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아르바트의 아이들 1 저자: 아나톨리 리바코프 옮김: 최종민, 이병순 출판: 우아당 역자의 말 ....그들의 가슴은 자부심으로 부풀어올랐다. 이곳은 그들의 국가요, 세계 프롤레타리아 의 첨병이며, 진보적인 세계혁명의 실험무대요, 위기와 실업, 도덕적 타락과 정신적 빈곤으 로 갈가리 찢겨진 세계에 떠 있는 유일한 희망의 섬이었던 것이다. 배급 카드를 가지고 있 고 실제로 모든 것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지금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것은 풍요한 미래에 대한 담보였다. .... 이는 사샤 판크라토프를 비롯한 이 책의 중심인물들, 즉 <아르바트의 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신념을 단적으로 표현한 부분이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읽으며 <아르바트의 아이들>을 둘러싼 한 가지 오해를 떨쳐 버리게 된다. 이 책은 흔히 이데올로기와 국가권력의 틈바구니 에서 각 개인의 인간성이 어떻게 말살되어 가는가를 그린 서정물로 알려져 있다. 보리스 파 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에 비견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들은 혁명의 주체로부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소외된 나약한 감상 주의자 지바고보다는 훨씬 더 긍정적인 인간형의 소유자들이다. 현실의 고통과 좌절은 숭고 한 혁명의 도정에서 겪어야 할 일시적인 시련일 뿐이라는, 그리고 자기들이 밀고 가는 혁명 의 수레바퀴가 언젠가는 꿈의 낙원에 이를 것이라는 신념은, 그야말로 가장 투철한 혁명가 이자 가장 순수한 이상주의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샤의 그것은 순수하기가 이를 데 없다. 사샤는 곧 혁명의 의지와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을 깊이 신봉하는, 그 시대의 가장 바람직한 인간형으로 드러난다. 도스토예프스키, 고골리, 차이코프스키 등이 살았던 예술과 낭만의 거리 아르바트, 그곳 에도 혁명의 물결은 어김없이 밀어닥쳤고, 그리하여 사샤는 전통적인 사색의 분위기와 뜨거 운 정열을 함께 지닌 혁명적 인텔리겐챠의 전형으로 성장했다. 사샤에게는 자신과 국가, 그 리고 전체 인민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눈부신 사회주의의 미래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형법 제 58조 반혁명적 선전, 선동 혐의라는 저주스런 제도의 굴레였다. 결국 사샤는 3년간의 유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의 어느 외딴 마을에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삶을 체험하게 된다. 이 책은 사샤 판크라토프로 대표되는, 현실에 물들지 않은 세대의 순수한 열정이, 이미 일개인의 권위에 봉사하기 시작한 국가권력과 맞부딪히면서 빚어내는 긴장과 갈등을 형상화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의 비밀을 아는 자만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비정한 힘의 논 리, 그 이면에서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기회주의적 인간형들, 거기에 대항하는 이상주의 지 식인들의 외롭고도 긴 투쟁, 그리고 변질된 인간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쉬는 진솔한 애정을 작가는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혁명의 대열 한 켠에 물러서서 우수 어린 시선을 보 내고 있는 <닥터 지바고>나, 혁명의 흐름에 휩쓸려 그 어두운 이면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 >,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에서와는 다른, 벅차고도 뜨거운 감동을 <아르바트의 아이 들>은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원작의 의미를 충실히 전달하려고 노력했지만, 워낙 방대한 분량이다 보니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끝으로 번역대본으로는 영어판을 사용했음을 밝혀 둔다. 옮긴이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1 니콜스키 가와 데네즈니 가(오늘날 이 거리는 각각 플로트니코프 가와 베스닌 가로 불린다) 사이에 아르바트에서 가장 큰 아파트단지가 있었다. 그 아파트단지는 바짝 붙어선 8층 짜리 건물 세 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는 데, 맨 앞의 건물 정면은 번쩍거리는 흰색 타일로 되어 있었다. 벽에는 고급자수 , 말더듬 교정 , 성명, 비뇨기병 이라고 씌어진 간판들이 붙 어 있었고, 아치 모양으로 낮게 철판을 씌운 통로가 깊고 어두운 안뜰로 연결되어 있었다. 사샤 판크라토프는 거리고 나와 스몰렌스크 광장을 향해 왼쪽으로 돌아 섰다. 아르바트와 도로고밀로프, 그리고 플슈쉬치하 가에서 온 여자애들이 아르바트 예술국장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왔다갔다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 다. 아무렇게나 세운 코트 깃, 루즈를 바른 입술, 길게 곱슬린 눈썹과 색 깔 있는 스카프, 이것들은 모두 아르바트의 가을에 볼 수 있는 독특한 풍 경이었다. 영화가 끝나자 좁은 출입문들을 통해 관객들이 거리고 쏟아져 나왔다. 문에서는 떠들썩한 십대들 한패거리가 서로 밀고 밀치며 자리다툼 을 하고 있었다. 아르바트는 그날의 일과를 모두 마감했다. 가즈와 아모 자동차들이 길에 패인 구멍을 요리조리 패해 가며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 한가운데를 달려갔 다. 전차궤도 사이에는 아직도 자갈이 깔려 있었다. 전차가 두 량이나 세 량만 매단 채 정거장에서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으로 도시의 엄청난 수 송량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1번 노선이 지하에 부설 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스몰렌스크 광장에서 설치된 환기구 위로 강철 기중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다. 카챠는 데비치 대로에 있는 고무공장클럽에서 사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갈색 눈에 광대뼈가 튀어나온 그녀는 스텝지대에서 온 소녀처럼 차리고 있 었다. 그녀는 두터운 털실로 짠 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입에서는 술 냄새 가 풍겼다. 얘들하고 술 좀 마셨어. 너도 축제일 잘 보냈니? 무슨 축제? 그가 물었다. 몰라? 응. 음.... 동정 성모축일(구력 10월 1일)말야. 아! 이제 알았어? 그런데 우린 지금 어딜 가고 있는 거지? 어딜 가냐구? 내 친구한테. 그럼 뭘 좀 가지고 가야 되잖아? 과자는 거기 있을 거야. 보드카나 좀 사자. 그들은 낡은 노동자막사들을 지나 사빈스키대공 가를 따라 걸어갔다. 술 취한 음성과 곡조도 맞지 않는 노랫소리, 아코디언과 축음기소리가 막사에 서 들려왔다. 나무로 된 공장울타리 사이로 난 좁다란 길을 따라 내려가다 가 그들은 마침내 제방에 이르렀다. 왼쪽으로는 스베른들로프와 레베르 공 장의 커다란 창문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모스크바 강이, 정면으로 노보데 비치 수도원의 높은 담과 순환선 철교의 교각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뒤쪽 으로는 코치키, 루츠니키의 습지와 수초 밭이 펼쳐져 있었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사샤가 물었다. 어디 어디 하지 말고 따라오기만 해. 거지한테 못 갈 곳이 어디 있어? 사샤가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자 그녀는 그걸 뿌리치려고 했다. 좀 참으라구. 그녀가 쏘아붙였다. 그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진정해 하며 그녀가 달랬다. 저 만치에 회벽도 바르지 않은 4층 짜리 시멘트 건물이 서 있었다. 그들 은 어둠침침하고 긴 복도를 따라 수많은 방들을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 방 에 이르자 카챠가 말했다. 마루샤에게는 같이 사는 친구가 하나 있어. 아무 것도 묻지 마. 한 남자가 얼굴을 벽 쪽으로 향하고 긴 의자에 잠들어 있었다. 여나믄 살 가량 된 남자애와 여자애가 창문 앞에 앉아 있다가 돌아서서 카챠에게 인사했다. 체구가 작은 마루샤는 식탁과 조리대를 치우느라 분주했다. 그 녀는 유쾌하고 친절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카챠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것 같았다. 우린 기다리다 지쳤어. 오지 않나 생각했지. 그녀가 손을 닦고 앞치마 를 풀며 말했다. 우린 분명히 다른 데로 갔을 거라고 생각했어. 일어나요, 이반 페트로 비치. 손님들이 왔어요. 야위고 시무룩한 얼굴을 한 그 사나이는 몸을 일으키더니 성긴 머리카락 을 쓸어 넘기고는, 잠기를 씻어내려고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댔다. 옷은 구 겨지고 넥타이도 풀어져 있었다. 파이가 말라 버렸어. 마루샤가 파이에 덮어두었던 천을 벗겨 냈다. 이건 콩을 넣은 거야. 이쪽 것은 감자, 그리고 저것에는 양배추가 들어 있어. 토마, 접시 좀 가져와라. 조그마한 여자애가 식탁에 접시를 갖다 놓았다. 카챠가 자켓을 벗고 찬장에서 나이프와 포크를 꺼내 식탁에 늘어놓기 시 작했다. 그녀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전에도 와 본 적 이 있는 것 같았다. 방을 치워야겠어 하고 카챠가 거의 명령조로 말했다. 마루샤가 의자에 있던 옷들을 치웠다. 저녁 먹고 잠깐 눈을 붙였어. 그녀가 변명하듯 말했다. 애들이 종이 를 자르고 있었거든. 비챠, 종이를 치워라. 남자애가 마루를 기어다니며 종이조각들을 주웠다. 이반 페트로비치는 싱크대에서 얼굴을 씻고 타이를 바로 맸다. 마루샤는 파이를 한 조각씩 떼네 아이들에게 주고는 그들을 창가에 앉혔 다. 자, 먹어! 이반 페트로비치가 보드카를 따랐다. 축제일을 위하여! 그러다간 곤드레가 되겠는데요! 카챠가 사샤만 빼놓고 모두들 돌아보 며 맞받았다. 그녀가 자기 친구들에게 사샤를 데려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여기서는 보드카를 마시지만 그와 함께 있을 때면 늘 적포도주를 마셨다. 넌 정말 검고 예쁜 눈을 가진 사람을 만났구나. 마루샤가 씩 웃으며 카챠를 항해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눈에 곱슬머리. 카챠가 웃었다. 이반 페트로비치가 술병으로 손을 뻗었다. 젊어서는 곱슬머리지만 늙으면 벗어지기 마련이지. 그는 친해지고 싶 은 듯 얘기를 꺼냈다. 사샤도 이제 그가 시무룩해 보이지 않았다. 마루샤 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샤는 마루샤의 부지런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교외에 있는 집을 좋 아했고, 또 아파트 옆집에서 들리는 노랫소리와 아코디언 소리를 좋아했 다. 좀 들지 그러세요? 마루샤가 권했다. 감사합니다. 먹고 있어요. 맛이 아주 좋은데요. 이런 걸 대접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뭘 좀 구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 데. 괜찮은 이스트를 넣지 못했어요. 겨우.... 이건 이반 페트로비치가 가 져온 거예요. 이반 페트로비치가 이스트를 주제로 정색을 하고 얘기했다. 아이들이 파이를 더 달라고 보챘고, 마루샤는 그들에게 한 조각씩을 더 떼어줬다. 내가 너희들만 먹으라고 그걸 만든 줄 아니? 이제 실컷 먹었으니 가서 씻어라! 그녀는 아이들의 침대시트를 걷어 옆집으로 갔다. 아이들도 잠을 자러 그녀를 따라나갔다. 그러자 이반 페트로비치가 떠날 채비를 갖췄다. 마루샤는 카챠에게 벽장에 깨끗한 시트가 있어 라고 말하 며 그를 배웅하러 나갔다. 그녀는 저 사람한테 뭘 원하지? 마루샤가 나가자 사샤가 물었다. 남편이 생활비를 대주질 않아서 그래. 졸라 봤자 희망이 없어. 그래도 먹고살아야 되는 거잖아. 하지만 여기서 아이들과? 그럼 그들이 굶는 게 나을까? 그는 늙었던데. 그녀도 청춘은 아니야 그럼 왜 결혼을 안 하지? 그녀는 경멸하듯 그를 쏘아보았다. 그럼 넌 왜 나랑 결혼하지 않니? 너 나하고 결혼하고 싶어? 그래, 정말이야. 잠이나 자자. 그는 또 한번 놀랐다. 매번 그는 그녀를 마치 처음 만나기라도 한 것처 럼 어렵게 정복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 스스로 자리를 펴고 옷 을 벗었던 것이다. 단지 불 좀 꺼 줘 하고 말했을 뿐. 잠시 후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칼을 헤집기 시작했다. 넌 정말 강해. 그래서 여자애들이 모두 널 좋아할 거야. 하지만 넌 조 심스럽지가 못해. 그녀는 그에게 몸을 바짝 붙이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검은 눈을 가진 작은 사샤를 낳을까봐 겁나지 않니? 그 일은 조만간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낙태를 시킬 것이 다. 그들은 아무도 아이를 원치 않았으니까. 임신했어? 그녀는 비참한 자신의 삶으로부터 피난처라고 찾듯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그를 세차게 껴안았다. 그녀에 관해 그는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어디에 살고 있는지? 숙모하 고? 기숙사에서? 아니면 구석방 하나를 세냈을까? 낙태라니! 집에다가는 그걸 어떻게 얘기하며, 직장에는 또 어떻게 얘기할 텐가? 그러다가 때를 놓친다면? 아이와 함께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래서 아기를 낳는다면, 우린 결혼을 하는 거야. 머리를 파묻은 채, 그녀가 물었다. 하지만 뭐라고 부르지? 생각을 좀 해보자. 시간은 많이 있으니까. 그녀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넌 결혼 안 할 거야. 어쨌든 나도 너와 결혼하고 싶지는 않아. 너 지금 몇 살이지? 스물 둘? 난 너보다 나이가 많아. 게다가 넌 교육을 받았지만, 난 학교라고는 겨우 육 년밖에 못 다녔어. 나도 결혼은 할거야. 하지만 너하고는 아냐. 그럼 누구지? 알고 싶은데. 알고 싶다고? 한 고향 사람이야. 지금 어디 있는데? 누구냐, 어디 있냐.... 그는 우랄지방에 있어. 나한테 오고 있는 중이 야. 뭘 하는데? 뭘 하냐구? 기계공이야. 오래 전부터 알았어? 얘기했잖아. 같은 마을 출신이라고. 그럼 왜 진작에 결혼하지 않았니? 그 사람은 먼저 바람 좀 피우고 싶어했어. 그게 이유야. 그래서, 그렇게 했다는 거야? 그는 서른 살이야. 그리고 여자를 몇 명이나 거쳤어. 그를 사랑하니? 그래. 그럼 왜 나하고 같이 다니는 거지? 왜, 왜, 왜. 도대체 이게 뭐야. 지금 심문하는 거야? 꼬치꼬치 캐묻 고. 그는 언제 오니? 내일. 그럼 우린 이제 다신 만나지 못하겠네? 그럼 넌 결혼식에 초대라도 해달라는 거야? 그는 힘이 세단 말이야. 한 방만 먹이면 넌 그걸로 끝장이야. 우린 또 만날 거야. 웃기고 있네. 넌 임신했어. 누가 그렇대? 네 입으로 말했잖아.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그건 네 생각일 뿐이야. 조용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카챠가 일어나 마루샤에게 문을 열 어 주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그가 떠나는 걸 봤어요? 응. 마루샤는 전 등을 켰다. 차 마시겠어? 사샤가 바지를 집어들었다. 그대로 있어도 돼요. 하고 마루샤가 말했다. 이 사람은 수줍음이 많아요. 카챠가 싱긋 웃었다. 나하고 같이 있는 걸 보이기가 부끄러운 거예요. 그러면서도 결혼하쟤요. 결혼하고 또 이혼하고 하는 게 그렇게 시간 걸리는 일은 아니잖아? 하 고 마루샤가 말했다. 사샤는 남아 있던 보드카를 컵에 따르고 파이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는 일이 이렇게 끝나게 된 것을 오히려 카챠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 끼고 있었다. 그녀가 기계공에 대해 한 얘기는 아마 사실일 테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 었다. 문제는 그녀가 자기를 가지고 놓았고, 자기는 바보처럼 거기에 끌려 다녔다는 점이었다. 그가 일어섰다. 어딜 가려구? 그녀가 물었다. 집에.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마루샤가 정색을 했다. 여기서 자고 내일 아 침에 가면 되잖아요. 난 옆집에 가서 자겠어요. 아무도 당신을 방해하지 않을 거예요. 난 가야 합니다. 카챠가 화가 나서 그를 쳐다봤다. 집에 가는 길이나 찾을 수 있겠어? 난 길을 잃지는 않아. 그녀는 그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여기 있어. 가겠어. 행복하게 살아. 그래도 역시 카챠는 좋은 여자였다. 카챠가 그에게 전화를 걸지 않아 다 시는 보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정말 슬픈 일일 것이다. 그는 그녀가 어디 사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자기 주소도 그에게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숙모님이 화를 내실 거야 하면서 그녀는 어느 공장에서 일한다는 것조차 그에게 얘기하지 않았다. 입구의 가로등 아래 서 있어. 그녀는 처음에 공중전화박스에서 그를 부르곤 했다. 그들은 영화를 보거 나 공원엘 가기도 했다. 그들은 나중에 네스쿠츠니 공원 깊숙한 곳으로 들 어가기 시작했다. 가는 가지로 엮어 만든 벤치들이 달빛에 하얗게 반사되 었다. 카챠는 뒤로 물러섰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날 내버려둬.... 넌 네 마음대로 날 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리고는 그에게 몸 을 던졌다. 스텝지대 출신의 소녀. 그녀의 입술은 마르고 터 있었다. 그녀 는 양손으로 거칠게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있잖아, 난 널 처음 보았을 때 네가 집시인 줄로 생각했어. 우리 마을 옆에는 집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너처럼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거든. 네 살결이 훨씬 매끄럽지만 말이야. 그녀가 여름에 그를 보러 왔을 때, 그의 어머니는 시골에 있는 이모집에 가고 없었다. 그런데 입구에 앉아 있는 이웃여자들을 보고는 그녀는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잘 봐! 이제 죽어도 이곳엔 다시 오지 않을 거야. 그녀는 전화를 걸면 늘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다 시 걸곤 했다. 카챠? 그래, 나야. 방금 전에는 왜 아무 말도 안 했니? 그건 내가 아니었어. 우리 만날까? 어디서? 공원 옆에? 이미 네 마음속에 정해 놓았잖아. 데비치 가로 와. 여섯 시, 일곱 시? 여섯 시까지 가 있겠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며 사샤는 그런 기억들을 떠올렸다. 다음날, 사샤 는 그녀가 전화를 할 경우에 대비하여, 가능하면 빨리 집으로 돌아오고 싶 었다. 그러나 10월 혁명 16주년 기념특집호 벽신문을 준비하느라고 늦게까 지 학교에 남아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당위원회 회의에 소환되 었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2 출입문 근처에는 빈자리가 없어서 사샤는 총총히 놓인 의자들 사이를 비 집고 나아가야 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어선 청중들 틈으로 밀고 나가 다가 그는 당위원회 서기인 바울린의 성난 표정과 맞닥뜨렸다. 바울린은 붉은 머리에 단순하고 둥글넙적한 얼굴을 가진 건장한 체구의 사나이로, 두 개의 흰 단추로 목을 여민 청색 농민복 밑으로 넓은 가슴이 부풀어올라 있었다. 그는 사샤가 자리를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크리보루츠코를 항해 돌아섰다. 자, 크리보루츠코, 당신은 그 기숙사의 건축을 사브타지했소. 당신의 변명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소. 당신은 그 자금이 긴급계획에 돌려졌다고 말했지요? 당신은 마그니트카와 같은 제철공장을 짓고 있는 게 아니오. 그 건 단지 학교의 기숙사일 뿐이오, 당신은 공사계획서가 비현실적이었다고 왜 우리에게 경고해 주지 않았소? ....아, 그 공사계획서는 현실적이었다 고요, 그런데 왜 지켜지지 않았느냐 말이오? 당신이 이십 년 동안을 당에 몸담고 있던 사람이오? 당신의 지난날 공적에 대해 우리들은 깊이 존경해 왔지만, 우리는 여전히 당신의 과오에 대해 처벌해야만 하오. 사샤는 바울린의 말투에 깜짝 놀랐다. 크리보루츠코는 대학의 부학장으 로 학생들은 그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그의 화려한 전 공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역시 군복 상의와 바지, 그리고 장화를 착용해 서 늘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는 등이 굽었고, 길고 볼품없는 코에 눈 밑에는 살점이 늘어져 있었다. 그는 결코 길을 가다 멈추고 잡담을 나누는 법이 없었으며 인사를 받을 때에도 고개를 한번 까딱하는 게 전부였다. 크리보루츠코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는데, 사샤는 그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평소에 그토록 무섭던 사람에게서 약 한 면을 본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건축자재가 조달되 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그런 사실에는 신경을 쓰고 있지 않지만. 사샤가 속한 학부의 학생감으로 쉽게 동요하지 않는 라트바아인인 얀슨 이 글린스카야 학장의 지지를 구하려고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어쩌면 상부에서 우리에게 완공일을 다시 제시해 주지 않겠습니까? 무슨 일자를 말인가요? 바울린이 부드러우면서도 기분 나쁜 투로 물었 다. 글린스카야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괴로운 표정은 그따위 쓸데없는 논 의가 자기한테까지 강요되는 데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대학원생인 로즈가체프가 일어났다. 키가 큰 데다 매끄럽고 인상적으로 생긴 그는 연극적인 제스처로 자기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들이 분명히 마그니트카에도 삽을 보내 주지 않았단 말입니까? 학생 들은 맨손으로 언 땅을 팠습니까? 콤소몰(공산청년동맹)의 조직책이 바로 여기 나와 있습니다. 학생들이 삽도 없이 어떻게 해야 했는지 그의 얘기를 들어보도록 합시다. 바울린은 사샤가 일어서자, 그를 유심히 쳐다봤다. 우리는 삽도 없이 일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창고가 한때 잠겨 있었습니 다만 관리인이 돌아와서 삽을 나눠주었으니까요. 오래 기다려야 했습니까? 크리보루츠코가 머리를 숙인 채 물었다. 아마 십 분쯤이었을 겁니다. 목격자인 사샤의 말로 멋쩍어진 로즈가체프는, 실수는 자기가 한 게 아 니라 사샤가 한 것인 양, 책망하듯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래, 일을 했소? 바울린이 씩 웃었다. 하려고 해보았습니다. 사샤가 대답했다. 얼마나 일을 하고 얼마나 놀았소? 우리에겐 자재가 없었습니다. 왜 없었소? 그건 모두들 다 알고 있는 바대로 입니다. 내 앞에서 변호사라도 된 것처럼 행세하지 마시오, 판크라토프. 바울 린이 경고했다. 그가 뱉은 말들이 팽팽한 긴장을 뿜어내며 효과를 드러냈 다. 이곳에선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니까 말이오. 위원들은 크리보루츠코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그를 당에서 쫓아내기 위한 표결에 들어갔다. 오직 얀슨만이 기권했다. 크리보루츠코는 등을 더욱 굽힌 채, 방을 나갔다. 전임강사인 아지쟌으로부터 고발이 접수되었습니다. 바울린이 그렇게 공표하고 나서, 이젠 네 차례다, 판크라토프 라는 표 정으로 사샤를 쳐다봤다. 아지쟌은 사샤의 그룹을 대상으로 사회주의 회계원리의 기초에 관한 당 기강좌를 실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주제를 전혀 다루지 않았다. 회 계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그 기초적인 원리에 대해서도 전혀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대신 그는 그런 원리를 왜곡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강 의를 했고, 그래서 사샤는 부기에 관해 자기들 그룹이 뭔가라도 배워야만 한다고 불평했었다. 그러자 교활하고 빤질빤질하고 엉큼한데다 대머리가 까진 작은 체구의 아지쟌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던 그가 이제 회계 학의 마르크스주의적 기초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사샤를 몰아세우고 있었 다. 어떻게 된 일이오? 바울린의 차갑고, 창백한 푸른 눈이 사샤를 향했 다. 저는 이론이 불필요하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우리가 부기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이론에 대한 당의 관심이 당신에겐 흥미롭지 않소? 물론 흥미롭습니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시식에도 흥미를 느낍니다. 이론에 대한 당의 관심과 구체적인 지식 사이에 차이가 있단 말이오? 로즈가체프가 다시 일어섰다. 동지 여러분! 과학은 정치적으로 중립이라고 사람들이 공공연히 떠들어 대고 있고.... 그리고 또, 학생대중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는 판크라토프는 당위원회에 대해 크리보루츠코에 관한 개인적인 의견을 교묘하게 집어넣으 려고 했습니다. 판크라토프, 당신이 이 자리에서 누구를 대표하는지 정직 하게 말해 주시오. 얀슨은 울적한 표정으로 그의 서류가방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강사와 논쟁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그러나 과학이 정치적으로 중립이 라는 말은 여전히 맞는 말이 아닌가.... 높은 직책에 따르는 부담감 때문에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그리고 이번 일은 단지 가엾은 한 학생에 관련된 사소한 문제라는 것을 암시하면서 글 린스카야가 바울린에게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콤소몰에 일임하는 게.... 로즈가체프는 바울린을 쳐다봤다. 글린스카야의 생각이 그에겐 탐탁지 않은 게 분명했다. 당위원회는 문제를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그의 한마디가 문제를 가라앉혔다. 바울린이 반박했다. 누구나 그 어느 것이라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절차라는 게 있습니다. 그 문제는 콤소몰이 다루도록 합시다. 우리는 그들이 정치적으 로 얼마나 성숙해 있는지를 보게 될 것이오. 사샤는 들어오면서 갈색의 가죽코트를 보았다 - 마르크 삼촌이었다. 삼촌이 그에게 안부를 물었다. 잘 있었니? 면도를 해서 매끄러운 삼촌의 뺨에 사샤는 입을 맞췄다. 마르크는 기분 좋은 파이프담배 내음과 향기로운 오데콜롱의 향내를 풍겼다. 어머니의 말 을 빌자면, 그것은 <아늑한 홀아비의 냄새>였다. 머리가 벗겨진 데다 풍채 좋고 유쾌해서 백부와도 같은 그는 실제 나이 서른 다섯 살보다 훨씬 나이 가 들어 보였다. 연노랑색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두 눈이, 소련의 새로운 야금기지인 동부에서 대규모 공사로 숱한 전설을 뿌림으로써 전국을 통틀 어 산업계의 거장 중의 하나로 알려진 사람의 강철같은 의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적 항공기의 공격범위밖에 있는 그 공장은 프롤레타리아 세력의 전략적 기초가 될 것이었다. 널 기다리는 걸 거의 포기할 뻔했다. 들어오지 않나 생각했지. 사샤는 매일 밤 집에 들어와.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테이블 위에는 포트와인 한 병과 핑크색 고급 소세지, 청어, 그리고 케 이크가 조금 놓여 있었다. 마르크가 이곳에 올 때면 늘 가져오는 맛있는 것들이었다. 거기에는 그의 어머니가 늘 마르크를 위해 구워 주는 전통적 인 파이도 있었다. 자기가 모스크바로 온다는 것을 어머니에게 미리 알려 준 게 분명했다. 여기 오래 계실 거예요? 사샤가 물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떠날 거야. 스탈린이 삼촌을 불렀다는 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그녀는 동생과 또 아들을 사랑스럽게 여겼다. 그녀에게는 달리 자랑할 만한 게 없었다 - 남편에게서 버림받고 홀로 된 작고 통통한 여인,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녀의 하얀 얼굴은 여전히 예뻤고 희끗희끗한 머릿결은 파도 처럼 풍성했다. 마르크는 의자 위에 놓인 짐 꾸러미를 가리켰다. 끌러 보세요.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매듭을 풀려고 애를 썼다. 이리 줘요. 사샤가 말하고 나이프로 끈을 잘랐다. 마르크는 누이에게 코트 감과 솜털같이 부드러운 쇼올을, 그리고 사샤에 게는 감청색 모직 양복을 가져왔다. 살짝 구김살이 진 자켓은 그의 몸에 꼭 맞았다. 아주 잘 맞는구나.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가 흐뭇해서 바라보았다. 고맙다, 마르크. 사샤는 입고 다닐 만한 게 하나도 없었거든. 사샤는 만족해하며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야보았다. 마르크의 선물은 언 제나 꼭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다. 그가 어릴 적에, 삼촌은 그를 데리고 구 둣가게에 가서 높고 부드러운 가죽부츠를 그에게 맞춰 준 일이 있었다. 그 아파트나 학교에서 그 같은 부츠를 신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 부츠가 무척 자랑스러웠고 지금도 여전히 그 부츠냄새와, 작은 구둣가게에 서 풍기는 가죽과 타르의 톡 쏘는 듯한 냄새를 잊을 수 없었다. 그날 저녁 마르크는 몇 번이나 전화를 받았다.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그 는 자재와 경비, 그리고 특별열차의 할당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 또 자기 는 오늘밤 아르바트에서 보낼 것이니, 차를 다음날 아침 8시에 거기 대 놓 으라고 일렀다. 그는 방으로 돌아와서 술병을 곁눈으로 보았다. 흠흠. 마시자, 친구여. 어디서든지, 인생의 슬픔에 젖어 보자. 사샤가 마르 크의 애창곡을 불렀다. 사샤가 어릴 적에 마르크는 그 노래를 자주 부르곤 했다. 살며시, 살며시, 우리의 모든 걱정, 오늘밤에는 사라지리. 마르크가 속도를 빨리 했다. 그게 맞니? 맞아요! 그리고 사샤가 다시 목청을 높였다. 아마도 내일 이쯤이면 체카가 여기 당도하리니 그래서 내일 이쯤이면 우리는 콜차크를 처형할 것이리. (Cheka:1997년 12월에 설립된 소비에트의 비밀경찰조직) 사샤의 목소리와 귀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녀는 한때 라 디오에서 노래를 불러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절대 허락하지 않았었다. 아마도 내일 이쯤이면 우리 동지들이 도착하리니, 그러나 내일 이쯤이면 그들은 우릴 총살하리라. 참 좋은 노래야. 마르크가 말했다. 그런데 넌 그걸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있어.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말했다. 장님들로 만든 합창단처럼 말야. 장님들의 듀엣. 마르크가 웃으며 말했다. 소파에 마르크의 침대가 꾸며졌고 사샤는 마포로 된 야전침대에 누웠다. 마르크는 자켓과 셔츠를 벗고, 목 부분과 소매에 띠가 둘러진 속옷차림으 로 욕실로 갔다. 한 팔로 머리를 받치고 누워 사샤는 그를 기다렸다. 당위원회 회의가 끝난 후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얀슨이 달려가듯 그 를 지나치면서 등을 가볍게 토닥거려 주었다. 그것은 사샤의 용기를 북돋 워 주기 위한 제스처였지만, 오히려 공허감만 더해 갔다. 갑자기 다른 사 람들이 모두 집에 돌아가거나 매점에 들르기 위해 급히 서두르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는 제멋대로 퍼져 나간 교외의 지저분한 도로를 따라 전차 정거장으로 걸어갔다. 크고 검은 자동차 한 대가 그의 옆을 지나쳤다. 앞 좌석에 글린스카야가 타고 있었는데 그녀는 돌아서서 뒷자리의 탑승객들에 게 무슨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의 존재엔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고 웃으 며, 그를 지나쳐 가는 그들을 보니 공허감과 함께 이유 없는 반항심이 갑 자기 솟아올랐다. 사샤는 인민학교시절부터 글린스카야를 알고 있었다. 학부형위원회에서 그녀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녀의 아들 얀은 사샤와 한 반이었다. 그는 침 울하고 말없는 친구로 오직 등산에만 흥미가 있었다. 그녀는 코민테른 간 부와 결혼했는데, 그녀의 폴란드식 액센트는 그녀의 엄숙한 발표에 문제점 을 남겼다. 그렇다 해도 사샤는 그녀가 당위원회에서 입을 다물고 있으리 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쨌든 그녀는 그 기숙사공사에 크리보루츠코만큼 이나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녀는 입을 열지 않고 있는 것이 었다. 마르크가 세수를 하고 돌아와서 세면도구세트에서 오데콜롱 병을 꺼내 얼굴에 톡톡 발랐다. 그리고는 침대에 눕더니 좀더 편한 자세를 취하려고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 안경을 벗어,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것을 둘 만 한 곳을 찾았다. 불을 끌까요? 사샤가 물었다. 그들은 한참 동안 말없이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사샤가 물었다. 스탈린이 왜 삼촌을 불렀죠? 스탈린이 부른 게 아냐. 난 그의 새 지시를 받기 위해 호출된 거야.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는 그렇게 키가 크지 않다면서요. 너나 나와 거의 비슷할 걸. 연단에 서 있으니까 크게 보이나 보군요. 그래, 맞아. 그의 쉰 번째 생일에서요, 사샤가 말했다. 자기를 찬양하는 연설에 답하는 게 맘에 안 들었어요 - 당이 그 표상으로 본인을 창조했습니다. 라는 따위 말예요. 그의 주장은 그런 찬양까지도 당에 귀속되는 것이지 제 개인에 귀속되 는 게 아니란 거야. 스탈린은 무례하고 불충하다고 레닌이 쓴 게 사실이에요? 네가 어떻게 그걸 아니?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문제는 내가 그걸 들었다는 거죠. 그런데 그가 정말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건 전적으로 개인적인 특성들일 뿐이야. 중요한 건 정치적인 노선이 지. 하지만 삼촌은 그걸 구분할 수 있어요? 사샤가 대꾸했다. 그리고 그 순간 바울린과 로즈가체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너 무슨 의심을 하고 있는 거니? 어쨌든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스탈린을 옹호하기는 하지만 지나치 게 미화하는 게 아니냐는 뜻이에요. 그게 좀 불쾌해요.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냐. 마르크가 말했다. 넌 당과 당의 지혜를 믿어야 돼. 상황이 어렵게 되어 가고 있어. 사샤가 웃었다. 네, 오늘 그게 어떻다는 건 알았어요. 그는 당위원회 회의에서 일어났던 일을 마르크에게 얘기했다. 부기? 하지만 그건 어떤 원리에 대한 문제 아니야? 마르크는 쉽사리 믿지 않았다. 그래요, 아마 원리에 대한 문제라고 판명될 때까지 기다리려면 평생을 그렇게 보내야 할 거예요. 그걸 강의실에서 논한다는 건 무모한 짓이야. 마르크가 말했다. 그들은 무모하다고 날 공격하진 않아요, 단지 비정치적이라는 거죠. 그 리고 나보고 그걸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중이에요. 네가 틀렸다면 인정을 해라. 아니에요. 그들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란 말이죠. 어쨌든 거기에 인정 할게 뭐가 있어요? 모든 게 허위에 가짜인데요. 글린스카야가 지금도 학장이냐? 네. 그 여자도 있었니, 그 위원회 회의에? 네, 있었어요.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3 마르크 알렉산드로브나는 그의 운전사에게 계속 앞으로 가라고 말하고, 자기는 천천히 걸었다. 상쾌하고 맑은 가을 아침이었다. 서늘한 냉기가 공기 중에 차분히 감돌 고 있었다. 사무노동자들은 자기들 직장으로 종종걸음을 치고, 빵가게 앞 에는 여자들의 시끄러운 줄이, 그리고 담배판매대 앞에는 남자들의 조용한 줄이 서 있었다. 그는 여러 누이들 중에서 소피야만을 늘 좋아했다. 그는 소피야를 사랑 하고 동정했다. 그녀는 약한 데다 융통성이 없었고, 지금은 남편에게까지 버림을 받아 스스로 일어설 힘이 없었다. 그는 또한 사샤도 사랑했다. 그 들은 왜 그 아이를 공격하고 있을까? 어쨌든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는 옳 은 얘기를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지금 그가 하지도 않은 행위에 뉘우침을 요구하며 그의 용기를 꺾으려고 하는 중이다. 그러나 그 또한 사샤에게 뉘 우치도록 부추기지 않았던가. 마르크는 아르바트 광장을 건너 보즈드비젠카 가를 따라 걸어갔다. 생기 가 넘치는 아르바트를 지나자 갑자기 그 거리가 조용하고 텅 빈 것처럼 느 껴졌다. 단지 한 곳에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는데 그들은 보엔토르그 상회가 문 열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보다 좀 작은 무리가 칼라 닌의 출입구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대기하고 있던 자기 차에 올라 모호바야 가, 오호트니 거리를 지나고 극장과 루뱐스 카야 광장을 가로질러 노진 광장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긴 복도 양쪽으로 수십 개의 방이 딸린 거대한 5층 짜리 건물이 예전의 직업재판소 자리에 들어섰는데, 바로 그 건물 안에 중공업인민위원회가 입주해 있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 나라 곳곳에서 이 건물로 찾아왔다. 모든 것이 바로 이곳에서 결정, 조정, 입안, 계획, 수정의 과정을 거쳤다. 관례대로 랴자노프 위원은 관리부서에는 들르지 않고 일선 사무부서에서 인민위원회 순시를 시작했다. 일반 조합원 노동자들은 그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사계획의 수장이자, 오르드조니키드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사람이면서도 자기들을 가장 먼저 찾아온 데 대해 기뻐했다. 그는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힘과 조직의 힘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적 극적으로 나서서 5개년 계획의 자랑이자 기쁨인 그 공장의 이익에 부합시 켜 문제를 처리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그 문제를 마르크 알렉산드 로비치가 원하는 방식으로 다루었던 것이다. 부서별 순시를 마치자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3층으로 올라갔다. 몇 개의 복도를 지나, 계단을 하나 올라가고 또 한 계단을 내려온 다음에야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건물의 한쪽 끝에 다다랐다. 인민위원과 그 보조원 들의 사무실이 이곳에 위치해 있었다. 카페트가 깔린 작은 방 안에서 각자 책상에 앉아 있던 직원들은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왔다는 것을 미리 알리지 않고 부쟈긴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중앙위원회 위원이자 시베리아에서의 유형시절부터 스탈린과 친구였던 부쟈긴은, 몇 달 전 가장 강력한 유럽 국가의 대사직에서 소환되어 이곳의 부인민위원으로 있었다. 소문으로는 그의 소환이 우연한 게 아니라 그가 스탈린의 눈밖에 났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검은 콧수염과 굵은 눈썹 밑의 회색 눈이 인상적인 그의 가냘픈 얼굴에서는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다. 부쟈긴같이 군대의 사령관 망토로 외교관의 모닝코드를 샀거나, 체카지부 의장의 가죽코트로 지배인 양복을 산 노동자 - 지식인들은 마르크 알렉산 드로비치에게 늘 무섭고도 무자비한 혁명의 정신, 즉 독재자의 무서운 파 괴력을 체험하게 했다. 그들은 제 4기 용광로에 대해 토의했다. 그것은 5개월 후에 있을 제 17 차 전당대회와 때를 맞춰 가동을 시작하게 되어 있었다. 원래 계획으로는 8개월 후였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나 부쟈긴 모두 정치적인 필요 때문 에 경제적인 지혜가 희생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바로 스탈 린이 원하는 바였다. 모든 문제가 다 검토되고 난 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가 말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내 조카 사샤 판크라토프 말입니다. 그는 당신 딸과 같은 반에 있기도 했지요. 알고 있네. 부쟈긴이 수수께끼 같은 표정을 얼굴에 띠었다. 이건 정말 웃기는 일입니다.... 그는 그 일을 부쟈긴에게 얘기했다. 사샤는 정직한 젊은이네. 부쟈긴이 말했다. 부기의 정치적 중립성이라! 당신은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 학교의 학 장이 글린스카야지요. 난 그녀를 모르지만 당신은 알 테니까. 그렇게 힘들 지 않다면 그녀에게 말해 주세요. 그건 그 애에게 수치입니다. 그들은 그 를 괴롭히고 있어요. 체르냐크에게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걸 지구당 문 제로까지 끌고 들어가고 싶진 않습니다. 체르냐크는 이제 지구당 서기가 아니네. 뭐라고요? 그는 이제 끝나 버렸다고. 부쟈긴이 어깨를 으쓱했다. 전당대회는 정월에 열리네. 부쟈긴이 계속해서 말했다. 사샤는 좋은 청년이야. 그는 가끔 이곳에 오지만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네. 그는 말을 안 하려 했을 겁니다. 그리고 어쨌든 이건 어제 일어난 일이 고요. 글린스카야는 뭘 좀 할 수 있을까? 부쟈긴은 의아스러운 눈치였다. 모르겠습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가 대답했다. 하지만 난 그가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놔두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절름발 이가 되도록 해서는 안 돼요. 그들은 이제 겨우 자기들의 인생을 시작했을 뿐입니다. 요즘 그런 일이 자네 조카에게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라네. 부쟈 긴이 말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이발을 하러 내려갔다. 그리고 전혀 안 하던 면도도 했다. 하지만 이내, 하지 말 걸하고 후회했다. 이발사가 그에게 냄 새가 독한 오데콜롱을 뿌려 주었던 것이다. 간부 전용식당에 들어가자 지워지지 않는 이국의 향내가 그를 괴롭혔다. 웨이터가 그를 향했다. 랴자노프 동지, 세무쉬킨 동지께서 전화로 찾으셨습니다. 그가 위층으로 올라가자 오르드조니키드제의 비서인 아나톨리 세무쉬킨 이 차갑게 그를 맞으며,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정작 필요할 때 보이지 않는다고 짜증을 냈다. 세무쉬킨은 아무에게나 예의를 차리지 않고 얘기했 다. 그는 자기의 상관인 세르고밖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으며, 다른 사 람들로서는 거의 세르고 못지 않은 두려운 존재였다. 내전 중에 부관으로 일했던 그는 1921년부터 트랜스코카서스와 중앙조정위원회에서 그의 비서 로 있었고, 현재는 중공업인민위원 비서였다. 유달리 심각한 표정을 얼굴에 띤 채, 그는 다이얼을 돌렸다. 랴자노프 동지가 여기 와 있습니다. 그는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수화기를 건넸다. 그가 4시에 크레믈린에 가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자기를 모스크바로 소환한 이유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퍼뜩 들었다. 그는 일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벌써 돌아갈 차표를 사 놓았었 다. 그런데 이제 40분 후면 스탈린과 같이 있게 된 것이다. 세무쉬킨이 다른 전화로 보브린스크 화학공장을 부르자, 그곳에서는 오 르드조니키드제가 자리를 비웠다고 응답했다. 세무쉬킨이 전화를 걸며 마 르크 알렉산드로비치를 기다리게 한 것은, 오르드조니키드제의 지시 없이 마르크를 그곳에 보내느니보다 스탈린을 좀 늦게 만나는 편이 좋을 거라고 어림잡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달리 보고 있었다 세무쉬킨은 고위층 사이에서만 왔다갔다하며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 는 타인의 관료적 열성이 자신의 업무에 방해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못하 는 성미였다. 그는 조용히, 흥분하지 않고 있었다. 단지 그를 괴롭히는 것은 이발사가 뿌려준 역겨운 향내뿐이었다. 이 같은 냄새를 풍기며 크레믈린에 들어가고 스탈린을 만난다는 것은 더없이 우스운 일이었다. 그는 이발소에 내려가서 얼굴을 씻고 마리를 감았다. 그 동안 이발사는 옆에서 수건을 들고 서 있 었다. 그는 이제 반시간 전만 하더라도 머리가 벗어진 사람들과 농을 주고 받던 마음씨 좋은 랴자노프 동지가 아니었다. 특히 안경을 벗은 그의 얼굴 은 몹시도 냉혹해 보였다. 그는 트로츠키 정문의 창구에 당증을 찔러 넣었다. 창구가 쾅 하고 닫혔 다가 다시 열리면서 유리 뒤로 한 병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몸을 앞으로 기울여서야 랴자노프는 그를 볼 수 있었다. 무기 가진 것 없습니까? 없소. 가방 안에는 요? 랴자노프는 서류가방을 들어올려 펼쳤다. 보초는 안에 출입허가증을 끼워 그에게 당증을 돌려주었다. 소총을 가진 두 명의 병사가 요인출입구에 서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허 가증을 요구하고 기록들을 검토했다. 당증에 붙은 그의 사진을 유심히 들 여다본 후에 보초는 의례적이지만 신중한 눈길을 그의 얼굴에 던졌다. 랴자노프는 작은 소지품 보관소에 코트를 맡겨 놓고 3층으로 올라갔다. 사무실 밖에서는 민간인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자기 서류를 다시 한 번 검 토하고 있었다. 안에는 포스크레비셰프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를 처음 본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그의 얼굴이 우락부락하고 매력 없게 생겼다고 생각했 다. 랴자노프가 자신을 소개했다. 포스크레비셰프는 옆에 딸린 작은 방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 소파를 가리 켰다. 그리고는 안쪽의 사무실로 들어가 문을 꽝 닫았다. 잠시 후 그가 되 돌아왔다. 스탈린 동지께서 지금 만나시겠답니다. 가늘고 긴 스탈린의 사무실 왼쪽 벽에는 거대한 소련지도가 걸려 있었 다. 한쪽 구석에는 커다란 지구의가 놓여 있고 다른 쪽에는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방 한가운데는 녹색 베이즈로 덮인 긴 테이블과 의자들이 차지하 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스탈린은 방에서 천천히 서성거리고 있다가 멈춰 섰다. 그 는 멋들어진 어두운 카키색 자켓과 그것에 맞춘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바 지단은 부츠 속에 집어넣은 채였다. 그는 보통에 못 미치는 키에 야무진 체구를 갖고 있었고 마마자국이 약간 있었다. 눈은 몽고계통에 가까웠다. 그는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에게 몇 발짝 다가와서 악수를 청했다. 그것은 단순하고 공식적인 행동이었지만 그런 제스처의 중요성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테이블로 의자 두 개를 끌어당겼다. 옅은 갈 색 눈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랴자노프는 계획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스탈린이 곧바로 그를 제지했다. 랴자노프 동지, 시간을 허비하지 마시오. 중앙위원회와, 그 서기들은 그게 어디 위치해 있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 빤히 알고 있으니까 말이오. 그는 강한 그루지아 액센트로 말을 했다. 그리고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 의 짐작대로, 그곳에서 진척되는 상황에 대해 매우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 었다. 콤소몰 회원들이 도망을 치고 있소?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동원하고 그들은 도망을 치고. 그래 얼마나 도망쳤소? 여든 두 명입니다. 스탈린은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보고서를 보여 주시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서류가방에서 노동력의 분포를 나타내는 도표 를 꺼내 그래프 하나를 손으로 짚었다. 너무 속상해 하지 마시오, 랴자노프 동지. 모스크바의 한 공장에서 도 망친 노동자가 여든 두 명밖에 안 된다면 그 지배인은 자신을 영웅으로 생 각해도 좋을 거요. 그는 눈가에 깊게 패인 그물 같은 주름을 만들어내며 미소를 지었다. 랴자노프가 장비를 공급해 주는 공장에 대해 불평을 하자, 스탈린은 그 지배인의 이름을 물었다. 그 사람은 바봅니다. 모든 걸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갑자기 그의 눈이 호랑이 눈처럼 노랗게 물들며 표독스러워졌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그 눈에서 유능한 지배인으로 알고 있었던 사람에 대한 분노와 실망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랴자노프는 좀더 미묘한 문제인 평로 제 2기의 건설 쪽으로 주제를 돌렸 다. 당신은 그걸 일년 안으로 건설할 수 있소? 스탈린이 물었다. 안 됩니다. 스탈린 동지. 왜 안 된다는 거요? 저는 공학(빈 말)과 도박을 하지는 않습니다. 갑자기 그는 자기가 뱉은 말에 대해 겁이 났다. 스탈린이 그를 빤히 쳐 다보았다. 그의 눈이 다시 노랗게 물들며 표독스러워졌고, 한쪽 눈썹이 거 의 수직으로 올라갔다. 그러면 중앙위원회가 공학과 도박을 한단 말이오? 그는 마디마디를 길 게 잡아끌며 천천히 말을 뱉었다.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 은.... 그는 왜 제 2기 평로가 1년 안으로 완성될 수 없는가에 대해 상세하고 정확한, 그러면서도 납득시킬 수 있는 설명을 차근차근히 해냈다. 스탈린은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그의 왼손은 파이프를 가슴에 품은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당신은 알아듣기 쉽게 얘기를 했소. 좋아하는 거면 무엇이나 다 약속을 하는 공산주의자는 우리에게 필요 없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이요. 그는 이 말을 정색을 하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말은 전국의 인민들에 하는 말처럼 들렸다. 랴자노프가 말을 계속하려 하자, 스탈린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당신 말을 내 지금껏 듣고 있었으니, 이제 당신이 들을 차례요. 스탈린은 금속공업과 동부지역, 제 2차 5개년 계획, 그리고 국토방위에 대해 얘기했다. 모두가 다 알고 있지만, 현재 새롭고도 특별히 중요성을 획득한 것들에 대해, 그는 조용하고 굵직한 목소리로, 천천히 그리고 정확 하게, 마치 비서에게 구술이라도 시키듯 얘기했다. 그는 제 4용광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스탈린 자신이 받아 들이지도 않을 반대의견을 제기함으로써 자기 위치를 위태롭게 할지도 모 를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를 구하고 싶었던 것처럼. 언제 떠날 거요? 스탈린이 일어섰다. 오늘입니다. 가능하면 이틀만 뒤로 미루시오. 내 생각으로는 정치국에 있는 우리 동 지들이 당신의 말을 흥미 있게 듣고 싶어할 테니까. 스탈린과 만나는 동안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가 느꼈던 두려움과 조바심 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이 맛보았던 모종의 위대함이었다. 그가 담당하는 대규모의 계획은 강철같은 의지를 요구했다. 자기 위에 있 는 스탈린의 강철같은 의지가 없었다면 그는 자신의 의지를 실행에 옮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의지 또한 강했다. 거기에 어떤 다른 선택 이 있겠는가? 역사상의 위대한 혁명들은 유약함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 었다. 인민위원회 직원들은 그가 스탈린과 얘기한 내용을 알고, 벌써부터 정치 국에 보고할 문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본부의 간부에서 타이피스트, 심지 어는 식당의 여지배인까지 필요한 사람들은 모두 저녁 내내, 그리고 밤이 새도록 일에 매달렸다. 직무관계상 보고문에 서명해야 하는 위원회 간부들 은 새벽녘에 인민위원회 사무실에 도착했고, 아침에는 별도의 연락책이 중 앙위원회에 문서를 배달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무도 스탈린이 무슨 말을 했는지 랴자노프에게 묻지 않았다. 내용을 다시 말하는 과정에서 와전되기만 할뿐이었던 것이다. 스탈린은 자기가 필 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지시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가 보고할 날 짜와 장소는 스탈린이 원한 대로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제 2기 평로의 완공일이 1년간 뒤로 연기되었다는 점 으로, 이것은 제 2차 5개년 계획의 배치에 대한 새롭고도 보다 현실적인 접근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결국 금속공업은 모든 것의 기초였다. 부쟈긴 역시 그 보고문의 작성에 참여했는데, 아침 8시에 혼자 돌아와 말없이 그것에 서명했다. 그들간의 우정으로 볼 때 부쟈긴에게는 그 <대화>에 관해 물어 볼 권리 가 있었지만 그는 묻지 않았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부쟈긴이 스탈린 에 대해 반대하는 면이 조금 있음을 느낌으로 알아챘다. 그러나 그게 어쩌 면 정치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것은 예전의 친구 지간에서 흔히 일어나는 개인적인 문제들이었다. 아마도 그는, 해외에서 소환되어 지위는 아무리 높을지라도 서열로는 아래인 부서에 배치 받은 데 대해 기분이 상해 있을지도 몰랐다. 오르드조니키드제가 도착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그와 함께 있으 면 늘 마음이 놓였다. 그는 가끔 불같이 화를 내곤 하지만, 악의라고는 전 혀 품지 않는 마음씨가 괜찮은 인간이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가 현재 의 높은 직책에 오르게 된 것은 그의 덕택이었다. 세르고는 그가 남부의 작은 공장의 지배인으로 있을 때 그를 발탁하여,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야금기술자로 키워 냈다. 그는 사람을 찾아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찾아낸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큼지막한 걸상에 앉아 있었다. 살찐 매부리코와 부풀어 오른 그의 얼굴은 희끗희끗해져 가는 머리카락, 제멋대로 쳐진 두꺼운 콧수염 때문에 더욱 피곤해 보였다. 상의의 맨 윗단추는 풀어놓은 채였고, 연보라색 셔츠 의 깃이 뚱뚱한 목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창문으로 옛날에 지어진 작은 교회로 통하는 샛길이 보였다. 그런 교회 는 야우자, 솔리양카와 모스크바 강 사이에 위치한 이곳 모스크바 구 시가 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교회는 아주 특별히도 지상에서 싹쓸이를 당 하지 않고 살아남은 게 분명했다. 잘됐네. 그 보고에 대한 칭찬은 랴자노프가 스탈린 앞에서 허둥대지 않았다는 사 실만큼이나 대단한 것이었고, 그것이 랴자노프를 기쁘게 했다. 그것은 또 한 올바른 사람, 복잡 미묘하고 중대한 상황에서 기대할 수 있을 만한 사 람을 발탁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칭찬이기도 했다. 그것에 대해 모두 내게 얘기하게. 랴자노프가 다시 얘기를 시작하자, 오르드조니키드제는 스탈린이 한 말 의 핵심을 붙잡으려는 듯, 주의 깊게 경청했다. 스탈린과의 만남이 힘들면 힘들수록, 그것이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한테 는 더욱 중요하게 비쳤다. 그러한 만남은 일생에 겨우 한번 있을까말까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위대한 사람들만이 이해하는 빛나는 감각이 있었고, 이 시대에 빛을 투사하는 천재성이 있었다. 난 도박을 않는다, 자네가 그렇게 말했나? 얘, 제가 말했습니다. 그럼, 중앙위원회가 도박을 하는 거야? 오르드조니키드제가 그 질문을 되풀이하고 껄껄 웃었다. 맞아, 정확히 그가 말한 대로야. 랴자노프를 보면서 오르드조니키드제가 갈색 눈을 치뜬 데에는 대단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중앙위원회에 열 시까지 도착하게. 자네가 보고를 하는 데는 오 분이 주어질 걸세. 더 이상은 기대하지 말게. 소비에트의 힘에 대해 격려연설은 하지 말고, 자네 위치를 떠받쳐 줄 사실만을 고수하게. 답변을 하되, 비판 적인 발언들은 무시하게. 그리고 흥분하지 말게. 자네 뒤에는 늘 내가 있 을 테니까. 랴자노프가 보고를 하게 될 대회의실 밖의 대기실에는 물이 끓고 있는 커다란 주전자와 얇게 썬 레몬, 샌드위치, 광천수가 테이블 위에 있었지만 바텐더나 웨이터는 보이지 않았다. 벽과 창문을 따라서, 서류를 정리할 수 있는 책상이 쭉 놓여 있었다. 지구당 서기 몇 명, 인민위원과 그 보좌관들, 많은 군인과 코카서스에서 올라온 한 떼의 대표단이 자기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년의 여비서가 이따금 호명을 했다. 000동지, 들어가 주세요. 000 혹은 00인민위원회에서 오신 동지들. 그녀가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의 이름을 불렀다. 비서실을 통과하여 대회의실로 들어서는 순간 안락의자에 열을 지어 앉 아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의장석에는 몰로토프가 서 있었다. 그의 오른편으로 연단이 있었고, 왼 편 약간 뒤쪽에는 보고를 하는 사람이, 그리고 그보다 더 왼쪽으로는 속기 사가 앉아 있었다. 발표자는 이쪽으로 오시오. 몰로토프가 연단을 가리켰다. 연단 안쪽의 가장자리에는 발표시간은 5분입니다. 라는 문구가 씌어 있 었다. 스탈린은 셋째 줄에 앉아 있었다. 그가 쉽게 자리를 뜰 수 있도록 줄 왼 편은 텅 비어 있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무슨 생각을 할 때 천천 히 왔다갔다하는 그의 습관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틀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신속하게 보고를 해나갔다. 그는 간결하고 대 체로 전문적인 용어로, 그러면서도 명확하고 간단하게 얘기했다. 그 방식 은 정치적인 연설에서 흔히 사용되는 것으로 사람들을 이해시키기에 편리 했다. 그는 제 4기 용광로의 조기 시동을 강조했고, 실제로 훨씬 중요한 제 2기 평로 건설의 지연에 대해서는 대충 넘어갔다. 이 순간에서 중요한 건 강조해야 될 부분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질문 없습니까? 몰로토프가 물었다. 누군가가, 그 보고에 의하면 나무의 공급이 필요한데 아직 산림위원회로 부터 승인이 나오지 않은 상태라고 지적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가 막 답변을 하려는데 갑작스런 침묵이 흘렀다. 스탈린이 입을 열었던 것이다. 랴자노프 동지를 현장으로 돌려보내 금속 생산을 시작하게 하시오. 서 류 몇장 때문에 그를 붙잡아 두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소. 그는 엉뚱한 쪽을 향하고 아주 낮게 얘기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고 바짝 긴장해야 했다. 필요한 승인은 랴자노프 동지 없이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 오. 그 보고는 충분히 숙고를 거친 만큼 별 문제는 없소. 랴자노프 동지를 도와줌으로써, 우리는 당의 명령을 수행하게 될 것이오. 말을 멈추기가 무섭게 그는 자리를 떴다. 아무도 다른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4 혁명 전에는 조용했던 아르바트 최초의 아파트단지는 이제 가장 혼잡한 곳이 돼 버렸다. 각각의 아파트는 다시 쪼개져서 세입자들로 꽉꽉 들어찼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두 사람은 어찌어찌 해서 자기 집을 보호하는 데 성공하여 새로운 질서에 대한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재단사 샤로크였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공장에서 일을 배워 재단사가 되었고, 수석재단사를 거쳐 마침내는 사장의 외동딸과 결혼했다. 그게 바로 샤로크의 경력이었 다. 그런데 혁명이 그의 희망을 잘라내고 말았다. 물려받으리라고 기대했 던 공장은 국유화되었다. 그는 의류공장으로 작업을 나가는 한편, 집에서 도 일을 하여 수입을 보충했다. 소득조사원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그는 믿을 만한 추천에 의해서만 고객을 받았다. 나이를 상당히 먹어서도 그 풍채 좋은 재단사는 양장점 주인으로서의 고 귀하고도 점잖은 품격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일주일에 엿새 저녁은 재단테이블 앞에 서서 줄자를 목에 건 채 분 필로 가는 선을 긋고, 천을 자르고, 바느질을 하고, 무거운 다리미로 솔기 를 문질렀다. 그는 돈을 벌고 있었다. 일요일이면 그는 경마에 심취했다. 그는 가사라든가, 위원회, 이웃들 그리고 그 밖의 예기치 못한 것들에 대 한 끊임없는 두려움만 없었다면 생활에 만족했을지도 몰랐다. 그 한 예가 보석가게를 강탈한 죄로 그의 장남에게 내려진 8년의 수용소 유형 판결이 었다. 그는 주의가 산만하고 변덕스럽기까지 한 그 녀석을 한번도 믿지 않았었 다. 그 녀석은 원숭이 같은 자기 어머니의 외모를 몰려 받았다. 그러나 샤 로크는 블라지미르가 프라그 레스토랑에서 요리사 과정을 마치고 집으로 월급봉투를 가져온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었다. 물론, 요즘의 레스토랑은 옛날 같지 않았다. 그러나 신체적으로 허약하 면서도 학교공부에는 소질이 없는 소년에게 있어서 그것은 썩 잘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경마에 돈을 거는 데에 맛을 들인 이후로 샤로크는 블라지미 르의 카드노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강도라니! 그것은 소련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의 법으로도 감옥 행을 의미했다. 샤로크의 둘째아들 유리는 내성적이고 까다로운 젊은이였다. 빈틈이 없 고 신중한 성격의 그는 아르바트의 뒷골목에서 성장했다. 스몰렌스크 시장 과 프로토츠니 가에 인접한 그곳은 모스크바의 온갖 사기꾼과 부랑아, 인 생패배자들의 온상이었다. 그는 자기 형이 하는 짓을 알고 있었지만 집에 다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거리의 법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법보다 그에게 훨씬 중요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혁명이란, 어쨌든 자신에게 이롭지 못하다는 신념을 품고 자랐다. 어째서 그런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그렇다는 사실만은 굳게 믿었다. 그에게는 다른 정치체제하에서는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인식은 없었지만, 그것이 좀더 나을 거라는 생각은 있었다. 그것에 대해 그는 털끝만큼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는 학교 콤소몰 회원들에게 빈정거리는 투로 <동지들>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새로 탄생한 보스들이 매 일 집에서 듣는 호칭이었다. 그런 우쭐대는 행동들은 세계가 마치 자기들 의 것인 양 생각게 했다. 콤소몰 학교 지부의 비서인 사샤 판크라토프가 연단에 올라서서 거창한 제스처를 써 가며 연설을 시작할 때 유리는 자신 이 무방비 상태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정치를 역겨워했고 기술자로서의 경력만이 자신을 자립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의 형이 체포되자 그의 계획도 바 뀌고 말았다. 노인은 변호사를 찾고 있었다. 고객과 협의한 후에 마침내 그는 5백 루 불의 수수료로 사건을 맡겠다는 사람을 구했다. 그것은 보통 큰돈이 아니 어서 샤로크는 증인도 없이 그걸 넘겨주기가 겁이 났다. 그래서 그는 유리 를 같이 데려갔다. 변호사는 돈을 세어 보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서랍 속에 던져 넣었다. 그 것으로 방문은 끝나 버렸다. 하지만 유리는 주위를 유심히 두리번거렸다. 그는 금박 액자에 넣어진 그림들과 유리케이스 안에 든 금박장정의 책들을 보았다. 그렇게 사치스러운 물품은 그에게 처음이었다. 그들이 다시 거리로 나왔을 때, 노인은 부러운 듯 한숨을 쉬었다.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살고 있는데! 하지만 그 변호사가 유리에게 더 욱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법정에서였다. 체구가 작고 핏기 없는 얼굴에 윤 기가 흐르는 수염을 가진 그는, 두려운 프롤레타리아의 법정을 자기의 손 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이었다. 어찌 됐든, 유리의 눈에는 그렇 게 비쳤다. 변호사는 법정에 법령과 규칙을 소나기처럼 퍼부어 대고, 속임 수와 계략을 사용하고, 증인을 부르고, 추가로 전문가를 지명하고 하여, 재판관이나 검찰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다. 침울해져 재판관과 검 찰관은 비록 자기들 손에 법을 쥐고는 있었지만, 그 법이 오히려 그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 장면을 보고 유리 샤로크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구체화시켰다. 공학은 잊혀졌다. 변호사로서의 경력을 쌓는 길은 더 높은 단계의 교육을 받는 데 있었고, 그 교육을 받는 길은 콤소몰 과 공장을 통해 개척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유리 샤로크가 콤소몰에 가입한 것은 입학한 지 9년째 되는 해 였다. 노동자의 아들로서, 아르바트의 인텔리겐챠의 자식들이 다니는 학교 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라선 그는 자신을 주위로부터 소외시켰다. 학생들은 그를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생각했다. 그를 좋아하는 부류들은 명석하고, 신중하고 활동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리를 정치적으로 교육시켜, 그 를 새로 만들고 그를 계발하려고 생각했다. 정직하고 타인에 대한 신뢰가 풍부한 그들은 그에게서 매력적이고, 멋지고, 단순하고, 내성적인 면을 발 견했던 것이다. 얼마 후 공장에서 일을 하며, 그는 자신에게 늘 부족했던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제 그는 한 사람의 노동자였다. 항상 깨끗한 청색 작업바지는 그의 괜찮은 체격에 꼭 맞았다. 그는 무례함을 키워 그것을 노동자계급의 고지식함과 지식인들에 대한 경멸로 전환시켰다. 한 때 수줍고 말이 없던 학생은 이제 모임에서도 자주 발언에 나서곤 했다. 그는 대중 앞에서 얘기 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장차 유능한 변호사로 성장하는 데 귀중한 자산 이 될 거라는 점을 민감하게 포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단 학교 안에 들어서면 별로 말이 없었고, 그렇다고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부각시키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유능하고 믿을 만한 미 래의 공복으로 그는 자신을 내세우려 했다. 신문들은 파괴자, 태업 선동자, 분파분자들에 대한 공격일색이었다. 그 들을 공개하라! 그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하라! 불한당! 인간말종! 그들을 궤멸하라! 그들을 끝장내라! 그들의 뿌리를 뽑아라! 그들을 몰살시켜라! 그들을 지구상에서 몰아내라! 이 짤막하고 무자비한 어구들은 피스톨에서 발사된 탄환처럼 그의 공포심을 다시 일깨웠다. 그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아주 치밀하게 자신의 미래를 가늠했다. 학교를 졸업하면 그는 지방이나 어느 지구의 인민재판소 또는 검찰청으로 보내질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개인변호사가 되고 싶어한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내비치지 않았 다. 네 임무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말아라, 샤로크. 그의 생각을 알면 그 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힘들고 고집스럽게 일하며 추구 해 온 목표를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샤로크는 유리에게 양복을 한 벌 맞춰 주었다. 그것은 최신 유행의 <찰 스톤> 스타일로, 통이 넓은 바지와 어깨의 선이 강조되고 몸에 착 달라붙 는 짧은 웃옷이 특색이었다. 그 양복은 유리의 파란 눈과 창백한 피부에 어울려 아주 근사해 보였다. 샤로크는 옷감을 트베르스카야 가에 있는 수 입품 상점인 토르그신에서 구입했었다. 이웃들은 원래 말이 많은 법이야. 노인이 말했다. 그들은 이렇게 지 껄이겠지. 샤로크네는 숨겨 놓은 금송아지가 있고 돈도 주체할 수 없을 만 큼 많다고 말이야. 금팔찌와 와이셔츠 핀을 팔아야 되는 것이 몹시 서운했지만, 노인은 아 들이 모스크바에서 좋은 지위에 앉으려면 옷을 잘 입어야 된다는 걸 잘 알 고 있었다. 고맙게도 모피와 잠방이를 걸치던 시절은 가버렸다. 자기 가족 에 대한 이기적인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샤로크는 막내아들을 향한 아버지 로서의 감정에 끈끈한 피가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샤로크는 그에게서 젊 은 시절의 자신을 보았던 것이다. 그에게는 또한 유리가 사용하는 방 문제 도 있었다. 그 문제는 그를 적잖이 괴롭혔다. 주택관리위원회가 가뜩이나 눈독을 들이고 있는데 만일 유리가 떠난다면 영락없이 그 방을 뺏길 판이 었다. 사람들을 많이 사귀어라.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그는 유리에게 그렇 게 채근했다. 그러나 유리는 공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샤로크의 집안에서 친구란 어림도 없었다. 가난한 친척들을 샤로크는 다만 부담으로 밖에는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왕래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남 는 시간을 경마에 보냈고, 어머니는 교회에 있었다. 부활절이면 아이들은 부활절 케이크를 한쪽 먹었고, 성회 수요일에는 팬케이크를 먹었다. 그게 그들이 즐기는 축제의 수준이었다. 비록 샤로크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큰 소리쳤지만, 자신을 파멸시킨 <그>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그는 또한 소비 에트 체제도 완전히 용서할 수 없었다. 메이데이나 11월 7일의 혁명기념일 이면 그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일을 했다. 유리와 사이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은 그래도 학교 친구들이었다. 그들 중 세 명은 그와 같은 아파트단지에서 살았다. 콤소몰 비서인 사샤 판크라 토프, 엘리베이터에서 일하는 여인을 어머니로 둔 막스 코스틴, 그리고 유 리를 교화시키려 했던 마음씨 좋은 콤소몰 회원 중의 하나인 니나 이바노 바가 그들이었다. 거기에 아버지가 유명한 외교관인 레나 부쟈기나가 합세 하여 그들은 아주 단단한 행동집단을 형성했다. 그들은 소비에트 제 5차 주택으로 알려진 아파트단지 내에 있는 레나의 집에서 주로 만났다. 부쟈긴은 그때 해외에 나가 있어서 그 아파트는 아이 들 차지였다. 유리는, 이들이 유용한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 으로 거기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이 막연한 감정이 어느 날 구체적인 희망으로 드러났다. 그를 돕게 될 한 사람인 부쟈긴이 해외에서 소환되어 중공업을 담당하는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유리는 보즈드비젠카 가에서 그라노브스키 가로 들어섰다. 소비에트 제 5차 주택 내에 회색 화강암으로 지어진 이 건물이 바로 <그들>이 사는 집 이었다. <그들>의 아이들은 철조망 울타리가 쳐진 작은 정원 안에서 놀고 있었다. 늙은 수위가 부쟈긴의 집에 전화를 거는 동안 유리는 묘한 표정으 로 현관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3층으로 올라가 벨을 눌렀다. 여느 때처럼 수줍게 웃으며 레나가 문을 열었다. 키가 크고 검은머리를 큰 빵 모양으로 둥글게 묶은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했다. 그녀의 주홍빛 입과 도톰한 입술은 흰 우윳빛의 길고 아름다운 얼굴에 비해 약간 큰 편이었다. 니나는 레나의 얼굴이 레반트인을 닮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 다. 유리는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 턱이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레나 부쟈기나가 학교에서 가장 예쁜 소녀라는 사실뿐이었다. 유리가 스스럼없이 그녀를 잡아끌자 그녀도 뿌리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왔니? 아직. 이반 그리고리예비치 씨는 집에 계셔? 그녀는 바닥에서 싱그러운 왁스냄새가 풍기는 복도를 따라 그를 아버지 의 서재로 데리고 갔다. 아빠, 유리가 아빨 보고 싶대요. 그녀는 그에게 애정이 담긴 행복한 미소를 던지고는 그를 슬쩍 방안으로 밀어 넣었다. 좁은 방안은 창문에 절반쯤의 높이로 걸쳐 있는 옆집의 담 때문에 약간 침침했다. 단행본이나 정기간행물, 잡지, 신문, 국내외 팜플렛들이 테이블 위에 흐트러져 있거나 선반, 의자 위에 무더기로 혹은 차곡차곡 쌓여 있 고, 또 방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부서진 소파 위엔 점선으로 기 선 항로가 표시된 세계지도가 걸려 있었다. 부쟈긴이 읽고 있던 파일을 덮 어 한쪽으로 밀어놓는 순간, 유리는 거기에 표시된 세 자리 숫자를 힐끗 보았다. 중앙위원회와 중앙조정위원회 위원들에게만 회람되는 비밀서류가 바로 그 파일에 들어 있었다. 유리는 또 파커만년필과 트로이카 담배, 고 무장화, 그리고 유명한 재단사 엔친이 고위급의 외교관들에만 만들어 준, 특수하게 재단된 자켓을 보았다. 그래? 조용하고 사무적인 부쟈긴의 어조는 청탁을 받는 데 익숙해진 그런 사람 의 것이었다. 저는 곧 학교에서 소비에트 법 공부를 마치게 됩니다. 이반 그리고리예 비치 씨. 유리가 말했다. 그런데 제 형이 형무소에 있기 때문에.... 초인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복도 쪽에서 들려왔다. 저는 결코 재판소나 검찰청에 배속되지 않을 겁니다. 샤로크는 계속했 다. 그러면 저에게는 경제 분야에서의 법률활동만이 남게 됩니다. 저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싶습니다. 학교에 들어오기 전에도 저는 프룬제에 있 는 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저는 그곳 사람들을 이해하고 생산에 대해서 도 알고 있습니다. 부쟈긴은 심드렁하게 샤로크를 건너다봤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타인 에 대한 감독의 권한을 자신하고 있었다. 유리 같은 부류가 그에게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 텐가? 그는 다수를 움직이고, 또 다수의 운명을 결정 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에게르트를 찾아가 보게. 내가 그에게 얘기할 테니. 감사합니다. 이반 그리고리예비치 씨. 형은 무슨 짓을 저질렀지. 강도를 하다 붙잡혔습니다. 아직 젊은데! 친구를 잘못 만났어요.... 우린 낡은 재판제도를 폐기했지만 새 제도는 아직 반밖에는 완성되지 않았어. 우린 지금 교육받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네. 알고 있습니다. 이반 그리고리예비치 씨. 샤로크는 진심으로 동의했 다. 하지만 그건 저한테 달려 있지 않습니다. 법원이나 검찰청을 위해 일 하고 싶어도, 형이 그렇게 되는 바람에.... 에게르트, 가서 그를 만나 보게. 부쟈긴이 되풀이했다. 내가 그에게 전화하겠네. 그런데 자네는 법률고문이 되겠다는 건가? 그가 빈정거리는 투로 얘기한 <법률고문>이란 말이 유리의 감정을 건드 렸다. 그러나 일단 목적은 달성했다. 결과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게 바 로 일을 해나가는 방식이었다. 어떤 사람한테는 힘들게 보이겠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모든 게 식은 죽 먹기였다. 한때 돈이면 다 되는 시절이 있었 지만 요즘 세상에는 뭐니뭐니해도 권력이 최고였다. 그는 이제 모든 것과 끝장이었다. 학교, 그리고 언제나 시큼한 양배추 냄새가 풍기던 구내식당, 지겨운 토요일 날의 자원봉사. 지루한 회의, 끝 없는 과제물, 그리고 무얼 잘못 말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도 끝장이 었다. 그는 학교에 갈 때는 새로 맞춘 옷조차 입지 못했다. 노동조합에서 나오는 싸구려 모직바지 하나를 주문하려고 몇 년 동안 애를 쓰는 학생들 앞에 그렇게 차리고 나타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한데 모여 멋대로 지껄일 것이다. 그는 적의에 찬 그들의 얼굴과 험악한 표정, 그리고 지도자들의 낭패감을 상상할 수 있었다. 넌 내 임무에서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구나, 샤로크 이 더러운 놈.... 그러면 그는 비웃는 듯한 웃음을 입가에 슬며시 떠올릴 것이다. 뭐가 어떻게 되었 다는 건가? 도대체 뭐가 불만이란 말인가? 나는 단지 내가 원래 있었던 공 장으로 되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즉, 내가 자란 집단에 다시 합세하기 위 해 돌아갈 뿐이다. 그때엔 7백 명이 있었지만 지금은 5천 명이 있다. 그곳 이야말로 5개년 계획의 진원지다. 나이가 어린 전문가가 그곳에서 일한다 는 것은 하나의 영광일 것이다. 자리는 말해 놓았나? 아니,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 공장과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었고 학교를 마치면 되돌아 오겠느냐고 그들일 물었을 때도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밖에 무슨 말이 필 요하겠는가? 하여튼 내게 관심을 가져 줘서 고맙다. 나는 어디까지나 소박 한 소비에트인이니까. 그것으로 그들은 말문이 막힐 것이다. 그들은 말투를 바꾸고 등을 찰싹 때리며 말할 것이다. 좋아, 샤로크, 훌륭해, 네가 해야 할 일을 해라! 그는 자신의 힘을 느꼈고, 학교 친구들에 대한, 그리고 소비에트 제 5차 주택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승리의 감정을 느꼈다. 오만한 이들 지식인들 은 늘 그를 너그럽게 대해 주었다. 그러나 사샤 판크라토프가 부쟈긴에게 똑같은 일을 청한다면, 부쟈긴은 당장 그 부탁을 거절하고, 어디든 당이 보내 주는 곳에 가서 일을 하라고 말할 것이다. 나 샤로크는 아직 빵껍질 이나 던져 받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샤로크를 존경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빵껍질을 나에게 던져줄 수 있는 것이다. 친구들 또한 결코 날 존경하지 않았었다. 이제 그들은 도움을 청하러 부쟈긴에게 달려간 날 경멸할 것이 다. 그들 좋을 대로 생각하도록 놔 둬라. 어쨌든 난 충고를 들으러 부쟈긴에 게 갔을 수도 있다. 오래 된 친구처럼. 그렇다. 바로 오래 된 친구에게 찾 아갔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그들은 점잖기 때문에, 왜 갔었느냐고 묻 지 않을지도 모른다. 안녕! 샤로크가 소리쳤다. 잘 있었니? 막스 코스틴이 사람들을 대표하여 답례했다. 잘 다려진 겉옷, 반짝이는 부츠, 조심스럽게 빗은 붉은 머릿결, 벌어진 어깨, 얼굴에 핀 해맑은 미소 등 학교를 졸업할 학생이면 당연히 그러하 듯, 그는 정말 눈이 부셨다. 그의 옆에는 니나 이바노바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구두 뒤축을 구겨 신 고 있었다. 조금 큰 사이즈로 샀어야 하는 건데,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샤로크는 혼 자 생각했다. 니나는 옷에 대해선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를 가 나 똑같은 낡은 자켓을 입었다. 또한 머리에 대해서도 말처럼 널찍한 이마 를 가리는 대신에 뒤로 빗어 넘겨야 할지 말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바짐 마라세비치의 어깨를 툭 쳤다. 유리는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의사의 아들인 이 순진한 수다쟁이한테 상냥하게 대했다. 바짐은 안락의자 에 파묻혀 M. G. 웰즈(영국의 비평가)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그는 몸집이 뚱뚱한 데다 입술도 두툼했다. 흐릿한 눈 위에 짧은 눈썹이 붙어 있었다. 어린 블라들렌 부쟈긴이 긴 갈색 양말을 신은 다리를 겹치고 앉아 숙제 를 하고 있었다. 레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동생의 펜놀림을 바라보고 있었 다. 