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지바고 2 지은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옮긴이: 오재국 출판사: 범우사 바르이키노 1 겨울이 깊어지면서 시간이 많아지자 지바고는 생각나는 대로 여러 가지 글을 쓰기 시작하 였다. 오 여름, 아름다운 여름이여! 이건 절묘, 바로 그것. 그래서 난 묻고 싶구나, 소리없이 언제 왔느냐고. 새벽부터 밤까지 자기와 가족을 위하여 땀흘려 지붕을 만들고 식량을 얻기 위해 땅을 파 며, 전능하신 조물주를 본받아 로빈슨 크루소처럼 자기 세계를 창조하고, 어머니와도 같이 새로운 자기를 탄생시키는 일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닌가! 두 손이 심한 육체 노동에 바삐 움직이며 마음이 육체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때, 기쁨과 성공을 가져올 일을 우리에게 맡겼을 때, 생명을 불어넣어 준 하늘에 몸을 불태우면서 여섯 시간 동안이나 쉬지 않고 땅을 파거나 마차에 뒤흔들릴 때 새로운 사상이 구름처럼 머리 속 에 끓어오르는 것이다. 이러한 잠시 동안의 생각, 직관, 추측 따위를 종이에 적어두지 않고 잊어버린다는 것은 손해보다는 이득이 되는 것이다. 독한 블랙커피나 담배 연기에 신경과 상상력을 쥐어짜는 도시의 은둔자들에게 무엇보다도 잘 듣는 약-그것은 건강과 진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나는 톨스토이의 인내 생활이나 땅으로 돌아가라고 설교하 는 것도 아니며 또 농업 문제에 대하여 사회주의를 수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며, 우리들 자신의 우연한 경험을 바탕으로 체계를 세워보려는 것도 아니 다. 우리의 예는 많은 이론이 있을 수 있으며,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의 경제는 너무 나 혼란되어 있다. 우리들이 생산하는 감자나 채소 따위는 필요한 양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 으며 나머지는 딴 곳에서 얻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의 토지 사용은 불법적인 것이다. 우리는 제멋대로 하고 있는데다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국가에 숨기고 있다. 우리가 숲에서 재목을 베어내는 것은 국가로부터 훔친 것이 되는 것이지, 그것이 한때 크류게르의 재산이었던 때문은 아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 은 미쿨리츠인의 너그러운 태도 덕분이었다. 그도 우리와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 고 그것은 도회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다행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전혀 알지 못했 기 때문이다. 나는 의사일을 집어치웠으며, 내가 의사라는 것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나의 자유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이키노에 의사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어떤 선량한 사람들이 30베르스타나 되는 길을 멀게도 생각지 않고 진찰을 받으러 왔다. 이 들은 닭, 달걀, 버터 따위 물건을 가지고 왔었다. 나는 보수를 받지 않으려고 극구 사양했으 나 이들은 공짜 치료를 받게 되면 병이 낫질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진료 행위 덕분 으로 그럭저럭 조금의 수입이 생겼다, 그러나 미쿨리츠인과 우리가 가장 크게 의지하고 있 는 사람은 삼제바토프 씨이다. 그는 걷잡을 수 없이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진정으로 혁명을 지지하고 유라친 시 소비에트가 신뢰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소비에트가 부여한 권한을 행 사한다면 그는 미쿨리츠인이나 우리한테 한마디도 없이 바르이크노의 목재를 징발할 수 있 을 것이며, 우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못할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그가 국가 재산을 훔치고 싶은 생각만 있다면 그는 호주머니를 가득 채울 수도 있으며, 누가 말할 사 람도 없고, 누구와 나눠 먹거나 뇌물을 줄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우릴 돕고 미쿨리츠인과 토르피나야 역장을 비롯한 이 지방 모든 사람들을 돕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 까? 그는 언제나 뛰어다니면서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우리한테 가져온다. 또 그는 <<공산 당 선언>>과 똑같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잘 읽으며 또 논하길 즐겨했다. 나의 생각으로는, 아마 그의 생활이 그처럼 복잡한 것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고독에 지쳐 벌써 죽 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2 얼마후 지바고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저택 뒤의 낡은 목조 건물 두 칸짜리 별체에 살고 있다,, 토냐가 어렸을 때, 크류 게르는 이 별체에 재봉사와 가정부 또 퇴물이 된 유모와 같은 특별한 하인들을 살게 했었 다. 우리가 왔을 때, 이 집은 매우 초라해서 우리는 급히 이것을 수리했다. 일꾼의 도움을 받 아서 페치카를 새로 놓고 굴뚝을 바로 세워서 지금 두 방은 따뜻해졌다. 공원이 있는 이 근처에는 새로 자라난 초목으로 해서 낡은 흔적이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겨울이 닥친 지금은 모든 것들이 생기를 잃게 되어 생명을 가지고 있던 자연도 이미 죽어간 것들을 감추지 못하게 되었다. 과거의 흔적이 눈 속에 파묻혀 버렸으며 뚜렷이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가을은 건조하고 따스한 날씨였다. 비와 추위가 닥치기 전에 감자를 캐낼 수가 있었다. 미쿨리츠인한테 돌려줄 것을 제외하고도 20부대나 되는 감자가 생겼다. 우리는 이 감자를 저장고 제일 큰 상자 속에 담고 낡은 담요와 짚으로 덮었다. 지하실에는 토냐가 소금에 절인 오이와 양배추가 각각 두 통씩 놓여 있었으며, 대들보에는 싱싱한 양배 추를 두 포기씩 걸어두었다. 마른 모래 속에는 당근, 무, 사탕무우, 순무우 등을 저장해 넣 고, 높은 장소에는 완두나 콩 따위를 잔뜩 저장했다. 창고 속에는 봄까지 쓸 수 있는 충분한 나무가 마련돼 있었다. 나는 지하실의 훈훈한 입김을 좋아했다. 겨울날 이른 새벽에 희미하게 비치는 등불을 손 에 들고 지하실로 내려가 문을 여는 순간, 흙과 나무와 무우와 눈의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찌 른다. 지하실에서 나오면 날은 아직 밝지 않았다. 문의 삐걱거리는 소리, 재채기 소리, 그리고 말밑에서 눈이 밟히는 바스락 소리만 들린다. 멀리 양배추 밭에서 산토끼가 뛰어나와 눈 위 에 이리저리 발자국을 남기면서 뛰어 달아난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여오기 시작하면 좀처럼 그치질 않는다. 새벽닭 우는 소리도 이미 그치고 먼동이 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끝없는 눈 벌판위에는 산토끼 발자국만이 아니라 삵괭이 발자국이 구슬끈처럼 이어져 가 고 있었다. 삵괭이는 고양이같이 양쪽 발을 번갈아 내디디며 하룻밤에도 수십 리 길을 간다 고 한다. 덫을 놓으면 삵괭이는 걸려들지 않고 산토끼가 걸려들어, 덫을 풀고 보면 눈속에 파묻혀 서 딴딴히 얼어 굳어 있다. 첫해 봄과 여름에는 고생도 많았다. 우리는 힘껏 일했다. 그러나 이제 겨울 밤에는 쉴 수 가 있었다. 삼제바토프가 석유를 공급해 준 덕분에 우리는 등불가에 모여 앉는다. 여인네는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하고, 나와 장인은 소리 내어 책을 읽는다. 페치카는 아주 잘 타고 있 었다. 화부 노릇은 내가 도맡아 했고, 열을 허비하지 않도록 바람 마개를 조절하는 데 신경 을 썼다. 잘 타지 않는 나무가 있으면 눈 속에 던져버린다. 나무는 횃불과 같이 불꽃을 튕기 며, 잠자는 정원, 새하얗게 네모진 잔디밭을 훤히 비쳤다가는 싯싯 소리를 내면서 눈더미 속 으로 묻혀갔다. 우리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푸슈킨의 <<예프게니 오네긴>>이나 그 밖의 시 들, 스탕달의 <<적과 흑>>, 디킨즈의 <<두 도시의 이야기>>의 번역탄과 콜레이스트의 단 편들을 되풀이해서 읽었다. 3 봄이 가까워 올 무렵에 지바고는 다음과 같이 썼다. 토냐는 임신한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으나 내말은 통 믿어주질 않는 다. 그러나 나는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기 증세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이상 더 확실한 징후를 기다릴 필요조차 없었다. 이런 때에는 여자의 얼굴은 변해가지만 매력을 잃 게 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용모 따위는 돌보지 않게 되고, 몸 속에 움직이는 미래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었다. 이젠 혼자가 아니었다. 아내는 용모를 돌보지 않게 되어 육체적으 로 쇠약해진 듯했다. 얼굴이 까칠해지고 피부가 거칠어지고 눈동자가 지나치게 번뜩여서 이 모든 변화를 감당해낼 수가 없어 포기하고 만 것이다. 토냐와 우리는 항상 떨어져 있지 않고 이 어려운 한 해 동안 함께 지내어 서로 더욱 가까 워졌다. 토냐는 유능하고 강인해서 피로를 모르고 일해 왔다. 헛된 시간이 생기지 않게 하려 고 현명하게 일할 계획을 짜내고 있는 걸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든 잉태는 다 순결하지만, 성모 마리아에 대한 가르침만큼 모성의 개념을 잘 나타낸 것 은 없다고 생각해 왔다. 어린애를 해산할 때면, 어떤 여성이든지 버림받고 난 외로움으로 고독감에 잠기게 된다. 이 중대한 순간에 남성은 지금까지 전혀 관계가 없는, 모든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동 떨어진 사이가 되고 만다. 여성은 혼자서 자손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어딘가 실존의 한 모퉁이에 요람을 놓기 위해 조용하고 안전한 장소로 옮긴다. 그리하여 말없이 홀로 애기를 키우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와 신에게 열심히 기도하라'고 청한다. 그리고 찬미의 소리가 성 모의 입을 빌어 말하게 된다. '내가 주를 찬양하며, 내 영혼이 우리 구주이신 하나님을 기쁘 게 섬기나니,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굽어 살피소서.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누릴 복이 있 다 일컬으리로다. '성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자식 때문이었다. 주는 마리아를 찬양하였고 전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사하셨다고 했다. 주는 마리아의 영광이었다. 모든 여성에게 있 어서 신은 그 자식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람의 어머니는 이런 감정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여성은 위인의 어머니인 것이다-훗날 그들을 실망시키는 때가 있더라 도 그것이 여성의 죄는 아니다. 4 우리는 푸슈킨의 <<예프게니 오네긴>>과 그의 시를 줄곧 읽고 있었다. 어저께 삼제바토 프가 찾아와 맛있는 음식과 등유를 주었다. 우리는 예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나의 생각으로는 예술이란 하나의 카테고리가 아니고, 여러 가지 개념이나 파생적인 형상 을 망라하고 있는 한 부문도 아니며, 이와는 반대로 뭔가 응집되고 엄밀하게 한정된 것이라 생각했었다. 예술이란 모든 예술 작품 속에 존재하는 본질이며, 예술 작품에 적용되는 하나 의 힘이며, 예술 작품 속에서 만들어내는 진리인 것이다. 나는 예술이 형식이라고 생각한 적 은 결코 없었다. 예술은 비밀로 숨겨진 내용의 한 부분이다. 이러한 것은 나에게 너무도 분 명한 것이었다. 나는 온 정성으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거나 형상화 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 려운 일이었다. 하나의 문학 작품은 제목, 주제, 내용, 인물의 성격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들에게 호소 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작품 속에 예술이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를 감동시 킨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속에 있는 예술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지 결코 라스콜리니코프(죄와 벌의 주인공)의 범죄 이야기는 아니다. 원시적 예술, 이집트의 예술, 그리스의 예술, 그리고 우리의 예술은 수천년 동안 변하지 않은 같은 예술이었다. 예술은 하나의 이념, 즉 생명에 관한 발언, 낱개의 말로써 나눌 수 없는 포괄적인 발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작품에도 여러 잡다한 것 가운데 예술의 한 조각이 섞여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을 눌러버리고 그 조각이 작품의 알맹이가 되어야 하는 것 이다. 5 오한이 좀 나고 기침을 했다. 열도 좀 있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숨이 가쁘고 목구멍에 무슨 덩어리가 막혀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언짢았다. 이것은 심장병이 아닐까? 한평생 심 장병을 앓았던 불쌍한 어머님이 나에게 물려준 약한 심장의 최초의 징후가 아닐까? 정말, 그럴까? 이렇게 빨리? 그렇다면 난 오래 살 수 없겠군. 방안에는 숯 냄새가 좀 풍겼다. 다림질을 하는 냄새도 났다. 토냐가 다림질을 하고 있었 다. 때때로 페치카에서 벌겋게 타고 있는 숯덩어리를 집어다 다리미에 넣는다. 그러면 이빨 을 다물 듯이 뚜껑이 닫힌다. 무엇인가 나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으나 좀처럼 그 생각이 떠 오르지 않는다. 걱정 탓일까. 삼제바토프가 비누를 준 일이 고마워서 이틀 동안 빨래를 했다. 그 때문에 싸샤를 돌보지 않아서, 지금 글쓰는 나에게 와서 테이블 밑의 횡목에 걸터앉아 나를 썰매에 태운 것처럼 놀고 있다. 삼제바토프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찾아오면 꼭 싸샤를 썰매에 태워주 었다.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시내 도서관으로 찾아가서 이 고장의 민속이나 역사를 일고 싶다. 도서관은 몇 권의 귀중한 장서를 기증받았다는 소문도 있고, 보기 드물게 훌륭하다는 평판 이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곧 봄이 돌아오면 그때는 그럴 시간이 없어진다. 점점 두통이 더해 갔다.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잠을 깨고 나면 곧 잊어버리는 뒤죽 박죽의 꿈을 자주 꾸었다. 기억에 잠시 남는 것은 눈이 뜨일 때의 부분만이었다. 그것은 어 떤 여자의 목소리였다. 꿈속에서 들은 여자의 목소리는 허공에 울려 퍼지며 나의 기억을 되 살렸다. 마음속에서 그 목소리가 자꾸 들려왔다. 여자 친구의 이름을 이것저것 생각해보았다 -그 깊고 조용한, 좀 목쉰 소리의 사람을 아무리 찾아보았지만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토 냐의 목소리라고 생각해봤다. 나의 귀가 그녀 음성에는 하도 익숙해 있어서 오히려 처의 음 성을 꼬집어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나의 처라는 걸 잊어버리고 제3자의 기분으 로 찾아보려고 애썼으나, 역시 토냐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그것은 풀리지 않았 다. 꿈은 통상 낮에 받은 강렬한 인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그 당시에는 전혀 주의하지 않았던 일-말하자면 곰곰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던 막연한 생각, 아무렇지도 않게 귓전을 스치고 간 말들이 밤이 되면 피와 살을 갖추고 되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낮에 눈 뜨고 있는 사이 무시된 것을 보상이나 하듯이, 그것이 꿈의 주제가 되 는 것이다. 6 맑고 추운 밤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죄다 이상하게 맑고 순수했다. 대지, 하늘, 달, 별 들, 모든 것이 서리에 얼어붙어 함께 못박혔다. 정원에는 뚜렷한 형체의 나무 그림자가 오솔 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길 건너편 여러 군데에 검은 형상들이 줄곧 보이는 것 같았다. 큰 별들이 마치 푸른 운모의 등불처럼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있고, 작은 별들은 여름 벌판의 들국화처럼 온 하늘에 널려 있었다. 밤마다 우리는 푸쉬킨에 대하여 토론을 했다. 전날 밤에는 학생 시절의 초기 작품에 관하 여 이야기가 있었다. 그의 시는 운율 선택에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모른다. 행이 긴 시로서는 아르자마스(19세기 초기의 문학 서클. 푸쉬킨도 그의 한 사람)의 친구를 놀라게 하려는 것이 그의 야망이었다. 어른에 뒤질세라 신화나 과장, 조작된 퇴폐선과 향락 주의 등으로 숙부를 놀라게 하려고 했으며 또 재간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오시안(3세 기경에 살았다는 켈트족의 시인)이나 파르니(1753∼1814. 프랑스 시인)의 모방을 그만두고 <차르스코에 세로의 회상>으로부터 <자그마한 도시>, <누나에게 보내는 글>, <나의 잉크 병에게> 또는 <유진에게>를 옮겨가자 후기의 푸쉬킨을 이미 엿볼 수가 있었다. 그의 시에는 마치 창문에서 방으로 흘러들어오듯 거리의 빛과 공기, 생활의 소음, 사물과 현실이 흘러들어와 있었다. 외부 세계, 일상 생활의 여러 가지 일과 명사들이 그의 시 속에 몰려 들어와서 시의 줄들을 차지하고, 애매한 표현을 몰아내고 나서 시구를 차지하였다. 그 의 시 곳에는 끓임없이 사물이 등장하여 리듬을 이룬다. 훗날 그렇게도 유명해진 푸쉬킨의 4음보구는 마치 러시아의 현실의 척도이며, 러시아의 모든 존재를 본뜨는 것과 같았다. 마치 장갑이나 신발을 잘 맞도록 하기 위하여 신발의 치수나 장갑의 사이즈를 지시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 후 대체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네크라소프(1821∼1877. 러시아 민중 시인)의 3음구와 강약약격 속에는 구화체 러시아의 운율과 보통 말할 때의 음조가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7 나는 의사나 농사일을 하는 한편 무엇인가 귀중한, 학술적이거나 예술적인 작품을 남기고 싶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파우스트가 된다고 했다. 이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파악하 고 경험하고 표현하고 싶었다. 파우스트는 선조와 동시대인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학자가 된 것이다. 과학에 있어서의 발전은 반발 법칙에 의하여 좌우된다. 모든 전진은 알려진 오류 나 그릇된 이론을 반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파우스트는 그의 스승들의 고무적인 모범이 있 었던 덕분으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예술의 진보는 인력 법칙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경애하는 옛 사람들을 모방하고 찬양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가 의사이면서 동시에 작가가 되는 것을 무엇이 방해할 것인가? 가난이나 방황, 떠돌이 생활 때문은 아니다. 지금 파다하게 퍼지고 있는 미사 여구의 분위기 탓이라고 생각된다. 어 디서나 입버릇처럼 '미래의 여명'이라느니, '신세계의 건설', '인류의 선구자' 등의 어구는 처 음 들었을 때는 '얼마나 폭넓고 풍성한 상상력이랴!'하고 감탄도 했지만 실은 상상력이 없는 값싼 허식에 지나지 않았다. 진실로 위대한 것이란 천재의 손질로써 변모하게 된 극히 흔해빠진 것들 뿐인 것이다. 그 제일 좋은 실례가 푸쉬킨이다. 그의 시는 성실한 노동, 의무, 일상 생활을 찬양하는 찬가 였다. 오늘날 우리는 시민 또는 소시민이란 용어를 비난하고 있으나 푸쉬킨은 <족보>에서 자기가 중류 계급에 속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예상되는 비판에 대하여 자기가 평민임을 강조하고 <오네긴의 여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썼다. 지금 나의 이상은 가정의 주부, 내 가장 큰 소원은 조용한 생활 그리고 큼직한 한 사발의 배추국. 내가 러시아 문학 전반에 걸쳐 가장 좋아하는 것은 푸쉬킨과 체호프의 러시아적 소박성이 다. 그들은 인류의 궁극의 목적이라든지 그들 자신의 구원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며, 이런 것들을 입 밖에 낸다는 것은 떠버 리의 사치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고골리,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은 하염없이 생명의 의미를 추구하여 죽음을 준비하고 결론에 이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푸쉬킨과 체호프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문학자로서의 천직이 그들에게 부과한 그때그때의 특정한 임무에 몰두했을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이런 일을 해가고 있는 과정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이들은 자기 삶과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적이며 개인적인 것으 로 취급해왔었다. 그런데 이런 개인적인 일들이 언제나 모든 인류의 관심사가 되어, 마치 익 기도 전에 따낸 푸른 사과가 저절로 익어 차츰 붉어지듯이 의미를 깊게 하고 있다. 8 봄의 첫 징후는 해빙에서부터 공기는 사순절의 떡과 보드카처럼 매끄럽게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기름칠을 한 듯한 태양이 숲속에서 졸고, 졸리는 듯한 소나무 잎이 속눈썹처럼 움츠 리고, 웅덩이는 한낮에 기름처럼 번들거렸다. 자연은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켜고 돌아누워 다시 잠들고 있었다. <<예프게니 오네긴>>의 제7장은, 봄을 묘사하고 오네긴이 없는 텅 빈 집과 언덕 기슭의 냇가에서 잠들고 있는 렌스키의 무덤을 그리고 있다. 봄의 연인 종달새가 밤을 지새워 노래 불렀다. 들장미가 피어났다. 왜 '연인'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이 형용어가 자연스럽고 적절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종달 새는 봄의 연인이며 '들장미'와 운을 맞추기에도 필요했다. 유명한 민요에 나오는 오지흐만 치의 아들을 '도둑 종다리'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종달새 휘파람 소리에 야상의 외침에 초목은 떨며 꽃잎은 지고 숲속의 어둠은 땅에 깔리고 착한 사람들은 쓰러져 죽는다. 우리가 바르이키노에 도착했을 무렵, 봄은 아직 일렀다. 얼마 있지 않아서 오리나무, 개암 나무, 들벚꽃나무가 푸르러 갔다. 특히 미쿨리츠인 저택 아래쪽 슈치마 골짜기는 푸르게 물 들어 있었다. 몇 밤이 지나고 나자 종달새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나서 처음으로 듣기나 하듯이, 종달새 소리와 다른 새소리의 차이에 새삼 감명을 받 았다. 그 넘쳐흐르듯이 풍부한 소리가 묘하게 떨리는 소리로 살짝 바뀌어가는 자연의 신묘 한 조화, 그 소리에는 다채롭고 힘차고 아름다운 울림이 있다! 투르게네프는 어디선가 휘파 람 소리 같고 피리 소리 같은 이 새들의 노래 소리를 묘사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도 특히 주의를 끄는 두 구절이 있었다. 하나는 호사스럽고 탐욕스럽게 되풀이하여 '쭈 쭈 쭈'하고 이슬에 젖은 초목이 몸을 떨며 기쁨에 대답한다. 다른 하나는 엄숙하게 가슴에 다가서서 호 소나 경고하듯 '깨어나세요! 깨어나세요! 깨어나세요!'하고 부르는 것만 같았다. 9 봄이 왔다. 우리는 농사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기를 쓰는 일을 그만두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으나 겨울까지는 중단해야 했다. 요전날, 진짜 사순제 날이 오고 말았다. 눈이 녹아서 물바다와 진구렁을 이루고 있을 때였 다. 병든 농부 한 사람이 썰매를 타고 뜰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의사를 그만두었고, 약도 기 구도 없다'고 말하고 진찰을 거절하였으나, '피부가 잘못 됐습니다. 도와주세요. 아픈 사람입 니다.'하고 막무가내였다. 하는 수 없었다. 내 심장은 돌 덩어리가 아니었다. 나는 환자에게 옷을 벗으라고 했다. 그의 병은 낭창이었다. 그를 진찰하고 있는 동안 나의 눈에 띈 것은 창 문턱에 놓인 석탄산 병이었다(저것이 어디서 내손으로 들어온 것인지 물을 필요도 없다. 이 모든 것은 삼제바토프한테서 온 것들이다). 이때 또 한 대의 썰매가 뜰에 보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다른 환자를 싣고 온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구름같이 나타난 나의 아우 예브그 라프였다. 그는 토냐, 쌰샤 그리고 장인과 함께 집안 이야기를 나눴고, 나도 얼마 후 그들과 자리를 같이했다. 어디서 오는 길이며, 어떻게 왔느냐고 캐물었다. 예브그라프는 여느 때와 같이 분명치 않게 미소를 짓고는 어깨를 흠칫하며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그는 약 두 주일 동안 머물렀다. 자주 유라친에 다녀오곤 했으나 돌연 땅속으로 꺼져 버 렸는지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예브그라프가 삼제바토프보다는 더 유력하다는 것을 그가 머 물러 있는 동안에 알게 되었으나, 그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이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어디서 왔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세력을 가졌을까? 그는 우 리들의 생활을 더 편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토냐는 쌰샤에게 더 많은 시간을 낼 수 있 게 하고, 나는 의사 노릇을 하면서 글을 쓸 수 있게 돌봐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에게 어떤 방법으로 우리 형편을 펴게 해주겠느냐고 물었으나, 그는 다만 빙긋이 웃음을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졌다. 우리의 생활이 실제 변화되고 있다는 징조 가 나타나게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야! 그는 나의 이복 동생이었다. 우리는 성이 같은 지바고라는 것 외 에는 그에 대하여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그가 선량한 천재로서 또 나의 구세주로서 나의 생활 속으로 뛰어들어와 여러 가지 어려 움을 단번에 해결해준 일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아마도 누구의 생활에나, 많은 등장인물 속 에는 신비스럽고 알 수 없는 힘이라 할까, 상징적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 있어서 그것이 부 르지도 않는데 뛰어오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의 경우는 동생 예브그라프가 은인 역할을 하 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지바고의 수기는 뚝 끊기고 말았다. 그 후부터는 계속 쓸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10 유라친 시립도서관 열람실에서 지바고는 대출한 책 몇 권을 읽고 있었다. 열람실은 여러 개의 창문이 있었고, 1백 명쯤 수용할 수 있었다. 창가까지 긴 테이블들이 줄지어 놓였다. 날이 어두워지면 도서관은 닫게 돼 있었다. 봄에는 거리의 가로등이 켜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지바고는 언제나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저녁때가 지나도록 읍내에 머물 러 있는 일은 없었다. 미쿨리츠인한테서 빌어타고 온 말은 삼제바토프 집에 두고 오전중에 는 독서하고, 오후엔 바르이키노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도서관에 다니기 전까지 지바고는 유라친에는 좀처럼 나오지를 않았다. 특별히 볼일도 없 었고 읍내를 잘 알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이 점점 열람실에 모여들어 그의 바로 옆자리나 좀 떨어진 자리에 앉게 된 지금, 흡사 네거리의 혼잡한 한 모퉁이에 익숙해지고, 주민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이나 거리까지 열람실에 흘러들어오고 있는 느낌이었 다. 창 너머로, 상상하고 있었던 유라친이 아니라 현실의 거리 모습을 내다볼 수가 있었다. 가 운데 있는 가장 큰 창문 앞에는 끓인 물을 넣어두는 물통이 놓여 있었다. 독서하는 사람들 은 휴식을 할 때면 계단으로 나가서 담배를 피우거나 물통 가에 모여서 끓인 물을 마시고, 마시다 남은 물을 대야에 버리고 나서는 창가에 서서 거리의 경치를 즐겼다. 도서관에 찾아오는 사람에는 두 부류가 있었다. 그 대부분은 지방의 인텔리층의 중년들이 며 나머지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전자의 대부분은 부인네들이었다. 보잘것없는 옷차림에 게으르고 천박한 모습의 여자들이 었으며, 병색이 나는 얼굴은 굶주림 때문인지 혹은 황달이나 수종에 걸려서인지 부어 있었 다. 그들은 매일같이 도서관에 다니며 직원들과도 친했고 도서관 안에서도 마음 편하게 지 내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서민층 출신의 사람들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용모에 명절날처럼 화려하게 성 장하고 교회에 가는 사람들처럼 들뜨고 초조해했다. 이들은 다른 열람자보다는 더 떠들썩했 다. 그것은 이들이 도서관 규칙을 모르고 있어서가 아니라.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탓으로 오히려 허덕이는 발걸음과 말소리를 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창문이 있는 반대쪽 벽의 우묵히 들어간 곳에 높게 단을 만들고 카운터를 설치하여 사서 와 두 사람의 조수가 앉아 있었다. 조수 한 사람은 심통궂은 얼굴 을하고 있는 여자였고 털 숄을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필요해서가 아니라 기분이 내키는 대로 줄곧 코안경을 썼다 벗 었다 하고 있었다. 또 다른 조수 한 사람은 검은 비단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으며, 가슴이 약 한 사람같이 언제나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숨쉬고 있었으며, 무슨 말을 할 때에도 절 대로 수건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도서관의 다른 직원들도 역시 볼이 축 늘어진 얼굴에 그 피부는 소금에 절인 오이나 곰팡 이 낀 것처럼 푸르죽죽하였다. 세 사람의 직원은 새로 오는 손님에게 교대로 낮은 목소리로 규칙을 설명해주고 대출증을 분류하거나 서적을 주고받고 하면서도 틈을 타서는 이것저것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마치 갑상선종에 걸린 사람들 같은 주위 사람들의 부어오른 얼굴, 그가 도착하던 날 아침 유라친 역 신호수를 보고 있던 여인의 얼굴을 생각게 하는 이 얼굴들과, 밖에 보이는 실제 의 거리 풍경과 열람실 안에서 상상하는 거리 풍경을 위시하여 지바고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연상이 떠올랐으며, 거리의 경치나 화물차 마룻바닥에 걸터앉았던 삼제바토프의 모습과 그 의 비판이나 설명들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는 여태까지 거리 밖에서 들었던 이 설명을 지금 그를 중심으로 하여 바로 주위에서 이 루어지는 정경과 연결시켜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삼제바토프가 하던 말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서 헛수고에 그쳤다. 11 지바고는 책이 놓여 있는 열람실 한쪽 끝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지방 농지 통계 에 관한 보고서와 지방 민속에 관한 서적 몇 권이 놓여 있었다. 그 밖에도 푸가초프 반란 (1773∼1775. 푸가초프 지휘하에 농노제에 대항하여 일으킨 투쟁)에 관한 서적 두 권을 신청 하였으나, 비단 블라우스를 입은 계원이, 혼자서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책을 대출할 수는 없 다고 말하면서 다른 책을 대출하려면 이미 대출해 간 정기 간행물과 참고 서적 일부를 반납 해야 한다고, 입에 손수건을 가린 채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는 꼭 필요한 것만 가려내고 나머지는 도로 반납하고, 역사 서적을 빌기 위하여 이미 대출해 놓고서 가려내지 못했던 책더미를 서둘러 휘저었다. 그는 재빨리 책장을 넘기 며 목차를 살피고 각 장의 제목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열중한 나머지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열람실의 사람들은 그를 방해하거나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가까이 있 는 사람들을 잘 관찰하여 그의 좌우에 앉은 사람들은 그의 의식에 소화되고 있기 때문에 눈 을 떼고 보지 않더라도 그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마치 창밖에 보이는 집과 교회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듯이 이들 열람자들도 자기보다 먼저 자리를 떠나지는 않으리라 생 각했다. 그러나 해는 멈추고 있지 않았다. 시종 움직이면서 열람실 동쪽 구석을 떠난 해는 지금 남쪽에 향한 창문 너머에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하고 있었다. 손수건을 코에 대고 있던 여직원이 단에서 내려와 창가로 걸어갔다. 아직 햇빛이 들지 않 고 있는 구석 창문을 제외하고는 주름이 잡힌 흰 커튼으로 죄다 가려버렸다. 햇빛은 기분좋 게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모든 창문을 다 가렸으나 창문 하나만 가리지 않았다. 제일 구석의 그 창문에 와서 노끈을 잡아 당겨 공기 창문을 열려는 순간 재채기를 시작했다. 열 번이나 열 두 번쯤 재채기를 연발하고 있을 때, 지바고는 그녀가 미쿨리츠인의 처제이며 삼제바토 프가 말하던 툰체프 댁의 따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읽고 있던 다른 사람들과 같 이 그도 고개를 돌려 여직원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그는 열람실 안에 변화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맞은편 끝에 새로 온 사람이 하 나 더 있었던 것이다. 지바고는 한눈에 라라를 알아보았다. 그에게는 등을 보이고 앉은 채, 재채기를 하던 여직원에게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직원은 몸을 기울이고 듣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얘기가 여직원한테는 흡족했던 것 같았으며 순식간 에 지긋지긋하던 감기가 나아버리고 신경질을 피우던 증세도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감사한 듯 다정스럽게 라라를 바라보면서, 얼굴에 대고 있던 손수건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행복과 자신에 넘친 미소를 띄어 가면서 그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열람실 여기저기에 앉은 사람들도 이 흐뭇한 광경을 바라보고서, 그들 또한 미소를 지으 며 라라에게 칭찬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 사소한 사건으로, 지바고는 라라가 읍내 사 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고 환대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12 지바고는 우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의 성질로서는 아주 이상스럽게도, 과거에 그녀를 대하면 수줍어지고 솔직한 마음이 없어지던 것처럼 조금 도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녀를 방해하지 말고 자기가 하던 일이나 계속하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앉아 있는 쪽을 바라보고 싶은 충동에서 벗어나려고 의자를 책상 사이에 돌려놓고 등을 보이고 앉았다.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또 한 권은 무릎 위에 펼쳐놓고는 독서에 주의 를 집중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책과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헤매는 것이었다. 느 닷없이 그는 바르이키노에서 어떤 겨울밤 꿈속에서 들었던 여자의 목소리 바로 라라의 목소 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해진 기색을 나타내더니 주위 사람들이 놀랄 만큼 거칠게 의자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나서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쪽 옆에서 바라보았다. 밝은 체크 무늬의 블라우스에 벨트를 맨 그녀는 고개를 오른쪽 어깨로 기울이고 어린애처럼 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따금 책에서 눈을 떼고는 천장을 쳐다보거나 앞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기곤 했 다. 그러다가는 한 손으로 턱을 괴거나 머리를 짚었다. 그러더니 재빨리 연필을 노트에 움직 여서 책을 발췌하고 있었다. 지바고는 이전 멜류제예보에서 받은 인상과 똑같은 것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 여자는 남성의 주의를 끌거나 예쁘게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의 본능을 깡그리 경멸하 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아름답기 때문에 자기를 벌하고 있는 거나 같았다. 그리하여 이 거 만스러운 적의는 그녀의 매력을 열 배나 더하게 했다.' 그녀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잘 되어 가는 것 같았다. 마치 독서가 가장 고상한 인간 의 행위가 아니라 짐승들도 할 수 있는 매우 단순한 일이며, 우물에서 물을 푸거나 감자 껍 질을 벗기듯이 쉽게 책을 읽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에 잠기고 있는 사이에 그는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마음의 동요 가 멈추고,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라라의 존재가 신경질을 부리던 여직원에 작용하였던 것처럼 그의 신경에도 편안을 가져다 주었다. 이젠 의자의 각도에 마음을 쓰거나 주의가 흩어지는 따위를 두려워하지 앉게 된 지바고는 전보다 더 열을 내면서 한 시간쯤 독서에 몰두하게 되었다. 테이블위에 쌓인 산더미 같은 책들을 죄다 훑어보고 나서 필요한 책을 추려내고, 그러는 사이에 발견한 중요한 논문 두 편을 골똘히 읽을 수 있는 여유까지 있었다. 이윽고 오늘은 이만 하기로 만족스럽게 생각하 면서 책들을 모아서 테이블 위에 챙겼다. 그리하여 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별다른 생각도 없이 오전중 열심히 공부를 하였으니까 옛 친구나 만나서 회포를 푼다는 것은 당연 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어나 방안을 휘둘러보았으나 라라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 았다. 지바고가 반납하기 위하여 책들을 가지고 갔을 때, 그녀가 반납한 서적도 카운터에 놓여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교재들이었다. 교사로 복직하기 전에 자신을 정치적으로 재교육하는 것 같았다. 책 사이에 끼워놓은 대출증에 그녀의 주소가 씌어 있었다. 지바고는 그 주소를 적어두었 는데 '쿠페체스카야. 조각품들이 있는 집의 맞은편'이라는 괴상한 주소에 놀랐다. 그래서 지바고는 알 만한 사람에게 물었다. 유라친에서 '동상이 있는 집'이란 표현은 모스 크바에서의 교구 교회의 이름을 따서 거리의 명칭으로 부르거나 페테르부르그에서의 '다섯 개의 모퉁이'와 같은 표현이었다. 그것은 여인 동상과 조각, 라라, 심벌즈를 손에 든 고대 뮤즈의 조상이 장식된 어두운 청 회색 건물이었다. 어떤 상인이 지난 세기에 개인용 극장으로 지었던 건물인데, 그 재산을 상 속받은 사람들이 상인조합에 이 건물을 팔아버렸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거리의 이름이 쿠 페체스카야로 불리고 그 집 일대를 '동상이 있는 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시 당위 원회가 쓰고 있으며, 이전 같으면 포스터나 프로그램이 붙어 있던 전면의 경사진 낮은 벽에 는 지금 정부의 발표문이나 법령 따위가 나붙어 있었다. 13 5월 초순의 찬바람이 불고 있는 오후였다. 지바고는 거리에서 일을 마치고 잠시 도서관을 기웃거리다가 급히 모든 계획을 바꾸고 라라를 만나러 같다. 바람은 모래와 먼지를 날려 지바고의 걸음을 이따금 멈추게 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눈 을 감고 먼지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다시 걸음을 계속했다. 라라는 쿠페체스카야 거리와 노브스발로치느이 골목길 모퉁이, 동상이 있는 어두운 청회 색 집의 맞은편에 살고 있었다. 지바고는 그때 동상이 있는 집을 처음 보았다. 이름 그대로 괴상하고 소연한 인상을 주는 집이었다. 위층은 사람의 반만큼씩한 신화의 여인 조상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세차게 휘몰아쳐 오가는 먼지 바람이 멈춘 사이에 바라본 이 여신상들의 모습은, 흡사 온 집안의 여자들이 발코니로 나와서 난간 너머로 그를 내려다 보는 것만 같았다. 라라네 집으로 들어가는 문은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 거리에서 현관으로 들어가고, 다른 하나는 골목길에서 들로 통하고 있었다. 지바고는 정면에 문이 있는 것을 모르고 골목길 문 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문을 지나 들어오는 순간 바람이 먼지를 공중으로 휘몰아쳐서 지바고는 뜰안을 볼 수가 없었다. 수탉한테 쫓긴 암탉이 성가시다는 듯 울어대면서 그의 발 근처를 스쳐갔다. 먼저 구름이 사라지자 우물가에 있는 라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물통 두 개에 물을 채우고 작대기에 걸어서 왼쪽 어깨에 지는 것이었다. 먼지를 막기 위해 머릿수건을 쓰고 이 마에 동여매서 마치 두견새 같았다. 그리고 바람에 나부끼는 치맛자락을 양 무릎으로 여미 고 있었다. 물을 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또 한 번 휙 바람이 일면서 머릿수건이 벗겨져 담 저만큼에 날려가는 바람에 멈추어 섰다. 그쪽 담에서는 아직도 암탉들이 꾸꾸거리고 있었다. 지바고는 뛰어가 수건을 집어들고 우물가로 가서 라라에게 주었다. 그녀는 새삼 놀라는 기색도 없이 여전히 자연스러운 얼굴로 그저 "지바고!"이 한 마디뿐이었다. "라라!" "여길 어떻게 오셨어요?" "물을 내려놓으시오. 내가 갖다드릴 테니." "나는 하던 일을 중도에서 그만두지 못하는 성미예요. 저를 만나러 오셨다면 이리로 오세 요." "당신 말고 누굴 만나러 왔겠소?' "누가 알아요." "어찌됐든 물통을 나한테 주시오. 당신이 수고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어요." "이게 일인가요 뭐. 그냥 두세요. 괜히 층계에 물이나 엎지르시려구. 그보다도 오신 영문 이나 말씀하세요. 무슨 바람이 불었지요? 이 지방에 오신지 1년이 넘도록 한 번도 찾아주지 않으셨으면서?" "어디서 알았소?" "세상 소문이 오죽한가요. 더구나 도서관에서 당신을 본걸요." "그럼 왜 모르는 체했지요?" "당신은 나를 못 보셨나요?" 흔들리는 물통의 무게에 몸을 휘적거리며 그녀는 지바고에 앞서 아래층 낮은 입구를 지나 가자 재빨리 웅크려 물통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어깨에 메고 있던 작대기를 벗어버리고 몸 을 일으키고 나서는 어디서 났는지 작은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자, 들어오세요. 집안 통로로 해서 현관방에 안내하겠어요. 거기가 밝아요. 거기서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저는 물통을 가지고 뒷층계로 올라가서 좀 치우고, 옷도 갈아입고 올게요. 오 래 걸리진 않아요. 이 멋있는 층계를 보세요. 무늬가 새겨진 주철 난간은 위에서 밑을 내려 다볼 수 있어요. 낡은 집이랍니다. 폭격 때문에 석조가 파괴되었어요. 벽돌 새에 생긴 틈을 보세요. 저와 카첸카가 외출할 때에는 여기에 열쇠는 감춰두어요. 기억해두세요, 아무 때나 제가 없는 사이에 당신이 찾아오실지 모르니까요. 여기서 열쇠를 찾아서 문을 열고, 제가 돌 아올 때까지 편히 계시도록 하세요. 자, 보셨지요. 여기에 두었어요. 지금은 필요하지 않아 요. 제가 뒷문으로 들어가 안에서 문을 열겠어요 한 가지 골칫거리는 쥐랍니다. 너무나 많아 서 잡히지도 않아요. 낡은 건물의 벽이 허물어져서 사방에 틈이 생겼어요. 한번 오셔서 절 도와주시겠어요? 마루와 띠나무 새를 막아야 해요. 자, 그럼 여기서 무엇이든 생각하면서 계 세요. 곧 당신을 부를게요." 기다리는 동안에 낡은 벽과 철층계를 구경하면서 생각했다. '그녀를 도서관에서 보았을 때 는 고된 육체 노동이나 하는 것처럼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대로 물을 길어 나 르는 일이, 마치 아무 어려움이 없이 가볍게 독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하는 모든 일 은 거침없이 돼갔다. 마치 어려서 인생의 길을 떠날 때부터 날아다닐 듯 민첩해서 그저 손 을 대는 일마다 척척 자연스럽게 해내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녀가 몸을 숙일 때 잔등의 선 에서도, 입술을 가볍게 열고 턱을 둥글게 부풀리며 미소짓는 폼에서, 그리고 말하고 생각하 는 데에도 나타나는 것이다 "지바고!" 라라가 층계 위에서 불렀다. 그는 층계를 올라갔다. 14 "저의 손을 잡고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가구를 쌓아 둔 방 두 개를 지나지 않으면 안 돼요. 어디 부딪쳐서 다치지 않도록 하세요." "정말 미로 같군요. 혼자선 길을 찾지 못하겠군. 왜 이렇지요? 집 수리중인가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이건 남의 집이랍니다. 우리는 집 임자를 알지도 못해요. 우리는 학교 관사에 살고 있었는데, 학교가 유라친 시 소비에트 주택부에 접수 되었기 때문 에 저와 딸은 주인이 버리고 간 집을 할당받게 되었답니다. 남은 가구들이 많았고, 저는 남 의 것에는 손대고 싶지가 않아서 이 방 두 군데에 가구를 모조리 옮기고, 햇빛을 막으려고 창문을 발라버렸답니다. 손을 놓으시면 안 돼요, 길을 잃게 되니까. 자,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미궁을 벗어나게 됩니다. 여기가 저의 방 문이예요. 곧 밝아질 거예요. 발 조심하 세요." 그녀의 안내를 받아서 방으로 들어선 지바고는 문 맞은편 창문에서 바라다 보이는 전망에 감명을 받았다. 뜰 저쪽은 옆집 뒤뜰이었으며, 그 저편 강가의 공지에는 염소와 양들이 긴 털옷을 땅바닥에 끌면서 풀을 뜯고 있었다. '모로 베트친킨 회사. 파종기·탈곡기' 눈에 익은 광고판이 서 있었다. 광고판 때문에 우랄에 도착했던 날의 일을 상기하게 된 지바고는 라라 에게 그 예기를 했다. 그런데 스트렐리니코프가 이 여자의 남편이었다는 소문이 있었던 것 을 그만 잊고서, 찻간에서 군사위원과 만났던 이야기를 해버렸다. 이 이야기는 그녀에게 각 별한 인상을 준 것 같았다. "스트렐리니코프를 만났단 말이에요?" 그녀는 열을 올려서 물었다.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지만, 정말 이상해요. 마치 당신이 그를 만나게 될 운명이었나 봐요. 언젠가는 말씀드리겠 지만 틀림없이 놀라실 거예요. 스트렐리니코프는 당신에게 나쁜 인상보다는 오히려 좋은 인 상을 준 것 같군요." "그런 것 같소. 그는 나를 좋지 않게 여기고 있을 텐데 그렇지도 않았소. 우리는 그가 죽 음과 파괴의 무대로 만들어놓았던 고장을 지나왔었소. 나는 그 사람이 야만적인 군인이 아 니면 혁명의 광신자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으나, 실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인물인 것을 알게 되었소. 어떤 사람을 봤을 때, 상상하던 인물과 현실의 인물이 다르다는 것은 좋은 일 이지요. 그 사람은 어떤 형에 맞는 인물은 아니었어요. 어떤 형에 맞는다고 하면, 그것은 이 미 인간으로서는 끝장이지요. 그러나 그 사람을 어떤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가 없다면, 적어 도 그 사람의 한 부분만이라도 살아 있는 인간임을 보여줄 수 있는 요소를 간직하고 있었어 요. 그는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불멸의 기질을 가졌어요." "사람들은 그 사람이 당원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래요, 나도 그렇게 느꼈어요. 그 사람에게 동정을 느끼게 된 까닭을 말할까요? 그의 운 명은 이미 결정돼 있어요. 그는 불행한 결말을 가지게 될 겁니다. 그는 자신의 죄값을 치르 는 거지요. 제멋대로 날뛰는 혁명가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들이 악인이라서가 아니라 궤도를 벗어난 기차와 같은 조절할 수 없는 메카니즘 탓이에요. 스트렐리니코프는 다른 혁 명가들과 같이 미치광이였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그의 광태가 이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겪어온 시련에서였다는 점이예요. 나는 그 사람의 비밀을 알지는 못하지만 비밀을 가 졌다는 것은 틀림없어요. 그가 볼셰비키와 손을 잡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지요. 그들에게 필 요한 때까지 그의 길동무가 되겠지요. 그러나 그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순간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군사 전문가들을 처치하듯 짓밟아 버릴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물론이죠." "그럼 그를 구할 길이 없을까요? 도망친다거나?" "어디를 도망친단 말이오? 제정 시대에는 가능했지만, 지금은 안 돼요." "안됐어요. 당신의 얘길 듣고 있으니까 그가 불쌍해지는군요. 그런데 당신은 많이 달라지 셨어요. 이전에는 혁명에 대하여 예민하지 않았고, 신랄하지도 않았어요." "바로 그 점입니다, 라라. 어떤 것에든지 한계가 있는 법이라오. 이때까지 무엇인가 뚜렷 한 것이 이루어졌어야 했어요. 그러나 혁명을 선동하던 사람들에게는 변화와 변동의 혼란만 이 그들의 마음에 맞는 자연의 상태였었고, 그들에게 빵을 주고 집을 주어왔어요. 그들에게 는 새로운 세계 건설, 다시 말해서 과도기 그 자체가 목적이었지요. 그 밖엔 훈련이 되지 못 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그 계속적인 준비란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아시오? 혁명가들은 정말 재간이 없는 무능한 사람들이었소. 인간은 살기 위 하여 태어난 것이지, 인생을 준비하기 위해서 태어나지는 않았단 말이에요. 인생 그 자체, 인생의 현상, 인생의 선물, 이런 것들이 숨가쁘게 심각한 문제들이 아니겠소! 어떻게 그런 유치한 철부지들의 생각과 바꿀 수 있단 말이오! 미국으로 도망칠 계획을 세웠던 체호프의 국민 학생들(체호프의 단편(어린이들)) 그대로가 아닙니까? 자, 그만둡시다. 이번엔 제가 물 어볼 차례입니다. 우리가 도착한 것은 이 지방에서 난리가 있던 때의 아침이었는데, 그때 당 신은 난리를 어떻게 겪었지요?" "그럼요! 이 일대는 불바다가 됐답니다. 우린 겨우 면했지만. 앞서 얘기했지만, 이 집도 흔 들흔들했어요. 지금도 정원 대문 옆에는 불발 폭탄이 뒹굴고 있어요. 권력이 바뀔 때마다 약 탈과 포격, 게다가 추태가 있었어요. 우리는 이미 이런 것에는 선생이 되었고, 단련이 되어 버렸어요. 그 전에 백위군 치하 때 있었던 일인데, 개인적인 보복으로 인한 뒷골목의 살인, 약탈, 협박 등 정말 지옥의 향연이란 이걸두고 하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은,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갈리울린에 대한 얘기예요. 제일 높은 사람이 되어서 체코 군과 함께 나타났어요. 총독인지도 몰라요." "알고 있어요. 들었어요. 당신은 그를 만나봤어요?" "여러 번 만났어요. 그 양반 덕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렸는지 몰라요! 또 많은 사람을 감춰주었어요. 공정하게 말해서 그 사람의 행동은 훌륭하고 당당했어요. 카 자크의 대위나 경찰 대장과 같은 속물들과는 달라요. 유감스럽게도, 잘난체 날뛴 것은 이런 속물들이지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요. 갈리울린은 절 무척이나 도와주어서 고맙게 생 각해요. 우리는 옛 친구가 아닙니까. 제가 어렸을 때 자주 그의 집엘 찾아갔었지요. 그 집에 사는 대부분은 철도 종업원이었어요. 제가 혁명에 대하여 당신과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된 것 도 이런 점에 있는가 봐요. 혁명은 저의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 혁명의 내부에서 보면 이해 되는 일이 여러가지 있어요 그런데 수위의 아들이 돌연 백위군의 대령이나 심지어 장군까지 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저는 군인과 접촉이 적어서 군대 계급은 잘 모릅니다만, 나 의 직업은 역사 교사가 아닙니까. 이건 당신이니까 하는 이야기인데, 나는 많은 사람들을 도 와줬어요. 저는 그를 찾아가서 만나보곤 했어요. 우리는 당신에 대하여도 이야기했어요. 정 권이 바뀔 때마다 새 정권에 친구나 연고자가 있었는가 하면 또 슬픔과 실망이 찾아오기도 했어요. 사람들이 두 진영으로 갈라서고 서로 적대시한다는 것은 시시한 책에나 씌어 있을 뿐이지, 실제는 모든 것이 뒤얽혀 있는 법 아니겠어요? 일생을 통해서 같은 역할만 하고, 사 회에서 한 자리만 차지하고, 그리고 정해놓고 같은 것만 지지한다는 것은 가망 없는 존재들 이나 할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 너 지금 왔구나."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내린 여덟 살쯤 되는 소녀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장난꾸러기 같이 생긴 실눈이 웃을 때마다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그녀는 밖에서 남자 목소리를 듣고서 손님 이 온 것을 알고 어머니한테 놀랐다는 듯이 보여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인사를 하고 나서 그애는, 어려서부터 생각에 잠기는 고독한 어린이한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두려워하 는 기색도 없이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지바고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딸 카첸카예요. 귀여워해주세요." "멜류제예보에서 사진으로 본 적이 있었지요. 참 컸군, 많이 달라졌어!" "너 집에 있었구나? 놀러 나간 줄 알았지. 집에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들었어." "나 거기서 열쇠를 집어내는데, 거기 아주 큰 쥐가 있었어. 이만큼한 게! 소리 질러버렸 지! 무서워 죽을 뻔했어." 카첸카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에서 끄집어낸 고기 입처럼 입을 동그랗게 하고는 귀여운 얼 굴을 찡그려 보였다. "이제 나가보렴. 아저씨는 저녁때까지 계실 거예요. 죽이 다 되면 알려주마." "고맙소. 같이 저녁 식사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읍에 다니게 된 후에는 여섯 시 저녁 식사에 언제나 늦은 일이 없어요. 집에 가는 데 세 시간, 아니, 네 시간 가까이 걸려요. 그래 서 일찍이 왔는데, 유감이지만 곧 가야겠어요." "그럼 반 시간은 더 계실 수 있어요." "좋습니다." 15 "그럼 이제 저도 탁 터놓고 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당신이 만나셨다는 스트렐리니코프는 저의 남편 파샤-파벨 파브로비치 안치포프예요. 저는 그이를 찾아 전선까지 갔었어요. 전사 했다고들 하였지만 전 믿지 않았어요. 역시 살아 있었어요." "별로 뜻밖의 일은 아니오. 짐작하던 일이었으니까. 나도 스트렐리니코프가 당신의 남편이 라는 뜬소문을 듣긴 했어도 도무지 믿어지질 않았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소문을 무시하고 거리낌없이 당신한테 얘기하였던 겁니다. 나는 그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은 당 신과 어떻게 결부시켜서 생각할 수 있단 말이오? 당신이 그 사람과 어디 맞는 데가 있습니 까?" "그건 사실이에요. 지바고 선생님, 스트렐리니코프는 저의 남편이에요. 저는 소문을 믿어 요. 스트렐리니코프는 남편의 가명이에요. 다른 혁명가들처럼 그이도 가명을 쓰고 있어요. 무슨 이유인지 남편은 가명으로 살고 활동하고 있는 거예요. 유라친을 탈취한 것도 그 사람이고,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다는 걸 알면서 포 사격을 퍼 부은 것도 그 사람이에요. 그리고 자기 정체가 드러날까 두려워서 우리가 살아 있는지 한 번도 알아보지도 않았어요. 물론 그것이 그의 의무란 것을 모르진 않아요. 만일 그이가 저한 테 물었더라면 그렇게 하라고 했을 거예요. 내가 무사히 살고 있는, 시 소비에트가 주택을 내주고 있는 걸 본다면 그 사람이 뒤에 숨어서 날 돌봐주었다고 할는지 몰라요. 그러나 그 사람이 실제로 유라친에 있으면서 우리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참았다는 생각은 어림없는 일 이죠! 나는 그걸 믿을 수 없어요. 옛 로마 사람들의 미덕처럼 신기한 생각을 어떻게 믿겠어 요. 난 당신의 영향을 받았고 당신의 흉내를 내왔어요. 나는 그걸 원치 않았었는데, 우리는 서로 생각이 달랐어요. 무슨 걷잡을 수 없는 하찮은 일에는 뜻이 맞았어요. 그러나 중대한 문제에 부닥치면, 가령 인생 철학에 대한 우리의 의견은 상반될 거예요. 그럼 스트렐리니코 프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그 사람은 지금 시베리아에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말한 대로 나도 심장이 서늘한 소문 을 들어왔어요. 그는 우리 군의 최전방의 한 부대를 지휘하여 가련한 갈리울린과 싸워 이기 고 있답니다. 어려서부터 친구이며 독일 전선의 전우였던 갈리울린과 말입니다. 그러나 저한 테는 그런 걸 한마디도 말하지 않더군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는 스트렐리니코프의 이름만 들어도 화가 치밀어 미칠 지경일 거예요. 아무튼 그이가 지금 있는 곳은 시베리아예요. 하긴 여기 오래 살았었지요. 당신이 그를 만났다는, 그 기차에서 살고 있었어요. 나는 항상 그를 어떻게 한번 만나봤으면 했답니다. 그는 이따금 본부에 다녀가곤 했는데, 본 부가 있는 건물은 이전에 제헌의회군의 코무치 군사령부로 사용하던 곳이었어요. 게다가 묘 한 운명의 장난 같지만, 본부의 입구는 제가 갈리울린을 만나러 자주 다니던 곳 바로 옆이 었어요. 나는 밤낮 그리로 가서는 누굴 구해 달라거나, 여러 가지 끔찍스러운 일이 있으면 그만두게 해달라고 그에게 부탁하곤 했어요. 예를 들면 육군사관학교에서 일어난 사건 같은 것은, 그때 아주 시끄러웠답니다. 인기가 나쁜 교관이 있으면 생도들이 숨어서 기다렸다가 사살해버렸지요. 그리고 그 사람을 볼셰비키의 동조자였다고 몰았어요. 또 유태인을 박해하 기 시작하였을 때도 대단했었답니다. 우리와 같이 정신 노동을 하거나 도시에서 살고 있었 다면, 우리가 아는 사람의 태반은 유태인이었어요. 그런데 유태인 박해가 시작되어 처참하고 비열한 일이 벌어졌을 때 우리는 그저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분개하거나, 창피하다고만 생각 한 것이 아니고 뭔가 모르게 거리감에 사로잡혔어요. 흡사 우리의 동정이 이 가슴에서 끓어 오른 것이 아니라, 머리에서 생각해낸 일종의 위선이 아니었던가 하는 석연치 못한 데가 있 었어요,. 한때 우상 숭배의 질곡에서 인류를 해방시킨 사람들인데, 지금은 그중의 많은 사람들이 인류 사회를 죄악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생명을 바치고 있는데, 그들은 이미 의미를 상실한 낡은 제도에 바치는 자신들의 충성에서 해방될 수 없다니 이상해요.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자기들이 창조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속에 융화되지 못하니 말이예요. 이해 하려고 노력만 한다면 정말 친해질 수 있는 사람들인데 멀어지고 있어요. 물론 박해를 받으니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하잘것없는 비참한 태도를 갖는 것이 사실이 에요. 자기 억제의 고립 속으로 유태인을 몰고 간 셈이지요. 그러나 나는 이런 현상이 그 일 부는 몇 세기에 걸쳐 역사적으로 누적된 피로, 말하자면 내부적인 노쇠에서 오는 것으로 봐 요. 그들의 압세적인 체념, 무미 건조한 좁은 시야, 옹졸한 상상 따위가 나는 싫어요. 마치 노인이 나이 얘기를 싫어하고, 병자가 병 이야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에 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그런 걸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나의 친구 중에 고르돈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당신과 같은 의견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이가 드나들 때 만날 생각으로 그곳에 자주 갔습니다. 재정 시대 그 건물 에는 총독실이 있었으나, 지금은 문 밖에 '창원소'라는 간판이 나붙어 있어요. 보셨겠지요? 시내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곳이에요. 앞쪽 광장은 포장돼 있고 그 맞은편 공원은 단풍나무, 아가위나무, 인동나무가 울창해요. 바깥 보도에는 청원인이 떼를 지어 기다리고 있었어요. 순서를 무시하거나 내가 그의 처라고 말하지도 않았구요. 성마저도 달랐으니까요. 그리고 또 그 사람들 감정에 호소해봐야 소용도 없었고, 바탕이 다른 사람들이에요. 예를 들어, 그 사람의 아버지 파벨 페라폰토비치 안치포프가 거리에서 가까운 도로를 지 나 좀 떨어진 마을에서 쭉 살고 있었어요. 그의 아버지는 고참 노동자로서 정치범으로 유배 되어 그 마을에서 쭉 살고 계셨어요. 아버지 친구 치베르진도 같이 있었어요. 둘 다 혁명재 판소 위원이었어요.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파샤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지도 않고 부자지간 이라고 해명도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 쪽에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조금도 가슴아프게 생각하지 않더군요. 자식이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나지 못하 면 그만이지, 하는 거예요.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주의나 규율이 꽉 들어찬 돌멩이예요. 그리고 끝내 내가 그 사람의 처라는 것이 증명이 됐다 해도 큰일이죠! 지금과 같은 시대 에 마누라가 다 뭡니까?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라든지 우주의 변혁, 이런 것들이 중요한 일이 지요. 그러니까 여편네란 그저 두 발 가진 동물이나 벼룩, 이따위란 말이에요. 그 사람의 부관이 나와서 다니면서 용무가 뭐냐고 묻고, 들여보내는 사람도 있었어요. 저 는 이름을 말한 적이 없고, 개인적인 용무라고만 했어요. 물론 거절당하는 실없는 소리가 되 고 말았어요. 부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의아한 눈으로 쳐다 봤어요. 결국 한 번도 만 나질 못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그가 우리를 싫어하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렇진 않아요! 저는 남편을 잘 알아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빈손으로 돌아오고 싶지가 않고, 우리들 발 앞에 월계관을 놓고 싶은 거예요, 정복자로서! 불멸의 영예를 안고, 우리의 눈을 부시게 하려고! 어린애처럼 말이에요." 카첸카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라라는 딸을 부둥켜안고, 흔들며 꼭 껴안아 보더니 입을 맞췄다. 16 지바고는 말을 타고 시내에서 바르이키노를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 이곳을 수없이 다녔기 때문에 길을 훤히 알아서 별로 의식하지 않고 다녔다. 그는 숲속 십자로 가까이에 이르게 되었다. 길 하나는 곧바로 바르이키노에 통하고, 다른 길은 사그마 강에 있는 바실리예브스코예 어촌으로 통하는 길로 갈라져 있었다. 그 갈림길 에는 세 번째 농업 기계 게시판이 서 있었다. 이 근처에서 지바고는 항상 저녁놀을 보게 되 었다. 지금도 황혼이 깃들어 있었다. 유라친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라라네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식구들에게는 일 때문 에 삼제바토프 댁에서 잤다고 말하던 때가 벌써 두 달이나 지났다. 라라는 지금도 그를 지 바고라고 불렀지만, 그는 이전에는 그녀를 라라로 불렀는데 지금은 '당신'이라는 친밀한 말 투로 바뀌고 있었다. 지바고는 토냐를 속이고, 그의 비밀은 차츰 커져 허용할 수 없는 무서 운 일로 되어버렸다. 그는 토냐를 숭배할 정도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마음씨는 이 세상에서 무 엇과도 바꿀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나 그녀 자신보다도 그녀의 명예를 지켜주었 다. 그녀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손으로 갈기갈기 찢었을 것이다. 그런 데 그러던 자신이 그녀를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집에서 죄인과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신구들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애정 을 쏟아주는 일들이 그에게는 지옥 같은 고통을 안겨다주었다. 즐겁게 담소하다가도 그는 불현듯 죄의식에 마음이 오싹해졌다. 그러면 주위의 얘기에 귀는 필요 없는 물건이 되고 마 는 것이다. 만일 식탁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 먹던 음식이 목구멍에 걸려버렸다. 그는 스푼을 내려놓고 접시를 밀어놓는다. 눈물에 목이 메었던 것이다. "왜 그러세요?" 토냐 는 걱정스럽게 묻는다. "시내에서 좋지 않은 소문을 들으셨어요? 누가 붙잡혔나요? 총살됐 어요? 말씀하세요. 나의 일은 걱정 마시고 말씀해 버리면 좀 마음이 후련해질 거예요." 그가 딴 여자에 마음이 끌렸다고 해서 토냐에 대한 마음이 변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 다. 그는 비교하거나 골라 좋아한 것은 아니다. '자유 연애'라는 개념이나 '정당한 사랑의 욕 구'라는 표현은 그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이었다. 그런 것을 생각하거나 주장한 것만으 로도 타락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젊은 기분의 잘못'을 한 적도 없으며, 자기를 특권 이나 특전을 가진 초인간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양심이 더러움에 짓눌려 피곤한 것뿐 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따금 생각했으나 대답을 찾지 못했다. 예상 외의 일이 갑자기 일 어나서 그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줄 것을 비통한 기분으로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여의치가 않았다. 그는 이런 관계를 끊어버리자고 다짐하면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모든 걸 토냐한테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지. 라라를 다시 만나지 말아 야겠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리 평탄하지가 않았다. 그는 라라와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하고 싶다 는 뜻을 그녀에게 분명히 알아듣도록 전하지 못했다고 느꼈다. 그날 아침, 그는 아내에게 모 든 걸 고백하리라 생각하고서, 이젠 만나지 말자고 라라에게 말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애매하게 얼버무려서 분명히 하지 못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의 비참한 기분을 눈치챈 라라는 시끄럽게해서 그를 더 괴롭히려 하지도 않고, 가슴을 쥐어짜는 슬픔을 꾹 참으며, 조용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고 애썼다. 둘은 텅 빈 방 안에서 이야기했다. 눈물이 볼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러나 맞은편 집의 석상이 얼굴에 흘러 내리는 빗물을 의식하지 못하듯이 그녀도 흐르는 눈물을 의식하지 못했다. "당신이 좋을 대 로하세요. 저의 일은 걱정마시고." 그녀는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아량을 보이 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하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울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지 못 하여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라라가 곡해하고 있지 않을까-잘못된 인상을 주어서 실없이 미련을 남기고 오지나 않았 는지 생각하게 되자, 그는 재빨리 말머리를 돌려 말하지 못했던 것을 모두 툭 털어놓고 더 욱이 마지막 이별의 부드럽고 따뜻한 인사를 남기러 곧장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간신히 자신을 억제하고 계속해서 가고 있었다. 해가 기울어지면서 숲은 차츰 춥고 어두워져갔다. 축축히 젖은 나뭇잎 냄새가 풍겼다. 모 기떼가 물 위의 부표처럼 공중에 떠서 끊임없이 윙윙거렸다. 그는 땀에 젖은 얼굴이나 목덜 미에 모기가 붙으면 연방 손바닥으로 때렸다. 탁 치는 소리에 말안장의 삐걱거리는 소리, 진 흙을 밟는 무거운 말발굽 소리, 말 배에서 새어 나오는 메마른 소리가 장단을 맞춰 대꾸하 듯 들렸다. 놀이 져 가는 저편 멀리서 느닷없이 종달새 소리가 들려왔다. "잠 깨라! 잠 깨라!" 줄기차게 들려온다. 부활제 전야의 "잠 깨라, 나의 영혼! 왜 잠들어 있는가!" 하듯이. 돌연 지바고는 아주 간단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서둘러야 하나. 집으 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변하고 있었다. 토냐한테 고백해야 하지만 반드시 오늘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토냐한테는 아직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으니까, 요다음에 시내를 다녀와서 하여도 된다. 라라와 따뜻한 사랑에 넘치는 말로써 이때껏 두 사람의 고뇌를 파묻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 얼마나 좋은가! 얼마나 멋있는가! 왜 이런 생각을 진작 하지 못했을까? 다시 라라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그의 가슴은 기쁨에 설레고 있었다. 그는 다시금 기대에 부풀어올랐다. 교외 목조 건물을 지나자 나무 포장길이었다. 지바고는 라라한테로 가고 있었다. 노브스발로치느이의 거리에서 빈터와 나무 포장길이 끝나고 돌 포 장 길이 시작되었다. 교외의 작은 집들을 책장을 넘기듯이 지나가 버렸다. 그것도 집게손가 락으로 한 장식 넘기는 것이 아니라, 책 끝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한꺼번에 책장을 전부 넘 겨버리듯이 획획 지나가버린 것이다. 눈이 어지럽도록 빨리 달렸다. 드디어 거리 맞은편에 그녀의 집이 보였다. 비구름이 벗겨지면서 저녁때는 하늘이 맑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집 으로 가는 길가의 자그마한 집들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걸 집어들어서 입이라도 맞추고 싶었다! 모자를 푹 내려쓴 듯한 지붕 밑의 외짝 문이 있는 이층집들. 그리고 물 웅덩이에 반사하여 딸기처럼 비치는 등불과 불빛! 하얀 구름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집! 거기서 그는 다시 조물주가 만든 희고 아름다운 선물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어 어둠에 싸인 모습이 문을 열어 줄 것이며, 이 세상 어느 주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차분한 북국의 백야와 간은 차가운 그녀의 지밀한 기대가 밀려 닥쳐오리라. 마치 어둠 속의 바닷가 모래밭에 뛰어 내려 갔을 때 밀어닥치는 첫 파도와도 같이. 지바고는 말고삐를 놓고 안장 위에 몸을 숙여 두 손으로 말의 목덜미를 껴안고 갈기에 얼 굴을 파묻었다. 이런 애정의 표시를 힘을 내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말은 힘껏 달리기 시 작했다. 발굽을 부드럽게 허공에 휘저으며 나는 듯이 달리고 있을 때, 지바고는 기쁨에 끊어오르 는 심장의 고동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으나,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잘못 들었겠거니 생각했다. 별안간 바로 옆에서 귀청이 떨어질 듯한 총성이 울렸다. 그는 몸을 일으켜 말고삐를 잡아 당겼다. 있는 힘을 다하여 달리던 말을 갑자기 세웠기 때문에 옆으로 쏠리면서 뒷발로 일어 서려고 엉덩이를 낮췄다. 앞은 십자로 갈림길이었다. '모로베트친킨 회사. 파종기·탈곡기' 간판이 석양을 받아 번쩍 였다. 세 명의 무장한 기병이 길을 막아 섰다. 두 개의 탄띠를 어깨에 엇갈아 두른 학생모에 소매 없는 상의를 입은 중학생과, 장교 외투를 입고 털모자를 쓴 기병이 마치 가장 무도회 에 나가는 사람들처럼 솜을 두툼하게 넣은 바지에 차양이 넓은 승려 모자를 눌러쓴 해괴한 모습의 뚱뚱한 사람이었다. "움직이지 말아요, 의사 동무." 제일 나이가 많은 털모자의 기병이 뚜렷하면서도 조용하게 말했다. "명령에 복종하면 생명을 보증하겠소. 그렇지 않으면 죄 없이도 처형하겠소. 우리 부대의 의사가 전사했기 때문에 당신을 의무 노동자로 징용하는 것이오. 말에서 내려 고삐 를 이 젊은이에게 주시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도망치려 들면 용서하지 않겠소." "당신은 미쿨리츠인의 아들 레스느이치 동무입니까?" "아니오, 나는 그의 수석 연락 장교 카멘노드보르스키요." 한길에서 1 도시, 읍, 부락들이 있었다. 크레스토보즈드비젠스크 읍, 오멜리치노, 파쥔스크, 트이사 츠코예의 여러 역들, 야글린스코예 개간지, 즈보나르스카야 마을, 볼리노예, 구르토브시츠 키의 여러 부락들, 케맴스카야 개척지, 카제예보 역 그리고 쿠체이느이 교외 마을, 말르이 예르몰라이 마을이 있었다. 시베리아에서도 제일 오래된 길이며 옛날의 역마가 달리던 한길이었다. 가도는 마치 빵을 자르듯이 읍내를 구분지어 놓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다보아도 보이지 않게 좌우편으로 시골 마을을 통과하고 있는 이 한길은 저 멀리 뒤쪽에 농가를 바라보며 마을을 휘감고 돌거나 급 커브를 짓고 뻗어 있었다. 먼 옛날 호다트스코예에 철로가 개설되기 전에 트로이카가 이 한길을 달렸다. 차, 곡식, 선철을 가득 실은 짐마차들이 한쪽 길로 가고, 경비대에 호송되는 유형수의 무리가 그 반대 쪽에서 오고 있었다. 그들은 보조를 맞춰 일제히 밭고랑쇠 소리를 내면서 걸어갔다. 울던 애들도 울음을 멈췄다. 구원받을 수 없는 무법자의 무리. 주위는 인적이 없이 어둡고 술렁 거리는 울창한 숲뿐이었다. 한길을 따라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가족같이 지내고 있었다. 마을과 마을, 읍과 읍은 우 정과 인척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호다트스코예는 한길과 철도가 교차되는 곳이었다. 기관 수리 공장, 그 밖에 보선 관계의 작업장이 여러 개 있고, 그 외에도 바라크 마을에는 가난 뱅이들이 우글거리고 살며 병을 얻어 죽어가고 있었다.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정치범들은 형 기를 끝마치면 숙련 기계공이 되어 일하러 와서는 여기에 그대로 눌러 살아버리는 수도 있 었다. 철도 노선을 따라 곳곳에 수립되었던 최초의 소비에트는 이미 오래 전에 뒤집혀지고 얼마 동안은 시베리아 임시 정부가 지배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모든 지방이 최고 통치자로 자처 하고 있는 콜차크 제독에게 넘어가버렸다. 2 길은 가다가 한 곳에서 오르막 산길이었다. 차츰 넓은 전망이 트였다. 밋밋한 언덕길과 지 평선은 한없이 넓었으나 피곤에 지친 말과 사람들이 한숨을 쉬려고 할 때 고갯길 꼭대기에 올라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은 다리를 지나고 그 밑으로 께쥐마 강의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강 건너편 상당히 가파른 꼭대기에 보즈드비젠스크 수도원의 벽돌담이 보였다. 길은 교회의 언덕길을 휘감아 돌아 교외까지 꾸불꾸불 읍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읍의 중심지에 이르러서는 길은 다시 뜰을 지나게 된다. 