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지바고 1 지은이: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출판사:범우사 1.다섯 시 급행 열차 1 <편히 쉬시옵소서>를 노래 부르며 장례 행렬은 가고 있었다. 행렬이 멈추고 나서는 노래가 다 시 시작되어 사람들의 발소리와 말발굽 소리, 바람 부는 소리가 계속되는 것 같았다. 길 가던 행인들이 길을 비키며 화환을 세어보기도 하고 성호를 긋기도 했다. 호기심에 못 이겨 행렬에 끼어들며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댁 장례인가요?" "지바고 댁이오." 누군가 대답했다. "어쩐지! 그래서 다르더라." "주인 양반이 아니고 부인이랍니다." "아 매한가지가 아니오. 명복을 빕니다. 참 훌륭한 장례식이군요." 마지막 가는 순간의 하나하나가 되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온 누리가 주님의 것이니, 거기서 삶을 누리는 모든 것 또한 주님의 것이니라." 신부는 마리아 니콜라예브나의 시신 위에 십자로 흙 한 줌을 뿌렸다. 모두들 <참된 영혼>을 노 래했다. 이윽고 몹시 서두르기 시작했다. 관에 뚜껑을 덮고, 못질을 하고, 구덩이에 내려놓았다. 네 자루의 삽으로 재빨리 구덩이를 메우기 시작하자 흙이 비오듯이 관 위로 떨어져 내려갔다. 관 위에 조그만 언덕이 생겼다. 열 살 가량의 소년이 그 위로 올라섰다. 어머니 무덤 위에서 뭔가 말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성대한 장례식이 끝나면 으레 허전하고 어정쩡한 상태가 되기 쉬운 것이다. 소년은 고개를 쳐들고 황량한 가을 경치와 수도원의 둥근 지붕을 얼빠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 다. 개발코의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목을 길게 뽑았다. 그것은 마치 승냥이 새끼가 금세 짖 기라도 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음을 터뜨렸 다. 불어오는 비구름이 쏟아내는 차가운 빗방울이 그의 손과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팔 소매가 꼭 끼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무덤으로 다가갔다. 고인의 남동생이며, 울고 있는 소년의 외삼촌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베제나핀이었다. 그는 스스로 성직을 물러난 신부였다. 그는 소년에게 다가가서, 소년을 묘지에서 데리고 나왔다. 2 니콜라이 아저씨의 안면으로 수도원의 방 하나를 빌어서 두 사람이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 날은 성모제 전날 밤이었다. 다음날 그들은 볼가 강변에 있는 지방 도시로 가기 위해 멀리 남쪽 으로 여행하기로 했다. 니콜라이 아저씨는 그 도시의 진보적 지방 신문을 발행하고 있는 출판사 에서 일하고 있었다. 기차표는 미리 사두었고, 짐도 꾸려서 방에 이미 가져다 두었다. 정거장이 머지 않아서, 선로를 바꾸는 기관차의 쓸쓸한 기적 소리가 멀리 바람결에 들려왔다. 저녁 녘에는 날씨가 무척 쌀쌀해졌다. 방에는 두 개의 창문이 밖이 지면과 같은 높이에 있었다. 누런 아카시아 숲으로 울타리 쳐진 채소밭 한 귀퉁이와 멀리 뻗어 있는 한길 군데군데에 얼어붙 은 웅덩이가 보였으며, 낮에 마리아 니콜라예브나를 배잔한 바로 그 묘지의 일부가 바라보였다. 채소밭에는 추위에 파랗게 쪼그라든 양배추 몇 이랑이 남아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바람이 불 어올 때마다 벌거숭이가 된 아카시아 숲이 춤추며 길가를 뒤덮곤 하였다. 한밤중에 소년 유라는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캄캄한 방안에 뭔가 희끗희끗 이상 한 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유라는 셔츠 바람으로 창가에 달려가서 차가운 유리창에 바싹 얼굴을 들이댔다. 눈보라가 휘몰아쳐 밖엔 한길도, 묘지도, 채소밭도 없는 듯했으며 하늘이 온통 눈보라로 뿌옇게 되어 있었다. 마치 폭풍이 유라를 보자,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자기의 힘을 과시하며 소년에게 무 서운 인상을 주려는 듯했다. 폭풍은 으르렁거리기도 하고 울부짖기도 하면서, 소년의 관심을 끌려 고 기를 쓰고 있었다. 하얀 휘장이 연거푸 공중에서 뒤집히듯 내려와 지면에서 퍼지며 겹겹이 뒤 덮고 눈보라만이 대지를 지배하며, 거기에 대항할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가에서 물러선 유라가 생각한 것은 우선은 옷을 입고 바깥으로 달려나가서 무언가 빨리 손 을 써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수도원의 양배추는 눈에 묻혀 뽑아낼수 없게 되지나 않았을까, 들판 에 묻힌 어머니가 꼼짝 못하고 그의 손이 미치지 못할 땅속 깊이 더 멀리에 사라져버리는 것이나 아닐까,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금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아저씨는 잠이 깨자 예수님의 이야기로 소년을 위로하려 했으나 이내 하품을 하고는 무슨 생각에 잠기며 창가로 가버렸다. 날이 밝아 왔다. 그들은 옷을 입기 시 작했다. 3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유라는 아버지가 오래 전부터 집을 떠나 시베리아나 외국을 돌아다니 며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고, 엄청난 재산을 모두 탕진해버렸다는 것은 전혀 모르 고 있었다. 유라에게는 아버지가 언제나 사업 관계로 페테르부르그에 가 계시거나 아니면 큰 시 장이 있는 곳에, 주로 이르비트 등지에 가 계신다고 얘기했었다. 그런데 그후, 원래 병약한 어머니는 폐를 앓게 되자 남부 프랑스나 북부 이탈리아 등지로 옮겨 다니며 요양하게 되었다. 유라는 어머니의 여행에 두어 번 따라갔을 뿐, 거의 언제나 혼자 떨어져 서 낯선 사람들 손에서 자랐다. 돌보는 사람도 자주 바뀌었으며, 이러한 생활에 그는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끊임없는 수수께끼에 쌓인 어수선한 가정 환경 속에서,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에도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 좀더 어렸을 적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자기의 성과 같은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불려지고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지바고 공장, 지바고 은행, 몇 군데에 지바고 저택 등이 있었고, 지바고 타 이 핀과 지바고 피로그라는 롬바바 비슷한 둥근 케이크까지 있었다. 그리고 한때는 모스크바에서 마부에게 "지바고 댁으로!"라고 말하기만 하면, 마치 "벽지로!" 라고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멀고 먼 왕국으로 썰매를 몰고 가는 것이었다. 저택 주변의 뜰은 마치 고요한 정원의 숙연함을 느끼게 했다. 까마귀들이 휘늘어진 전나무 가지의 고드름을 떨어뜨리며 날아와 우는 소리는 마치 나뭇가 지가 꺾이는 소리처럼 숲속을 메아리쳤다. 오솔길 저편에 새로 세운 집에서 순종 사냥개 무리가 우르르 몰려나와 숲 공지로 통하는 길을 지나 달려왔다. 그 맞은편 족에는 짙어 가는 황혼 속에 등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이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지바고 댁은 몰락해버린 것이다. 4 1903년 어느 여름날, 유라는 니콜라이 아저씨와 함께 타란타스를 타고 두플랑카를 향하여 들판 을 지나고 있었다. 그들은 이반 이바노비치 보스코보이니코프를 방문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견 직 공장주로 콜로그리보프 예술의 적극적 후원자이며 학교 교사로서 또 일반 교양의 행설자로 알 려져 있었다. 카잔의 성모제 날이어서 하곡 추수가 한창때였으나 마침 점심 시간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축 제일 때문인지, 밭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반쪽만 깎은 죄수의 뒤통수처럼 반쯤 만 베어낸 들판엔 타는 듯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들판 위에는 새들이 원을 그리며 날았다. 잘 영 근 밀 포기들이 꼼짝도 않고 늘어서 있었다.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저편에 우뚝 솟은 밀 짚단 더 미를 한참 눈 여겨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이 마치 토지 측량사처럼 지평선 위에서 뭔가 기록하면 서 걸어다니는 것같이 보였다. "여보게, 이건 지주의 밭인가, 농부의 밭인가?" 하고 니콜라이 아저씨가 파벨에게 물었다. 출판 사의 수위로 있는 파벨은 마부 석에 등을 구부리고 비스듬히 앉아서 '마부 노릇은 내가 할 일이 아니야'라는 듯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저쪽 것은 지주 어른의 밭이죠."파벨은 파이프에 불을 당겨 한 모금 빨아들이고는 한참 동안 잠잠하더니 채찍 끝으로 반대쪽을 가리켰다. "저쪽은 농부의 밭이구요. 이랴!" 그는 압력계를 지켜보는 기관사처럼 말꼬리와 궁둥이를 유심 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말들이란 흔히 축마는 정직하게 마차를 끌고 달리지만 종마란 놈은 백조처럼 목을 구부 리는 꼴이, 보기에 흡사 제 자신의 방울 소리에 맞추어 춤출 생각밖엔 하지 않는 꾀를 부리는 게 으름뱅이로 보였다. 니콜라이 아저씨는 토지 문제에 관한 보스코보이니코프가 저술한 원고의 교정을 부탁하러 가는 길이었다. 당국의 검열이 더욱 엄해져서 출판사 측에서는 저자에게 내용을 수정해달라고 부탁했 었다. "시골 사람들이 요즘 꽤 시끄러운 모양이야." 니콜라이 아저씨가 말했다. "파니콥스코예 마을에 선 상인 하나를 찔러 죽이고, 종마장을 불질러버렸다는군. 자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자네 마을에선 어떻게들 말하고 있지?" 그러나 농업 문제에 관한 보스코보이니코프의 과격한 견해를 완화시키려는 검열관 이상으로 파 벨의 견해는 어둡기만 했다. "어떻게들 말하다뇨? 동민들은 감당할 길이 없어졌어요. 너무 풀어주었단 말입니다. 우리한테는 오히려 좋지 않게 되었답니다. 농민들을 멋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서로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할 겁니다. 그건 뻔한 이예요! 이랴, 이랴!" 유라가 아저씨와 함께 두플랑카를 방문하기는 이것이 두 번째였다. 제딴엔 길을 잘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들판이 뒤로 물러가며 숲이 그들을 삼킬 적마다 길이 오른쪽으로 꺾이 고, 콜로그리보프의 저택이 어느덧 눈에 띄고, 10베르스타나 되는 들판과 저 멀리에 번쩍이는 강 물, 그리고 강 너머의 철도 가 이내 보이리라 생각됐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번번이 어긋나고 말 았다. 들판을 지나고 나면 또 다른 들판이 나타나고, 그것들이 다시 숲속으로 사라져갔다. 이러한 광활한 풍경의 변화는 그의 가슴에 넓은 도량을 안겨 주어 미래를 생각하고 꿈꾸게 하기도 했다. 후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의 명성을 떨치게 한 저서는 한 권도 나오지 않았으나 이미 그의 사상은 굳어져 있었다. 그는 자기의 명성을 떨칠 날이 가까워진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이내 당 대의 대표적 저술가들 속에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대학 교수나 혁명 철학가들과 비록 토론에 사용하는 용어는 같았으나, 그들의 사상과는 공통된 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어떤 도그마에 집착하여 언어의 농락이나 외관상의 멋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이 신부는 이미 지난 톨스토이 주의나 혁명적 이상주의를 초월하여 끊임없이 앞서나가고 있었다. 그 는 변천의 진로를 분명히 제시하는 동시에 무언가 세계를 향상시키는 영감에 차 있었으면서도 보 다 구체적인, 그런 사상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린애나 무지몽매한 사람에게도 번개나 천둥 처럼 자명한 사상이어야 했다. 그는 계속 새로운 것을 갈구하고 있었다. 유라는 아저씨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그는 아저씨한테서 어머니를 보는 듯했다. 어머니처럼 아저씨도 자유롭고 신비한 것을 좋아했고, 삶을 누리고 있는 자는 누구나 동등하다는 귀족적인 평등감을 품고 있었으며, 무엇이든 첫눈에 그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마찬가 지로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떠오르면, 그 의미와 활력이 상실되기 전에 재빨리 그것을 표현하는 천부의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유라는 아저씨가 자기를 두플랑카로 데리고 가는 것이 기뻤다. 그곳은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 역시 어머니를 상기하게 했다. 어머니는 자연을 사랑했으며 시골길 산책에 자 주 유라를 데리고 다녔다. 그 밖에도 유라는 니카 두도로프와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이 기쁨이었다. 보스코보이니코프 댁에 살고 있는 중학생인 니카는 두 살쯤 위라고 유라를 좀 깔보고 있어서, 지 난번에도 니카가 악수를 할 때 유라의 손을 밑으로 힘껏 잡아당기는 바람에 머리가 숙여지면서 머리카락이 얼굴을 반쯤 덮고 이마에 흘러내려 불쾌했던 일은 있었지만, 그까짓 건 문제가 아니 었다. 5 "빈곤 상태에 관한 문제의 생활 신경은..." 니콜라이 미콜라예비치가 수정한 원고를 읽어내려 갔 다. "생활 신경보다는 '요점'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군." 보스코보이니코프는 이렇게 말하고 교 정지에다 고쳐 써넣었다. 두 사람은 유리 창문이 달린 어둑어둑한 테라스에서 일하고 있었다. 물뿌리개며 원예용 도구들 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망가진 의자 등받이엔 비옷이 걸려 있고, 한쪽 구석엔 방수 장화가 진 흙투성이인 채 윗등을 밑으로 마룻바닥에 늘어뜨려져 있었다. "한편, 출생 및 사망 통계에 의하면..."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가 읽어내려 갔다. "해당 연도를 삽입해야겠군."하고 보스코보이니코프는 교정지에 써넣었다. 테라스 틈새로 바람이 가볍게 불어 들어왔다. 종이 위에는 바람에 날리지 않게 문진 대신에 대 리석 조각이 놓여 있었다. 일이 끝나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는 급히 돌아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소나기가 올 것 같은데. 곧 떠나야겠어요." "무슨 소리요. 그냥 보낼 줄 아시오? 함께 차나 마십시다." "저녁때까지 꼭 시내로 가야 하는데." "안 되겠소. 무슨 소릴 해도 내 귀엔 들리지 않소." 앞뜰에서 끓이는 사모바르의 숯불 냄새가 흘러 들어와서 담배 냄새와 헬리오트로프 향기를 몰 아내 버렸다. 별채에서 유지며 딸기며 크림 빵 등을 가져왔다. 그리고 파벨이 말을 끌고 강으로 목욕을 하러 갔다는 얘기를 했다.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는 하는 수 없이 주저앉을 도리밖엔 없 었다. "마차가 준비될 때까지 강 언덕에 나가서 벤치에나 좀 앉았다 옵시다." 보스코보이니코프가 청 했다. 그는 부호인 콜로그리보프와 친분이 있어서 별채의 관리인 방 두 개를 쓰고 있었다. 이 집은 앞뜰이 있고, 넓은 정원 한쪽 구석의 음침하고 황폐한 곳에 있었으며, 전에 차가 다니던 길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지금 이 길은 쓰레기 처리장 구실을 하는 골짜기로 쓰레기를 운반하는 데 사용 되고 있을 뿐이었다. 진보적 사상을 가진 콜로그리보프는 백만장자였으나 혁명에 대해서는 동정 적이었다. 그는 현재 아내와 함께 외국에 나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 영지 저택에는 그의 두 딸 나자와 리파 그리고 보모 외에 몇 사람의 하인들만 살고 있었다. 관리인 집과 뜰을 갈라놓은 인목나무의 빽빽한 울타리 너머로는, 곳곳에 연못과 잔디밭이 있는 넓은 정원 한복판에 저택의 본채가 자리잡고 있었다. 보스코보이니코프와 니콜라이가 울타리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참새들이 몇 마리씩 떼를 지어 거의 같은 간격으로 두 사람 앞에서 날아가고 있었다. 뒤이어 참새들은 인목 울타리에 무리가 되어서 파이프를 흐르는 물소리처럼 재잘거렸다. 온실과 정원사 집, 그리고 전에 무엇에 사용했는지 알 수 없는 석조 폐허 건물 옆을 지나서 걸 었다. 두 사람은 학문 분야의 새로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야 물론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기는 있지요." 니콜라이가 말했다. "하지만 요즘은 무슨 모임 이나 무슨 협회라는 걸 만드는 게 크게 유행하고 있거든요. 그들이 군거를 좋아하는 까닭은, 그것 이 재능이 없는 인간들의 피신처이기 때문이예요. 그들이 솔로비예프에게 충실하거나, 칸트나 마 르크스에게 충실하건 다 같은 겁니다. 진리는 개인만이 구할 수 있는 거니까. 사람들은 진리를 사 랑하지 않는 자들과는 함께 어울리지 않을 테구요. 세상에 과연 충실할 수 있는 대상이 얼마나 있을까? 아주 적을 겁니다. 나는 불멸은 믿을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불멸이란 생명을 다른 말로 좀더 강하게 표현한 것이니까. 불멸에 대해선 충실해야 하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충실해야 합니 다! 저런, 또 눈살을 찌푸리시는군, 안됐어. 역시 당신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으흠..." 보스코보이니코프는 헛기침을 했다. 그는 아마빛 머리에 호리호리한 미꾸라지와 같은 몸매에 링컨 시대의 미국인처럼 심통 사납게 생긴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난 아무말도 하지 않겠소. 당신도 알다시피 내 생각은 전혀 달라요. 그보다도 말이 나온 김에 묻겠는데, 성직을 박 탈당했을 때 기분이 어땠소? 오래 전부터 알고 싶었소. 두렵진 않았소? 파문 당한 건 아니오?" "화제를 바꾸고 싶은가 보군요. 좋아요... 하지만 파문된 것은 아니오. 요즘은 그런 가혹한 짓은 안 하게 되어 있어요. 물론 불쾌한 일도 있었고, 지금도 그 영향을 받곤 있지만. 예를 들면, 앞으 로 꽤 오랫동안 공직을 맡을 수가 없고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그엔 못 가게 되어 있어요. 그렇지 만 그까짓 건 아무래도 좋아요. 그러나 이제 말한 것처럼 난 그리스도에게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 하고 있어요. 당신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무신론자로서 신의 존재 여부나 존재하는 이 유를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인간은 자연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살고 있으며, 오늘날의 역사는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기초라는 것을 믿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역사란 무엇일까? 역사란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그리고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세기에 걸친 노력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것을 위해 인간은 교향곡을 작곡하였고, 수학 적 무한대와 전자파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정신적인 충동이 없었다면 그 방 향에로의 전진도 없었을 겁니다. 정신적 준비 없이는 지금 말한 그러한 발견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죠. 그것을 위해 복음서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준답니다. 첫째는 생명력의 최고 형태인 이웃에 대한 사랑인데, 이것이 일단 사람의 마음속에 충만 되면 넘쳐흘러서 소모되어 간 답니다. 둘째로는 근대인의 두 가지 근본적 이상 관념, 즉 이것 없이는 근대인이라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자유로운 개성이라는 관념과 또 하나 희생으로서의 인생이란 관념이지요. 아시겠어요? 이 것은 아주 새로운 사고방식이랍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인에겐 역사가 없었다고 할 수 있어요. 있었다면 유혈과 만행, 잔학, 노예 제도가 얼마나 악랄한 것인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곰보딱지 갈리굴라와 같은 인간들뿐이었어요. 거기엔 청동의 조상과 대리석 원주의 교만한 죽음의 영원만 이 있었지, 당시 그리스도가 출현하기 전까지 인간은 자유롭게 호흡할 수가 없었지요. 그리스도가 나타난 후에야 비로소 인간은 미래를 향해 살기 시작했고, 인간은 울타리 밑의 한 길가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역사 속에서 살면서 죽음의 극복을 위한 노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겁니 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 노력 속에서 죽어가게 되었던 거예요. 그만하지! 괜히 내가 너무 열을 올 린 것 같군! 그야말로 마이동풍 격이지!" "여보게, 그건 형이상학이로군. 그것은 나에게 금물이란 충고를 의사한테서 받았어요. 위장병에 해롭다는군요." "좋소, 당신은 가망이 없군. 그만둡시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야! 이렇게 경치가 좋은 데 살고 있으니까. 이런 경치라면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을 거요! 하긴 늘 여기 살고 있으면 별로 고마운 줄 모를 테지만." 강물은 햇빛을 받아 눈에 따갑게 반사되었다. 마치 금속판처럼 늘어나기도 하며 또 줄어들기도 하면서 반짝였다. 갑자기 수면에 잔주름이 퍼졌다. 말과 짐수레, 아낙네들과 농부들을 실은 커다 란 나룻배가 건너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호, 이제 겨우 다섯 시가 되었군." 보스코보이니코프가 말했다. "저기 보시오, 스이즈라니에 서 오는 급행 열차라오. 다섯 시가 조금 지나면 여길 통과하곤 하지요." 저 멀리 들판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노랗고 푸른 빛깔의 산뜻한 열차가 달리고 있었으며, 거 리가 멀어서 아주 조그맣게 보였다. 그것이 어쩐 일인지 갑자기 멈춰 섰다. 기관차 위를 흰 증기 가 솜털 모양으로 솟아오르더니, 얼마 후 경적 소리가 길게 들려 왔다. "이상한 일이군." 보스코보이니코프가 말했다. "무슨 사고가 난 모양이야. 저기 늪지대에서 정거 할 이유가 없는데. 틀림없이 무슨 일이 일어났어. 자, 이젠 가서 차나 마십시다." 6 니카는 정원에도 집안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른들과는 재미가 없고 유라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해서, 니카가 어디로 숨어버렸을 것이라고 유라는 생각했다. 아저씨와 보스코보이니코프가 테라스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유라는 그냥 집 주위를 돌아다녔다. 참 아름다운 곳이야! 수시로 노란 꾀꼬리들이 맑은 삼음부로 지저귀고, 피리 소리처럼 밝고 윤 기 있는 자기들의 노래 소리가 전원 속에 깊숙이 잦아들 때까지 한참씩 기다리곤 했다. 코를 찌 르는 꽃향기가 화단 위에서 더위에 응결된 듯이 공중으로 떠돌고 있었다. 마치 안티브나 보르디 게라와 똑같군! 유라는 정원을 정처 없이 거닐었다. 초원에서는 마치 어머니의 목소리가, 새들의 부드러운 지저귐과 벌들이 날아다니는 소리에 뒤섞여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자기의 대 답을 기다리며 여기저기서 자꾸 부르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느끼고 그는 후들후들 몸을 떨었 다. 골짜기 쪽으로 가서, 언덕 위에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들을 지나 골짜기 아래에 우거진 오리나 무 덤불 숲속으로 내려갔다. 땅위에는 바람에 쓰러진 수목과 꺾여진 나뭇가지가 흩어져 있는데다가, 어둡고 눅눅했다. 꽃은 별로 보이지 않았고, 마디가 많은 쇠뜨기 줄기가 유라의 그림 성경책에 있는 이집트식 왕홀을 연 상시켰다. 유라의 마음은 차츰 울적해졌다. 울고 싶었다. 그는 무릎을 굻고 울기 시작했다. "주님의 천사여, 나의 거룩한 수호신이여"하고 유나는 기도했다. "참된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지혜를 주십시오. 만일 죽음 후의 삶이 있다면, 주여, 성인들과 의인들의 얼굴이 별처럼 빛나는 주님의 나라로 우리 어머니를 데려가 주십시오. 어머니는 아주 좋은 사람이랍니다. 죄인일 수는 없습니다. 주여, 우리 어머니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어머니가 괴로움을 받지 않게 해주십시오. 어 머니!" 그는 가슴이 터질 것같은 슬픔 속에서, 새로이 성인의 자리에 오른 사람을 부르듯 어머니 를 불렀다. 그러고는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갑자기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오래 쓰러져 있지는 않았다.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위쪽에서 자기를 부르는 아저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얼른 대답을 하고 골짜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문득 그는 자취 를 감춘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드리지 않았던 일이 생각났다. 유라는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를 위 해 기도하라는 말을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순간적인 실신 상태를 지난 후여서 오히려 상쾌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 홀가분한 느낌을 잃고 싶지가 않았다. 언제든 다음 기회에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리라 생각했 다. '좀 기다리시라고 해야지.' 유라는 아버지를 전혀 기억조차 못했던 것이다. 7 중학 2학년의 미샤 고르돈은 오랜부르그 출신 변호사인 아버지와 함께 2등 찻간에 타고 여행하 고 있었다. 미샤는 점잖게 생긴 얼굴에 크고 검은 눈을 가진 열 한 살의 소년이었다. 아버지 그리 고리 오시포비치 고르돈이 모스크바로 전근하게 되어서, 미샤 역시 전학하게 되었다. 어머니와 누 이들은 새 주택과 이삿짐을 정리하러 이미 모스크바에 가 있었다. 소년과 아버지는 벌써 기차에서 사흘을 보내고 있었다. 햇볕을 받아 석회같이 희고 바랜 러시아의 대지, 들판과 초원, 도시와 마을들이 뜨거운 먼지 구 름에 싸여 잇따라 차창을 스쳤다. 길에는 짐마차 행렬이 길게 뻗어 있었다. 이따금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기차에서 내다보면, 짐마차들은 멈춰 서고, 말들이 제자리에서 다리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큰 정거장에 닿으면 승객들은 미친 듯이 뛰어내려 앞을 다투어 식당으로 갈려갔다. 정거장 뜰 의 수목 뒤로 져 가는 석양이 그들의 발과 열차 바퀴 밑으로 기어들고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개별적으로 하나하나 보았을 땐 계획적이고 의미 있는 일이지만, 총 체적으로 보면 그러한 움직임들은 인생의 큰 흐름 속에 합쳐져 모두가 저절로 취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하고 싸우며, 저마다 개인적인 걱정거리가 되는 메커니즘의 움직임 속에서 시간을 보 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낙천성이라는 고상하고도 근본적인 감정에 의해 늘 조정되고 있 지 않다면, 그 메커니즘들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데 될 것이다. 이 낙천성은 지상의 모든 인간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연대 감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인간의 생활이 서로 얽혀있다고 믿으 며, 죽은 자가 매장되는 이 지상에서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의 왕국으로 알려지고 또 어떤 사람은 역사라 부르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딴 명칭으로 부르는 다른 차원에서도 모든 것 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행복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 규칙에서 볼 때, 미샤는 불행하고 괴로운 예외가 되어 있었다. 우울한 감정이 그 의 궁극적인 원동력이 되었을 뿐 낙천적인 감정 같은 것이 그의 마음을 가볍게 하거나 즐겁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기 내부에 이 선천적인 특질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래서 유심히 자신의 징후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서글펐고,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남들과 똑같은 수족을 가지고 있으며 남들과 같은 언어와 생활을 가진 인간 이, 그들과는 달리 몇몇 좋아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일이 과 연 있어서 될 것인가? 철이 들면서부터 그는 한시도 이런 의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기가 남들보다 못할 경우, 아무리 고치려고 노력해도 절대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할 길 이 없었다. 유태인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일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슬픔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는 자기의 이 무력한 도전은 대체 무엇으로 보상될 것이며 무엇으 로 정당화될 것인가? 미샤는 이 문제를 아버지한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러한 전제는 불합리하며 그런 식으로 문제를 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뿐, 미샤를 만족시키거나 아니면 숙명 앞에 묵묵히 머리 를 숙일 뿐 그 밖에 깊이 있는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미샤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어른들을 점차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어른들은 이런 모순을 야기시키고서도 제힘으로 그걸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는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깨끗이 해결하고 말 것이라고 다짐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막 그 미치광이가 우리 찻간에서 복도로 달려나갈 때 아버지가 그를 뒤쫓아 나간 것이 잘못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아버지를 밀쳐내고 문을 열고 마치 수영장에서 다이빙하듯 달리는 열차에서 곤두박질로 몸을 던졌을 때, 아버지가 열차를 멈추 게 한 것이 공연한 짓이라고 말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열차가 아무 해명도 없이 이렇게 오래 멈춰 서 있게 된 원인이 다른 사람 아닌 바로 그 리고리 오시포비치 우리 아버지가 비상 신호선을 당겼기 때문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이렇게 출발이 지연되고 있는 이유를 아는 승객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사람은 열차를 급정거 시키다가 공기 브레이크가 터졌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열차가 급경사에서 멈췄기 때문에 뒤에서 밀어주지 않고는 기관차가 움직일 수 없다고도 했다. 