그녀는 유리에게 미소를 짓고는 앉으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샤 판크라토프만 빼고 그룹 모두가 모인 것이다. 웰즈는 전쟁과 유행병, 미국의 분열을 예언하고 있어. 바짐이 말했다. 그렇게 되면 과학자와 비행사들이 권력을 잡게 될 거야. 니나가 반박했다. 인류의 역사는 공상과학소설이 아냐. 권력을 잡는 건 계급이란 말야. 맞아. 바짐은 겸손하게 동의했다. 하지만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야. 우주를 정복할 사람들은 과학자나 비행사, 즉 미래의 권력의 지렛대인 테 크노크라트란 말야. 이봐, 만일 독일이 재무장을 하면 모두가 재무장을 할거야. 막심이 말 했다. 히틀러는 오래 가지 못할 거야. 니나가 들고 나왔다. 사회민주당이 팔 백만 표를 얻었고, 공산당이 오 백만 표였단 말이야. 하지만 그들은 탤만을 지키지 못했어. 유리가 대화에 끼여들었다. 그 는 만일 오 백만이 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면, 그들은 그다지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의 말에 숨은 뜻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들의 신 념은 너무도 강해서 친구의 마음을 의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 다. 그들은 논쟁을 하며 때로는 다투기까지 했지만, 그들의 삶에 의미를 던져 주는 것은 바로 마르크시즘과 계급의 이념, 투쟁의 마지막 목표로서 의 세계혁명, 소비에트국가, 그리고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라는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신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들은 권모술수라는 걸 몰랐어. 막심이 말했다. 지미트로프가 그 체제를 흔들게 될 거야. 바짐 마라세비치가 말했다. 나무를 흔들어 배를 떨어지게 만드는 거나 마찬가지지. 볼만할 거야. 세 기적인 재판이지. 그는 다가오는 지미트로프의 재판과 전쟁의 가능성, 아니 가능성이라기 보다는 그만이 식별할 수 있는 발발의 징후에 대한 생각들을 마구 떠벌렸 다. 그러나 바짐 마라세비치의 이론은 여기서는 이미 다 알려져 있었기 때문 에, 그들은 그가 계속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도록 놔두려 하지 않았다. 인 류는 천만의 인명을 앗아간 지난번의 전쟁을 거의 잊지 않고 있었다. 소련 에 대한 공격? 세계의 노동자계급이 그걸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는 옛날의 그런 러시아가 아니다. 마그니토고르스크와 쿠즈네츠크에 서 주철을 만들어내고 있고, 스탈린그라드와 첼리야빈스크, 하리코프의 트 랙터공장과 고르키와 모스크바의 자동차공장이 건설 중에 있으며, 소비에 트 최고의 압연공장이 이미 지어졌다. 그들의 가슴은 자부심으로 부풀어올랐다. 이곳은 그들의 국가요.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첨병이며, 진보적인 세계혁명의 실험무대요, 위기와 실업, 도덕적 타락과 정신적 빈곤으로 갈가리 찢겨진 세계에 떠 있는 유일한 희 망의 섬이었던 것이다. 배급 카드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 모든 것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지금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고 있었다. 토르그신 상점의 화려한 진열장은 사람들이 굶주리는 한 추잡하게 보이겠지만, 거기 에서 벌어들인 황금은 공장의 건설을 도왔다. 그것은 풍요한 미래에 대한 담보였다. 그들은 늘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항상 존재하는 그대로였다. 윤이 나는 마룻바닥, 낮게 드리운 남포갓 아래 놓인 긴 테이 블, 그 테이블 위의 마말레이드, 그것들은 모두 국가 고위관리의 정돈된 가정의 평온함을 말해 주고 있었다. 레나의 어머니가 차를 따르며 물었다. 막심, 레몬을 넣을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 출신의 이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러시 아 이름은 유리에게 어색하게만 들렸다. 결국 그들이 성취한 것은 무엇이던가? 그들에게 열려진 모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니나는 학교교사였고, 레나는 공학도서관에서 영어를 번역했으 며, 막심은 이제 곧 보병학교를 마치고 군대에서 땀을 흘릴 것이다. 그들 은 마음을 열어 놓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들의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유리 샤로크의 생각은 그랬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물었다. 사샤에게 무슨 일이 있니? 그는 오지 않을 거야. 막심이 대답했다. 샤로크는 막심의 짤막한 대답에서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소식을 언 제나 알고 있는 콤소몰 조직책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 있었어? 사샤에게 약간의 문제가 있어서 자기 아버지가 글린스카야에게 전화를 했었다고 레나가 대답했다. 그 고집스런 사샤가? 것 봐, 네가 뭘 안다고! 그것이 유리의 기분을 괜 찮게 만들었다. 그가 콤소몰에 가입신청을 냈을 때, 사샤는 약간 <자신이 없는> 연설을 하고 표결에 기권했었다. 공장에서는, 샤로크가 밀링머신 조 작 견습생으로 있는 동안 사샤는 트럭에서 짐을 부리며 일년 내내 하역부 로 일을 했다 - 물론 이 나라에서는 하역부도 필요하기는 했다. 사샤는 역 사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대신 공학으로 들어갔다. 물론 이 나라는 기술자 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저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작은 일이었다면 결코 부쟈긴이 간섭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리가 말했다. 학교에서 어떤 애가 이렇게 농담을 했어. <아내란 게 뭐지? 의자 위에 놓인 압핀>이라고 말야. 그 친구는 그걸 멘델 마란츠의 책에서 읽은 거야. 바짐 마라세비치가 말했다. 그는 <국제여성의 날> 모임에서 그 얘기를 했어. 그래서 학교와 콤소 몰, 노동조합에서 다 쫓겨났지. 농담이라도 때와 장소를 좀 가려라. 니나 이바노바가 말했다. 만일 다 쫓아낸다면 누가 남게 되지? 막심이 상을 찌푸렸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5 레나 부쟈기나는 국외에서 망명정치가의 딸로 태어났다. 혁명 후, 당시 외교관이던 아버지와 함께 처음 러시아로 들어왔을 때, 그녀는 자기 나라 말조차 제대로 못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보이고 싶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녀가 처한 특수하고 배타적인 상황은 그녀에게 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민족적이며 러시아적이라고 보는 모 든 것에 대해 극히 민감했다. 그녀는 독립심이 강하며, 거칠고 수수께끼 같은, 단순한 노동자계급 출 신의 청년인 유리에게 금방 마음이 끌렸다. 그녀는 니나 이바노바와 함께 그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려고 했다. 물론 유리에 대한 관심이 전적으 로 교육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유리도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당시 애정 따위는 진정한 콤소몰 회원들에게는 무 가치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혁명의 자식들로서 그들은 어떤 개인적인 방심 도 사회에 대한 배신으로 굳게 믿었다. 학교를 떠난 후 유리는 특별히 그녀와 가까워지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학교 시절에 느꼈던 감정을 정확히 그 수준에서 계속 유지하려고 했다. 때 때로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영화를 보거나 차를 마시자고 제안했고, 그룹 전체가 모여 있을 때면 가끔씩 들러 보기도 했다. 그날 복도에서의 포옹은 유리가 그녀에게 내딛는 첫발이었다. 의도적으 로 그는 충동적이고 거칠게 행동했지만 거기에는 그녀와 같은 성격을 가진 여자도 정복할 수 있을 거라는 일종의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며칠 동안 그녀는 유리에게서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예전에 그들이 서로 통화하던 식으로 자연스럽게 그에게 전화 를 걸었다. 그녀는, 말끝을 정확히 하고 또 각 단어의 강세가 올바른 자리 에 떨어지도록 애를 쓰며, 침착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녀는 또 전화 속에서도 그녀의 부끄러운 미소가 훤히 떠오를 수 있도록 천천히 그 리고 부드럽게 얘기했다. 유리도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한테 전화 걸려던 참이야. 육 일날 버지니스 클럽의 입장권을 두 장 구했거든, 오지 않을래? 그래, 갈게. 그녀가 대답했다. 11월 6일 저녁, 유리는 그녀를 만나러 왔다. 긴 청록색 이브닝 드레스에 희미한 진주장식을 검은머리에 단 그녀는 정말 숨막힐 듯 아름다워서 마치 딴 세계에서 온 여자 같았다. 오직 부끄러운 듯한 미소만 낯이 익었다. 그 미소는 누구를 위해 자기가 그렇게 꾸몄는지를 아는가 하고 묻는 것 같았 다. 그녀는 주방문을 열었다. 열 시까지는 자리에 누워, 블라들렌. 응. 블라들렌은 창턱에 뭔가를 쌓고 있었다. 식들은 다 어디 갔지? 그녀에게 코드를 입혀 주며 유리가 물었다. 아빠는 크라마토르스크에, 그리고 엄마는 랴잔에 계셔. 놀러 가신 거야? 아빤 휴일에는 늘 공장들을 돌아보시거든, 그리고 엄만 강연이 있어. 그녀는 긴 드레스를 코트 안으로 추스르며 웃었다. 드레스가 길면 좀 불편해. 그들은 운이 좋았다. 자동차 한 대가 어느 집에서 막 빠져 나오는 데 레 나가 우연히 운전사를 알아봤고, 그 운전사가 그들을 태워 준 것이다. 중 년쯤 돼 보이는 그는 고급 관리들의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자기 직업 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레나에게는 사근사근했지만 유리에게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사실 유리는 그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대 신에 댄스가 끝나면 레나를 집에 데려다 주어야 할거라는 생각에만 몰두해 있었다. 자동차 뒷좌석의 부드러운 시트 위에 그녀와 함께 앉아 있다는 사 실이 그를 자극했다. 그러나 그를 더욱 흥분시키고 가슴 뛰게 만든 것은 오늘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에겐 아는 여자가 꽤 있는 편이었지만 이런 여자는 처음이었다. 이웃 의 세탁소 여인, 교정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 아버지와 함께 방문한 마을 의 아가씨들. 그들과 같이 있으면 모든 게 더욱 따분했다. 그들은 어떻게 자신을 돌봐야 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지 책임을 져야 할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실 부쟈긴의 딸과 논다는 건 위 험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유리의 입장이라면 결국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하겠지만, 유리는 그와 같은 엄청난 도약이 두려웠다. 레나를 원하는 타입 의 아내로 만들 자신이 있을까? 그는 그의 가족 말고 낯설고 적의에 찬 그 녀의 가족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기다려야 했다. 그는 변호사가 되어 자립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레나와 결혼한다면, 그는 그 녀의 마차를 얻어 타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들은 버지니스클럽 앞까지 왔다. 유리는 어떻게 차 문을 열어야 될지 몰랐다. 먼저 한 손잡이를 돌려보고 또 다른 것을 돌려 봤지만 소용없었 다. 레나가 그의 앞으로 몸을 기울여 문을 열고는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 차 손잡이는 아주 비협조적인데? 그의 실수를 덮어 주려는 그녀의 말은 오히려 그의 화를 돋우고 말았다. 한번도 그런 차를 타 본 적이 없다는 사실만 강조한 셈이었던 것이다. 그 러나 그는 자신을 달랬다. 운전사를 차갑게 한번 쏘아보고 그는 레나를 따 라 클럽으로 들어갔다. 그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을 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는 레나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자기한테 쏠리는 눈초리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여자들이 자신을 쳐다 보는 데에 익숙해 있었지만, 지금 그들의 눈길은 특별히 다른 데가 있었 다. 그날 저녁 그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자가 그 들로서는 보통 궁금한 게 아니었다. 루슬라노바가 노래를 부르고 헨킨이 조쉬첸크의 단편들을 낭독했다. 그 리고 나서 춤이 시작되었다. 레나는 얌전하게 춤을 추었다. 적어도 그가 댄스홀에서 만났던 아가씨들보다는 경망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어 색해 하는 자신을 비웃으며 그에게 몸을 꼭 밀착해 왔다. 레나가 화장실에 간 동안, 유리는 기둥에 기대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둘 러보았다. 산업계의 지도자들, 고위 행정관리, 과학자, 모스크바에서 내노 라 하는 기술 계통의 인텔리겐챠들이 이곳에 다 모여 있었다. 이들은 인민 위원회에 일하면서 자기들 상관 앞에서는 벌벌 떨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두둑한 봉급과 보너스를 받고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가게에서 물건을 샀다. 유리는 모든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졸업 후에 최상의 직장에 들어 간 행운아들은 빠른 속도로 승진을 거듭했고, 공장에 파견되어 일하는 사 람들에게는 힘든 작업의 연속일 뿐이었다. 공장에서 그는 무엇을 성취할 수 있을까? 이 법정에서 저 법정으로 뛰어 다니며 해고, 결근 같은 사소한 것들이나 물자가 떨어지고 보호용 장갑의 질이 형편없다는 따위로 들어온 소송을 처리할 것이다. 인민위원회의 정식 부서, 혹은 이사회, 아니면 기획부서에서라도 근무한다면, 사정이 좀 달라 질 것이다. 고등법원이나 소비에트 연방의 대법정에서 다루어지는 큰 사건 들. 그런 건 장차 변호사로서의 경력에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은 나중의 일이었다. 우선 지방 법원에 배치되는 걸 피해야만 했다. 그런 날에는 모든 게 훨씬 간단해질 것이다. 11시였다. 유리는 수위가 입구를 잠그기 전에 레나를 집에 바래다주고 싶었다. 피곤해? 그가 물었다. 조금만 더 있어.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일어선 것은 새벽 1시가 넘어서였다. 숨이 턱턱 막히는 클럽에서 빠져 나오니, 밖에 내리는 보슬비가 무척 시원했다. 거리에는 개미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빗줄기에 흔들리는 가로등을 빼면, 생명의 신호란 루 비얀스카야 광장에 있는 비밀경찰 건물에 켜진 등불뿐이었다. 그들은 레나의 집에 도착했다. 잠깐 올라왔다 가. 유리는 그녀가 자기를 믿고 거침없이 말하는 태도에 깜짝 놀랐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늙은 수위는 그들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지금 시간에 웬 손님이냐고 그 는 묻지 않았다. 그는 아주 노련한 탓으로 어떤 일에도 놀라움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녀는 현관의 전등을 켜고 주방을 들여다보았다. 자고 있어. 그녀는 아이가 자고 있는 것에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그것은 유리가 거 기에 있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옷 갈아입을 동안 아빠 방에 가서 앉아 있어. 그녀는 서재의 천장에 달린 전등을 켜고 그를 남겨 둔 채 혼자 나갔다. 그는 쌓인 책더미에 눈길을 던졌다. 장서표가 끼워진 레닌 책 한 권이 있었고, 몇몇 야금 관계서적과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포트르 대제>도 있었 다. 어떤 공식적인 서류나 비밀문서, 그리고 <그들>만이 손에 넣을 수 있 는 금서는 보이지 않았고, <그들>이 모두 가지고 있을 권총도 도무지 어디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브라우닝이어야 될 거야. 유리는 자신했다. 그 래야만 뒷주머니 속에 찔러 넣기가 쉬울 테니까. 그에겐 금지된 것들에 대 한 호기심이 대단했다. 그들 권력의 비밀을 손으로 직접 만져볼 수 있게 되기를 그는 갈망했던 것이다. 그녀가 곧 돌아올 것이니 빨리 서둘러야 했다. 책상 가운데 서랍을 열어 봤지만 잠겨 있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의자에 막 등을 기대 고 앉는 순간 레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늘 보던 것처럼 감청색 스커트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커피 좀 마시겠어? 작은 방안에서 움직이다 보니 어쩌다가 살갗이 맞닿았다. 그녀는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커피를 따르려고 그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순간, 그는 풍만한 그녀의 젖가슴을 보았다. 밤에 그녀와 단 둘이 있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물론 그렇게 커피나 리큐르를 마셔 본 적도 없었고. 좀더 마실래? 됐어. 그는 소파에 가서 앉았다. 여기 앉아. 여전히 커피잔을 한 손으로 잡은 채, 그녀가 옆에 앉았다. 유리는 그녀 의 손에서 잔을 받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놀라움의 미소를 지으며 그를 응시했다. 그는 갈구하는 듯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거칠게 그녀를 껴안았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6 11월 7일, 사샤는 트베르스카야 가와 볼샤야 그루진스카야 가가 만나는 모퉁이에서 자기 학교의 행렬을 기다렸다. 행렬은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행진하는 사람들 머리 위로는 스 탈린을 찬양하는 깃발과 페넌트, 초상화가 나부끼고 있었다. 중년의 사람 들이 사뭇 엄숙하게 트럼펫을 불었고, 대열로부터는 음정이 맞지 않는 노 래가 퍼져 나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리 한가운데로 나와 춤을 추고 있었 다. 확성기를 통해 붉은 광장에서 나오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라디오 해설자의 목소리, 마브졸레이(1924년에 축조된 레닌의 묘소, 메이 데이나 혁명기념일의 시위행진 때에는 연단으로 사용된다)에서 나오는 인 사말, 그리고 시위자들이 광장을 행진하면서 지르는 승리의 함성들. 사샤의 학교 행렬은 2시간 후에 도착하여 잠시 멈춰 섰다. 대열이 무너 지고 행진하던 사람들이 서로 엉켰다. 사샤는 원래의 자기 그룹에 합세하 기 위해 군중 속으로 밀치고 들어갔다. 갑자기 그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기한테 쏠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말썽을 일으키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전 혀 그걸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쳐다볼 때와 같은 언짢은 표정들이었다. 이 런 일은 그 위원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전혀 딴 차원의 일이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고 그도 묻지 않았다. 친구인 루노츠킨만이 분명 히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듯했지만 자고 있는 깃발 때문에 움직이질 못 했다. 대열 속에 들어가, 대열 속에 말야! 인솔자들이 소리쳤다. 대열은 사전에 정렬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샤는 행렬 맨 끝에 가서 섰 다. 그는 루노츠킨과 또 한 학생이 잡고 있는 두 개의 장대 끝에 나부끼는 자기 학부의 플래카드를 볼 수 있었다. 바람을 받아 플래카드가 두루루 말 렸다가 다시 곧게 퍼졌다. 행렬이 다시 움직였다. 승리의 광장에 이르기 전에 행렬은 다시 멈췄다. 대열이 또 한번 얼크러 졌다. 사샤는 앞으로 나아가서 루노츠킨과 만났다. 우리 벽신문이 뜯겼어. 작고 구부정한 루노츠킨은 사팔뜨기여서 얘기를 할 때 비켜 서 있거나 머리를 약간 틀고 있곤 했다. 벽신문이 왜 뜯겼을까? 그런 일이 없었는데. 누가 그랬지? 바울린이야. 시 때문이래. 그 시들이 특별작업운동(규정량 이상의 실적 을 올리기 위한 노동운동)을 조롱한다는 거야. 루노츠킨은 벽신문 편집장이었다. 그러나 진군하는 학생노동자에 관한 시를 싣자고 한 사람은 사사였고, 그 그룹의 리더인 코발료프를 빗대는 시 하나를 직접 쓰기도 했던 것이다. 이제 그건 유행이 되었다네 정열을 품고 일을 하는 건 다른 세 개의 시는 로자 폴루잔이 썼다. 그녀는 보리스 네스테로프를 그 의 끝없는 식욕을 가지고 건드렸다. 그가 천국의 문에 이를 때/그는 자기 날개를 한 그릇의 밥과 바꾸리라. 포트르 푸자노프는 낮잠 때문에, 그리 고 프리호드코는 노력동원 중에 여우사냥을 특히 좋아해서였다. 그래서 프 리호드코는 누구보다도 동원을 많이 나갔다. 그 시들은 썩 좋은 작품이 못 되었고, 재미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순수한 면은 있었다. 특별작업운동을 조롱한다! 뭐가 조롱한다는 거지? 루노츠킨이 고개를 갸웃했다. 시가 그렇다는 거야. 하필이면 특별작업대원들만 이냐 이거지. 난 우연 히 실린 특별작업대원들의 사진 때문에 그 시가 싸잡아서 오해를 받은 것 이라고 설명했어. 그러자 이번에는 왜 사설이 없냐고 묻는 거야. 사설을 싣지 말자는 것도 사샤의 아이디어였다. 모든 신문들이 쓰고 있 는 내용을 무엇 때문에 되풀이한단 말인가? 신문이란, 특히 국경일 신문은 밝고 명랑해서 사람들이 생동감 있게 읽을 수 있어야지, 단지 복도에 볼품 없게 붙어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른 친구들도 그에게 동의를 했다. 단지 조심스러운 로자 폴루잔만은 그에게 의미 있는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네가 사설을 쓰고 서명을 한다면 더 낫지 않을까. 너 아지쟌이 그렇게도 무섭니? 그는 그렇게 그녀에게 되물었었다. 그런데 맙소사, 일이 이 모양으로 돼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아지쟌과 걸려 있는 일이 있는데, 이번 일까지 터지고 만 것이다. 좋다. 우리 스스 로 우리를 지켜나갈 것이다. 스트라스트나야 광장에서 행렬이 다시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정지하는 곳이 없었다. 인솔자들은 대열 속에 끼여든 사람이 없는가 세심하게 체크 했다. 그들은 대열을 더 반듯하게 다듬고, 간격을 바짝 좁혔다. 그래야만 마지막 구간을 멈추지 않고 행진하여 붉은 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울린과 로즈가체프가 그들 그룹에게로 다가왔다. 로즈가체프는 학교 대열의 지도자로서, 붉은 완장을 차고 있었다. 바울린은 차갑게 사샤를 노려봤다. 자넨 시위에 참가해야 된다는 사실을 모르나, 판크라토프?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행렬이 지나가는 도 중에 합세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그리고 바울린은 수천 명의 학생들이 학 교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나중에 대열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사샤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만 유독 관찰 의 시선을 맞춰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지금 그런 말을 함으로써 사 샤의 과오를 공식적인 기록으로 처리하기 위해 다가온 것이었다. 바울린은 사샤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한테 감히 대들지는 못하리라는 것 을 알고 있었던 만큼, 그건 더욱더 비열한 짓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가 어떻게 그런 말을 했겠는가? 당신도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시위에 참가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유 령이 아닙니다. 사샤는 아르바트의 지식청년들이 누구와 말다툼을 벌이게 될 때 사용하 는 아주 정중한 태도로 얘기했다. 경고하겠는데 조심하도록 해. 바울린은 그렇게만 말하고 사샤의 대답 도 듣지 않고 가버렸다. 역사박물관을 끼고 두 개의 흐름으로 나아가던 대열은 점점 간격을 좁히 면서 붉은 광장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광장을 가로지르면서 붉은 군대의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곳에 이르자 다시 갈라졌다. 사샤의 대열은 마브졸레이를 스쳐 지나갔다. 연단 위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제복을 입은 무관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아는 척하지 않았 다. 모든 시선이 마브졸레이로 집중되었다. 그들 모두는 오직 한 가지 생 각으로만 골몰해 있었다. 과연 저곳에 스탈린이 나와 있을까?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사진과 조각품들에서 금방 빼낸 것 같은, 까만 콧수염을 기른 얼굴, 그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함성소리가 점점 더 높아졌다. 스탈린! 스탈린! 다른 사람들 과 마찬가지로 사샤도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 스탈린! 스탈린! 하고 외치며 행진해 갔다. 그들은 마브졸레이를 지나친 후에도 계속 뒤를 돌아 보려고 했다. 그러나 병사들이 그들을 앞으로 밀어붙였다. 빨리 가! 빨 리! 성 바실 성당 앞에서 대열은 무너졌다. 무질서한 군중들은 강 쪽으로 몰 려가 다리 위로, 제방 위로 꾸역꾸역 올라갔다. 북과 트럼펫, 플래카드, 크고 작은 깃발들이 모두 트럭에 실렸다. 지치고 허기가 진 그들은 카메니 다리를 건너 서둘러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순간 광장에서 들려오는 천둥 같은 함성소리가 제방까지 메아리쳤다. 스탈린이 행진하는 군중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팔을 쳐든 것이었다. 국경일 다음날, 당위원회와 학교 당활동가들의 긴급회의가 회의실에서 열렸다. 연단에 선 로즈가체프가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그가 얘기를 시작했다. 교내에서 두 번에 걸친 반당행위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회계에 마르크 시즘을 적용하는 데 대한 판크라토프의 비난이며, 둘째는 역시 판크라토프 에 의한 벽신문의 발행입니다. 콤소몰 회원인 루노츠킨, 폴루잔, 코발료 프, 포즈드냐코바가 거기에 가담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들은 당원이나 콤소몰 회원들로부터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정치적 성실 성이 희박해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는 계속했다. 국경일에 발행된 그 신문은 10월 혁명 16주년 기념일에 대한 사설을 싣 지 않았으며, 스탈린 동지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또 특 별작업대원의 사진이 이른바 <시>라는 악의로 가득 차고 중상 모략적인 글 과 함께 실렸습니다. 그 시들 가운데 여기 마침 판크라토프 자신이 지은 시가 있습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정열을 품고 일하는 건 이제 유행이 되었다네 이제 유행이 되었다는 건 도대체 뭘 의미하겠습니까? 로즈가체프는 냉혹한 눈초리로 청중들을 훑어봤다. 우리는 정말 노동을 하나의 <유행>으로 보고 있습니까? 사회주의의 기 초를 창조하는 것은 우리 인민들이 수행하는 노동입니다. 우리는 노동을 하나의 명예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판크라토프에게 그것은 단지 또 하나의 <유행>일 뿐입니다. 오로지 우리 인민을 중상 모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조잡한 비평가만이 그런 식으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지쟌 의 강의에 대한 비난과 크리보루츠코의 옹호가 단지 우연한 일치일 뿐이라 고 강변함으로써, 어떤 사람이 판크라토프의 행위를 얼버무리려 한 것이 바로 지난번 당위원회 회의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란 누구였소? 다른 사람들은 물론 바울린 또한 로즈가체프가 염두에 둔 사람이 누구인 지 알고 있었다. 저는 교수회의 의장인 얀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책임을 회피하리라 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는 회피하지 않을 것이오. 바울린이 말했다. 얀슨 동지에 의해 이 조직사회에 만연된 자유방임적 분위기가 판크라토 프로 하여금 정치적 사보타지를 행하도록 허용했습니다. 수치스러운 일이군요! 준수한 용모의 4학년 학생인 카레프가 소리쳤 다. 그는 교내에서 선동가이며 모략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학교 당위원회는 판크라토프의 비난과 벽신문의 발행에 단호하게 대응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당 조직이 전체적으로 건강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굳건하고 무자비한 결단이 그런 사실을 확인해 주 고 있습니다. 로즈가체프가 자기의 서류를 챙겨 연단을 내려왔다. 그 신문의 편집장이 여기에 있소? 바울린이 물었다. 모두들 루노츠킨을 찾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체구가 작은 시골뜨기 소년이 연단으로 올라왔다. 바울린은 악의를 부드러움으로 포장한 일상적인 어투로 얘기했다. 당신들이 어떻게 하여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됐는지 우리에게 야기해 주 시오, 루노츠킨. 우리는 교지에 실리게 되어 있는 사설들을 굳이 반복할 만한 가치가 없 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지가 그렇게 하는 것과 그게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오? 바울린이 인 상을 찌푸렸다. 당신들이 신문을 발행했을 때는 그런 사설이 나오지도 않 았었소.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설이 무슨 내용이었는지 알고나 있었소? 물론입니다. 장내에 웃음소리가 퍼졌다. 바보같이 굴지 마시오! 그게 실려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내린 게 누구 요? 판크라토프? 바울린이 화를 벌컥 냈다. 기억이 안 납니다. 기억이 안 난다? 당신은 사설을 싣지 말자는 데 놀라지도 않았소? 루노츠킨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시를 집어넣자는 판크라토프의 제안이 놀랍지도 않았단 말이 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못하겠소? 로즈가체프 동지가 제기한 관점으로 하자면 그렇습니다. 제 과오를 인정 합니다. 그럼 당신의 관점은 뭐요? 루노츠킨은 입을 다물었다. 바보 같은 자식이군! 카레프가 한 말이었다. 바울린이 그의 서류를 들여다봤다. 포즈드냐코바가 여기 있소? 나쟈 포즈드냐코바가 미소를 지으며 연단으로 올라왔다. 예쁜 아가씨였 다.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사샤 판크라토프가 사설을 쓰지 않기 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콤소몰 조직책이니 만큼 우리는 그가 말한 대로 따 라해야 했습니다. 그럼, 그가 2층에서 뛰어내리라면, 당신은 그렇게 하겠소?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하며 대답했다. 제 생각 으로는.... 당신은 생각을 안 했소. 바울린이 끼여들었다. 당신에겐 특별작업운 동이 이런 식으로 조롱을 당하는 게 즐겁소? 아닙니다. 그럼 왜 반대하지 않았소? 그들은 제 말에 들은 척도 안 했을 겁니다. 하지만 당위원회로 올 수는 있었을 텐데. 저는.... 그녀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저는.... 됐소, 자리에 가서 앉으시오. 바울린은 서류를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폴루잔! 청중들 틈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 말은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소. 판크라토프 본인이 대답하게 하 시오. 판크라토프에게도 차례가 갈 것이오. 폴루잔, 무슨 일이 일어났었나 얘 기하시오. 바울린이 말했다. 저는 모든 게 중대한 과오였다고 생각합니다. 로자 폴루잔이 진술을 시작했다. 과오에도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소. 바울린이 그녀에게 상기시켰다. 이번 일은 정치적인 과오였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그렇게 솔직하게 얘기했어야 했소. 우리들 마음대로 그렇게 넘 겨짚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오. 저는 그것이 엄청난 정치적 과오였다고 생각합니다. 로자가 계속했다. 저는 사설을 싣자고 제안했다는 사실을 고려해 주시기를 부탁드릴 뿐입니 다. 그것으로 당신은 용서받을 거라고 생각하오? 바울린이 힐난했다. 당 신은 그 일에서 손을 씻음으로써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 고, 또 그럼으로써 당신만은 안전하리라 생각했소. 그러나 그렇게 저속한 글이 벽에 붙어 있다는 사실로도 당신은 괴롭지 않았소? 더구나 그 중에는 당신 스스로 쓴 시도 있었는데, 안 그렇소? 그렇습니다. 어떤 것들이요. 네스테로프, 푸자노프 그리고 프리호드코에 대한 시입니다. 아, 그래요 - 꿀돼지, 잠꾸러기, 사기꾼들이라! 그러면 당신은 그게 특 별작업운동을 명예롭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소? 바울린이 조롱하듯 물 었다. 그건 제 과오였습니다. 로자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앉으시오. 다음 코발료프! 코발료프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연단으로 올라왔다. 솔직하게 고백컨대 저는 이번 사건의 정치적 본질을 완전히 깨닫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고 부적절한 장난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제야 우리 모두가 판크라토프의 손에 놀아난 도구에 불과했음을 깨 달았습니다. 사실이지 저는 사설을 싣자고 고집했습니다. 그러나 시 얘기 가 나왔을 때는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 중에 하는 저를 빗댄 것 이었습니다. 저는 만일 제가 항의를 하면, 비판받기를 꺼려하는 것처럼 생 각될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당혹스러웠단 말이오? 바울린이 능글맞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코발료프는 위원회에 찾아와서 일어났던 일을 정직하게 우리한테 얘기 했습니다. 로즈가체프가 끼여들었다. 만일 신문이 부착되기 전에 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오. 바울린이 반 박했다. 지형학 강사인 시베르스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샤는 그가 당원일 줄 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굽 높은 부처에, 감청색 승마복, 길고 하얀 코 카서스 셔츠를 입은 이 말없는 사나이는 흡사 짜르 군대의 장교처럼 보였 다. 코발료프, 당신은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당신을 빗댄 시에 대해 항의조 차 못했단 말이죠? 예, 그렇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을 빗댄 시에 대해선 왜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야비한 질문이오! 다시 카레프가 소리쳤다. 당신은 주제를 혼동하고 있소. 다른 목소리가 맞장구를 쳤다. 바울린이 손을 들자 장내가 숙연해졌다. 당신의 질문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시 베르스키 동지. 코발료프, 저 청년에게 인생을 그렇게 시작하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해주 고 싶었을 뿐입니다. 시베르스키는 조용히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토론 중에 다시 발언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바울린이 말했다. 그 럼, 여기서 주인공의 말을 들어보기로 합시다. 판크라토프, 발언하시오. 사샤는 뒷줄 다른 부서의 학생들 틈에 끼어 앞에서 하는 얘기를 들으며, 자기가 해야 할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샤가 자신의 과오를 인정 할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의 참회의 언어와 함께 자신을 정당화하는 말들을 듣고 싶었다. 그 일에 대해 그는 후회하고 있었던가? 맞다. 후회하고 있었다. 아지쟌 과 논쟁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신문도 예전에 해왔던 방식으로 발행할 수 있었다. 만일 그가 다른 행동을 취했더라면, 이 엄청난 사건, 갑자기 자신의 삶고 동지들의 삶에 기분 나쁘게 뛰어든 이런 사건은 결코 일어나 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지켜 주어야만 했 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어야만 했다. 이곳에선 바울린, 로즈가체 프 그리고 카레프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얀슨과 시베르스키, 그리고 그의 동지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공감하고 있었다. 장내엔 침묵이 감돌았다. 담배를 피우러 나갔던 사람들도 이제 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자세히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거운 짐이 저한테 지워져 있습니다. 사샤가 말을 꺼냈다. 로즈가체프 동지는 정치적 사보차지, 반당적 비난, 악의 등의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건 전적으로 옳은 말이오. 그 고함소리는 필시 카레프에게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었지만, 사샤는 어떤 야유도 못들은 척하기로 했다. 바울린이 연필로 책상을 두드렸다. 사샤는 계속했다. 아지쟌 강사는 강의 주제의 이론적 측면과 실제적 측면을 결합하는 데 실패했고, 따라서 우리로부터 강의의 중요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 갔습니다. 아지쟌이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바울린이 손짓으로 그를 제지했다. 신문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콤소몰 조직책으로서 그 사건에 대한 전적 인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너 참 훌륭하다! 그래 어디 한번 책임져 봐라! 하는 고함소리가 여 기 저기서 터져 나왔다. 사설일 필요 없다고 한 것도 저였고, 시를 넣자고 한 것도 저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의 하나는 제가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무슨 지시가 있었던 걸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시? 누가 그런 지시를 <당신>에게 내릴 수 있었소? 바울린이 사샤를 노려봤다. 한동안 사샤는 그 질문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걸 깨닫고 사샤는 대답했다. 당신에겐 무슨 질문이고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면 다 저한테 물어볼 권 리가 있습니다. 단, 날 모욕할 속셈으로 하는 그런 질문은 빼놓고요. 저는 아직 추방되지 않았습니다. 곧 그렇게 될 거야, 걱정하지 마라! 카레프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또한 우린 교지와 교내 게시판에 실릴 얘기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 때 문에 사설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쪽엔 더 경험이 많은 논객도 있고.... 아무렴, 그 시로 판단해 볼 때, 당신은 역시 시인 쪽에 가깝지 않겠소? 바울린이 빈정거리는 투로 지껄였다. 삼류시인이겠지! 사설을 빠뜨린 건 이미 과오였다고 인정했습니다. 이제 그 시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그것들 중에 비난할 만한 게 전혀 없습니다. 실수라면 특 별작업대원들의 사진 바로 밑에 그걸 넣은 것이겠죠. 그게 본래의 의미를 왜곡시켰습니다. 왜 그것들을 집어넣었소? 오로지 국경일에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말 재미있게 됐군. 그것에 대해선 다른 말이 없을 것이오! 바울린은 계속 말을 꼬았다. 그러자 모두 큰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저는 정치적 사보타지라는 비난만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 다. 사샤는 계속했다. 판크라토프, 당신은 혹시 누구한테 도움을 청하지 않았소? 아닙니다. 바울린은 반대쪽에 있는 글린스카야를 건너다보고 시선을 다시 사샤에게 로 돌렸다. 부인민위원인 부쟈긴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느냔 말이오? 아닙니다. 그러면, 그가 학장에게 당신을 선처해 달라고 한 이유는 뭐요? 사샤는 마르크를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삼촌인 랴자노프한테 그 얘길 했습니다. 분명히 삼촌이 부쟈긴에게 그 얘기를 전했을 겁니다. 그랬겠지. 바울린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랴자노프는 분명히 동부 에 있었을 텐데? 삼촌은 잠깐 모스크바에 와 있었습니다. 랴자노프는 우연히 모스크바에 오고 당신은 우연히 랴자노프에게 얘기하 고 그는 또 우연히 부쟈긴에게 전달을 하고, 마지막으로 부쟈긴은 우연히 글린스카야에게 전화를 하고, 흔치 않은 우연이 여기엔 너무 많다고 생각 하지 않소. 판크라토프? 그렇습니다. 전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보았습니 다. 라고 터놓고 얘기하는 게 보다 정직한 대답이 아니겠소? 저는 있었던 그대로의 상황을 설명했을 뿐입니다. 그는 얼렁뚱땅 넘어가고 있소!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소! 거 짓말쟁이! 그 외침들 중에 카레프 것도 하나 끼어 있었다. 더 말할 게 있소? 없습니다. 앉으시오. 사샤는 연단을 내려왔다. 발언하실 분 없습니까? 얀슨! 얀슨! 얀슨에게 얘길 시키시오! 얀슨이 화가 난 표정으로 연단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동지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 다. 당신에게 그런 얘길 하라는 게 아니오! 라는 고함이 방청석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객관적인 결과를 주관적인 동기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같은 거 아니오? 말장난하지 마시오! 아닙니다. 그것들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이제 그만 하시오. 당신 얘긴 다 들었어! 시베르스키가 다시 일어나서 얘기했다. 바울린 동지, 질서를 잡아 주시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떠한 결론도 얻 을 수 없습니다. 바울린은 그런 요청을 못들은 척하고 있었다. 얀슨이 고집스럽게 이야길 계속했다. 판크라토프는 비정치적인 지위를 맡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무지한 사람 들을.... 아직도 남았소? 카레프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얀슨이 움찔했다. 동지들,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내 얘기를.... 들을 게 없소! 이런 행위를 반당적 혹은 정치적 사보차지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우리 는 먼저 그 행위의 고의성 여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오직 고의적이라는 증거가 있는.... 당신은 주제를 회피하고 있소! 당신 자신의 정체가 무언지, 자신의 역할부터 밝히시오! 그렇다면 문제는 판크라토프에게 당을 해칠 의도가 있었느냐는 것입니 다. 나는 그에게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타협주의자! 유화주의자!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지 마시오! 얀슨 동지, 당신은 지금 이 사건에서 당신 자신이 개입한 부분에 대해 서 얘기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린이 지적했다. 넌 전혀 개입한 바 없습니다. 신문을 제작하는 데 도와 준 일도 없고 그것의 발행을 허가하거나 허가하지 않을 권리도 내겐 없습니다. 아지쟌 강사의 불평은 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왜 벽에서 신문을 떼 내지 않았습니까? 바울린이 물었 다. 나보다는 분명히 당신이 먼저 보았을 텐데요. 그럼 왜 나보다 먼저 보지 않았습니까? 거긴 당신 사무실에서 더 가깝 지 않습니까? 얀슨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라면.... 중요하고 말고! 말 한번 잘했소! 얀슨이 이번에는 좀더 오랫동안 서 있더니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웃옷을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은 채, 의장석에 앉아 있던 바울린이 입을 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웃지도 않고, 아주 단호하게 또박또박 끊어 가 며 얘기를 했다. 판크라토프는 자신이 무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고위층의 비 호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이름 앞에서는 당 조직이 행동을 취하지 못할 것으로 그는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당 조직은 당의 사 업과 당 노선의 순수성을 그 어떤 이름이나 권력보다도 상위에 놓습니다. 그는 박수갈채를 기대하고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나 불과 두세 명밖에 박수를 치지 않자, 그는 박수 같은 건 원하지 않았다는 듯 다음 말을 이었 다. 우리는 콤소몰 회원인 루노츠킨, 포즈드냐코바, 폴루잔, 코발료프를 보 며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들은 기술자나 소비에트의 전문가로 성장 하는 과정에서 한 발짝 뒤쳐진 사람들입니다. 즉 이들은 얀슨 동지에 의해 양육된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계급의 적에 의해 그토록 쉽사리 놀아난 이유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얀슨을 비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얀슨, 당신은 판크라토프를 위해 질 좋은 토양을 배양 했습니다. 심지어는 이 자리에서조차 당신은 그를 감싸주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당신을 의심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7 유리는 레나에게 자기들 사이의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얘기했 다. 유리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유리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유리가 그녀에게 바라는 전부였다. 유리는 그녀의 가족과 그녀의 집, 그녀 의 친구들을 피했다.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봐, 레나는 그의 바램을 들어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결코 그가 여자들을 집에 데려오도록 놔두지 않았지만 인 민위원의 딸인 레나에 대해서만큼은 관대했다. 유리는 그런 여자와는 결코 사귀어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샤로크와 그의 아내는 레나에 대해서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한 여자가 유리를 찾아온다고 해도 그것은 그들 젊 은이들만의 일이었다. 만일 그들이 잘 어울리면 결혼을 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헤어질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시대에 달렸다. 그들이 만약 결혼을 한다면, 아무리 그녀가 인민위원의 딸일지라도 자기의 시부모를 공경해야 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와 잠자리를 같이했으면서도 그에게 결혼하자고 졸라대지 않은 여인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레나는 그들의 조심성을 그들의 고귀한 품성 탓으로 받아들였 다. 그녀가 보기에, 유리의 부모는 역시 뭔가 특별하고 보통과 다른 데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잘생기고 유능한 기능인이었고 어머니는 중후하고 헌신적인 부인이었다. 경외스러운 삶의 방식, 일상과는 완벽하게 구분되는 또 다른 세계, 순박하고 진실한 사람들만이 사는 세계가 거기 있었다. 때때로 그들은 블라지미르가 백해의 운하에서 보내 온 편지들을 갖고 얘 기를 나누곤 했다. 유죄판결을 받은 죄수의 몸으로 쓴 편지들은 사랑하는 아빠, 사랑하는 엄마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동생 유리 로 시작하고 있었 다. 거기에는 폐허가 된 한 젊은이의 삶과, <새처럼 가볍게 날고 싶은> 그 의 꿈을 노래한 눈물겨운 감옥에서의 시들이 씌어 있기도 했다,. 레나 앞 에서 그 편지를 읽고, 유리는 멈칫하며 눈에 띄게 당황해 하곤 했다. 그러 나 레나는 그의 아버지의 신중함과 어머니의 슬픈 표정, 그리고 그의 생활 속에 이러한 복잡함과 함께 존재하는 쾌활함에 감동 받았다. 그들에 관한 모든 것이 그녀를 즐겁게 했다. 예컨대 그들의 소박한 식사 라든가, 그의 아버지가 손가락에 묻은 분필가루를 털고 웃옷에서 실밥을 떼어 낸 후 일하는 사람만이 갖는 신중한 태도로 테이블에 와 앉는 따위가 그것이었다. 가족들의 품에 안겨지는 한 끼의 식사는 그가 치른 노동의 산 물이었다. 그녀는 유리의 어머니가 늘 가장인 자기 남편에게 제일 먼저 음 식을 덜어 주고, 그 다음에 역시 일하는 사람인 유리에게 그리고 세 번째 로 손님인 자기에게 그렇게 한 후에, 남은 음식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그러면서도 주방에서 일하는 어머니로서 항상 만족해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이들이야말로 서로서로 단단히 결속된 진정한 가족이었다. 각자가 자기만의 삶을 살면서 몇 주일 동안이나 얼굴 한번 못 보고 지내는 그녀의 가족과는 전혀 딴판이었던 것이다. 그녀와 유리는 때때로 스코모로프스키를 들으러 메트로폴에 가거나 츠파 스만을 들으러 그랜드호텔에 갔다. 그녀는 항상 자기 방식대로 돈을 치르 겠다고 고집했다. 어찌됐든 자기도 일을 해서 봉급을 받는데 자기 몫도 지 불하지 않는 것은 의리 없는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유리는 의리를 들먹이 는 그녀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녀가 하자는 데로 했다. 웨이터의 친절에 기 분이 좋아지듯, 그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헌신적으로 자기를 대해 주는 데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옆 테이블에는 아름다운 여인들과 잘 차려 입은 남자들이 있었다. 불빛이 흐려지며 오색찬란한 조명이 홀 중앙에 있 는 분수를 비추면 그들은 메트로폴 댄스 밴드에 맞춰 춤을 추곤 했다. 그 녀는 밤이 늦어서야 그와 헤어지곤 했다. 그러나 때때로 그가 원하는 경우 엔, 그녀는 새벽녘이 다 되도록 그의 곁에 있어 주었다. 정문이 잠겨 있으 면 그녀는 벨을 눌러야 했다. 그러면 졸음에 취한 수위가 비틀거리며 나와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고, 그녀는 그에게 돈을 조금 집어 준 다음 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어두운 아르바트의 거리로 달려나가곤 했다. 집에 서는 늦게 들어오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모를 리 없었 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비웃는 듯이, 심지어는 경멸하는 듯한 말투로 유리에 대해 얘기했다. 어쨌든 그건 그의 일일뿐이었다. 그녀는 가족에 매어 있었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주저하지 않고 가족을 떠날 것이었다. 12월 초, 유리는 사법인민위원회의 소환을 받았다. 빈 책상만 널려 있는 인사과에 들르자 펑퍼짐한 가슴에 머릿결이 붉고, 변덕스러워 보이는 작은 얼굴을 가진 말코바라는 중년여인이 그를 맞았다. 그녀는 자기 책상 맞은 편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샤로크 동지, 당신이 곧 학교를 마치게 되면 우리는 당신을 적당한 자 리에 배치해야 해요. 그런 만큼 내가 당신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야 될 것 같네요. 자신에 대해 얘기해 보세요. 보안서나 검찰청에 배치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좀 멍청하게 보여야 된다는 것을 유리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몇 년 동안에 걸쳐 형성된 자기 방어의 본능이 자동적으로 발동하여 자신을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인간으 로 보이도록, 그리고 그에게 해를 힙일지 모르는 것은 무엇이나 감추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에 대한 얘기를 했다. 의류공장 노 동자의 아들이며, 자신이 또한 선반공으로 일했고, 콤소몰 회원인데다 좋 지 못한 기록을 남긴 적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한 가지 미묘한 문제가 있 었다. 형이 강도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 점을 말함으 로써 자기가 한 말에 신빙성을 더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코바는 담배를 피우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담배를 재 떨이에 비벼 끄고 물었다. 콤소몰 회원인 당신이 왜 형을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었나요? 형이 체포됐을 적에 전 겨우 열 여섯 살이었습니다. 혁명 시에는 열 여섯 살에 연대를 지휘했어요. 그녀는 마치 자신이 열 여섯에 연대를 지휘한 것처럼 얘기했다. 아마 그 랬을지도 몰랐다. 가죽 자켓을 입고 이빨 사이에 담배를 문 깡마른 모습대 로 그녀는 정말 군인처럼 행동했다. 아니야,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 든 아무나 연대를 지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자리가 모두에게 골고루 차례 갈 만큼 넉넉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어쨌든 거미 같은 이 빨 간 머리 여자의 의견이 그를 공장으로 보낼지, 아니면 지방 멀리 어딘 가 로 보낼지를 결정할 것이다. 학교에서는 졸업반 전체가 시베리아 동서부로 보내질 거라는 얘기도 돌고 있었다. 유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형은 저보다는 나이가 한참 많습니다. 제가 형을 어떻게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겁니다. 말코바는 책상 위의 서류를 뒤적거려 그 중 하나를 찾아냈다. 화학 및 제약위원회가 자기네 법률 부서에 당신을 쓰고 싶어하더군요. 어떻게 해서 나온 얘기죠?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프룬제 화학공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설명을 했다. 거기엔 변호사가 필요합니다. 제가 그들과 계속 접촉을 유 지해 왔는데, 그래서 저를 원하게 된 겁니다. 말코바가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나 다 모스크바에 남고 싶어해요. 그러면 다른 지방의 일자리는 누 가 채우게 되지요? 재판소나 검찰청은 어떻습니까? 천천히,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가며 유리가 말했다. 재판소나 검찰청에서 일하려면, 절대적인 신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데 범죄자를 형으로 둔 저를 누가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재판소나 검찰청에 근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진정한 소비에트 사람이 돼야 합니다. 말코바가 강의조로 말했다. 당신 형의 일은 문제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도 왜 형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었냐고 나보고 묻지 않 았습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저는 생산현장에서도 유능한 변호사가 필요하 다는 생각입니다. 말코바가 일어섰다. 당신의 요청을 이사회에 접수시키겠어요. 그러면 그 문제는 배치위원회 로 넘어갑니다. 거기서 모든 걸 결정하게 되지요. 유리도 따라 일어섰다. 어디든지 보내 주는 곳에 가서 일을 하겠습니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녀는 능글맞게 웃었다. 당신은 지금껏 돈을 받아만 왔으니, 이제부터는 벌어야 할 거예요. 정말이지 전 모스크바에 남아 있고 싶습니다. 그는 애원조로 말했다. 부모님이 다 여기 계신데 늙으셨고 몸도 편치 못하십니다. 그리고 전 사 실상 혼자 남은 아들이고요. 하지만 그건.... 그는 책상 위의 서류를 손 으로 가리켰다. 제 생각이 아니라 공장에서 생각하는 겁니다. 그들은 단 순히 아무 변호사나 있어 주었으면 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분 야, 즉 화학공업에 대해 아는 사람을 찾고 있단 얘깁니다. 모스크바에 남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절박한 이유를 갖 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게 다 일리가 있고요. 당신처럼 말예요. 그녀는 조용히 있다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참, 학교 당조직에서도 다른 직종에 당신을 추천했어요. 역시 모스크바 에 있는 자리예요. 그것에 대해선 전혀 모르겠습니다. 정확히 어떤 자린가요? 그녀의 대답은 막연했다. 음, 빈자리가 몇 군데 있어요. 이를테면 검찰사무소라든지. 하지만 당 신은 여전히 공장으로 가고 싶겠죠? 물론입니다. 전 공장이 낫습니다. 거기에서 일을 했고 거기에서 자랐습 니다. 저를 학교에 보낸 준 것도 그들이었습니다. 전 공장에 빚진 게 많습 니다. 그의 목소리에 배인 자신감이 그녀의 마음을 녹였다. 우린 당신 뜻과 화학위원회의 요청을 존중하겠습니다. 어쨌든 최종결정 은 위원회에서 내려질 겁니다. 그의 운명이 이 여자의 손에 쥐어져 있다니! 어는 벽촌의 쓰레기 더미에 서 방금 나왔을 법한 그녀는 모스크바 토박이인 그를, 어쩌면 사방으로 수 십 리를 가야 겨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쓸쓸한 촌구석으로 보낼 준비를 해놓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 말이 옳았다. 촌놈들이 모스크바로 쳐 들어오는 바람에 도시사람들이 갈 데가 없어졌다는 말이.... 이제는 그 노 인이 그를 서서히 압박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널 모스크바의 검찰청에 추천하고 있더라. 그러나 그는 내심을 밝히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아파트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를 추천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일자리가 구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들은 형이 범죄자인 걸 트집잡을지도 몰랐다. 진실한 노동자계급, 프롤레 타리아의 가정에 범죄자가 존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믿을 수 있는 자기들만의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화려한 변호사직에 대한 유치하고 낭만적인 감상은 점차 퇴색해 갔다. 실제로 법정에 앉아 재판장면을 견학하고 기소업무를 맡아보았던 학교에서의 실습과정은 그에게 동전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 주 었다. 유창하게 변론을 하는 유명한 변호사들도 있었지만, 당황하고, 동료 변호사들과 서로 헐뜯으며, 파렴치하게 돈만 밝히는, 그리고 법정에서 서 기들의 비위를 맞추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노파를 붙들고 유치한 법률지식 을 되풀이하여 상당료로 5루불을 챙기는 형편없는 변호사들도 부지기수였 다. 그는 그들 집에 꾸며 놓은 호화스런 사무실의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고객이 나가고 나면 그 사무실은 식당이나 침실로 탈 바꿈한다는 사실도. 그렇다 해도 변호사는 그가 택하고 싶은 유일한 직업 이었다. 그러나 이상했다. 공직에서 배척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 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한번 그를 무시하고 있었다. 좋은 자리 는 모두 자기들이 나눠 가진 채 믿을 만하고, 말 잘 듣고, 능력 있는 그에 게는 힘들고 고된 일만 맡기려 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그들은 그에게 빵부 스러기를 던져 주고, 부쟈긴이 경멸해 마지않는 <법률고문>으로 그를 공장 에 보내자는 것이었다. 그는 인민위원회에서의 면담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레나에게 만은 걱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은 극장에 앉아 있었다. 오래 기다린 끝 에 유진 오닐의 <존스 황제>의 티켓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슨 걱정 있어? 그녀는 다정한 눈길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웃음을 띄우며 쉿 하고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집에 돌아온 다음 그녀는 그의 팔을 베고 누워 있다가 재차 물었다. 그 는 별일이 아니고 단지 공장에서 제안한 내용에 약간 어려운 점이 있을 뿐 이라고 말했다. 우리 아버지께 얘기해 볼까? 그 분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어. 그녀는 아버지가 더 이상 힘을 써 주지도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집하지 않았다. 사샤 판크라토프가 어제 우릴 보러 왔었어. 그 친구 참 안됐어. 왜? 모르고 있었니? 콤소몰과 학교에서 쫓겨났거든. 유리는 팔꿈치를 고여 몸을 약간 일으켰다. 첨 듣는 얘긴데. 사샤를 본 적이 없었니? 한동안 못 만났어. 이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사샤를 최근에도 한 번 보았다. 그러나 사샤는 그에게 아무 말도 안 했었다. 유리는 이 말 을 레나에게 할 수 없었다. 회계강사와의 일 때문에 그렇게 된 거야? 그래. 그리고 신문 건도 있고. 신문이 어떻게 되었는데? 사샤가 시를 몇 편 썼데. 그 친구가 시인이야? 사샤가 몇 편 쓰고, 다른 사람 시도 거기 실었다나 봐, 난 잘 모르겠 어. 갑자기 들어서, 얘기도 별로 못하고 그냥 가버렸어. 정말 안됐어. 투철한 신념의 소유자이며 바위처럼 강한, 굽힐 줄 모르는 활동가인 사 샤 판크라토프가 축출 당하다니! 이제 그는 완전히 제명됐다. 부쟈긴도 그 를 구하지 못했다. 유명한 랴자노프를 삼촌으로 둔 그가! 정말 무서운 일 이다. 사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니.... 만일 똑같은 일이 그에게 일어난다면, 누가 그를 도와줄까? 재단사인 아 버지가? 범죄자인 형이? 그에겐 사샤가 가진 그런 배경이 없었다. 그는 검 찰청에서의 근무를 거부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거기라면 안전할 것이다.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자기가 붙잡고 싶은 놈들을 붙 잡아, 도망치지 못하도록 가둬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음날 집에 오면서 사샤를 마주쳤다. 잘 있었니? 오랜만이다. 학교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며? 누가 그런 얘길 하든? 레나가 알려줬어. 해결됐어. 사샤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정말이니? 잘됐구나. 샤로크는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정말 다 행이다. 넌 금방 다시 일어섰구나. 겨우 어떻게 했어. 다음에 보자.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8 해결됐어. 사샤는 누구한테나 똑같은 말을 했다. 그는 어머니한테 그 소문이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간부회의 바로 다음날 글린스카야 학장의 결정이 공고됐다. <반당음모의 주모자>로 사샤가 제명을 당하고, 루노츠킨, 폴루잔, 포즈드냐코바가 경고 를, 그리고 코발료프가 견책을 받았다. 기구가 활동을 재개하면서 수집된 자료를 토대로 보고서가 적성되었다. 얀슨에 이어 학생감의 자리에 오른 로즈가체프가 요청을 받기도 전에 사샤 의 기록을 작성했다. 수염이 없는 핑크빛 얼굴의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당신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소. 세상일이 다 이런 거 아니오? 당신이 다시 오게 된다면 난 정말 기쁠 것이오. 사샤는 모두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나 코발료프에게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난 기생충과는 상대하지 않아. 루노츠킨도 코발료프가 기생충이라는 데 동의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역 시 그렇게 생각했다. 조그마한 루노츠킨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수업종이 울리자 복도가 텅 비었다. 이제 사샤와 같이 있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류는 이미 챙겼고, 남은 것이라곤 필요한 날인을 받고 학교를 떠나는 일 뿐이었다. 크리보루츠코는 여전히 조달부의 부책임자로 있었다. 그는 서류에 도장 을 찍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십이월 신청서는 벌써 배급카드 사무소로 우송했다네. 감사합니다. 신청서는 나중에 보내는 것이 보통이지만 크리보루츠코는 사샤가 배급을 탈 수 있도록 조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 었는데. 이제 12월말까지는 사샤의 어머니도 눈치를 채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어쨌든 사샤는 복교되어 있을 테고. 사샤는 이 학교에서 저 학교로 찾아다니며 면담을 요청했다. 오랜 시간 을 지루하게 기다린 끝에 면담이 이루어지면, 불신의 표정을 담은 얼굴들 앞에서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고 <고려해 보겠다>는 불확실한 한마디를 듣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왜 그런 일을 맡으려 하겠는가? 그를 복교시킨다는 것은 곧 그에 대한 책임을 떠맡 는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그의 사건은 지구당 위원회에서 자이체바라고 불리는 젊고 잘생긴 여자 가 다루고 있었다. 그녀에 관해 사샤가 아는 것은 고작 키는 작지만 농구 를 잘한다는 것뿐이었다. 자이체바는 그 얘기를 듣고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은 크리보루 츠코에 관한 것들로 사샤가 보기에는 조금도 중요한 게 못됐다. 그리고 나 서 그녀는 사샤에게 그가 다니던 공장에 가서 추천장을 하나 얻어 오라고 충고했다. 그녀는 그의 사건이 지구당 지부와 콤소몰 정기총회에서 다루어 질 것이라고 말했다. 공장으로 가는 동안 옛날의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일찍 일어나서 마시는 거리의 상쾌한 아침공기, 공장 문으로 밀려들어가는 사람들의 물결, 작업 장의 싸늘한 공허감, 공학에 특별히 마음이 끌린 일도 없으면서 그는 한때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이 그의 가슴에 찡하고 울리며 자신을 위대한 혁명계급의 일원으로 느끼게 했던 것이다. 사샤에게 는 정말 시적이고 잊을 수 없는 인생의 시작이었다. 공장에서의 첫날, 사샤는 트럭에 짐을 싣는 일을 맡았다. 그는 유리 샤 로크처럼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샤로크는 기술분야로 자리를 옮겨 밀링머신 견습공으로 일했다. 어쨌든 그들은 사샤를 짐을 싣는 곳에 배치 해 놓고 이내 그에 관해서는 잊어버렸다. 그 또한 자신이 거기 있다는 사 실을 구태여 알리려 하지 않았다. 누가 하든지 해야 될 일이었으니까. 그 때엔 인생이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미리 속에 있었다. 제품 이 쌓여 있는 야적장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찜통 같은 무더위 속이나 혹은 살을 에이는 추위 속이나, 그는 무명 작업복에 두꺼운 장갑을 끼고 트럭에 짐을 싣고 또 부렸다. 그는 조국이 필요로 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 었다. 그리고 그는 따뜻하고 환한 작업장에서 단정한 옷차림으로 편하게 일하고 있는 유리에게 경멸의 시선을 쏘아 보냈다. 점심시간이면 인부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식당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가곤 했다. 다른 노동자들은 염료나 도료, 석고, 석탄먼지가 자기들 옷에 묻을까봐 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들은 추잡스런 만들을 크게 떠들어댔다. 사샤는 한때는 사단장이었으나 신 경제정책으로 당을 떠나 주정뱅이가 된 말이 없는 모로조프를 떠올렸다. 반장인 아베르키예프도 기억해 냈다. 그 도 또한 주정뱅이로 아내가 도망쳐 버리고 없었다. 그밖에 몇몇 이름과 얼 굴들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들은 월급봉투의 두께에는 신경도 안 썼다. 한 병의 술값만 있으면 그 들은 행복했다. 그들은 삯일을 피하기 위해 반장과 말다툼을 벌였다. 그들 은 또 좀더 가벼운 일을 하려고 흥정을 했다. 그들은 시간제 근무를 선호 했는데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작업량이 정확히 규정된 할당제였다. 주어진 작업량을 다 채우면 집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할당제 아래서는 그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일을 서둘렀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집에 돌아가 기 위해서였다. 사샤는 그들을 진정한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에게는 감 동적이고 인간적인 일면이 있었지만 무언가 삶을 잘못 영위해 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작업량이 할당되는 동안 그들은 할 수 있는 한도까지 속임 수를 썼지만, 그들 서로간에는 결코 속이거나, 동료에게 더 많은 일을 떠 넘기려고 하지 않았다. 사샤는 그들과 함께 술자리에 끼어 농담을 주고받 거나 앞다투어 음란한 이야기를 꾸며내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가지각색의 인종들이 뒤섞여 있는 이들 인부들에게는 대개 잡다한 물품 들을 차에서 부리는 일이 주어졌다. 그러나 때때로 그들은 염료가 들어 있 는 드럼통을 취급하는 주하역장에 배치되기도 했다. 트럭이 한동안 도착하 지 않으면 야적장에 드럼통인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트럭이 계속 꼬리를 물고 쏟아져 들어오면 사샤를 포함한 하역팀 전체가 그곳에 동원되었다. 염료가 든 드럼통 하나의 무게는 70킬로그램 가까이 나갔다. 그들은 그 것을 경사지게 걸쳐놓은 두꺼운 널빤지 위로 굴려 트럭 적재함에 올려놓았 다. 널빤지의 경사는 매우 급했기 때문에 적재함까지 드럼통을 굴리려면 힘껏 달려가야만 했다. 일단 그렇게 올리고 나면 빈틈이 생기지 않게 차곡 차곡 세워 놓고 정확한 숫자가 실렸는가를 확인했다. 가파른 널빤지 위로 드럼통을 굴려 올리고, 그렇게 올린 드럼통을 똑바로 세워서 정돈시키는 그 작업은 휴식시간도 없이 내리 여덟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일단 드럼통 을 널빤지 위로 굴리기 시작하면 바로 뒤에 따라오는 사람 때문에 멈추거 나 늦출 수도 없었다. 한 사람이 일초라도 머뭇거리면 전체의 작업리듬이 깨지기 마련이었다. 사샤는 처음에 드럼통을 정확히 쌓을 수 없었다. 그들 은 드럼통 밑 부분을 양손으로 잡고, 힘껏 들어올려 가장자리 위에 올려놓 으라고 알려 주었다. 그 방법을 배우고 나니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붙잡을 필요가 없었다. 보통은 두 개의 작업반이 그곳에서 일을 했다. 한 팀은 우랴노브스크에 서 돈을 벌기 위해 온 타타르인들이었고, 다른 한 팀은 러시아인들이었는 데 역시 돈을 벌기 위해 그곳에 온 직업적인 하역인부들이었다. 드럼통을 싣는 작업은 급료가 높았던 것이다. 어느 날, 수석반장인 말로프가 작업반에 사람이 부족하다며 아베르키예 프에게 한 사람만 충원해 달라고 얘기했다. 아베르키예프는 타타르인인 가이눌린보고 가라고 얘기했다. 못 가겠소. 가이눌린이 대답했다. 리프시츠! 자네가 가게! 덩치가 크고 이마가 넓은 오뎃싸 유태인 리프시츠는 그걸 농담으로 슬쩍 받아넘겼다. 그들하고는 일을 못합니다.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라니까요. 말로프가 손을 들고 말았다. 난 가보겠소. 당신들끼리 알아서 한 명만 보내 주시오. 말로프는 결단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예비역 소대장인 그는 투사다운 면 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 자신도 과거에는 하역인부였으며, 아베르키예프의 부하들까지도 잘 다스릴 수 있었다. 당신이 결정하시오. 아베르키예프가 말했다. 말로프는 사샤를 쳐다봤다. 판크라토프. 일 반으로 가게. 말로프는 특별하게 사샤를 봐주지는 않았다. 고등학교를 마쳤기 때문에 사샤는 거기에서 가장 학력이 높았다. 아마도 유식한 하역인부라는 게 그 다지 맘에 들지 않았던 것 같았다. 말로프는 호기심과 비아냥거림이 반반 씩 담긴 눈초리로 사샤를 보며 싫다는 말이 나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샤는 예! 제가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못 말리겠군! 아베르키예프가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타타르인들은 드럼통을 굴리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그걸 등에 짊어지고 가파른 널빤지를 밟고 트럭 위로 뛰어올라가 정확한 자리에 그걸 내려놓았 다. 그렇게 하면 일은 빨랐지만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70킬로그램이나 되는 드럼통을 등에 얹고 흔들거리는 널빤지를 밟으며 가파른 경사를 뛰어 올라가, 발등을 찧거나 엉뚱한 자리에 내려놓지 않고 정확한 자리에 놓는 작업을 하루 종일 계속해야 했다. 드럼통이 등에서 미끄러져 내리며 자신 을 함께 잡아끌어 내리는 듯한 느낌이 늘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일초라 도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뒷사람의 거친 숨소리와 땀 냄새가 바로 등뒤에 느껴지는 상황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멈춰 섰다가는 그대로 부딪혀 둘 다 나가떨어질 게 분명했다. 있는 힘을 다해 널빤지를 한달음에 뛰어 올라가 통을 내려놓고는 다시 정신없이 뛰어 내려와야 했다. 특히 신참자들은 인 정사정도 없는 거칠고 노련한 하역인부들에 뒤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드 럼통에 매달려야만 했다. 호각소리가 정오를 알렸다. 사샤는 드럼통더미 옆에 무너지듯 주저앉았 다. 붉은 반점들이 눈앞에 떠다니고 머릿속에는 아득한 외침이 메아리쳤 다. 거기 누워 있는 동안, 그는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다시 일어나 대열 속 으로 뛰어가야 할 순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가서, 오전과 마찬가지로 그 늠름한 타타르인의 뒤에서 드럼통을 지고 아찔아찔한 널빤지를 뛰어 올라 가는 일을 시작해야 할 순간을 말이다. 그는 자신이 그 일을 끝까지 해내 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맥없이 주저앉아 널빤지 위에 시체처럼 널 브러지고 말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70킬로그램 짜리 드럼통을 지고 뛰어다니러 이곳에 온 게 아니라고 사무 실에 찾아가서 불평을 할 수도 있었다. 그는 정량의 작업을 하기 위해 이 공장에 왔다. 도대체 그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자원해서 노동을 하 러 온 사람을 하역인부들 틈에 박아놓고 있다니. 그는 그렇게 불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호각소리가 다시 들리면 벌떡 일어나 건장한 타타르인의 등뒤에 서서 허리를 숙이고 또 하나의 드 럼통을 등에 지고 차에 올라갈 것이었다. 다른 노동자들이 식당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점심시간이 끝나 리라는 걸 의미했다.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 고는 팔, 다리, 머리를 움직여 봤다. 온몸이 쑤시고 아파 왔다.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반장인 아베르키예프와 하역부 모로조프를 바라봤다. 그들은 분명히 점심시간에 몇 잔 들이켰을 것이다. 아베르키예프의 살찐 얼굴이 온통 발갛게 달아 있었고, 창백하고 푸른 모로조프의 눈은 보통 때보다 더 푸르고 멍청해 보였다. 이걸 좀 먹게! 아베르키예프가 그에게 빵 한 덩어리와 삶은 고기 한 쪽을 주었다. 감사합니다. 드럼통을 지려면 등뼈에 정확히 닿도록 등 전체로 져야 하는 거야. 아 베르키예프가 그에게 설명했다. 이렇게 말야, 자, 그걸 내게 얹어 봐. 그는 허리를 굽히고 손을 뒤로 뻗었다. 모로조프와 사샤가 드럼통 하나 를 그의 등에 얹었다. 그것은 그의 등 전체에 안정감 있게 얹혀 있었다. 자 이렇게 해보라고. 아베르키예프가 몸을 더욱 앞으로 숙였다. 드럼통이 어깨로 이끌어져 내 리자 그는 그걸 머리 위로 넘겨 자기 앞쪽에 떨어뜨렸다. 어깨로 지려고 하지 말고, 등에 살짝 얹어 놓는 거야. 한번 해 보게. 사샤가 일어서서 몸을 숙였다. 그러자 아베르키예프와 모로조프가 그의 등에 드럼통을 올려놓았다. 어깨를 내리지 마. 아베르키예프가 소리쳤다. 사샤는 어깨를 쭉 폈다. 드럼통이 등뼈 위에 정확히 얹혔다. 이제는 몸 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거야. 똑바로 걸어가서 그걸 내려놓게. 그 뒤부터는 확실히 안정감이 있었다. 널빤지 위를 달려가며 비틀거리지 도 않았고 드럼통도 등에서 미끄러져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드럼통은 더 욱 무겁게 느껴졌고, 다리에선 힘이 빠지고 있었다. 되돌아와서 또 하나의 드럼통을 지면 등이 펴지지 않았다. 그는 오후 일과를 어떻게 마쳤는지 생 각이 나지 않았다. 또 어떻게 집에 도착하게 되었는지도 기억할 수 없었 다. 어쨌든 집에 도착하자 그는 침대에 푹 쓰러져 다음날 아침까지 죽은 듯이 잤다. 다음날 일하러 나가자, 말로프는 1반에서 며칠만 더하면 다른 데로 옮겨 주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2주일이나 드럼통을 졌고 그때쯤 되니까 완전히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는 타타르인들과 서로 가까워졌다. 심지어는 세금문 제로 소비에트 지방정부로 보내는 항의서를 대서해 주기도 했다. 그 다음에 그는 옛날의 작업반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대신에 트럭조 수로서 수송부로 보내졌다. 자넨 운전을 배울 수 있을 걸세. 말로프가 그에게 말했다. 사샤는 말 로프가 자길 도와주려는 건지 멀리 쫓아 버리려고 하는 건지 감이 안 잡혔 다. 사샤는 수송부에서 일하면서 트럭운전까지 배웠지만, 이제 그곳을 다시 찾아가는 동안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하역인부로 지낸 날들뿐이었다. 처음 그 몇 달간이 공장에서 보낸 나날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기였다. 그는 옛날의 그 작업반원들 중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있을까 생 각해 보았다. 그렇게 오래 전은 아니었고 단지 4년 전이었다. 공장에는 나무로 된 하역대가 철거되고 다른 곳에 커다란 석조구조물이 만들어져 있었다. 옛날 정문이 있던 자리에도 널찍한 돌기둥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무실 건물이 안마당을 향해 새로 들어섰고 높은 돌담 너머로도 새 건물을 몇 채 볼 수 있었다. 안뜰도 깨끗이 포장되어, 사무실과 매점 창고가 들어서 있었다. 