교회의 푸른 철문은 큰 광장을 마주보고 있었다. 아치 모양의 대문 위의 성상에는 금박으로 '기뻐하라, 생명을 주는 십자 가, 패하지 않는 승리를 믿으라' 라고 씌인 틀이 걸려 있었다. 겨울이 끝나는 무렵, 사순절도 끝나는 부활제 전 주일이었다. 길에 눈이 꺼멓게 되면서 녹 기 시작하는 것 같았으나, 지붕 위에 쌓인 눈이 새하얀 높은 모자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종 치는 사람을 구경하려고 종각으로 기어 올라간 소년들에게는 저 밑으로 보이는 집들이 어수선하게 모아 놓은 흰 병과 작은 상자처럼 보였다. 점보다 별로 크다고 볼 수 없는 사람 이 집 쪽으로 움직여 가다가는 멈춰 서서 벽에 나붙은 최고 통치자의 포고문을 읽고 있었 다. 그것은 3년령 적령자를 군에 소집한다는 포고문이었다. 3 그날 밤 예상치도 않았던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이맘때의 계절로는 이상하게도 따뜻한 날씨였다. 가랑비가 내리는데 어찌나 가늘고 보이지 않게 내리는지 미처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물안개가 되어 공기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실 은 빗물이 되어서 땅바닥을 따뜻이 데워가며 재빨리 흘러서 남은 눈을 깨끗이 씻어 냈으며, 대지는 검게 물들고 땀흘리듯 번쩍거렸다. 키가 낮은 사과나무들은 순을 가득히 달고서 정원 울타리 너머 거리로 가지를 뻗치고 있 었다. 가지를 따라 물방울이 나무를 깔아놓은 인도 위로 사정 없이 떨어지는 소리가 온 시 내에 들렸다. 사진사의 집 뜰안에 매어두었던 강아지 토미크가 새벽까지 짖어댔다. 아마 그 짖는 소리 에 화가 낫던지 갈루진네 정원에서는 까마귀가 온 시내가 들으라는 듯이 시끄럽게 울고 있 었다. 시내 아래 지역에서는 짐마차 세 대가 상인 류베즈노프 집에 도착했는데, 그는 어디서 착 오를 했는지 주문을 낸 일이 없다면서 보내온 물건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마부는 시간이 늦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하룻밤을 묵게 해달라고 사정 했지만, 그는 빌어먹을 것이 라 욕설을 퍼붓고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 옥신각신 떠드는 소리가 온 시내에 들렸다. 일곱번째 기도 시간이었다. 밤 한 시, 교회의 제일 낮은 소리를 내는 종소리가 은은히 들 려왔다. 종소리는 캄캄한 밤중에 소리없이 내리는 부슬비에 녹듯이 대기 속으로 퍼지면서 마치 강둑에서 무너진 흙덩이가 봄 장마철에 홍수에 씻겨 내려 없어지듯이 사라졌다. 이날은 부활제 전날의 '발 씻는 목요일' 밤이었다. 멀리 비의 장막 저쪽 여기저기에 사람 들의 모습과 분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등잔불에 비친 이마와 코, 얼굴이 교회 뜰안 을 어른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신자들이 미사에 참석하고 있었다. 15분쯤 지났을 무렵, 미사가 시작되었을 때 교회에서 인도로 가까이 오는 발소리가 있었 다. 그것은 잡화상 갈루진의 처였으며,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털외투의 앞깃을 풀어헤친 채 한참 동안 뛰어가다간 걸음을 늦추더니 멈췄다가 다시 불안한 걸음걸이로 집으로 가고 있었 다. 그녀는 교회에서 졸도할 것 같이 숨이 막히는 것 같아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밖으로 잠 깐 나왔지만, 막상 나와보니 끝까지 앉아 있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창피했던 것이다. 그녀 는 이제 2년째나 사순절에 단식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정작 걱정되는 것은 이것 때 문이 아니었다. 그날 벽에 나붙은 동원령에 아무것도 모르는 가엾은 자기 아들 체로쉬카 걸 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생각을 잊으려고 애썼으나 길을 접어들 때마다 어둠 속에서 하얗 게 나붙은 종이가 그녀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녀의 집은 바로 모퉁이에 있었으나, 밖에 있는 것이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공기가 나쁜 방구석에 빨리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어두운 마음이었다. 괴로움을 다 말하자면 밤 새껏 말해도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밖에 나와 있으면, 슬픈 상념이 덩어리가 되어 밀려와도 교회 모퉁이에서 광장 모퉁이까지 두세번만 왔다갔다하다 보면 그런 걱정을 모조 리 떨쳐 버릴 수가 있었다. 이제 부활제 날이 눈앞으로 다가왔으나 집엔 아무도 없으며 그녀 혼자만 남게 되었다. 왜 나만 혼자가 됐지? 물론, 크슈샤는 양녀이니까 열외로 생각했다. 정말 그 애는 무슨 아이지? 남의 생각은 아랑곳없었다. 그 애는 내 편인지 원수인지 또 숨은 적수가 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남편의 먼저 부인이 데리고 온 딸인데, 남편 말에 의하면 그녀를 양녀로 입적시켰 다는 것이다. 아니, 혹시 그 애가 남편의 친딸이 아닐까? 아니, 딸이 아니고 딴 관계가 아닐 까? 남자의 속은 아무도 몰라! 하긴 솔직히 말해서 그 애는 흠잡을 데가 없어. 영리하고 예 쁘고 얌전하니까. 바보 같은 아들이나 아비보다는 훨씬 똑똑하지. 이렇게 나 혼자 남아서 부활절의 전 주일을 보내다니. 온 집안 식구들은 제멋대로 흩어져 나가버렸어. 남편은 거리를 누비고 다니면서 소집된 신병들 앞에서 연설을 하며 그들의 무공을 격려하 고 있었다. 바보 자식을 돌보고 위험에서 건져주는 것이 아비의 도리가 아닌가. 게다가 체로쉬카마저 역시 차마 견디지 못하고 부활제 전날 밤에 집을 뛰쳐 나가 버렸다. 그는 쿠체이느이 마을의 친척 집을 다니고 놀면서 근심을 잊고 있었다. 그애는 기어코 학교 에서 퇴학당하고 말았다. 한 학년 걸러 번번이 낙제를 시키고서 8년째 되는 지금 와서 쫒아 내다니 너무하는 일이었다. 참으로 따분한 일들뿐이야! 오 하나님! 왜 일이 이렇게 뒤틀어지기만 할까요! 즐거운 일이 란 하나도 없으니 다 집어치워 버리고 싶기만 해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이 모든 불 행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혁명 때문일까요? 아니, 절대 그런 건 아니야! 이 모든 것이 전쟁 때문이야! 전쟁이 러시아의 꽃 같은 대장부들을 죽여 버렸지. 지금은 썩어빠진 인간 쓰레기 밖엔 남지 않았어. 아버님이 살아 계셨을 때만 하더라도 아주 달랐었다. 우리 아버지는 청부업자였으며 술은 마시지 않았고 학식이 높은 분이었다. 우리는 아주 호강하며 살았고 폴랴와 올랴 두 자매가 있었다. 이름이 잘 조화되듯이 그들은 사이 좋게 지냈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 오던 목수 감독들은 능력 있는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나와 동생들은 여섯 가지 털실로 스카프를 짜려고 생각했어-느닷없이 무슨 생각이 났었는 지. 우리 자매의 뜨개질 솜씨가 얼마나 좋았던지 그 스카프는 온 고장에 소문이 자자했었지. 그리고 그때는 무슨 일이든지 즐겁고 풍족하고 좋았어. 교회에서 하는 일도 춤도 사람도 예 절도 다 가슴을 뛰게 하는 것뿐이었어. 이렇게 우리 집안은 농민 노동자의 평민이었지만 만 사가 즐겁기만 했어. 그리고 이 무렵 러시아는 처녀시대였었지. 요새 같은 쓰레기가 아니라 믿음직스러운 실제의 방패들이 지켜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모든 것이 빛 을 잃어가고, 변호사와 유태인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혓바닥을 놀리고 있으니 말이야. 남편 과 그의 친구들은 건배나 연설, 축원만으로 그때의 그 황금시절을 다시 오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나 그것으로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 바위를 녹이고 산을 움직이고 땅을 파보아도 소용이 없는 노릇이었다. 4 이제 그녀는 몇 번이나 장터가 있는 시장 입구까지 왔다갔다했다. 거리에서 길 왼편에 그 녀의 집이 보였으나, 거기까지 올 때마다 생각을 다시 하고는 또 교회로 통하는 구불구불한 뒷골목을 되돌아가곤 했다. 시장은 들판만큼 널찍한 곳이었다. 이전에는 장날이 되면 농부들의 짐짝으로 붐벼댔다. 광 장의 한쪽은 옐레닌스카야 거리와 통하고 있었다. 다른 한쪽은 둥글게 구부러진 곳에 1,2층 짜리 건물이 있었고, 거기에 큰 상점, 사무실, 공장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세상이 조용하던 그때, 여기에는 안경을 끼고 팔소매가 긴 옷을 입은 여자를 아주 싫어하 던 부르하노프가 피혁, 타르, 차바퀴, 마구, 보리, 건초 등의 장사를 하고 있었다. 네 장의 철판을 붙인 커다란 문 밖에 점잖게 나앉아서는 신문을 읽곤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 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뿌연 유리 진열장 속의, 리본으로 묶은 결혼식 양초와 꽃다발이 들어있는 종이 상자 위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뒤쪽 작은 방에는 가구도 없었고, 한두 군데에 촛덩어리 가 없었다면 아무런 물건 흔적도 없었을 것이며, 어디에 사는지도 알 수 없는 백만장자 양 초 제조업자가 1천 루불리대의 큰 거래를 한 적도 있었다. 여기 상점들이 있는 중간쯤에 창문이 세 개 달린 갈루진의 큰 잡화점이 있었다. 잘 다듬지 않아 짬이 많이 난 마룻바닥에 주인과 심부름꾼이 온종일 차를 마시고 차 껍데기 를 버렸기 때문에, 하루에 세 번은 훔쳐야 했었다. 결혼을 금방 한 그녀도 여기가 좋아서 자 구 계산대에 앉곤 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색깔은 엷은 자색이었다. 교회의 장엄한 의식이 있을 때 신부님이 입은 옷의 색깔이나 라일락 꽃봉오리의 색깔이 그랬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비로드 옷도 그 빛 깔이고, 그 집의 술장도 그런 색깔이었다. 그것은 행복과 추억의 빛깔인 것이다. 그리고 혁 명 전까지의 순결했던 러시아도 라일락꽃 빛깔이었다고 생각되었다. 전분과 설탕과 유리병 에 든 검은 당밀의 향기가 풍기는 상점 안의 어스름한 자색빛 속에서 계산대 앞에 앉기를 그녀는 무척 즐겨했던 것이다. 이곳 재목 하치장 옆골목에는 목조 이층집이 망가진 대형 마차처럼 서 있었다. 이 집에는 네 세대가 살았으며, 집 정면에서 양쪽으로 입구가 하나씩 나 있었다. 아래층에는 오른쪽에 잘킨드의 약국이 있었으며 왼쪽에는 공증인 사무소가 있었다. 약국 바로 위층에는 늙은 양 재사 쉬물레비치가 여러 식구와 살고 있었다. 공증인의 위층 즉 양재사의 방에서 계단 중턱 을 건너 맞은편 방에는 하숙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그들의 장사나 직업을 나타내는 명 패나 간판이 문 전체에 즐비하게 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기계 수리, 구두 수선, 조각사 카 민스키도 포함되었고, 두 사람의 사진사 주크와 쉬트로다도 이곳에 있었다. 이층 건물이 이렇게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사진사의 젊은 조수로서 수정을 맡아보는 세냐 마기드손과 대학생 블라제인은 뜰안의 큰 나무 창고 구석에 암실을 꾸며 놓고 있었다. 암실 창문에 희미하게 비치는 빨간 램프가 핏발이 선 눈처럼 보여서 지금도 아마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쇠줄에 매어 놓은 강아지 토미크가 옐레닌스카야 거리 일대에 들릴 만큼 시끄럽게 짖어대던 곳이 바로 이 암실 창문 밑이었다. '꽉 꽉 들어찬' 회색 집을 지나면서 갈루진 부인은 생각했다-'더러운 빈민 소굴' 이지. 그 러나 이내 그녀는 자기 남편의 지나친 유태인 증오에 대해 뉘우쳤다. 그들은 러시아의 문제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사람들은 아니니까. 그러나 소요와 혼란의 원 인은, 쉬물레비치 노인의 얘기대로이다. 그는 추한 얼굴을 찡그리고 웃으면서 "그런 레이바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가 트로쯔끼의 유태식 애칭)의 못된 장난이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 이런 하잘것없는 것을 뭣 때문에 생각하고 있담? 유태인이 어쨌단 말인가. 그들이 불행의 씨란 말인가? 불행의 씨는 도시에 있는 것이 아닌가. 도시 덕분에 러시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도시 사람들은 교육을 받았고, 지방 사람들은 도시에 아주 취해 버려서 도시의 흉내를 내려고 하지만 따라갈 수 없기 마련이야 그래서 촌사람들은 허공에 둥둥 떠 버리고 말았어. 그런데 반대로 무지가 곧 불행일지도 몰라. 배운 사람들은 땅속도 뚫어보며 모든 걸 이미 다 환히 알고 있었다. 우린 목을 잘렸는데도 모자를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지. 어두운 숲속을 헤매는 꼴이었어. 그렇다고 지금 지식 잇는 사람이라고 해서 편안히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기근 때문에 도시에서 잇달아 도망쳐 나오고 있는 꼴을 보란 말이야. 뭐가 뭔지 모르겠군. 잘 생각해보아야지. 그러나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있는 것은 시골 사람들이야. 친척인 셀리트빈, 팜필 팔르이흐, 네스토르와 판크라트 형제 집안들은 다 잘 지내고 있어. 한길가의 새 농장들은 참 멋있었 어! 15제사친(1제사친은 약2정보)의 경작지에 양, 소, 말, 돼지를 기르며, 앞으로 3년 먹을 곡식을 다 마련해놓았다. 농기구가 볼 만했어, 수확기까지 가지고 있었으니까. 콜차크는 그 들을 자기편에 끌어들이려고 애썼고, 군사 위원은 그들대로 산림 의용대에 끌어들이려고 기 분을 맞추고 있었어. 그들은 게오르기 훈장을 받고 전선에서 돌아와서는 교관이 되려고 앞 을 다퉜어. 어깨에 견장이 있거나 없거나 자기가 할 일을 잘 알고 있다면 언제든지 일자리 는 있는 법이야. 그냥 썩지는 않아. 그럼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여자가 이렇게 늦도록 거리를 서성거리는 것은 좋은 일이 못 되지. 정원이라면 몰라도. 게다가 여긴 진구렁이야. 아무튼 기분이 좀 가벼워졌으니까. 마침내 회상에 잠겨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다가 그녀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층계 앞 에서 발을 멈추고 다시 몇 가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지금 호다트스코예의 선도적 인물에 대하여 생각했다.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은 알고 있었다. 모두 도시에서 유배되어 온 정치범들이었다. 치베르진, 안치포프, 무정부주 의자인 '검은 깃발' 브도비첸코, 이곳의 난폭한 대장장이 고르제냐가 다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교활한 사람들이라 저마다 속셈은 다 가지고 있었다. 한창 날리던 때에는 소동깨나 일으켰던 족속들이었다. 지금도 무얼 꾸미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게 없이는 도무지 살아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기계로서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기계 처럼 냉혹한지도 모른다. 그들은 천천히 걸어다니며, 스웨터 위에 상의를 걸치고 파이프에 담배를 피워 물고, 전염별이 두려워 끓인 물을 마시고 있었다. 남편은 지금 공연히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모든 것을 제멋대로 뒤집어 놓고 제 갈 길을 찾아갈 사람들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을 했다. 자기 자신은 멋과 독창력이 있으며 또 절제할 줄 아는 영리하고 좋은 사람으로 생각됐다. 그런데 이런 촌구석에서는 자기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곤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우랄 일대에 알려진 센체추리하라는 어리석은 노파 의 노래가 생각났으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처음 구절뿐이었다. 센체추리하는 마차를 팔아 발라라이카를 샀다네. 그 뒤는 추잡한 소리뿐이었다. 크레스토보즈드비젠스크에서는 그녀에게 빗대어 노래 불렀 던 것이다. 그녀는 괴롭게 한숨을 내쉬고는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5 그녀는 현관에 머무르지 않고 슈바를 입은 채 침실로 들어갔다. 방의 창문은 뜰을 향해 있었다. 밤중인 지금, 창문 안쪽에서 중복되는 그림자는 마치 창 밖에서 비친 그림자처럼 생 각되었다. 축 늘어진 커튼의 그림자가 뜰의 앙상한 나무의 그림자와 흡사했다. 겨울이 끝날 무렵, 정원의 비로드 같은 어둠이 봄의 땅속에서 솟아 나는 진한 자색 열기에 훈훈하게 녹 고 있었다. 또 지저분한 커튼이 늘어져 있는 방안에도 비슷한 두 가지 요소가 얽혀 있었다. 숨막힐 듯한 어둠은 다가오는 축제의 훈훈하고 진한 자색빛으로 부드럽게 느껴졌다. 마리아 성상은 은빛 옷 속으로부터 갸름한 두 손을 펴서 위로 치켜올린 모습이 그녀의 그 리스 이름, 신의 어머니의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받들고 있는 것 같았다. 황금 촛대에 얹어 놓은 검은 잉크병 같은 등잔의 불빛이 석류석 유리를 통하여 별빛처럼 흐 트러져 검붉은 빛을 침실 융단 위에 뿌리고 있었다. 슈바와 스카프를 벗으면서 그녀는 거북하게 몸을 움직였다. 다시 옆구리가 결려와서 아픔을 느끼곤 했다. 예전의 아픔을 두렵게 회상하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슬픔이 있는 자를 지켜주시는 자비롭고 순결하신 성모 마리아, 고난에 빠진 자를 건져주시며 세상을 살피시 는..."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픔이 사라지고 옷을 벗기 시작하였으나, 잔등의 후 크가 손가락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부드럽게 줄어드는 천에 걸려서 그것을 풀어내느라 애썼 다. 크슈샤가 잠이 깨서 침실로 왔다. "어머니, 왜 어두운 데 계세요? 등잔불을 가져올까요?" "아니 그만둬라. 이만 해도 보인다." "제가 벗겨드릴게요. 가만 계세요."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아서 마음이 언짢구나. 그 양재사가 일부러 벗기 어렵데 후크를 달았나봐. 북북 찢어서 그놈의 보기 싫은 낯바닥에 모조리 던져버렸으면 속이 후련하겠다." "성십자가제의 노래는 참 좋았어요. 밤이 고요하니까 여기까지 들렸어요." "노래는 좋았는지 모르지만, 이 어미는 기분이 좋이 않아요. 또 결리기 시작하니-여기저기 온몸이 쑤시니 어떻게 하면 좋지?" "이전에는 스트이도브스키 선생이 봐주었는데." "그 의사는 되지도 않을 소리를 언제나 하고 있어요. 그 사람은 돌팔이니까. 그런데 지금 은 없어요. 시내에서 떠난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고, 부활제 직전이라 모두들 가 버렸어. 지 진이라도 나는지 야단법석들이야." "그럼 헝가리 의사는 어때요? 포로 말이에요. 그 사람의 치료는 효과가 있던 것 같았어 요." "그것도 틀렸어. 사람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어. 케레니 라이오쉬는 저쪽(백위군의 점령 지역 밖)에 있는 헝가리 사람들과 한패가 돼 버렸어. 적위군에 징용돼 끌려가 버렸지." 어머니는 왜 그렇게 조심성이 많으시죠? 너무 신경과민이예요. 어머니 같은 경우에는 좋 은 말 한마디로 거뜬히 낫는 수가 있는데. 주문을 외면서 어머니의 아픔을 고쳤던 군인 색 시 있었지요? 이름이 뭐더라..." "얘, 정말 못할 소리가 없구나. 그래 나를 무식한 바보로 취급한단 말이냐! 차라리 내가 없는 곳에서 센체추리하의 노래라도 부른다면 눈 하나 까딱 않겠다.'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죄가 돼요. 남부끄러운 줄 모르시고. 그 여자 이름을 가르 쳐주면 어때요. 입안에서 뱅뱅 돌면서 생각이 안 나요. 꼭 알아야 속이 시원하겠는데." "그 여자 이름은 바지 종류보다도 더 많단다. 네가 어떤 이름을 알고 있는지 몰라도 쿠바 리하라고도 하고 메드베치하 즐르이다리하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그 밖에 이름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그 여자는 지금 이 근처에 살고 있지는 않아요. 지금은 자취를 감춰 버렸단 말이야. 들리는 말엔 낙태를 시켰는데, 무슨 환약인가 가루약을 만들어서 잡혀가 케제마 형무소에 갇혔다고도 하고, 감옥에 들어간 직후에 탈옥해서 극동 지방 어딘가 도망쳐 버렸다는 소문이 있어요. 하기야 누구나 다 내빼고 말았지만 말이야. 블 라스 파호므이치(남편 블라수쉬카)도 체로쉬카도 마음씨 고운 네 이모 포랴도 다 가버리고 없단 말이야. 나하고 너 같은 바보만 우물쭈물하고 있지, 시내에는 정직한 여자라곤 하나도 없어지고 말이야 나는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야. 그리고 의사라고 이름이 붙은 것은 하 나도 없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젠 의사를 부를 수가 없게 되었어. 유라친에는 의사 한 사람이 있는데 모스크바에서 온 유명한 교수로서, 자살한 시베리아 상인의 아들이라고 말하 고 있었어. 그래도 내가 그 사람을 불러오려고 했는데 적위군이 길에 열 두 개소나 경계 초 소를 펴고 있어서 아무데도 못 가게 됐어. 그럼 너는 가서 잠이나 자렴. 나도 자야겠어. 너 는 그 학생 블라제인에게 정신이 빠져버렸지? 아니긴 뭐가 아냐. 새우처럼 얼굴이 빨개지면 서. 그 학생, 내가 맡긴 사진을 현상하느라 고생하겠군. 그집 사람들은 잠자지도 않더군, 다 른 사람까지 못 자게 하면서. 토미크는 온 거리를 떠들썩하게 시끄럽게 짖어대고, 사과나무 위에선 까마귀가 깍깍 울어대니 이 밤도 또 그냥 새우게 될 것 같구나... 뭘 그렇게 화내니, 발끈해 가지고. 처녀가 연애도 못할 바에야 학생도 어디 소용이 되겠니!" 6 "개가 왜 저렇게 짖어댈까? 가서 알아봐야겠어. 아무 이유도 없이 저렇게 짖어 댈 리가 없지. 리도치카, 기다려! 왜 그런지 알아 봐야겠어. 그러다가 경찰이 뛰어오면 큰일 나니까. 우스친, 자네는 여기 있게. 시보브류이, 자네까지 갈 건 없네." 중앙에서의 대표 리도치카는 빨치산 대장의 제지하는 소리도 듣지 않고 지루한 장광설을 재빠르게 늘어놓는다. "시베리아에 있는 부르주아 군사 정권의 약탈, 징발, 폭행, 총살, 고문 등의 정책은 무지 몽매한 민중의 눈을 뜨지 않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시베리아 정권은 노동자 계급만 아니라 전체 근로 농민의 적인 것입니다. 시베리아와 우랄 지방의 근로 농민은 알아야 합니다.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병사가 동맹을 하여야만이, 키르기스와 부라트의 빈민이 동맹을 하여야만 이..." 이윽고 그는 방해자가 들어온 것을 깨닫고 말을 멈추고 나서 땀이 흐르는 얼굴을 손수건 으로 닦고 피곤한 듯이 부풀어오른 눈을 감아 버렸다.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속삭였다. "좀 쉬고, 물이라도 마셔요." 알아보러 갔던 사람이 걱정하던 빨치산 대장에게 보고했다. "그렇게 걱정할 건 없습니다. 다 제대로 돼가고 있습니다. 신호등은 창문에 보이고 보초도 제자리에 있어서, 극적으로 말하자면, 공간을 시선으로 삼키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보고를 계속해 주십시오, 리도치카 동무." 큰 창고 안은 장작들이 치워지고, 천장까지 쌓아 올린 장작의 벽으로 막힌 입구의 깨끗한 장소에서 비밀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만일 비상시에는 비밀 문을 통하여 지하실로 내려 가 교회 뒤쪽의 콘스탄치노브스키 골목의 뒤뜰로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보고자는 벗겨진 대머리에 검은 무명 모자를 쓰고 귀 밑까지 구레나룻이 덮여 있는, 혈색 이 좋지 못한 얼굴이었다. 신경질 때문에 줄곧 담을 줄줄 흘리면서 책상위의 석유 램프에서 흘러나오는 열에 담배 꽁초를 연방 붙여 물고는 굶주린 듯이 연기를 빨아 삼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흩어진 종이조각 위로 허리를 구부려서 냄새를 맡듯이 근시의 눈을 신경질적으로 움직이면서 피로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도시와 농촌가의 빈민의 동맹은 소비에트를 통해서만이 달성됩니다. 지금이야말로 좋든 싫든간에 시베리아의 농민들은 목적을 향하여 돌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베리아의 노동자가 이미 오랜 옛날에 이것의 달성을 위하여 투쟁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노동자 농민의 공동의 목적은 카자크 두령이나 제독 따위의 증오할 만한 전제 정권을 타도 하고, 무장 봉기에 의하여 농민·병사 소비에트를 수립하는 것입니다. 이빨까지도 무장한 장 교나 카자크 등의 부르주아와의 용병들과 싸우면서 봉기한 민중은 정규의 전면 전쟁을 전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투쟁은 길며 가열될 것입니다." 다시 말을 멈추고 얼굴의 땀을 씻은 다음 눈을 감았다. 규칙을 무시하고 청중 가운데서 일어서서 손을 쳐들고 발언을 청하는 사람이 있었다. 빨치산 대장, 정확히 말해서 빨치산 부대 케젬 대장은 보고자의 바로 면전에 시무룩한 태 도로 앉아서 아주 버릇없이 그의 말을 연방 가로막고 있었다. 그에게는 조금도 경의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이제 겨우 소년의 꼭지가 떨어진 젊은 군인이 큰 부대를 지휘할 순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부하의 복종과 존경을 받을 수는 없었다. 의자 뒤로 제쳐놓은 기병 외투 속에 손발을 파묻고 앉아 있었다. 어깨에는 견장을 떼어낸 자국이 검게 보였다. 그의 양편에는 곱슬거리는 양털로 가장자리를 한 회색빛에 가까운 흰 염소 가죽의 짧은 외투를 입은, 대장과 같은 또래의 호위병이 묵묵히 서 있었다. 멀끔한 얼굴은 돌처럼 무표정 하고, 대장에 대한 맹목적인 총성과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나 할 용의가 있다는 결의를 나 타내고 있을 뿐이었다. 토론에도 끼어들지 않고, 그곳에서 제기된 문제에도 관심 없는 그들 은 이야기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았다. 방안에는 십여 명의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서 있는 사람도 있고, 장작더미에 기대거나 두 다리를 마룻바닥에 뻗어버리거나 또 무릎 위에 턱을 괴고 앉은 사람도 있었다. 귀빈 서너 명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제1차 혁명에 참가했던 고참 노동자였다. 그 들 중의 한 사람은 전과 달라진 음흉한 치베르진이었다. 그의 친구 안치포프 노인도 있었다. 그는 치베르진이 하는 말이라면 뭣이든지 찬성했다. 그들은 혁명이 발 앞에 제물과 희생이 바쳐진 신으로 인정되었으며, 우상과도 같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거만 때문 에 따뜻한 인간미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 밖에도 이름 있는 몇 사람이 있었다. 러시아 무정부주의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검은 깃발' 브도비첸코인데, 그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줄곧 마룻바닥에 앉아 있다가는 다 시 일어나고 또 왔다갔다 걸어다니다가 중앙에 서기도 했다. 아주 뚱뚱한 거구에다 큰 머리 와 큰 입, 사자의 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었다. 터키와의 전쟁 때인지, 아니면 노 일전쟁 때 장교로 참전했으며, 가슴 속에 자라나는 백일몽에서 언제나 헤어나지 못하는 몽 상가였다. 놀랄 만큼 거대한 체구 때문인지 또 자기보다 작은 것을 의식 못하는 탓인지, 아니면 너 무 좋은 성질 때문인지 몰라도 브도비첸코는 흔히 주위에서 일어나고 잇는 사태에는 마음을 쓰지 않고, 무엇이든 잘못 알아들으며 자기의 반대자의 의견을 자기 의견과 같은 것으로 생 각해버리고는 아무렇게나 다 찬성하는 것이었다. 그의 옆자리 마룻바닥에는 친구인 사냥꾼 스비리드가 앉아 있었다. 그는 농부는 아니지만, 그의 검은 셔츠에서 농민다운 데가 엿보였다. 목에 건 십자가를 끄집어 당겨서 그것으로 가 슴패기를 긁어댔다. 부라트인과의 혼혈인 그는 마음은 부드러웠으나 무식한 사람이었다. 머 리를 가는 변발로 땋고, 숱이 적은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몽고인 특유의 용모 탓으로 나이 먹어보이는 얼굴이 언제나 상냥한 미소로 주름을 짓고 있었다. 보고자는 중앙위원회의 군사 지령을 가지고 시베리아를 여행하고 있었으며, 이제 다녀야 할 넓은 지역을 끊임없이 머리 속에 생각했다. 그는 대부분의 경우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에 게는 무관심했다. 다만 어려서부터 혁명가였으며 민중을 위해 싸운 탓으로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젊은 대장에게 선망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었다. 그는 대장의 무례한 태도를 순수한 혁 명적 기질의 표시로 보고 용서하였을 뿐만아니라, 마치 연모하는 여인이 그 사내의 거친 태 도에 오히려 마음이 쏠리는 것처럼 대장의 독설을 좋아했다. 빨치산 대장은 미쿨리츠인의 아들 리베리였다. 중앙에서 파견된 사람은 협동주의 자로서 트루도비크(나로드니크의 경향을 가진 농민과 인텔리가 결성한 종파. 볼셰비키와는 반대적 입장)의 코스토예드 아무르스끼였다. 그는 이전에 사회혁명당에 가담하였으나 최근에는 과거의 사상적 오류를 시인하고, 여러 번 성명서를 발표하고 자기 비판을 하였다. 공산당은 그의 입당을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입 당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재의 책임 있는 일을 맡겼던 것이다. 그는 군인도 아니면서 지금 그 일을 위촉받게 된 것은 오랫동안 혁명의 경륜과 제정 시대 의 옥고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기도 하였으며, 또한 한때 협동조합운동에 참여하였던 경험이 잇기 때문에 서부 시베리아를 휩쓸고 있는 봉기에서 농민 대중의 심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 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그의 지식은 군사 지식보다도 중요시되었던 것이다. 그의 정치적 신념의 변화는 그의 마음과 태도, 습관까지도 바꾸어버렸다. 이전에 그를 알 고 있던 사람은 벗겨진 머리나 턱수염의 남자를 그 사람이라곤 알지 못했다. 혹시 또 변장 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는 당으로부터 이전의 신분을 밝히지 않도록 엄명을 받고 있었다. 지하 운동 시기의 그의 이름은 베렌제이 또는 리도치카 동무로 통용되고 있었다. 브도비첸코가 성급하게 금방 낭독한 지령에 찬성한다고 발언하였기 때문에 잠시동안 주위 가 소란해지더니, 잠시 후 조용해지자 코스토예드는 말을 계속했다. "확대되는 농민 대중의 운동을 극력 광범위하게 포섭하자면 지방당위원회 관할 구역에서 작전중인 모든 빨치산 부대와 연락할 길을 어서 터놓아야겠습니다." 그는 이어서 비밀 집회 장소, 밀어, 암호와 통신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더욱 자세히 설명하였다. "각 부대는 백위군의 시설과 단체에 속하는 병기, 식량, 장비 등의 저장 장소에 대한 정보 를 빨치산 부대에 제공하고, 백위군이 큰돈을 보관하고 있는 장소와 그 경비 상황 같은 것 을 알려고 합니다. 더 상세히 필요한 것은 빨치산 부대의 기구, 그 대장, 군사 집단의 규율, 모략활동, 부대와 외부와의 연락, 지방 주민에 대한 태도, 야전 군사 혁명 재판, 적의 지역내에서의 파괴 전술 -예로서 교량, 철도 노선, 증기선, 전마선, 역, 공장과 기술 설비의 전부, 그리고 전신, 광산, 식량 보급 등인 것입니다." 리베리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허황된 이야기로 들렸 다. "좋은 강의이군요. 귀에 담아두겠소. 그런데 적위군의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꼼 짝없이 모든 것을 수락하란 말이오?" "그래야지요." "나의 부대는, 포병과 기병을 합해서 3개 연대가 있소. 이들이 지금 수개월 동안이나 작전 하여 적을 격파하고 있었는데, 리도치카, 당신의 그런 어린애 같은 장광설은 대체 우리를 어 떻게 하라는 말이요?' '참으로 훌륭해! 힘이 있군!' 코스토예드는 생각했다. 리베리의 건방진 말버릇 때문에 화가 치밀어오른 치베르진은 논쟁을 막고 나섰다. "죄송합니다. 보고자 동무, 저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데가 있습니다. 아마 지령서 중의 한 점이 잘못 적힌 것 같습니다. 내가 그것을 읽겠습니다. 나는 확실히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 '혁명 다시 전선에 있던 병사의 조직에 속해 있는 재향 군인을 위원회에 들어오게 하는 것 이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위원회의 구성에는 한두 명의 하사관과 한 명의 군사 기술자를 포함시키는 것이 요망됩니다'라고 틀림없이 읽었지요, 코스토예드 동무?" "그렇소. 한마디도 틀리지 않았소." "그렇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저는 군사 전문가에 대한 점은 어쩐지 이해가 되 지 않습니다. 1905년의 혁명에 참가했던 우리 노동자들은 군인을 그다지 신뢰하지 못했습니 다. 언제나 그들 중에는 반혁명 분자가 숨어 있었습니다." 주위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됐어! 결의! 결의합시다. 늦었어. 돌아가야지." "난 다수 의견에 찬성이오." 브도비첸코는 우레와 같은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적으로 표현한다면, 시민에 대한 지령은 민주주의의 기반에서 마치 흙 속에 심어져 뿌리 를 박는 묘목과도 같이 밑으로부터 자라나야 하오. 울타리의 말뚝처럼 위에서부터 때려 박 지는 못하는 것이오. 이것이 바로 야코빈스키 독재의 과오였으며, 콘벤트(국민공회)가 체르 미도리안에 의하여 파탄된 이유였소." "그것은 햇빛보다 더 밝은 사실이오." 그의 방랑의 친구 스비리드가 찬성했다.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오. 지금은 늦은 감이 있어요. 벌써 알았어야 할 터인데. 이 젠 우리는 오직 싸우고 전진할 따름이오. 이제 출발 지점에 되돌아갈 순 없지 않소. 끓여놓 은 국은 먹어야 하오. 물속에 뛰어든 판이니 군소리 맙시다." "결의합시다! 결의합시다!" 사방에서 제의했다. 그로부터도 토론은 더 있었으나 그런 말은 점점 더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드디어 새벽 무렵에야 회의가 끝났다. 그들은 보통때 와 같이 한 사람씩 집으로 돌아갔다. 7 한길가에 그림같이 아름다운 장소가 있었다. 파쥔카 강의 급류가 쿠체이느이와 말르이 예 르몰라이의 두 마을로 갈라지는 곳이었다. 하나는 가파른 언덕을 미끄러져 내리듯이 펼쳐져 있었고, 또 하나는 그 밑의 골짜기에 퍼져 있었다. 쿠체이느이 마을에서는 신병 입대의 송별 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말르이 예르몰라이 마을에서는 부활제 때문에 한때 중지했던 쉬트레제 대령의 감독하에 징병위원회가 그 일대 장정들의 신체 검사를 다시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마을에는 카자크 병사와 기마 민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날은 예년에 비하여 늦게 시작한 부활절의 사흘째 되는 날이었으며, 예년보다 일찍 찾 아온 봄날이라서 따뜻하고 고요한 날씨였다. 한길에서 좀 떨어진 쿠체이느이 마을에서 장정 들에게 베풀 음식이 놓인 식탁에는 흰 상보의 끝을 땅바닥까지 내려 드리우고 있었고, 왕래 에 방해되지 않도록 호수처럼 길게 늘어놓았다. 장정들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돈을 냈으나, 대부분의 음식은 부활절에 쓰다 남은 것이었고, 햄 두 개와 쿨리치(큰 과자빵) 몇 개, 큰 파스하(세모난 우유 과자, 사순제 단식 후에 축하하기 위하여 부활제 당일 아침에 먹음) 두세 개, 게다가 소금에 절인 버섯, 오이, 양배추를 가득 담은 접시라든지 집에서 만든 두텁게 자른 빵과 부활제의 달걀을 쌓아놓은 접시가 식탁 위에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달걀은 대부분 분홍과 연한 푸른색으로 칠해 있었 다. 껍데기는 분홍색이나 푸른색 칠을 했으나 속이 흰 계란 껍데기가 식탁 주변 풀 위에 널려 있었다. 젊은 남녀의 의복도 분홍과 엷은 푸른색이었다. 그리고 분홍색 구름이 푸른 하늘을 서서히 그리고 아름답게 떠다니고 있었다. 하늘도 구름과 같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분홍색 루바쉬카에 일곱 색 명주 허리띠를 맨 갈루진이 좌우로 발끝을 돌리면서 한길 비 탈에 있는 파프누트킨네 집 계단을 요란하게 내려와 식탁 앞으로 달려와서는 연설을 시작하 였다. "샴페인이 없으니 우리가 만든 술로 건배합시다. 오늘 출발하는 젊은이 여러분의 장도를 위하여! 신병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여러 가지 축배를 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앞 길에 놓인 가시덤불 길은 강도의 무리로부터 조국을 지키는 길인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조 국의 산야에 동포의 피를 뿌리게 하고 있습니다. 민중은 무혈 혁명의 승리를 즐길 희망을 가졌으나, 외국 자본의 앞잡이인 볼셰비키당은 총검의 폭력을 가지고 민중의 최대의 희망인 제헌 의회를 해산시켰던 것입니다. 지금 의지할 길 없는 민중의 피는 강물처럼 흐르고 있습 니다. 오늘 출발하려는 젊은이여, 러시아 군대의 욕된 명예를 회복하는 것만이 여러분의 사 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굴욕을 받아왔으며 충실한 동맹국의 신세만 지고 있는 것입니 다. 그러나 빨갱이들뿐만 아니라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까지도 두꺼운 낯짝을 또다시 들고 기 웃거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의 목소리는 우라(만세) 소리와 그를 공중으로 치켜올리라는 함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 다. 그는 입술에 술잔을 대고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것은 잘 걸르지도 않은 보드카 술로 구미에 맞지 않았다. 그는 포도주만을 마셔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민중에게 희생하 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은 만족감에 부풀어 있었다. "너의 아버지는 대단한 웅변가야! 밀류코프 의원도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취해서 큰 소리로 떠들썩한 식탁에 나란히 앉은 고쉬카가 혀꼬부라진 소리로 옆의 친구 체렌치 갈루진에게 말했다. "말은 맞지만, 그러나 너의 아버지는 공짜로 그렇게 열을 낸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연설하 고 다니면서 널 징병 면제시키려는 속셈이겠지." "뭐라고, 고쉬카! 그런 양심의 가책을 받을 소릴 하다니. '징병 면제'라구, 터무니없는 소리 말게. 난 너와 같은 날에 영장을 받았어. 우리는 같은 부대에 갈 걸세. 내가 그 악당들한테 학교를 쫓겨나서 어머니는 울기만 하신다네. 놀란 것은 그것이 그의 타고난 재간이며, 그는 별로 학교 교육도 받지 못했단 말일세." "사니카 파프누트킨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봤나?" "들었어. 그놈이 그렇게 지독한 병에 걸렸었나?" "불치의 병이라네. 척추병으로 죽을 거라고 했어. 그가 잘못했으니까 하는 수 없지.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어. 상대가 어떤 여자인지 조심해야 하네." "그는 이제 어떻게 하 건가?" "비극일세. 자살하려고까지 했었지. 그런데다 또 군대에 소집되어서 지금은 예르몰라이 마 을에서 신체 검사를 받고 있는데 끌려가고 말았어. 그는 빨치산에 들어가서 사회악에 대항 하여 복수하겠노라 말했어." "고쉬카, 자넨 성병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여자한테 가지 않으면 다른 병이 생길 거야." "자네 말을 알겠어. 자네는 자기 경험으로 하는 소릴 테지. 그건 병이 아니고 숨기고 있는 죄악일세." "얻어맞고 싶은가. 친구를 모독하지 말게. 더러운 거짓말쟁이 같으니." "이봐, 그렇게 화내지 말게. 자네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파쥔스크에 놀러간 일이 있는데. 강연하러온 사람이 무정부주의자인데 재미나는 사람이었어. '인격의 해방'이란 연제였었는데 마음에 들었어. 멋있었어. 난 곡 무정부주의자가 되겠어. 힘 은 우리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라 했어. 성과 성격은 동물 전기의 각성이라고 표현했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는 천재였어. 나는 꽤 취해 있었다네. 사람들은 사방에서 떠들어대고 뒤가 멍멍해 버렸어. 이젠 참을 수가 없네. 가만 있게 체로쉬카, 제기랄, 가만 있어요." "고쉬카, 하나만 가르쳐주게. 나는 아직 사회주의 용어는 전혀 몰라서, 사보타주니크가 무 슨 뜻인가?" "그런 용어에 대해서는 내가 선생일걸세. 모르는 게 없다네. 체로쉬카, 난 지금 취했어. 시 끄럽게 굴지 말게. 사보타주니크란 것은 한패거리란 말이야, 이 바보야. 알겠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나쁜 데 쓰는 말이로군. 그런데 아까 자네가 전기에 대한 이야길 했는데 나도 들은 일이 있어. 난 페테르부르그에 전기띠를 주문하려고 했다네. 현품을 받고 대금을 지불하면 된다는 광고를 보고, 정력에도 좋다고 했어. 그런데 느닷없이 또 새로운 혁 명이 일어나고 말았어." 체렌치가 말을 끝내기 전에 술주정꾼의 떠들어대는 소리를 누르고 얼말 멀지 않은 곳에서 굉장한 폭음이 지축을 흔들며 울려왔다. 순간, 식탁에서의 소동이 뚝 끊기고 이내 훨씬 더 무서운 혼란이 일어났다. 의자에서 뛰쳐 일어난 사람 중에는 좀 덜 취한 사람은 서 있을 수 가 있었지만, 비틀거리는 발로 도망치려다 식탁 밑으로 비실비실 쓰러져 그대로 코고는 사 람도 있었다. 여자들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큰 소란을 피웠다. 갈루진은 주위를 연방 두리번거리며 범인을 찾고 있었다. 처음에는 폭음이 마을 어딘가 아니면 식탁 바로 근방에서 났던 것 같았다.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얼굴은 자색으로 변해 있었다. "우리들 대열에 숨어들어 만행을 저지른 반역자는 누구냐? 누가 수류탄을 던졌느냐? 그 독사 같은 놈을 이 손으로 죽여버릴 테다. 내 아들이라도 용서 못한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자라도 우리에게 이런 장난을 하도록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마을 주위에 비상선을 치고 스파이를 잡읍시다. 도망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에는 모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말르이 예르몰라이의 군청 건물에서 검은 연기 기둥이 천천히 하늘로 치솟고 있는 곳에 정신이 쏠렸다. 모두 골짜기의 낭떠러지 로 뛰어가 무슨 일인지 살피고 있었다. 군청 건물이 불타고 있었다. 여러 명의 장정이 뛰어나왔다. 그 중에는 맨발에 바지만 걸친 알몸뚱이도 있었다. 쉬트레제 대령이 다른 징병위원회 군인들과 함께 건물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카자크 기병과 민경대원들이 안장 밖으로 몸을 낮게 기울이고 말 채찍을 휘두르면 서 마을을 뛰어다니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말은 뱀처럼 꿈틀거리며 뛰어다녔다. 많은 사 람들이 경계 신호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를 듣고 쿠체이느이 쪽으로 길을 뛰어 올라가고 있 었다. 사건은 무서운 속도로 진전되고 있었다. 어두워지자 쉬트레제 대령은 범인이 예르몰라이 마을을 도망쳐 나갔다고 확신하고 카자트들을 이끌고 쿠체이느이 마을로 달려가 마을 주위 에 보초병을 풀어 모든 집과 농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장정들의 태반은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연회 장소에 그대로 남아 땅바닥에서 잠들 어버리거나 식탁 밑으로 머리를 처박고 코를 골고 있었다. 민병대가 마을에 왔다고 알려진 때는 이미 캄캄해진 후였다. 몇 명의 젊은이는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서 뒤뜰을 지나 가까운 곳간에 들어가 서로 밀고 차면서 벽의 좁은 사이로 마룻바닥 밑에 기어들어갔다. 어둠과 소동 때문에 누구의 집인지 알 수 없었으나 생선과 석유 냄새로 보아 소비 조합 상점의 곳간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 같 았다. 숨은 사람들은 양심에 거리낄 일은 없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단지 술에 취해서 이성을 잃 었기 때문에 순간적인 자극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 중 몇 명은 그다지 신통치 않 은 친구와 사귀고 있어서 그것이 들통이 나서 의심을 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들의 친구는 불량배 이상으로 더 나쁜 놈들은 아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요즘은 뭣이든지 정 치적인 색깔이 묻어 있기 마련이었다. 소비에트 지역에서는 불량배를 흑백인조(제정 러시아 의 극우 반동)와 동일하게 보았고, 백위군 점령 지구에서는 볼셰비키 도당으로 보게 되었다. 마루 밑에 숨어 들어간 친구들은 먼저 와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마루와 땅바닥의 좁은 새에는 두 마을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쿠체이느이 마을에서 온 자들은 몹시 취해 있었다. 코를 골고 이를 갈며 꿍꿍거리는 자도 있었으며, 병든 자도 있었다. 숨이 가쁘고 캄캄한데다 악취가 코를 찔렀다. 숨은 곳을 눈치채지 못하게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이 구멍을 돌과 흙 으로 막아버렸다. 곧 코고는 소리와 꿍꿍거리는 소리가 멎었다. 아주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 들이 죽은 듯이 깊이 잠들고 말았다. 다만 한쪽 구석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줄곧 들렸다. 체 렌치와 고쉬카가 예르몰라이에서 온, 싸우기 잘하는 난폭한 코시카 네흐발레느이와 함께 모 여 앉아 있었다. "조용히 해! 소리가 높아!" 코시카가 속삭였다. "들키는 날에는 우리 전부가 잡히게 돼. 저 소리 안 들려? 쉬트레제의 무리가 찾아다니고 있어. 놈들이 마을밖에서 다시 오고 있어. 저, 저기 왔어. 가만 있어. 그렇지 않으면 난 너의 목을 꺾어버릴 테야. 됐어, 가버렸군. 너희들 뭣 때문에 여기 기어들었지? 숨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 바보 녀석들! 너희들한테 볼일이 있 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고쉬카가 숨으라고 해서 여기 기어들어왔어." "고쉬카는 숨어야 할 이유가 있지. 그들 온 가족은 문제가 있어. 모두 의심을 받고 있으니 까. 그들 친척 중에 호다트스코예 철도 역에서 일하는 친척이 있었어. 그것이 그 이유야... 움직이지 말아. 조용히 해, 바보들 같으니. 여기 있는 놈들은 장소도 가리지 않고 토하고 똥 싸 놓아서, 움직이기만 하면 온몸에 그것이 묻어버려. 너희는 저 냄새를 맡지 못하니? 너희 들은 어째서 쉬트레제가 온 마을을 뒤집고 다니는지 알고나 있어? 그는 파쥔스크에서 온 사 람을 혈안이 되어서 찾고 있는 거야." "어떻게 된 영문이지? 코시카, 이 일은 어떻게 발단이 되었지?" "사니카가 그 장본인이야. 우리는 징병 검사소에서 알몸뚱이로 줄을 서서 신체 검사의 순 번을 기다렸어. 사니카의 차례가 됐는데 옷을 벗지 않았어. 올 때부터 좀 술 취해 있었던 것 같았어. 서기가 그에게 공손히 옷을 벗으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당신'이리고까지 말하며 공 손했었어. 그런데 사니카는 거칠게 대들 듯이 죽어도 벗을 수 없다면서, 내 몸의 음부를 남 한테 공개할 수가 있겠느냐면서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어. 그 다음에 서기한테 다가가 더니 그의 턱을 탁 쥐어박았어. 믿어지질 않겠지만 눈 깜짝할 새에 그는 몸을 굽혀서 책상 다리를 잡아당겨 엎어버렸어. 잉크병과 장정 명부 등을 한꺼번에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어! 그러니까 쉬트레제가 들어와 큰 소리로 '난폭한 행동은 용서치 않겠다. 난 무혈 혁명이 무엇인지 보여 줄 테다. 공무 집 행 장소에서 법을 무시하는 따위의 행동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 주겠다. 주모자가 누구냐?' 라고 으름짱을 놓았지. 그런데 사니카가 소릴 질렀어. '옷을 집어라! 여기 있으면 끝장이야, 여러분!' 창문 쪽으로 뛰어간 그는 창문을 주먹으로 깨뜨려버렸어. 나도 옷을 안고 입으면서 그놈의 뒤를 따라 달렸어. 거리로 뛰어나가선 바람처럼 재빠르게 달렸어. 다른 두 서너 명이 함께 따라왔었어. 우리는 모두 다리가 견디는 한 빨리 뛰고, 그들은 소리지르면서 우릴 따랐어. 그러나 왜 그렇게 뛰었는지 모르겠어." "그러면 폭탄은?" "폭탄이 어쨌단 말인가?" "그럼 던진 건 누구야? 폭탄이든, 수류탄이든간에." "천만에, 우리가 한 짓은 아니야." "그럼 누가 했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알아? 어느 딴놈이 한 짓이겠지. 어떤 놈이 그 북새통에 '소동이 일어났으니 까, 이틈에 여길 폭파해버리면 딴놈이 혐의를 받겠지' 하고 생각한 게 틀림없어. 파쥔스크의 정치 분자였을 거야. 그곳엔 정치패들이 우굴거리니까... 조용히 해, 입 다물어! 소리가 들리 지 않나? 쉬트레제가 돌아오고 있어. 들키면 마지막이야. 조용히 해."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장화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박차의 절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떠들지 말아. 너희는 날 못 속여." 페테르부르그 억양인 대령의 깡깡 울리는 목소리가 들 렸다. "틀림없이 저기서 누가 말하는 소릴 들었어." 예르몰라이의 촌장인 늙은 어부 오트바쥔스키 말했다. "놀란 탓이겠지요, 각하. 그리고 마을 사람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묘 지가 아닌 이상 말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벙어리 동물과는 다릅니다. 누가 집 귀신 한테 홀린 거겠지요." "아니 그만둬요. 날 바보 취급 말아요! 집 귀신이라니! 농담 마시오. 무슨 소린지 모르겠 군. 이번엔 인터내셔널 노래라도 부른다고 하겠군." "고정하십시오, 각하! 인터내셔널이라니요! 우린 모두 무식한 바보뿐이랍니다. 기도문조차 못 읽는 주제에 혁명에 대한 걸 어떻게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너희들은 다 그렇게 말한다니까, 꼬리가 잡히기 전까지는. 저기 소비조합의 상점을 철저 히 수색하라. 기와장을 뒤지고 풀 뿌리를 뽑아내는 한이 있어도 찾아내야해." "알겠습니다, 각하."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문제가 아니야. 파프누트킨과 랴브이, 그리고 네흐발레느이를 붙잡 아 와. 바다 밑까지라도 들어가서 말이다. 그리고 그 갈루진의 아들놈도 잡아라. 아비가 아 무리 애국적인 연설을 하고 다녀도 상관 없어. 거꾸로 그것은 우릴 자극하는 짓이야. 장사 아치가 연설을 하고 다닌다는 게 구린 짓이고 부자연스럽단 말야. 갈루진 부부가 크레스토 보즈드비젠스크 집에다 정치범을 숨긴 일이나 불법 집회를 가진다는 정보를 이리 입수하고 있다. 그놈의 새끼를 잡아오너라.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무슨 꼬투 리라도 잡히는 날엔 다른 놈한테 본보기로 교수형이야." 수색대들은 가버렸다. 그들이 아주 멀리 가 버렸을 때, 코사카는 겁에 질려 반쯤 죽어가는 체로쉬카에게 소곤거렸다. "들었어?" "그래." 목구멍이 막힌 소리였다. "이렇게 되면 나와 너 그리고 사니까와 고쉬카가 갈 곳은 숲속밖에는 없어. 하지만 오래 있을 필요는 없어. 잠시 조용해질 때까지만. 그러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제11장 산림 의용대 1 지바고가 빨치산의 포로가 된 지 1년이 지났다. 그가 붙잡혀 있는 상황은 매우 애매했다. 그를 울타리 속에 유폐해 놓은 것도 아니고, 감시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행동을 지켜보 는 사람도 없었다. 빨치산 부대는 쉴새없이 이동하고 있어서 지바고도 함께 이동했다. 빨치 산 부대가 지나가는 부락이나 마을 주민들과는 거리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주민에 섞여 그 속에 함께 융화되고 있었다. 밖으로 보면 그는 잡혀 있거나 구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보였으며, 다만 그 자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를 붙잡아 구속하고 있는 것은, 인생의 다른 형식의 강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도 대개는 눈에 띄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키마이라(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자의 머 리에 양의 동체, 용의 꼬리를 가진 괴물)처럼 공상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비록 쇠고랑을 차거나 쇠줄로 묶여서 감시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자유가 아닌 상태에 얽매여 있지 않을 수 없었다. 세 번이나 빨치산에서 도망칠 것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잡혀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아서 마치 불장난을 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는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빨치산의 두목 리베리 미쿨리츠인은 지바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리베리는 지바고 와 함께 있기를 좋아하여 같은 막사에서 지내게 하였다. 지바고는 어쩔 수 없이 강제적인 행동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지만 지긋지긋하게 생각되었다. 2 이 무렵 빨치산은 쉴새없이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때로는 콜차크를 시베리아 서부로 부터 몰아내려는 총공세의 일부가 취해지고 있었고, 때로는 백위군에게 배후에서 위협을 받 고 그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퇴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바고는 오랫동안 그 구별이 잡히질 않았다. 빨치산은 한길과 평행으로 이동하였지만 가끔은 한길을 따라가기도 했다. 한길을 따라 군 데군데에 있는 읍과 마을은 전세가 달라지면서 적위군의 수중에 있다가 백위군에 점령되기 도 했다. 그때마다 누가 권력을 잡고 있는지는 밖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었다. 농민 의용군(빨치산)이 이 읍과 마을을 지날 때는 마을의 모든 것이 아무런 존재도 아니 었다. 길 양쪽의 집들은 땅속으로 기어들어가 보였고, 진흙을 밟고 지나가는 기마병, 말, 대 포, 그리고 크게 떠들어대는 보병들이 집을 누르고 높게 두드러져 보였다. 어느 날, 한 잘은 읍에서 지바고는 빨치산 수중에 들어온 영국군 의약품의 저장품을 접수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카펠 장군 휘하의 백위군 장교 부대가 버리고 간 것이었다. 음산한 비오는 날의 오후였다. 흰색과 검은색만의 살벌한 정경이었다. 빛이 비치는 곳만 희고 나머지는 한결같이 어둑어둑했다. 색깔의 변화나 그늘도 없이 뚜렷한 명암만 드러나보 여서 쓸쓸한 기분은 한결 더했다. 군대의 빈번한 이동 때문에 아주 망가진 도로는 시꺼먼 진흙밖에는 없었다. 지나다닐 수 있는 곳은 불과 몇 군데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집 처마 밑으로 바싹 붙어서 먼 거리를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지바고는 파쥔스크 읍에서 펠라기아 차구노바를 만나게 되었다. 모스크바에서 기차를 함께 타고 왔던 여자였다. 차구노바가 먼저 그를 알아봤다. 지바고가 알아보면 먼저 인사라도 하고 알아차리지 못하 면 모르는 체하려는 표정으로, 마침 운하를 사이에 두고 진흙길 저쪽에서 흘끔흘끔 바라보 는 여자를 지바고는 낯익은 얼굴이라고 겨우 알아보았다. 잠시 후 그는 모든 것이 생각났다. 그와 동시에 초만원의 기차, 강제 노동에 끌려가는 무 리와 감시병, 가슴까지 머리를 땋아 늘인 여인, 그리고 가족들이 떠올랐다. 재작년 여행의 추억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가 죽도록 그리던 가족의 얼굴이 눈앞에 뚜렷 이 되살아났다. 도로 저편으로, 진흙탕 속에서 비어져 나와 있는 돌멩이를 따라 넘어갈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그는 고갯짓을 하고 자기도 그쪽으로 걸어가서 건너편으로 넘어가 그녀와 인사를 나눴다. 차구노바는 그에게 여러 가지 얘기를 들려주었다. 깔끔하고 순진한 바샤가 부당하게 징집 되어 같은 기차를 타고 가던 일을 회상하면서, 그녀는 소년의 고향 베레첸니크에서 그의 어 머니와 함게 지내게 된 사연을 얘기했다. 그녀는 바샤네 집에서 잘 지내고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낯선 외지 사람 취급을 하고 바샤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등 소문을 퍼뜨리면서 죽지 않으려면 동네를 떠나라느 것이었다. 그녀는 크레스토보즈드비젠스크에 살고 있는 언 니 올가 갈루지나한테 와서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파쥔스크에서 프리툴리예프를 보았다는 소문이 들려서 여기로 찾아왔지만 헛소문인 것을 알게 되었고, 그녀는 여기서 일자리를 얻 어서 눌러 살게 되었다 했다. 그동안 그녀의 가까운 친지들 중에는 불행하게 된 사람도 있었다. 식량 징발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베레첸니크 마을은 징벌대의 습격을 받아서 바샤네 집은 불타 버리고 식구 중의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문이 났었다. 그리고 크레스토보즈드비젠스크 읍에서는 형부 갈 루진이 집과 재산을 몰수당하고 투옥되었든지 총살되었을 것이라고 했으며, 그의 조카는 도 망쳐 버리고, 언니는 얼마 동안 헐벗고 굶주렸으나, 지금은 즈보나르스까야 마을 친척 종가 에서 겨우 먹고 살았다. 공교롭게도 차구노바는 지바고가 의약품을 징발하러 온 약국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러한 징발 조치 때문에 그녀 자신을 포함해서 약국에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파멸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지바고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차구노바는 물품을 인도하는 장소에 입회하 게 되었다. 지바고의 짐마차는 약국 뒤뜰 창고 입구에 대어놓고 있었다. 창고에서 주머니와 상자 그 리고 병을 담은 고리짝 등을 내고 있었다. 약국 사람들이 비통한 표정을 짓고 운반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비통한 마음은, 약 국의 깡마른 말까지도 알아보듯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비 오던 날씨도 저녁 무렵에 는 하늘이 맑아졌다. 석양이 구름 사이에서 잠깐 비치며 검은 구릿빛 광선을 뜰안에 뿌리고 질척한 거름 웅덩이에 불길하게 비치고 있었다. 바람은 잠잠했다. 진흙땅을 굴러가는 마차도 무겁게만 보였다. 길바닥에 고인 빗물이 가느 다란 잔물결을 일으키면서 붉게 반사되고 있었다. 기마 부대와 도보 부대가 깊은 물 웅덩이를 피하면서 길가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빨치 산 대장은 최근 코카인을 쓰기 시작했는데, 징발된 의약품에는 병에 가득 들어 있는 코카인 이 섞여 있었다. 3 빨치산 부대에서 의사가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겨울에는 발진티푸스, 여름에는 이질. 게 다가 또 전투가 새로 벌어진 지금은 부상자의 수가 매일 더 불어나고 있었다. 패전과 빈번한 퇴각은 있었으나, 농민 의용대가 지나갈 때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이 가세 하거나 적의 탈주병이 투항해 옴으로써 빨치산의 대열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지바고는 빨치산과 행동을 같이하면서, 1년 반 동안에 병력이 열 배로 늘어난 것을 보았으며, 그것은 리베리가 크레스토보즈드비젠스크 읍의 지하 본부의 회의에서 큰소리치던 숫자와 실제로 거 의 비슷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지바고는 새로 임명된, 경험이 많은 여러 명의 위생병을 부하로 두고 있었다. 또 조수 한 사람은 그의 임상 조수로서 헝가리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포로 출신 군의관 케레니 라이오 쉬였으며, 빨치산 사이에서 라유쉬치 동무로 통했다. 또 한 사람은 호르바트(남슬라브 사람) 인 간호병 안겔라르였다. 이 사람도 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로였었다. 지바고는 라이오쉬와 는 독일어로 말하고, 안겔랴르는 슬라브계 발칸 출신이기 때문에 다소 서투르긴 하지만 러 시아 말을 사용하였다. 4 국제 적십자사 협약에 의하면, 군 의무 요원은 무장하고 군사 행동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 어 있었다. 그러나 지바고는 한 번 이 규정을 어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전투장에서 전투원들과 운명을 같이하고 자기 방위 때문에 총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빨치산이 산개하고 있는 숲가에서 적의 사격을 받고 부대 통신병 옆에 엎드렸다. 뒤 쪽은 밀림 지대였으나 전방은 평야로서, 이 노출된 무방비 공간을 백위군이 공격하고 있었 다. 백위군은 아주 가까이까지 접근하여, 지바고는 병사의 얼굴 하나하나를 뚜렷이 보았다. 이들은 소년과 젊은 도시 청년 그리고 예비역에서 동원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대학 1학년이나 중고등학교 졸업학년 정도의 애송이들이었다. 지바고는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은 없었으나 그래도 태반은 본 적이 있는 얼굴들 같았으며, 아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옛날 학급 친구를 아주 닮은 얼굴도 더러 섞여 있어서 지바고는 그들의 동생이 아닌지 생 각도 됐다. 또 이전에 극장이나 길거리에서 만났던 얼굴도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뚜렷한 표정과 잘생긴 용모들은 지바고 자신의 친근한 사람들로 생각되었다. 그들은 자기 의무를 그렇게 알고 있었는지, 끓어오르는 황당무계한 용기로써 대형을 넓히 면서 근위병의 열병 행진이 무색할이만큼 정연한 자세로 전진하고 있었다.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지형도 무시하고, 달리거나 또 땅바닥에 엎드리는 일도 없이 똑바른 자세로 그냥 다가 오고 있었다. 그래서 빨치산의 총탄은 일제히 그들을 쓰러뜨렸다. 넓고 노출된 들판 한가운데 고목나무 하나가 서 있었다. 벼락을 맞아 불탄건지 아니면 모 닥불 불길에 탔는지, 또 이때까지 전투에서 탄 것인지도 모르겠다. 행진을 하던 젊은이들은 모두 이 고목나무에 시선을 던지며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안전하게, 더욱 정확하게 겨누 어 쏘고 싶은 유혹을 받았으나 이내 다시 생각하고 걸음을 계속했다. 빨치산에게는 탄약이 떨어지고 있어서 가까운 거리에서 뚜렷이 식별되는 목표만 사격하도 록 명령을 받고 있었다. 지바고는 총을 가지지 않고 풀 위에 엎드려 전투의 진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차츰 영웅처럼 쓰러져가는 젊은이에게 동정이 쏠리고 있었다. 지바고는 마음속으로 그들의 성공 을 빌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교육과 예절 그리고 판단력에서 그들과 가까운 한가족인 것이 다. 들판으로 그들에게 뛰어나가 항복하고 구원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 나 그건 발에 모험을 건 위험한 짓이었다. 두 손을 들고 달리고 있는 동안에 양쪽에서 쏘아 댈 수도 있다. 빨치산 쪽에서는 배신자를 벌하기 위하여 잔등을, 백위군 측에선 의도를 잘 모르고 가슴팍을, 그는 그런 일이 이전에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고, 자기도 경험한 적이 있 었다. 벌써 여러 가지로 탈주 계획을 생각한 끝에 이것도 저것도 성공할 공산이 보이지 않 아 단념하고 말았다. 그는 두 갈래의 마음을 지정시키면서 풀 위에 계속 엎드리고 들판을 향한 채 총도 없이 풀속에서 전투의 진전을 관망하였다. 그런데 주위에서는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아무 하는 일없이 방관만 한다는 것은 인간 의 힘으론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잡혀 있는 측에 대한 배신 행위라든지 그 자신의 생명을 지킨다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질서에 순응하느냐가 문제이며,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지배하는 법칙에 순응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가 제3자의 입장을 가진다는 것은 법칙을 벗어나는 결과가 된다. 누구나 다 하고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싸움은 계속되 고 있었다. 그들의 동료는 총격을 받고 있었다. 그는 반격을 해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때 옆의 통신병이 쭉 경련을 일으키더니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을 보고, 그는 기 어가 탄띠와 소총을 집어든 다음 제자리로 기어와서는 마구 쏘아댔다. 그러나 가련한 생각이 들어서 그가 감탄하고 동정까지 보내던 젊은이들에게 겨냥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공중에 쏴댈 수도 없어서 총의 가늠자와 목표 사이에 아무도 없을 때를 보아서 고목나무를 겨냥하여 쏘았다. 그에게는 제 나름의 사격 요령이 있었다. 우선 조용히 조준을 정하고 서서히 방아쇠를 당기는데, 마치 쏠 의사가 없는 양쭉 당기지 않는다. 그러면 탄환은 뜻하지 않게 혼자서 튀어나가게 되는 방법이었다. 그의 원래의 정확 성으로 낮은 고목나무 가지를 쏴서 나무 주위에 흩어놓았다. 그러나 무서운 일이 아닌가! 사람을 맞히지 않으려고 제아무리 애썼지만, 탄환이 튀어나 가는 순간에 공격해 오는 젊은이가 느닷없이 화선에 들어온 것이다. 이리하여 두 사람을 부 상시켰으나 고목 옆에 자빠진 한 사람은 생명을 잃은 것 같았다. 드디어 백위군 사령부는 무의미한 시도를 깨닫고 후퇴 명령을 내렸다. 빨치산은 적은 인원이었다. 주력의 일부를 전진하고 있고 나머지는 거기에서 좀 떨어진 지역에서 적의 유력한 병력과 교전하고 있었다. 빨치산은 자기 수의 열세를 노출시키지 않 기 위하여 백위군을 추격하는 것을 삼갔던 것이다. 들것을 가진 두 위생병을 대동한 조수 안겔랴르는 숲의 공지에서 지바고를 만났다. 지바고는 부상자를 돌보도록 지시하고 통신병을 살펴보았다. 아직 숨이 넘어가지 않아 살필 수 있겠다는 일말의 희망을 안고 셔츠의 가슴팍을 헤치고 심장에 손을 얹어보니 벌써 숨은 끊겨져 있었다. 지바고는 시체의 목에서 명주실로 매달아 놓은 부적을 끌러보았다. 푸석푸석해진 종이조 각은 꺾인 데로 실로 꿰매져 있었다. 그것을 펼치자 의사의 손가락 끝에서 조각조각으로 흩 어져 버렸다. 종이조각에는 성서의 <시편> 제91편의 발췌문이 적혀 있었다. 자꾸 기도를 되풀이하는 동안에 어느 새 말하기 쉽게 기도문의 내용이 변해서 원문과는 점점 멀어지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교회 스라브어를 러시아 문자로 옮겨 쓴 것이었다.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시로다'의 <시편>의 글이 '도움으로 산다'로 되어 있었고, '낮에는 날아오는 화살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하는 구절은 '날아오는 싸움의 화살을 두려워 말라'로 변경되어 있었고, '그가 내 이름을 안즉...'이 '후에 내 이름을 남긴다'로, 또 '괴로울 때 내가 그와 함께하여...'는 '곧 겨울이 온다'로 고쳐져 있었다. <시편>의 이 부분은 탄환을 피할 수 있는 기적을 낳게 한다고 믿어지고 있었다. 지난 제국주의 전쟁 때에는 병사들이 이 부적을 몸에다 달고 다녔다. 그후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죄수들은 의복에 그것을 꿰매놓고 밤중의 심문에 불리어 갈 때 몰래 외고 가 는 것이었다. 지바고는 통신병의 곁을 떠나서 들판에 자빠져 있는 백위군의 젊은 병사 곁으로 다가갔 다. 소년의 깨끗한 얼굴에는 죄 없는 순진함과 애련한 괴로움의 표정이 떠돌고 있었다. '나 는 왜 그를 죽였을까?' 의사는 생각했다. 외투의 앞자락을 열어 보니 안쪽에 누군가 정성들여 수놓은-아마 어머니가 한 것이겠지- 필기체로 세료자 란체비치라는 죽은 사람의 성명이 수놓여 있었다. 세료자의 루바쉬까 구멍으로 줄에 매달린 십자가와 조각품, 그리고 담배갑 같은 납작하고 작은 금 케이스가 보였으나, 케이스는 못을 박아놓은 것같이 굽어져 있었다. 거기에서 접힌 종이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펼쳐본 의사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역시 <시편> 제91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 슬라브어 원문을 인쇄한 것이었다. 이때 세료자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몸을 움직였다. 살아 있었던 것이다. 후에 알게 되었지 만, 그는 가벼운 내장 충격으로 기절했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주셨던 부적통이 탄환을 막아 서 그의 생명을 건졌던 것이다. 이 의식을 잃은 소년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 시기에는 야만 행위가 마구 자행되고 있었다. 포로들이 산 채로 본부까지 후송되는 일 은 거의 없었고, 적의 부상자는 전장에서 총검의 희생이 되고 말았다. 적의 탈주별이 투항하거나 빨치산에서 도망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 틈을 타서, 만일 완전히 비밀만 지킬 수가 있다면, 그를 새로 도착한 신병으로 가장할 수가 있을 것이다. 지바고는 통신병의 시체에서 웃옷을 벗겨 안겔라르한테 자기의 의도를 전하고 도움을 받 아 실신하고 있는 소년의 의복과 바꿨다. 그와 안겔라르는 세료자가 회복할 때까지 간호하고, 회복된 다음에 세료자가 콜차크 군에 돌아가 적위군과 계속 싸우겠다는 의도를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를 놓아 주었다. 5 가을에 빨치산은 리시 오토크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경사가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작 은 숲속이었다. 빠르게 흐르는 냇물이 거품을 일으키고 기슭에 부딪치며 감돌아 흐르고 있 었다. 전에는 카펠 장군 휘하의 백위군이 여기서 겨울을 보냈다. 그들은 가까운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자기들의 손으로 숲속에 진지를 구축하였으나 봄에 그 시설을 그대로 남겨둔 채 떠났던 것이다. 지금 빨치산은 그들이 파 놓은 엄폐호나 교통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지바고는 리베리 미쿨리츠인과 같은 참호를 쓰고 있었다. 리베리가 이틀 밤 내내 지껄여 서 그는 잠잘 수가 없었다. "나의 존경하는 아버님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계실까?" '제기랄, 무슨 얼간이 같은 소리.' 지바고는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아버지를 그대로 닮았 군.' "여태껏 얘길 듣고 보니 당신은 우리 부친을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당신은 우리 아버 지를 나쁘게 생각질 않는 것 같은데, 어때요?" "리베리 대장, 내일은 선거 강연회가 있고 또 술을 밀조한 위생병들의 재판도 가깝고, 라 이오쉬와 저는 또 자료를 조사해야겠지요. 그래서 저는 라이오쉬를 내일 만나야 되겠습니다. 저는 이틀 동안이나 잠을 자지 못했으니 우리 얘기는 후에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피곤해 죽겠어요." "그럼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주세요." "우선 당신의 아버님은 아주 젊습니다. 왜 당신은 아버지에 대하여 자꾸 말하는지 모르겠 군요. 말하지요. 전에도 가끔 말한 바와 같이 저는 여러 가지 사회주의를 식별할 수가 없습 니다. 더욱이 볼셰비키와 다른 여러 가지 사회주의자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합니 다. 당신의 아버지 같은 분은 최근 러시아가 무질서하고 혼란해진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분들 중의 한 사람이지요. 그분은 혁명가의 전형이며, 혁명적 기질입니다. 당신과 같이 러시 아의 혁명적 발효소의 대표란 말이에요." "이건 칭찬하는 거요, 욕하는 소리요?"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 이 토론은 적당한 때까지 미뤄둡시다. 그런데 당신은 코카인을 과도히 쓰고 있어서 조심해야 되겠어요. 코카인은 저의 책임이지만 당신은 의약품을 제멋대 로 쓰고 있어요. 코카인은 극약인데다 당신의 건강은 저의 책임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당신은 어젯저녁 학습회에 참석치 않았지요. 당신은 마치 무식한 농부나 완고한 부르주 와처럼 위축된 사회적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무엇보다도 당신은 의사면서도 박식하고 또 글도 쓰고 있으니, 대체 어찌된 노릇이오?" "모르겠습니다. 아마 아무것도 안 될 것 같군요.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일부러 겸손한 체하는 것은 교만한 것과 같아요. 남을 조롱하는 따위의 말버릇은 집어치 우고, 우리 학습회 강령이나 잘 읽어보시오. 그러면 그렇게 교만스럽게 굴지도 못할 거요." "천만에 리베리 대장! 제가 교만하다니! 저는 당신의 교육 활동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 어요. 당신이 나눠준 토론 자료를 보았습니다. 병사들의 사기 앙양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저 는 알고 있습니다. 훌륭한 생각이었어요. 동포, 약자, 연고가 없는 사람, 또한 부녀자에 대한 민중의 군대로서의 군인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명예와 순결 등에 관한 당신의 말씀은 두호보르(18세기 후반 러시아 남부에서 일어난,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와 의식을 부정하는 종파)의 교리와 아주 비슷한 데가 있었습니다. 저의 소년 시절에는 이러한 톨스토이주의나 인생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겠다는 정열에 불타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러한 것들을 비 웃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10월 혁명이래 널리 알려진 사회 개혁의 이념은 나를 고무시키지 못하 고, 둘째로 그러한 사회 개혁이 실천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단지 그 이론을 설명하는 데만 이렇게 무서운 피바다를 필요로 하였으니 말입니다. 목적 달성을 위해 어떤 수단을 써도 된 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셋째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인생의 개조를 떠들고 있는 걸 들으면 저는 자제심을 잃고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인생의 개조! 이런 소리를 예사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 다. 설사 제아무리 많은 것을 체험하였다 하더라도 인생의 입김, 인생의 고동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일 거예요. 이러한 사람은 인생을 어떤 가공하는 원료의 덩어리나, 아니면 손을 대서 품위를 높이는 소재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인생은 자기 스 스로가 갱신하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인생은 끊임없이 갱신되고 개조되고 변화되어 전신하 는 겁니다. 이것은 당신이나 저 따위의 제멋대로 된 인생론을 훨씬 초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우리들의 모임에 나와서 우리의 멋있는 민중과 접촉만 하였더라면 그렇게 실망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결코 고민할 필요는 없어요. 나만 하더라도 지금 당장 골 칫거리가 한둘이 아니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아요. 우리의 패배는 일시적인 것이오. 결국 콜차크는 망해버리고 말 테니까. 내가 하는 소릴 잘 기억해 두시오. 끝내 우리가 승리할 것 이오. 기운을 내시오." '도대체 말상대가 되지 않는군!' 지바고는 생각했다. '얼마나 우둔한가! 얼마나 단순한 사 람인가! 나의 생각과는 정 반대편에서 대립하여 있고, 나를 폭력으로 잡아서 여기에 억류하 고 있는데, 이놈은 내가 패배가 두려워서 생각을 달리하고 있는 줄 알고서 자기의 희망을 들려줌으로써 내가 힘을 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니! 도대체 사람이 저렇게 맹목적일 수 있을까! 이놈에게는 우주의 운명보다는 혁명의 승리가 중요하단 말이야.' 지바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베리의 어린애 같은데에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리베리도 그것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화났군요. 유삐제르. 그렇다면 당신이 잘못이야." "제발 날 좀 이해해 주시오. 그런 것은 나에게는 도대체 의미가 없어요. '유삐제르'라든지 '두려워 말라'라든지 'A라는 사람을 B라고 말하라'라든지 '모든 사람은 일이 끝나면 가도 된 다'-이 모든 케케묵은 글귀와 저속한 말들은 나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어요. 내가 A라고 말한 것을 결코 B라고는 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당신들이 러시아의 해방자이며 선도의 등 불이고, 당신들이 없으면 러시아가 망해 버려서 빈곤과 무지에 빠져버린다고 인정합니다. 