그리고 또 자살자가 저명 인사여서 그와 동 행하던 고문 변호사가 조서 작성을 위해 가까운 콜로그리보프카 역까지 관리를 불러올 것을 고집 하였기 때문에 기다린다는 말도 있었다. 기관 조수가 전주에 올라간 것을 보면 관리를 태운 궤도 차가 지금 이리로 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찻간 안에는 화장실의 악취를 없애기 위해서 향수를 뿌렸으나 악취가 약간 풍겨왔으며, 지저분 한 기름 종이에 싼 튀김 닭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잘난 듯이 지껄거리는 페테르부르그의 회색 머리 부인들이 저마다 기관차 연기와 화장이 뒤섞여 집시 여인처럼 되어 버린 얼굴에 분칠을 다 시 하고는 손수건으로 손을 닦기도 했다. 그들은 고르돈 부자의 찻간 옆을 지날 때마다 좁은 복 도를 빠져나가면서 연방 어깨에 걸친 솔을 고치며 옷맵시에 신경을 쓰곤 했다. 미샤는 그들의 오 므린 입술에서 "어때요, 우린 아주 세련된 감각을 지니고 있죠? 우린 특별하답니다! 교양도 있구 요! 이런 건 도무지 참을 수 없어요!" 라는 말이 금방이라도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자살자의 시체는 제방 풀 위에 뉘어져 있었다. 이마와 눈두덩으로 흘러내린 시커먼 핏자국은 마치 그 얼굴에 가위표를 그려놓은 것같이 보였다. 말라붙은 피는 그의 피가 아니라 그와는 전혀 관계없는 반창고 조각이나 흙탕이 튀긴 자국 아니면 눅눅한 자작나무 잎사귀처럼 보이는 것이었 다. 호기심이나 동정심을 가진 구경꾼들이 자꾸만 바뀌면서 끊임없이 시체 주위에 모여들었다. 자 살자의 친구이며 동행자였던 거만한 변호사는, 혈통 좋은 짐승처럼 건장한 몸집을 감쌌던 셔츠를 땀에 적시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시체 곁에 서 있었다. 그는 더위에 지쳤는지 파나마 모자로 부채 질을 하고 있었다. 질문을 받을 적마다,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어깨를 흠칫거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알코올 중독자요. 그래도 이해할 수 없나요? 가장 전형적인 정신착란증의 결과란 말이 오." 모직 옷에 레이스 스카프를 쓴 깡마른 노파가 두세 번 시체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기관사로 있는 아들 둘을 가진 과부 치베르지나였다. 두 며느리를 데리고 3등차 무임 승차권으로 여행하고 있었다. 며느리들은 수녀원장 뒤를 따르는 수녀들처럼, 스카프를 이마 위로 내려쓰고 조용한 걸음 걸이로 말없이 노파의 뒤를 따랐다. 이런 일행은 존경을 받기에 족했다. 군중이 그들에게 길을 비 켜주었다. 치베르지나의 남편도 철도 사고로 불에 타 죽었던 것이다. 노파는 시체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 사이로 들여다보면서, 자기 남편의 경우와 비교라도 하듯이 한숨을 내쉬었 다. "모든 게 팔자 소관이지"하고 노파는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어 가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이렇게 죽는 사람도 있다니까! 돈 많은 부자가 머리는 왜 돌았담!" 시체를 한 번 보기 위해서 승객들은 하나 빠짐없이 기차에서 내려왔으나, 이내 찻간으로 돌아 간 것은 도둑을 맞을까 두려워서였다. 그들은 철둑에 뛰어 내려 꽃을 꺾기도 하고 다리의 피로를 풀려고 가볍게 뛰어보기도 했다. 이 근방 일대가 생기를 띠게 된 것은 오직 차가 정거했기 때문 이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질퍽한 소택지도, 강 건너 언덕 위의 저 아름다운 저택과 교회당 도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소 한 마리가 무리에서 떨어져 사람들을 구경하려고 조심조심 다가오는 것과 마 찬가지로, 기울어진 광선으로 자살 현장을 조심스럽게 비추고 있는 석양조차도 한낱 무대의 소도 구와 같았으며, 하나의 순수한 시골 풍경이라고 느껴졌다. 미샤는 이 사건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으며, 처음엔 놀라움과 가련한 생각에서 울음을 터뜨리기 도 했다. 긴 여행 중에, 이제는 죽어버린 그 사람이 여러 번 고르돈 부자의 찻간으로 찾아와서 오 랫동안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아버지의 온정과 정신적인 안정과 이해심을 알게 되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솔직하게 어음이나 재산 양도 증서 그리고 파산과 사기 등에 관한 법률 문제 를 물어보기도 했다. "참 그렇군요!"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놀라는 것이었다."당신은 법률 해석을 그렇게 관대하게 하시는군요. 저의 변호사는 당신보다는 훨씬 비관적인 견해였습니다." 이 신경과민의 사나이가 마음을 좀 안정시킬 때마다 그의 동행자가 1등 찻간에서 찾아와서는, 샴페인을 마시자고 식당차로 그를 데려가곤 했다. 동행인이란 바로 그 건장한 체격에 수염을 깨 끗이 깎은 멋쟁이 옷차림의 변호사였으며, 그는 지금 시체 옆에 서서 아무런 놀랄 것도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그의 변호 의뢰인의 계속적인 흥분 상태가 그에게는 오히려 유리한 관계가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자살자는 지바고라는 유명한 갑부로서 호인이었으나 방탕한 사람이며, 이미 머리가 반쯤 돌았다는 것이다. 그는 미샤가 옆에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샤와 같은 나이 또래의 아들 얘기며 죽은 부인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리고 여태껏 버려둔 두 번째 가족 얘기로 옮겼다. 그러다가 무슨 다른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얼굴이 공포에 떨며 창백해지더니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가 미샤에게 말할 수 없이 상냥했던 것은, 아마 누군가 딴 사람에 대한 애정을 미샤에게 표 시하는 듯싶었다. 큰 정거장에 열차가 정차할 때마다 뛰어 내려가서는, 책이며 장난감, 도 터산물 을 파는 1등 대합실 매점에서 한아름씩 선물을 사 가지고 와서 미샤에게 안겨주는 것이었다. 그는 쉴새없이 술을 마시면서, 자기는 석 달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잠ㅅ 제정신으로 돌아 오기만 하면 정상적인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고민에 시달린다고 호소했 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고르돈의 찻간으로 들어와 그의 손을 움켜쥐고 무슨 얘길 하려다가 말고 복도로 뛰어나가 열차에서 몸을 던졌던 것이다. 미샤는 차실에 앉아서, 죽은 사람의 마지막 선물인 우랄 지방의 조그마한 광물 상자를 바라보 고 있었다.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반대쪽 선로에서 궤도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의사 한 사람과 순경 둘, 그리고 모표가 달린 모자를 쓴 예심판사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 냉랭한 사무적인 말소리가 들리며, 뭔가 질문하고는 수첩에 기록하곤 했다. 순경과 차장이 부딪치고 모래에 미끄러 지기도 하면서 간신히 시체를 철둑 위로 올렸다. 어느 시골 여인이 울음을 터뜨렸다. 승객들을 찻 간 제자리로 들여보내려 차장이 호루루기를 불어댔다.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8 '등잔불의 기름 같은 놈이 또 왔어!' 니카는 아니꼽게 생각하며 숨으려고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밖에서 손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갈 길이 막혀 버렸다. 방에는 침대가 둘, 보스코보이니 코프의 것과 자기의 것이었다. 니카는 잠시 생각하더니 자기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밖에서 그를 찾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없어진 일이 놀라웠다. 이윽고 침실까지 들어 왔다. "할 수 없군." 니콜라이 아저씨가 말했다. "나가자, 유라. 네 친구는 좀 있으면 나타나겠지. 그때 함께 놀려무나." 니콜라이 아저씨와 보스코보이니코프가 거기 주저앉아서 페테르부르그와 모스크 바의 학생 소요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니카는 무려 30분 가량이나 바보 같은 꼴로 그냥 갇혀 있어야 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테라스로 나갔다.니카는 살그머니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 나와 정원 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간밤에 잠을 자지 못한 탓으로 그는 오늘 제정신이 아니었다. 열 네 살인 니카는 자기가 어린 애라는 것이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밤새껏 한잠도 자지 못하고 새벽녘에 밖으로 빠져나왔다. 해가 떠올라 이슬에 젖었던 나무가 정원 지면에 둥그스름하게 그림자를 던져주고 있었다. 나무 그림자 는 검지가 않고, 젖은 포제 장화 같은 짙은 잿빛이었다. 취할 듯한 아침 향기를 발산하고 있는 것 이, 소녀의 손가락 모양의 빛으로 무늬진 땅 위의 이 축축한 그림자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갑자기 아침 이슬처럼 반짝이는 은빛 줄무늬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주르르 흘렀다. 자꾸만 흐르는데도 땅에 스며들지는 않았다. 이윽고 무언가 꿈틀하며 옆으로 홰 돌더니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한 마리의 누런 구렁이였다. 니카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괴상한 버릇이 있었다. 흥분했을 때 곧잘 혼잣말을 지껄이곤 했다. 어머니 흉내를 내서 고 상한 테마와 역설을 좋아했다. '산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항상 괴로울까? 신은 물론 존재한다. 그러나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바로 나다.' 밑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온통 흔들리고 있는 백양나무를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 '옳지, 저 나무더러 흔들리지 말라고 명령해 야지.' 그는 미친 듯이 열중하여 온 힘을 다해서 마음속으로 '움직이지 말라!'하고 외쳤다. 그러자 백양나무는 금세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니카는 좋아서 큰 소리로 웃어대며 미역을 감 으러 강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그의 아버지 제멘치 두도로프는 테러리스트였으며,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황제의 칙령으로 감형 되어 지금 복역 중에 있었다. 어머니는 그루지아의 에리스토프 공작의 딸이었다. 아직 젊고 미모 의 자유 분방한 여성으로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무엇엔가 열중하고 있었는 데, 그 대상이란 폭동이니 모반이니 하는 과격한 이론이나 소동 따위였으며, 유명한 배우들이나 불행한 낙오자들과 같은 족속들이었다. 어머니는 니카를 무척 사랑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인노켄치였으나 어머니는 인노체크니 노첸 카니 하는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러운 애칭을 수없이 만들어냈다. 어머니는 아들을 자기 친정인 치 플리스로 데려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그를 무엇보다도 놀라게 한 것은 집 앞뜰에 가지를 뻗고 서 있는 나무였다. 이상한 모양의 열대 식물인 이 거목은 코끼리의 귀 같은 잎을 가지고 뜨거운 남국의 하늘로부터 뜰 전체를 감싸주고 있었다. 니카는 그것이 동물이 아니고 식물이라는 것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무서운 이름을 그대로 지닌다는 것은 니카에겐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보스코보 이니코프는 니카의 어머니 니나 갈라치오노브나의 동의를 얻어, 니카의 외가 쪽 성을 쓸 수 있도 록 황제에게 청원할 작정이었다. 침대 밑에 숨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도 그런 마음을 먹었다. '보스코보이니코프가 대체 뭔데 남의 일에 간섭하고 있담? 어디 두고 보 자, 혼을 내주고 말 테니.' 게다가 나쟈는 또 뭐야! 열 다섯 살이라고 해서 콧대를 치켜들고 날 어린애 취급하고 있다니! 고것한테도 맛을 좀 보여줘야지! '빌어먹을 것!'하고 그는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내 고 것을 죽여버릴 테다. 보트에 태워 가지고 나가서 물에 빠뜨려버려야지.' 그리고 어머니도 보라지! 떠나가면서 나와 보스코보이니코프한테는 새빨간 거짓말을 했어. 흥, 카프카스로 간다구? 다음 정거장쯤에서 기차를 바꿔 타고는 북쪽으로, 페테르부르그로 가겠지. 난 이런 시골 구석에서 썩고 있는데, 어머니는 대학생들과 어울려 경찰한테 총질이나 하면서 싸돌아 다니겠지. 하지만 나는 멍청히 있을 줄 알아? 나쟈 고년을 물 속에 처넣고, 학교를 집어치우곤 아 버지가 있는 시베리아로 가서 폭동을 일으킬 테니 두고 봐! 연못가에는 연꽃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다. 보트가 삐걱거리며 꽃잎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그 것은 마치 반으로 자른 수박 위에 떠 있는 세모꼴의 쐐기처럼 보였다. 소년과 소녀는 연꽃을 꺾기 시작했다. 고무줄 같은 줄기를 둘이서 함께 잡아당겼다. 그들은 머 리를 서로 맞부딪쳤다. 끌어당기듯이 보트가 기슭으로 끌려갔다. 그곳엔 짧은 줄기들이 서로 얽혀 있었다. 핏줄이 가느다랗게 보이는 달걀 노른자처럼 샛노란 꽃술이 달린 흰 꽃송이가 물 속으로 들어갔다가는 다시 물을 토하며 떠오르곤 했다. 나쟈와 니카는 몸을 맞대고 보트와 함께 옆으로 누이면서 연꽃을 따고 있었다. "학교 다니기도 싫어졌어." 니카가 말했다. "이젠 인생을 시작할 때도 되었어. 사회에 나가서 남 들처럼 일해야지." "그보다도 난 너한테서 2차 방정식을 배우려고 했는데. 수학 실력이 형편없어. 하마터면 재시험 을 쳐야 할 뻔했어." 니카는 이 말을 듣자 어떤 모욕감을 느꼈으나 일부러 태연한 체했다. "넌 크면 누구와 결혼하겠니?" 하고 물었으나, 거의 동시에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고 뉘우쳤다. "그건 장래의 이야기 아냐? 난 그런 거 아직 생각해 본 일도 없어. 아마 난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거야." "내가 관심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 "그런 왜 물었지?" "넌 바보야." 말다툼이 벌어졌다. 니카는 아침에 자기가 여자를 무조건 저주했던 일이 생각나서 기분 나쁘게 굴면 연못에 던져버린다고 을러댔다. "어디 해보라지"하고 나쟈가 도전했다. 니카는 두 손으로 나 쟈의 허리를 움켜잡았다. 둘이 맞붙어 싸우다가 그만 몸의 중심을 잃고 함께 연못에 풍덩 빠져버 렸다. 둘 다 헤엄을 칠 줄 알았으나 연꽃 줄기가 손발에 감겼고,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 감탕에 발 이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그들은 간신히 기슭으로 기어올랐다. 신발과 호주머니에서 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니카 쪽이 더 맥이 빠진 것 같았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나란히 앉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만일 지난봄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일시적인 흥분이 가라앉기가 무섭게 서로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하거나 한바탕 웃어 대거나 하고는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어처구니없어서 말도 못하고 숨을 죽인 채 앉아 있기만 했다. 나쟈는 잔득 화가 나서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니카는 온몸이 뻐근해 왔 다. 마치 몽둥이로 호되게 팔 다리를 얻어맞고 갈비뼈라도 부러진 것같이 온몸이 아팠다. 한참만에 나쟈가 어른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내가 정신 나갔나봐!" 니카도 비슷한 어조로 대답 했다. "내가 잘못했어." 마치 그들은 두 대의 살수차처럼 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니카가 구렁이를 본 그 근처에 뱀들이 우글거리는, 먼지투성이의 오르막길을 그들은 걷고 있었다. 그는 어젯밤과 같은 이상한 흥분이나 아침에 자연을 자기 의사대로 복종시켰던 신비스런 힘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엔 어떤 명령을 내려볼까? 이 세상에서 가장 바라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언제 다시 한 번 나쟈와 연못에 빠지는 일이다. 그런 일이 과연 다시 있을 수 있다 면, 그는 어떤 희생이라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2.딴 세상에서 온 소녀 1 일본과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딴 사건들이 생기는 바람에 전쟁은 무대 뒤로 밀려나버렸다. 혁명의 파도가 러시아에 물결쳐 와 차츰 더 높아지면서 이상하게 되어가고 있었다. 바로 이 무렵에 아말리아 카를로브나 기샤르는 아들 로쟈와 딸 라라를 데리고 우랄 지방에서 모스크바로 이사해왔다. 그녀는 벨기에인 기사의 미망인이며, 그녀 자신은 러시아에 귀화한 프랑 스인 이었다. 아들은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시켰고, 딸은 여학교에 넣었다. 그런데 딸은 나쟈 콜로 그리보바와 동급생이었다. 마담 기샤르의 남편이 유산을 남겼으나, 그 유산인 주권이 처음엔 시세가 올랐으나 지금은 내 리막길에 있었다. 재산이 줄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선 뭔가 해야했다. 자그마한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래서 개선문 근처에 잇는 레비츠카야 양장점을 샀던 것이다. 가게의 권리나 단골들, 재봉 사와 견습공까지도 레비츠카야의 상속인한테서 모조리 인수받게 되었다. 변호사 코마롭스키가 적극 권장해서 이것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남편의 친구였으나 지금은 그 녀가 기둥처럼 믿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손바닥을 보듯 러시아의 사업계를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냉혈적이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녀는 코마롭스키와 연락을 가지며 모스크바에 올라올 준비 를 갖췄다. 그는 정거장으로 마중을 나와 주었고, 시내 중심 가에서 좀 벗어난 오르제이느이 거리 의 체르노고리예 여관에 방을 미리 예약하고, 그녀와 아이들을 안내했다. 로쟈를 사관학교에, 라 라를 여학교에 입학시키도록 권유한 것도 바로 그였다. 그는 서슴없이 로쟈한테 농담을 하거나 얼굴이 붉어지도록 라라를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다. 2 그들은 가게 이웃의 자그마한 세 칸짜리 집으로 옮기기 전에 체르노고리예 여관에서 한 달쯤 묵 었다. 이곳은 모스크바에서도 가장 험악한 곳으로, 거리 전체가 빈민굴과 사창굴로 들어차고 건달패 들이 득실거리는 악의 소굴이었다. 방이 지저분하고, 빈대가 있고, 가구들이 초라한 것 따위에 아이들은 놀라지도 않았다. 아버지 와 사별하고 여태껏 어머니는 항상 가난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오고 있었다. 로쟈와 라라는 금세 파멸하게 되리라는 말만 들어왔었다. 그들 자신이 거리의 애들과는 다르다는 자각하고는 있었지 만,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들처럼 돈 많은 사람 앞에서 기가 죽는 버릇이 몸에 배어 있었다. 어머니는 이러한 공포의 좋은 본보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담 기샤르는 나이 서른 다섯 안 팎으로 금발머리에 풍만한 여인이며, 이따금 심장의 발작과 어리석은 행실이 뒤엉켜 걷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몹시 겁이 많아서 남자를 매우 두려워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공포에 질려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체르노고리예 여관에서 기샤르 네 가족은 23호실에 들었고, 24호실에는 여관이 개업한 때부터 첼로 연주자인 트이쉬케비치가 들 어 있었다. 그는 대머리를 가발로 가렸고 곧잘 땀을 흘렸으며 친절한 사람이었다. 남에게 무슨 설 득을 할 때는 기도하듯이 합장한 손을 가슴에 갖다 대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상류 사회의 파티 나 음악당에서 연주하기도 하며, 그럴 때는 으레 고개를 뒤로 젖히고 황홀한 기분에 눈알을 굴리 곤 했다. 그는 집에 있을 때가 드물었고 온종일 볼쇼이 극장이나 음악학교에 가 있었다. 이웃의 기샤르와도 사귀게 되어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아이들이 집에 있을 때 이따금 코마롭스끼가 찾아오게 되면, 마담 기샤르는 고통을 받게 되었 다. 그것을 알고 트이수케비치는 그녀에게 열쇠를 맡기고 자기 방을 쓰도록 했다. 얼마 안 가서 기샤르는 그의 친절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의 방을 노크하고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자기 후원자로부터 자기를 보호해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3 트베르스카야 거리 모퉁이 근처에 있는 단층집이 그의 양장점이었다. 그 부근에는 브레스트 철 도와 기관고, 창고, 또 사무원들의 하숙집들이 있었다. 영리한 올랴 제미나 아가씨는 그곳에 있는 아저씨 댁에서 마담 기샤르네 양장점에 다녔다. 아저씨는 화물역의 직원으로 있었다. 올랴는 재간 있는 견습 양재사였다. 그녀는 양장점의 전 주인한테도 인정을 받았고, 지금도 새 주인의 귀여움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라라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레비츠카야가 주인으로 있을 때와 지금 달라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피곤한 봉재사들이 밟 아대는 발이나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 밑에서, 재봉틀 바퀴는 세차게 돌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직 공들이 테이블 위에 묵묵히 앉아 바느질하고 있었다. 길게 실을 꿴 바늘을 뽑을 때마다 팔이 반 원을 그리며 치켜올려진다. 마룻바닥에는 천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소란스러운 재봉틀 소리나 키릴 모제스토비치의 방울을 굴리는 것 같은 지저귀는 소리 때문에 목청을 돋우어 말을 주고받아 야 했다. 키릴 모제스토비치는 창문 가에 걸어 놓은 새장 속의 카나리아 이름이었다. 이 괴상한 이름을 붙인 사연은 전 주인 양반이 무덤 속으로 가지고 가버려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응접실에서는 아름다운 부인네들이 패션 잡지를 쌓아 놓은 테이블 주위에 모여 서서, 그림에서 본 대로 포즈를 취하며 서 있기도 하고, 낮기도 하고, 몸을 기대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다른 테이블에는 마담 기샤르의 조수이며 재단 주임인 페치소바가 앉 아 있었다. 야위고 뼈만 앙상한 그녀의 늘어진 볼에 여러 개의 사마귀가 달려 있었다. 궐련을 뼈 파이프에 끼워서 누런 이빨 사이에 물고, 코와 입으로 누르스름한 연기를 내뿜으면서 노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객의 치수나 요구 사항, 주소 등을 수첩에 기입하고 있었다. 마담 기샤르는 양장점을 경영해본 경험은 없었다. 그래서 주인의 위신을 세울 수 있을까 걱정 했지만, 일하는 사람들이 정직한 편이었고, 페치소바도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소란스러운 세상이기 때문에 장래를 생각할 때는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마담 기샤르는 이따금 깊은 절망 에 사로잡히곤 했다. 코마롭스키는 자주 찾아왔다. 안채로 들어가려고 양장점을 지나가고 있을 때, 가봉하러 온 멋쟁 이 부인들이 깜짝 몰라서 칸막이 뒤로 도망쳐 숨어서는 그의 음탕한 농지거리에 장난기로 응수한 다. 이럴 때 재봉사들은 밉살스럽지만 재미있다는 투로 소곤거린다. "오셨군." "마담의 기둥서방이 야." "물소야." "색마야." 더욱이 미움을 사고 있는 것은 그의 불독개 잭이었다. 가끔 줄에 매어 데려 오기도 했지만, 개 는 무서운 힘으로 앞에서 당기는 바람에 코마롭스키는 줄을 잡은 장님처럼 두 손을 쭉 펴고 비틀 거리며 끌려 다녔다. 언젠가 봄에, 잭은 라라의 다리를 물고 양말을 찢은 적이 있었다. "그 미친놈의 개새끼를 내가 처치해버려야지." 올랴는 목쉰 소리로 라라의 귀에다 속삭였다. "정말 미워 죽겠어. 하지만 네가 어떻게 그놈을 처치하겠다는 거니?" "가만, 목소리가 높아요. 어떻게 처치하는지 가르쳐줄까? 너의 어머니 장롱 위에 돌로 만든 부 활절 달걀이 있잖아..." "수정과 대리석으로 만든 것 말이지?" "그래, 바로 그거야! 좀더 가까이 귀를 갖다 대요. 그것을 돼지고기 기름에 담기는 거야-그 마 귀새끼 같은 수캐 놈이 맛있는 먹이로 알고 꿀꺽 집어삼키면 목구멍이 막혀 죽어버리고 말 거 야!" 라라는 배를 움켜쥐고 웃어댔다. 그리고 올랴가 부럽게 느껴졌다. 올랴는 가난하게 살면서 제힘 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라는 애들은 남보다 조숙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올랴는 아직도 순 진한 아이였다. 잭에게 그 달걀을 삼키게 하다니-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 '그런데 왜 나의 운명은 보이는 모든 일들이 이렇게 깊은 슬픔으로만 보일까?' 4 '어머니는 그 사람의 말하자면...그 사람은 어머니의 ...더러운 소리야.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 어. 그런데 그 사람은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지? 난 어머니의 달이 아닌가.' 라라는 이제 겨우 만 열 여섯 살이 지났지만 몸매는 벌써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열 여덟 살은 훨씬 더 넘어 보였고, 마음씨가 차분하여 느긋한 성격이었으며, 용모도 뛰어나게 아름다웠 다. 라라와 로쟈는 인생의 길이 탄탄대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유복한 게으름뱅이와는 달리 실생활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에 대하여 미리 이유를 내걸거나 호기심을 가지는 따위의 여유가 없었다. 천박스러운 것은 여분의 인간들이다. 라라는 이 세상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순결한 존재였다. 라라와 로쟈는 사물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자기들이 해온 일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잘 해내기만 하면 세상 사람들은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라라는 학교에서 성적이 좋았으며, 그것은 특별히 지식에 대한 욕망이 있어서도 아니고, 다만 장학금을 받기 위한 것 때문 이었다. 공부도 잘했지만, 집에서 설거지도 하고 양장점 일도 거들어주고 어머니의 심부름도 다녔 다. 그녀는 몸가짐도 우아하고, 날씬한 몸매와 목소리, 잿빛 눈동자와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하 며 잘 어울려보였다. 6월 중순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휴일에는 좀 늦잠을 잘 수가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머리 뒤로 받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가게 안은 유난히 조용했다. 한길로 향한 창문이 열려 있었다. 승용 마차가 포석에서 전차길로 옮겨갈 때,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소리고 바뀌는 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이제 조금만 더 자야지 하 고 생각했다. 거리의 소음이 자장가처럼 잠을 청한다. 라라는 육체의 두 군데, 왼쪽 어깨 끝과 오른쪽 엄지발가락까지, 잠자리 속에서 자신의 크기와 위치를 재보고 있었다. 그 밖의 모든 것도 크든 작든 그녀 자신이었으며, 그것은 육체의 윤곽 속 에 빈틈없이 자리잡고서 미래를 향해 줄달음치려는 그녀의 영혼이며 내적 존재인 것이다. 잠이나 자야지-라라는 생각하면서, 지금쯤 카레트 시장의 번화가는 어떨까하고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마차 가게의 깨끗이 닦은 마루에 전시된 대형 마차들, 마차용 램프, 박제곰, 유복한 생활, 거리를 좀더 내려가면 즈나멘스키 부대 연병장에서는 기병들이 훈련을 받고 있겠지-장교가 빠른 걸음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말을 몰고, 병사들이 날 듯이 안장으로 뛰어올라 말을 타고 천천히. 속보로, 구보로, 모둠발로 말을 달린다. 부대 밖에서는 유모나 보모가 데리고 나온 애들이 줄을 지어서 울타리 너머로 구경하느라고 눈이 휘둥그렇다. 이제 조금 더 내려가면- 하고 라라는 생각한다.- 페트로프카 거리다(정말 뜻밖이야, 라라! 무슨 바람이 불었지! 내가 살고 있는 집을 좀 보여주고 싶어. 바로 근처에 있으니까.). 올리가의 명명일 이었다. 그녀는 카레트에 살고 있는 코마롭스키의 친구의 어린 딸이었다. 어른들 은 댄스와 샴페인 파티를 열어서 명명일 을 축하하고 있었다. 코마롭스키는 어머니를 초대했으나, 어머니는 기분이 개운치 않아서 갈 수가 없었다. "라라를 데리고 가주세요. 당신은 늘 라라를 보 살펴주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약속대로 좀 그 애를 보살펴주어요."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그것이 보살펴 주는 건가 - 참 어처구니없어! 무슨 바보짓인지 몰라!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빙글빙글 춤추며 돌았다. 음악이 연주되는 동 안에는 소설 속의 인물처럼 시간이 흐르는 걸 모른다. 그러나 음악이 멈춘 순간, 마치 찬물을 끼 얹기라도 한 듯이, 또 자기 알몸을 남에게 보이기라도 한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물론 그 사람한 테 나긋나긋하게 굴게 된 까닭은 자기도 이젠 어른이 되었다는 걸 보이고 싶었던 허영심 탓이었 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춤을 잘 추리라고는 꿈엔들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정말 멋진 솜씨 였어, 나의 허리에다 손을 휘감아 당길 때의 그 차분한 손길! 그렇지만 그렇게 나에게 키스하는 것은, 이젠 다시 누구한테도 허락하지 않을 거야. 얼마나 오랫동안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갖다 비벼댔던지 참을 수가 없었어. 정말, 이젠 그러한 바보짓은 하지 않아야겠다. 마치 수줍은 듯이 보이려고 하거나 킥킥거리고 웃거나, 눈을 내리뜨는 짓일랑 하지 말아야 해. 이러다간 큰일이 나겠어. 여기저기 알 수 없는 무 서운 경계선이 쳐져 있었다. 한 발 잘못 내디디는 날엔 깊은 함정 속으로 빠져들고 말 거야. 댄스 따위를 이제는 생각지도 말아야지, 그것이 악의 화근이 되니까. 