공장은 점점 더 발전하고 있었다. 규모도 커지고 기술도 많이 개발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조국에 활력을 주는 것으로서 무슨 일이든 간에 그도 그런 과정에 참여해야만 했다. 당 서기는 알고 보니 말로프였다. 그건 기분 좋은 놀라움만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늙은 투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대머리가 되었고, 하역 부서에 반장으로 있을 때처럼 얼굴이 발갛지도 않았다. 그는 좀 말랐고, 혈색이 안 좋은 게, 피곤해 보였다. 그는 커다란 책상 뒤의 의자에 반쯤 걸터앉은 자세로 창턱에 놓인 작업 일지에 서명하고 있었다. 그는 사샤를 금방 알아봤다. 그는 4년의 세월은 온데간데없이 사샤가 거기에 아직도 일하고 있는 것처럼 대했다. 자, 판크라토프, 무슨 일이야? 사샤가 사건의 전말을 얘기했다. 좋아, 내가 위원회에 가서 그들에게 얘길 하지. 이제는 말로프까지도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사샤에게 추천장을 써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자이체바가 저보고 추천장을 하나 가져와야 된다고 말하더군요. 서식으로 된 걸 말인가? 그럼 써 줘야지. 자네가 무슨 부서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해 주게. 그는 사샤가 부르는 대로 메모를 한 다음 그를 쳐다보고 말했다. 그래, 자네도 결국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이거지? 왜 결국이라는 표현을 쓰십니까? 언젠가 일어나게 돼 있으니까. 자, 내가 추천장을 쓰고 있을 테니까 한 시간쯤 어디 산책이라도 하고 오게. 작업반원들을 좀 보고 싶은데요. 새 건물들이 공장 가장자리를 따라 세워져 있었지만 공장 본체는 예전이 나 다름없었다. 그는 기계실과 보일러실, 창고를 지나 수송부에 이르렀다. 지배인의 검정색 포드가 차고에 세워져 있고, 운전사인 세르게이 바실리예 비치는 자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는 검은 가죽제복에, 챙 있는 모자를 쓰고 펠트 부츠 위에 고무로 된 덧신을 신은 모습이었다. 아 주 단단한 사람으로 거만하고 남에게 의자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혁명 전 부터 운전사로 있었던 그는 지배인에게 무척 헌신적이었다. 그도 사샤를 때뜸 알아봤다. 여기 근무하러 돌아왔나? 들를 일이 좀 있었습니다. 사샤는 이곳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이제 돌아와 작업실을 들여다보고 기계 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겨우 기억을 살려 낸 자신이 놀라웠다. 그땐 모든 게 단순하고 직선적이었다. 일과 급료, 그리고 콤소몰의 임무만이 있 을 뿐이었다. 그는 여기서 그와는 반대되는 정치적 견해를 접해 본 적이 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생산작업이나 설비공사에 눈코 뜰 새가 없었 다. 그러나 시간이 흘렸다. 아마 여기도 예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말로프가 그에 대해 쓴 내용은 아주 재미있었다. 추천장에는 이렇게 씌 어 있었다. 판크라토프 A.P.는 1928년부터 30년까지 당 공장에서 하역인부와 운전사 로 근무했음을 증명함. 그는 성실하게 작업에 임했고 할당된 과업을 완수 했음. 그는 수송부의 콤소몰 지부 서기로 활동했음. 그는 규칙을 위반한 사실이 없음. 내가 위원회에 출두하면 더 자세히 말해 주겠네. 말로프가 약속했다. 집에 돌아오니 우편함에 파란 봉투가 하나 들어 있었다. 아버지한테서 온 것으로, 필적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편지는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아버지는 몇 권의 기술서적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책장 맨 아랫칸에 있다. 아마 어딘지 짐작이 갈 게다. 달리 부탁할 만한 사람이 있었으면 이런 일로 널 귀찮게 하지 않았을 게다. 그 걸 가지러 내가 모스크바로 갈 수도 있겠지만, 내가 나타나는 걸 반겨 줄 사람이 없을 것 같구나. 그는 거기에서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늘 그런 식으 로 얘기했다. 저녁 드시겠어요? 하고 어머니가 물으면 먹고 싶지 않아 하고 아버지는 대답했다. 회의에 가시는 거예요? 아냐, 춤추러 갈 거 야. 가는귀를 먹었기 때문에 그는 가족끼리 하는 얘기를 잘못 듣고 자기 얘기를 하는 줄로 오해했다. 아침에 사과가 없거나, 밤에 요구르트가 없으 면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어머니는 복도에서 아버지의 발자국소리가 들리 는 순간, 두려움으로 얼어붙어 말을 못했다. 그는 집에 올 때면 늘 가정이 나 아내, 아들에 대한 불평의 씨앗을 가지고 들어왔고, 아무 것이나 트집 을 잡아 역정을 냈다. 질투심이 폭발해야만 그의 어머니는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아버지의 고 함소리, 쾅하고 닫히는 문소리, 신경질적으로 울부짖고 날뛰며 온갖 욕설 을 퍼부어 댈 때 떠오르는, 토끼처럼 놀란 어머니의 표정. 그 당시 이 모 든 것들은 사샤의 영혼을 더욱 고갈시키고 있었다. 이제 아버지가 떠난 지도 6년이나 되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그렇게 멀 리 떨어져 있는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그 편지를 본 순간, 어머니의 얼굴 에는 낯익은 공포의 표정이 다시 나타났다. 너의 아버지한테서 왔어? 책을 몇 권 보내 달래요. 편지를 받아 읽어 내려갈 때에도 겁먹은 표정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 었다. 무엇보다도 사샤는 어머니가 자기 문제를 듣는 순간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가 아무 것도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애 를 썼다. 아침이면 여전히 학교에 가는 것처럼 집을 나섰다. 그는 12월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키에프 역에서 트럭에 실린 짐을 부렸다. 갈 데가 없 어지면 그는 니나 이바노바의 집으로 갔다. 그에겐 그녀에게서 받은 아파트 열쇠가 있었다. 그는 아침나절을 그곳에 서 책을 보거나 공부를 하며 보냈다. 어느 날 니나의 여동생 바랴가 짙은 색 코트와 고급스럽게 생긴 구두 차림으로 학교에서 돌아왔다. 스카프를 벗자 길고 짙은 머리가 어깨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 아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입술을 뾰족이 해서 불어 올리며, 예쁘게 생긴 십대의 여학생들이 남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그런 시선으로 사샤를 쳐다봤다. 방은 지저분한 기름천으로 씌워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었다. 니나가 쓰는 반쪽은 책상 위에 책과 종이가 흐트러져 있고 헤진 실내용 슬 리퍼가 침대 밑에 처박혀 있었다. 반면에 바랴가 쓰는 쪽은 밝은 색의 쿠 션 커버가 씌워져 있고 창턱에 축음기와 근육질의 운동선수가 조각된 청동 전기스탠드가 놓여 있었다. 학교에서는 무슨 일 때문에 쫓겨났어요? 곧 다시 들어가게 될 거야. 나 같으면 그 자식들을 쫓아내 버리겠어요. 우리 학교에도 그런 쥐새끼 같은 치들이 있어요. 당신 같은 사람은 보기만 해도 잡아먹으려고 덤벼들 걸요. 어제는 시험을 치는데 랴르킨이 말하더군요. 이바노바가 컨닝쪽지 를 치마 밑에 감추고 있어요 그래서 자 봐라 하면서 치마를 걷고 보여 주었어요. 그녀는 교실에서 했던 것처럼 다리를 쭉 뻗었다. 수학선생인 쿠즈야가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 말했어요. 그만해 이바노 바! 왜 나한테 화를 낸 거죠? 잘못은 랴르킨이 했는데요. 그 자식은 작년 에도 짐승같이 여학생들 책가방을 낚아채 가고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은 학급위원이에요. 자기가 위원장이라니까요. 하지만 한다는 일은 남을 고자 질이나 하는 거예요. 그런 자식들만 보면 구역질이 나와요. 컨닝은 어떻게 하니? 간단해요. 그녀는 목면 스타킹을 신은 무릎을 손으로 두드렸다. 여기에 진한 연필로 써 놓는 거예요. 다 준비가 되어 있다고요. 컨닝을 안하고는 통과할 수가 없니? 물론 있어요. 하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아요. 그녀는 한 마리 작은 벌레처럼 다리를 벌리고 앉아 도전적인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사샤는 웃음이 나왔지만 바랴가 그의 언니에게 얼마나 골 치덩어리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짐짓 심각한 척했다. 그들 자매는 아버지가 없이 자라 왔고 어머니마저 얼마 전에 세상을 뜨 고 말았다. 니나가 동생을 양육하도록 도와주는 문제를 협의했던 위원회 회의를 사샤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있는 대로 조금씩 돈을 각출해서 니나에게 전해줬고, 청소년 리더라는 유급직책이 그녀에게 주어졌다. 그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사샤는 바랴가 뜰에서 다른 십대들 몇 명과 서성대고 있던 일이 생각났다. 너 콤소몰에 들어갔니? 거긴 무엇 땜에 들어가요? 그냥 빈둥거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 난 이대로가 좋아요. 너 밤에도 집에 안 들어왔지? 하룻밤은 친구네 별장에서 잤어요. 그 애는 무서움을 너무 많이 타서 혼자서는 역에도 못 나간 다잖아요. 니나도 밤에는 혼자 나가려고 하지 않 아요. 언니는 나보다 백 배는 겁이 많을 거예요. 언니는 막심과 결혼해야 해요. 언닌 아무 것도 못하지만 막심이 그걸 원하지도 않고, 또 식당에서 먹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충고를 하기엔 좀 어리지 않니? 언니는 내 일에 자꾸 간섭하지 말아야 해요. 공연히 떠들어대지만 언니 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요. 넌 뭐가 되고 싶니? 대답 대신 그녀는 어린애같이 높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향기 가득한 초원의 꽃처럼 그녀의 웃음은 피리소리보다 더 달콤하고 그대의 눈동자는 하늘보다 더 푸르다네 초원을 누비는 용감한 목동. 복도에서 벨소리가 났다. 니나예요. 그녀는 일어나지도 않고 말했다. 열쇠를 또 잃어버렸거든 요. 언니인 줄 어떻게 아니? 여기 사는 사람들이면 벨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어요. 들어오던 니나는 바랴가 침대 위에 다리를 쩍 벌리고 단정치 못하게 앉 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동생에 관해 얘기부터 시작했다. 머릿속엔 사내애들 생각밖엔 없고, 손톱이나 입술에 빨간 칠이나 하고, 얜 그거밖에 몰라. 부엌칼로 눈썹을 곱슬이려고 몇 시간씩 붙들고 있다니 까. 부엌칼로? 사샤가 놀라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것뿐인 줄 알아? 항상 전화통에만 매달려 있고, 한번 들어 봐. 크레 이프 조젯, 벨벳, 빨간 보일, 파란 실크.... 오 년 동안 난 똑같은 블라우 스만 입었어. 그걸 매일 빨아 입었지만 그게 무슨 천으로 된 건지도 몰라. 하지만 쟨 드레스에 달 단추를 고르느라고 삼 일 동안이나 가게를 뒤지고 다니는 애야. 쟨 고무덧신은 신지도 않아. 펠트 부츠도 싫어하고. 그래서 내 구두를 훔쳐 신고 춤추러 갔다 와서는, 더러운 구두를 목욕탕에 처박아 놓는 거야. 오늘은 구두, 내일은 돈을 달라고 할거야. 만일 내가 가진 돈 이 없으면, 밖에 나가 누구에게서 훔쳐 올 테고. 너무 무섭게 하지 마. 사샤가 말했다. 너 자신한테도 그렇고. 그러나 바랴는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부러 하품을 하고 따분한 듯 눈알을 굴렸다. 그런 얘기는 백 번도 더 들었던 것이다. 저렇게 피곤한 애는 첨 봤어. 저 앤 막심을 비웃고 있어. 저한테 막심 이 어쨌다는 거야? 그건 야비하고 분별없는 짓이야. 막심의 얼굴이 안 좋아 보이더라. 사샤가 말했다. 니나의 얼굴이 금방 어두워졌다. 난 막심을 좋아해. 그는 다정하고 좋은 애야. 하지만 내가 무얼 할 수 있겠어? 제 스스로 살 수 있을 때까지 저 앨 데리고 있어야 되는데. 내 핑계 대지 마, 제발. 바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학교에서 벽신문을 만들라니까, 저 앤 옆 교실에 가서 글자 한 자 고치 지 않고 그대로 베껴 왔어. 심지어는 어찌나 게을렀는지 이름도 못 바꾸고 그대로 내버린 거야. 다음 번에는 무슨 짓을 꾸밀까? 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는지? 바랴가 신발을 신고 일어났다. 향기 가득한 초원의 꽃처럼 그대 웃음은 피리보다 더 달콤하고.... 사샤는 마음 든든히 먹고 지구당위원회로 갔다. 이곳은 소신껏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회의는 제 1서기 스톨페르에 의해 주재될 예정이었다. 복도에서 호출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연설 사이사이에 끼여드는 스 톨페르의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겁에 질린 직원들이 캐 비닛에서 서류를 꺼내 오기 위해 바쁜 걸음으로 들락날락했다. 그들 뒤에 대고 스톨페르는 짜증 섞인 고함을 쳐댔다. 스톨페르가 관리들한테 야단치 는 소리를 들으니까 사샤는 마치 자신이 바울린이나 자기에게 적이란 딱지 를 붙인 다른 사람들한테 야단을 치는 것 같아,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문이 열렸다. 판크라토프! 방안에는 벽면을 따라가며, 그리고 녹색 베이즈천이 씌워진 긴 테이블 주위로 사람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었다. 깡마르고 눈에 적의가 가득찬 스 톨페르는 피곤한 듯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사샤를 바라보다가 자이체바에 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시오. 부지런한 여학생처럼 자이체바는 사건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문제의 시 에 이르자 쿡쿡 하는 웃음소리가 새 나왔다. 사실 그 시들은 웃음이 나올 만도 했다. 그녀는 이러한 사실들이 주된 쟁점과 연관지어 다루어져야 한다고 엄숙 히 말했다. 사샤는 크리보루츠코가 한때 어떤 반대 그룹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그때 서야 알았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그룹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이체바 는 1992년 제 11차 전당대회에서 노동자들의 반대파가 중앙위원회에 보낸 공동선언문에 크리보루츠코가 서명했었다고 언급했다. 그렇지만 그 선언문 의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그녀는 또 크리보루츠코가 <접촉을 끊는 데 실 패>하여 당에서 축출된 적이 있었다고 말했지만 어떤 접촉이었는지도 명확 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이 그를 견책한 뒤 다시 기용했다고 그녀는 보 탰다. 그는 후에 <사회적으로 이질적이고 계급에 적대적인 분자>들과 함께 철도를 차단함으로써 또 한번 견책을 받았다고 했다. 그게 어떤 철도였고 크리보루츠코가 그 사건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녀는 말하 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공사계획을 망쳤다는 이유로 다시 한 번 축출 을 당한 것이다. 추방 및 견책 사실일 크리보루츠코의 개인기록에 소상히 나타나 있음에 도 불구하고 자이체바는 마치 그녀가 처음으로 그의 가면을 벗겨, 그를 광 명천지에 드러내 놓았으며, 범죄에 그토록 깊게 물든 인간을 발견하고 엄 청난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행동했다. 자이체바의 증언을 듣고 사샤는 크리보루츠코에 관한 것이 위원회에서 처음 드러난 것보다는 훨씬 복잡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리보루츠코는 본인에게 결코 이롭지 못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샤는 그것이 자신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관계는 얼마 안 가서 드러났다. 스톨페르는 사샤의 기록들을 대충 훑어봤다. 모두 숨소리 하나 내지 않 았다. 다만 스톨페르가 신경질적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이 들렸다. 당신의 위원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바울린? 바울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크리보루츠코를 당에서 추방했습니다. 그는 재빨리 말을 꺼냈 다. 그는 기숙사를 짓지 않았소. 스톨페르가 목청을 돋웠다. 그게 그의 < 임무>인데도 말이오. 그는 주먹으로 서류를 내려쳤다. 여러분은 그걸 잊 었단 말이오? 여러분은 그자들이 반당 팜플렛을 배포했을 때에야 <그걸> 기억해 냈소. 판크라토프와 크리보루츠코가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증거가 없다! 스톨페르가 입꼬리를 틀었다. 판크라토프는 수업시간에 마르크스주의를 비난했소. 그 후에 그는 국경 일 기념호 신문을 발행하도록 허락을 받았소. 그것을 그는 아주 당당하게 반당 팜플렛으로 이용했소. 판크라토프와 크리보루츠코를 비호했고, 그 학 생감.... 이름이 뭐더라....? 얀슨. 그녀는 자신이 이 사건을 얼마나 철저히 연구했나를 보여 주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얀슨이 판크라토프를 비호했소. 우리는 지금 조직망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오. 바울린, 당신의 정치적 판단은 어디에 숨어 있었소? 크리보루츠코 를 비호한 게 왜 하필이면 판크라토프인가를 나한테 정확히 설명해 주시 오. 판크라토프는 그것 때문에 추방되었습니다. 바울린이 반박했다. 아니오, 그것 때문이 아니란 말이오. 스톨페르가 고함을 질렀다. 그 는 공개적으로 치고 나온 다음에야 비로소 추방됐소. 왜 당신은 그가 크리 보루츠코를 비호했을 때부터 그를 감시하지 않았소? 위원회는 결단을 촉구 했지만 바울린 동지, 당신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소. 로즈가체프가 그걸 제 안했지만 당신 코앞에서는 크리보루츠코가 학생들을 오염시키고 있었소, 당신은 혹시 판크라토프가 <자기 혼자> 신문을 발행하고, 자기 자신만의 논리로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했다고 생각하오? 그 배후에 아무도 없었을 것 같소? 결국 당신은 알기를 꺼렸던 것이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랬소? 겁 이 났소? 우린 그 누구도 겁내지 않습니다. 분명히 스톨페르를 염두에 두고 그 가 대답했다. 스톨페르도 그걸 알아챘다. 바울린을 쏘아보면서, 갑자기 나직하게 말했 다. 우린 학교를 조사해야 될 것이오. 그렇게 하시오. 그렇게 하시오 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스톨페르가 화를 벌컥 냈다. 우린 당신 허락 따위를 구하고 있는 게 아니오. 바울린 동지. 얀슨은 왜 청문회에 나오지 않았소. 병석에 있습니다. 와병중이라, 그럼 학장은 어떻게 됐소? 바울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오지 않았습니다. 웃기는 조직이군! 그가 코웃음을 쳤다. 그들은 손바닥 위에서 당신을 가지고 논 게 틀림없소. 좋소. 말로프 동지, 이렇게 좋은 추천장을 써 주 시다니 정말 친절하시군요. 말로프, 판크라토프가 왜 그걸 써 달라고 했는 지 알았었소? 말로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가 크고 떡 벌어졌지만 몸이 앞으로 좀 굽었다. 정장을 입은 그는 흡사 프로권투선수처럼 보였다. 예,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당에서 추방되었다는 얘기를 당신에게 합디까? 예, 들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들은 얘기와 똑 같았소? 정확히 그대로입니다. 그런데도 추천장을 써 주었단 말이죠? 물론입니다. 그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말로프 동지? 난 사 년 전의 그에 대해서만 썼을 뿐입니다. 그 때쯤 그는 틀림없이 당을 기만하고 있었을 텐데요? 그는 그 때 당을 기만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등에 염료드럼통을 져 나르고 있었습니다. 무슨 종류의 염료요? 저런 겁니다. 말로프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당신네들 녹색 베이즈천 을 염색하는 그런 종류입니다. 당신네들 녹색 베이즈천 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당신네들 책상에 씌운 것 말입니다. 그게 베이즈천 아닙니까? 그게 이 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이오? 그는 어린 콤소몰 회원이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작업을 해서 공장건설 을 도왔습니다. 그 밖에 제가 뭘 써야 됩니까? 그건 사실 그대로였을 뿐입 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소. 하지만 결과는 좀 다르게 나오지 않았소. 스톨 페르는 달래는 투로 말했다. 사샤가 당신만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다면 그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오. 하지만 가족관계를 이용해서 인민위원들을 찾아 다닌다면 그건 또 다른 일이 아니냔 말이오. 당신은 그걸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오, 말로프 동지. 아마 그랬을지도 모르죠. 말로프가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저는 그 가 일하는 모습만을 보았고, 따라서 그가 당의 적이라고 믿지는 않습니 다. 당의 적이 되는 사람들은 그 같은 사람 뿐만은 아니오. 이제 판크라토 프의 얘기를 들어보기로 합시다. 사샤가 일어섰다. 그가 복교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여기 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이 얼토당토않은 것들이었지만, 가면 갈수록 공격은 더욱 치열해지고 따라서 이 음모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길은 전혀 없었 다. 그들에게는 어떤 논리도 들어 먹히게 할 수 없었다. 우스꽝스러운 시 들, 아지쟌과의 충돌, 그리고 크리보루츠코, 이 모든 것들은 설명이 가능 한 사실들이었지만 여기에서는 무자비한 힘이 제멋대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자기자신을 지켜야만 했다. 크리보루츠코에 관해서는, 저는 삽 문제를 갖고 위원회에서 얘기한 것 밖에 없습니다. 무슨 삽이오? 스톨페르가 불쑥 끼여들었다. 그냥 삽입니다. 공사장에서 쓰는, 관리인이 마침 없어서.... 쓸데없는 얘기는 집어치우시오! 스톨페르가 마구잡이로 그를 제지했 다. 왜 크리보루츠코를 비호했느냐에 대해서만 답하시오. 그를 비호한 적이 없습니다. 건축자재가 실제로 없었다는 말이 내가 꺼 낸 전부였습니다. 그래, 삽뿐만이 아니라 자재까지 없었군요. 스톨페르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말하고 싶었던 게 그거였군. 좋소. 계속하시오. 그는 피곤해 보였다. 사샤에게 질문해 봤자 더 이상 나올 게 없을 것 같 았다. 저는 크리보루츠코와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그와는 얘기해 본 적조차 없었습니다. 스톨페르는 머리를 흔들며 입술을 씰룩거렸지만, 입은 열지 않았다. 회계강사에 관한 한, 그의 강의는 시간 때우기였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시간 때우기란 말이오? 스톨페르가 사샤를 노려봤다. 그게 아니라.... 됐소, 판크라토프, 다 들었소. 스톨페르가 일어서며 웃저고리를 걸쳤다. 그 옷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 다. 가슴이 빈약하고 어깨가 좁은 민간인에게는 군복이 어울리지 않듯이. 우린 당신 얘기를 충분히 들었소. 당신은 반성할 의사가 없을 뿐만 아 니라, 오히려 이 자리에서까지 당을 기만하려고 했소. 가 보시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9 그들은 니나의 집에서 새해를 맞았다. 식사는 니나가 가까스로 구해 와 바랴가 요리한 오리구이였다. 밤중에는 아무도 집에 돌아갈 수 없기 때문 에, 파티는 아침까지 계속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곧장 직장으로 출근할 것 이었다. 새해 첫날은 정식 근무일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안락 의자에서 담배를 피우며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것 은 바짐 마라세비치의 누이인 비카였다. 통통하게 살찐 그녀는 남들이 한 참 일하는 중에도 난 뭘 하지? 하고 묻기나 할만큼 게을렀다. 그녀는 키 가 크고 오만한 금발의 여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녀는 토요일 밤 메트로 폴이나 일요일 오후 내셔널에서의 다과를 겸한 무도회에 가면 만날 수 있 는 그런 종류의 여자였다. 그녀는 새해를 맞기 얼마 전에 남자친구와 헤어 졌고, 그녀의 따분한 표정에서 알 수 있듯, 그 헤어짐이 그녀가 이 자리에 와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유리 샤로크는 그녀와 시시덕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의 흥을 돋우 기 위해서인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레나와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바짐 마라세비치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들 사이의 관계를 오랫동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리의 행동은 이상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바짐은 아직도 숫총각이어서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관계가 어떤지를 모르고 있 었고, 그런 관계는 아마도 인간에게 심오한 변화를 초래할 것이 틀림없다 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레나에게서는 그런 변화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바짐은 독일국회의 화재사건에서,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상영되는 <죽 은 영혼들>의 신작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에서 멘톤 에서의 루나찰스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태양 아래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 에 대해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 모두에게 다 알려진 사건들을 자기 혼자만 알고 있는 체하는 인상을 주었을 뿐이었다. 유리 샤로크는 그곳에 오기 전에 아버지와 전작이 있었던 탓으로 생기가 있고 긴장이 풀어진 상태였다. 비카와 시시덕거리는 데 대해 화를 내려면 내 봐라하는 식이었다. 그는 더욱 표나게 그녀와 시시덕거렸다. 바랴가 오리요리를 핑계로 집에 남은 것은, 니나에게 요리를 맡기고 싶 지 않아서가 아니라, 실은 그녀의 학교친구들보다 더 나이가 많은 이들과 어울리고 싶어서였다. 막스는 그녀에게 룸바를 출 수 있는 친구를 같이 데 려오겠다고 약속했었다. 세라핌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그 젊은 친구는 열심히 축음기 태엽을 감고 있었다. 막스는 슬픈 얼굴을 하고 세라핌의 곁에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얼마 전 에 니나에게 프로포즈를 했다가 매정하게 거절을 당했는지라, 기분이 좋을 턱이 없었다. 그는 사샤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그리고 그의 문제로 당황하 고 있었다. 사샤는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지, 친구들의 호의를 피하지 않기 로 마음먹었다. 그는 앞으로 다가올 삶을 어떤 식으로든 살아가야 했다. 흰색 리넨 천이 씌워져 있는 테이블 상석에 니나가 앉고 그녀의 오른편 으로 막심, 사샤, 바랴, 세라핌, 그리고 왼편으로 레나, 유리, 비카가 자 리를 잡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면서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밖은 얼어붙는 밤날씨였지만 방안 은 따뜻하고 포근해서 여자들은 라일로 짠 스타킹과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행성이 어김없이 궤도를 돌고 있고, 별들이 우주에서 끝없는 운동 을 계속하는 동안, 그들은 보드카와 와인, 그리고 구운 오리를 앞에 놓고 다가올 새해를 준비하고 있었다. 거기엔 청어를 찍어 먹는 겨자 소스와 가 게에서 한 햄도 있었다. 그들은 아직 1933년이란 시간에 있었지만 곧 1934 년에 들어갈 침이었고, 1935년, 36년, 37년, 계속해서 다가올 숱한 새해를 맞게 될 것이다. 젊은 그들에겐 죽임이나 노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그들은 이생과 젊음과 행복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자, 지난해를 위해 건배. 바짐이 말했다. 결국 지난해도 우리 인생의 한 해였어. 오뎃싸 에 나오는 것처럼 아무도 우리들의 앞길에 장미꽃을 뿌려 주지 않았어. 하기야 장미꽃으로 덮인 길은 진정한 인생이 아니겠지. 진정한 인생의 길은 가시로 뒤덮인 그런.... 시계가 자정을 알리자 그들은 모두 일어서 잔을 높이 들었다. 모두에게 행복한 새해를 위하여! 바짐이 읊었다. 잔들이 쨍 하고 부딪히는 소리를 내고, 접시가 들려졌다. 막스가 오리 를 자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야, 도사구나! 사샤가 감탄했다. 오리가 있을 때만 그렇지. 우리가 웃으며 자기 접시를 내밀었다. 막심, 나 다리 하나만 줘. 마침내 비카가 사정을 했다. 나머지 하난 내 거야! 바짐은 먹는 걸 좋아했다. 마라세비치네가 다 가져가겠군! 마라세비치네를 막아라! 바짐이 나이프로 접시를 두드렸다. 붉은 군대의 자랑, 막심에게 건배! 막심! 이봐, 내 몫은 어디 갔어? 동지들, 누가 내 포크를 훔쳐갔다! 다시 바짐이 접시를 두드렸다. 세라핌을 위해 건배하자, 우리의 유일한 손님이자 역시 붉은 군대의 자 랑이야. 젊은이여, 그대의 건강을 위해! 젊음은 죄악이라고. 목구멍에 걸린 가시일 뿐이야! 세라핌, 네 형 게오르그는 어디 있지? 얼굴이 붉게 물들면서, 세라핌이 일어나 인사를 했다. 이 시끄러운 패거 리 앞에서 그는 부끄럼을 타고 있었다. 늘 말이 많은 바짐이 레나를 위해 건배를 제안했다. 우리들의 미인을 위해! 그리고 비카에게도 역시 역시 그렇게 못생기지 않은 내 동생을 위 해! 그는 무대의 주인공역을 끝까지 놓지 않을 작정이었다. 우리 학교를 위해 건배! 이번은 막심의 제안이었다. 우리의 감상벽을 위해서도! 유리도 조소하듯 보탰다. 막심이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떨어진 신발처럼 그 시절들을 팽개쳐 버리자는 얘기야? 난 막심의 건배에 찬성이야. 바짐이 거들었다. 우리는 옛날부터 집에 서 모셔 온 신이나 모교나 가정을 부정할 수는 없어. 학교를 위해, 우리의 연합노동학교를 위해! 아주 어색하게 유리가 자 기 잔을 쳐들었다. 철모르는 녀석들! 잘들 해봐라! 그들이 학교를 위해 건 배를 하고 싶다면 그도 건배를 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털끝만치도 그러 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우리들에게 선심 쓰는 척하지 마, 유리. 니나가 쏘아붙였다. 그녀는 그가 비카와 시시덕거리는 것에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비카가 못마 땅해 미칠 지경이었다. 사실 아무도 그녀를 초대하지는 않았다. 니나는 샤 로크가 레나에게 창피를 주는 데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바짐이 중재에 나서기로 했다. 장래의 수석 검찰관, 유리 샤로크를 위하여! 우리가 감옥에 갇히면 넌 우릴 빼내 줄 수 있을 거야. 막심도 상냥하 게 거들었다. 자, 이제 우리의 여왕, 니나를 위해, 당의 마음과 영혼을 위해! 바짐 이 입술을 냅킨으로 닦으면서 말했다. 니나! 니나! 니나! 사샤가 바랴에게 몸을 돌렸다. 우리들의 두 여주인을 위해 마셔야 되겠지. 그곳에서 가장 날씬하고 우아하면서도 나이가 가장 적은 바랴는 말이라 도 잘못 할까봐 조용히 있었다. 세라핌이 수줍게 그녀에게 말을 붙이려 하 고 있었다. 사샤는 그들이 어색해 하는 모습에 즐거워하며 바랴와의 대화 에 세라핌을 끌어들이려 했다. 그녀는 반색을 하며, 자기의 동양적인 눈과 부드러운 얼굴을 바짝 들여 다보고 있는 사샤를 향해 돌아앉았다. 그들은 테이블과 의자를 뒤로 밀어놓고 레코드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 다. 저 검은 눈동자가 날 사로잡았네 난 그 눈동자를 잊을 수 없네 유리는 비카와, 바짐은 레나와, 그리고 바랴는 세라핌과 짝을 맞춰 춤을 추었다. 그리고 니나와 막스가 합류했다. 이라 나와. 나도 춤을 추고 싶단 말야. 곡이 바뀌자 사샤가 말했다. 그는 바랴와 춤을 추었다. 그녀의 나긋나긋한 몸매, 가벼운 스텝, 부풀 어오르는 그녀의 희열까지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니나를 괴롭히는 모든 것 - 짙은 회장, 향수, 아파트 주위를 서성대는 짓, 남자애들 - 들이 공연한 걱정이며, 바야흐로 인생과 아름다운 세계, 밝고 싱싱한 세계로 들어오려 는 젊은 여인의 열망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님을 그는 깨달았다. 비록 자신 은 그 세계로부터 차단 당해 육신과 영혼이 갈가리 찢기고 있지만 말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싸움이었다. 유리와 비카가 같이 복도로 나가자 니나의 화가 폭발했던 것이다. 난 떠들지 말라고 <분명히> 얘기했어. 이웃들이 있단 말이야. 그녀는 분을 삭이지 못해 얼굴이 빨개져서 얘기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시시덕 거리려고 복도까지 나가야 했어. 여기엔 자리도 없는 것처럼 말야. 그만 둬, 됐어. 레나가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유리의 행동은 니나가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비난받을 만했다. 흥분하지 마. 이번에는 막심이 상냥스럽게 얘기했다. 그들이 그렇게 뻔뻔스러울 줄은 몰랐어. 니나는 여전히 상기된 채, 어 쩔 줄을 몰라했다. 복도에 나가든 말든 그들 자유야 그건. 하지만 난 이 곳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해. 그만해! 사샤도 유리와 비카가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파티를 망치게 할 수는 없었다. 바짐은 모든 일을 장난으로 돌리려 했다. 내 동생은 혼자서 화장실도 못 찾는다니까. 그들은 평소에는 침착하던 니나가 때때로 불같이 화를 내는 것에 익숙해 있었고, 또 화를 낼 때와 마찬가지로 금방 거두어들인다는 것도 알고 있었 다. 하지만 송년회에서조차 아주 작은 일에도 화를 낼만큼 그들은 모두 피 곤해 있었다. 유리는 레나 곁에 앉아 한 팔을 그녀의 의자 뒤로 두르고 퉁명스럽게 말 했다. 전형적인 노처녀의 히스테리야. 그는 그 일이 자기들 둘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그 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나직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결과적으로 쌓였던 감정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입 닥쳐 샤로크! 사샤가 쏘아붙였다. 이제 사샤는 그에게 원한을 풀 구실을 찾았다. 유리의 어머니가 사샤의 어머니에게 아들이 퇴학당했다는 얘기를 할 때, 그녀는 고소하다는 표정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사샤는 유 리의 악의를 거기에서 느꼈다. 너무 많이들 마셨어.... 바짐이 화해를 시키려고 했다. 난 네가 어떤 놈인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 사샤가 말을 이었다. 넌 내가 본 걸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했으면 좋겠니? 유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네가 무얼 아는데? 얘기해 봐. 지금은 그럴 때가 아냐, 그럴 장소도 아니고. 또 다른 사람들은 흥미도 없을 테고. 그럴 때와 장소가 아니라고? 누가 너보고 장소, 시간을 선택하라고 했 어? 너 누구보고 지금 명령을 하는 거야? 죄를 짓고 쫓겨난 놈 치고 되게 건방진데. 닥치지 못해! 막심이 쏘아붙였다. 그건 신사답지 못해. 바짐이 어물쩡하게 말했다. 그건 내 일이야. 사샤가 냉정하게 맞받았다. 그건 너나 네 가족들하 고는 관계가 없어.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니? 넌 속이 좁고, 우쭐대고, 허영으로 꽉 차 있어. 이게 내가 생각하는 너의 전부다. 그리고 넌 벌거벗은 황제고, 군대도 없는 장군이고. 그게 내가 생각하 는 너의 전부다. 유리가 일어섰다. 이리 와, 레나. 왜 그래?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사태를 가라앉힐 수 있기 를 바라면서. 레나, 넌 네 자신이 더 큰 똥 덩어리라는 사실을 모르니? 사샤가 소리 쳤다. 레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아파트를 뛰쳐나갔다. 유리는 물간에서 사샤를 노려보고는 그녀를 따라나갔다. 그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막심이 사샤에게 부드럽게 타일렀다. 난 저런 쥐새끼들을 보면 참을 수가 없어. 그러나 그는 더 울적해졌다. 파티를 망친 건 결국 자신이었던 것이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10 사샤는 어머니가 차라리 울어버리길 바랬다. 그러나 그녀는 싸늘하게 얼 어붙은 채 입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사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설명해 달라고 하기 이전에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지가 않았다. 하나의 비극이 찾 아왔고 그녀에게는 그 비극만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는 초점을 잃은 어머니의 눈동자를 볼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책을 보더라도 글자는 읽지 않고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며, 밤낮 한 가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가정을 제대로 꾸려나가지 못해 아들의 뒤를 받쳐 줄 만한 사람이 없으며, 그들의 불행한 생활이 어렸을 적부터 아들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앞으로 6주 동안은 자리를 뜰 수 없다고 알려 왔다. 그녀 는 남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때쯤이면 모든 게 결판이 날 거라고 생 각하고 있을 것이다. 마르크가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늘 그녀의 집안에 대해 빈정거리며 하던 말이었 다. 그녀는 마르크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곧 전당대회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때 가서 손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답해 왔다. 그녀는 마음이 놓이지 않 았다. 사샤는 여전히 혼자였고 무방비상태였다. 그녀는 오랜 시간을 밖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사샤는 땅딸막하고 머 리가 희끗희끗한 그녀가 혼자서 안뜰을 거니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 그는 자기 손으로 음식을 데워 먹었다. 데워 먹을 음식조차 없을 때도 가끔 있 었다. 그녀는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그는 이모들에게 전화를 해보았지 만, 거기에는 없었다. 아마도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선처를 빌고 영향력 있 는 친구들을 찾아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겐 그런 친구들이 없었 다. 어디 가셨었어요? 그는 그렇게 묻곤 했다. 그러면 그녀는 잠자코 있거나 아르바트의 거리를 산보하고 광장에 앉아 있었다고 얘기했다. 사샤도 어릴 적부터 눈에 익은 아르바트의 거리를 따라 이리저리 배회했 다. 돌로 된 기둥, 회반죽으로 칠해진 벽, 연두색 지붕, 그리고 하얗게 치 장된 현관을 가진 저택들이 눈에 들어왔다. 옛날에는 학교운동장이었던 크 리보아르바트 거리에는 건축가 멜르니코프가 직접 지은 둥글고 이상한 집 이 하나 있었다. 사라사 무명 천으로 커튼이 쳐진 학교 지하실에는 건축노 동자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옛날처럼 어렴풋한 빛이 창에 비치고 있었다. 청소년 리더로, <젊은 개척단>을 이끌고 루블레보 캠프로 가는 도중에 불렀던 노래가 생각났다. 우리는 루블레보 캠프로 떠난다. 우리에게 필요 한 모든 게 거기 있지! 그는 무쇠처럼 엄격한 규율로 그들을 통솔했기 때 문에 그들은 사샤를 무서워했다. 그가 다루지 못한 유일한 사람은 코스챠 샤브린이었다. 그는 학교 목수의 아들로 장난을 좋아하고 말을 안 듣는 아 이였다. 그가 계속 말썽을 부리자 사샤는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심 했다. 그러자 학교의 요리사가 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안 돼, 사샤. 그의 아버지가 그 애를 죽이려 들 거야. 죽이려 든다 , 도대체 그녀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아무에게도 사람 을 죽일 권리는 없다. 사샤는 코스챠에게 미안했고, 다른 아이들도 코스챠 를 용서해 달라고 그에게 빌었지만, 자신의 결심을 철회한다는 것은 스스 로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들이 캠프에서 돌아와 정상수업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코스챠의 아버 지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그는 자리에 우뚝 선 채 사샤를 오랫동안 노려봤다. 사샤는 그 뒤로 그 눈 길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사샤는 그 당시 그토록 융통성 없고 어리석게 행동했었다. 집단의 활동 은 엄격한 규율을 요구했기 때문에 사샤는 그 규율을 위해 가엾은 코스챠 를 희생시켰던 것이다. 그는 처벌이 소년에게도 유용하리라고 생각했겠지 만 과연 아버지를 마주 대할 코스챠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를 자문해 봤던 가? 플로트니코프 가에서 그는 모길스트세프스키 가로 접어들었고 이어 메르 트비 가로 들어섰다. 8년 전 그가 콤소몰에 가입한 것은 네넬란드 대사관 맞은편에 있는 건물 안에서였다. 콤소몰 지구위원호가 바로 이 건물을 사 용했었다. 가죽자켓을 입고 있었던 그는 자기보다 잘 차려입은 사람이 있 으면 경멸의 눈초리를 쏘아보냈다. 그는 책밖에 다른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읽은 다음에는 도서관에 기증했다. 교내에서 자치회를 구성하려고 까지 했었다. 그의 상상력과 환상은 그를 자신도 모르는 곳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그에게 일어나야 했을까? 다수의견을 좇지 않아서 인가? 그러나 바울린, 로즈가체프, 스톨페르, 그들은 다수가 아니었다.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 볼까? 스탈린은 이 나라가 건성으로 교육을 받 은 사람아 아닌, 전문가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스탈린은 수다쟁이를 경멸했다. 그런데 아지쟌은 수다쟁이였다. 스탈린은 출세지상 주의들도 싫어했다. 거기에는 로즈가체프가 해당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약 한 자를 못살게 구는 사람도 싫어했는데 바울린이야말로 그 대명사였다.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는 스탈린은 순수한 시들이 진정으로 무얼 위한 것인 지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문제로 스탈린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건방진 일이었다. 언젠가 집에 들어가던 중에, 사샤는 어머니와 마주쳤다. 그녀는 정문에 서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아파트 현관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가 말했다. 너 먼저 들어가거라. 난 좀 걷다 들어갈 테니. 몹시 추울 텐데요. 좀 걷다 들어가겠다. 그녀는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녀는 토끼 같은, 고집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은 아버지와 다투었다는 사실을 암 시해 주던 그런 표정이었다. 또 한번은 아르바트의 길가에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아파트단지 정문 을 지나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시계점 앞에 서서 진열장 안으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척하다가 다시 오던 길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건너편을 바라보고 약국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섰다. 그녀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웃 밀리차 페트로브나와 관계를 맺고 있을 당시 그를 찾아 헤 매던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이곳에 없었고, 따라서 수상쩍 은 여인이나, 더 이상의 질투도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어 떤 새로운 강박관념에 눌려 고집스럽게 한 곳에만 긴장된 시선을 집중시키 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로 달려오는 자동차를 보기가 무서운 듯, 여 느 때처럼 고개를 숙인 채, 아무 쪽도 보지 않고 길을 건넜다. 운전사들이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창 밖으로 머릴 내밀고 그녀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 래도 그녀는 전혀 고개를 돌림이 없이 성역과 같은 인도에 무사히 올라섰 다. 누구를 찾고 계셨어요? 그녀가 집에 돌아온 뒤 사샤가 물었다. 그녀는 아들이 자기 말을 믿어 주지 않을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저한테 무얼 숨기려 하세요? 아들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이 무서움으로 휘둥그래져 있었다. 그들이 널 미행하고 있어. 그는 깜짝 놀랐다. 누가 절 미행한다는 거예요? 한 놈은 귀마개가 달린 모자를 쓰고 있고 또 한 놈은 키가 작고 다람쥐 털 코트를 입고 있어. 그리고 세 번째 놈은 펠트부츠를 신었는데 키가 크 고 심술궂게 생겼더라. 그 세 사람이 교대로 널 미행하는 거야. 글쎄요. 물론 미행할지도 모르고, 또 안 할지도 모르죠. 그런데 절 미 행해서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죠? 사샤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난 그 사람들 얼굴을 알고 있어. 그녀는 말을 이었다. 뒤에서 목소리 만 듣고도 알 수 있지. 빵가게에 줄을 서 있는데 펠트부츠를 신은 놈이 내 바로 뒤에 서 있더라. 난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가 있다는 걸 금방 알았지. 내가 빵을 사 가지고 나오자 그 놈도 따라나왔는데, 그 놈은 빵을 안 샀 어. 그냥 내 뒤에 서 있다가 다른 놈한테 날 가리켜 준거야. 그게 그 놈들 이 하는 식이야. 그 놈들은 나한테 들켰다는 걸 눈치챘는지 내가 돌아보자 니콜스키 가로 꼬리를 감췄다가 데네즈니 가로 다시 나왔어. 하지만 난 데 네즈니 가로 곧장 가서 그놈과 맞닥뜨렸지. 그 놈은 얼른 돌아섰지만 난 알아봤어. 그들은 누굴 미행하는 거예요? 어머니예요, 저예요? 그는 다시 웃었 다. 우리 집 전체란다. 누가 왔다 가고, 언제 네가 나가고, 누구와 다니다 가 누구에게 얘기하나를 감시하는 거야. 내가 정육점에서 생선 쿠폰을 끊 어주는데 그 놈이 내 뒤에 서 있다가 말하더구나. 아주머니, 사 번 쿠폰 을 내셔야지요. 내가 돌아보니까, 그 놈은 얼른 돌아섰지. 하지만 난 그 놈의 다람쥐털 코트를 알아봤지. 사 번 쿠폰을 내셔야지요 하고 그 놈이 말했다고요? 사샤는 또 한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몰렌스크 가에서 보초를 서던 군인이 그 놈들과 함께 있는 것 도 보았단다. 한번은 내가 그 키 큰 놈을 따라가고 있는데 그 놈이 어떤 사람을 눈짓으로 군인에게 알려주는 거야. 그러니까 군인이 그 사람한테 가더니 신분증 좀 보자고 말하더라. 그 때 키 큰 놈이 돌아서서 날 보고는 몹시 당황하는 듯했어. 난 그 뒤로 이틀 동안은 그 놈을 못 봤어. 작은 사 람이 그러는데 그 놈이 윗사람한테 좋지 않은 소리를 들었다더구나. 그가 누구한테 그 얘길 했어요? 나한테, 그는 내 뒤에 서 있다가 그 얘길 했어. 다른 사람이 못 듣도록 아주 나직하게 말이야. 나도 그때부터 뒤를 돌아보지 않았어. 그를 난처하 게 만들고 싶지 않았거든. 어쨌든 그는 내게 그 얘길 해줄 생각이 아니었 어. 난 그 사람 목소리를 잘 알고 있단다. 사샤는 두려움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무언가 무시무시한 것이 그들의 생 활 속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그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밑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 순간,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어머니마저 그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이 세 상에서 그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일단 그가 내 뒤에 서 있다는 것을 안 뒤로는.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난 돌아서지 않았어. 하지만 당신들은 우리 사샤를 데려갈 작정이에요? 하고 물어봤지. 그는 아무 말도 않더구나. 내가 견딜 수가 없어서 돌아섰 더니, 그가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갖다 대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군중 속으 로 사라져 버렸단다. 그건 전부 어머니의 상상이에요. 사샤가 말했다. 아무도 저나 어머니 를 감시하지는 않아요. 우리한테서 뭘 원하겠어요? 우리가 대역죄인이라도 되나요? 그건 웃기는 일이라고요! 그들이 만약 절 잡아가고 싶었다면, 벌 써 잡아갔을 거예요. 절 따라다니느라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이 말예요. 어쨌든 다 잘될 거예요. 저는 곧 복교될 거구요. 그들은 지금 전당대회 때 문에 정신이 없어서, 저한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요. 하지만 전당대회가 끝나면, 그들은 제 문제를 다루게 될 거예요. 이젠 좀 머리를 식히세요. 어머닌 지금 아무 것도 아닌 일로 골머릴 앓고 계시는 거라고요. 그녀는 어깨를 오그린 채,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중풍 에라도 걸린 것처럼 머리를 흔들고만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가 무슨 말을 해도, 그리고 아무리 그녀를 설득하려고 해도, 그녀는 한 얘 기를 또 할뿐이었다. 그게 오늘 일이었지만 어제도 마찬가지였고, 내일도 또 그럴 것이다. 그녀는 그들을 보러 나갈 것이다. 그리고 만일 예의 그 키 작은 사람이 근무중이면, 그는 다시 무언가를 어머니에게 말해 줄 것이 다. 그는 아마도 사샤를 데려갈 테냐, 안 데려갈 테냐 하는 어머니의 물음 에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다람쥐털 코트를 입은 사람은 동정하는 눈초리로 그녀를 보고는 자리를 떠 버렸다. 이제 어머니는 야윈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작 은 소리가 들려도 어머니는 깜짝깜짝 놀랐다. 아무 소리도 없으면 더욱 불 길한 것처럼 느껴졌다. 몇 시간 동안이나 계단을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혹은 뜰에 누가 서성대나 보려고 창턱에 웅 크리고 앉아 있었다. 한번은, 군인을 보자, 그녀는 두려움으로 몸이 뻣뻣이 굳은 채 방안을 허둥지둥 돌아다녔다. 그는 그들의 아파트로 오지 않고 옆집으로 갔다. 사 샤에 대해 체크하러 온 게 분명했다. 사샤를 나쁘게 말할 만한 것은 없었 지만, 사람들은 누구로부터 관심을 끌 만하다고 생각되면, 아무거나 손쉽 게 지어내는 법이다. 모든 사람이 사샤의 처지를 알고 있었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아파트 거주자 전체가 사샤에 관해 질문을 받거나 방문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아파트 정원에 있는 벤치에 앉아,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걸어가고, 그녀를 쳐다보고, 그녀에게 인사하는가를 마음속으로 재 보았다. 관리사무실로부터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사샤에게 그곳에 와 달라는 얘 기였다. 그녀는 언제나 그들을 무서워했지만 이번에는 혼자 갔다. 그들은 사샤가 근무했던 공장에서 만들어 준 추천서에 대해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건 핑계거리에 불과했다. 그녀는 관리사무실의 지배인을 20년 동안이나 알아왔다. 빅토르 이바노치 노소프는 이곳에서 < 작은 비트카>로 통했다. 그녀는 그의 어머니를 살아 있을 때 알았다. 그도 그녀를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샤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거 들떠보지도 않고, 학생인 사샤가 왜 하역인부로 일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도 묻지 않았다. 물론 그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는 쌀쌀맞게 잘 가라는 인사를 했다. 신분증을 담당하는 여자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무 척 바쁜 척했다. 언젠가는 누가 전화를 해서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를 찾았다. 여기에는 그런 사람이 안 산다고 말하니까 5분 후에 다른 목소리가 다시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를 찾았다. 그리고는 또 한 번 전화를 걸어 왔지만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건 숨소리뿐이었다. 거의 전화가 오지 않는 이웃집 갈랴에게도 몇 번이나 전화가 왔다. 갈랴는 애매 모호하고 두루뭉실하게 얘기했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나서 피하는 눈길로 서둘러 자기 방으로 향하곤 했다. 한때 그녀에게 불같은 질투심을 일으키게 했던 왕년의 연적 밀리차 페트 로브나가 그녀를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친구가 되어 있었다. 밀리차 는 젊었을 적에 힘깨나 있는 구애자들을 곁에 거느렸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소피아는 그들 때문에 넌덜머리가 났었다. 그녀는 가끔 조용하고 현명한 데다 나이가 많아 믿음직한 아르메니아 여자 마르가리타 아르테모 브나와 벤치에 앉아 있곤 했다. 그녀는 사샤가 카히체바에 있는 자기 친척 들에게 잠시 가 있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얘기했다.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기가 직 접 사샤한테 말하기가 겁이 났기 때문에 옆집에 사는 미하일 유레비치에게 대신 말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미하일 유레비치는 코안경을 즐겨 쓰고 책과 판화수집에 취미가 있는 독 신남성이었다. 그는 앨범과 서류가 겹겹이 쌓이고 페인트와 아교, 인도잉 크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방에서 혼자 살고 있었는데, 오래 된 가구는 책에 서 나온 먼지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그는 사샤와 즐겨 얘기했고 최근에 수집한 작품이 있으면 사샤에게 보여 주었다. 그가 최근에 손에 넣은 것은 도레의 삽화가 그려진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이었다. 그것은 지하세계에 떨어진 인간존재의 소용돌이를 묘사한 것으 로 남자, 여자, 아이, 머리, 팔, 다리 등 온갖 것이 뒤엉켜 있고 인류를 멸망으로 이끄는 욕망과 고통, 정열의 불꽃이 끝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단테의 작품 말고도 미하일 유레비치는 아카데미에서 펴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을 갖고 있었다. 난 그 책을 알아요 사샤가 말했다. 권력에 대한 그의 생각은 아주 유 치해요. 권력의 진정한 본질을 과학적으로 이해하지 목하고 있어요.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미하일 유레비치가 시인했다. 하지만 그것은 특정시대의 선과 악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유용할 수도 있어. 사샤, 끼여 들어서 미안하다만 실은 너의 어머니가 네 문제에 대해 얘기해 주신 게 있 다. 나한테 그런 얘기를 했다고 어머니께 화를 내지는 마라. 너도 알다시 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너의 아버지나 삼촌에게 가 있는 게 어떻겠니? 도망가라고요? 사샤가 놀라 물었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전 모르겠어 요. 그 사건은 제가 이곳을 떠나 있으면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께 서는 그 일 때문에 몹시 불안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건 아주 흔한 일이에요.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절 체포하려 한다고 생각하세요?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설사 그렇다고 하면, 제가 아버지나 삼촌한테 가 있는 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설마 저보고 지하로 숨으라는 것은 아니겠죠! 사샤 판크라토프는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을 피해 숨는다는 생각에 픽 웃고 말 았다. 어머니가 느끼는 두려움이 지나치다는 것은 나도 알아. 미하일 유레비 치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적인 사건의 특징이야. 즉, 진정을 해서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기관을 끌어들이게 되면, 당연히 그 사건은 눈덩 이처럼 불어나게 되는 거지. 사샤는 놀란 표정으로 미하일 유레비치를 쳐다봤다. 정치와 아무런 관련 이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얘기하고 있는 것에 대해 너무 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전 당을 믿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도피할 마음은 전혀 없어요.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11 사샤가 스트라야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이었다. 키타이고로드 성벽 이 있었던 곳에는 군데군데 눈 덮인 낡은 벽돌더미가 있었다. 그는 덩치가 크고 근사하게 지어진 회색 건물 안에 위치한 중앙조정위원 회로 들어갔다. 그는 입구에 있는 안내판에서 솔츠의 사무실 번호를 찾아 2층으로 올라갔다. 길다란 복도를 따라 사람들이 열을 지어 앉아 조용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청색 양복에 흰 셔츠, 그리고 넥타이를 단정히 맨 한 젊은이가 솔츠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사샤는 그가 아마도 방문객일 거라고 생각했 다.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아무도 움직이지 않아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방에는 두 개의 책상이 있었는데 문 앞에 있는 작은 책상은 비서 의 자리였고, 안쪽에 있는 커다란 책상에 솔츠가 앉아 있었다. 그는 희끗 희끗한 머리에 짧은 목, 넙적한 코, 그리고 언청이 입술을 가진 뚱뚱한 사 람으로, 유명한 장기의 명수인 에마뉴엘 라스케르를 연상시켰다. 그의 옆 에는 관료적이고 평범한 얼굴을 한 사람이 서명할 서류를 건네주며 서 있 었다. 솔츠가 바쁜 것 같아 사샤는 문 옆에 앉았다. 솔츠는 눈을 치뜨고 그를 쳐다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이 나빠 들어온 사람이 누구 인지 정확히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허가 없이는 아무도 이 사무실에 들어 올 수 없게 되어 있으므로, 그는 비서의 말을 듣고 들어왔으며 또 거기 들 어올 만한 중요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조수가 그에게 서류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당원들의 유죄 선고 사건에 관한 법원 판결문이었다. 사샤는 비서가 설명해 주는 말을 듣고 그걸 알았 다. 그 판결문에는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의 이름과 당적, 관련 법조항 등 이 장황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언급하는 조항들은 사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는 이 판결문보다 더 불쾌한 무엇에 대한 생각 때문인지, 얼굴을 한껏 찌푸린 채 아랫입술을 씰룩거리며 말없이 서류에 서명을 했다. 아마도 당적에서의 제명을 확인하는 서류인 듯했다. 사샤는 자기가 차례도 없이 우연히 그곳에 들어왔으며, 그곳에 들어올 만한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렇다고 다시 일어 나서 나갈 수도 없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최소한도 면담 약속이라도 얻어낼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제서야 복도에 있는 사람들이 솔츠와의 면담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어쩌면 그곳에 몇 달 동안이나 그렇 게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솔츠가 버럭 화를 냈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흔들고 손가락으로 조급하게 책상을 두드렸다. 철사 사십 야드 때문에 팔 년이나! 이십 육조 B항입니다. 몇 조, 몇 조...., 철사 사십 야드 때문에 팔 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하 다니! 조수가 허리를 굽혀 서류를 죽 훑어보았다. 그의 얼굴에 평온이 찾아왔 다. 그 서류는 제대로 되어 있었다. 또 아무리 솔츠가 소리를 지른다 해 도, 그에겐 법원 판결문을 대체할 만한 권한이 없었다. 솔츠도 또한 자신에게 선고형량을 바꿀 수 있는 권리가 없음을 알고 있 었다. 피선고자는 당으로부터 제명을 당했고, 그 제명을 확인하는 게 그에 게 맡겨진 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수에게 화를 낸 것은 분별없는 짓이 었다. 그는 사샤에게 다시 한번 눈길을 던졌다. 문 앞에 앉아 있는 이 알 수 없는 인간도 그의 기분을 긁어 놓았다. 저게 누굴까? 저기서 뭘 하려는 거 지? 그때 마침 솔츠의 비서가 들어왔다. 그는 사샤가 방문객으로 오인했던 감청색 양복의 젊은이였다. 비서는 솔츠 밑에서 몇 년 동안이나 일해 왔기 때문에, 솔츠가 판결문 때문에 화가 나 있고, 자기 사무실에 앉아 있는 침 입자로 인해서도 기분이 상해 있으며, 매점에 담배 몇 갑을 사러 나갔던 자신의 실수 때문에 이 청년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솔츠는 긴 손가락으로 사샤를 가리켰다. 저 친구는 뭘 원하지? 사샤는 비서를 쳐다보고 그의 재빠른 눈짓에 담긴 의미를 읽었다. 할 얘기가 있으면 빨리 해라! 사샤가 일어섰다. 저는 학교에서 제적당했습니다.... 무슨 학교야? 솔츠가 소리를 질렀다. 수송전문학교입니다. 이 동지는 수송전문학교 학생인데 학교에서 제적당했답니다. 비서가 싹싹하게 보고했다. 그는 속삭이듯 가까이 와 봐 하고 덧붙였다. 사샤가 솔츠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저는 벽신문과 회계 강의에 관한 논쟁 때문에 제적당했습니다. 무슨 신문? 그리고 회계 뭐라고?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그것들이 정치적인 사보타지로 분류되었습니다. 솔츠는 그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그가 무슨 이유로 자기 사무실을 찾아와 의자를 차지하고 판결문을 엿 들었는지, 그리고 벽신문과 회계강의는 또 무슨 얘긴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사샤를 쳐다봤다. 조수가 보일락말락한 미소를 띄웠다. 그는 어느 정도의 높이에 오른 직 책상의 자신감을 등에 업고, 이것은 사람들이 기존의 질서와 적절한 절차 를 무시할 때 생기는 사건의 일종이다. 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것은, 정확 히 얘기하면 사람들이 적절한 통로를 경유하지 않고 자기를 만나러 들어올 수 있는 절차의 필요성을 솔츠가 느끼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솔츠의 얼굴에서도 자족한 듯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사샤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던 그는 뜻밖에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을 모두 소환해. 사샤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 있나? 솔츠가 소리를 질렀다. 빨리 나가! 사샤가 주춤 물러섰다. 비서가 그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했다. 누구를 소환해야 됩니까? 그는 <중앙위원회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당원>이란 도장이 찍힌 서류를 그의 앞에 놓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제서야 사샤는 솔츠가 자기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소환하려 한다 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심장이 쿵쿵 뛰며 목구멍으로 뭔가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서는 그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울린, 학교당위원회 서기. 사샤가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직책은 빼고 이름만! 비서는 소환 목록에 그들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글린스카야, 얀슨, 루노츠킨.... 학생들도 합니까? 시간낭비하지 말아요. 이름만 대요! 폴루잔, 코발료프, 포즈드냐코바. 사샤는 이름을 부르면서 그의 뒤에 서 솔츠의 조수가 이름과 법조항을 들먹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게 전부요? 비서가 물었다. 예. 언제 소환할 겁니까? 내일이면 어떻겠습니까? 그들에게 다 연락할 수 있어요? 예. 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군요! 문에서 돌아서 보니 솔츠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샤는 그에게 머 리를 숙였다. 1월 10일 오후 3시에 솔츠 동지와의 면담을 위해 당원 사무국으로 출두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밑에 이름이 죽 씌어 있었다. 유일하게 빠져 있 는 게 사샤의 이름이었다. 솔츠의 비서는 그것에 대해 물어 보지 않았었 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승리한 것이다. 사샤는 그것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솔츠에겐 다른 부서의 의견이나 서류, 결정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그들을 모두 소 환해! 그러나 만일 그가 억지로 그 사무실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그리 고 그 비서가 자신의 실수를 덮어두기 위해 무언가 해야 된다고 판단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조수 의 거만한 웃음, 그 웃음은 솔츠를 화나게 했었다. 이제 일이 벌어지고 있 었다. 그리고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그를 괴롭히는 게 있었다. 복도의 벤치에 죽 늘어앉아 말없이, 그리고 참을성 있게,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들이었다.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는 반드시 스스로 수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진리였다. 그러나 그 복도의 공기 중에서는 인간의 비참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리 고 철사 40야드를 훔친 죄로 8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미지의 사나이도 있었다. 그는 사샤의 사건에서 한 역할을 행사했을지도 몰랐다. 그가 받은 동정심은 다른 사람이 받아야 했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샤는 젊었고 또 살고 싶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비극이 이 제 그 종말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만 생각하려고 했다. 중압감이 떠도는 관 청 복도에 말없이 앉아 있는 사람들 생각은 떨쳐 버리려 했다. 사샤가 그녀의 비서를 기다리지 않고 글린스카야의 사무실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전화 수화기를 잡고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사샤를 보더니 이내 두려운 표정이 되어, 손으로 수화기를 막았다. 무슨 일이에요? 사샤는 소환장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그녀는 소환장을 읽더니 당황하여 중얼거렸다. 왜 날 부르는 거지? 이건 바울린의 소관인데. 그녀가 갑자기 불쌍하게 보였다. 거기에 서명해 주십시오. 하지만 왜 내가 서명을 해요? 당위원회로 가세요. 그녀는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전 이것을 당신에게 전달하도록 지시를 받았습니다. 서명해 주십시오. 그녀는 결국 수화기를 내려놓고 목록을 집어들었다. 솔츠에게 갔었나요? 그녀는 갑자기 사샤에게 친밀한 어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예. 그녀는 목록을 훑어봤다. 중앙조정위원회가 개입했으면.... 그것은 랴자 노프나 부쟈긴이 힘을 쓰지 않고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만이 짐작 이 가는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전당대회 전날에, 그녀는 솔츠나 야로슬라 브스키, 루주타크가 그들의 연설에서 판크라토프의 사건을 젊디젊은 미래 의 전문가에 대한 무자비한 태도의 한 실례로 어떻게 거론하게 될지를 상 상해 보았다. 사샤는 마지막 학년에 학교로부터 제적을 당했고 자신은 그 명령에 직접 서명을 했다. 그렇다. 그녀는 당위원회의 결정에 굴복하여 거 기에 서명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바울린에게 경고했었다. 그들은 마 지막 학년에 있는 학생들을 도중 하차시켜서는 안 된다는 공문을 접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린이 들은 척도 안 했고 그래서 그로부터 칼자루를 빼 앗고 만 것이었다. 그녀는 사샤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목록을 그녀에게 밀어 놓았다. 여기에 서명을 하십시오. 참석하겠어요. 그래도 서명은 하셔야 됩니다.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는 자기 이름 옆에 서명을 했다. 바울린은 소환장을 읽으며 비꼬는 듯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이거지? 거기서 떨어지지 않을 자신 있어? 그는 사샤로부터 개인적인 모독이라도 받은 양, 기분 나쁜 표정으로 서 명했다. 얀슨은 두꺼운 안경알 너머로 사샤를 바라다보았다. 그 눈빛 속엔 어렴 풋한 희망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몇 층으로 가야 되느냐고 묻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목록은 사샤의 그룹에게로 넘어왔다. 이것 때문에 걱정께나 될 거야. 루노츠킨이 말했다. 코발료프, 너 지 금도 후회하고 있니? 사샤, 넌 정말 대단해. 포즈드냐코바가 말했다. 로자 폴루잔은 아주 조심스럽게 조용히 물었다. 이게 승리를 의미하는 거니? 솔츠는 사샤에 대한 건을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한꺼번에 여덟 사람이나 자기 사무실로 들어오자, 그들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뭔가 회의를 소 집한 게 틀림없지만 수첩에는 그런 게 적혀 있지 않았다. 글린스카야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그는 그녀를 알아보고 어색한 몸짓을 하며 일어섰다. 아주 작은 키였다. 수송전문학교 건입니다. 비서가 알려주었다. 그 말은 솔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솔츠에겐 수송학교 건들에 대 한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대단한 근시라서 그는 사샤도 알 아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늘 해왔던 것처럼 일동에게 자리에 앉으라 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글린스카야는 벽신문을 그의 앞에 펼쳐 보았다. 둘둘 말아서 보관했었기 때문에 양쪽 모서리를 커다란 연필꽂이로 눌러 놓아야만 했다. 솔츠는 아 직도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이게 그 시들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이게 무슨 시들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 순간 그는 사샤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전날 자기 사무실에 들어와 앉아 있 던 그 젊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시들을 읽어 갔 다. 이게 10월혁명 16주년 기념일에 발행된 신문입니다. 바울린이 말했다. 사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가하며 둘러보았다. 그 의 앞에는 잘생긴 금발미인 포즈드냐코바, 사샤, 키 작은 사팔뜨기 소년 루노츠킨, 겁에 질린 로자, 그리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코발료프가 앉아 있었다. 10월혁명이 시까지 폐기하진 않았소. 그는 딱딱한 말투로 맞받았다. 그 시들은 특별작업대원들의 사진 밑에 실렸습니다. 바울린이 고집스 럽게 말했다. 그제서야 솔츠는 그런 주장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들에 관해 시를 쓰는 것은 금지 당해 왔소. 하지 만 보통 시는 여전히 씌어지고 있소. 그러나 노동을 <유행>이라고 주장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이겠습니까? 노동이라! 솔츠가 다시 말을 받았다. 루르조아의 헌법도 노동에 관한 말로 시작되오, 문제는 그게 무슨 종류의 노동이냐는 것과 어떤 이름으로 불리느냐는 것이오. 그 시는 대체 노동을 어떻게 공격하고 있소? 보시는 것처럼.... 난 보고 있소, 그리고 당신들이 이 어린 생명들을 꺾으려는 것까지 말 이오. 그는 손을 들어 자기 앞에 죽 앉아 있는 학생들을 가리켰다. 내 생각으로는 당신들이 이들을 괴롭히며 고통을 주려 하는 것 같소. 레닌이 당신들은 공산주의 하에서 살게 될 것이오 했을 때 염두에 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소. 어떤 종류의 공산주의를 당신들은 이들에게 제공하고 있 소? 당신들은 그를 학교에서 내쫓으면 그만이겠지만, 그러면 그는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해야 된단 말이오? 하역인부나 하라고? 그는 이미 하역인부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얀슨이 한마디했다. 우리는 그를 가르치고 훈련시켜, 조금 있으면 전문가로 만들어 낼 것이 오. 그런데 당신이 그를 거리로 쫓아 버렸소, 무엇 때문에? 몇 줄의 시 때 문에? 젊은 친구들은 그 나름대로의 법칙을 지니고 있소, 그 첫 번째가 바 로 웃음이오. 그는 역시 약간 어색하게 몸을 움직여, 이번에는 글린스카야를 향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즐겨 웃곤 했습니다. 이제 그건 이들 차례이며, 그것 을 신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웃고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게 잘돼 나가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뜻합니 다. 그런데 당신들은 그들을 맞대놓고 걷어차 버리려 했어요. 서로에 대한 시를 썼다는 죄로.... 당신들은 그럼 그들이 누구에 대한 시를 썼으면 좋 겠습니까? 나에 대해서? 그들은 날 몰라요. 그렇다면 그들은 누굴 보고 웃 어야 됩니까? 그의 제명은 지구당위원회에서 확정된 일입니다. 바울린이 따지고 들 었다. 확정되었다고! 솔츠가 고함을 쳤다.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 다. 총알같이 일을 처리했군! 학교에서보다 더욱 든든한 지반 위에 서 있음을 느끼고 있던 글린스카야 가 타협 투로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양미간을 찌푸린 채 솔츠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를 복교시키시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12 밖으로 나오자 루노츠킨이 다른 사람들을 보고 말했다. 우리 자축을 해야 되지 않겠어? 나도 찬성이야. 나쟈가 신이 나섬 말했다. 난 좀 가 볼 데가 있어. 로자가 뒤로 빠졌다. 나도 가야 돼. 코발료프가 흐린 낯빛으로 말했다. 우리 얘기를 로즈가체프한테 좀 해줘라. 루노츠킨이 그의 등뒤에 대고 소리쳤다. 그들에게 가진 돈이라고는 몇 루불밖에는 없었다. 우리 집에 가서 좀더 가져오는 거야. 사샤가 말했다. 집에 오자 그는 어머니를 껴안고 입을 맞추며 말했다. 친구들이 왔어요. 제가 복교되었다고요! 야호!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진정하세요! 그가 말했다. 그녀는 눈물을 닦고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아직도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니나가 전화했더라. 우리가 곧 그 애를 데리러 갈 거예요. 그들이 거기 도착했을 때는 니나가 없었다. 바랴가 복도에서 전화를 걸 고 있었다. 사샤가 수화기를 빼앗았다. 나갈 준비나 해! 어딜 갈 건데? 그녀가 예쁘게 생긴 나쟈를 힐끗 보며 물었다. 한잔 하구 뭘 좀 먹을 거야. 재빨리 어둠이 깔리며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사샤는 초겨울 저녁 아르바트 거리의 분주한 마지막 몇 분 동안에서 느껴지는 활기를 사랑했 다. 모든 것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었다. 그는 옛날처럼 아르바트 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 사건>은 이제 과거의 일이 돼 버렸다. 그들은 아파나시예프스키 가 모퉁이에서 바짐을 만났다. 그는 사슴 모피 코드에 긴 귀마개가 달린 야쿠트 모자를 쓰고 있었다. 북극의 정복자여! 우리를 따라와라! 승리를 축하하려고? 그는 대번에 눈치를 챘다. 어디서 들었구나. 카나티크로 가자. 거긴 근사한 곳이야. 바짐이 나쟈를 보며 제안했다. 니나가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들은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아르바트의 지하실>로 들어갔다. 굵은 사 각기둥으로, 나뉘어진 그곳은, 말 그대로 천장이 낮은 지하실보다 나을 게 별로 없었다. 그들은 안쪽 구석에서 빈자리를 발견했다. 요리냄새, 뻣뻣한 테이블보, 엎질러진 맥주, 이것들은 모두 선술집의 냄새였다. 나지막한 천 장에 불안하게 매달린 전등에서 희미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무대 위에 는 껍데기를 벗기지 않은 더블베이스가 세워져 있고, 섹스폰 하나가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악사가 도착해 있었다. 사샤가 테이블 위에 있는 메뉴판을 집어들었다. 뭘 먹을까? 되게 비싸네. 나쟈가 입속말로 말했다. 소여물이나 한 그릇 먹어야겠 는데. 샐러드나 먹으러 여기 온 게 아니잖아? 여기서 먹을 만한 거라곤 커피하고 카카오 칵테일밖엔 없군. 바짐이 옛날부터 여기에 자주 온 것처럼 얘기했다. 옆 테이블에는 알코올버너의 파란 불꽃 위에 커피포트가 놓여 있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두 사나이가 커 피와 리큐르를 마시고 있었다. 우린 배가 고픈데. 사샤가 말했다. 바랴, 뭘 먹고 싶니? 비프스테이크. 그들은 남자들이 마실 보드카 한 병과 여자들이 마실 포트와인 한 병을 주문하고 모두에게 비프스테이크를 달라고 했다. 서로 다른 음식으로 주문할 걸 그랬어. 바짐이 말했다. 니나가 왔어. 입구를 마주보고 앉아 있던 나쟈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왜들 구석자리에 처박혀 있는 거니? 니나는 슬픈 표정이었다. 축하 해, 사샤! 그녀가 사샤에게 키스했다. 네 쪽지를 보자마자 눈치챘어. 물 론 그때도 의심은 안 했지. 그녀의 눈길이 바랴를 향했다. 너도 여기에 왔니? 그래, 나도 왔어. 막심이 이 일을 몰라서 유감이구나. 바짐과 루노츠킨의 사이에 앉으며 니나가 말했다. 밴드가 시작됐다. 작은 레몬, 나의 작은 레몬, 소냐의 발코니에서 자라 는.... 