에도 큰 위안이 되었다. 두 여지주 중 소피야 이바노브나인 동생은 마음씨가 고운 여자로 대모도이 동생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마리야 이바노브나인 언니는 성격이 좀 엄격한 편이어싿. 소피야 이바노브나 는 이 귀여운 계집애에게 고운 옷을 갖춰 입히고 교육도 시켜서 나중에는 예의 바른 숙녀로 기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이 아이를 부지런하고 튼튼한 하녀 로 길러내겠다고 하여 몹시 엄하게 다루었고 기분이 나쁠 때는 곧잘 벌을 주고 매질까지 하 곤 했다. 이같이 서로 상이한 양육 방식 속에서 이 소녀는 반은 하녀로서 반은 아가씨로서 자라난 형편이었다. 그래서 이름마저도 애칭인 첸카로도, 비칭인 카치카로도 불리지 않고 그 중간인 카추샤로 불렀다. 그리하여 카추샤는 바느질이나 방 청소를 하고, 성상도 닦고, 커피 를 볶아서 가루를 만들어 끓이기도 하고, 자질구레한 빨래도 하고, 때로는 여주인과 함께 앉 아 그들에게 책을 읽어 주기도 하였다. 여러 곳에서 그녀에게 청혼이 들어왔으나 그녀는 아무와도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청혼을 해온 사람들 모두가 그 날 벌어 그 날 먹는 품팔이꾼들이었으므로 편안한 지주의 집 생활에 젖은 자기로서는 그들에게 시집가기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런 생활이 그녀가 열여섯 살 되던 해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만 열여 섯 살이 되었을 때, 여주인의 조카인 대학생이며 부유한 공작이 고모네 집을 찾아왔다. 그러 나 카추샤는 그 청년에게 자기 자신이 감히 고백할 엄두도 못 내면서 점차 그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어느 날, 바로 그 젊은 공작이 전쟁터로 나가는 길에 고모네 집에 들러 나흘 동안 머물렀는데, 출발하기 전날 밤에 그는 기어코 카추샤를 욕보이고 말았 다. 그러고는 그 다음날 백 루블짜리 지폐를 그녀의 손에 쥐어 주고는 훌쩍 떠나 버렸다. 그 가 떠난 지 다섯 달이 지나서야 그녀는 자기가 임신한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런 뒤로 그녀는 모든 일이 귀찮아졌고 짜증이 났다. 어떻게 해야 앞으로 다가올 수모를 피할 수 있을까,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여주인들의 시중을 들 때도 그전과 달리 짜 증을 내게 되었고, 고분고분 말도 잘 듣지 않았을뿐더러, 자기도 모르게 발끈 성을 내기도 했다. 그러고는 이내 그것을 후회했지만 또다시 여주인에게 마구 대들며 집에서 나가게 해 달라고 떼를 쓰게까지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여주인들도 그녀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는 그녀를 내쫓아 버렸다. 그 집에서 나오자 그녀는 어느 지방 경찰서장 집으로 들어가 하녀로 일했으나 그 곳에서도 석 달밖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쉰 살이나 먹은 늙은 경찰서장이 추근거렸는데 하루는 그녀에게 미친 듯이 덤벼들었다. 화가 치민 그녀는 멍텅구리 같은 놈이라느니 늙은 색마라 느니 하고 소리치다 가슴을 그만 떼밀었는데 그냥 벌렁 나자빠지자 그녀는 주인에게 난폭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그 집에서도 내쫓기고 말았다. 그러나 해산날이 가까웠으므로 마땅한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술장사를 부업으로 하는 과부인 시골 산파집 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해산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산파가 그 마을의 어떤 앓는 여자를 돌보 아 준 탓에 산욕열을 카추샤에게 감염시켜 갓난 사내아이를 양육원으로 보내지 않을 수 없 게 되었다. 그런데 갓난아이를 데리고 간 노파의 이야기로는 그 아기는 양육원에 도착하자 마자 곧 죽어 버렸다고 했다. 카추샤가 산파집에 가서 살게 되었을 당시 그녀가 갖고 있던 돈은 전부 12루블이었는데 그건 그녀를 유혹한 공작이 그녀의 몸값으로 준 백 루블과 일을 해서 번 27루블이었다. 그 러나 그녀가 산파집에서 나왔을 때는 단돈 6루블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돈을 아낄 줄 모 르는 성격인지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돈을 물쓰듯 한 것은 물론이요, 아무나 간청하는 대로 선뜻 내주곤 했다. 산파가 두 달 동안의 하숙비로서-식비와 차값을 포함해서 -40루블을 받 아갔고 갓난아기를 양육원에 보낸다고 25루블, 또 암송아지를 산다고 해서 40루블을 꾸어 줬으며, 나머지 20루블은 옷가지와 자질구레한 주전부리 등으로 달아났다 그래서 카추샤가 회복되었을 때 그녀의 수중에는 돈이라곤 한푼도 남지 않아 곧 일자리를 찾아나서야 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어느 산림 감독의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 산림 감독 역시 결혼한 몸 인데도 불구하고, 이전의 경찰서장처럼 들어가는 첫날부터 카추샤에게 추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사내가 끔찍할 정도로 징그럽고 보기 싫었을 뿐만 아니라 카추샤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교활한 사내였다. 게다가 그는 주인이었으므로 아무데고 그가 원하는 곳으로 그녀를 끌어내서는 기회를 노려 끝내 욕망을 채우고야 말았다. 이를 눈치챈 산림감독의 아내는 어 느 날 자기 남편과 카추샤가 단둘이 한방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카추샤에게 미친 듯 달려 들어 그녀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추샤도 가만히 있지를 않아 둘 사이에 한바탕 싸움 이 벌어지고 카추샤는 결국 월급 한푼 못 받은 채 그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카추샤는 시 내에 사는 아주머니네 집으로 갔다. 아주머니의 남편은 제본업자로서 전에는 제법 잘 살았 지만 지금은 단골 거래인들을 몽땅 잃어 뭐든지 팔아서 마셔 버리는 술주정뱅이가 되어 있 었다. 그래서 아주머니는 손수 조그마한 세탁소를 경영해서 아이들과 함께 거의 폐인이 되다시 피 한 남편을 섬기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카추샤더러 자기 집의 세탁부로 있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막상 아주머니 집에서 일하고 있는 세탁부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 고서는 차마 마음이 내키지 않아 하녀의 일자리라도 찾으려고 소개소에 가보았다. 그녀는 두 아들이 중학생인 귀부인의 집에서 하녀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들어간 지 1주일 도 안 되고 코 밑에 수염이 듬성듬성 나기 시작한 중학교 6학년짜리 맏아들 녀석이 공부를 아예 집어치우고 카추샤에게 미쳐서 따라다녔기 때문에 그것마저 그만두어야 했다. 그 어머 니는 모든 책임을 카추샤에게 씌우고 쫓아냈다. 좀처럼 새로운 일자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녀자리를 알선해 주는 직업 소개소에 갔다가 우연히 그 곳에서 토실토실 한 손에 보석반지와 팔찌를 요란스럽게 낀 어떤 부인을 만났다. 일자리를 찾고 있는 카추샤 의 딱한 처지를 듣고 난 그 부인은 자기의 주소를 친절히 알려 주면서 한번 자기 집으로 찾 아오라고 했다. 카추샤는 그 집으로 찾아갔다. 반갑게 맞은 그 부인은 그녀에게 고기만두며 향긋한 술을 대접한 뒤 하녀에게 쪽지를 건네 주며 어디론지 심부름을 보냈다. 그 날 저녁, 흰 머리를 길게 기르고 턱수염이 난 키가 후리후리한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 노인은 들어오자마자 카추샤 옆에 붙어 앉더니 눈을 번뜩이며 벙글벙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치근 치근 농을 걸어 왔다. 잠시 후 카츄샤는 여주인이 사내를 옆 방으로 불러내어 '시골서 갓 올라온 숫처녀예요.'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카추샤를 부르더니, 그 남자는 소설가인데 부자라서 마음에 들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사준다고 일러 주었다. 그녀 가 마음에 든 모양인지 소설가는 앞으로 자주 만날 것을 약속하고 25루블을 주고 갔다. 그러나 아주머니에게 빌린 돈을 갚고 새 옷과 모자와 리본을 사니깐 25루블은 금방 없어지 고 말았다. 며칠이 지나 소설가는 다시 마슬로바를 불러냈다. 그녀는 갔다 그는 또 25루블을 주면서 따로 방을 얻어 이사하라고 권했다. 마슬로바는 이 소설가가 얻어 준 셋방에서 사는 동안에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쾌활한 점원 과 서로 좋아 지내게 되었다. 그녀는 이 사실을 솔직히 소설가에게 고백하고, 조그마한 외딴 집으로 점원과 함께 이사했다. 그러나 결혼을 약속했던 점원은 한 마디 말도 엇  그녀를 버리고 니즈니로 가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혼자 남게 되었다. 그녀는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 가기로 작정했으나 만사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검열 경찰관이 황색 면허(매춘부 카 드)와 정기 검진을 받지 않고서는 그러한 생활을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일러 주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는 다시 아주머니에게로 가야만 했다. 아주머니는 최신 유행의 의상으로 단 장하고 망토를 걸치고 모자까지 쓴 그녀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존경하는 빛을 보이며 반색 을 하고 맞아들였고, 이제는 그녀가 제법 굉장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여 감히 세탁부가 되 란 말은 입 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카추샤도 지금은 세탁부가 되거나 안 되거나 하는 따위 의 일은 무제도 되지 않았다. 파리한 세탁부들-그중에는 이미 폐병에 걸린 사람도 있었다- 이 가겟방에서 대단히 힘든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그들을 불쌍히 생각하는 마음까 지 생겼다. 그들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노상 문을 열어젖뜨리고 30도나 되는 숨막히는 비누 증기 속에서 바싹 마른 팔로 빨래와 다리미질을 하고 있었다. 자기도 하마터면 그런 지옥 같은 처지에 빠질 뻔했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말 하자면 카추샤가 한 사람의 후원자도 없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사창가에서 여자를 소개하 는 뚜쟁이를 만나게 되었다. 카추샤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만, 최근 그 점원에게 버림받은 뒤에는 차츰 술까지 입에 대는 버릇이 생겼다. 술을 마시게 된 것은 비단 술맛을 알게 되어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술이 지금까지 그녀가 겪어 온 모든 비참한 신세를 모조리 잊게 해주고 맑은 정신으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안정감과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그녀는 언제나 풀이 죽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가눌 수가 없었다. 뚜쟁이 여자는 아주머니에게 먼저 한턱 크게 내고 카추샤에게 잔뜩 술을 마시게 하더니 화려한 도시에 있는 멋들어진 유곽에 들어가 돈을 벌면 수입도 좋고 생활도 아주 편하다며 온갖 감언 이설로 그녀를 꾀었다. 카추샤는 양자 택일을 해야 했다. 치근거리는 주인 남자의 강요에 못 이겨 남몰래 간통을 해야 하는 천한 하녀짓을 하느냐, 아니면 생활이 보장되고 법룰로 공공연하게 허락된 상황에서 돈벌이도 잘 되는 매음 생활을 닥치는 대로 하느냐의 갈림길이었다. 그녀는 후자의 길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를 처 음을 배신한 사나이와 자기를 버리고 간 점원과, 그리고 그 외에 자기를 괴롭힌 모든 사람 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욱이 그녀의 마음을 충동하고 최종적인 결심 을 내리게 한 하나의 원인은, 자기만 잘하면 비로드나 비단으로 만들어진, 어깨와 팔을 온통 드러내는 무도회 의상을 마음내키는 대로 맞춰 입을 수 있다는 뚜쟁이의 말이었다. 검은 비 로드로 장식한 밝은 황금빛 비단옷, 등과 앞가슴을 깊게 판 깃 없는 야회복을 입고 있는 자 기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을 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자기의 신분증을 내주고야 말았다(자 기의 몸을 내놓았다는 뜻). 그날 밤 뚜쟁이는 마차를 얻어 그녀를 마담 키타예바가 운영하 는 유명한 유곽으로 데리고 갔다. 그 때부터 마슬로바는 하느님과 인간의 온갖 계율에 위배된 죄악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 다. 그 생활은 오직 대중의 행복만을 염려하는 정부 당국의 허가뿐만 아니라 비호까지 받아 가면서 영위하고 있는 수십 수백만 여자들의 생활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못된 병을 얻음으 로써 남보다 일찍 늙어버리고 끝내는 죽고 마는 그런 생활이었다. 광란의 밤이 지나면, 아침과 낮은 깊은 잠에 빠졌다가 오후 3,4시가 넘으면 그 때서야 더 러운 잠자리에서 지친 듯 몸을 끌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술 기운을 떨쳐 버리려고 소다수와 커피를 마시고 화장옷이나 잠옷, 재킷이나 가운만 걸친 채 방 안을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며 커튼 뒤에서 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든지, 쉬어 버린 목소리로 서로 말다툼을 한다든지 하며 제각기 가지각색들이었다. 그러고 난 다음 몸이나 머리를 다듬고, 광대처럼 화장도 하고, 향 수를 마구 뿌린다. 또 옷을 걸쳐 입고 본다. 이럴 때면 영락없이 포주와 옷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다. 거울에 이러저리 몸을 비춰보고는 뺨에 분을 칠하고 눈썹을 그리고, 그러고 나서 는 기름지고 당분이 많은 식사를 한다. 그 다음 몸뚱이가 다 비쳐보이는 화려한 비단옷으로 몸을 감싸고 밝고 멋지게 장식된 눈부시게 황홀한 홀로 나간다. 손님이 모여든다. 음악, 춤, 과자, 술, 담배, 그리고 음락-상대는 젋은 사람, 중년 남자, 애송이, 늙은이, 독신자, 기혼자, 장사치, 점원,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타타르인, 부자, 가난뱅이, 건강한 사람, 군인, 문관, 대 학생, 중학생 등등 온갖 계급과 연령, 갖가지 성질의 남자들이 다 있다. 소리 지르고, 농담하 고, 싸우고, 욕지거리하고, 음악과 담배와 술, 다시 술과 담배와, 그리고 음악이 저녁부터 밤 이 샐 때까지 계속된다. 아침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해방되어 또 깊은 잠에 빠져 버린다. 이 러한 나날이 1주일 동안 연속적으로 되풀이된다. 주말이 도면 이들은 그 지역 담당 경찰서 로 출두한다. 이 경찰서에서는 진료 담당 의사인 사내들이 어느 때는 몹시 거드름을 피우며 엄숙하게 어느 때는 장난삼아 쾌활한 태도로 범죄를 막기 위하여,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까 지 하늘이 부여한 수치심을 무시하면서 이 여자들을 진찰함으로써 1주일 동안 줄곧 그들이 남자와 관계한 죄악의 행위를 다시 계속해도 좋다고 새로운 허가를 내주게 된다. 이리하여 다시금 똑같은 1주일이 계속된다. 그런 식으로 이러한 생활이 여름이나 겨울이나 평일이나 공휴일이나 상관없이 되풀이되곤 한다. 이러한 생활을 카추샤는 7년이나 보냈다. 그 동안 그녀는 유곽을 두 번 옮겼고, 병원에 한 번 입원했었다. 창녀 생활로는 7년째가 되고, 처음 타락했을 때부터 친다면 8년째가 되는 26 살 때 우연히 어떤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미결 감방에 수용되어, 6개월 동안이나 살인범, 강도범 등 온갖 여죄수와 함께 갇혀 있다가 이제야 가까스로 법정 으로 끌려나온 것이다. 3 먼 길을 걸어오느라고 완전히 지쳐버린 마슬로바가 호송병들과 같이 지방 재판소 건물 가 까이 이르렀을 무렵, 때마침 그녀를 유혹하여 타락의 길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자 대모의 조 카인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네플류도프 공작은 아직도 자기 집에서 보료가 깔린 폭신폭신하 고 두툼한 스프링이 아주 좋고 높직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는 앞가슴에다 주름이 잘 잡힌 깨끗한 흰 리넨 잠옷 깃을 펼친 채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고 있었다. 그는 무심히 허공 을 바라보면서 오늘 해야 할 일과 전날에 있었던 일들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부호이고 사회적 명망이 높은 코르차긴 일가의 딸과 결혼하리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일과, 그 집에서 지낸 간밤의 일을 곰곰 생각하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 탄 담배 꽁초를 내던졌다. 그리고는 반짝거리는 은담뱃갑 속에서 또다시 한 개비를 꺼내 몰려다가 언뜻 생 각을 돌려 미끈한 두 다리를 침대 밑으로 천천히 내려 슬리퍼를 찾아 신은 다음, 떡 벌어진 어깨에 비단 실내복을 걸치고 잰 걸음으로 성큼성큼 침실 옆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엘릭시 르 약 냄새와 오데콜롱과 머릿기름 등의 인공적인 향기가 가득 배어 있는 화장실에서 그는 특제 치분으로 군데군데 금으로 때운 이빨을 깨끗이 닦고, 향로를 탄 물로 양치질을 하고는 몸을 구석구석 말끔히 씻은 다음, 몇 가지 다른 타월로 몸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향 기 좋은 비누로 손을 씻고, 길게 기른 손톱을 여러 가지 브러시로 정성스럽게 닦고 커다란 대리석 세면대에서 얼굴과 굵은 목덜미를 씻고 나서, 이번에는 샤워기가 마련되어 있는 침 실 옆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기름지고 건장한 흰 몸뚱이를 찬물로 씻고, 커다란 목욕 타월로 몸의 물기를 없애고, 곱게 다리미질한 속옷을 입고 거울처럼 반짝반짝 광을 낸 구두를 신은 다음, 화장대에 앉아 두 개의 브러시를 양손에 나누어 쥐고 짧고 곱슬곱슬한 검은 턱수염과 관자놀이에서 좀 성겨지기 시작한 곱슬머리를 빗어 올렸다. 그가 평상시에 사용하고 있는 장신구는 셔츠, 양복, 신발, 넥타이핀, 커프스 단추 할 것 없 이 모두가 최고급품으로써 점잖고 수수하고 견실한 값진 물건들뿐이었다. 한 다스나 되는 훌륭한 넥타이와 핀 가운데서 손에 잡히는 대로 골라 맸다. 하나같이 지 금은 대수롭지 않으나, 전에는 새롭고 진귀해서 마음에 들었던 것들이었다. 네플류도프는 미 리 깨끗이 손질하여 의자 위에 걸쳐 둔 옷을 입고 산뜻하게 차린 다음, 어제 세 하인들이 나무쪽으로 모자이크한 마루를 반들반들하게 닦아 놓은 길쭉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에 는 커다란 참나무 찬장과 역시 같은 커다란 식탁이 있고, 흡사 사자의 발처럼 조각된, 널찍 이 벌려진 식탁 다리들이 육중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모노그램(이름의 머리글자를 합해서 만든 글자)이 유난히 크게 새겨져 있고 빳빳이 풀을 먹인 식탁보가 깔려 있는 식탁 위에는 향긋한 커피가 들어 있는 은제 커피 잔과, 역시 은으로 만든 설탕 그릇, 끓인 크림이 든 주전자와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롤빵과, 살짝 구운 빵과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는 빵 광주리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릇들 옆에는 갓 배달된 편지와 조간 신문과 < 르뷔 데 되 몽드(두 세계 평론)>지의 최근호가 놓여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편지를 집으려고 했을 때, 식당에서 복도로 통하는 문으로부터 레이스가 달린 모자가 앞가르마를 감추다시피 눌러 쓴, 상복 차림을 한 몸집이 뚱뚱한 중년 부인이 미끄러지듯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바로 이 집에서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네플류도프의 어머니의 하녀였던 아그라페나 페트로 브나라는 여자였는데, 지금도 가정부로서 집안일을 돌보고 있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는 네플류도프의 어머니를 따라 여러 차례에 걸쳐 외국에서 10년간 이나 지냈기 때문에, 그 모습이나 태도에 귀부인 같은 데가 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네플류도프와 함께 살았고, 그가 소년이었을 때 미첸카(드미트리의 애칭)라고 불리던 무렵 부터 알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잘 잤소,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 뭐 새로운 뉴스라도 있소?" 네플류도프는 농담조로 물 었다. "공작 마님한테서 아가씨한테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댁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하녀가 가 지고 왔는데 아까부터 제 방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는 편지를 내 주면서 의미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았어. 곧 읽어 보지." 편지를 받아 쥐며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는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의 미소의 뜻을 알아 채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미소는 이 편지가 지금 네플류도프와 혼사 말이 있는 공작 영양 코프차기나로부터 온 게 틀림없다는 눈치였다. 미소로 나타난 그녀의 상상이 네플류도프의 기분을 자못 불쾌 하게 만들었다. "그럼 좀 기다리라고 이르겠습니다." 그리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는 식탁 위에 잘못 놓 여져 있는 빵가루 터는 솔(식탁용)을 제자리에 옮겨 놓고는 살며시 식당에서 빠져나갔다. 네플류도프는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가 갖다 준 향수 냄새가 풍기는 봉함 편지를 뜯어 읽 기 시작했다. 당신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저의 책임을 다하려고 말씀드립니다. 가장 자리가 고르지 않은 두꺼운 회색 편지지에 또렷하고 여유 있는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오늘 4월28일, 당신은 배심원으로 재판소에 나가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제 당신이 여느 때처럼 경솔하게 약속하신, 저희들이나 콜로소프 일가와의 미술 전람회 구경은 못 가시게 되었습니다. 만일 제시간에 출정하지 않으시면 말을 사는 데도 아까워하시는 300루블이란 돈을 벌금으로 지방 재판소에 바치셔야 한다면서요. 저는 어젯밤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 이 일을 생각해 냈어요. 그럼 아무쪼록 잊지 마시기를. M.코르차기나 편지 뒷면에는 프랑스어로 다음과 같은 추신이 있었다. 오늘 만찬회에서 밤늦게까지라도 당신의 자리는 따로 잡아 두시겠다고 하신 어머니 말씀 을 전해 드립니다. 아무리 늦더라도 꼭 와 주세요. 네플류도프는 못마땅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편지는 벌써 두 달에 걸쳐서 공작 양양 코르차기나가 그에게 씌우고 있는 교묘한 올가미 수법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요컨대 그 녀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실로 점점 더 강하게 자기에게 옭아매려 하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그리 젊지 않은 사람들이나 서로 열렬히 사랑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흔히 결혼에 대해서 망설이는 법이지만, 네플류도프에게는 그러한 이유 외에도 설사 결혼할 결심을 했다손 치더 라도 당장에 구혼을 할 수 없었던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그가 10년 전에 순진한 카추샤를 유혹하고는 내버린 데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일은 까맣게 잊어버 리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자기의 결혼에 방해가 되리라고는 꾸메도 생각지 않았다. 바로 그 이유라는 것은 그 무렵 그가 어느 유부녀를 우연히 알게 되어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자기 는 이미 그 부인과의 관계가 끝난 줄로 알고 있었으나 그 부인은 아직 그렇게 인정하지 않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네플류도프는 여자에 대해서 몹시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이런 성격이 그 유부녀로 하여금 그를 정복하려는 욕망이 생기게 하였다. 그 부인은 네플류도프가 선거 때 마다 찾아가는 그 군의 귀족 회장의 부인이었다. 이 부인이 그를 유혹해서 관계를 맺게 되 었는데 그녀 쪽에서 나날이 깊은 욕정으로 네플류도프를 빠져들게 했으나 이쪽에서는 점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는 처음에 이 유혹을 물리칠 수 없어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는 부인에게 죄스러움을 느끼면서도 그 부인의 승낙 없이는 도저히 관계를 끊을 수가 없 었다. 바로 이것이 네플류도프가 공작 양양 코르차기나에게 구혼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손 치더라도 구혼할 주게가 못 된다고 생각하게 된 원인이었다. 때마침 공교롭게도 식탁 위에는 그 부인의 남편한테서 온 편지가 놓여 있었다. 그 필적과 소인을 보자 네플류도프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위험이 닥쳐올 때마다 느끼곤 하던 힘 의 솟구침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흥분은 공연한 것임을 알았다. 왜냐하면 네플류도프의 중 요한 영지가 있는 그 군의 귀족 회장인 그 부인의 남편이 5월 말경에 열릴 임시 지방회의에 꼭 출석하여 이 회의에서 학교와 철도 지선 부설 문제에 대하여 반대파의 맹렬한 저항이 있 을 것이 확실하므로 적극적인 협조를 바란다는 것이 서신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귀족 회장은 도량이 큰 사람이었다. 그는 약간의 동지를 규합하여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 와 함께 대두한 반동 세력과의 투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가정 생활의 불행에 관 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네플류도프는 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언젠가는 치러야 할 모든 괴로운 순간들을 상기했다. 언젠가 남편이 눈치채게 되었을 때의 결투를 각오하고, 그럴 때 자기는 허공에다 대고 총을 발사하겠다고 생각한 일과, 부인이 절망한 나머지 정원에 있는 연못에 몸을 던지려고 뛰쳐 나간 것을 자기가 뒤쫓아가서 말리는 무서운 장면이 머리에 떠올랐다. '지금은 갈 수가 없다, 그녀로부터 회답을 받기 전까지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네플류도프는 번민 했다. 그는 1주일 전에 그녀에게 자기 죄에 대한 대가로서 무엇이든 감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며 '부인의 행복'을 위해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영원히 끊어 버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정적인 편지를 써서 보냈었다. 그러고는 그 회답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으 나 여지껏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회답이 오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좋은 징조이기도 했다. 만일 그 부인이 결별할 생각이 없다면 벌써 회답을 보냈거나 전처럼 몸소 달려왔거나 했을 것이다. 네플류도프는 요즘 그 지방의 어느 장교가 열심히 그 부인의 꽁무니를 쫓아다 니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그런 소문은 질투심을 일으켜 그를 가슴 아프게도 했지만 동시에 자기를 억누르고 있던 책략으로부터 가까스로 해방된다는 희망 때문에 기쁘기도 했 다. 또 한 장의 편지는 영지 관리인한테서 온 것이었다. 토지 상속권을 확정하기 위해서 네플 류도프가 직접 영지의 마을로 와주어야 하겠다는 것과, 그 밖에 토지는 공작 부인의 생존시 와 같이 관리할 것인지, 또는 돌아가신 공작 부인에게 관리인이 이미 권했고 또 현재 젊은 공작께도 권하고 있는 방법, 즉 농기구를 확장해서 여태까지 농민에게 빌려 주었던 모든 토 지를 이쪽에서 직접 경작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해야겠다는 내용이었다. 관리인의 편지에 의하면 이런 경영 방법이 훨씬 유리하다고 했다. 그리고 예정대로 초하룻날에 보내야 할 3 천 루블의 송금이 약간 지체될 것에 대하여 사과했고, 돈은 다음 번에 틀림없이 보내 드릴 예정이며, 이렇게 늦어진 이유는 농민들이 점점 약아져서 당국의 힘을 빌려 강제 수금이라 도 하지 않는 한 돈을 거두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다. 이 편지는 네플류도프를 한편으로는 줄겁게도 했고 또 한편 불쾌하게도 했다. 막대한 재산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즐겁기 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젊었을 때 스펜서의 열렬한 숭배자였고, 특히 자기 자신이 대지주였 기 때문에, 정의는 개인의 토지 사유를 허용치 않는다는 스펜서의 이론<사회정학>에 감동 된 그로서는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청년 시절의 솔직성과 결단성 때문에 그는 그 때 토지가 사유 재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 졸업 논문에서도 이에 관해 논술했고, 실제로 그 당시 자기의 이런 신념에 배반하면서까지 토지를 소유하고 싶지 는 않았으므로 토지의 일부분(그 토지는 어머니의 것이 아니고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것으 로 그 자신에 소속되는 토지였다)을 농민들에게 나우어 준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상속 받은 유산으로 대지주가 된 지금 일찍이 10년 전에 아버지의 유산 2백 정보에 대해서 단행 한 것처럼 자기의 사유 재산을 포기해 버리든가, 아니면 과거의 자기 사상이 모두 그릇된 것이라고 인정하고 침묵을 지키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토지 이외에 그에겐 아무런 생활 수단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자를 택할 순 없었다. 관청에 들어가기는 싫었고, 더군다나 사치스런 생활 습관이 완전히 몸에 배어서 그 것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젊었을 때 갖고 있던 굳은 신념도, 고단성 있는 결단력도, 세인을 깜짝 놀라게 하겠다는 야심도 희망도 이제는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 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후자를 태갛여 그 닷  스펜서의 <사회정학 >에 대하여 감며을 받았고, 훨씬 뒤의 일이긴 하지만 헨리 조지의 저서중에서도 그  확실 한 논거를 발견한 그로서는 토지 사유의 부조리에 관한 명백한 사실을 부정한다는 것도 도 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관리인의 편지는 그에게 불쾌감을 안겨 주었다. 4 커피를 다 마시자, 테플류도프는 언제까지 출정해야 하는가를 통지서에서 확인할 겸 공작 영양의 서신에 답장을 쓰려고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로 가자면 아틀리에를 지나가야만 했다. 아틀리에엔 그리다 만 그림을 뒤집어 놓은 화가가 세워져 있었으며, 여러 가지 데생도 걸려 있었다. 그가 2년 동안이나 고심하며 그린 유화와, 여러 가지 데생과, 아틀리에 전체의 조망 은 그림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무력감을 환기시켜 주었는데 최근에 와서는 더욱 강하 게 그런 느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감정을 너무나 섬세한 자기의 감수성 탓이라고 설명하려 했지만 어쨌든 그 의식은 매우 불쾌한 것이었다. 7년 전에 그는 자기가 그림에 대해 천부적 소질이 있다고 믿고 군복무를 내동댕이쳐 버렸 으며, 예술가적 높은 견지에서 얼마간 경멸의 눈으로 다른 모든 인간 활동을 보아 왔던 것 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는 자기에게 그런 자격조차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그 일을 다시 되새기게 하는 모든 일이 그에게는 불쾌했다. 그는 침울한 마 음으로 아틀리에 안의 모든 사치스런 시설을 둘러보고는 언짢은 기분이 되어 이내 서재로 들어갔다. 높은 천장의 서재는 아주 뛰어난 장식과 안락과 편의를 두루 갖춘 넓은 방이었다. 통지서는 '지급'이라고 써 붙인 큰 테이블 서랍 속에서 곧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재판소에 2시까지 출두하라고 적혀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테이블에 앉아 공작 영양에게, 초대해 주셔 서 감사하게 생각하며 식사 전까지는 될 수 있는 대로 가겠다는 답장을 썼다가 곧 그것을 찢어 버렸다. 너무 다정한 것 같았기때문이었다. 다시 한 장 썼으나 이번에는지나치게 냉정 하여 거의 모욕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는 또다시 찢어 버리고 벽에 붙은 벨을 눌렀다. 그 러자 회색 앞치마를 걸친 시무룩한 표정의 나이 든 하인이 나타났다. 그는 구레나룻만 남기 고 깨끗하게 면도질을 하고 있었다. "마차를 부르게." "네." "그리고 저쪽에 코르차긴 댁에서 온 분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오 늘 밤 되도록 참석하겠다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예의에는 어긋나지만 도무지 써지지 않으니 별수 없지. 그러나 어차피 오늘 밤에 만나 게 될 테니까.'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하면서 외투를 입으러 갔다. 옷을 갈아입고 현관에 나갔을 때에는 벌써 눈에 익은 고무바퀴가 달린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어제 나리께서 코르차긴 공작 댁에서 막 떠나신 후에 제가 마중을 나갔습죠." 마부는 루 바시카의 흰 깃 속에서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목덜미를 반쯤 돌리며 말했다. "그랬더니 문 지기가 방금 돌아가셨다고 일러 주더군요." '마부까지 나와 코르차긴 일가와의 관계를 알 고 있구나.'하고 네플류도프는생각했다. 그러나 코르차긴 공작 영양과 결혼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하는, 최근의 그의 마음을 휘잡고 있던 미결된 문제가 다시금 그의 눈앞을 가로막 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다른 여러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 역시 아무런 해 결도 지을 수 없는것이었다. 대체로 결혼을 해서 이롭다고 생각되는 점은, 첫째로 결혼은 가정의 단란 이외에도 성생 활의 불규칙성을 없애고 도덕적인 생활을 선도하는 가능성을 준다는 데 있다. 둘째로는 이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점이지만, 네플류도프는 가정, 즉 이들이 현재의 그의 무의미한 생활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있었다. 이것이 대체로 결혼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다. 결혼을 두려워하고 있는 이유는 첫째로 이미 젊은 시절을 넘긴 독신자들에겐 공통적인 현상인 자유를 박탈당하리라는 공포심과, 둘 째로는 여자의 신비로운 본질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였다. 특히 미시(코르차긴 공작 영양 이름은 마리야였으나, 특정한 계층의 다른 모든 가정에서 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이러한 애칭으로 불리고 있었다)와의 결혼이 이롭답고 생각되는 이유 는, 첫째로 그녀는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으므로 옷 매무새로부터 말솜씨라든가 걷는 모습, 웃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보통 처녀들보다 뛰어난 데가 있었다. 그렇다고 어딘가 특출난 데 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품위가 있다'는 것이었다-그는 이런 특질을 표현할 만한 다른 말 을 못 찾았으나 아무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둘째로는 그녀가 누구보다도 자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 즉 그의 생각에 따르면 그 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의 뛰어난 장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 은 네플류도프로서는 그녀의 지성과 판단력의 정확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한편 미시와의 결혼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첫째로 미시보다 훨씬 많은 장 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녀보다도 더 적합한 처녀를 만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었고, 둘째로 그녀는 벌써 27세니까, 과거에 여러 번 연애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 이런 생각을 하면 네플류도프는 괴로웠다. 비록 과거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녀가 자기 이 외의 다른 남자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그 녀가 장래에 자기를 만나게 되리라고 예측하지는 못했는지 모르지만 전에 다른 남자를 사랑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그는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긍정과 부정의 엇갈린 생각이 서로 비등했다. 그래서 네플류도프는 스스로 비 웃으면서 자기 자신을 '부리단의 노새'('재갈 물린 노새', 즉 결단성 없는 사람을 비유한 우화)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리단의 노새'를 면하지 못하고 두 더미 건 초 중에서 어느 것부터 먹어야 좋을지를 몰랐다. "어쨌든 마리야 바실리예브나(귀족 회장의 부인)로부터 회답을 받아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단 말이야."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렇듯 부득이 결심을 늦추어야 했고, 또 늦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자, 그는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어쨌든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의 마차가 소리도 없이 아스팔트로 포장된 재판소 앞 주차장에 닿았을 때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이제 나는 내가 평소에 하던 대로, 그리고 의당 해야 한다고 여겼던 대로 성심 성의껏 사회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이런 의무는 재미있을 때가 흔히 있단 말이야."하고 그는 자기 자신을 타이 르면서 수위 옆을 지나 재판소의 입구로 들어갔다. 5 네플류도프가 재판소에 출정했을 때 재판소 복도는 벌써부터 슬렁거리고 있었다. 위임장 과 서류를 든 수위들이 이리저리 바삐 오가고 있었다.그 중에는 마룻바닥에 발을 질질 끌면 서 종종걸음으로 숨을 헐떡이며 서성대는 사람도 있었다. 정리와 변호사와 판사들이 이리저 리 왔다갔다했으며, 청원인과 감시자가 따르지 않은 피고들은 순서를 기다리면서 기운 빠진 태도로 담장 근처를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그 근처에 앉아 있기도 하였다. "지방 재판소 법정은 어딥니까?" 네플류도프가 한 간수에게 물었다. "무슨 법정 말입니까? 민사 법정과 형사 법정이 있습니다만." "나는 배심원이오." "그럼 형사 법정입니다. 진작 그렇게 말씀하셔야죠.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셔서 왼쪽으로 돌아가시면 두 번째 문입니다." 네플류도프는 그가 가르쳐 준 대로 따라갔다. 그 문 앞에는 두 사나이가 개정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한 사람은 키가 큰 뚱뚱한 상인으로서 보기에도 호인답게 생겼고, 벌써 한잔 들 이키고 왔는지 무척 혈색이 좋아 보였다. 또 한 사람은 유대인 계통의 점원이었다. 두 사람 은 양털의 시세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네플류도프는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여기가 배심원실이냐고 물었다. "네, 여깁니다, 바로 여기예요. 댁도 배심원인가요?" 상인은 유쾌한 듯 눈을 껌벅이며 호 인다운 태도로 물었다. "그럼, 우린 함께 수고하게 되었군요." 네플류도프가 그렇다고 고개 를 끄덕이자, 상인은 말을 계속했다. "나는 제2급 상인(혁명 전 세금의 납입 액수에 따라 상 인을 두 계급으로 나눔) 바클라쇼프입니다." 그는 부드러우면서도 넓적하고 유연한 손을 내 밀며 말했다. "수고가 많겠습니다. 실례지만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네플류도프는 자기 이름을 밝히고 배심원실로 들어갔다. 조그마한 배심원실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10여 명쯤 모여 있었다. 의자에 앉은 사람 도 있고 서로 힐끗힐끗 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모두 방금 도착한 듯했다. 군복을 입은 퇴역 장교가 한 사람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은모두 프록 코트나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단 한 사 람만 소매 없는 농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할 일을 두고 와서 곤란하다고 푸념을 하고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의 표정에 는 중요한 사회적인 어떤 의무를 수행한다는 기대감으로 일종의 자부심을 풍기고 있었다. 배심원들은 서로 인사를 나눈 사람도 있었으나, 그 중에는 그저 짐작으로 상대방의 신분 을 추측하면서 날씨가 어떻다느니 이른 봄이 어떻다느니 하다가 눈앞에 다가온 사건에 관한 이야기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네플류도프와 아직 인사를 나누지 않은 사람들은 서로 다퉈가 며 자기 소개를 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영광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네플류도프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동석할 경우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런 일을 매 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만약 누가 그에게 어째서 자기 자신을 뭇 사람들보다 우월하 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아마 그 자신도 대답할 수 없었으리라. 왜냐하면 이때껏 그의 생 활에서 이렇다 할 만한 특성을 하나도 보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자유 자재로 구사한다든가, 또 그가 몸에 걸치고 있는 셔츠나 옷이나 넥타이나 커 프스 단추 따위가 모두 일류 상점에서 산 물건이라는 것들이 결코 우월성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우월성을 확고하 게 인정하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고, 그렇지 않 을 때는 모욕감을 느끼곤 하였다. 그런데 배심원실에서 공교롭게도 불손한 대우를 받음으로 써 불쾌감을 맛보게 되었다. 배심원들 중에서 마침 네플류도프가 아는 사람이 하나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표트르 게라시모비치라는 사람으로(네플류도프는 이제까지 한번도 그의 성 을 알려고 한 적이 없으며, 모르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었다.) 전에 그의 누님네 아이들의 가정 교사로 일한 적이 있었다. 이 표트르 게라시모비치는 대학을 졸업한 뒤 지금은 ㄹ어느 중학교 교사로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의 추근거리는 태도라든가, 자기 자신에 만족하고 있는 듯한 너털웃음이 라든가, 네플류도프의 누이가 으레 말했던 것처럼 '서민인척하는' 언어나 동작이 몹시 못마 땅했다. "저런, 당신도 끌려나오셨군요." 표트르 게라시모비치는 너털웃음을 치며 네플류도프를 맞 았다. "피할 수 없었던가 보죠?" "피하다뇨. 그런 건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소." 네플류도프는 냉엄하고 못마땅한 어조로 대꾸해싿. "그것 참, 시민다운 미덕이시군요! 그렇지만 좀 더 두고 보십시오. 배는고파 오고, 졸려도 자지 못하게 하면 당신도 아마 그런 태연한 소릴 못하게 될 겁니다." 표트르 게라시모비치 는 더욱 큰 소리로 웃어 대며 말했다. '이러다간 저 머저리 같은 놈에게 자네라는 말까지 듣게 되겠는걸.' 네플류도프는 생각했 다. 그래서 네플류도프는 육친이 모두 사망했다는 부고를 방금 받았을 때가 아니면 지을 수 없을 그런 침통한 빛을 얼굴에 띠고 그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는 키가 크고 풍채가 당당하 며 수염을 말쑥하게 깎은, 뭔가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는 신사를 에워싼 사람들 쪽으로 가까 이 갔다. 이야기하면서 재판관과 유명한 변호사들을 성을 빼고 이름과 부칭으로만 부르고 있었다. 유명한 어떤 변호사가 놀라운 재간으로 사건을 뒤집어 놓았기 때문에 상대편의 노부인은 막대한 금액을 억울하게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경위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천재적인 변호사야!"하고 그는 말을 맺었다. 사람들은 존경하는 표정으로 듣고 있었으며, 개중에는 자기의 의견을 말하려는 사람도 있 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자기 혼자만이 모든 것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듯이 다른 사 람의 말을 가로막아 버리고 혼자서만 떠들어댔다. 네플류도프는 늦게 온 편이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기다려야만 했다. 재판관 한 사람이 아 직껏 출정하지 않아 개정이 지연되었다. 6 재판장은 일찍부터 재판소에 나와 있었다. 훤칠하게 큰 키에 뚱뚱한 사나이로, 희끗희끗한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아내가 있었으나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방탕한 생활을 즐 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간섭하지 않는 주의였다. 오늘 아침에도 그는 스위스 태생인 여자 가정 교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이 가정 교사는 지난 여름 동안 그의 집에서 살고 있 었는데, 지금은 남러시아에서 페테르부르크로 여행하는 도중이라서 3시에서 6시 사이에 시 내의 '이탈리아' 호텔에서 기다리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래서 그는 작년 여름 별장 에서 로맨스를 맺었던 이 빨간 머리의 클라라 바실리예브나를 6시 전에 찾아가려면 오늘의 재판을 될 수 있는 대로 일찌감치 시작해서 얼른 끝내고 싶었다.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 문을 잠그고 서류장 밑의 서랍에서 아령을 두 개 꺼내어 위 로, 앞으로, 옆으로, 밑으로 20번씩 운동한 다음, 아령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 무릎을 세 번 가볍게 굽혔다. '냉수욕과 체조만큼 건강에 좋은 건 없지.' 그는 무명지에 금반지가 끼어 있는 왼손으로 오른팔의 튀어오른 상박근을 만져 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다음엔 선회 운동을 할 차례 엿으나(장시간 법정에 앉아 있을 재판 전 그는 언제나 이 두 가지 운동을 하는 습관이 있었 다), 그 때 문이 덜컹 흔들렸다. 누군가 문을 열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재판장은 얼른 아령 을 제자리에 집어넣고 문을 열었다. "아, 실례했소." 그가 말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금테 안경의 키가 작은 배심 판사였다. 그는 어깨를 쳐들고 얼 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마트베이 니키티치가 또 안 나왔습니다." 판사가 불만스럽다는 듯 투덜거렸다. "아직 안 나왔소?" 재판장은 법의를 입으면서 응답했다. "그 사람 언제나 늦는단 말이야." "정말 기가 막히는군. 염치도 없는 사람이야." 판사는 또다시 화를 내면서 의자에 앉아 담 배를 꺼냈다. 성격이 매우 꼼꼼한 이 판사는, 오늘 아침에도 아내와 한바탕 말다툼을 치르고 나왔다. 그 까닭은 한 달치 생활비를 아내가 기한도 되기 전에 몽땅 써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다 음 달치 생활비를 미리 달라고 하였으나, 그는 자기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부부 싸움이 벌어졌다. 아내는 정 그렇다면 식사 준비도 할 수 없으니 집에서 식사할 생각 일랑 아예 말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집을 뛰쳐나와 버렸으나, 아내가 그 협박을 정말로 실 행할지도 모른다고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아내는 무슨 짓이든지 할수 있는 여자였다. '저 사람처럼 도덕적이며 올바른 생활을 해야만 되는데.'하고 그는 건강하고 쾌화하며 선량한 재판장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재판장은 두 팔꿈치를 넓게 펴고 금빛 몰로 수놓은 제복 깃 양쪽 위의 숱이 많고 희끗희끗한 구레나룻을 희고 고운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저 사람은 항상 만족한 듯이 명랑해 보이는데 나는 어째서 이처럼 괴롭기만 할까?' 서기가 들어와서 무슨 사건 서류를 건네 주었다. "수고했네."하고 나서 재판장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어떤 사건을 먼저 처리할까?" "글쎄요. 독살 사건이 좋지 않을까요?" 서기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은 담담한 투로 말 했다. "그럼 좋아, 독살 사건부터 하기로 하지."하고 재판장은 말했다. 그 사건이라면 4시까지 끝내고 퇴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마트베이 니키티치는 아직도 안 나 왔나?" "아직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브레베는?" "나오셨습니다." 서기가 대답했다. "그럼 그를 만나면 독살 사건부터 시작한다고 말해 주게." 브레베는 오늘 이 공판에서 논고를 하기로 되어 있는 검사보였다. 복도로 나오자 서기는 브레베를 만났다. 그는 어깨를 치켜올리고 제복 단추를 열어젖뜨린 채 겨드랑이에 서류 가방을 끼고, 구둣소리를 딱딱내가면서 팔을 크게 흔들며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미하일 페트로비치께서 준비가 다 되셨느냐고 여쭈어 보라 하셨습니다." 서기가 그에게 물었다. "준비? 나는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다네." 검사보는 말했다. "그런데 무슨 사건부터 시 작한다든가?" "독살 사건입니다." "좋아."하고 검사보는 말했으나 실은 조금도 좋을 리가 없었다. 어젯밤을 그는 꼬박 새웠 다. 친구의 송별회에서 잔뜩 마신 다음, 2시까지 노름을 하다가 그 후 어떤 유곽으로 스며들 었다. 그 집은 6개월 전에 마슬로바가 있던 바로 그 유곽이었다. 때문에 그는 이 독살 사건 에 대한 관계 서류를 읽을 틈이 없었으며 이제부터 대강 훑어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서기 는 검사보가 독살 사건에 관한 서류를 읽어 보지 못했음을 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이 사 건부터 시작하자고 재판장에게 권했던 것이다. 서기는 자유주의자라기보다는 과격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브레베는 보수적인편으로 러시아에서 봉직하고 있는 대부 분의 독일인들이 그러하듯이 정교에 귀의해 있었다. 그래서 서기는 그를 몹시 싫어했을 뿐 만 아니라 그의 지위를 시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스코베츠(성의 욕망에서 악의 근원을 찾아 거세로써 인간을 구원하려는 한 종 파) 사건은 어떻게 하죠?"하고 서기가 물었다. "그건 증인이 없으니 할 수 없다고 했잖아 법정에서도 나는 분명히 그대로 말하겠어." "그렇더라도 어차피..." "할 수 없다잖아!"하고 검사보는 말하고 계속 한쪽 팔을 흔들면서 자기방으로 뛰어갔다.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필요하지도 않은 사건을 일부러 연기하려고 하는 것은 배심원의 구성이 지식층이었으므로 공판에서 심리할 때 무죄로 끝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재판장과 상의한 결과 이 사건은 군 소재의 재판소로 이관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곳에는 배심원들이 주로 농민들뿐이므로 유죄로 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복도로 점점 더 혼잡해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은 민사 법정 부근이었으며, 그 곳에서 남달리 소송 사건에 흥미를 갖는 그 풍채 좋은 신사가 이야기하던 바로 그 사건 이 현재 진행중에 있었다. 휴식 시간이 선언되자 그 법정으로부터 한 노부인이 나왔다. 이 노부인은 변호사의 천재적인 수완으로 인하여 자기의 재산을 아무런 권리도 없는 실업가에 게 빼앗긴 변호사는 더욱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변호사가 너무나 교묘하게 일을 꾸며 놓 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노부인의 재산을 몰수하여 그것을 실업가에게 넘겨 주어야 했다. 노부인은 화려한 옷차림을 한 뚱뚱한 여자로, 커다란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문에서 나오자, 복도에서 걸음을 멈추곤 굵고 짧은 두 손을 벌리면서 자기 변호사를 향하여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런 기막힌일이 어디 있단 말예요?"하며 안타까운 듯이 같은 말만 자꾸 되풀이하고 있었다. 변호사는 노부인의 모자에 달린 꽃만 바라보면서 그 부인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노부인의 뒤를 이어, 민사 법정 문에서 앞이 많이 팬 조끼 아래 눈부시게 풀먹인 셔츠 앞 가슴을 내밀고 아주 만족스러운 듯이 얼굴을 번득이면서 그 유명한 변호사가 모습을 나타냈 다. 이 사나이의 수완 때문에 모자에 꽃을 단 노부인은무일푼의 신세가 되었으며, 그에게 1 만 루블의 사례를 주기로 한 변호(소송) 의뢰인은 10만 루블 이상의 돈을 벌 수 있었으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그에게 쏠렸다. 변호사는 그런 눈치를 챘음인지 그 몸 전체가 '뭐 그토록 탄복하는 표정을 지을 건 없다.'는 듯한 태도로 여러 사람들 앞을 버젓이 지나갔다. 7 이윽고 마트베이 니키티치가 도착했다. 그리고 목이 길고 깡마른 정리가 배심원실로 들어 왔다. 그는 옆걸음질을 치는 습관처럼 아랫입술도 한쪽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정직하고 대학 교육까지 받은 사람이었으나 술을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에 어느 직장 에서도 오래 붙어 있지 못했다. 3달 전에 자기 처를 틈틈이 돌봐 주는 어느 백작 부인의 주 선으로 지금의 자리를 얻게 되었는데 오늘날까지 무사히 근무해 온 것을 본이도 기뻐하고 있었다. "자 여러분, 다 모이셨습니까?" 그는 코안경을 쓰고 안경 너머로 방 안을 둘러보면서 이 렇게 말했다. "다들 모인 것 같소." 쾌활한 성격의 상인이 대답했다. "그럼 확인해 봅시다." 정리가 말하고 나서 호주머니에서 종잇조각을 꺼내어 한 사람 한 사람 호명할 때마다 코안경을 올려다내렸다 하면서 얼굴을 확인했다. "5등관 N. M.니키포로프 씨!" "네." 모든 소송 사건에 조예가 깊은 풍채 좋은 신사가 대답했다. "퇴역 육군 대령, 이반 세묘노비치 이바노프 씨!" "여기 있소." 군복을 입은 홀쭉한 사람이 대답했다. "제2급 상인, 표트르 바클라쇼프 씨!" "여기 있습니다." 선량해 보이는 상인이 입에 웃음을 담뿍 담으며 "염려마시오!" 하고 대 답했다. "근위대 중위, 드미트리 네플류도프 공작!" "네."하고 네플류도프는 대답했다. 정리는 코안경 너머로 특별히 공손하게 그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렇 게 함으로써 그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려는 태도를 드러내어 보였다. "육군 대위 유리 드미트리예비치 단첸코 씨! 상인, 그리고 예피모비치 클로쇼프 씨! 등 등..." 두 사람을 빼놓고는 전원이 출석했다. "자 여러분, 법정으로 가십시오" 정리는 상냥한 손짓으로 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모두들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 앞에서 서로 먼저 나가라고 사양하면서 복도로 나와 법정 으로 향했다. 법정은 기다랗고 큼직한 방이었다. 한쪽 끝은 3단으로 된 높은 단으로 되어 있었다. 그 높 은 단 한복판에는 검푸른 술이 달린 초록빛 상보로 덮인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뒤 에는 떡갈나무로 조각한 아주 높은 등받이의 안락의자가 세 개 나란히 있었으며, 그 뒤 벽 에는 금테를 두른 액자에 넣은 황제 폐하의 전신상이 걸려 있었다. 황제는 금빛 찬란한 훈 장의 장군 복장에 현장을 어깨에 드리우고, 한쪽 발은 앞으로 내디디고, 한손을 패검 위에 얹고 있었다. 오른쪽 구석에는 가시 면류관을 쓴 그리스도 성상을 모신 상자틀이 걸려 있었 으며 선서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오른쪽에는 검사석이 마련되어 있었고 왼편의 검사석 맞은편 깊숙한 곳에 서기의 조그만 책상이 놓여 있었다. 방청석 가까이에는 도르래식으로 된 반들반들한 떡갈나무 칸막이가 있었으며, 그 뒤쪽에는 피고들의 빈 의자가 두 줄로 놓여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변호사의 테이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떡갈나무 울타 리로 칸막이를 한 법정 앞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뒤쪽으로는 방청객들을 위한 의자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것은 한 단씩 높아지면서 뒷벽에까지 꽉 차 있었다. 방청석의 앞쪽 의자에 는 여공 아니면 하녀 차림을 한 여자 네 사람과, 직공 차림을 한 남자 두 사람이 앉아 있었 으나 그들은 이 법정의 장엄한 장식에 분명히 위압되어 조심스럽게 소곤거리고 있었다. 배심원들이 들어온 뒤 곧 정리가 옆으로 쏠리는 듯한 걸음걸이로 중앙으로 걸어나와서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위압하려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개정!" 전원이 기립하자, 재판관들이 단상에 나타났다. 위풍당당한 체격에 훌륭한 구레나룻을 기 른 재판장, 그 뒤를 따라 침울한 표정을 하고 금테 안경을 쓴 배심 판사-그는 조금 전보다 더욱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개정 직전 판사보 자리에 있는 처남을 만났는 데, 아까 누이한테 들렀을 때 누이가 저녁을 준비할 수 없다고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매부, 오늘 밤에는 천상 선술집에라도 가야겠군요."하고 처남은 웃으면서 말했다. "웃을 일이 아니야." 배심 판사는 대답했지만 그의 표정은 한층 더 우울해졌다. 맨 나중에 입장한 판사는, 매번 지각만 하는 마트베이 니키티치였다. 그는 기다란 턱수염 을 하고, 눈꼬리가 아래로 처진 선량해 보이는 큼직한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위카타르 로 고생하고 있어서 의사의 권유로 오늘 아침부터 새로운 치료법을 시작했는데, 이 새 치료 법에 시간을 빼앗겨 오늘은 여느 때보다 더 오랫동안 집에서 꾸물거려야만 했다. 판사석에 들어 왔을 때 그는 무엇엔가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언 제나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그것을 점치는 습 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가 마음속으로 점치고 있는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판사실 의 방문으로부터 법정의 자기 자리까지의 걸음 수가 셋으로 나누어진다면 이 새롱누 치료법 으로 위카타르를 완치할 수 있지만 만약 나누어지지 않을 때는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하 는 터였다. 걸음수는 26이 되었으나, 그는 일부러 잔걸음을 한 걸음 더 걸어서 꼭 27번째에 정확히 자기 자리에 당도하도록 했다. 깃에 금몰이 달린 법의를 입고 단상에 나타난 재판장이나 배심 판사드의 모습은 사람들을 위압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들 자신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세 사람 다 자기네들의 위엄에 어색한 듯이 공손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면서 초록빛 책상보로 덮은 테이블 앞의 조 각된 의자에 재빨리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독수리의 문장이 들어 있는 삼각형의 서진과, 식 당에서 흔희 과자 따위를 담는 유리 접시와, 그밖에 잉크병, 펜, 백지, 새로 깎은 갖가지 길 고 짧은 연필 등이 놓여 있었다. 재판관들과 함께 검사보도 입정했다. 그는 역시 옆에 가방 을 끼고 여전히 팔을 내흔들면서 창가에 있는 자기 자리로 바삐 가더니, 1분이라도 아껴 준 비를 해두려는 것처럼 곧 사건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이 검사보가 법정에서 논고를 하기는 이번이 겨우 네 번째이다. 그는 매우 허영심이 강했으므로 무슨 일이 있든지 출세를 해야 한다고 굳게 결심하고 있었으며, 또 자기가 관계하는 사건은 무슨일이 있든지 유죄로 판결 을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독살 사건의 내막은 그도 대강 알고 있었으며 논고 내용도 이미 만들어 놓았지만 그래도 좀더 자료를 보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것을 급히 사건 서류에서 발췌하고 있었다. 서기는 단상 반대편에 자리잡고 낭독할 필요가 있을 만한 서류를 모두 준비한 다음, 어제 입수하여 읽은 판매 금지된 논문을 다시 한 번 읽고 있었다. 그는 이 논문에 대해서 항상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 긴 턱수염의 판사와 한바탕 논쟁을 벌이고 싶었기 땜누에, 그전에 우 선 내용을 정확히 파악해두기 위해서였다. 8 재판장은 서류를 한번 쭉 훑어본 후, 정리와 서기에게 두세 가지 질문을 던져 이상이 없 음을 확인한 다음, 피고의 출정을 지시했다. 그러자 곧 가름장 난간 뒤의 문이 열리며 모자 를 쓴 두 사람의 헌병이 군도를 빼들고 들어왔다. 그 뒤로 주근깨투성이의 붉은 머리 사내 가 먼저 들어오고 잇달아 여자 둘이 들어왔다. 남자는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죄수복을 입 고 있었다. 그는 법정에 들어올 때 엄지손가락을 쑥 밀다시피 하면서 바지 옷솔기에 두손을 갖다 대어 너무 긴 소매가 늘어지지 않도록 애쓰고 있었다. 그는 재판관이나 방청객은 거들 떠보지도 않고 피고석을 응시하며 긴 의자로 다가갔다. 달느 사람이 앉을 자리를 남겨 두고 맨 끝자리에 가 앉아, 재판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뭔가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듯 볼의 근육을 실룩거리기 시작하였다. 그 뒤를 이어 역시 죄수복을 걸친 중년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 여자 의 머리는 스카프로 동여져 있었으며 잿빛을 띤 창백한 얼굴에는 눈썹도 없독 눈만 빨갰다. 이 여자는 아주 태연해 보였다. 그녀가 자기 자리로 갈 때 죄수복이 무엇엔가 걸렸는데 서 두르는 기색 없이 유유히 그것을 벗기고, 제자리에 가 앉았다. 세 번째 피고는 마슬로바였다. 그녀가 들어오자 법정 안 모든 사내들의 시선은 그녀에게로 쏠렸다. 반짝거리는 까만 눈 에 하얀 얼굴, 죄수복 위로 불룩 도두라진 젖가슴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헌병들까지 도 그녀가 옆을 지나갈 때 그 모습에 시선을 드고, 그녀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눈을 떼지 않 았다. 이윽고 자리에 가 앉자 그들은 마치 나쁜 짓이나 하다 들킨 것처럼 한결같이 고개를 돌리고 몸을 한두 번 흔들더니 곧장 정면에 보이는 창문 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재판장은 피고들이 제각기 제자리에 앉고 마지막으로 마슬로바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자 곧 서기를 돌아보았다. 여느 때의 순서대로 공판이 시작되었다. 배심원의 점호, 결석자에 대한 심의, 그들에 대한 벌금 부과, 면제를 신청한 사람에 대한 재가, 결석자에 대한 보충 임명 등등이 진행되었다. 이어서 재판장은 조그만 표를 접어서 유리 쟁반 속에 넣고 금몰이 달린 법의 소매를 조금 걷어올려 무척 털이 많이 난 팔을 드러내면서 마치 마술사 같은 솜씨로 표를 한 장 한 장 꺼내더니 그것을 펴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걷어올린 소매를 내리고는 배심원의 선 서 순서를 사제에게 재촉했다. 부석부석 누렇게 뜬 얼굴에 갈색 법의를 입고 목에 금십자가를 걸고, 그 옆에 알 수 없는 조그만 훈장을 달고 있는 늙은 사제는 뻣뻣한 다리를 느릿느릿 법의 밑으로 옮겨 놓으면서 성상 앞에 놓여 있는 선서대로 다가갔다. 배심원들도 일어나서 한데 몰려 선서대 쪽으로 나아갔다. "여러분, 이쪽으로!" 사제는 통통한 손가락으로 가슴 위의 십자가를 만지면서 배심원 일동 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려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 사제는 이미 46년간이나 이 직책을 맡아왔는데 앞으로 3년만 더 있으면 얼마 전에 대 사원의 주교가 행한 것처럼 성직 50주년 기념 축하식을 거행할 작정으로 있었다. 그는 지방 재판소 창설 당시부터 줄곧 근무해 왔으므로 선서시킨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그렇 게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국가와 가족의 행복을 위하여 한결같이 봉사해 오면서, 자 신의 가족을 위하여 현재 살고 있는 집 이외에도 공채와 증권으로 3만 루블 남짓한 재산을 갖고 있음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모든 서약을 금하고 있는 성경 앞에서 사람들에게 선서를 시키는 재판소에 서의 그의 일이 옮지 않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거니와, 또 그것을 성가시게 여기지도 않았을뿐더러 익숙해진 이 일에 대하여 애착까지 느끼고 있었는데 더구나 이것은 상류 계급의 인사들과 친교할 기회도 적지 않았으므로 자기 직분을 더욱 좋아했다. 지금도 그는 유명한 변호사와 알게 되었으므로 속으로 매우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그 변호사가 모 자에 큰 꽃을 단 노부인 사건 하나로 거뜬히 1만 루블이나 되는 엄청난 사례금을 받았다고 하므로 그는 그 변호사에 대하여 경의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배심원 일동이 조그만 층계를 밟고 단상에 올라왔을 때, 사제는 희끗희끗한 대머리를 한 쪽으로 갸우뚱하더니 헐거운 법의 틈으로 천천히 손을 내밀어 드문드문 난 머리털을 한번 쓰다듬은 다음, 배심원들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오른손을 드십시오. 손가락을 이렇게 하고." 그는 늙은이다운 목소리로 느릿느릿하게 말 하면서 손가락마다 옴쏙옴쏙 통통한 손을 위로 들어서 물건을 잡을 때처럼 엄지손가락과 집 게손가락을 한데 모았다. "내가 말하는 대로 따라 하십시오." 하고는 선서문을 낭독하기 시 작했다. "거룩한 복음서와 생명의 근원인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맹 세하나이다. 이 법정에서 심리되는 사건..."하고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매듭을 지어가면서 말 했다. "손을 내리시면 안 됩니다. 계속 들고 계셔야 합니다." 그는 손을 내리려던 젊은 배심 원에게 주의를 주었다. "이 법정에서 심리되는 사건에 있어..." 구레나룻을 기른 풍채 좋은 신사와 대령과 상인 등은 사제가 시키는 대로 손가락을 합친 손을,마치 대단한 자부심이라도 맛보는 듯 높이 쳐들고 있었으나, 그 밖의 사람들은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 적당히 흉내만 내고 있었다. 그 중에는 화가 난 듯이 엄청나게 큰 소리로 '여하튼 할 수 있는 데까지 따라해 보겠다.'는 듯이 사제의 말을 되뇌는 사람도 있었 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저 중얼중얼할 뿐, 사제보다도 매우 뒤처지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 고 놀란 듯이 따라가려고 했지만 엉뚱한 구절을 되풀이하기가 일쑤였다. 어떤 사람은 마치 무엇을 떨어뜨리지나 않으려는 것처럼 보라는 듯한 손짓으로 힘껏 손가락을 모으고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손가락 끝을 벌렸다가 생각난 듯이 다시 모으곤 했다. 누구나가 어색한 기분이었는데 늙은 사제 혼자만은 자기가 중대하고 유익한 일을 하고 있음을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선서가 끝나자 재판장은 배심원들에게 배심원장을 선출하라고 제언하였다. 배심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앞을 다투어 배심원실로 들어갔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모두들 담배를 꺼내서 피우기 시작했다. 누군가 풍채 좋은 신사를 배심원장으로 선출하자고 제의하자, 모두들 찬성하고 피우다 만 담배를 비벼 끄고는 법정으로 되돌아왔다. 선출된 배 심원장이 자기가 선출되었음을 재판장에게 보고하고 일동은 다시 높은 등받이 의자에 2열로 줄지어 앉았다. 모든 일이 거침없이, 그리고 빠르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이렇게 규칙바르고, 일관성이 있고, 엄숙한 진행은 분명히 모든 참석자들에게 어떤 민족감을 주었으며 자기들이 진지하고 중대한 사회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의식케 했다. 네플류도프도 그런 기분을 맛보았다. 배심원들이 착석하자 재판장은 그들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책임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 켰다. 이러한 주의를 주고 있는 동안 재판장은 쉴 새 없이 자세를 바꾸었다. 왼쪽 팔꿈치를 짚는가 하면 오른쪽 팔꿈치를 문지르고, 의자 등받이나 팔걸이에 몸을 기대기도 하고, 종이 를 가지런히 챙겨 놓는가하면, 페이퍼 나이프를 만지작거리거나 연필을 만지기도 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배심원의 권리란 재판장을 통하여 피고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물적 증거를 체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배심원의 의무는 허위가 아닌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데 있다고 했다. 그러나 책임도 있어서 심리의 비밀을 누설하거나 외 부 사람과 연락을 위하거나 했을 경우 처벌을 받는다고 했다. 일동은 정중히 경청하고 있었다. 상인은 술냄새를 풍기다가 트림을 간신히 참으면서 한 마디 한마디 끝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9 훈시가 끝나자 재판장은 피고인석으로 얼굴을 돌렸다. "시몬 카르틴킨, 일어서시오!"하고 말했다. 시몬은 신경질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볼의 근육이 더욱 씰룩거렸다. "이름은?" "시몬 페트로프 카르틴킨입니다." 미리 대답하는 연습을 해두었는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막히지 않고 술술 대답했다. "신분은?" "농민입니다." "출생지의 현과 군은?" "툴라 현, 크라피벤스키 군, 쿠판스카야 면, 보르키 마을입니다." "나이는?" "서른넷, 태어난 해는 18..." "종교는?" "러시아 정교입니다." "결혼은?" "아직 안 했습니다." "직업은?" "마브리타니야 여관의 하인입니다." "전과가 있소?" "전혀 없습니다. 원래 저는 지금까지 저..." "전과가 없단 말이오?" "네, 절대 없습니다. 한 번도 없어요." "기소장의 사본은 받았소?" "네, 받았습니다." "앉아도 좋아요. 예브피미야 이바노브나 보치코바!"하고 재판장은 다음 여피고인을 호명했 다. 그러나 시몬은 여전히 서서 보치코바를 가로막고 있었다. "카르틴킨, 앉아요!" 그러나 카르틴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카르틴킨, 앉으라니까요!" 그래도 계속 버티고 서 있자, 정리가 달려가서 목을 한쪽으로 기울이며 부자연스럽게 눈 을 뜨면서 간절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자, 앉아요. 앉으라잖소!"하고 말하자, 그제서야 자 리에 앉았다. 카르틴킨은 일어설 때처럼 앉는 거솓 재빨랐다. 그리고 죄수복 앞깃을 여미고는 또다시 소리도 없이 양쪽 볼을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이름은?" 재판장은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며 상대방은 보지도 않고,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이며 두 번째 피고에게 물었다. 재판장으로서는 이런 사건은 흔해빠진 것이었으므로 심 리를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한꺼번에 두가지 사건이라도 다룰 수 있을 정도였다. 보치코바는 43세, 신분은 콜모므나 시의 시민, 직업은 같은 마브리타니야 여관의 하녀였 다. 그녀도 전과가 없었으며 기소장의 사본도 역시 받았다. 보치코바는 매우 대담하게 답변 했고, 한 마디 한 마디가 또렷또렷했다. "그래요. 세례명은 예브피미야고 성은 보치코바예요. 사본은 틀림없이 받았고요. 나는 조금도 수치스럽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나를 웃음거리로 취 급하면 가만 있지 않겠어요."하고 대답했다. 보치코바는 '앉아도 좋아요.'하고 하기도 전에 심문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앉아 버렸다. "당신 이름은?" 재판장은 특별히 친절한 말투로 세 번째 피고에게 물었다. 그는 항상 여 자를 좋아했다. 그는 마슬로바가 앉은 채로 있는 것을 보자, "일어서야지요."하고 상냥한 어 조로 덧붙였다. 마슬로바는 재빨리 일어서서 단단히 각오가 되어 있다는 표정으로 불룩한 젖가슴을 내밀 면서, 대답도 하지 않고 약간 사팔뜨기의 검은 눈으로 교태를 보이면서 재판장의 얼굴을 똑 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름은 뭐지요?" "류보비예요."그녀는 재빨리 말했다. 한편 네플류도프는 코안경을 쓰고, 한 사람씩 심문을 받고 있는 피고들을 바라보고 있었 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하고 세 번째 피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 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일까, 류보브라니?' 그녀의 이름을 듣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재판장은 더 심문을 계속하려 했으나 금테 안경을 쓴 배심 판사가 화가 난 듯이 무엇인가 속삭이며 가로막았다. 재판장은 알겠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다시 여자 피고 쪽으로 몸을 돌렸다. "류보브라니 어떻게 된 거요?"하고 그가 말했다. "서류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는데." 피고는 잠자코 있었다. "당신 본명이냐고 묻고 있는 거요." "영세명이 뭐냐니까요?"하고 성미가 괄괄한 판사가 물었다. "전에는 예카테리나라고 했습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네플류도프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이 여자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바로 '그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모집에서 양녀겸 하녀로 기르고 있던 그 여자 말 이다-그가 한때 욕정에 빠졌던 그 소녀, 그렇다. 미칠 듯한 열정으로 유혹했다가 그대로 내 동댕이쳐 버린 그 소녀였다. 그는 그 후로는 한번도 그 여자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느데, 그 것은 너무나 괴로운 추억이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그것은, 자기의 '고결함'을 스스로 자부 하고 있던 그가 이 여자에 대해서 고결은커녕 너무나도 비열한 짓을 한 비신사임을 증명케 하고 옛 상처를 들추어 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분명 그녀임에 틀림없다. 이제야 그는 한 사람의 인간을 똑바로 분간하고 그녀만 이 가진 유일하고 신비로운 특징을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얼굴은 이상스럽게 희고 퉁 퉁하게 살이 쪘음에도 불구하고, 저 특징, 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는 그 그리운 특징만은 저 얼굴에도 입술에도 약간 사팔뜨기인 저 눈에도, 더구나 저 귀염성 있는 천진한 웃음을 머금 은 눈매에도, 얼굴뿐만 아니라 몸 전체로 흐르고 있는 자연스러운 표정에도 나타나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어야 하는 거요."하고 나서 재판장은 다시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저는 사생아예요."하고 마슬로바는 말했다. "그래도 대모가 있을 거 아니오. 그 이름이 뭔가요?" "네, 미하일로브나입니다." '도대체 저 여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네플류도프는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면 서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성은 무엇이오?" 재판장은 심문을 계속했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마슬로바라고 합니다." "신분은?" "평민입니다." "종교는 정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직업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소?" 마슬로바는 잠자코 있었다. "무슨 일을 하고 있었나요?"하고 재판장은 좀더 큰 소리로 다시 한 번 물었다. "영업집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대답했다. "어떤 집이지요?" 금테 안경을 쓴 판사가 위엄 있게 물었다. "어떤 집인지 아시면서 뭘 그러세요?"하고 마슬로바는 방긋 웃엇다. 그러나 곧 주위를 둘 러보고는 다시 재판장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뭔지 이상스러운 빛이 어려 있었고 금방 입밖에 낸 말에도, 그 엷은 미 소에도, 웃음을 머금고 법정 안을 힐끔 돌아본 빠른 눈길에도 무섭고도 애처로운 무엇이 서 려 있었으므로 재판장은 그만 눈을 내리깔았다. 그 순간 법정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 다. 이 정적은 어느 방청객의 웃음으로 깨어졌으나, 누군가 '쉿'하고 나무라는 소리가 들 렸다. 재판장은 머리를 들고 심문을 계속했다. "전과가 있소?" "없습니다." 마슬로바는 한숨 섞인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소장의 사본은 받았소?" "네, 받았습니다." "앉아도 좋아요."하고 재판장은 말했다. 피고는 정장한 여인네들이 흔히 치맛자락을 매만질 때와 똑같은 동작으로 스커트 뒷자락 을 살짝가 쳐들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죄수복 소매 속에 자그마한 흰 두 손을 깍지낀 채 줄곧 재판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다음에 증인의 호출이 시작되었다. 계속해서 증인의 퇴정, 법원의로 결정된 의사를 소 환했다. 이윽고 서기가 일어나 기소장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또렷또렷하고 큰 소리로 읽었 으나, 어찌나 빠른지 L과 R의 발음이 분명치 않을 정도였다. 재판관들은 안락 의자 팔걸이 에 기대기도 하고, 때로는 테이블이나 의자 등받이에 기대기도 하며,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 서 서로 수군거리기도 했다. 헌병 한 사람은 하품을 몇 번이나 참고 있었다. 세 사람의 피고 중에서 카르틴킨은 쉴 새 없이 볼을 실룩거리고 있었다. 보치코바는 침착 하게 똑바로 앉은 채 가끔 스카프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머리를 긁고 있었다. 마슬로바는 낭독하는 서기의 표정을 꼼짝도 않고 바라보고 있다가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며 무언가 항의하려는 듯이 얼굴을 붉히기도 햇지만 이윽고 한숨을 내쉬면서 두 손의 위 치를 바꾸며 사방을 둘러보고 나선 다시 서기쪽에 시선을 멈추었다. 네플류도프는 맨 앞 줄 끝에서 두 번째의 의자에 앉아 코안경을 벗어든 채 마슬로바를 지 켜보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복잡하고 괴로운 감정이 얽혀 있었다. 10 기소장의 내용은 이러했다. 188X년 1월 17일, 마브리타니야 여관에서 쿠르간 출신의 2등 상인인 페라폰트 예밀리야노 비치 스멜리코프라는 숙박객이 급사했다. 당시 제 4관구의 경찰의의 감식에 따르면 사인은 알코올성 음료의 과음으로 인한 심장 파 열이라고 판정했다. 스멜리코프의 시체는 사후 3일 만에 매장되었다. 그런데 며칠 후 스멜리코프와 동향인이며 동업자인 상인 티모힌이 페테르부르크에서 돌 아와 스멜리코프가 죽었을 때와 그 때의 여러 정황을 살피고나서, 그가 가지고 있던 돈과 다이아몬드 반지를 강탈한 목적으로 독살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혐의로 재조사를 신청했다. 이 혐의는 예심에서 확인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사실이 판명되었다. 첫째, 스멜리코프는 죽기 직전 은화로 3800루블을 은행에서 찾았다. 그러나 고인의 소지품 목록에 의하면 현금은 겨우 312루블 16코페이카밖에 안 되었다. 둘째, 스멜리코프는 사망하기 전날 낮부터 밤새도록 매춘부 류브카(본명은 예카테리나 마 슬로바)와 함께 유곽과 마브리타니야 여관에서 지냈는데, 동인의 부탁으로 부재중 유곽에서 여관으로 돈을 가지러 가서, 마브리타니야 여관의 객실 담당 하녀인 보치코바와 청소부 시 몬 카르틴킨이 보는 앞에서 스멜리코프에게서 받은 열쇠로 그의 가방 속에서 돈을 꺼냈다. 마슬로바가 스멜리코프의 여행 가방을 열었을 때 보치코바와 카르틴킨은 백 루블짜리 지폐 뭉치가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셋째, 매춘부 류브카는, 스멜리코프가 그녀를 데리고 유곽에서 여관으로 돌아왔을 때, 하 인 카르틴킨이 시키는 대로 그에게서 받은 하얀 가루약을 코냑 잔에 타서 스멜리코프에게 마시게 하였다. 넷째, 다음 날 아침 매춘부 류브카는, 그녀 주장대로 스멜리코프가 선물했다는 그의 다이 아몬드 반지를 자기의 포주인 증인 키타예바에게 팔았다. 다섯째, 마브리타니야 여관의 하녀 예브피미야 보치코바는 스멜리코프가 사망한 다음 날 지방 상업 은행에 자기의 명의로 은하 1800루블을 예금했다. 법원의의 검사와 시체 해부 및 스멜리코프의 내장의 과학적 검사에 따르면 죽은 사람의 신체 조직 속에 분명히 독물이 들어 있다는 것이 판명되어, 독약에 의한 죽음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되었다. 용의자로서 기소된 마슬로바, 보치코바 및 카르틴킨은 모두 자기의 죄를 부인하고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즉, 마슬로바의 진술에 의하면, 자기가 일하고 있는-그녀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유곽에서 스멜리코프의 부탁을 받고 그의 돈을 가지러 마브리타니야 여관으로 가 상인의 맡긴 열쇠로 가방을 열고 부탁ㅎ나 40루블만 꺼냈지, 그 이상의 돈에는 절대로 손대지 않았으며, 그 사실 에 대해서는 시몬 카르틴킨과 예브피미야 보치코바가 증인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는 이 두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방을 열고 돈을 꺼냈기 때문이다. 자기가 다시 상인 스멜리 코프의 방으로 두 번째 찾아갔을 때, 시몬 카르틴킨이 시키는 대로 무슨 가루약을 코냑에 섞어 스멜리코프에게 마시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는 그것을 수면제로만 생각했다. 그래 서 그가 빨리 잠이 들면, 자기도 빨리 해방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다고 했다. 반지는 스멜리코프가 자기를 폭행하여 울면서 나가려 했을 때 그가 미안해서 선물로 준 것 이라고 했다. 한편 예브피미야 보치코바는 없어진 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며, 상인의 방에는 발도 들여놓은 적이 없거니와, 그 방은 류브카만 드나들었으므로 만일 상인의 돈이 없어졌다면, 그것은 상인의 열쇠를 가지고 돈을 가지러 왔던 류브카의 소행이 틀림없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대목이 낭독되자, 마슬로바는 몸을 부르르 떨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보치코바 를 돌아보았다. 예브피미야 보치코바는, 은행에 예금된 1800루블의 입금 통장을 제시하며-서기는 낭독을 계속했다-이러한 돈의 출처를 묻자, 그녀는 시몬 카르틴킨과 12년동안 번 것으로 그와 결혼 할 준비금으로 모은 돈이라고 변명했다. 다음에 시몬 카르틴킨은처음 진술에서 자기의 유곽 에서 열쇠를 가지고 온 마슬로바의 교사로 보치코바와 함께 돈을 훔쳤고, 그 돈을 자기와 셋이서 나눠 가졌다고 자백했다. 이 말을 듣자, 마슬로바는 다시 부르르 몸을 떨며 벌떡 몸을 일으키고 상기된 얼굴로 뭔 가 말하기 시작했으나, 곧 정리에게 제지당했다-마침내, 서기의 낭독은 계속되었다. 또 카르 틴킨은 상인을 재우기 위해서 가루약을 마슬로바에게 준 것도 자백했다. 그러나 두 번째 진 술에서는 자기는 돈을 훔친 데 관계가 없으며, 마슬로바에게 가루약을 준 기억도 없다고 하 면서, 모든 것은 마슬로바가 한 짓이라고 주장했다. 은행에 예금한 돈에 대해서는 그도 보치 코바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함께 여관에서 12년간 일하는 동안에 손님들이 팁으로 준 돈이라 고 진술했다. 그리고 기소장에는 각 피고들의 대질 심문, 증인의 진술, 심문자의 소견등이 계속되었다. 기소장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이상의 진술에 따라, 보르키 마을의 농민 시몬 카르틴킨(33세), 평민 예브피미야 이바노브 나 보치코바(43세), 평민 예카테리나 미하일로바 마슬로바(27세)는 188X년 1월 17일 서로 사전에 공모하여 스멜리코프의 소지금 2500루블과 반지를 훔치고 그의 목숨을 빼앗아 증거 를 은폐할 목적으로 스멜리코프에게 독약을 먹임으로써 그를 사망케 하였다. 이 범죄는 형법 제 1453조에 해당된다. 따라서 형사 소송법 제 202조에 의거하여 농민 시 몬 카르틴킨, 여인 예브피미야 보치코바와 예카테리나 마슬로바는 배심원이 참석한 지방 재 판소의 공판에 회부하는바이다. 서기는 이렇게 긴 기소장 낭독을 마치고, 서류를 접은 다음, 두 손으로 긴 머리칼을 매만 지며 자기 자리에 앉았다. 모든 사람들은 이제부터 심리가 시작되면 곧 모든 것이 밝혀져서, 사필귀정의 결과가 나오리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네플류도프만은 그렇나 기분이 되지 못했다. 그는 10년 전 순박하고 아름다운 소 녀로서 있던 마슬로바가 이런 끔찍한 죄를 저질렀다는데 대한 공포감에 기분이 꺾여 있었 다. 11 재판장은 기소장 낭독이 끝나자 다른 배석 판사들과 의논한 뒤, '이제는 모든 사실을 마 지막 세부까지 소상히 밝혀 내겠다.'는 단호한 표정을 짓고 카르틴킨에게로 몸을 돌렸다. "농민 시몬 카르틴킨!" 왼쪽으로 몸을 굽히고서 그는 입을 열었다. 시몬 카르틴킨은 두 팔을 옆구리에 내리뻗으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볼을 계속 실룩거 렸다. "피고는 188X년 1월 17일 예브피미야 보치코바, 예카테리나 마슬로바와 공모하여 상인 스 멜리코프의 가방에서 돈을 훔치고, 그 후 비소를 갖고 와 예카테리나 마슬로바를 충동하여 술을 타서 상인 스멜리코프에게 먹이도록 해 그르 치사케 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피고 는 자기 죄를 인정하는가?"하고 재판장은 짐짓 거들먹거리면서 말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희들은 다만 손님들의 시중을 들었을..." "그런 소린 나중에 하시오. 피고는 자기 죄를 인정하는가?"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저는 다만..." "그런 소린 나중에 하라잖소. 피고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가 말요?" 재판장은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있습니까? 왜냐하면..." 그러자 또다시 정리가 카르틴킨에게 달려와서 사정하듯 설득해 그를 제지했다. 재판장은 이로써 한 가지 일을 끝맺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서류를 든 쪽의 팔꿈치 자리를 바꾸고 나서, 예브피미야 보치코바에게 물었다. "예브피미야 보치코바, 피고는 188X년 1월 17일 마브리타니야 여관에서 시몬 카르틴킨과 예카테리나 마슬로바와 함께 상인 스멜리코프의 가방에서돈과 반지를 훔쳐 서로 나누어 가 진 다음, 자기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스멜리코프를 독살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자기 의 죄를 인정하는가?" "저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여피고는 단호하고 또렷한 여조로 대답했다. "전 그 방에 들 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화냥년이 들어갔으니까, 필경 이년이 한 짓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말은 나중에 하시오." 재판장은 여전히 조용하고 단호한 엊로 되풀이 말했다. "그럼 피고는 죄를 인정치 않는단 말인가?" "나는 돈도 훔치지 않았으며, 독약도 먹이지 않았거니와 방에도 들어간적이 없습니다. 제 가 방에 있었더라면 이년을 끌어냈을 거예요." "피고는 자신에겐 죄가 없다는 말이오?" "네, 절대로 없습니다." "좋소." "예카테리나 마슬로바."하고 재판장은 세 번째 피고를 향해서 물었다."피고는 상인 스멜리 코프의 열쇠를 받아가지고 유곽에서 마브리타니야 여관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 가방에서 돈 과 반지를 훔치고..." 그는 마치 암기한 대사를 외듯 말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증거품 목록 중에서 유리병이 하나 부족하다고 보고하는 왼편 배석 판사에게 귀를 기울였다. "가방에서 돈과 반지를 훔쳐내어," 재판장은 다시 되풀이했다. "훔친 물건을 나누어 가진 후 다시 상인 스멜리코프와 마브리타니야 여관으로 가서 스멜리코프에게 독약이 든 술을 마시게 하여 그 를 죽엿다고 기소되었는데, 피고는 자기 죄를 인정하는가?" "저는 아무런 죄도 없습니다." 그녀는 조급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말씀드린 그 대로예요. 저는 절대로, 절대로 도둑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요. 반지 는 그분이 직접 저한테 주신 거예요." "그럼 피고는 2500루블을 훔쳤다는 것을 인정치 않는단 말이오?"하고 재판장은 물었다. "40루블 이외에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그럼 상인 스멜리코프에게 가루약을 탄 술을 마시게 한 데 대해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 오?" "그건 맞미나 저는 그것이 수면제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 탈도 없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저 그 사람을 재우려고 먹였을 뿐이에요. 독살하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 니다. 하느님 앞에 맹세해요. 그런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말했다. "그럼 피고는 스멜리코프의 돈과 반지를 훔친 일에 대해서는 자기의 죄를 인정치 않지 만,"하고 재판장 말했다. "가루약을 먹인 일에 대해서만은 인정한단 말이오?" "그것은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말씀드린 대로 수면제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분 이 빨리 주무셨으면 했으니까요. 죽일 생각은 꿈에도 없었어요." "좋아요." 재판장은 심문 결과에 아주 만족한 듯 말했다. "그럼 그 때 일을 사실대로 말해 봐요."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사실 그대로 다 말해 봐요. 정직하게 진술하기만 하면 죄를 가볍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마슬로바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재판장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일을 이야기해 보라니까요." "사실은," 갑자기 마슬로바는 급히 말하기 시작했다. "여관에 도착하자 저는 방으로 안내 되었습니다. 거기에 그분이 있었는데 벌써 많이 취해 있었어요." 그녀는 자못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서 눈을 크게 뜨고 '그분'이라고 했다. "전 곧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분이 놓아 주질 않았어요." 그녀는 갑자기 말을 잊었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났는지 말을 뚝 끊어 버렸다.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지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되긴요. 잠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지요." 이 때 검사보가 한쪽 팔꿈치를 짚으면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무슨 질문이라도 있습니까?"하고 재판장이 물었다. 검사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손짓으 로 질문해도 좋다는 뜻을 표시했다.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피고가 시몬 카르틴킨하고 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였는가 하는 점입니다."하고 검사보는 마슬로바 쪽으로 보지도 않고 물었다. 이 질문을 끝내자 그는 입술을 깨물고 얼굴을 찌푸렸다. 재판장은 그 질문을 반복했다. 마슬로바는 겁에 질린 듯이 검사보를 쳐다보았다. "시몬하고요?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 다움에 내가 알고 싶은 것은 피고와 카르틴킨은 어떤 관계인가 하는 점입니다. 서로 자주 만났었던가요?" "어떤 관계라뇨? 그 사람은 손님이 있을 때 저를 불러 주었을 뿐이지, 달리 관계는 없었 어요." 마슬로바는 대답하고 불안스러운 시선을 검사보로부터 재판장에게로, 재판장으로부터 검사보에게로 옮겼다. "왜 카르틴킨은 손님들에게 주로 마슬로바만을 소개하고, 딴 여자들은 소개하지 않았는지 알고 싶습니다."하고 검사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교활한 메필스토펠레스 같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그런 일을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하고 마슬로바는 겁먹은 듯 주위를 둘러보 다가 네플류도프에게 잠깐 시선을 멈추고 대답했다. "그저 부르고 싶은 사람을 불렀을 뿐이겠지요." '혹시 알아봤을까?' 네플류도프는 피가 얼굴로 몰리는 것을 느낌녀서 생각했다. 그러나 마슬로바는 그를 딴 사람과 구별을 두는 것 같지는 않았고, 다시 겁먹은 얼굴을 하고 검사 보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피고는 카르틴킨하고는 별로 특별한 관계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겁니까? 잘 알 았습니다. 더 질문할 것이 없습니다." 검사보는 곧 테이블에서 팔꿈치를 떼고 무엇인가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으며, 그저 펜으로 먼저 적어 놓은 적요란 위에다 공연히 긁적거렸을 뿐이었다. 그 는 다른 검사나 변호사들이 곧잘 교묘한 질문을 던진 후에 계속하여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 는 구절을 수첩에다 기록해 두는 것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흉내를 낸 데 지나지 않았 다. 재판장은 피고 쪽을 이내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것은 마침 그 때 미리 준비해서 기재해 둔 질문의 제출 형식에 대하여 이의가 없는지, 금테 안경을 쓴 배석 판사에게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지요?" 재판장은 심문을 계속했다. "집으로 갔어요." 마슬로바는 더 확신을 가지고 재판장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답변을 계속 했다. "주변 마담에게 돈을 내주고 잠자리에 들었어요. 깜빡 잠이 들려고 하는데 우리 집 베 르타라는 계집애가 나를 깨웠어요. '일어나요. 당신의 단골 손님인 그 상인이 또 왔어요.'하 고 말입니다. 나는 정말로 가기 싫었지만 주인 마담의 부탁이고 해서 할 수 없이 나가 보았 더니, 그 분은..." 그녀는 '그분'이라는 말을 할 때 다시금 공포의 빛을 보였다. "그분은 색시 들한테 한턱 내서 돈이 떨어졌는데도 외상으로 술을 더 가져오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제가 심부름을 갔던 거예요." 이 때 재판장은 왼편 배석 판사와 뭐라고 귓속말을 하느라고 마슬로바의 말을 듣지 못했 다. 그러나 다 듣고 있었다는 듯이 그녀의 마지막 말끝을 되뇌었다. "그래서 간 거군. 음, 그래서 어떻게 했지요?" "여관에 도착하자 그분이 하라는 대로 했지요. 전 방에 들어갔어요. 하지만 저 혼자만 들 어가진 않았어요. 시몬 미하일로비치와 이 여자를 함께 불렀어요." 그녀는 보치코바를 가리 키면서 말했다. "거짓말입니다. 나는 결코 방에 안 들어갔습니다..." 보치코바는 이렇게 말대꾸를 하다가 곧 제지를 당했다. "두 사람 앞에서 10루블을 꺼냈을 때 그 속에 얼마의 돈이 들어 있는지 몰랐나요?" 다시 검사보가 말했다. 마슬로바는 검사보가 질문을 하자 바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는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으 나 이 검사보가 자기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일일이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백 루블짜리 지폐가 여러 장 들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피고는 백 루블짜리 지폐를 여러 장 보았다는 말이지요? 나는 더이상 질문할 것이 없습 니다." "그래서 그 돈을 가져왔나요?" 재판장은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질문을 계속했다. "가져왔어요." "그리고 그 다음엔?" 재판장은 계속 물었다. "그 분은 저를 데리고 여관으로 다시 돌아왔어요."하고 마슬로바는 대답했다. "그럼 피고는 어떻게 그에게 가루약을 주었지요? 술 속에?" "어떻게 주었느냐고요? 술에 타서 주었어요." "왜 주었지요?" 그녀는 대답 대신 괴롭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은 잠시도 절 놔 주질 않았어요."하고 잠시 후 말을 이었다. "전 지칠 대로 지쳐서 복도로 나와 시몬 카르틴킨에게 '이젠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피곤해 죽겠어요.'하고 말했 더니, 그가 '우리도 그 사람에겐 질려 버렸어. 그래서 잠자는 약을 먹일까 하는데 어떨까?' 하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요.'하고 대답했어요. 나는 그것이 해롭지 않은 가루약인 줄만 알았아요. 시몬이 내게 약봉지를 갖다 주었어요. 다시 들어가니 까, 그분은 칸막이 뒤에 누워 있다가 느닷없이 코냑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제가 테이블 위 에 있던 고급 샴페인 병을 열어 그의 잔과 내 잔에다 술을 따른 다음 그의 잔에다 가루약을 넣어 그에게 주었어요. 만일 독약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어떻게 그것을 줄 수 있었겠어요?" "그럼 어떻게 해서 반지를 갖게 되었나요?"하고 재판장이 물었다. "반지는 그분이 직접 내게 주신 거예요." "언제 주었지요?" "제가 그분과 함께 여관방으로 들어갔을 때, 하도 못살게 굴어 내가 방에서 나가려고 하 니까, 다짜고짜 내 머리를 때리지 않겠어요. 머리에 꽂은 빗이 분질러질 정도였어요. 그래서 화가 나서 가겠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 주면서 돌아가지 말라 고 애원했어요." 이 때 검사보는 다시금 몸을 일으키더니 여전히 거드름을 피우면서 어색한 태도로 몇 가 지 보충 질문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허락을 얻자, 금몰이 수놓인 칼라 위에 머리를 숙 이며 질문을 시작했다. "피고인은 상인 스멜리코프의 방에 얼마 동안 있었나요?" 다시 마슬로바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검사보로부터 재판장에게로 불안스러운 시 선을 옮기면서 재빨리 대답했다. "얼마 동안인지 생각나지 않아요." "그럼 피고는 상인 스멜리코프의 방에서 나와 다른 방에 들른 일도 역시 생각나지 않겠군 요." 마슬로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요, 옆의 빈 방에 들렀었어요." 그녀는 말했다. "왜 들렀지요?" 검사보는 흥미를 느끼며 그녀에게 물었다. "옷 매무시를 고치려고 들어가서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럼 그 때, 카르틴킨은 그 방에 피고와 함께 있었나요?" "네, 함께 있었어요." "왜 그가 들어왔지요?" "상인이 마시던 코냑이 남아 있어서 그걸 함께 마셨어요." "아, 같이 마셨군요. 좋아요. 그럼 피고와 시몬 사이에는 분명히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 텐 데, 무슨 얘기를 했지요?" 마슬로바는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고 빨갛게 상기되어 조급히 말했다. "무슨 얘기를 했느냐고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어요. 그 때 일은 다 말씀드렸으니까, 이 이상 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전 죄가 없어요. 이제 전부예요." "나의 질문은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검사보는 재판장에게 말하고 어색하게 어깨를 치켜 올린 다음, 그녀가 시몬과 함께 빈 방에 들렀다고 하고 피고의 진술을 자기의 수첩에다 재 빨리 기입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피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나요?" "이젠 다 말씀드렸어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한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재판장은 무언가를 서류에 기록하기 시작하다가 왼쪽 배석 판사가 나지막한 목소 리로 귀에다 소곤거리는 것을 듣고는 10분간의 휴정을 선언하고 황급히 일어나 퇴정했다. 재판장과 키가 크고 턱수염을 길게 기른 선량한 눈을 가진 왼쪽 배석 판사 사이에 오간 얘 기는 다름이 아니라 위가 좀좋지 않아서ㅓ 마사지를 하고 물약을 마시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가 그것을 재판장에게 귓속말로 전했으므로, 그의 청대로 휴정이 선언되었던 것이다. 재판관들의 뒤를 이어 배심원, 변호사, 증인들이 일어나 중요한 사건의 일부가 처리되었다 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며 제각기 흩어지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도 배심원실로 돌아와 창가에 걸터 앉았다. 12 그렇다. 그것은 틀림없는 카추샤였다. 네플류도프와 카추샤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네플류도프가 처음 카추샤를 본 것은 그가 대학 3학년 때, 토지 사유에 관한 논문을 준비 하기 우하여 고모집에서 한 해 여름을 보낼 때였다. 그는 여름 방학이면 언제나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어머니의 광대한 영지에서 보내곤 했었다. 그러나 그 해 에는 누이가 결혼을 했고, 어머니도 외국의 온천지로 여행을 떠나 버렸다. 그리고 네플류도 프는 꼭 완성해야 할 논문이 있었기 때문에 여름을 고모네 집에서 보내기로 작정했다. 고모네 집은 한적한 시골에 있었으므로 매우 조용했고, 그의 마음을 들뜨게 할 만한 것은 마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고모들은 조카이면서 자기들의 상속작인 그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 었으며 그 역시 고모들을 사랑하고 그 고풍스럽고 소박한 생활을 좋아했었다. 네플류도프는 고모 집에서 지낸 그 해 여름에 환희에 찬 기막힌 경험을 했다. 그것은 청 년이 처음으로 남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인생의 모든 아름다움과 그 의미를 인식하고, 인생 에 있어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의 가치를 깊이 깨닫고, 자기와 온 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찾아내고, 자기가 공상하고 있는 완성의 경지에 반드시 도달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뿐만 아니라 완전한 확신까지도 믿으면서, 그 일에 몰두할 때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정신적 감격 이었다. 그 해, 아직 대학에 있을 때, 그는 스펜서의 <<사회정학>>을 읽었다. 토지의 사유 에 관한 스펜서의 학설은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특히 그 자신이 대지주였다는 사실이 그 감명을 더 깊게 해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다지 부유하진 못했으나, 어머니는 지참금으 로 약 만 정보의 토지를 가지고 왔다. 그는 그 때 비로소 토지 사유 제도의 가혹함과 부당 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원래 그는 도덕적 요구를 위한 희생이라면 최고의 정신적 기쁨 으로 느끼는 그런 부류의 인가이었으므로, 토지에 대한 사유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아버지로부터 유산으로 상속받은 토지를 곧장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말았다. 그는 바로 이것을 주제로 하여 논문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해 여름, 고모네 집에서 보낸 그의 생활은 이런 궤도를 밟았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났 고, 때로는 새벽 3시경에 일어나서 해가 뜨기 전 자욱한 안개가 아직도 걷히지 않은 산기슭 의 개울로 목욕을 하러 갔다가 풀이나 꽃에 앉아서 논문을 쓰거나 그에 따른 참고 문헌을 살피기도 했지만, 대개는 독서와 집필 대신 집을 빠져나와 들이나 숲속을 거닐 때가 많았다. 점심 전에는 뜰 한구석에서 낮잠을 자고, 식탁에 앉으면 그의 능한한 이야기 솜씨로 고모들 을 웃기고 즐겁게 해주었다. 그리고 승마를 하거나 보토를 탔으며, 저녁이 되면 또 독서를 하거나 고모들을 상대로 트럼프 점을 치기도 했다. 밤에, 특히 닭 밝은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것은 가슴이 삶의 기쁨으로 충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잠자는 대신 공상과 사색에 잠기면서 날이 샐 때까지 뜰을 거닐곤 했었다. 이렇듯 그는, 고모네 집에서의 처음 한 달을 행복하고 평온하게 지내는 동안, 반은 하녀이 고 반은 양녀인 검은 눈동자의 동작이 민첩한 소녀 카추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 다.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네플류도프는 19세가 되도록 완전히 순결한 청년이었다. 그기 꿈 속에서 그리는 여성상은 아내로서의 여성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아내가 될 수 없는 여성 은 여성이 아니라 인간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해 여름의 부활절 날 아침 이웃 마을의 여자 지주가 아이들을 데리고 고모네 집을 찾아왔다. 두 딸과 중학생 한 명과 그들 집에서 기식 하고 있는 농민 출신의 젊은 화가 한 사람이었다. 모두들 차를 마신 후 이미 벌초가 끝난 저택 아푸 풀밭에서 술래잡기를 하였다. 카츄샤도 끼게 했다. 몇 번인가 교대하고 난 다음, 네플류도프는 카츄샤와 짝이 되어 도망치게 되었 다. 네플류도프는 카츄샤를 보는 것이 언제나 즐겁기는 했으나, 자기와 그녀 사이에 뭔가 특 별한 관계가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이 짝은 넘어지기 전에는 도저히 잡을 수 없겠는데."하고 술래가 된 쾌활한 청년 화가가 말했다. 그는 짧고 안짱다리이긴 했으나, 원래 튼튼한 농부였으므로 매우 빨리 뛸 수 가 있었는데도 그랬다. "당신, ...정말로 우릴 잡지 못할걸!" "하나, 둘, 셋!" 모두들 세 번 손뼉을 쳤다. 카추샤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면서 네플류도프와 재빨리 자리 를 바꿨다. 그리고 단단하고 조그만 손으로 큼직한 그의 손을 잡고 뒤도 안 보고 왼쪽으로 달려갔다. 풀을 먹인 그녀의 스커트가 버석 버석 소리를 냈다. 네플류도프는 빨리 달렸다. 그는 화가에게 잡히고 싶지 않아 기를 쓰고 달렸다. 뒤를 돌아 다보니 카추샤를 쫓아오고 있는 화가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탄력이 있는 미끈한 다리를 날쌔게 움직이면서 술래의 손에서 빠져나와 왼쪽으로 달려갔다. 앞에는 라일락이 우 거진 화단이 있었는데 그 곳으로는 아직 아무도 가지 않았다. 그러자 카추샤는 네플류도프 쪽을 돌아보고, 화단 뒤에서 만나자는 듯이 머리를 까딱해 보였다. 그도 카츄샤의 뜻을 알아 차리고 화단 뒤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화단 뒤에는 뜻밖에도 쐐기풀이 우거진 도랑이 있었 다. 그 바람에 그는 도랑에 넘어져 쐐기풀에 손이 찔렸고, 벌써 내리기 시작한 밤이슬에 흠 뻑 젖었다. 그러나 그는 벌떡 일어나서마구 웃어대면서 곧 풀이 없는 곳으로 뛰쳐 나왔다. 카추샤는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윤기 있는 까만 두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로 달려왔다. 두 사람은 서로 만나 와락 손을 마주잡았다. "어머니, 손을 찔리셨군요." 그녀는 다른 한 손으로 흩어진 머리채를 매만지며 숨을 가쁘 게 몰아쉬고 미소 띤 얼굴로 네플류도프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쪽에 도랑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 그 역시 미소를 띠면서 여자의 손을 꼭 쥔 채 말했다. 카추샤는 살며시 그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 쪽으로 얼굴을 기울 였다. 카추샤도 몸을 피하려고 하지 않아서 네플류도프는 더 힘있게 그녀의 손을 잡아 쥐면 서 그 입술에 키스했다. "어머나!"하고 그녀는 재빨리 손을 빼고는 그에게서 도망쳤다. 라일락 숲으로 달려가자, 그녀는 벌써 하얀 라일락 꽃이 지기 시작한 두 가지를 꺾어서 그것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자기 얼굴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그를 돌아본 후, 힘차게 두 팔을 흔들면서 다른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되돌아갔다. 이 때부터 네플류도프와 카추샤의 관계는 일변해서, 서로 마음이 끌리는 순진한 청년과 순결한 소녀 사이에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카추샤가 방에 들어오거나 그녀의 하얀 에이프런이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네플류도프는 모든 것이 햇빛이 내리비추는 것처럼 황홀해 보였고, 모든 일이 전보다도 한층 즐겁고 재미 있게 느껴지고 인생 자체가 보다 의미있고 행복하게 여겨졌다. 그녀도 역시 같은 기분이었 다. 그러나 네플류도프에게 이런 기분을 일으키게 한 것은, 카추샤가 눈앞에 있거나 가까이 에 있을 때만이 아니었다. 그저 카추샤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의식만으로도, 또한 그 녀 역시 네플류도프가 존재하고있다고 생각만 해도, 두 사람은 행복해싿. 네플류도프는 어머 니로부터 불쾌한 편지를 받거나, 논문이 잘 되지 않거나, 또한 청년에게 흔히 있는 이유 없 는 우수를 느끼거나 할 때에도 그저 카추샤가 가까이에 있고 언제든지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러한 모든 근심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카추샤에게는 집안 일이 무척 많았지만 그녀는 모든 일을 척척 해치우고 나서 틈이 나는 대로 책을 읽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자기가 다 읽고 나면 곧 그녀에게 도스토예프스키나 투르게네프의 소설을 빌려 주었다. 그 중에서도 그녀는 투르게네프의 <<정적>>을 좋아했 다. 그들 사이의 대화는 복도나 발코니나 뜰에서 우연히 부딪쳤을 때를 이용하여 잠시 동안 조급하게 주고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때로는 카추샤와 함께 자는 고모의 늙은 하녀 마트료 나 파블로브나의 방에서 얘기할 때도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가끔 그 방으로 가서 사탕이나 차를 대접받았다. 그런데 마트료나 파블로브나 앞에서 주고받는 대화는 그지없이 즐거웠지 만, 단둘이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 할 때는 어쩐지 어색했다. 이윽고 눈과 눈이 서로 마주칠 때마다 둘은 이심전심이 되기 시작했다. 입이 이상하게 떼어지지 않아 어쩐지 까닭을 알 수 없는 쑥스러움 때문에 두 사람은 어색하게 헤어지곤 했다. 네플류도프가 첫 번째 고모네 방문을 마칠 때까지 그와 카추샤 사이의 이런 관계는 줄곧 계속되었다. 고모들은 이런 관계를 눈치채고 펄쩍 뛰었다. 그리고 외국에 가 있는 네플류도 프의 어머니 옐레나 이바노브나 공작 부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마리야 이바노브나 고모 는 드미트리가 카추샤와 깊은 관계를 맺지나 않았을까 하고 걱정했다. 그러나 고모의 걱정 은 완전한 기우였다. 네플류도프는 스스로 의식은 못했지만 순결한 사랑을 카추샤에게 쏟고 있었다.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그에게 있어서나 그녀에게 있어서나 타락을 막아 주는 중요한 방패였다. 그는 육체적으로 그녀를 소유하려는 욕망같은 건 추호도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그녀와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으리란 생각만 해도 두려워질 정도였다. 그것보다도 로맨 틱한 작은 고모 소피야 이바노브나가 걱정하고 있는 일-과감하고 외곬으로만 생각하는 드 미트리가 일단 젊은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그녀의 가문이나 사회적 환경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결혼할 생각을 하면 큰일이다 하는 걱정이 훨씬 더 심각했다. 만일 네플류도프가 그 때 카추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었더라면, 더욱이 남이 그를 보고, 너는 그 처녀와 평생의 운명을 같이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을 했더 라면 그는 고지식하고 외고집인 성격대로 자기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상 그녀가 어떤 여자이 건 결혼하지 못할 이유는 절대로 없다고 단정해 버릴 수도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고 모들은 자기들의 걱정을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으므로 그는 카추샤에 대한 자기의 사 랑을 발견하지 못한 채 그대로 떠나 버리고 말았다. 그는 카추샤에 대한 자기의 감정이 그 당시 모든 존재를 충만시켜 주고 있던 삶에 대한 기쁨의 한 표현일 뿐, 그 감정을 쾌활하고 사랑스러운 소녀와 함께 나누고 느낀 데 지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떠날 때가 되어 카추샤가 고모들과 함께 현관 앞 층계 에 서서 눈물이 가득한, 약간 사팔뜨기인 까만 눈동자로 자기를 전송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다시는 얻을 수 없는 아름답고 귀중한 무엇인가를 버리고 가는 느낌에 사로잡혀 몹시 우울했다. "안녕히 가세요,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그녀는 솟구치는 눈물을 참으면서 언제나처럼 상 냥한 목소리로 기분좋게 말했지만 현관 안으로 뛰어들어가 실컷 울고 싶었다. 13 그 후 3년 동안 네플류도프는 카추샤를 만나지 못했다.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장교 로 임관된 네플류도프가 부대로 부임하는 길에 고모네 집에 며칠 묵었을 때였으나, 이제 그 는 3년 전 한여름을 이 곳에서 지내던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그는 모든 선한 일을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도 돌보지 않을 만큼 정직하고 도 희생 정신이 강한 청년이었으나, 지금의 그는 오직 자신의 향락만 추구하는 속물로 완전 한 이기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에게 있어 그 때는 이 세상이 신비롭게만 생각되었으며, 따 라서 그는 기쁨과 감격에 찬 태도로 그 비밀을 풀어 보려고 애를 썼으나, 지금의 그에게는 인생의 모든 것은 단순하고 명백해져서, 자신이 몸을 담은 생활 환경에 따라서 결정되는 셈 이었다. 그 당시 그에게 필요하고 중대한 것은 세속적인 관심사나 동료들과의 사회적 과제 였다. 그 당시 그에게 있어 여자는 신비스럽고 매혹적인-신비롭기 때문에 매혹적으로 보였 지만-존재였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여저의 존재-자기 가족이나 친구의 아내를 제외한 모든 여자-는 매우 분명하였다. 즉 여자란 이미 그 동안 경험한 가장 뛰어난 향락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 당시는 돈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서 어머니가 주는 돈의 3분의 1도 모 자라지 않았고, 아버지한테서 상속받을 땅도 사양하고 그것을 농민들에게 분배해 줄 용단도 있었으나, 지금은 어머니로부터 매달 받고 있는 1500루블도 부족하여 돈 때문에 벌써 여러 차례 어머니와 싫은 소리를 한 적도 있었다. 그 당시의 그는 정신적 존재를 참된 자아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건강하고 씩씩하고 동물적인 자아를 자기의 '참모습'으로 여기고 있었 다. 이러한 무서운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가 자신을 믿지 않고 남을 믿고 맹종하는 데서 생겨 났다. 그가 자신을 믿지 않고 남을 믿게 된 것은, 자신을 믿고 생활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려 웠기 때문이었다. 자기를 믿고 생활하자면, 항상 모든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값싼 쾌락만 을 찾는 동물적 자아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거꾸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남을 믿고 있으면 새삼스레 해결할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은 항상 정신 적인 자아를 무시하고, 동물적 자아에 영합하도록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믿고 생 활하면 늘 남의 비난만을 감수해야 했지만, 남을 믿고 있으면 주위 사람들의 칭찬ㅇ르 받을 수가 있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네플류도프가 신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부와 빈곤에 대해서 생각하고 읽고 이야기할 때면,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이를 그와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일 로 보았다. 심지어 어머니나 고모까지도 악의 없이 비꼬아서 그를 '우리의 친애하는 철학 자님(notre cher philosophe)'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러나 그가 소설을 읽거나 '외설스런' 이야기를 하거나, 프랑스 극장에서 구경한 저속한 희극 이야기와 재담을 재미있게 늘어놓 으면 모두들 손뼉을 치면서 칭찬했었다. 자기의 욕망을 절제할 필요를 느끼고 그가 낡은 외투를 입거나 술을 마시지 않게 되면 모두들 괴상하게 여기고 무슨 과시욕이나 나온 것 이라고들 말했다. 그러나 사냥을 하든지, 호화판 서재를 꾸미기 우해서 막대한 돈을 쓰면 사 람들은 그 취미를 칭찬하고 그에게 값진 선물을 보냈다. 그가 결혼할 때까지 동정을 지키는 순결한 청년으로 있겠다고 하면 친척들은 그의 건강을 염려했다. 그리고 어머니마저도 그 가 어엿한 남자가 되어 어느 친구로부터 프랑스 여자를 빼앗았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슬퍼 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카추샤와의 에피소드-그가 그 처녀와 결 혼할 생각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공작 부인인 어머니도 몸서리를 치며 두려 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네플류도프가 성년이 되어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약간의 사유 토지를 부당하다고 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해 주었을 때, 이런 처신은 어미니와 그의 친척들을 깜짝 놀라게 했으며, 그 때부터 그는 걸핏하면 친척들의 비난과 조소의 대상의 되었다. 사람들은 수시로 그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데, 그것은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은 마 을에다 선술집을 셋이나 차려 놓고, 일은 조금도 하지 않아서 재산이 늘어나기는커녕 오히 려 가난해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네플류도프가 근위대에 들어간 후부터 상류 계급의 동료 들과 함께 막대한 돈을 유흥비로 쓰거나 도박으로 탕진하여 엘레나 이바노브나가 은행으로 부터 재산의 일부를 찾아와야만 되었을 때도, 그녀는 한 마디의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녀 의 생각으로는 그런 일은 당연한 일일뿐더러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하여 우드를 맞는 것과 마찬가지로 젊었을 때 멋진 사회에서 체험을 한다는 것은 오히려 좋은 일이라 했다. 네플류도프도 처음엔 유혹과 싸워 보기도 했으니 그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싸움이었다. 왜 냐하면 그 자신이 선한 것으로 믿고 있던 모든 일을 다른 사람들은 악으로 생각하였으며, 반대로 그가 악으로 믿었던 일을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선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결국 네플류도프는 이에 굴복하고 말았으며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은 단념하고 남을 믿게 되었다. 처음에는 참된 자신의 포기에 대하여 불쾌하였으나 그 불쾌감도 오래 지속되 지는 않았다. 때마침 네플류도프는 술과 담배를 입에 대게 되자 그러한 불쾌감도 잊을 수 있었고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지기까지 했다. 이렇게 하여 네플류도프는 그의 열정적인 본래의 성정대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장려하 는 이 새로운 생활에 몰두하게 되었으며, 다른 무엇을 요구하는 마음속의 소리를 완전히 짓 눌러 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은 변화는 그가 페테르부르크로 옮긴 후부터 시작되었으며, 군 에 복무함으로써 절절에 달하였다. 일반적으로 군복무라는 것은 인간을 타락시키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군에 복무하는 사람 들을 완전히 무위한 나태의, 즉 모든 지적인 유익한 행동이 결여된 끌어넣어, 일반적인 인간 의 의무로부터 해방시키는 대신, 연대라든가 군복이라든가 군기라든가 하는 규정된 명예만 을 내세우고, 한편으로는 타인에 대한 무한한 권력을 부여하며 또 한편으로는 상관에 대한 노예적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군복과 군기에 대한 숭배, 폭력과 살인의 공인 따위로 뒤범벅이 된 군대는 일반적으로 사 람을 타락시키는 힘을 갖고 있지만, 더욱이 부유한 명문의 자제들만이 복모하고 있는 선발 된 근위 연대에서 볼 수 있는 금권과 황족과의 친분이라는 데서 오는 부패까지 겹치게 되면 그 타락은 이기주의의 완벽한 광적 상태에까지 이르고 마는 것이다. 네플류도프도 군에 복 무하여 동료들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된 이후로는 그 역시 이런 상태에 빠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자기가 직접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의 손에 의하여 깔끔하게 재봉되고 손질된 군 복을 입고 으리으리한 군모를 쓰고, 역시 남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손질되고 제공된 총을 들 고, 역시 남의 손으로 길러지고 길들여진 살찐 훌륭한 말을 타고, 자기와 같은 사람들과 함 께 훈련이나 사열을 하고, 뛰어다니며 군도를 휘두르며 사격하고, 그리고 남에게 그런 것을 가르치는 것 외에는 별로 하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더욱이 고귀한 사람들-청년과 노인, 황 제와 그의 측근자들-까지도 이 일을 시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찬양하고 또 감사하였다. 게다가 장교 클럽이나 최상급 요정에 모여 먹고 마시기 위하여, 특히 술을 마시기 위하여 출처도 모르는 돈을 물쓰듯이 쓰는 것이 대단하고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러고 나 면 연극, 무도회, 여자, 그리고 다시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훈련에 나서거나, 또 돈을 뿌 리고, 술, 도박, 여자-이런 생활이 계속되었다. 특히 이런 생활이 군인들에게 치명적인 작용을 미치는 것은 바로 군인이 아닌 사람이 이 런 생활을 한다면 내심 그런 생활을 수치스럽게 여기게 되는데, 군인은 이런 생활을 당연시 하며 때로는 자랑으로 여기고 자만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시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네 플류도프도 마침 터키에 선전 포고를 한 직후 군에 복무하였으므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 우리는 전쟁터에서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방종한 쾌락주의가 마땅히 허 용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런 생활을 영위한다.' 네플류도프도 그 때에는 막연하게나마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그 당시 그는, 여태 껏 자기 스스로 지켜 온 모든 도덕적 규범에서 해방되었으므로, 열광적인 환희와 만성적인 이기주의의 광적 상태 속에 빠져 끊임없이 헤매었다. 그가 3년 만에 고모네 집에 들렀을 때, 그는 이미 이러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 14 네플류도프가 고모네 집에 들르게 된 것은 그들의 영지가 전방의 자기 연대로 가는 길목 에 있다는 거소가, 고모들이 부디 꼭 한 번 들러 달라고 간청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 자 신이 한 번 더 카추샤를 만나고 싶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어쩌면 이 때 이미 마음속 깊 숙이 그에게 야수적 욕정이 꿈틀거리고 있어서 카추샤에 대한 이런 좋지 못한 의도를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뚜렷이 의식하지는 못했다. 그저 예전에 즐거운 나 날을 보냈던 곳에 들러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포근한 애정과 칭찬의 분위기 속에 그를 감싸 주고 좀 익살맞긴 하지만 선량한 고모들도 만나고 그지없이 즐거운 추억을 남겨 준 귀 여운 카추샤도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는 3월 말, 성 금요일(부활절 금요일을 말함, 예수의 수난일)에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눈이 질퍽거리는 길을 따라 고모네 집에 도착했다. 온몸이 흠뻑 젖어 추위에 부들부 들 떨었으나 흥분되었고 그 때 언제나 그랬듯이 정신만은 원기 왕성했다. '그 소녀는 아 직 있을까?' 낮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낯익은 고모네 구식 저택의 안뜰로 마차를 몰고 들 어서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안마당은 지붕에서 떨어진 눈으로 가득 쌓여 있었다. 카 추샤가 썰매 방울 소리에 현관으로 뛰어나오리라고 은근히 기대했으나 하녀 방의 입구 층 계로 나온 것은, 마루를 훔치고 있었는지 옷자락을 걷어붙이고 양동이를 손에 든 맨발의 두 늙은 하녀뿐이었다. 앞문 어디에도 카추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현관으로 마중 나온 사 람 역시 청소를 하고 있었는지 에이프런을 걸친, 그를 아주 좋아하는 티혼이라는 하인뿐이 었다. 응접실로 들어가자 비단옷에 실내 모자를 쓴 소피야 이바노브나가 나왔다. "참 잘 왔다!"하고 소피야 이바노브나는 그에게 키스를 하면서 말했다. "마센카는 몸이 좀 불편하단다. 교회 일로 무리했던 모양이야. 우린 성찬식을 끝냈단다." "거 참 잘하셨습니다. 소냐 고모님."하고 네플류도프는 소피야 이바노브나의 손에 키스하 면서 말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고모님 옷을 온통 적셔버렸군요." "네 방으로 어서 가거라. 옷이 흠뻑 젖었구나. 아니, 너 턱수염을 다 기르고... 카추샤! 카 추샤! 빨리 커피를 준비해라." "네, 곧 가져가요." 귀에 익은 쾌활한 목소리가 복도 쪽에서 들려왔다. 네플류도프는 기쁨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역시 있었구나!' 그것은 마치 태양이 먹구름 사이로 그 얼굴을 내민 것 같았다. 그는 티혼과 함께 예전의 자기 방으로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네플루도프는 티혼에게 카추샤에 대하여 물어 보고 싶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무엇 을 하고 있는지? 아직도 시집을 가지 않았는지? 그러나 티혼이 너무나 공손하고 딱딱한데 다가, 기어이 젊은 나리의 손에 손수 세숫물을 부어 주겠다고 주장했으므로 네플로도프로서 도 카추샤에 대하여 물어보기가 쑥스러웠다. 그래서 티혼의 손자와, '형제'라고 명명한 늙 은 종마와, 집을 지키는 잡종개 폴칸에 대한 것만 물어 보고는 그만두었다. 모두가 별고 없이 지내고 있었으나, 다만 폴카만은 예외로 작년에 광견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네플류도프가 젖은 옷을 몽땅 벗어던지고 새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을 때, 빠른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 발소리와 노크 소리의 임자를 알고 있었다. 이러한 발소리와 노크 소리 임자는 그녀밖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젖은 외투를 걸치고 문 가까이 갔다. "들어와요!" 그것은 그녀, 카추샤였다.여전히 변함없는 카추샤였다. 전보다 훨씬 더 예뻐졌다. 그전처럼 약간 사팔뜨기이며 미소를머금은 순박한 까만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고모의 심부름으로 금방 포장지에서 꺼낸 향수 비누와 두 개의 수건을 가지고 왔다. 한 개는 커다 란 러시아식 자수 타월이었고, 또 하나는 보들보들한 외래품이었다. 아직 한번도 쓰지 않아 새겨진 글자가 뚜렷한 새 비누도, 수건도, 그녀 자신도-- 모든 것이 깨끗하고, 신선하고, 손 때가 묻지 않아서 기분이 상쾌했다. 그녀의 꼭 다문 귀여운 붉은 입술은 그전처럼 기쁨을 누르지 못하여 잔주름이 생겨났다. "잘 오셨어요, 드미트리 아바노비치." 그녀는 간신히 입을 떼면서 얼굴을 붉혔다. "여어, ... 오랜만..." 그는 그녀에게 '너'라고 해야 할지 '당신'이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그녀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붉혔다. "잘 있었소?" "네, 나리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으로..... 이건 고모님이 보내 주신 거예요,당신이 좋아하는 장미 비누예요." 그녀는 비누를테이블 위에 놓고, 수건은 안락 의자 팔걸이에 걸어 놓으면서 말했다. "나리께서는 안 가지신 게 없어요."하고 티혼은 손님의 개성을 내세우듯이 이렇게 말하고 는 뚜껑이 열려 있는 커다란 은제 화장 상자를 자랑스럽게 가리켰다. 그 속에는 크고 작은 병, 솔, 포마드, 향수, 그 밖에 여러 가지 화장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고모님께 고맙다고 말씀드려요. 오기를 잘했어." 예날과 같이 가슴속이 환히 밝아오고 따 뜻해짐을 느끼면서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녀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그저 방긋웃고는 나가 버렸다. 네플류도프를 변함 없이 사랑하고 있던 두 고모는, 이번에는 그전보다더욱 따뜻하게 그를 환영해 주었다. 드미트리가 전쟁터로 나가는 몸이므로 어쩌면 부상을 당하거나 전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이 노부인들은 더욱 극진히 대해 주었다. 원래 네플류도프는 고모네 집에서 하루만 묵을 예정이었으나, 카추샤를 보고 난 다음 생 각이 달라져서 이틀 후에 있을 부활절을 고모들과 함께 맞기로 했다. 그래서 오데사에서 만 나기로 약속한 친구이며 전우인 센보크에게 전보를 쳐서 고모네 집을 들러 가라고 했다. 카추샤를 본 순간부터 네플류도프는 그녀에 대하여 전과 똑같은 감정에 싸였다. 그는 전 처럼 카추샤의 하얀 에이프런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의발소기, 목소리, 웃 음소리를 듣기만 해도 짜릿한 즐거움을 느꼈다. 그리고 윤기 있는 그녀의 까만 눈만 봐도 감격에 찼다. 특히 그녀의 방긋 웃는 모습에는 더할 나위 없는 환희에 젖었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네플류도프와 마주칠 때마다 얼굴을 붉히곤 하는 그녀의 모습은 이루 형언할 수 없 을 정도를 그를 감동케 했다. 그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느꼈으나,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전에는 사랑이란 신비로운 것이며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없는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사랑에 대해 자기 스스로 인정하고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자기 자신에게 숨기 긴 했지만 그 사랑이 어떤 것이며, 그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도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 었던 것이다. 네플류도프의 마음속에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 종류의 자아가 살고 있었다. 하나 는 남에게도 자기에게도 행복이 될 수 있는 그러한 행복만을 추구하는 정신적인 자아였고, 또 하나는 오직 자기만의 행복을 찾고 그 행복을 위해서는 온 인류의 행복마저 상관 않는 동물적인 자아였다. 폐테르부르크의 생활과 군대 복무에 의해 불러일으켜진 이기주의 때문 에 성미가 무척 급해진 상태였던 이 시기에는 동물적인 자아가 그의 내부에 군림하여 완전 히 정신적 자아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추샤를 보고, 그 당시 그녀에게 품었던 것과 똑같은 기분을 다시 느끼게 되었을 때, 정신적인 자아가 고개를 쳐들고 자기의 권리를 주장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네플류도프에게는 부활절까지의 이틀 동안에 걸쳐 그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내부투쟁이 줄곧 벌어지고 있었다. 마음속 밑바닥에서는 한시바삐 이 곳을 떠나야겠다, 새삼스럽게 고모네 집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또 이렇게 눌러 붙어 있게 되었지만, 너무나 큰 환 희를 맛보고 있었으므로 그는 그 자신에게 그런 것을 납득시키려 하지 않고 그냥 눌러앉고 말았다. 부활절을 앞둔 토요일 밤에 사제가 부제와 복사를 데리고 새벽 미사를 드리러 왔는데 그 들의 말에 의하면 2,3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썰매를 타고 물웅덩이와 황량한 땅을 가로질러 서 간신히 도착했다고 했다. 네플류도프는 두 고모와 하인들과 함께 미사에 참석했으나 문가에 서서 향로를 나르고 있 는 카추샤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미사가 끝나자 그는 사제와 고모들에게 인사한다 음 침실로 돌아가려고 하다고 그 때 복도에 있는 늙은 하녀 마트료나 파블로브나와 카추샤 가 쿠리치(부활절 의식 때 쓰이는 과자의 일종)와 파스하(역시 의식용 과자)를 신성하게 하 기 위하여 교회롤 가져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나도 가보자.'고 속으로 생각했다. 교회로 가는 길은 썰매도 마차도 쓸 수 없었으므로 고모네 집을 자기 집처럼 자유롭게 지 내는 네플류도프는 '형제'라고 불리는 종마에 안장을 얹어놓으라고 일렀다. 그리고 화려한 군복에 승마용 바지를 입고 두꺼운 외투를 걸친 다음, 이제는 사람을 너무 태워서 몸이 무 거워 울어 대기만 하는 늙은 말에 올라앉아 물웅덩이와 눈이 쌓인 어두운 길을 따라 교회로 갔다. 15 네플류도프에게 있어 일생을 통해 가장 빛나고 강렬한 추어그이 하나가 그때의 새벽 미사 였다. 군데군데 눈 때문에 훤하게 비치는 캄캄한 밤길의 물웅덩이 속을 철버덕거리면서 네플류 도프는 성당으로 갔다. 교회 주위에 있는 흐린 불빛들을 보자 귀를 쫑긋거리기 시작한 말을 몰면서 그가 교회 안으로 들어셨을 때 이미 미사는 시작되고 있었다. 농부들은 네플류도프가 마리야 이바노브나의 조카임을 알자 마른 땅으로 인도하여 말에서 내리게 하고 말을 끌어다 매는 수고까지 하면서 성당 안으로 안내했다. 성당은 축제 기분에 들뜬 군중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오른편에는 남자 농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노인네들은 집에서 짠 띠가 달린 긴 소매옷 에다 인피 짚신을 신고 때묻지 않은 하얀 각반을 두르고 있었고, 젊은이들은 새 나사 외투 에다 화려한 허리띠를 두르고 장화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왼편에는 여인네들이 자리를 잡 고 있었다. 그들은 붉은 미사포를 쓰고 솜 비로드의 소매 없는 재킷 밑으로 선명한 블라우 스를 내보이며, 푸른색, 초록색, 빨간색 등 여러 가지 빛깔의 화려한 스커트에 편자가 달린 구두를 신고 성장하고 있었다. 하얀 미사포를 머리에 쓰고, 회색웃옷에 구식 스커트를 입고, 가죽신이나 새로 만든 인피신을 신은 검소한 노파들은 젊은 여자들 뒤에 서 있었다. 그 중 간에는 머리에 기름을 번질번질 바르고 갖은 치장을 한 아이들이 서 있었다. 남자들은 성호 를 긋고 절을 하고는 머리카락을 뒤로 흔들어 올리고 있었다. 여자들 중에서 특히 노파들은 촛불이 몇 개나 켜져 있는 성상에 빛 잏은 눈동자를 고정시킨 채 깍지낀 손가락을 이마의 미사포나 어깨와 가슴에 꼭 누른 채 무엇인가 중얼거리면서 허리를 굽히기도 하고 무릎을 꿇기도 하면서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남이 보고 있을 때만 어른들 흉내를 내면서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 척 했다. 금빛으로 빛나는 성상대는 금으로 둘러 장식한 커다른 촛대 로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는 많은 작은 양초불빛에 비쳐서 번쩍이고 있었다. 샹들리에에는 많은 촛대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으며, 성가대에서는 저음과 소년들의 하이소프라노가 뒤섞 인 미숙한 성가대원의 유쾌한 찬송가 소리가 들려왔다. 네플류도프는 앞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성당 중앙에는 그 지방의 귀족 계급- 지구 내외, 수병복을 입은 그들의 아들, 경찰서장, 전신 기사, 장화를 신은 상인, 훈장을 단 촌장, 그리 고 설교대 오른쪽, 어느 여자 지주두에는 불빛에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보랏빛 옷에, 가장자 리에 수놓은 흰 숄을 걸친 마트료나 파블로브나와, 허리에 주름이 잡힌 흰옷에 하늘색 띠를 두르고 검은 머리에는 붉은 나비 모양의 리본을 단 카추샤가 서 있었다. 모든 것이 축제일답게 엄숙하고, 즐겁고, 아름다웠다. 금빛 십자가를 그려 넣은 은빛 제의 를 입은 사제와 축제 때 입는 금빛 은빛의 중백의 제의를 입은 부제와 복사도, 머리에 기름 을 번지르르하게 바른 성가대원들도,무용곡처럼 즐거운 느낌을 주는 축제일의 노랫소리도, 꽃으로 장식된 삼색양초로 사람들에게 내려주는 사제들의 축복도, 그와 동시에 끊임없이 되 풀이되는 '예수 부활하셨네! 예수 부활하셨네!'하는 축하의 외침도,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것은 흰옷에 하늘빛 띠를 두르고 검은 머리에 붉은 리본을 단 채 기쁨에 못 이겨 눈을 반짝이고 있는 카추샤였다. 네플류도프는 그녀가 돌아보지 않았지만,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옆을 지나 제단 쪽으로 갔을 때 직감적으로 간파했다. 그는 아무할말도 없었으나 언뜻 생각이 나서 지나가는 길에 말을 걸었다. "마지막 미사가 끝나면 잔치를 연다고 고모님이 말씀하시더군." 언제나 그를 볼 때면 그랬듯이, 이번에도 젊은 피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전체에 피어올 랐다. 그리고 까만 두 눈이 미소를 담뿍 머금고 천진스럽게 네플류도프를 쳐다보았다. "저도 알고 있어요." 그녀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 때 커피를 끓이는 놋쇠 주전자를 든 복사가 신도들을 헤치며 카추샤의 옆을 지나쳤는 데 제의 자락이 그녀에게 걸렸다. 짐작컨데 그는 네플류도프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피 해 가려다가 카추샤를 스친 모양이었다. 그러나 네플류도프에게는 그것이 못마땅하게 여겨 졌다. 어째서 그 사내는 그것을 모르고 있단 말인가?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은, 아니 이 세상 에 있는 모든 것은 오직 카추샤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며, 온 세상의 만물을 무시할 수 있을지라도 결단코 그녀만은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녀는 우주의 한 중심이기 때문이었다. 성상대의 금빛도 그녀를 위해서 빛나고, 샹들리에나 수많은 촛대에 꽂혀 있는 양초도 그녀를 위해서 타고 있고, '예수 부활하셨네! 기뻐하라, 만백성아!'하는 환희에 넘친 성가도 그녀를 위해서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무릇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은 모 두가 그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네플류도프에게는 카추샤 자신도 이 모든 것 이 그녀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주름진 흰옷을 입고 날씬한 모습과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한 듯한 기쁨에 찬 얼굴을 보았을 때, 네플류도프는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얼굴 표정으로 보아 그는 자기 영혼 속으로 부르고 있는 것과 똑같은 노래를 그녀의 영혼 속에서도 부르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깨달았 다. 처음과 마지막 미사의 중간에 네플류도프는 교회 밖으로 나왔다. 신도들은 그에게 길을 비켜 주면서 인사를 했다.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저이가 뉘 집 도련님이 야?"하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성당 입구까지 나와 발을 멈추었다. 그러자 거지떼들이 그를 둘러쌌다. 그는 지갑에 들어 있는 잔돈을 모두 나누어 주고 계단을 내려갔다. 어느새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먼동이 텄으나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성당 주변에 있는 묘지에 흩어져 앉아 있었다. 카추샤가 아직도 성당 안에 있었으므로 네플 류도프는 그녀가 나오기를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왔다. 그리고 포석에 구두징 소리를 울리면서 계단을 내려와 성당의 뜰과 묘지 쪽으로 흩어져 갔다. 마리야 이바노브나의 집에서 과자를 만드는 늙은이가 머리를 흔들면서 네플류도프를 붙잡 고 부활절 키스를 했다. 주름투성이의 목덜미를 비단 목도리 위로 드러내고 있는 그의 늙은 아내는 손수건에서 노란 달걀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바로 이 때 소매 없는 외투에 푸른 허 리띠를 두른 건장한 젊은 농부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다가왔다. "예수 부활하셨네" 그는 눈웃음을 치며 이렇게 축복한 다음, 네플류도프 옆으로 와서 농 부 특유의 구수한 냄새를 풍기면서 곱슬곱슬한 턱수염으로 상대의 낯을 간질이며 뻣뻣하고 싱싱한 느낌이 드는 입술로 네플류도프의 입술 바로 위에다 세 번 키스했다. 