단호하게 거절해야지-춤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거나 발을 삐었다고 핑계를 대면서 말이지. 5 그해 가을, 모스크바의 철도 노동자들 사이에는 심상치 않은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모스크바- 카잔 선의 종업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모스크바-브레스트선 종업원들도 합류하기로 돼 있었다. 이미 파업의 결정은 내려졌으나, 파업 개시 날짜에 대해서는 아직도 파업 위원회의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철도 종업원들은 파업이 곧 있으리라고 알고 있었다. 무슨 구실만 생긴다면 곧장 시 작하게 될 판국이었다. 10월 초순이었다. 우중충하게 찌푸린 쌀쌀한 아침이었다. 그날 바로 종업원들이 임금을 타는 날 이었다. 하지만 경리과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이윽고 임금 계산서와 벌과금을 공제하기 위 하여 가지고 있던 기록 서류 뭉치를 가지고, 사환이 사무실로 왔다. 출납 계원이 임금 봉투를 내 주기 시작했다. 승무원, 전철수, 철공, 창고, 기관고나 철로를 지나 관리부 건물까지 끝없이 움직 이고 있었다. 도시의 초겨울 냄새가 풍겨온다. 발길에 짓밟힌 단풍잎과 녹아 내리는 눈, 기관차의 연기 냄새, 역 식당 지하실에서 방금 구워 낸 따끈한 검은 빵 냄새. 흔들고, 감고, 펼치고 하는 신호기에 따 라서 열차가 오가고, 노선을 바꾸고, 연결하고, 분리되곤 한다. 기관차의 기적 소리가 울리고, 승 무원이나 전철수의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공기를 찢는다. 연기가 사닥다리 모양으로 끝없이 하늘에 치솟아 오른다. 기관차가 뜨거운 증기를 뿜어 올려 차가운 겨울 구름에 화상을 입힌다. 철 도 관구장 푸플르이긴과 역구보선 감독 파벨 페라폰토비치 안치포프는 선로를 따라 이리저리 거 닐고 있었다. 안치포프는 선로의 정비 부품의 품질이 나빠지고 있어서 거의 매일같이 정비 공장 으로 나갔다. 강철은 장력이 부족해서 부담력을 알아보는 테스트에 불합격되었다. 안치포프의 의 견에 따르면 엄동설한에는 금이 가서 터지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관리부에선 그의 의견 따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 계약으로 부당 이득을 취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푸플르이긴은 철도 제복인 금 쇼올을 두른 고급 슈바의 앞섶을 헤치고, 새로 맞춘 사지 양복을 내보이고 있었다. 발밑을 조심하며 노반을 걸으면서 옷깃과 곧은 주름과 멋있는 신발을 흡족한 눈으로 바라본다. 안치포프의 지껄이는 소리 따위는 한쪽 귀로 듣고는 다른 족 귀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푸플르 이긴은 지금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방 회중 시계를 꺼내어 들여다보고 있었다. 되도록 빨리 이야기를 끝맺고 싶었던 것이다. "하기야 그렇지, 자네 말도 옳지만," 그는 초조한 듯 상대방의 말을 가로채었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교통량이 많은 본선만이 아닌가. 자네네 선로는 뭣에 쓰는 건가, 안 그런가? 대피선과 종단 선이 아닌가. 노면에는 쐐기풀이나 민들레 천지고 말야. 그리고 드나드는 차래야 겨우 이따금 빈 차를 바꾸려는 고물 기관차뿐이란 말이야! 그런데 뭐가 불만이지? 머리가 좀 이상해졌군! 그런 곳에는 레일도 과분하지. 나무토막을 깔아도 아무 일없을 걸세." 푸플르이긴은 회중 시계를 꺼내 보더니 뚜껑을 살짝 닫고, 노선 가까이는 지나는 도로의 저쪽 을 바라보았다. 마차 하나가 길모퉁이에 나타났다. 푸플리이긴의 마차였다. 아내가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마치 유모가 말 안 듣는 아이를 꾸짖듯이 마부는 여자처럼 빽빽 소리를 지르며 철길 바로 옆에다 말을 끌어넣었다. 말은 기차를 두려워했다. 마차 안쪽 구석에 아름다운 부인이 사뿐 히 쿠션에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럼, 자네 또 보세." 관구장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레일보다 더 중대한 일이 있다 고나 하듯 이 부부는 마차를 달리며 가버렸다. 6 그로부터 서너 시간 후 황혼이 깃들 무렵, 철길에서 좀 떨어진 들판에, 여태껏 아무도 없었던 곳에 불쑥 두 사람의 그림자가 지면에서 솟아나더니 연신 뒤돌아보며 재빠른 걸음으로 사라져버 렸다. 그들은 안치포프와 치베르진이었다. "좀더 빨리 걷게." 치베르진이 말했다. "난 경찰에 붙잡히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야. 땅굴 속에서 덜덜 떨고 있는 겁쟁이들이 회의를 끝내고 나서 우리를 따라오는 것이 싫어서 그래. 놈들 의 상판때기도 보기 싫단 말이야. 그렇게 꾸물거리기만 하다니, 무슨 놈의 위원회인지 알 수가 없 어. 불장난을 시작해 놓고는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빼려는 수작이 아니야! 자네도 또 그래, 녀석들 의 편을 들다니." "마누라가 티푸스에 걸렸어. 병원에 데려가야 해.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네." "놈들은 오늘 임금을 지불한다고 했어. 난 사무실에 들러 보겠네. 만일 오늘 임금 지불이 안 될 경우, 난 자네들과는 별도로 행동하겠네. 나 자신이 결판을 내고야 말 테야. 우물쭈물할 것 없이." "그래 어떻게 결판을 낸다는 거지?" "일은 잘 되는 거지. 기관실로 내려가 지적을 울려대는 거야."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서 제각기 다름 방향으로 서류의 발길을 옮겼다. 치베르진은 시내 쪽으로 철길을 따라 갔다. 사무실에서 임금을 받아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들과 만났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었다. 보건대, 역의 종업원 거의 전부가 임금을 받은 것 같았다. 치베르진은 보기엔 역 지역은 거의 지불이 되어 있었다. 어둠이 짙었다. 사무실에 불이 켜 있어도, 광장에는 한가한 종업원들이 모여 있었다. 광장 입구 에 푸플리이긴의 마차가 서 있었다. 아침부터 몸도 움직이지 않고 같은 자세로 푸플르이긴의 부 인이 안에 앉아 있었다. 봉급을 받으러 간 남편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느닷없이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부는 가죽 포장을 씌우려고 자리에서 내려와, 마차 뒤 쪽에 한 발을 얹고 단단한 지주를 잡아당겼다. 그 동안에 푸플르이긴 부인은 사무실 등불의 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진눈깨비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눈 하나 깜박이지도 않고 꿈꾸는 듯한 눈동자는 모여 선 노동자들의 머리 너머로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진눈깨비나 아지랑이처럼 종업원들의 존재도 그 눈길을 막을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치베르진은 우연히 그녀의 표정을 보고 구역질 같은 걸 느꼈다. 그는 부인에게 인사도 하지 않 고 지나쳤다. 사무소에서 그녀의 남편과 마주치게 될까봐 임금은 후에 받기로 했다. 광장을 옆으 로 지나 작업장이나 전차대의 검은 그림자가 깔려 있는 어둠 쪽으로 선로가 뻗어 있었다. "치베르진! 쿠프리크!" 어둠 속에서 두세 명의 목소리가 부르고 있었다. 작업장 앞에는 사람들 이 모여 있었다. 안에서는 고함 소리와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렸다. "빨리 들어가 저 애를 구해줘 요." 군중 속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느 때처럼 직공장 포트르 후들레예프 노인이 견습공인 유수프카를 때리고 있었다. 후들레예프는 본래 견습공을 괴롭히거나 술에 취해서 싸움질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젊었을 때 는 늠름한 일꾼으로서 모스크바 교외의 공업 지대의 상인이나 승려의 딸들한테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무렵 교구의 승려원 학교를 졸업한 마르파는, 후들레예프의 구혼을 물 리치고 치베르진의 아버지인 기관사 사베리와 결혼하게 되었다. 치베르진의 아버지는 후들레예프 와 친한 동료였던 것이다. 사베리의 무서운 최후(1888년의 유명한 철도 충돌 사고로 타 죽었음)로보터 5년쯤 지났을 때 후들레예프가 다시 구혼했지만, 마르파는 이번에도 또 거절했다. 그래서 후들레예프는 술과 싸움 에 몸을 망치고, 자기의 온갖 불행은 이 세상 탓이고 이 세상을 복수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유수프카는 치베르진이 살고 있 는 셋집 구역의 수위로 있는 타타르인 기마제뜨진의 아들이었다. 치베르진이 그 소년을 보호해주 었기 때문에, 그것이 더한층 후들레예프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 줄칼을 잡은 꼴이 뭐야, 이 망할 놈의 새끼야!" 후들레예프는 유수프카의 머리털을 쥐어 잡 고 목덜미를 주먹으로 쥐어박으며 호통을 쳤다. "그래 주형 하나 제대로 떼어내지 못하는 이놈아! 일을 망쳐 놓아도 분수가 있지. 이 죽일 놈의 타타르 사팔뜨기 같은 놈!" "이젠 다시 안 그래요, 아저씨. 다신 안 그래요! 아, 아파요!" "한 번 가르쳐 주면 그대로 해야지, 이건 백 번 가르쳐도 매한가지야! 굴대를 먼저 조정하고 잭 을 죄어야 하는데, 네놈은 언제나 제멋대로야. 하마터면 스핀돌을 망가뜨릴 뻔했잖아, 개새끼야!" "저는 스핀돌을 건드리지도 않았어요. 정말 손도 대지 않았어요." "왜 어린애를 때리는 거요?" 치베르진은 사람들 사이를 밀치고 들어가면서 말했다. "쓸데없는 참견은 말아!" 후들레예프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무엇 때문에 그 앨 때리느냐 말요?" "어서 석 꺼지지 못해, 이 주둥이만 까진 사회주의자! 이놈은 죽여 버려도 시원치 않아. 하마터 면 내 스핀돌을 망가뜨릴 뻔했단 말이야. 여태 살려 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해. 난 이 녀석의 귀를 비틀어주고 머리끄덩이를 좀 잡아당긴 것뿐 이야." "그래, 모가지를 뽑아버려야 시원하단 말이오? 후들레예프 씨, 부끄럽지도 않소? 나이 많은 직 공장이 이게 뭐요? 머리는 허옇게 돼 가지고 아직 철이 덜 들었군." "병신이 되기 전에 썩 꺼져버려! 네가 날 설교할 참이냐, 이 개 아들놈 새끼야. 넌 침목 위에서 만든 놈이야. 그것도 네 애비가 보고 있는 앞에서 말이다. 네 어미를 잘 알겠지. 아무 놈하고도 붙어먹는 그 털이 빠진 암코양이 말이야!"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둘 다 묵직한 공구며 철재가 뒹굴고 있는 선반 대에서 닥치는 대로 집어들었다. 사람들이 재빨리 그들을 갈라놓지 않았다면 살인극이 벌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후들레예프와 치베르진은 목을 잔뜩 뽑아내고서, 창백해진 얼굴에 눈은 벌겋게 충 혈 되어서 이마를 맞댈 듯이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어찌나 화가 치밀었던지 말도 못했다. 두 사 람 다 뒤에서 팔을 뒤틀면서 매달려 있는 동료들을 끌어당겼다. 후크와 단추가 날아가고, 윗도리 와 셔츠가 벗겨지면서 어깻죽지가 드러났다. 한참 동안이나 소란이 계속되었다. "저 끌! 끌을 빼앗지 않으면 큰일나겠어. 얌전히 해요, 후들레예프 씨. 안 그러면 팔을 꺾어 버 릴 테요! 이거 안 되겠어! 따로 떼어서 둘 다 가둬버려야겠어. 그럼 끝장이 날 테니까." 치베르진은 갑자기 안간힘을 쓰더니 달라붙은 사람들을 뿌리쳐버리고 문 쪽으로 달려갔다. 사 람들이 뒤쫓았으나 그가 마음을 돌렸다는 것을 알자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는 문을 쾅 닫고는 뒤 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서 나갔다. 어둡고 눅눅한 가을밤이 그를 삼켜버렸다. "나는 그들을 위해 애쓰고 있는데, 놈들은 칼을 들고 덤벼드는군." 그는 중얼거리며 방향도 의 식하지 못한 채 걸어가고 있었다. 허위와 기만에 찬 이 비열한 세상에는 살찐 귀부인이 거드름부리며 노동하는 사람의 존재를 전 혀 무시하는가 하면, 이러한 욕된 희생자가 부질없이 동료를 학대하는 데서 쾌락을 찾기도 한다. 그에게는 이러한 세상이 무엇보다도 저주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 모든 일이, 지금 뜨겁게 달아오른 자기의 머리 속같이 합리적이고 조화된 시기가 빨리 오기 를 재촉하듯이. 지난 며칠 동안의 모든 노력, 철도 노동자의 움직임, 집회에서의 연설, 파업의 결 정(아직도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중지된 것도 아니다)등은 앞에 가로놓인 위대한 길로 향 한 하나하나의 단계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너무나 흥분해서 숨돌릴 겨를도 없이 목적지를 향해 돌진하고 싶었다. 그는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으나, 그의 발은 목적 장소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치베르진이 안치포프와 함께 지하의 비밀 집회에서 나온 후에 파업위원회는 그날 밤부터 파업 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치베르진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위원회 가 그렇게 빨리 결단을 내리리라고 그는 생각지 못했다. 그가 기관차수리장의 사이렌을 울렸을 무렵에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역이나 하치장에서 시내 쪽으로 떼지어 나오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는 그의 영혼의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듯이 날카롭게 밤공기를 찢으며 울려 퍼졌으나, 얼마 후 낮은 소리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윽고 치베르진의 신호 에 따라서 연장을 던져버린 기관실의 사람들도 군중 속으로 합류되었다. 그날 밤의 철도선의 작업이며 교통을 정지하게 만든 것이 바로 자기였다는 것을 몇 년 후까지 도 생각하고 있었다. 꽤 오랜 후에 파업 선동의 죄목이 아니라, 파업에 연루된 죄목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진상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황급히 뛰어나오며 물었다. "다들 어디로 가는 건가? 무슨 사이렌 소리지?" "귀머거 린가?" 어둠 속에서 묻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화재 경보란 말야. 우리더러 불을 끄라는 거 겠지." "아니, 어디서 불이 났는데?" "하여튼 불이 나지 않았으면 사이렌은 뭣하러 울리나." 문이 콰다당 열리며 또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화재는 무슨 화재! 촌놈! 바보 같은 소리! 파업 이란 말이야, 알았어! 다들 일을 집어치우라고, 일을 시키려면 다른 바보 녀석들이나 찾아보라지. 이것봐, 다들 집에 돌아가자구." 군중에 합류되어 수가 차츰 더해갔다. 철도 노동자는 파업에 들어갔다. 7 치베르진은 이틀 후 집으로 돌아왔다. 수염은 더부룩하게 자라고, 수면 부족으로 지쳐서 곤죽이 되었고, 뼛속까지 얼어들었다. 간밤에는 철보다 이르게 서리가 내렸는데, 치베르진은 아직 겨울옷 을 입고 있지 않았다. 대문에서 수위 기마제트진이 그를 맞았다. "고맙습니다, 치베르진 나으리." 그는 여러 번 되풀이했다. "당신이 유수프카를 구해주셨다지요.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 드리겠습니다." "갑자기 나으리는 뭐요? 그따위 말투는 집어치워요.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하구려, 난 추워서 견 딜 수가 없어요." "뭐가 춥습니까. 이내 몸이 녹을 겁니다. 나와 당신의 어머니는 어제 화물역에서 장작을 날라다 헛간에 하나 가득 쌓아 놓았답니다. 모두 다 잘 마른 자작나무 장작이죠." "그거 잘했군. 또 할 얘기가 없다면, 몸이 꽁꽁 얼었다니까." "오늘밤은 집에 있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숨어 있어야 해요. 경찰에서 와서 누가 오지 않았 느냐 묻더군요. '아무도 온 사람이 없어요. 나의 교대번이 왔구요, 철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왔지 요. 하지만 낯선 사람이라곤 아무도 보지 못했소.' 이렇게 난 대답했지요." 치베르진은 독신이었고, 어머니와 장가간 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들의 셋집은 성삼위일체 교회의 소유였다. 이 셋집에는 몇 사람의 승려가 살았고, 고기 장수와 채소 장수 두 사람 외에는 거의 대부분이 모스크바-브레이트 철도의 하급 종업원들이었다. 집은 석조 건물이었으나 지저분한 들이 사면을 둘러싸고 있었다. 복도에서 미끄럽고 진흙투성이 의 나무 층계가 이층으로 나 있었다. 거기서는 고양이 냄새와 절인 양배추 냄새가 풍겨 왔다. 층 계참에는 변소와 자물쇠를 잠근 광이 위태롭게 달라붙어 있었다. 치베르진의 동생은 전쟁에 병사로 징집되어 출정했었다. 그는 바팡코우에서 부상해서 지금은 크라스노야르스크 육군 병원에서 거의 완쾌되어 가고 있었다. 그의 아내와 두 딸이 그를 집으로 데려오려고 크라스노야르스크로 떠났다. 치베르진네는 대대로 철도 종업원이었고, 여행을 즐겼다. 무임 승차권을 가지고 전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지금 집안은 조용하고 텅 비게 되었다. 치베르진 과 어머니밖엔 없었다. 치베르진네는 이층에 살고 있었다. 바깥 층계참에는 물장수가 정기적으로 물을 길어주는 물통 이 놓여 있었다. 뚜껑이 반쯤 열려 있고, 양은 컵이 얼어붙은 물통 위에 놓여 있었다. '프로프가 왔다갔군.' 치베르진이 히죽이 웃으며 생각했다. '그 사람이 물을 꿀꺽꿀꺽 마실 때는 뱃속에 불이 라도 난 모양이지.' 프로프 아파나시예비치 소콜로프는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이었으며, 어머니의 친척이었다. 치베르진은 컵을 얼음에서 떼어 물통 위에 옮기고 문의 초인종 줄을 당겼다. 훈훈한 공기가 구 수한 냄새를 싣고 훅 풍겨왔다. "아주 따뜻한 것 같군요, 어머니. 불을 많이 땠네요." 어머니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어머니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 상냥하게 떼어놓았다. "무슨 일이든 결단성이 있어야 해요." 그는 조용히 말했다. "모스크바에서 바르샤바까지의 우리 철도가 멎어 버렸어요." "알고 있어. 그래서 우는 게 아니냐. 널 찾고 있었어. 피신해야겠다." "어머니의 절친한 남자 친구 후들레예프 영감한테 하마터면 머리통이 박살날 뻔했어요!" 그는 어머니를 웃기려고 꺼낸 말이었으나, 어머니는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 분을 놀려대면 못써요. 동정해 드려야 해." "안치포프가 체포되었어요. 밤중에 들이닥쳐서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아침에 끌고 갔대요. 그것 보다도 그의 처 다리아는 티푸스에 걸려서 병원에 있구요.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파샤는 귀가 들 리지 않는 고모와 함께 집에 남았을 뿐이예요. 그런데 집에서 쫓겨날 것 같으니 그 애를 우리가 맡아야겠어요. 한데 프로프는 왜 왔지요?" "어떻게 그걸 알았지?" "물통의 뚜껑이 열려 있고 컵이 있어서 틀림없이 밑빠진 프로프가 물을 들이켰구나 생각했지 요." "잘도 알아맞히는구나. 그래 프로프가 다녀갔다. 장작을 꾸러와서, 좀 주었다. 아이, 나 좀 봐. 바보같이 딴소리만 지껄이고 있었구나! 프로프가 전하던 소식을 깜빡 잊고 있었군. 얘야! 황제 폐 하께서 칙서를 서명하셨다는 구나. 이제 세상이 달라질 거라고 하더라. 누구나 다 사람 대접을 받 게 되고, 농민들은 토지를 받고, 우리 모두가 귀족과 대등하게 된다는 거야. 벌써 서명은 끝나고, 이제 공포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더라. 종무원에서 교회의 기도에 추가하도록 뭔가 보내왔다지 않 겠니. 감사의 기도문인지, 폐하를 위한 기도문인지는 들었어도 잊었지만." 8 파샤 안치포프는 아버지가 파업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구속된 데다가 어머니가 병원에 있었으 므로 치베르진네 집에 있게 되었다. 그는 아마빛 머리의 가운데에 가르마를 탄 용모가 단정하고 깔끔한 소년이었다. 머리는 언제나 단정히 빗질을 하고 교복이나 혁대에 달린 학교 휘장을 노상 바로잡곤 했다. 유머가 많고 또 대단히 관찰력이 예민하여, 보고 듣는 것은 무엇이건 곧잘 흉내를 내 보이기도 하고 잘 웃기곤 했다. 10월 17일에 칙서가 공포되고 나서 얼마 후, 일대 시위 행진이 계획되었다. 트베르 문을 출발하 여 모스크바의 반대쪽 끝의 칼루즈스카야 거리까지 행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 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속담이 들어맞은 격이 되었다. 몇 개의 혁명 단체가 공동으로 계획했었지 만 의견 충돌이 생겼기 때문에 도중에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예정했던 날 아침에 군중 이 모여든 것을 보고는 황급히 대표를 파견하여 시위 행진을 지휘하도록 했던 것이다. 치베르진이 입에 신물이 나도록 만류했지만 어머니는 시위 행진에 참가했다. 언제나 명랑하고 친절한 파샤도 함께 따라 나섰다. 11월 초순의 조용하고 쌀쌀한 날이었다. 회색빛 하늘에서 이따금 눈송이가 천천히 날아 내려와 서는 잿빛 먼지같이 길에 깔렸다. 거리를 다라 물밀 듯이 군중이 쏟아져 나갔다. 얼굴, 얼굴, 얼굴들의 소용돌이. 겨울 누비옷과 양털 가죽 모자. 남녀 대학생과 노인들, 아이들, 제복을 입은 노동자들, 장화를 신고 가죽 윗도리 를 입은 전차 운전사들과 전화국 종업원들, 남녀 중학생들. 처음 얼마 동안은 <바르샤반카>라든지 <희생되어 쓰러진 사람>,<마르세예어즈> 등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행렬 선두에서 뒷걸음으로 걸으면서 지휘봉 대신 모자를 뒤흔들며 노래를 지휘하 고 있던 사나이가 갑자기 앞쪽을 돌아보더니 옆의 간부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노래는 이내 흐 트러지며 멎어버렸다. 얼어붙은 길 위에 요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카자크 기병들이 전방에서 시위하는 행렬을 대기하고 있다는 정보가 시위 동정자에 의하여 지 휘자에게 급히 전달되었다. 가까운 데 있는 약국으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상관할 것 없어." 간부들이 말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냉철해야 돼. 이내 가까운 공공 건물을 점거하고, 군중에게 위험이 닥쳐왔다는 걸 말한 후에 해산시키기로 하자." 그럼 적당한 건물이 어느 것인지, 입씨름이 시작되었다. 점원협회 건물이 적당하다는 사람이 있 는가 하며, 기술전문학교를 내세우는 사람도 있었고, 해외통신학교가 좋다는 사람도 있었다. 의견의 일치를 보기도 전에 어느 중학교 건물의 모퉁이에 다다랐다. 여기가 거론되던 어느 건 물보다 적당한 피난처가 될 것 같았다. 학교 앞에 이르자 간부들이 대오에서 벗어나 현관 앞 반원형 층계에 올라가서 행렬의 선두를 향해 정지하라고 손짓했다. 여러 개의 출입문이 일제히 열리며 사람들은 현관 홀로 밀려들어가 층계를 올라갔다. "강당으로, 강당으로!" 뒤에서 몇 사람이 소리쳤으나, 군중은 그냥 안으로 몰려들어 제멋대로 복도와 교실로 흩어져 들어갔다. 간부들은 사람들을 간신히 강당으로 모아서 의자에 앉힌 후, 카자크 기병대가 전방에서 대기하 고 있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알리고자 했으나,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행진을 중단하고 큰 건물로 들어온 까닭을 그들은 즉흥적으로 집회를 갖기 위한 것으로 판단했다. 사실 즉각 집회가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행진하며 노래를 부르는 데 지친 사람들은 잠시 휴식을 하면서, 누가 자기를 대신하 여 떠들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연단에 나선 사람들은 한결같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혹시 사소한 의견의 차이가 있다손 치더라도 군중은 앉아서 담배나 피워 물고 대수럽 지 않게 넘겼다. 결국 제일 서투른 연사가 가장 열광적인 환호를 받게 되었다. 군중은 연사의 말을 이해하려고 도 하지 않고, 한마디 한마디에 무턱대고 환성을 지르곤 했다. 이렇게 방해를 받고도 그것을 탓하 려는 연사는 하나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수치를 알라!"는 구호를 외쳐대고, 또 항의 메시지를 기 초하기도 했다. 마침내 연사들의 지루한 목소리에 싫증이 난 군중은 일제히 자리를 막차고 일어 나, 생각할 틈도 없이 강당에서 뛰쳐나와 층계를 내려가서 거리로 쏟아져 나갔다. 다시 행진이 시 작되었다. 옥내에서 집회가 있었던 사이에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한길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차츰 눈은 더 많이 내렸다. 기병대가 달려들었을 때 시위 행렬 뒤쪽에 있던 사람들은 처음엔 아무것도 몰랐다. 군중은 일 제히 "우라(만세)!"를 거듭 외치며 앞에서부터 물결처럼 뒤로 퍼져왔다. "사람 살려!" "이 살인자!" 하는 몇 사람의 외치 소리가 뒤섞여 들러왔다. 이러한 찰나에, 그 고함 소리의 파도와 같이 군중 의 대오가 양편으로 싹 갈라지면서 생긴 좁다란 통로를 따라 말머리와 말갈기, 사벨을 치켜든 기 병들이 쏜살같이 내달았다. 일개 소대의 반쯤 되는 기병이 군중 사이를 뚫고 지나 방향을 바꾸어 대형을 갖추자, 다시 행 렬의 뒤쪽을 갈라 들어왔다. 마침내 살육이 시작되었다. 잠시 후 거리는 거의 텅 비어 버렸다. 사람들은 골목길로 도망쳐 들어갔다. 눈발이 좀 뜸해졌 다. 조용한 저녁거리는 마치 한 폭의 묵화와도 같았다. 이제 지붕 너머로 기울어 가는 석양이 건 물 모퉁이에서 손가락 하나를 길게 뻗어서, 기병의 모자에 달린 빨간 깃털과, 땅바닥에 뒹굴어 팔 락이는 붉은 깃발과, 눈 위에 불그스레한 피의 둥글고 긴 자국들. 길 위에 붉은 것들을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다. 머리통이 깨진 사나이 하나가 신음 소리를 내며 한 길가를 기어가고 있었다. 거리 끝까지 추격해 갔던 몇 명의 기병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빠른 걸음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머릿수건이 뒤로 벗 겨져 내려간 치베르진의 어머니가 말발굽에 채일 뻔하면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큰 소리로 "파샤! 파샤!"하고 거리를 우왕좌왕하면서 부르고 있었다. 파샤는 줄곧 어머니와 함께 있었으며 집회에서 맨 나중에 연설한 연사의 흉내를 내어 그녀를 웃기기까지 했는데, 기병대가 달려드는 속에서 갑자기 자취를 감췄던 것이다. 기병의 채찍이 그녀의 잔등을 후려쳤다. 다행히 두터운 솜옷을 입고 있어서 아픈 줄은 몰랐으 나, 그녀는 달려가는 기병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자기와 같은 노파에게, 그것도 한길가에서 채찍에 얻어맞은 것이 분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거리 양쪽을 두리번거리더니, 다행히도 길 건너 인도에 있는 소년의 모습을 발견했다. 소년은 식료품 가게와 석조 건물 현관 사이의 우묵한 곳에 서 있었다. 기병 한 사람이 인도에 말을 몰고 올라와 말 궁둥이와 옆구리로 사람들을 쫓아서 그곳에 몰리게 되었다. 사람들이 겁에 질려 허둥거리는 꼴이 재미있다는 듯이 그 기병은 승마 솜씨를 보이고 있었다. 뒷걸음질로 말을 사람들 사이로 몰아넣고 뒷발로 서게 하여, 마치 서커스의 곡예 모양 천천히 공 중에 말을 서게 했다. 그러는데 동료들이 되돌아온 것을 보고는 재빨리 방향을 바꾸더니 두서너 걸음으로 대오에 끼여들었다. 모퉁이에 몰려 있던 군중들이 흩어져갔다. 겁에 질려 꼼짝 못하고 서 있던 파샤가 노파 곁으로 달려왔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녀는 쉴새없이 욕설을 내뱉았다. "망할 놈의 살인자들 같으니! 폐하께서 자 유를 주셔서 백성들은 기뻐하고 있는데, 그놈들은 그게 못마땅한 거야. 모든 걸 다시 뒤엎어 버리 고 싶어서 저렇게 날뛰는 거야." 노파는 기병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통틀어 저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아들한테도 화를 내 고 있었다. 이렇게 화가 날 때는, 최근의 모든 소동이 쿠프린카와 같은 지지리 못났으면서도 똑똑 한 체하는 녀석들 탓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못난 녀석들은 대체 무슨 짓을 한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공연히 입만 까졌다니까! 파 샤야, 아까 그 연사의 흉내나 좀 내 보려무나. 자, 어서. 어쩌면 그렇게 똑같니! 정말 잘해!"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그녀는 아들한테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말 탄 고수머리 녀석이 자기 와 같은 늙은이의 궁둥이에다 채찍질을 하다니, 세상에 그런 법도 있느냐고. "하지만 어머니, 나한테 그러면 어떡해요! 내가 뭐 기병대장이나 헌병대장 이라도 된다는 건가 요?" 9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는 창가에 서서 도망쳐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시위 군중 이었다고 알게 되자, 한참 동안 멀리 바라보더니 그 속에 혹시 유라나 또 아는 사람이 끼여 있지 나 않을까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유라나 그 애의 친구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두도르 프의 아들 모습이 한 번 눈에 띄었을 분이다. 요 얼마 전에 왼쪽 어깨에서 총알을 뽑아냈는데, 이 제 또 저런 쓸데없는 데를 쏘다니고 있었다. 니콜라이는 그해 가을에 페테르부르그에서 이곳으로 왔었다. 모스크바에는 자기 집이 없었으나 여관에서 살기도 싫어서, 먼 친척인 스벤치츠키 댁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2층 구석의 서재 방 을 빌려쓰고 있었다. 스벤치츠키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으며, 고인이 된 양친이 예전에 돌고루끼 공작한테서 세를 얻었던 2층집이 너무 넓을 지경이었다. 그것은 돌고루끼 가문의 소유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여 러 가지 양식의 가옥들 중의 하나였다. 돌고루끼의 소유지는 좁은 골목길로 둘러싸인 세모진 땅 이었는데, 옛날부터 무치노이소도시로 불렸으며 거기에는 안뜰 셋과 정원 하나가 딸려 있었다. 서재에는 창문이 넷이나 있었으나 방안은 어둠침침했다. 책과 서류들, 융단과 판화 따위가 어수 선하게 놓여 있었다. 서재 쪽에 반원형 발코니가 달려 있었고 발코니의 2중 유리문은 겨울에 대 비하여 폐쇄되어 있었다. 발코니의 유리문과 서재의 두 군데 창문에서 내려다보이는 골목길은 썰매자국이 있었고, 구부 정하게 늘어선 작은 집들과 울타리를 따라 멀리 저쪽으로 뻗어 있었다. 정원으로부터 연한 보랏빛이 방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허옇게 서리가 덮인 나무와 녹아 내리는 촛물 모양으로 축 늘어진 나뭇가지가 서재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다는 듯이 방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니콜라이는 오솔길에 서서 페테르부르그에서 보낸 지난겨울을 회상하고 있었다. 가폰, 고리끼, 비떼, 그리고 그가 상면했던 현대 작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구상중인 책을 쓰려고 그 북새 통을 피해서 이 고도로 평온과 정적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여자전문학교와 종교철학협회, 적십자사와 파업위원회 기금 등을 위하여 날마다 강연을 해야 했지 때문에 차분히 앉아서 생각할 여유라곤 전혀 없었다. 마치 작은 난을 피하기 위해 큰 난중으로 뛰어든 격이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스위스의 외진 고장 같은 곳으로 가서 호수 와 산, 하늘이 맑은 대기의 고요 속에 파묻히는 것이다. 니콜라이는 창가에서 물러났다. 누구를 방문하든지 아니면 그냥 거리를 산책하기 위하여 집을 나서고 싶었다. 그런데 톨스토이 주의자인 브이볼로치노프가 무슨 용건이 있어서 방문하겠다던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방안을 서성거리다가 문득 조카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니콜라이는 볼가강 연안 벽지에서 페테르부르그로 옮겨갈 때, 베제냐핀, 오스트로므이슐렌스키, 셀랴빈, 미하엘리스, 스벤치츠키, 그로메코 등의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는 모스크바에 유라를 데 려왔던 것이다. 