웨이터들이 비좁고 혼잡한 통로를 비집고 돌아다녔다. 진정한 인간, 솔츠를 위해! 루노츠킨이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지독하게 신경질적이야. 나쟈가 덧붙였다. 입에 비프스테이크를 잔뜩 넣고 바짐이 말했다. 사샤는 이제 연옥의 불덩이 속을 빠져나왔어. 하지만 이걸 명심해라. 고통이 없이는.... 난 넋두리를 좋아하지 않아. 사샤가 그의 말을 막았다. 프루동이 말하기를 압제자들 다음으로, 나는 압제를 받는 사람들을 증 오한다 고 했어. 하지만 상황은 변하고 있어. 이것은 예를 들면.... 그가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 두 사나이는 곁에 예쁘기는 하지만 깡마른 얼굴의 한 아가씨를 앉혀 놓고 있었다. 사회악이군. 니나가 말했다. 아니면 일종의 병리학적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바짐이 토를 달 았다. 그건 병리학이나 사회학과는 관계없어. 그냥 평범하고 낡은 매춘일 뿐 이야. 사샤가 말했다. 난 저 여자가 왜 저런 식으로 사는가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어. 저 여자의 심리상태를 곰곰이 생각해 볼 마음도 없고, 니나, 바랴, 나쟈, 내 입장에서 보면 모두 아가씨들이란 말이야. 난 그들을 사랑 하고 존경할 준비가 되어 있어 인간은 도덕적 존재야. 그것이 바로 동물과 구별짓는 특징이고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능은 고통만이 아 니야. 바랴가 밴드에 맞춰 부드럽게 노래를 불렀다. 우린 그대를 사랑했네. 온화하고 진실한 그대.... 우린 모두 그대를 원했네.... 사람들은 왜 이 따위 맥빠진 노래를 그렇게도 좋아하지? 바짐이 묻고 는 스스로 답했다.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어. 가엾은 소년은 버림을 받고 잊혀졌어. 누구도 그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해. 인간은 괴로워한다. 이게 키 포인트 아니겠어. 괜히 심금 울리려 들지 마. 사샤가 말을 막았다. 바짐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래, 아량 참 대단하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하지만 그건 너무 추상적이야. 난 그걸 잘 알아. 어쨌든 우리한테 돈이 얼마 남았나 보자. 아마 한 병쯤 더 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술을 한 병 더 주문하고 여자들에게는 아이스크림을 부탁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바짐이 주의를 주었다. 그걸로 끝까지 버텨야 하 니까. 바랴, 넌 내일 학교에 가야 돼. 니나가 자기 동생에게 다짐을 놓았다. 난 음악을 듣고 싶은데. 그냥 놔 둬. 사샤가 말했다. 여기 있게 말이야. 그는 바랴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그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들에게 뭔가를 보여 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보다 중요한 무엇을 위해 싸워 왔던 것이다. 그는 친구들의 신념을 지켜 주었다. 그들의 무기력함에 그토 록 큰 고통을 받아 보기는 처음이었다. 루노츠킨이 그의 입장에 있었더라 면 어깨를 으쓱하고 가 버렸을 것이다. 나쟈 포즈드냐코바라면 역시 울음 을 터뜨리고 가 버렸을 것이고, 그리고 만일 바짐이 사샤와 같은 일을 당 했다면 처음부터 와락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사샤의 무용담을 특별히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바랴뿐이었다. 그 녀는 만일 학교에서 쫓겨난다면 한량없이 기쁘기만 할 것이다. 재즈악단이 있는 이런 지저분한 술집에, 새로 유행하는 옷을 걸친 젊은이들과 함께 앉 아, 볼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은 트럼펫 연주자와 정신없이 스틱을 두드려 대는 드럼주자를 넋을 잃고 쳐다볼 것이다. 술에 취한 두 사나이가 좀 전의 그 아가씨를 자기들 테이블로 끌어가려 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와 앉아 있던 두 사람을 경멸하는 듯 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둘은 그녀를 보호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술에 취한 목소리로 울고 짜고 있었다. 웨이터들은 이미 그녀를 내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개판이군. 사샤가 그들을 째려보며 말했다. 잠자코 있어. 바짐이 주의를 주면서도 제 의자를 치워놓았다. 그는 사 샤를 말려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샤가 고개를 빳빳이 하고 일어섰다. 그는 싸우는 방식을 알고 있었다. 그는 기분 나쁜 웃음을 띠고 옆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 여잘 놓아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둘 다 보라색 셔츠 차림으로 하나는 펠트부츠를 신고 또 하나는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뚱뚱하고 험상궂게 생긴 모습이, 어울리 는 한 쌍의 불한당으로 보였다. 펠트부츠를 신은 하나가 사샤를 밀어붙였다. 그러자 다른 하나가 그 사 이에 끼여들었다. 둘 다 물러서! 그러나 사샤는 그 수법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나가 싸움을 걸면 하나는 말리는 척하는 것이다. 사샤가 그를 향해 짧고 강하게 주먹을 날리자 그가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나동그라졌다. 사샤가 두 번째 놈을 향하자 그는 냉큼 뒤로 물러났다. 그 바람에 테이블이 쾅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여자 가 비명을 지르고 두 친구는 의자를 뛰어넘어 건너편으로 피했다. 트럼펫 연주자나 피아니스트, 드러머가 그 장면을 보고 있었지만 모두 제 할 일을 계속했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브라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밴드가 연주를 계속했다. 그들은 마냥 즐거웠다. 모든 게 다 제대로 됐다. 손님들 은 폭스 트로트와 탱고를 추고 커피와 카카오 칵테일을 마셨다. 작은 사건 이 있었지만, 약간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지금은 다 끝나 버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펠트부츠와 통 넓은 바지도 자기들 자리로 돌아가 있 었고, 웨이터가 벌써 테이블보를 갈고 있었다. 그들이 이따가 우릴 밖에서 기다릴 거야. 바짐이 말했다. 바짐은 겁이 많아. 니나가 웃었다. 다 잊어버려. 사샤가 말했다. 싸움을 할 때면 그는 언제나 침착했다. 그러나 일단 끝이 나면,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써야 했다. 바랴, 우리 춤이나 출까? 밴드가 라모나 라는 느린 왈츠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바랴를 안고 넓 지 않은 플로어를 천천히 움직이는 동안, 그는 모든 이의 시선이 자기한테 쏠리는 것을 느꼈다. 개자식들,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그 두 악당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놈들도 뒈져 버려라! 그는 예쁜 아가씨와 그렇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오늘 그의 행동은 정말 멋이 있었다. 5분전까지만 해도 매춘 운운 하며 스스로 비난하던 소녀를 위해 일어선 영웅! 그것을 보고 그녀는 뭔가 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 둘은 결국 마찬가지 아닐까? 그는 단지 정치적인 의식을 가진 체하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그를 보며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자기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밴드가 흐느끼듯 연주를 계속하고 있었다. 라모나.... 춤을 잘 추는데. 사샤. 모레 스케이트 타러 가지 않으래요? 바랴. 왜 하필이면 모레야? 토요일에는 음악을 틀어 줘요. 스케이트 탈 줄 아세요? 한때 탔던 적이 있지. 지금은 요? 내 스케이트가 어디 처박혀 있는 줄도 몰라.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13 판크라토프 학생이 자신의 과오를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그는 엄중한 문책과 함께 복교될 것임. 아무도 축하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제적은 모든 사람을 흥분시켰 지만 반대로 그의 복교는 그들 모두에게서 흥을 빼앗아 간 것이다. 크리보루츠코만이 그의 새 학생증에 서명을 하며 네가 돌아와서 기쁘 다 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한때 그토록 무섭게 보이던 그였지만, 이제는 자기 사무실에서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고독한 인간처럼 보였다. 그는 학생들이 그의 <간판>이라고 부르던 커다란 책상에서 도장 하나를 꺼냈다. 그는 학생들의 장학금이나 기숙사, 배급, 청구서 문제 따위를 취 급하고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종종 그와 마주쳐야 했다. 사실 난 자네 삼촌을 알고 있지. 우린 같은 당조직에 있었어. 이십삼 년 전이니 아주 오래 된 일이군. 그는 요즘 어떤가? 잘 지내십니다. 사샤는 부끄러웠다. 크리보루츠코는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그는 도피했 던 것이다. 당신도 솔츠 동지를 만나셔야 되겠네요? 내 경우엔 솔츠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다른 사람 손에 달렸지.... 그는 사샤는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한테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번 요리사는 아주 매운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리고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사샤는 그가 누구를 얘기하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 다음에 사샤는 로즈가체프에게 갔다. 그는 사샤의 승리를 기뻐하기라 도 하듯 미소로 그를 맞았다. 크리보루츠코를 만나 봤나? 그는 짐짓 모른 체하고 물었다. 그 분이 내 학생증과 허가증을 간수하고 계셨더군요. 사샤가 대답했 다. 바울린이 들어오다가 사샤의 대답을 엿듣고는 로즈가체프한테 퉁명스럽 게 물었다. 크리보루츠코가 아직도 그 도장을 가지고 있소? 새로 온 분은 월요일부터 업무를 시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도장만은 먼저 받아 놓았어야 되는데. 로즈가체프는 마치 젠체하는 글린스카야가 고무도장 하나를 거들떠보겠 느냐는 말이라도 하듯 어깨를 으쓱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도 죄의식이라든가 양심상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들이 사샤를 복교시켜 주었으니 이제 사샤도 달리 행동해야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듯했다. 그들은 사샤가 보는 앞에서, 글린스카야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고 공 공연히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런 솔직함 속에는 그를 믿겠다는 의도 가 내포돼 있는지도 몰랐다. 사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판크라토프, 이제부터 자네는 눈치 빠르게 행동해야 하네. 자네의 신상 엔 아제 금이 갔어. 전과가 올라갔단 말이지. 다음엔 그 고리를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할 걸세. 솔츠는 멀리 있지만, 우린 바로 여기에 있어. 그러니 우리한테 기대면 잘될 걸세. 자네는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는 풋내기라서 그런 실수를 했지만, 우린 그걸 이해할 수 있어. 이제 크리보루츠코가 어 떤 인간이라는 걸 똑똑히 알아두고 그를 쫓아내는 데 도와주게. 공동의 적 을 앞에 두었을 때는 언제나 신뢰가 싹트기 마련이지. 네 친구가 누구냐 하고 묻던 시대는 지나갔네. 요즘은 네 적이 누구인가를 말해 주면 네가 어떤 사람인가를 내가 말해 주지 하는 시대야. 크리보루츠코가 자네한테 무슨 불평이라도 하던가? 로즈가체프가 물었 다. 그런 일에 휘말릴 필요는 전혀 없었다. 패배자는 그가 아니었다. 그들로 하여금 사타구니에 꼬리를 감추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서, 결코 그 일을 잊지 못하도록 할 것이었다. 나한테 무슨 불평을 하겠습니까? 난 당위원회 멤버도 아닌데. 우린 다 불행한 동지들이네. 동지? 사샤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아직 복권되지 않았습니다. 바울린이 몹시 떫은 표정을 지었다. 사샤보고 조심하라는 경고신호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사샤의 용기를 북돋워 줬다. 네가 뭔데 자기에게 경고를 하는가? 다시 쫓아내겠다고? 해볼 테면 해보라지. 그들은 자기 손 가락을 데이고서도, 승리한 척하는 것이다. 자넬 용서한 사람은 솔츠가 아냐.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넬 용서한 건 당이야. 그리고 < 우리>가 당인 한, 자넬 용서한 건 바로 <우리>란 말이야. 그러나 어림없 다. 너희들은 <결코> 당이 아니다! 자넨 크리보루츠코가 복권될 거라고 생각하나? 로즈가체프가 빈정거리 는 투로 물었다. 나는 복권되었습니다. 자네야 달라, 자넨 실수를 저질렀을 뿐이지만 그는.... 그는 한 때 정치적인 과오로 제명되었다가 복권된 적이 있었습니다. 하 지만 이번엔 단순히 기숙사문제 때문에.... 이건 새로운데, 바울린이 팔걸이의자에 깊숙이 파묻힌 채 사샤를 보며 말했다. 자넨 결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었어. 아무도 그런 질문을 내게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에서야 그런 질문을 받 았죠. 전에 자네는 크리보루츠코와 관계가 없다고 말했어. 바울린이 말을 이 었다. 나는 모른다, 난 그를 모른다. 우린 말 한마디도 나눈 적이 없었 다. 그건 사실입니다. 나는 모릅니다. 난 그를 모릅니다. 우린 말 한마디도 나눈 적이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바울린이 기분 나쁘게 물었다. 자네 말은 틀렸어, 판크라토프. 로즈가체프가 설교 조로 말했다. 당 은 숙청을 통해서만.... 무엇보다도 기회주의자들이 그 대상이겠죠. 사샤가 말을 가로챘다. 지금 누굴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긴가? 로즈가체프가 미간을 찌푸렸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일반적인 기회주의자들 말입니다. 아냐, 자네 말은 틀렸어. 로즈가체프가 고개를 저었다. 당은 이념적 으로 불확실하고 적대적인 분자들을 추방해야만 하네. 자네는 제일 먼저 기회주의자들을 제거해야 된다고 주장했지. 옳은 말이야. 하지만 그 둘을 어떻게 비교하지? 그는 로즈가체프의 낯간지럽고 위선적인 목소리, 차가운 얼굴, 입으로 달달 외워 머릿속에 집어넣은 맹목적이고도 편협한 공식 때문에 짜증이 났 다. 로즈가체프 동지, 우리는 사람들의 이마 위에 함부로 어떤 낙인을 찍어 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그런 데 대한 충분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봅니다. 저는 크리보루츠코와 같은 늙은 볼셰비키가 저지른 몇 개의 과오보다도 한 명의 기회주의자가 당에 더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크리보루츠코는 당을 위하려다 과오를 범 했지만, 반면에 기회주의자는 자신의 안락한 지위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 다. 한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에 바울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괜찮은 생각이야, 판크라토프.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사샤가 대답했다. 물론 그들은 그가 한 말을 비비틀어서 엉뚱하게 해석할 것이다. 로즈가 체프의 사무실을 나오며 사샤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샤는 강의실의 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출석부에는 아직도 그의 이름 이 그대로 올라 있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그 일이 일단락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솔츠의 사무실에서 진행된 일련의 과정이 꿈결처럼 느껴 졌다. 현실은 이곳 학교에 있었다. 바울린, 로즈가체프, 그리고 꺾이고 만 크리보루츠코. 그는 북적거리는 전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밖에서는 초겨울 저녁이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붉은 턱수염을 기른 초라해 보이는 농부가 앉아 있었다. 헐렁헐렁한 모자 끝이 양피코트깃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는 큼지막한 펠트부츠를 신은 한쪽 발을 가방 위에 얹어 놓고, 다른 발을 옆자리에 걸치고 있었는데 촌스럽게 생긴 큰 가방이 복잡 한 전차 안에서 사람들의 발에 연신 체였다. 그는 초조한 듯, 내릴 곳을 알려주겠다는 차장의 말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내려야 되냐고 물어보며, 끊임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애태우고 있는 농부의 표정 깊숙한 곳에서 사샤는 뭔가 단단하고 굳건한 것을 감지했다. 틀림없이 이 사람은 집에 돌아가면 전연 딴판이 될 것이다. 사샤는 교량 및 도로건설 노트의 껍데기에 인간은 상황에 따라 변한다고 적어 넣었다. 시작했다가 중도에서 포기했고 이제 다시 계속 쓰기로 굳게 마음먹은 일기장에 그 얘 기를 제대로 써 볼 생각이었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14 어느 날 밤 사샤가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카챠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오랜 전에 하던 장난을 다시 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쥐죽은 듯 있다가 다시 거는 것이었다. 너, 카챠지? 나도 못 알아보는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시골의 공중전화에서 거는 것 처럼 아주 감이 멀었다. 아무 소리도 안 내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봐? 소리.... 이곳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지 않아. 그건 그렇고 어떻게 지내 니? 아주 좋아. 네 생각뿐이지. 내 생각 .... 아직도 여자친구가 충분하지 않은가 보지? 모두 떠나 버렸어. 넌 어떠니? 그저 그래.... 마루샤가 널 보고 싶어해. 너 마루샤 알지? 그녀는 내가 마음에 드나 봐. 나더러 맨날 그 까만 눈동자 친구를 데려오라나. 오, 좋아, 언제 갈까? 가다니.... 너 모르니? 난 결혼한 유부녀란 말야! 그 기계공이랑 결혼했어? 기계공.... 땜장이, 양복장이, 군인, 뱃사람. 너 취했니, 아니면 무슨 일이야? 아무 일 아냐! 언제 만날까? 언제 만나? 지금 밖은 영하 삼십 도야, 네 물건도 꽁꽁 얼어버릴 걸. 하지만 마루샤가 우릴 기다리고 있잖아. 우릴 기다려.... 그녀의 남편이 돌아왔어. 그래 좋아. 데비치 가에서 보자.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쿠디킨 언덕. 좋았어. 그럼 내일 데비치 가에서 만나자. 여섯 시, 아니면 일곱 시? 여섯 시까지 갈게. 카챠는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예전에 그녀에게 느꼈던 욕망들이 모두 되살아났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도 죽지 않았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9월 인가 10월에 만났었는데 벌써 1월이니, 넉 달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 다. 물론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고, 마루샤의 남편도 돌아오지 않았 을 거다. 그들은 내일 마루샤에게 갈 것이고, 그것이 바로 카챠가 그녀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일 것이다. 그녀는 늘 똑바로 말하지 않고 돌려서 얘기 했다. 그녀는 정말 이상한, 수수께끼 같은 여자였다. 그는 침대에 누워 그녀를 생각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그녀를 갖고 싶었다. 내일 그는 그녀의 따뜻한 입술에 키스할 것이고 그녀를 껴안 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사샤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복도에 있는 초인종이 날카롭게 울리는 바람에 그는 깜짝 놀라 잠이 깨 었다. 새벽 2시였다. 벨은 아주 끈질기게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겉 옷만 하나 걸치고 복도로 나가 문고리를 끌렀다. 누구십니까? 관리인입니다. 사샤는 바실리 페트로비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문을 열었다. 관리인은 문가에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코드와 모자를 쓴 낯선 청년과 붉은 견장을 단 두 명의 붉은 군대 병사가 서 있었다. 청년은 바실리 페트 로비치와 사샤를 차례로 밀치고 방으로 들어섰다. 붉은 군대 병사 하나는 문에 남고 다른 하나는 바실리 페트로비치를 따라가서 부엌을 지나 뒷문에 지키고 섰다. 판크라토프? 네. 당신이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판크라토프요? 네. 주의 깊게 사샤를 지켜보면서, 그는 아르바트의 주민 알렉산드르 파블로 비치 판크라토프의 수색 및 체포영장을 제시했다. 그들은 사샤의 방으로 들어갔다. 신분증을 보여 주시오! 사샤는 의자에 걸쳐 있던 자켓에서 자기의 신분증과 학생증을 꺼냈다. 그 청년은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테이블 위에다 내려놓았다. 무기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청년은 사샤의 어머니의 방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저기엔 누가 있소? 제 어머니 방입니다. 그녀를 깨우시오. 사샤는 바지를 끌어당겨 입고는 셔츠를 그 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양 말과 신발을 신었다. 코드와 모자를 쓴 그 청년은 그가 옷을 다 입을 때까 지 조용히 기다렸다. 사샤는 갑자기 깨워 어머니가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흰색 잠옷 앞자락을 잔뜩 움켜쥔 채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사 샤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그 청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흰 머리칼은 이마로 흘러내려 있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에 뭘 조사하러 왔대요. 뭔가 오해가 생겼나 봐요. 모든 게 잘될 거예요. 잠시만 가만히 계세요. 그러나 그녀의 의심하는 눈빛은 사샤를 지나 문가에 서 있는 낯선 사람 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여기예요, 여기. 사샤가 중얼거렸다. 내가 말했잖아요, 착오라고요. 제발 누우세요, 어머니. 그들이 방에서 나가자 사샤는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청년이 그를 제 지했다. 문을 열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 청년은 단지 명령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와 말다툼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꿋꿋한 태도를 지켜 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직 그것만이 그의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길이었으니 까. 도대체 뭘 찾는 거죠? 제가 찾아드리겠습니다. 청년은 코트와 모자를 벗어 한구석에다 걸었다. 그는 감청색 양복에 어 두운 색깔의 셔츠를 입고 역시 같은 색의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는 어 느 관공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학교에서 쓰는 사샤의 노트, 메모지 그리고 교과서가 책상 위에 놓여 있 었다. 그 청년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집어 들춰보고는 옆에다 가지런히 놓 았다. 그는 일전에 사샤가 전차 안에서 교량 및 도로건설 노트 껍데기에 적 어 넣은 메모에 관심이 끌렸다. 어쩔 줄 몰라 동정심마저 느끼게 하던 전 차 안에서의 농부, 그러나 가정에서는 믿음직스럽고 권위적이며 전체적인 가장. 그 노트는 그의 학생증 옆에 놓였다. 책상서랍 속에는 신문과 사진, 편지들이 들어 있었다. 청년은 편지 내용 에는 관심이 없이 발신인만을 눈여겨봤다. 서명을 판독할 수 없을 때에는 사샤에게 물었고, 사샤는 거기에 또박또박 답해 주었다. 청년은 편지를 오 른쪽으로 놓았다. 그것들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졸업장이나 추천장, 따 위는 원래 있던 곳에 그대로 넣어졌지만 콤소몰 회원증과 노동조합원증은 왼쪽으로 분류되었다. 콤소몰 회원증은 왜 가져가시는 거죠? 난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소. 그는 어릴 적에, 그리고 고등학교 때까지 찍은 사진들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지만, 어른들이 함께 끼어 있는 사진에는 유독 관심을 보였다. 이 사람은 누구요? 그리고 이 사람은? 사샤의 어머니가 일어났다. 그는 어머니의 침대가 삐걱대는 소리며, 슬 리퍼가 끌리는 소리, 그리고 옷장 문이 열리는 소리를 다 들었다. 그녀는 잠옷 위에 급하게 드레스를 걸치고 사샤의 방에 들어왔다. 걱정스러운 웃 음을 띠고, 그녀는 사샤에게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사샤의 머리칼을 쓰다 듬었다. 어머님께서는 방에 가서 앉아 계십시오. 청년이 말했다. 그 말투에는 평소 그녀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던 관료적인 단조로움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들에게 해를 끼칠 만한 행동이라도 한 것처럼 겁먹은 표 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있는 대로 다 바닥으로 끄집어내릴까요? 사샤는 비아냥거리듯이 물었 다. 선반에 있는 책들을 뒤적이던 청년이 놀라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다봤지 만 입을 열지 않았다. 방에 가서 앉아 계세요. 사샤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녀는 머리를 더욱 세차게 흔들더니 청년의 널찍한 등짝을 흘깃 쳐다보 고 그녀의 방으로 갔다. 저들은 혹시 솔츠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알 리가 없다. 그렇지 않고서 야 감히 여기 와서 이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기계장치 속에서 톱니가 하 나 잘못 물린 게 분명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냐? 이런 오해가 인생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법이다. 청년이 사샤에게 찬장을 열고, 자켓 호주머니에 든 것을 다 꺼내 놓으라 고 명령했다. 주소와 전화번호가 빽빽이 적힌 수첩이 이제 책상 위에 놓여 졌다. 청년은 빠진 게 없나 방안을 둘러보더니 침대 밑에 있는 가방을 발 견하고 사샤에게 그것을 열라고 말했다. 그것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양심적인 공복으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철저히 수행하고 있 었다. 만일 당이 사샤를 게페우 보안국에 배치하고, 특정인을 수색하고 체 포하는 일을 맡긴다면, 그는 똑같은 방식으로 그 일을 정확히 수행할 것이 다. 비록 그가 체포하려는 사람이 결백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종류 의 일에는 실수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인 인정 따위는 덮어두어야 한다. 그는 사샤 자신이 조정위원회에서 한 것처럼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것이다. 한동안 그 사람에게 자기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옆방으로 갑시다. 청년이 말했다. 어머니는 손으로 머리를 붙들고 서랍장에 기대로 있다가 그들이 들어오 는 걸 곁눈질로 보았다. 어머니, 여기 온 동지들이 어머니 방을 좀 보고 싶대요. 어머닌 앉아 계세요. 그러나 그녀는 그대로 서서 청년이 다가올 때까지 미동도 안 했다. 서랍장 위에는 사샤와 마르크, 그리고 누이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몇 장 있었다. 이 사람은 누굽니까? 내 동생이에요.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 랴자노프. 그녀의 동생이 저 유명한 랴자노프 인민위원이며 사샤가 그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대답이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줄곧 이 얘기를 그들 이 듣는 순간 즉시 수색을 중지하고, 아들의 체포를 포기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나라 전체가 마르크를 알고 있었고, 더욱이 스탈린까지 그를 알고 있었던 만큼. 그녀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띠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이 앤 사셴카예요, 아주 어렸을 적의. 청년은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마르크의 사진을 집어, 액자를 분해하고는 뒷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씌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그것들을 모두 서랍장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안 락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먹이기 시 작했다. 청년은 서랍장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가 리넨천을 들썩이니 세탁한 옷에서 풍기는 그런 신선한 내음이 물씬 풍겨 나왔다. 어머니가 사샤의 침 대시트를 새로 깔았을 때 나는 냄새와 같은 것이었다. 조사를 받는 사람은 저 혼자뿐인 줄 알았는데요. 사샤가 말했다. 당신들은 한 가족으로 살고 있는 것이오. 청년이 대답했다. 그들은 사샤의 방으로 되돌아갔다.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가 그들을 따 라왔다. 수색이 끝났기 때문에 청년은 그녀에게 방에 남아 있으라고 하지 않았다. 사샤를 데려갈 거라는 생각이 갑자기 그녀의 마음속에 소용돌이치 면서, 그녀를 멍해 있던 상태에서 깨어나게 했다. 그녀는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들뜬 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사샤의 주위를 맴돌며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청년을 지켜보고 있었다. 청년은 책상에 앉아 보고서를 작성했다. 몇 월 몇 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어디어디서, 명령 몇 호에 의해 다음 품목을 압수함 - 신분증 번호000, 노동조합원증 번호 000, 콤소몰 회원증 번호000, 학생증, 노트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교량 및 도로건설 노트를 한쪽으로 제쳐놓았다. 가져가지 않기로 생각한 것 같 았다. 손을 좀 씻어야겠는데요.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가 후닥닥 움직였다. 이리로 오세요. 그녀는 얼른 서랍을 열고 깨끗한 수건을 꺼내, 청년이 손을 씻는 동안 수건을 들고 욕실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애처로운 미소를 지으며 청년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물론 그것은 아들을 그곳에 데려가더라도 잘 봐 달라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청년은 손을 닦고 나서 전화를 걸기 위해 복도로 나갔다. 그가 하는 말 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오직 한 단어만은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아르바 트였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할 일을 마친 사람의 느긋한 표정으로 문가에 기대섰다. 문 앞에 있던 붉은 군대의 병사가 편한 자세를 취했고 또 한 병사도 앞뒷문을 그렇게 열어 놓은 채 부엌에서 나왔다. 관리인은 이미 가고 없었다. 아무도 옆집에 수색이 끝났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음에 도 불구하고 미하일 유레비치와 갈랴가 복도에 나타났다. 사샤의 어머니는 손을 덜덜 떨면서 그의 물건을 챙기고 있었다. 따뜻한 양말을 몇 켤레 넣으시오. 청년이 그녀에게 말했다. 먹을 것도 좀 가져가야 할 거예요. 마하일 유레비치가 점잖게 덧붙였 다. 돈도 필요합니다. 청년이 말했다. 저런! 사샤가 말했다. 담배가 다 떨어졌는데. 제가 가서 조금 가져올께요. 갈랴가 꾸러미를 하나 들고 나왔다. 돈 가진 거 좀 있나, 사샤? 미하일 유레비치가 물었다. 사샤가 호주머니를 뒤졌다. 십 루불입니다. 그거면 충분하오. 청년이 말했다. 그곳에선 물건이 쌉니다. 붉은 군대의 병사 한 명이 설명해 주었다. 너무도 조용했다. 마치 사샤가 어떤 미지의 도시로 여행을 떠나려는 참에 가져가야 할 것을 옆에서 챙겨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청년은 현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붉은 군대의 병사 한 명은 갈랴 와 얘기를 나누고, 다른 한 명은 쭈그리고 앉아 역시 담배를 피우고 있었 다. 미하일 유레비치가 사샤에게 격려의 미소를 보내자 사샤도 역시 미소 로 답했다. 사샤는 자기의 미소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 고 있었지만, 그나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 사셴카, 네가 가져갈 거다. 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꾸러미를 들어 보 였다. 봐라, 비누. 치약, 칫솔, 수건, 면도칼.... 면도칼은 안 됩니다. 청년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면도칼을 끄집어내며 그녀가 말했다. 네 양말, 갈아입을 속옷, 손수건....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 빗, 네 예쁜 목도리.... 예쁜 목도리.... 그녀의 말은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이 물건들을 꾸리는 동안 완 전히 탈진해 있었다. 그들이 그녀에게서 빼앗아 감옥으로 데려가는 아들의 물건들을 꾸리는 동안. 그녀는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흐느 낌이 따라 작고 통통한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자, 자, 마음을 편하게 먹어요. 모든 게 잘될 테니까. 갈랴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알마조프네 아들도 잡혀갔다가 곧 집으로 돌아왔잖아 요? 우실 까닭이 없다니 까요. 사샤도 그렇게 될 거예요. 그러나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더욱 거세게 흐느꼈다. 이젠 끝장이야, 끝장이라고.... 청년이 시계를 봤다. 준비됐소? 그는 담배꽁초를 버리고 몸을 똑바로 세웠다. 보초들도 자기의 임무로 돌아와 꼿꼿이 섰다. 그들은 더 이상 충고를 하지 않았고, 호송을 위해 무 기를 준비했다. 청년은 미하일 유레비치와 갈랴에게 피의자를 데려갈 수 있도록 비켜서 라는 손짓을 했다. 사샤는 코트를 걸치고 모자를 쓴 다음 짐꾸러미를 집어들었다. 한 병사가 자물쇠를 더듬어 문을 열었다.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에게 엄청난 두려움의 순간이 오고 말았다. 복도 로 달려나간 그녀는 코드차림의 사샤에게 매달려 울며불며 몸부림을 쳤다. 마하일 유레비치가 살며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 정말 이러시면 안 됩니다. 사샤는 흰머리가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미하 일 유레비치와 갈랴가 몸부림치는 그녀를 떼어놓기 위해 뒤에서 그녀를 잡 았다. 사샤는 그렇게 떠났다. 자동차 한 대가 부근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청년과 병사 한 명이 사샤를 가운데 두고 뒷좌석에 앉고 또 한 명의 호송병은 운전사 옆좌석에 앉았다. 그들은 말없이 모스크바의 밤거리를 질주해 갔다. 사샤는 그들이 감옥을 향해 어느 길을 달려가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거대한 철문이 열리자 자동차는 사방이 막힌 좁고 긴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호송병 이 내리고 그 다음에 사샤, 청년이 차례로 내렸다. 자동차는 즉시 떠났다. 그들은 아치형의 천장이 낮게 드리운 아주 넓은 지하실로 그를 데려갔다. 그곳은 의자나 책상도 없는 그저 텅 빈 공간으로, 표백제 냄새가 물씬 풍 겼고, 벽과 시멘트바닥에는 군데군데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사샤는 이곳 이 집결지란 것을 알아챘다. 좌수들은 이곳에서 각 방에 수용되기도 할 것 이고, 몇 명씩 분류되어 다른 감옥이나 유배지로 이송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곳은 이 감옥의 입구이자 출구이며, 첫 관문이자 마지막 관문 인 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텅텅 비어 있는 것이다. 이젠 청년과 호송병들은 사샤의 움직임을 더 이상 감시하지 않았다. 도 망할 기회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맡은 바 임무를 성공적 으로 수행하여 피의자를 안전하게 인도한 만큼, 더 이상 그에 대한 책임이 없었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청년이 그렇게 명령하고 가버렸다. 호송병들도 자기들 막사로 가 버렸다. 열려진 문을 통해 눅눅한 군용외 투 냄새와 양배추 수프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사샤는 짐꾸러미를 내려놓고 벽을 등지고 섰다. 체포단계가 끝나고 조사 단계가 시작되기까지는 아무도 자기를 감시하거나 지켜보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홀로 남겨진 이 시간 동안 사샤는 자기의 위치를 명확히 파악하 고 있었다. 만일 한 발짝이라도 움직인다면, 그들은 그를 제지하고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라고 명령할 것이다. 그로서는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 때문에 더 큰 모욕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들 에게는 변명도 해서는 안 된다. 그 길만이 자신의 위엄, 나아가서는 어쩌 다가 실수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소비에트인의 위엄을 지키는 길이다. 옷깃에 사각형의 금장을 단 키작은 군인 한 명이 나타나서 사샤에게 따 라오라고 명령했다. 사샤는 짐꾸러미를 집어들고 시키는 대로 했다. 호기심밖에는 아무런 느 낌도 없었다. 그 바로 옆방에는 작은 사무용 책상이 하나 있었다. 그는 그 책상에 앉 아 서류를 한 장 꺼냈다. 성은?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은? 생년월일? 신체 상의 특징? 문신? 상처? 흉터? 화상자국?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특징은? 그는 사샤의 머리칼과 눈동자의 색깔까지 적어 넣었다. 그리고는 스탬프를 꺼내 사샤에게 지문을 찍게 했다. 그의 소지품들도 모두 기록되었다. 코 크, 털모자, 부츠, 스웨터, 바지, 자켓, 셔츠, 그리고는 사샤에게 서명하 라고 했다. 돈은? 그는 돈을 세어 보고 서류에 액수를 기입했다. 그리고는 다시 사샤에게 서명하게 했다. 영수증을 받게 될 거다. 그는 한 쪽 문을 가리켰다. 저리로 가 봐. 작은 방에는 사복을 입은 뚱뚱한 사람이 졸리운 표정으로 사샤를 기다리 고 있었다. 옷 벗어. 사샤가 모자와 코트를 벗었다. 부츠도. 사샤는 부츠를 벗고 양말 바람으로 섰다. 끈을 풀러. 뚱보가 끈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구석을 가리켰다. 저기 가서 서 있어. 구석에는 키를 잴 수 있도록 눈금이 그어진 판자가 있었다. 뚱보는 손잡 이를 사샤의 머리까지 내리고 벽 쪽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 수치를 불러 주 었다. 백육십오 센티미터. 그리고는 사샤의 코트와 모자를 집어 칼로 안감을 뜯고 속을 살펴본 후 에 철제 의자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그는 사샤의 양복을 가리켰다. 벗어. 사샤가 자켓을 벗었다. 몽땅 벗으란 말야! 뚱보는 자켓과 바지를 더듬어 보고, 안감과 비짓단을 뜯었다. 그리고는 혁띠를 풀러 부츠끈 옆에 놓고, 자켓과 바지는 의자 위로 던졌다. 입 벌려. 그는 졸린 얼굴을 사샤의 얼굴에 바짝 갖다 대고 입안을 들여다봤다. 그 리고 이빨 사이에 감춰 둔 게 없나 하고 입술을 잡아 들추었다. 그 다음에 는 속옷을 가리켰다. 벗어! 그는 문신이나 흉터, 화상자국이 있나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 했다. 돌아서서 다리를 벌려. 더 넓게, 몸을 앞으로 숙여. 사샤는 사람의 손이 엉덩이에 닿는 차가운 감촉을 느꼈다. 뚱보가 항문 을 검사하고 있었다. 옷 입어. 사샤는 혁띠도 없는 바지를 손으로 움켜잡고 역시 끈이 없는 부츠를 질 질 끌며, 짧은 복도를 몇 번 지나고 철제 계단을 오르내렸다. 간수가 찰랑 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물통에 열쇠를 끼워 넣었다. 주위는 온통 빈 감방과 철문뿐이었다. 그들이 멈춰 섰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또 하나의 간수가 한 감방문을 열었다. 사샤는 안으로 들어섰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15 스탈린이 요구한 대로 제 4기 용광로는 계획보다 빨리, 수은주가 영하 35도까지 내려간 12월 30일 저녁 7시에 점화되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 치 랴자노프는 제 1기 용광로에 점화할 때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으 리라는 자신이 생길 때까지 모스크바로 떠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공교롭게 도 그때와 기온이 비슷한 날씨에서 점화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지구당 위 원들이 이미 떠난 후인 1월 19일에야 자신의 전용열차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의 전용열차는 벌써 기관차에 연결되어 있었다. 제설차는 그보다 앞서 달려갔다. 엄청나게 쌓인 눈 위로 드문드문 박혀 있는 신호등이 휘몰아치 는 강풍 속에서 가물거리고 있었다. 역이나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 았다. 전기는 공장까지만 들어와 있었는데, 그것 없이는 금속을 정련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작은 역사 안, 네덜란드식 난로 주위에는 마르크의 참모들이 마지막 현 안문제를 가지고 모여들었다. 그들은 젖은 부츠와 덧신을 신고 마르크를 따라 열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발을 쿵쿵 굴러 모자나 옷에 쌓인 눈 을 털어 내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마르크가 탈 때면 늘 그래 왔듯 열 차 안을 반들반들하게 닦아 놓고 난로에 불까지 지펴 놓은 차장에게 그들 의 행동은 여간 곤혹스러운게 아니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양피코트와 모자를 벗었다. 그래도 무척 따뜻 하게 느껴졌다. 때때로 침침해지기도 했지만 불빛은 밝은 편이었다. 그는 재빨리 그의 서류를 훑어보며, 모스크바에 가서 필요한 게 다 준비되었는 가를 확인했다. 중앙위원회가 제시한 완공기한은 1937년이었다. 그리고 5 개년 계획기간 동안 국내 선철 생산목표는 2,200만 톤에서 1,800만 톤으로 감소되었다. 현실주의가 그만큼 팽배해 있었다. 과거에는 단지 속삭이기만 했던 문제들, 가령 주택문제라든지 기계화, 소비자 보호 등의 문제를, 목 청껏 요구할 때도 되었다. 역장이 들여다보고 말했다. 출발신호를 하겠습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 검은 제복을 입은 차장이 랜턴을 들고 들어와서 열차가 출발합니다, 여 러분, 열차가 출발합니다. 하며 퉁명스럽게 알렸다. 다른 사람들은 열차에서 내리고, 대신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이 쏴 하고 밀려 들어왔다. 차장은 계단에 쌓인 눈을 밖으로 차 내 버리고 문을 닫았 다. 호각소리가 울리자 열차가 기적소리로 응답하며 거대한 덩치를 앞쪽으로 기울였다. 그리고는 좌우로 조금씩 움직이며 서서히 레일의 리듬을 되찾았 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부츠를 벗고 가방에서 실내용 슬리퍼를 꺼내 신었다. 그리고는 뿌듯한 기분으로 다리를 한번 쭉 펴고 나서 실내를 천천 히 오갔다. 그는 창가로 가서 커튼을 한 쪽으로 젖혔다. 열차는 눈 덮인 평원을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질주했다. 산기슭에 있는 도시를 지나면서 번쩍거리는 용광로의 불빛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4 년 전에는 말 그대로 허허벌판이었지만, 지금은 20만이나 되는 인구가 형 성되었고, 세계수준의 거대한 공장이 연간 백만 톤의 선철과 수십만 톤의 강철, 그리고 수백만 톤에 달하는 원광을 이 나라에 공급하고 있었다. 그는 회상에 잠겼다. 요 몇 년 동안 그럴 만한 시간이 전혀 없었다. 코 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하기도 벅찼던 것이다. 그런 그가 전당대회를 앞두 고, 지구당 위원들과 함께 먼저 출발한 로미나드제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었다. 한때 중앙위원회 위원이었던 로미나드제는 이론적인 과오 때문에 모든 중요한 직책에서 쫓겨나 지방 소도시 위원호의 서기로 파견되어 있었다. 그는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와 같은 나이였는데, 입당년도는 그보다 2년이 나 빠른 1917년이었다. 그는 지적이고 재치가 넘치며, 상상력이 풍부하고 창의적인, 한마디로 아주 이상적인 정치가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만일 전당대회의 목표가 반대파를 퇴치하는 데 있다면, 로미나드제는 이번 전당 대회의 표적이었고 그러면 공장도 역시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 다. 금속도 중요했지만 정치는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만반의 준비를 다했으므로,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이번 전당대회가 무사하게 지나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승리자의 대회 라는 타이틀까 지 그런 느낌을 던져 주고 있었다. 이 전에 있었던 세 번의 대회는 모두 권력투쟁의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지만 이제는 새로운 지도체제를 중심으로 하여 당의 굳건한 결속을 과시할 때였다. 그렇지만 돌발적인 가능성에는 여전히 대비해야 했다. 그에게도 두꺼운 군용외투를 입고 배낭을 짊어진 채, 화물칸이나 심지어 는 지붕꼭대기에 올라타고 모스크바를 왕래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그는 수십만 인민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했으며, 그만큼 막강한 권력을 부여받았 다. 그는 당이 올바른 노선 위에 서 있음을 굳게 믿었고, 어떤 반대파에도 속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세르고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스탈린으로부터 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판단 해야 했다. 또 일년 전 로미나드제가 그곳 지구당 서기로 좌천되었다는 사 실만으로도 복잡한 일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했 다. 물론 로미나드제가 범한 과오는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와 그의 부하들 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샤의 구속사건이 일어나 고 말았다. 조카가 그런 곤궁에 처하다니, 그는 몹시 화가 나고 답답했다. 하지만 사태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으니 속으로만 삭여야 했다. 회계강사와 의 불화 때문에 체포될 리는 없었다. 더구나 솔츠가 이미 사샤를 복교시키 지 않았던가. 원인은 분명히 사샤가 그 날밤 얘기한 스탈린의 거만이라든 지 레닌의 편지 따위와 관계 있을 것이다. 그가 과연 레닌의 편지를 읽어 보았을까? 언제, 어디서, 누가 그에게 그 편지를 주었을까? 스탈린의 거만 은 또? 사샤는 그 말을 또 다른 사람한테 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누구 에게 했을까? 그것은 과연 그 애 자신의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또 누군가 가 그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을? 만일 그렇다면 그건 또 누구일까? 그에게는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조카가 개입 된 사건인 만큼. 그리고 철저하고 객관적인 조사를 기대할 수 있는 권리도 있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스베르들로브스크에서 그 지방의 공장 책임자 로 있는 키르자크를 만났다. 그가 타려던 모스크바 - 블라디보스토크 간 급행열차가 늦어지자 역장은 역사를 피해 정부관리들이나 그에 상당하는 요인들을 위해 마련해 둔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여급사가 차와 샌드위치를 가져왔다. 체구가 작고 성미가 까다로운 키르 자크는 업무진행상황에 대해 자세히 얘기했다. 공급자들을 믿을 수 없고, 수송이 원활치 못하며, 자금사정이 비현실적이고, 탁상공론으로 일이 진척 되지 않으며, 지방조직으로부터의 협조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힘이 없음에서 비롯되는 그의 불만스런 말투에 익숙해 있었다. 키르자크와 얘기가 끝나자 그는 플랫폼으로 나갔다. 역구내의 통로와 출 입구는 크고 작은 가방들과 짐꾸러미로 꽉 메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의자 와 바닥에 앉거나 누워 있었고 매표구와 물이 끓고 있는 보일러 앞에는 많 은 사람들이 줄을 선 채 몰려 있었다. 특히 여자와 아이들이 많이 눈에 띄 었다. 이것이 바로 농민의 나라 러시아요, 양가죽과 자작나무껍질로 만든 신발이 벗겨지지 않도록 자꾸만 끈을 고쳐 매야 하는 나라 러시아였다. 서 글픈 혼란 속에서, 비참한 가난과 부패 속에서 뒤엎어지고 찢겨져 미지의 세계 속에 내던져진 인민들이 거기 있었다. 그것은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전혀 새로운 풍경이 아니었다. 그는 이 나라 어디에서나 그런 풍경을 보아 왔다. 가방과 짐꾸러미를 들고 아내 와 자식들을 거느린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공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래 서 공장의 기숙사에서는 양가죽냄새와 땀냄새, 마늘냄새가 뒤섞여 지독한 악취가 풍겨 나왔다. 그것은 냉혹한 역사의 법칙과 산업화의 과정에서 비 롯되는 현상이었다. 그것은 원시적이고, 낡고, 근시안적이고, 무지한 촌락 생활의 마감이자, 사유재산제도와의 결별이었다. 이제 새로운 역사가 창조 되고 있었다. 낡은 모든 방식들은 고통과 상실 속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 다. 대륙횡단열차는 반 넘어 비어 있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쉬지 않 고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나서 통로로 나갔다. 오후 3시인데 밖에는 벌써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카페트가 깔린 바닥이 규칙적으로 들리는 열차의 진동음을 흡수하고 있 었다. 객실문은 하나만 빼고 모두 닫혀 있었다. 바로 그곳으로부터 프랑스 어로 얘기하는 남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복도로 나온 여자는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를 보자 당황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실내복에 실내화를 신고 머리를 푼 채 욕실로 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낯선 러시아인이 자기가 잠을 자는 동 안 탑승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35세 가량의, 체구가 큰 여인 으로 큼직한 뿔테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욕실에서 돌아오다가 다시 한번 그에게 미소를 보내고는 객실로 들어가 문을 받았다. 다시 문이 열리더니 역시 크고 풍채가 좋은 남자가 나타났다. 마르크는 그가 누구인가를 대뜸 알아봤다. 그는 제 2차 인터내셔널에서 두각을 나타 낸 저 유명한 벨기에의 사회민주주의자였다. 마르크는 그가 소련과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여행할 것이라는 짤막한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났 다. 그는 일본에서 몇 차례 강연을 할 예정이었다. 그때 마르크는 그런 보 도가 새로운 접촉의 징후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징후는 현재와 같은 국제 관계의 기류 속에서 아주 민감한 것이었다. 긴 여행을 앞둔 여행자들에게 흔히 있는 것처럼, 그들은 곧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 비치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프랑스어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자기의 모국어를 듣자, 벨기에인의 아내도 대화에 끼어 들었다. 이제는 울 스커트와 풍만한 가슴을 유달리 돋보이게 하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이 번에 지은 미소는 마침내 프랑스어를 말하는 여행자를 만났다는 데 대한 놀라움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러시아의 겨울과, 가도가도 끝없는 대륙, 그리고 언어소통과 여 행의 어려움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도쿄와 오사카는 따뜻했고 나가사키 는 더웠는데 이곳은 춥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은 추위 속에서도 활력이 넘친다고 했다. 벨기에인은 시베리아와 우랄지방을 통해 여행하는 바람에 그 유명한 큐즈바스와 마그니토스트로이를 볼 수 없다고 섭섭해했 다. 사실 그들이 열차 창밖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러시아의 눈뿐이었다. 그 는 <러시아의 실험>을 보고 싶었다고 말하면서 진부한 표현에 대해 웃음으 로 양해를 구했다. 그는 자기들의 객실로 들어가서 프라우디 최근호를 가지고 나왔다. 거 기엔 제 2차 5개년 계획의 주요 배치상황을 보여 주는 지도가 하나 그려져 있었다. 용광로, 자동차, 트랙터, 탈곡기, 기관차, 철도차량, 자동차타이 어, 수력발전소 등등이 이 계획의 상징으로 표시돼 있었다. 마르크 알렉산 드로비치는 섬유공장과 설탕공장, 볼 베어링공장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다. 벨기에인은 웃음으로 동의를 표했지만 그런 야심적인 계획은 다른 경제 분 야, 특히 농업의 희생 위에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온건사회주의자들인 이들 멘셰비키의 주장을 알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제 제 2의 혁명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말끔하게 차려입은 존경받을 만한 신사요, 품위있는 의회주의자는 현재 무 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1차혁명 때 일어난 일을 모르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논쟁 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는 외국에 나가 있으면서 외국인들과 이야 기하는 데 익숙해 있었지만, 늘 정치적인 주제만은 피해 왔다. 논쟁을 벌 여 상대방을 설득하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그는 마음속으로 정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논쟁을 꺼린다는 인상을 주기는 싫었다. 그 런 의미에서 그는 허영심이 좀 있었고, 또 논쟁에서 패배하는 데도 그다지 익숙치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의 인상을 이야기했다. 마르크는 그곳의 한 주물공장에 서 2년 동안 근무했었다. 그는 뉴욕에서 본 놀랄 만한 광경 하나를 자세히 얘기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유행이 지난 검정색 계통으로 치장하고 머리 위에는 새둥지 같은 것을 얹은 한 노파가 교회에서 나왔다. 그 노파는 아 마도 손녀나 증손녀쯤 될 법한 어린 소녀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소녀는 그녀를 붙들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와서 모퉁이에 세워진 차로 그녀를 데려갔다. 그리고 역시 조심스럽게 노파를 차에 태우고 부드럽게 입을 맞 추고는 문을 닫았다. 그러자 혼자서는 차 있는 데까지도 오지 못할 것 같 던 노파는, 일단 차에 오르자 시동을 걸고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것이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그 얘기를 설명을 달지 않고, 파이프를 피워가 며 아주 유머스럽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의미를 오해하지 않도록 한 대목에서만 설명을 집어넣었다. 미국에는 최첨단의 기술과 구시대적인 사회질서가 병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벨기에인은 그의 대화 수준을 가늠케 하는 절묘한 화술과 외교적인 세련 미에 감탄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외국인들 앞에서 자기의 지식이 나 기지, 그리고 넓고 허심탄회한 생각들을 펴 보이길 좋아했다. 그런 행 동은 권력과 명예를 가진 사람들로부터만 나온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벨기에인의 아내는 이야기의 요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재미있다는 생 각이 들었는지 깔깔 웃어댔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역에서 곧장 사도바야 가와 카레트니 가 사이 에 있는 소비에트 제 3청사로 갔다. 대표들은 모두 도착했는데 조직위원회 가 개최될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사무직원들이 그의 이름을 등록시키고, 신임장과 함께 호텔 숙박권, 식권, 그리고 제17차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 대표 라고 인쇄된 노트를 건네주었다. 그는 곧 엄격한 질서와 절차로 이루 어진 전당대회의 낯익은 분위기 속에 파묻혔다. 그리고 자신이 거기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태껏 살아온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높은 지 위로 자신이 부상했음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 위에서 짐이 덜어지 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늙은 병사가 자신의 부대를 찾았을 때 갖는 느낌과 비슷한 것이었다. 호텔에서는 두 사람이 한 방을 썼다. 호텔이라고 해봤자 침대와 의자밖 에 없었지만, 다른 것은 필요하지도 않았으므로 그걸로 족했다. 그는 참석 한 대표들 가운데서 오랜 친구들을 많이 만나리란 걸 알고 있었다. 몇 명 은 로비에서 이미 만났다. 그들은 반가움과 흥분의 표정이 역력하여 상대 방을 서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의 마음속에서는 흔 들림 없는 신뢰의 감정과 임무에 대한 자신감이 싹트고 있었다. 이제 당과 당원들은 경험을 통해 성숙했으며 자기들의 임무를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 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이 스탈린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다름 아닌 그들이 갖고 있는 힘의 과시였다. 이들이야말로 정직하고, 헌신적이며,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정의감으로 불타오르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사샤에게 일어난 일은 말도 안 되는 일이 었다. 혹시 벌써 풀려난 게 아닐까? 그녀는 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첫 음성으로 보아 변한 게 없음 을 그는 알아챘다. 여기로 올 거니? 그녀가 물었다. 그는 아르바트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늦었고, 갖고 있는 차도 없 었으며 친구들이 옆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안 가면, 언제 또 갈 수 있을지 몰랐다. 금방 주무시지 않는다면 한 시간쯤 후에 거기 가 있겠습니다. 어떻게 잠을 자겠니? 그녀를 본 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기억을 찾아 허둥대며 하소연이라도 하듯 그에게 얘기를 했다. 그리고 희망과 공포가 교차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 순간 그는 그녀의 동생이 아니라 권력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 아들을 도와줄 수도 있고 돕지 않을 수도 있는, 그래서 그를 구해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신경이 아주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녀는 동생이 앞뒤를 제대로 알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반면에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사샤 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숨막힐 듯한 절망감이 그를 짓눌렀다. 뒷덜미에 통증이 일고 있었다. 그 는 소피야를 사랑하고 사샤도 사랑했지만 막연한 약속은 할 수 없었다. 그 는 경험 많은 공상주의자였던 것이다. 내일 이 일을 알아볼께요. 사샤에게 죄가 없다면 반드시 풀려날 겁니 다. 그녀는 못미덥고 약간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샤가 죄를 져? 넌 사샤가 그럴 애라고 생각하니?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녀는 모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만일 사 샤를 구해 내지 못한다면, 그 타격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질 것이다. 뭔가 트집잡힌 일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뭔지 정확히 찾아낼 때까지 전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부쟈긴을 찾아갔다. 부쟈긴은 사샤 때문에 난 처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 그는 결국 체포될 사람을 봐 달라고 부탁한 꼴 이 되었던 것이다. 부쟈긴은 시무룩해져 있었다. 그는 전당대회 얘기는 꺼내지 않았는데, 매일 처리해야 될, 일상적인 업무만으로도 바쁜 것 같았다. 아마도 전당대 회 위원으로 선출되지 않아 상심했을까? 하지만 그는 중앙위원회와 조정위 원회 위원들이 대개 자리하는 자문회의의 대표였다. 그런 직책은 좌천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오랜 실무경험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아마도 전당대 회 위원은 오히려 그에게 골칫거리일 것이다. 일도 더 많고 문제도 더 많 이 생길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쟈긴은 좀 언짢고, 냉담하고, 긴장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제 조카가 어찌 됐는지 아십니까?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가 물었다. 알고 있네.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저번에 그 애 때문에 당신 을 찾았을 때는 말입니다. 물론 몰랐겠지. 부쟈긴은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한테 감정이 없다는 투로 조용히 말했다. 그 애는 제 조카니까 저도 뭘 좀 알아야 될 권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부쟈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책상에 앉아 손으로 턱을 고인 채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를 바라봤다. 전 전당대회 위원인 야고다와 베레진에게 얘기해 볼 생각입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얘기를 계속할 생각이 전혀 없는 부쟈긴과의 대화를 끝내려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부쟈긴이 곧바로 말을 받았다. 그들도 사샤가 자네 조카라는 걸 알고 있어.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가 뚫어지듯 그를 쳐다봤다. 그걸 어떻게 아시죠? 그들은 자네가 이 사건에 끼여들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 바로 그걸 노 린 거야. 부쟈긴은 마르크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덧붙였다. 사샤를 잡아 간 건 전혀 우연이 아니야. 그는 지난번 마르크에게 체르냐크가 이미 지구당 서기가 아니라는 걸 알 려 줄 때처럼 아주 신중하게 얘기를 꺼냈다. 그때는 단순히 정보만 흘렸지 만 지금은 진지하게 얘기를 해주고 있었다. 전당대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하지만 무슨 일이? 어떤 치들 이 로비를 진행하며, 표라도 모으고 있단 얘긴가? 지도체계에 또 다른 분 파가 생긴건 아닐까? <그의> 자리에 과연 누굴 들어 앉히려는 수작일까? 과거의 유력자들과는 이미 타협이 되어 있었다. 당은 그들을 지지하지 않 을 것이며, 스탈린이야말로 당의 노선과 당 정책의 화신이 아니던가? 부쟈긴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결과는 너무도 뻔한 것이어서 마르크는 한치의 오해나 애매한 점도 그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다. 사샤의 구속에 그렇게 많은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연한 일치를 갖고 그렇게 황당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없을 것 같아 요.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솔직하고, 직선적이며, 비타협적인 표정을 부쟈긴에게 보였다. 참 딱한 일이었다. 훌륭한 공산주의자, 타고난 능력을 가진 노동자, 거물급, 이는 모두 그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해외에서 많은 햇수를 보낸 관계로 그는 국내에서 배척을 당하고 있었고, 사람들을 혹은 당과 그 자 신,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를 움직이게 하는 메커니즘이 무엇인가를 모르 고 있었다. 부쟈긴 같은 사람들은 이제 뒤로 처지거나 한 켠으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들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희생의 와중에서, 낯선 시대 속에서 길을 잃고 만 것이었다. 당은 장님이 아닙니다. 이반 그리고리예비치. 그건 당신도 저만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는 부쟈긴을 쳐다봤다. 내전을 비롯해서 너무도 소중하여 결코 잊을 수 없는 숱한 것들을 함께 겪으면서 그들은 청춘을 불살랐고, 그리하여 그 들 사이에는 끈끈한 유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용광로의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산기슭의 도시 였다. 거기야말로 혁명이 존재하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곳이었다. 비록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부쟈긴은 혁명을 포기했지만 말이다. 부쟈긴의 생각은 하등 중요한 게 없었다. 그가 말한 것은 모두 사소한 것들이어서 마르크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반 그리고리예비치 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하게 들려왔다. 마르크는 그가 입밖에 내는 말들을 거의 한쪽 귀로 흘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 사이에 흩어져 있던 괴로운 감정들의 잔해가 거의 가라앉을 즈음에 부쟈긴이 한마디했다. 우리는 콤소몰 동지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있네. 크레믈린 궁전의 로비와 현관 객실, 넓고 긴 대리석 층계와 회의실 밖 휴게실은 각 지역 대의원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은 끼리끼리 얘기를 나누며 서 있거나 사람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혹은 전당대회용 서류를 나 눠주는 테이블 주위에 웅성거리기도 했다. 자기 서류를 집어든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자신이 한때 근무했던 돈 바스 지역 출신의 대표자들과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눴다. 벨이 울리자 모 두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장은 새롭게 꾸며져 있었다. 큰 접견실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밖에 모든 것들도 새로 들여놓아 나무냄새와 페인트냄새가 아직도 풍기고 있었 다. 다음날 신문에 보도된 것처럼, 그 회의실은 엄숙해 보이면서도 또한 장엄한 단조로움이 있었다. 멋없이 잔뜩 칠해졌던 금색이 벗겨지고, 기둥 과 문장, 황제의 상징이 사라졌으며, 수세기 동안 끼었던 때도 말끔히 벗 겨졌다. 그 회의실은 이제 넓고 환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대의원들의 좌석은 연단을 중심으로 하여 제 4열과 5열에 배치되었다. 그들을 마주보고 서 있는 사람들은 카가노비치, 오르드조니키드제, 보로쉴 로프, 코시오르, 포스티셰프, 미코얀, 막심 고리키였다. 칼리닌은 단상에 앉아 농부들이 쓰는 금속테 안경 너머로 회의장을 둘러보며 노트에 뭔가를 바쁘게 적고 있었다. 몰로토프가 박수갈채를 받으며 입장했다. 그가 상임위원석에 앉자, 이번 에는 더 우렁찬 박수가 터지며 스탈린이 입장하여 그의 옆에 앉았다. 의자 와 책상이 밀리는 소리에다 모두가 일어서서 발을 굴러대는 소리로 회의장 은 떠나갈 듯했다. 스탈린 동지 만세! 하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모든 사람들이 소리쳤다. 만세! 볼셰비즘의 위대한 영웅 만세! 만세! 세계 프 롤레타리아의 위대한 지도자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스탈린에 대한 연호는 몰로토프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리고 흐 루시초프가 상임위원들을 소개할 때마다 반복되었고 마지막으로 의장이 스탈린 동지께서 단상에 오르시겠습니다. 하고 알리자 지금까지보다 훨씬 우렁차고 긴 함성이 터져나왔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서서 박수를 치고 환호했 다. 단상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밝은 색 옷을 입은 스탈린이 단 산에 올랐다. 그는 자기의 서류를 챙긴 다음 환호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런 태도는 그가 모든 박수갈채나 환호를 자기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현하고, 인민과 당이 선취한 위대한 승리를 찬양하는 것으로 받 아들이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것은 스탈린 자신이 행한 아이러닉 한 연설에서도 드러나 있었다. 물론, 우리는 스탈린 동지께도 우렁찬 환 호를 보냈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리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바로 이런 것들이 스탈린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과 그의 사이에 친밀감과 이해의 다리를 놓고 있었다. 15차 전당대회를 우리가 여전히 당 노선의 정합성을 입증해 가며, 반레 닌 집단들과의 투쟁을 전개해야 했던 대화라고 한다면, 이번 전당대회는 입증할 것도, 타도해야 될 사람도 없는 대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바와 같이 우리 당의 노선은 결국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이런 말들에서 자신의 예측이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즉 이번 전당대회는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며, 로미나드제로 인 한 말썽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스탈린 자신이 결속을 원하고 있었다. 투쟁은 끝났고, 투쟁과 관련된 극단적인 처방들도 다 사라 져야 할 때였다. 그런 생각은 스탈린이 자기의 연설을 마무리할 즈음에 더욱 굳어졌다. 동지 여러분! 우리 당 지도부는 모든 정치현안들을 만장일치로 가결시 켰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주요 안건들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의견이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당 서열에 있어서 우리는 유례없는 이념 적 결속과 조직적 통일을 보여 주었습니다. 굳이 폐회사가 필요할지 어떨 지에 대해서 의아해 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 다. 이것으로 폐회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스탈린이 내려오자 곧바로 로미나드제가 연설을 했고, 이어 리코프, 부 하린, 톰스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퍄타코프, 프레오브라젠스키, 라데 크 등 예전의 반대파들이 차례로 연단에 올랐다. 16차 대회에서와 같은 자 아비판 같은 것은 없었다. 그 대신 그들의 과오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자 신들의 목소리를 당의 목소리에 합치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도 그들의 말을 가로막거나 더욱 굽힐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런대로 그들의 연설은 충분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다만 리코프의 연설 중에 한때, 누군가가 조급 하게 집어치우시오 하고 소리쳤을 뿐이었다. 퍄타코프는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리코프, 부하린, 톰스키, 그리고 소콜르니코프는 후보로 임명되었다. 그렇게 새로 구성된 중앙위원회의 후보 명단은 사실상 지난번과 마찬가 지였다. 물론 거기에는 지도체계에서 몇 사람 빠져나가고 그만큼 다시 들 어온 일상적인 변화가 반영되어 있었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그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을 보았 다. 그는 중앙위원회의 투표권이 없는 위원으로 추천되었다. 그는 그것을 2차 5개년 계획에서 자신의 공로가 인정받은 덕택으로 생각했다. 그 명단 에는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규모 공사의 책임자들 이름도 들어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시대의 징표이자 국가산업화의 상징이었다. 부쟈긴의 이름은 그 명단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뭔가 집히는 게 있었 다. 사샤는 그를 자주 방문했었다. 이반 그리고리예비치는 그와 많은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사샤에게 레닌의 편지를 보여 준 것도 그가 아니었을까? 아마도 그는 사샤와 함께 단순한 의미의 대화 이상의 것을 나 누었을지도 몰랐다. 마르크는 야고다와 베레진 둘 다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했지만 사샤의 문 제를 갖고 비밀경찰의 총수인 야고다를 만난다는 것은 좀 지나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런 문제로는 베레진을 만나는 게 적합할 듯 했다. 그러나 휴식시간이면 누군가가 항상 그를 붙들고 있었고, 그렇지 않 으면 어느 틈에 박혀 있는지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적당한 기회가 찾아왔다. 1월 31일 전당대회를 경축하는 시 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가 본 몇 번 안 되는 시위모습 중에서 가 장 장대한 광경이었다. 얼어붙는 듯한 1월의 밤공기 속에서, 두 시간 이상 을 백만의 군중들이 탐조등 불빛을 받아 장엄한 분위기가 고조된 붉은 광 장을 가로질러 행진해 갔다. 스탈린! 게시판과 깃발들에는 온통 <스탈린>이란 단어뿐이었다. 군중들이 외치는 <스탈린>이란 연호가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끝없이 울려퍼졌다. 모든 시선 이 마브졸레이로 향했다. 바로 그곳에 스탈린이 귀마개를 내린 모자에 군 복을 입고 서 있었다. 마브졸레이에 서 있는 사람들은 다 같이 두꺼운 모 자를 쓰고 있었지만 귀마개를 내린 사람은 스탈린 혼자뿐이었다. 그런 모 습 때문에 백만의 군중들에게는 그가 더욱더 인간적이고 소박하게만 보였 다. 귀마개를 내린 것은 물론 추위를 느껴서였다. 군중들이야 계속 움직이 고 있었지만 스탈린은 그들의 환호에 답하기 위해 마브졸레이 위에서 몇 시간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다른 대의원들과 함께 크레믈린 궁전 옆에 설 치된 스탠드에 서 있었다. 그는 이보다 더한 추위에도 단련되어 있었지만, 그런 그의 발도 얼어붙어 감각이 희미해져 갔다. 펠트부츠를 신고 나올 걸 하고 그는 후회했다. 그는 스탠드를 걸어가서 베레진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시위행렬이 시작되자 그는 베레진에게 다가갔다. 에스키모인과도 같은 베레진의 구릿빛 얼굴은 오직 사람을 죽이고 살리 는 일만 전달하는 사람의 무감각하고 불가해한 그런 표정을 담고 있었다. 베레진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역시 전당대회 위원은 대우를 받고 있었 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가 자기 소개를 하자 그는 더욱 부드럽게 인사 말을 건넸다.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는 사샤의 구속사건을 벽신문과 솔츠까지 섞어 가 며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사샤가 부당하게 공격을 받자, 젊은 혈기로 해서는 안될 말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자기가 조카의 보증인이 되겠노라고 말했다. 또 만일 사샤가 다른 일로 체포되었다면, 그것은 자기와도 관련되 기 때문에, 무슨 내용인지 듣고 싶다고 말했다. 베레진은 광장을 지나가는 시위행렬에 가끔 눈길을 던지면서 그의 말을 주위 깊게 들었다. 탐조등 불빛이 비칠 때마다 지친 표정의 살찐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사샤의 이름을 한번 더 물어봤을 뿐 말없이 듣고만 있다가 무슨 내용인지 알고 싶다는 마르크의 요청에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끝이 없는 안개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말은 자기는 그 사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얘기할 만한 장소나 때가 아니라는 것처럼 들렸다. 또한 얘기할 만한 장소 라 하더라도, 그가 하는 일의 성격상 그는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아 무 것도 얘기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제가 조사해 보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조사는 철저하고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하겠습니다. 