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열쇠 A. J. 크로닌 지음 홍준희 옮김 제1부 끝머리의 시작 1938년 9월 어느 늦은 오후에 프랜치스 치셤 노신부는 성 콜롬바 교회에서 나와 다리를 절룩거리며 언덕 위에 있는 자기 집으로 통하는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노쇠하긴 했으나 그는 마커트 와인드의 완만한 고갯길보다는 이 비탈길을 더 좋아했다. 이윽고 담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의 좁은 문 앞에 다다라선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러운 정복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멈춰 서서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언제 보아도 좋은 경치를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눈 아래에는 은빛 티드 강의 잔잔하고도 폭넓은 흐름이 가을의 석양에 엷은 사프란 빛을 발하며 굽이치는 것이 보였다. 북쪽 스코틀랜드 쪽의 강변 언덕바지에는 티드사이드 시의 너저분한 집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고, 핑크나 노랑색 천조각과 같은 타일 지붕들이 좁고 꾸불꾸불한 골목길을 가리고 있었다. 이 국경 도시는 지금도 높은 성벽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 성벽 위의 크리미아 전쟁 때 빼앗은 대포는 지금은 게를 쪼아먹으러 오는 갈매기들의 휴식처에 지나지 않았다. 강어귀의 모래톱에 널어놓은 어망에는 안개가 자욱했으며, 항구로 들어오는 고깃배의 너덜너덜한 돛대는 하늘을 향해 늘어서 있었다. 뭍 쪽으로 눈을 돌리니 청동색의 조용한 다람 숲에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고, 그 숲을 향해 백로가 한 마리 부지런히 날아가고 있었다. 맑고도 싸늘한 공기는 장작을 태우는 냄새와 떨어진 사과의 강한 향기에 넘쳐 있어 계절보다도 빨리 첫서리가 내릴 듯한 느낌이었다. 치셤 신부는 자못 만족스럽다는 듯이 숨을 몰아쉬고는 발길을 돌려 자기 집 정원으로 들어갔다. '비취 동산' 의 정원과는 비할 수 없었으나 스코틀랜드의 정원 특유의 아름다움이 있었고, 부드러운 울타리를 따라 손질이 잘 된 과수가 늘어서 있어 실로 풍요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 중에서도 정원 남쪽에 있는 배나무가 으뜸이었다. 잔소리가 많은 정원사 두갈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신부는 조심스레 부엌 쪽을 살펴보고 나서 제일 잘 생긴 배를 하나 따서 법의 속에 감추었다. 그리고는 낡아서 지금은 못 쓰게 된 우산 대신 유일한 사치품으로 산 격자무늬 새 우산을 지팡이 대신 짚고는 주름투성이의 누런 얼굴을 자랑스럽게 반짝이면서 절룩거리며 자갈길을 걸어갔다. 무심코 현관 쪽을 바라보니 자동차가 한 대 멈춰 서 있었다. 불쾌한 생각으로 얼굴에 주름이 생겼다. 기억이 나쁜데다 이따금 방심 상태가 되는 것을 늘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그는 차를 보고 갑자기 얼마 전에 주교의 편지로 당혹했던 일을 생각해 낸 것이다. 주교는 비서인 스리스 신부의 방문을 제안이라기보다는 통지해 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스리스 신부는 응접실에 불기가 없는 난로를 뒤로 하고 약간 굳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거무스레하고 여윈 듯한 얼굴을 기품이 있어 보였으나, 주위의 초라함을 보고는 성직자의 위엄이 손상이라도 된 듯 화가 나 있었다. 도자기라든가 칠기 같은 뭔가 동양의 토산물이라도 있어 주인의 취미를 엿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방 안은 텅 비어 있고 바닥은 보잘것없는 리놀륨이 깔려 있었으며, 담요로 덮어씌운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을 뿐 이렇다 할 만한 특징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힐난하는 듯한 표정으로 낡아빠진 벽난로 위에 아직 계산도 하지 않은 현금과 그 옆에 놓여 있는 팽이를 곁눈질로 흘겨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절을 지키겠다는 생각인 듯 얼굴을 부드럽게 하고 치셤 신부가 정중하게 변명하려는 것을 말렸다. "저는 벌써 가정부의 안내로 제가 쓸 방을 알았습니다. 4, 5일 신세를 져야 할 형편인데 폐가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오후는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 경치는 참으로 근사했답니다. 타인카슬로부터 여기에 이르는 길은 마치 산 모랄레스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는 거드름을 피우며 어두워지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리스 신부를 보고 있으려니까 타란트 신부와 신학교의 일이 생각나서 늙은 신부는 하마터면 미소를 지을 뻔했다. 스리스 신부의 고상한 몸가짐이나 날카로운 눈초리, 오똑한 콧날까지가 타란트 신부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아무쪼록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하고 노신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 곧 식사시간이 될 겁니다. 정식을 준비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여기서는 그만 스코틀랜드의 하이 티(고기 요리를 곁들인 저녁 식사)의 습관대로 한답니다." 스리스는 반쯤 외면한 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침 그때 미스 모파트가 들어와 낡은 커튼을 걷어 젖히고 식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스리스는 겁에 질린 듯이 자기를 힐끔 쳐다보는 얌전한 이 여자가 이 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세 사람 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조금은 불쾌한 느낌을 받았으나 그녀가 있었으므로 화제는 이어나갔다. 식탁에 앉자 스리스는 이번에 건립되는 타인카슬 대성당의 외장을 위해서 주교가 일부러 카라라에서 구해 온 특별한 대리석에 대해 칭찬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햄과 내장을 곁들인 달걀찜을 다 들고 나자 브리타니아의 티 포트로 따라 준 홍차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잘 구어진 토스트에 버터를 바르면서 그는 치셤 신부가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어떻습니다, 수프는 안드레아도 함께 들어도 되겠습니다. 안드레아, 이 분이 스리스 신부님이시다." 스리스는 얼굴을 들었다. 아홉 살쯤 된 사내아이가 어느 사이에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푸른색 스웨터를 입은 길쭉하고 창백한 얼굴을 신경질적으로 긴장시킨 채 머뭇머뭇하더니 살며시 자기 자리에 앉으며 기계적으로 우유 주전자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접시 위로 고개를 숙였을 때 축축한 갈색 머리카락이-미스 모파트가 스폰지로 씻어 주었기 때문에 젖어 있었다-보기 싫게 이마위에 늘어져 있었다. 그 파란 눈에는 어린이답지 않게 이 자리의 심상치 않은 일의 예감이 깃들어 있었다. 소년은 불안스럽게 고개를 떨군 채 얼굴을 들려고 하지 않았다. 스리스 신부는 의젓함을 보이며 다시 천천히 식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직 이야기의 본론을 꺼낼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끔 그의 시선은 은연중에 소년 쪽으로 가 있었다. "아, 네가 안드레아냐?" 단순한 인사로라도 뭔가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조금은 친절함을 보여 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래, 이곳 학교에 다니니?" "네......" "아, 그랬었구나. 그럼 무엇을 배웠니?" 그는 상냥하게 간단한 질문을 두세 가지 던져 보았다. 소년은 얼떨떨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만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고 있는 바람에 완전히 무지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스리스 신부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형편없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마치 빈민굴의 아이 같군.' 그는 내장요리를 다시 한 입 먹었다. 문득 알고 보니 자기만이 고급 요리를 먹고 다른 두 사람은 죽을 먹고 있었으므로 얼굴이 붉어졌다. 노인으로부터 이런 금욕주의를 과시 당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불쾌한 일이었다. 치셤신부도 그의 기분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는 머리를 저었다. "나는 스코틀랜드의 맛있는 오트밀을 몇십 년이나 먹지 못하여 요즘은 매일 그것만 먹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스리스 신부는 잠자코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때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던 안드레아가 얼핏 눈을 들어 먼저 일어나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식후의 기도를 드리고 일어서다가 스푼에 팔꿈치를 부딪혀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무거운 장화 소리를 내면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식사를 끝낸 스리스 신부는 거만스럽게 일어나 난로 앞으로 가서 뒷짐을 지고는 아직 자리에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괴상한 모양을 하고 있는 늙은 동료를 슬며시 관찰하고 있었다. '이거 참 곤란하군' 하고 스리스는 생각했다. 성직자의 신분으로서 이건 너무나도 한심스러운 것이었다. 얼룩진 더러운 법의, 땟국이 반질거리는 칼라, 혈색이 나쁜 까칠한 피부의 볼품없는 늙은이! 한쪽 볼에 있는 흉터처럼 보기 흉한 빨갛게 부은 자국은 아래 눈꺼풀을 뒤집어 놓아서 그 때문에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느낌이었다. 영원히 비뚤어진 것 같은 목은 절름거리는 한쪽 다리와 균형이 잘 잡혀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언제나 아래를 향하고 있는 눈은-이따금 위를 쳐다보는 수도 있지만-날카로운 사팔뜨기며, 그것이 이상스럽게도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스리스 신부는 헛기침을 했다. 드디어 얘기를 꺼낼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는 애써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이곳에 오신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치셤 신부님?" "1년이 되었군요." "아, 그렇습니까. 주교님께서 신부님을 이곳에 오시게 한 것은 여간 친절한 배려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귀국하시자 바로 고향으로 말입니다." "이곳은 주교님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스리스는 점잖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주교님께서 신부님과 같은 고향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신부님은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다? 일흔이 다 되셨지요?" 치셤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점잖게 노인다운 긍지를 가지고 덧붙여 말했다. "나는 그래도 안셀모 밀리보다 나이가 많지 않소." 스리스 신부는 노인의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투에 얼굴을 찌푸렸으나 그 것은 이내 연민의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요? 그러나 같은 일생이라도 신부님은 주교님과 비교할 때 너무 심한 차이가 나는 것 같군요." 그는 몸을 뒤로 젖히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주교님도 저도 신부님이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성실하게 일해 오신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이제는 신부님이 그 보답을 받으실 때라고 생각합니다......그러니까 은퇴하실 때가 왔다는 말씀입니다." 그 순간 방 안은 기묘한 침묵에 휩싸였다. "그러나 나는 은퇴할 생각이 전혀 없소." "저도 여기 온 것이 무척 괴롭습니다." 스리스는 조심성 있었고, 시선은 천정을 향한 채 말했다. "조사를 한 다음 주교님께 보고를 드려야 합니다. 간과해선 안 될 일도 있고 해서요." "그게 뭡니까?" 스리스는 안절부절 못하는 몸짓을 했다. "여섯 가지......열 가지......아니 더 있습니다. 숫자를 세는 것이 제 역할을 아닙니다만, 신부님의......그 동양적인 엉뚱한 행동 말입니다." "그건 유감이군요." 노인의 눈에서는 서서히 불꽃과 같은 것이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중국에서 35년 동안이나 살았었다는 것을 제발 잊지 마시기를." "이곳 교구의 사무가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엉망이라지요?" "빚이라도 졌다 이 말씀인가요?" "그런 것은 우리가 알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일년에 네 번 내는 헌금에 대해서도 최근 6개월 동안 아무 보고도 받지 못했어요." 스리스의 억양이 높아지면서 말도 빨라졌다. "이것저것 모든 것이 너무 비사무적이고......예를 들면 말씀입니다. 브랜드의 거래처에서 지난 달에 청구서를 댄 데 대하여......양초값 3파운드와 그 밖에 있어서......신부님은 그걸 모두 동전으로 지불하셨지요!" "받은 돈이 모두 동전이었기 때문에......" 치셤 신부는 물끄러미 스리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언제나 나는 돈에 대해선 관심이 없으니까 돈이란 것을 가져 본 경험이 없어서......그러나 결국 당신은 돈이란 것을 그렇게까지 중대하게 생각하고 있군요." 난처하게도 스리스 신부는 스스로 의식할 정도로 얼굴이 붉어졌다.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하고 그는 들추어냈다.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신부님이 하신 설교나......충고나......교리에 대해서도 어느정도까지는." 그는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가죽 표지의 노트를 새삼스럽게 들여다보았다. "모두가 위험할 정도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천만에!" "성령 강림 대축일에도 신부님께서는 신도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국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여러분의 손바닥 안에 있다......그것은 어디에나 있고 그리고 어디에 있어도 좋은 것이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스리스는 노트를 넘기면서 검열관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또......사순절 동안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신론자라 해서 모두 지옥에 간다고 할 수 없다. 나는 한 사람, 지옥에 가지 않은 무신론자를 알고 있다. 지옥에는 하느님 얼굴에 침을 뱉은 자만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너무 심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었으나 공자 쪽은 유머가 풍부했다!" 스리스 신부는 단호한 태도로 노트를 덮어 버렸다. "아무리 보아도 신부님은 이미 자기의 영혼에 대한 지배력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고 치셤 신부는 침착하게 "나는 어떤 영혼에 대해서도 지배력 따위를 갖고 싶다고는 생각지 않는데요."라고 말했다. 스리스의 얼굴에는 불쾌한 듯한 빛이 더욱 짙어졌다. 새삼스럽게 이런 영감쟁이를 상대로 신학상의 토론을 벌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밖에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신부님이 양자로 삼은 안드레아도 말입니다." "내가 돌보지 않는다면 누가 저 아이를 돌봐 주겠소?" "랠스톤에 수녀원이 있지 않습니까. 그곳은 이 교구에서 가장 훌륭한 고아원입니다." 치셤신부는 사람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눈으로 스리스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자기 어린 시절을 그 고아원에서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해 보았소?" "그렇게 개인적인 일에까지 비약시킬 필요가 있을까요.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경우에 따라서 그 이유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이런 상태는 아주 변칙적으로 어떻게든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게다가......" 하고 그는 양손을 쭉 뻗쳤다. "신부님이 이곳을 떠나시고 나면......우리가 그 아이의 거처를 마련해야겠지요." "우리를 내쫓을 작정이군요. 나도 수녀원 신세를 지란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신부님은 클리톤의 노사제관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곳에는 완전한 평화와 안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치셤 신부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메마른 짧은 웃음이었다. "완전한 안정이라면 죽은 뒤에 충분히 취하겠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늙은 신부들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 이상하게 여기실지 모르겠으나......나는 신부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오." 스리스는 당황해 하며 쓴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신부님. 실례지만 이 말만은 해야겠습니다......신부님의 평판은 중국에 가시기 전부터도 역시......신부님의 생애가 좀 기이한 것이었으니까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치셤신부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일생의 청산서를 하느님께 제출하겠소." 스리스는 자신의 경솔을 게면쩍게 여기면서 시선을 떨구었다. 좀 지나친 것 같았다. 성격은 차가운 편이었으나 그는 늘 공정하게, 아니 신중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서 난처한 얼굴을 보이는 것 정도는 터득하고 있었다. "물론 저는 신부님의 재판관이라든가 또는 조사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아무튼 어떻게 될지 이 며칠 동안 기다려 볼 필요가 있겠지요" 하며 그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 성당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대로 계십시오. 길은 알고 있으니까요." 다소 부자연스러운 미소로 입을 일그러뜨리며 스리스 신부는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치셤 신부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꼼짝도 하지 않고 테이블을 향해 앉아 있었다. 어렵사리 얻어낸 이 한적한 생활이 이렇게 별안간 위협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무엇인가가 완전히 부서져 버린 느낌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에 여러가지 환경에서 어거지로 얻은 체념도 이번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뭔가 갑자기 하느님에게도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무의미하고 낡아빠진 인간처럼 생각되었다. 타오르는 듯한 적막감으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사소한 일이지만 이것은 대단한 무게를 가지고 밀어닥쳤다.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주님이시여, 주님이시여, 어찌하여 당신은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는 힘없이 일어서서 2층으로 올라갔다. 응접실 위에 있는 다락방에서는 안드레아가 이미 잠들어 있었다. 모로 누워 몸을 방어라도 하듯이 베개 위에 여윈 한 팔을 겹쳐 베고 있었다. 치셤 신부는 그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배를 꺼내어 침대 옆에 벗어 놓은 옷 위에 얹어 놓았다. 그것밖엔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었다. 산들바람이 모슬린 커튼을 흔들었다. 그는 창문께로 가서 커튼을 젖혔다. 서리라도 내릴 것 같은 하늘에는 별들마저 떨고 있었다. 이 별빛 아래 형태도 없고 고결함도 없는, 하찮은 노력 위에 세워진 자기의 어리석은 생애의 긴 세월이 펼쳐져 있었다. 이 티드사이드 거리에서 뛰어놀던 소년 시절의 나날이 바로 엊그제의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추억은 멀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만일 자기의 일생이 어느 일정한 틀에 따라 씌어진 것이라고 하면, 그 숙명적인 첫머리의 기록은 아마 60년 전 그 4월의 토요일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누구로부터도 방해를 받지 않은 행복한 날이었기 때문인지 그것은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으면서도 아무도 몰래 지나가 버린 것이다...... 제2부 기묘한 천직 1 그 봄날 아침, 프랜치스 치셤은 깨끗하고 아담한 식탁에 앉아 긴 장화를 신은 다리에 불기의 따스함을 느끼면서 나무 타는 냄새와 뜨거운 케이크의 향긋한 내음을 맡으며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마침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연어 낚시에는 알맞은 날씨였으므로 프랜치스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어머니는 완두콩이 든 오트밀 냄비를 나무 국자로 솜씨있게 휘저으며 아버지와 프랜치스의 사이에 놓았다. 그는 뿔로 된 스푼으로 오트밀을 한 숟가락 떠서 자기 앞에 있는 버터 밀크 컵 속에 넣었다. 그리고 덩어리도 귀리알도 없는 솜씨 좋게 만들어진 금빛의 오트밀을 혀로 굴리듯이 먹고 있었다. 아버지는 낡은 청색 스웨터에 낚시용 장화를 신은 채 그 큰 체구를 앞으로 숙이고 묵묵히 오트밀을 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오트케이크 한 개를 오트밀 접시 옆에 놓고 식탁에 앉으며 홍차가 담긴 컵을 보았다. 노란 버터가 그녀 몫의 오트 케이크 위에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작은 식당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기분으로 충만했고, 백토를 칠한 난로에서는 빨간 불꽃이 춤을 추고 있었다. 아홉 살 난 프랜치스는 지금부터 아버지와 함께 어부의 합숙소로 갈 참이었다. 합숙소에서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알렉스 치셤의 어린 아들이었던 것이다. 털 스웨터에 허리까지 오는 가죽장화를 신은 어부들은 그를 보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혹은 묵묵히 친근한 미소를 띈 얼굴로 맞아 주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바다로 나가는 것이 그에게는 남모르는 자랑이었다. 크고 펑퍼짐한 고깃배가 시끄럽게 노젓는 소리를 내면서 방파제를 크게 한 바퀴 돌아 바다고 나가면 고물 쪽에 있는 아버지는 큰 밧줄을 솜씨있게 늦추고 당기곤 한다. 방파제 끝에 다다르면 어부들은 바람을 피하여 한 덩어리가 되고, 혹은 노랗게 된 돛을 어깨에 걸친 채 몸을 움츠리고, 어떤 사람은 까맣게 된 짧은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추위를 이겨내려고 한다. 그럴 때 프랜치스는 아버지와 함께 다른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자기 위치에 선다. 알렉스 치셤은 어부들의 지휘자이고, 티드 제3 어장의 주임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찬바람을 맞으며 강이 바다로 흐르는 역류의 파도 속에서 멀리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있는 찌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햇빛에 잔물결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있으면 흔히 눈앞이 캄캄해지는 수가 있다. 그러나 눈을 깜박여서는 안 된다. 한순간이라도 잘못 보면 한 다스 정도의 연어를 놓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연어가 요즈음 적게 잡히므로 먼 비링스게이트 어물 시장에까지 가져가면 어업회사는 파운드 당 반 크라운의 벌이가 넉넉히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키 큰 모습이나 어깻죽지에 약간 파묻힌 듯한 머리나, 차양이 뾰족한 모자 밑으로 보이는 씩씩한 얼굴 윤곽이나 깨끗하고 불그스름한 높은 관골 등에서 아직도 확고한 기개를 엿볼 수 있었다. 때로는 멀리 파제스 읍의 큰 시계 소리나, 다람 숲의 까마귀 울음소리가 뭍으로 밀린 해초의 향기와 의식 속에서 미묘하게 어울려서 가만히 있어도 기쁘기만 한 아버지의 기분이 가슴에 스며들면 이미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는 것이다. 갑자기 아버지가 큰 소리를 쳤다. 아무리 보아도 프랜치스는 찌가 갈아 앉는 것을 먼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보통사람은 소용돌이가 일면 긴장하지만 숙련된 사람을 고기가 밀어올리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는 모양이다. 그 아래로 서서히 찌가 이끌리는 것이 아무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의 큰 외침소리를 들으면 어부들은 한꺼번에 우르르 그물을 끄는 권선기로 뛰어가서 말아올린다. 그 순간의 감격은 몇 번을 되풀이해도 결코 신선미를 잃지 않는다. 어획고에 따라 그에 상당한 보너스가 나오지만, 어부들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 아니다. 그 커다란 흥분은 좀더 횔씬 원시적인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바닷말이 뒤엉킨 그물이 물을 줄줄 흘리면서 서서히 올라온다. 그럼 최후 한순간에 고기를 가득 채운 큰 그물의 넘실거림 속에 금속의 빛과 같은 힘차고 미묘한 섬광이 번쩍하고 나타난다-그것이 연어인 것이다. 어느 토요일에는 한 그물에 40마리나 걸린 일도 있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큰 연어가 몸뚱이를 활처럼 굽히고는 서로 다투어 그물에서 빠져 나오려고 파닥거리기도 하고 미끈미끈한 방파제에서 미끄러져 강으로 도망치려고 하기도 한다. 프랜치스도 어부들과 함께 뛰어가서 도망치려고 하는 연어를 붙잡기도 했다. 어부들이 그를 안아 일으켰을 때 그는 고기비늘투성이가 되어 물어 흠뻑 젖곤 했지만 팔 안에는 괴물처럼 큰 연어를 꼭 안고 있었다. 그날 저녁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어두컴컴한 황혼 속을 씩씩하게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도중에 아버지는 파레이 상점에서 그가 좋아하는 봉봉과자를 사주었다.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그들 부자의 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요일이 되면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리고는 낚싯대를 메고-점잖은 분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안식일로 조용한 거리를 뒷길로 해서 빠져나와 숲이 우거진 위타다 계곡으로 가는 것이다. 톱밥이 가득한 깡통 속에는 엊저녁에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미끼로 쓸 구데기가 들어 있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들풀의 향기를 맡으면서 빨간 반점이 있는 송어가 해안 하상에서 넘실거리는 것을 보기도 하고, 아버지가 모닥불에 구운 생선구이를 먹으면서 보낸다. 그런 날을 머리가 어떻게 될 정도로 즐거웠던 것이다. 다른 계절에는 흔히 귤이나 산딸기 등 고급 잼을 만드는 노란 들딸기를 따러 쏘다녔다. 가끔 어머니도 함께 갈 때에는 마치 축제날과 같았다. 아버지는 그런 것이 있는 장소를 잘 알고 있었다. 꾸불꾸불한 숲속 길이나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딸기덩굴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곤 했다. 눈이 왕서 땅바닥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이 되면, 그들 부자는 다람 숲의 금렵 구역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기도 했다. 내쉬는 입김이 하얀 서리가 되고, 피부도 경비원의 호각소리가 들리지나 않을까 하고 긴장한다. 별장의 창 밑에까지 가서 덫을 열어 볼 때 프랜치스는 마치 귓속에서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것 같았다-이윽고 무거운 사냥 자루를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토끼고기 파이를 먹을 것을 생각하면 눈은 빛나고 마음은 녹아 나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요리 솜씨가 좋았고 살림을 잘 꾸려나갔기 때문에, 좀처럼 겉치레 인사를 하지 않는 스코틀랜드 사람들 사이에서도 '엘리자벳 치셤은 훌륭한 부인이다'라는 칭송을 받았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어머니는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알렉스, 오늘밤은 읍내에 가야 하니까 좀 일찍 돌아오셔야 해요." 아버지는 잠자코 있었다. 틀림없이 강물을 불어났을 것이기 때문에 연어잡이가 신통치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말에 문득 오늘밤 가지 않으면 안 될 연례 시민 음악회의 일이 생각난 모양이다. "여보, 당신 정말 음악회에 가고 싶소?"하고 아버지는 조용하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약간 얼굴을 붉혔다. 프랜치스는 왜 어머니가 그런 묘한 얼굴을 했는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좀처럼 가져 보기 힘든 즐거움의 하나가 아니에요? 일년에 단 한 번뿐인......더군다나 당신은 읍의원이시잖아요. 단상에 가족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아버지가 더 크게 미소를 짓자 다정한 주름살이 눈언저리에 잡혔다. 프랜치스가 제일 좋아하는 미소였다. "아무래도 가지 않으면 안 되겠군, 엘리자벳." 아버지는 홍차 잔이나 깨진 컵, 삐걱삐걱 소리나는 구두가 싫은 것과 마찬가지로 마을의 집회에 나가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그러나 함께 가 주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꼭 빨리 돌아와 주세요, 네, 알렉스. 그렇게 하시겠지요?' 하고 무심코 말하려 했으나, 어머니는 이제 안심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보! 고마워요. 오늘 타인카슬에서 폴리와 노라가 오기로 돼 있어요. 그런데 네드는 오지 못할 사정인가봐요." 어머니는 거기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에탈에 계산서를 가지고 가는 것은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지 않아요?" 아버지는 기지개를 켜며 아내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꿰뚫어 보기라고 하듯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프랜치스는 너무나 기뻤기 때문에 처음엔 그 말들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돌아가신 고모는 여기에서 6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남쪽의 흥청거리는 타인카슬에서 유니온이란 술집을 경영하는 네드 바논에게 출가했었다. 그 네드의 누이동생인 폴리와 어머니가 없는 폴리의 조카인 열 살 난 노라는 어느 의미에서는 가까운 친척을 아니었다. 그래도 이 두 사람의 방문은 언제나 프랜치스의 집에서는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갑자기 아버지의 목소리가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야, 에틸에는 역시 내가 가지 않으면 안 돼." 아버지의 말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프랜치스는 어머니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당신이 아니더라도 되잖아요......덤 마리스도 있고 그 밖에 누구라도 기꺼이 가 줄 텐데요." 아버지는 대답을 하지 않았으나 스코틀랜드인 특유의 배타적인 자존심이 손상된 때문인지 그대로 조용히 쳐다볼 뿐이었다. 어머니는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이제는 부끄러움도 체면도 따지고 있을 수가 없었던지 몸을 굽혀 아버지의 소매를 잡았다. "절 안심하게 해줘요, 알렉스. 요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그곳에 또 위험한 일이 생기고 있다는 것을. 매우 위험한 상태라고 하잖아요." 아버지는 커다란 손으로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는 안심시키려는 듯 침착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몰래 간다면 당신도 싫을 거요, 그렇지?" 아버지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웃으면서 벌떡 일어났다. "빨리 갔다가 일찍 돌아오겠소......당신과 폴리가 좋아하는 음악회에 늦지 않도록 말이오." 결국 아버지의 말대로 되어 버렸지만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어머니는 아버지가 고무장화를 신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프랜치스도 낙심천만이었고, 어쩐지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버지는 일어나서는 프랜치스를 돌아보며 여느때와는 달리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아, 프랜치스! 오늘은 집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어머니가 바쁘시니까 도와 드려야지......폴리 아주머니와 노라가 온다니까 준비할 것이 많을 거야, 알았지?" 프랜치스는 실망하여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았으나 싫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가 프랜치스의 어깨를 포근히 감싸주었다. 아버지는 문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고 애정어린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는 그대로 말없이 나가 버렸다. 정오가 되자 비는 그쳤다. 프랜치스는 어쩐지 쓸쓸하였고 다른 날과는 달리 몹시 지루하게 느껴졌다. 근심스러운 듯한 어머니의 굳은 얼굴을 될 수 있으면 보지 않으려 했지만,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 치셤 일가는 이 평화스러운 읍내에서는 잘 알려진 집안이었다. 그래서 모든 일에 방해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매달 어획고의 청산을 하러 가지 않으면 안되는 어업회사의 본사가 있는 에탈에는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백년 전 에탈 읍에는 프로테스탄트 장로교파의 피로 물들여졌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그 반대로 카톨릭 신자가 가차없이 탄압을 받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 새로 부임한 읍장을 중심으로 최근들어 맹렬한 종교적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비밀 집회가 결성되는가 하면 광장에서 군중대회가 열려 민중들의 심리는 완전히 들떠 있었다. 군중의 폭력은 일단 억제되긴 했지만 읍내에 살고 있는 신자는 에탈 읍에는 얼씬도 못하도록 엄중한 경고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프랜치스의 아버지는 그러한 협박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으나, 그렇기 때문에 특히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지난달만 해도 습격을 당하기는 했으나 그 때는 건장한 이 어장 감독은 보기 좋게 그들을 때려 눕혀 버린 것이다. 그러한 위험이 더욱 격화되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 보내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버지는 에탈 읍으로 간 것이다. 프랜치스는 자기의 어린 생각에도 격분을 참을 수가 없어서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왜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지 않는 것일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같은 종파가 아니었다. 그래도 서로 존경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매우 선량한 사람이다. 아마 이 세상에서 제일 선량할 것이다......그런데 왜 그러한 아버지를 사람들은 해치려고 하는 것일까? 뜨거운 피가 돌고 있는 심장을 한가운데를 예리한 불의의 칼에 찔리기라도 한 듯이, 그는 이 '종교'라는 말 앞에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똑같은 하느님 섬기는 방법이 좀 다르다고 해서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그것은 어린 그에게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네 시에 손님을 마중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같은 또래인 노라가 명랑하게 말을 걸어 왔으나 프랜치스는 내키지 않은 얼굴로 대꾸를 해주었다. 도랑을 뛰어넘으면서도 그는 뭔가 불길한 것이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차분한 폴리 아주머니는 어머니와 나란히 뒤에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명랑하게 떠들어대는 노라는 갈색끈이 달린 새옷을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예뻤다. 그리고 노라는 자기를 보고 굉장히 반가워했지만 그것이 프랜치스의 기분을 전환시켜 주지는 못했다. 프랜치스는 침울한 얼굴을 한 채로 캬넬케이트 앞의 아담한 낮은 회색 석조건물인 자기 집에 다다랐다. 집 앞에는 여름이 되면 아버지가 시온과 베고니아를 가꾸는 손질이 잘 된 작은 정원이 있고, 번쩍번쩍하는 놋쇠로 된 현관문 고리와 먼지 하나 없는 계단은 지나치게 깔끔한 어머니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새하얀 커튼을 친 창문 뒤에는 진홍빛 제라늄꽃이 한창 만발해 있었다. 노라는 몹시 기쁜 듯 얼굴이 빨갛게 되어 숨을 헐떡이며 파란 눈을 반짝거리면서 완전히 들뜬 채 장난꾸러기의 본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차 마실 시간까지 안셀모 밀리와 함께 밖에 나가서 놀고 있으라고 했다. 프랜치스와 노라는 뒤뜰로 나갔다. 노라는 몸을 구부리고 프랜치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프랜치스, 우리 재미있는 놀이할까?" 프랜치스는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노라가 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기 때문에 오늘도 끝내는 노라 말을 따랐다. "하겠지, 꼭?" 하고 그녀는 독촉했다. "언제나 안셀모는 성당놀이밖에 모른다니까. 자아, 프랜치스, 우리 안셀모를 골탕 먹일까?" 다물고 있던 입술이 겨우 열리며 프랜치스는 방긋 웃었다. 마당 구석에 있는 헛간에서 삽과 물뿌리개를 가지고 나왔다. 노라가 시키는 대로 보리수나무 밑에 2피트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물을 붓고는 그 위에 신문지로 덮고 마른 흙을 뿌렸다. 두 사람이 삽을 갔다 두고 돌아왔을 때 안셀모 밀리가 아름다운 흰 세라복을 입고 나왔다. 노라는 프랜치스에게 대단히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어서 와, 안셀모!" 하고 노라는 그를 반갑게 맞았다. "야, 참 예쁜 옷이다. 기다렸어. 무슨 놀이를 하고 놀까?" 안셀모 밀리는 명랑하게 인심 쓰는 체하는 얼굴을 하고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열한 살인데도 키가 크고 잘 생기고 하얀 얼굴에 볼이 빨간 아이였다. 갈색 머리칼은 곱슬곱슬했고 눈이 초롱초롱했다. 유복하고 신앙심이 깊은 집안에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경건한 어머니의 희망도 있었고 또한 자기도 그럴 생각이 있어, 장래 신부가 될 작정으로 북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카톨릭 계통의 호리웰 신학교에 가기로 정해 놓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강 건너에 수입이 좋은 어분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는 프랜치스와 마찬가지로 성 콜롬바 성당의 합창단 일원이었다. 그가 가끔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커다란 눈에 감동적인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라도 할 때면 그 옆을 지나가던 수녀들은 안셀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이런 이유로 모든 사람들은 그를 '꼬마 성자'라고 불렀다. "그렇군, 행렬놀이를 하자" 하고 안셀모는 말했다. "오늘은 성 율리아노의 축일이니까 성당놀이를 하자." 노라는 정말 그렇다는 듯 손뼉을 치며 좋아라 했다. "그럼, 저 보리수나무 밑에서 하자. 그런데 옷은 이걸 입어도 될까?" "으응" 하고 안셀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이보다는 진짜 기도를 하는 거야. 내가 신부가 되어 수단을 입고, 보석이 박힌 성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면 돼. 넌 하얀 옷을 입은 칼트교단의 수녀야. 그리고 프랜치스, 너는 내 복사가 되는 거야. 프랜치스는 문득 가책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아직 안셀모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다. 안셀모가 네가 제일 좋은 친구라고 말할 때 프랜치스는 그의 깊은 생각에 오히려 자신이 이상하게 괴롭고 부끄럽게 되는 것밖에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느님은 그로서는 대단히 두려운 존재였다. 무엇 때문인지 그것은 몰랐다.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마음 속 깊이 감추고 있었다. 안셀모가 교리 학습에서 "저는 구세주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찬송합니다" 하고 열정적인 말을 했을 때, 프랜치스는 포켓 속에서 유리구슬을 만지작거리면서 온몸이 빨개지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때 그는 화난 얼굴을 하고 집에 돌아와선 느닷없이 유리창을 한 장 깨뜨려 버린 적이 있었다. 이튿날 아침, 정기적으로 위문 가는 안셀모가 통닭구이를 학교에 가지고 와서 팍스톤 할머니에게 갖다 줄 것이라고 자랑하는 것을 보고 프랜치스는 수업시간에 몰래 빠져나와 그 닭 꾸러미를 놓아둔 응접실에 가서 통닭을 빼내고 그 대신 썩은 송어 대가리를 넣어 두었다. 그리고 통닭은 친구들과 나누어 먹어 버렸다. 팍스톤 할머니는 어부의 아내로 위선자였고 그리고 간경변증 때문에 바싹 말라빠져 버렸으나 토요일 밤이 되면 캬넬케이트에서 흡사 정신병자처럼 소란을 피우곤 했다. 안셀모의 눈물과 팍스톤 할머니의 저주는 그에게 깊고 어두운 만족감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셀모를 구덩이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망설이면서 천천히 말했다. "누가 먼저 할래?" "물론 내가 서야지" 하고 안셀모가 거드름을 피웠다. 그리고는 선두에 섰다. "노래하는 거야, 노라야. 탄토움 엘고(성체 강복식 때의 찬송가)를 시작!" 한 줄로 서서 노라의 노랫소리에 맞추어 세 사람은 앞으로 나갔다. 보리수나무 밑에 가까이 가자 안셀모가 신문지를 덮어놓은 구덩이에 발을 헛디뎌 흙탕물 속에 풍덩 빠져 버렸다. 한동안 모두들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려고 허우적거리는 안셀모의 울음소리가 노라를 웃겨 버리고 말았다. 안셀모가 엉엉 울면서 "죄악이야, 이건 죄악이야!"하고 계속 부르짖고 있는 동안 노라는 배꼽이 빠지게 웃어댔다. "정신 차려, 안셀모. 정신 차려! 왜 프랜치스를 때려 주지 못하지?" 하고 노라가 떠들었다. "싫단 말이야. 그렇게 할 순 없어. 난 이쪽 뺨도 내놓을 거야, 난......" 하고 안셀모는 집으로 뛰어가 버렸다. 노라는 어쩔 줄을 몰라 프랜치스에게 매달렸다. 얼마나 웃었는지 노라는 숨도 못 쉬고 눈물이 흘러내릴 정도였다. 그러나 프랜치스는 웃지 않았다. 그는 우울한 얼굴을 하고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에탈 읍에서 적들이 우글거리는 곳을 걸어가고 있을 터인데, 어쩌다가 이런 바보짓을 한 것일까? 집에 돌아와서도 그는 역시 말이 없었다. 아담한 방에는 스코틀랜드 식으로 손님을 접대할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다. 소박한 살림 중에서도 가장 좋은 접시와 그릇, 그리고 도금을 한 나이프와 포크가 식탁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프랜치스의 어머니는 폴리 아주머니와 함께 벌써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의 순진하면서도 지나칠 만큼 진지한 얼굴은 불을 쬐어 약간 상기된 채 가끔 탁상시계를 바라보곤 했다. 불안과 기쁨이 뒤섞인 하루해를 보내고 이렇게 초조해 하다니, 참으로 바보 같다고 자신에게 타이르는 듯했으나 어머니는 전 신경을 귀에 모으고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견딜 수 없이 그의 귀가가 기다려졌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다지 넉넉지 못한 작은 빵집을 하고 있는 다니엘 그레니의 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타인카슬 시에서 20마일쯤 떨어진 조선소가 많은 따분하기 짝이 없는 달로라는 작은 읍에서 빵집을 경영하면서, 한편으로는 교단의 옥외 설교사로 선출되어 색다른 그리스도 교단을 지도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열 여덟 살 때에 빵집이 일주일간 휴업하는 동안에 티드사이드 어부인 젊은 알렉산더 치셤과 열렬한 연애를 하여 단숨에 결혼해 버린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다른 종파끼리의 결혼은 불행을 가져오는 것으로 흔히 알고 있었으나 그들의 실제 생활은 보기 드물게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신앙에 있어서도 치셤은 무턱대고 믿는 신자가 아니었다. 그는 온건하면서도 대범한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다. 아내에게 자기의 종교를 강요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어머니도 역시 어릴 적부터 신물나도록 신앙교육을 받았고, 부친으로부터 넓은 관용과 미덕을 가르치는 색다른 교리를 배워 왔기 때문에 종파적인 토론 따위는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혼한 지가 오래 되었지만 어머니는 결혼 초의 꿈 같은 세월을 지금까지 지속시킬 수 있었고 그것은 정말 행복한 것이었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그분이 집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손재간이 있는 사람이어서 무엇이나 잘해 주었다. 세탁기를 고치거나 닭장을 잠그는 일이나 꿀벌통에서 꿀을 따는 일까지 아버지의 손이 가는 곳은 언제나 말끔했다. 그가 재배하는 탱자원은 티드사이드에서 제일 아름답게 손질되어 있었으며, 그가 사육하고 있는 애완용 닭은 전람회에서 언제나 일등을 차지했다. 최근 프랜치스를 위하여 만들어 준 비둘기집은 상점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것이었다. 겨울 밤 같은 때에 프랜치스는 이미 잠이 들고 어머니는 난로 옆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으면 젊고 건강한 아버지는 식당을 맨발로 왔다갔다하면서 묵묵히 뭔가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상냥한 미소를 머금으며 "저요, 참으로 당신이 좋아요" 라고 말하곤 했다. 어머니는 이제 침착성을 잃은 눈으로 시계를 보았다. 벌써 돌아와야 할 시간은 지났다. 밖은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갑자기 캄캄해지는가 싶더니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마침 그때 노라와 프랜치스가 들어왔다. 그녀는 애써 아들의 근심스러운 시선을 피했다. "자아, 이리 오너라" 하고 폴리 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자기 옆으로 불러 앉히고 뭔가 그 자리의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했다. "재미있었니? 그래, 잘했다. 노라야, 넌 손을 씻었니? 프랜치스, 넌 오늘밤의 음악회가 기다려졌겠지? 나도 노래를 좋아해.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노라, 알았지, 얌전하게 있어야 해요. 이제부터 차를 마실 시간이야."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젠 더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조바심으로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감추려고 하니 더욱더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엘리자벳은 그만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알렉스를 기다리는 것은 단념합시다. 자, 우리끼리 시작하기로 해요." 그녀는 억지로 웃으려고 했다. "틀림없이 곧 돌아오실 거예요." 차는 정말 맛이 있었다. 핫케이크와 과자도 잼도 엘리자벳이 손수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긴장된 분위기는 무겁게 식탁주위에 가득 차 있었다. 언제나 프랜치스를 은근히 재미나게 해주는 폴리 아주머니도 웃기는 말도 하지 않고 단정하게 앉은 채로 차를 마시고 있다. 그녀는 이미 마흔이 다된 나이였다. 갸름한 얼굴은 피로한 기색이였지만 유쾌한 사람이었고, 좀 이상한 옷을 입고는 있었지만 그 품위 있고 침착한 태도는 퍽 교양이 있어 보였다. 레이스가 달린 손수건을 무릎에 올려놓은 모습이다, 코끝이 뜨거운 차로 완전히 빨갛게 된 것이나, 모자를 새털로 장식한 것 등 모두가 친절한 인상을 풍겼다. "그렇긴 하지만, 저는" 하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침묵을 깨뜨렸다. "밀리도 이 자리에 부를 걸 그랬나봐요. 저는 그의 아버지의 기분을 잘 알고 있어요. 신학교에 간다지요, 안셀모는." 그녀는 조용히 무엇이나 잘 알고 있다는 듯 다정한 시선으로 프랜치스를 바라보았다. "프랜치스도 호리웰에 보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엘리자벳. 당신도 이 애가 설교단 위에서 설교하는 것을 보고 싶죠?" "그렇지만 외아들이라 안 돼요." "하느님은 그런 외아들을 좋아하신답니다." 폴리 아주머니는 아는 척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웃지 않았다. 자기 아들은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유명한 변호사라든가 혹은 의사라든가 어느 것이든 좋았다. 그렇지만 성직자가 되어서 화려하지도 않게 더구나 일생을 고독하게 보내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그녀는 점점 더 불안해지기만 했다. 참다 못한 그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알렉스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는데......무슨 일인지 도대체......음악회는 이미 늦어 버렸고,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틀림없이 아직 계산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 거예요" 하고 폴리 아주머니는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완전히 침착성을 잃어버리고 보기 딱할 정도로 상기되어 있었다. "아마 지금쯤은 합숙소에 돌아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에탈에 갔다 올 때는 언제나 거기에 들르거든요."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불안을 떨쳐 버리려고 했다. "우리들 일을 잊어 버렸을지도 모르지. 성질이 느긋한 사람이니까." 어머니는 온갖 생각이 다 나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5분만 더 기다려 봅시다. 폴리 아주머니, 한 잔 더 하세요." 그러나 차를 마시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불안한 침묵이 계속 되었다. 무슨 일이 있단 말인가......오늘은 거기서 자고 오는 것일까? 너무 걱정이 되어 더 이상 엘리자벳은 자기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깃든 얼굴로 다시 한 번 시계 쪽으로 시선을 던지더니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폴리 아주머니, 잠깐 실례하겠어요. 빨리 다녀올게요.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고 오겠어요. 오래 걸리지 않아요." 프랜치스도 걱정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후미진 사잇길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기 등등한 얼굴들이 보이기도 하고, 아버지가 여러 사람에게 포위되어......서로 치고 받고......군중 속에 쓰러져 있기도 하고......돌바닥 위에 쓰러진 채 머리가 깨져 있기도 하고......프랜치스의 머릿속에는 환상이 꼬리를 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이상하게 몸이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저도 데리고 가 주세요, 어머니" 하고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하고 그녀는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에서 손님을 대접하고 있어야지." 그때 옆에 있던 폴리 아주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해 가기만 하는 불안에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침착한 태도를 지키고 있었다. "데리고 가세요, 엘리자벳. 노라와 나는 조금도 염려하지 말고......." 침묵이 흐르는 동안 프랜치스는 눈으로 데리고 가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꾸나." 어머니는 그에게 두터운 외투를 입혀 주었다. 그리고 자기도 케이프를 걸치고 아들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다. 빗물은 길바닥에 물거품을 일으키며 도랑으로 분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간신히 마커트 와인드 언덕을 올라가니 멀리 읍내 공회당의 광장에 켜진 조명등이 희미하게 보였다. 프랜치스는 심한 바람과 어둠 때문에 또다른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입술을 꽉 깨문 채 자꾸만 빨라지는 어머니의 발걸음을 부지런히 쫓아갔다. 10여분 수 두 사람은 국경의 다리를 건너 물에 잠긴 부두를 따라서 제 2 합숙소까지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어머니는 깜짝 놀라 멈춰섰다. 합숙소에는 자물쇠가 잠겨져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망설이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1마일쯤 떨어진 강 위쪽에 있는 덤 마리스의 제5 합숙소의 희미한 등불이 눈에 띄었다. 마리스는 어느 모로 보나 술주정꾼에 지나지 않았으나, 틀림없이 뭔가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길은 이미 폭우로 보이질 않았다. 도랑에 빠져 넘어지기도 하고 홍수가 진 들판을 힘겨운 줄도 모르고 가로질렀다. 어머니 옆에 바싹 달라붙어 걷고 있는 프랜치스도 한 발짝 옮길 적마다 어머니의 불안이 더해 가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은 겨우 제5 합숙소에 도착했다. 그 집은 콜타르를 바른 목조 오두막으로, 강 언덕에 쌓아올린 석축의 높은 방파제를 등지고 있었다. 오두막 주위에는 어망이 빙 둘러쳐져 있었다. 프랜치스는 이제 1분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뛰어가서 황급히 문을 밀어젖혔다. 순간 하루 종일 그렇게도 괴롭혔던 환상이 현실로 나타났다. 아버지가 마리스의 간호를 받으면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흙빛이 된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한쪽 팔에는 아무렇게나 붕대가 감겨져 있었으며, 얼굴에는 시뻘건 상처가 깊게 나 있었다. 두 사람 다 허리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있었으나 옆 테이블에는 술병과 컵 두개가 놓여 있고 세숫대야의 흙탕물은 피로 새빨갰다. 바람이 심하게 불 때만 사용하는 칸데라의 희미하고 노란 불빛이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 왔고 으스스한 공포의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황급히 달려가서 침대 옆에 쓰러질 듯이 무릎을 꿇었다. "알렉스......알렉스......많이 다쳤군요." 아버지는 눈이 부어 올라 보이지 않는 것 같았으나 핏기가 없는 부르튼 입술로 약간 웃어 보인 것 같았다. 아니 웃으려고 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상대놈보다는 덜하답니다, 아주머니!"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의 고집과, 그에 대한 사랑과,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자들에 대한 분노의 눈물이었다. "여기 왔을 때는 이미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하고 마리스는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내가 위스키를 두어 잔 먹였더니 기운을 차렸어요." 어머니는 타는 듯한 시선을 마리스에게 돌렸다. 토요일 밤이니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취한 것일까. 이 바보 녀석이 이렇게 중상을 입은 남편에게 술을 먹였는가 하고 생각하니 너무나 엄청난 일에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엘리자벳은 남편이 많은 피를 흘렸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슨 수를 쓰고 싶어도 붕대 하나 없었다. 바로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1초라도 빨리. 그녀는 긴장하여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때요, 알렉스. 나와 함께 걸을 수 있겠어요?" 걱정 없을까? 천천히 걸어가기만 하면......그녀는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생각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남편을 따스하고 밝은 안정한 장소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관자놀이의 뼈까지 파고 든 가장 심한 상처는 겨우 출혈이 멎은 것 같았다. 그녀는 프랜치스를 돌아다보았다. "프랜치스, 빨리 뛰어가라. 폴리 아주머니에게 치료할 준비를 해 달라고 말하고 바로 의사 선생님을 부르러 가거라. 알겠니!" 프랜치스는 오한이라도 든 것처럼 몸을 떨면서 자기도 모르게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떨군 채 미친 듯이 부두 쪽으로 달려갔다. "그럼, 여보, 일어나 보세요. 자, 내 손을 붙잡고." 마리스가 부축을 하려 했지만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엘리자벳은 냉정히 거절하고 혼자서 남편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다리를 휘청거리면서 그는 시키는 대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몹시 떨려서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난 가네, 마리스! 잘 자게나" 하고 그는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중얼거렸다. 그녀는 왠지 남편이 살아날 가망이 없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그러나 입술을 깨물며 쏟아지는 빗속으로 그를 데리고 나섰다. 합숙소의 문이 닫혔다. 그녀는 날씨 따위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비틀거리면서 서 있는 남편을 데라고 나오긴 했지만 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그때 문득 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어째서 여지껏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기와공장의 다리를 건너 지름길로 가면 적어도 1마일 정도는 가까우니까 20분이면 집에 도착하여 침대에 뉘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녀는 새로이 결심을 하고 남편의 손을 잡았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남편을 부축하여 강 위쪽의 다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도 아내의 속셈을 짐작하지 못했으나 요란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 오자 걸음을 멈추고 아내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요, 엘리자벳. 티드 강이 이렇게 세차게 흐르고 있는데 기와공장 다리를 어떻게 건넌다는 말이오? 난 건너지 못해요." "잠자코 계세요, 알렉스. 말을 많이 하면 기운이 빠져요." 그녀는 남편을 안심시키려 끌어안듯이 부축하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다리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다리는 철사로 된 로프에 손잡이가 달려 있는 좁은 나무다리로 강폭이 가장 좁은 곳에 있었다. 비교적 튼튼하게는 되어 있으나 기와공장이 이미 오래 전에 폐쇄된 후로는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 발을 다리에 걸친 엘리자벳은 어둠과 귀가 먹을 정도로 세찬 물소리에 불현듯 막연한 불안과 형용키 어려운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 마음을 스쳐 갔다. 다리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걸어갈 만큼 폭이 넓지 못했으므로 그녀는 잠깐 멈춰 섰다. 엘리자벳은 부상당한 남편을 생각하니 갑자기 모성애와 같은 묘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비에 흠뻑 젖어 무력해진 남편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여보, 이 손잡이를 꼭 잡아야 해요." "응, 잡고 있어." 그녀가 손에 쥐어 준 굵은 철사 로프를 알렉스는 커다란 손으로 잡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는 혼란해지고 숨은 차고, 마치 무엇이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녀는 그 이상 어떻게 하여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나 이대로 여기서 포기할 순 없는 거시다. "저를 꼭 잡고 따라 오세요" 하고 그녀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두 사람은 한 걸음 한 걸음 걷기 시작했다. 겨우 다리 중간쯤 이르렀을 때였다. 아차 하는 순간 남편의 한쪽 발이 미끄러졌다. 이렇게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 아니었다면 별 문제가 될 것도 없었을 테지만, 이미 다리 위에까지 넘치고 있는 티드 강의 세찬 탁류와 장화의 무게에 저항하여 필사적으로 발을 끌어올렸으나 다시 한쪽 다리마저 미끄러져 버렸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두 다리의 장화는 에탈에서 얻어맞아 기진맥진해진 그의 체력으로써는 어쩔 수가 없었다. 남편의 비명 소리에 놀라 돌아다본 그녀는 반사적으로 큰 소리를 지르며 남편을 꼭 붙잡았다. 그때 밀려온 거센 탁류에 남편은 난간의 로프를 놓쳐 버렸다. 그녀는 두 팔로 남편을 껴안고 전신의 힘을 다해 그를 끌어당기려 했다. 그때 다시 밀려온 거센 탁류와 칠흑 같은 어둠이 순식간에 두 사람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그날 밤 프랜치스는 밤새도록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두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강물이 좀 줄어들었을 때에 서로 부둥켜안은 두 사람의 시체가 모래톱에 가까운 물가에서 발견되었다. 그 무서웠던 환상의 공포는 프랜치스를 하루 아침에 고아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2 그로부터 4년이 지난 9월의 어느 목요일 저녁때의 일이었다. 프랜치스 치셤은 달로 조선소가 파하자 여느때와 다름없이 지친 다리를 이끌고 그레니의 빵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페인트를 칠한 공장의 허술한 판자 울타리가 있는 데까지 왔을 때, 그는 갑자기 중대한 결심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밀가루 공장과 가게 사이를 지나 뒷문으로 부엌에 몰래 들어가 설거지통에 빈 도시락을 놓았을 때 그의 천진스러운 까만 눈동자에는 어떤 결심의 빛이 타오르는 것이 역력히 보였다. 그의 모습은 커다란 무명 작업복에 감싸여 이상하게도 찌부러진 것같이 보였고, 거꾸로 쓴 어른의 모자 밑에 있는 얼굴은 기름투성이였다. 부엌에는 땅딸막한 키에 창백한 얼굴을 한 열 일곱 살 난 말캄 그레니가 식탁을 향하여-더러운 식탁보 위에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식기가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팔꿈치를 괴고 로크의 <부동산 양도 절차>라는 책을 읽으면서 한쪽 손으로는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더러운 머리칼을 박박 긁으면서 비듬을 털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모친이 암스트롱 대학에서 돌아온 자기를 위하여 만들어 놓은 쇠간요리를 부지런히 입으로 나르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찬장에서 자기의 저녁밥인 2센트 짜리 파이와 점심때에 구워 놓은 감자를 꺼냈다. 유리가 반밖에 끼워져 있지 않은 칸막이의 빈틈으로 가게에서 말캄의 어머니 미세스 그레니가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것을 내다볼 수 있었다. 그 쪽을 보면서 식탁위에 널려 있는 식기를 치우려고 하자 이 집의 아들인 말캄은 화난 듯한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공부하고 있는데 좀 조용히 할 수 없어? 야아, 그 손은 뭐야......언제나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군." 프랜치스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최상의 방위책이었다.. 프랜치스는 화상 자국과 못투성이가 된 손으로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들었다. 칸막이 문이 열리고 미세스 그레니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다 먹었니, 말캄. 아주 맛이 좋은 계란빵을 구워 놓았는데 먹어 보려무나. 싱싱한 달걀과 우유로 만들었으니까 소화도 잘 될 거야." "난 하루 종일 배가 불러 아무것도 못 먹겠어." 말캄은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여봐란 듯이 크게 호흡을 하여 비를 불쑥 내밀었다. "이봐, 이 숨소리를 들어보라고요." "공부를 지나치게 하니까 그래." 그녀는 큰 솥이 있는 부엌으로 뒤뚱뒤뚱 걸어갔다. "그렇지만 이것을 먹으면 기운이 날 거야......조금만 먹어 봐......엄마에게 효도하는 셈치고 말이야." 그는 어머니가 빈 접시를 치우고 대신 계란빵이 담긴 큰 접시를 가져다 놓은 것을 잠자코 보고 있었다. 찢어진 코르셋을 입고 스커트 자락을 너절하게 늘어뜨린 그녀는 아들이 걸신들린 것처럼 먹는 것을 만족한 듯이 바라보았다. 아들이 한 입 먹을 적마다 그녀는 아들을 향해 몸을 굽히고 길고 가는 코에 엷은 입술을 한 심술궂게 생긴 얼굴에 모성애를 드러내고 있었다. "네가 빨리 돌아와 주어 잘 된 거야. 오늘밤 아버지는 집회가 있단다." 하고 중얼거렸다. "아니, 그래요?" 하고 말캄은 귀찮다는 듯이 머리를 들었다. "미션 홀에서 말인가요?" "아니야, 공원이라던데." "우리 모두가 가는 건 아니죠?" 그녀는 이상야릇한 소리로 자랑처럼 말했다. "그렇지만 말이야, 말캄. 그것은 아버지가 나와 너에게 주신 오직 하나의 선물 아니냐. 아버지가 설교를 하시는데 우리도 참석하는 것이 좋지 않겠니?" 그러나 말캄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어머니는 자랑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따위 집회에 나가는 것은 질색이야. 아버지가 성서를 두드리면서 설교하는 옆에서 아이들이 '다니엘 성자, 다니엘 성자' 하고 떠드는 것을 듣고 있으란 말이에요! 어릴 적에는 그다지 싫지는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나도 말이지 변호사가 되려고 하는 판인데." 마침 그때 문이 열리고 아버지 다니엘 그레니가 조용히 방안으로 들어 왔기 때문에 말캄은 화난 얼굴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니엘은 식탁으로 가까이 와서 치즈를 한 조각 잘라 들고 컵에 우유를 따라 선 채로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벌써 작업복과 해어진 융단 슬리퍼를 벗고 번쩍번쩍하는 까만 바지에다가 몸에 맞지 않는 짧은 모닝 코트를 입고 있었다. 때묻은 와이셔츠에 까만 끈으로 된 넥타이를 매고 있었으므로 한층 비약하고 초라해 보였다. 구두도 수선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되어 있었다. 허리도 약간 굽었고 시력도 좋지 않았으나 눈은 뭔가 열심히 먼 곳을 보고 있는 일이 가끔 있었다. 다만 오늘밤은 안경 너머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지극히 온화했었다. 그리고 식사를 하면서 물끄러미 프랜치스를 지켜보았다. "프랜치스, 너 몹시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구나. 저녁은 먹었느냐?" 프랜치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이 들어온 후부터 어딘지 모르게 방안이 밝아진 것 같았다. 프랜치스를 보는 그의 시선에서 그 옛날 어머니가 자기에게 던져 주던 그것과 똑같은 것을 느꼈다. "얘야, 저쪽에 체리 케이크를 만들어 놓은 것이 있으니 먹고 싶으면 가서 먹으려무나. 솥 위의 선반에 있다." 미세스 그레니는 다니엘의 이 무분별한 너그러움에 화가 난 듯이 코를 벌름거렸다. 이렇게 자기 것을 누구에게나 인심썼기 때문에 두 번이나 파산을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언제 나가시겠어요? 지금 바로 나가시겠다면 가게문을 닫겠어요." 그는 노란 상아 장식이 달린 커다란 은시계를 꺼내서 들여다보았다. "아, 벌써 이렇게 됐나. 지금 곧 가야 해. 가게문을 빨리 닫읍시다. 하여간 하느님의 일이 먼저이니까. 그러나......" 하고 잠시 말을 끊었다가 "오늘밤엔 손님도 없을 테니까 일찍 닫는 게 좋을 거야." 그녀가 파리똥투성이인 과자 진열장의 덧문을 닫고 있는 동안 다니엘은 멍하니 선 채로 오늘밤에 할 설교의 말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윽고 몸을 움직이면서 "자, 말캄, 가자!" 하고는 프랜치스를 돌아보며 "조심해야 한다. 너무 늦도록 놀지 말고 일찍 자거라" 하고 말했다. 말캄은 입속으로 뭔가 투덜거리면서 책을 덮고 모자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부르튼 얼굴을 하고 아버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미세스 그레니는 손에 맞지도 않는 까만 장갑을 억지로 끼었다. 그녀는 집회 때마다 느끼는 것처럼 나들이 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프랜치스, 접시 닦는 것을 잊지 말아라" 하고 의미 있는 어두운 미소를 프랜치스에게 던졌다. "함께 가지 못해 유감이구나." 세 사람이 나가 버리자 그는 식탁 위에 엎으려 엉엉 울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아까의 새로운 결심이 다시 마음속에 타올랐다. 윌리탈록의 일을 생각하면 피곤한 몸에서 갑자기 활기가 되살아났다. 기름 묻은 접시를 설거지통에 쌓아 놓으며 문득 자기가 놓여 있는 처지를 생각하고 이마를 찌푸리면서 화가 난 것처럼 접시를 씻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기 전날의 일이었다. 다니엘이 폴리 아주머니를 향하여 핏대를 올리며 떠들던 것이 생각났다. "엘리자벳의 아이는 내가 맡겠어요. 우리가 제일 가까운 핏줄이니까요. 그 애는 우리가 데려가겠습니다." 그후 끌려오다시피 한 프랜치스는 불행 속에 파묻혀 살게 된 것이다. 그의 운명을 완전히 망쳐 놓은 것은 미세스 그레니가 약간의 유산과 아버지의 생명보험과 가재도구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속셈에서 그를 맡겠다고 한 폴리 아주머니의 요청을 법률에 호소하겠다고까지 협박하여 그를 데려온 그 혐오스러운 사건 때문이었다. 이 결정적이고 악랄한 수법으로 인해 그로 하여금 폴리 바논 일가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켜 버린 것이다. 더구나 간접적인 책임은 프랜치스에게도 있다고 생각하고 대단히 화가 난 폴리 아주머니는 그래도 최선을 다해 주었다는 확신에서 프랜치스에 관한 일은 앞으로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겠다고 결정해 버린 것이다. 프랜치스가 이 빵집에 와 보니 모든 것이 낯설고 이상한 것뿐이었다. 미세스 그레니가 손질을 해준 옷을 입고 책가방을 메고 프랜치스는 말캄과 함께 읍내의 달로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미세스 그레니는 처음에는 대견하게 생각하고 가게에서 두 사람이 학교에 가는 모습을 바라다보곤 했다. 아, 그러나 그러한 마음은 불꽃처럼 반짝 빛났다가 금방 꺼져 버리고 말았다. 다니엘 그레니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정도로 유순한 성격에 고결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파이 꾸러미와 자기가 만든 팜플렛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토요일 밤이 되면 마차 뒤에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고 쓴 간판을 내걸고는 읍내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천국의 꿈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 같았으나 때때로 하계에 내려와서 빚쟁이의 성화에 식은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생각은 천국을 뛰어다니면서도 두 다리를 밀가루 속이 처박고 뼈가 부서지도록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외손자의 읠 따위는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도 생각이 나면 프랜치스의 손을 잡고 뒤뜰로 데리고 가서는 봉지에 넣은 빵부스러기를 참새들에게 뿌려 주곤 했었다. 인색하고 살림도 잘 꾸려가지 못하는 미세스 그레니는 남편의 잇달은 실패를-자기 가게의 마부나 점원에게 속아서 빵 굽는 솥을 하나 하나 팔아 버리고 드디어는 싸구려 빵집으로 전락하기까지-몹시 불안스럽게 생각해 온 터이므로 이내 프랜치스의 일도 귀찮은 짐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를 맡을 때에 함께 붙어 온 70파운드의 매력이 사라져 버리자 이 흥정은 결국 손해를 보았다고 바로 후회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쩌지도 못하는 가난에 시달리고 있던 그녀에게는 프랜치스의 양육비와 학교의 수업료 등은 견딜 수 없는 부담감이었고 고민 거리였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식비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는, 그 외는 한 푼도 들일 수 없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프랜치스의 바지가 다 해어지자 다니엘이 젊었을 때 입던 헌 녹색 윗도리를 바지로 고쳐 입혔는데, 그 우스꽝스러운 무늬나 색깔이 읍내에서는 웃음거리가 되었고, 프랜치스를 한층 비참한 처지로 만들뿐이었다. 말캄의 수업료는 언제나 어김없이 지불되었으나 프랜치스의 수업료는 많은 아이들 앞에서 수업료 체납자로 불러 세워진 후, 굴욕에 떨면서 창백한 얼굴이 되어 그녀에게 애걸하러 가기 전에는 언제나 잊어버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런 때는 으레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심장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다는 얼굴을 하고서 마치 피라도 빨리는 표정으로 잔돈만을 골라 던져 주곤 했다. 프랜치스는 모든 것을 견디고 참았다. 그러나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라는 것이 어린 프랜치스로서는 가장 참기 어려운 슬픔이자 고통이었다. 슬픔에 미칠 것 같을 때에는 어딘가 송어라도 낚을 수 있는 개천이 없을까 하고 혼자서 따분한 시골길을 방황하기도 했다. 때로는 항구를 떠나는 기선을 바라보며 목적도 없는 동경에 모자챙을 잘근잘근 깨물며 절망감을 달래는 일도 있었다. 서로 용납이 되지 않는 종파 사이에서 태어나 혼자 남겨진 프랜치스로서는 어찌하면 좋을까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타고난 밝고 영리한 머리는 둔해지고 얼굴의 생김새까지도 음산해져 가고 있었다. 오직 그에게 즐거움이 있다면, 말캄과 미세스 그레니가 외출하고 집에 없는 날 부엌 난로 옆에 다니엘과 마주 앉아 외할아버지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담은 얼굴로 잠자코 성서를 읽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다니엘은 특히 종교에 관해서는 프랜치스의 자유에 맡기고 절대로 간섭하지 않으리라고 암암리에 굳게 마음먹고 있었으나-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설교하는 그가 어떻게 남의 종교의 자유를 속박할 수가 있을 것인가-이것 또한 미세스 그레니가 볼 때는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자기와 같이 영원히 복받은 '그리스 교도'에게는 자기의 딸이 저지른 바보 같은 행위의 유물인 이 손자는 파문에 해당하는 저주의 씨앗이며, 이웃의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상태가 최고조에 달한 것은 그로부터 일년 반이 지난 후였다. 성적이 좋은 프랜치스는 전교 글짓기 대회에서 불행하게도 말캄을 꺾어 버린 것이다. 외할머니는 이제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몇 주일이고 계속해서 잔소리를 하게 되자 드디어 외할아버지도 굴복해 버렸다. 집안이 때마침 파산에 직면해 있었으므로 프랜치스의 교육은 그만 중단하도록 상의가 되었던 것이다. 미세스 그레니는 몇 개월 동안 보인 적이 없는 미소를 능글맞게 지으며 어린애라고는 하지만 너는 똑똑하니까 집안 일을 돌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지금부터 학교는 그만두고 사내답게 단념하고 일터로 나가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열두 살의 프랜치스는 이렇게 해서 주급 3실링 6펜스의 리벳공으로서 달로 조선소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 일곱 시 십오 분쯤 설거지를 끝낸 프랜치스는 조그만 거울 앞에 서서 대충 머리 손질을 하고 그대로 집을 나왔다. 밖은 아직 어둡지 않았으나 밤공기가 차가워서 기침이 나왔다. 옷깃을 세우면서 큰길로 들어섰다. 그는 마차를 세워 놓은 공터를 지나서 달로 양조장 앞 모퉁이에 있는 병원까지 왔다. 빨강과 녹색의 약병을 그려 놓은 밑으로 '닥터 서더렌 탈록 내과 및 외과'라고 쓴 네모난 간판을 보고 프랜치스는 약간 입을 해죽이 벌린 채 안으로 들어갔다. 약국은 어두컴컴했으며 노회, 아위, 감초등 강한 약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쪽 벽에는 짙은 녹색 병이 가득 찬 선반이 있고, 그 끝에는 진찰실로 통하는 나무계단이 있었다. 길다란 카운터 저쪽에 의사의 장남이 윌리가 선 채로 대리석 판 위에서 열심히 약봉지를 만들고 있었다. 건강하고 주근깨투성이의 얼굴을 한 열 여섯 살의 소년은 커다란 손과 갈색 머리가 유난히 눈에 띄는, 말수가 적고 아무 말 없이 미소를 띄우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는 지금도 프랜치스에게 인사를 하면서 정다운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에서 깊은 우정을 느끼며 쑥스럽다는 듯이 눈길을 돌렸다. "그만 늦어 버렸어, 윌리!" 프랜치스는 카운터 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도 그래......그리고 나는 아버지 대신 약을 전해 주지 않으면 안 되거든." 윌리가 암스트롱 의과대학에 가게 되면서부터 탈록 박사는 농담 삼아 자기 아들을 자기 조수라고 부르곤 했다. 두 사람은 잠시 잠자코 있었으나 이윽고 윌리가 조용히 프랜치스 쪽으로 눈을 돌렸다. "결심은 했니?" 프랜치스는 그때까지도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싶은 생각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입을 꼭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프랜치스." 윌리의 순박하고 믿음직한 얼굴이 찬성의 뜻을 표하면서 활짝 빛났다. "나 같으면 도저히 그렇게 참고 견디지 못했을 거야." "나도 마찬가지야" 하고 프랜치스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만......외할아버지와 너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참아 온 거지." 그의 홀쭉한 어린 얼굴은 그늘이 져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귀뿌리까지 빨개졌다. 윌리의 얼굴도 동정으로 붉어졌다. "기차시간은 알아두었어. 토요일에 알스테드를 여섯 시 삼십오 분에 떠나는 직행 열차가 있어......쉿! 아버지가 오신다." 윌리가 갑자기 말을 중단하고 주의를 주듯 프랜치스를 보았을 때 진찰실 문이 열리고 탈록 박사가 마지막 환자를 전송하면서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까다롭고 성급한 사람이었으며, 희끗희끗한 트위드를 입고 있었다. 거무스름한 얼굴에 곱슬곱슬한 머리와 윤기 있는 수염 등은 모기에도 활기가 넘치는 것 같았다. 그는 스스로 자유 사상가라고 말하고, 로버트 잉가솔(미국의 법률가이며 자유 사상가)이나 다윈(<종의 기원>으로 유명한 영국의 박물학자이며 진화론의 창시자)교수의 제자임을 자칭했다. 읍내에서는 좋지 않은 평판을 받고 있었으나, 막상 마주 대하고 보면 전혀 흠잡을 데가 없는 아주 매력적인 데가 있었다. 그것이 환자에게는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것인가를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프랜치스의 볼이 홀쭉하게 야윈 것을 보고 박사는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이봐, 프랜치스, 이제 또 한 사람 죽게 됐구나. 아니 지금 당장에 그런다는 것은 아니고. 그러나 시간 문제야, 불쌍하게시리. 나이도 어린놈이......." 프랜치스의 얼굴에 순간 씁쓸한 미소가 지나갔다. 그는 프랜치스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똑바로 프랜치스를 쳐다보며 문득 자기의 어두운 소년 시절을 떠올렸다. "기운을 내라. 백년만 지나며 누구나 결과는 똑같이 되는 거야." 프랜치스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박사는 껄껄거리며 웃고 나서 모자를 뒤로 젖혀 쓰곤 마차용 장갑을 끼면서 방을 나가 버렸다. 그리고 마차에 올라타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윌리, 잊지 말고 프랜치스를 저녁 식사 때에 데리고 오너라, 알았니? 그리고 아홉 시에는 따끈한 차를 부탁한다." 한 시간 후 약을 전해 주고 두 소년은 표현할 수 없는 우정을 서로 느끼면서 윌리네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은 공원을 바라보고 있는 다 낡은 집이었다. 내일 모레 결행하기로 한 대담한 모험을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프랜치스의 마음에는 희망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윌리 탈록과 함께 있기만 한다면 자신의 장래도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우정은 싸움을 하고 나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것은 아직 프랜치스가 학교에 다니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카슬 가를 친구들과 함께 걷고 있을 때 윌리의 시선이 가스공장 옆의 허술한 카톨릭 성당에 머물렀다. "얘들아!" 하고 윌리가 갑자기 기운찬 목소리로 외쳤다. "너희들 중에 6펜스 가지고 있는 사람 있니? 윌 성당에 들어가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자." 그리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일행 가운데 프랜치스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를 보자 윌리는 왠지 부끄러워 얼굴을 밝혔다. 별로 의미도 없는 그 바보스러운 농담은 말캄 그레니가 '바로 이때다!' 하고 선동하여 교묘하게 싸움의 기회를 만들지만 않았더라도 아무 일 없이 잊어 버렸을 일이었다. 모두에게 선동되어 프랜치스와 윌리는 공원으로 가서 승부도 나지 않는 피투성이의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서로 조금도 굽히지 않고 용감히 싸운 그 싸움은 참으로 근사한 격투였다. 어두워졌기 때문에 승부 없이 끝내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당사자들은 싸울대로 싸웠으므로 이미 그것으로 충분했었다. 그러나 구경꾼들의 잔인성은 그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다음날 학교가 파하자 두 소년은 비겁자가 되지 않기 위해 이미 상처투성이가 된 서로의 얼굴을 다시 치고 받았다. 그들은 어느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렇게 일주일 동안을 두 소년은 투계처럼 맞붙어 비열한 친구들을 위하여 구경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유도 없으려니와 끝도 없는 이 비인간적인 싸움은 두 사람으로서는 슬픈 악몽이 되었다. 그런데 다음 토요일, 그들은 우연히 마주쳐서 대면을 하게 되었다. 어색한 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렬한 충동에 사로잡혀서 서로의 목을 얼싸안았던 것이다. 윌리는 엉엉 울면서 말했다. "나는 싸움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난 너를 좋아해! 좋아한단 말이야!" 프랜치스도 시퍼렇게 멍든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닦으면서 말했다. "윌리, 나도 네가 달로에서 제일 좋아......." 두 사람은 공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흙투성이의 잔디밭의 한가운데에 음악당이 덩그렇게 서 있고, 녹슨 창살이 보이는 공동 변소가 그 건너편에 보였다. 등받이가 떨어져 나가 의자가 놓여 있고, 그 근처에는 창백한 얼굴을 한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부랑자들은 담배를 피우면서 뭔가 떠들썩하게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프랜치스는 외할아버지가 설교하고 있는 곳을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깨닫고 움찔하고 놀랐다. 변소 반대쪽 한 구석에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가 있으라' 라고 노란 글씨로 쓴 빨간 깃발이 꽂혀 있었다. 그 깃발 아래에는 휴대용 올간이 놓여 있고 그 앞 의자에 미세스 그레니가 순교자와 같은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깃발과 올간 사이의 낮은 단상에 서서 30명 정도의 청중에게 에워싸여 있는 것은 '다니엘 성자'였다. 두 사람이 그곳에 갔을 때 마침 다니엘은 개회 기도를 마치고 막 설교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모자를 벗어 든 채 머리를 뒤로 젖히고 설교를 시작하는 그의 음성은 온화하고 아름다웠다. 타오르는 신념과 단순한 마음씨를 그대로 나타내는 목소리였다. 그의 교리는 동포애의 정신이며, 이웃과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을 표방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서로 도우며 세계에 평화와 선의를 가져와야 한다고 했다. 그의 그 이상으로 인류를 인도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교리라 하겠다. 그는 어떠한 교회와도 분쟁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으나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힐난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참다운 겸양과 자비이고 또한 관용이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러한 덕은 단순히 말로만 주장하는 것은 무가치하며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전에도 외할아버지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다니엘 성자'라는 별명으로 읍내 사람들의 빈축을 사고 있는 이러한 그의 신념에 공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모한 결심을 하고 있는 현재의 그로서는 설교의 의미가 한층 뼈에 사무치며 잔학과 증오가 없는 세계에의 동경에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선 채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문득 조선소의 리벳반 반장인 조 모어가 청중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조의 뒤에는 달로 주점에 드나드는 노름꾼들이 각각 손에 벽돌과 썩은 과일, 보일러 공장에서 버린 기름투성이 걸레 조각 등을 쥐고 따르고 있었다. 조 모어는 입버릇은 좋지 않지만 근본은 괜찮은 사람으로 취하면 구세군이나 성당의 행렬 뒤를 따라 다니며 빈정대길 잘했다. 그런 그가 지금 기름걸레를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 다니엘 성자! 춤추며 노래를 불러보라구!" 프랜치스는 눈이 휘둥그래지고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들은 집회를 망쳐 놓을 작정인 것이다. 그는 순간 미세스 그레니의 머리에 썩은 토마토가 날아가고 말캄의 그 보기 싫은 얼굴에 기름투성이의 걸레가 뒤집어 씌워지는 꼴을 상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온몸에 고소한 기쁨이 넘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프랜치스는 다니엘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영혼의 강렬한 열변으로 심취된 채 신념에 찬 말들을 전신을 떨면서 외치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자기도 모르게 모어에게 뛰어가서 그의 팔을 잡고 신음하듯이 애원을 했다. "안돼, 조, 그런 짓 하지 마. 우린 서로 친구가 아냐?" "어떤 놈이야?" 조가 프랜치스를 보자 술 취한 사나운 얼굴 표정이 금세 누그러졌다. "아니, 프랜치스 아냐?" 그리고 조용한 말로 중얼거렸다. "난 네 할아버지라는 것을 깜박 잊었어. 미안해." 그는 잠시 잠자코 있더니 마침내 명령하듯이 부하들에게 호령했다. "야, 우리 저쪽 광장에 가서 구세군 여자들이나 골려 주자." 그 패거리들이 가버리자 올간 소리가 갑자기 활기를 띠며 울려 퍼졌다. 윌리 탈록 이외에는 왜 날벼락이 떨어지지 않았는지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조금 후에 그들은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윌리는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그러나 감동적인 소리로 물었다. "왜 그랬지, 프랜치스?" 프랜치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나도 모르겠어......그렇지만 할아버지의 설교는 모두 옳은 말이었어......난 지난 4년간 인간의 증오라고 하는 것을 싫증이 나도록 맛보았어.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만 하더라도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의 미움만 사지 않았더라면 익사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는 더 이상 말을 계속할 수가 없어서 부끄러운 듯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윌리는 그대로 잠자코 프랜치스를 거실로 안내했다. 어두컴컴한 밖에서 들어와 보니 그곳은 너무나 밝았다. 더구나 방안이 너절하게 흐트러져 있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갈색 벽지를 바른 천장이 높은 길다란 방에는 다 낡은 소파와 다리가 부서진 의자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커다란 탁자는 칠이 다 벗겨지고 그 위에 아교로 붙여 놓은 꽃병이 놓여 있으며, 손잡이가 떨어진 초인종과 물약병과 환약 상자가 벽난로 위네, 그리고 그림책과 장난감 등이 잉크 얼룩투성이인 융단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이미 아홉 시가 가까운데도 윌리네 집 식구들은 아직 누구 한 사람도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윌리의 일곱 남매는 진, 톰, 리차드 등-너무나 우굴우굴 했으므로 그 아버지마저도 그들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수가 있다고 했지만-프랜치스도 그 이름들을 잘 분별하지 못했다. 그들은 책을 읽거나 쓰거나 스케치를 하거나 씨름을 하거나 방금 구어낸 빵과 우유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럼 매력적인 모습을 한 모친 아그네스 탈록이 반쯤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앞가슴을 드러낸 채 난로 옆의 요람에서 아기를 안아 젖을 먹이며 기쁜 얼굴로 프랜치스를 맞아 주었다. "어서 와요, 프랜치스. 진, 너는 가서 수프를 2인분 더 가져와야겠다. 리차드, 소피아를 건드리지 말아요. 아, 그리고 진, 아기 기저귀 좀 갖다 다오. 그리고 아버지 드릴 토디(위스키에 설탕 끓인 물을 섞어서 만든 술)를 만들어야 하니까 주전자에 물이 끓는지 보렴. 참으로 좋은 날씨야. 그렇지만 선생님은 폐렴이 많이 유행하고 있다고 하시더군. 프랜치스, 앉아요, 토마스, 아무 옆에나 그렇게 앉는 게 아니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잖아?....." 의사 아버지는 이 달은 홍역, 다음 달은 수두, 이렇게 무엇이나 병균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언제나 그 희생이 되는 것은 여섯 살 난 토마스였다. 이 꼬마 환자는 또 다른 동생에게 병을 전염시키기 때문에 언제나 주의를 제일 많이 받았다. 프랜치스는 진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소파는 여러 사람이 앉았기 때문에 삐걱삐걱하는 소리를 냈다. 올해 열네 살이 된 진은 어머니를 꼭 닮았고, 크림색 피부를 가진 귀엽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프랜치스는 빵과 고기와 우유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대접받았다. 그는 아까 공원에서의 흥분이 아직 가라앉지를 않았고 가슴 속에 뭔가 큰 덩어리가 들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착잡하고 혼란된 감정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집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이 집 사람들이 왜 이렇게 친절하고 그리고 그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지 그것이 그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시하는 것 같은 아무런 신앙마저도 갖지 않은 합리주의자에게 교육받은 이 집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져야 하고 지옥의 불길이 이미 그 발목을 핥고 있어야 할 터인데. 아홉 시가 지나고 십오 분쯤 되어 문 밖에 마차 멈추는 소리가 울렸다. 탈록 박사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모두들 환성을 질렀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자 박사는 아내에게 사랑에 넘치는 키스를 하고 나서 겨우 의자에 앉았다. 구두를 슬리퍼로 바꿔 신고 한 손에 술잔을 들고 무릎에는 젖먹이를 올려놓았다. 그런 그가 문득 프랜치스의 눈과 마주치자 김이 일고 있는 술잔을 쳐들며 놀리듯 말했다. "언젠가 내가 말했었지, 독도 약에 쓸데가 있다고 말이야. 이런 독한 술도 좋은 때가 있어. 알코올 중독만 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단 말이야. 그렇지, 프랜치스?" 아버지가 기분 좋아하는 것을 보자 윌리는 공원에서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고 말았다. 박사는 무릎을 치면서 프랜치스에게 미소를 던졌다. "참 좋은 일을 했구나. 카톨릭에서도 너 같은 작은 천사가 있구나. 하긴 네 신앙에는 나는 어디까지나 반대지만. 그러나 신앙의 자유는 존중한단 말이야. 진, 그런 눈으로 프랜치스를 보는 게 아니야. 간호사가 된다고 했는데, 그렇게 조숙하다간 난 마흔도 되기 전에 손자를 볼 것 같구나. 뭐 그것도 나쁠 건 없지." 그렇게 말하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아내를 향하여 건배를 했다. "우리들은 비록 천국엔 절대 가지 못하겠지만-그러나 당분간은 먹을 것, 마실 것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야." 잠시 후 프랜치스가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 하자 문 밖까지 따라 나온 윌리가 프랜치스의 손을 힘껏 잡았다. "성공을 빌겠어.......거기에 도착하면 꼭 편지해." 이튿날 새벽 다섯 시,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을씨년스러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조선소의 기적이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잠이 덜 깬 프랜치스는 침대에서 구르듯 빠져나와 황급히 작업복을 입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고개를 움츠리고 몸을 떨면서 조선소로 향한 행렬에 끼었다 .아직 어두컴컴하고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아침 바람이 그의 얼굴을 후려갈기는 것 같았다. 수위실을 지나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골조만 세워진 선체가 주위의 조선대 위에 여러 개 솟아 있었다. 반쯤 조립된 철갑선의 선체 옆에서 조 모어반의 점호가 시작되었다. 조와 조수인 철공, 철판을 자르는 철판공, 거기에 두 사람의 소년 리벳공과 프랜치스 자신이었다. 프랜치스는 불을 지피고 화덕 밑에서 풀무질을 시작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싫으면서도 모두 열심히 각자의 작업에 착수했다. 모어가 큰 해머를 들어올려 내려치자 일제히 해머 소리가 높아지면서 조선소 일대에 울려 퍼졌다. 프랜치스는 화덕 속에서 시뻘겋게 달은 리벳을 꺼내 들고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골조의 볼트 구멍에 재빠르게 던져 넣었다. 그것은 배의 동체가 될 커다란 철판을 달구어 해머로 편편하게 두들겨 맞춘다. 이 작업은 대단히 괴로운 일이었다. 화덕 옆에서는 타 죽을 것같이 뜨겁지만 사닥다리를 올라가면 얼어붙을 것같이 추웠다. 직공들의 도급작업이었기 때문에 소년공은 아무리 재빨리 몸을 움직여도 언제나 느리다는 잔소리를 들었다. 더구나 리벳은 완전히 백열상태가 될 때까지 달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사닥다리를 오르내리고 불 옆을 우왕좌왕하다가 화상을 입거나 연기에 눈이 충혈 되어 끙끙거리면서도 프랜치스는 하루종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갑철공에게 리벳을 날라다 주어야 했다. 오후가 되면 더욱더 재촉이 심했다. 직공들은 더 많은 수입을 올리기 위해 소년공을 인정사정없이 혹사한다. 퇴근 한 시간 전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오직 퇴근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만이 빨리 울렸으면 하고 기다려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프랜치스는 구원이라도 받은 듯 기뻐했다. 그른 부르튼 입술을 핥으면서 모든 소리가 그친 조용함에 오히려 귀가 먹은 것처럼 그 자리에 잠시 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이윽고 귀가길에 오른 프랜치스는 땀흘린 피곤한 머리로 생각했다! 내일이다-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눈동자가 희망으로 빛나며 문득 우쭐한 기분이 되었다. 그날 밤, 그는 쓰지 않는 가마솥 속에 감추어 둔 나무상자에서 몇 년 동안 모아 둔 은화와 동전을 꺼내서 10실링의 금화로 바꾸어 바지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 금화를 꼭 쥐어 보았을 때는 뜨거운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미세스 그레니에게 가서 바늘과 실을 빌려 달라고 했다. 그녀는 무엇에 쓰느냐고 야단을 쳤으나 돌연 무엇인가를 느꼈는지 금방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잠깐 기다려라. 그 위의 서랍에 실꾸리가 있다. 바늘도 꽂혀 있으니 가져가려무나." 그녀는 의혹에 찬 눈초리로 프랜치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헐렁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자기 방으로 돌아온 프랜치스는 금화를 정성 들여 종이에 싸서 저고리의 속주머니에 단단히 꿰맸다. 실꾸리를 돌려주려고 아래로 내려갔을 때는 이젠 안심이다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튿날은 토요일이고 조선소도 열두 시에 파했다. 두번 다시 이 문을 드나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고 생각하니 너무나 기뻐서 점심밥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안절부절못했으므로 미세스 그레니로부터 꾸중이나 듣지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외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랜치스는 식사를 마치고 아무도 모르게 살그머니 집을 빠져나와 달음박질을 하듯이 걸음을 재촉했다. 읍내를 벗어나자 달음박질하는 것을 그쳤으나 잔걸음은 여전했다. 프랜치스의 가슴은 노래라도 나올 것 같은 기분으로 꽉 차 있었다. 이것은 옛날부터 있어 온 흔해빠진 불행한 소년의 가출이라고 하는 평범한 사건이지만 지금의 그로서는 자유에의 길인 것이다. 그는 맨체스타에 닿기만 하면 어느 방직공장이든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정거장까지 15마일을 네 시간에 걸었다. 알스테드 역 건물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여섯 시를 치고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플랫폼의 불빛도 희미하게 졸고 있었다. 그는 대합실 의자에 걸터앉자 칼로 속주머니에 꿰맨 자리를 뜯어 소중히 간직한 빛나는 금화를 꺼냈다. 열차 시간이 되어 가자 매표소의 창문이 열렸다. 프랜치스는 얼른 창구로 가서 표를 사려고 했다. "맨체스타 표 한 장 주세요." "9실링 6펜스." 매표소 직원은 녹색 표를 일부인 기계에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그는 이젠 살았다는 듯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역시 생각했던 차비와 꼭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돈을 내밀었다. 직원은 잠시 잠자코 앉아 있더니 "이거 뭐야? 9실링 6펜스라니까" 하고 말했다. "10실링 드렸잖아요."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 봐. 파출소에 넘겨 버릴 테다!" 직원은 화를 내며 돈을 프랜치스 앞으로 내던졌다. 그것은 반짝반짝 하기는 하나 10실링 짜리 금화가 아니라 1파징(4분의 1 페니)짜리 동전이었던 것이다. 너무나도 어이없는 일에 멍청해진 채 프랜치스는 열차가 홈에 들어와서 승객을 태우고 다시 기적을 울리며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불현듯 스치는 것이 있었다. 칼로 꿰맨 데를 뜯었을 때 조금 이상하다 하고 생각하긴 했으나 역시 그것은 자기의 서투른 솜씨가 아닌 아주 솜씨 있게 꿰맨 것이었다. 피가 가셔 버릴 것 같은 머리에 금화를 훔친 사람의 머리가 떠올랐다. 미세스 그레니였다. 그날 밤 아홉 시 경, 선다스톤 탄광촌의 교외를 달리는 한 대의 마차가 축축이 내린 안개 때문에 램프 불빛이 흐려져서 길 한가운데를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사람을 자칫 잘못했으면 칠 뻔했다. 이런 밤 이런 장소에 마차를 몰고 가야 할 사람은 탈록 박사 이외에는 없었다. 박사는 놀라 앞발굽을 쳐들은 말을 진정시키고 안개 속의 앞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금방 튀어나오는 욕지거리를 참았다. "아니. 너였구나! 정말 놀랐는걸. 자, 빨리 타거라. 그러고 있으면 내 팔이 빠져 버린단 말이다." 탈록 박사는 프랜치스의 몸을 모포로 싸 주고는 아무 말도 묻지 않고 마차를 몰았다.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좋은 약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열 시 반경 프랜치스는 박사집의 거실에서 뜨거운 수프를 먹고 있었다. 이미 모두 잠자리에 들어 무척 조용했다. 어쩐지 낯선 집에 온 것같이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있으려니까 머리를 따 내리고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친 윌리의 어머니가 들어왔다. 그리고 남편의 옆에 서서 몹시 허탈 상태에 빠져 있는 피곤에 지쳐 버린 프랜치스를 지켜보았다. 소년은 그 두 사람이 있는 것도 뭔가 작은 소리로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프랜치스는 웃으려고 했으나 웃어지지가 않았다. 그러자 탈록 박사가 다가와서 이상한 제스처로 청진기를 꺼내면서 말했다. "네 그 기침은 심상치 않아. 자, 진찰을 해보자." 프랜치스는 앞가슴을 열고 박사가 가슴을 두들기며 진찰을 하는 대로 내맡기고 있었다. 탈록은 진찰을 끝내고 어색한 얼굴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여느 때의 유머는 어디로 갔는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잠깐 아내 쪽을 보며 두툼한 입술을 깨물었는가 싶더니 난로 옆에 자고 있는 고양이를 느닷없이 발로 차면서 말했다. "이게 무슨 꼴이야. 어린애를 군함 만드는 중노동을 시키고, 탄광이나 방직공장에서 혹사시키면서도 그리스도교 국가라고? 진짜 그리스도교 국가가 보면 질색을 할거야. 아니, 나는 자신이 이교도인 것을 참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한단 말이다. 제기랄!" 그는 거칠게 프랜치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봐, 너 타인카슬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냐? 이름이 뭐지? 뭐 바논? 유니온 주점? 좋아, 그럼 빨리 집으로 가서 쉬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폐렴에 걸릴 거야, 알겠니?" 프랜치스는 이젠 거역할 기력도 없어 시키는 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일주일간 미세스 그레니는 줄곧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캄이 입고 있는 새로 산 스웨터에는 10실링의 정가표가 붙어 있었다. 그 일주일 동안은 프랜치스에게는 참으로 비참한 나날이었다. 기침을 할 때마다 왼쪽 옆구리가 아팠으나 그 몸을 이끌고 조선소에 일하러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외할아버지가 여러 가지로 애써 자기를 감싸주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가끔 체리 케이크를 몰래 만들어 갔다 주곤 했으나 프랜치스는 그것조차 먹을 수가 없었다. 토요일 오후가 왔으나 프랜치스는 밖으로 나갈 원기가 없어서 이층 자기 방 침대에서 거의 혼수상태가 된 채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믿을 수 없을 만큼 심한 심장의 파동을 느꼈다. 창 밖의 길거리에 그 잊을 수 없는 모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미지의 위험한 해역을 지나가는 기선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있기는 하나, 둘도 없는 바로 그 모자였으므로 틀림이 없었다. 그렇다. 잘못 봤을 리가 없다. 그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금빛 자루가 달린 양산, 거기에 짧은 실크 코트. 그는 창백한 입술을 움직여 약하디 약한 목소리로 외쳤다. "폴리 아주머니!" 아래층에서 가게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휘청거리면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으나 반만 유리를 낀 문 뒤에서 멈춰서 버렸다. 폴리 아주머니는 입을 꼭 다문 채 가게 한가운데에 꼿꼿이 서 있었다. 미세스 그레니도 이에 대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일어났다. 카운터에 기댄 채 말캄이 반쯤 입을 벌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폴리 아주머니의 시선이 이윽고 빵집 노파에게로 돌려졌다. "확실히 미세스 그레니죠?" 미세스 그레니는 전에 없이 몰골이 사나웠다. 아직 잠옷 위에 더러운 앞치마를 두르고, 어깨가 다 드러난 이상한 블라우스는 깃이 오그라들었고 끈이 축 늘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지요?" 폴리 아주머니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프랜치스 치셤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 애는 지금 없습니다." "그럼,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폴리 아주머니는 하루 종일이라도 기다릴 듯이 재빨리 카운터 옆의 의자에 앉았다. 잠시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미세스 그레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캄, 공장에 가서 아버지를 빨리 오시라고 해" 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공회당에 가신다고 5분 전 쯤에 나가셨어요. 저녁 식사 때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폴리는 천장을 보고 있던 눈을 돌려 남의 흉이라도 들추어낼 것처럼 말캄을 쏘아보았다. 그가 얼굴이 빨개졌으므로 그녀는 약간 미소를 지었다가 그대로 그를 외면해 버렸다. 미세스 그레니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드디어 노기를 폭발시키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 바빠요.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수 있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란 말예요. 아까도 말했듯이 그 애는 밖에 나가고 없습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릅니다. 못된 친구들하고 놀아나고 있을 거예요. 언제나 늦게 집에 돌아오고, 버릇은 나쁘고, 정말로 돌보기 성가신 애예요. 그렇지, 말캄?" 말캄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말이고말고" 하고 미세스 그레니는 말을 계속했다. "모두 털어놓으면 당신도 놀랄 거예요. 그렇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우리들은 그리스도 교도니까 얼마든지 돌봐 줄 작정이에요.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말해두겠습니다-그 애는 대단히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건 잘된 일이군요" 하고 폴리는 장갑 낀 손으로 품위 있게 하품을 막으면서 시치미를 딱 떼고 말했다. "저는 그 애를 데리러 왔습니다." "뭐라고요!" 느닷없는 말에 미세스 그레니는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깜짝 놀라며 외쳤다. 그리고는 새파랗게 질렸다. "여기에 의사 선생님의 진단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고 폴리는 그 결정적인 말을 음미라도 하듯이 차근차근 힘주어 말했다. "그 애는 영양 부족과 과로로 늑막염에 걸린 거랍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폴리는 지갑 속에서 진단서를 꺼내어 의미있는 듯이 양산 끝으로 툭툭 쳐보였다. "미세스 그레니, 당신도 이 진단서 정도는 읽을 수 있을 텐데요." "거짓말,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애는 내 자식과 마찬가지로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고 있어요." 그녀는 일순 말을 중단했다. 문에 바싹 몸을 기댄 채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와들와들 떨면서 그 자리의 광경을 보고 있던 프랜치스가 헐렁거리는 손잡이에 너무 바싹 기댔기 때문에 문이 덜컹하고 열려 튕겨 나오듯이 가게 한가운데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아연실색하여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마침내 폴리 아주머니가 침착성을 잃지 않은 채 말했다. "자아, 프랜치스, 이리 와. 그렇게 떨지만 말고. 너 거기에 있었구나?" "네, 있었습니다." 프랜치스의 몰골에 눈시울이 뜨거워진 폴리는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럼 가서 짐을 챙겨 가지고 오너라." "챙길 것이 없습니다." 폴리는 다시 장갑을 끼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럼 여기 더 있을 필요가 없다. 빨리 가자." 미세스 그레니는 노기로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렇게 당신 맘대로는 안 될 거예요. 법에 고발해서라도......." "고발하겠으면 하세요." 폴리는 의미 있는 듯 진단서를 지갑 속에 넣었다. "그렇게 되면 불쌍한 엘리자벳의 가재도구를 판돈이 얼마만큼 이 애를 위하여 쓰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당신의 아들을 위하여 쓰였는지 그것이 확실해질 거예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미세스 그레니는 공박을 당하여 얼굴이 새빨개져서 한 손으로 자기 가슴을 쥔 채 표독스러운 눈으로 폴리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어머니, 가게 내버려두세요" 하고 말캄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잘 됐지 뭐예요. 성가신 존재를 내쫓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야." 폴리 아주머니는 양산을 팔로 안으며 그렇게 말하는 말캄을 아래위로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바보로군, 네 놈은" 그리고는 몸을 돌려 미세스 그레니에게 "당신도 역시 그래요." 그리고 의기양양한 듯이 프랜치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 모자를 쓰지 않은 그를 지체할 것도 없이 데리고 나갔다. 그들 두 사람은 역을 향해 말했다. 장갑을 낀 폴리의 손이 그의 윗저고리를 꼭 붙잡고 있는 모습은 흡사 언제 달아날지 모르는 사랑스런 새라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역 앞에까지 와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스켓 한 봉지와 기침약 그리고 모자를 사주었다. 기차를 타고 마주 앉아서야 폴리는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모자를 귀까지 덮일 정도로 눌러쓰고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비스켓을 먹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을 반쯤 감으면서 그래도 활달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 전부터 알고 있었단다. 얼굴만 보아도 알지. 그런 사람들한테 너를 맡겨 놓았다니, 참으로 멍청한 짓을 했지 뭐냐. 프랜치스야, 도착하면 당장 그 머리부터 깎자." 3 서리가 하얗게 내린 추운 아침에 폴리 아주머니가 맥주 회사 상표가 붙은 타원형의 은빛 쟁반에 아직도 지글지글 끓고 있는 베이컨 에그와 따끈한 홍차, 그리고 막 구어낸 토스트를 아침 식사로 가져다 줄 때까지 포근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여간 즐거운 게 아니었다. 그는 가끔 아침 일찍 불안한 기분으로 잠을 깨는 수가 있는데, 그래도 이젠 그 지긋지긋한 조선소의 사이렌 소리 따위에 놀라거나 할 필요가 없다 생각하면 금세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따뜻한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가곤 했다. 스위트피의 넝쿨 무늬 벽지를 바른 아담한 그의 침실은 깨끗한 나무 벽장에 모피 융단이 깔려 있고 한쪽 벽에는 경마에 이긴 기념으로 맥주 회사가 주는 경마의 석판화가 걸려 있었다. 다른 한쪽 벽에는 법황 그레고리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가 꽂혀 있는 작은 성수반이 문 옆에 놓여 있었다. 프랜치스는 이제 옆구리의 통증도 나았고 기침도 별로 나오지 않게 되었다. 볼에는 살이 붙기 시작했다. 안일하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애무와 같았으나 장래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걱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현재의 생활은 대단히 고마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10월도 다 가는 어느 날씨 좋은 날 아침, 폴리 아주머니는 그의 침대 곁에 앉아서 무엇이나 잘 먹어야 한다면서 자꾸 더 먹기를 권하고 있었다. "자, 그것 좀 더 먹어라. 잘 먹기만 하면 가슴둘레도 커진단 말이야." 접시에는 달걀이 세 개 그리고 베이컨까지 곁들여 있었다. 아침밥이 이렇게 맛있는 것인 줄은 벌써 옛날에 잊어 버렸었다. 무릎 위에 놓인 쟁반의 균형을 잡으면서 프랜치스는 아주머니의 표정에서 여느 때와는 다른 명랑함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과연 그녀는 의미 있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은 뉴스가 있어. 너무 놀라지 않겠다면 가르쳐 줄 수도 있는데......" "무슨 뉴스 인가요, 폴리 아주머니?" "굉장히 기쁜 소식이야. 네가 아저씨와 나하고만 있으면 무척 따분할 거야." 그녀는 프랜치스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을 그 인자한 갈색 눈으로 살피고는 밝게 웃어 보였다. "무엇인지 알아맞혀 보렴." 프랜치스는 깊은 애정이 담긴 눈으로 폴리 아주머니를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그녀의 어느 때나 변함없는 애정이 불러 일깨워 준 것이다. 폴리 아주머니의 잘 생기지 못한 넓적한 얼굴-긴 윗입술과 그 위에 난 잔털, 볼 옆에 털이 난 사마귀가 있는 창백한 얼굴이 지금은 정이 들어 아름답다고까지 생각되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아주머니." 그의 호기심을 교묘히 불러일으킨 것이 재미있다는 듯이 그녀는 좀처럼 웃는 일이 없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짧은 코웃음을 쳤다. "영리한 네가 어찌된 게 아니냐? 너무 잠만 자서 바보가 된 모양이구나." 그는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제는 회복기도 이미 지나고 있었다. 그녀의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폐결핵을 두려워하고 있는 폴리는 프랜치스도 폐를 앓지나 않을까 해서 걱정이 되어 언제나 아침은 열 시까지 잠을 재우곤 했다. 그리고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면 아주머니를 따라서 쇼핑을 하러 나가는데, 아저씨가 먹새가 좋은 사람이어서 맛있는 것밖에 먹지 않으므로 고급 육류를 사기 위하여 타인카슬의 번화가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폴리 아주머니는 물건을 살 때 까다로운 편이었다. 그녀는 일류 상점의 단골이면서도 마음에 드는 점원이 없으면 아무것도 사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주머니는 레이디다운 우아한 행동을 가장 소중히 했다. 그러므로 시내의 부인복 전문점에서 맞추는 그 옷은 종종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하고 웃음거리가 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폴리 아주머니는 평판이 좋았다. 거리를 거닐고 있으면 여기저기서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는다. 그것도 이 지방에서 상당한 위치의 인물, 예를 들면 측량 기사라든가 위생 검사관이라든가 또는 경찰서장 등등의 높은 사람이거나 하면,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 기쁨은 여간한 것이 아닌 것이다. "저분은 오스틴 씨인데 철도 회사의 전무님이야. 아저씨의 친구분이시지......참 좋은 분이야" 하고 인사를 받고 나면 아주머니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모자에 달린 새털을 날리면서 낮은 소리로 프랜치스에게 말해 주곤 했다. 성 도미니코 교회의 미남이며 풍채가 좋은 피츠 제랄드 신부가 지나가면서 정중하고 약간 겸손한 미소를 지어 보일 때엔 아주머니의 기뻐하는 모습은 보통 이상이었다. 