처음엔 주책없는 떠버리 노인이며, 친척들간에도 폐지까라고 불리던 오스트로므이 슐렌스키에게 유라를 맡겼었다. 노인은 자기가 돌봐주던 모쨔라는 양녀와 동거 생활을 하고 있어 서, 그런 죄 많은 생활을 자기 나름으로 구질서의 파괴자이며 진보적 사상가로 자처하고 있었다. 게다가 친척들의 신의를 저버리고 유라의 양육비로 위탁한 돈을 가로채 써버리기까지 했었다. 그 래서 유라는 그로메코 교수 댁으로 옮겨 지금은 거기서 살고 있었다. 그로메코 댁의 분위기는 유라를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유라와 유라의 친한 동급생 미샤 고르돈, 그리고 그로메코 교수의 딸 토냐. '그 애들은 재미있 는 3인조'라고 니콜라이는 생각했다. 셋이 다 <사랑의 의미>나 <크로이체르 소나타> 따위의 책 을 탐독했고, 광적으로 순결을 부르짖고 있었다. 미성년의 한때에 순결을 주장하는 것도 좋은 일 이긴 하지만 너무나 도가 지나쳤다. 참으로 순진하면서도 괴상한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관능의 세계를 몹시 멸시하여 '천박'하다는 딱지를 붙이고, 지루하도록 이런 표현을 남발하곤 했다. 본능도 호색 문학도 마음도 육체에 관계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천박'하다고 규정했다. 얼마나 서투른 표현인가! 그리하여 이 말을 입밖에 낼 때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것이었다. '내가 모스크바에 있었더라면'하고 니콜라이는 생각했다. '적당한 선에서 머무르게 할 수도 있었 을 텐데, 순수한 것도 좋지만 그것도 정도 문제가 아닌가...' "오오, 브이볼로치노프 씨, 어서 오시오!" 니콜라이는 손님을 맞았다. 10 회색 루바쉬까를 널찍한 혁대로 졸라맨 뚱뚱한 사나이가 들어왔다. 포제 장화를 신고 있었으며 바지의 무릎 부분이 부풀어 있었다. 그는 세상사에는 초연한 호인다운 인상을 풍겼다. 검고 널찍 한 끈이 달린 조그만 코안경이 코위에 꼴사납게 놓여 있었다. 현관에서 외투는 벗었으나 목도리가 그냥 목에 걸린 채 방바닥에 질질 끌리고 또 둥근 펠트 모 자를 손에 들고 들어왔다. 그러한 것들이 방해가 되어 그는 악수를 나눌 수도 또 인사말조차 제 대로 건네지 못했다. "으음..."하고는 유심히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데나 놓아요." 니콜라이는 브이볼로치노프에게 제자 중 한 사람이었으나. 안식을 모르는 천재의 사상이 그 사람에게는 형편없이 자질구레한 것으로 변질되어 태평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 었다. 어떤 학교에서 열리는 정치범 구제 집회의 연사로 나와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니클라이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 학교에서는 벌써 연설을 했는데요." "정치범 구제를 위해서였나요?" "그렇지요." "한 번 더 해 주시오." 니콜라이는 처음엔 망설였으나 결국은 승낙하고 말았다. 용건은 그것으로 끝났다. 니콜라이는 손님을 굳이 있도록 만류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내 돌아가 도 무방했으나, 빨리 돌아가는 것이 멋쩍게 생각되어, 무슨 흥미 있고 자연스러운 화제로 잠시 얘 기나 나눌 생각이었다. 그런데 화제는 오히려 어색하고 불쾌하게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당신은 퇴폐주의가 되었군요? 신비주의에 흘러버리게 되었단 말이지요?" "그건 또 무슨 뜻이오?" "이봐요, 그건 안 되는 일이야. 우리가 젬스트보를 기억하지요?" "기억하고말구. 함께 선거 운동을 하지 않았소?" "그리고 우리는 농촌학교나 사범학교를 위해 함께 일했지 않소. 꽤 좋은 일이었어. 생각나오?" "물론이지. 열렬한 싸움이었지." "그 후 당신은 공중 위생이라든지 사회 복지에 관심을 가졌지요?" "그렇지, 얼마 동안은요." "흠, 그런데 지금은 폰이나 님프라든지 고대 그리스의 청년 시민이니,<태양처럼 되자> 따위가 인텔리 냄새를 풍겨대고 있으니,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소. 당신같이 유머를 알고 민중을 아는 지적인 인간이 그런 소리를 하다니... 제발, 그만 해둡시다. 혹시 내가 당신의 무슨 비밀이나 건드 리지 않았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우린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요? 나의 사상도 모르면서." "지금 러시아가 필요한 것은 폰이나 님프가 아니라 학교와 병원이오." "그렇지 않다고 하지는 않았소." "농민은 헐벗고 굶주려 있고..." 이렇게 대화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니콜라이는 쓸데없는 이야기가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도, 상징파의 일부 작가에게 끌렸던 까닭을 설명하려 했다. 이윽고 톨스토이 사상에 화제를 돌렸 다. "어떤 점에 있어서는 나도 동감이지만, 인간은 미에 헌신하면 할수록 선에서 멀어진다고 톨스 토이는 말하고 있었어." "당신은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지요? 미로써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이를테면 도스토 예프스키나 로자노프, 신 비극 따위로 말이죠?" "잠깐만. 내 설명부터 들어요. 난 이렇게 생각해요. 이를테면 감옥도 좋고, 내세의 응보도 좋고, 어떤 방법에 의해서건 인간 내부에 잠자고 있는 수성을 억제할 방도가 있다면, 인간성의 최고 상 징이 자기 희생적인 전도자가 아니라. 서커스의 채찍을 휘두르는 사자의 조련사가 될 것이오. 그 러나 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을 야수보다 높은 위치에 올려놓은 것은 몽둥이가 아니라 마음속의 음악이오. 무엇으로도 물리칠 수 없는 진리의 힘, 본보기의 매력이오. 복음서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도덕적인 가르침과 계율이라고 사람들은 언제나 생각해왔소. 그러나 나로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일상 생활 속에서 비유를 말했다는 사실, 즉 날마 다 쓰고 있는 현실적이 말로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오. 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사상은 사라질지라도 인간들끼리의 영혼의 교감은 불멸의 것이며, 생명의 모든 것이 의미를 지니기 때문 에 생명의 모든 것은 상징적이라 말할 수 있어요."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 소리로군. 그런 건 책으로나 써내는 것이 좋겠소." 겨우 브이볼로치노프가 돌아가 버렸다. 니콜라이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아무런 효과도 반응도 없는 어리석은 자에게 자기 가슴속에 깊이 간직해 온 사상의 일부를 털어놓은 데 대한 분노가 치 밀어 올라왔다. 이따금 있는 일이지만, 그의 분노는 이윽고 대상을 바꾸었다. 그는 마치 자기 습 관대로 브이볼로치노프에 대한 것은 말끔히 잊어버렸다. 그는 다른 일을 상기해 냈다. 니콜라이는 일기를 쓰고 있지는 않았으나. 1년에 한두 번은 각별히 머리에 떠오른 사상을 두터 운 노트에 써놓곤 했다. 지금 그는 노트를 꺼내 놓고 읽기 쉬운 큼직한 글씨로 쓰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슈레진게르라는 경망스러운 여자 때문에 온종일 기분이 우울하다. 점심때까지 붙잡 고 앉아서 무려 두시간 동안이나 잠꼬대 같은 소리를 낭독하는 바람에 나중엔 짜증이 날 지경이 었다. A하는 작곡가의 <천지 개벽>교향곡을 위해 작사를 한 상징파 시인 B의 운문인데, 유성의 정령이니, 사원소의 못소리니 하는 따위의 헛소리의 나열이었다. 참고 간신히 듣고 있었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그만둬 달라고 애원하게 됐다. 설사 <파우스트> 속에 그런 말들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참을 수 없도록 부자연스러운 이 유를 나는 문득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전체가 무리하게 꾸며낸 표현이어서 아무도 흥미를 느끼 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현대인이 우주의 수수께끼에 압도 될 때엔 헤시오도스의 시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학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그 형식이 시대 착오를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또 과학이 이미 분명하게 밝혀낸 것을 땅과 하 늘의 정령들이 다시 혼란시키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도 아니다. 이 장르가 현대 예술의 정신과 본 질, 원동력과 전혀 맞아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우주 진화론은 고대 세계-인간이 아직 많이 살지 않아서 자연이 인간에 의하여 밀려나지 않았던 세계인 것이다. 맘모스가 지상을 활보하고 커다란 용이나 공룡의 기억이 인간의 머리 속 에 아직도 생생했다. 자연이 인간의 눈을 사로잡고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던 그 시대에는 아직도 신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 시대는 인류 연대지의 첫 페이지가 시작되는 시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고대 세계는 로마에서 끝났다. 인구 과잉이 그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로마는 다른 나라에서 빌어온 신들과 정복당한 사람들의 이시장. 땅과 하늘의 두 층계로 이루어 진 특매장이었다. 장폐색처럼 세 겹으로 묶어져 감긴 오물덩어리였다. 다키아 사람, 헤룰리아 사 람, 스키티아 사람, 사르마티아 사람, 북쪽 여러 나라 사람들. 육중한 수레바퀴, 비곗살에 가리어 진 눈, 남색, 두 겹으로 늘어진 턱, 무지몽매한 황제들. 학식이 있는 노예의 살점을 뜯어먹고 사는 물고기. 세계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이 우글거렸고, 모두 커다란 원형 투기장 통로에 빽빽 이 몰려서 처참한 꼴이 되었다. 이윽고 이 우울한 황금과 대리석의 퇴적 속으로 휘황한 빛에 감싸이며, 인간미에 넘친 시골티 나는 갈릴리 사람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때부터는 신도 없고, 국민도 없고, 오직 한 사람-목수이며 농사 짓는 사람, 낙조에 양떼를 모는 양치기, 조금도 떨치기를 바라지 않는 이름을 가진 사람, 그러나 세상의 어머니들의 자장가로 불려지며 전세계의 화랑에 그려진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11 페트로프카 거리는 페테르부르그의 한 모퉁이를 모스크바에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았다. 길 양쪽에 늘어선 집들, 건물의 차분하고 얌전한 장식, 책방, 도서관, 지도 제작소, 고급 담배집, 고급 요리점과 커다란 외등 위에 놓인 뿌옇고 둥근 가스등과 등 사이의 전면의 문 따위 모든 것이 그 러한 인상을 주었다. 겨울 거리를 다니는 삼들은 몹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건실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수입이 좋은 자유 직업을 가진 사람들뿐이었다. 코마롭스키는 여기서 독신으로 살았다. 단단한 참나무 난간이 있는 2층집 호화주택이었다. 엠마 에르네스토브나는 가정부라기보다는 조용한 성의 여인이었으며, 그녀는 눈에 띄지도 않고, 말도 없이 집안 일을 빈틈없게 또 신중하게 꾸려나갔다. 주인의 생활에는, 조심스럽게 일체 간섭을 하 려 들지 않았다. 그도 역시 훌륭한 신사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품위와 예의로 그녀를 대했고, 올 드미스인 그녀의 평온한 생활에 해롭겠다고 생각되면 남녀를 불문하고 집에 초대하지 않기로 했 었다. 집안은 항상 수도원 같이 조용했으며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고, 마치 수술실처럼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일요일 아침이면 코마롭스키는 불독을 끌고 페트로프카에서 쿠즈네츠키 다리까지 천천히 산책 하면서, 이따금 네거리에서 배우며 도박사인 사타니지와 만나곤 했다. 두 사람은 쿠즈네츼 다리를 함께 걸으며 짤막한 농담이나 의견을 나누며 세상사를 경멸하듯 나 무라기도 하고 너털웃음을 웃어대기도 했다. 그들의 높은 웃음소리는 개짓는 소리만큼 무의미하 게 공기를 뒤흔들어 놓았다. 12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양철 홈통이나 처마끝 차양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면서 봄소식을 알리듯 지붕에서 지붕으로 물방울이 그 소식을 전했다. 해빙기였다. 라라는 넋잃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자기 몸에 무 슨 일이 있었는지 의식했다. 다들 잠들어 있었다. 다시금 허탈한 마음에 사로잡혀 어머니의 화장대 앞에 앉았다. 레이스의 테가 둘린 밝은 연보랏빛 옷에, 저녁 외출을 위해 가게에서 특별히 빌어낸 기다란 베일을 걸친 꼴이 마치 가장복 같은 차림이었다. 화장대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움켜잡고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과 마주 앉았으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있었다. 이윽고 두 팔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머니가 알면, 난 죽일 거야. 그리고 자기도 자살하고 말 거야.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그러나 이젠 다 글렀어.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거지? 그렇지, 타락한 여자. 프랑스 소설에 흔히 나오는 여자. 더욱이 내 일도 태연한 얼굴로 학교에 나가, 나에 비하면 젖먹이 같은 다른 아이들과 나란히 앉겠지.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몇 년이 지난 후,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라라는 올랴에게 숨김없이 말하게 되겠지. 올랴는 그 녀를 껴안고 울음을 터뜨리게 되겠지. 창밖에는 물방울 튕기는 소리와 눈 녹아 내리는 소리가 속삭였다. 길 건너에서 누군가 옆집 문 을 두들기고 있었다. 라라는 두 팔 속에 얼굴을 묻고 있을 뿐이었다. 어깨가 들먹였다. 그녀는 흐 느껴 울고 있었다. 13 "그건 아무래도 좋다니까, 엠마 에르네스토브나. 다 귀찮아요." 그는 서랍을 이것저것 여닫으며 뒤지더니 커프스 단추며 칼라를 양탄자나 소파 위에 닥치는 대 로 내던졌으나, 자기 자신도 무엇을 찾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라라였다. 하지만 이번 일요일에는 만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는 우리 안에 갇힌 맹수처럼 안절부절못하고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요정 같은 그녀의 아름다움은 너무나 매혹적인 것이었다. 그녀의 손길은 최상의 이념인 양 눈 부셨다. 호텔 방벽에 던져진 그녀의 그림자는 순결의 실루엣 그것이었다. 그녀의 속옷이 자수 틀 에 끼운 천처럼 팽팽하고 또 단순하게 가슴을 감싸고 있었다. 아래 한길에서 느린 말발굽 소리가 들려 오자 그는 이내 손가락으로 창문을 톡톡 두드린다. 눈 을 지긋이 감으며 "라라"하고 속삭여보았다. 그의 팔에 안겼던 그녀의 머리가 문득 눈앞에 떠올랐 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지켜보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베개에서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 아름 다움은 연기처럼 그의 눈에 몽롱하게 스며들어 심장을 파고들었다. 일요일 산책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코마롭스키는 잭을 데리고 몇 걸음 걷다가 멈춰 섰다. 쿠즈 네츠키 다리며 사타니지와의 농지거리, 아는 사람과 마주칠 일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니다, 견 딜 수 없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되돌아섰다. 개는 뜻밖이라는 듯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 더니 슬슬 뒤따라왔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코마롭스키는 생각했다. '무슨 마귀가 씌운 걸 까?' 양심의 가책인가, 연민 탓일까, 후회하는 걸까? 아니면 불안감 때문인가? 아니야, 그녀는 무 사히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잊어버릴 수가 없단 말인가? 그는 집에 돌아와서 층계를 올라가 첫 번째 층계참을 지나쳤다. 창문 네 귀퉁이의 색채 장식 무늬가 발밑에 색색의 빛 조각을 던지고 있었다. 다음 층계에서 그는 발을 멈췄다. 가슴을 짓누르 며 온몸을 죄어드는 이 불안한 기분을 극복해야 한다! 나는 어린애가 아니지 않은가. 죽은 친구의 딸, 아직도 젖비린내 나는 계집애한테 정신이 빠져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나는 자기 자신과 자기 습관에 진실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코마롭스키는 층계를 힘껏 움켜쥔 채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몸을 돌려 층계를 내려갔다. 층계참의 색색의 빛 속에 그의 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밑으로 처진 아래턱에서 침을 흘리는 늙은 난쟁이처럼 얼굴을 쳐들고 그를 우러러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 개는 그 처녀를 미워하고 있었다. 언젠가 짖으며 덤벼들어 그녀의 양말을 물어뜯은 일이 있 었다. 그녀가 무슨 인정 어린 짓을 자기 주인에게 전할까봐 그녀를 질투하고 있었다. "그래. 지금 모든 것이 이전과 다를 서이 없어! 사타니지도, 농담이나 장난도. 이놈아 그래, 이 거나 먹어라, 이거나!" 기는 단장으로 개를 때리며 발길로 찼다. 잭은 비명을 지르고 꼬리를 달달 떨면서 층계 위를 뛰어올라가, 엠마 에르네스토브나에게 알리려고 문을 긁어댔다. 며칠이 지나고 또 몇 주일이 흘렀다. 14 오, 피할 길 없는 이 속박! 라라의 인생에 코마롭스키가 침입한 것이 그녀를 미움의 구렁텅이 로 빠뜨려 넣었다면, 오히려 반대로 그녀가 그와의 관계를 끊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다. 백발이 희끗희끗 보이는 아버지와 같은 나이의 멋쟁이 남자, 집회에서 박수를 받기도 하고 신 문에 크게 나기도 하는 남자가 그녀를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써가며 음악회나 극장에 동반하고, 그녀를 소중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지성을 향상시켜 주겠다'는 그의 태도가 라라의 마음을 사로잡 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갈색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한창 장난칠 나이였다. 코마롭스키가 마차 속에서 앞에 마부가 앉았거나 말거나, 또 극장 특석에서 남들의 이목도 아랑 곳없이 그녀에게 열을 올리는 그 대담성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잠자는 작은 악마의 눈을 뜨게 하여 그의 흉내를 내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어린애 같은 불장난은 그다지 오래 갈 수가 없었다. 가슴을 저미는 절망과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가 차츰 뿌리를 뻗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노상 졸기만 했다. 밤이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울기만 해서 종일토록 머리가 쑤셔댔다. 학교에서 너무 공부에 열중한 탓 으로 피곤한 거라고 그녀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15 라라는 그를 증오하며 저주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그녀는 이런 생각을 되새기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녀의 모든 생활이 그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그의 노예가 되었 을까? 무엇으로 그녀를 정복했을까? 그리고 또 그녀는 무엇 때문에 그에게 몸을 허락하고, 숨길 수 없는 굴욕에 떨면서도 그의 욕정을 충족시켜 주는 것일까? 대체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무엇일 까? 그의 나이일까, 또는 어머니가 그에게서 돈을 얻어 쓰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교묘하 게 그녀를 위협하기 때문일까? 아니, 절대로 그것은 아니다! 라라가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 그가 얼마나 애타게 그녀를 갈망하고 있는지 그것을 그녀가 모 를 리가 없었다. 두려워할 까닭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양심만은 결백했다. 부끄럽고 두려운 것은 오히려 남자 쪽이었다. 자기가 배신을 당하게 되지나 않을까 겁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 는 절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한테는 그 사람같이 냉혹한 데가 없었다. 그의 냉혹한 성격이야 말로 그에게 의지하려는 자와 약한 자들을 대하는 중요한 무기인 것이다. 두 삶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것 때문에 인생이 온통 이처럼 무섭게 변해버린 것이 다. 무엇이 그녀의 이성의 귀를 멀게 했을까, 천둥이나 번개였을까? 아니다, 그것은 은밀한 눈길 과 속삭임이었다. 인생이란 간사하고도 아리송한 것이다. 한 가닥의 실오라기는 거미줄 마냥 가늘 지만, 그것은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더 얽혀들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제 아무리 강자라 할지라도 약자나 비열한 자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16 설사 결혼을 한들 달라질 것이 있을까?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또 자기 궤변에 빠 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따금 그곳을 빠져나갈 도리가 없다는 고뇌에 젖곤 했다. 그는 그녀의 발아래 엎드려 애원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았다. "앞으로 이대로 계속할 수는 없 어. 나와 너의 사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봐. 너는 지금 파멸로 줄달음치고 있는 거야. 어머 니한테 말하고 나와 결혼하기로 하자."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마치 그녀가 반대라도 한 것처럼 진지하게 제의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말뿐이었다. 라라는 이런 비극적인 헛소리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는 긴 베일로 얼굴을 가린 그녀를 그 몸서리치는 레스토랑 별실로 끌어들 이곤 했다. 그곳에서 웨이터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리며 그녀를 더듬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 라면, 그것이 천박한 짓일까'.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자문해보았다. 하루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땅에 묻혀 있었다. 왼쪽 어깨와 오른쪽 발끝만이 따위에 남아 있었 다. 한 포기의 풀이 왼쪽 젖꼭지에서 돋아 올랐다. 땅 위에선 사람들이 <검은 눈동자와 흰 젖가 슴>,<마샤는 냇가에 나갈 수 없다네> 따위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17 라라는 신앙심이 두텁지 못했다. 의식 따위는 믿지도 않았다. 그러나 인생을 참고 살아가기 위 해서는 간혹 그 어떤 내면적인 음악의 반주를 필요로 할 때가 있었다. 그러한 음악은 언제나 자 기 스스로가 작곡할 수는 없었다. 음악은 바로 인생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라라는 음악을 들으며 울기 위하여 교회에 가곤 했다. 12월 초순의 어느 날, 라라는 마치 <뇌우>의 카체리나와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무거운 마음으 로 기도하러 갔다. 지금이라도 발밑의 땅이 꺼지고 교회당의 둥근 천정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된대도 겁날 건 없었다. 그것으로 모든 일은 끝장이 나고 말 테니까. 다만 이 수다쟁이 올랴를 데리고 온 것이 후회될 뿐이었다. "저기 소콜로프가 있어."올랴가 라라의 귀에다 속삭였다. "쉿, 제발 좀 가만있어. 소콜로프가 누군데?" "프로프 아파나시예비치 소콜로프를 몰라? 저기서 성가를 부르고 있잖아. 나의 팔촌 아저씨뻘 되는 사람이야." "아아, 저 성가를 부르는 사람 말이지? 치베르진네 친척이지? 자, 이제 좀 잠자코 있어 줘. 귀 찮게 굴지 말고." 방금 미사가 시작되었다. <내 영혼, 주를 찬송하며 나의 모든 것, 성스러운 주님의 이름으로 찬 송합니다>라는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소리는 거의 비어 있는 교회당 안에서 크게 메아리쳐 울렸다. 신자들은 제단 앞쪽에만 몰려 있 었다. 새로 지은 교회당 건물이었다. 맑은 유리 창문은 눈에 덮여 잿빛 거리와 오가는 통행인들의 모습을 희미하게 보이게 했다. 교구의 직원이 창가에 서서, 미사에는 아랑곳없이 냉랭한 창문이나 거리와도 같은 목소리로 귀머거리 여자 거지를 보고 호통을 치고 있었다. 라라가 동전을 손에 쥐고 살며시 신자들의 사이를 빠져 문가로 가서 올랴와 자기 몫으로 양초 두 자루를 사 가지고 되돌아오는 사이에 소콜로프는 <산 위에서의 가르침>을 낭송했다. "행복할 지어다. 마음이 가난한 자여... 행복할 지어다. 슬퍼 우는 자여... 행복할 지어다. 의에 굶주려 목마른 자여..." 라라는 흠칫 몸을 떨며 멈춰 섰다. 저건 바로 나를 위해 하는 말이야. '행복할 지어다. 짓밟힌 자에게도 할 말은 있다. 짓밟힌 자에게도 미래는 밝다. 이것이 주님의 생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뜻인 것이다.' 18 프레스냐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였다. 기샤르네 집은 폭동 지구에 있었다. 집에서 몇 걸음밖에 안 되는 트베르스카야 거리에는 바리케이드가 구축되고 있었다. 거실 창문으로 그것이 내다보였다. 돌과 쓰레기를 얼음으로 굳혀서 얼음벽을 만들기 위해 사람 들은 앞뜰에서 양동이로 물을 날랐다. 이웃집 뜰은 노동자 자위대의 집합소가 되어 있었다. 그곳 은 구호소나 급식소 같은 곳이었다. 그 집합소에 모인 소년들 가운데서 라라는 두 소년밖에는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하나는 그녀 의 동급생 나쟈의 남자 친구인 니카 두도로프였다. 자부심이 강하고 직선적이며 말수가 적은 편 이었다. 라라는 나쟈네 집에서 이 소년과 알게 되었지만, 성격상 그는 자기와 비슷한 점이 많은 그녀에게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또 한 소년은 올랴 제미나의 할머니인 치베르지나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실업계 중학생 파샤 였다. 라라는 그 할머니네 집에서 파샤와 만났을 때, 자기가 이 소년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된 것 을 알았다. 파샤는 아직 미숙한 어린애처럼 순진해서, 마치 자작나무 숲이 있고 구름이 떠다니는 교회에 소풍하러 나온 듯이 라라와 만나게 된 들뜬 기쁨을 감추지도 않고, 웃음거리가 되리라는 두려움도 없이 그녀를 환대하는 표정을 거침없이 보였었다. 라라는 파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여겨지는 순간부터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이용하기 시작했 다. 그러나 부드럽고 유순한 그의 성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한 것은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두 사람의 우정이 훨씬 더 가까워져서였다. 그때 이미 파샤 자신도 라라를 죽도록 사랑하며, 그녀 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일생을 바쳐도 후회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두 소년은 어른들의 놀이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놀이인 전쟁판에 끼어들고 있었다. 더욱이 이 전쟁에 끼어든다는 것은 유형이나 교수형의 위험성이 많았다. 그러나 털실 모자 꼬리에 털 방울 을 달고 다니는, 아직도 부모의 품속에 있을 어린애들이었다. 라라는 어른스럽게 두 아이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들의 위험한 놀이에는 순진한 데가 있었다. 그 순진성이 엉겨 붙은 고드름이 검게 보이는, 추위가 휘몰아치는 밤에도 짙푸른 그림자에도, 소년들이 잠복하고 있는 맞은편 집에도, 무엇보다도 거기서 줄곧 들려오는 권총 소리에도 울리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총을 쏘고 있구나' 하고 라라는 생각했다. 니카와 파샤뿐만 아니라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 도시 전체에 대한 생각이 기도 했다. '착하고 훌륭한 아이들. 착하기 때문에, 그리고 훌륭하기 때문에 총을 쏘고 있는 것이 다.' 19 바리케이드에 포격을 가할지 모르니 집이 위험하리라는 소문이 번졌다. 모스크바의 다른 지역 으로 친지를 찾아 피난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이 지역은 벌써 포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래서 가까운 곳에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문득 체르노고리예 여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여관은 벌써 만원이 되어 있었으며 다른 곳도 사정은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예전의 친분을 생각해서 침구를 넣어두는 방을 그들을 위해 하나 내 주기로 약속했다. 커다란 트렁크 따위를 실어 나르면 남의 눈에 띄기 쉬우므로 긴요한 물건만을 보자기 세 개에 꾸렸다. 그러고서도 여관으로 옮기는 것을 하루하루 미루고 있었다. 양장점의 고용인들은 한집 식구나 다름이 없어서 총파업이 개시된 후에도 그냥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춥고 음산한 어느 날 저녁 무렵에 한길 쪽 출입문의 초인종이 울렸다. 어떤 사람 이 들어오더니, 파업에 참가할 것을 독려하기 위해 온 것이니 현관에서 주인을 좀 보자고 했다. 현관으로 페치소바가 대신 나갔다. "얘들아, 모두 이리 오너라!" 그녀는 곧 직공들을 그곳에 모이 게 한 후 방문객을 소개했다. 그는 서투른 솜씨지만 한 사람 한 사람씩 악수를 나누고, 페치소바 한테서 무슨 다짐을 받았는지, 그냥 돌아가 버렸다. 직공들은 작업실로 돌아가자 숄을 걸치고 좁은 털외투를 입느라고 팔을 머리 위로 치켜들며 부 산했다. "아니, 왜들이래?" 마담 기샤르가 황급히 달려나오며 물었다. "우리는 갑니다. 우리도 파업에 참가하기로 했어요." "그렇지만 내가, 내가 너희들에게 무엇을 잘못했다는 거냐?" 마담 기샤르는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 섭섭히 생각진 마세요. 우리가 주인한테 유감이 있어서 이러는 것은 아니예요. 오히려 매 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나 주인에게 있는 문제가 아니예요. 누구 나가 다, 온 세상이 다 하고 있는 일을 우리만 거역할 순 없잖아요?"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가버렸다. 올랴와 페치소바까짇 가게를 떠났다. 페치소바는 작별 인 사를 하면서 주인과 가게를 위하여 일부러 파업을 했다고 마담 기샤르에게 소곤거렸다. 