그 대답은 마르크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진지하고도 고맙게 들렸다. 그는 좀 안심이 되어 베레진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솔츠와도 얘기를 나눠 보고 싶었지만, 솔츠는 와병중이라서 전당대 회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리에 누워 있는 사람을 집으로 찾아간다 는 것도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되었다. 어쨌든 베레진과 이야기한 이상, 솔 츠와의 만남은 그리 절박해 보이지 않았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16 모스크바 시민들이 탐조등 불빛이 환한 붉은 광장을 행진해 가며 마브졸 레이에 서 있는 스탈린에게 환호를 보낼 때 부티르키 형무소는 저녁 식사 시간을 맞았다. 구두소리가 복도를 따라 조용히 울려 퍼지면서 자물쇠가 철커덕거리며 열리고 숟가락이 그릇 속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 끓는 물을 컵에 붓는 소 리가 들렸다. 감시창이 살짝 열리며 한 줄기 불빛이 보였다가 금세 사라지고 대신 간 수의 머리가 나타났다. 그는 방안을 감시하듯 훑어보다가 빗장을 풀고는 해치를 열었다. 저녁이다. 사샤가 그릇을 들자, 급식 담당 죄수가, 또 다른 죄수의 두 손에 들려 있는 커다란 통에서 메밀죽 한 국자를 떠서 그릇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사샤의 컵에 부었다. 간수는 사샤가 그들에게 아무 것도 건제 주지 않도록 감시했고, 그들이 사샤를 쳐다보지 못하도록 했다. 이 복도는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이었다. 사샤와 마찬가지로 다른 죄수들도 그릇과 컵을 들고 해치로 다가가 메밀죽과 뜨거운 물을 받았다. 이들은 누구일까? 사샤는 지난 3주 동안, 그에게 음식을 갖다주는 사람 들을 제외하고는, 단지 두 명의 죄수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한 사람은 이 발사였는데, 그는 짙은 눈썹, 뾰족한 턱수염, 그리고 살인자 같은 비정한 눈매의 허약한 노인네였다. 그는 항상 잘 들지 않는 무딘 면도칼로 사람들 의 수염을 깎아 주려고 했다. 그래서 사샤는 턱수염을 그냥 기르기로 결심 했다. 또 한사람은 곱상한 얼굴의 창백한 청년 죄수였다. 그는 복도 청소를 담 당하고 있었는데, 다른 좌수를 보거나 자신의 얼굴을 그들에게 보이는 것 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샤가 그의 옆을 지날 때면 얼굴을 벽 쪽으로 향한 채 서 있곤 했다. 그러나 사샤는 그가 곁눈질로, 호기심어린 다정한 눈초리를 자신에게 보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갸가 운동을 하거나 목욕탕에 가기 위해 바깥으로 나올 때면, 다른 모 든 방들도 비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첫날밤, 저녁식사 후에 감방 오른 쪽 벽에서 빠르고 가벼운 두드림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있다가 벽을 긁는 것 같은 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무언가가 벽면을 가로지르며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조용해졌다. 옆방 죄수는 그가 응답하길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메시지 전달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아무런 반 응도 보내지 않았다. 다음날 저녁식사 후에 또 다시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자 신이 듣고 있음을 상대방에게 알리기 위해, 손가락으로 몇 번 벽을 두드렸 다. 이렇게 하여 그는 매일 저녁마다 이 행사를 벌이게 되었다. 사샤는 그 소리에서 어떤 패턴 - 두드리다가 잠시 멈추고, 그러다가 다시 두드리고, 마지막에는 긁는 듯한 소리를 내는 - 을 발견할 수는 있었지만, 상대방이 어떤 내용을 전달하려는 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죄수의 굳건한 희망 을 전달하는 듯한 이 조심스러운 의사전달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외쪽 벽에서는 아무도 벽을 두드리지 않았으며, 또 그가 두드리 는 소리에도 아무런 응답을 보내 오지 않았다. 사샤는 메밀죽을 숟가락까지 핥아먹은 다음, 그 숟가락으로 컵에 남은 차에다 약간의 설탕을 넣어 휘저었다. 그는 식어 버린 차를 들며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감방 안을 걷기 시작했다. 구석에서 문까지는 여섯 걸음이었고, 기하학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지만, 한쪽 구석에 다른 쪽 구 석까지도 여섯 걸음이었다. 이 방에서는 대각선 거리와 직선 거리 간의 차 이를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방의 네 모서리 중에서 한쪽에는 변기통이, 그 리고 다른 쪽엔 침상이, 또 한쪽엔 작은 탁자가 있었으며 나머지 한쪽에는 아무 것도 없이 비어 있었다. 천장에는 철망으로 둘러싸인 전구가 희미하 게 빛나고 있었고, 경사진 천장의 맨 위쪽에 박힌 굵은 쇠창살 뒤로 지저 분한 유리창이 있었다. 끈이 없어져 버린 그의 구두가 콘크리트 바닥에 질질 끌리며 소리를 냈 다. 그는 셔츠 단추를 바지 맨 윗단추구멍에 끼워놓아 벨트 없는 바지가 미끄러져 내려가지 못하게 했지만 그 때문에 바지가 꼬이곤 하여, 걸어다 니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바지가 내려가 창피를 당할 염려는 없었다. 사샤는 불려나가 취조를 받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분명 고발을 당해 끌 려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언제 고발당했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 다. 때때로 자신이 잊혀진 것이 아닌가, 그래서 영원히 감금되는 것이 아 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애써 그런 생각을 지워 버렸다. 그는 기 다려야만 했다. 마침내 불려나가 조사를 받게 되면 모든 일이 밝혀져 풀려 나게 될 테니까. 그는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초인종을 누르면 어머니가 안에서 누구세요? 하겠지. 아니, 이건 너무 돌연한 행동일 거 야. 우선 전화를 걸어야지. 사샤가 곧 집에 도착할 겁니다. 그러고 나서 곧장 집으로 가서 어머니, 저예요! 라고 말해야지. 그는 어머니가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 형무소에서 저 형무소로 찾아다니면서, 초췌하고 놀란 모습으로 끝없이 그를 기다릴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말하지만, 그는 어머니가 자신이 투옥된 충격을 결코 극복할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벽을 부수 고, 철문을 망치로 깨뜨리며 절규하고 싶었다. 자물쇠가 철커덕하더니 문이 열렸다. 청소시간이다! 사샤는 수건을 목에 두르고 변기통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간수 앞에 서서 복도를 걸어 내려갔다. 세면장은 감방보다 염소 냄새가 더 심했다. 그는 변기통을 비우고는 염 소 용액으로 헹궜다.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는 다시 감방으로 되돌아왔다. 철문이 그의 뒤에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철문 은 이제 내일 아침까지 열리지 않을 것이다. 희미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별들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복도에서 사 람들 움직임 소리가 다시 들리고 철커덕 소리와 함께 감방문이 다시 열렸 다. 청소시간이다! 형무소의 하루가 또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감시창이 미끄러지듯 열렸 다. 아침식사다! 급식 담당 죄수가 목에 걸고 있는 커다란 나무 상자에는 검은 빵덩어리, 설탕덩어리, 차, 소금, 반쯤 찢어진 담뱃갑, 성냥 그리고 성냥곽에서 찢어 낸 인광 종이 조각 등이 들어 있었다. 각각의 죄수에게 담배가 여덟 개피 씩 배급되었다. 그러나 담배 한 갑엔 스물다섯 개피의 담배가 들어 있었으 므로 세 번째에 타는 사람은 항상 아홉 개피를 받았으며, 뿐만 아니라 담 뱃갑까지, 아니 엄밀히 말하면 반조각뿐인 갑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아 무리 보아도 그것은 종이 조각에 불과 한 것이긴 했지만, 사샤는 오늘 운 좋게도 그 종이 조각을 얻었다. 어쩌면 그는 거기에 글을 쓸 수 있는 기회 를 얻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것을 어디에 감추느냐였다. 결국 그는 그것 을 난방기 뒤에다 붙여 놓았다. 배급받은 빵은 무겁기만 할 뿐 제대로 굽지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껍질 도 벗겨져 있었다. 그러나 아침이라 그런지 빵에서는 아직도 신선한 이스 트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아버지가 반년치 일삯으로 빵 대신 받은 밀가루로 어머니가 빵을 굽던 시절이 생각났다. 빵집에서 받 은 빵은 밀가루보다 더 무거웠는데, 그 사실은 오랫동안 그를 혼란에 빠뜨 린 신비한 수수께끼였다. 그는 어머니를 도와 그 빵을 썰매에 실어 집으로 날랐다. 그 겨울의 혹독한 추위, 딱딱한 눈길 위를 달리는 쇠썰매에 눈이 밟히는 소리, 막 구운 빵덩어리에서 나는 따뜻한 냄새, 그리고 어머니의 기뻐하시는 모습 - 그들은 그 빵을 말려 겨울 내내 양식으로 이용했다. - 모든 것들이 이젠 감방 안에 앉아 차를 마시고 빵을 씹으며 그리는 추억이 되고 말았다. 어린 시절의 추억들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것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수감되어 있는 형무소의 어두운 감방 속에서는 너무도 인간적인 추억이었다. 자물쇠가 철커덕거리더니 문이 열렸다. 총을 든 간수가 말했다. 운동시간이다! 감방을 나온 그는 왼쪽으로 돌아 복도 끝까지 간 다음, 간수가 물을 열 고 그를 작은 운동장으로 내보낼 때까지 기다렸다. 운동이 끝나면, 같은 길을 그대로 밟아 방으로 되돌아왔다. 운동을 포함하여 전 과정에 소요되 는 시간은 20분이었다. 사각형의 작은 운동장 중 두 면은 형무소 담으로 막혀 있었다. 다른 한 쪽 면은 높은 돌담으로, 그리고 나머지 한쪽 면은 둥근 벽돌탑으로 둘러싸 여 있었다. 그는 눈으로 다져진 길을 따라 원을 그리며 걸었다. 대각선으 로 난 길도 있었는데, 빙빙 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죄수들은 그 길을 택 했다. 보초들은 총을 들고 문간에 기댄 채 죄수들을 감시하면서 때로는 담배도 피우고 때로는 반쯤 감은 눈으로 사샤를 바라보기도 했다.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눈이 밟히는 소리가 뽀드득뽀드득하고 났다. 파란 하늘과 분주한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 그리고 담배와 석유 타는 냄새 등 은 사샤에게 짙은 외로움을 던져 주었으나, 가끔 다른 방 창문으로 언뜻언 뜻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 그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자위하곤 했다. 방안의 악취에서 벗어나 그는 신선한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형무 소 안에서도 삶은 이렇게 계속되는 것이었다. 인간은 숨을 쉬고 또 희망이 있는 한 살아 있는 존재였다. 스물 두 살의 나이에 삶이란 희망 그 자체였 다. 간수가 똑바로 서서 총을 툭툭 치더니, 안쪽 문을 열었다. 이쪽으로 와! 사샤는 운동장에서 나왔다. 그들은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열쇠가 철커 덕하는 소리를 내더니 감방문이 잠겼다. 그곳은 다시 텅 빈 벽과 침상, 탁 자, 변기통, 그리고 감시창만이 존재할 분이었다. 그러나 신선한 공기와 거리의 소음을 만끽했던 기분은 오랫동안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겨울 하늘, 잠깐이었지만 방금 전엔 자신의 머리 바로 위에 있던 푸르고 밝기 만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의 또 다른 즐거움은 목욕이었다. 그것은 일주일에 딱 한 번만 허용되었다. 문이 열리면서 간수가 그에게 물었다. 목욕한 지 오래 됐지? 예, 오래 됐습니다. 가자. 그는 잠시 앉아 있던 침상에서 튀듯이 일어나 재빨리 수건을 움켜쥔 채 방을 나섰다. 탈의실에 도착하자, 간수는 그에게 회색 비누 조각을 하나 주었다. 그는 칸막이가 된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고 때로는 차 가운 물이 제멋대로 나왔다. 그것을 조절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사샤는 샤워꼭지 아래 서서 순수한 기쁨의 노래를 불러댔다. 그는 물 떨어지는 소 리가 자신의 노랫소리를 삼켜버려, 탈의실 바깥 창턱에 걸터앉아 있는 간 수에게는 들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자그마한 붉은 군대의 병사는 쾌활하고 친절한 풍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사샤를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 는 인내심 있게 앉아서 기다렸다. 사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그는 그렇게 기다렸으리라. 사샤는 비누가 얇아서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비누칠 을 했다. 그리고는 샤워꼭지 아래에 서서 등, 배, 다리로 물이 흘러내리도 록 하면서 계속 노래를 불러댔다. 사샤가 탈의실로 돌아와 몸을 닦고 있는 동안 간수는 호기심에 찬 눈초 리로, 이렇게 잘생긴 지식인 청년이 어떻게 해서 여기에 잡혀 왔는가 하고 의아스러워하며 근육질의 몸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간수가 그를 깨워 물었다. 목욕한 지 오래 됐지? 사샤는 사실 전날 밤에 목욕을 했었으나 간수가 혼동하고 있음이 분명하 다고 생각하며 예, 오래 됐습니다. 라고 말했다. 가자! 그는 목욕탕에서 나와 몸을 닦으며 말했다. 이런 일이 좀더 자주 있었 으면 좋겠군요. 키 작은 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날 밤에도 찾아왔다. 결국 사샤는 매일 밤 목욕을 하게 되었다. 때때로 귀찮아서 그냥 더 자고 싶기도 했으나 한번 기절하면 다음부터는 그 간수가 오지 않을까봐 그러질 못했다. 어째서 그에게 이 같은 특별 대우를 해주는 걸까? 어쩌면 그 간수는 다 른 죄수들이 목욕을 거절해 버리는 바람에 심심해졌거나, 아니면 뜨거운 물을 그냥 내버리는 게 아까워서인지도 몰랐다. 혹은 사샤가 그를 만나는 것과 목욕하는 것을 즐거워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샤에게 특별 대우를 해주는 건지도 몰랐다. 사샤는 자물쇠 소리에 잠이 깨었다. 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간수가 허리띠에 커다란 열쇠 꾸러미를 차고 감방으로 들어왔다. 밖에도 복도 경 비원이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이름. 판크라토프입니다. 옷을 입어. 사샤는 침상에서 내려왔다.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 풀려나는 걸까? 그 런데 왜 하필 밤에 이러는 걸까? 지금이 몇 시지? 그가 코트를 입으려 하자. 간수는 코트는 입을 필요 없어 라고 말했다. 그는 고갯짓으로 오른편을 가리키며 복도로 나갔다. 허리에서 열쇠끼리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들은 짧은 복도를 수도 없이 지나고 철창으로 둘러싸인 계단을 오르내 리면서 오랫동안 걸었다. 문 하나를 열기 전에 간수는 매번 열쇠로 문을 두드리고는 반대쪽에서 비슷한 신호가 온 다음에야 문을 열었다. 사샤는 간수보다 앞서 걸으면서, 그들이 있는 곳이 형무소의 어디쯤인지 를 알아내려고 애썼다. 층계를 수없이 오르락내리락한 다음에야 사샤는 지 금 형무소의 1층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이곳에 있는 문들은 철문이 아니라 보통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여 기엔 통풍구나 감시창도 없었다. 간수가 하나의 문에 대고 노크를 했다. 들어와! 방에 들어간 사샤는 밝은 불빛 때문에 눈이 부셨다. 탁자에 앉아 있던 한 사내가 사샤의 얼굴을 향해 램프를 비췄던 것이다. 사샤는 가늘게 쏟아 지는 불빛에 순간적으로 아이 안 보였다.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또는 어디로 가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앉아! 사샤가 앉았다. 심문관은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진 금발의 청년으로 커다 란 뿔테 안경에다 옷깃에 세 개의 줄이 쳐진 상의를 입고 있었다. 그는 사 샤가 잘 알고, 또 좋아하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입고 있는 제복으로 보아 지방 콤소몰의 조직책으로, 아마도 시골 도서관 사서나 학교 선생 출신일 것이었다. 그는 자기 앞의 탁자에 놓인 조서를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이 름은? 네 이름 말야! 성은? 생년월일은? 출생지는? 주소는? 서명해 사샤는 서명을 했다. 심문관의 이름이 조서 위에 쟈코프라고 씌어져 있 었다. 쟈코프는 잉크병 옆에 펜을 놓고는, 눈을 들어 사샤를 쳐다보았다. 자넨 왜 이곳에 오게 됐지? 그것은 사샤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다. 난 당신이 그 이유를 말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쟈코프는 초조하고 화난 몸짓을 하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농담을 아껴! 그리고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잊지 마! 나는 질문을 하고 너는 대답을 하는 거야. 자, 다시 묻겠다. 너는 왜 체포되었지?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이 사샤를 체포했는데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게 자기 가 맡은 일이라는 투로 얘기했다. 사샤는 자신이 왜 체포되었는지를 잘 알 고 있었기 때문에 버티거나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빨리 말할수록 좋았 다. 방안은, 탁자 위에 있는 램프에서 나오는 불빛을 제외하고는, 전체적 으로 어두웠다. 쟈코프의 얼굴은 그가 의자에 몸을 파묻을 때마다 사라졌 으며, 그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울려나왔다. 학교에서의 일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사샤가 대답했다. 어떤 사건이지? 쟈코프는 마치 그 사건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고, 또 그 사건과 사샤의 체포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 었던 것처럼 피곤하고 관심 없다는 투로 물었다. 심문관들은 항상 그와 같 은 트릭을 사용하는 법이다. 그리고 심문 받는 사람들은 심문관의 말이 단 조롭고 의미없어지더라도 귀담아 들어야만 했다. 장난으로 그러는 건가? 아니면 이 심문관은 정말로 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걸까? 사샤는 당황했다. 그리고 답답하고 메스꺼운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마치 어렸을 때 비상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가던 중, 계단 끝이 옥상에서 떨어져 흔들거리는 걸보고 느꼈던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래 서 그는 사다리가 다시 옥상에 가까워지는 때를 기다렸다가 재빨리 옥상으 로 뛰어 올라갔었다. 8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친구들이 마당에 서서 목을 길게 빼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자신이 그처럼 멀리까지 뛰어오를 수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만약 그가 적시에 사 다리에서 뛰어오르지 않았다면, 그는 저 아래 있는 아스팔트에 떨어졌을 것이었다. 심문관 앞에 앉아 있으면서 그는 목숨을 건 위험한 놀이를 할 때와 같은 기분, 즉, 죽음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의 경우는 경 미한 사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정치적 범죄에 대한 처리과정과 마찬가지로 체포, 투옥, 심문 등이 차례로 행해졌다. 사샤는 더욱더 극심 한 공포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내는 그의 동 지이며 같은 공산주의자였지만, 그에게 있어서 사샤는 적일 뿐이었다. 사샤는 자신이 미리 준비했던 것을 말해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감방 안에서 같은 말을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면서 연습했었다. 그는 아지 쟌과의 불화, 벽신문과 솔츠 등 모든 과정을 설명했다. 자넨 분명히 중앙조정위원회가 자넬 복교시켰다고 말했지. 예, 그렇습니다. 그건 자네가 체포된 이유가 아니야. 그것과는 다른 일로 체포된 것이 틀림없어. 그게 뭐지? 그 밖에는 없습니다. 잘 생각해 봐, 판크라토프. 회계학 강사와의 어떤 논쟁이나 학생 신문 에 안 좋은 글을 실어서 체포됐다고는 생각지 않겠지? 자넨 우리가 공기총 으로 참새나 잡으려는 족속인 줄로 생각하나? 자넨 체카(비밀경찰)를 우습 게 보고 있군! 그렇다면 내 죄는 뭡니까? 정식으로 고발당하고 싶나? 그게 자네한테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모 양이지? 난 내가 왜 체포됐는지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린 자네가 스스로 그걸 말하길 바래. 우린 너와 타협하려는 거야. 지금이 바로 자네 스스로가 당에 대해 자신의 정직함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야.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지 말해 주십시오. 그러면 거기 에 대해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과 박혁명적인 대화를 나누었지? 내가요? 난 어는 누구와도 반혁명적인 대화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럴 수도 없고요. 그러면 누군가 자네한테 그런 얘기를 했지?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분명한가? 예, 분명합니다. 쟈코프는 얼굴을 찡그리며 돌아서더니 탁자 위에서 서류뭉치를 집어들었 다. 그래? 그것 참 유감스럽군. 우린 자네한테서 좀더 나은 답변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었지. 자넨 정직하고 성실한 답변을 하지 않고 있어. 그것이 자네 처지를 보다 낫게 해주진 않을 거야. 학교에서의 사건 이외에, 나로선 다른 일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넨 아무 이유도 없이 체포된 거로군? 우리는 결백한 사람을 형무소에 집어넣은 거고 그런가? 참, 여기서도 반혁명적 선정을 일삼는군. 우린 짜르 시대의 경찰이 아냐. 옛날의 그 제3부 (니콜라이 1세 때 황제 원에 세 번째로 속해 있던, 국가 전복음모를 감시하던 보안경찰대)가 아니 란 말야. 또 우린 형벌을 내리는 조직도 아니야. 우린 당의 무장파견대야. 판크라토프, 자네는 이중인격자야. 그게 자네 본모습이란 말야. 어떻게 그런 말을 당신이 내게 할 수 있습니까? 쟈코프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이 친구 맛을 좀 봐야 되겠군. 어디 화장실에라도 와 있는 줄 아나? 자 네 같은 위선자들한테는 따로 방이 마련되어 있지. 자넨 부농들한테서 총 을 맞아 본 적이 없었지. 자넨 평생 동안 노동자계급을 등쳐먹으며 살아 왔고 지금도 나라 덕분에 교육받고, 연금을 받으며 살고 있어. 그런데도 여전히 나라를 기만하고 있단 말이야! 그는 얼굴을 찡그린 채 가만히 앉아 있다가, 마치 쓸데없고 무의미한 임 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자네가 지껄인 쓰 레기 같은 말들을 적어나 보지. 앉게! 그는 사샤에게 언제 누구와 함께 신문을 만들었는지, 회계학 강사와의 의견 차이는 언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언 제 어디서 제명됐는지, 그리고 그때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등의 질문을 짧게 툭툭 던지며 조서를 적성하기 시작했다. 조서 작성이 다 끝나자 그는 그것을 사샤에게 건네주었다. 읽고 서명해.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사샤는 자신을 응시하는 그의 침착한 눈초리 를 느꼈다. 쟈코프는 이 순간을 사샤를 면밀히 관찰하는 데 이용하고 있었 다. 모든 사항이 옳게 기입되어 있었지만, 약간 일방적인 것 같았다. 혁명기 념일 특집호 벽신문을 발간했었고, 통속적인 충격을 주는 내용들을 약간 끼워 넣었으며, 당 지부와 지구당위원회에서 제명되었다는 등의 내용이었 다. 그것은 격식에 맞춰 자연스럽게 기술되어 있었다. 조서 상으로는 그의 체포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샤는 말했다. 여기엔 내가 중앙위원회에 의해 복 교된 사실이 기술되어 있지 않군요. 쟈코프는 얼굴을 찡그리며 서류를 다시 집어들었다. 그들이 복교명령서에 뭐라고 썼던가? 그들이 그 사건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진 못했습니다만.... 쟈코프가 그의 말을 제지했다. 내가 묻는 건 그들이 어떤 식으로 명령서를 작성했느냐가 아니라, 그들 이 명령서에 어떻게 써 놓았는가 하는 것이야. 자신의 잘못에 대해 판크라토프가 인정한 것을 고려하여.... 쟈코프는 펜을 들더니 조서 아래쪽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잘못을 시인했으며, 후에 복교되었다. 그는 사샤에게 다시 서류를 건네주었다. 사샤가 서명했다. 쟈코프는 서류를 받아 한쪽 구석에 밀어 두었다. 판크라토프, 난 자네가 신중하게 생각할 것을 충고하네. 우린 그 일로 자넬 잃고 싶진 않아. 우리가 자넬 괴롭히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야. 우린 자네한테 자비를 베풀고 있어. 그걸 알아야만 해. 또 그걸 제대로 이 해해야 돼. 깊이 명심하라고! 그는 일어나서 문을 열더니, 고갯짓으로 간수를 불렀다. 데려가! 사샤는 감방으로 되돌아왔다. 그의 뒤에서 자물쇠 닫히는 소리가 들렸 다. 겨울 하늘의 별들이 희미한 창 너머에서 희미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지금이 밤인가 아침인가? 그는 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상대방은 그가 어디에 다녀왔는지 알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는 응답으로 벽을 세 번 두드렸다. 그러고 나서 옷도 벗지 않은 채 침상에 누웠다. 쟈코프는 그에게서 무얼 원했을까? 어떤 것을 고백하길 바랐던 걸까? 누구와 반혁명적 대화를 나누었나? 대화라고? 그는 감을 잡을 수 없었 다. 그가 체포된 것은 학교에서 일어났던 일 때문이었다고 확신하고 있었 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는 어리둥절했다. 모든 것이 혼란스 러웠고 뒤죽박죽이었다. 그는 이해와 신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학교에서의 사건이 체포 이유가 아니라면, 그것은 다 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고발자가 그 증거를 잡고 있다는 것을 의 미했다. 그러나 누가 그를 반혁명자로 고발할 수 있었을까? 그는 당과 아 무런 의견 차이도 없었다. 다만 아첨꾼들과 기회주의자들이 스탈린을 찬양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생각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 한 적이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스탈린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았었다. 단 지 마르크에게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지만, 마르크는 다른 사람들에 게 그들의 대화 내용을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마르크가 체포된 걸까? 어떤 사람이 지명수배 되면 사진을 만들어 각지 에 붙이는 등 가능한 모든 방면에서의 수사가 행해지는 법이었다. 쟈코프 는 마르크에 관한 증거를 얻어내려 하고 있는 걸까? 그는 사샤가 그 증거 를 제공해 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부쟈긴에 관한 일일까? 그는 아마도 에이스몬트나 스미르노프의 친구였 을 것이다. 그리고 스미르노프 역시 5번가에서 살고 있었다. 부쟈긴은 그 끔찍한 스미르노프-에이스몬트 사건으로 외국에서 소환된 적이 있었다. 그 들은 부쟈긴이 글린스카야에게 전화했었고, 사샤가 부쟈긴의 집을 종종 방 문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사샤에게서 부쟈긴에 관한 정보를 얻어 내려고 한 것은 아닐까. 제기랄! 사샤는 모든 일을 거꾸로 생각해 보았다. 내가 누군가의 조카이 기 때문에, 아니면 문제시되는 어떤 인물을 여차여차하게 알고 있다는 이 유로 해서 나를 체포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날 여기에 붙잡 아 두는 데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심문관이 빈둥거리며 시간 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날마다 사샤는 지난 몇 달간의 생활을 반추해 보았다. 그가 자신도 모르 는 사이에 무언가를 발설했던 걸까? 그는 학교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어 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다만 그룹의 친구들은 알고 있었다 - 리 나, 레나, 바짐, 막심, 유리.... 유리 샤로크! 연초에 그들은 그 일로 다투었었다. 그러나 유리도 그 깊 은 내막은 알지 못했다. 다른 친구들은 어떨까? 코발료프? 아냐, 그는 그 일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어. 그럼 과연 누굴 까? 낮에 옷깃에 두 개의 작대기를 단 교도관이 감방에 나타났다. 사샤는 집에서 그러던 것처럼 기계적으로 일어났다. 그것은 잠시라도 자 신을 풀어놓지 않겠다는 다짐의 몸짓이었다. 이름은? 판크라토프입니다. 볼만 사항 있나? 편지가 전혀 오지 않습니다. 심문관에게 말해 봐. 신문이나 책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심문관에게 부탁해 보게. 그 말고 함께 그는 떠났고 보초가 문을 잠갔다. 감옥에서의 생활방식은 그곳에 있는 사람만이 배우게 된다. 죄수들은 점 차로 이전 죄수들이 만들어 놓은 모든 불문율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교도관의 방문은 사샤에게 자신의 사건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음 을 확실히 느끼게 했다. 곧, 그에 대한 심리가 이제 시작된 것이었다. 교 도관은 그의 요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사샤에게 그의 운명뿐 아니라 이곳에서의 모든 여건이 전적으로 심문관에게 달려 있다는 점을 깨 닫게 해주었다. 그날부터 사샤의 생활은, 외면적으로는 전과 똑같았지만, 실상은 엄청나 게 변해 버렸다. 전에는 초조와 기대 속에서 심문을 기다렸으나 이제는 보 이지 않는 공포 속에서 심문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전혀 몰랐고 예기치 못했던 어떤 것을, 그리고 전혀 준비하지 못했고 미리 알았더라도 설명할 수 없었을 어떤 것을 추궁 당함으로써,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불 신과 의혹의 간격이 더욱 넓혀질 것만 같은 공포에 시달렸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17 늙은 샤로크와 그의 아내는 판크라토프 일가를 좋아하지 않았다. 기술자 인 사샤의 아버지와 <지나치게 똑똑한> 어머니도 싫어했거니와, <그들 일 가의 한 사람>이자 보스들 중의 하나인 사샤의 삼촌도 역시 싫어했다. 사 샤의 어머니가 정원에서 <인텔리겐챠>들과 즐겨 얘기하는 데 반해, 샤로크 부인은 엘리베이터 안내원이나 수위들과 함께 있는 게 어울리는 편이었다. 그들은 사샤의 체포를 <동지들> 간에 벌어진 패싸움 정도로 이해했다. 자, 저희들끼리 서로 물고 뜯기는 거나 구경하자고. 그러나 유리 샤로크는 사샤의 체포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들은 결국 같은 그룹의 성원이 아니던가. 무엇 때문에 유리는 그 그룹에 끼었을까? 사실 그들간에는 진실한 우정 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다만 유리를 그저 너그럽게 대했을 따름이었다. 니나는 신경질적이고, 막심은 얼간이였으며, 바짐은 입만 놀리는 인간이었 다. 그들은 사샤를 위해서는 울었지만, 유리를 위해서는 그르지 않았을 것 이다. 레나. 그녀는 세련되고 예쁜 소녀였지만 자기와 무슨 공통점이라도 있었 던가? 착한 아내는 결코 될 수 없을 테고, 커피 타는 법이나 제대로 알까? 그를 기쁘게 해준다는 게, 오히려 성가시게만 할뿐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동갑이었다. 환갑인 그의 아버지는 아직 건장하지만 레나는 마흔 살만 돼 도, 아르메니아 출신인 그녀의 어머니처럼 뚱뚱해지고, 게다가 콧수염까지 날 것이다. 언젠가 레나는 스탈린이 부쟈긴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말을 유리에게 들려주었었다.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게 무슨 뜻인지, 또 그러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에 대해 유리는 너무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소비에트 주택단지에 있는 호화스런 아파트도 결국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부 쟈긴은 그에게 소비에트의 정의에 대해 설명했었지만, 과연 그 자신이 그 걸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던가? 당에 관해 서라면 그는 맹목에 가까울 정도 로 순진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부쟈긴보다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겐 있었다. 부쟈긴이 실각한다면 유리는 무슨 면목으로 자기 아버지를 대할 텐가? 그 인민위원회의 딸한테 그렇게 정신을 쏟더니만.... 맞다! 유리에게는 여자가 좀 있었다. 모스크바에는 예쁜 여자애들이 얼 마든지 있었다. 바짐의 누이인 비카 마라세비치는 부르기만 하면 금방 달 려올 테고, 또 남자들의 군침께나 흘리게 생긴 바랴 이바노바도 있었다. 그는 일주일 동안 레나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걸도록 했다.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면 그녀는 아마도 다시는 전화를 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전화를 걸어 은근하고도 다정한 목소리로, 유리, 무슨 일이 있니? 하고 물었을 때, 그는 당황해 하면서, 그 동안 졸업논문 준비 하랴 일자릴 구하러 다니랴 한밤중이나 돼야 집에 갈 정도로 너무 바빴고, 게다가 학교의 공중전화가 고장이 났었다고 변명했다. 그녀는 손으로 수화 기를 감싸고 속삭였다. 보고 싶어. 한가해지면 곧 전화할게. 아마 이번 주말쯤이면 될 거야. 그러나 그는 그 주말에도, 그리고 그 다음 주말에도 그녀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그에겐 그녀에게 전화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변명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녀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유리, 널 좀 만나야겠어. 한가해지면 전화한 댔잖아. 꼭 만나야 해. 좋아. 아르바트 광장 예술극장 앞에서 아홉 시에 보자. 그들은 아르바트 광장 주위와 니키타보울레바르드 가를 거닐었다. 서리 가 내리고 있었다. 레나는 모피코드에 빨간 장갑을 꼈고, 귀를 덮는 양털 스카프 위로 둥근 모피모자를 쓰고 있었다. 언제나 그를 흥분시키는 통통 하고 쭉 뻗은 다리는 긴 부츠로 감싸여 있었다. 또 그녀에게서는 친근한 향내가 풍겼다. 마지막 만난 것이 언제였더라? 어쨌든 산책하기엔 안 좋은 날씨였었다. 사샤 일이 너무 걱정돼. 그녀가 말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유가 있으니까 체포됐겠지.... 너는 걱정되지도 않니? 걱정해서 뭐하니. 사실 그 친구는 모든 인간을 너무 우습게 봤어. 난 사샤를 믿지 않아. 아니, 믿을 수가 없어. 사샤를 안 믿는다고? 내가 콤소몰에 가입하려 했을 때, 사샤는 난 널 믿지 않아 라고 말했 지. 그때는 아무도 그 말에 신경 쓰지 않았는데, 내가 그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니까 넌 지금 화내는구나. 그의 화난 말투에 그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당황해 했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좋게 생각하고 있어. 내 말을 믿어 줘. 그들도 너처럼 겸손한 체하는 무리들이야. 그녀는 놀란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그는 싸움을 걸고 있었다. 그는 2 주 동안이나 그녀에게 전화하지 않았었다. 문득 그녀는 자신이 그를 보고 자 했던 까닭을 말하기가 두려워졌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니키타 문까지 걸어갔다. 돌아갈까? 푸쉬킨 동상까지 걷자. 네 얘기 좀 해줄래? 그는 또 한번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지루할 뿐이 었다. 일자리는 구했어? 아직. 눈에 덮인 푸쉬킨 동상이 저쪽으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앉자. 피곤해. 그녀가 말했다. 얼굴을 찌푸린 채 그는 그녀를 위해 벤치의 눈을 치웠다. 그는 수난 수 도원 을 바라보며 마냥 서 있을 작정이었다. 그녀가 꺼질 듯 한숨을 내리 쉬는 것조차 그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유리, 나 임신했어. 정말이야? 그래. 생리가 좀 늦는 거 아냐? 두 주가 넘었어. 그녀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들렸다. 그가 그녀를 만나지 않은 기간이 2주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는 매우 조심했었다. 그리고 분명 그녀도 이런 사태를 예방하 기 위해 외제 피임약까지 썼었는데.... 어떻게 해봤니? 난 우선 네게 말하고 싶었어. 난 의사가 아냐. 마치 레나의 임신이 성가시다는 듯이 그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난 이런 식으로 너와 결혼하고 싶진 않아. 그녀는 놀랐다. 무슨 뜻이지? 우린 좀더 기다려야 해.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장갑 위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레나가 내 말을 따라주어야 하는데.... 그녀가 고집을 피우지 말아야 할 텐데.... 이봐, 난 졸업도 아직 안 했고 일자리도 얻어 야 돼. 아직 아무 것도 확정되지 못한 상태야. 모든 것이 막연할 뿐이라 고. 그리고 사샤 문제도 있어. 어쨌든 간에 우리 모두는 그와 관계가 있 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고 복잡하잖아. 상황이 악화되길 바라진 않겠지? 지금은 좋은 때가 아니야. 그게 치욕스런 수술이란 걸 알아. 그렇지만 단 몇 분이면 끝나잖아. 참고 기다리자. 언젠간 우리도 아이를 갖게 될 거야. 게다가 우리 부모님들도 생각해야 돼. 그들은 구세대야. 장남은 감옥에 들 어앉았고 난 또 애까지 낳아 봐. 내가 소심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난 우 리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건 참을 수 없어. 그건 너무 울화통 치미 는 일이야. 네가 그걸 알아줬으면 해. 알았어. 레나는 슬프게 말했다. 얼어죽기 전에 그만 가자. 그는 일어나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직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고 싶은 유혹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가 약간 뚱뚱해졌고 벤처에서 일어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 했다. 그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말 것 같은 생각에 두려워졌다. 미처 깨닫 지 못하는 사이에 아버지가 될지도 몰랐다. 그런 일은 인생살이 가운데 무 수히 일어나는 것이다. 그녀가 수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표가 나기엔 아직 일러. 결코 잊지 못할 밤이었다. 그녀는 그를 위해 낙태 수술을 받기로 했다. 그녀에게 있어 그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동 의는 그를 기쁘게 해주었고 또 그를 의기양양하게 해주었다. 그는 다시 그 녀에게 친절해졌지만, 그녀가 꼼짝도 못하도록 완전히 굴복시키려 했다. 인생에서 모든 일은 반복되는 법이었다. 그녀가 최초의 경우는 아니었고, 또한 마지막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여성에게 지극히 정상적인 일일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몇 번씩 낙태수술을 받았었다. 임신한 마을 소녀들은 문 꼭대기에서 뛰어내렸으며, 그런데도 다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살아남았던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여름에 그들은 소치에 갈 것이다. 그곳은 최고가는 휴양지다. 그곳 에서는 바다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스크바 외엔 다른 곳에 가본 적 이 없었다. 운 좋게도 레나는 세상구경을 했지만 유리는 어땠던가? 그는 그녀의 깊숙한 감정을 짓이겨댔다. 그의 주장이 그녀에게는 지극히 명쾌하고 상식적인 말로 들렸다. 물론 그녀는 아이 문제나, 그를 그녀에게 서 멀어지게 할지도 모를 걱정거리들로 그를 괴롭히지 않아야 했다. 그를 방해해서도 안되고 자기를 비난할 꼬투리를 주어서도 안 되었다. 그 말고 달리 얘기할 사람이 없지만 그 때문에 그에게 걱정은 물론이고 생각조차 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 일로 그들은 더욱 가까워졌다. 유리가 그처럼 다정하고 진지하며 상 심해 본 적은 결코 없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가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누르려 애썼으며 이전보다도 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침에 유리는 손을 그녀의 가슴 위에 얹은 채 졸고 있었다. 그녀는 그 를 깨우지 않으려 조심했다. 예전 같으면 그는 그녀가 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고 때로는 무심하게도 야밤중에 그녀를 보내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은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서로 뺨을 맞댄 채 그는 문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평상시처럼 발끝으로가 아니라 당당하게 걸 으며, 또 큰소리로 말하고 웃으며, 문이 삐꺽거리는 소리와 자물쇠 여는 소리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수위 또한 그들을 미심쩍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고, 고맙습니다 란 인 사와 함께 그가 내민 동전을 받아 쥐었다. 따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아르 바트의 거리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그의 거리, 그녀의 거리를 걷고 있다 는 확신에 차 있었다. 사샤의 아파트를 그냥 지나쳤다는 생각이 든 것이 아르바트 광장에 이르 러서였다, 왜 이제서야 그 생각이 났을까? 다른 사람들을 머릿속에서 모두 지워낼 만큼 사랑에 빠져 있었던가? 그곳에는 뜬눈으로 밤을 새운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사샤의 생각에 젖어 있을 것이었 다. 병원에 잠깐 머물러 있는 것조차도 쉽게 감출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부쟈긴의 부모들은 금세 그녀에게서 진실을 캐낼 것이다. 어머니에게 감출 수 있는 일이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머니들은 그러한 일에 대해 무척이 나 예민하고 또 잘 안다. 레나는 두러대는 데 능숙치 못했으며, 게다가 그 녀의 자존심이 그걸 용납치 않았다. 그러나 부모님이 다른 사람을 통해 그 사실을 듣는다면? 어쩌면 부모님은 애를 낳으라고 할지도 몰랐다. 샤로크 없이 우리가 어떻게 해볼게. 그녀의 머릿속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유리는 그녀의 직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부드럽게 얘기했지만 목소 리에는 피곤함이 베어 있었다. 그는 바쁜데다 걱정거리가 많았으므로 자기 문제까지 그에게 떠맡겨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단순하고 솔직한 아르바트 의 처녀들은 결코 남자에게 그런 어려움을 전가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스 스로를 다스리는 법을 알고 있었다. 겨자로 하건 과망간산칼리로 하건 아 니면 키니네로 하건, 그것은 남자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골치 아픈 작은아가씨는 전혀 그런 걸 몰랐다. 그녀는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레나는 마치 다른 나라 여자 같군. 그는 이를 계기 로 그녀를 자신의 머리에서 떨쳐버리고 싶었다. 유산이라도 한다면 오죽 좋을까. 특히 그녀처럼 근시에다 덜렁대는 사람들은 빙판 길에서 잘도 넘 어지던데.... 진지한 의논이란 샤로크 집안에선 그다지 자주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유리는 어머니와 의논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늙은 부인네들이 사 용하는 은밀한 처방들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도와줄 만한 사람 이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가 정원에서 나이 많은 여자들과 수 군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표정으로 봐서 자기의 일임이 분명했다. 어머니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유리를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 다. 오라, 그 갈보 같은 년이 애를 뱄구먼. 그녀는 레나를 행실이 나쁜 여 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좀 배운 것들이 무식한 여자들보다 더 싹수가 없는 법이야. 그 음탕한 것이 유리를 홀리려 하고 있었어. 그녀는 지가 무얼 하 고 있는 건지, 그리고 저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라는 걸 생각했어야 했어. 그 무렵 그녀는 유리가 인민위원인 딸과 결혼하여 크레믈린에서 살게 될 거라고 떠벌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레나를 괘씸하게 여겼다. 이게 모두 <동지들>인가 하는 그 못된 놈들 때문이야. 그놈들은 우릴 자 기 집 문지방도 못 넘어오게 했어. 심지어는 너까지도. 그놈들은 그년에게 애를 낳아서 남편과 살라고 얘기할 거야. 너한테는 방이 하나 있으니까. 저들은 세 개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말이지. 게다가 남편에게는 노파도 하 나 딸려 있어서 유모도 필요 없다고 지껄일 거야. 하지만 어림없다고. 그 집구석 피붙이한테 유모 노릇 해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으니까. 또 그년 은 러시아인도 아니야. 그년의 코를 봐라! 유태인임에 틀림없어! 게다가 그년이 이젠 낙태수술비까지 요구하고 있다고? 독사 같은 년! 그만해요! 유리가 고함쳤다. 어떻게 해야 할지나 말해 줘요! 그녀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딱딱하게 물었다. 몇 달이나 됐냐? 얼마 안 됐어요. 그는 거짓말을 했다. 그가 얼마나 오래 됐는지 말하 면 혹시 그녀가 도와주길 거절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겨자물에 발을 담그고 있어야 돼. 그년이 견딜 수 있는 한 뜨거울수록 좋아. 걔네 집에 커다란 물통 같은 것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있을 거예요. 그는 그녀의 집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그 일은 이곳, 즉 그의 입에서 해야만 했다. 아르바트에서 겨자를 구하지 못한 그는 우사체프 가에 가서야 그것을 구 할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을 서류 가방에 숨겨서 가져왔다. 그의 어머니는 그 안을 감히 들여다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복잡한 자물쇠를 고장낼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부엌에 물통이 몇 개나 있나 세 보았 다. 물통은 두 개였다. 그날 저녁 그와 레나는 파이코의 서류 가방을 든 사나이 를 보러 혁명 극장에 갔다. 유리는 그라나토프를 좋아했고 그의 운명적인 생애에 친밀감 을 느꼈다. 중간 휴식시간 동안 그는 휴게실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며 향수와 화장 품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에게 있어서 극장에 가는 것은 가벼운 마음으로 휴일을 즐기는 것과도 같았다. 그는 사샤나 니나가 다른 활동을 하는 가운 데서도 거의 빠짐없이 극장에 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 바짐 마라 세비치가 마치 개구리 한 마리를 해부하듯이 연극을 이리저리 분석하는 것 도 이해가 안 갔다. 그가 말했다. 네게 전해 줄 좋은 소식이 있어. 우리 과에 콜랴 시조프 란 친구가 있는데, 아버지가 유명한 의사야. 들어본 적 있니? 시조프? 아니. 그는 의과대학의 산부인과 교수야.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는 움찔했다. 그러나 그 일 이 그렇게 금방 닥쳐오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는 거리낌없이 계속 얘기했다. 안전한 방법이 있어. 사람들이 감기를 치료하려고 그러는 것처럼 겨자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거야. 그녀는 약간 긴장이 풀렸다. 도움이 될까? 그럼, 사람들이 모두 그러던 걸. 그의 단정적인 말투에 그녀는 경악했다. 의사한테 가는 게 좋겠어. 그러나 그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이건 낙태수술이 아니야. 아프지 않 을 거야. 조그만 참고 있으면 돼. 손해볼 거 없잖니, 응? 아니, 난 싫어. 잠시 후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근데...., 어떻게 집에서 그 짓을 할 수 있겠니? 사람들이 볼 텐데.... 그러자 그는 막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우리 집에서 하자. 우리 아버지 는 감기 때문에 항상 그걸 하시거든. 그러니까 집에 분명히 겨자가 있을 거야.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18 뜨겁니? 하고 유리가 물었다. 괜찮아.... 기분이 좋은데. 레나는 침대에 앉아 갈색 용액이 가득 든 물통에 다리를 담근 채 얼굴을 돌려 눈을 콕콕 찌르는 듯한 독한 겨자 증기를 피하고 있었다. 그녀는 발이 커서 물통 속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속옷을 걷어올리자, 희고 둥근 무릎이 드러났다. 그녀는 그 무릎을 꼭 붙였다. 손을 배에 대고 앞으로 숙이자 포동포동한 어깨와 파란색 레이스로 덮인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는 물 속에서 발을 움직이며 미소 지으려 애썼다. 유리는 그녀의 다리 위로 끓는 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주전자 꼭지를 물 통에 가까이 대고 조금씩 부어넣었다. 그녀는 어깨를 움찔하더니 좀더 요란하게 발을 움직였다. 뜨거워. 참아. 금방 식을 거야. 그는 한 손으로 주전자를 든 채, 물통 속의 물이 얼마나 뜨거운지 만져 보았다. 별로 뜨겁지 않은 것 같아 물을 더 부었다. 악!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꼭 감고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그대로 있어. 금방 끝날 거야. 레나, 몇 분만 참아. 그녀는 몸을 뒤로 젖혔다. 그 순간 뒷머리가 벽에 부딪히면서 속옷자락 을 꽉 움켜잡고 있던 손이 스르르 풀려 버렸다. 단 몇 분이야! 몇 분! 레나, 참아! 그녀의 입술과 앞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물을 더 부었다. 그녀는 신음소리를 내며 발을 물통에서 빼냈다. 그녀의 피부가 빨갛게 부풀어 오른 것은 그는 보았다. 방안은 겨자 냄새로 꽉 차 있었다. 유리, 더 이상 못 참겠어. 그녀가 호소했다. 일 분만, 단 일 분만 발 을 빼고 있게 해줘.... 잠깐이면 다 끝나. 잠깐만 있으면 돼. 좀더 참아 봐.... 감각이 하나도 없어. 내 발이 아닌 것 같애. 이빨을 악문 채 그녀는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숨을 쉴 수가 없어.... 그는 몸을 굽혀 어깨끈과 브래지어를 벗겨냈다. 그리고는 그녀의 무릎을 쓰다듬었다. 자, 자, 다 됐어. 그는 조심스럽게 물통 속에 뜨거운 물을 더 부었다. 그녀는 가볍게 신음 하며 발을 힘없이 움직였다. 풍만하고 하얀, 그러면서도 생기라고는 하나 도 없는 그녀의 나신이 파란 속옷으로 아슬아슬하게 덮여 있었다. 그는 부엌으로 가 난로에서 두 번째의 주전자를 가져왔다. 주전자 뚜껑 이 시끄럽게 덜걱이며 신구들을 깨울 것만 같아 불안했다. 빌어먹을 놈의 물통은 땜질 투성이었다. 인색한 노인네들이 이런 고물도 아직 못 버린 것 이었다. 누군가가 들어온 것 같아서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어머니가 부엌문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에 그녀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발을 삶지 마라. 그는 말없이 물통을 들고 방으로 와 문을 힘껏 닫았다. 부엌에서 불을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나는 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다. 장딴지가 진홍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레나, 자는 거야?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약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굵은 땀방울들이 앞이마, 눈썹, 윗입술, 턱에 맺혀 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그는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 아주었다. 레나! 너무 아파.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속삭였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받치고 입술에 물컵을 대주었다. 아래턱이 덜덜 떨 리며 물컵 가장자리에 이빨이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물을 마신 후 힘이 빠져 다시 베개 위로 쓰러졌다.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 주고 나서, 그는 물통에 뜨거운 물을 더 쏟아 부 었다. 그러다가 실수로 그녀의 다리 위에 조금 쏟았다. 악! 그녀가 신음소리를 내며 담요를 걷어찼다. 그녀의 얼굴이 고통으 로 일그러졌다. 끝났어. 이게 마지막이야. 그녀는 오한이 들린 것처럼 몸을 덜덜 떨었다. 그녀는 어깨를 잔뜩 웅크 리고, 불끈 쥔 두 손도 마구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다시 담요를 덮어 주었다. 자, 다 끝났어. 그녀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잘됐어. 이제 더 이상 하지 않을게. 그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2시 15분전이었다. 40분이 걸린 셈이었다. 이 제 5분만 더 있으면 될 것이다. 그녀는 울음을 그치고 나서 머리를 베개에 파묻고 죽은 듯이 누워 있었 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차가웠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분명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발을 조심스럽게 물통에서 꺼냈다. 진짜로 물에 삶은 것처 럼 보였다. 괜찮을 거야.... 방에선 아직도 툭 쏘는 듯한 겨자 냄새가 났 다. 그는 그녀의 다리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물통을 부엌에 가져가 겨자를 씻어낸 다음 제자리에 갖다 놓고 방으 로 돌아왔다.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그는 창문으로 가 차양을 올렸다. 아파트 옆 동 의 계단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잘돼야 할 텐데. 망할 놈 의 애는 배 가지고.... 다른 사람 같으면 그렇게 질질 짜지는 않았을 거 야. 그까짓 뜨거운 물 때문에 죽는 것처럼 울다니. 다리에 다시 크림 로션 을 바르면 괜찮을 텐데도 말야. 그는 옷을 벗고 불을 껐다. 그리고는 그녀 옆에 누워서 조심스럽게 그녀 의 다리를 치운 후 담요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불덩이 같은 몸으로 죽 은 것처럼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 껴졌다. 강렬하고도 자극적인 향내가 그녀의 몸에서 풍겨 왔다. 그는 아무런 저항이나 반응도 없이 그렇게 누워 있는 그녀를 힘껏 안았 다. 그런 행위는 지금까지 그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자극을 주었다. 그 것은 동물적인 어떤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체내에 존재하는 생명체를 파 괴할, 그리하여 그의 인생을 거의 파탄시킬 뻔했던 작은 태아를 찢어 없애 버릴 충격을 가하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마침 내 그녀의 몸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던 또 하나의 생명이 완전히 죽었다 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스타킹을 신을 수가 없었다. 다리가 아파. 구두를 신을 수도 없었다. 그는 윗부분이 밖으로 재봉된 약간 큼지막한 펠트부츠를 그녀에게 찾아 주었다. 좀 나은 것 같애. 조심스럽고 부자연스럽게 방안을 거닐며 그녀 가 말했다. 그녀는 더욱 왜소해 보였다. 마치 허옇게 살찐 얼굴에 눈 주위 에는 거무스레한 기미가 끼어 있는 농부의 아낙네 같았다. 그녀는 갑자기 침대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아. 그는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기로 결심했다. 잘못하면 거리에서 쓰러질지 도 몰랐다. 그는 뜨거운 차를 한 잔 그녀에게 주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이 미 부엌일을 하고 있었다. 아파트 정원을 통과하는 동안 그들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아파트에서 나온 사람들이 빵집 앞에 줄지어 서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르바트 가를 가로질러 갔다. 레나는 그에게 몸을 기댄 채 천천히 걸었다. 이것이 그와 함께 걷는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레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그 순간을 영원 히 간직하고 싶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가능한 한 그에게 몸을 붙인 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유리에게 미소를 보낸 후 마당을 홀로 가로질러 갔다. 그는 레나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하여 전화를 걸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것은 자신의 관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들이 지난밤에 했던 일이 위험한 짓이었다는 사실만 강조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음날 그녀의 직장으로 전화를 걸 작정이었다. 그녀가 자리에 있다면 그것은 괜 찮다는 뜻일 테고, 또 효과가 있다면 그에게 얘기를 해 줄 것이다. 그녀는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쥐고 부드러우면서도 분명한 어 조로 말했다. 잘됐어. 그는 자신에게 행복감을 주는 말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기쁨이 배어 있음을 느꼈다. 축하해! 잘됐어! 다시 전화할게.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다시는 전화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건 그녀를 차버리겠다는 의미 였다! 그날 저녁, 학교에서 돌아오자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니나 이바노바가 전화했다. 뭐래요? 전화해 달라더라. 사샤 일로 또 그르겠지. 빌어먹을! 니나가 다시 전화를 했다. 너, 레나 일 알고 있니? 그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뭔데? 걔가 하혈을 했대. 맙소사! 오늘도 통화했었는데, 레나는 직장에 있었어. 그가 덧붙여 말 했다. 물론 만난 지는 꽤 됐지만 말야. 사람들이 레나를 병원으로 데려갔어. 어디에 있대? 그녀는 마리나야 구역에 있는 병원 이름을 알려주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는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레나의 병명이 뭐래? 몰라. 레나가 병원에 있는 걸 누가 알려주었니? 걔네 엄마가. 레나 생태가 굉장히 나쁘대. 알려줘서 고맙다. 내가 가 볼께. 그는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책상 앞에 앉았다. 제기랄! 이게 무슨 꼴 이람! 그는 법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변호사였던 것이다. 그는 불법 낙태행위를 한 것이다. 낙태시술로 여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 는.... 바보같이! 무엇이 이곳 자기 집에서 그 짓을 하도록 그를 꼬드겼 을까? 그녀 집에서도 아무도 모르게 그 일을 할 수 있었는데, 그녀에겐 자 기 방이 있지 않은가! 그는 바보짓을 했던 것이다! 바보짓을! 만일 살아난다면, 그녀는 발설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죽는다 면 그저 모든 걸 부인하면 된다. 아무 증거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 그녀 가 임신을 했으나 아이를 원치는 않았다는 것, 그래서 무슨 일인가 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하자. 그러나 그저 어떤 외제약을 복용하는 줄로만 여겼지, 실제로 자기 몸에 어떻게 하리라고는 전혀 몰랐다는 것이 다. 일전에는 그녀의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여 집까지 바래다주었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녀의 직장으로 전화를 했었다. 이건 그들 간의 우정상 너무나도 자연스런 일이 아닌가. 어찌됐든, 겨자 찜질과 낙태가 어떻게 동일시될 수 있단 말인가? 입법가 들은 무슨 이유로 그처럼 특별한 단어, 즉 <낙태>란 말을 사용해야 했을 까? 아주 넓게 풀이되는 단어는 아닐까? <인공임신중절>이란 용어는 어떤 뜻으로든 읽힐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입법가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아주 명확히 그것을 밝혀 놓았다. 즉, 의학적인 의미에서 낙태란 외과적인 조치를 의미했다. 그는 자신의 얘기를 세련되게 다듬고 좀더 치밀하게 꾸며야 했다. 언제, 어디서, 몇 일, 몇 시, 몇 분, 그리고 장소.... 이 모든 것들을 분명하게 해야 했다. 만일 레나가 죽는다면, 부쟈긴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물의를 피하고 싶어할지라도 말이다. 고위관리의 딸이 농부들이나 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떼려 하다니 될 법이나 한 얘긴가? 그리고 만일 누가 상세히 들춰내기라도 한다면 부쟈긴 일가는 상당한 비난 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혼에 반대해 왔고, 그 때문에 레나는 아이를 안 가지려 했던 것이다. 결국 객관적으로 볼 때, 그들은 레나가 그 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끔 내몰았던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레나에 게 해준 게 뭐가 있던가? 뭘 가르치기라도 했었나? 영어번역이나? 인생에 대한 준비는 거의 못해 주었다. 그는 항상 그녀의 가족을 증오했었다. 그 런데 이제 그는 그들의 수중에 갇혀 자신의 작은 방안에서 버둥거리게 된 것이다. 반면에 그들은 소비에트의 제 5차 주택단지에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 안 에 앉아서 레나를 구하기 위해 의사들을 동원할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레나를 구해 낼 것이다. 그런 다음에 그를 족칠 것이다. 유리의 어머니는 뚱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짐작은 했겠지만 무슨 말이라도 했다가는 아들한테 비난이라도 받을까봐 겁을 내는 모습이 었다. 하지만 레나가 어떤 애든가? 그렇게 곱게 커 온 애를, 누구나 다 하 는 식으로 하게 했으니. 생각을 해봐라. 걔처럼 어린 처녀한테! 그리고 유 리는 또 그렇지, 무턱대고 달려들어 발을 삶아 놓지 않았던가. 그는 제대 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유리는 병원에 가긴 했지만,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가 안으로 들어 가기만 하면, 부쟈긴 집안의 사람이나 다른 이들이 그를 발견하게 될 것이 고 그러면 골치께나 아프게 될 것이다. 그를 본 사람이 좀더 적을수록 나 았다. 그는 아르바트 가로 되돌아왔으나, 집에는 가지 않고 공중전화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엘레나 이바노브나 부쟈기나의 상태에 대해 문의했 다. 상태가 심각합니다. 체온이 사심 도예요. 그는 매일 전화를 걸었다. 주말이 돼서야 병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제 안정됐어요. 체온은 삼십팔 도로 떨어졌어요. 3일 후 그녀는 만족할 만한 상태가 됐고,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둘째 주말에 그녀의 어머니 가 레나를 집에 데리고 왔다. 그날 저녁 유리의 어머니가 그에게 물었다. 너의 공주는 어떠냐? 그는 싱긋 웃었다. 건강해요. 유리는 그녀가 자기에게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아 전화를 하지 않았다. 한 번도 병문안을 하지 않았고, 편지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빌어먹을! 어쨌든 그건 잘한 일이었다. 단 한 가지 궁금한 게 있 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또 했을까? 하지만 그는 아직 전화를 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그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대신 니나가 했다. 유리, 오늘 모여서 레나를 찾아가기로 했어. 너도 올래? 오늘 바빠. 늦게라도 와. 늦게까지 일해야 돼. 그녀는 독자적으로 전화한 걸까, 아니면 레나가 시켜서 한 것일까? 그는 확인해야 했다. 그는 레나에게 전화했다. 부드럽고 깊은, 달래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네 일로 무척 걱정했어. 그녀가 말했다. 나도 네 걱정을 했어. 온종일 생각했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거니? 내게 좀 와 주지 않을 래? 난 네가 어떤지 병원에다 매일 전화로 물었었어. 그 말이 그녀를 기쁘게 해주었다. 정말? 다른 사람들이 오늘 날 보러 올 거야. 너도 올 거지? 별로 생각 없어. 그런 악당들하곤 같이 하고 싶지 않아. 그래, 괜찮아. 그럼 언제 올래? 전화할게.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19 니나는 5시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바랴와 그녀의 친구인 조예가 문 옆 계단에 앉아 있었다. 문이 잠겨 있어. 열쇠를 읽어버렸지 뭐야. 열쇠를 읽어 버렸다고? 이 깜찍한 거짓말쟁이. 니나가 조예를 아파트 안 에 데리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그저 계단에 앉아 있었던 것이 다. 이 계단은 언니 거가 아냐, 여기에 앉아 있는 것조차 못하게 할 수는 없다고. 너에겐 삼십 초 동안의 반성할 시간과 그것을 실행에 옮길 이 분간의 시간이 있어. 니나는 학교선생처럼 조예에게 말했고, 그러자 그녀는 계단 을 도망치듯 뛰어 내려갔다.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에게 갔었니? 응. 물건들은 다 샀니? 응. 카드는 어떻게 했어? 그건 주문했어. 돈은 얼마나 남았니? 바랴가 거스름돈을 내놓았다. 스케이트 타러 가려고 오십 코페이카 남겨 뒀어. 숙제는 어떻게 할거야. 해야지. 그들은 각자 서로의 일을 했다. 니나는 온종일을 공부하다가 식사하러 집에 왔고, 그리고는 또 돈을 더 벌기 위해 야간 학교에 나가 가르쳐야 했 다. 그들은 추가수입이 없이는 생활을 꾸려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 나 바랴는 스케이트장에, 그리고 영화관이나 극장에 다녔으며, 아니면 남 자친구나 여자친구들을 만났다. 그래서 집안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처 럼 보였다. 카샤를 데워서 저녁에 먹도록 해. 프라이팬에 있어. 버터는 찬장 위에 있고. 바랴가 말했다. 열한시 전까지 집에 와. 니나가 코트에 단추를 채우며 경고했다. 문이 닫히자마자, 바랴는 조예에게 전화했다. 이제 와. 니나가 갔어. 그녀는 탁자를 치우고, 저녁을 준비하려고 접시를 씻었다. 그리고는 모 든 것을 제자리에 정돈해 놓았다. 그녀는 물건을 정돈하는 걸 좋아했다. 니나는 결코 제자리에 물건을 두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렸다. 행주를 손에 든 채 바랴는 수화기를 들었다. 나타샤? 그것은 <전화용 남자 친구>였다. 그녀는 그를 단지 전화로만 알고 있을 뿐 한번도 본 적이 없었으며,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이름은 볼로쟈였 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길 거절했다. 나타샤쯤 될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후로 그는 그녀를 나타샤라고 불렀으나, 그래도 매번 나타샤, 진짜 이름은 뭐죠? 라고 물었다. 바랴는 그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고, 그에게 솔직하게 대해 주었다. 그와 는 결코 만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무슨 일이고 간에 그에게 얘기 할 수 있었다. 그도 또한 자신이 그녀 이외의 누구에게도 그처럼 솔직하게 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타샤의 머리칼은 금발일 겁니다. 정말 금발이에요. 눈은 무슨 색이죠? 푸른 자위에 오렌지색 눈동자예요.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어딨습니까? 지난밤엔 어디 갔었어요? 근사하게 시간을 보냈어요. 우린 공예강습소에서 춤을 추었죠. 거기 사 람들은 룸바춤을 추는 데 필요한 악기들을 다 연주해요. 샘나는데요. 난 숙제를 해야 했어요. 이것 보세요. 공부해서 남 주나요? 최선을 다해 공부해야죠. 그 열매는 달다고요. 배운다는 것은 어둠 속으로부터 광명의 세계로 이끄는 확실한 길이라니까요. 우린 언제나 만나게 되죠? 절대로 만나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사랑에 빠진다면? 아니,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우리는 생각하는 게 서로 너무 비슷하거 든요. 오늘은 뭐 할 거예요. 스케이트 타러 갈 생각이에요. 어디로? 공장 근처의 스케이트장요. 어느 공장? 비누와 못을 만드는 공장. 나도 같이 갑시다. 난 스케이트를 잘 타거든요. 하지만 난 못 타요. 그래서 당신은 금방 지겨워질 거예요. 자, 아제 끊 어야겠어요. 친구가 오기로 했거든요. 니나의 표현을 빌면, 두엄더미에 핀 한 송이 꽃처럼, 창백하고 여드름 투성이인 조예가 흰 모자를 쓰고 스커트 아래로는 긴 바지를 입고 왔다. 그녀의 어머니는 카니발 시네마 극장의 매표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딸의 친구들을 무료로 입장시키곤 했다. 왜 흰색 모자를 썼니? 바랴가 조예의 모자를 바로 보며 물었다. 같은 모자를 쓰기로 했잖아? 빨간 모자는 고무줄이 끊어졌어. 막 쓰려고 하는데 툭하고 끊어졌어. 넌 빨강 모자를 써라. 그게 잘 어울리니까. 너는 내가 빨간 모자를 쓰고 하얀 스웨터를 입었으면 하니? 그럼 네가 빨간 모자를 써. 나는 네 하얀 모자를 쓸래. 우린 왜 네가 원하는 대로만 해야 하니?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합의한 거야. 조예가 어깨를 으쓱하며 기분이 상한 투로 말했다. 그래 좋아. 네가 꼭 그래야 한다면.... 싫으면 관두렴. 난 스케이트 타러 가지 않겠어. 그녀는 신발을 내던지 고 나서 침대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러지 마. 조예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내가 네 빨간 모자를 쓸게. 난 스케이트 타러 가지 않겠어. 그들은 아무 말도 않고 잠시 앉아 있었다. 조예는 자신들이 하찮은 일로 싸운 게 슬프고 안타까웠다. 가자. 하고 그녀가 애걸했다. 그 남자가 분명히 거기에 와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난 절대 안가. 그렇지만 넌 준비하고 있었잖니? 그래, 준비하고 있었어. 하지만 지금 마음을 바꿨어. 사샤가 체포된 후부터 바랴는 자신이 다른 소녀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 다. 그녀는 갑작스레 사라졌지만, 예기치 않게 다시 나타나서는 혹 그녀가 잘못했을 경우 자기를 호되게 혼내 줄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모든 사 람들은 그녀가 <아르바트의 지하실>에서 사샤와 춤추었던 것과 그들이 함 께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으며, 거기에서 서로 싸우는 장면도 보았었다. 바랴는 이제 사샤의 어머니와 친구가 되어 있었으며, 감옥에 있는 그에게 물건을 보내 주기도 했다. 바랴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부터 형무소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 리곤 했다.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도착하면 그들은 함께 줄을 서서 초 소에 난 작은 창문으로 조금씩 이동해 갔다.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처 음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잘 몰랐다. 그려는 창문 뒤에 앉은 사람을 화 나게 할까봐 두려웠다. 그녀는 새벽 다섯 시부터 높고 긴 형무소 담을 따 라 서 있는 춥고 피곤한 사람들이 지체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무척이나 당 황했다. 그러나 바랴는 누구도 겁내지 않았고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사샤를 찾기 위해 온 형무소를 뒤졌다. 그들은 창구에서 죄수의 이름과 성, 그리고 주소를 적어 넣는 서류들을 받았다. 소피야 알렉산드로 브나가 서류를 다 작성하면, 그들은 줄로 다시 돌아가 서류를 제출한 다 음, 두세 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대개 그는 여기 없소 라는 말을 듣고 발길을 되돌리곤 했다. 그럼 어디 있는 거죠. 바랴가 탄식하며 말했다. 몰라. 그러나 누군가는 알 거 아니에요? 당신들이 그를 체포해 갔잖아요. 그 러니 당신은 알아야 해요. 바랴는 아르바트 거리에서 숱한 조언들을 들었다. 느빈스키 가에 사는 한 소녀는 남자친구가 타간카 형무소에 있다면서 어떻게 하면 깨끗한 속옷 속에 쪽지를 감출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고, 술을 만들 수 있는 설탕과 사 과를 좀더 보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알렉산드로브나는 머 리를 흔들었다. 아냐, 바랴. 사샤에겐 술이 필요 없을 거야. 매혹적인 중년의 여인이었던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는 하룻밤 사이에 폭 삭 늙어 버렸다. 처음에 그녀는 사샤를 체포한 사람들 앞에 자기가 나타나 기만 해도 그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들에게도 모두 어머니가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많은 어머니들이 그곳 에 있었지만 아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머니들은 길게 줄지어 서 서, 닫혀진 사무실 문 뒤에 꿈틀거리고 있을 그 비정함이 지금 막 들어간 누군가에게 가해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만 있었다. 그녀는 무장한 보초들과 물샐 틈도 없는 돌담을 보았다. 그 뒤에 사샤가 갇혀 있었다. 그녀의 자식은 그곳에서 모든 생물들에게 부여된 권리, 즉 대지의 공기를 마시는 자유를 박탈당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사샤에게 어 떻게 대하고 있을까? 그녀는 밤새 잠들 수 없었다 - 그는 어떻게 자고 있 을까? 그녀는 먹을 수 없었다 - 그는 감방 그릇으로 무얼 먹고 있을까? 사 샤는 그녀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사샤는 그녀의 생명이고 피였다. 어린애 같은 그의 머리칼 냄새가 그의 베개에 배어 있었고, 그의 신발에서는 어릴 때 맨발로 뛰어 놀던 마른 흙냄새가 났으며, 잉크가 묻은 책상에는 학교 교과서 냄새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녀는 사샤가 체포되기 전에 그를 쫓아다녔던 사람들을 만나볼 양으로 이 거리 저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들은 사샤가 어떤 곤경에 빠져 있고, 그 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었다. 다람쥐털 코트를 입은 키 작은 사내를 만나기만 하면, 그녀는 사샤에 대해 물어볼 작정이었 다. 그녀는 당신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다고, 그저 임무를 수행한 것 뿐 아니겠느냐고 말하려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제 임무를 마친 이상, 그들에 게 잘못될 것은 없을 테니까, 자비를 베풀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해볼 작정 이었다. 그녀는 아르바트의 거리를 이리저리 배회했다.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척하기도 했으나, 그녀는 다람쥐털 코트를 입은 키 작은 사내는 물론 모자 쓴 사내, 그리고 키 크고 기분 나쁘게 생긴 사 내도 볼 수 없었다. 추위에 몸이 뻣뻣해지고 자신에게 아무 힘도 없다는 생각에 서글퍼하며 그녀는 어둡고 텅 빈방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비탄에 잠겨 이내 오래 전에 버린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다.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하느님이시 여, 부디 선과 자비의 성령으로 사샤의 운명을 결정할 사람들의 마음을 녹 여 주소서. 아침마다 우체부의 발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검 사로부터, 혹은 막강한 힘을 가진 어느 이름 모를 독지가로부터 올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한 형무소에 있다가 석방되었거나 추방된 사람을 통 해 사샤가 보낼지도 모르는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런 식으로 편 지가 도착한 일이 있었다. 그녀는 그런 경우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 었던 것이다. 그녀는 신문에 난 스탈린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점잖은 옷 을 입은 그는 눈 주위에 인자해 보이는 주름살이 잡혀 있었다. 뿐만 아니 라 그는 깨끗한 정신을 지닌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현명하고 조용한 얼굴 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50세 생일 잔치가 몇 년 전에 열렸으니까, 지금 그는 53세, 아니 그녀의 남편 파벨 니콜라예비치와 같은 54세였다. 스탈린 의 큰아들은 분명 사샤와 같은 나이였고, 그 외에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더 있었다. 그는 최근에 아내를 잃었기 때문에 자식이 있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가족의 슬픔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사샤에 관한 일을 알기만 한다면.... 그녀는 마르크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다. 마 르크는 스탈린에게 사샤의 일을 말할 것이다. 