그 렇다고 해도 나는 당신들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아요.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는단 말이예요. 당신들의 정신적 지배자들은 곧잘 속담을 쓰지만, 한 가지 속담만은 모르고 있어요. 그것 은 '사랑은 강제로 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별로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당신들은 해방시키고 은혜를 베푸는 버릇이 있어요. 당신은, 내가 당신과 함께 야영을 하고 당신과 지 내게 되는 일처럼 세상에서 즐거운 일이 더 없으리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포로 로 잡아주신 것을 감사하고, 나의 처자나 집안일 같은, 내가 더없이 귀중히 생각하며 삶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모든 일에서 나를 해방시켜 준 것에 기뻐 눈물을 흘려야 할 것 같군요. 러시아인이 아닌, 누군지 알 수 없는 부대가 바르이키노를 습격하여 제멋대로 약탈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카멘노드보르스키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집과 우리 가족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피했다는 얘깁니다. 무슨 괴상한 솜외투에 털모자 를 쓴, 눈꼬리가 치켜올라 붙은 군사들이 추위도 아랑곳없이 르인바 강 얼음을 타고 와서는 마을의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모조리 사살하고 사라져버렸다는 겁니다. 이런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까? 이게 사실일까요?" "어리석군. 다 거짓말이야. 터무니없는 소리지." "당신이 병사의 사기 앙양을 역설하듯이 친절하고 관대하다면 나를 자유롭게 해 주십시 오. 나는 가족을 찾고 싶어요. 어디 있는지 생사조차 모릅니다. 그리고 날 자유롭게 할 수가 없다면, 제발 나에게 신경 쓰지 말고 날 가만히 있게 해주시오. 나한테는 가족들의 운명에 대한 것밖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요. 당신이 계속해서 이렇게 군다면 나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겠소. 여하튼 나한테도 잠잘 권리는 있지 않겠소!" 지바고는 침상에 엎드려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리베리의 지겨운 변명을 듣지 않으려고 애 썼다. 리베리는 봄이 되면 백위군을 뿌리째 격멸한다면서 내란이 막을 내리는 날에는 평화 와 자유와 번영이 찾아온다고 했다. 그때에는 당신을 붙잡아 둘 사람도 없으며 그때까지 참 고 견디어가야 한다고 했다. 여태껏 여러 가지 시련을 겪고 많은 희생을 해가면서 언젠가 그날이 오기를 기다려 왔는데, 이 두세 달을 참을 수가 없겠는가? 그리고 당신은 지금 어디 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을 생각하기 때문에 혼자 내놓을 수가 없다고 했다. '참 단순한 소릴 지껄이는군!' 지바고는 분통이 치밀어올라 이렇게 혼자 생각했다. '입을 놀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니까. 몇 해를 똑같은 소리만 되풀이하면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용케도 싫증을 느끼지 않고 제 못소리를 듣고 견디는군, 이 코카인 중독자! 잠도 제대로 못 자게 구니. 이 악마 같은 놈! 정말 이놈이 지겨워 죽겠군! 하나님 굽어살피십시오. 언젠가는 내가 저놈을 죽여버리겠습니다. 그리운 토냐! 당신은 살아 있어요? 어디 있어요? 벌써 오래 전에 애기를 낳았을 텐데, 어떻게 산고를 이겨냈을까? 아들일까? 아니면 딸일까? 그리운 것 들아! 지금 어느 별 아래 살고 있을까? 토냐, 당신은 영원히 내 양심의 가책이 되고 있어요. 라라, 그대의 이름을 부르면 나는 괴로움에 견딜 수가 없어요. 아, 이 아픈 가슴을 어찌 달 래야 좋을까! 이 더러운 우둔한 짐승은 또 지껄인는다. 언젠가는 참을 수 없게 될 거야. 그 때엔 죽여버려야지! 알았느냐, 죽여버린단말야!' 6 늦여름이 지나고, 황금빛 맑은 가을날이었다. 리시 오토크의 서쪽 끝에는 백위군이 구축한 나무 포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지바고는 여기서 의사 라이오쉬를 만나 여러 가지 일에 대 한 상의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약속한 시각에 도착했다. 그는 동료가 오는 것을 기다 리며 허물어진 흙담 가를 거닐면서 망루에 올라가, 지금은 비어 있는 기관총 총좌 앞의 틈 새로 강건너 먼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은 이미 침엽수와 낙엽수 사이의 경계를 뚜렷이 긋고 있었다. 칠흑같이 새까만 소나 무의 침울한 바늘벽 사이에 울창한 숲이 불길처럼 붉게 보여서, 무성한 숲속에서 베어낸 재 목으로 세운 금빛 지붕처럼 보였으며, 울긋불긋한 성을 에워싼 중세 도시를 연상시켰다. 지바고의 발밑 지면이나 참호 속, 그리고 얼어붙은 숲 오솔길의 차바퀴 자리에는 버드나 무의 가느다란 낙엽이 회오리쳐서 소복이 쌓였다. 가을의 내음은 갈색 낙엽이나 그 밖의 여 러 것에서도 풍기고 있었다. 그것은 서리 맞은 사과의 짜릿하게 쏘는 향기와 마른 나뭇가지 의 씁쓸한 향기, 눅눅한 대지의 달콤한 내음을, 갓 꺼진 모닥불의 연기처럼 자욱이 퍼지는 9 월의 푸른 안개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그는 라이오쉬가 뒤에서 올라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라이오쉬는 독일 어로 말했다. 둘은 일에 대하여 상의했다. "용건은 세 가지라네. 첫째는 술 밀조자들의 처벌 문제, 둘째는 야전 병원과 약국의 재편 성, 셋째는 정신병자 응급치료에 대한 나의 의견, 라이오쉬, 당신의 생각은 어쩐지 모르지만 내가 알기에는 우린 언젠가는 미치고 말걸세. 새로운 형의 정신병이 전염병처럼 퍼지면서." "그 문제는 아주 흥미가 있지만 차차 말하기로 하고, 우선 다른 얘기부터 합시다. 숙영지 내에서 좋지 못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밀조자의 신세를 동정하는 자들이 있단 말입니다. 역 시 많은 사람들이 백위군이 장악하고 있는 마을로부터 피난하고 있는 자기 가족을 걱정하고 있어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처자와 노인을 수송하는 치중대가 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빨치산의 대부분은 치중대 야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거길 떠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답니다." "알고 있어요. 물론 기다려야 되지." "마침 우리 부대와 우리들로부터 독립돼 있던 다른 부대들을 지휘할 통합 사령관을 선출 하는 이 시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기에 말입니다. 난 통합 사령관의 유일한 후보자는 리베리 통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젊은 집단은 브도비첸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를 내세우고 있 는 자들은 우리와는 사상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부농과 상인의 아들, 그리고 콜차크군의 탈 주병들, 이들은 밀조자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이들이 특히 소란을 부렸습니다." "술을 밀조해 판 위생병들은 어떻게 될 것 같소?" "나의 생각으론 총살 선고를 받고, 정상을 참작하여 집행 유예 정도로 마무리되겠지요." "그렇겠군. 그럼 먼저 일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합시다. 먼저 야전 병원 말인데..." "좋아요. 그런데 나는 당신이 제의한 정신병 예방안을 별로 의외의 일로 생각하지 않습니 다. 나도 역시 같은 의견입니다. 현대에 있어서는 전형적이며 특히 시대의 역사적 특징과 직 접 관계를 가지는 일종의 정신 질환이 발생하여 만연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습니 다. 야영지에도 그러한 예는 하나 있습니다. 팜필 팔르이흐는 제정 군대의 병졸로 있었는데, 계급 의식이 강해서 혁명에 투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가 전사할 경우 가족 이 어떻게 될 것인가, 또는 가족이 백위군한테 붙잡혀 자기 때문에 추궁을 당하지나 않을까 근심하다가 병이 났습니다. 매우 복합적인 심리 상태입니다. 호송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의 가족이 있을 겁니다. 저는 러시아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모르긴 하지만, 안겔라르나 카멘노드보르스키한테 한번 알아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를 진찰할 필요도 있습니다." "나는 팔르이흐를 아주 잘 알고 있어요. 군사 소비에트에서 한 번 만났어요. 까무잡잡하고 볼이 좁은 잔인하게 생긴 사람이지. 난 당신이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줄 알 았어. 그는 언제나 극단적으로 엄격한 조치로 처형하는 데 찬성했었지. 그리고 항상 날 괴롭 혀왔었지. 좋아요, 어떻게 해봅시다." 7 맑게 갠 화창한 날이었다. 지난 한 주일 동안 날씨는 쭈욱 조용하고 건조했었다. 야영지에는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와 같은 소음이 계속 들렸다. 발소리, 말하는 소리, 나무를 패는 소리, 철판이 울리는 소리, 말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 이런 소 리가 숲속에서 뒤섞여 들려왔다. 숲속에는 햇볕에 그을은 사람,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사람 들이 이리저리 나다니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지바고를 알아서 인사를 했지만 몰라서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있었다. 빨치산은 가족이 따라올 때까지는 리시 오토크를 떠나지 않겠다고 우겼으나, 이제 가족들 이 곧 도착하기 때문에 동쪽으로 더 이동할 준비에 부산했다. 무엇인가 닦고 수리하며 짐 상자에 못질을 하거나 짐마차를 헤아려보기도 하였다. 숲 중앙에는 넓은 공지가 있어서 이따금 거기에서 집회가 열리곤 했다. 둔덕이나 성터 자 리였는데 풀은 죄다 짓밟혀 있었다. 오늘도 역시 여기에서 중요한 발표가 있어서 총회가 소 집되도록 되어 있었다. 숲의 깊숙한 곳에 있는 나무는 대부분 아직 누렇지 않고 푸르고 싱싱했다. 서쪽으로 기운 태양이 숲 그늘에 가라앉으면서 화살과 같은 빛을 던지고, 나뭇잎들은 햇살을 받아 해맑은 유리병처럼 푸른 불너울을 토하고 있었다. 수석 연락 장교 카멘노드보르스키는 그의 문서 보관소 밖의 빈터에서 입수한 카펠 장군의 기록 문서 가운데서 불필요한 서류와 자기가 작성한 빨치산 문서를 불사르고 있었다. 석양 을 바라보며 타오르는 불길이 나무 잎새에서 투명하게 바라보였다. 불은, 너울거리는 열기가 무엇인가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숲속의 여기저기에 무르익은 딸기가 눈에 띄었다. 황새냉이의 맑은 수술과 검붉은 빛의 오리나무 열매들이며 순 붓꽃송이들이 흰빛에서 자주색으로 변해서 산뜻하게 아롱거리고 있 었다. 그리고 유리처럼 맑은 날개를 윙윙거리며 허공을 노질하듯 날아 다니는 잠자리들도 붓꽃과 나뭇잎들에 못지않게 햇빛에 젖어 있었다. 어려서부터 지바고는 숲속의 저녁놀을 좋아했다. 그럴 때면 자기 역시도 이 햇빛에 꿰뚫 린 것같이 느껴졌다. 마치 살아 있는 영혼이 그의 가슴속으로 흘러들어 몸을 꿰뚫고 어깻죽 지에서 나래를 펴듯이 느껴졌다. 모든 소년들이 어렸을 때 자기 생애에 형성할 원형은 그 후에도 변하지 않는 내면의 얼굴이 되고 개성으로 바뀐다고 생각되었으나, 지금 다시 지바 고의 마음 뒤에 숨은 본원의 힘을 다하여 눈떠서 자연이나 숲, 저녁놀 그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압도하고 한 소녀의 본원적인 비슷한 모습으로 변모되어 가는 것이었다. 그는 눈 을 감고 "라라!" 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생명의 모든 것, 하나님의 땅 위의 모든 것, 햇빛을 받고 있는 앞쪽 공간의 모든 것을 향하여 불러 본다. 그러나 매일 계속되는 어지러운 현실은 아직도 그를 뒤덮고 있었다. 러시아는 10월 혁명 을 겪고 있으며, 그는 빨치산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지바고는 무심코 카멘노드보르스키의 모닥불 쪽으로 걸어갔다. "서류를 불태우고 있어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전부 다 태우려면 며칠이 걸릴지 모르겠소." 의사는 종이 뭉치 하나를 펴 보았다. 백위군 사령부의 통신 문서였다. 란체비치와 관련 있 는 것이 나오지나 않을까 살펴보았으나 전부 작년 것으로, 뜻을 알 수 없는 다음과 같은 간 추린 암호 보고 문서로서 흥미가 없는 것들뿐이었다. '옴스크 기병 총사령부 제일 사본 옴스크 우리 옴스크 지도 40베르스타 예니세이 공격 중 지' 또 다른 뭉치를 펴 보았다. 그것은 같은 낡은 빨치산 회의 의사록 뭉치였다. 제일 윗장의 종이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지급. 휴가 건. 심의위원회 재선. 당면한 문제. 이그나토드보르차 마을의 여교사에 대한 고발은 증거 불충분으로 군사 소비에트는 다음과 같이 제의한다...' 카멘노드보르스키는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끄집어내어 의사에게 보여주었다. 의무대 의 출발 지시서였다. '빨치산의 가족을 데리고 오는 치중대가 곧 가까이 오고 있고 부대내의 의견이 오늘 저녁 때까지는 해결이 되기 때문에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다.' 지바고는 종이쪽지를 바라보면서 불안스럽게 중얼거렸다. "이전보다도 차량이 적지 않습니까? 게다가 부상자는 더 불어났고. 그래서 경상자는 걸어 가야 하지만, 걸을 수 있는 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중상자를 어떻게 처리하란 말입니까? 그리고 약품이나 침대, 의료 기구 같은 것도 실어야 되고." "어떻게 되겠지요. 우리는 환경에 순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것은 우리 전부가 요구하는 것인데, 우리 한 동지를 좀 보아주시겠어요? 사업을 위하여 신명을 바친 훌륭한 투사였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약간 이상한 점이 있단 말이에요." "팔르이흐 말이죠? 라이오쉬한테서 들었습니다." "그래요. 좀 가 봐주세요." "정신병 같은 거지요?" "그럴 겁니다. 이상한 것이 보인다고 합니다. 과대망상증 같아요. 지금 바쁘지 않으니까 가서 보지요. 집회는 언제부터 있지요?" "곧 있을 것 같은데, 괜찮아요. 보다시피 나도 나가지 못해요. 우리가 없더라도 별일이 없 을 겁니다." "그럼 팔르이흐를 진찰하러 갑시다. 잠이 와서 눈을 뜰 수가 없어요. 리베리는 밤중에 철 학을 논하기를 좋아해서 나는 말상대를 하느라고 지쳐버렸어요. 팔르이흐는 어디 있어요. "저기 쓰레기장을 지나 어린 자작나무 숲을 아시지요?" "알았어요." "그 공지에 지휘관 막사가 있지요. 그 하나를 팔르이흐가 쓰고 있어요. 지금 가족을 기다 리고 있어요. 치중대와 함께 가족이 오고 있어요. 유독 그에게만 혁명의 공로 때문에 대대장 대우로 그곳 막사를 쓰게 하였답니다." 8 팔르이흐를 진찰하러 가던 도중에 지바고는 피로가 몰려와서 더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꼬박 며칠 밤을 계속 새워서 피곤이 쌓였던 것이다. 엄폐호에 되돌아가서 잠으 잤으면 좋겠 지만, 그곳은 수시로 리베리가 와서 잠을 자지 못하게 굴 것이 뻔했다. 그는 숲속의 좁은 공터에 누웠다. 주위 나무에서 누런 나뭇잎들이 낙엽져서 흩어져 겹겹 이 쌓였고, 햇빛이 황금 융단 위에 무늬를 지으며 물들어 있었다. 이 이중으로 엇갈린 빛깔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마치 작은 활자의 글을 읽거나 단조로운 소리를 듣듯이 졸음이 왔다. 그는 비단결처럼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위에 누워서 나무 밑동의 이끼를 베개삼아 올려놓 은 팔에 머리를 파묻었다. 어느 새 잠이 들어 버렸다. 잠이 들게 한 빛과 그림자의 명암은 격자 모양으로 그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에 땅에 늘어진 몸이 햇빛과 나뭇잎의 만화경 같은 색깔과 구분이 되지 않아서, 마치 마술사의 모자를 쓰듯이 눈에는 띄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잠자고 싶은 그의 욕망과 필요성이 오히려 그의 잠을 깨뜨리고 말았 다. 직접 원인은 정해진 한도에서 조화되는 것이지, 그 한도를 넘어서면 반대 효과를 내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의 생생한 의식이 조금도 쉬지 못한 채, 그 자신의 타성대로 한층 더 맹 렬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에서는 여러 가지 상념이 회오리치며 맴돌아, 마치 고 장난 기계처럼 뛰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정신적 혼란에 들떠 있었다. '리베리, 이놈! 이 세 상에 사람을 미치게 할 일이 없어서 멀쩡한 사람을 붙잡아 두고 억지 우정을 베풀어 일부러 정신병자를 만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단 말인가. 언젠가 죽이고 말 테다.' 갈색 반점이 있는 나비가 색헝겊처럼 움직이며 공지의 양지쪽을 날아갔다. 지바고는 졸음 이 오는 눈으로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비가 자기와 같은 배경을 찾아 갈색 반점이 있는 소나무 껍질에 앉자 구별할 수 없게 되어, 빛과 그늘의 엇갈림 속에 숨어 있는 지바고 처럼 전혀 보이질 않았다. 지바고는 늘 머리에 그리던 일련의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많은 의학 논문에서 간접 적으로 다뤄온 문제로서, 적응의 최고 형태로서의 의사와 목적 의식, 모방과 보호색, 적자 생존, 자연 도태의 길은 의식의 형성과 발생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가설이었다. 주체란 무엇 일까? 그것의 동일성은 과연 무엇일까? 지바고의 생각에는 다윈이 쉴링과 비슷하고, 지금 날고 있었던 나비는 근대회화나 인상주의 예술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창조하는 것, 창조 되는 것, 창조력과 또 모방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다시 잠들었다가 잠시 후 그는 또 눈을 떴다. 바로 이웃에서 들려오는 조용하고 나지막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몇 마디 가만히 듣고 나서, 그것이 무슨 비밀 음모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지바고가 엿듣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 여 발각될 경우 목숨이 달아날 판국이었다. 지바고는 숨을 죽여 가면서 귀를 바짝 세웠다. 그 목소리에서 몇 사람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빨치산의 찌꺼기나 추악한 부류들 이었다. 사니카, 고쉬카, 코시카와 그들을 따랐던 체렌치 같은 추잡하고 더러운 마부놈들이 었다. 거기에 또 자하르도 끼어 있었는데, 그는 술 밀조 사건에 한몫 끼었던 자이지만, 그가 그 주모자를 고발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면하게 된 한층 더 간악한 자였다. 그러나 지바고가 의외로 생각한 것은, 대장 호위병 중의 한 사람이며 정예 '은중대'에 소속되어 있는 시보블 류가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스첸카 라진(1667∼1671년 사이의 러시아 농민전쟁 지도자)과 푸가초프(1742∼1795 러시아 농민 폭동의 지도자)때의 전통에 따라 이놈은 대장의 신임을 톡톡히 받아서 '두목의 귀'라는 별명까지 붙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다. 그들은 적의 전초 진지에서 온 대표들과 교섭중에 있었다. 대표들의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매우 낮은 소리로 배신자들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바고는 이따금 말소리가 끓 기고 있을 때는 적의 대표가 말한 것으로 추측하였다. 주정뱅이로 알려진 자하르가 누구보다도 얘기를 도맡아, 가끔 욕설을 해가며 쉰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아마 그가 주모자인 것 같았다. "너희들 잘 들으란 말야. 제일 명심해야 될 건 혓바닥을 조심하는 일이야-이 칼 알지?-배 창자를 갈라놓을 테니까. 똑똑히 새겨두란 말야. 자네들 자신이나 나나 다 잘 알겠지만 우리 는 독 안에 든 쥐야.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우리끼리 밖에는 용서를 받을 데가 없단 말야. 여태껏 아무도 못해 본 일을 해야 하거든. 이 사람들은 그 자를 생포해 달라는 거야. 헌데, 이 사람들의 두령 굴레보이 자신이 오기로 되어 있다구(잘 알아듣지 못해서 갈레예프 장군 이라고 다시 고쳐 말했다). 더없이 좋은 기회야. 이런 기회란 그리 흔한 게 아니야. 이 사람 들은 그 대표란 말이야. 이제부터 너희들한테 설명할 테니 잘 들어둬. 이 사람들은 그놈을 사로잡으라고 하니까. 당신들 설명해봐요." 대표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지바고는 한마디도 들을 수가 없었으나 침묵의 길이로 봐서 제안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자하르가 다시 지껄이기 시작했다. "알아들었어? 여보게들, 우리에게 얼마나 귀중한 인물이 굴러 들어온 건지 알겠나?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놈의 죄값을 치러야 하나? 그 바보 같은 놈은 인간이 아니라 승려나 풋내기 애 같단 말이 야. 뭘 그렇게 웃는 거야. 체로쉬카! 맞고 싶어? 너에 대한 걸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풋내 기 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거야. 그런 승려 같은 놈을 쫓아다녀 봐야 결국 너희들을 승려 나 내시로 만들 거야. 그가 하는 소리 알지? 욕도 하지 말고 술도 마시지 말고 그리고 여자 는 멀리하라.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산단 말인가? 나의 결론은, 오늘 저녁 우리 그 자식을 돌이 많은 개울로 끌고간단 말일세. 내가 그 자식을 데리고 올 테니 다 같이 달려들어야 돼. 어려울 건 없지만 그들이 생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지 꽁꽁 묶어서 생포하라는 거야. 만일 잘 안 되면 나 혼자서라도 없애버리면 돼. 저쪽에서도 사람을 보내서 도와줄 걸세." 그는 계획을 더 설명하고 있었으나 점점 더 저쪽으로 멀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지바고는 더 이상 엿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놈들은 리베리를 사로잡아서 백위군에게 넘기든지 아니면 죽여버릴 심산이군.' 그는 자기 자신이 이따금 리베리를 죽이고 싶다던 생각은 아주 잊어버리고 몹시 놀라며 분 개했다. 어떻게 하면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막아낼 수가 있을까? 그렇지, 카멘노드보르스키한 테 돌아가서 이름을 하나도 밝히지는 말고 음모를 알려주어야겠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 리 베리를 위험에서 막아주어야겠다. 그러나 되돌아와서 보니 그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그의 보좌관이 모닥불 곁에서 불이 흐 트러지지 않도록 지키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음모는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사저에 음모는 다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날로 자세한 내용이 밝혀지고 주모자는 체포되고 말았다. 시보블류이는 정탐과 선동의 이중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지바고는 한층 더 염증을 느꼈다. 9 아이들과 함께 가족들이 야영지에서 이틀 걸리는 곳까지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리시 오토크에서는 가족을 맞이하고 곧바로 이동을 시작할 태세를 갖췄다. 지바고는 팔르이흐한 테 찾아갔다. 팔르이흐는 막사 입구에서 손에 도끼를 들고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어린 자작나무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찍어서 자빠뜨렸을 뿐 아직 껍질을 벗기지 않고 있었다. 자빠진 자 리에 그냥 흩어져 있는 것도 몇 그루 있었다. 나무가 무겁게 자빠지면서 꺾어진 가지의 뾰 족한 끝이 눅눅한 땅에 꽂혀 있었다. 팔르이흐는 가까운 곳에서 끌어다 나무 산더미 위에 자꾸 얹어놓았다. 어린 나무의 탄력 있는 가지들이 지면에 뻗쳐 흔들리면서도 지면까지는 닿지 않고 서로 한데 뭉쳐지지도 않았다. 마치 손을 내뻗치면서 찍어 자빠뜨린 팔르이흐에 저항하면서 푸른 잎들이 막사로 들어가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귀한 손님들을 위해 쓰려고." 팔르이흐는 설명했다. "마누라와 애들 말이오. 말사가 너무 낮은데다 비가 새서 지붕을 만들려고 이 나무를 찍었다오." "그래 어떨까요-가족을 막사에서 살게 할까요? 민간인이나 여자들을 야영지 안에서 살게 한 예가 있어요? 곧 밖의 어디서 짐마차와 함께 살게 되지 않을까요? 당신이 여가 나는 대 로 만날 수도 있지만, 군인의 막사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허락치 않을 것이오. 당신은 먹질 못하고 잠도 못 자서 허약해졌다고 들었는데? 보기엔 별로 이사이 없는 것 같군요. 머리나 좀 깎으세요." 팔르이흐는 새까만 머리칼과 턱수염이 더부룩하고 울퉁불퉁한 이마가 두 줄로 금이 간 모 습으로, 건강한 거구의 사내였다. 관자놀이를 찍어누르고 있는 앞턱의 두둑한 뼈는 철테나 철띠 같아서, 그 때문에 무뚝뚝하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혁명의 초기인 1905년처럼 혁명은 교양 있는 상류 계급을 휩쓰는 정도로 짤막한 사건으로 되고, 하층 사회는 아무 영향도 없이 끝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민중을 일깨우고 선동 하고 열광시킬 목적으로 혁명 선전을 대중 속으로 넓히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써왔던 것 이다. 그 당시에는 지식인이나 장교, 상류 계급에 대하여 무자비한 증오를 일으키게 하려면 아무런 외부 자극이 필요치 않는 팔르이흐와 같은 인물이 필요했었다. 좌익 인텔리 중에서 는 찾기 어려운 아주 귀중한 존재 였었다. 그들의 비인간성은 계급 의식으로 보였으며, 그들 의 만행은 프롤레타리아의 용감성과 혁명적인 본능의 표본인 양 취급되었다. 팔르이흐는 그 러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졌으며 빨치산 대장이나 지도자들의 귀중한 존재로 여겨졌 던 것이다. 지바고한테는 그 엉큼하고 비사교적이며 냉혹하고 마음이 좁은 거인이 저능한 변절자로 생각되었다. "막사에 들어가지요." 팔르이흐가 권했다. "아니예요. 바깥이 더 시원하고 좋아요. 더욱이 지금은 들어갈 시간이 없어요." "그래요. 편하신 대로 합시다. 우리 나무 위에 앉읍시다.' 그리하여 그들은 흔들거리는 자작나무 위에 앉았다. 팔르이흐는 의사한테 신상에 대한 얘 기를 끄집어냈다. "자, 말하자면 짧고 또 말하게 되면 길답니다. 내 얘기는 길어요. 3년을 두고 얘기하더라 도 끝이 없다오. 그럼 어디서부터 얘기하면 좋을지. 마누라와 제가 아직 젊었을 때였어요. 마누라는 집일, 나는 밭에서 일하면서 별로 어려움 이 없었답니다. 어린애도 생겼어요. 그런데 나는 군대에 잡혀 전선으로 보내졌습니다. 전쟁 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얘기가 당신한테 필요하겠습니까. 의사 동무도 전쟁을 보았겠지요. 한데 도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나는 광명을 발견했답니다. 병사들의 눈이 확 트이게 되 었어요. 우리의 적은 독일군이 아니라 호히려 우리편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세 계 혁명의 병사들이여, 총을 버리라! 전선에서 돌아와 부르주아들을 무찌르라!' 이렇게 외치 는 것이었어요.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의사동무, 그리고 드디어 내란이 일어났어요. 나는 빨 치산에 참가하게 되었어요. 여기서 얘기를 뛰어넘지 않고는 끝이 나질 않겠군. 그렇게 고생 하였는데도 우리는 지금 어떠한 처지에 있지요? 그 기생충 같은 놈. 그놈이 일선에서 제1, 제2 스타브로폴리스키 연대와 제1오렌부르그 카자크 연대를 데리고 왔단 말이에요. 내가 어 디 어린앤가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군대에 있었기 때문에 곤경에 빠지게 됐습니다. 파멸입니다. 그 악당들이 노리는 것은 그 찌꺼기를 데리고 우리를 치려는 것이지요. 우리는 독 안에 든 쥐란 말입니다. 그러나 나한테는 처자식이 있어요. 만일 그놈들의 뜻대로 되는 날에는 처자식은 피할 길 이 없어요. 물론 내 처자식한테는 아무런 죄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놈들이 용서해 줄 리 가 없어요. 놈들은 마누라를 동여매고는 배를 눌러 죽일 겁니다. 내 처자식은 온몸의 뼈가 분질러지고 갈기갈기 찢겨버릴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나에게 왜 잠을 자지 못하느냐고 물 었지요? 사람이 비록 쇠뭉치로 만들어졌다 해도 그런 일을 생각하면 미치고 말아요." "매우 달라졌군요. 당신을 난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은 수년 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있으 면서 어디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다가, 이제 하루 이틀 후에는 말날 수 있게 되었는데 좋아하기는커녕 마치 장례식이라도 치르는 것 같군요." "이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달라요. 백위군 놈들한테 당할 판국인데. 난 괜찮아요. 어차피 죽을 건데, 뭐. 그러나 처와 애들을 저 세상에 함께 끌고갈 수는 없어요. 이 세상에 남아 있 어서 놈들의 손아귀에 잡혀서 피를 한 방울 한 방울씩 짜내게 하다니." "그래서 이상한 것이 보이게 되는 거죠? 당신에게는 이상한 것이 보인다고들 하더군요." "아니 선생님, 나는 아직 할 얘기가 있어요.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좋다면 사실을 모졸 이야기할 테니 날 너무 나무라지 말아요. 나는 당신 같은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오. 내 손은 장교들의 피로 물들어 있어요. 장교나 부르주아의 피로써 말입니다. 나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왔어요. 마치 물을 흘리듯이 말입니다. 죽은 놈들의 이름이나 숫자 따위는 아예 잊어버리고 말았다오. 그런데 딱 한 사람 이 머리에 남아서 좀처럼 떠나지 않는 조그마한 친구가 있습니다. 뭣 때문에 그를 죽였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나를 웃기고 즐겁게 했는데. 그저 놀이삼아 바보처럼 죽여버렸단 말입니 다. 2월혁명 때의 일입니다. 케렌스키 정부 때지요. 우리는 폭동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기차 정거장 근처에서였어요. 우리는 전선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전선으로 복귀 시키기 위하여 젊은 친구가 파견되어 왔답니다. 승리할 때까지 계속 싸우라고 설득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사관생도의 애송이가 우릴 설복하는 거예요. 마치 병아리 같은 놈이어서 '승 리할 때까지 싸워나가자'는 것이 그놈의 슬로건입니다. 물통 위에 올라서서는 슬로건을 외쳐 댔어요. 정거장 플랫폼에 있었던 물통인데, 좀 높은 데서 싸우라고 호소하면 권위가 있으려 니 생각하고 물통 위로 올라선 거지요. 한데 갑자기 통 뚜껑이 뒤집히면서 물속에 풍덩 빠 지고 말았어요. 그 광경이 얼마나 우스웠던지 옆구리가 결리는 것 같았어요. 그때 나는 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데굴데굴 구르면서 웃었답니다. 웃음이 멈추질 않았어요. 마치 간지럼이라 도 타듯. 우물거리는 새에 나는 총을 겨누고 탕 한 방을 놓았어요. 그 자리에서 쏴 죽이고 말았어요. 왜 죽였는지 지금도 모를 일이오. 마치 어떤 사람이 날 떼민 것처럼 말이오. 헛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그것 때문입니다. 밤이 되면 정거장이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그때에는 우스꽝스럽던 일이 지금은 후회가 됩니다." "그것이 멜류제예보 읍 근처의 비류치라는 정거장이 아닙니까?" "기억이 안 납니다." "당신은 즈이부시노 폭동에 참가했던가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전선은 어땠습니까? 어느 전선에 있었지요? 서부 전선인가요?" "아마 서부였을 겁니다.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달콤한 마가목 열매 1 마차를 탄 빨치산의 가족들이 그들의 어린애와 가구를 싣고 주력 부대의 뒤를 쫓아 이동 하기 시작한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그 뒤를 따라서 피난자의 짐 뒤로 주로 암소가 많이 섞 인 소떼가 움직이고 있었으며, 소는 수천 마리나 되었다. 부녀자들의 도착과 함께 숙영지에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였다. 그녀는 어떤 병사의 아내 였으나 가축의 의사, 말하자면 수의사이며 남몰래 무당 노릇도하는 즐르이다리하 또는 쿠바 리하라고 불리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호떡처럼 생긴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최고 통치자(꼴 차크)가 영국에서 얻은 보급품인 스코틀랜드 저격병의 황록색 외투를 입고 다니면서, 누구 한테나 죄수의 모자와 옷을 고쳐 만든 것이라고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 말에 의하면, 별로 뚜렷한 이유도 없이 콜차크한테 붙잡혀 케제마 감옥에 감금되었으나 적위군에 의하여 풀려 나왔다고 했다. 이 무렵 빨치산은 새로운 숙영지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그 부근을 정찰하여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장소를 찾으려고 했지만 장차의 상황과 그 밖의 사정 때문에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 게 되었다. 새 숙영지는 전의 리시 오토크와는 전혀 달랐다. 주위의 산림은 수목이 빽빽이 들어찬 밀 림이었다. 숙영지와 한길에서 떨어진 한쪽은 끝없는 수풀이었다. 도착하자 숙영 준비를 하면 서 지바고는 틈이 있어서 발길이 닿는 대로 숲속을 걸어 보았는데, 하마터면 길을 잃을 뻔 했다. 이렇게 답사하는 도중에 그의 관심을 끌게 된 두 군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었 다. 그 한 군데는 숙영지 바로 바깥쪽 숲의 끝이었다. 나무들이 제멋대로 자라고 있어서 열린 대문에서 안쪽을 들여다보듯이 숲속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아름다운 마가목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으며 불그스름한 그 나무는 잎사귀를 잔뜩 달고 있었다. 낮고 기복 이 심한 눅눅한 습지에 솟아 있는 산 꼭대기에 서 있는 그 나무는 회색빛에 젖어든 늦가을 하늘에 딴딴하고 새빨간 열매를 납작하고 둥근 방패처럼 내밀고 있었다. 추운 겨울 새벽놀 처럼 맑은 빛으로 털을 단장한 새떼들, 콩새와 파랑새가 마가목나무에 앉아서 큼직한 열매 를 쪼아내면서 목을 치켜들어 간신히 삼키곤 했다. 새들과 나무 사이에는 어떤 친밀한 생명의 연줄이 있는 것같이 보였다. 마가목나무는 마 치 아무것도 하려들지 않고 오랫동안 새들의 무리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결국 그들이 가련하 게 여겨져서 유모가 젖가슴을 헤치면서 갓난애기에게 젖꼭지를 물리듯이 새들에게 열매를 먹여주고 있었다. '그래, 그래, 할 수 없군. 먹어요, 실컷 먹으렴.' 마가목나무가 미소를 지으 며 속삭이는 것 같았다. 또 한 장소는 한층 이상스러운 곳이었다. 그곳은 한쪽이 아주 가파른 낭떠러지 위였으며, 내려다보면 그 낭떠러지 밑에는 꼭대기에 있는 광경과는 다른 어떤 것이 있으려니 생각되었다. 거기에는 개울이나 골짜기 그리고 높 이 자란 잡초가 무성한 풀밭이 있을 것만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실제는 밑에도 위와 똑같 은 것이 있었으며, 그것이 깊게 있어서 현기증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었다. 깊숙한 밑에는 마 치 숲과 나무들이 한꺼번에 깊이 가라앉아 나무 꼭대기가 발밑으로 내려앉은 것 같았다. 언 젠가 산사태가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끝없이 넓고 무성한 숲이 주름 가까이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발이 미끄러지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밑으로 떨어져 땅속으로 파묻히는 순간,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지금은 상처 하나 없이 건재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숲의 높은 곳이 각별한 인상을 주게 되는 까닭은 다른 데 있었다. 높은 곳의 가장 자리에는 대리석 바위들이 솟아 있어서 마치 선사 시대의 고인돌을 연상케 했다. 지바고는 처음 이 바위에 왔을 때, 그것은 자연적으로 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손이 간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 그것은 한때 우상 숭배자의 무리들이 기도와 제물을 바치던 고대의 이교도들의 전 당으로 됐던 곳인지도 모른다. 열 한 명의 빨치산 음모에 가담했던 범인들과 술을 밀조한 두 명의 위생병에 대한 사형 집행을 여기서 하게 되었다. 몹시 추웠던 어느 우울한 아침이었다. 선발된 정예 분자를 포함하여 혁명에 가장 충실한 약 20명의 빨치산들이 죄수들을 형장에 끌고 나왔다. 그리고 반원형으로 포위하여 총을 겨누면서 빠른 걸음으로 이 낭떠러지 가장 자리까지 몰고 갔다. 죄수들은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지는 외에는 더 갈 길이 없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구금되어 심문과 학대로 그 얼굴에서 인간의 모습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가 없었다. 새까맣게 때묻은 얼굴과 제멋대로 자라난 수염의 초췌한 모습은 귀신과 같았다. 그들이 체포되었을 때 이미 무기를 압수해서, 지금 처형될 마당에 다시 몸 수색을 할 필 요는 없었다. 만일 다시 몸 수색을 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하고 비열하게 생각되었으며 곧 죽 음을 앞둔 사람들을 참혹하게 조롱하는 짓이었다. 그러나 브도비첸코의 친구였으며 그와 함께 오랫동안 무정부주의자로 일하고 또 지금 함 께 형장에 끌려가고 있는 르자니츠키가 갑자기 경비병을 향하여 권총을 빼들고 시보블류이 를 겨누어 세 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르자니츠키는 사격의 명수였으나 지나치게 흥분한 나 머지 손이 떨려서 빗나가고 말았다. 아니면 옛 동지를 가엾게 여겨서 그에게 덤벼들거나 그 자리에서 사살하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권총에는 아직 탄환이 세 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흥분한 탓인지 아니면 탄환이 남지 않 았다고 생각했는지 르자니츠키는 화가 치밀어 권총을 바위에 내동댕이쳤다. 그러나 권총은 저절로 발사되면서 같은 죄수인 파치콜랴의 발을 꿰뜷고 나갔다. 위생병 파치콜랴는 비명을 지르면서 한쪽 발을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스러워했 다. 옆에 있던 카프누트킨과 고라즈드이는 양쪽에서 그를 껴안고 일으켜 이미 정신이 나가 버린 동료들의 발밑에 짓밟혀 죽지 않도록 팔에 끼고 질질 끌고 있었다. 파치콜랴는 부상한 다리를 땅바닥에 내려놓을 수가 없었고 줄곧 비명 소리를 지르면서 죽음이 기다리는 바위 낭떠러지로 한쪽 발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의 고함 소리는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으며 그 소리는 마치 무슨 신호처럼 들렸다. 모든 죄수들이 자제심을 잃어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 경이었다. 죄수들은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붓더니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애걸하며 또 기원했 다. 나이 어린 갈루진이 여전히 노란 테두리의 학생 모자를 쓰고 있었으나, 이때 모자를 벗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무서운 바위 낭떠러지를 향하여 기어가면서 경비병이 서 있는 땅바닥에 연방 머리를 조아리면서 울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 "용서해주시오. 여러분, 저는 잘못을 뉘우치고 있어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테니까, 도 와주세요. 죽이지는 말아요. 저는 아직 인생을 살아 보지도 못했어요. 제발 여러분 용서해주 시오. 저는 단 한 번만이라도 어머니를 보고 싶단 말이에요. 날 놓아주세요, 여러분이 시키 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발에다 입을 맞출까요. 물을 기어드릴까요. 오, 어머니, 절 살려주세요, 이제 틀렸어요. 어머니! 어머니!" 죄수 가운데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훌륭한 여러 동무들!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는 두 개의 전쟁에서 피를 함께 흘리 지 않았습니까! 똑같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말입니다. 제발, 우릴 놓아주시오. 불쌍히 생 각해주시오. 당신들은 귀머거리란 말입니까? 왜 아무 대답이 없어요? 당신은 기독교인이 아 니란 말입니까/" 시보블류이에게 소리질렀다. "이 유태인아! 그리스도를 팔아먹는 놈! 우리가 반역자라면 넌 세 갑절이나 반역자란 말 야! 개 같은 놈, 목을 매달아 죽일 놈! 넌 황제에 충성을 맹세하고 황제를 죽인 놈이야. 그 런데 이번엔 우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배신을 하다니, 너의 레스느이한테 키스해줘라, 그놈 을 네가 배신하기 전에 말이야. 어차피 네놈은 배반할 테니까." 그러나 브도비첸코는 무덤에 가까이 쫓겨가면서도 당황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백 발이 성성한 머리카락을 불어오는 바람결에 날리며 머리를 치켜들고 쩡쩡 울리는 우렁찬 목 소리로 무정부주의자가 자기 동료들에게 하는 말투로 르자니츠키를 보면서 말했다. "우리는 절대로 천박한 행동은 하지 말자! 너의 항의는 그들 귀에 들리지 않아. 이 새 오 프리치니크(군주의 절대 권력을 대표하는 이반 황제의 근위병)들과 새 고문 집행자들이 너 를 이해할 리가 있겠니! 하지만 실망은 말게. 역사는 진실을 전해줄 걸세. 후세 자손들에게 이 공산주의 전제정치의 반동 귀족들을 그놈들의 추악한 행위와 함께 세상에 폭로하고 말 걸세. 우리는 세계 혁명의 여명기에 이상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거야. 정신 혁명 만세! 세 계 무정부주의 만세!" 사형 집행 사수들의 귀에만 들리는 어떤 구령이 내리면서 20발의 총성이 일제히 울리더니 사형수의 반수가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다. 다시 일제 사격을 받고 그들도 쓰러지고 말았다. 어린 갈루진이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몸을 뒤틀고 있었으나 그마저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2 겨울을 나기 위해 숙영지를 찾아 동쪽으로 더 이동하려는 계획은 쉽게 포기되지 않았다. 한길 건너의 브이트스카강과 케제마강이 갈라지는 일대의 지역을 정찰하기 위하여 척후병이 파견되었다. 리베리는 지바고를 혼자 남게 하고 가끔 밀림의 숙영지를 비우고 있었다. 그러나 빨치산은 이미 이동할 시기를 놓쳐서 이젠 어디로도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빨 치산은 지금 최악의 형편에 몰렸던 것이다. 그들의 마지막 붕괴에 앞서 백위군은 숲속의 이 비정규 부대를 완전히 소탕하기로 결심하고 포위망을 형성하여 여러 방향에서 압박을 가해 오고 있었다. 만일 포위망이 좀더 좁혀졌다면 빨치산은 파멸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 행히도 적의 포위망은 지나치게 넓었다. 겨울이 닥치는 바람에 밀림은 발붙일 수 없게 되어 적의 포위망을 압축하려는 부대는 이미 이동이 불가능하게 됐다. 물론, 혹시 군사적으로 어 떤 특정하게 유리한 점을 가진 계획이 있다면 새로운 진지로 돌파를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런 명확한 계획은 가지지 않았다. 병사들의 사기는 저하됐고, 하급 지휘관들 자신의 사기마저 떨어져 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부하에 대한 통솔력을 점차 잃게 되었다. 상급 지휘관은 밤마다 회의를 열고 대책을 의논하였으나 토론만 계속되었을 뿐이었다. 결국 숙영지를 이동하는 계획은 단념하고 밀림 한복판인 현 위치에서 방어 시설을 구축하 기로 했다. 겨울에는 눈이 깊게 덮여 적의 접근을 막고 있는 점과 적의 스키보급이 좋지 않 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해야할 일은 진지를 더욱 구축하고 대량의 식량을 확보하는 일이었 다. 병참 참모인 비슈린은 밀가루와 감자가 매우 부족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가축이 많아서 겨울 동안의 주식은 우유와 고기를 먹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겨울 의복도 부족했다. 빨치산의 대부분은 가볍게 옷을 입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숙영지에 있는 개를 모조리 때려 잡아서, 털옷 만드는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털을 바깥으로 한 개가죽 웃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바고는 마차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짐마차는 지금 더 긴요한 일을 위하여 사용하 도록 돼 있었다. 빨치산은 이 숙영지에 옮겨왔을 때도 30베르스타의 먼 거리를 들것으로 중 환자를 수송해왔던 것이다. 지바고가 가지고 있는 남은 의약품으로는 키니네와 염산소다 그리고 요드 용액 정도였었 다. 요드는 굳어 있기 때문에 상처의 치료나 수술을 할 때는 알콜에 녹여서 사용했다. 그러 고 보니 새삼 양조기를 부숴버린 일이 후회되었다. 전의 재판에서 비교적 죄가 가벼워서 방 면된 술 밀조자들이 양조 시설을 다시 고치거나 새로운 것을 만들도록 지시받았다. 이리하 여 의료용 알콜을 제조하는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빨치산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알려지자 서로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정뱅이들이 늘어나서 전체의 사기가 떨어져가 기 시작했다. 양조해 낸 알콜은 근 1백 도에 가까웠다. 요드를 녹이거나 키니네 용액을 만드는 데는 이 정도의 도수가 적당했다. 추위가 닥쳐오면서 다시 티푸스가 고개를 들어서 키니제 용액을 치료하는 데 사용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3 이 무렵에 지바고는 팔르이흐의 가족을 만나 보았다. 그의 처자는 지난 여름 동안 피난민 이 되어서 먼지투성이 한길을 방황하면서 공포에 시달려 지내왔으며, 이제부터 새로운 고통 이 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끝없는 유랑이 그들 얼굴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새겨놓고 있었 다. 팔르이흐의 처와 두 딸과 아들은 원래는 금발머리였으나, 햇볕에 그을려 아마빛으로 희 게 퇴색되었으며 굵직한 눈썹 역시 비바람에 시달려 불그레 탄 얼굴에 희끗희끗하게 보였 다. 그러나 어린애들은 작았고 별로 고생티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의 어머니의 얼굴은 생 기를 잃고 있었다. 근심과 두려움에서 입술이 실처럼 가늘고 깡마른 것이 고통을 참으려는 표정으로 굳어져 있었다. 팔르이흐는 가족을 사랑했으며 유독 아이들한테는 대단했다. 지바고는, 그가 잘 갈아 놓은 도끼날로 교묘하게 나무를 깎아 토끼나 수탉, 곰 따위의 장난감을 만든 솜씨에 놀랐다. 가족이 도착하자 팔르이흐는 기운을 회복하고 병도 나아갔다. 그러나 가족을 빨치산과 함 께 있게 한다는 것은 군의 규율을 문란하게 하므로, 적당한 경계 조치를 하여 숙영지에서 좀 떨어진 장소에서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지방 피난민의 부담을 덜려고 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지금은 그것이 한낱 계획으로 토의되고 있는 정도였으며 실제 준비 는 아직도 시작되지 않았다. 지바고는 그렇게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으나, 팔르이흐는 또다 시 침울해지더니 다시 발광하는 버릇이 되살아났다. 4 겨울이 닥쳐올 무렵, 숙영지에서는 한동안 소란한 공기가 감돌았다. 불안과 의혹, 혼란과 술렁이는 공기 그리고 뜻밖의 사건들이 일어났다. 백위군은 작전 계획대로 포위를 완료했다. 그 작전의 지휘관은 비츠인, 크바드리, 바살르 이고와 같은 엄하고 강인한 장군들이었으며, 숙영지에 있던 피난민은 물론 포위 부대의 후 방 부락에 남아 있던 주민들까지도 그 이름만 들어도 덜덜 떨었다. 앞서 말한 대로 적은 포위망을 압축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빨치산은 걱정할 필요는 없 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도 없었다. 괴로운 입장을 소극적으로 참고만 있을 경우, 적의 사기를 높이게 되는 것이다. 포위망 속에서는 제아무리 안전하다 해도 어떤 시위 작전이 있어야 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빨치산의 주병력은 분할되어 포위망의 서부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계속되었던 격전 끝에 빨치산 부대는 백위군을 격파하고 그 후방을 돌파하였다. 돌파구는 밀림 속을 뚫고 숙영지에 이르는 길을 터놓게 되어서 새로운 피난민들이 연달아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피난민의 전부가 빨치산의 연고자는 아니었다. 지방 농민들이 백위군의 박해가 두려워서 가정을 버리고 보호를 요청하여 숲속의 농민군에 합류하려고 들 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숙영지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많은 사람을 데리고 있어서 그들을 떼어버리고 싶었 던 처지였으며, 새로 밀려들어오는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그리하여 피난 민을 도중에서 막아서 칠림카 강변에 있는 마을로 보내려고 대표를 파견하게 되었다. 그 마 을은 제분소가 있고 농가가 군데군데 흩어져 있어서 드보르이라고 불렀으며, 피난민들을 이 곳에 정착시켜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식량을 보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내렸으나 형편이 여의치가 않아서 빨치산 사령부는 그것을 도저히 감 당할 수가 없었다. 적은 이윽고 자기 진지의 돌파구를 막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돌파해나갔던 빨치산 부대는 고립되어 숲으로 되돌아올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여자 피난민은 성가신 존재였다. 밀림 속에서 여자들은 곧잘 길을 잃게 되었으며, 찾아나선 사람들이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되돌아왔다. 여자들은 흐르는 물결처럼 밀림에 흘 러들어와 나무를 찍어 길을 내고 다리를 만들고 놀랄 만한 창의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짓들은 빨치산 사령부가 의도했던 것과는 반대였으며 리베리가 세운 계획을 흔들 어놓게 되었다. 5 그런 이유 때문에 리베리는 몹시 언짢은 낯빛으로 스비리드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몇 명의 참모가 길가에서 도로변에 가설된 전화선을 절단할 것을 의논하고 있었다. 역시 최 종 결정은 리베리가 하게 되었으나, 그는 스비리드와 얘기중이므로 참모들에게 기다리라고 연방 손짓하고 있었다. 스비리드는 브도비첸코가 총살되는 것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았었다. 브도비첸코의 죄라 고 한다면, 그의 인기가 리베리의 권위와 겨루게 되어서 빨치산 내부에 반목을 가져왔다는 것뿐이었다. 스비리드는 빨치산에서 이탈하여 이전과 같은 혼자만의 자유로운 생활로 되돌 아가고 싶었으나 그것을 상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악마한테 정신을 팔고 나면 다 시 사들일 수는 없게 되었다. 산림에서 이탈하게 되면 배신자로 처형되는 것이다. 날씨는 상상도 못할 만큼 험악하게 찌푸려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예리한 바람이 연기처 럼 검은 구름을 땅위에 휘몰아 붙이고 눈은 미친 듯이 휘날려 떨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광막한 대지는 하얀 담요에 덮여버린다. 그러나 다음 찰나에는 그 흰 담요가 녹 아버리듯이 사라지고 저 멀리 소나기의 빗줄기를 비스듬히 쏟고 있는 컴컴한 하늘 밑에서 대지는 석탄처럼 검게 보였다. 대지는 이 이상 더 수분을 흡수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구름 이 창문처럼 열리면서 하늘이 보였다. 하늘은 차갑게 또 유리알처럼 희게 반짝였다. 흡수되 지 않고 땅 위에 괸 작고 큰 물 웅덩이도 반짝이고 있었다. 습기는 연기처럼 소나무 꼭대기에 엉겨서 송진을 가진 솔잎이 방수포처럼 물기를 막아 냈 다. 빗방울이 전선줄에 구슬처럼 맺혀 있었다. 스비리드는 여자 피난민을 만나러 밀림 속으로 보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 기가 목격한 것들을 낱낱이 대장에게 말하고 싶었다. 여러 가지 모순된 명령이 내려졌기 때 문에 괜히 혼란만 일어났을 뿐이며 무엇 하나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라든지, 여자들 중에는 처음부터 실망해버린, 마음이 약한 사람이 범한 몸서리치는 행위 등을 말하고 싶었다. 자루 와 보따리를 등에 지고 젖먹이 애를 안고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걸어온 젊은 어머니들은 이 미 젖은 떨어지고 길에서 지쳐 정신을 잃게 되어, 아기를 길바닥에 팽개치고 주머니와 곡식 을 쏟아버린 채 길을 돌아섰다. 굶주리고 오래 고생하면서 죽는 것보다는 단숨에 죽어버리 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숲속의 야수 이빨에 찢기느니보다는 적의 손아귀에 들어 가는 편이 낫다고 결심하였다. 또 다른 억센 여자들은 남자에 못지않게 용기와 자제심을 가졌다. 스비리드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대장에게 하고 싶었다. 그는 또 이전에 진압했던 것보다 더 위험한 새 로운 폭동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을 경계하도록 말하려 했으나, 리베리는 서두르면서 그에 게 천천히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다. 더욱이 리베리가 스비리드의 말을 자주 가 로막는 것은, 자기 참모들이 길에서 부르고 손짓하고 있었던 이유만이 아니었다. 지난 두 주 일 동안은 그러한 경고를 귀에 혹이 나도록 들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두르지 마십시오, 대장 동무. 저는 언변이 좋지 못해서 말이 이빨에 걸리고 목 구멍에 붙어서 숨이 막힐 것 같아요. 어떻게 말한담? 피난민들이 노숙을 하는 곳에 가서 그 여자들에게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라고 말해주십시오. 도대체 우리는 어느 편입니까? 총력을 다해 콜차크와 싸우는 겁니까, 아니면 여자들의 수라장이란 말입니까?" "요점만 말해요, 스비리드. 날 부르고 있으니 딴소리 말고." "그런데 그 도깨비 같은 쿠바리하 말입니다. 아무도 그 여자의 정체를 모릅니다. 그 여자 는 소의 병을 고치는 여의사로 내보내달라는 겁니다." "수의 말이로군, 스비리드." "그래, 맞았어요. 가축의 병을 고치는 여자 수의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소 따위를 돌볼 여자가 아닙니다. 암소에 먹이를 주고는 새로 온 피난민의 젊은 여자들을 들뜨게 하고 있답니다. 당신들이 이렇게 비참한 꼴이 된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당신들 자신의 탓이 라면서 말입니다. 당신네가 옷깃을 쳐들고 붉은 기를 따라온 보답이 이거니 이제 다시는 그 런 짓을 말라는 겁니다." "그건 어느 피난민 말인가? 우리들 빨치산 편인가, 아니면 다른 피난민들 말인가?" "물론 다른 피난민 말입니다. 새로 들어온 낯선 사람들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드보르이 마을에 있기로 했지 않소. 여기에 어떻게 들어온 거요?" "드보르이 마을 말이군요. 그곳에는 화재가 일어나서 제분소고 뭐고 모든 게 다 타버리고 남은 거라곤 잿더미밖에는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칠림카에 도착해서 보니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답니다. 그래서 그들의 반은 마음을 돌이켜 울면서 백위군 쪽으로 가버렸 으며, 나머지는 다시 이쪽으로 온 겁니다." "밀림과 늪지대를 어떻게 지나왔지?" "톱과 도끼는 언제 씁니까? 우리들이 보낸 호송대원들도 좀 돕기는 했습니다. 그들은 30 베르스타나 되는 곳을 나무를 찍고 길을 내면서 왔다는 거예요. 다리도 놓으면서 말이에요. 정말 억척스러운 여자들이에요. 생각지도 못할 일을 해치웠습니다." "제기랄! 30베르스타의 길을 만들었다고 좋아하는 건가, 이 바보 같은 친구야! 그건 바로 백위군이 바라던 일이 아닌가. 어서 오십시오, 하는 것과 같단 말일세. 밀림에 통로를 내 주 어서 대포도 끌어들일 수가 있겠네." "그럼 막아야지요. 빨리 막아버립시다. 막으면 그만이지요." "걱정 말아요, 나도 생각이 있으니까." 6 해가 짧아졌다. 다섯 시가 되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저녁녘에 지바고는 일전에 리 베리가 스비리드와 말다툼하던 바로 그 근처의 한길을 지나고 있었다. 숙영지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공지에 거의 가까이 오자, 숙영지의 경계 표시로 되어 있는 마가목나무가 있는 낮 은 산 기슭에서 카랑카랑하고 거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소의사'라는 별명으로 불리 는 쿠바리하였다. 그녀는 귀에 거슬리게 높은 목소리로, 어딘가 명랑하면서도 거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듣는 사람이 많았는지 흥겨운 남녀의 웃음 소리가 이따금 터져나왔다. 이윽 고 조용해졌다. 모두 헤어진 모양이었다. 그때 쿠바리하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혼자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 했다. 지바고는 어둠 속에서 늪지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마가목나무 앞의 늪가의 오 솔길을 천천히 걷다가 문득 멈췄다. 쿠바리하는 옛 러시아 노래를 불렀는데 무슨 노랜지 알 수는 없었다. 아마 그녀가 즉흥적으로 지어 부르는 노래 같았다. 러시아의 노래는 저수지의 물같이 움직이지 않고 고요히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밑에 서는 끊임없이 물이 수문으로 흘러나가고 수면의 고요는 거짓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의 노래는 반복과 비유로 은근히 전개되는 주제를 이끌어가다가 어느 한계에 이르 러 그것을 갑자기 드러내어 듣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다. 노래의 애절한 정신은 이렇 게 해서 표현되었다. 노래란 말로써 시간을 멈춰보려는 미치광이 노릇인 것이다. 쿠바리하는 노래 부르듯 또 말하듯 혼자 지껄이고 있었다. 새하얀 빛을 따라 토끼는 흰 세상, 흰 눈을 달린다. 마가목나무를 지나 숲속을 달린다. 숲속을 달려 마가목나무한테 울면서 난 겁장이에요, 놀라기만 하는 겁장이래요. 난 짐승이 지나간 자국만 봐도 굶주린 늑대의 배가 무서워요. 나를 불쌍히 여겨주오, 마가목 숲아! 아름다운 마가목나무. 너의 아름다움을 못된 원수에게 원수의 까마귀에겐 주지 말아요. 너의 빨간 열매를 바람결에 실어 바람이 흰빛과 흰 눈 위에 그리운 땅 위에 뿌리게 해요. 우리 고향까지 저 멀리 담을 쌓은 집까지 그 창문에, 그 방안에 나의 사랑, 그리운 그대 그대가 닫고 들어간 방에까지 나의 불타는 말 한마다 속삭여 다오, 뜨거운 사랑의 속삭임을. 난, 속박된 병사의 몸 난, 향수에 젖은 가련한 병사 나는 쓰라린 구속을 박차고 나의 빨간 열매, 나의 사랑을 찾겠네. 7 병사의 처 쿠바리하는 팔르이흐의 처 아가피아의 병든 소를 고치기로 돼 있었다. 그 소를 여러 소들 사이에서 끌고나와서 관목이 우거진 숲속으로 데려다 나무에 뿔을 동여매었다. 앞다리 옆의 나무토막에는 아가피아가 앉고 뒷다리 옆에는 젖 짤 때 쓰는 의자에 쿠바리하 가 앉아 있었다. 그 밖의 많은 가축들이 좁은 공지에 들어차 있었다. 검은 침엽수림이 산 높이로 자라난 삼각형 모양의 전나무를 사방으로 벽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전나무의 아래쪽에 뻗은 가지은 마치 살찐 엉덩이를 땅바닥에 붙이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시베리아에서는 소의 품종이 어떤 한 가지 스위스종뿐이었다. 암소는 검은 바탕에 흰 반 점이 있었고 거의 대부분이 똑같은 털무늬였다. 그것들도 사람에 못지않게 궁핍과 끝없는 방랑과 견딜 수 없는 혼잡으로 지쳐 있었다. 소들은 옆구리를 비벼대고 장소가 비좁아 미칠 지경이었으며, 자기네들의 성도 잊어버리고 뒷발로 서면서 다른 소에게 올라타 누르는 바람 에, 묵직한 젖통을 빼내기에 힘을 쓰며 수소처럼 으르렁거렸다. 어미소에 깔렸던 어린 송아 지가 밑에서 튀어나와 숲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꼬리를 하늘로 쳐들고 나무 덤불과 가지를 짓밟고 다니자, 소몰이꾼 아이들과 노인이 소리를 질러 그들을 쫓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전나무의 꼭대기가 겨울 하늘을 빽빽이 둘러싼 것처럼 보여서, 숲속 공지 위 에서 검고 흰 구름이 소떼처럼 혼잡하게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갈 길을 막고 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장소에는 호기심에 찬 구경꾼들이 쿠바리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래 서 그녀는 언짢은 눈으로 아래위를 훑었다. 하지만 구경꾼에 한눈을 판다는 것은 체면이나 예술가의 자존심에 손상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됐다. 지바고는 쿠바리하한테 들키지 않도록 사람들의 등뒤에 숨어서 슬그머니 지켜보았다. 그가 그녀를 똑똑히 바라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쿠바리하는 여전히 영국군의 약모를 쓰고 제멋대로 깃을 꺾어 놓은 황록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나이든 여인의 정열 에 넘치는 모습과 교만스러운 표정, 그리고 젊음이 빛나는 검은 눈동자와 눈썹은 무슨 옷을 입건 그녀의 성미를 나타내긴 매일반이었다. 그러나 지바고가 놀란 것은 팔르이흐의 아내가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요 며칠 사이에 얼마나 늙어버렸는지 부릅뜬 두 눈이 금방 밖으로 떨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마차의 굴대처럼 가느다란 그녀의 목에는 혈관이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마음의 공포가 그녀의 모습을 이렇게 바꿔놓았다. "이 소는 젖을 통 내지 못해요." 아가피아가 말하고 나서 생각했다. '새끼를 밴 것은 아닐 까. 그래도 지금쯤은 젖이 날 것 같은데 여전히 없다니.' "새끼를 밴 것은 아니오. 저 젖꼭지에 딱지가 붙어 있는 걸 보아요. 우유에 담갔던 약초를 줄 테니 발라봐요. 그리고 주문으로 기도를 드리겠소." "그리고 또 남편 때문에 걱정이라우." "내가 기도하면 그까짓 바람기는 잡을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주인이 당신한테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 세번째 걱정거리는 뭡니까?" "그 양반이 바람난 게 아니예요. 바람이라도 났으면 좋게요. 반대로, 나와 애들일을 하나 하나 걱정하다 보니까 몸도 마음도 곪아버렸답니다. 저는 그이의 생각을 알고 있어요. 이제 우리는 서로 딴곳에서 살아야 한댔어요. 우린 바살르이코한테 붙잡히게 되고, 남편이 없어지 면 우릴 지켜줄 사람이 없어질 거예요. 놈들은 우리를 고문하고, 그 고통을 그놈들은 즐기 고... 이렇게 생각하니 그이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오. 이만하면 알겠지요?" "생각해 봅시다. 그 걱정을 덜어볼 궁리를 할 테니까. 그럼 또 세번째 걱정은?" "세번째 걱정은 없어요. 암소와 그이에 대한 걱정뿐이에요." "아니 그것뿐이라니! 하나님 은총이예요. 대낮에 불을 켜들고 찾아봐도 당신처럼 행복한 사람은 없을 거요. 그것도 하나는 주인이 너무 위해 주는 걱정이란 말이오. 그런데 소 별을 고쳐주면 뭘 줄 테요? 그럼 기도를 시작해봅시다." "뭘 드릴까요?" "빵 한 덩어리와 당신의 주인을 받겠어요." 주위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농담하시는 거요!" "너무 비싸면 빵은 그만두고, 당신 남편만으로 합시다." 웃음 소리가 더 높았다. "이름이 뭐지요? 주인 말고 소의 이름 말이오." "크라사바라고 해요." "여기 암소의 절반은 크라사바가 아니오. 좋아요. 그럼 시작합시다." 쿠바리하는 암소에게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축한테만 주의를 쏟고 있었으나, 잠시 후 흥이 돋아나 아가피아를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주문을 외는 법과 규칙을 말하는 것 이었다. 지바고는 꼼짝도 하지 않고 열띤 주문을 듣고 있었다. 그가 러시아에서 시베리아로 여행하던 중 마부 바커스의 멋있는 객설을 들은 일이 있었다. "모르고시야 아주머니, 어서 우리한테 나들이 오소서. 화요일과 수요일엔 썩은 종기를 가 져가시고, 암소 젖꼭지에서 딱지를 떼어내 주시오. 얌전히 있어요. 크라사바! 의자를 자빠뜨 리지 말고. 산처럼 서서 강물처럼 젖을 흘리라. 도깨비와 요괴 같은 딱지를 떼어서 쐐기풀 밭에 던져버리라. 나의 말은 상제의 말과 같으니라. 아가피아, 당신은 무엇이든지 알아야 해 요. 저기 숲을 잘 보고 잘 생각해 보란 말이오. 그건 숲이 아니예요. 저것은 우리가 바살르 이코 부대와 싸우듯이 악마의 군대와 천사의 군대가 싸우는 거예요. 그럼 다른 예를 들어서 가르쳐주지. 내가 손짓하는 쪽을 봐요. 그것이 아니예요. 잔등으로 볼 수는 없으니 눈으로 보란 말이오. 그렇지, 그래! 저것이 무엇이라고 생각되지요? 바람 탓 으로 자작나무 가지가 얽혔거나 아니면 새가 둥지를 짓는다고 생각하겠지. 아닙니다, 저건 도깨비의 장난이란 말이에요. 물귀신이 자기 딸을 위해 엮은 꽃다발이에요. 사람이 지나가는 소릴 듣고 반쯤 만들다가 그만뒀어요. 밤이 오면 다시 만들 테니, 두고 봐요. 그리고 또 당신들의 붉은 깃발 말이에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지요? 그것을 깃발이라고 생각해요? 아니오, 그것은 깃발이 아니랍니다. 그것은 죽은 딸자식을 홀려내는 데 쓰이는 새 빨간 스카프라오. 왜 홀려내느냐 하면, 젊은 사람들에게 스카프를 흔들어 추파를 던져 젊은 이를 죽음에 빠지도록 유혹하여 병을 준단 말이예요. 그런데 당신은 그 깃발을 믿었어요. 만 국의 노동자와 가난뱅이여, 모여라 하는 깃발이라고. 아가피아, 오늘날에는 뭣이든지 다 알아둬야 해요. 새는 뭣이고, 돌은 뭣이고, 그리고 풀은 뭣인지 다 알아두어야 한단 말이에요. 가령 이 새는 찌르레기이고, 저 짐승은 오소리라고 하 듯이... 그리고 또 당신이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면 말해요. 상대가 누구이든 당신한테 반하게 만 들 테니까. 당신들의 대장 레스느이든, 콜차크든 아니면 이반 차레비치(러시아 동화에 잘 나 오는 이목구비가 수려한 왕자)든 아무라도 좋아요. 거짓말인 줄 아시오? 아니예요. 자 들어 보시오. 겨울이 되면 들판에 눈보라치고 회오리바람이 일고 눈기둥이 치솟아 올라가는데, 내 가 그런 눈기둥에다 단도를 찔러 놓으면 그 칼에 시뻘건 피가 묻어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당신은 내가 거짓말은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바람과 눈으로 된 눈기둥에 서 어떻게 피가 나오겠어요. 그것은 말하자면 그 회호리바람이 예사 바람과 눈이 아니고 귀 신이 앗아간 어린 아이를 찾아, 울면서 들판을 헤매는 이리로 변신한 인간이랍니다. 그것을 내가 칼로 찔러서 피가 묻었던 거예요. 나는 그 칼을 가지고 어떤 사람의 발자국을 떼어내 서 당신의 스커트 깃에 명주실로 꿰매주겠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콜차크든, 스트렐리니코프 든 또 새로운 황제건 당신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면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당신은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러면서 만국의 가난한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생각 하고 있단 말이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돌멩이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것 말이예요. 어떤 사람이 집에 서 어두운 밖으로 나오니까 머리 위에 돌멩이가 떨어졌어요. 또 어떤 사람들이 본 것처럼 기사가 말을 타고 하늘을 달려서 말굽이 지붕을 차고 지나 갔다고 했어요. 그리고 아주 옛 날의 점장이는 '이 여자에게는 곡식을, 저 여자에게는 꿀을, 그리고 또 한 여자에게는 호랑 이 가죽을 몸에 지니게'했다는 거예요. 그러고는 기사가 마치 상자를 열 듯이 여자의 어깨를 칼로 찍어서 열고는 칼끝으로 밀과 다람쥐 그리고 꿀벌집을 끄집어냈대요." 이따금 우리는 깊고 강렬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반드시 어떤 연민의 정 을 가지게 된다. 인간은 그 숭배의 대상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점점 더 그 사람이 희생돼 가는 것처럼 생각되기 쉽다. 어떤 남자들은 여자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에 그녀를 비현실적 인 공상의 세계에서 바라보게 되며, 여자가 호흡하고 있는 공기마저도 질투를 느끼며 자연 의 법칙과 그 여자가 태어나기 전 세상에 있었던 수천 년의 역사의 흐름까지도 질투를 느끼 게 했다. 지바고는 교양이 많은 사람이었다. 쿠바리하가 말하던 마지막 이야기가 노브고로드 연대 기가 아니면 이파치예브 연대기의 첫 부분과 흡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몇 세기를 거쳐서 점장이의 이야기로 전해준 것을 시인들이 왜곡하면서 입으로 전하고, 후세로 내려와서 필생 들의 손으로 잘못 기록되어 점점 더 왜곡되어서 나중에는 원본과는 조금도 비슷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런데 왜 지바고는 구비의 위력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 왜 이렇게 돼먹지 않은 터무니 없는 소리가 마치 실재하는 사실처럼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게 되었을까? 라라의 왼쪽 어깨를 째서 열어 젖뜨렸다. 그리고 숨겨 둔 금고의 자물쇠에 열쇠를 꽂듯이 칼을 꽂아서 어깨뼈를 젖혔다. 그러자 그녀의 영혼 깊숙이 간직했던 비밀이 드러나고 말았 다. 낯선 고장, 거리, 집들 그리고 공간 등이 마치 리본의 둥그런 뭉치를 굴리듯이 하나하나 나타나는 것이다.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던가!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내가 언제나 생각하고 꿈꿨던 그녀의 모습은 항상 그려보던 그대로가 아닌가! 어쩌면 그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그 녀의 아름다움을 말로 다할 수 있을까? 아니야, 절대로 안돼! 그녀는, 조물주가 단 한 번 붓 을 놀려 그녀의 신성한 윤곽을 그린 둘도 없는 소박하고 날랜 선에 의하여 탄생하여 깨끗하 게 담요에 싸놓은 갓난애처럼 신에게 영혼을 맡기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숲, 시베리아 그리고 빨치산. 그들은 지금 포위되고 있으며, 나는 그들의 운명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 무슨 기이하고 믿을 수 없는 일 인가! 그리하여 또다시 지바고의 눈앞이 흐려지면서 머리가 혼란했다. 모든 것이 흔들리며 움직였다. 그때 눈이 내릴 것으로 짐작했던 날씨가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거리의 한길을 가로질러 집과 집 사이에 걸쳐진 넓은 플래카드의 천처럼 숲속 공지의 한쪽에서 다 른 쪽으로 몇 배나 더 넓게 놀라운 환상의 머리가 쑥 나타나 하늘에 퍼졌다. 더욱 세차게 퍼붓는 비는 하염없이 우는 환상의 머리에 입맞추어 씻어 내렸다. 쿠바리하는 아가피아에게 말했다. "이젠 됐어요. 당신의 암소는 곧 나을 겁니다. 빛의 보금자리이며 생명의 성전이신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드려요." 8 밀림 서쪽 경계선에서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밀림은 끝없이 넓기 때문에 마 치 더 먼 국경에서 전쟁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산림 깊숙한 곳에 있는 숙영지에 는 사람이 많아서, 아무리 사람을 전투에 투입하고도 남아 있는 사람의 수가 오히려 불어난 것처럼 느껴져서 서운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 멀리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터의 총성이 깊숙한 숙영지까지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숲속에서 몇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또 몇 발의 총성이 가까운 곳에서 들리 더니 재빠른 일제 사격 소리로 변했다. 총성을 들은 사람들은 겁을 집어먹고 일제히 흩어졌 다. 숙영지 예비 대대에 편입되었던 사람들이 자기 마차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소동이 벌 어지면서 모든 사람이 전투 태세를 갖췄다. 얼마 후에는 잠잠해졌다. 적이 습격해 왔다는 경보는 착오였던 것이다. 총성이 들리던 곳 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군중은 점점 많아지고 새로 모여든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군중이 모인 땅 위에는 피투성이가 된 한 사람이 구르고 있었다. 아직 숨은 쉬고 있었으 나 그의 오른쪽 팔과 왼쪽 다리가 잘려 있었다. 이 가련한 살덩어리가 남은 한쪽 팔과 다리 는 몸서리나는 핏덩어리로 되었고, 뭐라고 길게 써 붙인 널빤지와 함께 잔등에 묶여 있었다. 널빤지에는 여러 가지 욕설과 함께 이 조치가 어떤 적위군 부대의 이와 유사한 만행에 대한 보복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은 숲속의 빨치산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부대였다. 그리고 널반지에는 어떤 기한까지 빨치산이 항복하고 비쯔인 군단의 대표에게 무기를 인도하지 않 을 경우엔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이러한 결과가 된다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지금도 피를 흘리면서 때로는 의식을 잃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자기가 후방에 주둔해 있는 비쯔인 장군의 군법 징벌부에서 받은 고문에 대하여 더듬더듬 말하고 있었다. 그는 교수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어서 수족을 잘리게 되었으며, 빨치산 사이에 공포를 일으키기 위하여 이렇게 무서운 불구의 꼴로 만들어 보내진 것이다. 적은 숙영지의 제1선 전초 지점까지 그를 날라와서 거기서 땅바닥에 내려놓고 기어가도록 명령하고 멀리서 공포 를 쏘면서 위협했다. 그는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말을 듣기 위하여 사람들은 몸 을 낮게 굽혀 귀를 기울였다.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여러분 조심해요. 적은 우리 진지를 뚫었어요. 예비 부대는 이미 왔어요. 이제 곧 큰 전투가 있을 겁니다. 차단해버리고 맙니다. 또 돌파됩니다. 돌파된다니까요. 아마 급습을 해올 겁니다. 난 알아요, 이제 나는 글렀어. 여러분, 이렇게 피를 토하고 있으니, 난 죽여요." "당신은 누워서 쉬어요. 그리고 그에게 말을 시키지 말라구, 이놈들아. 그에게 나쁘단 걸 몰라!" "그 흡혈귀 같은 놈이 내 온몸을 성한 데가 하나도 없이 두들겨 팼어요. 너의 정체를 밝 히라면서, 고백할 때까지 피로써 씻어준다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난 정말 솔직히 탈영병이라 고 말했지만, 아무리 말해도 믿질 않았어요. 나는 그놈들에게서 당신들한테로 도망쳐왔어 요." "당신은 그놈들이라고 하는데 당신을 고문한 놈이 도대체 누구요?" "아, 괴로워요. 숨을 좀 돌립시다. 말하지요. 카자크 대장 베케쉰과 쉬트레제 대령 그리고 비쯔인 군단의 놈들이었어요. 당신들은 숲속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요, 마을 전체가 혼나 고 있는데도 그놈들은 사람을 산 채로 삶아 죽이거나 생가죽을 벗겨서 허리띠를 만들고 있 다오. 놈들은 우리 목덜미를 잡아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곳에 떼밀었어요. 우린 손으로 더듬어 거기에 철장이 있는 걸 알았어요 거긴 화물차였는데 철창 안에는 속옷 한 장 만 걸친 사람이 40명은 더 있었어요 그리고 놈들은 문을 열고 화물차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누구든지 손에 잡히는 대로 밖으로 끌어낸답니다. 마치 닭 모가지를 비틀기나 하듯이. 