그러나 마담은 분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배은망덕한 것들 같으니! 내가 사람들을 잘못 봤어! 고것들이, 내가 그만큼 친절하게 대해 준 보답이 고작 이거란 말인가! 그래 좋아, 애들은 철따구니가 없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그 늙은 것까 지 나한테 이럴 줄이야!" "엄마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잖아요." 라라는 어머니를 위로했다. "악의가 있어서 하는 짓은 아니예요. 오히려 그 반대일 거예요. 지금 주위에서 하고 있는 일은 인도적인 일을 위해서, 약자 를 보호하며 부녀자를 위해서 하는 일이에요. 그래요, 그것은 부인하지는 마세요. 그 덕택에 언젠 가는 우리들도 잘살게 될 날이 올 테니까요." 어머니는 도무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넌 그렇다니까." 어머니는 훌쩍였다. "내가 속이 상할 때면 넌 으레 내 속을 뒤집어 놓 는 그런 소리만 지껄이는구나. 남이 나한테 못할 짓을 하는 걸보고도, 그게 날 위해서 하는 짓이 라고 우겨대니 말이다. 정말 이러다간 미칠 것만 같구나." 로쟈는 사관학교에 가 있었다. 라라는 어머니와 단둘이서 텅 빈 집안을 서성거렸다. 가로등이 켜지지 않은 한길이 방안을 기웃거리며, 창문이 밖을 쏘아보고 있었다. "여관으로 가요, 어머니. 더 어두워지게 전에." 라라가 애원했다. "아시겠어요, 어머니. 늑장을 부리지 말고 지금 곧 가요." "필라프, 필라프!" 그들은 문지기를 불렀다. "우릴 체르노고리예까지 데려다 줘요." "예, 알았습니다." "보따리를 갖다 눠야겠어. 세상이 조용해질 때까지 집 좀 잘 봐줘요. 그리고 카나리아한테 모이 와 물을 주는 것도 잊지 말고. 자, 이 열쇠를 받아요. 더 일러둘 말은 없을 것 같은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곧 알려줘요." "예, 알겠습니다." "고맙네, 필라프.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그런 여기 좀 앉았다 떠나기로 하자." 그들은 거리에 나왔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웠다 밖으로 나왔을 때처럼 바깥 공기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마치 선반으로 갈고 닦아 동그랗게 된 것처럼 음향이 가볍게 메아리치며 서리가 내린 상쾌한 공간을 굴러갔다. 멀리서 단발 사격과 일제 사격의 총성이 울리며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 는 것같이 쿵쾅거렸다. 필라프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으나, 라라와 어머니는 그것이 공포 쏘는 소리라고 우겨댔다. "바보 같은 소리. 생각해봐요, 필라프. 쏘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데 그게 공포가 아닐 리 있겠 어? 틀림없이 공포를 쏘는 걸 거야." 그런데 네거리에서 순찰병을 만나 검문을 받았다. 카자크 순찰병들은 히죽히죽 웃으며 머리끝 에서 발끝까지 손으로 몸수색을 했다. 턱걸이 끈이 달린 둥근 모자를 모양을 부려서 한쪽 귀 쪽 으로 삐뚜름하게 쓰고 있어서 모두 애꾸눈같이 보였다. '참 잘됐군!' 라라는 생각했다. 이 지역이 차단되고 있는 동안만은 코마롭스키를 만나지 않을 테 니까. 어머니 때문에 그와의 관계를 끊을 수도 없었다. 어머니에게 그이와 만나지 말라고 말할 수 도 없는 일이 아닌가. 섣불리 그런 말을 했다간 모든 일이 드러나고 만다. 설사 드러나 버린다 해 도 겁날 것은 없다! 오오, 주여, 깨끗이 끝장만 낼 수 있다면 어떻게 되어도 좋습니다! 주여, 주 여! 그 생각만 하면 길거리에서 금세 기절해버릴 것만 같았다. 여기서 그녀는 지나간 일을 회상했 다. 그때 그 이상한 그림의 제목이 뭐라 하더라? 뚱뚱한 로마인의 그림이었다. 레스토랑의 그 처 음 만나던 별실에 걸려 있었다. 모든 것은 바로 그 별실에서 시작된 것이다. <여자, 아니면 항아 리>였던가? 맞았어. 그런 제목을 가진 유명한 그림이었다. 그때만 해도 라라는 아직 여자가 되지 못했다. 그 값비싼 예술 작품과 자기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식탁 위에는 굉장한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얘, 어딜 가려고 그렇게 달려가는 거야? 쫓아갈 수가 없구나." 마담 기샤르가 뒤에서 숨을 헐 떡이며 투덜거렸다. 라라는 무슨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무언가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자랑스러운 힘에 끌려 허공으로 껑충껑충 걷는 것 같았다. '얼마나 멋있는가.' 총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생각했다. '행복할 지어다, 짓밟힌 자여. 행복할 지 어다, 속은 자여. 하나님이 보내 주는 총소리다! 저 총소리, 저건 바로 내 마음이다!' 20 그로메코 형제는 시브체프 브라조크 거리와 다른 조그만 거리가 엇갈리는 모퉁이에 살고 있었 다. 알렉산드르 그로메코와 니콜라이 그로메코는 둘 다 화학 교수이며, 형은 페트롭스크 아카데미 에서, 동생은 모스크바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니콜라이는 미혼이었지만 알렉산드르에겐 안 나 이바노브나 부인이 있었다. 안나 부인의 친정은 크류게르가인데, 제철업자인 아버지는 우랄 지 방의 유라친 근처에 큰 영지도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곳에는 폐광과 채산이 맞지 않는 광산도 여 러 개 있었다. 그로메코 댁은 2층집이었다. 위층에는 침실과 연구실, 알렉산드르 교수의 서재와 독서실, 안나 부인의 거실, 토냐와 유라의 방이 있었다. 아래층은 주로 손님 접대를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 연 두색 커튼, 윤기 나는 피아노 뚜껑, 커다란 어항, 연둣빛 가구 커버, 화분에 심어놓은 해초 같은 식물들이 졸고 있듯이 움직이는 푸른 바닷속을 연상시켰다. 그로메코네 사람들은 모두 교양이 있고 친절할 뿐만 아니라 미술과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 이 따금 손님을 초대해서 실내악 모임을 가졌는데, 여기서는 피아노 3중주와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 4중주 같은 것이 연주되곤 했다. 1906년 1월, 니콜라이가 해외로 여행을 떠난 후에 그로메코 댁에서는 또 이런 실내악 모임이 열릴 예정이었다. 타네예프의 제자인 젊은 작곡가의 바이올린 소나타의 첫 번째 연주와 차이코프 스키의 3중주곡이 연주될 것이다. 준비는 전날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홀의 가구를 옮기고, 한쪽 구석에서는 피아노 조율사가 몇십 번이나 같은 화음을 쳐보기도 하고, 한꺼번에 콩을 흩뿌리듯 아르페지오를 치기도 했다. 부엌에서 는 닭의 털을 뽑고, 야채를 씻고, 샐러드 소스를 만들려고 올리브유에 겨자를 섞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이 안나 부인의 절친한 친구인 슈라 슐레진게르가 찾아 왔으나, 그녀는 오히 려 일에 방해가 되었다. 슈라는 키 크고 날씬한 몸매에 용모가 단정한 여자였으나 어딘지 남자 같은 인상을 풍겼다. 더 욱이 곱슬거리는 양털 모자를 비스듬히 썼을 때는 황제의 얼굴을 연상케 했다. 손님으로 초대되 어 있는 동안 모자는 벗지 않고 핀을 꽂은 베일을 약간 쳐들 뿐이었다. 슬픈 일이나 걱정거리가 있을 때, 슈라와 안나는 서로 무거운 마음을 풀어주곤 했다. 얘기는 서 로 약을 올리며 독설을 퍼부으며 점점 험악해지고 드디어 감정의 폭풍이 폭발하지만, 이내 또 울 면서 화해하게 되는 것이다. 고혈압 치료법에 거머리를 쓰는 것처럼 평소의 말다툼은 두 사람의 감정을 진정시키는 데 효과가 있었다. 슈라는 여러 번 결혼한 경험이 있으나, 이혼을 하자마자 남편에 대한 생각은 깨끗이 잊는 것이 었다. 그녀는 결혼하고도 독신녀에게서 엿볼 수 있는 차가운 느낌이 감돌았다. 슈라는 접신론자였지만 러시아 정교회의 의식도 도통해서, 사제가 무아의 경지에서 의식을 진 행하는 것을 도와줄 수가 있었다. '주여 들어주시옵소서'라든지, '영원 무궁할 지어다'라든지, '거룩 한 가브리엘 천사여' 등의 말을 목쉰 소리로 연방 주워섬기는 것이었다. 슈라는 수학과 인디아 비술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모스크바 음악대학의 저명한 교수들의 주소 를 낱낱이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누구한테 무슨 중요한 인생사의 문제가 생기면 중간에 끼여들 어 조종하고 처리하곤 했다. 정해진 시간에 손님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아젤라이다 필리포보나, 긴츠, 푸프코프 내와, 바수 르만 내외, 베르지츠키 내와, 카프카즈체르 대령 등이 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릴 때마다, 크고 작은 눈송이가 팔락이며 한군데 엉기기나 하듯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손님들은 헐렁한 방한 장화를 신고서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나타났다. 나자들은 하나같이 촌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으나, 그들의 아내는 추위에 얼굴을 붉히며 외투는 위에서 두 번째 단추까지 풀어헤치고, 숄을 뒤로 제쳐서 머리에는 물방울이 맺힌 채 손가락을 입가에 갖다 대며 교태를 짓고 있었다. 이 집에 처음으로 초대된 신인 피아니스트가 도착하자 "큐이의 조카야" 라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홀에서 활짝 열린 옆문 저쪽에는 식탁이 마치 겨울 길처럼 만찬을 싣고 길게 뻗어 있었다. 빨 간 마가목나무의 과실주 병에 반사되는 불빛이 눈길을 끌었다. 은쟁반에 놓인 커트글라스의 조미 료 병들, 보기 좋게 늘어놓은 닭고기며 디저트의 접시들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피라미드형 으로 접힌 냅킨이며, 편도의 향기를 풍기는 연보라 빛의 시네라리아 꽃바구니가 식욕을 돋우어주 었다. 지상의 양식이 주는 쾌락을 너무 미루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서둘러 정신의 양식에 달려들었다.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무미건조하고 어울리지 않고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소나타는 예측한 대로였을 뿐만 아니 라, 너무나 느린 곡이었다. 휴식 시간에 비평가 케림베코프와 그로메코 교수는 오히려 칭찬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잡담을 나누기도 하고 이리저리 의자를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옆방의 화려한 식탁에 주의가 끌리자 빨리 연주회를 계속하도록 재촉했다. 피아니스트가 곁눈으로 청중을 바라보고는 파트너들에게 시작하라는 눈짓을 했다. 바이올리니 스트인 트이쉬케비치가 활을 움직이자 구슬픈 멜로디가 흐르기 시작했다. 유라와 토냐, 그리고 그로메코 댁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미샤 고르돈이 셋째 줄에 앉아 있었 다. "예고로브나가 부르고 있어요." 유라가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는 그로메코 교수에게 속삭였다. 그로메코 댁의 백발의 늙은 하녀 예고로브나가 문가에 서서, 유라에게 연방 눈짓을 하여 그로 메코 교수 쪽을 보고 고개를 흔들어 보이면서 급히 주인한테 알리려고 애썼다. 그로메코 교수는 뒤돌아 하녀를 바라보며 나무라듯 어깨를 흠칫해 보였으나 예고로브나는 물러 설 기색이 아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홀의 한쪽 끝에서 한쪽 끝으로 벙어리처럼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안나 부인은 남편을 흘겨보고 있었다. 그로메코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뭇거리더니, 얼굴을 붉히며 방 옆을 살며시 돌아서 하녀에 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인데, 예고로브나? 뭐가 그리 급하지?" 예고로보나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체르노고리예가 어딘데?" "여관이랍니다." "그래서?" "그분더러 곧 돌아오라는 거예요. 친척 되는 분이 위급하시다구요." "위급하시다구? 알겠어, 그렇지만 지금은 연주도중이니까 안돼. 끝나면 그렇게 전하지." "여관 사람이 마차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어요. 누군가 거의 죽어간다구요. 여자 분이랍니다." "안 된다면 안 돼요. 한 5분 정도 더 기다린다고 해서 큰일날 건 없을 테니까." 그는 조용한 걸음으로 벽 쪽을 돌아 제자리에 가서 미간을 찌푸리고 콧등을 문지르면서 앉았 다. 제 2악장이 끝나고 미처 박수 소리가 멈추기도 전에, 그는 연주석으로 가서 무슨 사고가 생겨 서 곧 집으로 오라는 전갈이 있으니 연주를 중지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로메코 교수 는 한 손을 흔들어 청중에게 박수를 중지시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트리오의 연주를 중지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트이쉬케비치 씨한테 슬픈 기별이 왔 기 때문에 돌아가셔야 합니다. 참 안되었습니다. 이런 경우 그를 혼자 보낼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와 함께 가는 것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얘 유라, 빨리 나가서 세몬 더러 마차를 준비하도록 일러줘요. 벌써 준비가 됐을 테지만. 그럼 여러분, 다녀올 테니 그대로 계셔 주십시오, 곧 돌아오 겠습니다." 소년들은 추운 밤길을 그로케코 교수와 함께 드라이브하고 싶어서 졸라대는 것이었다. 21 12월이 지나면서 폭동의 거리는 평온한 생활의 흐름을 되찾기는 했으나, 아직도 어디선가 간혹 총소리가 들리고, 평상시와 같은 화재가 발생되는 경우에도 그것이 폭동의 연장인 것처럼 생각하 게 되었다. 소년들은 오늘밤같이 이렇게 오랫동안 마차를 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곳은 손이 닿으리만 큼 가까운 곳이었다. 스몰렌스크와 노빈스크를 지나 사도바야 거리를 반쯤만 가면 되는 곳이다. 맹수와 같은 추위와 안개가 목적지까지의 길을 여러 토막으로 갈라놓았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 의 공간이 똑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거리의 모닥불에서 솟아오르는 연기, 발걸음 소리, 썰매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어쩌면 꽤 마차를 오랫동안이나 타고 또 아직도 머나먼 곳으로 가는 도중이라는 인상을 더해주기도 했다. 여관 앞에는 좁다랗고 멋진 썰매가 한 대 멈춰 서 있었다. 말에는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혔고 말발굽도 천에 싸여 있었다. 마부는 승객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서 목도리를 감은 머리를 따뜻이 하려고 장갑 낀 큰 두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여관의 현관 안은 따뜻했다. 수위는 출입구에서 외투 보관대로 구분되어 있는 난간 뒤에 앉아 서 코를 골고 있었다. 이따금 자기 코고는 소리에 놀라서 번쩍 눈을 떴다가는, 환풍기가도는 소리 와 페치카에서 불타는 소리, 사모바르가 끓는 소리에 취하여 다시 잠들어버리곤 했다. 현관 왼쪽 거울 앞에는 얼굴에 짙게 분칠한 여자가 서 있었다. 추운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얄 팍한 털자켓을 입고 있었다. 누군가 위층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거울에 등을 돌려 대고 어깨 너머로 자기의 뒷모습의 매무새를 확인하고 있었다. 추위에 꽁꽁 얼다시피 한 마부가 거리에서 안으로 들어왔다. 두툼하게 부풀어오른 외투는 빵집 간판에 그려져 있는 찐빵을 연상시켰고 입에서 뿜어내는 흰 입김은 더욱 그런 느낌을 주었다. "아직 멀었습니까, 아씨?" 그는 거울 앞의 여자에게 물었다. "이렇게 오래 기다리다간 말이 얼 어버리고 말겠습니다." 24호실의 사건은 여관 종업원에게는 흔히 겪는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신호 벨이 쉴새없 이 울리고 벽에 걸린 길쭉한 상자 유리에 번호가 나타나면, 어느 호실의 손님이 성가시게, 무엇을 원하는 건지 자기도 모르면서, 종업원을 들볶으려 하는지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지금 24호실에서는 의사가 그 늙은 얼간이 가사로바에게 토하는 약을 먹여 위장을 세척해내고 있었다. 여관 하녀 글라샤가 방바닥을 닦고 오물 통을 들어내고, 다시 깨끗한 물을 퍼 들여가며 부산했다. 그러나 이 소동이 벌어지기 훨씬 전에 체로쉬카가 마차로 의사와 그 가엾은 바이올리 니스트를 데려오고, 코마롭스키가 달려오고, 사람들이 방문 앞 복도를 부리나케 오가기 시작하기 훨씬 전에, 이 여관 종업원 실에서 말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날 오후에 여관 종업원 스이소이가 그릇을 가득 놓은 쟁반을 오른손에 받쳐들 고 주방에서 달려나오는 순간, 층계로 통하는 좁은 통로로 누군가 갑자기 문에서 튀어나오면서 그를 밀쳐버린 데서 일어난 것이었다. 쟁반이 날아가면서 수프를 엎지르고, 수프 접시 세 장과 얕 은 접시 한 장이 깨졌다. 스이소이는 부딪친 접시닦이 여자가 잘못했으니까 그녀가 변상해야 한다고 우겨댔다. 이미 밤 은 열 한 시 가까이 되어서, 종업원들 반쯤은 이제 일손을 놓아야 할 때가 되었는데도 말다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노상 손발을 떨고 있고, 밤낮으로 술병을 마누라 대신 껴안고 있는 주제에 누가 떠밀었다느니, 누가 수프를 엎질렀다느니, 누가 접시를 깼다고 우겨대는 거야. 그래 누가 당신을 떠밀었다고, 사 팔뜨기 같으니, 밸 빠진 수캐 같은 게 누굴 보고 그런 허튼 소릴해?" "다시 말하지만, 마트로나 말조심하라구." "그럼, 이 소동의 장본인이 대체 누구냐구요? 접시를 깰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겁 니까? 그 꼴사나운 계집 때문이야! 그 여자는 갈보 퇴물이에요. 지금은 장사를 그만두고 시침을 떼고 있지만, 원래는 싸구려 갈보란 말예요. 온갖 재미 다 보다가 비소까지 마셨지. 지금은 이 체 르노고리예에 저렇게 살고 있으니까 누구도 갈보로는 보지 않을 테지." 미사와 유라는 방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로메코 교수가 상상하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는 음악가의 생활을 맑고 무언가 우수가 깃들어 가치 있는 것으로 상상하고 있 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소동이란 말인가. 이따위 추악한 사태인 줄 알았다면 아이들은 절대 데 려오지 말았어야 할 것을 그랬다. 소년들은 복도에서 기다리기가 지루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도련님들." 종업원이 다가와서 다시 정중하고 조용한 말투로 권했 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부인께서는 괜찮으십니다. 이젠 다 나으셨습니다. 여기 이렇게 서 계 시면 곤란합니다. 아까도 여기서 사고가 나서 값비싼 그릇을 깨뜨렸답니다. 이렇게 우리는 심부름 하느라 줄곧 다녀야 하는데, 여기 계시면 좀 비좁으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소년들은 그 말에 따랐다. 방안에는 언제나 탁자 위에 걸려 놓았던 석유 등불이 판자 칸막이 저쪽 침상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 침상에서는 빈대 냄새가 풍겨왔다. 그곳은 침실로 되어 있어서 문간이나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꾀죄죄한 포장이 드리워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포장이 걷 혀서 이 북새통에 그것을 다시 드리워 놓을 겨를이 없었다. 침상 의자 위에 놓인 등불이 마치 무 대 조명등처럼 침상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접시닦이 여급이 생각했던 것처럼, 마담 기사르가 자살하려고 비소를 먹은 것이 아니라 옥도를 마셨던 것이다. 껍질이 아직 굳지 않아서 손을 대면 검은 물이 들 것 같은 덜 익은 호도의 시큼 하고 떫은 냄새가 방안에 가득차 있었다. 칸막이 뒤에서 하녀가 방바닥을 닦고 있었다. 반나체가 된 여인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물과 눈 물과 땀에 뒤범벅되었고,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머리를 물통에 드리운 채 엉엉 울고 있었다. 이때 소년들은 그쪽을 바라보는 것이 쑥스럽고 무례한 느낌이 들어서 얼른 외면했다. 그런데 유라는 이 짧은 순간에, 어색하고 난처한 입장에서는 긴장과 노력을 하게 되고, 여인이 조각에서 표현하 는 자세를 버리면 근육이 울퉁불퉁한 레슬러가 팬티만 입은 알몸으로 시합하러 나온 꼴과 흡사하 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윽고 칸막이 저쪽에서 누군가 포장을 드리웠다. "트이쉬케비치 씨, 당신의 손이 어디 있어요? 내 손 좀 잡아주세요." 여자는 간신히 눈물과 구 토를 참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무서운 의혹이 날 괴롭게 했답니다! 트이 쉬케비치 씨... 하지만 그건 공연한 생각이었어요... 어리석게도 모든 게 다 지나친 자기 환상이었 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아아, 이렇게 다행한 일이 어디 있지요! 결국... 이렇게... 이렇게 난 죽지 않았어요." "진정하십시오. 부인, 제발 좀 진정하세요. 이게 다 무슨 창피한 일입니까, 정말." "그럼 돌아갈까." 그로메코 교수는 소년들을 돌아보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몹시 당황 하면서 어두운 문간에 선 채, 눈 둘 곳을 몰라 등불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방 한 구석을 바라보 고 있었다. 벽에는 사진 몇 장이 붙어 있었고, 책꽂이에 악보가 꽂혀 있었다. 책상 위엔 서류와 앨범이 쌓였고, 실로 짠 상보를 덮은 식탁 저편의 안락의자에서 한 소녀가 앉은 채 팔을 의자 등 받이에 얹고 거기에 볼을 대고 잠들어 있었다. 이런 소란한 가운데서도 잠을 자는 걸 보면 그녀 는 몹시 지쳐 있었던 것 같았다. "이젠 돌아가자." 그로메코 교수는 또 한 번 되풀이했다. 여기에 온 것이 무의미한 일이었지만 이 이상 더 머뭇거리는 것도 예의에 벗어나는 일이었다. "이젠 트이쉬케비치 씨가 나오면 인사나 하고." 그러나 칸막이 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트이쉬케비치가 아니라 체구가 당당하고 깨끗하게 면도를 한 의젓한 남자였다. 등불을 머리 위로 치켜들자 소녀가 잠자고 있는 탁자로 다가가서 제자리에 걸어 놓았다. 불빛에 소녀는 잠이 깼다. 그녀는 사내에게 미소를 보이면서 가늘게 눈을 뜨고 기지 개를 켰다. 미샤는 이 낯선 사람을 보자 흠칫 놀라고,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았다. 유라의 팔 소매를 잡아 끄며 뭔가 말하려고 했으나 유라는 손을 뿌리치고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남 앞에서 귀엣말을 하면 안 돼. 너를 어떻게 생각하겠니?" 그러는 동안에 소녀와 사나이 사이에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한마디 말도 없이 시선만 오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요술이라도 부리듯 서로의 의사를 재빨리 알아 차리고 있었다. 마치 사내는 인형극 조종자이고 소녀는 사내의 손놀림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 같 았다. 그녀 얼굴에서 엿보이는 피곤한 미소는 그녀의 눈을 반쯤 감게 하고 입술은 반쯤 벌리게 했으나, 사내의 비웃는 듯한 시선에 공모자의 교태스런 눈짓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일 이 무사히 끝나게 되어 만족하였다. 그들의 비밀이 드러나지 않고, 음독자가 살아나게 된 것이다. 유라는 뚫어지게 그들을 지켜보았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는 등장 불빛이 환하 게 비치는 그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노예가 된 소녀와 그 주인이 벌이고 있는 이 한 장면은 수수 께끼와 같았고 또 치욕스럽게 보였다. 유라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복잡한 감정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유라와 토냐와 미샤, 셋이 열띤 토론을 하며 결국은 '천박'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외던 것이 바 로 이것이었다. 그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면서도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이 안전한 거리 에서 말로만 제어해 오는 힘, 그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지금 그 힘은 유라의 눈앞에 구체적인 현 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꿈속에처럼 종잡을 수 없고 숨겨지고 무자비할 만큼 파괴적이 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처롭게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유라의 순진한 철학이 어떻게 여기에 대처할 것인가?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 한길로 나오자 미샤가 물었다. 생각에 골몰한 유라는 대답하려 하지 도 않았다. "너의 아버지를 술에 빠지게 해서 파멸하게 한 자가 바로 그 사람이야. 너의 아버지와 기차에 함께 타고 가던 변호사 말이다... 언젠가 얘기한 적이 있지?" 유라는 아버지와 과거를 생각하지 않고 소녀와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샤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아듣지 못하고 추워서 말하기에도 힘들 지경이었다. "추워서 혼났겠군." 그로메코 교수는 마부 세몬을 위로했다. 그들은 집으로 향했다. 3.스벤치츠키 댁의 크리스마스 파티 1 어느 겨울에 그로메코 교수는 구식 옷장 하나를 안나 부인에게 선물로 사주었다. 우연한 기회에 사게 된 물건이었다. 검은색 향나무로 만든 굉증히 큰 옷장이어서 그것을 그대로 방아능로 들여 놓을 수 있는 문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분해해서 들여는 왔으나, 어디네 놓을 것이지 문제였다. 아래층 응접실은 넓기는 하였으나 어울리지 않았고, 위층 침실에는 장소가 비좁아서 놓 을 수가 없었다. 결국 부인의 침실이 있는 이층 조그만 홀을 치우고 거기다 놓기로 했다. 하인 미르켈이 옷장을 조립하러 왔다. 그는 여섯 살짜리 딸 마린카를 데리고 왔다. 마린카는 엿 한 가락을 얻어 가지고 코를 훌쩍이며 엿과 끈끈한 손가락을 빨면서 아버지의 일손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 얼마 동안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안나 부인의 눈앞에서 옷장이 형태를 갖 추어 갔다. 위에다 판자만 얹으면 일이 끝날 단계에 가서 안나 부인은 갑자기 마르켈을 거들어주 고 싶었다. 그녀는 깊은 옷장 안으로 들어가 받ㄱ을 딛고 섰으나 발을 헛딛는 바람에 옷장 한쪽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벽 판자는 혼에 맞춰 겨우 세워 놓았던 것이다. 마리켈이 대강 둘러 매 놓 았던 새끼줄이 풀어지면서 와르르 무너지는 판자와 함께 안나 부인이 벌렁 나자빠지면서 심하게 다쳤다. "아이구, 마님, 이게 어쩐 일입니까!" 마르켈이 질겁해서 달려왔다. "어쩌자고 이런 일을 다 하 신다고? 뼈는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뼈를 한 번 만져보세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뼈니까요. 살은 다쳐도 문제없습니다. 이내 낫기 마련이에요." "넌 왜 울고 야단이나, 이놈아! 코나 닦고 엄마한테 어서 가 봐." 그는 울고 있는 아이를 나무 랐다. "아아, 마님, 마님께서 거들어 주시지 않으면 혼자서 못할 줄 아셨습니까? 마님꼐서 저를 아마 그저 하인으로만 아시겠지만 실은 저는 원래가 목수였답니다.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가구를 만 들었는지 아십니까? 옷장, 찬장, 칠기 할 것 없이 호도나무나 마호가니를 써서 수없이 ㅁ나들어냈 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실례가 되겠지만, 얼마나 많은 귀부인들이 출가할 때 저를 거쳐갔는 지 아십니까. 지금 요모양 요꼴이 된 건 술 때문이에요. 모든 게 술 때문이에요." 마르켈이 안락위자를 끌고 왔다. 안나 부인은 그의 부축을 받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신 음 소리를 내며 다친 곳을 어루만졌다. 하인은 다시 옷장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위에 판자를 얹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문짝만 달면 전람회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습니다." 안나 부인은 이 옷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크기나 모양이 마치 상여나 임금님의 관 같은 걸 연 상케 해서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옷장을 으스콜리드의 무덤이라고 불렀다. 자 기 주인을 죽게 한 올레그의 말과 비유해서 이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체계 없이 독서한 탓으로 제멋대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안나 부인은 이 두 가지를 혼동하고 있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 안나 부인은 폐렴 증세가 점점 더 심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2 1911년 11월에 안나 부인은 한 달 내내 폐렴을 앓아 자리에 눕게 되었다. 유라와 미샤 고르돈과 토냐는 이듬해 봄에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유라는 의학을, 토냐는 법 학을, 미샤는 철학을 전공했었다. 유라는 여러 방면에 소질이 많아서 그의 머리 소겡는 잡다한 지식이 가득 차 있었으나, 그의 견해나 습관, 경향 등은 무척 독특한 것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상력이 뛰어나 독창성이 풍 부했다. 예술과 역사에 매력을 느꼈으나 직업을 선택할 때에 주저하게 되지는 않았다. 타고난 낙천성이 나 우울증이 결코 직업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이 천직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물리학과 자연과학에 흥미를 느꼈고, 인간은 실생활에서 공익성이 있는 일에 종사해 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의학을 택하기로 했던 것이다. 4년간의 수업 기간중 첫 번째 한 학기 동안을 그는 줄곧 대학 지하실에 있는 해부실에서 보냈 다. 나선형 층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해부실에는 머리가 헝클어진 학생들이 언제나 우글거렸 다. 해골에 둘러싸여 허름한 교과서 책장을 넘기며 입속으로 웅얼거리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한 쪽 구석에서 조용히 해부에 몰두하는 학생도 있었다. 서성거리는 학생, 잡담을 하고 있는 학생, 시체실 돌바닥을 떼지어 다니는 쥐를 쫓는 학생도 있었다. 어둑어둑한 시체실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젊은 자살자, 익사한 여인의 시체 등이 알몸으로 잘 보존되어 부패한 흔적도 없이 인처럼 희게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명반염을 주사하면 생기를 되찾은 듯 피부가 팽팽해져서 사람의 눈 을 속인다. 시체는 절개되고 수족이 절단되어 표본으로 만들어지지만, 아무리 잘게 토막을 내도 인간의 몸은 여전히 아름다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함석을 씌운 테이블 위에 아무렇 게나 던져진 익사자의 시체를 대할 때도, 절단된 팔이나 손을 바라볼 때도 유라는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석탄산과 포르말린 냄새가 코를 찌르는 지하실에는 알몸의 시체들이 경험한 운명의 수수께끼를 비롯하여 삶과 죽음 자체의 불가사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신비의 존재를 느끼게 하며, 마치 여기가 죽음의 안식처나 본거지가 된 것처럼 주검들이 이 지하실에서 고이 잠들고 있 었다. 