네플류도프가 젊은 농부의 키스를 받고 그에게 다갈색 달걀을 받고 있을 때, 불빛에 따라 여러 가지 빛깔로 변하는 옷을 입은 마트료나 파블로브나와 빨간 나비 리본을 단 까만 머 리의 귀여운 카추샤가 나타났다. 카추샤는 앞서 나아가는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이내 네플류도프를 알아보았고, 그도 그녀 의 얼굴이 금방 밝아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마트료나 파블로브나와 함께 성당 입구로 나오자 거지에게 적선을 하기 위해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민둥코 자리에 붉은 흉터가 난 거지가 카추샤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손수건에서 무엇인가 꺼내어 거지에게 준 다음, 그에게로 다가가서 조금도 싫은 기색 없이 오히려 즐거운 듯 눈을 반짝이면서 세 번 키스했다. 그녀가 거지와 키스를 하고 있을 동안, 그녀의 눈이 네플류도프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마치 '이런 짓을 해도 괜찮을까요? 잘못 된 일은 아닐까요?' 하고 묻는 것 같았다. '괜찮아, 괜찮고말고. 모두 훌륭해. 모두가 꼭 바 라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널 사랑해.' 그들은 입구의 층계를 내려왔다. 그는 그녀 쪽으로 걸어갔다. 부활절 키스를 하고 싶은 것 은 아니었으나, 그저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예수 부활하셨네!" 마트료나 파블로브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했으 나, 그 말투는 '오늘이야말로 모두 평등하답니다.'하고 말하는 듯싶었다. 그녀는 조그맣게 똘 똘 뭉친 손수건으로 입을 닦고는 그에게로 입술을 내밀었다. "예수 부활하셨네!"하고 네플류도프는 대답하고 키스를 했다. 그는 카추샤를 돌아다보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혔지만, 곧 그에게로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어요,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축복합니다." 그는 말했다. 두 사람은 두 번 키스하고 다시 한 번 더 해도 될까 하며 생 각하다가 그럴 필요가 있다고 결심이나 한 것처럼 세 번째 키스를 했다. 그리고는 두 사람 다 방긋 웃었다. "사제님한테 같이 가지 않겠어?"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아니에요.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잠깐만요." 카추샤는 정말 기쁨에 넘쳐 어쩔 줄 모르는 듯이 사랑에 넘치는 상냥한 사팔뜨기 눈으로 네플류도프의 눈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남녀간의 사랑에는 반드시 그 사랑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 있게 마련인데, 그 순간에는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것이라곤 티끌만큼도 없으며 육감적인 것 또한 추후도 없는 법이다. 네플류도프에게 있어서는 부활절의 이 밤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순간이었다. 지금 그가 카추 샤와의 일을 회상해 볼 때 이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 훨씬 압도적이었다. 그녀의 윤기나는 까맣고 매끈한 머리, 날씬한 처녀다운 허리와 불룩 솟아오른 가슴을 단정하게 감싸고 있는 주름잡은 흰 드레스, 불그스레한 뺨,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이런 것들이 두 가지 특징을 나 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순결한 처녀성과 순결한 애정이었다. 그 사랑은 네플류도프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라-그는 이것을 알고 있었지만-모든 사람, 모 든 것을 향한 사랑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오직 훌륭한 것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그 녀가 키스해 준 거지에게까지도 베푸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녀의 내부에 이러한 사랑이 넘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날 밤부 터 그런 사랑을 아침까지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 만일 모든 것이 그 날 밤 같은 감정에만 젖어 있었더라면! 그렇다, 그 무서운 사건은 바로 부활절 밤이 지난 이튿날 일어나고 말았다!' 하고 그는 이렇게 배심원실 창가에 앉아 옛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16 성당에서 돌아오자 네플류도프는 고모들과 함께 금식을 끝낸 다음, 연대에서 익힌 습관에 따라 화주와 포도주를 마신 뒤 방으로 돌아와 옷을 입은 채로 잠이 들었다. 그러다 그는 노 크 소리에 잠이 깼다. 그 노크 소리가 카추샤의 것임을 깨닫고 그는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났다. "카추샤야? 들어와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녀는 살며시 문을 열었다. "식사하러 나오시랍니다."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역시 같은 흰옷을 입고 있었으나 그 빨간 리본은 머리에 없었다. 네플류도프의 눈 을 흘깃 보고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무슨 반가운 소식을 전할 때처럼 갑자기 빛나 보였다. "곧 가지." 그는 대답하면서 머리를 빗기 위하여 빗을 집어들었다. 그녀는 잠시 동안 주춤거리고 서 있었다. 그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자 빗을 내던지고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는 그 순간 재빨리 몸을 돌려 가볍고 빠른 걸음으로 복 도에 깔린 양탄자 위로 미끌어져 갔다. "바보 같으니라고! 왜 그녀를 붙잡지 않았을까?" 네플류도프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의 뒤를 쫓아 복도를 달려갔다. 그녀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방에 들어왔을 때, 자연스럽게 대해야 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카추샤, 잠깐만." 그는 말했다. 그녀가 돌아보았다. "왜 그러세요?" 발을 멈추면서 그녀가 말했다. "아무것도 아냐, 그저..." 그는 가까스로 자신을 달래며 이런 경우 다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면서 카추 샤의 가는 허리를 껴안았다. 그녀는 선 채로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안 돼요,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이러시면 안 돼요." 눈물이 글썽이도록 얼굴이 빨개진 그 녀는 억세고 딱딱한 손으로 자기를 껴안으려고 하는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네플류도프는 그녀를 놓아 주었다. 그 순간 그는 쑥스럽고 부끄러웠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마저 느꼈다. 그 때 그는 자신을 믿었어야 했다. 이 쑥스럽고 부끄러운 생각이 밖으로 드러내려고 몸부림치는 자기 영혼의 가장 순박한 감정임을 깨달았어야 했다. 그러나 도리어 그는 자기가 못난 탓이다. 다른 사람처럼 자기도 그런 짓을 해야 한다는 생 각이 앞섰던 것이다. 그는 다시 뒤쫓아가서 카추샤를 껴안고 목덜미에 키스했다. 이번 키스는 전에 했던 두 번 의 키스-라일락 숲 뒤에서 정신 없이 했던 키스와 오늘 새벽 성당에서 했던 키스-와는 판 이한 것이었다. 이것은 뜨거운 키스였다. 그녀도 그것을 느꼈다. "아. 왜 이러세요!" 그녀는 마치 한없이 귀중한 무엇을 깨드려 버려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도 저지 른 것처럼 외치며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네플류도프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두 고모와, 의사와 이웃 마을의 부인이 자쿠스카(식사 전의 전채 요리)를 차려놓은 테이블에서 식사중이었다. 모든 것은 여 느 때와 같으나, 네플류도프의 마음속에는 폭풍이 일고 있었다. 그는 누가 자기에게 말을 걸 어와도 못 알아듣고 엉뚱한 대답을 하면서 오직 카추샤만을 생각했다. 그의 머리에서는 그 녀에게 한 마지막 키스 때의 감촉뿐이었다. 그 밖의 일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녀가 방으로 들어오자 보지 않고도 그는 자기의 온몸으로 그녀가 그 곳에 있음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녀 쪽을 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식사 후에 곧 자기 방으로 돌아간 그는 몹시 흥분하여 한참 동안 방 안을 왔다갔다하면서 귀를 곤두세우고 그녀의 발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 태질하는 동물적 자아가 그를 사로잡고 있어서 그가 처음 이 곳에 왔을 때와 오늘 아침 성당에 갔을 때까미나 해도 생생하던 정신적인 자아가 무서운 동물적 자아에 마구 쫓기고 있었다. 이 날 네플류도프는 카추샤에게만 신경을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단둘이서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아 마도 그녀가 그를 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저녁때 그녀는 우연히 네플류도프의 옆 방까지 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여기서 의사가 하룻밤 묵고 가야 했으므로 카추샤는 이 손님의 잠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의 발소리를 듣자 네플류도프는 마 치 도둑처럼 숨소리와 발소리를 죽이고 살그머니 그녀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녀는 두 손을 하얀 베갯잇에 넣고 양쪽 귀를 쥔 채 그를 돌아보면서 생긋 웃었으나, 그 것은 전처럼 쾌활하고 즐거운 미소가아니라 겁을 먹은 듯한 애처로운 미소였다. 그 미소는 마치 그를 향하여, '당신이 지금 하려는 짓은 좋지 않은 일이에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는 그 순간 잠시 머뭇거렸다. 이 때만 해도 아직 자신을 이겨낼 힘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약하 기는 했지만 그녀의 처지, 감정, 생활에 대해서 그에게 속삭여 주는 진정한 애정의 소리가 아직은 그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소리가, '정신 차려, 멍청하게 있다 간 자신의 쾌락과 행복을 놓치고 말 거야.'하고 유혹하고 있었다. 이 두 번째 소리가 첫 번째 소리를 눌러 버렸다. 그는 단호히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억제할 수 없는 무서 운 동물적 감정이 그의 온몸을 휩쌌다. 그리하여 네플류도프는 그녀를 꼭 껴안아 침대 위에 억지로 앉혔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 자신도 그녀와 나란히 앉았다. "드리트리 이바노비치, 제발 놔 주세요." 그녀가 애원하듯 말했다. "마트료나 파블로브나 가 와요!" 그녀는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그 때 정말 누군가가 문으로 가까이 오는 듯했다. "그럼 오늘 밤에 갈게. 너 혼자 있겠지?"하고 네플류도프는 속삭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안 돼요! 절대로 안 돼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으나, 그것은 말뿐이었 으며 흥분에 휩싸인 그녀의 육체는 그것과는 반대로 말하고 있었다. 방문 쪽으로 온 사람은 바로 마트료나 파블로브나였다. 그녀는 담요를 들고 들어왔다. 그 리고 나무라는 듯한 눈초리로 네플류도프를 흘겨보고는 카추샤에게 화난 목소리로 담요를 잘못 가지고 왔다고 꾸짖었다. 네플류도프는 잠자코 방에서 나왔다. 그러나 부끄럽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마트료나 파블 로브나의 표정으로 보아 그녀가 자기를 비난하고 있다는 것도, 그 비난이 정당하는 것도, 그 리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옳지 못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에 카추샤에 대하 여 품고 있던 참다운 애정의 그늘에서 솟구치는 동물적 감정은 이제 다른 어떤 무엇도 거부 한채 그의 마음과 육신을 완전히 지배하고 말았다. 급기야 그는 자기의 열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하며, 오직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만을 모색하고 있었다. 초저녁에는 마음이 들떠서 안절부절 못했다. 고모들 방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또 자기 방 에 틀어박혀 보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현관 계단에 나가 보기도 하면서 오직 한 가지 일만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와 마주앉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 나 그녀가 그를 피하고 있었으며, 마트료나 파블로브나도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17 이윽고 초저녁이 지나고 밤이 되었다. 의사도 침실로 들어갔다. 고모들도 잘 준비를 했다. 네플류도프는 마트료나 파블로브나가 고모의 침실에 가 있으므로 하녀방에는 지금 카추샤 혼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현관 계단으로 나왔다. 바깥은 캄캄하고 습기가 찼으며 안온했다. 마지막 녹아가는 봄의 잔설 때문에 더욱 피어오르는 봄의 흰 안개가 공중에 가득 차 있었다. 집에서 백 보쯤 떨어진 낭떠러지 밑을 흐르고 있는 시내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 려왔다. 그것은 얼음이 깨지는 소리였다. 네플류도프는 입구 계단을 내려가서 물웅덩이를 건너 조각조각 얼어붙은 눈을 밟고 하녀 방 창가로 다가갔다. 심장은 두 귀를 내리치듯 맹렬히 고동치고, 호흡은 끊겼는가 하면 갑자 기 무거운 한숨으로 터져나왔다. 하녀방에는 조그마한 램프가 커져 있었다. 카추샤는 무엇인 가 생각에 잠겨 테이블 옆에 홀로 앉아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아무 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어서 꼼짝도 않고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다가 문득 눈을 들어 방긋 웃다가 마치 자기 자신을 책망하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는 자세를 고치고는 느닷없이 두 손을 테 이블 위에 얹어 놓으면서 또다시 앞을 노려보았다. 그는 선 채로 그녀를 지켜보면서, 그와 동시에 자기 심장의 고동과 냇가에서 들려오는 기 묘한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안개에 싸인 냇가에서 무엇인가 느릿느 릿 지칠 줄 모르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무엇인가 숨을 헐떡이고 소리가 나는가 하면, 쨍그랑 깨지는 소리도 들렸고, 이번에는 뭔가 빗발치듯 내리쏟아지는 듯한 소리로 변하기도 했다가, 유리같이 쨍그랑 울리는 얇은 얼음 조각 깨지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네플류도프는 마음속의 갈등으로 고민하고 있는 카추샤의 얼굴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 다. 그러자 이 처녀가 가엾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연민의 정이 그녀에 대한 욕망을 한층 더 강하게 부추겼다. 그는 점점 더 욕정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는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녀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자 공포의 빛이 그 얼굴에 역력히 나타났다. 이윽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창가로 가까이 와서 얼굴을 유리창에 대었다. 그리고 두 손바닥을 말의 곁눈가리개 모양 눈 위에다 대어 그를 알아보고 나서도 공포의 빛은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도 심각했다. 그는 그녀의 이런 얼굴을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빙그레 웃자 그녀도 비 로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짓는 미소일 뿐, 그녀의 마음속에는 그 대 신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나오라고 신호를 했으나 그녀는 '싫어요. 안 가겠 어요.'하듯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면서 창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가 다시 얼굴을 유리에 대고 나오라고 소리치려고 했을 때 그녀는 누가 부른 듯 문 쪽으로 홱 몸을 돌렸다. 네플류 도프는 창문에서 물러났다. 안개가 너무나 짙어서 집에서 다섯 발짝만 떨어져도 벌써 창문 이 보이지 않고 다만 시커먼 덩어리 속에 램프불만이 붉고 크게 번지고 있었다. 냇가에서는 여전히 신비스럽게 흐느끼는 소리와, 와삭와삭하는 소리와,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안뜰의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마리의 닭이 홰치며 울자 근처의 닭들이 이에 호응했다. 마침내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도 닭 울음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여기저기서 들려왔 다. 냇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빼놓고는 주위는 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했다. 그것은 벌써 두 번째 닭이 우는 소리였다. 네플류도프는 몇 번이나 물웅덩이에 빠지면서 집모퉁이를 두세 번 왔다갔다하고 나서 다 시 하녀방 창문 쪽으로 가까이 갔다. 램프는 여전히 켜져 있었는데, 카추샤도 역시 홀로 테 이블 옆에 앉아서 무엇인가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창문으로 가까이 가자, 그녀는 창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러자 누가 두드렸는지 볼 생각도 않 고, 그녀는 방에서 뛰쳐나갔다. 네플류도프는 현관문이 열렸다가 삐걱하고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현관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말없이 덥석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도 그에게 몸을 맡긴 채 얼굴을 들어 입술 로 그의 키스를 받았다. 그들은 눈이 녹은 현관 모퉁이 뒤에 서 있었다. 그의 온몸은 애타는 욕망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현관문에서 아까와 같은 삐걱 소리가 나더니 마트료나 파블로브나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추샤!" 그녀는 네플류도프로부터 빠져나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찰칵하고 열쇠 잠그는 소 리를 들었다. 그런 뒤엔 모든 것이 조용해졌고, 창문의 붉은 램프도 꺼져 버렸으며, 다만 안 개와 냇물 흐르는 소리만 남았다. 네플류도프가 창문으로 다가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노크를 해도 아무 대꾸가 없었 다. 네플류도프는 저면의 현관 층계를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갔으나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구두를 벗고 맨발로 복도를 따라 마트료나 방과 붙어 있는 카추샤의 방문을 향하여 살금살금 걸어갔다. 처음에는 마트료나 파블로브나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자 칫하면 그대로 들어갈 뻔했으나, 그 때 갑자기 마트료나가 기침을 하기 시작하더니 침대를 삐그덕거리면서 돌아눕는 소리가 났다. 그는 멈칫하고, 숨을 죽이고 5분 가량 그대로 서 있 었다. 주위가 조용해지고 다시 코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그는 삐꺽거리지 않는 마루 널빤지를 골라 디디며 카추샤의 방문 앞까지 다가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소리 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그녀는 아직 자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카추샤!"하고 속삭 이기가 무섭게 그녀는 벌떡 일어나 문께로 다가와서 성난 듯한 어조로 돌아가 달라고 애원 하기 시작했다. "왜 이러세요? 이러시면 안 돼요. 고모님이 들으시겠어요." 그녀의 입은 이렇게 말하고 있 었지만, 그래도 온몸은 '난 당신 것이에요.'하는 듯했다. 네플류도프 역시 이것만은 직감했 다. "자, 잠깐만 열어 줘, 제발 부탁이야!" 그는 정신 없이 지껄였다.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이윽고 손으로 자물쇠를 더듬는 소리가 들렸다. 쇳소리가 찰칵 나 자 그는 열린 문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그는 빳빳한 속옷만 입은 채로 두 팔을 드러내 놓고 있는 카추샤를 번쩍 안아들고 문 밖 으로 무턱대고 나왔다. "어머나, 왜 이러세요?" 그녀는 속삭였다. 그러나 그는 그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그녀를 자기 방으로 안고 들어갔다. "아이, 안 돼요. 놓아 주세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온몸은 그에게 더욱 바싹 다가 갔다. 카추샤가 그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바들바들 떨면서 묵묵히 방을 나갔을 때, 그는 현 관 밖의 계단으로 나와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해 묵묵히 서 있었다. 밖은 훨씬 밝아졌다. 아래쪽 냇가에서 얼음조각이 갈라지는 소리, 출렁이는 물소리, 살랑 거리던 바람 소리가 더욱 요란해지고, 거기다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까지 어떤 소리와 겹쳐 들려왔다. 안개는 점점 아래로 걷히기 시작하여 마치 성벽처럼 쌓인 안개의 그늘에서 초승 달이 희끄무레한 빛을 띠고 떠오르고 있었다.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일까? 나에게 일어난 일은 행복인가? 아니면 불행인가?'하고 그는 회의에 빠졌다. '이것이 세상이라는 거야. 누구든 다 이렇게 살아가는 거야'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침실로 갔다. 18 이튿날 멋지게 차려입은 쾌활한 센보크가 네플류도프를 찾아 고모네 집에 왔다. 그는 우 아하고 친절하며 괘활하면서도 싹싹한데다가, 특히 드미트리에 대한 깊은 우정을 보임으로 써 고모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의 원만한 성품은 고모들의 마음에 들었지만, 너무나 과 장이 심했으므로 도리어 고모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그는 가끔 이 집에 찾아오는 눈먼 걸인 에게 1루블을 주기도 하고 하인들에게 팁으로 15루블으 ㄹ던져 주기도 했다. 또 소피야 이 바노브나의 애완용 강아지 슈제트카가 그 앞에서 다리를 다쳐 피를 흘리자, 그 개에게 붕대 를 감아 주겠다고 나서더니 그 자리에서 냉큼 가장자리에 수가 놓인 고급 무명 손수건(소피 야 이바노브나는 그런 손수건은 한 다스에 15루블이 넘는다고 말하였다.)을 쭉 찢어 슈제트 카에게 매어 주기도 했다. 고모들은 이런 사람을 여태껏 본 적도 없었거니와 더군다나 센보 크에게는 그 자신 도저히 청산할 길이 없는 20만 루블의 부채 때문에 그에게 있어선 25루블 쯤의 돈은 있건 없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센보크는 단 하룻밤만 묵었을 뿐 다음날 저녁에 네플류도프와 같이 떠났다. 그들은 연대 로 돌아가야 할 기한이 다 되었으므로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네플류도프의 마음속에는 어젯밤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에 고모네 집에서 보낸 그 마지막 하룻동안은 두 가지 감정이 머리를 쳐들고 서로 싸우고 있었다. 그 하나는 관능 적 사랑(그것은 예상했던 만큼 만족스럽지 못했지만)의 타는 듯한 성적 추억과 아무튼 목적 을 달성했다는 어느 정도의 자기 만족이었다. 또 하나는 뭔지 몹시 나쁜 일을 저질렀다는 죄악감이어서 이 나쁜 행위는 반드시 보상을 해야 하는데, 그녀를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을 위해 보상해야 한다는 그런 의식이었다. 네플류도프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으므로 자기가 카추샤에게 한 짓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비난을받게 될 것인가, 비난을 받는다면 얼마나 받게 될 것인가 하는 따위만 염려했을 뿐 그녀가 얼마나 고민하고 있으며 앞으로 그녀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 지 않았다. 그는 센보크가 자기와 카추샤의 관계를 눈치채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내심 우쭐 했다. "자네가 갑자기 고모들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이젠 알겠어. 한 주일쯤 묵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냐." 센보크는 카추샤를 보자 곧 그에게 말했다. "내가 자네라면 이렇게 떠나진 않을걸세. 정말 미인이야!" 네플류도프는 그녀와의 사랑을 한껏 즐기지 못하고 이렇게 떠나는 것은 섭섭하지만 이왕 오래 가지 못할 관계라면 빨리 끊어 버리고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그녀 에게 돈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녀를 위해서 주는 것도, 또 그녀가 돈 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경우 세상 사람들이 으레 그렇게 하기 때문 이었다. 만일 자기가 그녀를 농락하고도 아무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다면 비열한 인간이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와 그녀의 위치로 보아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금 액을 그녀에게 주기로 했다. 출발하는 날 점심 식사 뒤에 그는 현관에서 카추샤를 기다렸다. 그녀는 네플류도프를 보 자 얼굴을 붉히면서 문이 열린 하녀방을 눈짓하며 옆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카 추샤를 잡고 가지 못하게 했다.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어." 그는 백 루블짜리 지폐 한 장이 들어 있는 봉투를 손에 쥐고 말했다. "이건 그저..." 그녀는 그 뜻을 알아차리자, 눈살을 찌푸리고 머리를 흔들면서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지 말고 받아둬." 하고 그는 더듬더듬 말하면서 그녀의 꽉 낀 옷에다 봉투를 쑤셔넣 고는 화상이라도 입은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신음하면서 자기 방으로 뛰어갔다. 그러곤 오랫동안 방 안을 왔다갔다 걸어다녔다. 몸을 비틀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그 날 밤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나면 몸에 통증이라도 오는 듯이 신음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할 수 없잖아? 세상은 언제나 그렇고 그런 것이다. 센보크의 말을 들으면 그와 여자 가정 교사와도 그랬고, 또 숙부 그리샤도 그랬고, 아버지도 시골에 있는 동안 시골 여 자하고 관계하여 지금도 살아 있는 미첸카라는 사생아를 낳지 않았나? 모두들 그렇게 하는 데 나라고 그렇게 한다고 나쁠 게 뭐 있어.' 이렇게 자기 자신을 위로하려 했으나,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날 밤의 회상은 낙인 찍듯 그의 양심을 괴롭혔다. 그의 마음 가장 깊숙한 데에서는 자신의 처사가 추악하고 비겁하며, 잔인한 짓이라는 것 을 알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니 남을 비난할 수 없을뿐더러 세상 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하물며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처럼 자기를 훌 륭하며 고상하고 관대한 청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 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그것은 그녀와의 사건을 잊어버리면 된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그가 이제 들어가려는 생활-새로운 환경, 친구, 전쟁 등-은 모두 이 목적에 도움이 되었 다. 그래서 네플류도프는 날이 갈수록 점점 그 일을 잊어버렸고, 나중에는 깨끗이 잊어버리 고 말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한번 그녀를 만나 보려고 고모네 집에 들렀을 때 카추샤가 이미 없음을 알았다. 그녀는 그가 떠난 뒤 해산을 하려고 집을 나가서 어디선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 그 후 고몯들의 귀에 들어온 소문으로는 그녀가 완전히 타락해 버렸다고 했다. 이런 소 식을 듣고 그는 몹시 가슴이 아팠다. 달수를 따져 보니 그녀가 낳은 아이를 자기 아이 같기 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고모들은 그녀가 타락한 것은 자기 어미를 닮은 바람기 때문 이라고 했다. 고모들의 이런 판단은 자기를 변명해 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가벼웠다. 그래도 처음에는 카추샤와 아이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나중에는 그런 것을 생각하기조차 괴롭고 창 피한 일이기 때문에 찾아보려는 노력도 않고, 차츰 자기 죄도 잊어버리고 그녀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의 이 놀라운 발생 사건은 그에게 모든 것을 회상시키고, 지난 10년 동안 이 러한 죄를 양심에 지닌 채 안일하게 살아 올 수 있었던 자기의 잔인성과 비열함을 스스로 인정토록 요구했다. 그러나 네플류도프는 이것을 자인하는 인간이 되기엔 아직 거리가 멀었 다. 그래서 지금의 그로서는 이제 와서 당장이라도 모든 것이 폭로되지나 않을까, 그녀와 그 녀의 변호인이 뭇 사람들 앞에서 모든 사실을 밝혀 자기에게 모욕이나 주지 않을까 초조해 하고 있었다. 법정에서 나와 배심원실로 들어가면서 네플류도프의 마음은 이러한 상태에 있었다. 그는 창가에 앉아서 주위에서 주고받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담배만 연거푸 피우고 있었다. 그 쾌활한 상인은 분명히 상인 스멜리코프의 바람기에 공감하고 있는 듯 했다. "그만하면 정말 시베리아식으로 잘 놀아났다고 할 수 있지. 그 친구 계집 추려 내는 안목 만은 상당히 높아." 배심원장은 모든 문제는 감정에 달렸다는 말을 했다. 표트르 게라시모비치는 유대인 점원 과 농담을 하면서 큰 소리로 웃어 대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묻는 말에 대해서는 한두 마 디 짤막하게 대답하면서 그저 조용히 있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정리가 절룩거리면서 배심원들을 다시 법정으로 출정하도록 전하러 왔을때 네플류도프는 자기가 재판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재판을 받으러 끌려가는 듯 몹시 당황했다. 마 음속으로 자기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치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습관 대로 침착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단상에 올라가 배심원장의 자리에서 두 번째의 자기 자리 에 다리를 꼬고 앉아 코안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피고들도 역시 법정 밖으로 끌려나갔다가 다시 불려왔다. 법정에는 새 얼굴들이 보였다. 증인들이었다. 네플류도프는 마스로바가 실크와 벨벳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한 뚱뚱한 부인에게 도저히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는 듯이 몇번이 고 그쪽을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그 부인은 머리에 커다란 나비 리본으로 장식된 꼭 뒤 높 은 모자를 쓰고 팔꿈치까지 드러낸 팔을 우아한 손가방에 걸치고 칸막이 난간 옆 첫째 줄에 앉아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여자는 마슬로바가 있었던 유곽의 포주이며 증인의 한 사람이었다. 증인들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이름과 종교 등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증인들에게 선 서를 시켜야 할지 어떨지 의논한 뒤, 아까 그 늙은 사제가 가까스로 다리를 질질 끌면서 다 시 들어왔다. 그리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실크 제의 앞에 걸린 금빛 십자가를 매만지면서 여 전히 침착한 태도로, 자기는 정말 유익하고 중대한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증인들 과 감정인에게 선서를 시켰다. 선서가 끝나자 유곽 포주인 키타예바만을 남기고 모든 증인 들을 퇴장시켰다. 그녀는 이 사건에 관해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을 심문 받았다. 키타예바는 어색한 웃음을 띠면서 말끝마다 모자를 쓴 머리를 끄덕이며 독일식 악센트로 요령 있게 자 세히 진술했다. 그녀의 진술에 의하면 전부터 낯익은 여관집의 하인 시몬 카프틴킨이 돈 많은 시베리아 상인을 위해서 여자를 데리러 자기 유곽으로 찾아왔다. 그래서 그녀는 류바샤(마슬로바를 말함)를 보내 주었다. 얼마 후에 류바샤는 상인과 함께 돌어왔다. "그 상인은 매우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키타예바는 가볍게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우리집에 와서도 계속해서 술을 마셨으며, 아이들에게도 한턱 냈지요. 그러는 동안 돈이 다 떨어져 버렸으므로, 자기가 '홀딱 반한' 류바샤를 여과의 자기 방으로 보냈어요."하고 피 고 쪽을 흘끔 바라보며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이 때 마슬로바가 생긋 웃는 듯이 느껴졌다. 이 미소는 그에게 혐오감을 안 겨 주었다. 말할 수 없는 혐오와 동정이 뒤섞인 이상야릇한 감정이 그의 가슴속에서 회오리 쳤다. "그럼, 증인은 마슬로바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소?" 마슬로바의 관선 변호사인 판사보가 얼굴을 붉히면서 딱딱하게 물었다. "말할 수 없이 좋은 애지요."하고 키타예바는 답변했다. "교양도 있고, 훌륭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프랑스어도 읽을 줄 안답니다. 가끔 술을 지나치게 마시는 일은 있습니다만 그래도 탈선할 정도로 정신을 잃은 적은 없었어요. 정말 좋은 아이입니다." 카추샤는 여주인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배심원석으로 시선을 옮겨 훑어보다가 네플류 도프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심각해지더니 험악해졌다. 험악한 한쪽 눈 은 곁눈질로 보았다. 이상하게 바라보는 두 눈은 꽤 오랫동안 네플류도프를 보고 있었다. 그 는 겁이 덜컥 났으나, 흰자위가 유달리 많은 사팔눈으로부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에게 는 얼음이 깨지는 소리며, 안개며, 특히 새벽녘에 떠올라 무엇인가 희끄무레하게 비춰 주던 초승달과 함께 그 괴로운 밤의일이 되살아났다. 그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의 너머 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한 까만 두 눈은 그 때의그 괴로움을 생각나게 했다. '날 알아봤구나...'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네플류도프는 심한 충격이라도 받은 듯이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녀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재판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 빨리 끝났으면 좋겠군.'하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 그의 기분은 사 냥 갔을 때의 기분과 흡사했다. 상처를 입은 새의 숨통을 끊어야만 했을 때 경험한, 몸서리 쳐지고 불쌍하고 괴로운 감정과 비슷하였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새가 불치 주머니 속에 서 버둥거리고 있으면 불쾌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해서 한시바삐 죽여서 잊어버리고 싶은 법이다. 이러한 것은 지금 증인들의 진술을 들으면서 네플류도프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 복잡한 감 정이었다. 19 공교롭게도 재판은 오래 끌었다. 증인들과 감정인에 대한 개별 심문이 끝나고 노상 거만 스러운 표정을 짓는 검사보와 변호인들의 쓸데없는 질문도 끝나자, 재판장은 배심원들에게 증거물을 검사하도록 제의했다. 증거물이란 아마도 굵은 둘째손가락에 끼고 있었으리라고 여겨지는 커다란 꽃무늬 다이아몬드 반지와 독약을 분석한 시험관이었다. 증거물은 하나같 이 봉인되어 조그마한 딱지가 붙어 있었다. 배심원들이 그 증거물을 검사하려고 할 때 검사보가 다시 일어나서, 증거물을 검사하기 전에 의사의 검시 보고를 낭독하도록 요구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사건을 처리해서 그 스위스 여자인 가정 교사한테로 가고 싶었던 재판장은 그런 서류의 낭독은 지루하기만 할 뿐 아니라 식사 시간을 지연시키는 결과밖에는 아무 효과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검사보가 낭독을 요구하는 것은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으므로 동의했다. 서기는 서류를 끄집어 내어, 문제의 L자와 R자의 발음이 분명치 않은 맥빠진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외부 검진에 따라서 판명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페라폰트 스멜리코프의 신장은 6피트 5인치임. "꽤 덩지가 큰 사람이었군."하고 상인은 동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네플류도프에게 속삭였 다. 2. 외모로 본 연령은 40세 가량으로 추청됨. 3. 시체는 부어 있었음. 4. 살결음 푸르고 군데군데 검은 반점이 있었음. 5. 피부 표면에는 크고 작은 물집이 생겨 있었고, 여러 군데가 터져서 커다란 헝겊 조각처 럼 늘어져 있었음. 6. 머리칼은 밤색이고 숱이 많으며, 손으로 만지면 쉽게 빠졌음. 7. 눈은 눈구멍에서 튀어나왔고 각막은 흐려 있었음. 8. 콧구멍, 귀, 구강에서 거품을 품은 혈장성 점액이 스며나오고, 입은 벌어져 있었음. 9. 얼굴과 흉부가 부어올랐기 때문에 목을 거의 식별할 수 없었음. 등등... 이렇게 하여 4페이지 27개 항목에 걸친 검시 보고는 계속되었다. 그것은 이 거리에서 방 탕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부어올라서 썩어간, 보기만 해도 무서운, 크고 뚱뚱한 상인의 시체에 관한 상세한 외부 검시 보고서였다. 네플류도프가 막연히 느끼고 있던 혐오감은 이 검시 보고의 낭독에 의해서 한층 더 커졌다. 카추샤의 생활, 콧구멍에서 흘러나온 혈장성의 액체, 눈구멍에서 튀어나온 눈알, 그녀에 대한 상인의 행동, 이런 것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것으로 생각되어 그는 사방팔방에서 그런 것들에 둘러싸여 파먹히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 다. 외부 검시의 낭독이 겨우 끝났을 때 재판장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이제야 끝났다고 생 각하면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서기는 곧 이어 내부검시 보고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재판장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한쪽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괴고는 눈을 감았다. 네플류도프 옆에 앉아 있는 상인은 간신히 졸음을 참으면서 가끔 가다가 꾸벅거리고 있었다. 피고와 그 뒤에 서 있는 헌병들은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내부 검시에 의해서 판명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두 개골의 표피는 용이하게 두 개골에서 벗겨졌으며, 피하 출혈의 흔적은 전연 인정할 수가 없었음. 2. 두 개골은 보통 두께이며 상처는 없음. 3. 견고한 뇌막의 두 곳에서 변색한 작은 반점이 있으며, 크기는 약 4인치, 뇌막 그 자체 는 윤기 없는 창백한 빛을 나타내고 있음. 등등 기타 13개 항목으로 되어 있었다. 그 후에 입회인들의 이름과 서명이 계속되고 마지막으로 의사의 의견서가 첨부되었다. 그 의견서에 의하면 해부할 때 발견되어 조서에 기입된 위 및장과 신장의 작은 부분에서 볼 수 있는 변화는 술과 함께 위 속으로 들어간 독물 작용이 스멜리코프의 사인이 되었다는 확신 을 갖고 결론을 내리는 근거가 되었다. 위장의 상태에서 결정된 변화만으로써는 어떠한 독 물이 위 속으로 들어갔는지 단언하기 곤란하지만 이 독물이 술과 함께 위 속으로 들어갔는 지 단언하기 곤란하지만 이 독물이 술과 함께 위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스멜리코프의 위 속에서 다량의 술이 발견되었다는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었다. "아마 대단한 주호였나 보군." 이내 잠이 깬 상인이 이렇게 속삭였다. 이 조서의 낭독은 약 한 시간이나 계속되었으나, 그래도 검시보는 만족하지 않았다. 조서 의 낭독이 끝났을 때 재판장은 그에게 말했다. "내장 해부 결과 보고는 낭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아니, 나는 그해부의 결과도 낭독해 주길 요청합니다." 검사보는 비스듬히 몸을 조금 일 으키면서 재판장 쪽은 보지도 않고 단호히 말했다. 그 말투에는, 이 낭독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의 권리이며 그 권리를 포기할 수 없다. 만일 거절한다면 상소라도 하겠다는 기세가 엿 보였다. 진한 턱수염에 사람이 좋아 보이고 눈꼬리가 처진 위카타르를 앓고 있는 배석 판사 는 피로를 느꼈음인지 재판장에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읽습니까? 시간만 오래 끌 뿐입니다. 이런 풋내기 관리는 깨끗이 쓸어 버릴 줄은 모르고, 청소하는 데 시간만 잡아먹는단 말이야." 금테 안경을 쓴 배석 판사는 아무 말도하지 않고 어둡고 담담한 눈초리로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아내한테서나 자기 생활에서나 좋은 일이 라곤 아예 기대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보고서의 낭독이 시작되었다. "188X년 2월 15일, 아래에 서명한 본직은 법의부 위임 제 638호에 의하여."하고 서기는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잠을 쫓아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한층 목소리를 돋 워서 단호한 어조로 읽기 시작했다. 법의부 검시관보의 입회하에 실시된 내장 검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우측 폐와 심장(6파운드들이 유리병 속에 들어 있음). 2. 위의 내용물(6파운드들이 유리병 속에 들어 있음). 3. 위(6파운드들이 유리병 속에 들어 있음). 4. 간장, 비장, 신장(3파운드들이 유리병 속에 들어 있음). 재판장은 낭독이 시작되자, 배석 판사 중의 한 사람에게 몸을 굽히고 무엇인가 귓속말로 속삭인 다음, 이번에는 또 한 사람의 배석 판사에게 소곤거리며 동의를 얻자, 여기서 낭독을 중지시켰다. "법정은 보고서의 낭독이 필요없다고 인정합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서기는 서류를 챙기면서 입을 다물었으며, 검사보는 화가 난 듯이 무엇인가 기입하고 있 었다. "배심원 여러분, 증거물을 보셔도 좋습니다."하고 재판장이 말했다. 배심원장과 배심원 중 두세 사람은 일어서서 자기 손을 어디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난처해 하면서 테이블 곁으로 걸어갔다. 반지, 유리, 시험관 등을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상인 은 반지를 자기 손가락에 끼어 보기까지 했다. "흠, 손가락도 꽤 굵은데." 그는 자기 자리로 돌아오면서 말했다. "커다란 오이만하군요." 하고 덧붙였다. 독살당한 상인을 옛날 얘기에 나오는 호걸처럼 상상하고, 혼자 재미있어하는 모양이었다. 20 증거물 검사가 끝나자, 재판관은 심리의 종료를 선언한 뒤, 한시바삐 마무리짓고 싶은 심 정에서 휴정 시간도 없어 검사의 논고를 지시했다. 검사보도 인간인 이상 담배도 피우고 싶 을 것이며, 또 여러 사람의 사정도 알아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검사보는 자기 자신에게도, 또 남에게도 동정을 베풀지는 않았다. 검사보는 천성이 우둔한데다가 불행하게 도 중학교를 졸업할 때 금메달을 탄 외에도 대학에서는 로마법에 규정된 용역권에 관한 논 문으로 상을 받기도 해서 형편 없이 자만하고 오만했다. 거기에다 여자 문제에도 성공해서 더욱 그렇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그는 형편 없는 바보가 되어 버렸다. 자기에게 논고가 허용되었을 때, 그는 벌떡 일어서서 금몰로 수놓은 제복에 짐짓 의젓한 태도를 보이면서, 두 손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피고들의 시선을 피해 법정 안을 한 바퀴 훑어본 다음 입을 열었다. "배심원 여러분, 이제 여러분의 재량에 맡겨진 사건은 본관의 견해에 따르자면, 매우 특이 한 범죄라고 사료됩니다." 그는 조서와 보고서가 낭독되고 있는 동안에 논고를 준비해 두었 다. 검사보의 논고는 그 자신의 의견에 의한다면, 이미 명성을 떨친 여러 변호사들이 한 바 있는 유명한 변론과 마찬가지로 으레 훌륭한 사회적 의의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방 청객이라야 고작 세 명의 여자-재봉사와 식모와 시몬의 누이동생, 그리고 마부가 한 사람 있을 뿐 이었지만,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저 명성을 떨친 선배 변호사들도 처음에 는 다 마찬가지였다. 검사보가 신조로 삼고 있는 것은 항상 자기 직업의 정상에 서 있겠다 는 것, 즉 범죄의 심리적 의미를 깊숙이 연구하고, 사회의 병폐를 폭로하겠다는 것이었다.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특색 있는, 말하자면 세기말적 범죄를 눈 앞에 보고 계십 니다. 이를테면 현대 우리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부패와 참상이라는 특수 양상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심문의 신랄한 정의 아래 뚜렷이 폭로되고 있습니다." 검사보는 한편으로 자기 머리로 할 수 있는 멋진 문구란 문구는 모조리 생각해 내려고 애 쓰면서, 또 한편으로는-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지만-잠시도 쉬지 않고 줄곧 한 시간 15분 동안을 청산 유수 같은 웅변을 토하려고 애쓰면서, 아주 장황하게 지껄여 댔다. 꼭 한 번 말이 막혀 오랫동안 침을 삼키고 있었으나, 곧 정상을 되찾고 더욱 열띤 웅변을 토하면서 잠시 동안의 정체를 만회하였다. 그는 가끔 배심원들을 바라보고 처음에는 한 다 리에, 그러다가 또 다른 다리에 힘을 주면서 다정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하면 서, 때로는 수첩을 들여다보며 나지막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바꾸었다가, 때로는 청중과 배심 원을 번갈아보면서 큰 소리로 폭로하는 말투로 열변을 토하였다. 다만 뚫어질 듯 그를 지켜 보고 있는 세 사람의 피고 쪽으로는 한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논고 속에는 그 당 시 그들 사회에 유행되었고, 지금도 과학 지식의 최신 용어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새로운 어휘들이 총망라되었다. 유전성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선천적 범죄성도 나오고, 롬브로소(이 탈리아의 형법학자)도, 타르트(프랑스의 사회학자)도, 심지어 데카당스까지 서슴없이 튀어나 왔다. 검사보의 정의에 의하면, 상인 스멜리코프는 성실한 성품을 지닌, 육체적으로 힘세고, 뱃 심도 큰 러시아인의 전형적인 인물로서 너무나 남을 잘 믿는 관대한 성격 때문에 몹시 타락 한 사람들 손에 빠져 그 희생이 되었다는 것이다. 시몬 카르틴킨은 농노제의 인습적 산물로서 교육도 못 받고 뚜렷한 사상도 없고 종교조차 도 갖지 않은 보잘 것 없는 인간이다. 예브피미야는 그의 정부로서 유전의 희생자이다. 그녀 에게는 타락된 인간의 여러 가지 특성이 배어 있다. 그러나 범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마슬로바로서, 그 여자야말로 가장 퇴폐적인 최저급형 의 한 표본이라고 했다. "이 여자는,"하고 검사보는 그녀 쪽은 보지도 않고 말했다. "방금 이 법정에서 유곽의 여 주인한테서 들은 바와 같이 교육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읽고 쓸 줄 알 뿐만 아니라, 프랑스 말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고아이기 때문에 아마 범죄의 싹을 선천적을로 타고 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교양 있는 귀족 가정에서 양육되었기 때문에 건실한 노동으로 생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은인을 저버리고 욕정에 몸을 맡겼으며, 더구나 그 만족을 채우기 위해 사창가에 모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녀는 동료들보다 단연 뛰어난 존재 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교육을 받았다는 점도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녀에게는 배심원 여러분도 이 자리에서 여주인의 말을 들어 아시다시피 최근의 학자들, 특히 샤르코 일파에 의하여 연구되어 최면의 암시력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신비한 기능으로 사람들을 농락하는 비결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이 힘을 이용해서 러시아 민화 중의 용사 가드 코처럼 선량하고 남을 잘 믿는 유복한 상인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의 신뢰를 얻은 다음, 처 음에는 돈을 훔치려고 했던 것이 끝내는 그의 생명을 빼앗기 위해 그 신뢰를 악용했던 것입 니다." "아무래도 저 친구, 비약이 좀 심한데."하고 재판장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엄수한 표정을 하고 배석 판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한심한 친구군!"하고 엄숙한 표정의 배석 판사가 내뱉었다. "배심원 여러분," 하고 검사보는 가느다란 허리를 점잖게 움직이며 계속했다. "이들 피고 의 운명은 여러분의 수중에 달려 있습니다만, 사회 전체의 운명 또한 여러분들의 수중에 쥐 어져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판결은 사회에 크나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아 무쪼록 이 범죄의 의의를 잘 이해하시고 마슬로바와 같은 이른바 병리적 존재에 의하여 사 회가 받고 있는 위험을 이해하시어, 그 전염을 예방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의 건전 무구한 요소를 감염과 멸망으로부터 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기 스스로도 눈앞에 다다른 판결의 중대성에 압도된 것처럼, 검사보는 분명히 자기 자 신의 논고에 도취도기라도 한 듯 자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논고는 웅변상의 수식을 빼버리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마슬로바는 교묘하게 상 인의 신용을 얻은 다음, 돈을 꺼내기 위해 열쇠를 가지고 여관으로 갔으며, 돈을 몽땅 가지 려고 했으나 예브피미야에게 발각되자 부득이 그들과 나누어 가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후 증거를 없애기 위해 상인과 함께 다시 여관으로 와서 거기서 그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검사보의 논고가 끝나자, 변호인석에서 풀을 먹여 빳빳한 흰 와이셔츠가 가슴을 커다랗게 반원형으로 드러낸 연미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일어서서 힘찬 어조로 카르틴킨과 보치코바 의 변호를 시작했다. 그는 그들이 300루블로 의뢰한 변호사였다. 변호사는 이 두사람을 옹호 하고 모든 죄를 마슬로바에게 뒤집어씌웠다. 그는 마슬로바가 돈을 훔쳤을 때, 보치코바와 카르틴킨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피고의 진 술을 허위하고 부정하면서 독살 용의자인 여자의 진술 따위는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주 장했다. 2500루블의 돈은 정직하고 근면한 두 사람이 일해서 번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했 다.그들은 여관에 묵고 있는 손님들로부터 하루 3루블 또는 5루블씩 팁을 맏고 있다는 것이 다. 그리고 상인이 가지고 있던 돈은 마슬로바가 훔쳐서 누구를 주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녀는 비정상인 상태에 있었으므로 분실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했고, 어쨌든 독살은 마슬로 바 한 사람의 범행이라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변호사는 카르틴킨과 보치코바를 금전 절도죄에 관해서는 무죄를 인 정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설사 그들의 절도죄를 인정한다손치더라도, 독살에는 가담치 않았으며, 또한 범행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결론으로서, 변호인은 검사보의 약점을 찌르기 위해, 유저의 주체에 관해 친절히 가르쳐 준 검사보의 고견은 이 문제에 관한 과학적인 설명이 될지는 모르나, 이번 경우에는 적합하 지 않은데, 왜냐하면 보치코바는 부모를 알수 없는 사생아이기 때문이라고 공박했다. 검사보는 화난 표정으로 뭔가 자기 좋이에 적어 넣고는 경멸하는 듯한 얼굴을 하며 어깨 를 으쓱했다. 다음엔 마슬로바의 변호인이 일어서서 겁먹은 듯이 말을 더듬으며 변호하기 시작했다. 그 는 마슬로바가 절도에 가담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고 오직 그녀는 스멜리코프를 독살한 의 도만은 결코 없었으며, 가루약을 준 것도 사내가 잠들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고 역설했다. 그는 여기서, 웅변의 묘미를 보이려고, 마슬로바는 맨 처음 어떤 남자의 유혹에 빠져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인데, 그 남자는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그녀만이 타락의 고통을 짊어지게 되었다고 하면서, 대국적인 견지에서의 이 개관론을 시도했으나 그의 이런 심리적 영역에 속하는 논조는 너무 지루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가 남성의 잔인성과 여성의 무력 한 지위에 대하여 더듬거리면서 논하기 시작하였을 때 재판장은 그의 입장을 도와 주려는 심정에서 사건의 본질로부터 벗어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이 변호가 있은 후, 다시 검사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첫 번ㅉ재 변호인의 비난에 대해서 유전에 관한 자기의 학설이 옮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설사 보치코바가 부모 를 모르는 사생아일지라도 유전학설의 진리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전 법칙 은 과학에 의해서 확립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엔 우리는 유전에서부터 범죄의 원인을 추론 할 수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슬로바가 어떤 가상적인(그는 이 가상적이라는 말을 비꼬는 투로 발음했다.) 유혹자에 의하여 타락하게 되었다는 변호인의 가정에 대해서는 모 든 자료가 오히려 그녀 자신이 그 많은 희생자의 유혹자였음이 드러나고 있다고 잘라 말하 고 나서 그는 의기양양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 다음에는 피고들의 진술이 허용되었다. 예브피미야 보치코바는,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며, 일절 관계가 없다고 되풀이하고 모든 책 임은 마슬로바에게 있음을 끈덕지게 우겨 댔다. 한편 시몬은 몇 번이고 다음과 같이 되풀이 하기만 했다. "아무리 말씀하셔도 저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저는 결백합니다." 마슬로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변명을 위해 하고 싶은말이 있으면 하라고 재 판장이 권해도 그녀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다가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짐승처럼 여러 사 람을 둘러보았을 뿐 곧 시선을 떨구곤 큰소리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왜 그러시오?" 갑자기 네플류도프가 지른 이상스런 소리를 듣고 옆 자리의 상인이 이렇 게 물었다. 그것은 복받쳐 오르는 흐느낌을 참는 소리였다. 네플류도프는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자기가 현재 놓여 있는 처지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 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간신히 참고 있는 흐느낌과 솟구치는 눈물을 신경 쇠약 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눈물을 감추려고 코안경을 끼고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었다. 만 일 여기 이 법정에서 과거 자기가 저지른 행실이 드러나게 된다면 자기는 커다란 모욕을 받 게 되리라는 두려움이 그의 가슴속에서 눈뜨기 시작한 양심의 소리를 억눌러 버렸다. 처음 에는 이 두려움이 그의 마음속의 무엇보다도 강했다. 21 피고들의 최후 진술이 끝난 후, 자문 질의 사항의 제출 형식에 관해서 당사자간의 협의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며, 그것이 결정되자 재판장이 요약된 사건을 개진했다. 사건을 개진하기에 앞서 그는 분명하고 거침없는 말투로 배심원들에게, 강도는 강도이며, 절도는 절도이고, 폐쇄된 장소에서의 약탈은 폐쇄된 장소에서의 약탈이며, 개방된 장소에서 의 약탈은 개방된 장소에서의 약탈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 설명을 하면서 특히 그는 자주 네플류도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 사람이야말로 자기가 말하는 중대한 사실 을 이해하고 동료들에게 이해시켜 주리라는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배심원 일 동이 충분히 이 사실을 납득했다고 짐작했는지 이번에는 또 다른 사실을 부연하기 시작했 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살인이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말하며, 따라서 독약 을 먹이는 것은 분명한 살인 행위라는 것이었다. 이윽고 이 사실도 역시 배심원들에게 이해되었다고 생각하자, 이번에는 절도와 살인이 동 시에 행해졌다면 그 때는 이런 형식의 범죄를 절도 살인죄를 구성한다고 설명했다. 재판장 자신도 되도록 빨리 끝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스위스 여자가 이미 기다리고 있 을 시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직무에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에 일단 말을 꺼 내기 시작한 이상 도중에 말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배심원들을 향해서 만약 여러분들이 피고를 유죄라고 생각한다면 유죄로 인정할 수 있고, 또 만일 어떤 점에 있어서 는 유죄라고 생각하더라도 다른 점에 있어서 무죄라고 한다면, 그대로 한편으로는 유죄, 또 한편으로는 무죄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여러분은 이 권리를 부여받은 대신, 이것을 신중하게 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 는 이 밖에도 만일 여러분이 제출된 자문 질의서에 대해서 긍정적인 회답을 주면 여러분은 그 자문에 포함된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지만, 만일 여러분이 자문에 제출되어 있는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점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으나, 시계를 보니 벌써 3시 5분 전이었으므로 곧 사건 요약에 들어갔다. "본 사건의 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하고 그는 서두를 꺼냈다. 그리고 이미 변호인이나 검사보나 증인들에 의해서 몇 번이나 언급된 바를 되풀이 했다. 재판장은 계속해서 말했다. 양 옆에 앉아 있는 배석 판사들은 아주 의미 심장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이 사건 요약은 참 훌륭하다, 즉 마땅히 갖추어야 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지루해서 가끔 시계를 들여다보곤 했다. 검사보도, 재판소의 직 원들도,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역시 그에 동감이었다. 재판장은 사건의 요약을 끝마쳤 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다 진술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재판장은 좀처럼 자기의 발언권 을 양보하지 않았다. 좌중을 압도하는 듯한 어조의 자기 목소리를 듣는 것이 유쾌했기 때문 이었다. 그는 배심원에게 부여된 권리가 얼마나 중대한가에 대해서, 또 이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서는 주의 깊고 신중해야 하며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들은 선서를 했다는 사실, 그들은 사회의 양심이라는 것, 배심원실의 비밀은 신성해야 한다는 것 등등에 대해서 몇 마 디 더 주의해 둘 필요를 느꼈다. 마슬로바는 재판장이 사건 요약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의 말을 한 마디도 빼놓지 않겠다는 듯이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칠 염려가 없어졌으므로 줄곧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았을 때, 처음에는 헤어져 있는 동안에 생긴 외부의 변화에 놀라게 되지만, 차츰 그 얼굴이 몇 해 전의 모습으로 되살아나 서 달라졌다고 생각되던 점도 없어지고, 마음의 눈앞에는 그 사람만이 가지는 특유한 정신 적 개성의 표정이 떠오르게 되는 법이다. 지금 네플류도프의 마음속에는 바로 이러한 현상 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죄수복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모이 나고 가슴이 더욱 풍만해지고 턱에 살이 찌기 는 했지만, 이마와 관자놀이에 잔주름이 생기기는 했지만, 눈이 좀 부어 있기는 했지만 틀림 없는 카추샤였다. 부활절 때 삶의 충만한 기쁨으로 빛나는 미소를 띠고 쳐다보던 그 카추샤 였다. '그래, 이 얼마나 놀라운 우연이냐! 이 사건이 하필이면 내가 재판소에 나오는 날에 걸리 다니. 지난 10년 동안 어디서도 만나지 못하다가 지금 여기 이 피고석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다니! 도대체 이 사건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 어서 빨리 끝나 버렸으면...' 그는 아직도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가책의 소링에 승복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다만 우연이며 곧 그의 생활을 파괴하는 일 없이 지나가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자 신이, 마치 방 안에서 오물을 흘렸다고 해서 주인에게 목덜미를 잡혀 자기가 흘려 놓은 오 물 속에 콧등을 틀어박히는 강아지처럼 생각되었다. 강아지는 낑낑거리면서 뒷걸음치며, 자 기가 흘려 놓은 오물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멀어져서 그것을 잊어버리려고 하고, 주인은 절 대로 놓아 주려 하지를 않는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네플류도프도 자기가 저지른 추잡 한 행위를 충분히 느끼고 주인의 억센 손도 느끼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저지른 행위 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 주인의 존재조차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눈앞 에 놓여 있는 사실이 자기의 소행이라는 것을 아직도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지 않는 사정 없는 억센 손이 그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예감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여전히 허세를 부리고, 습관대로 다리를 꼬고 앉아 코안 경을 만지작거리면서 첫째 줄 둘째 번에 있는 자기 자리에 당당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그는 마음속으론 이 행위뿐만 아니라 자기의 게으르고 방종하며, 잔인하고 이 기적인 생활 전체가 무자비하고 비열하고 속되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12년간이나 자 기의 이러한 범행은 물론이고, 그 후의 생활까지도 어떤 기적에 의해서 그의 눈을 가려왔던 무서운 막이 벌써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막 뒤에 감춰 왔던 것이 조금씩 들여다보이는 듯했 다. 22 드디어 진술을 끝낸 재판장은 점잖게 자문 질의서를 집어 앞으로 가까이 나온 배심원장에 게 건네 주었다. 배심원들은 마침내 퇴정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무엇이 부끄러운지 몸둘 바를 몰라하며 줄줄이 뒤이어 배심원실로 갔다. 그들 뒤로 문이 닫히자, 헌병 하나가 그 문에 다가서서 칼집에서 군도를 빼어 어깨에 세우고 문 옆에 보초를 섰다. 판사들도 모 두 퇴정했고, 피고들도 끌려나갔다. 배심원들은 배심원들로 돌아오자마자 아까처럼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법정의 자 기 자리에 앉았을 동안 모두들 뭔지 모르게 느끼고 있던 부자연스럽고 어색했던 태도는 배 심원 협의실에 들어가 담배에 불을 붙이기 시작하자 씻은 듯이 사라졌고,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여자에겐 죄가 없어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휩쓸려 들어간 것뿐이죠." 사람좋은 상 인이 말했다. "관대히 봐 줄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심의하자는 겁니다." 배심원장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개인 감정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재판장의 사건 요약은 참 훌륭하더군요."하고 대령이 말했다. "쳇, 훌륭하다고요? 난 졸음이 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슬로바가 공모하지 않았다면 여관 하인들이 어떻게 돈이 있다는 것을 알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하고 유대인 점원이 말했다. "그럼, 당신 생각엔 그녀가 훔친 것 같소?" 누군가가 물었다.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선량한 상인이 외쳤다. "모두 그 핏발 선 눈을 한 늙 은 요부가 한 짓이에요." "한 마디로 대단한 자들이군."하고 대령이 말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방에 안 들어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여자를 꽉 믿고 계시는군요. 나는 그런 계집의 말은 죽어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당신이 믿든 안 믿든 그건 아무 상관없지 않소?"하고 점원이 말했다. "열쇠를 그녀가 갖고 있었거든요." "갖고 있었다고 해서 그게 무슨 죄가 됩니까?" 상인이 대꾸했다. "그럼 반지는?" "그것은 그녀가 다 말하지 않았소?" 상인이 다시 소리쳤다. "그 상인이란자는 성미가 대 단한데다가 얼근한 판에 그녀를 때린 겁니다. 그러곤 불쌍해진 거죠. 뻔해요. 울지 말라고 달래기 위해서 준 거겠지요. 뭐 키가 6피트 5인치나 되고 체중은 35관이나 나가는 위인이라 니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하고 표트르 게라시모비치가 말을 가로챘다. "문제는 그녀가 모든 일을 꾸몄느냐, 아니면 하녀가 했느냐 하는 점입니다." "하녀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열쇠는 그녀가 갖고 있었으니까요." 두서 없는 문답이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저 잠깐, 여러분!"하고 배심원장이 말했다. "테이블에 앉아서 의논하기로 합시다. 자, 어서." 그는 대표석에 앉으며 말했다. "그런 계집은 하나같이 추잡하지."하고 점원은, 마슬로바가 주범이라는 자기 의견을 뒷받 침 하기 위하여 어떤 매춘부가 가로수길에서 자기 친구의 시계를 훔친 이야기를 늘어놓았 다. 대령은 이 틈을 타서 은제 사모바르(러시아에서 사용되는 물주전자)를 도둑 맞았다고 하 는 더욱 놀랄 만한 사건을 이야기했다. "여러분, 자문 질의 사항에 대해서만 토의해 주십시오." 배심원장이 연필로 책상을 두드리 면서 말했다. 모두 입을 다물었다. 자문 질의 사항은 이러했다. 1. 크라피벤스키 군, 보로키 마을의 농민 시몬 페트로프 카르틴킨, 33세, 188X년 1월 17일 N시에서 상인 스멜리코프의 돈을 절취할 목적으로 다른 두 사람과 공모해서 살해를 기도하 고 독약이 든 코냑을 그에게 주어 스멜리코프를 죽인 후 약 2500루블과 다이아몬드 반지를 절취한 데 대해서 유죄로 인정하는가? 2. 평민 예브피미야 이바노브나 보치코바, 43세, 제 1문과 동일한 범행에 있어서 유죄로 인정하는가? 3. 평민 예카테리나 미하일로바 마슬로바, 27세, 제 1문과 동일한 범행에 있어서 유죄로 인정하는가? 4. 피고 예브피미야 보치코바가 제 1문의 범행에 있어서 무죄라고 한다면, 188X년 1월 17 일 N시의 마브리타니야 여관에서 일하면서 동 여관의 숙박객인 스멜리코프의 방에 있는 가 방으로부터 남몰래 2500루블의 돈을 절취하려고 자기가 가지고 온 열쇠로 그 자리에서 가방 을 열어 위에서 말한 목적을 달성한 것을 무죄로 볼 것인가? 배심원장은 제 1문을 낭독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즉시 대답이 나왔다. 모두는 카르틴킨이 독살과 절도에 가담한 것을 인정하고 '유죄'라는 데 동의했다. 다만 늙은 직공 조합원 한 사람만이 카르틴킨을 유죄로 하는 데 반대하면서 모든 문제에 대해서 변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배심원장은 이 노인이 이해를 못해서 그러는 줄 알고, 카르틴킨과 보치코바가 모든 점으 로 보아 틀림없이 유죄라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늙은 직공 조합원은 자기도 잘 알 고 있지만 동정르 베푸는 데 나무랄 게 무엇이냐고 대꾸했다. "우리들 자신은 아니니까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보치코바에 관한 제 2문에 대해서는 한참이나 승강이를 하다가 마침내 독살에 가담한 뚜 렷한 증거의 불충분으로 무죄로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서는 특히 그녀의 변호사가 강조 했다. 상인은 마슬로바의 무죄를 변호하기 위해서 보치코바야말로 모든 일의 주모자라고 주장했 다. 다른 배심원들도 그에 찬성했으나, 배심원장만은 어디까지나 공정한 태도를 지키기 위하 여 그녀를 독살 공모자로 인정할 만한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오랜 논의 끝에 배심원장의 의견에 모두 합의하고 말았다. 보치코바에 관한 제 4문에 있어서는 '유죄'로 결정을 내렸으나 직공 조랍원의 주장으 로 '단, 정상을 참작할 것'이라는 말이 첨가되었다. 마슬로바에 관한 제 3문에 있어서는 논쟁이 불붙듯 벌어졌다. 배심원장은 마슬로바가 절 도와 독살에 대해 모두 유죄라고 주장하였는데, 상인은 이에 반대했다. 대령과 점원과 늙은 직공 조합원은 모두 상인 편을 들었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동요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러나 사람들은 배심원장의 읜견에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배심원들이 모두 지쳐 있어 서 되도록 빨리 끝마치고 그 자리를 떠날 수 있게 해줄 듯한 의견에 가담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법정 심리에 나타난 모든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마슬로바의 성품 으로 보더라도, 그녀가 절도나 독살에 대해서 전혀 죄가 없다고 네플류도프는 확신하고 있 었다. 처음에는 배심원 누구나 이를 인정할 것으로 여겼던 것이 상인의 변변치 못한 변호와 마슬로바가 육체적으로 그의 마음에 들었다는 점에 입각한(그는 이것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 다.) 변호와, 그 점에 중점을 둔 배심원장의 반박과, 특히 모든 배심원들의 피로 때문에 점 점 결론은 유죄로 기울어져 갔다. 이것을 본 네플류도프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마슬 로바를 두둔하는 발언을 하는 것이 두려웠다. 자기와 그녀와의 관계가 여러 사람들에게 알 려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대로 놔둘 수도 없어서 즉시 반박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면서 간신히 입을 떼려고 했을 때, 이때껏 침 묵을 지키고 있던 표트르 게라시모비치가 배심원장의 억압적인 태도에 대뜸 화를 내며 그를 반박하면서 네플류도프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마슬로바가 열쇠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훔친 게 틀림없다고들 하지만 그녀가 돌아간 뒤 여관 하인들이 딴 열쇠로 그 가방을 열 수 도 있지 않습니까?" "암, 그렇지, 그래!"하고 상인이 맞장구를 쳤다. "게다가 그녀는 돈을 훔칠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처지로서는 돈을 숨겨둘 만한 데가 없 었으니까요." "바로 그 점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도."하고 상인이 거들었다. "그것보다는, 그녀가 방에 들어가자 두 하인의 머리에 어떤 계교가 떠올라 그 기회를 이 용하여 일을 저지르고는 모든 것을 그녀에게 덮어씌웠다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표트르 게라시모비치는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그의 흥분은 배심원자에게도 옮겨져서 그 바람에 배심원장은 더한층 끈질기게 자기의 반대 의견을 고집했다. 그러나 표트르 게라시모 비치의 말이 조리 있고, 확신에 찼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게 동의했고, 마슬로바 는 현금과 반지를 훔치는데에 관계가 없다는 것, 반지가 그녀가 상인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것이 인정되었다. 그런 뒤에 그녀의 독살 관계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자, 그녀의 열렬한 옹호 자가 된 상인은 그녀에겐 그를 독살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무죄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배심원장은 그녀가 스스로 가루약을 주었다고 자백한 이상 무죄라고 할 수는 없다 고 주장했다. "수면제인 줄 알고 주었다지 않습니까?"하고 상인이 말했다. "그렇지만 수면제로도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가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에서 빗나가기 를 잘하는 대령이 말했다. 그리고 자기 처남의 아내가 수면제를 먹었는데 만약에 이웃에 의 사가 없어서 금방 응급 치료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죽었을 거라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얘기를 하는 대령의 태도가 아주 진지했으며 자신만만하고 더욱이 위엄이 있었기 때문에 아 무도 그것을 막을 엄두를 못 낼 정도였다. 다만 점원만은 대령의 본을 떠서 자기도 한바탕 늘어놓으려고 용감히 대령의 이야기를 가로막았다. "그렇지만 개중에는 점점 습성이 되어."하고 그는 지껄이기 시작했다. "수면제를 마흔 알 쯤 먹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저의 친적 중에도..." 그러나 대령은 남에게 자기 이야기를 빼앗기고도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었으므로 수면 제가 처남의 아내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계속했다. "여러분, 벌써 4시가 지났습니다."하고 배심원의 한 사람이 말했다.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여러분?"하고 배심원장이 사람들에게 물었다. "유죄라고 인정하기는 하지만, 절도할 의사는 없었으며, 사실 훔치지도 않았다.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 까?" 표트르 게라시모비치는 자기의 승리에 만족하여 이내 찬성의 뜻을 표시했다. "그러나 정상을 참작해야 합니다." 상인이 덧붙였다. 모두들 찬성했으나 다만 늙은 직공 조합원만이 그녀가 무죄라고 끝까지 주장했다. "결국 무죄가 되는 겁니다."하고 배심원장이 설명했다. "훔칠 의사도 없었고, 또 사실 훔 치지도 않았다고 하면 당연히 무죄가 되는 거 아니겠어요." "자, 이렇게 합시다. '정상을 참착할 필요가 있음'이라고 해둡시다. 이제 마지막 손질을 해 봅시다."하고 상인이 기분이 좋아서 말했다. 그들은 모두들 지칠 대로 지쳐 있는데다 논쟁을 하느라고 머리가 어지러워졌기 때문에, 답신서에 '단, 살해할 의도는 없었음'이라고 단서를 덧붙이는 것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네플류도프도 몹시 흥분해 있었으므로 거기가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답신서는 이런 형 식으로 기록되어 법정에 제출되었다. 라블레(<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라는 풍자소설을 남긴 프랑스의 유명한 풍자 작가) 는 이런 이야기를 쓴 일이 있다. 어느 법률가가 소송 사건을 가지고 온 사람들에게 대하여 온갖 법률 조항을 가리키면서 무의미한 법률상의 용어를 20페이지나 읽어 준 다음 주사위를 던져서 짝수냐 홀수냐를 시험해 보라고 제의했다. 만약 짝수가 나오면 원고가 이기고 홀수 가 나오면 피고가 이긴다는 것이었다. 이것과 똑같은 일이 여기서도 행해졌다. 바로 이 결의가 채용된 것은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이 아니라. 첫째로는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서 사건 요약을 늘어놓은 재판 장이 언제나 반드시 말하던 일, 즉 배심원들은 자문 사항에 답할 때, '유죄임. 단, 살해할 의 사는 없었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먹고 주의시키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로 는 대령이 자기 처남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오랫동안 했으므로 모두가 지루했기 때 문이었다. 셋째로는 네플류도프가 너무 흥분했기 때문에, '살해할 의사는 없었음'이란 단서 가 빠진 것을 모르고, '절도할 의사는 없었음'이란 단서만으로도 기소를 무효화시킬 수 있다 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넷째로는 배심원장이 자문 질의 사항과 답신서를 낭독할 때, 표트 르 게라시모비치가 밖에 나가서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모두들 지쳐 버려서 한시라도 빨리 자유롭게 되고 싶은 마음에서 빨리 결말이 날 듯 한 결의에 찬성을 했기 때문이다. 배심원들은 벨을 눌렀다. 군도를 빼들고 문 앞에 서 있던 헌병은 칼을 칼집에 도로 넣고 옆으로 비켜섰다. 이윽고 재판관들이 자리에 앉자, 배심원들이 한 사람씩 들어왔다. 배심원장은 엄숙한 태도로 답신서를 가지고 있다가 재판장에게 가까이 가서 그것을 주었 다. 재판장은 그것을 한 번 읽고 난 다음, 어이가 없다는 듯이 두 손을 벌리고는 배석 판사 들과 의논하기 시작했다. 재판장은 배심원들이 '절도할 의사는 없었음'이란 단서를 붙였으면 서 '살해할 의사는 없었음'이란 단서는 붙이지 않았다는 데 놀랐더 것이다. 배심원의 결의에 의한다면, 마슬로바는 훔치지도 않았고 빼앗지도 않았으면서 이렇다 할 목적도 없이 사람을 독살한 결과가 되고 만 것이었다. "이것 좀 보게. 이런 바보 같은 짓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고 그는 왼쪽에 앉아 있는 배 석 판사에게 말했다. "이건 징역감이란 뜻이야. 하지만 그녀는 죄가 없단 말이야." "아니 어째서 죄가 없다는 겁니까?" 엄격한 표정의 배석 판사가 말했다. "암, 죄가 없다마다. 내 생각으로는 이 사건은 818조를 적용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818 조란 재판장이 유죄를 부당하다고 생각할 경우 배심원의 결정을 파기할 수 있음을 명기한 조문이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재판장은 마음씨 좋은 배석 판사에게 물었다. 그 마음씨 좋은 판사는 금방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서류 번호를 힐끔 보고는, 그 숫자를 셋으로 나누어 봤다. 만약 나누어 떨어지면 찬성하려고 했던 것이지 만, 나누어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워낙 마음이 좋은 탓으로 찬성하고 말았다. "나도 그게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그럼 당신 생각은?" 재판장은 성미 급한 배석 판사에게 물었다. "절대로 찬성할 수 없습니다."하고 그는 딱 잘라 말했다. "그렇잖아도 신문에서는 배심원 들이 범인을 무죄로 하고 있다고 공격하고 있는데, 재판소까지 무죄로 해버린다면 뭐라고 떠들어 댈지 모릅니다. 나는 절대로 반대입니다." 재판장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가엾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군."하고 답신서를 배심원장에게 주고 낭독시켰다. 모두 기립했다. 배심원장은 한 발에서 다른 발로 중심을 바꾸면서 우선 잔기침을 하고 나 서 자문 질의 사항과 답신 사항을 낭독했다. 재판소의 여러 관리들은, 서기로부터 변호인, 검사에 이르기까지 깜짝 놀란 기색을 나타냈다. 피고인들은 답신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 지 못한 모양으로 태연히 앉아 있었다. 모두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재판장은 검사보를 보고 피고를 어떤 형에 처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의견을 물었다. 검사보는 마슬로바에 관해서 뜻밖에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져서 그 공로를 자기 웅변이 훌륭한 탓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서류를 뒤적여 조사한 다음 일어서서 말했다. "시몬 카프틴킨은 제 1452조 및 제1453조 제 4항에 의하여, 예브피미야 보치코바는 제 1659조에 의하여, 예카테리나 마슬로바는 제 1454조에 의하여 각각 구형해야 되리라고 생각 합니다." 이같은 구형은 죄 중에서도 가장 준엄한 형벌이었다. "재판관은 형의 결정을 위해서 잠시 휴정한다."하고 재판장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모두들 그 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커다란 일을 해치웠다는 흐뭇한 기분을 맛보면서 사람들은 법정에서 나가기도 하고 그 안을 서성거리기도 하였다. "허 참, 우리는 나이값도 못하고 형편없는 실수를 했단 말이야." 표트르 게라시모비치가 배심원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네플류도프에게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그 여자에게 우리가 징역을 언도한 셈인지요." "네, 뭐라고요?" 네플류도프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이 때만은 이 교사의 능글맞 은 태도가 조금도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이러쿵저리쿵할 것도 없어요. 우리는 그 답신서에, '유죄. 단, 살해할 의도는 없었음'이 라 고 써넣는 것을 잊어버렸지요. 내가 금방 서기한테서 들었습니다만 검사는 그 여자에게 징 역 15년을 구형했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그렇게 정한걸요."하고 배심원장이 말했다. 표트르 게라시모비치는 그녀가 돈을 훔치지 않았으므로 생명을 빼앗을 의도를 가질 리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맞섰다. "그렇지만, 내가 법정에 들어가기 전에 답신서를 낭독해 드렸잖습니까?"하고 배심원장은 둘러 댔다. "그 땐 아무도 이의를 말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습니까?" "난 그 때 마침 방에 없었습니다."하고 표트르 게라시모비치가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어 째서 그걸 몰랐지요?" 그는 네플류도프에게 물었다. "나는 전혀 생각치도 못했습니다." "허, 생각도 못했다니." "하지만, 그러한 것은 정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아니, 안 되죠. 이제 모두 끝났으니까, 다 틀렸습니다." 네플류도프느 피고들을 보았다. 이미 운명이 결정된 이 사람들은 여전히 꼼짝도 않고 헌 병들이 지키는 나무 칸막이 안에 앉아 있었다. 마슬로바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네플류도 프의 마음속에는 못된 감정이 꿈틀거렸다. 이 때까지는 그녀가 무죄가 되어 이 도시에 남아 있게 될 경우를 예상했었으므로, 그녀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망설이고 있었다. 사실 그녀에 대한 관계는 골치 아픈 것이었다. 그런데 징역과 시베리아 유형은 그녀에 대한 모든 관계를 일시에 끊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미처 숨이지지 않고 불치 주머니 속에 갇 힌 새는, 곧 퍼덕거리지 못할게 될 것이며, 자기의 존재를 상기시키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23 표트르 게라시모비치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재판장은 배심원 협의실에서 돌아오자 선고문을 읽어나갔다. 188X년 4월 28일, 황제 폐하의 칙령을 받들어 N지방 재판소 형사부는 배심원 여러분의 결의에 따라 형법 제 771조 제 3항 제 776조, 제 777조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선고한다. 농민 시몬 카르틴킨(33세)과 평민 예카테리나 마슬로바(27세)에 대하여 이 양인은 형버버 제 28조를 적용하여 공민권과 일체의 재산권을 박탈하고 카르틴킨은 8년, 마슬로바는 4년의 징역에 처한다. 평민 예브피미야 보치코바(43세)는 형법 제49조에 의거하여 공사의 특권 일 체를 박탈하고, 3년간 금고형에 처한다. 본건에 관한 재판 비용은 등분하여 피고들에게 부담시키기로 한다. 단, 그들에게 그 능력 이 없을 경우에는 국고의 부담으로 한다. 본건에 관한 증거물을 공매 처분키로 하며 반지는 반환하고 유리병은 파기한다. 카르틴킨은 여전히 장승처럼 몸을 쭉 펴고 두 팔을 옆구리에 찰싹 붙이고 손가락을 옆으 로 쫙 펼치고 볼을 실룩거리면서 서 있었다. 보치코바는 어디까지나 태연자약해 보였다. 마 슬로바는 판경을 듣자 금방 얼굴이 새빨개졌다. "저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억울합니다."하고 그녀는 갑자기 법정이 울릴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그건 너무해요. 전 억울합니다. 그런 짓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입니다. 제가 말한 것은 사실 그대로예요. 정말 사실이에요!" 이 렇게 말하고 의자에 쓰러져서는 큰 소리로 통곡을 했다. 카르틴킨과 보치코바가 끌려나갔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서 울고 있었으므로 헌병은 할 수 없이 그녀의 죄수복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니다.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네플류도프는 자기의 못된 생각을 깨끗이 잊어버 리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한 번 더 그녀의 모습을 보려고 복도로 급히 나갔 다. 문에는 사건이 끝난 데 대하여 만족스러운 듯한 배심원들과 변호인들이 떼를 지어 나오 면서 웅성거리고 있어서 한참 동안 통로가 막혀 기다려야 했다. 그가 복도에 나왔을 때 마 슬로바는 벌써 저만큼 가 있었다. 그는 남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안고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쫓아가 앞지른 다음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벌겋게 얼룩진 얼굴을 목도 리 자락으로 닦으면서 어깨를 들먹거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눈 팔지 않고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녀를 보내고 나서 네플류도프는 재판장을 만나기 위하여 급히 되돌아왔으나 재판장은 벌써 퇴정하고 없었다. "재판장님! 지금 막 판결이 내린 사건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네플류도프는 이미 얇은 외투를 걸친 후 수위가 내주는 은손잡이가 달린 단장을 받아쥔 그의 곁으로 다가 가서 말했다. "저는 배심원입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네플류도프 공작이시지요? 전에 뵌 일이 있었지요."하고 재판장은 악 수를 하면서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 네플류도프를 만났던 날 밤에 그가 다른 청년들보다 뛰 어나게 멋있고 즐겁게 춤을 추던 일을 흐뭇한 마음으로 회상했다. "그런데 뭘 도와 드릴까 요?" "마슬로바에 관한 답신서에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독살에 관해 전혀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징역을 선고받고 말았습니다." 네플류도프는 좀 굳어진 듯한 어두운 표정을 하고 말했다. "법정은 당신들께서 내주신 답신서에 의거하여 판결을 내렸던 것인데요?"하고 재판장은 출구 쪽으로 걸어나가면서 말했다. "하기야 그 답신서가 부당하다고 생각되긴 했습니다만." 그는 만약 배심원이 살의를 부정하지 않고 '유죄다.'하고 답신했을 경우에는 고의적 살의 를 긍정하는 것이 된다고 배심원들에게 주의시키려고 했던 것인데 빨리 끝내려고 서두르는 바람에 말하지 못했던 것이 문득 생각났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잘못을 시정할 수는 없을까요?" "상소의 이유는 충분하지요. 변호사와 의논해 보십시오." 재판장은 모자를 약간 비스듬히 쓰고 여전히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겨 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좀 어렵지 않을까요?" "잘 아실 줄 압니다만, 사실은 마슬로바에게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운명밖에 없었습 니다." 재판장은 네플류도프에 대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부드럽고 공손한 태도를 취하려는 듯 외투깃 위로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가볍게 상대방의 팔을 잡고 출구 쪽으로 끄는 듯이 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당신도 돌아가시는 길이지요,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네플류도프는 급히 외투를 입으면서 대답하고 함께 걸어나갔다. 두 사람은 상쾌하고 밝은 햇빛 속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곧 포도를 달리는 마치 소리 때문에 전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시다시피 일은 참 묘하게 되어 버렸습니다."하고 재판장은 소리를 높여 말을 이었다. "그 마슬로바는 둘 중 하나를 택할 운명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거의 무죄나 다름없 는 미결일수까지 계산한 단기간의 금고, 또는 구류 처분을 받든가, 그렇잖으면 시베리야 유 형이든가, 이 둘 중의 하나이지 딴 경우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당신들께서 '단, 살해할 의도는 없었다'라고 한 마디만 덧붙였더라면 그녀는 무죄가 되어 풀려났을 겁니다." "그것을 빠뜨렸던 것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였습니다."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문제는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입니다."하고 재판장은 미소를 띠며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클라라가 정해 놓은 시간까지는 겨우 45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렇게 된 바에야 변호사와 의논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상소 이유를 찾아내야 할 테니 까요. 그러나 그런 것은 곧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이봐, 드보랸스카야 가까지 가!" 하고 그 는 마부에게 명령했다. "30코페이카 이상은 절대로 안 돼." "좋습니다, 나리. 어서 타십시오." "그럼, 실례합니다. 무슨 일이 있으시면 드보랸스카야 가의 드보르니코프의 집으로 오십시 오. 외기 쉽습니다." 그는 다정하게 인사를 한 뒤 마차를 타고 가버렸다. 24 재판장과의 대화와 신선한 바깥 공기 때문에 네플류도프의 마음은 다소나마 진정되었다. 그가 아침부터 지금까지 겪은 감정은 여느때 느끼던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기 때문 에 그 자신이 너무 긴장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정말 상상도 못할 정도로 놀라운 우연이군! 그리고 나는 그녀의 슬픈 운명을 도와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야 한다. 그것도 한시라도 빨리 해야 한다. 지금 곧 말이다. 그렇다. 지금부터 재판소로 가서 파나린이나 미키신, 둘 중 한 사람의 주소만이라도 알아봐 야겠다.' 그는 유명한 한 사람의 변호사 이름을 생각해 냈다. 네플류도프는 재판소로 되돌아오자, 외투를 벗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첫 번째 복도에 서 파나린을 만났다. 그는 그를 불러 세우고 잠깐 볼일이 있다고 말했다. 파나린은 그의 얼굴과 이름을 익히 알고 있는 처지였으므로 무엇이든지 도움이 될 수가 있다면 기쁘겠다고 말했다. "좀 피곤하긴 하지만...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는 일이라면 들어 보지요. 이리로 오십시 오." 이렇게 말하면서 파나린은 네플류도프를 어떤 방으로 데리고 갔다. 아마 어느 재판관의 방인 듯싶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우선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하고 네플류도프는 말을 꺼냈다. "내가 이 사건에 관련되 어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셔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야 물론이지요. 그래서요?" "나도 오늘 배심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만, 우리들은 한 여자에게 징역을 선고했습니다. 죄도 없는 여자에게 말입니다. 나는 그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습니다." 네플류도프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더듬었다. 피나린은 눈을 번뜩이며 그를 힐끔 쳐다보았지만 다시 눈을 내리깔고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요?"하고 그는 묻기만 했다. "죄도 없는 여자를 유죄로 만들었으므로 상소하고 싶습니다. 사건을 상급법원으로 옮기고 싶습니다." "대심원으로 말이지요?" 파나린이 정정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이 일을 좀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네플류도프는 이 거북한 일을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고 싶어서 얼굴이 상기되어 서둘러댔 다. "이 사건에 드는 사례와 비용은 얼마가 되더라도 일체 내가 부담하겠습니다." "아, 그것은 나중에 결정하기로 합시다."하고 변호사가 그가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함을 보 고 미소로써 점잖게 받아넘겼다. "대관절 어떤 내용입니까?" 네플류도프는 사건의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다. "알았습니다. 내일 사건 기록을 가져다가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럼 모레, 아니 목요일 저 녁 6시경에 저의 집으로 와주시면 그 때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되겠지요? 그럼 가보십시오. 난 아직 여기서 조사할 일이 있어서요." 네플류도프는 그와 헤어져서 밖으로 나왔다. 변호사와 의논을 했다는 사실과, 자기가 마슬로바의 변호를 위한 재빠른 조치를 취했다는 사실은 네플류도프의 마음을 한결 가라앉혔다. 그는 거리로 나왔다. 상쾌한 날씨였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봄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마부들이 마차를 타라고 권했으나 그는 걸어갔다. 그러자 카추샤의 일, 그녀에게 했던 자 기의 행위와 추억과 상념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아 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잘 생각하돌고 하자.'하고 중얼거렸다. '지금은 이 무거운 감정을 씻 어 버리기 위하여 기분전환을 해야 한다.' 그는 코르차긴가의 만찬회가 생각나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늦지는 않았으므로 식 사 때까지는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마침 철도 마차가 방울을 울리면서 지나갔다. 그는 달 려가서 마차를 잡아탔다. 광장에 이르러 뛰어내린 그는 다시 보기 좋은 마차를 잡아타고 10 분 후에는 코르차긴가의 웅장한 저택 현관에 도착했다. 25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여러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코르차긴가의 상냥하고 뚱뚱한 문지기가 영국제의 돌쩌귀가 달린 참나무 대문을 소리 없이 열면서 말했다. "지금 식사중이 십니다만, 공작님만은 모시라는 분부셨습니다." 문지기는 층계 쪽으로 들어가서 2층으로 연결된 벨을 눌렀다. "누가 와 계신가?" 네플류도프는 외투를 벗으면서 물었다. "콜로소프 씨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씨, 그 외에는 모두 집안 식구들뿐입니다." 층계 위에서 연미복에 하얀 장갑을 낀 말쑥한 하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공작님, 어서 올라오십시오. 방으로 모시라는 분부십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층계를 올라가서, 이제는 익숙해진 호화롭고 넓은 홀을 지나 식당으로 들어 갔다. 식당에는 자기 방에서 한번도 나와 본 적이 없는 소피야 바실리예브나 공작 부인을 제외한 전가족이 모두 모여 있었다. 식탁의 상석에에는 코르차긴 노인, 그와 나란히 왼쪽에 는 의사, 그 반대편에는 전에 현의 귀족 회장이었으며 지금은 은행 중역으로 있고 코르차긴 의 자유사상의 상대역이 되고 있는 이반 이바노비치 콜로소프가 손님으로 앉아 있었다. 그 에 이어 왼쪽에는 미시의 어린 누이동생의 가정 교사로 있는 미스레데르, 그 다음에는 네 살 난 미시의 어린 누이동생, 오른쪽 맞은편에는 미시의 남동생이며 코르차긴 집안의 외아 들이고 중학교 6학년생인 페챠(이 아이의 시험 때문에 갖고 전체가 이 도시에 남아 있다.), 가정 교사인 대학생, 그 왼쪽에는 40세가 된 노처녀이며 격렬한 슬라브주의자인 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그 맞은편에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또는 미샤체레긴이라고도 불리는 미시의 사촌 오빠가 앉아 있었으며 맨 끝 자리에는 당사자인 미시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주인 없는 빈 자리가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마침 잘 왔군. 자, 앉으시오. 막 생선 요리를 들려던 참인데."하고 코르차긴 노인이 충혈 되고 흐릿한 눈으로 네플류도프를 쳐다보며 의치로 조심스럽게 음식을 씹으면서 말했다. "이봐 스테판!"하고 그는 입 안에 음식을 가득 담은 채, 뚱뚱하고 풍채가 좋은 주방장에게 빈 자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네플류도프는 코르차긴 노인을 잘 알고 있었으며 식사 때도 여러 번 본 일이 있었는데도 오늘은 어쩐지 이 노인으로부터 몹시 불쾌한 인상을 받았다. 먹기에 바빠서 입을 우물거리고 있는 그 혈색 좋은 얼굴도, 조끼에 끼운 냅킨도, 기름도 목 덜미도, 특히 살이 찐 장군 타입의 모습이 끔찍스럽게 생각되었다. 네플류도프는 문득 이 노 인의 잔인성에 대하여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겨났다. 그가 왜 그랬는지 납득이 가진 않았 지만-그는 집안도 좋고 부자였으므로 근무상 입신 출세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어느 지방 장관으로 있을 때 사람들을 태형에 처하기도 하고 교수형에 처하기도 했다는 것이었 다. "네, 곧 가져갑니다. 각하!"하고 스테판이 은쟁반이 가득 진열된 천장에서 스푼을 꺼내면 서 구레나룻을 기른 말쑥한 하인에게 눈짓을 하자 그 하인은 냉큼 미시 옆에 놓여 있는 주 인 없는 나이프와 포크들과, 그 접시 위에 문장이 한가운데로 돋보이도록 맵시 있게 접혀 있는 풀먹인 냅킨을 바로놓았다. 네플류도프는 거기 있는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면서 식탁을 한 바퀴 돌았다. 그가 옆으로 왔을 때, 코르차긴 노인과 부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기에 있는 대 부분의 사람들과는 한번도 말해 본 적도 없지만 이렇게 식탁을 한 바퀴 돌면서 여러 사람과 악수를 한다는 것이 오늘 그에게는 유달리 불쾌하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늦게 온 데 대하여 사과하고 미시와 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사이의 빈 자리에 앉으려고 했으나, 코 르차긴 노인은 보드카를 마시지 않으려면 새우, 어란, 치즈와 간 청어가 담긴 작은 접시들이 놓여 있는 식탁으로 가서 좀 먹으라고 권했다. 네플류도프는 그다지 시작하지는 않았으나, 치즈를 얹은 빵을 먹다 보니 도중에 그만두기도 뭣해서 억지로 집어먹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회의 기초를 흔들어 놓으셨습니까?"하고 콜로소프는 배심원 제도 를 공격한 보수주의 신문의 논조를 빌려서 비꼬는 투로 말했다. "법인은 무죄로 만들고, 죄 없는 사람은 유죄로 만들어 놓으셨겠지요?" "사회의 기초를 흔들어 놓았단 말이야... 사회의 기초를..."하고 자유주의의 동지인 친구 인 기지와 학식에 무한한 신뢰를 품고 있는 노공작도 낄낄 웃으면서 되풀이했다. 네플류도프는 실례가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콜로소프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때마침 나온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이이가 천천히 잡수실 수 있도록 놔두세요."하고 미시가 방긋 웃으면서 말했는데, 그녀는 '이이'라는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친근함을 알렸다. 콜로소프는 그 동안에도 커다란 소리로 그를 분개시킨 배심원 제도를 공격한 신문의 논문 내용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조카인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도 맞장구를 치면서 그 신문에 실린 다른 논문에 대해서 얘기했다. 미시는 여느 때와 같이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마 몹시 피곤하셨던 모양이에요. 시장하시지요?" 그녀는 입 속에 든 음식을 씹어 삼킬 때까지 기다렸다가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뭐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화랑에 가셨던가요?" "아니에요, 다음으로 미루었어요. 저희들은 살라마토프 씨 댁으로 잔디밭에서 하는 테니스 를 치러 갔었어요. 크룩스 씨는 정말 잘 치시더군요." 네플류도프가 여기 온 것은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해서였다. 이 집에 있으면 언제나 기분 이 유쾌했었다. 그것은 그의 감정에 유쾌한 영향을 주는 고상하고 사치스러운 환경 때문이 기도 했지만, 주제넘지 않게 그를 둘러싸고 있는 아양과 응석의 분위기에도 그 원인이 있었 다. 그런데 오늘 밤은 이상하게도 이 집의 모든 것이 불쾌하게만 여겨졌다. 문지기로부터 넓 은 계단, 꽃들, 하인들, 식탁 위의 장식들을 비롯하여 미시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러했다. 오늘 밤의 미시는 어쩐지 매력이 없었으며 부자연스럽게 생각되었다. 저 콜로소프의 자유주 의자인 척하는 자신만만하고 저속한 말투도 불쾌했으며, 코르차긴 노인의 황소같이 자만심 에 차고 미련스럽게 육감적인 모습도 불쾌했다. 남녀 가정 교사가 모두 쭈뼛거리는 모습도, 그리고 자기를 가리켜 '이이'라고 부른 대명사가 무엇보다도 불쾌했다. 네플류도프는 미시를 대하는 태도에서 항상 두 가지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즉 어떤 때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거나, 아니면 달빛 아래서 보는 것처럼 그녀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그 때는 싱싱하고 아름답고, 총명하며, 자연스럽게 느껴지는가 하면..., 또 어떤 때 는 갑작스레 마치 밝은 햇빛 아래서 보듯이 그녀의 결점이 모조리 드러나 보였다. 오늘 밤 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 잡혀 있는 잔주름을 모조리 보았고, 흐트러져 일어선 머리칼이며, 삐죽 튀어나온 팔꿈치를 보았다. 특히 자기 부친의 손톱을 연상케 하는 엄지손가락의 커다란 손톱이 눈에 띄었다. "따분하기 짝이 없는 게임이지요."하고 콜로소프는 테니스 이야기를 했다. "그런 것보다는 우리가 어렸을 적에 하던 라프다(공놀이의 일종)가 훨씬 재미있지요." "아니에요. 당신은 해보지 않았으니까 모르시는 거예요. 참으로 재미있는 게임이에요." 미 시가 반박했으나, 네플류도프에게는 그 '참으로'란 말의 발음이 유난히 부자연스럽게 생각되 었다. 그래서 논쟁이 벌어졌다.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도 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도 모두 그 논쟁 에 한몫 끼였다. 다만 가정 교사 두 사람과 아이들만은 입을 다물고 따분한 듯이 앉아 있었 다. "밤낮 논쟁이 그칠 새가 없다니까!"하고 코르차긴 노인은 껄걸 웃더니 조끼에서 냅킨을 꺼내며 말했다. 그리고 의자를 덜거덕거리면서(하인이 얼른 그 의자를 붙잡았다.) 일어났다. 그 뒤를 따라 다른 사람들도 일어나서 양치질할 물그릇과 향기 높고 따뜻한 물이 놓여 있는 조그만 테이블로 가서는 양치질을 한 다음 다시 흥미도 없는 논쟁을 계속했다. "그렇지 않으세요?" 미시는 네플류도프를 돌아다보았다. 게임을 할 때만큼 그 사람의 성 격이 잘 드러나는 적은 없다고 하는 자기 의견에 동의해 달라고 했다. 그녀는 네플류도프의 표정이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고, 그리고 무엇인가 비난하는 듯하다고 생각되었으 므로 물어 보고 싶었다. 미시는 평소에도 그의 그런 표정을 두려워했었다. "글쎄, 모르겠군요. 그런 문제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네플류도프는 대답했 다. "어머니께 가볼까요?"하고 미시가 물었다. "네, 그럽시다." 그는 담배를 꺼내면서 대답했으나, 별로 가고 싶지 않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녀는 말없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자신도 좀 민망스럽게 여겨졌다. '남의 집에 와서 다른 사람들의 기분까지 잡치게 하는 건 아주 좋지 않은 일이지...'하고 그는 자 기 스스로 반성했다. 그래서 될 수 있는대로 상냥하게 하느라고 애쓰면서 공작 부인이 만나 주신다면 기꺼이 가 보겠다고 말했다. "그럼요. 어머니께선 무척 반가워하실 거예요. 거기서도 담배는 피우실수 있어요. 이반 이 바노비치도 거기 가 계세요." 이 집의 주부인 소피야 바실리예브나 공작 부인은 늘 자리에 누워 사시는 환자였다. 벌써 햇수로 8년째나 손님이 있건 없건 레이스와 리본과 비로드에 싸여서 금박과 상아오 청동과 꽃 속에 누워 있었다. 한 발짝도 밖에 나가지 않고,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다만 '자기의 친구'만을 방에 들어오게 하고 있었다. 그녀의 의견에 의하면 그 친구들은 어떤 점에 있어 서도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사람들이라 했다. 네플류도프도 이 친구 중의 한 사람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총명한 까닭도 있었으며, 미시가 그와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 엇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피야 바실리예브나 공작 부인의 방은 크고 작은 두 객실 저쪽에 있었다. 네플류도프 앞 에 걸어가던 미시가 큰 객실에 들어서며 일부러 걸음을 멈추고, 금칠을 한 조그마한 의자의 등받이를 잡으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미시는 무척 결혼을 서두르고 있었고, 또 네플류도프라면 알맞은 배우자이기도 했다. 게다 가 그녀는 그가 좋았으므로, 저 사람은 내 것이 되리란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자기가 그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그녀는 정신병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무의 식중에 집요하고 교묘한 꾀를 부려서 속마음을 털어놓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녀는 물었다. "무슨 일이죠?" 그는 법정에서 우연히 카추샤를 만났던 일이 생각나서 눈살을 찌푸리고 얼굴을 붉혔다. "네, 있었습니다." 그는 솔직하려고 애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도 기묘하고 중대한 일 이었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제게 그걸 말씀해 주실 수 없으세요?"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제발 묻지 말아 주십시오. 그 일에 대해서 아직 생각을 완 전히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니까요." 그는 더욱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럼 제게는 말씀 못하시겠다는 거군요?" 그녀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고 그녀가 붙잡고 있던 조그마한 의자가 약간 뒤로 밀려났다. "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녀에 대하여 그가 이렇게 대답하다는 것은 자기 신변에 일어난 일이 그야말로 매우 중대한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그 자신에게도 굳게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래요, 그럼 가보실까요?" 그녀는 마치 부질 없는 생각을 털어 버리려는 듯이 머리를 한번 흔들고는 앞장서서 여느 때보다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는 미시가 눈물을 참느라고 부자연스럽게 입을 꼭 다물고 있음을 이내 알아차렸다. 그 녀에게 괴로움을 주었다는 것이 무척 가슴 아픈 일이었으나, 여기서 조금만 마음을 약하게 먹으면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게 된다는, 즉 꽁꽁 묶이고 만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공작 부인의 내실로 가면서도 말없이 그녀 뒤를 따라갈 따름이었다. 26 소피야 바실리예브나 공작 부인은 이제 막 정성을 들인 아주 영양이 풍부한 저녁 식사를 끝마친 후였다. 그녀는 자기가 식사하는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항상 혼자 먹 곤 했다. 파히토스카(옥수수 이파리로 말아놓은 가느다란 궐련)를 피우고 있는 그녀의 침대 옆에는 그녀가 마실 커피가 놓인 조그만 테이블이 있었는데, 공작 부인은 시원한 검은 눈과 고른 이와, 아직도 나이보다 더 젊은 티를 내려는 암갈색 머리의 가냘프고 훤칠한 부인이었 다. 공작 부인과 의사와의 사이에는 스캔들이 떠돌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이 때까지 그런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으나, 지금 그 일이 문득 생각났는데, 기름을 발라 번질번질한 턱수염 을 좌우로 멋지게 갈라 붙인 의사가 그녀의 의사 옆에 있는 것을 보자 속이 메스껍도록 불 쾌해졌다. 콜로소프는 공작 부인과 가까운 낮고 폭신폭신한 안락 의자에 조그만 테이블을 사이에 두 고 마주 앉아서 커피를 젓고 있었다. 조그만 테이블 위에는 리큐어 술잔이 하나 놓여 있었 다. 미시는 네플류도프와 함께 어머니 방으로 들어가긴 했으나, 그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피곤하시다고 혼자 있고 싶다고 하시면 제 방으로 오세요." 그녀는 네플류도프 에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하고, 명랑한 미소를 지으면서 두꺼운 양타자 위를 사뿐사뿐 밟으며 방에서 나갔다. "참 잘 왔어요. 자, 여기 앉아서 얘끼나 좀 해주구려." 소피야 바실리예브나 공작 부인은 진짜와 혼동될 만큼 감쪽같이 만든 아름답고 긴 틀니를 드러내 보이면서 일부러 어색한 웃 음을 지으며 말했다. "몹시 우울한 얼굴로 재판소에서 돌아오셨다고요. 확실히 그런 일은 상 냥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매우 괴로우리라고 생각되었다오."하고 그녀는 프랑스 어로 덧붙여 말했다. "맞아요, 그래요."하고 네플류도프는 대답했다. "이따금 느끼게 되는데, 자기에게는...다른 사람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는 것 말입니다." "그렇고말고요." 부인은 그의 말의 진실성에 감동한 것처럼 언제나 그렇듯이 교묘하게 상 대방의 환심을 사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당신 그림은 어떻게 됐나요? 꼭 한번 보고 싶은데."하고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몸이 이렇게 부자유스럽지만 않다면 벌써 보았을 텐데." "전 그림을 완전히 집어치웠습니다." 네플류도프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그녀의 빤히 들여다 보이는 아첨이 숨기려고 애쓰는 나이와 마찬가지로 다 드러나 보이는 것만 같 았다. 그는 상냥하게 대하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래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시면 안돼요! 저, 레핀(러시앙의 대표적 화가)씨도 저에게 말씀하셨다우. 당신은 천재 적 소질이 있다고요."하고 그녀는 콜로소프에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저렇게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면서 부끄럽지 않을까?' 하고 네플류도프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생각했다. 네플류도프가 기분이 얹짢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분위기에 맞는 세련된 자기네 대화 속에 끌어들이진 못하겠다고 단정한 소피야 바실리예브나는 콜로소프 쪽을 돌아보며 새로 나온 희곡에 대한 그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마치 콜로소프의 의견이 모든 의혹을 풀어 주고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영원불멸의 의의를 갖기나 하는 것처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말투였다. 콜로소프는 그 희곡을 깍아내리는 김에 예술에 관한 자기 의견까지 늘어놓았다. 공작 부인 은 그 의견의 진실함에 경탄하면서 희곡 작가들을 위해서 두둔도 해봤지만, 곧 항복하여 절 충안을 꺼내놓기도 했다. 네플류도프는 가만히 듣고 있긴 했지만, 사실 그가 보고 듣고 있었 던 것은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었다. 소피야 바실리예브나의 말을 듣는가 하면, 어느새 콜로소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네플류 도프는 분명히 깨달았다. 첫째로 소피야 바실리예브나나 콜로소프에게 있어서 그 희곡은 하 찮은 것이고 그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그저 식사 후 소화를 위한 생리적 욕구를 만족 시키기 위하여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고, 둘째로는 콜로소프는 보드카와 포도주, 리 큐어 주 따위를 마셔 약간 취해 있었는데, 그것은 어쩌다 한잔 마셨다가 취해 버린 농부들 의 주정과는 달라서 항상 술을 마셔서 취한 사람들의 주정이라 비틀거리지도 않고 돼먹지 않은 소리를 지껄이지도 않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흥분한 자기 만족감에 빠져 있었다. 셋째 로 소피야 바실리예브나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불안스러운 듯이 창문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을 네플류도프는 알아챘다. 그것은 비스듬히 비쳐 들어오는 태양 광선이 그녀에게까지 비쳐 와서 그녀의 나이를 너무나 뚜렷하게 드러낼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렇군요." 그녀는 콜로소프의 의견에 대하여 이런 식으로 장단을 맞추고는 침대 옆의 벽에 붙어 있는 벨을 눌렀다. 그러자 의사는 벌떡 일어나 마치 자기가 한집안 사람이기나 한 것철럼 아무 말도 않고 그 냥 방에서 나갔다. 소피야 바실리예브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필리프, 제발 저 커튼을 내려 줘요." 벨소리를 듣고 잘생긴 하인이 들어왔을 때, 그녀는 창문의 커튼을 눈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녜요,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거기에는 신비로운 것이 있어요. 신비로운 데가 없다 면 시라는 것도 있을 수 없지요."하고 그녀는 까만 눈으로 커튼을 내리고 있는 하인의 동작 을 화난 듯이 지켜보며 말했다. "시가 없는 신비란 미신일 뿐이며, 신비가 없는 시는 산문에 불과해요." 그녀는 서글픈 미소를 짓고 커튼을 바로잡고 있는 하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을 계 속했다. "필리프, 그 커튼이 아니라 저 창문의 것 말이야." 소피야 바실리예브나는 이런 데까지 일 일이 말을 해야 하는 자기 자신이 불쌍하다는 듯이 수난자 같은 말투로 주의를 준 다음, 곧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향기로운 연기가 피어오르는 파히토스카를 보석 반지로 장식된 손으로 집어 입에 물었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근육이 발달한 잘생긴 하인 필리프는 미안한 듯 가볍게 고개를 숙이 고, 장딴지가 불룩한 튼튼한 다리로 양탄자를 조심스레 밟으며 묵묵히 다음 창문으로 옮겨 가서 주의 깊게 부인을 지켜보면서 한 줄기의 햇살도 부인 쪽으로 비치지 않도록 커튼을 고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는 또 실수를 했으므로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소피야 바 실리예브나는 신비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중단하고, 지독하게도 자기 속을 썩여 주는 둔해 빠진 필리프에게 주의를 주어 일을 다시 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순간 필리프의 눈이 번득였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 하인은 분명히 속으로 이렇게 투덜거렸을 것이다. 네플류도프는 이 광경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미남이고 힘이 센 필리프는 이내 화난 기색을 감추고 질렸다는 듯이 가냘프고 야윈 몸이 온통 겉치레 일색인 공작 부인이 하 라는 대로 묵묵히 일했다. "물론 다윈의 학설에도 다분히 진리가 있습니다."하고 콜로소프는 낮은 안락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거슴츠레한 눈으로 공작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그는 좀 지나친 데가 있어요. 정말이에요." "당신도 유전설을 믿으시나요?"하고 소피야 바실리예브나는 네플류도프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이렇게 물었다. "유전설이라고요?" 네플류도프는 물었다. "아니,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으나, 그는 이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자기 상상 속에 떠오른 이상한 환상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모델로 써 보고 싶을 만큼 미남이며 힘이센 필리프 옆에다, 수박같이 둥근 배, 벗겨진 대머 리, 근육이라고는 전혀 없는 채찍 같은 두 팔을 가진 콜로소프의 발가벗은 몸뚱이를 세워 놓은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지금은 실크나 비로드로 감겨 있지만 소피야 바 실리예브나의 진짜 어깨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 상상은 너 문나 소름이 끼쳤기 때문에 떨쳐 버리려고 애썼다. 소피야 바실리예브나는 그를 훑어보았다. "참, 미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그녀가 말했다. "그 애한테 가 보세요. 슈만의 신곡을 들려 주고 싶어하더군요. 참 흥미있는 곡이예요." '그녀는 피아노를 칠 생각도 없단 말이야. 어쩌자고 그런 엉뚱한 거짓말만 늘어놓을까?' 하고 네플류도프는 일어서서 소피야 바실리예브나의 보석 반지로 장식된 속까지 비쳐 보일 듯이 뼈만 앙상한 손을 잡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객실에서 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가 그 를 만나자 여느 때처럼 프랑스 말로 곧 지껄여 대기 시작했다. "보이하니 배심원이란 직무가 몹시도 괴로운 모양이군요." "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까지 이 불쾌한 기분에 젖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 "무슨 일로 그렇게 기분이 상하셨죠?" "그 까닭은 묻지 말아 주세요." 그는 모자를 찾으며 말했다. "당신은 항상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ㅗ 말씀하신 걸 기억하고 계시죠? 그래서 항상 우리들 앞에서 가혹하도록 진실한 말씀을 하시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은 왜 말씀하시길 꺼리시지 요? 생각나지, 마시?" 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는 때마침 객실로 들어온 미시에게 말을 건넸 다. "그야 그 때는 농담이었으니까요." 네플류도프는 정색을 하면서 대답했다. "농담이라면 얼 마든지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 속에서 우린 너무나 추악하기 때문에... 아 니, 나라는 인간이 진실을 말할 수가 없도록 그렇게 추악하다는 거죠." "변명은 그만두세요. 그보다 어째서 우리들이 그토록 추악한지, 그 말씀이나 해보세요." 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는 네플류도프의 심각한 표정을 모른 체하고 조롱하듯 말했다. "아녜요. 나 자신이 불쾌함을 자인하는 만큼 거북한 일은 없어요." 하고 미시는 말했다. "난 그런 것을 절대로 자인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늘 즐거울 수 있지요. 자아, 제 방으로 가 세요. 우리들이 정성껏 당신의 '우울한 기분'을 풀어 드릴께요." 네플류도프는 마치 말에 재갈을 물리고 안장을 얹기 위해 쓰다듬어 줄 때 그 말이 경험하 는 것 깥은 그런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오늘은 유별나게 다른 때볻다 더욱 마차를 끌고 싶 지 않았다. 그는 이젠 돌아가야겠다고 사과하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미시는 그 전보다 더욱 오랫동안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당신한테 중대한 일은 당신의 친한 친구한테도 중대하는 걸 잊지 마세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내일 와 주시겠어요?" "글쎄요, 어떻게 될지."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으나 자신에게 대해선지 아니면 그녀에게 대해선지도 모르는 부끄러움이 느껴져 얼굴을 붉히면서 허둥지둥 나와 버렸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아무래도 수상한데요." 네플류도프가 나가자 카테리나 알렉세예브 나가 말했다. "내가 꼭 알아내고야 말겠어요. 어쩌면 자존심이 얽힌 애정 문제일지도 몰라 요. 우리 미챠(네플류도프의 이름. 드미트리의 애칭)는 너무나 다정다감한 사람이니까요." '애정 문제라 해도 틀림없이 지저분한 일일 거야.'라고 미시는 말하고 싶었으나 입밖에 내 지 않았다. 그녀는 네플류도프를 보고 있을 때와는 딴판으로 마치 불이 꺼진 듯한 맥빠진 표정을 하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더러운 말을 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에게는 말하지 않고 다만 "누구나 기분이 나쁜 날도 있고 좋은 날도 있는 법이니까요." 하고 말했 을 뿐이었다. '그분도 나를 속이나?' 그녀는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되었으면서도, 그렇다면 그분 역 시 너무하신 거야.' '이렇게까지 되었다면서도'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것인지 설명하라고 한다면 미시 자 신도 뭐라고 분명히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가 그녀의 마음속 에 희망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장래를 거의 약속할 정도였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확실한 말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단지 눈짓, 미소, 암시 등의 무언의 말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잃는다는 것은 더없이 괴로운 일이었다. . 27 '창피스럽고 정나미 떨어질 일이다. 정나미 떨어지고 창피스러운 일이다.' 네플류도프는 낯익은 거리를 따라 집으로 발길을 향하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미시와의 대화에서 느낀 답 답한 감정은 그의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형식적으로는(만일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 다면), 그는 그녀에게 공명정대하여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 었으나, 본질적으로는 그는 자기를 그녀와 결부시켰으며 그녀에게 약속을 한 것처럼 느껴졌 다. 그러나 오늘은 자기가 그녀와 도저히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뚜렷이 느꼈던 것이다. '창피스럽고 정나미 떨어질 일이다. 정나미 떨어지고 창피스러운 일이다.' 미시와의 관계 뿐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다고 느끼면서 그는 마음속으로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모든 것 이 더럽고 부끄럽다.' 그는 현관으로 들어서면서도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녁은 안 먹겠네." 그는 자기를 따라 식당에 들어온 코르네이를 보고 말했다. "자넨 물 러가도 좋아." "네, 알겠습니다." 코르네이는 대답했으나 나가지 않고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네플류도 프는 코르네이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이 사나이가 밉살스럽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기에 대해서 무관심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일부러 심술궂게 괴롭히고만 있는 것같 이 생각되었다. 코르네이가 식기를 가지고 나간 뒤 네플류도프가 사모바르에 차를 따르려고 했을 때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의 음성이 들려와 그는 그녀의 얼굴을 피하려고 얼른 객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 객실은 석 달 전에 어머니가 숨을 거둔 방이었다. 지금, 아버지와 어머니의 총상화 옆에서 램프가 하나씩 켜져 있는 이 방에 들어서자,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마지막 태도가 떠올랐다. 그것은 부자연스럽고 언짢은 것이었다. 그것 역시 창피스럽고 정나 미 떨어지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위독했을 때 그는 어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를 바랐으 니까. 어머니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었지만, 사실은 자신 이 어머니의 고통을 보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에 관한 좋은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유명한 화가에게 5천 루블을 주고 그렸던 모친 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슴을 드러내 놓은 검은 비로드 옷을 입고 있었다. 화가는 가슴, 특히 양쪽 유방 사이의 움푹 팬곳과, 눈이 부실 듯 아름다운 어깨와 목을 특별히 정성 을 들여서 그렸음이 분명했다. 그것은 정말 창피스럽고 정나미 떨어지는 일이었다. 어머니를 반나체의 미인으로 그려낸 이 그림 속에는 무엇인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모욕적인 것이 있었다. 더군다나 석 달 전에는 이 방에서 바로 이 초상화의 여인이 미라처럼 시들어 빠진 몸을 누이고 이 방뿐만 아니라 온 집안에 참을 수 없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므로 한층 더 정나미가 떨어지게 느껴졌다. 그는 지금도 그 냄새가 풍겨나오는 것 같았다. 운명하 기 전날에 어머니가 거무스름하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으로 억세고 뽀얀 아들의 손을 붙 잡고 아들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미챠, 만약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해도 제발 나를 책 망하지 말아 다오."하면서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며 눈물을을 글썽거리던 일을 생각했다. '얼 마나 정나미 떨어질 일인가!' 그는 대리석처럼 아름다운 어깨와 손을 드러내고 자랑스러운 듯한 미소를 띤 반나체의 어머니의 초상호를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이렇게 중얼거렸다. 초 상화에 그려져 있는 가슴은 며칠 전 그가 똑같은 모양으로 본 일이 있는, 또 한 사람의 젊 은 여자를 연상케 했다. 그것은 미시였다. 그녀는 무도회에 나가는 야회복을 입은 자기 모습 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구실을 만들어서 그를 밤에 불러냈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요염한 어깨와 팔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났다. 더욱이 촌스럽고 천한 짐승 같은 그녀의 아버지, 그의 죄 많은 과거와 잔인성, 그리고 좋지 모샇ㄴ 소문을 퍼뜨리는 그 '아름다운 정신'이라고 빈 정거려서 불리는 그녀의 어머니. 이 모든 것이 구역질나고 부끄럽게 여겨졌다. '창피스럽고 정나미 떨어질 일이다. 정나미 떨어지고 창피스러운 일이 아니고 뭔가.' '아니야, 아니야.' 그는 생각했다. '나는 자유롭게 돼야 한다. 저 코르차긴 일가나 마리 야 바실리예브나와의 거짓에 찬 관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한다. 그리고 유산 상속이나 그 밖의 모든 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롭게 숨을 쉬어야 한다. 외국으로 가자. 로마로 가서 그림 공부를 하자......'그는 이렇듯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재능에 대하여 품고 있 던 회의를 되새겨 보았다. '아니다. 뭐 아무래도 매한가지야. 그저 자유롭게 숨을 쉴 수만 있다면 되는 거다. 먼저 콘스탄티노플로 갔다가 다음에는 로마로 가자. 되도록 빨리 배심원 일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 변호사에게 부탁한 사건도 처리해야겠고......' 그러자 갑자기 까만 사팔눈의 여죄수 모습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피고에게 최후의 발언이 허용되었을 때, 울음을 터트렸던 그 모습! 그는 황급히 그녀의 환 상을 지워 버리려고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다시 새로 한 대를 붙여 물고 방 안을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와 함께 지냈던 여러 가지 일이 꼬리를 물고 떠 올랐다. 그녀와의 마지막 밤, 그 때 그를 지배하고 있던 동물적인 욕정, 그것을 만족시켰을 때 경험했던 환멸감, 그런 것들을 생각해 냈다. 그에게는 또 하늘색 리본과 함께 하얀 오소 가 부활절 미사가 회상되었다. '나는 그 날 밤에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아름답고 순 수한 애정으로 사랑했던 것이다. 아니 그전에도 이미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다, 처음으로 내 가 고모네 집으로 가서 논문을 쓰고 있을 때부터 벌써 진심으로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그는 그 당시의 자신을 상기했다. 그러자 싱싱하고, 젊고, 충만된 삶의 숨결이 몰아치 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는 한없이 마음이 아팠다. 그 당시 자기와 현재의 자기와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시골 성당에 함 께 갔을 때의 카추샤와 오늘 여러 사람들이 재판을 한, 상인을 상대로 술을 진탕 마시는 매 춘부 카추샤와의 사이에 생긴 차이에 못지 않을 만큼 큰 것이었다. 그 무렵 그는 발랄하고 자유로운 청년이어서 그 앞날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었으나, 지금의 그는 어리서고 공허한, 목적도 없는 하찮은 인생의 굴레를 덮어쓴 채 벗어날 출구를 찾지 못하는, 아니 오 히려 찾으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온몸이 허위투성이였다. 그 것은 가장 무서워해야 할 허위, 주위의 사람들에게는 진실이라고 인정되고 있는 허위인 것 이다. 이 허위로부터 빠져나갈 길은 전연 없었다. 적어도 그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 다. 더욱이 그는 그 속에 흠뻑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그 속에서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마리야 바실리예브나와 그녀의 남편과의 관계를 해결하고, 그들이나 그들의 자식들 눈을 거리낌 없이 똑바로 바라볼 수 있으려면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미시와의 관계를 거짓 없이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토지 사유를 부정이라고 인정하면서 도 어머니의 유산을 차지하고 있는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카추샤에 대한 죄를 보상할 수 있을까? 그 여자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자기를 사랑한 여 자를 뿌리쳐 버릴 수는 없다. 변호사에게 돈을 주어 억울한 죄명으로 선고를 받은 징역의 고통으로부터 구해 주는 것만으로 자위할 수는 없다. 돈으로 죄를 보상하다니 될 법이나 할 말인가? 마치 그 때 내가 그녀에게 돈을 줌으로써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던 것과 무엇 이 다르단 말인가.' 그러자 그 때 복도에서 그녀를 쫓아가 돈을 가슴팍에 찔러넣고는 도망쳤던 일이 생생하게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 그 돈!' 그 때와 똑같은 공포와 혐오를 느끼면서 그는 그 순 간을 상기했다. '아! 저런, 저런, 이 무슨 더러운 짓이냐!' 역시 그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크게 소리를 내어 이렇게 말했다. "불한당만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야말 로 바로 그런 불한당이다!"하고 그는 소리를 질렀다. '정말 나는......정말로 틀림없는 악당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문득 발을 멈추고 자문 자답했다. '그러나 나쁜 짓이란 이것 하나뿐일까?'하고 그는 계속 자기 자신을 비난했다. '마리야 바실리예 브나와 그녀의 남편에 대한 관계는 비열하지 않단 말인가? 더러운 행위가 아니란 말이냐? 그리고 재산에 대한 태도는 어떠냐? 돈은 어머니로부터 받았다는 구실 아래, 불법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재산을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게으르고 추잡한 생활은 어떠냐! 그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것은 카추샤에 대한 것이다. 악당, 불한당! 그렇다. 세상 사람들은 나 를 마음대로 비난하라지. 나는 그들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최근에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느끼고 있는 혐오. 특히 오늘 코르차긴 공작이나 소피야 바실리예브나, 미시나 코르네이에 대해서 느낀 혐오감은 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놀란 것은 자기의 비열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이 감정 속에는 뭔가 병적이면서도 마음을 기쁘게 하고 안정시키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네플류도프의 생애 중에는 이미 몇 번이고 그가 말하는 '마음의 정화 작용'이란 것이 일 어 났었다. 그가 마음의 정화 작용이라고 부른 것은 다음과 같은 마음의 상태였다. 곧 가끔 상당한 시일이 경과한 후 느닷없이 내적 생활의 지체나 때로는 정지를 의식했다. 그러면 그 는 자기 마음속에 쌓여서 이러한 정지의 원인이 된 쓰레기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이런 각성이 있은 뒤에는 언제나 네플류도프는 스스로 자기의 생활 규범을 만들어서 늘 이것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일기를 쓰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앞으로는 절대로 이 규범을 위반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생의 새로운 장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언제나 현실 생활의 유혹에 빠져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타락하였다. 그리고 전보다 더 깊은 곳으로 떨어져 버리곤 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몇 번인가 자기 자신을 순화하고 스스로 격려했다. 그 첫 번째는 그가 고모네 집에 갔을 때였다. 그것은 가장 발랄하고 환희에 넘친 각성이었다. 그 결과는 상당히 오래 계속되었다. 두 번째 각성은 문관직을 내동댕이치고 한 몸을 희생시키려는 일념으로 전쟁중에 군복무에 투신했을 때 경험했다. 그러나 그 때는 쓰레기가 너무 빨리 쌓였다. 마지 막으로 그가 군대를 나와 외국에 가서 그림 공부를 했을 때도 각성이 있었다. 그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화의 기회가 없이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러므로 이렇게 까지 그의 내부가 썩어빠진 적은, 이를테면 양심이 요구하는 것과 실제로 하고 있는 생활과 의 사이에 이렇게까지 커다란 간격이 생긴 적은 여태껏 한번도 없었다. 그는 그 간격을 느 끼자 더럭 겁이 났다. 이 간격은 너무도 넓고 너무나 더럽혀졌으므로, 처음에는 정화의 가능성에 대하여 절망을 느꼈다. '지금까지 자기 완성을 위한 시도는 여러 번 해보았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지 않 은가?'고 그의 마음속에는 유혹의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시도해 볼 필요 도 없지 않느냐? 나 혼자만이 아니라 모두들 그런 것이니까 말이야. 그것이 결국 인생인 것이다.'하고 유혹의 소리가 속삭였다. 그러나 오직 하나밖에 없는, 영원히 자유로운 정신적 존재가 네플류도프의 내부에 눈뜨고 있었다. 현실의 그와,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그와의 간 격이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한번 눈뜬 정신적 존재에는 모든 것이 가능한 것처럼 생각되었 다. '아무리 비싼 값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속박하고 있는 이 허위를 깨뜨려 없애야겠 다.'하고 그는 단호히 결심했다. '미시에게는, 나는 음탕한 인간이며 그녀와 결혼할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혀서 미안하다고 말하자. 마리야 바실리예브나(귀 족 회장의 아내)와도 결판을 내자. 사실 그 여자에겐 더 할 말도 없다. 나는 그 여자의 남편 에게 말하자. 나는 불한당이며, 지금까지 그를 속여 왔다고 말이다. 유산에 대해서도 진실이 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처리를 하자. 카추샤에 대해서도 나는 불한당이며 그녀에게 지은 죄를 한량없으므로 그녀의 운명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말하자. 그렇다. 그녀를 만나면 용서해 달라고 간청해야겠다. 그렇다. 어린애처럼 마구 용서를 빌어야겠다.' 그는 우뚝 섰다. '만약 필요하다면 그녀와결혼도 하리라.' 그는 걸음을 멈추고, 어릴 때 하던 것처럼 두 손을 가슴 우에 포개 놓고 눈길을 하늘로 우러르고는 누구에게 말하듯이 이렇게 간구했다. "주여, 저를 도와 주소서. 저를 인도해 주소서. 저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저의 모든 더러 움을 깨끗이 씻어 주소서." 그는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면서 그를 돕고 그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그를 깨끗이 씻어 달 라고 빌었으나 이미 그 소원은 그 동안에 성취되었다. 그이 내부에 존재하던 신은 그의 의 식 속에서 눈을 떴던 것이다 그느 자기 자신을 신으로 느꼇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와 용기 와 삶의 기쁨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서느이 힘을 마음껏 만끽했다. 모든 일,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착한 일은 그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느껴졌다. 그가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을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 괴었다. 그것은 선 한 눈물이기도 하고 악한 눈물이기도 했다. 선한 눈물이라 함은, 최근 수년간 그의 내부에서 잠자고 있던 정신적 인격의 각성에 대한 기쁨의 눈물이었기 때문이고, 악한 눈물이라 함은 그것이 자기 본래의 선함에 대한 아첨의 눈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래서 창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창문은 뜰을 향해 있 었다. 조용하고 상쾌한 달밤이었다. 거리에서 마차 바퀴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쥐죽은 듯 조 용해졌다. 창문 바로 밑에는 키가 큰 앙상한 포플러 그림자가 깨끗하게 자갈이 깔린 아담한 뜰 위에 두 갈래 나뭇가지 윤곽을 드리우고 있었다. 왼편에는 밝은 달빛 때문에 하얗게 보 이느 헛간 지붕이 드러났으며, 그 앞에는 나뭇가지들이 두엉켜 있는 사이로 전원담장 그림 자가 시커몋게 보였다. 