이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목을 누르거나 총 개머리판으로 때리거나 심문을 하는 겁니다. 몸뚱이가 녹초가 되도록 매질하고 상처에는 소금을 비비고 뜨거운 물을 끼얹는 거예요. 토하기라도 하면 그걸 억지로 도로 먹이는 겁니다. 아이들과 여자들이 어떤 짓을 당하고 있는지는 말할 수 없어요." 불행한 이 사나이는 드디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무엇인가 말하려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흐느껴 우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축 늘어지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이 모자를 벗고 성호를 그었다. 그날 밤 그것보다 더 무서운 소식이 숙영지에 알려졌다. 팔르이흐도 군중 틈에 끼어서 그 죽어가는 사람을 바라보며 그의 얘기를 듣고 널빤지에 적힌 글을 읽었던 것이다. 자기가 죽었을 경우, 가족한테 닥칠 운명에 대하여 언제나 하던 걱정이 절정에 달했다. 이 미 그의 머리 속에는 상상하던 자기 가족의 고문 광경이 현실처럼 느껴지고, 고통스럽게 일 그러진 가족들의 얼굴이 눈에 보이고, 신음하면서 살려달라는 소리가 그의 귓전에 들렸던 것이다. 가족에게 앞으로 있을 고통을 없애며 자기의 고민을 청산하기 위해 팔르이흐는 심 한 번민에 사로잡혀 가족들을 자기 손으로 죽였던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던 딸들과 아들 프 레누쉬카에게 목각 장난감을 만들어 줄 때 쓰던 그 예리한 도끼로 아내와 세 자식을 때려 죽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범행 후 자살하지는 않았다.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앞으로 어찌 할 것인가? 그의 경우는 이미 인간으로서 종지부를 찍은 미치광이였다. 리베리와 지바고 그리고 군 소비에트 위원들이 처리 문제를 의논하고 있었으나, 팔르이흐 는 머리를 깊숙이 떨구고 노랗게 흐린 눈으로 멍하게 바라보면서 숙영지를 마음놓고 돌아다 니고 있었다. 어떤 힘으로도 이겨낼 수 없었던 초인간적인 고민에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는 애매한 웃음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를 동정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그를 피했다. 그를 처치하자는 사람도 있었으나 찬성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할 일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동쪽 하늘이 밝아올 무렵에 그는 미 친개처럼 제정신을 잃고 숙영지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9 한겨울에 접어들면서 모진 추위가 닥쳐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이 찢는 듯한 소리와 형체가 차가운 안개 속에 나타나 멈추고 또 움직이면서 사라져갔다. 태양은 늘 보던 것과는 달리, 누군가 바꿔놓았는지 새빨간 공처럼 숲에 걸려서 꿀보다 진한 호박색의 광택이 꿈이나 동화에서처럼 서서히 퍼지면서 하늘과 나무에 얼어붙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발이 펠트 장화를 신고 둥근 밑창으로 대지를 스치면서 사방으로 움직 여갔다. 그리고 방한모를 쓰고 짧은 털외투를 입은 몸뚱이만이 마치 우주를 나는 천체처럼 공중에 떠서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아는 사람들끼리 걸음을 멈추고 얘기를 나눴다. 목욕탕에 들어간 사람들처럼 빨갛게 상기 된 얼굴과 빳빳하게 얼어붙은 수염을 가까이 대고 입에서 진한 입김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러나 무뚝뚝한 말이 토해내는 입김의 크기보다는 오히려 적었다. 오솔길에서 리베리는 지바고와 마주쳤다. "아, 당신이었군요? 오래간만이오. 오늘 저녁에 내 막사로 오시오. 옛 정도 나누면서 전해 야 할 소식도 있어요." "연락병은 돌아왔나요? 바르이키노에서 무슨 소식이라도?" "당신이나 우리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어요. 오히려 그것이 다행이었소. 아마 가족들은 안전한 것 같소. 그렇지 않았다면 무슨 소문이 났을 텐데. 아무튼 오늘밤 차분히 얘기해봅시다. 기다리겠어요." 그날 밤 지바고는 리베리의 막사에서 질문을 되풀이 했다. "우리 가족에 대해선 무슨 소식이 없었소?" "여전히 당신은 자기 코앞의 일밖엔 관심이 없군 그래. 그들은 무사하고 안전하다니까. 그 것보다도 좋은 소식이 있어요. 고기를 먹겠소? 차가운 송아지 고기가 있어요." "아니 괜찮아요. 딴소리 말고 빨리 얘기나 해주어요." "그래요. 어쨌든 난 좀 먹어야겠어. 숙영지에는 괴혈병이 만연되고 있고, 사람들은 빵과 야채의 맛을 잊어버렸어요. 지난 가을, 여자들이 있었을 때 호도열매와 딸기를 좀더 많이 주 워 들일 걸 그랬어. 그런데 전세는 내가 말하던 대로 유리해지고 있어요. 내가 항상 예언하 던 그대로가 아니오. 어려운 고비는 지났어. 콜차크는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고 있어요. 완전 한 패배란 말이오. 이제 알겠지요? 그런데도 당신은 꿍꿍 앓고만 있으니." "언제 내가 꿍꿍 앓았어요?" "언제나 그랬지 않소. 더욱이 우리가 비쯔인의 압력을 받게 되었을 때에 말이오." 지바고는 지난 가을에 일어났던 반란자들의 총살과 팔르이흐의 처자 살해 사건과 같은 잇 따라 일어난 무의미한 유혈과 살인을 회상하고 있었다. 백위군과 적위군은 서로 잔인성을 겨루면서 폭행은 또 폭행을 낳게 했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는 목구멍을 찌르고 머리에 올 라와 눈을 흐리게 했다. 이것은 꿍꿍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전혀 달랐다. 어떻게 하면 리베 리한테 설명할 수가 있을까? 막사 안에는 탄내가 자욱하여 입과 코 그리고 목구멍을 찔렀다. 철제 삼발의 받침대 위에 서 타고 있는 나무조각이 희미한 불빛을 발하고 있었다. 다 타 버린 나무조각은 물을 담은 접시에 떨어진다. 그러면 리베리는 다시 새것에 불을 붙였다. "무엇이 타고 있는지 봐요. 기름이 떨어졌어. 나무는 너무 말라서 이내 타 버려요. 괴혈병 말인데... 정말 송아지 고기가 싫어요? 그렇지 괴혈병 얘길 하고 있었지. 당신은 뭘 보고 있 어요? 참모들을 모아서 괴혈병에 대한 방역 지도와 그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소?" "제발 날 희롱하지 말아요. 우리 가족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뭣이지요?" "정확한 것은 전혀 없다고 하지 않았소. 그리고 최근의 전황 보고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아직 당신한테는 말하지 않았군. 내란은 끝났어요. 콜차크군은 격멸되고 말았어요. 적위군 부대는 철도를 따라 동쪽으로 추격중에 있어요. 놈들을 바다로 쫓아 버린단 말이오. 적위군 의 다른 부대는 우리와 합류하기 위하여 이리로 지금 진격중에 있어요. 후방 여러 곳에 산 재해 있는 많은 나머지 적을 소탕하기 위해 합동 작전을 하게 되는 겁니다. 러시아의 남쪽 방면에는 백위군의 그림자도 안보이게 됐어요. 어떻소, 기쁘지 않아요? 당신은 이것으로 충 분하지 않아요?" "그야 물론 기뻐요. 하지만 우리 가족은 어디에 있어요?" "바르이키노에는 있지 않아요. 그건 참 운이 좋았어요. 지난 여름에 카멘노드보르스키가 지껄이던 것은 생각했던 대로 아무 근거 없는 허튼소리였어요. 정체 불명의 사람들이 바르 이키노를 습격했다는 말이에요. 기억나지요? 그러나 마을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을리 만큼 황폐해버렸어요. 그걸 보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어요. 그래서 우리의 가족들 이 피난한 것은 썩 잘된 일이지요. 척후병의 보고에 의하면 거기에 남아 있는 몇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유라친은? 거기서는 어떻게 됐어요? 어느 편이 장악하고 있지요?" "그것이 또 우스운 일이거든. 어딘가 잘못된 모양이야." "뭐라구요?" "백위군이 있다고 하는데,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요. 곧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당신에 게 보여드리지요." 리베리는 등불에 새 나무를 꽂아놓고 구겨진 지도를 끄집어내서 필요한 부분만을 위로 나 오도록 접어 펴놓고는 연필을 쥐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아요, 백위군은 이 일대에서 격퇴되고 있어요. 여기와 또 여기에서. 알겠어요?' "그렇군." "그래서 유라친 방면에 백위군이 있을 리가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보급선이 차단되어서 독 안에 든 쥐란 말이오. 제아무리 무능한 장군들이라 할지라도 이걸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 왜 외투를 입었지요, 어디 가려고?" "잠시 실례하겠어요. 마호르까(질이 나쁜 담배)와 나무 연기가 꽉 차서 골치가 아파 바깥 공기를 좀 쐬고 오겠어요." 지바고는 막사 입구에 걸상 대신에 놓인 통나무에서 눈을 쓸어내고 그 위에 앉아서 잔등 을 구부려 두 손으로 얼굴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겨울의 밀림과 숲속의 숙영지 그리고 빨 치산 부대에서의 18개월의 세월 따위는 다 잊어버렸다. 다만 머리에 남은 것은 자기 가족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그는 점점 더 두려워지면서 그들의 운명을 이것저것 상상해 보는 것이 었다. 토냐가 눈보라 치는 벌판을 손에 싸샤를 껴안고 간다. 그녀는 담요에 아기를 싸안고 눈에 깊이 빠지는 발을 간신히 빼면서 걸었으나, 눈보라에 날려 나자빠진다. 일어나기는 했지만 디디고 서 있을 힘이 없다. 나는 항상 잊고 있었다. 토냐한테는 아이가 둘이고, 어린 놈은 아직 젖먹이라는 사실마저도. 토냐는 두 손에 아기를 안고 있다. 슬픔과 힘에 겨운 긴장 때문에 칠림까의 여자 피난민들처럼 미칠 것만 같다. 토냐는 두 손에 어린애를 안고 있다. 주위에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싸샤의 아버 지는 어디로 갔는지 없다. 그는 늘 멀리에 떨어져 있었다. 일생 동안 어딘가 떨어져 있었다. 이런 사람이 아버지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까? 참된 아버지란 어떤 사람일까? 장인은 어디 있을까? 뉴샤는 어디에 있을까? 또 다른 사람들은? 그만, 생각지 않는 것이 낫겠다. 막사에 돌아오려고 통나무에서 일어나는 순간 지바고의 머리에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리베리에게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는 스키와 건빵 등을 넣은 주머니와 그 밖에 도망치는 데 필요한 물 건을 숙영지의 경비선 밖에 있는 큰 소나무 밑에 묻어서 표시해두었다. 지바고는 눈더미 사 이에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물건을 숨긴 장소로 가고 있었다. 둥근 달이 밝은 밤이었다. 지 바고는 밤의 경비병 배치 지점을 잘 알고 있어서 빠져나가기 쉬웠다. 그러나 공지의 얼어붙 은 마가목나무가 있는 곳에서 보초가 멀리서 소리를 지르면서 몹시 휘어진 스키 위에 곧바 로 서서 달려왔다. "정지! 쏜다! 누구냐! 암호를 말해!" "왜 이러시오. 날 몰라요? 의사 지바고란 말이오." "미안해요. 나쁘게는 생각지 말아요. 제르바크(빨치산에서 지바고를 이렇게 불렀다. 혹, 종 기라는 뜻) 동무. 잘 몰랐어요. 그러나 동무도 여기서 더 이상은 못 갑니다. 규칙대로 해야 합니다." "좋아요. 암호는 '붉은 시베리아', 응답은 '간섭자 타도'." "그렇다면 좋아요. 마음대로 가시오. 그런데 어찌된 일로 밤중에 나다니는 겁니까? 환자가 있나요?" "잠도 잘 오지 않고, 목구멍이 말라서 밤공기를 쐬면서 눈을 좀 먹을까 해서요. 그리고 마 가목나무에 얼어붙은 열매가 있어서 따 먹을까 해요." "양반의 근성이로군, 겨울에 마가목 열매가 먹고 싶다니. 우리는 3년 동안이나 당신네들을 두들겨 팼는데 여전히 그대로란 말이야. 알겠어요. 어서 가서 마가목 열매를 실컷 따 잡수시 오. 내가 알 바가 아니니까." 보초가 큰 걸음으로 힘있게 내딛자 기다란 스키가 바람 소리를 내면서 곧 바른 자세로 점 차 속력을 더해가며 눈 위를 미끄러져서 대머리처럼 벗겨진 겨울 관목 너머로 사라져 갔다. 지바고는 걸음을 계속하여 마가목나무 밑에 이르렀다. 얼어붙은 잎사귀와 열매가 붙은 채 반쯤 눈 속에 파묻힌 나무는 눈투성이가 된 가지를 뻗 어서 그를 맞이하는 듯했다. 지바고는 라라의 희고 통통한 팔뚝을 생각하면서 나뭇가지를 잡아당기자 마치 적극적으로 대답이나 하듯 마가목은 그의 온몸에 눈을 퍼부었다. 지바고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꼭 찾아내야지. 나의 그리운 여인이여. 사랑하는 마가목의 여왕이여." 밝은 달밤이었다. 그는 밀림 속으로 더듬어 들어가, 전나무 밑에 숨겨둔 물건을 파내 가지 고 숙영지를 떠났다. 여신상 맞은편 집 1 볼리샤야 쿠페체스카야 거리는 경사를 따라 말라야 스파스카야 거리와 노브스발로치느이 거리 쪽으로 뻗어내려 가고 있었다. 뒤돌아보면 언덕 위에 집들과 교회당이 있었다. 거리 모퉁이에 그리스의 여신상들을 부각한 짙은 잿빛 건물이 있었다. 네모난 큰 돌로 쌓 은 맨 아래층 벽면에는 정부 기관지와 포고문, 결의문 등이 지저분하게 붙어 있었다. 통행인 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서 묵묵히 그것을 읽고 있었다. 금세 해빙기가 자나, 공기는 건조했고 몹시 추웠다. 몇 주 전만 해도 벌써 날이 어두웠겠 지만 지금은 아직 밝았다. 동절기가 지나자 밝은 빛은 공지를 고루 채우고, 밤이 찾아와도 물러서려고 하지 않고 서성거리며 민심을 위협하고 경계하게 했다. 백위군이 적위군에게 이 도시를 내주고 퇴각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총성이 멎고 유혈 이 그치고 전쟁의 공포가 끝났다. 겨울이 지나고 점점 해가 길어졌으나 사람들의 불안감과 경계심은 여전했다. 길가던 사람들이 읽고 있는 고시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주민에게 알림. 해당자에게 1인당 50루불리로 노동 수첩을 교부함. 교부 장소는 아크차브 리스카야 거리(구 총독 거리) 5번지, 137호실, 유라친 시 소비에트 식량과. 노동 수첩을 소지 하지 않은 자, 또는 노동 수첩에 호위 사항을 기재한 자는 전시에 준하여 엄벌에 처함. 노동 수첩을 사용함에 있어서 주의할 사항은 유라친 시 집행위원회 공보 제86호에 상세히 공시되 어 있으며, 137호실에 있는 유라친 시 소비에트 식량과에도 제시되어 있음. 또 다른 고시문은, 시내에는 충분한 식량의 재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량 배급을 방해 하여 식량 사정을 혼란케 하려는 목적으로 부르주와 분자들이 은닉하고 있다고 강조한 다 음,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었다. 식량을 매점하여 은닉한 자는 이를 발견하는 즉시 총살에 처할 것임. 셋째 고시문은 다음과 같다. 식량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착취 계급에 속하지 않은 자는 소비조합에 가입할 것. 상세한 문의는 아크차브리스카야 거리 5번지, 137호실, 유라친 시 소비에트 식량과로. 군관계 고시. 무기를 인도하지 않는 자, 또는 새로 허가증을 교부받지 않고 휴대하는 자는 법에 의하여 엄벌에 처할 것임. 허가증 교부 장소는 아크차브리스카야 거리 6번지, 63호실, 유라친 시 군 사혁명위원회. 2 초췌한 얼굴에 이상한 차림의 사나이가 고시문 앞에 모여 선 사람들 쪽으로 다가갔다. 오랫동안 세수도 하지 않았는지 얼굴엔 시꺼멓게 때가 끼고, 어깨엔 배낭을 메고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은 아직 희어지지는 않았으나 갈색 턱수염에 흰 수염이 섞 여 있었다. 그는 유리 지바고였다. 아마 오는 도중에 빼앗겼는지, 아니면 음식과 바꿔 먹었 는지 슈바조차 입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소매가 짧은 얄팍한 낡은 웃옷을 걸치고 있었다. 배낭 속에는 교외 마을에서 얻어먹다 남은 빵껍질과 조그만 돼지기름 덩어리 한 개가 들 어 있을 뿐이었다. 그는 한 시간 전에 철길을 따라 이 도시로 들어왔으나 너무나 지쳐 있었 기 때문에 거기서 여기까지 오는 데 거의 한 시간은 걸렸다. 그는 자주 걸음을 멈췄으며, 그 때마다 땅바닥에 엎드려 거리의 포석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제했다. 다시는 영 영 못 볼 것으로 체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그립던 사람을 만나기나 하듯 반가웠던 것이 다. 그는 긴 여행의 반 이상을 길을 따라 걸어왔다. 철길은 어디서나 죽은 듯이 눈 속에 묻혀 있었다. 도처에 백위군의 열차가 내버려져 있었다. 눈더미에 막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기 때 문에, 콜차크군의 전면적인 패배 때문에, 또는 연료가 떨어졌기 때문에 하는수없이 포기할 열차들이었다. 이렇게 눈 속에 묻혀버린 열차들은 마치 기다란 리본처럼 수십 리에 걸쳐 잇 따라 늘어서 있었다. 그것은 주변에 날뛰는 무장 강도단의 거점이 되었고, 그 당시 본의 아 닌 떠돌이 생활을 하던 범법자나 정치범들의 은신처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철도선 주변의 수많은 부락을 무자비하게 휩쓴 티푸스의 희생자들과 동사자들의 공동 묘지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옛 속담에 '사람을 만나면 승냥이로 알라'는 말이 사실이었다. 여행자들은 서로 안전한 장소로 피해버리거나, 어쩌다 맞부딪치면 자기가 살기 위해 먼저 상대방을 죽여야 했다. 때로는 사람의 고기를 먹은 사실도 있었다. 인류 문명의 법칙은 자취를 감추고, 그 대 신 야수의 법칙이 지배하게 되었다. 인간은 유사 이전의 동굴 시대의 꿈을 꾸고 있었다. 간혹 사람의 그림자가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오거나 멀리 앞의 오솔길을 지나는 것이 보이 면, 지바고는 되도록 조심스럽게 길을 피했다. 그때마다 어디선가 낯익은 사람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착각이었지만, 한 번은 그런 느낌이 적중한 적이 있었다. 완전히 눈 속에 묻힌 침대 열차에서 소년 하나가 기어 나와 소변을 보고 나서 다시 눈더미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 그것이 숲속의 동료였던 체렌치 갈루진인 것을 알았다. 지바 고는 그가 총살을 당해 죽은 줄 알았었다. 그러나 총알이 급소를 벗어나, 일시 실신 상태에 있다가 다시 깨어난 그는 처형장에서 도망쳐 숲 속에 숨어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렸다는 것 이었다. 그 후 그는 딴 이름으로 눈에 묻힌 열차에 숨어들어 사람의 눈을 피하면서 고향인 크레스토보즈드비젠스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런 모든 광경은 도저히 이 세상일같이 느껴지지 않는 초월한 인상을 주었다. 마치 지구 이외의 다른 혹성이 어쩌다 잘못해서 지상으로 옮겨온 것처럼 생각되었다. 오직 자연만 여 전히 역사에 충실할 따름이며, 현대 화가가 그리는 그림과 같은 광경이었다. 때로는 연한 잿빛이나 진분홍빛 겨울 황혼이 조용히 찾아들고, 저녁놀에 물든 하늘을 배 경삼아 상형문자처럼 가느다란 자작나무 가지가 나타나보였다. 잿빛 안개와도 같은 얄팍한 얼음 밑으로 검은 냇물이 흐르고, 흰 눈이 쌓인 냇가는 흐르는 물에 침식되어 검게 보였다. 그리고 지금도 차갑고 투명한 버들가지의 솜털처럼 부드러운 잿빛 황혼이 한두 시간 후면 유라친의 여신상 맞은편 집에도 조용히 깃들일 것이다. 지바고는 고시문을 읽어보려고 중앙출판위원회 석조 건물 게시판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자꾸만 맞은편 집 2층 창문으로 옮겨졌다. 한길 쪽으로 향한 창문에 회칠을 하 고, 집주인의 가구를 두 방에다 모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창문은 지금 아래쪽에 엷 게 성에가 끼어 있고 회칠이 말끔히 씻겨 떨어져 투명해 보였다. 어쩐 일일까? 집주인이 돌 아왔을까? 아니면 라라는 딴 데로 이사해서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는 걸까? 지바고는 끓어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거리를 건너 현관으로 들어가서 낯익은 층계를 올라갔다. 숲속에서 그는 이 층계를 얼마나 그려보았는지 모른다. 난간 사이 로 내려다보면 층계 밑에 버려둔 낡은 물통이며 대야며 찌그러진 의자 따위가 보였는데, 지 금도 그대로였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지바고는 과거에 충실한 이 층계에 감사하고 싶 은 심정이었다. 전에는 문에 초인종이 달려 있었지만, 지바고가 숲속으로 잡혀가기 전에 이미 고장나서 소리가 나지 않았었다. 그는 문을 노크하려다가 투박한 자물쇠가 걸려 있는 것을 알았다. 자 물쇠는 아름다운 조각이 붙어 있는 참나무 문짝에다 아무렇게나 박은 문고리에 걸려 있었 다. 전 같으면 이런 몰골 사나운 짓은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손잡이 밑에 있는 열쇠 구멍 에 열쇠를 꽂아 잠그거나 걸어놓았으며, 혹시 망가지면 곧 열쇠 장수를 불러서 고치게 했었 다. 사소한 일이긴 하지만, 이것 하나만 보아도 그가 없는 사이에 주위의 모든 분위기가 얼 마나 거칠어졌는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라라와 카첸카가 집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유라친에도 없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바고는 최악의 사태를 각오했다. 어쨌든 전에 열쇠를 숨겨두 던 구명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손끝에 쥐가 닿아 그와 카첸카가 질겁을 하던 일이 가끔 있었기 때문에, 우선 발로 벽을 차면서 쥐를 쫓았다. 구멍은 벽돌장으로 막혀 있었다.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으면서, 벽돌장을 뽑아내고 손을 넣어 보았다. 이건 기적이 아닌가! 열쇠와 편지가 들어 있었다. 큼직한 종이에 꽤 길게 쓴 편지였다. 지바고는 층계 위 창가에 다가갔다. 기적이라도 이런 기적이 있담! 바로 자기에게 쓴 편지였다. 그는 급히 읽어내려 갔다. 하나님,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당신이 살아 계시다니, 근방에서 당신을 보았다는 사람 이 나한테 달려와서 알려주었어요. 당신이 우선 바르이키노에 가시리라고 생각해서 전 카첸 카와 함께 그리로 떠납니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열쇠를 여기에 넣어 둡니다. 내 가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데도 가지 마시고 여기서 기다려 주어요. 당신은 아직 모르시겠지 만 저는 지금 길가에 있는 방에서 살고 있어요. 물론 들어가 보시면 알게 되시겠지요. 먹을 것을 좀 놔두고 갑니다. 삶은 감자뿐이예요. 쥐가 모여들 테니 내가 늘 하던 것처럼 다리미 따위를 남비 뚜껑 위에 얹어 놓아두세요. 너무 기뻐서 미칠 것만 같아요. 편지 앞면은 여기서 끝나 있었다. 지바고는 뒷면에도 무언가 씌어 있는 것엔 미처 주의하 지 않았다. 그는 손에 펼쳐 들었던 종잇장을 입술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유심히 보지도 않고 열쇠와 함께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기쁨에 벅차오르는 가슴에 문득 그는 찌르는 듯한 아 픔을 느꼈다. 라라가 바르이키노로 떠나가는 설명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가족 이 이미 거기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자기 가족에 생각이 미치자 참을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왜 라라는 나의 가족의 운명에 대해 한 마디도 쓰지 않았을까? 마치 그들이 이 세 상에 없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 그들이 어디 있다는 것조차 라라는 쓰지 않다니!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생각에 골똘할 수는 없었다. 한길은 어느덧 어둑어둑 저물기 시작 했다. 캄캄해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첫째로 거리에 나붙은 고시문들을 읽어둘 필요 가 있었다. 바짝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었다. 멋도 모르고 법규 같은 걸 위반하 여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는 라라의 방에 들어가지도 않고 배낭을 등에 멘 채 한길 을 건너 여러 가지 인쇄물이 가득 나붙어 있는 벽으로 다가갔다. 3 신문 사설, 의사록, 연설문, 포고문 등이 붙어 있었다. 지바고는 제목들을 대강 훑어보았 다. '유산 계급의 재산 몰수와 과세 기준. 노력 관리. 공장 위원회 운영' 등, 이 도시를 지배 하게 된 새로운 권력이 구질서에 대치하여 선포한 성명들이었다. 백위군이 일시 지배하고 있는 동안에 주민들이 잊어버렸는지 모르므로, 새로운 권력은 모든 일에 준엄하다는 것을 새삼 강조하기 위한 것 같았다. 동일한 말투의 끝없는 반복에 지바고는 현기증을 느꼈다. 이 런 제목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던가? 혁명 초기였던가, 아니면 백위군이 다 소나마 저항을 시도한 중간기 였던가? 저 슬로건은 뭔가? 작년 것인가, 아니면 재작년 것인 가? 그는 일생에 단 한번, 이 타협을 모르는 말투와 단순하고 직선적인 사상에 감격했던 것 이다. 그렇지만 그 경솔한 감격의 대가로, 해가 거듭될수록 더욱 진부해지고 더욱 무의미해 지는 미치광이 같은 절규와 요구의 반복을 죽을 때까지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의 시선은 어디서 오려내서 붙인 연설문 조각에 멎었다. 기아에 관한 보도는 지방의 여러 단체의 활동이 형편없이 침체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다. 부패와 투기가 공공연히 횡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 노동조합 단체는 도대체 무 엇을 하고 있는가? 시와 지방 공장위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유라친 역 창고나 근교 라즈빌리예 르이발카 역 등을 공습하여 철저히 수색하고 투기배들은 총살형에 처하는 등 준 엄한 테러 수단을 강구하지 않는 한 기아 상태를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무지함이 오히려 부럽구나!'하고 지바고는 생각했다. '빵이란 것이 이 세상에서 없어진 지가 옛날인데 이제 와서 빵을 운운하다니! 여태까지 수없이 발표된 포고문으로 벌써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춘 자본 계급이니 투기배가 지급 어디 있단 말인가? 농민이나 농촌이라는 것 조차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자기들의 계획과 자기들이 취한 조치로 하나도 남질 않았는데, 그걸 까맣게 잊었단 말인가! 날이면 날마다 핏대를 세워서 이미 옛날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들을 비난하고 공격할 뿐,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고 주위를 유심히 관찰하려 하지도 않는 건 대체 무슨 까닭일까?' 지바고는 머리에 현기증을 느꼈다. 순간, 그는 정신을 잃고 인도에 쓰러져버렸다. 얼마 후 정신을 차려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일어섰다. 어디로 가려느냐, 데려다 주마고 친절을 베풀 려는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바로 길 건너편이니 염려할 것 없다고 거절했다. 4 그는 다시 층계를 올라가서 이번엔 라라의 방문을 열었다. 층계 위는 아직도 밝았다. 그는 시간의 여유가 있음을 알고 안심했다. 문 열리는 소리에 놀라 방안에서는 소동이 일어났다.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 방이었지만 양철통이 뒤집히고 떨어지기도 하면서 요란한 소음이 그 를 맞아들였다. 쥐들이 후닥닥 방바닥에 내려와 재빨리 흩어졌다. 굉장히 번식한 모양이었 다. 이 저주할 생물을 대하자 지바고는 말할 수 없이 불쾌한 무력감을 느꼈다. 여기서 밤을 지내려면 무엇보다 쥐들의 습격을 막아야 했다. 문단속이 비교적 잘되는 방 에 자리를 잡고 유리 조각이나 양철 조각 따위로 쥐구멍을 죄다 막아버려야 겠다. 문간방에서 왼쪽으로 구부러져 처음 보는 어두운 방을 지나 한길 쪽으로 창문이 두 개나 있는 밝은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 맞은편에는 여신상이 있는 건물이 짙은 잿빛으로 보이고, 1층 벽에는 신문이며 공고문 따위가 가득 붙어 있었다. 통행인들이 이쪽에 등을 대고 그것 들을 읽고 있었다. 방안은 바깥과 같이 싱싱하고 상쾌한 초봄의 저녁 빛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방안 은 바깥의 일부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만 한 가지 사소한 차이점이 있었다. 지금 지바 고가 서 있는 라라의 침실은 바깥 쿠페체스카야 거리보다 오히려 추운 편이었다. 아까 한두 시간 전에, 멀고 먼 여행 끝에 마침내 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지바고는 체력이 극도로 쇠잔해졌음을 느꼈다. 그때 그는 병에 걸리는구나 싶어 두려움을 느꼈다. 지금 그는 집안과 바깥의 빛깔이 같다는 것이 까닭 없이 기뻤다. 그리고 밖에서와 같이 서늘한 공기를 숨쉬면서 그의 마음은 황혼의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과 거리의 기분과 그 리고 이 세상의 생활과 따뜻하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공포가 사라지고, 이젠 병에 걸린다는 생각도 없어졌다. 도처에 스며 있는 황혼의 해맑은 봄빛이 먼 앞날의 풍성한 꿈을 약속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차츰 나아질 것이며, 따라서 자기는 인생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획득 하리라, 모든 것을 찾아내어 융화시키고,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으리라고 그는 확신했다. 사실 그가 지금 라라와 만나게 된다는 기쁨이 그 첫 증명일 수 있는 것이다. 이때까지의 무력감은 씻은 듯 사라지고 그는 격렬한 흥분에 휩싸였다. 그것은 병이 들고 있다는 확실한 징후였다. 지바고는 가만 있지를 못하고 무엇이든 구실을 찾아 밖으로 뛰어 나가고 싶었다. 우선 머리와 수염을 깎고 싶었다. 그래서 아까 거리를 지나올 때 이발소 창문을 기웃거렸 으나, 안이 비어 있거나 아니면 딴 용도에 사용되고 있었다.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는 이발 소도 있기는 했지만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지바고 자신은 면도칼을 갖고 있지 않았다. 가 위라도 있었으면 어떻게도 할 수 있겠지만, 라라의 화장대를 뒤져 봐도 보이지가 않았다. 꽤 오래 전이기는 하지만, 말라야 스파스카야 거리에 양장점이 있었던 기억이 났다. 아직 도 그 가게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문을 닫기 전에 가서 가위를 좀 얻어 쓸 수도 있을 것이 다. 그는 다시 한길로 나왔다. 5 그의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양장점은 전에 없던 그 자리에서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 입구는 거리에 면하고 인도와 같은 높이로 유리 진열장이 가게 전면을 차지하고 있어서 안을 들여다보면 재봉실 안쪽 벽까지 훤히 보였다. 재봉사들이 일하는 것이 거리를 지나가 면서 다 보였다. 가게 안은 무척 비좁은 것 같았다. 재봉사 이외에도 시내의 중년 귀부인인 듯한 여자들 몇 사람이 재봉틀을 밟고 있었다. 아마도 여신상이 있는 집 벽에 게시된 고시문에 따라 노 동 수첩을 교부받을 자격을 얻기 위해 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어색한 동작은 진짜 재봉사들의 능숙한 동작에 비하면 이내 구분할 수 있었다. 가 게에서는 군복과 솜 누비 바지, 누비 자켓, 그리고 지바고가 빨치산 야영지에서 눈에 익은 여러 가지 개털 가죽 외투 등을 만들고 있었다. 중년 부인들이 서투른 솜씨로 외투 소매 끝 을 재봉 바늘 밑에 쑤셔넣고 있는 것이 보였다. 털가죽 재단사만이 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을 맡아 하느라고 쩔쩔매고 있는 눈치였다. 지바고는 진열장 유리를 툭툭 두드려 들어가게 해달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안에서는, 개인 주문을 받지 않는다고 손짓으로 대답했다. 그는 물러서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손짓을 되풀이하자, 지금 일이 몹시 바쁘니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라고 대답했다. 재봉사 하 나가 퉁명스러운 얼굴을 하고 귀찮다는 듯이 손바닥을 위로 쳐들며, 도대체 무슨 용무냐고 물었다. 지바고는 집게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으로 가위질하는 시늉을 해 보였으나 상대방은 알아듣지를 못했다. 공연히 장난삼아 자기들을 놀리는 싱거운 놈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누 더기옷을 걸치고 괴상한 시늉을 하는 것으로 보아 필시 미치광이나 환자의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여자들은 킥킥 웃으면서 손짓으로 그를 쫓는 시늉을 했다. 이윽고 그는 뒷문으로 돌아가면 되리라 생각하고, 작업장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아서 노크했다. 6 검은 옷차림에 얼굴이 가무스름하고 나이 지긋한 여자가 문을 열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보아 아마 가게 책임자인 것 같았다. "난 또 누구라구!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거요! 저리 가요, 지금 우린 바쁘단 말이오." "다름 아니라 가위를 잠깐 빌릴까 해서 그럽니다. 여기서 이 수염을 좀 자르고 곧 되돌려 드리겠어요." 여인의 눈에는 놀라는 빛을 나타냈다. 틀림없는 정신병자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난 먼데서 온 사람입니다. 방금 도착했어요. 수염을 깎으려고 했는데 어디 이발소가 있어 야죠. 그래서 내 손으로 자르려 했으나 가위가 없어요. 미안하지만 좀 빌려주십시오." "알았어요. 그렇다면 내가 깎아드리죠. 두고보아요, 만일 무슨 고약한 딴생각이나 무슨 정 치적 이유로 변장을 하려는 속셈이라면 당장 당국에 보고할 테니 그리아세요. 당신 때문에 내 목숨을 버릴 수는 없으니까요." "천만의 말씀! 조금도 염려 마십시오." 재봉사는 지바고를 들어오게 하여 다락방만한 좁은 옆방으로 안내했다. 얼마 후에 그는 이발소에서처럼 흰 수건으로 목을 감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인이 방에서 나가더니 잠시 후에 가위와 빗, 바리캉과 혁대, 면도칼 등을 가지고 돌아왔 다. 이발 기구가 다 갖추어진 것을 보고 지바고가 놀라자,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난 일생 동안 안 해본 일이 없답니다. 이발사 노릇도 했어요. 전시에 간호원으로 있을 때 배웠죠. 우선 수염을 가위로 대강 자른 후 면도합시다." "머리는 좀 짧게 깎아주십시오.' "그러죠. 일부러 그렇게 무식한 체해도 당신이 인텔리라는 건 금방 알아낼 수 있어요. 요 즘은 날짜를 주 단위로 세지 않고 10일 단위로 센다는 걸 모르실 리 없을 텐데. 오늘은 17 일이죠? 제7일은 이발소의 정기 휴일로 되어 있어요. 그걸 모르셨군요." "그래요, 정말 몰랐습니다. 무엇 때문에 알면서 모르는 체하겠어요? 난 먼 곳에서 왔다고 하잖았습니까? 이 고장 사람이 아니예요." "가만히 좀 앉아 계세요. 움직이면 다치기 쉬우니까. 그럼 여행중이란 말씀인가요? 무엇을 타고 오셨죠?" "두 발로 걸어서요?" "국도를 걸어오셨나요?" "국도를 걷기도 했지만 주로 철길을 따라 걸어왔습니다. 기차는 죄다 눈 속에 파묻혀 있 었지요. 특급, 급행 할것없이 모든 열차가 말이오." "자, 이젠 이쪽에 조금 남았을 뿐입니다. 이것만 깎아버리면 다 끝나요. 그럼 집안 일로 여행을 하시는 건가요?" "천만에! 예전의 신용조합연합회 일 때문입니다. 난 순회 검사원이었어요. 회계 감사를 하 면서 순회중이었지요. 동부 시베리아까지 출장을 갔었는데 되돌아올 수 있어야죠. 기차가 없 으니 하는수없이 도보로 떠났습니다. 한 달 반이나 걸어왔어요. 별별 고생을 다 해서, 죽을 때까지 얘기해도 다 못할 겁니다." "그런 얘긴 안 하는 게 좋아요. 여러 가지 가르쳐드려야겠군요. 이젠 거울을 한번 비춰보 세요. 그만하면 됐나요?" "좀더 짧게 깎으면 좋을 것 같은데." "너무 짧게 깎으면 앞머리가 곤두서요. 하여튼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지 금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죠. 신용조합이니, 눈에 묻힌 특급 열차니, 검 사원이니 감사원이니 하는 따위의 말은 아주 잊어버리는 게 좋아요. 그것들이 당신을 곤경 에 빠뜨릴 겁니다. 그런 말이 통용되지 않는 세상이니까요. 의사나 선생이 무난할 거예요. 자, 턱수염을 대강 잘랐으니 이젠 깨끗이 면도해 볼까요? 비누칠을 하고 면도하면 10년쯤은 젊어질 거예요. 더운 물을 가져 올 테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이 여인은 대체 누굴까?' 그녀가 나가고 없는 사이에 지바고는 생각했다. '어쩐지 아주 낯 선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어디서 만났던가 아니면 누구한테서 얘기를 들었는 지 모르겠군. 그렇잖으면 내가 아는 누굴 닮았든지, 제기랄, 생각이 날듯 날듯 하면서 나지 않는군!' 재봉사가 돌아왔다. "그럼 이젠 면도를 합시다. 잘 알아들으셨죠. 쓸데없는 얘긴 금물이예요. 말은 은이고 침 묵은 황금이라는 속담은 언제나 진리거든요. 특급 열차니, 신용조합이니 하는 말은 집어치우 고 의사나 선생 행세를 하세요. 여행중에 본 것은 가슴 속에 깊이 숨겨두는 게 제일이죠. 그 런 얘기는 아무도 놀라지 않을 테니까. 어때요, 아프지 않아요.?" "좀 아프군요." "그럴테죠. 하지만 참는 수밖에 없어요. 수염이 자라서 빳빳한데다 피부가 약해졌으니까. 사실 요즘은 웬만한 일엔 아무도 놀라지 않는답니다. 이 고장 사람들도 별의별 참혹한 일을 다 당했거든요. 백위군이 들어와 설치고 있을 땐 그야말로 지옥이었죠. 약탈, 살인, 유괴, 게 다가 인간 사냥까지 했으니까. 예를 들면, 안하무인격으로 으스대던 말단 관리 하나가 있었 는데 어떤 소위가 자기 비위에 거슬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관리는 크라블리스끼 저택 건 너의 자고르드나야 숲에다 별정들을 매복시켜서 소위를 잡아 무기를 빼앗은 다음에 라즈빌 리예로 끌고 가지 않았겠어요. 라즈빌리예에는 요즘 체까 지부가 있지만 그때도 역시 백위 군의 처형장이 있었어요. 무시무시한 곳이었죠. 왜 머리를 움직거리죠? 아픈가요? 아플거예 요. 하지만 곧 끝날 테니 조금만 더 참고 계셔요. 여기는 털을 완전히 깎아야 하니까. 게다 가 털이 너무 뻣뻣해요. 그래서 소위의 마누라가 미친 듯이 발악을 했죠 내 남편 콜랴가 대 체 어쨌다는 거냐고 악을 쓰며 높은 양반한테 바로 진정하러 갔어요. 하지만 바로 만나게 할 리가 있나요. 말뿐이지, 경계가 이만저만 심해야죠. 그런데 바로 이웃 거리에 그 높은 양 반을 잘 아는 여자가 있었어요. 그 여자가 힘을 서서 사람을 많이 구해냈답니다. 게다가 높 은 양반 역시 아주 인정이 많은 사람이어서 부탁만 하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어요. 갈리울 린 장군이라던가요. 하지만 주위에서는 린치, 폭행, 중상 모략이 그치지 않았어요. 그야말로 스페인 소설과 똑같았지요." 라라 얘길 하고 있구나 하고 의사는 추측이 갔으나,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좀더 자세 히 물어보지를 못하고 그냥 듣고만 있었다. 여인이 '스페인 소설과 똑같았다'고 한 말이 너 무나 심한 비유여서, 그 순간 여인의 정체를 거의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끝내 실마리 가 풀리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는 얘기가 다르죠. 수색이나 밀고나 총살 같은 건 여전해요. 하지만 사상이 전혀 다르거든요. 첫째는 새 정권이라는 겁니다. 이제 겨우 정치라는 걸 시작 했을 뿐이니까 능숙하지가 못해요. 둘째로는 무엇보다도 평민의 편이라는 데 힘이 있어요. 우리는 네 자매랍니다. 그런데 모두가 근로자예요. 우린 자연적으로 볼셰비키에 기울었어요. 언니 하나는 돌아가셨지만, 정치를 하는 분한테 시집갔어요. 형부는 이곳 공장의 지배인으로 있었어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나한테는 조카가 되지만, 이 지방 농촌 봉기자들의 두목이 랍니다. 지방의 명사라 할 수 있어요." '아, 이제야 알겠군 .' 지바고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베리의 이모로구나. 미쿨 리츠인의 처제로서 이 고장에서는 유명한 여자였다. 이발사건 재봉사건 레일 전철수건, 무슨 일이건 닥치는 대로 다 해내는 여자였다. 하지만 내 정체가 폭로되면 곤란하니 잠자코 있는 게 좋겠군.' "조카는 어려서부터 민중에 무척 관심이 있었답니다. 스바토고르에서는 노동자 속에서 자 랐거든요. 바르이키노 공장에 대해선 들은 일이 있겠죠? 아니, 내가 이거 정신 나갔나! 한쪽 볼은 빤빤하게 깎았는데 이쪽은 그냥 남겨두었군. 왜 진작 말씀하시지 않았죠? 비누가 다 말라버렸군요. 물도 식어버렸으니 다시 데워 오겠어요." 그녀가 되돌아오자 지바고는 물어 보았다. "바르이키노라는 곳은 외따로 떨어진 안전한 장소 아닙니까? 이 소동도 거기까지는 미치 지 않겠지요?" "그다지 안전하지도 않았나 봐요. 여기보다 오히려 더했다고들 했어요. 정체 불명의 비적 단이 바르이키노를 휩쓸고 지나갔는데, 우리말을 못하는 놈들이었대요. 그놈들이 글쎄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거리에 끌어내다가 총살했다지 않겠어요. 그러고는 시체를 눈 속에 내버랬 대요. 겨울에 있었던 일이예요. 왜 이렇게 움직이지요? 하마터면 목을 벨 뻔했어요." "당신 형부가 바르이키노에 살고 있다고 했지요? 그분도 역시 변을 당했나요?" "아뇨. 하나님이 도우셔서 그분은 부인과 함께 도망칠 수 있었어요. 부인은 저의 언니가 아니고, 후취로 들어온 여자예요.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죽지 않은 것만은 확실해요, 모 스크바에서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벌써 비적단이 쳐들어기도 전에 떠나고 말았어요. 그 집 가장인 젊은 의사는 행방 불명이 되었지만, 그건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지, 실제로는 죽었을 거예요. 백방으로 찾았으나 나타나지 않았거든요. 그때 노인 분은 나라에서 필요해서 소환해 갔어요. 농학 교수라나 봐요. 그 가족이 가는 길에 유라친에 들렀었는데, 그때가 바로 백위군이 두 번째로 이곳에 들어오기 전이었지요. 아니, 왜 또 그 렇게 꼼지락거리죠? 그러다간 정말 베겠어요. 당신 겉은 사람을 만나선 이발사도 못해 먹겠 군요." '그러다면 그들은 모스크바로 되돌아갔군!' 7 '모스크바에 갔군! 모스크바로.' 지바고는 세번째로 주철 층계를 오르며 한 걸음마다 마음 속으로 외쳤다. 라라의 텅 빈 방에 들어가니 이번에도 쥐들이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이 추 악한 생물을 그냥 내버려두고는 단 1분도 는을 붙일 수 없을 것이 뻔했다. 그는 잠자리를 준비하면서 쥐구멍을 막기 시작했다. 다른 방들은 방바닥과 벽 자체가 손을 댈 수도 없었으 나, 다행히 침실만은 그다지 심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서둘러야 했다. 밤이 가까워졌다. 그가 찾아올 것을 예기했던지, 석유 램프가 부엌 식탁에 옮겨져 있고 그 옆에 성냥 여남은 개비 가 든 통이 뚜껑이 열린 채 놓여 있었다. 하지만 석유나 성냥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침실에 는 그 밖에도 심지가 놓인 작은 등잔 접시가 있었으나, 여기엔 석유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 이었다. 아마도 지가 핥아 먹은 듯했다. 굽돌이 판자가 마룻바닥에서 떨어져 뻐끔이 입을 벌리고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지바 고는 유리조각을 겹쳐, 뾰족한 쪽이 안을 향하게 하여 틈새를 막아싿. 침실 문에는 틈새가 없었다. 잘 닫기만 하면 쥐구멍토성이인 다른 방들과 결리시킬 수 있었다. 지바고는 한 시간 남짓 걸려 작업을 끝냈다. 침실 한쪽 구석에 타일을 붙인 페치카가 있었다. 부엌에는 장작이 열 단 가량 남아 있었 다. 지바고는 두어 아름 안아서 침실로 날라다가 페치카 옆에 놓고, 페치가를 설펴보았다. 침실 문을 잠그고 싶었으나 쇠걸이가 망가져서, 우선 문틈에 종이를 꽉 끼워서 열기 어렵게 하고 나서 천천히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궁이에 장작을 겹쳐 넣다가 그는 문득 장작의 잘린 부분에 'K.D.'라는 낙인 흔적이 있 는 것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그것은 어느 창고에서 출하(出荷)한 것이가를 표시하기 위해 찍은 낙인이었다. 전에 크류게르 소유인 바르이키노의 쿨라브이셰프스크 숲에서 벌목한 목 재에 'K.D.'라는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라라의 집에 이런 장작이 있다는 것은 삼제바토프가 그녀의 생활을 돌봐주고 있다는 것이 다. 한때 그는 지바고네한테 필요한 모든 물건은 공급해주었는데, 지금은 라라한테 그런 도 움을 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지바고는 가슴에 칼을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전에 지바고는 삼제바토프의 원조에 무거운 부담감을 느꼈으나 지금은 거기에다 좀 더 복잡한 감정이 얽혀 드는 것이었다. 라라의 눈동자가 아름답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만으로 삼제바토프의 활달한 언동과 라라 의 대담한 성격을 생각해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페치카에서 장작이 활활 타오를수록 지바고의 걷잡을 수 없는 질투는 한낱 추측으로부터 움직일 수 없는 확신으로 변해갔다. 그의 가슴은 온갖 고뇌로 갈갈이 찢기는 듯했으며, 하나의 고통은 또 다른 고통을 불러일 으켰다. 그는 라라의 신상에 관한 의혹을 끝내 물리쳐 버릴 수는 없었으나, 그의 상념은 저 절로 다른 더ㅔ로 옮겨져 다시금 압도적인 힘으로 엄습하는 자기 가족에 대한 생각이, 질투 에서 오는 환상을 한때나마 밀어낼 수 있었다. '그래 우리 가족은 지금 모스크바에 있단 말이지?' 지바고는 그들이 무사히 모스크베에 도 착했다는 것을 재봉사가 보증이라고 했듯이 느꼈다. '이번엔 나도 없었는데 그 머나먼 어려 운 여행을 했겠지. 모스크바까지 어떻게 갔을까? 장인이 초빙되었다는 건 무슨 말일까? 대 학에서 다시 강의를 맡아달라는 걸까? 모스크바의 우리 집은 어찌되었을까? 아직 그대로 남아 있을까? 아아, 가슴이 답답하구나! 괴로워. 생각하지 말아야지. 머리 속이 온톤 뒤집히 는 것 같군. 내가 왜 이럴까, 토냐? 아무래도 병에 걸린 것만 같군. 토냐, 우린 앞으로 어떻 게 될까? 나는 어찌 될 것이며 당신과 싸샤, 그리고 장인은 어떻게 될까? 오오, 주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내 사랑하는 가족을 영영 내 곁에서 떼어버려야 합니까? 그러냐 토냐, 우린 곧 다시 만나서 함께 살게 될 거야. 나는 걸어서라도 당신한테 갈 테니 까! 우린 꼭 만날 수 있어요. 우린 다시 만나서 행복하게 살게 될 거야! 그보다도 토냐는 그때 임신한 몸이었으니 그 사이에 아이를 낳았겠지. 그런데도 언제나 그걸 잊고 있는 이놈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인간이야. 내가 그걸 잊고 있는것은 이것이 처음 은 아니었어. 해산은 어떻게 했을까? 모스크바로 떠날 때 그들은 유라친에 들렀다고 했다. 물론 라라는 그들과 안면이 없지만, 아까 그 재봉사처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그 들의 소식을 알고 있는데, 하물며 라라가 그걸 몰랐을 리가 없지 않을까? 그런데도 편지에 우리 가족 얘기는 한 마디도 쓰지 않은 건 대체 무슨 까닭일까? 그토록 무관심힐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삼제바토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건 수상한 일이 아닌가.' 지바고는 새삼스럽게 침실 벽을 차근차근 둘러 보았다. 방안에 놓인 물건 중에 라란의 것 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지금은 어디론가 피신해버린 이 집 주인의 가구는 라라의 취미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취미 없는 가구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적의를 품고 지바고를 압박했다. 그는 마치 남의 침 실에 들어온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런데 나는 어리석게도 이 집을 항상 생각하며 그리워했고, 라라에 대한 사랑 속에 몸을 내맡기는 심정으로 이 침실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제3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얼마나 우스 꽝스러운 일이냐. 나는 삼제바토프처럼 수와과 세력과 외모를 고루 갖춘 사람과는 근본적으 로 다르다. 나같이 아무런 장점도 없는 사내를 라라가 좋아할 리도 없거니와, 꿈 같은 비현 실적인 나의 찬사가 그녀의 마음을 끌 수도 업을 게 아닌가! 내가 가슴 속에 그리고 있는 그런 여자가 되기를 라라 자신이 원할리도 없는 것이다. 내가 가슴속에 그리는 라라는 대체 어떤 여인일까? 오오, 그거라면 언제든디 서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다. 바로 저 뜰안에 내리깔린 봄날의 저녁. 대기는 여러 가지 음향으로 가득차 있다. 철업이 뛰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멀리서 가까이서 들려온다. 마치 끝없는 공간이 생기에 넘쳐 있 듯이. 그리고 이 광활한 공간이 바로 러시아인 것이다! 바다 너머 멀리 그 이름을 떨친, 비 할 데 없이 위대한 어머니 나라 러시아! 파멸의 모험도 서슴지 않고 고난의 길을 꿋꿋이 전 진하는, 미치광이처럼 대담한 러시아! 아아, 생존하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 세 상에 삶을 누르고 그 삶을 사랑하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 삶에, 그 존재에 감사를 드리고 싶구나. 바로 이것이 라라인 것이다. 삶과 존재 그 자체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라라는 삶과 존재의 대표자이며 그 표현이며, 그녀를 통해 소리 없는 존재는 청각과 언어를 부여받은 것 이다. 한 순간이라고 라라를 의심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야말로 흠잡 을 데 없이 완벽한 존재인 것이다!' 회오와 환희의 눈믈이 솟구쳤다. 지바고는 아궁이 뚜껑을 열고, 잘 타고 있는 장작을 안쪽 으로 밀어넣고, 안쪽에 있는 장작을 바람이 잘 통하는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얼마 동안 아궁이 뚜껑을 열고 손은 불에다 쬐었다. 너풀거리는 불길이 그를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했 다. 그러자 라라를 보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솟구쳐올랐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라라의 구겨진 편지를 꺼냈다. 아까는 한쪽 면만을 읽었으나, 지금 보 니 뒷면에도 무언가 씌여 있었다. 종이의 주름을 펴서 페치카 불빛에 대고 읽었다. "당신 가족 소식은 알고 계시는지? 그분들은 지금 모스크바에 가 있어요. 토냐는 딸을 낳 았답니다." 그 다음의 몇 줄은 지워져 있었다. "여기다 쓰기가 어색해서 지워버렸습니다. 만 나서 말씀드리겠어요. 서둘러 말을 구해야겠습니다. 말을 구하지 못하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 겠군요. 말이 없으면 카첸카를 데리고 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뒤의 몇 마디는 잉크가 번져서 읽을 수가 없었다. '삼제바토프한테 말을 얻으러 갔겠지. 바르이키노로 떠난 걸 보면 말을 얻은 모양이군.' 지 바고는 침착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조금이라고 양심에 걸리는 데가 있다면 이렇게 자세하게 쓰지 못할 게 아닌가.' 8 페치카가 달아오르고 방안이 따뜻해지자 지바고는 연통 마개를 막고 좀 요기를 햇다. 식 사를 하고 나니 몸이 나른해지며 졸음이 와서 옷도 벗지 않고 그냥 소파에 누워 깊이 잠들 어버렸다. 방문 밖과 벽 뒤에서 설치는 쥐들의 시끄러운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불쾌한 꿈을 두 번이나 계속해서 꾸었다-그는 모스크바에 있었다. 방 유리문에 자물쇠를 잠 그고, 그러고도 열리지 않도록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기고 있었다. 외투를 입고 수병(水兵) 모자를 쓴 귀여운 그의 아들 싸샤가 안에서 문을 두드리며 열어 달라고 울면서 애원하고 있 었다. 싸샤의 등뒤에서 쫙쫙 물이 쏟아져 내려와 아이와 유리문에 물방울을 튀기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흔히 수도관이 터지거나, 아니면 쓸쓸하고 좁다란 골짜기의 험로가 유리문으로 차단되어 계곡을 흐르던 시냇물이 유리문을 두드리는 일이 있는데, 마치 그것과 같았다. 무서운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리는 물에 아이는 겁을 집어먹고 새파랗게 질려 비명을 지 르고 있지만, 물소리 때문에 들을 수가 없었다. 이 모양이 마치 "아빠! 아빠!"하고 부르는 듯 했다. 지바고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이를 덥썩 가슴에 안고 어디로 도망치고 싶은 충동 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여전히 유리문의 손잡이를 힘껏 붙잡아 당기고 있었다. 그 는 아이를 구해 낼 수가 없었다. 이제 곧 자기 등뒤에 나타날, 아이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 성에 대한 의무감 때문에 아이를 희생해야 하는 것이었다. 지바고는 눈물을 흘리며 눈을 떴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열이 대단하구나. 앓아 눕게 될 모양이군'하고 생각했다. '티푸스는 아니지만, 무겁고 심한 증세가 있는 일조으이 피 로라고 할까, 하여튼 위험하기 짝이 없는 병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죽느냐 사느냐로 결판이 나겠지. 그런데 왜 이렇게 졸음이 올까!' 그는 다시 잠들어 버렸다. 어두운 겨울 아침 무렵이었다. 모스크바와 같은 사람의 왕래가 많은 거리에 첫전차가 종 을 울리며 달리고, 인도의 잿빛 눈 위에 가로등 불빛이 노란 무늬를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 아 필시 혁명 전인 것 같았다. 한쪽에 창문이 많고 낮고 길죽한 2층집. 집 안에는 여행자같이 옷을 입은 채 저마다 여러 가지 자세로 누워 잠자고 있었다. 흡사 야간 열차 속처럼 무질서했다. 그겨진 신문에 뭉쳐놓 은 먹다 남은 음식, 튀김닭의 뼈다귀며 날갯죽지 따위가 흩어져 있었다. 며칠 동안 다니러 온 친척들과 친지들, 그리고 떠돌이들이 벗어놓은  발이 한줄로 나란 히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가운 허리띠를 아무렇게나 맨 이 집 주부인 라라가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소리없이 재빨리 오가면서 손님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그 뒤를 침울한 얼굴로 그가 쫓아다니면서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라라는 그를 상대할 겨를이 없어서, 이따금 그에게 얼굴을 돌려 차분하면서도 의혹의 시 선을 던지기도 하고 방울을 굴리득 그 독특한 웃음 소리가 그의 말에 대답하고 있을 뿐이었 다. 이것이 그들 두 사람 사이에 남은 유일한 친근감이었다. 항상 거기를 느끼며, 차가우면서 도 강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여성이었다. 이 여성을 위해 그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모든 것 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다.! 9 그 자신이 아니라 무언가 좀더 넓은 것이 어둠 속에 빛나는 인광(燐光)처럼 밝고 부드러 운 말을 속삭이면서, 그의 마음속에서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리고 흐느끼는 그의 영혼과 함 께 그 자신도 울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가엾게 여겨졌다. 고열에서 오는 실신 상태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는 이따금 의식을 되찾고 있었다. '병에 걸 린 것이 틀림없어. 이건 의학 책에는 없는, 대학에서 배우지 않았던 티푸스의 일종인 것 같 았다. 뭘 좀 먹지 않으면 굶어 죽을지 모른다.' 그는 생각했다. 팔꿈치를 세우고 몸을 일으켜 보려다가 꼼짝 못할 만큼 힘이 빠진 것을 깨닫고 다시 잠들 어버리곤 했다. 잠이 든 것이 아니라 실신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이런 생각도 했다. '옷을 입은 채로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 누워 있었을까? 몇 시간 동안이나? 아니면 며칠간이나? 누웠을 때는 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성에가 창문에 가득 끼어 있다. 방안이 컴컴해지도록 더렵혀졌다.' 부엌에서 쥐 떼가 접시를 뒤엎고 벽에 기어올랐다가는 쿵하고 뛰어내리기도 하고 불쾌한 울음소리를 내기도 하면서 소란을 떨고 있었다. 다시금 그는 잠들었으나, 얼마 후 눈을 떠 보니 성에가 하얗게 끼었던 창문은 수정(水晶) 술잔에 따른 포도즈 같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것이 새벽놀일까, 아니면 저녁놀일 까? 바로 옆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았다. 이젠 아주 미쳐버린 게 아닐까, 그는 절 망했다. 자기 자신이 가엾어 눈물을 흘리며, 왜 나를 버리시느냐고 하늘을 향해 소리없이 호 소했다.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쩌질 줄 모르는 영원한 빛이여! 어찌하여 나를 저주스러운 어둠 속에 떨어뜨리시나이까!' 문득 그는, 옷을 벗고 깨끗이 몸을 씩고 깨끗한 셔츠를 입고 소퍼가 아닌 산뜻한 시트가 깔린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누군가 침대 옆에 붙어 앉아서, 그의 머리 에 자기의 머리가 엉킬 듯이 가까이 얼굴을 대고, 그의 눈물에 자기의 눈믈을 뒤섞으면 그 와 함께 울고 있는 라라가 있었다. 그는 행복한 나머지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10 조금 전까지 그는 무심한 하늘을 원망했드나, 지금 하늘은 끝없이 넓은 아량으로 그를 포 옹하려는 듯 침대 위로, 어깨까지 여인의 흰 두 팔을 그에게 내밀고 있었다. 그는 눈앞이 캄 캄할이만큼 기쁨에 넘쳐 의식을 잃듯 깊은 행복감에 빠져버렸다. 그는 일생 동안 뭔가 쉴새없이 활동해 왔었다. 가정을 보살피고, 환자를 치료하고, 사색하 고, 연구하고 글을 썼다. 그러니까 지금은 일하며 애쓰고 생각하기를 멈추고, 얼마 동안 이 러한 노고를 죄다 자연에 맡기고, 자애롭고 아름다운 저연의 품에 안겨 그 관심의 대상이 되고 그 창조물이 된다는 것이 더없이 편했다. 지바고의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었다. 라라는 먹을 것을 비롯하여 온갖 시중을 자 상하게 들어주었다. 백조같이 우아하고 청결한 그녀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도 대 답하면서 쉴새없이 간호했다. 그들의 소곤거리는 대화는 아무리 평범한 화제라도 플라톤의 대화처럼 심오한 뜻을 가졌 다. 그들은 서로 마음이 통해서라기보다는 고난의 세계에서 공통점을 찾았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 둘 다 현대인의 전형적인 유형(類型)을 싫어했다. 판에 박은 듯 진부한 감탄사, 떠득썩 하고 공허한 열광, 그리고 우수한 과학자와 예술가들이 열심히 퍼드리고 있는 지독한 상상 력의 결여-그 때문에 참으로 천분을 지닌 사람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그 몸서리치는 풍 조에 반발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애정은 위대한 것이었다. 누구나 애정은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허구(虛構)의 감정이란 것을 모르고 있다. 두 사람에게는-그들이 예외라고 할 수 있는 것은-영원한 입김과 같은 정열의 입김이 파 멸에 처한 인간 존재에 찾아드는 순간이야말로, 그들 자신과 생명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 하고 인식하는 것이었다. 11 "당신은 가족을 찾아가셔야 해요. 난 단 하루도 더 당신을 붙잡지는 않겠어요. 그렇지만 주위의 사정을 살펴보세요. 이 고장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편입되더 그날부터 우린 허물어져 갔어요. 지금 소비에트 러시아는 동부 지방과 시베리아로 뚫어진 구멍을 막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전혀 모르실 거예요. 앓고 계시는 동안 이 고장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어요. 이곳 창고에 비축했던 식량은 중앙으로, 모스크바로 죄다 실어가고 있어요. 그래 봐야 밑 빠진 독 에 물 붓기지만. 이젠 이 고장사람들이 굶을 판이예요. 우편도 안 되고 여객 열차도 없어지 고, 곡식을 운반하는 화물 열차만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예요. 이 도시는 다시 가이다 반란 전과 똑같이 술렁이고 있어서 불온한 공기에 대한 보복이 있을 거예요. 이런 판국에 당신처럼 지쳐서 뼈와 가죽만 남은 사람이 대체 어딜 가시겠다는 거예요? 걸 어서 가시겠어요? 안 돼요, 갈 수도 없어요! 우선 건강을 회복하고 힘을 기르고 나서 가세 요. 당신한테 충고드리는 건 아니지만, 만약에 내가 당신 입장이라면 가족한테 돌아갈 때까지 일이라고 좀 해보겠어요. 물론 전문적인 분야에서 말이예요. 실력을 인전받게 될 거예요. 내 가 당신이라면 지방 보건부 같은 데 나가겠어요. 전에 의사회가 있던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다더군요.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자살한 시베리아 백만장자의 아들이고, 부인은 이 지방의 큰 공장주 이며 대지주였던 사람의 외손녀, 게다가 당신 자신은 빨치산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예요. 아무리 변명해도 군사 혁명 대열에서 이탈한, 아니 탈주한 혐의는 벗지 못해요. 그러니까 당 신은 시민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처럼 물러나 있어서는 안 돼요. 나의 경우도 역시 탄탄하진 못해요. 그래서 난 지방 교육부에 나가 일하겠어요. 나도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나 다 름없으니까요."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스트렐리니코프 때문이가?" "네, 그리 때문이에요. 그 사람한테는 적이 많다는 얘긴 들었지요. 적위군이 일단 승리하 고, 비당원인 군인으로 수뇌에 가가운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모가 지예요. 그야말로 도끼 신세를 져야 할 사람이예요. 그는 생병의 위협을 느끼고 극동 지방으 로 도주하여 은신하고 있는 거예요. 풀포기를 들춰가며 그를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는군요. 하지만 그이 애긴 그만둡시다. 난 울고 싶진 않아요. 그이 얘기를 더 하다간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아요." "사랑하고 있었군, 여태까지 줄곧 구 사람을 사랑하고있었나 보군?" "난 그와 결혼한 사이예요. 그는 내 남편이예요, 유라. 고상하고 깨끗한 성품을 가진 사람 이예요. 그이한테 난 죄가 많아요. 그렇다고 내가 그이한테 무슨 나쁜 짓을 했다는 뜻은 결 코 아니예요. 하지만 그이는 아주 큰 포부를 가진 참으로 정직한 사람인데, 나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못난 인간의 쓰레기거든요. 그래서 난 죄가 많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이 얘긴 그만 둡시다. 언제든 또 기회를 보아서 꼭 말씀드리죠. 당신 부인은 참 멋진 분이예요. 마치 보티 첼리의 화폭의 여인처럼. 토냐가 해산할 때 내가 돌봐주었어요. 둘이 아주 친해졌답니다. 하 지만 이 얘기도 다음 기회로 미룹시다. 그보다도 우리 함게 나가서 일하기로 해요, 맞벌이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만 하면 한 달에 몇 십억 루불리(극도의 인플레 때문에 화폐 가치가 없 었음)의 월급을 받을 수 있어요. 이 지방에선 얼마 전까지도 시베리아 지폐가 통용되었는데 최근에 폐지됐어요. 당신이 앓고 있는 동안에 나는 그야말로 무일픈이었답니다. 정말이예요.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나갈 수 있었어요. 이번에 화물 열차에 지폐를 가득 싣고 왔더더군요. 화차로 40향이나 된다는 거예요.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인쇄된 지폐는 우표처럼 한 장식 떼 어 내게 되었어요. 푸른것은 5백만 루불리, 붉은 것은 1천만 루불리예요. 인쇄가 엉성한데다 가 빛깔까지 바래서 돈 같지도 않아요." "나도 본 젓은 있어요. 우리가 모스크바를 떠나기 직전에 통용되기 시작했지." 12 "바르이키노에선 왜 그렇게 오래 있었소? 아무도 없었을 텐데? 무슨 일이 있었소?" "카첸카와 함께 당신이 살던 집을 정리했어요. 당신이 우선 그리로 오실 것 같았어요. 당 신 집이 그런 꼴이 된 걸 당신한테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어떻게 됐는데? 엉망진창이었던가 보지?" "형편없었어요. 더러워서 청소를 했어요." "말하고 싶지가 않은가 보군.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니오? 좋아요, 캐묻지는 않겠어. 그 보다도 토냐 얘길 해주어요. 딸아이의 이름은 뭐라고 지었는데?" "미샤예요. 당신 어머니 이름을 땄어요." "좀더 자세히 얘기해 주어요." "다음 기회로 미루어요. 자꾸만 눈물이 나서." "당신한테 말을 빌려 준 그 삼제바토프는 재미있는 사람이지. 당신 생각을 어때요?" "정말 재미있는 분이에요." "나도 그 사람을 잘 알아요. 우리 가족들과도 친하게 지냈지. 낯선 고장에서 우리를 여러 모로 도와주었어요." "그건 나도 알아요. 그분한테서 들었어요." "당신과 매우 가까이 지냈겠군? 여러 가지로 당신을 도와주었겠군?" "줄곧 신세만 져왔지요. 그분이 없었더라면 정말 살길이 막연했을 거예요." "그렇게 짐작은 되더군, 무척 가깝게 지냈을 거라고. 그 사람은 줄곧 당신한테 접근하려 했겠지?" "그래요, 줄곧 그랬어요." "그럼 당신 자신은 어땠어? 아니, 이거 실언했군. 나에겐 그런 걸 캐어 물을 권리는 없으 니까. 용서하시오. 내가 경솔했어." "괜찮아요. 아마 당신이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건, 이를테면 어떤 성질의 관계냐는 거죠? 그러니까 당신은 그 사람과의 사이에 무슨 이상한 관계라도 없었는가를 알고 싶다 그 말이 죠? 물론 그런 관계는 없었어요. 그 사람한테는 너무 많은 신세를 져서 그 만분의 하나도 갚을 수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설사 그 사람이 내 앞에 황금의 산더미를 쌓아놓는다 해도, 또 나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다 해도 나를 한 걸음도 가까이 끌어당길 수는 없어요. 나는 태 어나면서부터 그런 사람을 증오했으니까. 그처럼 빈틈없는 자신만만한 사람은 일상 생활에 는 유용하지요. 그러나 애정 문제에서는, 남성이라는 걸 내세우는 자신만만한 태도는 질색이 에요. 나는 애정과 인생의 문제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어요. 내가 이렇게 된 까닭도 바로 그런 사람때문이었어요." "그런 사람이란 누군데? 대체 어떤 사람 말이오? 당신은 이 세사으이 누구보다도 훌륭해 요." "그럼 안 돼요, 유라. 난 진진하게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마치 손님처럼 인사치레 의 말만 하시는 군요. 내가 어떤 사람이냐구요? 나는 허물어진 인생이에요. 나는 참혹할 만 큼 일찍 여자가 된 거예요. 그것도 더없이 추악한 모양으로 말예요. 늙고 거만한 구시대의 기생충한테 마치 길거리의 여자와 같은 취급을 당했던 거예요. 이용해 먹을 수 있으면 무엇 이든 그런 인간한테 말예요." "난 짐작은 했어요. 잠깐만, 그보다도 당신이 소녀 시절에 겪은 어린애답지 않은 고통, 경 험이 없는 데서 오는 공포감, 아직 덜 성숙한 처녀가 받은 최초의 모욕 등이 어떤 것이었는 지 나는 상상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모두 지나간 일들이 아니오?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그것 때문에 정작 슬퍼해야 할 사람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나처럼 당시을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그때 만일 내가 당신 곁에 있었더라면 그런 불행을 당하지 않게 했을 텐데, 하고 머리털을 쥐어뜯어며 원통해 하는 사람은 바로 나란 말이오. 당신이 정마로 그 일을 슬퍼한다면 말이오. 이건 좀 이상한 얘기지만, 나는 자기보다 훨씬 저열한 인간에게만 심한 질투를 느끼는 것 같소. 나보다 훌륭한 사람과 라이벌 관계에 있을 때에는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어요. 내가 좋아하는, 정신적으로 서로 통하는 남성이 나와 똑같이 그 여성 을 사랑하는 경우엔 서글픈 심정이 되어 기를 쓰고 경쟁을 할 수 없게 될 거요. 물론 내가 사랑하는 여성을 그 남자와 공유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피비린내나는 질투와는 전혀 다 른 괴로운 감정을 느끼며 나는 물러날 거요.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군. 이를테면 나와 같은 일을 하며 나보다 능력이 있고 나보다 뛰어난 예술가와 맞서게 될 경우라면 나는 자기 의 탐구(探求)의 시도를 스스로 포기할 겁니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일 을 해 보아야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 얘기가 좀 벗어난 것 같군. 하여튼 당신이 슬픔과 회한 같은 걸 가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당신을 이토록 사랑하지 않았을 거요. 나는 한 번도 발을 헛디디거나 낙오하거나 잘못을 하 지 않은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런 사람의 미덕이란 생명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가치 도 없는 것이니까. 그런 사람은 인생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요." "바로 그 인생의 아름다움 말인데요, 그것을 알게 되면 상상력에 때가 묻지 않은 어리애 같은 순결이 필요해요. 그런데 나는 그것을 잃었어요. 인생의 첫걸믕에서 내 마음에 비열하 게 타인의 낙인이 찍히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좀더 다른 눈으로 인생을 볼 수 있었을 거예 요. 그뿐만이 아니예요. 인생의 시발점에서 부도덕한 자기쾌락 탓으로, 그 후 나를 꽤나 사 랑하고 나도 역시 사랑했던 좋은 사람과의 평범한 결혼 생활마저 파탄에 이른 거예요." "잠깐만, 당신 남편 얘기는 뒤로 미루기로 합시다. 나는 자기와 대등한 자에게보다는 훨씬 저열한 자에게 질투를 느낀다고 하지 않았소? 나는 당신 남편에겐 질투를 느끼지 않아요. 하지만 '그 사람'은?" "'그 사람'이라뇨?" "당신의 인생을 망쳐버린 사람 말이오. 대체 어떤 인물이오?" "꽤 유명한 모스크바의 변호사예요. 우리 아버지의 친구였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 린 생계에 곤란을 받았어요. 그때 그 사람이 어머니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어요. 독신 생 활을 하는 돈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너무 나쁘게 말하는 바람에 오히려 당신한테는 흥 미 있는 인물로 생각되는가 보군요. 사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에요. 이름을 밝힐까요?" "그러지 않아도 돼요. 나도 알고 있으니까. 한 번 본 일도 있었소." "그래요?" "당신 어머니가 여관 방에서 음독한 적이 있잖소? 한밤중이었었지. 난 아직 어린 중학생 이었지만." "나도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은 어두컴컴한 문간방에서 서 있었어요. 언젠간 전에도 한번 나한테 그 얘길 하셨죠? 멜류제에보에 있을 때였던가요?" "거기에는 코마롭스카가 있었어." "그래요? 그랬을 거예요. 우리 식구하곤 언제나 허물없이 지냈으니까." "당신, 왜 얼굴을 붉히지요?" "당신 입에서 갑자기 코마롭스티의 이름을 들으니까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요." "그때 난 학교 친구와 함께 그 여관에 갔었는데, 그 친구한테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 어요. 미하일 고르돈이라는 친구였었어. 그가 그전에 기차 여행중에 백만장자인 사업가였던 우리 아버지의 자살을 목격했다는 거요. 고르돈은 우리 아버지와 같은 찻간에 타고 있어서, 그때 우리 아버지가 달리는 기차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거예요. 그는 아버지와 동행인 코마 롭스키도 그때 보았다고 했어요. 크마롭스키는 우리 아버지의 법률 고문으로 있으면서 아버 지를 술에 빠지게 했고 사업을 망쳐 파산시켰을 뿐 아니라, 끝내는 자살에까지 몰아넣었던 거요. 아버지가 자살한 것은 그자 대문이었소. 그놈 때문에 난 고아가 되고 알았단 말이오." "어쩌면! 정말 기이한 인연이로군요! 곧이 들리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당신의 악령(惡靈)이기도 했군요. 그런 점에서도 당신과 나는 같은 운명에 매어진 사이예요!" "내가 당신을 두고 미칠 듯이 질투를 느끼는 건 바로 그자요."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기는커녕 경멸하고 있어요." "당신은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천성이란, 특히 여성의 천성이란 종잡을 수 없는 모순덩어리란 말이오! 당신은 그 자를 혐오하지만 그 혐오 속엔 그자에게 강하게 끌리는 무언가가 잠재해 있지 않을까-당신 스스로 사랑하는 남자에게서보 다 더 강하게 끌리는 그 무엇이?" "정말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너무나 태연스럽게 말하시니까 그런 당치도 않은 말이 마치 사실인 것같이 들리는군요.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요!" "진정해요. 내가 하는 말에 신경을 쓸 건 없어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뭔가 모호한 건 에, 설명도 할 수 없고 추측도 할 수 없는 것에 질투를 느낀다는 사실이오. 말하자면 당신의 화장품, 당신의 살갗에 배어 나오는 땀방울, 공중에 떠다는다가 당신에게 들러붙어 있는 당 신의 몸을 해치는 병균, 이런 것들에까지 나는 질투를 느껴요. 그리고 이런 병균에게 질투를 느끼듯 나는 코마롭스키에게 맹렬한 질투를 느끼고 있는 겁니다. 언젠가는 죽음이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겠지만, 그보다도 코마롭스키가 먼저 나한테서 당신을 빼앗아 갔는지도 모른 단 말이오. 내가 종잡을 수 없는 말만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걸 좀더 조리 있게 설명할 수는 없어요. 다만 나는 당신을 미칠 듯이, 그리고 끝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할 수 있을 뿐이오." 13 "당신 남편 얘길 좀더 해주어요. '우리 운명의 책 속에 나란히 이름이 적힌 사람들'이라고 셰익스피어가 말했어." "그건 어느 작품에 나오는 말이죠?" "<<로미오와 줄리엣>>이던가." "그이 얘긴 내가 그이를 찾으러 갔을 때 멜류제예보에서 당신한테 여러 번 했어요. 그리 고 여기 유라친에서 처음 만났을때, 열차 찻간에서 당신을 연행했다는 말을 하셨을 때도 나 는 그이 얘길 했지요. 그이가 자동차에 타는 걸 먼발치에서 보았다는 얘기도 했던 것 같아 요. 어찌나 경호가 삼엄했는지 말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이 자신은 조금도 변한 데가 없 는 것 같았어요. 여전히 착하고 성실하고 단정한 얼굴-내가 이 세상에서 본 것 중에서 가장 성실한 얼굴이에요. 거드름이나 제스처라곤 털끝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남성다운 성격이죠. 과거에도 언제나 그랬었지만 그때도 여전했어요. 하지만 단 한 가지 변한 데가 있더군요. 나 는 그것이 무척 마음에 걸렸어요. 마치 무슨 추상적인 것이 그이의 용모에 배어 들어 어쩐지 빛을 바래게 한 것 같은 느낌 이었어요. 살아 있는 인간의 얼굴이 주의(主義)와 사상의 화신으로 변해 아주 굳어져 버린 것 같더군요. 나는 가슴이 섬뜩했어요. 그이가 자기 자신을 바친 그 고상한 힘이 그렇게 만 든 거예요. 고상하긴 고상하지만 언젠가는 그이를 무자비하게 짓밟아 버릴 냉혹한 힘이죠. 그이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거라고 나는 생각했어요. 그러나 어쩌면 내가 잘못 보았는지도 몰라요. 당신과 나는 감정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나  항상 당신한테 많은 영 향을 받고 있으니까요!" "그보다도 혁명 전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그 얘기나 들려주어요." "나는 어릴 때부터 순결을 동경했어요. 드이는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어요. 우린 한 집에서 살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으니까요. 그이와 나와 갈리울린 말이에요. 그이는 어릴 때부터 나한테 매혹을 느꼈나 봐요. 나를 만나면 넋을 잃고 얼어붙었답니다. 이런 걸 말하다는 건 쑥스러운 일이지만, 그걸 몰랐다고 시침을 뗀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 거예요. 말하자면 나 는 그이의 순진한 정열의 대상이었어요. 어린 자존심 때문에 애써 숨기려 했지만, 그의 얼굴 에 나타나서 남들이 눈치채게 되는 그런 정열 말예요. 우린 친해졌어요. 하지만 그이와 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어요. 나와 당신의 성격이 비슷한 것과는 달리 나는 그때 이미 그를 결혼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학교를 졸업하면 곧 이 비범한 소년과 인생을 함께하기 로 마음 먹고, 말하자면 마음속으로 약혼한 셈이죠. 그이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아시죠! 비범한 사람이에요! 일개 철도 종업원의 아들에 지나지 않지만, 천부적인 재능과 꾸준한 노력으로 수학과 인문 과학의 두 분야에서 현대 대 학 교육 이상의 최고 수준에 도달한 거예요. 어디 그게 수월한 일인가요!" "서로가 그토록 사랑했다면 어째서 가정 생활에 금이 갔을까?" "그걸 설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제 말씀드리죠. 