유라가 시체 해부에 임할 때, 들려 오는 듯한 신비한 목소리가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의 마 음을 흔드는 이러한 여러 가지 상념에 익숙해지면서 차츰 마음을 쓰지 않게 되었다. 유라는 두뇌가 명석하고 글을 곧잘 썼다. 중학 시절부터 산문과 전기물을 쓰고 싶다는 꿈을 가 지고 있었다. 그 속에 자기가 보고 느낀 가장 인상적인 것들을, 마치 폭발물을 땅속에 묻어두듯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쓰기엔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 대신 시를 쓰게 되었다. 그것은 화가가 가슴 속에 구상하고 있는 거작을 준비하면서 일생 동안 스케치에 전념하는 것과 같았다. 유라는 자기의 시가 강렬하고 독창적이기 때문에 성숙해 보이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대견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열과 독창성만이 예술 작품에 현실성을 부여할 수 있으며, 그것을 지니지 못 한 예술이란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라는 자기 성격 형성에 니콜라이 아저씨가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니콜라이 아저씨는 로잔느에 살았었다. 그의 저서 몇 권이 그곳에서 러시아어와 외국어로 출판 됐다. 저서에서 그는 역사를 제 2의 우주, 인간이 죽음의 도전을 받으면서, 시간과 기억의 도움을 받아 이룩한 또 하나의 우주라고 보는 견해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해석 에 자극되어 그의 견해는 새로운 예술관을 낳았다.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의 사사은 유라보다는 그의 친구 미샤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다. 미샤가 철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의 영향 때문이며, 미샤는 신학 강의도 열심히 듣게 되고 나중 에는 아예 신학 아카데미에 전학할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유라는 아저씨의 영향을 받다 발전하고 그 영향에서 점차 해방되었으나, 미샤는 아주 그 영향 에 구속되어 버렸다.미샤가 그토록 열중하게 된 이유는 그의 출신 때문이라는 것을 유라는 잘 알 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극단적인 생각을 버리도록 섣불리 미샤를 설득하려 하지는 않았다.이뜨금 미샤가 좀더 인생에 접근하는 현실 주의자가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3 11월 말, 어느 저녁 무렵 유라가 대학에서 늦게 돌아왔다. 그는 몹시 피곤했으며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낮에 안나 부인이 경련을 일으켜서 소동이 벌어졌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여러 사람의 의사가 와서 진찰을 했다. 한때는 교회 신부를 모셔 와야겠다는 권유까지 있었으나 나중엔 보류 하게 되었다. 지금 그녀는 퍽 좋아지고 의식이 회복되어서 유라가 돌아오변 곧 자기한테 올라오 도록 일렀다. 유라는 그 소리를 듣자 옷을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위층 침실로 올라갔따. 방에는 낮에 일어난 소동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간호원이 조용히 탁자 위를 치우고 있 었다. 주위에는 구겨진 냅킨과 찜질에 썼던 젖은 수건이 흩어져 있었고 대야의 물에는 토해 낸 피가 불그레한 빛으로 변해 있었으며, 쓰고 난 앰플하며 탈지면 뭉치 따위가 거기 떠 있었다. 부인은 땀에 흠뻑 젖었고,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눅이고 있었다. 아침에 보았을 때보다 형편없 이 수척해 보였다. '진단이 잘못되지 않았을까?' 유라는 생각해 보았다. '엽성 폐렴 증세인데 몹시 위독한 것 같다.' 그는 인사를 한 후, 의례적인 격려의 말을 하고 간호원을 내보냈다. 그는 부인의 손을 잡고 맥을 짚어 보고 나서 호주머니에서 청진기를 꺼냈다. 부인은 소용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뭔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괴로운 듯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 성찬을 받도록... 신부님을 모셔 오려고 했어... 언제 죽을는지...몰라요... 이를 뽑을 때는, 얼마나 아플까... 겁이 나지... 단단히 각오를 하지... 그런데 이건 이가 아니야... 나의전부... 생명을 빼앗기는 거야... 그게 언떤 것인지 아무도 몰라요... 난 서글프고 두려워요." 부인은 말을 멈추었다. 눈물이 볼을 따라 주르륵 흘렀다. 유라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이윽고 그 녀는 말을 이었다. "넌 머리가 좋고, 재능이 있어... 다른 사람과는 달라... 넌 알고 있겠지... 나한테 말해줘요... 내가 안심할 수 있도록." "무슨 말씀을 드릴까요?" 유라는 그냥 앉아 있기가 멋적었다. 슬그머니 일어나 방안을 한 바퀴 돌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내일이면 병세가 매우 좋아질 거예요. 이젠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니 까. 틀림없어요. 그리고 죽음이라든지, 의식이나 부활, 믿음 따위에 대한 과학자로서의 저의 의견 을 듣고 싶으십니까? 그건 후에 말씀드리지요. 아니라구요? 지금? 그럼 말씀드리지요. 하지만 갑 자기 말하기는 어렵군요." 그리하여 그는 즉석에서 일장의 즉흥 연설을 하면서 스스로 놀라는 것 이었다. "부활의 그 깊은 개념이 마치 약자의 위안을 위하여 있다는 것을 저는 받아 들일 수가 없습니 다. 저는 늘상 다른 의미로서,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마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수천 년에 걸쳐 살아온 그 많은 사람의 무리를 과연 어디에 그냥 둘 수가 있겠습니까? 우주는 그렇게 넓지는 못합니다. 하나님도 선도 의도 다 밀려날 수밖엔 없을 겁니다. 그 탐욕스러운 동물적인 혼 잡에 밟혀 죽고야 말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이며 무한하고 불변인 생명은 무수한 결합과 변형을 일으키면서 우주를 가득 채우고 끊임없이 부활되고 있습니다. 부인은 죽은 후에 과연 부활할 수 있을까, 그것 을 염려하시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죽음에서 부활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 을 미처 모르고 있을 따름이지요. 우리는 죽을 때 고통을, 육신의 조직이 붕괴되는 것을 느낄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위식할까 요? 그런데 의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생각해 봅시다. 의식적으로 잠을 청하면 반드시 불면증에 걸립니다. 의식적으로 음식을 소화시키려 들면 틀림없이 위장이 상합니다. 의식을 우리 자신에게 작용시킬 경우 의식은 독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의식은 우리의 외부로 향하는 한 줄기 빛입니 다.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우리 앞길을 밝혀주는 빛이란 말입니다. 의식은 앞으로 가고 있는 기관 차의 조명등과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그 빛을 우리의 내부로 향하게 하면 사고를 일으키게 됩니 다. 그렇다면 당신의 의식은 어떻게 될까요? 당신의 의식은 당신 자신의 것이지 다근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럼 당신 자신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자신이 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 자신 속에서 어느 부분이 의식 하는 기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장, 간장, 아니면 혈관인가요?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 리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외적인, 활동적이 현상뿐입니다. 예컨대 자기 자 신의 손으로, 자기 가족이나 타인들 속에서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겁니다. 타인들 속에 자기 자신이, 자기의 영혼이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인 것이며, 우리의 의식이 한평생 호흡하며 살 고 있고 즐기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타인들 속에 있을 것이며, 타인들 속에 남게 될 것 입니다. 사람들이 후에 그것을 우리의 추억이라고 해도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영원 한 '우리'입니다. 미래의 일부가 되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긑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도 염려할 건 없습니다.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 음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그런데 방금 재능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타인과 구분 이 되는 것입니다. 재능이란 우리 자신의 것이며, 우리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그리 고 폭넓고 고상한 의미에서 재능이란 곧 생명의 지혜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성요한은 말하기를 죽음은 없어질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의 논증은 간단합니다 죽음이 없어질 것이라는 것은 그것이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벌써 경험했으며, 낡고 싫 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없엊ㄹ 것이라는 뜻이며, 지금 필요한 것은 무언가 새로운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것이란 영원한 생명일 것입니다." 그는 방안을 서성이며 말하고 있었다. 침대에 다가가서 부인의 이마를 짚어보고 "편히 쉬십시 오"하고 말했다. 얼마 후 그녀는 잠들기 시작했다. 유라는 조용히 방에서 나와 예고로브나에게 간호원을 침실에 들여보내도록 일렀다. "이거 참, 나도 돌팔이 의사가 다 되어버렸군. 주문 같은 소리를 뇌까리고 손을 얹기도 하면서..." 다음날 부인의 병세가 좋아졌다. 4 안나 부인은 날이 갈수록 병이 나아가고 있었다. 12월 중순에는 자리를 걷고 일어나려고까지 했으나 아직 너무 쇠약해서 기력이 없었다. 의사들은 좀더 자리에 누워서 정양하도록 권했다. 그녀는 가끔 유라와 토냐를 불러서 자기 어린 시절을 보내던 우랄 지방의 얘기를 몇 시간이고 늘어놓았다. 그녀는 르인바 강변에 있는 아버지의 영지인 바르이키노에서 자랐다. 유라와 토냐는 아직 한 번도 거기 가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유라는 부인의 말을 통하여 5천 제사치나가 넘는 어두운 밤처럼 검푸른 원시림이며, 그 속에 휘어진 칼날처럼 구불구불 구비쳐 흐르는 물줄기, 바 위가 깔린 강 바닥, 그리고 크류게르 댁의 영지 쪽으로 길게 뻗은 가파른 강 언덕 등을 눈 앞에 바라보듯 훤히 머리 속에 그릴 수가 있었다. 유라와 토냐는 최근에 난생 처음으로 야회복을 주문했다. 유라는 검은 프록코트를, 토냐는 목 밑만 조금 드러나는 밝은 빛 비단 이브닝드레스를 마췄다. 해마다 12월 27일에 스벤치츠키 댁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처음으로 그 옷을 입고 갈 예정이었다. 양복점과 양장점에서 같은 날에 옷을 가져왔다. 유라와 토냐는 입어보고 무척 기뻐했다. 옷을 벗기 전에 예고로브나가 부인의 분부로 두 사람을 부르러왔다. 그들은 새 옷을 입은 채 부인 방 으로 갔다. 부인은 팔꿈치를 짚고 일어나서, 옆으로 그들을 바라보고는 뒤돌아 서보라고 했다. "참 멋있구나. 썩 잘 맞는다. 난 벌써 옷이 다 될 줄은 몰랐다. 한 번 더 보자, 토냐... 응, 괜찮 구나. 어깨에 주름이 잡힌 줄 알았더니. 내가 왜 너희들을 불렀는지 알겠니? 우선 너한테, 유라에 게 할 말이 있단다." "네, 알겠어요. 편지를 보셨군요? 제가 갖다 보여드리라고 일부러 올려 보낸 거예요. 니콜라이 아저씨와 같은 의견이시겠지요. 유산 상속을 거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지요? 하지만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어요. 물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시겠지 만. 첫째로 변호사들에게는 '지바고 상속 사건'이란는 게 있는 편이 좋겠지요. 아버지의 유산으로는 소송 내용이나 변호 사례금 정도는 지불할 능력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이상의 유산은 실제 남 을 것이 없습니다. 있다는 것은 부채와 분규, 그리고 추문뿐입니다. 만일 단돈 얼마라도 저한테 올 게 있다면, 전 그돈을 소송 비용으로 재판소에 바치지 않고 제 자신을 위해 쓰겠습니다. 요는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공연히 쓰레기통을 뒤적거리기보다는 있지도 않은 재 산에 대한 저의 권리를 포기하고, 상속인을 자처하고 나서는 자들에세 깨끗이 양보하겠다는 겁니 다. 부인도 아시겠지만, 유산 청구인 중에는 마담 알리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바고의 유족이라 고 자처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파리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답니다. 그 밖에도 별별 사람이 다 나타나서 아버지의 유산을 청구하고 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지만 저도 최근에야 그 얘길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실 때, 아버지는 스톨부노바 엔리츠이 공작 부인이라는 고상가인 미친 여자한테 빠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부인과의 사이에 예브그라프라는 아들까지 보았는데, 그 아 이가 지금 열 살이랍니다. 공작 부인은 현재 옴스크 교외에 있는 자기 저택에 아들과 함께 살면서 바깥 출입을 일체 하지 않는다고 해요. 수입의 출처는 분명치 않지만, 저는 그 저택의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 식 창문이 다섯 개 있고 처마 밑에 멋진 원형 조각이 있는 집입니다. 최근에는 모스크바에서 수 천 베르스타나 떨어진 시베리아에서 그 집의 다섯 개 창문이 저를 불쾌한 눈초리로 응시하고 있 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조만간 악마와 같은 눈으로 저를 흘겨보게 되겠지요. 이런 판국에, 실속 없는 유산, 자칭 상속인들, 악의와 선망, 그리고 엉큼한 변호사, 이런 것들을 상대로 제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어쨌든 그것을 포기해서는 안 돼." 부인은 반대였다. "그건 그렇고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하고 그녀는 전날에 하다가 그만둔 얘기를 다시 계속했다. "그 이름이 이제야 생각나서... 어제 얘 기한 산림 간수 말이다. 바커스라는 이름이야. 참 괴상한 이름이지? 구레나룻이 눈썹과 맞붙은 꼴 이 꼭 숲속의 시커먼 도깨비 같았어! 게다가 이름이 바커스라니! 얼굴을 상처투성이고. 곰한테 할 퀴었으나 때려잡았다는 거야. 그 고장 사람은 그런 식의 짧은 이름이 많아요. 부르기 좋고 알아듣 기 쉬우라고. 바커스, 혹은 루프, 프르스트 같은. 때로는 할아버지 사냥총에서 나는 소리 같은 이 름을 가진 사람이 오게 되면-아프크트니 프롤이니 하는 이름도 있었지-우리는 곧 아래층으로 우 르르 내려가곤 했어. 곰 새끼를 데리고 온 숯 굽는 사람, 영지 구석에서 광석 표본을 가지고 온 광산을 찾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었어. 그러면 할아버지는 전표를 끊어서 사무실로 가게 했어. 돈 을 주거나 양식을 주기도 하고 화약을 주기도 했어. 바로 창문 앞부터는 숲이었어. 그리고 눈도 많이 내렸지! 지붕 위까지 쌓였으니까." 부인은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이젠 그만하세요, 몸에 해롭습니다." 토냐와 유라가 말렸다.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 지금 생각이 났는데, 예고로브나의 말을 들으니 모레 파티에 갈 것인지 망설이고 있다고 하던데, 그런 바보스런 생각 따위는 하지도 말아라! 당치도 않은 생각 이지. 유라 넌 의사가 아니냐! 가기로 했으면 아무 소리 말고 가도록 해야지. 그럼 다시 바커스의 이야기를 계속하자. 바커스는 젊어서 대장장이를 하고 있었는데, 싸움을 하게 되어 창자가 터져나 와 버렸다는 거야. 그래서 무쇠로 창자를 한 벌 만들었다는 거야. 아니, 잠깐 유라. 물론 그럴 수 는 없겠지, 나도 알아요. 그 말을 그대로 들어서는 안 되지! 하지만 거기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 또 기침이 나와서 이야기가 중단되었다. 이번에는 꽤 오래 계속되었다. 계속되는 시침에 숨을 돌려 쉬기 힘들었다. 유라와 토냐는 동시에 침대 옆으로 뛰어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부인은 기침을 하면 서 두 사람의 손을 잡고 그것을 가지런히 포개고 한참 동안 그대로 쥐고 있었다. 이윽고 기침이 가라앉자 "내가 죽은 후에도 서로 헤어지지 말아야 한다. 너희들은 천생 배필이야. 결혼하거라. 지금 여기서 내가 정혼을 한 거니까." 그녀는 말하고 나서 울음을 터뜨렸다. 5 1906년 봄, 라라가 여학교 졸업 학년으로 진학하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코마롭스키와의 6개월 에 걸친 관계는 라라를 인내의 한계점까지 몰고 갔다. 그는 라라의 처참한 기분을 교활하게 이용 하여 필요할 때면 언제나 그녀의 수치스러운 일을 은근히 상기시켜 주곤 했다. 이런 암시는 호색 한이 여자에게 바라는 그런 혼란된 상태로 라라를 이끌어갔다. 그 결과 라라는 육욕의 악몽으로 차츰 깊이 빠져들었고, 악몽에서 깨어날 때면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곤 했다. 밤의 어둠 속에서의 그녀의 광기는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전도되어 있었고, 모 든 것이 논리를 벗어나 있었다. 찌르는 듯한 고통은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웃음소리로 표현되고, 저항과 거절은 곧 동의를 의미하는가 하면, 그녀의 입술은 감사의 키스가 되어 박해자의 손들을 미친 듯이 더듬고 있었다. 이런 일이 끝없이 계속되는 듯싶었으나, 그해 봄 학기말을 앞둔 역사 수업 시간에, 라라는 학교 수업이나 숙제가 그녀와 코마롭스키와의 밀회에 지장을 주지 않을 더없이 좋은 여름 방학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고 문득 결심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인생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폭풍이 곧 닥쳐올 것 같은 무더운 오전이었다. 열린 교실 창문으로 먼 시가지의 소음이 마치 벌통을 맴도는 꿀벌들의 날개 소리처럼 단조롭게 들려오고, 교정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 리가 들려 왔다. 사순절의 빵 굽는 냄새와 보드카 냄새 같은 흙냄새와 새로 돋아난 나뭇잎의 싱 그러운 향기에 머리가 아팠다. 역사 선생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강의하고 있었다. 프레주스 상륙 작전을 설명하고 있을 때, 번개와 천둥소리가 시커먼 하늘을 찢으며 흙먼지를 실은 구름이 비 냄새를 싣고 교실 안으로 불어왔다. 사환에게 창문을 닫게 하려고 개구쟁이 학생 둘이 재빠르게 복도로 달려나갔다. 그들이 교실 문을 여는 순간 휙 불어닥친 거센 바람이 책상 위에 노트에서 잉크 흡인지를 모조리 날려버 렸다. 창문이 닫혀졌다. 도회지의 먼지 끼고 더럽혀진 비가 쏟아져 내렸다. 라라는 공책에서 종이 한 장을 찢어 내어 옆자리에 앉은 나쟈 폴로그리보바에게 편지를 썼다. "나쟈, 난 엄마한테서 나와 살아야겠다. 가정교사 자리가 있으면 소개해 줘. 넌 부잣집을 많이 알고 있으니까." 나쟈가 종이 쪽지로 회답을 보냈다. "마침 내 동생 리파의 가정 교사를 구하는 중이야. 우리 집에 오면 어때? 아버지 어머니도 널 좋아하고 계시는 걸 알지." 6 라라는 폴로그리보크 댁에서 3년을 더 살았다. 마치 요새 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처럼 안전하여 아무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했고, 그녀로부터 떨어진 어머니와 오빠도 전혀 얼씬하지 못했다. 나쟈의 아버지 콜로그리보르는 새로운 타입의 진보적인 실업가로서 재능 있고 지적인 인물이었 다. 그는 낡은 제도를 두 가지 면에서 증오하고 있었다. 그것은 국고와 맞먹을 만큼 재력을 가진 부호로서의 증오였으며, 평민 출신으로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크게 성공한 인간으로서의 증오 이기도 했다. 그는 정치범들을 자기 집에 은신시켜 주는가 하면, 그들을 위해 변호사를 주선하기 도 하고 혁명 운동에 자금 지원도 했었다. 자기 재산을 제 손으로 뺏는 일에 열중하여 자기 공장 에서 스스로 파업을 선동하고 있다는 농담까지 나오게 했다. 사냥을 즐기며 사격의 명수였던 그 는, 1905년 겨울에는 일요일마다 세레브라느이 숲이나 로시느이 섬까지 가서 혁명 운동자들에게 사격술을 가르치기까지 했다. 그는 참으로 보기 드문 개성의 소유자였다. 그의 아내인 세라피마 부인은 그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라라는 그들 부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으며, 온 가족들이 그녀를 친척처럼 사랑하 고 있었다. 걱정 없이 3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라라의 오빠 로쟈가 그녀를 방문해왔다. 로쟈는 기다란 두 다리를 뻗치고 서서 몸을 앞뒤로 흔들며 공연히 거만스럽게 콧소리를 내 말끝을 길게 끌면서 라라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사관학교 동기생들이 졸업 기념으로 교장에서 선물을 하려고 모든 돈 을 자기가 맡아오다가 그저께 도박판에서 몽땅 날려버렸다는 것이었다. 이 말이 끝나자 그는 자 리에 앉아서 울기 시작했다. 이 말을 들은 라라는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로쟈는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어젯밤 코마롭스키를 찾아갔었지. 그 사람은 나하고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도 않다고 거절 하면서, 만일 네가 와서 부탁을 한다면 그땐 자기도 거절할 수 없겠다는 거야... 너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있지 않지마, 그 사람한테는 여전히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거야... 라라. 제발 부탁이야... 네가 한마디 만 그 사람한테 말해주면 돼... 내가 지금 얼마나 곤경에 빠져 있는지 너도 알 게 아 니냐. 그런 수치가 어디 있겠니. 사관생도로서의 내 명예가 어떻게 되겠니!... 제발 그 사람에게 부 탁해 줘.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니... 설마 내가 목숨으로 명예를 보상하기 바라지는 않겠지." "목숨으로 보상한다고? 사관생도의 명예라구요?" 라라는 화가 치밀어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었 다. "그렇다면 난 사관생도가 아니니까 명예고 뭐고 없단 말인가요? 나 같은 건 무슨 짓을 시켜 도 좋다는 건가요? 오빠는 지금 나더러 무슨 일을 요구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요? 그 사람이 오빠 에게 한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 말예요? 나는 이렇게 몇 년 동안이나 땀을 흘리고 일했는데, 오빠가 불쑥 나타나서는 내가 겨우 이룩한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린다 해도 대수롭지 않다는 거군요. 오빠가 어떻게 되건 내가 알 게 뭐예요! 이제 자살을 하건 맘대로 하세요! 그래 그 돈이 얼마나 되죠?" "6백 90루불리 조금 더 돼."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대략해서 7백루불리쯤 되지." "오빠! 아니, 정신 있어요?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7백 루불리나 되는 돈을 도박에 날리다니? 오빠!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정직하게 일해서 그만한 거액을 벌려면 몇 년이 걸리는지 아세요?" 라라는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이윽고 아주 모르는 사람에게 말하듯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내가 해보겠어요. 내일 오세요. 그리고 권총을 가지고 와요, 자살할 때 쓰려던 것을. 그것은 저한테 주어야 해요. 그리고 총알도 넉넉히 가지고 와요. 알았죠?" 라라는 콜로그리보프한테서 그 돈을 빌었다. 7 라라는 콜로그리보프 댁에서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여학교를 카이고 여자전문학교에 진학했다. 성적도 우수했고, 이듬해 1912년에 졸업할 예정이었다. 1911년 봄에는, 그녀가 가르친 리파가 여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리파는 이미 유복한 가문의 젊은 기사 프라젠단크와 약혼한 사이였다. 리파의 부모는 딸이 선택한 사윗감에 만족했지만, 딸이 너무 어려서 결혼하는 데는 반대하여 좀더 기다리라고 권했다. 집안에서 귀염둥이로 자라고 제멋 대로 굴던 리파는 부모에게 마구 대들며 울고불고 하면서 소동을 벌였다. 이 유복한 가정에서 라라는 한집안 식구나 다름없이 지내고 있었다. 오빠 때문에 돌려 쓴 돌을 갚으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조차 없었다. 남몰래 매달 지출되는 돈만 아니었어도 라라는 그 빚을 벌써 오래 전에 갚아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파샤한테도 숨기고 시베리아에 유형중인 그의 아버지 안치포프에게 돈을 보내고 있었으 며, 병들고 사나운 그의 어머니의 생활을 자주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파샤의 부담을 덜어주려 고 그의 숙식비의 일부를 직접 주인 여자에게 지불하곤 했다. 라라보다 나이가 좀 아래인 파샤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으며,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했 다. 실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녀의 권유에 따라 대학에 입학하려고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보충하 게 되었다. 라라의 소망은, 1년 후 두 사람이 국가 시험에 합격하여 결혼도 하고 우랄 지방의 적당한 도시 에 가서 함께 중학교 교사로 일하는 것이었다. 파샤는 예술 극장 근처의 카메르게르스키가에 있는, 조용한 집주인이 있는 새 집에 라라가 방 을 얻어주어 살고 있었다. 1911년 여름에 라라는 마지막으로 콜로그리보프네 가족들과 함께 두플 랑카에 갔다. 그녀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으며, 오히려 그 집 가족들보다도 그 고장을 더 좋아했 다. 가족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며, 여름에 여기에 오게 되면 으레 똑같은 광경이 되풀이되곤 하 였다. 그들 일행을 태워 온 무덥고 지저분한 기차에서 내려서 짐들을 마차에 옮겨 싣고 일행이 마차에 올라타고서, 새빨간 셔츠에 소매 없는 덧옷을 입은 두플랑카의 마부한테서 이 고장의 새 소식을 듣고 있는 사이에 라라는 넓은 전원의 향기와 정적에 흠뻑 위하며 혼자 별장까지 걸어가 는 것이었다. 순례자와 방랑자들이 다니던 오솔길이 철길을 따라 뻗어서 숲 쪽으로 나 있었다. 라라는 걸음 을 멈춰 눈을 감으며 넓은 들판의 꽃향기를 풍기는 맑은 공기를 가슴 가득히 들이마셨다. 그녀에 게 이 고장은 핏줄보다도 친근하며 애인보다도 좋고 책보다도 현명해서, 잠시나마 라라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 찾게 해주었다. 나는 지상의 광란하는 유혹을 떨쳐버리고, 모든 것을 올바른 명칭으 로 부르기 위해 여기 있다. 만일에 그것이 내 힘으로 못다 할 것이라면, 인생을 사랑하는 뜻에서 나 대신에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 그해 여름에 그녀는 자기가 짊어진 엄청난 고통을 벗어 던지기 위해 두플랑카에 오게 되었으 며, 그녀는 쉽게 기분을 전환시킬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예전에 보지 못하던 고생티가 많아지고 걸 핏하면 흥분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에 기분을 상하여 그녀의 성질을 대범하지 않게 했다. 콜로그리보프네 사람들은 여전히 라라를 사랑하고 언제까지나 함께 살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라라 자신은 리파가 성장한 지금 자기는 이미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 는 월급을 받을 수 없다고 했으나 억지로 받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라라는 돈이 필 요했으며, 달리 돈을 마련할 방도도 없었다. 이 댁에 머물러 있으면서 독립적으로 돈벌이를 한다 는 것도 이상하고 실제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라라는 자기의 입장이 난처하고 참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집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짐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 좋은 낯으로 대해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러한 시 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우선 빌어 쓴 돈부터 갚아야 했 으나 당장엔 아무데서도 그만한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마치 자기가 인질로 이 집에 잡혀 있 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오빠의 어리석은 과실 때문이며, 덧없는 절망에 가슴이 찢 기는 듯싶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그녀는 모든 데서 멸시를 받는 듯했다. 콜로그리보프 댁을 방문한 친지들이 그녀에게 친절히 대해주면 그녀는 자기를 가엾은 '식객'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 불쾌하였고, 가만 내버려두면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우울증의 발작이 계속되기는 하였으나, 라라는 코로그리보프 댁에 많은 손님이 초대되 는 즐거운 여러 행사에는 스스로 참여했다. 그녀는 수영이나 보트 놀이에 참가하고 밤에 있는 강 변 야유회에서 남들과 함께 불꽃놀이를 하며 춤을 추었다. 그녀는 아마추어 연극에도 출연하고 사격 경기에는 더욱 열을 올렸다. 짧은 모제르 총이 사용되었으나 그녀는 오빠의 가벼운 권총을 애용했다. 사격 솜씨도 제법 능숙해졌다. 그녀는 표적에 연습 사격을 적중시키고 나서 한바탕 농담으로 웃겼다. "내가 남자였으면 결투의 명수가 되었을 거예요." 그러나 명랑해지려고 애쓰면 그럴수록 더 우 울해지곤 했다. 도대체 웬일인지 자기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태는 휴가가 끝나 그녀가 도시로 돌아오자 한 충 더 심해졌다. 여기서 파샤와의 사소 한 불화가 그녀를 불쾌하게 했다. 