매일 아침 함께 교회에 들를 때마다 프랜치스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그녀의 열성적인 얼굴과 경건하게 합장한 손과 소리도 없이 움직이는 움직이고 있는 입술을 언제나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기도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 그녀는 튼튼한 구두라든가 책이라든가 드로프스 등등을 프랜치스에게 사주곤 했다. 그럴 때 그가 눈물을 머금고 아주머니의 지갑을 못 열게 말리기라도 하면 폴리는 언제나 그의 팔을 꼭 잡고 머리를 흔드는 것이었다. "아저씨는 구두쇠 노릇을 하는 사람을 아주 싫어하신단다." 아주머니는 네드 아저씨와 유니온 주점을 퍽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유니온 주점은 파지장에서 아주 가까운 운하의 거리와 제방 모퉁이에 있어서 근처에 있는 집들과 석탄선과 새로 생긴 철도 마차의 역까지 내다 볼 수 있는 좋은 상소였다. 갈색 페인트를 칠한 이층집으로, 바논 일가는 주점의 이층에 살고 있었다. 매일 아침 일곱 시 반이 되면 청소부인 매기마군이 가게문을 열고 청수를 한다. 정각 여덟 시에는 네드 바논이 윗도리는 입지 않았을망정 말쑥한 모습으로 이층에서 내려와 술통 뒤에 있는 부대에서 새 톱밥을 꺼내어 바닥에 뿌린다. 그럴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아저씨는 이것을 일종의 서비스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끝나면 몇 시가 되었는가 하고 시계를 보고 나서, 우유를 가지고 뒤뜰로 나가 호이페트(그레이하운드와 테리어의 잡종인 경주용 개)에게 아침밥을 먹인다. 개는 모두 열세 마리였다-이것은 그가 미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일이 끝나면 단골 중의 제일 첫 손님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첫 손님은 스캔티 마군이며, 그는 목발을 짚고 절름거리며 그가 좋아하는 맨 구석 자리에 앉는다. 이어서 파지장의 인부들이 들어오고 그리고 밤일을 끝낸 철도 마차의 마부가 한두 사람 들어온다. 그들은 독한 술을 작은 글라스로 한 잔 마신 다음 맥주를 몇 명 마시고는 이내 돌아가 버린다. 그러나 스캔티만은 예외이다. '신사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라고 쓴 나무액자가 걸려 있는 카운터 테이블에 온화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네드를 충실한 번견같이 아첨하는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면서 스캔티는 앉아 있다. 오십 살이 된 네드는 살이 찌고 체격이 좋은 사람이었다. 혈색 좋은 얼굴에 눈이 약간 튀어나왔으나 매우 착실하고 침착한 인상이다. 옷은 수수한 짙은 색이 잘 어울리는 그는 흔히 선술집의 주인에게서 볼 수 있는 천박함이나 화려한 점은 조금도 없는 착실하고 무뚝뚝하며 점잔을 빼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자기에 대한 평판과 또 이 주점 자체를 운영한다는 것을 그는 자랑으로 알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감자 농사가 흉작으로 끝나자 아일랜드에서 이주해 왔으며, 그 자신도 어렸을 적에 가난과 굶주림을 너무나도 뼈저리게 체험을 했으나 모든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성실성을 가지고 운영되는 그의 주점은 단속 기관이나 양조 회사에게 다같이 잘 보여서 유력한 지인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또 실제로 "술장사도 그렇게 나쁜 장사가 아니야. 나는 오히려 훌륭한 장사라고 생각해. 우리 집이 그 좋은 본보기일 거야"라고 말할 정도였다. 미성년자가 술을 마시는 것은 절대로 반대했으며, 마흔 살이 되지 않은 여자가 들어오면 아주 쌀쌀하게 거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니온 주점은 '가족적'이었다. 무질서를 대단히 싫어했고 조금이라도 문란해지는 기색이 보이면 당장에 노기등등하여 카운터를 낡은 구두로-이것은 특히 그 목적으로 언제나 카운터 밑에 놓아두고 있었다-탕탕 치면서 소란이 진정될 때까지 그만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대단한 주호였으나 술을 마시고 결코 흐트러진 자세를 보인 적이 없었다. 성 바트리시오 축일(아일랜드 보호 성인 축일로 3월 17일)밤이라든가, 하로인(모든 성인의 축일. 천국에 있는 성인을 종합하여 축제함. 11월 1일부터 8인간의 대축제를 말함)의 밤 축제라든가, 섣달 그믐날 같은 날에는 술을 마시고 여느 때보다도 훨씬 만연에 웃음을 지으며 눈동자가 몽롱해지는 수가 있으나 이것은 일년에 며칠밖에 없는 축제가 있는 날의 밤에만 그러했다. 또 기르는 개가 경주에 이겨서 목에 새로운 매달이 하나 더 늘어날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렇게 마셨어도 그 이튿날 아침이 되면 으레 부끄러운 얼굴을 하고서는 성 도미니코 교회의 보좌 신부인 크랜시 신부를 모시러 스캔디를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고백 성사를 한 후 바지를 툭툭 털면서 천천히 일어나 헌금 상자에 넣어 달라고 말하면서 젊은 신부의 손에 1파운드 금화를 억지로 쥐어 주는 것이다. 그는 성직자를 매우 존경하고 있었으며, 교구 성당의 주임신부인 피츠 제랄드 신부에 대해서는 외경에 가까운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네드를 가리켜 '구두쇠 같은 사람'이라고 했으나 그는 잘 먹고 헌금 잘하고 주식을 사는 일이나 투기를 싫어했으며 여유가 생기면 확실한 부동산에만 투자했다. 폴리는 폴리대로 죽은 오빠 마이클로부터 물려받은 상당한 재산이 있었으므로 네드에게는 그 면에서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는 좀처럼 애정을 나타내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그의 말에 따르면 프랜치스만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프랜치스의 조심성 있고 말수가 적고 어딘지 모르게 침착한 태도, 묵묵히 감사하고 있는 태도가 좋은 것이다. 하기는 주의해서 보고 있자면 그 애가 혼자서 멍청하게 뭔가를 생각하고 그 어린애다운 얼굴에 쓸쓸한 기색을 나타낼 때에는 네드도 언짢게 얼굴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프랜치스를 좋아했다. 오후가 되어 햇빛이 비스듬히 내리쬐는 한산한 주점에서 프랜치스는 네드 옆에 앉아 배부름에서 오는 몽롱한 눈을 하고서 스캔티와 함께 네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식은 풍부하지는 못하지만 부지런한 매기의 남편이며 귀찮은 존재인 스캔티 마군이 스캔티(부족 또는 불충분이라고하는 의미)로 불려지는 것은 몸이 남들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몸은 반쪽만이 완전했다. 혈액순환이 안돼 몸 한쪽을 전혀 쓰질 못했다. 스캔티는 죽으면 해부해도 좋다는 증서에 서명을 하고 의사에게 몸을 팔아 버렸다. 그러나 그 돈은 모두 술 마시는 것에 다 써 버리고 그 후로는 재수 없는 세월만이 이 눈이 짓무르고 게으르고 수다스럽고 운이 나쁜 늙다리에게 남겨진 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상대해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술이라도 한 잔 들어가면 난 사기꾼에게 걸려들었노라고 말하면서 자꾸만 분개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돈이라고 받았으니 무엇에 쓰겠는가 말이야. 돌팔이 의사놈 같으니라고. 그렇지. 내가 의사놈보다 더 오래 살면 문제는 간단해. 절대로 네까진 놈들한테는 주지 않을 거야. 천만의 말씀이지. 안 되면 물에라도 빠져 죽어 버릴 거야. 두고 보라고!" 그래도 네드는 그런 스캔티에게 가끔 프랜치스를 시켜 맥주를 갖다 주라고 했다. 물론 동정해서 주는 것이지만 첫째는 프랜치스에게 병뚜껑 따는 스릴을 맛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아로 된 손잡이가 달린 오프너로 맥주병을 따서 조끼에 술을 가득 부으면 스캔티는 좋아서 '거품이 넘치지 않는가'하고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거품이 일면 맥주의 향긋한 남새가 참으로 좋았고, 문득 프랜치스도 한 모금 마셔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네드는 마셔도 좋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조카의 얼굴이 기쁜 듯이 일그러지면 싱긋 웃었다. 그리고 "이것만은 마셔 본 사람이 아니면 그 맛을 모른다"하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또한 "여자와 맥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라든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친구는 자기의 돈이다"라는 상투적인 문구를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자기 철학인 체하며 사용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이도 저도 모두 경구와 같이 되어 버린다. 네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마이클 바논의 딸 노라였다. 노라는 세살 때에 어머니를, 그 2년 후에는 아버지를 모두 폐병으로 여윈 네드의 형의 딸이었다. 당시 켈트 민족에게는 이 병이 매우 성행했다. 일단 발병하면 거의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네드는 그런 노라를 애지중지 길러서 그녀가 열세 살이 되자 노던바란드에서 으뜸가는 성 엘리자벳 수도원의 기숙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비싼 수업료를 지불해 주는 것이 그로서는 무엇보다도 큰 기쁨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교육의 향상을 상냥하고 관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방학이 되어 노라가 집에 돌아오면 그는 전적으로 딴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옷차림은 여느 때보다도 더 단정히 하고 소풍이라든가 그 외 여러 가지 오락을 이것저것 계획한다던가, 노라의 그분이 상하지 않도록 주점이 있을 때에도 한층 엄격하게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그럼 말할까......"하고 폴리 아주머니는 아침 식사 쟁반을 든 채 프랜치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모두 이야기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되겠군. 먼저 아저씨가 오늘밤 파티를 열기로 하셨단다. 하로인 축제와......그리고"-거기에서 약간 눈을 내리뜨고-"또 하나의 중대한 발표가 있단다. 식단에는 거위 고기와 4파운드의 케이크, 스냅 드라곤(타오르는 브랜드 접시에서 건포도를 꺼내 먹는 오락)의 건포도, 그리고 물론 사과에-사과는 고스포스의 랭 과수원에서 아저씨가 언제나 특별히 좋은 것을 주문하신 거지만. 점심때가 지나서 그 사과를 가지러 가 줄래? 좋은 산책이 될 거야." "네, 가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길을 잘 모르잖아요." "좋은 사람이 안내해 줄 거야." 폴리는 아주 침착하게 은밀히 숨겨 두었던 뉴스를 내놓았다. "그건 말이지, 방학을 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예쁜 아가씨란다." "노라군요!"하고 프랜치스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맞았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쟁반을 들고 일어섰다. "아저씨는 노라가 오기 때문에 대단히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야. 자아, 착한 애야, 어서 옷을 갈아입으렴. 마중 나가야지. 열한 시까지는 역에 가야 하니까." 아주머니가 나가자 프랜치스는 이상하게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노라가 온다는 뜻밖의 소식에 마음이 몹시 설레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프랜치스는 그녀가 좋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움과 동시에 애달픈 기분이 섞인 뭔가 이상하게 새로운 감정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유도 모르면서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후다닥 일어나 서둘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프랜치스와 노라는 오후 두 시경에 집을 나섰다. 크라몬트의 교외에까지 철도 마차를 타고 거기서부터는 커다란 바구니를 둘이서 들고 고스포스쪽으로 조용한 시골길을 걸어갔다. 노라와 마지막으로 헤어진 지 4년이 되었다. 프랜치스는 점심을 먹는 동안 이상하게도 줄곧 혀가 굳어 버린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느 때와는 달리 네드만이 재미없는 농담을 하고 있었다. 단 둘이가 된 지금도 괴로우리만큼 부끄러울 뿐이었다. 기억 속의 노라는 아직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조금만 있으면 열 다섯 살이 되는 것이다. 짙은 감색 스커트에 블라우스 차림의 그녀는 완연히 어른이 되어 있었으며 전보다도 훨씬 어딘지 모르게 이해하기 어려운 데가 있었다. 손발이 자그마할 뿐만 아니라 얼굴도 작았다. 그 작고 민첩하고 도전적인 얼굴은 때에 따라서 대담하게 보이는가 싶으면, 갑자기 부끄러운 표정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키는 크지만 아직 어딘가 덜 성숙한 어색함이 있고 골격은 가냘프고 날씬했다.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그 푸른 눈빛에 투명한 흰 피부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시원한 공기는 그 눈에 빛을 더해 주고 오뚝한 코언저리를 핑크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가끔 바구니를 맞잡은 노라의 손이 자기의 손에 닿을 때의 짜릿한 감정은 그가 아직껏 느껴 보지 못한 그런 것이었다. 그는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똑바로 보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나 노라는 때때로 자기를 보고 웃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황금색 단풍의 계절은 이미 지났으나 숲이나 높은 산은 아직도 빨갛게 단풍이 물들어 있었다. 프랜치스에게는 나무들이나 정원이나 높은 하늘색이 이다지도 신선하고 생기 있게 보인 적이 없었다. 자연은 그들에게 마치 노래라도 불러 주는 것 같았다. 그때 그녀가 갑자기 웃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뛰어갔다. 바구니를 맞잡은 프랜치스도 덩달아 나란히 뛰었다. 이윽고 그녀가 멈춰서서 숨을 헐떡이며 아침에 햇빛을 받은 물방울처럼 영롱한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말했다. "미안해, 프랜치스. 난 가끔 이렇게 참을 수 없도록 감정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아마 학교에서 해방된 탓인지도 몰라." "왜, 학교가 싫어?" "으응, 너무 엄격해. 그렇지만 좋기도 해. 재미있기도 하고. 내 기분 이상하지?" 그리고 듣는 사람이 어안이 벙벙해질 것 같은 천진스러운 소리로 웃어댔다. "그런데 말이지, 목욕탕에 들어갈 때도 잠옷을 입고 들어가야 해. 프랜치스, 다른 데 있을 때에도 줄곧 내 생각했어?" "으응." 그는 목에 걸린 것 같은 소리로 말했다. "난 기뻐......나도 역시 프랜치스를 생각했었어." 그녀는 얼른 그에게 시선을 던지며 뭐라고 말하려고 하다간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고스포스의 과수원에 닿았다. 네드의 친구인 과수원주인 쥬디 랭이 과수원의 한가운데서 낙엽을 태우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보자 반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리 와서 도와 달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가지각색의 낙엽을 산더미처럼 긁어모아 불태웠다. 결국엔 연기에 그을린 냄새가 옷에까지 배어들었다. 그것은 노동이 아니라 근사한 스포츠였다. 처음엔 거북한 생각도 들었으나 그런 것은 이내 잊어버리고 어느 사이에 누가 더 많이 긁어모으는가 두 사람은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자기 몫의 산을 만들고 있으면 노라가 장난으로 훔쳐 가 버린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맑고 차가운 공기를 뒤흔들어 놓았다. 쥬디 랭은 두 사람을 보며 호의에 찬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게 여자의 상투적인 수단이란다, 프랜치스. 네 더미에서 가져가고선 저렇게 좋아서 웃고 있는 걸 보라고." 그리고 랭은 과수원 끝에 있는 목조 창고로 가라고 손짓을 했다. "자아, 일을 해주었으니 그 대가로 얼마든지 가져가거라."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었다. 그러자 랭은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얘들아, 바논 아저씨에게 안부 말씀 전해 다오. 이번 주중에 한잔하러 갈 테니까." 사과 창고에는 석양의 부드러운 빛이 비쳐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이 사닥다리를 타고 다락에 올라가니 거기에는 이 과수원을 유명하게 만든 립스톤 퍼핀종 사과가 서로 맞닿지 않게 가지런히 줄을 지어 짚을 깐 바닥에 가득히 놓여 있었다. 프랜치스가 낮은 지붕밑으로 기어들어가 바구니를 채우고 있을 동안, 노라는 짚 위에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사과를 하나 골라서 옷에 쓱쓱 문질러 먹기 시작했다. "야아, 정말 맛있네, 프랜치스도 먹어 봐, 응?" 프랜치스는 노라와 마주보고 앉아서 그녀가 내민 사과를 받았다. 참으로 맛이 좋았다 .그들은 먹으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작은 이빨이 사과를 베어물 때마다 사과 속살에서 사과즙이 튕겨 얼굴에 묻었다. 그도 이 좁고 어두운 다락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고,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따스함이 살아 있는 기쁨에 넘치고 있었다. 지금 이 과수원에서 그녀가 준 사과를 먹은 것 같은 그런 근사한 일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몇 번이나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서로 웃었다. 그러나 노라의 미소는 이해할 수 없는 어정쩡한 미소였다. "씨도 먹어, 프랜치스?" 문득 노라가 놀렸으나 바로 덧붙여 말했다. "안돼, 프랜치스! 마가렛 메리 선생이 씨를 먹으면 배가 아프다고 했어. 더구나 씨에서는 새로운 사과나무가 생긴대. 그런데 말야, 프랜치스......아저씨하고 아주머니를 좋아해?" "그야 물론이지" 하고 그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넌?" "나도 물론 그래......다만 아주머니는 내가 기침을 할 때마다 근심하시잖아......그리고 아저씨가 나를 무릎에 올려놓고 귀여워해 주시는 것-난 그것만은 참으로 싫어." 그녀는 그런 말을 하고선 약간 계면쩍어 했으나 마침내는 눈을 감아 버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마가렛 메리 선생이 나를 건방지다고 했는데, 정말 그럴까?" 프랜치스는 난처하여 외면했다. 그럴 리가 있나, 하고 강력히 부정하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어색한 표정으로 "아, 아니" 하고 말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한 얼굴을 하고 미소지었다. "아냐, 프랜치스. 우리는 친구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마가렛 메리 선생이 뭐라 해도 상관없어. 그건 그렇고 프랜치스, 장래 뭘 할 생각이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 그는 노라를 바라보았다. "난 아직 모르겠어. 왜 그러지?" 그녀는 갑자기 침착성을 잃고 자기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다만, 다만 말이지, 네가 좋아서 물어 본 거야. 난 훨씬 전부터 널 좋아한걸. 벌써 여러 해 동안 프랜치스의 일을 많이 생각했어. 그러니까 만일 어디로 가버리든가 하면 어쩌나 하고 생각한 거야." "왜 내가 가 버리지?" 그는 웃었다. "아직 몰랐어?" 그녀는 아직도 어린애다운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난 폴리 아주머니의 생각을 잘 알고 있어......오늘도 말하던걸. 너를 신부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아까운 게 없다고 말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야 하잖아. 나 같은 건 말할 것도 없고." 프랜치스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는 몸을 일부러 말괄량이처럼 흔들면서 일어났다. "자, 일어나자. 이런 데에 하루 종일 앉아 있어 봐야 소용없어. 밖은 쨍쨍 해가 빛나고 오늘밤은 파티가 있잖아." 프랜치스가 따라 일어나려고 하자, "가만있어. 잠깐만 눈을 감아. 좋은 것 선물할 테니까." 대답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느닷없이 덤벼들어 프랜치스의 볼에 살그머니 키스를 했다. 따스한 촉감과 그녀의 호흡과 볼에 작은 점이 있는 그 야윈 얼굴이 너무나도 느닷없이 다가왔기 때문에 프랜치스는 어안이 벙벙해져 버렸다. 귓불까지 빨개져서 그녀는 갑자기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가 그대로 뛰어나갔다. 그도 역시 빨갛게 상기된 채 약간 젖은 볼에 상처라도 만지듯 손등을 가져다 대면서 천천히 뒤를 따라갔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그날 밤, 하로인 파티는 일곱 시에 시작되었다. 네드는 주인의 특권으로 주점을 여느 때보다 앞당겨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초대 손님 외의 손님들은 모두 나가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초대 손님들은 이층의 거실에 모였다. 거기에는 유리 상자에 든 납세공의 과실 모형, 파란 유리 촛대 위의 파넬(19세기 말엽의 정치가이며, 아일랜드 자치당의 당수)의 초상화, 자이안트에서 촬영한 네드와 폴리의 사진, 킬라니(아일랜드 서남부에 있는 호수 유람지) 산물인 참나무로 만든 이륜마차 모형, 용설란 등이 장식되어 있었다. 니스칠한 떡갈나무 곤봉이 있고, 주저앉으면 먼지가 일 것 같은 육중한 팔걸이 의자가 놓여 있었다. 가운데에는 여자의 수정다리같은 다리가 달린 긴 마호가니 식탁이 있고, 그 위에는 벌써 20명분의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방안은 난롯불이 벌겋게 타올라 아프리카 탐험가도 꼼짝 못할 만큼 더웠다. 그리고 또 부엌에선 칠면조 구이의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얀 모자에 앞치마 차림의 매기마군은 몹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혼잡한 방에는 젊은 크랜시 신부와 서디어스 길포일, 근처의 상점 주인이 몇 사람, 철도 마차 회사의 전무 오스틴 씨 부처와 그 세 자녀, 거기에는 물론 네드와 폴리, 그리고 노라와 프랜치스가 있었다. 수선스러운 가운데서 네드는 기쁜 얼굴을 하고 6펜스나 하는 여송연을 피우면서 길포일을 향하여 뭔가 자기 주장을 말하고 있었다. 서디어스 길포일은 얼굴색이 창백하고 가벼운 카타르에 걸린 것 같은 서른 살의 청년으로서 가스 회사의 사원인데-회사에 나가는 한편 바렐 가에 있는 네드의 임대 가옥의 집세를 징수한다던가, 성 도미니코 성당의 일도 돌보거나 하고 있었다. 짬짬이 하는 일을 시켜도 신뢰할 수 있는 착실한 사람이며, 싫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네드의 말을 빌리면 그것도 자진해서 그런 일을 맡고 나선다는 것이었다.-남을 반대하는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대신 자기의 주장 같은 것은 털끝만큼도 없으며, 그러면서도 자기가 부탁할 일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융통성이 없으나 신뢰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비위를 거슬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언제나 콧물을 훌쩍거리고 회사의 배지를 만지작거리거나 했다. 눈은 흐리멍텅했고, 발바닥이 마당발인 것이 흠이었으나 고지식하고 조심성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오늘밤엔 연설을 해주시겠지요?" 그런 그가 네드에게 묻고 있는 태도는 만일 네드가 연설을 하지 않으면 온 세계 사람이 서운해 할 것이라는 표정이었다. "자아, 어떻게 한다지?" 네드는 주저하면서도 공손한 태도를 취하면서 심각하게 여송연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해주십시오, 네드 씨." "천만에. 모두가 기대하는 것이 아니니까 사양하는 게 좋겠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오히려 바라고 있는걸요." "하는 수 없다 그건가?" "물론입니다. 제발 해주십시오." "그럼, 의무다 이거야?" "의무지요, 네드 씨. 근사하실 테니까요." 대단히 기분이 좋아진 네드는 여송연을 이빨로 자근자근 씹었다. "사실은 말이지, 서디어스" 하고 그는 의미 있는 눈짓을 했다. "나는 발표하고 싶은 일이 있다네......중대 발표야.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나중에 한마디하기로 하지." 폴리의 지시로 파티의 서곡으로 아이들이 하로인의 유회를 시작했다. 먼저 커다란 접시의 타고 있는 브랜디 가운데서 납작하고 파란 건포도 꺼내기, 그 다음은 의자의 뒤에서 큰 대야에 띄워 놓은 사과를 입에 문 포크로 맞추는 다크 애플 놀이였다. 일곱 시가 되자 '합창대'가 들이닥쳤다. 그것은 이웃 공장의 소년공과 점원들이 검정으로 얼굴을 칠하고 그로테스크한 복장을 한 채 예로부터 내려오는 하로인의 습관대로 거리를 누비며 들르는 집마다에서 6펜스씩 받아 가는 것이다. 소년들은 네드가 좋아하는 노래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귀여운 샴록'과 '캐더린 마봐닌', '매기 마피의 집' 등 아일랜드의 민요를 불렀다. 사례금을 받은 그들은 흡족하여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 바논 씨, 유니온 만세! 안녕히 계세요, 네드 씨!" 하고 외치면서 나갔다. "좋은 아이들이야, 모두 착실한 놈들이야" 하며 두 손을 마주 비비면서 아일랜드의 추억을 되새기는 네드의 눈은 젖어 있었다. "자, 폴리, 손님들이 배고프시겠어. 서둘러야겠군." 일동이 식탁에 앉고 크랜시 신부가 식사 전의 기도를 마치자, 매기마군이 타인카슬에서 가장 좋다고 하는 거위 요리를 들고 쩔쩔매면서 들어왔다. 프랜치스는 이런 거위 요리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대단히 맛이 좋았고 입에 넣자마자 녹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은 뜨거운 방안 공기에 오래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속의 야릇한 기쁨 때문인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얼굴을 들면 테이블 맞은편의 노라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부끄러운 듯 그들만이 아는 눈짓을 했다. 프랜치스는 줄곧 조용하게 앉아 있었으나 노라의 밝은 얼굴을 보면 마음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 행복한 날에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비밀의 정은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것이었으며 또한 고통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네드는 박수 갈채를 받으면서 천천히 일어나 연설을 할 자세를 취했으나 얼굴이 몹시 상기된 채 조금 불안해 보였다. "신부님,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밤은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저는 워낙 말재주가 없어서......" "아닙니다. 훌륭하십니다" 하고 길포일이 소리쳤다. "그렇더라도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네드는 좀더 침착하려고 말을 잠깐 끊었다. "저를 에워싼 친우 여러분이 행복하고 만족해하시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저는 무엇보다도 기쁘기 한이 없습니다. 좋은 벗과 좋은 맥주,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합창대와 함께 들어와서 아직 문 옆에 서 있던 스캔티 마군이 불쑥 소리쳤다. "바논 씨 만세!" 그는 거위 다리를 한 손에 쥐고 흔들면서 외쳤다. "당신은 대단한 인물이오." 네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훌륭한 인물에게는 언제나 추종자가 있기 마련이다. "미세스 마군의 남편이 나에게 벽돌을 던졌을 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때 와아 하고 웃음소리가 터졌다. "......저는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번에 우리는 몇 년 전에 부모를 잃은 제 아내의 친정 조카를 맡기로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드리는 것은 우리에게는 더할나위없는 기쁨이며 또한 자랑이기도 합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 속에서 폴리의 소리가 들렸다. "인사를 해야지, 프랜치스!" "조카에 대하여는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과거는 과거로서 옳은 겁니다. 그러나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만 이 애를 보아주시라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처음에 우리 집에 왔을 때와 비교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또다시 박수 갈채가 터져나왔다. 그때 복도에서 스캔티의 소리가 들렸다. "매기, 제발 거위 고기를 조금만 더 주구려!" "저는 여기에서 자화자찬을 하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도 인간에게도 아니, 짐승에 대하여도 저는 공명정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제 말이 거짓으로 들린다면 저의 집에서 기르는 개를 보십시오." 길포일이 또 큰 소리로 외쳤다. "그거야 타인카슬에서 제일가는 개지요!" 잠시 네드는 조용히 있었다. 아마도 이야기의 실마리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어디까지 얘길 했더라?" "프랜치스의 얘기였어요, 네드" "아, 그렇군." 그리고 네드는 목청을 높여 "프랜치스를 데려왔을 때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애는 대단히 쓸모가 있을 것 같은데 카운터를 보게 하여 제 몫의 일을 시키면 어떨까. 아니, 천만에 말씀-크랜시 신부님 앞에서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폴리와 저는 충분히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애는 아직 어리고 지금까지 무참히 학대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프랜치스는 장래가 여간 촉망되는 게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내 아내의 죽은 오빠의 아들인 겁니다. 그래서 학교에 보내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네드는 거기에서 한숨을 돌렸다. "신부님, 신사 숙녀 여러분! 프랜치스는 다음달부터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호리웰이지요! 저는 여기에서 자랑스럽게 이것을 알려 드리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의기양양하게 그렇게 말을 끝내고 네드는 요란한 박수 갈채를 받으면서 땀에 흠뻑 젖은 채 자리에 앉았다. 4 호리웰의 잘 다듬어진 잔디 위에 느티나무 그늘이 길다랗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북극의 6월의 석양은 아직도 대낮처럼 밝았다. 일몰이 늦고 금방 또 아침이 되기 때문에 오로라는 푸른 하늘에 아주 잠깐 동안 번쩍이면서 그 모습을 나타낼 뿐이었다. 프랜치스는 '철학 연구회'에 선출된 후 로렌스 허드슨, 안셀모 밀리와 함께 공동으로 천장이 높은 작은 공부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열어 놓은 창가에 앉아 비통하리만큼 쓸쓸한 기분으로 시시각각 변해 가는 아름다운 전망에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눈앞에는 1909년에 아치볼드 프레이저 경의 성으로 세워졌다가 지금은 카톨릭 중학교가 된 장대한 화강암 건물이 솟아 있었다. 그 건물의 오른쪽 모퉁이에는 이 건물과 비슷한 성당이 있고, 역사적으로 이름높은 커다란 회랑에 의하여 도서관으로 통하는 그곳은 네모진 잔디밭으로 에워싸여 있다. 그 건너편에는 테니스와 핸드볼 코트 등 운동장이 있고, 또한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로 스틴챠 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는 강기슭의 넓은 목장에는 뿔이 없는 폴드 앙가스 종의 검은 소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떡갈나무와 참나무 숲 속에는 양치기의 오두막집이 있다. 그러한 것들을 배경으로 파랗게 톱니처럼 솟아 있는 그랜피언의 산들이 멀리 바라다 보였다. 프랜치스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몹시 눈보라가 치던 그날 두운 역에서 열차를 갈아타던 일, 미지의 세계를 앞에 놓고 불안에 떨던 신입생 시절, 그리고 교장인 하미슈 마그냅 신부 앞에서 면접 시험을 치르던 일 등이 바로 어제의 일인 것 같았다. 가벨로호 제도의 명문가문인 마그냅의 사촌인 라스티 맥(녹슨 또는 침침한 색이라는 뜻으로 마그냅 신부의 별명)이 격자무늬의 두건을 쓰고 책상 건너편에 몸을 구부리고 곱슬곱슬한 붉은 눈썹 아래서 오그라들 것 같은 눈으로 힐끔 쳐다보았을 때의 일은 지금도 기억에 뚜렷하다. "그래, 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저는......아직 아무것도 못합니다." "아무것도 못해! 아일랜드 프링(스코틀랜드 고지대에서 추는 활발한 춤)도 추지 못하는가?" "네!" "뭐라고, 치셤이란 훌륭한 이름을 가지고서도......" "죄송합니다." "음, 그럼 넌 재주를 못 부리는 원숭이란 말이지?" "네, 그렇지만 단지......"하고 떨면서 "낚시질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구?" 그는 천천히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다면 우린 친구가 될 것 같군. 치셤이라든가 마그냅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함께 낚시질도 했고 그리고 싸움도 했었지. 너나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말이야. 돌아가도 좋다, 매맞기 전에." 이것이 모두 어제의 일같이 생각되는데 벌써 1학기만 지나면 졸업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시선은 다시 분수대 옆의 자갈길을 왔다갔다하는 몇몇의 그룹에 쏠렸다.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들은 대부분 이곳을 졸업하면 스페인의 산 모랄레스 신학교로 갈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는 같은 방을 쓰는 친구도 둘이나 있다. 안셀모는 여느 때와 같은 표정으로 한 손을 정답게 친구의 팔에 걸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자꾸만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프레이저 특별 장학금을 탄 사람다운 자신만만한 행동이었다. 두 사람 뒤에서 또 다른 학생들에게 에워싸여 걷고 있는 사람은 키가 크고 바싹 마른 얼굴색이 까만 타란트 신부였다. 그는 열정적이면서도 비꼬기를 잘하고 고상한 성품이긴 해도 자기와는 인연이 먼 사람이었다. 그 젊은 신부의 모습을 본 순간 프랜치스의 표정은 이상하리만큼 굳어져 버렸다. 그는 창틀에 올려놓은 노트로 시선을 옮겨 펜을 들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일기는 타란트 신부로부터 벌로써 과해진 것이었다. 그는 훤칠한 이마에도 잘 생긴 볼에도 아니 깊숙한 맑은 갈색의 눈에도 활기가 넘쳤고, 열 여덟의 청년으로서 갖추어야 할 튼튼하고 건강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 자연스런 변화를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가다듬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1887년 6월 14일,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을 이 혐오스러운 일기장에 기록해 타란트 신부에게 복수를 해야 내 직성이 풀릴 것 같다. 저녁 기도 전의 이 값진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되지만-어차피 안셀모가 나도 학생의 본분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핸드볼을 권유하러 올 것이 틀림없겠지만-오늘은 목요일, 예수 승천 축일, 맑음. 라스티 맥과의 기억해 두어야 할 만한 모험이 행해졌다라고만 써 두어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랄한 부학장은 내 집안의 좋은 점, 양심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강의 후에 이렇게 말했다. "치셤, 앞으로 일기를 써라. 물론 발표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여느 때처럼 조소를 섞어서 "양심의 규명을 위해서 말이다. 치셤, 넌 지나칠 만큼 정신적인 고집으로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다. 마음속을 털어놓고 보면......그럴 수만 있다면......조금은 그것을 고칠 수가 있을는지 모른다." 신부의 명령에 나는 얼굴이 화끈해지고 화가 났다. "말씀하신 대로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타란트 선생님?" 신부는 검고 깡마른 체구에다 코끝은 송곳처럼 뾰족했다. 양손을 수단 소매 속에 감추고 나 같은 건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뿐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에 대한 혐오를 감추려 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엄격한 언동을 함으로써 무자비할 만큼 자기를 단련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벌써부터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막연히 "마음가짐에 순종성이 없어......" 하고 말해 놓고는 나가 버렸다. 2년 전에 여기에 부임한 이래 타란트 신부의 주위에는 안셀모를 중심으로 한 많은 숭배자가 있었는데 유독 나만은 그를 모범으로 섬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혹독하게 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지나친 자만심일까. '유일하며 진실한 사도적 종교'의 강의에 대해서 내가 말한 것을 그는 잊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신부님, 종파라고 하는 것은 우연히 생긴 것이니까 하느님도 종파 따위를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이 질문에 모두 어안이벙벙해서 잠자코 있는 가운데 그는 당황한 것 같았으나 냉정하게 말했다. "치셤, 너는 굉장한 이단자가 될 소질이 있는 것 같구나." 적어도 나에게는 결코 하느님의 부르심이 없다는 이 한 가지 점에 대해서만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고 할까. 아직 열 여덟의 애송이인 주제에 나는 이렇게 오만불손한 글을 쓰고 있다. 이것도 젊은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허세일는지 모른다. 하여간 여러 가지 일이 괴롭다. 첫째 타인카슬의 일이 마음에 걸린다. 방학이래야 겨우 4주간밖에 되지 않으니, 타인카슬과 멀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매년 휴가가 짧은 것이 호리웰의 유일하고 엄격한 규칙이다. 신앙심을 굳건히 하는 데는 좋을는지 모르지만 너무 마음을 조리게 했다. 네드 아저씨는 나에게 한 번도 편지를 보낸 적이 없다. 호리웰에 2년 있는 동아 아저씨가 보낸 것이라곤 뜻밖의 선물로 먹을 것을 보내 준 것뿐이었다. 여기에 온 첫 번째 겨울, 파지장에서 보내 준 엄청나게 큰 밀크 부대와 작년 봄 보내 준 바나나다. 그 바나나는 2분의 1이 너무 익어 그것을 먹고서 신부님과 신학생들이 집단 설사를 하는 소동이 있었다. 그러므로 네드 아저씨로부터 소식이 없는 것은 크게 이상할 게 없었고, 폴리 아주머니의 편지는 나를 근심스럽게 했다. 언제나 알려 주시는 아주머니 특유의 이웃 소식이 요즈음에는 주로 날씨가 어쩌고 하는 무미건조한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그 변화는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물론 노라는 아무 소식도 전해 주지 않는다. 그녀는 일년에 한 번 바닷가에서 단 몇 분만에 써 버린 것 같은 그림엽서를 보낼 뿐이다. '스카바라 부두에서 바라본 석양빛'이라는 최후의 그림엽서가 온 것은 이미 수세기가 지난 것 같은 느낌이고, 내가 보낸 두 통의 편지에 대하여는 '호이트리 만의 달빛' 정도의 엽서라도 보낼 만 할 텐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노라! 나는 그 사과 창고에서의 이브와 같은 너의 행동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다시 고스포스까지 함께 걸을 기회는 있을 테지. 네가 어른이 되는 것을-나는 숨을 죽이고 은밀히 관찰해 왔다. 나는 너의 약삭빠르고 부끄러워하면서도 대담하고 민감한, 어떻게 보면 건방져 보이기도 하는 노라의 티없이 맑은 명랑함과 천진난만함, 어느 것이든 모두 좋아하고 있다. 지금 이렇게 있어도 나는 폴리 아주머니와 나의 흉내를 내면서 가냘픈 팔을 허리에 대고 파란 눈을 반짝이면서 결국엔 참을 수가 없어서 춤을 추어 버리던 너의 매혹적인 빈틈없는 작은 얼굴이 보인다. 너의 모든 것은-가냘픈 몸을 흔들면서 결국에는 큰 소리로 울어 버리는 신경질마저도-어쩌면 그렇게 인간다우며 생동적인 것일까. 결점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마음이 따스하고 정직한 너는 무의식적으로 남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때에도 바로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힌다. 나는 잠자리에 누워 커다랗게 눈을 뜨고 너의 일을 생각한다. 그 눈 속의 표정이나 작고 둥글한 유방, 그리고 슬프기만 한 늑골의 언저리 등을...... 프랜치스는 여기까지 쓰고 나서 문득 펜을 놓고 불현듯 얼굴이 빨개지며 마지막에 쓴 것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다시 고백은 계속되었다. 둘째로 나는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도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다. 나는 지금 내 신분에 적합한-이것도 타란트 신부는 동의할 것이다-교육을 받고 있다. 호리웰 학교 생활도 이제 한 학기 남았다. 싫어도 역시 유니온 주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나는 이젠 더 이상 네드 아저씨-라기보다는 정확히 말해서 폴리 아주머니에게(최근에 우연히 안 일이지만 폴리 아주머니는 어쩌면 그렇게 훌륭하실까! 아주머니는 약간의 수입 가운데서 나의 수업료를 지불해 주고 있는 것이다) 부담을 드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것저것 여러 가지 야심을 가지고 있다. 폴리 아주머니에 대한 애정과 넘치는 감사의 생각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에 보답해야 한다고 나로 하여금 결심하게 만든다. 그리고 아주머니의 최대 희망은 내가 사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여기처럼 졸업생의 3분의 2개 성직자가 되도록 되어 있는 데서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누구나 이런 경우에 갈 길을 가고 싶은 것이다. 타란트 신부는 차치하고 마그냅 신부는 나 같은 사람도 좋은 사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그 신부님의 기민함과 친구처럼 사람을 대하는 친근함, 그리고 강한 인내심이 나로 하여금 그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 신학교의 학장으로서 하느님의 소명에 대하여 그는 뭔가 알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하긴 나는 본래 성질이 격하기 쉽고 급한 데가 있다. 더구나 이곳 저곳 옮겨 다니며 자란 생활 환경이 나에게 종파분립적인 관념을 붙여 버린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이 학교 도서관에서 빠지지 않고 공부를 하는 것처럼 내 생애를 하느님께 바친 청년이라고 자부할 수는 없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입으로 기도문을 외우고, 숲 속에서 제단만들기를 하였고, 혹은 '테레사나 아나벨도 가까이 오지 말라. 나는 그대들과 한 자리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하는 식으로 온 마을의 축제에 모여드는 작은 여자아이들을 타박하거나 자기 혼자만이 큰 은총이라도 받은 듯이 행동하는 인간들인 것이다. 그러나 때대로 갑작스럽게 엄습해 오는 그 순간적인 감정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혼자서 두운 역을 향해 갈 때라든가, 밤중에 고요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떴을 때라든가, 또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기침을 하면서 조용조용히 속삭이며 성당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호젓하게 혼자 남아 있을 때에 느끼는 감정 말이다. 그것은 묘한 불안을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전부터 흔히 있었던 그 혐오스러운 감상적인 무아의 경지가 아니고 오히려 위로와 희망을 안겨 주는 그런 감미로움이다. 그렇게 말하는 내가 수련사장의 광분한 얼굴만 보면 왜 구토증을 느끼는 것일까? 이런 것을 쓰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면 나는 괴롭다 .나 이외에 아무도 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자기 내부의 불타오르는 것 같은 기분도 이렇게 일기장에 적어 버리고 나면 타 버린 재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어져 버린다. 그래도 나는 적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은 싫건 좋건 간에 하느님께 소속된다. 그리고 또 이 우주의 정연하게 예정된 무자비한 운행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은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확고한 신념이 갑자기 암흑 가운데서 번쩍하고 번득이는 것을 나는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다니엘 그레니의 그 그리운, 그 미치광이 '다니엘 성자'의 영향이라고 나는 느꼈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외할아버지의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느낀다. 제기랄 것-타란트 신부가 말한 대로이다-나는 나의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있다. 만일 나에게 그 만큼의 의지가 있다면 왜 하느님을 대신하여 행하여야 할 일이 없다는 말인가. 저 냉담하고 무엄한 구중을, 오늘날 온 세계에 만연되고 있는 유물주의에 물든 무지한 군중들을 인도하지 못하는가......요컨대 사제가 되지 못하는가. 아니 정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모두 노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노라에 대한 나의 아름다운 정감으로 나의 마음은 터져 버릴 것 같다. 성모님께 기도하고 있을 때마저도 그 귀여운 그녀의 얼굴이 언제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운 노라! 내가 산 모랄레스 행의 성스러운 급행 열차의 차표를 사지 않는 참다운 이유는 너 때문인 것이다! 그는 펜을 놓고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진 채 방황했다. 이마는 약간 찌푸렸으나 입술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애써 침착하려 했다. 라스티 맥과의 오늘 아침 있었던 일을 아무래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 오늘은 감사 휴일(학과나 육체노동을 하지 않고 미사에 참가하는 날)이었으므로 오전에는 자유였다. 편지를 부치러 가다가 수위실 앞에서 스틴챠 강에서 한 마리도 낚지 못하고 돌아오는 학장 선생님과 마주쳤다. 학장은 걸음을 멈추고 작달막한 몸집을 낚싯대에 기대면서 타는 듯한 빨간 머리에 검게 그을린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아니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라스티 맥을 아주 좋아했다. 그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이 다같이 순수한 스코틀랜드인 기질로 낚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스코틀랜드인은 전체 학교에서도 두 사람뿐이다. 프레이저 부인이 스틴챠 강 연안의 소유지를 학교에 기증했을 때에도 라스티는 그 자리에서 이 강가를 자기의 전용으로 했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다음날 호리웰 학교 신문에 '나의 강에는 얼간이 낚시꾼의 낚싯줄 한 가닥도 드리지 못할지니......'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감탄조의 노래가 실려 있었는데, 이 노래야말로 학장 신부의 마음을 잘 묘사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낚시를 좋아했다. 학장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 프레이저 저택에 있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는데 막역한 친구인 장로교파의 질리 씨가 성당 유리창 너머로 얼굴을 내밀며 흥분을 억제하는 듯한 소리로 "마그냅 신부! 로카바의 강가에 많은 낚시꾼들이 모였어요" 하고 급보를 전한 것이다. 그때만큼 미사가 빨리 끝난 적은 없었다. 프레이저 부인을 비롯하여 어안이벙벙해진 일동은 대단한 스피드로 축복을 받았는가 싶었는데, 다음 순간에는 그 지방 사람들이 말하는 악마와 같은 시커먼 것이 제의실에서 날아가듯 뛰어나갔다. 오늘 아침은 그 신부가 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속상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 마리도 없어. 손님을 위해서 한 마리라도 잡혔으면 했는데 말이야." 오늘 교구의 주교와 이번에 퇴직하는 산 모랄레스 신학교의 학장과 오찬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리브 강이라면 한 마리쯤은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 하고 내가 말했다. "이 강에는 전혀 없어. 피라미 한 마리도 없어......아침 여섯 시부터 한건데." "큰 것도 있습니다." "거짓말 작작 하라고." "아닙니다. 어제 뚝 밑에서 보았는걸요. 물론 잡으려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빨간 눈썹 밑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을 보았다. "고집쟁이야, 치셤, 그렇게 하고 싶으면 다녀오렴." 그는 나에게 낚싯대를 주고는 가 버렸다. 나는 마침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물소리에 가슴을 설레면서 그리브 강으로 내려갔다. 데그스 실 끝에 달린 낚싯바늘은 '실버 닥터'라는 것으로, 강에 꼭 어울리는 것이었다. 나는 강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거의 한 시간쯤 기다렸지만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건너편 그늘진 곳에서 까만 지느러미가 움직이는 것을 본 듯싶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때 문득 조심성 있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 .돌아다보니 외출용 까만 수단을 입고 장갑에 실크 해트를 쓴 라스티 맥이 서 있었다. 두운 역으로 손님을 맞으러 가다가 애를 태우고 있는 나를 놀려 주려고 온 것이다. "야아, 큰놈인 것 같다, 치셤" 하고 그는 히죽 웃었다. "그게 언제나 골치야, 피라미일 게다."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나는 30야드 전방에 낚시를 던져 넣었다. 낚싯바늘은 뚝 가까이 소용돌이의 거품이 이는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그 순간 나는 손에 감촉을 느끼고 지체없이 낚싯대를 잡아챘다. "잡았구나!" 하고 라스티가 큰 소리를 쳤다. 동시에 연어를 4피트나 높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하마터면 그것을 놓칠 뻔했으나 바로 그때 그가 재빠르게 낚싯대를 잡아 주었다. 그는 내 옆에 서서 몸을 꼿꼿하게 젖히고 "야아, 대단한걸!" 하고 놀란 소리로 말했다. 그 연어는 이 스틴챠 강은 물론이고 아버지의 어장인 티드사이드에서도 본 일이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머리 쪽부터 올리는 거야" 하고 라스티가 소리쳤다. "그래, 옳지, 아가미를 잡아라." 나는 이미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종횡무진으로 설쳐대던 연어가 강 아래쪽으로 도망을 쳤다. 나는 정신없이 따라갔다. 그 뒤를 라스티가 따랐다. 스틴챠 강도 호리웰까지 오면 티드 강과는 달리 다갈색의 분류를 이루고, 소나무나 협곡 사이를 꾸불꾸불 돌아가는가 하면 미끈미끈한 암석이나 높은 낭떠러지와 부딪쳐 물안개를 일으키고 있었다. 10여 분 후에는 학장도 나도 이미 반 마일이나 강 아래까지 와 버렸고 이미 숨이 턱까지 찼다. 그러나 아직 두 사람은 연어를 쫓고 있었다. "치셤, 잡아라, 잡아!" 라스티는 너무 소리를 질러서 목이 쉬어 있었다. "아니야, 아냐. 그렇게 깊이 들어가면 안 돼!" 그렇지만 연어는 이미 깊숙한 데로 들어가 버렸고, 강바닥에 있는 너저분한 나무뿌리에 실이 엉켜 아무리 해도 빠지지를 않았다. "늦춰라, 늦춰! 돌로 칠 테니 약간 늦춰." 학장은 잠시도 가만있을 수가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 이번에는 숨을 죽이고 실이 끊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너무나 긴장했기 때문에 알 수 없으나, 숨어 있던 연어가 다시 요동을 치며 달아나기 시작하자 낚싯줄이 풀리며 학장도 나도 뛰었다. 그리고 한 시간쯤 되었을 것이다. 두운 마을의 건너편의 얕은 곳까지 왔을 때 연어도 드디어 패배의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몇 번 놓칠 뻔했는지 모른다. 정신없이 연어를 쫓았기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런 만큼 완전히 지쳐 버렸다. 라스티가 헐떡거리면서 다시 고함을 질렀다. "저기다, 저기. 모래 위야!" 그는 이제 완전히 목이 쉬어 있었다. "작살이 없으니까 조심해라. 이 이상 끌고 가면 줄이 끊긴단 말이다. 조심하라고." 나도 입안이 바싹바싹 탔다. 나는 헐떡이던 숨을 가다듬고 연어의 옆에 섰다. 얌전한 것 같던 연어가 갑자기 미친 듯이 최후의 발악을 했다 .선생은 앗! 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저런, 저런......이번에 놓치면 마지막이야!" 얕은 물에서 보니 연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만일 또 놓친다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섬뜩해졌다. 나는 연어를 뒤에서 몰아 겨우 모래사장 위로 밀어 올렸다. 숨을 죽인 학장이 손으로 연어의 아가미를 붙잡고는 굉장히 큰 연어를 풀밭 위에 내동댕이쳤다. 파란 풀밭 위에서 보니 40파운드 이상 될 것 같은 연어는 굉장했다. 활처럼 굽은 등에 아직도 번쩍번쩍하는 바닷진드기가 붙어 있었다. "최고다, 최고야!" 학장은 우쭐해져서 노래라도 부를 것 같은 소리로 말했다. 나도 정신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마주 잡고 판댕고(스페인 무용)를 추고 있었다. "42파운드가 확실해......기록을 해 두도록 하자." 학장은 나를 얼싸안고 "이봐, 치셤, 넌 훌륭한 낚시꾼이다!" 하고 말했다. 마침 그때 강 건너 철로에서 기관차의 기적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라스티는 숨을 몰아쉬며 야단났다는 얼굴이 되었다.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기관차의 연기와 두운 역의 빨간 신호기가 급히 아래로 내려졌다. 겨우 정신을 되찾은 학장은 바지 안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냈다. "이거 큰일났구나, 치셤!" 그 소리는 이미 호리웰의 학장의 것이었다. "저건 주교가 타고 있는 기차야." 궁지에 빠진 것은 명백했다. 고귀한 손님을 5분 안에 마중하지 않으면 안 되고, 역까지 가는 데는 5마일의 길을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더구나 그 역은 스틴챠 강을 경계로 하여 바로 눈앞의 논밭 건너에 보이는 것이다. 선생은 결심을 한 듯이 천천히 말했다. "저 놈을 가지고 가서 점심에 통째로 구워 내라고 해라. 자, 빨리 가거라. 그리고 롯의 처와 소금 기둥 이야기를 잊어서는 안 돼(롯의 처가 여호와에 의해서 금지되어 있는데도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되었다고 하는 구약성서 <창세기>의 비유). 무슨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아선 안 된다, 알겠느냐." 그러나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견딜 수가 없었다 .강이 첫 번째로 구부러진 곳에 와선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관목 사이에서 돌아다보았다. 라스티 신부는 이미 벌거벗고 예복을 둘둘 말고 있었다. 그리고 실크 해트를 단단히 쓰고 옷을 마치 목장(끝이 구부러진 지팡이. 주교의 표시)처럼 쳐들고 벌거벗은 채 강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처음엔 철벅거리고 걸어갔으나 그러는 동안에 물이 목까지 차는가 싶었는데 벌써 건너편 언덕에 닿았다. 그러자 바로 황급히 예복을 입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기차를 향해 전속력으로 용감하게 달려갔다. 나는 배꼽을 움켜쥐고 풀밭 위를 뒹굴었다. 내가 감동한 것은 사람도 없는데 단정히 머리 위에 쓴 실크 해트의 모양 따위가 아니다-그것도 영원히 잊을 수 없지만-그것보다도 그 갑작스러운 행위의 배후에 숨어 있는 대담한 배짱이다. 그런 학장 신부님이라면 인간의 알몸을 보고 질겁을 하지 않고 여체를 보고도 너털웃음을 웃을 것 같은 이상한 생각을 했다. 문 밖의 발소리에 프랜치스는 쓰던 것을 멈추었다. 방문이 열리고 허드슨과 안셀모 밀리가 들어왔다. 가무스름한 피부에 온순한 허드슨은 의자에 앉아서 구두를 벗기 시작했고, 안셀모는 저녁때 온 우편물을 손에 들고 있었다. "편지야, 프랜치스" 하고 그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밀리는 하얀 얼굴에 언제나 혈색이 좋은 아름다운 청년이다. 눈은 맑게 빛났고 건강했다. 무슨 일에나 열심이고 따라서 잠시도 쉴 틈이 없는 그는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았다. 확실히 학교 안에서 제일 인기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성적은 뛰어나게 우수하다 할 수는 없었으나 어느 교수에게나 호감을 받았고, 그의 이름은 언제나 우등생 명단에 들어 있었다. 크리켓이나 테니스나 그다지 힘들지 않은 스포츠는 무엇이나 잘했고, 사람을 조직하는 특수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우표 수집을 비롯하여 철학 연구회까지 많은 그룹을 능숙하게 움직였고, 의결에 필요한 정원수라든가 의사록이라든가 의장 등등의 말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교묘히 구사할 줄도 알았다. 새로운 그룹이 생길 때마다 안셀모의 의견을 반드시 듣게 마련인데, 결국은 자연히 그가 회장이 되곤 했다. 성직자의 생활을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그의 말투에는 어딘지 과장된 감정도 엿보였으나 어쨌든 훌륭한 학생으로 그의 성공은 틀림없이 보장되는 듯했다 .다만 그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은 학장과 고독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그를 대단히 싫어한다는 것 외에 그는 교내에서 영웅적인 존재였으며, 그리고 그들로부터의 찬사를 사양하면서도 떳떳하게 받아들였다. 지금도 프랜치스에게 편지를 건네주면서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틀림없이 좋은 소식일 거야." 프랜치스는 편지를 재빨리 뜯어보았다. 날인도 '타인카슬 운하 가 유니온 주점 네드 바논 보냄'이라고 되어 있었고 편지 내용은 연필로 쓴 것이었다. 프랜치스, 너도 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도 잘 있다. 연필로 편지를 쓰는 것을 용서해 다오. 요즈음 집에 대단한 일이 생겼단다. 너에게 이러한 일을 알리는 것은 매우 유감이지만 이번 방학은 그곳에서 보내 주었으면 한다. 지난 여름방학이래 줄곧 만나지 못했으니 나로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유감이고 또한 슬픈 일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참으로 이번만은 돌아와서는 안 되게 되었으며 하느님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겠다. 너는 이런 말을 하여도 들어주리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이번만은 그럴 수밖에 없으며 성모 마리아님이 증인이시다. 물론 곤란한 일이 생겼다고 해서 별로 숨길 생각은 없다. 이것은 너에게는 아무 도움도 방해도 되는 일이 아니다. 돈이나 누가 앓아 누운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다만 하느님의 도움으로 어떻게든 극복해 나가고 모든 것이 잊혀질 수만 있었으면 하고 빌 따름이다. 그러니까 방학은 학교에서 보내도록 결심하기 바란다. 여분의 비용도 아저씨가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책도 사보고 그곳은 경치도 좋으니까 더구나 크리스마스에는 돌아올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있어 다오. 아저씨는 개를 모두 팔아 버렸는데 이것은 돈 때문이 아니다. 길포일 아저씨가 여러 가지로 잘 돌봐 주고 있단다. 거기도 그다지 기후가 좋지 않을 듯싶으나 여기는 장마가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단다. 제발 프랜치스, 지금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묵고 있어서 네가 온다 해도 잘 곳도 없단다. 끝으로 한 번 더 말하지만 이번 방학만 그곳에서 지내도록 해라. 돌아오지 말고(여기에 점선이 이중으로 그어져 있었다). 오늘은 이만 쓴다. 안녕! 폴리 바논 프랜치스는 창가로 가서 편지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 문맥의 의도는 명백했으나 뭔가 석연치가 않았다.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니?" 안셀모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프랜치스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를 몰라 침착하지 못한 표정으로 잠자코 있었다. "무슨 일이지!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인데." 안셀모는 터벅터벅 다가와서 위로하는 얼굴을 하며 프랜치스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뭐든지 말해 봐, 자아" 하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밤엔 핸드볼을 할 기분이 나지 않겠구나." "으응" 하고 프랜치스는 중얼거렸다. "오늘밤은 참가하지 못하겠어." "좋아, 좋아, 프랜치스." 저녁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뭔가 근심스러운 일이 있는 것 같구나. 오늘밤은 특히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기도하는 동안 프랜치스는 폴리 아주머니가 보낸 편지를 이모저모로 생각해 보았다. 기도가 끝나자 그는 문득 라스티 맥에게 상의해야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넓은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학장실에 들어가 보니 학장은 타란트 신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프랜치스가 들어간 순간 이상하게 대화를 끊어 버린 것으로 보아 프랜치스는 두 사람이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직감했다. "실례했습니다." 그는 망설이는 시선을 라스티 맥에게 던졌다. "손님이 계신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죄송합니다." "괜찮아, 치셤. 앉아라." 프랜치스는 나오려던 몸을 돌려 학장이 따뜻한 눈길로 가리키는 의자에 낮았다. 라스티는 짧고 굵은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닳아빠진 마도로스 파이프에 담배를 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저는 신부님 혼자 계신 줄 알고......" 왠지 학장은 그의 시선을 이상하게 피하는 것 같았다. "타란트 신부가 계셔도 상관없지 않은가. 무슨 용무지?"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다른 구실도 생각이 나지 않아 프랜치스는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편지가 왔습니다......집에서." 아까는 라스티 맥에게 폴리의 편지를 보여 줄 생각이었으나 타란트 신부의 앞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번 방학 때는 학교에서 보내라는 겁니다." "그래?" 내가 지나치게 과민한 탓일까. 두 사람이 재빠르게 시선을 주고받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 참 실망이 크겠구나." "네, 그렇습니다. 더구나 편지 내용이 마음에 걸립니다. 여러 모로 생각해 보았습니다만......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학장님께 여쭈어 보려고 왔습니다." 마그냅 신부는 낡아빠진 파이프를 만지작거릴 뿐 대답이 없었다. 그는 대개의 학생들 일을 소상히 알고 있었으나 지금 자기 옆에 앉아 있는 학생은 자기의 마음에 불을 밝혀 줄 것 같은 섬세하고 아름답고, 더구나 완고하리만큼 정직한 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실망이라는 것은 있는 법이야, 프랜치스." 그 말소리는 여느 때보다도 부드러웠다. "타란트 선생님이나 나도 실망할 일이 생겼단다. 스페인에 있는 신학교로 전근 명령을 받았단다. 나는 학장으로 신부는 부학장에 임명되었어." 프랜치스는 말이 막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산 모랄레스에 가는 것은 주교가 되기 위한 단계로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영전이었다. 그러나 학장은 조금도 기쁜 빛이 없었다. 프랜치스는 타란트 신부의 무표정한 얼굴을 훔쳐보았다. 어떤 사람보다도 호리웰의 푸른 숲과 스틴챠 강을 진정으로 사랑해 온 학장으로서는 건조한 땅인 아라곤(스페인 동부 지방)의 평원은 뭐니뭐니해도 이방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라스티 맥은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말이지 언제까지나 여기에 있으려고 마음먹고 있었고, 너는 너대로 집에 돌아갈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겠지. 그러나 어쩌겠나. 전능하신 하느님에 의한 이 징벌을 우리 두 사람 다같이 달게 받아들이세." 프랜치스는 혼란한 머릿속에서 적당한 말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저는 다만......걱정이 되어 찾아뵈었습니다......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히 알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걸까?" 하고 마그냅 신부는 말했다. "타란트 선생, 어떻게 생각하시오." 타란트 신부는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저의 경험으로는 복잡한 일은 당사자들이 처리하게 맡겨 두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은 말할 것이 없었다. 학장은 테이블 위의 스탠드에 스위치를 넣었다. 어둡던 서재가 갑자기 밝아졌다. 회견도 끝이라고 생각되었다. 프랜치스는 일어났다 .그리고 두 사람을 향해 똑바로 섰으나 마음은 학장을 향해 말했다. "신부님이 스페인으로 가시는 것은 대단히 유감이며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학교도......아니, 저는 정말 섭섭합니다." "거기에 가서 또 만나게 되겠지." 그 말에는 희망과 온화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프랜치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우뚝 선 채로 복잡한 감정이 엇갈리는 눈길을 돌리다가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편지를 보았다. 약간 거리가 멀어 글씨는 잘 안 보였으나 편지 겉봉에 선명하게 잉크로 인쇄된 글씨가 보였다. 프랜치스는 얼른 눈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는 '성 도미니코 성당, 타인카슬'이라는 것밖에 읽지 못했다. 온몸이 떨렸다. 집에 뭔가 불행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미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로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신부들은 그가 편지를 본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프랜치스는 이미 누가 반대할지라도 자기가 나아갈 길은 하나밖에 없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5 기차가 타인카슬 역에 도착한 것은 무더운 6월의 어느 날 오후 두 시였다. 프랜치스는 가방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역을 빠져나왔으나 낯익은 거리 쪽으로 들어서면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점 앞에 이르러 보니 이상하게 조용했다. 그는 폴리 아주머니를 놀라게 해줄 양으로 살그머니 옆 계단으로 올라갔다. 여기도 조용하기만 하고 밖의 환한 곳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그곳은 묘하게 어두컴컴했으며, 복도도 부엌도 텅 비어 있었고 다만 시계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는 거실로 들어갔다. 네드가 식탁 앞에 앉아서 두 팔꿈치를 세우고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도 모습이려니와 아저씨의 너무나 많이 달라진 모습에 프랜치스는 갑자기 숨이 막혀 왔다. 네드는 20킬로나 야위어 옷이 헐렁해 보였으며 둥글고 윤기 있는 얼굴도 비참하리만큼 초췌해져 버렸다. "아저씨!" 하고 부르며 프랜치스는 손을 내밀었다. 잠시 동안은 아무 대답도 없었으나 아저씨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 불행에 찌든 것 같은 눈으로 겨우 상대를 알아본 것 같았다. "너였구나, 프랜치스." 어딘지 모르게 애매한 미소를 머금고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갑자기 와서 놀라셨죠?" 근심이 앞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애써 웃는 얼굴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방학이 되고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아주머니는요?" "출타했어......아아......아주머니는 이틀 전에 호이트리 만에 가셨다." "언제 돌아오시죠?" "글쎄, 아마 내일쯤 올 거야." "노라도 같이 갔습니까?" "응, 그래......" 네드의 대답이 이상하게 떨렸다. "그래요?" 프랜치스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전보를 쳐도 회답이 없었군요. 그런데 아저씨......아저씨도 건강하신 거지요?" "으음, 나는 건강해. 요즘 기후 탓인지 약간 이상은 하지만......뭐 대단치 않다. 나는 괜찮아." 아저씨의 가슴께가 갑자기 파도치는 물결처럼 흔들리는 것 같더니 몹시 초췌해진 얼굴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프랜치스는 뭔가 오싹해지는 전율을 느꼈다. "자아, 가서 뭘 좀 먹으려므나. 찬장에 먹을 게 많이 있으니까. 길포일에게 말하면 뭐든지 꺼내 줄 거야. 아래 주점에 있다 .그 사람에겐 많은 폐를 끼치고 있단다." 네드는 눈 둘 곳을 몰라 하며 다시 벽 쪽으로 눈을 돌려 버렸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다가 프랜치스는 가방을 가지고 자기 방으로 갔다. 복도를 지나가다가 노라의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깨끗하고 아담한 방을 얼핏 보고 당황하여 얼른 고개를 돌리고 황급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주점은 텅 비어 있었고 단골인 스캔티마저도 보이지 않았으며, 여느 때의 그 구석 자리에 아무도 없는 것이 단단한 벽에 금이라도 간 것처럼 오히려 눈길을 끌었다. 카운터 옆에서 길포일이 셔츠 소매를 걷어올리고 컵을 닦고 있었다. 프랜치스가 들어가자 그는 휘파람을 뚝 그쳤다. 약간 놀랐는지 일순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에 젖은 손을 쑥 내밀었다. "여어, 여어." 그는 큰 소리를 쳤다. "야, 귀한 손님이 오셨군." 길포일의 주인 행세하는 태도가 약간 비위에 거슬렸지만 잠자코 받아 주고 나서도 프랜치스의 심장 고동 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그러나 농담처럼 말했다.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어요. 가스 회사는 어떻게 하고서......" "회사는 이미 그만두었어" 하고 길포일은 태연스럽게 말했다. "왜요?" "여기서 아주 살게 됐거든......" 그는 모든 일에 익숙한 듯 컵을 하나 들어올려 햇볕에 비춰 보고는 입김을 후 불어 닦기 시작했다. "와 달라고 부탁 받았기 때문이야......어쩔 도리가 없었지." 프랜치스는 신경이 이미 견딜 수 없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어찌된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요, 길포일?" "길포일 씨라고 불러 주었으면 좋겠는데, 프랜치스." 길포일은 책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네드 씨의 얼굴을 보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오지 않을 수 없었단 말이야. 옛날의 네드 씨가 아니야, 프랜치스. 옛날대로 좋아질는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어쨌다는 거요? 마치 아저씨가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데." "그래요, 프랜치스. 그 사람은......" 하고 길포일은 신음하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요즈음은 제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말야." 듣고 있던 프랜치스의 얼굴이 몹시 일그러지자 그는 달래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 주점에 오고 나서 열심히 일했단 말야. 거짓말 같으면 피츠 제랄드 신부님에게 여쭈어 보게. 전부터 다들 나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어. 자넨 커 가면서 휴가 때에 돌아오면 나를 놀림감으로 삼았었지 않았는가 말이야. 그렇지만 나는 너를 대단히 호의를 가지고 대해 왔어.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안 될 거야......특히 지금에 와선 말이지." "그게 어쨌다는 거야. 그리고 지금에 와서라니?" 프랜치스는 이를 악 물었다. "그래, 에, 에......자넨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그야 그럴 테지." 길포일은 기분 나쁘게 히죽히죽 웃었다. "저번 일요일에 비로소 성당에서 공포되었다. 프랜치스, 나와 노라가 결혼하게 되었다고." 폴리 아주머니와 노라는 그 이튿날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길포일 수수께끼 같은 말을 이해할 수 없어 프랜치스는 불안하고 초조하여 두 사람이 돌아오기를 안타깝게 기다렸었다. 그래서 프랜치스는 즉시 폴리 아주머니를 붙잡고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폴리는 그를 보고 "프랜치스, 오지 말라고 일렀지 않았니?" 하고 울음 섞인 소리를 지르며 노라를 데리고 이층으로 뛰어올라 가 버렸다. 프랜치스가 아무리 물어봐도 아주머니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똑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노라는 건강이 좋지 않아......병이라고 했잖니? 나가 있거라......간호를 해줘야 하니까 말이야." 핀잔을 들었기 때문에 그는 더욱더 불안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뾰로통하여 그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노라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그대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한 시간 가량 폴리 아주머니가 노라의 방을 들락거리며 모든 시중을 들어주며 또 쉬지 않고 뭐라고 하는 소리와 안절부절못하며 자꾸만 주의를 주고 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버들가지처럼 여윈 노라의 창백한 얼굴은 그야말로 병자 같았다. 폴리 아주머니도 역시 초췌해져서 여느 때와는 달리 몸매무새 같은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시종 이마에 손을 대는 묘한 버릇이 생겼다. 밤늦게 노라의 방에서 낮은 목소리로 기도를 올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올 뿐 집안은 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무리 해도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채 프랜치스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튿날은 무척 좋은 날씨였다. 그는 일어나자 습관적으로 새벽 미사에 나갔다. 돌아와 보니 노라가 뒤뜰 계단에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녀의 발밑에서 두세 마리의 병아리가 삐약거리면서 놀고 있었다. 그가 와도 그녀는 길을 터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멈춰서자 그제야 얼굴을 들고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꼭 신부님 같군요.......일찍 다녀오시는군, 천당에 가시려고!" 그녀의 말투는 뜻밖에도 가시가 돋쳐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당황해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 수 없었다. "미사는 피츠 제랄드 신부님이 집전하셨나요?" "아니야, 보좌 신부님이." "그 무뚝뚝한 소 같은 양반이. 그래요, 하긴 그 사람 악의는 없어. 그렇지요?" 그녀는 여윈 턱을 더욱 여윈 손등에 괴고 병아리들을 복 있었다. 본래 허약한 체질이지만 이렇게 대쪽같이 마르다니......그는 새삼스럽게 놀랐다. 그녀는 어른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사치스럽도록 화려한 새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눈빛도 소녀 티가 가신 성숙한 여인의 눈 같았지만 가냘프기 짝이 없는 몸매와는 어울리지 않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노라의 고통이 자신의 가슴을 찢어 헤치는 것 같았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침 식사는 했니?" 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가 무리하게 먹게 하셨어. 정말로 내버려두었으면 좋으련만." "오늘 어디 나갈 예정이라도 있니?" "예정 같은 거 없어." 그는 다시 머뭇머뭇하고 있었으나 자기의 온 마음을 다 쏟아 빠르게 말했다. "그럼 산책이라도 하지 않겠어? 노라, 전에 자주 갔었잖아. 오늘은 근사한 날씨니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말라빠져 홈이 패인 볼에 약간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럴 기분이 아니야."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쌀쌀했다. "난 피곤해 죽겠단 말야." "이봐, 노라. 가자.......부탁이야." 그녀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그래, 좋아" 하며 일어섰다. 그 순간 프랜치스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막혀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잽싸게 부엌으로 들어가 샌드위치와 케이크를 잘라 서둘러 싸면서 마침 폴리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10분 후에 노라와 프랜치스는 빨간 전차를 타고 덜커덩덜커덩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스포스의 언덕길을 말없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왜 이 추억의 언덕길을 택했는지 자신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마침 새싹이 돋아날 때여서 전원 경치가 참으로 좋았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 해주는 것이었다. 사과의 꽃봉오리가 거품이라도 품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랭의 과수원에 이르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려고 입을 열었다. "자아, 노라, 잠깐 들어가서 랭 아저씨께 인사나 하고 갈까?" 그녀는 사과 창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과나무로 흘끗 눈을 돌렸다. 그리고 느닷없이 토해 내듯이 말했다. "싫어, 저런 곳에는 다시는 가기 싫단 말이야." 프랜치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신경질이 자기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한 시경 두 사람은 고스포스 언덕 정상에 닿았다. 노라가 몹시 피로한 것 같아서 프랜치스는 커다란 떡갈나무 아래에서 도시락을 먹을 생각으로 멈추어 섰다. 보기 드물게 따뜻하고 쾌청한 날씨였다. 멀리 눈 아래의 평지에 둥근 지붕과 첨탑이 솟아 있는 시가가 금빛으로 반짝거리면서 펼쳐져 있고 전망이 무척 아름다웠다. 노라는 그가 펼쳐 놓은 샌드위치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프랜치스는 폴리의 강요하는 친절을 싫어하는 노라인 줄을 알기 때문에 억지로 권하지는 않았다. 나무 그늘은 상쾌했다. 신록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마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나무뿌리 옆으로 융단과도 같은 푸른 이끼 위에 햇빛이 얼룩져 비치고 있었다. 향기로운 풀내음이 가득 대지 위에 넘치고 떡갈나무 가지에 콩새 한 마리가 날아와 외롭게 지저귀고 있었다. 노라는 나무 그루에 몸을 기대고 머리를 돌려 눈을 감았다. 이러한 휴식만이 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인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는 그러한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가냘프고 뼈가 드러난 목덜미가 말할 수 없이 가련하게 보였다. 복받쳐 오르는 슬픔이 노라를 어떻게는 지켜 주어야겠다는 감정을 몰고 왔다. 그때 노라의 머리가 나무 그루에서 미끄러질 것 같았으나, 그는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그러나 노라가 잠깐 잠이 든 줄 알고 머리를 받쳐 주려고 팔을 뻗쳤다. 그때 그녀는 벌떡 일어나 그의 얼굴과 가슴을 마구 때리며 소리쳤다. "내버려둬요. 싫어! 이 짐승 같은......" "노라, 노라! 왜 그러는 거야." 그러나 그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프랜치스를 무섭게 노려봤다. "그런 식으로 속이지 말아요. 사내는 다 똑같아. 누구든지 다 그렇다니까." "노라!" 그는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부탁이야......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똑바로 말해 줘!" "똑바로 라고? 무엇을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 줘......왜 네가 이러는지......왜 길포일과 결혼하는지......" "그 사람하고 결혼하는 것이 뭐가 나빠?" 그녀는 괴로운 변명을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입술이 말라 거의 말이 나오지 않았으나 프랜치스는 간신히 대꾸했다. "노라, 길포일은 쓸개빠진 아첨꾼이라는 건 잘 알지 않아......너완 질적으로 다르단 말이야." "그 사람이건 누구건 다 마찬가지야. 모두 똑같다고 했잖아.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다운 일을 하게 할 테야." 그는 어안이벙벙하여 뺨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새파랗게 된 얼굴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원망과 분노가 끓어오르는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으나 그녀는 더욱 혹독한 말을 내뱉었다. "내가 너하고 결혼이라도 할 줄 알았었나.......영리한 눈을 가진 올챙이 사제님......설익은 성자님." 그녀의 입술은 통렬한 조소로 일그러졌다. "하고 싶은 말 다 할 테야. 넌 우스꽝스러운 바보야......만화 같은 신부님. 꼴불견이야. 경건한 체 눈을 하늘로 향하고, 자기는 그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르는 모양이야......올챙이 승정님. 너 같은 사내들이 없었으면 참으로 좋겠어......난." 그녀는 숨이 차서 가슴을 거칠게 들먹이면서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했으나 드디어는 흐느껴 울며 그의 가슴에 허물어지듯이 안겼다. "프랜치스, 프랜치스, 용서해.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해 왔는지 넌 알고 있잖아. 난 이대로 죽어 버리고 싶어. 차라리 네가 날 죽여 줘. 무섭지 않아. 모두가 귀찮단 말야." 프랜치스는 떨리는 손으로 노라의 이마를 쓸어 주면서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그러한 그 자신도 역시 그녀에 못지 않게 몸을 떨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몸부림치며 흐느끼던 소리는 점점 낮아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상처 입은 작은 새처럼 그의 가슴에 안겨 얼굴을 파묻고 피로에 지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마를 그렇게 있던 노라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수건을 꺼내서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고 모자를 고쳐 썼다. 그리고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이젠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나를 봐, 노라."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뭐든 말해." "그럼 하겠어, 노라!" 젊은 피가 뜨겁게 그의 가슴을 불태웠다. "이젠 나도 잠자코만 있을 순 없어. 나도 뭔가가 이면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그것을 기어코 캐내고 말 테니 두고 보라고. 넌 그 멍청이 길포일과 결혼해선 안 돼.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노라. 너를 위해서 끝까지 싸울 테야."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잠자코 있었다. "프랜치스, 내 말 좀 들어." 노라가 묘하게 몽롱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네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니까 어쩐지 무척이나 오래 산 것 같은 기분이야." 그녀는 몸을 굽혀 그의 볼에다 살짝 키스를 했다. 그것은 옛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언덕길을 내려갈 무렵에는 높은 나무 위의 콩새도 울음을 그치고 날아가고 있었다. 그날 밤 프랜치스는 결심한 바가 있어 파지장 근처의 마군 부부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방문했다. 매기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주점에서 추방된 스캔티만이 구석방 불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털 깔개를 만드는 북을 놀리고 있었다. 들어온 사람이 프랜치스인 것을 보고 멍한 눈이 반가운 빛으로 변했다. 그 빛은 프랜치스가 주점에서 슬쩍 가져온 위스키 병을 꺼냈을 때 한결 더 빛났다. 스캔티는 서둘러 컵을 꺼내 진지한 얼굴로 그의 건강을 빌면서 건배했다. "야아, 이 맛, 이 맛!" 그는 너덜너덜한 소매깃으로 입을 닦으면서 중얼거렸다. "그 인색한 길포일이라는 놈이 주점에 버티고 있은 후부터 난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어." 프랜치스는 등받이도 없는 나무 의자를 불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입을 열었다. "스캔티 씨, 유니온 주점이 무슨 일이 있었나요? 노라와 아주머니, 아저씨에게 말예요. 내가 돌아온 지 사흘이 지났는데도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요. 알고 있는 대로 말씀 좀 해주세요." 일순 스캔티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스쳐 갔다. 그는 프랜치스와 위스키 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가 그 집은 일을 어떻게 아는가?" "아니, 알고 있어요. 얼굴에 그렇게 씌어 있는걸요." "네드가 아무 말도 하지 않던가?" "아저씨 가요? 아저씨는 마치 벙어리 같아요." "안 됐어." 스캔티는 신음하듯이 중얼거리면서 십자 성호를 긋고 다시 위스키를 따랐다.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그만한 사람에게 재난이 있으리라고는......" 그리고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나는 말할 수 없어, 프랜치스. 생각만 해도 부끄러울 뿐이야. 들어봐야 아무 소용없어." "그렇지 않아요, 스캔티 아저씨!" 하고 프랜치스는 재촉했다. "내용만 확실히 알면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 거예요." "길포일의 일 말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스캔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한 잔을 쭉 들이키고서 주름투성이의 얼굴을 진지하게 긴장시키며 조용조용히 말했다. "그럼, 결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이야기해 주겠네, 프랜치스. 실은 노라가 아기를 낳았어." 그 순간 프랜치스는 숨을 죽였다. 스캔티가 또 한 잔을 들이키고 있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죠?" "벌써 6주일 지났네. 호이트리 만에 가서 낳은 모양이야. 애기는 여자아이였는데 그곳에서 어떤 여자가 맡아 기르고 있나 봐. 노라는 그 일로 인해 무척 괴로운 것 같아." 프랜치스는 땀을 줄줄 흘리면서 가슴속의 격정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물었다. "그럼, 길포일이 그 애 아버지인가요?" "그 짐승보다 못한 놈!" 스캔티는 제 정신을 잃은 듯이 증오에 불타는 눈에 노기를 띠고 말했다. "아니야, 천만에. 그 놈은 좋은 일 한답시고 아기에게 자기의 이름을 붙여 주고 한 술 더 떠서 유니온 주점에 들어앉은 거야. 악당놈! 그런 놈을 피츠 제랄드 신부가 두둔하고 있다네. 뻔한 일이야, 놈들이 하고 있는 것은. 결혼식을 올리고 그리고 신혼여행을 장기간 가 있다가 적당한 때에 그 아기를 데리고 돌아올 속셈이지. 정말 웃기는 짓이야. 그런다고 누가 모를 줄 알고......" 프랜치스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떨리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억제하며 다시 물었다. "노라에게 애인이 있었다니, 난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어요. 스캔티......누군지 당신도 알고 있나요......그 애의 아버지 말예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방안을 왔다갔다하다가 스캔티는 갑자기 큰 소리를 질렀다. 그때 그의 얼굴에 피가 왈칵 몰렸다. "그런 것 난 몰라. 나 같은 가난뱅이는 알 도리가 없지. 네드 씨도 몰라. 정말이야. 네드 씨는 언제나 나한테 잘해 주었어. 친절하고 훌륭한 사람이야. 하긴 폴리 아주머니가 집을 비워 술에 취했을 때만 빼고 말이야. 이제 다 끝난 거야, 프랜치스. 아무리 찾아봐야 헛일이야. 그런 사나이는 알 필요도 없어." 다시 얼어붙은 것 같은 침묵이 계속되었다. 프랜치스는 눈앞이 캄캄하여 심한 구토증을 느꼈다. 그러나 간신히 일어났다. "감사해요, 스캔티 씨. 여러 가지로 알려 주어서......" 그는 스캔티의 방을 나와 현기증을 느끼면서 아무것도 깔지 않은 아파트의 계단을 내려갔다. 이마도 손바닥도 얼음 같은 식은땀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어떤 환영이 머리에 달라붙어 그를 괴롭혔다. 아담하고 조용한 노라의 침실이었다. 그에게로 향한 증오는 아니다. 다만 연민의 정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지저분한 앞뜰을 지나자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전신주에 기댄 채 뱃속에 있는 것을 전부 토해 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오한이 났으나 정신은 아까보다 훨씬 맑아졌다. 그는 결심을 하고 성 도미니코 성당 쪽으로 걸어갔다. 성 도미니코 성당의 가정부는 조용하게 문을 열어 주었다. 가정부는 잠시 안에 들어가 1분쯤 있다가 희미한 등불이 켜진 현관으로 다시 돌아와 비로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들어오세요, 프랜치스. 신부님께서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프랜치스가 들어가자 제랄드 신부는 코담배 쌈지를 손에 든 채 일어섰다. 붙임성이 좋고 탐색적인 태도나 사내다운 풍채는 프랑스 풍의 가구에 고풍스런 기도대, 벽에 걸려 있는 이탈리아 문예부흥 전기의 훌륭한 복제화와 방안을 향기롭게 하는 테이블 위의 백합, 그리고 그 섬세한 화병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었다. "야아, 어서 오게, 프랜치스. 북쪽에 가 있는 줄만 알았지. 자, 앉으라고. 호리웰의 내 친구들은 모두 잘 있나?" 코담배를 집으려고 잠시 말을 끊은 그는 프랜치스가 입고 있는 교복과 넥타이를 보고선 옛날 생각이 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로마에 가기 전엔 거기에 있었지......근사하고 훌륭한 학교야. 마그냅과 타란트 신부는 로마 신학교 시절의 내 동창생들이지. 둘 다 장래가 유망한 친구들이었어. 그런데 프랜치스." 그는 잠깐 말을 끊고 기분이 좋은 부드러운 시선을 엄숙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뭐 내가 도움이라도 될 일이 있나?" 프랜치스는 괴로운 표정을 하고 숨을 헐떡이면서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라의 일로 찾아뵈었습니다." 말이 떨려 지금껏 온화하던 방안의 분위기가 어색하게 변했다. "그래, 노라 양의 일이라면?" "길포일과의 결혼 문제 말입니다. 노라는 그럴 의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옆에서 보기가 딱합니다. 어쩐지 바보짓 같고 부정한 것 같고......헛되고 또 무서운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넨 그 무서운 사건이란 것을 알고 있는가?" "네......다 알고 있습니다......노라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랄드 신부의 부드럽던 얼굴에 순간 당혹의 빛이 스쳐 갔다. 그러나 그는 앞에 앉아 있는 이성을 잃은 청년을 엄숙한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프랜치스 군, 자네도 언젠가는 성직에 봉사하리라고 생각하네. 그때 나의 경험을 반이라도 쌓았다고 하면......불행하게도 나는 너무 많은 경험을 했지만, 어떤 종류의 사회적 질환이든 같은 방법의 특수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할 걸세. 자네는 이번......" 하고 신부는 잠시 생각하더니 프랜치스가 산 말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무서운 사건으로 망연자실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지 않았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야. 나는 사실 주점을 잘 알고 있지만 좋은 곳이라곤 생각하지 않았거든. 그것도 이 교구를 구성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의 열등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기 때문이지. 너나 나라면 침착하게 라크리마 크리스티('그리스도의 눈물'이라고 하는 이름의 이탈리아 산 붉은 포도주)를 조용히 음미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에드워드 바논 군에게는 그렇게 되지 않는단 말이야. 그것도 좋다고 치자. 나는 누구를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말이야.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있다는 거야. 우리처럼 몇 시간이고 단조로운 고해실에서 지내는 사람으로서는 불행하게도 드문 일이 아니지만." 제랄드 신부는 잠시 말을 끊고 점잖은 손놀림으로 코담배를 꺼냈다. "그럼 그것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인데, 먼저 태어난 어린아이를 법률상으로 인정시키고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음은 노라에게 적당한 배우자를 물색해서 혼인 성사를 맺게 하는 일이지. 뭐든 확실한 질서를 밟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거야. 한번 망쳐 버린 사람에게도 다시 훌륭한 카톨릭의 가정을 만들어 주는 일이야. 뒤얽힌 실이라도 사회라고 하는 건전한 직물로 짜 나간단 말이다, 알겠나. 노라가 길포일과 결혼을 한다는 건 잘못된 게 아니란 말일세. 머리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 사람은 착실한 사내야. 두고 보라고. 2, 3년쯤 지나면 노라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에워싸여 미사에도 나오게 될 테니까......매우 행복하게 말이지." "아뇨,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프랜치스의 꼭 다문 입술에서 갑자기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노라는 결코 행복하게 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상처 입고 불행하게 될 뿐입니다." 제랄드 신부는 약간 놀란 듯 고개를 쳐들었다. "그럼 자넨 행복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나?" "그러는 동안에 노라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할 것입니다. 무리하게 노라에게 결혼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신부님보다 제가 노라의 일은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가까이 있어서 잘 안다는 얘기로군." 제랄드 신부는 약간 바보 취급을 하는 것처럼 미소지었다. "너 자신이 그 여성에게 육체적인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핏기를 잃은 프랜치스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저는 노라를 몹시 좋아합니다. 그러나 좋아한다고 해서 고해실을 더럽히는 사랑의 방법은 절대로 취하지 않습니다. 부탁입니다." 그의 말소리는 이상하게 낮았고 필사적인 어조를 띠고 있었다. "이 결혼을 노라에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보통 사람과 다릅니다. 총명하고 다감한 영혼을 가졌습니다. 그녀의 팔에 아기와 남편을 강제로 떠맡길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진하고 죄 없는 노라를......" 제랄드 산부는 노기가 충천하여 담배 쌈지로 테이블을 탕탕 쳤다. "나에게 설교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신부님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주셨으면 하고 부탁드릴 뿐입니다." 프랜치스는 누그러지는 마음에 채찍질을 하면서 최후의 힘을 짜냈다. "하다못해 노라에게 조금 더 시간의 여유를 주십시오." "이미 충분해요, 프랜치스 군." 아무리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고 얼굴색을 변하게 했을 때에도 곧바로 스스로를 누르고 또한 상대방까지도 제압하는 능력을 지닌 사제는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나 납작한 금시계를 꺼내 보였다. "여덟 시에 회합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네." 사제는 따라 일어서는 프랜치스의 어깨를 안 됐다는 듯이 가볍게 두들겼다. "자네는 아직 어려. 사물을 보는 눈이 어리다고나 할까. 그러나 다행히도 성당이란 것이 있단 말이야. 이것이 네 현명한 어머니시다. 그 성당이 원치 않는 일은 결코 하지 말라고, 프랜치스. 성당은 몇 세기를 거쳐왔고, 반항보다 더욱더 강한 저항에 견디어 왔으니까 말이다 .자, 똑똑한 프랜치스, 결혼식이 끝나면 다시 오라고. 그때 호리웰의 이야기나 좀더 하게 말일세. 그때까지 오늘의 너의 무례한 언동의 속죄로서 나를 위하여 성모송(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도)을 외워 주지 않겠나." 프랜치스는 잠자코 있었다. 모든 것이 헛일이었다.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 프랜치스......하느님의 축복을." 밖은 밤기운이 차가웠다. 프랜치스는 어린 자기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사제관을 나왔다. 그 발자국소리가 침울하게 메아리쳤다. 성당의 돌계단까지 왔을 때 마침 성당 문을 닫고 있었다. 하나 남은 등불도 꺼져 버리고 어둠 속에 우뚝 선 성당의 높은 건물이 망령같이 보였다. 그러자 문득 절망의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것 같은 기도의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 하느님,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결혼식 날짜가 가까워지자 프랜치스는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한잠도 잘 수 없었다. 그러나 집안의 분위기는 잔잔한 연못과도 같았다. 노라는 얌전해졌고 폴리도 어딘지 희망을 찾아낸 것 같았다. 더구나 네드는 사람의 눈을 피하여 혼자서 고독을 지키고 있었으나, 그 멍청한 눈에 담겨 있던 공포의 빛은 엷어져 갔다. 결혼식은 은밀히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혼수와 지참금 등은 남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으며 신혼 여행도 당초 예정대로 하기로 했다. 집안에는 혼수감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고, 폴리는 입에 핀을 물고 차례차례 완성되어 가는 옷들을 하나씩 입혀 보면서 가봉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길포일은 점잖은 체하면서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구경을 했으며, 고급 담배를 피우면서 네드와 주점의 재정 문제 등을 상의했다. 공동 경영 계약서를 작성했고, 또 결혼 후 자기들이 살 집 무제로 시끄럽게 떠들어대곤 했다. 길포일 쪽의 가난한 친척들이 떼를 지어 드나들었고 알랑거리며 제멋대로 굴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심한 것은 시집간 길포일의 누님인 미세스 닐리와 그의 딸 샬로트였다. 노라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프랜치스와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그녀는 재빠르게 한 마디 했다. "알고 있죠......그렇죠?" 그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아 그런 그녀의 눈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음, 알고 있어." 두 사람은 숨막히는 침묵 속에서 잠시 동안 서 있었다. 프랜치스는 더 이상 답답함을 참을 수 없어 눈물을 글썽이면서 밑도끝도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노라......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 나는 네 일을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몰라......나도 너 하나쯤은 돌봐 줄 수 있어. 일하겠어, 너를 위해서라면. 노라......우리 어디로든 가자! 아무도 모르는 먼 곳으로 말야." 그녀는 측은한 얼굴로 프랜치스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가자고, 어디로 가지?" "어디든 상관없잖아."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으나 프랜치스는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뜨거운 눈물만 흘렸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손을 힘주어 잡고는 새 옷의 가봉을 하러 황급히 가 버렸다. 결혼식 전날이 되자 그때까지만 해도 끌려 다니기만 하던 노라가 여느 때와는 달리 생기를 되찾아 조금 마음을 터놓게 되었다. 폴리가 홍차를 들고 왔을 때도 노라는 순순히 받아 마시며 말문을 열었다. "아주머니, 호이트리 만에 다녀오고 싶어요, 오늘 당장." 폴리는 깜짝 놀라 그 말을 되물었다. "호이트리 만에? 오늘 당장이라고?" 그리고 당황하여 덧붙였다. "그럼 나도 함께 갈까?" "나 혼자 가고 싶어요" 하고 말을 끊었으나 조용히 홍차를 저으면서 "그렇지만 아주머니가 꼭 같이 가고 싶으시다면 좋아요." "물론, 나도 가보고 싶었거든." 노라의 그 명랑한 모습에 폴리는 안심하고 호이트리 만에 가는 것을 승낙해 주었다. 그녀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노라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생각하고 기뻐했다. 차를 마시고 나자 노라는 어렸을 때 한 번 가본 적이 있는 아름다운 길라니 호수 이야기며, 그곳의 유람선 선장이 대단히 재미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등을 명랑하게 지껄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점심때가 지나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길모퉁이에 서서 노라는 프랜치스가 서 있는 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에 약간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그대로 모퉁이를 돌아 가 버렸다. 사고 소식이 전해진 것은 폴리 아주머니가 실신해 차로 실려 오기 직전이었다. 순식간에 온 거리가 술렁거리고 대단한 화젯거리가 되었다. 젊은 여자가 달리는 기차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이처럼 호기심과 동정을 모은 것은 결혼식을 앞둔 신부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파지장 근처의 여자들은 여기저기 모여서 어깨들을 맞댄 채 이 불행한 여자의 이야기를 침이 마르도록 했다. 결국 그런 비극을 초래한 것은 신부가 새 구두를 신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결론이 났다. 세상의 동정은 길포일을 비롯하여 바논 일가에게로 집중되었으나 동시에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혼례 전에 기차 여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젊은 여성은 크게 경계를 해야 하는 것으로 되기도 했다. 결국 노라의 장례식은 성당의 악대를 동원하여 읍장으로 성대히 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날 밤늦게 프랜치스는 자기도 모르게 성 도미니코 성당에 와 있었다. 성당 안은 텅 비어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그는 감실 앞 빨간 성체불이 흔들리는 것을 의식할 뿐이었다. 굳어져 버린 것처럼 창백해져서 무릎을 꿇고 있으나 마치 운명이 무자비한 그물을 쳐 놓고 그 속에 자신이 얽혀 있는 것 같았다. 이다지도 고독하고 버림받은 것 같은 외로움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었다. 울래야 울 수도 없는 기분이었다. 차갑게 다문 입술로는 어떤 기도도 드릴래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토록 괴로운 가운데에 문득 머리에 번득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 고뇌 그 자체인 이 몸과 마음을 희생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그의 곁을 떠났고, 삶의 유일한 즐거움이던 노라가 다시 떠나 버렸다. 이것은 이미 그에게 주어진 천상의 성약인 것이다. 그렇다, 가자......가지 않으면 안 된다......마그냅 신부에게로......산 모랄레스로. 그리고 자기를,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는 이때 비로소 자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심을 했다. 6 1892년의 부활절 기간동안에 일어난 사건은 산 모랄레스에 있는 영국계 신학교에 놀라운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신학과 학생 하나가 꼬박 4일간이나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물론 이 학교에서도 50년 전에 이 아라곤 고원에 학교를 설립한 이래 이것이 처음 있는 소동은 아니다. 학교 앞 주점에 숨어서 담배를 피우고, 화주를 마시고, 양심은 물론 위장까지도 망치면서 열두 시간이나 학교 당국과 맞섰던 학생도 있었고, 비아 아모로사('사랑의 거리'란 뜻)에 있는 지저분한 주점에 숨어 들어가 당국의 단속반에게 붙들려 오는 주정뱅이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과 같이 학생의 신분으로 대낮에 당당히 정문으로 나가 나흘이나 지난 후에 다시 그 정문으로 절름거리면서 먼지투성이에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르고 머리칼은 산발한 채, 누가 봐도 기가 찰 만큼 방탕한 모습으로 태연히 들어와, 더구나 '산책하러 갔다 왔다'고 하는 말 이외에는 확실한 변명을 하려고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눕자 하루 내내 잠만 잤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언어도단의 배교적인 행동인 것이다. 휴식 시간이 되자 학생들은 햇볕이 내리쬐는 언덕바지의 포도밭길과 그 아래의 황토땅에 하얗게 빛나고 있는 학교 앞을 거닐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이러쿵저러쿵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치셤은 틀림없이 퇴학 처분을 받을 것이다'-이것이 그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사문 위원회가 지체없이 설치되었고, 지금까지의 교칙 위반 문제의 예에 따라서 위원회는 학장, 부학장, 사감 신부, 그리고 신학부 학생 대표 한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사문 위원회는 신학부 강당에서 프랜치스가 귀교한 이튿날 예비 토의를 거쳐 개최되었다. 그날밖에는 동풍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으로 다 익은 까만 올리브 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지며 껍질이 터져 벌어졌다. 오렌지꽃 향기가 부속병원 위의 숲에서 풍겨 왔다. 불타는 것 같은 대지가 태양의 열로 소리를 내며 갈라진다 프랜치스는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의자가 줄지어 있는 서늘하고 어두컴컴한 강당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검은 알파카 제복이 야윈 몸뚱이를 한층 야위어 보이게 한다. 머리를 짧게 깎아 인상이 더욱 뚜렷했다. 까만 눈동자와 자기를 억제하고 있는 태도는 한결 더 음산하게 보였다. 특히 두 손이 어쩐지 이상하게 생기가 없는 느낌이다. 그의 앞 단상에는 오늘의 사문회 위원인 마그냅 신부, 타란트 신부, 고메즈 신부, 그리고 밀리가 각각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프랜치스는 자기에게 집중되는 불쾌함과 우려가 뒤섞인 시선을 의식하면서 머리를 떨구고 있었다. 사감인 고메즈 신부가 빠르게 죄상을 낭독했다.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으나 이윽고 타란트 신부가 말문을 열었다. "뭐라고 변명할 말이 있는가?" 주위에 아무도 없었으나 프랜치스는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머리를 들고 대답을 했다. "저는 산책을 나간 것입니다." 답변이 좀 애매한 것 같았다. "그것은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그 의도의 선악을 불구하고 걷는 데에는 다리를 사용한다. 허가 없이 교문을 나갔다고 하는 명백한 죄상은 차치하고라도 네가 어떤 악의로 그런 짓을 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밖에서 술을 마셨는가?" "아닙니다." "투우라든가, 축제 또는 도박장에 갔었는가?" "아닙니다." "윤락가의 여자와 접촉했는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바로 대답은 못했지만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이해하실 수 없습니까? 저는, 저는 산책을 하러 나갔던 것입니다." 타란트 신부는 엷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너는 우리에게 오로지 4일간이나 쉬지 않고 시골길을 걸어다니고 있었다고 이해시킬 작정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럼 마지막에는 어디를 갔었는가?" "코사에 갔었습니다." "코사라면! 여기에서 5마일이나 되는 곳이 아닌가?"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코사에 갈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타란트 신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더 이상 이런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간 생각은 손발을 뒤틀어 조이고 혹은 형틀에 매달거나 하는 옛날 식의 고문이었다. 중세기의 사람들이 그런 기구를 사용한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치셤!" "거짓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억누르는 듯한 부르짖음이 밀리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그야말로 형식적인 것이고, 반장으로서 학생을 대표하고 있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밀리는 프랜치스에게 소리를 치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탁이야, 프랜치스! 우리 학생 전체를 위해서......자네를 사랑하고 있는 우리들 모두를 위해서......솔직히 고백해, 부탁해." 그래도 프랜치스는 잠자코 있었으므로 사감인 고메즈 신부가 타란트 신부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시내에서 증거가 될 만한 정보는 아직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만......그러나 코사의 사제에게 편지로 문의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타란트는 이 스페인 신부의 얼굴에 날카롭게 시선을 던졌다. "과연 좋은 생각입니다." 두 신부가 대화를 하는 기회를 틈타 학장이 말을 걸었다. 호리웰 시절보다 나이가 들어 더욱 대범해진 그는 약간 몸을 앞으로 내밀고 천천히 동정심이 어린 어조로 말했다. "생각해 볼 문제야, 프랜치스. 이러한 경우에 그런 막연한 설명은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아라. 무단 결석이란 중대한 사건이니까. 단순히 교칙을 위반한 것만이 아니야. 오히려 너에게 그렇게 행동하게 한 동기가 무엇인지 나에게 말해라. 여기에 있는 것이 행복하지는 않는가?" "아닙니다, 행복합니다." "좋아. 그럼 너는 천직을 의심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 것이 아닌가?" "네, 요즘은 전보다도 훨씬 세상에 뭔가 선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좋은 생각이야. 그럼 퇴학이라고 하는 것을 바라고 있지 않은 게로군."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말이야, 왜 그렇게 되었는가 너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보란 말야. 너의 그 이상야릇한 모험을 말야." 부드러운 학장의 말에 프랜치스는 겨우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은 눈을 하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저는 그때 성당에 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뭔가 뒤숭숭하여 침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동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그 뜨거운 바람 때문에 더욱 침착성을 잃은 것 같습니다. 학교 생활이 갑자기 하찮게 생각되고 귀찮아졌습니다. 문득 교문 밖을 바라보니 길바닥이 하얗고 무척 상쾌해 보였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이미 자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순간 저는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한 밤을 내내 걷기만 했습니다. 몇 마일이고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 이튿날도 계속 걸었다는 말인가" 하고 타란트 신부가 신랄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은 내 평생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이다! 위원회를 모욕하는 것도 분수가 있지." 학장은 얼굴을 찌푸리며 뭔가 결심을 뜻을 보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잠시 휴회를 제안합니다." 다른 두 사람이 놀라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학장은 프랜치스를 향하여 확실하게 말했다.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도 좋다. 필요하면 다시 부를 테니까." 프랜치스는 죽은 것처럼 적막한 강당을 물러나왔다. 프랜치스가 나가자 학장은 모두를 향해서 냉정한 목소리로 확실하게 말했다. "여기는 학생을 학대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신중히 처리해야 해요. 아무래도 알 수 없는 문제가 그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니까." 학장의 일방적인 처리에 분개한 타란트 신부는 안달을 하면서 강당을 왔다갔다했다. "멋대로 하는 것도 분수가 있어야지요." "아니오 그렇지 않아요" 하고 학장은 말했다. "그는 여기에 온 이래 모든 일에 열심이고, 대단한 인내를 하고 있어요. 품행표에도 나쁜 점은 아무것도 기재되어 있지 않지요, 고메즈 신부?" 고메즈는 자기 앞의 책상 위에 있는 품행표를 뒤적여 보았다. "없습니다" 하고 그는 천천히 눈으로 읽으며 대답했다. "장난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작년 겨울에 데스퍼드 신부가 담화실에서 읽고 있던 영자 신문에 느닷없이 불을 지른 일이 있습니다. 왜 그런 짓을 했는가 하고 질문한 데 대하여 그는 웃으면서 '악마가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손에 일을 주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는 괜찮지?" 학장은 빠른 어조로 말했다. "데스퍼드 신부가 학교에 배달되는 신문을 모조리 혼자서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일이오." "그리고" 하고 고메즈 신부는 계속했다. "식당에서 독서 낭독의 대리에 명해 졌을 때 말입니다.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 전>대신 은밀히 가제고 온 <이브가 사탕을 훔쳤을 때>라고 하는 소설을 읽었답니다. 그래서 중지 명령을 받을 때까지 폭소를 터뜨리게 했습니다. "죄가 없는 장난이오." "그 외에......" 고메즈는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학생들이 일곱 가지 성사(카톨릭에서 세례, 견진, 성체, 고백, 혼인, 신품등 7성사를 말함)를 나타내는 가장 행렬 때-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세례라고 해서 한 사람이 갓난아이의 옷을 입거나, 결혼이라고 해서 한 사람이 신부로 가장하거나 한 때의 일 말입니다-물론 모두 허가가 있어서 한 것입니다만, 그러나......" 고메즈는 수상쩍은 눈으로 타란트를 힐끗 쳐다보았다. "병자 성사라고 해서 치셤은 시체를 들쳐 메고 왔었는데, 그 시체의 등에 카드를 붙여 '여기에 타란트 신부 잠들다, 사망 증명은 내가 기꺼이 쓴 것. 만일......" "이제 그만" 하고 타란트는 재빨리 고메즈 신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 바보 같은 장난보다 더욱 중대한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학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엉터리야, 그러나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오. 나는 때에 따라서 장난을 치는 젊은이가 좋아요. 더구나 치셤은 유별난 성격이라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전적으로 괴짜야. 그에게는 큰 심연의 불이 있소. 감수성이 강하고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성격이지만, 그것을 그 익살스러운 장난으로 감추고 있는 거요. 아무튼 녀석은 대단한 고집이 있으니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거요. 어린애 같은 단순성이 있으면서도 정직한 고집은 매우 이론적인, 또 거기에다 철저한 개인 주의자거든." "개인주의라고 하는 것은 신학자에겐 오히려 위험한 성격입니다." 타란트가 신랄하게 말했다. "종교개혁도 개인주의에서 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종교개혁이 카톨릭 교회의 법규를 개선해 주기도 했지." 학장은 천장으로 눈을 돌리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데 그거 약간 포인트를 벗어난 것 같군. 하여간 이번 일이 교칙에 크게 위반되는 것은 나도 부정하지는 않아요. 징벌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징벌도 서둘러서는 안 되오. 