그러면 스탈린은 그에 대한 서류를 보자고 할 것이고, 어쩌면 사샤를 부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사샤를 좋아하게 되리라. 모든 사람이 사샤를 좋아하니까. 파벨 니콜라예비치가 왔다. 그는 물론 당황했지만, 결코 파국적 상황이 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사샤를 총살하거나 종신형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 다. 종신형은 없어졌으니까 말이다. 사샤는 젊었고, 아직 앞길이 창창했 다. 분명 무언가를 하긴 해야 했지만, 이런 경우에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 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법이었다. 그에겐 그러한 사람들에게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마르크만이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어째서 그걸 이해할 수 없었을까? 왜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도 하 지 않았을까? 그는 참겠다는 아니 나아가서는 좀더 다정하게 굴어야겠다는 확고한 의도를 갖고 여기에 왔었다. 그러나 지겨운 아파트에 들어와 한때 그의 아내였던 늙은 여자의 모습과, 그 여자가 두려움을 감추려고 애를 쓸 때 떠오르는 고집스런 표정을 보는 순간, 그리고 그 샛된 목소리를 다시 듣는 순간, 옛날의 짜증과 초조와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하고 말았다. 그것 은 전적으로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녀와 그녀의 동생이 사샤를 키웠었으니 까. 그들은 서로 반대편에 앉아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녀는 입술을 떨고 머리를 흔들고 있는 데 반해 파벨은 깨끗이 면도를 했고 혈색도 좋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커다란 잿빛 눈동자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들은 숱한 세월 동안 함께 앉았던 탁자에 앉아 있었다. 예전이나 마찬가 지로 볼품없는 남포갓 아래 놓은 그 탁자는 역시 똑같은 기름천으로 덮여 있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구겨지지도 않은 테이블보를 손바닥으로 펴 고 있었다. 그 동작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당신은 내가 관청들을 다 찾아다니길 바라는 거지? 내가 설명했잖아, 소용없는 짓이라고, 공연히 반감만 일으킬 수 있단 말이야. 그들은 아직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어. 아직도 조사가 계속되고 있으니까. 그녀는 혹시 자기를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나? 당신은 내가 공장 일을 집어치우길 바래? 날 놔주질 않을 거야. 나도 모스크바로 돌아올 생각은 전혀 없어. 그걸 알아야해.... 뭐라고? 그는 그녀가 무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너무 작아 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녀 는 단지 가늘게 입술을 떨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뇨, 아무 말도.... 난 당신 얘기를 듣고 있었어요. 그래, 나도 당신이 듣고 있는 걸 알아. 당신은 내 얘길 들으면서, 자기 자식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내가 얼마나 썩어빠진 아버지인가 생 각하고 있었겠지. 당신은 항상 나를 썩어빠진 아버지로 생각했으니까. 또 당신은 자식에게도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지. 그의 비난과 불평은 언제나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옛날 감정이 되살아난 그녀는 아들을 구해내야 하는 이 마당에도 자신이 그런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그녀는 사샤에 대한 그의 적개심과 사샤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멀리하 려는 그의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순간에도 자신만의 감정과 비애를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또 사샤의 생명이 기로에 있는 이때 에도 그녀는 어떻게 그를 두려워할 수 있는 걸까? 그녀는 누구도 두려워해 선 안 된다. 그녀는 그의 어머니가 아닌가! 그 애가 잡혀갈 때 당신이 여기에 있었더라면.... 그녀는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더 크게 얘기해야 한다 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들을 수 있도록 외치려 했다. 오, 그래 물론이지. 나는 비난받아야 마땅해. 내 잘못이었어.... 당신 은 순교자고, 고난자지. 반면에 난 술이나 마셔대고 여자나 쫓아다니는 돼 지 같은 놈이고.... 맙소사!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예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얼굴을 붉히고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녀의 흉내를 냈다. 그녀는 그가 돌아 오길 기다렸고, 그가 한 아버지로서, 또 한 사내로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길 바랬었다. 사샤 이외에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에겐 그것 외에 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권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가 사샤의 일만 생각 하도록 강요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책상으로 가서 검찰관에게 보낼 탄원서를 꺼냈다. 여기 있어요. 그녀는 탄원서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의 얼굴에 불쾌하고 혐오스런 표정이 나타났다. 저 우둔한 여편네는 아직도 내가 이 가망 없는 일에 관해 무언가를 하도록 만들려는군. 누가 이따위 탄원서를 읽기나 한단 말인가? 그러나 파벨만큼은 그것을 읽어야 했다. 만일 지금 그녀의 청을 거절한 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를 비난할 것이다. 그는 세상이 자신을 버젓한 한 인간, 버젓한 한 아버지로 보아줬으면 하고 바랬다. 그는 그녀가 이렇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 그는 탄원서조차도 읽지 않으려 했어요! 그러나 그녀가 써놓은 글이 오죽했겠는가! 귀하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저는 한 어머니입니다.... 제 아들을 돌려주세요. 순진하고, 감성적이 고, 설득력도 없군. 저는 우리의 공정하고 은혜스러운 정부에 호소하는 바입니다.... 단어들, 단지 단어들만 있을 뿐이잖아. 저는 제 아들이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걸 압니다.... 누가 그걸 믿겠어? 그가 설혹 잘못을 범했더라도, 그것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었을 겁니다. 그는 어린애에 불과합니다.... 스물 두 살 먹은 어린애라니! 아니, 어떤 잘못이라고? 왜 그의 잘못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거지? 그녀는 머리를 젖히고 소파에 앉아 빈정대는 그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듣 고 있었다. 그의 말들은 그녀의 우둔함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그렇다. 그녀는 탄원서 쓰는 법을 몰랐다. 사샤에게 도움만 될 수 있다면 그에게 다시 써 달라고 하자. 그녀는 남편 앞에 종이와 잉크병을 밀어놓았다. 제대로 써 주세요. 그는 분하고 당혹스런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 은가를 깨달았다. 탄원서 자체가 별 소용이 없는데 그걸 어떻게 쓰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무언인가를 써야 했다. 그러나 그가 과연 무얼 쓸 수 있겠는가? 그는 사샤에게 부과된 죄목조차도 몰랐다. 이봐. 그가 말했다. 그걸 그대로 보내. 잘못을 저질렀다는 부분하고 아들을 돌려달라는 부분만 빼고 나머지는.... 그래, 그냥 보내도록 해요. 좋아요. 그녀가 편지를 집어들면서 말했다. 보내겠어요. 그녀는 그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녀는 먼저 마르크에게 보인 다음에 보낼 작정이었다. 언제 돌아올 거예요? 그가 다시 소리쳤다. 내일 일 때문에 가야 한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 돈 약간만 주세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상점에 가서 사샤에게 보낼 물건을 사야 해요. 그는 하마터면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을 뻔했다. 그는 평범한 임금을 받 는 평범한 기술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를 화나게 만든 것은 돈이 아니라 경멸로 가득찬 그녀의 말투였다. 그에게서 필요한 것은 오로지 돈이었던 것이다. 그는 150루블을 내놓았다. 이게 내가 가진 돈 전부야.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20 사샤가 덜거덕거리는 쇳소리에 잠을 깬 것은 또 다시 밤이었다. 어제의 그 간수가 허리띠에 매달린 열쇠꾸러미를 철렁거리며 수없이 많은 짧은 복 도들을 따라 그를 호송했다 그는 계단의 입구를 막아선 쇠창살을 열쇠로 부드려 죄수를 호송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사샤는 자기가 1층에 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복도 끝에 있는 열려진 문으로부터 말소리 와 때로는 웃음소리까지 흘러나왔다. 여기서는 형무소의 냄새와는 다른 냄 새가 풍기고 있었다. 쟈코프는 이번엔 그에게 불을 비추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익히기 위해 서 그 방법을 써먹었던 게 분명했다. 그는 제복을 입지 않고, 파란 스웨터 에 갈색 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사샤를 앉힌 다음, 그 대로 머리를 숙인 채 계속 무언가를 썼다. 그는 사샤 쪽은 바라보지도 않 은 채 자기가 쓴 글을 읽고, 그러다가 다시 쓰곤 했다. 그들 사이에는 커 다란 잉크 스탠드와 역시 커다란 문진만이 있을 뿐이었다. 문진을 들어 쟈 코프의 머리를 내려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사샤의 뇌리를 스쳤다. 이 의자에 앉았던 죄수들 가운데에는 그렇게 하고 싶었던 사람도 있었을 테고, 언젠가는 그런 일도 벌어질 것이다. 여기에서는 걸음걸이나 행동 등 모든 것이 예측되었지만, 그것만은 고려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혹시 문진을 건드리게 되면 어떤 비밀장치가 작동될지도 몰랐다. 물론 누구도 여기에서 탈출할 수는 없었지만, 절망감으로 인해 그러한 행동을 할 사람 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쟈코프는 그러한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진짜> 위험한 죄수들은 감옥의 어딘가 다른 장소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지도 몰랐다. 쟈코프는 서류를 챙겨, 문을 열어둔 채 방에서 나갔다. 그는 입고 있는 갈색 바지의 가랑이를 펠트부츠 속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쟈코프가 매우 따뜻한 복장을 하고 있음을 안 사샤는 갑자기 자신의 얇은 신발을 통해 시 멘트 복도의 한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달랐다. 지난번과 같은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쟈코프는 어떤 중요하고 급한 일 때문에 바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마치 쟈코프가 다른 일로 바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샤를 여기로 데려온 것같이 보였 다. 일반인 복장과 펠트부츠는 쟈코프를 단순하고 관료적으로 보이게 했 다. 그는 탁자 위의 모든 서류와 사샤를 그대로 남겨둔 채 방에서 나갔다. 그는 사샤가 그것들을 볼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려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것은 마치 사샤가 문진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칠지도 모른다는 것을 겁내지 않는 것과 같았다. 문을 쾅 닫는 소리와 함께 복도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쟈코프가 누 군가와 얘기하고 있었다. 그가 펠트부츠를 볼품없게 끌면서 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는 탁자에 앉아 서랍 속을 뒤지더니, 지난번 취조 서류가 들어 있는 얇은 서류철을 꺼낸 다음 또 다른 것을 한동안 뒤적거리다가, 사샤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래, 판크라토프, 오늘은 무얼 말할 건가? 그는 무심히 그 말을 했는데, 억양에는 어떤 유머까지 배어 있었다 마치 지난번에 나누었던 얘기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하고 사샤가 말을 꺼냈다. 아! 쟈코프는 마침내 찾던 서류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가지고 방을 나 갔다. 그는 되돌아 와, 서랍 속에서 서류들을 이리저리 뒤지고 있다가, 다 시 앉아 사샤의 서류철을 열었다. 자, 판크라토프, 내가 저네에게 해준 충고에 대해 생각해 봤나? 예,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안됐군. 쟈코프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목소리엔 나무람과 안쓰러 움, 그리고 심지어는 동정심까지도 배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친구, 자네 는 스스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어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서류철을 뒤적였다. 자넨 이번 일을 끝내 질질 끌 작정인가? 전 지난번에 당신이 말한 반혁명적인 대화라는 것이 무얼 뜻하는지 도 무지 모르겠습니다. 쟈코프가 얼굴을 찡그렸다. 자넨 솔직하지 못하군, 판크라토프. 자넨 우리를 중요한 사실에서 떼어내어 자네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만 초점을 맞 추게 하려하고 있어. 그 점이 자넨 매우 부정직해. 자넨 감추고 있는 게 많아. 그러나 바로 그 사실이 우리에게 자네에 관한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지. 내가 무얼 감추고 있습니까? 사샤는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순간 에스키모인 같은 얼굴을 한 중년 사내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그의 건장한 몸에 꼭 달라붙는 검푸른 조끼를 입고 있었다. 쟈코프가 일어났다. 그 사샤는 쟈코프에게 앉으라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도 그 곁에 앉았다. 계속하시오. 그는 사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샤는 이 자가 틀림없이 쟈코프의 상급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샤는 그가 일상적인 심문과정을 보기 위해서 온 게 아니라, 특별한 관심 을 갖고 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갑자기 이 자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졌다. 쟈코프가 말했다. 자, 판크라토프, 어디까지 했더라? 당신이 내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고 말하는 중이었습니다. 내가 도대 체 무엇을 감추고 있습니까? 당 회의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봐. 넌 높은 직위에 있는 누군가의 보호를 기대했어. 쟈코프는 기대에 찬 눈초리로 주의 깊게 사샤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거였군. 마르크나 부쟈긴, 아니면 그 둘 모두와 관계가 있었어. 드디어 그는 힌트를 얻어냈다. 쟈코프는 높은 직위에 있는 <동지> 라고 부르지 않고,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 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이름도 말하진 않았다. 자, 이제 쟈코프가 그 들의 이름을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샤가 그들의 이름을 말하진 않 을 테니까. 당신은 누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겁니까? 쟈코프는 불만스럽게 찌푸렸다. 판크라토프! 부끄러운 줄 알아. 우리가 고양이와 쥐 놀이를 하고 있는 줄 아나? 우리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 로 많은 걸 알고 있어. 넌 우리가 말하길 바라지? 그러나 우린 네가 스스 로 말하길 바래. 그리고 그게 너에게도 이로울 거야. 랴자노프와 부쟈긴은 자네의 대표자로서, 당모임에서 자네의 의견을 상당히 많이 수용해 주었 어. 그러나 지금 자넨 여기에 있고, 우리에게 진술을 하고 있는 거란 말 야. 그는 분명하게 <동지들>이 아니고 <랴자노프와 부쟈긴>이라고 말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보호를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사샤가 반대 의견을 말 했다. 난 삼촌인 랴자노프에게 제 일을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개입해 달라고 부탁하진 않았습니다. 그는 내게 알리지도 않은 채 부쟈긴을 찾아 가 대학 학장인 글린스카야에게 전화해 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좋아. 쟈코프가 사샤의 말에 동의했다. 그런데 어째서 지난번에 그 일을 내게 말하지 않았나? 어째서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나? 자넨 다른 사람들 이름만 주워섬겼어. 그는 사샤의 서류철에서 사샤가 본 적이 없는 얇은 서류를 한 장 끄집어냈다. 바울린, 로즈가체프, 아지쟌, 코발 료프.... 하지만 랴자노프와 부쟈긴은 없군. 어째서 그런 거지? 사샤는 초조해졌다. 그의 한 마디 말이 마르크와 부쟈긴 두 사람의 운명 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번 사건의 표적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분명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일로 문책 받고 있는 걸까? 나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건 순수하게 가족간의 유대와 관계되는 일이거든요. 나는 당신이 어째서 그걸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그 일을 더 이상 논의하는 걸 바라지 않음을 명백히 밝혔다. 쟈코프는 사샤가 나아가야 할 길을 지적해 주었지만, 그는 그쪽으로 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쟈코프는 은근하고 호기심에 찬, 그러나 경계하는 눈초리로 사샤를 바라 보았다. 솔츠가 이 사건을 맡도록 주선한 것도 역시 자네 삼촌 아니었나? 아무도 주선하지 않았습니다. 제 스스로 솔츠에게 간 겁니다. 쟈코프가 능글맞게 웃었다. 사람들은 그와 면담을 하려고 몇 달씩 기다 리는 법이야. 그런데 자넨.... 그 자리에서 만나 일을 처리했군. 그러나 누가 그 말을 믿을까? 하지만 정확히 그대로입니다. 사샤가 대답했다. 제가 그 사무실에 찾 아가니까, 그가 나를 바라보면서, 무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순전히 운이 좋았던 거군? 천만예요. 저에겐 중앙조정위원회에 조회할 권한이 있지 않습니까? 그 리고 분명히 삼촌은 나를 위해 소청할 권한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제 죄입니까? 당신은 제가 그것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거라고 주장하는 겁니까? 천만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쟈코프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 일 을 어떻게 처리할지 가르쳐 달라는 듯이 상급자를 쳐다보았다. 아마도 그 는 상급자가 무언가 말해 주길 기대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에스키모인 같은 얼굴을 한 그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의 자에서 일어나 방에서 나가 버렸다. 다양한 음색을 구사하며, 쟈코프가 선언했다. 자네 죄는 바로 당 앞에 서 불성실하고 부정직하다는 거야. 자네는 많은 사실들을 감췄어. 자네는 자네에 대한 비판자들의 이름은 모두 댔지만, 자넬 지지했던 자들의 이름 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어. 몇몇 사람들이 자네 일에 관여되어 있지. 예 컨대 크리보루츠코 같은 자들.... 사샤는 위험을 느꼈다. 어느 순간에 모든 것이 박살날지도 몰랐다. 그는 마르크와 부쟈긴에 관한 한, 그들을 만족시킬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하지도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크리보루츠코는 어떤가? 이 번 요리사는 아주 매운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라고 그는 스탈린에 대 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샤가 그 일에 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다면, 그는 불성실과 거짓말의 길을 걷는 꼴이 될 것이었다. 저는 그의 사무실을 두 번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그는 저의 제 적서에 도장을 찍었었고, 두 번째엔 저의 복교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쟈코프는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 우린 자네를 추방했고, 두 번째엔 자네를 복교시켰어. 그리고 나서 우린 자네를 형무소에 처넣었지.... 그가 자네에게 무슨 말을 하지 않았었나? 그는 괴롭고 우울해 보였습니다 - 결국 그는 당에서 추방되었죠. 자네 역시 추방되었지. 분명 그가 자네에게 무언가를 말했음에 틀림없 지? 쟈코프는 사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 자가 혹시 뭔가를 알아낸 것 은 아닐까? 아니면 제멋대로 넘겨짚는 것일까? 아마도 사샤가 당황하고 있 다는 걸 눈치챈 것 같은데.... 그는 자네가 추방됐다가 복교된 것에 대해 어떤 의견을 말한 게 아닌 가? 그가 집요하게 물었다. 그는 그 사건에 대해 자네 생각을 물었지? 자네가 당위원회 모임에서 그를 변호했었으니까. 나는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해 주었을 뿐입니다. 사샤가 반론을 폈다. 그리고 그는 다만 고무 도장을 휘둘렀을 뿐이고? 포기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쟈코프는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고, 그를 이리저리 교묘하게 유도하면서 핵심적인 문제인 마르크와 부쟈긴으로 부터 그를 떼어내면서 혼란에 빠뜨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대화는 전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학장이었고, 난 평 범한 학생이었으니까요. 쟈코프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우린 그가 다른 학생들과 반 당적인 대화를 나눴다는 정보를 갖고 있어. 헌데 자네처럼 불만 많은 학 생, 그를 변호했던 자네가 바로 그자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너무 이 상하군 그래! 크리보루츠코는 마르크를 알고 있었으며, 그에게 안부 전해 달라고 사샤 에게 부탁했었다. 그 사실은 절대로 말해선 안 되었다. 정말 그게 전부입니다. 쟈코프는 뚫어지게 그를 노려보고 있다가, 갑자기 악의에 찬 웃음을 터 뜨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아무 것도 씌어 있지 않은 조서를 집어들었다. 좋아, 판크라토프, 우린 인내심이 아주 많은 사람들이야. 우리는 자네 가 정직해지기로 결심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 자네가 얘기해야 할 것 이 무언지 기억하게 될 때까지 말야. 이날 쟈코프의 보고서는 본인이 전번에 기록한 증거에 덧붙여 란 말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샤가 크리보루츠코의 사무실에 찾아간 적이 있었고, 당 모임에서 그를 변호했었으며, 얀슨과 시베르스키가 자신을 변호한 사실 이 있음을 사샤가 시인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나 부쟈긴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모든 것이 올바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사샤는 또 다시 막연한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쟈코프에게 수정해 줄 것 을 요구한 사항은 자신이 업무 때문에 크리보루츠코를 찾아갔었다는 것뿐 이었다. 자넨 학생이니까, 업무 때문에 방문한 게 분명해. 그래, 그렇지. 빌어먹을 놈! 사샤는 진술서에 서명했다. 어머니에게 차입이 전혀 오고 있지 않아 걱정됩니다. 또 도서관에서 신 문과 책들을 좀 빌려 보고 싶습니다. 쟈코프는 머리를 흔들었다. 심문 기간 동안은 금지야. 자네가 좀더 솔직하기만 하면, 사태는 달라 질 거야. 즉 소포나 책, 신문을 받게 될 거라구. 명심해. 판크라토프, 다 음 만남이 마지막이야 - 난 더 이상 이 일을 질질 끌 수 없어. 그는 손가 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나 역시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해. 난 자네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번 일을 결론짓고 싶어. 명심해. 마르크나 부쟈긴, 아니면 둘 다였다. 양심적인 두 공산주의자는 당에 모 든 걸 바쳤다. 사샤는 부쟈긴을 잘 몰랐다. 그러나 마르크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엄격했고, 자신의 임무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생 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만약 마르크가 체포된다면, 그것은 어떤 오해 때 문일 것이다. 마치 사샤 자신의 체포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잘못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에겐 최소한 학교에서의 사건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마르크의 경우엔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탁월한 기술자이고 뛰어난 행정 가이며 사심 없고 진정한 공산주의자인 그의 모든 삶은 오로지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에만 매달려 있었다. 그런 그를 체포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는 이곳에, 이 복도에, 심지어는 바로 옆방에 있을지도 모른다. 근시에다 심장이 약한 마르크가 이런 방에 갇혀 있다고 한다면? 그는 마르크가 나쁜 짓 할 사람이 결코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자 신의 정직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사샤가 마르크를 변호하려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니,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그는 마르크 와 운명을 같이 할 작정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일이 마무리될 경우,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만, 상황을 보아 가면서 그들의 결백이 증명될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명백했으므로, 그가 어떤 설명을 할 것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 다. 그는 정직한 당원이었고, 아무 것도 숨기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마르크에 대해 어떤 나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또 그렇게 하지도 않을 작 정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가 걱정하는 유일한 인물은 크리보루츠코였다. 그것만이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사항이었다. 어쨌든 간에 그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이 다. 어쩌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 사실 을 감췄다. 그는 끝까지 양심을 지키고 싶었지만, 크리보루츠코는 이러한 의미의 정직과 결백에 장애가 되고 있었다. 그날 못 보던 간수가 메모지와 연필을 들고 나타났다. 도서관에서 빌리고 싶은 게 있으면 쓰게. 도서관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얼마나 많은 책을, 그리고 얼마 동안 빌려 볼 수 있는지 알 수 없 었다. 그러나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형무소 요원이란 경험 많은 죄수들을 속이는 법이 거의 없으니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 고골리의 죽은 혼 , 발자크의 잃어버린 환 상 , 스땅달의 빠르므의 승원 , 중요한 문학 최근호들.... 그는 생각 없 이 써 내려갔다. 간수가 기다리고 있어서 생각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 던 것이다. 죄수는 자신이 원하는 걸 미리 결정해 두어야만 했다. 그는 머 리에 떠오르는 대로 써갈겨댔다. 책을 잡아 보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두꺼울수록 좋았다. 그래야만 다음 번에 신청할 때까지 볼 수 있 을 것이다. 그가 의도적으로 적어 넣은 게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소비에트 형법 이 었다. 빌려줄 리야 없겠지만 지금 처지에 대한 저항의 표현으로 추가했던 것이다. 그런데 쟈코프는 무엇 때문에 자신이 책을 볼 수 있도록 허락했을까? 사 샤를 불복시키려는 것일까? 사샤의 생활을 비참하게 해서 마침내 고백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생리에 맞을 텐데. 혹시 죄수들이 책을 빌릴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규칙을 깨는 것이 두려웠을까? 아니면 불쌍해서 였나? 그러나 반혁명으로 문책 받고 있는 자에겐 동정의 여지가 없는 법이 었다. 쟈코프는 아마도 이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지 모른다. 그가 매일 샤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런 게 밝혀지면 책을 못 빌리게 될지도 몰랐다. 다음날 어제 봤던 새 간수가 꾸러미를 하나 들고 나타났다. 그것은 다림 질로 누렇게 변색된 깨끗한 천으로 싸여 있었다. 집에서 자기가 옷을 다릴 때 사용했던 천이었다. 이제 책뿐만 아니라 차입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름은? 판크라토프입니다. 서명해. 간수가 그에게 꾸러미에 든 물품 목록과 몽당연필을 건네주었다. 목록은 어머니의 투박하고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씌어져 있었다. 그러나 <초콜릿> 이라는 단어만은 꼼꼼하고 세련된, 낯선 글씨였다. 사샤는 어머니가 정성껏 쌌는데, 어떤 낯선 손이 거칠게 풀어헤쳐 놓은 가방과 꾸러미를 찬찬히 살폈다. 길다란 흰 빵, 치즈, 냉동 고기, 소세 지.... 이런 것들은 검사를 받아 조각조각 잘리어져 있었다. 납지에 싸인 버터, 설탕, 속옷, 양말, 손수건 등도 있었다. 그래, 어머니께서 살아 계셨구나. 무사하시겠지. 내가 있는 곳도 알고 계시구나. 빨랫감들을 보내도 됩니까? 거기에 싸게. 그는 더러워진 속옷을 천에 쌌다. 하얀 아마포에서 집, 그의 집 냄새가 났다. 잘 받았다고 뒷켠에 쓰게. 그는 목록 뒤쪽에 다 받았어요. 흰 빵, 고기, 그리고 속옷 외에는 보내 지 마세요. 난 잘 지내고 있어요. 어머니께 키스를 보냅니다. 사샤. 연필 내놔! 간수가 말했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21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사샤의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수십 번씩 읽고 또 읽었다. 그것은 아들의 고통과 운명의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그녀에게 아들이 살아 있음을 말해 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 - 마 하일 유레비치, 그녀의 이웃인 갈랴, 밀리차 페트로브나, 그녀의 자매들, 바랴 이바노바, 막스 코스틴 등에게 그 편지를 보여 주었다. 다 받았어 요..... 난 잘 지내고 있어요. 키스를 보냅니다.... 사샤만이 그런 편지 를 쓸 수 있으리라, 오직 그녀의 착하고 용감한 아들만이.... 이제 모든 것이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구겨진 노트, 형무소 냄새가 나 는 빨래감들, 그가 부탁한 고기와 빵 등 - 지금까지는 그녀에게 사샤가 살 아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할 분명한 증거들이 별로 없었지만, 이젠 아니었 다. 저녁과 밤이 이젠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와 함께 있는 것 같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활을 보고 있는 듯했고, 그의 움직임 들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마음이 아프면, 그것은 그가 편치 않음을 뜻했으며 그녀가 잠이 오지 않으면, 그가 뜬눈으로 침상에 누워 있 다는 증거였다. 그녀가 무서운 공포에 시달리는 것은 그가 심문 받으며 고 통으로 괴로워하고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어린 사샤 에게 벌을 주던 생각이 떠올랐다. 자기가 극장에 가는 것을 사샤가 싫어해 서였다. 그때 사샤가 운 것은 육체적인 고통 때문이 아니라 그를 어리다고 얕보는 데 대한 서러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샤를 슬프게 하는 것은 삶 자체였다. 마르크는 사샤 일로 영향력 있는 고위직 인사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마르크를 믿었다. 마르크는 그녀를 거짓말로 안심시키려 하지는 않 았으며 자기가 도울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했다. 또한 그녀는 마르크를 믿 는 것 이상으로 형무소에서 함께 줄 서 있는 여인들을 믿었다. 그 대열 속 에서는 모든 것이 분명하고, 간단하고 확실했다. 그 불쌍한 여인들은 자기 들이 아끼는 사람들을 지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추위 속에서 몇 시간을 떨고 있으면서도 자식들을 따스한 온기로 감쌌고, 경 먹고 살 만한 배급 식량에서 일부를 떼내 자식들을 허기를 달랬으며, 높다란 형무소 돌 담 너머로 자신들의 사랑과 희망을 전하기도 했다.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이제 아무런 두려움 없이 형무소밖에 늘어선 줄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곳에 혼자 서 있다는 느낌을 갖 지 않게 되었다. 그것으로 고통이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혼자 남아 있다는 생각을 지우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이 하는 걸 똑같이 해야만 됐다. 전엔 무섭기만 했던 세상이 이젠 행동을 원했으며, 그 행동 은 두려움을 멀리 사라지게 했다. 그녀는 여인들로부터 사샤를 찾아내는 법, 차입꾸러미를 싸는 법, 그 안 에 넣을 내용물, 그리고 어떤 관리에게 호소해야 하는지와 누구에게 편지 를 써야 하는지 등에 대해 배웠다. 그들의 충고는 언제나 정확히 들어맞았 다. 그녀는 검찰청 간부와의 면담을 가까스로 성사시켰다. 조사가 끝나면 결과를 통보해 주겠다 는 답변은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였으나, 그것은 검 사가 사샤의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에 중요한 정보였 다. 경우에 따라서는 괜찮은 걸과가 나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사샤가 형을 언도 받았을 때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고, 그 앞에 놓인 길이 어떤 것인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것은 또 다른 인생행로를 의미했지만 그런 길 위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삶을 영위해 가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희망이나 약속보다도 그녀를 더욱 안심시켰다. 그들이 사샤를 어디로 보낼 것인가는 사샤의 신체검사 결과에 달려 있을 것이었다. 폐가 약할 경우 그는 시베리아 대신 볼가 지역으로 보내질 수도 있었다. 만약 담당자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두툼한 옷가지 들을 챙기라고 하면 그것은 시베리아나 북부 지역을 뜻하는 것이고,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중앙 아시아일 것이다. 그녀는 또한 아파트 관리인인 빅토르 이바노비치 노소프가 사샤의 방에 봉인을 하러 왔을 때도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 그것에 대해서도 그 여 인들은 소피야에게 얘기했었다. 그는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단지 그가 거북함을 이겨내려고 더 욱 거칠게 나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몇 마디 준비해 둔 말이 있었다. 빅토르 이바노비치, 만약 당신이 내게 조용히 말에 준다 면, 난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빅토르 이바노비치는 결코 무례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게 체제란 겁니다.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 사샤가 돌아오면, 우린 방의 봉인을 뗄 겁니다. 그때엔 이번처럼 당신을 성가시게 하지는 않을 거 예요. 그놈들이 얼마나 냄새를 잘 맡는지 아시죠? 그 봉인들을 떼내지 마 세요. 수위를 불러 물건 나르는 걸 돕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에게 필요 없 는 건 남겨두세요. 그 방은 당신 거니까. 빅토르는 그녀에게 사샤의 방에서 모든 것을 옮길 필요는 없다고 말했 고, 그녀는 물건들이 거기에 있는 한, 누구도 허락 없이는 그 방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수위를 불러주겠다는 그의 제의를 사양 했다. 그럴 경우 그에게 돈푼이라도 집어 주어야 하는데, 그녀에겐 돈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포기하기로 한 방은 사샤가 자고 공부했던 안방이 아니라, 그녀 가 쓰던 작은 침실이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들은 모두 밖으로 옮기고, 사샤의 책상, 의자, 그리고 옷걸이를 방안에 들여놓았다. 바랴가 왔을 때, 그녀는 그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바랴는 모자와 코트를 벗고는 재빨리 일을 도왔다. 그녀는 옷가지나 양탄자, 베개, 담요 등을 날랐는데, 하나도 떨어뜨리거나 잘못 놓지 않고 아주 잘 해냈다. 그 녀는 어떤 것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고, 마지막엔 모든 것 이 제대로 정돈되었는지를 확인하기까지 했다. 바랴의 도움은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바랴 역시 기뻤다. 그녀는 이 어린 소녀를 자신의 불행한 삶 속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반면에 도와주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너무도 강해서, 소피야는 어떻게 하면 바랴를 보낼 수 있을지 난감했다. 바랴가 있으므로 해서, 작업은 가구를 재배치하는 따위의 일상적인 집안 일이 돼 버렸다. 실제로 그렇게 보이게 하려고,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남편은 그녀에게서 떠났고, 아들마저 빼앗겨 버렸다. 그런데 이젠 방까지.... 그녀는 오래 전 에 사샤에게 방을 주었어야 했다. 그는 어른이었고, 따라서 그가 안방에서 같이 생활하는 것은 안 어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방을 포기 하지 못했다. 약간의 편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얼마나 이기적이었던가! 그러나 착하고 인정이 많은 아들은 결코 그녀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는 않았었다. 그들은 커다란 철제 침대와 다리가 하나 부러진 장롱을 치울 수가 없었 다. 또 서랍을 다 빼낸 서랍장도 무거워 옮길 수가 없었다. 미하일 유레비치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고, 다음엔 갈랴가 나타났 다. 그들은 함께 서랍장과 장롱을 치우고, 사샤의 침대와 의자, 책장은 작 은 방으로 날랐다.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사샤의 필기구와 책들을 모두 정돈하고 나서 커튼을 쳤다. 막스가 신년파티 때 데려왔던 세라핌이 집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바랴는 모든 걸 다 치우고 나서야 사샤의 아파트에서 나왔 다. 세라핌은 그 파티 바로 다음날 아주 뻔뻔스럽게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아르바트 광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녀는 장난기가 동해, 혼자가 아니라 조예와 또한 친구를 데리고 나가기로 했다. 멋진 병사가 바랴에게 다가왔을 때, 그녀의 친구들은 길 반대쪽에 서 있 었다. 그들은 무슨 뜻인지 모를 바보 같은 제스처를 보내며 거리를 따라 걸었다. 바랴도 그들에게 똑같은 신호를 보냈다. 세라핌은 그녀에게 붉은 군대 클럽에 춤추러 가자고 제의했으나 바랴는 이미 그날 범에 영화 보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으므로 다음 토요일에 가기로 했다. 붉은 굳대 클 럽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를 바랴는 잘 알고 있었 다. 그는 최근에 유행하는 춤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매주 갔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게 몹시도 부러웠다. 그녀는 세라핌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에 익숙해졌다. 유명한 즈나멘스 키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장거리 달리기 선수 이름이 역시 세라핌이었다. 그는 이곳 아르바트의 전형적인 모스크바 소년들과 달리 좀 촌스러웠고 수 줍음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구애는 바랴가 자신을 어른처럼 느낄 정도로 진지했다. 또 니나도 그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 세라핌은 막스의 친구였 고, 막스는 나쁜 친구를 사귈 리 없었던 것이다. 니나가 찌푸린 얼굴로 들어오는 그녀를 대했다. 세라핌은 침대에 앉아 책을 보며 한 시간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의 시험지를 채점하고 있 던 니나는 그가 책장을 넘길 때 나는 바스락 소리가 여간 성가시지 않았 다. 데이트했구나, 좀 일찍 오지. 네 친구를 접대하느라 지겨워 혼났어. 그녀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바랴는 왜 늦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끝까지 그럴 작정이었다. 그녀는 세라핌에게 옷을 갈아입을 동안 복도에서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장롱문에는 거울이 걸려 있었다. 바랴는 불빛을 옆에서 받을 수 있도록 장롱문을 열고 서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것도 니나를 화나게 했다. 니나는 그녀가 입고 있던 옷도 괜찮다고 봤던 것이다. 스타킹 신은 것 좀 봐! 그녀는 다리에 포즈를 잡고 거울을 보았다. 저렇게 반쯤 벌거벗고 방 안을 휘젓고 다니는 버릇은 어디서 배웠지? 열여섯 살밖에 안 도니 계집애 가! 누가 널 기다린다는 걸 잊었니? 아니. 바랴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리고 똑같은 말투로 되물었다. 언니의 그 예쁜 구두 좀 빌려도 되겠어? 니나는 그녀에게 한 짝도 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바랴가 제발 좀 나가 주었으면 싶었다. 신어. 바랴는 구두를 꺼내 자세히 살펴봤다. 바랴는 그걸 신고 거울 앞에 서 봤다. 그리고는 앉아서 곧게 뻗은 다리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옷을 다 입자. 그녀는 현관문을 열었다. 들어와요, 세라핌. 그녀는 벌써 코트를 입고 있었다.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거울을 보았다. 그녀는 언니를 돌아보며 말했다. 소피야 알렉산 드로브나의 집에 갔었어. 거기서 짐 나르는 걸 도왔지. 사샤의 방이 봉인 됐거든. 바랴가 나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말이 니나에게는 매우 충격적이 었다. 니나는 사샤의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바랴에게 듣고서 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니나뿐 아니라 그 누구도 사샤를 도와줄 수 없었다. 누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가 무슨 일로 잡혀 있는지조차 모르지 않는가? 그녀는, 자기는 자유롭지만 그는 감옥에 있다는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 꼈다. 그는 모임의 회원들 중 최고의 존재였다! 그들 모두가 그에게는 한 풀 꺾인 태도를 취했었다. 그녀는 곧 밝혀질 오해 때문이길 바랬다. 그러 나 사샤의 방은 봉인되었고, 그것은 그가 쉽게 풀려나지 않을 것임을 의미 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사샤가 소비에트 정부의 적이라는 걸 의미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려야 한다는 걸 의미 하는 것일까? 그들은 모두 사샤를 불행한 처지에 남겨둔 채 훌훌 떠났다. 그녀는 소피 야 알렉산드로브나에게 동정을 표시했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 가? 그들은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탄원서를 보내는 게 좋겠지. 먼저 모든 사람들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사샤는 콤소몰 지부의 비서였으니까, 사샤 에게 뒤엔 자기들이 있다는 편지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막스는 당연히 서명할 것이다. 바짐과 레나,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그리고 그들 학교의 교장과 사샤를 아는 선생들도 서명할 것이다. 그녀와 사샤는 그녀가 지금 선생으로 있는 학교에 다녔었다. 그러니 서명을 받아내는 건 별 문제가 아닐 것이다. 물론 유리는 서명하지 않으리라. 빌어먹을 자식! 그녀는 레나와 자비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날 레나의 지에서 모이기로 했 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막스의 어머니에게 내일 그가 집에 오면 나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친구들을 소집한 결과는 좋지 못했다. 레나는 쇼올로 몸을 감싼 채, 아 무 말 없이 그냥 앉아 있으면서 단지 탄원서를 쓰는 것과 서명하는 것에 동의만 했다. 막스마저도 침울해 보였다. 그는 자기들이 보내는 탄원사가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거절하고 싶지도 않고 또 니 나에게 겁쟁이로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바짐만이 목청을 높였다. 탄원서로 무얼 할 수 있겠니? 그것이 사샤에게 도움이 될까? 그건 사태 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야. 우리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지도 몰라. 우 리는 소환되어 판크라토프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뭐냐고 심문을 받겠지. 학교에서 그는 훌륭한 콤소몰 회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너희들은 같은 학교에 있기 시작한 지 육 년이 됐잖아. 지금의 그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 지 말해 봐?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그가 말해 주던가? 정확 히 뭐라고 말했지? 그리고는 사샤를 붙잡고 우리에게 무얼 말했는지를 캐 내겠지. 나는 사사의 결백을 의심치 않아.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될 건지 너 희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 그러면 사샤의 일을 그의 운에 맡기자는 말이니? 니나가 물었다. 운에 맡기자고? 그는 조사 받고 있어. 어째서 그것이 옳지 않다고만 생 각하는 걸까? 그래, 우린 <사샤>를 알아. 그러나 그들은 틀림없이 사샤에 대한 특별한 정보를 얻어냈을 거야. 그들은 그가 사샤 판크라토프이기 때 문이 아니라,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를 체포한 거야. 우린 그게 뭔지 모르고 있어. 그러니까 우리가 그를 도와야 해. 니나가 말했다. 생각해 봐. 바짐이 반대의견을 말했다. 사샤는 우리가 탄원서를 보낸 것조차 모를 거야. 반면에 그들은 그에게 우리들 각자에 대해 묻기 시작할 거야. 그건 그의 처지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야. 넌 그들이 너에 대해 물을까 두려운 거지? 난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아! 바짐이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들은 모두 그가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니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단 순히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진실이 있었다. 아프고 부끄러웠지만, 또 다 른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삶이 복잡해지는 걸 두려워 하고 있었다. 그 두려움을 참는 게 탄원서를 보내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우리 아버지께 여쭤 보자. 레나가 제안했다. 좋아! 니나가 외쳤다. 사실 그녀는 이반 그리고리예비치가 개입하여 사샤를 도와주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바짐도 거기에 동의했다. 이반 그리고리예비치는 그들에게 그런 무모한 탄원서는 보내지 말고 할 게 분명했던 것이다. 바짐은 결코 서명하지 않기 로 마음먹었다. 가장 올바르게 생각을 한 사람은 막스였다. 그는 이반 그리고리예비치를 그처럼 애매하게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린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해. 최소한 어떤 충고는 들을 수 있잖니. 니나가 고집했다. 그때 레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차를 들고 방에 들어왔다. 아빠. 레나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사샤를 도울 수 있죠? 무얼 하려고 하는데? 우린 당국에 탄원서를 보낼까 하거든요. 부쟈긴이 얼굴을 찌푸렸다. 너희가 보낸 탄원서가 소용이 있을까? 하지만 우린 뭔가 해야만 해요. 니나가 말했다. 그자들은 너희가 편지를 보내지 않아도 잘 꾸려나갈 거야. 그가 꾸짖 듯 말했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22 외국에서 돌아온 이후, 부쟈긴은 아직 한번도 스탈린의 부름을 받지 못 했다. 그에겐, 전보에는 빼놓을 수밖에 없었던 보고거리가 많았다. 그것들 은 긴급 사인으로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현재의 국제정세에 관한 내용 들이었다. 그는 면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기다리시오, 곧 부름이 있을 겁 니다. 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는 일 년 이상을 기다렸다. 그것은 그가 중 앙위원회에서 빠진 것과 마찬가지로, 우연한 게 아니었다. 아마도 스탈린 은 그를 축출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축출될 이유가 전혀 없 었다. 가장 강력한 서방 국가들 중의 한 나라에 대사로 재직했던 인물로 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앙위원회 가 지시하는 정책을 묵묵히 수행했다. 부쟈긴은 스탈린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으나 그와 상대한다는 것은 언제나 골치 아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키와 허약한 신체 때문에 스탈린은 특 히 시베리아에서의 생활을 무척 힘겨워했었다. 그는 늘 추위를 탔고, 그래 서 양말을 신은 채로 잠을 잤다. 스탈린은 여러 색깔로 누빈 비단 이불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 역시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스탈린은 그것을 자신의 적응력 부족과 허약함의 증거로 여겼다. 사람들은 결국 그를 놀리는 일을 중단했다. 스탈린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스 탈린에겐 화해하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루지아 지방 특유의 강한 억양와 문맥을 자주 바꾸는 습관 때문에, 그는 뛰어난 선동가가 되지 못했 다. 그는 토론 때에도 마음의 상처를 잘 입었다. 그래서 동료들은 그를 비 판하길 꺼려했다. 논쟁도 많고 의견 차이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배자들은 사이 좋게 지냈다. 그러나 스탈린은 결코 타협할 줄을 몰랐다. 그한테 이데올로 기적인 적은 곧 개인적인 적이었다. 그는 동료가 신어야 할 펠트부츠를 예 사로 빌어 오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난밤에 논쟁했던 동료에게서는 결코 빌려 하지 않았다. 변덕스럽고, 불평을 잘하고, 속이 좁은 그는 정말 역겨 운 존재였다. 다른 유배자들은 낚시나 사냥도 자주 다녔지만 스탈린은 어디에도 가지 않고, 석유 등불을 켜놓고 공부하면서 저녁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은 고집 센 이 외톨박이 그루지아인을 안쓰럽게 여겼다. 그는 항상 시베리아의 침 엽수림 깊숙한 곳에 위치한 마을 한 귀퉁이의, 좀처럼 사귀기 힘든 러시아 의 농부들 틈에 끼어 생활했다. 그의 동료들은 그를 종종 관대하게 용서해 주곤 했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용서해 주는 법이니까. 또 어른은, 다루 기 까다로운 - 어떤 때는 불가능한 - 어린애를 용서해 주는 법이니까. 부쟈긴은 스탈린과 친하게 지낸 유일한 인물이었다. 모토빌리하 출신의 노동자였던 그는 그 그루지아인을 보자마자, 얼음투성이의 시베리아, 러시 아인도 견디기 힘든 척박한 이곳으로 쫓겨난 그 남부인에게 안쓰러움을 느 꼈다. 부쟈긴은 작은 친절들을 베풀었으며, 스탈린을 위해 할 수 있는 거 라면 뭐든지 다했다. 또 스탈린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부쟈긴에게는 그런 일이 다른 사람들보다는 쉬웠다. 게다가 부쟈긴은 유능한 대장장이고 금속노동자였으며, 도끼나 심지어는 쟁기도 다를 줄 알고 있었다. 뿐만 아 니라 그는 총 쏘는 법을 알고 있었고 낚시를, 특히 뱃머리에 등불을 밝히 고 하는 가을 밤낚시를 좋아했다. 부쟈긴은 조용히, 지적인 그의 동료들이 행하는 논쟁과 토론과 철학 논 의를 경청했다. 그는 독서를 많이 했고, 심지어는 영어도 공부했다. 대부 분의 사람들은 독어나 불어를 배웠다. 스탈린은 어학 공부를 하지 않는 유 일한 인물이었다. 유배자들은 부쟈긴에게 읽을 책들을 주면서, 그것을 분 석하고 설명해 주었다. 스탈린 역시 그것들을 설명해 주었다. 스탈린의 교 리적이면서도 평범한 화술, 신학생다운 해석, 자기의 지식이 선진적이라는 데 대한 확신 등은 다른 사람들의 교과서적인 수사보다 더 큰 인상을 부쟈 긴에게 남겼다. 그러나 부쟈긴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리고 스탈린보다 더 굳세고 더 많이 공부했고 더 똑똑한 사람들과 접하면서 스탈린에 대한 인 상은 점차 사라졌다. 하지만 함께 보낸 여덟 달간의 유배기간은 그의 기억 뿐 아니라 가슴에도 깊이 새겨졌다. 그것은 그의 필생의 업이 된 명제와의 천 만남이었던 것이다. 부쟈긴은 내전기간 동안 가끔 스탈린을 보곤 했다. 스탈린은 그 당시 매 우 중요한 역할을 맡기 시작하고 있었다. 무례함과 불충, 전제적인 권력욕 이 용인되는 그리고 극단적인 조치들이 필요했던 혁명의 시기에는 그의 의 지와 정력이 쓸모가 있었다. 그러나 건설기에 들어서면 그러한 성격적 결 함은 위험할 수 있었다. 스탈린의 권력욕이 무한대까지 늘어났고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레닌은 당에 보낸 편지에서 바로 그 점을 경고한 바 있었다. 스탈린에게 있어서, 이념에 대한 헌신은 그 자신에 대한 헌신으로 평가 되었다. 랴자노프가 - 당의 리더십이 통일되었다는 점을 들어 - 한 과정의 마지막 단계라고 여겼던 상태가 단지 시작에 불과함을 부쟈긴은 알고 있었 다. 그는 전당대회에서 자신의 예외적인 위치를 확립했으므로 이제 자기의 독창성을 유감없이 발휘해 나갈 것이며, 그가 취하는 조치들은 지금까지보 다도 더욱 위험하리라는 것을 부쟈긴은 알고 있었다. 혁명의 이름으로 행동할 때마다 부쟈긴은 책임감을 느꼈다. 혁명의 이름 으로 수행되는 모든 행위를 그는 자기 자신의 행위로 생각했다. 혁명의 과 정에 일어나는 실수는 곧 자신의 실수였고, 모든 불의 또한 자신의 불의였 다. 그는 혁명가적인 용기를 가지고 있었고, 사회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진 자들의 운명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다.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할 정 도로 사람들은 타락했지만, 부쟈긴은 혁명이 미래의 세대로 가는 길을 열 고 있다고 믿었다. 진정한 혁명이란 파괴한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가 아니라 창조한 인물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위대성이 가려지는 법이었다. 부쟈긴은 스탈린이 랴자노프를 신임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중앙위원 회 위원의 조카가 체포되자, 그 사실은 모든 이들에게 알려졌다. 체포된 조카는 랴자노프의 아킬레스건이 되어 그로 하여금 그런 사실에 무관한 사 람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샤 문제에 대한 부쟈긴의 개입은 랴자노프와 스탈린의 관계를 복잡하게만 만들지도 몰랐 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넌방에서 어떻게 사샤를 도울 것인지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젊은이들 의 생각이 그를 전율케 했다. 그는 그들이 곧고 사심 없이 혁명의 대의를 수행하는 걸 보았다. 그러나 혁명을 준비하고, 실천하고, 굳건히 했던 늙 은 볼셰비키인 자신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는 사샤 의 체포가 정당한 것이라고 그들에게 얘기할 수 없었다.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자신이 알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샤의 체포가 부당하다는 것도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를 먼저 설명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부쟈긴은 베레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베 레진이 정직하고 용감한 체코인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베레진에게 자 신이 사샤의 보증인이 되겠다고 말하면서, 그에게 사샤 사건을 조사해 달 라고 부탁했다. 베레진도 사샤 판크라토프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는 사샤의 심문 과정을 보았었기 때문에 그 사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샤가 정직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수북히 난 검은 턱수염도 그의 잘생 긴 젊은 얼굴과 명예심, 용기, 그리고 고상함을 감추지는 못했다. 베레진 은 사샤의 짧고 위엄 있는 대답과 아무런 두려움 없이 생명력을 그대로 발 산하는 젊음의 미소에 탄복했다. 베레진은 사실 부쟈긴이나 랴자노프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었으며, 그 래서 그들이 할 수 없는 추리까지도 할 수 있었다. 한때 코민테른의 지도급 인물이었던 로미나드제는 중국혁명에 대해 스탈 린과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그 문제를 샤츠킨과 시르초프와 함 께 논의했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스탈린은 그들을 <좌우 회색분자>로 분 류하여, 로미나드제를 직위 해제시킨 후, 우랄 지방의 당위원회 서기로 보 내 버렸다. 공개된 그의 서류 속에는, 로미나드제가 비밀리에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창립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전직 코민테른 간부인 체르라는 자의 증언도 들 어 있었다. 체르는 여러 나라에서 활동한 국적 불명의 사나이였다. 그는 많은 이들이 로미나드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 협잡꾼이자 악당이었 다. 그들 가운데는, 전에 폴란드 사회당의 좌익으로 활동했고 레닌의 망명 기간 동안 그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 글린스키도 포함되어 있었다. 글린스키의 아내 글린스카야가 바로 수송전문학교의 학장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글린스카야의 대리이자 한때 노동자의 반대당원이었던 크리보루츠 코가 이끄는 지하반대세력이 그 학교 내에서 발각되었다고 했다. 체카의 총수인 야고다는 이 사실을 재빨리 포착했다. 글린스키의 아내와 지하반대 세력과의 연계는 체르의 주장에 현실성을 부여해 주었다. 서류 속에서는, 어떠한 간접적인 연계라도 사건의 규모와 신빙성을 더해 주고, 사실의 비 중도 커지며, 누구의 이름이라도 중요하게 비쳐지는 법이었다. 더욱이 그 런 것들이 원래의 상태에 교묘하게 추가된다면 그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베레진은 그 학교에 지하세력 같은 것은 없으며, 크리보루츠코와 글리스 키가 아무런 관계가 없듯이 판크라토프와 크리보루츠코가 서로 아무 관계 도 없고, 또한 글린스키와 로미나드제도 아무 관계가 없으며, 로미나드제 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계획한 바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로 미나드제 사건은 스탈린의 명령으로 야고다의 지휘하에 조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베레진의 추측대로 더욱 확산되고 있었다. 야고다가 사 샤의 사건을 안다면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리란 것을 베레진은 훤히 내다볼 수 있었다. 그 연계는 불길한 공포의 사슬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판크라 토프를 풀어 달라고 하는 것은 그 연계의 하나를 제거하려는 시도로 보여 질 수 있었다. 하찮은 선이었지만, 그래도 선은 선이었던 것이다. 야고다 는 결코 그것을 허락치 않을 것이다. 비신스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솔츠 는 판크라토프를 복교시켰었다. 그와 동시에 비신스키는 그의 체포를 명령 했다. 판크라토프에 대한 유일한 희망은 그 소년을 배후에 둠으로써 그를 주목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한동안은 모든 것이 현 상태로 유지되어야 했다. 쟈코프는 학교 차원에 묶여 있는 그 사건을 계속 진행시킬 수 있었 다. 이것이 베레진이 알고 있는 전부였다. 베레진이 한 일은 사샤가 차입 을 받고, 형무소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볼 수 있도록 조치한 것밖에 없었 다. 쟈코프는 베레진의 명령을 공손히 받아들였다. 그는 중앙에서 베레진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있다고 추측하면서도, 항상 그의 말을 공손히 들었다. 분명 차입과 책은 특혜였다. 그러나 조사를 위해 그런 일이 행해지기도 했 으므로, 책잡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시행하겠습니다. 쟈코프가 대답했다. 베레진은 진실로 혁명을 주창했고, 체카에서의 그의 활동이 혁명을 위한 것이라고 여겼다. 내전 기간 동안 지방 체카의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그는 혁명의 위험 인물이 아니란 판단이 서면, 운 나쁜 자유주의자들이나 공포 에 떠는 부르조아들을 숱하게 풀어주기도 했지만, 적색 테러를 단호히 사 용했었다. 그러나 쟈코프는 달랐다. 작지만 집요한 그의 손아귀에서 아무 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의 수중에 떨어지면 자연히 죄가 확정되게 되어 있었다. 쟈코프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실제로 죄를 범했는가 하는 여부가 아니었 다. 그는 죄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일반적 > 해석이 특수한 개인에게 교묘하게 적용되기만 하면, 그로부터 <구체적> 해석이 산출되었다. 구체적인 해석이 산출되면, 그는 조사 그 자체와 조사 를 받는 자를 통해 그 해석을 조정했다. 만약 상대가 그 해석을 거부할 경 우, 그것은 국가에 대한 더욱 명백한 적대행위의 증거로 채택될 것이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곳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으 니까. 쟈코프 스스로가 진실로 균형 잡혀 있고, 논리적이고, 반박이 불가능하 다고 믿는 사샤 사건에 대한 해석은 이랬다: 그 학교는 이전의 반대파로 서, 쟈코프의 생각으로는, 오래 전에 실각하여 쓰라린 원한을 품고 있는 크리보루츠코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런 사람은 활동을 하지 않고는 못 배 겼다. 즉 적은 활동을 멈추지 않으며, 언제 어디서든지 기회만 생기면, 특 히 정치적으로 미숙한 젊은 층들 사이에서 파괴행위를 자행하는 법이다. 드디어 그러한 청년 집단이 반당적인 신문을 만들어 냈다. 이 두 상황 사 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 그것은 불가능했다! 청년들의 지도자인, 대학 생 판크라토프는 크리보루츠코를 두둔했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일치가 아 니었다. 크리보루츠코 사건이 판크라토프 사건과 동시에 발생했다는 것이 단순한 일치였을까? 불가능해! 판크라토프의 배후에는 예전의 저항주의자 였던 크리보루츠코가 격려자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또한 반혁명 조직도 배후에 있었다. 판크라토프를 심문하면 자신의 해석이 증명되리라. 쟈코프는 조금도 의 심하지 않았다. 쟈코프에게 심문 받는 인간은 두 종류였다. 심문 과정을 신뢰하는, 따라 서 소비에트 체제를 신뢰하는 자들과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 그것이었다. 그는 조서에 씌어 있는 용어 하나 하나에 대해 시비를 거는 옹졸한 부류와 그러지 않는 비교적 대범한 부류로 그들을 또 나누었다. 판크라토프의 경 우, 그는 체카를 신뢰했으므로 대법한 부류였다. 그는 체포로 충격을 받았 고, 자신이 풀려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또 그는 진실을 찾고 있었다. 그 는 경험이 없고 직선적이었으며, 필요 이상으로 동료들을 비호했고, 그들 의 짐을 혼자 떠맡으려 했다. 따라서 그는 다루기 쉬운 부류였다. 크리보루츠코는 사야와 같은 날 밤에 체포되었다. 그는 자기가 판크라토 프의 사건을 듣긴 했었지만, 판크라토프가 누군지는 기억할 수 없다고 말 했다. 물론 크리보루츠코는 위원회 회의에서 본 판크라토프를 잊지 않고 있었 으며, 그가 서류에 도장을 찍으러 왔었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자 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해서 판크라토프를 모른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어 떤 것도 그에게 해를 끼치거나,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는 판크라토프가 형무소에 갇혀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가 판크라토프를 모른다고 한 것은 그가 어떤 이름을 대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해가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23 사샤는 네 권의 책을 받았다. 비슷한 책들을 고르려고 애썼던 것 같았지 만, 사샤가 신청했던 책은 한 권도 없었다. 발자크의 잃어버린 환상 대 신에 세자르 비로또 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대신에 유년기, 소년 기, 청년기 를, 잡지로는 1906년판 자연과 인민 지와 1925년에 발행된 붉은 토지 한 권을 받았다. 책들은 얼마나 여러 차례 읽혀졌던지 모서리 가 닳아 있었고, <부티르키 형무소 도서관>이라는 타원형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발자크는 1899년판이었고 톨스토이는 1913년 판이었다. 없어진 페 이지가 많았고 책 뒤에 붙어 있는 분실 페이지 목록도 정확하지 못했다. 사샤에게는 아직 일주일간의 시간 여유가 있었다. 그는 먼저 잡지들을 자세히 본 후 책들을 읽었고, 그런 뒤에 다시 잡지들을 보았다. 그는 푸 른 안개, 눈 덮인 광야 라는 예세닌의 시를 한 편 발견했다. 예전엔 한번 도 보지 못했던 시였다. 발작의 세자르 비로또 는 이미 읽은 것이었다. 그때는 너무 감상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불행이란 천재성의 발견을 위한 시작이며, 크리스챤에게는 속죄를 위한 정화이며, 빈틈없는 자에게는 보물이요. 약한 자들에게는 심연이다. 사샤는, 천재도 크리스챤도 빈틈없는 사람도 약한 자도 아니었지만, 이 말 속에서 뭔가 중요한 의미를 느꼈다. 그는 책과 어머니가 보내 준 깨끗한 속옷과 맛있는 음식들 덕분에 즐거 운 일주일을 보냈다. 그는 고기 몇 점을 스프에 넣고 데운 후 그런대로 먹 음직한 식사를 만들었다. 아침저녁으로는 빵과 버터, 그리고 살라미 소시 지나 치즈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기 때문에 그의 감방은 학교의 점심시 간 같은 냄새가 진동했다. 실컷 먹고 몸을 씻은 다음에는 침상에 누워 책을 읽곤 했다. 규칙상 낮 에는 누워 있지 못했지만 그는 간수들의 규칙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그들도 사샤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상관들이 나타날 때에는 그 들도 다시 엄격해졌다. 그는 책과 살라미 소시지와 초콜릿으로 느긋한 생활을 하며 만족스러운 일주일을 보냈다. 점차 이 생활에 익숙해지고 적응이 되는 것 같았다. 이 생활을 좋아하든 안 하든, 우리는 모두 여기서 평온을 얻게 될 것이다. 설득력은 없었지만 마음이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책과 잡지에 몰두해 있 을 동안의 사샤는 자신의 현실과는 완전히 분리된 느낌이 들었다. 과거의 생활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 의 고통과 괴로 움은 그 자신의 유년기, 청년기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사샤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저는 아버지가 다시는 어머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겠어요. 아버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는 너는 정말 착한 아들이구나 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버 지는 어디까지나 아버지다. 아마 아버지의 손은 차가웠을지 모르지만, 유 년기에 느낀 아버지 손의 감촉을 회상하면서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아버지는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누가 너더러 간섭하라고 하더냐? 어머니가요. 그때부터 아버지는 유난히 말이 없어졌다. 면도하고 세수하고 옷을 입는 데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거울을 보고 난 다음 식탁에 앉아서 말 한마 디 없이 조용히 식사를 했으며, 서류들을 서류가방에 집어넣고 나면 뭐라 고 중얼거리면서 인사도 없이 출근해 버리곤 했다. 집에 돌아오면 화가 난 눈길로 방을 둘러보곤 말 한마디 없이 저녁을 먹었고, 어머니가 뭐라고 말 을 해도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밤이 늦어 침실로 들어간 다음에야 사샤는 아버지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그때에는 어 머니가 침묵을 지켰다. 사샤는 그런 침묵이 어머니의 마음을 갈갈이 찢어 놓을 거라고 생각하며 두려워했다. 나중에 아버지가 사샤에게 이렇게 말했 다. 얘기 좀 할까? 그들은 집을 나와 아르바트의 거리를 걸었다. 가로등 불빛 속에서 눈송 이가 휘날렸다. 아버지는 코트의 깃과 같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모피모자를 쓰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아버지는 어떤 형태의 간섭도 용납치 않 는 인물이었다. 그는 아들이 그들 부부관계에 끼여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아내는 사샤가 어렸을 때부터 그에 대한 편견을 갖게 했다. 사실 그들을 불화와 그의 실패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그 의 야망과 관심을 공유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형제자매들에게 더 관심을 가졌었다. <질투>,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샤는 절망적인 느낌에 사로잡혔다. 길을 걸으며 아버지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아버지는 구가 약간 어두워서 누군가가 그에게 말 을 하려면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만약 함께 살 수 없다면, 헤어지는 수밖에 없어 라는 말이 아버지가 한 얘기의 전부였다. 한달 후에 그의 아버지는 에프레모프에 있는 합성고무공장으로 떠나갔 고, 16세인 사샤가 모든 것을 떠맡게 되었다. 쟈코프는 사샤를 부르지 않았지만, 사샤는 걱정하지 않았다. 첫 번째 심 문은 희망을 갖고 기다렸지만, 두 번째에는 두려웠다. 그리고, 지금은 희 망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가 오직 걱정하는 것은 크리보루츠코뿐이 었다. 크리보루츠코는 체포됐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샤에게 이번 요리 사는 아주 매운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지 라고 말한 사실을 자백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마르크와 관련된 주요 범죄사실이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거짓말로 사샤를 함정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크리보루츠코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가 지껄인 얘기 한마디 가 그를 잡아넣어 버린 이 터무니없는 상황을 보라! 만약 위원회 회의에서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사샤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런 자리였다면 사샤 는 그 말을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크리보루츠코 동지는 자신이 한 말의 의미와 자신의 입장을 명백히 밝혀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는 이렇게 다 른 행동을 해야 했을까? 왜 크리보루츠코를 보호해야만 했을까? 그는 모든 사실을 솔직히 말해 버리고, 자신의 짐을 덜고 싶었다. 그의 양심이 명백히 밝혀지면,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 다. 시베리아는 무시무시한 곳이다. 그리고, 매우 먼 곳이고, 그러나 인 민들은 그곳에서도 살고 있다. 도대체 이런 생각들은 어디서부터 온 것인 가.... 그러나 사샤는 바로 이곳, 감옥 안에서 생활하며, 침상에 누워 책을 읽 고, 살라미 소시지와 초콜릿에 만족하며, 매일 밤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 며 노래를 불려대고, 생각도 하고, 회상도 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는 쓰다 듬을 수 있을 정도로 턱수염도 길렀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거울이 없었다. 간수가 연필과 종이, 그리고 도서목록을 가지고 다시 나타났다. 사샤는 새로운 주문들을 적었다. 이번에는 10권의 책을 신청하며 혹시나 하는 생 각에서 전쟁과 평화 와 잃어버린 환상 을 다시 신청해 보았고, 어는 수 준 높은 잡지의 1,2,3월호를 신청했다. 그는 스땅달, 바벨리 그리고 체포 되기 얼마 전에 읽기 시작했던 기본의 로마제국흥망사 , 그가 좋아했던 고골리와 좋아하지 않았지만 읽어야만 한다고 느꼈던 도스토예프스키를 추 가했다. 그리고 적어도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를 알리기 위하여 형식상 형사소송법 을 다시 적어 넣었다. 쟈코프는 분명히 목록을 조사해 보고 사샤가 자신의 권리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책 없이 지낸 이틀 동안 사샤는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멋없이 텅빈 벽, 숨막힐 듯한 침묵,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리는 부산한 발자국 소리, 감시의 눈초리, 변기통, 그리고 어머니가 차입해 준 음식마저 떨어져 버려 소화불량에 걸릴 지경인 맘에 안 드는 식사. 사샤는 카챠를 떠올렸다. 그녀의 따뜻한 손과, 바람에 메마른 입술을.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어 일어나 방안을 천천히 거닐었다. 그러나 밤에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이봐! 자리에 누워! 그는 자리에 누웠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깜박하고 조는 사이에 아스라이 사라져 가던 소년시절의 기억이 꿈속에서 되살아났다. 열일곱 살 때, 사샤는 어머니와 함께 리페츠크에 간 적이 있었다. 그들 이 그곳에 머무는 동안 안주인의 며느리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사마라 에서 돌아왔다. 그녀의 남편은 그 곳에서 철도관계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알몸을 간신히 가려주는 얇은 옷만을 입고 있었다. 바싹 마른 금발 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곁눈으로 사샤를 힐끗 쳐다보면서 요상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일부러 꾸며서 정숙한 척하는, 사마라 출신의 아주 전형적 인 시골뜨기였다. 그러나 그녀의 애매한 웃음과 값싼 향수 냄새, 그리고 반쯤 열린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속살 때문에 사샤는 무척 당황하 곤 했다. 낮에는 정원에서 옷을 풀어헤치고 누워 늘씬한 다리를 햇볕에 쏘 이곤 했다. 사샤는 노골적으로 그녀를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사과 나무 아래다 아름다운 다리와 동그란 무릎을 내놓고 누워 있다는 것을 의 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과 미소까지도. 사쉬-아. 어느 날, 그녀는 사샤의 쉬 발음을 길게 빼며 사샤를 불렀 다. 사샤는 그녀 옆에 다가가 앉았다. 사쉬-아. 그녀가 다시 한번 사샤를 부르며 옷자락을 내려뜨리자 깡마 른 어깨와 빈약한 젖가슴이 드러났다. 사쉬-아. 하루 종일 어디가 있었어? 여자 친구하고? 여자 친구 얘기 좀 해봐! 사샤는 그녀의 다리와 작고 하얀 가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을 잊어버 렸다. 타는 듯한 태양, 말벌의 윙윙거리는 소리, 그리고 향긋한 사과냄새 속에서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일어설 수도 없었고 도저히 움직 일 수도 없었다. 그녀가 요염한 웃음을 띄면서 은근히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을 때 사샤는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책밖에 모르는구나. 