파샤는 요즘 점차 자신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마치 그녀에게 지 시하듯 했다. 그것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라라를 못마땅하게 했다. 파샤, 리파, 콜로그리보프네 사람들, 그리고 돈. 이런 여러 상념이 그녀의 머리 속을 맴돌았다. 그녀는 삶에 대한 회의를 느꼈으며 미칠 것만 같았다.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이미 경험한 모 든 것을 모조리 내동댕이치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러한 심정으 로 1911년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그녀는 숙명적인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당장 콜로그 리보프 댁을 나가서 어떻게든 스스로 생활을 개척하자, 그러기 위해 필요한 돈은 코마롭스키한테 달라고 하자. 이렇게 결심한 것이다. 전에 있었던 두 사람 사이의 관계로 보나 또는 그 관계를 청 산한 후 이미 몇 해라는 세월이 흘러간 사실로 보아, 그는 어떤 설명이나 요구나, 어떤 치사한 조 건을 내걸지 않고 순수한 의리에서 자기를 돕는 것이 마땅하리라 생각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라라는 27일 저녁에 페트로프카 거리로 향했다. 로쟈의 권총에 장탄을 하 고 안전장치를 풀어서 외투 소매 속에 지니고 갔다. 만일 코마롭스키가 거절하거나 도로 붙잡으 려 하거나 창피를 줄 경우 쏴버릴 작정이었다. 몹시 시끄럽고 들뜬 명절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으나 주위의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생각하 는 것은 다만 일발의 총성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권총이 발사되어 있었다. 누구를 겨누었건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페트로프카 거리까지 가는 동안 그녀의 귓전에는 줄곧 총성이 울리고 있었다. 그것은 코마롭스키를 향해, 그녀 자신을 향해, 그녀의 운명을 향해, 드플랑카의 잔 디밭에 서 있는 참나무에 붙은 표적을 향해 발사되고 있었다. 8 "내 외투 소매를 건드리지 말아요!" 오오! 아아! 소리를 연발하면서 수다스럽게 외투 벗는 것을 거들어 주려고 손을 내미는 엠마 에르네스토브나에게, 라라는 이렇게 말했다. 코마롭스키는 지금 집에 없으니 돌아가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난 바쁘니까. 어디 가셨죠?" 그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청되었다는 것이었다. 파티 장소를 적은 종이 쪽지를 받아 보자, 라 라는 무늬 유리 창문이 낯익을 어둠침침한 층계를 단숨에 달려 내려왔다. 무치노이 거리의 스벤 치츠키 댁으로 향했다. 추위가 매서웠다. 길거리는 깨진 맥주병 밑바닥처럼 두꺼운 얼음이 시꺼멓게 깔려 있었다. 공기 는 숨쉬기에도 따가웠다. 잿빛 안개가 자욱하고, 얼어붙어 빳빳해진 털외투의 회색 깃털이 그녀의 얼굴을 찌르기도 하고 간지럽히기도 했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라라는 인적이 드문 거리를 걸어갔다. 길가의 찻집과 음식점 유리문은 증기에 뿌옇게 서려 있었다. 소시지처럼 뻘겋게 언 사람의 얼굴과 수염 같은 고드름을 늘어뜨린 말과 개의 머리가 안개 속에서 불쑥 나타나곤 했다. 얼음과 눈이 두껍게 집집의 창문에는 크리스 마스 트리의 불빛이 화사하게 반사되고, 흥겹게 떠드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마치 환 등을 비추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카메르게르스키 거리에 이르자 라라는 걸음을 멈췄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구나.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그녀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이런 소리가 튀어나왔다. "파샤한테 올라가서 모든 걸 다 얘기해버리자."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육중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9 파샤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혀끝으로 연신 볼을 내밀면서 거울 앞에 서서 면도를 하고, 칼 라나 커프스 단추를 빳빳한 셔츠에 끼우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파티에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중 이었다. 아직 순진하고 경험이 없는 청년이었으므로 노크도 없이 들어온 라라에게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자기 꼴을 보이게 되어 당황했다. 그는 이내 라라가 몹시 흥분돼 있다는 것을 알아챘 다. 그녀는 서 있기조차 힘겨웠다. 그녀는 마치 여울물을 건너듯이 한 걸음마다 스카프 자락을 제 치면서 걸음을 옮겼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어?" 파샤는 재빨리 그녀를 맞아들이며 불안하게 물었다. "내 옆에 좀 앉아요. 그대로 앉아요, 옷 갈아입지 말고. 시간이 없어요. 곧 가야하니까. 외투 소 매에 손대지 말아요. 잠깐만 저쪽을 보고 있어요." 그는 라라가 시키는 대로했다. 라라는 영국제 옷을 입고 있었으며 외투를 벗어 못에 걸고 권총 을 호주머니 속에 넣고 나서 소파로 돌아왔다. "이젠 됐어요. 촛불을 켜요, 그리고 전등불은 끄고." 라라는 촛불의 어슴푸레한 불빛에서 담소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파샤는 언제나 양초를 준비 하고 있었다. 창가에 있는 촛대에 새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불꽃이 펄렁거리며 조그만 불덩이가 튀더니 곧 화살 모양으로 가늘어졌다. 부드러운 불빛이 방안에 가득 찼다. 유리창의 얼음이 촛불 높이에서 녹아 까만 동그라미가 생겼다. "이봐요, 파샤." 라라가 입을 열었다. "난 지금 곤경에 빠져 있어요. 날 도와주어야 해요. 그렇다 고 너무 걱정할 건 없어, 그 이유는 묻지 말고.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걸, 그 점만은 알아둬야 해요. 나한테는 항상 위험이 뒤따르고 있어요. 이건 진정으로 하는 말이에요. 파 샤가 진실로 나를 사랑한다며, 그리고 나를 파멸에서 구하고 싶다면 우리 하루속히 결혼해요, 네?" "그건 오히려 내가 항상 바라지 않았소?" 파샤가 말을 가로막았다. "난 라라가 날짜만 정하면 언제든지 결혼할 생각이오. 그보다도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분명하게 얘기해줘요. 수수께끼같이 공연히 나를 괴롭히지 말고." 그러나 라라는 말꼬리를 흘리면서 화제를 바꾸었다. 그들은 라라의 슬픔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꽤 오랫동안 나누고 있었다. 10 그해 겨울에 유라는 대학 금메달 획득 시험에 제출하기 위해 망막 신경 이론에 관한 자기 학술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일반 기초 의학 과정을 끝냈을 뿐이었지만, 안과에 관해서는 전문 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시각 생리에 대한 유라의 관심은 그의 성격상의 한 측면인 창의적 소질을 말해 주었으며, 그것 은 예술에 있어서의 상상적인 것과 이념의 논리 구조에 대한 흥미와도 관련이 있었다. 토냐와 유라는 썰매를 타고 스벤치츠키 댁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가는 길이었다. 그들은 소년 시절이 끝나는 무렵에서 청년 시절 초기까지 6년 동안을 한 집에서 살아왔지 때문에 서로를 속속 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버릇까지 같고, 상대방의 농담이나 익살에 웃는 모습도 닮았다. 지 금 그들은 썰매를 타고 가면서 이따금 몇 마디 주고받을 뿐 추위에 입을 봉한 채 제각기 상념에 빠져 있었다. 유라는 시험 기일이 다가와서 논문 작성을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간 축제 기분에 들뜬 세모 거리의 혼잡에 끌렸던 상념이 다른 데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는 고르돈이 편집을 맡고 있는 등사판 학생 신문에 블로크에 관한 논문을 기고하기로 오래 전에 약속했었다. 페테르부르그와 모스크바의 젊은이들은 모두 블로크에 열중해 있었으나 유라와 고르돈만은 유독 그렇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도 그의 마음을 오래 사로잡고 있지는 못했다. 유라와 토냐는 옷깃 속에 턱 을 파묻고 얼어 들어오는 귀를 연신 비비면서 제각기 딴 생각을 하며 썰매를 타고 갔다. 그러나 같은 한 가지 일에 두 사람의 생각은 합치되고 있었다. 며칠 전 안나 부인의 방에서 있었던 일은 그들을 아주 딴사람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들은 마치 처음으로 눈을 뜨고 서로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던 것이다. 유라는 오랜 친구인 토냐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본 적은 없었고 너무나 잘 아는 대상으로 만 여겨 왔는데, 그 토냐가 뜻밖에도 어렵고 복잡한 존재로 변해서 한 여인으로 된 것이다. 그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황제나 영웅, 예언자나 정복자로서의 자신을 머리 속에 상상해보았으나, 그녀 를 여자로 생각해보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토냐는 여자라는 어렵고도 지극히 고상한 임무를 그 가냘픈 두 어깨에 지고 있었 다. 그리하여 그는 뜨거운 동정과 수줍은 호기심을 느끼며 연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유라에 대한 토냐의 태도에도 역시 똑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오늘 외출하는 것을 단념하는 편이 좋겠다고 유라는 생각했다. 그들이 집에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외출할 채비를 마쳤을 때 안나 부인의 병세가 악화됐다는 말 을 듣고 둘이서 부인 방으로 달려갔으나, 부인은 파티에 꼭 참석해야 한다고 고집했었다. 유라와 토냐는 창가에 다가가서 바깥 날씨를 내다보았다. 창가에서 물러날 때 레이스로 만든 커튼 자락 이 토냐의 옷에 붙어 마치 결혼식 면사포처럼 길게 늘어졌다. 그것을 보고 방안의 사람들이 일제 히 웃음을 터뜨렸다. 썰매에 타고 유라는 주위를 살폈다. 그는 조금 전에 라라가 본 적과 같은 광경을 보았다. 얼어 붙은 길을 썰매는 유독히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달렸고, 그 소리는 주위의 정원이나 길가의 수목 에 크게 메아리쳤다. 등불이 비치는 성에 낀 창문들은 마치 누르스름한 황옥으로 만든 귀중품 상 자를 보는 듯했다. 그 안에서는 화려한 모스크바의 크리스마스 생활이 숨겨지고 있었다. 크리스마 스 트리에 촛불이 타고, 가장복을 입은 손님들이 술래잡기나 반지 돌리기 등 여흥을 즐겼다. 느닷없이 유라의 머리에 생각이 떠올랐다. 블로크는 러시아 생활의 모든 영역, 이 북국의 도시 생활에서, 최신 러시아 문학에서, 별빛 찬란한 이 신식 거리에서, 20세기 객실에 놓인 불빛 찬란 한 크리스마스 트리에서 그의 크리스마스 정신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블로크에 대한 논문 같은 건 쓸 필요도 없다. 네덜란드 사람이 그린 그림<마가의 예배>를 러시아 판으로 눈과 승냥이 떼 와 검은 전나무 숲을 배경으로 그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카메르게르스키 거리를 지날 때, 유라는 어느 한 창문의 얼음이 촛불에 검게 녹아 동그랗게 뚫 어져 보이는 것을 눈 여겨 바라보았다. 그 구멍으로 촛불은 한 길가를 내다보면서 지나가는 사람 을 살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책상 위에서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유라는 입 속으로 혼자 중얼 거렸다. 무언가 걷잡을 수 없는 어렴풋한 것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다음 구절이 떠오르기를 바랐 으나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11 오래 전부터 스벤치츠키 댁의 크리스마스 파티는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밤 열 시가 되 면 아이들은 흩어져 돌아가고, 남은 사람들을 위해 트리에 다시 불이 켜지고 아침까지 파티가 계 속된다. 사람들은 커다란 놋쇠 고리에 매단 무거운 포장으로 홀 한쪽 구석을 막아서 만든 '폼페이 실'에서 밤새도록 카드놀이를 한다. 그리고 새벽에 모두 함께 만찬을 드는 것이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스벤치츠키의 조카 조르즈가 아저씨 내외의 방으로 가면서 현관을 지나 다 이렇게 물었다. 유라와 토냐도 역시 주인 부처에게 인사하러 가면서 옆걸음으로 걸으며 옷을 벗고 잠시 무도실을 기웃거렸다. 옷자락을 스치며 서로 발을 맞추어 춤추는 사람들과 춤을 추지 않고 돌아다니며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여러 층으로 불을 켜고 뜨겁게 숨쉬고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 둘레를 마치 검은 벽처럼 둘러싸서 움직이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춤에 열광한 사람들이 어지럽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차장 검사의 아들인 법과 대학생 코카 코르나코프의 지휘로 둘씩 짝을 짓기도하고 둥글게 원을 그리기도 하면서 춤추 고 있었다. 홀 한쪽 구석에서 " 크게 돌아요! 손을 맞잡아요!"라고 외치면 사람들은 구령대로 움 직였다. "원무곡을 쳐주시오!"하고 코카는 피아니스트에게 소리치고 자기 파트너를 첫째 원무의 선두로 리드하여 크게 선회하면서 점점 원을 좁히기 시작했다. 차츰 원무곡은 사라져가는 메아리 처럼 여운을 남기고 잠잠해졌다. 일제히 박수를 쳤다. 서로 어깨를 비벼대며 웅성거리는 손님들에 게 얼음과 차가운 음료수가 고루 돌아갔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젊은 남녀들이 과일과 레몬 주 스를 마시면서 떠들며 웃고 있었다. 그들이 유리컵을 쟁반에 내려놓은 후에는 장내의 떠들썩한 소리와 웃음소리는 열 배나 더 요란스러워졌다. 마치 흥분제 음료수라도 마신 것처럼. 토냐와 유라는 홀에 들어가지 않고 곧장 주인 부처의 거실로 갔다. 12 스벤치츠키 부처의 거실은 홀과 응접실에서 옮겨온 가구 때문에 발 들여놓을 자리도 없을 지경 이었다. 이 방은 스벤치츠키 댁의 파티를 준비하는 마법을 요리하는 작업실이었다. 물감과 아교풀 냄새가 풍기고, 색종이 뭉치와 선물 상자 그리고 양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주인 부처는 선 불에 꽂아 넣을 타드와 만찬회 식탁 좌석 카드에 이름을 써넣는 일과, 복권에 번호를 기입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조르즈가 거들어주고 있었으나 자꾸만 숫자를 틀려서 부처의 잔소리를 들었다. 부처는 토냐와 유라가 와서 무척 반가워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는 사이여서 허물없 이 도와달라고 했다. "우리 집사람은 손님이 와서 파티가 있기 전에 이런 일을 다 끝마쳐야 한다는 걸 몰라요. 이것 봐 조르즈, 또 번호가 틀렸어. 설탕 졸임 과일을 테이블에 놓고 빈 상자를 소파에 놓으면 어떡해, 그건 반대가 아닌가?" "아네뜨가 좀 나았다니 천만 다행이다. 삐에르와 나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여보, 좋아진 것이 아니라 나빠졌다지 않소. 당신은 무엇이든지 반대로 듣는군." 유라와 토냐는 주인 부처와 조르즈를 도우면서 파티의 절반을 무대 뒤에서 보내고 말았다. 13 유라와 토냐가 주인 부처와 함께 있는 동안에 라라는 줄곧 홀에 있었다. 그녀는 야회복을 입지 않았고, 여기에 아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몽유병자처럼 코카 코르나코프와 춤을 추기 도 하고 홀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홀 쪽을 향해 앉아 있는 코마롭스키의 눈에 띄게 되기를 바라면서 한두 번 응접실 출입문 앞에 서 서성이며 멈춰 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얼굴을 가리듯 왼손에 들고 있는 카드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실제 그녀를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보고도 못 본 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라라는 분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때 낯선 처녀가 홀에서 응접실로 들어섰다. 코마롭스키는 전에 라라에게 곧잘 던지던 바로 그런 시선을 그 처녀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처녀는 반 색을 하며 얼굴을 붉히고 살며시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라라의 얼굴은 수치심에 이마와 목까지 온통 벌겋게 달아오르고 하마터면 버럭 고함을 지를 뻔했다. '새로운 희 생자'하고 생각했다. 라라는 마치 거울을 보듯 자기와 코마롭스키와의 과거를 보는 듯싶었다. 그 러나 그와 만나서 얘기할 결심은 포기하지 않고 나중에 좀더 적당한 기회에 시도할 것을 결심하 고 설레이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다시 홀로 돌아왔다. 코마롭스키와 함께 카드놀이를 하고 있던 세 사람 중에서 바로 그 사람 옆에 앉은 사람이 멋쟁 이 전문학교 학생의 아버지였다. 라라는 그 청년과 함께 춤을 추면서 주고받은 몇 마디 대화에서 그것을 알아차렸다. 청년의 어머니는 검은 눈에 시퍼렇게 불을 켜고, 목은 뱀처럼 불쾌하게 뽑아 들었고, 얼굴빛이 검은 키 큰 여인이었다. 그녀는 홀과 응접실을 수시로 왔다갔다하면서 춤추는 아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남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우연히 알았지만, 라라의 마음에 복잡한 감정을 일으킨 그 처녀는 청년의 누이동생이었으며 라라의 상상은 전혀 근거가 없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청년은 라라에게 자기 소개를 했지만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코르나코프, 코르나코프라 고 합니다." 그는 왈츠가 끝날 때 미끄럼을 타듯 라라를 의자까지 인도하고 나서 또 한 번 자기 성을 말하고 물러갔다. 이때 비로소 그녀의 기억 속에 무언가 불쾌한 것이 떠올랐다. 차츰 그녀의 기억이 선명해졌다. 코르나코프-모스크바 중앙재판소 차장 검사. 치베르진을 비롯한 철도 종업원 을 재판에 제소한 사람이었다. 라라의 부탁으로 콜로그리보프가 그를 찾아가서 관대한 조치를 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아아, 그렇군... 재미있게 됐군... 코르나코프. 코르나코프.' 14 자정을 지나 한 시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유라의 귀에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식당에서 차 와 비스킥을 들며 잠시 휴식이 있는 후 또다시 댄스가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촛불은 다 타버렸으나 이제 바꾸어 꽂으려는 사람도 없었다. 유라는 넓은 홀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낯선 남자와 춤을 추는 토냐를 지켜보고 있었다. 토냐 는 유라 옆을 미끄러져 지나가면서 지느러미를 움직이는 물고기처럼 야회복 꼬리를 흐느적거리며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갔다. 그녀는 기분이 몹시 들떠 있었다. 휴식 시간에 식탁에 앉아서도 차를 거절하고 귤 여러 개로 갈증을 풀었다. 귤껍질을 벗기고는 조그만 손수건을 꺼내 손끝과 입 가장자리를 닦곤 했다. 웃으 며 쉴새없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연방 손수건을 꺼냈다가는 다시 허리춤이나 소매 속에 기계적으 로 꽂아 넣곤 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낯선 남자와 춤을 추며, 불쾌한 표정을 짓고 구석으로 물러 서 있는 유라의 곁을 옆으로 지나치면서 장난스럽게 그의 손을 꼭 쥐어주고는 의미 있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쥐고 있던 손수건이 유라의 손에 쥐어졌다. 그는 그것을 입술에 갖다 대며 눈을 감았다. 손수건에서 귤 향기와 열기 띤 토냐의 손 냄새가 뒤섞인 감미로운 향기가 풍겼다. 그것은 유라의 인생에 있어 새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여지껏 경험하지 못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짜릿하게 흐르는 야릇한 감정이었다. 순진한 소녀의 향기는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소리처럼 친밀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유라는 손수건을 잡은 손으로 눈과 입술을 가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순간 집안에서 총소리가 울 려 퍼졌다. 일제히 머리를 돌려 홀에서 응접실 사이의 포장 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했으나 잠시 후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며 뛰어 다니는 사람, 코카 코르나코프의 뒤를 쫓아 총성이 울린 응접실로 달려가는 사람, 우는 사람, 고함지르는 사람, 큰 소리로 지껄이 는 사람, 그야말로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게 무슨 짓이야!" 코마롭스키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여보, 당신 살았수? 여보." 코르나코프 부인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드로코프 선생이 여기 오 셨다고 했는데, 그분이 어디 계시죠? 아아, 어디 계세요, 의사 선생님은? 여보, 제발 좀 가만히 있 어요. 당신은 가벼운 상처라고 하지만, 난 정말 십년 감수했어요! 당신은 가엾은 순교자예요. 그 모든 죄인들을 다스렸다고 이런 보복을 받다니! 이 인간의 쓰레기야! 네년의 눈깔을 뽑아버리겠 다! 이 능구렁이 같은 년, 자, 이년을 놓치지 말아요! 뭐라고, 코마롭스키 씨? 당신을 겨누었다고 요? 당신을 말이에요? 이런 비극에, 코마롭스키 씨, 농담을 할 때가 아니예요. 코카, 코카야! 네가 말 좀 해라! 저년이 너의 아버지를 죽이려 한 거야... 그렇지... 하지만, 하나님이 도우셨어... 코카! 코카야!" 사람들이 응접실에서 홀로 밀려나왔다. 그 속에서 코르나코프 검사는 껄껄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다고 손님들을 안심시켰다. 가벼운 상처를 입어 피가 흐르는 왼손을 깨끗한 냅킨으로 가볍게 누르고 있었다. 한쪽에서 몇 사람들이 라라의 팔을 잡고 끌고 나왔다. 유라는 그녀를 바라보자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바로 그 여자야! 또다시 이런 이상한 상황 속에서 만나다니! 그리고 이번에는 그 백발의 사나이가 나타나다니. 유라도 이번에는 그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알려진 변호사 코마롭스키이며 유라의 아버지 유산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다. 인사를 할 필요도 없이 유라와 그는 서로 모르는 체했다. 그런데 저 여자는... 그러니 까 총을 쏜 것이 바로 저 여자란 말인가? 검사에게? 필시 정치적 동기겠지. 가엾게 되었어. 저 어 엿하고 아름다운 용모! 저럼 몹쓸 놈들, 마치 도둑이라도 잡듯이 팔을 비틀어 올리다니! 그러나 곧 잘못 본 것을 알게 되었다. 라라는 서 있을 수가 없을 만큼 다리가 휘청거려서 그녀 를 부축하며 가까운 의자에 데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유라는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그녀에게 다가갔으나, 먼저 피해자 쪽에 관심을 표시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서 코르나코프에게 다가갔다.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지요. 저는 의사입니다. 손을 보여주십시오. 아아, 다행이로군 요. 붕대를 감을 것까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옥도정기를 좀 발라둡시다. 주인 마나님께서 나오셨 으니 좀 부탁드리죠." 스벤치츠키 부인과 토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다가와서 빨리 외투를 찾으라고 했다. 급히 집으로 돌아오라는 기별이 왔다는 것이다. 유라는 최악이 사태를 예상하며 모든 일을 다 잊어버리고 외투를 입으려고 달려갔다. 15 안나 부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유라와 토냐가 허겁지겁 층계를 달려 올라가 방으 로 들어갔을 때는 숨을 거둔지 10분이 지난 후였다. 급성 폐기종에 의한 발작적인 질식이 원인이 었으며 의사의 오진이었던 것이다. 처음 몇 시간 동안 토냐는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경련을 일으 키며 흐느껴 울기도 하면서 아무도 알아보지를 못했다. 다음날은 기분이 좀 진정되기는 했으나 유라나 아버지가 말을 건네도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입을 열고 말할 듯하다가도 슬픔이 복받쳐 올라와 다시 발작을 일으키듯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추도식이 거행되고 있는 동안에는 토냐는 관대 위에 안치된 화환에 덮인 관머리를 그 깨끗하고 길쭉한 손으로 부여잡고 돌아가신 어머니 곁에 오래도록 무릎을 끓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의 사 람들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혹시 누군가 가까운 사람의 시선과 마주치게 되면, 벌떡 일어나서 울 음을 참으며 위층 자기 방으로 달려 올라가 침대에 쓰러져 절망의 눈물로 베개를 적시곤 했다. 슬픔과 몇 시간씩 서 있어야 하는 곤욕 그리고 수면 부족, 낭랑하게 들리는 찬송가 소리, 밤낮 으로 환히 타오르는 촛불, 게다가 감기까지 들어서 유라의 정신이 나른한 어지러움과 끓어오르는 비탄과 허탈에 싸이게 됐다. 10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만 해도 유라는 아직 어린애였었다. 그때 슬프고 무서워서 떨 며 울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당시 어린 그는 자기 자신의 개성이 문제되는 것은 아 니었다. 유라라는 인물이 존재하거나, 무슨 가치나 관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외부나 주위의 모든 사물뿐이었다. 외계가 숲처럼 울창하게 사방으로부터 무 서운 힘으로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가 공포감에 휩싸인 까닭은 여 태까지 어머니 곁에 붙어 숲속에 있던 자기가 이제는 그 숲속에 혼자 외로이 남게 된 것을 발견 했기 때문이었다. 그 숲은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름, 상점의 간판, 종각의 황 금빛 지붕, 성모 마리아의 성상을 실은 마차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말 탄 사람들, 시장 상점의 진 열대, 별들이 반짝이고 하나님과 성인들이 살아 계시는 높은 밤하늘... 그 아늑히 높은 하늘이 어린 시절에 유모가 하나님 얘기를 들려주었을 때는 유라의 방까지, 유 모의 치맛자락 높이에까지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골짜기에서 자라난 호도나뭇가지 끝처 럼 손이 닿을 만큼 가까워서 가지를 휘어잡고 호도를 딸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유라는 어렸을 때 금빛으로 도금한 대야에 몸을 담그고는 황금과 불로 목욕하였다고 생각하고 유모를 따라 자주 조그만 교회에 아침 예배나 미사에 갔었다. 교회에서는 하늘의 별이 성상 앞의 등불로 변하고, 하 나님은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고, 크고 작은 모든 것이 저마다 적당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른들의 현실 세계였으며, 그것은 숲처럼 그의 주위를 어둡게 둘러싼 도시와도 같았다. 이 무렵 유라는 모든 자신의 반동물적인 신앙으로서 파수꾼처럼 이 숲의 신을 믿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때와는 아주 달라졌다. 중학교와 대학에서 공부하는 12년 동안에 유라는 고전과 성서, 전설과 시인, 역사와 자연과학을 공부했다. 이런 것들은 곧 그의 가문의 기록이나 족보와 같은 것 이었다. 지금 그는 삶도 죽음도 그 밖의 아무것도 두렵지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이 세상의 모 든 사물이 그의 사전 속의 낱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우주와 대등한 입장에 있다고 느꼈다. 그 리하여 안나 부인의 장례식에서 어머니의 장례식 때와는 다른 감명을 받았다. 어머니의 장례 때 는 고통을 잊고 공포에 떨면서 기도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전하는 , 직접 관 련된 말처럼 기도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무언가 분명한 의미가 깃들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가 조상으로서 숭배하던 하늘과 땅의 지고한 힘에 대한 경건한 감정에는 종교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16 "거룩하신 주님이시여, 전능하시고 거룩하시며 영원하신 주님이시여, 우리에게 자비를 내려주소 서." 그는 어디 갔을까? 사람들이 관을 끌어내고 있는가 보다. 어서 잠을 깨워야겠다. 새벽녘에, 다섯 시가 지나서 그는 옷을 입은 채로 소파에 쓰러져 잠에 떨어져 있었다. 아마 그 는 열이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 사람들이 집안을 온통 뒤지고 있지만 그가 도서실 구석 책꽂이 선반 뒤에 누워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유라 도련님, 유라 도련님!" 마르켈리 부르고 있었다. 발인이 시작되어 마르켈은 화환을 밖으 로 들어내는 데 유라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라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가 않아서 찾 고 있는 중에 마르켈은 화환을 쌓아둔 침실에 들어갔다가 그만 갇혀 버렸다. 복도의 옷장 문이 열려 침실 문이 닫혀버렸던 것이다. "마르켈! 마르켈! 어디 있어? 유라!" 아래층에서 두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마르켈은 힘을 모아 일격에 문을 간신히 박차고 나와 화환 몇 개를 들고서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거룩하신 주님이시여, 거룩하고 전능하시며, 거룩하고 영원하시며..." 골목길로 조용히 흘러나온 목소리가 여기에 잠시 머물렀다. 부드러운 깃털을 하늘에 살짝 비질 이라도 하듯이 화환과 행인과 깃털 장식을 붙인 말머리, 신부 손에 쥔 사슬 끝에서 흔들거리는 향로 그리고 발밑의 흰 대지까지 모든 것이 흐느적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듯싶었다. "아아, 유라가 나왔군!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어!" 슈라 슐레진게르가 그이 어깨를 잡아 흔 들었다. "지금 발인을 할 참인데 어디서 뭘하고 있었니? 우리와 함께 가겠니?" "네, 가구말구요." 17 영결식이 끝났다. 거지들이 추위에 발을 동동거리며 두 줄로 빽빽이 늘어섰다. 영구차와 화환을 실은 이륜마차, 그리고 고인의 친정인 크류게르네 마차가 장송 행렬의 선두로 자리를 옮겼다. 교 회당 옆에는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슈라 슐레진게르가 교회당에서 울면서 나오더니 눈물 젖은 얼굴에서 베일을 쳐들고 마차가 모여 선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군중 속에서 운구할 사람들을 찾아 손짓으로 불러모으고, 함께 다시 교회당으로 들어갔다. 교회당에서 사람들이 차츰 더 몰려나왔다. "이번엔 안나 이바노브나가 갔구만. 