치셤과 같은 성격의 학생을 타당한 이유도 규명하지 않고 퇴학 처분을 하는 것은 나는 불가하다고 생각하오. 그러니까 며칠 더 기다려 보도록 합시다. 그는 어린애 같은 동작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세 신부는 강당에서 나와 헤어졌다. 고메즈와 타란트는 함께 갔다. 프랜치스는 이틀 동안 엉거주춤하고 불안한 기분으로 지냈다. 금족령을 당하지도 않았고, 수업 참석도 금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를 가나-도서관에서도 식당에서도 또 휴게실에서도-그가 가면 모두 부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어 버리고 급히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를 취하지만, 그것은 누가 봐도 어색했다. 자기가 학교 안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하는 의식은 그를 불쾌하게 했다. 호리웰 시절부터 친구이며 똑같은 보좌 신부인 허드슨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언제나 다가와 애정이 담긴 눈으로 그를 위로해 주었다. 안셀모 밀리가 리더인 그룹은 또 달라서 모두 분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 밀리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절대로 궁지에 빠져 있는 너를 괴롭히려는 것은 아니야. 프랜치스. 그렇지만 이번 일은 우리들 전체의 문제이고 학생 전체의 명예에 관한 일이야. 그래서 우리들은 네가 흉금을 털어놓고 정직하게 말해 주면 네가 얼마나 훌륭한 사나인가 하고 생각할 걸세." "정직하게 말하라니, 무엇을 말하지?" 밀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있을까. 밀리는 일행과 함께 가려고 하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너를 위하여 노베나(9일 기도)를 드리기로 했네.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견딜 수 없는 심정이라네. 너는 나의 첫째가는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프랜치스는 그대로 평정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그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그는 교정을 거닐다가도 갑작스럽게 발길을 멈추고는 걷는 것 그 자체가 이번 사건의 원인이 된 것이다,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래도 그는 자기도 모르게 교정을 거닐고 있었다-타란트나 그 외의 교수들 모두 이미 자기의 존재를 생각지도 않는 것 같았다. 교실에서 번쩍 정신을 차려 보면 강의 같은 것은 듣지도 않고 있었다.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학장의 호출도 없었다. 긴장감은 점점 심해져 갔다. 이젠 자기 자신을 가늠할 수가 없게 되었다. 자기는 목적도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너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없다'고 예언처럼 말해 준 사람들이 결국 진실을 말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결국 프랜치스는 자기는 성직자로서가 아니라 한낱 수도사로서 어딘가 쫓겨 갈 것 같은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리하여 아무도 몰래 기도실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학우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더욱 조심했다. 고메즈 신부가 문의한 회답이 도착한 것은 그후 3일이 지난 수요일 아침이였다. 신부도 그 회답 내용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자기의 계략이 보기 좋게 주효한 것에 크게 만족하면서 당장에 그 편지를 가지고 부학장의 방으로 달려갔다. 타란트 신부가 편지를 읽고 있는 동안 그는 마치 영리한 개가 칭찬하는 부드러운 말을 듣거나 고기가 달라붙은 뼈다귀라도 물고 있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생략 성령 강림절에 문의하신 편지에 대하여 회답 드립니다. 유감천만이오나 문의하신 키가 크고 안색이 창백한 신학생 한 사람이 4월 14일 코사에 틀림없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늦게 그 학생이 로사 오얄사발이라는 여성의 집에 들어갔다가 다음날 아침 그 집에서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그 문제의 여성은 독신녀로서 7년 동안 성당을 한 번도 찾아온 일이 없는 인물입니다. 총총. 귀하의 형제인 코사 본당 주임 사제 살바돌 볼라스 고메즈가 실눈을 뜨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떻습니까, 좋은 전략이었지요?" "으응." 타란트는 험악한 얼굴이 되어 고메즈를 밀어젖혔다. 그리고 뭐 부정한 것이라도 된 듯이 그 편지를 가지고 복도 끝에 있는 학장실로 당당하게 들어갔다. 그러나 학장은 미사에 나가고 없었다. 삼십 분쯤 걸릴 것 같았다. 타란트 신부는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질풍처럼 교정을 가로질려 노크도 하지 않고 프랜치스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거기도 텅 비어 있었다. 프랜치스도 역시 미사에 참례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그는 놀란 말처럼 자기의 격분과 싸우고 있었으나, 그는 의자에 주저앉으며 하여간 기다리자 하고 무리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그러나 까무잡잡하고 야윈 몸뚱이는 전류라도 통하는 것처럼 경련이 일었다. 프랜치스의 방에는 침대와 옷장, 책상 그리고 지금 그가 앉아 있는 의자밖에 없고, 다른 학생의 방보다 몹시 초라했다. 옷장 위에는 괴상한 모자를 쓴 중년 여자가 하얀색 옷을 입은 작은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퇴색한 사진이 놓여 있었다. 사진에는 '폴리 아주머니와 노라로부터'라고 씌어 있었다. 타란트는 간신히 냉소를 참았다. 그러나 흰 벽에 딱 하나 걸려 있는 '시스틴 마돈나'의 작은 복사판 사진을 보고는 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때 문득 그의 눈길이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노트에 멈추었다. 프랜치스의 일기장이었다. 타란트는 다시 놀란 말 같은 발작을 일으키며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눈에는 어두운 불꽃이 타올랐다. 잠시 꼼짝 않고 망설이고 있다가 마침내 그 노트 쪽으로 다가갔다. 그도 신사였다. 야비하게 함부로 남의 비밀을 엿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그 일기 속에 또 어떤 죄악이 숨어 있는지 누가 알 것인가. 그는 냉혹하리만큼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일기장을 넘겼다. ......무분별하고 완고하며 비뚤어져 있다고 자기 자신을 말한 것은 성 안토니우스(3, 4세기경 이집트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수도원을 창설한 사람)였던가. 이 말만이 타락의 구렁텅이에 있는 나를 위로해 준다. 만일 여기에서 퇴학을 당하면 이미 그것으로 내 인생은 파멸되고 말 것이다. 나는 참으로 비참하리만큼 비뚤어졌고, 남들처럼 사물을 있는 그대로 생각할 수도 없고, 남들과 보조를 맞추지도 못한다. 그래서 나는 전령을 다하여 하느님께 마음으로부터 봉사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할 곳이 많다' 하였다! 쟌 다크와 같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그렇다, 온몸에 이가 득실거리는 성 베네딕트 라브레(5, 6세기경의 이탈리아의 수도사이며 베네딕트회의 창시자)와 같은 사람도 살 곳이 있었다. 나에게도 틀림없이 살 곳이 없을 것이다! 모두들 나에게 설명하라고들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아니 명백히 수치스러운 일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알의 프랜치스(1567--1622년, 스위스의 카톨릭 주교)는 '나도 하나의 규율을 파괴하기보다는 연자맷돌에 깔려 가루가 되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교문을 나갈 때 그런 규율을 생각지도 않았으며 규율을 어길 생각도 없었다. 사람의 의식 속에는 무의식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다. 이렇게 쓰고 있으면서도 나는 나의 죄에 대해 변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나는 가장 두려울 뿐이다. 나는 이미 몇 주일째나 잠을 자지 못하고 이 더운 여름밤을 내내 열에 들뜬 것처럼 전정 긍긍하고 있다. 어쩌면 다른 사람보다도 나는 이곳에 익숙하기 어려운 사람인지 모른다-여러 가지의 해박한 서적을 보면 성직자가 되는 길은 한 걸음 한 걸음 아무런 심로도 없이 매우 즐거운 것처럼 씌어 있다. 아아, 이 괴로움! 얼마나 자기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것을 최소한 친애하는 속인이 알아나 주었으면! 여기에서의 나의 최대의 고통은 폐쇄되어 있다는 느낌, 육체적 무위, 이것이다-그러니까 나 따위가 성직자가 된다면 최하등일 것이다-외부로부터 스며드는 반항과 잡음에 끊임없이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스물세 살이 된 주제에 아직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불안하여 온몸이 열에 들뜨지 않을 수 없다. 윌리 탈록의 편지는-고메즈 신부의 말을 빌린다면-가장 위험한 흥분제인 것 같다. 윌리도 지금은 훌륭한 의사가 되어 간호사 자격을 얻은 누이동생 진과 함께 타인카슬의 무료 진료소에 근무하고, 빈민가에서 여러 가지로 스릴 있는(필사적인 모험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나도 한가하게 있을 수 없고 세상에 나이가 크게 활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절실하게 생각한다. 물론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무슨 일이나 인내가 필요하다. 이상하게 침착할 수 없는 마음은 네드와 폴리의 편지로 한층 더 그렇다. 이제껏 살던 주점 이층집을 두고 교외의 크라몬트로 아사하여 노라의 딸인 쥬디와 살고 있다고 들었을 때는 참으로 기뻤었다. 그러나 네드가 병에 걸렸고 쥬디는 아주 말을 듣지 않으며, 주점은 길포일에게 맡겨 버린 것 같다. 그와 동업을 한다는 것은 무리다. 네드는 이미 자포자기가 되어 밖에 나가지도 않으며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한다. 그 상상할 수도 없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래 완전히 모든 것이 망가져 버린 것이다. 좀 불순한 사람이었다면 그런 쇼크 정도는 견뎌 낼 수 있었을 텐데. 매일같이 규칙적인 생활이 때로는 큰 신앙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그리운 노라! 그 가냘픈 평범한 인생은 얼마만큼의 생각과 감정을 지니고 있었던가. 타란트 신부는 '유혹에 대항해서'라는 강의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어떤 종류의 유혹과도 싸울 필요가 없다-그러한 것에는 눈을 돌려버리고 피하는 길밖에 없다"고. 내가 코사에 간 것도 그러한 도피였던 것이 틀림없다. 처음 교문을 나섰을 때는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머리까지 갈 작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끝없이 자신을 걷게 한 것은 그 격렬한 동작에 의하여 답답증나는 자기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고 욕구였다. 들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처럼 나는 엄청난 땀을 흘렸다-그 흐르는 것 같은 짭짤한 땀이 인간의 더러움을 씻어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머리는 가벼워지고 마음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쓰러질 때까지 어디까지나 걸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마시지도 먹지도 않고 걸었다. 차츰 저녁때가 되자 바다 내음이 풍겨 오는 것을 보니 아주 먼 곳까지 와 버린 것 같았다. 별이 검푸른 하늘에 반짝이기 시작할 무렵 나는 어느 산마루에 이르렀는데, 그 산밑이 바로 코사 마을이었다. 바닷물이 철썩거리는 깊숙한 후미진 마을, 그 마을을 지나고 있는 곧은 신작로 양옆에 핀 아카시아 가로수는 마치 천국의 아름다움이었다. 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발은 부르터서 커다란 물집이 생겼다. 그러나 마을로 내려가니 그 마을은 조용한 어둠에 싸여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작은 광장에는 마을 사람들이 아카시아꽃 향기가 충만한 시원한 바람을 쐬며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앞의 어두컴컴한 곳에서 노인 몇 사람이 공굴리기를 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물가에서는 개구리가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고, 아이들은 한데 뒤엉켜 뛰놀고 있었다.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는 주머니에 1페세타(스페인 화폐 단위)도 없는 것을 알았지만 여인숙 앞 벤치에 걸터앉았다. 휴식이란 얼마나 기분 좋은 것인가. 나는 지쳐 버린 머리가 멍해져 있었다. 그때 갑자기 가로수 밑 어둠 속에서 가타로니아풍의 피리 소리가 들려 왔다. 조용한 밤 분위기에 어울리는 소리였다. 참으로 격조가 높은 이 지방의 독특한 리듬을 들어본 사람이 아니면 그 순간의 기쁨을 도저히 알지 못하리라. 나는 정신없이 그 리듬에 귀를 기울였다. 스코틀랜드인인 나의 핏속에는 피리의 멜로디가 흐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피리 소리와 어둠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빠져 황홀하게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나는 물가 모래톱에서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벤치에서 일어서려는데, 바다에서 안개가 일기 시작했다. 그것이 마치 베일처럼 마을을 휩싸 버렸다. 오분쯤 지나자 광장은 수증기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가로수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하는 수가 없었다. 마을 신부에게 가서 사실대로 고백하고 하룻밤 잠자리를 애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저쪽 벤치에 앉아 있던 여자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아까부터 그 여자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으나 그 여자는 줄곧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국에서 신부에게 보내는 동정과 경멸이 뒤섞인 눈초리로. 그리고 내 기분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노랭이들뿐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정해도 잠자리를 주지 않을 거예요." 그 여자는 서른 살 정도의 수수한 검은 옷을 입고 창백한 얼굴에 눈이 새까만, 좀 뚱뚱해 보이는 여자였다. 그 여자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말을 계속했다. "당신만 좋다면 우리 집으로 오세요. 비어 있는 침대가 있으니까." "난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그녀는 안됐다는 듯이 웃었다. "기도를 해주시면 돼요." 어느 사이에 안개는 비로 변해 있었다. 여인숙은 문을 닫아 버렸다. 우리 두 사람은 이미 사람의 흔적이 없는 광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아카시아 나무 아래 젖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런 데에 있는 것이 볼썽사납다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일어섰다. "나는 가겠어요. 당신도 바보가 아니라면 모처럼의 친절을 베푸는 거니까 오세요." 나의 얇은 제복은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추위에 떨고 있었다. 학교에 돌아가서 돈을 좀 부쳐 주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으므로 나는 그녀를 따라 좁은 골목을 걸어갔다. 그녀의 집은 그다지 멀지는 않았다. 돌계단을 내려가니 부엌이었다. 그녀는 램프에 불을 켜고 나서 검은 숄을 벗어 던지고 코코아를 불에 올려놓고 화덕에서 빵을 꺼냈다. 그리고 빨간 격자무늬 식탁보 위에 코코아와 뜨거운 빵을 올려놓았다. 맛좋은 냄새가 작고 깔끔한 방안에 가득 찼다. 투박한 컵에 코코아를 따르면서 그녀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식전 기도를 하세요, 그래야 맛이 훨씬 좋아질 테니까." 그 말은 분명히 야유였으나 그래도 나는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먹고 마시고 했다. 기도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줄곧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옛날에는 대단한 미인이었겠다고 생각되었으나 아직도 남아 있는 아름다움이 까만 눈동자에 올리브색 얼굴을 한층 엄숙하게 해주었다. 작은 귀에는 묵직한 금귀고리를 달고 있었다. 두 손은 루벤스의 마돈나의 손처럼 보송보송했다. "애송이 신부님, 여기에 오기를 잘했어요. 나는 신부라면 딱 질색이에요. 바르셀로나에선 신부를 만나면 큰 소리로 비웃어 주거든요."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비웃음은 조금도 겁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런 것을 배웁니다. 남에게 비웃음을 사는 것을.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 중에는 언제나 노천에서 설교를 하시고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비웃었답니다. 그 사람을 바보 취급하여 다니엘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요즘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 위선자거나 아니면 바보예요." 그녀는 코코아를 천천히 마시면서 나를 의미 있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당신은 바보가 아니에요. 네, 말해 봐요. 내가 당신의 마음에 드나요?" "당신은 매우 아름답고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에게 친절한 것은 내 천성이에요. 나는 무척이나 슬프게 살아왔어요. 아버지는 카스티리아의 귀족이었지만 마드리드 정부에게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되었어요. 남편은 해군 장교였고 큰 군함의 함장이었어요. 결국 바다에서 죽었지만요. 나는 여배우였지만-지금은 아버지의 재산이 반환되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여기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물론 당신은 이것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겠죠." "그야, 물론이지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녀는 이것을 농담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약간 얼굴을 붉혔다. "당신은 참 영리해요. 그렇지만 왜 여기까지 왔는지 나는 알고 있어요. 당신들은 모두 똑같으니까요." 그러면서 놀리기라도 하는 듯이 말했다. "어차피 이브 때문에 교회를 단념할 테니까 말이야." 나는 얼른 알아듣지 못했으나 겨우 그 의미를 깨달았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큰 소리로 웃어 주고 싶었지만 여기를 나가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빵과 코코아를 다 먹고 일어나 모자를 집어들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참으로 잘 먹었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 표정이 싹 달라졌다. 놀랐는지 심술궂은 표정이 씻은 듯이 가셔 버렸다. "역시 당신은 위선자군요."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내가 문 쪽으로 가려고 하자 그녀는 소리를 쳤다. "가지 말아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번에는 덤벼들 것같이 빠른 말로 지껄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무슨 짓을 하건 내 멋대로가 아닌가요. 이것으로 나는 즐거워요. 토요일 밤엔 언제든지 바르셀로나의 카바레에 있으니까 언제든지 오세요. 당신들의 비참한 생활이 참으로 재미있다니까. 자아, 이층에 가서 쉬세요."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녀도 이번에는 평상시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밖에서 비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망설였으나 그래도 좁은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발목이 시큰시큰 아파서 절뚝대자 그녀는 황급히 말했다. "발을 다쳤나요?" "괜찮습니다......약간 부르튼 겁니다." 그녀는 속셈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씻어 드릴게요, 내가." 한사코 사양했지만 결국 나는 의지에 앉혀졌다. 그녀는 세숫대야에 뜨거운 물을 가져 와서 무릎을 꿇고 나의 구두를 벗겼다. 부르터진 살갗에 양말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뜨거운 물에 적셔서 가만히 벗겨 냈다. 뜻하지 않은 그녀의 친절에 나는 어안이벙벙했다. 상처를 깨끗하게 닦고 약을 발라 준 다음 그녀는 일어났다. "이제 됐어요. 괜찮을 거예요. 양말은 내일 아침까지 말려 드릴 테니까 안심하세요."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이상하게 울적한 어조로 대꾸했다. "어쩔 수 없잖아요. 나 같은 여자는 고작 이럴 수밖에 없지요." 내가 뭐라고 하기 전에 그녀는 끓는 물주전자를 머리 위로 쳐들었다. "나에게 설교는 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 주전자를 머리에 엎어 씌워 줄 테니까. 침대는 이층에 있어요. 편히 쉬세요." 그녀는 등을 돌리고 화덕 쪽으로 가 버렸다. 이층에 올라가니 창 아래 작은 침대가 놓여 있었다. 나는 눕자마자 죽은 듯이 잠을 잤다. 이튿날 아침 아래로 내려가니 그녀는 부엌에서 커피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아침 식사를 내놓았다. 작별을 할 때 감사의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참으로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신부님이 되기엔 너무나 죄가 없어요. 틀림없이 대실패를 할 게예요." 나는 산 모랄레스의 길로 접어들었다. 발을 절룩거리는데다가 학교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그것이 두려워 시간을 허비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타란트 신부는 창가에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다가 살그머니 일기장을 제자리에 놓았다. 그때 이 일기를 쓰게 한 것이 자기인 것을 문득 생각해 냈다. 그는 들고 있던 편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의 얼굴은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험악한 얼굴 표정 대신 깊은 자책감에서 오는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 얼굴에서 관용과 사려 깊음이 넘치기 시작했다. 갈기갈기 찢은 편지를 손에 쥔 채 천천히 자기 가슴을 세 번 두들겼다. 그리고 발을 돌려 그 방을 나왔다. 그가 큰 계단을 내려가려고 할 때에 안셀모 밀리의 건장한 모습이 나선형의 난간 너머 저쪽에서 나타났다. 타란트 신부를 보자 그 모범생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는 부학장을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자기가 상대의 주의를 끄는 것은 더할나위없는 기쁨인 것이다. 밀리는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선생님, 실례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뭐 새로운 일이 있습니까......치셤의 일 말입니다." "무슨 말이지?" "저......퇴학이라든가......" 타란트는 불쾌한 얼굴로 안셀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치셤은 퇴학감이 아니야!" 그리고 격렬한 어조로 덧붙였다. "이 바보 자식아!" 그날 밤, 프랜치스는 자기가 용서를 받고 퇴학 처분을 면했다는 기적을 믿을 수가 없어서 정신없이 앉아 있었다. 그때 사환이 소포를 들고 와서 그에게 전했다. 소포에는 흑단에 새긴 훌륭한 몬트세라트(스페인 북동부 카타로니아 산악 지방의 순례지. '슬픔의 성모상'으로 유명함)의 성모상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15세기 스페인의 명장의 유명한 걸작품이었다. 정교한 그 조각에는 아무 편지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때 문득 프랜치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타란트 신부의 방에 기도대 위에 있던 성모상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일주일 후 학장과 마주쳤을 때 비로소 사건의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대단히 모순된 논리였던 것이다. "이봐, 프랜치스. 무슨 수로 그렇게 쉽게 해결되었지? 그 무시무시한 종교재판이 말이야. 내 학창 시절에 무단 결석은 무조건 퇴학이었지. 별 도리가 없었거든......" 그는 날카로운 눈을 반짝거리면서 프랜치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벌로 논문을 써서 나한테 가져오게. 단 길이는 2천 자 내외로 제목은 '산책의 효능'이야." 신학교라고 하는 작은 세계에서는 언제나 벽에 귀가 있고 항상 열쇠 구멍은 악마가 엿보고 있었다. 프랜치스의 무단 이탈 이야기도 점점 널리 퍼져서 어느 사이 조금씩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달될 때마다 꼬리를 하나씩 달기 마련이다. 훌륭한 다면체의 보석 마냥 그것은 하나의 고전으로서 이 신학교의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고메즈 신부는 상세한 점까지 조사하여 친구인 코사의 사제에게 사건 경위를 적어 보냈다. 볼라스 신부는 매우 감격하여 곧바로 다섯 페이지나 되는 답장을 보내 왔다. 그 편지의 마지막 부분은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의 최대의 귀결은 마땅히 로사 오얄사발이란 여성의 귀의에 있다고 봅니다. 그 여성이 청년 사도의 방문으로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했다면 얼마나 근사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다른 여자 친구와 바로셀로나에서 술집을 시작했으며, 더구나 그 술집이 대단히 번창하고 있는 것을 보고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3부 성공하지 못한 보좌 신부 1 1월 어느 토요일 저녁때 프랜치스가 타인카슬에서 40마일이나 되는 셀즈리 역에 닿았을 때는 운 나쁘게도 비가 세차게 내렸다. 그러나 그 비마저도 그의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정열을 식히지는 못하였다. 타고 온 기차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 후에도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지붕도 없는 플랫폼에 서서 황량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마중 나온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프랜치스는 낙담한 빛도 없이 가방을 들고 탄광촌의 한길로 나아갔다. 구세주 성당을 못 찾을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보좌 신부가 된 후 여기가 첫 임지인 것이다. 프랜치스는 아직도 뭐가 뭔지 실감할 수 없었다. 그래도 드디어 임명되어 인간의 영혼을 구제하는 싸움터에 나갈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곳의 이야기는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걸으면서 보는 현재 이 비참하고 지저분한 전경은 상상보다 훨씬 더 심했다. 셀즈리 거리는 음울한 회색 지붕과 허술한 점포들의 길다란 행렬이라 할 수 있었고, 그 사이 사이의 공터에서는 산더미 같은 석탄 찌꺼기가 빗속에서도 연기를 품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회색빛 지붕 위에 렌쇼 탄광의 새카만 굴뚝이 여러 개 솟아 있었다. 프랜치스는 자신의 흥미는 거리의 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 있다고 생각하며 밝은 기분으로 자기 자신에게 일러주었다. 카톨릭 교회는 마을 동쪽 끝에 있는 탄광 회사에 인접해 있어 주위의 풍물과 잘 조화되고 있었다. 빨간 벽돌로 된 커다란 건물이며 유리창에는 고딕풍의 파란 스테인드글라스가 끼워져 있고, 검붉은 양철 지붕엔 꼭대기를 잘라 버린 것 같은 녹슨 탑이 서 있었다. 학교처럼 보이는 건물 옆으로 사제관이 보였는데, 그 앞도 잡초가 우거진 뜰이고, 그 주위는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으나 이것도 이가 빠진 것처럼 군데군데 부서져 있었다. 태연하려 한 마음이 긴장감으로 위축되는 것을 애써 참으며 프랜치스는 그 쓰러질 것 같은 집으로 가까이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있다가 다시 누르려고 하자, 파란 줄무늬 앞치마를 두른 건장한 여자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그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당신이셨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신부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입니다." 그녀는 순직하고 말수가 적고 호인과 같은 얼굴로 응접실 문을 가리켰다. "정말 무슨 날씨가 이런지 모르겠어요. 나는 가서 연어 구이를 준비해야지." 프랜치스는 그녀가 가리킨 방문을 조용히 열었다. 하얀 식탁보가 덮인 식탁 위에 벌써 저녁 식사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먼저 눈에 띄었다. 식탁 앞에 오십 살쯤 돼 보이는 땅딸막한 신부가 앉아 있었다. 식사를 기다리기에 지쳤다는 듯이 나이프로 식탁을 두드리고 있던 손을 멈추고 새 보좌 신부에게 말을 걸었다. "드디어 오셨군. 자, 어서 와요." 프랜치스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키저 신부님이시죠?" "그래요. 나를 윌리엄 3세인 줄 알았나. 자, 마침 저녁 식사에 맞춰 왔군. 맛있을 거야." 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옆방에다 대고 소리쳤다. "캬퍄티, 어찌된 거요. 밤새워야 하는 건가?" 그리고 프랜치스를 향하여, "앉으라고. 그렇게 미아 같은 얼굴을 하고 서 있지만 말고. 트럼프는 할 줄 알겠지. 나는 밤이 되면 그것을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지." 프랜치스가 식탁에 앉자 이윽고 미스 캬파티가 훈제 연어와 달걀 구이 접시를 가지고 황급히 들어왔다. 키저 신부가 달걀 두 개에 연어 두 토막을 자기 접시에 놓자, 그녀는 프랜치스 앞으로 접시를 옮겨 주었다. 키저 신부는 입안에 가득히 넣고 먹으면서 큰 접시를 프랜치스 쪽으로 돌려주었다. "자, 많이 들게. 사양할 것 없어요. 여기선 힘껏 일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많이 먹어야 한다고." 그는 까만 털투성이 손과 턱을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조금도 쉬지 않고 허둥지둥 먹고 있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 야무진 입매, 코는 넓적하고 큰 콧구멍에는 코담배로 물들은 진한 털이 들여다보였다. 전체적으로 정력적이고 위신 있게 보이며 자신이 넘쳐 보였다. 달걀을 반으로 나누어 하나를 입에 넣고, 그는 백정이 소 흥정을 하는 것처럼 작은 눈으로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프랜치스를 살폈다. "자넨 그다지 건강한 것 같지 않군. 70킬로도 되지 않지? 요즘은 보좌 신부도 많이 달라졌어. 자네 전임자도 말라깽이였고 전혀 패기가 없었어. 대륙적인 체하고 놈이 다 망쳐 놓았지. 우리 시절에는 말이야-그래 메이노스(성 페트릭 신학교의 소재지) 출신들은 모두 사나이다웠는데......" "곧 알게 되실 겁니다. 몸은 건강하니까요" 하고 프랜치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야 곧 알게 되겠지" 하고 키저 신부는 중얼거렸다. "식사가 끝나면 가서 신자들의 고해를 받아 주지 않겠나? 나는 나중에 가겠네. 이렇게 비가 오면......오늘밤에는 많이 오지는 않을 거야. 그들에겐 좋은 구실이겠지. 모두 근본적으로 게으름뱅이들이니까......여기 놈들은." 프랜치스에게 주어진 이층의 방에는 튼튼한 침대와 커다란 옷장이 있었다. 그는 그 방의 더러운 세면대에서 손과 얼굴을 씻고 서둘러 교회로 내려갔다. 키저 신부의 인상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닌 것 같았다. 처음 본 인상은 흔히 잘못 보기 쉬운 것이라고 프랜치스는 자신을 타이르며 오랫동안 추운 고해실에서-아직도 전임자인 리 신부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런 후 거기를 나와 텅빈 교회 안을 돌아다녔다.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창고처럼 텅 비었고 더구나 청결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안쪽을 대리석으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진한 녹색 페인트를 칠했던 흔적이 너저분하게 남아 있었다. 한쪽 팔이 떨어진 성 요셉 상은 매우 서툴게 수선되어 있고, '십자가의 길'을 표시한 성화는 물감을 더덕더덕 칠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재단 위의 녹슨 놋쇠 꽃병에는 야한 조화가 꽂혀 있어 보기만 해도 모욕을 당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잘한 결점들은 그만큼 그에게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는 셈이 된다. 프랜치스는 감실(성체를 안치해 놓은 곳) 앞에 꿇어앉아 진심으로 자기의 생애를 하느님에게 바칠 것을 기도 드렸다. 그러나 런던, 마드리드, 로마간을 왕복하는 고귀한 신분의 성직자라든가 학자나 선교사 등의 숙사로 되어 있는 산 모랄레스의 문화적인 분위기에 익숙한 프랜치스에게는 처음 4, 5일 동안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더해 갈 뿐이었다. 키저 신부는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원래가 신경질적이고 까다로운 성격인데다가 나이를 먹어 갈수록 신자들의 경애를 얻지 못한 원한에서 마치 철못을 박아 놓은 것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도 한때는 이스트크리프 해변 피서지에서 훌륭한 본당을 담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를 좋게 안 본 유지들에 주교에게 탄원하여 전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당시는 몹시 분개했으나 그것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희생적 행위였다고 생각하게 되어 체념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난 내 왕좌를 스스로 버리고 낮은 의자에 앉은 거야......그러나......어쨌든 그 무렵은 좋았어." 가정부인 미스 캬파티만이 그의 편이었다. 그녀는 벌써 여러 해 그의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성격이나 기질이 비슷해서 그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큰 소리로 꾸지람을 듣고 무표정으로 응수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는 없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서로 상대를 소중히 하고 있었다. 신부가 매년 6주간의 휴가로 하로 게이트에 여행할 때는 그녀도 휴가를 얻어 자기의 집에 돌아가는 혜택을 받고 있었다. 키저 신부의 태도나 동작에는 조금도 세련된 데가 없었다. 침실 바닥을 요란하게 탕탕 구르기도 하고 목욕탕 문을 열어 놓은 채 물소리를 심하게 냈기 때문에 성냥통 같은 집은 그럴 때마다 메아리치듯이 울렸다. 키저는 무의식중에 자기의 종교를 하나의 공식으로 환원시켜 버리고 있었다. 그것은 내적인 의미라든가 정신적인 의미가 전혀 없는 완고한 자기 고집이었다. '이것을 행하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이것이 그의 마음에 새겨진 말이었다. 성당에는 말과 물, 혹은 기름과 소금을 사용해서 행하는 의식이 있는데, 그것을 게을리 하면 지옥이 타오르는 불꽃의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그는 편견이 심해서 다른 교회는 무조건 매도하는 바람에 그는 친구가 없었고 언제나 외로웠다. 자기 교회에 오는 신자들까지도 그를 바로 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교구가 가난한데다가 교회에는 적지 않은 빚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절약을 해도 수지 균형을 잘 맞출 수가 없는 때가 있었다. 이것은 마땅히 신자들이 협력해야 할 것이지만 그는 붙임성 없이 행동하는 것만이 아니라 타고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나 화를 버럭버럭 낼뿐이고, 설교를 할 때에도 거만하게 버티고 서서 도전적으로 신자들에게 성의가 부족하다고 책망하는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집세와 세금과 보험료를 지불하는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지금 당신들은 이 교회를 어떻게 해서 존속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말이다. 전능하신 하느님께 바치라 이겁니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잘 들어주기 바라오. 나는 헌금 상자에 은화가 넣어지는 것을 보고 싶은 거지 너절한 동전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오. 당신들 남자는 거의 조지 렌쇼 경의 덕택으로 일하고 있소. 그러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겁니다. 여자는 여자대로 입는 것에 돈을 적게 들이고 헌금을 하라고 하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소." 그는 이런 식으로 부르짖고선 직접 헌금 상자를 들고 책망하는 눈으로 노려보면서 그것을 신자들 코앞에다 들이대는 것이었다. 그러한 강압적인 요구가 그와 신자들과의 사이에 반목을 불러일으켜 헌금의 액수는 점점 줄어들 뿐이었다. 그러자 화가 치민 그는 꾀를 내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갈색 봉투를 배부하기로 했다. 그리고 신자들이 돌아가고 나면 봉투를 거둬들였다. 혹시 봉투에 돈이 들어 있지 않으면 몹시 화를 내면서 중얼거렸다. "이것이 전능하신 하느님을 대하는 놈들의 태도란 말인가." 이러한 재정상의 음산한 구름이 뒤덮여 있었지만 하나의 빛나는 태양은 있었다. 셀즈리 탄광만이 아니라 주 내에 열 다섯 개나 되는 탄광을 가지고 있는 조지 렌쇼 경은 큰 부자이고 카톨릭 신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름난 자선가이기도 했다. 그의 저택은 70마일이나 떨어진, 셀즈리와는 반대쪽에 있었으나 어찌된 까닭인지 구세주 교회는 그 기부 명부에 실려 있었으므로 크리스마스에는 빼놓지 않고 1백 기니의 수표가 교회에 전달되는 것이었다. "1백 기니다! 이봐." 키저 신부는 기니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쩨쩨한 파운드 따위가 아닐세. 이게 진짜 신자라고 하는 거야." 그는 조지 경을 수년 전 타인카슬의 신도 대회 때에 두 번 만났을 뿐인데, 이야기할 때에도 존경과 외경을 잊지 않았었다. 더구나 이유도 없는데도 기부가 끊기지나 않을까 하여 늘 걱정하고 있었다. 셀즈리에서 한 달이 지날 무렵 프랜치스는 키저 신부와 얼굴을 맞대는 것부터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는 매사에 안달복달하며 짜증만 부리고 있었다. 전임자인 젊은 리 신부가 심한 신경쇠약에 걸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정신생활이 둔화될 뿐이었고, 사물의 가치판단을 확실하게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때때로 키저 신부에 대한 불같은 적대감이 끓어올랐다. 그럴 때면 그는 정신을 번쩍 차려 남모르게 신음하면서 순종과 겸손을 생각하곤 했다. 성당의 일은 특히 겨울철에는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미사를 올리거나 고해를 듣거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일주일에 세 번이나 먼 브라우톤과 그렌반의 빈한한 두 한촌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슨 말을 지껄여도 도저히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고, 그만큼 일하기가 까다롭고 곤란함만 더할 뿐이었다. 어린애들까지도 무기력하고 게을렀다. 가난뱅이가 대부분이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교구 전체가 무신경하고 열의도 신앙도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프랜치스는 절대로 이 상태로 내버려두지는 않겠다고 마음에 맹세를 했다. 여기서 포기한다면 자기는 결국 패배자인 것이다. 자기의 능력이 부족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이 가난한 마음에 구원의 손을 뻗쳐 어떻게 해서든지 갱생을 도모하고 싶다는 불타는 욕망이 타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의 마음에 불꽃은 점화하여 죽은 재가 타오르게 하고 생명을 불어넣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교활하고 조심성 많은 키저 신부가 프랜치스가 맞닥뜨린 곤경을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그는 프랜치스의 이상주의가 자기의 실제적인 상식에 항복하는 것을 은밀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날 프랜치스가 심한 눈보라 속을 10마일이나 자전거를 타고 브라우톤까지 병자의 위문을 갔다가 흠뻑 젖어 돌아오니 키저 신부는 모멸에 찬 시선에 웃음을 띄우면서 그를 조롱했다. "어떤가, 공덕을 베푼다는 것이 생각한 대로는 되지 않지, 안 그래?" 그리고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모두 변변치 못한 것들 뿐이야." 프랜치스는 순간 발끈하여 얼굴을 붉혔다. "그리스도는 그 변변치 못한 것들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프랜치스는 완전히 의기소침해 버려 그 이후로 고행을 스스로 단행했다. 식사량을 줄이고 홍차 한 잔에 토스트를 먹는 것으로 자신을 단련시켰다. 한밤중에 눈이 더질 때에는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발소리를 죽여 가면서 성당으로 향할 때가 많았다. 어두컴컴하고 쥐죽은듯이 조용한 성당 안은 파란 달빛에 씻기어 아름답게 보였다. 그는 몸을 내던지듯이 무릎을 꿇고 이 최초의 시련을 이겨낼 용기를 주십사 하고 간곡히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면 온화하고 괴로움을 참고 있는 그리스도의 상처 입은 십자가상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에 평화가 자기의 몸에 충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그날도 잠을 이룰 수 없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성당에 갔다가 조심스레 계단을 올라가든 중 멈칫 놀라고 말았다. 계단 위에서 키저 신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옷 위에 외투를 걸친 그는 괴상한 모습으로 손에 촛불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털이 덥수룩한 맨발로 버티고 서서 노한 얼굴로 프랜치스를 흘겨보았다.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건가?" "제 방으로 돌아가는 참입니다." "어디를 갔다 오는데?" "기도실에요." "뭐라고! 이 한밤중에......" "왜 잘못입니까?" 프랜치스는 억지로 웃으려고 했다. "하느님을 깨울 작정이라도 한 건가?" "아닙니다, 잠을 깬 것은 저입니다." 키저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내일부터 당장 그만두게. 이렇게 어리석긴. 이곳을 수도원으로 착각해서는 곤란해. 기도하고 싶으면 낮에 하면 될 것 아닌가? 자네가 나와 함께 있는 한밤엔 잠을 자란 말일세." 프랜치스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반발심을 꾹 참았다. 그리고 잠자코 침실로 돌아갔다. 이 교구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하려고 하면 자신을 억제하고 윗사람과 타협을 잘 하기 위하여 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키저 신부의 정직하고 배짱이 있는 것, 엉뚱하고, 소탈하고, 정직한 것 등 그의 장점에만 주의를 집중하려고 했다. 그러던 며칠 후, 적당한 시기를 잡아 프랜치스는 사교적 수완을 발휘할 양으로 신부에게 접근했다. "신부님, 벌써 생각한 것입니다만......여기는 벽촌이고 어디를 가나 보잘것없고, 그렇다고 적당한 오락장도 없으니까......한번 교구의 젊은이들을 위하여 클럽을 만들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 하하" 하고 키저 신부는 매우 만족한 듯이 웃어댔다. "과연 그렇군. 대중의 인기를 얻자는 거로군." "아니, 천만 에요." 어떻게 해서든지 승낙을 받으려고 프랜치스는 진지한 마음으로 열심히 설명했다. "그럴 생각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클럽이 있으면 젊은이들은 거리를 방황하지 않을 것이고 나이든 사람도 술집 같은 데에 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도 계몽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성당에도 나올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호오-"키저 신부는 비웃음 섞인 웃음소리를 냈다. "자넨 아직 멀었어. 리 군보다 더 심한 것 같군. 하고 싶은 것은 해도 좋지만 말이야......여기 변변치 못한 것들로부터 감사의 말을 들으려고 하다간 계산 착오야." "감사합니다. 저는 다만 허가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프랜치스는 설레이는 가슴으로 계획을 당장에 실행했다. 스코틀랜드인이며 확고한 카톨릭 신자인 렌쇼 탄광 감독인 도날드 카일이 당장에 찬성하고 호의를 나타내 주었다. 그 외에도 현장 직원이며 아내가 가금 사제관의 일을 도와주는 검사계의 모리슨, 또 폭약계 주임인 크리덴의 구급실을 주 3회, 밤에만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얻었다. 그리고 현장의 두 사람의 도움으로 계획 중인 클럽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로 했다. 교구 사람들의 도움은 청하지 않았다. 자기 주머니를 몽땅 털었으나 2파운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윌리 탈록에게 편지를 띄워-윌리는 일 관계로 타인카슬의 시립 스포츠 센터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거기에서 필요 없는 헌 운동기구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첫 출발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하고 생각한 결과 젊은이들에게는 댄스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댄스 파티를 열기로 했다. 마침 탄광 구급실에는 피아노도 있었고 크리덴은 바이올리스트로서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클럽 문에 붉은 포스터를 붙여서 날짜와 시간을 알리고, 목요일이 되자 전 재산을 털어서 케이크와 과실, 레모네드 등으로 뷔페를 마련했다. 처음에는 약간 어색한 기분이었으나 그날 밤은 예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큰 성공을 거두었다. 카드릴(4인조의 춤)을 출 수 있는 팀이 여덟 팀이나 모인 것이다. 청년들은 모두 구두가 없어 갱내에서 일할 때 신던 장화를 신고 춤을 추었다. 댄스의 막간에는 기쁨에 들뜬 얼굴로 벤치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여자들은 파트너에게 케이크나 레모네드를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왈츠를 추면서 다같이 합창을 하기도 했다. 탄광에서 교대 시간이 되어 돌아온 광부들도 입구에 서서 가스등 불빛으로 숯검정투성이의 얼굴에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들여다보았다. 나중엔 그들도 함께 합창을 하는 등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참으로 즐거운 밤이었다. 기쁨에 넘치는 목소리고 "안녕!"하고 소리치며 헤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프랜치스는 충만한 만족감에 뛰는 가슴을 누르며 생각했다. '이제야 모두들 살아난 것 같다. 하느님, 하여간 출발은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튿날 아침, 키저 신부가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서 식당으로 들어왔다. "도대체 어찌된 건가. 대소동이 아닌가 말이야. 훌륭한 착상이군 그래. 자넨 그래도 부끄럽지 않은가?" 프랜치스는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듣지 않아도 알 게 아닌가. 엊저녁의 미치광이 놀음 말이야." "허락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일주일 전에 말입니다." 키저 신부는 느닷없이 큰 소리를 쳤다. "남자와 여자가 한 패가 되어 놀아난 소동을 성당 문 앞에서 하라고 허락한 기억은 없어. 문란하게 껴안고 히히덕거리는 짓은 자네가 거들지 않아도 돼. 난 젊은 여자의 순결을 지켜 주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단 말이야." "엊저녁의 모임은 의심할 여지없이 순수한 모임입니다." "순수하다고! 어안이벙벙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군." 키저 신부는 화가 난 나머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모르겠단 말인가. 자네는-그렇게 껴안거나 손을 잡거나 몸뚱이나 다리가 달라붙거나 하는 것이 결국에는 어떻게 된다는 것을. 바보 천치야. 젊은 놈들이 나쁜 생각을 갖게 하는 첫째 이유가 된단 말이야. 욕정으로 인도하는 도화선이라고." 프랜치스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의분으로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신부님은 욕정과 순수한 이성 교제를 혼동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요?" "뭐라고! 그게 그거지 뭐가 다르단 말인가." "마치 병과 건강만큼이나 다릅니다." 키저 신부의 두 손이 경련을 일으켰다. "도대체 자네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프랜치스도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이곳에 와서 두 달 동안 쌓이고 쌓인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 버린 것이다. "누구도 자연의 힘은 거역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간 오히려 역효과만 낼뿐이고 자신을 망치고 맙니다. 젊은 남자와 여자가 어울려 함께 댄스를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훌륭한 것입니다. 구애와 결혼의 자연스러운 서곡입니다. 성이라고 하는 것은 썩어 가는 시체처럼 더러운 시트 밑에 감추어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추어 두는 데서 괴이한 악과 문란한 행위가 비롯되는 것입니다. 잘 교육하여 성이라고 하는 것을 좀더 공명한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독사나 되는 것처럼 목을 졸라 질식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오직 실패할 뿐입니다. 순결하고 아름다운 것을 더욱 추하게 할뿐입니다. 무겁고 두려운 침묵이 계속 흘렀다. 키저 신부의 목에 있는 혈관이 파랗게 부풀어올랐다. "벌받을 말은 그만 지껄이게. 풋내기 주제에. 젊은 남녀를 한 조로 만들기만 하면 이젠 절대로 그 댄스홀에 출입시키지 않을 테니까." "그럼 젊은 남녀를 한 조씩-이건 신부님의 말씀입니다만-어두운 골목길이나 후미진 밭으로 내쫓겠다는 말씀이군요." "입 다물게. 나는 이 교구의 처녀들을 문란하게 놀아나게 하지는 않고 있어. 잔말 말게. 내 일은 내가 잘 알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프랜치스는 비꼬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면 어째서 통계에 나타난 셀즈리의 사생아 수가 이 관구에서 최고입니까? 오직 순결만을 가르친 신부님의 그 신조 덕분 인가요?" 잠시 동안 키저 신부는 발작이라도 일으킨 것 같았다. 손을 꼭 쥐거나 또 펴거나 하여 누군가의 목이라도 조르고 있는 것 같은 동작을 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주먹을 흔들어댔다. "통계라면 나도 할 말이 있네. 이곳에서 5마일 내에는 클럽따윈 한 군데도 없어. 자네의 대견스러운 계획은 오늘로써 끝장이야. 절대로 안 돼. 알았어? 이것이 나의 최후 명령이야." 그는 말을 끝내고 식탁 앞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화를 참으면서 식사를 시작했다. 새파랗게 질린 프랜치스는 황급히 식사를 마치고 이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더러운 유리창 너머로 구급실이 있는 건물이 보였다. 어제 탈록이 보내 준 복싱 글러브와 체조용 곤봉이 들어 있는 상자가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서글픔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리고 불굴의 기분으로 생각했다-이대로 복종만 하고 있어선 안 된다. 하느님도 이런 굴종은 강요하시지 않는다. 어떻게든지 싸우는 것이다. 키저 신부가 끝까지 고집을 버리지 않는다면 나는 더욱 완강히 대처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미 성당을 떠나 버린 신자들과의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다고까지 생각한 프랜치스는 별의별 생각을 다해 봤지만 신통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은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셀즈리의 반이나 줄어 버린 교구민을 위해서다. 그는 넘칠 것 같은 사랑과 여기의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해야겠다고 하는, 지금까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첫 사업이란 생각이 들자 가슴 뿌듯한 사명감이 솟구쳤다. 그 후 며칠 동안 여느 때와 같이 성당 일에 쫓기면서 어떻게든 클럽을 다시 열 길은 없을까 하고 궁리를 했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다시 키저심부를 움직이는 것은 도저히 곤란하다는 생각이 되었다. 프랜치스가 온순해진 것을 자기 멋대로 패배한 것으로 생각한 키저 신부는 승리의 기쁨을 누를 길이 없었다. 저따위 풋내기를 굴복시켜서 순종케 하는 것은 문제없다. 이러한 인간들을 겸손하게 만들 수 있는 자기의 능력을 주교도 알아주었으면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의 비꼬는 미소는 더욱 짙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랜치스는 느닷없이 근사한 생각을 한 것이다. 성공의 가망은 적을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만의 하나 성공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쁨에 가슴이 떨렸다. 창백한 얼굴이 약간 불그레해지고 자칫하면 큰 소리를 칠 뻔했다. 그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그는 결심을 했다. 하여간 해보자. 어떻게 해서든지 하는 거다......폴리 아주머니가 온다고 하니 아주머니가 다녀가신 후에 바로 실행을 하자. 폴리 아주머니와 쥬디는 6월 말 일주일간의 휴가를 셀즈리에서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셀즈리는 휴양지는 아니었으나 지대가 높고 건조한 땅이어서 공기가 좋았다. 평상시는 살풍경한 이곳도 6월에는 신록으로 뒤덮여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었다. 더구나 프랜치스는 꼭 폴리 아주머니를 모시고 즐겁게 해 드리고 싶었다. 지난겨울 폴리 아주머니는 육체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난삽한 겨울이었다. 아주머니의 말을 빌리면 길포일은 주점을 망칠 작정인지 파는 것보다는 자신이 마시는 것이 더 많았고, 들어오는 돈은 보여 주지도 않고, 더군다나 뭐든지 자기가 독점해 버리려고 하는 것 같다고 했다. 네드의 병은 더욱 악화되어 두 다리마저도 쓸 수 없어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장사 같은 것은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게다가 정신마저 이상해져 꼭 미친 사람 마냥 히죽거리기까지 했다. 어떤 때는 아첨하는 길포일에게 자기는 중기 요트가 있다느니 더블린에 양조장을 가지고 있다느니 얼토당토않은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폴리 아주머니 몰래 스캔티의 부축을 받아 크라몬트까지 가서 모자를 두 타스나 주문한 일이 있었다. 프랜치스의 부탁을 받은 탈록 의사의 진단 결과 네드의 병은 중풍이 아니라 뇌종양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탈록의 권유에 따라 남자 간호사를 두게 되어 폴리 아주머니가 일주일간 휴가를 얻게 된 것이다. 프랜치스는 폴리 아주머니와 쥬디가 오면 어떻게 해서든지 사제관의 내빈실에서 지내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키저 신부의 요즘의 태도로 보아 그런 것을 부탁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프랜치스는 미세스 모리슨의 집에 적당한 방을 하나 얻어 놓았다. 6월 22일이 되자 폴리 아주머니와 쥬디가 왔다. 두 사람을 역으로 마중 나간 그는 가슴이 몹시 아팠다. 아직 건강하고 활기를 잃지 않은 폴리 아주머니가 가무잡잡하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기차에서 내렸다. 그 모습이 옛날 노라의 손을 잡고 올 때와 흡사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 폴리 아주머니!" 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아주머니는 별로 변한 데는 없었으나 어쩐지 복장이 전보다는 조금 허술하고, 볼이 훨씬 야윈 것 같았다. 옛날에 입던 옷과 장갑, 그리고 똑같은 모자였다. 아주머니는 자기를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고 남을 위해서만 쓰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네드와 쥬디에게만 신경을 쏟는 것 같았다. 전혀 자기라고 하는 것을 돌아보지 않은 그 모습에 그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황급히 뛰어가서 폴리를 껴안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참 잘 오셨어요......아주머니......조금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오, 프랜치스!" 그녀는 가방 속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여기는 바람이 심하구나. 눈 속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 프랜치스는 아주머니와 쥬디의 손을 잡고는 미세스 모리슨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는 두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고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밤에도 늦게까지 폴리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프랜치스가 성직자가 된 것을 무척 자랑스럽고 기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려운 집안 이야기는 그다지 언급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걱정스럽게 꺼내 놓은 이야기는 쥬디에 관한 것이었다. 쥬디는 올해 열 살이 되며, 크라몬트의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복잡한 성격의 아이였다. 겉으로는 애교가 있고 정직했으나 매우 의심이 많은데다가 남의 것을 잘 감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쓸데없는 잡동사니를 자기 침실에 감추는 버릇이 있었고, 그것이 발견되면 어쩔 도리가 없을 만큼 화를 내는 것이다. 흥분을 잘하고 변덕이 심하며 자기의 잘못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그런 때에는 태연히 거짓말을 하고 어디까지나 시치미를 뗀다. 그리고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책망이라도 하게 되면 분해서 엉엉 울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프랜치스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 쥬디의 신뢰를 얻으려고 했다. 쥬디는 자주 사제관에 와서 키저 신부의 방에 들어가서 소파에 앉아 놀기도 하고 파이프나 문진 등을 만지거나 했다. 프랜치스는 그것이 몹시 걱정스러웠으나 키저 신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랜치스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휴가 마지막날이 되어 폴리 아주머니는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하며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쥬디는 프랜치스의 방에 차분히 앉아서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가정부 미스 캬파티였다. 그녀는 프랜치스를 향해서 말했다. "신부님이 지금 만나셨으면 합니다." 뜻하지 않는 말에 프랜치스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일어났다. 키저 신부는 방 한가운데 우뚝 선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몇 주간 동안 처음으로 프랜치스의 얼굴을 정면으로 대했다. "저 애는 도둑이야." 프랜치스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밸이 뒤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여기에서 제멋대로 놀게 한 거야. 귀여운 애라고 생각했는데." 키저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무엇을 가지고 갔습니까?" 프랜치스가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보통 도둑은 뭘 훔치지?" 키저 시누는 벽난로 위쪽을 향했다. 그 위에는 그가 언제나 정중하게 하얀 종이에 쌓아 두는 12페니씩의 동전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그는 그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 속에서 훔친 거야. 보통의 도둑보다 나쁘단 말이야. 성물 절도죄야. 이것을 보라고." 프랜치스는 꾸러미를 조사해 보았다. 봉함을 뜯고는 돈을 꺼내고 그 자리를 비틀어 놓았다. 3페니가 부족했다. "어떻게 쥬디가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난 바보가 아니야." 키저 신부는 물어뜯을 듯이 응수했다. "이 일주일 동안 동전이 없어진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보고만 있었지. 이 꾸러미 속의 돈에는 모두 표시를 해 놓았어." 프랜치스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키저 신부가 그 뒤를 따라 왔다. "쥬디, 네 지갑을 보여 다오." 쥬디는 깜짝 놀라는 것 같았으나 바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웃어 보였다. "모리슨 아주머니 방에 두고 왔어요." "아니, 여기 있잖아." 프랜치스는 몸을 구부리고 그녀의 포켓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것은 휴가가 되기 전에 폴리 아주머니가 사준 가죽으로 된 작은 지갑이었다. 프랜치스는 맥이 풀리는 기분으로 지갑을 열었다. 그 속에 3페니가 들어 있었다. 모두 동전 뒤쪽에 십자 표시가 되어 있었다. 키저 신부의 씁쓸한 표정에는 노기와 함께 승리를 기뻐하는 빛이 역력했다. "말하지 않을 수 없군. 이봐, 하느님의 것을 훔치다니, 나쁜 아이야." 그리고 그는 프랜치스를 노려보았다. "버릇을 고쳐 주어야 해. 내가 맡고 있는 애라면 당장 경찰에 넘겨 버리겠네." "싫어요, 싫어요." 쥬디는 갑자기 울어 버렸다. "돌려 드리려고 생각했어요. 정말이에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프랜치스는 새파랗게 질렸다. 매우 난처했다. 그렇지만 두 손에 힘을 주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럼"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이 애를 데라고 경찰서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이대로 하밀턴 경부에게 넘기겠습니다." 쥬디는 요란하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키저 신부는 깜짝 놀랐으나 조소하는 것 같은 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좋겠지." 프랜치스는 모자를 쓰고 쥬디의 손을 잡았다. "자, 쥬디,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경찰한테 가서 키저 신부님한테서 3페니를 훔쳤습니다, 하고 말하고 오자꾸나." 프랜치스가 어린애의 손을 끌고 나가려고 하자, 신부는 당황한 표정으로 얼굴 색이 변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좀 지나친 말을 해 버린 것이다. 신교도인 하밀턴 경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정치적으로도 의견을 달리해 심하게 말다툼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 하찮은 일로 경찰 신세를 지게 되면......또 마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황급히 중얼거렸다. "갈 필요 없네." 그러나 프랜치스는 못 들은 척 여전히 시뻘건 얼굴로 문을 열었다. "기다려!" 그는 자기가 자기의 노기를 진정이라도 시키는 것처럼 쥐어짜는 소리로 말했다. "가지 않아도 되겠네......아무 일도 없는 것으로 치자구. 자네가 잘 타일러 주게나." 그렇게 말하고서 신부는 무뚝뚝한 화난 얼굴을 하고 나가 버렸다. 폴리 아주머니와 쥬디가 타인카슬로 돌아가 버리자 프랜치스는 갑자기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쥬디의 도벽에 대하여 신부에게 진심으로 유감의 뜻을 표시하고 사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키저 신부의 얼굴을 대하고 나면 그런 기분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리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기분이 키저 신부를 한층 외고집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곧 휴가로 요양을 떠나게 되어 있었다. 그 전에 프랜치스를 절대로 버릇없이 굴지 않도록 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입을 다문 채 아예 프랜치스가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다. 미스 캬파티에게 일러 식사도 프랜치스보다 먼저 혼자서 했다. 휴가를 떠나기 바로 전 주일에는 제 7계명인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한 마디 한 마디 프랜치스에게 들어보라는 것 같이 격렬한 어조로 설교를 했다. 그 설교가 프랜치스의 결심을 굳히게 했다. 미사가 끝나자 프랜치스는 탄광 감독인 도날드 카일을 방문하여 그를 한쪽으로 불러내어 귓속말로 자기 계획을 털어놓았다. 카일은 처음엔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프랜치스의 적극적인 설득에 차츰 흥미를 보였다. "글쎄요, 과연 잘 될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어디까지나 힘이 되어 드리겠어요." 두 사람은 굳은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월요일 아침 키저 신부는 6주일간 예정으로 광천지인 하르게이트로 요양차 출발했다. 그날 저녁때는 미스 캬파티도 고향인 로스레아로 떠났다. 그 이튿날인 화요일에 프랜치스는 아침 일찍 약속대로 카일과 역에서 만났다. 카일은 묵직한 서류철과 경쟁 상대인 노팅검 탄광 회사의 팜플렛을 안고 있었다. 깨끗한 신사복으로 정장을 한 카일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들떠 있었다. 두 사람은 열한 시에 셀즈리발 기차에 올라탔다. 긴 하루가 좀처럼 저물지 않았으나 그래도 두 사람이 돌아온 것은 밤이 이슥해서였다. 두 사람은 앞만 향한 채로 나란히 말없이 걷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피로한 듯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자, 그럼 안녕히" 하고 헤어지는 인사를 했을 때 감독의 얼굴에 엄숙한 미소가 떠올랐는데, 그것만이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4일간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 다음날 갑자기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일이 탄광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탄광 바로 옆에 새 건물이 신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랜치스는 교회 일을 보면서 틈틈이 카일에게 달려가 의논을 하고 설계도를 검토하거나 일꾼들이 일하는 것을 바라보거나 했다. 건물은 빠르게 완성되어 갔다. 보름 후에는 위생실 옆에 골조가 세워지고 한 달이 지나자 대체로 건물이 완공되었다. 그리고 목수와 미장이가 일을 시작했다. 쇠망치 소리는 프랜치스의 귀에 기분 좋은 연주로 들렸다. 톱밥의 냄새는 코를 간지럽혔다. 프랜치스는 때로는 목수들의 일을 도와 주었다. 모두들 프랜치스에게 호의를 가졌다. 그는 아버지의 솜씨를 그대로 물려받았던 것이다. 시간제로 성당 일을 맡은 미세스 모리슨이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텅빈 성당에 혼자 있는 프랜치스는 키저 신부로부터 귀찮은 잔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더없이 유쾌해져 일에 대한 열의는 끝없이 불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과도 훨씬 친해진 느낌이었고, 교회에 대한 그들의 쓸데없는 억측도 풀리고 서서히 그들의 단조로운 생활에도 파고들어 잠자고 있는 그들의 영혼을 일깨워 하느님의 품안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주위를 에워싼 빈곤과 비참한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뻗쳐 사랑으로 감싸주어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해야 할 사명감에 또 다른 긍지와 자신을 느끼며 무한한 용기가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목적을 세워 사업을 완성하는 빛나는 감격 바로 그것이었다. 키저 신부가 성당에 돌아오기 5일 전 프랜치스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조지 경 귀하 귀하가 친절하게도 셀즈리에 기증해 주신 새로운 레크리에이션 센터는 이제 완성을 눈앞에 두었습니다. 이 건물은 탄광 종사자는 물론 그 가족, 널리 계급이나 신앙의 여하를 불문하고 이곳 공업 지대에 거주하는 모둔 주민들에게 커다란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운영 위원회도 결성되어 여러 차례 회의 결과 운영 강령도 결정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동봉하는 것은 동계 프로그램입니다. 이것에 의하여 회관 활동의 전모를 상상하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복싱, 검술, 체육, 그리고 응급처치법 훈련과 매주 1회 목요일에는 댄스 파티를 열도록 되어 있습니다. 카일 씨와 제가 돌연히 방문하여 외람된 청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쾌히 승낙을 해주신 것에 오직 감격할 따름입니다. 어떠한 감사의 말을 늘어놓아도 도저히 이 기분은 전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귀하에 대한 참다운 감사는 오직 셀즈리 주민에게 주신 행복과 이것에 의하여 촉진되는 그들의 사회적 결합에서 얻어지리라고 믿는 것만이 그것을 전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9월 21일에는 개관 축하의 밤을 개최하려고 합니다. 만사를 미루시고 참석해 주시면 더할나위없는 영광이겠습니다. 구세주 교회 보좌 신부 프랜치스 치셤 프랜치스는 흥분으로 긴자오딘 채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다. 편지의 내용은 감사의 뜻을 담았을 뿐이지만 프랜치스의 다리는 왠지 떨리고 있었다. 가정부 캬파티가 돌아온 이튿날 19일 점심 무렵에 키저 신부도 돌아왔다. 광천에서 원기를 회복하여 돌아온 그는 정력이 충만한 것 같았다. 그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시커먼 털투성이 몸으로 사제관이 좁다는 기세로 들어와선 큰 소리로 미스 캬파티에게 인사를 하고는 당장 먹을 것을 준비하라고 명하고 주재중에 온 편지를 모두 읽었다. 그것이 끝나자 두 손을 비벼대면서 식당으로 당당하게 들어왔다. 그리고 접시 위에 놓여 있는 봉투를 보고 봉함을 열더니 인쇄된 안내장을 꺼냈다. "이건 뭐야?" 프랜치스는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면서 용기를 내서 말했다. "아, 그것은 이번에 새로 생긴 셀즈리 레크리에이션 클럽 개관 축하의 밤 초대장이 아닌 가요. 저한테도 와 있습니다만......" "레크리에이션 클럽이라.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지?" 그는 팔을 쭉 뻗치고 얼굴이 빨개지며 초대장을 노려봤다. "뭐야, 이것은?" "대단히 근사한 클럽입니다. 저 창문에서도 보입니다." 프랜치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조지 렌쇼 경이 기증한 것입니다." "조지 경이......" 키저는 놀란 표정으로 말을 끊고 성큼성큼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당당한 새 건물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서 있다가 자리로 돌아와선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몹시 시장해 서두르던 아까와는 달리 식욕이 가신 듯 가끔가다 실눈으로 프랜치스 쪽을 힐끔거릴 뿐 식사가 끝나도록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프랜치스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태도는 몹시 온순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확실히 결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댄스 모임이나 남녀 공동의 레크리에이션을 신부님은 금지하셨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 교구 사람들이 모두 협동을 하지 않았다던가 클럽을 배척하거나, 혹은 댄스 파티에 모이지도 않거나 하면 조지 경은 대단히 기분이 상하실 것 아닙니까." 프랜치스는 자기의 접시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목요일 개관 축하에는 조지 경도 오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키저 신부는 더 이상 먹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막 구어낸 맛있는 비프스테이크가 마치 더러운 걸레 조각처럼 보이는지 먹던 것을 밀어 놓고는 초대장을 무섭게 찢어 버렸다. "그런 더러운 악마의 축하 따위에 누가 나간단 말이야. 천만에 말씀. 알겠나, 절대로 가지 않을 테니 그리 알게." 그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러나 목요일 밤이 되자 그는 수염을 깎고 새하얀 목셔츠에 외출용 수단을 입고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는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얼굴을 하고 축하식에 참석했다. 프랜치스는 그의 뒤를 따랐다. 새로 생긴 회관은 휘황한 등불과 흥분으로 들끓고 탄광의 노동자와 주민들로 입추의 여지없이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단상에는 유지들이 자리하고, 도날드 카일 부부, 탄광의 의사, 국민 학교장, 거기에 종파가 다른 교회의 목사 두 사람의 얼굴도 보였다. 프랜치스와 키저 신부가 자리에 앉아 와하고 환성이 오르더니 이어서 몇 마디의 야유가 있자 높은 웃음소리가 폭발했다. 키저 신부는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이빨을 갈았다. 밖에서 자동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리자 군중들은 술렁대기 시작했고, 그 다음 순간 일동의 박수 갈채를 받으면서 조지 경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예순 살 정도의 보통 키에 적당히 살찐, 대머리가 약간 벗겨진 백발의 노신사였다. 하얗게 쉰 수염에 혈색이 좋아 보였다. 노인들에게서 간간이 이렇게 눈에 띄게 건강한 얼굴을 볼 수도 있으나, 이처럼 백발이 두드러지게 훌륭한 느낌을 주는 것은 드물다. 복장도 태도도 온화한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러한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조지 경은 축하식의 진행을 기분 좋게 바라보고 있었으나 카일 씨로부터 환영의 말을 듣자, 이번에는 자기가 일어나서 짧은 인사말을 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어조로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이 매우 가치 있는 계획을 최초로 계획하신 분은 프랜치스 치셤 신부님이며, 직접 신부님의 창의와 광대한 정신에서 비롯된 것임을 특히 저는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만장은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박수 소리에 휩싸였으나 프랜치스는 빨개진 얼굴로 탄원과 후회가 뒤섞인 눈을 키저 신부에게로 돌렸다. 키저 신부는 기계적으로 손을 들어 내키지 않는 박수를 두어 번 쳤으나 얼굴은 험상궂게 일그러지며 쓰디쓴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축사가 끝나고 장내가 조용해지자 댄스 파티가 시작되었다. 키저 신부는 선 채로 조지 경이 카일의 딸 낸시와 춤을 추고 있는 것을 잠시 바라보고 있더니 어느 사이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뒤를 쫓는 것처럼 바이올린의 연주 소리가 이어졌다. 프랜치스가 늦게 돌아와 보니 키저 신부는 불도 켜지 않은 응접실 의자에 두 손을 무릎에 얹은 채 앉아 있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활기가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투지가 완전히 없어져 버린 모양이었다. 20년간 헨리 8세가 왕비를 갈아치운 것보다 많은 보좌 신부를 갈아치운 그는 이번에는 자기가 보좌 신부에게 쫓겨날 판국이 된 것이다.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우 입을 열었다. "자네의 일을 주교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네." 프랜치스는 가슴속에서 심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기세에 물러나지는 않았다.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키저 신부의 권위는 이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키저 신부는 우울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자네가 다른 데로 가는 것이 좋을 거야. 그것은 주교가 결정하는 일이지만 말이지. 피츠 제랄드 신부가 타인카슬 성당에 보좌 신부 한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한 것 같은데......자네 친구 밀리도 분명히 거기에 있을 텐데 말야......" 프랜치스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겨우 눈을 뜨기 시작한 교구를 뒤에 두고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렇게 되기 마련이라면 자기의 후계자에게는 사태가 용이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클럽은 계속 성황을 이룰 것이다. 아직 시작의 첫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니까 여러 가지로 변화가 있을는지 모른다. 자신을 결코 그것만을 자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거의 몽상가와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침착하고 낮은 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혹시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시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다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싶었습니다......그 너절한 것들을 위해서 뭔가를 하려고 했습니다." 두 신부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키저 신부는 얼른 눈을 감아 버렸다. 2 사순절(부활절 전의 40일)도 마지막인 어느 금요일의 일이었다. 성 도미니코 사제관 식당에는 프랜치스와 스루커스 신부가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 점심에는 빅토리아 왕조 풍의 은그릇과 옥색의 근사한 도자기에 담은 대구포 찜과 버터도 없는 토스트만은 조촐한 식사가 나왔다. 거 에 이른 아침부터 병문안을 나갔던 밀리 신부가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뭔가 억제하고 있는 것 같은 태도와 식사도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보아서 프랜치스는 바로 안셀모가 가 속에 뭔가 은밀한 일을 지니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피츠 제랄드 주임신부는 사순절 동안 이 에서 식사를 하는 습관이 있었으므로 식당에는 젊은 신부 세 사람밖에는 없었다. 밀리 신부는 식 맛 같은 것은 아무 상관도 없이 그저 입만 놀리고 있을 뿐, 약간 상기된 채 식사가 끝날 때 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리투아니아인 스루커스 신부가 턱수염에 붙은 빵부스러기를 털면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나갈 때까지 그는 그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런 다음에야 겨우 여느 때의 로 돌아가 푹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프랜치스! 오후엔 나와 함께 동행해 주었으면 싶은데, 별다른 약속은 없겠지?" "으응......4시까지는 별일 없어." "그럼, 꼭 와 주게. 자넨 내 친구이고 똑같은 신부끼리니까 나는 자네를 제일 먼저......" 그는 거기에서 돌연 입을 다물었다. 자기만이 알고 있는 굉장한 신비스러움을 더 이상 말하 가 아까운 모양이었다. 프랜치스가 차석 보좌 신부로서 성 도미니코 성당에 온 지 벌써 2년이 지나고 있었다. 성당에는 주임신부가 된 제랄드 피츠 제랄드가 아직도 머물고 있었고, 거기에 수석 보좌 신부 안셀모와 리투아니아인 신부 스루커스가 있었다. 타인카슬에는 해마다 폴란드에서 이민 오는 사람 수가 상당수에 이르고 있었으므로 절대로 스루커스와 같은 보좌 신부도 필요했던 것이다. 셀즈리와 같은 벽촌에서 옛 고향인 이곳의 교구에 전임해 와서 보니 성당 업무는 태엽을 감아 놓는 것처럼 정확했고, 성당은 권위가 있고 흠잡을 데가 없어 잠시 동안은 프랜치스도 어리둥 한 기분이었다. 더욱이 폴리 아주머니의 가까이에 살며 네드와 쥬디를 돌봐 줄 수 있는데다가 록 가의 사람들, 윌리나 그 누이동생 등과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 게는 행복스러운 일이었다. 마그냅 학장이 최근 산 모랄레스에서 이 교구의 주교로 영전해 온 도 일종의 묘한 위로와 같은 기분과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마음 든든함을 느끼게 했다. 하기는 마그냅의 현재 모습은 전과는 전적으로 달라진 신중한 태도나 침착한 눈언저리의 주름이나 야윈 몸으로 보아 전임지가 그렇게 편한 곳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취미가 고상하고 스스로도 신사임을 자처하는 피츠 제랄드 주임신부는 키저 신부와는 좋은 조를 이루었다. 그야말로 극에서 극이다. 다만 그는 공평하게 행동하는 데에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아무래도 조금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피츠 제랄드는 안셀모를-그가 가장 그의 마음에 들었다-귀여워하는 것과는 반대로 스루커스 신부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하기는 루커스는 영어도 능숙하지 못했고, 식탁의 예절도 나쁘고, 식사 때는 언제나 턱수염 아래 냅킨을 받쳐야 한다던가 수단을 입고서 이상한 모자를 쓰는 취미가 있기도 해서, 주임신부의 눈에 거 리는 것은 당연했지만, 또 다른 한 사람의 보좌 신부에 대하여도 묘하게 경계하는 데가 있었다. 프랜치스는 자기 태생의 미천함과 유니온 주점 관계, 더군다나 그 바논 사건 후 자기와 관련된 일까지 겹쳐 자기는 신임을 받을 수 없는 너무나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이곳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매우 서투른 짓을 한 것이다. 진부하기 짝이 는 설교를,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내듯이 하는 설교를 하는 것에 진절머리가 난 프랜치스는 부임하자 바로 '개인의 성실'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자기가 늘 생각한 대로 신선하고 독자적인 을 구사하여 간단하게 설교를 해 버렸다. 그러나 피츠 제랄드 사제는 이것을 위험한 혁신 사상 로 간주하고 통렬히 비난했다. 다음 주일에는 사제의 명령을 받들어 안셀모가 설교단에 올라가 지체없이 해독제가 될 것 같은 설교를 했다. '바다의 별(성모 마리아를 말함)'이라고 하는 제목 었는데 그 설교는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 수사슴이 샘물을 찾아 우는 이야기, 배가 안전하게 모 톱을 떠나는 이야기 등을 하여 끝에 가서 연극조로 두 팔을 쳐들고 '나를 따르라!'고 하는 그리 도의 말을 인용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간청하는 것이었다. 신자들 가운데 여자들은 눈물까지 흘 며 감동할 만큼 대단했다. 아침 식탁에서 성찬을 들던 제랄드 신부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밀리를 칭찬했다. "그거야, 밀리 신부-진짜 웅변이란 바로 자네 설교일세. 나도 들은 적이 있는데, 돌아가신 사 께서 20년 전에 그것과 똑같은 설교를 하신 적이 있었다네." 아마도 이 양 극단의 설교가 두 사람의 진로를 결정해 버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몇 개월이 지나자 프랜치스는 우울한 기분으로 자기의 전적으로 투기적 모험심이 없는 행동과 안셀모의 륭한 성공을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밀리 신부는 교구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언제나 기분이 좋았고, 활기 있었고, 누구를 만나도 웃는 얼굴이었으며, 고통받거나 괴로워하거나 하는 사람에게는 상냥하게 들을 두들기며 위로를 해주었다. 그는 노력가이며 일에 참으로 열심이고, 끼 호주머니에 든 수첩에는 할 일이 가득 적혀 있었다. 그는 집회의 연설에 초대되거나 테이블 스피치를 요청 받으면 사양하는 적이 없었다. 더구나 <성 도미니코 가제트>의 편집까지 하고 었다. 이것은 종교 관계 뉴스와 유머러스한 기사를 실은 팜플렛이었다. 그런 관계로 외출할 일이 매우 많았는데, 고상한 인품 때문에 상류 가정의 초대도 종종 받았다. 또 유명한 성직자가 이 시에 설교차 오면 안셀모는 지체없이 찾아가서 정중하게 경청을 했다. 그리고 나서는 정중한 지를 써서, 이번에 뵙게 되어서 참으로 기쁘며 정신적인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열심히 표명했다. 이러한 성의를 피력함으로써 그는 유력한 지기를 많이 만들어 가고 있었다. 물론 그의 일의 능력에도 한도는 있었다. 이번 새로 생긴 타인카슬 교구 해외 포교단 본부- 것은 맥나브 주교가 절실하게 희망하고 있는 계획이었다-의 비서직을 담당하여 주교를 만족시 기 위하여 불철주야로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샨드 거리에 있는 '노동 소년 회관'일을 본의 아 게 프랜치스에게 일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샨드 거리의 환경은 이 시내에서 가장 더러운 곳으로 싸구려 아파트와 노동자들의 판잣집이 어선 빈민가였다. 그러니 이곳도 자연히 프랜치스의 담당 구역이 되었다. 여기에서는 무슨 일을 하거나 효과가 없었고, 또한 문제시되지도 않은 것처럼 생각되고 있었으나 그래도 자기의 일은 오히려 이러한 데에 얼마든지 있다고 프랜치스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기는 그러기 위해서는 빈곤 바로 그 자체를 직접 눈으로 보고 세상의 불행이나 오욕이나 가난이라고 하는 것의 영원한 비 를 굴하지 않고 직시하도록 자신을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부터 자기가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성인의 사회가 아니라 때로는 눈물마저도 억누를 수 없는 비참한 죄인들의 사회인 것이다. "왜 그러지. 졸고 있지 않은가?" 안셀모가 책망하는 것처럼 말했다. 깜짝 놀라 몽상에서 깨어나자 모자와 단장을 든 밀리 신부가 식탁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싱긋 웃어 보이며 천천히 일어났다. 밖은 구름 한 점 없이 개인 오후였고 바람이 약간 불고 있었다. 단정하게 차려 입은 우아한 안셀모는 혈색 좋은 얼굴에 활기찬 걸음걸이로 걸어가면서 만나는 교구민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성 도미니코 성당에서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우쭐하거나 하지 않았다. 많은 숭배자들에게는 그러한 겸손한 태도가 참으로 믿음직스럽게 비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이 무렵 새로 교구에 편입된 교외로 가는 길목에 접어들고 있었다. 시내를 벗어나자 옛 장원의 흔적이 뚜렷한 이곳에 많은 주택이 건축 중이었다. 노동자들이 벽돌을 운반하거나 손수레를 밀거나 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무심코 '호리스 지방 재판소 소속 변호사 말캄 그레니에게 문의하실 것'이라고 크게 쓴 흰 페인트로 칠한 간판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안셀모는 자꾸 걸어가 언덕을 오르고 초록의 들판을 지나, 이번에는 숲속 오솔길로 접어들더니 왼쪽으로 내려갔다. 바로 가까이에 공장의 굴뚝이 있었고 그 근처는 기분이 상쾌한 시골 풍경이었다. 갑자기 밀리 신부가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개처럼 조용한 흥분을 보이며 걸음을 멈췄다. "여기가 어딘 줄 알겠지, 프랜치스. 이곳에 대하여 물어 본 적이 있었잖아." "으응." 프랜치스는 이 근방은 자주 다녔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그곳은 노란 금잔화로 뒤덮여 있고 구리색의 떡갈나무 숲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이끼 낀 작은 바위 동굴은 이 근처 수마일 되는 주위에서 가장 깨끗한 장소였다. 동굴 안에는 샘이 있었지만 몇 년 동안 물이 말라 있었다. 이 동굴은 '마리아의 샘'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그는 가끔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보라고! 프랜치스." 밀리는 프랜치스의 팔을 끌고 샘 가까이 까지 데리고 갔다. 말라 있어야 할 바위틈에서 수정과 같은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잠시 두 사람은 잠자코 있었으나, 이윽고 밀리가 두 손을 모아 쥐고 마치 성찬식 때처럼 정중하게 그 물을 떠서 마셨다. "마셔 보게, 프랜치스. 그리고 이 샘물을 맛보는 특권에 감사드리세." 프랜치스도 몸을 구부리고 마셨다. 물은 차갑고 맛도 좋았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좋군." 밀리는 엄숙한 표정을 하고 그를 보았다. 그 얼굴에는 약간 선심을 쓰는 것 같은 데가 없지는 않았다. "나라면 천국의 맛이라고 하겠네." "언제부터 샘이 솟고 있었는가?" "어제 저녁 황혼 무렵부터 다시 솟기 시작한 거야." 프랜치스는 소리를 내서 웃었다. "안셀모, 어쩐지 자네는 델파이의 신탁 같은 말을 하는 것 같군. 하느님 은혜의 현현이란 말인가. 자, 말해 보라고. 누구한테서 들었지?" 밀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아직은." "그렇지만 난 매우 호기심이 나는군." 안셀모는 만족한 듯이 웃었다. 그러나 바로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자세한 말을 할 시기가 못 되네, 프랜치스. 제랄드 사제에게 먼저 보고해야겠어. 엄청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분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그때까지만 기다리게. 물론 나는 자네를 믿고 있네......나의 신뢰를 배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말이야." 프랜치스는 밀리의 인간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더이상 난처하게 하지는 않았다. 성당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프랜치스는 밀리와 헤어져서 그렌빌에 있는 병자를 위문하러 갔다. 그의 담당인 소년 회관 회원인 오웬 워렌이라고 하는 소년이 수주일 전에 풋볼 시합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집이 가난했으므로 심한 영양 부족인데다가 상처도 그대로 돌보지 않고 내버려두었던 모양이었다. 빈민 구제법에 의하여 의사가 왔을 때에는 이미 상처는 심해졌었고 정강이에 두번 다시 보기 민망할 정도로 상처가 커져 버린 것이다. 이 일로 프랜치스는 오로지 마음이 아팠었고-탈록 박사도 매우 근심하고 있는 눈치여서 더욱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밤엔 워렌과 그 모친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느라 조금 전 안셀모와의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제랄드 신부 방에서 탄원하는 것 같은 큰 말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듣고서 어제의 일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사순절은 주임신부에게는 대단한 고행의 기간이었다. 고지식한 사람인 만큼 문자 그대로 단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충분한 영양으로 길들여진 그 매우 호화스러운 몸뚱이는 단식에는 적합치가 않았다. 심신이 다같이 괴로운 시련을 견디면서 사람을 멀리하여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사제관 안을 왔다 갔다 걷는 것뿐이었으나 그의 약한 시력으로는 사람을 분간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밤이 되면 그 날이 지난 표시로 달력에 십자표를 해 나가고 있었다. 밀리 신부에 대한 제랄드의 총애는 보통 이상의 것이었다. 그렇긴 하나 이러한 때에 그에게 접근하는 데는 상당한 대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듣고 있는 동안에 안셀모의 설득 비슷한 탄원의 소리가 낮아졌는가 싶자, 갑자기 사제의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나 밀리의 끈질긴 설득력이 승리를 한 것 같았다. '부드러운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 프랜치스는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나자 제랄드 신부가 초췌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밀리 신부는 현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시내 중심가를 향해서 가고 있었다. 세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이 돌아왔는데,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사제는 비로소 금기를 깨뜨리고 식당으로 들어왔다. 식탁에는 앉았으나 뭘 먹으려고는 하지 않고 커피만 시켰다. 단식 중에도 이것만은 빼놓지 않는 유일한 사치였다.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앉은 신부는 향기로운 커피가 아깝기라도 한 듯 조금씩 음미하는 것이 모두에게 다정함을 느끼게 했으며, 뭔가 마음속에 일고 있는 감동으로 해서 자신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프랜치스와 폴란드인 보좌 신부를 향해 오늘 있었던 일을 천천히 얘기했다. 스루커스에게도 부드러운 시선을 던졌는데, 이것은 여태껏 없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나도 이번만은 밀리 신부의 끈기에는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내가 완강히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하여간 이 사람은 밀고 나갔으니까 말이야. 물론 이......어떤 종류의 현상에 대하여는 될 수 있는 한 의심을 갖는다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본 적도, 보려고도 생각한 적이 없는 현현을 직접 나의 교구 내에서 봤단 말일세." 그는 말을 끊고 커피 잔을 들더니 점잖은 몸짓으로 우쭐한 밀리 신부에게 다음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재촉했다. "실제 이 이야기는 사실을 발견한 자네가 직접 하게나, 밀리 신부." 밀리 신부의 볼에는 아까부터 예의 희미한 흥분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헛기침을 한번하고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앞으로 말하는 사건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의 열변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우리 교구민의 한 사람입니다만 오랫동안 신병을 앓고 있는 한 소녀가 지난 일요일에 산책을 나갔다가-무엇보다도 증거가 확실해야 하니까 정확히 말씀드리죠. 그것은 3월 15일이며 시간도 오후 세 시 반이었습니다. 산책의 이유도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소녀는 신앙심이 깊고 열렬한 영혼의 소유자로서 경솔한 행동이나 빈둥거리고 놀며 생활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의사가 하라는 대로 산책을 한 것입니다. 이 소녀에게는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습니다. 의사는 보일 크레센트 42번지의 윌리엄 브라인 박사입니다. 이 사람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흠잡을 데 없는 아마도 이곳에서 가장 신뢰받는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밀리 신부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소녀는 중얼거리듯이 기도를 하면서 산책에서 돌아오는데, 우연히 '마리아의 샘'으로 알려진 장소까지 간 것입니다. 이미 황혼이 되어 태양의 마지막 빛이 그 아름다운 장소를 찬연히 비치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멈추어 서서 물끄러미 그 경치를 보면서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연 새하얀 옷에 하늘색 케이프를 입고 별을 수놓은 관을 쓴 부인이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때 소녀는 신성한 본능에서 그대로 바로 부인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부인은 형용할 수 없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소녀에게 '내 딸아, 너는 병자지만 너야말로 선택받을 사람이니라' 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반쯤 방향을 바꾸고 심히 놀란 가운데서도 무엇인가를 깨달은 소녀를 향하여 다시 '나의 이름을 가진 이 샘이 말라 있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닌가. 잘 기억해 두어라. 너와 같은 사람들에게만 이런 일은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고운 미소를 보이더니 부인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순간 지금까지 메마른 바위에서 참으로 깨끗한 샘이 솟아오른 것입니다." 밀리 신부는 입을 다물었으나 누구 한 사람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잠시 있다가 주임신부가 말을 받았다.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미묘한 문제에는 아무것에도 휘말려 들지 않도록 회의적인 태도로 임해야 할 것이야. 구즈베리의 나무라 해서 어느 나무에나 기적의 열매가 맺어진다고는 할 수 없어. 그 또래의 소녀들은 모두 로맨틱하기 마련이며, 더구나 샘이 솟았다 하는 것도 우연의 일치일는지 모를 일이지. 그러나, 그렇긴 하나......" 그의 어조에는 깊은 만족감이 배어 있었다. "나는 밀리 신부와 브라인 박사와 함께 이 문제의 소녀를 만나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온 참이오. 자네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소녀가 목격한 엄숙한 체험은 그녀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지. 그녀는 그후 바로 침대에 누워 버렸는데 지금까지 계속 잠만 자고 있다네." 이야기는 점차 부드러워지고 뭔가 헤아릴 수 없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그 동안 소녀는 환희와 행복감에 젖어 있고 지난 5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육체적으로 더욱 건강해졌다네." 그는 말을 끊었으나 잠시 있다가 묵묵히 이 놀라운 사실에 그럴 듯한 장중함을 덧붙였다. "그뿐만이 아니라......소녀의 몸에 확실히 의심할 여지없이 성흔(그리스도와 같은 상흔을 손과 발에 받는 것)이 나타나고 있었네. 이것은 이미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이야." 제랄드는 득의 만면하여 말을 계속했다. "좀더 결정적인 증거가 있을 때까지 발표는 아직은 너무 이른 감이 있지만, 나는 지극히 강렬한 거의 확신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예감을 가지고 있소. 그것은 이 교구에 있는 우리가 전능하신 하느님으로부터의 특권으로서 이것도 최근 발견된 디그비의 동굴집이라든가 혹은 더 오래 전의 더욱 역사적인 루르드의 성지(남프랑스 오토 피레네에 있는 베르나데스 스비루가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본 것) 등과 비교할 수 있는 기적, 아마도 그런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기적을 나누어주신 거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네.' 이 결론의 말에는 뭔가 장중함이 있어 모두들 크게 감동하였다. "그 소녀가 누구입니까?" 프랜치스가 물었다. "샬로트 닐리라고 하는 애야." 프랜치스는 주임 신부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무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침묵만이 오래 계속되었다. 그후 며칠간 사제관의 흥분은 점점 도를 더해 갔다. 그러한 일을 교묘히 처리하는 데는 아마도 제랄드 신부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진실한 신앙인임과 동시에 처세 수단에도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시의 학무위원회나 평의회 등에서의 오랜 경험에서 사제는 속세의 일에 대하여 빈틈없는 처세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는 그것이 설사 신도의 집이라 할지라도 일체 누설하는 것을 금하고 모든 것을 극비에 붙여 놓았다. 완전한 준비를 갖출 때까지는 손가락 하나도 대지 못하게 했다. 이 기적이라 할까 좀 뜻밖의 사건에 의하여 그는 새로운 생명이 불어넣어진 것 같았다. 지난 몇 년 동안을 통틀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이렇게 만족해 보긴 처음이었다. 그는 신앙과 양심의 두 가지를 혼합해 놓은 것 같은 데가 있었다. 정신도 육체도 다같이 뛰어났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자동적으로 지위가 승진한다 하는 운명이었던 것 같았다. 더구나 교회 자체의 융성과 똑같을 만큼의 큰 동경을 자신의 영달에 대하여도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는 성당의 현대사를 빛내고 있는 뉴먼(근대 영국의 카톨릭 추기경이며 옥스포드 운동의 지도자)과 자기를 비교할 정도로 자만심도 강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순하게 성 도미니코 성당에 다소곳이 머물러 있었다. 더구나 20년 전에 걸친 봉사의 공적으로 비로소 발탁된 것이 겨우 주임신부라고 하는 직위에 머무는 하찮은 승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이것은 카톨릭 교회에서는 흔치 않은 칭호였으며 타인카슬에서 한 발이라도 밖으로 나갔을 때에는 흔히 성공회 신부로 오인 받기 일쑤였다. 이것이 또한 그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기도 하고 분하게 생각하는 것이기도 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싫은 것이었다. 하기야 그는 자기는 존경을 받고 있으나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진즉 깨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금씩 실의에 빠져듦과 동시에 모든 것을 체념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나 머리를 숙이고 '오 주여, 주의 뜻대로 하십시오!' 하고 기도할 때에도 그 겸허한 마음 밑바닥에 '이제 모제타(카톨릭 교회에서 고위 성직자가 착용하는 작은 두건이 달린 어깨옷)쯤은 주어도 될 터인데' 하는 불타오르는 상념이 감추어져 있는 것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의 사정은 달라졌다. 성 도미니코 성당에 처박아 둘 테면 얼마든지 처박아 두라. 성 도미니코 교회는 자기가 빛나는 성지로 만들어 보이겠다. 루르드가 좋은 선례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다. 시대도 장소도 훨씬 가까운 중부 지방의 디그비도 있지 않은가? 그곳 기적의 동굴에서 솟는 물은 현재 많은 병자가 치유된 것이 확인되어 이름도 없는 한촌이 흥청거리는 도시로 변모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의 이름도 없는 그러나 기략이 뛰어난 신부가 일약 국가적인 인물이 되어 있지 않은가. 피츠 제랄드 사제는 새로운 도시라든가 대성당, 장엄한 기도, 훌륭한 수단을 입고 고위직에 오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현란한 꿈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꿈속에서만 사는 게 아니라 실제적인 만반의 준비도 착오 없이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계약서의 초안을 다시 검토하면서 모든 일에 충실을 기했다. 그리고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도미니코 교단의 수녀인 테레사를 샬로트 닐리의 집에 들어가 있게 했다. 테레사로부터 확실한 보고가 있으면 안심하고 계약을 맺을 생각인 것이다. '마리아의 샘'과 그 부근 일대의 토지는 다행히 홀리스라고 하는 부유한 지주의 소유였다. 그는 카톨릭 신자는 아니었으나 부인이 조지 렌쇼경의 누이동생이었다. 홀리스는 친절하고 기품이 좋은 사람으로서 이 사람과 그의 고문 변호사인 말캄 그레니는 그후 며칠에 걸쳐서 셰리주와 크랙커를 앞에 놓고 사제와 장황한 밀담을 거듭했다. 그 결과 쌍방에서 서로 좋은 협정이 맺어지게 되었다. 신부는 돈에는 참으로 담담하고 활달한 사람이었다. 돈은 무용지물이라고 하여 경멸하고 있었다. 그러나 돈으로 구입하는 것도 차제에는 중요한 것이므로 장래의 빛나는 계획을 위해서는 돈을 확보해 둘 필요가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그곳의 땅 값이 많이 뛰리라는 것을 모를 까닭이 없는 것이다. 계약을 맺는 날, 프랜치스는 2층 복도에서 그레니와 마주쳤다. 정직하게 말해서 말캄이 홀리스 사건을 담당하는 것을 알고 프랜치스는 의외로 생각한 것이다. 그레니는 그 동안 변호사로서의 기한이 끝나자 약삭빠르게 처의 지참금으로 기초가 튼튼한 변호사 사무소의 주를 사들여 힘들이지 않고 일류 변호사가 되어 있었다. "아, 말캄!" 프랜치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잘 오셨습니다." 그레니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며 악수를 했다. "깜짝 놀랐는데. 주홍빛 옷의 여자(그레니 같은 신교도가 로마 카톨릭교를 비방해서 하는 말. 원래는 묵시록에 나오는 음부를 말함) 집에서 너를 만나다니 뜻밖이군." 말캄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더듬거리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나는 자유 주의자야, 프랜치스......거기에다 지금은 돈이 좀 필요하단 말이야."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프랜치스는 이전부터 그레니 가와는 본래의 관계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다니엘이 죽은 것을 알고 그것도 생각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더구나 타인카슬에 와서 미세스 그레니를 우연히 만났을 때 자기가 인사를 하려고 거리를 가로질러 건너갔더니, 외할머니는 곁눈질로 그를 보자마자 마치 악마의 모습이라도 본 것처럼 허둥지둥 달아나 버린 일까지 있었다. 프랜치스는 말했다.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무척 슬펐어요." "아, 고맙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사실은 나도 슬퍼. 그저 아버지는 실패만 거듭하셨으니까 말이야." "실패라고 하지만, 천국에 가지 못할 만큼 큰 실책은 아니잖아요." 프랜치스는 농담으로 말했다. "그래 옳아. 지금쯤 아버진 틀림없이 천국에 계실 거야." 그레니는 시계줄에 매단 휘장을 무의식적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벌써 중년에 접어들어 몸은 탄력이 없어지고 어깨와 배에 군살이 찌고, 숱이 적은 머리칼을 벗겨지기 시작한 대머리에 두 갈래로 갈라 붙여 더욱 나이가 들어 보였으나 파랗고 반짝거리는 눈만은 아직도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그는 계단 쪽으로 걸어가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초대의 말을 던졌다. "틈이 있으면 놀러 오게. 내가 결혼한 것은 알고 있겠지? 가족은 둘이야. 어머니도 함께 계신다네." 말캄 그레니는 샬로트 닐리가 아름다운 부인을 보았다는 사건에 그 나름의 독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어떻게 해서든지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슴에 간직한 채 인내를 하면서 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모친으로부터의 유전이며 놀라울 만큼의 탐욕과 어딘지 여우같은 교활한 성질이 있었다. 그것이 이 우스꽝스러운 로마 카톨릭 식의 계획 가운데서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는 이것이 다시없는 굉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가능성을 완전히 믿어 버리고 있었다. 몇 년에 걸쳐 기다리고 바라던 기회가 눈앞에 익은 과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이런 일은 일생을 통하여 두 번 다시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사건 의뢰는 적당히 처리해 가면서 말캄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자기만이 혼자서 메모를 해 두었다. 그리고 비밀리에 많은 비용을 들여 지질을 조사한 결과 자기의 생각이 적중했다. '마리아의 샘'은 역시 히스나무가 울창한 산 위에서 흘러내리는 지하수였던 것이다. 말캄은 부자는 아니었다. 현재로서는 부자라곤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지축해 놓은 돈과 집과 변호사의 주를 저당 잡혀서 그 돈으로 주위의 땅을 3개월 후에는 자기의 것이 되도록 계약금을 지불했다. 그는 신비의 샘이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기는 샘을 새로 팔 생각은 없었다. 다만 선수를 쳐서 그것을 협박 수단으로 하여 자기를, 이 말캄 그레니를 대지주로 만들어 주는 확실한 계약을 맺자는 계획인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신비의 샘은 솟아오르고 있었다. 샬로트 닐리도 여전히 신들린 것처럼 성흔이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음식을 먹지 않고 기적적으로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자기 신앙이 더 깊어지기만을 기원하여 마지않았다. 그러한 내심의 고투를 경험하지 않은 안셀모처럼 믿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아담의 늑골의 이야기에서, 고래의 뱃속에 머물러 있었다고 하는, 더더군다나 황당무계한 요나의 이야기까지 무엇이든 믿을 수가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겉으로만이 아니라 마음 밑바닥부터 믿고 싶다......남을 사랑하고 자기 의복에 기어다니는 이를 물통에 털어 낼 정도의 빈민굴에서 몸이 가루가 되도록 일할 때만은 그것도 용이한 일은 아니지만......병자나 불구자나 좌절된 창백한 얼굴을 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만은 마음 깊은 곳에서 신앙심이 우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의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시련, 그 어떤 편파적인 양상은 자기의 신경을 손상시키고 있을 뿐이었고, 기도의 기쁨도 위축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 것은 그 문제의 소녀였다. 어쩌면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샬로트의 모친이 서디어스 길포일의 누이동생이라고 하는 사실이 아무래도 간과해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샬로트의 어머니는 말만 앞세우는 애매한 인물이었고, 아버지는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기는 했으나 게으름뱅이이며, 잡화상을 한답시고 점포를 벌려 놓았지만 장사는 하지 않고 교회 제단 앞에 촛불을 밝히고 장사만 잘 되기를 기원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샬로트는 이 아버지의 나쁜 점은 모두 물려받은 것 같았다. 소녀가 성당에 열심히 나오는 것은 향로와 밀초 타는 냄새가 그녀의 신경을 기분 좋게 자극하는 고해실의 어두컴컴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닐까 하고 프랜치스는 의심을 해 보았다. 그렇다고 소녀의 순결한 마음과 말없이 의무를 다하는 갸륵한 마음씨까지 부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반면에 얼굴을 씻는 것이 귀찮다면 숨쉬는 것도 귀찮다는 식으로 어쩐지 소녀에게 싫은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다음 토요일 프랜치스는 공연히 우울한 기분으로 그렌빌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143번지의 오웬 워렌의 집에서 의사인 탈록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프랜치스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탈록을 불렀다. 그가 돌아보며 걸음을 멈췄다. 윌리는 나이가 더해감에 따라 몸이 불어난 것 외에는 변한 데가 없었다. 믿음직한 성품에 끈기 있고 조심성이 많았으며, 친구들에게는 신의를 지킬 줄 알았으나 불의에 대하여는 조금도 용서할 줄 모르는 그런 데가 있었다.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부친의 성실성을 모조리 이어받았으나 부친만큼의 매력은 없었고, 용모에서도 전혀 닮은 데가 없었다. 잘 생기지 못한 코와 세련되지 않은 붉은 얼굴에 빗질도 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수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전체 모습에서는 고상한 기품이 엿보였다. 의사로서의 경력은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어디까지나 성실하고 자기의 일을 즐기고 있었고, 세상 일반의 하찮은 야심 따위는 무시하고 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때로는 '온 세계를 돌아보고 싶다' 던가 어디든 낭만적인 나라에서 모험을 해보고 싶다든가 하는 말을 한 적은 있었으나, 그것은 말뿐이었고 실제는 의연하게 빈민 구제 회의에 나가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환자에게 쓸데없는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고 자기 생각대로 소신껏 일할 수 있는, 그날 그날을 성실하게 사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면서 돈과는 인연이 멀었다. 보수는 몇 푼 되지 않는데다가 그 대부분을 위스키를 사는 데에 써 버리는 것이다. 그는 외모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늘 아침도 그는 머리에 빗질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움푹 패인 눈은 음산하고 표정도 여느 때와는 달리 험악한 데가 있어 오늘은 뭔가 세상이 비위에 거슬리고 속상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가냘픈 목소리로 워렌의 다리가 악화됐다고만 말했다. 오늘은 병리학상의 검사에 필요하기 때문에 환부의 조직을 조금 절취해 왔다고 했다.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그들에게만 통하는 침묵을 지키면서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문득 프랜치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충동에서 샬로트 닐리의 이야기를 했다. 탈록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꾹 찔러 넣고 옷깃을 세운 채 하늘만 쳐다보며 걷고 있었다. "으음." 그는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는 나도 어떤 사람한테 들었네." "자네, 어떻게 생각하나, 그 일을?" "왜 나한테 묻는 거야." "그야 자네라면 정직하게 대답해 줄 테니까 그렇지." 탈록은 묘한 얼굴을 하고 프랜치스를 보았다. 매우 겸손하고 자기의 지성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는 탈록이었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의 태도에는 이상하리만큼 적극적인 데가 있었다. "종교는 나의 전공이 아니야. 철저한 무신론을 아버지한테서 이어받았고......그것을 또 해부학 교실에서 더욱더 확고하게 했단 말이야. 그렇지만 굳이 내 의견을 듣고 싶다면-아버지의 흉내를 내지 않더라도 나는 그 사건을 부정하고 싶네. 그러나 어떨까, 한번 그 애를 진찰해 보면. 그 애의 집은 여기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가. 함께 가 보세." "그런 일을 해서 브라인 박사와 일이 생기지는 않겠는가?" "좋아, 브라인과는 내가 좋게 말할 테니까. 동업자와 교제를 하려면 무조건 하고 나서 사과하면 된다는 것이 나의 방침이야." 그는 프랜치스에게 묘한 미소를 던졌다. "물론 자네의 윗사람이 두렵지 않다면야." 프랜치스는 몹시 난처해 망설이다가 말했다. "두렵긴 하지만 어쨌든 가보자구." 생각과는 달리 쉽게 그 집안으로 들어갔다. 미세스 닐리는 간호에 지쳐서 정신없이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아버지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점포에 나가고 집에 없었다. 작달막하고 온순하며 교양 있는 테레사 수녀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타인카슬 출신이 아니었으므로 탈록을 알지 못했으나 프랜치스와는 구면이기 때문에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두 사람은 수녀의 안내로 깨끗한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몸을 청결히 하고 하얀 잠옷을 입은 샬로트가 번쩍번쩍 빛나는 놋쇠 침대에 누워 있었다. 테레사 수녀는 소녀에게로 몸을 구부렸다. 깔끔하게 청소된 방이 그녀는 적지 않게 자랑인 것 같았다. "샬로트 양, 치셤 신부님이 만나러 오셨어요. 브라인 선생님과 친하신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샬로트 닐리는 방긋 웃었지만 좀 귀찮은 것 같은 의도적인 것이 엿보였다. 그러나 어딘가 신들린 것 같은 데가 있었다. 베개에 반듯이 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창백하지만 맑은 얼굴을 그 미소가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그 미소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프랜치스는 마음속으로 가책이 되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조용한 하얀 방에는 일상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진찰을 해도 괜찮지, 샬로트?" 탈록은 상냥하게 말했다. 소녀는 그대로 미소를 띄운 채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소녀는 누가 봐도 환자라고 할 수 없었다. 태연하고 오히려 득의양양한 사람의 태도였다. 자기가 자기 내부의 힘,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힘을 의식하고 있으며, 보고 있는 사람에게 외경의 마음을 일게 할 수 있다는 듯한 묘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창백한 눈까풀이 두세 번 깜박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녀의 소리는 조용히 어딘가 먼데서 들려 오는 것 같았다. "괜찮고 말고요, 선생님. 기쁩니다. 