네플류도프는 달빛이 qll는 뜰, 지붕과 포플러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듯한 상쾌한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얼마나 좋은가, 정말 얼마나 기분 좋은가, 정말로 기분 좋구나!" 하고 그는 마음속에 품 고 있던 것을 말로 표현했다. 28 마슬로바느 저녁 6시가 되어서야 겨우 감방으로 돌아왔다. 평소에 걷지 않던 다리고 15킬 로미터나 되느 자갈밭을 걸어왔으므로 지치고 발이 아픈데다가, 뜻밖에도 중형을 선고받아 맥이 풀렸는데 무엇보다도 배가 몹시 고팠다. 휴식 시간에 호위병들이 그녀 옆에서 빵과 삶은 달걀을 맛있게 먹을 때 군침이 돌았기 때 문에 배고프다느 것을 실감했으나, 그들에게 구걸하는 것은 치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 고 나서 다시 세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먹고 싶다는 생각도 나지 않고 다만 피로만 느꼈을 뿐이엇다. 그런 상태에서 그 뜻하지 않던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방금 귀에 들어온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는데 자신을 징역수로 서 생각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재판관들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이 선고를 받아들인 배심원들의 침착하고 사무적인 표정을 보자, 그녀는 분통이 터져서 법정 안이 떠나갈 듯이 자기는 죄가 없다고 고함을 쳣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는 것이 당연한 것 으로 생각이 되었으며, 사태를 변경시킬 만한 힘이 없다는 것을 알자, 자기에 대해서 행해진 이 가혹하고도 놀라운 부정에 대하여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끼고 울음을 터뜨 렸다. 특히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자기에게 이러한 잔인한 판결을 내린 사림이 남자들, 그 것도 늙은이가 아닌 젊은 남자들, 언제나 자기를 호기심으로 바라보고 있던 남자들이라는 점이었다. 단 한 사람 검사보만은 아주 다른 기질임을 그녀도 알아차렸다. 그녀가 개정을 기 다리면서 죄수실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휴식 시간에도 이들 사내들은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문 앞을 지나가기도 하고 방 안에 들어오기도 했으나, 사실은 그저 그녀를 보 려고 그랬던 것이다. 바로 이런 사내들이 무엇 때문인지 느닷없이 그녀에게 징역을 선고했 던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그 사건에 대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데 말이다. 처음에 그녀는 울 었다. 그러다가 눈물을 거두고 아주 넋을 잃은 사람처럼 죄수실에서 호송을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지금 그녀의 단 한가지 소원은 담배를 피웟으면 하느 것뿐이었다. 그녀가 이런 기분에 잠 겨 있을 때, 보치코바와 카르틴킨이 들어왔다. 선고를 받은 다음 같은 방으로 끌려온 것이 다. 보치코바는 느닷없이 마슬로바에게 욕지거리를 해대더니 '징역수'라고 불렀다. "기분이 어떠냐? 아무리 수를 써도 빠져나가기는 글렀어. 이 더러운 년아! 자기 잘못으로 이렇게 되었으니 할 수 없는 느릇이지. 징역을 살게 되면 이젠 몸치장도 못 한단 말이다." 마슬로바는 두 손을 죄수복 소매에 쑤셔넣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볓 발짝 앞의 마룻바 닥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면서 다만 이렇게 대꾸했다. "난 당신들 일에 참견하지 앟을 테니, 당신들도 내 일에 참견 말아요. 나는 아무 말도 하 지 않고 있지 않아요?" 그녀는 두세 번 이렇게 되풀이하고는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보치 코바와 카르틴킨이 끌려나가고 다음에 간수가 들어와서 3루블의 돈을 그녀에게 주었을 때 카추샤는 비로소 간신히 기운을 차렸다. "네가 마슬로바냐? 자 이걸 받아. 어떤 부인이 네게 전해 주라는 거야." 그는 돈을 주면서 말했다. "어떤 부인이신데요?" "잔말 말고 받아 두면 되는 거야. 네까짓 것들과 얘기할 시간이 어딨어!" 이 돈은 유곽 주인인 키타예바가 보내 준 것이었다. 그녀는 재판소에서 돌아가는 길에 정 리를 붙잡고 마슬로바에게 돈을 좀 전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정리는 문제 없다고 대답 했다. 이렇게 하여 유곽 주인은 통통한 하얀손에서 단추 셋 달린 양가죽 장갑을 벗고 실코 스커트에 달린 뒷호주머니에서 유행되고 있는 지갑을 꺼내가지고 유곽에서 벌어 둔 이식금 (利殖金)에서 갓 꺼내온, 상당한 양의 쿠폰 중에서 2루블 50코페이카짜리 한 장을 골라 내어 거기에 20코페이카짜리 은화 두 개와 다시 10코페이카 은화 하나를 더 보태서 정리에게 주 었다. 정리는 간수를 불러 그녀가 보는 앞에서 그 돈을 간수에게 주었다. "꼭 좀 전해 주세요." 하고 키타예바는 간수에게 말했다. 간수는 자기를 못 믿은 것에 화를 내고 그 화풀이로 마슬로바에게 퉁명스러운 태도를 취 했던 것이다. 마슬로바는 돈을 보고 기뻐했다. 왜냐하면 그 돈은 지금 그녀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소망 을 풀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담배를 구해서 한 대 피워 봤으면.' 그녀는 속으로 생각햇다. 그러므 로 그녀의 온 신경은 그저 담배 한 대만 피웟으면 하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미칠 듯이 담배가 피우고 싶었으므로 다른 방에서 복도로 흘러나오는 담배 냄새를 맡자 그 공기를 마 구 들이마셨다. 그러나 다시 그녀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것은 그녀를 돌려 보내야 할 서기가 피고의 일은 잊어버리고 변호사 한 사람을 상대로 금지된 논문에관한 얘기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 으며, 그러다가 마침내 논쟁까지 벌어졌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과 늙은이 몇 사람이 재판이 끝난 뒤에 그녀를 보러와서는 뭐라고 서로 수군대고들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을 거들 떠보지도 않았다. 이윽고 4시가 넘어서야 그녀의 퇴출 허가가 나왔으며, 니즈니 노브고로드 출신과 추바시 출신의 두 호위병이 재판소 뒷문으로 그녀를 이끌고 나왔다. 재판소 현관문을 나오자마자 그녀는 20코페이카를 주면서 빵 두 개와 담배를 사달라는 부 탁을 했다. 추바시인은 웃으며 돈을 받고 말했다. "그래, 사다 주지." 그리고 실제르 정직하게 담배와 빵을 사왔으며 거스름돈까지 갖다 주 었다. 그러나 걸으면서 피울 수는 없었으므로 마슬로바는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싶은 소망을 안 고 감옥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문 앞까지 왔을 때, 백 명쯤되는 죄수가 기차에 실려 도착했 다. 좁은 통로에서 그녀는 이 대열과 부딪쳤다. 죄수들-턱수염을 기른 사람, 수염을 깎은 사람, 젊은 사람, 늙은 사람, 러시아 사람, 다른 종족의 사람, 그 중에는 머리를 반쯤 깎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철거덕거리는 쇠고랑 소리와 말소리와 코를 찌르는 시큼한 땀 냄새로 통로를 가득 메웟다. 죄수들은 옆을 지나면서 모두 힐끔힐끔 그녀를 쳐다보았다. 개중에는 옆으로 다가와 서 그녀의 몸을 건드려 보고 가는 자도 있었다. "여어, 굉장히 예쁜데."하고 한 사람이 말했다. "아가씨, 안녕하슈!"또 한 사람이 마슬로바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말했다. 뒷머리를 빡빡 깎고 면도질을 한 얼굴에 유별나게 콧수염만을 기른 시커먼 머리의 한 사 나이가 쇠고랑을 철거덕거리면서 달려들어 그녀의 몸을 껴안았다. "이봐, 옛 애인을 몰라 보기야? 너무 시치미떼지 말라고!" 마슬로바가 떼밀자 그는 이빨을 드러내고 눈을 부릅뜨며 고함쳤다. "이놈들, 뭣들 하는 거야?"하고 교도소 부소장이 뒤에서 달려와서 소리 쳤다. 죄수는 몸을 움츠리고는 잽싸게 물러섰다. 부소장이 다짜고짜 마슬로바를 야단쳤다. "넌 왜 이런 데서 우물거리는 거야?" 마슬로바는 재판소에서 이제 막 끌려오는 길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아주 녹초가 되도록 지쳐 버렸으므로 말도 하기가 귀찮았다. "법정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하고 고참 호위병이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걸어나와 이 렇게 말하면서 경례를 붙였다. "그럼 빨리 간수장에게 인계해야잖아. 이런 데서 이렇게 추태를 부려야되나!" "네, 알았습니다." "소콜로프! 인계받아라!"하고 부소장이 외쳤다. 간수장이 걸어와서 마슬로바의 어깨를 화난 듯이 툭 치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여자 감방 복도로 끌고 갔다. 복도에 들어서자 그녀의 온 몸을 만지작거리며 구석까지 일일이 검 사를 했으나 아무것도 없으니까(담뱃갑은 빵속에 쑤셔녛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침에 그녀를 데리고 나왔던 그 감방으로 그녀를 밀어넣었다. 29 마슬로바가 수감되어 있는 감방은, 길이가 6.3미터, 폭이 5미터의 큰 방을 두 개의 창이 있었고 벽에는 튀어나온 페치카와 금이 간 나무 침대가 방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었다. 중간에 있는 문 건너편에는 꺼멓게 그을린 성상이 하나 걸려 있었고 촛불이 켜져 있었으며 그 밑에는 뽀얗게 먼지가 앉은 국화 꽃다발이 걸려 있었다. 왼쪽 문 뒤에는 마룻바닥이 꺼멓게 된 곳이 한 군데 있었고, 그 곳에는 몹시 냄새가 나는 변기통이 놓여 있었다. 방금 점호를 끝낸 여죄수들은 어제부터 밤을 보내기 위해서 수감되 었다. 이 감방에 수용된 자는 모두 열다섯 명으로서 여자가 열두 명이고 어린아이가 세 명이었 다. 아직 날이 어둡지 않아서 두 여자만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한 여자는 죄수복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이 여자는 여권이 없어서 구류된 백치 여자로서 언제나 잠자는 게 일 이었다. 또 한여자는 절도범으로 형기가 거의 다 차 가는 폐병 환자였다. 이 여자는 자지 않 고 죄수복을 베개삼아 눈을 크게 뜬 채 누워 있었다. 목구멍이 넘치도록 쿨룩쿨룩 끓는 가 래를 참으면서 기침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머지 여자들은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거친 삼베 셔츠를 입고 침대 위에 앉아 바느질을 하거나 창가에 서서 마당을 지나 다니 는 남자 죄수들을 바라보거나 했다. 바느질을 하고 있던 세 여자 죄수 중 한 사람은 아침에 마슬로바를 전송한 그 노파 코라블료바였다. 노파는 침울해 보이는 얼굴을 더욱 찌푸렸는데 턱 밑에 혹같이 살이 축 늘어져 있었다. 키가 크고 힘이 센 이 노파는 관자돌이 부근에 흰 아마빛 머리털을 짧게 땋아 틀어올리고 볼에는 털이 난 사마귀가 붙어 있었다. 이 노파는 도끼로 남편을 찍어 죽인 죄로 징역을 선 고받고 있었다. 노파는 감방장이었으며, 몰래 술까지 팔고 있었다. 그녀는 안경을 쓰고 바느 질을 했으나, 노동자의 손처럼 큼직한 손에 세 손가락으로 농군이 하듯 바늘을 쥔 다음 바 늘 끝을 자기 쪽으로 향해 잡고 바느질을 했다. 그녀와 나란히 앉아 자루를 꿰매고 있는 여 자는 키가 작고 코가 납작하고 거무튀튀하며 눈이 조그맣고 까만, 사람 좋고 말 많은 여자 였다. 이 여자는 철길 건널목지기였는데 기차가 통과할 때 막사에서 신호하러 나오지 않아 사고를 냈기 때문에 3개월의 금고형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바느질하던 세 번째 여자는 페 도샤라고 하는(동료간에는 페니치카라고 불렀다.) 하얀 얼굴에 발그레 홍조를 띤 여자로서, 아이들처럼 맑고 파란 눈을 갖고 있었으며, 머리칼을 두 갈래로 땋아서 조그만 머리에 친친 둘러감은, 아직 어리고 귀여운 여자였다. 그녀는 남편 독살 미수범으로 수감되어 있었다. 열 여섯 살 때 시집을 간 뒤 곧 남편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석이 되어 재판을 기 다리고 있던 8개월 동안에 남편과 화해했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남편을 사랑하게 되어 재 판이 시작될 무렵에는 도저히 헤어질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남편과 시아버지, 특히 그 녀를 사랑하는 시어머니는 재판소에서 그녀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변호 했으나 시베리아 유형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말았다. 마음이 착하고 쾌활하고 언제나 미소를 머금고 있는 페도샤는 마슬로바 옆 자리에 앉아 있었고, 마슬로바를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일을 거정하고 돌봐주는 것을 자기의 책임인 듯 생각하고 있었다. 한 여자는 핏기가 없는 파리한 얼굴을 한 40 안팎의 여자로서(한때는 상당한 미인이었을 것 같았으나 지금은 야위고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한손에 어린애를 안고 희고 축 늘어진 젖을 아이에 게 물리고 있었다. 그녀의 수감 이유는 마을에서 신병이 한 명 징집되었을 때, 농민들이 그 것이 부당한 처사라 하여 경관을 밀치고 그 신병을 빼돌렸는데 그 사건에 연루되어서였다. 이 여자는 불법으로 징집된 청년의 숙모로서 맨 앞에서 신병을 태운 말고삐를 잡았다고 했 다. 또 침대에는 키가 작고 얼굴이 온통 주름살투성이인 마음 좋고 머리가 페치카 옆 침대 에 걸터앉아서 네 살쯤 되어 보이는 머리가 짧고 배가 불쑥 나온 사내아이가 낄낄거리며 내 ㅃ배는 것을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셔츠 차림으로 노파 옆에서 뛰어다니며 똑같 은 말을 되풀이했다. "거봐, 못 잡았지!" 방화죄로 아들과 같이 복역하고 있는 이 노파는 같이 수감된 아들을 걱정했는데 그보다도 늙은 남편을 더 걱정하면서 보기 드물게 착한 태도로 금고형을 견디고 있었다. 며느리조차 도망쳐 버렸으므로 빨래도 해줄 사람이 없어서 영감이 이투성이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걱정 을 했다. 이 일곱 명의 여자 이외에도 네 명의 여자가 열려진 창가에 쇠창살을 꽉 붙잡고 서서는 마슬로바와 마주친 죄수들이 마당을 지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손짓을 하거나 소리를 질러 대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 중 절도범으로서 복역중인 한 여자는 몸집이 굉장히 크 고 빨간 머리에다가 주근깨 투성이의 누르스름한 얼굴을 하고 누렇게 뜬 손과 굵은 목을 드 러내 놓고 있었다. 그녀는 창 밖을 쉰 목소리로 상스러운 말을 뇌까리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서 있 는, 키가 열 살 된 아이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허리가 길고 다리는 짧은 시커멓고 전체적 으로 균형이 잡히지 않은 여죄수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붉고 부스럼 났던 흔적투성이였 으며, 까만 두 눈 사이가 넓고, 두껍고 짧은 입술은 비어져 나온 흰 이를 감추지 못하고 있 었다. 그녀는 안마당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가끔 찢어질 듯한 소리로 웃어 댔다. 유난스 레 멋을 내기 때문에 '멋쟁이'라고 불리는 이 여죄수는 절도와 방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 뒤에는 몹시 더러운 셔츠를 입은 바싹 마르고 초라해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아 이까지 배고 있는 이 여자는 장물 은닉죄로 재판중에 있었다. 이 여자는 입을 다물고 있었 으나, 마당에서 일어나는 일을 시종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보고 있었다. 창가에 서 있는 네 번째의 여자는 술 밀매죄로 복역중인, 작달만한 키에 딱 바라진 시골 여자로 눈 이 불거져 나오고 얼굴은 착해 보였다. 이 여자는 노파와 같이 있는 사내아이와 같이 수감 되어 있는 일곱 살 난 계집아이의 어머니로서(애들을 맡길 데가 없어서 감옥에 둔 것이었 다.), 그녀도 딴 여자들처럼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으나, 양말을 뜨던 손을 멈추지 않고 지 나가는 죄수들이 지껄여 대는 말은 숫제 못 들은 척하면서 언짢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의 딸인, 먼지가 앉아 희부연 머리를 헝클어뜨린 일곱 살 난 계집아이는 셔츠 바람으로 붉은 머리의 여자오 나란히 서서 마르고 조그마한 손으로 그 여자의 스커트를 잡아쥔 채, 한 곳에 눈을 박고 여죄수들과 남자 죄수들이 주고받는 상스러운 욕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 었다. 그리고 그 말을 외려는 것처럼 나직한 소리로 되뇌곤 했다. 자기가 낳은 어린애를 우 물에 집어던졌다는 열두 번째의 여자는 교회 부집사의 딸이었다. 이 여자는 크고 날씬한 키 에 짧고 굵게 땋아내린 갈색의 머리채가 헝클어져 있었고, 눈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는 주 위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더러운 회색 셔츠를 입은 채, 맨발로 감방을 왔다갔다하면서 벽까지 걸어가서는 재빠르게 몸을 홱 돌려 되돌아오곤 했다. 30 자물쇠가 철거덕하면서 마슬로바가 감방 안으로 들어오자 모두들 그녀를 쳐다보았다. 교 회 부집사의 딸까지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마슬로바를 보았으나 곧 다시 말없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코라블료바는 올이 굵은 자루에 바늘을 꽂고 안경 너머로 의심스러운 듯 마 슬로바를 찬찬히 보았다. "어머나! 돌아왔군. 난 꼭 석방될 줄 알았는데."하고 나직하게 사내 같은 쉰 음성으로 코 라블료바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징역형을 받은 모양이군." 노파는 안경을 벗고 바느질감을 침대 옆으로 치웠다. "지금 우리는 할머니랑 이야기하고 있었어. 곧 석방될 거라고. 잘하면 돈도 받을지 모른다 고 말했지."하고 건널목지기는 노래하듯 재빨리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이 지? 우리 추측이 빗나간 것 같은데 그래. 하느님에겐 하느님의 생각이 따로 있는 모양인 가?"하고 그녀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선고를 받았나요?"하고 페도샤는 귀엽고 맑고 파란 눈으로 마슬로바를 바라보면서 동정어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명랑하고 앳된 얼굴이 금세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마슬로바는 잠자코 자기 자리로 가서 코라블료바와 나란히 앉았다. 그녀의 자리는 끝에서 두 번째 침대였다. "아직 아무것도 먹지 못했겠군." 페도샤가 마슬로바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마슬로바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머리맡에다 흰빵을 놓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먼 지투성이의 죄수복을 벗고 구불구불한 검은 머리에서 삼각형 스카프를 끄르고 앉았다. 침대의 건너편에서 사내아이와 놀고 있던 허리가 구부러진 노파도 다가와서 마슬로바 앞 에 마주 섰다. "쯧쯧!" 노파는 안됐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 혀를 찼다. 사내아이들까지 노파를 따라와서 눈을 크게 뜨고는 윗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면서 마슬로바 가 가지고 온 흰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오늘 당한 여러 가지 일 뒤에 동정어린 여러 사 람들의 얼굴을 대하자, 마슬로바는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 나 그녀는 노파와 사내아이가 다가올 때까지 꾹 참고 있었다. 하지만 노파의 너그럽고 동저 어린 소리를 듣고, 특히 흰빵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내아이의 천진한 시선을 보자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더니 와락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기에 내가 뭐래. 유능한 변호사에게 부탁하라고 그랬잖아."하고 코라블료바는 말했 다. "그래 정말 시베리아 유형이란 말이야?" 그녀는 되물었다. 마슬로바는 대답을 하려고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울기만 하면서 흰빵 속 에서, 머리를 길게 땋고 삼각형으로 가슴을 드러내 놓은 가운을 입고 볼에 연지를 바른 귀 부인이 그려져 있는 담배갑을 꺼내 코라블료바에게 권했다. 코라블료바는 담뱃갑의 그림을 보고는 마슬로바가 쓸데없이 돈을 낭비한다고 못마땅한 듯 머리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한 대를 뽑아 램프불에 붙여 한 모금을 빨고 나서 마슬로바에게 주었다. 마슬로바는 여전히 울먹거리면서 굶주린 듯이 몇 모금 계속해서 빨아 대고는 연기를 내뿜 었다. "징역이래요." 그녀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그 녀석들은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가 보구먼, 천벌을 받을 놈들. 그놈들은 약한 자를 울 리는 악귀들이라구." 하고 코라블료바가 말했다. "아무 죄도 없는 이런 아가씨에게 징역살이 를 시키다니." 이 때 창가에 남아 있던 여자들 사이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계집애도 따라 웃었다. 그 가늘고 앳된 목소리가 어른들의 킬킬거리는 쉰 목소리에 뒤섞였다. 남자 죗 수 한 사람이 밖에서 이상한 짓을 해보였기 때문에 창 밖을 내다보던 여자들이 이렇게 떠들 어 댔던 것이다. "개자식 같으니! 저게 무슨 꼬락서니람."하고 빨간머리의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뚱뚱한 몸집을 흔들면서 얼굴을 창살에 맞대고 망측스런 상소리로 떠들어 댔다. "저 뚱보가 또 수선을 떨고 있어!"하고 코라블료바는 빨간머리의 여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 다시금 마슬로바를 향해서 "몇 년이야?"하고 물었다. "4년."하고 마슬로바는 말했다. 그러자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려 한 방울이 담배 위에 떨 어졌다. 마슬로바는 화가 난 듯 담배를 문질러 버리고 새로 한 개비를 뽑았다. 건널목지기 여자는 담배도 안 피우면서 냉큼 담배꽁초를 주워들고 구김살을 펴며 이야기 를 계속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이로군그래."하고 그녀는 말했다. "진실이라는 것은 돼지가 다 먹어 버 렸나 봐요. 모두들 제멋대로 해치우거든. 모두들 마트베예브나는 무죄 석방이 될 거라고 말 했었는데 말이야. 그렇지만 나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했더니 과 연 그렇게 됐어."하고 그녀는 자기 목소리에 취한 듯이 말했다. 이 때 남자 죄수들이 모두들 마당을 지나가 버렸으므로 그들과 더불어 지껄이고 있던 여 자들도 창가에서 물러나 마슬로바 곁으로 왔다. 제일 먼저 옆에 온 사람은 눈이 튀어나오 고 계집애를 데리고 있는, 술을 밀매하던 여자였다. "어떻게 됐어? 무거운 판결을 받았나?" 그녀는 마슬로바 곁에 앉아 부지런히 양말을 뜨면 서 말을 걸었다. "다 돈이 원수라고. 돈만 있었으면 그럴싸한 변호사를 대서 무죄로 할 수 있었을 것을."하 고 코라블료가 말했다. "그 때 그 사람 있잖아? 머리가 더부룩하고 코가 큰 변호사 말이야. 이봐요, 그 사람은 물 속에서도 마른 것을 끄집어 내는 재주가 있거든. 그 사람한테 부탁했 더라면......" "그 사람이라면, 나도 부탁해 보았죠."하고 옆에 앉았던 '멋쟁이' 여자가 이빨을 보이면 서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천 루블 이하는 상대도 않는다고요." "당신도 꽤나 팔자가 더럽군."하고 방화죄로 들어온 노파가 말했다. "나 역시 괴롭기는 한 량없지. 며느리는 빼앗기고, 게다가 자식놈까지 감옥에 들어와 매일같이 이에 뜯기고, 나 역 시 이 나이에 이런 곳에 들어와서 고생을 하고 있으니."하고 그녀는 수없이 되풀이한 신세 타령을 다시 시작했다. "난 감옥이나 거지 신세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모양이야. 거지가 아니면 감옥이거든." "그 녀석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지."하고 술을 밀매하던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잠깐 딸의 머리를 쳐다보더니 뜨개질하던 양말을 옆에다 놓고 소녀를 다리 사이에 그러안고 손가락을 재빨리 움직이면서 소녀의 머리에 있는 이를 잡기 시작했다. "왜 밀주를 파느냐고? 아니, 그러지 않고도 애들을 기를 재주가 있어?" 그녀는 익숙하게 이를 잡으며 말했다. "술이나 한잔 마셨으면." 마슬로바는 죄수복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여전히 흐느끼면서 코 라블료바에게 말했다. "카므리카 말이지? 그래 주지."하고 코라블료바가 말했다. 31 마슬로바는 흰빵 속에서 돈을 꺼내 가지고 지폐 한 장을 코라블료바에게 주었다. 코라블 료바는 그 돈을 받았지만 글자를 읽을 줄 몰랐으므로 그저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모르는 게 없는 멋쟁이 여자가 그것이 2루블 50코페이카짜리라고 하니까 그 말을 믿고, 통풍구 속에 감추어 둔 술병을 꺼내러 갔다. 이것을 보자 자기 침대에서 나와 있던 여자들은 제각기 자 기 침대로 돌아갔다. 한편 마슬로바는 스카프와 죄수복의 먼지를 털고 침대에 올라가 흰빵 을 먹기 시작했다. "차를 얻어 뒀는데 벌써 식었을 거야." 페도샤가 각반으로 싼 함석 주전자와 잔을 선반에 서 꺼내며 말했다. 물은 식어빠지고 함석 냄새가 푹푹 났지만 마슬로바는 차를 잔에다 따라서 흰빵을 먹고 목을 축였다. "피나시카, 이것 먹어."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빵을 한 조각 떼어서 자기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사내아이에게 주었다. 그러는 동안 코라블료바가 술병과 잔을 가져왔다. 마슬로바는 코라블료바와 멋쟁이 여자 에게도 술을 권했다. 이 세 여죄수는 돈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들인 물건을 서로 나누어 가 지기도 하여 감방에서는 귀족 계급에 속했다. 몇 분 후 마슬로바는 비로소 생기가 나서 검사보의 흉내를 내며 명랑하게 법정의 재판받 던 이야기와 재판소에서 자기를 놀라게 한 일들을 이야기했다. 재판소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있었고, 또 자기를 보려고 일부러 죄수 대기실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그치지 않 앗다는 말도 했다. "호송병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러 오는 것이라고 말이에요. 서류가 이러니저러니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서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모양이었어 요."하고 싱글벙글 웃으며 이상하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모두들 그럴싸하게 연 극을 하던데요." "그야 물론 그랬을 테지."하고 건널목지기 여자가 말을 가로챘다. 노래하는 듯한 그녀의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사탕에 모여드는 파리 같은 거야. 다른 것으론 안 되더라 도 그것만 보면 오금을 못 쓰거든. 세 끼 밥은 안 먹어도......" "그런데 말이야."하고 마슬로바가 말을 가로 막았다. "여기서도 붙잡히고 말았어요. 돌아 올 때 정거장에서 끌려온 한패를 만났죠. 어찌나 못살게 구는지 아주 혼이 났어요. 다행히 교도관이 와서 쫓아 주긴 했지만 그 중에서도 어떤 녀석은 얼마나 끈질기게 달라붙는지 간 신히 뿔리쳤다고요." "어떻게 생긴 녀석인데?" 멋쟁이 여자가 물었다. "살결이 거무튀튀하고 콧수염이 난 남자였어요." "필시 그 녀석일거야." "누군데요?" "시체그로프야, 방금 지나간." "시체그로프라니 어떤 사람이죠?" "시체그로프도 모르다니! 두 번이나 탈옥한 사내야. 이번에도 붙잡혔지만 아마 또 탈옥할 거야. 그는 간수들도 무서워한다고."하고 멋쟁이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남자 죄수들의 편지 를 전달해 주고 있었으므로 감옥 안의 사정은 빠짐없이 알고 있었다. "곧 또 달안날 거야." "아무리 달아난다 해도 우리들을 데리고 가지는 않을 테지."하고 코라블료바가 마슬로바 를 향해서 말했다. "변호사가 상소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든? 곧 상소를 해야 할 텐데." 마슬로바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때 빨간머리의 여죄수가 기미투성이인 두 손을 숱이 많고 헝클어진 붉은 머리카락 속 에 쑤셔넣고, 손톱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술을 마시고 있는 귀족들에게로 다가왔다. "카테리나, 내가 가르쳐 주지."하고 그녀는 말을 시작했다. "먼저 판결에 불복한다는 서류 를 작성해 내고 그 다음에 검사에게 그것을 알려야 해." "넌 왜 와서 참견이야?"하고 코라블료바가 그녀에게 화난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술냄새를 맡았나 보지? 위해 주는 척해도 소용 없어. 너 아니라도 할 수 있으니까. 너 같은 건 필요 없어." "너한테 말한 게 아니니까 쓸데없는 걱정 마." "왜, 술이 먹고 싶어? 그래서 어슬렁거리며 온 거야?" "그럼 한잔 주지 그래요." 언제나 가지고 있는 것을 모조리 나누어 주는 마슬로바가 말했 다. "저까짓 년에게 주긴 뭘 줘." "아니 뭐라고!"하고 코라블료바에게 대들면서 빨간머리가 말했다. "네까짓 년은 무서울 게 없어." "감방 쓰레기야!" "그건 너야!" "빌어먹을 년!" "내가 뭘 빌어먹어? 이 마귀할멈 같은 년이!" 빨간머리의 여자가 악을 썼다. "썩 꺼지지 못해!" 코라블료바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빨간머리는 더욱 어거지로 대들었기 때문에 코라블료바는 드러난 그녀의 살찐 가 슴팍을 떼밀었다. 그러자 빨간머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번개같이 한 손으로 코라블료바가 재 빨리 그 손을 잡았다. 마슬로바와 멋쟁이 여자가 그들의 손을 떼 내려고 했으나, 빨간머리는 머리채를 휘어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채를 더 휘어잡으려고 잡은 손을 잠깐 늦 추었다. 코라블료바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여서, 한 손으로 빨간머리를 때리고 팔뚝을 물어 뜯었다. 딴 여잗들은 싸우는 두 사람 옆으로 모여들어 싸움을 말리느라고 떠들어 댔다. 폐병 환자까지도 달려와서 기침을 해가며, 맞붙어 싸우는 두 여자를 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고 있었다. 그 때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서 여간수와 남자 간수가 들어왔다. 싸우 던 여자들은 서로 떨어졌다. 코라블료바는 땋아내린 희끗희끗한 머리채를 풀어 뽑힌 머리칼 뭉치를 골라 내고 빨간머리는 찢어진 속옷으로 누런 가슴을 여미면서 제각기 변명과 넋두리 를 늘어놓았다. "다 알겠어. 모두가 술 때문이야. 내일 교도관한테 말해서 혼쭐을 내 줘야지. 말하나마나 야. 술냄새가 나는군."하고 여간수가 말했다. "이봐,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가. 그렇지 않으면 혼날 테니. 너희들 시비 가려 줄 틈이 없다고. 가서 조용히 좀 있어." 그러나 그 뒤에도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여자들은 오랫동안 서로 욕지거리를 하며, 어떻게 돼서 싸움이 벌어졌다는 둥, 누구 잘못이라는 둥 서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마침내 간수들이 모두 나가자 여자들도 조용히 자리에 눕기 시작했다. 노파는 성상 앞에 가더니 기도를 드리 기 시작했다. "징역수 년이 둘씩이나 모여 있으니 말이야." 갑자기 빨간머리가 저쪽 끝에서 말끝마다 악의에 찬 욕설을 쉰 목소리로 퍼붓기 시작했다. "조심해, 또 혼구멍이 나기 싫으면 말이야." 코라블료바도 곧장 욕설로 대꾸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잠잠해졌다. "말리지만 않았더라면, 네년의 눈깔을 빼 버렸을 거야." 다시 빨간머리가 이렇게 뇌까렸 다. 그러자 코라블료바도지지 않고 당장에 응수했다. 더 오랜 침묵이 계속되었다가 다시 욕지거리가 시작되었다. 침묵하는 시간이 차츰 길어지 더니 마침내 완전히 잠잠해졌다.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벌써 코를 고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항상 오랫동안 기도를 드리 는 노파만은 여전히 성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교회 부집사의 딸은 간수가 나가자 곧 일어나 감방 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마슬로바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기가 징역수가 된 것을 생각했다. 벌써 두 번이나 그런 욕을 들었다. 한 번은 보치코바한테서, 또 한 번은 빨간머리한테서......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등을 돌리고 누워 있던 코라블료바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 렸다.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하고 마슬로바는 조용히 말했다. "별짓을 다 하고도 아무 렇지도 않은 사람도 있는데 나는 죄도 없이 괴로움을 받아야 하다니." "걱정할 것 없어. 시베리아에도 사람은 살고 있으니. 그리고 거기 간다고 곧 죽는 것은 아 니니까." 코라블료바가 그녀를 위로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해요. 그런 곳은 싫어요. 그래도 여태껏 편한생활만 해 왔는 데." "그러나 하느님을 거역할 수는 없는 거야." 코라블료바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암 거역할 수는 없지." "알고 있어요, 할머니. 그래도 정말 괴로워요."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들리지, 저 소리? 저건 그 잡년이 지르고 있는 소리야." 코라블료바가 저쪽 침대에서 들 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마슬로바의 귀를 기울이도록 말했다. 그 소리는 빨간 머리가 흐느껴 우는 소리였다. 그녀는 지금 욕을 먹고, 얻어맞고, 또 그토 록 마시고 싶었던 술도 마시지 못한 것이 분해서 울고 있었다. 그리고 일생 동안 자기에게 는 욕설과 조소와 모욕과 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서러워서 우는 것 이었다. 그녀는 페지카 몰로죤코프라는 직공과의 첫사랑을 생각해 내어 스스로를 위로하려 했으나 그 사랑을 생하니 그 사랑의 종말까지 아울러 생각났다. 그녀의 사랑은 몰로죤코프 가 얼근히 술에 취해 돌아와서, 장난으로 그녀의 제일 소중한 급소에 다 황산을 바르고는, 그녀가 아파서 몸부림치는 꼬락서니를 보면서 친구들과 웃어 댐으로써 끝장이 나고 말았다. 그녀는 지금 그것을 상기했다. 그러자 자신이 불쌍해져서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아이들처럼 코를 훌쩍거리고 찝찝한 눈물을 핥으면서 울었다. "가엾어요."하고 마슬로바가 말했다. "가엽긴 하지만, 그렇다고 봐 줄 건 없어." 32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네플류도프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 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생각하기에 앞서 진작 무슨 중대하고도 좋 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그는 알아차렸다. '카츄샤...... 공판', 그렇다. 이젠 거짓말을 집어치 우고 모든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 무슨 우연의 일치일까! 그렇듯 오래도록 기 다리던 마리야 바실리예브나의 편지, 지금의 그로서는 특히 필요한 편지가, 이날 아침에 도 착했던 것이다. 그녀의 편지에는 그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며 앞으로의 결혼에 있어서 행복 하기를 빈다고 씌어 있었다. "결혼이라고!" 그는 비웃는 듯한 투로 말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 지금은......." 그는 모든 것을 그녀의 남편에게 고백하고 참회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겠다고 한 어제의 결심을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오늘 아침이 되니까 그것이 어제 생각한 것같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그 사람에게 일부러 그런 소리를 하여 괴롭힐 필요가 있을까? 만약 나에게 물어 온다 면 숨기지 않고 얘길 해주겠지만 일부러 찾아가서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래, 그럴 필요는 없어.' 또 미시에게 모든 사실을 말한다는 것 역시 오늘 아침이 되고 보니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이것 역시 일부러 알릴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도리어 그녀에게 모욕을 주는 것 밖에 안 되리라. 일상 생활의 모든 문제가 흔히 그렇듯이 무언가를 함축성 있게 다소 남겨 두는 게 좋은 것이다. 그래서 굳게 결심한 것이, 지금까지 그 집에 드나들지 말 것이며 만약 그쪽에서 물어 오면 사실대로 이야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신 카츄샤에 대한 일에서만은 애매하게 남겨 두어서는 안 되었다. '감옥으로 찾아가서 그녀에게 모든 얘기를 하고, 용서를 구하자. 그리고 만약 필요하다 면...... 그렇다, 만약 필요하다면 그녀와 결혼하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윤리면에서 볼 때 모든 것을 희생하고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이 생각은 오늘 아침 그의 마 음을 깊이 감동시켰다. 그가 이토록 생기에 찬 하루를 맞은 것은 근래에 드문 일이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 가 방에 들어오자 그는 갑작스레 자기도 예기하지 못했던 단호한 태도로, 이제는 이 집도, 그녀의 시중도 필요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비싼 큰 집을 가지고 있는 것도 요 컨대 여기서 결혼하여 살기 위해서라는 것이 지금까지 은연중에 인정되어 왔었다. 그러므로 이 집을 내놓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는 어처구니 가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소. 하지만 이젠 나는 이런 큰 집도, 많은 하인들도 필요 없게 되었소. 만일 당신이 나를 돕고 싶다면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처럼 짐 을 꾸려두고 얼마 동안만 관리해 주시구려. 나타샤가 와서 정리해 주기는 하겠지만." 나타샤 란 네플류도트의 누이였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정리를 하라는 말씀이신지요? 지금 쓰시고 계시잖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아니, 이젠 필요 없소.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 반드시 필요 없을 거야." 네플류도프는 그 녀가 머리를 저은 것에 대한 대답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코르네이에게도 그렇게 말해 주시오. 두 달치 봉급을 주겠다는 것과 이제 그만두어 달라는 말을. 이제 그 사 람도 필요 없소." "나리,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녀는 말했다. "외국에 가시더라도 집은 어차피 필요 한 것이니까요." "아니, 그게 아니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 나는 외국에 가는 것이 아니오. 만약 간다면 전연 딴 곳으로 갈 거요." 그는 갑자기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그렇다. 이 여자에게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생각했다. '숨길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에게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게 옳다.' "사실은 어제 내게 몹시 이상하고 중대한 일이 있었소. 당신은 마리야 이바노브나 고모 집에 있던 카추샤를 알고 있소?" "알고말고요. 제가 그 애에게 바느질을 가르쳤는걸요." "그랬었군요. 그런데 어제 재판소에서 그 카추샤에 대한 재판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 배 심원으로서 출석했었소." "어머나, 가엾어라!"하고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는 외쳤다. "도대체 그 애가 무슨 죄를 지 었기에요?" "살인 혐의를 받고 있었소. 그런데 그것이 모두 내 책임이었던 거요." "어째서 도련님의 책임이신가요? 참 이상한 말씀도 다 하십니다." 하고 아그라페나 페트 로브나는 말했다. 늙은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네플류도프와 카추샤와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아니야, 그 원인은 다 내게 있소. 그 때문에 나는 내 모든 계획을 바꾸어 버렸소." "그 따위 일로 계획을 바꾸다니요. 왜 그래야 된다는 말씀이세요?" 아그라페 페트로브나 는 웃음을 참으면서 물었다. "왜라니? 만약에 그녀가 그렇게 타락한 이유가 나 때문이라면 나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야 하지 않겠소?" "그건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렇지만 도련님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어요. 그런 일은 누구나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일이며, 또 정신만 차리면 모든 것을 보상하고 잊어버리게 되어 편안 하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는 엄숙한 태도로 과감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굳이 도련님께서 책임을 지실 필요는 없다고요. 그 애가 그런 몹쓸 데서 생활하 고 있다는 말은 저도 전부터 들어 왔습니다만, 그것은 누구의 죄라고 하겠어요?" "바로 내 죄란 말이오. 그러니 그 보상을 해야겠다는 거요." "그러나 그 보상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에요." "그것은 내가 생각할 문제요. 그런데 당신에 대한 문제는 어머님께서 바라시던 대로......." "저는 저 자신은 일 따윈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돌아가신 마님의 하늘 같은 은혜를 입은 몸이어서 이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오래 전부터 리자니카(출가한 그녀의 질녀)가 오라고 했으니 만약 제가 필요 없게 되면 그 애에게로 가겠습니다. 그렇지만 도련님의 그런 생각은 쓸데없는 것이에요. 그런 건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니까요." "아니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어쨌든 부탁이니까, 이 집을 내놓고 가구를 정리해 줘요. 제발 화내지 말아요. 나는 당신의 모든 일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니 까." 네플류도프는 자기 자신을 옳지 않은 인간이라고 느낀 뒤부터는 이상하게도 남을 싫어하 는 마음이 없어졌다. 뿐만 아니라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에 대해서도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 하는 넓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크르네이에게 사과하고 싶었으나, 코르네이가 너무나 공손한 태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꺼낼 용기를 잃어버렸다. 네플프도프는 재판소로 가는 도중 그전과 같은 마차를 타고 같은 거리를 지나면서도 오늘 의 자기가 그전과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데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가깝게 생각되던 미시와의 결혼이 지금은 전혀 불가능한 것 처럼 생각되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자기의 처지를 생각하여 그녀는 자기와 결혼 함으로써 행복해질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녀와의 결혼은커녕 그녀에게 가까이 갈 자격조차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녀는 결코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가 딴 남자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을 보면 그것을 책망하려 했거든. 설사 미시가 나와 결혼한다하더라도 한 사람의 여자가 감옥에 갇혀 있으며, 내일이나 모레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유형을 간다는 것을 알 고 있으면서도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것은 고사하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있을 것인가? 나 때문에 일생을 망쳐버린 여자가 징역살이를 한다는데 나는 여기서 신 부와 함께 축복을 받고 답례를 하러 다닐 수가 있을까? 또 현재 내가 비열한 방법으로 속이 고 있는 그 귀족 회장과 함께 지방 장학관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찬반의 표수를 세서 보고 그의 아내(끔찍한 생각이야! )와 밀회 날짜를 약속할 수 있을까? 아, 얼마나 더러운 짓이 냐? 또 그렇지 않으면 어제 완성할지도 모르는 저 그림을 계속해서 그릴 것인가? 내게서 그런 대수롭지도 않은 일을 하 필요도 없거니와 또 그런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없지 않느냐 말이야.' 그는 마음속으로 다짐한 결심을 끊임없이 기뻐하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우선, 이 제부터 변호사를 만나서 그가 하는 말을 들어야겠다.'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리고 교 도소로 가서, 그녀를, 어제의 그 여죄를 면회해서 죄다 털어놓자.' 자기가 그녀를 만나서 모든 것을 털어놓고 그녀에 대한 자기의 죄를 갚을 수 있다면 자기 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겠다, 그녀와 결혼까지도 하겠다고 할 때의 광경을 상상하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눈물이 솟아났다. 33 재판소에 닿자 네플류도프는 복도에서 어제의 그 정리를 다시 만나 어제 판결을 받은 피 고들이 지금 어디에 수감되어 있는가, 그리고 면회를 하려면 누구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가 를 물어 보았다. 정리는 피고들이 여러 곳에 나뉘어 수감되어 있으며 판결의 최종적인 확정 이 선고될 때까지는 면회는 검사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재판이 끝나면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검사님은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재판이 끝난 다음에 뵙겠습니다. 우선 법정으로 가십시오. 곡 시작됩니 다." 네플류도프는 오늘 유별나게 불쌍히 느껴지는 정리에게 그의 친절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배심원 협의실로 갔다. 그가 협의실 가까이에 갔을 때 배심원들은 법정으로 들어가기 위하 여 방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상인은 어제처럼 얼근히 취해 있었으며, 마치 옛 친구나 만난 것처럼 반갑게 네플류도프를 맞아 주었다. 표트르 게라시모비치도 오늘은 그 버릇처럼 친한 척하는 태도와 너털웃음으로 네플류도프 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았다. 네플류도프는 배심원 전부에게까지 어제의 피고와 자기와의 관계를 말하고 싶었다. '사 실은 어제 재판 때 일어서서 나의 죄를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고백해야 했다.'하고 그는 생 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다른 배심원들과 함께 법정에 들어간 뒤 역시 어제와 같은 형 식과 절차 ---"재판정 입정!"하는 선언과 함께 금몰의 칼라를 한 세 명의 판사가 다시 나타 나고, 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 배심원들이 높은 등받이의 같은 의자에 앉고, 헌병이 입정하 고, 비슷한 얼굴, 사제가 나타나고 ---가 시작되자 그는 속으로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 엄숙한 분위기를 깨뜨릴 수는 없다고 느꼈다. 재판 준비는 어제와 마찬가지였다. 다만 배심원 선서와 그들의 대한 재판장의 훈시만을 생략되었다. 오늘 사건은 가택 침입 절도범에 관한 것이었다. 군도를 빼든 헌병 두 사람의 호위를 받 으면서 들어온 피고는 회색 죄수복을 입고 핏기 없는 회색 얼굴빛을 한 어깨가 좁고 말라빠 진 20세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는 혼자 피고석에 앉아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힐끔힐 끔 쳐다보았다. 이 청년은 친구들과 함께 자물쇠를 부수고 창고 안으로 들어가서 3루블 60 코페이카짜리 낡은 돗자리를 훔쳐 낸 혐의로 기소되었던 것이다. 기소장에 의하면, 이 젊은 이가 낡은 돗자리를 멘 친구와 함께 걸어가고 있을 때 순경에게 불심 검문을 당했다는 것이 다. 그 청년과 친구는 순순히 범행을 자백하고 둘 다 수감되었다. 그런데 자물쇠 직공인 그 친구가 감옥에서 죽었기 때문에 지금 젊은이 혼자만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 낡은 돗자리가 증거물로서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사건은 어제와 마찬가지의 순서대로 증거 서류, 증거물, 증인 선서, 인정 신문, 감정인 대 질 심문 등 질서 정연하게 심리되었다. 증인인 순경은 재판장과 검사 및 변호사의 물음에 대하여 찬에 박은 듯 무뚝뚝하게 "그렇습니다." "모릅니다." 그리고 또 "그렇습니다."라고만 대답하였다. 그러나 순경의 우둔하게 군대식이 되어 버린, 또 단순한 기계가 된 사실에도 불 구하고 그가 djWJs지 젊은이를 동정하고 있는 듯이 보였으며 체포 경위에 대해 증언하기를 주저했다. 또 한 사람의 증인이며 피해자인 노인은 집주인인 동시에 돗자리 소유자였는데 얼핏 보기 에도 신경질적인 사람이어서, 이 돗자리가 그의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말하기 싫다 는 듯한 태도로 "내 거요."라고 대답했다. 검사가 이 돗자리를 무엇에 쓸 작정이었느냐, 매 우 필욯나 것이었느냐 하고 물었을 때 그는 아주 화가 나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 따위 돗자리가 어떻게 되든 내가 알 게 뭐요. 그까짓 것은 조금도 필요 없어요. 그런 쓸데없는 것 때문에 이렇게 말썽이 일어날 줄 알았더라면 찾기는커녕 오히려 붉은 지폐 한 장, 아니 두 장이라도 붙여서 내 주고 심문에 끌려나오지 않도록 부탁했을 텐데. 마차삯만 해도 5루블이나 써 버렸어. 게다가 나는 몸이 불편하단 말이오. 탈장에 류머티즘까지 앓고 있다고요." 증인들의 진술은 다 이 모양이었다. 그러나 피고는 모드 s죄상을 인정하고 마치 사냥꾼에 게 붙잡힌 조그만 짐승처럼 멍청히 사방을 둘러보면서 떠듬떠듬 일어난 일을 죄다 말했다. 사태가 명백히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사보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양어깨를 들썩이면 서 교활한 범인의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이상한 질문을 해대었다. 그는 논고에서 이 절도는 사람이 살도 있는 건물 안에서, 그것도 잠긴 문을 부수고 이루 어진 것이므로 피고를 중형에 처해야 한다고 논고했다. 그런데 관선 변호인은 범죄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절도가 행해진 곳이 사람이 살고 있는 건물 안이 아니었으므로 검사보가 단언한 바와 같이 사회적인 어떤 위험은 없었다고 변호했 다. 재판장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공평과 정의의 상징이기나 한 것처럼, 이미 배심원들이 다 알고 있는 일, 몰라서는 안 될 일 등을 지루하게 늘어놓았다. 또 어제와 같이 휴정이 선언되 고 모두 담배를 피웠다. 역시 어제와 같이 정리가 "개정!"이라고 선언하고, 두 명의 헌병은 졸음을 쫓느라 애쓰면서 군도를 빼들고 피고를 위협하며 앉아 있었다. 조서에 의하면, 이 젊은이는 어렸을 때 담배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5년이나 그 곳에 있었다. 그러나 올해 그 공장 주인과 노동자 사이에 분쟁이 생겨서 그 때문에 그도 해고되 고 말았다. 해고당한 뒤 몇 푼 안 되는 돈을 털어 술을 마시면서 이리저리 시내를 돌아다니 다가 어떤 술집에서 자기보다도 먼저 실직한 몹시 술을 좋아하는 자물쇠 직공과 사귀게 되 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취한 김에 그 창고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닥치는 대로 훔쳐댔 던 것이다. 그들은 체포되자 모든 것을 자백하고 말았다. 그래서 갇히게 되었는데 자물쇠 직 공은 재판도 받기 전에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 젊은이만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하는 위험 인물로 취급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이 사람도 어제의 그 죄수와 같을 만큼 위험한 인물이군.'하고 네플로도프는 자기 눈앞에 서 진행되고 있는 일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들을 위험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위 험하지 않은가? 나는 음탕하며 거짓말쟁이이고 사기꾼이다. 우리는 모두가 그렇다. 그런 것 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나를 경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존경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젊은이가 이 법정에 와 있는 사람들 중에서 사회의 가장 위험한 존재라고 할지라도 상식 에 비추어 보아 이미 잡힌 이상 무엇을 떠들 것이 있을까? 이 젊은이가 그리 특별한 악당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며 모두들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의 죄인이 된 것은 다만 그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환경 속에 놓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젊은이가 없게 하려면 이런 불행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 환경을 없애도록 애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 나 우리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이런 인간들이 수천 명이나 잡히지 않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연히 붙잡은 이런 운 나쁜 젊은이를 삶에 지치고 타락한 사람들만 들끓는 감옥 속에 가둔 후, 완전한 태만이 아니면 가장 불건전하고 무의미한 노동에 몰아넣었다가, 국비 를 들여서 모스크바현에서 이르쿠츠크 현의 극도로 타락한 인간 사회로 추방하고 있지 않는 가.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태어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실제로는 그 들을 만들어 내는 그런 종류의 시설 투자에만 급급하고 있다. 즉 제분소, 공장, 여인숙, 술 집, 유곽 들 말이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시설을 쓸어 없애기보다는 오히려 필요하다고 생각 하면서 열심히 만들고 규제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수백만씩 길러서 그 중 한사람만을 체포해서는 우리 자신의 보호를 위해서 어떠 일을 해냈다고 생각하며 그 이상은 아무것도 우리들에게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지금 우리는 그를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 로 추방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네플류도프는 평상시와는 달리 활기차고 맑은 기분으로 대 령 다음의 안락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변호사와 검사보와 재판장의 서로 다른 소리를 듣고 그들의 확신에 찬 몸짓들을 보고 있었다. 네플류도트는 넓은 법정, 초상화, 램프, 안락 의자, 군인, 두꺼운 벽, 창문들을 보며, '얼 마나 많은 노력과 겉치레 비용이 들었는가.......'라고 혼자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건 물의 크기와 부대 시설을 떠올리며, 아무에게도 필요치 않은 이 어릿광대극을 연출하기 위 해 돈을 받고 있는 모든 군관, 서기, 교도소장, 심부름꾼 들을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노력의 백분의 1만이라도 우리의 안락과 평안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 고 생각은 하면서도 한낱 팔다리로밖에는 여기지 않는 그런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쓴다 면 어떨까? 바로 이 젊은이만 하더라도, 그가 가난 때문에 시골에서 도시로 나왔을 때.......' 하고 네플류도프는 젊은이의 병적이며 겁에 질린 얼굴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그를 딱하게 여기고 그의 생활고를 위해 힘써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아니 그가 도시 생 활을 시작하여 하루에 열두 시간이나 공장에서 일을 하고 난 다음에 그보다 나이가 많은 친 구들에게 끌려 술집에 가게 된 다음에라도 누구든지 친절한 사람이 (가면 못쓴다, 바냐야. 좋지 않은 일이다.)하고 충고를 해주었더라면 이 젊은이는 술집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 나 그가 이 도시에서 몇 해 동안 직공으로 일하면서 마치 조그만 짐승처럼 머리에 이가 안 끼게 하려고 짧게 깎고 나이 많은 직공들의 심부름을 하고 있는 그 동안에 그를 동정해 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도시 생활을 한 이후로 동료들이나 선배 들이 들려 준 이야기로는 모두 사람을 속이고 술을 마시고 욕지거리를 하고 때리는 못된 짓 을 하는 사람만이 잘난 사람이라고 했다. 그가 건강을 해치는 노동과 음주와 방탕 때문에 몸이 약해져서 거의 병자가 되어 마치 꿈을 꾸듯 멍청한 기분으로 목적 없이 시내를 돌아다 니다가 어느 집 창고로 들어가서 별로 소용도 없는 돗자리를 꺼냈을 때 우리는 이 젊은이를 현재와 같은 환경에 몰아넣은 원인을 없앨 생각은 않고, 오직 나이 어린 젊은이만 벌함으로 써 사태를 바로잡으려고만 한다! 무서운 일이다! 이런 경우, 잔혹성과 불합리성에 있어 어느 쪽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양쪽이 다 그 결정에 이른 것 같다.' 네플류도프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내 그 일에 대해서만 생 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스스로 깜짝 놀랐다. 어째서 지금 까지는 이런 것을 모르고 지냈을까, 어째서 다른 사람들도 이런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하는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34 첫 번째 휴정이 선포되자 네플류도프는 곧 자리를 차고 일어나 이젠 두 번 다시 법정으로 돌아오지 않을 작정으로 복도로 나갔다. 너희들 멋대로 해라. 그렇지만 자신은 더 이상 무섭 고 추악한 희극의 참가할 수는 없다는 결심으로. 검사실이 어디 있는가를 알아보고 네플류도프는 그리고 곧바로 갔다. 사환이 지금 검사가 바쁘다면서 못 들어오게 했다. 그러나 네플류도프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그냥 문을 밀고 들 어갔다. 그의 앞으로 다가온 서기는 보고 자기는 배심원인데 매우 중대한 일로 검사를 만나 고 싶으니 전해 달라고 말했다. 공작이란 칭호와 훌륭한 옷차림이 그 말에 도움이 되었다. 서기가 검사에게 자기를 만나러 들어온 데 대하여 노골적으로 불만스럽다는 기색을 들어내 며 일어서서 그를 맞이했다. "무슨 용건이시지요?"하고 검사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난 배심원이며 성은 네플류도프라고 합니다. 피고 마슬로바를 꼭 면회하고 싶습니다."네 플류도프는는 지금 자기가 자신의 일생일대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행동을 하고 있다는 생 각에 주저하면서도 서슴지 않고 말했다. 검사보는 희끗희끗한 머리를 짧게 깎고 튀어나온 아래턱에는 숱이 많은 짧은 수염을 기르 고 있었으며, 반짝반짝 빛나는 눈알을 재빨리 움직이는 키가 작으며 살빛이 까무잡잡한 사 나이였다. "마슬로바라고요? 잘 알고 있습니다. 독살 혐의로 기소된 여자 말이군요?"하고 검사는 침 착하게 말했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그 여자를 면회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러고는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왜 만나시려는지 그 이유를 알기 전에는 허락해 드릴 수가 없는데요." "극히 중대한 용건 때문에 꼭 면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네플류도프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렇습니까."하고 검사는 눈을 치켜뜨고 주의 깊게 네플류도프를 훑어 보았다. "그 여자 는 재판에 회부되었습니까? 아직 안 되었습니까?" "어제 재판이 있었는데, 징역 4 년이라는 억울한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여자는 무죄입니 다." "그래요? 어제 선고를 받았다면,"하고 검사는 마슬로바가 무죄라고 말에는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말했다. "그 여자가 최종 결판의 선고를 받기 전까지는 아직 미결감에 있을 겁니다. 거기서는 지정된 날 이외에는 면회가 허가되지 않습니다. 그 곳으로 가셔서 의논하 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난 한시바삐 그 여자를 면회하고 싶습니다." 네플류도프는 바야흐로 모든 것을 정할 순간이 다가왔음을 느끼고 턱을 후들후들 떨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검사는 약간 불안한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아무런 죄도 없는데 그 여자가 징역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모두 내 게 있습니다."하고 네플류도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으나 그와 동시에 자기가 지금 필요 도 없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또 어째서 입니까?"하고 검사는 물었다. "실은 내가 그 여자를 속여 지금과 같은 형편으로 빠트렸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그러 지 않았다면 그 여자는 그런 형편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고, 이번과 같은 범죄의 혐의도 받 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것과 면회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무슨 상관이냐고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나는 그 여자를 시베리아까지 쫓아가서 결혼할 생각입니다." 네플류도프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돌았다. "네? 그래요!"하고 검사는 말했다. "그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군요. 당신은 아마 크라스노 페르스크의 지방 자치회 의원이시죠?" 검사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네플류도프에 대해서 분명히 전에도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아 물어 보았다. "실례지만, 지금의 그 질문과 제가 부탁하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을 텐데요."하고 네플류 도프는 발끈해서 기분 나쁘고는 말투로 대꾸했다. "물론 상관이야 없지만요."하고 검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은근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당신이 너무나 뜻밖의 것, 보통 일반적인 것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을 원하 시므로......." "어떻하시겠습니까, 허가를 내 주시는 겁니까?" "허가요? 네, 곧 내드리도록 하지요. 잠깐 기다리십시오." 그는 테이블에 앉더니 쓰기 시작했다. "앉으십시오." 네플류도프는 그냥 서 있었다. 허가증을 다 쓴 검사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네플류도프를 쳐다보면서 그것을 그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난느 앞으로 재판 에 참석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아시다시피 그 이유서를 첨부해서 제출해야 합니다." "이유란 것은 달리 없습니다. 그저 모든 법정이란 것이 무익할 뿐만 아니라 부도덕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까?" 검사는 또 은근한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그것은 마치 그따위 의견은 새삼 스럽고 특이한 것이 못되고 그저 어떤 우스꽝스런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투였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나는 검사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의견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 니 이 일은 재판소에 맡기도록 하십시다. 그러면 재판소에서 당신의 이견이 정당한지 아닌 지를 검토하여 해결해 줄 것입니다. 만약 부당하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당신은 벌금을 물 것 입니다. 아무튼 이유서를 재판고에 제출하십시오." "나는 이미 내 입장을 설명했으므로 이 이상 아무데도 가지 않겠습니다." 네플류도프는 화난 듯이 쏘아붙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검사는 이 엉뚱한 손님과 한시바삐 헤어져야겠다는 듯이 머리를 숙이 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그 사람은 누굽니까?" 네플류도프가 나가자 뒤이어 검사실로 들어온 배석 판사가 물었다. "네플류도프입니다. 그 왜 크라스노페르스크 군의 지방 자치회에서 여러 가지 기묘한 의 견을 내놓던 사람 말이오. 그런데 이런 일이 있답니다! 그 사람은 여기 배심원인데 피고 중 에 징역을 선고받은 계집애인지 아낙네인지가 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자기가 그 여자를 속였다든가 하면서 이번에는 그 여자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는군요." "그럴 수가 있나요!" "그럴 수가 있나요!" "아니, 자기가 그럽디다. 괜히 흥분하면서 말이에요." "요즘 젊은 애들은 어딘지 모르게 비정상적인 데가 있거든." "그렇지만 그 사람은 그다지 젊지도 않잖소." "그래, 그건 그렇고 당신들의 그 유명한 이바셴코프에는 정말 질려 버렸소. 한번 말을 꺼 내면 끝이 없으니 말이오." "그런 자는 가차없이 발언을 중지시킬 도리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사 방해가 되 니까......." 35 네플류도프는 검사와 헤어진 뒤 그 길로 곧장 미결감으로 갔다. 그러나 거기에는 마슬로 바라는 여죄수가 없었다. 아마 옛날 이송 감옥에 있을 것이라고 전옥이 네플류도프에게 말 해 주었다. 네플류도프는 그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과연 예카테리나 마슬로바는 그 곳에 수감되어 있었다. 검사는 깜박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6 개월 전에 극도로 날카로워진 정치적 소요 사태가 헌병들의 탄압으로 더욱 확대되어 미결 감의 모든 감방은 모조리 대학생, 의사, 노동자, 여학생, 간호사 들로 가득 차게 되었던 것이 다. 미결감에서 이송감까지의 거리는 대단히 멀어서 네플류도프가 거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그가 거대하고 음산한 건물의 문으로 가까이 가려고 하자 보초병이 들여 보내지 않고 벨을 물렀다. 그러자 곧 간수가 나왔다. 네플류도프가 허가증을 보였지만 간수 는 교도소장의 관사로 갔다. 그가 계단을 올라서자 뭔지 복잡하고 웅장한 피아노 곡이 집 안에서 흘러나 왔다. 곧이어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시무룩한 얼굴의 하녀가 문을 열었는데, 그 때 피아노 소리가 집 안에서 둑 터지듯 울려나와 그를 놀라게 했다. 그것은 이제껏 싫증 이 나도록 들은 리스트의 <광상곡>으로서 훌륭한 솜씨였지만 어느 일정한 부분까지밖에는 치지 않았다. 그 부분까지 쳤다가는 다시 처음부터 같은 곡을 되풀이했다. 네플류도프는 눈 에 안대를 한 하녀에게 교도소장이 집에 있느냐고 물었다. 하녀는 없다고 대꾸했다. "곧 돌아오실까요?" <광상곡>이 다기 요란하게 시작되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그 부분까지 채 가기도 전에 멎 고 여자의 목소리가 문 뒤에서 들려왔다. "안 계시고 오늘은 돌아오시지 않는다고 말해요. 초대받고 가셨다고요. 정말 귀찮아 죽겠 군." 그리고 또 <광상곡>이 들이는가 싶더니 멎으며 의자를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기분 잡친 피아니스트가 때아닌 시간에 찾아와서 귀찮게 구는 방문객에게 직접 잔소리를 할 적정인 것 같았다. "아버지는 안 계세요."하고 우울해 보이는 눈 밑에 푸른 점이 있고, 흐트러진 머리를 높이 빗어올린 창백한 얼굴의 처녀가 문간으로 나오면서 툭 쏘아붙였다. 그러나 훌륭한 외투를 입은 청년을 보자 그녀는 곧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좀 들어오세요. 어떤 일로 오셨는 지......." "감옥에 있는 여죄수를 면회하려고 합니다." "아마 정치범이겠죠?" "아니 정치범이 아닙니다. 검사의 허가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저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안 계셔서. 어쨌든 이리로 들어오세요." 그녀는 다시 좁은 현관에서 그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러시다면 부 소장님에게 말씀해 보세요. 지금 사 무실에 계실 거예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고맙습니다." 네플류도프는 물음에 대꾸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의 등뒤에서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또다시 그 활기 있고 경쾌한 피아노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연주되고 있는 장소로 보거나 가련한 처녀의 얼굴로 보거나 어울리지 않았다. 안뜰에서 네플류도프는 염색한 콧수염을 뻣뻣하게 세운 젊은 장교를 만났기에 부소 장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가 부소장이었다. 그는 허가증을 받아 보 고 나서 미결감의 면회 허가증이므로 여기서 그것이 허용될 수 있을는지 자기도 모르겠으며 또 이미 늦었으니 내일 오라고 말했다. "내일 오십쇼. 내일 10시에 일반 면회가 허가됩니다. 그때는 교도소장도 집에 계실 겁니 다. 일반 면회는 물론, 교도소장의 허가만 있으면 사무실에서도 면회하실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이 날은 끝내 면회를 하지 못하고 네플류도프는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녀 를 만난다는 생각으로 흥분했던 네플류도프는 재판소의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검사나 부소 장의 이야기만을 상기하면서 거리를 걸어갔다. 그녀와 만날 방법을 알아보고 자기의 결심을 검사에게 말하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감옥을 두 군데나 찾아다녔다는 사실이 그를 몹시 흥분케 했으므로 한참 동안 그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즉시 오 랜 동안 쓰지 않았던 일기장을 꺼내서 몇 군데를 읽어 보고, 다음과 같이 적어 넣었다. '2년 동안 나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어린애 같은 짓은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린애 같은 짓이 아니라 자기와의 대화이다. 모든 사 람 속에 살고 있는 진실하고 신성한 자아와의 대화이다. 지난 2년 동안 이 마음속의 자아가 잠자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다. 4월 28일 배심원으로 나갔던 법정 에서의 뜻밖의 사건은 내 자아의 잠을 깨워 주었다. 나는 그녀가, 나에게 속아 몸을 버린 카 추샤가 피고석에 않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상한 오해와 나의 과오 때문에 그녀는 징역 을 선고받았다. 나는 곧 검사를 찾아보고 감옥으로 갔다. 그녀와의 면회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만나 용서를 빌고 결혼을 해서라도 나의 지난 죄를 속죄하겠다. 아, 신 이여, 도와주옵소서! 나의 영혼은 평화롭고, 나는 지금 기쁨에 가득 차 있다.' 36 그 날 밤 마슬로바는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뜬 채 누워서, 방 안을 왔다갔다 하는 교회 부집사의 따 때문에 가려지는 문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빨간머리 여자가 훌쩍이 는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기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사할린의 징역수 따위와는 결혼하지 않고 관리나 서기, 하다 못 해 간수나 간수보와 라도 살림을 차리도록 해야 한다 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지 않도록 해야지, 말라 빠지면 끝장이다.' 그녀는 변호사나 재판장 이 뚫어지게 자기를 바라보던 일이며, 또 재판소에서 만난 사람들이나 자기 옆을 지나던 사 람들이 줄곧 자기만 바라보던 일들을 상기했다. 그리고 감옥으로 면회와 준 친구 베르타의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 키타예바 마담의 윤곽에 있을 무렵 카츄샤가 좋아하던 어느 대학생 이 유곽으로 찾아와서 여가 가지 소식을 묻고 무척 동정하더라는 말을 전해 준 것이다. 그 리고 빨간머리의 여자와 싸우고 난 다음, 오히려 그녀가 가엾어진 생각이며, 흰빵을 하나 덤 으로 준 빵장수 생각을 했다. 그녀는 가엾어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지만 네플류도프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소녀 시절이며 처녀 시절이며 더욱이 네플류도프와의 사랑에 대 해서는 이제껏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었다. 그러한 추 억은 그녀의 마음속 깊숙한 한 구석에 건드리지 않은 채 간직되어 있었다. 꿈에서도 네플류 도프를 본 적이 없었다. 오늘 법정에서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도 그녀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군인으로서 짧은 콧수염을 길렀을 뿐, 턱수염도 없이 탐스러운 머리칼만 물 결치듯 굽이치고 있었으나, 지금은 얼른 보아 청년이라 할 수 없었을 정도로 노숙해졌고 턱 수염도 기른 탓이긴 했지만, 그보다 앞서 오히려 지금까지 한번도 그의 일을 생각해 본 적 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가 군대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모네 집에 들르지도 않고 그 냥 마을을 지나쳐 간 r 무섭고 캄캄하던 밤에, 네플류도프와의 모든 추억을 가슴속 깊은 곳 에 묻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 날 밤까지도 그가 틀림없이 집에 들르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뱃속에 든 어린애를 그렇게 괴롭게 여기지 않았을 뿐더러 몸 속에서 때로는 부 르럽기도 하고 때로는 활발한 태동을 느꼈을 때 이상한 감동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날 밤 이후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다. 앞으로 태어날 아기는 귀찮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 다. 고모들도 네플류도프를 기다리며 반드시 들러 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는 시일이 급해서 빨리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들르지 못하겠다는 전보를 보내 왔다. 이것을 안 카추샤는 역까지 나가 그를 만나 보려고 하였다. 새벽 2시에 기차가 그 곳을 지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카추샤는 두 여주인의 잠자리를 돌봐 주고 요리사의 딸 마샤라는 계집애를 구 슬러서 귀가할 때 그 애와 함께 오려고 낡은 부츠에다 머릿수건을 뒤집어쓰고 옷자락을 걷 어붙인 채 역으로 달려갔다.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캄캄한 가을밤이었다. 굵은 빗방울이 한 차례 퍼붓고는 뚝 그쳐 버렸다. 들판에서 발끝도 보이지 않았다. 숲속도 캄캄했기 때문에 익숙한 길인데도 카추샤는 숲속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그래서 기차가 3 분밖에 정차하지 않은 조그만 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두 번째 벨이 울린 뒤였다. 카추샤는 플랫폼으로 달려가자 곧 1 등칸 차창에서 그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 1등 객차 안은 유달리 휘황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두 사람의 정 교가 벨벳 안락 의자에 마주 앉아서 트럼프를 하고 있었다. 창가에 보이는 조그만 테이블에 는 굵은 양초들이 녹아내리며 타고 있었다. 그는 꽉 끼는 군복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고 좌 석의 팔걸이에 걸터앉아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웃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녀는 얼어붙은 손으로 차창을 두드렸다. 그러나 바로 이 때 세 번째 벨이 울리고, 기차는 덜커덩하며 뒤로 좀 물러서더니 이윽고 객차와 객차가 부딪치면서 하나씩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럼프를 하고 있던 장교가 트럼프를 들고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녀는 한 번 더 창문을 두드리면서 얼굴을 유리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이 때 그녀가 바싹 붙어 있던 객 차도 덜커덩하고 움직이며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차장 안을 들여다보면서 따라갔다. 장 교가 창문을 열려고 했으나 잘 열리지 않았다. 그 때 네플류도프가 일어나서 그 장교를 밀 어젖히고 차장을 열려고 했다. 기차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카추샤는 더욱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만 했다. 기차는 더욱 속도를 더해갔다. 가까스로 창문이 열린 그 순간, 차장이 카추 샤를 밀치면서 그 객차에 뛰어올랐다. 이내 플랫폼이 다 지났다. 카추샤는 넘어지지 않으려 고 조심하면서 층계에서 땅으로 뛰어내렸다. 그녀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나 1등칸은 벌써 훨씬 앞에 있었고, 그녀 옆을 2등칸이 달리고 잇달아 3등칸이 더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그 래도 그녀는 자꾸만 달렸다. 신호등을 단 마지막 객차가 스쳐갔을 때 그녀는 울타리 밖의 급수 탱크 앞까지 와 있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머리수선을 날려 보내고 한쪽 옷자락이 다 리에 휘감겼지만 그녀는 여전히 계속 달려가고 있었다. "아줌마!" 간신히 그녀 뒤를 따라오던 계집애가 외쳤다. "머릿수건이 날아갔어요!" 카추샤는 그 자리에 섰다. 그러고는 뒤돌아서서 느닷없이 계집애를 껴안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이는 휘황찬란한 1등칸 안에서 벨벳 안락 좌석에 걸터앉아 농을 하며 마시 고 있는데,'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어두운 추운 밤에 흙투성이가 되어 모진 비바람을 맞 아 가면서 서서 울고 있다.' "가버렸어!"하고 그녀는 외쳤다. 계집애는 깜짝 놀라서 카추샤의 젖은 옷을 팔로 끌어안았다. "아줌마, 집으로 가요." '이번에 기차가 지나가면, 그 밑으로 뛰어들자. 그래, 그러면 도든 게 끝나는 거야.' 맞추 샤는 계집애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카추샤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바로 이 때 흥분이 지난 뒤에는 흔히 그렇듯이 태아가---뱃속에 든 그의 아이가---갑자기 꿈틀거리며 움직이더니 몸을 쭉 뻗었다가는 다 시금 가느다랗고 뾰족한 것으로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조금 전의 괴롭던 생 각도, 그에 대한 증오심도, 죽어서라도 그에게 복수하려던 생각도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렸 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어서서 옷 매무새를 고치고는 수건을 머리에 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에 젖고 흙투성이가 된 채 피로에 지쳐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 날부터 그녀의 마음속에 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서 그 결과 지금과 같은 타락의 세계로 빠져 버린 것이다. 그녀는 그 무서운 비바람이 몰아치던 밤 이후, 신도 선도 믿지 않게 되었다. 그 때까지는 그녀 자신도 신을 믿었고 다른 사람들도 신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날 밤부터 아무도 신 을 믿지 않으며, 사람들이 신에 대하여, 또는 신의 계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가 거짓 이며 엉터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기가 사랑했고 또 자기를 사랑했던 네플류도프는(그것 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그녀를 농락한 후 그녀를 버리고 가버렸다. 그렇지만 그 는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그 에 못 미쳤다. 그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그의 고모들, 그렇게 신앙심이 깊은 노부인들조차도 그녀가 전처럼 일을 잘하지도 못하니까 쫓아내고 말았다. 그 녀가 만난 모든 여자들은 모두 다 그녀를 보고 돈벌이할 궁리만 했고 또한 남자들은, 그 늙 은 경찰서장을 비롯해서 감옥의 간수에 이르기까지 그녀를 한낱 육체적 쾌락의 도구로만 생 각했다. 이 세상에서는 모두들 쾌락만 찾았다. 이러한 확신은 그녀가 자유로운 생활을 시작 한 지 2년째 되던 해에 만난 늙은 소설가에 의해 더욱 굳어졌다. 그는 모든 행복은 쾌락에 있다고 단언하며, 그것을 소위 시나 미라고 불렀다. 사람은 그 누구나 자기만을 위해서, 자기의 쾌락만을 위해서 살고 있으므로 신이나 선에 관한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 고민하도록 혼란스럽게 이루어진 것일까 하는 따위의 의문이 생겼을 때는 일체 그런 일은 생각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따분해질 때면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거나, 아니 무엇보다 도 좋은 것은 남자들과 즐기는 것이었다. 그러면 모든 괴로움은 사라져 버렸다. 37 이튿날은 일요일이었지만, 아침 5시에 여죄수 감방의 복도에서 여느 날과 같이 호각 소리 가 요란하게 울려펴지자 일찍부터 잠이 깨어 있던 코라블료바가 마슬로바를 흔들어 깨웠다. '징역수'라는 생각에 섬뜩해 하면서 마슬로바는 눈을 비비고 아침이 되면 굉장한 악취 가 풍기는 공기를 얼떨결에 깊숙이 마셨다. 또다시 잠에 빠져 망각의 세계에 잠기고 싶었 지만, 이미 습관이 되어 버린 공포심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일어나서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죄수들은 모두 잠이 깨어 일어나 있었고, 아니들만 여 태 잠자고 있었다. 눈이 튀어나온, 술을 밀매하는 여자는 애들이 깰까 봐 조심하면서 애들 밑으로 겉옷을 살그머니 끄집어 냈다. 폭동죄로 투옥된 여자는 난로 옆에서 기저귀로 쓰고 있는 누더기를 펼치고 있었고 아이는 푸른 눈의 페도샤에게 안겨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 다. 페도샤는 상냥한 목소리로 아기를 달래며 몸을 흔들흔들하고 있었다. 폐병쟁이 여자는 가슴을 움켜쥐고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연방 기침을 하고 있었는데, 기침을 멈출 때마다 거 의 외치는 듯한 소리를 내며 한숨을 몰아쉬곤 하였다. 빨간머리 여자는 잠이 깨자마자 그 자리에 반듯이 누워서 굵은 다리를 꼬부리고 큰 소리로 어젯밤 꿈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고 있었다. 방화범 노파는 여전히 성상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늘상 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성호 를 긋고 있었다. 교회 부집사의 딸은 꼼짝도 않고 나무 침대에 걸터앉아 아직 감기가 가 시지 않은 거슴츠레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멋쟁이 여자는 기름을 번지르르하게 바른 뻣뻣한 검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감아올리고 있었다. 복도에서 죄수화를 질질 끄는 소리가 들리고 자물쇠를 녀는 소리가 들리더니, 짧은 웃옷 에 발목에서 훨씬 올라간 깡똥한 회색 바지를 입은 변기 소제부인 두 명의 죄수가 들어왔 다. 그들은 화가 난 듯 굳은 표정으로 하고 냄새나는 변기통을 막대기에 둘러꿰어 어깨에 메고는 밖으로 나갔다. 여자들은 세수를 하려고 복도의 수도가 있는 곳으로 나갔다. 수도가에서 빨간머리와 옆 감방의 여죄수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욕지거리를 해 대고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고 야단 들이었다. "독방에 들어가고 싶어서 그래?" 간수가 소리를 지르며 빨간머리의 투실투실한 벗은 잔들 을 찰싹 후려갈겼다. 그 소리가 온 복도에 울렸다. "조용히 하지 못해!" "아이, 영감님도 너무하네요!" 빨간머리는 그 매를 애교로 받아넘겼다. "자, 빨리들 해! 미사드릴 준비를 해야잖아." 마슬로바가 채 머리도 빗기 전에 소장이 부하를 거느리고 왔다. "점호!" 간수가 외쳤다. 다른 감방에서도 여죄수들이 나와서 모두 복도에 두 줄로 늘어섰고, 뒷줄의 여자는 앞줄 의 여자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점호를 받았다. 점호가 끝난 뒤 여간수가 와서 여죄수들을 성당으로 데리고 갔다. 마슬로바와 페도샤는 각 감방에서 몰려나온 백 명도 넘는 행렬의 중간쯤에 섰다. 모두들 흰 목도리에 흰 웃옷과 흰 치마를 입고 있었으나, 그 중 어떤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색깔 있는 옷을 입고 있는 것 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남편을 따라 유형지로 가는 아이 딸린 여자들이었다. 모든 층계는 이 행렬로 메워졌다. 되수화의 가벼운 발소리, 이야기 소리, 그리고 간간이 웃음소리도 들렸 다. 마슬로바는 길모퉁이에서 앞쪽에 걸어가는 자기의 적 보치코바의 심술궂은 얼굴을 보자 그것을 페도샤에게 알려 주었다. 아래로 내려간 여죄수들은 잠잠해지고 성호를 긋거나 머리 를 숙이며 텅 빈 금빛 찬란한 성당의 열려진 문 안으로 들어갔다. 자기들 자리인 우측으로 간 여죄수들은 이리저리 밀치면서 정돈했다. 여죄수들의 뒤에 이어 회색 죄수복을 입은 남 자 죄수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헛기침을 해 대면서 한 무더기씩 성당의 좌측과 중앙에 자리 를 잡았다. 위쪽 성가대 자리에는 먼저 인솔되어 온 자들이 서 있었다. 한쪽에는 머리를 절 반쯤 깎은 징역수들이 쩔렁거리는 쇠고랑 소리를 내면서 자기들이 왔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 고, 또 한쪽에는 머리도 깎지 않고 쇠고랑도 차지 않은 미결수들이 서 있었다. 교도소 내의 성당은 어느 돈많은 상인이 수만 루블을 기부하여 신축하고 장식한 덕분에 밝고 찬란한 금빛으로 빛났다. 잠시 동안 성당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코를 푸는 소리, 기침 소리,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그리고 이따금 쇠고랑 소리 외에는 별로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중앙에 서 있던 죄수들이 움직이더니 설 떼밀면서 중간에 통로를 만들었다. 그러자 소장이 그 통로를 따라 들어와서 는 맨 앞자리인 성당의 중앙에 섰다. 38 미사가 시작되었다. 미사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 먼저 사제가 일종의 기묘하고 거북스러운 금란 제의를 입고 여러 성인들의 이름과 기도문을 외면서 성반 위의 빵을 잘게 썰어 늘어놓은 다 음, 그것을 포도주가 들어 있는 성작 속에다 집어넣었다. 그러는 동안 부제는 쉴 새 없이 자 기도 잘 모르는 슬라브어로 된 기도문을, 더군다나 너무나 빨리 읽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 을 수도 없는 기도문을 읽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죄수들로 구성된 성가대가 번갈아 가며 찬가를 불렀다. 기도문은 대개 황제와 그 가족의 안녕을 비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도문은 다 른 기도문과 함께, 혹은 그것만 단독으로 여러 번 되풀이되었으며, 그때마다 모두들 무릎을 꿇었다. 그 외에 부제가 <사도 행전>중의 몇 구절을 낭독했는데, 너무나 긴장된 목소리로 낭독했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에 사제가 <마가 복음> 중에 한 구절을 매우 또렷또렷하게 읽었다. 그것은 예수가 부활 승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 에 앉기 전에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 하고, 동시에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하고, 믿어서 영세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에게 손을 대기만 하여도 병이 낫고, 새로운 말을 하며, 뱀을 쥐고 독 을 마셔도 죽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 말한 대목이었다. 미사의 본 의미는 사제가 잘게 썰어 포도주 속에 넣은 빵 조각이 일정한 순서와 기도가 행해지는 동안 하느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데 있었다. 이 일정한 순서라는 것은 사제가 몸에 두른 금란의 자루 같은 제의 가 거추장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두 팔을 같은 높이로 쳐들 고 한동안 그대로 있다가 무릎을 꿇고 제단과 그 위에 있는 성물들에 입을 맞추는 일이었 다.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행위는 사제가 두 손으로 냅킨을 집어 성반과 금 성작 위에서 능숙한 솜씨로 일정하게 흔드는 것이었다. 바로 이 순간에 빵과 포도주가 하느님의 살과 피 로 변한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미사 중에서도 이 행위가 제일 엄숙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더없이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축복받으신 성모 마리아를 위하여!"하고 사제는 본당 칸 막이 뒤에서 소리 높이 부르짖었다. 그러자 성가대가 엄숙히 찬미가를 불렀다. 순결한 처녀 의 몸으로 그리스도를 낳은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며, 그러므로 마 리아는 케루빔(제2급의 천사, 곧 지품 천신)보다 더한 존경과 세라핌(천사, 곧 지품 천신)보 다 더한 영예를 받을 가치가 있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이러한 것 뒤에 성찬의 기적이 이루 어진 것으로 생각하여 사제는 성반에서 냅킨을 걷어치우고 가운데의 빵 한 조각을 넷으로 잘라 먼저 포도주 속에 넣고 다음에는 자기 입에다 넣었다. 이것으로 그는 신의 살(성체) 한 조각을 먹고 신의 피(성혈) 한 방울을 마신 셈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 사제는 제단을 모신 곳의 막을 걷고 가운데 문을 연 다음, 한 손에 금 성작을 들고 열린 문으로 나와, 성작 속에 든 성혈과 성체를 먹고 싶은 사람을 앞으로 불렀다. 희망자로서 몇몇 아이들이 나왔다. 먼저 사제는 아이들의 이름을 묻고는 성작 속에서 조심스럽게 포도주에 적신 빵 조각를 스푼으로 건져내어 아이들 하나하나의 입 안에 차례차례 넣어 주었다. 그러면 옆에 서 있던 부제가 그 자리에서 아이들의 입을 닦아 주면서 아이들이 신의 살(성체)을 먹고 그 피(성 혈)를 마셨다는 뜻의 찬가를 불렀다. 이러한 의식이 끝나자 사제는 성작을 칸막이 뒤로 가 져가서 잔에 남아 있는 성체를 다 먹고 성혈을 다 마신 후 정성껏 수염을 닦고 입과 성작을 닦고 나서는, 몹시 흐뭇한 듯 쇠가죽구두의 얇은 뒤축을 가볍게 울리며 힘찬 걸음걸이로 칸 막이 뒤에서 걸어나왔다. 이것으로 미사의 중요한 부분이 끝났다. 그러나 사제는 이곳에 온 불행한 죄수들을 위해 서 보통 미사 의식에다가 특별한 의식을 덧붙였다. 이 특별한 의식이란 사제가 지금 자기가 먹은 신의 상을 본뜬 금니 성상(얼굴과 손은 검다.)과 켜져 있는 열 자루의 촛불 앞에 서서 노래도 아니고 이야기도 아닌 괴상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더없이 너그러우신 예수여, 사도의 영광이시고 전능하신 예수여, 가장 아름다우신 우리의 예수여, 당신을 그리며 모여드는 자들을 구원하소서! 당신을 낳으신 자와 당신의 거룩하신 모든 예언자의 기도에 의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의 구주 예수님, 천국의 기쁨을 베푸소서! 만백성을 사랑하시는 예수여!" 여기까지 하고 그는 말을 끊더니 잠시 동안 숨을 돌리고 나서 성호를 긋고 코가 땅에 닿 도록 깊숙이 절을 했다. 모두들 그대로 따라 했다. 소장도 간수들도 죄수들도 절을 했다. 위 층에서는 빈번히 쇠고랑 소리가 울렸다. "모든 천사의 창조자이시고 힘의 구현자이신 예수여!"하고 사제는 계속했다. "모든 천사들 의 경탄의 표적이시고 우리 시초의 구원이신 굳센 예수여, 온 족장의 찬송이신 예수여, 모든 왕들의 지위를 굳게 하신 영광스러운 예수여, 모든 수도자들의 기쁨이신 겸손하신 예수여, 사제들의 동경이신 자비로우신 예수여, 제계자들의 계율이신 인자하신 예수여, 모든 성자들 의 기쁨이신 거룩하신 예수여, 동정자들을 지키시는 순결하신 예수여, 죄인들의 구원이신 영 원하신 예수여,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제는 예수라는 말을 입에 올릴 적마다 점점 소리를 높여 나중에는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가까스로 끝마쳤다. 그 는 한 손으로 비단을 안에 댄 제의를 붙잡고 한쪽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성가대는 '하느 님의 아들이신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마지막 구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죄수 들 절반쯤 깎은 머리를 흔들며, 뼈만 남은 앙상한 발목에서 쇠고랑을 절그럭거리면서 엎드 리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했다. 미사는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처음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로 끝나는 성 가를 부르고, 다음엔 '할렐루야!'로 끝나는 새로운 성가를 불렀다. 죄수들은 성호를 긋고 절을 했다. 처음에는 노래가 끝난 때마다 절을 하더니 나중에는 한 번씩 걸러 절을 하다가 두 번씩 걸러 절을 했다. 그리고 성가가 전부 끝났을 때에는 모두들 마음이 흐뭇했다. 사 제도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기도서를 덮은 다음 칸막이 뒤로 들어갔다. 마지막 한 가지 일 이 나아 있었다. 사제가 커다란 제단에서 끝에 칠보 메달이 달린 도금한 십자가를 들고 와서 성당 중앙으 로 걸어갔다. 그런 다음 제일 먼저 소장이 그 곳으로 다가가 키스하고 뒤이어 간수들, 죄수 들의 순서로 나아갔는데 죄수들은 서로 떼밀며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나갔다. 사제는 소장과 뭔가 이야기를 하면서 곁에 온 죄수들의 입에다 십자가와 자기 손을 내밀기도 하고 때로는 코에다 불쑥 내밀기도 했다. 그러자 죄수들은 십자가와 사제의 손에 키스하려고 애를 썼다. 이런 식으로 길 잃은 형제들의 위로와 교화를 위한 크리스트교의 미사가 끝난 것이다. 39 소장을 비롯하여 마슬로바에 이르기까지 사제와 이 미사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그 어느 한 사람도, 사제가 갖은 기괴한 소리로 몇 번씩이나 되풀이하면서 찬송한 예수, 그 자신이 실은 여기서 행해졌던 모든 일을 금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는 사제라는 교사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행하는 무의미하고도 모독적인 요술을 금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딴 사람들을 스승이라고 부르는 일도 분명히 금했다. 또한 회당 안에서의 기도를 금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오직 혼자서만 기도하라고 일렀던 것이다. 그는 회당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진리 속에서 행해야한다고 말했다. 특히 예수는 여기서 행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을 재판하고 감금하고 괴롭히고 욕을 보이고 벌을 주는 일을 금했을 뿐만 아니라, 죄수 들을 자유롭게 풀어 주기 위해서 왔노라고 말하면서 타인에 대한 일체의 폭력과 강제를 금 했던 것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그 어떤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 곳의 모든 일이 실 상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더없는 모독이며 조소라는 것을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또 사제가 들고 와서 여러 사람들에게 키스를 시킨, 끝에 칠보 메달이 달린 도금 십자가는 지금 여기 서 그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 같은 일을 금한 탓으로, 그리스도가 처형되었던 그 형 구를 본뜬 것에 불과하지만, 누구 한 사람 그것을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빵과 포도주를 입 에 넣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있다고 상상하고 있는 사제들이야말로 빵 조각과 포도주로써가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빨고 있다는 사실을 아 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자기 몸처럼 여기던 '이 어린 양들'을 잘 못 인도를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져온 복음을 사람들에게 숨기 고 그들에게서 최대의 행복을 빼앗고 그들로 하여금 참혹한 괴로움을 맛보게 함으로써 그 본뜻을 정녕 아무도 생각지 못하게 했다. 사제는 아무 거리낌 없이 담담하게 어제와 같은 모든 일을 행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어릴 깨부터 이것이야말로 성인들이 믿어 온 오직 하나의 진실한 신앙이며, 성직자와 관리도 이 것을 믿고 있다는 생각 아래 지금까지 키워져 왔기 때문이다. 그가 믿고 있는 것이 빵이 살 로 되었다든가, 말을 길게 늘어놓으면 영혼에 유익하다든가, 혹은 자기가 실제로 하느님의 살을 한 조각 먹었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가 믿 는 것은 이런 것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신앙이었다. 특히 그로 하여금 이런 신앙을 굳게 믿게 한 것은, 이 신앙의 요구를 이행함으로써 벌써 18년간이나 일정한 수입을 얻어 자기 가족을 먹여 살려 왔고, 아들을 중학교에, 그리고 딸을 신학교까지 보내고 있다는 사실 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제는 사제보다 더 굳게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신앙의 가 르침의 본질은 완전히 잊어버렸지만 그저 장례식이라든가 추도식이라든가 미사라든가, 보통 의 감사 기도라든가 찬미가가 붙은 감사 기도하든가 하는 것들에 일정한 가격이 정해져 있 어서, 참된 크리스트교도라면 기꺼이 그 돈을 지불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러므로 그는 장작이나 밀가루나 감자를 파는 장사꾼들과 마찬가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의 필 요성을 냉정한 마음으로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 치기도 하고 판에 박은 일정한 구절의 노래를 불러대기도 하고 낭독하기도 했다. 한 걸을 더 나아가 소장이나 간수에 이르러서는 이 신앙의 가르침이 어떠하며 성당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런 것은 알지도 못했을뿐더러 이해하려고도 하 지 않았다. 그저 상관과 황제께서 이 종교를 믿는 이상 자기들도 그것을 믿지 않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만 믿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막연하긴 했지만(그들 자신도 어째서 그런지 뚜렷이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이 신앙이 자기네들의 잔인무도한 직무를 두둔해 주 는 듯이 느껴졌던 것이다. 만일 이런 신앙이 없었더라면 지금이 그들처럼 거리낌없이 남을 괴롭히는데 전력을 기울 이기가 어려웠을 것이거니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교도관은 매우 마음씨가 선량한 사람이어서, 만일 이 신앙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지 못했더라면 이런 생활을 견뎌낼 수 없었 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움직이지도 않고 똑바로 서서 열심히 절을 하며, 성호를 긋 고, <케루빔과 더불어>라는 성가를 부를 때면 자진하여 앞으로 걸어가 성체를 모시는 아이 들을 안아 사제 쪽으로 내밀어 주기도 했던 것이다. 이 신앙이 사람들에게 미치고 있는 일체의 기만을 뚜렷이 꿰뚫어보고 마음속으로 냉소하 고 있는 몇 사람을 제외한 대다수의 죄수들은 이러한 금빛 찬란한 성상과 성촉과 성작과 제 의와 십자가와 '더없이 아름다우신 예수'라든가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수없이 되풀이되는 뜻모를 말 속에 무엇인가 신비로운 힘이 들어 있어 그것에 의해서 현세와 내세에서 많은 행 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기도와 미사와 촛불에 의해 현세의 행복을 누리려고 이미 몇 번이나 시도 해 보고, 또 사실 그 행복은 얻지 못했지만-그들의 기도는 한번도 성취된 적이 없었다-그 러한 실패는 우연한 일에 불과하며, 학자들이나 사제들에 의해 권장되고 있는 이 제도는 비 록 현세에서 이익을 얻지 못할지라도 내세를 위해서는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제도 임에 틀림없다고 그들은 굳게 믿고 있었다. 마슬로바 역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미사 중에 경건함 과 지루함이 뒤섞인 감정을 맛보고 있었다. 처음 한동안은 칸막이 뒤의 군중들 속에 있어서 자기네 동료들 이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었지만 성체를 모실 사람들이 앞으로 나가고 그녀 도 페도샤와 함께 앞으로 나가자, 소장의 모습이 보이고, 다시 그 뒤에 간수들 틈에 끼인 하 얀 턱수염을 기름 아마빛 머리의 농부도 눈에 띄었다. 그 농부는 페도샤의 남편이었는데, 그 는 자기 아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슬로바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찬가를 부르는 동안 그를 열심히 쳐다보기도 하고 페도샤와 소곤거리기도 하다가 여러 사람들이 성호를 긋 고 절을 할 때에만 자기도 따라 하였다. 40 네플류도프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골목길에서는 아직도 근처에서 나온 농부가 마차를 끌고 지나가면서 기묘한 목소리로 "우유 사려, 우유, 우유!"라고 외치고 있었다. 간밤에 처음으로 포근한 봄비가 내렸다. 포장되지 않은 곳에서는 파릇파릇한 풀이 돋아나 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뜰에 있는 자작나무에서는 녹색의 솜털이 솟아나고 벗나무와 포플러 는 그 길쭉한 향기로운 싹들을 벌렸으며 저택이나 상점에서는 즐비하게 한 줄로 늘어선 노 점 둘레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법석거리고 있었다. 겨드랑이에 장화를 낀 사람과 반질반질 하게 다림질한 바지와 조끼를 어깨에 걸친 누더기옷 차림의 사람들이 벌써부터 돌아다니고 있었다. 술집 근처에는 휴무일로 풀려나온 사람들로 벌써 붐비고 있었다. 남자들은 말쑥한 반코트 에 번쩍거리는 장화를 신고 있었으며, 여자들은 화려한 비단 스카프로 머리를 묶고 유리구 슬로 장식한 외투를 입고 있었다. 노란 권총 혁대를 찬 순경들은 무엇인가 따분하고 지루함 을 달래 줄 만한 사건이라도 없나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각자 자기 담당 구역에 서 있었다. 가로수가 늘어선 좁은 길이나 이제 막 파릇하게 돋아난 잔디밭에서는 아이들과 개가 한데 어울려 장난을 치며 뛰놀고 있었고, 할머니들은 그 근처의 벤치에 앉아서 서로 즐겁게 잡담 을 주고받고 있었다. 햇볕이 비치지 않는 쪽은 아직도 냉랭하고 습기가 차 있었지만 말라 버린 길 한복판에서 는 무거운 짐마차가 삐걱거리며 가고, 철도 마차는 방울을 울리며 지나갔다. 사방에서 들려 오는 여러소리와 지금 감옥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과 같은 미사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고 여기저기서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 때문에 공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각기 나들이옷을 입고 서둘러 성당으로 가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를 태운 마차는 감옥 앞까지 가지 않고 감옥으로 가는 길 모퉁이에서 멎었다. 보따리를 옆에 낀 몇 명의 남녀가 감옥으로부터 백 보 가량 떨어진 길 모퉁이에 서 있었 다. 오른쪽에는 별로 크지 않은 목조 건물이 늘어서 있었고, 왼쪽에는 무슨 간판을 내건 2층 집이 한 채 있었다. 그 앞에 석조 건물의 거대한 교도소가 있었지만, 면회자는 그 곳까지 갈 수가 없었다. 총을 멘 보초가 왔다갔다 하면서, 거기로 가려는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 다. 이 보초 맞은편에 있는 오른쪽 목조 건물의 옆문 옆에는 금줄이 쳐진 제복을 입고 장부를 손에 든 간수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면회자가 그리고 가서 면회하려는 사람의 이름을 대면 그것을 장부에 써 넣곤 하였다. 네플류도프도 그리로 가서 예카레티나 마슬로바 이름을 댔 다. 금줄이 쳐진 제복의 간수가 그것을 기입했다. "왜 아직 들여 보내지 않는 겁니까?"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어 보았다. "지금 미사중입니다. 미사가 끝나면 들어가시게 됩니다." 네플류도프는 기다리고 있는 무리 쪽으로 물러섰다. 그 때 갑자기 사람들 속에서 남루한 옷에 찌그러진 모자를 쓰고 맨발에 헌 구두를 신은 사나이가 상기된 얼굴로 허둥지둥 뛰어 나오더니 감옥 쪽으로 가려고 했다. "이봐, 어디로 가는 거야?"하고 총을 멘 보초가 소리쳤다. "네깐놈이 웬 잔소리냐?" 남루한 옷의 사나이가 보초의 고함 소리에는 아랑곳없이 이렇게 대꾸하면서 되돌아왔다. "들여 보내지 않겠으면 그만둬. 기다릴 테니. 쳇, 장군이나 된 것처 럼 아니꼽게 굴어." 사람들 속에서 그 말 한번 잘했다는 듯한 폭소가 터져나왔다. 면회자 대부분은 초라한 옷 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은 완전한 누더기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간혹 가다 개중 에 괜찮게 차린 사람들도 있었다. 네플류도프의 바로 옆에는 굉장한 옷차림을 하고 혈색이 좋은 얼굴에 말쑥히 면도질을 한 뚱뚱한 나자가 서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보따리는 보기 에 속옷같았다. 네플류도프는 그 사나이에게 여기에 처음으로 왔느냐고 물었다. 보따리를 든 사나이는 일요일마다 온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서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 고받게 되었다. 그는 어느 은행의 수위로 있는데 지폐 위조범으로 체포된 동생을 만나러 왔 다고 말했다. 사람좋은 이 사나이는 네플류도프에게 자기의 신상 이야기를 모조리 털어놓은 다음, 그의 사정도 알고 싶어했으나, 때마침 당당한 순종 흑마가 끄는, 고무 바퀴가 달린 마 차를 타고 온 대학생과 베일을 쓴 여자의 모습이 두 사람의 눈에 띄었다. 대학생은 커다란 보따리를 안고 있었다. 그는 네플류도프에게 다가오더니 자기는 자선을 위해 빵을 가지고 왔는데 어떻게 하면 이것을 죄수들에게 차입할 수가 있는지를 물었다. "이것은 저의 약혼녀가 바라는 일입니다. 이 사람이 제 약혼녀입니다. 이사람의 부모님께 서 죄수들에게 차입해 주라고 권하셨어요." "나도 오늘 처음 왔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 사람에게 물어 보시면 알 수 있을 겁 니다." 네플류도프는 오른편에 장부를 들고 앉아 있는 금줄이 쳐진 제복의 간수를 가르키면 서 말했다. 네플류도프가 대학생과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한가운데 조그만 창문이 달린 감옥의 커다 란 철문이 열리더니, 그 속에서 군복 차림의 장교가 다른 간수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러자 장부를 든 간수가 면회자 접수가 시작됐다는 것을 알렸다. 보초가 옆으로 비켜 섰다. 면회자 들은 모두 남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빠른 걸음으로 감옥 입구 쪽으로 밀려갔다. 그 중에는 달음질쳐가는 사람도있었다. 철문에는 간수가 한 명 서 있었는데 면회자들이 그 옆을 지나 갈 때마다 커다란 소리로 16, 17 하고 숫자를 불렀다. 건물 안에서도 한 사람의 간수가 한 사람 한 사람씩 몸수색을 하면서 역시 다음 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를 세고 있었다. 그 것은 밖으로 내보낼 때의 사람 수를 확인하여 면회자를 한 사람도 감옥 안에 남겨놓지 않도 록, 또 한 명의 죄수라도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수를 세고 있던 간수 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네플류도프의 등을 한 손으로 툭 쳤다. 이 간수의 손이 닿았을 때 네플류도프는 한순간 모욕감을 느꼈으나 곧 자기가 무엇 하러 여기 에 왔는가를 생각하고 이따위 일에 불만을 가지고 모욕감을 느꼈다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워 졌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쇠창살이 달린 조그만 창문이 여러 개 있는 둥근 천장의 방이 있었다. 집합소라고 불리는 이 방에서 네플류도프는 뜻밖에도 벽이 움푹 팬 곳에 걸려 있는 삽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상을 보았다. '이런 것을 무엇 때문에 여기에 걸어 놓아을까? ' 그는 자기의 상상 속에서 무의식중에 그리스도 상을 죄수들과 결부시키지 않고 해방된 사람들과 결부시키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네플류도프는 빠르게 걸어가는 면회자들을 먼저 보내고 그 뒤에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 고 마음속으로 이 곳에 감금되어 있는 죄수들에 대한 공포심과, 어제의 그 젊은이나 카추샤 와 같이 죄 없이 이 곳에 갇혀 있는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여민과, 눈앞에 닥쳐온 면회를 앞두고 두려움과 감격스러움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첫째 번 방에서 나올 때, 그 곳 구석 에 서 있던 간수가 뭐라고 했으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네플류도프는 그 말엔 상관치 않 고 다만 면회자들이 많이 가는 쪽으로 뒤따라갔는데 그 길은 여죄수 감방 쪽으로 가는 곳이 아니라 남자 죄수 감방으로 가는 쪽이었다. 성미가 급한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그는 제일 마지막으로 면회실에 들어섰다. 그가 문을 열고 그 방에 들어서자 수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져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은 굉음으로 들려왔다. 방을 둘로 갈라놓고 철망에 다닥다닥 매달려 있는 사람들 곁 으로 가까이 가 보고서야 네플류도프는 비로소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입구의 반대편 벽에 창이 나있는 이 방은 한 겹이 아니라 두 겹의 철망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철망은 천장에서 마룻바닥까지 막혀 있었으며 그 철망 사이로 간수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철망 저 쪽에는 죄수들이 있었으며, 이쪽에는 면회자들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두 겹으로 된 철망은 2 미터의 간격이 있었으므로 무엇을 건네주기는커녕 얼굴을 똑똑히 보는 것조차 ----특히 눈이 나쁜 사람에게는---불가능할 정도였다. 이야기하기도 쉽지 않았으며 알아듣 도록 하려면 힘껏 고함을 질러야만 했다. 양쪽에서 서로의 모습을 잘 알아보고, 하고 싶은 말을 잘하려고 기를 쓰고 있는 아내, 남편, 아버지, 어머니, 아이 들이 철망에 얼굴을 바싹 대고 있었으나, 저마다 상대편이 알아듣도록 말하려고 악을 쓰고 있는데다가 옆의 사람까지 역시 그와 같이 소리쳐서 그들의 목소리가 서로 방해를 할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남을 압도 하려고 모두들 더 큰소리로 기를 쓰며 외치고 있었다. 그 때마다 귀청이 떨어질 듯한 아우 성 소리가 울리고, 거기에다 여자들이 악을 쓰는 소리도 한데 썩여 들렸기 때문에 네플류도 프는 방 안에 한 발 들여놓자마자 깜짝 놀랐던 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그들의 표정을 봄으로써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또 어떤 사이 인지를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네플류도프의 바로 옆에는 머리에 수건을 쓴 노파가 철망에 바싹 매달려 턱을 부들부들 떨며 머리를 절반쯤 깎은 파리한 얼굴의 젊은이에게 무엇인가 떠들어 대고 있었다. 젊은 죄수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상을 찌푸리면서 주의 깊게 노파의 이 야기를 듣고 있었다. 노파 옆에는 소매 없는 외투를 입은 젊은이가 서 있었다. 그는 불만스 러운 듯한 얼굴에 희끗희끗한 턱수염을 기른 자기와 얼굴이 닮은 죄수가 이야기하는 것을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듣고 있었다. 그 옆에는 고급모직 목도리를 머리에 덮어쓴 여자가 젖먹이를 안은 채 마룻바닥에 앉아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아마도 머리를 깎인데다가 죄수 복을 입고 쇠고랑을 찬 백발의 남편 모습을 처음으로 본 모양이었다. 그 여자의 바로 옆에 는 조금 전에 네플류도프와 이야기하던 은행 수위가 건너편에 서 있는, 눈에 광채가 나는 대머리 죄수에게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자기도 이런 상태 에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런 규칙을 만들어 낸 사람들, 그리 고 이 규칙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속에서 불같이 끓어오름을 느꼈다. 그러나 이러한 무서운 상태에 놓여 있어도, 또 인간의 감정에 대한 이같은 우롱에 대해서도 시림들 이 아무런 모욕감을 느끼지 않는 데 대하여 그는 적지 않이 놀랐다. 호위병도, 간수도, 면회 자도, 죄수도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인정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고 있었다. 네플 류도프는 자기가 얼마나 무력한가를 자각하고 사회와의 괴리를 의식하면서 무엇인가 이상하 고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혀 한 5 분 가량 그 방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뱃멀미 같은 정신 적인 구토감이 그의 가슴을 메스껍게 했다. 41 '그러나 여기에 온 목적만은 수행해야 한다.'고 그는 자기 자신을 격려하면서 중얼거렸 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관리를 찾았다. 그러자 장교 견장을 달고 콧수염을 기른, 작달 막한 키의 야윈 사내가 면회자들의 뒤에서 서성거리고 있음을 보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저, 말씀 좀 묻겠습니다." 네플류도프는 역시 긴장한채 정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러시다면 집합소에서 계실 때 말씀하실 걸 그랬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만나시렵니까?" "예카테리나 마슬로바입니다." "정치범입니까?"하고 부소장이 물었다. "아닙니다. 그저 보통......." "그럼 선고를 받았나요?" "네, 그저께 선고를 받았습니다." 네플류도프는 자기에게 호의를 보이는 듯한 이 부소장이 기분을 건드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여죄수라면, 이리로 오십시오." 부소장은 네플류도프의 외모와 보아 정중히 대우해야 할 인물이라고 판단을 내렸는지 이렇게 말했다. "이봐 시도로프!"하고 그는 가슴에 여러 개의 훈장을 단 턱수염이 많은 하사를 불렀다. "이분을 여죄수 면회실로 안내해 드리게." "네, 알겠습니다." 이 때 철망 옆에서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곡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울어댔다. 네플류도프는에게는 모든 것이 다 이상하게 생각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이상하게 느껴진 것은 이 건물 안의 잔인한 모든 행위를 실천자인 부소장이나 간수장에 대해서 은혜 를 느끼고, 또한 감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간수장은 네플류도프는를 남자 죄수 면회실에서 복도로 나가 맞은편에 있는 문을 열고 여 죄수 면회실로 데리고 갔다. 이 방도 남자 죄수 면회실과 같이 두 겹의 철망으로 둘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그 규모와 면회자들이나 죄수들의 수에 있어서 남자 죄수 면회실보다 훨씬 적었다. 그러나 아우성과 떠들어 대는 소리는 남자 죄수 면회실과 다를 바 없었다 여기서도 철망 사이를 간수가 거닐 고 있었다. 이 곳 감독은 소매와 금줄을 두르고 암청색 파이핑을 단 제복을 입고 남자 간수 와 같이 혁대를 찬 여간수였다. 이 곳도 역시 남자 죄수 면회실처럼 사람들이 철망 양쪽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쪽에는 하얀 죄수복을 입기도 하고 자기 옷을 입기도 한 여죄수들 이 있었다. 철망은 사람으로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어떤 사람은 잘 들리게 하려고 님의 머 리 위로 발돋움을 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였 다. 귀청이 떨어질 듯한 소리나 그 차림새가 모든 여죄수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머 리칼이 흩어진 말라빠진 집시 여자였다. 그녀는 곱슬곱슬한 머리에서 스카프가 벗겨진 채 철망 저쪽 방 한복판의 기둥 옆에 서서 푸른색 프록코트 아래에 단단하게 허리띠를 졸라맨 집시 남자에게 재빠르게 손짓을 해 대면서 무엇인가 소리지르고 있었다. 집시 남자 옆에는 한 병사가 마룻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서 여죄수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턱수 염을 기르고 짚신을 신은 젊은 농부가 철망에 달라붙어서 울음을 참느라고 얼굴을 붉히고 서 있었다. 예쁘장하게 생긴 금발의 한 여죄수는 파란 눈으로 상대방을 보면서 농부와 이야 기를 하고 있었다. 페도샤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들 옆에는 남루한 옷을 입은 남자가 머리 를 흐트러뜨린 얼굴이 넓적한 여자와 함께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여자가 둘, 그 리고 남자, 그리고 또 여자가 있었고, 그들 앞에는 여죄수가 한 명씩 마주 서 있었다. 그런 데 마슬로바는 그 속에 없었다. 그러나 맞은편 여죄수들 뒤에 한 명의 여자가 서 있었는데, 네플류도프는 곧 그 여자가 카추샤임을 알아보았다. 그러자 별안간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바야흐로 운명을 결정할 최후의 순간이 닥쳐온 것이다. 철망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역시 틀림없는 그녀였다. 카추샤는 파란 눈의 페도샤의 뒤에 서서 살며시 미소 를 띤 채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카추샤는 그저께처럼 죄수복이 아닌 잘록하니 허리를 졸라매서 가슴을 도톰하게 한 흰 윗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 스카프 밑으론 법정에서 보던 것과 같이 까만 곱슬머리가 비어져나와 있었다. '드디어 모든 것이 결정되는구나.'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뭐라고 불러야 할까? 혹 시 그녀가 먼저 내게 와 주지는 않을까?' 그러나 그녀는 끝내 그에게 와 주지 않았다. 그녀는 친구인 클라라가 온 줄로만 알았고 이 남자가 자기를 면회하러 온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누구를 면회하시렵니까?" 철망 사이를 거닐던 여간수가 네플류도프의 곁으로 걸어와서 이렇게 물었다. "예카테리나 마슬로바입니다." 네플류도프는 큰마음 먹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마슬로바, 면회!"하고 여간수가 외쳤다. . 42 마슬로바는 이쪽으로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면서 낯익은 침착한 표 정으로 두 여죄수 사이를 뚫고 철망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네플류도프를 알아보지 못하 고 의아한 듯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녀는 그의 옷차림으로 보아 그가 돈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생긋 웃어 보였다. "저를 만나러 오셨나요?"하고 그녀는 미소 띤 사팔눈의 얼굴을 철망 쪽으로 가까이 대면 서 말했다. "만나소 싶었소." 네플류도프는 '당신'이라고 해야 할지, '너'라고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 지만 곧 '당신'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당신을 만나고 싶었소....... 나는......." "우물쭈물하지 마!"그의 곁에서 남루한 옷을 입은 남자가 소리쳤다. "훔쳤어, 안 훔쳤어?" "이젠 다 죽게 됐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해?"하고 저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마슬로바는 네플류도프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나, 그가 말을 건넸을 때 그의 표정 으로 문득 옛날의 그를 생각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졌고, 이마에는 고뇌의 빛이 깊이 어리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들리지 않는군요." 카추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점점 더 이마에 깊은 주 름을 지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온 것은......." '그렇다, 지금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참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하고 네플 류도프는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핑 돌고 목이 메어서 철망을 붙잡은 채 복받치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느라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죄가 없다면 여기 왜 들어왔어?" 누가 한쪽에서 소리쳤다. "당신도 하느님을 믿으세요. 나는 절대로 모른다니까요."하고 또 다른 쪽에서 여죄수가 소 리쳤다. 네플류도프가 흥분한 것을 보자 마슬로바는 그를 알아보았다. "어디서 뵌 것 같긴 한데 누구신지 모르겠네요." 그녀는 그를 보지도 않으면서 외쳤다. 갑 자기 붉어진 그녀의 얼굴은 더욱 침울해졌다. "나는 당신한테 용서를 빌러 왔소." 그는 마지 무슨 과목을 암기라도 하듯 큰 소리로 거 치없이 말했다.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 나자, 불현듯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부끄러운 게 당연하므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편이 오히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는 다기 큰 소리로 말했다. "용서해 주오. 정말 내가 잘못했소."하고 스는 다시 외쳤다. 카추샤는 꼼짝도 않고 서서 그에게서 사팔눈을 떼지 않았다. 네플류도프는 더 이상 말을 계속할 수가 없어서 솟구쳐오르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철망 곁을 떠났다. 아까 네플류도프를 여죄수 면회실로 데려다 준 부소장이 그에게 흥미를 느낀 듯이 면회실 로 왔다. 그리고 네플류도프가 철망 곁에 떨어져 서 있는 것을 보고 왜 면회하려는 여자와 말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네플류도프는 코를 풀고 몸을 부르르 떨고 나서 애써 침착한 태도를 가지려고 애쓰며 대 답했다. "철망 너머로는 도무지 얘기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도 들리지 않는군요." 부소장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 여자를 잠시 이리로 데려오겠습니다." "마리야 카를로브나!"하고 그는 여간수에게 말했다. "마슬로바를 밖으로 데리고 가요." 잠시 후 옆문에서 마슬로바가 걸어나왔다. 그녀는 가벼운 걸을걸이로 네플류도프 바로 옆 에까지 걸어오더니, 걸음을 멈추고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저께와 마찬가지 로 곱실곱실한 까만 머리가 똘똘 말려 있었다. 병색을 느끼게 하는 얼굴은 새하얗고 부어 있었으나 역시 귀엽고 침착해 보였다. 다만 윤기 있는 까만 사팔눈만 부석부석한 눈까풀속 에서 유난히도도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서 말씀하십시오."부소장은 이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마슬로바는 뭔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부소장을 흘깃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네플 류도프를 따라 벤치로 가서 그와 나란히 앉아 스커트를 만지작거렸다. "나를 쉽게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문을 열 기 시작했으나 또다시 눈물이 솟아올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비록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라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소. 제발 말 좀 해봐요." "어떻게 저를 찾으셨어요?" 그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는 그를 보는지 안 보는지 도 모를 사팔눈으로 이렇게 물었다. '아, 하느님! 저를 도와 주소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쳐 주십시오.' 네플류도프는 이렇 게 추하게 변해 버린 카추샤의 얼굴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저께 당신이 재판을 받을 때 나는 배심원으로 법정에 나갔었소."하고 그는 말했다. "그 때 나를 알아보지 못했소?" "네, 알아보지 못했어요. 그럴 겨를도 없었고 또 보려고도 하지 않았으니까요."하고 그녀 는 말했다. "아기가 있었다는데?" 네플류도프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금방 죽어 버렸어요." 카추샤는 그에게서 시전을 돌리며 화난 듯 짤막하게 대답 했다. "아니, 어째서 죽었소?" "저까지도 병으로 하마터면 죽을 뻔한 걸요." 그년는 눈을 내리깔고 말을 했다. "그런데 왜 고모님들은 당신을 내보냈지요?" "누가 애 밴 하녀 따위를 집에 두겠어요. 탄로난 즉시 쫓겨났지요. 지금 와서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죄다 잊어버렸어요. 옛날에 다 끝난 일이예요." "아냐, 아직 끝나지 않았소. 나는 당신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소. 이제라도 내 죄를 속죄하겠소." "속죄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건 모두 다 지나 버린 일이니까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더니 뜻밖에도 갑자기 눈을 들어 유혹하듯, 호소하듯, 불쾌한 듯 야릇하게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슬로바는 이런 곳에서 그를 만나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므로, 처음 그를 대하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여태껏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일들을 부득이 회상해야만 했다. 카추샤는 먼저 옛날 서로 사랑을 주고받던 시절에 아름다운 청년이 보여 준 새롭고 오묘한 감정과 사상의 세계를 막연히 회상해야만 했다. 그 다음 그 청년의 이해할 수 없는 무정함과 그 꿈같은 행복에 뒤이어 몰아쳐 온 너무나 많았던 굴욕과 고민을 상기했다. 그러 자 가슴이 아팠다.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전처럼 이런 아픈 추억을 머릿속 에서 몰아내고 타락한 생활의 독특한 안개 속에 애써 덮어 버리려고 애썼다. 그를 처음 볼 때에는 자기 눈앞에 앉아 있는 사나이를 한때 사랑했던 청년으로 연관시켜 보려고도 해보았 으나 그것은 너무나 괴로웠기에 곧 단념해 버렸다. 이제 이 말쑥하게 차린, 턱수염에서까지 달콤한 향수 냄새가 풍기는 이 신사는 그녀에게 있어서는 한때 자기가 사랑했던 청년 네플 류도프가 아니라 필요할 때면 언제나 자기와 같은 여자를 이용하는 사나이에 불과했다. 그 러므로 이런 사나이는 또한 자기로서도 될 수 있는 대로 유리하게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 다. 그래서 그녀는 유혹하는 듯한 미소를 보냈던 것이다. 카추샤는 이 남자를 어떻게 이용해 야 좋을까 하는 궁리를 하며 잠시 동안 잠자코 있었다. "옛일은 다 끝장이 났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젠 벌써 유죄 판결이 내렸으니까요." 이 무서운 말을 핼 때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나도 당신의 무고함을 알고 있소. 절대로 확신하고 있소." "그야 물론이지요. 난 도둑도 아니고 강도도 아니에요. 죄다 변호사 탓이라고들 하더군 요."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상소를 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돈이 많이 든다니......." "돈을 아끼지 마시고 좋은 변호사를 좀 대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데까진 하겠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다시 아까와 같이 유혹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부탁이 있는데요...... 괜찮으시다면 제게 돈을 좀 주시겠어요? 조금만...... 한 10루블 가량...... 그 이상은 필요 없어요." 갑자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 그러지." 네플류도프는 당황하여 지갑에 손을 댔다. 카추샤는 면회실 안을 왔다갔다 하는 부소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저 사람 앞에선 꺼내지 마세요. 저 사람이 저쪽으로 갔을 때 꺼내세요. 그렇잖으면 빼앗 겨요." 네플류도프는 지갑을 꺼내서 부소장이 돌아섰을 때 10루블짜리 지폐를 건네 주려고 하자 부소장이 다시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돈을 움켜쥐었다. '이 여잔 이미 죽은 여자나 다름 없구나.' 과거에는 사랑스러웠지만, 지금은 더럽고 부석 한 그 얼굴, 까만 사팔눈을 흉측맞게 번득거리며 부소장과 지폐를 움켜쥔 그의 손을 번갈아 보고 있는 카추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 순간 그는 망설 였다. 간밤에 그에게 속삭이던 그 유혹의 소리가 또다시 네플류도프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것 은 평상시처럼,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또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그를 이끌어 가려는 마음의 소리였다. '너는 지금 이 여자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하고 그 소리는 말했다. '다만 자기 목 에 돌을 매다는 격이다. 너를 물 속에 가라앉게 하고 네가 세상에서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그러니까 지금 갖고 있는 돈을 몽땅 이 여자에게 주어 버리고 영원히 인연을 끓어 버리는 게 상책일 것이다.'하고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동 시에 그이 내적 생활은 지금 이 순간 흔들리는 저울대 위에 놓여 있듯이 조금만 힘을 가해 도 어느 한쪽으로든 기울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에 느꼈던 신의 이름을 부르 면서 새롭게 노력을 해보았다. 그러자 그 신은 곧 그의 마으넹 호응했다. 그는 모든 것을 그 녀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카추샤! 난 용서를 빌러 온 거야. 그런데 넌 한 마디도 용서한다든지 또는 언제 용서하겠 다든지 하는 대답을 안 해 주는구나."하고 그는 갑자기 호칭을 바꾸어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은 들은 체도 않고 그의 손과 부소장만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가 부소장이 저쪽으로 돌아서자, 그녀는 재빨리 네플류도프쪽으로 손을 내밀어 지폐를 빼앗 아 허리띠 밑에다 감추었다. "참 이상한 말씀을 다 하시네요."하고 방긋 웃으면서(그것이 그에게는 모욕적으로 생각되 었다.) 그녀는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그녀의 마음속에는 무엇인가 그를 미워하는 감정이 있어서, 그것이 현재의 그녀를 우지케 하려 하고 동시에 자기 마음속을 틈입해 들어가려는 그의 노력을 방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야릇하게도 그 사실은 그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엇인가 더 한층 특별하고 새로운 힘으로 그녀에게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그 녀를 정신적으로 눈뜨게 하지 않으면 한 된다고 느꼈다. 그것은 한없이 어려운 일일 것이지 만 그 어렵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자기에게 힘이 되는 것 같았다. 지금 그는 그녀에 대하여 여태껏 그녀에게는 물론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은 이기적인 면이란곤 전혀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그녀에게서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현재와 같은 상태를 떨쳐 버리고, 반성하고 예전의 그녀로 되돌아가 주 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카추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는 너를 잘 알고 있어. 파노보 마을에 있던 옛날 의 너를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단 말이야." "과거를 되살려 무엇해요?" 그녀는 냉담하게 내뱉었다. "난 옛날에 지은 내 죄를 속죄하려고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카추샤."하고 그 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할 생각도 있다고 말하려 했느나 그녀의 시선과 부딪치자 그 속에서 무엇인지 무섭고 난폭하고 반항적인 것을 읽었기 때문에 그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 다. 그 때 면회자들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부소장이 네플류도프 곁으로 다가와서 면회 시간이 끝났다고 일러 주었다. 마슬로바는 그러기를 바라고 있다는 듯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안녕! 아직 더 할 말이 많지만 보다시피 오늘은 안 되겠어."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하고 손을 내밀었다. "다시 오겠어." "이젠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실 것 같은데요." 그녀는 손을 내밀었지만 꼭 쥐지는 않았다. "아니야, 난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에서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 어. 그리고 그 땐 꼭 해야 할 매우 중대한 이야기를 하겠어." 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러시다면 또 오세요." 그녀는 사나이들의 마음에 들고 싶을 때 언제나 짓곤 하던 그런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너는 내게 있어서 누이동생 이상으로 가까운 사람이야."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재미있는 말씀이네요!"하고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철망 저쪽으로 가버렸다. 43 네플류도프는 이 첫 면회 때부터 카추샤가 자기를 보고 그녀에게 봉사하려는 자기의 결심 과 참회의 말을 듣고 나면 반드시 기뻐하고 감동하여 다시 그 옛날의 카추샤로 되돌아가 주 리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옛날의 카추샤는 존재하지 않고, 지금은 타락한 마슬로 바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곤 기겁을 했다. 이 사실을 그를 놀라게 했고 무섭게 했 다. 그를 특히 놀라게 한 것은, 마슬로바가 자기의 처지, 이를테며 죄수로서의 처지가 아니라 (그 점에 있어서는 그녀도 부끄러워했다.) 매춘부로서의 처지가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기는커 녕 오히려 그것에 만족을 느끼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기야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인간이란 누구든지 전심으로 무슨 일을 할 때 그 일이 중요하고 훌륭한 일이라고 믿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가령 인간의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자기의 일이 중대하고 훌륭한 일인 것처럼 보이도록 일반적으로 인생에 대한 관념을 갖도록 노력해야 하 는 법이다.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도둑이나 살인자나, 간첩이나 매춘부와 같은 사람들이 자 기의 직업을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 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반대인 것이다. 운명이나 자기의 죄악이나 또는 과실에 의해서 특정한 입장에 처한 모든 사람들은 아무리 그 입장이 부정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입장 이 훌륭하고 존경할 만한 것으로 보이도록 인생관을 채택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생 관을 유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채택한 인생관과 그들 자신의 생의 이념 에 있어서의 자기의 위치를 인정해 주는 그러한 사회와 함께 혼합된 것을 옹호하려고 한다. 자기의 교묘한 솜씨를 자랑하는 도둑이나, 음탕함을 자랑하는 매춘부나, 잔인함을 자랑하는 살인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이런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나 환경이 좁고 한정되어 있고, 우리 자신은 그 밖에 처해 있기 때문이라는 데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그것과 조금도 다름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 않을까? 자기의 재산, 즉 약탈을 자랑하는 부자, 자기의 승 리, 즉 살인 행위를 자랑하는 장군, 자기 권력, 즉 폭압을 자랑하는 위정자 등등. 우리들이 이런 사람들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왜곡하는 행위를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은, 그런 사람들의 사회가 더 크고, 우리들 자신도 그 사회에 속해 있 지 때문인 것이다. 마슬로바의 마음속에서도 자기의 생활과 사회에 있어서의 자기의 위치를 대한 견해가 완 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징역을 선고받은 매춘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기 자신 을 정당한 것으로 믿고 있었고 자기의 처지를 남에게 자랑까지 할 수 있는 인생관을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녀의 철학에 따르면 모든 남성의 가장 중요한 행복이란---늙은이, 젊은이, 중학생, 장 군, 교양이 있는 자, 교양이 없는 자, 그 밖의 누구를 막론하고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매 력 있는 여자와의 성행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모든 남성은 모든 일로 바쁜 체 하고 있지만 사실은 오직 그것만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상대자인 그녀는 매력 이 있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켜 주느냐 않으냐는 오로지 자기의 재량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필요하고도 중대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그녀 의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의 생활 전체가 이 견해의 정당성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10년이란 세월을 그녀는 어디를 가건 네플류도프와 나이 많은 경찰서장을 비롯 해서 감옥의 간수에 이르기까지 사내란 사내는 모조리 그녀를 탐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자기를 탐내지 않는 사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그녀의 눈으로 볼 때 전세계는 정욕의 폭풍에 휩싸여 사방 팔방에서 그녀를 노리고 기만, 폭력, 간계 등 모든 수단으로 그녀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인간들의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마슬로바는 이런 식으로 인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눈으로 볼 때 그녀의 가치란 인간 의 찌꺼기가 아니라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마슬로바는 이런 인생 관을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존중하고 있었다. 또한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인생관을 바꾸게 되면 그것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확보되고 있던 그녀의 가지를 상실케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의 자기의 가치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기와 똑같이 인생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애 쓰고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자기를 딴 세계로 끌어 내려고 하는 것을 눈치채자, 그가 데려가 려는 그 세계로 들어가면 지금까지 자기에게 자부심과 자존심을 불러일으켜 주던 인생에 있 어서의 지금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될 거이 틀림없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기에 그녀는 네 플류도프의 생각에 반항하였던 것이다. 역시 같은 이유로 그녀의 처녀 시절의 추억도, 네플 류도프와의 첫사랑의 추억도 몰아 내려고 했다. 