하지만 이상해요, 나같이 보잘것 없는 여자가 당신과 같이 총명한 분에게, 러시아의 인간 생활이 지금 어떻게 돼 가고 있으 며 나의 가정과 당신의 가정을 포함한 모든 가정이 어째서 파괴되고 있는가를 설명해야 하 니 말입니다. 요컨대 인간 관계라는 것은, 성격의 일치나 애정의 유무 따위는 전혀 문제가 이니예요. 전통적으로 자리잡힌 모든 것, 일상 생활과 인간의 보금자리와 질서에 관계되는 모든 것이 사회 전체의 변혁이나 개조와 함께 무너져 버렸어요. 모근 생활 양식이 송두리째 뒤집히고 파괴되어 버린 거예요.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홀랑 벗긴 벌거숭이의 인간 영 혼만이 남았어요. 이 영혼에겐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요. 그것은 언제나 추위에 오그라져 떨 면서, 똑같이 벌거숭이가 된 바로 곁의 다른 고독한 영혼에게 몸을 의지하는 법이니까요. 몸 을 가릴 필요가 없었던 아담과 이브처럼, 당신과 나도 지금 이 세상 종말에서 벌거숭이가 된 채 외롭게 남아 있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과 나는 태초부터 말세까지 수천 수만 년 동안 이 세상에서 이루어 놓은 수많은 위대한 것의 마지막 추억이에요. 이미 사라져 버린 모든 아름다운 것들의 기변으로 우리는 호흡하고 사랑하고 울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몸부림치고 있는 거예요." 14 잠시 말을 멈추고 나서 그녀는 한충 조용한 어조로 다시 계속했다. "제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일에 스트렐리니코프가 다시 옛날의 파샤안치포프로 되돌아와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짓을 그만둔다면, 만약에 시계 바늘이 뒷걸음질쳐서 어디 먼 이 세상 끝에 우리 집 창문이 밝게 비치고 파샤의 책상 위에 등잔과 책들이 놓여 있다면, 나는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그리로 갈 거예요. 나는 과거의 부름, 신의(信義)의 부름을 거부 할 수가 없을 거예요. 나는 모든 것을 다 희생할 용의가 있어요. 가장 귀중한 당신까지도. 아니, 마음에도 없즌 소릴 지껼였나봐요. 용서하세요. 그건 아니였어요." 그녀는 지바고의 목을 얼싸안고 흐느껴 울었다.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눈물을 닦으며 말 을 이었다. "그라나 이건 당신을 토냐에게로 돌아가게 하는 의무의 목소리예요. 하나님 우린 어쩌면 이렇게도 가련한가요? 우린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좋을까요?" 흥분을 가라앉고 나서 라라는 말을 계속했다. "우리의 결혼 생활이 파탄된 이유를 아직 말하지 않았군요. 말씀드리죠. 이건 비단 우리 가정뿐 아니라 많은 가정에도 같은 운명일 거예요." "말해주구려." "우린 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에 결혼했어요. 겨우 가정을 이루어 살려고 할 때 전쟁이 터졌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세대가 여태까지 겪어온 불행의 근본 원인은 전쟁이에요.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평화롭던 지난 세기의 사고 방식이 인간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어 요. 사람들은 이성(理性)이 가르치는 대로 행동했어요. 양심이 명령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으니까요. 남의 손에 사람이 죽는다는 건 극히 드문 예외적인 현상이었지 요. 살인 사건 같은 건 연극이나 탐정 소설 아니면 신문 사회면에서나 볼 수 있었고, 일상 생활에서는 좀처럼 보지 못하는 일로 여겨왔지요. 그런데 평화롭고 소박하던 세계가 순식간에 뒤집혀 유혈과 통곡의 세계로 변해 버리고, 난폭한 광기가 팽배하여 살육이 합법적인 것으로 찬양을 받게 되었어요. 이런 판국에 어찌 무사할 수가 있겠어요. 나보다도 당신이 더 잘 기억하시겠지만, 순식간 에 모든 것이 허물어졌습니다. 열차 운행, 도회지로의 식량 공급, 가정 생활의 기반, 도덕률 다위가 한꺼번에 무너져버린 거예요." "계속하시오. 당신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소. 당신이 모든 걸 그렇게 정확 히 이해하다니 놀랐군! 참으로 기뻐요!" "그리하여 우리 러시아 땅은 허위가 휩쓸기 시작했어요. 불행의 근본은, 다시 말해서 그 후의 모든 악의 근원은, 개인적인 의사를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데 있어요. 도덕적으 로 행동하는 사대는 이미 과거의 유물로 되어버렸어요. 이제는 남들이 노래하는 데 맞춰 함 께 노래를 불러야 하고, 외부에서 강요하는 관념에 보조를 맞춰 살아나가야 한다고 모두들 생각한 거예요. 판에 박은 화려한 구호가 판을 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제정주의(帝政主義) 의 구호가, 다음엔 혁명의 구호가 말예요. 이런 사회적인 풍조가 전염병처럼 퍼지고 고질화되고 말았어요. 모든 것이 영향을 받게 된 겁니다. 우리 가정도 역시 그 무서운 파괴력에 대항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어떻게 되었 다고 꼭 짚어 말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금이 가기 시작한 것만은 사실이었어요. 우리 가정 에 항상 감돌고 있던 자유롭고 활달하고 신선한 공기가 사라져버리고, 바보스러운 토론이 우리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심각한 국제적 큰 문제를 자못 지진한 얼굴로 논하기 시작한 거 예요. 파샤처럼 섬세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 그리고 언제나 실제와 거짓된 외관을 정확히 식 별할 줄 아는 사람이 우리 가정에 침입한 그 허위성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지요. 그때 그이는 피할 수 없즌 숙명적인 오류를 범했던 거예요. 시대의 상징-즉 사회악을 가 정의 현상으로 오인한 것입니다. 우리의 대화가 관료적으로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자 기가 형식에 구애되는 융통성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이런 실없는 일이 우리 결혼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면 당신은 아마 믿을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러나 우 리어ㅔ겐 참으로 중대한 문제였어요. 이러 유치한 생각 때문에 파샤는 마침내 어리석기 짝 이 없는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어요. 파샤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전쟁터에 나갔어요. 자기가 나와 카첸카의 무거운 짐이 되 고 있다고 판단하고 우리를 해방시켜 주려는 것이었어요. 이것이 그의 미치광이 짓의 발단 이었어요. 어린애 같은 엉뚱한 자존심 때문에 아무도 모욕을 느끼지 않는 사소한 일에 심한 모욕을 느꼈던 모양이예요. 그이는 사태의 진전, 즉 역사에 항거하고있는 거에요. 그이의 도 덕적인 행동은 바로 그 때문이죠. 그런 어리석은 야심 때문에 그이는 반드시 파멸하고야 말 거에요. 아아, 그이를 구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한 당신의 애정은 강하고도 순수한 거요. 그 사람을 사랑하시오. 나는 그것 을 질투하지도 않고 방해하지도 않겠소." 15 어느덧 찾아왔던 여름이 지나가 버렸다. 지바고는 완전히 건당을 회복했다. 모스크바로 떠 날 계획은 포기하지 않고 그는 한꺼번에 세 군데나 일자리를 구했다. 인플레가 극심해서 한 군데서만 일해 가지고는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그는 첫닭이 울 때 자리에서 일어나, 쿠페체스카야 거리로 나가 '거인 회관(巨人 會館)'앞 을 지나서, 옛날엔 우랄 카자크군의 인쇄소였으나 지금은 '붉은 식자공(植字工)`이란 이름이 붙은 작업장 앞까지 갔다. 고로드스카야 거리 모퉁이에 있는 시사무소 문에 '청원소'라 쓴 게시판이 걸려 있었다. 광장을 지나 말라야 부야노프카로 나가서 스첸곤 공장 앞을 지나, 뜰 로 향해 군 병원 진료소로 출근했다. 여기가 그의 본직장이었다. 통근길의 태반은 가로수의 짙은 녹음이 덮여 있고 양쪽에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지부 으이 경사가 가파르고 나무 울타리에 조각 무늬의 대문이나 덧문이 달린 집이 많았다. 진료소 이웃에는 상인의 미망인 고레글랴도바의 소유였던 정원 안에 조그만 고대 러시아 식 집 한 채가 있었다. 옛날 모스카바 영주(領主)의 저택처럼 피라밋 형의, 유약을 바른 타 일을 붙인 건물이었따. 지바고는 열흘에 서너 번씩 진료소에서 스타라야 미아스카야 거리에 있는 리게치의 저택 으로 가야만 했다. 그것은 유라친 시 보건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시내 반대쪽에 삼제바토프의 아버지가 시(市)에 기증한 산부인과 연구소 건물이 있었다. 삼제바토프를 낳고 죽은 자기 아내를 기념하기 위한 연구소였다. 지금은 로자 룩셈부르크 (독일의 유명한 여자 공산주의자)내와과(內外科) 강습소라고 불렸으며, 지바고는 거기서 일 반 병리학과 그 밖에 두세 과목을 강의하고 있었다. 밤늦게 지치고 허기져서 집으로 돌아오면, 라라는 식사 준비며 세탁 등 살림에 골몰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흩어지고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치맛자락을 허리춤에 낀 라라의 소박하 고 평범한 모습은 숨막힐 듯 매력적이었다. 설사 그녀가 가슴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키 가 날씬해 보이도록 굽이 놓은 구두를 싣고. 폭이 넓은 화려한 치맛자락을 흔들려 무도회에 나가는 모습에서도 그는 이토록 매료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라라는 식사 준비를 하거나, 세탁을 하고 남은 비눗물로 마룻바닥을 닦기도 했다. 그리고 세 식구의 속옷을 다림질하거나 뚫어진 데를 깁기도 했다. 그리고 카첸카에게 글 읽고 쓰기 를 가르쳤다. 혹은 개편된 새 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준비로서 정치 방면의 입문서(入門書) 따위를 틈틈히 읽기도 했다. 이들 모녀에 대한 애정이 깊어 감에 따라 지바고는 가정적 분위기에 젖어들려는 욕망을 억제 했다. 자기 자신의 가족을 저버리고 있다는 괴로운 의무감이 그를 압박해 왔다. 그래서 그는 이들 모녀가 자기와의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가지도록 노력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라라와 카체카에게 어떤 모욕감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서로 깊은 존경을 유지하는 구실을 했 다. 지바고는 이와 같은 감정의 분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는 했으나, 그래도 이따금 덜 아 문 상처가 쑤셔 오듯 예리한 동통(疼痛)을 가슴 속에 느끼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두세 달 가량 세월이 지났다. 10월로 접어든 어느 날 지바고는 라라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직장을 그만둬야 할 것 같소. 으레 그럴 것이라는 건 니리 짐작하고 있었어요. 처음엔 더할 수 없이 좋았어요. '성실하게 일해주기만 한다면 우린 언제나 환영하오. 사상을 지닌다는 건, 특히 새로운 사상은 대환영이오. 잘해주시오. 일하고, 투쟁하고, 탐구하시오.'라 고 말이오. 그러나 잘 알고 보면 그들이 말하는 사상이란 단지 형체뿐이오. 혁명이나 정권을 찬양하 는 엉터리 같은 구호의 반복일 뿐, 정말 구역질이 날 만큼 따분해요. 게다가 나는 그 방면엔 전혀 서ㅗ질이 없는 인간이오. 어쩌면 그들 쪽이 실제 옳은 건지도 몰라요. 물론 나는 그들과 같은 생각일 순 없지만. 그 러나 그들은 영웅이고 공명정대한 인물인 데 반해 나는 무지 몽매하고 인간의 노예화를 지 지하는 치사스러운 인간이라는 그런 사고 방식과는 도저히 타협 할 수가 없어요. 당신은 니 콜라이 베제냐핀이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어요?" "물론 있어요. 당신을 알기 전에도 들었고, 당신을 만나고 나서도 이따금 당신에게서 들었 어요. 시모치까 툰체바가 곧잘 그분 얘길 했어요. 그분을 좋아했어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 는 아직 그분의 책을 다 읽어보지 못했어요. 철학 문제만을 다룬 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 든요. 철학이란 건 예술과 인생의 양념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철학에만 몰두한다는 건 마치 겨자만 먹는 것 같아서 이상하거든요. 용서하세요. 쓸데없는 말로 당신 얘기를 방해했군요." "아니 천마에, 나도 당신 의견엔 동감이오. 내 생각과 아주 비슷해요. 그보다도 우리 아저 씨 얘긴데, 나는 정말로 니콜라이 아저씨의 악영향을 받았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들은 모 두들 나보고 천재적인 진단의(診斷醫)라고 감탄하고 있단 말이오. 사실 나는 좀처럼 오진을 하는 일이 없어요. 그런데 무슨 병인가를 대번에 정확히 알아내는 힘은, 내가 빠져 있는 직 관(直觀) 그것이란 말이오. 그들이 증오하고 있는 직관력 이와의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오. 나는 모방의 문제-이건 주위의 환경에 유기체가 외적으로 적응하는 것을 말하지만-이 모 방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어요. 나는 이러한 색채의 적응에 있어서, 내적인 것의 외적인 것으 로의 놀라운 전이(轉移)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강의 시간에 용기를 내어 이 문제를 언굽해보았어요. 그러자 대번에 '관념론이다, 신비주의다, 괴테의 자연철학이다, 네오 셸링주의다'라고 하더군. 아무래도 그만둬야겠어. 보건부와 강습소는 의원 면짓으로 그만두고. 병원만은 쫓겨날 때 까지 버티어볼 작정이오. 이런 말을 해서 당신을 놀라게 하고 싶진 않지만, 나는 오늘이나 내이 ㄹ체포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요." "염려 마세요, 유라. 그렇게 되려면 아직 멀었어요. 그러나 당신 말이 옳아요. 조심하는게 좋아요. 체제가 바뀌고 새 권력이 뿌리를 박기까지는 몇 개의 단계를 거치는 법이거든요. 처 음엔 이성(理性)의 승리, 비판 정신, 편견과의 투쟁. 다음에 제2단계가 오게 되지요. 새 체제에 진심으로 공명하는 것같이 가장하는 '부화뇌동 배(附和雷動輩)'들이 판을 치는 단계예요. 중상, 모략, 밀고, 음모, 증오 등이 횡행하지요. 지 금은 바로 제2단계의 시초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실례는 어디에도 있어요. 이곳 혁명재판소 위원으로 과거 정치범으로 유형되었던 사 람이 호다트스코예에서 두 사람이 왔어요. 치베르진과 안치포프라는 노동자예요. 두 사람 다 나와는 잘 아는 사이예요. 그 중 한 사람은 바로 시아버지 되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최근 이 두 사람이 부임해 온 후부터 나는 우리 모녀의 생명이 염려되어 몸둘 곳을 모를 지경이에요. 그들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사람들이니까요. 시아버지는 날 마땅치 않게 생각했었어요. 그들은 어느 날에 최고 정의의 이름으로 나뿐 아니라 파샤까지도 능히 죽일 수 있는 인간들이란 말예요. " 이 대화는 곧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어느 날 밤, 진료소 이웃인 말라야 부야노푸까 48 번지인 고레글랴도바 부인이 집이 수색을 받도, 은닉 무기가 발견되어 반혁명 조직이 적발 되었다. 많은 주민이 검거되었고 가택 수색과 체포가 계속되었다. 용의자의 일부가 강 너머 로 도주했다  소문이 돌았다. "도망쳐 봐야 별수 있나? 강만 건넜다고 되나, 강도 강 나름이지." 사람들을 서로 수군거 렸다. "예를 들어, 블라고베스첸스크에는 아무르 강(黑龍江)이 있지. 강 이쪽은 소비에트 정 권이지만 건너편은 중극이 아닌가. 강에 뛰어들어 헤엄쳐 건너가기만 하면 그만이거든. 이쯤 돼야 진짜 강이랄 수가 있지. 이 고장 강이야 그게 어디 강인가!" "분위기가 험악해졌어요." 라라가 말했다. "어물거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 둘 다 틀림없이 검거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카첸카는 어떻게 하죠? 나나 그애 어머니예요. 불행을 피하기 위해 대책을 강구해야 해요. 벌써 어떻게든 계획을 세워 놨어야 하는 건데...... 이 생 각을 하면 미칠 것만 같아요." "잘 생각해봅시다. 그러나 어디든 남의 눈에 띄지 않을 곳에 당부간 숨어 살 수가 있어요. 가령 바르이키노 같은 곳 말예요. 난 바르이키노의 그 집을 생각해봤어요. 거기라면 외딴곳 이니까 여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거예요. 겨울도 가까워졌으니 거기서 겨울을 지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요. 거기까지 손이 미치려면 아직 1년은 더 걸릴테니까 우리도 그만큼 더 살 수 있는 거예요. 시내와의 연락은 삼제바토프가 맡아줄 거에요. 부탁하면 거전 하진 않은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 생각은 어떠세요? 거긴 인적도 없고 황폐하고 쓸쓸한 곳 이에요. 지난 3월에 내가 갔을 때도 그랬어요. 늑대가 우글거린다더군요. 무서워요. 그렇지만 지금은 늑대보다 사람이, 특히 안티포프나 치베르진 같은 사람이 더 무서워요." "글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군. 당신은 언제나 나더러 모스크바로 떠나라고 하지 않았소? 이제는 기차 여행도 어느 정도 가능해진 모양이오. 역에 가서 알아 보았더니, 기차 를 이용하는 보따리 장사들의 단속도 전같이 심하지가 않고, 무임승차자를 강제로 하차시키 는 일도 없다는군. 총살하는 것도 이젠 싫증이 났는지 뜸해졌다는 거요. 모스크바에는 여러 번 편지를 냈으나 답장이 없어서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소. 이젠 모스 크바로 가서 가족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 보는 수밖에 없겠소. 당신이 늘 그렇게 말하지 않 았소. 그런데 지금 바르이키노 얘길 꺼내는 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구려. 설마 당신 혼자 서 그 무서운 외딴곳으로 가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물론 당신 없이 혼자서 어떻게 가겠어요!" "그러믄요. 떠나야 해요." "알겠소? 그렇다면 좋은 수가 있어요. 우리 카첸카를 데리고 함께 모스크바로 떠납시다." "모스크바로? 당신 제정신이 아니군요. 모스크바엔 뭣하러 가요? 안 돼요. 난 여기 남아 있어야 해요. 어디든 근방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해요. 파샤의 운명이 결정되는 건 여기니까 요. 필요한 경우 그이를 돕기 위해 결말이 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죠." "그렇다면 카첸카는 어떡하지? 그걸 생각해봅시다." "나한테 가끔 시모치까가 찾아왔어요. 시모치까 툰체바 말예요. 언젠가 당신한테 그 여자 얘길 하지 않았던가요?" "알고 있어요. 자주 당신한테 온 걸 보았소." "난 놀랐어요. 남자의 눈은 어디 붙어 있지요? 그 여자한테 반해버릴 거예요. 참으로 멋진 여자예요! 키도 크고 날신한 몸매에 머리도 좋고, 박식한데다 성질도 착하고 명석한 판단력 을 지녔어요." "내가 빨치산에서 빠져나와 여기 도착한 날 그 여자의 언니인 글라피라한테 이발을 했어 요." "그 얘긴 전에도 들었어요. 그 여자의 자매들은 도서관에 있는 맨 위의 언니 아브도쟈네 집에서 함께 살고 있어요. 일 잘하는 정직한 사람들이예요. 만일의 경우 당신과 내가 체포되 면 카첸카를 데려다 길러달라고 부탁해볼까 해요. 아직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요." "최악의 경우엔 그렇게라도 할 수 밖에. 하지만 그렇게까지 되려면 아직 멀었을거요." "남들은 시모치까를 보고 좀 머리가 돈 여자라고들 말해요. 하긴 완전히 정상적인 사람이 라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건 그 여자의 깊이 있는 성격과 독창성 탓이예요. 그 여자는 비범한 교양을 가졌으나 그건 지식인이 아니라 민중의 교양이예요. 당신의 사상과 너무나 서로 닮았어요. 그 여자한테라면 마음놓고 카첸카를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 17 지바고는 다시 역에 나가 보았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이 되돌아왔다. 모든 것을 결정하지 못했다. 지바고와 라라는 앞길이 막막했다. 첫눈이라도 내릴 듯싶은 춥고 우중충한 날씨였 다. 길게 뻗은 거리에서보다도 한결 넓게 바라보이는 네거리 위의 하늘은 벌써 겨울빛이 감 돌았다. 지바고가 집에 돌아왔을 때, 시모치까가 라라를 찾아왔다. 두 사람의 대화는 시모치까가 라라에게 무슨 강의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바고는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가 않았고 또 잠시 혼자 있고 싶어서 옆방으로 들어갔다. 사잇문이 반쯤 열려 있어서, 천장에서 드리운 포장 너머로 여자들의 목소리가 뚜렷이 들려 왔다. "난 바느질을 할 테니 어서 얘기해주어요, 시모치까. 저는 학교 시절에 역사와 철학 강의 를 들었어요. 당신의 사고 방식이 퍽이나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당신의 얘길 듣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아요. 요즘은 여러 가지 걱정거리가 많아서 밤에 잠도 제데 로 못 잔답니다. 우리들에게 최악의 사태가 닥쳐왔을때, 카첸카에게 재난이 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머니로서의 의무가 아니겠어요. 그애를 위한 대책을 심각하게 강구해야 한 텐 데, 좀 처럼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요. 내가 이토록 무력한가 생각하면 서글퍼지는군요. 그런데 당신 얘기를 듣고 있으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거든요. 게다가 오늘은 금세 눈이라 도 내릴 것만 같아요. 눈 내리는 날에 현명한 이야기를 오래 들을 수 있다는 건 즐거운 일 이에요. 눈이 내릴 때, 곁눈으로 창문을 바라보면 누군가 정원으로 우리집에 찾아올 것만 같 아요. 어서 시작하세요, 시모치까." "지난번에 어디까지 얘기했죠?" 라라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지바고는 듣지 못했다. 그는 그녀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문화'니 '시대'니 하는 말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딴 뜻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 어서 혼동하기 쉬우니까 난 그런 말은 쓰지 않기로 하겠어요. 그 대신에 다른 표현으로 바 꾸기로 하죠. 인간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요-신(神)과 사업의 두 부분으로. 인간 정신의 발달은 오랜 기간을 통해 계속된 개개의 사업에 의하여 구분되지요. 하나의 사업은 몇 세대 에 걸쳐 계속되었고,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사업이 이루어지곤 했어요. 이러한 사업이 이집 트였고. 그리스였고, 성서의 예언자들이 말한 신(神)의 인지(認知)였어요. 시대로서 본다면 최후의 시대에 해당되어 아직도 다른 시대와 교체되지 않았드며, 영감을 받은 모든 사람들 에 의해 현재 달성되고 있는 사업-그것이 곧 그리스도교지요. 그리스도교가 이 세상에 가져다준 전혀 새로운 것-당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더 간단하게, 더 직접적으로 신선하게 전하기 위해 기도서(祈禱書)의 구절들을 잠깐 인용하 기로 하겠어요. 송시(頌詩)의 대부분은 구약과 신약을 한데다 결부시킨 것들이죠. 예를 들어 구약에 나오 는 타지 않는 수풀,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탈출, 불가마 속의 젊은이들, 고래 뱃속 에 들어간 이오나 등의 개념은, 신약의 성모 수태(聖母受胎)와 그리스도 부활 등의 개념과 결부되어 있어요. 이렇게 자꾸 결부시키고 있기 때문에 구약, 신약의 독특한 성격과 양자의 차이점이 분명 히 나타나게 되지요. 송시의 여러 곳에서 마리아의 처녀 잉태와 유태인의 홍해(紅海)를 건너간 것을 비유하는 대목이 있어요. 예를 들면 '흑해(黑海)는 이따금 처녀 신부(新婦)와도 흡사했다'는 송시가 '이 스라엘 백성이 건너간 후 바다즌 이전처럼 다시 건너갈 수 없는 상태로 되돌아간 것처럼, 주님을 낳으신 성모 마리아는 여전히 순결했다는 뜻이지요. 이 두 가지 사실은 모두가 초자 연적인 것이예요. 둘 다 기적으로 보아야 해요. 하나는 고대의 원시 시대이고 또 하나는 로 마 이후의 새로운 시대인데, 그렇다면 이 상이한 두 시대에 각각 어떤 것을 기적이라고 봤 을까요? 첫째 경우는, 민주의 지도자인 모세가 마술 지팡이를 휘두르며 명령하기 무섭게 바 다가 두 쪽으로 갈라지고, 민족 전체의 많은 사람이 건너가고, 마지막 사람이 건너가자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뒤쫓던 이집트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지요. 이런 광경은 고대 정신 에 어울리는거예요. 대자연, 마술사의 주문, 떼지어 움직이는 군중, 민중과 지도자 등 모든것 이 압도적으로 시각과 청각에 호소하고 있어요. 둘째 경우는, 고대 세계에선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일개 평범한 처녀가 조용히 남몰래 아 기를 낳지요-이 세상에 생명을, 삶의 기적을, 모든 사라므이 생명을, 후에 예수라고 불리게 된 '만인의 생명'을 부여한 거예요. 이 생명의 탄생은 혼인과는 관계 없는 것으로, 학자의 견 지에서 보더라도 비합법적인 것을 뿐더러 자연의 법칙에도 어긋나는 것이에요. 처녀는 인과 (因果)에 의해 아기를 낳은 것이 아니라 기적에 의해, 영감에 의해 아기를 낳았어요. 이 영 감이야말로 복음서가 평범한 것을 예외적인 것과 대립시키고, 평일을 축제일과 대립시키며, 온갖 강제를 배제하고 생명을 이룩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이 아니겠어요! 이 얼마나 큼 의의를 지닌 변화일까요! 고대 세계에서였다면 하잘것없는 이런 개인적인 사건이, 민족의 대이동(大移動)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게 되다니(그 이유는, 이러한 것은 하 늘에서 볼 때 하늘과 대치하여 평가해야 되면 유일하고 성스러운 울타리 안에서 성취되는 일이니까)! 이 세상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난 거에요. 로마가 끝나고 수(數)의 지배가 끝났지요. 무기 의 힘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삶을 강제당하던 시대는 끝나고, 지도자와 민중이라는 관계도 과거로 밀려나 버린 거예요. 그 대신에 개성과 자유의 전도(傳道)가 시작되었어요. 개개의 인간 생활이 끝없이 넓은 우 주에 충만되는 하나님의 시대가 도래한 거에요. 성모 수태제(聖母綬胎祭) 찬송가에 나오는 구절처럼, 아담은 신(神)이 되려는 과오를 범했지만 신이 될 수 없었고 이제는 오히려 아담 으로 하여금 신이 되게 하기 위해 신이 스스로 인간이 된 거예요.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다른 얘기를 좀 하겠어요. 근로자의 생활을 한다 거나, 모성(母性)을 보호한다거나, 금권(金權)과 투쟁하다거나 하는 점에서 본다면 오늘날의 혁명기는 영원히 남을 만한 업적을 달성한 비차는 시기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현재 떠 들고 있는 인생관이나 행복의 철학 따위는 제정신으로 말하는 것으로 믿기 어려워요. 우스 꽝스럽기 짝이 없는 고대 세계의 유물이라고나 할까요. 그들이 떠들어대는 지도자와 민중에 관한 미사 여구, 그것이 만약 인생을 뒷걸음질치게 하여 역사를 수천 년 전의 옛날로 환원 시킬 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를 태고적 유목 종족과 족장의 시대로 되돌아가게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예요.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에 관해 잠깐 이야기하지요. 이건 복음서의 대목이 아니라 성수 난 주일(聖受難週日)의 기도문에 있는 구절이지만-아마 화요일이나 수요일의 기도문일 거예 요. 하긴 당신도 알고 있을 테니까 다만 그 대목을 상기시킨다는 뜻에서 말씀드리겠어요. 아시다시피 슬라브어의 '스트라스치'라는 말은 원래가 '수난'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던 것 이에요. 주의 수난, '주 스스로 고난을 받는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또 이 말은 고래의 러시 아어 기도문에선 '악덕'이라든지 '정욕'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어요. 예를 들면 '내 영 혼, 짐승과도 같이 정욕에 사로잡혀'라든지 '낙원에서 쫓겨나면, 악덕을 가지고 되돌아오진 못한다'는 거예요. 아마 나는 타락해선지 모르지만, 정욕을 억제하고 금하는 이 사순절(四旬 節)의 기도문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조잡하고 단조로와서 종교 서적에 불가결한 시 적(詩的)인 요소가 없거든요. 필시 비곗덩어리처럼 뚱뚱한 신부(神父)가 썼을 거예요. 하지 만 시눕들이 계율대로 생활하지 않고 남을 속여서가 아니예요. 양심껏 사는 것도 무방한 일 이예요. 내가 문제로 생각하는 것은 기도문 자체의 내용이랑 말예요. 이러한 상심은 육체의 여러 약점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뚱뚱하거나 야윈 데에 지나치게 마음을 스고 있어요. 그건 오히려 반대예요. 무슨 불결하고 하잘것없이 부차적인 것을 터무니없이 치켜올린단 말예요. 얘기가 좀 빗나간 것 같군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까요. 내가 항상 의아하게 생각한 건 부활제 전야에 그리스도의 최후와 막달라 마리아를 상기시 킨 이유를 모르겠어요. 하지만 생명과 이별하는 순간에, 그리고 생명이 부활하기 직적에 생 명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데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것은 매우 적적하다고 생각해요. 그것 도 단도직입적으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거든요. 그것이 정말로 막달라 마리아인지, 또는 이집트의 마리아인지, 아니면 또 다른 마리아인 지, 거기에 대해선 의견이 구구하지만, 하여튼 마리아는 주님에게 이렇게 간청했어요. '내가 머리를 풀듯 내 죄를 풀어주시옵소서!'라고. 죄 사함을 갈망하고 깊이 뉘우치는 심정을 어쩌 면 이렇게도 잘 표현했을까요! 마치 손으로 풀듯이. 같은 날의 또 다른 찬송가에는 이와 비슷한 절규가 좀더 자세히 나타나 있어요. 이건 틀 림없는 막달라 마리아의 얘기지요. 마리아는 뜨렷이 자기의 과거를 뉘우치면서, 옛날의 고질적인 나쁜 버릇 때문에 밤마다 고민하던 것을 스스로 한탄하고있어요. '밤은 억제할 수 없는 음욕의 불길로 나를 불태우나 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자기 회오의 눈물을 받아들이마시고 마음속으로부터의 탄식에 귀 를 기울여주기를 애원합니다. '거룩하신 당신 발에 입을 맞추고 내 머리털로 그 발을 닦으 로. 그러면 낙워느이 이브는 낮에 귀를 찢을 듯한 소음이 두려워 숨게 되리라.' 그리하여 머 리카라그이 얘기가 끝난 뒤 느닷없이 '나의 죄가 많으며 그대 운명은 끝없을 것이니라'하고 마리아의 입을 통해 말했다. 이 얼마나 친말한 표현일까요! 신(神)과ㅓ 생명, 신과 개인, 신 과 여자는 어디까지나 대등합니다!" 18 지바고는 지쳐서 역에서 돌아왔다. 그날은 열흘 만에 한 번씩 있는 공휴일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아흐레 동안의 수면 부족을 보충할 셈으로 늘어지게 낮잠을 잤을 것이다. 그는 소파 에 몸을 기대고 앉아서 이따금 졸기도 하고 시모치까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물론 저 소린 모두 니콜라이 아저씨의 사상이지만, 꽤 재치 있고 현명한 여자야!' 그는 생각했다. 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라라와 시모치까가 소곤고리는 말소리가 바 로 옆방처럼 정원에서 들리고 있었다. 날씨가 짜푸둥했으며 정원에는 어둠이 깃들였다. 정원으로 가치 두 마리가 날아오더니 날 개를 바람결에 가볍게 푸덕이며 앉을 곳을 찾았다. 이윽고 쓰레기통 위에 앉았으나, 이내 울 타리로 자리를 옮기고 다시 땅위에 내려앉아 뜰안을 걷기 시작했다. '까치는 눈 올 징조야.' 지바고는 생각했다. 그때 커튼 너머에서 시모치까가 라라에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까치는 소식을 전한대요. 댁에 손님이 오시든지 편지가 올 거예요." 얼마 후 지바고가 최근에 고쳐 놓았던 문의 초인종이 울렸다. 라라가 현관문을 열려고 급 히 달려나갔다. 문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시모치까의 언니 글라피라툰체바가 찾아온 것 이었다. "시모치까를 찾으러 오셨나요?" 라라가 물었다. "여기 와 있어요." "아니, 그 애 때문에 온 건 아녜요. 하지만 지금 집에 돌아가겠다면 함께 가지요. 실은 당 신의 남자 친구에게 편지를 전하러 왔어요. 내가 우체국에 근무했던 덕택에 이 편지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참 다행이에요. 그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바람에 다섯 달 전에 모스크바에서 부친 편지가 이제야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겠어요. 언젠가 이발을 해드 린 일이 있어서 나는 그분을 알고 있거든여." 퇴색된 겉봉은 개봉되어 있었고, 여러 장 되는 길 편지는 온통 구겨져 있었다. 토냐의 편 지였다. 지바고는 그 편지를 라라가 자기가 지금 라라의 집에 있다는 것을 의식햇으나, 더 읽어나감에 따라 그것마저 염두에 없었다. 시모치까가 돌아가면서 인사를 하는데도 그는 기 계적으로 인사에 대답햇을 뿐이었다. 그는 자기가 어디 있으며, 주위에 누가 있는지조차 완 전히 잊고 말았다. 토냐의 편지는 다음과 같았다. 유라, 우리들 사이에 딸이 생겼다는 걸 알고 계신지요? 돌아가신 당신 어머니 마리아 미콜라예브나를 기억하는 뜻으로 미샤라고 이름지었지요. 그런데 이번에 아버님을 비롯한 우리 가족은 국외 추방 명령을 받았어요. 우리와 함께 추방되는 사람 중에는 몇 명의 저명한 사회 활동가, 입헌 민주당원과 우익(右翼) 사회주의자인 대학 교수들-밀리구노프, 키제베르체, 쿠스코 바, 그리고 나의 숙부인 니콜라이 그로메코가 포함되어 있어요. 불행한 것은, 당신을 빼놓고 우리들만 추방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런 무서운 세상에 비록 추방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관대한 처분을 받게 된 것만도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하겠어요. 이보다 훨씬 가혹한 처분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당신도 여기 계셨다면 함께 떠날 수 있었을 텐데. 지금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이 편지는 라라 안치포프 의 주소로 보내겠어요. 그녀가 혹시 당신을 찾으면 꼭 전해줄 거라고 생각해요. 하나님 덕분에 후에라도 당신이 살 아서 돌아올 경우, 우리 가족의 한 사람으로 당신도 과연 출국 허가를 받을 수 있겠는지 그게 걱정이예요. 나는 당 신이 꼭 살아 계셔서 언제든 모스크바에 나타나실 것이라고 확신해요. 내 마음속의 사랑의 목소리가 그렇게 일러 준답니다. 당신이 나타나셨을 때 러시아의 사정이 완화되면, 당신 자신의 노력으로 해외 여행 허가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때는 우리 가족도 다시 함께 모여 살 수 있게되겠지요. 지금 이렇게 쓰기만 하면서도 그런 꿈 같은 행복 이 돠연 실현될 것이지는 전혀 믿을 수가 없군요. 무엇보다 슬픈것은,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지 그 까닭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어요. 나의 결점을 모두 들추어 내보기도 하고, 우리들의 부부 생활 을 돌이켜보기도 하면서 이런 불행을 초래한 원인을 발견하려고 애써 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아무래도 당신은 나를 오해하고 게신 것 같아요. 비뚤어진 거울에다 나를 비춰보고 계신 것만 같아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아아,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그걸 당신이 아신다면! 나는 사랑해요-당신 의 모든 특이한 것을-장정일 수 있는 특이한 점도, 결점일 수 있는 특이한 점도. 그것들은 서로 하나의 비범한 결 합을 이루어 미남자라곤 할 수 없는 당신의 용모에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결핍 되어 있는 의지력을 보충해 주고 있는 당신의 그 재능과 지혜 또한 내게는 귀중한 것이예요. 나는 당신보다 더 훌 륭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 여보, 당신은 내가 말하는 듯을 아시지요? 혹시 냉혹할 슬픈 사실을 알고 당신이 나한테 그렇게 소중한 존재가 아니며 나에게 당신이 필요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리라 생각되시겠지요. 말하자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이 얼마나 처참하고 죄스런 일인가 두려워, 그런 생각을 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나도 당신도 결코 그 것을 알 수는 없어요. 나 자신의 마음이 그것을 감추고 있어요.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살인과 같기 때문이예요. 난 결코 그런 타격을 기할 힘이 없어요. 아직 확실히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우린 파리로 가게 될 것 같아요. 그곳은 당신이 어릴 때 가본 곳이고, 우리 아버님과 숙부님이 공부하신 곳이기도 라지요. 싸샤도 잘 생겼다고 할 수 없어도 이제는 크고 튼튼하게 자랐답니 다. 당신 얘기가 나오면 언제나 울곤 한답니다. 눈믈이 가슴을 파고들어와 이젠 더 이상 쓸 기력도 없어요.그럼 안 녕! 앞으로 끝없이 계속될 고나느이 가시밭길에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당신을 탓하거나 나무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어요. 이것만은 알아주세요. 만약 당신만 좋으시다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주세요. 그렇게 무섭고 우리의 숙명적인 고장 우랄 지방을 떠나기 전에,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라라와 가까이 사귈 기회를 가졌어요. 내가 괴로울 때 언제나 옆에 있어 주었고, 해산 때도 여러 가지 도와주었어요. 감사의 인사를 전 해주세요. 솔직이 말씀드려서 아주 좋은 분이었어요. 그러나 나와는 정반대 되는 사람이더군요. 나는 인생을 보다 단순하게 살면서 항상 곧은 길만 걸으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녀는 인생을 복잡하게 살면서 변화 있는 길을 걸으려고 태어난 사람인 것 같아요. 이젠 펜을 놓아야겠습니다. 편지를 가지러 왔어요. 짐도 빨리 꾸려야겠구요. 아아, 유라, 나의 귀중한 남편 유라, 나는 어찌하면 좋을까요? 우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우린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걸까요? 만나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를 당신은 아시나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네? 옆에서 재촉이 성화 같습니다. 마치 형 장으로 나를 끌고 가려고 재촉하는 것 같군요. 유라! 유라! 지바고는 말할 수 없는 비탁과 고뇌 때문에 눈물조차 말라버린 빛 잃은 눈을 편지에서 떼 었다. 주위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창 밖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눈송이를 점점 더 빨리 점점 더 많이 실어다 퍼부 었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고 서두르기나 하듯이. 지바고의 시야에 명멸되는 것은 건조한 별 부스러기 같은 누송이가 아니라 검고 조그만 글씨로 빽빽이 메운 흰 지면이었다. 지바고는 갑자기 신음 소리를 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기절하는가 보다 생각하고, 두세 걸음 비틀거리며 소파 쪽으로 다가가는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제 14장 다시 바르이키노르 1 겨울로 접어들었다. 함박눈이 쏟아졌다. 지바고는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에서 라 라를 만났다. "코마롭스키가 왔어요." 그를 맞으러 나온 라라가 목쉰 것 같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들 은 현관에 그대로 서 있었다. 라라는 한바탕 얻어맞은 사람처럼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어디로? 누구한테? 지금 여기 와 있다는 거요?" "아녜요. 아침에 왔었는데,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했어요. 이제 곧 올 거예요. 당신을 좀 만나야겠다더군요." "무슨 용문데?" "그 사람의 말은 잘 알 수가 없었어요. 극동 지방으로 가는 길에 만나고 싶어서 일부러 유라친에 들렀대요. 당신과 파샤의 일 때문이라고 했어요. 우리 세 사람, 당신과 나와 파샤 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자기 말대로 하면 살아나갈 수가 있다는 거예요." "난 나가겠소.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지도 않아요." 라라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지바고의 다리를 끌어 안고 머리를 그 에게 기댔으나, 그는 억지로 그녀를 잡아 일어켰다. "저를 보아서라도 여기 있어 주어요. 그 사람과 단둘이 만나는 게 무서운 건 아니지만 당 신이 없으면 난 괴로워요. 그보다도 그 사람은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이니까 정말로 무슨 좋은 수가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당신이 그 사람을 싫어하시는 건 당연해요. 그렇지만 제발 꾹 참고 나와 함께 있어 주어요." "왜 이러는 거요? 당신, 마음을 진정해요. 무릎을 꿇고 이게 뭐요? 일어나요. 염려할 것 없소. 그자는 한평생 당신을 괴롭혀왔지만, 문제없어요. 내가 옆에 붙어 있으니까. 당신이 나 한테 한마디만 말해 주면 난 그자를 죽여버릴 수도 있어요." 반 시간쯤 지나 밤이 되어 밖은 캄캄했다. 마룻바닥에 쥐구멍을 모조리 막아버린 지도 벌 썬 반 년이 되었다. 지바고는 새로 구멍이 생기기가 무섭게 이내 틀어막곤 했다. 털이 북슥 북슥한 큰 고양이도 길렀다. 고양이는 꼼짝 않고 앉아서 수수께끼 같은 눈을 번득이고 있었 다. 쥐들이 아주 없어져버린 것은 아니지만 조심스러워졌다. 코마롭스키에게 대접하려고 라라는 배급받은 검은 방을 잘라서 삶은 감자를 곁들여 접시 에 담아 식탁에 놓았다. 집 주인이 사용하던 식당인, 지금 그들이 쓰고 있는 방에 손님을 맞 기로 했다. 커다란 참나무 식탁과 역시 참나무로 만든 커다란 찬장이 놓여 있었다. 식탁 위 에는 피마자 기름병에 꽂은 심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지바고의 책상용 등잔불이었다. 코마롭스키는 온몸에 눈은 뒤집어쓰고 12월의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슈바와 모자 그리고 덧신에서 큰 눈덩이가 떨어져서 마룻바닥에 물이 되었다. 예전엔 기르지도 않았던 콧수염과 턱수염에 젖은 눈이 엉겨붙어서 흡사 어릿광대와 같았다. 잘 손질한 양복 상의와 주름이 빳 빳이 선 줄무늬 바지를 입고 있었다. 코마롭스키는 인사말은 하기 전에 우선 주머니빗을 꺼 내더니 젖어 헝클어진 머리에 빗질을 하고 손수건으로 수염을 깨끗이 닦았다. 그러고 나서 아무 말 없이 의미심장한 동작으로 왼손을 지바고에게 오른손을 라라에게 동시에 내밀었다. "우린 이미 구면이나 다름없지요"하고 지바고에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나는 당신 부친과 가까운 사이였어요. 내 팔에 안겨 숨을 거두셨지요. 아무리 보아도 아버지를 닮은 데가 없는 것 같군요. 아버지는 참으로 호탕한 분이었지요.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무엇이든 꼭 해내고 야 말았으니가. 당신은 모친을 많이 닮은 것 같군. 부드럽고 조용한 부인이었지요." "라라가 당신이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하기에 일단 만나기로 했습니다. 나 자신으 로서는 당신과 얘기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용무가 있거든 어서 말씀하시기 바랍니 다." "그래 그 동안 안녀하십니까!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지나치게 허 물없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분은 참 잘 어울립니다. 아니, 지극히 다정한 사이인 것같이 보이는군요." "그만두시오. 당신한테 관계 없는 말은 하지 마시오. 구태여 당신더러 알아달라는 건 아니 니까. 잊어버리신 것 같군요." "그렇게 대번에 흥분하면 골란합니다. 젊은 양반, 그러고 보니 당신은 아무래도 부친을 닮 은 것 같군요. 그분도 어지간히 급한 성미였으니까. 유감스럽게도 두 분은 너무나 세상 물정 을 모르는 어린앱니다, 어린애예요. 난 여기 온 지가 이틀도 채 안 됐지만, 당신네들에 대해 모든 걸 다 알았어요. 아마 당신네들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당신네들은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지만, 지금 두 분은 그야말로 낭떠러지 끝을 걷고 있는 거나 다름없단 말입니다. 어떻든 위험을 피할 방도를 취하지 않으면 자유는 고사하고 목숨까지도 잃고 맙 니다. 공산주의 인간형(人間型)이라는 것이 있어요. 이런 형에 잘 들어맞는 사람은 드물지만, 지 바고 선생, 당신만큼 이 생활 양식이나 사고방식을 배척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그들을 자극하지요? 당신의 존재 그 자체가 공산주의 세계를 우롱하고 모독한다고 할 수 있어요. 더욱이 당신의 사상을 아는 사람이 없다면 모르지만, 지금은 여기 에 모스크바에서 온 영향력 잇는 사람들이 있어요. 당신들은 이 고장 데미스(법과 질서와 정의의 여신)의 고승(高僧)들의 눈 밖에 나 있어요. 안치포프와 치베르진 동무 같은 사람들 이 라라와 당신을 덮치려고 잔뜩 벼르고 있다는 걸 모르느냐는 말입니다. 당신은 남자니까 자기 목숨을 어떻게 다르든 그건 당신 자신의 신성한 권리지요. 그러나 라라는 자유스런 입장은 아닙니다. 한 아이의 어머니니까. 아이의 생명, 아이의 일생의 운명 이 그녀의 손에 달렸어요. 경솔한 행위는 있을 수 없어요. 아까 아침에 와서 라라에게 이 점을 입이 닳도록 설득했지만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더 군요. 당신이 거들어주시오. 당신의 말이라면 들을는지 모르니까요. 라라에겐 카첸카의 안정 을 무시할 권리가 없지 않습니까. 나는 결코 자기의 의견을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아닙니 다. 더욱이 가가운 사람한테는. 라라가 당신으 뜻을 받아들이건, 안 받아들이건 그녀의 마음 이지요. 그 밖에 내가 할 말이라곤 전혀 없어요. 그런데 나는 당신의 생각을 조금도 알 수가 없어요. 아니, 그러고보니까, 당신은 부친을 너무나 닮았군 그래. 그분도 당신처럼 외고집이었어. 그럼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하지만 꽤 복잡한 이야기니까 참고 끝까지 들어주어요. 위에서는 커다란 개혁을 준비하고 있어요. 자, 잠시 기다려주어요. 내가 꽤 믿을만한 데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이제는 좀더 민주주의 노선으로 옮겨서 법질서에 양보가 있을 것 같 아요. 이제 곧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징벌 부대는 폐지되겠지만 오히려 더 난폭하게 되어서, 자기가 잃었던 것을 되찾으려고 서두르게 될 겁니다. 당신을 제거한다는 것은 이미 결정된 사실입니다. 지바고 선생,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어요. 이건 농담이 아닙니다. 이 눈으로 보았으니가, 믿지 않아 도 좋아요. 당신이 살 수 있는 궁리나 해요. 더 늦기 전에. 이것은 서론이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지금 태평양 연안의 연해주(沿海州)에는 쓰러 진 임시 정부와 해산된 제헌회의(制憲會議)에 계속 충성을 다하고 있는 정치 세력이 집결되 어 있습니다. 전직 국회 의원, 사회 활동가, 전 지방자치단체 중진이었던 사람들, 실업가들이 지요. 의용군의 장군들도 거기서 휘하에 남은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소비에트 정권은 이 극동 공화국의 탄생을 묵인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변경 지방에 그런 것이 생기면 적색(赤色) 시베리와와 외계(外界) 사이에 일종의 완충 지대 구실을 할 것이라 는 점에서 소비에트 정권에게도 유리할 테니까요. 이 광화국의 정부는 우선 연립의 형식을 취할 겁니다. 모스크바 측의 요구에 딸라 각료 자리의 과반수는 공사주의자들에게 안배하도 록 예정되어 있어요. 이렇게 만들어놓으면 언제든지 기회를 보아 쿠테타로써 공화국을 수중 에 넣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지요. 뻔한 속셈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남은 시간을 여하히 활용하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나는 혁명 전에 아르하로프 형제나 메르클로프, 그 밖에도 블라디보스토크의 상사와 은행 관계 일을 보아 준 적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나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은 비밀리 에, 반은 소비에트 정부의 묵인하에 조각(組閣) 본부에서 사람이 찾아와 나한테 극동 공화극 정부의 법부장관 자리를 주겠다는 겁니다. 나는 쾌히 승낙하고 지금 그리로 가는 길입니다. 이건 소비에트 정부측에서도 다 알고 묵인하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공개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라라와 당신을 함게 데리고 갈 수 있는 입장에 있단 말입니다. 거기 가기만 하면 당신은 얼마든지 바다를 건너 가족이 있는 것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가족이 추방되었 다는 소식은 물로 알고 있겠지요? 큰 소동이 났었지요. 지금도 모스크바는 떠들썩하답니다. 라라한테는 스트렐리니코프를 구출하겠다는 것을 약속했습니다. 나는 합법적인 독립 정부의 일원으로서 동부 시베리아에서 스크렐리니코프를 찾아내어 우리들의 공화국으로 넘어로게 하도록 노력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탈출해 오지 못하면, 그때는 이족에서 억류하 고 있는 사람 중에서 모스크바 중앙 정권에 유용한 인물과 교환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 니다." 라라는 이야기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 의아스러운 얼굴로 듣고만 있었으나, 코마 롭스키가 지바고와 스크렐리니코프의 안정을 보장하고 나서자 갑자기 긴장하여 얼굴에 홍조 를 띄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유라, 이 계획이 당신과 파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젠 아셨죠?" "이봐요, 라라, 그렇게 간단히 믿어버리면 안 돼요. 아직은 덜 익은 계획에 불과하니까. 물 론 나도 코마롭스키 ㅆ가 의도적으로 우리를 속이려 든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하지만 아직 은 공중누각이나 다름없잖소! 그보다도 코마롭스키 씨, 나의 신상에 대해 염려해 주신 건 고맙지만, 설마 내가 그걸 원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겟죠? 스트렐리니코프에 관해서는 라 라가 알아서 결정할 문제입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지요? 지금은 우리가 코마롭스키와 함께 갈 것인가 안 갈 것인가, 그것 만 결정하면 그만이에요. 당신이 안 가시면 나도 안 간다는 건 잘 아시지요." 코마롭스키는 지바고가 진료소에서 가져온 물에 희석한 알콜을 자주 마시면서 감자를 씹 고 있었으나 차츰 취기가 도는 모양이었다. 2 밤도 꽤 깊었다. 이따금 심지 끄트머리를 떼어버리면 등잔불이 한순간 방안을 환히 밝게 비췄다가는 다시 어두컴컴해지곤 했다. 지바고와 라라는 졸음이 왔고 둘이서만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코마롭시키는 좀처럼 돌아가려는 기색도 없었다. 그의 존재는 커다란 참나무 찬장 과 창밖의 차가운 추위와 어둠과 함께 방안을 무섭게 짓눌렀다. 코마롭스키는 취기가 감도는 눈을 거슴츠레하게 뜨고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멀리 한곳을 응시하면서, 혀꼬부라진 소리로 같은 말을 여러 번 중얼거렸다. 그는 극동 공화국 얘기를 끈 질기게 되씹다가 이번엔 몽고의 정치적 의의를 길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바고와 라라는 잘 듣지도 않았지만, 무슨 까닭에 몽고에 대한 화제로 탈선하게 되었는지 몰랐다. 그따위 아 무런 상관도 없는 화제는 오히려 하품만 하게했다. "시베리아는 이를테면 신천지인 아메리카 대륙과 마찬가지요. 무진장한 가능성을 내포하 고 있어요. 시베리아는 위대한 러시아의 미래의 요람이며, 러시아의 민주화와 번영과 정치적 부활의 기둥입니다. 그러한 미래에 몽고는 그보다 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 위대 한 극동의 인방(隣邦)인 외몽고 말입니다. 당신은 이것에 대해 아십니까?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뻔뻔스럽게 하품을 하거나 눈을 깜박이고 있지만, 미개발된 지하자원을 무한히 간직하고 있는 1백 50만 평방 베르스타의 외몽고는 유사(有史) 이전의 처녀지 그대 로 입니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아메리카는 이 나라에 탐욕의 손을 뼏쳐, 모든 경쟁국이 공 인하고 있는 우리 러시아의권익을 짓밟고 이 지구의 먼 한 모퉁이에 세력권을 부활하려는 미끼로 삼고 있어요. 중국은 몽고의 낙후된 봉건적 신권제(神權制)를 이용하여 라마승(僧)이 나 후트후트(몽고의 고승)를 움직이고 있어요. 적색 공산 러시아는 몽고 봉기인혁명동맹(蜂 起人革命同盟)의 하므질수와 제휴하고 있습니다. 나는 자유 선거에 의한 후룰루따이(몽고 회 의)가 통치하는 진실한 몽고의 번영을 바랍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하고 싶어요. 몽고의 국경을 넘으면 마치 새처럼 자유스럽게 되기를!" 아무런 흥미도 없는 화제를 끝없이 늘어놓는 바람에 라라는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코마 롭스키에게 악수를 청하며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밤이 늦었습니다. 돌아가시는 게 좋겠군요. 나도 이젠 자야겠어요." "이건 손님 대접이 너무하군, 이 시각에 나를 밖으로 몰아내다니. 낯선 도시라 난 길도 잘 모르잖소." "그럼 뭣 때문에 그렇게 오래 앉아 계셧죠? 아무도 붙잡지 않았어요." "왜 이렇게 나한테 심하게 대하지요? 숙소를 정했는지, 인사치레로라도 물어야 할 게 아 니오?" "내가 알 게 뭐예요.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죠. 여기서 주무실 생각이라면 우리가 자는 방은 안 돼요. 다른 방은 쥐 때문에 잘 수 없을 거예요." "쥐 같은 건 무섭지 않소." "그럼 맘대로 하세요." 3 "무슨 일이 있었소, 라라? 간밤엔 한잠도 자지 않더니, 오늘 종일 식사도 입에 대지 않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방안을 서성거리고만 있으니 어쩐 일이오? 뭐가 그렇게 걱정되어요? 걱 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소." "병원 수위 이조트가 또 다녀갔어요. 이 집 세탁부와 눈이 맞아 드나들고 있어요. 나한테 잠깐 들러서 위로를 하면서 무서운 비밀을 알려주었어요. 당신이 금명간 잡혀갈 거라는 거 예요. 그 다음은 저의 차례고요. 어디서 들은 말이냐고 물으니까, 폴칸(러시아 전설에 나오 는 반인반견{半人半犬}의 괴물)에서 들었다는 거에요. 폴칸이라는 건 이스폴콤(집행 위원회) 을 두고 하는 말인가 봐요." 라라와 지바고는 한바탕 웃었다. "그 말이 맞았어. 위험이 닥쳐오고 있는 건 사실이오. 한시 바삐 자취를 감춰야겠는데, 어 디로 가느냐가 문제요. 모스크바로 도망칠 수는 없고, 남들이 눈치챌 테니까. 남모르게 슬그 머니 없어져버려야 할 텐데. 그렇군, 당신의 제안에 따르기로 합시다. 바프이키노로 가잔 말 이오. 보름 동안이나 한 달 가량이라고 거기 숨어 있는 게 좋겠소." "고마와요, 유라, 정말 고마워요. 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당신이 바르이키노에 가고 싶 지 않다는 건 나도 잘 알아요. 당신의 집으로 가서 산다는 건 당신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일 테니까. 당신의 가족이 없는 텅 빈 방은 보기에도 견딜 수가 없을 거예요. 잘 알아요. 남의 괴로움에 행복을 심으려는 건 너무나 크고 신성한 것을 짓밟게 되는 거예요. 난 당신에게 그런 희생을 바랄 순 없어요. 게다가 당신 집은 너무나 파괴돼서 살 수 있게 하려면 큰 일 이예요. 그래서 난 그 집이 아니라 클리츠인네가 살던 집을 생각하고 말했던 거예요." "하긴 그래. 그런 데까지 신경을 써주어서 고맙소. 그런데, 잠깐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 는데, 잊었어. 코마롭스키는 어디 있지요? 아직도 여기 있어요, 아니면 벌써 떠났어요? 그자 와 다투고 집에서 쫓아낸 후로는 전혀 소식을 듣지 못했어." "나도 전혀 모르겠어요. 알아서 뭣해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그렇긴 하지만, 내 경우와 당신 경우는 그자의제안에 대한 태도가 서로 다를 수 있지 않 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오. 나와 당신은 입장이 다르니까. 당신에겐 아이가 있 는데, 당신은 끝까지 나와 함께 있지 않소. 당신이 끝까지 나와 함께 행동하려는 그 심정은 알고 있지만, 사실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없어요. 하지만 좋아요. 바르이키노 얘기나 합시다. 비축해 놓은 식량도 없고 힘도 희망도 없는데, 엄동이 몰아닥칠 황막한 무인지경으로 찾아가다니, 고르고 골라서 하는 미친 짓이야. 하지만 미친 짓밖에 우리가 할 일이 남지 않았다면 그 짓이라고 해야지. 우리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여봅시다. 삼제바토프한테 부탁해서 말을 빌어 봅시다. 그 사람이나 그 사람 밑의 암매상 한테 밀가루와 감자도 좀 꾸지요. 도저히 갚을 재간은 없지만. 삼제바토프에게는 말이 도로 필요할 때까지 바르이키노에 오지 않도록 부탁해야겠어. 얼마 동안 우리 둘이서만 있고 싶 으니까. 하여튼 가기로 합시다. 그리고 절약해서 쓰면 1년은 쓸 장작을 1주일 동안에 때 버 립시다. 아니, 내가 또 실없는 소릴 지껄였군. 용서하시요, 입버릇이 되어서. 어리석은 감정은 빼 버려야지! 그런데 실은 지금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있어요. 불길한 말이지만, 죽음의 사자(使者)가 우리의 문을 노크하고 있단 말이오. 우리들의 생명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 소. 그 짧은 기간이 될 수 있는 한 보람 있게 보내야 하지 않겠소. 그 기간은 인생에 이별을 고하는 데 보냅시다. 영원한 이별을 앞둔 마지막 밀회로. 우리가 귀중하게 여겨온 모든 것에 이별을 고하고, 우리에게 생활의 꿈을 주게 하고 양심을 가르쳐준 사상에 이별을 고하고, 희 망에 이별을 고하고, 우리 서로 이별의 말을 주고받읍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서로 밤의 밀 어(密語)를 속삭입시다. 나의 은말한 천사인 당신이 전쟁과 동란의 하늘 밑에서 내 인생의 종막에 나와 함께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오.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아직 어렸을 때, 평화로운 하늘 아래서 내 인생의 시발점에 나와 함께 있었으니까. 당싱은, 그날 밤 커피색 제복을 입은 여학교 졸업반 학생이, 여관방의 어둠 속에 있었어 요. 지금도 당신은 그때와 조금도 변한 데가 없소. 지금처럼 그때도 놀랍게도 아룸다웠어. 그때 당신이 나한테 던진 그 매혹적인 색깔, 그 어둑어둑한 빛과 사라져가는 소리가 후에 나의 전존재에 배어들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었어. 나는 이따금 그 마 법의 힘을 알아내려고 고민해왔었지. 여학교 제복을 입은 당신이 방안의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나타났을 때, 당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과 함께 깨달았던 거요-이 연약하고 가냘픈 몸매의 소녀는, 이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여자다운 모든점을 전기처럼 극한까지 내포하 고 있었어. 만약에 다가가서 대는 순간에 눈부신 불꽃이 일어나 방안을 대낮처럼 밝히고, 나 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거나 한평생 억제할 수 없는 연모와 애수의 자력에 걸려들고 말리라 생각했어. 나는 쏟아지는 눈믈을 억제하지 못하고 가슴에 뜨거운 것을 느끼며 울었어요. 그 리고 나는 이렇게 스스로 묻기도 했소-여성을 사랑하고 여성의 전파를 흡수하는 것이 이토 록 괴로운 것이라면, 그 전파를 발하여 사랑에 눈뜨게 하는 자신은 백 배 더 괴로울 게 아 닌가. 그래 드디어 고백하고 말았어. 미칠 것만 같았어. 그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어." 라라는 옷을 입은 채 침대 한쪽 끝에 누워 있었다. 지바고는 그 옆 의자에 앉아서 이따금 입을 다물었다가는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 얘기를 계속하곤 했다. 라라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입을 반쯤 벌리 채 지바고를 쳐다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 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지바고를 꼭 껴안고 속삭였다. "유라! 유로치까! 당신은 정말 총명한 분이예요! 무엇이든지 다 알아맞히는군요! 유라, 당 신은 나를 지키는 요새(要塞)이며 의지한 피난처예요. 아아, 하나님, 나의 모험을 용서해주십 시오! 유라, 난 너무나 행복해요! 우리 가요, 바르이키노로!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 이 있어요. 바르이키노에 가서 말씀드리겠어요." 지바고는 라라가 임신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확실하지는 않지만 일단 수긍하듯이 말했다. "알겠어요." 4 우중충한 잿빛 겨울날 아침에 그들은 유라친을 떠났다. 평일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용건 을 안고 거리를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아는 사람과 자주 만나게 되었다. 네거리에 있는 급 수장에는 집에 우물을 가지지 않은 주부들이 물통과 물지게를 옆에 놓고 줄지어 늘어서 있 었다. 삼제바토프한테서 얻은 갈색 마링 자꾸만 내달리려는 것을 지바고는 고삐를 당기며 조심스럽게 주부들의 대열을 우회했다. 물통에서 흐른 물이 길바닥에 얼어붙어 썰매가 자꾸 미끄러져 인도 쪽으로 쏠리며 가로등과 경계석에 눈받이를 부딪쳤다. 전속력을 내어 썰매를 달리던 도중, 인도를 걸어가던 삼제바토프를 만났으나 본체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한참을 달리다가 이번엔 코마롭스키가 걸어가는 것을 보았으나, 그 가 유라친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 인사고 건네지 않고 지나쳐버렸다. 글라피라 툰체바가 맞은편 인도에서 소리쳤다. "어제 떠났다고들 하더니 헛소문이었군. 감자 사러가는 길이오?" 그러고는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는 시늉을 하고는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시모치까를 보았을 때는 썰매를 멈추려 했으나 공료롭게도 비탈길이어서 멈춰 서지를 못 했다. 그러지 않아도 내달리려는 말의 고삐를 힘껏 당겨야 했다. 시모치까는 두세 장의 목도 리를 온몸에 감고 있어서, 마치 통나무처럼 보였다. 뻣뻣한 걸음으로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썰매까지 다가와서 이별의 인사를 했다. "돌아오시면 그때 또 얘기합시다, 지바고 선생." 마침내 시내를 벗어났다. 지바고는 겨울에도 이 길을 다녔으나 기억에 남는 것은 여름 풍 경뿐이어서 무척 생소한 느낌이었다. 식량 주머니와 그밖의 짐들은 썰매 앞쪽의 건초더미에 깊이 넣고 단단히 묶어놓았다. 지바고는 이 고장 사람들이 하듯이 널찍한 썰매 바닥에 무릎 을 세우거나, 썰매 가에 옆으로 앉아 삼제바토프한테서 빈장화를 신은 발을 밖으로 늘어뜨 린 자세로 말을 몰았다. 오후가 되고 해질 무렵까지는 꽤 시간이 있었으나, 어느덧 겨울 해가 져서 어둑어둑해지 자 지바고는 갈색 말에 연방 채찍질을 했다. 말은 쏜살같이 달렸다. 썰매는 차바퀴나 썰매에 깊게 패인 눈길 위를 조각배처럼 위아래로 움직이며 떠서 가는 것 같았다. 카첸카와 라라는 슈바를 입어서 움직이기 어려웠다. 길이 옆으로 기울거나 깊이 패인 곳 에서는 썰매 한쪽으로 데굴데굴 굴러서 건초 속으로 파묻히곤 했다. 그러자 그들은 비명 소 리를 지르거나 뱃가죽이 찢어지듯 웃어댔다. 이따금 지바고는 일부러 썰매 한쪽을 눈더미에 올려서 썰매가 갑자기 기울면서 라라와 카첸카는 눈 속으로 내던지기도 했다. 지바고는 말 고비를 서서히 당겨 몇 걸음 지나서 말을 멈추고 썰매의 균형을 잡았다. 그러면 그들은 눈 을 털고 썰매에 올라와선 웃으며 지바고한테 눈을 흘겼다. "내가 빨치산한테 잡혔던 곳을 가르쳐주지." 유라친 시에서 꽤 멀리 떨어졌을 때 지바고는 이렇게 말했으나, 벌거숭이가 된 숲과 죽음 과도 같은 정적(靜寂) 그리고 주위가 온통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어서, 가도 가도 비 슷한 장소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들판에 서 있는 모로베크친킨회사의 첫번째 간판탑을 보 자 빨치산한테 붙잡힌 숲속의 두 번째 간판으로 잘못 보고, 지바고는 "자! 이제 금방이야." 하고 외쳤다. 그러나 사끄마 십자로 숲속에 서있는 두번째 광고탑을 지나게 될 때에야, 검은 숲을 은빛 레이스처럼 깊은 안개가 가려서 잘못 보았던 사실을 알았다. 바르이키노에 도착했을 때, 아직도 해는 남아 있었다. 지바고가 살던 집은 마을 어귀에 있 었으므로 우선 그 집 에서 썰매를 멈췄다. 마치 무엇을 훔치려는 강도처럼 황급히 집 안으 로 달려 들어갔다. 곧 날이 어두워지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집 안은 벌써 어두컴컴한데다 가 급히 서둘러대는 바람에 집 안이 온통 뒤죽박죽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눈에 익은 가구의 일부는 그대로 있었다. 바르이키노에는 남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더 이상 황 폐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바고는 가족이 출발할 때 이곳에 없었으므로 물건을 얼마나 가져가고 또 얼마나 남겨놓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라라가 말했다. "빨리 서둘러야겠어요. 곧 캄캄해질 테니까 우물쭈물하고 있을 사이가 없어요. 이 집에 자 리를 잡을 생각이면 말을 헛간에 넣고 식량은 문간방에 들여놓고, 우린 이 방을 써야겠군요. 하지만 나는 반대예요. 여기선 당신이 괴로울 거예요. 당신이 괴로우면 나도 괴로워요. 여긴 당신의 침실이었나요? 아, 아이 방이었군요. 당신 아들의 침대가 있는 걸 보니. 카첸카가 쓰 기엔 작겠군요. 하지만 창문은 제대로 있고 벽이나 천장도 틈이 나 있지 않군요. 그런데 페 치카가 멋있군요. 전에 와서도 놀랐어요. 당신이 괜찮다면 여기서 살아도 좋아요. 그럼 슈바 를 벗고 일하겠어요. 우선 페치카에 불을 지펴서 일주일 동안은 덥혀야 해요. 웬일이죠, 당 신? 한마니도 없으시군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미안하오. 역시 미쿨리츠인네 집으로 가는 편이 좋을 것 같군." 그들은 다시 썰매를 몰았다. 5 미클리츠인네 집엔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지바고는 간신히 문짝에서 나사못과 나무조각 이 붙은 채 자물쇠를 떼어냈다. 아까처럼 황급히 안으로 들어가 모자와 방한화를 벗을 사이 도 없이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이내 눈에 띈 것은 집안 집기들이었다. 미쿨리츠인의 서재만 하더라도 말끔 히 정돈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 여기서 최근까지 살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과연 그는 누굴가? 주인 부처나 또는 주인네 식구라면 대체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현관문을 일 부러 자물쇠로 잠근 것은 어쩐 일일까? 더욱이 주인 부처가 여기 오랫동안 살았다면 집안을 죄다 정돈하지 않고 왜 하두 방만 정돈했을까? 아무래도 미쿨리츠인네 식구는 아닌 것 같 다. 딴사람이 들어와 살았다면 대체 누굴까? 지바고도 라라도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으나, 별로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이러저리 숨어다니는 백위군 장교일 거야. 돌아오면 함께 살기 로 하자.' 그들은 이렇게 결정했다. 언젠가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지바고는 서재 문지방에 못박힌 듯 서서 널찍하고 아늑한 방 안과 창가에 놓인 커다란 책상을 선망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런 쾌적한 환 경 속에서라면 끈기 있게 알찬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뜰안의 부속 건물에는 헛간 바로 옆에 외양간이 있었으나, 문이 잠겨 있어서 그날 밤만은 우선 잠겨져 있지 않은 헛간에 말을 매기로 했다. 지바고는 말에서 썰매를 풀어 내고 땀을 식힌 후 우물에서 물을 떠서 말에게 먹였다. 썰매 바닥에 깔았던 건초를 먹이려 했으나 너 무나 밟히고 부스러져서 먹일 수가 없었다. 다행히 헛간 구석에 건초가 꽤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날 밤은 옷을 입은 채 슈바를 뒤집어쓰고 온종일 놀다 지친 아이들처럼 깊이 잠들었다. 6 아침에 잠이 깨기가 무섭게 지바고의 시선이 자꾸만 창가의 책상으로 끌렸다. 뭔가 쓰고 싶은 욕망 때문에 손이 근질거렸으나, 밤이 되어 라라와 카첸카가 잠들 때까지 참기로 했다. 그때까지 방 두 개만이라고 깨끗이 정돈해야 하기 때문에 바삐 움직여야 했다. 그가 밤에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했지만,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 은 아니다. 그저 펜을 손에 쥐고 무엇인가 쓰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느꼈던 것뿐이었다. 처음엔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긁적여 보려고 했다. 여태껏 써 본 적이 없는 흘러간 회 상이나 메모 형식의 글을 쓰면 된다. 오랫동안 무료하게 지내서, 잠들어버린 능력을 일깨우 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오래 머물러 있게 되면 기회를 보아 무엇이든 새롭고 보람 있 는 글을 쓰고 싶었다. "여보, 무얼 하고 계시죠? 바쁘신가요?" "페치카에 불을 때고 있어요. 왜 그러지?" "이렇게 불을 때다가는 사흘도 못 가서 장작이 떨어지겠는건. 전에 살던 집 헛간에 가 봐 야겠어. 장작이 남아 있을 거야. 썰매로 몇 차례 실어와야지. 내일 가 보겠어. 빨래 대야가 필요하다구?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나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질 않아요. 없으면 할 수 없지요. 청소하려고 물을 많이 데워 놨더니 남은 물로 빨래를 하려구요. 당신도 세탁할 게 있으면 죄다 내놓으세요. 청소를 대강 마치면 우리 자기 전에 목욕을 해요, 네?" "그럼 금방 속옷을 내오겠소. 고마와요. 당신 말대로 장농이나 무거운 것을 벽가에서 옮겨 놓았어요." "됐어요. 빨래 대야가 없으면 설겆이 통으로 해 보겠어요. 하지만 기름이 더덕더덕 붙어 있어서 큰일이예요. 이것부터 씻어 내야겠군요." "페치카가 더워졌으니 나머지 서랍들을 정리해야겠소. 여러 가지 물건이 쏟아져 나오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 비누와 성냥이 나오는가 하면 연필이나 종이등 필기구가 나오 기도 하구. 그리고 여기 책상 위엔 석유가 가득 들어 있는 램프가 놓여 있군. 이건 미쿨리츠 인네 물건이 아니라는 건 내가 알아요. ?딴 사람이 가져온게 틀림없어요." "그게 웬일이죠! 필시 수수께끼 인물이 갖다 놓았을 거예요. 마치 쥬리 베르니(1828∼1905 프랑스의 공상 과학 소설가)의 소설 같군요. 아, 정말 당신이 뭐라 하셨더라! 더운 물이 펄 펄 끓고 있어요." 그들은 바삐 움직였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분주히 드나들며 물던을 나르다가는 서로 맞 부딪치기도 하고, 발 앞에 얼씬거리는 카첸카와 부딪치기도 했다. 카첸카는 심심해서 방안을 서성이며 길을 가로막는가 하면 옆에서 툭 튀어나오기도 하여 청소를 방해했다. 그러지 말 라고 나무라면 금세 토라져서, 추워 죽겠다고 투덜거렸다. '요즘 아이들은 가엾군'하고 지바고는 생각했다. '어른들의 방랑에 희생되고 있으니. 그래 도 불평 없이 잠자코 있는 걸 보면 더욱 가엾어진다.' "춥긴 뭐가 춥다는 거냐?" 그는 아이에게 말했다. "페치카가 벌겋게 타고 있는데.: "페치카는 따뜻한지 몰라도 난 추운걸요." "조금만 참아요. 저녁엔 후끈해질 테니까. 어디 그뿐이냐, 목욕까지 시켜 주겠다고 했잖았 어? 그때까지 이거나 가지고 놀려무나." 그는 창고에서 리베리의 장난감을 한아름 갖다 마룻바닥에 놓았다. 성한 것도 있고 망가 진 것도 있었다. "이건 뭣하거 가져왔지요?" 카첸카는 어른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건 다 딴 사람 거예 요. 그리고 이건 조그만 아이들의 장난감 아녜요? 난 이젠 꼬마가 아니란 말예요." 그러나 곧 마음이 변했는지 양탄자 한가운데에 주저앉았다. 카첸카의 손이 닿자 온갖 종 류의 장난감이 건축 자재로 변해 유라친에서 가져온 인형의 집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딸이 놀고 있는 것을 부엌에서 바로보던 라라가 불쑥 말했다. "보세요, 저것이 가정 생활의 본능이며, 파괴할 수 없는 단란과 질서에 대한 동경이예요! 아이들은 정직해요. 진실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우리 어른들은 남에게 떨 어질까봐 스스로 더없이 귀중한 것을 짓밟고 추악한 것을 찬양하며, 아해할 수도 없는 것을 지지하고 나선단 말예요." 지바고가 어두운 현관에서 들어오며 말했다. "빨래 대야를 찾았소. 천장에서 새는 빗물을 받으려고 구석진 곳에 가을부터 놓아두었던 모양이오." 7 준비된 식량으로 라라는 사흘을 먹을 만한 음식을 마련했다. 점심은 감자 수프와 구운 양고기 에 감자까지 곁들인 호화판이었다. 줄곧 굶주려 온 카첸카는 신바람이 나서 깔깔거리고 떠들면서 실컷 먹더니, 졸음이 오는지 라라의 숄을 덮고 소파에 누워서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화덕에서 물러난 라라는 땀을 흘리고 피곤해서 딸처럼 졸음이 왔다. 그녀는 자기가 만든 음식 이 잘 되어서 흐뭇했으며, 설겆이를 뒤로 미루고 의자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카첸카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녀는 식탁에 가슴을 대고 손으로 턱을 고였다. "여보, 이것이 헛된 일이 아니고 그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여기서 행복을 찾을 수도 있고 힘껏 노력할 수도 있을 거예요. 당신은 우리가 여기 온 것이 둘이 함께 있기 위해서라는 걸 끊임없이 나한테 상기시켜 줘야 해요. 내가 우울해 하지 않게 용기를 북돋아 주세요, 네! 솔직이 말해서 우리는 지금, 염치없이 남의 집에 침입해서 자기들이 살기 좋게 멋대로 집을 정돈하고 있 을뿐만 아니라 쉴새없이 일하면서 정신을 딴 데다 돌려서, 이것이 현실의 인생이 아닌 연극이고 실생활이 아닌 어린애 소꿉장난 같은 가공의 생활이란 것을 인식하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리로 오자고 한 건 당신이었소. 나는 처음부터 반대였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결국 나쁜 건 나예요. 당신은 동요하거나 번민할 수 있어도 나는 언제나 한 결같이 논리적이어야 하니까. 당신은 전에 살던 집에 들어갔을 때 아들의 침대를 보고 괴로움에 기절한 뻔했었지요. 카첸카를 열려하거나 장래를 생각하는 건 당신과의 애정을 위해 희생해야 합 니다." "라라, 무슨 소리요, 흥분하지 말아요. 지금이라도 결코 늦지는 않았어. 나는 당신한테 코마롭스 키의 제의를 진지하게 고려하라고 권했어. 우린 말을 가지고 있으니까 당신이 원한다면 내일이라 도 유라친으로 돌아가요. 코마롭스키는 아직 유라친에 머무르고 있어요. 우리가 썰매를 타고 떠나 올 때, 거리에서 그 사람을 보지 않았소? 저쪽에선 우릴 알아보지 못했겠지만. 돌아가면 말날 수 있을 거요." "내가 뭐라고 한두 마디만 하면 당신은 곧 못마땅하게 말씀하시는군요. 하지만 내 말이 틀렸나 요?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무턱대고 몸을 숨기려면 유라친에서도 돼요. 정말 살길을 찾으려면 코마롭스키가 말한 것 같은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해요. 나도 물론 그런 사람은 보기도 싫지만 어 쨌든 세상 물정에 밝은 실제적인 인간인 것만은 틀림없어요. 생각해보세요-여기라고 안전하다고 볼 수 없어요. 눈보라치는 허허벌판에서, 밤에 눈에 묻혀 버리면 아침에 기어나갈 수도 없을 거예 요. 게다가 그 수수께기의 인물이 은인이기는커녕 강도인지도 몰라요. 언제 우릴 죽일지. 당신은 무기를 가지고 있나요? 없지요, 그걸 봐요. 당신의 부주의가 겁이 날 지경이예요. 난 미칠 것만 같아요." "그럼 어떡하면 좋단 말이오? 나더러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요?" "그건 나도 모르겠어요 하여튼 나를 언제나 당신에게 복종하도록 곽 잡아 주어요. 그리고 항상 상기시켜 주세요-나는 당신의 것이며, 당신을 무조건 사랑하고 무조건 복종하는 노예라는 것을. 솔직이 말해서 당신의 토냐와 나의 파샤는 당신이나 나보다도 백 배 천 배나 훌륭한 사람들이예 요! 하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예요. 사람의 능력은 다른 모든 능력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아무 리 크더라도 축복받지 못하면 결실을 보지 못하는 법이죠. 