책밖에. 그건 네가 바보라는 거야. 그녀는 사샤가 손에 들고 있던 아나톨 프랑스의 책을 낚아챘다. 돌려주지 않겠어. 그녀는 책을 뒤로 감췄다. 책을 향해 손을 뻗다가 사샤는 그만 그녀의 손을 잡고 말았다. 뜨거운 그녀의 손에 사샤는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재 빨리 대문 쪽을 힐끗 보더니 머리를 뒤로 젖히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 녀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은밀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따스한 손으로 그의 목을 감아 더욱 가까이 잡아당겼다. 그들의 입술이 마주치자 그녀는 뒤로 몸을 눕혔다. 얼마 있다가 그녀는 사샤의 눈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자! 이것 좀 봐 요. 씻어야겠어. ....기분이 좋지 않았어? 걱정하지 마, 처음에는 누구나 다 그런 거니까. 처음이지? 그렇지 않아? 솔직히 말해 봐. 그는 너무나 부끄러워 그날은 하루종일 그녀를 피해 다녔다. 그러나 다 음날 점심을 먹으며 그녀가 말했다. 사샤! 용감하게 보트 좀 태워 주겠 어? 그래 그렇게 해라, 사샤. 어머니가 말했다. 그녀는 사샤가 리페츠크에 싫증을 낼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식당의 소파에서 자고 있는 사샤를 찾아왔다. 그녀는 매일 밤 그를 찾아왔고, 낮에는 보로네쥐 강의 반대편으로 그를 데리고 갔 다. 어린애하고 붙어 보니까 어때? 그녀의 시어머니가 나직하게 뱉었다. 갈보같은 년! 사샤의 어머니는 그래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엘리자베타의 남편이 집에 돌아왔다. 그는 사샤를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 라보았다. 자기 어머니로부터 무슨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엘리자베타는 다시 상냥한 젊은 아내로 되돌아가 사샤를 절망적인 사랑에 빠진 소년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녀는 남편에게 교태 섞인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나 를 짝사랑하던 바로 그 소년이에요. 사샤는 그녀의 연극이 혐오스러웠다. 그리고 밤이면 그녀의 방에서 들리 는 속삭임과 웃음소리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곧 공장에서 일을 시작해 야 했기 때문에 리페츠크의 어머니 곁을 떠나 모스크바의 집으로 돌아왔 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사샤는 오랫동안 여자들을 꺼려했다. 그리던 중에 공장에서 토요일 자원 작업장에는 키가 크고 단정하며 예쁜 폴리라는 소녀 가 하루종일 그의 옆에서 일하며 농담을 걸곤 하였다. 일이 끝날 때쯤 해 서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집으로 가서 몸이나 녹이지 그래요. 오늘 밤은 나 혼자예요. 그러나 사샤는 그때 그녀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 노골적이었 다. 지금 사샤는 그때 그녀를 따라가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의 피는 끓었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가끔 혼자라는 사실이 어떤 상황을 초래하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샤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했다. 낮에는 누워 있지 않고, 하루에 만 걸 음씩을 정해 놓고 방의 끝에서 끝까지 걸었다. 가급적 늦게 자고 일찍 일 어났다. 그리고 찬물로 샤워를 했다. 이틀 후, 그가 신청한 책들이 도착했다. 그는 다시 독서에 열중했다. 그 러나 눕지 앉고, 앉거나 벽에 기댄 채 책을 읽었다. 그는 기본의 전집 처 음 두 권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그리고 고골리의 죽은 혼 대신에 대장 부리바 를 받았다. 어느 날, 사샤의 감방에 죄수가 한 명 더 들어왔다. 그는 얇은 외투에 낡아빠진 신발과 모자를 쓴 야위고 지친 젊은이였다. 그가 온 뒤 침대, 매 트리스, 담요 하나씩 더 들어왔다. 그의 이름은 사벨리 쿠스코프로 모스크바 사범대학의 3학년생이었다. 부 티르키 형무소에는 5개월째 수감중이었다. 사샤의 감방 크기만한 곳에 네 명이 수감되어 있다가 오늘 분산 수감됐다는 것이었다. 죄수가 새로 들어 온 것이 분명했다. 사샤가 그에게서 받은 인상은 그가 완전히 미치지 않았다면 최소한 정신 이 좀 나갔다는 것이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말 한마디도 않은 채 누워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간 침대 위에 누워 조용하고도 단조롭게 노래를 불렀다. 어디에나 수레국화, 수레 국화가 들판에 가득 덮여 있네--- 그는 산책하러 마당에 나가지도 않았고, 사샤와 함께 샤워하러 가지도 않았으며, 운동도 하지 않았다. 모스크바에는 친척이나 가까운 친구가 없 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차입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형무소 음식이 들어오면 별로 뜨겁지 않은데도 완전히 식어버릴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그릇을 대충 닦은 뒤 그릇을 깨끗하게 닦는 사샤의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곤 했다. 사샤는 어머니가 두 번째로 보내 준 꾸러미를 풀어 안에 든 것을 전부 탁자 위에 올려놓았으나, 사벨리는 아무 것도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그는 기본의 책을 잠깐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이미 고골리나 도스토예프 스키는 다 읽은 책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국경 마을인 세베츠 지역 출신 으로 방학이 되어 막 집에 가려던 참에,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고 향에는 잔돈이 부족해서 물건을 사고 팔거나 거스름돈을 받기가 무척 힘들 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는 은화를 모으기 시작했다. 검문을 받았을 당 시 주머니에는 28루블 40코페이카가 있었다. 그는 해외로 도피하려고 했다 는 죄목으로 고발당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외국어가 전공이었다. 그는 예비심문에서 혐의사실을 인정해 버렸고, 그것으로 조사가 끝난 채 지금 판결을 기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자백했니? 난 아무 것도 증명할 수가 없었거든. 사벨리는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증명을 해야 하는 건 네가 아니라 <그들>이란 말야. 그래, 내가 은화를 모았다는 사실을 말이지. 정말 기가 막히고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벽신문 사건이나, 그의 삼촌 때문에 체포된 사샤 자신의 경우처럼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지나지 않 았다. 사벨리는 탈출한 사람들의 얘기를 할 때만 생기가 있었다. 그들은 창문 의 철책을 자르고 지붕으로 기어올라가 다른 지붕으로 건너뛴 다음, 벽을 타고 내려가 길거리로 달아났다는 이야기였다. 얼마 전에도 두 명의 암거 래상이 4층에서 길거리로 뛰어내렸다는 것이었다. 사샤는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만큼은 감옥밥을 먹고 있었다. 그러 나,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사벨리의 전반적인 무지가 사샤 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사샤가 학교에서 배운 독일어를 몇 마디 하려고 했을 때, 사벨리가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사벨리가 시범대학 학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깨끗이 사라졌다. 사벨리는 감옥에 있는 병원에 대해 얘기할 때도 역시 생기를 띠었다. 거 기에는 전기요법기기와 치과기구를 포함하여 모든 장비를 갖춘 진찰실이 있었다. 열이 나든가, 종기, 요통 등, 몸에 이상이 생기면 날마다 태양등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흰 빵과 우유를 먹을 수 있는 병동에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의 아무 것도 먹 지 않으려 하는 그가 정신 못 차릴 정도로 황홀해 하며, 흰 빵과 우유 얘 기에 넋을 읽고 있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사샤에게 중요한 얘기를 하나 해줬다. 만약, 의사가 찾아와 몸에 이상이 없느냐고 물으면, 그것은 곧 유형을 의미하는 데, 유배지를 결정하 는 권한이 바로 그 의사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남쪽, 이를테면 중앙 아시아나 카자흐스탄으로 가고 싶다면, 결핵이나 류마티즘 또는 좌골신경 통이나 디스크에 걸렸다고 해야 하며, 북쪽으로 가고 싶다면, 심장이 좋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의사가 아예 오지 않을 경우 에는 그것은 수용소행을 의미하는 것인데 어느 곳으로 가게 될지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샤는 감옥 안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배웠다. 마당 안쪽의 감 시탑은 푸가체프 탑이라고 불렸다. 그게 제일 작은 마당이었고 더 큰 것들 도 있었다. 가장 좋은 곳은 작업장이 딸려 있는 마당이었다. 왜냐하면, 그 곳을 통해서 밖의 사정을 알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벨리는 삼일째 되던 날 다른 감방으로 옮겨갔다. 그는 올 때와 똑같이 무관심한 표정으로 떠나갔다. 사샤는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과 함께 이틀 을 보낸 것이었고 또한 지금도 전혀 모르는 사라과 헤어지고 있는 것이었 다. 그러나, 사샤는 뒤를 돌아보거나 인사말을 건네는 법도 없이 떠나는 사 벨리를 문간에 서서 전송했다. 그의 잔뜩 굽은 좁다란 어깨를 바라보며, 사샤는 자신이 끝없는 형극의 길을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 길을 따라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사벨리는 단지 하나의 시작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24 부쟈긴 동지, 전화 받으시죠. 낯익은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안녕하시오, 이반! 부쟈긴은 스탈린을 어떻게 불러야 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안녕하십니까! 집에 돌아와서도 날 보러 오지 않는구려. 콧대가 세어졌나 보지, 아니 면 길을 읽었거나. 언제 찾아가면 좋겠습니까? 전 언제라도 괜찮습니다만. 괜찮다면 당장 건너와요. 우리는 서로 이웃에 살잖소. 부쟈긴이 스탈린의 집을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것은 2년 전이었다. 스탈 린의 아내인 나쟈가 죽기 꼭 한달 전이었다. 그 당시 스탈린의 집을 방문 한다는 것은, 리트비노프를 만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해외문제를 담당했던 그는 스탈린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스탈린의 해외문제에 대한 이해는, 소련의 적이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일본이라는 믿음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영국은 소련을, 그들의 식민주의 적 제국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고,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그들의 종주권 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으며, 프랑스는 유럽에서의 그들의 영향력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동시에 영국과 일본은 세계시장에서 미국과 경쟁국이었 다. 패배한 독일은 그를 정복한 프랑스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복잡한 문제들이 간단하게 정리되었었다. 영국, 프랑 스, 일본이 하나가 되고, 소련, 미국, 독일이 다른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자기 자신이, 복잡한 문제를 간단하게 처리하는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고 믿었다. 부쟈긴은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에 형성된 스탈린의 생각은 이미 구시대적 이며, 모든 문제를 단순하게 처리하려는 욕구는 비극의 씨앗과 같다고 여 겼다. 히틀러의 등장은 힘의 균형에 변화를 가져왔고, 현재 독일문제는 가 장 근본적인 것이었다. 리트비노프는 분명히 부쟈긴의 견해에 공감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스탈린의 입장이 바뀔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을 까? 그는 부쟈긴에게 멋대로 하게 놔 둬라 라는 말을 가끔 했었다. 그는 외교관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자기가 스탈린의 잘못을 지적하려고 하면, 스탈린은 자기의 노선에 아무 불평 없이 앞장설 사람을 새로 기용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스탈린은 유럽을 알지 못했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망명해 있는 당의 지식인들을 경멸했다. 그들은, 밤에는 이브닝드레스를, 아침에는 모 닝코트를 즐겨 입는 서유럽의 노동계급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엇이든 다 알고 있는 자만심에 빠져 있는 자들이었다. 스탈린이 지하활동가로서 끊임없이 유배, 탈출, 은신의 생활을 되풀이하는 동안, 그들은 안전한 외 국에서 독서와 저술, 그리고 명성을 얻으며 지냈던 사람들이었다. 런던에 서 열린 제 5차 인터내셔널에 참가한 스탈린은 가까운 거리에서 그들을 잘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때까지, 스탈린은 타메르포스와 스톡흘름에서 개최된 공산당 대회에 참가한 게 외국에 나가 본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런던대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런던대회에는 볼셰비키, 멘셰비키, 동맹주의자 그리 고 폴란드와 라트비아의 사회민주주의자 등 3백 명 이상의 대표들이 참석 했다. 스탈린은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계 권력의 수도이자 자 본가들의 바빌론인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보루를 보았던 것이다. 각기 독자적인 전통 속에서 성장해 온, 자신감에 넘치는 많은 사람들 틈 에서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스탈린은 마치 자신이 보잘것없는 사람 으로 무시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5월의 런던 날씨가 꽤 쌀쌀했던 데다 목도리까지 잃어버려 스탈린은 리트비노프와 함께 새 것을 사러 나갔다. 그는 목이 긁힐 것 같은 거친 모직 목도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가 장 부드럽고 비싼 것을 하나 샀으나, 스탈린은 그래도 불만이 가시지 않아 지나가는 행인이 자기를 빤히 쳐다보는 것 같다며 마구 욕을 해댔다. 리트비노프는 부두에서 스탈린과 잠깐 헤어져야 할 일이 생겼다. 돌아와 보니 스탈린이 부두노동자에게 매를 맞고 있었다. 아마, 그들이 스탈린에 게 무엇인가를 물어 본 모양인데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그가 아무 대꾸 도 하지 않자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결국 용감하고 런던토박이나 마찬 가지로 영어를 잘 구사하는 리트비노프가 그들을 쫓아 버렸다. 당시 대회 에 참석했던 그 누구도 스탈린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건은 알려지지 않았다. 후에, 리트비노프는 부쟈긴에게 목도리에 대해서는 얘기 했지만, 부두사건에 대해서는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만약, 그런 얘기를 했다면 스탈린은 결코 그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애처럼 자그마하 고 유약한 일면이 있는 스탈린은 자신의 체력과 용기를 의심할 만한 어떤 일에 대해서도 병적으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이것이 후에 스탈린을 의 심 많은 사람으로 만든 정신적 조건이 되었다. 아직 그들이 유배지에 있을 때, 스탈린은 부쟈긴에게 말했다. 무례는 더 큰 무례로 대해 줘야 해. 사람들은 그걸 힘이 더 센 걸로 받아들이니 까. 스탈린 자신이 부두노동자와의 사건을 얘기한 것은 어느 긴 겨울밤이었 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자기를 인도인으로 잘못 보고 두들겨 패려 다가 곧 자기를 알아보고 도망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누구를 알아본다 는 표현을 좋아했다. 그게 바로 그 유명한 영국의 노동계급이야. 그가 말했다. 자기네 보 스들과 똑같은 식민주의자들이지. 부쟈긴은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1년 이상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여겼다. 그는 스탈린의 마 음을 바꾸는 일이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스탈린은 좋아하 던 것을 쉽게 포기하기는 해도 싫어하던 것은 좀처럼 좋아하지 않는 인간 이었다. 그러나, 부쟈긴은 스탈린이 전쟁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 었다. 부쟈긴은 자신의 노력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곧 깨닫을 것이 다. 시간도 스탈린의 입장을 바꾸지는 못했다. 스탈린의 위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부동했다. 그리고 부쟈긴은 그런 그에게 반대한다는 것이 어 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부쟈긴은 크레믈린 쪽으로 걸었다. 평소 때처럼 보즈드비젠카를 따라 걷 지 않고, 헤르젠 가를 거쳐 마네츠 광장을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알렉산 드로 공원의 철책을 따라 트로츠키 문 쪽으로 갔다. 그는 느린 발걸음으로 시간을 끌며 천천히 걸었다. 곧 있을 대화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기 위해 서였다. 아마도 그의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임에 틀림없다 고 느껴지는 스탈린과의 만남을 그는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었다. 부쟈긴은 항상 당 내부의 시시한 논쟁들과 교조적인 경직성을 지니고 있 는 당 지식인들을 피해 왔다. 또한 스탈린에 대한 찬미의 합창에도 끼지 않았다. 스탈린에 대한 찬양은 자신이 아니라도 충분히, 정도 이상으로 이 루어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형제들, 그리고 그 자 신 역시 모토빌리하 공장의 유능한 숙련공이었다. 그 공장은 전국에서 가 장 큰 국영기업의 하나였다. 그 공장의 50톤급 프레스기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라고 했다. 카마 강 좌안에 위치한 모토빌리하는 간선철도가 통과하고, 또 공업과 상업의 중심지인 페름의 근교에 있어서 비교적 일찍 개발된 도시였다. 쾌활하고 젊은 노동자였던 부쟈긴은 아크 용접의 발명가인 니콜라이 스 라비야노프에게 발탁되어 최초의 아크 용접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선진기술을 익혀 작업에 참여한다는 사실은 부쟈긴의 마음에 큰 자극을 주었다. 그는 공장의 교육받은 노동자나 그 도시의 반체제 인사들 가운데 존재하는 많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부쟈긴은 역시 말단 사회민주주의자가 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톰스크의 일반교육과정에 등록했다. 기술전문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증을 얻기 위해서였다. 제 1차 러시아혁명이 일어났을 때 부쟈긴은 이미 직업혁명가가 되어 있 었다. 1905년 12월의 정치적 동맹파업에도 참여한 그는 군대와의 무력충돌 도 경험했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나림으로 유배되었다. 독재정치에 대해 투쟁을 벌일 때에는 모든 것이 분명했다. 혁명의 최종 목표는 이념의 전취였다. 이 과정에서 극단적인 행동들은 필요불가결한 것 이었다. 오랜 세월 억눌려 왔던 인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혁명은 그 자 체를 수호해야만 했기에 적색테러는 정당화되었다. 내란이 끝나자 모든 것은 제자리를 되찾았다. 신경제정책은 단순히 새로 운 경제정책이 아니라 총체적인 정책의 변화였다. 혁명을 완수한 러시아는 합법적인 국가가 되었고, 젊은 부쟈긴이 한때 꿈꿔 왔던 새로운 인간의 창 조를 약속하는 생활의 새 질서가 탄생했다. 그러나, 레닌이 오랫동안 중요하게 구상해 왔던 이 정책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수백만의 농민들이 죽거나 시베리아로 쫓겨났다. 그리고 스탈린은 이렇게 하는 것이 레닌의 목표를 성취하는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공포정치를 실시하고 무법과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제거했다. 스탈린 은 시베리아에서 부쟈긴에게, 레닌은 러시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난했으면서도 레닌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거나 그를 이용하기를 좋아했 다. 그때 스탈린은 레닌이 내건 토지 국유화의 슬로건이 농민들에게 호응 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었다. 그후에도 스탈린은 내란 중에 차리친 에서, 레닌은 군사문제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탈 린은 항상 당 내부에 존재하는 레닌의 영향력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그에 반대하지 않았다. 레닌의 정당성이 밝혀지면 스탈린의 정당성도 밝혀졌다. 스탈린은 레닌의 정책들을 실행에 옮기는, 그의 충실한 계승자 로 자신을 내세웠다. 현재까지도 그는 모든 면에서 레닌에게 존경심을 표 시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레닌의 결정에 암시와 영감을 던져 준 사람으로 자처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레닌이 추구하던 사회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른 하나의 권력체제를 만들고 내고 말았다. 스탈린은 타자에 혼자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아테니 포도주 한 병과 생수 두 병, 잔 몇 개와 과일 바구니 그리고 책도 한 권 펼쳐져 있었다. 그는 집에서도 진홍색의 짧은 바지와 가벼운 모로코 부츠를 신은 군복차림 이었다. 스탈린은 고개를 돌렸다. 늘어진 목덜미와 살찐 턱이 하얀 옷깃을 덮었 고, 아랫배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널찍한 이마와 마마자국들, 그리고 고운 손이 눈에 익었다. 부쟈긴은 이게 마지막 방문이 될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스탈린은 악수도 청하지 않은 채 천천히 일어서더니 부쟈긴을 계속 뚫어 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키가 작았지만 올려다보거나 혹은 똑바로 쳐다보는 법이 없었다. 마치 무겁게 내리깐 눈꺼풀을 통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래서 스탈린은 키가 큰 사라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부쟈긴은 스탈린이 앉으라고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색한 순간은 곧 끝났다. 스탈린은 턱으로 창문 쪽을 가리켰다. 밖에서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고 있소? 그것은 부쟈긴이 1년 전에 주재했던 외국이나,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이 나라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말은 온 세계를, 인류 전체를, 사실 은 창문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시베리아 오두막에서 보낸 외로운 유배생활이 이 무자비한 아시아적인 신의 가슴에 의심하는 버릇을 심어 준 것이다. 전당대회에서 승리를 획득한 다음에야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스 탈린은 오랫동안 그랬던 것처럼 어느 누구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이러 한 불신과 의심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고, 부쟈긴과 그의 일 당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었다. 스탈린 은 이미 부쟈긴에 대해서도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는 웃지도 않았고 가족의 안부도 묻지 않았으며, 지난날 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도 전혀 말을 하지 않은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런 사람도 있겠지요. 부쟈긴이 대답했다. 스탈린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부쟈긴은 자리에 앉았다. 파이프를 손에 쥔 채, 스탈린은 예의 그 경쾌한 걸음걸이로 방안을 거닐 기 시작했다. 랴자노프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뜻밖의 질문이었다. 스탈린은 랴자노프의 방문을 받고, 정치국원에서 보 고하는 것을 듣고는 그를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시켰다. 어쩌면 그의 조카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스탈린의 의심을 사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현실적이고 통찰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부쟈긴이 대답했다. 난 그가 계획에도 없는 뭔가를 건설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소. 인민위원회에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랴자노프는 그 자신의 권한으로 영 화관과 스포츠센터, 그리고 이른바 <우랄 마체스타>라는 휴양소의 기초공 사에 착수해 있었다. 퍄타코프가 그곳에 위원회를 내려보냈습니다. 부쟈긴이 긴장하여 대답 했다. 스탈린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부쟈긴의 말을 신뢰하지 않고 있으며 그의 대답을 좋아하지 않고 있다는 표시였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 엇이란 말인가? 그는 진실을 얘기했을 뿐이다. 한편으로 부쟈긴은 부당한 상황에 대해 불신을 보임으로써 혼란을 야기하고, 의심의 여지가 있을 때 신뢰의 인상을 주는 스탈린의 방식에 매우 익숙해 있었다. 스탈린은 천천히 눈길을 돌리며 능글맞게 웃었다. 세르고가 랴자노프를 중앙위원으로 추천했소. 그는 경제정책가들로 그 자리를 채워 넣고 싶은 모양이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부쟈긴의 반 응을 기다렸다. 이것은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스탈린의 전형적 인 방법이었다. 세르고가 중앙위원회에 추천한 것은 랴자노프지 부쟈긴이 아니었다. 스탈린은 목소리를 높여 말을 계속했다. 세르고의 의견을 존중한다 하 더라도 우리는 당중앙위원회를 국가경제최고회의로 바꾸려고 하는 것은 아 니오. 중앙위원회는 우리의 최고법원과 같은 곳이오. 경제정책가와 정치 가, 그리고 군인과 문화지도자가 모두 거기에 있어야 하오. 우리 당의 모 든 재원들이 그곳을 대표해야 하오, 특히 젊은 재원들이. 그는 부쟈긴을 마주 보고 섰다. 우리는 비켜서서 인민들에게 길을 내주어야 하오. 인민은 새로운 귀족 이 아닌 그들 자신의 아들들이 국가에서 일하는 것을 보기 원하오. 러시아 인민들은 결코 귀족을 좋아하지 않소. 러시아 인민들의 역사는 귀족에 대 한 투쟁의 역사요. 러시아 인민들은 이반과 표트르를 사랑했고, 그들은 귀 족들을 탄압한 황제였소. 볼로트니코프로부터 푸가초프에 이르기까지의 모 든 농민운동은 훌륭한 황제에 대한 지지와 귀족에 대한 반대운동이었소. 그는 갑자기 주제에서 벗어나 역사얘기로 들어갔다. 역사는 그가 비교적 유식하게 말할 수 있었고 특히 교회와 종교의 이단의 역사에 대해서는 더 욱 그랬다. 그는 부쟈긴 같은 사람을 새로운 귀족으로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민들은 더 이상 그러한 신흥귀족을 원치 않는다고 강조 하려는 듯했다. 스탈린은 계속했다. 예를 들어볼까? 왜 중부지역에 사는 농민들은 혁명을 지원했는데 시베 리아 같은 변경지역에서는 그렇지 못했는 줄 아오? 중부지역에는 지주와 귀족이 있었지만, 시베리아에는 그런 사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오. 그리 고 귀족인 콜차크가 우리와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농민들은 혁명에 참여했 소. 그는 어두운 눈으로 부쟈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창문 쪽으로 가서 부쟈긴에게 등을 보이고 섰다. 그러나 모든 젊은이들이 새로운 힘으로 간주될 수는 없소. 언젠가 난 아르바트를 지나가는데 서구식 레인코트를 입은 젊은 녀석들이 거리 모퉁 이에 서서 웃는 것이 눈에 띄더군.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소. 저들에겐 무 엇이 더 중요한가? 저들의 조국 소비에트인가, 아니면 서구식 레인코드인 가? 그는 젊은이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사샤의 소송 건에 대해 알고 있음을 의미했다. 서구식 레인코트를 입고서도 조국 소비에트를 사랑하는 것은 가능합니 다. 부쟈긴이 말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오? 스탈린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 생각은 다르오. 내 아이들은 서구식 레인코트를 입지 않았소. 그 애들은 소비에트 의 국산품만으로도 행복하오. 내 아이들은 서구식 레인코트를 구할 수도 없소. 나는 그 애들이 그것을 어디에서 구하는지가 무척 궁금하오. 혹시 레나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아닐까? 아마도 어떤 여자인가가 짓궂 게 부쟈긴의 딸은 서구식 옷을 입었더라? 고 입방아를 찧어댔을 것이다. 스탈린에게는 사소한 사실들이 중요했다. 그는 항상 그것들에 관심을 기울 이면서 그가 얼마나 정보에 뛰어난가를 과시하는 데 이용했다. 그리고 그 는 사소한 사실들을 일반화시켜 결론을 이끌어내는 능력을 자랑스러워했 다. 저도 지금 외제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가족은 거의 십년 가까이 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곳에서 옷을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렸다. 스탈린은 무슨 말인지 알아채고는 그의 말을 존중해 주는 척하며 두 팔 을 펴 보였다. 그렇소. 하지만 당신은 우리를 위해 국제무대에서 활동했소. 어떻게 당 신이.... 그는 천천히 부쟈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갑자기 손을 뻗어 부 쟈긴의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당신은 참 젊어 보이는군. 아직 핸섬하고, 검은머리에.... 부쟈긴은 스탈린이 방금 자기 머리를 만졌던 그 부드러운 손으로 자기 머리를 쉽게 잘라 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탈린은 마치 부쟈긴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손을 내리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항상 논쟁을 좋아했지. 이반. 철저하고 치열한 논객이었어. 그는 다시 창문 쪽으로 가서 부쟈긴에게 등을 돌린 채로 섰다. 우리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사랑하오. 그들은 우리의 미래지, 그러나 그 들은 당연히 일어나야만 해. 당신은 정원사가 나무를 기르는 것처럼 그들 을 길러야 하오. 그들을 추켜세우거나 비위를 맞춰서도 안 되오. 더구나 그들의 잘못을 용서해서는 더욱 안 되고.... 그렇다. 그는 결국 사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정보량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이 아는 것 중에서 극히 일부만을 말하고 있었다. 때가 되면 전부를 드러내 보일 것이다. 젊은이들에게서 천박한 대중성을 추구해서는 안 되오. 그는 계속했다. 인민들은 천박한 대중성을 추구하는 지도자들을 좋아하지 않소. 레닌은 그렇지 않았소 - 그는 거리를 방황하지 않았소. 인민은 미사어구를 늘어놓 는 지도자들도 좋아하지 않소. 트로츠키는 수다쟁이였소. 그가 결국 어떻 게 되었는지 보시오. 이 화살은 사실 키로프를 향한 것이었다. 키로프는 레닌그라드 거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당에서 가장 뛰어난 연설가였 다. 그러나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 스탈린은 새로운 숙청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아직까지 스탈린은 키로프와 오르드조니키 드제를 제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움직여 정치국의 몰 로토프와 카가노비치를 인질로 남겨둘 것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 다. 시기가 좋지 않다. 당은 결코 그런 계획을 수용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당장에는 부쟈긴에서부터 일을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부쟈긴이 아 스트라한 방어와 북부 코카서스의 군사작전 이후에 키로프나 오르드조니키 드제와 가까이 지내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를 불러 들인 이유였다. 그는 국제문제엔 별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있었다면 1년 전에 벌써 부쟈긴을 소환했을 것이다. 늘 그랬지만, 가까운 동지에 관해 이야기할 때 보이는 스탈린의 솔직함 은 아주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자기가 말한 것은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 된 다는 게 스탈린의 확신이었던 것이다. 만약 부쟈긴이 방금 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일러준다면 그는 영원히 음모자로 낙인 찍힐 것이다. 그는 당지 중앙위원회에 보다 많은 계획자들을 끌어들이려는 오르드조니키드제 의 노력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을 뿐이며, 레닌그라드 거리를 돌아다니는 키로프의 개방적인 태도에 대해 염려의 말을 했을 뿐이었다. 스탈린은 몸을 돌리지도 않고 말을 계속했다. 도대체 코다츠키는 어떤 사람이오? 아스트라한에서 당신과 같이 있지 않았소? 예 그랬습니다. 그는 해당지역 수산업 분야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하 지만 당신도 그를 알고 계실 텐데요. 지금은 레닌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입 니다. 스탈린은 부쟈긴의 대답 속에 암시된 빈정거림을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그래, 코다츠키는 지노비예프파지.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부쟈긴은 깜짝 놀랐다. 코다츠키가요? 하지만 그는 지노비예프에 반대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소, 분명히 지노비예프에 반대했지. 거기까지는 스탈린도 동의했 다. 그러나 레닌그라드의 노동자들이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를 당에서 추 방하라고 요구하고 있을 때 코다츠키 동지는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소. 그는 망설이고 있었소. 그리고 그와 같은 문제에 대해 계속 그러했소! 그 뒤 코다츠키를 모스크바 - 나르바 지구당위원회의 서기직에서 해임시켜야 한다고 제안한 사람이 키로프 동지 바로 그였소. 결국 그는 해임되었소. 하지만 경제자문회의의 직은 가지고 있다가 이제는 레닌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이 된 것이오. 그렇소,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대신에 우리는 또 하나의 지노비예프를 앉힌 셈이오. 이렇게 된 것을 레닌 그라드 노동자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소. 제가 아는 바로는 코다츠키는 결코 반대편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부 쟈긴이 말했다. 만약에 그가 <조직>의 문제에 대해 동요를 일으켰다 면.... 그러나 그런 종류의 동요에 완벽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더구나 팔 년 전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코다츠키 동지의 피를 강요하고 있는 사람은 없소. 스탈린 이 부쟈긴 쪽으로 돌아서서 침착하게 맞받았다. 그렇지만 레닌그라드와 같은 조직 속에서는 인물 선정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오. 사실상 당 은 그의 후임자 선출을 키로프 동지에게 맡겼소. 우리는 간섭하지 않을 것 이오. 이 마지막 말은 코다츠키에 관한 그들의 대화가 개인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지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는 경고가 내포되어 있었다. 히틀러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히틀러는 곧 전쟁을 의미합니다. 부쟈긴이 대답했다. 스탈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히틀러에게 싸울 만한 힘 이 있을까? 독일의 산업잠재력은 대단합니다. 그들이 재무장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겁입니다. 그러나, 주위에서 히틀러의 재무장을 내버려두겠소? 그는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권력유지가 가능할 수 있겠소? 예, 그렇게 보입니다. 스탈린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목덜미 주위를 만지작거렸다. 동지는 독일이 싸움을 벌일 것이라고 생각하오? 만일 그런 상황이 온다면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스탈린은 천천히, 그러나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선언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베르사이유에서 독일의 손과 발을 묶어 버렸소. 배상금은 독일을 발가벗겨 버린 것이오. 그들은 독일의 식민지와 단찌히, 폴란드 지역을 차 지했소. 그리고 동프러시아를 조각내 버렸소. 그런데, 독일이 어떻게 싸움 을 걸어온단 말이오? 영국과 프랑스는 우리를 희생타로 하여 독일과의 거래를 시도할 것입니 다. 부쟈긴이 설명했다. 스탈린은 그를 향해 돌아섰다. 자기의 관심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느끼 는 게 분명했다. 오히려, 그는 부쟈긴을 앞에 두고 그것을 똑바로 표현해 야 한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한 모습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강한 독일이 유럽의 심장부에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반대로 우리는 영국과 프랑스에 비견할 만한 강한 독일을 원 하오. 독일은 우리에게도 실질적인 위협입니다. 부쟈긴이 신념을 가지고 응 수했다. 스탈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독일의 위협을 과장하는 것은 중요한 위험 을 간과하는 것이오. 분명히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그렇게 할 것이오. 그러 나, 그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오. 저는 제 의견을 번복할 수가 없습니다. 부쟈긴은 말했다. 그게 바로 동지가 이 자리를 지킬 수 없는 이유요. 스탈린이 위협적으 로 쳐다보며 말했다. 부쟈긴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듯 돌아서서 말했다. 당은 의견차이의 과시를 필요로 하지 않소. 당이 필요로 하는 것은 힘 든 노동이오. 누구든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 이상 당에 쓸모 가 없는 존재요. 제가 쓸모 있는지 없는지는 당이 결정할 것입니다. 부쟈긴이 말했다. 스탈린은 탁자에 앉아 등을 돌리고는 책을 집어들었다. 난 좀 바빠서 이만 실례하겠소.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25 부쟈긴 뒤에서 문이 닫혔다. 스탈린은 책을 옆에 두고 일어서서, 파이프 를 꽉 잡고 방안을 천천히 걸었다. 그는 창문에 서서, 눈에 익은 노랗고 하얀 아르세날 빌딩과, 그 정면에 일렬로 늘어선 청동대포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모토빌리하 출신의 외교관! 위협이 되는 것은 독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의 후방인, 극동의 만주에 있는 일본군대였다. 부쟈긴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의견을 억제했다. 그는 히틀러에 대해 얘기하러 온 것이 아니었었다. 부쟈긴은 당 내부에 제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며 적당한 시기에 스탈린의 노선에 대항하려 한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왔다. 부쟈긴은 자진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 기엔 그는 너무도 보잘것없는 인물이었다. 스탈린을 도와 그의 적들을 제 거한 사람들의 지시를 받고 온 것이었다. 부쟈긴은 그를 의지해야만 했고 또 지금도 의지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들이 다른 자들을 제 거했던 방법으로 그를 제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가 모든 면에서 자기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스탈린은 자칭 진정한 지도자였 고, 그의 권력도 자기 혼자 소유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지도자 가 아니라 꼭두각시였을 것이다. 그들이 스탈린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스 탈린이 그들을 선택했다. 그들이 스탈린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 아니라 스 탈린이 그들을 자기 뒷전에 거느리고 있었다. 스탈린이 자기를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 것도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국가권력의 정상에 오르 도록 키워준 게 스탈린이었다. 그들이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전적 으로 스탈린 곁에 자리를 차지한 덕분이었다. 레닌은 누구에게 빚을 졌던가? 런던과 제네바의 망명자들? 표트르 대제? 멘쉬코프와 레포르트에게? 그의 권력이 세습되었었다는 사실을 문제의 핵 심을 바꾸지는 못했다. 권력의 절정에 이르기 위해, 군주는 자기를 꼭두각 시로 보는 측근들을 제거해야 했다. 그것이 표트르 대제가 했던 방법이고, 공포의 황제 이반도 마찬가지였다. 스탈린은 적들을 제거했기 때문에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지도자였기 에 적들을 제거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나라를 지배하도록 예정된 사람이었 다. 그의 적들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패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직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다라서 깡그리 타도되어야만 했다. 실패한 척하는 자들은 늘 잠재적인 적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그를 선택했다. 그야말로 이 국가에서 최고권력의 비밀을 이해하 고, 이 국가를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가를 아는, 그리고 이 국가의 장단점 에 대해 정통한 유일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러시아인은 집단적인 민족이었다. 오래 전부터 지방공동체가 그들의 생 활양식이 되어 왔다. 그 뿌리에는 평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것은 현재 러시아에 건설하고 있는 것과 같은 사회에서는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전술적으로 레닌의 신경제정책은 적절한 조치였다. 그러나 그것이 <장기간 에 걸쳐 신중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실수였다. 이 운동은 보다 많은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적용된 일시적인 조치였다. <장기 간에 걸쳐 신중하게> 란 표현은 부유한 자작농에 기초를 둔 정책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농부들은 거기에서 불평등을 발견했고, 그것은 러시아인들 의 정신적 체질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책장으로 가서 레닌의 책 한 권을 꺼내 한 귀절을 다시 읽었 다. 신경제정책을 통해 모든 대중을 협동적인 사업에 참여시킨다면 역사의 신기원이 이룩될 것이다. 광범위한 지식과 적절한 생산방식, 책을 이용하 는 방법에 대한 교육, 물질적 기초, 흉작이나 기근 따위에 대한 확실한 대 비책 등이 없이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스탈린은 책을 덮어 제자리에 도로 꽂아 놓았다. 이것은 러시아나 러시아의 농촌, 또는 농민들을 알지 못했던 망명자의 논리였다. 레닌이 1922년, 순진한 희망을 가지고 관심을 집중했던 그 유명 한 전기쟁기는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레닌이 기술 을 이해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의 농촌과 농민들을 이해하지 못 한 것이었다. 농민들을 읽고, 쓰고, 교양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리고 농 촌을 기근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이 필 요했다. 농민들의 정신을 깨우치려고 한 그 접근방법은 농민에게 맞지 않는 것이 었다. 농민은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원하지 않았다. 농민들도 한 인간이었지 만 그들은 농민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억압의 대상이 된다. 협동의 형태라 고는 해도 농부들은 그 안에서 단순한 일개 노동자에 불과할 것이다. 그게 바로 스탈린이 간파한 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2차 혁명은 1차 혁명 못지 않게 중요했다. 10월혁명 당시 농민들은 우리편이었지만 집단농장화를 실시하면서 그들 은 우리를 반대했다. 물론, 우리에게는 책과 과학과 흉작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집단농장화의 예비단계로서가 아니라 그 토대로 서 필요했던 것이다. 레닌은 교육이 우선이고 그 뒤에 집단농장화가 필요 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방식은 집단농장화가 먼저고 그 다음이 교육이었다. 레닌이 관료주의적 악용이라고 불렀던 것은 사실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방법에는 위험이 따랐다. 관료주의는 인민과 지도 자 사이에 끼여들어 지도자를 내몰려고 한다. 그것은 가차없이 제거되어야 만 한다. 국가기구는 최고의지의 확실한 집행자가 되어야 하며, 그 의지는 국가의 위엄으로 지켜져 인민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스탈린은 그런 기구를 갖고 있었던가? 그렇지 못했다. 지금의 기구들은 권력 투쟁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었으며, 아직은 지도자의 도구가 아니었 다. 그것은 승리의 동반자로 여겨졌다. 부쟈긴의 방문이 이런 사실을 상기 시켰다. 진정한 지도자의 기구는 권력을 장악한 뒤에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관은 영원불변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게 되면 연계가 굳어져 그 기구는 완전 통일적인 속성과 독자적인 힘을 획득하게 된다. 따 라서 그것은 마음대로 뜯어고치거나 전면적으로 대치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그러한 기구를 만드는 것은 정적들을 제거하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 그 기구는 단일조직의 꼭대기부터 밑바닥까지 수십만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현재의 정치국원은 이제 레닌과 함께 외국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 정치국원들은 지금 기관 내의 꼭대기부터 밑바닥까지 뻗쳐 있는 자신의 조직책과 연계원을 갖게 되었다. 그 전체를 흔들려면 한 연결부위에만 손 을 대면 되는 것이다. 스탈린은 자신의 측근들을 신뢰했던가? 정치에 있어서는 누구도 신뢰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그리고 보로쉴로프가 가장 믿을 만한 자들이었 다. 그들은 독자적인 지도자가 되려는 야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훌륭한 실무자들이었다. 몰로토프는 머리가 좀 둔했고, 카가노비치는 좀더 활발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명령을 수행하고 그 명령에 스스로 를 내던지는 능력을 보여왔다. 이제 스탈린이 없으면 그들은 아무 것도 아 니었다. 보로쉴로프는 잠재적으로 배반할 가능성이 있어 보였지만 군부의 지식계급, 특히 투하체프스키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매달렸다. 보로쉴로프는 부덴니, 티모덴코, 쉬차덴코, 고로도비코프와 같은 군 기갑 부대에 의지하고 있었지만, 그들도 그렇게 큰 힘은 못되었다. 무력정치시 대는 이미 끝난 것이다. 칼리난과 안드레예프. 정치국원 중에서 하나는 가장 나이가 많고 하나는 가장 적은 국원이었다. 칼리닌은 59세였고 안드레예프는 39세였다. 칼리닌 은 농민출신으로 성공한 인물이었고 안드레예프는 노동자계급 출신으로 성 공한 인물이었다. 그들은 다수파를 지지했다. 마지막으로 독자적인 인물들로서 키로프, 오르드조니키드제, 코시오르, 쿠이비세프 그리고 루드주타크가 있었다. 레닌은 그의 유명한 편지에서 개인적으로 루드주타크를 자신의 자리인 서기장직에 추천했었다 레닌은 이 문제에 대해 루드주타크와 의논하지 않 았으며 실제로 그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다. 그 편지는 단지 레닌의 아내 인 크룹스카야와 레닌의 누이 마랴 그리고 그때 서기국에서 일하고 있던 스탈린의 아내 나쟈에게만 알려졌다. 스탈린에게 그걸 말해 준 사람은 바 로 나쟈였으며 후에 다른 모든 사람들도 나쟈에게서 그 얘기를 둘었다. 레 닌은 그 때문에 끝까지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루드주타크는 매우 신중 한 인물이었다. 그는 조직과 중요한 관계를 갖고 있진 않았다. 1917년 2월 혁명이 임박할 때까지 그는 거의 10년 동안 힘든 중노동을 하며 지냈다. 그런 사람이었지만 레닌은 그를 자신의 자리에 임명하려 했던 것이다. 그 것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일이었다. 루드주타크도 그것을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쿠이비세프는 귀족출신이었다. 제정시대에 사관학교를 나온 그는 멋진 생활을 즐겼다. 그는 개인적인 생활에만 몰두했고 그다지 건강이 좋지 않 았기 때문에 혼자 있기를 원했다. 훌륭한 일꾼이었으나 그런 당원은 얼마 든지 있었다. 코시오르는 이곳에 와서 스탈린과 같은 노선을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좌 우로 자리를 바꾸곤 했다. 왜? 그는 진실하지 못했고 믿을 수 없는 인물이 었다. 세르고 오르드조니키드제는 좀 곤란한 경우였다. 그는 스탈린과 30년 전 부터 티플리스에서 함께 지내면서 지금까지 친분을 맺어 온 유일한 인물이 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세르고는 그를 너무 오래 알아 왔었고 너 무 많은 상황에서 그를 보아 왔으며, 자신을 공범자로 여기고 있었다. 그 러나 진정한 지도자는 공범자를 가지지 않는다. 그는 그의 세력 안에서 동 지들을 소유한다. 친구가 아닌 학생들은 제자가 된다. 세르고는 낭만적이 며 솔직했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 행동한 것들을 너무 믿었는데 정치가에 게는 위험한 성격이었다. 반대파가 항복했을 때 세르고는 그들 모두를 복 권시키자고 제의했다. 누구든지 스탈린에게 반대한다는 것이 드러나면 제 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세르고는 이해하지 못했을까? 누구든지 스탈린에 게 반대하는 것은 소비에트정권에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왜 세르고 는 소비에트정권의 적들이 당 외부가 아닌 당 내부에 있음을 알면서도 그 들을 제거하려 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정략이었다. 그것 은 당 내부에서 스탈린을 견제할 세력을 보호할 의도였다. 그것은 세르고 가 미래의 판관으로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언젠가 때가 오면 스탈린에 대항하여 속박을 풀어줄 수 있는 잔여세력을 만들고 있었 다. 로미나드제가 바로 그 증거였다. 세르고는 1930년 로미나드제가 샤츠킨 에게 보낸 편지가 가로채인 사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그는 소년일 뿐입니다. 라 고 말했다. 그러나 그 소년은 편지에서 스탈린에 대해 뭐라고 썼던가? 정 치는 아이들의 놀이가 아니기 때문에 어리광은 정치에서 통하지 않는다. 로미나드제와 샤츠킨은 그들 스스로를 후계자로 자처하며 서둘렀다. 그들 은 스탈린을 무식하고 교육받지 못한 반쪽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미나드제는 어떤 사람인가? 만약 3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그는 조 르다니아, 츠헤이드제, 그리고 제레텔리 등 그루지아 출신의 멘셰비키와 어울리며 집에서 편히 지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스탈린을 무식하 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루지아의 인텔리들은 그루지아 민족의 가 장 나쁜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아시아의 바다에 떠 있는 유럽의 섬으로 생각했다. 로미나드제는 지금 우랄지방에 있지만 세르 고는 아직도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이것이 우연이었을까? 아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로미나드제는 세르고파와 연계되어 있는 사람 중의 하나 였다. 세르고의 정책은 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키로프와 함께 추구하고 있던 공동의 정책이었다. 그들은 떨 어질 수 없는 동료이자 친구였다. 키로프는 모스크바에 오게 되면 항상 세 르고의 집에 머물렀다. 그와 같이 다정한 우정 뒤에는 무엇이 감추어져 있 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서로 묶어 두었는가? 정치지도자들 사이에 어떠한 우정이 가능했을까? 왜 정치국의 두 국원이 우정을 가지고 다른 국원들로 부터 자신들을 분리시켜야 했는가? 그들은 둘 다 대략 48세였고 둘 다 코 카서스와 그루지아의 북부지방에 살았었으며, 둘 다 1930년부터 정치국의 국원이었었다. 그러나, 이중 어떤 것도 그와 같은 밀착의 기초가 될 수는 없었다. 친구란 결코 동등할 수가 없다. 정치에 있어서의 우정은, 한 사람이 지 도하고 다른 사람은 지도 받으며, 한 사람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다른 사람 은 영향을 받는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 지도자는 키로프였다. 그는 완 전히 교육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처럼 허영심이 강했고, 적은 도시의 평범 한 글쟁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인민선동가였으며, 대부분의 인민선동가와 마찬가지로 말재주가 있었다. 그것은 그를 <혁명의 영도자>는 못되더라도 당내 최고의 연설가로 생각하는 팬들이 있음을 의미했다. 스탈린이 원래 키로프를 레닌그라드에 보낸 이유는, 레닌그라드 사람들 에게 그들의 도시가 제 2의 수도가 아닌 단지, 국가의 북서지방 구석에 있 는 지방도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수도가 두 개 있을 수는 없었다. 제 2의 수도는 항상 제 1의 수도의 경쟁상대였다. 레닌그라 드 사람들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오는 데 익숙해 있었 다. 그러나 멀리 아제르바이잔에서 올라온 키로프는 그들도 알 리 없었다. 더구나, 당시 그는 정치국원조차 아니었다. 레닌그라드의 노동자들은 자기 들의 혁명사를 즐겨 과시했다. 그런데 혁명 전에 테레크 라는 아주 초라 한 잡지의 평범한 기고가를 맞게 된 것이었다. 그는 당원이 아닌 비밀요원 의 신분으로 레닌그라드에 보내졌는데, 그의 임무는 선동적인 반대파를 근 절시키는 것이었다. 스탈린의 구상은 간단했다. 즉 레닌그라드 사람들은 그걸 견디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상황이 악화되어 마침내는 영원한 반대파들의 거점을 쓸어 버릴 만한 조건이 성숙되리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그곳에 머문 지 8년만에, 키로프는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그는 총애를 받는 인물로서 당조직의 지지를 얻었으며, 국가 제 2의 도시 로서 레닌그라드의 중요성을 실제로 강화시켰다. 또한 그들의 뿌리깊은 분 리주의와 그들의 도시가 특별하고, 예외적이며, 러시아에서 유일한 유럽적 인 도시라는 우스꽝스런 신념을 부추겼다. 키로프는 인기를 얻기 위해 단순한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카멘노스트로프스키 대로에 있는 큰집에서 살면 서 늘 걸어서 출근했고, 가끔 도사의 거리를 정처 없이 거닐기도 했다. 또 그의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도 즐겼고, 마당에서 같이 술래잡기를 하기도 했다. 아랫사람은 자기가 모시고 있는 윗사람을 본받기 마련이다. 지도자의 생 활스타일은 그가 구현하려는 시대의 특색을 이루게 되는 바, 국가의 통치 스타일도 결국 지도자에 달려 있다. 키로프는 개방성과 친근감을 내세우면 서 스탈린에게 도전하고 있었다. 마치 스탈린은 크레믈린에서 경호원들과 함께 살면서 거리를 돌아다니지도,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그리하여 스탈린은 인민을 두려워하지만 키로프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관념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제17차 전당대회에서 키로프는 말했다. 레닌그라드에서 낡은 것이 있다 면 페테르스부르그 노동자들의 혁명적 전통뿐이다. 그밖에 모든 것은 새롭 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혁명 전부터 공무원들이었던 사람들이 아직 거 리에 살고 있었고, 자본가와 지식계급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체키스트, 라 트비아인, 에스토니아인, 핀란드인, 독일인들 그리고 자신들이 10월혁명의 주체였다고 생각하는 쁘띠부르조아들과 지노비예프가 당을 공격하는 것을 지지했던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전체 레닌그라드 당조 직은 지노비예프를 지지했다. 그의 옛 동지들도 그 자리에 계속 남아 있었 다. 키로프는 왜 그들을 제거하지 않았을까? 그는 츄도프, 코마로프 그리 고 지노비예프를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몇 사람들에게 의존했던 것이 다. 그러나 왜 그랬을까? 지노비예프가 그들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무능 한 자들! 지노비예프는 그걸 알고 있었고, 그게 바로 그들을 억누른 이유 였다. 스탈린 역시 그들을 더욱 억압하려 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이 스탈린에게 대항하여 문제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키 로프 동지는 그런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고도 어떻게 키로프는, 레닌그라드에 남아 있는 낡은 것은 <혁명적 전통>뿐이라고 말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알게 모르게 활동해 온 레닌그라 드 내의 반대파들을 공개적으로 방어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레닌그 라드의 쁘띠부르조아에게 아첨함으로써 그들의 동정을 얻고, 나아가 그들 을 스탈린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레닌그라드를 그 자신의 강력한 지지기반으로 삼으려는 시도였다. 세르고와 마찬가지로 키로프도 스탈린에 대항할 준비를 하고 있 었으며, 전술과 정책 모두가 똑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스탈린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또 그 생각을 포기하지 않 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스탈린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고, 그의 이름을 내세워 맹세해도 스탈린의 눈을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부쟈긴은 그 전 해에, 키로프와 함께 일주일을 같이 지낸 적이 있었다. 보로쉴로프도 역시 같이 있었다. 그들은 백해운하와 소로카, 무르만스크, 레닌그라드 등의 항구도시를 보러 갔다. 그는 키로프가 운하에 대한 어떤 복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직까지, 북쪽의 항로는 태평양으 로의 진출로 일본의 후방에 이르는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키로프는 이 같은 전략적 문제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키로프는 동양이 아니라 서양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그러한 정보를 스스로 유럽인이라고 생각하는 레닌그라드 사람들로부터 얻었다. 그는 부쟈긴과 같은 입장을 취 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쟈긴은 일반적인 경고가 아니라 매우 특별한 정보 를 갖고 왔었던 것이다. 키로프는 열성적으로 보이는 데 능숙했다. 그러나, 백해운하에 대해서는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았다. 그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가급적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유혹 이 생겼다. 그는 무르만스크 항구의 관리자가 새로운 크레인을 보여 주었 을 때, 그의 우월성을 과시할 생각으로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설명 하려 했다. 그런데 어땠겠는가! 그는 정규학교에서 교육받지 못하고 기술 학교에 다녔던 공인된 기계공이었다. 문제는, 단지 키로프가 약간의 이유 로 인해, 지난 20년 동안 기계공으로서 일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신문일도 완전히 잊어버렸다. 부차적인 기술교육도 전혀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결 국 그는 낡아빠지고 피상적인 지식을 드러내지 말았어야 했다. 정치가가 기술에 대해 얘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려고 한다면, 그것을 듣기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구나 그것에 대해 별로 공부한 적이 없으면서도 단지 피상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사실상 그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 한다면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도대체 그는 누구를 가르치려 생각했을까? 그날 밤, 바로 그날 밤에 나쟈는 스탈린에게 흥분해서 말했다. 그들은 당신을 보다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얼마나 순진한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당신을 몰라요. 누구도 당 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어요. 당신은 이미 그것이 미치지 않는 곳 에 있어요. 그녀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인 키로프와 부하린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포섭했었다! 바로 그들이! 그들은 그녀를 이용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에 대한 불신감을 심어 줌으 로써 순진한 여자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준비를 해놓은 것이다. 그들은 그 의 개인적인 성역과 가정, 아내 그리고 가족들까지 빼앗으려 했으며, 스탈 린을 뒤에서 공격하고 그의 등을 찌르려고 했었다. 스탈린은 그들이 한 짓 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들은 그 일에 대해 충분한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 었다. 그녀는 재미있는 동료들과, 영리하고 잘생긴 친구들을 많이 갖고 있 었다. 그녀의 죽음까지도 스탈린에게는 하나의 도전처럼 생각되었다. 나쟈 역시 그 저주받은 도시의 출신이었다. 그녀는 줄곧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 녀에 관한 모든 것이 스탈린에게는 적이었고, 그 적들은 늘어만 갔다. 어 느 누구도 신뢰해서는 안 되었다. 심지어는 아내까지도 그들은 스탈린을 고립시키려고 했으나 스탈린은 오히려 혼자서 그들 모두와 대결해도 결코 지지 않을 사람이었다. 영향력, 세르고 역시 스탈린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에게 영향 력을 미치다니! 자만에 빠진 멍청이 같으니! 키로프는 가치도 없고, 교양도 없는 건방진 녀석이었다. 그리고, 선동가 였다. 그는 제17차 전당대회에서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 그는 붉은 광장에 서 거행된 전당대회 축하행사에서 또 다른 갈채를 받았다. 정치국원은 레 닌그라드만의 대표로서가 아니라 전 공산당의 대표로서 모스크바사람들 앞 에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사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신뢰할 수가 없었다. 키로프는 그를 지켜보는 눈길이 모스크바로 전임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 는 공개적으로 제거될 것이다. 제 2수도의 전체 사업은 장기간에 걸쳐 충 분할 정도로 진행되었다. 그들이 보낸 자가 누구인가? 바냐 부쟈긴이었다. 그들은 더 똑똑한 사람 을 찾을 수 없었다. 스탈린은 랴자노프에 대한 첫 질문으로 부쟈긴을 함정 에 빠뜨렸다. 퍄타코프가 그곳에 위원회를 보냈습니다. 부쟈긴은 곧이곧 대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랴자노프는 모스크바위원회 위원들을 가택연금시 킨 다음 모스크바로 돌려보냈었다. 부쟈긴은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 다. 왜 그들은 스탈린에게 이와 같은 사실들을 숨겼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이질성을 숨기려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관이 단합되고 일체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랴자노프가 있는 도시의 당 비 서는 로미나드제였다. 그들은 그의 역할에 대해 숨기려 했다. 그러나 그들 이 스탈린에게 모든 것을 다 숨긴다 하더라도 스탈린은 그들의 모든 행동 과 모든 의도를 다 알고 있었다. 그 위원들의 연금과 추방은 하나의 독립적인 사건으로서 랴자노프가 그 일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은 또한 오르드조니키드제의 조직이 잘못 되어 가는 징조였다. 비록, 퍄타코프가 위원회를 구성했었다 고 해도 그것은 오르드조니키드제를 모욕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 사태가 그 곳에서 끝나기를 바랬기 때문에, 스탈린에게는 감 추려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스탈린은 스스로 그 일을 처리할 것이다. 스탈린은 창문 쪽에서 걸어나와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포스크레비셰 프에게 랴자노프를 모스크바로 급히 소환하라고 명령했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26 랴자노프는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전화를 받자 출발했다. 그 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 직위를 잃고 당에서 쫓겨날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의 행동에 대해 책 임질 준비는 되어 있었다. 랴자노프는 주거지역에서 떨어진 곳에 영화관, 클럽, 젊은 개척단의 캠 프, 탁아소를 짓기 시작했고, 소치에 이어서 두 번째로 유황온천 옆에 <우 랄 마체스타>라는 의료 센터를 건설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복지대책이 마 련되지 않는다면, 우수한 노동력을 계속적으로 확보할 가망이 없었던 것이 다. 랴자노프는 국가가 금속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는 금속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속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국가는 산업을 필요로 했다. 그것은 콩고에서와도 같이 단지 몇 개의 소규모 공장을 건설하여 아시아적 러시아 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유럽식으로 산업화된 사회주의 러시아를 건설하려 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무렇게나 훈련된 농민들에 의해 이룩될 수 없었다. 근대문명의 이기를 이용할 수 있는 잘 교육된 노동자의 힘이 필요했다. 생 활수준은 생산수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거센 폭풍과 눈보라 속 에서, 인민들의 피와 땀으로 공장을 세울 수는 있지만, 산업화는 결코 그 와 같은 식으로 달성될 수 없었다. 그는 그리 많은 일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영화관, 클럽, 탁 아소, 그리고 병원뿐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단지 시작에 불 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민들은 그들이 용광로를 건설할 때와 같은 정력과 열의를 가지고, 저녁시간도 포기한 채 하루 종일 일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는, 랴자노프가 생산설비들을 손상시키면서 계획되 지 않은 건축을 시작했고, 인민들을 보수 없이 일터에 내몰고 있다는 보고 를 받았다. 퍄타코프는 위원회를 파견했다. 위원회의 대표는 머리가 좀 둔한 한물간 경제 계획가였다. 그는 랴자노프를 오직 한 가지, 즉 철을 만드는 것밖에 는 다른 아무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인물로만 알고 있었다. 위원회의 수석전문가는 부하린학파의 경제학자였다. 그는 1920년대 말에 시베리아와 우랄지역의 개발에 대한 견해를 발표한 바 있었다. 그는 우랄 지역의 전망이 좋지 않기 때문에 시베리아의 개발이 더 효과 있는 일이라 고 말했다. 시베리아에는 더 많은 석탄과 석유, 그리고 무엇보다도 발전에 필수적인 수자원이 많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처음부터, 위원회가 랴자노프의 건축계획을 지지하지 않을 것은 분명했 다. 또 그것이 공장의 발전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 줄 것이라는 점도 분명했다. 인민들을 공장으로 내모는 것은 모두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일이 었다. 랴자노프는 정부로부터 파견된 그 저명한 위원회의 손님을 맞기 위해서 별장을 제공하고 특별한 식사와 서비스를 제공하라고 명령했다. 그 별장은 공장에서 12마일쯤 떨어진 그림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내노라는 위 원들은 한 가지만 빼고는 만족해했다. 그들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차가 없어 공장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루에 세 번 훌륭한 식사를 제공받았다. 그러나 랴자노프한테나 모스크바로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첫째날 그들은 배부르게 먹은 뒤, 랴자노프가 교통편조차 제공할 능력이 없는 모양이라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둘째날에는 그를 욕하기 시작했고, 세째날에는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째날에는 철도역으로 보 내졌으며 날인된 서류와 한께 1등석 기차표를 받았다. 그리고는 모스크바 로 되돌아갔다. 랴자노프는 로미나드제에게 알리지 않고 그런 모든 일을 처리했다. 스탈 린은 로미나드제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개입한다면 일이 꼬일 게 분 명했다. 랴자노프와 로미나드제의 관계는 제 17차 전당대회 이후부터 악화되었 다. 로미나드제는 중앙위원회에서 축출되었고 랴자노프는 중앙위원회의 위 원이 되었었다. 이제 그는 로미나드제보다 정치적으로 더 높은 위치를 차 지하게 되었다. 랴자노프는 기술자였지만 로미나드제는 아니었다. 그의 모 든 지식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기술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공장의 경영자는 당에 처음 들어온 사람이 아니었고 대부분의 작업반장들도 공산 주의자였다. 그들은 내란 중에 적군에게 이용을 당한 전제적인 <군사전문 가>와는 달랐기 때문에, 자기들의 목을 조르는 정치인민위원은 필요하지 않았다. 화려한 연설과 역사적인 비교가 소용이 될 때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랴자노프는 2년을 미국에서 보내고, 유럽전체를 여행했 다. 그는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앞으로 얼마나 많은 분야를 개척해야 하 며,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이 필요한지를 알고있었다. 나머지는 모두 허풍이 었다. 공산주의는 탁자 위에서 떠든다고 건설되는 것이 아니었다. 로미나드제가 이전에 사용했던 영향력을 행사하면 좋은 효과가 있겠지 만, 이제는 중앙당에서건 지역당 사무실에서건 이곳 공장에서건 간에 랴자 노프의 말이 더욱 중요한 비중을 지니게 되었다. 사실, 로미나드제는 오르 드조니키드제의 측근이었고 따라서 그와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었지만, 랴자노프는 공장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오르드조니키드제에게 직접 얻어낼 수 있었다. 어떤 경우든 사소한 일로 인민위원을 찾아가지는 않았 다. 그것은 산업화된 조직에서는 당연한 일이었고, 오직 랴자노프만이 그 걸 알고 있었다. 공장과 랴자노프는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그의 삶이자 운명이었다. 랴자노프는 위원회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신중히 고려했다. 그리고, 그 가 하는 일이 모험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나 이 일이 성공하면 보상은 막대할 것이며, 그의 위치는 앞으로 오랫동안 흔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 는 오르드조니키드제의 지원을 기대했다. 퍄타코프는 그에게 알리지 않고 위원회를 파견했었다. 세르고는 랴자노프가 이 사건에 로미나드제를 결코 연루시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랴자노프는 보로쉴로프의 지원도 역시 기대했다. 한달 전, 보로쉴로프는 극동에서 돌아가는 길에 우 연히 들렀었다. 그는 그가 본 모든 것에 만족해했다. 그는 랴자노프의 어 깨를 치며 말했다. 나는 볼셰비키의 코를 갖고 있어서 금속냄새를 맡을 수 있다네! 랴자노프는 그가 스탈린을 이해하는 것만큼, 스탈린이 그를 이해해 주기 를 바랬다. 그와 같은 처지였다면, 스탈린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랴자노프의 지도원칙이었다. 랴자노프는 스탈린의 사람이었다. 그 는 스탈린의 공장이자 우랄지방과도 같았다. 스탈린은 그 점을 틀림없이 고려할 것이다. 그 사건은 스탈린, 보로쉴로프, 오르드조니키드제, 예조프에 의해 크레 믈린에서 토의되었다. 보랏빛 눈을 가진, 조용하고 예의바른 예조프는 중 앙위원회 조직국의 새 책임자였다. 랴자노프는 설명을 길게 늘어놓았다. 그는 아무도 체포하지 않았다. 위 원회의 위원들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그는 다만 오르드 조니키드제 동지에게 말할 때까지, 그들의 공장방문을 지연시킨 것이었다. 그는 오르드조니키드제 동지에게 위원회의 철수를 명령해 줄 것을 요구하 려 했었다. 그들의 방문이 공장에 해로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는 모스크바에 전화를 걸었고, 세르고가 남부지방에 가 있으며 며칠 안으 로 돌아온다는 말을 들었다. 위원회는 며칠 더 기다릴 수도 있었다. 그리 급한 일도 없었으니까. 사회복지시설은 승인된 자금의 한도 내에서 지어졌 으며,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력을 기꺼이 제공했다. 이 모든 것은 그렇게 명성 높은 위원회보다는 회계 삼사원 한 명만 보냈어도 조사될 수 있는 것 이었다. 그들은 말을 가로채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스탈린은 파이프를 손에 쥐고, 방안을 왔다갔다했다. 오르드조니키드제는 눈살을 찌푸리고있 었다. 예조프는 커다란 노트받침대를 가지고 탁자의 구석에 조용히 앉아있 었다. 보로쉴로프는 랴자노프에게 격려의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랴자노 프가 위원회를 명성 높다고 했을 때 큰소리로 웃었다. 그가 먼저 말했다. 나는 최근에 그 공장을 방문했었는데 그곳은 아주 빠르게 발전할 것이 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협조체제가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왜 원래 공장 건설에 반대했던 전문가를 그곳에 보냈습니까? 랴자노프는 옳은 일을 했습니다. 나는 그를 비판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세르고 동지를 기다렸듯이 위원회도 역시 기다렸어야 합니다. 그러나, 위 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랴자노프의 과 업입니다. 그리고, 그는 또 옳게 판단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랴자노프 동 지를 지원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모두 오르드조니키드제가 어떻게 말할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었 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사실은 얘기된 대로요.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우리 모두 인정 하기로 합시다. 그러나 랴자노프 동지, 당신은 위원회의 위원들에게 교통 수단뿐만 아니라 통신수단마저 제공하지 않았소. 당신이 내게 얘기하고 싶 다면 그것은 당신의 권리요. 그러나, 그들이 모스크바에 통화하기를 원했 던 것도 바로 그들의 권리란 말이오. 당신은 잘못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리 콘스탄티노비치. 랴자노프가 반 박했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일반회선은 자주 불통됩니다. 따라서 그것으 로 모스크바와 통화한다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반면, 우리는 당신 과 두 개의 직통회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리 콘스탄티노비치. 하나 는 내가, 하나는 로미나드제 동지가 가지고 있죠. 위원회는 로미나드제 동 지에게는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문제에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았 어요. 