나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지 않았을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그렇지만 선택을 받은 이상 기꺼이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공손히 탈록에게 진찰할 것을 허용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는군, 샬로트." "네, 선생님." "식욕이 없어서?" "먹을 것은 생각지 않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의 은혜로 살아 있는지도 모르죠." 테레사 수녀가 조용히 말참견을 했다. "제가 여기로 온 이래 무엇 하나 입에 넣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방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탈록 의사는 몸을 반듯하게 눕도록 하고 곱슬곱슬한 머리를 손으로 빗어 올리면서 간단하게 말했다. "참 감사해요, 샬로트. 테레사 수녀님, 감사합니다. 참으로 친절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프랜치스가 그 뒤를 따라 나오려고 하자, 샬로트의 얼굴에 문득 그늘이 서렸다. "보시지 않겠어요, 신부님? 자, 이 손......발도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제물의 희생처럼 양팔을 펴 보였다. 그 새하얀 손바닥에는 이미 의심할 여지도 없이 못자국 모양의 혈흔이 보였다. 발바닥도 마찬가지였다. 밖으로 나온 탈록은 신중한 태도를 지키고 있었다. 그 동네의 끝까지 왔을 때까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헤어져야 할 길목에 와서 황급히 지껄이기 시작했다. "내 의견을 듣고 싶을 테지......그 소녀는 이미 위험한 한계를 넘어섰단 말이야. 항진 상태에 있어서의 조울병이라는 거야. 혈흔도 확실히 병적 흥분 때문에 생긴 거야. 다행히 정신병원에 가지 않게 되면 성녀로 추앙되겠지." 그는 여느 때의 침착성을 잃고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예의고 뭐고 없었고 말을 하는데도 헐떡거리고 있었다. "제기랄! 생각만 해도 화가 치미는군. 밀가루 포대를 입은 빈혈증의 천사처럼 침대에 누워서 성녀인 체 방실방실 웃고 있는 소녀가 있는가 하면, 더러운 지붕밑 다락방에 누워 괴저에 걸린 다리가 자네가 말하는 지옥의 겁화의 고통은 고사하고 악성 육종에 시달리는 소년 오웬 워렌이 있단 말야. 자네도 기도를 올릴 적에 그 일을 잘 생각해 보라고. 곧 기도하러 가겠지. 그럼 나도 집으로 돌아가 한잔하기로 할까." 프랜치스가 대답할 틈도 없이 그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날 저녁 프랜치스가 수난절의 기도(테네브레. 부활절 전 1주일간 등불을 끄고 행하여지는 그리스도 수난을 추모하는 저녁과 새벽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니, 사제관의 현관에 걸려 있는 게시판에 긴급 소집 안내가 붙어 있었다. 그는 이상한 예감을 안고 2층 서재로 올라갔다. 거기엔 주임신부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융단이 찢어질 것 같은 걸음걸이로 방안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치셤 신부! 나는 어안이벙벙해서 말도 못할 정도야. 사실 자네라고 하는 인간은 어딘가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라고, 하필이면 무신론자 의사를 데리고 가서 진찰을 해? 난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단 말이야!" "죄송합니다." 프랜치스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만 저는......아닙니다. 그 사람은 저의 친구였기에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것부터 틀려먹은 거야. 나의 보좌 신부 한 사람이 닥터 탈록과 같은 인물과 교제를 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돼먹지 않은 거야." "우리들은......우리들은 어렸을 적부터 친구입니다." "그런 것은 구실이야. 난 자네에게 실망할 대로 실망했네. 자넨 처음부터 이 위대한 사건에 대해 냉담했고 또한 공감이 결여되어 있었어. 틀림없이 자네는 최초의 발견자라는 명예가 밀리 신부에게 돌아간 것을 질투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자네가 공공연히 반대하는 무슨 이유라도 잇단 말인가?" 프랜치스는 자신이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이 옳은지도 모른다. 그는 중얼거리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죄송하기 짝이 없는 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무관심한 건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괴로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탈록을 데리고 갔었습니다. 아무래도 미심쩍은 곳이 있어서......" "미심쩍게 생각했다고! 자넨 루르드의 기적을 인정하지 않는 건가?"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종파의 의사들이 확언을 하고 있는 거니까요." "그럼 묻겠는데, 우리가 여기에 이 교구 안에 새로운 신앙의 증적을 만들려고 하는 기회를 왜 자네는 부정하려고 하는 건가?" 피츠 제랄드 신부의 얼굴이 어둡게 흐려졌다. "영적 존재의 의미는 고려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다못해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것만이라도 존중하라고." 그의 입가에 냉소가 번졌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병약한 소녀가 전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9일간이나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을? 더구나 건강하고 충분히 영양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이 별도의 자양분을 취하지 않고서 그럴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말이야." "별도의 자양분이라니요?" "영적인 양식!" 제랄드 신부는 새삼스런 분노를 느낀 듯 거칠게 말했다.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1347--80. 신비 사상을 가진 도미니코파의 성녀)도 지상의 어떤 음식보다 신비로운 영적 음식을 취하고 있지 않았는가 말이야? 자넨 참으로 의심이 많아. 내가 화를 내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는 거지. 그렇잖은가?" 프랜치스는 머리를 떨구었다. "성 토마스(또는 토마. 12사도의 한 사람. 주의 부활을 의심했음)도 의심했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도가 보고 있는 앞에서 말입니다. 주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러 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노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해 버린 프랜치스는 자신도 놀랐는지 문득 입을 다물어 버렸다. 피츠 제랄드 신부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으나 곧 침착을 되찾고 있었다. 그는 테이블에 몸을 기대고 프랜치스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고 뭔가 서류 같은 것을 찾고 있었다. 이윽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성당 일을 방해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야. 본당 내에서도 자네의 평판이 좋지 않아. 이제 돌아가게나." 프랜치스는 자기의 결점이 자신도 싫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방을 물러나왔다. 그러자 불현듯 이 고충을 마그냅 주교에게 호소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그 기분을 억눌러 버렸다. 라스티 맥은 이젠 옛날의 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주교라고 하는 높은 지위에서 격무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자기와 같은 비참한 한 신부의 고뇌 따위에 주교가 관계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튿날은 토요일이었다. 피츠 제랄드 신부는 열한 시 장엄미사 때, 지금껏 없었던 격렬한 설교를 하고 마침내 이 사건을 공개했다. 그것은 순식간에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신자들은 성당밖에 몰려 선 채로 은밀하게 속삭이며 집으로 돌아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사이 엔지 자연히 행렬을 이루어 밀리 신부를 선두로 '마리아의 샘'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자 닐리의 집 앞은 군중들로 들끓었다. 샬로트가 가입되어 있는 소녀회 회원들이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로사리오 기도를 합창했다. 그날 저녁 때 제랄드 신부는 신문기자단과 회견한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문기자단은 모두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거드름을 피우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이 도시에서는 상당히 존경받고 있었으며, 공공 정신이 투철한 성직자로 간주되고 있었으므로 매우 유리한 인상을 주었다. 이튿날 각 신문들은 회견 내용을 비교적 큰 지면을 할애하여 보도하고 있었다. <트리뷴>지는 제 1면에 이를 게재하고, <크로브>지는 2면에 3단 짜리 기사로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 외에도 <노산바란드 헤럴드>지는 '제 2의 디그비'라고 보도하고, <요크션 에코>지는 '기적의 바위샘, 수천의 병자에게 희망을 주다'라고 했으나, 신교의 <하이 앵그리칸>주간지는 '다시 증적을 기다리자'는 애매한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런던 타임스>는 신학자의 말을 실어, 에단(에단 오브런디스판. 아일랜드의 성인. 7세기 전반의 수도승. 성스런 샘과의 관계는 불분명함)과 성 에제룰프(또는 에켈볼트. 영국의 성인. 10세기 초의 인물)에까지 소급하는 '기적의 샘'의 역사를 문예란에 게재할 정도였다. 제랄드 신부는 희열에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밀리 신부는 아침 식사도 못 먹을 정도였고, 말캄 그레니는 너무나도 기뻐서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날뛰었다. 그런 소란 속에서 8일이 지난 후 프랜치스는 저녁 때 시의 북쪽 끝에 있는 크라몬트의 폴리의 작은 아파트를 방문하려고 나섰다. 담당 구역의 지저분한 연립 주택을 하루 종일 돌아다닌 후였기 때문에 피곤하였고 기분도 대단히 우울한 참이었다. 그날 오후 탈록 의사로부터 워렌 소년이 위독하다는 편지가 도착했다. 다리는 악성 육종이 되어 버려 이제는 희망이 없는 것이다. 빈사 상태에 빠진 워렌은 이 달을 넘길 것 같지 않다고 했다. 크라몬트에서 폴리는 여전히 억척을 부리고 있었으나, 네드는 전보다 더 까다로워진 것 같았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서 모포로 무릎을 감싼 채 지껄이고 있었으나 그것이 어쩐지 이상했었다. 유니온 주점에 있는 네드의 이권의 나머지에 대하여 길포일과의 사이에 최후의 결정을 간신히 마무리 지을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도 대단한 액수는 아니었으나, 그러나 네드는 그것을 큰 재산이나 되는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었다. 쓸데없는 불평을 너무 많이 늘어놓은 탓인지 혓바닥까지 이상하게 되어 애처로울 정도로 발음이 확실하지 않았다. 프랜치스가 갔을 때 쥬디는 이미 자고 있었다. 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표정으로 보아 쥬디가 또 나쁜 장난을 하여 초저녁부터 침실로 쫓아 버린 것 같았다. 그런 일을 생각하니 그는 한층 마음이 무거웠다. 아파트를 나왔을 때 시계는 이미 열한 시를 가리켰다. 타인카슬행 차는 벌써 떠난 후였기 때문에 걸어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모든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낙심천만한 표정으로 그렌빌 거리로 접어들었다. 건너편에 닐리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아래층엔 아직 등불이 켜져 있었다. 거기는 샬로트의 방이었다. 노란 블라인드에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것을 보자 프랜치스는 갑자기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새삼스럽게 자신의 미련함이 뼈아프게 느껴져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문득 닐리 가의 사람들을 만나서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죄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서 거리를 가로질러 현관 계단을 올라갔다. 놋으로 된 문고리를 잡아당기려다 그는 고풍의 손잡이를 돌렸다. 그것은 문득 환자를 방문할 적에는 안내를 요청하지 않고 들어가도 좋다고 하는 의사나 성직자의 공통된 특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좁은 현관으로 통하는 침실에서 가스등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멍청하게 돌처럼 서 버렸다. 침대에 일어나 앉은 샬로트가 닭고기와 빵을 담은 접시를 무릎에 올려놓고 한참 꾸역꾸역 먹고 있었던 것이다. 낡은 잠옷을 입은 미세스 닐리는 근심스러운 듯이 몸을 굽혀 조용히 스타우트를 곁들여 주고 있었다. 처음 프랜치스의 모습을 본 것은 미세스 닐리였다.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떨어뜨려 스타우트를 침대에 쏟아 버린 것이다. 그러자 샬로트가 접시에서 시선을 돌렸다. 파란 눈동자가 커다랗게 되더니 울음을 터뜨리며 침대에 미끄러지듯이 누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버렸다. 무릎 위에 놓였던 접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도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미세스 닐리의 목줄기의 동맥이 경련을 일으킨 것처럼 파닥파닥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스타우트의 병을 잠옷 속으로 감추려고 어리석은 노력을 했다. 그리고 겨우 신음 소리 같은 소리로 말했다. "무엇을 먹여서라도 기운을 되찾아 주고 싶었습니다......그런 일이 있은 후이므로......이것은 환자용 스타우트입니다." 그의 죄인 같은 놀란 표정만으로도 모든 것은 명백했다. 그는 속이 뒤집혀지는 기분이었다. 뭔가 크게 모욕을 당한 느낌이었다. 말을 하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매일 밤 이렇게 먹을 것을 주고 있는 거죠......테레사 수녀님이 잠든 틈을 타서." "그런 일을 없습니다, 신부님. 하느님이 증인이십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부인하려고 했으나 자기가 생각해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울음을 터뜨리며 완전히 실성한 사람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왜 나쁩니까. 불쌍한 이 애가 배를 곯아 죽을 지경에 이른 것을 보고 내버려 둘 수 는 없는 것이 아닌 가요. 이 애에게 이런 일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렇게 큰 소동이 될 줄 알았다면......와글와글 사람들은 몰려오고, 신문은 떠들고.....이제 이것으로 이 고통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제발 우리들에게 관대히 대해 주십시오, 신부님." 프랜치스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들을 공박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미세스 닐리." 그녀는 다시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프랜치스는 문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녀의 울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어리석은 행동, 아니 이런 때에 모든 인간이 행하는 어리석음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울음을 그치자 그는 조용히 말했다. "이번 일을 빠짐없이 이야기해 주시오." 샬로트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띄엄띄엄 새어나왔다. 그녀는 언젠가 교회의 도서관에서 성녀 벨라뎃다(1858년, 루르드에서 성모 마리아의 환영을 보았다고 하는 벨라뎃다 스필을 말함)의 이야기를 쓴 책을 빌려다가 읽은 적이 있었다. 그후 어느 날 '마리아의 샘' 옆을 지나가는데 문득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는 그녀가 즐기는 산책길이었는데, 이상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거기서 그 물과 벨라뎃다와 자기가 우연히 일치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큰 충격이었다. 그러자 어쩐지 성모 마리아의 모습 같은 것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것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또한 갑자기 무서워지기도 했다. 전신이 새하얗게 질리고 떨리는 것이 그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침대에 누워 버리고, 빨리 밀리 신부를 와 주도록 했다. 그리고 전적으로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모든 것을 신부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그날 밤은 밤새도록 황홀 상태에 빠진 채 온몸이 경직되어 마치 나무토막 같았다. 이튿날 아침에 눈을 뜨니 몸에 성흔이 나타나 있었다. 지금까지도 많은 부상을 입은 적은 있었으나 이번의 것은 전연 달랐다. 그래서 신념은 더욱 굳어졌고 음식을 먹으려고 기를 써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너무나 벅찬 행복감, 너무나도 큰 흥분으로 인해서 무엇을 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성자들은 식사를 하지 않고서도 살아간다고 하지 않는가. 이 생각이 그녀의 머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밀리 신부와 피츠 제랄드 신부가 찾아왔을 때 자기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했다-그때는 정말 그런 상태였다. 그것은 굉장한 감정을 그녀의 가슴에 심어 주었다. 그런 후부터 그녀는 주목의 과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물론 시간이 지나자 심한 공복을 느꼈다. 그러나 밀리 신부나 피츠 제랄드 신부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특히 밀리 신부가 그녀를 보는 눈은 참으로 경건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에게만 사실대로 고백했고 그의 어머니도 딸의 거짓말을 숨겨 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샬로트는 매일 밤 한 번 때로는 두 번 듬뿍 식사를 한 것이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사태는 그 이상으로 발전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금 말씀드린 대로 신부님, 처음에는 참으로 근사했어요. 그 가운데서도 가장 근사했던 것은 소녀회의 여자아이들이 창 밖에서 나를 위해 기도를 드려 준 것입니다." 그러나 신문이 그처럼 떠들어대기 시작하자 그녀는 차츰 겁이 난 것이다. 제발 하느님, 이번 일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고 싶었다. 테레사 수녀의 눈을 속이는 것도 좀처럼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두 손바닥의 성흔도 점점 희미해지고 흥분이나 황홀 상태도 점차로 비참하리만큼 무겁고 침울한 기분으로 바뀌어 갈 뿐이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는 다시 심하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은 속악하기 짝없는 이야기며 어리석은 인간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낸 비극의 단편인 것이다. 샬로트의 어머니가 옆에서 말참견을 했다. "이 일을 제랄드 신부님에게는 말씀드리지 않으시겠지요, 신부님?" 프랜치스는 이제 화도 나지 않았다. 다만 불쌍하고 측은한 연민의 정을 느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이 정도까지 발전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내가 먼저 말하지는 않겠어요, 미세스 닐리. 한 마디도 하지 않겠소. 그러나......" 말을 잠깐 끊었던 프랜치스는 샬로트를 향해 "이 이야기는 아무래도 네가 직접 신부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 고 말했다. 그러자 다시 그녀의 눈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아닙니다. 할 수 없어요......제발 신부님, 살려 주세요." 프랜치스는 애원하는 두 사람에게 고해 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제랄드 사제가 생각하고 있는 계획은 바로 본색이 드러날 거짓말 위에 꾸며질 수 없는 일이라고 간곡하게 타일렀다. 그렇게 되면 9일간의 기적도 바로 열이 식어 잊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두 사람을 위로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난 후, 반드시 충고에 따르겠다는 샬로트의 확답을 받은 프랜치스는 닐리의 집을 나왔다. 텅 빈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서 잠들어 버린 사제관에 발소리를 죽여 들어서면서 문득 제랄드 신부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이튿날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그는 하루 종일 외출을 했었기 때문에 그와는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나 사제관의 내부에는 뭔가 이상한 공허한 분위기, 일종의 가사와 같은 공기가 떠오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는 분위기를 감지하는 데 민감했었다. 오늘은 그것이 특히 강하게 느껴졌다. 다음날 오전 열한 시경 말캄 그레니가 그의 방으로 찾아왔다. "프랜치스! 좀 도와 다오. 제랄드 신부가 모든 계획을 취소한다는 거야. 부탁이니 제발 중간에 들어서 뭐라고 좀 해 다오." 그레니는 가련할 정도로 기가 꺾여 있었다. 얼굴은 핏기를 잃고 입술은 떨리고 눈은 충혈 되어 있었다. 그는 더듬거리면서 "왜 제랄드 신부의 계획이 그렇게 됐는지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어. 머리가 이상해진 건 아닐까. 이런 근사한 계획은 다시는 없을 텐데 말이야. 대단히 잘 되어 갈 텐데......" "나에게는 주임신부를 설득할 힘이 없어요. 불가능한 일이에요." 아야, 그럴 리가 있나. 그 사람은 자네를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네. 더구나 자네는 신부가 아닌가. 자네가 신부로 있는 것은 신도들의 덕택이 아닌가. 이 일이 잘 되면 카톨릭 신자를 위해 복지를 가져오는 것이 될 텐데 말이야." "그런 것은 전혀 당신과 관계가 없는 일이 아니오, 말캄." "아니야, 크게 상관이 있네." 그레니는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열심히 지껄여댔다. "나는 자유주의자가 아닌가. 카톨릭도 근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훌륭한 종교라고 생각해. 부탁이야, 프랜치스. 늦어지지 않도록 빨리 가서 말좀 해줘." "안됐지만 이번 일은 틀렸어요. 우리 모두에게 말예요." 그는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려 버렸다. 그러자 그레니는 완전히 자제심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느닷없이 프랜치스의 팔을 붙잡고 비굴한 콧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를 불필요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말게. 자네가 오늘날 이렇게 된 것도 우리 덕택이 아닌가 말이야. 나는 그 땅을 사는 데 내 재산을 전부 쏟아 넣었어. 만일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면 그게 모두 날아가 버린단 말이야. 우리 집을 파산시키지 말아 다오. 우리 어머니가 불쌍하지 않는가. 어떻게 어머니가 자네를 길렀는가 생각해 보라고, 프랜치스. 제발 부탁이니 그 사람을 설득해 다오. 그러면 뭐든지 해줄 테니. 카톨릭 신자가 되라면 되겠어." 프랜치스는 한 손으로 커튼을 움켜 쥔 채 성당 지붕 위로 우뚝 솟은 대리석 십자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인간은 돈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것인가. 자기의 영혼을 파는 일까지도 하겠다는 말인가. 그레니는 드디어 지쳐 버린 것 같았다. 프랜치스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겨우 깨달은 그는 이번에는 하다못해 자신의 체면이라도 지키려고 태도를 표변시켰다. "그럼 도와주지 않겠다는 거로군. 그래, 알았어. 오늘 일은 잘 기억해 두겠네." 그는 문 쪽으로 갔다. "언젠가는 너희들 모두에게 복수해 줄 테니 두고 보라고. 그렇게 되면 죽어도 내가 상관할 바 아니야." 그의 창백해진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기를 개에게 물린다는 것쯤은 알았어야 하는데, 더러운 네놈들에게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그는 문을 꽝 닫고 나가 버렸다. 사제관은 여전히 공허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본래의 자기를 상실한 것 같은 모든 것이 허무로 변해 버린 듯한 진공상태와 같은 것이었다.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상가에라도 와 있는 것처럼 발걸음마저도 조심했다. 리투아니아인 신부는 오로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밀리 신부는 눈을 내리깔고 돌아다녔다. 그는 심한 충격을 받았으나 꾹 참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침묵도 천성적으로 활발한 그를 또 우아한 품위로 감싸 더욱 고상하게 느끼게 했다. 입을 열어도 딴 말만 하고 일체 그 일에 대한 것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고 해외 포교단의 일에 몰두하여 생각을 딴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그레니가 행패를 부린 후 일주일 이상이나 제랄드 신부와는 얼굴을 맞댈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제의실에 들어가니 그가 막 수단을 벗고 있었다. 합창대 소년들은 돌아가고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개인적인 체면 손상이야 어찌됐건 그의 사건 처리 방법은 완벽한 것이었다. 실제 그의 손에 의하는 것은 사건도 사건이 아니었고 재난도 재난이 아니었다. 홀리스 대위는 자진해서 계약을 파기했고, 닐리에게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주선해 주고 이것을 기회로 닐리 일가는 아무도 모르게 살그머니 이사를 해 버렸다. 악착같은 신문의 비난도 교묘히 진정시켰다. 이윽고 일요일이 되자 제랄드 신부는 다시 설교단에 올라섰다. 그리고 물을 끼얹은 것 같은 회중을 앞에 놓고, '그대들 믿음이 적은 자들이여' 하고 성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설교를 시작했다. 그는 조용한 가운데도 격렬한 어조로 연제를 부연해 나갔다. "교회는 이 이상 어떠한 기적을 필요로 하는가? 교회는 이미 기적으로 그 정당함이 입증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교회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기적 위에 깊이 확고부동하게 서 있는 것이다. 마리아의 샘과 같은 현시를 만나는 것은 영광된 일이고, 의심할 것도 없이 우리를 고무 격려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모두 나를 포함해서 그것을 위하여 열중했다. 그러나 냉정히 반성해 보면 이미 천상의 꽃이 여기, 이 교회 가운데 우리의 눈앞에 피어 있는데도 다만 한 송이의 꽃을 더 찾았었다고 해서 그와 같은 대소동을 벌여야 했을까? 이 이상 더 물질적 증거가 필요할 만큼 우리의 신앙은 약하고 무기력한 것이었다는 말인가? '보지 아니하고 믿는 자는 행복하느니라.' 이 엄숙한 말씀은 사람들은 잊었단 말인가?" 그것은 더할나위없는 웅변이었다. 지난 주 일요일에 얻은 승리 이상의 것이었다. 이 설교를 하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희생이 있었던가. 그것을 아는 사람은 지금 단상에 서 있는 제랄드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제의실에서 처음 부딪쳤을 때 제랄드 신부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밖으로 나갈 준비가 다 되어 까만 상의를 어깨에 걸쳤을 때 그는 갑자기 뒤돌아보았다. 제의실의 밝은 광선으로 프랜치스는 사제의 잘 생긴 얼굴에 새겨진 깊은 주름과 둥근 회색의 눈 속에서 피로한 표정을 읽고 불현듯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거짓말은 하나만 한 게 아니더군. 마치 거짓말로 뭉쳐진 사람 같아. 하여간 난처했지만 최후에는 정의가 이기는 거야." 그는 잠깐 말을 중단했다. "자넨 퍽 좋은 청년이야, 치셤. 자네와 내가 배짱이 맞지 않은 것은 유감천만이야." 그는 의젓하게 제의실을 나갔다. 부활절이 끝날 무렵에는 사건은 거의 잊혀지고 있었다. 제랄드 신부가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샘 주위에 둘러 친 울타리는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입구의 작은 문은 자물쇠도 걸지 않고 봄의 상쾌한 미풍에 뭔가 감상적인 모습으로 서 있었다. 때때로 몇 사람의 선남선녀가 기도를 하러 와서는 깨끗하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물로 몸을 씻고 가기도 했다. 프랜치스는 바쁜 성당 일에 쫓겨 그 일을 잊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자연히 잊어버린 것을 기뻐했다. 그 사건이 남긴 오점도 점차로 희미하게 엷어져 갔다. 다만 마음 속 밑바닥에 약간의 추한 응어리가 되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될 수 있으면 완전히 없애 버리려고 노력을 했다. 성당의 청소년들을 위한 새로운 운동장을 만들자는 그의 제안이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시의회에서는 공원의 일부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가 나왔다. 거기다 제랄드 사제의 승낙도 얻었다. 이제 그는 여러 가지 운동기구 안내서에 파묻혀 운동기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스도 승천 축일 전날 밤 갑자기 오웬 워렌을 방문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 연락은 그의 얼굴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이러한 연락이 있으리라고는 벌써 몇 주일 전부터 예감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역시 그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그는 서둘러 성당으로 가서 노자 성체(죽을 위험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마지막 성체)를 모시고 사람의 통행이 많은 그렌빌 거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워렌의 집 앞에서 탈록이 안절부절못하며 왔다 갔다 것을 보고 그의 표정은 금세 슬픈 빛으로 변해 버렸다. 탈록도 역시 오웬을 귀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랜치스가 다가가니 그는 완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이젠 최후가 온 건가?" 프랜치스가 물었다. "으응." 그리고 잠시 생각하고 나서 "어제 동맥이 막혀 버렸어. 이미 늦었어. 절단해 봤자 틀렸어." "너무 늦었는가?" "아니." 탈록의 태도에는 뭔가 광포한 기분을 억제하고 있는 데가 있었다. 그는 어깨로 프랜치스를 난폭하게 떠밀었다. "난 자네가 꾸물대며 오는 동안 세 번이나 오웬을 보고 왔네. 자네가 들어가 볼 마음이 있다면 어서 들어가 보게." 프랜치스는 탈록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미세스 워렌이 문을 열어 주었다. 회색 옷을 입은 그녀는 쉰 살쯤 된 몹시 야윈 모습으로, 요즘 수주일 동안의 심로로 초췌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위로했다. "참으로 안 됐습니다, 미세스 워렌." 그녀는 힘없는 소리로 흐느끼듯이 웃었다. "어서 오십시오, 신부님." 그는 깜짝 놀랐다. 슬픔이 그녀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미치게 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오웬은 침대에 누운 채 붕대를 풀고 환부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몹시 야위고 왜소해진 다리였다. 그러나 그의 양 다리는 완전하고 환자 같은 티가 전혀 없었다. 프랜치스는 탈록이 오웬의 오른쪽 다리를 쳐들고 완전하게 곧은 정강이를 손으로 만져 내려가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다리는 어제까지만 해도 곪아터져 고름이 더덕더덕했던 곳이다. 탈록의 도전적인 눈이 일부러 아무 설명도 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어지러운 눈을 미세스 워렌 쪽으로 돌렸다. 그때서야 그녀의 눈물이 기쁨에서 나오는 눈물이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울면서 말했다. "오늘 아침의 일입니다.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에 저는 이 애를 따뜻하게 감싸고 낡은 유모차에 태웠습니다. 저희들은 도저히 체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애는 신심이 두터운 애니까요......어떻게든 마리아의 '샘'까지만 갈 수 있다면 하고 보챘기 때문에 그곳에 데리고 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올리고 이 애의 다리를 물에 적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오웬이...... 스스로 붕대를 풀어 본 것입니다." 방안은 한참 동안 조용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오웬이었다. "잊지 마시고 저를 새로운 크리켓 팀에 넣어 주세요, 신부님." 밖으로 나온 윌리 탈록은 프랜치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건 틀림없이 현대 의학의 한계를 초월한 뭔가 신비스런 그 무엇이 있을 거야. 회복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과학적으로 설명하려면 세포의 심리적 재생 말이야." 그는 갑자기 멈추어 서서 그 커다란 손으로 프랜치스의 팔을 잡았다. 그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 하느님이여! 신이 만일 있다면! 하여간 이 일에 대하여는 절대로 딴 말은 하지 않기로 하겠네." 그날 밤 프랜치스는 아무래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커다란 눈을 멀뚱히 뜨고 물끄러미 방안의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기적이다. 그렇다. 믿는 것 그 자체가 기적인 것이다. 욜단의 물, 루르드의 물, '마리아 샘'의 물-어느 곳의 물이든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흙탕물일지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라 한다면 믿는 마음에 보답이 있는 것이다. 마음속의 지진계가 격동을 기록해 간다. 그것은 신의 불가 지성에 대한 인식의 빛이었다. 그는 열렬히 기도했다. "오, 하느님이여! 우리들은 이 세상의 시작마저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의 작은 개미와 같은 존재입니다. 몇백만인지도 알 수 없는 두꺼운 막에 덮여서 오직 한결같이 하늘을 우러러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 신이시여......신이여, 저에게 겸손과......그리고 신앙을 주시옵소서!" 3 주교로부터 호출장이 온 것은 그런 일이 있은 지 3개월 후였다. 프랜치스는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부름을 받고 보니 역시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교관으로 가는 언덕을 올라가는 도중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빨리 뛰어왔기 때문에 옷이 흠뻑 젖지는 않았으나 흙탕물이 튀어 옷이 더러워져서 이대로는 좀 곤란하지 않을까 하고 약간 걱정이 되었다. 그러한 불안은 공식 접견실의 훌륭한 붉은 주단과 진흙투성이가 된 자기의 구두와 젖은 옷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더욱 심해졌다. 잠시 후 주교의 비서가 나타나 앞장서서 대리석 계단을 올라가 묵묵히 어두컴컴한 마호가니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프랜치스는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교는 테이블을 향해 앉아 있었으나 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팔꿈치를 가죽 의자의 팔걸이에 대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엷은 햇살이 높은 창문의 빌로드 커튼을 통해 주교의 보랏빛 법관을 한층 빛나게 하고 있었고, 얼굴은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프랜치스는 주교의 태연한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이 분이 정말 호리웰이나 산 모랄레스의 그 사람일까 하고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방안에는 벽난로 위에 놓인 나전 세공의 탁상시계가 조용하게 시간을 새기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이윽고 엄격한 소리가 떨어졌다. "여어, 프랜치스 신부, 오늘은 어떤 기적의 보고를 가져왔는가. 그렇다면 잊기 전에 묻고 싶은데, 댄스홀의 일은 잘 되어 가는가?" 프랜치스는 느닷없이 목을 졸리는 것 같은 느낌으로 할 수만 있다면 살려 주십사 하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주교는 넓은 융단 위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프랜치스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직하게 말해서 늙은이인 내 입장에서 말한다면 자네처럼 눈부신 실수를 거듭하는 신부를 만나는 것도 또한 대단한 효험 있는 약이 되는 거야. 대개 여기에 오는 사람들은 장의사로서 성공했습니다 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들어오기 마련인데 말이야. 자네 그 몰골이 뭔가? 더구나 굉장한 구두까지 신고 있잖은가." 그는 천천히 일어나 프랜치스 쪽으로 다가왔다. "자네 참 잘 왔네. 그런데 퍽 야위었군." 그는 한 손을 프랜치스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어찌된 거야. 옷이 다 젖어 버리지 않았나." "오다가 비를 만났습니다." "뭐라고! 우산도 없는가! 이리 불 가까이로 오게나. 뭔가 따뜻한 것을 들어야지." 그는 작은 찬장 안에서 술병과 글라스를 두 개 꺼냈다. "나는 아직 이런 높은 지위에 익숙하지 못하네. 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초인종을 눌러서 주교가 애용하는 고급 포도주를 명하는 것이 예의겠지만 말이야. 이건 보통의 그랜리비트(고급 위스키)인데, 우리 스코틀랜드인에게는 이런 술이 훨씬 적합하다네." 그는 위스키를 따른 작은 글라스를 프랜치스에게 건네주며 그가 마시는 것을 보고 자기도 마셨다. 그리고 난로 옆에 걸터앉았다. "지금 높은 지위라고 말했는데, 그렇게 무서워하는 얼굴로 날 보지 말게나. 나는 이처럼 거창하게 옷치장을 하고 있지만 이 옷 속에는 스틴챠 강을 벌거벗고 건넌 그 볼썽사나운 몸뚱이 그대로일세." "프랜치스는 얼굴을 붉혔다. "네,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그대로 잠시 아무 말이 없었으나 이윽고 주교의 다정스러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자네도 무척 괴로운 꼴을 당한 모양이더군. 산 모랄레스를 떠나온 후에......" 프랜치스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실수도 저질렀습니다." "정말인가?" "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서는 미리부터......여기에 호출되어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제랄드 신부님의 마음에 들지 못한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마음에만 든다는 건가, 응?"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저 자신이 정나미가 떨어져서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반항적 성격 때문입니다." 문득 그는 입을 다물었다. "자네의 가장 큰 실수가 뭐라고 생각하나. 시의회 의장인 샨드를 축하하는 연회에 출석하지 않은 모양이더군......그는 이번에 주제단 건립 자금으로 5백 파운드라고 하는 큰돈을 기부한 사람이야. 왜 그러는 건가. 선량한 시의회 의장을 자네가 인정하지 않다니......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사람은 샨드 가의 빈민굴의 집세 문제를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게 한다고들 하던데......" "아닙니다......" 프랜치스는 망설이면서 숨을 내쉬었다. "저는 그런 일은 알지 못합니다. 출석하지 않은 것은 제가 나빴습니다. 제랄드 신부가 우리들에게 출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특히 다짐을 하셨습니다. 그 연회를 대단히 중요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겼기 때문에......" "오?" 주교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침 그날 오후 다른 곳에서 꼭 와 달라는 부탁이 있었습니다." 프랜치스는 그것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으나 하는 수 없이 말을 했다.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에드워드 바논......벌써 옛날의 모습은 없어져 버렸습니다. 계속 병환 중에 있어서 아주 형편이 없습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은 됐는데 그 사람은 제 손을 꼭 쥐고 제발 더 있다가 가라고 애원을 하는 것입니다.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저는 그 이상한 모습으로 죽어 가고 있는 인간이 참으로 불쌍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마침내 '성스러운 아버지 존, 성스러운 아들 존, 성령이신 존' 하고 중얼거리면서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것도 제 선을 꼭 쥔 채 희끗희끗한 텁수룩한 수염에 침을 흘리면서 말입니다. 저는 차마 그의 잠든 손을 뿌리치고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이튿날 아침까지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프랜치스는 거기에서 잠시 말을 중단했다. 듣고 있던 주교가 입을 열었다. "과연 그렇겠군. 자네가 성인이 아니라 죄인 쪽을 선택했다고 해서 제랄드 신부의 기분이 상했군 그래." 프랜치스는 머리를 떨구었다. "저 자신도 스스로에게 화가 납니다. 어떻게든 자신을 보다 낫게 하려고 노력은 계속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이상합니다......어렸을 때 성직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절대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우리는 모두 성직자 이전에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단 말인가? 그렇겠지. 물론 자네의 반항적인 성격을 내가 좋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지도 몰라. 그러나 그건 우리가 너무 단조로운 신앙생활에 혁신적인 훌륭한 해독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세. 프랜치스, 자네는 방황하는 고양이야. 모두들 따분한 설교를 듣고 하품을 꾹 참고 있을 때, 교회 안에 들어오는 고양이란 말이야. 이건 비유로도 잘못된 것이 아닐 거야. 자네는 다 알고 있는 규칙을 절대로 중요하게 지키고 있는 자네 동료들과 잘 어울리진 못하지만 역시 자넨 성당 안의 인물이야. 이 교구에서 진실로 자네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나 한 사람뿐일거야.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뭐 내가 기분이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니야. 하여간 내가 여기 주교로 있다고 하는 것은 자네에겐 행복한 조건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주교님!" "내가 본 바로는......." 주교는 깊이 생각하는 어조로 말했다. "자넨 실패를 한 것이 아니고 대단한 성공을 거둔 거야. 그러니까 좀더 명랑해질 필요가 있네. 그래, 자넬 치켜세울 생각은 없지만 좋으니까 좀더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자네는 사물을 철저하게 연구하는 편이며, 또 정에도 너무 약한 데가 있어. 사고와 회의를 확실히 구별하는 두뇌도 가지고 있네. 자넨 아무나 시키는 대로 따라만 하는, 그리고 내 일이 끝났다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런 사무적이고 규칙적인 사람과는 다르단 말이야. 더구나 자네의 가장 좋은 점은 프랜치스, 신앙이라기보다는 교리에서 생기는 누구나 가진 그 거만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일세." 주교는 잠시 말을 중단했다. 프랜치스는 점차로 이 노인과 대하고 있는 동안에 자기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조용히 시선을 떨군 채로 있었다. 이윽고 주교가 온화한 말로 계속했다. "물론 이번 일도 어떻게든 손을 쓰지 않으면 자네는 또 고통을 받을 것이 틀림없어. 지금까지와 같이 몽둥이를 휘둘러 대면 또 많은 사람이 상하겠지. 자네 자신도 예외일 수는 없어. 아니, 나는 알고 있어. 자네가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자네 생각과는 달라. 자네를 무의미하게 희생시킬 수 없어. 그래서 자네에게 하나의 제안을 하려고 하네." 프랜치스가 황급히 얼굴을 들자, 주교의 애정이 충만한 눈과 맞부딪쳤다. 주교는 미소를 지었다. "어떤가, 한번 나를 위하여 분발해 주지 않겠는가. 나는 자네를 참다운 동료로 생각하고 있네. 내 마음을 알겠는가." "무슨 말씀이라도......" 프랜치스는 더이상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몰랐다. 주교는 한참을 잠자코 있었다. 그 얼굴은 조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야......전임은 예상도 안 했을 터이고......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면 주저하지 말고 그렇다고 말해도 상관없어. 그러나 자네에게 이 이상 적합한 일은 없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네." 거기에서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우리 해외 포교단에서는 간신히 중국에 교구 설치를 하게 됐다네. 여러 가지 수속이 완료되는 대로 그리고 자네의 준비가 되는대로 떠나면 되는데, 어떤가, 모험을 각오하고 최초의 선교사로 중국에 가볼 생각은 없는가?" 프랜치스는 너무나 뜻밖의 말에 어안이벙벙하여 잠시 동안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잠자코 있었다. 주위의 벽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안이라 해도 이것은 너무나도 뜻밖이며 엄청난 일이라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고국을 떠나 친구를 버리고, 그리고 멀고먼 미지의 이국 땅으로 길을 떠난다......이런 일은 지금껏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일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만족감이 전신에 충만해 오는 것이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가게 해주십시오." 마그냅 주교는 몸을 굽혀 프랜치스의 손을 잡았다. 그의 두 눈은 젖어 있었으며 프랜치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도 자네가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네. 그리고 틀림없이 자네는 나의 체면을 세워 줄 것으로 믿었네. 그런데 거기에 가서는 연어 낚시는 할 수 없을 거야, 알겠나. 그것만은 미리 알아두게나." 제 4부 중국에서 생긴 일 1 1902년 초, 톈진에서 1천마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오지인 절강성을 흐르는 황하의 끝없는 황토 기슭을 따라, 한 척의 정크가 한쪽으로 약간 기우뚱한 채 물살이 거의 없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배에는 그다지 남루하달 수는 없지만 신통치 않은 옷을 걸친 한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그는 보통 체격의 카톨릭 신부이며, 테를 두른 구두를 신고 낡은 헬멧을 쓰고 있었다. 잘라 낸 그루터기와 같은 뱃머리의 나무토막에 말을 탄 듯이 앉아서 성무 일과표를 한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프랜치스는 큰 소리로 중국어를 연습하다가 그것을 잠시 그쳤다. 침이 말라 버릴 정도로 열심히 연습을 한 탓인지 중국어의 음계는 모두 반음계와 같은 억양을 가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지나쳐 가는 갈색뿐인 황토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가운데 갑판이 겨우 3피트밖에 되지 않는 선실 안에서 벌써 열흘 동안이나 밤을 보냈으므로 그는 몹시 지쳐 있는 데다, 맑은 공기를 쐬고 싶어 손님들의 보따리며 여기저기 짐이 흐트러져 있는 사이를 겨우 비집고 뱃머리로 나온 것이다. 가운데 갑판에서는 농부들과 센샹에서 탄 바구니 제조공, 갖바치, 마적과 어부, 거기에 파이탄으로 가는 병사와 상인, 그들의 집오리를 담은 큰 바구니와 돼지를 넣은 망태, 단 한 마리지만 사람을 얼씬도 못하게 하는 산양을 넣은 그물 망태 사이에서 그들은 팔꿈치를 서로 맞대고 담배를 피우거나, 이야기를 하고 또 요리 냄새까지 피우는 등 굉장했다. 프랜치스는 결코 너무 깔끔하게 행동하지 않으려고 생각했으나, 여행이 거의 끝날 무렵에 이르러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이 너무 추하고 풍겨 오는 냄새가 지독한 데에는 정말 참기가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오늘밤 드디어 파이탄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프랜치스는 하느님과 성 안드레아에 감사하고 싶었다. 그는 아직도 자기가 이 진기한 새로운 세계에 와 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멀리 이 외국까지 와서, 지금까지 알고 있었거나 또는 알려고 하는 모든 것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멀어져 버렸다고는 아직도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자기의 인생 행로가 느닷없이 그 자연스런 방향에서 기괴한 방향으로 빗나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속으로 삭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평온 무사한 정상적인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만이 불필요하고 잘못되었으며 약간 비뚤어져 있는 인간인 것이다. 고국에서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할 때에는 정말로 괴로웠었다. 네드는 고맙게도 3개월 전에 이 세상을 하직했다. 그 기괴하고 비참한 인생의 마지막으로서는 오히려 축복된 최후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폴리 아주머니와는......앞으로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라면서 기도했다. 그래도 쥬디가 타인카슬의 시청에 타이피스트로 채용된 것은 큰 위안이었다-그 자리는 확실하고 승진의 기회도 많은 곳이었다. 다시 한 번 신념을 굳게 하려는 것처럼 그는 이번의 임명에 관하여 최후로 받은 편지를 안주머니에서 꺼냈다. 그것은 성 도미니코 성당의 성직을 물러나고, 지금은 오로지 해외 포교단의 일만 맡아보고 있는 밀리 신부에게서 온 것이었다. 주소가 리버풀 대학부로 되어 있는 것은 프랜치스가 거기에서 1년간 중국어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친애하는 프랜치스 치셤 신부에게 여기에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게 된 것을 나는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네. 지금 막 접수된 보고에 의하면 알다시피 오는 12월에 해외 포교단 관리국에서 신청한 바 있는 절강성 교구 관할 내의 파이탄 파견에 대한 건이 포교성성에 의하여 이번에 정식으로 재가가 났다네. 타인카슬 해외 포교단에서 오늘밤 개최된 회합에서도 자네의 출발을 더이상 연기시킬 이유가 없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지. 드디어 동양에서의 자네의 영광된 선교 활동에 대한 성공을 빌 수가 있게 되었네. 파이탄은 내가 확인해 본 것에 의하면, 다소 오지이긴 하지만 아름다운 강변과 쾌적한 환경을 가진 지방이라고 들었네. 대바구니의 주생산지로 알려진 번화한 도시라고 하더군. 곡류, 식육, 거위 및 열대성 과일 등이 풍부하다더군. 그러나 더욱 중요하고 축복된 사실은, 다소 먼 지리적인 조건이었기 때문에 요즘 일년간 불행하게도 사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교가 지극히 성행한다는 점일세. 불행하게도 사진이 없어서 유감이지만, 나는 교회와 사제관의 경내 시설은 극히 만족할 만한 것이라고 믿고 있네(이 경내라고 하는 말에는 어쩌면 그렇게 자극적인 여운이 있단 말인가. 자넨 인디언 놀음을 하던 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가. 나의 흥분을 용서하게). 그러나 무엇보다도 잘된 일은 확실한 통계가 있다는 점이야. 1년 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간 전임자인 롤러 신부의 연간 보고서를 함께 넣었으나 참고하기 바라네. 나는 이것을 자네를 위하여 분석할 필요를 굳이 인정하지 않고 있네. 왜냐하면 자네가 상세히 연구하고 또한 가장 단시간 내에 완전히 파악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일세.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숫자를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이야. 파이탄의 성당은 설립된 지 아직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성찬의 영광을 입은 자가 4백, 영세를 받은 자가 1천 명 이상이라고 하는 성과를 자랑하고 있다는 점을 말이야. 임종시에 영세를 받은 자는 그 가운데 겨우 3분의 1뿐이야. 이것은 기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프랜치스 신부!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이교 사원이 한가운데서도 믿지 않는 신도의 마음에까지 얼마나 큰 감화를 미치는가 하는 좋은 일례가 아닌가. 친애하는 프랜치스, 이러한 선택된 지위가 자네의 것이 되었음을 나는 마음으로부터 기뻐해 마지않네. 그리고 자네의 터전에서 노동에 의하여 실질적인 수확이 더욱 증대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네. 하여간 성공적인 첫발을 기다리고 있겠네. 나는 자네가 드디어 천직을 찾은 것이라 생각하며 동시에 과거에 있어서 자네의 명예를 손상시킨 약간의 이상한 행동이 이제는 자네 일상생활의 장애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프랜치스, 겸손이야말로 하느님의 종복인 우리들의 생명의 피와 같다고 생각하네. 나는 자네를 위하여 매일 밤 기도하겠네. 다시 뒤에 소식 전하겠네. 부디부디 여행 준비에 세심한 주의를 바라네. 튼튼하고 질긴 고급 수단을 고르게나. 속바지는 짧은 것이 좋으며 그리고 복대를 준비해야 할걸세. 한슨 부자 상회에 가 보게. 주인은 정직하기 짝없는 사람이야. 아무튼 본당의 올간 연주자의 사촌이니까. 아마 자네의 상상보다 빨리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네. 나의 새로운 지위는 나로 하여금 지구를 한 바퀴 돌게 할 것 같네. 파이탄의 경내에서 만난다는 것은 근사한 일이라 생각하네. 또다시 진심으로 축하하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자네의 충실한 형제 타인카슬 주교관구 해외 포교단 비서 안셀모 밀리 해질 무렵이 되자 정크 속의 소란함은 도를 더했다. 드디어 도착 작전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배는 강을 따라 크게 원을 그리더니 거룻배가 여러 척 붐비고 있는 물이 더러운 항만으로 들어갔다. 프랜치스는 낮은 계단 같은 도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거리는 소음과 노란 불빛으로 북적거리는 벌집 같았다. 바로 눈앞에는 뗏목이나 거룻배들이 점점이 떠 있는 갈대가 무성한 갯벌이 펼쳐지고, 훨씬 멀리에는 희미한 복숭아색과 진주색으로 흐린 산자락이 그 배경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성당에서 마중을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마중 나온 것은 챠씨 소유의 거룻배뿐이었다. 그는 파이탄의 부유한 상인인데, 지금에야 비단옷을 입고 몹시 무표정한 얼굴로 배 밖으로 나타났다. 그의 나이는 서른 다섯쯤 된 것 같으나, 그 지나치게 침착한 태도 때문에 훨씬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부드럽고 탄력 있는 황금색 피부에 머리칼은 촉촉이 젖어 보일 정도로 윤기가 났다. 선원들이 주위에서 떠들 때도 이 사람만은 움쩍도 않고 담담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프랜치스에게 눈길을 주지는 않았으나, 프랜치스는 어쩐지 그에게 관찰 당하고 있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사무장이 수속을 세밀하게 했기 때문에 프랜치스가 양철 트렁크를 들고 사람들을 헤치고 밖으로 나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거룻배로 옮겨 탈 때 프랜치스는 커다란 비단 양산을 꼭 쥐고 있었다. 이것은 치셤의 이름을 새긴 좋은 양산이며, 마그냅 주교가 이별 기념으로 준 것이었다. 기슭에 가까이 오자 선착장에 사람들이 매우 북적거리는 것을 보고 그는 약간 흥분이 되었다. 신도들이 환영을 나와 준 것일까. 긴 여행이긴 했지만 이렇게 열렬히 환영해 주다니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그의 심장은 감미로운 기대로 거의 고통에 가까울 정도로 울렁거렸다. 그러나 내려서 보니 전적으로 자기의 착각인 것을 알았다.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서글픈 얼굴을 무심히 쳐다보는 군중을 헤치고 치셤은 서서히 나아갔다. 그는 계단을 다 올라가서 갑자기 우뚝 섰다. 눈앞에 중국인 부부가 기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산뜻한 청색 옷을 입고 화려한 색채의 '성가족'그림을 마치 신임장처럼 받쳐들고 있었다. 그가 멈춰서자 그 작달막한 두 사람은 한껏 기쁨의 표정을 지으면서 다가와 허리를 굽히며 열심히 성호를 그었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우리는 호산나 왕과 피로메나 왕입니다. 당신 교회의 전도사들입니다, 신부님." "성당에서 나오셨군요?" "네, 그렇습니다. 롤러 신부님은 성당을 대단히 훌륭하게 만드셨답니다, 신부님." "성당까지 안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럼, 가시죠. 그런데 너무 더우니 우선 저희 집에 들렀다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맙소. 그러나 나는 먼저 성당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러시겠지요. 그럼 성당으로 가시지요. 신부님을 위해서 가마를 준비했습니다." 호산나는 알 수 없을 정도로 약간 얼굴을 찌푸렸으나 미소를 머금은 채 뒤돌아보며 빠른 중국말로 알아듣지 못할 말다툼 같은 말을 주고받더니, 두 가마꾼들을 보내 버렸다. 뒤에 남은 사람은 쿠리(중국인 노동자) 두 사람 뿐으로, 한 사람은 트렁크를 들고 다른 한 사람은 양산을 들고 일행은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좁고 지저분한 거리지만 정크 속에서 시달려 온 프랜치스에게는 다리를 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자 뭔가 뜨거운 것이 불현듯 가슴을 치밀어 올라왔다. 처음 보는 것뿐인 가운데서 인간적인 그 어떤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한 심장을 획득하고 그러한 영혼을 구제하는 것이 그의 임무인 것이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왕이 멈춰 서서 자기에게 말을 걸었다. "그물 상가에 좋은 여관이 있습니다......1개월에 단 5냥입니다......어떻습니까, 신부님. 오늘밤은 거기서 쉬시는 것이......" 프랜치스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 돼요, 호산나. 성당으로 곧장 갑시다." 호산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로메나가 기침을 했다. 프랜치스는 그때서야 두 사람이 거기에 서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호산나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신부님, 여기가 성당입니다." 처음엔 그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눈앞의 강둑에 햇빛에 말라 갈라지고 비 때문에 도랑이 생기고, 마구 밟혀 발자국이 수없이 나 있는 물렁한 흙에 에워싸인 1에이커 정도의 황폐한 땅이 있었다. 그 한 모퉁이에 지붕은 날아가 버리고 한쪽 벽은 허물어진 채 남아 있는 벽도 거의 성한 곳이 없는 흙벽돌로 된 성당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그 주위에는 키가 큰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런 폐허 가운데 기울어지기는 했으나 아직 초가집 하나가 남아 있었다-마구간이었다. 프랜치스는 약 3분간 그대로 서 있었으나 자신의 바로 옆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말끔한 옷차림을 하고 쌍둥이처럼 서 있는 속을 알 수 없는 왕 부부를 마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된 거요?" "아름다운 성당이었습니다, 신부님. 돈도 꽤 많이 들었지요-우리들은 이 건물을 위해서 여러 군데서 돈을 융통하느라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롤러 신부님이 성당을 이 냇가에 지었기 때문에 악마가 비를 많이 내리게 해서 이렇게 됐습니다." "그럼, 신도들은 어디에서 모입니까?" "그놈들은 나쁜 놈들이에요. 천주님을 믿지 않으려 해요."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보충하면서 손짓 몸짓으로 점점 말을 빠르게 했다. "신부님, 우리가 얼마나 성당을 갖고 싶어하는지 알아주십시오. 아, 롤러 신부님이 가신 뒤 우리들은 매달 받던 15냥의 급료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못된 놈들을 다루기는 정말 어렵습니다요, 신부님." 치셤 신부는 벌써부터 비참한 기분이 되어 그곳을 외면했다. 이것이 자기의 성당이며, 이 두 사람이 유일한 교구민인 것이다. 주머니 속의 편지를 생각하니 불현듯 격렬한 감정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면서 굳어진 자세로 서 있었다. 왕 부부는 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자꾸만 시내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간신히 돌려보내고 나서야 그 귀찮은 존재들로부터 피할 수가 있었다. 지금 그에게서 가장 큰 위안은 다만 혼자 있는 것이었다. 그는 굳게 결심을 하고 마구간 안으로 트렁크를 운반했다. 일찍이 마구간도 그리스도에게는 충분한 삶의 터전이었던 때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흙바닥에는 아직 짚이 푹신하게 깔려 있었다. 먹을 것도 물밖에 없었으나 최소한 자신의 잠자리만은 생긴 셈이었다. 트렁크를 열고 모포를 꺼내 편안한 잠자리를 만들기 위해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서 갑자기 종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황급히 마구간에서 뛰어나갔다. 거기에는 두꺼운 각반을 차고 노란 솜옷 장삼을 걸친 노승이 저녁 공양을 위해 손종을 울리며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승직자는-불타와 그리스도를 받드는 승직자는-말없이 서로를 탐색하고 있었으나, 이윽고 노승은 무표정하게 방향을 돌려 돌계단을 넘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밤은 순식간에 찾아와 어두운 장막을 온 누리에 드리우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황폐한 경내의 어둠 속에 무릎을 꿇고 빛나기 시작한 성좌를 우러러보았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했다. "하느님, 당신은 저에게 무에서부터 시작하라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저의 허영, 저의 고집과 오만에 대한 벌인 가요. 그러시다면 좋습니다. 절대로 중도에서 그치지 않겠습니다......절대로......절대로!" 그는 잠을 자려고 마구간으로 돌아와 귀찮게 덤벼드는 모기와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무더운 밤공기를 뒤흔드는 가운데서 억지로나마 웃어 보려고 했다.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어리석음에 눈을 뜬것이다. 성 테레사(칼멜 수도원을 개혁한 16세기의 스페인 성녀)는 인생을 여관에서의 하룻밤에 비유했다. 그러나 그가 파견되어 온 이곳은 결코 리츠와 같은 여관은 아니었다. 어쨌든 아침은 부옇게 밝아 왔다. 나무상자에서 성찬배를 꺼내어 트렁크로 성단을 꾸미고 마구간 바닥에 꿇어앉아 미사를 올렸다. 그러고 나니 아주 마음이 상쾌하고 기분도 밝아지고 힘도 솟았다. 호산나 왕이 온 뒤에도 그 기분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신부님, 제게 복사를 시켜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 일도 저의 급료에 포함되는 일인뎁쇼. 그건 그렇고-그물 상가에 방을 하나 알아볼까요?" 프랜치스는 생각이 달라졌다. 엊저녁엔 사태가 호전될 때까지 여기에서 살겠다고 확실하게 결심을 했었으나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좀더 적당한 중심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대답했다. "자, 그럼 같이 가 볼까요?" 거리엔 이미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있었다. 개가 사람의 가랑이 사이로 뛰어다니고, 돼지가 도랑에서 밥찌꺼기를 찾아 코를 박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들의 뒤를 따라와서 킬킬거리며 웃거나 놀려대곤 했다. 거지들이 귀찮게 손을 내밀고 아우성을 쳤으며, 초롱 상가에서는 노점을 차리고 있던 노인이 저런 흉한 코쟁이놈 보기도 싫다는 듯이 불쾌한 얼굴을 하고는 프랜치스의 발 밑에다 대고 침을 뱉았다. 재판소 앞에서는 순회 이발사가 서서 가위 소리를 시끄럽게 내고 있었다. 빈민이나 불구자가 많이 눈에 띄었고 그 중에는 음이 높은 피리를 불면서 대나무 지팡이로 땅바닥을 탁탁 치면서 걸어가는 곰보 장님도 있었다. 왕이 데리고 간 2층집 방이라고 하는 곳은 종이와 대나무로 대강 칸막이를 해 놓긴 했지만 앞으로 할 일에는 그런 대로 소용이 될 것 같았다. 많지 않은 돈주머니에서 홍이라고 하는 주인에게 한 달 분의 방값을 치르고 그는 지체없이 십자가와 한 장밖에 없는 제대포로 방을 장식했다. 수단과 제단용 비품의 부족이 그를 초조하게 했다. 번창하는 성당이라 충분한 설비가 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왔기 때문에 그런 것은 거의 아무것도 준비해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명색만은 갖춘 셈이었다. 왕은 그보다도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걸 내려다보니 홍이 아까 그가 건네 준 돈 중에서 은화 두 개를 머리를 꾸벅꾸벅 하면서 왕에게 주는 것이었다. 프랜치스는 롤러 신부가 남겨 놓고 간 것의 가치는 이미 미루어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것을 보자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거리로 나와서 그는 왕에게로 조용히 얼굴을 돌렸다. "유감이지만 호산나, 나는 당신에게 월 15냥의 급료를 지불할 수 없겠어요." "롤러 신부님은 주셨습니다요. 신부님은 왜 주시지 못하십니까?" "나는 돈이 없기 때문이오, 호산나. 우리 주님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요." "신부님은 그럼 얼마나 주시겠습니까?" "글쎄 한 푼도 지불 못한다니까, 호산나. 나도 급료를 받고 있지 않으니까 말이야. 우리들에게 보수를 주시는 것은 천주님뿐이오." 왕은 웃음을 잃지도 않고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렇다면 호산나와 피로메나는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로 가야겠군요. 센샹에서는 메서디스트(신교의 교회)라도 존경받고 있는 전도사에게는 16냥씩 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부님은 꼭 후회하실 것입니다. 파이탄은 대단히 적개심이 강한 곳입니다. 주민들은 이 읍내의 풍수설이 선교사들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는 신부의 입에서 무슨 대답이 나올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프랜치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왕은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고는 사라졌다. 왕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프랜치스는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일한 신도인 왕 부부와 인연을 끊은 것은 과연 잘한 일인가? 아니 나쁠 것도 없을 것이다. 왕과 같은 사람은 자기의 친구가 아니라 돈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믿는 척하는 아첨꾼이며 기회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럴지라도......자신과 이 도시와의 유일한 유대가 이것으로 단절된 것이다. 그는 갑자기 혼자라는 무서운 생각에 사로잡혔다. 며칠이 지나도 이 무서운 고독감은 정신을 마비시킬 것 같은 무력감과 함께 더해 갈 뿐이었다. 전임자인 롤러 신부는 모래 위에 누각을 지은 것에 불과하다. 롤러는 무능하고 기만당하기 쉬운 사람이었으나, 돈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므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돈으로 사람을 사고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아무에게나 영세를 해주고 '돈으로 낚아지는 그리스도교도'의 무리를 만들어 놓고는 장문의 보고서를 보냈던 것이다. 그는 완전히 속고 있는 것도 모르고 기분이 좋아 위장된 승리에 도취했던 것이다. 따라서 겉으로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는 않았지만 그 허황된 승리는 이 도시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외국인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인상 이외에 남긴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생활비를 위한 약간의 돈과 떠나올 때 폴리 아주머니가 억지로 손에 쥐어 준 5파운드 짜리 지폐 한 장밖에는 돈이라고는 가지고 있지 않은 프랜치스였다. 더구나 새로 창설된 본국의 포교단에 원조를 요청해도 헛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롤러의 못마땅한 처사에 울분을 느끼며 오히려 돈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리고 마음을 긴장시키고 돈으로 신자를 사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고 맹세했다. 본연의 임무를 하느님의 도움과 자신의 두 다리로 성취해야 한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현재의 입장으로서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임시로 꾸려 놓은 성당밖에 게시판을 내걸었다. 역시 아무런 반응도 오지 않았고, 미사에 참례하러 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왕 부부가 이번에 온 신부는 가난뱅이며, 까다로운 말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다녔기 때문이다. 한번은 재판소 앞에서 야외 설교를 시도해 봤다. 그러나 비웃음만 실컷 샀을 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 실패로 그는 심한 굴욕을 느꼈다. 리버풀의 거리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엉터리 영어로 설교하던 중국인 세탁소 주인도 이보다는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내부에서 자기의 무능을 비웃는 악마의 소리와 격렬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는 거의 필사적으로 기도를 했다. 그는 기도의 효험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 하느님, 당신은 과거에 저를 도와 주셨습니다. 하느님, 이번에도 힘을 주십시오. 하느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어떤 때는 미친 사람처럼 날뛸 때도 있었다. 왜 놈들이 나를, 제법 당연한 것 같은 구실을 엮어 이러한 오지에 보낸 것일까. 이러한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 하느님의 힘으로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모든 교통이 차단된 이 오지에선 현상 유지조차 어려운 것이다. 가장 가깝다고 하는 센샹의 치보드 신부도 여기에서 4백 마일이나 떨어져 있지 않은가 말이다. 왕 부부에 말에 선동되어 그에 대한 시민의 적의는 날로 증대될 뿐이었다. 아이들의 조소에도 그는 익숙하게 되었다. 요즘은 거리를 걸을 때면 젊은 쿠리들이 모여들어 그의 뒤를 따르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만일 되돌아서기라도 하면 무뢰한이 다가와서 그의 발 밑에 오줌을 싸갈기는 것이었다. 어느 날 밤, 마구간으로 돌아왔을 때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돌이 날아와 그의 이마에 맞았다. 이런 일들은 오히려 프랜치스의 본능을 한층 불타오르게 했다. 상처를 입은 이마에 붕대를 감으며 그 상처로 해서 갑자기 무모한 생각이 솟구쳤다. 그렇다! 그는 결연히 생각했다. 좀더......좀더 민중에 접근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그렇게 하면......수단은 아무리 소박해도 상관없다......그리고 새로운 노력을 하면 뭔가 효력이 있어 목적에 근접할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튿날 아침, 그는 한 달에 2냥씩 더 지불하기로 하고 아래층 점포의 뒤쪽에 있는 방을 빌려 당장 진료소를 열기로 했다. 그는 전문의는 아니었지만 이 사실을 누가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성 요한 병원에서 응급치료 강습을 받은 일이 있었고, 그 수료증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닥터 탈록과의 오랜 교우로 보건 위생에는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엔 누구 한 사람 진료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절망한 나머지 안절부절못하였다. 그러나 차츰차츰 호기심에 이끌려 한 사람 두 사람 찾아오기 시작했다. 시내에는 병자가 그칠 새가 없었고 중국인 의사의 치료법은 매우 원시적이었다. 그가 치료한 몇 사람의 환자가 완전히 병이 나았다. 그러나 그는 사례비도 믿음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자 환자가 늘어갔다. 그는 지체없이 닥터 탈록에게 편지와 함께 폴리에게서 받은 5파운드 지폐를 동봉하여 치료 용품과 붕대와 간단한 비상약을 보내 주도록 부탁했다. 성당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으나 진료소만은 예외였다. 밤이 되면 그는 폐허가 된 성당을 거닐면서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기곤 했다. 물이 범람하는 이 장소에 성당의 재건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길 건너 아름다운 '비취 언덕'으로 눈길을 돌려 격렬한 욕망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 언덕은 몇 개의 절이 있는 위쪽으로 삼나무에 덮여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성당을 세우기에는 그 얼마나 품위가 있고 적당한 장소인가! 이 언덕의 주인은 시의 재판관인 파오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이 시의 시정을 장악하고 있는 호상이나 관리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그도 규벌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이 토지의 관리를 하고 있는 마흔 남짓한 키가 큰 고급 관리인 파오의 사촌은 거의 매일같이 오후에 나타나 숲속의 점토 채취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에게 급료를 지불하고 돌아갔다. 몇 주일 동안의 고민으로 초췌해진 프랜치스는 기분이 몹시 침울했고, 더구나 소외감과 굴욕으로 정신도 심상치 않았다. 자기는 아무것도 가지고 잇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찮은 인간이라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문득 생각 없이 거리를 가로질러가 가마를 타고 가는 키가 큰 파오의 사촌을 불러 세웠다. 그는 이렇게 직접 사람에게 접근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을 알지 못했었다. 실제로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잇는지 거의 의식도 하지 않았다. 요즈음 식사를 해본 적도 없었고 더구나 미열이 있어서 머리도 멍한 상태였었다. "당신이 관리를 하고 계신 모양인데, 저 '비취 언덕'은 참으로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뜻밖의 일이라 당황하긴 했으나 그래도 파오 씨의 사촌은 서글서글한 눈으로 이마에 더러운 붕대를 감은 이 작달막한 외국인의 예의로 대하여 바라보았다. 그는 냉정하면서도 은근하게 신부가 몇 번이나 문법상의 오류를 범하면서 말하는 것을 난처해하면서 자기의 일, 가족의 일, 그리고 자기의 재산에 관한 것은 화제에 올리지 않고 날씨라든지 농사라든지, 작년에는 이 도시가 와이 츄의 비적단에게 돈을 주어 물리친 괴로운 일 등을 이야기했다. 그러고 난 다음 성큼성큼 자기 가마의 문을 열었다. 프랜치스가 현기증이 나는 머리로 '비취 언덕'의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자 그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비취 언덕은 넓이가 60무 이상이나 되고 값을 칠 수 없을 만큼 금싸라기 땅입니다......나무도 물도 풀도 있고요......더군다나 기와와 벽돌, 도자기의 재료가 되는 질이 매우 좋은 찰흙의 채취장이기도 하지요. 파오 씨는 팔 의사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사겠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거절했습니다......은화 1만 5천 냥으로 사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상했던 값보다 10배나 되는 것을 알고 프랜치스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열은 이미 내린 것 같으나 갑자기 몸이 노곤하여 현기증을 느끼고 자기가 지금까지 꿈꾸고 있던 어리석음이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면서 파오 씨의 사촌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도 알 수 없는 변명을 했다. 프랜치스의 실망을 눈치 챈 중년의 깡마른 교양 있는 중국인은 조심스럽게 얼굴에 경멸의 빛을 떠올렸다. "신부님은 왜 중국에 왔소? 댁의 나라에는 갱생시킬 나쁜 인간이 없단 말인 가요? 우리들은 나쁜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종교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은 당신의 하느님보다 오래된 하느님입니다. 다른 신부님은 임종에 처한 인간에게 작은 병에 든 물을 떨어뜨리면서 '야아, 오오!' 하는 노래를 부르며 많은 그리스도 신자를 만들었습니다. 입을 것이 있고 배만 부르면 무슨 노래라도 부르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자꾸 옷과 음식을 주어 많은 그리스도 신자가 늘어나긴 했지요. 신부님도 그런 방법으로 하실 겁니까?" 프랜치스는 한참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야윈 얼굴은 초췌하여 핏기도 없고 눈은 움푹 패였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까?" 파오 씨의 사촌은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실례했습니다."그는 매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제가 잘못 안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신부님은 정직한 분이십니다." 그는 가책을 느꼈는지 약간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좋은 땅이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유감입니다. 뭔가 다른 방법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파오 씨의 사촌은 아까의 무례를 보상이라고 하려는 것인지 이번에는 은근한 태도로 신부의 대답을 기다렸다. 프랜치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어떻습니까, 정직하게 말해서 여기에는 참다운 그리스도교도가 없습니까?" 파오 씨의 사촌은 천천히 얘기했다. "아마 없을 겁니다. 파이탄에서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은 무리한 얘기죠." 거기에서 잠시 말을 중단하였으나 다시 "콴산 속에 그런 마을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먼 산자락을 막연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마을은 훨씬 옛날부터 그리스도교도의 마을이라고 불렸죠. 그러나 굉장히 멉니다. 여기에서 수백 리나 떨어져 있으니까요." 프랜치스는 초췌해진 어두운 마음에 뭔가 번쩍 밝은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건 참 근사한 일이군요. 좀더 상세히 가르쳐 주시지 않겠습니까?" 상대방은 유감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고원 가운데 있는 작은 마을인데......아무도 모를 겁니다. 내 사촌 동생이 양피 구입 관계로 그 마을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의 말에 프랜치스는 애원조로 말했다. "그 사촌 동생에게 물어 봐 주실 수 있습니까? 거기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지도 같은 것이 있다면 더욱 좋겠구요." 파오 씨의 삼촌은 잠시 생각하더니 신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사촌에게 물어 보지요. 그리고 당신이 대단히 훌륭하다는 것도 전하겠습니다." 그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전혀 뜻밖의 희망으로 프랜치스는 완전히 활기를 되찾았다. 폐허가 된 성당에는 모포 몇 장과 물을 넣는 가죽부대와 거리에서 산 약간의 도구로 원시적인 야영 설비가 되어 있었다. 쌀을 사용하여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면서 그의 손은 쇼크를 받은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리스도교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마을을 찾아내고 말 것이다. 그것은 피로에 지쳐 버린 결실이 없는 요즘 수개월을 통해서 처음으로 얻은 감동이여, 하느님의 계시이기도 했다. 그는 어두컴컴한 방에 앉아서 긴장된 기분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물가에서 뭔가 썩은 고기라도 서로 다투듯 새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너무 귀찮아 일어나서 그는 밖으로 나가 새떼를 쫓아 버렸다. 추하게 생긴 큰 새들이 울면서 건너쪽으로 날아갔다. 잘 살펴보니 새들의 먹이였던 것은 갓난 여자아이의 시체였다. 그는 전율을 느끼면서 찢긴 시체를 강에서 주워 올렸다. 질식시켜서 강에 던져 버린 것 같았다. 그는 이 작은 시체를 린넨 천에 싸서 성당 마당 한 구석에 묻어 주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그렇다. 자기는 여러 가지로 자신을 갖지 못했으나 결국 이 이국의 땅은 자기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2 그런 일이 있은 지 두 주일 후 신록의 계절에 겨우 여행 준비가 갖추어졌다. 그물 상가의 셋방에는 일시 폐쇄라고 페인트로 쓴 표찰을 걸어 놓고, 모포와 식량을 가죽끈으로 묶어 어깨에 짊어지고 양산을 한 손에 들고서 그는 활기 있게 출발했다. 파오 씨의 사촌이 준 지도는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네 귀퉁이에는 불을 토해 내는 용의 그림이 있고, 산까지 매우 상세한 지형이 기입되어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지명이 아니라 작은 동물 형태의 스케치식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프랜치스는 그들의 이야기와 자기의 방향감각으로 길에 대한 것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콴산을 향하여 걸음을 빨리 했다. 여행을 떠난 지 이틀째까지는 평평한 시골길이었으나 푸른 논은 어느 사이에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침과 같은 낙엽이 수북히 쌓인 숲속은 마치 탄력성 있는 융단을 밟는 것 같았다. 콴산 기슭의 입구 바로 옆 야생의 석남화가 불처럼 타는 협곡을 건너갔다. 그 꿈같은 오후, 그는 은행 나무숲을 가로질러 갔다. 그 근처는 포도주의 향기처럼 코를 자극하는 향기로 충만해 있었다. 거기를 지나자 이번에는 산협의 험준한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좁은 돌투성이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감에 따라서 점점 추위를 느껴야 했다. 그날 밤은 세찬 바람소리와 협곡을 흐르는 해빙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바위틈에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잤다. 대낮에도 높은 산꼭대기에서 차갑게 빛나는 하얀 눈을 바라보면 눈동자가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 얼음처럼 차가운 대기는 폐부를 찌르는 듯하였다. 5일째에는 산마루에 닿아 빙하처럼 얼어붙은 황무지와 바위와 바위의 사이를 넘어서 드디어 반대쪽의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이 고개를 지나 설선을 넘으니 신록의 푸르름이 눈에 스며드는 넓은 고원이 있고, 거기서부터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둥근 작은 산들이 잇닿아 있었다. 이것이 파오 씨의 사촌이 설명하던 초원이었다. 여기까지는 꾸불꾸불하긴 했으나 어떻게든 산길을 따라 올 수 있었으나 이곳에서부터는 하늘의 도움과 자석과 스코틀랜드인 특유의 감각으로만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쉬지 않고 서쪽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 근처는 고국인 스코틀랜드의 고원과 흡사했다. 수도승과 같은 얼굴로 풀을 뜯고 있는 산양과 들염소떼를 만났으나 동물들은 그가 다가가자 미친 듯이 도망쳐 버렸다. 또 나는 것처럼 달리는 영양의 모습도 보였다. 진한 감색으로 보이는 널따란 늪 가 풀섶에서는 수천 마리의 오리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하늘이 캄캄할 정도로 날아갔다.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직 따스함이 가시지 않은 오리알을 훔쳐서 보따리에 넣었다. 길도 없고 나무 한 그루 서 있지 않은 평원이었다. 이러다간 목적하는 마을에 도달할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9일째 아침, 이제는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멀리 앞에 양치기의 움막이 눈에 띄었다. 남쪽의 경사지를 내려와서 처음으로 보는 인가였다. 그는 내달리듯 움막까지 걸어갔다. 입구는 진흙으로 칠해졌고, 안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그러나 실망으로 일그러진 눈을 들어 휘둘러보니 양떼를 몰면서 자기 쪽으로 다가오는 양치기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양치기는 열 일곱 살 정도며 양과 마찬가지로 작달막했으나 단단한 체격이었다. 명랑하고 영리할 것 같은 얼굴에는 놀라움과 웃음이 섞어 있었다. 소년은 양피로 만든 반바지를 입고, 모피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목에는 해묵어서 종이처럼 얇아진 표면에 비둘기가 새겨진 원시대의 청동제 십자가를 걸고 있었다. 치셤 신부는 소년의 솔직할 것 같은 얼굴에서 고풍스런 십자가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조용히 소년에게 인사를 하며 류 촌사람이냐고 물었다. 소년은 미소를 지었다. "전 그리스도교 마을의 사람입니다 .저는 류따아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마을의 사제이시거든요." 소년은 자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려는 듯 바로 덧붙였다. "마을엔 사제가 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대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치셤 신부는 소년에게 좀더 물어 보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나는 참으로 먼 곳에서 왔단다. 역시 나도 사제야. 어때, 나를 그대의 마을에 데려다 주지 않겠는가?" 마을은 거기에서 서쪽으로 5리쯤 들어가 기복이 심한 골짜기에 있었다. 이 고원의 산자락에 숨은 듯이 돌담을 둘러친 약간의 밭 사이의 집이라고 해야 고작 30채 정도의 부락이었다. 중앙의 작은 동산에 느티나무 그늘 아래 돌을 쌓아올린 원추형의 묘한 무덤 뒤에 돌로 지은 성당이 눈에 돋보였다. 마을에 들어서자 순식간에 마을 사람들이 그를 둘러쌌다.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거기에다 개들까지 와글와글 떠들면서 소매를 끌어당기기도 하고 구두를 만져 보고는 탄성을 올리며 양산을 이모저모 살펴보기도 했다. 그 동안에 소년이 알 수 없는 사투리로 모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60명 정도 될 것 같은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원시적이었고 건장했으며, 순박하고 상냥한 눈을 가지고 있어 용모가 자못 동계 가족에서나 볼 수 있는 특유한 것이었다. 이윽고 소년이 기쁨의 미소를 머금고 부친인 류찌를 데리고 왔다. 짧은 반백의 수염을 기른 그는 쉰 살쯤 된 작달막한 체격의 사나이로 언행은 적이 소박하고 기품이 있었다. 류찌는 의미가 통하도록 천천히 발음을 했다. "신부님, 우리는 진심으로 당신을 환영합니다. 어서 저의 집으로 가셔서 기도를 드리기 전에 잠깐 쉬시지요." 류찌는 치셤 신부를 교회 옆 돌축대 위에 지은 가장 큰집으로 안내하여, 천장이 낮고 서늘한 방에 정중하게 맞아들였다. 방의 한 귀퉁이에는 마호가니의 스피네트(피아노의 전신이라고 일컫는 현악기의 일종)와 포르투갈제 시계가 놓여 있었다. 놋쇠로 만든 문자판에는 '리스본 1632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류찌가 말을 걸어왔으므로 그는 시계에서 눈을 돌렸다. "미사를 드려 주시겠습니까, 신부님. 그렇지 않으면 제가 할까요?" 치셤 신부는 꿈을 꾸고 있는 기분으로 상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는 무의식중에 엉뚱한 대답을 해 버렸다. "당신이......하시지요." 그는 정신이 집중되지 않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이 불가사의한 기분을 말로 옮기려면 조잡하게 되어 오히려 쉽사리 깨질 것 같았다. 이 상태로 침묵을 지키면서 신의 자비를 지켜보자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반시간쯤 지나서 모두 교회에 모였다. 규모는 작았으나 회교 사원의 모습과 르네상스 건축양식을 섞어 놓은 것 같은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홈을 새긴 세줄의 소박한 아케이드(복도)가 있고 통로와 창은 굴곡이 없는 곧은 피라스타로 떠받쳐져 있었다. 벽면은 미완성인 데도 있으나 유연한 모자이크 무늬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는 이 열성적인 회중의 맨 앞줄에 앉았다. 사람들은 모두 성당에 들어오기 전에 깨끗이 손을 씻었다. 남자와 여자 거의가 기도용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때 종이 울리고 색이 바랜 황색 수단을 입은 류찌가 두 사람의 젊은이를 거느리고 제단으로 나왔다. 그는 돌아서서 치셤 신부와 회중을 향하여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이윽고 미사가 시작되었다. 치셤 신부는 꿈속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기분으로 매료된 것처럼 똑바른 자세로 무릎을 꿇고 미사의 진행을 지켜보았다. 미사는 구식 그대로였으며 미사의 감동적인 옛 면모를 전해 주고 있었다. 류찌가 라틴어를 알 까닭이 없었으므로 기도문은 물론 중국말이었다. 처음엔 참회의 기도를 드리고 이어서 사도 신경을 모두 같이 외웠다. 그가 제단에 올라가 나무 제대 위에 놓인 양피지의 미사 경본을 읽었을 때, 프랜치스는 이 나라의 말로 장중하게 독송되는 복음서의 1절을 똑똑히 들었다. 원전에서 번역된 것이다......그는 외경심에 사로잡혀 문득 숨을 죽였다. 모든 사람들이 영성체를 하기 위하여 차례차례 앞으로 나아갔다. 어머니의 팔에 안긴 어린 아기도 제단 아래까지 데려오도록 했다. 류찌는 쌀로 만든 술이 담겨진 성배를 손에 들고 내려왔다. 그 술에 손가락을 적시어 모두의 입술에 한 방울씩 떨어뜨려 주었다. 교회를 나가기 전에 신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상 앞에 모여서 불을 붙인 향을 십자가 아래에 있는 무거운 촛대에 꽂았다. 그 의식이 끝나자 각각 세 번 엎드려 절을 하고 공손히 밖으로 나갔다. 치셤 신부는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끝까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이 단순하고 유치한 경건성에 이미 감동되었다. 그것은 스페인 농민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건함이었고, 역시 똑같은 소박함이었다. 물론 지금의 의식은 완전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타란트 신부가 보면 틀림없이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하니 희미한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할 것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류찌는 그를 집으로 안내하기 위하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서는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치셤 신부는 배가 너무 고팠다-산양 고기 스튜와 배추 수프에 작은 고기 경단을 띄운 것과, 그 뒤에 나온 쌀과 천연의 꿀로 빚은 이상한 요리를 그는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이렇게 맛있는 식사를 한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프랜치스는 차근차근 류찌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 보았다. 그는 상대방이 불쾌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었다. 친절한 노인은 아무 의심 없이 대답을 해주었다. 노인의 신앙은 확실히 그리스도교였으나 아이놀음 정도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상하게도 도교(노자에서 비롯된 철학으로 중국 민간 풍습에 큰 영향을 주었다)의 풍습과 혼합되어 나타났다. 거기다가 어느 정도는 경교(그리스도의 2성설을 주장, 이단자로 몰려 이집트로 추방된 시리아의 네스토리우스교. 당나라 때에 중국에 전래함)도 혼합되었는지 모른다고 치셤 신부는 나름대로 생각하니 내심의 미소를 금치 못했다. 류찌의 설명은, 이 믿음은 선조 대대로 몇 대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마을은 세상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벽지인 것만은 틀림이 없고, 사실 이 마을은 모두가 한 집안 식구 같았으므로 다른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교란 당하는 일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순수하게 전형적인 목축 생활을 하고 있고 식량은 자급자족했다. 아무리 심한 한발이 들어도 곡물과 양고기만은 충분히 저축되어 있었으므로 걱정이 없었다. 또 양의 위에 넣은 치즈나 콩으로 만든 장이라고 하는 버터(된장을 말함)도 있었다. 옷은 자가제의 양모가 있고, 방한용으로는 모피가 있었다. 또 이 양피는 북경으로 가져가면 값이 비싼 양피지를 만들 수 있었다. 고원에는 야생의 조랑말이 많이 있었다. 때로는 가족 가운데 누군가 한 사람이 양피지를 그 조랑말에 싣고 장사하러 나가는 것이다. 이 작은 부족은 세 사람의 사제를 두기로 되어 있었는데 각각 어릴 적에 이 명예로운 지위에 선출되는 것이다. 신직의 사례는 쌀로 납품하기로 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삼보위에 대하여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삼위일체를 말한다. 고로들에게 확인해 보아도 정규로 임명을 받은 사제라고는 이 마을에서는 아직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치셤 신부는 노인의 말을 열심히 들이며 가장 마음에 걸리던 질문을 했다. "처음에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지 그것은 아직 말씀하시지 않으셨군요." 류찌는 다시 한 번 새삼스럽게 평가하는 것 같은 눈으로 손님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안심한 듯 약간의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옆방으로 들어갔다. 돌아왔을 때에는 양피지로 얌전히 싼 종이 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종이 다발을 건네주고 치셤 신부가 그것을 펼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신부가 빨려 들어갈 듯이 읽기 시작했을 때 그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것은 포르투갈 어로 쓴 리비에로 신부의 일기였다. 색은 바래고 얼룩투성이의 남루한 것이었으나 거의 모든 부분을 판독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프랜치스는 스페인어 지식으로 어림하여 천천히 해독을 할 수가 있었다. 끌려 들어가는 재미에 해독하는 것이 조금도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그는 마치 못 박혀 버린 것처럼 때때로 무겁게 페이지를 넘기는 것 외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대는 3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움직이지 않은 채로 옛 시계가 시간을 새기기 시작한다. 마누엘 리비에로는 1625년에 베이징에 들어갔다. 그는 리스본의 선교사였다. 프랜치스는 이 포르투갈인의 모습을 눈앞에 환히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스물 아홉 살의 청년, 가냘픈 몸매, 올리브색 피부, 성질은 약간 거친 편이고 열정적인 반면 겸허한 까만 눈동자를 가졌다. 이 젊은 선교사는 베이징에서 다행하게도 위대한 독일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신부와 친교를 맺었으나 샬 신부(1591--1666)는 선교사임과 동시에 순치 황제(청의 세조, 1644--1661 재위, 샬을 아버지처럼 존경했다고 한다)의 총애를 받은 충신이며 천문학자이고, 황제의 명을 받아 법전을 기초한 사람이기도 하다. 궁정의 계속되는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사람들의 손가락질 한 번 받지 않게 처신했으며, 후궁들에게까지 그리스도교를 전파하였다. 혜성의 출현과 일식의 시기를 정확히 짚어 냈으며 가차없이 적의 증오를 분쇄하고 새로운 역서를 편찬하는 등 많은 신임과 함께 그 자신과 선조들의 이름까지 빛내는 영광을 얻고 있었다. 리비에로 신부는 수년에 걸쳐서 이 놀라운 사나이의 비호 하에 있었던 것이다. 그후 이 포르투갈인은 샬 신부에게 머나먼 달단의 궁정에 포교를 간청했다. 아담 샬은 즉시 그 간청을 들어주도록 했다. 완벽한 여행대가 조직되고 강력한 무장을 갖추었다. 1629년 8월 15일 일행은 베이징을 출발했다. 그러나 여행대는 달단의 궁정에 도달하지 못했다. 콴산 북방 중간에서 오랑캐에게 습격 당했을 때 강대함을 자랑하는 호위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 그 때문에 완벽하게 꾸려졌던 여행대는 순식간에 약탈을 당하게 된 것이다. 리비에로 신부는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고 소지품과 성직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을 가지고 간신히 도망쳤다. 그는 눈 속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이것이 마지막이라 체념을 하고 아픈 몸을 신에게 맡겼다. 그러나 상처는 추위 때문에 얼어붙어 생명을 되찾았다 .이튿날 아침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양치기의 움막에 다다랐다 .그대로 거기에서 반 년동안 생사의 기로를 헤매었다. 한편 리비에로 신부가 살해되었다는 보고가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 때문에 수색대는 결국 파견되지 않고 끝나 버린 것이다. 포르투갈인은 생명이 연장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담 샬에게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시간은 자꾸 흐르고 있었으나 그는 거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 광활한 초원의 고원에서 그는 새로운 가치의 의식, 새로운 명상의 습관을 얻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베이징은 3천리나 먼 곳에 있었고, 아무리 불굴의 정신을 가졌다 해도 도저히 귀환의 가망은 없었다. 그는 결심을 하고 몇 사람 되지 않은 양치기들을 모아 여기에 한 부락을 만들고 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벗이 되고 목자가 된 것이다. 달단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얌전하고 온순한 사람들을 위하여. 프랜치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일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저물어 가는 햇빛을 받으며 조용히 앉아 상념에 빠져서 갖가지 환영을 좇고 있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회 옆에 있던 커다란 돌무덤에 가 보았다. 그리고 리비에로 신부의 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올렸다. 그는 류촌에는 일주일 정도 머물러 있었다. 그 동안 마을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설득하여 세례와 혼인 성사를 받도록 권했다. 때에 따라서는 부드럽게 말하여 교회 사무를 조금씩 정정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 마을을 엄정한 정교의 법규에 완전히 합치시키기에는 아마도 몇 개월은 필요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몇 년을 필요로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서서히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작은 마을은 맛있는 능금처럼 오염되지 않고 더구나 모두의 생각은 건전하였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밤이 되면 류찌의 집 앞에 모닥불을 피웠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 주위에 옹기종기 앉으면 그는 입구의 계단에 앉아서 조용히 그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 가운데서도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들 자신과 똑같은 하느님을 밖의 넓은 세계에서도 믿는다는 것이었다. 사소한 차이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야기가 유럽의 교회나 본산의 대사원 성 베드로(로마에 있는 카톨릭 교황청의 대사원) 성전에 무리를 이루어 모여드는 순례자 이야기, 위대한 국왕이나 왕자, 정치가나 귀족이라 할지라도 천주님 앞에서는 모두 무릎을 끓는다는 이야기, 또 그들이 이 마을에서 예배하고 있는 같은 천주님이 그 사람들에게도 주이시며 벗이라는 데에 이르러서는 마을 사람들 모두 마음을 빼앗긴 것처럼 황홀해 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막연히 추측으로 짐작하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자기들도 이 세계와 한 몸이라고 하는 의식은 모두에게 큰 희열과 자랑을 심어 주었다. 희미한 모닥불 빛이 비치는 어둠 속에서 마을 사람들의 진실한 얼굴은 기쁨과 놀라움의 빛을 감추지 못하며 그를 황홀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열성 어린 얼굴을 보니, 바로 눈앞에 잠들어 있는 리비에로 신부가 어둠 속에서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순간에는 파이탄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 단순하고 순박한 사람들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여기에 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되면 광야의 한가운데서 뜻하지 않게 발견한 이 보석을 사랑으로 갈고 닦아 훌륭하게 빛낼 수가 있을 터인데. 그러나 여기 머물 수는 없다. 마을은 너무나도 작고 또 벽지였다. 이런 곳을 참다운 포교의 중심으로 삼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결연히 유혹을 물리쳤다. 류따이 소년은 그가 어디를 가든 따라 다녔다. 소년에게 세례를 줄 때 요셉이란 이름을 주었으므로 이제 그는 요셉이라고 부르게 되어 있었다. 요셉은 이 새로운 이름에 힘을 얻어 치셤 신부의 미사에 복사를 하겠다고 간청했다. 물론 라틴어를 한 마디도 모르는 요셉이었지만 치셤 신부는 웃으면서 이를 승낙했다. 이윽고 출발하기 전날 밤, 치셤 신부가 집 앞에 앉아 있는데 요셉이 나타났다. 언제나 명랑하던 얼굴은 근심에 싸여서 그의 마지막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먼저 들으러 온 것이다 .그러한 소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동안에 치셤 신부는 그 슬픔의 원인을 알아내고 무척 기뻤다. "요셉, 나와 함께 가고 싶지 않은가?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말이야. 네가 도와주어야 할 일이 많이 있어요." 소년은 환성을 지르며 신부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키스를 했다. "신부님, 저는 신부님의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찬성입니다. 저는 마음으로부터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괴로운 일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요셉. 그래도 괜찮은가?" "어떤 길이라도 함께 하겠습니다, 신부님." 치셤 신부는 무릎을 꿇은 소년을 일으켜 세웠다. 소년을 일으켜 세웠다. 소년은 감동해 마지않았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드디어 출발 준비가 다 되었다. 요셉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털북숭이 조랑말 옆에 있는 짐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한 무리의 사내아이들이 그를 에워쌌다. 그도 신이 나서 바깥 세계의 경이에 대하여 지껄이며 친구들에게 부러움을 더욱 사게 하고 있었다. 그가 일어서자 류찌가 손짓으로 불렀다. 가보니 굴 속 같은 제실로 안내했다. 그는 나무상자에서 수를 놓은 제의를 꺼냈다. 금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근사한 것이었다. 비단천이 종이처럼 얇아진 곳도 있었으나 미사복으로서는 완전하고 아직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귀중한 것이었다. 노인은 프랜치스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런 하찮은 게 마음에 드실는지요?" "대단히 훌륭합니다." "그럼, 받아 주십시오.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몇 번이고 사양했으나 류찌는 한사코 가져 갈 것을 바랬다. 프랜치스는 곱게 싸서 요셉의 짐 속에 넣도록 했다. 드디어 그들에게 작별을 할 때가 되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축복을 빈 후 6개월 이내에 다시 돌아온다고 약속하여 모두를 안심시켰다. 이번에는 말을 타고 오겠으며, 요셉이 안내를 해주기 때문에 훨씬 편하게 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조랑말을 타고 언덕을 올라갔다. 애정을 듬뿍 담은 마을 사람들의 눈길은 두 사람의 모습을 언제까지나 좇고 있었다. 치셤 신부는 요셉과 나란히 경쾌하게 말을 몰았다. 다시 자기의 신앙이 소생하고 훌륭히 확증된 느낌이었다. 그의 가슴은 새로운 희망에 불타고 있었다. 3 파이탄에 돌아왔을 때 계절은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여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오두막은 더욱더 황폐해져 있었다. 프랜치스는 요셉과 함께 갈라진 벽 틈을 진흙으로 다시 바르고 손댈 수 없이 무너진 벽에는 새로 기둥을 세웠다. 바닥에도 골고루 흙을 깔고 마루에는 큼직한 쇠화로를 묻어 난로 구실을 하게 만들자 오두막은 훨씬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되었다. 언제나 식욕이 왕성한 요셉은 무엇보다도 부엌 살림을 장만하기 위해 바쁘게 돌아다녔다. 이제 시골 소년의 수줍은 티를 어느 정도 벗은 그는 가끔 고집을 부릴 때도 있지만 퍽 말이 많은 데다 남들에게 칭찬 받는 것을 좋아하여 사람들과 잘 사귀었다. 그는 또 한때는 부근의 채소밭에 숨어 들어가 잘 익은 참외 따위를 몰래 따오곤 했다. 프랜치스는 자신의 포교 방향이 구체적으로 설 때까지 오두막에 머무르기로 결심했다. 그물 상가의 성당에는 차츰 사람들이 남의 눈을 피하여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 찾아온 사람은 초라한 차림새의 노파였다. 노파는 살금살금 성당 안에 들어와서는 옷 속에서 묵주를 꺼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프랜치스가 다가가 말을 걸까 하다가 시종 모른 체했다. 노파의 태도는 가까이 가거나, 아니 눈길이라도 줄라치면 금세 도망을 갈 듯한 불안해하는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아침, 노파는 딸을 데리고 다시 성당에 나왔다. 눈물이 날 정도로 신자의 수가 적었으나 그의 용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일시적으로 금품으로 신자를 매수하는 따위의 방법을 쓰지 않겠다는 처음의 그의 결심을 더욱 굳게 할뿐이었다. 진료소의 운영은 잘 되어 나갔다. 그가 진료소를 비운 동안 사람들은 큰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홍의 가게 앞에는 벌써부터 치료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환자들을 치료하는 동안 그의 진찰은 좀더 정확해지고 치료 솜씨도 훨씬 훌륭해졌다. 피부병, 기침과 배앓이, 장염, 눈과 귀의 악성 화농 등 온갖 증상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이 몰려왔는데 거의가 다 불결한 생활 환경에서 오는 질병이었다 때문에 소독과 간단하게 처방한 약의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이곳에서 과망간산칼륨은 금덩어리만큼 가치가 있었다. 애초부터 넉넉지 않았던 의료품이 그나마 바닥이 날 무렵 때맞춰 탈록 의사에게 부탁했던 물건이 도착했다. 단단히 못질한 나무 궤짝 안에는 탈지면, 거즈, 옥시풀, 방부제 그리고 피마자 기름과 크로로다인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리고 맨 밑바닥에서 처방지에 휘갈겨 쓴 편지가 한 장 나왔다. "교황 폐하! 열대지방에서의 치료는 바로 내 임무인 줄 알았는데 자네가 선수를 치다니. 어쨌든 좋은 일이야.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치고 고칠 수 없는 것이라면 할 수 있나.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자네에게 필요할 듯해서 조그만 기구들을 주머니에 넣어 두었네." 주머니 속에는 메스와 가위, 핀셋트가 들어 있는 응급 처치용 케이스였다. 케이스 속에는 또 추신이 들어 있었다. "주의하게.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영국 정부와 교황과 쭝륭쓰(영중 합병의 중국 사회 비슷한 것)에 보고할 예정이네." 탈록의 그 농담 투는 여전했다. 프랜치스는 편지를 보고 미소를 지었으나 고마움으로 목이 메었다. 요셉의 도움과 열성에 힘입어 자신의 노력의 결과가 나타날 조짐이 조금씩 보이는 지금, 탈록으로부터 격려가 날아들었으나 더욱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일은 즐겁고 잠은 평화로웠다. 프랜치스로서는 생전 처음 맛보는 희열이며 평화였다. 11월의 어느 날 밤, 그는 어떤 예감에 사로잡혀 깊이 잠들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그는 완전히 잠이 깨어 일어나 앉았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엄습했다. 어둠 속에 깊이 잠든 요셉의 고른 숨소리가 평화스럽게 들려 왔다. 프랜치스는 다시 누웠으나 무엇이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불안한 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요셉이 깨지 않게 발소리를 죽에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얼어붙은 밤공기가 피부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별빛도 없는 밤, 얼어붙은 눈이 하얗게 시야를 밝히고 있었다. 온 세상은 죽음과 같이 고요하였고 그것은 프랜치스에게 이상한 두려움을 주었다. 그때 그 고요함을 뚫고 어디선가 희미한 소리가 들려 왔다. 프랜치스는 흠칫 놀라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프랜치스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 돌연 죽어 가는 새의 마지막 울음소리와도 같은 가냘픈 소리가 또다시 들려 왔다. 마치 프랜치스의 발길을 되돌리려는 듯이.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서 있다가 소리의 방향을 가늠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한 오십 보쯤 갔을 때 뭔가 검은 물체가 눈에 띄었다. 얼굴을 눈 속에 묻고 엎드려 있는 여자의 몸이었다. 여자는 벌써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 가냘픈 울음소리는 완전히 숨이 끊어진 여자의 품속에서 들려 오는 것이었다. 프랜치스는 몸을 굽혀 여자의 품속에서 조그맣고 연약한 생명을 안아 들었다. 피부는 차가웠으나 부드러웠다. 이상한 감동으로 프랜치스는 가슴이 벅차 올랐다. 눈 위를 미끄러지며 고꾸라질 듯 급히 집으로 달려와 요셉을 깨웠다. 화덕에 장작불을 지피자 방안은 이내 따뜻해졌다. 신부와 요셉은 비로소 아기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태어난 지 겨우 1년이 될까말까 한 아기는 검은 눈을 크게 뜨고 타오르는 장작불을 바라보다가 가끔씩 흐느끼곤 했다. "배가 고파서 그럴 거예요." 요셉이 어린아이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들은 곧 우유를 끓여 성수병에 넣고 깨끗한 린넨 조각을 길게 찢어 좁은 병 주둥이에 늘어뜨렸다. 그리고 충분히 우유가 적셔진 뒤 아기의 입에 갖다 대었다. 아기는 그것을 빨기 시작했다. 몇 차례 그렇게 하는 동안 아기는 곤히 잠이 들었다. 프랜치스는 모포로 아기를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잠든 아기를 바라보는 동안 프랜치스의 가슴은 감동으로 벅차 왔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도록 고통스러웠던 예감, 그것에 의해 눈 속에 던져졌던 연약한 생명체가 이곳 그의 오두막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 극히 단순한 사건이야말로 신이 행하신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죽은 아기 어머니의 신원은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달단인의 특징을 지닌 가난에 찌든 모습이었으나 퍽 아름다웠을 여인이라는 것뿐이었다. 아마 어제 이 거리를 지나간 유목민의 무리에서 떨어져 헤매다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숨진 것이리라. 그는 어린아이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마침 그날이 성 안나(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축일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고 안나라고 부르기로 했다. "요셉, 내일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신 이 아기를 돌봐 줄 사람을 구해야겠다." 요셉은 어림없다는 듯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신부님, 계집아이를 맡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주는 것이 아니란다." 프랜치스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의 결심은 확고부동했다. 하늘이 보내신 이 어린아이는 자기의 첫 번째 자식이 되는 것이다. 그가 파이탄에 온 이래 줄곧 그리고 있던 꿈-고아원을 세우는 일-에 한 걸음 다가가는 길이 되는 것이다. 많은 어려움이 따르겠지. 물론 수녀들의 도움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먼 장래의 일이다. 새근새근 잠든 어린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이 아이야말로 자기의 오랜 꿈을 성취시켜 줄 하늘로부터의 약속이라는 믿음이 느껴짐은 어쩔 수 없었다. 프랜치스는 수다쟁이 요셉을 통해 처음으로 챠씨의 아들이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겨울은 아직도 콴산의 깊은 눈 속에 머물고 있었다. 미사가 끝나고 프랜치스가 수단을 벗는 것을 곁에서 돕던 요셉이 다친 손끝을 후후 불면서 말했다. "이러다간 내 손도 챠유의 손처럼 되어 버릴라." 챠유는 엄지손가락에 조그만 생채기가 생겼는데 그곳으로 나쁜 균이 들어갔는지 팔까지 몹시 부어오르고 온몸에선 열이 나고 있었다. 거리에서 제일 유명한 의사가 셋씩이나 줄곧 아이의 곁을 지키며 온갖 좋다는 약은 다 쓰는 한편 센샹으로 사람을 보내 '불로장수의 영약'을 구해 오게 했다. 그것은 개구리의 눈에서 뽑아 낸 엑기스인데, 더욱이 용성이 돌 때 구한 것이 아니면 효력이 없다고 알려진 영약이었다. "챠는 그 약만 먹으면 틀림없이 나을 거예요." 요셉은 자신 있게 말했다. "무슨 병이든 그 약만 쓰면 다 나을 수 있대요. 게다가 유는 귀한 외아들이니 그 집안에서 어떤 방법이든 쓰지 않겠어요?" 그로부터 나흘 후 성당이 있는 가게 앞에 두 대의 가마가 멈춰 섰다. 한 대는 빈 것이었고 또 한 대에는 파오 씨의 사촌이 침울한 얼굴로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프랜치스에게 우선 갑작스런 방문을 사과한 뒤 챠씨의 집까지 함께 가 줄 것을 부탁했다. 프랜치스는 이 초청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파오 씨와 챠씨의 가문은 이 읍내에서는 서로 비슷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재산가들인데 사업뿐만이 아니라 인척 관계를 통하여 밀접히 맺어져 있었다. 프랜치스는 류촌에서 돌아온 후 키가 크고 말랐으며 항상 유쾌한 표정과 유머를 잃지 않는 파오 씨의 사촌과는 거리에서 종종 만나고 또한 챠씨의 사촌이기도 한 선량한 그는 프랜치스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에서와는 달리 침통한 표정과 전에 없던 초대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프랜치스는 말없이 모자와 외투를 들고 따라 나갔으나 결코 흔쾌한 기분은 되지 않았다. 챠씨의 저택은 무거운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후원에는 얼어붙은 연못 위를 스치는 바람소리뿐, 돌바닥 위를 걷는 두 사람의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더욱 음산하게 울렸다.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굵은 삼베로 감싸 놓은 소향나무 사이를 지나 금빛과 붉은 색으로 화려하게 칠해진 중문을 들어서자 넓은 마당이 나타났다. 문이 굳게 닫힌 안채에서는 소리를 죽인 여자들의 흐느낌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프랜치스가 안내되어 들어간 방은 몹시 덥고 어두침침한 온돌방이었다. 유는 아랫목에 누워 있었고 그 곁에 소매가 긴 덧옷을 입은 의원들이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앉아 유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 한 의원이 앉은 채 몸을 굽혀 궤짝처럼 생긴 화덕 속에 숯을 한 줌 집어넣었다. 방 한구석에서는 푸른 옷을 입은 도인이 피리 반주에 맞춰 끊임없이 주문을 외고 있었다. 유는 부드러운 우윳빛 피부에 눈이 검은 귀여운 사내아이였다. 외아들로서 가문의 사랑과 기대를 온통 한 몸에 받았지만 가부장제도의 엄격한 전통과 교육 탓인지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치고는 벌써 어른스러운 데가 있었다. 