하지만 우리는 하늘에서 키스하는 법 을 배우고 나서 동시에 이 세상에 보내진 거예요. 하늘에서 배우고 익힌 사라의 능력을 지상에서 서로 시험해보도록 내려보내 진 거예요. 이것은 완전 무결한 융합이에요. 안팎도 없고, 높고 낮음 도 없어요. 전존재가 완전히 한 몸으로 되고, 모든 것이 기쁨을 안겨주고, 모든 것이 영혼으로 되 는 거예요. 그렇지만 물결처럼 끊임없이 밀려드는 이런 티없는 애정에는, 아무래도 어린애처럼 안 전성이 없는 무책임한 요소가 따르기 마련이예요. 그것도 가정적인 평온과는 적대되는 자유 분방 한 파괴적인 요소예요. 그러니까 그 애정을 두려워하고 의혹의 눈으로 보는 것이 나의 의무가 아 닐까요?" 라라는 지바고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이렇게 말을 맺었다. "당신과 나의 입장은 서로 달라요. 당신에겐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날개가 있지만, 여자인 나에 겐 땅에 웅크리고 병아리를 감싸주어야 할 날개가 있을 뿐이에요." 라라의 말은 지바고에게 걷잡을 수 없는 감명을 주었다. 그러나 달콤한 감정에 빠져서는 안 된 다는 생각에서 그런 내색은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들의 떠돌이 생활은 사실 정상적인 것은 아니오. 그건 당신의 말이 옳아요. 그러나 이건 우리 자신이 생각해낸 것은 아니잖소. 한없이 광분하게 된 것은 모든 사람의 운명이니까. 이를테 면 이건 시대 정신이란 말이오. 나도 오늘은 아침부터 당신과 거의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나는 조금이라고 오래 여기 머물러 있고 싶어요. 나는 얼마나 일을 하고 싶었는지 말할 수 없었어. 일이라고 해서 농사일을 말하는 건 아니오. 전엔 여기서 식구들과 함께 열심히 농사일도 해 보았고, 그것이 잘 되었소. 그러나 또 다시 그런 일을 할 만한 기력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요. 언젠가는 사회 생활의 모든 면이 점차로 자리잡혀 갈 거요. 그때는 다시 책도 출판할 수 있게 될거요. 그래서 나의 생각은 삼제바토프를 설득해서, 그에게 유리한 조건하에, 반 년 가량 우릴 먹여달 라고 부탁해봅시다. 그 동안에 나는 뭐든지 글을 써서 그에게 제공하지요. 예를 들어, 의학 입문 서나 예술 작품, 시집 같은 걸 말이오. 혹은 외국의 유명한 고전을 번역할 수도 있어요. 난 외국 어에 자신이 있으니까. 얼마 전에도 페테르부르그의 유명한 출판사 광고를 보았는데, 그 출판사는 번역물만 취급하고 있다는 거요. 번역도 훌륭한 교환 가치가 있으니까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해 요. 하여튼 그런 종류의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고마워요. 나도 오늘 그런 생각을 해 보았어요. 그렇지만 어쩐지 여기서는 오래 배겨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그렇지만 여기 있는 동안, 당신한테 부탁이 하나 있어요. 앞으로 며칠 밤 은 하루에 두세 시간씩 나를 위해 희생해주어요. 그동안 저한테 들려 준 시를 정리해주세요. 내가 적어둔 것도 반은 분실해버렸고, 적어두지 않은 것도 꽤 많을 거예요. 지금 써 두지 않으면 당시 은 죄다 잊어버리고 말 테니까." 8 그날 저녁에 빨래하고 남은 더운물로 모두 목욕을 했다. 라라는 카첸카를 씻어 주었다. 지바고 는 상쾌한 기분으로 창가에 놓인 책상에 앉아 있었다. 등뒤의 방에서는 젖은 머리를 타월로 둘둘 감은 라라가 향긋한 냄새를 풍기면서 카첸카를 재우고 있었다. 지바고는 이제 누구의 방해도 받 지 않고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뻐서 견딜 수 없었으며,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밤 한 시였다. 그때까지 자는 체하고 있던 라라도 잠이 들어버렸다. 그녀와 카첸카의 속옷이며 침대의 시트 등이 새하얗게 보였다. 라라는 그 무렵에도 용케 빨래에 풀을 먹였다. 지바고는 감미롭게 정적을 호흡하면서 안일하고 완전한 행복에 휩싸였다. 등잔 불빛이 흰 종이 를 부드럽게 비추고 잉크 표면이 황금빛으로 비쳤다. 창 밖은 창백한 엄동의 밤이었다. 지바고는 어두운 옆방으로 걸어가서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보금달 빛이 눈 덮인 들판을 달걀 흰자나 흰 그림 물감처럼 끈끈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겨울밤의 눈부신 아름다움은 더할 데가 없 었다. 지바고의 마음은 편안했다. 그는 밝고 따뜻한 방으로 되돌아가 다시 펜을 집었다. 생동하는 손의 움직임을 전하면서 개성을 잃지 않고 영혼이 없는 무감각한 인상을 주지 않도록 힘차고 큼직한 필체로, 자작시를 상기하여 추고를 거듭하면서 <성탄제의 별>과 <겨울 밤>을 비 롯한 여러 편의 시를 썼다. 후에 이러한 시들을 잃어버려서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 다음에는 언젠가 손을 댔다가 도중에 내던졌던 시로 옮겨가서, 지금 당장 그것을 완성하지 는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시의 정신 속에 잠겨 다음을 계속해서 쓰기 시작했다. 몇 줄을 어렵지 않게 쓰다간 스스로 감탄할 만한 비유가 떠올라, 이른바 영감이 다가오고 있음 을 느꼈다. 예술 찬조를 지배하는 힘의 관계가 뒤바뀐 느낌이었다. 전면에 나타나는 것은 시인도 아니고, 시인의 표현하려고 애쓰는 영혼의 상태도 아니었다. 표현의 매개체인 언어였다. 미와 의미의 샘이 며 그릇인 언어가 시인을 대신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청각을 울 리는 음향으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무서운 속력으로 힘차게 흐르는 음악의 모든 것을 포옹한다. 그리고 냇가 바닥의 돌을 굴리고 물방아를 돌리며 엄청난 힘으로 달리는 물살처럼 솟아나오는 언어 그 자체가, 자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사이에 운과 리듬, 그 밖에 더욱 중요하면서도 여 태까지 인정되지 않고 고려되지 않던 여러 가지 형식을 창조했다. 이러한 순간에 지바고는 자기 위에서 자기를 움직이는 시적 창조의 힘을 뚜렷이 느꼈다. 그것 은 세계의 사조와 시의 움직임, 말하자면 그 미래에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면, 혹은 역사적 발 전이 움직임 속에 들어맞게 될 것이라고 의식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잠시 동안 그는 자책과 불만에서 풀려나 예리한 열등감에서 벗어났다. 그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그의 시야에 새하얀 베게를 베고 잠들어 있는 라라와 카첸카의 얼굴이 비쳤다. 깨끗한 속옷, 깨 끗한 방안, 그리고 모녀의 깨끗한 얼굴이 밤과 눈과 별과 달에 함께 얽혀서 지바고의 마음을 파 도처럼 소용돌이쳐 흘렀다. 그는 존재의 더없는 깨끗함에 가슴이 뭉클했다. '주여! 주여! 이것이 모두 저의 겁니까? 왜 이다지도 많은 것을 저에게 주십니까? 왜 당신 곁에 제가 가까이 있도록 허락하시고, 당신의 별 아래, 한없이 귀중한 당신의 땅에서 방황하며, 이 어 리석고 방향도 모르며 불운하고 몽매한 자를 당신의 발 앞에 부르셨나이까?' 세 시경에 지바고는 책상과 종이에서 눈을 들었다. 마음과 몸을 하염없이 쏟았던 정신이 집중 으로부터 행복하고 고요한 현실로 돌아왔다. 창밖에 펼쳐진 황량한 들판 끝에서 갑자기 무언가 원망에 찬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그는 밖을 내다보려고 캄캄한 옆방으로 갔다.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유리창에 온통 성에가 얼어 붙어 밖이 잘 보이질 않았다. 지바고는 현관 문틈의 바람을 막으려고 가려놓은 양탄자를 치우고 슈바를 걸치고 현관으로 나갔다. 그림자 하나 없는 눈 덮인 벌판에 흰 달빛이 눈부시게 반사하고 있어서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 지 않았다. 잠시 후 뱃속에서 끓어오르듯 긴 포효가 멀리서 들리더니, 골짜기 저쪽 들판에 연필로 짧게 그은 선 정도의 조그만 네 개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늑대들이 코빼기를 나란히 하고 서서 미클리츠인네 집 창문을 향해 짖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지바고가 늑대임을 알아차린 순간 짐승들은 홱 몸을 돌려 개들처럼 달려가 버렸다. 그가 늑대들 이 어느 방향으로 도망쳤는지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늑대들의 모습은 없었다. '불길한 징조가 아닌가!' 그는 생각했다. '아주 가까운 곳에 늑대 굴이 있는 게 아닐까? 저 골짜 기에 있는지도 모르겠군. 무서운 일이야! 삼제바토프의 말이 마구간에 있는 걸 냄새 맡은 게 아닐 까.' 라라가 놀라지 않도록 당분간 아무 말도 안 하기로 작정하고, 집안으로 들어와 현관문을 잠그 고 문틈을 막은 후 다시 책상으로 다가갔다. 등불은 여전히 발게 타오르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아직도 그냥 따뜻하게 타오르고 있었나요, 내 밝은 등불인 당신은?" 라라가 잠이 덜 깬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 내 옆에 가까이 앉으세요. 방금 꾼 꿈 얘기를 들려드릴께요." 이윽고 지바고는 등불을 껐다. 9 다음날도 꿈처럼 조용히 지나갔다. 집 안에서 어린이 썰매를 찾아냈다. 지바고는 앞뜰 눈더미를 삽으로 굳게 다진 다음 물을 부어 얼음산을 만들어주었다. 카첸카는 두 볼이 빨개지며 깔깔거리 고 미끄럼을 타고 내려왔다가는 다시 새끼줄에 맨 썰매를 끌고 올라가곤 했다. 추위는 눈에 띄게 더했다. 양지바른 뜰은 대낮의 햇볕을 쬐며 눈이 누렇게 되고, 이윽고 재빨리 찾아온 황혼의 보라빛 그림자가 꿀처럼 누런 눈 속으로 스며들었다. 라라가 세탁을 하고 목욕을 했기 때문에 집 안에 습기가 가득했다. 창문엔 성에가 더욱 두껍게 끼고, 수증기에 젖은 벽지가 천장에서 방바닥까지 부풀어 올랐다. 방안은 어둡고 침울했다. 지바 고는 장작과 물을 운반하고 나서, 어제에 이어 다시 집 안을 샅샅이 뒤져서 오늘도 새로운 것을 많이 찾아냈다. 라라는 아침부터 여러가지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지바고는 틈틈이 그녀를 도왔다. 한창 일을 분주히 하다가 서로 손이 맞닿는 일이 있었다. 그들은 손에 들었던 물건을 방바닥에 내려놓고, 억제할 수 없는 은밀한 애정의 발작에 모든 잊어버리고 빠져들고 말았다. 이리하여 시 간은 사정없이 흘러,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꽤 시간이 늦었었다. 카첸카를너무 오랫동안 돌보 지 않았거나 말에게 먹이를 주지 않았던 일이 생각나, 허겁지겁 옷매무시를 고치고 송구스러운 생각이 들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바고는 잠을 덜 잔 탓으로 머리가 아팠다. 술취한 사람 모양으로 의식이 몽롱하고 기력이 약 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중단했던 일을 계속하기 위하여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는 연기처럼 졸음을 느끼며 일했다. 졸음은 주위의 모든 것을 휩싸고 그의 생각마저 뒤덮었 더. 모든 것에 넓게 깔린 몰롱한 안개가 말끔히 개는 마지막 단계의 직전이었다. 최초의 원고처럼 낮의 감미로운 무의는 밤의 창조에 필요한 준비가 되니까. 그의 피곤한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했다. 지바고는 바르이키노에 정착하고 싶은 자기의 꿈이 실현될 수 없을 것이며, 라라와의 이별의 시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영영 잃게 될 것이며, 삶의 의욕을 잃게 되고, 나아 가서는 생명까지도 잃게 될 것이다. 그의 마음은 우수에 차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한시 바삐 밤이 되어.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그 우수를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간밤에 목격한 늑대 떼가 온종일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늑대떼는 달밤의 들판 에서 짖어대는 현실의 늑대떼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시의 주제가 되었고, 지바고와 라라를 파멸시 키려는, 아니면 바프이키노에서 찾아내려는 목적을 지닌 악귀의 상징으로 변했다. 이러한 마귀의 생각은 밤이 되기까지 점점 심해져서, 드디어 슈치마에 유사 이전의 괴물 발자국을 발견하고, 한 없이 큰 용이 지바고의 피를 요구하고 라라의 몸을 탐내서 계곡에 숨어 있는 공상까지 하게 됐 다. 밤이 되었다. 지바고는 전날 밤처럼 책상 위의 등불에 불을 밝혔다. 라라와 카첸카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원고는 두 가지로 분류되었다. 하나는 기억하고 있던 시를 추고해서 깨끗이 정서한 것이고, 새 로 쓴 시는 줄거리를 읽기도 어렵게 난잡한 필체로 씌어 있었다. 언제나 지바고는 갈겨쓴 초고를 읽으며서 깊은 실망에 빠지곤 했다. 간밤에는 눈물이 날 만큼 감동되었고, 그중 두세 절은 뜻밖에 잘 되었다고 스스로 감탄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읽어 보니 한심스럽게도 엉성했다. 될수록 감정이 노출되지 않고 밑바닥에 깊숙이 가라 앉아서 겉으로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흔 히 쓰는 형식 뒤에 숨겨진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하는 것이 그이 평생의 꿈이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하고 소박한 스타일이면서도 시를 읽고 듣는 사람의 마음이 부지불식간에 그 시의 핵심에 도 달할 수 있는 그런 스타일을 이룩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거기까진 아직도 먼 거리에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날 밤, 그는 순진할이만큼 소박한 자장가를 생각케 하느느 따스한 애정과 공포, 비수와 용기 에 뒤얽힌 감정을 표현하고, 그것이 언어로서가 아니라 저절로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금 시의 행을 낱낱이 허물어버리지 않도록 묶어서 그 시도를 재검토해 보고, 내용이 부족한 것을 알았다. 지바고는 쓰기 시작한 시를 깨끗이 지우고, 같은 서정시 형식으로 용사 예고 리(러시아 구비 문학에 나오는, 용을 퇴치한 장수)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폭넓은 보격으 로 써나갔으나 시 정신과는 관계 없는 규칙적인 격식이 판에 박힌 듯 인위적인 음률처럼 들려서 싫증이 났다. 그래서 과장된 음률과 중간 휴지를 포기하고 너무나 말이 많은 산문은 짧게 고쳐서 사각음까지 행을 압축했다. 펜을 움직이기는 둔했으나 감흥은 한결 강했다. 시는 활력을 더해 갔 으나 여전히 말이 많아지기 쉬웠다. 여기서 행을 더 압축했다. 그리하여 보격속에 시어가 농축되 어, 지바고한테서 졸음의 마지막 흔적을 사라지게 하고 타오르는 흥분을 느끼게 했다. 짧은 행을 채우게 될 적절한 언어가 운을 타고 샘솟았다. 사물은 언어로 표현되자마자 구체적인 형상을 그 렸다. 쇼팽의 담시곡에 평보로 걸어가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게오르기 포베도노세쯔(러시아의 전설적인 용사)가 말을 타고 광막한 대평원을 질주하다가 멀리 사라져 가는 뒷모습이 지바고의 눈앞에 선했다. 그는 정신없이 펜을 휘두르자 언어나 행이 제자리를 잡아갔다. 지바고는 글쓰기에 열중하여 라라가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옆으로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 다. 발뒤꿈치까지 내려오는 긴 자리옷 때문인지 그녀는 날씬하여 실제보다 키가 더 커보였다. 지 바고는 흠칫 놀랐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내밀며 조용히 물었다. "저 소리 들리죠? 개가 짖고 있어요. 한 마리도 아니고 여러 마리인가 봐요. 무서워요. 불길한 징조예요. 날이 새면 곧 떠납시다. 여기선 한시도 더 견딜 수가 없어요." 한 시간 가량이나 여러 가지로 달래고 위로해서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자 라라는 잠이 들었다. 지바고가 현관 앞 층계에 나가보니, 늑대들이 어젯밤보다 더 가까운 곳까지 와 있다가 날쌔게 사 라져버렸다. 지바고는 이번에도 늑대들이 달아난 방향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늑대떼는 한데 몰려 있어서 몇 마리가 되는지 헤아릴 수는 없었으나, 어제보다 수가 더 늘어난 것 같았다. 10 바르이키노에 와서 열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처음 왔을 때와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한때 자취를 감추었던 늑대들이 간밤에 또 나타나서 짖어댔다. 이번에도 개가 짖는 것으로 오인 한 라라는 불길한 징조에 겁을 집어먹고 내일은 꼭 유라친으로 돌아가겠다고 서둘렀다. 다시 그녀의 차분했던 기분이 어두운 불안으로 바뀌었다. 라라와 같은, 감정을 밖으로 나타내거 나 게으름피우거나 낭비하는 버릇이 없는, 일하기를 좋아하는 여인한테는 당연한 것이었다. 똑같은 일이 그대로 반복되었다. 그러니까 두 주일이 지난 그날, 이때까지 여러번 있었지만, 라 라가 떠날 준비를 시작하면서 중간의 한 열흘은 없었던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우중충하게 흐린 날씨여서 집안에 또 습기가 차고 어두컴컴했다. 추위는 좀 덜한 듯싶었으나 구름이 낮게 덮인 컴컴한 하늘에서는 금새 눈이라고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수면 부족 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지바고는 몸과 마음이 무척 피곤했다. 머리 속이 혼란해서 정신을 집중할 수 가 없었으며, 몸도 쇠약해서 몹시 추위를 탔다. 그는 몸을 움츠리고 두 손은 비비면서 싸늘한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는 라라가 어떻게 마음을 정했는지, 그녀의 결심에 따라 자기가 무슨 일을 해 야 할 것이지 알 수가 없었다. 유라친에 돌아가서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지, 라라 자신도 막연했다. 지금이 혼돈된 자유속 에서 갈팡질팡하느니 차라리 분명하게 정해진 엄격한 질서에 복종하여 직장을 가지고 성실히 의 무를 다하면서 살 수만 있다면, 라라는 자기 반생(半生)을 희생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 다. 이날 아침에도 그녀는 전처럼 침대를 정돈하고 방안을 거두고 나서 지바고와 라라의 아침 식사 를 차렸다. 그러고 나서 짐을 꾸리기 시작하고, 지바고에겐 말에 썰매를 매어달라고 했다. 떠날 결심엔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지바고는 결심을 번복하도록 권할 수도 없었다. 유라친에서는 지금 한창 검거 선풍이 불고 있 으니, 불과 얼마 전에 자취를 감췄다가 다시 돌아간다는 건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무서운 허허벌판에서 무기도 없이 외따로 떨어져 산다는 것도 현명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 다. 또한 헛간에서 긁어모은 건초는 이제는 바닥이 났다. 여기에 아주 정착한 작정이라면 부근을 돌아다녀서 건초나 식량을 찾아 보충할 수도 있지만, 언제 떠날지 모르는 처지에 공연히 헛수고 할 것도 없었다. 지바고는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한 기분으로 말을 끌어내어 썰매를 맸다. 그는 썰매를 잘 맬 수가 없었다. 삼제바토프가 가르쳐주었으나 잊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투른 솜씨로 필요한 조치는 해놓았다. 쇠고리가 달린 가죽끈을 말의 멍에채에 묶고, 그 끝을 한쪽 채 끝에 두세 번 감아서 동여맸다. 그리고 말의 배에 한 발을 대고 목걸이를 단단히 끼웠다. 그 밖의 일을 다 마치고 나서, 말을 현관 앞에 대고 안으로 들어가 라라에게 준비가 다 되었다고 알렸다. 라라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그녀와 카첸카는 길 떠날 채비를 미치고 짐도 꾸려 놓았으나, 그녀 는 눈물이 글썽해서 두 손을 깍지 끼고 지바고에게 좀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도 의자에 풀 썩 앉더니 다시 벌떡 일어나 울먹이는 소리로 '그렇지 않아요'를 연발하며 몹시 재빠를 어조로 뇌 까렸다. "내가 나쁜 게 아녜요. 왜 이렇게 됐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어쨌든 지금 떠날 수 없지 않아요? 곧 어두워질 텐데 밤길을 갈 수는 없잖아요? 더구나 그 무서운 숲속을 어떻게 가요? 그렇잖아요? 난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하겠어요. 나 자신의 힘으로 결심할 수가 없어요. 뭔가 목덜미를 잡아당시 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은지 당신은 알고 계실 거예요. 그렇잖아요? 왜 잠 자코 계세요? 하룻밤 여기서 더 자고 내일 날이 새자마자 떠나기로 해요, 네! 당신은 뜨뜻하게 불 을 때고 하룻밤 더 글을 쓰세요. 하여튼 오늘 밤은 여기서 잡시다. 왜 아무말도 안 하시죠? 아마, 또 내가 잘못했군요!" "당신이 잘못 생각한 거요.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어. 하지만 당신 말대로 합시다. 좋아요, 가지 맙시다. 자, 마음을 가라앉혀요. 당신은 너무 흥분하고 있어요. 어서 외투를 벗어요. 카첸카가 배 고프다고 하는군. 뭘 좀 먹읍시다. 당신 말대로 오늘 떠나는 건 좋지 않겠소. 제발 좀 진정해요. 그럼 페치카에 불을 때야겠군. 아니, 그보다도 썰배를 맨 김에 전에 내가 살던 집 헛간에 가서 장 작을 실어와야겠소. 자, 울음을 그쳐요. 곧 돌아오겠소." 11 헛간 앞 눈 위에는 여태까지 지바고가 다녀간 썰매 자국이 몇 줄기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문지 방의 눈은 엊그제 장작을 실어낼 때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아침부터 하늘을 덮었던 구름이 걷히면서 날씨가 추워졌다. 이 해 겨울은 유달리 눈이 많이 와 서 헛간 문지방보다 더 높게 쌓였다. 마치 문설주가 내려앉고 헛간의 키가 낮아진 것 같았다. 지 붕 위에는 바람에 날린 눈이 큼 버섯처럼 지바고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 지붕 위에 한 쪽 끝을 찔러 넣은 듯 초생달이 잿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아직 밝은 낮이었으나, 지바고는 밤늦게 인생의 어둡고 울창한 숲속에 홀로 서있는것 같은 느 낌이 들었다. 막막하고 처량한 심정이었다. 거의 얼굴 높이에서 타오르고 있는 초승달은 이별의 전조(前兆)였으며 고독의 상징이기도 했다. 지바고는 너무나 지쳐서 서 있는 것조차 힘에 겨울 지경이었다. 여느 때보다도 적은 야ㅡ이   작을 들어다가 헛간 문지방 너머로 썰매에 던져 올리곤 했다. 장작개비에 얼어붙은 눈이 장갑을 통해 따갑게 느껴졌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데도 몸이 더워지지 않았다. 그의 내부에서 무언가 망가져서 움직이질 않는 듯싶었다. 그는 불행한 운명을 저주하면서, 슬픔에 잠긴 소박하고 아름다 운 라라의 인생에 주님의 가호가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초승달은 여전히 헛갖ㄴ 위에서 차 갑게 타오르며 비치고 있었다. 갑자기 말이 오던 길 쪽으로 되돌아 서며 처음엔 낮은 소리로 울더니 점점 높게 큰 소리로 울 어댔다. '어쩐 일일까?' 지바고는 생각했다. '무슨 기쁜 일일까? 무서워서 우는 걸가? 아니다, 겁이 날 땐 울지 않는 거야. 늑대 냄새를 맡았더라도 자기 위치를 알리려고 울어댈 리는 없지. 저건 반가 움을 나타내는 울음 소리가 아닌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 그렇다면 잠깐만 기다 려. 이제 곧 갈테니.' 지바고는 헛간에서 나무조각과 장작에서 벗겨진, 장화 몸체처럼 생긴 자작나무 껍질을 썰매 장 작 위에 얹고 밧줄로 동여 매고 썰매와 나란히 걸어서 미클리츠인의 집 헛간으로 돌아왔다. 또다시 말이 울었다. 어딘가 멀리 맞은편 쪽에서 다른 말이 호응하듯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 바고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누구네 말일까? 바르이키노엔 우리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그렇지가 않은가 보군.' 그는 말 울음 소리가 언덕 너머에 있는 미쿨리츠인네 집 현관 앞에서 들렸으며 손 니밍 오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공장 부지의 부속 건물 뒤로 돌아와 있기 때문에 언덕에 가려 집 정면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실어온 장작을 천천히 헛간에 옮기고, 썰매를 풀어서 헛간에 넣었다. 말을 마구간에 끌고 들어 가 건초를 두어 아름 구유에 던져 주었다. 그는 불안스럽게 집으로 다가갔다. 현관 앞에 살찐 검정말 한 필과 큼직한 썰매가 멈춰 있었다. 값비싼 외투를 걸친 낯선 사내가 말 옆구리를 툭툭 치기도 하며, 다리를 살피면서 주위를 돌고 있었다. 여기 말처럼 살찐 작달막한 사내였다. 집 안에서는 떠들썩한 말소리가 들렸다. 엿듣고 싶지가 않아서. 지바고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다가 갑자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이야기의 내용은 잘 알 수 없었으나, 라라와 카첸카의 목소리 이외에 코마롭스키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현관 옆방인 듯싶었다. 코마 롭스키는 라라에게 무언가 따지고 있었다. 라라의 음성과 어조로 미루어, 그녀는 몹시 흥분해서 울면서 무언가를 기를 쓰며 반대하더니 금세 동의하는 눈치였다. 지바고의 귀에는 이때 코마롭스 키가 자기 얘길 하는 것처럼 들렸다. 지바고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며, 지바고가 자기 가족과 라 라와 어느 쪽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겠는가, 라라가 이런 사람을 믿고 의지하려는 것은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쫓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열심히 강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바고는 집 안으로 들어 섰다. 그가 생각했던 대로 현관 바로 옆방에, 발등까지 덮을 만큼 긴 슈바를 입은 코라롭스키가 서 있었다. 라라는 카첸카의 외투깃을 여미어주고 있었으나, 후크가 잘걸리지 않는지, 좀 가만 있으 라고 짜증을 부렸다. 카첸카는 "엄마, 억지로 그렇게 하면 숨이 막혀"하고 투덜거렸다. 세 사람 다 길 떠날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지바고가 들어가자 라라와 코마롭스키가 앞을 다투며 그에게로 달려왔다. "당신 어디 가 계셨어요? 우린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안녕하시요, 지바고 선생! 저번엔 서로 어색하게 헤어졌지만, 보시다시피 또 이렇게 불청객이 되어 왔소이다." "안녕하시요, 코마롭스키 씨." "어디 가서 그렇게 오래 계셨어요? 유라, 이븐 얘길 듣고 빨리 결정을 내리세요. 시간이 없어 요. 급히 서둘러야해요." "왜 이렇게 서 계시죠? 어서 앉읍시다, 코마롭스키 씨. 어디 갔었느냐 묻는 거요, 라라? 장작을 날라오려고 간 건 당신도 알지 않소. 그리고 말 손질도 하고. 자, 이리 앉읍시다, 코마롭스키 씨." "당신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지요? 이분이 가신 후에 우린 이분의 제의를 거절했던 일을 후회했지요. 그런데 당신은 이분이 이렇게 나타나셨는데도 그렇게 태연하 세요? 그런, 놀랄 만한 소식이 있어요. 당신이 말씀하세요, 코마롭스키 씨." "무슨 뜻으로 라라가 나더러 말하라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내가 말하겠습니다. 나는 일 부러 출발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얼마 동안 유라친에 더 머물러 있었어요. 당신과 라라가 신중 히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 위해서 였지요."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요. 지금 떠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어요. 내일 아침이면...... 코마롭스키 씨한테서 듣는 편이 좋겠어요." "라라, 잠깐만. 실례했습니다. 코마롭스키 씨. 왜 외투를 입은 채 계시죠? 자, 어서 벗고 앉으세 요. 이건 참으로 중대한 문젭니다. 그렇게 간단히 결정한 문제가 아닙니다. 실례지만 나는 당신과 동행할 생각을 털끝만큼도 해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라라는 다릅니다. 우린 간혹 서로 생각이 다른 경우가 있으니까요. 우리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각기 다른 운명을 지닌 두 개의 존재라는 걸 생각해보았어요. 라라의 경우는, 특히 카첸카를 위해서라도 당신의 제의를 신중히 고려할 필요 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라라 자신도 줄곧 당신의 제의를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당신과 함께 떠난다는 조건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라라, 서로 헤어진다는 건 당신이나 나나 괴롭기는 같아요. 그러나 우린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 같소. 내가 떠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요."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몰라요. 우선 들어보세요. 내일 아침에...... 코마롭스키 씨!" "라라는 내가 가져온 소식을 두고 말하는 모양인데, 다름 아니라 지금 유라친에는 극동 공화국 정부의 특별 열차가 출발 준비를 완료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제 모스크바로부터 도착했는데, 내일 아침에 떠납니다. 이 열차는 우리 교통부 것인데 반은 침대차로 되어 있어요. 나는 이 열차로 떠날 예정입니다. 내가 보좌관으로 배치할 사람에겐 좌석을 제공해도 좋게 되 어 있습니다. 아주 편안하게 여행할 수 있는 겁니다. 두 번 다시 없는 기회지요. 당신이 한 번 안 간다고 말한 이상 끝까지 고집하리라는 건 나도 잘 알지만, 라라는 당신이 가지 않는 한 자기도 가지 않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유라친까지만이라고 함께 갑 시다. 거기 가서 봅시다. 갈 생각이면 급히 서둘러야 합니다. 한시도 꾸물거릴 수가 없습니다. 나 는 말을 모는 게 서툴러서 마부를 데리고 왔습니다. 내 썰매에 다섯 사람이 다 탈 수는 없어요. 당신한테는 삼제바토프의 말이 와 있지요. 장작을 날라 아직 썰매를 풀지 않았겠군요?" "아니, 풀었습니다." "그럼 빨리 썰매를 매십시오. 내 마부에게 거들도록 이르겠습니다. 아니, 썰매는 두 대씩이나 필요 없습니다. 내 썰매에 다 함께 탑시다. 하여튼 서둘러주십시오. 꼭 필요한 물건만 들고 가면 됩니다. 집은 잠그지 않아도 돼요. 자물쇠 잠그는 것보다는 아이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코마롭스키 씨. 당신은 마치 내가 동의한 것처럼 말하지 만, 만약 라라가 떠나길 원한다면 어서 함께 떠나십시오. 이 집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내가 남아서 깨끗이 정리하고 문을 잠글 테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유라? '만약에 라라가 원한다면......'이란 무슨 뜻이죠? 당신이 함께 떠나 지 않는 한, 이 라라는 절대 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당신도 잘 아시지 않느냐 말예요! 그런데 '집 을 정리하겠다'니 무슨 소리예요!" "끝까지 고집하는군. 그렇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라라가 없는 자리에서 당신과 둘이서 만 얘기하고 싶어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부엌으로 갑시다. 괜찮겠지, 라라?" 12 "스트렐리니코프가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어요. 이미 형이 집행되었어요." "뭐라구요! 그게 정말입니까?" "예, 그렇게 들었어요. 틀림없을 겁니다." "라라한테는 말하지 마십시오. 그 얘길 들으면 미쳐버릴 겁니다." "물론이지요. 그래서 당신한테만 따로 말하는 겁니다. 스트렐리니코프가 총살을 당했으니, 그녀 와 딸의 신변에도 위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구해주어야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당신은 절대로 함께 떠나지 않겠다는 겁니까?" "벌써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안 가면 라라도 안 갑니다.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군. 좋아요, 그러시다면 이렇게 해주십시오. 말만이라도 좋으니 양보할 것 같은 태도를 보여달란 말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우리를 배웅하러 간다 하더라고 유라친 역에서 라라가 당신에게 이별을 고하고 혼자 떠날 리는 없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함께 떠난다는 걸 라라가 믿게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여길 떠 나지 않더라도 당신이 곧 뒤따라오겠다고 라라에게 약속해야 합니다. 물론 당신도 함께 떠나실 의향이라면 나는 기꺼이 편의를 제공할 것이며,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보내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당신이 함께 떠난다는 확신을 라라에게 주어야 합니다. 가령 말에 썰매를 매러간다고 하 면서, 우리들이 먼저 떠나면 곧 뒤쫓아가겠다고 약속하면 어떨까요?" "스트렐리니코프가 총살됐다는 말에 아찔해서, 당신이 하는 말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만, 좋습니 다,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지요. 요즘 세상의 논리에 따른다면 스크렐리니코프가 숙청된 이상 라 라와 카첸카의 생명도 위험하다고 봐야 하니까요. 라라와 나 두 사람 중에 누구든 자유를 잃게 되면 필경은 이별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라라와 카첸카를 어디든 이 세상 끝으로 데 려 가게 하는 편이 낫겠지요. 결국 당신의 계획대로 되고 말았군요. 어쩌면 나 자신도 맥이 짜져 자존심을 버리고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의 도움을 간청하게 되겠지요. 라라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시고, 내가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주십사하고 애걸하게 될는지 모 릅니다. 잘 생각하게 해주십시오. 당신한테서 소식을 듣고 머리 속이 뒤집혀 생각할 힘조차 없어 요. 혹시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나는 돌이킬 수 없는 무서운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 일생 동 안 후회의 쓴맛을 맛보게 될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이렇게 괴로우니 뭐가 뭔지 모르겠소. 이젠 기 계처럼 당신의 말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라라의 행복을 위해 연극을 해보겠습니다. 난 썰매를 매러가겠으니 먼저 떠나면 곧 뒤쫓아가겠노라고 라라한테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기 혼자 남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곧 해가 질 텐데 지금 떠나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숲속을 지 나야 하는 데 거긴 늑대가 우글거리고 있어요.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소총도 있고 권총도 가지고 있어요. 염려 마십시오. 아 참, 술을 좀 가져왔습니 다. 추위를 견디려면 필요하지요. 넉넉히 있으니까, 좀 나눠드릴까요?" 13 '어쩌자고 내가 그랬을까? 어쩌자고 그런 바보짓을 했을까? 내가 라라를 저버리다니, 라라를 단 념하고 양보하다니! 단숨에 달려가야겠다. 뒤쫓아가서 도로 찾아와야겠다. 라라! 라라! 들리지 않을 테지, 바람이 이쪽으로 불어오고 있으니까. 게다가 큰 소리로 지껄거리고 있겠지. 라라는 이젠 즐겁고 편할 테지. 내 연극에 속았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겠지. 라라는 자기 희망대로 만사가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고집쟁이 유라고 하나님 덕분에 드디어 마음을 돌려 안전한 곳으로 함께 떠나기로 했으니 이런 다행한 일이 어디 있을까. 우린 이제 우리들보다 더 분별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법과 질서가 보호하는 곳으로 가는 거다. 유라가 또 고집을 부리면 내일 기타를 타지 않더라고, 코마롭스키 씨가 다른 기차를 보내주면 얼 른 타고 뒤쫓아오겠지. 지금 그이는 물론 마구간에 있을 거야. 너무나 흥분해서 허겁지겁 서두르 는 바람에 오히려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러나 곧 말에 썰매를 매고 쏜살같이 뒤쫓 아올 테니까 숲 속에 들어가기 전에 우릴 따라잡을 수 있겠지.' 라라는 필시 이렇게 생각하고 있 을 것이다. 우린 제대로 이별의 인사조차 나누질 못했다. 나는 손을 한 번 흔들었을 뿐, 목구멍에 솟구쳐 오르는 아픔을 참으려고 이내 등을 돌리고 말았으니까. 지바고는 슈바를 아무렇게나 한쪽 어깨에 걸친 채 현관에 서 있었다. 외투에 덮이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는 현관의 매끄러운 기둥 윗부분을 마치 목을 조이기라도 하듯 힘껏 부여잡고 있었다. 그는 온몸의 주의력을 집중하여 저 멀리 들판 한 곳에다 시선을 쏟았다. 듬성듬성 서 있는 자작 나무 사이로 오르막길이 잠시나마 드러나 보이는 곳이 있었다. 서쪽 지평선에 기울어진 태양이 지금 그 근방 일대에 마지막 햇살을 던지고 있었다. 방금 우묵한 지대에 가라앉은 썰매가 이제 곧 그 오르막길에 나타날 것이다. "잘 가오! 잘 가오!" 지바고는 그 순간을 기다려 소리없이 되풀이했다.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속삭임이 차가운 저녁 공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잘가오, 영원히 떠나가 버린, 오직 하나 내 사랑이여!" 이윽고 썰매는 쏜살같이 자작나무 사이를 달려 올라갔다. "아, 저기 가는구나, 저기!" 그가 파리한 입술로 이렇게 속삭이고 있을 때, 썰매는 갑자기 속력 을 늦추며 마지막 자작나무 옆에 멈추어 섰다. '아아, 이 가슴의 고동 소리! 미칠 듯 뛰노는 심장이여! 두 다리에서 힘이 쑥 빠지고, 마치 어깨 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슈바처럼 온몸이 금세 쓰러질 것만 같구나! 하나님, 라라를 제게 도로 돌려 주시려는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저 멀리 석양 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왜 가지 않고 멈춰 섰을까? 아니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이 집에 이별을 고하려고 썰 매를 세워달라고 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뒤쫓아오는지 확인하려고 한 것일까? 다시 떠나버렸어.' 다행히 해가 먼저 넘어가지만 않는다면(어두워지면 볼 수가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골짜기 저편 공지에, 그저께 늑대떼가 몰려왔던 곳에 또 한 번 썰매가 얼른 나타날 것이다. 이윽고 그 순간이 오고 또 지나갔다. 검붉은 태양은 아직도 눈에 덮인 푸른 지평선 위에 둥글 게 빛나고, 눈은 달콤한 파인애플빛의 광선을 굶주린 듯 빨아들이고 있었다. 썰매는 땅속에서 솟 아오르는 듯 퍼뜩 나타나서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잘 가오, 라라! 저승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안 녕! 나의 사랑이여, 끝없이 영원한, 그치지 않을 나의 기쁨이요. 안녕, 안녕!' 마침내 썰매는 아주 사라져버렸다.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두 번 다시 라라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 다.' 어둠이 깃들이기 시작했다. 눈 위에 여기저기 깔렸던 구리빛 노을의 반점이 이내 퇴색되고 사 라져갔다. 부드러운 잿빛 공간이 재빨리 라일락빛 황혼에 잠기면서 차츰 자주빛으로 변했다. 가느 다란 레이스처럼 꼬불꼬불한 자작나무 가지가 갑자기 핏기를 잃은 듯 불그레한 하늘에 섬세한 선 을 그리고 있었으나, 이내 잿빛 안개 속에 녹아들었다. 애수는 지바고의 감각을 한층 더 예민하게 했다. 그는 열 배나 더 날카로와져서 주위의 모든 것을 포착했다. 그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심지어 공기까지도 희귀한 자질을 지니고 있는 듯싶었 다. 겨울밤은 호의를 지닌 증인인 양 동정 어린 입김을 내뿜고 있었다. 마치 이때까지 어두워진 적이라곤 없었는데, 지금 홀로 고독에 빠진 한 인간을 위하여 오늘 처음으로 어둠의 장막을 내리 는 듯싶었다. 지평선을 등진 언덕의 수목들은 단순한 주위의 전망이 아니라, 마치 그에게 동정을 베풀기 위해 방금 땅속에서 솟아오르기라도 한 것같이 보였다. 지바고는 억지로 동정을 베풀려는 무리를 피하듯 그 순간의 선명한 아름다움에서 도망치고 싶 은 심정이었다. 빛을 뻗쳐서 저녁놀을 향해 '고맙소, 하지만 필요 없어'하고 속삭이고 싶었다. 그는 뒤돌아서서 현관문을 응시하며 여전히 현관에 서 있었다. '나의 밝은 태양은 져버렸어.' 마 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솟구쳐 오르는 눈물이 목구멍을 막아서 이 짤막한 몇 마디도 제 대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두 가지의 상반되는 독백이 머리 속에 맴돌았다. 그 자신에 관한 메마르고 사무적인 독백과, 라라를 향해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독백이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자 이젠 모스크바로 가자. 무엇보다도 살아 남는다는 것이 우선 문제이다. 수면 부족을 극복해야 한다. 누 워서 잠을 자서는 안 된다. 의식을 일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밤을 새워 일을 하자. 그리고 또 한 가지, 밤에 얼어 죽지 않도록 지금 곧 침실에 불을 때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여! 당신을 포옹한 감 촉을 내 팔이 잊지 않는 한, 그리고 내 손과 입술이 당신을 기억하는 한 당신은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나는 후세에 남을 훌륭한 작품 속에 당신에게 향하는 눈물을 쏟으리라. 당신의 추억을 우 아하고 서글픈 시에 담으리라.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길 떠나지 않겠다. 나 는 당신을 이렇게 그릴 작정이다.-바다 속 밑바닥까지 온통 뒤집은 무서운 폭풍이 지나간 후, 제 일 멀리까지 밀려온 파도의 흔적이 모래 위에 새겨져 있다. 바다 밑에는 휘저어 올릴 수 있는 가 벼운 조약돌이며 코르크, 조개 껍질, 해초 따위가 줄지어 모래사장에 밀려왔다. 끝없이 멀리 뻗은 해변의 경계선이야말로 가장 높았던 파도의 흔적인 것이다. 이렇게 인생의 폭풍이 당신을 나한테 밀어다 준 것이다-나는 당신을 이렇게 묘사할 생각이다.' 집안에 들어가 문을 닫고 외투를 벗었다. 아침에 라라가 말끔히 청소를 했지만 출발을 서두르 는 바람에 뒤죽박죽되어 버린 침실로 들어가서 흩어진 침대며 방바닥과 의자 위에 마구 내던져진 물건들을 보자, 지바고는 어린애처럼 무릎을 꿇고 딱딱한 침대 가장자리에 가슴을 들이대고서 이 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목놓아 울었다. 그러나 통곡은 그리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서 얼른 눈물을 닦고 빛 잃은 피로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코마롭스키가 두고 간 술병 을 집어들고 마개를 뽑아 컵에 반잔쯤 따른 후 물과 섞었다. 그러고는 방금 목놓아 울던 때와 마 찬가지로 모든 것을 잊고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14 지바고에게는 전혀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그는 차츰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런 이상 한 느낌은 처음 느껴보았다. 라라가 떠나간 후에 집안을 치우거나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은 고사 하고, 세월이 흘러가는 것마저 잊어버리고 밤낮을 가리지 못했다. 그는 술을 마시고는 라라를 그리는 시를 썼으나, 추고를 거듭함에 따라 시와 메모 속에 그려놓 은 라라는 카첸카의 어머니로서의 라라, 딸을 데리고 먼길을 떠나간 라라, 말하자면 현실의 라라 와는 비슷하지도 않고 멀어져갔다. 이렇게 추고를 거듭하는 까닭은 표현의 박력과 정확성을 모색하려는 데 있었으나, 그보다도 그 것은 개인적인 경험이나 과거에 일어난 실제 사건 따위를 솔직히 털어놓아 현실의 인물들을 해롭 게 하거나 자극하지 않으려는 배려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의 시에서는 피어오르는 듯한 박진감은 어느덧 사라졌으나, 그렇다고 병적으로 생기가 없는 것이 되기는커녕 특수한 경우 를 누구한테나 친숙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경우로 승화시켰다. 이것은 그가 의식적으로 추구하려던 목적은 아니었다. 길을 떠난 라라가 도중에서 그에게 보내준 위로의 말처럼, 멀리서 흔드는 그녀 의 손짓처럼, 끔에서 그의 이마를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길처럼 저절로 우러난 것이었다. 그는 시 에 새겨진, 마음을 씻은 듯 고결한 인상을 더없이 좋아했다. 라라를 그리는 애끓는 심정을 시로 읊는 일에 골몰하면서도, 자연이나 일상 생활, 그 밖의 모든 일에 관하여 몇 해 동안 틈틈이 적어 온 노트에 지금도 그는 이따금 뭔가 써놓곤 했다. 시를 쓸 때면 언제나 개인 생활이나 사회 생활에 관한 온갖 상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다시 역사를 생각해 보았다. 이른바 역사의 흐름이란 흔히 있는 통속적인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식물계와 같은 것이었다. 겨울에는 눈을 뒤집어쓴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늙은이의 혹 은 자라난 털처럼 가냘프고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얼마 후 봄이 오면, 숲은 며칠 새에 그 모습이 달라져 하늘을 찌를 듯이 자라는 울창한 잎 속에 몸을 숨길 수도 있었다. 이러한 전환은 동물과 는 비길 수도 없을 만큼 급속히 이루어진다. 동물이란 빨리 자라지는 못하니까. 그러나 식물의 움 직임은 절대 관찰할 수는 없다. 숲은 이동하질 않는다. 느닷없이 덤벼봐도 장소의 이동을 잡아내 지는 못한다. 어떤 경우에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끊임없이 선장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 의 생명인 역사도 이처럼 언제나 움직이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역사의 전환을 포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와 비슷한 생각으로 나폴레옹이나 군수나 장군이 역사를 움직인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는 결론에 이르거나 분명하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역사를 만들지는 못한다. 마치 풀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없듯이 역사의 움직임도 눈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전쟁이나 혁 명, 황제나 로베스피에르는 역사의 유기적인 동인이며 그 효모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은 행동적인 사람들, 외고집 광신자나 날뛰는 천재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들은 불과 몇 시간이나 며칠 동안에 구질서를 뒤엎고 만다. 변혁은 몇 주일 또는 기껏해야 몇 년의 세월이면 족하다. 그러나 그 후 수십 년, 아니 수세기에 걸쳐서 변혁을 유발시킨 편협한 정시은 우상처럼 신성시되는 것이다. 라라를 생각하며 지바고는 멀리 지나간 멜류네예보의 여름을 그리워했다. 그 당시 혁명은 하늘 에서 지상에 강림한 신이었고 그해 여름의 구세주였었다. 모두가 제멋대로 미쳐서 날뛰고, 모든 생명은 제 나름으로 존재해 있었다. 최고 정책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거나 증명하기 위해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감상을 쓰고 있는 사이에 그는 자기의 예술관을 새삼 검토해 보았다. 예술이 란 언제나 미에 봉사하는 것이며, 미는 형식을 통해서 표현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몹시 지쳐서 머리가 아팠다. 삼제바토프가 찾아왔다. 그도 또한 보드카를 가지고 왔다. 그는 라라가 딸을 데리고 코마롭스키 와 함께 유라친을 떠나던 얘기를 했다. 그는 철길을 선로 수리차로 왔던 것이다. 말을 제대로 돌 보지 않았다고 지바고를 나무라면서, 그에게 사나흘동안만 더 말을 두어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 다. 그러나 며칠 안으로 다시 와서 바르이키노에서 딴 데로 지바고를 데려다 주겠다는 약속을 남 기고 돌아갔다. 이따금 지바고는 글을 쓰다가도 문득 라라를 눈앞에 그리며 그리움에 몸부림쳤다. 지난 소년 시절에 아름다운 여름 자연 속에 파묻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돌아가신 어머니 목소리를 듣듯 이, 귀에 익은 라라의 그리운 목소리가 옆방에게 '여보!' 하고 부르는 것만 같았다. 그 주일에는 라라의 목소리 이외에 또 다른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 어느 날 밤, 꿈에 이 집 밑 에 용의 굴이 있다는 터무니없는 흉몽을 꾸었다. 끔에서 깨어나 눈을 뜬 순간, 골짜기 쪽에서 불 빛이 번쩍하더니 총성이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놀라운 것은, 이런 놀라운 일이 있었는데도 그는 이내 다시 잠들어버렸던 것이다. 아침에 깨어나자 그는 어젯밤 일은 죄다 꿈이었구나 하고 생각 했다. 15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어느 날이었다. 지바고는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이렇게 괴로워할 것 없이 더 빠른 방법을 선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삼제바토프가 데리러 오면 즉시 떠나기로 결심했다. 저녁 무렵이었으나 아직 어둡기 전이었다. 눈을 밟고 오는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누군지 가벼 우면서도 당당한 걸음걸이로 집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상하군. 누굴까? 삼제바토프는 말이 있으니까 걸어올 리가 없는데. 텅 빈 바르이키노에 여행 자가 있을 까닭도 없었다. '나를 데리러 온 게로군.' 지바고는 생각했다. '시내로 출두하라는 호출 이나 명령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나를 체포하러 온 걸까? 아니다, 나를 데리어 왔다면 적어도 두 사람은 왔어야 할 게 아닌가. 미쿨리츠인이 돌아왔나 보다.' 그는 발소리의 주인공을 알 것 같 아 무척 기뻤다. 아직 정체를 확실히 드러내지 않은 이 방문객은 자물쇠가 없어진 것을 의아해 하듯 현관문을 더듬거리더니 문을 열고 조심스레 닫고는 이 집 구조를 다 알고 있는 듯 서슴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때 지바고는 문을 뒤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돌아다보았다. 낯선 사 나이는 이미 문턱에 우뚝 서 있었다. "누구를 찾소?" 지바고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을 던졌다. 대꾸가 없었다. 그래도 지바고는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이 낯선 방문객은 용모가 제법 단정하고 체격도 늠름한 사나이였다. 짧은 털가죽 외투와 털가 죽 바지에 따뜻해보이는 양피 장화를 신고 어깨에는 소총을 메고 있었다. 그래도 지바고는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사나이를 바라본 순가, 지바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낯선 사람이 불쑥 나타나서가 아니 었다. 이 집의 살림의 흔적을 보고 이미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짐작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물건들은 미쿨리츠인네가 내버리고 갔을 리는 없었고, 분명 이 사람이 그 주인공일 것이다. 어딘 지 사나이의 얼굴 모습이 낯익은 듯 싶었다. 예전에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나이는 지바고 를 보고서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집에 누가 살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왔는지도 모른 다. 아니 어쩌면 지바고가 누군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누굴까?' 지바고는 곰곰이 생각했다. '도대체 어디서 보았을까......그것은 어느 5월의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는 아침이었던 것 같다. 라즈빌리에 정거장이었지. 무뚝뚝한 인상의 군사 위원의 객차. 뚜렷한 사상, 편협한 사고(思考). 가열한 주의 주장. 잘못을 모르는 태도. 독선적인 자세. 그렇다. 스트렐리니코프다!' 16 두 사람은 벌써 몇 시간이나 계속해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러시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런 대화였다. 그 당시 누구도 그랬듯이 불안과 공포의 열띤 얘기였다.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했다. 그런 신경질적인 다변은 누구한테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으나, 스트렐리니코프가 이렇게 쉴새없이 지껄이는 데는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듯싶었다. 그는 무서운 적막을 피하기 위하여,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어서 지바고와 대화에 애를 쓰며 마구 지껄였다. 외로움을 잊으려는 것일까?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서일까? 또는 슬픈 추억이 두 려워서일까? 아니면 죽고 싶도록 자학하는 자기 혐오 때문일까? 또는 그 어떤 최후적인 결심을 하고서, 그것과 대결하기 두려워 이렇게 지바고를 상대로 잡담을 하면서 고통을 잊으려는 것일 까? 어쨌든 그는 마음속에 괴롭고 중대한 비밀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쓸데없 는 화제를 꺼내어 마구 지껄이며 무거운 마음을 더는 것이었다. 이것은 시대적인 병폐이며 혁명기의 광증이었다. 모든 언행이 마음과는 딴판이었다. 깨끗한 양 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나 죄의식을 느꼈으며, 범법자였으며 무언가 속이고 있다고 스스로 자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소한 일로도 큰 자기 가책에 고민했었다. 사람들은 공포심에서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저주하고 학대했었다. 모두가 병적인 파괴본능에서 스스로 최면술에 걸린 듯, 자기 비판의 정열을 멈출 길이 없었다. 스트렐리니코프는 고급 장교였으며, 군법 회의를 주재하여 죽어 가는 자의 문서나 자백을 많이 읽고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자기 폭로의 발작에 사로잡혀, 자기 생애를 재검토하고 결 말을 지으며 극도의 흥분 속에서 모든 것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두서없이 자기 고백을 계속했다. "이것은 치타시 근방에서 있었던 일이었소. 이 집 서랍이나 장롱에 넣어둔 진기한 물건들을 보 고 놀랐지요? 그 물건들은 적위군이 동부 시베리아를 점령했을 때 징발해 온 것들입니다. 그렇다 고 나 혼자서 이곳에 날아온 건 아니지요. 믿음직하고 충실한 부하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그때의 생활은 참 좋았어요. 이 양초며 성냥, 커피, 홍차, 필기 도구 등이었고, 어떤 것은 체코의 재산이 었고, 일본, 영국 재산이었어요.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죠. 그렇잖아요? 참 '그렇잖아요'라는 말은 내 아내의 말버릇이었지요. 당신도 아실 거요.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이 말을 해야 옳을지 망설였 답니다. 나는 아내와 딸을 만나러 온 겁니다. 모녀가 여기에 있다는 소식은 최근에야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늦었어요. 소문이나 보고에 의하여 당신이 라라와 가까운 사이라는 말을 듣고 '의 사 지바고'란 이름을 들었을 때, 내가 근년에 만나 본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 주에서 언젠가 심문 에 받으러 나에게 끌려온 당신의 얼굴이 생각났어요." "그때 나를 총살해버리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았소?" 스트렐리니코프는 이 질문을 그대로 흘려버렸다. 아마 잘 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 생각에만 열중하면서 계속 지껄였다. "물론 질투를 느낀 건 사실이오. 지금도 질투하고 있어요. 하지만 당연한 일 아니오? 내가 이 근처에 잠복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한두 달 전입니다. 그전 원동지방 은신처가 노출되고 말았어 요. 나는 누명을 쓰고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었지요. 결과는 뻔했어요. 나는 결백했어요. 사태가 호 전되면, 불원간 내 입장을 밝히고 오명을 벗을 전망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체포되기 전에 당분간 숨어서 도피 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던 겁니다. 결국 난 구조받게 되었을 텐데, 내가 믿었던 어린 놈의 사기꾼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나는 겨울에 사람의 눈을 피해서 굶주리며 시베리아를 도보로 건너 서쪽으로 갔습니다. 나는 눈덩이에 구멍을 파고 숨거나 눈이 뒤덮인 기차에서 자곤 했어요. 그때 나는 떠돌아 다니는 소년 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애는 빨치산 소대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는 다른 죄수들과 함 께 총살형을 당했으나 총알이 급소를 벗어났다는 겁니다. 그는 쌓인 시체 속에서 기어나와 안전 한 장소에 숨어 상처를 치료하고, 나 모양으로 전전하며 숨어다녔다는 것이 그의 얘기였어요. 그 어린 놈은 고약하고 머리도 나쁜 놈이지요. 중학교 2학년 때 성적이 나빠서 퇴학당했다는 얘기였 으니까." 스트렐리니코프의 얘기를 자세히 들을수록 지바고는 그 소년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그애 이름이 체렌치, 성이 갈루진이 아니오?" "그렇소." "그럼 빨치산이나 총살형이라는 말은 사실입니다." "그 애의 한 가지 칭찬할 점은 어머니에 대한 미칠 듯한 효성입니다. 그애 아버지는 인질로 잡 혀서 총살되고 어머니는 투옥되어 남편과 같은 운명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애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서 어떤 짓이라도 하려고 결심했지요. 그는 체까에게 죄값을 치르겠다고 했어요. 말하자면 체 까가 찾는 거물을 넘겨줄 테니 자기의 죄를 사면해달라고 요구하고, 체까가 이를 받아들인 겁니 다. 그래서 그놈은 내가 숨었던 집을 가르쳐주게 된 겁니다. 그러나 난 그놈의 배신을 미리 짐작 하고 그곳을 빠져나온 후였어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초와 끊임없는 모험을 거듭하며 시베리아를 건너 겨우 이 지방에 도착 하게 되었소. 이곳에서는 모두들 나를 알고 있으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으로 그들은 내가 설마 이곳에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사실 내가 이 집이나 근처의 또 한 집에 은신하고 있 는 동안에 치따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어요. 이젠 끝장입니다. 이제 여기에도 손을 뻗치고 있 어요. 아니, 벌써 어두워지는군요. 나는 밤이 질색이에요. 오래 전부터 나는 밤에 잠을 못 자는 버 릇이 생겼거든요.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아실 겁니다. 내 초가 앚ㄱ 남아 있으면..썩 좋 은 초지요? 그렇잖아요? 진짜 수지로 만든 겁니다. 우리 좀 더 얘기할까요? 당신이 견딜 수 있을 때까지 밤새도록 환히 촛불을 밝히고 얘기나 합시다." "초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한 갑을 뜯었을 뿐입니다. 석유가 있어서 등불을 썼어요." "빵은 없나요?" "없어요." "그럼 무엇을 먹고 살았지요? 아니,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군요. 감자일테지요." "그렇습니다. 얼마든지 있어요. 이곳에 살던 주인 부부는 경험이 많아서 잘 저장해 두었더군요. 감자는 지하실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썩지도 않고 얼지도 않았어요," 느닷없이 스트렐리니코프는 혁명에 대한 화제를 끄집어냈다. 17 "이런 얘기는 당신에게 흥미 없을 겁니다. 당신은 이해할 수 없겠지요. 우리와는 다르게 살아왔 으니까. 도시의 변두리 지대, 철도 주변의 빈민굴과 셋집들의 세계가 있어요. 불결하고 비좁고, 가 난에 지친 생활들, 노동자의 인간적인 타락, 부녀자들의 타락, 그런데 한편에서는 어머니들의 귀 염둥이들, 말쑥한 학생들, 부유한 상인자식들의 뻔뻔스러운 음탕. 그것도 어떤 짓을 해도 벌받지 않는, 인생을 조롱하듯 하는 방탕한 생활 말입니다. 가난에 찌들고 치욕에 탄식하며, 정조를 빼앗 기고 농락당한 여인의 눈물과 탄식이 그들에게는 농담이나 발작을 일으킨 정도지요. 무위도식하 는 그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일 없고 세상에 이바지하는 일도 없으며 후세에 아무것도 물려 줄 것이 없는 기생충들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생활이 곧 투쟁이었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바위라도 움직였 소. 비록 슬픔 이외에는 아무것도 갖다 준 것이 없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랑하는 여자를 모욕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몇 배나 더 괴로움을 당해 왔으니까. 내가 얘기를 계속하기 전에 당신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당신은 생명이 중하면 지체없이 이곳을 떠나시오. 그들의 손길이 여기까지 뻗치고 있어요. 내가 잘못되면 당신도 함께 걸려 들 겁 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얘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당신은 연루를 면할 길이 없어요. 게다가 이 주변에는 늑대가 우글거리고 있어요. 얼마 전에도 총을 쏘아 겨우 늑대떼를 쫓았지요." "총을 쏜 것이 바로 당신이었군요?" "그러하오. 물론 당신도 들었겠지만. 나는 다른 피신처로 가는 길이었소. 그러나 그곳에 도달하 기 전에 여러 가지 징조로 미루어 그곳이 이미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거기 있던 사람들 은 아마 총살되었을 거요. 나는 이 집에 오래 있지 않겠소. 하룻밤을 새우고 아침엔 떠나겠소. 자, 그럼 내 얘기를 계속합시다. 물론 그런 젊은 탕아들이 멋쟁이 모자를 쓰고 전세 마차에다 계집을 태우고 쏘다니던 트베르스 카야 얌스카야 거리는 비단 모스크바나 러시아에만 있었던 걸까요? 그 거리, 그 밤거리, 19세기를 하나의 역사적 시기로서 구분한 것은 사회주의 사상의 탄생이었소. 혁명이 시작되고 헌신적인 천 년들이 바리케이드에 일어났어요. 어떻게 하면 황금의 횡포를 막고, 어떻게 하면 가난한 인간의 권위를 구원할 수 있을까 하고 머리를 짜내던 정치학자들. 그리하여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했어요. 마르크스주의는 악의 근원을 들추어내고 그 구제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19세기의 거대한 힘이 되었어요. 그것은 트베르스카야 얌스카야 거리에도, 불결한 곳에도, 성스러운 빛에도, 방탕과 노동자의 거주지에도, 선언이나 바리케이드에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아아, 그 옛날 학생 시절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당신은 모를 겁니다. 그녀는 우리 이 웃집 셋방에 살던 여학생과 친구 사이였소. 주민들 거의가 부레스트 철도 노동자들이었어요. 그 시절에는 브레스트 선이라고 불렀지요. 그 후에 그 철도는 여러번 이름이 바뀌었지만. 지금 유라 친 혁명재판소의 위원인 우리 아버지는 정거장의 보선공이었어요. 나는 늘 이웃집에 가서 그녀를 자주 만났어요. 그녀는 아직 어린 소녀였으나 깜찍한 생각과 세상의 불안을 그녀의 얼굴 표정이 나 눈동자에서 읽을 수 있었어요. 그 시대의 테마였던 모든 것 - 눈물과 모욕과 희망, 그리고 분 노와 자존심 - 이 그녀의 표정이나 태도에 새겨져서 소녀다운 수줍고 우아한 태도에 뒤섞여 있었 어요. 그녀의 도든 것이 이 시대를 고발하고 규탄하고 있었던 겁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이건 사 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숙명이나 운명과 같은 겁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이건 사소한 문제가 아 닙니다. 이건 숙명이나 운명과 같은 겁니다. 자연이 그녀에게 부여한 권리, 태어나면서부터 가 지고 있던 권리인 것입니다." "그녀를 참으로 정확하게 표현하시는군요. 나 역시 그 시절에 그녀를 존 일이 있어요. 당신이 지금 말한 것과 꼭 같은 인상이었어요. 여학생다운 순결과 더럽혀진 드라마의 여주인공의 비밀이 한데 뭉쳐진 느낌이었습니다. 벽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는 긴장된 자기 방어의 그림자였소. 나는 그녀를 그렇게 보았고. 아직도 그녀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은 완벽하게 그 모습을 그려 냈어요." "그녀를 보았고, 그리고 기억한다구요?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했소?" "그건 전혀 다른 문제이니까." "그렇지, 좋아요. 지난 19세기에 파리의 혁명, 게르첸을 비롯한 러시아 망명객들의 무리, 러시아 황제의 암살 사건- 그중 몇은 미수에 그쳤지만 대개는 수행되었지요-세계의 노동 운동, 유럽 제 국의 의회와 대학에서 일어난 마르크스주의 운동, 색다르고 재빠른 추론, 자비를 내건 냉혹한 구 제책 그리고 날카로운 조소가 담긴 새로운 사상체계 등 이 모든 것이 남김없이 흡수되고 종합되 어 표현 된 것이 바로 레닌이지요. 레닌은 구세계가 저지른 죄를 앙갚음하기 위해 무서운 힘으로 도전한 보복의 화신이었어요. 레닌과 함께 세계의 눈앞에는 한없이 거대한 러시아의 모습이, 세계가 보는데서 인류의 모든 비애와 불행을 구제하는 광명이 비쳤던 겁니다. 그런데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얘길 하고 있지 요? 당신에겐 헛된 소음에 지나지 않을 텐데. 그리하여 나는 그 소녀를 위하여 대학에 가고, 그녀를 위하여 교원이 되어 낯선 유라친으로 왔 던 겁니다. 그녀를 위하여 나는 책을 탐독하고 지석을 쌓았어요. 그녀에게 나의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나 곁에서 도움이 되려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3년간의 결혼 생활을 보낸 뒤 나는 그녀를 나 의 것으로 새로이 획득하기 위하여 전쟁에 나갔어요. 전쟁이 끝나고 포로 생활에서 다시 돌아왔 을 때, 나는 내가 죽었다고 소문이 나 있는 것을 이용했어요. 나는 가명으로 혁명 대열에 뛰어들 었소. 그녀가 경험한 모든 부정을 하나도 빠짐 없이 복수하고, 그녀의 마음을 그런 슬픈 기억에서 깨끗이 씻어주고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다시는 크베르스타야 얌스키야의 생활이 되풀이되 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소. 그녀와 내 딸이 바로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는데도 나는 그들에게 달 려가 만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고 있었어요! 내 평생의 사업을 먼저 끝마치기를 원했기 때문이 었소. 이제 단 한 번이라도 그들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라도 바치겠소! 그녀가 들어올 때 면, 마치 창문이 활짝 열리고 침실은 신선한 공기와 밝은 빛으로 가득 차는 것 같았지요." "당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잘 알겠소. 실례지만 당신은 그녀가 당신을 얼마나 깊이 사 랑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뭐라고 하셨지요?" "당신은 그녀가 당신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생각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왜 그런 말을 묻습니까?" "그녀가 내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오." "그런 말을 했소? 당신에게?" "그렇소." "용서하시오, 내가 물어서는 안 괼 일인 줄은 알지만, 지나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녀가 당 신에게 말한 것을 꼭 그대로 내게 전해줄 순 없을까요?" "그러지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모범적인 사람이며, 당신과 견줄 사람은 아무도 만 나 보지 못했다는 거요. 그리고 당신은 뛰어나게 성실하다고 말했어요. 또 당신과 함께 지낸 그 집이 다시 나타나지만 하면 자기는 지구 끝까지라도 무릎으로 기어가겠노라고 했어요." "미안하지만, 혹시 당신이 말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면 그녀가 이 말을 했을 때의 상황을 말해 주겠어요?" "그녀는 이 방을 치우고 있었어요. 그리고 밖에 나가서 융단의 먼지를 털었어요." "미안하지만 어느 융단이지요? 두 개가 있는데." "저 큰 거요." "그녀에겐 너무 무거웠을 텐데. 당신이 도와주었나요?" "그래요." "당신이 한쪽 끝을 잡고, 그녀는 몸을 뒤로 젖히고 마치 그네를 타듯이 팔을 높이 쳐들고 얼굴 은 먼지를 외면하고 눈을 가늘게 뜨면서 큰 소리로 웃지 않던가요? 그렇잖아요? 난 그녀의 버릇 을 잘 압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들은 마주 다가가서 그 무거운 융단을 둘로 접고 다시 넷으로 접 으면서 그녀는 농담을 하며 장난을 쳤겠지요. 그렇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들은 벌떡 일어서 각기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내다보았다. 얼마 후 스 트렐리니코프가 지바고에게 왔다. 그는 지바고의 손을 잡아 자기 가슴에 지긋이 댔다. 그리고 여 전히 재빠르게 말을 계속했다. "용서하시오. 당신이 소중하게 가슴속에 간직한 것을 건드렸군요. 하지만 용서하시오. 몇 가지 만 더 물어보고 싶어요. 제발 날 혼자 두고 떠나지는 마시오. 내가 먼저 떠나겠어요. 생각해보시 오-우린 6년간이나 떨어져 살았소. 6년 동안이나 만나고 싶은 생각을 억제해왔단 말입니다. 그러 나 난 아직 자유를 완전히 쟁취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것을 쟁취할 때는 내 두 손 은 풀려날 것이며. 난 처자와 다시 어울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소. 그러나 모든 것이 수포로 돌 아가고 말았소. 내일 나는 체포될 겁니다. 당신은 그녀와 친밀한 사이였소. 언젠가는 그녀를 만나 게 되겠지요. 아니, 내가 무근 말을 하고 있지? 그런 부탁을 할 수 는 없어요. 내가 체포되면 한 마디 변호할 기회도 얻지 못할 겁니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내 입에 자갈을 물리고 말 것이오. 난 잘 알아요!" 18 지바고는 드디어 깊은 잠에 떨어졌다. 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든 것은 근래에 처음 있는 일이었 다. 스트렐리니코프의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지바고는 뒤돌아 눕거나 흘러내린 담요를 끌어당기 느라고 잠깐 잠이 깼을 뿐, 깊은 잠이 밀물처럼 밀려와 다시 달콤한 잠결에 빠져들었다. 새벽녘에 그는 소년시절의 꿈을 짤막하게 여러 깨 꾸었다. 그 꿈들은 어떻게나 자세하고 또렷한지 생시의 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머니가 그린 이탈리아 해안 지방의 수채화가 느닷없이 멱에서 떨어져 유리가 산산조각나는 바람에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아니, 이건 꿈이 아니다. 라라의 남편 안치포프가, 즉 스트렐리니코 프가, 가커스의 말마따나 슈치마 골짜기에서 늑대를 쫓고 있는가 보다. 아니, 그게 아니다. 잠꼬대 같은 소리야. 물론 벽에 걸렸던 그림이 떨어진 거야! 저것 봐, 저렇게 방바닥에 유리조각이 흩어 져 잇지 않은가-이렇게 확인하고, 그는 다시금 잠이 들었다. 늦게서야 잠이 깼다. 너무 많이 자고 나서 골치가 아팠다. 처음에는 자기가 누구인지, 지금어디 에 있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아참, 스트렐리니코프가 이집에 머물렀지. 시간이 너무 늦었어. 옷 을 입어야겠군. 스트렐리니코프는 지금쯤 일어나 있을 테지. 아직 자고 있다면 깨워서 커피를 끓 여 같이 마셔야지.' "파베 파브로비치!"그는 소리쳤다. 대답이 없었다. '아직도 자고 있는 게로군 곯아떨어진 모양이지. '지바고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스트렐리니코프의 털모자는 탁자 위에 그대로 있었으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산책하러 나갔나? 모자도 안 쓰고 가다니. 무슨 단련을 하는가 보군. 오늘은 바르이키노 를 떠날 작정이었는데, 너무 늦었어. 언제나 이렇다니까!' 그는 부엌 화덕에 불을 붙여 놓고 물통을 들고 우물가로 나갔다. 현관 앞 몇 걸음 떨어진 길 위에 스트렐리니코프가 머리를 눈더미에 처박고 가로 뻗어 있었다. 자살한 것이다. 회족 관자놀이 밑의 눈이 붉은 덩어리로 굳어져 있었다. 저만큼 뿌져진 핏덩어리가 마치 얼어붙은 마가목 열매 처럼 눈 위에 반점이 되어 굴러 있었다. 제15장 종막 이제 남은 지바고의 이야기는 그의 죽기 전 8, 9년 동안의 일이다. 이 기간에 그의 심신은 점점 약해졌으며 ,의사로서 또 작가로서 지식과 능력이 점차 쇠퇴해가고 있었다. 때로는 어두운 번민에 서 잠시 빠져나와 영감에 사로잡혀 시작에 몰두했으나, 얼마 후에는 불꽃이 사라지듯이 오랫동안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곤 했으며, 자기는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일에 아주 무관심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는 동안에 그의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심장이 나쁘다고는 알고 있었으나, 어느 정도 악화되고 있는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된 후, 더욱 애매하고 위선적인 시기였던 네프(신경제정책 1921∼1927)초 기에 지바고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빨치산에서 탈출하여 유라친에 돌아왔을 때 보다도 머리와 수염이 텁수룩한 초췌한 모습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좀 값이 나가는 옷가지는 하나씩 벗어서 빵 과 바꿔 먹었고, 찢어진 누더기 옷을 얻어 입어서 겨우 벗는 것을 면했다. 이렇게 외투와 웃도리 도 없이 모스크바 거리에 나타났을 때는 회색 털모자를 쓰고 각반을 하고 있었으며, 단추가 다 떨어진 죄수의 옷처럼 낡은 병사의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옷차림은 모스크바의 광장 이나 거리, 그리고 역 구내에서 우글거리는 적위군 병사들 틈에 끼이면 조금도 식별할 수 없게 되었다. 지바고는 혼자서 모스크바로 온 것은 아니었다. 그가 어디로 가든 그의 뒤에는 역시 낡은 군 복 차림의 곱살스럽게 생긴 시골 청년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런 꼴로 그들은 아직 남아 있던 여인숙을 찾았다. 지바고가 소년 시절에 자주 다니던 집을 찾으면, 지금도 잊질 않고 안으로 들 어오도록 권하면서 여행 후에 목욕을 했느냐고 묻곤 했다―그 당시 티푸스가 창궐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리고 처음 방문했을 때는 그의 가까운 사람들이 모스크바를 떠나게 된 내력 같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지바고와 소년은 몹시 사람이 두려워서 누구라도 만나는 것을 아주 꺼렸으며, 혼자서는 절대로 남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혼자 방문하면 그냥 묵묵히 있을 수는 없었고, 자기가 화제를 끄집어 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통상 아는 집에서 모임이 있을 경우 두 사람은 큰 키를 엉거주춤하여 사 람들 눈에 띄지 않게 구석진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서 밤을 보냈다. 남루한 차림의 수척하고 키 큰 지바고는 서민적인 진리의 탐구자로 보였으며 언제나 따라 다니 는 젊은이는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제자처럼 보였다. 이 젊은 동행자는 과연 누구일까? 2 지바고는 모스크바에 가까이 오면서, 여행의 후반은 기차를 탔으나 전반은 훨씬 더 먼 길을 걸 어왔던 것이다. 그가 지나온 마을의 모습은 이전에 빨치산에서 도망쳐 시베리아나 우랄 지방을 다녔을 때의 비 하면 별로 나아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때는 겨울이었는데, 지금은 늦여름에서 가을 사이의 따 뜻하고 맑은 날씨여서 훨씬 쉽게 올 수가 있었다. 