그리고 나는 내 전화회선을 그들 마음대로 사용하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퍄타코프 동지하고만 접촉했을 테고, 퍄타코프 동지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활동을 승인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 는 당신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당신이 그들의 활동을 승인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직통회선 운운하는 말이 나왔을 때, 스탈린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랴 자노프는 보았다. 스탈린이 강한 그루지아의 액센트로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확실 히 흥분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랄지역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원치 않소. 우랄 지역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스크바의 책상에나 앉아 있게 하시오. 이번에 특별위원회를 파견한 것은 엄청난 실수였소. 그것은 퍄타 코프 동지가 책임을 져야 하요. 그는 잠시 쉬었다. 예조프가 빠르게 받아 적고 있었다. 적당한 규모의 편의시설과 사회복지시설을 건설하는 것 역시 필수 불가 결한 것이오. 생산목표량이 성공적으로 달성되고 있는 곳에서는 특히 그렇 소. 노동자 계급이 사회주의의 확실한 결실을 볼 수 있어야 하오. 단지 그 들의 보수를 올리기만 해서는 안 되오. 자본가들 역시 임금을 지불했소. 노동자계급이 그들 자식들을 위한, 즉 노동자의 자식을 위한 의료시설이나 탁아소와 같이 문화적인, 사회적인 측면에서, 사회주의의 결실을 볼 수 있 도록 해야 하오. 계획을 완수한 공업단지는 그럴 권리가 있소. 그것은 인 민들이 원하는 바요. 그게 현실적이냐고요? 그렇소. 그게 설득력이 있느냐 구요? 그렇소. 스탈린은 그의 파이프에 담뱃가루를 채워넣었다. 이번 문제에서 지구당위원회는 어떤 역할을 했소? 나는 아무런 증거도 보지 못했소. 그곳에서는 보통 어떤 일을 하오? 왜 공장경영자가 그 위원 회에 대해서 당에 보고하지 않았소? 그런 것들이 왜 고려되지 않았느냔 말 이오? 랴자노프가 대답을 하려 했으나, 스탈린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곳 지구당은 아무런 권한도 없소? 그러면 왜 없는 거요? 만약 로미나 드제 동지가 그 공장에 관계가 없다면, 그는 도대체 무엇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물어야 되지 않겠소? 그는 활동적인 사람이오. 그는 앉아만 있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오. 국제문제로 너무 바쁘답디까? 그는 왜 자신의 직접적인 업무를 수행하지 않았느냔 말이오. 어디에서든지, 당이 직접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데 실패하면 경영자들이 수단을 강구해야 하오. 왜 지구 위원회 서기가 인민위원과 직통 전화회선을 가지고 있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구당 비서와의 직통회선이란 말이오. 직통회선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르드조니키드제가 눈살을 찌푸리 며 말했다. 그렇소. 사소한 것이오. 스탈린이 동의했다. 그리고 갑자기 자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도 알다시피 일에 혼란을 초래하오. 다른 지구위원회의 서기들은 당신과의 직통회선을 갖고 있지 않소. 그러 나, 그들은 항상 당신과의 직접통화가 가능했소. 그런데 왜 우리는 이 특 별한 상황에 사랑하는 로미나드제 동지를 결부시켜야 하는 것이오? 로미나 드제와 같이 젊은 당지도자들을 이렇게 대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소. 이것은 그의 주체의식에 대해 패배감을 안겨 주는 것이오. 지금 우 리는 그를 학대하고 있는 셈이오. 랴자노프는 스탈린의 생각이 옳다고 판단했다. 스탈린도 또 랴자노프의 생각에 공감했다. 그들은 더욱 가까워졌고, 그것이 랴자노프의 용기를 북 돋아주었다. 그들을 이간질했던 모든 사람들과, 위원회와 문서들은 사실상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제 스탈린만이 그를 이끌어 주고 있었다. 그는 스 탈린에게로 완전히 돌아섰다. 스탈린의 행동에 비추어 자신의 행동을 관찰 하고 평가하게 된 것이다. 랴자노프는 자신의 권력 및 중요성에 대한 자신감과 자각으로 충만했다. 천부적으로 권위적인 그는 더 이상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하는 방식까지 바꾼 것은 아니었다. 모스크바에 가면, 그는 인민위원회 로 직행하지 않고, 각 부서들을 돌며 일반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 전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일에 열성적으로 매달렸으며, 모든 문제들을 공장에 유리하게 해결해 나갔다. 아무도 그의 새로운 점을 눈치채지 못했 다. 그의 권위는 더욱더 강화되었다. 전에는, 그가 비서와 얘기할 때에는 앉은 채로 말하곤 했지만 이제는 선 채로 얘기했고, 그의 비서는 그의 발 만 쳐다보았다. 대화는 여전히 우호적이고 사려 깊었다. 그러나 거기도 변 화가 생기고 있었다. 이제는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의 모습은 유명한 공장 의 경영자나 스탈린과 오르드조니키드제가 아끼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어떤 미래의 인민위원에 가깝게 보였다. 그러나 랴자노프와 오르드조니키드제와의 관계는 다소 껄끄러워졌다. 세 르고는 랴자노프가 좀 유감스러웠다. 랴자노프는 좀더 요령 있게 행동해야 했다. 또 세르고 자신이 부각되지 않는 사소한 논쟁은 피했어야 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세르고는 스탈린이나 보로쉴로프에 반대하지 않았다. 랴자노프는 세르고가 자신에 대해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앙심을 품은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기분을 억제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자위했다. 어쨌든 랴자노프는 근본적으로 옳았고, 로미나드제에 대한 스탈린의 입장차이에 대해서도 책임이 없었다. 그는 오르드조니키드제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동안 그는 국가계획위원회나 국가은행 등과 관련한 수많은 일 들로 바쁘게 지냈다. 아무리 급한 일로 모스크바에 가더라도, 그는 처리해 야 될 일은 다 처리했다. 인민위원회에서 부쟈긴의 임기가 얼마 안 남았지만, 그는 부쟈긴을 방문 해야만 했다. 랴자노프는 로미나드제를 동정하는 것 이상으로 그를 동정했 다. 부쟈긴은 이론가나 연설가가 아니었다. 그는 당의 실무자였고, 기술자 는 아니었지만 무엇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이해하고 재빨리 포착하는 인 물이었다. 그러나, 낙오되었다. 그는 시대를 따라잡지 못했던 것이다. 그 리고, 시대는 스탈린의 것이었다. 부쟈긴은 스탈린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 에게 저항했다. 그것은 곧 그가 국가와 당에 저항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랴자노프는 마치 자기의 상관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부쟈긴에게 딱딱 하고 사무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세르고의 부관들이 퍄타코프와 부쟈긴이라는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다면 결국 그들을 포함하여 세르고의 수많은 측근들은 스탈린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인물들이 아니던가? 세르고가 그들을 선택했을까, 아니면 그들이 자청하였을까? 만 일, 그렇다면 그 목적이 무엇일까? 부쟈긴 역시 랴자노프와 이야기하는 것이 거북스러워 그 위원회에 대해 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서류에 서명을 하고 용무를 다 마치자 부쟈긴이 물었다. 자네 조카는 어떻게 됐지? 랴자노프는 그가 이런 질문을 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누이를 만나볼 계획이었으나 그날 밤으로 그 도시를 떠나야만 했다. 아직 감옥에.... 부쟈긴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랴자노프도 사무실을 나왔다. 그러나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부쟈긴은 사샤가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 다. 그는 다른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왜 랴자노프는 스탈린과 만났던 때를 사샤에 대해 물어 보는 기회로 활용하지 않았을까? 그 질문은 공격적이었다. 상당한 이유가 있어서 구속되었을 하찮은 소년을 위해, 스탈린의 시간을 얻어낼 수 있는 권리가 과연 그에게 있을까? 그는 분명히 어떤 어리석은 행동을 했음에 틀림없었다. 만약 랴자노프의 베레진 방문이 사샤의 석방을 실현하지 못했다면, 그건 그들이 사샤에 대해 뭔가 혐의점을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그가 어떻게 스탈린에게 접근할 수 있겠는가? 스탈 린은 비록 그의 조카가 체포된 상태였지만, 그를 중앙위원회 위원에 임명 했다. 스탈린은 그와 그의 조카문제를 별개로 생각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지금 스탈린에게 그 문제를 제기했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분별없는 짓이 다. 그리고 스탈린도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두 사 람 사이의 내적 친숙 관계는 영원히 파괴되어 버릴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제까지 그래 왔던 방법이었다. 사샤에 대해 스탈린에게 얘기하지 못한 것을, 부쟈긴은 어쩌면 자신의 소심성 탓으로 돌릴지도 몰랐다. 부쟈긴은 유치한 사람이고 정치적으로 이미 끝난 사람이야. 랴자노프 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몹시 괴로워했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27 사벨리는 사샤에게 암호로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알파 벳은 여섯 줄로 나뉘어져 있었고 각 줄마다 다섯 글자씩 있었다. 첫번째 신호는 줄을 의미했고, 두 번째는 줄에 있는 글자의 위치를 가리켰다. 신 호 사이의 짧은 간격은 신호가 바뀐다는 뜻이었으며, 좀더 긴 간격은 글자 가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보다 더 긴 간격은 단어를 구분하는데 이 용했다. 손으로 긁는 소리는 <끝났음>이나 <중단> 또는 <반복>을 의미했 다. 신호 사이의 간격은 매우 짧았으며, 노련한 죄수들은 초단위까지 해낼 수 있었다. 신호의 간격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만일 하나라도 놓치게 되면 신호가 섞여 엉뚱한 의미가 되고 뒤따라 나오는 글자의 의미 를 잃게 되는 것이다. 사샤는 타다 만 성냥개비로 담뱃갑에 알파벳을 적어 놓았다. 그리고 옆 방과 연락을 시작했다. 그는 간수가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 참대에 누워 담요를 뒤집어썼다. 사샤는 천천히 두드려 가면서 한참 동안 기다려 보았 다. 옆방의 죄수는 그의 말을 알아들었으나 사샤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옆 방의 죄수는 천천히 정확하게 두드렸다. 그러나 사샤가 받아 적을 때 글자 를 썩어서 쓰고, 자꾸만 반복을 요구하는 바람에 엉뚱한 의미가 되고 말았 다. 그는 사샤에게 이름을 물었고, 자신은 공산당원인 체르냐프스키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는 사샤에게 혹시 신문에서 읽거나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가 없느냐고 물었다. 아마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정보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매일 저 녁 사샤에게 소식을 전해 주었다. 간수가 감방 근처로 다가오면 잠깐 중단 했다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쇄빙선인 첼류스킨 호가 북극해 빙산에 부딪쳐 침몰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데 꼬박 이틀 밤이 걸렸다. 그리고 그 다음 이틀 밤에는 프랑스의 반파시스트주의자들의 총파업에 대한 얘기 를 들었다. 사샤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징벌방에 끌려 갈 위험을 무릅쓰 고 사샤와 연락을 취했다. 다소나마 외로움이 가시는 것 같았다. 나라 전 체가 여러 가지 재건사업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그러나 사샤는 그날 소비 에트 신문에 보도된 사건이 뭔지 자기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간수 에게 들킬까봐 노심초사하며, 감방문을 향해 앉아 있었다. 체념도 사라지고, 그 대신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겠다는 마음이 불현듯 솟아올랐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자신과 타협하고 싶지는 않아, 진정 코. 그건 내가 걷고자 했던 길이 아니야. 내 길은 당과 인민과 국가와 함 께 걷는 길이여. 난 뭘 해야 하지? 누구에게 편지를 써야 한단 말이야? 검사에게? 내 체 포를 명령한 감사에게 말이지. 아니면 스탈린에게? 그 편지는 쟈코프가 가 로챌게 분명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도대체 뭐라고 써야 할까? 삼촌은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하지만 나 자신조차 이 사건이 뭔지. 그리고 삼촌이 내 체포와 관련되었는지 어땠는지 모르잖아. 그제서야 사샤는 한 가지 계획을 머릿속에 떠올리기 시작했다. 계획이라 고 할 것까지도 없었지만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그날 저녁, 사샤는 옆방과 접촉을 시도하여, 최근 신문에 마르크의 공장 에 관한 기사가 혹시 나오지 않았느냐고 물어봤다. 답이 왔다. 찾아보고 알려주겠소. 다음 날 소식이 왔다. 용광로를 가동시켰고, 그걸로 메달을 수여받았 소. 사샤가 물었다. 랴자노프가? 상대방이 대답했다. 레닌 훈장이오. 마르크는 건재했고 여전히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그와 관 련이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순전히 학교와 관련된 사건이었다. 그것도 벽신문 때문이 아니라 크리보루츠코 때문에 지 구당위원회에서 그를 괴롭힌 것도 바로 그 문제였다. 그리고 그 문제라면 바울린, 로즈가체프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전부였다. 그 순간 사샤는 자신이 실수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 결과를 안고 살아가야만 할 터였다. 쟈코프는 여전히 크리보루츠코에 관해 묻고 있었다. 자네와 반혁명적인 대화를 나눈 게 누구야? 그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과 뿌리는 결국 그거였다. 어쩌면 크리보루츠코 도 체포되어 스탈린에 관해 사샤에게 한 말을 실토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사샤가 먼저 발설했을까 두려워서 그랬을지라도, 그렇게 되면 크리보루츠 코는 정직하게 인정을 한 반면에 사샤는 부정직하게 그를 비호하고 있는 셈이 된다. 자네와 반혁명적인 대화를 나눈 게 누구야? 쟈코프가 옳았다. 반면에 사샤는 옳지 않았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기 회를 포기했다. 그는 죗값을 치러야만 했다. 3주 동안 그는 아무런 조사를 받지 않았다. 어쩌면 조사가 끝났을지도 모른다. 뻔한 사실조차 부인하는 그를 조사해서 뭐하겠는가? 이제 사건이 종결되어, 판결만 남았을 것이다. 아니, 판결은 벌써 내려졌을 것이다. 사샤는 감방 안을 서성거렸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는 누가 와서 자기에게 내려진 판결을 읽어 주었으면 싶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죄 때문에 야기된 모든 것이 끝나 버렸음을 깨닫고 싶었 다. 결정이 아직 내려지지 않아 쟈코프가 다시 한번 그를 신문한다고 해 도, 자백하기에는 너무도 늦었다. 이에 그들 앞에서 모든 걸 숨김으로써 그들을 기만한 것이다. 첫번째 심문 때 모두 털어놓았더라면, 그의 자백은 자발적이고, 성실하며, 정직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제는 강요에 의한 자백밖에는 안 되었다. 불성실하고 부정직한.... 사샤는 아침에 일어나려고도 하지 않고 저녁에 세면장에 가는 것도 포기 했다. 그는 사벨리처럼 변기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밤에 샤워를 하는 것도 싫어졌다. 그가 두 번째로 샤워를 거절하자 간수도 오는 것을 포기했다. 오로지 먹는 것만 원했다. 음식담당이 와서 자기 몫을 나눠주기 만을 그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어머니가 보내 줄 음식만을 눈앞에 떠올렸다. 어머니에게 흰 빵과 고기만 보내 달라고 한 게 후회스러웠다. 당장 크고 맛있는 소시지 하나만 있으면 족할 것 같았다. 적어도 그에겐 그럴 권리가 있었다. 보고 또 봐도 이제 끝난 인생이었다. 반혁명의 낙인 은 결코 지워 버릴 수 없었다. 체르냐프스키가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대체 체르냐프스키는 누구이기에 그와 연락을 취하는 걸까? 그는 이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어떤 공통점을 지니고 있을까? 그는 정직한 공산주의자인 마르크나 부쟈긴이 억울하게 이곳에 갇혀 있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보았 다. 그러나 마르크와 부쟈긴은 이곳에 없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정직 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범죄자였다. 바벨리에게도 이유가 있었고, 체르냐 프스키나 사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크리보루츠코를 동정해서였다. 이제 그는 순간적인 나약함의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그는 분명한 입장을 견지하지 못했다. 그런 만큼 아지쟌과의 일이나 벽신문을 결코 우연한 게 아니었다. 스탈린, 저 위대한 스탈린에 대한 의구심이 우 연한 게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소심했고, 한편으로 자만에 빠졌 다. 모든 걸 자기본위로 해석하려 했다. 그러나 자기본위로 생각해서는 안 될 일도 있으며, 보다 강한 의지로 생각해야 할 일도 있는 법이다. 4월의 엷은 햇빛이 쇠창살 너머 칙칙한 유리를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처음 맞는 봄날, 사샤는 그 따스함을 마음껏 만끽하고 싶었다. 그는 테이 블 위로 올라가, 운동하러 나갈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닫혀 있던 환기창을 열었다. 그러자 곧 감방빗장이 열리더니, 간수가 문간에 나타났다. 닫아! 창문에서 떨어져! 벌방 맛 좀 보고 싶나? 사샤는 환기창을 닫고, 테이블에서 뛰어내렸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소! 사샤는 그때 잠깐이나마 멀리서 떠들썩하게 들려오는 거리의 소리를 들 었다. 전차의 벨소리, 자동차들의 경적소리, 그리고 아이들의 목소리도 들 려왔다. 그는 보도의 아스팔트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그려보 았다. 이제 여자들은 목이 파인 가벼운 옷을 입고 맨팔과 긴 다리를 드러 내고 거리를 활보하겠지. 앞으로 이 모든 모습들을 정말 다시 보게 될까? 아니야! 그는 밖에 있는 봄의 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도 다른 사람 들처럼 살고 싶었다. 작년 봄 사샤는 자동차 차고에서 실습을 했었다. 그 차고에서는 항상 가 솔린 냄새가 풍겼으며 매연이 가득 차 있었다. 지붕의 유리는 대부분 깨져 버려, 함석조각으로 덧대어 놓았다. 그것은 모스크바 식품공장보다 훨씬 이전에 세워진, 모스크바에서 가장 오래 된 차고였다. 거기에는 낡은 포드 형 자동차도 몇 대 있었고, 빵 배달용 1톤짜리 트럭도 있었다. 사샤는 그 차고의 관리자인 안토노프를 좋아했다. 그는 밝은 갈색머리에 안경을 쓴 젊은 사람이었다. 사샤는 그의 기지와 상식, 그리고 지식에 대 한 욕구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낮이나 밤이나 하루 24시간 동안 그곳에 있었다. 책임있는 지위에 오른 그 노동자는, 혁명이 이룩한 성과를 그대로 체득한 사람이었다. 최하층계급에서 올라와 창조적인 과업에 종사하는 사 람들, 그들이야말로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힘이자, 인민이었던 것이다. 그 역시 인민과 함께 있어야 했다. 그의 자리는 전직 운전사인 안토노프, 그 리고 전직 하역인부인 말로프와 함께 있었다. 그들은 잘난 척하거나 사물 에 대해 토론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묵묵히 맡은 일만을 해낼 따름이었 다. 그들은 이것을 아름다운 생활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라나 사샤는 그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 도 그런 삶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들은 그에게 책들을 갖다 주었다. 사샤는 전과는 달리 무관심하게 책 들을 훑어보았다. 기본 전집 3권과 4권, 표지가 없는 오래 된 잡지, 그리고 마분지로 제 본한데다. 책장과 모서리가 다 낡은 소련여행기 라는 문고판 책이 전부였 다. 그 책은 드 몽지 라는 프랑스 극좌파 국회의원이 쓴 것이었다. 중산 층 출신의 그는 1920년대 중반에 소련을 여행하면서 다소 피상적이기는 하 지만 비교적 생생하게 소련을 묘사했다. 도서관 사서가 왜 이 책을 보냈을 까? 사샤는 그것이 궁금했다. 드 몽지는 소련에 대체적으로 공감하고 있었지만, 약간 비판하는 바도 있었다. 특히 형사재판절차에 대해서는 신랄했다. 그 증거로 그는 형법 58 조를 들었다. 사서는 그 조항 때문에 이 책을 보낸 것이 분명했다. 그가 신청했던 형사소송법 은 감옥 내로 들여보낼 수가 없는 책이었다. 사샤는 그 조항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어떤 조항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문제는 58조가 아니었다. 문제는 어느 이름 모를 감옥 내의 사서가 그의 절규의 기도에 응답하여, 인간성과 용기, 그리고 신뢰의 본보기를 주었다 는 사실이었다. 그는 왜 그렇게 했을까? 자신의 의무를 거역한 것일까?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숭고한 의무, 즉 인간적 의무를 성실히 이행 했던 것이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법은 양심의 법과 충돌하는 것을 허락 하지 않았다. 결백한 사람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아무런 방어수단도 없 는 사람들을 무방비 상태로 몰아넣고, 아무런 권리도 없는 사람들의 권리 를 부정하려 드는 자들이야말로 의무를 거역하는 자들이었다. 사샤는 이제 침대 위로 올라가거나, 방안을 서성거리지도 않았다. 자신 의 체포는 진실한 그의 인간성처럼, 순수하고 밝고, 명백한 사건이었다. 그는 흥분이나 충격으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원하던 것을 찾은 것이다. 단지 용기를 잃었던 것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사샤는 아무런 희망도 두려움도 없이 두 번째 심문을 받으러 갔다. 스탈 린을 매운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 인간을 적으로 만들 수 는 없다. 그러나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심문관 쟈코프는 사샤가 한 말의 의미를 무시해 버리고 임의대로 해석해 버렸다. 그래서 사샤는 심문과정을 거부했다. 사샤는 부티르키 형무소에서 빠져나가기를 원했으나, 당과 자신 의 양심에 비추어 전과사실이 없는 깨끗한 몸으로 나가기를 원했다. 심문관 쟈코프는 매우 형식적이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종결시킬 작정이야. 그는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자네에 대한 기록이 여기 있어. 이제 정치적 평가는 자네 한테 달렸어. 벽신문의 발행이 과오였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사샤가 대답했다. 주관적인 과오겠지. 쟈코프가 불쑥 끼여들었다. 그러나 과오에는 항 상 객관적인 원인과 객관적인 결과가 같이 존재하는 법이지. 그렇지 않은 가? 예의 그 해석이 시작되었다. 쟈코프에게는 인간이란 기록을 완성시키기 위한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였고, 그 기록은 선고를 내리는 데 필요한 것 이었다. 자 판크라토프, 그래서 자네 과오의 객관적 이유와 객관적 결과가 뭐 야? 사샤는 쟈코프의 앳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만약 아르바트에서 다 시 만나기만 해봐라.... 쟈코프는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생각해 봐. 만약 그 학교에 건전한 정 치적 환경이 조성돼 있었다면, 자네가 만든 벽신문 따위는 발행될 수 없었 을 거야. 그런데 정치적 환경이 건전하지 못했어. 그것은 밝혀진 사실이 야. 그 반당지하조직의 정체가 드러났고, 모두 체포됐어. 그리고 그들은 여기에 자네와 함께 수감되어 있어. 모든 사실을 다 자백했단 말이야. 공장의 인사부에 있던 서기와 경리들도, 쟈코프와 똑같이 아주 조잡한 방법으로 사실과 숫자를 조작하곤 했다. 쟈코프가 그에게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사샤는 70킬로그램짜리 드럼통을 등에 진 적이 있었고, 나무 밑에 깔린다 해도 죽지 않을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아베르키예프나 모로조프에 게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또한 그들이야말 로 진정한 인민이었다. 당의 진짜 적은 쟈코프 같은 자들이었다. 자넨 너무 순진해, 판크라토프, 자넨 <인민>이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아. 크리보루츠코는 학생들의 불평과 그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야기하기 위해서 기숙사의 완공을 시연시켰어.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자넨 그 같은 종류의 벽신문을 발행할 수도 있었겠지. 자의든 타의든 간에 객관적 으로 볼 때 자넨 크리보루츠코와 그의 일당에 의해 권력의 도구가 되어 버 린 거야. 그들은 자넬 그들의 반혁명적 목적에 이용했던 거야. 자네가 자 네의 과오에 대해 정치적인 평가를 스스로 내리지 않는다면 자넨 이곳에서 인생의 종말을 맞게 될 거야. 그러나 아직은 늦지 않았어. 우리를 믿어 봐! 너희들을 믿으라고.... 아, 그래! 믿고 말고 얼마나 많이 그런 말들을 들어왔던가? 얼마나 많이 그런 말들을 되풀이해 왔던가? 그건 인간적인 말 들이 아니었다. 그건 의식을 행하는 주문이었다. 로즈가체프는 이러한 의 식주의를 아지쟌, 바울린, 그리고 스톨페르에게 적용했다. 이제는 쟈코프 가 그 의식을 다시 행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의식의 제단 위에 놓여 있는 것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결백한 인민들의 삶이었다. 쟈코프는 사샤를 바라보았다. 알아들었어, 판크라토프? 예,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써 내려가자구. 되도록 좀 확실하게 쓰세요. 사샤는 아르바트에서는 한번도 써먹지 않 았던 상대방을 살살 녹이는 말투로 말했다. 그러나 쟈코프의 말을 알아들 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너무도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겁을 주고, 그들의 운명을 주물렀다. 그는 또한 칠면조와도 같이 끝없는 자만에 빠져, 그와 같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이 형무소 안에 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 다. 그들은 온갖 거짓과 의식주의를 꿰뚫어보고, 조만간 종말이 다가오면 목숨을 걸고 인민들을 도와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 다. 물론 그래야겠지. 쟈코프는 엄숙하게 말했다. 사샤가 전에 쓴 자술서를 흘낏 보면서, 쟈코프는 새로 꾸며 혼자 읽어보 고는 큰소리로 사샤에게 읽어 주었다. 저의 행동을 다시 생각해 보고 순수하고도 거짓 없는 평가를 내리고 싶 은 의도에서 지난번 진술서의 추가사항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는 바입니다. 저는 10월혁명 16주년 기념행사장에서 루노츠킨, 코발료프, 폴루쟌 그리고 포즈드냐코바 등과 함께 반당적인 벽신문을 발행한 정치적 과오를 범했음 을 인정합니다. 저는 또한 크리보루츠코를 옹호한 행위도 정치적 과오였음 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과오는 부학장인 크리보루츠코에 의해 조성된 정치 적 혼란에서 야기된 결과였습니다. 반당적 벽신문 발행도 크리보루츠코가 주동한 반당운동의 하나였음을 인정하는 바입니다. 쟈코프는 그 자술서를 사샤에게 넘겨주었다. 판크라토프, 자네 스스로 틀림없는지 확인해 보게. 그리고 서명해. 서명할 수 없습니다. 사샤는 쟈코프를 정면으로 노려보면서 말했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28 아르바트에서의 생활은 전과 다름없었다. 4월의 태양은 창문을 통해 빛 을 가득 쏟아 부었고, 거리를 따뜻이 데워 주었다. 한길 가에는 검게 변한 눈더미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다시 소생하는 따뜻한 흙냄새가 아스팔 트 틈새로 피어 올라왔다. 아이들은 모자와 코트를 벗어 던진 차림으로 거 리의 한쪽에서 축구를 했다. 건축공사장의 벌판이 보였고, 그 위에서 벽돌 공과 페인트공들이 집단장을 하기 위해 부지런히 오갔다. 저녁에는 극장의 불빛이 환하게 밝혀졌다. 아르바트 예술극장, 카니발 극장, 프라그 극장은 변함없이 사람들로 붐볐다. 아르바트와 도로고밀로프의 소녀들이 다시 거리고 나왔다. 플류쉬치하에 서 온 소녀들도 간간이 보였다. 그들은 코트깃을 내리고 화려한 스카프를 풀어 버렸으며 가벼운 신발과 고급 살색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사샤의 아 파트 현관 주위에도 같은 또래의 십대들이 떼지어 있었다. 바랴는 손을 흔 들며 그들 곁을 지나쳤다. 그녀는 붉은 군대 중앙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군 사학교의 졸업식에 서둘러 가고 있는 중이었다. 바랴는 한번도 그런 웅장한 행사에 가본 적이 없었다. 단상에는 전국적 으로 이름이 알려진 지휘관들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부조니를 알아봤다. 그리고 세라핌이 그녀에게 속삭여 준 이름들 중에서 투하체프스키도 기억 해 냈다. 그렇게 멋있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바랴는 회의나 연설, 보고 따 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경우만큼은 흥겨운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화려한 식장, 기라성 같은 지휘관들이 졸업생들에게 들려주는 멋진 무공담, 군인다운 절도 있는 분위기 등은 너무도 인상적이 었다. 선후배간의 벽이 무너져, 졸업생들은 유명한 선배 장교들에게서 자 신들의 미래를 보았고, 선배장교들 또한 졸업생들에게서 자신들의 젊은 시 절을 보았다. 장교들의 아내는 좀 특별하게 보였다. 그들은 남편들의 직업에 수반되는 짐과 좌절과 위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초대된 소녀들까지도 이런 생활양식 에 이미 익숙해 있는 것처럼 격식 있게 행동했다. 바랴는 그들을 주의 깊 게 관찰했다. 그 중에는 아주 아름답게 옷을 입은 애들도 있었다. 전에는 붉은 군대 찬가와 군무가 특별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지만, 그녀는 지금 병 사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과 러시아인 특유의 원기 왕성함에 넋이 빠져 있었다. 군악대가 폭스 트로트와 룸바, 탱고를 연주했다. 아주 세련되고 단순하 며, 활기에 넘치는 이들에 비교해 볼 때 통 넓은 바지에다 촌스러운 타이 를 매고, 지저분한 신발을 신은 민간인 청년들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니나도 오늘은 좀 다르게 행동했다. 그녀는 잔소리를 늘어놓지도 않았 고, 오히려 밝고 쾌활해 보였다. 좀 슬픈 일이 있다면, 곧 떠나게 될 막스 의 청혼을 거절한 것이었다. 세라핌도 극동지역으로 떠날 예정이었지만, 바랴는 그렇게 슬프지 않았 다. 그 날 저녁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우선 학교를 마친 다음에 그에게로 갈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는 서로 편지만 주고받게 될 것이다. 아 파트나 학교의 친구들은 자기가 일년 후면 극동지역에 있는 남편에게 간다 는 사실을 모두 눈치챌 것이다. 친구들 중에서 그녀가 유난히 돋보이리라. 극동지역에서 기다려 줄 애인이 있는 친구는 아무도 없으니까 말이다. 극 장이나 스케이트장에는 혼자 갈 수도 있겠지만, 춤을 추러는 절대로 혼자 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만일 춤을 추러가게 된다면 조예와 동행할 생각이 었다. 남자와 춤을 춘다고 해도 가깝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겠지. 고마워 요, 하지만.... 죄송해요.... 안 돼요.... 혼자가 되면 쓸쓸하겠지만, 곧 극동지역으로 떠날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많은 관심을 끌게 될 것이다. 바랴는 사샤의 일로 여전히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아 직 사샤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극동지역에서는 세라핌이 그녀를 기다리도록 해놓고, 이곳 모스크바에서는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와 사샤가 그녀를 필요로 하게끔 나들어 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스스로 생각 해 봐도 더없이 재미있는 일이었다. 바랴는 무척 행복했다. 사람들 눈에 바랴와 세라핌은 춤을 잘 추는 것처 럼 보였다. 고급장교와 그 아내들까지도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녀는 멋있는 투하체프스키가 서 있는 곳으로 가능한 한 바짝 다가서려고 했다. 막스는 니나와 짝이 되었다. 그의 둥그런 들창코 얼굴이 오늘따라 인자 하게 보였다. 그의 친구들이 니나에게 춤을 청하면 막스는 사람 좋게 웃으 며, 구석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져, 아주 튼튼하게 생긴 그는, 그런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완력을 사용하는 일에 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는 춤을 추다가 남의 발을 밟거나, 뭘 깨뜨릴까 봐 항상 조마조마했다. 증기기관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 결국 그는 엘리베 이터 안내원인 아내와 네 아이를 남겨 두고 알코올중독으로 죽었다. 막스 는 맏이였다. 어린 시절의 빈곤은 그로 하여금 절약이 몸에 배게 했다. 학 교 친구들은 그런 막스를 구두쇠라고 놀려댔다. 그는 항상 인조가죽 케이 스에 빗을 넣어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지갑에는 지폐를, 동전지갑에는 잔 돈을 넣고 다녔다. 연필은 심을 보호하도록 끝에 금속 뚜껑을 씌웠고, 주 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노트를 몇 년 동안이나 가지고 다녔다. 그는 오래 가는 물건들을 좋아했다. 음식은 간단하지만 든든한 것을 즐겼다. 먹는 것 에 많은 돈을 써 본 적이 없었으며, 그럴 경우에 차라리 굶는 걸 택했다. 조심스럽고 인색한 막스에게는 학교의 모든 허드렛일이 맡겨졌다. 회의 록을 작성하거나 회비를 거두어들이고, 지역위원회의 지시사항을 철해두는 일은 늘 그가 도맡았다. 그리고 보고서 작성에서부터 짐 운반, 순회확인업 무, 공고문 작성, 선언문 게시, 기념일 현수막 준비와 게양, 극장 단체 관 람권 구입, 서클 및 세미나에서 접수를 보는 일 등 모든 게 거의 차지였 다. 그보다 나은 일에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나 어쨌든 그렇게 되 고 말았다. 사람들은 으레 그러려니 했다. 동료들보다 한두 살 나이가 많은 그는 동료들이 하찮은 일로 싸우는 것 을 보면 얼른 주제를 바꾸거나 우스갯소리를 던져 화해시키는 능력을 가지 고 있었다. 그는 농부들처럼 눈치가 빨라,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아첨을 떨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신념을 굽히거나 우정을 손상시키지는 않았다. 막스는 의무노동을 마친 후 군사학교에 들어갔다. 군대는 그에게 재정적 인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그는 나약하고 쇠진한 어머니와 가족들을 돌볼 수 있게 되었다. 젊고 튼튼하고 유식한 장교로서 그는 보람있는 군인 의 길을 발견했다.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최전방의 부대야말로 그가 가야 할 곳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를 떠난다는 것은 여전히 슬픈 일이었다. 니나, 사샤, 레나, 바짐, 이런 친구들을 뒤에 남겨 두고 떠날 생각을 하 니, 막스는 여간 슬프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둡고 축축한 지하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삶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어렸을 적에 막스는 어머니 대신 가끔 계단을 청소하곤 했다. 그럴 때면 니나가 그를 도왔다. 그것은 그가 도움을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천한 일이라도 그들은 능히 할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바로 그런 것이 굳건한 동지애를 가진 콤소몰 회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막스는 그런 모습들을 보며, 그가 읽은 어느 책에서보 다도 더 소중한 윤리의식을 배웠다. 그런데 9학년 때인가 엄청난 사건이 생겼다. <모스크바 콤소몰>이란 비행기를 제작하기 위해 모금한 돈을 막스 가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막스의 아버지가 훔쳐 술을 마셔 버렸던 것이 다. 합해서 30루불 가까이 됐었는데, 당시에는 적지 않은 액수였다. 막스 는 죽어 버리고만 싶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30루불을 만들어 내며, 또 친 구들한테는 어떻게 말을 한 텐가? 니나는 그가 사색이 된 걸 알고 자초지 종을 캐물었다. 그리고는 즉시 사샤 판크라토프에게 가서 얘기했다. 이봐! 사샤가 그에게 말했다. 넌 생명을 너무 우습게 아는구나!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어머니와 마르크 삼촌에게서 각각 15루블씩 얻어 내 그에게 주었다. 이제 그런 친구는 다시 사귀지 못할 것이다. 사샤는 그를 구해 주었지 만, 그는 사샤를 위해 무슨 일을 했던가? 아파트 뒷마당에서 술래잡기를 하던 시절부터 막스는 니나를 좋아했다. 학교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남들보다 조숙했고, 결단력이 있 는 소녀였다. 그는 그녀의 엉뚱함, 까다로운 성미, 고집, 무기력까지 좋아 했다. 그녀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 었다. 그녀는 그걸 모르고 있었다. 막스는 세라핌을 바랴와 짝지어 주려고 일부러 그녀의 집에 데리고 갔다. 세라핌은 총명한 데다 용모가 준수한 괜 찮은 소년이었다. 그라면 바랴가 독립할 때까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니나의 변명도 설득력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니나의 생각은 좀 달랐다. 장교란 직업이 매력적인 것은 분명하 지만, 그들은 결국 정치적으로 모든 걸 생각하며, 전략가이자 공적인 인간 이었다. 막스는 그들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경력은 연병장에서 붉 은 군대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게 될 것이다. 저기 서서 기다리는 모습 좀 봐! 떡 벌어진 어깨, 불그스레한 뺨, 정성스럽게 빗어 넘긴 갈색 머릿결, 반짝거리는 단추와 부츠, 덜거덕거리는 가죽벨트, 그리고 춤출 때 바닥에 닿아 쇳소리를 내는, 부츠에 박힌 정.... 그는 노병으로 일생을 마치게 되 겠지. 안타까운 일이야! 그는 더 멀리 날 수도 있을 텐데. 전쟁이 나면 모 두 나가 싸워야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동안에는 일을 하며 살아가야 되는 게 아닐까. 그녀는 막스가 군사학교에 들어갈 때 이런 얘기를 했었지만, 그는 귀담 아 듣지 않았다. 물론 자기 운명을 결정할 권리는 그에게 있었다. 막스와 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며, 또 모스크바를 떠나지도 않겠다고 니나는 굳게 마음먹었다. 작고 뚱뚱한 고류노프가 주연을 맡은 햄릿 이 바흐탄고프에서 공연되고 있었다. 유리는 바짐 마라세비치에게 전화를 걸어 표를 사 달라고 부탁하 고, 저녁에 아파트로 찾아가겠다고 덧붙였다. 마라세비치 교수는 모스크바 의 유명한 의사로서, 한 달에 한번씩 가가린 가에 있는 중앙병원으로 출근 했다. 그 병원은 과학자들을 위해 만든 것으로, 그의 진찰을 한번 받으려 면 6개월이나 앞서 예약해야 했다. 피로고프 가에 있는 병원은 의과대학 부설로서, 그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마라세비치 교수는 가까운 친구들만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스타로코뉴 셰니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는 피아니스트 이굼노프, 무대 연출가 스타니슬 라브스키, 작곡가 프로코피에프, 가수 네즈다노바, 발레리나 겔체르, 배우 카찰로프, 배우 겸 극작가 숨바토프 유진, 감독 메예르홀드, 그리고 인민 위원 루나찰스키 등 유명인사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모스크바를 여행하는 유럽의 유명 예술가나 인기 있는 연주자들도 거의 빠짐없이 우아하면서도 좀 어수선한 그의 아파트에 초대되었다. 초대된 손님들은 마라세비치 교수의 예쁜 딸이 영접을 했다. 그녀는 정 교하게 구워 낸 유리그릇들을 내오고, 탁자에는 풀먹인 린넨 테이블보를 깔았다. 가끔 일을 끝낸 젊은 배우들이 느닷없이 방문하여 송아지 고기와 연분홍빛 연어 요리를 열심히 먹어대곤 했다. 그들은 즉흥연기나 단막극 등으로 자리의 흥을 돋우었다. 바짐은 그의 아버지도 인정해 준 재치를 섞어 가며 즉석에서 그들의 연기를 평했다. 바 짐은 대학에서 예술사 학위를 받았고, 강의도 몇 번 한 적이 있으며, 그 분야와 관련하여 여행도 했었다. 요즘은 연극 비평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오로지 그루지아의 보르조미 광천수만 마시는 마라세비치 교수는 아버지 나 자기가 병원에서 겪은 한두 가지 일을 재미있는 일화로 들려주곤 했다. 그리고는 자정이 되기 전에 일어나면서, 자기는 직업상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게 좋다는 말고 함께 손님들에게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비카도 또한 영화나 연극 쪽으로의 진출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잘 알 려진 배우, 장래가 촉망되는 감독, 또는 세간에 자주 오르내리는 언론인 등 숱한 사람들과의 연예사건을 빼고 나면 그녀에겐 별로 가진 게 없었다. 그녀의 연애사건은 항상 꽃, 편지, 레스토랑, 택시와 같은 고상한 수준에 서 시작되어, 하찮은 일로 싸우고 난 뒤 전화에 대고 한바탕 욕지거리를 퍼붓는 것으로 끝이 났다. 단지 유리 샤로크와의 사건만은 간단하게 시작되어 간단하게 끝이 났다. 언젠가 아르바트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들은 봄볕을 받으며 함께 산책했다. 유리가 말했다. 내가 사는 모습 좀 한번 볼래? 그녀는 유리가 무슨 꿍꿍이속을 지니고 있는지 빤히 알고 있었다. 그런 의례적인 초대가 그녀에게 자동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그녀는 또한 레나와 의 보이지 않는 경쟁심리 때문에도 자극을 받았다. 그녀는 레나와 유리가 이제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유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보 는 일은 말이나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들은 마치 몇 년 동안 사귄 연인이 나 다름없었다. 그녀를 쫓아다닌, 그리고 지금도 쫓아다니고 있는 치들과 비교해 볼 때, 유리는 그녀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 의 방과 초라한 아파트, 그리고 다림질하는 냄새로부터 그녀는 유리의 아 버지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차렸다. 걱정스러운 점은 때가 되어 그녀가 유리를 걷어차게 되면 유리가 몹시 당황하지 않을까 몰라서였다. 그녀는 불시에 친구 집에 찾아가는 것처럼, 사귀던 남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차 버리곤 했다. 그러나 유리는 재단사의 아들답게 아주 침착했다. 하지만 그가 약삭빠르게 처신한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아주 매몰차게 그의 곁을 떠났지만, 그 또한 그녀를 차갑고 머리가 둔한 여자로 보고 있었다. 유리는 그녀를 레나와 비교해 보고 그걸 알았 다. 어떻게 낯선 남자의 침대에 그리도 태연하게 뛰어들 수 있단 말인가? 방탕한 모든 여자들에게서 자기 아내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쁘띠 부르조아 에 대한 분노가 그의 마음속에서 끓어올랐다. 유리는 전화했던 대로 바짐의 아파트에 들렀다. 바짐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유리는 비카의 방에서 그녀 와 함께 바짐을 기다렸다. 그녀는 옷을 반쯤 걸친 채, 침대에 누워 외국 잡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리는 그녀의 겉에 앉아 함께 페이지를 넘겼 다. 남성 및 여성 패션의 사진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잡담을 나누었다. 비카는 그의 분별 있는 행동과 신사다움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래서 뭔가 보답을 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유리가 다른 잡지를 잡으려는 순간 손과 손이 맞닿았다. 그녀는 유리의 눈을 들여다보며 부드 럽게 속삭였다. 날 갖고 싶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했다. 기다려, 문을 걸고 올께. 바짐이 돌아왔을 때, 보답의 행위는 막 끝난 참이었다. 유리는 안락의자 에 앉아 있었고, 비카는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녀는 바흐탄고프 극장 의 유명한 배우 하나가 곧 올 거라고 말했다. 그는 정말 대중들의 우상이 었다. 유리는 중재 란 연극에서 마지막으로 그를 봤었다. 그 친구와 한번 사귀어 봐. 바짐이 말했다. 유리, 이리 와서 같이 뭘 좀 먹지 않을래? 그들은 샤로크네 아파트만큼이나 넓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바짐은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그는 두꺼운 입술과 작은 눈, 그리고 투박 한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말을 할 때에는 다소 지적인 억양을 사 용했는데, 그것이 용모와 묘한 대조를 이뤘다. 그는 빵에 버터를 두껍게 발라 스프와 함께 먹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사법권과 법학을 혼동하고 있어. 희귀성과 가치, 판례와 소 송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아직은 신인이야. 네가 좋아하는 식으 로 부르면 특별 작업대에 새로 들어온 친구쯤 되겠지. 그 친구의 연기는 주제나 미래 영웅으로서의 이미지에 잘 어울리고 있어. 하지만 우린 정말 미래를 사 분의 일 파운드의 버터와 바꿀 수 있을까? 그는 버터 접시를 밀어 놓았다. 결국 정확히 그만큼의 버터 때문에 신음하는 사람들.... 유리는 참을성 있게 미래의 영웅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었다. 바짐의 얘 기는 그로서는 완전히 낯선 세계에 대한 지식을 넓혀 주었다. 얼마 전까지 만 해도 바짐은 악취미를 비웃고, 예술적인 재능을 칭찬하는 등 정반대 되 는 얘기를 했었다. 바짐은 바람이 부는 대로 자기의 노선을 바꾸는 데 뛰 어난 소질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항상 강한 사람들한테 가서 붙었다. 초 등학교 시절에는 사샤 판크라토프에 붙었고, 대학시절에는 또 다른 사람, 그리고 지금은 시의 유치함을 비웃는 내용의 글을 쓰고 있는 유명한 비평 가한테 붙어 있었다. 하지만 유리는 바짐의 일관되지 못한 태도를 결코 꼬 집지 않았다. 유리는 배우들이나, 재미있고 근심 걱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저명인사 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마라세비치네 집을 좋아했다. 남아 돌아갈 정도의 명성을 지니고 있는 이들의 대화 속에는 안일하면서도 분명히 냉소적인 무 엇이 있었다. 어쩌면 그런 명성 자체가 노력도 없이 우연히 굴러 들어왔거 나 교묘한 처신, 또는 부적절한 방법에 의해 획득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마라세비치 교수도 좋아했다. 깨끗이 다듬은 얼굴과 멋있는 턱수염 은 특권층의 분위기에 썩 잘 어울렸다. 유리는 거의 매일 바짐을 만나 극장에 함께 가곤 했다. 때로 바짐이나 바짐의 집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초대권을 얻으면 혼자 극장게 가기도 했 다. 아주 특별하고도 멋진 한때였다. 유리 샤로크는 1934년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검찰직 근무에 대한 건은 아직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러 나 말코바는 곧 결정이 날 거라고 약속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유리는 자유 로운 생활을 즐겼다. 아무런 근심걱정도 없이 최대한 충만하고 재미있는 나날을 보냈다. 가끔 레나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극장에 들어가면 혹시 그녀를 만날까 하는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면서 객석을 둘러보곤 했 다. 레나는 앓고 난 이후 극장에 한번도 가지 않았다. 극장은커녕 집밖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지난번 사샤를 돕는 문제로 친구들을 만난 뒤로는 아 무한테도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게라 트레챠크가 찾아왔다. 그녀도 대사의 딸 로서, 레나와는 어릴 적부터 친구사이였다. 그들 두 가족이 런던이나 파 리, 혹은 베를린에 함께 있을 때는 종종 만났지만, 모스크바에서는 사실상 접촉이 없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작고 예쁜 게라는 재치가 많아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도 그럴 듯하게 얘기하는 솜씨가 대단했다. 레나는 그녀가 늘어놓는 얘기 를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들이 남부 웨일즈 지방을 여행하며 카 디프의 싸구려 호텔에서 머물던 때를 회상했다. 그곳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축구선수들이 열네 살이면 결혼이 허용되는 어느 도시로 달아나자고 제의 해 왔다. 레나와 게라는 그때 열다섯 살이었다. 몽텐느블로의 왕궁에도 갔 었다. 나폴레옹의 침대를 보고 있을 때 여자 안내원은 나폴레옹의 키가 150센티미터밖에 안 됐다고 알려주었다. 게라가 깜짝 놀라 158센티미터라 고 정정했다. 그러나 안내원은 화를 내며 자기 남편의 키도 150센티미터이 며, 나폴레옹 황제의 키와 같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고 말했 다. 어찌된 영문인지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보다 훨씬 더 우스웠다. 그들 은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레나는 게라와 함께 보내는 저녁이 몹시 즐거웠 다. 그녀가 떠나는 게라를 껴안고 키스를 했다. 그리고는 슬프게 말했다. 날 잊지 마.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29 저녁 여덟 시였다. 바랴, 니나, 그리고 막스가 붉은 군대 중앙회관에서 춤을 추고 있었고, 유리는 바짐 마라세비치와 식사를 하고 있었으며, 게라 트레차크가 레나 부쟈기나를 방문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에게 전화가 왔는데, 내용은 다음날 아침 10시까지 부티루 키 형무소로 출두하라는 것이었다. 그곳에 가면 그녀는 아들인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판크라토프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따뜻한 옷가지와 돈과 음 식물을 준비했다. 전화를 거는 사람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차분했다. 그 남 자의 목소리는 항상 똑같은 말만하고 지냈던 것처럼 간결하고 분명했다. 그는 전달사항을 말한 우 어떤 질문도 기다리지 않은 채로 곧장 전화를 끊 어 버렸다.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그가 뭔가를 빠뜨린 것은 아닌지, 혹시 중요한 것을 잊은 것은 아닌지, 그녀가 행동해야 할 필수사항들을 정확하게 전달 해 주었는지 걱정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자기가 무엇을 잊어버리지는 않 았는지, 또는 혼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되어, 그가 말했던 것을 모두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내일 10시, 부티르키, 아들을 만나고, 따뜻한 옷, 음식물, 그리고 뭔가가 더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오! 하느님, 그녀 는 뭔가를 잊어버린 것이었다.... 아! 맞아. 돈, 여행을 위한 돈이야. 확 실하게 해두기 위해, 그녀는 종이 조각에 내용을 적어 두었다. 10시, 만 남, 옷, 음식, 돈. 돈과 음식은 유배를 의미했고, 따뜻한 옷은 북쪽이나 시베리아를 의미했다. 단 하룻밤 동안에 모든 일을 하느라고, 그녀는 슬퍼하거나 기뻐할 겨를 이 없었다. 이런 일을 각오는 했었지만, 그녀는 좀더 서둘러 챙기지 못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형이 확정되기도 전에 미리 서둘러 준 비해 놓는 것도 재수 없는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했었다. 사샤에게는 겨울 외투와 방한용 귀마개가 달린 모다, 스웨터, 그리고 따 뜻한 목도리는 있었지만 펠트부츠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4월이니, 사샤 가 어디로 보내지든,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겨울에 대비할 필 요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그녀가 후에라도 그에게 부쳐 줄 수 있는 것들이 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가죽부츠였다. 그곳은 진흙과 녹기 시작한 눈으로 진창이었기 때문에, 그의 신발은 하루를 견디기가 힘들었 다. 그는 부츠를 꼭 가져야만 했다. 그러나 사샤에게는 그게 없었다.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쿠폰만 있 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되겠지만 그녀에게는 가지고 있는 쿠폰이 없었다. 중고가게에 가서라도 샀으면 좋겠지만 중고 가게 또한 모두 문이 닫혔다. 그러다가 그녀는 베라언니의 집에서 사샤의 발에는 좀 클 것 같은, 튼튼 하고 투박하게 생긴 부츠를 본 기억이 났다. 값이 얼마나 나가든 간에 베 라에게 새것을 사주면 되겠지만, 문제는 당장 사샤에게 갖다 주어야 한다 는 것이었다. 그녀는 베라에게 전화를 했지만 베라는 남편과 나가 집에 없었고, 모레 까지도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운이 없었다. 그녀의 동생 폴리나에게는 전화가 없었다. 그러나 옆집에 전화가 한 대 있었다.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는 폴리나가 이웃과 친하게 지낼 때에는 번 호를 기억해 두었다가 전화를 걸곤 했었지만, 이제는 이웃과 대화를 끊은 지 몇 년이 되었고, 폴리나도 그곳으로 더 이상 전화하지 말라고 그녀에게 부탁했었다. 그러나 이웃이 전화를 바꿔 주지 않을 것이고 게다가 그녀를 무례하게 여길 것이라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화를 걸었다. 귀에 거슬리는 다혈질의 남자 목소리가 받았다. 저.... 괴롭혀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급한 일이라서 그러는데요. 폴리나 알렉산드로브나를 부러 전화 좀 바꿔 주실 수 있겠습니까?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말했다. 폴리나 알렉산드로브나? 댁의 이웃인 이십육 호에 사는데요. 저는 언니 되는 사람이에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나 그는 전화를 끊지 않고 다른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누굴 바꿔 드릴까요?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댁의 이웃에 사는 폴리나 알렉산드로브나의 언 닌데요. 폐를 끼쳐 드려 죄송하지만, 아주 급한 일이라서 그럽니다. 수고 스럽겠지만 제 동생을 좀 바꿔 주시겠어요? 알았어요. 그 여자는 별로 달갑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폴리나가 가쁜 숨을 내쉬면서 사샤에 대한 좋지 않은 소식일 거라고 추측하며 전화를 받았다. 그 애가 내일 유배지로 떠난대. 네가 베라의 집에 가서 부츠를 가져 와! 어쩌면 좋아. 폴리나는 울먹였다. 이고레크는 열이 있고, 콜랴는 열 한 시 이후에나 오는데 누가 여기에 남아 있지? 나는 콜랴가 들어온 다음 에야 갈 수 있을 텐데. 그러면 베라에게 가기엔 너무 늦지 않을까? 어쨌든 이리 와서 짐 좀 꾸리는 걸 도와 다오 라고 소피야 알렉산드로 브나는 말했다. 부츠는 내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께. 내가 뭘 가져가야 되지? 아무 것도, 내가 다 준비했어. 그녀는 밤에 길을 잘 찾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베라의 집에 가야 했다. 그곳은 새로 생긴 지역이라서 큰길은 없고 좁은 골목길만 있었다. 아무도 그 길의 이름을 알지 못했고, 어떤 특별한 특징도 없었다. 게다가 그 근처를 돌아다니는 주말 여행자들도 없었기 때문에 물어 보기도 힘들었 다. 그럼에도 그녀는 반드시 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곳에 가더라도 이 늦 은 밤중에 누가 가게에 가려하겠는가? 그녀는 바랴에게 전화를 했지만, 바랴도 니나도 집에 없었다. 그러면 밀 리차 페트로브나에게 부탁해야 하나? 하지만 그녀는 갈 수가 없었다. 그녀 는 심장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우유 한 통도 그녀는 못 들었다. 그리고 빵, 비스킷, 설탕, 농축 우유, 레몬 등, 많은 것을 사야 했다. 그에겐 비 타민도 필요했다. 그리고 훈연 소세지, 치즈, 베이컨.... 그녀는 모든 것을 써 가지고, 마하일 유레비치의 아파트 문을 두드렸다. 그는 가운을 입고서 책상에 가대고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매우 부담스럽겠지만, 일을 해줄 사람은 그 이외에 아무도 없다고 그녀 는 말했다. 그러면서 목록과 돈을 내 놓았다. 훈연 소세지가 없으면 반쯤 훈연된 것도 좋고, 이런 날씨에도 상하지 않는 생선 몇 마리 - 소금에 너 무 절이지 않은 것으로 - 를 달라고 했다. 마하일 유레비치는 코안경 너머 로 언짢은 기색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늦은 밤에 마을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또 어떻게 돌아오려고 하지 요? 라고 그가 말했다. 밤차를 타려고요. 한 시 몇 분에 떠나던가.... 전차는 다니지 않을 겁니다. 그가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해보겠어요.... 당신이 가게에 가세요. 제가 당신 언니 집으로 갈게요. 그렇지만 미하일 유레비치 씨. 그곳은 삼십 마일이나 되는 먼길이에요. 그리고 역에서 이십 분이나 더 걸리고요. 그 마을은 가로등도 없고, 적당 한 도로나 인도도 없어요. 온통 진흙탕 투성이고요. 당신은 정말 갈 수 없 을 거예요. 그래요. 너무 무리한 요구예요. 제가 옷을 입는 동안, 주소를 적어 놓고, 약도나 그려보세요. 그가 말 했다. 그녀는 약도를 그리고, 가능한 한 자세히 설명을 했다. 역 바로 옆에 바 람을 막느라고 널빤지를 세워 놓은 가게가 하나 있다. 중요한 것은 상점에 서 오른쪽 골목길을 찾는 일이다. 그런 후에, <제 3의 녹색거리>라고 불리 는, 왼쪽에서 세번째 길로 가야 한다. 그 거리는 여름에 아이들이 표지판 을 떼어 버려, 표시가 안 되어 있다. 베라의 집은 65번지인데, 대문에 씌 어 있다. 앞쪽을 따라가면, 담을 찾기가 쉬울 것이다. 첫 번째에 튼튼한 담장이 있고, 좀더 앞으로 가다 보면 또 다른 튼튼한 담장이 있는데, 그 사이에 베라의 집 팻말이 있었다. 그리고 꼭 명심해야 할 것은 상점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정확한 골목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드러운 털모자를 쓴, 미하일 유레비치는 눈썹을 찌푸린 채 구식 코안 경을 쓰고, 매우 근엄한 얼굴로 신발을 신었다. 그는 더러운 곳을 터벅터 벅 걸어야 할 일과 황폐한 그 마을을 생각했다. 그는 밤새도록 헤매고, 그 다음날엔 다시 일터에 나가야 할 것이다. 그녀는 시계를 힐끗 보았다. 벌써 9시 30분이었다. 야간 상점은 10시에 문을 닫는다. 전차는 앞뒤칸이 모두 만원이었지만, 그녀는 뒤칸 발판에 간신히 올라섰 다. 벌금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차에서 내리게 하지 않았고, 벌금도 부과하지 않았다. 그녀는 차비를 내고 내내 발판에 매달려 갔다. 그녀는 가게에 다녀와서 해야 할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 다. 그래, 바로 여행용 가방이었다. 그녀는 가방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심지어는 자물쇠가 수리되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 여행용 가방 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었다. 자물쇠는 사용 가능하게 되어 있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사샤는 소매치기 범인들과 함께 여행하게 될 것이기 때문 이다. 사샤와 같이 유배된 범인들 패거리가 그를 때리고 강탈하며, 해꼬지할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자신이 아들이 커다란 모욕을 받게 될 것만 같아 서글퍼졌다. 그는 권리를 잃고 추방될 것이고 박해받은 자들 중 에서도 특히 심한 박해를 받게 될 것이었다. 모스크바는 무한한 공간을 지닌 현실 같지 않은 상상의 세계같이 보였 다. 거리, 광장, 불빛, 상점의 청문들, 그리고 자동차들, 전차, 어디를 가 나 움직이고 달리는 모든 것들, 게다가 모든 것이 죽음의 가면을 쓰고 있 었고, 밀랍 인형이나 장식인형이 나오는 악몽처럼, 혹은 전차의 유백색 불 빛으로 목욕하는 것처럼 모스크바는 모든 것이 현실성이 없고, 부자연스러 우며 분명하지 않은 도시였다. 그녀는 오호트니 가에서 내렸다. 열시 십오분 전이었다. 전차가 서는 순 간, 그녀는 재빨리 상점을 바라보았다. 아직 열려 있었다! 그녀는 숨가쁠 정도로 빠르게 걸어갔지만, 상점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내쫓기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1~2분 밖에 안 늦었다고 소리치며 호소하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별 수가 없었다. 한 점원이 문에서 버티 고 서 있었다.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도 밀고 들어가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녀는 시끄 럽게 떠드는 작은 무리 속에 섞였다. 그러다가 빽빽하던 사람들이 줄어들 고 이젠 몇몇 사람들만 남았다. 가게 안의 불도 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 은 서서히 떠나기 시작했다. 오직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만 남았다. 문이 열려 있는 동안, 그녀는 계 속 자기를 들어가게 해달라고 점원에게 애걸했다. 뚱뚱하고, 얼굴이 벌겋고, 동상에 걸린 듯한 모습의 여자 점원이 거칠게 문을 꽝하고 닫으며, 아주머니, 저리 좀 비켜요! 라고 말했다. 부탁해요. 나를 안으로 좀 들어가게 해줘요. 떠들썩한 십대 아이들이 가게밖에 모여들더니, 그들 중 한 명이 큰소리 로 지껄였다. 그 늙은 소녀 부탁대로 들여보내! 그리고는 낄낄거리며, 오호트니가 쪽으로 급히 달아났다. 부탁해요. 난 별로 늦지 않았단 말예요. 그녀는 문이 다시 열리자 간 청하며 말했다. 점원은 들은 척도 안 했다. 끈질긴 고객에겐 그녀도 이력이 나 있었다. 문에 자물쇠가 정말로 채워질 때까지 그녀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밤마다 있 었던 것이다.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문을 열려고 하자 그녀는 소리를 빽 질렀다. 밀지 말아요! 문에서 떨어져요. 청소부 여자들은 이미 새로 톱밥을 뿌리며 바닥을 쓸고 있었다. 그리고 점원들도 선반을 치우며 퇴근을 서두르고 있었다.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그대로 그냥 있었다. 뚱뚱한 점원은 마지막 고객을 보냄으로써 자기의 일을 모두 마쳤다. 쇠 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마침내 문을 밀어젖히고 들어왔다. 어디 가는 거예요? 그 뚱뚱한 점원이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나는 가지 않을 거예요.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경찰을 부르겠어요. 점원이 경고했다. 내 아들 때문이에요. 지금 감옥에 있는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겨울 날 길거리에서 뜨거운 파이와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의 얼굴 같은 점원의 거친 얼굴을 들여야보았다. 그 아인 내일 유배지로 떠날 거예요. 나는 그 애를 위해 짐을 꾸려야만 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그 이야긴 사람들이 흔히 꾸며내는 얘기예 요. 그들은 뭐든지 닥치는 대로 거짓말을 하죠. 당신도 알다시피 우린 집 에 가야 해요.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점원들도 벌써 외투를 입고 가방을 들었다. 그때 그 뚱뚱한 점원이 가게 저쪽 끝에다 대고 커다랗게 소리쳤다. 미 헤바, 이분을 모셔라! 폴리나가 도착한 한참 뒤에야 베라와 미하일 유레비치가 부츠를 가지고 왔다. 그 부츠는 한쪽이 너무 크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거라도 좋았다. 고급은 아니지만 매일 일을 하기에는 괜찮아. 베라가 말했다. 거기에 다 모직 양말만 신으면 걱정 없을 거야. 베라는 부츠뿐만 아니라, 길이를 조정할 수 있는 넓은 어깨걸이 가죽끈 이 달린 배낭도 가져왔다. 이 배낭에는 음식물을 담고, 여행용 가방에는 사샤의 물건들을 담으면 돼. 모스크바 근교에서 자란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실용적인 기질을 가 지고 있는 베라는 자매들 중에서 가장 활기차고 일처리가 기민했다. 그녀 의 남편은 사냥과 낚시를 즐겼고, 아이들은 휴일에는 스키를 타러 갔다. 그들은 과수원과 야채 농장을 가꾸고 있었다. 넌 너무 착해. 남편과 헤 어지라며, 그녀는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베라는 동생들을 감싸주며 파벨 니콜라예비치와 곧잘 다투었다. 그의 말을 도저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판크라토프를 찾아오는 일도 그만두었다. 베라는 능수능란하게 혼자서 짐을 꾸렸다. 그녀는 칼과 포크, 그리고 스 푼과 컵이 그에게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피야는 그것들을 꼼꼼히 훑 어보았다. 거기에는 면도기까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죄수의 짐을 꾸리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번에는 여행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좋 아한 것이면 무엇이든 넣어주고 싶었다. 지금은 그에게 너무 많은 돈을 주지 마. 베라가 말했다. 도둑맞을 수도 있어. 후에 그 애가 있는 곳으로 보내 주는 게 더 나을 거야. 사샤를 만나면 이렇게 말해.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전보를 치라 고.... 그러면 그때 돈을 보내, 너무 걱정하지 마, 그 애는 아마 잘해 낼 거야. 아직 젊으니까. 그녀를 안심시킨 것은 베라의 말보다도 베라의 정력과 능력이었다. 그것 들은 인생 전반에 대한 것이었고, 또한 사샤의 삶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었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 제 1 부 30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의 집에 아직도 불이 켜 있는 것을 니나는 알아채 지 못했다. 꼼꼼한 바랴는 그걸 알았지만,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 냐하면, 그녀가 바랴에게 말했던 것처럼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가 가끔 밤 새도록 불을 켜 놓은 채 잠을 잤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랴의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내일 저녁 그녀와 니나는 막스와 세라핌을 전송하려 역에 갈 것이었다. 붉은 군대 중앙회관에서의 무도회는 새벽 2시까지 계속 되었다. 대부분 의 사람들이 마지막 전차를 타기 위해 떠났고, 니나도 그때 떠나려고 했지 만, 바랴와 세라핌은 더 있다 가자고 그녀를 설득했다. 막스는 그냥 가만 히 웃고만 있었다. 결국, 니나는 소수였고, 그래서 계속 남았다. 그들은 어둡고 추운 모스크바의 밤거리를 걸어 집으로 행했다. 바랴는 덧신도 신지 않은 채 단지 얇은 무명 드레스만 입고 있었다. 세라핌은 그 녀의 머리에 그의 모자를 씌우고, 군대에서 입는 두꺼운 외투를 입혀 주었 다. 그녀는 가로등 아래에 멈춰서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모 자가 이마 앞으로 기울어져 있었지만, 그녀는 이 모습이 자신에게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주 말쑥하고 예쁜 군인 같아 보였다. 세라 핌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막스의 뒤쪽에서 걷고 있었다. 막스와 니나가 모퉁이를 돌자 그들은 멈춰서 키스를 했다. 세라핌은 그녀의 입술이 아플 만큼 정열적으로 키스를 했다. 바랴는 이제까지 그렇게 황홀한 키스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기분은 지금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오히 려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진실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세 라핌이 열정적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니나는 왜 그들이 머뭇거렸는지 알았지만, 모르는 체하고 있었다. 그리 고 집에 도착했을 때, 바랴에게 뭐라고 그러지도 않았다. 단지 내일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일찍 일어나야 하므로, 빨리 침대로 가서 불을 끄라고 말했 을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니나는 바랴의 선생님 앞으로 쪽지를 써 탁자에 놓았다. 오늘 바랴 이바노바가 집안 사정으로 조퇴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물론 집안 사정이란 막스와 세라핌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랴는 학교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역에서 가장 아름 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무도회에서 그녀가 보았던 잘 차려입은 예쁜 소녀들을 포함하여, 젊은 장교들을 전송하기 위 해 많은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그녀는 그들에게 뒤질 수가 없었다. 그녀 는 성숙하고 진지하게 보이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미래의 남 편과 동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검은 옷을 입고 싶지 않았지만 근 엄하면서도 눈에 띄는 옷을 입어야 했다. 머리도 하고 화장도 해야 했으므 로, 그녀가 아무리 학교에서 일찍 떠난다 할지라도, 충분하지 못할 것 같 았다. 그녀는 빨리 니나의 점심을 준비하고, 교과서를 챙겨 조예에게로 달려갔 다. 조예도 역시 학교에 가지 않고, 바랴의 머리와 속눈썹을 만져 주기 위해 집에 있었다. 그녀는 바랴에게 최근에 유행하는 쇠 장식이 달린 부츠를 빌 려주었고, 게다가 그녀 어머니의 소중한 물개가죽 코트까지 빌려주었다. 그 옷은 그녀가 가끔 입고 나오는 것이 허락되어 있었다. 바랴가 그 옷을 입었을 때, 조예는 그녀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성숙해 보인다고 말했다. 또 한 물개가죽 코트와, 최신 유행의 부츠와 조예의 어머니 것처럼 보이는 흰 솜털 스카프로 차려입은 그녀가 매우 돋보일 거라고 말했다. 바랴는 마침내 다섯 시에 모든 준비를 끝내고, 니나에게 전화를 했다. 전차역에서 만나. 지금 어디에서 전화를 하니? 학교에서. 그들은 동시에 전차역에 도착했다. 바랴의 모습은 니나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어떻게 그토록 멋지게 차려입었니? 외투 보관소가 잠겨 있어서, 조예에게 코트와 스카프를 빌렸어. 조예는? 내 옷을 입었을 거야. 책은 어디다 뒀니? 내 책상에다 두고 왔어. 설마 내가 역에 가지고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 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니나는 바랴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만약 그 곳이 정말 로 조예의 코트라면 외투 보관소가 잠겨 있어서 그것도 입고 오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니나는 그녀에게 따져서 거짓말했음을 증명해 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바랴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나름대 로 살도록 내버려두자.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방식대로 세라핌을 전송하게 하자. 역은 혼잡했으며, 플랫폼도 전송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니나와 바 랴가 풀이 죽어 입구에 서 있는데 막스와 세라핌이 그들을 찾아내고는 손 을 흔들며 사람들 사이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친척들이나 친구들을 찾느라고 떼지어 있는 사람들 사이를 가르면서, 열차 옆을 따라 헤치고 왔 다. 역은 꾸러미와 선물을 가지고 가는 남편과 그 아내들, 꽃을 가지고 다 니는 소녀들, 포옹하고 키스를 하고 있는 젊은이들로 붐볐다. 새로 임관된 이들 붉은 군대의 장교들은 군복상의에 모자를 벗은 차림으로서 어깨 끈을 엇갈리게 두르고 있었다. 모자와 외투는 이미 열차 안에 두었다. 그들은 젊고 열정적이며, 성실했고, 또한 진지한 분위기도 지니고 있었다.... 그 들은 소비에트 군대의 위엄과 힘을 상징하고 있었다. 니나는 이런 홍안의 젊은이들이 침략자가 나타나면, 제일 먼저 전쟁터로 가서 그들과 맞서 싸워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막스의 곁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건장하고 조용하 며 마음씨 착한 청년이었다. 그가 가버리면 그의 이러한 점들 때문에 그를 그리워할 것 같았다. 바랴는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세라핌의 눈길에 흠뻑 빠져 있었고, 다른 생도들도 그녀에게 시선을 쏟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돋보였으며, 그곳에 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리고 그녀는 예상외로 키가 커서, 거의 니 나와 비슷할 정도였다. 그리고 아무도 그렇게 세련된 물개가죽 코트를 입 거나 그렇게 멋있는 스카프를 하고 있진 않았다. 역의 부산함, 그리고 길 고 미지의 매력적인 여행을 알리는 기차의 경적소리와 역 안의 모든 흥분 된 상황이 그녀를 달아오르게 했다. 막스는 그녀가 영화배우 같다고 말했 다. 세라핌은 자신의 인생보다도 더 그녀를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심지어 니나조차도 그녀를 보며 정말로 아름다운 소녀라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 다. 성숙한 여인으로, 그리고 한 사람의 약혼녀가 된 그녀는 니나, 막스, 세 라핌으로 이루어진 작은 테두리 안에 푹 빠져 있어서 그 누구도 안중에 없 었다. 그녀가 이따금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그것은 바람기가 있어서가 아 니라 그냥 역과 기차 그리고 기차를 잡으려고 서두르는 사람들에게 잠시 눈길을 주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건너편 플랫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샤를 보았다. 그는 등에 배낭을 매고 여행용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옆에는 두 명의 붉 은 군대병사가 호위하고 있었다. 얼굴이 거무스레한 그들은 긴 외투를 입 고 사람들을 헤치며 빠르게 걷고 있었다. 사샤는 누군가가 그를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바랴가 있는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무척 창백했으며, 집시처럼 검은 턱수염을 기 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떠나고 있는 사관생도들과 막스, 니나, 바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건너편 플랫 폼에서 떠나려 하는 기차를 향해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행가방 과 짐가방을 든 사람들이 그들의 주위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사샤는 그들 속으로 사라졌다. 바랴는 사샤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진 지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녀는 기차가 떠남을 알리는 기적소리를 듣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작별 인사를 하는 것도, 니나가 막스의 이마에 키스하는 것도, 세라핌이 그녀 쪽으로 다가와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였다. 정신 차려, 바랴! 니나가 말했다. 나 방금 사샤를 보았어. 뭐라고? 바랴가 말하는 게 사실임을 알아채고는 니나가 소리쳤다. 그는 검사를 받고 있었어, 그리고 턱수염을 길렀어. 바랴는 마치 가방 과 짐꾸러미를 든 사람들 사이에 있던 그의 모습을 찾는 것처럼, 아직도 건너편 플랫폼에 눈을 고정시킨 채 중얼거렸다. 그는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어. 늙은이처럼.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마치 늙은이처럼 말야.... 그만해! 네가 잘못 본 거야. 니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막스도 침착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네가 잘못 본 거야, 바랴. 그런 식으로 데려 가진 않아. 분명히 사샤였어....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난 똑똑히 봤 어.... 그는 돌아서서 이쪽을 보았단 말야. 그는 늙은이 같았고, 얼굴은 백짓장같이 창백했어. 어쩔 줄을 모르며 세라핌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안녕, 바랴. 그는 마치 시체 같았어. 여행가방을 들고 있었어. 여행가방을. 그녀는 울부짖었다. 당황하여 얼굴이 빨개진 세라핌은 몸을 굽혀서 그녀의 뺨에 키스를 했다. 그녀의 뺨은 눈물로 젖어 있었고, 눈 화장이 지워져 검게 얼 룩져 있었다.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관생도들은 창문 밖으로 모을 내밀 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전송 나온 사람들도 기차를 따라 뛰어가면서 손을 흔들고 좋은 여행이 되기를 바라며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막스와 세라핌도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바랴는 플랫폼 한복판에 선 채,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내며 울고 있었 다. 니나는 떨리고 걱정되면서도,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만해, 지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를 찾아가 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지나가던 노파가 멈춰 서서, 바랴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 을 어루만졌다. 아가씨가 군대 가는 애인 때문에 울고 있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