이미 여러 날째 높은 열과 뼛속까지 곪아 들어가는 고통에 시달려 몸이 야위고 입술은 까맣게 타 들어갔으나 유는 입 밖으로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 있었다. 이불 밖으로 내놓은 팔은 너무 부어 올라 본래 그것이 팔이었다는 것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희푸렇게 썩어 있는 팔에는 불결하기 짝없는 고약만 잔뜩 붙어 있었고, 그 위에 한자가 씌어진 종이 조각을 덮어놓았다. 파오 씨의 사촌이 프랜치스와 함께 들어가자 방안은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곧 도사의 주문이 다시 계속되고 세 의원은 여전히 유를 지켜보는 한편 화덕의 아궁이를 살펴보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이미 의식이 없는 아이의 뜨거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주 위급한 상태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다 써야 하겠지만 만일 실패라도 하는 날엔 앞으로 닥칠 냉대와 질시, 핍박은 이제까지의 모든 고생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심해질 것 또한 생각해 봐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다음 문제이고 먼저 위태로운 아이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것과 다만 상태를 악화시키기만 할뿐인 의원들의 무지한 치료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먼저 아이의 팔에서 조심스럽게 더러운 고약을 떼어 내고 그 자리를 따뜻한 물로 닦았다. 그 번들거리는 팔을 물에 담그자 마치 썩은 생선 부레처럼 둥둥 떴다. 긴장으로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으나 침착하게 탈록이 보내 준 가죽 케이스를 열고 메스를 꺼냈다.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외과 수술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이 팔을 째지 않으면 아이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것뿐이었다. 방안의 모든 시선들이 무서운 압력으로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느꼈다. 특히 뒤에서 지켜보는 파오 씨 사촌의 짙은 불안과 의심은 더욱더 또렷이 느껴졌다. 그는 순간적으로 성 안드레아에게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메스를 환부에 깊숙이 찔러 넣어 길게 찢자 환부로부터 피고름이 거품이 일듯 부글대며 솟구치더니 팔 아래 받쳐 놓은 질그릇으로 흘러내렸다. 악취가 온 방에 진동했다. 그러나 그 지독한 냄새가 프랜치스에게는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프랜치스는 고름이 완전히 다 빠질 때까지 두 손으로 환부의 주위를 꾹꾹 눌러 짰다. 마침내 부어오른 팔이 본래의 제 모습대로 돌아오자 그는 커다랗게 뚫린 환부의 구멍에 소독된 가제를 넣은 뒤 붕대로 단단히 감았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듯 탈진한 상태로 프랜치스는 자기도 모르게 영어로 중얼거렸다. "이젠 됐어. 운이 좋기만 바랄 뿐이지-" 이것은 탈록의 유명한 말버릇으로서 극도의 긴장이 이완되면서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치료를 마친 뒤 그는 평상시처럼 밝고 정중한 태도로 방안을 나왔다. 파오 씨의 사촌이 가마가 있는 곳까지 따라 나왔다. 프랜치스는 그에게 몇 가지 주의할 사항을 일러주었다. "정신이 들면 수프를 먹이도록 하고 고약 따위는 절대 붙이지 마십시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다음날 프랜치스가 다시 왔을 때 유의 상태는 훨씬 좋아져 있었다. 열은 거의 내렸고 밤에는 아주 잘 잤을 뿐만 아니라 닭고기 국물을 몇 공기나 먹었다는 것이다. 탈록이 보내 준 메스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이 소년의 생명은 영영 건지지 못했으리라. "앞으로도 영양 있는 음식을 주도록 하십시오." 프랜치스는 비로소 안도의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내일 또 오겠습니다." 프랜치스의 말에 파오 씨의 사촌은 헛기침을 한 번 해 보이고는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젠 다시 오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챠씨는 이번 일로 충격을 받아 지금 누워 계십니다. 그러나 유가 회복되었으나 챠씨도 곧 좋아지시겠지요. 머지않아 신부님을 한 번 찾아 뵙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말을 마치자 그는 양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프랜치스는 가마도 거절한 채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걸어가며 타오르는 노여움을 삭이려고 애를 썼다. 이쪽은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를 온갖 장애와 위험을 무릅쓰고 아이의 생명을 구했는데 한 마디 인사도 없이 이렇게 쫓아 버리다니. 감사 표시를 이런 식으로 하다니. 이 거리에 처음 도착하던 날 배 위에서 만났을 때에도 자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만하게 굴던 챠씨는 애초부터 모습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프랜치스는 주먹을 불끈 쥐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싸웠다. "주여, 제 마음을 가라앉혀 주소서. 이 사악한 분노에서 구해 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정의롭고 인내심 강한 인간이 되게 하소서. 또한 진정 겸손함을 아는 인간이 되도록 도와주소서. 저 불쌍한 아이의 생명을 구한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롭고 거룩한 뜻이었나이다. 주여, 다만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저에게 행하도록 하여 주소서. 저는 당신의 한갖 종일 뿐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주여, 당신도 챠씨가 은혜를 저버리는 행동을 한 것임은 인정하시겠지요." 그후 며칠 동안 프랜치스는 거리에 나갈 일이 생겨도 이 챠씨 집 부근은 피해서 다녔다. 단지 자존심이 상한 정도가 아니라 몹시 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막을 알 리 없는 요셉은 거리에서 떠도는 소문-유의 돌연한 쾌차에 대한 사례로 챠씨가 세 의원들에게 거액의 돈을 주었을 뿐 아니라 아들에게 붙었던 잡귀를 물리쳐 준 사례로 도관(도교의 사원)에 굉장한 기부를 했다는 등-을 듣고 와서는 한 자도 빠짐 없이 그대로 떠벌렸다. "정말 대단하죠, 신부님? 그분의 자선으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게 되었으니까요." "정말 대단하군." 프랜치스는 짐짓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꾸했으나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진료소 문을 닫기 전 프랜치스는 시험관에 과망간산염을 배합하고 있다가 시험관의 유리를 통해 진료소 안으로 들어오는 챠씨의 모습을 보았다. 순간 그의 가슴속에서 간신히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어느덧 챠씨는 검은 비단 장포에 노란 덧저고리를 차려 입고 예식용 작은 부채를 꽂은, 수놓은 빌로드 신발에 납작한 비단 모자까지 쓴 굉장한 성장을 하고 정중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프랜치스 앞에 와 섰다. 길게 기른 손톱에 금깍지가 끼워져 있었다. 중후하고 원숙한 풍채와 이마에 서린 깊은 우수의 그늘은 그가 단순히 돈만을 아는 상인일 뿐만 아니라 대단한 학식과 지성과 경륜을 갖춘 사람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찾아뵈러 왔습니다." 낮고 묵직한 음성이었다. "뜻밖입니다." 프랜치스는 계속해서 시험관 안의 보랏빛 용액을 유리 막대로 저으면서 차갑게 대답했다. "그 동안 장사 일과 여러 가지 정리할 일들이 겹쳐서......찾아 뵙는 일이 그만 늦어졌습니다." 챠씨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무슨 용무이신지요?" 프랜치스의 어조는 여전히 차가웠다. 챠씨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스쳤다. "물론......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죽음과 같은 침묵이 흘렀다. 이 순간이야말로 수개월간에 걸친, 말할 수 없이 치열한 고통 끝에 승리를 얻는 때이며 선교 사업의 첫 열매-더욱 풍요롭고 확실한 장래의 수확을 보장하는-를 따는 순간이었다. 이교도의 유력한 권력자가 지금 그의 앞에 서서 공손히 세례를 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랜치스는 기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당신은 하느님을 믿으십니까?" 프랜치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챠씨는 서글프게 대답했다. "앞으로 교리를 배울 생각이십니까?" "내게는 교리를 배울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든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챠씨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떤 방법으로든 지라고요?" 프랜치스의 반문에 챠씨는 미소를 지었다. "모르시겠습니까? 저는 정말 당신과 같은 신앙을 갖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이해를 할 수 없군요. 솔직히 말해 당신은 나와 같은 신앙을 갖겠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군요.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이러시는 거지요?" 프랜치스는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것을 느끼며 캐물었다. "은혜를 갚기 위해서입니다." 챠씨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당신은 내게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나도 당신에게 최선을 다해야 할 것 같군요." 프랜치스의 가슴은 흥분으로 두방망이질 쳤다. 유혹은 강했고, 유혹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은 약했다. 그러나 꺾일 수는 없다. 그는 끓어오르는 노여움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건 옳지 못합니다. 내가 당신이 진실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고, 또한 가질 생각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인다면 그건 하느님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내게 은혜를 입은 것이 없습니다. 자, 이제 돌아가십시오." 챠씨는 자기의 귀를 의심하는 듯했다. "제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다만 저는 제 생각을 솔직히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프랜치스는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신음을 눌러 참으며 대답했다. 챠씨의 태도는 급작스럽게 표변했다. 갑자기 눈빛이 달라지면서 이마에 서린 우수의 빛도 순간 사라졌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형식적으로 세 번 절을 하고는 말했다. "제 뜻을 받아들이시지 않아 유감입니다. 내게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입니다만, 다른 것으로라도 약소하게나마......" 그는 말을 끝맺지도 않고 다시 세 번 절을 하고는 진료소를 나갔다. 그날 밤, 치셤 신부는 시종 심각한 표정으로 화로 옆에 앉아 있었고 그 서슬에 눌려 수다쟁이 요셉도 감히 말을 붙일 생각도 못하고 조용했다. 저녁 준비를 했다. 바깥에서는 챠씨의 집 하인들이 터뜨리는 요란한 폭죽 소리가 들려 왔다. 그때 문이 살짝 열리고 파오 씨의 사촌이 들어섰다. 그는 프랜치스에게 공손히 절을 한 뒤 붉은 종이에 싼 양피지 문서를 내놓았다. "챠씨께서 드리는 선물입니다. 약소하나마 받아 주신다면 정말 영광이겠답니다. 비취 언덕의 토지와 수리권과 적도토의 채취권 문서를 당신 명으로 양도하는 것입니다. 또 당신이 건물을 지으실 계획이 있으시면 완공될 때까지 스무 명 정도의 일꾼을 보내 드리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제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프랜치스는 그가 말을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입을 열지 못했다. 뜻밖의 충격으로 정신이나가 버린 듯했다. 그는 파오 씨의 사촌과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챠씨가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양피지의 문서를 찬찬히 살펴본 뒤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외쳤다. "요셉! 요셉!" 또 무슨 좋지 않은 일인가 싶어 요셉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러나 기쁨으로 빛나는 프랜치스의 얼굴을 보자 그는 영문도 모르고 함께 웃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비취 언덕의 울창한 삼목의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달이 높이 떠오를 때까지 성모 찬가를 합창했다. 프랜치스는 모자도 쓰지 않은 채 오랫동안 언덕에 서서 이 귀한 땅에 장차 서게 될 성당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이제껏의 간절한 기도가 지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람은 살을 에일 듯 차가웠다. 요셉은 몹시 춥고 배가 고팠으나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터질 듯한 신부의 기쁨 속에서 자신의 소망도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면서 한편으로는 집을 떠나기 전에 화덕에서 밥솥을 내려놓고 온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4 1년 반이라는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다시 5월이 되어 긴 겨울의 깊은 눈과 무더운 여름 사이의 짧은 봄이 찾아와 절강성에는 아름다운 봄색이 완연했다. 새로 지은 성 안드레아 성당의 마당을 거닐며 일찍이 이처럼 평화롭고 만족한 기분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대기는 맑고 깨끗했으며 흰 비둘기 떼가 원을 그리며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그 자신이 설계한 성당 앞마당에 그늘을 만들기 위해 심어 놓은 용나무 옆에 서 있었다. 이곳에서라면 성당 전체를 한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성당을 바라볼 때마다 그는 자랑스러움과 동시에 그것이 신기루처럼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어린애 같은 염려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성당은 늘 그 자리에 찬란하게 무성한 삼목 숲 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다. 또한 숲 사이로 붉은 색 커튼이 드리워진 사제관의 창이 보이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교실, 담 너머 건너편에 마련된 진료소 건물도 보인다. 그리고 정원에 그늘을 만들어 주는 파파야의 넓은 잎 사이로 또 한 채의 집이 보인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아름다운 벽돌을 생산하게 한 훌륭한 도토갱을 축복했다. 그것은 거의 기적적이라 할 수 있었다. 여러 번 되풀이된 실험과 실패 끝에 마침내 엷은 장밋빛으로 장식한 것이다. 하늘의 도우심이 없었던들 성당을 짓는 일은 불가능했으리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게다가 챠씨의 빈틈없는 배로, 훌륭한 기술과 인내성을 가진 일꾼들, 열성적인 감독의 지휘 등으로 일은 모두 순조로웠다. 지난주에는 챠씨와 파오 씨의 가족, 친지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낙성식을 가졌다. 날씨까지 더할 수 없이 맑아 축복이 더해진 듯했다. 그는 담을 따라 걸었다. 빈 교실을 남몰래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싶어서였다. 그리고는 교실 창문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흰 벽에 걸린 칠판, 그림, 그리고 자신이 손수 정성을 들인 책상을 돌아보았다. 모두가 자신의 손을 거쳤거나 세심하게 마음을 쓴 것들이라 또다시 새로운 감회가 솟구쳤다. 그러나 아직 다 마무리짓지 못한 일이 있다. 그는 다시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 구석의 쪽문과 엇대어 조그만 공장이 있고 그 옆에 벽돌을 굽는 가마가 걸려 있다. 사제복을 벗고 작업복 바지와 와이셔츠 차림이 되었다. 그는 즐거운 기분으로 주걱을 들고 진흙을 개기 시작했다. 내일 수녀 세 사람이 도착할 것이다. 물론 그들이 기거할 곳도 더 손볼 것 없이 마련되어 있었다. 방은 맑고 시원하며 창에는 깨끗한 커튼을 달았다. 그러나 꼭 필요한 수녀들의 명상과 휴식을 위한 별채의 마지막 손질을 위해서는 아직 한 가마쯤 더 진흙을 끓여 벽돌을 구워야 할 것이다. 그는 끓인 진흙으로 부지런히 벽돌을 빚으면서 머릿속으로는 장래의 계획을 세우기에 바빴다. 지금으로서는 수녀들이 오는 것이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가 애초부터 꿈꾸어 왔던 일이었으며 그것을 위해 일하고 많은 기도를 했다. 성당 건축이 진행되는 동안 밀리 신부에게, 그리고 주교에게 몇 차례나 편지를 띄웠는지 모른다. 이곳에 와서 일하는 동안 이미 의식이 굳어진 중국인을 그리스도교에 귀의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민족성도 완고하거니와 대개가 무지하였으며 예로부터의 신앙이 삶 속에 배인 탓에 보편적인 선교 방법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또한 개개인에게 기적을 베풀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따위의 방법으로 신앙을 갖게 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아주 싫어하신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형편이 이러하니만큼 성당의 건립은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인가. 성당이 완성되자 입교를 망설이던 사람들도 신자가 되었고 따라서 미사 참례자도 60명 정도로 늘어났다 .그들이 모두 입을 모아 '기리에'(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자비를 구하는 기도문)의 기도를 소리 높여 노래할 때에는 마치 대군중의 합창 같은 노랫소리가 아름다운 건물을 울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희망은 역시 아이들이었다. 계속되는 가뭄, 흉작과 가난으로 아이들은 그냥 내다 버리는 것과 다름없는 헐값으로 매매되고 있었다. 더욱이 유교적 전통에 기초한 뿌리깊은 남존여비 사상으로 여자아이는 길에다 내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따라서 교실은 이내 버려진 아이들로 가득 찰 것이고 그 아이들은 이곳에서 수녀의 따뜻한 보호와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여느 행복한 가정의 아이들처럼 웃고 떠들고 놀며 구김살 없이 자랄 것이다 .또 글도 익혀 교리문답도 배우고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오, 미래는 아이들의 것이며......아이들은......아이들은......바로 하느님의 아이들이리라. 그는 벽돌 모양으로 빚은 흙을 화덕 안에 넣으면서 끝없이 펼쳐지는 공상의 날개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금 내일이면 만나게 될 수녀들에게로 생각을 돌렸다. 그 자신 여자들과 잘 사귀는 사교적인 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민족 사이에서 생활하다 보니 같은 언어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피어났고, 상대가 누구이든 가릴 것 없이 몹시 기다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바바리아 태생인 마리아 베로니카 원장 수녀는 런던의 본 세큐어(복음구제회)에서 5년 동안 활동했다고 한다. 함께 오는 두 수녀 중 클로틸드 수녀는 프랑스 사람, 또 한 사람은 벨기에 사람으로 말타 수녀인데 모두 리버풀에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수녀들은 다른 곳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영국에서 오는 길이니 적어도 고국의 공기를 담뿍 지니고 올 것이다. 그는 내일의 환영식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해 놓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안심이 안 되어 환영 절차를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우선 배가 닿으면 화려한 중국식 폭죽을 터뜨린다. 단, 수녀들이 놀라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파이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마에 태운다. 성당에 도착하며 곧 향기로운 중국차를 대접한다. 잠깐 휴식을 취한 후에는 축성식이 있다. 틀림없이 그녀들은 장식해 놓은 꽃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 축성식이 끝나면 그녀들이 놀랄 만큼 굉장한 만찬회를......준비는 완벽하다. 그는 흡족해 하다가 만찬 메뉴에 생각이 미치자 그만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딱딱하기 짝없는 빵이라니. 처음에는 놀라겠지만 그녀들도 곧 익숙해질 것이다. 실상 그 매일 매일의 식사는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울 정도로 보잘것없었다. 더욱이 성당을 짓는 동안은 공사장에 선 채로 혹은 공사 감독과 설계 도면을 들여다보면서 쌀밥과 된장만으로 요기를 해 온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내일'의 만찬을 위해 그는 요셉을 읍내 시장에 보냈다. 망고와 챠우챠우(중국 김치)와 또 그토록 희한하게 맛이 좋다는 북쪽 산서 지방의 명물 들오리 등을 사 오도록 했다. 등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화덕에서 얼굴을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 열려진 문 사이로 헙수룩한 차림의 인부가 세 수녀와 함께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긴 여행으로 몹시 지치고 피로한 기색이 낯선 곳에 대한 불안이 눈에 띄게 드러나 보였다. 그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당의 작은 길을 향해 걸어 들어왔다. 맨 앞에 선 사람은 마흔 살 가량의 수녀로 매우 품위 있고 아름다웠다. 얼굴 윤곽이 섬세한데다가 눈은 파랗고 컸다 .피로 탓인지 창백해 보였으나 걸음걸이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단정했다. 그녀는 프랜치스 앞에 와 섰으나 제대로 그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유창한 중국어로 말했다. "신부님께 안내를 좀 해주실 까요?" 그는 뜻하지 않은 수녀들의 출현에 놀라 얼결에 중국어로 대답했다. "당신들이 내일 도착할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저 끔찍한 배로 다시 돌아가 있으라고요?"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노여움을 겨우 삭이며 다시 말했다. "어쨌든 신부님께로 안내해 주세요." 그는 이번에는 영어로 천천히 대답했다. "내가 바로 치셤 신부입니다." 성당 건물만을 바라보고 잇던 그녀의 눈이 순간 놀라움으로 커지며 셔츠 차림의 작은 남자에게로 돌려졌다. 그리고 그 눈은 낡은 작업복 바지와 더러운 손, 진흙투성이인 구두, 흙물이 튄 얼굴 등을 차례로 훑어보는 동안 낭패의 기색이 역력해졌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더듬거렸다. "마중을 나가지 못해 정말 미안합니다. 무척 고생을 하셨을 텐데......" 그러자 곧 그녀의 노여움이 폭발했다. "마중을 기대한 것이 잘못이었나요. 우리는 6천 마일이나 되는 길을 왔습니다." "하지만......편지에는 분명히......" 그녀는 다시금 품위 있고 당당한 말투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방으로 안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 수녀들이 모두 지쳐 있으니까요." 프랜치스는 그녀에게 마중을 못 나간 데 대한 변명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두 수녀의 모습이 너무도 지치고 불안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거북하고 어색해져서 말없이 그녀들을 안내했다. 거처할 집 앞에 오자 그는 먼저 수녀에게 말했다. "짐을 가지러 사람을 보내겠으니 편히 쉬십시오. 그리고 오늘 저녁 식사는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초대는 고맙습니다만 사양하겠어요." 그녀는 냉랭하게 대답하며 다시금 경멸하는 눈길로 그의 차림새를 훑어보았다. "대신 우유와 과일이 있으시면 좀 나눠주세요. 그리고 일은 내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심한 굴욕감을 억누르며 천천히 사제관으로 돌아왔다.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수많은 서류 뭉치들 속에서 문제의 텐진발 편지를 찾아냈다. 그의 기억은 틀림없었다. 저 수녀들의 도착 날짜는 5월 19일, 즉 내일로 적혀 있었다. 그는 분풀이라도 하듯 편지를 잘게 찢어 휴지통 속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소용이 없어진 들오리를 생각하며 얼굴을 붉혔다. 프랜치스가 다시 사제관을 나왔을 때 바로 몇 걸음 앞에서 요셉이 지시한 물건들을 잔뜩 사 들고 신이 나서 걸어오고 있었다. "요셉, 수녀들이 도착했으나 과일은 모두 수녀들에게 가져가고 다른 물건들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주도록 해라." "뭐라고요, 신부님?" 요셉 또한 놀라 더 뭐라고 지껄이려다 신부의 무서운 표정에 겁을 먹고 다음 말을 꿀꺽 삼켰다. "네, 알겠습니다." 프랜치스는 언짢은 마음을 달래려는 듯 묵묵히 성당을 향해 걸었다. 다음날 수녀들은 미사에 참석했다. 미사가 끝난 후 감사의 기도를 마치자마자 그는 밖으로 나왔다. 마리아 베로니카 원장 수녀가 그를 기다려 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없었다. 의당 맡겨진 일에 대해 한 마디의 상의도 하러 오지 않았다. 한 시간쯤 지나 프랜치스는 교실로 가 보았다. 그녀는 책상 앞에서 무엇인지를 쓰고 있다가 그를 보자 조용히 일어났다. "앉으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편지지가 펼쳐진 책상 앞에 선 채로 있었다. "저는 여기서 계속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점심때가 지나야 모입니다. 한 열 명쯤 되는데 그것도 몇 주일에 걸쳐서 모집한 인원이지요." 그는 애써 명랑함과 유쾌한 표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퍽 귀엽고 영리해 보이는 아이들이에요." 그녀는 그때에야 비로소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진료소의 일도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솔직히 말해 내가 가진 의학 지식이란 보잘것없거든요. 그러나 이곳에서는 하찮은 지식과 치료도 효과는 놀라울 정도랍니다." "물론이지요. 진료소의 시간을 알려 주시면 제가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의 태도는 흠잡을 데 없이 깍듯하고 예의발랐다. 그러나 프랜치스는 처음부터 줄곧 무어라 할 수 없는 차가움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이 그를 거북하고 어색한 기분으로 만들었다. 그의 시선이 조그만 액자 속에 끼워진 사진-그녀가 이곳에 오자마자 꺼내 놓은 것-에 머물며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주 아름다운 경치군요." 그는 가벼운 대화로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차가운 벽을 허물고 싶었다. "네, 아름다운 곳이죠. 안하임 성이라고." 그녀가 푸른 솔밭을 배경으로 하얗게 솟아 있는 옛 성이 찍힌 사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성에 딸린 테라스와 정원이 아름다운 호수로 이어져 있었다. "아,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이라지요. 댁이 그 부근입니까?"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무 표정도 없이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대꾸했다. 더욱 거리감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네, 아주 가까운 곳이죠." 대화는 다시 끊어졌다. 그녀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빠른 어조로 말했다. "물론 두 수녀와 저는 이곳에서 우리에게 맡겨지는 일들을 힘껏 도우려는 각오로 왔습니다. 그러니까 신부님께서도 우리들에게 부탁하실 일이 있으시면 거리낌없이 말씀해 주세요. 그 대신......"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들에게 어느 정도 행동의 자유를 허용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프랜치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반문했다. "구체적으로 그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가능한 한 생활의 독자성을 갖고 싶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식사는 우리들끼리만 하고 또 숙소도 완전히 독립되어 있어야 하는 것 등입니다." 그녀의 대답은 아주 명료했다. 그는 피가 얼굴로 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원래 그렇게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당신들이 머무는 집은 바로 당신들의 수녀원입니다." "그럼 수녀원 내의 관리는 제게 맡기시겠어요?" 비로소 상대방의 뜻을 명백히 안 신부는 가슴속에서 마치 납덩어리라도 가라앉은 듯 무거웠다. "물론입니다. 단 우리의 재정 상태가 매우 취약하니 그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히 해주십시오." "아, 그건 수녀원 본부에서 책임지기로 되어 있답니다." 그는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럼 수도회 본부에서는 청빈의 정신을 지키도록 명하지 않습니까?" "물론 청빈은 기본적인 의무지요." 그녀는 잠깐 신부를 바라보고는 애매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청빈과 인색함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이 한없이 계속될 듯한 침묵의 압력에 견딜 수 없다는 듯 가벼운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그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린 채 쌀쌀하게 말했다. "요셉 편에 진료소의 시간과 교회의 행사표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만 실례합니다." 그가 교실 밖으로 나가자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았다. 꺾일 수 없는 자존심으로 팽팽하게 긴장된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곳의 상황은 예상했던 대로 아주 좋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끝에 힘을 주어 편지를 계속 써 나갔다. .....그리운 오빠, 걱정했던 일들이 벌써 시작되었어요. 대대로 우리 호엔로에 가의 핏속을 흐르는 완고한 자존심이 저지른 짓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 혼자만의 잘못이라고는 그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제 앞에 서 있었어요. 흙은 다 털어 내고 턱에 지저분한 면도날 자국을 남기긴 했지만 그런 대로 수염도 깎았더군요. 애써 위엄을 부리려 했지만 저는 첫눈에 벌써 보잘것없는 집안 태생이라는 것을 알아 버렸기에 그 위엄은 별로 효력이 없었어요. 게다가 하는 말이라니, 오빠, 오빠는 안하임 성을 역사적인 곳이라고 기억하세요? 기억하시는지요. 어머니와 함께 호수에서 요트를 타던 날 제가 찍었던 사진-그것은 이 세상에서 저의 유일한 보물이기에 어디든 지니고 다닙니다-을 바라보며 그는 "당신은 쿡크(영국의 관광 여행사 이름)의 어떤 코스로 이곳을 가셨습니까?" 라고 진지하게 묻지 않겠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거기서 태어났노라고 바른 대로 대답을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더러운 흙투성이인 자신의 구두를 내려다보며 "아, 그러십니까. 우리 예수님께서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는데요" 라고 중얼거렸을 거예요. 그분은 남을 놀라게 하는 데에는 뛰어난 소질이 있어 보여요. 옛 가정교사였던 헬 슈핀너를 기억하시지요. 우리의 놀림감이 되곤 하던-항상 그의 눈에 감돌던 마치 얻어맞은 개처럼 전전긍긍하고 불안한 빛을 저는 오늘 아침 그분의 눈에서 다시 보았습니다. 아마 출생 신분이나 자란 환경이 슈핀너와 별반 다를 바 없어서일 거예요. 에른스트 오빠, 저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두려움 없이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살아온 환경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든 것이 부족하고 불편하기만 한 이국의 벽촌에 파묻혀 게다가 도저히 존경할 수 없는 인물과 더불어 교류를 가져야 한다니 말이에요. 저는 제가 어쩔 수 없이 위선자가 될 것이 두렵습니다. 또한 말타 수녀와 클로틸드 수녀는 리버풀에서부터 줄곧 병난 송아지 꼴이 되어 얼빠진 미소만 짓고 있으니 주의를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게 맡겨진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할 결심입니다. 제 위치를 지키며 굳은 의지로...... 그녀는 거기까지 써 내려가다 펜을 놓고 다시금 창 밖을 내다보았다. 불안이 가슴 가득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프랜치스는 원장 수녀 이외의 두 수녀도 애써 자신을 멀리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서른이 채 못되었을 클로틸드 수녀는 몹시 마르고 창백하여 늘 신경질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기울이고 기도할 때의 그녀의 푸른 눈은 간절한 기구와 감동으로 빛났다. 말타 수녀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았다. 말타 수녀는 우선 나이도 마흔이 넘은 데다 체격도 크고 살빛도 검어 퍽 튼튼하고 소박한 시골 아낙네를 연상시켰다. 또한 행동거지도 성급하고 거친 데가 있어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농가의 부엌이나 넓은 마당이 제격일 듯싶었다. 프랜치스는 그녀들과 종종 마당에서 마주치는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벨기에인 수녀는 몹시 당황한 듯한 태도로 한 무릎을 굽혀 인사를 하곤 했다. 그리고 그는 몇 걸음 지나지 않아 소곤대는 그녀의 말소리를 들었다. 때때로 프랜치스는 그녀들에게 '날 그렇게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 말아요. 첫인상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보기보다 괜찮은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이유는 없었다. 수녀들의 의무 수행은 완벽했다. 성당 제의실은 언제나 깨끗이 정리되어 있고 아름답게 수놓은 제대포와 굉장히 공을 들여 만들어야 하는 스톨라(사제가 미사집전 때 목에 두르는 긴 천. 사제의 권위를 상징함)가 여러 개 새로 마련되었다. 뿐만 아니라 진료소의 약장에는 붕대와 약품들을 종류와 쓰임새에 따라 가지런히 분류하여 정돈해 놓았다. 아이들의 수도 늘었다. 교실은 늘 아이들이 목소리를 합해 따라 읽는 소리와 노랫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프랜치스는 종종 교실 밖의 나무 그늘에 서서 그 귀여운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이 얼마나 초라한 학교인가. 그러나 또한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보물인가. 그는 되도록 교실 안에 들어가는 것은 피했다. 자신이 방해자가 된 듯한 거북스러움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마리아 베로니카 원장은 대단히 헌신적으로 일에 임했다. 여전히 아름답고 훌륭했으나 그 의연한 태도 속에 까다로운 성질이 숨어 있었다. 신부의 첫인상에서 받은 혐오감은 씻겨지지 않는 것 같았다. 프랜치스로서는 이번 일로 자신이 사교성이 없을 뿐더러 여자들의 호감을 사기에는 적당치 못한 남자라는 판단이 더욱 확실해진 것뿐이었으나 역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일주일에 세 번 두 사람은 진료소에서 오후 내내 함께 일했다. 때로는 네 시간이 넘게 일해야 되는 날도 있었다.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가 일에만 열중한 듯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사실은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잊기 위해서라는 것을 그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치셤 신부는 함께 일하는 동안 그녀에 대해 우정이라고나 해야 할 따뜻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수녀들이 온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어느 날 손가락이 몹시 곪은 환자의 치료를 끝냈을 때 곁에서 지켜보던 수녀가 무척 놀랍고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주 훌륭한 솜씨로군요." 그는 얼굴을 붉혔다. "나는 어릴 때부터 손으로 하는 일이면 뭐든지 좋아했답니다." 그녀의 칭찬 한 마디에 그는 어린아이처럼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대답했다. 진료소 문을 닫기 전 의료품 정리를 끝낸 그녀가 무엇인가 할 이야기가 있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저, 수녀원 일에 대해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아이들 돌보는 일이랑 여러 가지 집안 일이 두 수녀의 손만으로는 벅찬 것 같아요. 더욱이 클로틸드 수녀는 건강도 그리 좋지 않고......그래서 신부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도와 줄 사람을 두고 싶습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는 기꺼이 승낙했다. 그녀가 사전에 허락을 구해 왔다는 것이 뜻밖인 만큼 그의 마음은 흐뭇했다. "마땅한 사람을 찾아보도록 할까요?" "아닙니다. 벌써 적당한 사람들을 구했어요." 이튿날 성당 앞뜰을 지나가던 프랜치스는 무심히 수녀원 쪽을 바라보다가 수녀원 테라스에서 침구를 털고 있는 호산나와 피로메나 부부를 발견하고 낯빛이 흐려졌다. 그리고는 잠시 망설이던 끝에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세탁장에서 홑이불을 정리하고 있던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는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그는 되도록 빠른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새로 온 사람들에 대한 얘긴데......그들이 마음에 드십니까?" 그녀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빛을 드러내며 그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 일이라면 제 소관이 아닌 가요? 제게 맡겨 두세요." "물론입니다. 간섭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 부부가 매우 불성실하고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려 드리는 겁니다." 그녀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그것이 신부로서, 또 신자로서 갖추어야 할 자비 인가요?"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한 마디는 그를 궁지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그는 단조로운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이 성당과 당신들을 위해서는......" "부탁이니 제발 저희들의 일은 염려하지 마세요.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띄운 채 잘라 말했다. "저 왕씨 부부는 질이 좋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미 스스로 모두 얘기해 주었답니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겪은 거예요." "저 두 사람을 내보내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 "내보내다니요? 전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녀는 때로는 완강했다. 섣부른 호의 따위는 보이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호의를 미끼삼아 이렇게 간섭하고 권위를 내세우려 하다니. 그의 속셈을 분명히 안 이상 앞으로 절대로......그녀는 거듭 자신 있게 다짐했다. "약속하지 않으셨던가요? 수녀원의 관리와 책임은 모두 제게 맡기신다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더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순수한 동기에서 나온 충고가 오해와 반발심만 일으켜 겨우 호전되려던 둘 사이를 악화시키기만 한 것이다. 그로 인해 그의 입장은 더욱 불리해졌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이나 사제관 앞을 지나치는 왕씨 부부의 태도는 오만하고 의기양양하였고, 그때마다 프랜치스는 치미는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7월도 다 지나간 어느 날 아침, 여느 날과 다름없이 요셉은 과일과 홍차뿐인 식사를 가져왔다. 신부의 눈길이 몹시 부어 거북스러워 보이는 요셉의 손에 가 닿았다. 요셉은 조금은 두려워하는 듯, 그러나 뽐내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신부님, 그만 죄를 짓고 말았어요. 하지만 저 건방진 왕씨가 하도 못되게 굴길래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혼을 내 주었어요." 프랜치스는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요셉은 겁먹은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글쎄, 그 작자가 하도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니......베로니카 수녀에 비하면 우리는 한갖 티끌처럼 보잘것없다나요......" "요셉, 결국 인간이란 티끌에서 태어나 티끌로 돌아가는 것이란다." 신부는 씁쓸히 웃었다. "그뿐인 가요? 나참......" "더 심한 말을 해도 참아야 한단다." "말뿐이면 참지요, 신부님. 계산을 속여서 수녀님들에게 돈을 뜯어내서는 흥청망청 쓰고 돌아다녀요. 수녀님들 생활비가 모두 그 작자의 뱃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요셉의 말대로 였다. 프랜치스의 충고를 간섭으로 받아들인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는 보란 듯 왕씨 내외에게 집안의 모든 일을 맡겨 처리하게 했다. 호산나는 수녀원 안의 모든 일을 도맡았고 피로메나는 으스대며 매일 물건이나 사러 거리로 나가는 게 고작이었다. 물건값은 월말에 한 번 지불하게 되어 있었다. 돈을 치를 때가 되면 그들 내외는 새옷으로 갈아입고 나가 상인들에게서 실제보다 엄청나게 많은 액수가 적힌 영수증을 받아 오는 것이었다. 이것은 프랜치스의 엄격한 스코틀랜드 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절도 행위고 또한 신자라면 파문에 해당되는 중죄였다. "왕씨를 너무 심하게 때린 것은 아니겠지?" 그는 정색을 하고 요셉에게 물었다. "별로 다치진 않았어요." "넌 참 어쩔 수 없는 놈이야. 요셉, 벌로 휴가를 주마. 또 전부터 사 달라고 하던 새옷도 사주지." 그날 오후 환자들이 오기 전에 의료품 정리를 하던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가 기어이 그 문제를 입에 올렸다. "신부님은 신부님께서 저 가엾은 왕씨에게 한 짓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너무 심한 건 바로 왕씨 부부입니다." "신부님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 사람들은 바로 당신들 것을 도둑질하고 있는 겁니다. 본래 도둑놈이니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도둑질을 두둔하는 건 도둑질을 시키는 것과 같아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전 신부님 말씀을 믿을 수 없군요. 저는 항상 제가 부리는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해 왔습니다." "더이상 드릴 말씀이 없군요. 하지만 머지않아 제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요." 그는 왕씨 부부에 대해서는 더 거론하지 않을 것을 그녀에게 다짐했으나 그 일은 수주일 동안 무겁게 그의 머릿속을 내리누르며 떠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해 극도의 미움과 경멸의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과 계속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 더욱이 상대방의 권위와 정신적인 만족감을 위해 막대한 피해와 손실에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다는 게 커다란 고통이었다.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가 무심코 그러나 솔직히 내뱉은 말이 그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것이다. 그녀 역시 괴로워하고 있는 듯했다. 매일 미사 때마다 그는 성반을 받쳐들고 있는 그녀의 희고 연약한 손에서 그리고 창백한 얼굴과 신경질적으로 떨리는 눈까풀에서 그에 대한 감출 수 없는 경멸의 빛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길고 평화로운 잠을 맛볼 수 없었다. 종종 밤중에 깨어나 다시 잠들지 못하고 날이 밝을 때까지 성당의 뜰을 거닐곤 했다 .두 사람 사이의 상태를 호전시키려는 노력도 결국 그녀의 직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오해받을 것이기에 그는 침묵으로 자제해야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머지않아 자신의 의사를 명백하게 밝히고 주장할 시기가 오리라는 것을 그는 막연히 예감하고 있었다. 그 시기는 간단한 사건으로 인해 뜻밖에도 빨리 왔다. 가을로 접어드는 어느 날 그는 뭔가 단단히 결심한 태도로 수녀원을 향했다.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가 이곳 사정에 어둡고 경험이 없어 하는 일이라고는 해도 이제는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원장 수녀님......" 그녀 앞에 서면 언제나 그렇듯 그는 긴장과 거북스러움을 느끼며 예의 그 구두-이제는 명물이 되다시피한-로 시선을 떨구었다. "요즘 클로틸드 수녀와 함께 거리에 나가십니까?" 그녀는 좀 놀란 듯했으나 예사롭게 대답했다. "예, 나갑니다." 한참 동안 둘 다 입을 열지 않았다. 먼저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러나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로 신부의 다음 말을 채근했다. "거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싶으신 가요?" "거리의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러 다니신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만주교 부근까지도 가셨지요?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 일을 그만두셨으면 합니다." 그는 되도록 침착하게 말했다. "무슨 이유죠?" 그녀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따지듯 캐물었다. "그 이유는 말씀드리지 않는 편이 낫겠군요." 그녀의 낯빛은 긴장으로 더욱 창백해졌다. "물론 저희들의 자선 행위가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인 이상 그것을 막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으시겠지요. 그럼 적어도 그 까닭 정도는 알 권리가 저희에게도 있지 않을까요. 말씀해 주셔야겠어요." "요셉이 비적떼가 거리에까지 들어와 있다는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모양이에요. 게다가 와이츄의 군사들은 잔인하고 무지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얼굴을 쳐들고 신부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소하는 투로 말했다. "저는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희 집안 남자 치고 용감한 군인 아닌 사람이 없었답니다."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는 수녀의 교만하게 치켜든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당신이나 클로틸드 수녀는 남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와이츄의 무리를 바바리아 귀족 가문의 키드 장갑을 낀 기사처럼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그는 이제껏 이렇듯 직설적으로 말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곧 파랗게 질렸다. "신부님은 저에 대해 하느님께 헌신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을 만큼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시군요. 저는 이곳에 올 때 질병, 재난, 사고 등 어떤 위험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앞에서 두려움을 갖거나 비겁해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거예요. 죽음까지도 각오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경고나 충고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듣고 싶지도 않고요." 그녀가 말을 하는 동안 프랜치스는 줄곧 타는 듯한 강한 시선을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럼 그 이야긴 그만 두지요. 당신이 산적들에게 잡혀간다 해도 당신 말대로 그건 큰 문제가 될 게 없을 테니까요. 거리로 나가는 것을 중지하라는 데에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중국 사회에서 여자들의 지위란 당신네 나라와는 아주 달라 너무나 미천합니다. 여러 세기에 걸쳐 내려오는 전통이지요. 이런 사회에서 당신네들이 거리를 공공연히 나다니는 것은 굉장한 반감만 일으킬 뿐입니다. 선교하는 데 여간 불리한 것이 아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들이 내 허가 없이 또 호위해 주는 사람 없이 거리에 나가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그녀는 신부의 너무도 뜻밖의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는 모욕감으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도저히 깨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몸을 간신히 버티고 있었지만 이미 이야기할 기력을 잃고 있었다. 프랜치스가 돌아가려 할 때 복도에서 급한 발소리가 나더니 말타 수녀가 들어왔다. 너무나 흥분한 탓에 문 옆에 반쯤 가려져 서 있던 프랜치스를 미처 보지 못한 그녀는 흘러내리는 머릿수건을 끌어올리며 미친 사람처럼 떠들기 시작했다. "모조리 훔쳐 가지고 달아났어요. 가게에 지불할 90달러와 은그릇들......아니 클로틸드 수녀의 상아 십자가까지도요." "대체 누가 달아났다는 거죠?"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의 신음 같은 물음이었다. "누군 누구겠어요? 왕씨 부부지요. 도둑들이었어요. 전 진작부터 그 작자들이 얼마나 지독한 거짓말쟁이고 악질들인지 알고 있었어요." 프랜치스는 차마 마리아 베로니카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어서 발소리를 죽이며 교실을 나왔다. 그녀는 계속 떠들어대는 말타 수녀를 바라보며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5 방금 수녀원에서 있었던 일 때문만은 아니지만 뭔가 알지 못할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치셤 신부가 사제관으로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의 방문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챠씨와 그의 아들이었다. 날씨가 추워진 탓에 그들은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있었다. 용나무 뒤로부터 다가오는 황혼을 배경으로 연못가에서 두 손을 꼭 잡은 채 서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들은 전부터 자주 성당에 드나들었기에 신부는 그들이 특별한 용건으로 왔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인사를 나눈 뒤 프랜치스가 말하자 챠씨는 그럴 시간이 없노라고 사양했다. "신부님께 저희 집에 오시라는 청을 드리러 찾아왔습니다. 저희들은 오늘밤 산으로 떠납니다. 저희들과 함께 가신다며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프랜치스는 뜻밖의 제의에 어리둥절했다. "겨울인데 산장에 가십니까?" "네, 사실은 우리도 여름에나 더위를 피하기 위해 콴산 숲속의 별장을 사용했지만......그러나 겨울산도 또다른 운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식량도 땔감도 충분합니다. 신부님, 눈 쌓인 조용한 산 속에서의 명상도 때로는 필요한 것이 아닙니까?" 챠씨의 어조는 상냥하고 공손했다. 프랜치스는 이 은근하나 간곡한 청 뒤에 숨은 뜻을 추측해 보며 탐색하는 눈초리로 챠씨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 거리에 와이츄가 쳐들어오는 건 아닙니까?" 프랜치스의 물음에 챠씨는 어깨를 움츠려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으나 굳이 숨기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럴 염려는 없습니다. 제가 이미 와이츄에게는 많은 돈과 살 만한 집을 주었으니 아마 파이탄에 오래 머물겠지요." 프랜치스는 점점 더 챠씨의 속셈을 알 수 없었다. "신부님, 함께 가 주십시오. 현명한 사람들일수록 때로 고독한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신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초대는 고맙습니다만 성당에서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댁에서 주신 이 아름다운 곳을 어떻게 떠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이곳 기후가 좋습니다만......만일 오실 의향이 있으시면 꼭 연락 주십시오. 유야, 마차에 짐을 다 실었겠지. 신부님께 영국식으로 인사드리렴." 프랜치스는 두꺼운 솜옷 소매 박으로 악수를 하기 위해 내민 소년의 가냘픈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하느님의 축복이 있기를 기도했다. 챠씨는 몹시 섭섭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프랜치스는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넋을 놓고 지켜보았다. 챠씨의 갑작스런 산장행이 심상찮은 일인만큼 까닭을 알 수 없어 기분이 착잡했다. 챠씨가 돌아간 후부터 더욱 확실히 그의 가슴속에 자리잡은 불안한 기분과 싸우며 그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일과를 보냈다. 수녀들과는 거의 대면하지 않았다. 날씨가 나빠지기 시작하자 철새들은 떼를 지어 남쪽으로 날아갔다. 눈다운 눈도 내리지 않는 하늘은 회색 빛으로 어둡게 내려앉아 더욱 사람들의 기분을 음산하게 만들뿐이었다. 날씨 탓인지 요셉도 요즘 들어 무척 침울한 얼굴이더니 갑자기 프랜치스에게 고향에 다녀오겠노라고 말했다. "집을 떠난 지 오래되었잖아요. 부모님의 일이 걱정돼서요." 문득 프랜치스에게 요셉이 갑자기 고향에 가고자 하는 것이 그가 막연히 예감하고 있는 불안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물음에 처음에는 고개를 가로젓던 요셉이 마침내 사실은 머지않아 이곳에 큰 재난이 닥칠 거라는 소문이 파이탄 거리에 퍼지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프랜치스는 요셉의 근심을 없애 주기 위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 버티고 서서 재난의 악령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지켜보지 않겠니? 그때 달아나도 늦진 않겠지." 이튿날 새벽 미사를 끝낸 후 그는 소문의 내용과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거리로 나갔다. 거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혼잡을 이루고 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문을 닫은 가게가 이상하다면 이상한 점이었다. 그물 상가를 지나칠 때 남의 눈을 피해 가게문에 못을 치고 있는 홍의 모습을 보았다. "이번에는 틀림없습니다, 신부님." 신부를 바라보는 늙은 가게 주인의 눈에는 벌써 다가올 재난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흑사병이라나요? 벌써 여섯 주가 당했고 어젯밤 파이탄에도 환자가 생겼대요. 그리고 또 여자 하나가 만주문 안에서 죽어 있더랍니다.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이라면 이게 얼마나 참혹한 재난의 전조인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습죠. 피난 갈 궁리에 여념이 없어요. 맙소사, 흉년이라고 피난 가고 전염병이라고 피난 가고.......살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침통한 얼굴로 성당 언덕을 올라가던 치셤 신부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성당 담 옆의 길 가운데에 쥐 세 마리가 죽어 있었다. 닥쳐올 전염병의 경보였다. 그는 순간 아이들을 생각하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는 급히 석유를 가지고 와서 쥐들에게 끼얹고 태웠다. 다 탄 재를 땅 속 깊이 묻은 뒤에도 그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나룻배론 아무리 빨리 간다 해도 6일은 걸릴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써서 든지 외부와의 연락을 취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길이었다. 묘안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그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사제관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는 요셉을 불러들였다. "요셉, 심부름을 좀 가야겠다. 아주 중요한 일이란다. 챠씨의 새 보트로 가는 거야. 선원에게는 챠씨와 내 허락을 받았다고 말하고 보트를 안 내주면 훔쳐도 좋아, 알겠니?" 자신의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자 요셉의 눈이 반짝 빛났다. "보트를 구하는 대로 전 속력을 내어 센샹으로 가거라. 그리고 그곳 성당의 치보드 신부님을 만나는 거야. 만약 신부님이 안 계시면 즉시 미국 석유 회사로 가서 제일 높은 분을 찾아 파이탄에 페스트가 퍼지고 있으니 곧 약품과 식량과 의사를 보내 달라고 부탁해라. 그런 뒤에는 전신국에 가서 여기 써 있는 대로 전보를 쳐야 한다. 그리고 또 베이징 사제관과 난징 유니온 제네랄 병원으로 보내는 편지가 있다. 돈은 여기 있다. 요셉, 충분히 해낼 수 있겠지? 어서 떠나도록 하렴. 하느님이 너와 함께 가 주실 거야." 한 시간 후 요셉은 푸른 보따리를 등에 메고 단호한 결의로 입을 굳게 다문 채 성당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요셉을 보내고 난 뒤 프랜치스는 겨우 가라앉은 마음으로 보트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기 위해 종루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광막한 평원의 정경은 참혹한 것이었다. 평원을 가로질러 가축과 짐마차와 사람들의 행렬이 두 줄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시라도 지체할 수 없을 만큼 사태는 절박했다. 그는 종루에서 뛰어내려와 학교로 달려갔다.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는 어디 계십니까?"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열심히 복도를 닦고 있는 말타 수녀에게 물었다. "교실에 계십니다." 그녀는 젖은 손으로 머릿수건을 매만지며 그에게 비밀이라도 알려 주듯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가 요즈음 매우 기분이 우울해 있다고 덧붙였다. 그가 교실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얼굴을 보자 그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 그것은 숨이 막히는 것과 같은 거의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그는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숨에 말했다. "전염병이 퍼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페스트인 것 같아요. 대책이 필요합니다."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페스트로부터 아이들을 지켜 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실과 수녀원을 격리시키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과 수녀님은 절대로 바깥출입을 금하도록 하고 수녀님 한 분이 항상 입구를 지키도록 해주십시오." "......" 그는 잠시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말을 끊고 심호흡을 했다.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여전히 창백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는 수녀에게 그는 착잡한 시선을 보내며 대답을 구했다. "대단히 좋은 방법이군요." "그 밖에 또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빨리 의논해서 일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는 비로소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겠지요. 격리 당하는 일이라면 벌써부터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그의 신경이 날카롭게 긴장되었으나 그런 일로 시비를 가릴 때가 아니었다. "페스트가 어떤 병인지는 수녀님도 잘 아시겠지요." "네." 그녀의 대답은 딱딱했다. 더이상 말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는 시종 적대감인지 반감인지를 감추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기분이 한층 언짢아졌다. "만일 이것도 하느님의 뜻에 의한 재난이라면 우리는 마음과 힘을 합해 이 시련을 견뎌 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 사사로운 감정들은 버리도록 합시다." "물론 그래야겠지요." 그녀는 여전히 차가운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빈정대고 있었다. 의연하고 품위 있는 태도 속에 그토록 오만한 본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교실을 나와 성당으로 돌아오며 새삼 그녀의 담대함에 놀라고 있었다. 페스트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용기가 있다니. 어쨌든 다행한 일이다. 앞으로 한 달 동안만이라도 모두 베로니카 수녀만큼 침착한 태도로 일해 나간다면 한결 수월할 것이다. 성당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정원사를 보내 성당 건축을 맡았던 챠씨네 감독과 여섯 명의 일꾼을 불렀다. 그들에게 미리 표시를 해 두었던 성당과 수녀원과의 경계선에 흙담을 쌓도록 부탁했다. 마른 옥수수 대는 훌륭한 바리케이드가 되었다. 교실과 수녀원 바깥으로 담이 쌓여지는 동안 그는 담 아래에 좋은 도랑을 파 나갔다. 만일의 경우 소독약을 흘려 보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두컴컴해서야 겨우 일은 끝이 났다. 일꾼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도 그는 불안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고에서 감자와 밀가루, 버터, 베이컨, 밀크, 통조림 등을 잇는 대로 모두 새로 쌓은 담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약품까지 옮겨 놓자 조금 불안이 가시는 듯했다. 그때가 새벽 3시, 잠을 자기에는 좀 애매한 시간이었으므로 그는 성당 안에 들어가 미사 시간이 될 때까지 기도를 드렸다. 날이 밝자마자 그는 사법 장관의 청사를 찾아갔다. 만주문에는 병이 만연되고 있는 성으로부터 밀려오는 피난민들의 행렬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성벽 밑에는 이미 수백 명의 피난민들이 점거하고 있었다. 살을 에는 찬바람 속에서 몸을 녹일 불도 없이 웅크리고 밤을 지새운 그들 사이에서 불길한 기침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이미 피난민들의 대부분이 페스트에 감염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손을 써 볼 도리 없이 다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과 함께 무슨 수를 써서 든지 그들을 살리고 싶다는, 아니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밤사이에 죽은 노인은 옷들이 다 벗겨진 탓에 발가벗겨져 하늘을 향한 채 눕혀져 있었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프랜치스는 연민으로 터질 듯한 가슴을 안고 사법 청사로 들어갔다. 그러나 희망을 걸고 찾아온 파오 씨의 사촌은 보이지 않았다. 파오씨 집의 굳게 닫힌 덧문만이 이 주인들이 이미 멀리 떠나 버렸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재판소로 뛰어갔다. 그러나 그곳 역시 텅 비어 있었다. 미처 달아나지 못한 서기들도 도망갈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그들 중 한 사람을 붙잡고 장관의 소재를 물었다. "장관님은 짼찐의 친척집 장례식에 가셨습니다." 그는 프랜치스의 팔을 뿌리치며 대답했다. 짼찐이라면 8백 리나 떨어진 곳이다. 극도의 흥분과 절망감으로 혼란된 프랜치스의 머리로도 최하급 관리 외에는 모두 '소집'이라는 명목으로 파이탄을 빠져나간 것을 알 수 있었다. 행정은 이미 정지된 것이다. 이제는 한 가지 길밖에 없었다. 헛걸음이 되기 분명하겠지만 어쨌든 가보는 수밖에. 프랜치스는 둔영소를 향해 뛰었다. 와이츄가 이 지방을 점령하고 유지들에게 공물을 바치도록 강요하게 되면서부터 실상 정규군은 유명무실해졌다. 비적떼가 거리에 나타날 때면 군대는 으레 해산되고 군인들은 그 무리에 끼여 비적이 되어 버리는 형편이었다. 지금도 바로 그런 시기였다. 병영에서는 열두 명쯤 될까 한 군인들이 더러운 회색 솜옷 차림으로 총도 없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프랜치스가 문으로 들어서려 할 때 보초병이 앞을 막았다. 그러나 프랜치스는 그를 떠밀어 버리고 병영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군복을 단정히 입고 창가에 기대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젊은 중위가 미처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멍한 눈길로 신부를 쳐다보았다. 신부는 탐색하는 시선으로 재빨리 중위를 훑어보았다. 젊은 장교는 곧 정중한 태도로 신부를 맞았다. 신부는 초조하고 절망적인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으나 되도록 침착하게 말했다. "파이탄 전체가 무서운 전염병의 위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 재난과 싸워 주실 용기와 권력을 가지신 분을 만나러 왔습니다......" 샨은 침착한 얼굴로 프랜치스를 바라보았다. "그런 권력을 가진 분은 와이츄 장군뿐입니다. 장군은 내일 뚜엔라이로 출발하십니다." "그렇다면 좀 자유롭게 되겠군요. 제발 부탁이니 부디 도와주십시오." 샨이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사람들을 살리려면 희생적으로 일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병이 퍼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벌써 퍼지고 있어요. 초롱 상가에서도 10명 이상의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대부분 죽고, 남은 사람도 죽어 가고 있습니다." 샨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프랜치스는 결코 여기서 물러나선 안 된다는 것을, 그것은 패배를 자인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초조해졌다. 그는 중위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바로 그들이 애타게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가지 않겠다면 나 혼자라도 가겠소. 하지만 나는 당신이 함께 가 주실 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중위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섬약하고 사치스러워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그는 용기와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출세에의 야망도 있지만 타협을 용납 못하는 강직한 성격 탓에 와이츄에게 매수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파이탄 사람들의 운명 따위에 대해선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신부가 방에 들어설 때까지 그를 사로잡고 있던 생각은 유광로에 남아 있는 소수의 병력에 합류할까 어쩔까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신부의 말은 그의 성품 속에 있던 용기와 정의로움을 두드려 깨웠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기는커녕 관심도 없었던 일에 협력하기 위해 일어나 권총이 달린 혁대를 찼다. "전염병 퇴치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물건이지만 그래도 장교에게 있어서는 상징이니까요. 부하들을 복종시키는 데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병영을 나와 유광로로 향했다. 그곳에서 39명의 군사들을 모아 마치 양계장처럼 사람들이 바글바글 들끓는 개천가의 초롱 상가로 갔다. 근처의 분뇨 처리장은 페스트균의 온상이었다. 판자로 지은 오두막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개천가 둑 위는 쓰레기 더미와 오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곳을 빨리 처치하지 않으면 페스트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 시내를 모두 삼켜 버릴 것이다. 그 중 큰 움막을 둘러보고 나온 신부는 중위에게 말했다. "우선 환자들의 수용소를 마련합시다." 샨은 감탄에 가까운 감정으로 신부를 바라보았다. 이 외국인 신부는 어딘가 좀 다르다. 페스트 환자에게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하다니. 도대체 겁도 없는 모양이지. 드물게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용기란 중위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미덕이었다. "마땅한 집이 있습니다. 유시따이(관리의 감찰을 관장하는 관청)의 집을 접수하면 됩니다." 샨이 말했다. 유시가 자기의 염세 몫을 사취했으므로 그래 사이가 아주 나빴던 것이다. "제 친구의 집인데 마침 비어 있어요. 훌륭한 병원이 될 겁니다." 그들은 곧 군사를 이끌고 시내에서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구역에 있는 유시따이로 갔다. 샨이 힘들이지도 않고 출입문을 열었다. 크고 훌륭한 저택으로 호화스러운 가구들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프랜치스는 5, 6명의 군사들과 함께 병자를 수용할 준비를 하기로 하고 중위는 나머지 사람들을 이끌고 나갔다. 최초의 환자가 들것에 실려 들어와 마루에 눕혀졌다. 종일 환자가 끊이지 않았다. 마루는 줄을 지어 누운 환자들로 가득 찼다. 그날 하루는 그의 생애 중 가장 긴 날이었다. 밤이 깊어서야 프랜치스는 솜처럼 지친 몸을 끌고 성당 언덕을 올라갔다. 멀리 시가지의 외곽에는 장례식을 치르는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오고 있었고, 그 소리를 묻기라도 하려는 듯 술취한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간간이 총소리도 들렸다. 그것은 주인 없는 상점을 약탈하는 소리였다. 잠시 후 거리는 소란이 끝나고 달빛 아래 말을 타고 동문으로 달려가는 한 떼의 비적들이 보였다. 그들은 이제 이 거리를 떠나는 것이다. 갑자기 달빛이 흐려지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언덕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제법 눈송이들이 굵어져 있었다. 그는 수녀원의 새로 쌓은 담에 기대어 서서 잠시 얼굴을 쳐들었다. 피로와 흥분으로 뺨에 와 닿는 눈의 감촉이 상쾌했다. 눈은 조그만 호스티아처럼 입안으로까지 날아들어왔다. 어느새 눈은 대지를 흰색으로 꽉 채웠다. 그는 급작스럽게 밀려오는 막막한 불안감으로 급히 대문을 두들겼다. 곧 발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리고 등불을 든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흐린 불빛 밑에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흔들렸다. 그는 피로한 음성으로 물었다. "모두들 괜찮습니까?" "네." 수녀의 대답을 듣자 안도감과 함께 하루종일 그를 짓누르던 긴장이 풀리며 현기증으로 눈앞이 어지러웠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피로와 시장기가 견딜 수 없이 밀려왔다. 잠시 그는 선 채 정신을 가다듬었다. "빈약한 대로 거리에 구호소를 설치하여 환자를 수용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더이상의 것을 바랄 수도 없지만......" 그는 말을 끊고 상대방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의 협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였다. 수녀들 중 한 사람이라도 와 준다면 일은 몇 배의 능률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대답을 듣기 위해 다시금 입을 연다는 것이 매우 거북스러웠으나 그녀가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수녀님을 한 분만 구호소로 보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자진해서 오실 분이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만......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녀는 여전히 잠자코 있었다. 굳게 다문 얇은 입술은 마치 "일찍이 당신은 우리의 바깥출입을 엄중히 금하시지 않으셨던가요?" 라고 말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러나 불안과 과로로 인해 퍼붓는 눈발 속에 서서 도움을 구하는 신부의 고통스런 눈길이 마음을 감동시킨 것일까.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시다면 제가 가겠어요."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기에게 결코 버릴 수 없는 적의를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고 그녀의 일솜씨는 말타 수녀나 클로틸드 수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빈틈없고 재빠른 것이다. "지금 곧 저와 함께 유시따이로 가셔야 합니다. 옷을 두텁게 껴입으시고 그 밖에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챙기십시오." 십여 분 후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는 필요한 물품들이 든 가방을 들고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는 가방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나란히 유시따이를 향해 걸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눈은 이제 발목을 덮을 만큼 쌓이고 그 위로 꽤 넓은 간격을 둔 채 나란히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나갔다. 밤사이에 구호소에 수용된 환자 중 열 여섯 명이 실려 나갔다. 그리고 그 세 배의 환자가 들어왔다. 모두 페스트 환자였다. 페스트균 앞에서는 아무리 독한 소독약도 소용이 없었다. 감염된 사람은 마치 쇠뭉치에라도 맞은 듯 맥없이 쓰러져서는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었다. 피는 굳고 폐는 썩으며 환자들이 끊임없이 뱉아내는 가래 속에는 병균이 무서운 속도로 번식했다. 경직된 얼굴의 근육이 한 순간 이완되어 웃는 것처럼 보일 무렵이면 몸은 이미 싸늘해져 있었다. 심할 경우에는 병에 걸린 지 단 한 시간 만에 죽기도 했다. 한의사들은 침술로 페스트를 고칠 수 있다고 떠벌렸으나 성공했다는 얘기는 없었다. 일주일이 채 지나기 전에 거리는 페스트의 지옥이 되어 버렸다. 도처에 페스트의 공포가 있었다. 거리의 남쪽에 있는 몇 개의 성문들은 거리를 빠져나가려는 사람들과 짐마차, 가마, 짐을 잔뜩 실은 당나귀들로 일대 혼잡을 이루었다. 추위는 더욱 심해졌으나 전염병은 조금도 누그러질 기미가 없었다. 프랜치스는 과로와 수면 부족으로 쓰러질 것만 같은 몸을 이끌고 환자들을 치료했다. 막연하게나마 그는 페스트가 비단 이 파이탄뿐만 아니라 이미 전국적으로 창궐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이므로 도무지 바깥 세상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페스트가 10만 마일에 걸친 전 국토를 휩쓸고 있으며 이미 50만 명의 희생자가 눈 속에 묻혔다는 사실에 대해, 또한 세계 각국의 시선이 중국으로 총집중되어 있으며 급히 조직된 미국과 영국의 의료진들이 벌써 중국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대해 그는 단 한 조각의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불안과 공포 속의 시간은 흘러갔다. 요셉은 돌아오지 않았다. 센샹으로부터 아무런 구원의 손길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프랜치스는 하루에도 몇 번씩 부두로 나가 강으로 올라오는 배를 기다리다가 무거운 발길을 돌리곤 했다. 요셉은 떠난 지 두 주일째 되는 날 느닷없이 나타났다. 몹시 피곤해 보이기는 했으나 얼굴에 감도는 자랑스러운 미소로 보아 일이 잘된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요셉은 퍽 어려운 임무를 훌륭히 해낸 것이다. 페스트는 어디에나 퍼져 있었으며 센샹은 바로 지옥을 방불케 했다. 그는 황하의 크리크(상해 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늪지대)에 매어 놓은 보트에 숨어 들어가 지내면서 신부가 지시한 일을 한 가지도 빠짐없이 해냈던 것이다. 요셉은 더러운 손을 안주머니 깊숙이 넣어 간직했던 편지를 꺼냈다. 탈록의 편지였다. 옛 친구 탈록이 의료진에 끼어 이미 중국에 와 있을 뿐만 아니라 며칠 후에는 파이탄에 도착한다는 소식이었다. 치셤 신부는 흥분을 억제할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레이턴 경 구호 원정대 절강에서 그리운 프랜치스, 나는 레이턴 경이 이끄는 의료 반원으로 5주일 전부터 중국에 파견되어 있다네. 내가 그 옛날부터 대양을 횡단하는 화물선의 갑판이라든가, 그 앞에 있는 밀림지대 따위를 꿈꾸어 왔는가를 자네가 기억한다면 이러한 내 행동을 충분히 이해하리라 믿네. 나는 정말 어린 시절의 꿈은 단지 꿈으로서 잊혀질 줄로 알고 있었지. 그러나 그게 아니었더군. 중국에 파견할 구호대의 지원 모집에 자신도 모르게 지원해 버리고는 스스로도 좀 놀랐네. 그러나 결코 소영웅주의적 감상에 빠져서 한 일은 아니야. 굳이 원인을 캐자면 아마 타인카슬에서의 단조로운 생활에 대한 권태 때문이 아닌지. 게다가 또 중국에서는 자네와의 상봉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야. 중국에 온 이래 줄곧 시골로만 찾아다니며 구호 활동을 하고 있네. 한시라도 빨리 자네를 만나고 싶어 안달일세. 자네가 난징으로 친 전보는 틀림없이 구호대 본부로 들어갔고, 그래서 다음날에는 하이창에 있는 내게까지 그 소식이 전해졌지. 나는 즉시 레이턴 경(얘기가 통하는 사람이지)에게 가서 빨리 출발할 수 있도록 조처를 해 달라고 부탁했네. 경은 흔쾌히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그 귀한 발동선까지 배려해 주더군. 지금 막 센샹에 도착해서 구호 물자를 모으고 있는 중일세. 물자가 모아지는 대로 전속력으로 자네 곁으로 가겠네. 아마 자네가 보낸 소년보다 하루쯤 늦게 닿을 걸세. 부디 몸조심하게.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기로 하세. 윌리 탈록 프랜치스의 얼굴에 거의 잃어 버렸던 밝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페스트의 습격 이후 그는 처음으로 가슴에 차 오르는 환희를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느닷없이 나타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탈록다운 짓인가 말이다. '벗이 있어 먼 곳에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논어의 한 구절) 이 구절을 생각하며, 예기치 못했던 탈록의 편지는 그의 용기를 새삼 북돋워 주었다. 탈록이 오기까지는 하루가 남아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벌써부터 기다림으로 설레기 시작했다. 이튿날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구호선의 모습이 멀리 보이기 시작하자 그는 허둥지둥 부둣가로 달려나갔다. 탈록도 역시 배가 미처 닿기도 전에 뛰어내렸다. 몸은 좀 건장해진 듯 했으나 전형적인 스코틀랜드인 성품인 무뚝뚝함과 침착성은 여전했다. 옷차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도, 고원 지방의 황소처럼 우직하고 강인한 태도도, 또한 전체적인 인상이 홈스펀의 직물처럼 소박하고 솔직해 보이는 것도 전과 다름없었다. 프랜치스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아 앞이 보이지 않았다. "탈록, 자네가 오다니. 정말 자네인가!" 탈록도 프랜치스의 몸을 잡고 흔들 뿐 아무 말도 못했다. 북국인의 피가 더이상의 감정 표현을 허용하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한참 만에야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전에 함께 달로 거리를 거닐었을 때는 우리가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 상상이나 했었나." 두 사람은 웃으려 했으나 굳어진 얼굴 근육이 잘 말을 듣지 않았다. "자네 꼴이 그게 뭔가. 그 윗도리와 고무 구두라니......그런 구두를 신고 페스트균이 들끓는 곳을 활보하는 건가? 자네부터 단단히 감시해야겠네." 탈록은 프랜치스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화를 냈다. "제발 우리 병원도 잘 감시해 주게." 프랜치스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뭐, 병원이라고? 그런 게 있어? 그럼 어서 보여 주게나." 의사의 연한 금빛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지금부터 가려는 곳이지. 자네만 준비가 되었다면......" 탈록은 타고 온 배의 선원에게 구호 물자를 가지고 따라 오도록 이르고는 프랜치스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몸은 뚱뚱해졌으나 동작은 재빠르고 혈색 좋은 얼굴과 특히 눈은 전과 다름없이 빛나고 있었다. 프랜치스에게 그 동안의 경과를 들으며 연방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의 이마 위로 머리카락이 몇 올 흘러내렸다. 유시따이에 닿았을 때 탈록의 눈은 더욱 빛났다. 그리고 그 빈정대는 투로 프랜치스에게 말했다. "난 물론 더 형편없는 곳이려니 생각했다네. 여기가 바로 자네 본부인 게로군." 그는 뒤따라 온 선원에게 짐을 집안에 들여놓으라고 이른 뒤 구호소로 들어갔다. 재빨리 구호소 안을 살펴보는 한편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들어 온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에게 호기심에 찬 눈길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샨 중위가 따라오자 프랜치스는 그를 탈록에게 소개했다. 두 사람은 힘차게 악수를 나누었다. 네 사람은 함께 제일 병동으로 불리는 길다란 방에 다다랐다. 탈록이 감동 어린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당신들이 하신 일은 정말 대단하군요. 그러나 제게 멜로드라마 같은 기적은 바라지 마십시오. 이제까지 품고 있던 이상이나 바람은 모두 있도록 합시다. 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건 정확한 현실 파악 그것뿐입니다. 저는 대단한 의사는 못 됩니다. 하나의 일꾼으로서 이곳에서 당신들과 함께 일하러 온 것뿐입니다. 제 가방 안에는 한 방울의 왁친도 없습니다. 그런 것은 소설에서라면 몰라도 실제로는 전혀 쓸모가 없으니까요. 본국에서 가져온 앰플은 일 주일도 안 되어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잠깐 말을 끊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시겠지만 전염병은 그런 것으로 막아낼 수 없습니다. 페스트란 걸리기만 하면 죽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죠. 1온스의 예방약이 1톤의 치료약보다 몇 배의 효과를 낸다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죽은 사람에게 주의를 돌려야 합니다." 탈록의 말뜻을 정확히 알아차리는 데는 조금 긴 시간이 걸렸다. 샨 중위가 알겠다는 듯이 웃었다. "시체들은 대부분 눈에 안 띄는 후미진 골목에 버리기 때문에 처치가 몹시 곤란한 형편입니다. 밤에 길을 걷다가 시체의 팔에라도 걸려 넘어질 때면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프랜치스는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의 표정 없는 얼굴을 재빨리 살피고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역시 젊은 탓이겠지만 중위는 가끔 경박하게 입을 놀리는 것이 흠이다. 의사는 그가 가지고 온 상자 뚜껑을 하나씩 뜯었다. "먼저 옷차림부터 제대로 갖춥시다. 당신들 두 분은 하느님을 믿고 중위님은 공자님을 믿지만......" 탈록은 상자 속에서 고무 장화를 꺼냈다. "나는 예방이란 놈을 믿습니다." 그는 차례로 흰 가운과 보호 안경을 꺼내어 착용하게 하고는 사무적인 태도로 이야기했다. "당신들은 병에 대해 너무 무방비 상태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처럼 말이오. 환자의 기침이 한 번만 눈에 들어가는 날엔 끝장입니다. 각막으로 침입하니까요. 그 정도의 상식은 이미 14세기의 사람들도 가지고 있었소. 그래서 그들은 예방책으로 원숭이 사냥꾼들이 시베리아에서 가져온 부레풀로 만든 탈을 썼던 것입니다. 이젠 됐어요, 수녀님.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환자를 보기 전에 먼저 샨 주위와 신부와 함께 거리를 한 바퀴 돌아야겠습니다." 끊임없이 실려 들어오는 환자들에 떠밀리어 너무 바빴던 탓에 프랜치스는 시체를 쥐들이 건드리기 전에 즉시 파묻어 버려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설령 잊지 않았다 해도 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돌덩이처럼 굳게 언 땅을 파고 일일이 매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욱이 관을 구할 수 없게 된 것도 오래 전부터였다. 또한 그 많은 시체를 무엇으로 태운단 말인가. 샨의 말대로 언 시체처럼 타지 않는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 성밖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중위에 생석회를 뿌린 다음 시체들을 묻어 버리는 것뿐이었다. 징발된 마차로 시체들을 가득 싣고 병졸들이 돌아다닌 지 사흘만에 거리는 깨끗해졌다. 개가 물고 돌아다니던 임자 없는 시체들도 공동 매장되었다. 그러자 시체를 마루 밑이나 지붕밑에 숨겨 두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부모나 형제의 시체를 짐승들처럼 부정하게 처리해 넋을 편안치 않게 한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탈록의 제안으로 샨 중위는 '시체를 숨기는 자는 총살에 처한다' 는 엄중한 방을 발표하고 거리에 붙이도록 했다. 병사들도 종일 포고문의 내용을 외치고 다녔고 마차는 밤낮없이 덜컹대며 시체들을 실어 날랐다. 탈록은 또한 병사들로 하여금 페스트의 온상이라고 할 수 있는 난민가를 허물어 버리게 했다. 그러한 특권은 전염병이 돌 때에 한해서 의사들에게 부여되는 권한이었다. 첫 번째 대상은 초롱 상가였다. 병사들은 집을 부수고 쥐들을 불태웠다. 일을 마친 뒤 그을음과 먼지로 더러워진 얼굴로 손에는 도끼와 기름 깡통을 든 채 조용해진 거리를 프랜치스와 나란히 걸으며 탈록은 나무라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일들은 자네에게 맞지 않아. 게다가 그렇게 과로를 하니 얼마나 더 지탱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다만 2, 3일이라도 성당에 돌아가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게 어떤가. 자네는 늘 아이들 걱정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만일 그렇게 한다면 모두의 비웃음을 사겠지. 사람들은 모두 죽어 가고 집들은 불태워지는데 명색이 신부라는 자가 편안히 쉰다는 것은 말이 안되네." "누가 자네를 본다고 그러는가. 더욱이 여기는 외진 곳이 아닌가?" "누구의 눈에서도 피하지 못하지. 우리는......" 프랜치스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탈록은 더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유시따이에 이르자 그는 돌아서서 아직도 거리 쪽에서 타고 있는 불빛의 반사로 노을이 진 듯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런던의 그 끔찍한 화재도 필요에 의한 것이었어......"(1666년에 있던 런던 대화재. 그때까지도 페스트는 영국의 풍토병이었다) 그리고는 격한 어조로 프랜치스에게 말했다. "마음대로 하게나. 자살을 생각한다면 말이야. 하지만 누구나 자신에게 대한 책임은 있는 것일세." 날이 갈수록 일은 더욱 많아졌다. 근 열흘 가까이 프랜치스는 옷을 벗지 못했다. 땀에 절은 속옷은 밖으로 나오면 다시 얼어붙곤 하여 나무껍질처럼 딱딱해졌다. 동상도 심했다. 가끔 장화를 벗고 탈록의 명령대로 식물성 기름으로 발을 문질렀으나 오른쪽 발가락은 이미 곪아 가고 있었다. 그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결사적으로 일에 매달렸다. 눈이 녹지 않으니 식수난까지 겹쳤다. 우물물은 모조리 두껍게 얼어붙어 밥을 짓는 일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탈록은 언제나 여유 만만했다. 괴롭고 고달픈 생활을 견뎌 나가기 위해서는 점심때만이라도 한자리에 모여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풍부한 유머와 화제로 분위기를 화사하게 이끌곤 했다. 때로는 가지고 온 축음기로 에디스벨의 걸작품들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는 또 뛰어난 얘기꾼이기도 했다. 그가 살았던 타인카슬이나 영국의 시골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상한 이야기 등을 놀랄 만큼 많이 알고 있었다. 가끔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까지도 즐거운 듯 웃곤 했다. 물론 샨 중위는 다른 사람들처럼 완전히 탈록의 이야기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럴 듯한 얼굴로 듣곤 했다. 샨은 가끔 식사시간에 맞춰 오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 사람들은 그가 요행히 살아남은 미인이라도 찾아 위로하고 있는 모양이라며 웃었지만, 덩그러니 비어 있는 중위의 자리는 마치 죽은 자의 자리처럼 그들의 신경을 괴롭히곤 했다. 3주째 접어들면서부터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에게 극심한 피로의 기색이 역력히 나타났다. 저녁에 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탈록은 이제 유시따이 병동으로는 환자를 다 수용할 수 없다고 걱정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듯 즉각 대답했다. "그물 상가에서 해머크를 가져오는 게 어떨까요?" 탈록이 손뼉을 쳤다. "참, 어째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칭찬을 받고 그녀의 얼굴은 소녀처럼 빨개졌다. 식사 준비가 다 되어 쌀로 만든 요리가 각자 앞에 놓여졌다. 그녀는 평소처럼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포크를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팔에 힘이 쭉 빠지며 도저히 포크를 들 수가 없었다. 포크로 떠올리던 밥알이 흐트러지자 그녀는 목까지 새빨개졌다. 그리고는 포크를 놓고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잠시 후 식사를 마친 프랜치스가 병실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전과 다름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무서운 희생정신에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인 청소부들도 하기 싫어하는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사이는 더욱 나빠져가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눈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까마득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수녀님, 탈록 의사도 걱정을 하고 또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당신은 너무 무리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말타 수녀님과 일을 바꾸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본래의 냉정한 태도로 일을 하던 그녀는 몹시 자존심이 상한 듯 벌떡 일어섰다. "저는 부족하다는 뜻입니까?" "아니,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신은 비할 바 없이 훌륭하게 일을 해 나가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왜 제게 떠나기를 강요하시는 건가요?"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당신을 위해서예요." 그녀의 세찬 반응에 머쓱해진 프랜치스가 중얼거리듯 낮게 대답했다. 그녀는 충격을 받은 듯 낯빛이 창백해지더니 격한 어조로 프랜치스에게 말했다. "제발 그런 염려는 그만두세요. 동정은 딱 질색이에요. 대신 내게 더 많은 일을 맡겨 주세요. 그러시는 편이 훨씬 나아요." 적대감으로 똘똘 무장한 그녀에게 이 편의 뜻을 이해시킬 도리는 없었다. 그의 눈길을 피해 그녀는 완강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는 참담한 마음으로 그녀의 곁을 물러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일주일간 맑은 날씨가 계속되더니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다시는 그치지 않을 듯한 기세로 밤낮없이 퍼부어 대는 것이었다. 마치 함박꽃처럼 큰 눈송이들이 쌓이면서 거리는 더욱 깊은 정막 속에 잠겨 갔다. 눈에 뒤덮인 집들도 깊은 잠 속에 빠져들어간 듯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눈사태로 인해 구호 사업은 벽에 부딪혔고 그 와중에도 환자는 계속 발생했다. 그는 다시금 암담한 기분에 빠져들어갔다. 페스트와의 싸움은 언제나 끝나려는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는 차차 시간의 흐름도 장소의 관념도 공포와 더불어 잊어 가고 있었다. 죽어 가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간단없이 떠오르는 단편적인 상념만이 살아 있었다......그리스도가 약속하셨던 고난......이 세상은 그것으로써 목적이 아니다. 다만 내세의 준비로써 주어진 것일 뿐이다. 신은 마침내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시고, 그리고 우리는 슬픔과 외로움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페스트는 무서운 속도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피난민들을 성문 밖에서 일단 소독시킨 후 검역소에 수용하여 감염되지 않은 것이 확인된 사람만을 거리로 들여보냈다. 어느 날 검역소로부터 돌아오던 길에 탈록이 갑자기 프랜치스에게 물었다. 과로 탓인지 낙천가인 그도 몹시 신경질적으로 변했고 우울해 보였다. "지옥이 이곳보다 더 참혹할 거라고 생각하나?" 피로로 곧 쓰러질 것만 같아 간신히 걸음을 옮겨 놓던 프랜치스는 그러나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히 대답했다. "지옥은 바로 인간이 희망을 놓아 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일세." 절대로 수그러들 것 같지 않던 페스트의 기세가 언제부터 약해졌는지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일에 열중해 있다가 문득 오늘은 사망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깜짝 놀라곤 했다. 새로 오는 환자의 수도 눈에 띄게 줄었고 북쪽에서부터 오는 피난민의 대열도 끊어졌다. 페스트는 이제 이 거리를 떠나 남쪽으로 이동해 간 것이다.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빈민굴은 더러운 잿더미로 변해 처참했던 흔적을 남겼을 뿐 들끓던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자네의 하느님만은 알고 계시겠지. 얼마나 끔찍한 비극인가를, 또한 우리의 싸움이 얼마나 처절했는가를......" 탈록은 기운을 차리려는 듯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환자들이 많이 줄었네. 오늘은 좀 쉬도록 하지.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아." 그날 밤 두 사람은 처음으로 사제관에서 밤을 지내기로 했다. 하늘은 어둡고 별빛은 흐렸다. 성당 언덕으로 올라섰을 때 탈록은 걸음을 멈추고, 하얗게 눈이 쌓인 대지 위에 우뚝 서 있는 성당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조용히 말했다. "정말 훌륭하군. 자네의 고생이 결실을 맺은 거야. 자네의 어린아이들은 이제 안전해. 내가 자네에게 뭔가 도움이라도 주었다면 그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겠네." 그리고는 드러내 보인 자신의 진지함이 쑥스러운 듯 농담조로 덧붙였다. "자네를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것은, 늘 베로니카 수녀같이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지내고 있지 않나?" 탈록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프랜치스는 화를 내는 대신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쪽에서는 괴롭기만 하다네." "흐흠?" "자네도 알잖나. 그 수녀가 얼마나 지독히 나를 싫어하는지 말일세." 탈록은 알 수 없다는 듯한 눈초리로 프랜치스를 흘끔 바라보았다. "자네는 예나 지금이나 도대체 자부심이라는 게 없군. 그것이 자네의 가장 장점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제관에 돌아오자 탈록은 아까와는 달리 몹시 기분이 들떠 있는 듯했다. "이제 겨우 지옥을 빠져나와 인간 세상을 보게 되었군. 대단한 일이야. 짐승의 수준에서 인간으로 승격하다니. 자, 토디라도 한잔할까. 그러나 이번 기회에 내게 영혼의 존재를 증명해 보여 개심시키려는 허튼 수작은 그만두게." 둘 다 몹시 지쳐 있었으나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유쾌했다.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중 탈록은 간간이 빈정대는 투로 자신의 이야기를 내비치곤 했다. "이제까지 나를 지배한 것은 허무였지 않았나 싶네. 그래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거야. 그런데 이제 중년에 접어들고 보니 우습게도 사람의 정이 새삼 그리워지지 않겠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얘기겠지. 이제 고향이 돌아가 남들처럼 가정을 꾸며 볼까 하네. 결혼이라는 커다란 모험을 감행하려는 거지." 그는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집에다 병원을 차리는 것을 무척 원하신다네. 내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고 싶으신가봐. 아버지는 지금도 자네를 카톨릭의 불테리어라고 말씀하신다네." 그리고는 화제를 누이동생인 진에게로 옮겼다. 그가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는 진은 이미 결혼을 해서 타인카슬에서 상당히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프랜치스의 시선을 피하며 자못 이상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그 애는 신부들이 평생 독신으로 지낸다는 것에 대해 대단히 회의적이더군." 화제는 계속 그들이 함께 알고 있는 사람들로 이어졌다. 이야기가 쥬디에 이르자 탈록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폴리에 대해서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반년 전에 타인카슬에서 우연히 보았지. 여전히 원기 왕성해 보이더군. 정말 훌륭한 분이야.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는 변함없는 애정과 존경을 보내고 있다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테지." 그들은 거의 새벽녘에 이르러서야 의자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주말이 되자 눈은 그쳤다. 페스트는 이제 파이탄을 떠난 것이 확실해졌다. 밤낮없이 덜컹거리며 거리를 돌던 시체 운반차도, 하늘 높이 맴돌던 독수리 떼도 사라졌다. 토요일 아침, 프랜치스는 성당 발코니에 서서 흙담 너머로 아이들이 뛰어 노는 모습을 감회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대기는 차갑고 그만큼 신선했다. 악몽으로 시달리던 긴 밤끝에 맞은 새아침은 형용할 수 없이 감사하고 유쾌한 기분이었다. 눈길이 아이들 너머 숲을 향했을 때 그는 성당 언덕을 급히 뛰어오는 군인을 발견했다. 필시 샨의 부하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가까워지는 모습은 그가 샨이라는 것을 알고는 의아했다. 중위가 성당까지 찾아온 일은 한 번도 없는데 웬일일까. 그를 맞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 프랜치스의 가슴은 불길한 예감으로 두근거렸다.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을 본 순간 프랜치스는 인사도 잊은 채 얼어붙은 서 버렸다. 샨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무섭도록 긴장되어 있었다. 이마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군복 상의의 단추도 풀어진 채 단정하기로 이름난 그로서는 유례없이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중위는 숨이 턱에 차서 마치 보고라도 올리는 듯 단숨에 말했다. "지금 곧 유시따이로 와주십시오. 친구분께서 병이 나셨습니다." 순간 프랜치스는 갑자기 찬바람 속에 알몸으로 내동댕이쳐진 듯 심장까지 얼어붙는 듯한 심한 추위를 느꼈다.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 왔다. 그는 샨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 후 신부는 더듬더듬 말했다. "너무 무리를 했어. 그래서 그만 당한 거야." 샨이 신부에게 눈을 돌렸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뜻밖의 일입니다." 프랜치스의 머리는 갑작스런 충격으로 헝클어졌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그에게 있어서 최악의 사태라는 인식이 혼미한 머릿속에 칼날처럼 와 닿았다. 프랜치스는 자신이 중위의 뒤를 따라 언덕을 내려가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걸음을 옮겼다. 가는 동안 줄곧 중위는 전혀 감정이 담기지 않은 군대식 어조로 마치 상관에게 전황을 보고하듯 간단하게 경위를 이야기했다. 일을 끝내고 몹시 지친 탈록은 술을 꺼내 왔다. 그리고 술을 따르려는 순간 갑자기 심한 기침을 해대며 대나무 식탁에 몸을 기댔다. 얼굴빛은 검게 변하고 입에서는 거품이 흐르고 있었다. 심상찮은 거동을 눈치채고 급히 다가간 베로니카 수녀에게 의사는 희미하고 웃어 보이며 농담조로 중얼거렸다. "이제 치셤 신부를 부르러 갈 때가 된 모양입니다." 그 길로 샨 중위는 프랜치스에게 뛰어온 것이었다. 안개가 몹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흰눈이 무겁게 쌓인 유시따이의 지붕이 흐릿하게 보였다. 탈록은 안채의 구석방 군용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가 덮고 있는 이불의 어두운 보라색이 그의 얼굴에 더욱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이미 죽은 것처럼 보였다. 병은 무서운 속도로 진전되고 있었다. 어제까지의 탈록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수주일간의 과로로 몹시 수척해졌던 몸은 이상하게 퉁퉁 부었고 혀와 입술도 본래의 모습은 전혀 없었다. 눈은 새빨갛게 충혈 되어 유리알처럼 번들거렸다. 그 앞에 꿇어앉아 이마에 얼음찜질을 하고 있던 베로니카 수녀는 두 사람이 들어서자 평소와 다름없는 조용한 태도로 일어나 한 쪽으로 비켜섰다. 프랜치스는 병자의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공포로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지난 몇 주일을 그는 수많은 죽음을 보고 겪었다. 죽음과 더불어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그에게는 충실히 수행해야 할 의무였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그는 고통으로 가슴이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탈록은 아직 의식이 남아 있어 주위 사람들을 알아보았다. "고국을 떠난 건 모험이 하고 싶어서였지......모험은 성공한 것일까?" 그는 애써 미소를 지으려 얼굴 근육을 실룩거렸다. 그리고는 눈을 반쯤 감으며 빈정대는 투로 덧붙였다. "프랜치스, 난 고양이 새끼보다도 약한가봐." 프랜치스가 의자를 당겨 침대 머리맡에 앉았다. 샨과 베로니카 수녀는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 숨소리조차 되살아난 듯한 정적 속에서 한 발 한 발 다가오고 있는 그 무엇을 다만 기다릴 수밖에 없을 때 그 고요함은 차라리 공포였다. "기분은 좀 어떤가?"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네. 일본 위스키를 좀 주게. 한잔 마시면 기운이 날 것 같네. 프랜치스,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너무 평범해. 삼류 소설이나 멜로드라마는 딱 질색이었는데......" 프랜치스가 술잔을 입에 대주자 그는 조금 마셨다. 잠이 든 듯하더니 곧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주 근사함 맛이군. 한잔 더 주게. 한창때 타인카슬의 빈민굴에서 무섭게 마셔 댔었지. 이제 곧 그리운 달로로 돌아간다. 따뜻한 봄날 아란 강가를 거니노라면......기억하고 있나, 프랜치스? 참 멋진 노래지. 내게 불러 주게나, 큰 소리로. 좀더 크게......너무 어두워서 들리지 않네." 프랜치스는 복바치는 설움과 슬픔을 억누르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바로 그거야, 신부님. 떠들어대는 것으로 체력을 소모하는 건 어리석어. 그런데 이상해......누구든 결국은 출발 전으로 되돌아가서 서게 되지......" 그의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프랜치스는 마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한 마디의 기도문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머리를 깊이 숙인 채 신의 도움을 바랄 뿐이었다. 방안에 저녁 무렵의 어스름이 스며들었다. 베로니카 수녀가 조용히 들어와 램프에 불을 켜고는 다시금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물러갔다. 그는 그때까지 탈록의 곁에서 로사리오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환자의 용태는 절망적이었다. 혀가 까맣게 타고 목이 더욱 부어 올랐으며 끊임없이 거품을 토하고 있었다. "지금 몇 신가?" 갑자기 의식이 돌아온 듯 탈록이 몹시 쉰 목소리로 물었다. "벌써 어두워졌나......5시가 되면 우리 집에서는 저녁 식사가 시작되곤 했지. 기억나지, 프랜치스. 소란을 떨면서 커다란 식탁에 둘러앉던 일을 말이야." 그는 말하는 것조차 힘이 드는지 잠깐 말을 끊었다가 성급하게 이었다. "우리 아버님께 편지를 해주게. 당신의 아들이 죽어 갔다고 말일세. 하지만 이상해. 난 지금까지도 신의 존재를 믿을 수가 없다네."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대체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프랜치스 자신도 모르는 채 웅얼거렸다.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약함과 어리석음에 도전하듯 그는 불쑥 떠오르는 대로 내뱉았다. "하느님은 자네를 알고 계신다네." "위로하려고 하지 말게......난 회개를 하지 않았다네." "인간의 괴로움이 바로 회개라네." 탈록은 기진한 듯 입을 다물었다. 프랜치스는 잠자코 생명이 꺼져가는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 무슨 말이 필요하랴. 탈록이 간신히 팔을 움직여 프랜치스의 손을 잡았다. "프랜치스, 자네는 정말 좋은 친구야......날 천국으로 밀어 넣으려고 들볶지 않으니 말이야."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머리가 아파......"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호흡이 점점 빨라지고 불규칙해졌다. 반듯이 누워 천장에 시선을 두고 있었으나 보다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목이 막혀 기침도 나오지 않았다. 임종이 가까워진 것이다. 베로니카 수녀는 무릎을 꿇고 창 밖의 어둠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샨은 마치 석상처럼 굳은 표정으로 침대 발치에 서 있었다. 갑자기 탈록의 눈이 움직였다.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반짝이며 그는 무엇인가 말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프랜치스는 그의 상체를 안고 입 가까이 귀를 갖다 대었다. 처음에는 가쁜 숨소리뿐이었으나 마침내 분명치 않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6펜스씩 내고 죄를 용서받자고 했을 때......싸움을 했었어." 탈록의 눈에서 빛이 꺼졌다. 환청처럼 느껴지는 커다란 숨소리를 마지막으로 그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방안은 눈 내릴 때와 같이 고요해졌다. 프랜치스는 마치 어린아이를 잠재우는 어머니처럼 탈록을 그대로 가슴에 안은 채 조용히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깊은 구렁 속에서 주께 외치나니 주여, 내 소리를 들어주소서. 내 비는 소리에 귀기울여 주소서. ......주님께는 인자하심이 있사옵고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오니다...... (시편 130편, 죽은 이를 위한 기도) 기도를 마친 뒤 그는 이미 영혼이 떠난 탈록의 몸을 침대에 반듯이 눕혔다. 그리고 눈을 감기고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주었다. 방을 나오다가 그는 다시금 돌아섰다. 베로니카 수녀는 아직도 창가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꿈을 꾸듯 몽롱한 눈길로 샨 중위의 격렬하게 들먹이는 어깨를 바라보았다. 6 페스트는 사라졌다. 그러나 얼어붙은 대지는 깨어날 줄 몰랐다. 논과 밭은 눈과 얼음 속에 숨어 버렸다. 마치 호수처럼 두껍게 얼어붙은 논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린 듯했다. 움직이는 것은 용케도 페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짐승들처럼 멍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기어 나와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일찌감치 달아났던 호상이나 관리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일찍이 없었던 험악한 기후로 곳곳에 길이 막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고갯길들은 모두 눈에 막히고 멀리 보이는 콴산에서는 눈사태가 자주 일어나 눈보라와 함께 산이 무너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려 오곤 했다. 강의 상류도 얼어붙었다. 대지는 끝없는 회색빛 황무지로 변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미친 듯 휘날리는 눈가루는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강을 타고 내려오는 커다란 얼음덩이들이 만주교에 부딪히며 아래로 흘러갔다. 식량은 귀해지고 기근은 코앞에 닥쳐왔다. 어느 날 서로 부딪치며 떠내려오는 얼음덩이들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한 척의 배가 식량과 의료품 그리고 오래 묶여 있던 우편물 등을 가득 싣고 센샹으로부터 황하를 거슬러 올라왔다. 레이턴 원정대에서 보내 온 것들이었다. 배는 2, 3일간 부두에 정박했다가 탈록과 함께 왔던 몇몇 사람들을 태우고 다시 난징으로 돌아갔다. 우편물 중에는 해외 포교단 본부에서 보낸, 곧 파이탄을 시찰 방문할 것이라는 내용의 퍽 중요한 편지도 들어 있었다. 탈록은 성당 뜰에 묻혀 있었다. 묘비 대신 작은 나무 십자가가 서 있는 무덤 앞을 떠나 언덕을 올라가며 프랜치스는 그 편지를 되풀이해 읽었다. 흥분과 그러나 동시에 일말의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까지 그가 해 온 일에 대해 그들은 흡족해 할까. 성당의 신축은 확실히 내세울 만하다. 앞으로 좋은 날씨가 2주일만 계속된다면 만사는 잘 되어 갈 것이다. 그는 가슴속의 불안을 털어 버리듯 걸음을 빨리 했다. 성당 앞에서 그는 층계를 내려오던 베로니카 수녀와 맞부딪쳤다. 그들은 탈록의 죽음 이후 사무적인 대화조차도 꺼리게끔 사이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일만은 알려야 했다. 그는 수녀에게 다가갔다. "수녀님, 본국의 해외 포교단 밀리 신부가 중국의 선교지를 시찰하러 온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5주일 전에 떠났다니까 한 달 후에는 이곳에 도착 할 겁니다."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물었다. "이번 일에 대해 제안할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지요." 날씨가 몹시 추운 탓에 털목도리 속에서 얼굴만 내놓고 있는 그녀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올려다볼 뿐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가까이서 본 신부의 모습에 약간 놀란 것이었다. 신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 것은 수주일 만에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 동안 이렇게도 달라질 수 있을까. 광대뼈가 앙상히 드러날 정도로 양볼이 움푹 패였고 쑥 들어간 눈빛만이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어쩌면 신부가 가져온 뜻밖의 소식이 오랫동안 마음 속 깊이 숨겨 두었던 생각을 말하게 했는지도 몰랐다. "있습니다. 저를 다른 성당으로 보내 주세요." 그는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제안은 예상을 전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패배감이 엄습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선 행복하지 않으신가요?" "행복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수도 생활을 시작한 이래 저는 그런 것에 구애를 받지 않아 왔으니까요." "그렇다면 당신이 경멸하는 인간과는 더이상 함께 일할 수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녀의 얼굴이 모욕감으로 인해 새빨개졌다. "그건 신부님의 오해입니다.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지요. 어떻게 말씀드리면 좋을지......보다 근본적인 문제예요." "말씀하실 수 있는 거라면 거리낌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솔직히 말씀드려서......저는......" 그녀는 숨을 가다듬기 위해 잠시 말을 끊었다. "신앙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신부님 때문에 제 생활이 혼란에 빠진 거예요." "그렇다면 매우 중요한 문제로군요." 그는 편지를 움켜쥐고 있는 손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런 말씀을 들으니 정말 가슴이 아프군요. 당신도 물론 괴롭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서로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은 없을까요. 대관절 제가 무슨 일을 했다는 겁니까?" "제가 일일이 말씀드려야 하나요?" 그녀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몹시 애를 썼으나 음성은 흥분으로 약간 떨리고 있었다. "탈록 의사가 임종할 때 하신 말씀이라든지 그 후에 취하신 신부님의 태도는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의문투성이였어요." "전부 말씀하십시오." "그분은 신앙을 전혀 갖지 않은 무신론자였어요.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그분에게 영원한 보상의 약속이나 다름없는 말씀을 하셨잖아요." "우리는 신앙에서뿐만 아니라 행위에 대해서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분이셨어요. 더욱이 카톨릭 신자도 아니고......" "당신이 말하는 그리스도교도란 어떤 사람일까요. 7일 가운데 하루만 교회에 나간다면 나머지 6일은 거짓말과 거짓된 행동으로 살아가도 되는 사람들입니까?" 그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띄며 말을 이었다. "탈록은 그렇게 살지 않았어요. 그리고 환자들을 위해 일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그녀는 굽히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분은 자유사상가였어요." "베로니카 수녀님, 그리스도께서도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위험천만한 자유사상가로 여겨졌었지요......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겁니다." 그녀는 거의 이성을 잃었다. "그리스도와 감히 비교를 하시다니......불경이 지나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럴까요? 그리스도는 무척 너그러운 분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겸손도 아셨습니다." 창백해졌던 그녀의 뺨이 흥분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리스도께서 규율을 세우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지키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탈록 의사는 그것을 지키지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신부님도 알고 계시겠죠. 임종이 다가올 때도 신부님은 성사(병자의 죄를 사하고 은총을 받아 영혼을 굳세게 하는 카톨릭 교회 의식)를 줄 의무조차 저버리셨습니다." "성사를 주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겠지요."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어쨌든 하느님께서는 그 친구를 용서하셨을 겁니다. 수녀님도 그에게 호감을 갖고 계셨지 않습니까?" 그녀는 예상치 못한 그의 반문에 당황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좋은 분이었어요. 누가 그분을 싫어할 수 있겠어요." "그렇다면 그를 두고 다툼으로써 그에 대한 추억을 흐리는 일은 그만두도록 합시다.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것으로 교회에서도 가르치고 있지요. 하기야 오늘날 교회에 속해 있다는 대부분의 인간들을 보면 그런 것을 생각할 여지조차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것인가 하면 확고한 믿음만 가지면 결코 지옥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그렇지요. 불교도든 회교도든, 또한 도교를 믿든......선교사를 죽인 후 그 고기를 먹어 버렸다는 식인종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부끄럽지 않게끔 자신의 삶에 성실한 자세를 갖는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지요. 최후의 심판 때에 결코 신의 존재를 알 수 없노라 대답하는 사람들에게도 진노의 채찍을 내리지는 않으실 겁니다. 