지나온 마을의 대부분은 적군의 습격을 받고 난 직후처럼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이 텅 비어 있 었으며 밭은 곡식을 추수하지 않은 채 버려져 있었다. 사실 그것은 전쟁의 결과라기보다는 내란 의 피해였던 것이다. 9월 말경 그는 가파른 언덕길을 2, 3일 동안 걸어왔다. 밑에는 강물이 오른쪽으로 흐르고 있었 다. 길 왼편에는 주인을 잃은 밭들이 구름 덮인 지평선까지 막막하게 뻗어 있었다. 드문드문 무성 한 숲이 우거져 있었으며, 떡갈나무와 단풍나무, 그리고 느릅나무들이 많았다. 숲은 깊은 계곡이 되어 강까지 뻗어 낭떠러지는 가파른 경사지가 되어서 길을 막고 있었다. 밭에는 거둬 들이지 않은 보리가 무르익어 이삭을 지탱하지 못하고 땅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지바고는 죽을 끓일 수가 없는 최악의 경우에는 낱알을 한줌 긁어 모아 입에 넣고서 간신히 씹어 삼켰다. 이럴 경우에 위가 제대로 소화를 못 시켜서 눅눅한 생낱알째로 배설하게 되었다. 지바고는 이렇게 진한 흑갈색의, 마치 녹슨 금덩이 같은 보리를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수확기 에 추수해 들인 것은 훨씬 밝은 빛을 띠고 있었다. 불길이 없이 타고 있는 넓은 밭, 소리없이 구원을 청하고 있는 밭들이 차가운 막에 잠겨 겨울 빛이 감도는 하늘과 잇닿아, 마치 얼굴표정에 검은 그림자가 비치듯이 희고 검은 눈구름이 길게 깔리면서 떠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서서히 그리고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강물은 흐르고, 길은 강을 따라 뻗어 있었 다. 그 길을 지바고는 걷고 있었다. 그 길과 같은 방향에 구름이 흐르며 들판도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쉴새없이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태껏 이처럼 성가시게 굴던 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밭 가운데를 걷고 있을 때 해가 저물 어 좁은 공지에서 야영을 하게 되면, 쥐가 지바고의 얼굴과 손에 뛰어 다니고 바지와 팔소매 속 으로 기어들었던 것이다. 낮에는 구름 떼처럼 큰 무리가 길가에 우글거렸고, 지바고의 걸음을 방해하다 밟혀 찍찍 비명을 질러댔다. 야성적으로 사나와진 마을의 개들이 지바고한테 덤벼들어 물어뜯기라도 하듯이 서로 눈치를 살 피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따르고 있었다. 개들은 짐승 고기를 먹고 살았으며, 밭에서 뛰노는 쥐 떼를 성가시게 여기지도 않고 좀 떨어진 곳에서 지바고를 빤히 쳐다보면서 무슨 일을 기다리기라 도 하듯 침착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개들이 숲속으로 들어가기를 싫어했고, 숲에 차 츰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처지더니 나중에는 꼬리를 감추면서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숲과 들은 아주 대조적이었다. 들은 인기척이 없는 사람한테 버림받은 고아 신세가 된 같았다. 반면에 인간으로부터 해방된 숲은 마치 속박에서 벗어난 듯 자유를 즐기고 있었다. 평시에는 사람들이, 더욱이 동네 애들이 호도 열매가 채 익기도 전에 다 따 버렸겠지만 지금은 언덕 경사지나 골짜기 숲에는 가을 해에 타서 거칠어진 황금 및 나뭇잎에 쌓인 호도 열매가 서너 개씩 한데 엉켜 너무나 잘 익어서 금방 흘러 떨어질 듯 했으며, 마치 리본에 묶은 듯 예쁘게 보 였다. 지바고는 걸으면서 쉴새없이 호도를 까 먹었다. 그리고 호주머니와 자루에 호도를 가득 채 웠다. 일주일 동안을 그는 호두만 먹고 지냈다. 그가 보기엔 들판은 심한 열병에 걸려 있는 것 같았고, 숲은 병이 나은 후의 맑은 상태였다. 그 것은 마치 숲에는 신이 살아 계시고 들판은 악마의 냉소가 깃들여 있는 듯싶었다. 3 이 무렵 지바고는 인기척이 없는 타버린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화재가 나기 전에는 강변 도 로의 맞은편에 집들이 한 줄로 나란히 있었으며 강변에는 집들이 없었다. 마을에는 바깥은 시커멓게 그을었으나 무사한 집도 여러 채 남아 있었다. 그 밖의 농가는 완전 히 잿더미가 되어버린 채 페치카의 굴뚝만 시커멓게 서 있었다. 강쪽에 면한 낭떠러지 여기저기에는 구멍이 패어 있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돌절구를 쪼아 낸 자욱이었으며, 이것이 그들의 호구지책이었던 것이다. 마을 동구밖에 있는 농가 앞에는 완성되 지 않은 돌절구 세 개가 굴러 있었다. 이 집도 역시 다른 집과 같이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지바고는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조용한 저녁 무렵이었으나 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바람이 집안으로 불어와서 마룻바닥에 흩어진 마른 풀잎과 삼 지푸라기를 사방에 흩어버리며 붙어 있는 종이조각들을 팔락거렸다. 집안의 모든 것이 바스락거리며 움직였다. 여기서도 역시 쥐들이 울어 대며 성가시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는 농가를 나왔다. 해는 벌판 저 멀리에 지고 있었다. 황금빛에 물든 저녁 노을이 건너편 언 덕 여기저기의 덤불과 강물에 반사되어 흰 무늬를 번득이면서 길게 뻗어 있었다. 지바고는 길 건 너 풀밭에 뒹굴고 있는 돌절구에 걸터 앉았다. 낭떠러지 밑에서 금발머리가 보이더니 어깨와 손이 차츰 떠올라 왔다. 물을 가득 담은 물통을 들고, 누군가 낭떠러지 밑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지바고를 보자, 허리까지 낭떠러지 위에 나타낸 채로 서 버렸다. "물을 드릴까요? 당신이 날 해치지 않는다면, 나도 당신을 해치지 않습니다." "고마워, 물 좀 주게. 두려워 말고 이리 와요. 내가 자넬 해칠 리가 있겠나?" 낭떠러지를 올라온 그는 아직 소년이었다. 맨발에 누더기를 걸치고 머리카락은 흩어져 있었다. 다정하게 말을 건넸으나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지바고를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무슨 까닭인지, 소년은 이상하게 흥분되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물통을 땅에 내려놓고 지바고 한테로 달려오더니 갑자기 멈춰 서며 중얼거렸다. "아니…아니…그럴 리가 없지. 이것이 꿈인가. 용서하세요. 혹시 동무, 물어봐도 되겠지요? 당신 을 어디선가 뵌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그래! 의사 아저씨가 아니에요!" "그런데, 넌 누구냐?" "모르시겠어요?" "생각이 나지 않아." "모스크바에서 같은 기차를 탔었지요. 같은 찻간에 말이예요. 저는 강제 노동에 끌려서 호송되 었구요." 그는 바샤 브르이킨이었다. 지바고 앞에 엎드려 두 손에 입맞추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불에 타버린 마을은 바샤의 고향인 베레첸니크 마을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던 것이 다. 징벌대가 마을을 습격하고 방화했을 때 바샤는 돌을 파낸 구멍 속에 숨어 있었으나, 어머니 바샤가 읍에 끌려간 것으로 알고 한탄한 나머지 미치게 되었고, 지금 이 낭떠러지 밑의 펠가 강 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그의 여동생 알렌카와 아리쉬카는 다른 고장의 고아원에 있을 거라는 소 문이었다. 지바고는 바샤를 모스크바로 데려가기로 했다. 오는 길에 바샤는 소름이 끼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지바고에게 들려주었다. 4 "이것은 지난 가을에 씨 뿌린 겨울 보리예요. 씨를 뿌리고 나자 습격을 받았지요, 폴라 아줌마 가 떠나 버린 후의 일입니다. 아줌마를 기억하시죠?" "아니, 잘 모르겠다. 누군데?" "모르시다니, 펠라기아 니로브나 말이예요! 우리와 함께 왔던 차구노바란 말입니다. 얼굴이 착 하게 보이고 살이 통통하고 흰 여자 말입니다. " "언제나 머리를 풀었다 매었다 하던여자 말인가? " "그래요, 맞아요! 바로 머리를 땋아 올린 여자예요. " "그래, 생각이 난다. 가만 있어, 그 후에 시베리아에서 만났었지. 길가에서 만난 일이 있었어. " "정말이예요? 폴라 아줌마를요? " "웬일이야! 바샤, 미친 사람같이 내손은 잡 흔드는 거지? 손 빠질라, 계집애같이 얼굴은 왜 붉히 나?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빨리 애기해주세요? " "만났을 때는 무사했었지. 너의 집 얘기를 하더라. 너의 집에서 살면서 폐가 많았다고 하면서, 내가 혹시 잘못 들었나? " "그래요. 그랬어요. 우리 집에 있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그 아줌마를 마치 친동생처럼 대했고, 좋아했답니다. 아줌마는 조용하고 일 잘하는 손재간도 있었어요. 그녀가 우리 집에 있는 동안은 무엇이든 풍족했어요. 그런데 소문이 나쁘게 나서 베레첸니크에서 쫓겨나게 되었답니다. 아주 몹 쓸 악담을 들어가면서 말이에요. 하를람 구닐로이라는 농부가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폴라 아주머니를 좋아했어요. 아 주 험담꾼이었어요. 그런데 아주머니는 그를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는 나한테 까지 원한을 품었어요. 그는 나와 아주머니에 대해 험담을 했는데, 결국 그녀는 참을 수 없어서 나가 버렸답니다. 이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어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무서운 살인 사건이 일어났어요. 부이스코에서 아주 가까운 숲속 농장 에서 한 과부가 살해된 거예요. 그녀는 혼자서 살았으며, 고무끈이 달린 남자 장화를 신고 사나운 개를 기다란 쇠줄에 묶어서 온 농장을 뛰어다녔어요. 개 이름이 고를란이었어요. 과부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집안과 농사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난해에 뜻밖에 겨울 추위가 일찍 닥쳐서 눈이 빨리 왔으며, 과부는 그때까지 미처 감자를 캐지 못했어요. 그래서 베레첸니크 에 찾아와, 돈이나 감자를 줄 테니 도와 달라는 겁니다. 제가 감자를 캐러 과부의 농장으로 갔을 때, 이미 하를람이 와 있었어요. 나보다 먼저 부탁했던 모양이었어요. 그녀는 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요. 그것 때문에 그 녀석과 싸울 생각도 없었 고, 둘서 같이 일을 했어요. 날씨가 아주 고약해서 비와 눈이 내려 마치 진흙 바다와도 같았어요. 그래도 열심히 감자를 캐고 줄기와 잎을 불태워서 따뜻한 연기로 감자를 말리곤 했습니다. 일을 끝마치고 나서 그녀는 품삯을 주더군요. 하를람을 보내면서 그녀는 저더러 눈짓으로 남아 있거나 훗날에 다시 와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찾아갔더니, 그 과부는 여분의 감자를 정부의 강제 조달에 빼앗기고 싶지 않는 다 겁니다. 자네는 착한 사람이니까, 입밖에 낼 리가 없다고 믿어서 얘기한다는 거예요. 자기가 구덩이를 파려고 했으나, 이미 날씨도 겨울이고 또 혼자서는 도저히 해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파 주면 나한테는 잘 해주겠다고 했어요. 나는 구덩를 팠습니다. 숨기기에 알맞게 병 모양으로 밑은 넓고 윗부분은 좁게 했어요. 그리고 불을 피워서 굴 안을 말리고 따뜻하게 했어요. 더욱이 눈보라가 한창인데 말입니다. 감쪽같이 감 자를 파묻고 흙으로 덮었어요. 누구도 냄새맡지 못하게 했지요. 물론 이 굴에 대해서는 아무한테 도 말하지 않았어요. 어머니와 동생들한테까지도 말입니다. 누구한테도! 그리하여 한달 가량이 지났을 무렵, 과부집에 강도가 들었어요. 부이스코예에서 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문이 다 열린 채 깨끗이 털렸고 과부의 행방도 모르게 됐어요. 개는 쇠줄을 끊고 도망쳐 버렸구요. 얼마 후, 해가 바뀌기 바로 전에 눈이 처음으로 녹고, 성바실제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어요. 언덕에서 눈이 씻겨 내리며 땅이 보였어요. 그런데 어디선가 개가 돌아와서 눈이 녹은 땅을 발로 파기 시작했어요. 마침 감자를 파묻었던 굴 위를 말입니다. 마구 파헤치자 구덩이 안에서 고무줄 이 달린 신발을 신은 과부가 나왔어요. 끔찍한 일이었어요! 베레첸니크의 사람들은 누구나 다 이 과부를 동정했어요. 하를람이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아 무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놈의 짓이라면 베레첸니크에 버젓이 살면서 동네를 나다닐 수 있겠어요.? 아마 멀리 도망쳐 버렸겠지요. 농장에서 있었던 참사를 오히려 좋아한 사람은 마을 부농들이었어요. 그들은 마을을 시끄럽게 했어요. 그것을 도시 사람들의 짓이라면서, 겁을 주기 위해서 한 짓이라고 했어요. 곡식을 감추거 나 감자를 숨기지 않도록 하려고 일부러 저런 짓을 저질렀는데, 바보 같은 당신들은 그것이 숲속 의 도둑들이 한 짓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어리석은 사람들! 그저 읍내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 고 있단 말이야. 그들은 앞으로 더욱더 당신들에게 명령을 하게 되며, 당신에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조리 빼앗기고 굶주림에 몰리게 되고 말 거요. 마을 사람이 편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시 키는 대로 해요. 좋은 길로 인도해 주겠소. 놈들이 당신들의 피와 땀의 결실을 빼앗으려 올 경우, 여분의 곡식은 고사하고 한톨의 보리도 없다고 하란 말이오, 뭣하면 갈퀴를 휘둘러서 처치해요. 그리고 마을의 총의에 반대하는 자는 조심해야 해요. 그래서 마을 노인들이 서둘러서 부락 회의 를 열고 법석을 떨었답니다. 험담꿈인 하를람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어요. 모자를 벗어들게 읍 내에 가서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마을에서는 야단이 났는데, 여기서는 바라다보고만 있을 셈인가 요? 우리에게는 빈농 위원회가 필요합니다. 한마디만 해 주시면 저는 당장 에 그들 사이에 싸움 판을 벌여놓겠소―그는 이렇게 말하고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으며, 그후 다시는 우리 고장에 나타 나지 않았어요. 그 후에 모든 일은 제대로 되어갔어요. 나쁜 장난을 하거나 죄짓는 사람도 없었어요. 읍내에서 적위군 병사들이 파견되어 왔어요. 순회 재판이 열리고 저는 곧 체포되었습니다. 하를람이 밀고했 던 겁니다. 제가 강제 노동을 도피하고, 마을의 폭동을 선동하고, 과부를 살해했다는 거예요. 그리 하여 저를 감금했으나 다행히도 마루 판자를 뜯고서 빠져 나왔어요. 땅속에 숨어 있었던 덕택에 머리 위에서 마을이 불타고 있는 것도 보지 못하고, 저 때문에 어머니가 강 얼음 구멍에 몸을 던 지는 것을 보지도 못했어요. 이 모든 일이 저절로 일어난 일이에요. 한 농가에서 적위군 병사들을 불러 술을 대접해서 취해 버렸어요. 밤중에 불을 잘 간수하지 못한 탓으로 이 집에 불이 붙기 시 작하더니 옆집으로 하나하나 옮겨 붙게 되었답니다. 불이 붙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은 밖으로 뛰어나와 도망쳤어요. 읍내에서 와 있던 사람들은 죄다 타 죽을 말았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죽 이려고 방화한 것은 아니예요. 그리고 아무도 마을 사람들이 쫓아 버리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일 어날까봐 두려워서 저절로 도망쳐 버렸답니다. 또 마을의 유지들이 열 사람중 한사람은 총살되리 라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제가 굴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마을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들 은 어디선가 방황하고 있을 겁니다.” 5 지바고와 바샤는 새로운 경제 계획 초기인 1922년 봄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맑고 따뜻한 날 씨가 계속되었다. 햇빛이 구세군 교회당의 황금빛 원형 지붕 위에 눈부시게 비치고, 네모진 돌 포 장 틈에서 잡초가 자라나 있는 넓은 광장에 비치고 있었다. 개인 기업을 금지하던 법령이 해제되고, 엄격한 통제하에 자유 상업이 허용되었다. 고물 시장에 서 고물상끼리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보잘것없던 거래가 점차 커져서 투기로까지 발전해서 법망 을 벗어나게 되었다. 적은 매매가 아무리 흥청거려도 무슨 새로운 것은 생산해 내지는 못하고, 도 시의 낡은 물자로는 운택해질 수가 없었다. 이미 팔린 물건을 열 번도 더 팔고 사면서 돈을 번 것뿐이었다. 얼마 안 되는 집의 책을 몇이서 모아서 시 소비에트 협동조합 서점을 개업하고 싶다고 신청했 다. 영업할 장소를 신청하여 혁명 초기에 비어 있던 신발 창고나 원예를 하던 온실을 얻어서, 넓 은 천장 밑에서 잡동사니 책들을 팔고 있었다. 대학교수 부인들은 이전에 어려운 시기에 흰 빵을 구워서 몰래 암시장에다 팔곤 했지만, 지금은 비어 있는 자전거 수리장에서 버젓이 장사하고 있 었다. 세상이 변해서 혁명은 받아들여졌으나 '그렇습니다.'라든지, '좋습니다'라는 말 대신에 '그저 그래요'라고 말하게 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지바고는 이렇게 말했다. "바샤 너도 뭘 해야지" "저는 공부하고 싶어요. " "그야 그렇겠지 " "그리고 또 한가지 희망은, 어머니의 초상을 그리는 일이예요" "그것 참 좋은 일이지. 하지만 그릴줄 알아야지. 언제 그림 그려본 일이 있니?" "아프라크신에 살았을 때, 아저씨 몰대 목탄으로 장난해봤어요." "그래, 기회를 봐서 해보자. " 바샤는 그렇게 뛰어난 재간을 보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응용미술을 공부할 수 있는 소질은 가지고 있었다. 지바고는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바샤를 구스트로가노프 미술학교 고양학부에 입학시키고, 후에 인쇄 미술과로 전학시켰다. 여기서 바샤는 석판 인쇄와 활판 인쇄 그리고 제본 과 장정기술을 공부했다. 지바고와 바샤는 서로 힘을 합쳤다. 지바고는 여러 가지 집다한 문제에 관한 얄팍한 소책자를 기술하고, 바샤는 실습 삼아 그것을 학교에서 인쇄했다. 부수는 아주 적었으나, 아는 친지들이 최 근에 개업한 고본점에 맡겨서 팔 수 있었다. 지바고의 소책자는 그의 철학, 의학, 건강과 질병의 정의, 생물의 변이설과 진화론에 관한 사상, 유기체의 생물학적 기초로서의 개인의 문제, 콜라 아저씨나 시모치까지의 사고방식에 가까운 역 사관이나 종교관, 지바고가 탐방한 푸가초프 사적에 대한 감상, 자기의 시와 단편등이었다. 알기 쉬운 대화체 문장으로 씌었으나 아무리 보아도 통속적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 까닭은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독단적이며 생소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생기있고 독창 적인 것이었다. 그의 책은 잘 팔려서 호사가들의 평가가 높았다. 그 당시, 시 작법이나 예술 작품의 번역 기술을 포함해서 모든 일이 전문화되어 여러 가지 주 제에 대한 이론적 연구 서적이 나왔으며, 여러 종류의 연구소가 생겼다. 또 여러 가지 사상 연구 소나 미학아카데미가 탄생했다. 지바고는 이런 기구의 절반 이상의 고문의를 맡았다. 지바고와 바샤는 오랫동안 의좋게 지내고 있었다. 이 무렵 이집저집을 전전하면서 하숙을 옮겼 으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살기엔 좋지 않았다. 지바고는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곧 시브체프 브라조크에 있는 그의 옛집을 찾아갔다. 그의 가족 은 바르이키노에서 모스크바에 돌아와서는 집에 들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가족의 추방은 모든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지바고네에게 할당되었던 방에는 새 사람이 살았으며, 살림살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웃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지바고를 보자 위험 인물이나 나타난 듯이 새파 랗게 질려서 숨어버리는 것이 었다. 마르켈은 출세해서 이제는 시브체프에서 살지도 않았다. 그의 무치노이 읍의 주택 관리인으로 임명되어 있었다. 직무상의 사정으로 그의 가족은 전의 수위가 쓰던 방을 쓰기를 원했다. 흙바닥 이었으나 수도전이 있었고, 커다란 러시아식 난로가 있었다. 겨울이면 이집 여러 곳에서 수도관이 나 난방관이 터지기마련이었으나, 이 수위실만은 언제나 따뜻하기 때문에 물도 얼지 않았다. 이 무렵 지바고와 바샤의 사이가 멀어지고 있었다. 바샤는 놀랍게 성장했던 것이다. 말하고 생 각하는 것이 그가 옛날에 펠가 강변 베레첸니크 마을에서 헌 누더기를 걸치고 맨발에 헝클어진 머리를 한 소년이었다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혁명이 내세운 간단 명료한 진리에 점점 끌려가게 되었다. 여기에 비해서 비유가 많고 어딘지 애매한 지바고의 이야기는 약점을 가지고 현실을 도피하려는 패배주의의 잘못된 생각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지바고는 정부기관을 드나들었다. 그는 두 가지 일에 분주했다. 하나는 자기 가족의 정치적 복 권을 얻어 그들을 조국에 돌아오게 하는 허가를 얻으려는 것과, 또 하나는 출국 여권을 얻어서 파리로부터 가족을 데려오는 데 허가를 얻으려는 것이 었다. 그런데 이 노력이 너무나 냉담하고 미지근한 데는 바샤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바고는 이 제는 모든 게 글렀다고 체념하고, 며 오히려 만족하고 있는 듯싶었다. 바샤는 차츰 지바고를 비난하게 되었다. 지바고는 바샤의 올바른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들의 친했던 관계에 금이 가게 되었다. 드디어 우정은 깨어지고 헤어지게 됐다. 지바고는 바샤와 함께 살던 하숙집을 떠나 무치노이 읍내로 옮겼다. 마르켈이 권세를 쥐고 있는 이곳 옛 스벤치츠 키 저택의 한 쪽 구석진 방을 얻었다. 이 집에는 못쓰게 된 욕실과 창문이 하나밖에 없는 좁은 방이 있었고, 기울어진 부엌과 지반이 가라앉아 허물어지는 뒷문이있었다. 지바고는 이리로 옮겨 서는 의사 노릇을 포기하고, 자신을 돌보거나 친구를 만나는 일도 없이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었 다. 6 찌푸등한 겨울 일요일었다. 난로 연기가 지붕 위에 높이 떠오르지 못하고 연기를 내면서 조그 마한 창문에서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시민들은 금지되어 있는 철제 난로 연통을 여전히 창문으로 내고 있었다. 도시 생활은 아직도 복구되지는 못했다. 무치노이 읍내의 주민들은 때투성 이가 되어 종기를 앓고, 추위에 감기를 앓곤 했다. 일요일에는 마르켈의 가족들이 언제나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그들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했다. 빵 배급 제도가 정상적으로 실시되고 있던 시기에는, 이 식탁 에서 집안에 하숙하고 있는 사람들의 빵 배급표를 가위로 잘라서 구분하여 수를 헤아리며 등급별 로 묶어서 빵집에 가져갔었다. 돌아와서 빵을 잘게 잘라 나누며 각자 배급량만큼 저울에 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일이 옛말이 되어버렸다. 식량 통제의 방법이 달라진 것이다. 마르 켈의 가족은 긴 식탁에 앉아서 맛있게 먹고 마셔대는 것이었다. 수위실의 절반은 커다란 러시아식 난로가 차지하고 있었고, 난로 위의 높은 침상에서 솜이불의 깃이 드리워져 있었다. 입구 현관 벽에는 수도전이 있었다. 방 양쪽에는 긴의자가 있었고 그 밑에 주머니와 물건이 든 긴 트렁크를 집어 넣고 있었다. 왼쪽에는 부엌 조리대가 놓였고, 그 위에 식 기를 놓는 선반이 벽에 붙어 있었다. 난로가 타올라 방안은 무더웠다. 난로 옆에는 마르켈의 아내가 작은 병을 솜씨있게 모았다 헤 쳤다 하고 있었다. 땀에 젖은 얼굴에 난로 불빛이 비치다가도 끓는 증기가 덮이곤 했다. 작은 병 을 옆으로 치워 놓고, 안쪽 철판 위에 올려놓은 만두를 끄집어내서 단숨에 뒤집어 누렇게 익은 쪽을 위로 돌려서 다시 난로 안에 넣었다. 지바고가 물통을 양손에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많이 드십시오. " "당신도 같이 먹읍시다. " "고맙소. 난 벌써 먹었어요." "당신의 식사가 어떻다는 건 다 알고 있어요. 앉아서 따뜻한 것을 좀 드시지요, 사양 마시고, 감자 구이, 삐로그(고기만두의 일종)그리고 수프가 있어요. " "아니, 정말 먹었어요. 그런데 여러 번 드나들게 되어 방을 식혀서 안됐지만, 한번에 물을 다 길어 놓으려고 해요, 목욕통도 깨끗이 소재하고 물을 가득채워 놓으려고, 일고 여덟 번만 드나들 게 하면 당분간 폐를 끼치지 않아도 되니까. 용서해요. 다른 데서는 물을 얻을 수 가 있어야지." "괜찮아요. 물은 얼마든지 길어 가시오. 시럽이라면 몰라도 물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냥 드리죠. 장사가 아니니까" 식탁에 앉았던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다. 그러나 지바고가 세 번째 물을 길어가는 데 공기가 달라졌다. "내 사위가 당신이 누구냐고 묻길래 얘기했는데 믿질 않더군. 상관없으니 물은 얼마든지 길어 가요. 하지만 마룻바닥에 쏟지는 말구. 그런데 이것 봐요, 문간에 물을 엎지르지 않았소. 그게 얼 어붙으면 쇠꼬챙이로도 파낼 수 가 없어요. 문은 제발 꼭 닫아요. 바람이 들어오지 않소. 한데 우 리 사위한테 당신이 아무래라고 말했는 데도 통 믿질 않더군. 도대체 당신한테 돈이 얼마나 들었 소! 그렇게 공부하고 이꼴이람? " 지바고가 다섯 번인가 여섯 번째 들어갔을 때 마르켈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젠 그만두었으면 좋겠어. 예의를 알아야 하지 않아요? 저 내 딸년 마리나가 당신의 역성을 들어서 내가 참았으니 말이지, 당신이 제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문을 잠그고 말았을 거요. 저 식탁옆에 앉아있는 애 말이으. 마리나를 기억하지요? 저것이 얼굴을 붉히긴…나보고 당신의 기분 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거요. 누가 당신을 들먹거리기나 한다구. 마리나는 중앙 전신국에 전신기 사로 있어요. 외국어도 알고 있다오. 그리고 저애는 당신이 불쌍하다는 거요. 당신한테 내 딸이 그만큼 동정하고 있어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빈다오. 당신이 잘 되지 못하 는 것이, 마치 내 탓이나 되는 것 같소. 당신이 중요한 시기에 집을 버리고 시베리아로 도망친 것 이 운이 막힌 원인이었소. 모두가 제 잘못이란 말이오. 우리가 기아(飢餓)와 백위군의 봉쇄를 겪 으면서도 버티고 무사했어요. 자기의 책임을 알아야 해오. 토냐도 그냥 내버려루었기 때문에 지금 외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게 아니오. 그건 당신의 일이고, 내가 알바가 아니오. 그런데 그렇게 많 은 물을 대체 어디에 쓸작정이오. 어디 스케이트장이라도 만들 공사를 하고 있는 거요? 그런 꼴 을 하고 있는 당신을 보고 화낼 수도 없군요" 다시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리나는 잔뜩 화나서 주위를 훑어 보더니 화가 터져서 그들을 욕하기 시작했다. 지바고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가슴을 치는 것을 느꼈으나, 무 슨 영문인지는 알지 못했다. "씻을 게 많아요. 청소도 해야 하고, 마루도 닦아야 하고, 세탁도 하고."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소릴 하고는 남부끄럽지가 않아요? 이번엔 중국인 세탁소를 시작한다 하겠군! " "의사선생, 당신에게 딸을 보내드리겠어요. 빨래도 시키고 마루도 닦고 또 바느질도 시켜요. 얘 야, 저분을 겁낼건 없어. 얼마나 얌전한 분인데, 파리도 죽이질 못하는 분이야. " "아니예요, 부인, 괜찮습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마리나가 나를 위해 손에 구정물을 묻혀서 되겠습니까? 나 혼자서 할 수 있습니다. " "자기는 더러운 물을 손에 묻힐 수 있어도, 난 할 수 없다는 말씀인가요? 너무나 까다로우신 분이군요., 선생님, 왜 사양하시죠? 제가 선생님한테 손님으로 가면 쫓아내시겠어요?" 마리나는 성악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듣기 좋은 말은 음성은 성량이 풍부한데다 세련되 어 있었다. 마리나는 조용히 말했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대화에 필요한 정도를 초월하여 울려 퍼 지듯, 그녀로부터 떨어져 따로 사색하듯이, 옆방이나 그녀의 뒤쪽에서 흘러나오듯 들렸다. 이런 음성은 그녀를 보호하고 경호하는 천사와도 같았다. 이런 음성을 가진 여자를 모욕하거나 슬프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일요일의 물 긷던 일이 발단이 되어서, 지바고와 마리나 사이에 우정이 맺어지게 되었다. 그녀 는 자주 지바고한테 로 와서 일을 돌봐주었다. 이윽고 그녀는 지바고한테서 수위실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마리나는 지바고의 세 번째 아내가 되었다. 그런데 지바고는 토냐와 정식 이혼이 되어 있지 않아서 마리나를 입적시킬 수는 없었다. 얘기 를 낳게 되었다. 마르켈 부부는 딸을 의사의 부인이라고 차츰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마르켈 은 지바고가 마리나와 정식 결혼식을 하지 못하고 신고도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말한 적이 있었 으나, 그의 아내는 "여보, 정신 있어요? 토냐가 살아 있는 데 그런 바보짓이 어디 있어요. 이중 결혼이 되잖아요? "하고 쏘아붙였다. 그리고 마르켈은 이렇게 대답했다. "정말 당신이 바보로군. 토냐를 보란 말이오, 죽은 거나 다를 게 없지 않소. 그녀를 보호할 법률은 없어요. " 지바고는 가끔 농담으로 우리는 스무개의 물통으로 이루어진 로맨스라고 말하면서 마치 20장이 나 20통의 편지로 된 연애 소설과 같다고 했다. 이 무렵 지바고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스스로 낙담하고 자기 타락을 자각한 사람처럼 제 멋대로였다. 또 그는 집안을 어지렵혔으나 마리나는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으며, 그의 변덕이나 난 폭한 태도와 신경을 과민을 꾹 참아냈던 것이다. 그녀의 헌신은 차츰 더해 갔다. 지바고 때문에 겪어야 했던 생활의 곤경이 닥쳐올 때, 마리나는 지바고를 혼자 두기가 안되어 전신국을 그만두고 함께 있는 것이었다. 전신국은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불가피한 시기가 지나면 다시 복직하는 것을 환영했다. 마리나는 지바고의 기분을 맞춰서 함께 날품팔이를 한 적도 있었다. 그들은 셋집에 사는 사람들의 땔나무 를 패 주는 벌이를 한 적도 있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네프 초기에 돈을 번 암상인이나 정부와 가 까운 관계가 있는 학자나 예술가들은 집을 새로 짓고 가구를 장만하고 있었다. 하루는 지바고와 마리나가 길에서 먼지가 묻은 신발로 융단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신발을 조심하여 옮기면서 주인 의 서재로 장작을 날랐다. 주인은 무언가 열심히 읽으며 그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일을 시 키고 임금을 주는 사람은 그의 집 부인이었다. '이 돼지 같은 놈이 뭘 그렇게 열중하고 있을 까? '지바고는 호기심을 느꼈다. '뭘 저렇게 열심 히 쓴담? '장작을 안고 책상 뒤로 지나면서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책상에는 예전에 바샤가 학교에서 인쇄한 지바고의 소책자가 놓여 있었다. 마리나와 지바고는 스피리도노브카 거리에서 살았으며, 고르돈은 근처인 말라야 브론냐에서 방 을 얻어 살고 있었다. 지바고 부부에게는 카프카와 클라쉬카라는 두 딸이 있었다. 카프카는 일곱 살이었고, 클라쉬카는 여섯달 된 갓난애였다. 1929년의 초여름은 몹시 무더웠다. 아는 사람들끼리는 모자를 쓰지 않고 셔츠 바람으로 거리를 두세개 지나 서로 방문하고 있었다. 고르돈이 살고 있는 방은 구조가 이상했다. 한때 유행되던 양복점의 작업장으로 아래위층으로 되어 있고 거리를 향한 쪽은 유리창문이 달려서 전망이 좋았다.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통하는 나 선형 계단이 내부에 있었다. 지금 이 작업장은 셋으로 칸막이 되어 있었다. 아래위층으로 방이 있고, 그 중간에 추가로 방을 하나 들였다. 이 가운데 방에는 살림방으로는 좀 이상하게 높이 1미터 가량의 유리창이 있었다. 이 유리창의 금박이 벗겨져서 밖에서 들여다보 면 방안 사람의 무릎까지 볼 수 있었다. 여기에 고르돈이 살고 있었다. 지바고와 두도로프 그리고 마리나가 아이들을 데리고 와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과 달리 머리끝까지 유리창을 통해서 보였다. 얼마 후 마리나와 애들은 돌아가고 남자 셋만 남았다. 여름에 흔히 보듯이 그들은 한가하게 앉아서 얘길 주고받았다. 그들은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학교시절의 우정 그대로의 잡담이었다. 이렇게 잡담을 해나가려면 누군가가 화제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어야 했다. 이런 사람이 자연스 럽게 말의 실마리를 풀어서 얘기를 끌고 가든지 생각을 하고 있어야 했다. 지금은 그럴 자격이 지바고 외에는 없었다. 두 친구는 필요한 표현능력이 부족했으며 화술의 재능도 없었다. 말문이 막히면 방안을 서성거 리면서 담배를 피우거나 몸짓을 하며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건 속이는 짓이야…속이는 짓 이야…속이는 짓이란 말이야." 그들의 이런 연극 대사와 같은 말투는 정열적이며 폭넓은 성격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딘가 허무하고 텅 빈 데가 있었다. 고르돈과 두도로프는 좋은 신분인 학자의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좋은 서적이나 훌륭한 사상가나 작곡가와 함께 생활하며, 어제도 오늘도 좋은 환경에서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지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취미 때문에 가지게 되는 불행이, 취미가 없는 데서 오는 불행보다 더 못하다 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고드론과 두도로프는 줄곧 지바고를 나무라고 있었으나, 그것은 우정이나 친구의 힘이 되겠다 는 것은 아니며,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의식하지도 않았다. 제 멋대로 달리는 짐마차 모양으로 화제는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비뚤게 나갔다. 대화를 조종하지 못하면 결국 궁지에서 충돌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설교도 훈계도 아닌 방향으로 탈선해 서는 지바고와 심하게 다투었던 것이다. 지바고는 이들의 목적의식 없는 동기와 하찮은 감상, 기계적인 이론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여보게 친구들, 당신들 자신과 당신들이 대표하는 서클이 얼마나 속되며, 당신들이 자랑하는 명예나 권위가 그렇게 퇴색하다니, 우린 다만 같은 세대에 살고 안다는 것뿐일세' 이러한 소리를 친구들한테 해서 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며 지바고는 그들을 낙담시키지 않으려고 조용히 말을 듣고 있었다. 두도로프는 첫 번째 유형를 마치고 돌아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공민권이 회복되어 잠 시나마 매우 감격하고 있었다. 대학의 강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지금 그는 유형에서 느꼈던 감정이나 정신상태를 친구들한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고백은 무슨 비굴한 생각이나 딴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왜 유형되었는지, 또 풀려나오게 된 일, 그 중에는 검사와 흉금을 터놓고 했던 얘기를 통해서 아주 세뇌되어서 정치적으로 재교육되었으며 여러 면에서 눈을 뜨고 성장했다는 것이다. 두도로프의 감상은 속된 이야기였으나 고르돈에게는 흡족했다. 그는 줄곧 고개를 끄덕이며 동 의를 표시했다. 더욱 두도로프의 이야기는 감상이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의 감동을 사게 됐 다. 그는 그의 회고담이 진정한 인간성의 표현에서 우러나오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이라고 잘못 알 고 있었던 것이다. 두도로프의 솔직한 이야기는 당시의 시대 정신과 상통했다. 하지만 그의 적응성과 위선이 지바 고의 신경을 건드렸다. 자유를 가지지 못하는 인간은 항시 노예 상태를 이상화하는 법이니까, 중 세기가 그러했고, 그리스도교도 언제나 그걸 이용했던 것이다. 지바고는 소비에트 지식인들의 정 치적 신비주의를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성과로서, 말하자면 시대정신의 조 류라 할 수 있었다. 지바고는 다투기 싫어서 참아 왔었다. 그러나 두도로프의 이야기에서 그의 마음을 끈 것이 있었다. 그것은 두도로프의 감방 친구였고 치흔(1865∼1925 러시아 정교회 대주교, 반혁명 운동의 중심 인물)의 추종자였던 오를레초프 신부 의 얘기였다. 신부에게는 여섯 살된 딸이 있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체포되어 투옥된 사실은 그 녀에게 큰 타격이었다. '우상 숭배자'라든지 '공민권 상실자'라는 딱지는 부끄러운 오점으로 생각 되었다. 흐리스치나는 정열이 끓어오르는 어린 가슴에 언젠가 꼭 훌륭한 가문에 찍힌 오점을 벗 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철없이 정한 목적은 그녀의 마음속에 굳은 결의로 불타올라, 지금은 공산 주의의 광신자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난 가야겠어."지바고는 말했다. "화내지는 말게, 미샤, 방안이 무덥고 밖은 더워서 갑갑하네. " "창문은 열렸는데, 미안해, 우리가 담배를 너무 피웠군. 자네와 함께 있을 땐 삼가야 하는 건데, 내 잘못보다 이 집 구조가 이래 놔서, 자네 방 하나 구해주지 않겠나? " "정말 가야겠네, 우리 실컷 얘기했어, 여러 가지 염려해 주어서 고마웠어. 그런데 공연한 소리 가 아니고, 난 환자일세, 동맥 경화증이야, 심장 근육이 약해졌어. 언젠가는 이 심장병이 터지고 말 테지. 아직 나이 40도 안 되었는데, 술도 못 마시고, 인생을 즐기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 "벌써 임종의 기도를 하는 건가. 어리석군. 자넨 오래 살 걸세. " "최근에는 현미경으로 보일 정도의 심장 출혈이 있었어. 물론 치명적인 것은 아니지만, 나을 수 도 있어요. 이것은 현대적인 질병일세. 정신상태가 병의 원인이 돼요. 많은 사람이 습관화될 만큼 항상 표리부동한 생활을 해야 하니 말일세. 매일 마음에도 없는 소릴 지껄이면서 싫은 것 앞에서 굴복하고 불행을 가져오는 일을 좋아 날뛰고 있으니 우리의 건강이 나빠질 것은 뻔한 이치가 아 닌가. 우리의 신경 계통은 허구가 아니란 말이야. 그것은 섬유로된 신체의 일부라네. 우리의 영혼 은 공간에 존재하여 마치 입속에 이빨이 있듯이. 우리 내부에 자리잡고 있어요. 그것을 계속 학 대하게 되면 온전할 수가 없지. 두도로프, 난 자네의 유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어. 유형으로 인해서 자네가 성장하고 재교육되었다고 했어. 그것은 마치 말이 자기가 자기를 길들 였다는 얘기와 같군. 그래" "난 두도로프의 얘기에 찬성이야. 자넨 이미 보통 인간의 언어와는 인연을 끊었으니까, 우이독 경이란 말일세. " "그럴 테지. 미샤, 어쨌든 가야겠어. 숨이 막혀요. 진정일세" "잠시 기다려주게. 그건 구실에 지나지 않아. 우리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기 전에는 보내지 않 겠네. 알겠나, 이제는 자네도 사고방식을 바꿔야 하지 않겠나? 어때, 자네는 토냐나 마리나의 관 계를 분명하게 해야 하지 않겠나? 그들은 살아있는 인간이며, 고민하고 감정을 가진 여성이란 말 일세. 자넨 머리속에 제멋대로 도사리고 있는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상과는 다르네, 게다가 자네와 같은 인물이 아무 쓸모 없이 썩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야. 자넨 잠에서 깨어나 새 출발을 해야 하네. 그 하잘것없는 거만스러운 태도를 버리게. 그래, 주위의 현실을 모르는 체하는 고집을 버리고, 직장을 가지고 일하는 거야" "좋아야. 내가 대답하지. 난 혼자서 최근 그런 생각을 자주 해왔어. 부끄럼 없이 약속할 수 있 네, 내 생각으론 모든 일이 잘 것만 같네. 그것도 이제 곧 말일세. 두고 보세. 이제 잘 될 거니 까. 나도 이상한 것은 내가 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는 것일세. 하지만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앞 으로 지고지선를 향하여 전진하고 도달하는 데 있어요. 난, 고드론 자네가 이전에 토냐를 돌봐주듯이 마리나를 위해 주어서 기쁘네. 그런데 나는 마리 나나 토냐와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네. 그들뿐만 아니라 나는 누구와도 다투지는 않아. 처음엔 내 가 마리나를 '너'라고 불렀는데, 그녀는 '당신'이라고 부르며 나를 경칭으로 유리 안드레예비치라 고 불러서 자넨 곧잘 날 비난했지만 나 역시 마음이 괴로웠어. 하지만 이런 부자연스러운 관계의 밑바닥에 깔린 어색한 점은 벌써 사라지고 말았어. 이젠 모든 것이 잘 돼가고 있고, 우린 대등한 사이로 돼버렸어. 이제 좋은 소식을 또 전해주겠네. 다시 파리에서 편지가 오기 시작했네. 애들도 잘 크고, 같은 또래의 프랑스 애들과도 잘 사귀고 있다는 거야. 싸샤는 그곳 국민학교 에코르 프리메르를 졸업 하게 되고, 미샤는 입학하게 되었대. 그렇지만 난 내 딸놈을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우리 가족은 프랑스 국적으로 있지만 어쩐지 돌아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긴 해도, 잘 될 것 같은 느낌이야. 여러 모로 보아서 장인과 토냐는 마리나와 애들의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았어. 난 편지에 그런 얘기는 하지도 않았지만, 무슨 소문을 들은게 분명해. 물론 장인은 토냐를 생각하고 분개했겠지. 5년 동안이나 편지 왕래가 끊긴 것이 그 탓이겠지. 내가 모스크바에 돌아온 후에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회답이 뚝 끊기고 말았으니까. 그런데 이제야 그쪽에서 편지가 온 거야. 심지어 애들까지 편지를 써보냈어. 따뜻하고 예쁜 편 지였어. 뭔가 좀 누그러진 모양이야. 아마 토냐한테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제발 그녀에게 새로운 친구라도 생겼으면 좋겠어. 모를 일이야. 나도 가끔 편지를 보내겠어. 이젠 정말 이 방에 못 있겠 군. 꼭 나가 봐야겠어. 다들 잘 있게.” 다음날 아침 마리나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고르돈에게 뛰어왔다. 아이들을 맡길 사람이 없어서 클라쉬까를 담요에 둘둘 싸서 한 손으로 가슴을 껴안고 다른 손에는 카포카의 손목을 끌고 뛰어 왔다. "유라가 여기 있어요, 미샤?"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래요." "저는 거기서 와요. 그는 대학 강의가 있어서 안 계셨어요. 이웃 사람이 유라를 아는데, 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럼 어딜 갔을까?" 마리나는 클라쉬까를 소파에 뉘고, 미친 듯 울음을 터뜨렸다. 8 이틀 동안 고르돈과 두도로프는 마리나 옆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 혼자만을 있게 하는 것이 두 려워서 교대로 그녀를 지켰고, 그러는 동안에 지바고를 찾아나섰다. 갈 만한 곳은 죄다 찾아보았 다. 무치노이 읍과 시브체프 댁에도 알아 보았고, 전에 지바고가 근무하던 문화 회관이나 사상 연 구소도 샅샅이 찾아다녔으며, 생각나는 대로 주소를 알면 그의 옛 친구를 모조리 찾았으나 허탕 이었다. 그러나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았다. 설사 호적 계출이 되었고 전과사실도 없었다 해도 그 당신 의 생각으로는 모범적인 시민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며, 그에게 주의를 쏠리게 한다는 것은 좋지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최후의 수단이 아니고는 그의 행방 수색을기를에 의뢰하지 않기로 했다. 사흘째 되던 날, 마리나와 고르돈 그리고 두도로프는 각각 다른 시간에 지바고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는 편지에서 소동을 일으켜 미안하다는 말과 자기에 대해 걱정하지 않도록 바랐으며, 또 아무리 찾으려 해도 소용이 없으니 제발 찾지 말도록 간청했다. 그는 편지에서 되도록 빨리 그리고 철저하게 자기의 운명을 뜯어고치를 위해 정신을 집중할 수 있도록 얼마 동안혼자 있게 해주기를 바랐으며, 조금이라도 다시 소생하고 또 옛날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게 된다면 숨어 있는 곳을 뛰쳐 나와 마리나와 애들한테로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다. 고르돈한테 보낸 편지에는 그의 명의로 돈을 보낼테니 마리나에게 전해주기를 부탁했으며, 마 리나는 유모를 두고 아이를 맡기고 직장에 나가도록 당부했다. 그리고 마리나한테 직접 송금하지 않는 이유는 만약 돈의 액수가 알려지만, 그것을 도둑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녀는 걱정시 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얼마 후에 송금되어 왔다. 지바고 자신은 물론, 그의 친구들의 형편에도 생각 못할 엄청나게 큰 돈이었다. 그래서 유모를 두고 마리나는 전신국의 직장으로 다시 나가게 되었다. 그녀는 얼마 동 안은 마음이 들떴으나 지바고의 괴팍한 성미에 익숙했던 그녀는 이번에도 체념하고 말았다. 지바 고의 간청과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그의 친구들과 마리나는 계속 그의 거처를 찾았지만, 그의 말 대로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9 그 사이에 지바고는 몇 발자국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숨어 살았다.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것 이다. 그가 자취를 감추던 날, 어두워지기 전에 브론나야 거리에 있는 고르돈의 하숙집을 나와서 스 피리도노브카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백 보도 채 못 되는 앞에서 이복 동생 예브그라 프와 만나게 되었다. 지바고는 한 3년 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고, 소식조차 알지를 못했다. 예브그 라프는 얼마 전에 모스크바에 왔다고 했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뜻밖에 지바고 앞에 나타나서 는 이것저것 묻는 말에는 그저 웃으며 농담으로 넘기며 어깨만 흠칫해 보였다. 예브그라프는 인 사를 하고 그 자리에서 몇 마디 묻고는 지바고가 겪고 있는 고난을 죄다 파악하고 골목길을 지나 오면서 득실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형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바고가 자취를 감추고 얼마 동 안 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카메르게르스키 거리의 예술 극장 근처에 지바고의 방을 구해주었다. 그가 돈을 대고, 연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어디 병원 같은 곳을 찾아서 분주히 다녔다. 동생은 일상 생활이나 여 러 면에서 형의 뒤를 돌봐주었다. 끝으로 지바고의 가족들이 파리에서 불안한 생활을 그만두도록 지바고가 그곳에 가든지 가족들을 귀국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예브그라프는 모든 것을 잘 알아서 처리하겠으니 자기한테 맡기라는 것이었다. 동생의 도움으로 지바고는 힘을 얻었다. 그의 권력에 대한 수수께끼는 지금도 풀리지 않았으나 지바고는 그것을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10 방은 남향이었다. 이중창 너머로 극장 지붕이 보였다. 오호트느이 시장 하늘 높이 여름 해가 비 치고 있었으며 뒷골목길에 그림자가 들어 있었다. 지바고가 일하기엔 방은 너무 큰 편이었고, 서재로서도 널찍했다. 이 무렵 그는 일에 열중하고 있어서 여러 가지 계획이나 착상이 책상 위에 쌓아 놓은 노트에서 넘쳐, 한꺼번에 많은 일을 시 작한 화가의 아틀리에이 그리기 시작한 화폭들이 벽 여기저기 걸려 있듯이, 고개를 든 구상이 망 령처럼 구석구석 떠 있었다. 그의 방은 정신적인 전당이었으며 광적인 발상의 서가를 계시하는 창고였던 것이다. 다행하게도 병원과의 교섭이 오래 끌게 되어서 언제부터 근무하게 될지 몰랐다. 이 시간을 이 용해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지바고는 작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던 책자들을 예브그라프가 어디선가 찾아다 주었다. 그 뷜는 그의 필적이었으나 또 일부는 딴 사람이 복사한 것이었다. 자료 가 두서없이 엇갈려 있어서 아주 정력만 낭비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의 원고를 정리하는 일은 단 념하고 새로 쓰기로 했다. 그가 바르이키노에 처음 갔을 때 글을 쓰던 것처럼 논문의 골자를 나열하거나, 처음과 중간 그 리고 결론의 구별없이 생각나는 대로 시의 단편을 틈틈이 썼다. 때론 샘솟듯 떠오르는 생각에 쫓 기어 첫 문자만 쓰거나 약어를 쓰기도 했지만, 이렇게 서둘러 속기하고도 밀어닥치는 생각을 뒤 따를 수가 없었다. 그는 서둘러댔다. 상상력이 희미해져서 펜을 움직이기 어려워지면 낙서를 하면서 상상력을 일 으키곤 했다. 그럴 때면 으레 숲의 공지나 거리의 십자로 중앙에 있는 '모로베트친킨 회사. 파종 기·탈곡기'의 광고탑이 있는 그림을 그렸다. 논문이나 시의 주제는 한결같았다. 그것은 도시에 관한 것이었다. 11 이것은 후의 일이었으나 다음과 같은 그의 글이 발견되었다. 1922년 내가 모스크바에 돌아왔을 때,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았다. 혁명 초기의 시련 을 겪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주민들은 피난해버렸으며, 새 집을 짓거나 집을 수리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에서도 역시 모스크바는 현대적 대도시였으며, 현대의 새로운 예술에 참된 영감을 낳게 하는 유일한 곳이었다. 블로크, 베르하렌, 휘트먼과 같은 상징주의 시인들이 연관도 없이 사물과 관념을 무질서하 게 나열하는 것은 결코 문체상의 변덕이 아니다. 그것은 생활에서 인식되고 자연에도 받아 들인 인상의 새로운 질서인 것이다. 상징주의 시인들이 시의 한줄 한줄을 엮듯이 19세기와 20세기의 초엽의 도시에서 거리의 잡담은 군중과 마차의 무리, 전차와 지하철의 차량들이 스스로 불을 토하며 우리들 눈앞에 지나가고 있었다. 여기에 목가적인 순박함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순박성을 가지려면 전원 생활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카데믹한 서재의 먼지를 쓰고 있는 서가에서 끄집어낸 책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생생하게 구성되어 현대 정신에 아주 자연스럽게 메아리치는 살아 있는 언어는 도시의 언어인 것이다. 나는 분주한 도시 네거리에서 살고 있다. 내리쬐는 모스 크바의 여름해는 아스팔트를 녹이고 집 이층 창문에 반사되며 비구름과 가로수 길에 입김을 불어서 우리 주변을 눈부시게 맴돌아 나의 눈을 현혹케 하고, 내가 도시를 찬미하고 남의 눈을 흐리게 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 도시는 나를 길렀고 나의 손에 예술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담장 너머에서 밤낮없이 들끓고 웅성거리는 거리는 현대 정신과 굳게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울리기 시작한 서곡이, 아직은 어둠에 감춰져 있으나 이제 조명을 받으며 붉게 나타나 게 될 무대의 막과도 같았다. 대문과 창 밖에서 쉴새없이 아우성치는 도시는 우리들 모든 인생에 끝없이 거창한 서곡을 울리고 있었다. 내가 쓰고 싶은 도시는 이러한 모습이어야 한 다. 그러나 지바고의 작품으로 보존된 것 중에는 이러한 시가 없었다. 혹시 시 (햄릿)이 이런 부류에 속할지도 모르겠다. 12 8월도 저물어 가는 어느 날 아침, 지바고는 가제트나야 거리 모퉁이의 정류장에서, 대학에 서 니키트스코예 거리를 경유하여 쿠드린스카야 행 전차를 탔다. 그는 솔다첸코프라고 불리 는 보크킨 병원에 처음 출근하는 길이었다. 그는 이전에 한두번 취직 관계로 병원에 가본 적은 있었다. 지바고는 운이 나빴다. 그가 탄 전차는 낡아서 줄곧 고장을 일으켰다. 짐마차 바퀴가 철길 홈에 끼어서 길을 가로막거나, 전차 지붕이나 마루 밑에서 전기 누전이 일어나서 불꽃을 튕 기기도 했다. 운전사가 렌치를 들고 앞문을 열고 내려서 전차 주변을 둘러보면서 고장난 장소를 조사하 고, 엎드려서 이 뒤 운전대와 바퀴 사이의 기계 장치를 수리하고 있었다. 이 운 나쁜 전차는 그 노선의 모든 교통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미 길거리는 멈춰선 전차 들 때문에 혼잡을 이루고 있었으며, 뒤에서는 다른 전차가 자꾸 밀려 들었다. 멈춘 전차의 행렬은 제일 끝이 마시장까지 이르렀고 그 뒤까지 뻗어 있었다. 뒤쪽 전차에 탔던 승객들이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하게 된다고 생각해서 인지, 앞의 고장난 전차로 옮겨 타고 있었다. 이 무더운 아침에 몸도 움직일 수 없게 꽉 차버린 전차 속은 숨막힐 것 같았다. 니키트스키 대문 쪽에서 길거리를 뛰어 오는 승객들 머리 위에는 검은 자색 구름이 차츰 하늘높이 흐르 고 있었다.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았다. 지바고는 차츰 창문 쪽으로 밀려서 왼쪽 좌석에 앉아 우두커니 음악원이 있는 왼편 거리 를 유심히 내다 보았다. 무슨 딴생각을 하면서 우두커니 지나가는 사람이나 마차의 왕래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았다. 천으로 만든 실국화와 수레국화 꽃을 장식한 밝은 색 밀짚 모자를 쓰고 몸에 달라붙은 구 식 연보라 옷을 입은 백발 노부인이 숨가쁘게 헐떡이며 손에 든 납작한 보자기로 부채질하 면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코르셋을 꼭 끼게 입고 있어서, 더워서 땀에 젖은 눈썹과 입술을 레이스가 달린 조그마한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그 부인이 가고 있는 방향은 전차가 가는 방향과 같았다. 전차의 이 고장이 고쳐져서 움 직일 때마다 지바고는 여러 번 그 부인을 시야에서 놓쳤으나, 또 고장이 나서 멈추게 되면 다시 보게 되곤 했다. 어떤 사람들은 나란히 발전해가면서도 제각기 조금씩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인 생 도상에서 남을 앞지르고 있는 사람도 있고 남보다 오래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럴 경우, 일 상 생활의 경쟁의 터전에는 상대성 원리와 비슷한 것이 작용한다고 생각했으나 끝내 머리가 혼돈되어서 이런 추리도 집어치우고 말았다. 번개가 번쩍하더니 천둥소리가 들렸다. 불쌍한 전차는 이때 쿠드린스카야 거리에서 동물 원까지 가는 언덕길에서 또 멈춰버렸다. 얼마 후, 보라빛 옷의 부인이 지바고의 차창밑을 지나서 멀리 가고 있었다. 굵직한 빗방울이 인도와 차도, 그리고 부인에게 떨어지기 시작했 다. 세찬 먼지 바람이 불어서 가로수의 나뭇잎을 흔들면서 부인의 모자를 벗기고 스커트를 젖혔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지바고는 허탈한 충격을 느꼈다. 겨우 일어서며 창문에 달린 끈을 붙잡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열심히 창문을 열려고 했으나 끄덕도 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창문에 못을 박아서 열리지 않는다고 큰소리로 말했지만, 불안에 사로잡혀 발작과 싸우고 있는 지바고는 자기한테 하는 소리인 줄도 몰랐고 그 뜻도 알지 못했다. 그 래서 다시 끈을 세 번 올렸다내렸다하며 당기면서 문을 열려고 애썼으나, 갑자기 경험하지 않았던 심한 고통을 가슴에 느꼈다. 몸속에서 무언가 망가지고 어떤 치명적인 일이 생겨서 최후의 시각이 오고 있다고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는 순간 전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프 레스냐를 좀 달리더니 다시 멈추어 버렸다. 그는 초인적인 의지의 힘으로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의자 사이의 통로에 빽빼이 들어찬 승객 속을 헤치고 뒤쪽 승강구로 나왔다. 승객들은 잘 비켜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욕 설을 퍼붓기까지 했다. 그러나 밖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공기를 쐬자 살 것 같았다. 아직 종 말은 아닌가 보군, 기분이 좋아졌다고 생각되었다. 뒤쪽 승강구에 빽빽이 들어찬 사람을 밀치고 나오자 다시 소리지르며 밀치곤 했다. 그는 아랑곳없이 밀에 헤치면서 서 있는 전차에서 포도에 내려와 한 발짝 두발짝 세 발짝 내디디 다가 갑자기 돌 위에 픽 쓰러져버렸다. 금세 떠들썩한 소리, 말소리, 다투는 소리가 났다. 몇 사람은 전차에서 내려와 그를 둘러 쌌다. 이미 호흡이 멎고 심장도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을 알았다. 인도에서도 사람들이 몰려 와,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가 아닌게 다행이라고 했고, 또 실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이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보라색 옷을 입은 부인이 가까이 와서는 시체를 들여다보며 주위 사람들 얘기를 듣고는 가버렸다. 그녀는 외국사람이었으나 시체를 전차에 실어서 병원 으로 운반해야 한다느니, 경찰에 알려야 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아듣고 있었다. 부인은 결과를 알 생각도 하지 않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보라색 옷을 입은 노부인은 스위스 사람이었으며 멜류제예보에서 온 마드므와젤 플레리였 다. 그녀는 12년 동안 자기 나라에 돌아갈 출국 허가를 신청하여 왔던 것인데, 드디어 최근 에 그것이 결실을 보게 되어 출국사증을 받기 위해 오게 된 것이었다. 그날 대사관에서 사 증을 받아 종이에 싸서 리본으로 묶은 서류를 부채로 쓰고 있었다. 마드므와젤 플레리는 열 번도 더 전차를 앞질러 걸어가면서도, 자기가 지바고를 앞질러 그를 이겼으며, 그보다 더 오 래 살게 되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13 복도에서 문안으로 들여다보면 방 한쪽 구석에 놓인 테이블이 있었다. 그 위에 아무렇게 나 깎아 만든, 통나무 배처럼 생긴, 밑부분이 좁다란 관 유해의 빳빳한 다리가 보였다. 이 테이블은 지바고가 글을 쓰던 책상이었다. 그밖에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원고지는 책상 서랍에 넣고, 그 위에 관을 올려놓았다. 베개를 높게 괴어 머리를 받치고 있어서 관 속의 유 해는 몸을 일으켜 일어나려는 모습이었다. 그 계절에 귀하게 볼 수 있었던 라일락, 시클라멘 그리고 시네라리아 등의 많은 꽃들이 화병과 바구니에 담겨 주위의 놓여 있었다. 창문으로 비치는 햇빛은 그 둘레에 쌓인 꽃을 지나 유해의 창백한 얼굴과 손에, 그리고 관 나무와 쇠붙이에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테이 블 위에는 금세 움직일 듯한 아름다운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유해를 화장하는 풍습이 많았다. 아이들의 학교 교육과 마리나의 직장을 감 안하고 또 아이들의 학비 보조를 받을 수 있도록 종교 의식을 하지 않고 시민화장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을 관계당국에 통지하고 대표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안은 마치 살던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새 사람이 오기 전처럼 텅 비어 있었다. 조용한 분위기에 문상객들의 발걸음 소리만 간간히 들려올 뿐이었다. 문상객은 그다지 많지 는 않았지만,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많았다. 거의 무명인사였던 그의 죽음은 놀랄 만큼 빨리 알려졌다. 고인의 생애에서, 여러 시기에 지면이 있고 또 잊혀졌던 꽤 많은 사람 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의 사상과 예술은 더욱 많은 면식조차 없는 친구들을 끌어들였다. 그 들은 본 적도 없는 사람을 추모하기 위하여 처음이자 마지막인 방문을 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의식도 없이 적막에 싸인 이 시각은 몸에 스며드는 가난을 느끼게 하였으나, 다만 꽃들만이 의식과 노래를 대신해주고 있었다. 꽃은 향기를 뿜으며 피어났다가 향기가 사라지며 시들어가면서, 있는 힘을 모조리 불사르 고 무언가 이룩하려는 듯 서두르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식물계는 유계의 가까운 이웃이라고 생각되었다. 여기 푸른 대지 나무 사이에 있는 묘지, 그리고 땅속에서 돋아나는 꽃의 새싹에 우리를 번뇌시키는 비밀과 생명의 수수께끼가 응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처음에는 잘못 보고, 교회 안을 가고 있는 정원사로 생각했던 것이다. 14 마지막 거처였던 카메르게르스키 거리에 고인의 유해가 운구되었을 때, 그의 죽음에 놀란 친구들은 거의 미치광이가 된 마리나를 데리고 허겁지겁 뛰어왔다. 주문한 관이 도착하고 방안 정돈이 끝날 때까지 유해는 긴 의자에 뉘어 있었으나, 마리나는 오랫동안 실신한 사람 처럼 마룻바닥에 엎드려 의자 끝에 얼굴을 대고 눈물을 흘리며 목메어 몸부림 치고 있었다. 그것은 말하는 소리라기보다는 신음소리가 되어 저절로 나왔다. 마리나는 시골 여인처럼 남 부끄러움없이 정신을 잃고 통곡했다. 방을 정리하고 나머지 기구는 밖으로 내가고 유해를 운반해서 관속에 안치할때까지도 그녀는 유해에 매달려 좀처럼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어제 있었던 일이었다. 오늘은 미칠듯한 슬픔도 가라앉고 몹시 얻어맞은 것처럼 허탈한 상태였다. 그러나 여전히 제정신을 잃고 한마디 말도 없이 꼼짝 않고 있었다. 그녀는 어제 밤낮을 꼬박 앉아서 한 걸음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어린 유모가, 젖을 먹이 기 위하여 클라쉬까를 여기까지 안고 오거나 카프카를 데려오곤 했다. 비탄에 잠긴 두도로프와 고르돈이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녀 곁에 벤치에는 아버지 마르 켈이 앉아서 조용히 코를 풀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들도 울면서 방문했다. 그런데 모인 사람들 속에 유독 눈에 띈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그들은 남들보다 고인과 가깝다거나, 또 마리나와 그의 딸이나 친지들보다 슬픔이 더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고인에 대해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별다른 주장을 한 것도 아니다. 저절로 그 두사람한테 모든 권리를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권한을 침해하려는 사람도 없었 고 또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두 사람은 장례를 마련하는 데 스스로 나섰다. 처 음부터 만족스러운 듯이 침착하게 필요한 수속을 하나하나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느긋 한 태도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게 되고 이상한 인상을 주었다. 이 두 사람은 장례에 관 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바고의 죽음에도 관련된 듯 했으나, 죽은 데 대해서 책임이 있 는 것도 아니며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오히 려 모든 것을 체념하는 태도였다. 세 사람 정도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며, 더러 는 짐작할 정도였으나 대부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키르기스 사람의 인상을 풍기는 가느다란 눈매가 예리하게 빛나고 호기심을 일으 키고 있는 이 사람과 수수한 모습의 아름다운 여인이 관이 안치된 방으로 들어오자,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과 마리나까지도 한마디 항의도 없이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했듯이 자리를 비켜서 벽쪽에 놓인 의자에서 일어나 복도나 대기실로 나가버렸다. 이리하여 두 남녀는 조 용히 누구의 방해도 없이 직접 장례에 관계되는 아주 중요한 일 처리에 초청된 전문가처럼 반쯤 문이 열려 있는 방안에 그들만이 남게 되었다. 그들은 의자에 앉자마자 사무적인 얘길 시작했다. "알아 보셨습니까? 예브그라프 안드례예비치?" "화장은 오늘 밤 하게 될 겁니다. 이제 반 시간 후에는 의무요원조합에서 유해를 조합 클 럽에 운반하게 될 겁니다. 장례식은 네 시에 있습니다. 그런데 서류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 었어요. 노동 수첩은 기한이 지나버리고, 조합원증은 낡은 것이 었으며 갱신되어 있지도 않 았고, 조합비도 최근 2, 3년 동안 체납돼 있었어요. 이러한 것을 전부 정리하려니까, 꽤 시간 이 걸렸어요. 유해를 그쪽으로 옮기기 전에―이제 곧 올 텐데, 준비를 다 해놔야 됩니다―부 탁하시던 대로, 여기에 혼자 계십시오. 실례하겠습니다. 전화가 왔군요. 곧 돌아오겠습니다." 예브그라프는 복도에 나왔다. 지바고의 친구, 학교 동창, 병원 하급 직원 그리고 출판계 사람들이 복도에 뒤끓고 있었다. 마리나는 어깨에 걸친 외투 (날씨가 추웠으며 현관에서 추 운 바람이 불었다)속에 아이들을 감싸 손을 붙잡고 벤치 끝에 앉아서, 마치 죄수를 면회하 러 온 사람이 형무관이 면회실에 들여보내기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다시 방문이 열리기를 기 다리고 있었다. 복도가 비좁아서 모인 사람의 일부는 나오고 있었다. 계단으로 오르는 문이 열리고 많은 사람이 대기실이나 현관에서 서성거리고 담배를 피우곤 했다. 층계에서는 거리 에 가까운 쪽일수록 더 큰소리로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예브그라프는 떠들썩 한 속에서 귀를 기울이고 수화기를 손바닥으로 감싸고 마치 호령하듯이 큰 소리로 전화에 대답하고 있었다. 장례식 준비와 지바고의 사망 경위등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이어 그는 방으 로 돌아와 이야기를 계속했다. "화장이 끝난 후에도 어디 가시지 마십시오, 라라 아주머니, 저는 중대한 청을 드려야겠어 요. 어디서 묵고 계시는지 모르겠군요. 되도록 빨리, 내일이나 모래쯤 형의 원고를 정리해야 겠습니다. 당신한테 좀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형님에 대해 잘 아실 겁니 다. 아까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르쿠트스크에서 모스크바로 오신 지가 이틀 된다고 하셨 지요. 여기서 형님이 몇 달 사셨는지 또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딴 볼일로 우연히 오게 됐다 고 하셨지요. 저는 당신의 얘기에 이해할 수 없는 데가 있지만 굳이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 니다. 아무튼 그냥 떠나버리지는 마십시오. 저는 당신의 주소로 모릅니다. 얼마 동안, 형의 원고를 정리하는 동안은 같이 여기에 계시든지 가까운 곳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웬만하시면 이 집에서 딴 방을 얻어보겠습니다. 관리인도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 되겠지요?" "당신은 저한테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다고 했는데, 뭣 때문이죠? 나는 모스크바에 도착 해서 짐을 맡겨두고 옛 모스크바 시내를 걸어보았어요. 절반은 모습이 변해서 알 수가 없더 군요. 또 많이 잊어버렸구요. 자꾸 걸어가다가 쿠즈네츠키 다리를 지나서 그 옆길로 올라가 고 있는데, 갑자기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곳으로 왔더군요―카메르게르스키 거리까지, 거긴 돌아간 내 남편, 총살된 안치포프바 대학시절에 방을 얻고 있던 곳이예요. 그것도 바로 지금 당신과 내가 앉아 있는 이 방이란 말이예요. 그래서 잠깐 들러보려구, 혹시 이전 주인이 지 금도 살고 있나 해서요. 그런데 알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다 변해버렸더군요. 저는 어제 오늘 찾아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알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당신이 거기에 계셨지요. 제가 왜 당신한테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난 기절할 지경이었어요. 현관은 활 짝 열려 있고 방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관에 유해가 안치되어 있었어요. 누가 죽은 것일까? 들어 가서 가까이 보고, 난 미쳤거나 아니면 꿈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신 은 거기서 나를 보고 계셨어요. 그렇지요?" "잠깐만, 라라 아주머니, 말씀드리겠어요. 형이나 제가 이 방에 무슨 사연이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한때 안치포프바 이방에 살고 있었다니. 그런데 당신이는 말씀하 신가운데 뜻밖의 사실이 하나 있어요. 용서하세요. 안치포프에 대한 것인데, 스트렐리니코프 의 군사 혁명활동에 대해서 군사 혁명 초기에는 거의 매일같이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그리 고 한두번은 직접 만난일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가족관계에서 그 분과 제가 가까운 사이라 는 것은 추호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런데 혹 잘못 들었는지, 당신이 '총살된 안치포프'라고 하셨지요. 혹시 잘못 말씀하신 것은 아닌 지요? 자살한 것을 당신이 모르실 리가 없을 텐 데." "그런 소리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난 믿질 않았어요. 안치포프는 자살할 사람이 아니예 요."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형 얘기에 의하면, 당신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 버린 후에 유 라친을 떠나기 전까지 살고 계셨던 집에서 안치포프바 자살했다고 했어요. 당신이이들을 데 리고 떠난후 얼마 있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지요. 형이 유해를 매장했어요. 그런 얘길 듣지 못했다니 어떻게 된 겁니까?" "그래요, 제가들은 이야기는 다릅니다. 그럼 정말 그분은 자살한 걸까요? 사람들은 그렇게 얘길 했지만 나는 믿질 않았어요. 바로 집에서 일이 일어났다니? 그럴 수가! 죄송합니다만, 그분이 지바고와 얼마나 만났는지 모르세요듣지 못했어요?" "형의 얘기는 매우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고 했어요?" "정말이예요? 됐어요, 그렇게 되질 잘했어요(라라는 천천히 성호를 그었다."어쩌면 그렇게 신통히 꼭 맞췄을까! 그럼 나중에 천천히, 다시 한번 물어봐도 괜찮겠지요? 아무리 사소한 일도 저에게는 귀중한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 난 지금 몹시 흥분해 있어서 조금 쉬면서 진정하고 나서 생각 좀 해야 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하세요." "정말 그렇지 않아요?" "물론이지요." "아, 참 제가 깜빡 잊을 뻔했군요. 당신이, 화장이 끝난후에 저더러 가지 말라고 하셨지요. 알겠어요. 약속하겠어요. 저는 당신과 함께 돌아와서, 말씀하신 대로 일이 끝날지 때까지 머 물러 있겠어요. 우리함께 유라의 원고를 정리하기로 하지요. 도와드리겠어요. 도움이 될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필요할 겁니다. 저는 가슴에 뛰는 피와 전신을 흐르고 있는 피로써 그이의 모든 필적을 흠뻑 느껴보겠어요. 그리고 또 제가 당신한테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도움을 받 아야겠어요. 제가 듣기에는 당신은 법률가시라구요. 적어도 구제도와 지금의 신제도를 잘알 고 계시지요. 게다가 어떤 일을 어느 관서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두는 일은 중요한 일 이예요. 이런 것은 매우 알기 어렵거든요. 그렇잖아요? 나로선 무척 마음이 아프고 무서운일 이 한가지 있답니다. 그 일 때문에 당신의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어린 아이에 대한 문제예 요. 그러나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죠. 화장이 끝난후에 말예요. 나 같은 여자는 평생을 사람 만 찾는 팔자인가 봐요. 그렇잖아요? 가령, 예를 들어서 말씀드린다면, 남에게 길러달라고 주었던 아이의 행방을 찾아야 할 경우, 전국에 있는 고아원의 기록 같은 것이 없을까요? 또 인구 조사나 집 없는 애들의 명부같은 것이 없을까요? 아니, 지금은 대답하시지 마세요. 나 중에, 제발 나중에 듣기로 하지요. 정말 무서운 일이예요! 인생은 너무나 처참해요! 어떻게 될는지 몰라도 저의 딸이 올때까지는 여기에 있기로 하겠어요. 카첸카는 연극과 음악에 뛰 어난 소질을 가졌답니다. 그 아이는 흉내도 잘 내고요. 자작 연극도 곧잘 한답니다. 그리고 또 듣고 오운 오페라의 한 대목을 멋있게 부르기도 한답니다. 맹랑한 계집아이예요, 그렇죠? 나는 딸을 연극 학교나 음악학교 초급반에 보내고 싶어요. 어디든지 입학만 시키면 기숙사 에 넣을 작정이예요. 그래서 그 아이를 안 데리고 왔어요. 그것이 잘 되면 저는 돌아가려고 해요. 단숨에 다 얘기할 수는 없군요. 그렇잖아요.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리기로 하고 지금은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좀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걱정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하겠어요. 그 리고 참, 유라의 가족들을 복도에 쫓아내서 안됐어요.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꽤 떠들썩하군요. 문을 열어서 그분들을 들어오시게 하시죠. 잠깐 기다리세요. 관 곁에 의자를 하나 갖다 놓지 않으면 유라한테까지 닿질 않아요. 저도 발끝으로 쳐켜서 봤지만 무리였어 요. 마리나와 아이들을 위해서도 필요해요―'너희는 마지막 키스를 나에게 보낼지어라'말이 예요. 정말 괴롭군요.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모두들 들어오게 하겠어요. 그러나 그전에 한마디만, 당신은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 와 고통스러웠던 문제들을 물으셨지만 저는 뭐라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제 힘 자라는 데까지 기꺼이 도와드리지요. 그리고 아시겠습니까, 언제 어느 경우에도 절망해서 는 안됩니다. 희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만이 불행한 경우를 당했을 때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가 아닐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실망만 한다는 것은 의무를 저버리고 의무에 역행하 는 것이 됩니다. 이제 문상객을 방에 모시기로 하지요. 말씀대로 의자를 옆에 놓도록 하겠어 요. 곧 가져오도록 하지요." 그러나 라라는 이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예브그라프가 방문을 열고, 복도의 사람들이 밀려들어 오고, 그가 장례를 맡은 사람들과 문상객들에게 하는 말소리도 듣지 못했으며, 문 상객들의 발걸음 소리도, 마리나의 통곡도, 남자들의 기침 소리도, 여자들의 눈물과 울음소 리도 듣지 못했다. 주위의 단조로운 소음은 소용돌이 속으로 그녀를 휘몰아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녀도 기절 하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가슴이 울렁거리며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머리를 숙 이고 상념의 추억 속에 잠겼다. 잠시 몇 시간 동안에 그녀는 알지 못할 미래, 수십 년 후의 장래로, 그녀가 노파가 되어있을 미래로, 생전에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먼 시간속으로 도망쳐 가는 것이었다. 깊은 생각에 빠지며 불행한 밑바닥으로 잠겨가고 있었다.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한 사람은 죽었다. 또 한 사람은 자살했다. 그래서 죽여도 시원 치 않을 사람만 남았다. 내가 죽이려다 못 죽인 사내들만 남았다. 이 세상에 살아있을 필요 도 없는,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비참한 인간들만이, 나의 생애를 뜻하지 않는 범죄의 연 속으로 만들어 버린 사내들만이 꾸역꾸역 살아 남았다. 그 소름끼치는 늙은 괴물은 우표 수 집가만이 알고 있는 아시아 지방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한테 있어야 할 가까운 사람은 이미 남지 않았다. 아, 그 크리스마스 날, 너무나도 추악한 그 속물을 쏴 죽이려고 생각하고 나가기 전에, 이 방 어둠 속에서 나는 아직 소년이던 파샤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고별해 가는 유라는 그때까지는 나의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기억을 되새기며 크리스마스 날 파샤와 나눈 이야기를 생각해내려고 애썼으나, 머 리에 떠오르는 것은 창문에 얼어붙은 성에를 둥글게 녹이며 타오르던 창가의 촛불뿐이었다. 여기 고인이 되어 책상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이 그 당시 거리를 지나가는 길에 그 구멍난 유리 창문을 들여다보며 촛불에 마음이 끌렸던 것을 그녀는 생각이나 했을까? 밖에서 바라 본 그 불빛―'테이블 위에서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다.'―여기서 그의 숙명적인 인생이 시작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명상은 흐트러지고 있었다. 교회 장례식을 올리지 않게 된 것은 얼마나 유감스러 운 일인지 몰라! 그 장엄한 의식 말이야. 