그러한 추억은 현재의 인생관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으므로 그녀의 기억으로부터 말살되고 있었다. 아니, 말살되었다기보다는 오 히려 기억의 한 구석에 손도안 댄 채 보존되고 밀폐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꿀벌 이 자기들의 노동의 대가가 없어질까 봐 유충의 집을 밀봉해 버리고 완전히 격리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런 까닭으로 지금의 네플류도프는 그녀에게 있어선 한때 그녀가 순진 한 처녀의 마음으로 사랑했던 사나이가 아니라, 오직 한 사람의 돈 많은 사나이에 불과했다. 이용할 수도 있고, 당연히 이용해야만 하는 사나이였으며, 또한 모든 사내를 대할 때와 같은 관계밖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는 그런 사내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다. 나는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하고 사람들과 함께 출구 로 걸어나오면서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결혼할 작정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기어코 그녀와 결혼하겠다.'하고 그는 다짐했다. 출구에 서 있던 간수들은 이번에도 역시 죄수가 밖으로 나가거나 면회자가 감옥 안에 남 아 있지 않도록 하려고 사람들을 내보내면서 두 손으로 세고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이번에도 등을 얻어맞았으나 모욕감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얻어맞았다는 사실 조차 전혀 느끼지 못하고있었다. 44 네플류도프는 자기의 외적 생활 양식을 바꾸어 보려고 마음먹었다. 커다란 자기의 집을 세주고 하인들을 내보낸 다음, 여관으로 옮겨가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그라페나 페트로브 나는 겨울까지는 생활 양식을 바꾼다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며, 여름철에는 집을 세들 사 람도 없고, 또 어디서 생활을 하든지 가구와 도구는 있어야 한다고 우겨댔다. 그래서 외적 생활을 변경하려던 네플류도프의 모든 노력은(그의 대학생과 같이 검소한 생활을 하려고 했 던 것이다.) 수포로 돌아가 아무런 결과도 보지 못했다. 모든 것이 그전과 똑같이 유지되었 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집 안에서 모직물이나 모피류의 일광 소독 등 큰 소동이 벌어졌다. 문지기나 그의 조수 코르네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 일을 도왔다. 처음에는 아직껏 아무 도 사용해 본 일이 없는 예복과 괴상한 모피 의복들을 들어내다 줄에 널고, 그 다음에는 융 단과 가구를 내놓고 문지기와 조수가 우람한 팔뚝을 걷어붙이고 장단을 맞추어 가면서 열심 히 먼지를 털었다. 모든 방에서는 나플탈렌 냄새가 잔뜩 풍겼다. 뜰을 돌아 보기도 하고 창 에서 내다보기도 하던 네플류도프는 물건이 엄청나게 많은 데에 놀랐고, 또 그것들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에 더욱 놀랐다. 이런 물건들의 유일한 용도와 목표라는 것은, 아그라페나 페 트로브나, 코르네이, 문지기, 그의 조수, 식모에게 운동할 기회를 제공하는 일일뿐이라고 그 는 생각했다. '마슬로바의 사건이 해방되기 전엔 생활 양식을 굳이 바꿀 필요는 없다.'하고 네플류도프 는 생각했다.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아무튼 그녀가 석방되든지, 유형이 결정되어 내가 그 뒤를 따라가게 되면 모든 것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네플류도프는 변호사 파나린과 약속한 날에 그의 집에 찾아갔다. 커다란 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창문에는 호화로운 커튼이 걸려 있었으며 대체로 벼락부자가 된 집에서 흔히 볼 수 있 는, 이를테면 불로 소득으로 얻은 돈이라도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고급 가구로 장식된 웅 장한 저택이었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네플류도프는 마치 병원의 대기실처럼 지루함을 잊게 하려는 잡지가 놓여 있는 테이블 주변에서 침울한 얼굴을 하고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소 송 의뢰인을 보았다. 높은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변호사의 조수가 네플류도프를 보자 곁으로 다가와서 인사하고 곧 선생님께 말씀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수가 사무실 문까지 채 가기도 전에 문이 저절로 열리더니 혈색 좋은 얼굴에 짙은 콧수염을 기르고 새 양복을 입은 뚱뚱한 중년 남자와 바로 이 집 주인 파나린의 떠들썩한 큰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두 사람 의 얼굴에는 뭔가 부정한 돈벌이를 하고 난 인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정이 감돌고 있었 다. "그건 당신이 나빠." 파나린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천국에는 가고 싶은데, 죄가 많아 안 되겠지?" "그래, 다 알고 있다네." 두 사람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 공작님, 어서 들어오십시오." 파나린은 네플류도프를 보자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다 시 한 번 나가는 상인에게 인사하고, 네플류도프를 빈틈없이 꾸민 자기 사무실로 안내했다. "자, 담배피우시지요." 변호사는 네플류도프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면서 방금 결말을 본 사건 의 성공이 가져다준 자랑스런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실은 마슬로바 사건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네 네, 곧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본 땅딸보는 정말 골치덩이리랍니다."하고 그 는 말했다. "그자를 보셨지요? 그래도 재산을 1200만이나 가지고 있죠. 그런데 그 작자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만일 당신에게 25루블짜리 지폐 한 장이라도 얻어 낼 수 있 다고 생각되면 입으로 물고 뜯어서라도 뜯어갈 놈입니다." '그 사내가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한다고 하지만 그러는 너도 25루블 짜리 지폐라는 엉터 리 간은 말을 쓰고 있지 않는가?'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네플류도프와 자기와는 같 은 계급에 속하지만 여기에 모여드는 다른 의뢰인들은 자기와 계급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려는 이 무례한 사내에게 네플류도프는 참을 수 없는 혐오를 느꼈다. "정말 그자한테는 질렸습니다. 무서운 악질이죠. 한 마디 따끔하게 쏘아 주려고 했습니다 만." 변호사는 쓸데없는 소리를 한 것에 대해 변명이나 하듯이 말했다. "그런데 당신의 사건 말입니다. 내가 일건 서류를 자세히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투르게테프가 표현한 대로 '그 내용에는 찬성할 수 없다.', 즉 변호사가 돼먹지 않아서 상소의 이유를 모조리 놓쳐 버리고 말았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결정하셨습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변호사는 때마침 들어간 조수에게 말했다. "그 사람에게 이렇 게 말하하고. 내가 말한 대로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라고 말이야." "싫답니다." "그럼 그만두게."하고 변호사가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쾌활한 표정으로 떠들더니만 점차 침울하고 화난 표정으로 변했다. "모두들 변호사는 그저 돈만 뜯어먹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는 다시금 아까와 같은 유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실은 내가 부당하게 파산 선고를 받은 자를 면소시 켜 주었더니, 요즘은 그런 작자들이 밀어닥친답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은 모두 대단한 노력 이 필요합니다. 어떤 작자가 말했듯이 우리들은 가슴의 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 신의 사건, 아니 당신이 관심을 갖고 계시는 사건은,"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아주 졸렬하 게 다루었기 때문에 상소할 만한 좋은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상소할 수는 있어서 이렇게 서류를 작성해 놓았습니다." 변호사는 새까맣게 써넣은 서류를 집어서 흥미도 없고 형식적인 대목은 어물어물 넘기고, 그 밖의 대목은 억양을 붙여 또박또박 발음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대심원 형사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상소. 모년 모월 모일 모 재판소에서 성립된 판결에 의하여 마슬로바라는 여자 는 상인 스멜리코프를 독살했다는 것이 유죄로 인정되어 형법 제1454조에 의거하여 ......징역 의 선고를 받았음." 그는 여기서 잠시 말을 끊더니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나 있어서 자기가 작성한 문장에 대하 여 흐뭇한 듯 자기 도취에 빠져들었다. "이 판결은 지극히 중대한 사법상의 위반과 착오의 결과이므로,"하고 그는 힘을 주어 가 면서 계속했다. "마땅히 취소되어야 함. 첫째로 본건 심의 중 스멜리코르의 내장 해부에 관 한 보고서 낭독이 재판장에 의해서 중지되었음. ......이것이 그 이유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낭독은 검사가 요구했습니다." 네플류도프는 놀라서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변호사도 같은 요구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낭독은 전혀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찌 되었던 상소의 이유는 됩니다. 다음은......둘째로 마슬로바의 변호인은,"하고 그는 계 속했다. "변론 도중 마슬로바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녀가 타락한 내적 원인을 언급하 려 하자, 이것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하여 재판장의 제지로 중지되었음. 그러나 형사 사건에 있어서는 전부터 대심원에서 누누이 지적한 바와 같이 피고의 성격과 일반적인 도덕적인 인격에 관한 설명은 형사상 중대한 의의를 갖는 것임.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 니다."하고 그는 네플류도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 변호사의 변론이 너무 서툴러서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는걸요." 네플류도프는 더욱 놀라면서 말했다. "그야 물론, 어리석은 풋내기니까 제대로 말도 못했을 겁니다." 파나린은 웃으면서 말했 다. "그러나 이것도 상소의 이유가 됩니다. 그럼 그 다음으로는 ......셋째로, 재판장은 결론에 있어서 형사소송법 제 81조 제 1항의 필연적인 요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죄의 개념을 규 정하는 법률상의 모든 요소를 배심원에게 설명하지도 않았고, 또 마슬로바가 스멜리코프에 게 독약을 준 사실을 승인하더라도, 그녀에게 살해의 의사가 전혀 없을 때는 그 행위만으로 써 그 여자에게 죄를 돌릴 것이 아니라, 그럴 경우에는 형사상의 범죄가 아니라 다만, 그 여 자로서는 뜻밖에 상인의 사망을 초래케 한 과실에 불과한 것이며, 그 행동에 대해서만 죄를 인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배심원들에게 주의하지 않았음. ......이것이 제일 중요한 점입니 다." "네, 우리들도 곧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과실이었습니다." "끝으로......넷째로,"하고 변호사는 계속했다. "마슬로바의 유죄에 관한 법정의 자문에 대한 배심원의 답신서는 그 자체에 있어서 명백한 모순을 내포고 있음. 마슬로바는 오로지 탐욕 때문에 고의로 스멜리코프를 독살한 것으로 기소되었으며, 그 살해의 유일한 동기가 금전욕 에 있다고만 인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은 그 답신서에서 마슬로바는 절도의 의 사가 있었다는 것과 귀중품을 절취하는 데 참가하였다는 것을 부정하였음.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피고에게는 살해의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재판장의 불완전한 결론 으로 말미암아 생긴 오해의 의해서, 그점을 답신서에 충분히 표현하지 않은 것이 명백함. 따 라서 이와 같은 배심원의 답신은 현사소송법 제 816조 및 제808조의 적용을 요함. 즉, 재판 장은 배심원에 대하여 그들이 범한 오류를 설명하고 답신서를 반환하여 피고의 죄의 유무의 관해 새로 심의케 하고, 그 질의에 대한 또 다른 답신을 제출토록 해야 한."하고 파나린은 읽어 내려갔다. "그럼 어째서 재판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나도 역시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파나린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대심원이 이 잘못을 수정하겠군요?" "그것은 그 때의 담당자들에게 달렸죠." "담당자들이라니요?" "범죄자 노역장에 보낸 담당자지요. 그래서 또 이렇게 써두었습니다. 이 같은 판결은,"하 고 그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마슬로바에게 형벌을 가하는 권리를 법정에 부여하지 않고, 또 그년에게 형법 제 771조 제 3항을 적용하는 것은 우리 형법의 근본 원칙에 대한 명백하 고 중대한 위반임. 상술한 이유로써 형사소송법 제 909조, 제910조, 제912조에 의거하여...... 원 판결을 파기하고, 또한 본건을 재심하기 위하여 재판소의 다른 부로 이관할 것을 청원하 는 바임. ......이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러나 모든 걸 대심원 담당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겠지요. 아는 사람 이 있으시면 힘써 보세요." "좀 아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그러시다면 한시라도 빨리 서두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모두들 치질을 치료하러 떠날겁 니다. 그렇게 되면 석 달은 기다려야 하니까요. 그래도 성공하지 못하면 최후 수단으로 황제 에게 청원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만, 그때에 또 도와 드리기로 하지요. 배후 운동이 아니라 청원서 적성에 대해서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례금은......." "그것은 비서가 정서한 상소장을 내드릴 때 말씀드릴 것입니다." "한가지 더 물어 보겠습니다. 나는 검사에게 서 마슬로바에 대한 면회 허가증을 받고 그 여자를 면회하러 갔습니다만, 감옥에서 듣기에 보통 면회날이 아니 날에 면회실 이외의 곳 에서 면회를 하려면 지사의 허가가 꼭 필요하다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네, 그럴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가가 없어서 부지사가 직무를 대리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그자는 형편없는 인간이라서 그자를 상대로 일이 될까 모르겠군요." "마슬레니코르 말입니까?" "네." "그 사람이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네플류도프는 돌아가려고 일어섰다. 이 때 아주 못생긴, 들창코에 뼈만 앙상하여 누런 얼굴에 작달만한 여자가 총총걸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변호사의 아내였다. 그녀는 자기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듯이 노 란색과 푸른색의 비로드와 비단으로 몸을 휘감은 괴상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숱 이 적은 머리르 f지져 붙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뛰어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키가 크고 얼굴이 검은 비단깃의 프록 코트를 입고 흰 넥타이를 맨 남자가 미소를 지으면서 들어왔다. 그는 작가였는데 네플류도 프는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나톨리!"하고 그녀는 문을 열면서 말했다. "내 방으로 가십시다. 지금 세묜 이바노비치 가 자작시를 낭독하시겠다니까요. 당신도 가르신(19세기 후반의 러시아 작가)를 낭독해 주셔 야겠어요." 네플류도프가 나가려고 하던 참에, 변호사의 아내는 남편과 소곤거리더니 곧 그에게 말을 걸었다. "잘 오셧어요, 공작님. 저는 당신을 잘 알고 있으니까 소개는 필요 없겠군요. 저희들의 문 학회에 와 주시겠어요? 정말 유익하답니다. 아나톨리도 낭독을 썩 잘하고요." "어떻습니까, 나도 여러 가지 면에서 재주가 많지요?" 변호사는 두 팔을 벌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이런 매력적인 여자에게는 아무런 반대도 할 수 없다는 듯이 자기 아내를 가리키 면서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슬프고 엄숙한 표정을 하고 지극히 정중한 태도로 변호사 부인에게 초대해 준 데 대한 감사를 한 다음, 시간을 핑계로 거절한 뒤 응접실을 나왔다. "어쩌면 저렇게 침울한 얼굴을 학 있을까?" 변호사의 아내는 그가 나가자 이렇게 말했다. 대기실에서 조수가 네플류도프에게 미리 마련된 상소장을 내주었다. 사례금에 대해 묻자, 파 나린이 천 루블로 정했다고 말한 다음, 파나린을 다른 때 같으면 이런 사건을 맡지 않으나 이번엔 특별히 네플류도프를 위해 맡았다고 설명했다. "이 상소장에는 누가 서명을 합니까?"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피고 자신이 하는 겁니다만 그러기가 어려우시다면 본인의 위임장을 받아 파나린이 대신 해도 무방합니다." "아니, 그렇다면 내가 피고한테 가서 직접 서명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네플류도프는 지정 된 면회일 전에 카추샤를 만나게 될 기회가 마련된 것을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45 감옥에서는 여느 때처럼 감수들의 호각 소리가 목도에 요란하게 울려퍼지자, 복도와 감방 문이 철커덩 열리며, 맨발로 걷는 소리와 신발 뒤축을 끄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변기통 담 당 죄수들이 역겨운 냄새를 피우면서 복도를 지나갔다. 남자 죄수와 여죄수들은 세수를 하 고, 옷을 갈아입고, 점호를 받으려고 복도로 나왔다. 점호가 끝나자 더운 차를 가지러 갔다. 이 날은 두 사람의 죄수가 태형을 받게 되어 있었으므로 차 마시는 동안 어느 감방에서나 그 호제로 야단들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바실리예프라는 이름의 어느 정도 공부도 한 젊 은 점원이었는데 질투 끝에 자기의 정부를 죽인 사내였다. 그는 쾌활하고 도량이 넓은 사내 로서 간수들에게 조금도지지 않았기 때문에 감옥 친구들은 그를 좋아했다. 그는 감옥의 규 칙을 잘 알고 있어서 부당한 처우를 항의하고 했기 때문에, 간수들은 그를 미워했다. 한 2주 일 전에 간수 한 사람이 변기통 죄수가 그의 새 옷에다 더러운 똥물을 묻혔다고 하여 그를 때린 일이 있었다. 이 때 바실리예프는 죄수를 때리라는 규칙은 없다고 따지면서 변기통 담 당 죄수를 두둔했다. "내가 그 규칙을 가르쳐 주마."하고 간수가 바실리예프에게 욕지거리를 해댔다. 바실리예 프도지지 않고 이를 받아 응수했다. 간수가 그를 때리려고 했으나 그는 간수의 손을 재빨리 붙잡아 한참 동안 꼭 쥐고 있다가 홱 돌려 문 밖으로 떼밀었다. 간수는 이 일을 고소했다. 소장은 바실리예프를 징치감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징치감이란 밖에서 빗장으로 걸어닫게 되어 있는 여러 개의 캄캄만 독방들을 말한다. 어 둡고 싸늘한 징치감에는 침대도 의자도 탁자도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갇히게 되는 사람은 더러운 마룻바닥에 앉거나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징치감에 들끓고 있는 수많은 쥐들이 몸을 넘어다니기도 하고 몸 위로 기어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쥐들이 얼마나 대담한 지 빵도 제대로 둘 수가 없었다. 쥐들은 죄수들의 팔 밑에 놓아둔 빵을 갉아먹는 정도가 아 니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라치면 사람에게 덤벼들기까지 하였다. 바실리예프는 자기 에게 아무 죄도 없으므로 징치감에 갈 이유가 없다고 버텼으나, 강제로 끌려갔다. 그가 저항 을 하자 두 사람의 죄수가 그에 합세하여 간수가 그를 데려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자 간 수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엄청나게 힘이 센 페트로프라는 간수도 있었다. 죄수들은 잔뜩 얻어맞고 징치감에 감금되고 말았다. 그러고는 폭동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곧 지사에게 보고되었다. 그래서 지사로부터 폭동의 두 주모자, 바실리예프와 불량배인 네폼냐시치에게 30대의 태형에 처하라는 지사가 내려져 여죄수 면회실에서 집행하게 되었다. 이런 소식이 어젯밤부터 감방 안의 모든 죄수들에게 펴졌기 때문에 모든 감방에서는 앞으 로 있을 태형에 대한 얘기로 한창 떠들썩했다. 코라블료바, 멋쟁이, 페도샤, 마슬로바 등 넷은 구석에 자리잡고, 최근 마슬로바에게서 항 상 떨어진 적이 없는, 또 동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고 잇는 보드카를 마시고 모두들 얼굴들이 빨개져 흥분했다. 그들은 차를 마시면서 태형을 성토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가 무슨 짓을 했다고 저 야단들이야?" 코라블료바는 그녀의 튼튼한 이로 조그 만 각설타을 갉아먹으면서 바실리예프의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 두둔했을 뿐이야. 사실 요즘 죄수라고 해서 무턱대고 때릴 수 없게 되어 있거든." "젊고 좋은 사라이라던데." 찻주전자가 놓여 있는 나무 침대 맞은 편 장작위에 앉아 있던, 디다랗게 머리를 땋아내린 맨머리의 페도샤가 이렇게 덧붙였다. "이런 일은 그분한테 말해 보면 좋을 텐데, 미하일로브나." 건널목지기는 '그분'이라는 말로 네플류도프를 가리키며 마슬로바에게 말했다. "말해 보겠어요. 그분은 날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해주실 테니까요." 마슬로바는 생 글거리면서 머리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언제 와 주실지. 저놈들이 곧 끌러갈 텐데."하고 페도샤가 말했다. "아, 끔찍스 러워."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덧붙였다. "난 시골에서 어느 농부가 매 맞는걸 본 적이 있어. 시아버님 심부름으로 촌장 집엘 갔었 을 때였는데 가보니......."하고 건널목지기는 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건널목지기의 이야기는 2층 복도에서 들리는 말소리와 발소리에 의해 중단되었다. 여죄수들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끌어내고 있어. 망할놈들 같으니라고." 멋쟁이가 말했다. "틀림없이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팰 거야. 간수놈들, 그가 자기네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다고 몹시 미워했거든." 2층이 조용해지자 건널목지기는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녀는 촌장 집 헛간에서 농부가 얻 어맞는 것을 봤을 때는 뱃속이 온통 뒤집히는 것같이 놀랐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멋쟁이가 시체그로프라는 사람이 채찍으로 무자비하게 얻어맞으면서 전혀 소리를 지르지 않더라고 말 을 했다. 그러자 페도샤는 차를 치우고 코라블료바와 건널목지기는 바느질감을 집어들었다. 마슬로바는 무릎을 끌어안고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은 채 몹시 지루해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여간수가 와서 사무실에 면회자가 있다고 불렀다. "우리들 얘기를 곡 해주어요." 수은이 반이나 벗겨진 거울 앞에서 마슬로바가 목도리를 매만지고 있을 때 메니쇼프 할머니가 말했다. "불을 지른 건 우리가 아니라 그 악당이야. 일 꾼이 보았어. 일꾼은 자기의 영혼을 죽이는 일은 절대 할 리 없으니까. 그분에게 미트리를 불러서 불러 보시라고 그래줘요. 그러면 미트리느 모든 것을 샅샅이 말해 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이건 너무해. 우린 정말 아무 죄도 없이 감옥에 쳐박혀 있고, 그놈은 남의 여편네와 붙어 술집에서 재미 보고 있으니." "세상에 그런일이!"하고 코라블료바가 맞장구를 쳤다. "말하겠어요. 꼭 말할께요." 마슬로바가 대답했다. "기운을 내기 위해서 한잔 해야지." 그 녀는 한눈을 깜박거리며 이렇게 덧붙였다. 코라블료바가 컵에 반쯤 따라 주었다. 마슬로바는 쭉 들이켜고 나서 입술을 햝고는,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방금 말한 '기운을 내기 위해서'를 되뇌며 웃는 얼굴로 머릴를 쳐들면서 여간수를 따라 복도로 나갔다. 46 네플류도프는 벌써 오랫동안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감옥에 도착하자마자 입구에 있는 벨을 눌러 당직 간수에게 검사의 허가증을 내보였 다. "누구를 면회하러 오셨습니까?" "여죄수를 마슬로바를 만나고 싶습니다." "지금은 안 됩니다. 소장인이 바쁘시니까요." "사무실에 계십니까?" 네플류도프는 물었다. "아니, 여기 면회실에 계십니다."하고 간수는 대답했으나, 네플류도프는 간수의 얼굴에서 당황해 하는 빛을 보았다. "왜요, 오늘은 면회일이 아니잖습니까?" "특별한 용무가 있어서요." "어제 뵐 수 있습니까?" 이제 곧 나오실 겁니다. 그 때 말씀해 보십시오. 조금 기다려 보세요." 이 때 옆문에서 얼굴에 번들번들 윤기가 흐르고 담배 연기가 밴 수염과 금줄이 번쩍이는 군복을 입은 상사가 나오더니 엄숙한 태도로 간수에게 말했다. "왜 이런 데로 사람을 들이는 거야? 사무실로 모시도록 해!" "소장이 여기에 계시다고 하기에......." 네플류도프는 이 상사에게도 어딘지 불안한 표정을 보았으므로 수상쩍게 여기며 말했다. 이 때 안쪽에 있는 문이 열리더니 땀투성이가 된 간수 페트로푸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나왔다. "이젠 좀 정신을 차렸을 겁니다."하고 그는 상사에게 말했다. 상사가 눈짓으로 네플류도프를 가리키자 페트로프는 입을 다물고 굳어진 얼굴이 되어 뒷 문으로 나갔다. '누가 정신을 차린다는 것일까? 왜 이렇게 모두들 어색해 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상사 는 그에게 눈짓을 하는 것일까?' 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여기서 기다릴 수가 없으니, 사무실로 가시죠." 하고 상사는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네 플류도프가 나가려는 참에 뒷문에서 부하들보다 더 당황한 소장이 나타났다. 그는 연방 가 쁜 숨을내쉬고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와 있는 것을 보자 간수를 향해서 말했다. "이봐, 페트로프! 5호 여자 감방의 마슬로바를 사무실로 데리고 와1" "그럼, 가십시다." 그는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그들은 경사가 급한 층계를 올라가 창문 하나와 테이블 한 개, 그리고 여러 개의 의자가 놓여 있는 조그마한 방으로 들어갔다. 소장 은 자리에 앉았다. "정말 괴롭고 힘든 직무랍니다." 네플류도프를 바라보며 궐련을 꺼내면서 그는 말했다. "퍽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이 직무는 피로하지요. 정말 괴로운 직업입니다. 짐을 덜겠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도리어 더 무거워질 뿐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그만둘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정말 괴로운 일입니 다." 네플류도프는 소장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오늘의 소장은 어딘지 유별나게 측은하고 슬프고 절망적인 기분에 잠겨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렇겠죠. 괴로운 일이겠지요."하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을 맡고 계십니까?" "재산은 없고 거기다가 딸린 가족이 있으니......." "하지만 그게 괴로우시다면......."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좀 우습지만 그래도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힘껏 일을 하고 있습니 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친절하려고 애쓰지요 가령 딴사람이 내 자리에 앉게 된다면 그렇게 는 못할 겁니다. 뭐, 말로 하기야 쉽지만, 2000명이나 넘는 사람을, 그것도 어디 보통 인간입 니까? 우선 다루는 방법부터 알아야 합니다. 역시 그들도 인간이니까 동정이 안 갈 수는 없 지만 그렇다고 너무 고삐를 늦출 수도 없어요." 소장은 최근 죄수들끼리 싸움이 벌어져 결국 살인 소동으로 번진 사건을 이야기하기 시작 했다. 이 이야기는 간수들 따라 들어온 마슬로바 때문에 중단되었다. 네플류도프는 그녀가 소장이 있는 줄도 모르고 문간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연방 미소를 머금고 머리를 흔들면서 생기 있게 간수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러다 그녀는 소장의 모습을 보자, 깜짝 놀란 얼굴로 찬찬히 훑어보다가 곧 태연하고 쾌활하고 씩씩한 태도로 네플류도프에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느릿느릿하게 말하고는 생긋이 웃었다. 그리고는 전번고ㅘ는 달리 힘차게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실은 상소장에 서명을 받으러 왔소."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했으나, 오늘 따라 그를 반 갑게 맞아 주는 데 적이 놀랐다. "변호사가 상소장을 작성해 주어서 서명을 해야겠소. 곡 페 테르부르크로 보낼 거요." "좋아요. 서명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에요.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 하고 생긋 웃으며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호주머니에서 접은 종이를 꺼내 들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여기서 그녀가 서명해도 좋습니까?" 네플류도프는 교도관을 돌아보며 물었다. "자, 펜도 있으니, 글을 쓸 줄 아나?" "이리 와서 앉아요." 교도관이 말했다. "옛날엔 쓸 줄 알았어요." 그녀는 말하고 생글생글 웃으며 스커트와 윗옷의 소매를 만지 작거리며 테이블 앞에 앉아 조그마한 손에 힘을 주어 어설프게 펜을 잡더니 픽 웃고 네플류 도프를 쳐다보았다. 그는 서명하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조심스럽게 펜을 잉크에 적셔 잉크를 한 번 턴 다음 그녀는 자기 이름을 썼다. "더 필요한 건 없나요?" 그녀는 네플류도프와 소장을 번갈아 바라보고 펜을 잉크병 속에 꽂았다가 서너 장 있는 종이 위에 놓기도 하며 물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좀 있는데." 그녀의 손에서 펜을 받아들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 말씀하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별안간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아니 면 졸음이라도 온 건지 정색을 했다. 그러자 소장은 일어서서 나갔다. 네플류도프는 그녀와 마주 앉았다. 47 마슬로바를 데리고 온 간수는 테이블에서 물러나와 창턱에 앉았다. 네플류도프에게는 드 디어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처음 면회 왔을 때 그녀에게 중요한 일, 즉 그녀와 결 혼할 생각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에 대햇 항상 자기를 책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말하리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녀는 테이블 한쪽에 앉고, 네플류도프 는 그 반대쪽에 앉아 있었다. 방 안이 밝았기 때문에 네플류도프는 처음으로 가까운 거리에 서 그녀의 얼굴과 눈, 입술 언저리의 잔주름, 그리고 부석부석한 눈을 똑똑히 바라볼 수가 있었다. 전보다 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창가에 앉은 희끗희끗한 구레나룻을 기른 유대인인 듯한 간수들에게는 들리지 않고 그녀 에게만 들리도록 테이블 너머로 상체를 굽히고 그는 입을 열었다. "만일 이 상소가 성공하지 못하면 황제에게 청원해 봅시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겠 소." "이러기 전에 처음부터 버젓한 변호사를 대기만 했더라면......."하고 그녀는 그의 말을 가 로막았다. "요전번 변호사는 정말 바보였어요. 나한테는 듣기 좋은 말만 했거든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만일 그 때 제가 당신과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결코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글쎄,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모두들 나를 도둑년으로만 알고 있잖 아요." '오늘은 좀 이상하군.'학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그가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하자 다시 그녀가 말을 꺼냈다. "저 좀 할 말이 있어요. 우리들 방에 할머니 한 분이 계시는데 다들 놀라고 있어요. 정말 좋은 할머니인데 역시 아무 죄도 없이 아들하고 둘이 갇혀 있거든요. 불을 질렀다나 봐요. 그 할머니는 내가 당신과 잘 아는 사이라는 걸 알고," 마슬로바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 면서 말했다. "나더러 당신에게 이야기를 해서 아들을 불러 내어 물어 봐 달라는 거 예요. 매니쇼프라고 한 대요. 어떡하시겠어요? 들어 주시겠어요? 정말 좋은 할머니예요. 한 번만 보시면 억울하다는 걸 아실 거례요. 수고 좀 해주세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고는 눈을 내리 깔고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좋아, 해보자."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했으나, 그녀의 누그러진 태도에 점점 놀라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내 일로 당신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소. 전번에 내가 얘 기한 것을 기억하고 있소?"하고 그는 말했다. "여러 말씀을 하셨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었더라?" 여전히 생글거리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어 대며 그녀가 말했다. "내가 당신한테 용서를 받으러 왔다고 그랬지." 하고 그는 말했다. "내가 자신의 죄를 속죄하겠다는 것은,"하고 네플류도프는 말을 이었다. "말로써가 아니 라, 실제 행동으로써 속죄하겠다는 거요. 당신과 결혼하려고 결심했단 말이오." 그녀는 얼굴에서 별안간 놀라는 기색이 보였다. 그 사팔눈은 까닥도 하지 않고, 보는지 안 보는지 알 수 없는 시선을 던졌다. "지금 와서 그럴 필요가 어디 있어요?"그녀는 화가 난 듯이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느꼈소." "어떤 하느님 말씀이세요? 당치도 않은 말씀만 하시네요. 하느님이라고요? 어떤 하느님이 죠? 벌써 그전에 하느님을 찾으셨어야 했어요."하고 그녀는 입을 벌린 채 말을 끊었다. 네플류도프는 그제야 비로소 그녀의 입엣 풍기는 강한 술냄새를 맡고 그녀가 흥분한 이유 를 알았다. "진정해요." 그는 말했다. "왜 진정하라는 거예요? 취한 줄 아세요? 그래요, 난 취했어요. 그렇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요." 그녀는 느닷없이 빨리 말하곤 홍당무처럼 얼굴 이 빨개졌다. "난 징역수고 매춘부예요. 그러나 당신은 귀하신 공작님이시잖아요? 나 같은 것에 몸을 더럽맇 필요는 없으세요. 공작 아가씨한테나 가세요. 나의 몸값은 10루블짜리 지 폐 한 장이면 그만이에요." "당신이 아무리 지독한 말을 해도 내 마음은 조금도 모를 거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네플류도프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당신에 대해서 얼마나 가책을 느끼고 있는지 상상도 못 할 거요." "가책을 느낀다고요!"하고 그녀는 심술굿게 흉내를 냈다. "그 때는 가책을 느끼지 않아서 백 루블짜리 한 장을 틀어넣어 주셨군요. 아, 그렇죠, 그것이 내 몸값이었죠." "알고 있소, 잘 알고 있소, 그러니 지금에 와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오?"하고 네플류도프 는말했다. "이제 다시는 당신을 버리지 않으려는 거요." 그는 되풀이했다. "한 말은 꼭 실행 하겠소." "실행을 해요?"그녀는 이렇게 뇌까리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카추샤!" 그는 그녀의 손을 쥐면서 말했다. "돌아가세요! 나는 징역수고 당신은 공작님이세요. 이런 곳에 볼일이 없으실 거예요." 화 가 나서 얼굴빛이 변한 그녀가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이렇게 외쳤다. "당신은 나를 미끼로 해서 자신을 구원받으려 하는 거죠." 그녀는 가슴속에 숨겨 왔던 모든 말을 단번에 쏟아놓 으려는 듯이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나를 노리갯감으로 만들어 놀고, 저 세상 에서까지 또 나를 미끼로 자신을 구하려는 거죠! 보기도 싫어요. 그 안경도, 기름진 더러운 상판도, 다 보기 싫어요. 어서 가요, 가!" 그녀는 발딱 일어서서 이렇게 외쳤다. 간수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왜 이렇게 떠드는 거야? 자기 분수를 지켜야지." "내버려 두십시오."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혼 좀 나야 알겠어?" 간수가 말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내버려 두십시오."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간수는 다시 창가로 물러섰다. 카추샤는 다시 자리에 앉아 눈을 내리깐 채 조그마한 두 손의 손가락을 꼭 끼어 쥐었다. 네플류도프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당신은 나를 믿지 않는군."하고 그는 말했다. "저와 결혼하시겠다는 말을요? 그런 말씀은 하지도 마세요. 오히려 목을 매어 죽는 편이 낮겠어요. 이것이 저의 대답이에요.!" "어쨌든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하겠소."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이제 나로서는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아무것 도 없어요." 그녀는 덧붙이고는 구슬프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는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물이 그의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듯 했다. 그녀는 눈을 들어 놀란 듯이 그를 바라보고는 눈물에 젖은 두 눈을 목도리의 한끝으로 닦 아냈다. 간수가 다시금 다가와서 시간이 다 되었다고 일러주었다. 카추샤는 일어섰다. "당신은 지금 흥분해 있소. 가능하면 내일 또 올 테니 잘 생각해 봐요."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간수의 뒤를 따라나갔다. "애야, 넌 이제 팔자가 피었어." 감방으로 돌아오자 코라블료바가 마슬로바에게 이렇게 말 했다. "아무래도 너한테 홀딱 반한 보양이야. 그이가 온 동안만은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해. 그이는 반드시 구해 줄거야. 돈 많은 사람이야 무슨 일인들 못하겠어?" "그야, 그렇지." 건널목지기도 노래라도 부르는 듯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가난뱅이 가 결혼하자면 힘들지만, 부자는 마음만 먹으면 즉석에서도 할 수가 있거든. 우리 마을에도 그런 사람이 있어서......." "그런데 내 이야기는 해보았어?"하고 할머니가 물었다. 그러나 마슬로바는 그들에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침대에 드러누운 채 사팔눈으로 한구 석만은 쏘아보면서 저녁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괴로운 투쟁이 벌어지 고 있었다. 네플류도프의 말은 그녀를 옛날로 돌아가게 했다.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이해도 못한 채 증오에 사로잡혀 떠나 버린 그 세계로 말이다. 그녀는 이제껏 살아온 세계를 벗어 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의 생생한 기억을 가슴에 안은 채 살아가기란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밤이 되자 그녀는 다시 술을 사서 동료들과 함께 마셨다. 48 '그렇다,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당연해.' 감옥을 나오면서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생각 했다. 이제야 비로소 자기 죄를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다. 만일 그가 자기 죄를 속죄할 생각 을 먹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모든 죄를 깨닫지 못하였으리라. 더구나 그녀도 자기가 받은 모 든 악행을 느끼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제 그 모든 것이 무섭고도 분명하게 표면에 드 러났다. 그는 이제야 이 여자의 영혼에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닫게 되었으며, 그녀 역시 자기가 당한 일을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여태까지 네플류도프는 자기 자신 과 자기의 회오의 감정을 음미하고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저 두렵기만 했다. 그녀는 버 린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그는 이것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그 녀와 어떻게 관계를 이어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감옥문을 나서려고 할 때, 가슴에 십자 훈장과 여러 개의 메달을 단 간수가 네플류도프에 게로 걸어와서 아첨하는 듯한 불쾌한 표정을 짓고 몰래 편지를 내주었다. "어느 부인이 나리께 이 편지를 전해 달라시는데요." 네플류도프에게 봉투를 건네면서 간수가 말했다. "어떤 부인인데요?" "읽어 보시면 아실 겁니다. 국사범으로 수감된 분입니다. 저는 그 감방 담당자이죠. 그래 서 부탁 받은 겁니다. 이런 일은 금지되어 있습니다만, 인정상 할 수 없이......." 간수는 어색 하게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정치범 담당 간수라는 자가 감옥 안에서 이토록 공공연히 편지 연락을 하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때까지는 아직 그가 간수인 동시에 첩자라는 사실을 몰 랐다. 그는 감옥을 나오면서 그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경음부(경음부는 고대 러시아에서는 자음으로 끝나는 단어 뒤에 붙여 썼는데 혁 명 후 폐지되었음. 경음부를 생략하고 썼다는 것은 혁명 사상을 가진 자가 썼다는 것을 암 시함.)를 생략하고 활달한 필적으로 다음과 같이 연필로 쓰여 있었다. 당신이 어느 형사범에 관심을 가지고 감옥에 오신다는 것을 알고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 다. 만나주세요. 면회는 허락될 것으로 압니다. 당신이 돌봐 주고 계시는 분이나 우리들 정 치범을 위한 중요한 자료를 많이 제공하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리고 있는 베라 보고두호프스카야 베라 보고두후프스카야는 네플류도프가 곰 사냥을 하려고 친구들과 함께 들렀던 노브고르 드 현 벽촌의 여교사였다. 이 여고사는 공부를 하러 가겠다고 네플류도프에게 학자금을 청 한 일이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돈을 주었는데 이미 그것은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부인이 정치범으로 수감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모든 소문을 듣고 이렇듯 자진해서 도와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 당시는 모든 것이 간단하고 단순했지만 지금은 만 사가 어렵고 복잡하기만 했다. 네플류도프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 때의 일과 보고두호프스카 야와 알게 되었던 경위를 생각해 냈다. 그것은 사육제를 앞둔 어느 날 철도길에서 10킬로미 터나 떨어진 벽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곰을 두 마리씩이나 잡는 좋은 성과를 거두고 사냥 이 끝난 후 돌아갈 채비를 하면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그들이 머물고 있던 농가의 주인이 와서 부제의 따님이 네플류도프 공작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뜻을 전해 왔다. "미인인가?"하고 누군가가 물었다. "농담은 그만두게!"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하고 정색을 하고는 식탁에서 일어나 입을 닦 고 부제의 딸이 무슨 일로 자기를 만나려고 하는지 이상하게 여기며서 안채로 건너갔다. 방에는 펠트 모자에 털외투를 입은 튼튼한 몸집에 해쓱하고 못생긴 얼굴을 한 천가 앉아 있었다. 다만 눈썹 밑에서 반짝이는 두 눈만은 아름다웠다. "자, 베라 예프레모브나, 이분에게 얘기해 봐요."하고 늙은 주인 여자가 말했다. "이분이 공작님이셔. 나는 나가 보겠어." "무슨 일이시죠?"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저......저...... 공작님은 돈이 많으시니까 그런 쓸데도 없는 사냥에 돈을 허비하지만, 저 는......"하고 처녀는 몹시 수줍어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다만 한 가지 소원은 보람 있는 일 을 하고 싶어서입니다만, 아는 것이 없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요." 눈이 성실하고 선량해 보이고, 게다가 결의가 굳어 보이면서도 수줍어하는 표정이 몹시 감동적이어서 네플류도프는 전에도 흔히 있었던 일이지만 그녀의 처지를 자기와 바꾸어 생 각하고 동경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달라는 말씀이시죠?" "저는 여교사예요. 대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만, 마음대로 암 되는군요. 그렇다고 집에서 보내 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돈이 없기 때문이에요. 혹시 돈을 빌려 주실 수는 없으실 까요? 학교를 마치고 나면 반드시 돈을 갚아 드리겠어요. 돈 맣은 사람들이 곰을 잡고 농민 들에게 술을 먹이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왜 그런 분들은 좋은 일을 하 지 않으실까요. 제게는 단돈 80루블만 있으면 족해요. 그러나 싫으시다면 아무래도 괜찮아 요."하고 그녀는 화난 듯 말했다. "아닙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곧 갖다드리죠."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는 현관으로 나왔다. 그 때 그는 거기서 둘의 이야기를 엿듣고 섰던 친구 하나와 마주 쳤다. 그는 친구들이 놀리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 그녀에게 갖다 주 었다. "자, 어서 받으시오. 감사는 필요 없습니다. 도리어 내가 감사를 해야 할테니까요." 네플류도프는 이러한 것들을 회상하는 것이 무척이나 유쾌했다. 이 때문에 짓궂은 농담을 하던 장교와 하마터면 싸울 뻔한 일과 또 다른 장교 하나가 자기편을 들어주던 일과, 그 때 사냥의 성과가 퍽 좋아서 즐거웠던 일, 밤에 정거장까지 되돌아왔을 때의 상쾌했던 일들을 생각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두 필의 말이 끄는 썰매의 행렬은 마치 기러기떼 처럼 어떤 때는 높고 어떤 때는 낮은 숲속의 좁은 길을 소리 없이 질주했다. 숲속 에는 눈 방석에 뒤덮인 전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빨간 불빛을 내며 향기 높은 궐련을 피웠다. 몰이꾼인 오시프는 무릎까지 눈에 파묻히면서 이 썰매 저 썰매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시중을 들어주었고 깊은 눈 속의 굴속에 틀어박혀 숨구멍으로 훈훈한 입김을 내뿜고 있는 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네플류도프는 이 모든 일, 특히 건강과 정력과 평온을 의식하던 저 행복한 감정을 회상하 고 있었다. 폐는 양가죽 외투가 꽉 죄도록 싸늘한 공기를 가슴 깊숙이 들이마시고, 언제나 화살대가 머리 위 나뭇가지를 건드려 신선한 눈이 얼굴에 떨어졌다. 몸은 따듯하고 얼굴은 상쾌하고 마음에는 어떠한 걱정도 가책도 공포도 욕망도 없었다. 참으로 좋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아, 어째서 모든 것이 이렇게 괴롭고도 어려운 것일까? 분명히 베라 보고두호프스카야는 혁명가로서 지금 혁명운동 때문에 수감되어 있음에 틀림 없을 것이다. 꼭 만나야겠다. 더구나 카추샤와의 문제에 도움을 주겠노라고 약속하지 않았는 가. 49 이튿날 아침 네플류도프는 눈을 뜨자 어제 었던 일을 하나하나 회상해 내고는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고하고 그는 전보다 더 굳은 마음으로 일단 시작한 일을 끝 까지 계속하리라 결심했다. 이러한 자신의 의무감을 의식하면서 그는 집을 나와 마슬레니코프한테로 마차를 몰았다. 그것은 마슬로바의 일 외에도 그녀에게서 청을 받은 메니쇼프 노파 모자에 대한 면허 허가 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 밖에도 마슬로바에게 무슨 도움이 될지도 모를 보고두호프스카야의 면회에 대해서도 부탁해 볼 참이었다. 네플류도프는 마슬레니코프와 옛날 연대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다. 그 당시 마슬레니코프 는 연대의 경리 장교였다. 그는 다시 없는 호인으로서, 연대와 황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몰랐 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이제 네플류도프는 연대에서 현청으로 자 리를 바꾼 행정관인 그를 생각해 내고 만나러 간 것이다. 그는 유복하고 활달한 여자와 결 혼했는데 아내의 강요로 군무로부터 문관으로 전직했던 것이다. 그녀는 남편을 깔볼 뿐만 아니라 마치 애완 동물처럼 귀여워해 주는 여자였다. 네플류도 프는 지난 겨울에 한 번 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 부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후론 다시 찾아가지 않았었다. 마슬레니코프는 네플류도프를 보자 무척 반가워했다. 기름기 도는 붉은 얼굴하며, 뚱뚱하 게 살찐 몸매며, 군대 시절과 다름없는 말쑥한 복장이며,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옛날부 터 그는 언제나 어깨와 가슴이 꼭 끼는 최신식 날씬한 군복이나 평복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 도 역시 널찍한 가슴과 뚱뚱한 몸에 꼭 끼는 최신 유행의 문관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양식 복장을 하고 있었다. 연령의 차이는 많았으나(마슬레니코프는 40세에 가까웠다.) 그들은 서 로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참 잘 왔네. 집사람한테 가세. 회의에 나갈 때까지 꼭 10분 남았어. 지사가 부재중이라서 내가 대신 현쳥 일을 맡아 보고 있지." 그는 기쁨을 참을 수 없는 듯이 말했다. "오늘은 자네에게 용건이 좀 있어서 온 걸세." "무슨 용건인데?" 갑자기 경계하듯 다소 놀라는 어조로 마슬레니코프가 물었다. "실은 내가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는데(감옥이라는 말을 듣더니 마슬레니코프의 얼굴은 한층 더 굳어졌다.), 그 사람을 일반 면회실이 아닌 사무실에서 만나 고 싶네. 그것도 정해진 날이 아니라도 언제든 만나고 싶은데, 그것이 모두 자네 손에 달려 있다고 해서." "물론이지. 자네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도와 주겠네." 마슬레니코프는 자기의 위엄을 덜기라도 하려는 듯이 네플류도프의 무릎위에 두 손을 올려 놓으면서 말했다. "그야 가능한 일이지만,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임시 주인일세." "그래도 그 여자와 만날 수 있는 허가증을 내줄 순 있겠지?" "여자인가?" "응." "무엇 때문에 들어갔지?" "독살 사건이야. 그러나 억울하게 들어간 걸세." "그것 보라고, 그것이 정당한 재판이라는 거야. 그 친구들은 그 따위 짓밖에 할 줄 모른다 네." 그는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프랑스어로 말했다. "자네는 찬성 안하는 줄 아네만 할 수 없지. 이건 나의 굳은 신념이니까." 그는 1년 동안 보수주의 신문에서 주워 읽은 의견을 늘 어놓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자네가 자유주의자라는 것도 알고 있어." "자유주의자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를 일이지만,"하고 네플류도프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 다. 그는 사람을 재판하는 데 있어서는 우선 피고의 말을 들어 보아야 한다는 것, 재판하기 전까지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 또 모든 사람, 특히 아직 판결이 나지 않은 사람을 고문해 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했을 뿐인데도, 자기를 어느 당파에 쓸어 넣어서 자유주의자라고 간 주하는 데는 항상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유주의자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를일이지 만, 다만 한 가지 오늘날의 재판이 아무리 나쁘다 해도 옛날의 재판보다는 그래도 역시 낫 다는 것만은 나도 잘 알고 있지." "그래 변호사는 누구를 골랐나?" "파나린에게 부탁했네." "뭐 파나린이라고!" 작년에 마슬레니코프가 증인으로서 법정에 나갔을 때, 파나린이 자기 를 범인 다루듯 심문했을 뿐만 아니라, 반 시간 이상이나 능글능글한 태도로 자기를 조롱하 던 일을 생각하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 놈과는 관계하지 않는 게 좋겠 네. 파나린이란 작자는 평이 좋지 못한 인간이야." "또 한가지 청이 있는데." 네플류도프는 그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전부터 알고 있는 여교사 한 사람이 있는데 참 불행한 여자야. 지금 그 여자도 역시 감옥에 있네만, 그녀를 만날 수 있는 허가증도 내줄 수 있겠지?" 마슬레니코프는 한쪽으로 약간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정치범인가?" "응, 그런가봐." "실은 정치범의 면회는 친적에게만 허용되네만 자네에게만 통용될 수 있는 허가증을 내주 지. 자네는 남용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 여자의 이름이 뭐지? 자네가 돌봐 주는 여자 말이야. 보고두호프스카야라고? 미인인가?" "못생겼어." 마슬레니코프는 못마땅한 듯이 머리를 흔들면서 테이블로 가자 표제만 인쇄되어 있는 종 이 위에다 시원스럽게 다음과 같이 썼다. '본 증명서 지참자인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네플류도프에게 수감중인 평민 마슬로바 및 여 교사 보고두호프스카야와의 감옥 사무실에서의 면회를 허가함.'이라고 쓰고 나서 굵은 필 치로 서명을 했다. "자, 이제 자네도 거기 질서가 어떤지 알게 될 걸세. 만원인데다가 특히 이송 유형수들이 많아서 질서를 유지하기가 무척 힘들어. 그러나 나는 엄중하게 감독하고 있고, 또 이 일이 내 마음에 들어. 가 보면 알 테지만, 그들은 대단히 우대받고 있고 또 만족하고 있어. 하지 만 그들을 다룰 줄 알아야 하네. 최근에 불유쾌한 일, 즉 사건이 있었다네. 딴사람이면 폭동 으로 인정하고 많은 희생자를 냈을 거야. 그러나 우리들은 잘 수습했지. 한쪽으로는 고삐를 늦추고 다른 한쪽으로는 단단히 나꿔채야 하거든." 금 커프스 단추가 달린 희고 빳빳한 와 이셔츠 소매에서 내민 터키석을 박은 반지를 낀 토실 토실한 흰 주먹을 불끈 쥐면서 그는 말했다. "친절한 배려와 단호한 위력이지." "글세, 그건 잘 모르겠네만,"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난 그 곳에 두 번 가 봤는데 몹 시 마음이 아프더군." "아니, 알고 있다고? 그러면 말이야, 파세크 백작 부인과 일단 친해 둘 필요가 있겠네." 마슬레니코프는 흥에 겨워 말을 계속했다. "그 부인은 이 사업에 온몸을 바치고 있네. 자선 사업을 많이 했지. 덕택에 나는 허물없이 말하네만, 감옥을 일신할 수가 있었어. 전과 같은 참혹한 것들을 없앴더니 죄수들이 기뻐하고 있다네. 가보면 알거야. 그런데 그 파나린 말일 세. 나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하거니와, 또 나의 사회적인 지위로 봐서라도 서로가 합치될 리 만무하지만 그는 확실히 좋지 못한 인간이야. 게다가 법정에서 덜된 소리를 마구 지껄여 대 고......" "여러 모로 고마웠네." 네플류도프는 서류를 집으면서 말했다. 그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도 않고 옛 친구에게 작별을 고했다. "집사사람을 만나지 않겠나?" "실례하겠네, 시간이 없어서." "그럼 하는 수 없지. 이따 야단맞겠는걸." 옛 친구를 계단의 중턱까지 배웅하면서 마슬레 니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제일 중요한 손님이 아니라 다음으로 중요한 손님을 배웅할 때는 여기서 전송하곤 했으므로 그는 네플류도프를 두 번째 중요한 손님으로 생각한 것이었 다. "그러지 말고 잠깐만 만나 주게." 그러나 네플류도프는 끝까지 사양하면서 하인과 문지기 가 달려와 외투와 단장을 내주며 밖에 순경이 서 있는 문을 열어 주었을 때, 오늘은 아무래 도 그냥 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럼 목요일에 꼭 와 주게. 그 날은 아내가 손님을 접대하는 날이니까. 그렇게 말해 두겠 네!" 마슬레니코프는 계단에서 이렇게 외쳤다. 50 그 날 네플류도프는 마슬레니코프의 저택에서 곧장 감옥으로 가서 낯익은 소장의 관사를 찾았다. 요전처럼 낡은 피아노 소리가 들여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광상곡>이 아니라 클레 멘티(이탈리아의 작곡가)의 <연습곡>이었는데, 역시 몹시 힘차고 명확하고 빠른 템포로 연 주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한 눈을 가린 하녀가 문을 열어 주더니 소장님이 집에 계시다면서 네플류도프를 조그마한 객실로 안내했다. 객실에는 소파와 테이블이 있고, 털실로 짠 테이블 보 위에는 한쪽이 누렇게 된 장밋빛의 종이갓을 씌운 커다란 램프가 놓여 있었다. 잠시 후 침울하고 쓸쓸한 얼굴을 한 소장이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무슨 용무시죠?" 그는 제복 한가운데의 단추를 채우면서 말했다. "지금 막 부지사한테서 허가증을 받아 왔습니다." 네플류도프는 허가증을 내밀면서 말했 다. "마슬로바를 만나고 싶습니다." "마슬로바를?" 소장은 피아노 소리 때문에 잘 알아듣질 못했는지 되물었다. "마슬로바 말입니다." "아, 네!" 소장이 일어서서 클레멘티의 <롤라드>(빠른곡조)가 들려오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마루 샤, 잠깐만 멈춰라."하고 마치 피아노 소리가 그의 일상 생활에 있어서의 두통거리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안 들리잖아." 피아노 소리가 멎었다. 그러고는 불안스러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가 문에서 이쪽을 들여 다보았다. 소장은 피아노 소리가 멈추자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굵고 연한 빛깔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네플류도프에게도 권했다. 네플류도프는 사양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마슬로바를 만나고 싶습니다." "마슬로바는 오늘 만나기 어려우신데요."하고 소장이 말했다. "왜요?" "그건 당신의 실수 때문에" 빙그레 웃으면서 소장은 말했다. "공작님, 제발 그들에게 직접 돈을 주지 마십시오. 주시려거든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다 그녀의 것이 됩니다. 어제 그녀 에게 돈을 주신 모양인데 그녀는 그 돈으로 술을 구해서-이 폐단은 도무지 근절이 되지 않 고 있습니다.-오늘은 곤드레만드레 취해 가지고 형편없이 난폭해졌습니다."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엄격한 조치를 취해서 독방으로 옮겼을 정도입니다. 평소에 얌전한 여자입니 다만 제발 돈은 주지 마십시오. 그런 여자들은......" 네플류도프는 어제 일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소름이 끼쳐졌다. "그럼 정치범인 보고두호프스카야는 만날 수 있습니까?" 네플류도프는 잠시 후에 물었다. "네, 됩니다."하고 소장은 말했다. "아니, 넌 무엇하러 왔니?" 그 때 마침 방에 들어온 대 여섯 살 난 계집아이에게 소장이 말했다. 그 계집애는 네플류도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버지한테로 왔다. "조심해라, 넘어지겠어." 교도관은 계집아이가 앞을 보지도 않고 양탄자 에 걸려 비틀거리면서 아버지 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면회할 수 있다면 곧 가 보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시죠." 소장은 이렇게 말하고 아직도 네플류도프를 바라보고 있는 계집아이 를 안고 벌떡 일어서더니 다시 계집아이를 살그머니 옆에 내려놓고 현관으로 나왔다. 소장이 한 눈을 안대로 가린 하녀가 내주는 외투를 입고 채 문을 나서기도 전에 다시 클 레멘티의 활발하고 빠른 <롤라드>가 들려왔다. "콩세르바투아르(프랑스의 국립 음악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만, 교풍이 문란해서요. 그 러나 소질은 있는 모양이에요." 계단을 내려가면서 소장은 말했다. "연주회에 나가고 싶어하 죠." 교도관과 네플류도프는 감옥으로 갔다. 교도관이 가까이 가자 옆문이 활짝가 열렸다. 간수 들은 경례를 붙이고 눈으로 전송하였다. 머리를 절반쯤 깎인 4명의 죄수가 무엇인가 통을 메고 오다가 입구에서 이들과 마주치자, 모두 소장을 보고 몸을 움찔했다. 한 사람은 유달리 몸을 굽히고 까만 눈을 반짝이며 기분 나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물론 재능을 길러 주어야지요. 묻어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조그마한 집이고 보니 곤란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소장은 죄수들에게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 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피로한 듯이 다리를 질질 끌면서 네플류도프와 같이 면회실로 갔다. "누그를 만나시겠습니까?"하고 간수가 물었다. "보고두호프스카야입니다." "탑에 있는 여죄수군요. 데려올 때까지 좀 기다려 주십시오."하고 그는 네플류도프에게 말 했다. "그럼 그 동안에 메니쇼프 모자를 만나 볼 수 있을까요? 방화범으로 기소되어 있는." "그건 21호실입니다. 좋습니다. 불러 드리지요." "메니쇼프를 그의 감방에서 만날 수는 없을까요?" "그러나 면회실이 조용해서 더 좋으실 텐데요?" "아니, 제겐 그것이 더 흥미가 있습니다." "대단한 흥미시군요!" 이 때 옆문에서 말쑥하게 차린 부소장이 나왔다. "저, 공작님을 메니쇼프가 있는 감방으로 안내해 드려. 감방은 21호실일세." 소장이 부소 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동안에 그녀를 사무실로 데려오겠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이름을 뭐라고 하셨던가요?" "베라 보고두호프스카야."하고 네플류도프가 대답했다. 부소장은 콧수염을 염색하고 콜로뉴 향수의 꽃향기를 뿌리고 다니는 금발 청년이었다. "그럼 이리로 오십시오." 그는 유쾌한 미소를 지으면서 네플류도프에게 말을 건넸다. "여 기 시설에 흥미를 가지고 계십니까?" "네,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이 곳에 수감되어 있다고 하기에 마음이 끌린 것입니다." 부소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 그런 일이 간혹 있기는 하지요." 그는 공손하게 길을 비켜서서 넓고 냄새나는 복도로 손님을 앞세우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거짓말을 잘하지요. 자, 이리로 들 어가십시오." 감방문은 열려 있었고, 여러 명의 죄수들이 복도에 나와 있었다. 부소장은 간수들에게 가 볍게 머리를 끄덕여 인사하고 벽에 달라붙다시피하여 감방으로 들어가는 죄수와, 두 손을 옷솔기에 착 대고 군대식으로 상관을 보내면서 문 옆에 서 있는 죄수들을 곁눈질하며, 복도 를 빠져나가 왼쪽으로 돌더니 철문이 굳게 닫혀 있는 다른 복도로 네플류도프를 안내했다. 이 복도는 처음 복도보다 좁고 어둡기도 하려니와 퀴퀴한 냄새가 더욱 강하게 풍겼다. 복 도 양쪽에는 자물쇠로 잠긴 문들이 줄지어 있었다. 모든 문에는, 소위 눈구멍이라고 불리는 지름 2,30센티미터 가량의 문구멍이 뚫려 있었다. 복도에는 초라한 얼굴에 주름살이 많은 간 수가 하나 서 있을 뿐이었다. "메니쇼프는 어느 감방에 있나?"하고 부소장이 간수에게 물었다. "왼쪽으로 여덟 번째 감방입니다." 51 "들여다봐도 좋습니까?" "좋고 말고요, 원하신다면." 부소장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곤 간수에게 뭔가를 묻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는 구멍 하나를 들여다보았다. 까만 턱수염을 기르고 키가 큰 젊 은 사나이가 셔츠 바람으로 재빨리 감방 안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문 쪽에서 발소리가 나자 그 사나이는 힐끗 돌아다보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는 다른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그 때 안에서도 역시 이쪽을 보고 있던 놀란 듯 한 커다란 눈이 네플류도프의 눈과 마주치자 그는 곧 물러셨다. 네플류도프는 세 번째 감방 에서 무척 키가 작은 사나이가 몸을 구부리고 겉옷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네 번째 감방에는 얼굴이 넓적하고 창백한 사나이가 머리를 푹 숙이고 무릎에다 팔 꿈치를 괴고 앉아 있었다. 발소리를 드자 그 사나이는 머리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았다. 얼굴 전체에는, 특히 그 커다란 눈에는 온갖 희망을 상실한 슬픔이 어려 있었다. 그는 누가 자기 의 감방을 들여다보든 말든 그것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네플류도프는 무서 워졌다. 그는 들여다보는 것을 중지하고 메니쇼프가 있는 21호 감방으로 갔다. 간수는 자물 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목이 길고 몸집이 좋은, 선량해 보이는 둥근 눈과 짧게 턱수염을 기 른 젊은 사나이가 나무 침대 옆에 서 있다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얼른 겉옷을 걸치 고 들어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의심이 가득하고 놀란 표정으로 네플류도프에게서 간수로, 간수에게서 부소장에게로 잽싸게 시선을 돌리는 이 선량하고 동그스름한 눈에 네플류도프는 몹시 놀랐다. "이분이 네 사건에 대해서 물어 보시겠단다." "고맙습니다." "나는 당신의 사건에 대해서 남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지만," 네플류도프는 쇠창살이 끼 여 있는 더러운 창을 향해 감방을 가로지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한테서 직접 듣고 싶 어서 온 거요." 메니쇼프도 창가로 다가와서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소장을 흘끔흘끔 보고 겁 을 내면서 이야기를 하더니 차차 대담해졌고, 이윽고 부소장이 무슨 용무로 복도로 나가 버 리자 더욱 대담해졌다. 그의 말하는 태도나 어조로 보아서 지극히 순박하고 선량한 평범한 농부 같았으며, 따라서 이런 이야기를 감옥에서 수치스런 죄수복을 입은 사람의 입으로부터 듣는다는 것이 네플류도프에게는 무척 이상하게 느껴졌다. 네플류도프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방을 둘러보고 짚이 깔린 낮은 침대며, 굵은 쇠창살이 낀 창이며, 더러워지고 젖어서 끈적 끈적한 벽이며, 죄수화에 죄수복을 입은 초라하고 불행한 농부의 가련한 얼굴과 모습을 보 고 있자니 점점 더 마음이 우울해졌다. 이 선량해 보이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정말이라고 믿 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단지 모욕을 주기 위해서 그를 잡아다가 죄수 복을 입히고, 이러한 무서운 곳에 가두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더 무서운 것은 이렇게도 선량한 얼굴을 한 사람이 말하는 참된 이야기가 기만이 라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러했다. 젊은이는 결혼한 후 곧 마을의 여인숙 을 겸한 술집 주인에게 아내를 빼앗겼다. 그는 백방으로 법에 호소했다. 그러나 술집 주인은 관리들을 매수했는지라 언제나 주인이 승소했다. 한번은 아내를 억지로 끌어왔으나 아내는 이튿날 도망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아내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러 갔었다. 그러나 술집 주 인은 아내가 없다고 하면서(그는 들어가면서 아내의 모습을 언뜻 보았다.) 꺼지라고 했다.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술집 주인과 일꾼들이 합세하여 그를 피투성이가 되도록 마 구 때렸다. 그 이튿날 술집에서 불이 났다. 그들 모자는 방화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 그는 방화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때에는 자기 집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 정말 방화하지 않았나?" "방화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그 악당이 자기네 집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 듣기론 얼마 전에 보험에 들어 놓았다는 것이에요. 그래 놓고는 나와 어머니가 와서 방화를 했다고 둘러 대지 않겠어요? 그 때 내가 너무 화가 치밀어서 실컷 욕을 퍼붓고 오기는 했어요. 그 러나 방화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불이 났을 때에는 거기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걸 놈들은 나와 어머니가 거기 갔을 때 불이 났다고 꾸민 것입니다. 보험금을 타려고 불을 질러 놓고 우리에게 뒤집어씌운 겁니다." "정말인가?" "정말이고 말고요. 하느님께 맹세합니다." 네플류도프는 자기 발 아래 엎드려 절하려는 그를 간신히 말렸다. "부탁입니다. 전 아무 나쁜 일도 하지 않았는데 여기서 일생을 망치게 되었습니다."하고 그는 계속했다. 그는 별안간 뺨에 경련을 일으키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겉옷의 소매를 걷고 더 러운 셔츠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끝났습니까?"하고 부소장이 물었다. "네, 끝났습니다. 자, 너무 슬퍼하지 말게나. 될 수 있는 대로 힘써 볼테니까." 네플류도프 는 이렇게 말하고 나왔다. 메니쇼프는 문 옆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간수가 닫는 문에 쾅 부딪쳤다. 간수가 문에 자물 쇠를 잠그는 동안 메니쇼프는 구멍으로 바깥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52 넓은 복도를 되돌아서서(마침 점심 시간이었으므로 감방문은 모두 열려 있었다.) 연한 갈 색 겉옷에 짧고 통이 널찍한 바지를 입고 죄수화를 신은 죄수들이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 는 사이를 지나가며 네플류도프는 이상한 기분에 잠겼다. 여기 갇혀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동 정과 그들을 여기에 가둔 사람들에 대한 공포와 의혹, 또 이런 것을 태연하게 조사하고 다 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유 모를 수치심을 느꼈다. 어느 복도에서 누군가가 죄수화 소리를 내면서 감방 안으로 뛰어들어가자, 거기서 사람들 이 우르르 몰려나오더니 네플류도프의 길을 막아서며 인사를 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 나리, 제발 우리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달라고 말씀을 좀 해주십시오." "나는 관리가 아니라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누구라도 좋으니 높은 사람에게 말씀해 주십시오."하고 화난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아 무 죄도 없는데 벌써 두 달째 고생하고 있습니다." "아니, 왜요?"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그저 이렇게 감옥에 갇혀만 있습죠. 벌써 두 달이나 됩니다만 왜 그런지 저희도 그 이유 를 모릅니다." "사실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하고 부소장이 말했다. "이 사람들은 여권 이 없어서 구류되었죠. 자기네 현으로 보내게 되어 있습니다만, 그 곳 감옥이 타 버렸기 때 문에 현청에서 보내지 말아 달라는 통지가 왔습니다. 그래서 다른 현의 사람들은 모두 보냈 습니다만, 이 사람은 그대로 구류시키고 있습니다." "뭐요?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네플류도프가 문에서 걸음을 멈추고 외쳤다. 죄수복을 입은 40명 가량 되는 사람들이 네플류도프와 부소장을 둘러쌌다. 한꺼번에 몇 사람의 소리가 시끄럽게 튀어나왔다. 부소장이 그것을 제지했다. "누구 한 사람만 말해요." 그러자 그 중에서 한 50세 가량 되어 보이는 키가 크고 풍채가 좋은 농부가 나섰다. 그들 은 돈별이를 위해서 나왔으나, 단지 여권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구류되어 있다는 것을 네플 류도프에게 설명했다. 그것도 여권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기한이 2주일쯤 경과되었 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권 기한이 경과하는 경우는 매년 있던 일로서 그 때문에 문책을 받 은 일이 없었는데 유달리 금년엔 붙들려 벌써 두 달째나 죄인처럼 이런 데 갇혀 있다고 했 다. "우리는 모두 석공이며 같은 조합원입니다. 현의 감옥이 타 버렸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그것은 우리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제발 저희들을 도와 주십시오." 네플류도프는 말을 듣고는 있었지만 이 풍채 좋은 사람의 이야기를 거의 이해하지는 못했 다. 그것은 발이 많이 달린 잿빛의 커다란 이가 석공의 볼수염 속에서 기어다니고 있는 것 에 한눈이 팔렸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럴 리가? 다만 그런 이유로?" 네플류도프는 부소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네, 당국에서도 실수가 있긴 합니다. 모두 송환해서 자기네 고장에서 살게 해야 하지요." 하고 부소장이 말했다. 부소자이 말을 마치자 사람들 속에서 역시 죄수복을 입은 키 작은 사람이 튀어나오더니, 입을 기묘하게 일그러뜨리면서 아무 죄도 없이 여기서 고생하고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개만도 못한......"하고 그는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작작하고 입 닥쳐!" 그렇잖으면 따끔한 맛을 보여 줄 테야! "무슨 맛을 보여 준다는 거야?" 키 작은 사내는 울화통이 터져서 소리질렀다.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이야?" "닥쳐!" 부소장이 호통을 쳤다. 키 작은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하고 네플류도프는 감방을 나오면서 중얼거렸다. 문에 서 구멍을 토해 내다보는 죄수, 또는 도중에서 만나는 수백의 죄수들의 눈총이 자기를 쫓는 것 같았다. "정말 죄도 없는 사람들을 이렇게 수감해 두어도 괜찮은가요?" 복도로 나오면서 네플류도 프는 이렇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물론, 그 자들은 거짓말을 이만저만 잘하는 것이 아닙니 다. 그자들 말만 드으면 그자들은 모두가 무죄입니다."하고 부소장이 말했다. "그러나 사실 저 사람들은 아무 죄도 없지 않습니까?" "저자들은 그렇다고 합시다. 그러나 정말 돼먹지 않은 자들이 있기 때문에 엄격히 하지 않으면 당해낼 수 없다는걸요.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망나니들이 있으니까요. 어제만 해도 어쩔 수 없이 두 놈을 처벌했지요." "어떻게 처벌합니까?"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명령에 의해서 몽둥이로 치는 거지요." "그러나 체형은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건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은 사람에 한한 거죠. 이런 자들에겐 아직 적용되지 않습니 다." 네플류도프는 어제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목격한 일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가 거 기에서 기다리고 있을 무렵에 태형을 행하고 있는 중이었음을 이제야 깨닫게 디었다. 그러 자 호기심, 우울, 어리둥절함과, 그리고 거의 육체적인 것으로까지 변해 가는 정신적인 구토 증에 뒤섞인 이상한 감정이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는 힘으로 그의 마음속에 치솟아올랐다. 전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긴 했으나, 지금처럼 전신을 휩 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는 부소장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곱바로 급히 복도로 나와 사무실로 갔다. 소장은 복도에 서 있었지만 다른 일에 바빠서 보고두호프스카야를 부르는 것을 잊고 있었 다. 네플류도프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비로소 그녀를 부르기로 한 일이 생각났다. "곧 부르러 보내겠습니다. 좀 앉아 계십시오."하고 그는 말했다. 53 사무실은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 방에는 칠이 벗겨지고 불룩 튀어나온 망가진 아주 큰 난로가 있고 두 개의 더러운 창문이 나와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죄수의 키 를 재는 데 사용하는 시꺼먼 야드 자가 있었고 다른 한쪽 구석에는 고문하는 데는 어디나 있게 마련인 커다란 예수의 상이 '그분'의 가르침을 조롱하듯이 걸려 있었다. 첫 방에는 간 수가 몇 명 서 있었다. 다른 한 방에는 스무 명 가량의 남녀가 한 무리 또는 두 사람씩 짝 이 되어 구석에 앉아서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창 옆에는 필기용 테이블이 하 나 있었다. 소장은 테이블 앞에 앉아서 네플류도프에게 옆에 있는 의자를 권했다. 네플류도프는 앉아 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중 제일 먼저 그의 주의를 끈 사람은 짧은 재킷을 입고 명랑한 얼굴을 한 젊은 사나이 였다. 그는 눈썹이 검은 중년 부인 앞에 서서 무엇인가 열심히 손짓을 해가면서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파란 색안경을 쓴 노인이 그 옆에서 죄수복을 걸치고 있는 젊은 여자의 손 을 잡고는 꼼짝도 않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중학생인 듯한 한 소년이 놀라운 얼 굴로 눈을 노인에게 고정시킨 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젊고 아름다웠는데 짧게 자 른 금발머리에 정력적인 얼굴을 한데다 옷은 유행에 따라 입고 있었다. 남자는 품위 있는 얼굴과 물결치듯 아름다운 머리칼을 지닌 말쑥한 청년으로 방수복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 들은 구석진 곳에 앉아서 사랑에 취해 속삭이고 있었다. 테이블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사람은 검은 색의, 보기에 그와 같은 방수복 재킷을 입은 폐를 앓는 듯한 청년의 모친 인 듯싶은 백발의 부인이었다. 그 부인은 청년을 커다란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으나,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못하고 있었다. 여러 번 말을 꺼냈다간 그만 막혀 버리고 말았다. 청년은 손에 종잇조각을 든 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는 듯이 화난 표정으로 그 종잇조각을 구겼다 폈다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회색 옷에다 좁 고 긴 테이프를 두른, 뽀얀 빰이 포동포동하고 아름다운 소녀가 유난히 놀란 눈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는 어머니 옆에 앉아서 상냥하게 어머니의 등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 다. 이 소녀는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웠다. 그녀의 하얗고 큰 손, 탐스러운 짧은 머리칼, 오 똑한 코, 입술 등이 모두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것은 양같이 부드 럽고 진실해 보이는 갈색의 눈이었다. 네플류도프가 들어올 때에 한순간 그 아름다운 눈이 어머니의 얼굴에서 떨어져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러나 곧 눈길을 돌려 어머니에게 뭐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 쌍의 연인들이 앉은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는 우울한 얼굴 빛에 머리를 헝클어뜨린 한 남자가 스코페츠 교도같이 보이는 수염없는 남자에게 화를 내며 말을 하고 있었다. 소장 옆에 앉은 네플류도프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머리 를 짧게 깎은 사내아이가 가까이 와서 가느다란 목소리로 묻는 바람에 그의 주의가 깨드려 졌다. "어저씬 누구를 기다리세요?" 네플류도프는 이 소리에 깜짝 놀랐으나, 그 소년의 조심성 있고 반짝이는 눈을 가진 착실 하고 영리한 얼굴을 대하고는, 지금 아는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솔직히 말해 주었 다. "아저씨의 누님이세요?"하고 소년이 물었다. "아니야, 누이가 아니야." 네플류도프는 깜짝 놀라서 대답했다. "그런데 누구하고 왔니?"하 고 그가 소년에게 물었다. "엄마하고요. 엄마는 정치범이에요."하고 소년은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마리야 파블로브나, 콜랴를 그리로 데리고 가요." 네플류도프와 그 소년의 대화가 위법이 라고 생각했는지 소장이 이렇게 말했다. 네플류도프의 시선을 끈 양같이 순한 눈을 가진 단정한 소녀 마리야 피블로브나는 발딱 일어서서 남자 같은 걸음걸이로 힘차게 네플류도프와 소년의 곁으로 가까이 왔다. "이 아이가 당신이 누구신가 물었나요?"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지금껏 순수하고 형제처럼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가졌었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을 확 신하는 듯한 순진하고 신뢰하는 눈으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애는 뭐든 알고 싶 어한답니다."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렇게 말하며 그녀가 소년에게 너무나도 따스하고 친절한 미소를 짓는 바람에 소년과 네플류도프도 무의식중에 따라 웃었다. "누구를 만나러 왔으냐고 묻더군요." "마리야 파블로브나, 외부 사람과 이야기해서는 안 돼요. 잘 알잖아!"하고 소장이 말했다. "잘 알아요, 잘 알아요." 소년은 이렇게 말하곤, 하얀 손으로 자기에게서 줄곧 시선을 떼 지 않고 있던 콜랴의 조그마한 손을 잡고 폐를 앓는 청년의 어머니한테로 되돌아갔다. "저 앤 누굽니까?" 네플류도프는 소장에게 물었다. "애 엄마는 정치범인데 감옥에서 낳았습니다." 소장은 자기네 감옥 안에서 일어난 진기한 일을 이야기한다는 듯 다소 으쓱해서 말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이번엔 어머니는 시베리아로 갈 갑니다." "저 소년은?" "그건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하고 소장은 어깨를 움츠리면서 말했다. "아, 보고두호프 스카야가 왔습니다." 54 짧은 머리에 얼굴빛이 노랗고, 여윈데다가 몸집이 작은 베라 예프레모브나 보고두호프스 캬야가 뒷문에서 커다란 눈을 반짝이면서 들어왔다. "이렇게 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녀는 네플류도프의 손을 꼭 쥐면서 말했다. "절 알아보시겠어요? 앉으세요." "이런 데서 만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정말 기뻐요. 어찌나 기쁜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예요." 베라 예프레모브나는 예 전과 다름없이 그렇듯 선량하고 둥근 큰 눈으로 놀란 듯이 네플류도프를 바라보면서 추레하 고 구겨지고 더러운 상의의 깃 밖으로 내민 몹시 가느다랗고 힘줄투성이인 누런 목을 설레 설레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그녀가 수감된 내력을 물었다. 그녀는 몹시 생기차게 자기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경위를 띄엄띄엄 낯선 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말 속에는 선전, 계급 타파, 자기가 관여하던 단체, 본부, 지부 등의 외래어가 많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그런 말은 누구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듯 했으나, 네플류도프는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들이었다. 그녀는 네플류도프가 '이민 의지파'('나로드니키'운동에서 생긴 혁명 단체. 극도로 과격 하여 테러 행위로 정부를 쓰러뜨리려고 모의하여 알렉산드르 2세도 암살함)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된다는 것에 몹시 흥미를 느끼고 유쾌하게 생각하리라고 분명히 확신하고 기염을 토 했다. 하지만 네플류도프는 그녀의 앙상하게 뼈가 드러난 목덜미와 숱이 적은 흐트러진 머 리칼을 보면서 왜 그런 짓을 했으며, 또 무엇 때문에 자기에게 그런 놀랄 만한 이야기를 하 는 것인지 의아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 여자가 측은하게 생각되긴 했지만, 그 것은 아무 죄도 없이 지독한 악취가 풍기는 감옥에 갇혀 있는 저 농부 메니쇼프에 대한 측 은함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측은해 보인 것은 그녀의 머릿속 이 사상적으로 몹시 분명한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분명히 자기 목적의 성공을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영웅이라고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이 어떤 성격이며 그 성고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 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베라 예프레모브나가 네플류도프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용건은, 그녀의 친구 슈스토박라 는 여자가 지부에 속해 있지도 않았는데 다만 보관을 부탁받은 서적과 서류가 그녀 집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5개월 전에 그녀와 함께 체포되어 페트로 파블로프스크의 요 새 가옥에 수감되어 있다는 사건에 대해서였다. 베라 예프레모브나는 슈스토바의 수감이 자 기에게도 일단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어서 교제가 넓은 네플류도프에게 친구를 석방시키는 데 모든 힘을 다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또 하나의 부탁은 이러했다. 즉, 페트로 파블로 프스크 요새 감옥에 수감되어 잇는 구르게비치라는 사나이가 양친과 면회할 수 있고 또 그 의 연구에 필요한 학문적인 서적을 받아 볼 수 있도록 수고해 달라는 것이었다. 베라 예프레모브나가 자기 경력을 이야기한 바에 의하면, 그녀는 산파 학교를 졸업하자 '인민 의지파'에 참가하게 되어 그들과 함께 혁명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한다. 처움에는 만사가 잘되어 선언서도 쓰고 공장에서도 선전 운동을 하고 했으나, 그 후 간부 한 사람이 체포되어 비밀 서류가 압수되자 모조리 검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도 체포되었습니다만, 이번에 유형을 가게 되었어요."하고 그녀는 자기의 이야 기를 끝냈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저는 무척 기뻐요. 올림포스의 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에요."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양과 같은 눈을 가진 소녀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베라 예프레모브나가 그 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그 소녀는 어느 장군의 딸이며, 퍽 오래 전부터 혁명당에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헌병을 저격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체포된 것이라고 했다. 그 소녀는 인쇄 소로 위장된 비밀 아지트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헌병들이 가택 수색을 하러 왔을 때, 그 곳에 있던 동지들은 자위 수단을 쓰기로 결정하고 불을 끄고 증거물을 없애기 시작했다. 헌병들이 집 안에 뛰어들어오자, 동지 한 사람이 헌병을 쏴서 치명상을 입혔다. 그 뒤 저격 범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자, 여태껏 한번도 손에 권총을 쥐어 본 적도 없고 거미 한 마리 죽여 본 일이 없는 그녀가 자진해서 자기가 쏘았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번에 시베 리아로 중노동 유형을 가게 된 것이다. "애타주의자며 훌륭한 성격의 소유자예요." 베라 예프레모브나는 감탄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녀가 부탁하고 싶었던 세 번째의 용건은 마슬로바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마슬로바의 사건은 물론 마슬로바와 네플류도프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이미 감옥 안에 쫙 퍼져 있었다. 그러니까 마슬로바를 정치범으로 돌리든가, 아니며 지금 병원에는 환자가 많아 잡역부가 필요하니 가능하면 그쪽으로 돌리든가 해보도록 힘쓰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네플류도프는 그녀의 충고에 감사하고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겠노라고 말했다. 55 소장이 일어서서 면회 시간이 끝났으니 돌아가 달라고 말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이야기는 중단되고 말았다. 네플류도프는 베라 예프레모브나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문 쪽으로 갔는데 그 때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여러분, 시간이 됐습니다. 시간이 됐어요!"하고 소장은 조바심 때문에 안절부절하면서 되 풀이했다. 하지만 소장의 말은 방 안에 있는 죄수들을 흥분시켰을 뿐 누구 하나 헤어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일어선 채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그대로 앉아서 계속 이야 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작별 인사를 하면서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고, 특히 폐를 앓는 청년과 그의 어머니의 모습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젊은 아들은 줄곧 종잇조각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으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는 어머니의 슬픔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어머니는 드디어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될 시간이 온 것을 알자, 아들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코를 훌쩍거리면서 소리내어 울었다. 양 같은 눈을 가진 소녀는(네플류도프 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으므로) 흐느껴 우는 어머니 앞에 서서 무슨 말로 달랬다. 파란 색안경을 쓴 노인은 선 채로 딸의 손을 잡고 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 다. 젊은 연인들은 일어선 채 손을 마주잡고 아무 말도 없이 서로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 다. "저 사람들만이 즐거워 보이는군요." 네플류도프의 옆에 서서, 그와 마찬가지로 이별을 고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던 짧은 재킷을 입은 청년이 연인들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네플류도프와 청년의 시선을 느끼자, 두 연인들은-방수복 재킷을 입은 젊은이와 금발의 귀여운 처녀-붙잡은 손을 내밀기도 하고 뒤로 돌리기도 하며 웃으면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 했다. "오늘 밤에 이 감옥에서 결혼하고 남자를 따라 시베리아로 간답니다."하고 젊은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징역수입니다. 그들은 즐거워 보이지만 저 소리를 들으니 무척 괴롭군요." 재킷을 입은 청년은 폐를 앓는 청년의 어머니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이렇게 덧붙였다. "자 여러분, 어서 어서! 엄격한 조치를 취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소장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자, 어서요!" 그는 힘없이 우유부단하게 말했다. "왜들 이러십니까? 벌써 시간이 지난 지 오랩니다. 이러면 곤란해요. 마지막으로 말합니다."하고 그는 메릴랜드제 담 배에 불을 붙였다껐다 하면서 힘없이 말했다. 그들 간수들이 저지르고 있는 악행에 대한 아무런 책임과 감정도 없이 죄수들을 괴롭히는 것이 허용되고 있는 이론이 그토록 교묘하게 행해지고 오래도록 익숙해 있다고는 하지만, 소장은 자기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슬픔을 빚어 낸 장본인의 한 사람이라 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선지 그는 더욱 괴로워 보였다. 드디어 죄수들과 면회자들은 헤어지기 시작했다. 죄수들은 안쪽 문으로, 면회자들은 바깥 쪽 문으로 향했다. 방수복 재킷의 남자도, 폐를 앓는 청년도, 흐트러진 검은 머리의 남자도, 감옥에서 낳은 아이를 거느린 마리야 파블로브나도 모두 나가 버렸다. 면회자들도 방을 나가기 시작했다. 파란 색안경을 쓴 노인은 무거운 걸음걸이로 터벅터벅 걸어나갔고 네플류도프도 그 뒤를 따라나갔다. "정말 놀라운 규칙입니다." 수다스러운 청년이 네플류도프와 같이 층계를 내려가면서 중 단되었던 이야기를 다시 계속했다. "그래도 다행히 이 곳 소장은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어서 그다지 규칙을 따지질 않는군요. 무엇이건 실컷 이야기를 하고 나면 속이 확 풀리니까요." "다른 감오겡는 이런 면회조차도 없나요?" "그럼요. 절대로 이런 것은 없어요. 한 사람씩, 그것도 철망을 사이에 두고서야 만날 수 있을 정도랍니다." 네플류도프가 메드인체프(수다스러운 청년은 이렇게 자기 소개를 했다.)와 이야기하면서 현관에 내려서자, 소장이 피로에 가득 찬 얼굴로 걸어왔다. "마슬로바를 면회하시려거든 내일 다시 와 주십시오." 소장은 네플류도프에게 친절을 베 풀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하고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메니쇼프의 억울한 고생은 참으로 무서운 것 같았다. 육체적인 고통은 차치하고라도 이유 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는 사람들의 잔인한 짓들을 봄으로써 그가 품을 것이 틀림없는 선과 신에 대한 의혹과 불신의 마음이 더 무서웠다. 그 외에도 서류에 제대로 기입되어 있지 않 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모욕과 고통을 주는 것 또한 무서 운 일이었다. 자기 동포를 괴롭히는 것을 직업으로 삼으면서도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믿고 있는, 양심이 마비된 간수들도 무서운 존재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늙어빠지고 몸이 쇠약한 소장이 자기와 자기 애들과도 같은 사람들인 어머니와 아들을, 아버지와 딸을 떼어 놓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이다. '이것은 다 무엇 때문인가?' 네플류도프는 감옥에서 나올 적마다 예외 없이 찾아오는 정 신적인 것에서 육체적인 것으로 변해 가는 구토감을 오늘은 유독 심하게 느끼면서 이렇게 자문해 보았다. 그러나 결코 대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56 이튿날 네플류도프는 변호사를 찾아가서 메니쇼프 모자 사건을 이야기하고 역시 그 변호 를 맡아 줄 것을 부탁했다. 변호사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일단 조사해 보고 난 뒤, 만일 네플류도프가 말한 것이 사실임이 증명되면 무보수로 그 변호를 맡겠노라고 선뜻 나섰다. 네플류도프는 또 사소한 부조의로 130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 고, 이것은 누구의 책임이며, 누구의 죄냐고 다그쳐 물었다. 변호사는 분명하게 정확한 대답 을 하려는지 잠시 침묵했다. "누구의 잘못이냐고요? 아무도 죄짓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검사에게 물 으면 지사의 과실이라고 할 것이고, 지사에게 물으면 검사의 책임이라고 말할 것이 뻔합니 다. 결국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난 지금부터 곧장 마슬레니코프에게 가서 얘기하겠습니다." "글쎄요, 소용 없을 것입니다." 변호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그자는 당신의 친척도 친구도 아니겠죠? 이렇게 말해서 안 됐지만, 그자는 멍텅구리인데다가 교활한 작자입니다." 네플류도프는 마슬레니코프가 변호사에 대해서 말한 것을 생각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 고 인사를 한 뒤 마슬레니코프 집으로 마차를 몰았다. 네플류도프는 마슬레니코프에게 두 가지 일을 부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마슬로바를 감옥 병원에 옮겨 줄 것과 여권 이 없다고 해서 아무 죄도 없이 수감되어 있는 130명을 방면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자기가 존경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무슨 부탁을 해야 하는 것인 만큼 비위에 거슬리긴 했으나 목적 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것이 유일한 수단이었으므로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마슬레니코프의 집 부근에 이르렀을 때, 네플류도프는 현관의 마차를 대는 곳에 여러 대 의 승용 마차-지붕 없는 사륜 마차, 포장 마차, 2인용 경미차-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자, 마 침 오늘은 마슬레니코프의 부인이 손님을 청하는 날이며 자기도 또한 초대받은 일이 생각났 다. 네플류도프가 그 집에 이르렀을 때, 한 대의 포장 마차가 현관 옆에 서 있었고, 꽃모양 의 모표가 붙은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른 하인이 문턱에서 긴 치맛자락을 치켜들고 단화 를 신은 검은 스타킹의 가느다란 발목을 드러내 놓고 있는 부인을 마차에 올려 주고 있었 다. 네플류도프는 서 있는 마차들 중에서 무이 닫혀진 코르차긴 일가의 포장 마차를 발견했 다. 흰 머리에 혈색이 좋은 마부가 낯익은 네플류도프에게 모자를 벗고 정중하고도 공손하 게 인사를 했다. 네플류도프가 마슬레니코프가 어디에 있으냐고 채 묻기도 전에, 그 자신이 직접 층계 첫 단계에서 층계 맨 아래에까지 배웅하게 되어 있는 대단히 귀한 손님을 배웅하 면서 마슬레니코프가 양탄자가 깔려 있는 층계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 귀중한 손님은 군부 인사는 층계를 내려오면서 이 곳 도시에 설치될 고아원의 기금 모금을 위한 제비뽑기에 대 한 이야기를 프랑스 말로 떠들어대며, 그 일은 귀부인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는 의견을 늘어놓았다. "부인들에게는 재미나고, 돈도 모아들이고, 일석이조입니다." "마음껏 재밀 보라죠, 그러면 하느님도 축복해 주실 겁니다...... 어, 네플류도프, 웬일인가! 오랜만일세"하고 그 손님이 네플류도프에게 인사를 했다. "부인한테 가서 인사나 하게. 코르 차긴 영양도 와 있으니까. 그리고 나디네 부크스헤브덴 영양도. 시중의 미인들이 몽땅 모였 지." 화려한 금줄에 정복을 한 하인이 입혀 주는 외투 밑으로 그 군인다운 어깨를 약간 치 켜들고 말했다. "자, 그럼 잘 있게나!" 그는 다시 한 번 마슬레니코프와 악수했다. "자, 2층으로 가세. 잘 와 줬어." 마슬레니코프는 네플류도프의 팔을 붙들고, 비대한 몸집 에도 불구하고 그를 재빨리 층계 위로 끌어올리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마슬레니코프가 날 듯이 즐거워하는 까닭은 귀한 손님들의 방문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 다. 그 까닭은 조금 전에 왔던 귀한 손님이 호의를 보여 분 때문도 있었다. 황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근위 연대에서 근무했으므로 마슬레니코프도 이젠 황족과의 접촉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단계에 있을 텐데도, 속물 근성이란 것은 그 이름을 대하는 일이 반복될수록 더욱 비굴해질 뿐이어서, 마슬레니코프는 오늘처럼 높은 분으로부터 이런 호의를 받게 되면 일종 의 환희를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그 환희라 마치 주인이 길들인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고 토닥토닥 두드려 주고 귓등을 긁어 줄 때 강아지들이 느끼는 그런 환희와도 같았다. 그러면 강아지는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고, 몸을 움츠리고, 비비 꼬고, 귀를 비벼대며, 미친 듯이 빙 글빙글 돌게 마련이다. 마슬레니코프는 능히 이런 짓을 할 만한 자였다. 그는 네플류도프의 심각한 표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가 말하는 것도 듣지 않으면서 정신을 딴 데다 팔며 객실 로 끌고 들어갔다. 네플류도프는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 들어가싿.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세. 그저 무엇이든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마슬레니코프는 네플류도프와 함께 객실로 들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플류도프 공작께서 오셨다고 마님 께 알리게." 그가 걸어가면서 하인에게 일렀다. 하인은 잰걸음으로 앞서서 걸어갔다. "뭐든 지 자네 말대로 할 테니, 우선 아내를 만나 주게나. 요전번에는 자네를 그냥 보겠다고 아주 혼이 났다네." 그들이 객실로 들어갔을 때는 벌써 하인이 부인에게 알린 뒤인지라 부지사 부인, 즉 장관 부인(그녀는 그렇게 자칭하고 있었다.) 안나 이그나치예브나는 소파 옆에서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보닛 모자들과 그 밖의 사람들의 머리 사이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네플류도프에게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 보였다. 객실의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티테이블 옆에는 귀부인들이 앉아 있었고, 군인과 문관들은 서 있었다. 이들 남녀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이야기 소리 가 끊임없이 터져나왔다. "드디어 와 주셨군요! 우리들을 완전히 잊으셨나 했어요. 저희가 무슨 실례라도 저질렀나 보지요?" 안나 이그나치예브나는 자기와 네플류도프와는 막역한 사이라는 듯한 말투로 말하 면서 네플류도프를 맞았다. "서로 아시던가요? 만나셨던가요? 이부은 베랴프스카야 부인, 그리고 미하일 이바노비치 체르노프 씨. 좀더 다가앉으세요. 미시, 우리들 테이블로 오세요. 차를 드리겠어요...... 그리고 당신도." 그녀는 미시와 이야기하고 있는 장교에게 말을 던졌는데 아마도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어서 이리로 오세요...... 공작님, 차를 드시겠어요?" "아니에요, 절대로, 절대로 찬송할 수 없어요. 그 부인은 진실로 사랑하고 있지 않으니까 요."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요? 그 부인은 고기 만두를 얼마나 사랑했는데요." "언제나 짓궂은 농담만 하시더라!"하고 높은 보닛 모자를 쓰고 비단옷에 금과 보석을 반 짝이면서 어떤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참 좋습니다. 이 웨이퍼 비스킷은 맛이 좋군요. 좀더 주세요." "곧 떠나시나요?" "네,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그래서 온 겁니다." "지금 봄이 한창인데 시골은 얼마나 좋을까요!" 마치 그 옷을 입은 채 막 세상에 태어나기라도 한 듯 구김살 하나 없이 날씬한 몸매에 꼭 맞는 검은 줄무늬 옷을 휘감고 모자를 쓴 미시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는 네 플류도프를 보자 얼굴이 새빨개졌다. "벌써 떠나신 줄로만 알고 있었어요." 미시는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그럴 뻔했습니다만," 그는 대답했다. "일 때문에 떠나지 못했죠. 실은 여기 온 것도 역시 그 일 때문입니다." "어머님한테 들러 주세요. 무척 만나고 싶어하세요." 그녀는 말했으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네플류도프가 눈치챈 듯했기 때문에 얼굴이 더 빨개졌다. "글쎄요, 좀 어렵겠는데요." 네플류도프는 그녀가 얼굴을 붉힌 것을 모른체하면서 침울하 게 대답했다. 미시는 화가 난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어깨를 움츠리더니 우아한 차림을 한 젊은 장교 쪽 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장교는 그녀의 손에서 빈 술잔을 받아들고 군도를 안락 의자에 부딪치면서 사내다운 몸집으로 딴 테이블로 가져갔다. "당신도 고아원에 꼭 기부를 하셔야 해요." "그야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제비를 뽑을 때 까진 내 온 자선심을 한껏 간직해 두겠 습니다. 그 때 가서 내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 드리지요." "어머, 정말이시죠!" 애써 지어 내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초대가 매우 좋은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안나 이그나치예브나는 무척 기뻐했다. "감옥 일에 바쁘시다고 미카(그녀의 뚱뚱한 남편 마슬레니코프를 가리킨다.)한테 들었어 요. 저는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아요."하고 그녀는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미카에게는 물론 다른 결점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시다시피 그는 무척 인정이 많아요. 모든 불행한 죄수들 을 자기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있지요. 그는 꼭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니까요. 그의 인 정은 무척......" 그녀는 남편의 명령으로 죄수들이 고생한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남편이 인정 많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를 몰라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는 곧 미소를 지으면서 때마침 방으로 들어온 연보랏빛 리본을 단 주름살이 많은 늙은 여자에게 몸을 돌렸다. 네플류도프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필요한 말만 적당히 한 다음, 일어서서 마슬 레니코프에게로 걸어갔다. "그럼 귀찮더라도 내 말을 좀 들어 주겠나?" "아 참! 무슨 이야기지? 이리 오게." 그들은 일본식으로 꾸민 조그마한 방으로 들어가서 창가에 앉았다. 57 "자, 무슨 이야긴지 어디 해보게. 담배 피우겠나? 잠깐만 기다리게. 재투성이가 되면 안 되니까."하고 그는 재떨이를 가져왔다. "자, 무슨 이야기지?" "자네한테 두 가지 청이 있네." "아, 그래!" 마슬레니코프의 얼굴은 어둡고 침울해 보였다. 주인이 귓등을 긁어 줄 때의 흥분했던 강 아지의 그런 모습은 말끔히 사라졌다. 객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말소리였다. "절 대로, 절대로 믿지 않아요."하는 여자의 프랑스 말 목소리와 그 반대편에서 '보론초바 백작 부인과 빅토르 아프락신'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무엇인지 지껄여 대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한쪽에서는 웃음소리가 범벅이 되어 들려왔다. 마슬레니코프는 객실에서 일어나 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며 네플류도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또 그 여자 때문에 왔는데."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응, 죄 없이 판결을 받았다는 여자 말이지? 알고 있어. 잘 알고 있어." "그 여자를 교도소 병원 근무로 옮겨 주었으면 해서 말이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더 군." 마슬레니코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생각에 잠겼다. "글세, 어떨지?"하고 그는 말했다. "어쨌든 이야기해 보고, 결과는 내일 전보로 알려 주겠 네." "병원에 환자가 많아서 보조 간호사들이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그래 그래. 어쨌든 결과를 알려 주겠네." "부탁하네."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객실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기분 좋게 터뜨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또 빅토르가 나섰 군." 빙그레 웃으면서 마슬레니코프가 말했다. "저 친구는 흥이 나면 참 재미있는 말을 하거 든." "그리고 또 한 가지,"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지금 감옥에는 여행권의 기한이 지났다 는 이유만으로 1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는데, 벌써 한 달이나 됐다더군." 그리고 그는 그들이 수감된 이유를 설명했다. "자네는 어떻게 그 일을 알았나?"하고 마슬레니코프가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갑자기 불 안과 불만의 기색이 떠올랐다. "어느 죄수한테 갔을 때, 그들이 복도에서 나를 둘러싸고 호소하더군." "어느 죄수한테 갔었는데?" "죄 없이 수감된 농부였네. 나는 그에게 변호사를 대 주었지.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닐세. 대체 그들은 아무 죄도 없는데 말이야, 단지 여권의 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도 수감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건 검사가 한 일이야." 화가 난 듯이 그는 네플류도프의 말을 가로챘다. "이것이 바로 자네가 말하는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이라는 걸세. 검사란 가끔 감옥을 방문하고 죄수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아닌가를 살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카드 놀이만 하고 앉았다네." "그럼 자네로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말인가?" 네플류도프는 지사가 반드시 검사의 탓으로 돌릴 것이라던 변호사의 말을 상기하면서 우 울한 낯으로 물었다. "아니, 어떻게 해보지. 곧 조사해 보도록 하겠네." "저분에게는 오히려 더 좋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그분은 수난자가 되니까요." 객실로부터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마슬레니코프의 대답은 말뿐지 속으로는 자기가 한 말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 그런 말투였다. "그렇다면 더욱 좋습니다. 그럼 난 이걸 갖겠습니다." 이번에는 남자의 농담 소리가 방 다 른 구석에서 들려오고 곧이어 분명히 무엇인가 안 주겠고 버티는 여자의 농담 섞인 웃음소 리가 들려왔다. "안 돼요. 안 된대두요. 절대로 안 돼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럼 모든 일은 내가 해보겠네." 마슬레니코프는 터키석의 반지를 낀 하얀 손으로 담뱃 불을 끄면서 이렇게 되뇌었다. "자, 부인들 쪽으로 가세." "참, 그리고 또 하나." 네플류도프는 객실로 들어가는 문가에서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어제 감옥에서 태형을 가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인가?" 마슬레니코프는 얼굴을 붉혔다. "아니, 자네 그런 말까지 하긴가! 여보게, 이러면 절대로 감옥에 들여 보낼 수 없겠네. 모 든 문제에 마구 개입하려 드는 말일세. 자, 가세. 안나가 부르고 있으니." 그는 네플류도프의 팔을 잡고 귀빈들의 방문을 받았을 때의 흥분을 되살리면서 말을 했지만 그 흥분은 이 시각 부턴 기쁨에 넘치는 흥분이 아니라 다만 불안이 깃들인 것이 되고 말았다. 네플류도프는 그에게서 팔을 빼고는 아무에게도 인사 한 마디 하지 않고, 말없이 어두운 낯으로 객실과 무도실을 지나 마침 달려나오는 하인과 부딪치면서 현관을 지나 밖으로 나왔 다. "그분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하고 부인이 남편에게 물었다. "그게 프랑스식이라는 거죠." 누군가 말했다. "그게 프랑스식이라고요? 그건 줄루(아프리카의 야만족)식이에요." "그렇지만 그분은 항상 그러시는걸요. 뭐."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도 있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도 있어서 지껄여 대는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일동은 네플류도프의 에피소드들 이 날 파티의 최고의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마슬레니코프를 방문한 이튿날 네플류도프는 마슬레니코프루부터 문장이 들어 있는 번들 번들한 두꺼운 종이에다 멋진 필체로 마슬로바를 감방 병원 근무로 옮기도록 의삭에게 써 보냈으니까, 자네의 희망은 실현될 것이라는 뜻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 말미에, '친애하는 옛 벗 마슬레니코프'하는 글이 쓰여 있고, 그 밑에는 놀라운 만큼 커다랗고 뚜렷한 사인이 있었다. "미친 놈!"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벗'이라는 말 속에 서 마슬레니코프가 관대한 자비심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이려 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 다. 즉, 도덕적으로 가장 더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자 기를 훌륭한 인물로 자부하면서 스스로 네플류도프의 벗이라고 칭하는 뻔뻔스러움을, 그다 지 자랑으로 삼지 않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하는 의도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58 이 세상에서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미신의 하나는 인간은 저마다 일정한 성격을 가지고 있 다는 것이다. 즉, 선한 자, 악한 자, 영리한 자, 어리석은 자, 근면한 자, 태만한 자 등등의 사람이 있다는 것...그러나 사실 인간이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다만 우리는 어떤 한 사 람에 관해서, 나쁜 점보다 좋은 점이 많다든가, 어리석을 때보다 영리할 때가 더 많다든가, 태만할 때보다 근면할 때가 더 많다든가, 또는 그 반대로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 리는 인간을 언제나, 저 사람은 선한 자 영리한 자이며, 이 사람은 악한 자 어리석은 자이 다, 라는 식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것은 그릇된 짓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강과도 같은 것 이어서, 물은 어느 강에서든 어디로 흘러가든 역시 같은 물이요, 또 강에서 좁은 곳도 있거 니와 빠른 곳도 있고, 넓은 곳도 있거니와 고요한 곳도 있고, 맑은 곳도 있거니와 흐린 곳도 있고, 찬 곳도 있거니와 따뜻한 곳도 있는 법이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 속에 인간으로서 온갖 성질의 싹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성질이 나타 나고 다른 경우에는 또 나른 성질이 나타난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지만, 가끔 전혀 다른 성 질이 나타나곤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경우가 몹시 심한 사람이 있다. 그의 내부에 있 어서의 이러한 변화는 육체적인 원인과 정신적인 원인에서 온 것이었다. 지금도 내부에서는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재판이 끝나고 카추샤와 처음으로 만난 뒤에 느꼈던 갱생의 승리와 환희의 감정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최근에 만난 뒤부터는 그녀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만 일었다. 그는 결 코 그녀를 버리지 않겠다, 그녀만 원한다면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자기의 각오를 절대로 변 경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고 괴로운 일이었다. 마슬레니코프를 방문한 이튿날, 네플류도프는 카추샤를 만나기 위하여 감옥을 향해 마차 를 달렸다. 소장은 면회를 허가했지만, 면회 장소는 사무실도 아니요 변호사 대기실도 아닌 여죄수 면회실이었다. 소장은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전보다는 네플류도프에 대해서 더욱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분명히 마슬레니코프와의 대화가, 감옥에서 네플류도프에 대하여 엄중히 경 계하라는 명령으로 나타난 모양이었다. "면회는 하셔도 좋습니다만,"하고 그는 말했다. "다만 돈만은 전에 제가 부탁드린 대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그리고 그녀를 병원으로 옮기는 것은 부지사 각하 말씀대로 할 수 있으며, 의사의 동의도 얻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마다하면서 '옴쟁이들을 간호하기는 싫다.' 고 합니다. 아무튼 전부 그 모양들입니다, 공작님." 이렇게 그는 덧붙였다. 네플류도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만나게 해 달라는 부탁만 했다. 소장은 간수를 보냈 다. 네플류도프는 그를 따라서 텅 빈 여죄수 면회실로 들어갔다. 마슬로바는 벌써 거기에 와 있다가, 겁먹은 듯이 수줍어하며 철망 저쪽에서 조용히 나타났다. 그녀는 네플류도프에게 다 가오더니 시선을 피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용서해 주세요,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그저께는 너무 실례되는 말씀을 했어요." "나더러 용서하라니..."하고 네플류도프는 말을 꺼냈다. "그렇지만, 어쨌든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이렇게 그녀는 덧붙였다. 그 때 그를 무섭 게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사팔눈에는 긴장된, 원한에 찬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어째서 내버려 두라는 거요?" "어째서고 뭐고 그저..." "어째서?" 그녀는 또다시 적의에 찬(그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튼," 그녀는 말했다. "저를 내버려 두세요. 진정이에요. 어떻게도 할 수 없어요. 이런 일도 다 그만둬 주세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정말 그 래요. 나 같은 인간은 목이라도 매어 죽어버리는 게 나을 거예요." 네플류도프는 그녀가 그렇게 거절하는 것을 자기를 미워하고 용서할 수 없는 원한 때문이 라고 생각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을 짐짓 거절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이 네플류 도프의 마음에 뭉쳐 있던 일체의 의혹을 쫓아버리고, 다시금 이전의 진지한 환희의 감동적 인 상태로 되돌려 준 것이었다. "카추샤, 내가 전에 말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하고 결혼해 줘요. 만일 싫다고 한다면, 당신의 마음이 돌아설 때까지 전처럼 따라다니고, 당신이 어디로 가든 지 따라가겠소." "마음대로 하세요. 더 말하고 싶지 않아요." 다시 그녀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는 말할 기력도 없어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는 일단 시골로 갔다가 페테르부르크로 가겠소."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는 말했 다. "당신의, 아니 우리들의 사건에 대해서 힘써 볼 생각이오. 반드시 판결은 취소될 거요." "취소되지 않아도 상관 없어요. 이번 일이 아니라도 다른 죄를 짓고 있으니까요."하고 그 녀는 말했다. 그 때 그는, 솟구치는 눈물을 참기 위해서 그녀가 몹시 애쓰고 있는 것을 보았 다. "그래, 메니쇼프를 만나셨어요?" 그녀는 동요된 마음을 감추려는 듯이 갑자기 이렇게 물 었다. "그 사람들이 무죄라는 게 사실이죠?"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정말 좋은 할머니예요." 그는 메니쇼프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다 하고, 무슨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들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병원의 일이지만," 그녀는 갑자기 사팔눈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가겠어요. 그리고 술도 다신 안 마시겠어요." 네플류도프는 잠자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녀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야." 그는 간신히 이 말만 하고 그녀와 헤어졌다. '그래, 그렇다. 그녀는 딴사람이 되었다.' 여태까지의 모든 의혹 끝에 오는, 전혀 새롭고 일찍이 맛보지 못한 새로운 감정, 사랑보다 강한 것은 없다는 절대성을 느끼면서 네플류도 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면회를 마치고 악취가 물씬 풍기는 감방으로 돌아오자, 마슬로바는 겉옷을 벗고 양손을 무릎 속위에 얹은 채 나무 침대틀에 앉아 있었다. 감방에는 젖먹이 어린애를 거느린 폐병쟁 이 블라디미르 현의 여자와 메니쇼프 노파, 그리고 두 아이가 딸린 건널목지기 여자밖에 없 었다. 교회 부집사의 딸은 어제 정신병자라는 진단을 받고 병원으로 끌려갔다. 다른 여자들 은 모두 빨래하러 가고 없었다. 그리고 노파는 자기 잠자리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아이들은 복도에서 놀고 있었고, 그 쪽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두 팔에 어린아이를 안은 블라디미르 현의 여자와, 쉴 새 없이 손가락을 눌리면서 양말을 뜨고 있던 건널목지기 여자가 카추샤 곁에 가까이 왔다. "그래, 만나고 왔수?" 그들은 물었다. 마슬로바는 높은 침대에 걸터앉아 마루까지 닿지 않는 다리를 흔들흔들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우는 거야?" 건널목지기가 말했다. "절대로 낙심해선 안 돼요. 자, 카추샤! 자!"하고 그녀는 잽싸게 손가락을 눌리면서 말했다. 마슬로바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들 빨래하러 갔어. 오늘은 자선 차입이 한아름이래. 잔뜩 가져왔나봐." 블라디미르 현 의 여자가 말했다. "피나시카!"하고 건널목지기가 문 쪽을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이 장난꾸러기가 어딜 갔을 까!"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뜨개바늘을 하나 빼서 실뭉치와 양말에 꽂고 복도로 나갔다. 이 때 복도에서 시끄러운 발소리와 여자들의 말소리가 들리더니 맨발에 죄수화를 신은 다 른 감방의 여죄수들이 들어왔다. 모두 흰 롤빵을 한 개씩 들고 있었으나, 개중에는 두 개를 들고 있는 여자도 있었다. 페도샤가 곧 마슬로바 곁으로 다가왔다. "왜 그래?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어?" 페도샤는 맑고 푸른 눈으로 정답게 마슬로바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이건 차 마실 때 받은 거야."하고 그녀는 흰빵을 선반 위에 올려놓으면 서 덧붙였다. "그분이 결혼을 망설이기라도 하든?" 코라블료바가 물었다. "아냐, 그렇지는 않지만, 내가 싫은걸."하고 마슬로바가 말했다. "그래서 싫다고 했어." "바보 같으니!" 코라블료바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같이 살 수 없을 텐데 무엇 때문에 결혼을 해?" 페도샤가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 너의 남편도 따라다니고 있잖아?" 건널목지기가 말했다. "그야, 우린 정식 부부니깐 그렇지 뭐."하고 페도샤가 말했다. "하지만 같이 살 수 없는데 무엇 때문에 굳이 정식 결혼을 하겠어?" "이 바보야! 무엇 때문이냐고? 그 사람하고 결혼만 하면, 등 따습고 배부르지 않아!" "그이는 내가 어디를 가든 따라오겠다고 말했어."하고 마슬로바는 말했다. "그런데 오고 싶으면 와도 좋고, 또 그러고 싶지 않으면 안 와도 좋지뭐. 나는 부탁하지는 않았어. 그분은 지금부터 페트르부르크로 가서 석방 운동을 하겠다는 거야. 그 곳의 장관들이 모두 친척이 라나."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나는 그 사람 필요 없어." "그야 뻔하잖아!" 코라블료바는 자루를 챙기고 있었으므로 아마 딴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갑자기 맞장구를 쳤다. "어때, 술이나 한잔 마실까?" "난, 안 마시겠어."하고 마슬로바는 대답했다. "당신들끼리나 실컷 마셔요." . 제 2 부 1 2주일 후에 대심원의 심리가 시작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네플류도프는 그때까지 페데르부 르크로 가서, 만일 대심원에서 잘 안 될 경우에는 상소장을 작성해 준 변호사와 권고대로 황제한테 청원해 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변호사가 말한 바와 같이 상소의 이유가 매우 허 술해서 기각되는 경우 그만한 각오도 미리 해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6월 초순 마슬로바를 포함한 징역수의 이송단이 출발하게 될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네플류도프는 이 미 굳게 결심한 대로 마슬로바의 뒤를 쫓아 시베리아까지 따라갈 채비를 서두르기 위해서 는, 먼저 영지의 여러 마을을 두루 살펴 정리를 해두어야 했다. 제일 먼저 네플류도프는 쿠즈민스코예 마을로 출발했다. 그 곳은 제일 가까운 데 있었을 뿐더러, 흑토질의 광대한 영지로서 그의 집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그는 이 곳에서 소 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미 성인이 된 후에도 두 번이나 이 곳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한 번은 그의 어머니의 부탁으로 독일 사람인 관리인을 데리고 가서 전체 재정 상 태를 조사한 일이 있었으므로 벌써부터 이 영지의 사정과, 농민과 관리 사무소와의 관계, 즉 지주와의 관계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농민과 지주와의 관계는 좋게 말해서 농민은 관리 사 무소에 완전히 사활 문제를 맡기고 있었으며, 솔직히 말하면 농민들은 관리 사무소에 노예 처럼 예속되어 있었다. 그것도 1861년에 폐지된 농노제와 같은 사실상의 예속, 즉 일정한 주 인에 대한 예속이 아니라, 토지를 갖지 않은 농부나 토지가 적은 농부들 전체의 일반적인 최초의 대지주에 대한 예속이었다. 때로는 그들 농민이 생활하고 있는 부근의 대지주들에게 만 단독으로 예속되는 일도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것을 알고 있었는데, 사실 모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수입은 그 노 예 제도 위에 존재하고 있고, 그 자신도 그러한 제도에 협력하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정하지 못하고 잔혹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것 은, 대학 시절에 헨리 조지의 학설을 신봉하고 선전했으며, 그 학설을 근거로 하여 토지 사 유가 50년전의 농노 소유와도 같은 현대의 큰 죄악이라고 생각하여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해 준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그가 군인 생활을 하면서 1년에 2만 루블이나 되는 큰 돈을 낭비하는 습관이 생기면서부터 이러한 인식은 그의 생활 을 위해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이 되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돈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물어 보지도 않았고, 또 그런 일 은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과 유산 상속, 그에 따르는 자기 의 재산, 즉 토지를 관리할 필요성에 부딪치게 되자 다시금 토지 사유에 대한 자기의 태도 를 결정해야 된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네플류도프에게는 현존하는 질서를 변혁할 만한 힘도 없었고, 영지를 관리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고 하면서, 영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며, 거기서 돈을 받으면서 어느 정도 평안한 마음으로 생활하 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베리아로 떠날 일이 눈앞에 박두하고 감옥 세계를 상대 로 하는 복잡하고 곤란한 관계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또 이러한 문제를 해 결하기 위해서는 돈과 사회적인 지위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토지 문제를 그전대로 그냥 방치해 둘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손해를 각오하고 그것을 개혁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토지를 스스로 경작하지는 않고, 싼값으로 농민들에게 빌려 주어서 농민들이 지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들에게 주기로 결심했다. 네플류도프는 여러 번 지 주와 농노 소유자와의 입장을 비교해서 소작인에게 경작시키는 대신 토지를 농민들에게 빌 려 주는 것은, 농노 소유자가 각자의 농노를 부역에서 연공제로 바꾸는 거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근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해결을 위한 일보 진전임에는 틀림없었다. 그것은 폭력이라는 거친 형식에서 비교적 온건한 형식으로 전 환시키고자 하는 기도였다. 그래서 그도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네플류도프는 정오가 다 되어서 쿠즈민스코예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자기 생활의 모든 면을 간소화하려는 생각에서 전보도 치지 않고 역에 내려 마차를 불렀다. 마부는 허리의 아 래쪽 주름이 잡힌 곳에 낮게 띠를 맨 몸집이 작은 젊은 사내로서 소매가 없는 남경 무명 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마부석에 비스듬히 걸터앉아서 신사 손님과 열심히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기진 맥진하게 혹사당한 절름발이 헌 수레말 과, 수척하고 숨을 헐떡이는 곁다리 말은 그들이 즐길 수 있는 보조로 늘쩡늘쩡 달릴 수 있 었다. 마부는 자기 마차에 탄 손님이 이 고장의 '지주'인 줄도 모르고 쿠즈민스코예의 관리 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네플류도프는 짐짓 모르는 체했다. "그 독일인은 꽤나 멋을 부리지요." 하고 도시에서도 살아 보았고, 소설깨나 읽었다는 마 부는 말했다. 그는 손님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반쯤 돌리고 마부석에 앉아서는, 기다란 채찍 을 위아래로 연방 바꾸어 쥐면서 자기가 밤색 말을 사서, 마누라와 함께 마구 쏘다니고 있 습죠. 대단합니다!"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크리스마스 같은 때에는 으리으리한 집에 크리 스마스트리까지 장식하고, 나는 그럴 때 자주 손님을 태워다 드렸습니다만, 전깃불도 환하게 밝혀져 있어요. 어디 이런 시골 구석에서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까? 얼마나 돈을 해먹었는 지....... 물론 댁에선 믿지 않으실 테지만, 어쨌든 만사가 자기 멋대로라니까요. 또 이번엔 좋 은 땅을 샀다고 소문이 자자해요." 네플류도프는 독일인 관리인이 자기 영지를 어떻게 관리하든지, 또 어떻게 그것을 이용하 든지 자기는 전혀 그것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허리가 긴 마부의 이야기는 불 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름다운 날씨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은 구름이 가끔 태양 을 가리는 모양이며, 여기저기서 농부들이 귀리밭을 갈며 보습을 따라 다니는 들 풍경이며, 종달새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있는 파릇파릇한 채소밭이며, 철늦은 참나무를 빼 놓고는 벌써 신록에 덮인 숲이며, 소와 말이 점점이 얼룩져 보이는 목장이며, 밭갈이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어른거리는 경작지를 즐거운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나, 이따금 불쾌한 느낌이 스쳐가곤 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 자기를 불쾌하게 하는가를 자문해 보았다. 그 때마다 그 독일인 관리인이 자기의 쿠즈민스코예의 토지를 자기 토지나 되는 것처럼 마음대로 관리 취 급하고 있다는 마부의 말이 떠오르곤 했다. 그러나 한번 쿠즈민스코예에 도착하여 일에 착수하게 되자, 네플류도프는 곧 그러한 불쾌 한 감정을 말씀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사무소의 장부를 점검하고, 농부들의 얼마 되지 않는 땅이 지주의 땅으로 둘러싸여 있어 서 매우 유리하다고 숨김없이 떠들어 대는 관리인의 설명을 듣자, 네플류도프는 마침내 자 기가 직접 토지를 경작하지 않고 전부 농부들에게 빌려 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사무 소의 장부를 검사하고 관리인의 말을 듣고 난 그는 기름진 땅의 3분의 2는 종전과 같이 완 비된 농구를 사용해서 일꾼들의 손으로 경작되고, 나머지 3분의 1은 한 정보당 5루블씩의 임금을 주고 농민들에게 경작시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5루블의 임금 때문에 농민들 은 한 정보의 토지를 세 번씩 갈고 다듬고 하여 씨를 뿌리고 거둬들여서 다발을 지어 창고 로 운반해야 했다. 요약해서, 자유 계약의 머슴일지라도 적어도 한 정보당 10루블에 해당될 만한 노동을 해야만 했다. 농부들은 또 사무소에서 지급되는 모든 필수품에 대해서도 엄청 나게 비싼 값을 노동으로 갚아야만 했다. 그들은 목초나 숲속의 장작, 감자나 일을 얻는 데 도 노동을 해서 그 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모두가 사무소에 빚을 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예를 들어서 농민들에게 일정한 임대료로 대여하는 경지 이외의 토지를, 보통 한 정보당 5푼 이자 정도의 이익으로 계산한다면, 약 4배의 수입을 짜내고 있는 셈이 되는 것 이다. 네플류도프는 전부터 이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이번에 새삼스럽게 다시 듣고 보 니, 자기를 비롯해서 자기와 같은 위치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러한 불합리한 사실 에 대해서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는가 하는데 대해서 그저 놀랄 뿐이었다. 농민들에게 토지 를 양도해 주면 농기구는 소용 없게 될 것이고, 그걸 팔려 해도 원가의 4분의 1도 받지 못 할 것이며, 또한 살 사람도 없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농민들은 땅을 못 쓰게 만들것이니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라는 관리인의 말은, 다만 농민들에게 토지를 빌려 줌으로써 자기 수입 의 대부분을 잃을망정 자기 행위가 올바른 것이라는 네플류도프의 신념을 더욱 굳게 해줄 따름이었다. 그는 이 문제를 이번 여행중에 완전히 처리해 버리리라 마음먹었다. 이미 파종 을 끝낸 곡식의 수확과 매각될 농기구며 불필요한 건물의 매각은 모두 그가 떠난 후에 관리 인에게 그 처리를 맡기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이튿날 자기의 계획을 농민들에게 발표하고, 임대 토지에 대한 대부 조건을 비롯한 그 밖의 것을 조정하기 위해서 쿠즈민스코예의 영지 를 둘러싸고 있는 세 마을의 농부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해달라고 관리인에게 부탁했다. 관리인의 주장에 끝까지 굴하지 않고 농민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확고 부동한 각오가 되어 있다는 의식에 만족감을 느끼며 네플류도프는 사무소를 나섰다. 그리고 당면 문제를 심사 숙고하면서 집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손질도 하지 못하고 내버려 둔 꽃밭(올해는 꽃 밭이 관리인의 집 앞에만 가꾸어져 있었다.), 민들레가 무성하게 자란 테니스 코트, 보리수 가 서 있는 가로수길, 이 길은 그가 항상 시가를 피우며 거닐던 곳이었으며, 3년전에는 한동 안 어머니 집에 손님으로 와 있던 아름다운 키리모바가 그에게 매혹적인 눈길을 던지던 곳 이기도 했다. 네플류도프는 내일 농민들 앞에서 연설한 이야기의 요점을 대충 생각하고 나서 관리인이 있는 데로 갔다. 차를 마시면서 네플류도프는 다시금 자기의 토지 경작을 완전히 폐지해 버 릴 방법을 상의한 후, 안정된 마음으로 이제부터 자기가 농민들에게 베풀려는 행동에 만족 하면서 자기를 위해 마련된 안채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객실은 항상 손님을 맞기 위해 준 비되어 있는 큰 저택에 있는 방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이 방에는 베니스의 풍경화와, 두 창문 사이에 거울이 걸려 있었다. 그리 고 깨끗한 침대와 유리병, 성냥, 소등기 등이 놓여 있는 조그만 테이블이 있었다. 거울 앞의 큰 테이블 위에는 그의 트렁크가 열린채 놓여 있었고, 트렁크 속에는 여행용 화장 케이스와 책들이 삐죽삐죽 나와 있었다. 그 책들은 러시아어로 된 <형법 연구 시론>과, 같은 제목의 독일어와 영어로 된 책들이었다. 그는 이 책들을 이번 여행중에 틈틈이 읽으려고 생각했는 데, 지금은 도무지 그럴 겨를이 없었다. 내일은 되도록 일찍부터 농부들과 상담하기 위해서 잠잘 채비를 했다. 방 한구석에는 자개가 박힌 낡은 마호가니 안락 의자가 놓여 있었다. 전에 어머니 침실에 놓여 있던 그 안락 의자를 보자, 그의 마음속에는 예기치 못했던 감정이 복받쳐올랐다. 그는 머지않아 헐리게 될 이 집과 황폐해질 정원, 벌목되고 말 삼림, 그리고 자기 스스로가 마련 한 것은 아니지만, 굉장한 공을 들여서 유지해 온 가축 우리와 마구간과 농구를 넣어 두던 헛간, 그리고 기계와 소와 말 등 모든 것들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이런 것들을 내동댕이쳐 버리는 것은 손쉬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지금은 그런 것들만 아니라 토지며 앞으로 필요하게 될 수입의 반감이 아까워졌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를 뒷받 침이나 해주는듯이 토지를 농민들에게 대여하여 자기의 재산을 없애 버릴 필요가 어디 있는 가, 그것은 좀 경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나는 토지를 소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토지를 가지지 않고서는 이만한 집과 농장을 꾸려 나갈 수가 없다. 나는 곧 시베리아 가야 하니까, 집도 토지도 필요 없다.'하고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우선, 너는 시베리아에서 한평생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결혼을 하면 아이도 생 길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자신이 영지를 물려받은 것처럼 네 아이들에게도 물려주어야 한 다. 그것이 토지에 대한 의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남에게 양도하든지 때려부수든지 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지만,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 낸다는 것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다. 무엇 보다 먼저 너는 자신의 생활을 충분히 생각해 보고, 자기 자신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너는 마음속에 이것을 굳게 결심하고 있는가? 그리고 또한 네가 하고 있는 행위는 정말로 자기 양심의 소리에 따른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인가? 다시 말해 남 들에게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닌가?' 네플류도프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물 어보았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자기 결심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많은 의문이 생겨서 해결하기가 더욱 난처해졌다. 그는 이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 보려고 깨끗한 잠자리에 드러누워 지금 혼란에 빠져 있는 모 든 문제가 내일 아침에는 산뜻한 머리로 해결될 것을 기대하며 잠을 청했다. 그러나 잠자리 에 든 그는 오랫동안 뒤척거렸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부터 신선한 공기와 달빛과 함께 개구리 울음소리가 정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리고, 창문 바로 밑의 활짝 핀 라일락꽃 가지 속에서는 드높이 울러 대는 밤꾀꼬리의 울음소리도 뒤섞여 들려왔다. 개구리와 꾀꼬리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네플류도프는 문득 소장 딸의 피아노 소리를 생 각했다. 소장을 생각하자 마슬로바를 생각하게 되고, '이제 그런 것 그만두세요.' 하고 그녀 가 말했을 때, 마치 개구리의 울음소리와도 같이 입술이 바르르 떨리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 자 독일인 관리인이 개구리가 우는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를 불러 세우려 했으나 그 는 이미 아래로 내려가 버렸을 뿐만 아니라, 어느 새 그는 마슬로바로 변해서 '나는 징역 수고 당신은 공작님이신걸요.' 하고 네플류도프를 힐책하기 시작했다. '아냐, 이런 일에 굽히지 않는다.' 하고 생각하며 그는 눈을 떴다. 그리고 자문해 보았 다. '어떻게 된 일인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잘한 일이냐, 아니면 그릇된 일이냐?