아마 '여기를 보아라, 네가 그토록 부정하려 했던 나와 천국이 있지 않느냐. 자, 들어오너라' 하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는 말을 끝내면서 미소를 지으려 했으나 그녀의 얼굴에 떠도는 경악의 빛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수녀님에게 그런 의심과 불안을 갖게 한 건 전적으로 제 탓입니다. 제가 워낙 남과 함께 원만하게 일을 꾸려 나가지 못하는 인간이란 걸 저 자신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과 견해도 좀 달라요. 수녀님께서는 이곳에서 정말 성실하고 훌륭하게 일하셨습니다. 아이들도 모두 당신을 따르고 좋아합니다. 페스트와 싸울 때의 당신은 놀라웠습니다."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 사이가 그다지 화목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만.......수녀님께서 떠나시면 우리 성당에는 많은 어려움이 생기겠지요. 전교 사업에도 그렇고......" 그는 속마음을 솔직히 열어 보이며 겸허한 마음으로 그녀의 대답을 간절히 기다렸으나 끝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베로니카 수녀는 아이들 식당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평온한 태도로 식당의 저녁 식사 준비를 거들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새로이 치솟는 흥분으로 방안을 서성거렸다.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내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쓰다 만 편지를 계속 써 내려갔다. 그녀에게는 편지 쓰기가 바로 화산처럼 격렬한 감정의 분출구였다. 또한 속죄와 위안의 방편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씌어진 편지는 모두 오빠인 에른스트에게로 보내지는 것이다. 조금 전 저는 그분에게 전임시켜 덜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 자신 전혀 생각해 오지도 않았던 말을 갑작스럽게 한 것은 아마 이제까지 억눌러 온 감정의 순간적 폭발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종의 협박이기도 했고요. 전 항상 그분의 마음에 상처를 낼 기회를 찾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에른스트, 내가 바라던 대로 그분의 얼굴이 무서운 실망감으로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는 승리감보다 당혹감과 슬픔이 앞서는 건 어찌된 일일까요 이곳의 겨울은 생명의 소리 하나 없이 삭막하기만 합니다. 황금빛 햇살 아래 눈 쌓인 들판을 달리는 썰매의 방울 소리, 통나무로 이은 지붕들이 숲 사이로 그림처럼 바라다 보이는 고향의 겨울 풍경과는 너무도 다른 살풍경입니다.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잿빛 광야를 바라보고 있자면 가슴이 답답하게 막혀 와 저는 그만 소리쳐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그분의 침묵입니다. 한없이 온화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상대방을 제압하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죠. 페스트가 돌 때의 그분의 활약에 정말 그 누구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마치 고향에라도 돌아오는 듯 불결하기 짝없는 환자들을 자기 혈육에 대한 정으로 지극한 정성을 쏟아 마지막까지 보살피며 지키곤 했으니까요. 초인적인 용기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 용기를 말없이 실천한다는 점에서 가히 영웅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분의 친구이던 의사가 병에 걸려 병균 덩어리인 피를 토해 낼 때에도 그 핏덩어리가 얼굴에 닿는 것도 아랑곳없이 친구를 팔에 안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분의 얼굴에 나타난 깊은 애정과 슬픔으로 제 가슴은 터져 버릴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완고한 자존심이 그분의 발아래 엎드려 실컷 울고 싶다는 굴욕적인 충동에서 너를 구해 주었지요. 전에 오빠에게 경멸받아야 할 인간이라고 그분을 표현했던 적이 있는 제가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에른스트, 그건 잘못된 표현이었습니다. 오빠는 아마 고집쟁이 동생으로부터 이런 고백을 듣다니, 놀라시겠지요. 저는 이제 더이상 그분을 경멸하지 않습니다. 대신 저 자신을 경멸합니다. 그러나 역시 그분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겸손한 그분의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 또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군요. 두 수녀들은 그분에 대해 깊은 존경과 신뢰를 품고 잇습니다. 이것은 내게 주어진 또 하나의 고행입니다. 성실하지만 우둔한 말타 수녀는 그분의 뜻이라면 만사 제쳐놓고 따르고 숭배하는 형편입니다. 몹시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클로틸드 수녀도 그분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답니다. 페스트로 인해 격리 당했을 때 클로틸드는 정성을 다해 두껍고 푹신푹신한 쿠션을 만드는 것으로 지루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쿠션이 완성되자 사제관에서 일하는 요셉에게 주면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신부님의 침대에-신부님 앞에서라면 '침대'라는 말조차 입에 올린다는 건 생각도 못할 거예요-놓아 드리도록 해요." 요셉은 피식 웃으며 "고맙긴 하지만 침대라는 게 있어야지요"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분은 마룻바닥에서 외투만을 두른 채 잠을 잔답니다. 낮에는 의복, 밤에는 모포 구실을 하는 그 푸른 외투는 몹시 낡아 털이 다 빠진 것인데도 언젠가 그분은 더없이 대견스럽다는 듯 "정말 좋은 외투지요. 호리웰 신학생 때부터 입던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두 수녀는 제게 말을 안했지만, 그분이 자신의 건강에 너무도 무관심한 것이 걱정되어 가끔 사제관 부엌을 살펴보곤 했던 모양이에요. 어느 날 숨이 턱에 닿아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신부님의 식사는 매일 말라빠진 검은 빵과 감자 그리고 된장뿐이라고 제게 말했을 때 전 그만 웃어 버릴 뻔했어요. 저는 진작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글쎄 요셉의 식사 준비란 것이 감자를 삶아서 바구니에 넣는 것뿐이래요. 신부님은 시장하시면 식어 빠진 감자를 된장에 찍어 잡수실 뿐이고 그나마 감자 한 바구니가 다 없어지기도 전에 곰팡이가 슬 때가 많다는군요.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죠. 사람에 따라서는 천성적으로 음식의 맛에 대한 감각이 둔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런 사람들은 음식이 맛이 있거나 없거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나는 냉랭하게 대꾸했습니다. "그렇기도 하겠군요." 클로틸드 수녀는 수긍하는 듯 더 말을 하지 않고 돌아섰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신부님의 고행을 자신이 대신 했으면, 그래서 그분이 따뜻하고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램이 얼굴 가득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그분 앞에서 얼마나 깊은 신앙의 무아경에 빠지며 또한 얼마나 그분의 마음에 들고 싶어하는지요. 에른스트, 제가 이런 태도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아시죠? 저는 지나치게 고집이 세지만 결코 위선자는 되기 싫어요. 저는 언제나 제 자신과 신 앞에 솔직할 것을 코브렌츠에서의 착복식 때 맹세했고 리버풀에서 이 맹세를 신께 바쳤습니다. 파이탄에서도 저는 끝까지 이 맹세를 지킬 것입니다. 에른스트, 된장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 아무리 설명해도 짐작할 수 없을 거예요. 갈색의 밀가루풀같이 생긴 것으로......아무도 그 맛에 길들여지기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녀는 창 밖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에른스트......이곳 기후란 정말 특이해요. 비가 오기 시작하는군요. 그녀는 더이상 쓸 기력이 없어졌는지 펜을 내려놓고는 갑자기 내리기 시작하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빗줄기는 유리창을 두드리며 거침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는 2주일이나 계속되고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줄곧 내렸다. 미처 녹지 않은 눈들은 빗물에 씻기듯 떠내려갔다. 성당 지붕 위에 딱딱하게 얼어붙었던 얼음들도 미끄러져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거센 빗줄기는 거리마다 고랑을 만들면서 강쪽으로 가서 합류했다. 언덕이 무너져 내리고 성당의 주면은 그대로 진흙 밭이 되었다. 대지를 뒤덮었던 흰눈이 씻겨 내려가면서 비로소 군데군데 갈색의 땅들이 알라테 산(노아의 방주가 도착했다고 전해지는 아르메니아의 산)의 봉우리처럼 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더욱 황량하고 살풍경했다. 비는 폐허의 대지 위에 끊임없이 쏟아졌다. 드디어 성당의 지붕도 새기 시작했다. 처마끝으로는 낙숫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페스트와 폭우로 줄곧 교실에만 갇혀 살던 아이들의 얼굴은 창백하고 침울했다. 말타 수녀는 비가 새는 곳마다 물통을 받쳐 놓느라 헐레벌떡 뛰어다니고 독감에 걸린 클로틸드 수녀는 빗물이 떨어지는 교탁 위에 베로니카 수녀의 우산을 받쳐 놓고 수업을 했다. 성당의 정원은 특히 흙이 부드러웠기 때문에 피해가 혹심했다. 시뻘건 물줄기에 아름다운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 언덕 아래로 떨어졌다. 연못도 넘쳐 잉어들은 전부 물위로 떠올라 자칫하면 떠내려갈 듯했다. 큰 나무들도 거센 물살을 견디지 못하고 뿌리를 드러내더니 마침내 쓰러졌다. 한창 꽃이 피던 매화나무도 뽕나무도 물에 쓸려 버리고 담도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단지 뿌리가 든든한 삼나무와 몇 그루의 뽕나무만 남아 진흙 속에 서 있었다. 밀리 신부가 도착하기 전날 오후, 어린이들을 위한 성채 강복식이 있었다. 프랜치스는 교실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이 참담한 광경에 곁에 있던 정원사 후를 돌아보며 침통하게 말했다. "나는 눈이 녹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어. 하느님은 내게 대한 벌로서 비를 보내신 거야." 후는 낙천적인 성품이 못 되었다. "멀리서부터 바다를 건너오시는 신부님께는 퍽 미안한 노릇입지요. 제가 그렇게 애를 써서 가꾼 백합을 보여 드리지 못하게 되다니." "자, 우리 기운을 냅시다. 세상이 이것으로 끝나 버리는 것은 아니잖은가." "그렇지만 나무들은 이미 다 떠내려가 버렸는걸요. 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 후는 우울했다. "그게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아닌가. 인생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 위에 그 무엇을 세우는 것일세." 낙심해 있는 후에게 그렇게 위로했으나 성당으로 가는 프랜치스 또한 그 못지 않게 마음이 무거웠다. 제단 앞에 나아가 엎드렸으나 귀에는 탄툼 에르고(강복식 때 부르는 성체 찬가)를 노래하는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보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마룻바닥 밑으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더욱 크게 가슴을 울려왔다. 내일이면 어쩔 수 없이 물바다 위에 서 있는 성당의 이런 비참한 모습을 시찰단에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성체 강복식이 끝나자 요셉은 제대 위의 촛불을 끄고 제의실을 나갔다. 프랜치스도 뒤따라 나오면서 성당 안을 둘러보았다. 저녁 준비를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성당 앞뜰을 지나가고 있는 말타 수녀의 모습이 창문을 통해 보였다. 오랫동안 볕이 들지 않아 습기가 찬데다 비가 오는 탓에 어둑한 성당 안에서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클로틸드 수녀와 베로니카 수녀의 모습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는 성당을 나오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감기를 오래 앓고 있는 클로틸드 수녀의 초췌한 얼굴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베로니카 수녀도 추위로 입술이 새파래져 있었다. 그는 그녀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제 성당문을 닫아야겠습니다." 두 수녀는 놀라 고개를 들어 기도의 방해자를 바라보고는 말없이 일어났다. 베로니카 수녀의 얼굴에는 불쾌감이 확연했다. 수녀들이 나가자 그는 곧 성당문을 닫고 물바다가 된 마당으로 나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곧 벼락이라도 치는 듯 굉장한 소리로 변해 땅을 울렸다. 앞서 가던 클로틸드 수녀의 비명 소리에 프랜치스는 몸을 돌렸다. 성당이 위아래로 좌우로 미친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마침내 거대한 몸체가 무너져 버렸다. 귀성을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위용과 아름다움을 뽐내던 성당 건물은 마치 장난감 집처럼 힘없이 무너져 더러운 진흙 속에 처박혀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의 성당은 사라지고 대신 흙더미와 부러진 기둥들과 산산 조각난 유리들이 작은 산을 이루었다. 그는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로 그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던 성당은 그의 눈앞에서 한꺼번에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제단은 흔적 없이 부서지고 감실도 서까래에 깔려 산산조각이 났다. 성기들도 모두 파손된 것은 물론, 소중히 간직해 오던 리비에로 신부의 유품인 비단 제의도 갈갈이 찢겨 흙탕물 속에 잠겼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그는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빗속에 몸을 맡기고 서서 말타 수녀의 울부짖음을 꿈결처럼 듣고 있었다. "어째서......우리가 무슨 잘못으로 이 지경을 당해야 하나요. 하느님, 이것도 당신의 뜻입니까?" 프랜치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늪처럼 한없이 깊은 두려움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자신을 향해 나직이 속삭였다. "10분만 빨랐더라면 우리들은 모두 죽었을 겁니다."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어둠과 빗속에 성당의 잔해를 남겨 둔 채 그곳을 떠났다. 주교좌 성당 참사 위원인 밀리 신부는 이튿날 오후 3시에 드디어 도착했다. 배는 파이탄에서 5리나 떨어진 강 하류에 닻을 내렸다. 홍수로 물결이 사나워진 강을 거슬러 올라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마도 탈 수 없었다. 탈것이라고는 나무 바퀴를 단 손잡이가 쇠스랑처럼 긴 손수레가 몇 대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고위 성직자에게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밀리 신부는 손수레를 타고 머리까지 진흙을 뒤집어쓴 채 성당을 찾아 온 것이다. 클로틸드 수녀가 그토록 애써 준비했던 환영식-그 중에는 아이들이 깃발을 흔들며 부르는 노래 순서도 있었다-은 생략하기로 했다. 밀리 신부가 도착하는 것을 사제관 발코니에서 지켜보던 프랜치스는 급히 문으로 내려가 그를 맞았다. "여어, 프랜치스 신부!" 밀리는 반가움에 프랜치스의 손을 덥석 잡으며 외쳤으나 가슴을 내밀어 권위를 나타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만나다니 반가우이......언젠가 동양을 한 바퀴 돌 때가 있을 거라고 말한 것을 자네는 기억하고 있겠지. 세계 각국의 눈이 재난에 빠진 중국에 총집중되었던 덕분에 내 꿈도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일세." 문득 그는 프랜치스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참담한 풍경을 발견하고는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떴다. "어찌된 일인가? 성당은 어디 있지?" "저기 있네. 비록 흔적뿐이지만......" "아니, 말이 안되네. 자네의 보고서에 따르면 아주 훌륭한 건물이라던데......" "그랬었지. 비록 어제까지지만......그래도 조금 흔적은 남아있잖은가." 프랜치스는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흙더미와 유리 조각, 깨어진 벽돌 더미로야 뭐가 뭔지 알 도리가 있나." 프랜치스는 어색한 미소로 상대방의 말을 가로막았다. "자, 그런 얘기는 천천히 하기로 하고......우선 목욕부터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내 자세히 경과를 얘기해 주겠네." 한 시간 후 밀리는 새 비단 옷으로 갈아입고 식탁에 앉았다. 혈색 좋은 얼굴 가득 불만을 표시하며 뜨거운 수프를 휘저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실망은 내 평생 처음일세. 멀리서 이곳까지 찾아 올 때는......" 그는 천천히 수프를 마셨다. 전보다 살이 더 쪘는지 어깨는 더욱 넓어져 당당하고 위엄이 있어 보였다. 혈색 좋은 얼굴과 맑은 눈초리, 따뜻하고 다정해 보이는 두툼한 손까지 모두 고위 성직자가 갖추어야 할 풍채는 고루 갖추었다. "나는 자네의 성당에서 장엄미사를 올릴 계획이었다네. 그런데 이렇게 무너져 버리다니. 필시 땅을 잘못 선택한 탓일 테지." "하지만 땅이 갈라지리란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나?"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지, 프랜치스. 기초를 튼튼히 다질 시간은 충분했지 않나......본국에다 뭐라고 보고를 한단 말인가?" 그의 실망은 정말 대단한 듯했다. "런던의 해외 포교단 본부에서 강연을 부탁받았다네. 그래서 '성 안드레아, 또는 중국 벽지에서 역사 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제목까지 생각해 놓았지. 어때 근사하지 않나? 또 슬라이드를 만들려고 특별히 필름까지 가져 왔는데 이런 형편이라니,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입장이 아주 곤란해졌단 말일세." 프랜치스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물론 그 동안 자네의 고생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잘 알지만......" 밀리는 착잡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 고생이야 말할 것도 없지, 하지만 우리도 고생을 꽤 했다네. 특히 최근 두 교구를 통합시킨 후로는......마그냅 주교가 돌아가신 후......" 프랜치스의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몸의 어딘가를 심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왔다. "돌아가셨다고?" "워낙 고령이셨으니......폐렴이었다네. 지난 3월 중순 무렵부터 자주 혼수상태에 빠지곤 하셨지. 하지만 평화로운 임종이었어. 타란트 주교님이 후임이 되셨다니. 참 좋은 분이시지." 프랜치스는 눈을 감았다. 라스티 맥도 마침내 돌아가셨다......그리운 추억들이 감은 눈으로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스틴챠 강에서 보낸 하루, 근신을 친절하게 도와주었던가. 중국으로 출발하지 전 타인카슬의 서재에서 '잘 싸워 주게, 프랜치스. 하느님과 우리의 스코틀랜드를 위해서' 라고 격려해 주던 인자한 음성 등. 밀리 신부는 정색을 하고 프랜치스를 쳐다보았다. "염려하지 말게. 무슨 일이든 직접 맞부딪쳐 해결해 보려고 여기 온 이상 나는 자네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네.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힘껏 뛰어보세. 내가 어떻게 포교단의 기초를 닦아나가는지는 차차 이야기하겠지만......아마 자네에게도 참고가 될 걸세. 런던과 리버풀 그리고 타인카슬에서 나 혼자의 힘으로 자금 조달을 하기 위해서 여러 번 연설을 했는데, 그 결과 당장에 3만 파운드라는 돈이 들어오더군. 그러나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했던 일이야." 그는 가슴을 내밀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미리 낙심할 건 없어. 자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는 않을 테니까......우선 내일 점심 식사에 수녀원장을 초대하게. 아주 기품 있어 보이더군. 세 사람이 정식으로 원탁회의를 열기로 하세." "원장 수녀는 절대로 수녀원 밖에서는 식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네." "정식으로 초대해 본 적이 있었나?" 밀리는 프랜치스의 몹시 야윈 얼굴을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실수를 했군, 프랜치스. 자네에게 여성을 이해하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지. 그분은 반드시 초대에 응할 걸세. 잠자코 내게 맡기게." 밀리의 장담은 입증되었다. 그 이튿날 베로니카 수녀는 점심 식사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전날 밤 충분히 휴식을 취한 밀리 신부는 유쾌한 기분으로 오전 내내 폐허가 된 거리를 돌아보고 다녔다. 성당으로 돌아오는 길에 교실에 들러 베로니카 수녀를 만난 것이 불과 5분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심 식사 자리에서 곧 다시 만난 수녀를 그는 깍듯이 예의와 친절으로 맞아들였다. "수녀님이 초대에 응해 주시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쉘리 한잔 드시지 않겠어요? 스페인 산으로 유명한 고급품이지요. 이렇게 먼길을 가지고 다니느라 맛은 좀 떨어지긴 했지만......" 그는 신사다운 예의를 지키며 미소를 띄운 채 끊임없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원산지에서 가져온 것이니까요. 스페인에서 마셔 본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이렇게 가지고 다니며 즐긴답니다." 세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여보게, 오늘 요리는 어떤 것인가. 설마 제비 둥지 수프라든지 숟가락으로 먹어야 되는 퓨레(야채와 고기를 함께 끓여 거른 걸쭉한 수프) 같은 괴상한 요리는 아니겠지, 하하하......" 밀리 신부는 닭튀김을 자기의 접시에 덜며 큰 소리로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동양 요리에 완전히 반한 것 같아요. 배 안에서 심한 폭풍우를 만났는데 식당에서 식사를 한 사람은 나흘 동안에 나 혼자였으니까요. 덕분에 그 기막힌 볶음밥은 온통 내 차지가 되었답니다." 눈을 내리깔고 식탁만을 내려다보던 베로니카 수녀가 입을 열었다. "볶음밥은 중국요리가 아닐 텐데요. 제가 알기로는 남은 밥들을 모아서 미국식으로 볶은 것입니다." 뜻하지 않는 기습에 그는 입만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베로니카 수녀님, 그러니까 볶음밥은......그런 것이로군요." 그는 말을 더듬으며 도움을 청하려는 듯 프랜치스 쪽을 보았다. 그러나 프랜치스가 도무지 반응을 보이지 않으므로 다시 큰 소리로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러나 어쨌든 잘 씹어 먹어야 하는 음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하하......" 그때 요셉이 샐러드가 담긴 큰 접시를 가지고 왔으므로 그는 접시를 받으면서 말을 이었다. "비단 음식뿐만 아니라 동양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고 느꼈습니다. 우리 서양인들은 중국인을 야만인으로 규정짓지만 그건 잘못이에요. 저는 어떤 중국인과도 기쁘게 악수할 수 있으며 또한 인정합니다. 단 그가 하느님을 믿고......" 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맺었다. "그리고 세숫비누부터 생각해야겠습니다만." 프랜치스는 곁에서 식사 시중을 들고 있는 요셉을 힐끗 바라보았다. 요셉은 무표정했으나 콧구멍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긴장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자, 그럼 이젠--" 밀리는 갑자기 이제까지의 농담투를 버리고 고위 성직자다운 위엄 있는 태도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원장 수녀님, 저는 어릴 때 이곳 본당 신부님께 늘 골탕을 먹곤 했지요. 그러나 이젠 궁지에 빠진 이 친구를 끌어 낼 차례지요." 이 회합에서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본국에서 해 왔던 밀리 신부의 활동과 그 방법, 결과 등이 신중하게 이야기되었을 뿐이었다. 본당을 맡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밀리 신부는 전교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주교는 특히 해외 포교에 주력한다는 원칙 아래 이 사업에 희생적으로 봉사할 사람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밀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전국을 누비고 다니며 설교를 했다. 또한 천성적으로 사람을 잘 사귀는 기질을 타고나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과의 교제에서도 최선을 다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맨체스터나 버밍검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그곳에서 체류하는 동안 만났던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편지를 띄우곤 했다. 그것은 때로 즐거웠던 점심 초대에 대한 인사 편지가 되기도 했고, 해외 포교단에 바친 기부금에 대한 감사편지가 되기도 했다. 편지를 쓰는 일에 점점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자 그는 비서를 두었다. 이러는 동안 그는 어느새 런던 사교계의 저명인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최초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행한 연설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어서 그 이후 부인들의 인기와 숭배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특히 런던 하이드 파크 남쪽 큰 저택에 고양이와 신부들을 모아 놓는 취미를 가진, 자칭 독실한 신자라는 노처녀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사실 그의 태도에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 해 이미 아씨니엄(런던의 유명한 학자, 문인, 명사들이 많이 모이는 클럽)의 지방 회원이 되었다. 따라서 해외 포교단을 위한 모금 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교로부터 감사 인사까지 받았다. 그러므로 그가 영국 북부 감독관구의 최연소 주교좌 성당의 참사 위원에 선출된 것은 누구의 눈에도 이상하게 비칠 리가 없었다. 그의 눈부신 빠른 승진을 갑상선이 유난히 발달되었기 때문이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일에 대한 그의 수완만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재에 밝았으므로 그는 모금한 돈을 한 푼도 헛되게 흘리지 않았다. 그 결과 5년만에 일본에다 성당을 두 개나 지었으며, 난징에 중국인 신학교를 창설했다. 타인카슬에 자리잡은 해외 포교단 지부 건물도 훌륭했다. 모든 일은 합리적이고 능률적으로 운영되어 계속 모금 활동은 호조를 보이고 있는 형편이었다. 밀리 신부가 필생의 사업으로 삼아 전력투구하고 있는 모금 운동에 타란트 주교는 든든한 배경이 되었고, 사업은 날로 확대되고 그의 영향력의 폭은 더욱 넓어졌다. 그들이 회합을 가진 지 이틀 후 비가 그치고 참으로 오랜만에 태양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밀리 신부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내가 오자 비가 그쳤군. 하긴 태양의 뒤만 쫓는 사람도 있지만 태양이 따라 다니는 행운아도 있는 법이니까." 그는 카메라를 꺼내 들고는 쉴새없이 사진을 찍어 댔다. 그의 정력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요셉을 불러 목욕 준비를 지시하고는 교실에 들어가 미사를 드린다. 왕성한 식욕으로 아침 식사를 끝내면 곧 헬멧을 쓰고 굵은 막대기와 카메라를 들고서 뛰어나갔다. 아무리 멀더라도 기념물이 있을 만한 곳이면 다 찾아다녔다. 파이탄의 어느 곳이나 페스트와 홍수가 할퀴고 간 상흔은 역력했으며, 그러한 황폐한 모습을 볼 때마다 그는 기묘한 표정으로 "이 모두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다" 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어느 날 성문 앞을 지날 때였다. 문득 그가 걸음을 멈추고는 나란히 걸어가던 프랜치스를 불러세웠다. 그리고는 마치 연극배우같은 과장된 태도를 취하며 말했다. "여보게, 프랜치스. 잠깐 그 자리에 서 있게. 아주 훌륭하고 감동적인 보도 사진이 될 것 같군. 각도도 광선도 적당하고......" 프랜치스는 어처구니없었지만 멍하니 선 채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그의 진지한 표정 속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요일 낮 점심 식사를 할 때 그는 자못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보고 듣고 겪은 것을 종합해서 훌륭한 강연을 할 수 있을 것같네. '포교 사업에 따르는 위험과 어려움'을 주제로 하여 이번에 자네들이 겪은 홍수와 페스트를 다룬단 말일세. 오늘 아침에는 무너진 성당을 찍었다네. 굉장히 그럴 듯하더군. 그 사진에 '신은 그 사랑하는 자를 벌하시다' 라고 제목을 붙일 생각인데 어떤가, 멋지지 않나?" 출발이 가까워지자 밀리의 태도는 어색할 정도로 정중해졌다. 떠나기 전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프랜치스와 함께 발코니에 나와 앉은 밀리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까지 자네가 내게 베풀어 준 호의와 환대에는 정말 감사를 느끼고 있네. 하지만 프랜치스 자네가 당면한 일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몹시 무거워진다네. 무엇보다 급전무는 성당 재건일세. 그런데도 자네는 그것을 위해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고 있으니......포교 본부를 믿고 있는 거라면 미리 말해 두지만 포교 본부에서는 단 한 푼도 도울 재력이 없다네." "나는 전혀 그런 부탁을 할 생각이 없네." 딱 잘라 말하는 프랜치스의 음성은 노여움에 떨고 있었다. 지난 두 주일 동안 애써 억눌러 왔던 밀리에 대한 역겨움이 그 순간 마침내 폭발했던 것이다. 밀리는 순간 프랜치스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자네가 그 동안 이곳의 세력가인 호상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면 이러한 곤경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자네와 교분이 두터운 챠씨만이라도 신자로 만들었다면......" "그렇게 할 순 없네!" 프랜치스의 대답은 단호하고 몹시 냉담했다. "그에게는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네. 이제는 정말 단 l테르라도 더 청할 수 없네." 밀리는 곤란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자네 일이니 내가 관여할 바 아니고 또 관여할 생각도 없네. 솔직히 말할까. 난 이곳 전교 사업 현황에 크게 실망했네. 개종률이 다른 곳과는 비교도 안 되게 현저히 떨어지지 않나. 본부에는 각 지부의 전교율이 그래프에 모두 정확히 나타나게 되는데, 자네 본당의 성적이 제일 형편없네." 프랜치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밀리에게서 시전을 외면하며 야유조로 내뱉었다. "전교사의 능력이란 것도 저마다 다른 것이 아니겠나." 밀리는 야유에는 유난히 민감했다. 그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반문했다. "그렇다면 자네가 굳이 전교회장을 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본당들은 모두 두고 있지 않나? 한 달에 40테르씩 주고 세 사람만 두어 보게. l천 5백 달러로 l천 명을 영세 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네." 프랜치스는 대답 대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에 안간힘을 쓰며 어떻게든 이 치욕을 견디어 보려고 기도했다. "내가 보기에 자네는 아직도 이곳 사정에 너무 어둡네." 밀리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자네 생활이 지나치게 가난한 것도 전교에 걸림돌이 되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난하게 보인다는 것은 위엄이 서지 않는 일일세. 가마나 하인을 두게. 겉치레도 필요한 것이네." "그건 자네가 잘못 생각한 걸세." 프랜치스가 딱딱하게 말했다. "중국인들은 특히 겉치레를 싫어하거든. 위엄이나 체면 따위에 전전긍긍하는 성직자들을 멸시한다네." 밀리도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건 중국의 저속한 이교승들이 하는 소리 아닌가." "그래서 그 말이 틀렸다는 말인가?" 프랜치스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선량하고 성품이 고결한 이교승도 많다네." 침묵이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모욕을 당한 데 대한 분노를 애써 누르며 밀리가 입을 열었다. "더이상 무슨 말을 하겠나. 자네의 태도가 몹시 유감일세......평소에도 늘 자네가 그런 태도로 나온다면 원장 수녀님이 자네를 꺼리는 것도 당연한 것이겠군. 그 수녀가 자네에게 가지고 있는 반감은 이미 내가 도착한 첫날 알아차릴 만큼 대단한 것이더군." 비수 같은 날카로운 말을 던지듯 내뱉으며 밀리는 거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랜치스는 시야를 거의 가릴 듯 밀려오는 안개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었다. 밀리가 내뱉은 마지막 말이 가슴에 칼끝처럼 박혀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예감은 적중했다. 이제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가 진정으로 전임을 희망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튿날 아침 밀리는 서둘러 파이탄을 떠났다. 난징으로 돌아가는 대로 일본으로 건너가 나가사끼를 비롯한 여러 지방의 6개 성당을 돌아보아야 하는 바쁜 일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밀리 신부를 커다란 트렁크와 부두까지 태워다 줄 가마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짙은 선글라스에 토퍼모자를 쓰고 파란 코트로 여행자다운 차림을 한 밀리 신부는 먼저 수녀들과 아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프랜치스와 마주섰다. 그리고는 화해를 하자는 듯 손을 내밀었다. "프랜치스, 이제 그만 서로 기분을 풀도록 하세. 말재주는 우리들 누구나 다 타고난 재능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자네가 몹시 선량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그는 프랜치스의 반응엔 아랑곳없이 가슴을 펴 보이며 유쾌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여행에 대한 욕망은 늘 새롭고 끝이 없으니......아마 내 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방랑벽이 숨어 있는 모양이야. 굿바이. 그리고 자네에게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겠네." 그가 가마에 올라 벌레를 막기 위해 장치된 발을 내리자 가마꾼들이 가마를 들어올렸다. 가마가 흔들리며 성당 언덕을 다 내려갈 때까지 그는 가마 밖으로 몸을 내민 채 흰 손수건을 흔들어 보였다. 그날 저녁 프랜치스는 황혼 무렵이면 성당 뜰을 거닐곤 하던 평소의 습관도 잊은 채 무너진 성당의 잔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갖가지 상념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생각은 마치 회전축처럼 라스티 맥 주교에게로 되돌아오곤 했다. 이상하게도 그에게로 생각이 미치면 언제나 신학생 시절의 분위기에 잠겨 들게 된다. 용기와 자신을 북돋아 주던 그분의 말씀이 떠오른다. 지금이야말로 그 시절의 용기를 생각할 때가 아닌가. 프랜치스는 지난 두 주일 동안 밀리 신부로 인해 기진맥진해 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밀리의 말이 옳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자신은 신의 눈에도 인간의 눈에도 실패자로 보이는 것이 아닐까. 이루어 놓은 것이라곤 보잘것없고, 그것도 미숙하기 짝없는 탓에 모래 위의 성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그는 밀려드는 심한 피로와 실망으로 머릿속이 완진히 정지되어 버리는 것을 느끼곤 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헛되이 맴도는 상념에 완전히 빠져 있었으므로 등뒤로 다가오는 근심스러운 발소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는 한참을 기다리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신부님, 방해가 될까요?" 그는 비로소 인기척을 알아차리고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그저 이렇게 앉아 있을 뿐이니까요." 그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말없이 서 있었다. 날이 이미 저물기 시작하여 엷은 어둠 속에 숨겨진 그녀의 표정을 알아낼 수 없었다. 단지 그녀가 몹시 흥분을 억제하려 하고 있다는 기미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메마른 음성으로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무례를 무릅쓰고 꼭 드려야 할 말씀이기에......용서하세요." 말머리를 꺼내기가 몹시 어려운지 처음에는 더듬거리고 날카롭게 긴장된 어조였으나 곧 평소의 차분하고 분명한 음성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먼저 신부님께 대한 지금까지의 제 태도에 대해 깊이 사과 드립니다. 처음 뵈었을 때의 제 편견으로 인한 나쁜 선입견을 그 후로도 버릴 수 없었기에 후회하면서도 그렇게 되었던 것이에요. 오만이라는 악마 때문이지요. 저는 어릴 때 화가 나면 유모의 얼굴에 물건을 함부로 집어던지곤 했어요. 그때부터 오만은 제 성격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던 거예요. 벌써 몇 주일 전부터 신부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고자 별러 왔지만 오만과 고집이 번번이 저를 가로막았습니다. 지난 두 주일 동안 저는 몹시 괴로웠습니다. 신부님의 구두끈도 풀러 줄 자격이 없는 천하고 속된 인간으로부터 신부님이 받으시는 멸시와 굴욕에는 저 자신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제가 더욱 밉고 싫어질 뿐이에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흐느낌으로 감정이 복받쳐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땅에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그녀의 뒤로 이제는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 아래 우뚝 선 거대한 산 그림자가 무겁게 드리워져 있을 뿐, 사방은 쥐죽은듯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프랜치스의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제 이곳을 떠나지 않으시겠지요?" "네......신부님께서 허락하신다면......저는 아직껏 사람을 존경해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의 영혼은 너무도 고결하고 아름다우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도 영혼도 가난하기 짝없는 평범하고 무기력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녀의 흐느낌이 다시 높아졌다. "수녀님이야말로 훌륭한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란 하느님 앞에서는 한낱 어린애에 지나지 않지요. 힘과 지혜가 너무도 미약합니다. 그러니 힘을 합해서 함께 일할 수 있다면......서로 도와 가며......" "오, 물론입니다. 제 힘껏 일하는 것으로 신부님을 돕고 말고요. 먼저 오라버니께 이곳에 성당을 세워 달라고 부탁드리겠어요. 제 오라버니는 굉장한 부자니까 그만한 능력은 있어요. 오히려 기뻐할 거예요. 신부님께서 저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그리고 저의 오만을 겸손으로 바꿔 놓으신 것을 알면......" 오랜 침묵이 흘렀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그녀의 흐느낌도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프랜치스의 가슴은 감동으로 따뜻하게 젖어오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그녀가 일어나기를 기다렸으나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그도 함께 땅에 무릎을 꿇었다. 대기 속에 충만한 평화가 몸 세포마다 스며들었다. 점점 깊어가는 어둠 속을 응시하며 그는 느끼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마음이 가난하고 이름도 없는 한 인간인 자기들을 구세주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환희가 소리 없이 그러나 벅차게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고 있었다. 7 1912년의 어느 맑은 날 오후, 프랜치스는 채소밭 한 귀퉁이에 바바리아풍으로 꾸며진 그의 일터에 있었다. 꿀을 많이 따낸 벌꿀 가운데에서 밀랍을 가려내고 있는 것이다. 발디딤식의 녹로(질그릇을 만드는 연장)를 비롯하여 그 밖에 여러 도구와 연장들이 가지런히 놓인 조촐한 방-이곳은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가 열쇠를 건네주던 그날이래 그의 기쁨과 안식의 보금자리가 되었다-은 향긋한 꿀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꿀을 식히기 위해 함지박에 담아 대팻밥이 널려 있는 마루 위에 놓았다. 놋쇠 냄비에 가득 담긴 밀랍으로는 내일 양초를 만들어야지. 이렇게 좋은 밀랍으로 만들어진 양초는 불꽃이 맑고 냄새가 향긋한 진품이 되는 것이다. 아마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서도 이렇게 훌륭한 양초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마의 땅을 닦고 손에 달라붙어 있는 밀랍도 깨끗이 닦았다. 그리고는 꿀이 담긴 함지를 어깨에 메고 성당 앞뜰로 나갔다. 새삼 찾아 드는 행복감으로 어린아이들처럼 마구 달리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이면 처마 끝에 날아와 지저귀는 콩새의 소리에 잠을 깨고, 풀잎마다 영롱하게 빛나는 이슬에서 청명한 이른 새벽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어떠한 일일지라도 노동으로써 얻어지는 기쁨과 보람에 견줄 수는 없을 것 같다. 머리보다는 손을 움직여 마음을 다 바쳐 일할 때의 기쁨이란, 대지의 위대한 창조에 참여하여 소박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천국의 생활이 아닐까. 이 지방도 눈에 띄게 발전해 가고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페스트와 홍수, 그 뒤를 이은 혹심한 기근 등의 무서운 시련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차츰 잊혀졌다. 폰 호엔로에 백작의 도움으로 성당이 재건된 지 5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된 평화로운 나날들이었다. 성당은 매우 견고하고 크게 지어졌다. 먼젓번의 참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석회 따위는 한 중도 넣지 않고 마가레트 여왕(1240--1275년 때의 스코틀랜드 여왕) 시대의 건축양식을 택했다. 아름다움보다는 견고함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자연 고전적이나 소박하기만 할뿐인 종각과 무지개 모양의 둥글고 긴 회랑이 딸린 성당의 전체적인 인상은 아주 평범했다. 교실 수도 늘렸고 고아원 건물도 지었다 기름진 밭도 두 마지기나 사들였고, 소, 돼지, 닭 등도 기르다 보니 그런대로 농장의 형태가 갖추어졌다. 그곳은 또한 말타 수녀의 훌륭한 일터이기도 했다. 나막신을 신고 치마를 걷어올린 채 닭에게 모이를 주며 프랑스 말로 말을 건네는 그녀의 모습이 자주 사람들의 눈에 띄곤 했다. 신자는 2백 명 정도로 늘어났다.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제단 앞에 무릎을 꿇는 거짓 신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에게 가장 많은 사랑과 인내를 요구하던 아이들의 교육도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이가 든 소녀들은 이미 수녀들을 도와 어린이들을 돌볼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수녀가 되기 위해 수련자가 된 소녀가 있는가 하면 세상으로 나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준비를 하는 소녀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결실이랄 것은 제일 나이 많은 처녀를 류마을의 건장하고 성실한 농부와 결혼시킨 일이었다. 혼인은 너무도 빨리 이루어져 오히려 겁이 날 정도였다. 지난주 그는 류마을에 다녀왔다. 수확도 많고 즐거운 여행이었다. 그가 류마을에 가자 그 젊은 색시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세례를 해 달라고 그를 자기 집으로 청했었다. 이제 프랜치스의 나이도 마흔 셋이 되었다. 머리는 벌써부터 벗겨지고 등이 굽어 버려 키가 더욱 작아졌다. 게다가 심한 류머티스로 뼈 마디마디가 쑤시곤 했다. 꿀이 든 함지는 무척 무거웠다. 다른 쪽 어깨로 옮겨 메려는데 늘어진 쟈스민 가지가 얼굴에 닿았다. 정원이 이처럼 풍성하고 아름다워지다니. 베로니카 수녀의 손이 닿기만 하면 꽃이든 잎이든 눈부시게 피어나는 신묘한 효과를 얻는다. 손재주로 말하자면 그도 누구에게 뒤지는 법이 없었지만 정원 일만은 퍽 서툴렀다. 워낙 섬세한 성격의 베로니카 수녀라 어떤 일이나 틀림없이 잘 해냈지만 특히 나무를 가꾸고 꽃을 피우는 솜씨는 천하 일품이었다. 갖가지 묘목과 꽃씨들이 단단히 포장되어 독일의 고향집으로부터 속속 도착했다. 또한 그녀는 부지런히 편지를 써 마치 전서 비둘기를 날려보내듯 광뚱이나 베이징의 유명한 원예원에 보내곤 했다. 그러한 베로니카 수녀의 열성으로 정원은 새들과 꿀벌의 합창이 끊이지 않는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성역이 된 것이다. 잘 자라고 있는 정원의 나무들은 어쩌면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우정의 표상과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이미 습관이 되다시피한 저녁 산책길에서 그는 으레 헌 장갑을 낀 손에 가위를 들고 흰 작약꽃을 자르거나 비틀린 모란 가지를 바로잡아 주거나 아니면 진달래에 물을 주고 있는 그녀와 만나게 된다. 잠시 멈춰 서서 그날 지낸 일을 이야기할 때도 있으나 대개는 조용한 침묵 속에서 저물어 가는 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마침내 어둠이 짙어지고 정원의 관목 사이로 반딧불이 부지런히 날기 시작할 무렵이 되면 그들은 별다른 인사도 나눔 없이 각각 자기의 처소로 발길을 돌리곤 하는 것이다. 수녀원 문에 들어섰을 때 아이들은 두 줄로 나란히 서서 뜰을 지나가고 있었다. 벌써 점심때가 된 것이다. 그는 질서 있게 걸어가는 아이들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아이들은 수녀원 옆에 마련된 식당으로 들어가 긴 테이블에 앉았다. 베로니카 수녀와 클로틸드 수녀가 테이블 양끝에 앉았고 말타 수녀는 젊은 수련자와 함께 김이 무럭무럭 나는 뜨거운 죽을 그릇에 담아 아이들 앞에 차례로 놓아주고 있었다. 이곳의 최초의 어린이-그 옛날 눈 위에서 프랜치스에 의해 안아 올려졌던-인 안나도 이제는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서 밝은 웃음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항상 어둡고 우울한 표정뿐이었다. 지금도 아이들의 시중을 드는 안나의 얼굴은 화가 난 듯 무뚝뚝하고 어두웠다. 그가 들어서자 시끄럽게 재잘대던 아이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일제히 멎었다. 그는 마치 엄마에게 매달리는 어린아이처럼 어리광과 장난기가 가득 찬 시선으로 베로니카 수녀를 바라보면서 자랑스럽게 벌꿀 함지를 내려놓았다. "금방 따온 벌꿀이란다. 그런데 너희들이 조금도 먹고 싶어하지 않으니 섭섭하구나......정말 먹고 싶지 않니?" "먹고 싶어요." 머리를 짧게 자른 조그만 얼굴들이 일제히 벌꿀 함지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마치 원숭이 새끼들이 떠드는 것처럼 귀여웠다. 그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주기 싫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리고는 작은 엉덩이를 간신히 의자에 걸치고 앉아 몸을 흔들며 숟가락을 빨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다가갔다. "착한 어린이는 벌꿀 따위를 먹고 싶어하지 않을 테지. 심포리엔, 그렇지? 벌꿀보다 교리 공부가 더 좋지?" 새로운 신자에게 가장 아름다운 성인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리 좋은 습관이 아닌 것 같다고 그는 잠깐 생각했다. "어떠냐, 심포리엔. 교리 공부가 벌꿀보다 더 좋다고 대답하려무나." "아냐, 꿀이 좋아. 꿀이 더 좋다니까." 아이는 주름살투성이인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정색을 하고 외쳤다. 그리고는 문득 크게 울음을 터뜨리며 의자에서 미끄러졌다. 아마 프랜치스가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큰 소리로 웃으며 아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울지 마라. 내가 잘못했다. 심포리엔은 정말 착한 아이지. 하느님은 너희들을 모두 사랑하신단다. 말을 잘했으니 꿀을 더 많이 주마." 그는 베로니카 수녀의 나무라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그가 어린아이를 의자에 도로 앉히고 식당을 나오려 할 때 그녀는 문까지 따라나오며 조그맣게 말했다. "신부님께서 그러시니까 애들이 모두 응석받이가 된답니다. 어린아이 때부터 예의를 익히도록 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교실에도 마음대로 들어가 보지 못하고 멀찌감치에서 서성이며, 귀여운 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를 엿듣던 옛 기억이 아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이젠 아무것도 없다. 그는 나름대로의 사고방식으로 남의 웃음거리가 될 정도로 아이들을 귀여워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그는 가장으로서의 특권이라고 말하곤 했다. 베로니카 수녀는 그의 뒤를 따라 식당을 나왔다. 표정이 몹시 어둡고 불안해 보였다. 언제나 자기에게 비난조로 다정함을 나타내던 태도라고는 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그녀는 몹시 주저하면서 말을 꺼냈다. "요셉에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아침 이상한 얘기를 하더군요." "아, 항상 그 녀석이 하는 푸념이란 장가를 들고 싶다는 것이겠지요. 그럴 만도 하지요. 또한 성당문 옆에 수위실을 세워야 한다나요. 집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녀석은 그것이 모두 자기나 자기 색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성당을 잘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거라고 주장하고 나서니 웃을 수밖에요." "결혼이나 수위실 얘기가 아니었어요." 그녀는 조금도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거리의 중심가에, 초롱 상가라든가......그곳에 큰 빌딩을 짓는 중이라더군요. 우리 성당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크고 굉장한 건물이래요. 센샹에서 오는 배마다 대리석 등 건축 자재를 가득가득 실어 나른다는군요. 일꾼도 몇십 명이나 되고......미국의 백만장자가 아니면 꿈도 못 꿀 만큼 큰 공사래요. 머지않아 완공될 거예요. 그 건물 안에는 현대식 시설을 완전히 갖춘 학교, 자선 배급소, 무료 진료소 그리고 전문의가 있는 병원까지 들어선대요." 그녀는 씁쓸한 어조로 말을 맺으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가 짓는 것인가요?" 건물의 주인이 누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그는 짐짓 그녀에게 물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 목사랍니다. 미국의 메서디스트 교회 계통인......" 두 사람은 입을 다문 채 멀거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문명 세계와는 등진 벽지여서 이토록 빨리 프로테스탄트의 세력이 밀려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클로틸드 수녀가 베로니카 수녀를 찾으러 나왔다. 혼자 남게 되자 그의 마음은 더욱 괴롭고 심란해졌다. 그는 자기 처소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조금 전까지의 행복감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중세기풍의 견고한 그의 요새가 맥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혼자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산딸기 숲을 남몰래 찾아갔을 때 이미 여러 아이들이 숲을 점령하고는 제멋대로 산딸기를 따고 있는 것을 보아야만 했던-이, 그때의 분노가 문득 되살아남을 느꼈다.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교회 사이의 오랜 반목과 갈등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리 막막하고 암담한 심정이었다. 대수롭지도 않는 조그만 교회 문제로 언쟁 거리를 만들고 싸움으로까지 발전하고 마는 사례가 빈번했다. 두 교파의 증오와 질투는 감각이 무딘 중국인들도 곧 눈치채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리스도교에 대한 불신이 쌓일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프랜치스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으나 별 도리가 없었다. 지옥처럼 질서가 없고 혼란만이 있는 바벨탑(노아의 자손이 하늘까지 닿고자 세우려 했던 탑. 이것은 인간의 교만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에 분노하신 하느님이 탑을 쌓고 있던 사람들의 언어를 통하지 못하게 하심으로 혼란을 일으켜 벌을 내렸다는 진설이 있다. 이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각 인종마다 언어가 달라졌다고 한다)의 주위처럼 분노와 저주와 소음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요셉은 먼지떨이를 손에 들고 서성대며 프랜치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소를 핑계삼아 듣고 온 거리의 소문을 실컷 떠들어대려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다를까, 신부를 보자마자 총을 쏘듯 단숨에 말머리를 꺼냈다. "신부님, 가짜 하느님을 믿는 미국 사람이 온다는 얘기 들으셨어요?" "요셉, 시끄럽다." 프랜치스가 엄하게 나무랐다. "가짜 하느님을 믿는 게 아니란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거란다. 다시 그런 소리를 떠들고 다니면 수위실은커녕 혼을 내줄 테다." 무색해진 요셉은 무어라고 입속말을 중얼거리며 슬그머니 나가 버렸다. 저녁 무렵 산책 시간이었지만 프랜치스는 거리로 나갔다. 요셉의 얘기는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다. 초롱 상가 부근은 커다란 나무판자를 옮기는 일꾼들과 아름다운 초록빛 기와 바구니를 등에 지고 바쁘게 다니는 쿠리들로 장날처럼 들끓었다. 왕족이거나 백만장자가 아니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정도의 대규모 공사였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공사 현장을 지켜보며 오랫동안 서 있었다. 언제 왔는지 챠씨가 그의 바로 곁에 서 있었다. 그는 비로소 오랜 상념에서 깨어나 챠씨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와 날씨에 대해서나 장사 경기에 대한 의례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프랜치스는 챠씨의 그에 대한 태도가 몹시 동정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챠씨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런 교회들이 많이 생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여러 교파가 지방에 자리잡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기도 합니다만......그러나 여러 교회를 두루 다니며 그 정원을 산책하는 것도 한 가지 재미가 아니겠습니까? 신부님께서도 이곳에 처음 오셨을 때 퍽 냉대를 받으셨지요......" 부드럽고 예사로운 어조였으나 깊은 뜻이 숨겨져 있는 듯한 말이었다. "나처럼 지위도 세력도 보잘것없는 사람의 생각으로도 아마 이번에 새로 올 선교사들이 오래지 않아 돌아가야 할 정도로 심한 배척을 받게 될 것 같습니다." 프랜치스는 등을 스치는 전율을 느꼈다. 달콤한 유혹이었다. 호상이 지나가는 말처럼 무심결에 지껄이는 이야기에는 무서운 암시가 숨겨져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챠씨는 드러나지 않는 조직을 가진 이 지방 전체를 지배하는 숨은 세력가다. 프랜치스는 눈을 들어 묵묵히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챠씨가 어떤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큰 뜻을 품고 새로 오시는 선교사들이 그런 결과를 맞게 된다면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또한 신의 뜻이라면 누구든 막을 수 있을까요." 챠씨가 바란 대로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자기가 확보해 놓은 구역을 침입해 오는 커다란 위협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순간적일 망정 그런 생각을 떠올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일었다. 이마에 진땀이 솟았다. 그는 냉정히 자신의 입장을 지키려고 애쓰며 천천히 말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단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쪽 문을 택했듯이 새로 오시는 선교사들은 또 다른 쪽의 문을 택했다는 것이 다르지요. 그분들이 자기의 믿는 바에 따라 자선과 신앙을 베풀 권리를 우리가 어떻게 막을 수 있습니까? 또 그래서도 안 되겠지요. 역시 받아들이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챠씨의 눈에 놀라움과 찬탄의 빛이 번쩍였으나 프랜치스는 보지 못했다. 말을 하고 나니 자신이 취할 태도가 어때야 하는지 어느 정도 확실해지고 마음도 안정되었다. 챠씨와 헤어져 성당으로 돌아왔다. 성당 안에 들어가자 피로가 엄습해 왔다. 그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제단 옆에 세워진 십자가의 가시관을 쓴 예수의 고통스런 얼굴을 바라보며 자기에게 인내와 지혜와 너그러움의 덕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6월말경 메서디스트 교회가 완공되었다. 그 동안 프랜치스는 새로운 교회의 일을 염두에 두지 않으려 애썼으나 그럴수록 더욱 신경이 그쪽으로 집중되어 될 수 있으면 건축 현장 앞을 피해 다녔다. 완공이 된 후에도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아 보러 가는 것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좋지 않은 소식이라면 누구보다도 먼저 듣고 뛰어오는 요셉이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들어오며 드디어 교회 목사가-요셉은 목사를 이단의 악마라고 불렀다-거리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프랜치스는 단 한 벌밖에 없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그 유명한 우산을 자랑삼아 들고는 결심을 행하려는 사람처럼 단호하고 긴장된 얼굴로 교회를 찾아갔다. 페인트와 석회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짙은 녹색의 유리를 낀 현관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1분쯤 기다리고 있자니 안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회색 스커트에 깃이 높은 블라우스를 입은 자그마한 중년 부인이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치셤 신부입니다. 미리 연락도 드리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실례인 줄은 압니다만......당신들이 파이탄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뜻을 알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낯선 방문객에 대한 경계의 빛이 금방 사라지고 그녀의 푸른 눈에 따뜻한 감사의 빛이 가득 넘쳤다. "어서 들어오세요. 전 미세스 피스크예요. 월버는 아니, 피스크 박사는 2층에 있답니다. 단 두 식구뿐인 단출한 살림이지만 아직 정리가 덜 되어서 지금 서재를 정리하는 중이에요." "아, 몰랐군요. 그러시다면 다음에 다시 오기로 하겠습니다." "그냥 돌아가시다니, 그건 안 됩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그는 천장이 시원스럽게 높은 2층의 넓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깨끗이 면도된 얼굴에 짧게 다듬은 콧수염이 인상적인 마흔 살 정도의 남자가 사다리 위에 올라서서 책을 꽂고 있었다. 부인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키가 작아 보였다. 박사는 도수 높은 안경 너머로 프랜치스를 바라보았다. 총명해 보이는 눈빛이었으나 결코 날카롭지는 않았다. 헐렁헐렁한 목면의 닛커를 입은 자그만 체구가 어딘지 애잔한 인상을 주어 전체적으로 온순한 인상이었다. 급히 사다리를 내려오던 그가 발이 걸려 넘어 질듯 비틀거리자 부인이 재빨리 손을 내밀어 부축하며 애정이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조심하셔야 해요." 박사가 방바닥에 내려서자 부인이 프랜치스에게 말했다. "자, 여기 앉으세요. 몹시 어수선합니다만......이해하세요. 아직 가구가 도착하지 않았거든요. 의자도 변변히 없는 형편이지요. 하지만 중국에서는 무엇하나 금세 익숙해지게 마련이니 곧 괜찮아질 테지요." 부인은 웃으려 했으나 웃음이 목에 걸려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 사람은 방바닥에 앉았다. 아무래도 일말의 불안감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듯한 그들에게 치셤 신부는 애써 명랑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대단히 훌륭한 건물을 세우셨군요." "아, 네......별로......" 피스크 박사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변명하듯 말했다. "운이 좋았던 거지요. 석유왕 챠드러씨의 호의입니다. 우리는 늘 그분의 도움을 받곤 했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이 서로 생각해 왔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상황에 당황해 버린 것이다. 치셤 신부는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듯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소문에 의해 그의 선입견으로 은연중 그의 머릿속에 침략자로 규정되었던 목사에 대한 인상은, 이 피스크 박사 부부의 왜소한 모습과 온순한 태도를 대하는 순간 단번에 사라져 버렸다. 피스크 박사는 목사라기보다 전형적인 학자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렸다. 부드럽고 내성적인 성격인 듯 입가에서는 수줍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얼굴선이 뚜렷한 부인은 박사보다도 훨씬 강직한 성품인 듯했으나 곧 눈물이 쏟아질 듯한 푸른 눈이 몹시 착해 보였다. 작고 통통한 손으로 연신 황금색 그물 망사를 씌운 갈색의 고수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는데, 프랜치스의 눈으로도 그것이 가발임을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침내 피스크 박사가 헛기침을 몇 번하고 입을 열었다. 꾸밈이 없는 솔직한 말투가 친밀감을 더해 주었다. "우리들이 이곳에 온 것이 퍽 불쾌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프랜치스는 어색한 표정으로 강하게 부인했다. "당연하죠. 우리도 이미 경험했던 일이기 때문에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오기 전 산시성에 있었는데, 경치는 아름답지만 이곳보다도 훨씬 벽촌이었지요. 복숭아가 그 고장의 명물이랍니다. 그 복숭아밭만은 정말 아름답지요. 우린 그곳에서 9년 동안 살았습니다. 마치 고향 같았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다른 선교사가 들어왔답니다." 그는 잠깐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물론 카톨릭 신부는 아니었습니다만......아네스, 그 때는 참 싫었지?" "그래요, 정말 얼마나 싫었는지......" 부인은 그때를 생각하는 듯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익숙해져서 무관심하게 되니 괜찮아지더군요. 군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어쨌든 고참병이니까요." "중국에는 몇 년이나 계셨습니까?" "결혼식을 치르자마자 미친 사람들처럼 중국 대륙으로 건너왔으니 벌써 20년이 넘은 셈이군요. 일생을 이곳에 바칠 생각이지요." 타오르는 열정과 복받치는 감정으로 그녀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여보, 신부님께 우리 존의 모습을 보여 드립시다." 부인은 재빨리 일어나 아직 아무런 장식도 없는 벽난로 위에서 은빛 액자 하나를 들고 왔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 아들이랍니다. 하버드 대학에 다녔는데 로스 장학금 급비생으로 옥스퍼드에 가기 직전에 찍은 사진이에요. 지금은 영국 타인카슬의 조선소 부근에 있는 인보관에서 일하고 있답니다." 타인카슬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치셤 신부는 이제껏 그를 억누르고 있던 긴장감에서 해방되었다. "타인카슬이라고요?" 그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외치듯 반문하며 활짝 웃었다. "바로 저의 집 근처예요." 부인은 사진을 가슴에 꼭 껴안으며 정신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인연이 참 묘하군요. 정말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 그리고는 사진을 소중하게 벽난로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커피를 끊여 오겠어요. 그리고 솜씨는 형편없지만 제가 만든 도너츠도 좀 드세요." 그는 초면에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사양했으나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폐라니요? 아니에요. 남편도 늘 이 시간이면 가벼운 다과를 드시곤 한답니다. 위가 좋지 않기 때문에 조금씩 자주 드시곤 하죠." 부인이 내온 차와 도너츠를 먹는 동안 5분으로 작정했던 방문 시간이 l시간이 넘어 버렸다. 피스크 박사 부부는 둘 다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 출신이었다. 뉴잉글랜드 사람으로 메인 주의 비드로드에서 태어나 우연한 기회에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들의 즐거웠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프랜치스도 자신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감상에 빠졌다. 지나간 날의 추억은 모두가 아름답다. 추운 겨울, 시골 마을의 맑은 공기, 참나무 숲속을 지나 마침내 안개낀 바다로 흘러들던 큰 강줄기, 그 강가에 드문드문 서 있던 흰 목조 집들, 그리고 집들을 에워싼 단풍나무들은 눈이 쌓이는 겨울날에는 더욱 붉은 빛이 선명해져서 마을 전체가 이글이글 불타오르듯 보이곤 했었다. 마을 한가운데 우뚝 솟은 교회의 첨탑과 그곳에서 울려 퍼지던 맑은 종소리, 얼어붙은 거리를 코트 깃을 올려 세운 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그런 광경이 필름처럼 눈앞을 스쳐 간다. 피스크 부처는 그처럼 아름다운 고향을 버리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했다. 20여 년에 걸친 중국에서의 나날은 위험과 고봉으로 일관된 생활이었다. 콜레라로 두 사람 다 죽을 뻔하기도 했다. 의화단 사건 때 역시 처참하게 학살당한 동료들 가운데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긴 했으나 6개월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기도 했다. 험난한 세월을 함께 걷는 동안 부부의 애정은 더욱 더 깊어졌다. 둘 사이의 헌신적인 애정과 아들 존에 대한 사랑은 어떠한 장애 앞에서도 더욱 견고해질 뿐이었다. 부인은 원래 그다지 강인한 기질이 못 되면서도 남편과 아들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시련도 이겨 나갈 강한 모성애를 지니고 있었다. 부인은 그토록 어렵고 고통스럽게 살아온 사람답지 않게 여전히 감정이 풍부하고 로맨틱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이상한 기념품들을 소중히 모으는 어린애 같은 취미도 있었다. 그녀가 프랜치스에게 보여 준 수집품들 중에는 도너츠를 만드는 법을 써 보낸 굉장히 오래된 어머니의 편지, 로켓 속에 담긴 존의 머리털, 어릴 때 뽑은 존의 앞니 등이 있었다. 그밖에도 부인의 서랍에는 노랗게 빛바랜 편지 뭉치, 바짝 말라 버린 부케, 비드로드 교회에서 열렸던 그녀 생애 최초의 무도회의 밤에 달았던 리본 등이 추억의 기념품으로 소중히 간직되어 있었다. 부인은 건강이 좋지 않아 이 집들을 정리하는 대로 영국으로 건너가 6개월간 아들과 함께 지낼 계획이었다. 그녀는 프랜치스를 돕고자 하는 열망으로 그에게 고향에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해 달라고 강요하다시피 말했다 프랜치스가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부인은 박사를 뒤에 두고 현관 밖 정원까지 배웅을 나와 눈물 어린 눈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마음도 놓이고......우리 남편을 위해서도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먼저 있던 곳에서는 좋지 않은 일을 많이 겪었거든요. 우리는 미움을 받았지요. 미움은 무서운 증오로 변하고 마침내 큰 사건이 터졌어요. 남편이 환자의 문병을 갔다가 새로 온 선교사에게 얻어맞아 정신을 잃었던 거예요. 그 선교사는 주인에게 병자의 영혼을 훔쳤다는 트집을 잡아 몹시 괴롭혔지요." 부인은 다시금 그때의 생각으로 격해지는 감정을 억제하려 애를 썼다. "서로 도우면서 일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월버는 훌륭한 의사랍니다.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부인은 오랜 벗에게 하듯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치셤 신부는 설레는 감동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후 며칠 동안 피스크 부부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나 토요일에 부인이 온 정성과 솜씨를 다해 만들었음직한 훌륭한 과자를 성 안드레아 성당으로 보내 왔다. 아직 따스한 온기가 손끝에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갓 구어낸 것이었다. 프랜치스가 그것을 들고 어린이 성당으로 가자 말타 수녀가 반갑지 않은 표정을 했다. "여기서는 뭐 과자도 만들 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죠?" "워낙 친절한 부인이라 다른 뜻은 없을 겁니다. 호의로 보낸 것이니 고맙게 받아야죠." 말타 수녀는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이었으나 과자를 큼직하게 잘라 아이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었다. 클로틸드 수녀는 몇 개월 전부터 심한 피부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가려움증과 욱신욱신 쑤시는 아픔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는 형편이었다. 칼라민이나 석탄산 등 좋다는 약은 모두 바르고 먹고 했으나 조금도 차도가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 방법으로 열심히 9일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치셤 신부는 살갗이 벌겋게 벗겨진 클로틸드 수녀의 손을 보고는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으나 피스크 박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박사는 편지를 보낸 30분 후에 도착했다. 베로니카 수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찰을 마친 박사는 이제까지의 치료 방법을 칭찬해 주면서 세 시간마다 복용하라며 약을 조제해 주고는 겸손한 태도로 돌아갔다. 약을 복용한 지 열흘 정도 지나자 종기는 씻은 듯 싹없어지고 피부 색깔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클로틸드 수녀는 처음에는 몹시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며칠 후 고해성사에서 매우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백했다. "신부님......저는 정말 성심껏 기도를 했습니다만......결국......" "프로테스탄트의 선교사가 낫게 해주었다는 말이지요?" "네, 신부님." "클로틸드 수녀님, 의심은 신앙에 대한 시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한갓 도구에 불과하지요. 우리도 물론 그렇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벌써 오래 전에 노자는 말했지요. '종교는 많지만 진리는 하나며 우리는 모두 한 형제다'라고. 이 말을 잊지 마십시오." 그날 저녁 산책길에서 만난 베로니카 수녀가 그다지 호의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미국인 선교사는 퍽 솜씨가 좋은 의사시더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리고 좋은 사람입니다." 두 교회간에는 예상했던 어떠한 마찰도 불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의 각박함에 물들지 않은 파이탄에는 두 교파가 충돌 없이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었을 뿐더러 또 서로 상대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마음을 썼던 때문이었다. 게다가 치셤 신부가 철칙처럼 지켜 오던 고집-결코 물질로써 신자를 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이 비로소 결실을 본 것이다. 카톨릭 신자로서 초롱 상가의 교회로 개종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으나 그도 짧은 편지와 함께 되돌려 보내졌다. "치셤 신부님, 이 사람은 고약한 카톨릭 신자입니다. 메서디스트가 될 경우 더욱 나빠질 우려가 있기에 돌려보냅니다. 단 한 분 하느님을 믿는 귀하의 변함없는 벗 월버 피스크. 추신-카톨릭 신자로 입원을 해야 할 환자가 있으면 보내십시오. 카톨릭을 욕하는 일 따위는 가르치지 않을테니까요." "오, 하느님!" 프랜치스는 가슴이 뭉클해져 속으로 하느님을 외쳤다. 선의와 관용만 있다면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말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피스크 박사가 다방면에 걸쳐 대단한 실력가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의사며 고고학자일 뿐 아니라 중국학에도 이미 일가견을 이루고 있었다. 본국의 동양 연구 협회에서 발간되는 여러 잡지에 매우 전문적인 논문을 투고하는 한편 독자적인 연구에 열중하고 있었다. 특히 건륭시대의 도자기에 심취하여 18세기의 흑유 도자기를 비롯해 꽤 많은 진품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열성적이며 적극적인 부인을 둔 남편답게 그도 무척 진지한 토론을 좋아했다. 프랜치스도 역시 토론을 즐기는 편이어서 두 사람은 몇 번 만나지 않아서 벌써 좋은 토론 상대가 되었다. 주로 서로 가지고 있는 신앙이라든가 그 방법의 차이점 등에 대해서는 상대방의 감정이나 영역을 침해하지 않으려고 충분히 주의를 함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너무도 토론에 열중하여 양보하기를 잊어버리고 열을 올리기도 했다. 어떤 때는 팽팽히 맞선 의견 대립으로 기분이 상한 채 헤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특히 피스크 박사 쪽이 심했다. 그는 현학적인 면이 있는 데다 흥분하면 곧잘 화를 내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화를 내는 것도 그때 뿐으로 두 사람은 만나면 다시금 토론을 벌이곤 했다. 언젠가 그들은 장시간에 걸친 토론 결과 종내 의견의 일치점을 보지 못하고 헤어진 뒤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피스크 박사는 프랜치스를 보자마자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치셤 신부님, 요즘 나는 줄곧 엘더 커밍즈라고 하는 미국의 유명한 학자의 설교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카톨릭 교회를 말함) 사제의 음험하고 악마적인 음모에서 발전된 것이 바로 현대의 최대의 악이다'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나는 신부님과 사귀는 영광을 가진 이래 커밍즈가 형편없는 허풍 쟁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신부님께서도 이런 것쯤은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프랜치스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돌아섰으나 집에 오는 길로 열심히 신학 서적을 펼쳐 보았다 열흘쯤 후에 그들은 다시 만났다. 프랜치스는 인사를 마치기가 바쁘게 말했다. "피스크 박사님, 쿠에스타 추기경의 교리서에 그럴 듯한 구절이 있더군요. 즉 '프로테스탄티즘이란 신을 모독하고 인간을 타락시키며 사회를 교란시키는 부도덕한 운동이나 다름없다'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박사님을 아는 영광을 누리기 이전부터 이 추기경은 용서할 수 없는 망언을 했다고 생각해 왔답니다. 박사님께서도 이것을 알아 줬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는 모자를 약간 쳐들어 보이고는 진지한 얼굴로 그 자리를 떠났다. 배를 쥐고 웃어대는 외국인 메서디스트 곁에 서 있던 중국인들은 도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느새 10월도 다 지나가고 거센 바람이 부는 날씨가 계속되었다. 어느 날 프랜치스는 만주교 위에서 박사 부인을 만났다. 시장에 다녀오는 길인지 피스크 부인은 한 손에는 묵직한 시장바구니를 들고 한 손으로는 모자가 날리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프랜치스를 보자 반색을 했다. "무서운 바람이군요. 머리가 온통 먼지투성이가 되었으니 집에 가면 머리부터 감아야겠어요." 프랜치스는 부인의 이런 거짓말에는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사에 솔직한 부인이었지만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가발에 대해서는 감추려 들었다. 아무리 눈이 나쁜 사람에게라도 그녀의 가발은 곧 드러나는 것이었으나 그녀는 단념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진짜 머리임을 믿게 하려 애쓰는 것이다. "모두들 다 안녕하십니까?" 그녀는 여전히 모자에 손을 댄 채 고개를 약간 숙이며 대답했다. "제 건강은 아주 좋아요. 내일 제가 출발하기 때문에 월버는 지금 울적해져 있답니다. 월버가 쓸쓸하게 지낼 것을 생각하면 저도 마음이 언짢아요. 늘 혼자 계신 신부님께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녀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정색을 하고 프랜치스에게 물었다. "제가 가는 길에 신부님께서 부탁하실 일이 있으시면 서슴지 마시고 말씀하세요. 월버에게는 털옷을 선물할 생각이랍니다. 털옷은 뭐니뭐니해도 영국산이 최고니까요. 신부님께서는 무엇이 필요하신지요?"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만일 시간을 낼 수 있으시면 타인카슬에 계신 숙모님을 찾아가 주시겠습니까? 폴리 바논이라는 분인데 연세도 많으시고 해서 혼자 지내시기 무척 쓸쓸해하실 겁니다. 주소를 적어 드리죠." 그는 부인의 시장바구니 속에 든 물건의 포장지를 조금 찢어 급히 폴리 아주머니의 주소를 적어 주었다. 주소가 적힌 쪽지를 받아 소중하게 장갑 속으로 집어넣던 부인이 다시 물었다. "전하실 말씀은 없으세요?"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또 이곳이 얼마나 좋은 고장 인가도 설명해 드리세요. 그리고 또 제가 부인의 주인 다음으로 중국에서 필요한 인물이라는 것도......" 그를 바라보는 부인의 눈이 금세 따뜻한 애정으로 가득 찼다. "아마 신부님께서 지금 하신 말씀보다 더 자세히 전해 드리겠지요. 여자들이란 만나면 한없이 얘기를 하게 되는 법이니까요. 가끔 월버를 찾아가 주세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신부님께서도 몸조심하시고요." 악수를 나눈 뒤 부인은 빠른 걸음으로 초롱 상가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멀어져 가는 부인의 모습을 지켜보며 작은 몸 속에 숨은 강철같은 의지에 새삼 감복하고 있었다. 피스크 박사에게 한번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몇 주일을 그냥 지내 버렸다. 잠시도 틈을 낼 수 없을 만큼 바빴던 것이다. 요셉의 집을 마련한다는 것이, 비록 작은 오두막이었지만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집이 마련되자 곧이어 결혼식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이제까지 성심 성의껏 성당을 위해 일해 온 요셉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신부 들러리로 여섯 명의 꼬마를 세우는 장엄미사로 혼례식을 올리는 등 프랜치스는 세심하게 마음을 썼다. 신랑 신부가 새집에 살림을 차리자 프랜치스는 요셉의 부친과 형제들을 따라 류촌으로 갔다. 류촌에 제2의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그의 오래 전부터의 꿈이었던 것이다. 콴산에 커다란 교역로가 생긴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어 그는 머지않아 보좌 신부를 구해서 산골 마을을 중심으로 전교 활동을 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우선 마을의 유지들과 의논해서 밭을 넓히고 고원에도 60에이커쯤 개간해서 씨를 뿌리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러한 사정은 피스크 박사를 방문하지 못한 충분한 이유는 되었으나 5개월이나 지나 뜻밖에 피스크 박사와 마주쳤을 때 그는 어쨌든 면목이 없었다. 그러나 박사는 농담이라도 하고 싶은 듯한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혹시 부인께서 좋은 소식이라도 보내 오신 거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안사람이 내달 초에 돌아온다는군요." "그것 참 반가운 소식입니다. 부인께서도 긴 여행에 무척 피로하고 지루하실 텐데......"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마음이 잘 맞는 동행이 있어 여행이 퍽 즐겁다고 하더군요." "워낙 상냥하고 사람을 잘 사귀는 분이니까요." "게다가 유능한 수단가지요." 피스크 박사는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고 있는 듯 얼굴을 실룩거렸다. "일을 꾸며내는 데에는 따를 사람이 없어요. 집사람이 돌아오면 꼭 식사하러 와 주십시오." 치셤 신부는 되도록 외식을 삼가는 습관이었다. 더구나 초대에 응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너무 미안했으므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청해 주실 때 찾아가 뵙도록 하겠습니다." 3주일 후 초롱 상가로부터 정식 초대장이 날아왔다. 시각은 저녁 7시였다. 별반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이미 약속을 했었기에 하는 수 없었다. 7시로 정해진 저녁기도 시간을 30분쯤 앞당기고 프랜치스는 정장을 한뒤 요셉에게 가마를 불러오게 했다. 메서디스트 교회는 마치 축제라도 벌인 것처럼 불빛이 휘황했다. 그는 정원으로 들어서면서 제발 여러 사람이 북적대는 연회가 아니기를, 그리고 모임이 빨리 끝나기만을 빌었다. 본래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 아니었으나 오랫동안 사교적인 생활과 동떨어져 살아오는 동안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매사에 수줍음이 앞서는 스코틀랜드인의 기질이 강해져 초면인 사람과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고 그것이 오히려 고통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온통 갖가지 꽃들로 장식된 2층 거실로 올라가니 주인 부부 외에 다른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난로 앞 카펫 위에 나란히 선 그들은 훈훈한 방안 공기로 얼굴이 상기되어 있어 마치 처음으로 파티에 참석하는 흥분한 소년 소녀 같았다. 프랜치스가 들어가자 도수 높은 안경 너머로 박사의 눈이 기쁨으로 빛났다. 부인이 한 발 앞서 걸어나오며 다정하게 프랜치스의 손을 잡았다. "정말 오랜만이군요.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부인은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프랜치스의 손을 잡고 한동안 놓지 않았으나 어딘가 한 군데 정신이 빼앗긴 듯 묘하게 들뜬 태도였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저도 참 기쁩니다. 여행이 매우 즐거우셨다고요?" "그럼요,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존도 아주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더군요. 그 애가 오늘밤 이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녀는 젊은 처녀처럼 눈을 반짝이며 흥분한 어조로 빠르게 말했다.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해요. 그렇지만 그건 나중에 하기로 하지요. 또한 분 오실 손님이 있으니 그때......" 프랜치스는 또 다른 손님이라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눈을 치떴다. 낯선 사람을 대면하는 데 대한 긴장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한 부인이에요. 비록 우리와 종파는 다르지만 저와는 무척 가까운 사이랍니다. 이곳에 머물고 계세요." 프랜치스의 거북스러워하는 기색을 알아챈 부인은 잠깐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재빨리 덧붙였다. "신부님, 화내지 마세요." 그녀는 문 쪽을 향해 손뼉을 쳤다. 그 소리를 신호로 문이 열리더니 전혀 뜻밖에도 폴리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8 1914년 가을로 접어드는 어느 날, 폴리 아주머니와 말타 수녀는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산 쪽으로부터 끊임없이 희미한 총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으나 이미 그런 것에는 익숙해진 터이라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말타 수녀는 점심 식사 준비를 하고 폴리 아주머니는 창가에 수북히 쌓인 린넬로 된 베일을 다림질하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지낸 석 달 동안에 마치 남의 닭장에 함께 넣어진 암탉들처럼 절친한 사이가 되어 서로를 아끼고 소중히 여겼다. 말타 수녀가 폴리 아주머니의 뜨개질 솜씨를 칭찬하면 그것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폴리 아주머니는 말타 수녀의 훌륭한 바느질 솜씨를 칭찬했다. 언제나 두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나직하고 다정한 말소리가 소곤소곤 들려 왔다. 폴리는 빠른 손놀림으로 린넬에 물을 뿜어 구김살을 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프랜치스는 점점 몸이 약해져서 큰일이에요." 말타 수녀는 한 손으로 난로에 장작을 넣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수프를 식히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잡숫지를 않으니 건강을 해칠 건 뻔한 일이지요." "젊었을 때에는 얼마나 잘 먹었다고......" 벨기에인 수녀는 딱하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신부님들을 여러 분 대해 보았지만 그렇게 안 잡숫는 분은 처음이라니까요. 먹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메티에에 있는 우리 수녀 원장은 사순절(광야에서의 그리스도의 단식을 기념하기 위해 40일간 단식과 속죄를 행하는 기간) 중에도 한꺼번에 여섯 가지의 생선 요리를 먹을 만큼 식성이 좋았답니다. 식사를 제대로 안하면 위도 작아져 버리나 봐요." 폴리 아주머니는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제 금방 만든 핫케이크를 가져갔더니 그 애는 '이곳만 해도 몇천 명이라는 사람이 굶주리고 있는데 어떻게 저만 먹을 수 있습니까' 이러지 않겠어요." "그들은 언제나 굶주리고 있는 걸요. 중국에서는 물만 먹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답니다." "내란으로 인해 식량 사정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고 그 애가 말하던데......" 말타 수녀는 다 끓은 포 토오프(고기와 채소를 함께 넣고 끓인 수프)를 조금 떠서 맛보고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폴리 아주머니 쪽을 돌아보더니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내란이 없었을 때가 있었나요? 기근이 끊일 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비적이라는 게 파이탄에서는 아침에 커피에 곁들여 먹는 빵과 같은 존재예요. 몰려와서 총을 두세 발씩 쏘아 대면, 지금도 들리지요? 그러면 즉시 읍에서 돈을 주어 보내는 거지요.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그 핫케이크를 잡수셨나요?" "한 조각 먹었어요. 참 맛있다고 하더군요. 나머지는 모두 베로니카 수녀에게 가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도록 하라는 거예요." "신부님은 너무 마음이 좋으셔서 난 때때로 머리가 이상해지는 기분이에요." 말타 수녀는 더없이 소박하고 다정한 여자였으나 그녀의 왕국인 부엌 안에서는 사람이 달라 보일 만큼 활기차고 극성스러웠다. "있는 대로 모조리 남에게 주어 버리고 마니까 나중에는 당신 몸까지 남지 못할 거예요. 작년 겨울에는 또 어땠는지 아세요. 눈보라가 무섭게 치는 날이었는데 신부님은 글쎄 당신 외투를 벗어 얼어서 다 죽어 가는 거지에게 주셨지 뭐예요. 그것도 본국에서 수입된 제일 좋은 순모로 우리들이 정성껏 만들어 드린 새옷이었다니까요. 저도 싫은 소리를 한 마디 하려던 참이었는데 원장님이 먼저 신부님께 말씀드리더군요. 그랬더니 신부님께서는 의외라는 듯 깜짝 놀라며 원장님을 바라보시지 않겠어요? 그리고는 '그러면 왜 안 됩니까? 그리스도교도로서 살지 않는다면 아무리 입이 닳도록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설교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리스도라면 반드시 그 거지에게 옷을 벗어 주셨을 겁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겠어요? 몹시 화가 난 원장님이 '그 외투는 우리들 모두의 선물이에요'라고 응수를 하니까 신부님은 추위로 파랗게 된 얼굴에 웃음을 띄우시며 '그런 수녀님들은 선량한 그리스도교도고 난 그렇지 못한 게지요'라고 하시더군요. 정말 어쩌면 그러실 수가 있는지......저는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절약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배우고 자란 탓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그건 그렇고...... 앉아서 수프 좀 먹어 둘까요? 끝없이 먹어대는 아이들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다간 배가 고파 쓰러져 버릴 테니까요." 거리에서 막 돌아온 치셤 신부는 식당 앞을 지나다가 커튼이 쳐지지 않은 창문을 통해 때 이른 점심 식사를 들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자 그때까지 그의 얼굴에 무겁게 드리웠던 근심스러움이 단박에 사라지고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걱정과는 달리 폴리 아주머니의 방문은 성공적이었다. 아주머니는 놀라울 정도로 이곳 생활에 곧 익숙해져 매일 매일을 마치 블랙풀 근처에 주말 여행이라도 온 듯 평온하게 보내고 있었다. 고향에서와는 다른 변덕스런 날씨와 계절에도 상관없이 때때로 채소밭 가운데로 걸상을 내다 놓고 앉아 몇 시간이고 뜨개질에 열중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항상 입을 꼭 다물고 있었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낯선 이국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폴리 아주머니는 후노인과도 사이가 좋았다. 무뚝뚝한 정원사는 그녀에게만은 시종 상냥한 얼굴로 찾아왔다. 그리고 그녀로부터 잘 가꾼 채소를 칭찬 받고는 여간 기뻐하지 않는 것이었다. 때로는 그의 오랜 농사 경험으로 얻은 일기예보를 해주는 것으로 폴리 아주머니를 즐겁게 하기도 했다. 폴리 아주머니는 수녀들에게도 결코 손님 같은 서먹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조용한 성품인데다 단순한 생활에서 몸에 배인 소박한 태도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녀로서도 오랜 열망-전도 사업에 몸과 마음을 바치고 있는 프랜치스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이 비로소 이루어진 까닭에 일찍이 이처럼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또한 그러한 프랜치스를 미력하나마 잠깐 동안이라도 곁에서 도울 수 있다는 만족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당초 2개월로 예정되었던 체재 기간이 이듬해 1월까지 연장되었다. 폴리 아주머니는 좀더 일찍 오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오랫동안 네드의 시중을 들어야 했고 그가 죽은 뒤에도 변덕이 심하고 한 군데에 머물지 못하는 쥬디 때문에 쉽사리 떠나올 수 없었던 것이었다. 쥬디의 변덕과 불안정한 성격이 그녀를 몹시 괴롭혔다. 타인카슬의 시의회를 비롯하여 무려 여섯 개 회사의 비서로 떠돌아다녔는데, 자리를 옮길 때마다 처음에는 최고의 직장이라고 만족해 하다가 곧 얼마 못 가 팽개쳐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기곤 하는 것이 그녀의 습성이었다. 마침내 자기 자신도 이러한 떠돌이 생활에 어지간히 진력이 났는지 교사가 되겠다고 사범학교에 들어갔으나 견뎌 내지 못했다. 그리고는 막연히 수녀가 될까 하고 생각하는 것 같더니 느닷없이 자신의 천직은 간호사라고 하면서 노덤벌랜드 종합병원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나이는 이미 스물 일곱이었다. 어쨌든 이런 연유로 폴리는 겨우 마음놓고 먼 여행을 떠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모처럼 얻은 이 자유,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 뻔했다. 병원에 들어간 지 겨우 4개월이 되었을 뿐인데도 쥬디로부터는 연일 견습 생활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찬 편지가 날아오고 있었다. 편지마다 폴리 아주머니에게 이 불쌍한 조카를 위해 하루빨리 돌아와 달라는 애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주머니는 어쩌다가 한 마디씩 자신의 형편을 이야기할 뿐이지만, 그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고국에서의 그녀의 생활을 환하게 그려볼 수 있는 프랜치스로서는 아주머니를 성녀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성녀의 의미는 성상과는 달리 해석되어야 될 것이지만 말이다. 옛날부터 잘 알고 있는 아주머니의 결점과 특히 엉뚱한 짓을 잘 저지르는 것은 여전했다. 언젠가 그녀는 조금이라도 프랜치스의 선교 사업에 도움이 되고자 거리에 나가 사람들과 만났다. 길에서 만난 사람 중에 그녀에게 적선을 받은 두 남녀가 무엇인가 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따라왔다. 그녀는 그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켰다고 고지식하게 믿고 자랑스러워했지만 프랜치스는 그 남녀가 바로 수녀원에서 물건을 훔쳐 달아났던 호산나와 피로메나 부부임을 알고는 쫓아버리느라 진땀을 쏟은 적이 있었다. 함께 옛날 이야기를 하며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프랜치스에게는 폴리 아주머니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몰랐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시련에 직면한 지금, 그는 아주머니의 다정한 위로에 큰 힘을 얻는 것이었다. 프랜치스가 자기의 숙소로 돌아와보니 현관 앞에서 클로틸드 수녀와 안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늘 거리에서 듣고 온 소문들을 혼자 차근히 생각하고 정리해 볼 계획이었던 것이다. 붕대를 감은 손으로 마치 죄인을 다루듯 거칠게 안나를 붙잡고 서 있는 클로틸드 수녀의 얼굴이 평소와는 달리 붉은 빛을 띠고 있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안나의 검은 눈이 반항의 빛으로 사납게 불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향수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무슨 일이냐고 눈짓을 하는 프랜치스에게 클로틸드는 물을 쏟아 놓듯 단숨에 말하기 시작했다. "여태껏 말썽을 부려 왔지만 오늘만은 참을 수 없어서 신부님께 데리고 왔어요. 바구니 공장에서도 늘 주의 깊게 살피곤 있지만......조금도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하는 거예요." "무슨 일을 저질렀습니까?" 치셤 신부는 신중하게 귀를 기울이면서 클로틸드 수녀를 바라보았다. 클로틸드 수녀는 흥분으로 몸을 떨면서 말을 이었다. "참는 데도 한도가 있지요. 건방지고 반항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고 이제는 다른 아이들까지 나쁜 물을 들이니......게다가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뭡니까? 조금 전에도 폴리 아주머니의 크림을 훔쳐 바르고는......" 클로틸드 수녀는 말을 맺지 못하고 더욱 새빨개진 얼굴을 숙였다. "그리고 또 무얼 했습니까?" 프랜치스에게는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안나보다 얼굴이 붉어진 클로틸드 수녀가 더 딱하게 여겨졌다. "밤만 되면 군사들이 들끓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거예요. 어젯밤에도 집에서 자지 않은 걸 보니 밤새도록 와이츄의 군사들과 어울려 다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오늘 제가 조용히 불러 타이르려 했답니다. 그랬더니 글쎄 느닷없이 팔을 물어뜯지 뭡니까, 신부님." 프랜치스는 말없이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집에 온 첫 어린이, 그 잊을 수 없는 겨울밤의 눈 속에서 하느님의 선물로서 떨리는 기쁨으로 안아 올렸던 어린 생명이 이토록 반항적이고 비뚤어진 소녀로 변해 그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나이에 비해 성숙해서 가슴은 둥글게 부풀고 입술은 잘 익은 살구처럼 부드럽고 탄력 있어 보였다. 어릴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겁이 없고 반항심이 강했다. 바로잡아 보려고 애썼지만 결국 안나는 천사가 되지 못한 것이다. 치셤 신부는 치밀어 오르는 회한과 슬픔을 누르며 다정하게 물었다. "안나야, 너에게도 할 말이 있을 게 아니냐." "없어요." "할 말이 뭐 있겠어요?" 싸늘한 음성으로 클로틸드 수녀가 말했다. 안나는 증오의 눈빛으로 클로틸드 수녀를 흘겨보았다. "우리는 네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정말 네가 바른 사람이 될 것을 바라고 노력도 했단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오다니, 정말 가슴 저리구나. 너는 이곳에 있는 것이 행복하지 않으냐?" "네, 행복하지 않아요." "왜 그렇지?" "나는 내가 원해서 수녀원에 온 게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팔려 온 것도 아니고요. 어쩌다 그냥 흘러 들어온 것뿐이에요. 기도 따위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요." "언제나 기도만 하는 건 아니잖니? 다른 일들도 많이 있을 텐데......" "바구니 만드는 일 말인가요? 재미없어요." "그럼 다른 일을 하면 되지 않겠니?" "다른 일도 마찬가지예요. 기껏해야 바느질인 걸요. 평생 바느질만 하고 살란 말이에요?" 치셤 신부는 그저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는 않아. 배울 것을 다 배우고 좀더 나이를 먹으면 신사들 중에서 좋은 청년이 너와 결혼하기를 원하게 될 게 아니냐." 안나는 입을 비쭉이며 거침없이 조소를 보냈다. 그것은 분명히 훌륭한 신사 청년 따위보다는 와이츄 군사가 훨씬 좋다는 뜻이 내포된 웃음이었다. 프랜치스는 더이상 말해 봤자 반발심만 돋굴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어린 소녀라고 하지만 은혜를 모르고 반항만 하려 드는 것은 불쾌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네가 그렇게 싫다면 굳이 붙들어 두지는 않겠다. 그러나 거리가 조용해질 때까지는 여기 있거라. 자칫하면 거리뿐 아니라 온 세상이 뒤집혀질 위험한 지경이란다. 당분간 여기 있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 물론 여기 있는 동안은 규칙을 따라야 해. 어서 수녀님께 용서를 빌고 수녀님을 따라 가거라. 만일 다시 말썽을 일으킬 때에는 내가 직접 벌을 내리겠다." "수녀님, 베로니카 원장님께 잠깐 이곳으로 와 달라고 해주십시오."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진 고통을 감추려는 노력으로 그의 얼굴은 어둡게 굳어졌다. 5분 후 베로니카 수녀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손짓으로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리고도 꽤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겨우 입을 열었을 때 그의 음성은 비통했다. "베로니카 수녀님, 나쁜 소식을 두 가지나 들었습니다 .하나는 이 지방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고......그것도 올해 안으로 말입니다." 그녀는 침착하게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프랜치스는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금 막 챠씨를 만나고 오는 길인데, 그는 이번 전쟁만큼은 피할 수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이 지방에서는 지난 몇 년동안 와이츄의 횡포가 극심했습니다. 주민들은 피를 짜내듯 과도한 세금을 물어 왔죠. 말을 듣지 않으면 가족들을 죽이거나 읍내를 쑥밭으로 만들 테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지금까지는 호상들이 돈을 내어 그 무리들을 달래왔었지만, 이번에는 양쯔강 하류에 있는 내안 장군이란 자가 이 지방에 들어오겠다는 겁니다. 물론 와이츄보다는 낫다고 해도 결국 이곳 주민들의 고혈을 원하는 점에서는 그게 그거지요. 챠씨까지 내안의 편에 가담하기로 했답니다. 아마 머지않아 쳐들어올 것입니다. 양쪽을 다 돈으로 매수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니 전쟁이 터질 것이고 이긴 편에게 우리는 또 뇌물을 바쳐야 하는 멈추지 않는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그녀는 신부를 향해 조금 웃어 보였다. "벌써부터 듣고 있던 얘기인걸요. 다 알고 있었어요. 꽤 오늘 새삼스럽게 그런 좋지 않은 얘기를 꺼내시죠?" "오늘따라 전쟁이 아주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그것도 일찍이 없었던 참혹한 전쟁이......" 그의 긴장한 얼굴을 보자 그녀는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제가 그러하듯 신부님께서도 결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잖아요?" 그는 갑자기 창 밖의 시선을 거두어 그녀에게로 돌렸다. "물론 나 개인으로서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지요. 나는 지금 전쟁의 와중에 던져질 우리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겁니다. 와이츄가 저 언덕에서 시내를 공격한다면 여기는 바로 중심 목표가 되지요. 정말 염려되는 건 이 부근의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그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버릴 수 없어요. 그들은 단지 평화롭게 살기를, 피폐한 땅이나마 열심히 일구어 곡식을 거두고 가족과 더불어 평온하게 살기를 원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죄도 없이 수년 동안 폭군에게 착취를 당해 왔지요. 그런데 이제 또 새로운 폭군이 등장한 겁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착한 신자인 그들의 손에 무기가 들려지고 뜻모를 깃발을 흔들게 하며 이미 타락한 '자유와 해방'의 구호를 외치게 하지요. 거기에는 벌써 증오가 사납게 물결치고 있습니다 .결국 누가 승리를 하든 민중들만 희생당하게 마련입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일까요? 살육이 끝나고 화약 연기와 총소리가 멎으면 전보다 더 지독한 세금을 바치느라 허덕이게 되고 탄압은 더욱 심해지겠지요. 그러니 가엾은 주민들을 위해 어떻게 슬퍼하지 않을 도리가 있습니까."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신부님께서는 전쟁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으시는군요. 정의와 명예를 지키자면 전쟁도 한 방법이 아닐까요?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저의 집안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러한 전쟁에 기꺼이 참가하지 않은 적이 없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어둡고 슬픈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이해하기 어렵군요. 이 고장의 싸움은 더 큰 싸움의 작은 반영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잠시 망설이듯 눈살을 찌푸렸으나 단호한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챠씨가 센샹의 거래처를 통해 알아 온 소식에 의하면 독일은 벨기에를 침공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과도 전쟁을 벌였답니다." 한동안 오랜 침묵이 흘렀다. 베로니카 수녀는 석상처럼 꼼짝하지 않고 서서 질린 채 하얗게 허공의 어느 한 점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곧 알게 되겠죠.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우리 집안에 어떠한 작은 변화라도 생기지 않게 해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바깥 세상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불길은 성당 안으로도 불어닥쳤다. 프랜치스가 전쟁의 소식을 듣고 온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말타 수녀의 방 창문 위로 네모진 비단 헝겊에 색실로 수놓아진 벨기에 국기가 높이 올려졌다. 그리고 그날 낮 진료소의 일을 끝내자마자 그녀는 다급히 수녀원으로 뛰어들어오며 소리를 쳤다. "이제야 겨우 신문이 왔군요. 그렇게나 기다렸는데......" 그녀의 손에는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미국 신문 <인텔리젠스>가 들려 있었다. 일간 신문이었지만 이곳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아서 보내지곤 하는 것이었다. 신문을 펴 드는 그녀의 가슴은 기대와 불안으로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신문을 넘기던 그녀는 갑자기 분노의 외침을 터뜨렸다. "이럴 수가 있다니! 세상에 이런 극악무도한 짓이 있을 수가. 오, 하느님, 정말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침 신문이 왔다는 소리에 급히 들어오는 클로틸드 수녀를 손짓해 불렀다. "수녀님, 이걸 좀 보세요. 적이 루벤까지 쳐들어왔대요. 그리고 대성당을 파괴해 버렸다는군요. 그리고 메트류도......우리집에서 겨우 10킬로밖에 안 떨어진 곳인데......그 훌륭하고 번화한 거리가 이렇게 엉망이 되어 버리다니......" 같은 운명에 놓였다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굳게 맺어진 두 수녀는 머리를 맞댄 채 간간이 놀라움과 분노의 신음을 내뱉으며 열심히 신문을 읽어 내려갔다. "어쩌면! 제대까지 박살을 내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말타 수녀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연신 두 손을 비비대며 비통하게 말했다. "메트류는 추억이 많았던 거리예요. 내가 일곱 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 마차를 타고 처음 그 거리를 지나가 봤지요. 그날 우리는 살찐 거위를 열두 마리나 샀답니다. 그 번화한 시장이 지금은......" 클로틸드 수녀는 한편 마르느에 대한 기사를 읽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독일군들은 우리 나라 군인들을 마구 죽이고 있군요. 이건 전쟁이 아니라 도살이에요. 인간의 짓이라고 할 수가 없군요." 그녀는 베로니카 수녀가 들어와 테이블 앞에 앉은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외쳤다. 말타 수녀는 베로니카 수녀를 보긴 했으나 그녀에게 주의를 돌릴 만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 오히려 더 흥분하여 신문의 한 기사를 짚어 가며 떠들었다. "여길 보세요, 클로틸드 수녀.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루벤 수녀원은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또한 많은 어린이들이 무차별 학살을 당했다는 것도 믿을 만한 보고에 의해 확인되었다고 한다.' 기막힌 일이에요." 클로틸드 수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보불전쟁 땐 또 어땠다고요.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이 미국 신문이 독일을 흉노라고 부르는 것도 당연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증오로 떨렸다. 바로 그때였다. "우리 나라 사람에 대해 그렇게 모욕적으로 발언하는 거 나는 용서할 수 없어요." 뜻하지 않은 날카로운 소리에 흠칫 놀라 클로틸드 수녀는 창턱에 몸을 기댔다. 그러나 말타 수녀는 베로니카 수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우리 나라 사람이라니요, 원장님. 제가 원장님의 입장이라면 그렇게 '우리 나라 사람'을 자랑스럽게 내세우진 않을 거예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그 야만인들을 말이에요.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그렇게 죽이다니요......하느님이 무섭지 않을까요?" "그 신문은 엉터리예요. 속되고 거짓된 기사만 잔뜩 늘어놓은......그 따위 것을 어떻게 믿지요. 독일인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말타 수녀는 퉁퉁한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그녀 앞에 버티고 섰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에서 여느 때보다 더 농부 아낙의 거친 기질이 드러나 보였다. 그녀는 마치 질그릇이 깨지는 듯한 거센 음성으로 따발총처럼 내뱉었다. "당신네들의 그 신사 군대가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여 평화로운 나라들을 차례차례 짓밟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거짓이라는 말입니까?" 베로니카 수녀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독일은 태양의 빛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빛을 따라 나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무고한 생명을 빼앗고 성당과 거리를 파괴하고 약탈을 하는 짓이 모두 태양인지 달인지가 필요해서라는 말씀이죠? 참 훌륭한 해석이시군요. 허기에 미쳐 버린 돼지 새끼들 같으니라고." "말타 수녀!" 흥분 상태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으며 베로니카 수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 세상에는 정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부당한 대우를 받아 왔기에 일어난 것일 겁니다. 독일 군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게르만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피나는 투쟁을 한다는 걸 기억해 두세요. 내 오빠도 물론 참전하고 있겠지요. 그리고 당신들의 원장으로서 조금 전 자매님들의 입을 더럽힌 저속한 말 따위는 다시는 쓰지 않기를 명령합니다." 팽팽하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베로니카 수녀가 천천히 그곳을 나갔다. 그녀의 모습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말타 수녀는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네 나라의 그 훌륭한 운명은 아마 개척되지 못할 거예요. 물론 영광도......연합군은 반드시 승리할 겁니다." 베로니카 수녀는 단지 차가운 미소만을 띄울 뿐이었다. 전쟁의 위협 아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벽지의 교회에도 때때로 바깥 세계의 소식이 날아 들어오고, 그것은 좁은 사회 안에 반목의 뿌리를 굳히는 데 더욱 기여하게 되었다. 사실 이제껏 그다지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었던 클로틸드 수녀와 말타 수녀는 전쟁 발발 이후 각별한 우정으로 굳게 맺어졌다. 특히 말타 수녀의 클로틸드 수녀에 대한 보살핌은 극진하였다. 감기에 잘 걸리는 클로틸드 수녀에게 특별한 처방으로 기침약을 조제해 주고 영양 있는 음식을 마련해 주는 등 건강 관리에 많은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시간이 날 때마다 부상병들에게 보낼 장갑이나 양말을 짜면서, 특히 베로니카 수녀 앞에서는 한층 높은 목소리로 사랑하는 조국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물론 베로니카 수녀의 감정을 건드릴 얘기는 삼가도록 신경을 쓰고는 있었지만 때때로 말타 수녀가 진지하게 "자, 잠깐 우리의 소원을 기도 드리고 옵시다" 라고 말하며 클로틸드 수녀와 자리에서 일어날 때면 베로니카 수녀는 가슴이 저미는 듯한 아픔에 통증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베로니카 수녀는 원장답게 의연한 태도로 잘 참아 나갔다. 그녀도 역시 조국의 승리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치셤 신부는 각각 자신의 조국의 승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 드리는 세 수녀가 가슴속에 품고 있는 불꽃 튀는 적의를 볼 때마다 착잡하고 쓸쓸한 감회에만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것에 신경을 쓸 만큼 조용하질 못했다. 언덕을 끼고 행군하는 와이츄 군대의 동정을 살피는 동안 내안측이 드디어 공격을 개시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부터 그는 전적으로 기도에만 매달렸다. 오로지 평화를, 주민들의 안전을, 그리고 자기에게 의지하고 있는 많은 어린이들에게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식을, 그들에게 불행이 닥치지 않기를 기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로틸드 수녀는 자기가 맡고 있는 아이들에게 프랑스 국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때는 물론 베로니카 수녀가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바구니 공장에 가 있는 시간을 이용해서였다. 어느 날 아침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수녀원 안을 천천히 걸어들어오던 베로니카 수녀는 창문이 활짝 열린 교실에서 피아노 소리에 맞춰 드높이 울려퍼지는 '라 마르세예즈'를 들었다. "Allons, enfants de la patrie......(나가자, 조국의 젊은이들아)" 순간 베로니카 수녀는 넘어질 듯 다리가 떨렸다. 그대로 폭삭 주저앉을 것만 같이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으나 잠시 후 고개를 똑바로 치켜든 채 꼿꼿하게 걸어갔다. 그 달도 끝날 무렵, 오후 교리 공부를 마친 클로틸드 수녀는 예외 없이 아이들과 프랑스 국가를 합창했다. 그리고는 모두 함께 기도를 하자고 말했다. "여러분, 모두 무릎을 끓고 용감한 프랑스 군인을 위해 기도합시다." 아이들은 즉시 무릎을 꿇고 그녀를 따라 목청을 높여 기도문을 외웠다. 기도를 끝내고 막 일어서던 클로틸드 수녀는 비로소 난로 뒤에 서 있는 베로니카 수녀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베로니카 수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한 얼굴에 오늘은 명랑한 웃음까지 띄우고 아이들 앞으로 한 발 다가섰다. "여러분, 이제는 용감한 독일 군인을 위해서 똑같이 기도를 드립시다." 클로틸드 수녀의 얼굴이 금세 새파래졌다. 누군가에 의해 목을 졸린 음성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원장님, 여기는 저희 교실입니다." 베로니카 수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여러분 어서 기도를 올립시다. 용감한 독일군이 승리하도록 성모경을 함께 욉시다." 클로틸드 수녀의 가슴이 곧 터질 듯 무섭게 고동쳤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파들파들 떨리더니 발작적으로 손을 올려 원장의 뺨을 후려쳤다. 순간에 교실 안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한참 후에야 알아차린 수녀가 갑자기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리며 교실을 뛰쳐나갔다. 베로니카 수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에 보다 더 부드럽고 침착했다. "클로틸드 수녀님은 기분이 좀 좋지 않으신 거예요. 자, 공부를 계속합시다. 이 시간에는 내가 대신 수업을 하겠어요. 시작하기 전에 먼저 독일군을 위해 기도를 드릴까요?" 그녀는 기도가 끝나자 조용히 책을 펼쳤다. 그날 저녁 진료소에 들른 치셤 신부는 진료소에서 다량의 크로다인을 저울에 달고 있는 클로틸드 수녀를 보았다. 발소리에 놀란 수녀는 자칫 떨어뜨릴 뻔한 약병을 간신히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신부가 민망할 정도로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낮에 있었던 사건으로 그녀의 신경은 견딜 수 없도록 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변명하듯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위가 나빠진 것 같아요. 요즘 좀 신경을 많이 썼거든요......" 그녀의 심상치 않은 태도나 저울에 달린 약의 분량으로 보아 진정제로 사용할 의도임을 프랜치스는 곧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많이 마실 필요가 없습니다, 클로틸드 수녀님. 그 속에는 상당량의 아편이 들어 있으니까요." 수녀가 나간 뒤 프랜치스는 약병을 독약 진열장에 넣고 자물쇠로 잠가 버렸다. 심한 피로가 일시에 몰려왔다. 모처럼 조용한 진료소의 분위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위험, 그리고 타국에서 무의미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런 상황에서 수녀들까지 쓸데없이 투쟁들을 벌여 집안의 평화스러운 분위기마저 흐려 놓고 있다. 그녀들의 비상식적이고 융통성 없는 행동들이 새삼 분노를 느끼게 했다. 그는 전부터 이 비상식적인 사태를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을 줄곧 해 온 터였고 또 이제는 더이상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방관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날 하루 일과가 끝난 후 치셤 신부는 세 수녀들을 모두 자기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는 전에 없이 근엄한 얼굴로 수녀들을 세워 둔 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런 비상시에 당신네들이 하는 짓이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군요. 