다른 사람한테는 그것이 분에 넘치는 의식일는지 몰라도 유라에게는 그것이 잘 어울릴 거야. '관에 눈물을 뿌리면 할렐루야의 노래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분을 두고 하는 말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순간, 그녀는 자랑과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자 기의 얼마 되지 않은 생애에 지바고와 함께 지내고 있을 때에도, 헤어진 후에 그를 생각할 때에도 그녀는 언제나 이러한 감정을 절박하게 느끼곤 하였으나, 지바고의 영혼에서 끊임없 이 흘러나오는 자유스럽고 맑은 입김은 지금도 그녀를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녀는 의자 에서 재빨리 일어났다. 걷잡을 수 없는 생각이 가슴에 끓어올랐던 것이다. 잠시 동안이라도 그녀는 자기를 가두고 있는 슬픔에서 벗어나 유라의 도움을 받고 자유로운 천지에서 다시금 해방의 환희를 느끼고 싶었다. 자기 혼자만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그이 곁 에서 실컷 울면서 이별을 즐기는 행복이야말로 그녀가 그리던 해방에서 오는 행복이었다. 마치 안과 병원에서 안약을 넣은 때처럼 눈물이 흘러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으며, 고통스 러운 눈으로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코를 훌쩍이면서 움직이기 시작하 더니 드디어 방 밖으로 나가서 문을 닫았다. 그녀는 방안에 혼자 남게 되자, 재빨리 성호를 그으면서 관 가까이 가서 예브그라프가 놓은 의자에 올라서 천천히 세 번 유해 위에 성호를 긋고 얼음장 같은 얼굴과 손에 입술을 댔다. 차디찬 이마는 주먹 쥔 손과 같이 줄어든 느낌 이었으나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생각도 없이, 또 울지도 않고 관 중앙의 생화와 유해를 자기의 몸, 가슴, 영혼으로 그리고 영혼과 같은 자기의 큰 두 손으로 덥혔다. 15 드디어 참을 수 없는 오열이 그녀의 가슴을 들먹였다. 참을 수 있는 데까지는 참고 견디 었으나 갑자기 힘이 빠지면서 눈물이 쏟아져 뺨과 옷과 손으로 그리고 매달리고 있는 관 위 에 하염없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생각도 없었다. 그이와 밤중에 이야기하던 것처럼 일련의 생각, 돌아가 는 얘기, 자식 그리고 확신이 하늘에 뜬 구름처럼 그녀의 머리 속을 혼자서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도 행복과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절로 용솟음쳐 오르는 따뜻한 공감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밀착된 지식의 교환이 있었다. 지금도 그녀는 이러한 지식이 넘치고 마음의 준비가 되어서 죽음에 대한 어둡고 막연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수십번이나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지바고를 잃어본 일이 있 듯이 굳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서, 이 관옆에서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가 않았다. 참으로 자유스럽고 비할 데 없는 애정이 아닌가! 그들은 남들이 노래부르듯 서로 아주 자 연스럽게 이해하는 사이였다. 그들은 '정열에 불타'피할 길 없어서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애정은 그들이 자신보다는 주위의 모든 것 ―발밑의 대지와, 머리 위의 넓은 하늘과 구름, 수목들이 원하고 있었다. 또 거리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과 산책하면서 바라보던 먼 경치들과 그들이 살고 만나고 하던 방들이 그들 자신보다 더 그들의 사랑을 기뻐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거야말로 그들을 가까이 묶어놓은 귀중한 것이다! 언제나 낙원처럼 자기를 잊 을 만큼 행복한 순간에도 숭고하고 벅찬 마음을 잃지 않았다. 세계와 조화를 이룬 만족감, 세계의 모든 모습과 피가 통하는 감정, 우주 전체의 모든 정경이 미의 일부라는 감각을 잃 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이 모든 것과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을 자연계의 다른 것들 위에 올려놓고 인간을 존중하고 숭배하는 풍조는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러한 잘못 된 사회성의 원칙과 정치에의 적용은 보잘것없는 허튼 수작으로 생각되었고 이해가 되지 않 았던 것이다. 16 라라는 평상시의 말로써 그에게 이별을 고하기 시작했다. 꾸밈없는 말은 현실성과 논리의 궤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의 합창이나 독백 그리고 시나 음악, 그밖에 약 속된 논리를 벗어나 그저 격정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거침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녀 의 슬픈 사연이 담긴 말이 눈물에 젖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그녀의 말은 따스한 빗물에 젖어 바람결에 흔들리는 풀잎처럼 부드럽게 들렸 다. "우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유라 신은 우리에게 재회를 주셨어요.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도 무서운 방법으로 했을까요! 아, 난 울고 또 울어도 소용이 없군요. 생각해보세요. 앞으로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쳐오고야 말 거예요. 당신이 가셨으니 나의 종말도 가까워지 고 있어요. 아마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이 일어나고야 말 거예요. 삶의수수께끼, 죽음의 수수 께끼, 천재의 매혹, 계시의 매혹 등은 우리에게 이해가 되었어요. 그러나 지구를 개조한다는 따위의 속세의 자길구레한 일들은 우리들이 할 일은 아니예요. 잘 가세요. 나의 위대하고 그리운 사람아, 잘 가세요. 나의 자랑, 나의 깊고 빠른 시냇물의 흐름이여. 나는 당신의 끊임없이 흐르는 물결 소리와 그대의 차디찬 물결로 뛰어들기를 얼 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기억나시지요? 눈 내리던 그날, 당신과 헤어지던 때의 일을 어쩌면 당신은 나를 그렇게 속였을까! 당신을 그냥 두고 난 혼자 어떻게 갈 수 있어요? 난 알고 있어요 왜 당신이 억지 로 그렇게 하셨는지 알고 있었어요. 나의 행복을 위하여 당신은 억지로 하셨다는 것을. 그러 나 그때 모든 일은 다 끝장이 나버렸어요. 아, 거기에서 내가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당신 은 모르세요. 유라, 나는 나쁜 짓을 했어요! 죄인이란 말이예요. 당신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나쁜 짓을 한 여자란 말이예요! 그렇지만 그것은 나의 탓이 아니었어요. 그때 나는 석달 동 안이나 앓아 누웠어요. 그 한달 동안은 의식도 없었어요. 그때부터 후회와 고통 때문에 한시 도 편한 마음을 가지지 못했어요.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았어요. 도저히 고백할 용기가 없었어요. 그런 것들을 생각할 때 마다 머리끝이 빳빳해지는 두려움 에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저는 다른 여인들처럼 술을 퍼마시는 따위의 일은 없었 어요. 술취한 여자는 정말 마지막이니까 그렇잖아요?" 그녀는 무슨 말을 하더니 괴로움에 울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얼굴을 들어 자기 주변을 힐끗 돌아보았다. 방안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내려와 휘청거리는 관에서 물러서면서 마지막눈물을 짜내서 마룻바닥에 던지는 몸짓으로 손 바닥으로 눈을 비볐다. 남자 몇 사람이 관에 가까이 가서 세폭의 피륙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출관이 시작되었다. 17 라라는 카메르게르스키 거리에서 며칠을 보냈다. 예브그라프의 부탁으로 그녀는 원고 정 리를 도왔으나 끝내지는 못했다. 예브그라프는 그녀의 부탁도 알게 되었고, 그녀에게서 어떤 중대한 일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라라는 집을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그날 거리에서 체포된 것 같았으며 그녀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다. 북부에 있는 많은 보통 수용소나 여자 수용소에서 성명도 없이 번호만으로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후일에는 그 번호를 기재한 명부조차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제16장 에필로그 1 1943년 여름, 쿠르스크 만곡지대 돌파 작전과 오룔 탈환 후의 일이었다. 최근에 소위로 임관된 고르돈과 두도로프 소령은 각기 자기 부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고르돈은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다가 귀대중이며, 두도로프는 모스크바에서 사흘 동안의 휴가 를 끝내고 돌아가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도중에서 만나 체르니라는 작은 도시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적군이 물러가 면서 폐허로 만들어 '무인지대'가 된 주택지는 황폐하기는 했으나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 었다. 부서진 벽돌과 돌더미가 쌓인 거리의 폐허 사이에 그대로 있는 건초장를 발견하고 거기에 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두 사람은 잠자지 않고 밤새 얘기만 하고 있었다. 새벽 세 시경에, 졸고 있던 두도로프가 바시락거리는 고르돈 때문에 눈을 뜨게 되었다. 고르돈은 마치 물속처럼 부드러운 마른 풀 속에 뒹굴면서 옷을 챙겨 들고 엉금엉금 기어서 건초 더리에서 문 쪽으로 나왔다. "출발 준비하는 건가? 아직 일러요." "강으로 가는 길이야. 세탁 좀 할려구." "정신 없는 소리 하는군. 저녁녘엔 부대에 도착할 건데. 타냐가 갈아입을 것은 줄 텐데 뭘 그래." "참을 수 없네. 땀에 절어서 더럽혀졌어. 강물에 헹궤서 꼭 짜 입으면, 오전 햇볕이 뜨거 워서 금세 말라요. 거기서 몸도 씻고 옷도 갈아입어야지." "그래도 그건 곤란해. 자넨 장교가 아닌가?" "지금은 일러서 모두 자고 있으니까. 나무 그늘에서 씻으면 누가 보겠나? 자넨 아무 소리 말고 잠이나 자게." "어차피 잠들긴 글렀어. 나와 같이 가세." 금세 솟아오른 해는 벌써 뜨겁게 타고 있었으며, 그들은 하얀 돌더미를 지나 강으로 가고 있었다. 전에 거리였던 부근의 땅바닥에는 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빨갛게 달아오른 사람들이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집을 잃고 갈데 올데 없는 노인들과 아이들이었으 며, 본대에서 낙오된 적위군 병사도 간혹 섞여 있었다. 고르돈과 두도로프는 그들의 발을 밟 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조심스럽게 그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조용히 하게. 온 동네 사람들이 깨겠네. 그렇게 되면 빨래는 못 하게 되네." 그들은 낮는 목소리도 간밤에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2 "이것이 무슨 강인가?" "모르겠어. 묻질 못했어. 아마 주샤 강일 걸세." "아니야, 이름이 다르든데." "주샤라니까, 그 일이 일어난 곳인데. 흐리스치나의 일 말이야." "아, 그렇지. 그 강은 더 하류에 있어요. 교회에서는 그애를 성인으로 추앙했다더군." "거기엔 '미구간'이라고 불리는 석조 건물이 있었어. 실은 그것이 국영 농장의 마구간이었 지. 지금은 그것이 역사에 남을 명칭으로 되었어. 벽이 두꺼운 오래된 건물이었어. 독일군 이 점거해서 철통같은 요새로 만들어버렸던 거야. 그곳에서는 사방으로 사격이 가능해서 우 리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있었어. 그래서 마구간을 탈취해야 했는 데. 흐리스치니가 용기와 꾀를 가지고 독일군 진지로 들어가 마구간을 폭파해버렸어. 그러나 자신은 붙잡혀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지만." "왜 두도로바라고 부르지 않고, 흐리스치나라고 부르나?" "우리는 아직 결혼한 사이가 아니니까. 1941년 여름에 전쟁이 끝나면 하기로 약속했던 거 야. 그 후에 나는 굉장히 돌아다녔어. 우리 부대는 언제나 이동하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끝없 는 이동 때문에 그녀와의 연락도 끊기고 말았어. 그녀의 무공과 장렬한 전사에 대하여 나는 신문이나 연대 명령을 보고 알게 되었어. 아마 이 근처에다 그녀의 기념비를 세울 계획 같 았어. 죽은 유라의 동생 지바고 장군이 그 여자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이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얘기가 있어요." "미안하군, 괜히 그 여자 얘길 꺼내서. 자네한테는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나." "아니야. 아무렇지도 않아.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만 했어. 이제 방해하지 않을 테니 목욕 하고 빨래도 하게. 난 언덕에 누워서 풀잎을 씹으며 생각에 잠겨봄세. 한잠 잘지도 몰라." 잠시 후에 얘기가 계속되었다. "자넨 어디서 세탁하는 걸 배웠지?" "그것은 다 필요해서였어. 우리는 운이 나빴어. 형무소 중에서도 제일 지독한 곳으로 옮겨 졌었네. 살아 남은 사람이라곤 별로 없었다네. 우리는 그곳에 도착하자 기차에서 끌어내려졌 어. 그 일대는 눈 벌판이었으며, 멀리에 숲이 좀 보였어. 경비원들은 총을 겨누고, 경찰견도 있었어. 같은 시각에 또 다른 죄수의 집단이 또 몇 개 있었어. 우리는 온 들판에 깔려서 둥 글게 서고, 서로 마주 보지 못하게 바깥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정렬하게 했어. 무릎을 꿇고 앉으라는 명령이 내렸지. 옆을 바라보면 총살한다는 거야. 이리하여 몇시간 계속하여 긴 굴 욕적인 점호가 시작되었는데, 그것도 무릎을 꿇고 있는 그대로 였어. 점호가 끝나서 일어서 니까 다른 집단들은 줄지어 떠나간 다음에 '여기가 너희들의 수용소다. 알아서 하라'고 하는 거야. 아무것도 없는 눈의 허허벌판에 기둥 하나가 복판에 세워져 있었다네. 그 기둥에는 '구라그(국가수용소 총관리국의 약칭)92야 엔 90'이라고 씌어 있었어.그것뿐이야. "그럼 우리는 그것보다는 쉬웠군. 나는 운이 좋았어. 그러나 난 두 번째 유형이었으니까. 한번 당하면 으레 두 번 당하게 되는 법인가봐. 그것도 딴 죄목으로 걸렸으니 조건도 달랐 지. 석방되니까 첫 번째처럼 공민권도 회복되고 또 대학의 강의도 맡을 수 있었으니까. 전쟁 때에는 정식 소령계급으로 동원되었었네. 자네처럼 죄수 부대가 아니었어." "거기엔 정말 푯말뿐이고 아무것도 없었어. 처음 우리는 막사를 지을 나무를 구하기 위해 그 추위에 맨손으로 나뭇가지를 꺾어서 움막집을 지었다네. 그러는 사이에, 믿어지지 않겠지 만, 자고 깨고 하면서 마음도 좀 가라앉게 되었어. 자기 손으로 감옥을 짓고 울타리를 만들 고 감시탑도 세우게 되었지. 무엇이든지 다 제손으로 하는 거야. 그리고 벌목하기 시작했어. 숲에서 나무를 베어내고, 여덟사람이 한조가되어서 썰매를 끌고 재목을 운반해내는 거야. 가 슴팍까지 눈 속에 빠지면서 말일세. 우린 전쟁이 시작된 것을 오랫동안알지 못했다네. 숨기 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것이 알려지고 희망자는 죄수 대대로 편성되어 전선에 나 가게 되었고, 만약 전쟁후에 살아남으면 석방해준다는 조건이었어. 그 후에는 공격에 또 공 격,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의 끝없는 연속, 지뢰와 박격포의 폭음이 그치지 않는 포화의 탄막 이 있을 뿐이었어. 우리의 부대를 결사대라고 부른것도 당연한 일이야. 전우는 모두 쓰러지 는 데 내가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 정말 기적같은 일이 었어. 그러나 이 유혈의 지옥도 수용 소의 공포에 비하면 마치 천국이었다네. 그것은 물질적인 조건에서가 아니라 아주 딴 이유 에서 말일세." "그래, 정말 자네는 혼났겠군." "거기서 배운 것은 세탁만이 아닐세. 무엇이든지 다 배울 수 있었어." "놀라운 일이었어. 그것은 자네의 죄수 생활과 비교해서 뿐만 아니라, 1930년대까지의 생 활과 비교할 때, 자유스럽고 대학에서 한가하게 교편을 잡고 서적이나 금전에 윤택한 생활 을 하고 있던 그 당시와 비교하면, 전쟁은 폭풍처럼 불어서 신선한 공기를 흘러들여서 구제 의 입김을 느끼게 했었지. 나의 생각으론 농업의 집단화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과오를 시인하려고 하지도 않았어. 실패를 은폐하기 위해 여러 가지 테러 수법을 써서 국민들로부터 사물을 판 단하거나 생각하는 능력을 빼앗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강제로 있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 은 오히려 정반대도 역설해야 했어. 그리고 예조프(1936∼1938, 스탈린 대숙청의 하수인)일 당의 포악한 행위와, 처음부터 지킬 생각도 없는 신헌법과 선거의 원칙에서 벗어난 선거의 실시 따위였어. 이리하여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의 공포나 현실의 위기, 닥쳐올 죽음에 대한 위협등은 비 인간적인 허위의 지배에 비하면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 몰라.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 은 듯이 가벼운 마음이었지. 왜냐하면 전쟁은 사문자의 마력을 제한하니까. 자네와 함께 유형갔던 사람뿐만 아니라 전방 후방은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 을 쉬게 되었고, 참된 행복에 취해서 죽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구제를 의미하는 전쟁의 용광 로 속으로 뛰어들었던 거야.” "전쟁―그것은 연이어 내려오는 한 고리에 불과하며, 이것으로 인해서 변혁은 그 직접적 인 원인과 작용을 끝내고 만 것이 되네. 혁명의 간접적인 영향은, 변혁의 성과가 결실되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란 말일세. 그 것은 재앙에서 구출되고, 성격이 단련되고, 미지근한 것을 쳐부수고, 영웅주의가 생겨 나서 크게 펑펑거리면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어. 이런 기괴하고 놀라운 일들 이 이 시대의 도의적 정화를 가져오고 있었으니까. 이러한 것을 볼 때 흐리스치나의 죽음이나 나의 부상, 그리고 우리 모두의 희생과 전쟁에 서 뿌린 피흘린 대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감에 가득차 있었어. 흐리스치나최후의 빛, 우리 모두의 생명에 밝게 비치고 있는 자기 희생의 빛은 그녀를 잃은 고통을 어루만져 주고 있어요. 가엾게 자네가 고통을 받고 있을 무렵에는 난 석방돼 있었어. 그때 흐리스치나는 역사학 부에 다니고 있어서 내가 가르치고 있었어요. 벌써 이전에 내가 처음 수용소에서 형기를 마 치고 나왔을 때, 그녀는 어리고 예쁜 소녀라고 생각했네. 그땐 유라가 살아 있었던 때였어. 말한 적이 있었지. 이리하여 그녀는 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네. 그때는 말이야, 학생이 선생을 곯려주는 것이 유행이었지. 흐리스치나는 그런 장난에 열중 에 있었어.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는 유독 나한테만 매섭게 공격을 퍼붓는 거야. 그것 이 너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어서 다른 학생들까지도 분개해서 나의 편이 될 지경이었으니까. 흐리스치나는 제법 유머가 있는 여학생이었어. 나의 여러 가지 별명을 지어 서는 벽보에 발표해서 날 놀림감으로 만들었지. 그런데 우연히 그 뿌리깊은 증오가 그녀의 풋사랑의 눈가림이었다는 것을 후에야 깨닫게 되었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녀가 좋아졌단 말일세. 1941년의 여름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여름이었지. 전쟁 첫 해에 그녀는 몇 명의 남녀 학생 과 함께 모스크바 교외의 별장지에서 지내고 있었고, 우리 부대도 거기에 주둔해 있었어. 우 리는 사이가 좋아진 거야. 그 당시는 군사 교육과 의용 부대의 편성, 흐리스치나의 공수 훈 련, 그리고 모스크바 시내의 옥상에서 독일군의 공습을 최초로 격퇴하게 되었던 때였어. 아 까도 얘기했지만 그때 우리는 약혼을 했었지. 그러나 나는 이동하게 되어서 서로 헤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 후는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었어. 후에 전세가 호전되어 독일군이 한 번에 수천명씩 항복할 무렵에 두 번째 부상을 입고 병 원에 입원하고 난 후, 나는 고사포 부대로부터 사령부 제 7국으로 전속되었지. 거기서는 외 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필요해서 내가 우겨서 자네를 바다 밑창에서 집어올리듯 겨우 배속받 도록 한 걸세.” "세탁부로 있는 타냐는 흐리스치나를 잘 알고 있어요. 전선에 있었을 때 서로 잘 알고 친 숙한 사이였지. 흐리스치나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길 해주었다네. 타냐가 얼굴에 웃음을 지을 때는 유라와 닮았더군. 자네는 그렇게 생각지 않나? 그애가 웃을땐 들창코와 광대뼈가 안 보여서 꽤 매력이 있고 예브장하던데, 그런 아가씨는 흔히 볼 수 있어요." "그런 것 같기도 하군, 난 주의해서 보지 않았어." "타냐 베조체레도바라고 부르는 것은 가혹한 이름이야. 성은 아니지. 무슨 별명일 거야. 그렇게 생각지 않는가?" "그 내력을 우리에게 얘기하더군. 소녀는 자기 부모를 알 수 없는 고아였었대. 아마 러시 아의 깊은 시골에서 순박한 말투로 '애비 없는 아이'라는 뜻으로 베조트챠라고 불렀겠지. 그 런데 이렇게 불러본 적이 없는 도시 아이들이 제멋대로 불러서 그 이름이 달라졌을 거야." 3 이것은 고르돈과 두도로프가 체르니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서로 얘길 나누고 얼마 되지 않아서 철저하게 파괴된 카라체프 읍에서의 일이었다. 자기 부대를 찾아가던 그들은 이 읍 에서 주력 부대의 후방에 겨우 닿을 수 있었다. 무더운 가을날이었으며 맑은 바람 한점 없는 날씨가 달포로 더 계속 되었다.브란스크와 오룔 사이의 옥토 지대인 비옥한 브르인쉬치나는 맑게 갠 하늘에서 내리쏟는 뜨거운 열기에 짙은 갈색으로 타고 있었다. 곧바른 간선 도로가 거리의 중앙으로 지나고 있었다. 한쪽 길가에서는 지뢰가 폭발하면서 부서져 벽돌 더미로 돼버린 집들과 뿌리째 뽑힌 나무가 찢기고 타다 남은 과수원의 잔해가 엿보였다. 길 저쪽엔 거리가 파괴되기 전에도 별로 건물이 없었던 것같은 황야가 보였다. 그 곳에는 전혀 파괴될 것이 없어서 화재나 폭발의 흔적이 적었다. 집이 많던 쪽에서는 집 잃은 사람들이 무럭무럭 연기가 나고 있는 잿더미를 파헤치면서 덜 탄 데서 무언가 실어내서 한 곳에 모으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재빨리 토굴을 파고서 지 붕을 만들 잔디를 네모나게 자르고 있었다. 길 건너 공지로 돼 있는 쪽에는 사단 사령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야전 병원과 길을 잃고 혼란되어 서로 찾아 헤매는 수송, 병참, 보급 등의 모든 후방 부대의 막사가 허옇게 보였으 며, 트럭과 짐마차 등이 뒤범벅되어있었다. 회색 약모를 쓰고 무더운 외투를 말아서 어깨에 짊어진 보충 중대의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어린 병사들이, 적리를 앓고 나서 핏기가 없는 얼 굴로 여기와서 좀 쉬고나서 다시 서쪽을 향해 떠났다. 화재와 폭격 때문에 반쯤 잿더미가 된 거리는 여전히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시한폭탄 이 설치된 먼 곳에서는 지금도 폭탄이 터지고 있었다. 뜰안을 파던 사람들은 땅의 진동 때 문에 이따금 작업을 중지했다. 굽혔던 허리를 펴면서 곡괭이에 기대서서 폭발이 되고 있는 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저 멀리서 회색과 검은색 그리고 붉은 벽돌색의 구름 같은 연기와 먼지가, 처음에는 기둥 이나 분수처럼 하늘에 치솟아 올라가 공중에서 가볍게 퍼져서 깃 모양을 이루다가 마침내 산산이 흩어지며 땅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면 일손을 멈추고 있던 사람들이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들판 한쪽에서는 관목과 고목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공지가 있었다. 이 울창한 나무로 바깥 세계와 차단된 공지는 외딴집의 시원한 그늘진 뜰안과도 같았다. 여기에서 세탁부 타냐는 두 세사람의 같은 소속부대 사람과 고르돈과 두도로프 그리고 그 밖의 사람과 함께 아침부터 트럭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은 타냐와 그녀에게 맡겨진 연대의 짐들을 운반하기로 돼 있었다. 연대의 짐들을 상자에 넣어 공지에 산더미처 럼 쌓여 있었다. 타냐는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 나머지사람들은 그녀를 태우 러올 트럭을 놓칠세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 시간도 더 오래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그들은 심심한 참에, 갖은 파란을 다 겪은 이 수다스러운 여인의 지껄거리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는 지바고 장군을 만났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이예요. 장군에게 날 데려가더군요. 지바고 소장 말이예요. 그는 한 국리스치나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있어서 그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이야 기를 물어 보고 다니는 거예요. 그이는 흐리스치나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목격자들을 찾 고 있었어요. 우리둘이 친구였다고 말하니까, 그이는 날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와서 나를 데려간 거예요. 아니조금도 무섭지 않았어요. 그이는 조금도 다른 데 가 없이 남들과 똑같은 분이예요. 눈꼬리가 좀 치켜 올라가 있었고 머리는 검은 편이예요. 내가 알고 있는 걸 다 말했더니 가만히 듣고 있다가 고맙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름과 고향 을 물었어요. 난 창피하더군요. 자랑이 될 것이 있어야지요. 나는 여러 번 감화원에 있기도 하고 방랑하기도 했었거든요. 그러나 장군은 말해보라고 하면서 부끄러울 건 없다는 거예요. 저는 처음에는 말을 많이 못했어요. 그러다가 내 말을 조금 더 하니까, 그이는 머리를 계속 끄덕였어요. 그분이 머리를 끄덕이니까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사실 나는 할말이 많았어요. 내가 당신들에게 말해도 믿질 않을 거예요. 그분도 같았어요. 내 말이 다 끝나자 그분은 방 안을 오가면서, 이건 기적이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다시 나를 찾을 테 니 걱정하리 말라는 거예요. 꼭 찾아서 데려간다고 하셨어요. 난 꿈만 같았어요. 그분은 날 이대로 두지는 않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또 자상한 말씀이 있었는데, 다음엔 그분이 저의 아 저씨가 되고, 난 장군의 조카가 된됐어요. 날 대학에도 보내구, 어디든지 가고 싶은 학교말 이예요. 거짓말이 아니예요. 정말이예요. 날 놀리시는지도 몰라요." 이때 그의 짐마차가 공지로 돌아오고 있었다. 폴란드와 서부 러시아에서 보리 짚단을 나를 때 쓰는 옆이 높고 길죽한 마차였다. 예전에는 마부라고 불리었던 마차 수송대 병사가 두필 의 말을 몰고 왔다. 그는 공지에 들어와 자리에서 뛰어내리고 마차에서 말을 끄르기 시작했 다. 타냐와 몇 병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가 차삯을 줄테니 태워달라고 입을 모아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마차를 제 마음대로 사용할 순 없다면서 명령대로 해야 한다고 거절하고 말을 끌고가더니 다시 보이지 않았다. 땅바닥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일어나서 빈 마차에 올라 앉았다. 이것 때문에 중단되었던 타냐의 이야기가 다시 계속되었다. "장군이 또 무슨 말을 했지?"고르돈이 물었다. "말할 수 있으면 말해주게." "그럼요, 말하지요." 그리하여 그녀는 끔찍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4 "정말 할 얘기가 너무 많아요. 나는 보통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래요. 사람들의 하는 얘기인지 나 자신이 어렴풋이 생각이 떠올라 그런 지는 몰라도, 우리 어머니 라리사 코마로 바는 백몽고(당시 소비에트 지배밖에 있던 몽고 지방)에 잠복해 있던 러시아의 장관 코마로 프 동무의 부인이었대요. 그 코마로프라는 사람은 나를 낳은 아버지가 아니었어요. 물론 나 는 교육도 받지 못하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고아였어요. 당신들은 아마 우스울 겁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할뿐이예요. 내 입장이 되어보세요. 그런데 이제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크르쉬츠이를 지나 시베리아 끝해야 중국 국경이 가까 운 카자크의 거주 지역에서 시작돼요. 우리 편인 적위군이 백위군의 본거지였던 고장으로 가까이 왔을 때, 코마로프는 우리 어머니와 모든 가족을 특별 열차에 태워서 데려가라는 명 령을 내렸어요. 깜짝 놀란 어머니는 한발짝도 갈 수 없다고 했어요. 코마로프는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내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으니까요. 어머 니는 오랫동안 이분과 헤어져 있는 동안에 날 낳게 되었고, 어머니는 누가 그이에게 이말을 할까봐 정신이 없었어요. 코마로프는 어린애를 몹시 싫어했어요. 애들은 집안을 더럽히고 시 끄럽게 굴면서 소리지르고 발을 굴러 참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적위군이 가까이 오고 있을 때, 어머니는 나고르나야 역에서 신호수로 있는 마르 파 아주머니한테 사람을 보냈어요. 그것은 우리가 있었던 읍에서 세 정거장 떨어진 곳이었 는데, 처음 정거장은 니조바야였고, 그 다음이 나고르나야, 그리고 삼소노프스크 재가 있었 어요. 신호수는 이 재에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는 마르파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아마 그녀가 읍으로 야채와 우유를 팔러 왔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알 수 없는 일이 있어요. 그들은 우리어머니를 속였어요. 그들은 어머니를 속 이고 그저 잠시 어린애를 맡았다가, 사태가 안정될 때까지 하루 이틀이면 된다고 말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자기가 낳은 자식을 남한테 줄 어머니가 어디 있겠어요. 그때 난 어렸으니까 그 아주머니한테 가면 과자를 주고 좋은 아주머니라고 달래서 갔었어요.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어린 마음에 슬펐던 생각을 하면 끔찍해요. 나는 목을 매어 죽고 싶었어요. 어렸지만 미칠 지경이었어요. 내 짐작으론, 양육비로서 마르파는 많은 돈을 받았 을 거예요. 그 집은 부유한 편이었어요. 소와 말이 있었고, 닭도 치고 있었어요. 또 채소밭이 있었고 밭은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어요. 집은 관사였기 때문에 공짜로 살았구요. 철길 바로 옆에 있어서 기차가 우리 고향 쪽에서 올 때는 언덕의 경사가 너무 가팔라서 겨우 올라왔어요. 그러나 당신들이 살고 있는 러시아쪽에서 오는 기차는 내리막길을 너무 급하게 달려서 브레 이크를 걸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가을이 되어서 숲의 나뭇잎들이 떨어지면, 아래쪽의 나고 르나야 정거장이 마치 접시에 올려놓은 것처럼 보였어요. 신호수인 바시리 아저씨를 시골 풍속대로 아버지라고 불렀어요. 그는 명랑하고 선량한 분 이었어요. 그런데 남을 지나치게 믿는 게 흠이었어요. 술에 취하기라도 하면 마치 거세되는 돼지처럼 지껄여서 온 고장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자기 속을 툭 터놓는 거예요. 아주머니는 언제나 나더러 자기를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난 어머니란 소리가 나오 지 않았어요. 그건 내가 친 어머니를 잊지 못했거나 아주머니가 너무 무서웠던 탓인지 모르 겠어요. 그래서 그냥 마르파 아주머니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 몇해가 지나갔어요. 얼마나 지났는지 알지 못해도 나는 기차가 오면 깃발을 흔드는 일이나 마차에서 말을 끄르는 일을 하였고, 소를 돌보는 일을 했어요. 아주머 니는 나에게 물레를 돌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집안일은 말할것도 없고, 청소하거나 정 리하고 식사 준비에 가루를 빻는 일 등 아무 거나 다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또 페쨔를 돌봤어요. 페쨔는 세 살인데, 다리가 마비돼서 걷질 못해서 내가 돌보게 된 거예요. 후에 언 젠가 아주머니가 나의 튼튼한 다리를 곁눈으로 째려보던 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져요. 내 다리는 싱싱한데 페쨔의 다리가 마비된 것은 내가 눈으로 저주했기 때문이 란 거예요. 정말 이 세상에는 그렇게 무서운 증오와 무지한 일이 다 있어요. 하지만 이때까지는 얘기의 시작이고, 이제부터 좀 들어보세요. 당신들은 그저 놀라울 거예 요. 신경제정책으로 1천 루불 리가 1코페이카의 가치밖에 없었을 때, 바시리 아저씨가 아랫마 을에서 소를 팔아서 두 부대나 되는 돈을 받았어요. 그때는 게렌카 지폐(게렌스끼 정권에서 사용한 지폐)를 사용했는지 레몬 지폐(1920년대부터 3년간 통용된 1백만 루불리 지폐)였었 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건 그렇고, 아저씨는 술에 취해서 나고르나야가 떠들썩하게 부자가 되었다고 소문냈어요. 지금도 기억이 나지만, 바람이 몹시 불어서 지붕을 날리던 어느 가을이었어요. 기차는 바 람을 안고 달리기 때문에 재를 올라오지 못했어요. 이때 언덕에서 어떤 할머니가 내려오고 있었어요. 바람결에 그의 스커트와 스카프가 나부끼고 있는 것이 보였어요. 이 떠돌이 할머니는 우리 집으로 들어와 배를 움켜쥐고 신음하면서 안에 들어가게 해달라 는 거예요. 그래서 의자에 눕혔으나 배가 아파서 죽을 것만 같으니 제발 병원에 데려가 달 라며 돈을 얼마든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는 마차에 말우다로이를 매고 할머니를 태우고는 철길에서 15베르스타나 되는 먼곳에 있는 병원으로 데리고 떠났어요. 그후 얼마 지났는지 몰라도 나와 아주머니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창문 밑에서 우다로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마차가 뜰안에 들어왔어요. 병원에서 돌아오기에는 시간이 너무 빨랐어 요. 아주머니는 불을 들고 내의만 입은 채 문을 노크하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빗장을 열 었어요. 문을 열자 문밖에 검고 사납게 생긴 사람이 서 있었어요.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소 판돈 은 어디있지? 난 너의 남편을 숲속에서 죽여버렸어. 돈만 내놓으면 살려 주겠어. 여자니까,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지 알겠지. 자, 우물쭈물 할 시간이 없단 말이야.'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우린 얼마나 떨렸는지! 아버지는 도끼에 맞아 살해되었고 우리 강도한테 붙잡혀서 구해 줄 사람도 없었어요. 그 순간 아주머니는 정신을 잃은 것 같았어요. 주인이 죽었다는 소릴 듣고는 가슴이 떨렸 으나 마음을 가다듬어 조금도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먼저 아주머니는 그의 다리 밑에 몸을 던지며,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하며, 돈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어요. 그러나 그는 바보가 아니었어요.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되자, 아주머니는 꾀를 생각해냈어요. '할 수 없군.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어 요. 소를 판 돈은 마루 밑에 있어요. 마루 뚜껑을 열테니 내려가봐요'라고 말 했어요. 그런데 그 악당은 아주머니의꾀를 금세 눈치채 버렸어요. '이것봐, 넌 나를 덫에 걸리게 하려는 생 각이지. 잔소리 말고, 네가 내려가서 마루 밑이건 지붕 위건 돈만 내놓으면 그만이야. 하지 만 딴전을 부렸다간 용서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그럴 리가 있나요. 사람을 믿지 않는군요. 제 가 내려갈 수만 있으면 좋겠지만 난 무리예요. 그것보다도 제가 윗층계에서 촛불을 비추어 드리지요. 걱정 마세요. 딴생각이 없다는 증거로 내 딸과 함께 내려가세요.'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어요. 여러분, 내가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이 어땠을까! 이젠 끝장이라고 생각됐어요. 눈앞이 캄캄 해지고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 금방 자빠질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그 놈은 바보가 아니었어요. 나와 아주머니를 흘낏 바라보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빨을 보이며 쓴웃음을 지었어요. 농담하지 말라는 듯이, 아주머니가 날 귀여워하지 않고 핏줄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그래서 그놈은 폐쨔를 한 손에 안고, 한 손으로 뚜껑의 고리를 잡아 열고는 불을 밝히라고 하면서 폐쨔와 함께 마루 밑으로 내려갔어요. 이렇게 되자 아주머니는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놈이 페쨔를 껴안고 내려가자마자 아주 머니는 재빨리 뚜껑을 닫고 쇠를 잠그고 그 위에 큰 트렁크를 올려놓으려고 했으나 너무 무 거워서 혼자서 움직일 수 가 없었어요. 그래서 나더러 도와달라고 했어요 우리는 그위에 앉 아서 바보처럼 기뻐했어요. 아주머니가 앉자마자 도둑놈이 밑에서 뚜껑을 두드리면서 열어 주지 않으면 페쨔를 죽여버린다고 고함을 질렀어요. 나무 판자가 너무 두꺼워서 잘 들리지 않았으나 그의 말소리로 미루어 그가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숲속의 야수보다 더 험한 소리를 질러대서 겁이 났어요. 이제 너의 페쨔를 죽일 거라고 소리쳤어요. 그러나 아주 머니는 이젠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어요. 아주머니는 앉아서 배를 움켜쥐고 웃어대면서 나 를 쳐다보는 거예요. 아주머니는 트렁크 위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우기면서, 또 열 쇠는 자기가 가지고 있으니까 제아무리 떠들어도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나는 아주머니가 제정신이 들게 하려고 애썼어요. 그의 귀에다 큰 소리도 지르고 트렁크 위에서 밀어젖히기 도 했어요 뚜껑을 열고 페짜를 구해내려고 했으나 나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어요. 그때 나 는 어렸으니까. 도둑놈은 밑에서 연방 천장을 두드리고 있었어요. 아무리 두드려대도 아주머니는 트렁크 위에 앉아서 눈만 깜박이고 있을 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어요. 나는 별의 별 일을 다 겪 었으나 이런 무서운 일은 처음이었어요. 페쨔의 가느다란 비명 소리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천사처럼 예쁜 페쨔의 신음 소리가 마루 밑에서 들리는 거예요. 이 악마 같은 놈이 어린아이의 목을 졸라서 죽였어요. 그럼 어떻게 할까? 이 미친 노파와 살인 강도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빨리 손을 써야겠 다고 생각했어요. 이때 밖에서 우다로이의 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말은 마차를 끄르지 않은 채 바깥에 있었던 거예요. 말 우는 소리가 마치 '빨리 달아나요, 타냐, 그리고 좋은 사람한테 도움을 받아요’하는 것 같았어요. 동이 틀 무렵이었어요. 고마워, 우다로이, 네가 시키는 대 로 하자, 좋은 생각이었어요. 뛰어라, 그런데 이런 생각에 뒤따라 나는 또 숲에서 들리는 소 리를 들었어요. ‘기다려요. 서두르지 말고, 타냐, 우리에게 좋은 방도가 있어요’그런데 이 런 소리는 숲속에서만 들리는 것이 아니었어요. 마치 우리 집 닭들이 울어대는 것 같았고, 저 아래 귀에 익은 기관차의 기적 소리가 들렸어요. 이 기적 소리는 언제나 나고르나야에서 대기중에 있는 기관차에서 울렸는데, 그 기관차는 화물차 뒤에 붙어서 언덕길을 밀어 올렸 어요. 매일 밤 이 시각에 화물 객차가 통과하는데, 그 귀에 익은 기관차가 아래에서 나를 부 르고 있다고 생각됐던 거예요. 그 소리를 듣자 내 가슴이 울렁거렸어요. 나도 아주머니처럼 정신없이 짐승이나 기관차까지 나에게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나 기차가 가까이 오는데 우물쭈물할 수는 없었어요. 새벽녘이었으나 아직 날이 어두 워서 등불을 들고 미친 듯이 철길 한복판으로 뛰어가 등불을 앞뒤로 흔들어댔어요. 말할 것도 없이 나는 기차를 멈추게 했어요. 다행히 바람이 불어서 기차는 서서히 걷듯이 움직이고 있었지요. 기관차를 세우자, 나는 아는 기관사가 운전대 창문에 몸을 내밀고 뭐라 고 물었으나 바람 때문에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했어요. 나는 기관사에게 큰 소리로 신호 수 집에 강도가 들어서 살인을 하고 물건을 훔치고, 지금 그강도가 집에 있으니 도와달라고 했어요.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데 객차에서 적위군 병사들이 우르르 뛰어 내려왔어요. 이 기차는 군용 열차였으며, 그들은 내려오자마자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요. 숲속 언덕길에서 기차가 멈췄기 때문에 놀랐던 거예요. 그들은 내 얘길 듣고 강도를 마루 밑에서 끄집어냈어요. 그놈은 페쨔보다도 더 가느다란 목소리로, 여러분,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애원했어요. 그들은 그 놈을 끌어내서 철길에 손발을 묶고 그 위로 기차가 지나가게 해서 죽여버렸어요. 나는 겁에 질려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집에 돌아가지도 못했어요. 나는 그들에게 기차에 태워서 같이 데려가달라고 부탁했고, 그들은 날 태워주었어요. 그 후부터는 정말 다른 고아 들처럼 끝없이 방황하게 되었답니다. 어렸을 때의 슬픔과 고통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자 유롭고 행복한지 몰라요! 물론 혼도 나고 나쁜 짓도 했지만, 그것은 나중 일이예요, 다음에 또 얘기하지요. 그런데 아까 얘기하던 그날 밤 철도 관리인이 신호수 집에 가서 가구를 챙 기고 아주머니를 정신 병원에 보냈다고 했어요. 그냥 미쳐서 죽었다는 소문도 있고,또 병이 나아서 퇴원했다는 소문도 있었어요.” 타냐가 이야기를 마치자 고르돈과 두도로프는 오랫동안 풀밭을 아무 말 없이 걷고 있었 다. 드디어 큰 트럭이 한길에서 돌아서 공지로 돌아왔다. 세탁물 상자를 싣기 시작했다. 고 르돈이 말했다. "자넨 알겠나, 저 세탁부 타냐가 누군지 말이야?" "그야 물론이지." "예브그라프가 보살펴주겠지." 잠시후 고르돈이 말을 이었다. "역사에는 간혹 있을 수 있 는 일이네만, 지나치게 고상한 이상이 타락해서 정신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지. 그래서 그리 스가 로마에 굴복했고, 러시아의 계몽운동이 혁명으로 변하게 된 걸세. 블로크의 시에 “우 린 러시아의 암흑 시대의 아이들”이란 구절이 있지. 아이들이란 어린아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손과 젊은 세대, 그리고 지식인들을 말하는 거지. 또 암흑이란 섭리나 계시를 말하 는 걸세. 말하자면 아주 차원이 다른 이야길세. 그런데 지금은 비유적인 것이 다 없어지고 말았어. 아이들은 어린이를 말하고, 암흑은 그대로 어두운 상태를 말하고 있어요. 여기에 시 대의 차이가 있어요." 5 그 후 5년이나 10년이 지난 어느 조용한 여름날 저녁녘에 고르돈과 두도로프는 다시 한자 리에 앉게 되었다. 창문을 열어 젖뜨리고 높은 장소에서 끝없이 넓게 황혼이 깃들인 모스크 바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예브그라프가 정리한 지바고의 원고를 들추고 있었다. 여러 번 읽어서 거의 외다시피 돼 있었다. 읽으면서 그들은 감상을 교환했다. 읽던 동중에 날이 어두 워서 전등을 켰다. 저 멀리 뻗어있는 모스크바는 이 작자의 고향이었으며 그와 반생을 함께 한 도시인 것이 다. 그날 저녁 그들이 원고를 다 읽었을 때, 모스크바는 기나긴 얘기의 단순한무대가 아니라 그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전쟁이 끝난 뒤에 기다리던 희망과 해방의 빛은 전승과 함께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렇지 만 자유의 예감이 전쟁 후 온통 넘치고 유일한 역사의 내용이 되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창가에 앉은 연로한 친구들은, 이 영혼의자유가 이미 찾아와 미래가 눈 아래에 보이는 거리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고 그들 자신이 이 미래를 딛고서 그 일부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설에 등장한 인물이나 그의 자손들은 이날 저녁까지 살아 남아서 이 거룩한 소리와 지상의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행복하고 평화스러운 고요 속에 잠겨 소리없이 흐르는 행복한 음악에 젖고 있었다. 그들이 손에 든 책은 그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의 감정을 뒷 받침하며 확인하는 것이었다. 유리 지바고의 시 햄 릿 소요가 멎는다. 난 무대 위로 나선다. 문설주에 기댄 채 멀리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의 생애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을까. 밤의 어둠이 나를 향해 수천의 쌍안경 눈알처럼 응시한다. 제발, 하나님 아버지 나의 곁에서 부디 이 술잔을 가져가 주소서. 나는 당신의 꿋꿋한 뜻을 사랑하며 맡겨진 이 역할들을 기꺼이 수락합니다. 그러나 지금 다른 연극이 상연되고 있으니 이번만는 나를 그대로 있게 하소서. 하지만 연극의 순서는 이미 정해진 것 마지막 길은 피할 수 없다. 나는 외롭다, 세상엔 득실거리는 바리새 사람들뿐. 산다는 것은 들판을 지나듯 되지는 않는다. 삼 월 태양은 땀투성이로 무덥고 골짜기 마을은 광기어리게 들떴다. 건강한 소몰이 아가씨처럼 봄일은 손아귀에서 바빠진다. 눈이 녹아 빈혈을 앓고 앙상한 가지가 힘없이 푸르렀다. 그러나 외양간에는 생명이 솟아나고 갈퀴의 이빨이 건강하게 빛났다. 이러한 밤, 이러한 낮과 밤! 한낮의 처마 밑에 비가 뿌리고 가느다란 고드름이 처마에 매달리고 밤새도록 시냇물은 재잘거린다. 모든 것이 열렸다, 마구간도 외양간도. 비둘기는 눈 속에서 귀리를 쫀다. 이 모든 것의 원천이며 생명을 주는 자 그것은 신성한 공기를 풍기는 거름더미. 성주간(聖週間)에 아직 밤의 어둠이 주위를 감싸고, 세상은 너무나 일러 하늘엔 무수한 별들이 저마다 대낮처럼 빛났다. 대지는 하는수없이 찬송가를 자장가 삼아 부활제에도 마냥 잠자고 싶었다. 아직 밤의 어둠은 주위를 감싸고, 세상은 너무나 일러 네거리에서 모퉁이로 광장은 영원처럼 잠들고, 새벽과 따뜻함이 오기까진 아직도 천 년이 걸리리라. 대지는 여전히 벌거숭이 밤에 걸칠 실오리 하나 없이 종이 울리며 제멋대로 이부 합창한다. 부활절 전 목요일부터 셋째 토요일까지 강물은 기슭을 파고들며 소용돌이친다. 숲은 벌거숭이로 헐벗고 예수 수난주(受難週)에 참배자들이 기도하듯 소나무들이 모여 서 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크지 않은 거리에서 벌거숭이 나무들이 교회당 창살을 들여다본다. 그들의 눈길은 두려움에 떨고 그들의 전율은 역력하다. 정원 울타리는 허물어지고 대지는 흔들리고 신이 지금 여기에 묻히려 한다. 제단 간막이에 등불이 보인다. 검은 포장과 늘어선 촛불, 눈물젖은 얼굴들. 그리고 갑자기 십자가의 행렬이 나타나 수의를 들고 들어온다. 대문 옆 두 그루 자작나무가 길을 열어서 물러선다. 행렬의 보도의 끝을 따라 교회의 뜰을 돌고 거리에서 대문 안으로 실려오는 봄과 봄의 이야기. 그리고 성찬의 뒷맛을 풍기는 공기 봄의 열기를. 삼월은 눈을 흩날려서 문간에 모인 불구자에게 적선하듯 뿌리고, 마치 누군가 법궤를 들고 와서 이를 열고 모든 것을 남김없이 나누어주듯. 노랫소리는 새벽까지 이어지고 한껏 흐느껴 울던 소리도 지금은 가라앉는다. 성가와 복음 소리는 더욱 조용하게 가로등이 비치는 쓸쓸한 거리이 사라진다. 그러나 자정이 되면 생명과 육신은 침묵하며 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이윽고 날씨가 좋아지면 부활의 힘으로 죽음도 정복되리라. 백야 나는 까마득한 과거를 그려 본다, 페테르부르그의 집을. 너는 초원의 소지주의 딸, 쿨스크 태생인 여학생이었다. 너는 귀엽고 따르는 사람이 많았지. 그 백야에 우리 둘은 너의 창가에 앉아 네 마천루에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가로등은 가스의 나비처럼 아침의 천 한기에 부딪쳐 떨었다. 나는 너에게 조용히 얘기한다, 멀리 잠든 풍경처럼. 너와 나는 끝없는 네바강(강)너머에 파노라마처럼 쭉 뻗어 있는 저 페테르부르그를 감싸고 있는 신비로운 정경에 잠겼다. 저쪽 멀리 우거진 숲속, 봄의 그 백야에 꾀꼬리의 즐거운 노랫소리가 온 숲속에 넘쳤다. 그 바보스런 소리가 흘렀다. 보잘것없는 이 작은 새의 소리가 도취된 숲 깊숙한 곳에서 환희의 소란을 일으켰다. 밤은 맨발의 여자 순례자처럼 울타리를 껴안고 그리로 기어가고, 몰래 엿들은 우리 대화의 망령이 창가로부터 살짝 그 뒤를 따라갔다. 그 메아리가 닿는 곳까지 울타리로 둘러싸인 과수원이 있고 사과나무며 벚나무 가지에 하얀 꽃이 가득 피었다. 그리고 유령처럼 흰 나무들은 무리를 지어 길가에 몰려나왔다, 너무나도 많은 것을 보아 온 백야에 작별의 인사라도 하려는 듯이. 봄의 홍수 저녁놀의 불길이 꺼져갔다. 깊은 소나무 숲속으로 우랄의 외로운 마을을 향하여 말탄 고달픈 사나이가 봄의 홍수가 터진 산길을 가고 있었다. 말은 내장을 뒤흔들며 철벙거리는 발굽 소리에 맞춰 흐르는 물속으로 길을 가며 그 뒤를 쫓는다. 말탄 사나이가 고삐를 늦추고 천천히 가노라면, 봄의 홍수는 바로 옆까지 소리치며 굴렀다. 어떤 이는 웃고 어떤 이는 울고 돌과 돌이 부딪치고 뿌리째 뽑힌 나무들은 소용돌이 속에 굴러 떨어졌다. 지는 해의 불꽃 속 나뭇가지들이 까맣게 엉킨 사이에서, 메아리치는 종소리처럼 한 마리의 꾀꼬리가 요란스레 울었다. 한 그루의 버드나무가 과부의 스카프 모양으로 늘어진 골짜기에서 새는 옛날의 도둑 꾀꼬리처럼 일곱 개 떡갈나무 피리의 곡조로 지저귄다. 무슨 불행에 대하여 무슨 연정에 대하여 그토록 필사적인 열정을 기울이고 있는가? 그는 누구를 겨누어 소총의 커다란 산탄을 숲속에서 쏠 것인가? 어쩌면 작은 새는 숲의 정령처럼 탈옥수의 피난처에서 빠져나와, 말을 타든 도보로 가든 지방 유격대를 찾아갈 것만 같다. 땅과 하늘, 산과 들 이 희귀한 음향 속에 그 열광과 고통, 행복한 고민을 저마다 접으려고 귀기울인다. 고백 생활은 한때 조그마한 이성을 되찾았다, 그렇게도 이상하게 비뚤어졌던 것을. 난 옛 모습의 거리에서 그해 여름날, 그때 그 시각과 같은. 같은 사람들, 같은 고뇌 그리고 낙조의 불길은 아직 식지 않았다. 저 죽음의 저녁이 마네즈의 흰 성벽에 허둥지둥 못을 박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여인들은 줄무늬의 값싼 무명옷을 입고 여전히 그 밤처럼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처럼 양철 지붕 밑 다락방에서 여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있다. 지금 그중 한 사람이 고달픈 발길로 천천히 문간에 나타나 지하실로부터 층계를 올라가 들을 가로질러 가고 있다. 나는 또 다시 나의 변명을 마련한다. 그리고 다시 모든 것에 무관심해진다. 이웃의 여인은 뒤뜰을 한바퀴 돌더니 우리만 따라 남겨둔다. 울지 마라, 부은 입술을 찡그리지 마라, 입술에 주름살을 짓지 마라. 봄의 열병으로 생긴 부스럼이 터질 따름이다. 내 가슴에서 손을 떼려무나. 우리는 전기가 흐르는 전선이다. 다시 한번 조심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불현 듯 내던져질 것이다. 세월은 흘러 너는 결혼하고 참기 어려운 고난을 잊을 것이다. 여자가 된다는 것은 ―위대한 걸음이다. 마음을 사로잡는 건 영웅적인 일이다. 나 자신은 한평생 헌신적인 노예처럼 손과 등과 어깨, 그리고 목에서 여인의 손의 기적 앞에 공손할 따름이다. 그러나 밤이 아무리 많은 고통의 교리로써 나를 얽어맨다 하더라도 원심력은 더욱 거세어 절연하려는 정열이 나를 유혹한다. 도시의 여름 나직은 얘기 소리. 질풍처럼 서둘러 여인은 머리카락을 묵덜미 위로 쓸어올린다. 무거운 빗 밑으로 철모를 쓴 여인이 바라본다. 머리는 땋아 올린 머리카락과 함께 뒤로 젖혀져 있다. 거리의 무더운 밤이 궂은 날을 알리고 행인은 흩어져 집을 향하여 서두른다. 갑자기 천둥이 무너질 듯이 울리고 세찬 바람에 창문 커튼이 흔들린다. 침묵이 찾아오고 공기는 여전히 무덥다. 그리고 번개는 하늘에서 여전히 탐색하고 있다. 그리하여 새벽이 오면 뜨거운 아침이 다시 오고 간밤에 비에 패어진 거리의 웅덩이를 말린다. 천 년을 묵어 향기롭게 만발한 보리수는 간밤에 잠 못 이루어 사방을 우울하게 둘러본다. 바람 나는 죽었지만, 너는 살았다. 그래서 바람은 외치며 호소하며 시골 숲과 별장을 흔들었다. 낱낱의 소나무가 아니라 온통 나무를 한데 묶는다. 끝없이 먼 곳에서 일시에 닻을 내린 돛단배의 선체가 흔들리듯이. 이것은 무턱대고 하는 짓도 아니며 목적 없는 분노에서도 아니다. 너를 위하여 그 슬픔에서 자장가의 언어를 찾으려 한다. 홉 담쟁이가 감긴 버드나무 아래 우리의 사나문 날씨를 피갈 곳을 찾는다. 두 사람 어깨의 우비를 두르고 내 두팔로 너를 힘차게 안는다. 아니다, 내가 잘못 본 것이다. 숲속의 관목에 감겨 있는 것은 담쟁이가 아니라 홉이었다. 그러니 우비를 땅바닥에 편히 까는 것이 좋겠다. 따뜻한 늦가을 구즈베리 나뭇잎은 거칠고 털복숭이다. 집안 웃음 소리에 유리창이 흔들린다. 안에서는 칼로 썰고 소금에 절이고 후추며 정향유(丁香油)로 양념하기에 법석이다. 숲은 어릿광대모양 신나게 술렁이고 그 소음이 멀리 비탈진 초원에 들리고 초원엔 햇빛이 그을은 호도나무가 모닥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여기서 길은 길다란 골짜기로 흐른다. 여기 물에 잠긴 삭정이 사이에 서 있으면 모조리 이 골짜기 쓸어 모으는 넝마주이 노파의 가을이 서글퍼진다. 우주 만물은 게으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하다. 숲은 언젠가는 물속에 잠기고 모든 것엔 저마다 종말이 있다. 눈앞의 모든 것이 태양에 타서 가을의 희디흰 매연이 변덕스런 산들바람을 타고 창문으로 날아들 때 공연히 눈을 깜박거린다는 것이. 울타리에 뚫어진 틈새로 정원 나 있는 길이 자작나무 숲속으로 사라진다. 집안에는 주부들의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 똑같은 웃음과 소음이 멀리서도 들려 온다. 결혼 손님들은 저마다 악기를 들고 곧장 뜰을 지나 아침까지 마시고 노래하러 신부집으로 모여든다. 펠트 천으로 가린 주인네 안방에선 한 시부터 일곱 시까지 떠드는 소리가 끊기더니 단잠에서 깨기 싫은 날 샐 무렵이 되자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면서 다시 아코디언이 울린다. 하모니카도 불고 바랄라이카도 치고 손뼉치며 구슬 흔들며 향연이 벌어진다. 술취한 손님들의 고함 소리가 여러 번 되풀이되고 신랑 신부의 침실을 향해 곧장 달려들곤 한다. 눈처럼 새하얀 여인 하나 휘파람과 환호 속에 또 한번 공작 춤을 춘다, 둥실두둥실 엉덩이를 흔들며. 얼굴을 번쩍 쳐들고 오른손을 내저으며 포장 길 위에서 춤추는 공작이다, 암공작이다. 갑자기 떠들썩한 소음도 흥겨운 윤무(윤무)도 멎고, 지옥이 하품을 하며 입을 벌리고 한꺼번에 삼킨 듯 잠잠해진다. 시끄러운 뜰안이 잠깨며 부산하게 일하는 소리가 일꾼들의 얘기 소리, 웃음 소리에 뒤섞여 들려온다. 하늘 높이 회색 반점이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듯 집 떠난 비둘기떼가 일제히 날아 올라간다. 누군가 잠에서 덜 깨어나 여러 해를 바라 온 염원을 비둘기에 실어 결혼 축하로 날려 보내리기라도 하듯이, 인생이란 한 순간일 뿐, 나 자신을 녹여서 남에게 선물을 주듯 남들 속에 용해될 수밖에 없다. 결혼이란 창문을 빠져 날아가는 소음에 불과한 것, 한 가락의 노래, 일장의 꿈. 청회색 비둘기에 불과한 것. 가을 난 식구들이 제각기 떠나게 했다. 모든 가까운 사람은 이미 흩어졌다. 그리고 항상 고독을 느끼며 내 가슴에, 자연에, 모든 것이 가득차 있다. 여기 나는 그대와 함께 오두막집에 있다. 숲속은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는 사막. 옛 노래의 오솔길들은 거의 잡초에 뒤덮여 분간할 수 없다. 우린 지금 단둘이 슬픔에 잠겨 통나무 바람벽을 멀거니 바라본다. 우린 벽을 뚫고 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우린 여기서 태연히 죽어가리. 한 시에 식탁에 앉고 세 시에 일어나서 나는 책을 읽고 그대는 수를 놓는다. 그리하여 날이 밝을 때 우리는 언제 키스를 그만두었는지 모른다. 나뭇잎들아, 나부껴라, 흩날려라, 더욱 화사하게, 더욱 방종하게. 어제의 쓴 술잔을 오늘의 비애로 채워라. 애착도 미련도 환희도― 이 9월의 바람결에 날려 보내자! 그대의 모든 것을 가을의 속삭임에 묻어 버리자. 그저 고요히, 넋없이! 숲속의 나무가 잎을 털어버리듯 그대도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비단 술이 달린 잠옷 바람으로 내 팔에 안겨라. 산다는 것이 질병보다더 역겨울 때 너는 파멸의 길을 축복하리라. 아름다움의 근원은 대담함이니 그것이 우릴 서로 끌게 하는 것이다. 옛날 이야기 옛날 옛날 먼 옛날에 동화의 나라에서 한 기사가 말을 타고 험한 황야를 가고 있었네. 그는 싸움터로 서둘러 말을 몰았으나 저 멀리 그의 앞길에 어두운 숲이 떠올랐다. 불길한 예감이 담대한 가슴을 스쳤다. 물을 조심하고 안장 띠를 죄어라. 그러나 기사는 아랑곳없이 박차를 가하며 숲의 오르막길을 쏜살같이 달려 올랐다. 그리고 묘지를 돌고 물 마른 강바닥을 건넜다. 작은 초원을 지나 고개 하나를 넘었다. 골짜기로 접어들어 비탈기를 따라가 짐승의 발자국과 냇물이 있었다. 경고를 무시하고 의혹을 외면하여 그는 계곡으로 내려가 말에게 물을 먹였다. 냇가엔 동굴이 있고 동굴 앞에는 여울이 흐르고 유황불 비치듯 굴 입구가 환했다. 진홍빛 연기 속에 시야를 가리고 높이 솟은 침엽수 사이로 멀리 울부짖는 소리, 기사는 몸을 떨고 구원을 바라는 울부짖음에 따라 계곡을 건너 그쪽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기사는 보았다. 무서운 용(용)의 머리를 그 몸통과 그 꼬리를. 기사는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벌린 입에서 용은 시뻘건 불길을 토해내고 굼실거리는 몸통으로 아가씨 허리를 세 번 감았다. 뱀의 동체는 가련한 먹이의 하얀 어깨 위에서 채찍 끝처럼 흔들렸다. 이 고장 풍습대로 예쁘고 젊은 아가씨가 숲속의 괴물에게 바쳐진 것이다. 대사(대사)의 노여움을 피하여 자기들의 오막살이를 지키려고 이 고장 사람들은 해마다 희생물을 바친다. 그녀의 손을 휘감아 목에 달라붙어 대사는 제멋대로 이 산 제물을 괴롭혔다. 기사는 하늘을 우러러 도움을 빌고 힘껏 창을 거머쥐고 대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굳게감은 눈꺼풀. 높은 산. 구름. 물. 여울물. 시냇물. 날과 달. 많은 세월. 투구는 쭈그러지고, 싸움에 지친 기사는 말에서 떨어져 뻗었다. 충실했던 말발굽으로 대사의 목을 짓뭉갠다. 대사의 시체와 말은 모래밭에 나란히 누웠다. 기사는 의식을 잃고 기절한 아가씨는 깨어나질 못한다. 대낮의 둥근 하늘은 푸르게 빛났다. 누굴까? 공주일까? 눙부의 딸일까? 귀족의 따님일까? 환희와 행복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기진한 영혼은 잠에 잠겨 잊고 말았다. 기사는 차츰 의식이 돌아왔다. 그러나 손발은 꼼짝할 수 없다. 많은 피를 흘려 기력이 쇠진했다. 하지만 그들의 심장은 뛰었다. 기사도 아가씨도 정신을 차려 눈을 뜨려다가 다시 잠속으로 빠진다. 굳게 내리깐 눈꺼풀. 높은 산. 구름. 물. 여울물. 시냇물. 날과 달. 그리고 많은 세월이…… 8월 태양은 약속대로 어김없이 아침 일찍 찾아들었다. 주황빛 다발을 비스듬히 끌면서 커튼을 통해 소파에 앉는다. 그 태양은 뜨거운 벽돌빛으로 이웃 숲이며 마을의 집들을, 나의 침대며 축축한 베개를, 책장 뒤 구석진 벽을 비친다. 내 베개가 축축한 까닭을 나는 생각해본다. 너희들이 길 떠나는 길을 배웅하려고 숲에서 나오는 꿈을 꾼 것이다. 너희들은 짝을 지어, 떼를 지어 서로 앞을 다투어 걸어나왔다. 문득 누군가 생각했다. 구력(구력)으로 오늘은 8월 6일 '그리스도 변용(변용)의 날'이다. 언제나 이날은 불길 없는 빛이 타보르의 산에서 솟아오르고, 가을이 진홍빛 깃발처럼 사람들의 눈을 끄는 것이다. 그러면 거지처럼 떨고 있는 벌거숭이의 관목 사이를 빠져 너희들은 묘지의 타오르듯 붉은 잡목 숲으로 들어간다. 하늘은 조용한 나무 꼭대기에 점잖게 걸려 있고, 수탉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길게 들린다. 죽음은 마치 정부의 감독관처럼 이 숲속 공지에 버티고 서서 생명 잃은 내 얼굴을 곁눈질하며 파야 할 묘혈의 크기를 재고 있다. 너희들은 모두 너희들이 청각으로 누군가의 나직한 음성을 가까이 듣는다. 그것은 전에 내 것이었던 예언의 목소리. 지금 그것이 순수하게 들려온다. "잘 있거라, 변용의 날의 창공이며 재림의 날의 금빛이여, 부드러운 마지막 애무의 손으로 내 숙명의 시간의 고통을 덜어다오. 잘 있거라. 흐름을 모르는 세월이여, 타락의 심연에서 도전한 여인이여! 이제는 너희들과 이별할 때다. 나는―너희들의 싸움터였다. 잘 있거라, 활짝 펴진 날개여, 하늘을 나는 자유로운 의지여, 말로 표현된 세계의 표상이여, 기적의 창조물인 우주 만상이여!” 겨울밤 눈이 날린다, 눈이 날린다, 온 누리에 끝없이 눈이 내린다. 촛불이 타오른다. 책상 위에서 촛불이 타오른다. 여름날 날벌레들이 불꽃으로 날아들 듯 밖에서 눈송이들이 유리창에 몸을 부딪는다. 눈보라가 유리창에 부딪쳐 활과 화살 무늬를 새긴다. 촛불이 타오른다, 책상 위에서 촛불이 타오른다. 비뚤어진 그림자가 환한 천장에 비친다. 서로 얽힌 팔, 다리, 운명의 그림자. 조그만 여자 신 한 켤레가 방바닥에 떨어진다. 침실의 촛불이 자리옷에 눈물처럼 촛농을 흘린다. 모든 것이 눈안개 속에 자취를 감춘다. 백발처럼 하얗게. 촛불이 타오른다, 책상 위에서 촛불이 타오른다. 구석에서 바람이 촛불을 흔들고 유혹의 뜨거운 입김이 천사처럼 날개를 펼치고 십자가를 그린다. 2월은 내내 눈이 날린다. 그리고 쉴새없이 촛불이 타오른다, 책상 위에서 촛불이 타오른다. 이별 사나이가 문가에서 들여다본다. 자기 집 같지 않다. 여자는 도망치듯 떠나가 버렸고, 사방에 혼란의 흔적이 방마다 온통 혼란이다. 머리가 띵하고 눈물이 앞을 가려 그의 눈엔 잘 보이지 않는다. 아침부터 귓속이 윙윙 울렸다. 깨어 있는가, 악몽을 꾸고 있는가? 그리고 바다에 대한 생각만이 자꾸만 머리 속에 기어드는 건 어쩐 일인가? 창문에 성에가 끼어서 바깥 세상을 볼 수 없게 되자 절망의 슬픔이 배가하여 황량한 바다와 비슷해진다. 여자의 적절한 행위가 그에게 귀중한 것으로 되었다. 밀물이 해안선을 밀어 올려 육지를 바다 가까이 끌어당기듯. 폭풍 뒤의 거친 물결 속으로 갈대가 가라앉아 버리듯, 여자의 행위와 그 모습은 그의 영혼 속 깊이 가라앉았다. 고난에 찬 세월 예측할 수도 없을 때 그녀는 운명의 파고(파고)로 바다 밑에서 그에게 밀어 올렸다. 헤아릴 수 없는 위험 속을 무서운 암초를 피해 가며 파도는 여자를 밀고 밀어 마침내 바닷가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지금 여자는 떠나버렸다. 어쩔 도리가 없었으리. 이별은 그들을 삼키고 슬픔은 뼛속에 스며든다. 사나이는 방안을 둘러본다. 여자는 떠나갈 때 장농 서랍을 모두열고 밑바닥까지 온통 뒤집어 놓았다. 그는 어두워질 때까지 서성이며 흩어진 헝겊 조각이며 구겨진 옷본 종이 따위를 서랍 속에 차분히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바느질감에 꽂혀 있던 바늘에 손을 찔렸다. 여자의 모습이 떠올라 사나이는 소리를 죽여 흐느꼈다. 해후 눈이 길을 묻어버리고 지붕 위에 쌓인다. 한 걸음 밖으로 나가면 너는 문밖에 와 서 있겠지. 혼자서 가을 외투를 입고 모자도 쓰지 않고 덧신도 신지 않고 너는 흥분을 억누르며 눈에 젖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무와 울타리는 안개 속으로 멀리 사라지고, 홀로 눈을 맞으며 넌 모퉁이에 서 있다. 물이 스카프를 따라 옷깃과 팔소매 속으로 흘러들고 구슬 같은 물방울이 머리카락에서 반짝인다. 밝은 삼실 같은 머리채 너의 얼굴, 너의 스카프, 너의 가냘픈 모습, 너의 초라한 외투를 비추어주고 있다. 눈이 너의 속눈썹 위에서 녹는다. 너의 두 눈에는 슬픔이 있다. 그리고 너의 윤곽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 같다. 너의 모습은 내 심장에 조각칼과 강한 산(산)으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아로새겨져 있는 것 같다. 너의 유순한 모습은 지워버릴 수 없고, 세상이 아무리 잔인해도 난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눈 속에 이 밤이 아무리 겹쳐도 너와 나 사이를 가르는 경계선은 그을 수가 없구나. 하지만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이 모든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들이 세상에 없을 때 소문만이 살아 남는다면? 성탄일의 별 겨울이었다. 광야에선 바람이 불고 언덕 기슭 동굴에서 아기는 추웠다. 소의 입김이 몸을 덥혀주었다. 집짐승들이 동굴 안에서 비좁게 몸을 비벼댔다. 따뜻한 김이 구유 위를 감돌았다. 목동들은 낭떠러지에 서서 양피 외투에 붙은 짚 부스러기며 수수 알갱이를 떨고 졸린 눈으로 먼 야경을 바라본다. 저 멀리 눈 덮인 들이 있고 묘지와 묘석이 있고 울타리가 있고 묘지 위에는 별들이 찬란한 하늘이 있다. 그리고 바로 앞에 본 적이없는 이상한 별이, 오두막집 창문의 촛불보다 더 수줍게 빛나는 별이,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을 비추고 있다. 지금 그별은 타오르는 건초 더미처럼 하늘과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불타는 초가집처럼 불붙는 곳간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엄청하게 큰 집더미처럼 하늘을 향해 불길을 휘말아올리는 이 새로운 별의 출현에 우주 만물은 전율했다. 짙어가는 붉은빛은 무슨 징후인 양 별의 광채를 더해준다. 이 놀라운 빛의 부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세 사람의 점성가(점성가)가 황급히 달려간다. 그 뒤를 공물(공물)를 실은 낙타들이 따르고, 화려한 마구(마구)로 꾸며진 나귀들이 끝없이 줄지어 언덕을 내려간다. 그리하여 후세에 온 모든 것이 기이한 환상이 되어 멀리 떠올랐다. 모든 사상, 모든 꿈, 모든 세계. 모든 미래의 미술관과 박물관, 융단의 그림 무늬, 유술장이의 기적 지상의 모든 크리스마스 트리, 어린이들의 모든 꿈. 흔들리는 촛불의 따뜻한 빛, 반짝이는 구슬의 장관… 바람은 더욱 짓궂게 광야에서 불어오고 …모든 붉은 능금, 모든 황금빛 유리알. 연못의 일부는 오리나무에 가려 있으나 나뭇가지에 둘러싸인 띠까마귀 집 저쪽으로 일부는 낭떠러지에서 똑똑히 보인다. 목동들은 물방앗간 둑을 따라가는 낙타와 나귀를 보았다. "우리도 함께 가서 기적앞에 경배하자." 이렇게 말하며 목동들은 양피 외투를 입는다. 눈을 밟으며 걸어가니 몸이 훈훈했다. 돌비늘처럼 반짝이는 맨발 자국을 따라 밝은 공지로 나가 객주집 앞을 지났다. 양 지키는 개들이 별빛에 발자국을 찾아 악을 쓰고 짖어댔다. 엄동의 밤은 흡사 동화의 나라, 눈 덮인 산등성이에서 누군가 내려오며 아무도 모르게 그들의 행렬에 끼여든다. 개들은 겁을 먹고 뒤돌아보며 젊은 목동 곁으로 다가온다. 같은 마을 쪽에서, 같은 길을 따라 천사도 사람들 속에 섞여 걸었다. 육체가 없어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한 걸음마다 발자국이 남았다. 많은 사람들이 바위 앞에 모였다. 날이 밝아 전나무들이 뚜렷이 떠오른다.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마리아가 물었다. "저희는 목동이온데 하나님이 보냈습니다. 두분을 위해 찬송가를 부르겠습니다." "모두 한꺼번에 들어올 수 없으니,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새벽녘의 잿빛 어둠속에서 목동들이 추위를 잊으려 발을 굴렀다. 걸어온 자와 말 타고 온 자는 서로 나무랐다. 통나무 물통 곁에서 낙타와 나귀는 서로 으르렁거렸다. 날이 밝았다. 새벽놀이 둥근 하늘에서 다 타서 재가 된 별들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마리아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박사들만을 바위 틈새로 불러들였다. 아기는 참나무 구유 속에서 잠들었다. 깊은 나무 구멍 속의 달빛처럼. 나귀의 입술과 소의 코가 양피 외투 대신 따뜻이 덥혀주었다. 외양간의 어둠 속에 그들이 머물러 조심스레 귀엣말을 주고 받는다. 갑자기 누군가 어둠 속에서 옆사람의 손을 건드려 구유에서 왼쪽으로 조금 물러서게 했다. 뒤돌아보니, 안으로 들어오려는 손님처럼 성탄일의 별이 마리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명 너는 내 운명의 전부였다. 그리고 전쟁이오고 황폐가 왔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너한테서는 소문도 소식도 없었다. 또 수많은 세월이 흘러 너의 목소리는 다시 내 마음을 흔들었다. 밤새도록 나는 너의 유언장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의식을 되찾았다. 나는 민중속에서 그들과 함께 아침의 소생을 나누고 싶다. 모든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릎을 끓게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층계를 단숨에 달려 내려간다. 마치 첫 외출이라도 하듯이 눈 덮인 한길로, 인적 없는 보도. 사람들이 깨어나고, 등불이, 아늑함이 있다. 차를 마시고 전차로 뛰어간다. 잠깐 사이에 거리의 모습은 몰라보게 달라진다. 눈보라가 대문에 눈송이로 그물을 친다. 모두들 시간에 늦을세라 조반도 먹는 둥 마는 둥 달려나간다. 나는 그들과 살을 맞대기라도 한 듯 모든 사람을 피부로 느낀다. 눈이 녹듯 나 자신도 녹으며 아침처럼 나도 눈살을 찌푸린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다. 아이들도, 나무들도, 집 지키는 사람들도 모두가 나의 승리자. 그리고 나의 승리는 오직 거기 있다. 기적 그는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걸음을 옮겼다. 슬픈 예감에 고뇌하면서. 언덕 비탈길의 가시나무 잡목은 햇볕에 타고 가까운 움집에선 한줄기 연기도 나지 않았다. 공기는 뜨겁고, 갈대는 움직이지도 않고, 죽음의 바다는 조용했다. 슬픈 고뇌는 바다의 고통에다 비길까. 조그만 구름 따라 그는 걸어왔다. 먼지길 따라 객주집으로. 거리에는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는 너무나 깊은 생각에 잠겼고, 들에는 향쑥 내음이 자욱해 만물은 고요하고, 그 한가운데 그는 홀로 외롭게 섰다. 땅은 의식을 잃어 쓰러지고 모든 것이 혼돈에 빠졌다. 뜨거운 날씨와 사막, 도마뱀과 샘물과 냇물.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가까이에 있었다. 열매 하나없이 가지와 잎만 있었다. 그는 나무에게 말했다. "너는 무슨 소용이 되느냐? 너 멍청이는 무슨 기쁨을 나에게 주겠는냐? 나는 굶주리고 목말랐는데 넌 열매 하나 없고, 너를 만남은 화강석을 대하는 기쁨보다 나을 것이 없다. 오오, 실망시키는 너, 너, 정녕 쓸모가 없구나? 너는 종말이 올때까지 그대로 있을지어다” 이렇게 저주받은 나무는 번개에 맞은 피뢰침마냥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만일 그때 잠시나마 자유의 선택이 허용되었다면 잎새도 가지도 줄기도 뿌리도 자연의 법칙에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기적은 기적―기적은 신(神). 우리가 혼란에 빠져 마음 앓을 때 기적은 뜻하지 않은 그 순간에 우리를 놀라게 한다. 대지 당돌한 봄은 곧장 모스크바의 집들에 파고들었다. 옷장을 열면 나방이 나래를 펴고 여름 모자 위로 기어다닌다. 털옷은 트렁크 속으로 감춰진다. 높은 목조 이층집 창가에 화분을 내다놓는다. 꽃무우와 계란풀 화분을. 방안은 한가롭고 다락방엔 먼지 냄새가 풍긴다. 그러고는 희뿌연 창마다 반갑다는 인사를 한다, 이것 참 오랜만이라면서…… 백의 (白衣)와 저녁놀이 시냇가에서 이별을 서러워한다. 이윽고 복도에 다다르면 바깥 세상의 뭇소리가 들려오고, 4월의 우연한 대화도 들려온다. 그는 수천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인간의 고뇌에 대해 놀이 담장에 얼어붙어 긴 얘기를 늘어놓는다. 불길과 불안이 한데 엉겨 바깥이나 안락한 집 안에 가득하다. 어디를 돌아봐도 공기는 불안에 떤다. 같은 버드나무 가지는 한데 얽히고 같은 하얀 봉우리들이 융기하는 것을 창가에도 네거리에도 한길에도 작업장에도 볼 수 있다. 왜 지평선은 안개 속에서 흐느끼며 퇴비는 저렇게 거센 냄새를 풍길까? 하지만 나의 역할은 먼 곳을 한껏 바라보며 지겹지 않기를, 거리 너머 저쪽 대지가 슬픔을 느끼게 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기에 이 이른 봄 그리운 친구들이 나에게 모여든다. 그리하여 우리의 저녁은 고별이고, 즐거운 모임은 끝났다. 슬픔은 은밀한 흐름이 삶의 한기를 녹여주겠지. 흉일 지난 주에 그가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 우리와 같은 찬미를 받으며 사람들은 감람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나날이 불안만 짙어지고 마음속에 사랑이 일지 않고 양미간에 모멸이 스쳤다. 이제 모든 것이 종말을. 하늘은 납덩이 같은 무게로 집을 짓누르고 바리새인은 주를 모함하는 핑계를 찾아 여우처럼 그에게 알랑거렸다. 그리하여 사원(寺院)의 음침한 힘으로 심판을 위해 인간의 더러운 손에 넘겼다. 지난날에 찬미하던 것처럼 사람들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군주들은 문밖에 모여 문틈으로 들여다보며, 결과를 기다리며 앞뒤에서 서성거렸다. 속삭이는 소리는 이웃에 퍼지고 소문은 사방에 흩어졌다. 이젠 꿈같이 회상되리라 이집트로 피했던 그날, 어린 시절이. 사막과 가파른 언덕길에서 그는 회상하였다, 준엄한 산악을. 사탄이 그를 유혹하던 이 세상 최고의 권세를 가지고 그리고 가나에서의 혼인 잔치, 기적에 놀라운 찬사를 보내던 내빈들. 안개에 잠긴 바다를 뭍인 양 거침없이 뱃전으로 걸어가던 그날. 가난한 오두막집에 모여 촛불을 밝히며 무덤을 찾아 불쑥 깨어난 주검 앞에서 겁에 질려 꺼져버린 촛불. 막달라 마리아 Ⅰ 밤이 되자 악마는 내 곁에 불쑥 왔다. 그난의 과거에 대한 보상 같은 것. 오욕된 기억이 되살아나 내 심장을 핥는다. 변덕스런 사내들의 노예가 되어 바보처럼 거리를 헤매던 추억들. 남아 있는 찰나가 흐르고 나면 무덤 같은 적막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들이 지나기 전에 삶의 막바지에 이른 나는 석고의 그릇을 너의 앞에 깨뜨린다. 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나의 스승, 나의 구세주여, 내 그물에 걸린 새 손님처럼 밤의 탁자에서 영원히 날 기다지 않는다면. 말해주소서, 죄악이 무엇인지, 죽음과 지옥과 불과 유황의 뜻을. 모든 눈들이 보는 앞에 나의 한없는 슬픔이 싸여 당신과 한몸의 가지가 되리. 주 예수여, 당신의 두 발을 나의 무릎 위에 부둥켜 안을 때, 십자가의 네 기둥을 안는 법을 익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의식을 잃고 당신의 육체를 껴안은 것은 주의 무덤을 마련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Ⅱ 성일(聖日)를 앞두고 사람들이 시끄럽다. 혼잡을 피하고 작은 그릇에 성유(聖油)로 씻고 난 그대의 발을 씻는다. 더듬어 찾아도 찾을 길 없는 샌들. 눈물이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에는 잘못을 깨달아 뉘우치고 베일마냥 드리운 머리카락. 주의 두 발을 내 치맛자락에 묻고 그 위에 떨구는 눈물, 주 예수여, 목에 감은 구슬 줄로 발을 동이고 외투처럼 머리바락으로 덮는다. 당신이 정지시킨 미래를 나는 샅샅이 살펴봅니다. 이 순간 나는 시빌의 예지로써 다가올 앞날을 예언할 수 있습니다. 내일이면 신전(神殿)의 베일은 찢어지고 우린 흩어져 한쪽에 밀려나고 발밑의 땅은 흔들리고 아마 나도 예외는 아니리라. 호위의 대열은 새로 짜이고 기마병들은 어디론지 사라지리라. 폭풍속의 회오처럼 십자가는 하늘로 치솟으리. 나는 십자가의 발부리에 쓰러져 입술을 깨물리라. 팔은 수많은 인간을 포옹키 위해 십자가 양끝을 뻗치리라. 그렇게 넓은 세상 누굴 위하여 그런 고통과 그런 권세를 지니는 것입니까? 이 온 우주에는 그처럼 많은 영혼과 생명이 있는 것일까? 그처럼 많은 마을과 시내와 수풀이 있는 것일까? 그리하여 이 사흘도 이내 지나고 이 사흘은 날 허무속에 밀어넣지만 , 무서운 그 순간이 지나면 나는 모습을 가다듬어 부활하리라. 겟세마네 동산 길모퉁이는 뜻하지 않은 요원한 별빛이 비치고 있었다. 길은 올리브 산을 감돌고 산기슭에는 께드론 강이 흘렀다. 숲속의 초원은 연연히 뻗어 은하 속으로 사라지고, 은회색 올리브나무는 허공을 활보하며 뻗었다. 길 너머 저쪽에 채소밭이 있다. 담장밖에 제자들을 세워 두고 주는 말씀하셨다. "내 영혼은 슬픔에 가득차 죽음을 향하고 있노니, 그대들에게 머물러 날 살필지어다.” 마치 빌어오기라도 했듯이 전지 전능과 기적을 행하는 일을 주저없이 뿌리치고 이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려 했다. 허무와 절멸의 왕국. 온 우주에는 살아 있는 생명도 없는 듯, 다만 그 동산만이 삶을 위한 고장. 우주 공간은 인적도 없다. 시작도 끝도 없는 공허 이 암흑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피에 젖어 아버지께 기도한다, 이 죽음의 잔을 물리치기 위하여. 번뇌를 기도로써 달랜 그는 동산 문을 떠났고, 죽음에 겨운 제자들은 잡초가 우거진 길섶에 쓰러졌다. 그는 제자들을 일깨웠다. "나는 지상에 있는 생명을 보증하였거늘 어찌 다들 이 모양인고, 시간은 닥쳐왔다. 그는 자신을 죄인의 손에 넘기리라." 횃불과 칼을 든 한무리의 노예와 도둑들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자 그의 말씀이 멎었다. 그들 앞에 배신자의 입술, 유다가 섰다. 베드로는 칼을 뽑아 악당을 무찌르고, 그중 한 놈의 귀를 잘랐다. 그때 그는 "검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 칼을 칼집에 거두라. 하느님 아버지는 날 구하기 위하여 천사의 대군단을 보낼줄 모르는가? 그러니 내 머리칼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고 적은 자취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생명의 책은 어느 성스러운 것보다 더 값진 대목에 이르렀다. 거기 씌어진 내용은 이루어지리라, 꼭 이루어지리라, 아멘! 세월의 흐름은 우화(寓話)와 같아 그 흐름에 따라 생기는 것. 무섭고 엄한 그 이름으로 고뇌를 거쳐 나는 자유로이 무덤에 이르리라. 그리고 사흘만에 나는 다시 일어나 강물 위에 흘러내리는 뗏목처럼 수송선의 호송선같이 세월은 어둠을 넘어 흐르나니, 나는 그를 심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