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상관없다. 어서 잠을 자야지!' 그러는 사이에 그도 곧 관리인과 마슬로 바가 내려간 곳으로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그는 어느새 깊은 잠 속으로 빠 져 들어갔다. 2 이튿날 아침 네플류도프는 9시에 잠을 깼다. 주인의 시중을 들고 있는 젊은 사무원은 그 가 일어난 기척을 알아채고, 이제껏 그렇게 해본 적이 없을만큼 번쩍번쩍하게 닦아 놓은 구 두와 차고 깨끗한 샘물을 떠가지고 들어와서 농부들이 벌써 모이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네플류도프는 정신을 차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지를 농부들에게 분배하여 자기 재 산을 없애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던 어제의 마음은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그는 간밤에 후 회하던 일을 되새겨 보니 퍽 놀라웠다. 지금 눈앞에 닥쳐오고 있는 일에 기쁨을 느끼고, 무 심결에 자랑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창 밖으로는 민들레가 무성한 테스트 코트가 보였는데, 그 곳에는 관리인의 지시대로 농부들이 모여 있었다. 어젯밤 개구리가 요란하게 울어 대더니 날씨는 잔뜩 흐려 있었다. 아침부터 바람 한 점 없고 가랑비가 소리 없이 내려 나뭇가지와 잎사귀와 풀잎에 빗방울이 대롱대롱 맺혀 있었 다. 창으로부터 신록의 향기와 더불어 비를 재촉하는 듯한 향긋한 흙냄새가 풍겨오고 있었 다. 네플류도프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테니스 코트에 모여드는 농부들을 여러 번 창 밖으로 내다보았다. 농부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어서는 둥글게 서서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면서 서로 모자를 벗어 인사를 주고받았다. 큰 단추가 달리고 짧고 푸른 깃을 세운 신사복을 입은 육 중하고 체격이 좋은 관리인이 네플류도프에게 와서, 농부들이 모두 모이기는 했으나 조금 더 기다리게 해도 상관없으니 미리 마련해 놓은 커리를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아니, 그리로 먼저 가서 곧 그들을 만납시다."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러나 막상 농 부들 앞에 나가서 이야기할 생각을 하니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그는 농부들이 꿈에도 그려보지 못한 그들의 희망을 실현시켜 주려고 했다. 싼값으로 그 들에게 땅을 빌려 주려고 하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는 왠지 자꾸 부끄러웠다. 네플류도프는 농부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까 이 갔을 때, 모자를 벗은 연한 황갈색의 머리, 곱슬머리, 대머리, 백발의 머리들을 보고, 어 리둥절해져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랑비가 계속해서 내려 빗방울이 농부들 의 머리카락이며, 턱수염이며, 긴 외투의 보풀 위에 방울방울 맺혔다. 농부들은 주인을 바라 보고 그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네플류도프는 몹시 당황했기 때문에 얼른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 같은 불안한 침묵을 깨뜨린 것은 침착하고 자신만만한 독일인 관리인이었 다. 그는 러시아 농민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를 정확하고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기름기가 흐르고 단단한 체력을 하고 있는 관리인과 네플류도프의 모습은 농부 들의 파리하고 주름 투성이의 얼굴과, 그들의 외투 밖으로 삐죽 나온 말라빠진 어깨뼈와 좋 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번에 공작님께서는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토지를 나누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당신네들은 그럴 만한 가치조차 없지만."하고 관리인이 말했다. "왜 우리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거요. 바실리 카롤로비치? 우리가 당신을 위해서 일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우린 돌아가신 마님한테 큰 은혜를 입었습죠. 마님의 명복을 빌고 있습니다! 젊은 공작님께서도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니 고맙습니다." 수다스러운 붉은 머리의 농부가 말했다. "그래서 오늘 당신들을 모이게 한 것입니다. 당신들이 원한다면, 토지를 전부 당신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플류도프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농부들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동안 침묵 을 지킬 뿐이었다. "어떻게 토지를 나누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하고 소매 없는 긴 조끼를 걸친 중년의 농부가 네플류도프에게 물었다. "싼값으로 토지를 쓸 수 있도록 빌려 주려는 겁니다."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하고 노인 한 사람이 말했다. "빌려 주신다는데 뭘 그래." "당연한 일이지. 우린 땅 없이는 살 수가 없으니까!" "지주님에게는 그 편이 안심일 겁니다." 여러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어 댔다. "단지 땅값만 거둬들이면 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귀찮은 일이 많습지요." "귀찮은 일은 언제나 당신들 때문에 일어나."하고 독일인이 말했다. "당신들이 일을 잘해 주고 질서 있게 규칙을 지켜 주기만 한다면야......" "말이야 쉽지요. 바실리 카롤로비치." 하고 날카로운 코에 말라빠진 작은 노인이 말했다. "왜 밀밭에다 말을 들여 놓았느냐고 야단이지만, 누가 그런 짓을 일부러 하겠습니까? 아침 부터 저녁까지 1년을 하루같이 낫자루나 무슨 연장을 휘두르며 일하고 나면 밤에 말을 감시 할 땐 그만 곯아떨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말이 당신네 밀밭에 들어갔다고 해서 마구 들볶으니 말이에요." "그러니까 규칙을 지키란 말이요." "규칙! 규칙! 말로는 쉽지만, 우리 힘엔 겨운 일입니다." 하고 털북숭이의, 머리카락이 검 고 별로 나이가 많지 않은 키가 큰 농부가 반박했다. "그러니까 울타리를 하라고 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재목을 주십시오." 하고 몸집이 조그마한 초라한 모습의 사내가 끼여들었다. "나는 여름에 울타리를 하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당신은 3개월 동안이나 나를 감옥에 가두 어서 이의 밥으로 만들지 않았어요? 울타리를 만들려면 이런 꼴이 된다니까, 글세!" "저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네플류도프가 관리인에게 물었다. "저자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도둑놈입니다." 하고 관리인이 독일어로 대답했다. "매년 숲속 에서 잡혀오는 녀석입니다. 너는 남의 재산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부터 배워야 해." 관 리인이 말했다. "그래, 우리가 당신을 소홀히 대했다는 말이오?" 하고 한 노인이 말했다. "우리는 당신 손 에 꽉 쥐여 있으니 당신을 소중히 모시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당신이라면 우리들을 엮 어서 밧줄이라도 만들 수 있는 신분이 아니냐고요." "무슨 소리야! 당신들이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당신들을 괴롭힌단 말이야. 제발 당신들이나 나를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뭐라고요? 괴롭히지 않았다고요? 작년 여름, 나를 때리지 않았소? 그래도 나는 아무 대 꾸도 하지 못했어요. 돈을 가진 사람하고는 겨룰 자격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규칙대로 하란 말이야." 이렇게 말다툼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다투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다투고 있는지, 또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뚜렷이 말할 수 있는 것은, 한편에는 공포에 억눌린 원한이 있고, 또 한편에는 우월감과 권력이라는 의식이 있다는 것 뿐이었다. 네플류도프는 그 같은 입씨름을 듣고 있는 것이 괴로워서, 본론으로 말머리를 돌 려 보려고 했다. 그래서 땅값과 지불 기한을 결정하려고 했다. "대체 토지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러분들은 내가 말한 대로 하시겠습니까? 그 리고 토지를 전부 빌려 드린다면 땅값은 얼마로 하면 좋겠습니까?" "지주님의 땅이니 가격도 정하시지요." 네플류도프는 가격을 말했다. 그러자 네플류도프가 부른 가격은 이 고장에서 부르는 가격 보다 훨씬 싼값이었지만, 농부들은 늘 하는 식으로 비싸다고 값을 깎기 시작했다. 네플류도 프는 자기의 제안을 반갑게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했었지만, 농부들에게서는 조금도 그런 기 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네플류도프는 다음의 이유에서 그의 제안이 그들에게 유리 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누가 토지를 빌리느냐, 다시 말하면 전체의 농부의 이 름으로 빌리느냐, 그렇잖으면 조합을 만들어서 빌리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지불 능력이 없는 사람은 제외하자는 농부들과 제외당하는 농부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관리인의 중재로 땅값과 지불 기간이 결정되었다. 농부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언덕길을 내려가 마을로 돌아갔다. 네플류도프는 관리인과 같이 계약서 의 문안을 만들기 위해 사무소로 갔다. 모든 것이 네플류도프가 원하고 기대했던 대로 되었다. 농부들은 그 지방일대의 땅값보다 3할이나 싼 값으로 토지를 빌려 쓰게 되었다. 영지로부터 나올 수입은 반감되었으나, 그래도 네플류도프에게는 충분했다. 특히 산림을 판 대금과 농기구를 팔아 들어올 금액을 가산하면 오히려 남아돌아갈 정도였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잘되어 가는데도 왠지 네플류도프는 그 무언가가 양심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농부들 중에는 고맙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 분은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으며, 뭔가 좀더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결국 그는 많은 재산상의 손해를 보면서도 농부들이 기대했던 것을 채워 주지 못한 셈이 되었다. 이튿날, 가계약서에 서명한 네플류도프는 마을의 대표로 뽑혀 온 노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무엇인가 불쾌한 마을으로, 전날 정거장에서 타고 올 때 마부한테서 들은 관리인의 잔뜩 뽐 낸 삼두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뭔가 미완성으로 떠나는 불유쾌한 감정으로 정거장으로 마 차를 몰았다.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선 채 불만족스러워 머리를 흔드는 농부들에게 작별 인 사를 하고 출발했다. 네플류도프 자신도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어떤 점이 만족스럽지 못한지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으나, 그는 시종 뭔가 서글프고 수치스러운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3 네플류도프는 쿠즈민스코예를 떠나 고모한테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영지로 향했다. 그 곳 은 카추샤를 처음으로 만났던 곳이었다. 그는 이 영지에서도 쿠즈민스코예에서 한 것처럼 토지 문제를 처리하려고 생각했다. 그밖에 카추샤의 일과, 카추샤와 자기와의 사이에서 태어 난 갓난애의 일, 그 갓난애가 죽었다는 것은 사실인지,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죽었는지, 가능한한 확실히 알고 싶었다. 그는 아침 일찍이 파노보 마을에 도착했는데, 집안에 마차를 들여놓았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모든 건물, 특히 안채의 황폐하고 퇴 락한 모습이었다. 전에는 파랗게 빛이 나던 지붕이 오랫동안 칠을 하지 않아서인지 뻘겋게 녹이 슬고, 아마 폭풍 때문인지 여러 장이 뒤집혀져 있었다. 안채를 둘러싼 얄팍한 판자는 군데군데 누군가의 손으로 뜯겨져 있었고, 녹슨 못이 구부러져 있었다. 입구의 계단은 두 고 다-앞문과, 그리고 그에게 특별한 추억을 남겨 준 뒷문도-모두 허물어져 나무 뼈대만 남아 있었다. 몇 개의 창문은 유리 대신 얄팍한 판자로 가려져 있었고, 관리인이 살고 있던 별채 와 부엌과 마구간도 모두 낡아빠져서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다만 정원의 풀만은 무성하게 자라 때마침 꽃이 만발하였고, 울타리 저쪽 활짝 핀 벚꽃과 사과, 살구 등이 마치 흰구름처 럼 보였다. 라일락 산울타리에는 12년 전 네플류도프가 열여섯 살이 된 카추샤와 그 그늘 밑에서 술래잡기를 하다가 구덩이에 빠져 라일락 나무숲뒤의 쐐기풀에 찔렸을 때와 똑같이 라일락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소피야이바노브나 고모가 안채 옆에 심은 낙엽송은 그 당시 말뚝만하던 것이 지금은 대들보만하게 자라 있었으며, 황록색의 부드러운 솜털 같은 잎으로 덮여있었다. 냇가에는 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고, 물방앗간이 있는 둑에 이르러서는 요란스 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개울 저쪽 풀밭에서는 마을의 농부들이 키우는 여러 가지 털빛을 한 가축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신학교를 중퇴한 관리인이 미소 띤 얼굴로 뜰에서 네플류도 프를 맞아들였다. 그는 연방 미소를 지으면서 네플류도프를 사무실로 안내했고, 무슨 특별한 일을 약속이라도 하듯이 싱글벙글하면서 칸막이 뒤로 사라졌다. 칸막이 벽 뒤에서 무엇인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조용해졌다. 네플류도프를 역에서 태워다 준 마부가 찻삯을 받아 가지고 딸랑딸랑 방울 소리를 내면서 밖으로 몰고 사라져 버리자 사방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잠시 후 수놓은 속옷을 입고, 술을 너덜너덜하게 늘어뜨린 귀고리를 단 맨 발의 계집애가 창가로 뛰어가자, 뒤이어 농부 한 사람이 두툼한 장화의 징소리를 요란스럽 게 내며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갔다. 네플류도프는 창가에 앉아서 정원을 내다보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조그만 쌍여닫이 창 문으로 신선한 봄의 향기와 일구어 놓은 땅의 흙냄새가 들어왔고, 산들바람이 땀 맺힌 그의 이마에 늘어진 머리카락과 칼자국투성이의 창턱 위에 놓여 있는 종이를 하늘하늘 날려 주었 다. 냇가에서는 아낙네들의 빨래 방망이 소리가 들려왔다가는 햇빛에 반짝이는 맑은 강물 위로 퍼져나갔다. 방앗간에서는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박자를 맞추며 들려왔다. 파리 한 마리가 놀란 듯 귓 전을 윙하고 스치며 지나갔다. 그러자 불현 듯 자기가 젊고 순수했던 시절인 그 옛날 생각이 밀려왔다. 그 때도 역시 아 낙네들의 방망이 소리가 들려왔었다. 봄바람이 땀에 젖은 그의 이마에 산들산들 불어왔고, 칼자국이 나 있는 창턱 위에 놓여 있는 종이가 팔락이고 있었다. 역시 파리가 귓전을 스쳐 갔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그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18세의 소년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지만 그 때의 그 젊고 순순하고 한없이 위대한 미래의 가능성에 넘쳐 있었던 시절로 되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그와 동시에 자기가 지금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 각되었으며, 그 옛날의 일들은 모두 실재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자, 무섭도록 서글퍼졌다. "언제 식사를 하기겠습니까?"하고 관리인이 미소 지으면서 물었다. "언제든지 좋소. 그러나 별로 시장하지 않으니, 마을이나 한 바퀴 돌아보겠소." "그럼 먼저 안채로 들어가시는게 좋지 않을까요? 깨끗이 정리해 놓았습니다. 밖은 좀 뭣 합니다만...... 쭉 한번 둘러보시는게 어떨지......." "아니, 그것은 나중에 보기로 하지. 그보다 한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이 마을 에 마트료나 하리나(카추샤의 이모)라는 여자가 있소?" "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밀주를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저는 그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꼬리를 잡아서 잔소리를 해주곤 합니다만, 고소를 하기에는 불쌍합니 다. 늙은 몸에 손자들을 키우고 있으니까요."하고 관리인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 다. 그것은 주인의 호감을 사려는 것과, 네플류도프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모든 문제를 이해 하고 있다는 확신을 나타내는 미소였다. "그 노파는 어디서 살고 있는지, 가서 잠깐 만나 보았으면 좋겠는데." "마을 제일 끝에서 세 번째 집입니다. 왼편에 벽돌집이 있고, 그 뒤쪽에 노파가 사는 오두 막집이 있습니다. 그보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하고 관리인은 기쁜 듯이 벙글거리며 말했다. "아니, 고맙소. 나 혼자도 갈 수 있고. 그보다 당신은 농부들을 한 곳에 모이도록 연락해 주시오. 난 토지 문제로 그들에게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될일이 있으니까."하고 네플류도프가 일렀다. 그는 이 곳에서도 쿠즈민스코예 마을에서처럼 가능하다면 오늘 밤 안으로 농부들과 의 이야기를 끝맺을 작정이었다. 4 대문을 나서자 네플류도프는 탄탄히 다져진 오솔길에서 알록달록한 무늬의 앞치마를 두르 고 귀에는 장식술 귀고리를 달고, 질경이와 백산다가 우거진 목장 뜰을 가로질러 맨발로 재 빠르게 걸어오는, 다리가 굵은 시골 처녀와 마주쳤다. 집으로 돌아오고 있던 그녀는 오른손 에 빨간 볏이 흔들리는 수탉은 가만히 품에 안겨 있는 듯했으나, 이따금 눈을 두리번거리며 시커먼 한쪽 발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처녀의 앞치마를 발톱으로 박박 긁고 있었다. 시골 처녀는 주인 앞으로 다가오자, 빠른 걸음을 보통 걸음으로 늦추어 가다가 주인과 마주치자 우뚝 멈추어 서서 고개를 뒤로 번쩍 쳐들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는, 네플류도프가 옆으로 지 나가자, 수탉을 안은 채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우물 쪽으로 내려가는 도중, 이번에는 더럽 고 다 떨어진 옷을 걸치고 구부정한 등에다 물이 철철 넘치는 물통을 메고 오는 노파와 부 딪쳤다. 노파는 네플류도프를 보자 물통을 가만히 내려놓고 아까 처녀와 똑같이 고개를 바 로 쳐들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우물을 지나자 바로 마을이 나타났다. 맑게 갠 무더운 날씨였다. 아침 10시인데도 날씨는 후끈후끈 찌기 시작했고,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서는 이따금씩 태양을 가리곤 했다. 코를 찌르는 듯한 거름 냄새가 마을에서 풍겨왔다. 그 냄새는 반짝반짝 빛나는 산길을 줄지어 올 라가고 있는 짐마차에서 풍겨오는 것 같았으나, 그보다는 주로 네플류도프가 지나가는 집집 의 안마당에 파헤쳐 놓은 거름 더미에서 열어 놓은 문을 통해 풍겨오는 냄새가 더 지독하고 역했다. 거름이 묻은 바지와 셔츠를 입은 맨발의 농부들은 짐마차 뒤를 따라 산길을 걸어 올라가면서, 키가 크고 뚱뚱한 신사가 햇빛에 번쩍이는 비단 리본이 달린 회색 모자를 쓰고,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반짝이는 은손잡이가 달린 지팡이로 가볍게 땅을 짚으면서 마을 길 쪽으로 걸어 올라가는 모습을 자꾸 뒤돌아보았다. 들에서 돌아오는 농부들은 빈 마차를 달리며 흔들거리는 마부석에서 모자를 벗고는, 깜짝 놀란 얼굴로 자기들이 다니는 길에 나타난 이 낯선 사람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여자들은 현 관에 서거나 문 밖까지 뛰어나와서, 서로 눈짓 손짓해 가며 그를 전송했다. 네플류도프는 네 번째 집을 지나가려고 할 때 요란스럽게 달려오는 짐마차 때문에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그 짐마차 위에는 거름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사람들이 앉게 편평하게 멍석이 깔려 있었다.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맨발로 마차 뒤를 따라 가고 있었다. 짚신을 신은 젊은 농부가 성큼성큼 발을 내디디며 말을 문 밖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다리가 길고 털이 푸르스름한 망아지가 문 밖으로 쫓겨나오다가 네플류도프를 보고 는 질겁을 해서 마차 옆으로 비켜서다가 다리가 바퀴에 부딪치자, 깜짝 놀라서는 때마침 문 에서 무거운 짐을 끙끙거리며 끌고 나오는 어미말 앞으로 달려갔다. 어미말은 근심스러운 듯이 히힝 소리를 냈다. 그 뒤를 따라서 줄무늬 바지에 더러운 셔츠를 걸친, 역시 어깨뼈가 불거져 나오고 깡 말라 원기가 왕성해 보이는 노인이 맨발로 말을 몰고 나왔다. 말들이 잿빛을 띤 말똥이 흩어져 있는 길로 나가자, 노인은 문이 있는 데까지 되돌아와서 네플류도프에게 인사를 했다. "나리께선 우리 여지주님 조카님이신가요?" "네, 조카올시다." "잘 오셨습니다. 그러시다면 저희들을 만나러 오셨습니까?"하고 노인은 수다스럽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고. 그런데 어떻게들 지내고 있지요?" 네플류도프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이 렇게 되물었다. "어떻게들 지내다뇨! 우리들의 생활이란 말씀이 아니죠." 수다스러운 노인은 노래라도 부 르듯 흥겹게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어째서 그렇게 형편없단 말입니까?" 네플류도프는 문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이것도 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말씀이 아닙니다." 네플류도프의 뒤를 따라서 거름이 깨끗이 치워져 땅바닥이 드러나 있는 처마 밑으로 발길을 옮기며 노인 이 대답했다. 네플류도프는 노인을 따라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바로 저기 보시다시피 제 식구는 모두 12명이나 됩니다." 노인은 두 여자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여자들은 수건을 늘어뜨리고, 땀에 젖은 치맛자라을 걷어올리며, 장딴지를 절 반이나 거름에 묻힌 채, 쇠스랑을 손에 들고 거름더미 속에 서 있었다. "매달 적어도 스물대여섯 관의 보리를 사야 되는데 어디서 그 돈을 구해 오겠습니까?" "당신네 밭에서 나오는 것으로 모자란단 말이오?" "우리 밭이라고요?"하고 비웃기나 하듯이 되물었다. "우리 밭에서는 세 사람분밖에 나오 지 않습니다. 작년에는 여덟 단밖에 추수를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크리스마스까지도 먹지 못했지요." "그럼, 어떻게 살아가시오?" "그래서 할 수 없이 자식 한 놈을 머슴으로 보내고, 나리 사무실에서 빚을 냈습지요. 그러 나 그것도 대제일 전에 다 써버렸기 때문에 지대도 물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지대는 얼마나 되오?" "저희는 넉 달마다 17루블씩 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 내살림이지 만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 봐도 좋겠소?"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묻고 앞마당을 지나 말끔히 쓸어 넣은 자리에서, 아직 손도 대지 않 은 채로 쇠스랑으로 흐트려 놓은, 지독한 냄새가 풍기는 싯누런 거름더미 쪽으로 걸어갔다. "이르다뿐인가요! 어서 들어가십시오."하고 노인은 대답하면서, 맨발의 발가락 사이로 거 름이 비죽비죽 새어나오는 발을 재빨리 옮겼다. 그는 네플류도프의 앞장을 서더니 그를 위 해 문을 열어 주었다. 여자들은 머리에 쓰고 있는 수건을 매만지고 옷의 깃을 바로잡으면서 자기네 집으로 들어오는, 소매에 황금빛 커프스를 단 말쑥한 신사를 호기심 어린 두려운 눈 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집 안에서 속옷만 걸친 두 계집아이가 뛰어나왔다. 네플류도프는 모자를 벗어들고 허리를 굽혀 좁고 더러운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는 시큼한 음식 냄새가 풍겼으며, 베틀 두 대 가 방 안 가득 놓여 있었다. 난롯가에는 소매를 걷어올린 비쩍 마르고 햇볕에 까맣게 탄 팔 을 드러낸 노파가 서 있었다. "나리께서 오셨소. 귀하신 손님이오."하고 노인이 말했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노파는 걷어올렸던 소매를 내리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어떻게들 살고 계신지 보고 싶어서 왔소."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살고 있지요. 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해서 언제 누가 깔려 죽을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저 늙은이는 걱정할 것 없다고 하지요. 임금님처럼 태평하게 살 고 있답니다."하고 성질이 있어 보이는 노파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마침 지금 점심을 차리고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먹이려고요." "평소 무엇을 먹습니까?" "무엇을 먹느냐교요? 먹는 거야 고급이지요. 먼저 빵에다 크바스(라이보리와 엿기름으로 만든 음료수)를, 또 다르게는 크바스에다 빵을 먹습니다." 노파는 반쯤 썩은 이빨을 드러내 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 농담이 아닙니다. 당신네들이 먹는 것을 좀 보여 주구려." "먹는 것을요?" 웃으면서 노인이 말했다. "우리가 먹는 것이란 뻔한걸요. 보여드려요, 할 멈." 노파는 머리를 흔들었다. "우리 농부들이 먹는 것을 보시고 싶다니, 나리도 참 자상하시군 요. 꼭 눈으로 보셔야 되겠다니…… 방금 말씀드린 대로 빵과 크바스, 거기에 수프입니다. 간밤에 한 여편네가 엿기름 찌꺼기를 가져왔기에, 그것으로 수프를 만들었지요. 그리고 감자 도 있고요." "그게 전부란 말이오?" "더 없느냐고요? 그저 우유를 넣어서 희멀겋게 만드는 정도랍니다." 노파는 웃으면서 문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으며,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 있었다. 사내아이들, 계집아이들, 그리고 어린애를 안은 여자들이 서로 떼밀며, 농부의 음식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리를 바라보고 있 었다. 노파는 자신 있게 나리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나리, 우리들의 생활이란 말이 아닙죠." 노인은 말했다. "어딜 들어오려고 하는 게 야!"하고 문가에 모여 선 사람들에게 노인이 소리를 꽥 질렀다. "그럼 잘들 있어요." 네플류도프는 아지 못할 수치심과 어색한 기분을 느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 같은 사람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노인은 말했다. 입구 쪽에 서 있던 사람들이 네플류도프에게 길을 비켜 주기 위해 서로 밀치고 당기고 했 다. 네플류도프는 한길로 나와서 언덕길로 올라갔다. 그의 뒤를 따라 맨발릐 두 아이가 뛰어 왔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아이는 애초에는 하얀 것이었으나 지금은 새까맣게 때가 묻은 셔츠를 입고 있었으며, 다른 한 아이는 색이 바랜 분홍빛 셔츠를 입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들을 돌아다보았다. "이번엔 어디로 가세요?" 흰 셔츠를 입은 애가 물었다. "마트료나 하리나한테 가겠다. 너희들 그 사람을 아니?" 진홍빛 셔츠를 입은 조그만 사내애가 무엇이 우스운지 킬킬거렸으며, 나이를 먹은 소년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어느 마트료나 말이에요? 할머니 말이에요?" "응 그래, 할머니다." "아!" 사내아이는 목소리를 길게 뺐다. "그럼, 세묘니하 할머니군요. 그 할머닌 마을 끝에 살아요. 우리들이 모셔다 드릴게요. 얘, 페드카, 우리 같이 모셔다 드리자." "말은 어떡하고?" "염려 마, 괜찮대도." 페드카가 동의했으므로 그들은 같이 윗마을 쪽으로 걸어오라갔다. 5 네플류도프는 어른들을 상대하기보다 어린이들을 상대하는 쪽이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 래서 그는 그들과 같이 걸어가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홍빛 셔츠를 입은 조그만 놈도 웃음을 멈추고, 큰 놈과 같이 영리하고 또렷또렷하게 이 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이 누구냐?" 네플류도프는 애들에게 물었다. "누가 제일 가난하냐고요? 마하일네가 가난하고, 시몬 마카로프도 가난하지요. 그렇지만 마르파는 그보다 더 가난해요." "아니야, 아니샤가 더 가난해. 아니샤는 소도 없는데다 빌어먹고 다니잖아."하고 조그만 페드카가 말했다. "소는 없지만, 아니샤는 단 세 식구 아냐? 그렇지만 마르파는 다섯 식구나 된단 말야."하 고 큰 놈이 반박했다. "그렇지만 아니샤는 과부야."하고 진홍빛 셔츠는 아니샤 편을 고집했다. "넌 아니샤가 과부라고 하지만, 마르파도 과부나 다름없단 말이야."하고 큰 놈이 말을 이 었다. "아저씨가 집에 없으니 마찬가지지 뭐야." "아저씨는 어디로 갔지?"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감옥에서 이를 기르고 있대요."하고 큰 놈이 어른들이 말하듯이 대답했다. "작년 여름에 지주네 숲에서 작은 자작나무 두 그루를 베었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어 요." 진홍빛 셔츠의 조그만 놈이 재빨리 설명했다. "벌써 6개월이나 됐어요. 그래서 마르파 는 동냥을 다녀요. 집에는 어린애가 셋이나 있고 더구나 몸을 못 쓰는 할머니까지 있어요." 소년은 자세하게 덧붙여 말했다. "그 여자는 어디 살지?"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바로 저 집이에요."하고 소년은 집 한 채를 가리켰다. 그 오두막집 바로 앞에 있는 , 네 플류도프가 걸어가고 있는 샛길에 머리가 누르스름한 조그만 어린애가 게처럼 굽어진 다리 를 하고 비틀비틀 간신히 서 있었다. "바시카, 어디로 도망가는 거냐, 이 개구쟁이야?" 그 때 마치 재라도 뒤집어쓴 듯한 칙칙 한 잿빛 속옷을 입은 여자가 집에서 뛰어나와 네플류도프앞으로 달려와서, 어린애를 들쳐안 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네플류도프가 어린애에게 무슨 못할 짓이라도 하지 않을까 염려하 는 듯한 그런 태도였다. 이 여자가 바로 네플류도프의 산에서 자작나무를 도벌한 죄로 감옥에 갇혔다는 사나이의 아내였다. "그런데, 마트료나도 역시 가난하냐?" 그들 셋이 마트료나 집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네플 류도프가 이렇게 물었다. "가난한 게 뭐예요, 술을 팔고 있는데." 진홍빛 셔츠를 입은 여윈 소년이 거침없이 말했 다. 마트료나의 오두막집에 닿자, 네플류도프는 두 어린애를 돌려 보내고, 출입구를 거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마트료나 할머니가 살고 있는 오두막집은 두 칸 반도 채 못 되는 넓이였 으므로, 난로 뒤에 놓여 있는 침대에서는 어른이 제대로 발을 뻗고 잘 수도 없을 정도였다. '바로 이 침대 위에서'하고 그는 생각했다. '카추샤가 애를 낳고 병이 났겠구나.' 방 안은 베틀이 거의 방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나직한 문살에 머리를 부딪치며 들어갔을 때, 노파는 큰손녀와 함께 날실을 가지런히 하고 있던 참이었다. 다른 두 손자들 은 네플류도프의 뒤를 따라 들어와서 문기둥을 붙잡고 서 있었다. "누굴 찾으시죠?"하고 노파가 화난 얼굴로 물었다. 베틀이 시원치 않아 짜증이 나 있었으 며, 더욱이 밀주를 팔고 있기 때문에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주입니다만, 잠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노파는 찬찬히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잠시 말이 없더니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아이고 주인 나리셨군요! 바보같이 알아뵙지도 못하고, 그저 지나는 사람인 줄만 알았습 죠." 노파는 짐짓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아무도 없는 데서 조용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하고 네플류도프는 열린 문 쪽을 바라 보며 말했다. 그 곳에는 많은 어린애들이 모여 있었으며, 그 뒤로 말라빠진 여인네가 넝마조 각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병으로 인해 얼굴빛이 좋지 못한, 연방 빙글거리고만 있는 갓난애 를 안고 서 있었다. "뭘 보는 게야! 혼 좀 나봐야 알겠니? 그 몽둥이 좀 이리 가져와!" 하고 노파는 문에 서 있는 애들에게 고함을 쳤다. "문을 닫지 못해! " 어린애들은 겁을 먹고 달아나 버렸다. 갓난애를 안고 있던 아낙네가 문을 닫았다. "난 또 누구시라고. 주인 나리이신걸. 정말 귀하신 손님이군요!"하고 노파는 말했다. "아 유, 이렇게 누추한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자, 여기 걸터앉으 십시오, 이 의자에."하고 그녀는 앞치마로 나무 의자를 훔치면서 말했다. "난 또 어느 놈팡 이가 왔나 했었지요. 우리 생활의 은인이신 나리가 오셨을 줄이야. 제발 용서하십시오. 늙어 서 벌써 눈이 멀었나 봐요." 네플류도프는 앉았다. 노파는 그의 앞에 서서 오른손으로 뺨을 받치고 왼손으로 오른손의 뾰족한 팔꿈치를 쥐면서 노래를 부르듯이 말했다. "그런데 나리도 나이가 드셨군요. 물오른 나무처럼 싱싱하시더니, 지금은 그렇지 못하시니 말이에요. 무슨 걱정이 있으신가 보지요?" "실은 할머니한테 물어 볼 게 있어서 왔는데. 카추샤 마슬로바를 기억하시겠소?" "예카테리나 말씀입니까? 모를 리 있겠습니까, 내 조카딸인걸……. 그야 잊을 수 없지요. 그 애 때문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요. 다 알고 있습니다. 하기야 하느님 앞에 죄 없 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임금님 앞에 송구스럽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젊은 탓이지 요. 누구나 차와 커피를 좋아합니다. 다 젊은 기분으로 저지른 짓이지요. 할 수 없는 일입니 다. 나리는 그 애르 버리셨지만, 백 루블을 주셨으니까 그것으로 할 일을 다 하신 셈입니다. 그러나 그 애의 꼬락서니라니. 미친 짓을 했죠. 내 말만 들었던들 버젓하게 살아갈 수 있었 을 텐데. 그 애는 내 조카딸입니다만, 사실은 미친년이었어요. 그 뒤 내가 좋은 자리에 들여 보내 주었는데, 글세 주인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고 대들지 않았겠어요? 우리 같은 주제 에 감히 주인에게 욕을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쫓겨나고 말았답니다. 그리고 또 산림 감독 의 댁에 들어갔는데, 거기서도 싫다고 나와 버렸어요." "어린아이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여기서 낳았다면서요? 그 애는 어디있소? " "어린 것 말씀입니까? 나리, 그 때 나는 여간 많이 생각하지 않았습죠. 그 애 어미는 산후 가 좋지 않아서 일어나지도 못했지요. 그래서 어린애는 영세를 받게 한 다음 육아원으로 보 냈습니다. 어미가 죽게 되었다고 해도 어디 천사 같은 어린 것을 괴롭힐 수 가 있어야지요. 세상에는 어린애에게 젓을 주지 않아서 굶겨 죽이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어야지요. 힘은 들었지만 육아원으로 보내야 되겠다고 생각하여 그 때 마침 돈도 있 고 해서 데려다 주었지요." "그럼 등록 번호가 있었을 텐데요?" "번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애는 곧 죽어 버렸어요. 그 여자의 말은 도착하자마자 죽 었다더군요." "그 여자라니?" "바로 스코르드뇨예에 살고 있던 여자지요. 그 여자는 그게 직업이었어요. 이름은 말라냐 라고 했는데 지금은 죽고 없습니다. 똑똑한 여자였어요. 잘해 나갔지요. 누가 갓난애를 데려 다 주면 그 애를 받아 가지고는 잘 길렀답니다. 갓난애가 육아원으로 보낼 만한 숫자가 찰 때까지 자기 집에서 길렀지요. 그러는 동안에 세 아이나 네 아이가 모이게 되면 곧 육아원 으로 데리고 갔답니다. 그녀는 둘이서 잘 수 있는 큰 요람을 여기저기에 만들었는데, 그 곳 에 손잡이도 달아놓았습니다. 그 속에다 네 아이를 머리가 서로 부딫치지 않도록, 즉 네 아 이의 발이 한 군데 모이게 뉘었답니다. 이엏게 해서 한꺼번에 네 아이를 돌봐 주었어요. 젓 꼭지만 물려 주면 모두 울지 않고 얌전하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됐소?" "그래서 예카테리나의 애도 그렇게 해서 길렀습죠. 그렇게 이럭저럭 2주일 동안 길렀다는 데, 벌써 그 때부터 그 애가 쇠약해져 갔다는군요." "좋은 애였었나요?"하고 네플류도프는 물었다. "그야 훌륭한 애기였어요. 어디를 가서 찾아봐도 그런 애는 없을 겁니다. 꼭 나리를 닮았 었지요." 노파는 늙은이답게 한쪽 눈을 깜빡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먹는 것이야 뻔하지요. 한 가지만을 먹였으니까요. 하긴 제 배를 앓아서 난 애가 아니니 까 당연하지요. 그 여자는 어쨌든 육아원에 도착할 때까지만 살아 있으면 된다고 말하더군 요. 가까스로 모스크바에 데리고 가자마자 숨졌다니…… 그녀는 빈틈없이 증명서까지 받아 왔더군요. 참 영리한 여자였어요." 네플류도프가 자기 자식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이것뿐이었다. 6 네플류도프는 방문과 현관에 다시 머리를 부딪치며 밖으로 나왔다. 때묻은 흰 셔츠와 진 홍빛 셔츠를 입은 두 아잉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밖에 새 얼굴이 댓 명 끼여 있었다. 젖먹 이를 안은 아낙네도 몇 명 있었는데, 그 중에는 낡아빠진 헝겊으로 모자를 만들어 씌운 핏 기 없는 갓난애를 안은, 앞서 본 그 여자도 끼여 있었다. 아이는 여전히 시들어 보이는 얼굴 에 줄곧 기묘한 미소를 띠면서 구부러진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 어린애가 고통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낙네가 누구냐고 물 어 보았다. "저 여자가 내가 아까 말한 아니샤예요."하고 나이 먹은 사내아이가 대답했다. 네플류도프는 아니샤에게 몸을 돌려 말을 걸었다. "어떻게 살고 있소?" 그는 물었다. "무엇으로 연명하는가 말이오?" "무엇을 먹고 사느냔 말이죠? 빌어먹지요." 아니샤는 이렇게 말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어린애는 애처로워 보이는 가느다란 다리를 움츠리면서 온 얼굴에 미 소를 띠었다. 네플류도프는 지갑을 꺼내 10루블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가 그 곳에서 두 걸음도 옮기기 전에 갓난애를 안은 또 다른 여자가 쫓아왔다. 뒤이어 노파, 그리고 또 다른 여자가 따라왔 다. 모두가 자기들의 가난한 처지를 호소하고 도와 달라고 했다. 네플류도프는 지갑에 있던 잔돈 60루블을 몽땅 털어 주고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집으로, 즉 관리인이 살고 있는 별관으로 돌아왔다. 관리인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네플류도프를 맞아들이면서 오늘 밤 농 부들이 모인다고 보고했다. 네플류도프는 고맙다고 말하고 방에 들어가지 않고 뜰로 나와, 무성한 풀 위에 하얀 사과꽃이 만발한 오솔길을 거닐면서 자기가 방금 목격한 모든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별관 근처는 처음에는 조용했으나, 곧 관리인의 방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 여 자가 서로 상대방의 말을 가로채며 외치는 사이사이에, 미소를 짓고 있는 성싶은 관리인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플류도프는 귀를 기울였다. "내 힘으로는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는데, 왜 남의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까지 빼앗고 야단이에요."하고 독살스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목장에 뛰어들었을 뿐이잖아요."하고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려 달 라니까요. 어째서 소는 굶기고 애들 우유도 못 먹이게 괴롭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으로 갚든지 일을 해서 갚든지 하란 말이야."하고 관리인의 차분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네플류도프는 정원에서 나와 입구의 층계 쪽으로 다가갔다. 그 곳에는 머리칼이 흐트러진 두 여자가 서 있었는데, 한 사람은 해산이 임박한 만삭의 배를 안고 있었다. 입구의 우층계 에는 관리인이 범포로 만든 외투 포켓에 두 손을 찌른 채 서 있었다. 주인을 보자 여자들은 입을 다물고 흘러내린 머릿수건을 매만지고 있었으며, 관리인은 포켓에서 손을 빼고 싱글벙 글 웃고 있었다.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농부들이 일부러 자기들의 송아지뿐만 아니라 어미소까지 지주네 목장으로 들여 보낸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이 여자들의 암소 두 마리가 목장에 들어와 있기 에 붙잡아서 외양간에 가둬 버렸다는 것이었다. 관리인은 소 한 마리에 30코페이카씩의 벌 금을 내든지, 아니면 이틀동안의 노동으로 배상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들 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첫째 자기네 소들은 조금 들어갔을 뿐이고, 둘째 그만한 돈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셋째 일을 하기로 약속할 테니까,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뙤약볕에 처량하게 울고 있는 소만은 빨리 돌려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몇 번씩이나 당신들에게 똑똑히 일러 두지 않았냔 말이야." 벙글거리는 관리인은 마치 네플류도프에게 증인이나 되어 달라는 듯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점심때에 소를 끌 어 낼 때는 자기 가축을 잘 보라고." "잠깐 애를 보러 간 사이에 소들이 나가 버린 거예요." "소를 보는 사람이 그 곁을 떠나는 법이 어디 있어?" "그럼, 어린 것은 누가 젓을 먹이고요? 당신의 젖꼭지라도 물려 주신다면 몰라도요." "그것도 목장을 아주 망쳐 놨다면 몰라도 그저 잠깐 들어갔을 뿐이잖아요."하고 다른 여 자가 말했다. "목장을 망쳐 놓았단 말입니다." 관리인은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단단히 혼내지 않으면 건초는 만져 보지도 못합니다." "그런 죄받을 소리 하지 마세요. 우리 집 소는 한번도 붙들린 일이 없지 않았어요?" 배가 부른 여자가 외쳤다. "그래서 이번에 붙들리지 않았어? 그러니 벌금을 내든지, 일을 하라잖아?" "좋아요. 일을 하겠어요. 그러니 소를 돌려주세요. 소를 굶길 수는 없잖아요." 여자는 독살 스럽게 외쳤다. "그렇잖아도 낮이나 밤이나 쉴 새라곤 없는데 말이야. 시어머니는 앓아 드러 누워 있지, 남편은 집에 붙어 있지 않지, 만사를 혼자 해가야 하니 정말 지쳐 버렸어. 게다 가 관리인은 일을 해서 갚으라고 들볶아 대니!" 네플류도프는 소를 돌려주라고 관리인에게 말하고 혼자서 다시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뜰 로 나갔으나 새삼스레 생각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그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나 명백 했기 때문에 이렇게 일목 요연한 것을 어째서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으며, 자기 자신도 그토록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들은 굶주리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가난에 익숙해져서 거기에 알맞은 생활 태도 에 젖어 버렸다. 어린것들의 죽음과, 여자들의 과중한 노동, 모든 사람, 특히 노인들의 굶주 림 등. 이렇게 농민들은 죽음에 빠져들어가는데, 그들 자신은 그러한 무서운 상태를 알지도 못하고, 그것을 호소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들도 이 같은 상태를 자연스러운 것,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대낮처럼 명백했다. 농민들 자신이 이미 깨닫고 있고 그들의 입으로 말하고 있듯이 그들이 가난한 중요한 원인은, 그들의 호구 지책이 되는 유일한 토지를 지주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에 있었다. 더욱이 대부분의 어 린이와 노인이 죽어 가는 것은 우유가 부족하기 때문이며, 우유가 부족한 것은 가축을 기르 고 곡식이나 건초를 만들어 낼 만한 땅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농 민들이 불행하게 된 모든 원인은, 아니 적어도 그들 불행의 중요하고도 직접적인 원인은 그 들을 먹여 살리는 땅이 그들의 수중에 있지 않고, 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이용해서 이들 농 민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중에 있다는 데에 있었다. 이것 역시 지극히 명백 한 사실이었다. 농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없으면 그들이 목숨을 부지 해 갈 수도 없는 그 토지는, 궁핍으로 쪼들리는 이들 농민들의 손으로 경작되고 있으나, 그 들이 거두어들인 곡물은 지주에 의해 외국으로 팔려가서 지주의 모자나 지팡이나 마차나 청 동 제품 같은 것으로 바꾸어진다. 이 모든 것이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것은 마치 울 안에 갇 힌 말이 발밑의 풀을 다 먹었을 때는, 다른 먹이가 있는 땅으로 자유로이 갈 수 있게 해주 지 않으면, 말은 점점 말라서 굶어 죽는 수밖에 없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절대로 있을 수 없고, 또한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이런 일이 없어지도록, 적어도 자기 자신은 이러한 일에 참여하지 않도록 적당한 방법을 강구하지 않 으면 안 되었다. 나는 반드시 그것을 찾아내겠다고 그는 가까운 곳에 있는 자작나무 길을 거닐면서 생각했다. '우리들은 학회나 정부 기관이나 신문 지상에서 농민들의 빈곤의 원인 이나 생활의 진흥책을 논의해 왔지만, 그들의 생활을 올바르게 진흥시키는 유일한 방법, 즉 그들에게 꼭 있어야 하는 토지를 그들에게서 빼앗는 일을 중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이 없 었다.' 그는 헨리 조지의 근본 이념을 생생하게 상기하고 어째서 그런 것을 잊어버리고 있 었는지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토지는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물이나 공기나 햇빛과 마찬가지로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토지에 대해서, 또 토지가 인간 에게 주는 온갖 이익에 대해서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 그 때 그는 비로소 쿠즈민스코예에서 개혁을 생각했을 때, 왜 자신이 수치심에 사로잡혔 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토지에 대 한 권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에 대해서는 그 권리를 인정하 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러한 권리가 없다고 느끼면서도 일부분을 농민들에게 분배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 이제는 그러한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쿠즈민스코예에서 한 일을 변경하려고 마음먹고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농민들에게 일정한 금액을 정해서 토지를 빌려 주지만, 땅값을 그들의 재산으로 인정하여 그 돈을 세금의 지불이나 마을의 공공 사업에 쓰 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일세 제도는 아니지만, 현재의 상황으로서는 그 제도에 가 장 가까운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토지의 사유권을 포기했다는 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관리인의 무척 신이 나서 그에게 식사를 권했다. 자기 아내가 고깔 귀고 리를 단 계집애의 시중을 받아서 만든 요리가 너무 끓여졌거나 지나치게 구워지지 않았을까 걱정이라도 되는 듯한 얼굴이었다. 식탁은 값싼 식탁보로 덮여 있었으며 냅킨 대신 수놓은 수건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식탁 위에는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낡은 색슨 식의 사기 접시에 감자 수프가 담겨 있었다. 수프 속에는 조금 전까지도 검은 두 다리를 버둥거리던 수탉이 토막토막 잘리고, 또한 잘게 썰려 서 군데군데 털이 붙은 채 들어 있었다. 그 다음에는 역시 닭고기를 털째로 구운 것과, 버터 와 설탕이 듬뿍 든 우유과자가 나왔다. 어는 것이나 맛은 없었지만 네플류도프는 정신없이 후딱 먹어치웠다. 그는 말을에서 돌아올 때의 그 고민을 단숨에 해결해 버린 자기 사상에 완전히 정신이 빠져 있었다. 관리인의 아내는 귀고리를 단 계집애가 접시를 나르고 있는 동안 문에서 목을 쑥 빼고 들 여다보았다. 남편인 관리인은 아내의 솜씨를 은근히 자랑하는 듯 흐뭇한 얼굴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네플류도프는 반강제로 관리인을 앉힌 다음, 자기 생각을 확인하고 싶고 동시에 자기가 몰두하고 있는 일을 누구에겐가 말하고 싶은 심정에서 자기가 농민들에게 토 지를 분배해 줄 계획임을 말하고 그의 의견을 물어 보았다. 관리인은 자기도 벌써부터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오늘 그런 말을 들으니 유쾌하다면서 웃고 있었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네플류도프의 설명이 애매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계획대 로 한다면 네플류도프가 남의 이익을 위해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는 셈이 되겠기 때문이었 다. 사실 이 관리인의 의식 속에는 모든 사람들이 남의 이익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의 이익 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네플류도프가 토지에서 걷히는 전수입을 농 민의 공동 기금으로 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왠지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알았습니다."하고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자금에서 이자를 받으 시겠다는 말씀이지요?" "아니, 그런 게 아니오. 토지라는 것은 개개인의 사유 재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이해 못하겠소?" "그러니까, 토지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여러 사람의 소유가 되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나리에겐 수입이라는 것이 없어지지 않습니까?"하고 관리인은 웃음을 멈추 고 이렇게 물었다. "그렇소. 나는 그것을 포기할 셈이오." 관리인은 한숨을 크게 쉬더니 다시 미소 지었다. 그는 네플류도프가 이성을 잃은 사람으 로 생각되었으며, 이제는 주인의 토지를 포기하려는 계획 속에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해 내려고 했다. 그래서 앞으로 분배될 토지를 자기도 이용할 수 있게 되도록 그 계획을 해석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게 되자 낙심하여 그 계획에 대하여 흥미를 잃게 되었 다. 그는 주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미소 짓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관리인이 자기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자 그를 물러가게 했다. 그러고는 칼자국투성이이고 잉크 자국이 나 있는 책상 앞에 앉아 자기의 계획을 종이에다 쓰기 시작했다. 이제 막 싹터오르는 보리수나무 뒤로 해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으며, 모기가 몰려와 네플 류도프를 쏘기 시작했다. 그가 초안 작성을 끝냈을 때, 마을 쪽으로부터 가축떼들의 울부짖 는 소리와 문을 여닫는 소리, 그리고 오늘밤 모임에 모여드는 농부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 왔다. 네플류도프는 관리인을 불러서 농부들을 사무실까지 불러올 필요가 없으며, 자기가마 을로 나가, 그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관리인이 권하는 차를 급히 들이마시고 네플류도프는 곧 마을로 향했다. 7 촌장 집 안뜰에 모인 농부들은 와글와글 떠들고 있었으나, 네플류도프가 가까이 가자 곧 조용해졌으며, 농부들은 쿠즈민스코예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차례로 모자를 벗기 시작했다. 이 고장의 농부들은 쿠즈민스코예의 농부들보다도 훨씬 더 비참했다. 계집애들과 아낙네들 은 귀고리를 달고 있었고, 남자들은 거의 짚신을 신고 있었으며, 집에서 짠 셔츠와 카프탄 (소매가 길고 띠가 달린 농민 의복)을 입고 있었다. 개중에는 일터에서 그대로 온 듯한, 셔 츠 바람에 맨발인 사람도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용기를 내어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농부들에게 토지를 분배해 줄 계획을 발표했다. 농부들은 말이 없었다. 그들의 얼굴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왜냐하면," 네플류도프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이었다. "토지라는 것은 거기서 일하는 않는 사람이 소유해서는 안 되며, 누구나 그 토지를 이용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 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사실 그래야 합니다."하고 몇몇 농부들이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이어서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은 여러 사람들이 평등히 나누어 갖게 될 것이 며, 따라서 자기 토지를 받아서, 협정되는 지대를 지불하고, 그 지대는 공동 기금으로 납입 하여 그들 자신이 이용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를 칭찬하며 좋아라고 하는 소리가 연방 들려왔다. 그러나 농부들의 정색한 얼굴은 더욱더 엄숙해져 주인을 보고 있던 눈들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마치 너의 교활한 속셈은 다 알고 있었으므로 너 같은 사람에게 속아넘 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렇더라도 우리는 너를 망신 주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네플류도프는 아주 명확하게 얘기했으므로 농부들도 알아들었을 텐데, 그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또한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 이유는 관리인이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 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누구나 인간이란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천성을 지니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주와의 관계는 그들이 몇 대에 걸친 지주에 대한 경 험에 의하여 잘 알고 있었다. 지주라고 하는 것은 항상 농부의 희생으로 하여 자기의 이익 만을 생각하는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주가 그들을 불러 모아서 무슨 새로운 제안을 하 게 되면 이전보다 더 교활한 방법으로 자기들을 속이려고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게 되었 다. "자, 어떻소. 지대는 얼마로 하면 좋겠소?"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어똫게 우리들이 정합니까? 우리는 그런 것은 할 수 없습니다. 토지는 주인님 것이니까 주인님 마음대로입죠."하고 군중 속에서 대답이 들렸다. "아니, 그렇지 않소. 그 돈은 공동 기금으로 당신들 자신이 쓸 것이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공동의 것은 공동의 것이고, 이것은 이것대로 별개의 것입니다." "자, 잘 들어 봐요." 네플류도프를 따라온 관리인이 사정을 설명할 셈으로 미소 지으며 말 했다. "공작님께서는 땅값을 결정해서 당신들에게 토지를 빌려 주시지만, 그 땅값은 또 당신 들의 공동 기금으로 조합에 넣어 주시겠다는 것이오." "그것은 알고 있어요."하고 이가 빠진 노인이 눈을 내리깐 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말하 자면 은행 같은 것이로군요. 기한 내에 지불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건 질색입니다. 그 렇잖아도 죽을 지경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알몸뚱이만 남게 되지요." "그런 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우린 예전 그대로가 좋습니다."하는 불안에 가득 찬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네플류도프가 계약서를 만들어서 쌍방이 서명해야 한다고 하자 그들은 더욱더 기를 쓰며 반대하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에 서명을 합니까? 우리는 이제껏 일을 해온 대로 앞으로도 일 하겠습니다. 도 대체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무식한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할 수 없습니 다. 아직까지 그런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해주세요. 다만 씨앗만 은 별도로 해주시면 좋겠어요."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씨앗을 별도로 해달라는 것은 현재의 제도로는 소작인의 씨앗이 농민의 부담으로 되어 있 었는데, 이것을 지주가 부담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럼 당신네들은 싫단 말이오? 토지가 필요 없다는 말이오?" 네플류도프는 쾌활한 얼굴 에 다 떨어져 너덜거리는 옷을 입은, 맨발의 중년 농부를 향해 물었다. 그 사나이는 마치 상 관의 명령으로 모자를 벗듯이 왼손을 구부리고 자기의 찢어진 모자를 똑바로 들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군대 생활의 최면술에서 덜 깬 듯한 그 농부가 대답했다. "그럼 당신들은 갖고 싶은 토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말이오?" "천만의 말씀입니다." 군인 출신의 이 농부는 다 떨어진 모자를 쓰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 에게나 가져가라는 듯이 모자를 앞으로 불쑥 내밀고는 짐짓 쾌활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한 것을 잘 생각해 봐요." 네플류도프는 기가 찬 듯한 어조로 말하고 다시 한 번 자기가 제안했던 문제를 되풀이해서 말했다. "우리는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습니다. 먼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하고 침울하고 이가 빠진 노인이 화난 듯 투덜거렸다. "내일 하루 종일 이 곳에 있을 테니까 생각이 달라지면 내게로 오시오." 농부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네플류도프는 아무 성과도 없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공작님, 제가 참고로 말씀드립니다만,"하고 둘이 같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관리인이 말 을 꺼냈다. "그들과는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고집이 어지간해야죠. 그들은 집회에 나오기만 하면, 고집만 부리고 까딱도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모든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농부들, 아까 반대하던 백발 노인이나 검은 얼굴의 사나이는 영리한 축들입 니다. 사무실에 왔을 때 차라도 대접하면......" 빙그레 웃으면서 관리인은 말을 계속했다. "말 도 잘할뿐더러 얼마나 영리한지, 솔로몬 왕쯤은 빰칠 정도입니다. 모든 것에 확고한 의견을 갖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일단 집회에 나오기만 하면, 전혀 사람이 달라져 가지고 똑같은 소 리만 되풀이하지요." "그러면 이해력이 있는 농부를 서너 명 이리로 불러 줄 수 없겠소?"하고 네플류도프가 말 했다. "그들에게 내 계획을 상세히 밝히겠소." "그거야 할 수 있지요." 관리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부탁이니, 내일 불러 주시오." "어렵지 않습니다." 관리인은 이렇게 말하곤 더 즐겁게 다시 웃으며, "내일 불러오겠습니 다."하고 말했다. "그놈 참, 굉장한 놈인데!" 생전 빗질 한번 하지 않은 듯 헝클어진 턱수염에다 검은 얼굴 을 한 농부가 배부른 암말을 타고 건들건들하면서 족쇄 소리도 요란스레 자기와 나란히 타 고 가는, 다 떨어진 카프탄을 입은 삐쩍 마른 늙은 농부에게 말했다. 두 농부는 밤이 되어 한길가의 풀을 말에게 뜯기러 가는 길이었는데, 때로는 지주의 영지 에 딸린 숲으로 말을 몰래 데리고 들어가기도 했다. "땅을 거저 줄 테니 서명을 하라고? 이제껏 우리들을 속여먹고 아직도 모자라서...... 안 될 말이지. 이젠 우리도 모든 것을 판단할 줄 알게 되었단 말이야."하고 덧붙이고 뒤떨어져 따 라 오는 한 살 된 망아지를 불렀다. "코냐쉬! 코냐쉬!"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서 소리쳤 다. 그러나 망아지는 뒤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옆길로 빠져서 목장 쪽으로 가버린 것 같았 다. "망할 놈의 망아지 같으니! 또 지주네 목장으로 가버렸군." 턱수염이 덥수룩한 검은 머리 의 농부는 뒤떨어진 망아지가 축축이 이슬에 젖은 숲의 향기가 풍기는 풀밭 속에서 승아(여 귀과에 속하는 다년생 풀)를 부러뜨리면서 뛰어나오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이봐, 목장의 풀이 꽤 자랐는데. 노는 날 여자들을 데려다가 풀을 뽑아 주어야겠어."하고 다 낡은 카프탄을 입은 삐쩍 마른 농부가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낫을 버리겠는걸." "서명을 하라고 하지만,"하고 털북숭이 농부는 지주가 말한 것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계 속 말했다. "서명이라도 하는 날엔 산 채로 잡아먹힐 테니까!" "맞았어!"하고 늙은이 쪽이 대답했다. 그들은 그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딱딱한 길을 걷는 말발굽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8 집으로 돌아온 네플류도프는 자기 침실로 마련된 사무실에 이부자리가 두툼하게 깔려 있 는 것을 보았다. 털요 위에 베개 둘이 포개져 있었고, 정성들여 꽃무늬 수가 놓여졌고 풀이 빳빳한 두꺼운 2인용 새빨간 비단 이불이 놓여 있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관리인의 아내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으로 보였다. 관리인은 점심 때 먹다 남은 음식을 가져다가 네플류 도프에게 권했으나, 그가 사양하자 변변치 않은 음식과 부족한 설비를 사과하면서 네플류도 프를 홀로 남겨 두고 나가 버렸다. 농부들의 거절은 조금도 네플류도프의 마음을 언짢게 하지 않았다. 반대로, 쿠즈민스코예 에서는 그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을지라도 이 곳에서는 불신과 적의까지 표시되었는데도 어쩐지 그는 마음이 침착하고 흐뭇하기만 했다. 사무실은 무덥고 더러웠다. 네플류도프는 밖 으로 나가서 정원으로 갈까 하다가 그 날 밤의 일, 하녀방의 그 창문과 뒷문의 계단에 생각 이 미치자, 죄스런 추억으로 더럽혀진 그 장소를 거닐기가 싫어졌다. 그는 다시 현관 계단에 걸터앉아서 새파란 자작나무의 어린 잎사귀의 짙은 향기와 따스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오랫 동안 어두워 가는 정원을 바라보기도 하며, 물방아 소리와 휘파람새의 울음소리, 그리고 계 단 바로 앞 숲속에서 단조롭게 울어 대는 이름 모를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관리인 방의 창문에는 불이 꺼졌다. 헛간 뒤의 동쪽에서 달빛이 환하게 비쳐왔다. 멀리서 번갯불이 밝아지더니 정원에 만발한 꽃들과 다 쓰러져 가는 집을 환히 비춰 주었다. 멀리서 천둥 소리가 들려오고 곧 하늘의 3분의 1이 검은 구름으로 뒤덮였다. 휘파람새와 다른 새들 도 울기를 멈추었다. 요란스러운 물방아 소리와 꽥꽥거리는 거위 소리가 들려오는가 하면, 관리인의 뜰과 마을에서 첫닭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닭이란 놈은 무덥고 천둥이 치는 날에 는 다른 날보다 일찍 울어 대는 법이지만, 닭이 일찍 우는 밤이면 즐거운 일이 생긴다는 속 담이 있다. 네플류도프에게는 즐겁다기보다 그 이상 가는 밤이었다. 즐겁고 행복한 밤이었 다. 그의 상상은 그에게 있어서 순진한 청년이었을 때 이 곳에서 지낸 행복했던 여름의 추 억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지금도 그 때와 똑같이 행복하다고 느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생 애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것을 상기했을 분만 아니라, 그가 열네 살 의 어린 소년이었을 때 진리를 계시해 달라고 하느님께 빌던 일과, 그보다 더 어렸을 때 어 머니의 곁을 떠나게 되면 자기는 좋은 사람이 되어서, 결코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어 머니 무릎 위에 엎드려 울던 시절의 자기와 지금의 자기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그리고 또한 니콜레니카 이르체테프와 함께 서로 도와서 언제나 선량한 생활을 하고,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자고 맹세했던 시절의 자기로 되돌아간 듯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는 쿠즈민스코예에서 유혹에 사로잡혀 집과 삼림과 농장, 그리고 토지 등이 모두 아깝게 생각되었던 것을 상기하고, 지금도 그렇게 아까우냐고 자문해 보았다. 그러나 지금 은, 그 때 어째서 그런 아까운 생각이 들었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는 오늘 모격한 것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다. 남편이 지주인 네플류도프의 삼림에서 나무를 도벌했 다는 죄로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남편도 없이 여러 아이들을 거느리고 고생하는 여자며, 자 기네와 같은 신분의 비천한 여자들은 주인 나리에게 몸을 파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아니 그런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내뱉고 있는 무서운 마트료나를 생각했다. 또 그는 아 이들에 대한 그 여자의 태도며, 어린애들을 육아원으로 보내는 방법이며, 먹지 못해 영양 실 조로 죽어 가고 있으면서도 차양이 없는 누더기 모자를 쓰고 연방 생글거리고만 있던 늙어 보이는 불쌍한 그 갓난애의 일 등을 상기하고, 또 힘겨운 노동에 지친 나머지 굶주린 자기 네 소를 잘 보지 못한 벌로 네플류도프를 위해 강제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허약한 만삭의 여자를 떠올렸다. 그러자 느닷없이 감옥이며, 머리를 빡빡 깎은 머리며, 감방이며, 구 역질나는 아구치며 쇠사슬 등이 생각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를 위시해서 도시에서 사는 귀족 계급들 전체의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생활이 생각났다. 이 모든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 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거의 보름달에 가까운 밝은 달이 헛간 뒤에서 떠올랐다. 검은 그림자가 뜰을 가리고, 무너 져 가는 집의 함석 지붕은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자, 이 달빛을 그대로 놓쳐 버리기가 아쉬운 듯이 멎었던 휘파람새가 뜰 구석에서 다 시 지저귀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는 쿠즈민스코예에서의 자기 행동을 신중히 생각해 보며 앞으로 어떻게 할 것 인가에 대하여 해결하려 했을 때 무척 망설여졌고, 또 해결하지 못한 일과,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도 고려되어야 할 문제가 많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 문제를 자문 자답해 본 결과 모든 문제가 너무도 간단히 해결되는 데에는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간 단해졌느냐 하면, 지금은 자기 한 몸이 앞으로 어떻게 되어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 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런 일에는 흥미가 없었으며, 다만 자기가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 하는 문제만을 생각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무엇이 자기에게 필요한가 하는 의문을 아무리 해결하려 해도 되지 않 았지만, 남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만은 명확안 답이 나왔다. 이제 그는 토지를 이대로 계속해서 갖는다는 것은 좋지 않으므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추샤를 버리지 않음은 물론 그녀를 돕고 그녀에 대 한 자기의 죄를 보상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서슴지 않겠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되 었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는 의견이 좀 다르다고 생각되는 재판과 형벌에 관한 모든 문제를 연구하고, 분석하고, 천명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밖의 모든 것을 반드시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만은 틀림없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굳은 신념은 그를 기쁨에 넘치게 했 다. 먹구름은 어느새 하늘을 뒤덮었고, 번개도 먼 곳에서가 아니라 바로 머리 위에서 번쩍이 며 넓은 뜰과 현관과 함께 낡아빠져 곧 허물어지게 된 집을 환히 비추었다. 천둥 소리가 머 리 위에서 들렸다. 새들이 우는 소리는 멎었으나, 그 대신 나뭇잎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바람은 네플류도프가 앉아 있는 현관 계단까지 몰려와 그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지는가 싶더니 승아와 함석 지붕을 후두둑 때리기 시작했으며, 온 하늘이 번쩍 타오르자 만물은 숨을 죽였다. 네플류도프가 셋까지 세기도 전에 머리 바로 위 에서 무엇인지 찢어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쿠르릉 하고 하늘을 굴리며 내달았다. 네플류도프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다, 그렇다.'하고 그는 생각했다. '우리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 그 문제의 의 의를 나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왜 고모들은 살고 있었을까? 왜 니코레니카 이르 체네프는 죽고 나는 살아 있는 것일까? 왜 카추샤라는 여자가 태어났을까? 나는 왜 몹쓸 짓을 했을까? 왜 전쟁이 일어났을까? 그 후의 나의 방종한 생활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 즉 조물주의 섭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 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의 양심에 새겨져 있는 조물주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내 힘으로 가 능하다. 나는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것을 하고 있을 때에는 나는 확실히 편안한 마음 임을 의심할 수 없다.) 비는 어느새 좍좍 퍼부어서, 지붕에서 홈통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뜰과 저택을 비추는 번갯불이 뜸해졌다. 네플류도프는 방으로 돌아와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으나, 더러운 벽지가 너덜거리고 있는 것을 보자 빈대가 있지 않을까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 나는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하고 생각한 그는 자기 생각에 기쁨을 느꼈다. 그의 걱정은 들어맞았다. 촛불을 끄기가 무섭게 빈대가 물어뜯기 시작했다. 토지를 내 주고 시베리아로 간다면, 벼룩이랑 빈대랑 불결한 것이...... 그러나 견뎌야 한다 면 그런 것쯤 견뎌 보는 것이지.' 그러나 제아무리 각오를 했다 해도 빈대만은 견뎌낼 수가 없어서, 활짝 열린 창가에 걸터 앉아 흘러가는 비구름 속에서 또다시 얼굴을 내민 달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 9 네플류도프는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이 들었기 때문에 이튿날 늦게 눈을 떴다. 정오 때 관리인이 불러 온 7명의 농부가 사과밭으로 왔다. 관리인은 땅에 박은 말뚝 위에 테이블과 몇 개의 의자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농부들에게 모자를 쓰게 하고 걸상에 앉히기 까지 설득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군인 출신인 농부는 오늘 유달리 깨끗한 각반에 인피 짚신을 신고 있었는데, 장례식 때의 군대 예식대로 다 찢어진 자기 모자를 꼿꼿이 가 슴 앞에 받쳐들고 서 있었다. 그 중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모세같이 생긴, 백발의 곱슬곱슬한 수염에 까맣게 그을린 이마 언저리에 백발이 성성한 위엄이 있고 어깨가 떡 벌어진 노인이 큼직한 모자를 쓰고 집에서 갓 지어 입은 소매가 낀 카프탄 자락을 여미면서 걸상에 앉자, 다른 농부들도 그의 뒤를 따라 의자에 앉았다. 다들 자리에 앉자 네플류도프는 그 맞은편에 앉아서 계획안의 요점이 적혀 있는 종이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팔꿈치를 괴고 그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농민들의 수가 적은 탓인지, 아니면 네플류도프 자신이 자기를 잊고 설명에만 열중한 탓 인지, 이번에는 조금도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무심결에 곱슬곱슬한 흰 수염에 어깨 가 떡 벌어진 노인에게 남달리 주의를 주면서 그 노인의 찬부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노인 에게 걸었던 네플류도프는 기대는 들어맞지 않았다. 풍채가 좋은 이 노인은 마치 찬성이라 도하는 듯이 이 존경할 만한 장로 풍의 아름다운 머리를 끄덕이기도 하고 또 다른 농부들이 반대하는 것을 듣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머리를 흔들기도 했지만, 실은 네플류도프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만 다른 농부들이 네플류도프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만 다른 농부들이 네플류도프의 말을 자기들의 말로 쉽게 말했을 때 비로소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보다도 이 장로연하는 노인과 나란히 앉아 있는 애꾸눈에 전혀 턱수 염이 없는 작은 노인 편이 훨씬 네플류도프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누덕누덕 기운 남경무명 외투를 입고 있었으며, 헐어서 쭈그러진 장화를 신고 있었다. 그는 수염이 없 고 눈이 빛나는 노인이었는데, 네플류도프가 뒤에 안 일이지만 그는 난로 제조공이었다. 이 노인은 눈썹을 찡긋찡긋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열심히 주의를 집중해서 듣고 있다가 네플 류도프가 한 말을 곧 자기들의 말로 옮겨서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해가 빨 랐던 또 한 사람은 흰 턱수염을 기로고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키가 크지 않고 통통한 노인 이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네플류도프의 말을 냉소적인 농담조로 비꼬면서 자신의 영리함을 자랑했다. 그 군인 출신의 농부도 보아하니, 군대 생활로 인하여 우둔해지지만 않 았더라면, 또 무의미한 군대 용어를 남용해서 혼란만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진작 이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느껴졌다. 그 누구 보다도 가장 진지한 태도로 듣고 있던 사람 은 집에서 짠 베옷을 입고 새 짚신을 신은, 턱수염이 짧고, 코가 길고, 아주 낮고 굵직한 목 소리로 느릿느릿 이야기하는 키다리 사나이였다. 이 사나이는 모든 것을 잘 이해했으나 필 요할 때만 입을 열었다. 나머지 두 노인은 한 사람은 어제의 집회에서 네플류도프의 제안을 한사코 반대하던 이가 없는 노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키가 후리후리하고 살갗이 희고, 가느 다란 다리에 각반을 치고 구두를 신은 호인 타입의 절름발이 노인이었는데 시종 주의 깊게 듣고만 있을 뿐 전혀 말이 없었다. 네플류도프는 먼저 토지 사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설명했다. "내 생각엔 토지란, 토지란 팔든지 사든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오. 왜냐하면 가령 토지를 팔아도 괜찮다고 한다면 돈 있는 사람이 쥐다 사 버릴 것이며, 토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 람한테서 토지 사용권에 대하여 마음대로 돈을 받아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땅 위에 서 있기만 해도 돈을 받으려고 들 것입니다." 그는 스펜서의 이론을 이용해서 이렇 게 덧붙였다. "그렇게 되면 할 수 없지. 몸에다 날개를 달고 날아다닐 수밖에 !" 흰 턱수염의 농부가 웃 으며 말했다. "그건 사실이야."하고 코가 긴 노인이 굵직한 소리로 말했다. "옳습니다." 군인 출신이 말했다. "아낙네가 송아지에게 주려고 풀을 좀 뜯었다고 잡아가는 형편이니까." 사람이 좋아보이 는 절름발이 노인이 말했다. "우릴 제멋대로 취급하거든요. 농노 시대보다 더 나쁘다니까요." "나도 당신들과 같은 생각이오."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죄악이라 고 생각하고 있소. 그래서 토지를 당신네들에게 내놓으려는 것이오." "참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모세처럼 곱슬곱슬한 턱수염을 기른 장 로풍의 노인이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 네플류도프가 높은 이자율로 토지를 빌려주려 는 생각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 때문에 내가 여기 온 것이오, 나는 이 이상 토지를 갖고 싶지 않소. 대체 어떻게 토지 를 처리해야 할는지 그 점을 지금 우리가 의논해야 하겠소."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면 그뿐 아니겠습니까"하고 이가 빠진 성급한 노인이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그 말들 속에서 자기의 진지한 계획을 의심하고 있는 것을 느끼자 처음에는 다소 당황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가다듬어 자기가 말하려고 생각했던 것을 다음과 같이 설 명했다. "물론 기꺼이 주겠소."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누구에게 어떻게 줘야한단 말이오? 어떤 농민에게? 그 마을에 있는 당신들에게만 주고 제민스코예마을(빈약한 토지를 가진 이웃 마 을)에 있는 농민들에게는 주지 말란 말이오?" 모두 말이 없었다. 그런데 군인 출신만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자, 그럼 ,"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한 가지 묻겠는데, 만일 황제가 지주한테서 토지를 몰 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준다고 한다면... 당신들은 어떻게 하겠소?" "그런 경우가 있을까요?" 노인이 물었다. "그야, 황제가 그런 말을 할 리는 없겠으나 가정해서 말하는 것이오. 지주한테서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준다면, 당신네들은 어떻게 하겠소?" "어떻게 하겠느냐고? 인원수대로 농부이든 주인이든 똑같이 나누어 갖지요." 눈썹을 분주 히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난로 제조공이 말했다. "별수 없지요. 머릿수대로 나누는 수밖에는."하고 하얀 각반을 두른 선량해 보이는 절름발 이 노인이 맞장구를 쳤다. 모두 그렇게 하면 불평이 없으리라고 이 의견에 찬성했다. "인원수 대로라니, 어떻게 한다는 것이오?"하고 네흘류도프가 물었다. "하인한테도 나누 어 주겠다는 것인가요?" "그것은 안됩니다."하고 군인 출신인 사나이가 쾌활하고 용기 있는 체해 보이려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분별있는 키 큰 농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누어준다면, 다 똑같이 주어야지요." 잠깐 생각하더니, 그는 낮고 굵직한 목소리로 이 렇게 말했다. "그건 안됩니다."하고 미리 반박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만약 다 똑 같이 나누어준다면, 자기가 경작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니까 지주라든가 하인이라든가 관 리, 서기, 그 밖의 도시의 모든 인간은 자기 몫으로 받은 것을 곧 부자들에게 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토지는 다시 지주에게 모이게 됩니다. 한편 자기에게 할당된 땅에서만 일하는 사람은 가족이 자꾸 늘어도, 토지가 모두 매점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금 부자가 토지를 필요 로 하는 사람들을 손아귀에 넣어버리게 된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하고 군인 출신 사내가 얼른 동의했다. "토지는 팔지 못하게 하고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만 나누어주면 되지 않겠습 니까?" 난로 제조공이 화난 듯이 군인 출신 사내의 말을 가로챘다. 이에 대하여 네플류도프는 자기를 위해서 농사짓는 사람과 남을 위해서 농사짓는 사람을 분간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 때, 키가 크고 분별 있게 생긴 노인이 조합을 만들어서 경작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 안했다. 즉,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는 나누어주고, 짓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 게 어떠 느냐고 굵은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이 공산주의적인 제안에 대해서도 네플류도프는 논증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 두가 다같이 가래와 말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 각자가 짠 사람에게 뒤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말과 가래와 탈곡기와 모든 농기구를 공유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하 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합심해야한다고 말했다. "우리네 농민들은 죽을 때까지 절대로 합심하지 못합니다."하고 빙충맞은 노인이 말했다. "노상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으니까요."하고 흰 턱수염을 기른 노인이 눈웃음 치며 말했 다. "아낙네들은 서로 눈알을 뽑으려고 덤벼들 거예요." "그리고 토질이 좋으니 나쁘니 다툴 테니, 땅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는지..." 네플류도프가 다시 말했다. "무엇을 기준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옥토를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진흙땅과 모래땅을 줄 것이냔 말이오?" "다 골고루 나누어주면 되지 않습니까?"하고 난로 제조공이 말했다. 이에 대하여 네플류도프는 토지 분배 문제는 한 마을의 한 조합에 한한 것이 아니라, 여 러 현에 걸친 전체적인 것이라는 것과 만약 토지를 무상으로 나누어준다면, 어느 사람은 좋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어느 사람은 나쁜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인데 농부들은 누구 나 좋은 땅을 원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옳은 말씀입니다."하고 군인 출신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잠자코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소. 헨리 조지라는 미국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이런 걸 생각해 냈소. 나는 그의 의견에 찬성하고 있소." "나리가 주인이시니까, 나리께서 알맞게 나눠주면 되는 거죠. 누가 뭐래도 나리 생각대로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빙충맞은 노인이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이 가로채는 말에 어리둥절했으나, 이 말에 대해 불만스러워하는 사람이 자 기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자 위로가 되었다. "잠깐만, 셰묀 아저씨. 나리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려." 분별있는 농부가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이 말에 용기를 얻어 헨리 조지의 단일세 안을 그들에게 설명해주었다. "토지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그 말씀이 옳아요." 몇 사람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토지는 공동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토지에 대해 평등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 나 좋은 토지와 나쁜 토지가 있으므로 누구나 좋은 땅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것은 좋은 토지를 사용하는 사람이 토 지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에게 각자의 토지에 해당되는 땅값만큼 지불하는 것입니다." 네플 류도프는 자신에게 설명하듯 말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누가누구에게 지불할 것인가 하는 것을 정하는 것이 제일 곤란한 일입니다. 그러나 돈을 모을 필요가 있으므로 토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제각기 토지에 해당하는 땅값을 공동비용으로 지불하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모두가 평등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토지를 갖고 싶으면 좋은 토지에 대해서는 나보다 많이 지불하고, 나쁜 토지에 대해서는 그 만큼 적게 지불하면 되는 셈입니 다. 가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한 푼도 내지 않아도 됩니다. 공동기금에 대해서는 토지를 사 용하는 사람이 대신 지불할 것이니까요." "옳은 말씀입니다." 난로 제조공이 눈썹을 움직이며 말했다.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이 더 내면 되거든." "그 조지라는 사람은 정말 머리가 좋은데." 풍채가 좋은 곱슬곱슬한 턱수염을 한 노인이 말했다. "다만 돈을 지불할 수 있다면 말이야."하고 키 큰 사나이가 일의 결말이 드러났다는 듯이 낮고 굵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 금액은 비싸지도 싸지도 않도록 정해야 되겠지요. 너무 비싸면 갚을 길이 없어서 도리어 선해가 날테고, 싸면 서로 사겠다고 할 테니까요. 그래서 내가 당신들에게 이 점을 해결해 드리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그건 정당한 말씀입니다.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고 농부들은 말했다.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이군." 어깨가 떡 벌어진 곱슬머리 노인이 되풀이했다. "조지란 사 람말일세.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런데 저도 토지를 갖고 싶은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관리인이 벙글거리면 서 말했다. "빈 터가 있으면, 그걸 얻어 농사를 지을 수가 있지."하고 네플류도프가 대답했다. "왜 당신이 땅이 필요하단 말이지? 그렇잖아도 배가 부를텐데."하고 눈웃음을 치는 노인 이 말했다. 이것으로 집회는 끝났다. 네플류도프는 자기의 제안을 다시 한 번 설명한 뒤 이번에도 직접적인 대답을 요구하지 않고 마을 전체의 사람들과 상의해서 확답을 보내달라고 말했다. 농부들은 마을의 여러 사람들과 상의해서 대답해 드리겠다고 말한 다음 인사를 하고 흥분 해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는 한길가에서는 한참 동안 이야기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 후에도 밤늦게까지 그들의 마을로부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냇가를 건너 들려왔다. 이튿날 농부들은 일을 쉬고 주인이 제안한 문제를 협의했다. 마을은 두 파로 갈라졌다. 한 파는 주인의 제안이 유리하고 의심할 바 없다고 인정했으며, 다른 한 파는 그 속에 무슨 간 계가 숨겨져 있다고 하여 그것이 어떠한 간계인지 모르기 때문에 더 두렵다고 했다. 그러나 사흘째 되던 날, 주인이 제안한 조건을 모두 승인하는 데 합의를 보고, 농민 전체 의 결의를 보고하기 위하여 네플류도프를 찾아왔다. 이렇게 합의를 보게된 이면에는 어떤 노파의 설명이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 노파의 설명은 주인의 제안에는 조금도 의심 할 만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가 영혼을 생각하게 되고, 이 영혼을 구제하기 위하여 이 런 행동을 하는 거라고 설명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의구심을 일소해 주었다. 그리고 이 설명은 그가 파노보에 머물러 있을 때, 많은 돈을 적선했다는 사실로써 입증되었다. 네플류도프가 그 곳에 적선하게 된 것은 그가 여기서 농부들이 가난의 구렁텅이 속에 빠 져 있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하자 그 빈곤함에 놀랐고, 처참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돈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그의 수중에 는 작년에 쿠민즈스코예에서 판 산림의 대금과 농기구를 판 계약금까지 받았기 때문에 많은 돈이 들어와 있었다. 지주가 그에게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준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 특히 아낙 네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도와 달라고 청했다. 그는 이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무 엇을 기준으로 누구에게 얼마를 주어야 할 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도움을 청하는 가 난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갖고 있는 많은 돈을 주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원하 는 대로 무턱대고 준다는 것은 무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이 곳을 떠나는 길밖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즉시 이 방법을 실행에 옮기도록 했다. 파노보에서 묵던 마지막 날, 네플류도프는 안채로 들어가서 거기 남아 있는 물건들을 점 검했다. 거기에서 그는 고모가 쓰던, 사자의 머리에 청동 고리가 달린 낡은 마호가니 장롱 아래서랍 속에서 많은 편지를 발견했다. 그 중에서 여럿이 찍은 사진 한 장이 나왔다. 그것 은 소피야 이바노브나, 마리야 이바노브나, 대학생 때의 그 자신, 그리고 순진하고 쾌활하고 아름답고 또 삶의 기쁨이 넘쳐 흐르는 카츄샤가 찍힌 사진이었다. 이 집 안에 있는 모든 물 건 중에서, 네플류도프는 이 편지와 사진만을 가졌다. 그 나머지 물건들은 늘 벙글거리는 관 리인의 주선으로 파노보에 있는 그의 집과 가구 일체를 10분의 1이란 싼값으로 물방앗간 주 인에게 팔았다. 네플류도프는 지금 쿠즈민스코예에서 재산을 잃어버리는 데 대해 애석하게 여겼던 것을 생각하고 어째서 그런 마음을 품게 되었을까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그는 끝없 는 해방된 듯한 기쁨과 신기할 만큼 쾌활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땅을 발견한 여행자 가 느끼는 그러한 종류의 감정이었다. 10 시골에서 돌아온 네플류도프는 도시의 거리가 유달리 새롭고 이상스럽게 느껴지는 데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저녁때 거리의 등불이 켜질 무렵, 정거장에서 집으로 돌아왓다. 방마다 아직도 나프탈렌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와 코르네이는 모두 녹초가 되고 시무룩해져서 밖에 내걸거나 말려서 챙겨 둘 수밖에 없어 보이는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놓고 말다툼까지 했다. 네플류도프의 방은 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직 정리도 되 어 있지 않고 트렁크가 흩어져 있어 방 안을 드나들기조차 거북했다. 네플류도프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어딘지 모르게 묘한 힘이 이 집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 의 방해가 된 것이 분명했다. 농촌의 빈곤한 현실을 보고 온 네플류도프에게 있어서는, 자기 도 한때는 이 속에서 살아오긴 했으나, 이 모든 낭비가 지극히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에게 나중에 누이가 와서 집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최종적으 로 처분해 줄 때까지 가구나 의류의 정리를 부탁하고는 이튿날 하숙으로 옮기기로 결심했 다. 네플류도프는 아침부터 집을 나와서 감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처음 눈에 띈 지저분 한 가구가 붙어 있는 두 칸짜리 검소한 아파트를 빌린 다음, 자가가 골라 놓은 짐들을 집에 서 우반하도록 일러 놓고 변호사 한테로 갔다. 밖은 제법 쌀쌀했다. 비가 온 뒤의 봄날씨에 흔히 있는 추위가 닥쳐 온 것이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불어와 얇은 외투를 입은 네플류도프의 몸을 얼게 했기 때문에 그는 걸음을 빨 리함으로써 몸을 녹이려 했다. 그의 기억 속에 시골 사람들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아낙네들, 어린아이들, 노인들, 또 그가 이번에 처음으로 본 빈곤과 고통, 특히 생글거리면서 말라빠진 다리를 흔들어 대던, 애늙은 이와 같이 보이던 갓난애의 모습이 뚜렷이 되살아났다. 그는 무의식중에 그러한 사람들과 도시 사람들을 비교해보았다. 푸줏간과 어물전과 기성복점을 지나가면서, 시골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말쑥한 옷차림에 기름기가 번질번질 흐르는 뚱뚱한 상인들의 모습을 보고 새삼 놀랐다. 분명 이들은 자기들의 상품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절대로 잘못 이 아니며, 지극해 유익한 일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뒷잔등에 단추를 단 옷을 입은 큼 직한 엉덩이의 마부, 모자에 금몰을 수놓은 문지기, 에이프런을 두르고 머리를 지진 하녀들, 특히 사륜마차에 앉아서 사람들 업신여기는 듯한 눈초리로 통행인들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는, 목덜미를 파랗게 밀어올린 마부도 뚱뚱해 보였다. 네플류도프는 이런 모든 사람들 속 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토지를 빼앗기고 도회지의 생활 조건을 교묘히 이용하여 주인 행세를 하며 자기의 처지를 기뻐하는 자도 있었지만, 어떤 사람은 도회지에 나왔으나 시골 에 있을 때보다 더 비참한 처지에 빠져 버리기도 했다. 어느 지하실 창가에 구두장이가 일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구두장이가 네플류도프에게는 바로 그러한 비참한 인간으로 여겨 졌다. 비누 냄새가 풍기는 김이 무럭무럭 나오는 열린 창문 앞에 서서, 말라빠진 두 팔을 드 러내고 다리미질을 하고 있는, 파리한 얼굴에 머리가 헝클어진 세탁부들도 그러한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네플류도프가 도중에 만난, 맨발에다 헤어진 구두를 신고 머리에서 발 끝가지 페인트 투성이가 된 앞치마를 두른 두 사람의 페인트공들도 역시 그러했다. 이 두 사람은 팔꿈치가지 소매를 걷어올리고, 볕에 그을고 비쩍 마른 파리한 선으로 페인트 통을 나르면서 쉴 새 없이 서로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다. 모두 지치고 화난 표정들이었다. 먼지투 성이가 되어 짐마차 위에서 흔들리며 지나가는 새까만 얼굴의 마부 역시 그런 표정이었다. 길모퉁이에 서서 동냥을 하는, 남루한 옷을 입고 얼굴이 부석부석한 사내와 아이를 거느린 여자들도 모두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얼굴은, 네플류도프가 옆을 지나가던 목로집이 열려져 있는 창 안에서도 볼 수 있었 다. 술병과 찻잔을 늘어놓은 지저분하고도 조그마한 탁자사이를 비틀거리면서 흰옷을 입은 급사 가 일을 하고 있었다. 땀이 배고 얼굴이 빨개진 손님들은 흐릿한 눈을 하고 앉아서, 떠들거 나 노래를 부르거나 했다. 창가에 앉아 있던 한 사나이가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술을 내밀더 니 마치 무엇을 생각이나 하는 듯이 앞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저자들은 이런 곳에 모여 있는 것일까?'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흙먼지와 더불 어 사방에 퍼진 방금 칠한 페인트의 시큼한 냄새며 고약한 기름 냄새를 무심결에 들이마시면서 네플류도프는 이런 생각을 했다. 어느 거리에서 무슨 쇠붙이를 운반하는 짐마차의 한 떼와 나란히 걷게 되자, 울퉁불퉁한 포장길에서 쇠붙이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대는 바람에 그는 귀가 멍멍해지고 머리가 아팠 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 콧수염 끝을 뾰족하게 세운, 혈색이 좋은 한 군인의 모습 이 눈에 띄었다. 그는 고급마차를 타고 있었으며, 손을 흔들면서 유난히 이를 드러내고 싱글 벙글 웃고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아닌가?" 네플류도프는 한순간 반가웠다. "여, 센보크!" 네플류도프는 반가운 소리로 그를 맞았으나, 곧 반가워할 일이라곤 전혀 없 음을 깨달았다. 그는 오래 전 고모네 집에 들렀던 센보크였다. 네플류도프는 그 후 오랫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으나 그가 빚을 많이 짊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대를 나와서도 기병으로 행세하고, 여전히 이럭저럭해서 부자들과 교제하고 있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다. 쾌활하고 만족스러운 듯한 그의 표정이 그 소문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자넬 만나서 정말 잘 됐네! 이 고장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마차에서 내려 어깨를 펴면서 그는 말했다. "한데 자네도 꽤 늙었군 그래! 걸음걸이를 보고서 곧 자낸 줄 알았어. 어때 ,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겠나? 이 곳에선 어딜 가면 좋은 걸 먹을 수 있나?" "글세, 난 그럴 시간이 없겠는데..." 네플류도프는 친구의 감정이 상하지 않으면서 이 자리 를 벗어날 궁리를 하며 대답했다. "자네가 어떻게 이 곳까지 다 왔나?"하고 그는 물었다. "좀 볼일이 생겨서. 후견인의 일일세. 나는 후견인이라네. 사마노프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 어. 자네도 알고 있지, 그 부자 말이야. 그 작자는 바보지만, 5만 4천 정보나 가지고 있거 든." 그는 마치 자기가 그만한 토지를 장만해 놓기라도 한 듯 무척이나 으스대며 말했다. "그런데 그의 재산이 엉망이라 말이야. 토지는 모두 농부들에게 빌려 줬는데, 놈들이 지대를 한푼도 물지 않아서 8만 루블 이상이나 체납되어 있었다네. 그래서 내가 1년 동안 전부 개 혁을 해서 70퍼센트의 수입을 올려 주었다네. 어떤가?" 그는 뽐내며 물었다. 센보크는 자기 재산을 전부 탕진해 버리고 도저히 갚을 수 없게 되자, 공교롭게도 어떤 사람의 특별한 주선으로, 재산을 낭비하고 있는 부자 노인의 후견인을 맡게 되어 , 아마 지 금도 그 후견인으로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하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이자를 떼어 버릴 수 있을까?' 포마드를 바른 윗 수 염에 혈색 좋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좋은 음식을 어디서 먹을 수 있느냐는 말과, 후견 일을 맡아보고 있다는 자랑을 친구에게 서슴없이 지껄여대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네플 류도프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 어디서 식사를 할까?" "아나, 난 그럴 틈이 없네."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럼, 오늘 저녁에 경마가 있는데... 자네 거기 가지 않겠나?" "글쎄, 난 못 가겠네." 오게나! 내 말은 없지만, 그리신의 말을 몇마리 맡고 있어. 알지? 그 자의 훌륭한 말 말 이야. 꼭 오게나. 그리고 함께 저녁 식사라도 하세." "저녁 식사도 어렵겠어."하고 네플류도프는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아니 왜 그러나? 지금 어딜 가는 거야? 뭣하면 태워다 주겠네." "변호사한테 가는 길일세. 바로 저 모퉁이야."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아 참, 자네, 감옥에서 무얼 한다면서? 죄수들의 후원자라도 된 건가? 코르차긴가의 사람 들에게서 들었네만."하고 센보크는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들도 벌써 떠나 버렸네. 대관절 어떻게 된거야? 이야기 좀 해주지 않겠나?" "응, 그래, 그건 다 사실이야."하고 네플류도프는 대답했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할 순 없 잖나." "그도 그렇군, 자넨 원래 이상한 성격이었으니까. 그럼 경마에는 오겠지?" "아니, 안 돼. 갈 틈도 없거니와 가고 싶지도 않네. 오해하진 말게." "왜 오해를 하겠나. 그런데 자넨 어디서 유숙을 하고 있지?" 하고 묻더니, 갑자기 정색을 하며 눈을 한곳에 못박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마 무엇인가 생각을 찾아 더듬는 모양이었 다. 네플류도프는 그 얼굴에서 조금 전 목로집 창가에서 보고 깜짝 놀란, 눈썹을 치켜 뜨고 입술을 불쑥 내밀고 있던 사나이와 똑같은 무딘 표정을 발견했다. "몹시 추운 날씨로군! 그렇잖나?" "정말 그렇군." "산 물건은 가지고 있지?" 센보크가 마부에게 물었다. "자, 그럼 잘 가게. 자네를 만나서 정말 기쁘네." 센보크는 이렇게 말하면서 네플류도프의 손을 꼭 쥔 다음, 마차에 뛰어올랐다. 새로 산 하얀 양피 장갑을 낀 큼직한 손을 번들거리 는 얼굴 앞으로 흔들면서, 유난히 흰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싱긋 웃었다. '나도 전엔 저랬을까?' 변호사 집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 그렇다. 꼭 저렇지는 않았더라도 저렇게 되려고 했었지. 그리고 저렇게 한 평생을 보내려고 했겠지.' 11 변호사는 차례를 무시하고 내플류도프를 만나 주었다. 그는 곧 자기가 조사한 메니쇼프 모자 사건에 대해서 말을 꺼냈고, 근거 없는 기소에 분개하고 있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사건입니다." 변호사가 말했다. "이 방화는 보험금이 탐나서 집 주인이 자기 손으로 한 짓이 틀림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자의 범죄도 전혀 증명되어 있 지 않습니다. 증거가 전혀 없단 말입니다. 이것은 예심판사의 지나친 특별 배려와, 검사보의 무성의에서 온 것입니다. 이 사건이 만일 지방 재판소가 아니고 여기서 심리된다면, 나는 승소를 보증하겠으며, 보수 따윈 한 푼도 받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건, 황제에게 낼 페도샤 비류코바의 청원서는 이미 작성해 놓았습니다. 페테르부르크에 가게 되면, 가지고 가 서 직접 제출하고 탄원하십시오. 안 그러면 청원 위원회에 조회하게 되고 또 청원 위원회에 서는 한시라도 빨리 손뗄 수 있도록 제멋대로 해답을 할 것이 뻔합니다. 즉 각하되어 한시 라도 여태까지의 고생이 허사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유력한 분에게 부탁을 드려 보 도록 하세요." "그렇다면 황제께 청원하란 말씀인가요?"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변호사는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제일 마지막, 즉 황제가 심의하는 최종심에서입니다. 지금은 그보다 낮은, 말하자 면 청원 위원회 서기나 주지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위뢰하신 건 다 됐지요?" "그리고 또 하나, 분리파 신도들이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네플류도프는 분리파 신도들의 편지를 호주머니에서 꺼내면서 말했다. "이 사람들이 써온 것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사건입 니다." "아무래도 당신은 감옥의 모든 불평이 흘러내리는 깔때기나 병 모가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리신 모양입니다." 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많은데요. 그러시다간 감당해 내기 힘 들 겁니다." "아니, 이것은 놀란 만한 사건입니다."하고 네플류도프는 사건의 진상을 대충 설명했다. 그것은 이런 것이었다. 어느 마을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한 농부가 복음서기를 읽기 위 해 동료 농부들과 모였다. 그러자 경찰이 와서 이를 해산시켜 버렸다. 농부들은 다음 일요일 에 다시 모였다. 그러자 마을의 경찰이 불러가더니 고소장이 작성되어, 농부들은 전원 재판 에 걸리게 되었다. 예심 판사가 심문을 하고, 검사보가 기소장을 작성하고, 재판관이 이 기 소 사실을 인정하여 재판에 붙여졌다. 검사보는 유죄를 구형했다. 테이블 위에는 증거물로서 복음서가 놓여 있었고, 결국 그들은 유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네 플류도프가 말했다.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 사건의 어느 점이 이상하다는 것입니까?" "사건 전부지요. 하기야 상부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경찰이야 그렇다치더라도, 기소장을 작 성하는 검사보는 교양이 있는 인간 아닙니까?" "그러나 바로 거기에 오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검사나 재판관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무슨 새로운 자유주의적인 인물인 양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들도 한때는 그런 인물 이었긴 했습니다만, 지금은 전연 다릅니다. 그들은 다만 월급을 받고 있는 이상, 더 많은 월 급을 받았으면 하고 원하고 있으며, 그들의 주의 주장도 이 한 곳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입 니다. 그래서 그들은 닥치는 대로 기소하고, 재판하고, 유죄로 판결해 버리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과 같이 단지 복음서를 읽었다 해서 사람들을 유형에 처하는 법률 이 있을 수 있습니까?" "네, 복음서를 읽어 줄 때, 규정되어 있는 이외의 해석을 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교회의 해석을 비난했다는 것만 입증되면 유형정도가 아니라 시베리아 징역도 받게 됩니다. 대중 앞에서 정교의 교리를 비판한 자는 제 196조에 의거해서 거주 유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아니, 그렇습니다. 나는 항상 재판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감사하다는 마 음 없이는 당신네들을 대할 수가 없다고요. 왜냐하면 나나 당신이나, 우리들 모두 감옥에 들 어가지 않고 있는 것은 오직 그들의 자비에 의한 것이니까요. 사실 우리들 중의 누구라도 공민권을 박탈해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형을 보내는 것쯤은 그들로서는 식은죽 먹기입니 다."하고 변호사는 말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식으로 법을 적용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음이 검사나 판사의 재량 에 달렸다면 무엇 때문에 재판 같은 것을 합니까?" 변호사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거 무슨 그런 질문을 다 하십니까! 공작님, 바로 그것이 철학입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를 크게 논의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 그럼 토요일에 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학자, 작가, 예술가 들이 모이게 되어 있으니 그 때 '일반적인 문제"를 논의하시지요." 변호사는 '일반적 인 문제'라고 하는 말에 힘주어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집사람하고는 인사하셧 겠 지요? 꼭 와 주십시오." "네, 되도록..." 내플류도프는 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되도록 토요일 밤에 변호사 집에 모이는 학자와 작가, 예술가들의 모임에 가담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대답했 다. 재판관들이 자기들의 뜻대로 법률을 적용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다면 재판따윈 무의미할 것이라고 네플류도프가 말했을 때, 변호사 및 그 동료들이 만사에 있어 네플류도프 자신과 얼마나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센보크와 같은 옛 친구들 과도 멀리 떨어진 존재가 되었지만, 그보다도 변호사와 그의 주변 사람들과의 거리는 한층 더 먼 것이라고 느꼈다. 12 감옥까지는 멀기도 했거니와 시간도 이미 늦었기 때문에, 네플류도프는 마차를 집어타고 감옥으로 향했다. 어느 거리에 이르자, 영리하고 선량해 보이는 중년의 마부가 네플류도프를 돌아보고 건축중인 커다란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십시오, 굉장한 공사가 아닙니까?" 마치 자기가 어느 정도 건축 공사에 책임이 있다는 듯이, 또 그것을 뽐내기라도 하듯이 물었다. 사실 그 건물은 규모도 크고 양식도 무엇인가 기발하고 복잡했다. 꺽쇠로 단단히 잡아맨 굵다란 통나무 비계가 높이 솟은 건축중인 건물 주위를 빙 둘러쌌고, 얇은 판자 울타리가 건물과 한길 사이에 가로막혀 있었다. 비계 위에는 석회가루를 뒤집어쓴 인부들이 개미떼처 럼 오고갔다. 돌을 쌓는 사람도 있었고, 돌의 각을 뜨는 사람도 있었다. 또 무거운 나무통과 양동이를 위로 나르는 인부가 있는가 하면, 빈 나무통과 양동이를 가지고 내려오는 인부도 있었다. 건축기사인 듯싶은 살이 찌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사는, 비계 한 옆에 선 채, 위를 가리 키면서 공손하게 듣고 있는 블라디미르 태생의 청부업자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건축 기사와 청부업자 옆의 문으로 빈 마차와 짐을 잔뜩 실은 손수레가 쉴 새 없이 드나들고 있 었다.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일을 시키고 있는 사람이나, 모두 한결같이 그렇게 하고 있 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러나 바로 이 시각에 그들의 집에서는 애를 밴 아낙네들이 힘에 겨운 일에 시달리고 있는가 하면, 차양도 없는 모자를 뒤집어쓴 어린 것들 이 아사를 눈앞에 두고 가는 다리를 내밀며 늙은이같이 히죽거리고 이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어느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 자기들에겐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이 궁전과도 같은 집을 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하고 네플류도프는 그 건물을 바라 보면서 탄식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건물이군!" 하고 그는 자기의 생각을 소리내어 뇌까렸다. "왜 어처구니없는 건물이라고 하십니까?" 마부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고마운 일 이지요. 덕택에 모두들 일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일이라는 것이 소용없단 말이오." "소용없는 일이 아닙니다, 짓고 있는 것이니 필요한 것이겠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먹 고 살아 가는걸요."하고 마부는 반박했다. 네플류도프는 입을 다물었다. 차바퀴 소리가 요란스러워서 말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감옥 가까이에 왔을 때, 마차가 자갈길에서 포석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얘기하기가 좋아지자 마 부는 다시 네플류도프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드는지 모르겠어요. 무서울 지경입니 다." 마부는 마부석에서 몸을 돌려, 앞에서 걸어오는 톱과 도끼를 들고, 반코트를 입고 배낭 을 짊어진, 시골에서 오는 품팔이 농민들의 떼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전보다는 많은가요?"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많고 말고요! 요즘은 어디를 가나 사람으로 가득 차 있어 야단입니다. 고용주는 사람을 무슨 나무토막처럼 내동댕이치는 판입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 천집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사람들이 늘었으니까 그렇지요. 달리 갈 곳도 없고요." "늘었다고 무슨 상관이 있소? 왜 시골에 꽉 붙어 살지 않느냔 말이오." "시골에 있다고 해서 할 일이 있겠어요? 땅이 있어야지요." 네플류도프는 상처를 건드렸을 때와 같은 강한 느낌을 받았다. 아픈 곳이란 일부러 거기 를 건드리기만 하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실상 그렇게 느끼게 되는 것은 아픈 곳을 다쳤을 때만 아픔을 느끼기 때문인 것이다. '도대체 어디나 다 똑같단 말인가?'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마부를 보고, 당신의 마 을 에 토지가 얼마나 있으며, 당신 자신은 얼마만한 땅을 가지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당신은 도시에 살고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 마을선 한 사람 앞에 1정보의 토지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3인분을 가지고 있습니 다." 마부는 신이 나서 말했다. "저의 집에는 아버지와 동생이 있죠. 또 다른 동생 하나는 군대에 나가 잇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동생이 농사를 짓고 있는데, 농사라고 별로 할 일이 있습니까? 그래서 동생도 모스크바로 나오고 싶어합니다." "토지를 빌릴 수는 없나요?" "요새 토지를 어디서 빌립니까? 그전의 지주들은 토지를 다 없애 버리고, 지금은 상인들 손으로 그것들이 모두 넘어가 버렸죠. 상인들은 절대로 토지를 빌려 주지 않고, 자기들이 직 접 농사를 짓습니다요. 우리 마을 땅은 프랑스 사람이 소유하고 있지요. 전 지주한테서 샀습 니다만, 절대로 빌려주질 않습니다. 상대도 안 해요." "그 프랑스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오?" "뒤파르라는 사람입니다만, 어쩌면 나리께서도 아실는지 모르겠군요. 그는 큰 극장의 배우 들 가발을 만들어 팔았는데, 장사가 잘되어서 톡톡히 한 몫을 벌었지요. 그래서 전 여지주의 토지를 몽땅 사버렸단 말입니다. 지금은 그 사람이 우리들의 주인으로 우리들을 자기 마음 대로 부리고 있습니다만, 다행히 그 사람은 마음이 좋은데, 그 여편네가 러시아 출신으로 성 미가 못돼 먹어서 야단입니다. 농민들을 어찌나 못살게 구는지 큰 두통거리입니다. 자, 이제 감옥에 다 왔습니다. 어디에 댈까요? 현관 쪽에 댈까요? 들여보내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13 오늘은 마슬로바가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가 하는 생각과, 그녀의 마음속에서나 옥중에 있는 다른 죄수들 전체 속에 존재하는 것같이 느껴지는 그 어떤 비밀을 생각하고,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마음과 두려움을 느끼면서, 네플류도프는 정문 현관의 초인종을 누르자 곧 나온 간수에게 마슬로바에 관해서 물었다. 간수는 잠깐 조사해 봤더니 마슬로바는 지금 병 원에 있다고 대답했다. 네플류도프는 병원으로 갔다. 병원의 수위는 마음씨가 좋아 보이는 노인으로서 곧 그를 안으로 들여 보내고, 누구를 만나고 싶으냐고 물은 다음 소아과 병실 쪽으로 안내해 주었다. 온몸에 소독약 냄새가 밴 젊은 의사가 복도에 있는 네플류도프에게 오면서 무슨 일로 왔 느냐고 딱딱하게 물었다. 이 의사는 죄수들에게 관대하게 대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간수들 이나 심지어 병원장하고도 자주 불쾌한 충돌을 일으키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네플류도프가 무슨 규정에 어긋난 부탁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또 누구를 위해서도 예외적인 일 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짐짓 화난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여긴 여자라곤 없습니다. 소아과 병실이니까요." 의사가 말했다.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감옥에서 넘어와 간호사 겸 잡역부로 일하는 여자가 있을 텐데 요." "네, 그런 여자가 둘 있는데, 누굴 찾으시는데요?" "나는 그 중의 마슬로바라는 여자와 가까운 사이입니다." 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잠깐 만나고 싶습니다만, 나는 그 여자의 사건에 대해서 상소하기 위해 지금 페테르부르 크로 갈 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좀 전해 주고 싶은데요. 사진입니다." 하고 네플류도프는 호주머니에서 봉투 한 장을 꺼내면서 말했다. "좋습니다, 그런 것쯤은." 의사는 부드러운 태도로 이렇게 말하고, 하얀 에이프런을 두른 노파에게 간호사로 있는 여죄수 마슬로바를 불러오라고 했다. "여기 앉으시든지, 그렇잖으면 응접실에 가서 기다리시지요." "감사합니다." 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러고 나서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 준 의사의 태도를 보고, 병원에서 마슬로바의 평판이 어떠냐고 물었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전의 그 여자의 환경을 생각하면 지금은 일을 잘하고 있는 편입니 다." 하고 의사는 말했다. "저기 오는군요." 한쪽 방문으로 늙은 간호사가 들어오고, 뒤따라 줄무늬 옷 위에 하얀 에이프런을 두른 마 슬로바의 모습이 나타났다. 머리에는 스카프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네플류도프를 보자 얼굴 을 붉히면서 망설이듯 발을 멈칫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내리깔고는 양탄자가 깔린 복 도를 재빠르게 걸어 네플류도프에게 왔다. 그녀는 그의 옆에 와서도 처음에는 선뜻 손을 내 밀지 않다가 잠시 후 손을 내밀더니 한층 더 얼굴을 붉혔다. 네플류도프는 그녀가 감정을 폭발했던 것을 사과한 이후 통 만나지 않았으므로 그는 지금도 그때와 같은 심정의 마슬로 바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그녀는 아주 딴판이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뭔가 새로운 것이 서려 있었다. 수줍으면서도 무언가 억제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그러면서도 그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듯 한 데가 있었다. 그는 마슬로바에게 의사에게 한 말과 똑같은 말을 하고, 페테르부르크로 가 겠노라고 말한 다음, 파노보에서 가져온 사진이 들어 있는 봉투를 내주었다. "이것은 파노브에서 찾은 옛날 사진인데, 기뻐할 것 같아서... 받아두도록 해요." 그녀는 깜짝 놀란 듯이 까만 눈썹을 약간 치켜올리고는 그 흘기는 듯한 눈초리로 그를 바 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왜 이런 것을 주느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봉투를 받아 에이프런 속에 집어넣었다. "거기서 당신의 이모님을 만났었소."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그러셨어요?" 그녀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여긴 괜찮소?" "괜찮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고생스럽지 않소?" "네, 별로. 아직 익숙하지는 못하지만요."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소. 아무래도 거기보다는 나을 테니까." "거기라니, 어디 말씀이세요?"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말했다. "저기 감옥 말이오." 네플류도프는 당황해서 얼른 대답했다. "어떤 점이 좋단 말씀이세요?" 그녀는 물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거기 있는 사람들보다 나을 것 같아서 말이오. 거기 있는 사람들 같 은 사람들이 있을라고." "거기에도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메니쇼프 모자의 사건도 힘써 보았는데, 아마 석방될 것 같소."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 다. "제발 그렇게 됐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참 보기 드문 좋은 할머니예요." 그녀는 항상 그 노파의 말ㅇ르 할 때마다 하는 칭찬을 되풀이하면서 살며시 미소를 띠었 다. "나는 오늘부터 페레르부르크로 출발하오. 당신 문제는 곧 재심이 있겠지만, 제발 판결이 취소되었으면 좋겠소." "취소되든 말든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말했다. "이제는 마찬가지라니 어째서?" "그건..." 그녀는 무엇인가 물어 보려는 듯 그를 힐끔 바라보고 이렇게 대답했다. 네플류도프는 그 말과 그 눈초리를 이렇게 해석했다. 그녀는 네플류도프가 아직도 자기의 결심대로 실행을 할 것이지, 아니면 그녀의 거절을 받아들여 그의 결심을 변경시켰는지 알 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왜 당신이 마찬가지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말했다. "그러나 당신이 무죄가 되건 유죄가 되건 나에게 있어서는 마찬가지요. 그 어느 쪽이 되든 내가 말한 대로 할 각오요." 그는 딱 잘라서 말했다. 그녀는 머리를 들었다. 까만 사팔눈으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옆으로 올리기도 했지만, 그녀의 얼굴 가득히 기쁨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눈이 말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반대의 말을 했다. "그런 말씀은 하셔도 소용이 없어요." 그녀는 말했다. "당신에게 알려 주고 싶어서 그렇소." "그 이야기는 이제 끝난 것이니까 새삼스럽게 하실 필요 없어요." 그녀는 간신히 미소를 숨기면서 말했다. 병실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아이들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저를 부르고 있나봐요." 그녀는 불안스러운 듯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자, 그럼." 그는 말했다. 그녀는 네플류도프가 내민 손을 짐짓 못 본 체하고 돌아섰다. 그러고는 표정을 감추려 애 쓰면서 빠른 걸음으로 양탄자가 깔린 복도 위를 사뿐사뿐 걸어갔다. '도대체 그녀의 마음속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을까? 그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나를 떠보려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인 가?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없거나, 아니면 하기 싫은 것일까? 기분은 좀 풀 어진 것일까? 그렇잖으면 더욱 원망하고 있단 말인가?' 네플류도프는 자문해 보았으나, 그 에 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그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변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영혼 속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변화로 인 해서 그는 그녀와 결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변화를 일으켜주신 하느님과도 연결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결합은 그를 기쁜 환희와 겸손한 감정으로 이끌어 주었다. 마슬로바는 여덟 개의 소아용 침대가 놓여있는 병실로 돌아오자,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침대를 정리하기 시작했으나, 시트를 들고 너무 몸을 뒤로 젖혔기 때문에 하마터면 미끄러 져 넘어질 뻔했다. 목에 붕대를 감은 회복기에 있는 사내아이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마 슬로바도 참을 수 없어서 침대에 걸터앉으며 큰 소리로 웃어 댔기 때문에 여러 아이들도 그 녀를 따라 '와아'하고 웃어 댔다. 간호사는 화를 내며 그녀를 나무랐다. "어쩌자고 그렇게 깔깔거리는 거야? 여태까지 있던 곳에 되돌아갈 테냐? 어서 저녁 식사 나 가지고 와요." 마슬로바는 웃음을 거두고 식기를 가지고 가라는 장소로 나가려다 목에 붕대를 감은 사내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또다시 '킥'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슬로바는 혼자 있게 되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봉투에서 사진을 꺼내 정신 없이 들여 다보곤 했다. 마슬로바는 일을 다 끝내고 밤이 되어 다른 잡역부와 함께 기거하는 방에 혼 자 있게 되면 사진을 꺼내서 여러 사람의 얼굴과 옷, 발코니와 계단, 그리고 자기와 네플류 도프, 두 고모의 얼굴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 되는 숲의 작은 부분까지 세세히 눈으로 핥 듯이 들여다보았다. 누렇게 퇴색된 그 사진은 오랫동안 꼼짝 않고 들여다보아도 도무지 싫 증이 나지 않았다. 특히 이마 언저리에 머리칼이 내려와 있는, 싱그럽고 아름다운 자기 얼굴 을 바라볼 때, 그녀는 황홀감을 느꼈다. 그녀는 너무 사진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료 잡역부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게 뭐니? 그분이 준 거야?"하고 뚱뚱하고 착해보이는 잡역부가 사진을 들여다보며 물 었다. "이게 너야?" "나 아니면 누구겠어?" 마슬로바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동료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 사람은 누구? 그분? 이것이 그의 어머니겠네?" "고모야. 정말 날 못 알아보겠니?" 마슬로바가 물었다. "어떻게 아니? 정말 모르겠어 얘, 전연 딴 얼굴인데. 이건 한 10년쯤의 사진이잖아!" "10년이 다 뭐야, 한평생도 더 지났는걸."하고 마슬로바는 말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밝던 표정이 사라지고 얼굴에 침울한 빛이 감돌면서 양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렇지만, 생활은 편했을 테지?" "편했고말고!" 마슬로바는 눈을 감고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그러나 감옥보다는 못했 어." "어째서 그래?" "어째서라니" 밤 8시부터 아침 4시까지, 그것도 매일 밤일걸." "그럼 왜 그만두지 않고?" "그만두려고 생각은 해도 그렇게 안돼. 다 쓸데없는 짓이야!"하고 마슬로바는 외치더니 벌 떡 일어나 사진을 테이블 서랍 속에 집어넣고는, 분한 듯 눈물을 삼키면서 문을 쾅 닫고 복 도로 뛰쳐나갔다. 사진을 보고 있는 동안 그녀는 거기 찍혀 닜던 시절의 자기로 돌아간 것 같아서 그 당시의 행복했던 일들, 그리고 앞으로도 그와 결혼하면 행복해지겠거니 하고 공 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친구가 한 한 마디는 현재의 자기 모습과 옛날 그곳에 있었 을 때의 자기 모습을 상기시켜 주었던 것이다. 당시 막연히 느끼고는 있었지만 굳이 생각하 지 않으리라고 하던 그 생활이 온갖 공포를 상기시켜 주었다. 이제 새삼스럽게 그 당시의 무서웠던 밤들이 생각났다. 그 중에서 사육제 날 밤 자기를 빼내 주겠다고 약속한 대학생들 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일이 생각났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술에 얼룩이 지고 가 슴이 넓게 노출된 진홍빛 비단옷을 입고, 흐트러진 머리에 빨간 리본을 달고, 그녀는 새벽 2 시경에야 손님을 다 보내고 술에 취해 지쳐서 춤을 추다 잠깐 쉬는 사이에, 바이올린의 반 주를 하는 비쩍 마른 부스럼투성이 여자 피아니스트를 붙잡고 신세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자기도 괴로워서 견디지 못하겠으므로 생활을 바꾸어 봤으면 좋겠다고 말 했다. 때마침 클라라가 와서 세 사람은 이런 생활을 집어 치우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 오늘 밤으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제각기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뜻하지 않게 현관에서 취한 손님들의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이올린이 '전주곡'을 켜기 시작하고, 피아 노 반주자가 카드릴의 제 1절의 경쾌한 러시아 민요를 피아노로 반주하기 시작했다. 연미복에 흰 넥타이를 맨 한 남자가 만취되어 술냄새를 풍기며, 딸꾹질까지 하면서 마슬로바를 잡아 끌었다. 역시 연미복을 입고 턱수염을 기른 뚱뚱한 또 한 사람이 클라라를 끌어안았다. 그리 고는 한참 동안 빙글빙글 돌며, 떠들며 뛰며 마셨다. 이렇게 해서 1년이 지나고, 2년, 3년이 지났다. 그 동안 왜 그런 생활을 바꾸지 않았을까! 이것은 모두 그 사람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녀의 마음속에서 다시금 그에 대한 원망스럽던 옛 생각이 홀연히 고개를 쳐들고 일어났다. 그녀는 그를 욕하고 책망해 주고 싶었다. 오늘 그를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의 뱃 속 을 환히 알고 있으니까, 당신 마음대로 되진 않을 거예요, 옛날에는 육체적으로 나를 마음대 로 했겠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예요, 자기의 관대함을 표시하는 도구로 삼 으려는 건 어림없는 일이에요'하고 다시 한 번 똑똑히 말해 주었어야 했는데 그 기회를 놓 친 게 분했다. 이같이 자신을 가련하게 생각하고 네플류도프를 부질없이 원망하는 마음을 씻어 버리기 위해 그녀는 술을 마시고 싶었다. 여기가 만약 감옥이었다면, 그녀는 자기의 맹 세를 어기고 술을 마셨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여기서 술을 구하려면 조수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으나, 그녀는 이 조수를 두려워했다. 그것은 그가 줄곧 그녀에게 지분거렸기 때 문이었다. 남자들과의 관계라면 이제 진저리가 났다. 오랫동안 복도의 의자에 앉아 있다가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친구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자기의 망쳐진 생애 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울었다. 14 네플류도프는 페레르부르크에 세 가지 용무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마슬로바에 관한 대 심원 상소였으며, 다음은 청원위원회에 제출해야 할 페도샤비류코바의 사건이었고, 마지막의 하나  베라 보고두호프스카야에게서 의뢰받은, 슈스토바의 석방을 헌병대 본부 또는 제 3 부에 신청하는 일과, 그리고 역시 베라 보고두호프스카야에게 서면으로 의뢰받은 요새 감옥 에 있는 청년에 대한 그 어머니의 면회를 신청하는 일이었다. 이 마지막 두 건을 그는 제 3 의 용건으로 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용건은 복음서를 읽고 해설했다는 이유만으 로 가족과 헤어져 카프카스 지방을 유형된 분리파 신도들의 이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을 위해서 보다도 자가 자신을 위해서 가능한 한 전력을 다해 명백히 밝히겠다고 결심했다. 최근 마슬레니코프를 방문한 이후, 특히 시골을 다녀온 후부터 네플류도프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을 해서가 아니라 이제까지 자기가 생활해 온 상류 사회를 마음속으로 혐오하 게 되었다. 그것은 소수의 편의와 만족에 대한 보장 뒤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 같은 고통 이 갖은 수단으로 숨겨져 있는 사화여서, 이 사회의 사람들은 이 같은 고통을 보려고 하지 도 않을뿐더러 볼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자기네의 생활이 얼마나 잔인하고 죄악에 가 치가 있는가를 책망하는 마음이 없이는, 이 사회의 사람들 속에 끼여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 러나 지난날의 생활 습관과 친척 관계, 그리고 친구관계에 끌려 이 사회와 손을 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를 그런 사회로 이끌어들이는 가장 큰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현재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유일한 관심사, 그러니까 마슬로바를 비롯하여 그가 도와 주고 싶은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존경은커녕 때로는 혐오와 경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싫더라도 그런 사회의 사람들에게 원조와 호의를 청하지 않으면 안되겠기 때 문이었다. 페레르부르크에 도착한 그는 큰이모이자 전 국무장관 부인인 챠르스카야백작 부인의 집에 여장을 풀고, 그렇게도 자기와는 인연이 멀다고 생각되던 귀족 사회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그에겐 그것이 불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모 집에 머물지 않고 호텔에라도 가면 이모를 모욕하는 것이 되었다. 더욱이 이모는 발이 넓기 때문에 이제부터 운동하려고 하는 사건에 대해서도 다시 없는 힘이 되어 줄 사람이었다. "네 소문은 만힝 듣고 있다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정말 이산한 소문이더구나." 카테 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그가 도착하자 커피를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주 하원드가 됐다더구나. 죄인을 도와서 감옥을 돌아다니며 개혁을 하고 다니다니..."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떠냐, 좋은 일인데. 그런데 거기에 소설 같은 사연이 있다면서? 말해보려무나." 네플류도프는 자기와 마슬로바와의 관계를 모두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래, 생각난다. 네가 고모 집에 가 있었을 때, 불쌍한 엘렌(네플류도프의 어머니)이 그 비슷한 얘기를 했었어. 네 고모들은 널 그 양녀하고 결혼시키려고 했었지(카테리나 이바노 브나 백작 부인은 네플류도프의 고모인 두 자매를 항상 경멸하고 있었다). 그래, 그 처녀였 구나. 지금도 그렇게 예쁘냐?"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이모는 60세의 노부인이긴 했지만 아직도 건강하고 쾌활하고 정력이 넘치는 여자였다. 키가 크고 뚱뚱했고 윗입술 언저리에는 거무스름한 잔털이 나 있었다. 네 플류도프는 이 이모를 좋아해서 어릴 적부터 이모의 정열적인 활동과 쾌활한 성격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아닙니다, 이모님. 그것은 모두 옛날 이야기입니다. 저는 다만 그 여자를 도와 주고 싶을 따름입니다. 첫째로 그녀는 아무 죄도 없이 유죄 판결을 받았어요. 그 점에 있어서는 저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녀의 운명 전체에 있어서도 역시 저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서라면 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해줄 의무가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들은 이야기로는 네가 그 여자와 결혼할 생각이라면서?" "네, 그러고 싶습니다만, 그 여자는 원하질 않습니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얼굴을 앞으로 내밀고 눈을 내리깔고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없 이 조카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표정이 변하더니 만족스러운 기색이 되었다. "그래, 그 여자는 너보다 영리하구나. 정말 넌 어쩌면 그렇게 바보냐? 넌 진심으로 그 여 자와 결혼하겠다는 거냐?" "물론입니다." "그런 데 있던 여자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게 다 제 죄니까요." "아니, 너 정말 철부지로구나!"하고 이모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넌 정말 철부 지야. 하기야 그런 철부지이기 때문에 넌 널 좋아하지만 말이다." 그녀는 이 철부지라는 말 이 자신이 생각해도 조카의 정신적 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해 준 말로 여겨졌던 모양인지 그 말을 되풀이했다. "아, 그렇지. 참 좋은 수가 있다."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알린이라는 사람이 창녀 갱생원을 경영하고 있는데, 나도 한번 가 보았다. 그러나 알린은 그 일에다 심 신을 다 바치고 있거든. 그러니 너의 그 여자를 알린한테 맡기면 어떻겠니? 그런 여자들을 올바르게 만들어 줄 사람은 알린밖에 없을 거야." "그렇지만 그 여자는 징역을 선고받았어요. 그래서 저 그 선고의 취소 운동 때문에 여기 온 것입니다. 이것이 이모님께 부탁하고 싶은 첫째 용건입니다." "그랬구나! 그 여자의 사건은 어디서 맡고 있지?" "대심원입니다." "대심원? 그래 대심원에 내 사촌 레부시카가 있긴 한데. 하지만 그 사람은 상훈국에어서 말이야. 글세 그쪽에는 아는 사람이 없군 그래. 그쪽은 독일 사람들뿐이라서, '게'라든가, ' 페' 라든가, '데'라든가 하는 첫 글자가 붙은 사람이 아니면, 이바노프, 세묘노프, 니키티치라 든 가, 또는 이바넨코, 시모넨코, 니키첸코라든가 하는 이상한 이름의 사람들뿐이야. 모두 딴 사 회의 사람들이지. 하여튼 이모부한테 얘기해 보마. 너의 이모부는 여러 방면의 사람들을 알 고 있으니까. 그러나 자세한 건 네가 설명하도록 해라. 내 얘기라면 언제나 잘 알아 듣지 못 하니까 말이야.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이모부는 모르다고만 하니 말이야. 항상 판에 박힌 대 답이란다. 남은 다 알아듣는데, 그분만은 모른다는 거야 글세." 이 때 긴 양말을 신은 하인이 은쟁반 위에 편지를 얹어 가지고 들어왔다. "마침 알린한테서 왔구나! 너도 키제베테르의 얘기를 들을 수 있겠다." "누굽니까, 키제라베티르란 사람은?" "키제베테르 말이냐? 오늘 밤 보려므나.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거다. 그 사람의 설교만 듣고 있으면 아무리 흉악한 범인이라도 무릎을 꿇고 울면서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단다." 백작 부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이상하게도 그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기독교의 본질은 속죄에 있다고 생각하는 교의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녀는 그 당시 유행하고 있던 교의를 전도하는 모임에 빠짐없이 나가기도 하고, 또한 자기 집으로 신자들을 불러오기도했다. 이 교의에 의할 것 같으면, 모든 의식과 성상은 물론 일체의 성례까지 부정해야 했는데 그러면 서도 백작 부인의 집에는 어느 방이나, 심지어 침대의 위에까지 성상을 걸어놓고 있었다. 그 러면서도 그녀는 아무 모순도 느끼지 않고 교회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충실히 l행하고 있었 다. "그러니 너의 막달레나(회개한 매춘부)도 그분의 설교를 들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틀림없 이 개심할 거야."하고 백작 부인은 말했다. "오늘 밤에는 꼭 집에 있도록 해라. 그분의 얘기 좀 들어 보라고. 참 훌륭한 분이란다." "별로 흥미가 없는데요. 이모님." "틀림없이 재미있을 거야. 그러니까 꼭 참석하도록 해라. 그리고 또 무슨 부탁이 있니? 아 주 털어놓고 말해보렴." "또 하나는 요새 감옥의 일입니다만." "요새 감옥? 아, 거기라면 크리스무트 남작에게 소개장을 써 주지. 부탁할 만한 문이야. 너도 알 거다. 네 아버지와는 절친한 친구였으니까. 강신술에 빠져 있었지만, 뭐 그런 건 아 무것도 아니다. 착한 사람이지. 그래 거긴무슨 용건이지?" "거기 수가되어 있는 청년에게, 그의 어머니를 면회시켜 주도록 부탁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듣기엔 그건 크리그스무트 남작의 관할이 아니라, 제르뱐스키의 관할이라고 하더군요." "체르뱐스키라는 사람은 싫지만, 그는 마리에트의 남편이니까 그녀에게 부탁해도 되겠지. 날 위해서라면 그만한 일쯤 해줄 거야. 그녀는 참 친절한 여자거든." "그리고 또 한 여자의 일도 부탁드려야겠습니다. 벌써 여러 달 수감되어 있는데 그 이유 를 모르고 있어요." "아니, 그럴 수야 있나? 이유는 그 여자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텐데. 난 그런 여자들을 잘 알고 있어. 그런 단발녀(허무주의를 지향하는 여자들을 뜻함)들에겐 당연한 일이지." "당연한 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요, 여하튼 고생하고 있으니까요. 이모님은 기독교 인이시고 복음서를 믿고 계시면서 그런 잔혹한..." "괜찮아. 복음서는 복음서고, 싫은 건 싫은 거니까. 난 그런 허무주의자, 특히 단발머리를 한 여자들은 아주 질색이거든.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체하는 것은 더 나쁘지 않겠니?" "어째서 그런 사람들이 질색이라는 말씀이시죠?" "그 3월 1일(알렉산더 2세가 암살된 날)의 사건이 있었는데도 그걸 묻니? 오히려 그런 걸 묻는 네가 이상하구나." "그렇지만, 그런 여자들이 모두 3월 1일 사건의 참가자는 아니잖습니까?" "마찬가지야. 자기가 할 일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참견을 하는 거야? 그런 일은 여자가 할 일이 아니야." "그럼, 저 마리에트도 쓸데없는 일에 참견할지도 모르잖습니까?"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마리에트? 마리에트는 마리에트지. 