도대체 정당한 근거가 어디에 있다고 그 야단들이오?" 잠시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클로틸드 수녀가 약간 몸을 떨며 입을 열었다. "정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녀는 흰 수녀복의 주머니 안에서 겹겹이 접혀진 신문을 꺼내어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읽어보세요. 어느 추기경의 말씀입니다." 그는 대충 눈으로 내용을 파악한 후 천천히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파리에 있는 노틀담 성당에서 아메트 추기경이 발표한 성명서를 인용 보도한 것이었다. 친애하는 동포여, 프랑스군과 연합군의 전우들이여, 전능하신 하느님은 우리의 편이로다. 과거에도 하느님은 우리를 도와 오늘의 위대한 발전으로 이끌어 주셨도다. 이 곤경에 빠진 시기를 맞이하여 하느님은 또다시 우리를 도울 것이다 .하느님은 전쟁터에서 용감한 우리 병사들 곁에 계시며, 전력을 강화시켜 병사의 용기와 투지를 더욱 투철하게 해주실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지키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승리를 우리들에게 주실 것이니...... 그는 거기에서 읽는 것을 중단했다. 더이상 읽고 싶은 생각이 싹 가신 것이다. 다시 냉랭한 침묵이 시작되었다. 클로틸드 수녀는 '그보라는 듯' 주시하며 신경질적으로 몸을 떨었고, 말타 수녀 역시 '이제 아시겠느냐'는 듯 득의에 차서 버티고 서 있었다. 베로니카 수녀도 지고 싶지 않다는 듯 넓은 허리띠 안의 검은 천으로 된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저는 프랑스 추기경의 일방적인 의견 따위는 괘념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저도 보여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쾰른, 뮌헨, 에센의 대주교님들의 공동성명서입니다." 그는 냉정하고 오만한 음성으로 성명서를 읽어 내려갔다. 사랑하는 조국의 백성들이여, 하느님은 우리에게 강요된 이 정의의 전쟁에 있어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조국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싸움에 임하기를 제군에게 명령한다. 하느님은 그 예지와 정의에 의하여 우리가 옳다는 것을 알고 계시며 또 하느님은 우리에 대해서는...... "그 정도면 충분해요." 프랜치스가 손을 저어 그녀의 낭독을 막았다. 인간의 악의와 위선 그리고 어리석음에 대한 분노와 실망이 그를 절망스럽게 했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 멍하니 서서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멋대로 된 그런 식의 호소에는 이제 하느님도 질려 버리셨을 겁니다." 그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 벌떡 일어나 방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나는 지존한 추기경과 대주교님들의 견해를 모순이라고 비난하지는 않겠습니다 .모순이라 해 보았자 결국 더 큰 모순만 느낄 뿐이니까요. 또 저같은 하찮은 주제에는 그런 평이 어울리지도 않는 것이지요. 게다가 이름도 없는 인간이며 중국의 황량한 들판에 선 채 눈앞에 다가오는 비적들의 싸움에 무서워 떨고 있는 불쌍한 스코틀랜드인 사제일 뿐이죠. 당신네들은 왜 그것을 모릅니까? 이런 짓들의 우매함과 야비함을 왜 올바로 꿰뚫어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까? 우리 신성한 카톨릭 교회는-아니, 세계의 그리스도교국이라는 교회가-세계대전을 아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찌 보면 신성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선자의 미소로 하느님의 사도라고 자처하려고 몇백만이라는 충실한 신도들을 축복하듯 전쟁터로 몰아 불구로 만들고 살육을 하고 몸과 마음을 찢어 서로 죽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국을 위하여 생명을 바쳐라, 그러면 너희 모든 것은 용서를 받으리라. 애국심! 국왕과 황제! 1만이나 되는 교회의 설교단에서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로' 하는 식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그는 갑자기 말을 끊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불타는 듯한 시선으로 창밖을 멀리 바라보았다. "현대란 시저가 없는 세대입니다. 있다면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이나 노예 혹사, 또는 콩고의 고목을 욕심 내는 금융자본가나 정치가뿐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사랑을 설교하고 인간의 동포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산 위에서 '죽여라! 죽여라! 증오로 나아가라. 동포의 배에 총탄을 퍼부어라' 하고 외치진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국가의 모든 교회와 대성당에서 울리는 말은 주의 말씀이 아니라 이 세상에 편승해서 아부하는 자와 비겁한 자들의 외침일 뿐입니다." 그는 입술을 떨고 있었다. "자기의 행위가 교의를 배반하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교도의 나라인 이 땅에 와서 주민을 개종시킨다는 그러한 주제넘은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인이 우리들을 조소하는 것도 깊이 생각해 보면 조금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그것은 허위로 뭉쳐진 종교입니다. 계급과 돈과 국민의 증오로 이루어진 종교입니다! 그리고 사악한 전쟁의 종교입니다!" 그는 갑자기 말을 중단했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번들거리고 눈은 고통으로 어둡게 그늘져 있었다. "왜 교회는 기회를 잡으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동반자로서 증명할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려 하는 것일까요. 증오를 나타내고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대신 모든 나라에서 교황에서 사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함께 '무기를 버려라. 너희는 살인을 하지 말라!' 하고 외쳐 보십시오. 그러면 물론 박해를 당하거나 사형을 당하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순교입니다. 그렇게 죽임을 당한 자는 우리의 제단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장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의 소리는 점점 낮아지고 침착한 태도로 마치 예언자처럼 이상한 빛을 띠는 것이었다. "교회는 이런 비열함으로 언젠가는 스스로 고통과 후회를 씹어야 할 것입니다. 가슴속에 자라게 한 독사는 어느 땐가는 자기의 가슴을 물어뜯을 것입니다. 무력을 시인하면 파괴를 선언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거대한 군사력이 고삐를 자르고 종횡무진으로 날뛰게 되면 끝내 교회로 뛰어들어 몇백만이나 되는 신자들을 부패시키고 다시금 카타콤바(초대 그리스도교도의 지하묘지로서 박해 당시 신도들의 피난소였으며 또 정식 예배소로도 사용되었음)로 몰아넣고 말 것입니다." 그가 말을 끝마치자 방 안 분위기는 긴장과 숙연한 침묵으로 휩싸였다. 말타 수녀와 클로틸드 수녀는 감동한 모양인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베로니카 수녀는 전에 그와 다투었던 일을 기억하고 오만하고 차가운 얼굴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말씀은 참 감동적이군요, 신부님......당신이 비난하신 그 성당에 가셔서 말씀하세요. 매우 훌륭하겠군요. 하지만 이 파이탄 땅에서부터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신다면 아무 쓸모 없는 얘기가 아니겠어요?" 그의 안면 근육에 피가 확 번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내 그것은 사라지고 그는 온화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신도들에겐 물론 이 부정한 전쟁에는 절대 참가해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모두 성당문 안으로 피난시킬 작정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입니다.: 세 수녀들은 모두 똑같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베로니카 수녀의 냉정한 얼굴에는 엷은 두려움이 스쳐 갔다. 그러나 그는 세 사람이 함께 방을 나가는 뒷모습에서 아직도 그들은 화해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돌연 뭐라고 이름지을 수 없는 공포가 전신을 휩쌌다. 무언가 그 무서운 일은 오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그 '때'를 기다리며 그 정해진 운명에 손을 써 보지 못하고 무력하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그를 더욱 두렵게 했다. 9 어느 일요일 아침, 그는 요 며칠 동안에 걸쳐 줄곧 두려워하고 있던 충성에 놀라 눈을 떴다. 행동을 개시한 포병대의 둔중한 사격 소리였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달려갔다. 수마일쯤 떨어진 서쪽 산에서 6문의 경야포가 거리를 향해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옷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와 동시에 현관에 있던 요셉이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터졌어요, 신부님. 어젯밤에 내안 장군이 파이탄에 입성했는데 와이츄의 부대가 내안 장군 부대를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신자들이 벌써 성당문 앞까지 밀려와 있습니다." 프랜치스는 요셉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모두들 어서 들어오도록 해 드려라." 요셉이 벌써 문을 열러 간 사이에 그는 급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벌써 아침 식사를 하려고 식당에 모여 있었으나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어 다행이었다. 어린 여자 아이 한둘이 멀리서 들려 오는 포성에 겁을 먹고 소리도 못 내고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는 긴 식탁을 한 바퀴 돌며 애써 웃는 표정을 지었다. "저 소리는 폭죽을 터뜨리는 것이니까 너희들은 놀라거나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 내일이나 모레쯤은 더 큰 것이 터질지도 모르니까 미리 마음을 단단히 가져야 하는 거야." 세 수녀들은 제각기 식탁 모서리에 서서 아이들을 돌보아 주고 있었다. 베로니카 수녀는 대리석처럼 차가운 얼굴로 태연했지만 클로틸드 수녀는 공포에 질려 있음이 분명했다. 긴소매 안에서 두 손을 꼭 잡고 두려움을 감추려고 무진 애를 쓰는 듯했으나 포성이 귀청을 때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얼굴이 창백해지곤 했다. 베로니카 수녀는 아이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기도 하여 시종 여유로와 보였다.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장하여 클로틸드 수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상태일지라도 계속 아이들에게 먹일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말타 수녀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글쎄 말이에요.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는데요." 클로틸드 수녀는 경직된 얼굴로 억지로 웃으려는 순간 다시 먼 거리에서 포성이 들려 왔다. 그는 식당을 나와 수위실로 갔다. 활짝 열린 문 옆에 요셉과 후노인이 서 있었다. 그 앞에는 남녀노소의 신자들이 짐보따리를 꾸려 들고 성당 마당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잔뜩 겁에 질린 모습으로 본능적으로 안전한 곳을 찾아 움직이는 모습들은 정말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이기도 했다. 이나마 가엾은 이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이 성역은 얼마나 고마운 장소인가. 견고한 벽돌담은 방음 역할을 잘 해줄 것이다. 이 건물을 지을 때 일부러 담을 높이 쌓아올렸던 자신의 허영심을 축하하기도 했다. 누더기 옷을 걸친 노파가 보따리를 등에 메고 그의 옆을 지나갔다. 오랜 가난을 통해 익숙해진 궁핍 생활과 그 표식인 주름살이 가득한 노파는 비틀거리며 성당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빈 우유 깡통에 한 주먹쯤 되는 콩을 삶기 시작했다. 그 노파의 모습에서 그는 야릇하게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그 어떤 것이 느껴졌다. 그의 옆에 서 있던 후노인은 태연한 기색이었으나 용감해야 할 요셉은 그렇지 못했다. 결혼이 그를 딴 사람처럼 만들어 버린 탓일까? 이제는 값없는 용감한 청년이 아니라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한 가정의 책임자인 가장의 의무감이 그를 변하게 한 모양이다. "빨리빨리 좀 움직여요!" 요셉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자물쇠를 채우고 빗장을 질러 놓아야 하니까요." 치셤 신부는 부드러운 손길로 요셉의 어깨를 쳤다. "너무 빨리 서두르지 않아도 돼, 요셉. 모두 다 들어온 후에도 늦지 않으니까." 요셉은 어깨를 움츠렸다. "피난 온 신자들 중에 와이츄의 군인도 끼여 있었어요. 싸움이 싫어 달아난 사람이라면 와이츄가 가만 두지 않을 거예요." "설사 그렇다 해도 서로 총질은 하지 않을 테지......" 치셤 신부는 다소 엄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걱정 말게. 깃발이나 내다 걸어. 문은 내가 지킬 테니까." 요셉은 뚱한 표정으로 곧 남청색 바탕에 성 안드레아의 짙은 남색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나와 문턱에 꽂았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은 치셤 신부의 가슴에 자랑스러움과 높은 긍지를 느끼게 했다. 그 깃발은 평화와 만인에 대한 선의를 상징하는 중립이며 보편적인 사랑의 표시인 것이다. 마지막 피난민이 들어오자 문은 굳게 닫혀졌다. 그 순간 후노인이 '비취 언덕'의 정면 3백 야드 가량 떨어진 저쪽의 울창한 삼나무 숲속을 가리켰다. 그 숲속에서 뜻밖에도 포신이 긴 대포가 나타났다. 나뭇가지로 인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하는 녹색 제복의 와이츄 군사가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군대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내안 군사들이 사용하고 있는 야포보다 훨씬 성능이 강하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윽고 포구에서 불을 내뿜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공기의 진동, 포탄이 공기를 가르고 날아가는 무서운 금속성 소리가 그의 머리 위를 지나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하늘을 찢는 듯한 굉음이 대지를 온통 흔들어 놓았다. 삽시간에 천지가 불바다로 변하는 듯했다. 대구경포가 고막을 찢을 듯 시내를 향해 계속 폭격을 했고, 잠시 후엔 내안의 포열도 곧 그에 응전을 했으나 그 포는 사정 거리가 짧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적지인 삼나무 숲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성당 부근에 우박처럼 쏟아져내리는 것이었다. 채소밭에도 포가 떨어져 마치 분수처럼 흙더미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가 떨어져 내리기도 했다. 성당 안은 졸지에 공포의 부르짖음으로 소란을 이루었고 프랜치스는 즉각 사람들을 성당 건물 안으로 대피시켰다. 소음과 혼란은 더욱 커져 갔다.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소리치며 이리저리 밀렸다.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공황의 소용돌이 속이라 모두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그때 베로니카가 포탄 소리를 뚫고 커다란 목소리로 아이들을 한데 모이게 했다. 그녀는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부드러운 미소까지 띄우며 그녀 주위로 몰려든 아이들에게 귀를 막게 하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게 했다. 아이들은 곧 공포를 잊고 흥이 나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그녀는 곧 재빠르게 수녀원의 지하실로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요셉의 아내와 두 아이는 먼저 거기에 와 있었다. 조그맣고 누런 얼굴들이 어두컴컴한 지하실의 기름과 감자, 여러 가지 설탕 조림을 올려놓은 선반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묘한 인상을 주었다. 그래도 지하실에서는 포탄의 날카로운 소리가 그다지 크게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간혹 심한 진동으로 건물은 뿌리째 흔들리는 듯했다. 폴리는 아이들과 함께 지하실에 있었고 말타와 클로틸드 수녀가 점심을 날랐다. 클로틸드 수녀는 평소에도 흥분을 잘했으나 지금도 거의 정신이 없는 듯했다. 게다가 마당을 가로질러 다니다가 그만 작은 금속 파편이 뺨을 스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아, 하느님." 그녀는 비명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 죽었군." 그녀는 거의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려서 회개를 하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짓은 그만하고 어서 가엾은 아이들에게 죽이나 날라나 줘요" 하고 말타 수녀가 클로틸드 수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치셤 신부는 요셉에게 불리어 곧 진료소로 갔다. 한 여자가 손에 가벼운 상처를 입고 있었다. 출혈을 막고 붕대를 감아 준 프랜치스는 곧 그녀와 요셉을 성당으로 돌려보내고 창가로 가 파이탄 시가지가 폭격에 불바다가 된 채 붕괴하는 건물의 잔해를 눈으로 측정해 보고 있었다. 중립의 마음을 가지려 했으나 이 참상을 볼 때 무자비한 파괴자인 와이츄를 격파해야 한다는 증오심이 가슴속에서 끝없이 타오름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서서 밖으로 내다보고 있으니까 돌연 1분대쯤 될까말까한 내안의 군사가 만주문에서 뛰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회색 개미떼들처럼 보이는 그 군사들은 약 2백 명쯤 되었다. 만주문을 나온 그들은 줄지어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전신에 무서운 전율을 느끼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회색의 병정들은 몇 소대인가로 나뉘어서 용감하게 돌진해 오는 것이 점점 뚜렷하게 보였다. 소총을 맨 사병들은 허리를 굽히고 10야드 정도까지 달려 올라가서는 땅바닥에 찰싹 엎드려 계속 나아갔다. 시내를 향한 와이츄군의 포격은 계속되었다. 회색 병정들은 낮은 포복 자세로 전진하여 적진 가까이 이르더니 잠시 멈추는 듯했다. 이윽고 지휘관이 손 신호로 진격을 알리자 군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50보쯤 뛰었을까, 이제 몇 초만 더 가면 목표 공격물에 닿을 수 있는 순간에 날카로운 기관총 소리가 공기를 뒤흔들었다. 삼나무 숲속에는 세 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신경을 파열할 것 같은 그 기관총 소리에 돌격하던 용감한 내안 군사들은 순식간에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어떤 자는 앞으로 고꾸라지고 또 어떤 자는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또 기도라도 드리는 듯 무릎을 꿇었다간 그대로 넘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뼈대만 있는 허수아비처럼 우스꽝스럽게 쓰러진 채 쨍쨍한 햇볕 아래서 다시는 움직이지를 않았다. 난사하던 기관총 소리도 그쳤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정적이 찾아왔다가 또다시 대포의 둔탁한 소리가 울려 주위 사물들은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녹색의 경사진 언덕엔 조용한 시체들이 널브러진 채로. 치셤 신부는 자신이 크나큰 죄악의 공범자인 듯 멍청하게 서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전쟁의 모습이다. 수백 번 찬미의 대상이 되었던 이 장난 같은 파괴의 무언극이 또 프랑스의 어느 황야에서 만행 되고 있을 것이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고,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으며 격렬한 탄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주여, 저를 오래오래 살게 하여 주옵시며 다만 평화를 위해서만 죽게 해주옵소서." 돌연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았을 때 언덕 위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물체가 눈에 띄었다. 절망에 떨던 그의 눈빛이 다음 순간 갑자기 빛을 발했다. 내안의 병사 한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 병사는 성당을 향해 고통스러운 듯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그 걸음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힘이 빠져 간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드디어 병사는 쓰러져서 조금씩 기어오는 듯하더니 성당 위쪽 문에서 약 60야드 떨어진 지점에서 완전히 멈췄다. 프랜치스는 생각해 보았다. 저 병사는 죽고 말 것이다......지금은 영웅인 체 한다는 게 우스울 때다. 자신이 거기까지 나간다면 자기의 머리나 그 밖의 어딘가에 틀림없이 탄환이 박힐 것이다. 그런 짓은 무모하다......그러나 그는 어느새 진료소를 나와 윗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문을 열 때에도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다행히 성당에서는 아무도 보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따가운 햇빛 아래서 언덕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검은 옷과 길게 드리운 검은 그림자는 뚜렷이 드러나 보일 것이었다. 성당의 창문은 모두 닫혀져 있다 해도 삼나무 숲에서는 누군가가 분명히 보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서둘러 움직이지는 않았다. 부상을 입은 병사는 숨을 몰아쉬며 신음하고 있었다. 손은 찢어진 배를 힘없이 감싸고 있었는데, 그 고통에 잠긴 눈이 공포의 빛을 발하며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프랜치스를 가만히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치셤 신부는 그 군인을 일으켜 어깨에 매고는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부상병에게 물을 먹이고 있을 때 베로니카 수녀가 다가왔다. 그는 그녀에게 진료소에 침상을 좀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날 오후에 내안의 대포가 다시 한 번 와이츄의 진지를 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밤이 되었을 때 치셤 신부와 요셉은 또다시 다섯 명의 부상병을 이끌어 들였다. 진료소는 야전 병원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포격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 시끄러운 소음은 언제 끝이 날지 알 수 없었다. 거리는 불에 타고 파괴되어 있었으며 서쪽의 성벽이 보기 흉하게 허물어져 있었다. 그때 1마일쯤 떨어진 서문에서 와이츄의 주력부대가 파괴된 성벽으로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프랜치스는 실망의 어두움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아직 판단을 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하루는 비상사태에 대한 불안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오후 늦게부터는 아이들을 지하실에서 해방시켜 주고 신자들도 성당 밖으로 나가 바깥 공기를 마시도록 해주었다. 한 사람도 폭격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신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들을 격려했고 자신도 막연하나마 희망을 가져 보려고 노력했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았을 때 요셉이 급히 다가왔는데, 그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역력했다. "신부님, 삼나무 숲속에 있는 와이츄군의 포병 진지에서 전령이 왔어요." 정문 앞에서 군사 세 명이 울타리 사이로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장교가 있었는데 치셤 신부는 그가 포병대의 지휘관일 것이라는 짐작을 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용건이 무엇 인지요?" 장교는 키가 작았고 둔하게 보이는 얼굴이었으며 입술이 두터운 인상이 좋지 않은 중년 남자였다. 게다가 누런 윗니가 보여 몹시 불쾌감을 주었다. 챙이 달린 보통 군모에 녹색 군복 허리를 가죽띠로 졸라매어 위엄을 보이려 했으나 졸라맨 바지 밑으로 다 해어진 운동화가 삐죽이 나와 있었다. "와이츄 장군님이 당신에게 특별한 요구를 하는 거요. 첫째, 당신은 적의 부상병을 끌어들이는데, 그따위 짓은 그만두시오." 프랜치스는 매우 화가 나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부상병들이 무슨 해를 끼칠 수 있단 말인 가요. 죽어 가는 그들이 전쟁 같은 게 다 뭐겠어요." 그러나 상대방은 이런 항의는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둘째, 와이츄 장군은 당신에게 우리 병참 부대에 물자를 기부할 특권을 주셨소. 당신의 저장실에 있는 쌀 8백 파운드, 또 미제 통조림 전부를 기부하시오." 프랜치스는 자신을 억제하려고 노력했으나 그만 격렬한 어조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당신들은 우리에게서는 아무것도 약탈하지 못해요." 포병 대장은 여전히 그의 항변 따위에는 한 마디의 대꾸도 없었다. 옆으로 조금 발을 벌리고 선 자세로 모욕하는 듯한 말투로 장교는 계속 말했다. "셋째, 당신이 보호하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성당 밖으로 내놓을 것. 와이츄 장군은 당신이 우리 군의 도망병을 숨기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발견하는 대로 총살이오. 또 건강한 사람들은 모두 즉시 와이츄군에 가담하지 않으면 안 돼요." 이번에는 치셤 신부도 항의를 하지 못했고 창백한 얼굴로 두 손을 꽉 움켜잡은 채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눈앞의 공기는 매우 살벌했다. "내가 만일 당신들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어쩔 작정이오?" 상대방의 얼굴에는 미소 같은 것이 떠오르는 듯 했다. "심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만, 그럴 경우 우리의 대포는 부득이 당신네들의 성당을 향해서 5분내에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어 놓을 수밖에 없을 거요." 프랜치스는 입을 다물었다. 세 사람의 병사들은 경내에 있는 젊은 여자들에게 손짓을 하며 히죽히죽 웃었다. 프랜치스는 이 사태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냉엄하고 명확한 현실로 결정되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이렇듯 비인간적인 요구 앞에 굴복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나 이번에 굴복을 한다면 앞으로는 이보다 더 무리한 강요를 해 올 것이라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분노의 불길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온몸을 태웠고 입술이 바싹바싹 오그라들었으며 그는 불길에 휩싸인 듯 뜨거운 시선으로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가져갈 저장품의 준비와......그러고 신자들에게 얘길 해서 밖으로 나갈 준비를 시킬 여유란......좀 시간이 걸리겠는데 와이츄 장군도 이 점은 고려해 주시겠죠. 얼마나 여유를 주실는지요?" "내일까지." 장교는 즉각 대답을 했다. "단 오늘밤 포진지까지 통조림과 적당한 선물을 개인의 헌납품으로 보낸다는 조건을 이행한다는 약속으로."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프랜치스는 손잡을 곳 없는 절망의 심연으로 무한정 떠밀려 가야 한다는 것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그는 나지막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하는 수 없는 일이죠. 오늘밤에 선물을 보내기로 하겠소." "당신은 상당히 지혜가 있는 사람이군. 좋소, 기다리기로 하겠소. 그러나 미리 충고해 두겠는데 틀림없이 이행해야 하오." 대장의 말투는 비꼬는 것 같았다. 그는 프랜치스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부하들을 데리고 삼나무 숲쪽으로 사라져 갔다. 프랜치스는 분노에 몸을 떨며 간신히 문안으로 들어왔다. 철문의 빗장을 지를 때 울리던 금속향이 머리 한 구석에서 계속 울리는 것 같았고, 열병에 걸린 듯 머리가 화끈대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어리석게도 자신은 이런 시련 정도는 피할 수 있다는 막연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비둘기 같은 평화주의에 불과하지 않는가. 그는 자기 자신이 미워서 이빨로 입술을 깨물었다. 요셉과 신자들이 묵묵히 그의 곁으로 몰려와 병사와 한 공포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들 앞을 달아나듯 떨어져나와 버렸다. 그는 마음이 약해질 때라든지 혹은 번민이 생길 때엔 으레 성당으로 들어갔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여, 나는 고통스럽습니다만 그러나 달게 받겠습니다" 라는 마음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자기 방으로 가서 등의자에 털썩 몸을 던졌다. 이번만은 어떻게 해도 도저히 해결책이 없다는 절박감이 바위처럼 그의 가슴을 눌러 왔다. 평소의 그의 냉철한 이성과 인내심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도무지 억제하고 수습할 방도가 없었다. 평화와 복음이라는 훌륭한 낱말들을 한가롭게 입에 올리던 자신을 돌아보자 그만 신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 미사여구는 모두 어디로 갔다. 대체 그런 어휘가 지금 이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걸까. 게다가 유감스럽게도 하필이면 이런 악순환의 시기에 폴리 아주머니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쓸데없이 피스크 부인이 과잉 친절을 베푼 탓으로 이런 엉뚱한 곳에서 폴리 아주머니가 변을 당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는 피스크 부인을 원망했다. 이 무슨 변이란 말인가. '하느님이시여! 이 위기는 흡사 저의 무력한 두 어깨 위에 온 세상의 어두움을 모두 지운 거나 다름없나이다.' 그는 절망적으로 중얼대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와이츄의 광적인 협박에 굴복을 한다는 것은, 더욱이 그 끔찍한 대포로 위협당하여 항복한다는 것은 안될 일이었다. 그 대포가 온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고 머리를 박살내고 거대한 파괴를 남기며 인간을 말살시키는 잔혹한 무기일지라도...... 그는 긴장과 초조함을 누르지 못하고 방안을 서성대기 시작했다. 그때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폴리 아주머니가 방으로 들어왔다. "프랜치스야, 방해가 되겠지만......잠깐만 나와 얘기하겠니?" 그녀는 그 옛날 프랜치스를 부르던 때와 변함없는 목소리로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뭔데요, 아주머님?" 그는 태연함을 가장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어쩌면 와이츄의 새로운 메시지를 가지고 왔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또다시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 털모자의 크기를 알아보려고 그런다, 프랜치스야. 너무 크면 안되니까. 올 겨울엔 이걸 쓰면 한결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거야." 핏발이 선 그의 눈앞에 반쯤 짠 털 발로크라바(겨울에 병사들이 쓰는 모자. 양모로 짠 전투모) 모자가 드러났다. 그는 잠시 어리둥절해서 울고 싶기도 하고 웃고 싶기도 한 묘한 감정이 되어 폴리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과연 폴리 아주머니다운 태도다.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이 울려 퍼져도 그녀는 필경 한 잔의 홍차를 잊지 않고 가져다 줄 것이었다. 그는 아이처럼 순순히 일어나서 폴리 아주머니에게 머리를 맡기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구나." 그녀는 그의 앞뒤로 왔다갔다하며 중얼거렸다. "둘레가 좀 넓은 것 같지만 좁은 것보다 풍성한 편이 더 나을 거야." 고개를 한 방향으로 돌리고 입술을 오므린 채 상아로 된 뜨개질바늘로 코 수를 헤아렸다. "68코니까 세 코만 없애면 되겠구나. 이젠 됐다. 프랜치스야, 내가 바쁜 시간을 너무 빼앗았구나." 그의 눈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대로 아주머니의 안온한 어깨에 머리를 묻고 실컷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폴리 아주머니, 난 정말 어떡하면 좋을까요......정말 큰일이 났어요" 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입을 열지 않고 그저 폴리 아주머니를 바라볼 뿐이었고, 그러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주머님은 걱정이 안 되세요? 지금 이곳은 매우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그녀는 살며시 웃었다. "걱정하면 뭐 이로울 게 있겠어. 게다가 네가 우리들을 보호해 주고 있지 않니?" 따뜻하고 신뢰가 담긴 음성이 프랜치스의 절망적인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폴리가 뜨개질감을 둘둘 말아 거기에다 뜨개질바늘을 찔러 넣고 여느 때처럼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대로 방을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가슴으로는 태연하게 돌아서는 아주머니에게서 깊은 지혜가 전달되어 옴을 느꼈다. 또 해야 할 일이나 어서 하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는 더이상 주저할 필요도, 또 그럴 여유도 없음을 깨닫고 급히 모자와 외투를 집어들고는 아래 문 쪽으로 살그머니 빠져나갔다. 성당을 빠져나오니 밖은 어느새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어떤 장해도 무시하고 빠른 걸음으로 비취 언덕을 내려가 거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만주문까지 왔을 때 돌연 칸델라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치고 지나갔다. 곧이어 엄중한 목소리가 그의 걸음을 저지시켰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 없이 보초병들이 자기의 신원을 파악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어쨌든 그래도 거기에서는 자기의 얼굴이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마침 운이 좋게도 세 병사들 중의 한 사람이 흑사병이 퍼졌던 당시 줄곧 샨 중위 아래서 일하던 군인이었다. 그가 곧 프랜치스를 알아보고 보증해 주었으므로 그는 어렵지 않게 중위에게로 갈 수가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여기저기 보루처럼 돌무더기가 쌓여 있을 뿐 온통 거리에는 불길한 고요만 감돌고 있었다. 멀리 동쪽 지구에서는 간혹 생각난 듯이 사격 소리가 들려 올 따름이었다. 안내를 하던 병사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며 프랜치스는 가벼운 죄의식을 느꼈으나 그것은 쾌감처럼 온몸을 상쾌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샨 중위는 이전과 같은 그 둔영지에 있었다. 의사가 사용했던 야전용 침대에 군복을 입은 채 누워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수염도 깍지 않고 바지에는 허연 흙이 묻어 있었으며 눈 밑에는 피로에 지친 검은 반점이 보였다. 프랜치스가 나타나자 그는 팔꿈치를 괴면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별안간 웬일이십니까?" 놀란 표정이었으나 이내 빙긋이 웃었다. "마침 당신의 꿈을 꾸고 있던 참이었어요. 언덕 위의 그 근사한 건물도 본 듯한데......"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램프 불의 심지를 돋우고는 식탁 앞에 걸터앉았다.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잘 오셨습니다. 당신을 내안 장군께 소개해 드리지 못하는 게 유감입니다. 내안 장군께선 지금 동쪽 지구에서 공격을 지휘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간첩인 줄 알면 처형하겠지만......그러나 아주 잘 통할 수 있을 텐데." 프랜치스는 아무 말 없이 식탁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샨은 상대가 잠자코 있으면 혼자 끊임없이 지껄여 대는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샨도 곧 입을 다물어 버렸다. 오늘밤은 그도 할 말이 있는 모양이므로 그는 조심스러운 눈길로 프랜치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좀 격한 어조로 말했다. "어째서 당신을 당신의 요구를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당신은 분명히 어떤 부탁이 있어서 온 듯한데요? 하지만 나로서는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는 입장이지만요. 저 소라나가 박살을 낸다는 것 몰랐더라면 우리는 벌써 이틀 전에 당신네 성당을 점령해 버렸을 거예요." "소라나라니, 그건 저 대포 말인 가요?" "그렇죠. 그 대포를 말하는 겁니다." 샨 중위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저 대포는 희한한 역사를 지니고 있답니다. 원래 그것은 프랑스군의 함대에 달려 있던 것인데 처음엔 샤장군이 소유하고 있었어요. 그걸 우리가 매우 힘들게 싸워 두 번이나 우리 수중에 넣었지만 번번이 샤장군은 돈으로 저 대포를 샀던 거예요. 그 무렵 와이츄가 은 2만 냥을 주고 북경에서 첩을 사왔었답니다. 아르메니아의 여인이었는데 정말 다시없는 미인이었죠. 그 여자의 이름이 소라나였어요. 그러나 와이츄는 금방 싫증을 느껴 샤의 그 대포와 바꿔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우리가 그걸 또다시 뺏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셨지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방비도 단단할 뿐만 아니라 이쪽은 몸을 은폐할 수도 없는 평지인데다 겨우 빵빵 소리만 내는 소총뿐이니 승산이 없는 싸움이랄 수 밖에요. 이번 전쟁은 아무래도 이기기 힘들 것 같아요......내안 장군과 조금만 더 있으면 저도 승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만." "만일 그 대포를 빼앗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치도 않는 말씀이오. 그런 어림없는 말씀은 아예 안 하는 게 좋습니다." 샨은 입맛을 쓰게 다시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나 그 괘씸한 놈의 옆에까지 만이라도 갈 수 있다면 그 놈을 영원히 소리가 안 나도록 해줄 텐데......" 프랜치스는 고개를 흔드는 샨을 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대포의 바로 옆까지는 갈 방법이 있어요." 샨은 갑자기 신중해진 표정으로 프랜치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점차 흥분의 빛이 번지고 있었다. 치셤 신부는 입가에 굳은 주름살을 보이며 엎드리듯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오후에 와이츄의 포병대 지휘관이 왔었소. 성당을 포격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오늘밤 자정까지 식량과 돈을 가져오라고 요구하고 돌아갔소......" 그는 계속 하려다가 더이상 설명이 필요 없음을 깨닫고 말을 중단했다. 얼마 동안 두 사람은 묵묵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샨의 표정 없는 얼굴은 무엇인가 궁리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윽고 그는 미소를 지었으나 눈은 긴장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신부님, 당신은 역시 하늘이 내게 주시는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군요." 프랜치스의 긴장한 얼굴에 일순 검은 그림자가 스쳐 갔다. "오늘밤만큼은 천국에 대해서는 잊고 싶군요." 샨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 말의 뜻을 해득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자, 그럼 어떻게 일을 진행시키느냐에 대해서 들어보십시오." 약 한 시간 후 프랜치스와 샨은 병영 뒷문으로 해서 만주문을 빠져나와 성당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샨은 군복을 벗고 쿠리로 변장을 했다. 주름이 잡힌 납작한 모자를 쓰고 등에는 대마실로 탄탄하게 꿰맨 큰 보따리를 짊어졌다. 그러한 샨과 3백 보쯤 거리를 두고 그의 부하 20명이 묵묵히 뒤를 따랐다. 비취 언덕길을 반쯤 올라가서 프랜치스는 샨의 팔을 잡았다. "자, 이젠 내가 지고 가지." "무겁지 않아요." 샨은 그렇게 말하고 반대쪽 어깨로 가만히 짐을 옮겼다. "이런 일은 제가 훨씬 익숙할 겁니다." 일행은 성당의 담 옆까지 왔다. 어디에도 불빛 하나 없어 사방은 캄캄하기만 했다.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성당의 담만이 검은 그림자처럼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주위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다. 그때 갑자기 수위실에서 미제 오르겔 시계가 정적을 깨고 정다운 멜로디로 시각을 알리는 소기가 들려 왔다. 그것은 프랜치스가 요셉에게 결혼 선물로 준 것이었다. 조용한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울리느 멜로디는 열한시를 알리고 있었다. 샨 중위는 부하들에게 최후의 지령을 내리는 중이었다. 병사 하나가 터져나오는 기침을 참으려고 담 옆에 몸을 꾸부렸으나 역시 기침은 터지고 말아 언덕 저 아래까지 울리는 듯했다. 샨은 나직한 목소리로 그 사병에게 마구 욕을 퍼부어 댔다. 병사들의 할 일은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었다. 중요한 임무는 샨과 프랜치스가 맡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어둠 속에서 샨중위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똑바로 알고 계시지요?" "네." "제가 가솔린 통을 겨냥해 발포하면 곧 불이 붙어 코울라이트가 폭발할 것입니다. 당신은 제가 권총을 들기 전에 거기서 떠나셔야 합니다. 폭발의 진동은 굉장할 테니까요." 샨은 잠깐 말을 중단했다. "준비가 끝났으며 갑시다. 그런데 그 횃불을 제발 보따리 가까이엔 가져가지 마십시오." 프랜치스는 용기를 내어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갈대 뭉치에 불을 붙였다. 불이 활활 올라붙은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그는 삼나무 숲을 향해 앞장섰다. 샨은 되도록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도록 부하들을 주의시키며 그러나 무겁다는 몸짓으로 일꾼처럼 프랜치스의 뒤를 따랐다.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다. 프랜치스는 커다란 나무가 있는 지점에 도착하자 쥐죽은듯이 조용한 가운데 어디선가 이쪽의 동태를 살피는 듯한 캄캄한 숲속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요구하신 대로 식량을 가지고 왔습니다. 대장에게 나를 안내해 주시오." 잠시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두 사람 뒤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났다. 프랜치스가 재빨리 돌아보니 그을음이 심한 횃불 그림자 아래 와이츄의 병졸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렸다, 이 마법사야. 잔소리 말고 어서 앞으로 썩 나서거라." 두 사람은 감시를 받으며 여기저기 파 놓은 참호와 끝이 뾰족한 대나무로 울타리처럼 막아 놓은 데를 조심스럽게 빠져나가 숲속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한순간 프랜치스는 심장의 고동이 딱 멎는 것 같은 전율에 사로잡혔다. 흙과 삼나무 가지로 가려진 사이로 그 커다란 대포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포병들이 불의의 습격을 방비하기 위해서 주위에 흩어져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우리가 요구한 것 전부를 가져온 거요?" 그 음성의 주인은 분명 저녁 때 성당으로 왔던 그 장교임에 분명했다. 이번에는 그도 아까보다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었다. "통조림 따위를 가져 왔소." 샨은 보따리를 보여 주기 위해 조금 대포 옆으로 다가섰다. "보따리가 그다지 크진 않군." 포병 대장이 횃불 아래로 걸어나왔다. "돈도 가져왔소?" "네." "어디 있소?" 대장은 보따리를 만지작거리며 살폈다. "그 보따리에는 없어요." 프랜치스는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라 다급하게 말했다. "돈은 내 지갑 속에 있어요." 그러자 장교는 돌연 탐욕스럽게 보따리를 만지던 손을 멈추고 프랜치스를 돌아보았다.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눈은 번득이며 프랜치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러분, 들어보시오!" 프랜치스는 긴장된 음성으로 그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그 사이에 샨이 그들의 눈을 피해 살그머니 나무 그늘로 들어서서 차츰 대포로 접근하고 있음을 프랜치스는 육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부탁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전도관 안에 있는 우리들에겐 부디 해를 끼치지 말아 주십시오." 대장의 얼굴에 경멸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그는 조롱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해를 가하진 않아......적어도 내일까지는." 한 병사가 뒤쪽에서 크게 웃었다. "그 뒤엔 우리가 당신네의 여자들을 보호해 주게 될 거요." 프랜치스는 동요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마음을 굳게 가지면서 샨쪽을 살폈다. 샨은 아주 피로하다는 듯 들고 온 보따리를 포미 아래에 내려놓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프랜치스 쪽으로 조금 뒷걸음질쳐왔다. 병사들이 더 많이 모여들었는데 모두들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프랜치스를 바라보았다. 프랜치스는 샨을 위해서 단 1분이라도 더 시간을 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신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와이츄 장군에게 직접 보증을 받고 싶습니다." "와이츄 장군은 계시오. 조금 있다가 뵙게 해줄 테니 염려 마시오." 장교는 냉랭하게 이야기를 끊어 버리고 어서 돈이나 내놓으라는 듯 프랜치스 앞으로 다가섰다. 프랜치스가 힐끔 샨 쪽을 바라보았다. 샨 중위의 손이 윗저고리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바로 이때라고 생각한 그 순간에 권총의 큰 발사음과 동시에 총알이 보따리 속의 가솔린 통에 박히는 소리가 났다. 폭진을 예상하고 매우 긴장하고 있었던 터이므로 그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샨이 기름통을 향해 계속 세 발의 총을 쏘아 댔는데도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프랜치스는 가솔린이 보따리에서 쏟아져나오는 것을 보았다. 한순간 '실패다'하는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 갔다. '샨은 뭔가 잘못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탄알로는 가솔린이 발화하지 않는다. 그것도 아니라면 통에 넣은 것이 가솔린이 아니라 보통 석유였을까?' 하는 생각들이 권총 발사보다도 더 빨리 돌아가자 그는 불현듯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현기증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샨은 그래도 주저하지 않고 계속 총성을 울려 떼지어 달려오는 병사들을 막아내며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에게 돌격하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대장과 열 두세 명의 군졸이 그를 포위해 버렸다. 이제 영락없이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분노와 절망이 그의 심장을 졸아붙게 했다. 그러자 그는 마지막 힘을 다 쏟아 고기를 낚기 위해 낚싯대를 던질 때처럼 목표 지점을 향해 팔을 크게 휘둘러서 횃불을 던졌다. 횃불은 적중했다. 활활 타는 불덩어리가 캄캄한 밤하늘에 포물선을 그리며 혜성처럼 하늘을 나르더니 가솔린이 흐르고 있는 보따리 위에 똑바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순간 무서운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눈앞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땅이 벌어지고 흙더미가 튀어 오르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고막이 찢어지는 폭음과 함께 발산한 뜨거운 열풍에 휘말려 어둠 저편으로 나가떨어졌다. 그가 의식을 잃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광막한 공간과 암흑 속으로 던져진 느낌이었다. 무엇이든 잡아 보려고 해도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허무와 망각 속으로 끝없이 떨어지고 있을 뿐. 의식이 되돌아왔을 때는 자신이 아무것도 없는 공지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은데 온몸이 풀대처럼 늘어져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산의 얼굴이 보였다. 샨은 매우 근심스럽게 그가 정신을 차리도록 애쓰면서 그의 귀를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머리 위로 빨간 하늘이 보였다. 삼나무 숲 전체가 무서운 불길에 싸여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대포는 어떻게 됐소?" 샨은 귀를 잡아당기던 손을 내려놓고 안심했다는 듯 몸을 세웠다. "깨끗이 끝장이 났습니다. 대포뿐만 아니라 병사 30명도 함께 날아가 버린 것 같습니다." 샨의 검게 그을은 얼굴에서 흰 이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신부님 솜씨에 탄복했습니다. 저는 아직 이처럼 통쾌한 싸움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걸요. 이런 전쟁을 한 번만 더 해낼 수 있다면 전도 기꺼이 카톨릭 신자가 되겠습니다." 그후 수일간을 치셤 신부는 머리도 마음도 매우 혼란한 상태로 지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모험을 겪고 난 후에 극도로 밀려온 허탈감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는 결코 언제나 용맹스런 소설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이미 마흔 고개를 넘어섰고 힘이 약해진 초라하고 볼품없는 자신을 새삼 느껴야만 했다. 게다가 자주 몸이 떨리고 심한 현기증이 느껴졌으며, 두통이 너무 심할 때는 아픈 다리를 이끌고 방으로 들어와서는 찬물로 머리를 식혀야 겨우 진정되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육체적인 고통은 영혼의 깊은 고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는 사제라는 작자가 구원해야 할 가엾은 인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다는 자책감은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렇다고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신자들의 안전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변명으로 용납될 일도 아니었다. 폭발의 진동으로 의식을 잃었을 때의 기억이 자꾸만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죽음이란 바로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완전한 망각이 아닌가 말이다. 그 일이 있던 날 밤 그가 성당을 빠져나갔던 일을 폴리 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폴리 역시도 그날 밤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조용한 침묵이 더욱 깊어졌고 수척해진 프랜치스의 모습을 살피다가는 꺼멓게 타 버린 삼나무 숲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무심코 던지는 한 마디가 프랜치스에게는 무언가 깊은 뜻이 있는 것처럼 들려 왔고 그것이 또 그럴 수 없이 위안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저 짐스러운 숲을 없애서 누가 우리에게 아주 좋은 일을 해주었구나." 그러나 전투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아직도 교외의 동쪽 구릉 지대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그 밤으로부터 4일째 되는 날 성당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와이츄가 매우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검은 구름이 낮게 흐르는 음울한 주말이 되었다. 그 날은 간혹 생각난 듯이 포화가 탕탕거릴 정도로 가라앉았고 시내는 조용했다. 노대에 나와 있던 치셤 신부의 눈에는 와이츄의 녹색 군복을 입은 병졸들이 서쪽 문으로 줄지어 후퇴하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 눈에 들어왔다. 거의가 반군으로 잡혀 사살 당할 것이 두려워서인지 무기를 버린 채 빈 손으로 바삐 서두르는 모습들이었다. 와이츄의 패배가 확연한 것일까, 아니면 내안 장군과 임시 휴전을 체결한 것일까. 성당 담 밖의 위쪽 대나무 숲이 제법 무성한 곳에, 숲에 가려서 뚜렷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그곳으로도 와이츄의 도망병들이 운집해 드는 게 틀림없었다. 분명히는 판단할 수 없으나 사기가 저하된 무기력한 군사들의 목소리가 성당 안에까지 들려 오고 있었다. 그날 오후 세 시경 너무나 소란스러워 자리에 누워 있을 수 없었던 치셤 신부는 안마당으로 나와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클로틸드 수녀가 격분한 얼굴로 다가왔다. "안나가 담 너머의 군사들에게 먹을 것을 던져 주고 있어요."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호소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 아이가 사귀고 있는 병사가 끼여 있는 거예요......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걸요." 그의 신경이 칼끝같이 서 있었으므로 자연 부드러운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먹을 게 필요한 사람이라면 주어서 안 될 건 없죠." "그래도 그 병사는 흉악한 군대의 한 사람이잖아요. 정말 무서워서 못 견디겠어요. 이러다간 언젠가 그들이 담을 뛰어 넘어와 우리를 죽이고 말거예요." 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기의 목숨이 달아나는 것만 걱정하고 있을 게 아니오. 순교란 천국에 가는 좋은 길이니까." 저녁때가 되자 와이츄군의 더 많은 패잔병들이 몇 개의 성문으로 떼를 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성문을 나와서는 서로 합류하여 만주교를 건너 군사들은 비취 언덕으로 올라와서는 소란스럽게 성당 앞을 지나갔다. 더럽고 초췌한 얼굴들은 한시라도 빨리 달아나고 싶다는 조바심과 피로로 몹시 힘들어 보였다. 밤이 깊어 갈수록 총성과 고함소리, 평원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뒤엉켜 더한층 혼란스러워졌다. 프랜치스는 성당 문 앞에 침울한 얼굴로 이 소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뒤에서 발소리를 죽여 가며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안나였다. 예측했던 대로 그녀는 고아원 제복인 외투 단추를 턱까지 끼워 입고는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어디로 가려느냐, 안나?"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가는 소리를 지르며 뒤로 주춤 물러섰으나 이내 그 얼굴엔 반항적인 기색이 드러났다. "그건 게 자유예요." "말하지 않을 생각이구나?" "그래요." 그의 표정은 부드럽게 변했다. 더이상 어떤 말을 해보아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여기를 아주 떠날 결심인 게지? 안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새삼스럽게 무슨 얘긴들 해 봤자 소용없겠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오늘밤은 이렇게 들켜 버렸지만 전처럼은 안될 거예요." 그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따 주었다. "마음대로 가거라." 안나는 매우 놀란 표정이었다. 그 커다란 눈이 놀라움으로 더욱 커지고 있는 것을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볼 수가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보따리를 움켜쥐더니 재빨리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달려가는 그녀의 모습은 곧 거리의 혼잡 속으로 묻혀 버리고 말았다. 문을 닫을 생각도 못하고 그는 그대로 서 있었다. 패잔병들은 여전히 그의 눈앞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돌연 군중의 한가운데서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말 탄 군사 한 떼가 높이 쳐든 횃불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 기마대들은 천천히 움직이는 보병들 사이를 헤치고 빠르게 문 쪽으로 다가왔다. 문 앞까지 오자 그 중의 한 사람이 콧김을 내뿜는 말을 세웠다. 눈이 가늘게 찢어지고 이마가 매우 좁은 얼굴이 횃불 너머로 어릿어릿 보였다. 사람의 얼굴 모습이라기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포악스럽고 잔인해 보이는 인상이라 흡사 사신의 얼굴처럼 소름이 끼쳐 프랜치스의 몸은 그대로 굳어 버리는 듯했다. 그 사나이는 말에 탄 채 증오와 저주가 가득 찬 욕설을 퍼부어대더니 프랜치스에게 위협하듯 칼을 휘두르는 것이엇다. 프랜치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려움을 모르는 초연한 자세에 오히려 상대가 기가 죽은 듯 잠깐 머뭇거리고 있을 때 뒤어서 재촉하는 다급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전진, 전진합시다. 와이......우엔다이로 어서 떠납시다. 추격대가 쫓아오고 있어요." 와이는 칼을 쳐들었던 손을 내리고 말을 타며 박차를 가하더니 다음 순간 몸을 굽혀 프랜치스의 얼굴에 침을 탁 뱉었다. 그리고는 황급히 말을 몰아갔다. 어둠이 곧 그의 모습을 감싸 버려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은 쾌청하게 개인 날씨였다. 후노인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성당 종루로 올라가서 줄을 당겨 종을 울렸다. 그의 얼굴은 함빡 웃을 때마다 듬성듬성 난 수염이 떨리곤 했다. 피난민들도 돌아갈 준비를 마치고 기쁨에 빛나는 얼굴로 신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성당 안으로 모여들었다. 아이들도 마당에 나와 소리를 지르며 뛰놀고 있었다. 말타 수녀와 베로니카 수녀도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서로 미소를 지을 정도로 사이가 좋아져 있었다. 클로틸드 수녀 역시 아이들과 함께 뛰어 놀고 있었다. 공을 던지고 받으며 아이들과 같이 함성을 지르고 있는 그녀는 누구보다도 기운이 있어 보였다. 폴리 아주머니는 자기가 좋아하는 채마밭 자리에 몸을 똑바로 세우고 앉아 새로운 털실을 감고 있었다. 그 평온한 모습은 마치 지금까지 전쟁 같은 것은 아예 없었고 늘 평온 속에서만 생활해 온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치셤 신부는 앞으로 나와 천천히 돌층계로 내려갔다. 그때 요셉이 통통한 어린애를 안고 기쁜 얼굴로 뛰어왔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신부님, 내안 장군의 승리예요. 새 장군님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앞으로는 이 파이탄엔 전쟁은 없을 거라고 약속해 주셨어요. 이제 우리는 영원히 평화 속에서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는 팔에 안은 아기를 사랑스럽게 얼러 대며 중얼거렸다. "전쟁은 이제 끝난 거란다. 요수에야, 이제 눈물이나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단다. 평화다, 평화가 왔단다." 하지만 프랜치스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으로 인해 웃을 수가 없었다. 그는 보드라운 아기의 볼을 살짝 꼬집어 주며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은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모두들 그에게로 달려왔다. 그는 자신의 소중한 신앙의 계명까지 어겨 가며 목숨을 구해 준 그들에게 둘러싸여 감사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도무지 기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우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지만 오늘도 태양은 저렇게 밝게 이 대지를 축복하고 있잖은가! 10 1월도 다 갈 무렵, 승전의 기쁨 대신 전쟁이 지나간 슬픈 결과가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랜치스는 이런 현상을 폴리 아주머니에게 보여 주지 않게 된 것을 무엇보다도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지난주에 영국으로 출발했다. 이별은 서글픔을 주기도 했으나 그래도 폴리 아주머니가 떠난 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아침에 정원을 지나 진료소로 가면서 쌀 배급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긴 행렬을 보았다. 어제는 이보다 더욱 길어서 성당의 담을 둘러쌀 정도였었다. 와이츄는 패전 보복으로 파이탄 주위 수마일에 걸친 전답의 곡식들을 깡그리 불태워 버리고 간 것이었다. 겨우 고구마가 남았다 해도 그 수확은 변변찮은 것이었고, 남자들이나 밭갈이를 할 소들은 모두 군대에 징용 당했으며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여자들뿐이었으므로 농작물의 수확은 예년에 비해 반도 안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물자가 모자라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폭등하기 시작했다. 시내에서는 통조림 류의 식료품 값이 다섯 배로 뛰어오르는 실정이었다. 물가는 날로 뛰기만 했으나 어떻게 조종해 볼 생각도 못 하는 듯했다. 그는 혼잡한 건물 쪽으로 다가갔다. 수녀 셋이서 검은 쌀통에서 3온스씩 담아서는 배급 타러 온 사람들이 내미는 그릇에다 부어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자들은 아무 군소리 없이 참을성 있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한 건물 주위에는 쌀을 퍼서 담아 주는 소리만 가득 했다. 그는 베로니카 수녀에게 나직이 말했다. "이대로 간다면 며칠 견디지 못하겠군요. 내일부터는 배급을 반으로 줄여야겠어요." "그래야겠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요즘 들어 그녀는 과로로 얼굴이 몹시 창백했고 많이 야위었다. 그녀는 쌀통에서 눈을 떼지 않고 부지런히 퍼 주었다. 그는 남은 사람들의 수를 헤아려 보려고 몇 번이나 문 밖까지 나가 보곤 했다. 간신히 행렬이 끝났고 더 밀려오지는 않았다. 그는 다행으로 생각하며 지하실의 저장실로 내려가서 식량의 재고표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마침 2개월 전에 챠씨에게 주문했던 것이 도착되어 있어서 아직은 아이들을 위해서는 그다지 양식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필요한 쌀이나 고구마는 재고량이 별로 없었다. 그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물가는 말할 수 없이 뛰고만 있으나 그래도 아직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입할 수가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본국의 포교단에 원조를 희망하는 전보를 치기로 작정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회신이 왔다. 원조금을 보내지 못함. 지금이 전시임을 상기하시오. 그 지역에 싸움이 없음을 매우 행운이라 할 수 있소. 적십자 활동에 분주함. 안셀모 밀리. 프랜치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녹색의 전보용지를 구겨 버렸다. 그리고 그날 오후 그는 성당에 있는 돈을 있는 대로 전부 긁어모아 거리로 나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버려서 돈이 있어도 물자가 없었다. 곡물 시장은 아예 닫혀 있었다. 그 밖에 대부분의 가게는 멜론이나 무, 민물고기 등 부패하기 쉬운 것들뿐이었으며 그것마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생각을 거듭하던 그는 초롱 상가의 전도관에 들러 피스크 박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서로 별로 도움될 만한 해결책을 얻지 못했으므로 돌아오는 도중에 챠씨의 집을 방문했다. 챠씨는 기분 좋은 얼굴로 프랜치스를 맞았다. 두 사람은 사향과 삼나무 내음이 짙게 풍기는 조그만 사무실에서 차를 마셨다. "그렇겠군요." 챠씨는 프랜치스의 곤란한 문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동의를 했다. "이건 정말 진지한 문제로군요. 파오씨가 절강에 가 있는데 새 정부의 확실한 보증을 받으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성공할 수 있을까요?" "성공이야 틀림없지만요." 관리인 챠씨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 말투에는 냉소가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증을 받아도 물자의 뒷받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곡물 창고에 상당량의 곡식이 저장되어 있다고들 하던데요." "내안 장군이 마지막 여덟 갤론까지 몽땅 가져가 버린 걸요. 거리의 식량이란 식량은 깡그리 약탈해 갔답니다." "그러나 설마......" 프랜치스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을 그 사람이 방관할 수 있을까요. 현재도 그 장군은 자기편이 되어서 싸워 주면 큰 보답을 하겠다고 민중들에게 약속까지 했으니까요." 챠씨는 입을 다물었다. 치셤 신부는 생각을 거듭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피스크 박사에게는 상당량의 식량이 오게 되었다니까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요. 베이징 포교단에서 정크 세 대 분을 보내 주겠다는 약속이 되어 있답니다." "그렇습니까?" 챠씨는 묵묵한 표정으로 말했다. "믿을 수 없으시다는 말씀이시로군요." 챠씨는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베이징에서 파이탄까지는 3천 리의 거리입니다. 더욱이 도중엔 아사지경에 있는 민중이 우글거리고 있지요. 제가 현명하지 못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신부님, 아마 반년 동안은 극심한 곤란을 각오해야 될 줄로 압니다. 이런 일은 중국에선 흔히 일어나는 일이니까 문제될 일도 아닙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죽어 가지만 중국은 영원히 남아 있을 테니까요." 다음날 아침 치셤 신부는 쌀 배급을 타기 위해 늘어선 사람들에게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돌아가 달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아야 했던 것이다. 그는 요셉을 시켜 극빈자의 명단만 적어 놓고 가도록 방을 붙이게 했다. 그 사람들을 직접 조사해서 꼭 필요한 극빈자들에게만 조금씩이라도 도와 줄 생각이었다. 성당으로 돌아온 그는 곧 급식 계획을 새로 세웠다. 다음 주일부터 그 급식 계획은 실행에 옮겨졌다. 급식 계획에 따라 식사가 시작되자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더니 곧 불평을 하기 시작했고 기운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식사 때마다 더 달라고 졸라대는 아이들의 투정도 심해 갔다. 당분과 녹말 부족이 아이들에겐 큰 고통이었고, 체중도 날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메서디스트의 전도관에서도 그후 구호 물자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정크가 오기로 약속된 날짜가 벌써 3주일이나 지났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피스크 박사의 초조한 표정은 보기에도 딱할 정도였다. 그의 배급소는 문을 닫은 지가 벌써 한 달이 지나 있었다. 파이탄에 살고 있는 모든 주민들은 기력을 잃고 허탈 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활기를 잃은 거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먹을 것을 찾아 그림자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드디어 살기 위한 당연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사람들의 수가 날로 급증해 간 것이다. 중국 대륙 여기저기에서는 먼 옛날부터 때때로 일어나던 부정기적인 이주가 일어나고 있었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민중들은 아무 미련 없이 정든 고향을 버리고 남으로 남으로 아이들의 손을 잡고 묵묵히 떠나는 것이었다. 치셤 신부는 이것을 알아차리자 마음이 얼어붙어 버리는 것 같았다. 이 파이탄 거리는 급기야는 모두 굶주림에 쓰러지고 마음은 죽음의 정적으로 휩싸여 버리고 말리라는 무서운 예감이 들었다. 하루하루 두드러지게 늘어나는 이주민들의 완만한 행렬에서 그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고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어서 몸을 일으켰다. 흑사병 때처럼 그는 다시 요셉을 불렀다. 그리고 자세히 용건을 말하고 급히 출발시켰다. 요셉이 출발한 다음날 아침, 그는 식당으로 가서 아이들에게 특별히 쌀밥을 많이 주도록 일렀다. 저장실에는 무화과 상자가 아직도 하나 남아있었다. 그는 긴 식탁 끝에서 그 달고 끈적끈적한 과일을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식량 사정이 좋아지려나 보다고 생각한 아이들은 매우 표정이 밝아 보였다. 하지만 말타 수녀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프랜치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저장실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신부님? 필시 뭐가 있나 보군요, 그렇죠?" "토요일이 되면 윤곽이 드러나겠죠. 말타 수녀, 원장에게도 이번 주 동안은 계속 특별 급식을 하도록 전해 주시오." 말타 수녀는 그 전달을 하기 위하여 급히 베로니카 원장 수녀를 찾았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오후 늦게까지도 베로니카 원장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언제나 수요일이 되면 바구니 공장에서 바구니 엮는 방법을 가르치곤 했었는데 그 수업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야 그는 식당에 얼굴을 내밀었다. 언제나처럼 침착한 모습이긴 했으나 매우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간 어디를 갔다가 저녁 식사시간에야 겨우 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그날 밤 클로틸드 수녀와 말타 수녀는 무서운 울음소리에 잠을 깼다. 그 소리는 베로니카 수녀의 방에서 들려오는게 틀림없었다. 이튿날 아침 두 수녀가 빨래를 할 때 원장이 여전히 냉정한 얼굴로 안마당을 천천히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들은 일손을 멈추고 소곤거렸다. "저분이 기어이 자신을 억제할 수 없게 됐나 봐요. 참 불쌍해요. 어젯밤에 그 울음소리를 들었죠?" 클로틸드 수녀는 다시 빨래를 양손으로 잡아 올리며 몸을 움츠렸다. "그래요. 무슨 무서운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요. 난 저분이 그 저주받을 붓슈(독일인을 경멸해서 부르는 말)만 아니라면 매우 동정했을 텐데." 말타 수녀는 얼굴에 깊은 주름을 짓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분이니까......남들의 고통보다 더 클 거예요." "만일 우리 나라가 먼저 항복을 했더라면 저분은 우리들을 동정해 주었을 거예요. 하지만 난 정직하게 말하자면......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그보다도 빨리 다림질이나 해요." 일요일 아침, 수명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산길을 돌아 성당 쪽으로 내려왔다. 요셉이 그것을 알려 주었으므로 프랜치스는 급히 수위실로 가 보았다. 다름 아닌 류촌 사람들이었다. 요셉의 아버지 류찌와 또 다른 세 사람이 그의 동행인이었다. 프랜치스는 환영의 인사를 하며 너무나 고마워서 류 노인의 손을 오랫동안 잡고 놓을 생각을 안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이렇게 친절하게도 와 주시다니. 여러분들께 하느님의 축복이 있으시기를 빕니다." 류찌는 다정한 환영 인사에 겸손한 감동을 보이며 활짝 웃었다. "좀더 빨리 오려고 서둘렀습니다만 말을 모는 데 시간이 너무 걸렸지 뭡니까." 서른 마리나 되는 털투성이의 고원말 등에는 커다란 짐바구니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프랜치스는 말에게 건초를 푸짐하게 주라고 일렀다. 그의 가슴은 시원하게 트였다. 그는 손님들에게 다과를 권하고 편히 쉴 자리를 마련해 주라고 요셉에게 이르고 수녀원으로 갔다. 세탁실에서는 베로니카 수녀가 일주일 동안 사용할 새하얀 테이블 커버며 시트 그리고 타월 등을 다른 수녀와 나이 든 여생도 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는 중이었다. 프랜치스는 기쁨과 흥분으로 큰 소리를 질렀다. "자, 여러분, 놀라지 마시오. 우리들은 잠시 동안 이 기근을 피해서 류촌으로 가 있게 되었소. 거기에는 먹을 것이 얼마든지 있다오." 그는 아주 천진스럽게 웃었다. "말타 수녀는 돌아올 때쯤엔 일류 요리사가 되어 있을 게요. 당신은 뭐든 배우고 싶어 하니까. 아이들에게도 오랜만에 즐거운 휴가가 될 것이오. 정말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소." 한순간 모두들 너무나 뜻밖이어서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윽고 말타 수녀와 클로틸드 수녀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꽃이 피었다. 그리고 곧 다가올 새로운 생활과 류촌행에 대한 기대로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젠 또 5분내에 준비를 서두르라고 하시겠지요?" 말타 수녀는 근래에 볼 수 없었던 따뜻한 눈길로 원장을 바라보며 유쾌한 불평을 했다. 그것은 여태껏 서로 냉랭함을 버리고 화해를 하고 싶어하는 첫 번째 신호이기도 했다. 그러나 베로니카 수녀는 생기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로 꼼짝도 안했다. "그럼 어서들 준비를 서둘러요." 프랜치스는 들뜬 기분으로 베로니카 수녀 대신 대답을 하면서 함빡 웃음을 지었다. "어린아이들은 짐바구니에 태워 가면 되겠군요. 좀 큰애들은 번갈아 걷게 하고 말을 타거나 하면 될 테고......밤기운이 차지 않아 다행이에요. 류찌 씨가 여러분들을 잘 돌봐 주실 거요. 오늘 출발하면 일주일 이내에 마을에 도착할 겁니다." 클로틸드 수녀는 킬킬댔다. "마치 출애급 같군요." 프랜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셉에게는 내 정보원인 비둘기를 가져가라고 하겠소. 매일 밤 한 마리씩 날려보내면서 어디까지 갔는지, 가는 도중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상세한 편지를 내게 갖다 주도록 말이오."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말타와 클로틸드 수녀가 똑같이 외쳤다. "그렇다면 신부님은 우리들과 함께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건가요?" "나는 좀 뒤에 가게 될 거요." 프랜치스는 그래도 수녀들이 자기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천천히 말했다. "누구든 이곳에 남아 지켜야 하지 않겠소. 원장님과 당신들 두 사람이 개척자가 되는 겁니다." "저도 떠나지 않겠어요.: 모두 입을 다물어 버렸다. 프랜치스는 조금 불쾌해졌다. 아직도 그녀는 전에 언쟁했던 일로 두 수녀와 함께 동행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일 때문이 아닌 듯 표정이 보다 더 가라앉았다. 그는 확실한 까닭을 할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가게 하려고 열심히 설득했다. "분명히 기분 좋은 여행이 될 거요. 환경이 바뀌면 마음도 훨씬 가벼워 질 거구요." 역시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독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겼어요. 우리의 수도회를 위하여......우리 집 토지며 재산 정리를 해야만 해요." 그는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의 오빠가 명예롭게 전사를 하셨어요......" 죽음처럼 깊고 어두운 침묵이 다시 계속 되었다. 그러자 클로틸드 수녀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이어 말타 수녀도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치셤 신부는 고통스런 얼굴로 수녀들을 바라보다가 묵묵히 그곳을 떠났다. 일행이 류촌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은 지 2주일 후에 베로니카 수녀가 떠나게 되었다. 프랜치스에게는 그런 사실들이 도무지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새가 가져다 준 소식에 의하면 마을에 도착한 아이들은 원시적이긴 하지만 좋은 숙사를 배당 받았고, 고원의 맑은 공기 속에서 마음껏 뛰놀고 있다는 것이었다. 치셤 신부는 자기가 시기를 잘 택한 일을 스스로 현명했다고 생각하고 자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짐의 어깨에 진 두 사람의 인부와 함께 베로니카 수녀를 배웅하러 부두로 가고 있는 그의 마음을 허전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부들이 짐을 삼판에 싣고 있는 동안 그와 베로니카 수녀는 부둣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등뒤로는 우울한 회색빛에 잠겨 있는 거리에서 소음이 들려 왔다. 눈 앞에는 벌써 출항 준비를 갖춘 정크가 강 한가운데서 흔들리고 있었고, 그 뱃전엔 황토 빛으로 찰랑거리는 탁한 물이 멀리 회색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치셤 신부는 어떤 식으로 자기 마음을 전해야 좋을지 몰라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를 도와주고 격려해 준 친구로서, 침착하고 고상한 이 여성은 자기 생애에 더할나위없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장래 일에 대해서는 손바닥을 보듯 환히 볼 수는 없으나 그래도 지금까지의 일로 미루어 두 사람 앞에는 협력해서 일할 끝없는 미래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도망이라도 치듯 그녀는 떠나 버리는 것이다. 암흑과 혼란의 안개 속으로 휩싸이는 듯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애써 한숨을 누르며 정다운 미소를 띄운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계속 우리 나라와 당신 나라가 전쟁을 할지라도......잊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결코 당신의 적이 아니니까요." 그가 할 수 있는 이 겸손한 작별 인사는 단단히 굳어 있던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몹시 마른 모습, 광대뼈가 불거져나온 얼굴, 어느새 희어지기 시작한 머리, 그런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 눈물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래요......신부님.......평생 신부님을 잊지 않겠어요."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가 놓고서 정크까지 태워다 줄 작은 보트로 훌쩍 뛰어올랐다. 치셤 신부는 낡은 체크무늬 우산에 기대어 선 채 정크가 작은 점이 되어 아득한 수평선 저쪽으로 사라져 버릴 때까지 물위로 반사되는 햇빛을 받으며 눈만 껌벅이고 서 있었다. 그는 그녀가 알지 못하게 타란트 신부에게서 받은 스페인 고풍의 진귀한 성모상을 그녀의 트렁크 속에 넣어 주었던 것이다. 그 성모상이야말로 그의 소지품 중에서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고 그리고 또 그녀가 그것을 볼 때마다 좋은 것이라고 칭찬하던 것이기도 했다. 그는 터벅터벅 발걸음을 돌려 성당으로 돌아왔다.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안마당 어디에고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녀의 사랑으로 가꾸어 놓은 정원에는 갖가지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이 가득히 들어서 있었다. 그는 평화로운 정적 속에 고마운 마음으로 정원을 거닐었다. 백합의 향기가 코끝을 알싸하게 쏘았다. 텅 빈 성당에 그와 함께 남아 준 후노인이 허리를 굽혀 저다운 친구를 어루만지듯 진달래 나무를 가꾸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지금까지 쌓이고 쌓인 오랜 피로가 일시에 몰려오는 듯했다. 자기의 일생의 한 장이 지금 막 끝나고 있는 것이다. 비로소 자신이 매우 늙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용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언젠가 베로니카 수녀가 옮겨다 놓은 소나무 테이블에 팔꿈치를 고였다. 진달래 나무 손질에 여념이 없어 보이는 후노인은 일부러 프랜치스를 못 본 척했다. 치셤 신부는 그만 두 팔에 얼굴을 깊이 묻고 말았다. 11 커다란 용나무 잎이 아직도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정원의 테이블에 걸터앉아 그는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어떤 감동적인 이야기라도 읽는지 그의 손은 힘줄이 불끈 솟아 있었고 이윽고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후노인이 고인이 된 지도 이미 오래 전이다. 또 조금 떨어진 곳에는 자그마한 체구에 고상한 품위를 지닌 중국인 주신부가 기도서를 들고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거닐면서 시종 갈색의 따스한 눈으로 프랜치스를 바라보곤 했다. 성당 마당에는 메마르고 건조한 8월의 햇빛이 황금빛 포도주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운동 시간이었으므로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즐겁게 뛰노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으로 보아 아직 오전 열한 시밖에 안되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저 애들은 나의 아이들, 아니 내 아이들의 또 아이들인 것이다." 그는 정다운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시간의 흐름이 너무 빠른 것 같았다. 1년도 1년, 이렇게 서둘러 왔다가는 또 그렇게 지나가 버리는 시간들......그 순간 순간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도 너무 빨라서 이젠 자기가 의식하기도 전에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골몰해 있는 그의 눈 앞에 우유가 가득 담긴 큰 컵을 든, 뚱뚱하고 항상 웃음보가 터질 듯한 불그레한 얼굴이 다가왔다. 원장 매시메리가 또 친절하게 시중을 들어 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 시중이 자기의 나이를 연상케 하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이제 예순 일곱에 불과하다......하기야 다음 달이며 예순 여덟이되지만......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아직 젊은이들만큼 자신도 튼튼한 것이다. "그런 것 가지고 오지 말라고 했었는데......" 매시 메리 수녀는 마치 어린애를 달래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매우 건강하고 시원스러운 여성이었다. "오늘은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그런 쓸데없는 긴 여행을 꼭 떠나셔야 한다니 말씀이에요."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 "주 신부님과 피스크 박사만으로는 왜 안 된다는 건지 도무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정말 모른단 말이오?" "네, 그래요." "그래요? 그것 참 난처하군......당신의 머리가 점점 둔해지는 것 같군."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그를 달래듯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신부님. 요수에에게 가시지 않기로 했다고 전할까요?" "요수에에게 한 시간 내로 말에 안장을 얹고 준비하라고 일러주시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돌아갔다. 그는 원장 수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자기는 누가 뭐라도 소신대로 움직일 뿐이라는 자신에 찬 미소였다. 그녀가 눈에 보이지 않았으므로 이제는 얼굴을 활짝 펴고 우유를 천천히 마시며 다시 일기를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이 습관은 근래에 와서 생긴 일로 닳고 단 일기장을 아무 데서나 닥치는 대로 펼쳐 놓고 마음대로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었다. 지금은 1917년 10월의 어느 날 일기가 펼쳐져 있었다. 파이탄의 사정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 벼농사도 풍작이고 류촌으로 갔던 아이들도 무사히 돌아와 모두 건강한데 나만 기운을 잃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오늘은 사소한 사건이었으나 그로 인해 아주 즐거웠다. 센샹에서 열리는 연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나흘쯤 성당을 비웠었다. 회의 장소가 센샹으로 결정된 것은 지목(중국과 같은 포교국에서 일반 재치권을 가진 사제)의 의견이었다. 너무 거리가 멀어서 나는 참석하지 않았으면 했다. 사실 우리 포교에 종사하는 성직자들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데다 몇 사람 안 되었다-치보드의 후임으로 오게 된 슈레트 신부와 절강의 세 중국인 신부와 라까이에서 온 네덜란드인 반 드빈 신부뿐이므로-이번 회의도 일부러 긴 여행을 강행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의견 교환'은 하고 왔고 그뿐만 아니라 경솔하게도 나는 흥분해서 '침략적인 그리스도교 포교법' 에 대한 반론을 내세우고 파오 씨의 사촌이 말한 내용을 인용해 가며 '선교사인 당신네들은 입국할 때에는 복음서를 들고 오나 귀국할 때에는 이 땅을 약탈해 간다' 는 말까지 해서 슈레트 신부를 불쾌하게 만들기도 했다. 슈레트 신부는 매사에 매우 정력적인 성격이었다. 완력도 행사하며 센샹의 20여 리 사방에 있는 작은 불교 사원들을 거의 없애 버리고 하루에 5만 명이라는 놀라운 수를 개종시킨 기록을 세웠다는 일화를 가진 사람이었다. 귀가하는 길에 나는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해야 했던가. 이 일기장에도 거듭 몇 번이나 써 놓았을 정도로 나는 하느님께 용서를 청했다. "주여, 또 실수를 했습니다. 제발 저의 혀를 묶어 주십시오" 하고. 이런 까닭으로 해서 나는 센샹에서 아주 괴상한 늙은이로 취급당하고 말았다. 고행하는 셈치고 배를 타고 오는 동안은 선실에도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갑판 내 바로 옆에 한 사나이가 서 있었는데 그는 몇 마리의 살진 쥐가 들어 있는 상자를 들고서 그 놈들을 한 마리씩 식욕이 동한다는 듯 잡아먹고 있었다. 내가 눈을 크게 뜨고 아주 진저리치며 놀라워해도 그 사나이는 태연했다. 뿐만 아니라 비가 심하게 쏟아지고 뱃멀미까지 나서 매우 고생을 했는데, 이것만으로도 보속을 톡톡히 치른 셈이었다. 드디어 파이탄에 도착했을 때에 나는 반쯤 죽은 사람처럼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지친 몸으로 간신히 배를 내렸을 때 부둣가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를 마중 나온 한 노파가 있었다. 그 노파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비로소 나는, 전쟁의 와중에 성당 마당 한 구석에서 빈 우유 깡통에 콩을 삶아 먹던 스우 할머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 교구에서는 가장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경이로운 일은 나를 발견하자 그녀의 얼굴이 활짝 밝아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빠른 말투로 하는 얘기인즉, 내가 없는 것이 허전해서 벌써 3일간이나 오후가 되면 으레 부두에 나와서 비를 맞으며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제사에 쓰이는 쌀가루와 설탕으로 빚은 떡을 여섯 개나 내밀었다. 이것은 먹기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중국인이 모시는 불상-저 슈레트 신부가 완력으로 때려부순 불상 앞에 바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의 행동은 좀 우스꽝스럽긴 했으나......그러나 적어도 한 인간이 어느 한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다시없는 귀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안다는 건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1918년 5월. 날씨가 쾌청한 아침나절에 첫 번째의 이주민이 류촌으로 출발했다. 모두해서 24명-굉장한 환영 속에 마음씨 좋은 원장 매시 메리로부터 상냥한 인사를 받고 좋은 충고를 받았다. 그녀가 처음 이곳으로 부임되어 왔을 땐 왠지 좋지 않은 감정이 앞섰었는데(그것은 아마 베로니카 수녀의 생각이 짙게 머리에 잠재해 있었으므로), 매시 메리는 훌륭하고 유능했으며 쾌활할 성격으로, 수녀로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결혼생활에 대한 이해심도 놀랄만큼 깊었다. 옛날 캬넬케이트의 어부의 아내인 매기 팍스톤이라는 할머니가 곧잘 너는 보기보다는 어리석지가 않다고 말하여 나의 용기를 고무해 준 일이 있었는데, 지금 류촌으로 이들을 이주시켜 살게 한다는 생각은 나로서는 여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이 성 안드레아 성당에서 착실한 아이들만 골라 보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제 한창때의 청년들에겐 충분한 일이 전혀 없다. 빈민굴에서 건져내어 기껏 하느님 덕분으로 이만큼 교육시킬 수 있었는데 다시 그런 곳으로 돌려보낸다는 것은 아무 보람도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류촌에 가서 새로운 혈통을 물려받으면 더욱 좋아질 것이다. 땅은 넓고 기후는 맑아 사람의 마음을 낙관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그곳에도 젊은 사제 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을 텐데......안셀모 밀리에게 건의해서 한 사람 파견해 달라고 해야겠다. 파견이 이루어질 때까지 성가시도록 끈질기게 편지를 보내야지. 그날 밤 흥분과 그리고 합동 결혼식을 올린 탓으로 피로가 더욱 겹쳤다. 이런 집단 결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게다가 중국말로 축사를 읊으면 목소리가 괴상하게 되고 마는 것 같다. 매사에 흥이 나지 않는 것도 모름지기 육체적 반동이 아닐까. 지금은 휴식이 필요하다. 머리의 회전이 좀 둔해진 듯하다. 피스크 부처는 늘 해 오던 것처럼 6개월간의 휴가를 얻어 버지니아에 살고 있는 아들에게로 갔다. 그 두 사람이 없으면 왜 이다지도 쓸쓸한지......그들과 교대로 온 에즈라 살킨스 목사는 "이렇게 정답고 고상한 이웃을 가진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고 말해 주었으나 사실 에즈라 목사는 정답지도 고상하지도 않다. 늘 명랑한 얼굴을 하고 있으나 거인이며 로터리 클럽식의 악수를 하고, 웃을 땐 흡사 막 녹기 시작한 라드같이 번질거리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이쪽 손가락뼈가 소리가 날 만큼 꽉 잡고는 "도와 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하고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곤 하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피스크 부처를 류촌으로 초대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얘기까지 에즈라 목사에게 할 필요는 없겠지. 그 사나이는 1분 이내에 리비에로 신부의 무덤에 "형제여, 그대는 구원받았는가?" 하고 포스터를 써 붙일지도 모를 일이니까. 아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 아무래도 나는 마음이 비뚤어져서 괴상하게 변한 것 같군. 매시 메리가 합동 결혼식 때 먹인 오얏 파이 탓인지도 모르겠군. 오늘은 참으로 즐겁다. 왜냐하면 1922년 6월 10에 부친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의 긴 편지가 온 것이다. 그녀의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모양이다. 전쟁의 시련으로부터 휴전의 굴욕을 겪어야 했으나 이번에 로마의 시스티나 수도원의 원장에 임명되었다니 이제 진정 인정받은 셈이다. 거기는 수도회가 창립된 곳이기도 한데 크르소 거리와 퀴리나레 언덕 중간 비탈에 서 있는 훌륭한 건물이었다. 그곳에서 사포레리나의 아름다운 12사도의 성당이 내려다보인다고 한다. 그런 수도원의 원장이란 최상급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지위지만 그 사람은 그만한 실력자니까 당연한 일이고 말고. 그녀도 지금은 만족하며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이 편지는 내가 오랫동안 동경해 왔던 성도의 향기를 더욱 짙게 했고-이건 꼭 밀리의 입버릇 같군-로마행을 결심하고 계획을 세웠을 정도였다. 이미 두 번이나 연기되었지만 이번에 휴가를 얻게 된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로마를 방문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모자이크 바닥을 거닐어 보고 그 기회에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까지 만나 볼 작정이다. 지난 4월에 안셀모 밀리가 타인카슬 대성당의 주임신부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에 나는 즉각 축하 편지를 냈었고, 그 회답에서 밀리는 6개월 안으로 보좌 신부를 파견해 줄 것이며, 또 해가 바뀌기 전에 내가 그토록 원하고 있는 휴가도 주게 될 것이라는 보장을 해주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이런 행복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기쁨으로 넘쳐흘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과 달리 정말로 저축을 해야겠다. 옛날 벽돌을 굽던 때처럼 엉덩이를 기운 바지를 입고서야 그 멀리까지 찾아가서 열두 사도의 으리으리한 이름이 붙어 있는 수도원장의 면회를 신청할 수 없지. 그렇게 되면 베로니카 수녀까지도 기가 막혀 할 테니까 말이다. 1923년 9월 17일. 이날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흥분 상태였다. 드디어 새로운 신부가 도착한 것이다. 내게도 동료가 생겼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고마워서 사실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처음 보낸 밀리의 편지에 의하면 주근깨투성이의 엷은 블론드 머리칼을 가진 튼튼한 스코틀랜드 청년이라도 오는가 했더니, 그 다음 편지에는 베이징에서 신학교를 나온 중국인 사제를 파견하기로 되었다고 했다. 나는 성당 가족 모두를 놀라게 하고 싶어져서 어떤 신부가 오게 되는지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모두들 몇 주일 전부터 모이기만 하면 본국에서 오는 젊은 신부들에 대한 이야기들만 나누는 듯했다. 클로틸드 수녀와 말타 수녀는 수염을 기른 프랑스인이 와 주기를 고대했고, 원장 수녀인 매시 메리는 아일랜드인이었으면 하고 특별히 기도까지 드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중 막상 신부가 도착하자 아일랜드인 특유의 혈색 좋은 얼굴의 원장이 가엾게도 보랏빛으로 질린 채 황급히 내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신임 신부님은 중국인이로군요." 체구는 작지만 똑똑한 주신부는 상냥하고 조용한 성격이었으며, 중국인의 찬탄할 만한 특성인 그 깊은 사색적 생활에서 오는 깊은 신앙심을 지닌 훌륭한 사람이었다. 나로서는 센샹에 자주 가 보진 못했지만 그곳에 가서 몇몇 중국인 신부를 만날 때마다 깊은 인상을 받곤 했었다. 좀더 현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우수한 사제 중에는 공자의 예지와 그리스도의 덕을 함께 겸비해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도 다음달에는 로마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19년만에 처음으로 맞는 휴가인 것이다. 마치 학기말이 되어서 책상을 탕탕 두들겨 대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러 대던 호리웰 신학교의 학생 같은 기분으로 되돌아간다. 이제 두 주일만 지나면 우리는 이 탄식의 문에서 해방되리라.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는 맛있는 생강 조림을 좋아했는데 이젠 그 맛을 잃어버렸을까. 선물로 그 생강 조림 한 통을 갖다 주고 시다. 아무래도 지금쯤은 마카로니를 더 좋아하겠지만. 인생은 참 즐거운 것이다. 창 밖을 내다보니 어린 삼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흡사 기쁨에 떨고 있는 듯 보인다. 오늘은 상하이에 표를 부탁하는 편지를 써야겠다. 만세! 1923년 10월. 어제 도착한 전보로 인해 나의 로마행은 취소되었다. 지금 나는 저녁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강가에 서서 안개 속에서 뜸부기를 이용해 고기를 낚고 있는 모습을 나는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고기를 잡고 있는 사람이 슬퍼 보인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착잡했던 탓인지 아무튼 슬픔이 앙금처럼 가라앉고 있었다. 매우 커다란 뜸부기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뱃전에 웅크리고 있다가 별안간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커다란 부리를 휘저어서 파닥거리는 고기를 잡아 물위에 내놓았다. 자유롭지 못한 목으로 먹이를 어떻게 할지 몰라 떨면서......이윽고 뜸부기는 물고 있던 고기를 빼앗기고는 슬픈 듯이 고개를 휘저었지만 곧 잊어 버렸는지 또다시 뱃전에 웅크리고 앉아 새로운 먹이를 기다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기분은 더욱 암울해졌다. 온 육신도 무겁게 내려앉는 듯했다. 회색으로 어두워져 가는 물가에 자라 있는 잡초들이 강 건너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에 어지러운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내 생각은 이상하게도 그렇게 가고 싶던 로마가 아니라 티드사이드의 깨끗하고 잔잔한 물에 맨발을 담그고 연어를 잡으려고 버들로 만든 낚싯대를 던지던 옛날로 돌아가 있었다. 근래에 와서는 소년 시절의 추억에 잠겨 있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졌다. 그 추억은 어찌나 뚜렷한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할 때도 있었다. 더구나 소년 시절의 사랑인 저 노라에 대한 사랑을-꿈만 같아 믿어지지 않지만-달콤했던 그 사랑에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어 꿈에서까지 그 사랑을 보는 것이다. 아마 지금 내 마음은 실망으로 인해 감상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른다. 이런 일들은 곧 잊혀지겠지만 그 전보가 도착되었을 때는, 매기 할머니의 말을 빌린다면 정말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었었다. 이젠 완전히 소외당한 것을 느끼면서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으로 돌아가면 선교사의 마음이 흔들린다는 말이 옳을는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 선교사들이란 자기 자신을 전부 바친 사람들이고 은퇴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내 일생을 이곳에 묻겠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윌리 탈록이 잠들어 있는, 저 스코틀랜드의 혼이 묻혀 있는 그 곁에 묻어 달라고 해야겠다. 이번 로마 여행이 나보다는 안셀모에게 더 필요하다고 하니(그건 핑계이긴 하지만) 옳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포교단의 자금이 두 사람에게 여비를 지불할 정도로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도 사실일 테지. 그러면 교황에게 그의 전도 사업의 진전 현황을 훨씬 유리하게 보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들 선교사들을 군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내 혀는 굳어져서 잘 놀려지지 않으나 그의 혀는 인기 절정에 올라 자금 조달 문제나 해외 포교단 전체를 요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편지로 자기의 행동반경 모두를 세밀히 적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즉 로마 구경은 그가 대신 해 주고 나는 상상으로 교황을 알현하고, 마리아 베로니카 수녀를 만나는 셈이 된다. 밀리는 단기 휴가를 마닐라에서 지내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해 왔는데 아무래도 그럴 기분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 번화한 거리에서 괴로움을 느끼면서까지 보잘것없는 사나이가 쓸쓸히 항구 주위를 헤매면서 폰티나(로마 근교에 있는 언덕)에 올라간 기분을 맛보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우습기만 한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주 신부는 류촌에 무사히 정주하고 우리의 소식을 전하는 비둘기는 신의 사도처럼 왕복하고 있었다. 나의 계획이 이처럼 훌륭하게 실천되고 있음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밀리가 교황을 알현할 때 신 외에는 그 누구도 모르고 있을 이 거대한 황야의 계곡에 보물처럼 숨겨진 작은 마을에 대해서도 얘기해 줬으면 좋으련만. 1928년 11월 22일. 숭고한 이 체험을 보통 말로써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내 무딘 붓으로는 도무지 그런 격정을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젯밤 클로틸드 수녀가 세상을 떠났다. 죽음이란 것에 대해서 나는 이 불완전한 삶의 기록에서는 거의 되새겨 본 일이 없다. 1년 전에 폴리 아주머니가 타인카슬에서 잠자듯 세상을 떠났다는-고령이기도 했으나 임종이 편안했다는 것은 착하게 한평생을 살아온 대가이리라-눈물로 얼룩진 쥬디의 편지를 받았을 때도 나는 다만 일기에 '폴리, 1927년 10월 17일 영면하다' 라고 적었을 뿐 아무런 감상도 적지 않았었다. 생전에 선량했던 사람의 죽음에는 어떤 불가피한 필연성을 느끼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으므로 나같이 건강한 늙은 사제도 마치 하늘의 계시를 받기나 한 듯이 놀라는 일이 있는 것이다. 클로틸드 수녀의 증세는 가볍게만 생각하고 그저 며칠 누워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12시가 지났을 무렵, 나를 깨우러 온 사람을 따라 갔을 때 그 갑작스런 증상에 나는 깜짝 놀랐다. 곧 요셉의 장남인 요수에를 시켜 급히 피스크 박사를 모시고 오도록 일렀으나 수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나를 만류했다. 그리고 그녀는 벌써 무언가 예감하고 있는 듯한 의미있는 미소를 지으며 심부름은 갈 필요가 없다고 요수에에게도 말했다. 그 음성은 나직했으나 별로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몇 년 전 무슨 까닭인지 그녀가 크로다인을 마시려 했을 때 냉혹하게 나무란 일이 새삼 떠오른다. 나는 그 후회로 울고 싶을 정도였다. 그 일만이 아니라 해도 나는 솔직히 말해서 클로틸드 수녀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언제나 무엇엔가 쫓기고 있는 듯한 그녀의 불안한 얼굴에 호감을 가질 수가 없었고 그녀의 말이나 행동은 민망할 정도로 부자연스럽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했으므로 나는 사실 그녀의 곁으로 다가서는 것조차 피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 행동은 스스로도 어떻게 조정할 수 없는 정신적 질환에서 기인된 것이었다는 것을 나는 일찍이 간파했어야 했을 것이다. 날 때부터 타고난 강한 수치심과 그래서 항상 주위 사람과 자신에게까지 초조와 불안을 느끼고, 그 때문에 생긴 신경병 적인 적면공포는 그녀를 평생 괴롭힌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극복해 내려고 남이 모르는 정신적인 고투를 겪으며 열심히 싸워 온 것이다. 때문에 언제나 피곤하고 허약한 그녀에게 주위 사람들은 따뜻한 이해의 눈길을 보냈어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내면적인 승리까지도.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표면에 드러나는 패배자의 불안감을 멀리서 차갑게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녀는 일년 반쯤 전부터 만성 위궤양에 의한 악성 육종으로 고통을 받아 왔다. 피스크 박사로부터 불치의 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그녀는 다름 사람에겐 비밀에 붙여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고, 그때부터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육체적인 고통과 고독한 긴 싸움을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방에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출혈의 전조를 보여 가망이 없는 듯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두 번째의 출혈이 있은 그녀는 정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 동안에 나는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 이야기들은 내 일기에도 기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직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이야기가 될 것이고 또한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조소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니까...... 우리 모두는 슬픔에 잠겼다. 특히 말타수녀가 심했다. 나와 같이 몹시 튼튼한 말타 수녀는 필시 오래 살 것이다. 가엾은 클로틸드! 아무 두려움도 없이 조용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평화롭게 잠든 얼굴에서 나는 몸도 마음도 희생의 제물로 아낌없이 바치고 싶어한 갸륵한 사랑의 표본을 본 것이다. 그리고 자연으로 돌아간 고고한 인간을. 1929년 11월 30일. 요셉의 다섯 번째 아기가 태어났다. 세월은 얼마나 빠른지! 수줍음을 타는 듯하면서도 수다스럽고, 화를 잘 내며 용감하기도 했던 소년 요셉이 이렇게 의젓한 가장이 되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단것을 좋아한 것으로 미루어 뚱뚱해질 건 뻔한 일이지만, 그는 뚱뚱한 풍채의 의젓한 중년이 되었다. 아직도 여전히 남의 시중들기를 좋아하고 특히 아내에게는 친절했다. 그러나 다소 오만한 점이 있어서 내게 반갑지 않은 손님이라도 오면 얼마나 무뚝뚝하게 구는지 나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또 일주일이 지났다. 이 마을의 뉴스를 좀더 부연하자면, 챠씨의 예장용 구두가 만주문에 모셔졌다. 이 지방에서는 이 일은 대단한 명예를 나타내는 것이니......이 늙은 벗을 위해 아낌없이 축하를 하고 싶다. 그는 근엄하나 명상적이고 관대한 성격을 가졌으며 항상 진과 미를 위해 자기의 생애를 일관시켜 온 것이다. 어제 우편물이 왔다. 밀리의 로마 방문에서 대성공을 예측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고위 성직에 취임하리라는 것쯤은 나도 그전부터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그의 업적에 광휘를 더하는 해외 포교 사업은 바티칸으로부터도 정당한 포상을 받은 것이다. 지금 그는 타인카슬의 새 주교가 되었다. 남의 출세를 허심탄회하게 보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또 없으리라. 그 눈부심으로 내 눈은 어두워지기만 한다. 또 사실 나이를 먹어감으로 해서 내 눈은 오래 전부터 먼 곳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밀리의 영광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걸릴 것도 없다. 그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오히려 반가울 정도다. 질투라는 것만큼 증오해야 할 것은 없다. 패배자일지라도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는 한 세상 전부를 소유한 것임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내가 도량이 넓은 인간이라는 것만은 인정받고 싶다. 하지만 이건 내가 뛰어나게 관대한 인간이란 뜻이 아니다. 단순히 밀리라는 인간과 나의 차이랄까......분수에도 맞지 않는 주교 자리를 넘겨다본 내 어리석음을 깨달았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리라. 그와 나는 똑같은 지점에서 출발했으나 밀리는 어느 사이에 나와 멀찍이 떨어져 갔다. 그는 훌륭한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지금은 <타인카슬 크로니클>지에 소개되었듯이 "훌륭한 언어학자며, 훌륭한 음악가며 교구 내의 예술 및 과학의 보호자로서 많은 세력 있는 유지들을 친구로 가지고 있다" 고 하지 않는가. 그는 정말 행운아임에 틀림없다. 아무 변화도 없는 평범한 내 생에 가운데는 여섯 명의 벗들이 있는데, 그나마 한 사람을 빼고는 모두 신분이 아래인 사람들뿐이다. 밀리에게 축하의 편지를 보내야겠다. 하지만 우정을 방편으로 승진을 바라는 따위의 의사는 추호도 없다는 것을 명백히 밝힐 필요도 있겠다-밀리 만세!-그건 그렇고 밀리, 자네는 자네의 인생을 얼마나 훌륭하게 살았는가-나는 내 인생을 얼마나 허비해 왔나 하고 생각하면 역시 마음이 슬퍼지는 걸 어쩔 수가 없다. 나는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전심전력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얼마나 심한 장애에 부딪쳤고 또 얼마나 실패를 거듭했는가-알 수 없는 일이다. 1929년 12월 30일. 지난 한 달 동안은 일기를 쓰지 못했다. 쥬디에게 편지를 받은 후부터일 것이다. 고국에서 일어난 일......그리고 이곳에서 내 마음속에 일어난 일들을 여기에 기록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요즘 나는 귀양살이 같은 내 생애가 마지막에 도달했다고 여기며 아무 혼란 없이 조용한 체념의 세계를 가졌다고 득의의 마음을 가졌었다. 그래서 2주일 전 어느 날 나는 매우 흔쾌한 감정으로 지난해에 사들인 강가의 논 네 마지기와 뽕나무밭 앞에 만든 가축장, 말 사육장 등 꽤 늘어나게 된 성당의 재산들을 돌아보고 나서는 성탄 구유를 만드는 아이들을 도와주려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특히 나는 이런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 좀 이기적일는지는 모르지만 이건 억압된 부성 본능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자신의 일생을 바친 것에 대한 슬플 정도의 집착이라 하는 것일까, 아무튼 아이들에 관한 나의 집착은 이상할 정도로 유난스럽다. 사랑하는 예수 아기는 물론이려니와 이 성 안드레아 성당에 내버려지거나 모아들인 아이들이거나 아무리 가엾게 버림받은 황색 아이들일지라도 내게는 더할 수 없이 귀엽고 소중스런 존재였다. 우리는 멋지게 말구유를 만들고 지붕 위에는 솜으로 하얀 눈까지 꾸미고 소와 당나귀도 만들어 놓을 참이었다. 그리고 색색의 작은 램프를 만들어 전나무 가지에 아름다운 수정별과 함께 매달아 아이들을 기쁘게 해주리라 생각했다. 아이들이 기쁨에 들떠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도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이 즐거운 기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전세계의 그리스도 교회가 제각기 성탄 구유를 꾸미고 아기 예수 탄생의 축하 잔치를 벌이고 있을 경건한 광경도 내 마음속에 환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니라 해도 인류의 아들을 낳은 어머니에 대한 잔치로서 적어도 흐뭇한 마음이 될 것은 틀림없다. 그때 큰 사내아이가 원장 매시 메리의 심부름으로 전보를 가지고 달려왔다. 나쁜 소식은 무엇보다도 먼저 도착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지구의 저편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이처럼 빠르게 온 것이다. 전문을 읽는 내 안색이 변한 탓일까. 내 얼굴을 바라보던 가장 어린 소녀가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내 가슴에 켜졌던 불길은 순식간에 꺼졌다. 쥬디의 소식으로 인해 내가 이렇게도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 어이없게도 생각되었다. 확실히 그럴 것이었다. 쥬디는 내가 파이탄으로 출발할 때에는 고작 십대 소녀에 불과했고 그 동안 잊어 버렸을 법도 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내 마음속으로는 그녀와 함께 생활에 오고 있었던 것이다. 여간해서는 받아 볼 수 없는 그녀의 편지였으나 어쩌다가 가뭄에 콩 나듯이 오는 편지는 묵주와 함께 늘 내 곁을 떠나지 않았었다. 유전적 운명처럼 쥬디는 자신마저도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 폴리 아주머니가 곁에서 지켜 주었을 때는 그래도 그 변덕스러운 성격이 어느 정도는 가라앉아 있었다. 전시 때에는 다름 젊은 여자들처럼 군수 공장에서 일했고 급료로 꽤 많았으므로 그런 대로 행복했던 모양이다. 지금도 나는 아주 기쁜 생활을 편지를 통해 알려 주었던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털외투와 피아노도 사들였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전시의 긴박한 분위기가 그녀의 급한 성격을 어느 정도 완화시켜 직장도 충실히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그 기간이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좋은 시기였던 것 같다. 드디어 전쟁이 끝났을 때 그녀는 이미 서른을 넘어 있었고, 취직할 자리도 마땅치 않은데다가 일할 의욕도 상실해 버려 폴리 아주머니와 둘이서 타인카슬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조용히 살았었다. 나이도 들었으니 이젠 철도 들었으려니 하고 주위 친척들은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 쥬디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에 대해서는 묘한 불신을 가지고 있어서 결혼 같은 것은 전혀 마음에도 두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마흔이 다 되었을 때 폴리 아주머니가 죽었으므로 새삼 결혼을 하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폴리 아주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지 3개월도 채 못 되어 쥬디는 결혼을 했고 또 곧 버림을 받았다. 여성 갱년기 전에 일어나기 쉬운 고비를 쥬디는 잘못 넘긴 것이다. 사실 그녀는 야수처럼 걷잡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폴리 아주머니가 쥬디에게 남겨 준 유산은 2천 파운드쯤 되었으므로 검소하게 살아가기에는 넉넉한 돈이었다. 그러나 스카보루의 아파트에서 만났다는 그녀의 남편이 재산을 활용하려면 자기 명의로 고치는 것이 좋다는 꾀임에 빠져 버려 그 돈을 깨끗이 날려 저렸다. 이런 얘기는 세상에서 흔한 것으로 그야말로 빅토리아 왕조(영국이 가장 강대하게 발전하던 19세기의 문학은 사실주의를 배척, 유머와 센티멘털리즘과 도덕적 경향으로 흐름) 시대의 걸작 소설로 만들어져 속기 쉬운 인간의 우매함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하여 많은 사람들을 웃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 당면한 사람들에겐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닌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의 결말은 성탄 구유 앞에 있던 내 손안에서 겨우 열 마디로 씌어진 간단한 전보로 막을 내렸다. 쥬디는 그 허황한 결혼으로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그 아이를 낳자 그만 이내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모순투성이인 쥬디의 생애는 조금도 보람을 찾을 수 없었고 그러므로 시종 어두운 운명이 뒤따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죄 탓이 아니라(죄라는 말을 나는 아주 혐오하고 믿지도 않지만) 인간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만 이 세상에 왔다가 가 버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지상에 존재하는 우리가 공동으로 지니고 있는 어두운 약점의 슬픈 증거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또 그녀와는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슬픔을 지닌 인간의 비극은 영원히 되풀이될 것이다. 지금 내게는 쥬디가 남기고 간 불쌍한 아기를 냉정한 입장에서 생각할 여유가 없다. 쥬디를 간호해 주었던 사람이라고 생각되는(쥬디의 죽음을 알려 온) 여자 외엔 그 아기를 돌봐 줄 사람도 없으리라. 어떤 류의 여자란 것도 쉽게 짐작은 간다. 궁지에 몰려 밝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들 중의 한 사람일지도 모를 일이다. 곧 답장을 해주어야 한다. 저축된 돈은 조금밖에 안 되지만 그 돈이라도 보내 주어야겠다. 우리는 청빈을 감수한다고 맹세는 했어도 인생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커다란 의무감을 잊고 이상하게 이기적이 돼 버리곤 한다. 가엾은 노라......가엾은 쥬디......아직 이름도 없는 가엾은 갓난아기...... 1930년 6월 19일. 초여름의 태양이 내리쬐는 빛나는 날이다. 오후에 받은 편지가 내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해주었다. 아이의 세례명은 이 교회의 이름을 따서 '안드레아' 라고 했단다. 그 편지를 읽고 나서 나는 마치 그 어린아이의 할아버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젠 어쩔 수 없이 이 관계의 끄나풀에 묶여 버리고 이 끄나풀은 항상 내 어깨에 걸려 있을 것이 분명하다. 아이의 아버지는 행방을 감추었지만 사실 나는 그를 그다지 찾아내고 싶지는 않다. 매달 얼마만큼의 양육비만 보내 준다면, 이 미세스 스티븐스라는 여인은 별로 나쁜 사람 같진 않으니까 안드레아를 돌봐 줄 것이다. 또 웃음이 나온다. 성직자로서의 내 경력은 우스꽝스러운 일로만 가득 차 있는데......이젠 또 8천 마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아이까지 양육을 맡아야 한다니......