그녀가 어떤 여자라는 건 하느님도 아실 거다. 그런데 할츄프키나라는 여자가 사람을 가르치려 드니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도와 주어야 할 사람과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쯤은 잘 알고 있단다." "그러나 농민들의 생활은 말이 아닙니다. 나는 얼마 전에 시골에 다녀왔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농민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배불리 먹을 수 없는데, 우리들 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으니 도대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네플류도프는 마 음이 좋은 이모에게 끌려서 무의식중에 품고 있던 것을 전부 털어놓고 말았다. "그럼, 나도 일을 부지런히 하고 아무것도 먹지 말기를 마라는 거냐?" "아닙니다. 이모님더러 잡수시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네플류도프는 웃으며 말했 다. "다만 같이 일하고 다같이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이모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 깔더니, 호기심에 찬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넌 제대로 죽지도 못하겠구나." 그녀가 말했다. "왜요?" "그 때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장군이 방으로 들어왔다. 이 사람이 카테리나 이바노 브나의 남편이며 전 국무장관인 차르스키 백작이었다. "여어, 드미트리, 잘 있었나?" 그는 말쑥하게 면도한 뺨을 내밀면서 말했다. "언제 왔니?" 그러고는 그는 가만히 아내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얘는 엉뚱한 이야기만 하고 있어요." 백작부인이 남편에게 말했다. "이 애가 나더러 냇가 에 가서 빨래를 하고, 감자나 먹으라지 안하요? 정말 철부지지 뭐예요." 그녀는 말을 바꾸었 다. "그건 그렇고 당신도 들으셨지요? 카멘스카야 부인이 몹시 낙심하고 있다고요. 생명이 위태롭다던데요."하고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다. "한번 가 보시는 게 어때요?" "그거 참 안됏군." 남편이 말했다. "그럼 이 애하고 가서 얘기나 하세요. 난 편지를 쓰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네플류도프가 응접실 앞방으로 나가자마자, q인은 그의 뒤에서 소리쳤다. "그럼 마리에트에게 편지를 쓸까?" "네, 이모님." "단발머리 여자에 관해서는 네가 써넣도록 여백을 남겨 두겠다. 마리에트는 남편에게 말 해 줄 것이고, 그럼 남편도 잘해 주겠지. 나를 언짢게 생각하지 말아라. 네가 걱정하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무슨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쩐지 마음에 안드는 것뿐이니까. 그런 사람들은 그대로 내버려두는 거야.! 그럼 다녀오렴. 저녁에는 꼭 와야한다. 키제베테르 씨의 설교가 있으니까, 함께 기도하자꾸나. 네가 반대하지 않는다면 네게도 반드시 보람이 있을 거다. 엘렌이나 너나 모두 이런 면에는 상당히 뒤떨어져 있으니까. 그럼 다녀오너라." 15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은 전 국무장관이었으며, 매우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의 젊은 시절부터 신념은 다름이 아니라 마치 새가 벌레를 먹고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 다니는 것이 천성인 것처럼 그 자신도 고급 요리사가 만든 고급 요리로 배를 채우고, 몸에 잘 맞는 값진 옷을 입고, 기분 좋고 빠른 준마를 타고 다니는 것 이 천성에 어울리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것이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지안흥면 안 돈다는 것 이었다. 더욱이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은 국고에서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으면 받을소록 좋 았고, 훈장도 다이아몬드가 박힌 것을 포함해서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으며, 남녀 누구나 신 분이 높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할 기회가 많으면 많을스록 좋다고 생각했었다. 이 같은 기본적인 신념에 비해 그 밖의 일체의 것은 이반 미하일로비치의 눈으로 볼 때 보잘것없고 흥미없는 것이었다. 이 신념에 따라서 이반 미하일로비치는 40년 동안 페테르부르크에서 생 활하고 활약한 나머지 국무장관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이 이 지위를 얻게 된 중요한 자질은, 첫째 공문서나 법률의 의미 를 잘 이해하고, 서툴렀지만 그럭저럭 서류를 초안할 수 있었으며, 철자법도 틀리지 않게 문 장을 쓸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둘째로는 풍채가 좋고, 때에 따라서는 의젓한 정도가 아니라 남이 근접할 수도 없을 만큼 위엄 있는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야비할만큼 비굴하게 아첨도 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셋째로, 그는 도덕적인 면이건 국가적인 면이건 일반적인 주의 원칙이라는 것이 전연 없었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누구에게나 찬성할 수 있 었고, 또한 필요에 따라서는 누구에게나 찬성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같이 행동하면서 그 는 줄곧 그의 체면을 유지해 갔고, 오직 뚜렷한 자가 당착을 보이지 않겠다는 데만 신경을 써왔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행동이 도덕적이거나, 부도덕적이거나, 또 자기 행동으로 해서 러시아 제국이나 전세계에 최대의 해악이 생기건 그런 것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국무장관이 되었을 때는 그의 세력권 내에 있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많은 사 람들과 측근자들이 있었는데, 일반 사람들과 바로 그 자신까지도 자기 자신이 자신이 지극 히 총명한 국가적 인물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한 세월이 지나가도 그는 이렇다 할 만한 일을 하지 못했고, 아무 수완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생존 경쟁의 법칙에 따라 그와 같이 서류나 작성하고 해석하는 것을 배운, 정견도 없는 무주의 무절제한 관리들에게 떠밀려 퇴직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가 똑똑한 인간이 아닐뿐더러 자존심만 강 할 뿐, 실상은 천박한 교양도 없는 다른 관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것을 깨닫고 있었으나, 이 사실이 해마다 막대한 국고금을 축내며 자기 예복에 다 는 새 장식품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확신을 조금도 흔들리게 하지는 않았다. 이 확신은 노무 강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를 반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 암아 일부는 은급이라는 형태로, 일부는 정부 최고 기관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그 박의 갖가 지 위원회의 회장이라는 자격으로 매년 수만 루블의 돈을 받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고맙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새로운 권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어깨와 바지에 새로운 몰 을 달고 연미복 밑에 새로운 술과 에나멜의 성장을 다는 자격을 획득한 것이었다. 이 때문 에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은 여러 방면에 연줄이 닿게 되었다.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은 네플류도프의 이야기를 옛날 부하들의 보고를 듣는 듯한 태도 로 듣고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그는 두 통의 편지를 써 주겠다고 말했다. 하나는 대 심원 상소국의 볼리프 앞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 사나이는 여러 가지 소문이 잇지만, 어쨌든 훌륭한 사람이다."하고 그는 말했다. "그 런데다가 내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라면 해줄거다."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이 준 또 한 통의 편지는 청원 위원회의 유력자 앞으로 보내는 것 이었다. 백작은 네플류도프가 말한 페도샤 비류코바 사건에 대해서 커다란 흥미를 가졌다. 네플류도프가 황후 폐하에게 청원서를 올릴 생각이라고 말했을 때, 사실 이 사건은 감동적 인 사건이므로 기회를 봐서 자기가 이야기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도 약속을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절차를 밟아서 청원서를 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 기회가 있어서 목요일의 소위원회가 소집된다든지 하면 그 자리에서 얘기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작이 써 준 두 통의 편지와 마리에트에게로 발길을 향했다. 그는 그녀를 처녀 시절 째 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귀족 가문에서 자라났으나, 처세술에 능 한 사람과 결혼을 했다. 그 남자에 대해서는 네플류도프도 좋지 못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 수백 수천의 정치범에게 냉혹하게 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 그의 큭별 한 직무가 되어 있을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금 네플류도프는 학대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학대하는 사람 측에 서지 않으면 암 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워졌다. 학대하 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그들 자신도 필시 모르고 있을 평소의 잔악한 처사를 몇 사람의 특정 한 인물에 대해서만이라도 다소 완화해 주기바란다는 식의 부탁을 함으로써 마치 그들의 행 위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케 되는 것이 못 견딜 지경이었다. 이런 경우 그는 항상 내적 불만 과 혼란 때문에 부탁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결국은 부탁하기로 결심하곤 했다. 그 자신은 마리에트와 남편에게서 쑥스럽고 치욕스러운 불쾌감을 맛본다 하더라도, 그 대신 독방에서 고생하는 불편한 여성이 석방되어, 그녀와 그의 친척들이 고민하지 않아도 좋게 될 것이라는 점이 중요했다. 이럴 때 그는, 이쪽에서는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를 친구로서 취급하는 사람들 틈에 의뢰자가 되는 것이 어딘지 거짓이 숨겨져 있 는 것 같아서 못 견딜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이 사회 속에서 이전의 습관의 괘도에 뛰어 들어가 이 서클을 지배하고 있는 경박하고 퇴폐적인 분위기 속에 자기도 모르게 동화되어 가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는 벌써 이것을 이모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의 집에서 체험했다. 오늘 아침에도 이모와 가장 진지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농담으로 빠져들어가고 말 았었다. 오랜만에 와서 보는 페테르부르크는 항상 그렇듯이 육체적으로는 자극을 주면서도 정신적 으로는 둔화시켜 버리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 곳은 모든 것이 깨끗하고 편리하고 설비가 잘되어 있었으며, 특히 사람들이 도덕적인 면에 무관심한 탓으로 생활이 유달리 안이하게 보였다. 단정하고 말쑥하며 겸손한 마부가 그를 태우고 역시 단정하고 말쑥하고 겸손한 순경 옆을 지나 단정하고 깨끗하게 물을 뿌린 포장길과 집들을 지나 마리에트가 살고 있는 운하 쪽에 자리잡은 집으로 그를 데려다 주었다. 현관의 주차장에는 눈을 가린 영국풍의 말 두필이 끄는 마차가 있었으며, 수염으로 뺨을 절반쯤이나 가린, 영국인 같은 제복을 입은 마부가 거만하게 채찍을 들고 마부석에 앉아 있 었다. 말쑥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문지기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곳에는 금몰이 달린 더 말쑥한 제복을 입은, 보기 좋게 턱수염을 기른 하인 한 사람과, 깨끗하게 새 정복을 입고 총검을 든 당직 사병이 서 있었다. "장군님의 면회는 사절입니다. 사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곧 외출하십니다." 네플류도프는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의 편지를 건네고, 명함을 꺼내어 방문객의 명부가 놓여 있는 테이블로 가서, 만나뵙지 못해 대단히 유감이라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때 하인이 층계 쪽으로 급히 달려가고 문지기는 현관으로 달려가더니 "준비!"하고 외쳤다. 당직 사병은 양손을 바지 솔기에 대고 부동 자세를 취했다. 당직 사병은 이러한 근엄한 태 도에 어울리지 않게 가벼운 총총걸음으로 층계를 내려오는 홀쭉하고 자그마한 귀부인을 눈 으로 배웅하고 있었다. 털이 달린 큼직한 모자를 쓰고, 검은 옷에 소매 없는 검은 외투를 걸치고 까만 장갑을 낀 마리에트는 얼굴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네플류도프를 보자, 베일을 치켜올리고 빛나는 눈동자의 귀여운 얼굴을 내밀면서,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머나,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공작님 아니세요?"하고 그녀는 쾌활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제 이름까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잘 알고 있어요. 전 동생과 둘이서 당신을 사모한 적도 있었는데요."하고 그녀는 프랑스 말로 말했다. "많이 변하셨군요. 마침 나가려던 참이어서 섭섭해요. 그렇지만 잠깐이라도 올 라가실까요?" 그녀는 망설이면서 발을 멈추며 말했다. 그녀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역시 안 되겠어요. 카멘스카야 댁의 영결식이 있어서. 그분은 몹시 상심하고 계세요." "카멘그카야란 누구시죠?" "어머, 모르세요? 구분의 자제분이 결투를 해서 죽었어요. 포겐하고 결투를 해서 죽었어 요. 외아들이었는데, 무서운 일이지요. 어머니께서 어찌나 상심하시는지..." "네,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럼 갔다 오겠어요. 내일이나 오늘 밤에 와 주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현관문을 향 해서 재빠르게 사뿐사뿐 걸어갔다. "오늘 밤에는 못 오겠습니다." 그는 그녀와 같이 현관으로 가면서 말했다. "실은 당신에게 좀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만." 현관에 대기하고 있는 밤색 말 한 쌍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데요?" "이겁니다. 이모님이 쓰신 편지인데 이 속에 다 쓰여 있습니다."하고 큼직하게 이름을 박 아 놓은 긴 봉투를 내밀면서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이것들을 일거 보시면 다 아실 수 있습 니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제가 남편의 일에 간섭하고 있는 줄 아실 거예요. 그 건 오해입니다. 전 그의 일에 참견할 수도 없거니와 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나 백작 부인 이나 당신을 위해서라면 이런 규칙을 깨뜨리겠어요, 대체 무슨 일인데요?" 까만 장갑을 낀 손으로 포켓을 뒤적이며 그녀가 말했다. "실은 요새 감옥에 어느 여자가 하나 수감되어 있는데, 그 여자는 병자인데다가 사건에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무엇인데요?" "슈스토바, 라지야 슈스토바입니다. 편지에 쓰여 있습니다." "잘 알았어요. 힘껏 노력해 보지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흙받이의 옻칠이 햇살을 받아 번쩍거리는, 푹신거리는, 푹신푹신한 깔개가 깔려 있는 사륜 마차에 사뿐히 올라타고는 파라 솔을 펼쳤다. 하인은 마부석에 올라앉아 마부에게 떠나라고 신호했다. 그 때 그녀가 파라솔 로 마부의 등을 치자, 윤기 있는 털에 미끈하게 생긴 말은 고삐가 당겨진 목을 움츠리고 날 씬한 다리로 제자리걸음을 시작했다. "꼭 오세요. 용건 없이 말씀이에요." 그녀는 스스로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고 의식하면 서, 빙긋이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러고는 마치 연극이 끝난 뒤 막을 내리듯이 베일을 내렸 다. "자, 가요." 그녀는 다시 파라솔로 마부를 툭쳤다. 네플류도프는 모자를 들었다. 순종의 밤색 말은 코를 벌름거리며 포장길을 발굽소리도 높 이 달려갔다. 마차는 가끔 울퉁불퉁한 길에 고무바퀴를 가볍게 퉁기며 신나게 달려갔다. 16 마리에트와 환한 미소를 생각하면서 네플류도프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주위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또다시 그 생활에 휩쓸려 들어갈 뻔했군.' 그는 자기가 존경하지 않는 사람의 비위를 맞추어야할 때마다 항상 일어나는 자기 분열과 의혹을 느끼면서 이렇게 생각 했다. 헛걸음치지 않으려고 어디를 먼저 가고 어디를 나중에 가야 하나를 생각한 끝에 네플 류도프는 먼저 대심원으로 가기로 했다. 대심원에서 사무실로 안내된 그는, 장엄한 실내에 서 단정하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많은 관리들을 볼 수 있었다. 마슬로바의 상소장은 수리가 외었으며, 이모부가 편지를 써 준 대심원 의원 볼리프에게 심리, 보고되도록 회부되었다고 관리들이 네플류도프에게 설명해 주었다. "대심원 회의는 이번 주에 있을 예정인데, 마슬로바의 사건은 이번 회의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청원하시면 이번 주 수요일 회의에 상정될 수는 있습니다."하고 한 사람이 말했다. 대심원 사무실에서 조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네플류도프는 또 다시 결투에 관 한 이야기와 카멘스키가 피살된 경위를 자세히 들었다.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페테르부르크 전체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사건의 전멀을 알게 되었다. 그 사건은 이러했다. 수명의 장고 들이 어느 술집에서 굴을 곁들여 술을 잔뜩 마시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카멘스키가 근 무하고 있는 연대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카멘스키는 그를 향해 거짓말쟁이라고 욕설을 퍼부 었다. 그러자 그는 카멘스키를 때렸다. 그 이튿날 결투가 벌어져 카멘스키는 복부에 총을 맞 고 두 시간 후 숨을 거두었다. 살해한 남자와 입회자들은 체포되어 영창에 들어갔으나 2주 일 후면 석방되리라고 했다. 대심원의 사무실에서 나온 네플류도프는 청원 위원회에 세력이 있는 보로비요프 남작을 찾아갔다. 그는 웅장한 관사에서 살고 있었다. 문지기와 하인은 면회일 외에는 남작을 만날 수 없으며, 더구나 오늘은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가셨고, 또 내일도 보고하러 가실 거라고 엄숙한 어조로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편지를 내주고 대심원 의원인 볼리프 한테로 갔다. 볼리프는 마침 아침식사를 끝내고, 여느 때와 같이 소화를 잘 시키기 위해 궐련을 피워 물고 방 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네플류도프를 맞아 주었다. 그는 자기의 이 특징을 높이 평 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이 특징으로 인해 자기가 원했던 지위를 얻었기 때문이 었다. 결국 결혼을 함으로써 1년에 1만 8천 루블의 수입이 있는 재산을 손에 넣었으며, 자기 노력으로써 대심원의 의원의 자리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빈틈없고 치밀한 사 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청렴한 기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청렴이라는 말은 그의 해석에 따르면, 사람들로부터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요구하는 일체의 일을 노예같이 실행하면서, 그 대신 여비라든가 보수라든가 대여금이라든가 하는 모 든 종류의 돈을 국고에서 받아내는 것은 별로 파렴치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전에 폴란 드의 어느 현의 지사로 있을 때 단행한 일이지만, 그 지방의 주민들이 자기 나라의 국민을 너무 많이 사랑하고 종교에 너무 충실하다고 해서 수백 명이나 되는 무고한 사람들을 파멸 시키고 재산을 몰수하고 유형에 처하거나 감금했는데, 그는 이것을 별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결하고 남자답고 애국적인 위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 욱이 자기에게 반한 아내와 처제의 재산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놓고도 파렴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의 가정은,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내와, 재산은 형부에게 빼앗기고 토지는 매각되고 돈은 형부 명의로 예금되어 있는 처제와 , 그리 고 얌전하고 어리벙벙하고 못생긴 딸로 구성되어 있었다. 딸은 괴롭고 외로운 생활을 보내 고 있었으며, 요즈음에는 복음서의 탐독과, 알링의 집이나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부인의 집에 서 열리는 모임에 나가 겨우 마음의 위안을 받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의 아들은 사람이 좋기는 했느나, 열다섯 살 때부터 턱수염을 기 로고 술을 마시며 방탕해지기 시작하여 스무 살이 되도록 학교 하나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 고, 못된 친구들하고 어울려 빚을 져서 아버지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이유 로 마침내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한번은 그의 아버지가 230루블의 빚을 갚아 주었고, 두 번째는 600루블의 빚을 갚아 주었다. 그 때 아들에게 이것이 마지막이니 개심하지 않으면 집에서 쫓아내어 부자간의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아들은 개심하기는 커녕 또 천 루블의 빚을 짊어진데다가 오히려 아버지에게 집에서 이렇게 사는 것은 고문을 받는 것 이나 마찬가지라고 대들었다. 그 때,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는 아들에게 어디든지 가버리 는 것이 좋겠다, 이제는 아비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 때부터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는 자기에게는 아들이 없는 것처럼 말해 왔으며, 가족들도 누구 하나 그의 앞 에서는 아들 이야기를 감히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는 가장 현명하 게 가정을 정리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볼리프는 상냥하면서도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면서 이것이 그의 평소의 버릇이었는데 다 른 사람들보다 탁월하다는 무의식적인 표현이었다 실내를 거닐던 걸음을 멈추고 네플류도프 와 인사를 한 다음, 편지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이리 앉으십시오. 죄송하지만 거닐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상의의 포켓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아담하고 정돈된 넓은 서재를 대각선으로 가볍게 걸으면서 말을 시작했다. "만나 서 정말 반갑습니다.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의 부탁은 될 수 있는 대로 힘을 써 보겠습니 다." 그는 재가 떨어지지 않도록 살며시 입에서 궐련을 떼고, 향기로운 파란 연기를 뿜으면 서 말했다. "네, 네 , 잘 알았습니다. 니즈니에서 첫 번 기선으로 가겠다는 말씀이시죠? 알고 있습니 다." 언제나 남의 말을 듣기도 전에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는 거만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 했다. "피고의 이름은 무엇이지요?" "마슬로바..." 볼리프는 테이블로 다가가서, 다른 서류와 함께 철해 둔 서류를 뽑아 들여다보았다. "아, 그렇군, 마슬로바. 좋습니다. 동료들에게 부탁해 놓겠습니다. 수요일에 이 사건을 심 리하겠습니다." "그러면 변호사한테 전보를 쳐도 되겠습니까?" "변호사에게 의뢰하셨나요?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그야 원하신다면 상관없습니다만." "상소의 이유가 허술한 것 같아서 말씀입니다."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그러나 이 사 건에 관한 선고는 오해에서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글쎄올시다. 그러나 대심원에서 꼭 사건의 본질을 심리한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하고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는 담뱃재를 바라보면서 엄숙한 투로 말했다. "대심원은 다만 법의 적용과 그 해석이 올바른가를 조사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예외라고 생각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무슨 사건이든 모두 예외적인 것이니까요. 우리들은 당연히 해야할 일은 꼭 합니다. 그것뿐입니다." 담뱃재는 아직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곧 떨어질 상태 에 있었다. "페레부르크에는 자주 오지 않으십니까?" 볼리프는 재가 떨어지지 않도록 궐련 을 들면서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도 담뱃재는 풀풀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볼리프는 가만히 재떨이로 가서 털었다. "카멘스키의 사건은 참 끔찍한 일입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그는 훌륭한 청년이었습니다. 게다가 외아들이었죠. 그의 어머니의 심정이란 말할 것도 없었을 겁니다." 그는 그 당시 페테르부르크에서 떠돌아다니던 카멘스키의 이야기를 중얼거리고 있 었다. 그리고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의 일과 부인이 열중하고 있는 새로운 종교적 경향 에 대해서 말한 다음,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자신은 그것에 대해 비난도 찬성도 하지 않 았지만, 그의 태도로 볼 때 그 종교는 그에겐 쓸데없는 것이었다. 그는 벨을 눌렀다. 네플류도프는 일어섯 작별인사를 했다. "시간이 있으시면 저녁 식사나 드시러 오십시오." 볼리프는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수요 일리면 좋겠군요. 그 때는 확실한 대답을 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이미 시간이 늦었으므로 네플류도프는 곧장 마차를 타고 이모네 집을 향해 달려갔다. 17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의 집에서는 7시 반에 저녁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식사는 네플류도프가 일찍이 보지 못한 색다른 방식으로 행해졌다. 요리를 식탁 위에 차 려 놓으면 하인들은 곧 물러가 버리므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가 요리를 날라 다 먹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자들은 부인들에게 쓸데없는 수고를 끼치지 않으려고, 또 여자 들보다 힘이 센 남성으로서의 남성다운 모든 수고를 도맡아 하면서, 부인들에게 음식을 날 라다 주기도 하고 자기네들도 먹고 마시는 것이었다. 백작 부인은 접시 하나가 비게 되면 벨을 눌렀다. 그러면 하인들은 소리도 없이 들어와 재빨리 치우고 다른 접시와 바꾸어 놓고 나서 요리를 날라왔다. 요리도 퍽 맛이 좋았지만, 술도 손색이 없었다. 밝고 넓은 부엌에서 는 프랑스인 요리장이 휜 옷을 입은 조수 두 명을 거느리고 일하고 있었다. 식탁에 둘러앉 은 사람은 모두 6명이었다. 백작 부처, 팔꿈치를 식탁에 괴고 있는 무뚝뚝한 근위장교인 아 들, 네플류도프, 가정 교사인 프랑스 여인, 그리고 시골에서 올라온 백작가의 총지배인이었 다. 여기서도 결투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황제가 어떤 태도로 나 올 것인지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황제가 피살된 청년의 어머니에 대해서 깊은 동정을 베푸셨음을 알자 그들은 모두 그 어머니를 동정했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해서 동정은 했다 고 하더라도 황제가 군복의 명예를 지킨 가해자에 대해서 엄격하게 다스릴 의사가 없는 것 도 알려진 사실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군복의 명예를 지킨 가해자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다 만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만이 본래의 경솔한 성미대로 가해자를 비난했을 뿐이다. "그러면 앞으로도 술을 마시고 훌륭한 젊은이를 마구 쏘아 죽일 테죠. 나로서는 결코 용 서할 수 없어요."하고 그녀는 선언했다. "그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얘기로군."하고 백작이 말했다. "네, 그러시겠죠. 당신은 언제든지 내 말을 못 알아들으시니까요."백작 부인은 네플류도프 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남들은 다 알아 주는데, 남편만은 몰라 준단다. 나는 그 어머니 가 불쌍해. 사람을 죽이고도 태연하다는 건 싫어." 이 때 여지껏 잠자코 있던 아들이 가해자의 편을 들면서, 장교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 으며 또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연대에서 쫓겨났을 것이라고 하면서 어머니에게 제법 거칠게 대들었다. 네플류도프는 대화 속에 끼여들지 않고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남을 죽인 장교와 감옥에서 만난 적이 있는, 역시 결투를 해서 살 인한 탓으로 유형을 선고받은 젊고 잘 생긴 죄수를 자기도 모르게 비교해 보았다. 어느 쪽 이나 다 술취한 김에 저지른 살인이었다. 그런데 한쪽의 농부는 격분한 순간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아내와 가족, 그리고 친척과 헤어져서 쇠고랑을 차고 머리를 박박 깍이고 유형을 가 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쪽의 장교는 영창 안의 깨끗한 방에서 좋은 요리에 맛있는 술을 마 시고 책을 읽으면 내일 쯤은 석방되어 전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될 것이고, 더욱이 특별한 관 심의 대상이 되어 있다. 네플류도프는 자기가 느끼고 있는 바를 밖에 내고 말았다. 처음에는 백작 부인도 조카의 의견에 찬성을 하는 듯했으나 나중에는 곧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래서 네플류도프도 자기가 무슨 불쾌한 말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 날 밤 식사가 끝나고 얼마 안 되어, 넓은 홀에는 멋지게 조각이 된 높다란 등받이 의 자들이 마치 설교를 들을 때처럼 여러 줄로 놓여지고, 큰 테이블 앞에는 설교를 들으려고 모두 모여들었다. 현관에는 번듯한 값진 마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호화롭게 장식된 홀에는 비단과 비로드와 레이스로 성장하고 머리는 덧머리를 얹고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여맨 귀부인들이 앉아 있었 다. 부인들 틈에 군인과 문관이 자리잡고, 평민도 다섯 사람 2명의 문지기와 장사꾼, 그리고 하인과 마부가 섞여 있었다. 키제베테르는 희끗희끗한 머리에 체격이 우람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영어로 말하자, 코안 경을 쓴 젊고 빼빼마른 여자가 재치 있고 재빠르게 통역을 했다. 우리들의 죄는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 죄악에 대한 벌도 크며, 더욱이 그것은 피하기 어 려운 것이므로, 그 벌을 예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활에 생각을 돌려 봅시다. 그 리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 또 자비로운 하느님께 어 떻게 죄를 범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우 리는 용서받을 수 없고, 이를 피할 길도 없으며,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우리는 파멸하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하고 그는 울음섞인 떨리는 목소 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형제들이여, 어떻게 하면 이 무서운 재난으로부터 피할 수 있을까요? 이미 불길이 집을 둘러쌌으니 벗어날 길은 없습 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미 8년 동안 설교를 해 오면서 무척 마음에 드는 이 대목에 이르면, 그 때마다 틀림없이 목이 떨리고 코가 메어, 눈물이 더욱더 그를 감동시켰다. 방 안에는 흐느껴 우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백작 부인은 모자이크 된 테이블 곁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괸 채 살찐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마 부도 놀란 얼굴로 독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그의 마차채에 부딪치 게 되어도 비켜서려고 하지 않을 때 짓는 그런 표정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작 부 인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닮은 볼리프의 딸은 최신 유행의 의상을 입은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설교자는 갑자기 얼굴에서 두 손을 떼고, 배우들이 기쁜 표정을 지을 때처럼 미소를 지으 면서 달콤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원의 길은 있습니다. 그것은 쉽고도 기꺼운 길입니다. 그 구원이란, 우리를 위 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하느님의 독생자가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인 것입니다. 그 리스도의 고난,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우리들의 구원의 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하고 그 는 또다시 눈물어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는..." 네플류도프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쾌해져서 슬그머니 일어섰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수치스러운 생각을 간신히 억제하면서 발끝으로 걸어나와 자기 방으로 갔다. 18 이튿날 네플류도프가 옷을 갈아입고 아래로 내려가려고 할 때, 하인이 모스크바에서 온 변호사의 명함을 가져왔다. 변호사는 자기 용무도 겸해서 만일 마슬로바의 사건이 곧 가까 운 시일 안에 심리가 된다면, 대심원의 심리에도 출석하겠노라고 온 것이었다. 네플류도프가 친 전보는 그와 엇갈렸던 것이다. 네플류도프에게 마슬로바의 사건이 심리 되는 날짜와, 심의관 누구라는 것을 듣자, 변호사는 빙긋이 웃었다. 네플류도프가 친 전보는 그와 엇갈렸던 것이다. 네플류도프에게 마슬로바의 사건이 심리 되는 날짜와, 심의관이 두구라는 것을 듣자, 변호사는 빙긋이 웃었다. "그렇다면, 세 가지 타입의 심의원이 전부 모임 세이군요."하고 그는 말했다. "볼리프는 페테르부르크 형의 관리고, 스보코로드니코프는 학자형의 법률학자이며 베는 실제형의 법률 가입니다. "어쨌든 이 사람이 그 중에서 제일 수완가죠." 변호사는 말했다. "어쨌든 이 사람 이 제일 믿음직합니다. 그런데 청원 위원회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사실은 이제부터 보로비요프 남작을 방문할 참입니다. 어젠 만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보로비요프가 어떻게 남작이 됐는지 아십니까?" 네플류도프가 이 러시아적인 이 름에도 외국어의 칭호를 한데 붙여 우스꽝스럽게 부른 데 대해 대답하면서 변호사는 말했 다. "그것은 파벨 황제께서 무슨 포상으로 그의 조부에게 내려 준 것이지요. 그의 조부는 궁 중에서 하인들의 책임자로 있었는데 황제께서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를 남작으 로 임명하겠으니 불평들은 하지 말라고 했지요. 이렇게 해서 보로비요프 남작이 탄생한 겁 니다. 그는 이걸 여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지 않아요. 아주 교활한 늙은 여웁니다." "어디 그렇다면 그 사람한테 가 볼까요?" 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마침 잘됐습니다. 함께 가십시다. 제가 마차로 모셔다 드리지요." 두 사람이 출발하려고 나왔을 때, 하인이 옆방에서 마리에트로부터 온 편지를 들고 네플 류도프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저의 주의 주장을 버리고, 당신이 보호하고 계시는 사람을 위 해서 남편에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 여자분은 곧 석방될 것입니다. 남편이 요새 사령관에 게 편지를 보냈으니까요. 볼일이 없으셔도 놀러와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M "자, 어떻습니까?" 네플류도프는 변호사에게 말했다. "무서운 일이 아닙니까? 7개월 동안이나 독방에 갇혀 있던 여자가 아무 죄도 없다니, 그 것도 석방하는 데 단 한 마디면 되다니." "언제나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러나 어찌 됐든 당신이 바라시는 대로 된 셈이군요." "네, 하지만 이 성공은 도리어 통탄할 일입니다. 도데체 거기서는 무엇들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군요. 무엇 때문에 그 여자를 가두어 두었을까요?" "그런 일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럼 제가 태워다 드리면 어떨지?" 그들이 현관 앞으로 나왔을 때 변호사가 말했다. 변호사가 타고 온 훌륭한 마차가 현관으 로 다가왔다. "보로비요프 남작을 뵈러 가시는 거죠?" 변호사는 마부에게 행선지를 알려 주었다. 그 멋진 말들은 곧장 네플류도프를 남작 집으 로 데려갔다. 남작은 집에 있었다. 첫째 방에는 제복을 입은 젊은 관리 한 사람과 두 귀부인 이 있었다. 그 관리는 무척 기다란 목에 후골이 튀어나온 경쾌한 걸음걸이의 남자였다.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후골이 튀어나온 젊은 관리가 부인들로부터 경쾌한 걸음으로 네플류도프에게 걸어와서 정 중하게 물었다. 네플류도프는 자기 명함을 주었다. "남작께서도 공작님 말씀을 하시더군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젊은 관리는 문을 열고 한 방으로 들어가더니, 상복을 입고 울고 있던 부인을 데리고 나 왔다. 부인은 눈물을 감추기 위하여 앙상한 손으로 헝클어진 베일을 내렸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젊은 관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제 문으로 걸어가서 문을 열고 네플류도프를 향해서 말했다. 서재에 들어간 네플류도프는 프록 코트를 입고 머리를 짤막하게 깎은 중키의 몸집이 탄탄 한 남자와 마주쳤다. 그는 큼직한 사무용 테이블 옆 안락의자에 앉아서 즐거운 표정으로 앞 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 콧수염과 턱수염 속에서 유달리 불그fp하게 보이는 얼굴이 네플류 도프를 보자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당신의 어머님하고는 예로부터 잘 아는 친구였지요. 당 신도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있지요. 장교였을 때도 본 일이 있고요. 자 앉으십시오. 무슨 일인지 말씀하세요." 그는 네플류도프로부터 페도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짧게 깎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 다. "어서 이야기를 계속하세요. 잘 알았습니다. 그렇고말고요. 정말 동정할 만한 여자군요. 그 래, 청원서는 제출했나요?" "네, 청원서는 준비해 왔습니다만." 네플류도프는 호주머니에게 청원서를 꺼내면서 말했 다. "특히 각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이 사건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려 주셨으면 하는 것 입니다."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내가 직접 청원하겠습니다." 하고 남작은 유쾌한 얼굴에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동정의 빛을 띠면서 말했다. "정말 동정이 가는군요. 그녀는 아직 어렸으므로 남편이 너무 노골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싫어져서 반항을 한 게 분명합니다. 그 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좋습니다. 내가 직접 청원해 드리지요." "이반 미하일로비치 백작도 황후께 청원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네플류도프의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작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어쨌든 청원서를 사무소에 먼저 내도록 하십시오. 나도 힘닿는 데까지 해볼 테니까요." 그는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이 때 젊은 관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그는 자기의 걸음걸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 부인이 한 말씀만 더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래, 그럼 들여 보내요. 참 그 여잔 눈물도 많지. 그 눈물을 닦아 줄 수만 있다면 좋겠 는데, 어쨌든 되는 데까지 해볼 수밖에." 부인이 들어왔다. "아까 부탁드린다는 것을 잊었습니다만, 그이가 그 애를 다른 데로 보내지 않도록 해주세 요. 그렇지 않으면 그이가 무슨 짓을 할는지..." "그래서 해드리겠다고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남작님, 부탁입니다. 제발 이 어미를 살펴주시는 셈치시고..." 그녀는 남작의 손에 키스를 했다. "모든 일을 다 잘 알아서 하겠습니다." 부인이 밖으로 나가자, 네플류도프도 작별 인사를 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도와 드리겠습니다. 법무성에도 연락해 두겠습니다. 그 곳에서 회답이 오면, 그 때는 가능한 한 도와 드리겠습니다." 네플류도프는 서재를 나와 사무실 쪽으로 나왔다. 대심원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이 곳에서도 장엄한 건물 안에, 복장에서부터 말씨에 이르기까지 단정하고 겸손하고 엄격하 고 또렷또렷한 관리들을 많이 보았다. '많기도 하군. 모두 기름기가 흐르고, 깨끗한 셔츠와 손, 반짝이는 구두, 도대체 누가 이토 록 사치스러운 짓을 시키고 있을까? 이 사람들은 죄수들과 비교하면 말할 것도 없고, 농민 들에 비해서도 얼마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네플류도프는 무의식중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19 페레르부르크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는 인물은, 수많은 훈장을 가 지고 있으면서도 보통 때는 단춧구멍에다 백십자 훈장 외에는 아무것도 달지 않는 독일계 남작 출신의 노장군이었다. 숱한 세월에 걸쳐 많은 공적을 세웠으나 지금은 사람들로부터 망령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카프카스에 근무하고 있을 때, 그 곳에서 특별히 그를 예찬해 주는 이 십자 훈장을 탔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그가 머리를 짧게 깎고 군복을 입고 총검으로 무장된 러시아 농민을 지휘해서 자기네들의 자유와 집과 가족을 지키려던 천 명이 넘는 삶들을 학살한 공로로 받은 훈장과 제복에 달 장식을 받았던 것이다. 그 후 몇 군데에서 더 근무했지만, 지금은 늙고 쇠약했기 때문에 훌륭한 저택과 수당과 현재의 명예 로운 지위에 매달리게만 되었다. 그는 상부의 명령을 엄격히 이행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상부로의 명령에 그는 일종의 특별한 의의를 부여했기 때문에, 비록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변경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 명령만은 절대로 변경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직무란 정치범들을 요새 감옥의 독방에 감금해 두는 일이었는데, 10년 동안에 그들의 과반 수가 일부는 발광하고 일부는 폐병이거나 자살로 죽어가도록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 은 스스로 굶어 죽거나, 유리조각으로 동맥을 끊거나, 목을 매거나, 분신 자살을 하거나 했 다. 노장군은 그러한 일을 샅샅이 알고 있었다. 이런 사건들은, 마치 벼락이라든가 홍수같이 자연히 일어난 불행이 그의 양심을 동요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전혀 그의 양심에 영향을 주 지 못했다. 이러한 사건은 상부의 명령에 의해서, 즉 황제 폐하의 이름에 의해서 생기는 일 들이었다. 이러한 명령은 필연적으로 실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 만큼, 그 명령의 결과를 생각해 본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노장군은 그런 문제 따윈 애당초 생각해 보려고 하 지 않았다. 노장군은 자기가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직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 명령의 수행 을 조금이라도 소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런 것을 섣불리 생각하지 않는 편이 애국자로 서, 또한 군인으로서의 의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1주일에 한 번씩 노장군은 직무 규정에 따라서 모든 감방을 순찰하고 죄수들에게 무슨 소 망이 없느냐고 물었다. 죄수들은 가지가지의 청을 다 했다. 그는 그들의 말을 냉정하게 잠자 코 들어 주기는 했지만, 이제껏 단 한번도 실행에 옮겨본 일이 없었다. 그들의 요청은 하나 같이 모두 규칙에 어긋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네플류도프는 노장군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마침 종밭의 시계가 가냘픈 종소리로 신을 찬미하는 국가인 '하느님의 영광이 있을 때'를 울리고, 이어 2시를 쳤다. 이 종소리의 음악 을 들으며, 네플류도프는 불현 듯 전에 데카브리스트들의 수기에서 읽은 것을 상기했다. 매시간 되풀이되는 이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종신 징역수들의 마음에 어떻게 만향되었을까에 대해 서 쓴 것이었다. 네플류도프가 그 저택의 마차 대는 곳에서 내렸을 때, 노장군은 어두컴컴한 객실에서 자개를 박은 조그만 테이블 앞에 앉아, 자기 부하의 동생인 젊은 화가와 함께 접 시를 가지고 점을 치고 있었다. 화가의 가늘고 작은 손가락이 노장군의 뻣뻣하고 주름투성 이의, 뼈가 드러난 손가락과 서로 깍지를 끼고 있었다. 이 깍지낀 두 손의 알파벳을 써 놓은 종이 위에서 엎어 놓은 접시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접시는, '사자의 영혼의 죽은 뒤에 서 로 상대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하는, 장군이 낸 문제에 대답하고 있었다. 하인의 일을 맡아 보고 있는 사병이 네플류도프의 명함을 가지고 들어왔을 때는, 접시를 통해서 바야흐로 잔 다르크의 영혼이 말하고 있을 때였다. 잔 다르크의 영혼은 알파벳의 문 자를 한 자 한 자 이어서 '서로 상대를 식별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 대답이 종이에 쓰여 졌 다. 사병이 들어 왔을 때, 접시는 한번 P자 위에 멎었다가 O자 위로 갔다가, 다시 S자 위로 가서 멎더니 좌우로 뒤뚱거렸다. 접시가 흔들렸다. 왜냐하면, 장군의 생각에 의하면 다음 문 제는 당연히 L자여야 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잔 다르크가 영혼은 모든 지상의 것으로부터 자기를 정화시킨 후에 비로소 서로 식별하게 되었다든가, 혹은 그와 비슷한 대답을 해야 했 으므로 다음 문자는 반드시 L자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화가는 다음 글자는 반드시 V자여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화가는 영혼이 란 에테르체에서 나오는 빛에 의해서 서로 식별하게 되는 것이라고 대답하리라 예측하고 있 었던 것이다. 장군은 굵고 흰 눈썹을 한참 손을 보고 접시가 저절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면서 L자 쪽으로 접시를 끌어당겼다. 한편 핏기 없는 푸른 창백한 눈으로 객실의 어두운 한구석 을 바라보고 있다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떨면서 V자 쪽으로 접시를 끌어당겼다. 장군은 자기의 놀이를 방해한 데 대해서 미간을 찡그리더니 얼마 후에 명함을 집어들고 코안경을 썼다. 넓적한 허리가 아파서 신음 소리를 내며, 저린 손가락을 펴면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섰 다. "서재로 안내해." "각하, 나머지는 저 혼자 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화가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전 영혼이 거기 있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좋아, 혼자 해보게." 장군은 엄하고 결단적인 말투로 말한 다음, 다리를 쭉 뻗고 적당히 보조를 맞추면서 성큼 성큼 서재 쪽으로 걸어갔다. "잘 오셨소." 장군은 네플류도프에게 사무용 테이블 옆의 안락 의자를 권하면서 괄괄한 음성으로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페테르부르크에 온 지 오래 되셨소?" 네플류도프는 온 지 얼마 안 된다고 대답했다. "공작 부인인 당신 어머니께서도 건강하시오?" "어머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것 참 안되었군. 내 아들 녀석이 당신을 만났다고 하던데." 장군의 아들은 부친과 같은 출세길을 밟아 육군 대학을 나온 뒤 첩보국에 근무하고 있으 며, 거기서 맡은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가 맡고 있는 일은 첩보원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난 당신 아버지하고 같이 일하고 있었는데, 아주 가까운 사이였지. 그래 지금은 어디 나 가고 있소?" "아무데도 나가고 있지 않습니다." 장군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머리를 갸우뚱했다. "사실은 각하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좋소, 무슨 일이죠?" "만인 저의 부탁이 부당한 것이라면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지만 저로서는 청을 드리지 않 을 수 없습니다." "대체 무엇이오?" "각하, 이 곳 요새 감옥에 구르게비치라는 청년이 수감되어 있는데, 사실은 그의 어머니가 면회를 원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안 되면, 책이라도 차입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장군은 네플류도프의 청에 대해서, 만족한 빛도 보이지 않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뭇 생 각에 잠긴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실제는 네플류도프의 청원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 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심조차 없었다. 규칙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다만 머리를 쉬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은 당신도 알다시피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오." 잠깐 틈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면회에 관해서는 황제께서 정하신 규칙이 있으므로 그 규칙이 허용하는 범위라면 허가해 줄 수 있지. 그리고 책에 대해서는 영내에도 도서관이 있어서 허가된 책만을 볼 수 있고." "그렇지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학술 서적입니다. 공부하고 싶다고 하니까요." "그런 소릴 곧이들어선 안 되오." 장군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공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귀찮게 굴어 보겠다는 것뿐이니까." "그러나 괴로운 처지에 있으니까 시간을 보낼 무엇인가가 그에게 필요한 것입니다."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그들은 항상 불평만 늘어놓고 있소." 하고 장군은 반대했다. "그들의 일이라면 우린 샅샅이 알고 있단 말이오." 장군은 그들이 마치 무슨 불한당인것 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감옥에서 볼 수 없는 편의를 받고 있소."하고 장군 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는 변명이라도 하듯이, 수감자들이 받고 있는 편의를 하나하나 상세하게 늘어놓 았다. 마치 죄수들을 살기 좋고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데 이 감옥의 중요한 목적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사실 전에는 꽤 가혹하게 대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호강들을 하고 있지. 하루에 세 끼를 먹는데, 그 중 한 끼는 비프스테이크나 비프 커틀릿 따위의 고기 요리를 먹거든. 일 요일에는 그 밖에 더 좋은 일품 요리가 제공되고 말이오. 그래서 모든 러시아 국민이 이와 같은 식사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길 정도요." 장군은 딴 노인들과 똑같이, 일단 자기가 잘 알고 있는 화제가 나오게 되면 만족스러울 때까지 되풀이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죄수들이 버릇이 없고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을 증명하 기 위하여, 수없이 한 말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종교서적과 낡은 잡지도 주고 있소. 우리 도서관에는 서적들이 비치되 어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들은 좀처럼 읽지 않아. 처음에는 흥미를 느끼는 듯하지만, 곧 내 던지  새 책은 반밖에 읽지 않고 나머지는 페이지가 붙은 채로 그냥 남아 있지. 우리는 가 끔 시험을 해보는데 헌책은 아예 집어 본 흔적도 없단 말이오." 장군은 미소도 아닌 야릇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일부러 종이를 끼워 놓아 보기도 하지만 그대로 있거든.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글 쓰는 것까지 금하고 있지는 않소."하고 장군은 말을 이었다. "석판도 석필도 주고 있으니까. 무엇이든지 써서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도록 지우고 또 쓸 수가 있거든. 그런데도 역시 그들은 쓰지 않아. 그렇지만 그들은 곧 얌전해지지. 처음 얼마 동안은 떠들어 대지만, 좀 있으면 살도 찌고 몹시 조용해진다고." 장군은 자기가 하고 있는 말 속에 그 얼마나 무서운 의미가 내포되어 잇는지 조금도 의식을 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 다. 네플류도프는 그 늙은이의 쉬어빠진 목소리를 들으면서, 뼈가 앙상한 손과 발과 흰 눈썹 밑의 퀭한 눈과 군복 깃에 걸치다시피 하여 축 늘어진 면도질한 볼이며 잔인한 살육의 대가 로 받은, 유난히도 자랑거리로 알고 있는 그 십자 훈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 을 반박하거나, 그의 말의 의미를 설명해 주어도, 도무지 무익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일에 대해서 용기를 내어 물었다. 오늘 아침 석방 명령이 나왔다는 소식 을 들은 슈스토바라는 여죄수의 일이었다. "슈스토바? 슈스토바라... 그들의 이름을 낱낱이 외고 있을 수도 없지. 하도 많으니까." 그 는 죄수가 너무 많은 것도 그들의 탓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리고 벨을 눌러 서기를 불러 오라고 일렀다. 서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정직하고 결백한 사람은 특히 황제를 위해서, 또 '조국을 위 해서' 필요하다고 말하고, 은연중에 자기도 그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그러면서 네플류도프도 봉직하라고 권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긴 했으나, '조국'이라는 말은 곁다리 로 붙인 말에 지나지 않음이 명백했다. "나는 이렇게 늙기는 했지만 힘껏 일하고 있소." 마침내 불려온 서기는 영리해 보이면서도 불안한 눈초리를 하고 있었는데, 말라서 바삭바 삭 소리가 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나이로서 그는 슈스토바가 어딘가 이상한 요새에 갇혀 있으며 명령서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명령서가 오기만 하면 그 날로 석방될 거요. 우리는 그들을 붙잡아 두지 않소. 남아 있다 고 해서 고마울 게 조금도 없으니까."하고 장군은 말하면서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고 했으나, 늙은 얼굴을 찡그리게 할 따름이었다. 네플류도프는 이 무서운 노인에 대해서 느낀 혐오와 연민이 뒤섞인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 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은 노인대로 틀림없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 는 이 경박한 청년, 자기의 옛 친구의 아들에 대해서 너무 엄격하게 다루어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마디의 훈계도 없이 그대로 보내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럼 잘 가요. 그러나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오. 나는 당신을 아끼는 마음에서 얘기 하는 것이니까. 여기 감금되어 있는 무리들과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오. 죄가 없는 자라곤 없으니까. 그들은 하나같이 다시 없는 부도덕한 자들뿐이오. 우리들은 그들을 잘 알고 있 지."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는 듯이 그는 말했다. 사실 그는 이 점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 그대로라는 것이 아니라, 만일 그것이 사시로가 어긋난다면 자기 자신 마음껏 훌륭한 생활을 누려 온, 존경을 받을 만한 영웅이 아니라 젊을 때부터 자 기 양심을 팔아 왔고, 늙어서까지 계속 팔고 있는 악덕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가 자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봉직을 해야지."하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황제께서는 성실한 인간을 필요로 하시니까. 또 조국을 위해서도."하고 그는 덧붙였다. "가령 나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당신처럼 봉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소? 도대체 누가 남겠느냔 말야? 그냥 제도를 비판만 하고 정부를 도우려고 하지 않는다면..." 네플류도프는 깊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면서, 너그럽게 내민, 뼈만 앙상 한 큼직한 손과 악수하곤 방을 나왔다. 장군은 불만스러운 듯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곤 허리를 문지르면서 다시 객실로 갔다. 객 실에는 아까 그 화가가 잔 다르크의 영혼에서 얻은 회답을 써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장군은 코안경을 쓰고 읽었다. '영혼이 서로 상대를 식별하는 것은 그 에테르체에서 발산하는 빛에 의한다.' "허!" 장군은 눈을 감고 감탄해 마지 않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어느 영혼의 빛도 똑같다면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그는 이렇게 묻고, 또 화 가의 손가락을 맞끼고 테이블에 앉았다. 네플류도프의 마차는 문을 나섰다. "거긴 무척 따분한 곳이죠, 나리." 마부는 네플류도프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기다리다 못해 가버릴까 했습죠." "사실이야. 참 지리한 곳이야." 네플류도프는 심호흡을 하면서 연기와도 같이 흘러가는 하 늘의 구름과 보트와 기선이 지나간 뒤에 남은 네바 강의 반짝반짝 빛나는 물결을 바라보며 마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 20 이튿날 마슬로바의 사건 심리가 있을 예정이었으므로 네플류도프는 대심원으로 갔다. 그 는 벌써 몇 대의 마차가 멈춰 있는 대심원 건물의 장엄한 문 앞에서 변호사와 만났다. 장엄 한 본관 계단을 통해서 2층으로 올라가자, 구석구석까지 죄다 알고 있는 변호사는 재판법 제정 연대가 새겨져 있는 왼쪽 문으로 갔다. 기다란 첫 번째 방에서 외투를 벗고, 심의원 전 원이 모였다는 것과 맨 마지막 의원이 방금 들어갔다는 것을 수위로부터 듣자 파나린은 하 얀 와이셔츠의 가슴팍이 보이는 연미복에 넥타이를 맨 채 유쾌하고 자신있는 태도로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방 오른쪽에는 큼직한 옷장과 테이블이 있고 왼쪽에는 나선형의 계단이 있었는데, 마침 이 때 가방을 겨드랑이에 낀, 제복을 입은 의젓한 관리가 내려왔다. 이 방에 서 먼저 눈에 띈 것은, 흰 수염을 길게 기르고 신사복에 회색 바지를 입은, 장로같이 생긴 노인이었다. 그 옆에는 두 명의 관리가 공손히 서 있었다. 백발의 노인은 옷장 곁으로 가더니 훌쩍 어디론지 사라졌다. 이 때 파나린은 자기와 똑같 은 연미복에 흰 넥타이를 맨 한 동료 변호사를 보고 곧 그와 쾌활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 했다. 네플류도프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방청인들은 모두 합쳐서 15 명이 있었는데 그 중 두명은 여자였다. 한 사람은 코안경을 쓴 젊은 여자였고, 또 한 사람은 백발의 노파였다. 신문의 명예 훼손 사건의 공판이 있는 탓인지, 여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 대부분은 신문사 관계의 사람들이었다. 근엄한 제복을 입고 볼이 불그스름하고 잘생긴 정리가 서류를 한 손에 들고 파나린에게로 다가오더니 그가 관계하는 사건이 무엇인가를 묻고, 마슬로바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자 무엇 인지를 기입하고 물러갔다. 이 때 옷장문이 열리면서 그 속에서 장로같이 생긴 노인이 나타 났다. 그러나 양복을 입지 않고 반짝이는 금속 기장을 가슴에 달고 금몰이 달린 옷을 입고 있어서, 그 법복 차림은 흡사 새를 연상케 했다. 이 우스꽝스러운 복장에는 그 노인 자신도 당황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여느 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입구완느 반대쪽의 문을 열고 허둥지둥 들어갔다. "저 사람이 베 씨입니다. 모두들 존경하고 있지요." 파나린이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이 어 그는 네플류도프를 그의 친구에게 소개한 다음 그의 가장 흥미있는 사건, 즉 오늘의 소 송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심의는 곧 시작되었다. 네플류도프는 방청인들과 함께 왼쪽 법정으로 들어갔다. 파나린도 다같이 방청석으로 정해져 있는 칸막이 저쪽으로 갔다. 페테르부르크의 변호사만 칸막이 앞 의 테이블 곁으로 갔다. 대심원의 법정은 지방 재판소보다 좁았고 구조도 간단했다. 심의원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에는 녹색 나사가 아니라, 금몰을 박아 넣은 빨간 비로드가 덮여 있는 점만이 지방 재판소 와 달랐다. 그리고 다른 재판소에서도 다 비치해 놓은 거울과 성상과 황제의 초상화들이 걸 려 있었다. 여기서도 역시 정리가 "개정!"하고 장엄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 일제히 기립하고 법복을 입은 심의원들이 입장하여 등받이가 높은 안락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의젓한 태도 를 보이려고 애쓰면서 테이블 위에다 팔꿈치를 괴었다. 모두가 지방 재판소와 똑같았다. 심의원은 4명이었다. 의장 니키틴은 말쑥하게 면도를 하고 길쭉한 얼굴에 쇠처럼 차가운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볼리프는 입을 굳게 다물고 하얀 손으로 사건 기록을 넘기고 있었다. 다음 스코보로드니코프는 곰보에 뚱뚱하고 육중한, 학자 출신의 법률가였다. 네 번째인 베는 제일 마지막에 들어온 장로같이 생긴 노인이었다. 다음에 심의원들과 함께 서기관장 겸 검 사국차장이 들어왔다. 그는 말쑥하게 수염을 깎은, 무뚝뚝하고 얼굴빛이 까맣고, 검은 눈에 슬픈 빛이 감돌고 있는 중키의 청년이었다. 네플류도프는 이 남자가 이상한 복장을 하고 5, 6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는데도 불고하고, 그가 대학 시절의 가장 친했던 친구의 한 사람 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저 사람은 검사국 차장 셀레닌이 아닙니까?" 그는 변호사에게 물었다. "네, 왜 그러십니까?" "그 사람이라면 잘 압니다. 훌륭한 사람이죠." "검사국 차장으로 있는데 수완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한테 부탁할걸 그랬군요."하 고 파나린이 말했다. "그러나 이제 와선 그럴 시간이 없군요." 파나린은 시작된 심의에 귀를 기울이면서 속삭 이듯 말했다. 지방 재판소의 판결에 아무런 수정도 없이 채용된 공소원의 판결에 대한 상소심이 막 시 작되었다. 네플류도프는 귀를 기울여, 지금 눈앞에서 행해지고 있는 심의의 의미를 이해하려 고 노력했으나, 역시 여기서도 지방 재판소 때와 마찬가지로 당연히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점에 변론이 이르지 않고, 완전히 지엽적인 일만 문제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의되고 있는 사건은 모 주식회사 대표자의 사기 행위를 들춰 낸 신문의 사설 기사에 관한 것이었다. 네플류도프는 그 대표자의 배임 행위가 사실인지 아닌지, 사실이라면 그러한 배임 행위를 막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을 써야 하는지의 여부가 마땅히 심의되어야 한다고 생각 했으나, 이에 관해서는 하등의 논의가 없었다. 다만 그런 기사를 게재할 권리가 법률상 신문 발행자에게 있는지 없는지, 또 그것을 게재했다는 사실이 어떤 범죄에 속하게 되는지, 즉 명 예 훼손이냐 중상이냐, 그렇잖으면 명예 훼손죄에 중상죄를 포함하게 되는지, 혹은 중상죄에 명예 훼손죄를 포함하게 되는지 하는 문제라든가, 그 밖에 여러 가지 법률 조문이나 판례라 든가 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이해되기 힘든 문제에 관해서만 논의되고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사건을 보고한 볼리프가 어제 자기에게 대심원은 사건의 본질을 심의할 수 없다고 그토록 엄숙히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관해서는 분명히 공소원 판결의 기각에 유리한 듯한 보고를 하고 있다는 것과, 이에 대해 평소 소극적인 성 격의 셀레닌이 격렬한 어조로 반대 의견을 진술했다는 것이다. 셀레닌이 네플류도프를 놀라 게 할 만큼 열변을 토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가, 주식회사의 대표자가 돈에 대해서는 매우 치사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과 더군다나 볼리프는 이 사 건의 전날 밤에 그 대표자한테서 굉장한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 이었다. 그래서 지금 볼리프가 매우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분명히 편파적인 보고를 하는 것 을 보자, 셀레닌은 버럭 화가 나서 대수롭지도 않은 문제에 대해서 신경질적인 의견을 말하 게 된 것이다. 그 반론은 틀림없이 볼리프의 마음을 상하게 한 듯싶었다. 볼리프는 얼굴을 붉히고 몸을 떨었으나, 입밖에는 내지 않고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근엄하면서도 화 가 난 표정으로 다른 심의원들과 함께 회의실로 나가버렸다. "당신이 어떤 사건에 관계하고 있다고 하셨지요?" 심의원들이 나가자 정리가 다시 파나린 에게 물었다. "마슬로바 사건이라고 먼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하고 파나린이 말했다. "아, 그러셨지요. 그 사건은 오늘 심의가 됩니다만, 그러나..." "그러나 어떻단 말씀입니까?"하고 변호사가 물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사건이 저쯤 되었으니 심의원들이 판결 후 다시 출정하실지 어떨 지 알 수 없군요. 그렇더라도 말은 해보겠습니다만..." "그게 무슨 말씀이죠?" "아무튼 말은 해보겠습니다." 정리는 부전지에다 무엇인가 써넣었다. 사실인즉, 심위원들은 명예 훼손 사건의 판결을 선고한 마슬로바의 사건을 포함하여 나머 지 사건은 회의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시며 처리해 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단 것이 다. 21 볼리프는 심의원들이 회의실 테이블 앞에 앉자마자, 무척 유창한 말투로 원판결이 폐기되 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의장은 평소에도 워낙 심술궂은 위인이었지만, 오늘은 가뜩이나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법정에서 사건을 들으면서 재빨리 자기 의견을 준비해 두었기 때문에 지금 볼리프가 하는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자기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기 가 오래 전부터 바라고 있던 자리에 자기를 앞질러서 빌랴노프가 임명된 데 대해서 어제 자 기 비망록에 써놓은 글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장 니키틴은 재직 중에 자기가 접촉해 온 칙임관급 이상의 여러 고관에 대한 비평을 기록해 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자료 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어제 적어 둔 한 문장에는 칙임관급의 몇몇 관리들을 혹 독하게 비판해 둔 대목이 있었다. 그것은 그 고관들이 현재의 위정자들이 끌고 가려는 파멸 로부터 러시아를 구하려고 하는 자기를 방해했다는 글이었으나, 실은 그들이 현재보다도 더 많은 봉급을 받으려는 그의 시도를 방해한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비망 록 속에 적어 놓은 글이 자손들에게 얼마나 새로운 광명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물론입니다." 그는 볼리프가 자기에게 한 말이 무엇인지 듣지도 않고 대답했다. 베는 앞에 놓인 종이에 화환을 그리며, 침통한 얼굴로 볼리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베 는 지극히 순수한 자유주의자였다. 그는 60년대의 전통을 신성하게 견지하고 있어서, 가령 엄정 중립에서 한 발짝 양보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자유주의를 옹호한 때문이 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사건에서도 베는, 명예 훼손으로 고소를 제기한 주식 회사의 대표 자가 더러운 인간이라는 사실 이외에 신문 기자를 명예 훼손죄로 처벌한다는 것은 출판 언 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도 이 상고를 기각해야 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볼 리프의 논증이 끝나자 아직 화환을 다 기리지 못했으나 서글픈 얼굴로, 이를테면 그렇게 명 백한 이치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서글프다는 듯이 부드럽고 경쾌한 목소리로, 이 상소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간단히, 그러나 설득력 있는 논법으로 증명한 다음 백발의 머리를 숙이고 계속해서 화환을 그리기 시작했다. 볼리프와 마주앉은 스코보로드니코프는 시종 굵은 손가락으로 턱수염과 콧수염을 쓸어모 아 입에다 넣고 있었으나, 베의 말이 끝나자마자 턱수염을 씹던 동작을 멈추고 큰 소리로 주식회사의 대표자가 사기꾼이라고 할지라도, 만일 법률적인 근거만 있다면 자기는 원심 판 결의 폐기를 주장했을 것이나, 그러한 근거만 있다면 자기는 세묘노비치 베의 의견에 찬동 하는 바라고 말했다. 그는 이로써 볼리프에게 따끔히 침을 준 것이라고 내심 기뻐했다. 의장 이 스코노로드니코프의 의견에 찬성해서 이 사건은 부결되었다. 볼리프는 마치 자기가 부정한 편을 들다가 제지당한 꼴이 된 것이 매우 불만스러웠으나, 짐짓 냉정한 척하며 다음 사건, 마슬로바의 사건 기록을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그 동안에 심의원들은 벨을 눌러서 차를 가져오게 했으며, 카멘스키의 결투와 더불어 그 당시 페테르 부르크 시민의 화젯거리가 되었던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것은 형법 제955조에 해당되는 혐의로 체포된 모 국장에 관한 사건이었다. "정말 추잡한 일이야!"하고 베는 내뱉듯이 말했다. "무엇이 추잡하다는 말이오? 어느 독일 문학가의 의견을 쓴 러시아의 책을 보여드릴까요? 그는 이런 것은 범죄라고 생각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성들끼리의 결혼도 가능하다고 했거 든요."하고 스코보로드니코프가 손가락 사이의 손바닥 안쪽 깊숙이 구겨진 담배를 뻑뻑 빨 면서 큰소리로 껄걸 웃어댔다. "저런 엉터리 같은!"하고 베는 말했다. "그럼 다음에 보여 드리죠." 스코보로드니코프는 책 이름과 발행일자, 그리고 발행소까지 들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시베리아의 어느 마을의 지사로 임명되어 간다는 소문이 있던데."하고 니키틴이 말했다. "잘되었군. 주교가 십자가를 들고 그를 환영할 거야. 그런 주교도 때론 필요한 거야. 무엇 하다면 그런 사람을 내가 하나 소개해도 되지."하고 스코보로드니코프는 말하면서 담배꽁초 를 재떨이에 내던지고는 콧수염과 턱수염을 잡히는 대로 입에다 갖다 넣고 질근질근 씹기 시작했다. 이 때 들어온 정리가 마슬로바의 사건 심리에 네플류도프와 변호사가 입회를 원한다는 보 고를 했다. "아 그래,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말이오."하고 볼리프는 말했다. "대단히 로맨틱한 이야기가 있지요."하고 네플류도프와 마슬로바의 관계에 대해서 늘어놓았다. 그들은 이 사건에 관해서 한바탕 이야기를 하고,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신 다음, 법정으로 나가 앞의 사건의 판결을 선고하고 마슬로바의 사건을 심의하기 시작했다. 볼리프는 그 가느다란 목소리로 마슬로바의 상소 이유를 상세히 보고했으나, 이번에도 절 대로 공정하다고 할 수 없는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싶은 듯 심의하기 시작했다. "첨가할 말은 없습니까?"하고 의장은 파나린을 향해서 물었다. 파나린은 일어서서, 넓고 흰 와이셔츠를 입은 가슴을 내밀고 설득력 있는 표현으로 원심 판결이 법률에 위배되어 있다고 여섯 가지 점을 들어 설명해 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간단하 나마 이 사건의 본질에 있어 원심 판결의 너무나도 명확한 불합리성을 지적했다. 파나린의 짧고 힘찬 변론의 어조는 변론을 하는지 주장을 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즉, 심의원들이 그 예리한 통찰력과 법률상의 지식으로써 자기보다 훨씬 잘 관찰하고, 또 이해하고 계신 것을 감히 자기와 같은 사람이 구차스럽게 말씀드리는 것은 직책상 하는 수 없는 일이라는 듯한 어조였다. 파나린의 변론을 듣고 난 뒤에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대심원이 판결을 파기할 것 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론을 끝내자 파나린은 승리자와도 같이 회심의 미소를 지 었다. 줄곧 변호사를 보고 있던 네플류도프는 변호사의 그 미소를 알아차리고 사건의 승소 를 확인했다. 그러나 심의원들을 흘끔 보았을 때 그는 파나린 한 사람만이 미소를 띠고 개가를 부르 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심의원들과 검사국 차장은 미소를 짓지도 않았고 승리의 기색도 없 었으며, 오히려 지루하기만 하고, ' 기네들의 이야기는 이제 싫증이 났어. 그런 이야기는 아 무 소용도 없는 것들이야.'하는 듯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변호사의 변론이 끝나자 공연한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처럼 만족하는 듯한 빛을 보였다. 변호사의 이야 기가 끝나자 의장은 곧 검사국 차장의 발언을 청했다. 셀레닌은 간단하기는 했으나, 명료하 고 정확하게 상소 이유가 불충분하므로 원심 판결을 취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심의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상의하기 위하여 회의실로 갔다. 회의실에서는 의 견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볼리프는 원심 판결의 기각을 주장했고, 베는 진상을 알고 있었으 므로 전번 법정에서의 광경과 배심원들의 오류를 자기가 똑똑히 보기라도 한 듯이, 동료들 에게 상세히 설명하고 열심히 원심 판결의 기각을 주장했다. 한편 니키틴은 여느 때와 같이 엄정성과 형식주의를 존중하여 반대를 했다. 그래서 사건 처리는 스코보로드니코프의 한 표 로 결정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네플류도프가 도덕적인 요구 때문에 그 여자와 결혼하 려 한 결심이 그에게는 다시 없이 불쾌하다는 이유만으로 상소 기각을 주장하는 편에 섰다. 스코보로드니코프는 유물론자였으며 다윈주의자였다. 모든 추상적인 도덕상의 현상은 물 론, 심지어 종교상의 현상까지도 경멸할 만한 어리석은 짓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에 대한 모욕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 매춘부 때문에 이렇게 소란을 피우고, 그 여자를변호하기 위해 유명한 변 호사와 네플류도프 자신이 대심원으로 나왔다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는 턱수염 을 입에 물고 얼굴을 찌푸르면서, 이 사건에 대해서는 상소 이유가 허술하다는 것밖에는 아 무것도 모른다는 태도를 극히 자연스럽게 취하면서, 자기는 상소를 기각한다는 의장의 의견 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이리하여 상소는 기각되고 말았다. 22 "무서운 일이야!" 네플류도프는 서류 가방을 다 챙긴 변호사 파나린과 같이 대기실로 들 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극히 명백한 사실을 형식에 얽매여서 기각하다니, 무서운 일이 야!" "이 사건은 이미 원심에서 실패한 것입니다."하고 변호사가 말했다. "게다가 셀레닌까지 기각에 찬성하다니, 정말 무섭고 무서운 일이야!"하고 네플류도프는 몇 번이고 이 말을 되풀이했다. "대체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요?" "황제한테 청원해 봅시다. 여기 계시는 동안에 직접 제출하십시오. 제가 써 드릴 테니까 요." 그 때 법의에 여러 개의 훈장을 단 왜소한 체구의 볼리프가 대기실로 들어와서 네플류도 프 곁으로 왔다. "이런 데서 자넬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네." 그는 네플류도프가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들어왔다. "이런 데서 자넬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네." 그는 네플류도프에게 다가오면서 말했 다. 입가에는 미소를 띠었으나 눈에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 "자네가 페테르부르크에 와있다 는 소문은 들었지만, 무슨 일로 여기엔?" "여기에? 공평한 재판을 바라고, 아무 죄도 없이 유죄 판결을 받은 여자를 구해 보려고 왔어." "어떤 여자인데?" "방금 판결된 사건이야." "아, 마슬로바의 사건이군!" 셀레닌은 아까 일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건 근거가 아주 허술한 상소던데." "문제는 상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에 있네. 아무 죄도 없는데 벌을 받고 있으니까 말일세." 셀레닌은 한숨을 쉬었다. "흔히 있는 일 아냐. 그러니..." "있을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틀림없네." "어떻게 아나?" "내가 배심원이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우리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자 알고 있다네." "그럼 그 때 이의를 말하지 그랬나."하고 그는 말했다. "이의야 말했지." "공판 기록에 기재가 됐어야 하는데. 상소장에도 기재되어 있었더라면 좋았을걸..." 셀레닌은 항상 분주해서 별로 사교계 출입이 없었기 때문에, 네플류도프의 로맨스에 대해 선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네플류도프는 그것을 눈치챘으나, 마슬로바와의 관계를 구태여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판결이 엉터리라는 것은 분명하지 않나?"하고 그는 말했다. "대심원에서는 그런 것을 말할 권리가 없는 걸세. 만일 대심원에서 원심 판결이 정당하냐 정당치 못하냐 하면서 멋대로 재판소의 판결을 파기한다면, 대심원은 맏을 만한 근거를 상 실하게 되고, 정의를 옹호하느니보다 오히려 그것을 침해할 위험을 무릅쓰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네. 그건 차치하고랃 그렇게 되면 배심원의 결의는 그 의의를 상실하게 될 테니까." 하고 셀레닌은 방금 심의된 사건을 생각하면서 말했다. "나는 그 여자가 완전히 결백하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네. 그리고 이 부당한 선고 에서 그 여자를 구해 줄 수 있는 최후의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최고 법정에 서 완전히 불법을 확정한 셈이지." "확정된 것은 아니야. 대심원은 사건 자체를 심의하는 것도 아니고, 또 심의할 수도 없는 걸세." 셀레닌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그런데 자네는 이모님 댁에 유숙한다고 그랬 디?" 그는 화제를 돌리려고 이렇게 물었다. "어제 자네 이모님한테서, 자네가 와 있다는 말 을 들었네. 외국에서 온 선교사의 모임에 자네하고 같이 참석해 달라고 백작 부인으로부 테 초대장이 왔었네."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셀레닌이 말했다. "참석은 했었는데, 싫증이 나서 중간에 나와 버렸어." 네플류도프는 화제를 돌리는 셀레닌 한테 화가 나서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왜 싫증이 났나? 하긴, 한쪽으로 치우친 편파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역시 종교적인 감정 의 표현이 아니겠나?"하고 셀레닌이 말했다. "그건 쓸데없는 잠꼬대에 지나지 않아."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아냐, 그렇지 않아. 오히려 우리가 우리들 교회의 교리도 모른다는 것이 이상한 거야. 게 다가 우리는 러시아 정교의 근본 원리를 무슨 새로운 계시나 되는 양 착각하고 있거든." 셀 레닌은 분명히 자기가 품고 있는 새로운 종교관을 옛 친구에게 알려 주려고 성급히 언명했 다. 네플류도프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서 "놀라운 알이군."하고 그는 말했다. "아무튼, 나중에 또 얘기하기로 하세."하고 셀레닌은 말했다. "우리 꼭 만나세." 그는 한숨 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자네 날 찾아 주지 않겠나? 나는 7시 저녁 식사 때에 는 언제나 집에 있다네. 집은 나제첸스카야 거리에 있네." 그는 다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 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갈 수 있게 되면 가지."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으나, 옛날에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셀 레닌이 이런 짧은 대화에서, 현실적으론 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갑자기 아무런 인연 이 없는 타인처럼 느껴졌다. 23 네플류도프는 알고 있는 대학생 시절의 셀레닌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아들이었고 충실한 벗이었으며, 언제 보아도 점잖고 용모가 단정하며, 지극히 성실하고 정직한 인간이었다. 그 는 별로 힘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성적이 뛰어나고, 진급 논문을 쓸 때마다 금메달을 탔으나 조금도 우쭐거리지 않는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는 말만 내세우지 않고 실제로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을 젊은 날의 목적으로 삼고 있 었다. 그리고 그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가에 봉사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 자기의 모든 정력을 기울여 일할 수 있는 분야를 조직적으로 검토하고, 결국 법률을 제정하는 고등 법원의 제 2부라면 자신도 가장 유익한 일을 하게 되 리라 생각하고 그곳에 들어갔다. 그러나 자기에게 요구되는 모든일을 성심껏 정확하게 처리 해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일에서 남을 위하여 유익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자기 본 래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도 없거니와, 자기 역시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질 수도 없었다. 이 불만은 지극히 옹졸하고 허영심이 강한 직속 상관과 충돌할 때마다 더 커져 갔으므로, 결국 그는 고등 법원의 제 2부를 그만두고 대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 심원은 훨씬 나았으나, 그런 불만은 여전히 뒤따라다녔다. 그는 항상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일과 현실이 전혀 상반된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곤 했다. 대심원에서 근무하고 있던 중, 친척들의 주선으로 시 종관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그는 금몰이 달린 예복에 흰 리넨의 가슴받이를 걸치고, 이런 요직에 앉게 해분 분들에게 인사를 보아도 이 직무의 합리적인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현재의 그로서는 관청 근무를 하고 있을 때마다 더욱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느꼈으나, 한 편으로는 그를 만족스런 자리에 앉게 해주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려 고 이 임명을 거절하지 못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자기의 비열한 근성을 기분 좋게 어 루만져 주기도 했었다. 금몰로 수놓은 예복 차림의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본다든가, 이 번 임명으로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생긴 존경심을 이용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에게 퍽 만족 감을 주었다. 이와 마찬가지의 일이 결혼을 했을 때에도 일어났다. 세속적인 관점으로 봐서 매우 호화 로운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그가 결혼한 중요한 이유는 역시, 만약 그가 결혼을 거절하기 라도 한다면 이 결혼을 원하고 있던 신부와 이 결혼을 성립시키려 중매한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 되고, 틀림없이 그들에게 불쾌감을 주리라는 생각과, 동시에 명문가의 젊고 사랑스러운 규수와의 결혼이 그의 자부심을 한층 북돋워서 그에게 큰 만족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 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결혼을 관청 근무나 시종관의 일보다 더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 었다. 첫아이를 낳자 아내는 더 이상 아이 낳기를 마다하고 호화로운 사교 생활로 들어갔으 므로 그도 아내와 더불어 그런 사회로 말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별로 아름답지 도 않았고 남편에게 충실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런 생활 태도로써 남편의 생활을 망쳐 놓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녀 자신도 또한 노력의 소모와 피로감 이외에 이 생활에 서 얻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온갖 방법 을 다해서 이런 생활을 바꿔 보려고 했지만, 친척과 친지들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아내의 바위처럼 확고한 신념 앞에는 마치 돌담에라도 부딪친 양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금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언제나 다리를 드러내고 있는 어린 딸은 그에게는 남의 집 아이 처럼 생각되었다. 특히 그가 희망하고 있는 것과는 전연 다른 방법으로 양육되고 있었으므 로 이러한 생각은 더했다. 부부간에는 세상의 흔한 몰이해가 깔려 있었으며, 심지어 서로 이 해하려고 들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예절에 억제된 무언의 냉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가정 생활은 다시 없이 괴로운 것이 되었다. 그래서 가정 생활이 관청의 근무나 궁중의 지위보다 더 '잘못된 것'임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잘못된 것'은 종교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그는 동료들이나 같은 연배 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교육받아 왔던 종교적 미신의 속박을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자신의 지적 성장과 더불어 타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 그런 속박에서 해방되었는 지는 자기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진지하고 성실한 남자였으므로, 청년 시절, 대학 시절, 그 리고 네플류도프와 친했던 시절에는 공인 종교의 속박에서 해방된 것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 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고 지위가 올라감에 따라 특히 당시 사회에 밀려온 보수적 반동 사 상의 대두와 더불어 이 종교적 자유는 방해가 되기 시작했다. 집안의 여러 관계, 특히 아버 지가 사망했을 때와 그 추도회 때 어머니가 성사를 받으라고 요구했고, 또 공론이 이를 요 구했던 것은 문제삼을 것이 못된다 할지라도, 직무상 예배식이나 성찬식이나 감사 기도 같 은 의식에 항상 참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실 표면적인 종교상의 갖가지 형식에 관계하 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런 의식을 피할 수도 없었다. 이런 의식에 참석하는 이상, 안 믿으면서도 믿는 시늉을 한다거나, 혹은 이런 모든 표면적인 형식을 허위로 인정하고, 허위로 인정되는 자리 에 참석할 필요가 없도록 자기의 생활을 뜯어고치든가, 그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일이라도, 막상 실행에 옮기려고 하면 여러 가지 장애가 뒤따랐다. 가까운 사람들과 항상 싸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처지를 변경하고 직무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리고 자기가 이제껏 그 관직에 있음으로써 인류를 위 하여 공헌하고 있다고 믿고, 앞으로는 더한층 공헌할 수 있으리라는 모든 포부를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끝까지 확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소나마 역사를 배우고 대체로 종교의 발생과 기독교의 발생, 분별을 아는 현대 의 교양인이라면 누구든지 자기의 상식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듯이, 그 역시 자기를 정 당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교회의 교의의 진실성을 믿지 않고 자기의 정당성을 믿었다. 그러나 일상 생활의 갖가지 조건의 압력 때문에 그와 같이 정직한 인간도 조그만 허위를 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합리한 것을 불합리하다고 단정 지으려면 우선 그 불합리한 것 을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조그마한 허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지금에 와서 는 그가 그 속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커다란 허위 속으로 그를 끌어들이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태어나서 자라온 정교의 세계, 주위 사람들로부터 요구받고 있고, 또 이를 인정치 않고는 인류를 위해서 유익할 자신의 활동을 계속할 수 없는 정교의 세계라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자문해 보았으나 이미 그의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는 불테르, 쇼펜하우어, 스펜서, 콩트의 저서를 읽지 않고, 헤겔의 철학서와 뷔네의 호마코프의 종교 서적을 읽었으며, 그 속에서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즉 종교적 교외의 평안과 변호 같은 것을 찾아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이를 이성으로써 부정하고 있기는 했지만 어려서부터 이교의 속에서 자 라 왔고,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의 생활은 불쾌한 것으로 충만될 것이며, 일단 이것을 인정해 버리면 일체의 불쾌한 일이 순식간에 소멸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판에 박은 일체 의 궤변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 개개의 이성은 진리를 인식할 수가 없다. 진리는 오직 사람들의 결합체에만 계시된다, 진리 인식의 유일한 방법은 계시이다, 계 시는 교회에 의해서 보존된다는 등등의 궤변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는 그 때부터 허위를 행한다는 의식도 없이, 아주 평안한 마음으로 의젓하게 기도식이나 추도식에 참석하게 되었 고, 성사를 받거나 성상을 향해 성호를 그을 수도 있었으며, 계속 직무에 머무를 수도 있었 다. 덕택으로 인류에 이익을 베푼다는 의식과 즐겁지 않은 가정 생활에서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이 신앙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반면에 신앙이라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잘못된 것'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의 눈은 늘 수심에 차 있었다. 또 그 때문에 그는 그의 마음속에 그러한 허 위가 미처 뿌리도 박히기 전에, 가까운 친구 네플류도프를 만나자 순진했던 옛날의 자기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더욱이 종교관에 있어서는 네플류도프에게 말한 뒤에는, 그 어느 때보다 도 이것이 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네플류도프 역시 옛 친구를 만난 기쁜 첫인상이 사라 진 다음에 이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으나 어느 쪽도 만날 기회를 마련하려고 하지 않아, 네플류도프가 페테르부르크에 체재하는 동안 두 사람은 끝내 다시 만나지 않았다. 24 대심원을 나온 네플류도프와 변호사는 나란히 보도를 걸어갔다. 변호사는 자기 마차를 뒤 따라오도록 이르고, 네플류도프에게 심의원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모 국장의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국장의 죄상이 폭로되던 경위와 법률상으로는 마땅히 징역 을 받아야 했지만, 그 대신 시베리아의 어느 현의 지사로 임명되었다 했다. 변호사는 이 사 건의 경위와 추악상을 모두 말해 버리고 나서, 오늘 아침에 그들이 그 옆을 지나쳐 온 아직 도 공사가 반쯤 된 채 버려져 있던 기념비의 건립을 위해 모은 기부금을 여러 고관들이 착 복했다는 이야기, 모 인사의 정부가 거래소에서 수백 만 루블이나 벌었다는 것, 누구하고 누 가 아내를 매매했다는 이야기 등을 신이 나서 말한 다음, 정부 고관들이 온갖 사기와 범죄 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감옥은커녕 각종 관청의 요직에 도사리고 앉아 있다는 이야기를 지껄 여댔다. 변호사에게는 이러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해 보였고, 그러한 이야기가 변호사 자신에게도 무척 만족을 주는 듯했다. 그것은 변호사로서 돈을 버는 방법은 돈을 벌기 위해 페테르부르 크의 다른 고관들이 사용하는 수단에 비해 훨씬 정당하고 죄가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입증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변호사는 네플류도프가 고고나들의 범죄에 관한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고, 작별을 고한 뒤 마차를 잡아타고 강가에 있는 집 쪽으로 돌아가 버리자, 무척 놀랐던 것이다. 네플류도프는 우울했다. 대심원이 상소를 기각했기 때문에 죄 없는 마슬로바가 억울한 고 통을 받게 될 것과, 그 기각이 그녀와 운명을 같이하려는 자신의 변함 없는 굳은 결의를 더 욱 괴롭혀 주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변호사가 그토록 신이 나서 말한 활개를 치고 있는 그 가공할 이야기와, 원래 얌전하고 무엇이나 솔직하게 이야기하던 그 고귀했던 셀레닌의, 가시돋친 냉정하고 불쾌한 눈초리가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서 그의 슬픔은 한층 더 심해졌 다. 네플류도프가 집에 들어오자, 문지기는 다소 업신여기는 듯한 표정으로 어떤 여인이 문지 기 방에 써놓고 간 편지를 주었다. 그 편지는 슈스토바의 어머니가 쓴 것이었다. 그녀는 딸 의 은인이며 구원자인 네플류도프에게 감사의 말을 드리려고 왔었으며, 바실리예프스키 5가 의 자기네 집으로 와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과, 그것은 베라 예프레모브나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라는 사연이었다. 번거로운 감사의 말을 드려서 괴로움을 끼치지 않겠으니 안심 하시고, 오직 한번 뵙기만 해도 기쁘겠으며, 만일 틈이 나신다면 내일 아침에 와 주실 수 없 겠느냐는 내용의 것이었다. 또 한 통의 편지는 네플류도프의 옛 친구인 시종 무관 보가트이레프로부터 온 것으로 네 플류도프 자신이 준비해 온 분리파 교도를 위한, 그들 명의의 청원서를 직접 황제에게 올려 달라고 이 친구에게 부탁했던 일에 대한 답장이었다. 보가트이레프의 편지는 굵직하고 무게 있는 필적으로 쓰여 있었다. 그는 약속한 대로 직접 황제에게 내겠으나, 얼핏 생각이 난 것 이지만, 네플류도프가 직접 이 사건의 담당자에게 미리 부탁해 두는 것이 좋겠다고 쓰여 있 었다. 네플류도프는 이번 페테르부르크에 체재하는 동안, 최근 며칠 동안에 받은 인상으로는 무 엇 하나 뜻대로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아주 절망적인 심정에 빠져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세 웠던 계획은, 사회 생활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청년 시절 의 공상과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페테르부르크에 온 이상, 계획했던 모든 일을 실행하는 것 이 자기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일은 우선 보가트이레프를 방문한 후, 그의 충고대로 분리파 교도의 사건 담당자들을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다. 그가 서류가방에서 분리파 교도 사건의 청원서를 꺼내 읽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 니 백작 부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의 하인이 들어와, 2층으로 차를 마시러 올라오라는 말씀 이 있었다고 전했다. 네플류도프는 곧 가겠노라고 대답하고 서류를 가방 속에 도로 넣고는 이모가 있는 방으로 갔다. 2층으로 가는 도중 그는 창 밖에 있는 마리에트의 두 필의 밤색 말이 끄는 마차를 발 견했다. 그러자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지고 빙그레 미소까지 떠올랐다. 마리에트는 모자를 쓴 채, 평상시의 까만 빛깔이 아니라, 여러 가지 빛깔이 섞인 밝은 옷 을 입고, 찻잔을 손에 든 채 백작 부인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소와 반짝이는 눈을 하고 무엇인가 열심히 지껄이고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방 안으로 들어섰을 떄, 마침 마 리에트가 무슨 우스꽝스럽고 점잖지 못한 이야기를 했는지 코 밑에 잔털이 있는, 사람 좋은 백작 부인은 뚱뚱한 몸을 흔들어 대면서 배를 안고 웃었다. 마리에트는 장난기 있는 표정에 웃음을 담은 입을 찡그리며 정력적이고 쾌활한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 말없이 상대편을 바 라보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단 몇 마디의 이야기로써, 두 사람의 화제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제 2의 뉴스 로 되어 있는 신임 시베리아 지사의 에피소드라는 것을 알았다. 마리에트가 이에 관하여 무 슨 우스운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백작 부인이 오랫동안 웃음을 그칠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사람 죽이는군요." 기침을 하면서 백작 부인이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인사를 하고 두 사람 옆에 앉았다. 그가 마리에트의 경박함을 탓하려고 하 자, 그녀는 그의 얼굴에 감도는 적이 불만스럽고 진지한 표정을 알아차리고, 곧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얼굴 표정뿐만 아니라 기분까지도 일변해 버렸다. 그녀는 갑자기 자기 생활에 불 만을 품고, 무엇인가를 구하고 있는 것 같은 진지한 태도를 취했는데,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기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사실상 그녀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으나, 이 때는 네플류도프가 빠져 있는 것과 같은 기분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네플류도프에게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심원에서의 실패와 셀레 닌과 만난 이야기를 했다. "아! 정말 결벽한 분이에요! 그분이야말로 '흠 잡을 데 없는 기사'에요. 참으로 결벽한 분 이라고요."하고 두 부인은 사교계에 알려져 있는 셀레닌의 별명을 붙여서 말했다. "부인은 어떤 분이죠?"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부인요? 글세 남의 흉을 보고 싶지는 않지만, 남편을 이해해 주는 편은 아니지요. 그건 그렇고 그분도 기각에 찬성하셨다고요? 정말이에요?"하고 그녀는 진심으로 동정하며 물었 다. "무서운 일이군요. 그 여자가 가여워요!"하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화제를 바꾸려고 그녀의 주선으로 요새 감옥에서 석방된 슈스 토바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그녀가 자기 남편에게 부탁하여 노력해 준 데 대하여 사의를 표명한 다음, 그 여죄수와 그녀의 온 가족이 아무도 힘을 써 주는 사람이 없어서 얼마나 고 생을 해야 했나를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일이라고 말하려고 하자, 그녀는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자기의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발 말하지 말아 주세요."하고 그녀는 그의 말을 막았다. "남편이 그 여자를 석방해도 좋다고 말했을 때, 저도 똑같은 생각에 흠칫했어요. 죄가 없 다면, 무엇 때문에 가둬 두었던 것일까요?" 그녀는 네플류도프가 말하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을 대신 말했다.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어요!"하고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이렇듯 덧붙였다. 백작 붕니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마리에트가 조카에게 아양을 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기 분이 좋았다. 두 사람이 입을 다물었을 때, 백작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일 밤 알린한테 가 봐라. 키제베테르 선생이 나오신다니까. 당신도요."하고 마리에트를 보면서 말했다. "그분은 너를 알아보고 계셨어. 네게 관심을 갖고 계셔."하고 조카에게 말했다. "네가 말한 걸 죄다 그분한테 말씀드렸더니만 그건 모두 좋은 징조니까 너는 반드시 그리 스도의 품안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시더라. 그러니 꼭 가거라. 마리에트, 당신도 권해 줘요. 당신도 가고." "백작 부인, 첫째로 제겐 공작님께 권고할 자격이 없어요."하고 마리에트는 네플류도프를 힐끗 보고 말했다. 그 눈길에는 그와 자기는 백작 부인의 말에 대해서나 복음서에 대해서 그 무엇인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그리고 둘째로 저도 그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잘 아시겠지만..." "그래요, 당신은 언제나 남들과는 반대죠. 자기 마음대로 하시니까." "마음대로라니, 그런 일 없어요. 저도 보통 여자들과 똑같은 신앙을 가졌을 뿐인걸요." 그 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셋째로 내일 프랑스 연극을 보러 갈 생각이에요." "마리에트, 당신은 그것을 보셨나요... 저... 뭐라고 하는 여배우더라?"하고 카테리나 이바 노브나 백작 부인이 말했다. 마리에트는 유명한 프랑스 여배우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꼭 가 보아라. 정말 멋있단다." "그럼, 이모님, 여배우하고 선교사하고 어느 쪽을 먼저 보는 게 좋지요?" 네플류도프는 미 소를 띠며 물었다. "제발, 내 말꼬리만 잡지 말아라." "내 생각으로는 선교사를 먼저 보고 난 다음에 여배우를 봐야 한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렇 잖으면 설교에 대한 흥미를 잃기 쉽지요."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아니에요. 프랑스 극장에 먼저 간 다음, 그 뒤에 참회하시는 쪽이 더 좋아요."하고 마리 에트가 말했다. "둘이서 그렇게 날 놀리는 게 아니에요. 설교는 설교, 연극은 연극이에요. 구원을 받기 위 해서 목을 길게 하고 울고만 있을 필요는 조금도 없으니까. 우선 믿는 거죠. 그러면 즐거우 니까요." "이모님은 어느 설교사보다 설교가 훌륭하십니다." "그럼요." 마리에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내일 우리들 좌석에 오세요." "아마 가기 어려울 겁니다..." 손님이 왔다는 것을 전하러 온 하인 때문에 대화는 중단되고 말았다. 손님이란 백작 부인 이 회장으로 있는 자선 단체의 비서였다. "따분한 손님이 오셨군. 저쪽에 가서 만나고 곧 오겠으니, 마리에트, 이 애에게 차나 권해 주세요." 백작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 총총걸음으로 나갔다. 마리에트는 장갑을 벗었다. 야무지고 넓적한 손의 무명지에서 반지가 번쩍번쩍 빛났다. "드시겠어요?" 그녀는 새끼손가락을 묘하게 뻗치면서 알코올 램프 위에 얹혀 있는 은주전 자를 들고 말했다. 그녀는 진지하고 슬픈 표정을 지엇다. "훌륭한 의견을 갖고 계시는 분들이 나라는 인간과 내가 놓여 있는 처지를 혼동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어요." 그녀는 마지막 몇 마디를 할 때에는 금세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설사 그녀의 말 을 분석해 본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며, 또 있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애 매한 것이었다. 그러나 네플류도프에게는 그 말이 유달리 심각하고 진실하고 선량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젊고 아름답고 훌륭한 옷차림을 한 여인이 이런 말과 함께 보내는 빛나는 눈길을 그토록 그의 마음을 끌었던 것이다. 네플류도프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당신은 당신의 기분과 당신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제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나 당신이 하신 일은 누구나 다 알고 있어요.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이 에 요. 나는 당신께 감탄했어요." "뭐 그렇게 감탄하실 일은 못 됩니다. 아무 일도 한 것이 없으니까요." "그런 건 문제가 안 돼요. 전 당신의 마음도 그 여자의 마음도 이해하고 있어요. 정말 훌 륭해요. 훌륭하고말고요. 이 이야기는 더 말씀드리지 않겠어요." 그녀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불쾌한 기색을 보고 말을 끊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당신은 감옥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 갖 공포와 고통을 보신 나머지," 마리에트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마음을 끌어 보려는 생 각에서 그가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일을 여자의 직감으로 추축하면서 말했다. "괴로움을 받 고 있는 사람들을 구해 주려고 생각하시죠? 그렇게도 무자비하고 몰인정한 사람들 때문에 그런 무서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이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도 괜 찮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알아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제각기 자 기의 운명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그것을 잠재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 양심의 소리를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네플류 도프는 그녀의 기만에 완전히 말려들어가서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그 후 그녀와 얘기한 것을 여러 번 상기하고서 부끄럽게 느꼈다. 거짓말을 했다기보다는 자기의 흉내를 낸 데 불과했던 그녀의 말과, 자기가 감옥 속의 무서운 일과 시골에서 받은 인상을 이야기할 때 사뭇 감동하여 주의 깊게 듣고 있었던 그녀의 얼굴을 상 기했다. 백작 부인이 들어왔을 때, 그들은 옛 친구이면서 자기네들을 이해 못하는 군중속에서 두 사람만이 서로 이해하는 둘도 없는 친구인 양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은 당국의 불법과, 불행한 사람들의 고통과, 농민들의 궁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 으나, 실상은 떠들어 대는 열띤 대화 소리에 따라 서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매에는 끊임없 이 '저를 사랑해 주시겠어요?'하고 묻고 '사랑합니다.'하고 대답하곤 했다. 그리고 성적 감 정 이 자기도 모르게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형태를 이루며 서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마리에트는 떠나면서, 힘이 되어 드릴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그에게 말하고, 또 중대한 이야기가 있으니 내일 밤에는 잠깐만이라도 극장에 와달라고 했다. "언제 또 뵙게 될지 모르잖아요?"하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그리고 보석 반지 로 뒤덮인 손에 조심스럽게 장갑을 끼었다. "내일 꼭 와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네플류도프는 약속했다. 그 날 밤 네플류도프는 자기 방에 누워, 촛불을 끄고 나서도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 다. 마슬로바의 일, 대심원의 판결, 어느 곳이든 그녀를 따라가겠노라고 결심한 일, 토지 소 유권을 포기해 버린 일들을 생각하고 있으려니까, 별안간 그러한 문제에 대답이나 하듯이 '언제 또 뵙게 될지?'하고 말했을 때의 마리에트의 얼굴과 한숨, 그 눈길, 그리고 피어오르 는 듯한 미소가 생생하게 떠올랐고, 그도 그녀를 만나기나 한 것처럼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시베리아로 가는 건 옳은 일일까?'하고 그는 자문해 보았다. 드리워진 커튼을 통해서 보이는 페테르부르크의 백야는 밝았으나,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 답은 막연하기만 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모든 것이 혼란에 싸여 있었다. 그는 예전의 기 분을 마음속에 불러일으켜 보기도 하고, 예전의 사상의 경로를 더듬어도 보았으나, 그 사상 은 이미 예전과 같은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 '나도 모든 것을 서둘러서 생각해 냈지만, 그것을 실행할 힘이 없다. 좋은 일을 하고 뒤에 돌아서서는 후회를 하는 처지고 보니...' 그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문제에 대해서 대 답할 기력조차 없어,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비애와 절망에 잠겼다.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던 그는, 트럼프 노름에 참패한 뒤 흔히 경험했던 것 같은 괴로운 잠에 빠져들어갔 다. 25 이튿날 아침, 네플류도프가 눈을 떴을 때 처음 느낀 것은 어제 무슨 추악한 짓을 저질렀 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저것 돌이켜 생각해 보았으나, 별로 추악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으며, 또 나쁜 일을 한 것도 없었다. 그러나 확실히 나쁜 생각을 했었다. 이를테면 지금 그가 계획하고 있 는 것, 즉 카추샤와 결혼하는 것도, 농민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것도, 모두 실현하기 어려 운 공상일 뿐, 자기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모두 인위적이고 부저연스러운 것이므로, 전과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행동이야 없었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것이 있었다. 나쁜 상념은 그러한 길로 완전히 끌어넣는 것이다. 어젯밤 자기가 했던 생각을 되살려 보고, 네플류도프는 잠시나마 자기가 어떻게 그런 것 을 믿을 수 있었는지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이루려고 하는 일이 아무리 새롭고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자기에게 있어서 유일한 생활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 이전의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무리 쉽고 익숙한 것이라 할지 라도, 그 길이 죽음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어젯밤의 유혹은 이제 와서 생 각해 보면, 마치 충분히 잠을 자고 나서 더 자고 싶지는 않으나, 잠자리에서 뒹굴며 게으름 을 피우는 기분으로 있을 때 간혹 볼 수 있는 상태와 겉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대하고 기꺼운 일을 위해 그만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페테르부르크에 체재하는 마지막 날인 그 날, 그는 아침부터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슈스토 바를 찾아갔다. 슈스토바의 방은 아파트 2층에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관리인이 일러 준대로 뒷문으로 돌 아가서 가파른 계단을 곧장 오른 뒤, 음식 냄새가 풍겨나오는 후덥지근한 부엌으로 돌아갔 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앞치마를 두른, 안경 쓴 나이 많은 여자가 부뚜막 앞에서 김이 무럭 무럭 오르는 냄비 속을 휘젓고 있었다. "누구를 찾아오셨는지요?"하고 그녀는 안경 너머로 들어온 사람을 넘겨다보면서 물었다. 네플류도프가 이름을 채 대기도 전에, 노파의 얼굴에는 놀라우면서도 기쁜 표정이 감돌았 다. "아, 공작님이시군요!" 두손을 앞 치마에 닦으면서 그녀는 외쳤다. "아니, 왜 뒷문으로 들 어오셨어요? 당신은 우리들의 은인이신데! 전 그애의 어미랍니다. 정말이지, 딸 하나를 아주 잃어버릴 뻔했습니다. 뭐라고 감사의 말슴을 드려야 좋을." 네플류도프의 손을 잡고 키스하 려 하면서 그녀는 말했다. "어제 댁에 갔었지요. 동생이 가 보라고 자꾸 졸라대서. 동생도 여기 있어요. 자, 이리로 오세요. 저를 따라오세요."하고 슈스토바의 어머니는 네플류도프를 안내하여 좁은 문과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가면서 걷어붙인 옷자락과 머리를 매만지며 말 했다. "제 동생은 코르닐로바라고하죠. 아마 들은 일이 있으시리라고 생각되지만..."하고 그 녀는 방문 앞에 멈춰 서서 속삭이듯 말을 계속했다. "정치 운동에 가담하고 있답니다. 아주 영리하고 좋은 애예요." 슈스토바의 어머니는 복도에서 문을 열고 네플류도프를 조그만 방으로 안내했다. 방안의 테이블 앞 소파에는 줄무늬진 무명옷을 입은, 그다지 키가크지 않고 통통한 처녀가 앉아 있 었다. 어머니를 많이 닮은 창백하고 둥근얼굴에 아마빛 곱슬머리가 곱슬곱슬 굽이치고 있었 다. 그 맞은편에는 러시아 식의 깃에다 수를 놓은 루바시카를 입고 검은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른 청년이 몸을 구부리고 안락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에 열중해 있었던 모양으로 네플류도프가 방 안에 들어섰을 때에야 비로소 그를 돌아다 보았다. "리지아, 이분이 네플류도프 공작님이시다. 바로..." 얼굴색이 창백한 처녀는 귀 뒤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면서 신경질적으로 발딱 일어나 커다란 잿빛 눈으로 손님을 바라보았다. "그럼, 당신이 바로 베라 예프레모브나가 부탁하던 그 위험한 아가씨군요?"하고 네플류도 프가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예, 저예요."하고 리지아는 입을 벌리고, 고운 이를 드러내어 어린아이처럼 크고 곱게 웃 으며 말했다. "실은 아주머니가 무척 만나 뵙고 싶어하셨죠. 아주머니!"하고 그녀는 문 쪽을 향해 상냥하고 기쁨에 넘치는 목소리로 불렀다. "베라 에프레모브나는 당신이 수감된 것을 몹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이쪽으로, 이쪽이 더 나아요. 자, 앉으세요."하고 리지아는 청년이 방금 앉았던, 좀 망가 지기는 했으나 폭신폭신한 안락 의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쪽은 저의 사촌 오빠인 자하로프예요." 리지아는 네플류도프가 청년을 힐끔힐끔 바라 보는 것을 눈치채고 소개했다. 청년은 리지아와 마찬가지로 선량한 미소를 지으면서 손님에게 인사했다. 네플류도프가 그가 앉았던 자리에 앉자, 그는 창가에 있는 조그만 의자를 옆에 갖다 놓고 앉았다. 그리고 다른 방으로부터 열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역시 아마빛 머리의 중학생이 들어오더니, 말없 이 창가에 가서 앉았다. "베라 예프레모브나는 아주머니하곤 둘도 없는 막역한 친구랍니다. 그러나 저는 알지 못 했어요."하고 리지아는 말했다. 이 때 옆방에서 흰 재킷에 혁대를 맨, 쾌활하고 똑똑해 보이는 여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지아와 나란히 소파에 앉으면서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베라는 어떻게 지내나요, 만나 보셨어요? 자기 처지를 잘 참고 있는지요?" "불평도 별로 하지 않습니다."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리고 원기도 왕성하다고 하더 군요." "아, 베로치카(베라)다운 말이군요."하고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끄덕이며 말 했다. "그 여자를 잘 이해해 주지 않으면 안 돼요. 정말 훌륭항 인격자입니다. 언제나 남을 위해서만 일해 왔을 뿐, 자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다군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부탁이 없었어요. 다만 당신의 조카(슈스토바) 만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조카가 아무 죄도 없이 갇혔다고 하면서 늘 걱정하고 있 었지요." "정말 그랬어요."하고 아주머니는 말했다. "참 무서운 일이에요! 사실 그 애는 저 때문에 그런 고생을 했던 거예요." "아니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아주머니."하고 리지아가 말했다. "아주머니가 부탁하시 지 않았어도, 나는 그 서류를 맡았을 거예요."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깐 가만히 있어요."하고 아주머니가 우겼다. "실은요,"하고 그녀는 네플류도프에게 다가왔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합니다. 어느 사람이 서류를 잠시 맡아 달라 고 했습니다만, 전 그 때 집에 없었기 때문에 이 애한테로 가져왔었지요. 그러자 바로 그 날 밤, 가택 수색을 당해서 서류와 이애가 같이 잡혀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구류를 받 고, 누구한테서 서류를 받았느냐고 문책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결코 말하지 않았어요."하고 별로 방해도 되지 않는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기면서 리지아는 황급히 말했다. "네가 말했다는 게 아니야."하고 아주머니는 말했다. "미친이 잡혀간 것도 결코 제 탓이 아니에요."하고 리지아는 얼굴을 붉히면서 불안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 얘긴 그만두어라, 리도치카(리지아)."하고 어머니는 말했다. "왜요? 전 말하고 싶어요."하고 리지아는 말했으나, 미소를 짓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이 제는 머리키락을 손가락에 감으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제도 그 얘기를 시작하자, 넌 흥분하지 않았니?" "걱정 마세요... 내버려 두세요, 어머니. 나는 아무말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켜 왔어요. 그 사 람들이 두 번이나 아주머니와 미친에 대해서 물었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겠다고 선 언했어요. 그 때 그 페트로프가..." "페트로프는 스파이입니다. 헌병으로 지독한 악당이에요."하고 아주머니가 네플류도프에게 조카의 말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가로막았다. "그 때 그 사내가," 리지아는 흥분하면서 조급하게 말했다.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어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건,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 반대로... 당신이 말 만 한다면, 죄 없는 사람들을 석방할 수 있다. 혹시 잘못돼서 우리가 이유도 없이 그런 친구 들을 고생시키고 있는지도 알 수 없으니까 말이야.'하면서 말이에요. 그래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그 사내는 '그러면 좋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 내가 말하 는 것을 부정하지만 마라.'하고 여러 사람의 이름을 쳐들었는데, 그 중에 미친의 이름을 지적했 어요." "그런 이야기는 그만둬라."하고 아주머니는 말했다. "아주머니는 제가 말하는 것을 간섭하지 마세요." 그녀는 여전히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글쎄 그 이튿날에야 안 일이지만, 옆의 감방에 있던 동료가 벽을 두드려서 모든 것을 알려 주었는데 미친이 잡혔다는 게 아니겠어요? 그 다음부터 그 일이 괴로워서 미칠 지경이었어요." "그러나 나중에 네 탓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지 않았니?"하고 아주머니가 말했다. "그래요.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몰랐어요. '그 사람을 판 것은 나'라고 생각했지요. 감방 안을 서성거리면서도, 그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아도 누 군가 내 귀에다 대고 '미친을 팔았지, 미친을 팔았지.'하고 속삭이는 것 같았어요. 그것이 착 각인 줄은 알면서도 듣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생각 하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정말 무서운 일이었어요!" 리지아는 점점 더 흥분해서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하면서 두리번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리도치카, 진정해라."하고 어머니는 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을 했다. 그렇지만 리지아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거기다 더 무서운 것은..."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을 채 맺기도 전에 갑자기 울음 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녀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안락 의자에 부딪치며 방에서 뛰어나갔다. 어머니는 그 녀의 뒤를 쫓아갔다. "악당들은 모두 목을 비틀어 죽여야지."하고 창가에 앉아 있던 중학생이 말했다. "그게 모슨 소리냐?"하고 어머니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녜요... 그저 그래 본 것뿐이에요." 중학생은 대답하고 테이블 위에 있는 담배 를 집어 푹푹 피우기 시작했다. 26 "정말 젊은 사람에게는 그 독방 생활이란 무서운 것이에요."하고 아주머니가 머리를 흔들 며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요."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아니, 누구나 다 같지 않아요." 아주머니가 대답했다. "진정한 혁명가에게는 도리어 휴식 처도 되고, 안정도 된다고 남들이 말하더군요. 법을 어긴 사람은 항상 불안과 가난과 공포 속에서 살고 있지요. 자기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 또 대의를 위해서 공포 속에서 살고 있어 요. 그러므로 일단 수감이 되면 모든 것이 끝나고, 그런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는 셈이지요. 다만 가만히 쉬고 있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잡히면 그야말로 기쁘다고 말을 하더군요. 그러나 죄 없는 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 언제자 리도치카와 같이 아무 죄도 없는 순 진한 것들이 붙들리지만 -- 처음 받는 타격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은 자유가 없다든가, 난폭한 대우를 받는다든가, 나쁜 음식을 먹게 된다든가, 공기가 나쁘다든가 -- 모든 게 부 자유스럽기는 하지만 -- 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부자유스럽다는 사실은 그것 이 세 배로 가중된다고 해도 참을 수 있지만, 처음 감옥에 들어갔을 때의 정신적 타격만은 그럴 수 없는 모양이에요." "당신도 경험이 있으십니까?" "저 말씀인가요? 두 번 들어갔었지요." 상냥하면서도 쓸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주머니는 말했다. "처음 잡혔을 때는, 그것도 아무 죄도 없이 잡혀 갔지만," 그녀는 말을 이었다. "스 물두 살 때였습니다. 내게는 어린것이 하나 있었고, 게다가 임신중이었지요. 그 당시 자유 를 빼았기고 어린것과 남편과 헤어져 있게 된다는 것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러 나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물건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느꼈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 었어요. 내가 어린 딸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하자, 빨리 나와서 마차에 오르지 못하겠느냐 고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로 데려가느냐고 묻자, 가 보면 알게 된다더군요. 내 죄가 무엇이 냐고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더군요. 그리고는 붙잡아 가더니 심문을 하고 옷을 벗기고 번호 달린 죄수복을 입혀서 둥근 천장의 감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문을 열어 집어넣고는 자물쇠 르 잠그고 말았습니다. 모두 가버리고 혼자 남은 보초가 총을 메고 말없이 왔다갔다 하면서 가끔 문틈으로 들여다보곤 했어요. 정말 무섭게 괴로웠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만, 그 때 내가 가장 화가 났던 것은 헌병장교가 나를 심문하면서 담배를 주던 일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담배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얼마나 자유를 사랑하고 광명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 이 어미를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사정 없이 나에게서 나의 소중한 모든 것을 격리시켜, 야수와 같이 그런 곳에 가두어 버린 것일까요? 그런 짓을 한 사람은 벌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설사 신과 인간을 믿고, 인간은 상호간에 사랑 하며 사는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라도 이런 지경을 당하고 보면 그런 것을 빋지 않을 거 예요. 그 때부터 인간을 믿지 않게 되고, 성격마저도 나빠지더군요." 이렇게 그녀는 말을 맺 고 빙그레 웃었다. 리지아가 뛰쳐나간 문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들어오더니, 리지아는 정신이 몹시 혼란해져 서 나오지 못한다고 말했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젊은 생명이 보람 없이 되는 것일까요?"하고 아주머니는 말했다. "더욱이 가슴이 아픈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그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골 공기라도 쐬면 나을지 모르겠어요."하고 어머니는 말했다. "아비한테 그 애를 보낼 까 해요." "정말이지 당신께서 힘써 주시지 않았더라면 저 애는 아주 죽었을 거예요."하고 아주머니 는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제가 뵈려 했던 것은 베라 예프레모브나에게 이 편지를 전 해 주셨으면 하고요."하고 그녀는 포켓에서 편지를 꺼내면서 말했다. "이 편지는 봉하지 않 았으니까 한번 읽어 보신 다음에 전해 주시든지 찢어 버리든지 당신이 좋으실 대로 하십시 오."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 편지 속에는 별반 폐글 끼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 습니다." 네플류도프는 편지를 받아들고, 곧 전해 주겠노라고 약속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 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편지를 읽어 보지도 않고 부탁받은 대로 봉해서 전해 주리라 결심했다. 27 네플류도프를 페테르부르크에 붙잡아 둔 마지막 용건은 분리파 교도들의 사건이었다. 황 제에게 바칠 청원서를 연대 시절의 옛 동료였던 시종 무관인 보가트이레프의 손을 빌려서 낼 작정이었다. 아침 나절에 보가트이레프를 방문한 그는 마침 출근 시간이긴 했어요 자택 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날 수가 있었다. 보가트이레프는 작달막한 키에 떡 벌어진 몸집으로 편자도 구부릴 수 있을 정도의 보기 드문 장사였는데, 친절하고 정직하고 강직한 자유주의자였다. 이러한 성격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궁정과 밀접한 관계에 있어서 황제와 그 의 일가를 사랑했으며 이 최고의 사회에서 생활하면서 그 좋은 면만을 보고, 좋지 않은 일 에는 일체 개의치 않는 비상한 재주를 터득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남을 비난하거나 남이 하는 일을 비판한 일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침묵만을 지켰지만 어떤 때는 마치 고함을 칠 듯이 큰 소리로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만을 해치우고 껄껄 웃어 댔다. 그렇다고 해서 처세 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고 워낙 그의 성격이 그러하였다. "아, 마침 잘 왔네, 식사 좀 안하겠나? 우선 앉게. 굉장히 맛있는 비프스테이크지. 나는 항 상 실속 본위일세. 하하하! 포도주라도 한잔하세."하고 그는 붉은 포도주가 들어 있는 병을 가리키며 고함치듯 말했다. "자네 일을 생각하고 있던 중이네! 청원서는 곧 올릴테니 그 점 은 문제 없어. 그런데 갑자기 생각이 난 일이지만, 그보다 자네 토포로프한테 가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토포로프라는 이름을 듣자, 네플류도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모든 일이 그에게 달려 있지. 황제도 그에게 물어 볼 테니까, 결국 마찬가지일세. 어쩌면 그가 자네 소원을 풀어 줄는지도 모르네." "자네가 권한다면 갔다 오겠네." "잘됐어. 그런데, 페테르부르크의 감상은 어떤가?"하고 보가트이레프가 외치듯 말했다. "말해 보게나!" "최면술에 걸린 듯한 느낌일세."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최면술이라고?" 보가트이레프는 반문하면서 큰 소리로 웃어 댔다. "먹기 싫은가? 그럼 마음대로 하게." 그는 냅킨으로 수염을 닦았다. "그럼 그에게 가겠지? 그가 해주지 않겠다고 하면 나한테 주게. 내일 내가 내지."하고 말한 후 다시 의자에서 일어나, 입을 닦을 때처럼 무의식중에 크게 성호를 긋고 군도를 찼다. "그럼 실례하겠네. 이제부터 가 봐야겠어." "함께 나가세." 네플류도프는 일종의 만족감을 느끼면서 보가트이레프의 넓적하고 힘찬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무엇인지 건강하고 신선하고 쾌활한 느낌을 마 음에 간직하면서 현관에서 그와 헤어졌다. 이 방문에서 별로 좋은 결과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네플류도프는 어쨌든 보가트이레프의 권고대로 분리파 교도의 사건을 장악하고 있는 인물, 토포로프를 만나러 갔다. 토포로프가 맡고 있는 직무는 그 사명으로 보아서 모순을 품고 있었다. 어지간히 우둔한 사람이거나 도덕적인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모순을 모를 리가 없었다. 토포로프는 이 부정적인 자질을 두 가지 다 구비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차지하고 있는 지위와 모순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 사명은 폭력까지 포함하는 외부의 수 단에 의해서 교회를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이었는데 교회는 본질적으로 신에 의해서 제정된 것으로 지옥의 문이건 여하한 인간의 노력이건 이것을 움직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즉 이 신성한, 그 무엇에 의해서도 흔들릴 수 없는 신의 시설을, 많은 관리들을 거느린 토포로프가 장이 되어 있는 기관에 의해서 유지하고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토포토프는 그 모순을 몰랐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지옥의 문으로써도 움직일 수 없는 교회를 카톨릭 교회의 신부나 프로테스탄트의 선교사나 혹은 분리파 교도 등이 이 교회를 파괴하지나 않을까 하고 무척 근심하고 있었다. 토포로프는 근본적인 종교적 감정이나 인간 의 평등과 동포 의식이 없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민중은 자기 같은 사람하고는 전연 별세계의 존재여서, 민중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자기에게는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 자신은 마음속에 털끝만큼도 신앙이 없었으며, 그러한 상태를 도리어 편리하고 흡족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민중들이 자기와 똑같은 상태가 되지 는 않을까 걱정하고, 그의 말대로, 이 민중을 구원하는 것이 자기의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 고 있었다. 28 네플류도프는 그 날 밤 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할 수도 있었지만, 마리에트와 극장에서 만나 기로 약속을 했으므로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단 약속한 것은 지키 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기로 했다. '그런 유혹을 이겨 낼 수 있을까?'하고 그는 약간 불성실한 기분으로 자문해 보았다. '마 지 막으로 더 시험해보자.' 그는 연미복으로 갈아입고, 연중 무휴 상연되는 춘희의 제 2막이 진행되고 있을 때 극장 에 도착했다. 극장에서는 외국에서 온 프랑스 여배우가 폐병을 앓다 죽어가는 장면을 새로 운 연출법으로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극장은 초만원이었다. 바깥 복도에 서 있던 예복을 입은 하인이 마치 친숙한 손님을 대하 듯이 머리를 숙인 다음 문을 열어 주었다. 마리에트와 좌석을 묻자, 그는 정중하게 그 좌석 으로 안내해 주었다. 건너편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그 등뒤에 서 있는 사람들, 가까이 잔등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대중석에 모여 앉아 있는 허연 머리, 반백의 머리, 대머리, 포마드를 바른 머 리, 곱슬머리들... 이런 모든 관객들은 비단과 레이스 의상을 입은 야윈 여배우가 부자연스러 운 목소리로 독백을 하고 있는 모습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누군가 "쉿!"하고 말했다. 차고 훈훈한 두 갈래의 공기가 네플류도프의 얼굴을 스쳐갔다. 거기에는 마리에트 말고도, 붉은 오페라 외투를 입고, 크고 묵직하게 머리를 틀어올린 귀 부인과 두 사람의 남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마리에트의 남편이었는데 그는 매부리코의 엄 격한 표정을 하고 솜과 염색한 리넨으로 사뭇 군인답게 가슴을 부풀려올린 키가 크고 잘생 긴 장군이었다. 또 한 사람은 밝은 안색의 대머리였으며, 멎진 구렛나루를 기르고 턱수염을 말끔히 깎은 턱이 날카로운 남자였다. 아름답고 얌전하고 우아한 마리에트는 목과 어깨를 드러낸 야회복을 입어서 목에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내려간 탐스러운 어깨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는 까만 사마귀가 하나 보였다. 그녀는 곧 뒤돌아보더니 네 플류도프에게 자기 뒷좌석을 부채로 가리키면서, 와 주셔서 감사하다는 듯 의미 심장한 눈 길로 방긋 웃었다. 그녀의 남편은 항상 그러듯이 침착한 태도로 네플류도프를 보고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아내와 주고받은 시선 속에는 자기는 이같이 아름다운 여인의 주인이며 소 유자라는 의식이 역력히 보였다. 여배우의 독백이 끝났을 때, 극장 안은 박수 소리로 떠나가는 듯했다. 마리에트는 일어서 서 비단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여미며 뒷자리로 와서 남편에게 네플류도프를 소개했다. 장 군은 여전히 눈으로 웃으면서 뵙게 되어 대단히 반갑다고 말하고는 또다시 태연하게 속을 알 수 없는 침묵 속으로 잠겨버렸다. "오늘 떠나지 낳으면 안 되는데, 당신과 약속을 했기에." 마리에트를 마주 보면서 네플류 도프는 말했다. "저야 만나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만, 저 훌륭한 여배우만은 모셔야 하잖아요?"하고 마리 에트는 함축성있게 물으며 말했다. "마지막 장면은 차 좋았어요. 그렇지 않아요?"하고 이번 에는 남편을 향해 말했다.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는 그런 것이 조금도 감격스럽지가 않군요."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나는 오늘 차으로 불행한 사람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고 온 탓인지..." "자, 앉으셔서 이야기나 들려 주세요." 남편은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으나, 그 눈에는 차츰 비웃는 듯한 미소가 짙어졌다. "나는 오랫동안 구류가 되었다가 겨우 석방된 그 여자의 집에 갔다 왔습니다. 완전히 미 쳐버렸더군요." "바로 내가 말씀드린 그 처녀 이야기예요."하고 마리에트가 남편에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석방이 되어서 나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하고 장군은 고개를 끄덕이 면서 노골적인 비웃음을 띠면서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오겠습니다." 네플류도프는 마리에트가 무슨 말인가 할 것이 있다고 했던 그 말을 꺼내리라 기대하면서 앉아 있었으나, 그녀는 아무 말도 아지 않았고, 또 말하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농담조로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연극이 네플류도프에게 특별한 감명을 주었으리 라 생각하는 듯싶었다. 네플류도프는 마리에트가 자기를 초대한 것은 자기에게 꼭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 깨와 사마귀를 드러낸, 매혹적인 저녁 화장을 한 아름다운 자기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였다 는 것을 이내 알아챘다. 