내 인생은 더욱 기묘한 종말을 장식하려는 모양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성직자로서의 경력' 이란 내 아픈 곳을 건드리는 말이다. 전날 피스크 박사와 여느 때처럼 토론을 벌이다가 화제가 '연옥' 이라는 문제에 이르렀을 때 내가 이길 것 같으니까 피스크는 열띤 어조로 "당신은 꼭 회교도와 하이 앙그리칸(영국 국교 내의 고교화파로 카톨릭의 전통은 중히 여기나 로마 교황을 인정치 않음)을 짬뽕 해 놓은 것 같은 소리만 하는구먼" 하고 공박했었다. 그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말투는 아마 나의 환경과 그리고 좋아하던 다니엘 그레니 외할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이 나를 걷잡을 수 없는 자유 주의자로 만들어 버린 게 아닐까. 나는 내가 물려받은 종교를 사랑하고 또 그것을 30년 이상이나 최선을 다해 가르쳐 왔다. 또한 그 일은 온갖 기쁨과 영원히 마르지 않은 감미로운 생의 원천으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 그리고 이런 곳에 오래 격리 당하고 보니 나의 신앙도 세월을 따라 점점 단순해져서 정화돼 버린 것 같다. 교의에 관한 복잡한 이론은 점점 흐려져 갔다. 솔직히 말해서 인간이 금요일에 고기를 먹었다고 해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에 던져진다니, 나로서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근본적인 것을 알고 있다면(다시 말해서 신에 대한 사랑이라든가 이웃에 대한 사랑 등)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때야말로 온 세계의 교회가 시로 질시를 버리고 하나가 되어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한다. 세계는 하나의 생명체로 호흡하고 건강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수십 억의 인간이라는 세포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니, 그 하나 하나의 작은 세포인 인간의 마음들이 잘 어울려야 할 것일진대...... 1932년 12월 15일. 오늘로서 이 성당의 수호 성인의 이름을 받은 그 아이가 세 살 되는 날이다. 즐거운 생일이 되기를 빈다. 그리고 티드사이드의 바리 과자점에 편지로 부탁했던 타피이를 너무 많이 먹지 말도록. 1935년 9월 1일. 오오 주여, 나를 어리석은 노인이 되게 하지 말아 주옵소서......이 일기는 아직 만난 적도 없고 이후에도 볼 수 없을 것같이 생각되는 어린아이의 단순한 기록으로 변해 가고 있는 것 같다. 나의 귀국은 불가능할 것 같고, 그 애도 여기에 올 리가 없지 않은가. 아무리 내가 고집쟁이고 바보 같은 말을 지껄였다 해도......그러나 사실은 피스크 박사에게 의논해 보았었다. 역시 이곳 기후로는 영국의 어린아이는 위험해서 부르지 않는 것이 더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걱정이 되어 죽을 지경이다. 몇 통인가 미세스 스티븐스가 보낸 편지를 보면 점점 더 생활이 어려워지는 모양이다. 거주지를 커크브릿지로 옮겼는데, 그곳은 맨체스타 근처로 주위 환경이 그리 좋지 않은 솜공장이 모여 있는 곳 같다. 편지문들이 달라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저쪽에서는 안드레아보다 이쪽에서 송금하는 돈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그곳 본당 사제는 그녀를 좋은 성격의 여인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여태까지는 별다른 일은 없었다. 이건 모두 내 탓이다. 물론 안드레아를 시설이 좋은 카톨릭 고아원에 보내 버리면 앞날에 대한 걱정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그 애만은 내 피붙이같이 여겨지고 옛날에 가 버린 사랑하는 노라의 살아 있는 생명처럼 여겨져서 그런 일은 할 수가 없고 또 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아마 이것도 전부터 괴벽스럽던 내 성격 탓이겠고, 그 괴벽이 교회의 차가운 관료주의에 반항하는 것인지도 모르나......만일 그렇다면 나도 안드레아도 이 고립의 종말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우리는 하느님의 수중에 있으며 그 아이도......장래도...... 치셤 신부가 다시 페이지를 넘기려고 할 때 경내에 말발굽소리가 들려 왔다. 이 소중한 몽상을 깨뜨려 버리기가 싫어서 말발굽 소리가 그대로 지나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활기 있는 목소리까지 들려 오는 것이었다. 그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일기장의 새 페이지를 펼쳐 펜을 들어 몇 줄 쓰기 시작했다. 1936년 4월 30일. 지금 곧 주 신부와 피스크 부처와 함께 류촌으로 출발할 참이다. 어제 주 신부가 천연두 같다면서 젊은 목동 항 사람을 격리시켰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상의를 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곧 함께 가보리라고 결심했다. 좋은 말을 타고 새로 만든 길로 간다면 이틀 정도면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피스크 부처에게는 전부터 우리의 모범 마을을 보여 주겠노라고 약속했었으므로 이번 기회에 함께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또 이번이 오래 전부터 미루어 왔던 박사 부처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부처는 이달 말경에 미국으로 영구 귀국할 예정이다. 벌써 두 분이 나를 부르고 있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 여행을 매우 기뻐하고 있는 모양이다......가는 도중에 피스크 박사의 그 무례한 일에 대해서 보복을 해주어야지......나에게 회교승이라고 하다니...... 12 좁다란 계곡으로 둘러싸인 벌거벗은 산봉우리 위로 해가 지고 있었다. 치셤 신부는 류촌을 떠나 말을 타고 달리면서, 병을 앓고 있는 목동을 위해 의약품과 주 신부를 남겨 두고 오긴 했지만 안심이 되지 않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성당까지 도착하려면 아무래도 하룻밤 야영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산모퉁이까지 왔을 때, 더러운 군복에 허리에 권총을 차고 머리를 숙인 채 걸어오는 세 사나이와 마주쳤다. 이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성내에서도 부정규군이나 제대한 병사들이 밀수입한 무기를 휴대하고는 산야를 누비며 비적 노릇을 하는 자들도 많았다. 치셤 신부는 그들을 지나치면서 인사했다. "당신들에게 평화가 함께 하기를......." 그리고 그는 일행이 따라올 때까지 걸음을 늦추었다. 뒤를 돌아본 그는 가슴이 섬뜩했다. 메서디스트의 전도관에서 데리고 온 짐꾼들과 자기가 데리고 온 짐꾼들이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허둥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와이츄의 부하 같은데요." 요수에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을 하곤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다른 놈들도 많이 오고 있습니다." 프랜치스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회녹색 군복을 입은 자들이 약 스무 명쯤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왔다. 그 외에도 으슥한 산길을 흩어져 오고 있는 자들도 스무 명은 훨씬 넘어 보였다. 그는 가만히 피스크와 눈짓을 했다. "얼른 지나쳐 버려야겠군." 한참 가다가 그 무리들과 또 마주쳤다. 치셤 신부는 웃는 얼굴로 태연하게 말을 건네며 길 가운데로 침착하게 말을 몰았다. 병사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좌우로 길을 비키며 어이없어 하고 있었다. 말을 탄 한 군사가 프랜치스의 털투성이인 작은 말을 막고 나섰다. 차양이 찌그러진 군모와 병장 계급장이 거꾸로 달린 잘난 체하는 젊은 얼굴이었다. "너희들은 누군데 길 한가운데로 가는 거냐? 어디로 가지!" "우리들은 파이탄에 있는 선교사들이오." 치셤 신부는 말을 계속 몰면서 어깨 너머로 조용히 대답했다. 피스크 박사 부처가 뒤를 바싹 따르고 요수에와 짐꾼들이 차례로 달리고 있는 일행은 더러운 군복으로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군사들 사이를 거의 다 빠져나오고 있었다. 병장은 다소 의심스러운 얼굴 표정이었으나 그냥 가도록 내버려두겠다는 의도인 것 같았다. 그리하여 간신히 위험이 끝나 가고 있을 바로 그 찰나였다. 연장자인 짐꾼 한 사람이 마지막 군 행렬 사이를 빠져 나올 때 한 폭도가 총부리로 툭툭 건드리는 통에 완전히 공포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며 짐을 내팽개치고 숲속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치셤 신부는 화난 목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았으나 간신히 삼켰다. 군사들은 짙어 가는 황혼 속에서 일제히 숨을 죽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곧이어 한 방의 총성이 울렸다. 그러자 모두 따라서 총을 쏘아 댔으므로 적막하던 산 속이 순식간에 살벌한 싸움터가 되었다. 등을 굽히고 도망치던 짐꾼의 파란 옷자락이 숲속으로 사라지자 "우리가 속았구나" 하는 분노의 소리들이 터져나왔다. 지금까지는 멍청하게 그들을 쳐다보던 군사들이 이젠 일행을 둘러싸고 격분해서 떠들었다. "당신네들, 안 되겠어. 우리와 함께 가자고." 병장의 태도도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것은 프랜치스가 가장 두려워하던 반응이었다. "우리는 보통 선교사일 뿐입니다." 피스크 박사는 화난 음성으로 거칠게 항의했다. "우린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 그리고 우린 모두 정직한 사람들이오." "정직한 인간이 왜 달아나지?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 총지휘관 와이츄 장군에게로 가자." "정말이라니까요." "여보!" 피스크 부인이 조용히 남편을 만류했다. "그런 말씀하신다고 알아주지 않아요. 오히려 귀찮아지기만 해요. 아무 소리 말고 가기로 해요." 군사들이 포위하듯 일행을 둘러싸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5리쯤 갔을 때 젊은 병장은 서쪽으로 구부러져 자갈 투성이 개천 바닥을 따라 산 속으로 들어갔다. 깊은 계곡에 이르자 폭도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엔 더욱 초라한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1백여 명 가량 흩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 말린 야자 열매를 씹는 사람, 또는 겨드랑이 밑에서 이를 잡아내거나 발에 묻은 흙을 털어 내는 등 여러 가지 자세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위편 편편한 돌 위에 걸터앉아 모닥불을 쬐며 계곡의 거대한 바위에 기대어 저녁을 먹고 있는 사람이 바로 와이츄였다. 그는 이미 쉰 살이 넘어 있었고, 살이 찌고 배가 튀어나왔으며 얼굴은 더 추악하게 변해 있었다. 길게 자란 머리는 기름을 발라 늘어놓은 듯이 착 달라붙었고 앞가르마를 타서 양쪽으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또 미간은 잔뜩 찌푸리고 있었으므로 사팔눈이 마치 실가죽이 찢어진 흠집처럼 더욱 가늘게 보였다. 앞니 입술에는 탄환이 스쳐 간 상처가 있어 더욱 험상궂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프랜치스는 퇴각하던 그날 밤, 성당문 옆에서 자기 얼굴에 침을 뱉던 한 사람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여태 까진 줄곧 침착을 지켜 인내할 수 있었으나 지금 와이츄의 그 살기 등등한, 도저히 인간의 눈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무서운 시선을 가진 그 사나이가 이쪽이 누군지를 알아본 것 같다고 판단하자 그는 심장이 졸아드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병장이 일행을 끌고 올 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동안 와이츄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돼지고기가 든 쌀죽 그릇을 턱에 바짝 갖다 대고 계속 먹고만 있었다. 그때 군인 두 사람이 도망쳤던 짐꾼은 질질 끌고 계곡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올라와서는 짐꾼을 모닥불이 있는 가운데로 걷어차 버리는 것이었다. 가엾게도 뒤로 손이 묶인 짐꾼은 와이츄의 바로 옆에 무릎을 꿇고 고꾸라졌다. 그는 옆으로 고꾸라져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공포에 질려 신음하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와이츄는 계속 먹고만 있었다. 이윽고 아무 생각 없는 표정으로 벨트에서 권총을 빼 들더니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었다. 무언가 열심히 변명하던 짐꾼은 와이츄가 쏜 총을 맞고 그만 앞으로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사지가 꿈틀거리며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잠잠해졌다. 총알에 부서진 머리에서는 붉은 것이 비지처럼 흘러나왔다. 갑자기 고막을 찢는 듯한 총성의 여운이 가라앉기도 전에 와이츄는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먹기 시작했다. 피스크 부인은 작은 비명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군사들이 모두 고개를 들어 피스크 부인을 흘끗 보았으나 곧 자기들의 하던 일을 계속했다. 짐꾼을 끌고 왔던 두 군사가 시체를 끌고 가더니 끈에 매단 동전, 구두, 옷 따위를 차근차근 가려내고 깨끗이 벗겨 버렸다. 프랜치스는 전신이 마비되고 구토증이 나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새파랗게 질려 있는 피스크 박사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냉정을 찾으십시오. 어떤 표정도 나타내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 살아남지 못합니다." 참혹하고 비정한 살인이 있은지라 질식할 듯한 무서운 공포를 억누르며 그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윽고 두 번째의 짐꾼이 와이츄의 손짓에 의해 끌려나갔고, 그 짐꾼은 와들와들 떨며 발길에 채여 무릎을 꿇었다. 프랜치스는 또다시 살해당하지 않을까 해서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느꼈다. 그때 와이츄가 일행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곧 이놈을 파이탄으로 보내서 너희 친구들에게 너희들은 당분간 내 보호를 받고 있다고 전하고, 내가 보호하는 동안 내 후한 대접에 특별한 선물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려라. 글피쯤 내 부하 두 사람이 만주문에서 좀 떨어진 것에서 이 놈을 기다리게 하겠다. 이 짐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이놈이 손수 그 특별한 선물을 가져오도록 해야 한다." "우리를 붙잡아 둬 봐야 아무 이익될 것도 없을 거요." 피스크 박사는 격분해서 입술을 떨며 말을 계속했다. "재차 말하지만 우리들에겐 당신들이 말하는 재산 같은 건 없답니다." "한 사람당 5천 달러를 요구한다. 그 이상은 필요 없어." 피스크는 그래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엄청난 거금이긴 하지만 돈이 많은 그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럼, 내 아내도 저 짐꾼과 함께 가도록 해주시오. 내 아내라면 반드시 돈을 융통할 수 있을 거요." 와이츄는 딴전을 피웠다. 프랜치스는 박사가 너무 흥분해서 쓸데없는 소리나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피스크는 비틀거리며 아내 옆으로 갔다. 짐꾼은 병장으로부터 단단히 엄한 명령을 받은 후 뒹굴듯이 계곡을 뛰어내려갔다. 와이츄는 몸을 일으켜 부하들이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에 자기 말 쪽으로 걸어갔다. 말을 매어 둔 나무 옆에 벌렁 나자빠져 있는 시체의 두 다리가 흡사 허깨비처럼 보였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에 올라탔다. 선교사들의 말이 끌려오고 일행이 말에 오르자 이번에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기다란 삼줄로 손을 묶었다. 그리고 짙은 어둠을 뚫고 부대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떻게나 말을 빨리 몰아가는지 일행들은 이야기도 나눌 수가 없었다. 프랜치스는 자기 일행들을 인질로 끌고 가는 와이츄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와이츄는 요즘 사양길에 접어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연히 극렬한 투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옛날엔 화려한 장군으로서 3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곳곳의 성을 협박해서 세금을 거둬들여 성벽으로 둘러싸인 투엔나이 요새에서 군주와 같은 호화로운 생활을 누린 적도 있었는데, 그것이 차츰 퇴락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부귀영화를 누리던 시절엔 5만 냥을 주고 베이징에서 첩을 사들이기도 했었다. 그러던 그가 이제 치졸한 약탈자로서 그날 그날을 간신히 연명하며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엔 가까운 지방의 용병과 두 번에 걸친 격전에서 참패를 당한 그는 민단과 결탁할까 했으나 홧김에 반대당인 유격대와 손을 잡고 만 것이었다. 실은 민단이나 유격대나 다 그와 결탁하는 일을 바라지 않았다. 타락해서 자기만의 이권밖에 모르는 배덕자를 결코 원할 리는 없었다. 따라서 부하들은 자연 이탈자가 늘어 그의 행동 범위도 좁아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더한층 광포해져갔다. 겨우 부하가 2백명 정도에 머무르는 한심한 최악의 상태에 몰려 버린 그는 잔학한 탈취와 방화로 모든 백성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영광이 땅에 떨어진 악인의 증오심은 과거의 부귀영화를 되씹었으며 끝내 인류의 적이 되고 만 것이다. 밤이 매우 깊었는데도 군사들의 목적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낮은 산을 넘고 계곡을 두 번이나 건넜으며 또 한 시간쯤 늪지의 수렁 속을 지날 때 프랜치스는 머리를 들어 북극성의 위치를 보았고 비로소 성의 서쪽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차렸다. 하지만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나이가 많이 들자 늘 천천히 말을 몰던 그로서는 오랜 시간 말을 달린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뼈마디가 와드득와드득 맞부딪치는 것 같아 고통은 점점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피스크 부처도 같은 고통을 하느님을 위해서 참고 있는 게 아닌가. 또한 요수에같이 어린아이는 얼마나 무서울까. 만일 무사히 돌아갈 수만 있다면,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벌써 오래 전부터 매우 갖고 싶던 눈치던 그 점박이 말을 그에게 줘야겠다고 프랜치스는 생각했었다. 그는 긴 생각에서 빠져나오자 일행의 안전을 위해 하느님께 짤막한 기도를 했다. 이미 날이 새고 있었다. 여기저기엔 온통 누런 풀숲일 뿐 인가도 초목도 없이 바람에 밀려온 모래와 바위뿐인 황량한 들판에 와 있는 것을 프랜치스는 겨우 확인했다. 그곳을 지나 한 시간쯤 더 가자 물소리가 들려 오는 절벽 뒤로 퇴락해 가는 투엔라이 요새가 눈에 보였다. 절벽의 비탈에는 허물어져 가는 낡은 흙집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었고 그 집들을 둘러싸고 보루로 쌓은 성벽이 서 있었다. 성벽은 수 없는 공격의 탄환 자국으로 허물어져 흠집투성이였다. 강변에는 지붕이 없는 반들반들한 옛 절터의 기둥만 서 있었다. 성안으로 들어가자 와이츄는 아무 말 없이 그 중에서 가장 집다워 보이는 자기 처소로 들어가 버렸다. 다른 일행들도 말에서 내렸다. 아침 공기는 살을 에듯 날카롭고 차가웠다. 성직자들은 얼어붙은 진흙 위에 내려졌으나 묶인 것을 풀어 주지 않아 마냥 떨고만 있었다. 전리품이 있다는 것을 알자 여자와 늙은이들이 절벽에 벌집처럼 파 놓은 작은 굴속에서 우르르 몰려 나왔다. 그들은 병사들과 무어라고 지껄여 대더니 일행 쪽으로 다가와서 포로들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 눈들은 검푸르고 빈곤과 악의도 번쩍이고 있었다. "뭐 좀 먹을 것과 쉬도록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치셤 신부는 빙 둘러선 사람들에게 말했다. "음식과 휴식을 취하게 해달라구?" 그 말은 메아리처럼 구경꾼들에 의해 되풀이되었고 모두들 재미있다는 듯 웃어댔다. 프랜치스는 다시 그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들도 보아 아시겠지만 이 부인은 아주 지쳐 있습니다." 사실 피스크 부인은 실신 상태에 있었다. "누구라도 친절한 분이 계시다면 이 부인에게 뜨거운 차를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차......뜨거운 차?" 구경꾼들을 또다시 헤아릴 수도 없는 중창을 하듯 웅웅거리는 반향음을 일으키며 점점 다가섰다. 이윽고 그들은 선교사들에게 손이 닿을 수 있는 곳까지 바싹 다가들었다. 그때였다. 맨 앞에 선 노인이 갑자기 손을 원숭이같이 날쌔게 움직여 피스크 박사의 시계줄을 잡아채는 것이었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강탈이 시작되었다. 성서, 기도서, 돈, 결혼 반지, 프랜치스의 낡은 샤프펜슬까지도-이와 같은 일은 약 3분 동안에 일어난 일었고, 일행은 구두와 입고 있는 옷 외에는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가져 갈 건 다 가져 갔는데도 그래도 미련이 남은 듯한 여자가 피스크 부인의 모자 리본에 꽂혀 있는 검은빛이 나는 버클에 눈독을 들이더니 순식간에 그것을 낚아채려고 달려들었다. 부인은 그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던지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을 쳤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버클은 모자와 가발도 함께 강탈자의 집요한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자 부인의 머리는 머리카락 한 올 없었고 그 대머리는 흡사 돼지기름을 바른 듯 이상한 모습으로 아침 햇살에 번쩍거렸다. 일행들도 약탈자들도 모두 숨을 죽였다. 그러나 곧이어 냉소적인 조롱이 빗발처럼 날아들고 킥킥대는 웃음소리까지 들려 오고 있었다. 피스크 부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절망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박사는 떨리는 손으로 수건을 들고 아내의 머리를 감춰 주려 했으나 그 비단 손수건마저 이내 빼앗기고 말았다. 프랜치스는 부인이 너무나 불쌍해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병사가 돌아오자 군중의 소요는 곧 진정되었다. 선교사들은 어떤 동굴로 끌려가고 강탈자들도 하나둘 흩어졌다. 동굴은 위로 창문이 하나 달렸을 뿐 무거운 골재로 만들어진 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닫히고 자물쇠가 채워졌다. 동굴 안은 꽉 막혀 버렸다. "이제......" 치셤 신부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겨우 우리들만 있게 되었군요." 그러나 아무도 대꾸를 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침묵은 계속되었다. 몸집이 자그마한 박사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아내를 팔로 안고는 작은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내 아내는 성홍열을 앓았답니다. 처음 중국에 온 그 해였지요. 아내는 머리에 몹시 신경을 썼답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를 써 왔는데도......" "보긴 누가 봤단 말입니까" 하고 프랜치스는 얼른 호의적인 거짓말을 했다. "요수에도 나도 입이 무거우니까요. 파이탄에 돌아가게 된다면-손해도 곧 보상될 겁니다." "들었소, 아네스. 이제 그만 진정해요." 부인의 흐느낌은 점차 잦아들고 이윽고는 아주 들리지 않게 되었다. 피스크 부인은 눈물로 얼룩진 눈-마치 타조와 같이 가장자리가 불그레한 눈을 살며시 들었다. "신부님의 친절하신 말씀, 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목이 메이는 모양이었다. "남아 있는 게 이것뿐인데 혹시 필요하시면 쓰세요" 하고 프랜치스 신부는 안주머니에서 커다란 밤색 손수건을 꺼내 주었다. 부인은 쑥스러운 얼굴로 받아 들고는 실내용 스카프처럼 귀 뒤에서 잡아매어 머리를 가렸다. "아, 그거 참 근사한데." 피스크 박하가 부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정말 좋아요. 예뻐졌어요." "어머, 정말이에요." 그녀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다소 기운이 나는 모양이었다. "자, 이제 이 비참한 야오빵(지하 감옥, 굴)을 무슨 방법을 쓰든 지 치워서 깨끗이 만들어야겠어요." 길이 9피트도 안 되는 동굴 안은 깨진 토기 그릇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어두컴컴했으며 눅눅한 습기가 가득 차 있어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햇빛과 공기는 울타리를 친 틈사이로 조금 들어올 뿐 무덤처럼 음침했다. 그렇다 해도 그들은 매우 지쳐 있었으므로 땅에 몸이 닿자 곧 잠들고 말았다. 문을 여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오전이 다 지나 버렸다. 꿈과 같은 햇살 한 줄기가 굴속까지 비치는가 했더니 한 여인이 따뜻한 물을 담은 주전자와 검은 빵 두 개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 여인은 치셤 신부가 빵 하나를 피스크 박사에게 주고 또 하나는 요수에와 둘로 쪼개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가무스레하고 무뚝뚝해 보이는 것이 왠지 마음을 끌어 프랜치스는 다시 한 번 그녀를 살펴보았다. "아아니!" 그는 엉겁결에 소리쳤다. "안나가 아니냐!" 여인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똑바로 쏘아보고 있다가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저 여인을 아시는지요?" 피스크 박사가 물었다. "확실치는 않은데.......아니, 틀림없네. 성당에서 길러 준 아이인데.......달아나 버렸지." "교육을 시켰던 것도 그다지 쓸모가 없는 모양이지요?" 피스크 박사는 신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글쎄요." 그날 밤은 한 사람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감금의 부자유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 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축축한 공기라도 마시기 위해 차례로 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몸집이 작은 박사는 계속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지독한 빵 때문이오! 온통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군요." 다음날 점심때, 안나가 다시 어제보다 좀 양이 많아 보이는 좁쌀죽과 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치셤 신부도 어제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따위의 바보스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 "우린 언제까지나 여기에 있어야 되는 건가?" 처음 여인은 전혀 대답을 하지 않을 것 같더니 냉담하게 말했다. "군인 두 사람이 파이탄에 파견되었으니까, 돌아오는 대로 나갈 수 있겠죠." 피스크 박사는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갖다 줄 수 없겠소? 담요도 좀 갖다 주시오. 돈을 줄 테니까." 여자는 겁먹은 눈으로 고개를 흔들더니 밖으로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문을 쾅 닫아 버리고는 문살 틈으로 말했다. "돈을 주고 싶으면 줘요. 하지만 그다지 오래 머물지는 않을 텐데요. 중요한 일도 아니면서."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여인이 사라지자 피스크 박사는 중얼댔다. "이 뱃속을 갈라 보이고 싶군." "기운을 내세요, 여보. 마음 약한 말씀은 하지 마시고." 피스크 부인이 컴컴한 구석에서 조용히 말했다. "전에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었잖아요." "그래, 그땐 그래도 젊었었지. 이번처럼 나이를 먹고 보면, 또 귀국을 얼마 앞두고 당한 일은 아니잖소. 와이츄라는 녀석은 선교사 보기를 원수같이 한다는 거야. 나쁜 짓만 일삼고 돈을 강탈하는 녀석에게 잘 걸려든 미끼지." "모두들 기력을 잃지 말아야 해요. 무슨 방법으로든 기분을 좀 풀어 봅시다. 이러다간-또 두 분이 그 지겨운 종교 토론을 시작하고 말 테니까요. 게임이라도 해봐요. 뭐 재미있는 게임이 없을까? 아, 그렇군요. 동물, 식물, 광물에 대한 스무고개를 합시다. 요수에, 눈떴어요? 그럼 시작해요. 방법을 설명하겠어요." 그들은 절망감에서 벗어나려고 최선을 다해 게임을 했다. 요수에는 아주 척척 잘도 맞추었다. 돌연 피스크 부인이 밝은 목소리로 웃음소리를 내었으나 곧 모두들 입을 다물어 버렸다. 급기야는 더욱더 깊이 저며 드는 듯한 음울한 침묵이 엄습해 왔다. 잠이 든 듯했으나 곧 깨어나고 모두들 안절부절하며 뒤척였다. "웬일인지 모르겠구나. 이제 돌아올 때도 되었을 텐데." 다음날도 피스크 박사의 입에서는 줄곧 절망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그는 얼굴도 손도 뜨겁게 열이 오르고 있었다. 공기와 수면 부족으로 얻은 병이었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까.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개들이 요란히 짖어 대는 소리로 보아 군사들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 소동이 가라앉다 다시 무거운 정적이 왔다. 얼마나 흘렀을까, 발소리가 다가오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내보내라는 명령이 내려졌는지 군사들은 네 사람을 밖으로 끌어냈다. 신선한 공기와 자유로운 감각이 전신에 와 닿자 다시 살아난 기분이었다. "아아, 고맙군." 피스크 박사가 외쳤다. "이젠 살 것 같군." 군사의 감시를 받으며 네 사람은 와이츄 앞으로 끌려갔다. 와이츄의 방안에는 램프와 긴 담뱃대가 우선 눈에 들어왔고, 그는 야자 껍질로 만든 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천장은 매우 높았고 여기저기 헐어 버린 방안에는 씁쓸한 아편의 악취가 코를 찔렀다. 와이츄의 옆에는 피가 스민 더러운 헝겊으로 팔을 싸맨 군인 하나가 서 있었다. 병장까지 다섯 명의 부하가 등나무 막대기를 들고 벽에 붙어서 있었다. 포로들이 끌려들어오자 공포에 가까운 침묵이 흘렀다. 와이츄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에 길게 찢겨진 눈을 더욱 잔혹하게 빛내며 차례로 훑어보았다. 그 눈길의 잔인함은 일행의 심장을 그대로 얼어붙게 했다. "선물을 받으러 갔던 부하들은 선물 대신 탄환을 받아 하나는 죽고 하나는 부상을 당했어." 프랜치스 신부는 등골에 찬물을 끼얹은 듯 소름이 오싹 끼쳤다. 두려워하던 일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그는 입은 열었다. "뭔가 전달이 잘못된 것 같군요. 겁이 난 짐꾼이 파이탄이 아니라 샹시의 자기 집으로 도주했는지도 모르잖소." "네놈은 너무 말이 많다. 저놈 종아리를 열 번 쳐라." 프랜치스는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벌은 엄했다. 군졸은 길고 네모난 몽둥이로 그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후려쳐 살점을 뚝뚝 떼어놓았다. "심부름꾼은 우리의 짐꾼이었어요." 피스크 부인은 분노를 참지 못하여 창백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도망친 게 신부님 탓이 아니잖아요." "네년도 너무 말이 많구나. 따귀를 스무 번 갈겨라." 무지막지한 손바닥이 그녀의 뺨을 후려치는 것을 곁에서 보고 있던 박사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몸서리쳤다. "자, 주둥이를 더 놀려 봐. 네놈의 짐꾼이 도망갔다면 왜 내 부하가 총알 선물을 받았느냐 말이다." 치셤 신부는 근래 파이탄에서는 수비대가 항시 경비를 하고 있으므로 와이츄의 군사라면 보는 즉시 쏘는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또 사실이 그랬으나 그는 잠자코 있는 게 상책이라 여겨 입을 열지 않았다. "이젠 또 입을 열지 않을 모양이군. 고의적인 묵비권의 벌로 어깨를 열 번 쳐라." 그는 또 맞았다. "함께 교회로 갑시다." 피스크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양손을 내저으며 애원했다. "일각의 지체도 없이 당장 돈을 내놓겠소. 신을 두고 맹세하리다." "나를 바보로 아는가?" "그럼 군사 한 사람을 내 편지를 가지고 초롱 상가로 가도록 하시오. 당장 보내 주시오." "그래서 그놈까지 죽이고 말겠단 말이냐. 나를 바보라고 생각한 벌로 열 다섯 대를 쳐라." 고통을 참지 못한 박사는 울음까지 터뜨리고 말았다. "불쌍하게도 독기만 남은 사람이군, 당신은" 하고 박사는 울면서도 계속 말을 했다. "당신을 용서하겠지만 정말 가엾게도 독한 사람이야." 모두들 당당해졌다. 와이츄의 찢어진 눈이 흐뭇한 듯 둔하게 번쩍였다. 이번엔 요수에를 향했다. 소년은 아주 건강하고 강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고, 와이츄에겐 그런 외형의 새 군사가 필요했다. "어때, 네놈은 군사가 되어 보상을 하고 싶지 않나?" "영광의 말씀입니다만" 하고 요수에는 똑똑하고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일은 할 수가 없습니다." "외국의 미신 따윈 믿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줄 테다." 소년이 항복하게 되면 당해야 할 고통과 굴욕을 이미 각오한 바이지만 치셤 신부에게는 잔혹한 불안의 순간이었다. "전 거룩하신 천주님을 위해 기쁘게 죽겠습니다." "서른 번을 쳐라.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벌로." 요수에는 신음 소리도 내지 않았다. 눈을 내리깐 채 그 벌을 고스란히 감수하며 신음 소리 한 번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치셤 신부는 한 번 때릴 때마다 몸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이쯤 해서 네놈이 저 소년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 게 어떠냐?" "싫소." 요수에의 용기에 마음이 밝아진 프랜치스는 간단히 잘라 말했다. "괘씸하게 고집을 부리는 벌로 다리를 스무 번 더 쳐라." 프랜치스는 스무 번째 내려친 몽둥이에 종아리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까무러치고 말 것 같은 고통이 뇌수를 찔렀다. "오오, 주여!"프랜치스는 꼭 다문 입술 속으로 중얼거렸다. 노인의 뼈는 마디마디 으스러지는 듯했다. 와이츄는 이제 끝났다는 듯이 일행을 둘러보았다. "더이상 네놈들을 보호할 수 없다. 만일 내일까지 돈이 오지 않는다면 네놈들은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와이츄는 네 사람을 밖으로 내보냈다. 치셤 신부는 간신히 다리를 지탱하고 절룩이며 안마당을 지났다. 굴 속 감방으로 돌아오자 피스크 부인은 재빨리 그를 앉히고 자기도 무릎을 꿇고 앉아 장화와 양말을 벗겼다. 다소 생기를 찾은 박사가 프랜치스의 부러진 뼈를 손으로 맞춰 놓았다. "기브스할 막대기도 없고......이런 걸레쪽 같은 것밖에 없으니." 박사의 음성은 매우 떨리고 있었다. "지독한 골절이야. 안정하지 않으면 귀찮게 되겠는걸. 이것 좀 봐요. 내 손이 이렇게 떨리니. 주여, 구해 주옵소서. 내달엔 고국에 돌아갈 참이었는데 어째서 이런......" "여보, 제발 그만해요." 부인은 다정하게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를 위로했다. 박사는 잠자코 붕대를 감았다. 부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모두들 기운을 차려야 해요. 지금부터 이런 상태면 내일은 어떻게 버티죠?" 그 말이 효과가 있었다. 모두들 단단한 각오로 몸을 곧추세웠다. 아침이 되자 네 사람은 다시 안마당으로 끌려나갔다. 안마당엔 이미 투엔라이 주민들이 이제 곧 벌어질 구경거리를 기대하며 와글거리고 있었다. 네 사람은 각각 뒤로 묶여져서 팔 사이마다 막대기가 끼워졌다. 그 막대기의 양쪽 끝을 두 군사가 잡고는 마당을 여섯 번이나 빙빙 돌리더니 탄환 자국이 가득한 집의 정면에 앉아 있는 와이츄 앞에 한 줄로 세웠다. 부러진 다리의 통증으로 치셤 신부는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고 더욱이 그 굴욕은 견디기 어려웠다. 다같이 신의 손길로 만들어진 인간이 자기와 똑같은 인간의 피와 눈물로써 잔치를 벌이려고 하다니, 이 무슨 절망스럽고 우울한 사건이란 말인가.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땐 결코 이런 의도로 만들진 않았을 텐데......아니, 어디에도 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심한 공포심과 의혹감을 떨쳐 버리려는 그는 필사의 노력을 했다. 몇몇 군사들이 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고, 그는 진심으로 자기의 최후가 곧 찾아오기를 고대했다. 그러나 한참 후 와이츄의 신호에 따라 군사들은 방향을 바꾸어 일행의 다리를 잡고 가파른 언덕으로 끌고 내려가 강속에 처넣었다. 잔뜩 흥미를 가지고 겁에 질린 눈으로 지켜 보고 있는 구경꾼들 앞에서 그들은 한사람씩 깊이가 5피트쯤 되는 강물 속에 내던져지고 배를 묶어 두는 말뚝에 묶여졌다. 당장 총살이라는 생각에 공포감에 질려 있던 그들은 너무나 갑자기 강으로 끌려와 어리둥절했었지만, 그러나 토굴 안에서와는 대조적으로 그 퀴퀴하고 습기가 밴 불결감이 맑은 물 속에 금방 다 씻겨 가는 듯해서 오히려 기분이 상쾌했다. 무엇보다도 물에 잠기는 것이 마치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어서 좋았다.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은 차고 수정같이 맑았다. 프랜치스는 다리의 아픔도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피스크 부인도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용기는 참으로 훌륭했고 그녀의 미소를 머금은 입술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몸은 깨끗해지겠죠." 하지만 30분도 못 되어 사태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치셤 신부는 다른 사람을 쳐다볼 기력도 없었다. 처음엔 참으로 시원하다고 느껴졌던 강물이 점차 차가워져서 발끝부터 둔한 마비를 일으키는가 싶더니 이제는 진저리가 처지도록 차갑고 예리한 감각이 전신을 꿰뚫는 것 같았다. 얼어서 조여드는 듯한 심장에 억지로 피를 보내려는 동맥이 한 번씩 뛸 때마다 숨이 막히는 고통을 주었다. 충혈된 두 눈은 몸뚱이에서 따로 유리되어 나가 벌건 안개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프랜치스는 이렇게 고문을 받는 까닭을 알아내려고 애를 썼다. 이 고문 방법은 폭군 창제가 창안한 것으로 시대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많이 이용되어 오며, 일종의 새디즘적 행위인 '물고문' 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와이츄가 이 고문을 쓰고 있는 목적은 아직도 몸값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 있다. 참을 수 없이 괴롭지만 죽지는 않는 이 잔혹한 형벌은 와이츄에게는 더할 수 없는 좋은 오락이 될 수도 있겠지. 프랜치스는 신음을 삼켰다. 그렇다면 그들의 고통은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이것 참 야릇한 기분인데." 박사는 이가 딱딱 마주치도록 몸을 떨며 겨우 말했다. "이 고통은 완전히 협심증에서 오는 거야......수축된 혈관으로 피를 보내려니까......오오, 주여."; 주님을 찾는 그의 음성은 울음으로 변했다. "오오, 하느님 아버지시여, 진정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가엾은 내 아네스......그대는 기절하고 말았는가. 차라리 그 편이 낫지. 여기가 어딜까. 아네스......아네스......" 그도 곧 의식을 잃고 말았다. 프랜치스는 고통스런 눈으로 요수에를 쳐다보았다. 충혈된 눈에 비치는 소년은 머리만 간신히 떠올라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은 마치 세례자 요한이 목이 잘려 큰 접시에 담긴 모습과 같았다. 가엾은 요수에-그리고 불쌍한 요셉, 그는 장남 요수에를 잃는다면 얼마나 커다란 상심에 빠질까. 프랜치스는 다정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요수에야, 너의 그 용기와 신앙은......내게 참으로 큰 기쁨을 주었다." "이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부님."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프랜치스는 진심으로 감격하여 안간힘으로 계속 이야기했다. "전부터 말하려고 생각해 왔는데, 성당으로 돌아가면 말을 네게 주겠다." "신부님, 정말 우리가 성당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 말이다, 천국에서 탈 수 있도록 하느님이 더 훌륭한 말을 네게 주실 거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요수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부님, 저는 역시 성당으로 돌아가서 그 작은 말을 타는 게 더 낫겠어요." 프랜치스가 귓전으로 큰 파도가 왈칵 덮쳐 오는 것을 느낀 순간 두 사람의 대화는 캄캄한 물결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프랜치스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흠뻑 젖은 몸으로 누워 있는 것을 알았다. 몽롱한 의식을 집중해 보려고 할 때 아내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피스크 박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오. 여전히 불평 섞인 어조였다. "그 무서운 강에서......그래 겨우 이제야 빠져나왔단 말인가." "네, 여보. 이제야 꺼내 줬어요. 하지만 내일이면 그 악당이 우리를 다시 물 속으로 집어넣을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남편에게 점심 메뉴를 이야기하듯 상냥함이 넘치고 있었다. "여보, 우리 자신으로 속이지 말도록 해야겠어요. 이렇게 살려 주는 것도 아마 될 수 있는 대로 잔학한 살인을 하기 위해서일 거예요." "당신은......그게 무섭지 않소. 아네스?" "무섭지 않아요. 그러니 당신도 무서워할 것 없어요. 그 불쌍한 이교도나......신부님에게도......뉴잉글랜드의 그리스도는 어떻게 죽는가를 보여 줘야 해요." "아네스......당신은 참으로 용감하구려." 프랜치스는 그녀가 남편을 가슴에 꼭 껴안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문득 도망칠 길은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빨을 악물고 이마를 땅에 박은 채 어떻게든 달아날 길은 없을까 하고 새로운 문제에 몰두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그 여인이 밥을 가지고 들어오자 그는 느닷없이 여인과 문 사이를 가로막고 호소를 했다. "안나! 너는 틀림없이 안나지. 아니라고 부인하진 못할 거야. 성당에서 너를 길러 준 은혜를 설마 잊진 않았겠지." 그녀는 그를 밀어 버리려고 했다. "내 말을 들어 줄 때까지 절대 너를 놓아 줄 수가 없어. 너는 뭐라 해도 하느님의 딸이니까. 우리가 이렇게 죽어 가는 것을 잠자코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지. 하느님의 이름으로 부디 우리를 구해 다오." "난 아무 힘이 없는 걸요." 동굴의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음성만은 다소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할 수 있어. 너는 반드시 할 수 있을 거야. 문을 닫지 말아 다오. 아무도 너를 의심하진 않을 테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시려구요? 말은 모두 감시를 하고 있는데." "말은 필요 없어, 안나야." 어둠 속이었으나 그녀의 반쯤 내리 감은 눈이 의아한 빛을 발하는 게 보였다. "투엔라이에서 걸어서 도망치다간 내일이면 잡히고 말 거예요." "삼판선을 이용하면 달아날 수가 있어. 강을 타고 내려가는 거야." "안돼요."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물살이 얼마나 세다고요." "급류에 휩쓸려 죽는 편이 이곳에 있기보다 낫단다." "빠져 죽거나 말거나 내가 알 바 아니지." 안나는 버럭 화를 냈다. "내가 당신네들을 살려 줄 힘이 어디에 있겠어요." 그때 어둠 속에서 피스크 박사가 팔을 뻗어 안나의 손을 잡았다. "이봐요, 안나. 내 손을 잡아 봐요. 그리고 잘 들어요. 당신이 알 바 아니라니, 그럴 리야 있겠어요. 오늘밤 문을 잠그지 말아 줘요."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안돼요." 여인은 망설이면서 천천히 잡힌 손을 빼냈다. "오늘밤은 안돼요." "꼭 부탁이오." "내일 하겠어요......내일......내일." 그녀는 얼마간 부드러워지는 듯하더니 불현듯 머리를 가로 저으며 동굴 밖으로 뛰쳐나가더니 탕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자 동굴 속은 더욱 침울한 정적이 흘렀다. 그녀가 말을 들어주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설령 내일 약속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무서운 고문을 생각하면 그 약속의 비중은 너무나 작은 희망일 뿐이었다. "난 병이 났나 봐." 피스크는 아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투덜거렸다. 어둠 속에서 피스크가 자신의 가슴을 진찰해 보는 것이 일행의 귀에도 들렸다. "내 옷은 아직도 흠뻑 젖어 있어. 들리지, 이 소리. 숨소리가 완전히 둔탁해졌어......폐렴이 분명해. 오오, 하느님이시여, 저는 종교재판 당시의 고문보다 더한 것이 있으리라곤 정말 생각해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날 밤은 그럭저럭 지나갔다. 춥고 흐린 아침이 왔다. 동굴 입구에 여명이 스며들어오고 안마당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피스크 부인은 창백하고 해쓱한 얼굴에 결연히 숭고한 빛을 띠더니 곧 몸을 꼿꼿이 일으켰다. "치셤 신부님, 당신이 가장 연세가 많으신 분이에요. 오늘 순교를 당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 전에 기도를 하시지 않으시렵니까?" 그는 부인 옆에 무릎을 꿇었다. 일행 모두는 손을 모았다. 이와 같이 정성을 쏟아 기도를 한 일은 아마 그의 생애 처음 있는 일이 아닐까. 프랜치스는 모든 심혈을 기울여 기도했다. 기도가 끝났을 때 병졸이 왔다. 몸이 약해진 까닭인지 강물은 전날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피스크는 물 속에 잠기자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치셤 신부에게는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침례식이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물론 깨끗하게 행해지는 예식이다. 한 방울의 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여기엔 몇 방울의 물이 있을까. 몇백만.......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여기 중국 인구 4억이 모두 구원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 방울씩의 물로....... "신부님! 치셤 신부님!" 피스크 부인이 치셤 신부를 불러 댔다. 부인의 눈은 순식간에 열을 띠고 밝게 빛났다. "언덕에서 모두 우리를 보고 있어요. 보여 줘야 해요. 용감하게 우리 모두 노래합시다. 우리 모두가 함께 부를 수 있는 찬송가가 뭐가 있을까요? 성탄 노래......그래요. 아름다운 곡이에요. 자, 요수에, 월버, 모두 다함께 노래합시다." 부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온 세상의 동포들아, 모두 함께 드높이 환희를 노래하라. 프랜치스도 커다란 목소리로 합세했다. 서로서로 손을 잡고 베들레헴으로 가자. 오후 늦게 서야 정신을 차려 보니 네 사람은 모두 동굴로 돌아와 있었다. 박사는 모로 누워 있었다. 호흡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단념한 듯한 음성으로 힘없이 말했다. "폐렴이야. 어제부터 알고 있었지. 폐첨에 둔탁한 소리가 더 심해지고 있어. 게다가 염발음이라니. 용서해 주오, 아네스......난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이오." 아무도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부인은 하얗게 불은 손바닥으로 남편의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었다. 안나가 동굴에 들어왔을 때에도 그녀는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안나는 먹을 것을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다. 그녀는 문 입고 선 채 기분이 나쁜 얼굴로 일행을 쏘아보다가 겨우 한 마디 던졌다. "군졸들에게 당신들의 저녁밥을 주어 버렸어요. 모두 장난으로 생각해요. 그들이 눈치채기 전에 빨리 도망가요." 일행은 숨을 죽였다. 치셤 신부는 지쳐 버린 몸이었으나 심장은 크게 뛰었고 설마 자기네들이 이 동굴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느님이 널 축복해 주실 거다, 안나. 너는 하느님을 잊지 않았고 하느님께서도 널 저버리시지 않으신 게야."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직 헤아릴 수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프랜치스는 처음 그 눈 오던 날 보았을 때도 그 눈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여하간에 피스크 박사에게 자기의 교육의 보람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그녀는 잠깐 서 있더니 묵묵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동굴 밖은 매우 캄캄했다. 옆 동굴에서 낮은 이야깃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 오. 안마당 저쪽에 와이츄 집의 불빛이 보였다. 바로 부근의 말우리에서와 병사들의 숙소에서도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돌연 개 한 마리가 요란히 짖어댔으므로 그의 신경도 날카롭게 곤두섰다. 약한 바람이 불고 있었으나 높아지는 심장의 고동은 그 바람만으로도 숨이 턱에까지 올라 새로운 아픔을 주었다. 그는 조심조시해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구슬 같은 땀만 비오듯 할 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다리가 평상시보다 세 배는 족히 부어올라 있었으므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는 요수에에게 반쯤 실신을 한 박사를 먼저 삼판선까지 업어다 놓고 다시 오라고 일렀다. 그는 두 사람이 피스크 부인과 함께 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수에는 축 늘어진 박사를 등에 업고 바위 그늘을 따라 조심스럽게 강으로 내려갔다. 그때 돌 하나가 요수에의 발에 채여 굴러 떨어졌다. 그 소리는 마치 죽은 사람도 벌떡 일으켜 세울 정도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 외엔 아무도 들은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5분쯤 지났을 때 요수에가 돌아왔다. 그는 소년의 어깨에 매달리다시피 해서 아픈 다리를 끌고 조용조용 언덕을 내려갔다. 피스크는 이미 삼판선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고 부인은 그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프랜치스는 선미에 앉아 부풀어오른 다리를 두손으로 끌어 나무토막이라도 다루듯 방해가 되지 않게 옆으로 갖다 놓고 팔꿈치로 뱃전에 몸을 기댔다. 그 동안 요수에는 뱃머리에 올라 매어놓은 끈을 풀어 뱃머리 끝에 매달린 단 하나의 노를 단단히 움켜쥐고 배를 띄울 채비를 했다. 그때 벼랑 위에서 갑자기 큰 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들려 오고 이어서 더 왁자지껄해지더니 사람들이 달려오는 발소리가 콩 튀듯 들려왔다. 요수에는 거친 숨소리를 내더니 겨우 끈을 잡아 끊자 그만 뒤로 자빠져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순간 배는 물살에 자유로이 밀렸다. 프랜치스는 죽을힘을 다해 세차게 흐르는 물 한가운데로 배를 밀었다. 정지해 있듯 고여 있는 물가에서 갑자기 물살로 떠밀려 나온 배는 방향을 잃고 빙빙 돌더니 이윽고 물길을 따라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멀리서 횃불이 타오르고 군인들이 한 무리 언덕을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총소리가 한 방 울렸다. 아이서 불규칙적인 총성이 계속 들렸다. 탄알이 수면을 스쳐 갔다. 그러나 삼판선은 이미 빠르게 떠밀려 내려가 사정 거리에서 거의 벗어난 듯싶었다. 치셤 신부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며 검은 벽처럼 보이는 눈앞의 어둠을 응시했다. 돌연 총성이 더욱 요란해졌다. 어둠을 뚫고 매우 묵직한 것이 얼굴을 스치는 것 같았다. 머리 전체가 얻어맞은 것처럼 심한 충격을 받았다. 아픔은 느낄 수 없었다. 얼굴에 손을 가져가 보았다. 피가 질펀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탄환이 위턱으로 해서 오른쪽 뺨을 관통했다.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총탄은 더이상 날아오지 않았고 또 다른 일행은 무사했다. 물살은 이제 어지러울 정도로 급속히 배를 밀어내고 있었다. 결국 이 강물은 황하로 흘러갈 것이 확실했다. 다른 곳으로는 흘러갈 데가 없다. 그는 피스크 얼굴 가까이 몸을 구부려 보았다. 피스크는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그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기분이 어떻소?" "뭐 괜찮은 편이오. 죽어 가는 것에 비하면." 그는 터져나오는 기침을 삼키려고 애를 썼다. "마치 내가 할멈 같아 미안하군, 아네스." "말하지 말아요, 여보." 프랜치스는 마음이 울적해져서 몸을 일으켰다. 피스크의 생명이 점점 꺼져 가고 있음이 분명했고 그는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 자신 역시도 이번 일로 몸의 저항력이 모두 쇠진해 버린 것을 느꼈다. 물결 소리가 높아지는 것으로 보아 격랑이 심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희미한 그의 시력마저 완전히 없어져 버렸는지 아무것도 보이는 것은 없었다. 프랜치스는 하나뿐인 노로 배를 물살 한가운데로 몰아갔다. 배는 쏜살같이 급류에 휩쓸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일행들의 생명을 하느님의 손에 맡겼다. 어떻게 해서 자기네들이 그 무서운 파도에서 살아났는지 생각할 겨를도, 알려고 애쓸 기력도 없었다. 그는 저 늪과 같은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배가 위태위태하게 기울거나 물을 뒤집어쓰거나 할 때 그는 본능적으로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노에 매달리곤 했다. 때때로 삼판선 밑바닥이 빠져 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깊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기도 하고 배가 다 박살이라도 났는가 싶게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리다가 멈추기도 해서 이젠 침몰되고 말았나 보다 하고 마비된 머리로 단념을 하고 있으면 다시 크게 흔들리며 물을 덮어쓰기도 하고 소용돌이에 휩쓸려 빙빙 돌면서 줄곧 떠내려가는 것이었다. 이제 끝인가 하면 물은 다시 쿨쿨 소리를 내며 물보라를 일으켜 배를 집어삼킬 태세였다. 배는 바위투성이인 좁은 수로를 지나치다가 바위에 부딪치고, 나뭇가지에 걸려 그 순간에 튀어 올랐다가는 다시 빙 돌아 물결의 격랑에 세찬 난타를 받았다. 그 바람에 더욱 충격을 받은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배는 아래로 아래로 떠밀려 갔다. 얼마나 떠내려갔을까, 잔잔한 물결 소리에 그는 다시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왔다. 새벽의 여명이 넓고 망망하게 펼쳐져 있는 강의 아름다운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짐작하긴 어려운 일이나 적어도 밤새껏 떠내려왔으니 몇십 리는 흘러왔으리라. 그리고 배는 이제 황하에 도달하여 파이탄을 향해 조용히 흘러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는 몸을 움직여 보았으나 너무나 지쳐 있어서 쇠사슬에 묶인 듯이 꼼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부러진 다리는 천근의 납덩이처럼 무겁고 총에 맞은 얼굴의 아픔은 비로소 맹렬한 치통처럼 솟구쳐 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도 믿지 못할 만큼 마지막 힘을 다 짜내서 몸을 굽힌 채 배 위를 기어 선수로 갔다. 새벽은 점점 밝아 왔다. 요수에는 뱃머리에 웅크린 채 의식을 잃고 있었으나 그래도 숨소리는 들렸다. 푹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바닥에는 피스크 부부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부인은 남편의 머리를 팔로 받치고 물이 닿지 않도록 자기 몸으로 보호하고 있었는데, 놀랍도록 침착하게 두 눈을 뜨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감탄과 놀라움으로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어려운 곤경을 가장 잘 견뎌 온 것이다. 그가 피스크 박사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눈빛을 보이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였다. 이제 가망이 없다는 것이리라. 피스크는 곧 숨을 거두려 하고 있었다. 피스크는 간헐적으로 발작이라도 일으키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가 너무 길어 이미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나 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는 순간 다시 숨을 내쉬곤 했다. 그리고 피스크는 끊임없이 무슨 말인가를 중얼대었고 이미 움직일 줄 모르는 두 눈을 빤히 뜨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 눈이 주위의 사람들을 알아차린 것같이 움직였다. 그리고 꼭 해야 될 이야기라도 있는 듯 입술을 조금 움직였다. 아니 그것보다도 희미한 미소 같은 것이 겨우 떠오른 것뿐이었다. 이윽고 중얼거림이 간신히 말로 되어 나왔다. "치셤, 으스대지 말게.......자네.......안나의 일 말야." 허덕이듯 급한 숨을 내쉬었다. "자네 교육 탓만은 아니었어." 다시 발작이 시작되었다. "내가 뇌물을 주었거든." 기력이라곤 하나 없는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쳐 갔다. "구두 속에 넣어 두었던 비상금 50달러를 안나의 손에 쥐어 주었어."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하느님은 자네를 축복해 주실 거야." 하고 싶은 말을 다하자 그는 기쁜 듯이 눈을 감았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퍼질 때 세 사람은 그가 숨을 거둔 것을 깨달았다. 배 끝에서 프랜치스는 피스크 부인이 죽은 남편의 손을 모으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 손도 밝은 햇빛 아래에 펼쳐 보았다. 양쪽 손목이 다 이상하게 부어 올랐고 붉은 반점이 손에 가득 퍼졌다. 만져 보니 피부 밑에 딱딱한 것이 여기저기서 만져졌다. 의식을 잃고 있는 사이에 독벌레에 물린 것이 분명했다. 한참 지나고 나니 아침 안개가 걷히고 멀리 하류 쪽에 평평하게 생긴 뜸부기 사육배가 몇 척 수면 위에 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프랜치스는 펄떡이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삼판은 흘러갔다......금색의 안개를 뚫고 뜸부기 사육배를 향해서. 13 세월은 흘러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오후였다. 새로 부임해 온 두 사제, 의사인 스티브 먼시 신부와 제롬 크레그 신부는 커피를 마시며 앞으로 있을 송별회 준비에 대한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모든 게 완벽해야겠어. 다행이 날씨는 좋겠는데." "태풍은 이제 끝난 모양이지." 제롬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자랑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주악대까지 있으니까 뭔가 잘 될 것 같지 않나?" 두 젊은 신부는 건강하고 정력이 넘치고 무엇보다도 신앙심이 돈독했다. 의사 학위를 가진 미국인 신부 먼시는 볼티모어 출신이며 키가 커서 6피트는 족히 되어 보였다. 크레그 신부는 키는 작은 편이었으나 어깨가 딱 벌어져 운동선수였음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는 호리웰의 권투 선수였었다. 그는 영국인인데 샌프란시스코의 성 미카엘 신학교에서 2년간 선교사 양성 과정을 거치면서 받은 영향일까, 그 모습 어딘가에 미국적인 상냥함과 유쾌한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크레그가 먼시를 처음 만나게 된 곳 역시 바로 그곳에서였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나자마자 갚은 우정을 느껴 서로 '스티브', '제롬' 이라고 부르며 아주 막역지간이 된 것이다. 물론 때로는 위엄을 지니기 위해 점잖게 대해야 할 때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 파이탄으로 파견된다는 것이 서로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해준 것이었다. "매시 메리 원장에게 오후에 잠깐 와 달라고 부탁했어." 스티브 신부는 커피를 다시 따랐다. 짧은 머리에 남성적인 씩씩한 청년 스티브 신부는 크레그보다 두 살이 많은 것뿐만 아니라 어느 모로 보나 형다운 인물이었다. "그날 일을 함께 의논하자고 말일세. 그분은 친절한 양반이니까 협조해 줄 거야." "물론 좋은 분이야.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제롬, 우리 둘이서 맘대로 할 수 있다면 매우 떠들썩하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쉿! 큰소리로 말하지 말게." 스티브 신부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노인의 귀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둡지가 않네." "그분 좀 엉뚱한 분이야." 뚱한 표정이던 제롬 신부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그분이 위험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자네의 노고였다. 그 나이에 다리가 부러지고 턱이 으스러지고 게다가 천연두까지 겹쳤으니......그런데도 노인의 기력은 굉장한 것이었어." "그건 나도 알지만, 이젠 매우 쇠약해지셨으니까." 먼시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돌아가는 긴 여행에서 제발 건강이나 잘 회복해 준다면 좋겠는데." "괴상한 노인이야. 아니, 실언을 했군. 시대에 뒤떨어진 분이라는 게 더 적절하겠군. 자네 생각나나? 그분이 중태에 빠졌을 때 피스크 부인이 귀국 전에 네 기둥 짜리 고급 침대를 선물했을 때의 일을 말이야. 그 침대로 옮길 때 얼마나 힘이 들었나, '왜 멀쩡한 사람을 눕혀만 놓으려고 하느냐' 하고 화를 내시며 말일세." 제롬은 킥킥하고 웃었다. "그리고 또 있었지. 매시 메리의 머리 위로 고기 수프 그릇이 날아간 일." 젊은 신부는 웃었다. "그만, 그만, 쓸데없는 말은 그만두세. 그분은 보통 분이 아니셔. 잘 사귀어 보면 정말 좋은 분이야. 어느 누구라고 해도 이런 곳에 30년 이상이나 혼자 내버려둔다면 다소는 이상해지는 게 당연할 거야. 우리는 두 사람이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지. 네, 들어오세요." 노크 소리에 이어 원장 매시 메리가 밝고 명랑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원장은 두 젊은 신부들에게 처음부터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 큰아들들을 맞아들이는 어머니 같은 그런 마음이었다고나 할까. 실제로 그녀는 어머니처럼 그들의 옷을 챙겨 주고 속옷까지 꿰매 주며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어서 오세요, 원장님. 한잔 하시지 않겠어요. 절대로 취하는 일이 없고 원기를 돋아 주는 좋은 놈이죠. 자, 드세요. 설탕은 두 스푼? 사순절 동안 원장님이 설탕을 즐기시나 감시해야 되겠어요. 자, 그럼 내일 치셤 신부님 송별회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해 봅시다." 치셤 신부는 낡은 우산을 지팡이 삼아 성 안드레아 성당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산책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이젠 조금만 움직여도 전 같지 않아 몹시 피곤했다. 오래 앓은 탓에 이제는 영 폐인이 된 모양이라고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실로 나이도 많이 먹은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그에게 견디기 힘든 슬픔을 안겨 주었다. 자신으로 놓고 볼 때에는 그다지 달라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사실이 그랬다. 오늘이 지나면 드디어 이 파이탄과도 작별을 해야 하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 같았다. 자신은 성당의 경내에 윌리 탈록과 뼈를 나란히 묻으리라고 생각해 왔다. 주교에게서 온 편지가 새삼 뇌리에 떠오른다. '......각설하고, 자네의 건강도 우려되므로 그 동안의 노고에 감사하며 이 기회에 해외 포교단 일을 그만두고 떠나도록......." -좋다. 하느님의 뜻대로 행하겠나이다! 조그마한 묘지들 앞에 서 있으려니까 죽은 이에 대한 그리운 추억이 잇달아 떠올랐다. 작은 나무 십자가가 즐비한데......윌리부터 시작해서 클로틸드 수녀, 정원사 후노인, 그 밖에도 열 몇 개의 십자가가 나란히 서 있다. 인생 행로에서 이정표가 끝났음을 보여 주는 표식으로. 그는 뙤약볕이 내리쪼이는 들판에서 파리매에게 시달리는 늙은 말처럼 고개를 저었다. 몽상 따위에 약해져서는 안 된다. 그는 낮은 담으로 둘러싸인 새로운 목초지로 눈길을 돌렸다. 요수에가 그곳에서 말을 타고 있었고, 그것을 네 아우들이 감탄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요셉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벌써 마흔 다섯이 된 그는 더 비대해 졌고 이젠 자녀가 아홉으로 늘어난 대식구의 가장이 된 것이다. 그 나머지 아이들과 막내 아이를 버드나무로 엮은 유모차에 태우고 천천히 집 쪽으로 밀며 오후의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훌륭한 가장이자 아버지인 남편이 가족들에게 봉사하고 있는 훈훈한 풍경이었다. 프랜치스는 자기도 모르게 떠오른 미소를 거둘 수가 없었다. 자신의 송별회 준비에 모두들 바쁠 것을 알고 있는 그는 되도록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주위를 돌아보았다. 학교, 기숙사 식당, 레이스나 돗자리를 만드는 작업장, 작년에 그가 앞 못 보는 아이들을 위해 바구니를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교실로 세웠던 작은 별관 등. 그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보잘것없는 것들에 왜 이다지도 애착을 갖는가. 옛날에는 이런 것도 하나의 업적으로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울적한 심정으로는 이것들은 결코 성공적인 것도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무겁게 돌렸다. 새로 증축한 홀에서 매우 서투른 금관악기 소리가 들려 오. 그는 다시 서글픈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다, 그것보다는 그의 얼굴이 찌푸려지고 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젊은 사제들은 엉뚱한 생각들만 하고 있다. 어젯밤에도 이 교구의 지세를 가르쳐 주려고 했더니, 물론 헛수고일 테지만, 의사 신부는 비행기를 이용하면 빨리 가고 어쩌고 하며 중얼거렸었다. 정말 너무나도 변했다. 류촌까지 비행기로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 내가 갈 때에는 걸어서 2주일은 족히 걸리지 않았던가. 오후가 되자 점차 대기가 차게 느껴졌다. 더이상 멀리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또 누구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잔소리를 들을 게 뻔하다는 슬픈 생각을 하면서도 우산대에 힘을 주어 비취 언덕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잊혀진 땅이지만 그 자리에 처음 성당이 섰던 곳이기도 했다. 그는 완전히 황폐해 질대로 황폐해진 폐허에 발걸음을 멈추고 섰다. 대나무가 우거진 낮은 지대는 거의 늪처럼 물이 괴어 있었고 그래도 그 옛날 흙벽돌의 외양간은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지붕밑으로 머리를 굽히고 들어갔다. 그러자 추억의 물결이 밀물처럼 덮쳐 왔다.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젊은 신부가 중국 소년 한 사람만을 데리고 화로 앞에 앉아 있던 그 옛날의 자신의 모습을 눈앞에 보는 듯했다. 검은 트렁크를 제단인 양 복사 소년도 없이 혼자 그 최초의 감격적인 미사를 드린 곳도 바로 여기가 아니 였던가. 그는 그 자리에 부자유스러운 몸으로 그대로 주저앉아 서툴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부디 행위로써가 아닌 의도대로 내 생애를 심판하소서" 하고 탄원했다. 성당으로 돌아오자 그는 옆 현관으로 해서 재빨리 이층으로 올라갔다. 다행히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자기 방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가 있었다. 자기를 위해 뜨거운 물주머니 찜질이니 뭐니 하고 귀찮게 구는 것이 싫어서 그는 이것을 "야단법석이군" 하고 빈정거렸던 것이다. 아무 눈에도 발각되지 않은 것이 몹시 기분 좋았다. 그런데 방문을 연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뜻밖에도 거기에는 챠씨가 와 있었던 것이다. 추위에 파랗게 얼어 인상이 달라 보이던 그의 얼굴이 프랜치스를 보자 밝게 퍼졌다. 예의고 뭐고간에 그는 우선 반가움에 옛친구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와 주셨으면 하고 기다렸습니다." "어찌 오지 않을 수 있습니까?" 챠씨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신부님, 새삼스런 말씀 같지만 떠나시는 것이 정말 저에게는 여간 비통한 일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맺어 오던 우위는 진실로 어디에서도 다시 찾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나 역시 당신과 작별한다는 것이 얼마나 섭섭한지 무엇으로 표현했으면 좋을지 모르겠군요. 여태까지 제게 베풀어주신 친절과 성당을 위해 많은 돈을 희사해 주신 당신은 제게 용기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프랜치스는 조용히 대답했다.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챠씨는 손을 내저으며 그의 입을 막았다. "저야말로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 모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당 정원에 그렇게 자주 와서 평화와 아름다움을 맛보지 않았습니까. 이젠 신부님이 안 계시면 아주 쓸쓸해지고 말겠지요. 그러나 몸이 회복되면 다시 이 파이탄으로 돌아오시는 거지요?" "글쎄 어려울 것 같군요. 이제는 천국에서 만날 날을 즐겁게 기다려야겠지요......." 프랜치스는 엷은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맺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임박한 이 마당에 서로 저세상의 얘기는 맞지 않아요. 다만......" "난 언제나 그런 식의 얘기만 했는데요." 챠씨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망설이며 다시 말했다. "내세가 어떤 것인지 여태까지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나 만일 그런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 당신과 꼭 만날 수 있도록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치셤 신부는 오랜 경험을 해 왔지만 이 말의 뜻을 금방 알아챌 수가 없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챠씨는 매우 난처했으나 솔직히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부님, 언젠가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세상에는 숱한 종교가 있고, 어느 종교에도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있다는 얘기......." 그의 가무잡잡한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데 나는 지금에야 당신의 종교의 문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이상한 소망을 품은 듯합니다."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치셤 신부는 몸이 굳어진 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내게는 진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군요." "벌써 오래 전의 일입니다만 제 자식의 병을 고쳐 주셨을 무렵에도 저는 진정으로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그 당시는 당신의 진정한 생활이, 그 인내와 용기가 내게는 이해되지가 않았지요. 종교의 좋고 나쁨은 그 귀의자의 신앙 태도에 따라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신부님......당신은 당신의 모범으로 저를 정복하신 것입니다." 치셤 신부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것은 벅찬 감동을 숨길 때 하는 그의 평소의 버릇이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종일 내가 한 실패를 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그것 때문에 입이 썼습니다만 당신의 말씀은 내 마음을 다시금 불타오르게 해주시는군요. 이 한순간의 일만으로도 내 사업이 무가치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하여간에.......우정을 위해서라면 제발 그런 짓은 말아 주십시오. 진실한 신앙이 있으시다면 별문제겠습니다만." 챠씨는 결연히 대답했다. "단단히 결심했습니다. 우정과 신앙을 위해서 한 결심입니다. 당신과 나는 형제입니다. 당신의 하느님은 또한 저의 하느님이기도 합니다. 내일 우리 서로 작별한다고 해도 어느 날엔가는 우리 주님 앞에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저는 기쁩니다." 한동안 프랜치스는 아무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 그저 깊은 감동을 감추기 위해 애쓰던 그는 챠씨에게 손을 내밀며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 함께 성당으로 가십시다." 다음날 아침은 아주 상쾌하고 따뜻한 날씨였다. 아이들의 노랫소리에 눈을 뜬 치셤 신부는 피스크 부인에게서 선물 받은 침대에서 빠져나와 절룩거리며 창가로 갔다. 베란다 아래서 아홉 살도 채 안 된 소녀 20여명이 모두 흰옷에 파란 띠를 두르고 그의 방을 향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해님이 방긋 웃는 이른 아침에......." 그는 아이들을 향해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계속되자 그는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그쯤 해 두고 가서 아침을 먹고 오너라." 소녀들은 악보를 접어 손에 들고는 그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이 노래 좋지 않으세요, 신부님?" "아니......그래 좋아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침밥을 먹어야 할 시간이 아니냐." 그가 면도를 하고 있는 동안 소녀들은 다시 그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고는 거기다 다른 노래까지 더 곁들였다. 노래 가사 가운데 '너의 정숙한 뺨에.......' 라는 구절이 나올 때 그는 면도날에 얼굴을 베고 말았다. 조그만 손바닥만한 거울에 천연두 자국뿐만 아니라 지금 빈 자국에서 피가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이자 그는 끌끌 혀를 찼다. "이건 영락없이 악한 같이 생겼군. 흉측한 얼굴이 돼 버렸으니 오늘만은 좀 산뜻하게 보이고 싶은데" 하고 중얼거리며 조심스레 얼굴을 다듬었다. 아침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먼시와 크레그 신부는 매우 정중하게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그를 맞아들였다. 한 사람은 재빨리 의자를 내놓았고 또 한 사람은 얼른 밥그릇 뚜껑을 열고 그의 기분을 맞추느라 제대로 자리에 앉지도 못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짓인가? 자네들 증조부 백 살 난 생일날도 아닐 테고. 나를 그렇게 다루는 건 질색이야. 그만두게나." 그래도 한사코 노인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제롬 신부가 다정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씀을.......지금 저희들은 신부님께 특별한 대접을 해 드리고 있는 게 아니올시다. 다만, 이곳에 첫발을 내디딘 개척자로서의 영예를 드리고 있을 뿐이죠. 그것은 아무리 부인해도 신부님의 몫이니까 당연한 보상으로 받으셔야 하고 또 이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닐세, 의심할 여지가 많다네." 프랜치스 신부의 무뚝뚝한 말엔 상관없이 스티브 신부가 진심으로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신부님의 심정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마는 저희들도 일을 잘 계속해 나갈 결심이니 마음 푹 놓으십시오. 좌우간 제롬과-아니 크레그 신부와 제가 성 안드레아 성당의 규모와 능률을 두 배로 올릴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입니다. 전도사를 스무 명쯤 고용하고요. 물론 월급을 주고 말이에요. 초롱 상가의 신부님의 친구 되시는 분이 지으셨다는 그 메서디스트 교회 앞에 급식소도 설치할 생각입니다. 그 교회에게 여봐란 듯이 해내겠습니다." 그는 자신감에 차서 쾌활하게 웃어댔다. "어디까지나 전통과 신뢰로 뭉쳐진 확고한 카톨릭 성당으로 지켜 나가겠어요. 여기도 비행기가 닿을 날이 있을 테니 그때 개종자 인원을 표시한 그래프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그러면......." "암소들이 집에 돌아오는가." 치셤 신부는 자기의 몽상에 빠져 이렇게 중얼거렸다. 두 젊은 신부는 딱하다는 듯 서로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스티브 신부가 정감 어린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여행 중에도 약 복용하시는 거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신부님. 하루에 세 차례 큰 스푼으로 한 스푼씩 드셔야 합니다. 가방 속에 큰 약병을 넣어 두었어요." "아니 내가 벌써 내버렸다네. 내려오기 저네 빼 버렸으니까." 갑자기 치셤 신부는 몸을 흔들어 대며 파안대소했다. "자네들, 나에 대해선 조금도 염려 말게. 이 고집통에다 악당인 나를 뭘 그리 생각할 게 있나. 자네들도 자부심만 강하지 않다면 앞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네.......항상 친절과 도량으로, 무엇보다도 서양식으로 계란 먹는 법 따위를 중국 노인들에게 가르치려 하지 말고 말일세." "그렇겠지요.......대장부들이라면.......아무튼 염려 마십시오. 잘 해보겠습니다, 신부님." "또 하나! 나는 비행기 같은 건 남겨 주고 갈 능력이 없지만 실용적인 조그만 기념품을 남겨 주고 갈 생각이네. 옛날 은사 신부님께 받은 것인데.......내가 여행할 때 언제나 가지고 다녔다네." 노신부는 식탁에서 일어나 방 한 구석에 세워 둔 라스티 맥에게서 받은 타이탄 체크 무늬의 우산을 스티브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파이탄의 심벌로서도 상당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네 자네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걸세." 제롬 신부는 마치 성인의 유골이라도 받는 듯이 정중하게 우산을 받아들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신부님. 색깔이 아주 곱군요. 중국제인가요?" "그것보다 더 못한 물건인지도 모르네." 치셤 신부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고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려 들지 않았다. 먼시 신부는 친구에게 가만히 눈짓을 하고는 자기 냅킨을 내려놓았다. 그 눈짓은 어떤 음모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크레그 신부가 조용히 일어섰다. "그럼 신부님, 크레그 신부와 전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주 신부님도 오시겠지요." 두 사람은 급히 나가 버렸다. 치셤 신부는 열한 시에 출발할 예정이었다. 방으로 되돌아와서 얼마 안 되는 짐을 모두 챙기고 나서도 출발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다시 한 바퀴 돌아보리라 생각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발길은 자연히 성당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온 순간 그는 그만 감동으로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5백 명에 가까운 신도들이 전부 마당에 나란히 서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쪽에는 주 신부가 데리고 온 류촌의 신도들이었고, 그 반대쪽에는 나이가 찬 여학생들과 대바구니 공장의 견습생들이 줄지어 있었고, 맨 앞줄에는 그가 사랑하는 어린아이들이 매시 메리 원장 수녀와 말타와 그리고 네 명의 중국인 수녀가 서 있었다. 보잘것없는 자기 같은 인간에게로 향한 애정이 담긴 눈길을 대하자 그의 가슴은 갑자기 화끈거리듯 격렬한 감동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물을 뿌린 듯 조용한 정적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 중에서 요셉이 매우 흥분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송별사를 읽는 영광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의자가 슬그머니 프랜치스 앞으로 놓여졌다. 노신부가 안자 요셉이 허둥대는 걸음걸이로 준비된 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는 매우 떨리는 손으로 붉은색 종이를 펼쳤다. "가장 존경하는 천주의 사도님, 참으로 비통한 마음으로 당신의 자식들인 우리는 광막한 대양을 건너 우리를 떠나시려는 당신과 송별하고자 합니다." 송별사는 몇 번이나 요셉의 눈물로 중단됐다 이어졌다. 한참 후에야 찬사와 아름다운 말로 가득 찬 송별사가 겨우 끝이 났다 아내 앞에서 몇십 번이나 연습했을 터인데도 요셉의 목소리는 군중에 압도되어 형편없이 떨렸고 땀까지 흘리며 뚱뚱한 몸을 떨곤 했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요셉을 바라보던 프랜치스는 시선을 떨구었다. 가엾은 요셉......치셤 신부는 자신의 구두를 내려다보며 30년 전의 날렵했던 그 요셉 소년을 생각했다-그 무렵엔 너도 건강해서 내 말고삐를 잡고 달리지 않았느냐. 송별사가 끝나자 5백명의 신자가 다함께 영광송을 합창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구두로 시선을 내리깐 채 둔중한 노래가 높아 가는 것을 마치 자신의 삭신이 으스러져내리는 듯한 느낌으로 듣고 있었다-하느님!-그는 마음속으로 외쳤다.-제발 제가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지 못하도록 도와주소서. 다음은 증정식 차례였다. 그에게서 바구니 만드는 법을 익힌 맹인들 가운데서 가장 어린 소녀가 앞으로 나왔다. 검정치마에 흰 윗도리를 입은 소녀는 원장 매시 메리의 속삭임과 예민한 본능에 의해 똑바른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갔다. 소녀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우편으로 난징에서 주문한 조각이 정교하게 새겨진 도금된 성작을 내밀었을 때 그의 눈은 눈물로 흐려져서 소녀처럼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내 아이들아, 주님의 축복이 있을지어다." 간신히 이 말만 했을 뿐 그는 그 이상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챠씨 소유의 가장 고급인 가마가 눈물로 흐려진 그의 시야에 흔들흔들 가까이 오는 것이 보였다. 프랜치스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가마에 올랐다. 이윽고 가마가 움직이자 펑펑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고, 그에 따라 요란한 연주도 울리기 시작했다. 교황의 행차처럼 일꾼들이 어깨에 맨 가마에 높다랗게 올라앉은 그는 언덕을 내려가면서 우스꽝스러운 악대만을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늘색의 제복을 입은 스무 명 정도의 남학생들이 볼을 불룩거리며 나팔을 불면서 시가를 행진하는 맨 앞에 지휘봉을 흔드는 것은 어여쁜 소녀였다. 깃털이 달린 군모에 흰 장화를 신은 소녀는 유연하게 지휘봉을 돌리며 발을 맞춰 걸어갔다. 거리로 나오니 다정하게 지내 오던 사람들이 상점 앞에 떼를 지어 서서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에서는 다시 폭죽이 터지고 꽃가루가 뿌려졌다. 챠씨의 보트는 조용한 엔진 소리를 내며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마에서 내리는 순간 이젠 정말 작별의 시간이 왔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모두들 그를 둘러싸고 제각기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젊은 사제들, 주 신부, 매시 메리 원장, 말타, 챠씨, 요수에-모두들 나와 있었다. 여자 신도들 가운데는 무릎을 꿇고 눈물로 그의 손에 입을 맞추는 사람까지도 있었다. 그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목이 꽉 막혀 제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정신없이 작은 배에 올랐다. 그러자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신호가 울리자 그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 '성신이어 임하소서' 를 어린이 성가대가 부르기 시작했다. 이 찬미가는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해 아껴 두었던 것이다. 임하소서, 성신이여! 메마른 우리 마음 은우로 적시소서. 9세기에 샤를마뉴 황제(최초의 프랑크 국왕이며 신성로마제국을 일으켜 샤를 1세로 황제가 됨. 741--814년)에 의해 쓰여진 고귀한 찬송가인 이 노래를 그는 아주 옛날부터 좋아했었다. 부둣가에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합창을 시작했다. 임하소서, 성신이여! 연약한 우리 마음 성우로 도우소서. 오오, 이 얼마나 다정다감하고 친절한 배려인가. 노신부의 마음은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평생 잊지 못할 감동으로 인하여 그의 얼굴은 일순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느라고 심하게 일그러졌다. 배가 서서히 부두를 떠나고 있었다. 모두에게 축복을 하기 위해 손을 든 프랜치스의 얼굴은 어수선하게 일그러지고 그 위로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주여! 저 형제들에게 항상 당신의 은총이 같이 하시길.......끝으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게 하소서." 제 5부 귀국 1 밀리 주교의 귀가는 자꾸만 늦어지고 있었다. 주교관의 품위가 있어 보이는 젊은 사제가 벌써 두 번째는 문을 열고 나타나 밀리 주교와 비서는 교구 회의 관계로 부득이 늦어지고 있노라고 일러주었다. 치셤 신부는 일고 있던 자신의 일기장 너머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젊은 사제에게 말했다. "시간을 엄수하는 것은 고위 성직자의 예절이 아닐까요?" "주교님은 매우 바쁜 분이라......" 젊은 사제는 어물쩡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마치 중국에서 온 늙은이를 혼자 내버려두면 은그릇들이 어떻게 될까 걱정된다는 듯한 눈초리였다. 약속 시간은 열한 시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벌써 시간은 열두시 반이 된 것이다. 라스티 맥과의 회견을 기다리던 것도 바로 이 자리에서였다. 그것은 언제의 일이었을까? 놀라운 일이지만 벌써 36년이나 지나지 않았는가. 그는 슬픈 듯 고개를 저으며 혼란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주교에게 부탁해야 할 일들 때문에 자꾸만 신경이 곤두섰던 것이다. 그는 남에게 부탁하는 것을 싫어했고 또 여태껏 부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그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리버풀에서 배를 내려 싸구려 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그곳에서 만나겠다는 회신을 받았을 때부터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구겨진 수단을 부지런히 손질하고 칼라를 깨끗이 했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급히 뛰어온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그렇게 늙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시계를 보았다. 점심때가 훨씬 지났으니 밀리가 함께 점심 식사를 하자고 하겠지. 오늘은 화를 내지 말아야지. 밀리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농담도 나누고, 할 수 있는껏 아첨이라도 해야지. 그러려면 뺨의 상처 자국에 경련이 일지 않도록 주의하자. 경련이 시작되면 꼭 미친 사람같이 보일 테니까...... 한 시 십 분 전쯤 복도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드리더니 곧이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밀리 주교가 들어섰다. 급히 온 듯 흘끔 시계를 보더니 곧 쾌활하게 반갑다는 듯 프랜치스를 보며 말했다. "여어, 프랜치스. 자네를 다시 만날 수 있다니 고마운 일이야. 늦어서 미안하군. 아니, 괜찮아. 일어나지 말고 그대로 앉아 있게. 여기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 이 방이 내 방보다 더 자유스러울 테니." 밀리는 프랜치스 옆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점잖게 앉았다. 그리고 잘 다듬어진 포동포동한 손을 반갑다는 듯 상대편의 어깨에 얹으며 '잠깐, 이 사람 왜 이렇게 볼품없이 늙어 버렸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 파이탄은 어떤가? 상당히 발전했다고 스리스 신부가 말하더군. 나는 그 무서운 페스트가 휩쓸고 간 후의 그 참혹한 거리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네. 그러나 확실히 신의 손길이 함께 계셨던 거야. 아, 그 무렵이 나에겐 개척 시대였다네, 프랜치스. 지금도 가끔 그 당시 일이 그리워." 그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나는 지금 주교에 불과하지만.......그러나 동양의 강가에서 작별하던 때와는 나도 상당히 달라졌다고 생각지 않나?" 프랜치스는 옛친구를 야릇한 기분으로 바라보면서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확실히 세월은 안셀모 밀리를 더 훌륭하게 만들어 주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위 성직자다운 고상한 위엄을 드러내고 있는 그에겐 이미 젊은 시절에 지니고 있던 화려한 기질도 점잖고 원숙한 품위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고 풍채는 늠름했으며, 부드러운 얼굴엔 그 눈빛이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아직도 그에게 젊음의 싱싱함이 풍기고 있는 것에 감탄하며 솔직한 심정으로 말을 꺼냈다. "자네가 이렇게 훌륭하게 보이는 것은 나도 처음인 것 같네." 주교도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나 나나 옛날처럼 젊진 않네. 그렇지만 나는 아직 매우 건강하네. 일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건강해야지 않겠나. 그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자네가 안다면 아마 놀라고 말걸세. 영양식을 먹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까진 좋으나 마사지까지 해야 한다네. 스웨덴 안마사인데, 말 그대로 하느님도 무서워할 만큼 억센 손으로 주물러 댄단 말일세. 그러나 정작 걱정인 것은......" 그는 갑자기 걱정스럽다는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자네 쪽이야.......그간 자네는 건강에 너무 소홀했던 것 같군." "글쎄, 자네 곁에 있으니 나는 마치 낡은 걸레 뭉치가 돼 버린 기분이군, 밀리. 어쩌면 이것이 하느님이 보여 주신 진리인지도 모를 일이야. 하지만 나도 마음은 아직 무척 젊다네. 적어도 생각은 그렇지. 그리고 또 아직 얼마든지 봉사할 수 있는 자신감도 있으니 말일세. 그 파이탄에서의 내 사업은 자네도 그렇게 불만스럽지는 않을 거라고 여기네만......" "아니, 프랜치스군, 자네의 노력은 가히 영웅적이었네. 물론 숫자상으로는 조금 실망도 했네만, 스리스 비서 신부가 마침 어제 보고했었네." 그 목소리에는 상당한 호의가 담겨 있었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자네가 36년동안 개종시킨 신자 수는 롤러 신부가 5년 동안 올린 실적보다 오히려 적었다네. 그렇다고 뭐 자네를 비난할 생각으로 하는 말은 아닐세. 우리는 친구 사이니까. 하여간에 언젠가 틈이 생기면 또 이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얘기해 보세. 그런데......" 밀리의 눈길이 급히 탁상시계 쪽으로 갔다. "뭐 내가 도움이 될 일이라도 있나?" 프랜치스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네......한 가지가 있네. 밀리 주교.......나에게 본당을 하나 주었으면 하네." 그때까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밀리의 표정이 싹 변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눈썹을 치켜올리며 치셤 신부의 조용하나 열의가 담긴 얘기를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티드사이드를 주었으면 좋겠네, 안셀모. 렌톤에 자리가 비었다니까 말일세. 거긴 티드사이드보다 훨씬 크고 좋은 성당이 아닌가. 그러니 티드사이드에 있는 사제를 렌톤으로 영전시켜 주고 나를.......나를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해주었으면 하네." 밀리 주교의 얼굴은 이미 어색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프랜치스, 마치 자네는 내 교구를 관리하고 싶어하는 것 같군 그래." "내가 자네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네. 그렇게만 해준다면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일 걸세." 치셤 신부는 흠칫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음성이 떨려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쉬었다가 그는 다시 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마그냅 주교가 옛날에 나에게 약속한 것일세. 만일 내가 귀국하면 성당 하나 맡기겠다고......" 하면서 그는 안주머니에서 빛바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여기 그 편지를 가지고 있네만......" 밀리는 볼 필요가 없다는 듯 손을 들어 내저었다. "선임자가 남긴 약속을 내가 대행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네......"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밀리 주교는 자못 다정하고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 얘기는 물론 고려해 보겠네. 하지만 지금 당장 뭐라고 약속하기란 곤란한 일이야. 내게도 티드사이드는 매우 그리운 고향이지. 주교좌 성당의 짐을 벗게 되면 나도 그곳으로 가고 싶기도 했었지. 자그마한 별장 같은 것이나 지어서 말이네." 밖에서 들려 오는 자동차 소리에 이어 현관의 인기척에 밀리 주교는 말을 끊고 탁상시계를 보더니 바쁘게 일어서며 말했다. "자, 그럼......무슨 일이든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네. 이제 알게 될 거야. 이제......" "아직 조금 더 이야기할 것이 남아 있네. 물론 자네만 좋다면......" 프랜치스는 급히 말했다. "나는.......집이 필요하다네. 물론 내가 쓸 집은 아니지만 집이 꼭 있어야 할 형편이네." "그런 얘기라면......프랜치스, 다른 때라도 할 수 있지 않겠나." 차가 또 한 대 도착한 것 같더니 밖이 좀더 소란스러워졌다. 밀리 주교는 보라색 수단 앞자락을 여미며 못내 유감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거 정말 미안하네, 프랜치스. 꼭 가야 할 곳이 있다네. 두루두루 오래 얘기하려고 매우 기대했었는데 말일세. 한 시에 시장과 시의회 의원과 점심을 하기로 되어 있다네. 역시 정치가 필요하거든. 제기랄, 교육위원회, 수도원 연합회 재정.......모두가 주고받는 거래야. 요즘은 간혹 주식의 브로커도 돼야 하는 입장이지.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런 일이 싫지 않거든, 프랜치스." "1분 이상은 걸리지 않겠네만......" 프랜치스는 말을 끊고 마룻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밀리 주교는 몸을 일으켜 치셤 신부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듯 하고는 방문까지 이끌고 나갔다. "자네가 돌아온 것이 정말 기쁘네. 그럼 오늘은 이만 실례하고 곧 연락을 할 테니 걱정 말고 기다리게. 잘 가게, 프랜치스. 자네에게 신의 은총이 있기를 빌겠네." 밖에는 대형 리무진 승용차 몇 대가 높이 올려다 보이는 주교관 현관 앞에 세워져 있었다. 바다 너구리로 만든 모자를 쓴 붉은 얼굴, 위엄 있고 존귀해 보이는 얼굴들이 작위를 나타내는 금줄을 늘어뜨린 모피 외투를 입고 있는 모습이 치셤 신부의 눈에 띄었다. 안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여태껏 햇볕에만 익숙해 온 그에겐 몹시 쌀쌀하게 느껴지는 바람이었다. 얇은 여름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터벅터벅 걸어 모퉁이로 돌아갈 때 뒤에서 차 오는 소리가 났다. 그는 몸을 비켰다. 차는 뒤뚱하고 흔들리더니 옆으로 물러나 있는 그의 얼굴에 흙탕물을 튀기고는 달아나 버렸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흙탕물을 닦았다. 문득 수십년 전의 옛날 일이 떠올랐다. 안셀모를 진흙탕에 빠뜨렸던 일이 이렇게 해서 복수로 갚아지는 건지도 모른다. 가슴속은 실망과 피로가 쌓여 왔지만 그래도 그 깊은 밑바닥엔 무엇으로도 끌 수 없는 빨간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아무 데건 가까운 성당에 들어가고 싶었다. 거리 저만치에 높다란 돔을 위로 한 거대한 대성당이 보였다. 그 새로운 모습은 마치 백만 파운드란 돈을 무거운 대리석과 맞바꾼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그 거대한 성당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넓은 계단을 따라 입구로 올라가다가 그는 문득 발길을 멈추었다. 성당문 앞 젖은 돌층계 위에 남루하기 짝없는 옷을 입은 불구자가 '상이 용사를 살려주세요' 라고 쓴 쪽지를 가슴에 핀으로 붙이고 바람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프랜치스는 가만히 서서 그 가엾은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하나밖에 없는 은화를 꺼내어 깡통 속에 넣어 주었다. 프랜치스는 자기도 이 늙어빠진 거지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발길을 돌려 임시 주교좌 성당으로 이용되고 있는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실내는 황홀하고도 아름다웠다. 대리석 기둥과 청동과 회나무를 풍부하게 사용한 벽과 높다란 천장은 우아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파이탄의 그의 성당 따위는 그 한 귀퉁이에 갖다 붙인다 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 정도로 이 성당은 웅장하고 대단한 규모였다. 프랜치스는 서슴없이 높은 제단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오, 주여, 내 평생 단 한번의 소망이옵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제발 저의 뜻을 이루게 해주옵소서." 2 5주일이 지난 후 치셤 신부는 오랫동안 뒤로 미루었던 카크부릿지를 향해 길을 떠났다. 기차에서 내려 역을 빠져 나올 때는 마침 점심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 대공업지의 목면 공장에서 직공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몇백 명이나 되는 여자들이 머리부터 숄을 뒤집어쓰고 빗속을 급히 가다가 기름투성이인 포도를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전차 때문에 잠시 멈췄다가는 다시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는 신작로의 끝부분에서 길을 물어 오른쪽으로 꺾었다. 그리고 이 시의 제사왕의 거대한 동상 앞을 지나 가난한 주민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갔다. 높다란 서민아파트 건물에 둘러싸인 너저분한 광장을 가로질러 골목으로 들어서니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어두컴컴한 골목이라 아무리 날씨가 화창한 날이라 해도 햇빛이 못 미치는 곳이었다. 그때까지는 기쁨과 흥분에 들떠 있던 프랜치스는 이 지저분한 길로 접어들면서부터 갑자기 우울해졌다. 다소 가난하리란 건 예상하고 왔으나 설마 이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나는 얼마나 바보였나. 이런 곳에 방치해 두었다니.......이건 하수구 속에 살고 있는 것과 똑같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니 후회가 되었다. 프랜치스는 아파트 호수를 겨우 발견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배수관이 새는 듯 계단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창문은 더러웠으며, 가스관조차 막혀 있는데다가 햇볕은커녕 공기도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무엇엔가 발이 걸려 하마터면 굴러 떨어질 뻔했다. 계단에는 사내아이가 걸터앉아 있었던 것이다. 안개라도 낀 듯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그 아이는 꼽추였으며 뼈가 앙상하여 툭 불거져 보이는 팔꿈치를 무릎 위에 얹고 무거운 머리를 손으로 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지친 노인 같았으나 겨우 일곱 살이나 되었을까 했고, 피부는 양초 같은 빛깔로 조금 투명해 보였다. 그때 갑자기 아이가 얼굴을 들었다. 창으로 스며든 한 줄기 빛이 그 모습을 비추었다. 비로소 아이의 얼굴을 보게 된 프랜치스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는 집채만한 파도에 휩쓸리는 조각배처럼 결렬한 감정에 휩싸여 주춤 벽에 몸을 기댔다.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본 아이의 창백한 얼굴은 노라와 꼭 닮아 있었다. 깡마른 얼굴에 휑그라니 큰 눈은 틀림없는 노라였다. "이름이 뭐지?" 아이는 입을 꼭 다문 채 앉아 있더니 한참만에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드레아." 계단을 올라가서 바로 문 뒤의 단칸짜리 방안에는 한 여인이 누더기 이불 위에 발을 꼭 앉아 빠른 속도로 재봉틀을 돌리고 있었다. 세간이라고는 눈에 띄는 게 없었다. 빈 달걀 상자 위에 병이 하나 놓여 있었고 주전자와 헝겊 주머니가 몇 개, 귀가 떨어져 나간 컵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달걀 상자 저쪽에는 반쯤 만들어진 싸구려 바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프랜치스는 너무나 초라한 광경을 보고 한참이나 말문을 열지 못했다. "미세스 스티븐스 댁이지요?"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이 때문에 온 사람입니다." 그의 말에 여인은 너무 놀란 나머지 정신을 잃고 바느질감을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그다지 나이가 많은 것 같지는 않았고 마음도 나쁜 사람 같진 않았는데 곤경에 시달려서 그런지 매우 늙어 보였다. "저, 편지는 잘 받았어요." 여인은 우는 듯한 소리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복잡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가로막았다. 듣지 않아도 그녀의 얼굴에 다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저 애를 데려갔으면 합니다만." 프랜치스의 부드러운 말을 들은 그녀는 바늘 자국으로 인해 퍼렇게 부어오른 손등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렇게 부드럽게 나오는 상대의 온화한 태도가 차라리 욕설을 퍼붓는 것보다 더 괴로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저 애를 학대했다고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그 애는 저를 많이 도와주었어요. 저도 그 애한테 될 수 있는 한 잘해 주고 싶었습니다만 생활이 어려워서......" 그녀는 입을 다물더니 갑자기 도전하듯 고개를 쳐들었다. 안드레아는 종이에 싼 꾸러미를 깡마른 가슴에 껴안고 프랜치스 뒤를 따랐다. 그는 매우 착잡한 심정이었다. 아이는 낯선 사람과 처음으로 먼 길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고 게다가 경계심까지 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이 아이를 안심시키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프랜치스는 입을 다물고 안드레아가 따라올 수 있도록 천천히 걷고 있었다. 비로소 그의 마음속에 서서히 기쁨이 솟구치고 있었다. '하느님이 나를 중국에서 떠나 여기에 오도록 하신 것은 오로지 이 조그마한 아이 때문인 것이다.' 두 사람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역까지 걸었다. 기차에 올라서도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삭정이처럼 여위어 보이는 앙상한 목덜미에는 때가 까맣게 끼어 있었다. 아이는 곁눈질로 프랜치스를 엿보는 듯하다가는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려버리곤 했다. 지금 저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커다란 눈 속에는 여전히 공포와 불신감이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무서워할 것 없다. 이젠 이 할아버지와 같이 살 거란다, 알겠지?" "무섭지 않아요." 그러나 아이의 아랫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기차는 카크브릿지 공단의 공해 속을 지나 푸른 강과 전원 사이로 달렸다. 소년은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듯 얼굴에 차츰 밝은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자연의 빛깔이란 그 빈민굴의 어두운 납덩이처럼 내려앉은 하늘과는 이렇게 대조적이란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넓은 들녘과 밭은 이윽고 울창한 푸른 숲지대로 바뀌었다. 갑자기 숲 사이로 은빛 물줄기가 물거품을 뿜으며 골짜기로 흘러내리는 전경이 나타나기도 했다. "할아버니, 우리가 가는 곳도 이런 곳이에요?" "그래,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단다."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기차는 티드사이드에 도착했다. 티드 강변의 경사진 길을 따라 들어선 이 오래된 마을은 그가 어제 떠난 것과 똑같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햇빛을 가득 받으며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눈에 익은 경계 푯말이 차례 차례로 보이자 프랜치스는 기쁨과 그리움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조그만 역을 나와 성 콜롬바 사제관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제 6부 시작의 끝머리 스리스 신부는 자기 방의 창가에서 얼굴을 찌푸리고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구니를 손에 든 미스 모파트가 안드레아와 치셤 신부와 함께 두갈이 반찬거리 채소를 뽑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이가 좋은 이 네사람의 분위기는 스리스 자기만이 소외되고 있는 듯한 초조한 기분을 더해 주었다. 그것이 스리스의 결심을 더욱 굳게 했다. 방 안 테이블 위에는 휴대용 타이프라이터로 찍은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이것은 치셤 신부에게 매우 불리한 증거가 될 서류였다. 그는 한 시간 후에 타인카슬로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면 이 보고서는 오늘밤에 밀리 주교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임무를 마쳤다는 흐뭇한 기분은 있었으나 성 콜롬바 성당에서 지낸 이 한 주 동안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많았다. 상류층에 속하는 뚱뚱한 미세스 그랜드닝을 중심으로 한 그룹 이외의 교구의 신도들은 모두 이 기이한 치셤 신부에게 대단한 경외감을, 아니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제는 치셤 신부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다 대표와 심하게 다투기도 했다. 어딜 가나 자기 고향 출신의 사람을 치켜세우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모르는 그는 아니었다. 그러나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이곳의 장로 교회 목사까지 찾아와서 요즘은 이곳 '감정' 도 굉장히 좋아졌으니 치셤 신부가 이 거리의 사람들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 없도록 기도를 하고 있다는 말을 한 일이었다......굉장히 좋아졌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채소를 뽑던 네 사람이 제각기 흩어져 갔다. 안드레아는 정자로 연을 가지로 뛰어갔다. 노신부는 연을 만드는 데도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지금 그 솜씨로 만든 종이연이 긴 꼬리를 흔들며 하늘 높이 치솟는 모습은 스리스도 싫건 좋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멋진 광경이었다. 무슨 거대한 괴조와 흡사했다. 지난 화요일에도 연을 날리면서 연싸움까지 하는 것을 본 스리스 신부는 한 마디 충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부님, 정말 이런 놀이를 고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노인은 싱긋 웃었다. 언제나 결코 맞서지 않는 그 조용함이 도리어 이 쪽을 초조하게 만드는, 그리고 다정하기까지한 웃음이었다. "중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입디다. 더구나 중국인들은 정말 고상한 국민이지요." "그건 이교도들인 그들의 풍습이 아닙니까?" "오, 그럴 겁니다. 진짜 순진한 민족이지요." 스리스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찬바람에 코를 빨갛게 얼리면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신부는 그렇게 노는 가운데 교육을 하는 것 같았다. 가끔 신부가 줄을 쥐고 있는 사이에 소녀는 정자에 앉아 종이 쪽지에 신부가 하는 말을 적고 있었다. 다 적고 나면 그 종이를 실에 꿰어 하늘 높이 날려보내면 두 사람은 신명이 나서 소리를 지르곤 했다. 스리스는 갑자기 호기심이 나서 소년이 쓴 종이 쪽지를 빼앗아 본 일이 있었다. 바보처럼 보이던 소년은 놀랄 만큼 훌륭한 글씨로 받아썼고, 철자법도 틀린 데가 없었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모든 어리석음과 잔악함에 대해서 감연히 항쟁할 것을 충심으로 맹세한다. 안드레아, 관용이란 최고의 미덕이다. 겸양은 그 다음이다.' 스리스는 그것을 읽고 나선 돌려주는 것도 잊은 채 다음 글이 씌어질 때까지 얼어붙은 얼굴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의 육신은 썩어서 한 줌의 흙이 되지만 영혼은 영광과 광명의 천상에서 산다. 하느님은 온 인류의 아버지시다.' 스리스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치셤 신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훌륭한 말씀입니다. 이건 성 바울이 하신 말씀 아닙니까?" "아니오" 하고 노인은 사과라도 하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그건 공자께서 하신 말씀이오." 스리스는 깜짝 놀라고 무안해져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날 밤에 생각지도 않는 토론이 벌어졌다. 노인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고는 교묘하게 화제의 핵심을 피하곤 했다. 마침내 스리스도 참다못해 상대편을 자극하는 말을 했다. "하느님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군요."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라니.......우리들 중에 누가 하느님에 대한 관념이라도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치셤 신부는 웃었다. "우리들이 '하느님' 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이 만든 말뿐이며 단지 우리들이 조물주에 대한 외경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뿐이지요. 그러한 외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눈으로 하느님을 볼 수 있겠지요......아무 두려움 없이 말이오." 스리스 신부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신부님은 신성한 성당을 몹시 경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천만에.......나는 평생을 성당의 품안에 안겨 있는 것을 얼마나 기쁘게 생각하고 있는지 당신은 모를 거요. 성당은 우리들의 위대한 어머니며 우리들......어두운 밤길을 헤매는 순례자의 무리를 인도해 줍니다. 그러나 어머니란 것은 달리 존재하기도 합니다. 또 그 중에는 비틀거리며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가엾고 고독한 순례자도 있을 겁니다." 이것은 그때의 대화의 단편에 지나지 않지만 스리스는 몹시 흔들렸다. 그날 밤에는 무서운 악몽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악몽 속에서 온 집안 식구가 잠든 동안 그의 수호 천사와 치셤의 수호 천사가 만나 본직을 내팽개치고 함께 아래층 거실로 술을 마시러 갔다. 치셤의 천사는 조그마한 예쁜 아기 천사 같았으나 그의 천사는 불만스러운 눈을 하고 날개를 거꾸로 세우고 있는 듯한 늙은 천사였다. 두 천사는 술을 마시면서 치셤과 스리스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치셤은 감상적이라고 공격을 받았다. 그 이상 시비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의 쪽은......철저하게 공격을 당하고 만 것이다. 자기의 천사가 더럽게 욕설을 퍼붓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제까지 내가 맡은 신부 중에서 가장 처치하기 곤란한 놈이야.......이상한 편견이 있고 현학적이며 야심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못돼먹은 것은 입이 더럽단 말이야." 스리스는 자기 천사의 불만스런 말을 듣다가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나 끔찍스러운 꿈이었던가. 몸이 떨리고 골치가 아팠다. 그런 악몽 따위를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낮에 생각한 일이 이상한 현상으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으리라. 예를 들면 파라오의 아내가 꾸었다는 꿈과 같이 성서에까지 나타나 있는 그런 믿을 수 있는 꿈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는 불순한 생각이라도 떨쳐 버리듯이 꿈에 대한 생각을 잊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지금 창가에 서 있으려니까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있고 현학적이며 야심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가장 못된 것은 입이 더럽다' 는 말이 귀에 쟁쟁하게 울려오는 것이었다. 분명히 그는 안드레아에 대해서는 오해를 한 것 같았다. 그때 안드레아가 바구니를 들고나와 갓 따 놓은 오얏과 배를 두갈과 함께 빈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년은 그 바구니를 들고 집 쪽으로 걸어왔다. 스리스 신부는 문득 안드레아가 어떻게 하는가를 살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것은 자기에게로 가지고 오는 선물임에 틀림이 없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스리스 신부는 이렇게 생각한 자기가 미워지면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또 마음이 어지럽고 초조해졌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그는 평온한 마음을 가지려 애쓰며 대답했다. "들어와요." 안드레아는 방안으로 들어와 테이블 위에 과일을 올려놓았다. 소년은 자기가 스리스 신부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을 느끼는 듯 부자연스러운 얼굴이었다. 2층으로 오면서 줄곧 외우고 온 듯한 전갈을 또박또박 말했다. "치셤 신부님께서 이것을 신부님께 갖다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오얏은 참 달고 배는 마지막으로 딴 것입니다." 스리스 신부는 소년을 바라보면서 이 간단한 말에도 다른 뜻이 포함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치셤 신부는 어디 계시냐?" "아래층에서 신부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내 차는?" "두갈이 지금 현관 앞으로 몰고 왔습니다." 스리스는 나가려는 안드레아를 불러 세웠다. "안드레아!" 스리스가 한 걸음 다가갔다. "내려가는 길에 저 과일들을 내 차에 넣어 주지 않을래......그렇게 해준다면 나도 좋고 너도 예의를 더 배운 셈이 될 거다." 소년은 얼굴을 붉혔지만 조용히 돌아서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바구니를 드는 순간 오얏 한 개가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안드레아는 귀밑까지 빨개지면서 허리를 굽혀 서툴게 집어들었으나 오얏의 껍질이 벗겨져 즙이 흘렀다. 스리스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안드레아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그건 못쓰게 됐잖아......그렇지?" 안드레아는 대답을 못했다. "어떻게 되었는지를 묻고 있는 거다." "네, 못씁니다." 스리스 신부의 차가운 미소가 더욱 싸늘해졌다. "너는 고집이 센 아이구나. 일주일 동안 줄곧 살펴보았지만 넌 고집이 세고 버릇도 없어. 왜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느냐?" 안드레아는 간신히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스리스 신부의 눈과 마주치자 겁을 먹고는 몸을 덜덜 떨었다. "남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것은 양심이 나쁜 증거야. 게다가 행실도 좋지 않고......랠스톤에 가서 예의 범절을 배울 필요가 있다." 안드레아는 아무 말도 못했으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스리스 신부는 차가운 미소를 띈 채 말을 계속했다. "왜 대답을 하지 않니. 고아원에 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냐?" 안드레아는 주눅이 들어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옳은 일은 하고 싶겠지?" "네." "그렇다면 가야 해. 가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꼭 가야 해. 자, 과일은 자동차에 실어라. 한 개도 떨어뜨리지 않도록 해라." 안드레아가 나간 뒤에도 스리스 신부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두 팔을 늘어뜨리고 양손은 주먹을 쥐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차가운 미소가 굳어진 채로 였다. 자기에게 그런 가학성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그 잔혹한 행위는 오히려 그의 어두운 영혼을 정화해 주는 것 같았다. 그는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고서를 집어들자 조금도 주저 없이 갈기갈기 찢어서는 마룻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신음 소리를 내며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오, 하느님이시여!" 그의 입에서 간절한 탄원이 흘러나왔다. "저 노인에게 주신 것과 같은 훌륭한 교훈을 저에게도 내려 주옵소서. 그리고 제가 제발 저 노인과 같은 초연한 인간이 되도록 하시옵소서!" 그날 오후 스리스 신부가 떠나자 치셤 신부와 안드레아는 살며시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소년의 눈은 아직도 부어 있었으나 뭔가 희망에 부풀어 빛나고 있었으며, 얼굴도 겨우 안심을 되찾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