그는 유쾌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불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전에 모든 것을 감싸고 있던 매혹의 베일이 지금 네플류도프에게서 완전히 벗겨졌다고 까지는 할 수 없었으나, 그 매력 밑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마리에트 를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반하기는 했으나, 마리에트가 수백, 수천 사람들의 눈물과 목숨 을 희생으로 해서 자기의 명예를 쌓아올린 남편과 같이 살면서도 그런 일쯤은 조금도 아랑 곳하지 않는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여자가 어제 말한 것도 전부 거짓말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알 수 없었고 또 그녀 자신도 몰랐지만, 여하튼 그녀가 바라고 있는 것은 그의 마음이 끌리지도 했으나 동시에 불쾌하기도 했다. 네플류도프는 몇 번이나 돌아가려고 했으나 모자에 손이 가면서도 망설였다. 그러나 마치내 그녀의 남편이 담배 냄새를 풍기면 서 자리로 돌아와서는 네플류도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경멸하는 듯한 거만한 태도를 보 이자, 네플류도프는 열린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얼른 복도로 나와서 외투를 찾아 가지고 극장을 나셨다. 네프스키 거리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네플류도프는 넓은 포장도로를 말없이 걸어 가거 있는 키 크고 체격이 좋은, 원색적인 옷차림을 한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넓은 아스팔 트 길을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으나 얼굴과 몸집에는 남성을 유혹하는 요염한 매력을 그녀가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오고가는 사람들도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네플류도프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앞질러서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뒤돌아보 았다. 짙은 화장을 한 그 얼굴은 아름다웠다. 그녀는 네플류도프를 보자, 눈을 반짝이며 살 짝 미소를 던졌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네플류도프는 순간적으로 마리에트의 생각이 났다. 극 장에서 느꼈던 애착심과 혐오감을 이 여자에게서도 느꼈기 때문이었다. 네플류도프는 당황 하여 그녀를 앞지른 자기 자신을 책망하면서, 모르스키야 거리로 접어들었다. 제방으로 나온 그는 순경이 이상한 얼굴을 하거나 말거나 오르락 내리락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극장에 들어갔을 때, 그 여자도 역시 저런 미소를 던져 주었지.' 그는 생각했다. ' 그 미소와 지금의 이 미소는 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 다른 것이 있다면, 거리에서 본 그 여자는 단적으로 하는 솔직한 데가 있었고, 마리에트는 사뭇 자기는 그런 것 따윈 생각지 않는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고귀하고 세련된 생활을 하고 있는 척하는 것이지만,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이 거리의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하고 있지 만, 마리에트는 아름답고 더러운 욕정을 장난거리로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 거리의 여자들 은 더럽다기보다는 갈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악취가 풍기는 구정물 같은 것 이지만, 그 극장에 도사리고 있는 여인들은 손아귀에 걸려드는 사람들을 독살해 버리는 독 약과도 같은 것이다.' 네플류도프는 귀족 회장 부인과의 관계를 상기하자, 수치스러운 추억이 꼬리를 물고 밀려 왔다. '인간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야수성은 증오스러운 것이지만.'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야수성이 그대로의 모습대로 나타날 때, 우리는 정신 생활의 높이에서 그것을 내려다보고 멸시할 수가 있다. 타락하든지 안하든지 간에 그것은 본래의 자세이지만, 야수성이 겉치레만 의 미적이고 시적인 감정의 껍질을 쓰고 우리들의 존경을 요구하게 되면, 우리는 이 동물적 인 것을 신처럼 모시게 되고 매혹되어서, 선악의 구별조차 못하게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무서운 것이 된다.' 이제 네플류도프에게는 이러한 사실이 지금 눈앞에 궁전과 위병과 성새와 강과 보트와 증 권 거래소가 뚜렷이 보이듯이 똑똑해 보였다. 그리고 그 날 밤, 이 지상에는 이미 휴식을 주는 평온한 어둠은 없고, 다만 어디서 흘러나 오는지도 알 수 없는 흐릿하고 불쾌하고 부자연스러운 빛만이 남아 있듯이, 네플류도프의 마음속에도 이미 휴식을 주는 무지의 어둠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세상 에서 귀중하고 훌륭하다고 생각되고 있는 것은 모두 하찮고 더러운 것이며, 눈부신 광채와 사치는 뭇사람들에게 아주 당연한 것으로 취급되어, 벌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 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아름다움으로 버젓이 장식된 낡은 죄악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네플류도프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싶었고, 또한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페테르부르크를 뒤덮고 있는 빛의 근원을 볼 수 없었듯이 그는 이들 모두 를 계시해 준 빛의 근원을 볼 수 없었으며, 또 그 빛은 흐리고 불쾌하고 부자유스러운 것으 로 여겨졌지만 그는 그 빛에 의해서 계시된 것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기쁘기도 했 거니와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29 모스크바로 돌아오자 네플류도프는 만사를 제쳐놓고 우선 대심원이 재판소의 판결을 인정 했으므로, 시베리아로 떠날 채비를 해야한다는 슬픈 소식을 마슬로바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감옥의 부속병원으로 달려갔다. 변호사가 써 준 황제 앞으로의 청원서를 지금 마슬로바이의 서명을 받기 위해 감옥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었으나, 그는 별로 희망을 걸지 않았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지금에 와서는 그 청원이 허용되기를 바라지 않게 되었다. 시베리아로 가서 유형수나 징역수들과 함께 생 활할 것만을 생각했고, 만일 마슬로바가 석방된다면 자기의 생활과 마슬로바의 생활을 어떻 게 설계할 수 있을 것이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는 미국 작가 도로우의 말을 상기했다. 미 국에 아직도 농노제가 존재하고 있을 무렵, 그는 농노제가 합법화되고 보호되고 있는 나라 레서는 정직한 시민이 몸을 의탁할 유일한 안식처는 오직 감옥뿐이라고 알했었다. 네플류도 프는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본 후부터 이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그렇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정직한 사람들이 몸을 의탁할 유일한 장소는 감옥뿐이다!'하 고 그는 생각했다. 마치내 마차가 감옥 가까이 가서 그 구내로 들어서자, 그는 이것을 직접 체험했다. 병원 수위는 그가 네플류도프임을 알자, 마슬로바는 이미 병원에 있지 않다고 알려 주었 다. "그런 어디로 갔소?" "다시 감옥으로 갔습니다." "왜 돌아갔죠?"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그런 여자야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각하."하고 수위는 경멸하 듯 엷은 웃음을 띠며 말했 다. "조수와 붙여다녔기 때문에 병원장이 돌려 보낸거죠." 네플류도프는 마슬로바와 그녀의 정신 상태가 그토록 자기와 거리가 먼 곳에 있으리라고 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참으로 괴로웠다.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치솟았던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정신 상태가 차 차 갈라져 간다고 적이 기꺼워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자기의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그 말도, 비난도, 눈물도...비교될 수 있는 한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여자의 교활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되었다. 마지막 만났을 때 바로 잡을 수 없는 타락의 징조를 그녀 속에서 보았던 것을 이제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모  스고 병원을 나왔을 때,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자,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그는 이렇게 자신에게 물었다. '아직 그녀와의 관계는 끝나 지 않은 것일까? 그녀의 이러한 행동으로써 나는 이제 해방된 것이 아닐까?'하고 그는 스스로 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이 질문을 던지자마자 자기가 해방된 기분으로 그녀를 버린다면, 자기가 벌을 주 려는 그녀는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벌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두려 웠다. '아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의 계획을 변경시킬 수는 없다. 결심을 굳게 할 따른이다. 그녀는 마음내키는대로 결심을 하라고 내버려 두자. 조수와 밀통하건 말건 상관할 것 없다. 내가 할일은 내 양심의 명령에 따라하는 것뿐이다.'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양심은 내가 범한 죄의 속죄를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 러므로 형식상으로나마 결혼을 하고 그녀가 어디로 추방되든지 그녀를 따라가겠다는 나의 결심은 변경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고집을 부리며 이렇게 혼잣말을 했 다. 네플류도프는 병원을 나와 단호한 걸음걸이로 감옥 문을 향해 걸어갔다. 감옥 문에 다가서자, 그는 마슬로바를 면회하러 왔다고 소장에게 전해달라고 담당 간수에 게 부탁했다. 간수는 네플류도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숙한 사람들 대하듯 감옥 안에서 일어난 중대한 새소식을 알려주었다. 전에 있던 소장은 이미 파면되었고, 그 후임으로 엄격 한 다른 소장이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그래 요즘은 굉장히 엄격해져서 곤란하답니다."하고 간수는 말했다. "마침 소장님이 계시 니까, 곧 전하긴 하겠습니다만." 소장은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곧 네플류도프가 있는 데로 왔다. 새로 온 소장은 키가 크 고 광대뼈가 툭 불거진, 동작이 몹시 느리고 침울한 사람이었다. "면회는 지정된 날, 면회소 안에서만 허용됩니다." 그는 네플류도프를 보지도 않고 말했 다. "황제에게 올릴 청원서에 서명을 받으러 왔습니다." "제게 그것을 맡기십시오." "본인을 직접 만나고 싶습니다. 전에는 언제든지 만나 볼 수 있었는데요." "전에는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네플류도프를 힐끗 보면서 소장은 말했다. "현지사의 허가증도 가지고 있습니다." 네플류도프는 수첩을 꺼내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보여 주십시오." 여전히 상대방을 똑바로 보지 않고 소장은 말했다. 넷째손가락에 금반지 를 낀, 길고 하얀 손으로 네플류도프가 내놓은 서루를 받아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그럼 사 무실로 오십시오." 소장은 말했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장은 자신도 면회에 입회할 작정인 듯 테이블 앞에 앉아서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는 서류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치범 보고두호프스카야를 면회할 수 있느냐고 네플류도프가 물어보자, 소장은 간단히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 "정치범과의 면회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소장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다시 서류를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보고두호프스카야에게 전할 편지를 호주머니 속에 넣고 있었던 네플류도프는 계획했던 범 죄가 발각되어 실패한 사람과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슬로바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소장은 고개를 들어 마슬로바와 네플류도프를 보지도 않 고 말했다. "자, 면회하십시오."하고 말이 확인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네플류도프는 종전과 같은 태도로 그녀를 대하고 싶었으나, 마음먹은대로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난 당신의 좋지 않은 소식을 가지고 왔소." 그는 손을 내밀지 않고, 얼굴도 보지 않고 덤 덤히 말했다. "대심원에서 그만 기각되고 말았소." "저도 그럴 줄 알았어요." 그녀는 숨이 찬 듯한 이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종전과 같으면 네플류도프는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풀리지 않았을뿐더러 그녀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져갔다. 소장은 일어서서 방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는 이제 마슬로바에 대해서 심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는데도 대심원의 기각에 대한 유감의 뜻만은 말해야되겠다고 생각했다. "낙심하지 말아요."하고 그는 말했다. "황제께 청원서를 내면 잘된 테니까. 나도 그것을 기대하고..." "전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그녀는 눈물을 글썽한 사팔눈으로 호소하듯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럼 뭐란 말이오?" "병원에 들르셨다니까 필시 제 소문을 들으셨겠지요?" "그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오?" 네플류도프는 이마를 찌푸리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녀가 병원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자, 간신히 가라앉으려던 모욕감이 다시 고개를 쳐 들었다. '난 어엿한 귀족이다. 어느 상류 계급의 처녀라 할지라도 좋아하고 결혼하는 걸 행 복 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 내가, 이런 여자에게 청혼을 하고 있는데 그 사이를 못참아 조수와 밀통을 하다니.'하고 그는 증오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자, 이 청원서에 서명해요." 그는 말하면서 호주머니 속에서 큼직한 봉투를 테이블위에 놓았다. 그녀는 스카프 끝으로 눈물을 훔치고 의자에 앉아, 어디다 무엇을 써야 하느냐고 물 었다. 네플류도프가 가르쳐 주자, 그녀가 왼손으로 오른팔 소매를 매만지면서 테이블 앞에 앉았 다. 그는 마슬로바의 뒤에 서서 슬픔을 참지 못하여 바들바들 떨며 그녀의 등을 말없이 바 라보았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선악의 두 가지 감정이 모욕을 당한 긍지와, 고민을 하고 있는 그녀에 대한 연민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결국 후자가 이기고 말았다. 진심으로 그녀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앞섰는지 혹은 자기 자신을 깨닫고 지금 자기 가 그녀를 비난하고 있는 자신의 죄와 추행을 상기해낸 것이 앞섰는지 그것은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는 갑자기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 다. 마슬로바는 청원서에 서명을 하고 잉크가 묻은 손가락을 스커트에 문지르며 일어서서 네 플류도프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든, 어떤 결과가 되었든 나의 결심은 변하지 않소."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그녀를 용서하겠다는 생각이, 그녀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사랑스러운 감정을 더욱 강하게 돋우어 주었다. 그는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나는 말한대로 실행하겠소. 당신이 어디로 유형가든 따라가겠소." "모두 소용없는 일이예요." 그녀는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챘으나 그녀의 얼굴만은 환하게 빛났다. "여행중 필요한 물건을 생각해 봐요." "별로 없어요. 정말 여러 모로 고맙습니다." 소장이 다가왔으므로 네플류도프는 주의를 받기 전에 그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지금까 지 한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기쁨과 마음의 평안과 만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맛보면서 밖 으로 나왔다. 마슬로바가 어떤 일을 했건,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변할 수 없다는 자각 이 그를 기쁘게 하고, 그를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은 정신의 세계로 승화시켜주었다. 그녀가 조수와 밀통을 했건 말건 그것은 그녀의 자유인 것이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 또 신을 위해서였으니까. 그런데 마슬로바가 병원에서 쫓겨난 원인이며, 네플류도프도 그것을 사실러 믿었던 조수 와의 사건이란 이런 것이었다. 마슬로바가 여조수의 심부름으로 탕약을 가지러 복도 끝에 있는 약국으로 가자, 공요롭게도 거기에는 오래 전부터 귀찮게 따라다니던 키 크고 여드름 투성이인 조수 우스티노프 한 사람만이 있었다. 마슬로바가 끌어안으려고 덤벼드는 그의 손 을 뿌리치고 힘껏 떼밀자, 조수는 그만 약장에 부딪쳐 그 곳에 있던 약병 두 개가 떨어져 깨지고 말았다. 마침 이때 복도를 지나가던 병원장이 물건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홍당무가 되어서 뛰쳐나오는 마슬로바를 보고 버럭 하를 내며 소리쳤다. "이 봐, 여기까지 와서 망측한 짓을 하면 내쫓을테야. 대체 왜 야단들이야!"하고 조수 쪽 도 번갈아보면서 안경너머로 쏘아보았다. 조수는 쓴웃음을 띠며 변명하기 시작했으나, 병원장은 그의 말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고 개를 들고 안경 너머로 그를 바라본 다음 병실로 가버렸다. 그리고 그는 그 날 중으로 마슬 로바 대신에 좀더 얌전한 여자를 보내 달라고 소장에게 말했던 것이다. 마슬로바와 조수와 의 관계란 이런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마슬로바는 사내와 밀통했다는 누명으로 병원 에서 내쫓긴 것이 무척 괴로웠다. 그녀는 네플류도프와 처음 만난 이후부터 오랫동안 진저 리가 나는 남자와의 관계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자기의 과거와 현재의 처지를 판단해서 뭇 사내들이, 더군다나 여드름투성이의 조수 녀석까지도 그녀를 능욕하는 것쯤 당연하게 생 각하고, 거절하기만 하면 도리어 이상한 표정을 짓는 것이 그녀로 하여금 뼈저린 모욕감을 느끼게 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에 눈물을 흐렸다. 방금 네플류도프를 만났을 때 도 그녀는 필시 병원에서 들었을 억울한 누명을 변명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변명을 시작 하면 그는 믿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의심을 깊게 살 것 같아서, 눈물이 솟구쳐 입을 다물어 버렸던 것이다. 마슬로바는 두 번째 면회 때 네플류도프에게 분명하게 말한 것처럼, 그를 절대로 용서하 지 않겠으며 미워하고 있다고 믿어왔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새 다시 그를 사랑하게 되었 고, 사랑하는 나머지 그가 바라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실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술도 끊고 교태도 부리지 않았으며, 병원의 잡역부가 된 게 아니던가. 네플류도프가 이 모든 것을 바라 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플류도프가 희생을 무릅쓰고 결혼을 하 겠다는 말을 꺼낼 적마다 그토록 완강히 거절해 온 것도 사실은 자기가 한번 입 밖에 낸 오 만스러운 말을 번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자기와의 결혼이 그를 불행하게 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그의 희생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 으리라고 군데 다짐은 하고 있었으나, 네플류도프가 옛날의 그녀로 생각하고 멸시하고 자기 마음속에 일어난 변화를 알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 괴로웠다. 지금 쯤 네플류도프는 그녀가 병원에서 무슨 불미스러운 인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 른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유형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는 통지보다 더 괴로운 사실이었다. 30 마슬로바가 제 1호송대에 끼여서 이송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네플류돌프는 출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정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아무리 시간이 많다 하더라도 도 저히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이라는 것이 이전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전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했고, 또 일의 흥미도 없었지 드미트리 이바노비 치 네플류도프 한 개인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단시에는 일의 흥미 여부가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일이건 모든 것이 그 자신에게는 조금도 상 관 없는 것이고 남에 관한 일뿐일지라도 모든 것이 그 자신에게는 조금도 상관없는 것이고 남에 관한 일뿐일지라도 모든 것이 흥미로울뿐더러 열중할 수 있었고, 더욱이 일은 산더미 처럼 쌓여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던 이전의 일들은 언제나 화가 나고 짜증이 났으나, 지금 이렇게 남을 위한 일을 하고 보니 대개의 경우 즐거운 기분이 우러나오게 했다. 네플류도프가 이 당시 전념하는 일은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었다. 그는 습관화된 조직적 방법으로 일을 분류하여 그것에 따라 세 개의 손가방에다 서류를 나누어 두었다. 첫 번째 일은 마슬로바를 돕는 일이었다. 이 일은 황제에게 제출한 청원서를 끝까지 해결 할 방법과 시베리아로 실제 출발하는 여행 준비였다. 두 번째 일은 영지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파노보 마을에서는 땅값을 마을의 공동 비용에 충당한다는 조건으로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그러나 이 계약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증 서와 유언장을 작성하여 서명을 해둘 필요가 있었다. 쿠즈민스코예 마을에서는 역시 자기가 정한대로, 그 자신이 땅값을 받도록 되어 있었지만, 그 기한을 정한다든지 그 중 얼마를 자 기의 생활비로 충당하고 얼마를 농민들을 위해서 남겨 둘 것인가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 다. 그리고 시베리아로 가는 비용은 얼마나 들 것인가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시베리아로 가는 비용은 얼마나 들 것인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수입을 절반으로 줄이기는 했으나, 그 수입을 완전히 포기할 만한 결심은 아직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세 번째 일은 점점 늘어 가는 죄수들의 간절한 청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처음 한동안 도움을 청해오는 죄수들과 교섭을 갖게 되었을 때는 그는 그들의 고민을 덜 어 주기 위해 그들의 대리인으로서 노력했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의뢰인이 너무 많아져서 그들을 일일이 도와 줄 수가 없음을 알고 부득이 네 번째 일이 생기게 되었는데, 최근에 외 서는 그 일에 무엇보다도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 네 번째 일이란 이른바 형사 재판이라고 불리는 이 놀라운 제도는 대체 무엇이며, 어 떻게 해서 생겼으며, 또 어디서 생기게 되었는지 하는 의문을 해결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현사 재판 때문에 일부이긴 하지만, 그가 수감자들과 친숙해진 감옥이라는 것이 존재하 게 되었고, 또 그에게는 참으로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이었지만 희생된 자들이 수백, 수천이 나 페트로파불로프스크 요새 감옥에서 사할린에 이르기까지 수없는 감금 시설에서 무참히 고생하고 있는 것이 모두가 형사 재판의 결과에 의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죄수들과 개인적인 접촉과 변호사와 교회사와 소장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와 죄수들의 수기에서 본 결과, 네플류도프는 보통 범죄자라고 물리는 죄수들을 다섯 종류의 인간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 부류는 잘못된 재판으로 희생이 된, 전혀 죄가 없는 사람들로서, 이를테면 방화범이 된 메니쇼프라든가 마슬로바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는 않아서, 교회사의 관측으로는 7퍼센트 정도라고 했는데, 이 사람들의 처지가 특히 그의 관심 을 끌었다. 둘째 부류는 분노라든가 질투라든가 술주정이라든가 하는 특수한 사정하에서 저지른 행위 때문에 벌을 받는 사람들로, 이러한 행위는 그들을 재판해서 벌을 준 재판관이라도 그와 같 은 상황에 놓이게 도니다면 십중팔구 그들과 같은 짓을 범했을 것이었다.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네플류도프가 보는 바에 의하면 전체 범죄자의 거의 반수가 넘었다. 셋째 부류는 이들 본인들의 생각에 의하면 매우 당연하고 오히려 잘한 일이라고 믿고 있 는 일이,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입법자들의 측에서 보면 범죄로 감주되는 그러한 행위 때문에 처벌된 사람들이었다. 이를테면 밀주 매매자라든가 밀수업자라든가 또한 대지주의 소유림에 서 풀을 베었다든가 나무를 했다든가 한 사람들이었다. 산적이나, 정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 이라든가 교회의 물건을 훔친 자들이 이 부류에 속했다. 넷째 부류는 단지 정신적인 면에서 일반 사회를 평균 수준보다 높다는 이유로 죄인 취급 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이를테면, 분리파 교도나 독립을 위해서 반란을 일으킨 폴란드인이나 체르케스인, 그리고 정치범들, 사회주의자, 동맹 파업을 일으킨 자, 권력에 반항한 탓으로 처 벌된 사람들 등이었다. 네플류도프의 관찰에 의하면 이러한 부류의 사람의 수는 많은 숫자 에 달했다. 끝으로 다섯째 부류는 그들이 사회에 대해서 범한 죄보다 사회가 그들에게 범한 죄가 더 크다고 생각되는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끊임없는 압박과 유혹 때문에 머리가 우둔해 진, 일반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로서, 돗자리를 훔친 청년을 비롯해서 네플류도프가 감옥 안팎에서 목격한 수백명의 사람들이 이에 속했다. 그들의 생활조건이 범죄가 될만한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네플류도프의 관찰에 의하면, 요즘 그들 가운데서 알게 돈 도둑과 살인자의 대부분은 대대 이 부류에 속했다. 새로운 범죄형이라고 부르는, 사회에 있어서 마치 존재가 형법과 형벌이 필요하다는 중요한 증거처럼 인정을 받고 있는 타락하고 부패한 사람들을 더 가까이 접촉해 본 결과 이 부류에 넣게 된 것이었다. 네플류도프의 의 견에 따르면, 이러한 이른바 타락하고 부패하고 변태적인 범죄형은 사회에 대해서 범한 죄 과보다 오히려 타락하고 부패하고 변태적인 범죄형은 사회에 대해서 범한 죄과 보다 오히려 사회가 그들에게 직접 죄를 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시대, 즉 그들의 양친과 조상에 대 해서도 이미 죄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으로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서 특히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오호턴이라는 절도 상습 범이었다. 그는 매춘부의 사생아로 사창가에서 자라낫고, 나이 서른이 되기까지 순경 이상의 품성을 지닌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도둑패에 들어갔다. 그는 몹시 익살스러운 데가 있어서 사람들과 잘 사귀었다. 그는 네플류도프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조차 도 자기에 대해서나, 재판에 대해서나 감옥에 대해서나 그리고 온갖 법률에 대해서나 형법 뿐만 아니라 신의 계율에 대해서도 익살을 부리지 않고는 못 배겼다. 또 한 사람은 자기가 거느리는 일단의 무뢰한들과 함께 어느 나이 먹은 관리를 살해하고 금품을 약탈한 표도로프 라는 잘생긴 사내다. 그는 부당하게 집을 몰수당한 농부의 아들로서 그 후 군데에 징집되었 다가 군대에서 어느 장교의 정부와 눈이 맞았기 때문에 단단히 혼이 났었다. 그는 정력적이 고 매력적인 성격의 소유자로서 인생을 실컷 즐겨 보자는 인간이었다. 그는 이제껏 이유야 어찌 되었든간에 자기 스스로 향락을 억제했다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네플류도 프는 이 두 사람이 다 좋은 소질을 타고났으면서도 내버려 둔 식물처럼 제멋대로 자라서 병 신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잔인하리만큼 우매한데다가 반발심이 있는 불량한 사람을 보았으나, 그들에게서 이탈리아 학파가 주장하는 범죄형을 볼 수가 있 었다. 다만 개인적으로 불쾌한 자도 있었으나, 그런 사람은 감옥 밖에서도 연미복을 입고 견 장을 달고 레이스로 장식을 한 자들 중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 한동안 네플류도프는 이런 무제에 대한 해답을 책에서 얻어 보려고 했다. 그는 롬브 로소, 모즐리, 가브리엘타르드 등의 저서를 사다가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그런 서적을 읽으 면 읽을수록 점점 더 실망은 커져 갔다. 학계에서 무언가 역할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즉 저술을 하고 논쟁을 하고 교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일같이 닥쳐오는 인생문제를 해 결해 보려고 과학을 대하는 사람들이 흔히 실망하듯이 네플류도프 역시 그렇게 실망한 것이 었다. 과학은 곤란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수많은 해답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싶어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해답도 주지 않았다. 그는 지극히 간단한 일을 묻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사람이 사람을 감금하고 고통 을 주고 유형을 보내고 매질을 하고 죽일 수가 있는가? 그가 얻은 해답은 갖가지 논의들이 었다. 즉 인간은 의지의 자유를 갖고 있는가 없는가? 두개골 따위를 측량함으로써 범죄자인 지 아닌지를 식별할 수가 있는가? 범죄에 있어서 유전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선천적 인 부도덕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도덕이란 무엇인가? 발광이란? 타락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또 기질이란 무엇인가? 기후, 음식, 무지, 모방, 최면술, 욕정 등이 범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대관절 사회란 무엇일까? 사회의 의무란 무엇일까... 등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 같은 논의는 언젠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린 소년에게 문을 했을 때 얻은 해답을 네플 류도프로 하여금 회상케 했다. 네플류도프는 그 소년에게 철자법을 배웠느냐고 물었다. "배 웠어요."하고 소년은 대답했다. "그럼 써봐, 발이라고." "발이라니 무슨 발이죠? 개 발 말인 가요?"하고 소년은 능청맞게 대꾸했다. 네플류도프가 자기의 우일한 근본적인 의문에 대해 서 학술서 가운데서 찾아낸 질문의 해답도 바로 이 소년의 대답과 같은 것이었다. 이들 서적 속에는 총명하고 박식하고 흥미로운 것이 많았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 무근 권 리로써 인간이 인간을 처벌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모 든 논의는 미리 형벌을 설명하고 주장하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수시로 많은 서적을 읽었 으므로 이러한 피상적인 연구로써 해답을 얻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해답다운 것이 점점 더 빈번히 나타나긴 했으나, 그 진실성은 아직 충분히 믿을 수 있는 경지에까지 는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31 마슬로바가 끼여 있는 죄수 이송단은 7월 15일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 날 그녀를 따라갈 준비를 했다. 출발 전날 밤 네플류도프의 누이와 매형이 동생을 만나 러 시골에서 올라왔다. 네플류도프의 누님인 나탈리아 이바노브나 라고진스카야는 동생보다 열 살이나 위였다. 그 는 어느 정도 누님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누님은 그가 어렸을 적부터 사랑했고 그 후 출가 하기 전만 해도 같은 나이 또래처럼 의좋게 지냈었다. 누님은 스물다섯 살의 처녀였고, 그는 열다섯 살의 소년이었다. 그 당시 그녀는 그의 친구 니콜렌카 이르체네프를 사랑하고 있었 다. 남매는 둘 다 니콜렌카를 사랑했는데, 그들은 그에게서나 자기들에게서나, 모든 사람들 과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그 무엇을 발견하고 그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 후 두 남매는 타락하고 말았다. 그는 군대에 입대해서 방탕한 생활을 했고, 그녀는 성 적으로 사랑한 남자하고 결혼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들 남매가 한때 사랑하고 소중히 여 기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조차 하지 않았 다. 그녀가 생활신조로 여기고 있던 도덕적 완성이라든가, 만인에 대한 봉사라든가 하는 모 든 동경을 그는 자기 멋대로 생각해서 이기심만을 만족시키고 뭇 사람들 앞에 돋보이려는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매형 라고진스키는 가문도 보잘것없고 재산도 없는 사람이었으나 무척 유능한 관리였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사이를 요령있게 누비고 헤엄쳐 다니면서 이 두 사조 중에서 때와 장소에 따라 자기 생활에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쪽을 이용하고, 특히 여자의 마음을 휘 어잡는 뛰어난 수완을 이용하여 비교적 유능한 재판관으로서 지위를 쌓아올린 것이었다. 이 미 청년기가 지났을 무렵, 그는 외국에서 네플류도프의 일가를 알게 되어, 그 때 역시 처녀 기가 이미 지난 나탈리아를 온통 몸달게 만들어 손아귀에 넣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이 결혼 이 어울리지 않는 다고 생각하고 반대했다. 네플류도프는 스스로 이런 기분을 감추려 했고 그 감정과 싸웠으나, 매형을 증오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 사내의 저속한 감정과 편 협한 자부심이 네플류도프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특히 누님이 그렇게도 천박한 남자를 열정적이고 이기적으로 또 육감적으로 사랑하게 되어, 여태껏 지니고 있던 좋은 점을 송두 리째 남편을 위해서 없애 버렸다는 것이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나탈리아가 텁 석부리며 대머리가 번뜩이는 자만심이 강한 사내의 아내라는 생각을 하기만 하면 네플류도 프는 언제나 괴로웠다. 그는 그의 아이들에 대해서까지 미운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누님이 이제 곧 애 어머니가 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자기들하고는 딴사람이나 다름없는 이 사 내에게서 누님이 무슨 병을 옮겨받기나 한 거처럼 슬픈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사내아이 하나와 계집아이 하나가 있었으나, 아이들은 데리고 오지 않고 라고진스키 부부만 왔다. 그들은 최고급 호텔의 제일 좋은 방에 들었다. 나탈리아 이바노브 나는 곧 어머니의 옛집으로 마차를 몰고 갔으나, 동생을 만나지 못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 브나에게서 동생이 하숙집으로 옮겼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갔다. 낮에도 램프를 켜고 있는, 불쾌한 냄새가 풍기는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만난 꾀죄죄한 하인이 지금 네플류도프는 없다 고 말했다. 그녀는 조그마한 두 방으로 들어가면서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모든 것에서 그녀는 눈에 익은 깨끗하고 빈틈 없는 동생의 성격을 엿볼 수 있었으나, 소박한 가구를 발견하고는 무척 놀랐다. 책상 위에는 눈에 익은 청동의 개가 달린 문신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여러 서류철 이며 서류며 필기구 등이 질서 정연하게 포개져 놓여 있었고 형법에 관한 서적과 헨리 조지 의 영어판과 타르드의 프랑스어 책 사이에는 낯익은 활 모양의 상아 페이퍼 나이프가 끼워 져 있었다. 그녀는 책상을 향해 앉아서 오늘 꼭 만나러 와달라고 쓴 다음, 기막히다는 듯이 방 안을 들러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호텔로 돌아왔다. 지금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동생에게 관계되는 두 가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하나는 카츄샤와의 결혼 문제였는데, 이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얘깃거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녀도 자기 마을에서 들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한다는 것 이었는데, 이 역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무슨 정치적 의미를 띤 불온한 행동이라고 생각들 을 하고 있었다. 카추샤와의 결혼 문제는 한편으론 나탈리아의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동생 의 결단성 있는 태도가 좋았고, 동생의 그러한 결단에서 출가하기 전의 행복했던 시절의 동 생과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런 무서운 여자하고 결혼한다고 생각을 하자 소름이 끼치는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더 강했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 소용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동생을 설득해서 그의 마음 을 돌려보겠다고 결심했다. 또 하나의 문제인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한다는 것도 그녀에게는 그다지 관심거리가 되 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몹시 분개해서 그렇게 못하도록 설득하라고 말했다. 그러한 행동 은 무분별하고 정박하고 오만한 것이며 구태여 설명하자면 자기를 과시하고 자랑하고 좋은 평판을 얻으려는 심사에 불과한 것이라고 남편은 말했던 것이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그 땅값까지도 그들을 위해서 쓰게 하다니, 거기에 대 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하고 그는 말했다. "만일 그러고 싶다면, 농민 은행을 통해서 그들에게 팔아 버리면 되잖아. 그거라면 그래도 의미가 있어. 어쨌든 지금 한다는 것은 아 무리 보아도 미친 짓이야."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벌써 후견인 문제를 궁리하면서 이렇 게 말하고는 처남의 엉뚱한 계획을 어떻게 해서든지 중지시켜야 한다고 아내에게 일러두었 다. . 32 네플류도프는 하숙으로 돌아와서 책상위에 놓여 있는 누님의 편지를 보자, 곧 그녀의 호 텔로 찾아갔다. 저녁 때였다.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별실에서 쉬고 있었기 때문에 나탈리 아 이바노브나만이 동생을 맞았다. 그녀는 허리가 잘록한 검은 비단 야회복을 입고 까만 머 리를 지져 유행하는 헤어스타일로 높이 틀어올리고 있었다. 같은 연배의 남편에게 좀더 젊 게 보이려고 높은 보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동생을 보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옷자락을 살랑거리면서 종종걸음으로 그를 맞았다. 남매는 키스를 나누고 미소를 지 으면서 물끄러미 서로 바라보았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롭고 의미심장한 진실이 깃 들인 시선을 주고받았으나, 그들은 진실이 깃들이지 않은 말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남매는 어머니가 별세한 이후 한번도 만난 일이 없었다. "누님은 몸이 나고 더 젊어지셨군요."하고 그는 말했다. 누님은 만족스러운 듯 입술을 벙 긋거렸다. "넌 좀 여위었구나." "그런데 매형은?"하고 네플류도프는 물었다. "지금 쉬고 계신단다. 간밤에 주무시지 못했어." 할 말은 태산 같았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말을 서로 눈으로 얘기했다. "아까 너한테 갔었단다." "네, 알고 있어요. 난 집을 나와 버렸어요. 혼자 살기엔 너무 넓고 쓸쓸해서. 그리고 난 아 무것도 소용 없으니 누님이나 모두 가져가세요. 가구든 뭐든." "글세,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도 그러더라. 거기에도 들러 봤어. 고맙긴 하지만..." 이 때 호텔의 하인이 은제 찻잔을 날라왔다. 그들은 하인이 찻그릇을 늘어놓는 동안 잠자 코 있었다.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테이블 앞에 놓인 안락의자에 가서 묵묵히 차를 따랐다. 네플류도프도 말이 없었다. "그런데 드미트리, 난 모든 걸 알고 있단다." 나탈리아는 흘끔 동생을 보고 결심한 듯 입 을 열었다. "누님이 알고 계시다니 기쁩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을 해 온 여자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나탈리아 이바 노브나가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조그마한 의자에 똑바로 앉아서 누님의 얘기를 잘 듣고 잘 대답하려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마슬로바와의 마지막 면회에서 일어났던 기분은 아직 그의 영혼을 조용 히 기쁨과 모든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으로 넘치게 해주었던 것이다. "난 그 여자를 바로잡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바로잡으려는 거예요."하고 그 는 대답했다.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 아니고도 다른 방법이 있을 테네." "그래도 난 그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뿐만 아니라 결혼을 함으로써 내가 남에게 소용이 될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요."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하고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말했다. "네가 행복해지라고는..." "문제는 내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 물론 그렇겠지. 그런 그 여자에게 양심이 있다면 그 여자는 행복해 질 수가 없을 거야. 또 그것을 바랄 수조차도 없을 거고." "그 여자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알겠어. 그러나 인생이라는 것은..." "인생이 뭡니까? 마땅히 우리가 해야할 일을 요구할 뿐, 인생은 그 밖에는 아무것도 요구 하지 않을 것입니다." 눈과 입언저리에 잔주름이 생기기는 했지만, 아직도 앎다운 누님의 얼 굴을 바라보면서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했다. "난 모르겠다." 그녀는 한숨을 내귀면서 말했다. '가엾게도! 어쩌면 저렇게 변해버렸을까?' 네플류도프는 결혼하기 이전의 누님을 상기 하 고, 자기가 아직 어렸을 때 맛보던 상냥하던 누님의 마음씨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 때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바싹 쳐들고, 널찍한 가슴 팍을 내밀고, 안경과 대머리와 검은 구렛나루를 번쩍이면서 경쾌한 걸음걸이로 빙그레 비소 를 띠며 방으로 들어왔다. "참, 오랜만이군요." 그는 의식적으로 힘을 주어 말했다. 걸혼 후 얼마동안 두 사람은 친밀한 '자네', '형님'이라는 말을 쓰려고 노력해 보았으나 결 국 허사가 되고 말았었다. 그들은 서로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그나치 니키포로치는 가볍게 안락의자에 앉았다. "얘기하는 데 방해가 도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말이나 행동을 누구에게도 감추지 않습니다." 그의 얼굴과 털투성이 손을 보고, 보호자연하는 자신만만하고 너그러운 말투를 듣자, 부드 러웠던 네플류도프의 기분은 순식간에 굳어져 버렸다. "우린 지금 동생의 계획에 대해서 얘기하던 참이예요."하고 나탈리아 이바노브나가 말했 다. "차를 드시겠어요?" 그녀는 찻잔을 들면서 이렇게 물었다. "음, 그런데 그 계획이란 어떤 것이지?" "실은 내가 죄를 끼친 여자가 시베리아로 가게 되어 같이 따라갈까 합니다."하고 네플류 도프는 말했다. "내가 듣기에는, 그냥 따라가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이 있다고 하던데." "네, 그 여자만 승낙한다면 결혼할까 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나 별 지장이 없다면 동기를 이야기해 줄 수 없겠어요? 나에겐 납득 이 가지 않는군요." "그 동기라는 것은, 그 여자가... 타락의 길로 접어든 그 첫걸음이..." 네플류도프는 적당히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해 짜증을 냈다. "그러니까 동기는 내게 죄가 있는데 그녀가 벌을 받았 기 때문입니다." "벌을 받았다면 그 여자도 죄가 없지는 않을 텐데." "그 여자는 전연 죄가 없습니다." 네플류도프는 필요 이상을 흥분하면서 그 경위를 얘기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재판장의 실수였군요. 그리고 배심원의 답신이 소홀했던 것에도 원인 이있고요. 그러나 이런 경우를 위해서 대심원이 있지 않던가?" "대심원에서도 기각됐습니다." "기각되었다면, 요컨대 충분한 상소 이유가 없었던 게로군." 대심원의 결과는 언제나 진실 하다는 속론을 믿고 있는 듯, 이그나치 니키로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대심원은 사건의 본질 적인 심리에는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판결에 잘못이 있다면 황제에게 청원해야 해 요." "수속을 했습니다만, 전옂 가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법무부에 조회가 가면 법무부는 대심 원에 조회하고 대심원은 자기네 판결을 되풀이할 것입니다. 결국 전과 마찬가지로 죄없는 여자가 처벌되고 마는 겁니다." "법무부가 대심원에 조회할 리가 있을까요?"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관대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재판소에서 상세한 것을 요구해서 잘못을 발견하면 그에 의해 새로 판결 을 내려요. 그리고 죄 없는 자는 절대로 형벌을 받지 않아요. 어쩌다 받는다 해도 극히 드문 일이지요. 역시 벌을 받는 것은 죄가 있는 사람입니다." 천천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와 정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네플류도프는 매형에 대한 반감을 품으면서 말했다. "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 사람들의 과반수가 무죄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 다." "그건 어째서지요?" "문자 그대로 무죄니까요. 이를테면, 그 여자는 독살 사건에 누명을 쓴 것이고, 요즈음 내 가 만난 농부는 자기가 범하지 않은 살인 사건에 말려 있어서 무죄이며, 그리고 방화범으로 잡혀 있던 모자도 무죄였습니다. 이 모자는 집주인이 저지른 방화 때문에 하마터면 유죄 판 결을 받을 뻔했습니다." "그야 물론 재판상의 착오란 항상 있어 왔고, 또 앞으로도 있을 테죠. 인간이 만든 제도니 까 완벽하다고 할 수야 없는 겁니다." "그리고 죄가 없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들이 자라난 특정한 환경 때문에 자기들이 저지른 행위를 범죄로 보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실례지만, 그건 좀 지나친 편견인 것 같군요. 어떤 도둑이라도 도둑질이 나쁘다, 도둑질 을 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은 사람의 도리에서 어긋나는 행위이다, 하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 까요." 여전히 다소 남을 멸시하는 듯한 자신 만만하고 침착한 미소를 디면서 이그나치 니 키포로비치는 말했다. 그 미소는 네플류도프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아뇨, 그들은 모릅니다. 그저 도둑질을 해서는 안 된다고 일러 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 은 공장주가 임금을 착복해서 그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는 일이며, 정부가 숱한 관리를 사 용해서 조세라는 명목으로 계속 그들의 돈을 수탈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건 벌써 무정부주의로군요."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처남의 말을 조용 히 이렇게 단정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단지 사실대로 말했을 따름입니다." 네플류도프는 말 을 계속했다. "그들은 정부가 자기네들의 돈을 수탈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어야 힐 토지를 우리네 지주들이 그들에게서 빼앗고 그들을 약탈하고 있다 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빼앗긴 토지에서 농민들이 자기네 난로에 땔 나뭇가 지를 꺾어 가면 우리들은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고 도둑이라고 단정짓는다는 것을 알고 있 습니다. 도둑은 그들이 아니라 실은 그들의 토지를 훔친 자들이며, 도둑을 맞는 것을 다시 찾는다는 것은 자기네들의 가족에 대한 의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잘 모르겠군. 비록 안다고 하더라도 찬성할 수가 없군요. 토지는 그 누구의 토지가 아닐 수 없는 것이며, 만일 당신이 토지를 분배해 준다면..."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네플류도프 가 사회주의자이며 또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은 모두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해 줘야 한다는 것 에 있다고 믿고, 이렇게 분배하는 법은 몹시 어리석은 것이며, 또 그 어리석음을 쉽사리 증 명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 만만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가령 오늘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해 준다고 하더라도, 내일에는 그 토지가 근면하고 수완있는 사람들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 것 입니다." "아무도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하려는 생각은 안합니다. 토지는 아무도 사유해서는 안 되 니까요. 사거나 팔거나 빌리거나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유권이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거예요. 기 사유권이 없이는 토지 를 경작하려는 따위의 흥미는 애당초 있을 수 없을 테니까요. 사유권을 없애려면, 우린 야만 시대로 되돌아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토지 사유에 대한 갈망은 토지가 필요한 증거라는 것을 반박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는 일반론을 되풀이하면서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마치 그것에 대한 권위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그 반대입니다. 아무도 토지를 소유하지 않게 되면 오늘날과 같이 지주라는 인간들이 건 초위에 누워 개처럼 아무일 하지 않고 자기는 토지를 쓰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 며, 그리하여 토지는 방치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이봐요.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그건 정신 나간 짓이야. 오늘날에 와서 토지 사유제를 폐 지할 수는 없는 일이오. 그건 당신의 낡은 도락에 지나지 않아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겠는 데..."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의 얼굴은 청백해지고 목소리는 떨렸다. 이 문제는 그의 마음에 자극을 주었음이 분명했다. "나는 이 문제의 실질적인 해결에 나서기 전에 신중히 생각하도 록 권하고 싶군요." "당신은 내 개인 문제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특별한 지위에 놓여 있는 우리들은 모두 이 지위에서 생기는 의무를 수 행해야 하며 또 우리가 태어나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생활 상태를 유지하여 자손들에게 전해 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바." "그러나 내가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실례지만,"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가로채이지 않으려고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말을 계 속했다. "나는 자신을 위해서나 자기 자식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나의 자식 들은 생활이 보장되어 있으며, 나 자신도 가족이 먹고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은 벌어 놓았어 요. 자식들도 걱정 없이 살 수가 있겠지요. 그러므로 기탄없이 말하겠는데, 당신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개인적인 이해 관계에 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당신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더 깊이 생각 하고, 책이라도 좀 일고..." "아니, 내 문제는 나 자신이 해결하게 내버려두세요. 무슨 책을 읽어야하며 무엇은 읽지 않아도 좋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네플류도프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말했다. 그의 두 손은 싸늘해졌으며, 자신을 자제할 수 없을 것 같아 말없이 차를 마시기 시작했 다. 33 "그런데 조카들은 잘 있나요?" 다소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네플류도프는 누님에게 물었 다. 누님은 시어머니와 함께 아이들을 시골에 남겨 놓고 왔다고 대답했다. 남편과 동생과의 논쟁이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긴 그녀는, 옛날에 네플류도프가 어렸을 때 검둥이라든가 프 랑스 계집애라고 이름을 지은 인형을 가지고 놀던 시절처럼, 요즘 자기 아이들도 인형을 가 지고 여행 놀이를 하며 논다고 얘기했다. "그걸 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네플류도프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글쎄, 그 애들이 노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도 너와 닮았는지." 불쾌한 대화는 끝났다. 나탈리아는 마음이 놓였지만 남편 앞에서 동생하고 둘만이 아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세 사람이 다 아는 화제를 꺼내려고, 결투에서 외아들을 잃은 케멘스카야 부인의 슬픔은 페테르부르크까지 퍼져 화제가 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결투에서 사람을 죽인 자를 일반 살인죄에서 제외하는 제도에는 찬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이 같은 의견은 네플류도프의 반감을 샀다. 그래서 끝장을 보지 못한 문제에 대해서 다시금 논쟁을 시작할 생각이 치밀어올랐으나, 두 사람은 다 입 밖에 내지는 않고 서로 마 음속으로만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각자의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네플류도프가 자기를 비난하고 자기가 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 기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자, 그의 그릇된 판단을 낱낱이 지적해 주고 싶었다. 한편 네플류도 프는 매형이 토지 문제에 대해서 쓸데없는 참견을 한 것을 밉살스럽게 여겼으나, 말로 표현 하지는 않았다(하긴 그는 마음속으로 매부나 누이나 조카들이 그의 상속인으로서 발언할 권 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편협한 인간이 자신 만만하고 침착한 척하며 저 열하고 죄악으로 가득 찬 결투 사건이 틀림없이 합법적이라고 계속 생각하고 있는 데 대해 서는 울화가 치밀어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자만심이 네플류도프를 화나게 했던 것이다. "그러면 재판소는 어떻게 하면 된단 말씀입니까?"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결투에서 사람을 죽인 자도 일반 살인자와 똑같이 다루어서 징역형을 선고해야겠지요." 네플류도프의 손은 또다시 싸늘해지고, 어조는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럼 어떻게 된다는 거죠?" 그는 물었다. "그래서 공평하게 되는 겁니다." "당신의 말은 공평하다는 것이 재판소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들리는군요."하고 네플류 도프는 말했다. "그럼 다른 목적이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어느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재판소란 나의 생각으로는 우리들 지주 계급에 유리한 현행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생겨난 행정상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건 정말 새로운 의견인데." 조용히 미소를 띠면서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말했다. "그러나 일반 재판소에 대해서는 좀 다른 사명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론상으로는 그렇겠지요. 그러나 내가 보기에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재판소의 목적은 현재의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일반 사회의 수준 위에 올라서서 사회를 향상시키려던 사람들, 이른바 정치범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수준 이하의 이른바 범죄형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처벌하는 것입니다." "찬성할 수 없군요. 정치범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우리들 일반 수준보다 높은 자리에 있 기 때문에 처벌된다는 데는 어폐가 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역시 좀 색다른 데가 있긴 하지만 지금 당신이 수준 이하라고 보고 있는 범죄형의 죄수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쓸모 없 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재판관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 다. 분리파 교도들은 모두 정신적이며 지조가 굳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자신의 말을 한번도 방해받은 일이 없는 사람들이 그러 듯, 네플류도프의 말에는 전혀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네플류도프의 비위에 거슬리든 말든 아랑곳없다는 듯, 네플류도프가 말하는 도중에도 자기 얘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재판소가 현행 사회 체제의 유지를 목적으로 한다는 의견에도 찬성할 수가 없습 니다. 재판소는 재판소의 목적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죄인을 올바른 길로 인 도한다든지..." "그럼 감옥에 넣으면 올바른 사람이 되겠군요."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혹은 제거한다든지."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완강히 자기의 말을 계속했다. "즉 사회의 존재를 위협하는 야수 같은 놈들과 방탕자들을 제거하는 그것을 실행할 만한 방법이 없습 니다." "그것은 어째서지요? 모를 소리군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면서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물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합리적인 형벌이란 단 두가지 방법밖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옛날에 사용되었던 체형과 사형이지요. 그러나 이 형벌은 인간의 성정이 부드러워져서 지금 은 폐지되어 가고 있습니다.?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당신한테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며 또한 놀라운 일이군요." "혼을 내서 다시는 나쁜 짓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사회에 대 해서 해롭고 위험한 자의 목을 베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겠지요. 어쨌든 이 형벌은 합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태하고 나쁜 짓을 한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놓고 근심 걱정 없이 강제로 게으르게 만들며, 더 타락한 인간들 속에 처박아 두는 것은, 대체 무슨 의 의가 있을까요? 그리고 무슨 심산인지 모르지만, 한 사람당 국고에서 5백 루블 이상이나 들 여 툴라 현에서 일쿠투스크 현으로, 혹은 루크스카야 현에서 또다른 현으로 이송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 관비 여행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관비 여행이나 감옥 제도가 없다면 우리는 이토록 태평스럽게 앉아 있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나 감옥은 우리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만한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수들은 영원 히 감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석방되는 날이 있으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이런 제도 밑에서 는 도리어 죄수들의 죄악과 타락이 극한에 이르게 되어 결국 위험만을 증대시킬 따름입니 다." "그렇다면 감옥 제도를 완전하게 하려면 국민 교육에 소용되는 비용보다 오히려 다 많은 비용이 드니까 국민에게 새로운 부담을 줄 뿐입니다." "그러나 감옥 제도의 결함 때문에 재판소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다시 이 그나치 니키포로비츠는 처남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자기 얘기만 되풀이했다. "그 결함은 바로잡을 수가 없습니다." 목소리를 높이면서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다 죽어야 합니까? 아니면 어느 정치가의 말대로 눈알을 빼 버려야 합니까?"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승리에 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좀 잔인하기는 하지만, 그 목적을 위해서는 효과적입니다. 현재 시행되고 있 는 제도는 잔인할 뿐만 아니라 아무 효과도 없고, 또 몹시 우매합니다. 정신이 올바른 사람 들이 어째서 이런 형사 재판과 같은 우매하고 잔인한 일에 관계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 습니다." "나도 바로 그런 일에 관계하고 있는걸요."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얼굴이 창백해지면 서 말했다. "그야 당신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은 것 같군요."하고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떨 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재판소에서 검사보가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동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불쌍한 소년을 어떻게 해서든지 유죄로 만들려고 애쓰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또 어떤 검사가 분리파 교도 를 심문하고 복음서를 읽었다는 죄로 유죄로 만들려던 것도 보았습니다. 요컨대 재판소의 일은 그렇게 무의미하고 잔혹한 것뿐입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나는 근무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그나치 니키포로비 치는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플류도프는 매형의 안경 밑이 이상하게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눈물이 아닐까?'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사실 그것은 눈물이었다. 모욕을 받아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이었 다. 이그나치 니키포로비치는 창가로 다가갔다. 손수건을 꺼내더니 헛기침을 하면서 안경을 벗 어들고 눈물을 훔치고 안경을 닦기 시작했다. 그는 소파로 돌아오자, 담배를 피워 물고 잠잠 히 있었다. 네플류도픈 이렇게까지 매형과 누이를 괴롭힌 것이 가슴 아프고 부끄럽게 생각 되었다. 더군다나 내일 출발하면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므로 더욱 그러했다. 그는 서 먹서먹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한 말이 사실임에는 틀림이 없어, 적어도 그는 반박을 못했으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었어. 감정에 사로잡혀서 그를 모욕하고 가엾은 누님을 슬프게 만든 것을 보면, 나도 별반 달라지지는 않았나 보군.'하고 그는 생각했다. 34 마슬로바를 포함한 죄수 이송대는 3시에 역을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그 일행이 감 옥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같이 역까지 따라가기 위해 네플류도프는 12시 전에 감옥으로 가 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날 밤, 네플류도프는 소지품이며 옷과 서류 등을 챙기면서 일기장에서 최근에 쓴 부분 을 드문드문 읽어 보았다. 그 마지막 부분은 그가 페테르부르크를 떠나기 직전에 쓴 것으로 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카추샤는 나의 희생을 바라지 않고 자기를 희생하려 든다. 그녀도 이겼고 나도 이긴 것 이 다. 그녀에게 내면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믿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그녀는 부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바로 뒤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몹시 괴로운 동시에 즐 거운 일을 경험했다. 그녀가 병원에서 좋지 못한 짓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갑자기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괴로움에 빠졌다. 이렇듯 못 견디도록 괴로울 줄은 몰랐다. 나는 그녀와 이 야기할 때 혐오와 증오를 금할 길이 없었다. 그 후에 문득 자기 자신을 느끼고 있는 나 자 신은 얼마나 큰 죄를 범했는가를 깨닫게 되자, 나 자신에 짜증이 났고 동시에 그녀가 불쌍 하게만 여겨졌다. 나는 마음이 누그러졌다. 우리가 항상 제때에 각자의 흠을 발견할 수만 있 다면 우리는 더 선량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오늘 날짜로 이렇게 써놓았다. '오늘 나탈 리아 누님을 방문하여 자기 만족 때문에 악의에 찬 말을 퍼부어서 마음이 무겁다. 그렇지 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일부터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 낡은 생활이여 안녕, 영원히 안녕. 여러가지 느낌이 너무도 많이 겹쳐 있어서 하나로 정리할 수가 없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자, 네플류도프는 매형의 기분을 언짢게 한 것을 후회했다. '이대로 떠날 수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다시 가서 사과를 해야지.' 그러나 시계를 들여다보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죄수 이송대가 출발하는데 늦지 않기 위 해서 서루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급히 떠날 채비를 한 다음, 하숙집 문지기와 같이 떠날 페 도샤의 남편 타라스에게 짐을 지워서 직접 역으로 가게 하고는, 네플류도픈 처음에 눈에 띈 마차를 집어타고 감옥으로 행했다. 죄수 열차는 네플류도프가 탈 우편 열차보다 두 시간 앞 서 출발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작정으로 하숙비를 다 치렀다. 7월의 몹시 무더운 날이었다. 무더웠던 전날 밤의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거리의 포석 과 집집의 돌벽과 함석 지붕들이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공기 속에서 열기를 내뿜고 있었 다. 간혹 바람이 불어올 때는 먼지와 폐인트 냄새가 뒤섞인, 역하고 후근한 공기가 몰려왔 다. 거리에는 행인들도 드물었다. 있어도 그들은 집 그늘 밑으로만 걸어다녔다. 까맣게 햇볕 에 그을린, 낡은 인피 짚신을 신은 도로 인부들만이 길 한복판에 앉아서 타는 듯한 모래바 닥에 깔린 돌을 망치로 다지고 있었다. 표백이 덜된 흰 제복을 입은, 침울해 보이는 경찰관 은 오렌지색의 끈이 달린 권총을 차고, 기운 없이 발을 바꿔 디디면서 길 한복판에 부루퉁 한 채 서 있었다. 흰 두건을 쓰고 그 사이로 귀가 삐져나온 말들이 끄는, 햇볕이 내리쬐는 한쪽만 차일로 가린 철도 마차들이 방울 소리를 울리면서 거리를 덜거덕덜거덕 앞서기 뒤서 거니 하며 왕래하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감옥에 도착했을 때, 죄수들의 대열은 아직 출발하지 않고 있었고, 감옥에서 는 아침 4시부터 시작된 이송 죄수들의 성가신 인계 사무가 계속되었다. 이번에 이송되는 죄수는 남자 623명에다 여자가 64명이었다. 이들 전원을 일일이 죄수 명부와 대조하고 병약 자를 골라내서 호송병에게 인계시켜야 했다. 신임 소장과 두 명의 부소장, 의사와 그의 조 수, 그리고 호송 장교와 서기가 바깥뜰의 담장 그늘에 마련된, 서류와 사무용품으로 쌓인 테 이블 곁에 앉아 있었다. 한 사람씩 호명해서 연달아 나오는 죄수들을 검사하고 심문하고는 장부에 적어 넣었다. 테이블은 벌써 반쯤이나 햇빛으로 덮여 있었다. 찌는 듯한 더위에다 바람은 없고 서 있는 죄수들의 입김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이야. 언제 끝날지 모르겠군!" 키가 크고 몸집이 뚱뚱한, 얼굴이 붉 고 어깨가 치켜지고 팔이 짧은 호송 장교는 수염에 덮인 임으로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아 들이면서 이렇게 뇌까렸다. "이거 정말 못해 먹겠는걸. 대체 어디서 이렇게 숱하게 긁어모아 왔어? 아직도 많이 남았어?" 서기가 장부를 조사했다. "아직 남자 죄수 24명에 여죄수가 그냥 남아 있습니다." "야, 뭘 우물쭈물해! 빨리 와!" 호송 장교는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아 한자리에 몰려 있는 죄수들을 향해서 외쳤다. 죄수들은 줄을 지어 차례를 기다리며, 그것도 그늘이 아니라 뙤약볕에서 세 시간 이상이 나 서 있었다. 감옥 안에서는 이런 일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밖에서는 문 옆에 여전히 총을 든 경비병이 서 있었고, 죄수들의 짐과 병약한 죄수들을 태워 갈 마차가 스물네 대 대기하고 있었다. 한 모퉁이에는 죄수들의 친척과 친구들이 한번 만나 보기라도 하려고, 그리고 될 수만 있으면 말이라도 한 마디 건네고 이송되어 가는 사람들에게 선물이라도 주려고 죄수들이 나오는 것 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도 이 사람들 속에 끼여 있었다. 그는 거의 한 시간이나 서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문 안으로부터 쇠사슬 소리, 발 소 리, 호령하는 소리, 기침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나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5분 가량 계속되고 있는 동안 간수들이 옆문을 들락날락했다. 이윽고 출발 명령이 내려졌다. 감옥문이 '쾅'하고 천둥같이 큰 소리를 내며 열리자, 철거덕 쇠사슬 소리가 더욱 요란해졌 다. 흰 하복에 머스킷 총을 든 호송병들이 밖으로 나와서, 익숙하고 잘 훈련된 동작으로 문 앞에서 널찍하고 둥근 열을 지어 정렬했다. 정렬이 끝나자 새로운 구령 소리가 들리고 박박 깎은 머리에 핫케이크 같은 모자를 쓴 죄수들이 어깨에 배낭을 메고 쇠고랑을 찬 발을 질질 끌면서 한 손으로 등의 배낭을 붙들고 또 한손으로는 보조를 맞추어 흔들면서 두줄로 서서 걸어나왔다. 처음에는 남자 죄수들이 나왔는데, 그들은 모두 회색 바지에 등에 번호가 찍힌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젊은이, 늙은이, 여윈 사람, 뚱뚱한 사람, 창백한 사람, 얼굴이 붉은 사람, 검게 탄 사람, 윗수염을 기른 사람, 턱수염을 늘어뜨린 사람, 턱수염이 없는 사람, 러 시아 사람, 타타르 사람, 유대 사람 -- 그들은 모두 발에 찬 쇠고랑을 쩔그렁거리며 마치 여행을 떠나기나 하듯이 씩씩하게 팔을 흔들면서 나왔다. 그러나 열 발짝쯤 나오더니 멈춰 서서 조용히 네 사람씩 열을 지었다. 뒤이어 계속해서 똑같이 머리를 박박 깎고 똑같은 복 장을 한 죄수들이 발에 쇠고랑만 안 찼다 뿐이지 두 사람씩 수감에 채인 채 줄지어 나왔다. 이들은 유형수들이었다. 그들도 씩씩하게 걸어나오더니 걸음을 멈추고 네 사람씩 줄을 지었 다. 다음은 농민 조합원들이었고 뒤이어 같은 순서로 여죄수들이 나왔다. 선두는 회색 죄수 복에 수건을 쓴 징역수들이었고, 그 뒤에는 자원해서 유형수를 따라가는 도시 복장과 시골 복장을 한 여자들이었다. 그 중에는 회색 죄수복 자락에다 젖먹이를 싸 안은 여자들도 몇 명 끼여 있었다. 여자들과 함께 사내아이들과 계집아이들이 따라나섰다. 이 아이들은 말무리 속의 망아지 처럼 여죄수들 사이에 붙어 따라갔다. 남자 죄수들은 이따금 기침을 하고 간혹 말을 주고받 을 뿐 묵묵히 서 있었으나, 여죄수들은 끊임없이 지껄이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마슬로바가 나왔을 때 이내 그녀임을 알았으나, 그녀의 모습은 인파 속에 곧 묻혀 버렸다. 인간다운 모 습을 잃고 아이들을 거느리고 배낭을 메고 남자 죄수들의 뒤를 떠들어 대면서 따라가는, 여 자다운 데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동물의 인원 점호가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호송병들이 아까 의 인원수와 맞추어 보려고 다시 인원수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이 인원 점검은 오랫동안 계 속되었다. 여러 죄수들이 이곳저곳 자리를 떠나서 인원 점검이 무척 번거로웠기 때문이었다. 호송병은 욕설을 퍼붓고, 얌전하면서도 증오에 찬 죄수들을 떼밀면서 다시 점검하는 수밖에 없었다. 점호가 끝나자 호송 장교가 뭐라고 호령했다. 그러자 죄수들의 무리 속에서 대혼잡 이 일어났다. 병약한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마차 쪽으로 달려가서 먼저 배낭을 얹어놓은 다음 올라타기 시작했다. 앙앙 울어 대는 젖먹이를 안은 여자와, 자리 다툼 을 하는 철부지 아이들과, 침울한 표정의 죄수들이 제각기 짐마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몇 사람의 죄수들은 모자를 벗어들고 호송 장교한테로 걸어가서 뭔가 부탁하고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들은 짐마차에 태워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이었다. 호 송 장교는 부탁하는 죄수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없이 담배만 뻑뻑 빨고 있더니 느닷없이 짧은 팔을 한 죄수 앞에 휘둘렀다. 죄수는 때리는 줄 알고 박박 깎인 머리를 움츠리면서 비 켜섰다. "뻔뻔스런 소리를 하면 맛을 보여 줄 테다!"하고 장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놈은 걸 을 수 있잖아!" 장교는 발목에 쇠고랑을 찬 키가 후리후리하고 비틀거리는 노인 한 사람을 태우기로 했 다. 이 노인은 핫케이크 모자를 벗고 성호를 그으면서 마차옆으로 갔으나, 노쇠한 다리에 쇠 고랑이 채워져 있어서 다리를 쳐들 수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마차에 기어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본 마차에 앉아 있던 시골 여자가 손을 잡아 끌어 주는 네플류도프는 보았 다. 모두 짐마차는 배낭으로 가득 찼고, 그 배낭 위에 타는 것을 허가받은 죄수들이 모두 자 리를 잡자, 호송 장교는 모자를 벗어 이마와 대머리와 붉은 살찐 목덜미를 손수건으로 훔치 고는 성호를 그었다. "앞으로 갓!"하고 그는 호령했다. 호송병들은 총을 절그럭거렸고, 죄수들은 모자를 벗고 성호를 긋기 시작했다. 왼손으로 성 호를 긋는 사람도 있었다. 전송나온 사람들이 뭐라고 외치자, 죄수들도 이에 호응하여 외쳐 댔다. 여자들 사이에서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흰 튜닉을 입은 호송병으로 호위된 죄소 이 송대는 쇠사슬로 묶은 발로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송병이 선두에 섰고, 그 뒤로 쇠고랑을 찬 징역수들이 절그렁 소리를 내면서 네 줄로 뒤따르고, 그 다음은 유형 수와, 두 사람씩 손에 수갑을 찬 농민 조합원, 그리고 여죄수들이 따랐다. 또 그 뒤를 배낭 과 병약자들을 태운 짐마차가 따르고 있었고, 한 마차 위에서는 얼굴을 가린 여자가 한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35 죄수의 행렬은 꽤 길었기 때문에 선두가 시야로부터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배낭과 병약 자를 태운 짐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짐마차가 움직이자, 네플류도프는 기다리고 있던 승 합 마차를 집어타고 대열을 앞질러 가라고 일렀다. 그것은 남자 죄수들 속에서 안면이 있는 죄수가 없나 알아보기도 하고, 여자 죄수들 속에서 마슬로바를 찾아내어 그녀에게 보낸 물 건을 받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찌는 듯이 무더운 날씨였다. 바람 한점 없었다. 천여 개의 발길이 일으키는 먼지구름은 길 한복판을 걸어가는 죄수들의 머리 위를 뽀얗게 맴돌았 다. 죄수들은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기 때문에 네플류도프가 탄 마차의 느린 속도의 말로 는 쉽게 그들을 앞지를 수가 없었다. 대열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이 낯설고 괴상한 인간 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복장을 하고, 같은 신발을 신은 수천 개의 발을 보조에 맞추어 가며, 마치 기운을 돋우려는 듯이 팔을 흔들며 걸어갔다. 그토록 많은 인간이 그토록 똑같은 복장 을 하고 그토록 기묘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보자니까, 무슨 무서운 생물과 같이 느껴졌 다. 그러나 이들 속에서 살인범 표도로프를, 유형수 속에서 익살꾼 오호틴과, 그리고 언젠가 힘을 빌려 달라고 부탁해 온 부랑인을 발견하자, 그의 이러한 인상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거의 모든 죄수들이 그들 옆을 지나가는 승합 마차를 바라보며 타고 있는 신사를 곁눈질했 다. 표도로프는 네플류도프를 알아보았다. 신호로 고개를 끄덕해 보였고 오호틴은 눈을 껌벅 거렸다. 그러나 그들은 혼이 날까봐 인사를 하지 않았다. 여죄수들의 대열과 나란히 가게 되 자, 네플류도프는 곧 마슬로바를 찾아냈다. 그녀는 두 번째 줄에 있었다. 맨 끝에는얼굴이 붉고 다리가 짧으며 눈이 까만 못생긴 여자가 있었는데 -- 옷자락을 허리띠에 찔러넣고 있 었다 -- 바로 그 멋쟁이 여자였다. 다음은 간신히 발을 끌고 가는 애를 밴 여자였고, 그 셋 째가 마슬로바였다. 그녀는 배낭을 메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조용하 고 단호한 결의가 나타나 있었다. 그녀와 같은 줄의 네 번째 여자는 짧은 죄수복에 시골 여 자처럼 머릿수건을 치켜쓴, 씩씩하게 걸어가고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페도샤였다. 네플류 도프는 마차에서 내려, 차입한 물건과 마슬로바의 건강을 알아보고 싶어서 여죄수들 쪽으로 다가갔다. 그랬더니 옆에서 걸어가던 호송병 하사관이 이를 보고 급히 달려왔다. "이봐요, 행렬에 접근하면 안 됩니다.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는 다가오면서 외쳤다. 곁에 가까이 와서 그가 네플류도프임을 알자(감옥에서는 누구나 네플류도프를 알고 있었 다.), 하사관은 거수 경례를 하고 옆에 멈춰 서서 말했다. "지금은 안 됩니다. 역에 가서라면 모르겠습니다. 여기선 안 됩니다. 이것 봐, 처지면 안 돼! 어서 걸엇!" 그는 이렇게 죄수들에게 외쳐 대고는 이런 더운 날씨에 번쩍거리는 새 장 화를 신고 위엄을 부리면서 재빨리 자기자리로 되돌아갔다. 네플류도프는 포석길로 돌아가서 마부에게 뒤에서 따라오라고 이르고 대열을 지켜보면서 걸어갔다. 이 대열이 지나가는 거리거리에서 동정과 공포가 뒤섞인 눈초리가 죄수들에게 쏟 아졌다. 마차를 타고 가던 사람들은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그들이 안 보일 때까지 지켜보 았다. 걸어가던 사람들은 발길을 멈추고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이 을씨년스러운 광경을 보고 있었다. 몇 사람은 다가와서 그들에게 적선을 베푸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것은 호위병이 받았다. 그 중에는 마치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대열을 따라가다가 멈춰 서서 고 개를 흔들며 눈으로만 전송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저기 현관이나 문에서 서로 부르면서 달려나오기도 하고, 창문에서 고개를 내민 채 꼼짝 않고 말없이 이 무서운 행렬을 보고 있 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네거리에서 이 행렬 때문에 아주 호화로운 사륜 마차가 지나가다가 멈추어 서게 되었다. 마부석에는 얼굴이 번들거리고 엉덩이가 큰, 등에 단추가 두 줄이나 달 린 옷을 입은 마부가 앉아 있었다. 마차 뒷자리에는 부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내는 마 르고 창백한 여인으로 밝은 색의 모자와 화려한 양산을 쓰고 있었다. 남편은 실크햇에 밝은 색의 훌륭한 여름 코트를 입고 있었다. 맞은편 앞자리에는 그들의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금 발머리를 늘어뜨린, 역시 화려한 양산을 쓴 꽃같이 어여쁜 소녀와, 가늘고 긴 목과 광대뼈가 튀어나온, 긴 리본을 단 수병모를 쓴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남자는 적당한 때 를 틈타 죄수들 행렬에서 발이 묶이기 전에 빨리 대열을 앞질러 가지 못했다고 화가 나서 마부에게 야단을 쳤으며, 여자는 불쾌한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비단 양 식으로 거의 얼굴을 가리다시피하여 햇볕과 먼지를 막고 있었다. 궁둥이가 큼직한 마부는 이 길로 가라고 시켜 놓고 이제 와서 부당하게 비난을 퍼붓는 주인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얼 굴을 찡그렸다. 그는 굴레 아래에서 게거품을 내뿜는, 번들번들거리는 검정 수말이 달려가려 는 것을 간신히 잡아 두고 있었다. 경찰은 이 호화로운 마차의 주인을 위해서 죄수들을 잠시 멈추고 마차를 통과시키려고 했 지만, 이 대열에는 그 어떤 부귀한 신사라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침통한 엄숙함이서려 있 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부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서 경례만 하고, 만일의 경우에는 마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겠다는 듯이 죄수들을 엄한 눈초리로 노려 보는 것이 고작 이었다. 그 때문에 마차는 대열이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배낭과 병약자들을 실은 마지막 짐마차가 요란스럽게 지나갔을 때에야 가까스로 움직일 수가 있었 다. 마차에 타고 있던 신경질적인 여자는 겨우 울음을 참고 있었으나, 이 호화로운 사륜 마 차를 보자 울음을 터뜨렸다. 이 때 마부가 고삐를 살짝 늦추자 두 필의 검정 말은 포장길을 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고무바퀴 위에서 경쾌하게 흔들리는 사륜 마차를 끌고 별장을 향해 달려갔다. 남편과 아내와 딸과 그리고 목이 가늘고 광대뼈가 불거진 소년은 그들의 별장으 로 놀러 가는 길이었다. 부모는 방금 죄수들의 대열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지금 본 광경의 의미를 제각기 스스로 판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소녀는 부모의 표정을 보 고, 그 사람들은 자기네 부모나 친척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나쁜 사람들이었기에 그런 대우 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던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녀는 그 대열이 무서웠으므로 그 대열 이 멀리 사라져 가자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눈도 깜빡 않고 죄수들의 행렬을 바라보고 있던, 목이 길고 가는 소년은 이 문제 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도 자기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며, 그러므로 누군가 해서 는 안 될 나쁜 짓을 그들에 대해서 한 것이라고, 마치 신에게서 계시라도 받은 듯 조금도 의심치 않고 믿었다. 죄수들이 불쌍해졌으며, 동시에 쇠사슬에 묶이고 머리를 깎인 사람이 나, 그들에게 쇠사슬을 채우고 머리를 깎은 사람이나, 다같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서 그는 곧 울음이 터질 듯이 차츰 입술을 오므렸지만, 이런 때 우는 것을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울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36 네플류도프는 죄수들과 보조를 맞추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는 얇은 옷에다 여름 코 트를 걸쳤을 뿐인데도 지독하게 더웠다. 더욱이 거리를 뒤덮고 있는 먼지와 그들의 주위를 감돌고 있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숨이 콱콱 막혔다. 그는 2,300미터쯤 걸어가다가 다시 마차 를 타고 갔으나 마차가 길 한복판에 나오자 더위가 한층 더 심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어 제 매형과 논쟁한 것을 상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침처럼 그렇게 흥분되지는 않았다. 감옥 을 떠나올 때의 인상과 이 행렬에서 받은 인상은, 그런 생각을 멀리 떨쳐 버리게 하고 말았 다. 아니 그것보다 더위 때문에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울타리 옆의 나무 그늘에서 모 자를 벗은 두 실업 학교 학생이 쭈그리고 있는 얼음 장수 앞에 서 있었다. 한 소년은 뿔로 만든 숟가락을 빨면서 입맛을 다시고 있었고, 또 한 학생은 뭔지 누런 것을 컵에 가득 담아 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마실 것을 구할 만한 곳이 없소?" 네플류도프는 억제할 길 없는 갈증을 못 견디고 마부에게 물었다. "바로 저기 좋은 곳이 있습니다." 마부는 이렇게 말하면서, 모통이를 돌아 큼직한 간판이 걸려 있는 입구로 네플류도프를 안내했다. 계산대에 있던 루바시카 차림의 뚱뚱한 점원과 한때는 깨끗했겠으나 지금은 더러워진 옷 을 입은 급사가 손님이 없어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낯선 손님을 호기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 면서 주문을 받았다. 네플류도프는 소다수를 주문하고 창가에서 좀 떨어진 더러운 식탁보가 덮인 테이블 앞에 앉았다. 다른 두 사람이 차 도구와 투명한 유리컵이 놓여 있는 테이블 앞에 앉아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무엇인가 계산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살결이 검고 머리가 벗어진 남자였는데, 이그 나치 니키포로비치처럼 검은 머리털이 뒤통수 가장자리에만 남아 있었다. 그 남자를 보자, 네플류도프는 어젯밤 매형과 함께 논쟁하던 일과, 떠나기 전에 매형과 누님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했던 생각이 났다. '떠날 때까지는 그런 여유가 없을 거야.'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보다 편지를 쓰는 쪽이 좋겠다.' 그는 종이와 봉투와 우표를 가져오라고 이르고 거품이 이는 찬 소다수를 들이키면서 어떻게 쓸까 하고 궁리했다. 그러나 마음이 산란해서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정다운 나타샤 누님! 간밤 자형과 그런 논쟁을 한 괴로운 인상을 갖고 이대로 떠날 수 없습니다...'라고 쓰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뭐라고 쓸까? 어제 한 말을 용서해 달라고 쓸 까? 그러나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대로 말한 것뿐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한 말을 취소했 다고 생각하겠지. 아니야, 그럴 수 없어. ' 네플류도프는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를 이해해 주 지않는, 남이나 다름없는 인간에 대해서 치밀어오르는 증오감을 느끼면서 쓰다 만 편지를 호주머니에 쑤셔넣고, 셈을 치는 다음, 거리로 나와 마차로 행렬을 쫓아갔다. 더위는 극심했다. 벽과 돌은 흡사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는 듯했다. 발은 뜨거운 보도에 델 것만 같았다. 바니시칠을 한 마차의 흙받이에 그의 손이 닿았을 때 불에 덴 듯한 느낌을 받았을 정도였다. 말은 먼지가 쌓인 울퉁불퉁한 포장길을 일정한 발굽 소리를 내면서 나른한 걸음걸이로 천 천히 걸어갔다. 마부는 줄곧 졸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무심히 앞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언덕길에 접어들자 커다란 집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총을 든 호소병 한 명이 서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의 마차를 급히 멈추게 했다. "무슨 일이지?"하고 그는 마부에게 물었다. "죄수 중의 누가 어떻게 된 모양입니다." 네플류도프는 마차에서 내려 군중 쪽으로 다가갔다. 한길 옆 경사진 포장도로의 고르지 못한 포장돌 위에, 코가 납작하고 붉은 얼굴에 턱수염을 기른, 몸집이 큰 중년 죄수가 회색 죄수복을 입은 채 발보다 머리를 낮게 하고 쓰러져 있었다. 두드러지게 탄탄한 앞가슴이 오 랜 간격을 두고 규칙적으로 뛰놀고 있었고,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삼키면서 눈동자가 움직 이지 않는 핏발이 선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죄수를 내려다보면서 얼굴을 찌푸 리며 경관, 장사치, 우체부, 점원, 양산을 들고 있는 노파, 빈 바구니를 든 까까머리의 소년 들이 서 있었다. "몸이 허약해졌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그런 몸을 이런 폭서에 끌고 다녔으니." 점원은 누구를 책망이라도 하듯이 다가온 네플류도프를 향해 말했다. "죽을 것만 같아요. 틀림없어요."하고 양산을 든 노파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셔츠를 풀어 줘야 해요."하고 우체부가 말했다. 경관은 굵다란 손가락을 떨면서 힘줄이 두드러진 붉은 목덜미의 끈을 서투른 솜씨로 풀기 시작했다. 그는 흥분하고 당황한 듯싶었으나, 그래도 군중을 제지해야겠다는 필요성만은 생 각한 듯싶었다. "왜 이렇게들 둘러서 있어? 그렇잖아도 더운데. 바람을 막지 말아요." "의사가 진찰해서 이렇게 허약한 사람은 마땅히 남겨두어야 해요. 이건 마치 죽은 사람을 호송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하고 점원은 법률 지식을 과시하려는 듯이 말했다. 경관은 셔츠의 끈을 풀고 나서,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러들 가요. 당신네들에게는 관계가 없는 일이니. 구경거리가 아니오!" 공감을 얻으려는 듯 네플류도프를 바라보며 경관은 이렇게 말했으나, 공감하는 눈치가 보이지 않자 호송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호송병은 한옆에 서서 한쪽이 닳아빠진 구두 뒤축만을 내려다보면서 경관의 곤경 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관계가 있는 일인지 모르지만, 당사자는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거든. 이렇게 사 람을 죽이는 법이라도 있단 말이오?" "아무리 죄수라 해도 모두 다같은 인간인데."하고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머리를 좀 높이 쳐들고 물을 먹이시고."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물은 가지러 갔습니다." 죄수의 겨드랑이를 붙들어서 간신히 허리를 좀 치켜들면서 경관 은 이렇게 대꾸했다. "왜들 이렇게 모여 섰는 거야?" 갑자기 상관인 사람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깨끗하고 빛나는 제복에 한층 더 번쩍거리는 장화를 신은 경찰서장이 죄수 주위에 몰려 있는 군중 쪽 으로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모두 돌아가! 뭣 때문에 이런 데 서 있는 거야!" 경찰서장은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지 알기도 전에 군중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 다. 더 가까이 가서 다 죽게 된 죄수를 보더니, 그는 마치 이런 일을 예기하고나 있었던 것처 럼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떻게 된 거야?"하고 경관에게 물었다. 경관은 행진 중에 이 죄수가 쓰러졌는데, 호송 장교가 그냥 내버려 두라고 명령했다고 말 했다. "그럼 할 수 없지. 서로 데려가는 수밖에. 마차를 불러!" "문지기가 부르러 갔습니다." 경관은 거수 경례를 하면서 말했다. 점원은 또다시 "이 더위에..."하고 말을 꺼내려고 했다. "무슨 참견이야, 응? 어서 자기 갈 길이나 가." 경찰서장이 이렇게 말하며 점원을 쏘아 보 자, 점원은 입을 다물고 물러갔다. "물을 먹여야죠."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경찰서장은 네플류도프를 엄한 눈초리로 쏘아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지기가 컵에 물을 가져오자, 경찰서장은 경관에게 물을 먹이라고 일렀다. 경관은 축 늘어진 머리를 받쳐들고 입에다 물을 부으려고 했으나 죄수는 물을 삼키지 못 했다. 물이 턱수염을 타고 흘러내려 죄수의 윗옷 가슴 부분과 먼지가 묻은 삼베 셔츠를 적 셨다. "머리에 끼얹어!"하고 경찰서장이 명령했다. 경관은 핫케이크 같은 모자를 벗기고 붉은 곱 슬머리와 벗겨진 머리 위로 물을 쏟아부었다. 죄수는 놀란 듯이 눈을 커다랗게 떴으나, 자세는 달라지지 않았다. 얼굴엔 먼지로 더러워 진 땟물 줄기가 흘러내렸으며, 입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헐떡이고 온몸을 쉴 새 없이 사시 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마차가 있잖아! 저걸 쓰지." 네플류도프의 마차를 가리키면서 경찰서장이 경관에게 말했 다. "여봐! 이리 와!" "손님이 계십니다." 마부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퉁명스레 대꾸했다. "제 마차입니다."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그렇지만 쓰시오. 요금은 내가 지불할 테니 까." 그는 마부를 보고 이렇게 덧붙였다. "뭘 멍청히 서 있어!" 경찰서장이 소리질렀다. "어서 태워!" 경관과 문지기와 호송병은 다 죽게 된 죄수를 들어서 마차를 데려다가 자리에 앉히려고 했으나, 죄수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머리를 뒤로 젖힌 채 자리에서 미끄러졌다. "옆으로 뉘어!"하고 경찰서장은 명령했다. "괜찮습니다. 이대로 데려가겠습니다." 경관은 죽어가는 죄수 옆에 붙어 앉아 억센 손으로 죄수의 겨드랑이를 안으면서 말했다. 경찰서장은 사방을 둘러보더니 죄수의 핫케이크 같은 모자가 포도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모자를 집어서 뒤로 축 늘어진 젖은 머리에 씌워 주었다. "출발!"하고 그는 명령했다. 마부는 화가 난 듯이 흘낏 바라보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호송병을 따라서 경찰서 로 마차를 돌렸다. 죄수와 같이 앉아 있던 경관은, 머리가 제멋대로 흔들리며 미끄러져 떨어 지려는 죄수의 몸을 계속 바로 앉히곤 했다. 호송병은 마차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죄수의 다 리를 고쳐 주었다. 네플류도프는 그들 뒤를 따라갔다. 37 보초가 서 있는 소방서 옆을 지나 경찰서(당시 모스크바에서는 소방서와 경찰서가 같은 건물을 사용했다.)에 도착하자, 죄수가 탄 마차는 경찰서 구내로 들어가는 현관 앞에 멈추어 섰다. 구내에서는 소방수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큰 소리로 지껄이면서 마차를 씻고 있었다. 마차가 멎자 몇 사람의 경관이 가까이 와서 마차 주위를 둘러쌌다. 숨이 끊어져 가는 죄 수의 겨드랑이와 다리에 손을 돌려 삐걱거리는 마차에서 안아내렸다. 죄수를 실어 온 경관은 마차에서 내리면서 저린 팔을 흔들고 모자를 벗고나서 성호를 그 었다. 죽어 가는 죄수는 문에서 층계를 통해 2층으로 운반되었다. 네플류도프는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죽어 가는 죄수를 안고 들어간 좁고 조그마한 방에는 침대가 네 개 놓여 있었다. 두 침대에는 긴 잠옷을 입은 두 명의 환자가 앉아 있었다. 하나는 붕대로 목을 감은, 입이 비뚤어진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폐병 환자였다. 나머지 두 침대는 비어 있었다. 그때 반짝 이는 눈에 노상 눈썹을 움직거리는 작달막한 남자가 속옷과 양말 바람으로 총총걸음으로 죄 수의 곁에 다가왔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죄수를 바라보더니, 다음엔 네플류도프를 보며 큰 소리로 깔깔거리고 웃었다. 경찰서 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정신병자였다. "모두들 나를 위협하려는 거지?"하고 미찬 사람은 말했다. "안 돼. 그렇게는 안 될걸." 시체와 다름없는 죄수를 운반해 온 경관에 뒤이어 경찰서장과 병원의 조수가 들어왔다. 조수는 죄수 옆으로 가까이 가서, 아직 굳어 버리지는 않았지만 벌써 죽은 사람의 손과도 같은 창백한 얼룩투성이의 손을 잠시 잡고 있다가 놓았다. 손은 힘 없이 죄수의 배 위로 떨 어졌다. "틀렸습니다." 조수는 머리를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으나, 다만 규정대로 후줄근한 땀에 젖 은 죽은 사람의 너절한 셔츠를 헤치고 귀언저리의 곱슬머리를 걷어올리면서 옴짝달싹도 하 지 않는, 싯누레진 가슴에다 귀를 갖다 댔다. 모두들 말 없이 서 있었다. 조수는 몸을 일으 키고 다시 머리를 흔들면서, 떠 있는 채 움직이지 않는 파란 눈꺼풀 하나를 손가락으로 만 져 보고 다시 눈꺼풀도 만져 보았다. "위협하려고 해보았자 소용 없어." 미친 사람은 쉴 새 없이 조수에게 침을 뱉으면서 말하 고 있었다. "어떻소?"하고 경찰서장이 물었아. "어떠냐고요?" 조수가 되뇌었다. "시체실로 치워야 합니다." "잘 봐요. 틀림없소?"하고 경찰서장이 물었다. "너무 늦었습니다."하고 조수는 무엇 때문인지 열어젖뜨린 죄수의 가슴을 여미면서 말했 다. "그러나 일단 마트베이 이바노비치를 불러다가 보이도록 합시다. 페트로프, 갔다와요." 조수는 이렇게 말하고 시체에서 물러섰다. "시체실로 운반해!"하고 경찰서장은 말했다. "자네는 사무실에 가서 인수증에 서명을 하 게." 시종 죽어 버린 죄수의 곁을 떠나지 않는 호송병에게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알겠습니다."하고 호송병은 대답했다. 순경들은 시체를 들어서 다시 층계 밑으로 운반했다. 네플류도프도 뒤따라 가려고 했으나 미친 사람이 그를 가로막았다. "당신은 악당패들하고 한패가 아닐 테지. 그럼 담배를 한 대 줘."하고 그는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담배를 꺼내 주었다. 미친 사람은 눈썹을 움직거리면서, 모두들 최면술을 써 서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는 이야기를 빠른 말씨로 말하기 시작했다. "놈들은 죄다 나의 적이기 때문에, 신들리게 해서 괴롭히고 못살게 굴고 있단 말이오!" "실례합니다."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하고 그의 말을 다 듣지 않고, 시체를 어디로 가져 가는지 알고 싶어서 마당으로 나갔다. 시체를 둘러멘 경관들은 벌써 마당을 지나 지하실 입구로 들어가는 참이었다. 네플류도프 도 그리로 가려고 하자 경찰서장이 불러세웠다. "무슨 볼일이 있습니까?" "아니오, 별로."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볼일이 없으시면 돌아가 주십시오." 네플류도프도 그의 말대로 순순히 자기 마차 있는 데로 되돌아갔다. 마부는 끄덕끄덕 졸 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를 흔들어 깨우고 다시 역을 향해서 마차를 돌렸다. 그가 백 보도 채 가기 전에, 또다시 총을 든 호송병이 호위한, 이미 죽은 것 같은 죄수가 또 한 명 누워 있는 짐마차와 만났다. 죄수는 마차 안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핫케이크 같은 모자가 긴 턱수염을 기른 얼굴을 코언저리까지 덮고 있었는데, 박박 깎은 머리는 마차가 흔 들릴 때마다 건들건들 흔들리며 마차에 부딪치고 있었다. 두꺼운 장화를 신은 마부는 짐마 차와 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네플류도픈 자기 마부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이게 무슨 짓이람!" 말을 세우면서 마부는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마차에서 내려서 짐마차를 따라 다시 소방서 옆을 지나 경찰서 마당으로 들 어갔다. 마침 마당에서는 소방수가 마차를 씻고 있었고, 그 옆에 키가 크고 수척한 소방서장 이 퍼런 줄을 두른 모자를 쓰고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서서, 엄격한 태도로 소방수가 끌어내오는, 목에 살이 토실토실하게 찐 밤색 수말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은 앞다리 하나를 절었다. 소방서장은 앞에 서 있는 수위에게 화가 잔뜩 나서 뭐라고 말했다. 경찰서장도 거기 에 서 있었다. 또 다른 시체가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그는 마차 쪽으로 다가갔다. "어디서 주워 왔어?" 그는 못마땅한 듯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스타라야 고르바코프스카야 거리에서입니다." 경관이 대답했다. "죄수요?" 소방서장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벌써 두 사람째로군." 경찰서장이 말했다. "암, 그러게 마련이지. 이렇게 덥고 보면." 소방서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절룩거리는 누런 말을 끌어온 소방수에게 고함쳤다. "구석 마구간에 넣어 둬! 말을 병신으로 만들다니. 말은 너보다도 훨씬 비싸단 말이야." 시체는 먼저와 같이 경관이 마차에서 안아내려 병실로 운반했다. 네플류도프는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그 뒤를 따랐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경관 하나가 물었다. 그는 대꾸도 않고 시체가 운반된 방으로 갔다. 미친 사람은 나무 침대에 걸터앉아서 네플류도프가 준 담배를 맛있게 빨고 있었다. "아, 돌아오셨구려!"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깔깔거리고 웃어 댔다. 그러나 시체를 보더니 입을 다물고 말았다. "또야?"하고 그는 말했다. "진저리가 났어. 난 어린애가 아니란 말야, 그렇잖아?" 그는 질문이라도 하는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네플류도프를 바라보았다. 네플류도프는 시체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전에는 모자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지금은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앞서의 죄수는 잘생기 지 않았으나, 이번 죄수는 얼굴이나 몸집이 뛰어나게 아름다웠다. 이미 새파래진 입술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고, 많지 않은 턱수염은 얼굴 아래쪽을 둘러싸고, 깎인 머리 쪽으로 조그맣 고 귀여운 귀가 보였다. 얼굴 표정은 조용하고 단아하고 선량해 보였다. 그의 얼굴에서 정신 생활의 어떤 가능성이 이 청년에게서 분명히 빼앗겨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은 차치 하고서라도, 손과 쇠고랑을 채운 발의 골격과, 균형이 잡힌 사지의 기운찬 근육으로 보아서 그가 얼마나 아름답고 강하며 민첩한 인간이었나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가령 동물로 견주 어 보더라도, 아까 병신을 만들었다고 그토록 소방서장이 화를 낸 밤색 말보다는 훨씬 완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를 죽여 버렸으면서도 누구 한 사람 인간으로서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쓸모없이 죽어 버린 노동용 동물만큼도 애석해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들의 가슴속에 일어난 유일한 감정 은, 썩을 우려가 있는 시체를 치워야 할 수고에 대한 성가심뿐이었다. 조수를 데리고 의사와 경찰서장이 들어왔다. 의사는 어깨가 떡 벌어진 튼튼해 보이는 사 내로 비단 양복을 입고 있었다. 좁은 바지는 그의 굵은 넙적다리에 꼭 끼었다. 서장은 땅딸 막하고 공처럼 둥글고 붉은 얼굴에다가 양볼을 불룩하게 해서 공기를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뿜는 버릇 때문에, 그 얼굴이 한층 둥글게 보였다. 의사는 시체가 놓여 있는 나무 침대 옆 에 앉아서, 아까 조수가 하던 것처럼 손을 만져 보기도 하고 심장에 귀를 갖다 대보기도 했 다. 그리고 일어서서 바지를 잡아당겼다. "완전히 시체가 되어 버렸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서장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더니 다시 내뿜었다. "어느 감옥에서 왔지?" 그는 호송병에게 물었다. 호송병은 뭐라고 대답하면서 시체의 발목에 채운 쇠고랑을 가리켰다. "풀어 주도록 하지. 마침 대장장이가 있으니까."하고 서장이 말했다. 그는 다시금 볼을 불 룩하게 하더니 문 쪽으로 가서 천천히 숨을 내뿜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네플류도프는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는 안경 너머로 그를 바라보았다. " 왜 이렇게 됐느냐고요? 일사병으로 죽은 것 아닙니까? 겨울 동안 운동도 하지 않고 햇 빛을 못 보다가 오늘 같은 날에 떼를 지어 행진을 하니, 게다가 바람 한 점 없는 날에, 그래 서 일사병에 걸린 겁니다." "그럼 왜 이런 날에 호송하는 겁니까?" "그건 저 사람들에게 물어 보시구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시오?" "관계는 없는 사람입니다." "아, 그래요... 그럼 실례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의사는 이렇게 말하고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지를 아래로 잡아당기더니 병자들의 침대로 갔다. "좀 어떤가?"하고 그는 목에 붕대를 감고 입이 비뚤어진 창백한 사나이에게 물었다. 한편 미친 사람은 자기 침대에 앉아서 담배를 끄더니, 연방 의사를 향해서 침을 뱉어 댔 다. 네플류도프는 마당으로 내려가서 소방서의 말들과, 닭들과, 놋쇠로 만든 헬멧을 쓴 보초 옆을 지나 문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끄덕끄덕 졸고 있는 마부를 깨워 마차를 타고 다시 역 으로 달렸다. 38 네플류도프가 역에 닿았을 때는 죄수들은 벌써 전원이 유리창에 창살이 달린 열차에 올라 타고 있었다. 열차 가까이로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탓인지 플랫폼에는 몇 명의 전송객이 서 있었다. 오늘이 호송병들에게는 유난히 성가신 날이었다. 감옥에서 역으로 가는 도중에 네플류도프가 본 두 사람 이외에도 세 사람이나 일사병으로 쓰러져 죽었다. 그 중 한 사람 은 처음의 두 사람처럼 가까운 경찰서에 수용되었고, 딴 두 사람은 역에까지 와서 죽었다 (1880년대 초에 부트이르스키 감옥에서 니제고르드 역으로 죄수들을 이송하는 도중, 하루 사이에 일사병으로 인하여 다섯 명의 죄수가 죽은 일이 있었음). 그러나 호송병들의 걱정거 리는 호송 중에 더 살 수 있었을는지도 모르는 다섯 명의 죄수가 죽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일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이런 경우에 법규대로 완전히 수속을 다 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 다. 이를테면 시체를 적당한 장소로 보내는 일, 니즈니로 가지고 가야 할 명부에서 그 이름 ㅇㄹ 삭제해야 할 일, 이런 일들은 차으로 귀찮은 일인데다가, 이런 무더위 속에서는 더욱 자증나는 일이었다. 호송병들은 이런 일로 무척 분주햇다. 그래서 이것이 다 끝날 때까지는, 네플류도프를 비 롯해서 다른 전송객들을 죄수들이 탄 열차 옆으로 가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렇지만 네플류 도프만은 호송 하사관에게 슬쩍 돈을 쥐어준 탓으로 허가가 되었다. 그 하사관은 네플류도 프에게 들어가게는 했지만 얘기를 되도록 빨리 끝내고 지휘관의 눈에 뜨지 않도록 떠나 달 라고 당부했다. 객차는 모두 여덟 차량이었다. 지휘관의 찻간을 빼놓고는 딴 차량들은 모두 죄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열차 옆을 지나가면서 차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는 찻간에서도 쩔그렁거리는 쇠사슬 소리와 지껄이는 소리, 쓸데없이 욕지 거리를 퍼붓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네플류도프가 기대했던, 도중에서 죽어간 동료에 관한 얘 기는 어느 곳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배낭과 음료수와 자리를 잡는 얘기들뿐이었다. 한 찻간 을 들여다보았을 때, 네플류도프는 통로 한가운데서 죄수의 수갑을 풀어 주고 있는 호송병 을 보았다. 죄수들이 손을 내밀면 한 호송병이 열쇠를 수갑을 끌러 주고, 또 하나의 호송병 이 수갑을 모으고 있었다. 남자 죄수들의 찻간을 지나서 여죄수들의 찻간으로 가까이 다가 갔다. 둘째 찻간에서는 "오, 하느님, 오! 하느님!"하는 신음 소리가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네플류도프는 그 옆을 지나 호송병이 가르쳐 준 대로 세 번째 찻간의 창가로 다가갔다. 차창에다 얼굴을 가까이 대자 땀냄새에 가득 찬 열기가 풍겨왔고 높은 목소리로 떠들어 대 는 여자들의 이야기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죄수복과 재킷을 입은, 땀에 젖고 벌겋게 탄 여자들이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앉아서 지껄여 대고 있었다. 창살에 바싹 갖다 댄 네플류도 프의 얼굴은 여자들의 주의를 끌었다. 가까이 있던 여죄수들이 얘길 멈추고 다가왔다. 마슬 로바는 재킷만을 입고 스카프도 쓰지 않은 채 반대편 창가에 앉아 있었다. 이쪽 가까이에는 얼굴이 흰 페도샤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를 알아보고 마슬로바를 쿡 찌르며 한 손으로 창을 가리켰다. 마슬로바는 얼른 일어나서, 까만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땀에 잦은 발그스름한 얼굴에 미소를 활짝 지으면서 창가로 다가와 창살을 붙들었다. "참 덥지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기쁜 듯 방글방글 웃었다. "물건은 받았소?" "받았어요. 고맙습니다." "뭐 더 필요한 게 없소?" 네플류도프는 찌는 듯한 찻간에서 흡사 한증탕에서의 증기와도 같은 열기가 흘러나옴을 느끼면서 이렇게 물었다. "네,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뭐 좀 마실 거라도 있으면." 페도샤가 말했다. "그래요, 뭐 좀 마셨으면." 마슬로바가 되뇌었다. "아니, 거긴 물도 없소?" "있었지만 벌써 다 마셔 버렸어요." "곧 가져다 주겠소."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호송병에게 부탁해 두겠소. 니즈니까지는 만나지 못할 테니까." "그럼 정말 당신도 가시나요?"하고 마슬로바는 그럴 줄 몰랐다는 듯이 말하고 네플류도프 를 기쁨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열차로 가겠소." 마슬로바는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한숨을 내쉬었다. "저 나리, 열두 명의 죄수가 죽었다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사내 같은 거친 목소리로 늙 은 여죄수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것은 코라블료바였다. "열두 명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소. 내가 본 것은 두 명이었소."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열두 명이라던데요. 대체 그런 못된 짓을 하고도 그놈들은 마음이 편안할까요? 악마 같 은 놈들!" "여자들 중에는 병든 사람이 없소?"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여자들은 더 강해요." 키가 작은 한 여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다만 한 사람, 별안간 산 기가 있어서요. 저렇게 진통하고 있죠." 그녀는 아까부터 끊임없이 신음 소리가 들려오는 옆 의 찻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당신은 필요한 게 없느냐고 하셨죠?" 마슬로바는 기쁨에 넘치는 미소를 간신히 참으면서 말했다. "저 여자를 남아 있게 해줄 수 없으실까요? 저렇게 괴로워하고 있으니까요. 지휘관 에게 말씀 좀 해주었으면." "좋아, 말해 보겠소." "그리고 또 한가지, 저 여자를 그의 남편 타라스하고 만나게 해주실 수 없으세요?"하고 마슬로바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는 페도샤를 눈으로 가리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분 도 당신과 함께 가게 될 거예요." "여보시오, 얘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하는 하사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플류도프를 들 여 보낸 하사관이 아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곳을 떠나, 산기가 있는 여자와 타라스의 일을 부탁하기 위해 지휘관을 찾았으나 오랫동안 찾을 수가 없었다. 호송병에게 물어도 시원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들 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이다. 죄수들을 어디로인지 데려가는 자들도 있고, 식료품을 사려고 뛰어다니는 자들도 있고, 여기저기 자기 짐을 찻간에 싣는 자들도 있고, 호송 지휘관 과 같이 가는 부인의 시중을 들고 있는 자도 있어서, 네플류도프의 질문에는 그저 마지못해 한두 마디 대답할 뿐이었다. 두 번째 벨이 울렸을 때에야 간신히 호송 지휘관을 찾았다. 지휘 장교는 짤막한 손으로 입가에 뒤덮인 수염을 매만지면서 어깨를 치켜들고 하사에게 뭐라고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용건입니까?" 그는 네플류도프에게 물었다. "저 열차에 아기를 곧 분만할 여자 죄수가 있어서, 어떻게 좀..." "아니, 낳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십시오. 어떻게 되겠지요." 이렇게 말하더니, 그는 짤막한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 자기의 찻간 쪽으로 걸어갔다. 이 때 호각을 손에 든 차장이 지나갔다. 마지막 벨소리와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플랫폼에 서 있는 전송객들과 찻간에 있는 여죄수들의 울음소리와 통곡이 터져나왔다. 네플류도픈 타 라스와 나란히 플랫폼에 서서 창살 차창 안에 머리를 박박 깎인 남자 죄수들의 모습이 보이 는 차량들이 한 칸 또 한칸 차례차례로 그의 옆을 지나치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다음 여 죄수의 첫째 차량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머리와 수건을 쓴 머리들이 창문을 통해 서 보였다. 그 뒤를 이어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둘째 차량이 지나가고, 그 다음에 마슬 로바가 탄 셋째 차량이 지나갔다. 마슬로바는 딴 여자들과 같이 창가에 서서 네플류도프를 바라보고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 였다. 39 네플류도프가 타고 갈 열차가 발차하기까지는 아직도 두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네플류도 프는 이 사이에 다시 누님을 찾아볼까 생각했으나 아침부터 심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흥 분하고 지쳐 있었으므로 일등 대합실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동안 몰려오는 졸을 견디다 못해 드러눕자마자 손을 뺨에 괜 채 곧 곯아떨어져 버렸다. 연미복 가슴에 배지를 달고 냅킨을 손에 든 급사가 네플류도프를 깨웠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네플류도프 공작님이 아니십니까? 어떤 부인이 찾고 계십니다." 네플류도프는 눈을 비비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으며 오늘 아 침부터 무슨 일을 겪었던가 하는 일을 생각해 보았다. 죄수들의 행렬이며 시체며 쇠창살이 있는 열차며 거기에 감금된 여죄수들이며, 그 중 한 여가가 아무도 도와 주는 사람 없이 진통으로 괴로워하던 일이며, 또 한 여자가 쇠창살 속 에서 서글프게 미소를 띠고 자기를 바라보던 일들이 주마둥처럼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현실은 전혀 딴판이었다. 술병과 꽃병과 촛대와 식기가 놓여 있는 식탁이 있고, 그 주위를 민첩한 웨이터들이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홀 안쪽의 찬장 앞에는 과 일을 잔뜩 담은 바구니와 술병들의 진열대 앞에 바텐더가 서 있었고, 그 스텐드 앞에는 이쪽으로 등을 돌린 많은 여행객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내풀류도프는 누운 몸을 일으켜 고쳐 앉고 좀 정신이 들게 되자,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호기심에 찬 눈으로 무엇인가 문간에서 일어난 일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 다. 네플류도프는 그쪽을 보았다. 거기에는 얼굴에 투명한 베일을 드리운 귀부인을 가마에 태워서 데려가는 일행이 있었다. 앞쪽에서 가마를 들고 가는 하인은 네플류도프도 낯이 익 었다. 뒤쪽의 하인은 금줄이 달리 모자를 쓴 문지기였는데 그 역시 낯이 있었다. 가마 뒤에 는 곱슬머리에 에이프런을 두른 점잖은 하녀가 보따리와 가죽 가방에 든 뭔지 둥그런 물건 과 큰 양산을 받치고 따라갔다. 그리고 그 뒤에는 두툼한 입술과 중풍 환자 같은 목을 한 여행복 차림의 코르차긴 공작이 가슴을 내밀고 뒤따르고, 그 뒤에는 미시와 그 사촌 미사, 그리고 네플류도프도 안면이 있는 목이 길고 후골이 튀어나온 외교관 오스텐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명랑한 표정으로 뒤따르고 있었다. 그는 미소짓고 있는 미시에게 설득조로, 그러 나 분명히 농담 섞인 태도로 뭐라고 말하면서 걷고 있었다. 맨 뒤로 의사가 화가 난 듯이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따랐다. 코르차긴 일가는 교외 영지에서 니제로드 철도 연변에 있는 공작 부인의 누이동생 영지로 이사가는 길이었다. 가마를 멘 하인들과 하녀와 의사들의 일행은 대합실에 있던 사람들의 호기심과 존경을 받 으면서 숙녀 대합실로 들어갔다. 늙은 공작은 식탁에 앉아 웨이터를 불러서 무엇인가 주문 하기 시작했다. 미시와 오스텐도 식당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무엇을 좀 먹으려다가, 그 때 입구에서 아는 여인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 여인은 나탈리아 이바노브나였다. 나 탈리아 이바노브나는 아그라케나 페트로브나를 데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식당으로 들 어왔다. 그녀는 미시와 동생을 거의 동시에 찾아냈다. 그녀는 네플류도프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는 미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미시하고 키스를 나누고 곧장 동생 네플류도프의 곁으 로 왔다. "간신히 찾아냈구나." 그녀는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일어서서, 미시와 미샤, 또 오스텐하고 인사를 하고 선 채로 이야기를 했다. 미시는 시골 별장이 타 벼렸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모댁으로 이사간다는 이야기를 했다. 오스텐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화재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를 말하기 시작했다. "누님이 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벌써 와 있었단다." 누님은 대꾸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와 둘이서말이야."라고 말하 며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를 가리켰다. 아그라페나는 먼지 방지용 외투에 보닛을 쓰고 있었 는데, 이야기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멀리 떨어져서 머뭇거리며 목례를 보냈다. "여기저기 찾아나녔어." "난 여기서 그만 깜박 잠이 들어 버렸어요. 정말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네플류도프는 거듭 고맙다는 말을 했다. "누님께 편지를 쓰려고 했습니다." 그는 말했다. "정말?" 누님은 놀라면서 대답했다. "무슨 일로?" 미시는 남매간에 내밀한 얘기가 시작되는 것을 눈치채고 사람들을 데고 자리를 떴다. 네 플류도프는 누구의 것인지 점과 체크 무늬의 모포와 궤짝이 놓여 있는 창가의 비로드 소파 에 누님과 함께 앉았다. "어제 하숙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찾아가 사과할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매형이 어떻게 생 각하실까 해서..."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매형에게 그런 언짢은 말을 해서 몹시 괴로웠습니 다." "나도 알고있었어. 그리고 또 믿고 있었어." 누님이 말했다. "네 본심이 그렇지 않다는 것 을. 그렇지만 너도 알잖니..." 누님의 눈에는 눈물을 괴었다. 그녀는 동생의 손을 잡았다. 누이의 말은 똑똑치 않았지만, 그는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감동했다. 그 말에는, 그녀의 전부를 지배하고 있는 남편에 대한 사랑 이외에 동생에 대한 사랑이 그녀에게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과, 그리고 동생과 남편 사이의 사소한 불화라 할지라도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는, 그런 뜻이 깃 들여 있었다. "고맙습니다. 누님. 그런데 누님, 나는 오늘 굉장한 것을 봐습니다." 네플류도프는 갑자기 죽은 두 죄수를 생각하고 이렇게 마랬다. "죄수가 두 명 죽었습니다." "어떻게 죽었는데?" "죽인 거나 다름없어요. 이런 더위 속을 끌려다녔으니까요. 일사병으로 둘 다 쓰러졌어 요." "그럴 수가! 어떻게? 오늘?" "네, 방금 그 시체를 보고 왔어요." "왜 죽였을까? 누가 죽였니?"하고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말했다. "강제로 죄수들을 끌어낸 자들이죠." 네플류도프는 누이가 이런 일에 있어서 자기 남편과 같은 눈을 하고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끼자 화가 나서 말했다. "어머나 저런!"하고 말하면서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들은 그런 불행한 죄수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털끝만큼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합니다." 네플류도프는 늙은 공작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 때 공작은 냅킨을 펴고 술잔을 앞에 놓고 식탁에 앉아 있다가 네플류도프를 뒤돌아보았다. "네플류도프!" 그는 콘 소리로 불렀다. "더위를 잊을 겸 한잔 안하겠나? 여행 전에 그 이 상 좋은 게 없어." 네플류도프는 사양하고 누이를 돌아다보았다. "이제부터 무얼 할 작정이냐?"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말을 이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 겁니다. 나로서도 무엇인지는 알 수없지만 무엇인가 해야 한다 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힘껏 해보렵니다." "그래 그래,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일은?" 누님은 미소를 지으면서 크르차긴 을 가리키며 말했다. "완전히 끝났습니다. 그리고 어느 쪽도 미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 됐구나, 정말 난 그 사람이 좋았단다. 그렇지만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런데 넌 무엇 때문에 자신을 그렇게 속박하려 드니?"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가는 거 지?" "가야 하기 때문에 가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두고 싶다는 듯이 그는 진지한 표정 으로 매정하게 말했다. 그러나 곧 누님에 대한 매정함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왜 나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을 죄다 말하려고 하지 않을까?'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한테도 들려 주면 좋지 않은가?' 늙은 하녀를 바라보면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그라페 나 페트로브나의 존재가 누님에게 자신의 결심을 되풀이해 들려 주자는 용기를 복돋아 주었 다. "누님은 카추샤하고 결혼하려는 내 계획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죠? 알고 계시겠지만, 난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잔 단호히 거절했어요." 그는 말했다. 이 얘기를 할 때 언제나 그렇듯이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나의 희생을 원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처 지에 있는 여자로서는 참기 어려운 희생을 나를 위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비 록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라 해도 그녀의 희생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따 라, 그녀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생각입니다. 힘이 자라는 데까지 도와 주고, 그 여자 의 괴로움을 덜어 줄 생각입니다."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아무 말도 안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를 보고 머리를 흔들었다. 이 때 숙녀 대합실에서 공작 부인의 일 행이 나왔다. 미남 하인 필리프와 문지기가 공작 부인을 가마로 운반했다. 공작 부인은 가 마꾼들을 멈추게 하고 네플류도프를 손짓해 부르더니, 슬프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혹시 자 기 손을 힘껏 주지나 않을까 염려하면서 반지 낀 하얀 손을 내밀었다. "지독하군요!" 그녀는 더위에 관해 프랑스 말로 말했다. "견딜 수 없군요. 이런 날씨엔 숨 이 끊어질 것만 같아요." 그녀는 러시아 기후의 대단함을 한바탕 늘어놓은 다음, 네플류도프 에게 놀러 오라고 하고는 가마를 든 사람들에게 가자고 신호를 했다. "그럼 꼭 들러 주세요." 그녀는 가마 위에서 길쭉한 얼굴을 네플류도프에게 돌리며, 이렇 게 덧붙였다. 네플류도프도 플랫폼에 나갔다. 공작 부인 일행은 오른쪽 일등 찻간 쪽으로 갔다. 네플류 도프는 짐을 날라 주는 인부와 자기 짐을 어깨에 멘 타라스와 함께 나란히 걸어갔다. "이 사람은 내 친굽니다." 네플류도프는 전에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 타라스를 가리키면 서 누님에게 말했다. "아니, 삼등차로 가니?" 네플류도프가 삼등차 앞에 서서 짐을 진 인부와 타라스와 함께 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 나탈리아 이바노브나가 물었다. "네, 이쪽이 마음이 더 편합니다. 타라스하고 같이 가니까요." 그는 말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아직 쿠즈민스코예 마을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으니, 내가 죽으면 누님 아이들이 상속받게 됩니다." "드미트리, 그런 말은 그만둬라." 나탈리아 이바노브나가 말했다. "그리고 토지를 나누어 준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토지 이외의 나머 지 재산은 모두 누님의 아이들 차지가 됩니다. 왜냐하면 난 아마도 결혼하게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또 한다고 하더라도 아니는 안 생길 겁니다......그러므로......" "드미트리, 제발 그런 소린 그만둬라."하고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말하긴 했지만, 실은 그의 말을 듣고 기뻐하는 것을 네플류도프는 이내 알 수 있었다. 안쪽 일등차 앞에는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서서, 코르차긴 공작 부인의 찾 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딴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늦게 온 사람들은 허둥 지둥 플랫폼의 널빤지를 꽝꽝 울리며 달려오고, 차장은 문들 닥고 승객들을 좌석에 앉힌 다 음 전송객들을 차 밖으로 내보냈다. 네플류도프는 햇볕을 받아서 무더운 악취가 풍기는 찻간에 들어갔다가 곧 승강구로 내려 갔다. 한창 유행하는 모자를 쓰고 랩코트를 걸친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 와 나란히 삼등차 앞에 서서, 열심히 무슨 화제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으나, 별로 할 이 야기가 없는 것 같았다. '편지를 해요.'하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그 들 남매는 여행하는 사람들 사이에 자주 되풀이되는 이런 판에 박은 부탁의 말을 비웃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재산 문제와 상속에 관한 짧은 대화가, 둘 사이에 깃들이기 시작한 부드러운 남매간의 저을 일시에 깨뜨려 버렸기 때문에 서로 남이 된 것 같은 서먹서먹한 기분을 느끼 고 있었다. 그래서 기차가 '덜컹'하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탈리아 이바노브나는 오히려 기 꺼운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쓸쓸하고 상냥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흔들면서 "잘 가, 드미트 리, 잘 가라!"하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막상 기차가 떠나 버리자, 그녀는 동생과의 대화 를 남편에게 전할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은 굳어지고 근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도 역시 누님에 대해서는 지극히 선량하고 따뜻한 감정 이외엔 아무것도 품지 않았으며 또 숨긴 일도 없었으나, 누님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이 거북하고 답답해서 빨리 누님 앞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예전에 그토록 가까웠던 그 나타샤의 모습은 사라지 고, 지금은 남이나 다름없는 불쾌하고 거무튀튀한 털복숭이 남편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그녀 남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문제, 이플테면 농민들에 대한 토지 분배와 상속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했을 때만 누님의 얼굴이 빛나는 것을 네플류도프는 똑똑히 보았 던 것이다. 그것은 그를 몹시 슬프게 했다. 40 온종일 햇볕이 내리쬐는데다 사람이 가득 찬 삼등 찻간의 더위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므 로, 네플류도프는 찻간에 들어가지 않는 승강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윽고 열차가 거리를 벗어나 바람이 불어 들어왔을 때에야 비로소 네플류 도프는 가슴 가득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다. 죽인 것이다."하고 그는 아까 누님에게 한 말을 혼잣말로 되뇌었다. 오늘 받은 모든 인상 가운데서 둘째 번 죄수의 시체의 미소띤 입 언저리와 오늘 받은 모든 인상 가운데서 둘째 번 죄수의 시체의 미소띤 입언저리와 단아한 표정, 깎아서 퍼렇게 된 머리의 아래쪽에 삐져나온 조그맣고 도톰한 귀 등 아름다운 얼굴 이 이상스러울 만틈 생생하게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사람이 살해되었는데도 누가 죽였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 러나 죽인 것은 사실이다. 다른 죄수들과 함께 그를 끌어 낸 것은 마슬레니코프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마슬레니코프는 필시 관례대로 명령을 내려, 인쇄된 표제가 붙은 서류에 저 바 보같은 서명을 했음에 틀림 없다. 그러므로 물론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 을 것이다. 또 죄수들을 진찰한 감옥의 의사도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 이다. 그는 자기의 직책을 정확하게 수행해서 병약한 자들을 골라 냈을 뿐이지, 이 무더운 더위와 이렇게 오랜 시간에 그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데려가리라고는 도저히 짐작도 못했 을 것이다. 그럼 소장은? 소장은 다만 수행했을 뿐이다. 호송 지휘관도 어디서 몇 명의 죄 수를 인계받고, 어디서 몇 명을 인계하는 것이 그의 임무이고 보면, 그에게도 죄가 있는 것 은 아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은 방법으로 지시에 따라 죄수단을 인솔했으므로 네플류도프 가 목격한 두 죄수와 같은 튼튼한 죄수가 견뎌 내지 못하고 죽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에게도 죄는 없다. 그러나 사람이 죽었으니, 이 죽음에 대 해서 책임이 없는 그 사람들에 의해서 살해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네플류도프는 혼자 중얼거렸다. '현지사라든가, 소장이 라든가, 경찰서장이라든가, 순경이라든가 하는 자들이 인간에 대해서 인간다운 태도로 대할 필요가 없는 경우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마슬레니코프나 소장이나 호송 장교라는 작자들이 현지사나 소장이나 호송 장교가 아니었던들,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무더운 날에 이토록 많은 사림들을 한덩어리로 내보낼수가 있을까 하고 스무 번은 더 생각했을 것이고, 또 도중에서도 열에 빼내어 나무 그늘로 데려 가서 물을 먹이고 휴식시켰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불행이 생기면 동정을 표했을 것 이다. 그러나 그들은 동정을 표하기는 커녕 남이 동정하는 것조차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 냐하면 그들은 자기앞의 인간을 보지 않고, 또 인간에 대한 자기의 의무를 보지 않고, 다만 자기의 직무와 그 요구만을 중시하고 그것을 인간 관계의 요구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 문인 것이다. 모든 문제는 이 한 가지에 있다.'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따라서 우리는 다만 한 시간이라도, 또는 무슨 예외적인 특수한 경우일지라도 인간애보다도 더 중요한 것 은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사람에 대해서 죄를 지면서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뻔뻔히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네플류도프는 너무나 깊은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덧 날씨가 변한 것도 모르 고 있었다. 해는 낮게 뜬 조각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서쪽 지평선에서는 연한 잿빛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어딘지 멋 곳에서는 어느새 들과 숲 위에 한량 없이 고마운 빗줄기가 대각선을 그으며 쫙쫙 퍼붓고 있었다. 그 비구름은 습기찬 공기를 몰아왔다. 간혹 번개가 구름을 뚫고, 요란한 기적 소리가 우레 소리와 함께 뒤섞여들렸다. 비구름은 점점 가 까워지고 바람을 타고 비스듬히 떨어지는 빗방울은 승강구와 네플류도프의 코트에 드문드문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는 반대쪽으로 옮겨가서, 습기 차고 신선한 공기와 오랫동안 비 에 굶주린 대지의 곡식 냄새를 들이마시면서, 차창을 지나가는 들과 숲과 메귀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밭과, 아직도 푸릇푸릇한 귀리밭의 줄무늬와, 꽃이 피어 있는 검푸른 감자밭의 검 은 밭고랑 등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바니시칠을 한 듯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푸른 색은 더욱 푸르고, 노란색은 더욱 노래지며, 검은색은 더욱 까맣게 윤기가 났다. "더, 더 퍼부어라!" 네플류도프는 자비로운 비를 받아 생기를 되찾은 들판을 흐뭇한 마음 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억세게 퍼붓던 비도 오랫동안 계속되지는 않았다. 비구름의 일부는 비가 되어 쏟아져 내 리고 일부는 그대로 흘러가 버려, 축축한 대지에는 마지막 가는 빗줄기가 직선을 그으며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태양은 다시 얼굴을 갸웃이 내밀고 만물은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동쪽 지평선 위에는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한 끝이 끊어진 보랏빛이 유달리 눈에 띄는 선명 한 무지개가 나타났다. '대체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지?' 네플류도프는 이 모든 자연의 변화가 끝나고, 기 차가 경사가 심한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이렇게 자신에게 물었다. '그렇 다. 나는 소장이나 호송 장교나 그 밖의 실무자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선 량하고 온화한 사람들이지만, 단지 공직에 매여 있다 보니, 그런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것이 다.' 그는 자기가 감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이야기해 주었을 때의 마슬레니코프 의 냉담한 태도와, 소장의 싸늘한 태도, 그리고 허약한 죄수를 마차에 태워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차 속에서 여죄수 임신부가 진통에 괴로워하는 데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던 호송 장교의 잔인함을 상기했다. ' 그자들은 관직에 매여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장 소박한 동정심마저도 받아 들이지 않는 냉혈한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관직에 있기 때문에 마치 돌로 다져 놓은 땅에 비가 스 며들지 않듯이 인간애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빛깔의 돌로 다져놓은 비탈길을 빗물이 땅에 스며들지 못하고 개울이 되어 철철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서 네플류도 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긴 이런 철로 축대를 돌로 다질 필요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 나 식물의 생장력을 잃어버린 이 흙을 보기란 슬픈 일이다. 이 흙도 축대 위에 보이는 저 흙과 마찬가지로 곡식과 풀과 숲과 나무들을 돋아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도 이와 같은 것이다.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아마도 지사니 소장이니 경찰이니 하는 사람들도 필 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질 -상호간의 사랑과 동정을 상실한 인간을 보기란 정말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율법이 아닌 것을 율법이라고 인정하고 신 이 스스로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 놓은 영구불멸의 율법을 율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내 가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괴로운 기분을 가지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하고 네플류 도프는 생각했다. '나는 까닭 없이 그들을 무서워하고 있다. 사실 그들은 무서운 인간들이 다. 강도보다도 무섭다. 그러나 강도는 동정할 줄 알지만, 그들은 인간을 동정할 줄 모른다. 그들은 식물의 성장을 억제하고 있는 돌과 같이 동정심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다. 이것이 그 들의 무서운 점이다. 푸가초프나 스텐카 라진(둘 다 대규모의 난을 일으켜 황제를 위협한 러시아 사상 유명한 발란 지도자)이 무섭다고들 하지만, 그들은 천 배나 더 무서운 것이다.' 하고 그는 계속 생각에 잠겼다. ''가령 현대의 사람들, 이를테면 크리스트교도나 자선가나 선량한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 식없이 가장 무서운 악행을 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심리학상의 문제를 내 준다면, 단 하나의 해결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현재 있는 그대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을 지사나, 소장이나, 장교나, 경찰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즉 첫째로 국가 공무 라는 것은 사람들에 대해서 모두 인간다운 형제와 같은 태도를 취하지 말고, 그들이 물건 취급을 해도 개의치 않는다는 확신을 갖지 않으면 안 되고, 둘째로 이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행위의 결과가 각자에게 돌아오지 않도록 잘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이 없이는 오늘 내가 목격한 것과 같은 무서운 사건 이 행해질 리가 없는 것이다. 요컨대 이런 일은 모두 인간이 서로 사랑 없이도대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여 기로 모든 문제가 있다. 물건이라면 애정 없이도 다룰 수가 있다. 나무를 베든지 벽돌을 굽 든지 쇠를 달구든지 하는 것은 애정이 없더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 대해 서는 애정없이 다룰 수는 절대로 없다. 마치 꿀벌을 다루는 데 있어서 각별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꿀벌의 특성이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꿀벌을 다루 지 않으면, 꿀벌도 해를 입고 자신도 해를 입게 마련인 것이다. 인간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 지며, 그 이외의 길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 상호간의 사랑의 인간 생활의 근본 법칙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인간은 억지로 일을 할 수는 있겠지만, 억지로 사람을 사랑할 수 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애정 없이 사람들을 상대해도 좋다는 이유는 성립되지 않는 다. 특히 남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에 대해서 애정을 느끼지 못할 때는 차라리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더 좋다.' 네플류도프는 자문자답하며 이렇게 생 각했다. '자기에게 몰두하는 것이 좋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좋다. 다만 인 간만은 상대해서는 안 된다. 해를 입지 않고 유익하게 인간을 접촉할 수 있는 것은 애정이 있을 때뿐이다. 어제 매형에게 대했던 것처럼 애정 없이 사람을 대하면, 오늘 목격한 것같 이 대인 관계에 있어서 냉혹함과 잔인한 바와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도 한없이 생기 게 될 것이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이젠 됐다. 됐어!" 지독한 더위가 가신 시원함과 벌써 오래 전부터 머리에서 떠날 줄 모르던 문제가 이를 데 없이 명 확하게 해결되었다는 의식에서 두 가지의 기쁨을 느끼면서 그는 이렇게 뇌까렸다. 41 네플류도프가 탄 찻간은 승객으로 반쯤 차 있었다. 그들은 하인, 직공, 노동자, 백정, 유대 인, 점원, 여자 들, 그리고 노동자의 아내들이었으며, 군인이 한 사람, 부인 같은 여자가 두 사람 타고 있었다. 그 중 한 여자는 젊었고, 또 한 여자는 드러나 보이는 팔뚝에 팔찌를 낀 중년 부인이었다. 그리고 꽃모양의 모표가 붙은 챙 있는 검은 모자를 눌러쓴 위엄 있는 표 정의 신사가 있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자리가 정리되어 안심이 되었다는 듯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해바라기씨를 까는 사람, 담배를 피우는 사람, 옆 사람과 활기차게 잡담을 하고 있 는 사람도 있었다. 타라스는 네플류도프의 자리를 잡아 두고, 행복스러운 듯이 통로 오른쪽에 앉아서 맞은편 에 앉은 단추가 풀어지고 소매 없는 외투를 입은 체구가 큰 남자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 다. 네플류도프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남자는 일자리를 구하러 가는 정원사였다. 네플류 도프는 타라스에게로 다가가다가 농부 옷차림을 한 젊은 여자하고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던, 소매 없는 무명 외투를 입고 턱수염이 난 풍채가 좋은 노인 옆에서 발을 멈추었다. 젊은 여 자 옆에는 사라판(러시아 농촌에서 주로 입는 긴 여자 옷, 소매는 없고 밸트를 맨다.)을 입 고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가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달랑 거리며 쉴 새 없이 해바라기씨를 까고 있었다. 그 노인은 네플류도프를 바라보더니 혼자 앉 아 있던 번들거리는 좌석에서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친절하게 말했다. "여기, 앉으시지요." 네플류도프는 고맙다고 말하고, 그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네플류도프가 자리에 앉자마 자, 여자는 중단했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녀는 남편이 일하고 있는 도시에서 돌아오는 길 이라고 했다. "사육제 때도 갔었지만, 하느님 덕분으로 이번에도 놀다가 오는 거예요."하고 그녀는 말했 다. "크리스마스 때에 또 갈까 해요." "그건 좋은 일이야." 노인은 네플류도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가끔 가보는 것이 좋지. 그렇지 않으면, 도시 생활을 하는 젊은 사내들은 못쓰게 되거든." "아니에요, 할아버지. 우리 주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랍니다. 그런 어리석은 짓은 절대로 안 해요. 순진한 사람이에요. 돈은 한푼도 남기지 않고 꼬박꼬박 보내 줘요. 이애 보는 것을 어찌나 기뻐하는지 그 기뻐하는 모습이란 뭐라 말할 수 없어요." 그녀는 방글방글 웃으면서 말했다. 해바라기씨를 까서는 껍질을 뱉으면서 어머니의 얘기를 듣던 계집아이가, 어머니의 말이 옳다는 듯이 침착하고 영리한 눈으로 노인과 네플류도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똑똑한 사람이군, 그렇다면 더욱 만나러 가야지."하고 노인이 말했다. "그런데 술은 하지 않소?" 통로 건너편에 앉아 있던, 공장 직공인 듯한 부부를 눈으로 가리키면서 노인이 덧붙 였다. 직공인 듯한 남편은 보드카 병을 입에다 대고 꿀꺽꿀꺽 들이켜고 있었고, 아내는 병을 받 아들고 웃으며 고개를 흔들더니 그녀 또한 술병을 입에다 갖다 대었다. 자기를 바라보는 네 플류도프와 노인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직공은 그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왜 그래요, 나리? 우리가 술을 마셔선 안된다는 거요? 우리가 일할 땐 누구 한 사람 거 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술을 마시면 모두들 흘끔흘끔 쳐다본단 말이야. 내가 벌어서 내가 마 시고, 여편네한테도 한턱 쓰고 있는데, 그게 잘못된 거요?" "아, 옳은 말이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나리, 내 여편네는 이래봬도 꽤 착실해요. 그리고 나를 소중히 생각하니까 나도 만족하고 있지요. 그렇지, 마브라?" "자, 당신이나 더 마셔요. 난 됐어요."하고 그녀는 남편에게 술병을 내주면서 말했다. "또 쓸데없는 소릴 하는군요."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보세요, 이렇답니다."하고 직공은 이어 말했다. "귀여운 여편네죠. 그러나 이따금 기름 떨 어진 바퀴처럼 삐걱삐걱 소리를 내서 야단이죠. 그렇잖아, 마브라?" 마브라는 취한 듯이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또 시작이로군!" "그렇잖아, 귀여운 여편네지. 하지만 그것도 고비를 잡고 있을 동안만 그렇지, 조금이라도 고삐를 늦추기라도 하는 날에는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습죠... 정말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술에 취하고 보니, 어쩔 수가 없군요." 직공은 이렇게 말하더니, 빙그레 웃고 있는 아내를 무릎을 베개삼아 자려고 드러누웠다. 네플류도프는 잠시 동안 노인과 함께 앉아 있었다. 노인은 자기의 신세타령을 늘어놓았다. 노인은 난로를 만드는 사람이었으며 53년간이나 그 일을 해 오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의 숱한 난로를 만들었으므로, 이제는 좀 쉬려고 해보았지만 도무지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 이다. 이번에도 모스크바로 가서 자식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이제부터 집안 일을 돌 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노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 서 타라스가 잡아 둔 자리로 갔다. "자, 나리, 이리 앉으시지요. 배낭은 이쪽으로 치우겠습니다." 타라스의 맞은편에 앉은 정 원사가 네플류도프의 얼굴을 쳐다보며 상냥하게 말했다. "좁긴 합니다만, 그런 대로 괜찮습니다."하고 미소를 머금고 있는 타라스가 노래를 부르듯 이 말하고는, 그 힘센 두 팔로 2파운드나 되는 배낭을 솜뭉치를 쳐들듯이 번쩍 들어 창가로 옮겼다. "자리는 넉넉합니다. 저는 있어도 상관 없고, 없다면 의자 밑에라도 들어갈 수 있으 니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불편할 것도 없어요." 선량하고 친절한 표정을 얼굴에 나타내면 서 그가 말했다. 타라스는 스스로 자신을 평하길, 술을 마시지 않으면 말문이 열리지 않으나 술만 마시면 말이 줄줄 나와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건 다 말하게 된다고 했다. 사실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의 타라스는 꿀먹은 벙어리였다. 그가 술을 마시는 일이란 좀처럼 없었고 특별한 경우에만 한정되는 것이었지만, 일단 술이 들어가면 유쾌하게 이야기했다. 그런 때는 솔직하고 정직한 태도로, 특히 그 선량해 보이는 파란 눈에 친절한 빛을 띠고 입가에는 연 방 벙글벙글 웃음을 띠고 있었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재미있게 늘어 놓곤 했다. 타라스는 오늘 마침 그런 상태에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왔기 때문에 잠시 그의 얘기는 중 단되었다. 그러나 배낭을 치우고 전과 같이 자리에 앉아, 그는 억센 농부다운 무릎위에 놓고 정원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얘기를 계속했다. 그는 자기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이 새 로 사귄 친구에게 모조리 털어놓고 있었다. 어째서 아내는 시베리아로 유형되었으며, 왜 자 기가 시베리아로 따라가는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이제껏 한번도 이 사건을 상세하게 들은 적이 없었으므로 흥미를 가지고 이 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왔을 때는 이미 독살 미수가 일어나 그것이 페도샤의 소행이라 는 것을 집안에서 모두 알게 되었다는 대목이었다. "지금 저 자신의 슬픈 신세를 얘기하고 있던 참입니다." 타라스는 친근한 얼굴로 네플류 도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렇듯 자기 일처럼 들어주는 친절한 분을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그만 그 이야기를 털어놓고 말았습니다." "그래요?"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그렇게 돼서 모든 것이 탄로가 나버렸지요. 나리한테 한번 얘기해서 잘 아시다시피, 어머 님은 독이 든 밀떡을 가지고 '경찰한테 가겠다.'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버님은 워 낙사리가 밝은 노인이셔서 말입니다. '여봐요, 할멈. 며느리는 아직 어린애라서 무엇을 했 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동정을 해줘야지. 자기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하고 말씀하시는 거 예요. 그러나 어머님은 아버님의 말을 듣지 않고 '그런 계집을 그대로 놔두면 진딧물처럼 집안 식구들을 모두 죽이고 말 거야.'하면서 종내 경찰한테로 갔답니다. 곧 경관이 오고.. 증 인을 부르는 소동이 난 거죠." "그래 당신은 어떻게 됐소?"하고 정원사가 물었다. "나 말이오? 나는 배가 아파서 뒹굴며 토해 버렸어요. 오장이 막 뒤집히는 것 같아서 말 은 한 마디도 못했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은 곧 짐마차에 말을 달고, 페도샤를 태워서 지서로 갔다가 예심 판사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말예요, 페도샤는 처음부터 자기 죄를 인 정하고 예심 판사에게 사실대로 고백했답니다. 어디서 비상을 얻었으며, 어떻게 밀떡 속에 섞었다는 걸 말이오. '왜 그런 짓을 했나?'하고 물으니까, '그런 사람은 정나미가 떨어져 요. 그런 사람하고 같이 사느니보다 차라리 시베리아로 가는 게 나아요.' 이건 나를 가리키 는 말이지요." 타라스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요컨대 모든 것을 고백한 셈이죠. 그러니 감옥에 가게 된 건 당연하죠. 아버님이 혼자 투덜거리며 돌아오셨어요. 마침 농사 일이 바빠 지고 집안에 여자라곤 어머님분인데, 그 어머님마저 몸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보석으로 꺼낼 수 없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버님이 어느 관리 한 사람을 찾아 갔으나 별수 없었고 딴 사람한테도 부탁하러 갔었으나 모두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만 모두 단념해 버리려던 참에 우연히 어떤 관리 한 사람을 알게 되었죠. 그자는 무척 약삭빠 른 인간이었습니다. 3루블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난 페도샤의 옷가지를 저당잡혀서 그 돈을 마련해 주었습죠. 그는 이런 서류를 써 주더군요." 타라스는 총 쏘는 이야기라도 할 때처럼 손을 벌렸다. "그래서 일은 즉석에서 해결이 났지요. 나도 그 무렵엔 일어나 있었으므로 거 리까지 아내를 마중하러 나갔습니다. '무슨 일이오?'하고 묻기에 이러저러한 일로 아내가 감옥에 갇혀 있다고 말했습니다. '서류는 가지고 있소?'하더군요. 난 서류를 내주었더니, 그 는 그것을 보고 나서 '기다리고 있어.'하더군요. 난 거기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지요. 정오가 지났을 때였습니다. 이윽고 관리가 나와서 '바르구쇼프가 당신이오?' '네, 접니다.' 그러자 '그럼 데리고 가요.'하더군요. 곧 문이 열리더니 아내가 집을 나갔을 대와 같은 차림으로 끌려나왔어요. '자, 갑시다.' '당신, 걸어 왔어요?' '아냐, 마차로 왔어.'하는 말을 주고받고 나서, 우리는 여관에 들러 셈을 치른 다음, 말을 마차에 달고 나머지 건초를 죄다 망태에 쑤 셔 넣었습니다. 아내는 수건을 푹 쓰고 그 위에 앉았죠.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만, 아 내도 나도 말이 없었습니다. 집에 가까이 오자 아내가 '어머님은 안녕하세요?'하고 묻기 에 '무사하시지.' '아버님은?' '편안하셔.'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여보, 타라스. 용서 해 주세요. 내가 바보였어요. 난 무엇을 했는지도 몰랐어요.' 그래서 나도 말을 줬지요. '그 렇게 걱정할 건 없어. 난 벌써부터 용서하고 있으니까.' 그러고는 더이상 말이 없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 아내는 곧 어머님 발밑에 엎드려 빌었지요. 어머님은 '하나님이 용서하신 다.'하고 말했지요. 아버님은 무사한 것을 기뻐하시고 '지난 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더 훌륭하게 잘 살아야지. 지금은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을 때가 아니야. 추수도 해야 한 다. 밭을 갈아 비료를 잔뜩 주었더니, 보리도 다행히 손을 댈 수가 없을 만큼 익어서 자리 를 깔아 놓은 듯이 덮여 있단다. 이젠 빨리 거둬들여야 한다. 너도 내일 타라스하고 함께 나가서 거둬들이도록 해라.' 그 때부터 아내는 곧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깜짝 놀랄 만큼 일 을 잘했답니다. 우리 집엔 그 무렵 3정보 가량의 밭을 빌려 붙였는데, 다행히도 보리도 귀 리도 근래에 보기 드문 풍작이었습죠. 내가 베어 놓으면 아내가 묶고, 때로는 둘이서 베었습 니다. 나도 일에는 능숙합니다. 아내는 더 능숙해서 무슨 일이든지 다 해치웠습니다. 아내는 재빠르고 젊고 또 튼튼했지요. 그래서 너무나 일을 열심히 하므로 오히려 내 편에서 좀 일 찍이 끝내도록 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손가락이 붓고 팔이 쑤시고 해서 좀 쉬어야 할 텐 데도 아내는 저녁도 먹지 않고 헛간으로 달려가서 다음날 쓸 단 묶을 새끼를 준비했습니다. 정말 딴사람이 되어 버렸습죠." "그래, 당신한테도 친절해졌겠군?" 정원사가 물었다. "말할 것도 없이 한마음으로 결합됐지요. 그토록 화를 내시던 어머님도 '우리 페도샤가 아주 변했구나. 전연 딴사람이 되었어.'하고 말하셨지요. 어느 날 우리 둘이서 마차를 타고 묶은 보릿단을 거두러 간 일이 있었는데 둘이 마부석에 나란히 앉았을 때 내가 물었어요. '페도샤, 왜 그런 일을 생각 했어?' '왜라뇨? 당신과 같이 살기 싫어서죠.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난 또 물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어때?' '지금은 당 신 생각뿐이에요.'라고 말하지 않겠어요?" 타라스는 말을 멈추고 기쁜듯이 벙글벙글 웃다가 놀란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데, 보리 타작도 끝났기에 내가 삼에 물을 적시러 나갔다 돌아와 보니," 잠시 그는 말을 끊었다. "뜻밖에도 소환장이 와 있지 않겠습니까. 재판을 한다는 거죠. 우리는 왜 재판 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일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야말로 악마의 짓이라고 말할 수밖엔 없었겠군." 정원사가 말했다. "그렇지 않고는 어 떻게 인간이 인간을 죽일 생각을 품을 수 있겠소? 우리 마을에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었는 데..."하고 정원사가 말을 꺼내려고 했는데, 이 때 기차가 정거하려 했다. "역인가 보군."하고 그는 말했다. "한잔 마시고 올까." 이야기가 중단되었다. 네플류도프는 정원사를 따라서 찻간에서 나와 비에 젖은 플랫폼 위 로 내렸다. . 42 네플류도프는 그가 찻간에서 미처 나오기도 전에 작은 방울을 여러 개 단 준마를 서너 필 씩 단 호화로운 마차가 역 구내에 머물고 있음을 보았다. 비에 젖어 거무스름해진 플랫폼에 내려서자, 일등차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 중에서도 값진 날개깃을 단 모자를 쓰고 비옷을 입은 키가 크고 살찐 귀부인과 사이클 운동복을 입은 후리후리하고 다리가 가는 청 년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청년은 값진 목걸이를 한 크고 살찐 개를 데리고 있었다. 그 들 뒤에는 비옷과 우산을 든 하인들과 마부가 마중나와 있었다. 이 사람들에게는 살찐 귀부 인을 비롯해서 긴 코트 자각을 한 손으로 받들고 있는 마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신감과 유복함이 엿보였다. 이 일단의 둘레에는 부유한 사람에게 아첨하는 비굴한 사람들로 담이 이루어졌다. 빨간 모자를 쓴 역장을 비롯하여 헌병, 여름이면 언제나 기차가 도착할 때마다 구경하러 오는 러시아의 옷차림을 하고 구슬 목걸이를 목에 건 야윈 처녀, 전신 기사, 그리 고 남녀 승객들이 모여들었다. 네플류도프는 개를 데리고 있는 청년이 코르차긴의 아들인 중학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살 찐 귀부인은 공작 부인의 동생이었으며, 코르차긴 일가는 이 동생의 영지로 이사 온 것이다. 빛나는 금줄이 쳐진 역무원 옷을 입고 장화를 신은 여객전무는 문을 열고, 필리프와 흰 에 이프런을 두른 수화물 운반부가 접는 가마에 얼굴이 긴 공작 부인을 태워 운반하는 동안 정 중한 태도로 문을 붙들고 서 있었다. 언니와 동생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공작 부인이 사륜 마차를 타고 갈지 포장 마차를 타고 갈지 의논하는 프랑스어의 애화가 들렸다. 파라솔과 상 자를 든 곱슬머리 하녀를 맨 끝으로, 행렬은 역의 출구 쪽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는 그들과 만나 또 작별 인사를 하기가 싫어서 출입구까지 가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일행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공작 부인과 아들, 미시, 의사, 그리고 하녀가 앞장을 서고 늙은 공작은 처제와 함께 뒤에 남았다. 네플류도프는 떨어져 있었으므로 그들이 주고 받는 프랑스 말이 드문드문 들려올 뿐이었다. 그 대화 속에서 공작이 말한 한 구절은, 간혹 있는 일이지만 그 음성이나 어조가 웬일인지 네플류도프의 기억에 그대로 남았다. "오, 그 사람은 정말 상류 사회의 인간이야. 상류 사회의 인간이라고." 공작은 크고 오만 스러운 소리로 그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 나서, 공손한 차장과 짐꾼들을 데리고 처제와 함께 출구 쪽으로 나갔다. 마침 이 때 어디서인지 역 한모퉁이에서 짧은 털외투에 인피 짚신을 신고 배낭을 짊어진 노동자들의 무리가 플랫폼에 나타났다. 그들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첫 번째 찻간으 로 달려가 들어가려고 했으나, 곧 차장에게 내쫓기고 말았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발을 멈출 새도 없이 서로 발을 짓밟으면서 앞을 다투어 다음 찻간으로 가서 찻간의 모서리와 문에다 배낭을 부딪치며 올라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딴 차장이 입구 쪽에서 그들의 거동을 보고 몹시 야단을 쳤다. 찻간에 올라탄 노동자들은 곧 그곳에서 허둥지둥 뛰쳐나와 여전히 가벼 운 걸음걸이로 네플류도프가 타고 있는 그 다음 찻간으로 몰려갔다. 차장이 또다시 그들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더 앞으로 가볼 셈으로 발을 멈췄는데, 그 때 네플류도프가 안에 아직 자리가 남아 있으니 들어가라고 말했다. 그들은 말을 듣고 들어갔다. 네플류도프도 뒤이어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재빨리 자리를 잡으려 했으나, 꽃모양의 모표를 단 채 있는 모자를 쓴 신사와 두 부인이 이 찻간에서 노동자들이 자리를 잡는 것은 자기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 각하고 열을 내어 그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20명 가량이었는데 늙은이도, 젊은이 도, 모두 햇볕에 새까맣게 그을어 지쳐 버린 듯한 메마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 자기들이 잘못했다고 느낀 양 곧 배낭을 걸상과 칸벽과 문턱에 부딪치면서 찻간 복판을 빠 져나가 더 앞으로 가려고 했다. 이 세상의 끝까지라도 가라면 가고 앉으라면 못 위에라도 앉을 듯싶었다. "어딜 가는 거야, 지금 너희들 있는 자리에 앉아 있으란 말야!" 그들과 마주친 딴 차장이 외쳤다. "또 새로운 소식이 있어요." 두 부인 중의 젊은 부인이 자신의 유창한 프랑스 말로 네플 류도프의 주의를 끌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팔찌를 낀 부인은 퀴 퀴한 냄새가 풍기자 노상 코를 벌름거리고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냄새가 풍기는 노동자들과 동석한 불쾌감에 무어라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이제사 큰 위험을 벗어난 기쁨과 안도감을 느끼면서, 걸음을 멈추어 제각기 자리를 잡고, 어깨를 틀어 등의 무거운 배낭을 내려 좌석 밑에 수셔넣었다. 타라스와 얘기하던 정원사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으므로 타라스의 옆과 앞에 세 개의 자리 가 생겼다. 세 사람의 노동자가 앉았다. 그러나 네플류도프가 옆에 오자, 그의 품위 있는 옷 차림에 놀라서 비켜나려고 했다. 네플류도프는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말하고, 자기는 통로의 옆좌석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나란히 걸터앉은 두 사람 중에서 쉰 살쯤 되어 보이는 노동자는, 이상하다는 듯한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젊은 노동자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보통 신사들처럼 욕 을 하거나 쫓아내지도 않고 오히려 자리를 양보해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놀라웠고 또 어리 둥절했다. 그들은 이 때문에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걱정을 했다. 그러나 별로 아무런 흉계도 있어 보이지 않고, 네플류도프가 소탈하게 타라스와 얘기하고 있는 것을 봐, 그들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고 앉으라고 권했다. 네플류도프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동자는 처음에는 몸을 움츠리고 신사 나리에게 자기 몸이 닿지 않도록 인피 짚신을 신은 두 다리를 애써 오므리고 잇었으나, 안중에는 네플류도프와 타라 스와 사귀어 얘기를 하게 되고, 얘기 도중에 특히 그의 주의를 끌고 싶은 대목에 이르면 손 등으로 네플류도프의 무릎을 치기까지 할 정도가 되었다. 그는 자기의 신에 타령을 하고 이 탄(泥炭) 파는 곳에서의 일을 얘기했다. 그는 거기서 두 달 반동안 일하고 지금 집으로 돌아 가는 길이나, 고용될 때에 임금의 일부를 선불로 받았기 때문에 집에 있는 동생들에게는 10 루블씩밖에는 보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밥 먹는 두 시간을 빼놓고는 무릎까지 잠기는 물 속에 들어가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몹시 힘든 일입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그렇지만 어느 만큼 견뎌 내면 아무렇지도 않아요. 먹을 것만 제대로 주면 견딜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 이 나빠서 말이지요. 처음 한동안은 지독한 걸 먹이더군요. 그래서 모두 불평을 했더니, 이 내 먹을 것도 점점 나아지고 일하기도 수월해졌습지요." 그리고 그는, 자기는 이로써 벌써 28년째나 날품팔이를 하고 있는데, 번돈은 고스란히 집 에 보냈다는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다음은 형에게, 그리고 다음에는 집안 일 을 돌보고 있는 조카에게 송금을 해주고, 자기는 1년 동안에 번 돈 5,60루블 중에서 겨우 담 배나 성냥을 사는 용돈 2,3루블 정도밖에 쓰지 않았다고 했다. "하긴 죄스러운 얘깁니다만 지나치게 피곤할 땐 보드카를 사 마셨습니다." 그는 죄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덧붙였다. 그는 또, 고향에서 남자들 대신 여자들이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는 이야기, 오늘 출발 전에 고용주가 모두에게 보드카를 반 통이나 사 주었다는 이야기, 친구 한 사람이 죽은 이야기, 또 한 사람의 친구는 병들어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가 말한 환자는 같은 찻간의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얼굴이 유난히 창백하고, 자주빛 입술을 한 젊은이였다. 그는 열병으로 빈사 상태에 있는 듯했다. 네플류도프는 그이 옆으로 가까이 가 보았으나, 젊은이가 너무나도 괴로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에게 여러 가지 이 야기를 할 수 없었다. 나이 많은 노동자에게 키니네를 사 주라고 약 이름을 종이에 적어주 었다. 그는 약값을 주려고 했지만, 나이 많은 노동자는 자기가 사 주겠다고 말하면서 사양했 다. "나는 지금까지 무척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이런 분은 처음 봤습니다. 화도 내시지 않 고 자리까지 양보해 주시다니, 나리들도 천차만별이군요." 그는 타라스를 바라보고 이렇게 말을 맺었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새로운 딴 세계다. '네플류도프는 노동자들의 거칠고 뼈가 이상한 팔다리와 허름한 무명옷과, 피로해 보이나 상냥하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을 바라보면 서, 비로소 인간 생활의 참다운 노동의 진정한 의미와 기쁨과 고통을 맛보고 있는 새로운 세계의 사람들 속에 자기가 끼여 있음을 느꼈다. '바로 이것이 상류 사회다!' 네플류도프는 아까 코르차긴 공작이 한 말을 생각하면서 무 의미하고 빈약한 생활밖에 모르고 무위 도식만을 일삼는 코르차긴 일가의 사치스러운 세계 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미지의 아름다운 세계를 발견한 나그네의 기쁨을 느꼈다. 21 네플류도프는 물살이 빠른 넓은 강을 바라보면서 뱃전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그 의 머릿속에 번갈아 가며 떠올랐다. 마차의 요동으로 머리를 흔들리며 울분의 감정으로 죽 음에 다다르고 있는 크르일리조프의 모습은 그를 괴롭고 처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른 또 하나의 인상, 시몬손과 같은 훌륭한 남자의 사랑으로 지금은 착실하고 올바르며 선한 길 로 들어선 생기찬 카추샤의 모습은 기뿐 일임에도 불구하고 네플류도프의 심정을 언짢게 했 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거리 쪽에서 오호트니츠키 사원의 커다란 종소리와 물결치는 금속성의 여운이 강을 타고 울려왔다. 네플류도프 곁에 서 있던 마부와 여러 마차의 마부들은 모두 차례로 모자를 벗고 성호를 그었다. 그러나 뱃전에서 가장 가깝게 서 있던 키가 작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한 노 인만은 성호를 긋지 않고 머리를 똑바로 든 채 유심히 네플류도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누덕누덕 기운 코트에 나사 바지를 입고 또 역시 다 해진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그리고 어깨에는 그리 크지 않은 보따리를 메고 머리에는 닳아빠진 높은 털모자를 쓰고 있 었다. "영감님은 어째서 기도를 안하는 거요?" 네플류도프의 마부가 모자를 고쳐쓰면서 말했다. "영세를 받지 않았소?" "도대체 누구를 향해 기도하지?"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노인은 도전하는 듯이 빠른 어조로 마디마디 분명하게 되물었다. "누구긴, 하느님께지." 마부는 비웃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자네, 어디 보여 주게나, 그 하느님이 어디 있는지?" 노인의 어투에는 무언가 진지함이 느껴져서 마부는 잘못 걸렸다는 생각으로 약간 당황했 지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듣고 있는 앞에서 남자로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얼른 대꾸했다. "어디라고? 뻔한 것이지, 하늘에 계신다는 건." "그럼 자네는 하늘에 올라가 봤나?" "가보든 안 가보든 하느님께 기도드려야 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 아니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은 본 사람은 하나도 없어, 아버지의 품속에 안긴 외아들에게만 그걸 보여 주셨지." 노인은 엄숙한 표정의 얼굴을 찡그리며 여전히 빠른 투로 말했다.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영감님의 신앙은 어떤 것이오?"하고 뗏목배 한구석에서 짐마차와 나란히 서 있던 그리 젊지 않은 한 남자가 물었다. "나는 신앙 같은 게 없소. 나는 아무도 믿지 않으니까. 나 자신밖에는 그 누구도 믿지 않 아." 노인은 아까처럼 단호하게 빨리 대꾸했다. "그러나 어떻게 자신을 믿을 수 있을까요?"하고 네플류도프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 끼여들 었다. "자기라도 잘못하는 때가 있을 텐데요." "아니,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머리를 흔들면서 분명하게 대답을 했다. "그러면 여러 가지 신앙이 존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여러 가지 신앙이 있는 까닭은 사람들이 남을 믿고 자기 자신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나도 남을 믿다가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도 헤어날 수 없을 만큼 아득하게 빠져 있었어요. 구교도, 신교도, 안식교도, 편신교도, 승려파 교도, 무승 려파 교도, 오스트리아 교도, 몰로칸 교도, 스코페츠 교도 등 어떤 종파나 모두 자기네만 옳 다고 떠들어 댑니다. 모두가 그런 꼴들이니까 눈먼 강아지처럼 떠돌아다니고 있을 뿐입니다. 신앙은 많이 있지만 영혼은 하나뿐이지요. 당신도 나도 저 사람도 영혼은 있습니다. 말하자 면 누구든지 다 자기의 영혼만 믿게 되면 전부 하나가 될 겁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만 믿으면 모두 하나로 될 수 있습니다." 노인은 언성을 높여,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들으란 듯이 끊임없이 주위를 둘 러보며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그런 신앙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습니까?" 네플류도프가 그에게 물었다. "내가요? 벌써 오래됐지요. 그래서 쫓겨다닌 지가 햇수로 23년이나 됩니다." "쫓겨다니다니, 왜요?" "그리스도가 쫓겨났던 것같이 나도 쫓겨난 거지요. 나는 붙들려서 재판소에 나간 적도 있 고 신부 앞에 나간 적도 있고 학자와 바리새인들 앞에 끌려간 적도 있고 정신 병원에 입원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지요. 나는 자유인이니까 말이오. '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렇게 묻더군요. 모두들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싶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름이 없습니다. 나는 뭐든지 다 내버리고 말았지요. 이름도 직업도 조국도 아 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나는 그저 나일 뿐입니다. 그래 이름이 뭐냐기에 인간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이번엔 '그럼 나이는 몇살이냐?'고 하겠지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 습 니다. 나이는 세어 본 일도 없고 또 셀 수도 없다고 말이에요. 그 이유는 나는 언제나 존재 해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의 부모는 누구냐?' 물으면 내게 는 하늘과 땅 외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하늘이 아버지요 땅이 어머니라고 대답해 줬지 요. 그러면 그 때엔 ' 제를 인정하는가?'하고 묻지요. 왜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황제는 그 분 자신이 황제이고 나는 나 자신이 황제입니다. 그러면 '너 같은 작자하고는 말할 수도 없 다.' 고 하기에 나도 이런 말을 해줬습니다. '나도 말을 해달라고 원한 적은 없다고요.' 그래서 나 는 추방된 것입니다." "그래 영감님은 지금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어디라고 정해진 데가 없어요. 하느님이 가라는 데로 갑니다. 그리고 일을 하지요. 일이 없으면 빌어먹지만."하고 노인은 뗏목배가 맞은편 강가에 가까이 온 것을 알자 이야기를 멈 추고 득의 만면한 표정으로 자기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나룻배는 맞은편 강가에 닿았다. 네플류도프는 지갑을 꺼내 노인에게 돈을 주었지만 노인 은 사양했다. "나는 그런 건 받지 않아요. 빵이면 받겠습니다만." "그럼 실례가 됐군요." "별로 잘못된 건 없어요. 당신은 내게 수치를 준 것은 아닙니다. 또 내게 수치를 줄 수도 없지만." 노인은 이런 말을 하고 내려놓았던 보따리를 어깨에 짊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 안에 네플류도프의 마차가 육지에 내려져 말을 매기 시작했다. "나리도 호기심이 참 많으시군요. 저런 늙은이하고 말씀을 다 나누시다니."하고 마부는 네 플류도프가 사공들에게 수고비를 준 뒤 마차를 탔을 때 이렇게 말했다. "저까짓 쓸데없는 부랑자를 가지고 말입니다." 22 언덕 위로 올라오자 마부는 네플류도프를 돌아보았다. "어느 여관으로 모실까요. 나리?" "최고급 여관은 어딘가?" "시비리스크 여관보다 좋은 데가 또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쥬코프도 괜찮습지만요." "어디든지 좋은 데로 가게." 마부는 또다시 옆으로 비스듬하게 앉아서 속력을 냈다. 도시는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다락방이 있는 푸른색 지붕의 집들이 나란히 서 있었고, 똑같은 모양의 교회, 조그 만 가게, 번화가의 상점, 순경들마저도 똑같아 보였다. 다만 대부분의 집이 목조인 것과 거 리가 포장되지 않았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번화가인 듯한 곳에서 마부는 어떤 여관 앞에 마차를 세웠다. 그러나 그 여관에는 빈방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여관으로 가야만 했다. 그 여관에는 빈방이 있었으므로 네플류도프는 두 달 만에 처음으로 그래도 비교적 깨끗하고 편 리한 이전의 환경과 비슷하게 지낼 수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안내받은 방은 그리 훌륭하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어쨌든 여행 마차와 시골 여인숙과 수인 중계소 등, 이런 데서만 지내 온 터라 아주 기분이 풀렸다. 그는 무엇보다 먼 저 수인 중계소를 방문하고 나서부터 아무리 애써도 완전히 없앨 수가 없었던 벼룩과 이를 말끔히 퇴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여장을 풀고 즉시 목욕을 한 뒤 도시인의 복장을 하고 -풀 먹여 잘 다린 와이셔츠에 줄이 선 바지, 그리고 프록 코트에 외투를 입고- 이 곳 의 지방 장관을 방문하기로 했다. 여관 문지기가 불러 온 마부는 덜컹거리는 마차에 살찐 커다란 키르기스 종의 말을 달고 와서, 보초병과 경관이 서 있는 아주 크고 훌륭한 저택 앞 으로 네플류도프를 데리고 갔다. 그 저택에는 앞에도 뒤에도 정원이 있었는데 포플러와 자 작나무가 잎이 떨어져 엉성한 가지만을 뻗고 있었고, 그와 대조적으로 전나무와 소나무, 그 리고 노간주나무들이 싱싱한 진록색으로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장군은 몸이 불편하다고 손님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네플류도프는 억지를 써서 명함을 전해 달라고 하인에게 부탁했다. 하인은 금방 회답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들어오시랍니다." 현관, 하인, 전령, 층계, 반질반질하게 닦여진 파키트로 바닥을 깐 홀 등 모두가 페테르부 르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 깨끗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대로 장엄하게는 느껴졌다. 네플 류도프는 서재로 안내되었다. 장군은 아주 몸집이 비대했으며, 주먹코에 이마가 훌렁 벗겨진 대머리에는 혹이 여럿 있 었고, 눈밑의 살이 주머니처럼 축 늘어진 다혈질의 사내였다. 그는 타타르식의 비단 가운을 입고 담배를 손에 든 채 은접시에 놓인 찻잔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잠옷 바람으로 실례가 되지만 만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요. 용서 하십시오." 그는 굵고 주름살이 진 목덜미를 가운으로 감싸면서 말했다. "몸이 좀 불편해서 쉬고 있었습니다. 한데 무슨 일로 이렇게 먼 곳까지 오셨습니까?" "저는 죄수 대열을 따라왔습니다. 죄수 중에 가까운 사람이 하나 있어서요."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그래서 사실은 그 죄수의 일과 또 한 가지의 다른 일 때문에 각하께 말씀드리려고 찾아 온 것입니다." 장군은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고 차를 또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담배를 공작석 재 떨이에 비벼 끄고는 부은 것 같은 가늘고 광채 있는 눈을 네플류도프에게 떼지 않으며 진지 하게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장군이 네플류도프의 말을 중단시킨 것은 '담배를 피우지 않 으시렵니까'하고 묻던 그 때 뿐이었다. 원래 장군은 자유주의와 인도주의를 자기 직무와 조화시키려는, 풍부한 교양을 갖춘 군인 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현명하고 선량한 인간성을 지닌 장군은 그 조화가 불가능함을 깨달았기 때문에 항상 자기의 내면적인 모순을 보지 않으려고 군인 사회에서 성행되고 있던 폭주의 습관에 물들었던 것이 마침내는 그 습관에 흠뻑 빠져 버리 게 되어 35년간의 군무 생활을 보낸 지금에 와서는 의사로부터 알코올 중독자라는 진단을 받게까지 되었다. 현재의 그는 전신이 흡사 술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어떤 술 이라도 마시기만 하면 취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술을 마시는 것은 이미 필수적인 조건이 되어 버렸고 술이 없이는 잠시도 살수가 없었 다. 저녁 무렵이면 항상 취해서 얼근한 상태에 있곤 했으나 워낙 그렇게 습관이 되었기 때 문에 휘청거리는 일도 없고 또 말을 그리 함부로 하지도 않았다. 만일 말이 좀 지나쳤다고 하더라도 그가 이 지방에서는 제일 높은 직위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이 현명한 말 인 줄 알고 들었다. 다만 아침 한때는, 즉 네플류도프가 찾아온 이 무렵에는 현명한 사람같 이 상대편의 말을 옳게 이해할 수도 있었고 항상 입버릇처럼 즐겨 말하는 '취해서 현명하면 두 가지의 이익을 본다.'라는 속담을 별탈없이 실행할 수 있었다. 상부에서도 그가 술꾼인 줄을 알고 있긴 했지만, 다른 사람보다는 그가 교양이 있었으며 대담하고 민활하며, 풍모가 당당하고, 또한 아무리 취중이라도 자신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는 수단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중책에 임명되어 그 지위를 지키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장군에게 자신이 걱정하고 있는 사람은 여죄수라는 것과 그녀가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황제 폐하에게 그녀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것 등을 말했 다. "아, 그래요. 그래서요?" "그녀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늦어도 이 달 안으로는 그 통지가 이 곳의 저에게 오게 되어 있습니다." 장군은 여전히 네플류도프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손가락이 뭉뚝하게 손을 탁자로 뻗쳐 초 인종을 누르고 담배를 한 모금 빨고 나서는 아주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잠자코 듣고 있었 다. "그러한 사정이라서 그 청원서에 관한 기별이 있을 때까지 될 수 있으면 그녀를 이 곳에 체류할 수 있게 허가를 해주십사 하는 부탁입니다." 군복은 입은 당번병이 들어왔다. "집사람이 일어났는지 알아봐." 장군은 당번병에게 말했다. "그리고 차를 한 잔 더 가져와. 또 하나의 용건이란 것은 뭐죠?" 그는 네플류도프를 향해 물었다. "또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은,"하며 네플류도프는 말을 계속했다. "역시 죄수 대열 중의 정치범에 관해서입니다." "아, 그래요!" 장군은 의미 있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 정치범은 중환자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아마 이 곳의 병원에 남게 되리라고 생각됩 니다만 역시 정치범인 여죄수가 한 사람 그를 간호하기 위해 남기를 희망하고 있어서..." "여죄수는 그 남자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이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만약 결혼을 해야만 같이 남을 수 있다면 기꺼이 결혼하겠다 는 말도 했습니다." 장군은 광채나는 눈으로 뚫어지게 그를 쏘아보면서 눈초리로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듯 잠 자코 담배만 피워 댔다. 네플류도프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장군은 탁자 위에서 책 한 권을 집어 들더니 손가락 끝에 침을 발라가며 책장을 재빠르게 넘겨서 결혼에 관한 조문을 찾아 읽었다. "그 여죄수는 무슨 형을 받았습니까?" 그는 책에서 눈을 떼면서 물었다. "중노동형입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결혼을 해봤자 환경이 지금보다 좋아지지 않을겁니다." "그렇지만 말씀입니다..." "아니, 잠깐만. 가령 그 여죄수가 보통 사람과 결혼을 한다 해도 역시 그 형기만은 어차피 치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그 남자와 여자 중 누가 더 형이 중한가 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 다 중노동형을 받았습니다." "아, 그것 참. 어쩔 도리가 없군요." 장군은 웃으면서 말했다. "둘 다 죄가 같군요. 그러나 남자만은 병 때문에 남게 될 수가 있습니다."하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그의 처지를 돕기 위해 가능한 한 노력을 다하겠습니다만, 여자 쪽은 설사 그 남자와 결 혼을 하더라도 이 곳에 남을 수가 없습니다." "부인께서는 지금 커피를 마시고 계십니다." 당번병이 보고를 했다. 장군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 봅시다. 그 두 사람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여기다 써주십시오." 네플류도프는 그들의 이름을 적었다. "그것도 곤란한데요."하고 장군은 그 병자와의 면회를 허락해 달라는 네플류도프의 청원 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당신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그 사내나 다른 죄수들에 대해서도 대단한 관심을 가시진 것 같고 돈도 가시고 계신 것 같군요. 이 지방에서는 돈이면 만사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뇌물을 근절시키 라는 말을 늘 듣고는 있습니다만, 모든 사람이 다 뇌물을 받고 있는 판에 어떻게 없앨 수 있겠습니까? 지위가 낮은 축일수록 더 심하지요. 5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어 떤 방법으로 감독할 수가 있겠어요? 그 사람들은 그 지방의 조그만 왕이지요. 내가 이 곳의 왕인 것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웃었다. "당신도 지금껏 정치범들과 면회해 왔겠지만 그 때마다 사례금을 주고 들어가셨지요?" 장 군은 빙글거리며 물었다. "어때요, 맞지요?" "네, 사실은 그렇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정치범과 만 나고 싶고 또 그들이 불쌍하게 여겨졌을 겁니다. 그리고 형무관이나 호송병들은 얼마든지 뇌물을 받지요. 하기야 20코페아카짜리 은화 두 닢의 봉급으로 가족을 부양해 나가야 하니 뇌물을 받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나라도 그들이나 당신과 같은 처지에 있다면 틀림없이 그 들이나 당신 같은 일을 서슴없이 하겠죠. 그러나 이런 지위에 있는 나로서는 준엄한 법 조 문에서 약간이라도 벗어나는 일은 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야 나도 인간이니까 인정에 끌리 지 않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행정관으로서 정해진 조건 밑에서 정부의 신임을 얻고 있으니까 의무를 다함으로써 그 신임에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이 문제는 이쯤 으로 끝냅시다. 이번엔 어디 당신께서 모스크바의 이야기나 들려 주시렵니까?" 이렇게 말하고 장군은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자기 얘기도 했다. 최근의 소식을 알고도 싶 고 동시에 또 자신의 중요성이며 인도주의를 과시하고도 싶었던 것이다. 23 "그건 그렇고, 지금 어디 묵고 계시지요?" 장군은 네플류도프를 전송하면서 물었다. "쥬코프 여관? 아니, 거기도 그리 좋지 않을걸요. 우리 집에 오셔서 저녁 식사나 하시지 요. 우리는 5시에 식사합니다. 영어를 할 줄 아시죠?" "네, 합니다." "그럼 더욱 잘됐는데요. 실은 여기에 영국인 여행가 한 명이 와 있는데 시베리아의 감옥 과 유형에 관해서 연구하고 있지요. 마침 그 사람도 저녁 식사를 함께 하러 오게 되어 있습 니다. 당신도 꼭 참석해 주십시오. 식사는 5시에 시작입니다. 우리 안사람은 제법 사무적인 사람이지요. 당신이 말씀하신 여죄수와 병자의 건에 대해서도 그 때 대답해 드리기로 하지 요. 어쩌면 누군가 한 명쯤은 간호를 위해 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장군과 작별을 한 뒤 네플류도프는 기운이 솟는 것을 느끼면서 우체국 쪽으로 마차를 몰 았다. 우체국은 낮고 둥근 천장의 건물이었다. 몇 명의 직원이 사무용 책상에 앉아서 몰려든 사 람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직원 한 사람은 고개를 기웃이 하고 앉아서 밀려나오는 봉투에 능 숙하게 소인을 찍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의 이름을 듣 고는 곧 아주 많은 우편물 뭉치를 내주었다. 거기에는 송금 수표도 있었고 편지도 몇 통 있 었다. 그리고 책과 조국잡기 최근호도 있었다. 자기의 우편물을 받아들고 네플류도프는 사병이 수첩을 들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나무 벤치로 가서 그 곁에 앉아 우편물을 훑어보았다. 그 중에서 등기 우편 한 통은 새빨간 봉랍으로 단단하게 봉해지고 소인이 뚜렷이 찍힌 훌륭 한 봉투였다. 봉투를 뜯던 그는 무슨 공문서 같은 것과 함께 들어 있는 셀레닌의 편지를 발 견했을 떄, 별안간 피가 얼굴로 끓어오르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것은 카 추샤 사건의 결정서였던 것이다. 대체 어떤 결정이 내려졌을까? 기각된 것은 아닐까? 네플 류도프는 판별하기 어려운 잔글씨로 딱딱하고 서투르게 쓰여진 편지를 단번에 읽어내리고 기쁨에 넘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결정서는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여! 우리가 나눈 마지막 대화는 나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네. 마슬로바의 사건에 관 한 자네의 생각은 옳은 것이었네. 세밀하게 그 사건을 검토해 본 결과 나는 그녀에 대하여 엄청난 부정이 있었음을 발견하고 놀랐다네. 이것을 수정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자네가 출원 한 청원 위원회에 의뢰할 수밖에 없었네. 다행히도 내가 이 사건의 해결에 다소나마 도움을 줄 수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 특사 지령서의 사본을 동봉하여, 백작 부인 카테리나 이바노브 나가 가르쳐 준 주소로 자네에게 보내는 것이네. 원본은 그녀가 재판 진행중 수감되었던 곳 으로 발송되는 것이니까, 아마 곧 그리로부터 시베리아 행정부로 회송될 것일세. 우선 이 기 쁜 소식부터 급히 전하는 것이네. 자네의 셀레닌 특사 지령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황제 폐하 직속 청원 사무국. XX과 XX계. X년 X월 X일. 황제 폐하 직속 청원 사무국장의 명령에 의해서 평민 예카테리나 마슬로바에게 다음과 같 이 선고함. 황제 폐하께 상신된 보고에 의하여 마슬로바의 청원에 대해서 원판결의 중노동 형을 취소하며 시베리아의 원격지가 아닌 지방으로의 이주형으로 변경할 것을 통고함. 이것은 너무나 기쁘고도 중대한 소식이었다. 네플류도프가 카추샤를 위하여, 그리고 또 자 기 자신을 위하여 희망하던 모든 것이 성취된 것이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그녀의 환경에 서의 이러한 변화가 그녀와의 관계에도 새롭고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녀가 징 역수로 있던 지금까지는 그가 청했던 결혼이라는 것도 공상에 가까운 것이었고 그녀의 고통 을 다소라도 덜어 주겠다는 의미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두 사람이 같이 사는 것을 방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서 네플류도프는 아직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거기다 시몬손과 그녀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제 그녀가 한 말은 무 엇을 의미하는 걸까? 만약 그녀가 시몬손과의 결합에 동의를 한다면 그것이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네플류도프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낼 도리가 없어서 당장은 생각을 않기로 했다. '이 문제는 나중에 어떤 해결이 나겠지.'하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 할 일은 무엇보다 먼 저 그녀를 만나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고 또 그녀를 자유의 몸으로 만드는 것이리라.' 그 렇게 하는 데는 지금 자기 손에 있는 이 사본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리하여 그는 우체국을 나서자 곧 마부에게 감옥으로 가자고 말했다. 조금 전 아침에, 장군은 감옥 방문을 허락해 주지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상급 관리에게서 얻지 못한 허가가 더러는 그 밑의 관리들에게서는 쉽게 받아 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한번 감옥과 맞서 보아서 일이 뜻대로 되면 카추샤를 만나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고, 될 수 있으면 석방이 되도록 서둘러 주고, 또한 크프일리조프의 병세도 물어 보고 그와 마리야 파블로브나에게 장군이 했던 말을 전해 주려 고 마음먹고 있었다. 형무관은 아주 키가 크고 비대하며 콧수염이며 구레나룻이 모두 입주위로 말려든 풍채가 당당한 사내였다. 그는 네플류도프에게 아주 엄격히 대하면서 장관의 허가가 없는 한 절대 로 외래인의 면회를 허락할 수 없다고 냉정히 잘라 말했다. 모스크바의 감옥에서도 자기는 허가를 얻었다고 말했지만, 형무관의 대답은 이랬다. "그야 그런 일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허락하지 못합니다." 이 말 속에는 이런 의미가 포함된 듯했다. '당신네 도시 사람들은 우리를 곯려 주고 당 황 하게 만들려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동부 시베리아인들도 규율과 질서가 어떤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고. 그것을 한번 가르쳐 드리지!' 황제 폐하의 직속 사무국에서 보내온 공문서의 사본도 이 형무관에게는 전혀 효력이 없었 다. 그는 감옥 구내로 들어가는 것을 딱 잘라 거절했다. 그리고 그 사본에 의해서 카추샤를 석방시켜 주어도 좋지 않느냐고 하는 네플류도프의 물음에 대해서도 그는 경멸하듯 웃을 뿐 직속 상관으로부터 직접 명령이 없는 한 누구를 불문하고 석방시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결 국 그에게서 약속받을 수 있었던 것은 특사가 내려졌다는 것을 카추샤에게 전해주고, 자기 의 상관에게서 영이 떨어지는 즉시 한시도 지체 없이 그녀를 석방하겠다는 것뿐이었다. 크프일리조프의 병세에 관해서도 형무관은 어떠한 말도 전하기를 거부하며 심지어 그러한 죄수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고까지 했다. 그리하여 네플류도프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마차를 돌려 여관으로 돌아왔다. 형무관이 이런 태도를 취한 이유는 거의 정원의 두 배나 처넣은 감옥 안에서 티푸스가 유 행하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네플류도프를 태운 마부는 돌아가면서 이러한 이야기를 해주었 다. 감옥에서는 사람들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 가고 있으며 무슨 나쁜 병이 번져 매일 스무 명 이상씩이나 죽어서 매장된다는 것이었다. 24 감옥에서 실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네플류도프는 여전히 기분이 좋아서 카추샤의 특사 서류가 도착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현청으로 마차를 몰았다. 그러나 아직 서류가 오지 않았 기 때문에 네플류도프는 여관으로 다시 돌아와서 우선 이에 관한 편지를 셀레닌과 변호사에 게 급히 보냈다. 편지를 다 쓰고 난 뒤 시계를 보았다. 벌써 장군 댁의 만찬에 참석할 시간 이 되었다. 장군 댁으로 가는 도중 그는 카추샤가 특사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생각 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 여자의 이주 유형지는 어디가 될 것인가? 네플류도프는 그녀의 마 음속에 일어났던 변화가 생각났다. 또한 그녀의 과거도 생각났다. '아니야, 그런 것은 잊어버려야 한다. 잊어버려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그는 급히 그 녀에 대한 생각을 지워 버렸다.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 테지.'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 고는 장군에게 이야기할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장군 댁의 만찬은 네플류도프에겐 별로 색다른 것이 없는 부호나 고관들이 늘 하는 일상 생활의 사치스러운 호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사치는 고사하고 일상 생활의 편의마 저도 궁했던 터라 그에게는 각별히 유쾌한 기분을 안겨 주었다. 장군 부인은 니콜라이 1세의 궁녀로도 있었던 페테르부르크의 고풍스런 귀부인으로 프랑 스어는 아주 자연스럽게 구사했으나, 러시아어는 부자연스러웠다. 그녀는 지나칠 만큼 자세 를 꼿꼿이 하고 앉아서, 손을 움직일 때에도 팔꿈치를 허리에서 떼지 않았다. 남편에게는 조 용하고 조금 수심 띤 존경의 태도로 대했지만 손님들에게는 사람에 따라 조그만 정도의 차 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특히 네플류도프에게는 마치 가족을 대하는 것같이 극진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에 네플류도프는 새삼스레 자기의 가치를 인식하고 유쾌 한 만족감을 느꼈을 정도였다. 그녀는 네플류도프가 이런 시베리아 벽지에까지 찾아온 것이 좀 파격적이긴 하였지만 그 진실한 성품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특이한 인물로 여기고 있 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게 하였다. 이런 세심한 친절과 장군 댁의 우아하고 사치스런 분위기 때문에 네플류도프는 이 환경과 맛있는 음식, 자기와 같은 계층의 친숙하고 품위 있는 사람들과 접촉하는 즐거움과, 긴장이 풀리면서 생기는 충족감에 흠뻑 젖어들었다. 흡사 최근 몇 개월 동안 자기가 처한 환경과 자기를 둘러싼 그러한 생활 속에서 줄곧 살아 온 것이 모두 꿈만 같고, 지금에야 겨우 그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만찬에는 장군의 딸과 사위, 부관 등 가족들 외에 예의 그 영국인과 금광 주인인 상인, 그 리고 시베리아의 먼 도시에서 온 지사가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네플류도프에게는 이 사 람들이 모두 다 유쾌하게만 보였다. 영국인은 건강하고 혈색이 좋은 사람으로, 프랑스어는 아주 서툴렀지만 영어는 뛰어나게 능통해서 웅변가처럼 구사하였다. 또한 그는 견문이 무척 넓어서 미국, 인도, 일본, 시베리아 등에 관한 이야기를 매우 흥미진진하게 하였다. 젊은 금광 주인인 상인은 농민의 아들이었지만, 런던에서 맞췄다는 연미복에 다이아몬드 커프스를 달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서재를 가지고 있었고 자선 사업에 거금을 기부하기도 했으며, 유럽적인 자유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 청년에게서 건강한 농민 기질의 어린 나무 에다 유럽 문화를 접분인 것 같은 전혀 새롭고 우수한 문화인의 유형을 보는 것 같아서 네 플류도프는 그에게 흥미와 호감이 갔다. 멀리 떨어져 있는 시베리아의 소도시에서 온 지사는 네플류도프가 페테르부르크에 있었을 때에 많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바로 그 국장이었다. 숱이 엉성한 곱슬머리에 상냥해 보이는 파란 눈동자를 지닌 뚱뚱한 사내로, 하반신이 무척 뚱뚱하고 정성껏 다듬은 흰 손에 반지를 몇 개나 끼고 있었는데 웃는 얼굴이 무척 보기 좋았다. 이 지사는 부정이 만연되어 있는 속에서 오직 자신만이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로 이 댁 주인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 었다. 또한 음악을 아주 좋아해 우수한 피아니스트였던 장군 부인도 지사가 훌륭한 음악가 이며 자기와 합주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를 존경하였다. 네플류도프의 기분은 매우 유쾌 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사람까지도 지금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쾌활하고 정력적이며 파르스름한 턱을 지닌 부관은 무슨 일에나 봉사 정신을 발휘한다는 그 선량함에 호감이 갔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네플류도프에게 호감이 간 사람은 장군의 딸과 사위인 사랑스러운 젊은 한 쌍이었다. 이 장군의 딸은 예쁘지는 않았지만 순진하고 젊 은 여성으로 두 어린애한테 온 정성을 다 쏟고 있었다. 그녀가 부모와의 오랜 싸움을 한 끝 에 연애 결혼을 했다는 그 남편은 모스크바 대학을 졸업한 겸손하고 머리가 영리한 자유주 의자로서 관청에 근무하면서 한편으로 통계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특히 토착 종족의 연구에 전념하면서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멸족으로부터 구출하려고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모두 다 네플류도프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새롭고 흥미있는 사람으 로 그와의 합석을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군복을 입고 백십자 훈장을 달고 식탁에 나온 장 군은 흡사 오랜 벗을 대하는 것처럼 네플류도프와 인사를 나누고 곧 손님들을 자쿠스카와 보드카가 있는 테이블로 안내했다. 오늘 아침 자기 집을 나간 뒤에 무슨 일을 했느냐는 장 군의 물음에, 네플류도프는 우체국으로 가서 아침에 말했던 사람이 특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다고 대답하고 또 한번 감옥 방문을 허가해 달라고 말했다. 장군은 만찬 식탁에서 사무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얼굴을 찌뿌 리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보드카를 드시겠어요?"하고 그는 프랑스어로 식탁에 다가온 영국인에게 물었다. 영국인 은 보드카를 한 잔 마시고 나서 오늘은 교회와 공장을 견학했는데, 이번에는 큰 이동 감옥 을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것 마침 잘됐군요!"하고 장군이 네플류도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같이 가도록 하시지요. 통행 허가증을 두 분께 내드리도록 하게." 그는 부관에게 말했다. "당신은 언제 가시렵니까?" 네플류도프가 영국인에게 물었다. "저는 오늘 밤에 가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다들 모여 있을 것이며, 사전에 준비도 못할 것 이고, 있는 그대로를 불 수 있겠죠." 영국인이 대답했다. "옳아, 최고의 장면을 보시겠다는 거군요! 보시도록 해드리죠. 꼭 보시도록! 감옥 개선에 대해 글도 많이 썼지만,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외국의 신문에서라도 알아보라고 해야겠어요." 장군은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부인이 손님들의 자리를 정하고 있는 만찬 식탁 쪽으로 다가갔다. 네플류도프는 장군 부인과 영국인의 사이에 앉았다. 그의 맞은편에는 장군의 딸과 전직 모 국장이 앉아 있었다. 식사하는 동안 영국인은 인도 이야기를 하고, 장군은 프랑스의 통킹 원정을 이야기하며 신랄하게 비평하기도 하면서 이따금 시베리아의 부패상과 뇌물에 관한 이야기도 화제로 등장시켰다. 네플류도프에게는 모두 별로 흥미없는 이야기들뿐이었다. 식사를 끝낸 후 응접실로 나와 커피를 마시면서 영국인과 장군 부인을 상대하여 글래드스 턴에 대한 아주 흥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에서 네플류도프는 상대편의 주목을 받을 만큼 현명한 말을 많이 했다고 생각했다. 훌륭한 식사와 술 다음에 커피를 마 시며 푹신한 안락 의자에 몸을 파묻고 친절하며 교양 있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앉아 있노라 니까 네플류도프는 점점 더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특히 영국인의 희망에 의해 장군 부인이 전직 모 국장과 피아노 앞에 같이 앉아 충분히 연습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 5번을 연주했을 때 네플류도프는 오랫동안 맛 볼 수 없었던 완전한 정신적 만족을 맛볼 수 있었다. 흡사 지 금에야 비로소 자기가 참으로 가치 있는 인간인 것을 깨달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피아노도 훌륭했지만 교향곡 연주도 아주 좋았다. 이 교향곡을 잘 알고 있고 또 좋아하는 네플류도프에게는 적어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안단테를 듣고 있는 동안에 그는 자신에 대한, 그리고 모든 자기의 선행에 대한 감동으로 말미암아 콧등이 찡해 옴을 느꼈다. 오랜만에 자기에게 즐거움을 맛보여 준 장군 부인에게 감사의 정을 표시하고 네플류도프 가 작별 인사를 하려 했을 때, 장군의 딸이 용기를 낸 듯한 표정으로 그의 곁으로 와서 얼 굴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제 아이들에 대해 물으셨는데 그 애들을 한번 봐주시겠어요?" "아니, 애는 아무라도 아이들에게 흥미를 느끼는 줄 아는가봐."하고 장군 부인이 귀여운 억지를 부리는 듯싶은 딸을 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공작님은 아이들 같은 것에는 별로 흥미가 없으셔." "천만의 말씀입니다. 대단한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네플류도프는 흘러넘칠 듯 행복스러 운 모성애에 감동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어서 보여 주십시오." "어린애를 보이려고 공작님을 끌고 가는군." 장군이 카드용 테이블에서 사위, 금광 주인, 부관가 함께 앉아 웃으면서 소리쳤다. "그럼 어서 보여드려야지." 이 젊은 어머니는 지금 자기 어린애들을 보이고 나면 어떠한 평을 받게 될까 하는 생각에 흥분하여 네플류도프의 앞에 서서 빠른 걸음으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하얀 벽지를 바르고 천장이 높은 네 번째 방에는 검은 갓을 씌운 조그만 램프가 방을 밝히고 있었고 귀엽고 작 은 침대가 두 개 나란히 놓여 있었다. 두 침대 사이에는 흰 숄을 두르고 시베리아 특유의 광대뼈가 튀어나온 선량해 보이는 유모가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인사를 하였다. 애들 어머 니는 첫째 침대 위로 허리를 굽혔다. 그 침대에는 곱슬곱슬한 긴 머리카락을 베개에 흐트러 뜨린 두 살 정도의 계집애가 조그만 입을 벌린 채 곤하게 자고 있었다. "얘가 카차랍니다."하고 어머니가 푸른 줄무늬가 쳐진 이불 사이로 드러난 조그맣고 하얀 발꿈치를 덮어 주면서 말했다. "예쁘지요? 이제 겨우 두 살이에요." "참 귀엽군요!" "그리고 얘가 바슈크에요.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부르시죠. 누굴 닮았는진 모르겠어요. 진 짜 시베리아인이죠, 안 그래요?" "정말 귀엽게 생겼군요." 네플류도프는 엎드려 잠든, 토실토실한 사내애를 보려고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정말 그래요?"하고 애어머니는 여러 가지 의미가 섞인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쇠사슬과 박박 깎인 머리, 구타, 타락, 그리고 빈사 상태에 놓여 있는 크르 일리조프와 카추샤 -그녀의 모든 과거와 함께- 가 떠올랐다. 그러자 왠지 모르게 별안간 마 음이 부드러워지면서 자신도 이렇게 고상하고 순결하게 보이는 행복이 그리워졌다. 몇 번이나 어린애들을 칭찬해 주어 그 찬사를 간절히 황홀하게 듣고 있는 어머니를 어느 정도 만족시켜 준 다음, 네플류도프는 그녀의 뒤를 따라 영국인이 아까 약속한 감옥에 함께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나왔다. 그러고 나서 장군과 그의 딸 부부에게 작별 인 사를 하고 네플류도프는 영국인과 함께 장군 댁의 현관 계단으로 나왔다. 날씨는 변하여 함박눈이 탐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어느 틈에 길도, 지붕도, 정원의 나무들 도, 마차 대기소도, 마차 지붕도, 말잔등도, 모든 것이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영국인은 자기 마차가 있었으므로 네플류도프는 그 마부에게 감옥으로 향하도록 일러 주 고 자기의 마차에 올랐다. 그는 언짢은 일을 해야만 되는 것에 부담을 느끼면서, 삐걱거리는 영국인의 마차 뒤를 따라 달리기가 무척 힘든 소복한 눈길 위로 마차를 달렸다. 25 문간에 매달린 호롱 등불 아래 보초가 혼자 지키고 서 있는 감옥의 음침한 건물은 마차 대기소도, 지붕도, 벽도, 모두 깨끗하고 하얗게 눈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정면의 늘어선 긴 창문들이 호젓이 불빛에 비춰져서 오늘 아침보다도 한층 더 침울한 인상을 주었다. 위엄을 부리던 형무관이 문으로 나와 불빛에 네플류도프와 영국인이 제시한 통행 허가증 을 비춰 보고는 의아스러운 듯 널찍한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이 두 방문객을 안내하였다. 그는 두 사람을 처음에 안마당으로 인도해서 그 곳에서 오른쪽 문을 통하여 층계로 올라가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그런 다음 두 사람에게 의자를 권한 뒤에 또 한 번 용건을 묻고 카 추샤를 면회하고 싶다는 네플류도프의 희망을 알자 간수에게 그녀를 불러오라고 이르고, 영 국인이 네플류도프의 통역으로 묻기 시작한 것들에 응답할 준비를 하였다. "이 감옥의 수용 인원은?"하고 영국인이 물었다. "현재 감금되어 있는 사람 수는 얼마나 됩니까? 남자는 몇 명이며 여자와 애들은 몇 명이 나 됩니까? 징역수, 유형수, 그리고 자원해서 따라온 사람은 몇 명이고, 환자는 몇 명이나 됩니까?" 네플류도프는 눈앞에 닥쳐온 카추샤와의 면회를 두고 의외로 마음이 산란해져서, 말의 의 미는 전혀 생각지 않고 영국인과 형무관의 대화를 그저 통역해 주고 있었다. 그러고 있을 때, 사무실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여느 때처럼 간 수가 앞서 들어오고 그 뒤에 카추샤가 죄수복에 머릿수건을 쓴 차림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모습을 보자 그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도 살고 싶다. 가정을 갖고 싶고 애도 갖고 싶다. 딴사람들처럼 생활을 하고 싶다.' 그 녀가 빠른 걸음으로 눈을 내리깐 채 방 안에 들어왔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이러한 생각이 언뜻 스쳐갔다. 그는 일어서서 몇 걸음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고 불유쾌해 보였다. 그건 그녀가 자기를 비난했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얼굴이 빨갛게 되었 다가 파랗게 질리기도 하면서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네 플류도프를 바라보기도 하고 눈을 내리깔기도 하였다. "특사를 내린 사실을 알고 있소?" "네, 간수에게 들었어요." "그렇게 되면 서류가 도착하는 즉시 방면되어 어디나 살고 싶은 곳으로 가도 되는 거요. 우리는 생각을 잘해서..." 그녀는 급하게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무엇을 잘 생각한다는 거예요? 저는 어디든 시몬손이 가는 데로 따라가겠어요." 카추샤는 몹시 흥분하고 있었지만 네플류도프를 똑바로 쳐다보며, 마치 할 말을 미리 준 비나 한 것처럼 거침없이 또렷하게 말했다. "아, 그래요!"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래선 안 되나요,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만일 그 사람이 저와 같이 살고 싶어한다면..." 하고 그녀는 놀란 듯이 말을 끊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만일 그 사람이 저를 곁에 두고 싶어한다면 저에게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 요... 저 같은 것이 그 이상 무엇을..." '두 가지 중의 하나다.'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시몬손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바 치려는 희생을 전혀 바라지 않든지, 혹은 나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행복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거절을 하고 시몬손과 운명을 함께 하여 영원히 나와 인연을 끊어 버리 려 하든지, 이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는 왠지 부끄러워서 얼 굴이 화끈해짐을 느꼈다. "물론 당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면야..."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사랑이고 무엇이고 없어요. 그런 것은 벌써 오래 전에 치워 버렸어요. 게다가 시몬손과 다른 사람들하고는 다르잖아요?" "그야, 물론이지."하고 네플류도프는 입을 뗐다. "그는 훌륭한 인물이지, 그래서 내 생각은..." 그녀는 자기가 지나친 말을 하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 워서 거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닙니다,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만약 당신이 바라시던 일을 제가 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 쁘게는 생각지 말아 주세요."하고 그녀는 신비스럽게 느껴지는 사팔눈으로 그의 눈을 바라 보며 말했다. "이러한 결과가 될 수밖에 없어요. 당신도 보람 있는 본연의 생활을 하셔야 할 테니까요." 그가 금방 자신에게 스스로 해 본 말과 똑같은 말을 똑같은 말을 그녀가 그대로 말한 것 이다. 그렇지만 지금 그는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고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 다. 그는 부끄러움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그녀와 더불어 잃어버리게 될 모든 것이 애석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소."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은 이런 데까지 와서 고생하실 필요가 조금도 없어요. 당신의 희생은 이미 그것으로 충분해요." 그녀는 묘한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했다. "고생이라니, 오히려 내게는 행복이었지. 될 수만 있다면 나는 좀더 당신을 도와 주고 싶 소." "우리들에게는," 그녀는 '우리들'이란 말을 하고는 네플류도프를 힐끗 쳐다보았다. "우리들에게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당신은 지금껏 저를 위해 얼마나 애를 쓰셨는지 몰 라요. 만일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무엇을 더 말하려고 했지만 음성이 떨려 그치고 말았다. "당신이 나에게 고마워할 건 아무것도 없소."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우리가 그것을 신중하게 계산할 필요는 뭐 있겠어요. 우리들의 계산은 하느님만이 해주 실 테니까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새까만 눈이 솟구치는 눈물 때문에 더욱 반 짝였다. "정말 당신은 훌륭한 여자요!" 그는 말했다. "제가요, 훌륭한 여자라뇨?" 이렇게 되묻는 눈물 젖은 그녀의 얼굴에는 괴로워 보이는 미 소가 어려 있었다. "이제 끝났습니까?" 이 때 영국인이 그들 사이에 끼여들며 물었다. "네, 곧..."하고 네플류도프는 대답하고 크르일리조프의 상태를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흥분을 진정시키고 나서 아는 데까지 차근차근히 이야기를 하였다. 크르일리조프 는 오는 도중 더욱 쇠약해졌기 때문에 여기에 도착하는 즉시 입원했고, 마리야 파블로브나 가 걱정이 되어 간호하도록 병원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했지만 허가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었 다. "그럼 저는 이제 돌아가 보겠어요." 기다리고 있는 영국인을 의식하고 그녀가 말했다. "작별 인사는 하지 않겠소. 우리는 다시 만날 테니까."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용서하세요." 그녀는 겨우 들릴까 말까 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이 눈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히 가세요.'가 아니라 '용서하세요.'라고 말했을 때의 사팔의 신비한 눈동자와 괴로 운 듯한 미소를 보면서 네플류도프는 그녀가 결심하게 된 원인의 두 가지 가정 중에서 둘째 번 것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네플류도프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언제까지 나 그와 관계를 갖게 되면 자기가 그의 일생을 파멸시키게 될 것이므로, 시몬손과 같이 그 에게서 떠나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게 되는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와 헤어지게 되는 것이 슬펐던 것이다. 그녀는 네플류도프의 손을 꼭 쥐었다가 재빨리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네플류도프가 함 께 감옥에 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영국인을 돌아보았더니 그는 무엇인가를 수첩에다 기록하 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의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벽에 댄 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 자 별안간 심한 피로감이 엄습했다. 그것은 단지 수면 부족이나 여행이나 흥분 같은 데서 오는 피로가 아니고, 생활 그 자체에 시달려 지쳐 버린 무서운 피로감이었다. 그는 긴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자, 자기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부터 감방을 한번 돌아보시겠습니까?"하고 형무관이 물었다. 네플류도프는 이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데서 자고 있었다는 것 을 깨닫고 놀랐다. 영국인은 수첩에 기록하는 것을 끝내고 감방을 돌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극도로 지쳐 있는 몸을 끌고 정신없이 그들 뒤를 따라갔다. 26 현관 대기실을 지나 메스꺼운 악취로 가득 찬 복도에 들어설 때, 마룻바닥에 오줌을 누고 있는 죄수 두 사람을 보고 놀리면서 네플류도프와 영국인과 형무관은 간수를 앞세우고 제1 감방으로 들어갔다. 이 감방 안에는 중앙에 나무 침대가 놓여 있고 죄수들은 모두 그 위에 누워 있었다. 모두 70명쯤 되었다. 그들은 머리와 머리를 맞대거나 옆구리와 옆구리를 맞대 고 자고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서니까 모두들 쇠사슬 소리를 철거덕거리면서 벌떡 일어나 절반쯤 깎은 시퍼런 머리를 번득이며 나무 침대 곁에 섰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대로 누워 있었다. 한 사람은 열이 있는 듯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청년이었고, 또 한 사람은 계속해서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 노인이었다. 영국인은 이 청년이 오랫동안 병중에 있었느냐고 물었다. 형무관은 이 청년은 오늘 아침 부터 앓기 시작했고 노인은 벌써 오래 전부터 위장을 앓고 있었는데 몇 달 동안 계속 병원 이 만원이라 입원시킬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영국인은 불만스러운 듯 고개를 젓고는 이 사 람들에게 몇 마디 물어 보겠으니 통역을 좀 해달라고 네플류도프에게 부탁하였다. 여기서 네플류도프는 이 영국인이 시베리아의 유형지나 감옥에 대해 조사하는 목적 외에도 또 한 가지, 신앙과 속죄에 의한 구원의 전도라는 목적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사람들에게 이러한 말을 좀 해주십시오. 그리스도는 당신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 하고 있으시다고요. 그리고 그분은 여러분들을 위하여 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만약 당신들이 그것을 믿는다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그가 말을 하고 있는 동안 모든 죄수들은 바지 옆솔기에 두 손을 댄 채 잠자코 나무 옆에 서 있었다. "이렇게 이들에게 말해 주십시오." 그는 말을 이었다. "이 책 속에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고요.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알아본 결과 20명 이상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국인은 신약 성서 몇 권을 손가방 속에서 꺼냈다. 그들은 새까맣고 딱딱한 손톱을 기른 우악스러운 손들을 거친 삼베 소매 속에서 빼내 서로 다투어 그에게로 내밀었다. 그는 이 감방에 두 권의 복음서를 나누어 주고 다음 감방으로 갔다. 다음 감방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숨막힐 것 같은 악취도, 전면의 창문과 창문 사이에 걸린 성상도, 문 왼쪽에 용변통이 놓인 것도, 일제히 모두 일어나서 부동 자세를 취하는 것도, 그 리고 일어나지 않는 세 사람의 죄수마저도 앞의 감방과 모든 것이 다 똑같았다. 세 사람 가 운데 둘은 몸을 일으켜 앉았지만, 하나는 들어온 사람들을 보려고조차 않고 그대로 누워 있 었다. 그들은 다 병자였다. 여기서도 영국인은 아까와 똑같이 말하고 역시 두 권의 복음서를 나눠 주었다. 세 번째 감방에서는 고함 소리와 요란스레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형무관은 문을 두드 리며 "모두 조용히 해!"하고 소리쳤다. 문이 열리자 모두들 똑같은 자세로 바로 섰는데 병자 몇 사람과, 맞붙어 싸우고 있는 죄수 두 사람은 예외였다. 이 두 사람은 증오로 얼굴이 일그 러져 한쪽은 머리를 잡고 또 한쪽은 턱수염을 움켜잡은 채 서로 싸우고 있었다. 형무관이 그들에게도 달려가자 그제야 겨우 둘은 손을 풀었다. 하나는 코를 얻어맞고 코피를 터뜨려 흐르는 콧물과 침과 피를 죄수복 소매로 훔쳐내고 있었다. 또 하나는 턱수염에서 빠진 털을 주워모으고 있었다. "반장!" 형무관이 거칠게 소리쳤다. 힘이 세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앞으로 갔다. "어떻게 뜯어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각하." 반장은 재미있는 듯 눈웃음치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말려 주지." 얼굴을 찡그리며 형무관이 말했다. "그들은 무슨 일로 싸웠습니까?"하고 영국인이 물었다. "덮는 것 때문이지요. 남의 것을 덮었거든요." 반장은 아직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나가 떼미니까 상대방이 덤벼든 겁니다." 네플류도프는 영국인에게 그 말을 전해 주었다. "잠깐 동안 그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만." 영국인이 형무관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그 말을 통역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형무관은 말했다. 영국인은 가죽 표지로 장정한 자기의 복음서를 꺼냈 다. "그럼, 통역을 좀 부탁합니다." 그는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말다툼과 싸움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을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는 싸우지 않고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 봐 주십시오. 그 리스도의 계율에 의하면 우리를 모욕한 사람에게 어떠한 태도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그들이 알고 있는지 말입니다." 영국인의 말과 질문을 네플류도프가 통역했다. "상관에게 말하면 그 상관이 해결해 주겠지요." 위엄이 있는 형무관을 곁눈질하며 죄수 하나가 질문하듯 말했다. "때려눕혀 버리면 돼. 그러면 모욕도 안 받게 될 거요." 다른 사람이 말했다. 동감이라는 듯 몇 군데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네플류도프는 그들의 대답을 영국인에 게 통역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말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계율에 의하면, 그와는 전혀 반대로 행동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한쪽 뺨을 때리거든 다른 한쪽 뺨도 내주어야 한다고요." 영국 인은 자기 뺨을 내놓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통역을 했다. "그렇게 말하고는 그 자신이 한번 해보라지." 어느 목소리가 말했다. "다른 뺨까지 얻어맞는다면, 그 다음엔 어디를 내밀어야 하나?" 누워 있던 환자가 말했다. "그랬다가는 만신창이가 되겠군." "어디 한번 해보시지 그래?" 뒤쪽에서 누군가가 말하고 유쾌한 듯이 웃어댔다. 웃음보가 한꺼번에 터져서 감방 전체가 웃음 바다로 변했다. 조금 전에 얻어맞은 사내까 지도 피와 콧물이 뒤범벅이 된 얼굴로 웃어 대고 있었다. 병자도 웃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도 당황하는 빛이 없이, 영국인은 신앙이 잇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가능하게 되고 용이하게 된다는 것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질문을 한번 해주십시오. 술을 마시느냐고요?" "그럼요, 마시고말고요." 한 목소리가 이렇게 대꾸하자, 그와 동시에 또 다시 비웃음과 폭 소가 터져나왔다. 이 감방 안에는 네 사람의 병자가 있었다. 왜 병자들만 한곳에 따로 수용하지 않느냐는 영국인의 물음에 형무관은 본인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이 병자들은 전염병 환자들이 아니며 병원의 의사 조수가 가끔씩 와서 진찰하고 치료도 해준다고 말했 다. "벌써 두 주일이나 조수가 나타나지 않는걸요."하고 누군가 말했다. 형무관은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음 감방으로 안내하였다. 또다시 문이 열리고 전 원이 일어섰고 조용해졌으며, 영국인은 또다시 복음서를 나누어 주었다. 다섯 번째 감방에서도, 여섯 번째 감방에서도, 좌우 양편 어떤 감방에서도 모두 마찬가지 였다. 어느 감방을 들여다봐도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 굶주린 사람, 게으른 사람, 병에 걸려 앓고 있는 사람, 모욕당한 사람, 감금되어 있는 사람들의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상황들이 눈 앞에 펼쳐졌다. 영국인은 복음서를 예정 부수대로 나누어 주고 그 이상은 더 나누어 주지 않고 설교도 하 지 않았다. 비참한 광경과, 특히 숨막힐 듯한 공기가 그의 정력을 꺾어 버렸는지 그 후부터 는 이 감방에는 이러이러한 죄수가 수용되어 있다고 각 감방마다 형무관이 설명해 주어도 그저 "좋습니다."하고만 되풀이 중얼거릴 뿐 다음 감방에서 다음 감방으로 옮겨다녔다. 네플 류도프 역시 거절하고 떠날 기력도 없고 해서 여전히 피로와 절망감에 싸여 몽유병자처럼 그 뒤를 따라다녔다. 27 네플류도프는 유형수의 한 감방에서 오늘 아침 나룻배에서 만났던 그 이상한 노인을 발견 하고 무척 놀랐다. 헝클어진 머리칼에 주름살투성이인 얼굴의 이 노인은 더럽고 어깨가 해 진 회색 셔츠와 그와 똑같은 바지를 입고 나무 침대 옆에서 맨발로 마룻바닥에 앉아 힐책하 는 듯한 날카로운 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더러운 셔츠의 해진 곳으로 엿보 이는 그의 말라빠진 몸은 가엾게 여겨질 만큼 쇠약해 보였으나, 그 얼굴만은 나룻배에서 보 던 때보다도 더욱더 날카롭고 진지하며 생기가 넘쳐 흘렀다. 죄수들은 다른 감방에서와 마 찬가지로 형무관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모두 벌떡 일어나 부동 자세를 취했지만 그 노인만 은 그대로 앉아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의 눈은 빛났고 눈썹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일어섯!" 형무관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노인은 꼼짝 않고 비웃는 듯이 싱긋 웃을 뿐이었다. "너의 앞에는 네 부하들이나 서는 거겠지. 그러나 나는 네 부하가 아니란 말이야. 너도 얼 굴에 낙인이 찍혀 있구나..."하고 노인은 형무관의 이마를 가리키면서 맞받았다. "뭐 어째?" 형무관은 한 걸음 그의 앞으로 다가가 위협하는 투로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형무관에게 네플류도프가 급하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수감되었나요?" ""신분증이 없기 때문에 경찰서에서 이리로 보낸 것입니다. 이런 자는 보내지 말라고 부 탁을 했지만 그래도 자꾸만 보내는군요."하고 화가 난 듯이 노인을 곁눈질로 노려보면서 형 무관이 말했다. "으응, 당신도 역시 반그리스도군이었군?"하고 노인이 네플류도프한테 말을 했다. "아닙니다. 나는 참관자일 뿐이오."하고 네플류도프는 대답했다. "그럼 반크리스트교도들께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걸 구경하러 왔다는 거요? 자, 어서 보시 오. 한 연대쯤이나 되는 사람을 붙잡아다가 한 우리 속에 가두어 두다니. 사람이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는 게 당연한데, 이런 곳에 돼지처럼 처박아 두고 일도 시키지 않고 처 먹이고만 있으니 모두 짐승이 될 수밖에 없는 거지." "이 노인이 뭐라고 말하는 겁니까?"하고 영국인이 물었다. 네플류도프는 형무관이 사람을 감금해 두는 것은 부당한 짓이라고 노인이 비난하고 있다 고 말해 주었다. "그러면 이렇게 한번 물어 봐 주십시오. 법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를 해 야 될 것이냐고요."하고 영국인이 말했다. 쭉 고른 이를 드러내면서 노인은 이상스럽게 웃었다. "법률이라!" 노인은 경멸하는 듯한 투로 되뇌었다. "자기네들이 먼저 사람들이 가진 것을 모두 약탈해서 땅도 재산도 다 빼앗고 거역하는 사 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나선, 그때서야 약탈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하는 식의 법률을 만든 것 아니냔 말이오. 그런 법률은 그러기 전에 만들었어야 하는 것이야." 네플류도프가 그대로 통역했다. 영국인은 빙그레 웃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에 와서 도둑이나 살인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걸 한번 물 어 봐 주십시오." 네플류도프는 그 말을 전했다. 노인은 얼굴을 무섭게 찡그렸다. "자기 이마에서 먼저 반그리스도의 낙인을 떼버리는 게 좋다고 말해 주시오. 그러면 도둑 도 살인도 다 없어질 테니까. 그렇게 말해 주시오." "이 사람은 돌았군요." 영국인은 네플류도프가 노인의 말을 통역해 주었을 때, 이렇게 말 하고 어깨를 움츠리며 감방을 나섰다. "인간은 자신의 일만 하면 되는 거야. 남의 일에는 참견한 것이 없어. 자기는 자기고 남은 남이니까. 누구를 벌주고 누구를 용서할까 하는 것은 하느님만이 아는 것이지 인간이 할 수 없는 거야."하고 노인은 말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는 거야. 다른 주인이란 필요가 없는 거지. 자, 어서 가라고, 어 서 가!" 노인은 성난 듯 미간을 찌뿌리고 아직도 감방 안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네플류도프 를 번득이는 눈으로 쏘아보며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반그리스도의 하수인들이 사람을 미끼로 써서 이를 기르고 있는 걸 잘 보았겠지? 자, 가 라. 어서 나가!" 복도로 나왔을 때, 네플류도프는 영국인이 형무관과 같이 문이 열려진 사람이 없는 방 앞 에서, 이 감방의 용도를 묻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형무관은 이 곳이 시체실이라고 하였다. "오!" 네플류도프의 통역을 듣고 영국인은 이렇게 소리지르면서 거기에 들어가 보고 싶다 고 말하였다. 시체실은 조그마한 보통 감방이었다. 작은 램프가 하나 벽에 켜져서, 한 구석에 쌓여 있는 배낭과 장작, 그리고 오른편 나무 침대 위의 시체 네 구를 희미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삼베 셔츠와 바지를 입은 한 시체는 큰 키에 짧은 턱수염을 뾰족하게 기르고 절반쯤 머리를 깎은 사내였다. 시체는 벌써 오래 전에 굳어져서 푸르죽죽한 두 손을 아마 가슴 위에다 모아 놓 은 것 같았으나 지금은 벌어져 있었고, 맨발인 두 발도 같이 벌어져서 발바닥이 따로따로 삐죽 내보였다. 그 옆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또 한 시체는 흰 재킷에 스커트를 입고 숱 적 은 머리를 조그맣게 땋아내린, 코가 작고 뾰족한 주름 투성이의 누런 얼굴을 한 노파로, 역 시 맨발로 머릿수건도 쓰지 않고 있었다. 노파의 뒤편에는 무엇인지 보랏빛의 물건에 감싸 여진 남자의 시체가 있었다. 그 빛깔은 무엇인가를 네플류도프에게 생각나게 해주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서 시체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위로 뾰족하게 뻗쳐진 짧은 턱수염과 날이 선 아름다운 코, 새하얗고 높은 이마와 숱 적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모든 것이 낯익 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자기의 눈을 의심하였다. 바로 어제 이 얼굴이 흥분 속에 분개도 하고 괴로와도 하는 것을 보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평안하고 움직이지도 않는, 표현할 수 없 이 아름다운 얼굴로 거기 누워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크르일리조프였다. 아니, 크르일리조프가 남긴 물질적 존재의 전부였다. '무엇 때문에 그는 괴로와했던가? 무엇 때문에 그는 살고 있었던가? 지금 그는 그 이유를 알았을까?' 네플류도프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대답은 얻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죽음 이외 에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러자 별안간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 네플류도프는 영국인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간수에게 안내를 부탁하여 밖으로 나오 자 오늘 밤에 경험했던 것 모두를 곰곰히 되새겨 보기 위하여, 조용히 홀로 있고 싶어서 마 차를 달려 여관으로 돌아왔다. 28 네플류도프는 자려고도 않고 오랫동안 여관방 안에서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카추샤에 과 한 문제는 결말이 나버렸다. 이제 그는 카추샤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네플류도프는 그것이 슬프기도 했고 수치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그를 괴롭히는 것은 그 일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 것은 결말이 나지 않았을 뿐더러 그 어느 때보다 한층 더 강하게 그를 괴롭히고 더욱 강렬 하게 그의 행동을 요구했던 것이다. 지난 수개월 동안 그가 계속해서 듣고 보아 온 그 가공할 만한 온갖 죄악들, 그리고 크르 일리조프를 파멸시켜 버린 저 사악은 자기의 승리를 구가하면서 이 세상 위에 군림하고 있 었다. 그것을 타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기는커녕 그것을 어떻게 정복해 나갈지 그 가늠 조차 할 수가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냉담한 장군들, 검사들, 형무관 등에 의해서 여러 면으로 부패된 공 기 속에 감금되어 있는 저 수백 수천의 학대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권력자들의 죄 상을 폭로하여 미친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있는 그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이상한 노인이 떠오 르고, 시체들 틈에 뉘어져 있던 분사한 크르일리조프의 백랍같이 아름다운 얼굴도 떠올랐다. 그러자 네플류도프는 그 자신이 광인인가, 아니면 자기네들을 총명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서 모든 부정한 행위를 자행하는 저 위정자들이 광인인가 하는, 전부터 느끼던 의문이 더욱 새로운 힘으로 그의 앞을 가로막고 그 해답을 요구하였다. 걷다가 지치고 생각하다가 지쳐, 그는 램프 앞쪽에 놓인 긴의자에 걸터앉아서 아까 호주 머니에서 무얼 꺼내다가 테이블 위에 내던졌던, 그 영국인에게 기념으로 받은 복음서를 별 생각 없이 펼쳐 보았다. '이 가운데는 온갖 것의 해결이 있다고 하지만,'하고 그는 혼잣말 을 하면서 복음서를 열고 그 열려진 쪽, 마태복음 제 18장을 읽기 시작했다.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2.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 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4.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을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 이다." '그렇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 그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자기가 마음의 평화와 삶 의 희열을 느꼈을 때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마음을 가졌을 때뿐이었다는 것을 상 기해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6. 그러나 나를 믿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이건 무얼 뜻하는 것일까? 도대체 누가 받아들이며, 어디로 받아들인다는 말일까? 또 내 이름으로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런 마이 자기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전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며 그는 자기 스스로 이렇게 물었다. '더구나 맷돌을 목에다 단다든가, 깊은 바다라든가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 까? 아니 이건 좀 이상한 데가 있다. 정확하지 않다. 분명하지가 않아.' 지금껏 몇 년이나 복음서를 읽다가는 언제나 이렇게 명확치 않은 대목에 싫증이 나서 집어던졌던 일을 기억하 며 그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 7, 8, 9, 10절을 읽어 나갔는데 거기에는 온갖 악의 유 혹과, 그 유혹이 반드시 이 세상에 올 것이라는 것과, 사람들이 지옥의 불 속으로 떨어져 벌 을 받으리라는 것과, 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어린 천사의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유감스럽지만 너무나 모순투성이군.'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좋은 점이 어디엔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그는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11.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12. "너희의 생각은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13.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14. 이와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것없는 자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 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그렇다, 그들이 파멸하는 거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도 수백 수천의 인간이 파멸되어 가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는 생각하였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제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 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22.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여 라." 23.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4. 셈을 시작하자 1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25.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 아서 갚아라.'고 하였다. 26.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 겠 습니다.'하고 애걸하였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보냈다. 28.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은 진 동료를 만나자 달 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고 호통을 쳤다. 29.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하고 애원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감 옥에 가두어 두었다. 31.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32.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 감해 주지 않았느냐?' 33.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고작 이런 것뿐이란 말인가?" 성경을 읽으면서 네플류도프는 별안간 소리내어 이렇게 부 르짖었다. 그러자 그의 전존재의 내부의 소리가 이렇게 소리쳤다. '그렇다, 그런 것뿐이다.' 그리고 정신 생활로 사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 네플류도프에게서도 일어났 다. 즉 처음엔 이상하고, 역설적이고, 농담같이도 생각되던 것이, 차츰 실생활 속에서 확증을 찾아내게 되고, 드디어는 갑자기 가장 단순하고 의심할 바가 없는 진리로서 그의 앞에 대두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있는 그 무서운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 는 단 하나의 확실한 방도는 사람들이 항상 하느님께 대하여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 인식하 고, 따라서 자기에게는 절대로 남을 벌준다든가 고쳐 줄 만한 힘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감옥에다 수인 중계소에서 목격한 온갖 무서운 죄악도, 이러한 사악을 감행하오 있는 태연 자약한 태도도, 요컨대 그들 자신이 악인이면서 악을 교정하려는 따위의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원하는 데서 생긴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죄 많은 인간이 죄 많은 인간을 교정하기 위해 기계적 방법으로 그것을 달성하려고 생각하 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온갖 것이 남겨주는 결과는, 생활이 어려운 탐욕스러운 사람들 이 가장된 형벌과 인간 교정의 직업에 종사하여 그 자신이 극단적인 타락에 빠짐과 동시에, 자기가 괴롭히는 사람들마저도 끊임없이 타락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네플류도프에게는 자기가 목격한 이런 공포가 어디서 생긴 것이며, 또한 그것을 근절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뚜렷해졌다. 오늘까지 그가 간절히 찾아다녔던 해답은 실로 그리스도사 베드로에 게 해준 그 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사람은 죄 없는 자가 없는 것이며, 그에 따라 사 람을 벌주거나 교정할 수 있는 사람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모든 사람들을 몇 번이라 도 끝없이 용서해야만 한다는, 그 한 가지 속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의 해결이 이렇게 간단할 리는 없다.' 네플류도프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 다. 그러나 지금껏 그는 그 정반대의 일에만 익숙해 왔었기 때문에 처음엔 아주 이상하게 생각 되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이론적일 뿐만 아이라 가장 실질적인 해결 방법이라는 것을 명확 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악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떠한 처벌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둘 것인가?'하는 항상 느끼고 있던 이러한 반문에도 이제 그는 당황해 하지 않았다. 만약 형벌이 범죄를 감소시키고 범죄자를 교정시킨다는 것이 입증된다면 이 반박은 큰 뜻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전혀 반대로 입증되어, 사람이 사람을 교정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밝혀진 이상,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롭고 비도덕적이며, 잔혹하기가 이를 데 없으므로 그러한 일 에서는 손을 떼야만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몇 세기 동안에 걸쳐서 너희가 범죄자라고 인 정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숱하게 처벌해 왔다. 그것으로 죄인이 근절되었던가? 아니, 근절은 고사하고 형벌에 의해 한층 더 타락해 버린 이 죄인들과 판사, 검사, 예심 판 사, 형무관 따위의 사람들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또 다른 이들 죄인들 때문에 오히려 그 수가 불어나고 있지 않은가?' 지금에 와서야 네플류도프는 사회와 질서를 존속시키고 있는 타락에도 불고하고 사람들이 서로 동정하고 서로 사랑하는 정신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 라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네플류도프는 이런 생각의 확증을 '마태복음'속에서 찾고자 하는 생각으로 처음 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항상 그를 감동시켰던 산상 수훈을 읽는 동안, 오늘 비로소 그는 그 설교 속에는 아름답고 추상적인 사상과, 과장되고 씰행 불가능한 사상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단순하고 명확하게 실제적인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계율이 있다 는 것을 알았다. 그 계율이 실행되기만 한다면 인간사회는 보다 새로운 체제를 형성하고, 그렇게도 네플류도프를 분개시켰던 온갖 폭력이 저절로 소멸될 뿐만 아니라, 인류가 얻을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인 지상 천국을 누리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계율은 다음의 다섯 조항이었다. 제1의 계율(<마태복음> 제5장 12~26절), 사람은 형제를 살해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형 제에 대하여 성을 내서도 안 된다. 누구든 형제를 하잘것없는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약 누구와 싸우는 일이 있을 때는 먼저 그와 화해를 하고 난 뒤, 하느님께 예물 을 바쳐야 한다. 즉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안된다. 제2의 계율(<마태 복음> 제5장 27~32절), 사람은 간음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여자의 아름다움을 향락해서도 안 된다. 일단 한 여자와 맺어졌다면 절대로 그녀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 제3의 계율(<마태 복음> 제5장 33~37절>), 사람은 무슨 일에서나 거짓맹세를 하거나 거 짓 약속을 해서는 안 된다. 제4의 계율(<마태복음> 제5장 38~42절>) 식의 복수를 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만약 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 한쪽 뺨도 내밀지 않으면 안 된다. 모욕을 용서하여 겸허한 마음으 로 참고, 사람들이 자기에게 원하는 것이면 누구에게라도 거역하지 마라. 제5의 계율(<마태 복음> 제5장 38~42절), 사람은 원수를 미워하든지 싸워서는 안 되며 그 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돕고 그들에게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네플류도프는 꼼짝도 않고 타오르는 램프 불빛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우리들 생활의 온갖 추악상을 생각해 보면서, 그는 만약 세상 사람들이 이 같은 계율에 따라 생활해 나간 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훌륭해질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 했던 환희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흡사 그것은 오랫동안 겪어 온 괴로움과 고통 끝에 별안간 안식과 자유를 발견한 것과 같았다. 그는 밤새도록 밤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 지만, 지금껏 몇 번씩이나 읽으면서도 찾아내지도 못했던 말씀의 의미가 이제서야 비로소 명확히 해득되는 것이었다. 흡사 해면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그는 이 복음서 가운데서 자신이 계시된 필요하고 중요하며 또한 기쁜 요소를 흠뻑 흡수하였다. 그리고 지금 읽은 것 이 죄다 오래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것같이 생각되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알기는 했었 지만 완전히 의식하지 못하고 또 믿지도 않았던 것을, 이제는 명확히 의식을 하게 된 것같 이 여겨졌다. 지금이야말로 그는 완전히 인식하고 또 믿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 계율이 실행만 된다면 인간으로서 원하고 기대하는 최상의 행복을 느릴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이 계율을 실행하는 것밖에 다른 아무것도 의미가 없고, 또 그 가운데 인생의 유일한 합리적인 의의가 존재하고 있으므 로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곧 벌을 초래하는 그릇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또한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교의 전체에서 맥맥이 흘러나온 것이지만, 그것이 특히 뚜렷하고 강력하게 묘사된 것은 포도밭 농부들의 우화 속에서였다. 농부들은 주인들의 일을 하기 위해서 맡겨진 포도밭을 자기네들의 재산이라 여기고, 포도밭에 있는 모든 것은 전부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포도밭에서 인생을 향락 아는 것만이 자기들의 일이라 여겨, 주인의 존재는 잊고 주인이나 주인에 대한 그들의 의무 를 상기시키려 드는 사람들을 몽땅 죽여 버렸던 것이다. '우리들도 그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우리 자신이 우 리 생명의 주인이라든가, 생명은 우리의 쾌락을 위해서 부여된 것이라든가 하는 불합리한 신념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어리석은 생각인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이 세 상에 보내진 존재라면, 그것은 그 어떤 의지에 의해서 어떤 목적을 진고 보내지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지 자기의 향락만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굳 게 믿고 있다. 이렇게 되면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실행하지 않은 포도밭의 농부가 보복 받아 비참한 앞날을 맞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무참한 경우를 당할 것이 자명한 사실이 다. 그런데 주인의 의지는 이들 계율만 실행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면 저절로 이 지상에 는 하느님의 왕국이 세워지고 사람들은 그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을 얻게 될 것이 다.' "너희들은 하느님의 왕국과 그 진실을 구하라. 그러면 나머지 것은 모두 너희들에게 졸아 가리니."라고 하였지만, 사람들은 그 '나머지 것'만 찾으려고 했으니, 그것이 발견되지 않음 은 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내 필생의 사업이다. 이제 한가지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더니, 또 다른 일이 시작되는 구나.' 그 날 밤부터 네플류도프에게는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가 새로운 생활 조건에 들어갔다는 것이 아니라, 그 때부터 그의 신상에 일어나 모든 것이 지금까지와는 전 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새로운 생의 시작이 어떠한 결말을 맺을지 그것은 미래가 말해줄 것이다. 톨스토이의 생애와 작품 세계 명문에서 고아로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1828년 8월 28일 툴라 시에서 15킬로미 터쯤 남쪽으로 떨어진 야스나야 폴랴나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쪽을 유서 깊은 백 작 집안이었고 어머니는 그보다 더욱 명문가로 알려져 있는 브로콘스키 공작 집안의 출신이 었다. 톨스토이에겐 니콜라이, 세르게이, 드미트리 등 세 형제가 있었고, 또 그가 두 살 때 여동생 마리아가 태어났다. 그런데 소년기의 톨스토이는 잇따른 육친의 죽음으로 슬픈 현실에 부닥치지 않을 수 없었 다. 맨 처음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여동생 마리아의 난산으로 끝내 어머니는 숨지고 말았다. 톨스토이는 아직 너무 어려서, 먼 친척인 타치야나 에르골리스카야 부인이 그를 보살펴 주 었으므로, 어머니의 죽음은 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지는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홉 살 나던 해 아버지가 사업 관계로 여행을 떠났다가 목적지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리 고 이듬해에는 자녀들의 양육을 맡았던 할머니마저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 무렵 가족을 모두 모스크바에 가 있었으나, 아버지와 할머니가 사망하는 바람에 두형 만 숙모네 집에 맡겨지고 어린 동생 셋은 에르골리스카야에게 이끌려 시골로 돌아왔따. 그 러나 3년 후 숙모가 사망하자 다섯 아이들은 카잔에 있는 친척 집에 맡겨지게 되었다. 1844년 톨스토이는 형들이 다니고 있던 카잔 대학의 동양어과에 입학했다. 16세라고는 하 지만 대학생이 된 그는 사교계에 드나들 수 있었다. 야회, 아마추어 연극 등에 매료되어 공 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학년말 시험에 난제하여 법과로 옮겼다. 그러나 그 후에도 여전히 태만하여 수업 시간에도 제대로 출석하지 않아, 결국은 큰형 니콜라이가 졸업할 때 중퇴하 고는 고향 야스나야 폴라냐로 돌아오고 만다. 시골에 돌아온 그가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한 것은 농사 개혁이었다. 농노제 아래 농민들 은 극도로 가난하여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던 시기로서 그들을 구제하는 것은 19세기 초 지 식 청년들의 슬로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톨스토이의 개혁 의식은 농노제를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가 실제로 날마다 부딪치는 농민은 게으르고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다. 그들 또한 개혁을 받아들일 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농사 개혁의 이상은 여지 없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 같은 실패와 이에 다른 자기 혐오는 반동적으로 그를 방탕의 세계로 몰고 갔다. 1848 년부터 1851년에 걸친 3년 동안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어두운 밑바닥부터 허우적거린 시기 라고 할 수 있다. 술과 도박에 빠지는 날이 매일 계속되었다. 이렇듯 자포 자기에 가까운 나 날을 보내며 관리가 될까, 근위 기병을 지원할까 하고 방황하던 것은 이 무렵이었다. 청춘의 위기에서 그를 구해 준 사람은 큰형 니콜라이였다. 코카서스의 포병대에 근무하던 형이 휴가차 고향에 왔다가 귀대하면서 톨스토이를 데리고 가기로 한 것이다. 톨스토이는 사관 후보생으로 코카서스를 향해 떠났다. 강렬한 자극이 난무하는 도시에서의 밤 생활에 빠졌던 그에게 코카서스의 아름다운 자연은 진정제 구실을 해주었다. 코카서스에서의 조용 한 생활을 이윽고 '습격(1853)', '산림 도벌(1855), '카자흐(1863)' 등의 여러 작품을 낳게 했 다. 당시의 톨스토이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1853년 터키와 러시아 간에 야기되어 1856년까지 계속된 크림 전쟁에 톨스토이는 장교로 서 참전했다. 군인으로서 애국적이었던 그는 싸운터의 중심인 세바스토폴리에 자진 출전하 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한 활약상을 보였다. 1855년부터 1856년에 걸쳐'현대인'에 실린 '세바스토폴리 이야기'는 이 때 그가 직접 체험한 전쟁의 비참함과 비인도성을 힘찬 필 치로 묘사한 작품으로서, 그의 이름이 문단에 널리 알려지게 한 출세작이 되기도 했다. 1855 년 군대에서 나와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을 때의 그는 이미 눈부신 앞날이 약속된 새로운 젊은 작가로 변신해 있었다. 문단 생활과 외유 : '현대인'이라는 잡지의 동인들은 이 신진 작가를 환영했다. 주간 네 크 라소프를 비롯하여 투르게네프, 곤차로프 그리고 로비치 등 선배 작가, 시인, 극자가들과의 교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단 생활에 뛰어들어 이들 문학가들과 교류하게 됨에 따라 톨 스토이는 점점 위화감을 느끼게 되었다. 어떤 일이든지 끝까지 파고드는 톨스토이로서는 그 들의 생활 방식은 모순과 타협으로 지속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거침없이 비평을 토로하는 이 신인의 오만성에 대해 선배 작가들도 점점 반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군에서 제대하고 문단에도 환멸을 느낀 톨스토이는 유럽여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1857년 1월 파리를 향해 떠났다. 반년 동안 파리, 취리히, 제네바, 프랑크프르트, 베를린 등지를 여 행 하고 8월에 귀국했는데, 이 여행 중에 그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파리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유럽 여행의 동기 중에 하나는 서구의 훌륭한 문명 생활을 견학하려는 데 있었으나, 공교롭게도 그 여행 초기에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합법적으로 끊 는다고 하는, 가장 야만적인 행위를 목격했던 것이다. 그 결과 톨스토이는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았다. 이렇듯, 실제로 유럽을 둘러본 톨스토이는 문명이란 진보될수록 오히려 인간 생활을 비뚤 어지게 하며, 인간의 영혼을 헤친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 작품 '류체른', ' 알리베르트', '청년 시절(1857), '세 죽음', '가정의 행복(1859)' 등에서는 이미 완숙된 경지 에 이른 예술가 톨스토이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는데, 당시의 일기에서는 자기 희생이나 사명감 등의 낱말이 자주 눈에 띈다. 유럽에서 돌아온 그는 글을 쓰는 한편, 농민 계몽과 교육을 위해 농민 학교를 개설한다. 대학을 중퇴한 뒤 야스나야 폴라냐에 돌아왔을 때에 한번 시도했다가 실패했었지만, 이번 경우도 성공이라고 할 수 없었다. 교육의 열의는 있어도 학교 제도와 교육 이론에 대한 지 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교육 시찰을 위해 유럽 여행에 오르기로 결심했다. 이 무렵, 큰형 니콜라이는 결핵 환자로서 독일의 소덴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형을 문병할 겸 1860년 8월 독일로 떠났다. 그러나 형의 병세는 이미 문병을 받을 정도의 단계가 아니었다. 톨스토이는 환자를 프라크푸르트로, 그리고 또 지중해 연안으로 옮겨가게 하여 진심으로 회복되기를 빌었으나, 그 보람도 없이 그 해 9월 영영 눈을 감고 말았다. 사 랑하는 사람의 생명이 눈앞에서 시시각각으로 꺼져 가고 있는 것을 직시한다는 것은 무서운 고통있었다. 형의 죽음에 직면하면서 큰 충격을 받은 톨스토이는 마음의 안정을 취하면서 예정대로 여 행길에 올라 독일,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초등 교육의 실상을 시찰한 후, 농노 해방의 해인 1861년 귀국했다. 야스나야 폴라냐에 돌아온 그는 교육 잡지를 발간하기도 하면서 '국민 교 육론(1862)' 등과 같은 교육 논문을 쓰기도 하는 한편, 농민의 자질을 위한 본격적인 정식 학교를 설립했다. 그의 교육 방침은 철저한 자유방임주의였다. 갖가지 개성을 갖고 있는 어 린아이들에게 일정한 학과를 강제로 주입시키는 방침은 전제 정치 아래의 러시아에서는 많 은 오해를 불러일으켜, 1862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건강을 해친 톨스토이가 사마라에 요양 을 떠난 동안 헌병들이 그의 집을 수색했을 정도였다. 결혼과 예술적 완성 : 헌병이 가택을 수색하기 전부터 그는 자신의 교육활동에 회의를 품 기 시작한다. 자신의 인생에 관해 명확한 해석을 내리지 못하는데다가, 무엇을 가르쳐야 좋 을지도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남을 가르치고 있다는 자기 비판이 싹트기 시작하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일종의 허위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는 혼미에 빠진 이 같은 상태에서 벗 어나기 위해 결혼 생활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신부는 오래 전부터 친지인 궁중 의사 베르 스이의 딸 소피야였다. 1862년 톨스토이의 나이 34세, 소피야는 18세였다. 신혼 생활은 밀월이라는 말 그대로 달콤하고 행복했다. 그리고 결혼 후의 그는 예술적으 로도 원숙한 경지에 접어들었다. 그의 대표작 '전쟁과 평화(1864~69)는 감미로운 행복 속에 쓰여지기 시작하여 5년 후에 완성되었다. 작가 자신이 스스로 "일리아드와 비견할 만한 작 품"이라고 말한 이 대장편은 말할 것도 없이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그린 민족적 대서사시 이며, 작자의 당시 생활 환경으로부터 우러난 힘찬 낙천주의가 전편에 걸쳐 넘치고 있다. 톹 르토이의 민족의 운명을 건 이역사적인 대사건을 묘사함에 있어, 자신의 조상인 톨스토이가 와 볼콘스키가를 모델로 삼고 있다. 즉, 로스토프가와 볼콘스키가라는 두 귀족의 가정을 설 정하여 자기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냉정한 회의가인 안드레이와 소박하고 성실한 공상가인 피에르에게 위탁하여,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의 생활과 운명을 생생하게 그려 내고 있다. 러시아에 존재하는 두 계급, 즉 귀족과 민중의 특징이 r장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나폴레 온 전쟁 때라고 생각한 톨스토이는 이 작품 속에서 이 두 계급의 생활을, 어떤 때는 직면하 여 발휘된 민중의 무한할 정도의 힘과,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소박한 신앙이었다. "역사적인 사건의 원인은 우리들로서는 파악하기 어렵다."고 말한 톨스토이도, 민족의 위기에서 러시아 를 구한 것이 바로 민중의 힘이라는 믿음은 의심하지 않았다. '전쟁과 평화'는 그러한 그의 신념에서 쓰여진 러시아 문학의 대명사이자, 세계문학의 대표적인 걸작이기도 했다. 이 무렵, 즉 1870년대 초부터 톨스토이는 다시 교육 활동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 '코카서스의 포로', '신은 진리를 보신다(1872)'등의 작품을 발표했고, 또 표트르 1세와 그 시대를 다룬 장편(미완성)을 구상하기도 했다. 마침내 1873년부터는 두 번째 장편인 회심의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1873~77)'를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 유뷰녀인 안나와 청년 장교 브론스키와의 뜨거운 불륜의 사랑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작자의 자화상이라고 도 할 지주 레윈과 순진한 소녀 키티와의 평화로운 결혼에 이르는 조용한 사랑을 이에 대치 시킴으로써, 지고의 도덕률은 변함이 없고, 이것을 저버리는 그 죄인을 심판하는 자는 신밖 에 없다고 하는 종교적인 사상을 제시한 것이다. 사색의 미로에서 번민한 톨스토이는 마침내 신을 느끼고 신을 갈구하고 있는 경우에만 삶 의 충실감과 소생감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다. 그 순간에는 진실로 보람있는 심정 으로 살아가는 듯하였으나, 그러다가도 신의 존재에 대한 의혹을 느끼게 되면 걷잡을 수 없 는 절망감이 그를 사로잡곤 하였다. 그래서 그는 깨달았다. 신을 아는 일과 사는 일은 하나 인 것이다. 신이 바로 삶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민중 생활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신앙이라는 점을 실감하기에 이른다. "모든 인간은 신의 의지에 의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의 사명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는 일이다. 자신으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신의 의지를 존중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인 생의 쾌락을 거부하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화평하게 살고, 인내하며 자비심이 깊은 인간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주창한 소박한 민중론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결론에 따라 그는 교회를 위선의 전장으로 규정할 수 있었다. 신은 하나뿐 일진대 교회는 다른 종교를 적대시하고 있을 분 아니라, 국가에 종속하여 폭력, 강제, 형벌, 전쟁 등을 긍정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이로부터 기성 종교 와 결별하고 자기 자신의 종교를 창출했다. 이것은 복음서에 기술된 예수의 산상수훈인 ' 화내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맹세하지 마라, 악에 항거하지 마라, 싸우지 마라.' 라는 다섯 가지 계율에 입각한,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원시 기독교였다. 이것이 이른바 톨스토이주의다. 무위 도식을 일삼는 특권 계급과 폭력을 그 기초로 삼는 국가, 물질 만능과 타락한 기성 종교 등을 부정하고, 폭력, 강제, 기만 등의 근절을 역설한 톨스토이가 이상으로 내세운 것은 사랑과 근로와 자기 희생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런 세계 에 도달하려면 자기 스스로 자기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믿었으며, 그가 이 런 믿음에 도달하기가지의 일은 '참회(1882)'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톨스토이는 자기가 발견한 복음서의 진리를 널리 일반 민중에게 알리기 위해 누구든지 쉽 게 알 수 있는 언어와 문체로 예술성이 풍부한 많은 동화와 민화를 썼다. '사람은 무엇을 사는가(1881)',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불을 소홀하게 다루면', '두 늙은이', '바보 이반(1885)'등이 중요한 작품이다. '참회' 이후의 예술 활동, 1877년에 '안나 카레니나'의 제8편이 발표된 뒤, 톨스토이는 오랫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다. 이미 종교가, 사상가로서의 톨스토이가 외었던 것 같다. 이 점을 애석하게 여긴 투르게네프 가 1883년 임종을 앞둔 병상에서 "예술 세계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런 톨스토이가 9년만에 발표한 것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희곡'어둠의 힘'이었다. 이 때까지도 그는 자주 죽음의 공포를 주제로 한 작품을 써 왔으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 음에 대한 종교적인 철학을 제시한 수작이며, '어둠의 힘'은 분란한 성도덕을 정면으로 파헤 친 작품이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부활'임은 새삼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 부활'은 그의 만년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와 견줄 만한 걸 작이다. 청년 귀족 네플류도프와 윤락녀 카추샤의 애정의 역정을 주제로 한 이 소설은 톨스 토이의 사상을 풍부한 예술성과 곁들여 남김없이 전해 주면서, 교회와 재판과 교도소 제도 등에 대한 그의 분노를 정면으로 터뜨린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그리스 정교의 교회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는 이유로, 그는 1901년 종무성으 로부터 파문을 당하기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그분 아니라 정부 당국의 압력도 점점 노골적 으로 가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꺾이지 않았다. 1904년 노일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생 각하라'라는 제목의 격렬한 글을 써서 전쟁 행위를 통렬하게 촉구했다. 이것은 발표가 금 지되었으나 비밀 출판에 의해 일반인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가출과 죽음 : 1910년 10월 28일 톨스토이는 별안간 가출을 했다. 그전에도 두세 번 가 출을 작심한 끝에 실행에 옮기려고 한 적이 있었다. 인생의 스승으로 숭앙을 받고 있던 82 세의 그가 가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내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의 존 재가, 정신적으로 너무 큰 부담이 되었던 데 있었다. 처음엔 '안나 카레니나'의 레윈과 키 티처럼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금실좋은 부부였으나, 만년에는 소피야의 신경질적인 언성 을 날마다 듣게 되자, 톨스토이로서는 그것을 참는 일이 고통스러웠다. 소피야로서는 '참 회'를 발표한 이후 남편이 거의 종교적인 저술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 불만이었던 것이 다. 10월 29일 이른 새벽 그는 '생애의 마지막 며칠을 고독과 정적 속에서 조용히 지내고 싶 다.'는 뜻의 글을 남겨두고 집을 떠났다. 그러나 이 가출은 그에게 '조용한 며칠'을 가져 다 주지는 않았다. 도중에 그는 급성 폐렴에 걸려 랴잔우랄 철도의 역 아스포타포보의 역장 관 사로 옮겨젺다. 기별을 듣고 가족과 제자의 친지들이 달려갔을 대는 이미 상태가 위중했고, 11월 7일 새벽에는 마지막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틀 후 시신이 야스아야 폴라냐에 실려 왔 을 때에는 위대한 문학가이며, 종교가이자 사상가인 톨스토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부활'에 대하여 : 로망 롤랑은 이 소설에 관해 "다른 어떤 작품을 통해서 보다도 톨스 토이의 영혼에 곧바로 도달하는 맑은 눈동자를 볼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 확실히 순수한 형태로 결정된 톨스토이의 사상과 만날 수 있다. '부활'의 줄거리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중심으로 엮어졌다. 1887년 톨스토이의 친지인 코미가 페테르부르크 지방 재판소의 검사로 재직하고 있었던 시절의 여죄수 로잘랴에 대해 서 들려준 이야기다. 로잘랴는 핀란드인인 별장지기 딸인데, 신병이 있는 아버지와 함께 임 대 별장에서 살고 있었다. 죽음에 임박했음을 안 아버지는 딸이 고아가 될 것이 걱정스러워 별장 주인인 부유한 부인에게 보살펴 달라고 부탁을 하고서는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부인 은 로잘랴를 맡아 양녀 겸 하녀로 부렸는데, 16세가 되었을 대 부인의 친척으로 대학을 갓 나온 청년에게 농락당해 임신을 하게 되었다. 로잘랴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된 부인은 그녀를 내쫓는다. 청년에게조차 버림받은 로잘랴는 태어난 아기를 양육원에 보내고 매춘부로 전락한다. 게다가 어느 날 술취한 손님에게서 1백 루블을 훔쳐다가 체포되어 4개월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마침 이 재판에 그 청년이 배심원으로 참석했다가 그녀가 윤락녀가 돈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녀를 구제하 기 위해 결혼을 하기로 결심한다. 주위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은 정진절 후로 정해졌다. 그러나 정진절이 끝날 무렵 로잘랴는발ㅈㄴ티푸스에 걸려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 고 숨지고 만다... 이런 이야기를 코니로부터 들은 톨스토이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자신이 젊은 시절에 곰 집에서 하녀를 유혹했다가 버린 적이 있고, 그 때문에 그 하녀는 일생을 망쳤던 어두운 추억이 있엇기 때문이다. 그는 즉시 코니에게 그 이야기를 작품이 되도록 써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88년 중반에 접어들어서도 그 이야기를 코니가 쓰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 자, 그는 그 테마를 넘겨받아 자신이 직접 집필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코니 이야기'라 는 제복이 붙여졌던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1898년 말경이었는데, 그 뒤 소설이 발표된 것이 1899년이었으나,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집필하는데 10년의 세월을 소비하였다. 소설이 완성되기까지 : 쓰기 시작하기는 했지만 글은 쉽사리 쓰여지지 않았다. 그 당시 의 노트에 적힌 메모에 의하면, 내플류도프는 마지막에 파리에 가서 카드놀이와 사냥으로 세월을 보냈지만, 백발이 성성해짐에 따라 차츰 인생의 적막을 느낀다는 내용의 구상이었던 듯 싶다. 처음 톨스토이는 연대를 따라 사건을 전개해 나갈 작정이었으나, 설명적인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법정 장면으로부터 쓰기 시작해 보기도 하고, 배심원 회의를 첫머리에 가져가기도 했다. 그런데 1898년이 되자 아무래도 발표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 이보다 앞서 성령을 부정하는 두호보르 교도들 사이에 병역을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탄압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싸우지 마라'고 역설하는 톨 스토이는 이런 사태에 몹시 가슴 아파했고, 그들 두호보르 교도의 국외 이주가 허용된 뒤에 는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선두에 나서서 모금 운동을 벌이기가지 했다. 그러나 자금은 예상했던 만큼 쉽사리 걷히지 않았다. 그러자 톨스토이는 저작물에 대한 인세를 받지 않는다는 결의를 뒤엎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원고를 될 수 있는대로 유리한 조건으로 출판사에 팔아 그 인세를 두호보르 교도의 이 민 자금에 충당하기로 했다. 그 때 그가 가지고 있던 언고는 '신부 세르게이', '부활' 등 3 편이었다. 그런데 거의 완성 단계에 가까웠던 '부활'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고쳐쓰는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그리하여 1898년 말에는 현재의 '부활'에 가까운 원고가 마무리되었 다. 그렇지만 교도소 안의 교회 장면이나 정치범과 분리파 교도들의 묘사는 아직 없었고, 베 라 보고두호프스카야라거나 셀레닌 등과 같은 인물도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1년 동안에 걸친 교정 단계에서 가필된 것이다. 이렇듯 '부활'의 출판에는 톨스토이의 존엄 한 인도적인 정신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부활'의 주제 : 부활은 몇 가지 테마를 지닌 소설이다. 네플류도프의 토지 사유권의 포기도 그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톨스토이가 헨리 w지의 토지 국유론을 알게 된 것은 1885년, 그가 사유 재산을 부정하는 논문을 쓴 뒤의 일이다. 그는 이 사상에 깊이 공명하 여 1895년에는 딸 타치야나의 토지를, 네플류도프가 바노브 마을에서 한 것과 마찬가지로 헨리 조지의 이론에 따라 농민들에게 빌려 주고, 그 임대료는 공익 사업에 쓰도록 조치해 놓았을 정도였다. 또 재판과 형벌이라는 형태로 인간의 자유로운 생활과 생명마저 빼앗아 버리는 국가 권력 의 폭력과, 무의미한 형식만 고수하여 근본 사상을 망각해 버린 교회에 대한 비판 역시 이 소설의 중요한 테마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가장 중심이 되어 있는 주제는 '심판하지 마라.'는 사상이라고 하겠 다. 우리는 항상 끝없이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톨스토이가 강조 하고 싶은 사상이었다. 이것을 인색했을 대 네플류도프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 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가 가르친 다섯 가지 계율을 충실하게 지킨 뒤에 찾아오는 사랑과 행복의 이상적인 낙원으로의 전망이었다. 톨스토이가 주장하는 사상과 이상이 현대인에게는 어쩌면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로 여겨질 는지도 모른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극단적인 사고 방식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사상을 현대라고 하는 시대에 비추어 뒤떨어진 것으로 생 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현대처럼 인류가 파멸의 위험성에 끊임없이 직면하는 시대야말로, 우리는 또 한 번 톨스토이적인, 순수하고 소박하면서도 그 이상의 진리를 찾을 수 없는 사상을 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톨스토이의 정치적, 철학적 저작 활동을 간추려 살펴보면 1905년 러시아에 제 1차 혁명이 일어나, 동맹 파업과 농민 폭풍, 유혈 사태까지 빚은 격돌, 그리고 이에 따른 탄 압, 체포, 투옥, 사형 등의 피비린내 나는 사태를 목격한 그는 '침묵을 지킬 수가 없다', ' 폭력의 율법'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또 다시 "악으로서 악에 보답해서는 안된다"고 외쳤다. 이에 따라 종교 단체와 톨스토이의 신봉자는 늘어나기만 하였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는 '1일 1선'과 최후의 저서 '인생의 길'을 통해 모든 인간이 사랑으로 맺어지는 세계를 하루속히 이룩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톨스토이는, 사랑을 인간이 성취해야할 최고의 목표로 생각했다. 대문호이면서 위대한 사 상가요 종교가인 그의 모든 면모가 배어 있는 작품 '부활'은 톨스토이가 노년을 불사른 불 꽃으로서, 숭고한 인간애를 담은 불후의 명작으로 세계 문학사에 영원히 빛날 것이다. 작가 연보 톨스토이 1828년 8월 28일 톨스토이 백작의 4남으로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출생. 부친은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퇴역 육군 중령. 1830년 2세 누이동생을 분만하다가 모친 사망. 1837년 9세 아버지가 노상에서 졸도, 사망. 숙모 오스틴 사켄 부인이 고아가 된 5남매의 후견인이 됨. 1840년 12세 현존하는 최초의 시 '어지신 숙모님에게'를 씀. 1841년 13세 후견인이던 오스틴 사켄 부인 사망. 1844년 16세 카잔 대학 동양어과에 입학. 아랍, 터키어 전공. 1845년 17세 4월 12일, 카잔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진보적인 지주로서 새로운 농장을 경영. 1848년 20세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학사 시험에 합격하여 법학사의 칭호를 받음. 1851년 23세 '지나간 이야기'집필. 5월, 큰형이 재직하고 있는 코카서스 포병대에 장교 후보생으로 입대. 1852년 24세 처녀작 '유년시절'을 '현대인'에 발표하여 재능을 인정 받음. 단편 '침입'탈 고 1853년 25세 1월, 체체네츠인 토벌에 참가. 4월, 단편 '크리스마스의 밤'탈고. 5월, '소년 시절'집필. 1854년 26세 1월, 장교로 승진. '소년 시절'발표. 1855년 27세 3월, 장편 '청년 시저'집필. 11월, 전령 장교로서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여 네 크라소프, 트르게네프 등 잡지 '현대인' 동인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음. 1859년 31세 농민의 자제를 위해 고향에 농민 학교를 세움. '세 죽음', '가정의 행복' 집 필. 1862년 34세 교육에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 궁정의의 차녀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 '꿈', '목가' 출판. 1864년 36세 '전쟁과 평화' 집필 시작. '톨스토이의 저작집' 출판. 1865년 37세 '전쟁과 평화' 첫머리를 '러시아 소식'지에 게재. 1869년 41세 '전쟁과 평화' 완결 출판. 1871년 43세 '초등 독본'호 집필 시작. 1872년 44세 '초등 독본' 소설 '코카서스의 포로', '표트르 1세', '신인은 진리를 보신다.' 발표. 1879년 51세 '참회', '악을 악으로 앙갚음하지 마라', '교회와 국가'를 발표하였으나 발매 금지됨. 1884년 56세 '나의 신앙' 발표. '광인 일기' 집필. 1886년 58세 '인생론'집필. 희곡 '어둠의 힘' 3일간에 25만 부가 팔림. '이반 일리치의 죽 음' 출판. 1887년 59세 '역' 간행. '어둠의 힘' 저작권을 포기. 9월 은혼식. 1889년 61세 '크로이체르 소나타' 탈고. '악마', '손의 노동과 지적 노동', '각성을 기울이 다' 등 발표. 1890년 62세 재산을 분배. 20개이 주에 게근이 일어나자 농민 구제를 위해 맹활약. 전 저 작권을 포기. 1899년 71세 '부활'을 발표하여 주목을 끔. '사랑의 요구', 어느 하사관에게 주는 글'을 발표. 1901년 73세 그리스 정교회에서 파문당함. 크리미아에 갔다가 티푸스와 폐렴에 걸려 중태 에 빠짐. 1903년 75세 1월, '유년 시절의 추억' 집필 시작. '성현의 사상' 편찬에 착수. 단편 '모도 회의 밤' 탈고. 1908년 80세 탄생 80년 기념 톨스토이 박람회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림. '세상에 죄인 없다', '사형과 크리스트교', '유일한 규칙', '꿈' 등을 발표. 1910년 10월 28일 아내에게 최후의 쪽지를 남겨 놓고 딸 알렉산드라와 의사를 데리고 가 출. 11월 7일 오전 6시에 82세를 일기로 영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