작별 인사를 하고 이제 머나먼 곳으로 떠나가 버렸어." "음, 좋은 세상 다 살았으니 이젠 쉬러 간 거지." "마차로 가시겠소, 아니면 걸어서 가시겠소?" "너무 오래 서 있었으니 다리를 좀 움직여야지. 좀 걷다가 마차를 탑시다." "푸브코프가 애통해하는 걸 보았소?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인의 얼굴에서 한시도 눈을 때지 않 더군. 그 옆에는 바로 남편이 있었어." "그 사람은 한평생 그 부인한테서 눈을 떼지 않았거든." 사람들은 이 거리의 반대쪽 끝에 있는 묘지까지 줄지어 걸어갔다. 매서운 추위가 놈 풀린 것 같았다. 조용하면서도 음산한 날씨였다. 추위와 함께 인생도 퇴장한 것이다. 장례를 치르기엔 알 맞은 날씨였다. 땅 위에 더렵혀진 눈은 검은 비단 천을 덮은 듯 탁하게 보이고, 교회 부속 묘지의 울타리 안의 전나무들은 젖어서 변색한 은처럼 거무칙칙한 것이 흡사 상복이라도 입은 것처럼 보 였다. 유라의 어머니도 바로 이 묘지에 모시고 있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한 번도 찾아와 보지를 못 했었다. 유라는 멀리서 어머니 무덤 쪽을 바라보며 옛날처럼 "엄마"하고 입 속으로 불로 보았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말끔히 청소된 좁다란 길을 따라 묵묵히 흩어져 갔다. 구불구불한 좁은 길은 슬픔에 잠김 사람들의 발걸음과는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로메코 교수는 토냐를 부축하 면서 걸었다. 크류게르 댁의 가족들이 그 뒤를 따랐다. 토냐에게는 검은 상복이 잘 어울렸다. 둥근 지붕에서 십자가를 내려 드리우고 있는 쇠사슬이나 수도원의 분홍색 벽에는 성에가 허옇 게 곰팡이처럼 끼어 있었다. 수도원 앞뜰 한쪽 구석 별 사이에 매 놓은 빨랫줄에는 빨래가 걸려 있었다. 젖은 소매가 축 늘어진 셔츠, 크림빛 상보, 제멋대로 짜서 삐뚜름하게 걸린 시트. 새 건물 이 들어서서 지금은 달라 보이지만, 그래도 오래 전에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곳이 바로 여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라는 남들보다 앞서서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이 따라오기를 기 다리곤 했다.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죽음이 안겨다 준 그 서글픔에 보상이라도 하 듯이, 그는 명상하고 사색하고 새로운 형식으로 미를 창조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하류를 향해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강물처럼 무슨 힘으로도 저지할 수 없는 강한 욕망이었다. 이 제 그는 예술에는 언제나 두 가지의 끊임없는 관심사가 있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예술은 항상 죽 음을 상상하며 또 이것으로 항상 삶을 창조하는 것이다. 모든 위대하고 참된 예술은 요한 묵시록 과 같은 것이며, 그것을 이어받은 데 지나지 않는다. 유라는 즐거운 기대를 품고, 하루나 이틀 대학과 집을 떠나 혼자서 조용히 안나 부인을 추도하 는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생이 던져준 여러 가지 일들. 안나 부인의 뛰어난 성품의 몇 가 지 서사문을 쓰며, 상복을 입은 토냐, 장례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생긴 일, 먼 옛날 소년 시절에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바라보며 그가 울던 곳에 걸려 있던 세탁물들, 이런 것들을 시로 쓰고 싶었 다. 4.피할 길 없는 운명 1 라라는 반쯤 실신한 상태로 스벤치츠키 부인 침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주인 부처와 의사 드 로코프와 하인들이 숙덕거리고 있었다. 저택 안은 텅 비었으며 어두컴컴했다. 다만 작은 응접실 처마 끝에 걸어놓은 등불만이 길게 늘 어선 방들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코마롭스키는 여기가 마치 제집이나 되는 것처럼 당당한 걸음걸이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 다. 그는 소식을 알려고 침실을 기웃거리는가 하면, 반짝이는 장식을 매단 크리스마스 트리 옆을 지나 식당을 빠져서 되돌아가곤 했다. 식탁에는 손도 대지 않은 요리 접시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마차가 창가를 지나갈 때마다 파르스름한 유리 술잔들이 짤그락 소리를 냈다. 생쥐 한 마리가 접 시 사이를 기어다니고 있었다. 코마롭스키는 몸둘 곳을 몰라 안절부절했다. 서로 엇갈리는 감정이 그의 가슴에 조여들었다. 이 런 수치스런 일이 어디 있담! 그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의 사회적 지위가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사건 때문에 평판이 땅에 떨어질는지 모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화제거리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소문이 벌써 돌리 시작했다면 더 퍼지기 전에 싹부터 잘라버려야 한다. 그 밖에도 그가 흥분하는 다른 이유는 그 모험적이고 광적인 처녀가 어딘가 또다시 마음에 끌 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눈에 그녀는 다른 여자와는 달랐다. 그녀가 보통 여자와 다르다는 건 전부터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딘가 비범한 데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그토록 깊고 아픈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단 말인가! 그리고 반항적으로 난폭하게 자기 운명의 타개를 위 해, 인생의 재출발을 위해 행동할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그녀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우선 방부 터 얻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아니, 그녀 앞에 얼 씬하지 말고 멀찍이 물러나서 방관만 해야 한다. 원래가 격하기 쉬운 성질이기 때문에 잘못했다 가는 또다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부터가 큰일이야! 이런 사건은 결코 불문에 붙일 수는 없지 않는가! 당국에서 눈감 아 줄 리가 없었다. 아직 날도 밝지 않았고 사건 후 두 시간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경찰이 두 번 이나 찾아왔었다. 코마롭스키는 주방으로 가서 경찰관들을 만나 변명을 늘어놓고 그들을 무마하 기에 진땀을 뺐다.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모든 일이 더욱더 복잡해질 것이다. 라라가 코르나코프 검사를 겨눈 것 이 아니라 코마롭스키를 쏘려 했다는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날 일이 못 된다. 혐의의 일부가 해소될 뿐, 역시 그녀는 기소를 면치 못할 것이다. 물론 그로서는 그녀가 기소되지 않도록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재판을 받게 될 경우, 그녀가 총을 쏘았을 때는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는 전문가의 증언 을 정신과 의사한테서 받아서 공소를 기각시키도록 해야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코마롭스키는 비로소 마음이 가라앉게 되었다. 밤이 지났다. 빛줄기가 방마다 기어들어, 도둑이나 집다리처럼 의자와 테이블 밑을 기웃거렸다. 다시 한 번 침실에 들러 라라가 여전히 정신이 들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코마롭스키는 스벤 치츠키 댁을 떠나 전부터 친분이 있는 루피나 오니시모브나를 찾아갔다. 그녀는 국외로 도피한 정치 망명가의 아내로 변호사였다. 방이 여덟 개나 있는 아파트가 그녀에게 너무 커서 방 두 개 를 세놓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요새 비어 있어서 그는 라라를 위해서 그것을 얻기로 했다. 몇 시간 후에, 급성 뇌척수막염 때문에 신경성 고열로 혼수 상태에 있는 라라를 그리로 옮겼다. 2 루피나 오니시모브나는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었으며 편견을 무엇보다 싫어했다. 그리고 '긍정적이고 긴요한 것'이라고 그녀가 생각한 것은 무엇이건 동조하는 여성이었다. 장농 위에는 저자 자신의 헌시가 씌어진 에르푸르트 강령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그녀의 남편 '나의 선량한 보이트'가 스위스의 유원지에서 플레하노프와 함께 찍은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다. 두 사람 다 알파카제의 자켓에 파나마 모자를 쓰고 있었다. 루피나 부인은 자기 집에 새로 세든 환자가 첫눈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라가 꾀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열이 심해서 헛소리를 하는 것을 보고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라 라가 토굴 속에서 미친 그레에트헨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라라에 대한 경멸을 표시하느라고 유난히도 성가시게 움직였다. 그녀는 문을 쾅쾅 여닫 기도 하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집안을 쏘다니는가 하면 온종일 방의 창문을 열어젖뜨리기도 했다. 그녀의 아파트는 아르바트거리에 있는 큰 건물의 맨 위층에 있었다. 동지가 지나면 범람하는 강처럼 푸르고 맑고 넓은 하늘이 창문마다 가득 찼다. 겨울이 반쯤 지나면 다가올 봄의 징후와 예고가 벌써 방안에 흘렀다. 열린 창문으로 따뜻한 남풍이 불어왔다. 멀리 철도역에서 기관차들이 해태처럼 짖어댔다. 라라 는 병상에 누워 지나간 날들을 회상하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아직 철이 덜 들었던 7,8년 전에 우랄 지방에서 모스크바로 올라온 첫날 저녁의 일을 자주 상 기하고 있었다. 정거장에서 마차를 타고 모스크바 시내의 반대쪽에 있는 여관을 향해 침침하고 좁은 거리를 몇 개나 지나왔었다. 가로등이 간간이 나타나 마부의 꼽추 같은 그림자를 길가의 건물 벽에 비치곤 했다. 그 그림자는 점점 커지면서 마치 거인처럼 지붕까지 퍼져 올라갔다가는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러다간 다시 처음부터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머리 위 어둠 속에서는 모스크바 시내의 무수한 교회당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거리에는 전차 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달렸다. 그러나 화려하게 장식한 진열장이며 눈부신 전등불까지도 종소 리나 전차 바퀴처럼 제각기 자기의 소리를 내고 있는 것처럼 라라의 귀를 어지럽게 했다. 여관방에서는 엄청나게 큰 수박을 보고 놀랐다. 그것은 코마롭스키의 환영 선물이었으나 라라 한테는 부와 권세의 상징으로 보였다. 코마롭스키가 이 수박에 칼을 꽂아, 짙은 녹색 공이 둘로 쪼개지며 달콤하고 차가운 붉은 속살이 보일 때 그녀는 다시 한 번 놀랐으나, 그 한 조각을 거절 하지는 못했다. 향기로운 과육이 목에 걸리는 것 같았지만 억지로 삼켰다. 그때 값비싼 음식이나 모스크바의 밤 풍경에 위협을 느꼈던 것처럼 그녀는 후에 코마롭스키에 게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모든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 코마롭스키는 아주 딴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그녀와의 과거를 들먹이지도 않았거니와 그녀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항상 멀찍한 거리에서 아주 점잖게 도움을 제의해오는 것이다. 콜로그리보프의 방문은 전혀 문제가 달랐다. 그의 방문은 라라에게 무척 반가웠다. 그는 훤칠한 키에 호남이었으며 활기와 재치에 넘쳐서 빛나는 눈동자에 지적인 미소를 띄고 있는 이 방문객은 그녀의 방을 통째로 차지해버린 것처럼 방안이 어쩐지 좁아진 느낌이었다. 그는 이따금 손바닥을 비비며 라라의 침대 곁에 앉았다. 페테르부르그 국무 회의에 그가 초청 되어 원로 의원들과 담소할 때는 마치 그들을 학생 다루듯이 하던 사람이었지만, 지금 그는 눈앞 에서 최근까지 자기 가족의 일원으로 친딸처럼 지내던 처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식구한테 그랬듯이 그는 이 처녀한테도 담담하게 이야기하면서 자상하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는 라라를 어른처럼 뚝뚝하고 무관심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어떻게 말하는 것이 그녀의 감정을 건드 리지 않게 될지를 잘 몰라서, 마치 어린애를 다루듯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쩌자고 그 런 짓을 했지? 그런 멜로드라마는 누구한테 필요하지?" 그는 입을 다물고 습기로 얼룩진 벽과 천장을 휘둘러보며 고개를 나무라듯 가로 저으며 말을 이었다. "듀셀리도르프에서 회화와 조각, 원예의 국제 전람회가 열려요. 그래서 나도 구경갈 참이야. 그 런데 이 방은 습기가 많군. 그리고 어디에 제대로 자리를 잡아야지, 이렇게 떠돌이로만 지내서 되 나? 우리가 알기엔, 이 집주인 루피나는 좋은 여자가 못 돼요. 옮기는 게 어떨까? 이 기회에 거처 를 바꾸고 공부를 계속해서 학교도 마치도록 해야지. 내가 아는 화가 한 사람이 있는데, 2년 예정 으로 투르키스탄 지방에 여행하기로 돼 있어. 아틀리에에 딸린 방이 있는데, 독립된 아파트나 다 름없지. 적당한 사람이 있으면 가구까지 그대로 다 빌려주겠다는 거야. 내가 말해 줄 테니 그리로 옮기면 어떨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용건이 있는데, 다름 아니라... 전부터 생각해 오던 나의 신성 한 의무로... 여태껏 리파에 대한... 리파가 졸업을 했으니... 적은 돈이지만 리파의 졸업 기념으로 주는 것이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 주어요... 아니,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고... 이건 꼭 받아줘야 겠어... 부탁이야..." 라라가 눈물을 흘리며 완강히 거절했지만, 그는 1만 루불리짜리 수표를 억지로 떠맡기고 돌아 갔다. 건강이 회복되자 그녀는 콜로그리보프가 알선해준 새로운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스몰렌스크 시장 가까이 있는 자그마한 구식 2층 석조 건물 위층이었다. 아래층은 창고로 쓰이고 있었는데, 짐마차꾼들이 살았다. 자갈이 깔린 뜰에는 언제나 귀리와 건초가 흩어져 있었다. 비둘기들이 구구 거리며 돌아다니다가는 포석 사이를 쥐들이 지나갈 때마다 라라의 방문 높이까지 푸드득 푸드득 날아오르곤 했다. 3 파샤는 라라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지냈다. 그녀가 중태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만나 볼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는 이번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가 보기엔 라라는 그저 아는 사람밖에 안 되는 사나이를 죽이려 했으나, 뜻밖에도 살인 비수의 상대자였던 그 사람이 사 건 후 오히려 그녀를 보호하여 손을 써주었던 것이다. 더구나 사건이 일어난 것은 크리스마스날 밤 타오르는 촛불 앞에서 그녀와 잊을 수 없는 대화를 가진 직후의 일이 아닌가! 만약 그 사람이 손을 써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 사나이 덕분으로 그녀 는 형벌을 면하고 무사히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파샤는 이러한 사정들을 도무지 이 해할 수가 없어서 더욱 고민하게 되었다. 건강이 회복되자 라라는 파샤를 불러서 말했다. "난 나쁜 여자예요. 당신은 내가 어떤 여자인지 모르고 있어요. 언젠가는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안돼요. 그걸 얘기하려면 울음부터 터져나와서 안돼요. 그보다도 날 잊어줘요. 나는 당신 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여자예요." 이런 가슴 아픈 장면이 자주 되풀이되었으며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라라가 아 르바트 거리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있었던 일이었다. 집주인 루피나는 복도에서 눈이 벌겋게 부 어오른 파샤의 얼굴을 보고는 제 방으로 달려들어가 소파에 쓰러져 배를 움켜쥐고 웃어댔다. "아 아, 정말 참을 수 없는 노릇이야! 그야말로 비극의 여주인공이로군! 아하하하." 파샤를 떳떳치 못한 애착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아예 단념하게 함으로써 그의 고민에 종지부를 찍도록 하려는 생각에서 라라는 파샤에게 선언했다. 자기는 그를 사랑하지 않으 므로 헤어지기로 결심했다고. 그러나 이런 말을 하면서도 흐느껴 쏟아지는 눈물은 파샤에게 그 말을 믿을 수 없게 했다. 그는 라라가 죽을 죄를 범한 것이나 아닐까 의심하게 되어서, 그녀의 말 은 믿지 않게 되었고 그녀를 저주하며 증오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칠 듯이 그녀를 사 랑하여, 그녀가 생각하는 일에까지, 심지어는 그녀의 머리 밑의 베개까지에도 질투를 느끼는 것이 었다. 이대로 가다간 양쪽 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한시바삐 결단을 내려서 행동해야만 했다. 그래서 졸업 전이라도 곧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부활제 다음 주 월요일에 식을 올릴 예정이었으 나 라라의 청에 따라 다시 연기되었다. 성신강림제 다음 주 월요일에 그들은 드디어 결혼식을 올렸던 것이다. 그때 이미 그들의 졸업 시험 합격이 확실해지고 있었다. 결혼식의 모든 절차는 류드밀라 체푸르코가 도맡아서 처리해주 었다. 류드밀라는 라라의 동창인 뚜샤의 어머니로서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가슴이 풍만하고 낮 은 음성으로 말하며 노래를 잘 부르는 수다쟁이 여자였다. 그 밖에도 그녀는 실제의 얘깃거리나 미신 따위의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류드밀라는 라라가 결혼식장으로 떠나기 전에 라라를 거들어주면서 마치 집시 같은 낮은 목소 리로 결혼이란 '제단으로 인도되는' 것이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날 시내는 굉장히 무더운 날씨 였다. 교회당의 황금빛 둥근 지붕과 새로 모래를 깐 정원의 좁다란 길이 누렇게 타오르고 있었다. 성신강림제 전날 밤에 잘라낸 푸른 자작나무 가지가 불에 그을린 것처럼 먼지투성이 잎사귀를 돌 돌 말고 교회당 난간 밑으로 축 늘어뜨려져 있었다. 이글거리는 햇빛이 숨을 콱콱 막히게 했으며 눈에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날은 수천 쌍의 결혼식이 일제히 거행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 가씨들은 모두들 신부처럼 밝은 빛 옷을 입었고, 청년들은 축제일답게 머리 그름을 바르고 검은 양복을 입고 맵시를 부리고 있었다. 모두들 더위에 웅성거렸다. 라라가 카페트 위를 걸어나가자 또 다른 친구의 어머니 라고지나가 그들의 앞날의 부귀영화를 빌면서 은전 한 줌을 발 앞에 던졌 다. 이러한 류드밀라의 미신은 라라에게, 주례가 혼례관을 머리 위에 씌워줄 때 맨손으로 성호를 긋지 말고 베일의 자락이나 레이스의 깃으로 손가락을 감싸듯 하라고 가르쳐주기도 했다. 라라는 자기의 장래를 파샤를 위해 바칠 각오였으므로 될 수 있는 대로 촛불을 낮추어 들었다. 그러나 파샤가 더욱 낮게 드는 바람에 결국은 그녀의 촛불이 높아져서 소용이 없었다. 교회에서 곧장 그녀의 거처인 아틀리에로 돌아와 피로연을 베풀었다. 손님들이 "써서 마실 수 없구나!"하고 소리치면, 또 다른 한 패가 "좀 달게 하라구!"하고 호응했다. 신란 신부는 수줍게 미 소를 지으며 키스를 했다. 류드밀라가 축하의 노래로 <포도밭>을 부르고 '하나님은 그대들에게 사랑과 지혜를 주시도다'라는 후렴을 되풀이하고 나서, 다시 <묶었던 머리를 풀어 아름다운 머리 카락으로>를 불렀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단둘이 남게 되자 파샤는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에 오히려 불안을 느 끼게 되었다. 한길 저쪽에 가로등이 환하게 비치고 있어서, 라라가 아무리 커튼을 당겨도 좁다란 판자쪽 같은 한 줄기 불빛이 방안으로 흘러들었다. 파샤는 그 빛을 따라 누군가 엿보고 있기나 하는 것만 같아서 좀처럼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는 라라나 자기 자신이나 또 그녀에 대한 자기의 애정보다도 가로등 불빛에 대해 더 신경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영원처럼 계속되는 이 한밤에 파샤 안치포프는 희열의 절정에서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져 버렸 다. 그의 의혹과 추측은 라라의 고백과 엇갈렸다. 그의 물음에 그녀가 대답할 때마다 그의 가슴은 마치 단애 속으로 나는 것 같았다. 그의 상처입은 상상력은 그녀의 새로운 고백을 쫓아갈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아침까지 이야기로 지샜다. 파샤의 생애를 통해 그의 마음에 이 밤처럼 감동적이며 급작스런 변화가 일어났던 적은 없었다. 여전히 자기가 파샤 안치포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아침에 그는 딴 사람이 되어버렸다. 4 열흘 후에 친구들이 파샤와 라라의 그 방에서 송별회를 열었다. 파샤와 라라 둘다 우수한 성적 으로 졸업하여, 우랄 지방의 같은 도시로 취직되어 그 이튿날 출발할 예정이었다. 다시 그들은 마시고 노래부르며 떠들어댔으나 이번엔 노인이 없이 젊은 사람들뿐이었다. 손님들이 모여 있는 아틀리에와 침실 사이의 칸막이 뒤에는 커다란 고리짝과 라라의 조그만 바 스켓, 트렁크, 식기 등을 넣은 궤짝 한 개,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여행용 가방이 몇 개 놓여 있었 다. 이삿짐은 꽤 많은 편이었다. 일부는 이튿날 아침에 수하물로 부칠 작정이었다. 짐은 거의 다 꾸린 셈이지만 아직 궤짝과 바스켓은 열린 채 얼마간의 여유가 있었다. 라라는 빠뜨린 물건을 생 각 해내며 연방 바스켓에 쑤셔 넣기도 하고 짐을 다시 꾸리기도 했다. 라라가 학교 교무실에서 출생 증명이나 기타 서류를 떼어 가지고 돌아왔을 때 파샤는 집에서 벌써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수위가 짐 꾸릴 포대와 든든하고 굵은 밧줄을 들고 들어왔다. 수위를 돌려보내고 나서 라라는 악수와 키스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칸막이 뒤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그녀가 다시 아틀리에에 나타나자 손님들은 박수로 그녀를 맞이 하고 제각기 자리에 앉았다. 며칠 전 결혼식 때와 같이 떠들썩한 연회가 다시 시작되었다. 스스로 나서서 옆사람 술잔에 보드카를 따라주기도 하며 식탁 중앙의 빵과 디저트 그리고 요리 접시를 향해 포크를 쥔 손들이 뻗기 시작했다. 일장 연설과 건배가 되풀이되고 농담과 익살이 오갔다. 이 젠 술에 취한 사람도 있었다. "난 피곤해 죽겠어요." 남편 곁에 앉아 있던 라라가 말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당신이 원하던 대로 된 셈이군요?" "응." "하여튼 유쾌한 기분이에요. 난 정말 행복해요. 당신은요?" "나도 역시 좋아. 그러나 아직 할 얘기가 많아." 이 젊은이들끼리의 송별회에 코마롭스키가 예외적으로 참석하도록 허락되었다. 연회가 끝날 무 렵에 그는 이제 두 젊은 친구가, 모스크바를 떠나면 자기는 무척 쓸쓸할 것이며 모스크바는 사하 라 사막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말을 시작하다가 그만 감상적인 기분에 젖어 울음이 치밀어 오르는 바람에 송별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그들이 그리워질 때에는 그들이 자리잡게 될 유라친으로 편지를 내거나 찾아가도 좋으냐 고 파샤의 의사를 물었다. "그럴 필요는 전혀 없어요." 라라는 큰 소리로 냉정하게 대꾸했다. "편지를 쓴다거나 사하라 자 막 같다는 말은 모두 쓸데없는 소립니다. 거기까지 찾아올 생각은 꿈에도 마세요. 우리가 없어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을 거예요. 우린 그렇게까지 중요한 존재는 아니니까요. 아마 당신은 곧 다 른 젊은 친구들을 발견하게 되겠죠. 그렇지요, 파샤?" 자기가 지금 누구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조차 아주 잊어버리고 라라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서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나 칸막이 안의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고기 다지는 기구를 분해 하여 식기 궤짝 구석에 넣고 그 위에다 밀짚을 치웠다. 그러다가 궤짝 뾰족한 모서리에 긁혀 하 마터면 손을 다칠 뻔했다. 그러다가 칸막이 바깥에서 갑자기 함성을 터뜨리는 소리에 라라는 문득 손님들이 와 있다는 것 을 상기했다. 사람들은 취기가 좀 돌게 되면 아주 취한 척하기를 좋아하며 취하면 취할수록 더욱 취한 체하게 되는가 보다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때 열린 창문을 통해 마당에서 아주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 다보았다. 두 발이 묶인 말이 절룩거리며 마당에서 껑충껑충 뛰고 있었다. 누구의 말인지 모르지만 어떻 게 잘못되어 이 집 마당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지만 벌써 밖은 훤히 밝았 다. 잠에 취한 도시는 죽은 듯 새벽의 푸르무레한 잿빛 냉기에 잠겨 있었다. 라라는 눈을 감았다. 발 묶인 말의 이상한 말발굽 소리는 어딘가 멀고 먼 시골의 아름다운 마을로 그녀를 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문가에서 초인종 소리가 났다. 라라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 테이블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러 나갔다. 나쟈가 온 것이다! 라라는 급히 친구를 맞으러 달려나갔다. 나쟈는 정거장에서 곧장 이리로 온 모양인데 신선한 매력에 넘쳐 있었으며, 마치 두플랑카 계곡에 피어난 백합꽃 향 기를 그대로 날라온 듯싶었다. 라라와 나쟈는 한동안 할 말을 잊은 듯 서 있더니 부모가 보내는 값비싼 선물을 가져왔다. 여행 가방에서 보석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목걸 이를 라라 앞에 내놓았다. 사람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나왔다. 취기가 좀 가신 손님 하나가 말했다. "장미빛 히야신스로군, 그래 장미빛이야. 놀랍군. 이건 다이아몬드 못지 않게 귀한 보석이지." 그러나 나쟈는 황색 사파이어라고 정정했다. 라라는 나쟈를 자기 옆자리에 앉히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내놓고도 접시 곁에 놓인 목걸이에 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보석은 자주빛 바탕의 상자 가장자리로 굴러가서는 이슬처럼 빛나는가 하면 조그만 포도송이 같이 보이기도 했다. 술이 깬 손님들이 나쟈를 상대로 또 마시기 시작했다. 나쟈는 곧 취하고 말았다. 얼마 안 있어 모두들 잠들어버렸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아침에 라라와 파샤를 정거장까지 배웅하려고 그냥 머 물렀던 것이다. 반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한쪽 구석에서 되는대로 누워서 코를 골고 있었다. 라라 자신도 동창생인 이라 라고지나가 잠든 소파에 기대어 어떻게 깜박 잠이 들었는지 생각나지 않았 다. 라라는 귓가에서 떠들썩한 말소리에 문득 잠을 깼다. 말을 찾으러 거리에서 마당에 들어온 낯 선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눈을 뜨자 그녀는 '무엇 하느라고 파샤는 잠도 자지 않고 저렇게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때 그녀 쪽으로 돌려진 파샤라고 생각했던 얼굴은 이마에 서 턱밑까지 얽은 곰보였다. 도둑이 든 것을 알고 소리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갑자기 목걸이 생각이 나서 살그머니 몸을 일으켜 아까 놓아두었던 식탁 쪽을 살펴보았다. 목걸이는 빵조각과 먹다 남은 캐러멜 사이에 그대로 있었다. 식탁 위가 어수선하여 도둑은 미 처 발견하지 못하고 라라가 애써 챙겨 놓은 옷을 마구 휘젓고 흩으러 놓았다. 몽롱하고 잠을 덜 깬 그녀는 어렴풋이 자기가 해놓은 일이 허사가 된다는 생각에 미쳤다. 화가 나서 고함을 치려고 했으나 여전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무릎으로 옆에서 잠자고 있는 이 라의 배를 힘껏 찔렀다. 이라가 비명을 울리는 순간 라라도 목이 터져라고 함께 소리를 질렀다. 도둑은 질겁을 하 고 훔친 물건을 버린 채 방에서 뛰어나가 달아나 버렸다. 남자들이 벌떡 일어나 영문도 모르고 뒤쫓아 달려나갔으나 도둑은 이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소동 때문에 손님들은 모두 잠에서 깼다. 남아 있던 취기가 말끔히 가셔버린 라라는 그들이 다시 졸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얼른 커피를 끓여 대접했다. 그리고 손님들은 일단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가 정거장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사람들이 가버리고 나자 일이 많아졌다. 라라는 재빠른 솜씨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스켓 과 홑이불을 챙기고 수하물을 가죽끈으로 묶고 밧줄로 동여매면서, 파샤와 수위 마누라더러 오히 려 방해가 되니 도우려 하지 말라고 했다. 모든 일이 제시간에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들 안치포프 부처는 시간에 맞춰 정거장에 나갔다. 배웅하는 친구들의 모자를 바람에 날려보내듯 기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자를 흔들다 말고 세 번쯤 "우라(만세)!"를 외쳤을 무렵에 기차는 더욱 속력을 내고 있었다. 5 구질구질한 날씨가 사흘째나 계속되었다. 전쟁 2년째의 가을이었다. 첫해 승리를 거둔 이후에는 패전하기 시작했다. 브루실로프 장군 휘하의 러시아 제8군은 카르파치아에 집결하여 경사지를 따 라 헝가리로 밀고 내려갈 준비를 하였으나, 동부 전선 전체의 총퇴각으로 부득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군은 전쟁 초기에 점령했던 갈리시아 지방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의사 지바고는 최근까지 유라라고 불리었으나, 이제는 자주 유리 안드레예비치라고 불리게 되 었다. 그는 방금 아내인 토냐를 입원시키고 나서, 아내와 작별 인사를 할 조산원을 기다리면서 산부 인과 병동 분만실 앞 복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필요할 경우에 연락할 장소를 일러두고, 또한 이 쪽에서 간호원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을 문의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시간이 없었다. 두 군데 왕진을 갔다가 급히 자기 병원에 돌아가 봐야 할 텐데, 지금 이렇 게 폭풍이 휘몰아치는 옥수수 밭처럼 가을 바람에 비스듬히 뿌리는 빗줄기를 내다보며 귀중한 시 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그다지 어두워지지는 않았다. 병원 뒤뜰에 있는 간호원 숙소의 유리창이 달린 테라스와 병원 지역에서 어둠속으로 뻗어 간 지선등이 바라다보였다.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는데도 빗줄기는 심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그대로 단조롭게 내리고 있었 다. 바람은 비가 무심하다고 화가 났었는지, 어느 집 테라스 앞의 덩굴나무를 뿌리째 뽑으려고 공 중으로 말아올렸다가 걸레조각 내던지듯 홱 던져버렸다. 두 대의 트레일러를 연결한 트럭이 테라스 앞을 지나 병원 입구로 다가왔다. 부상병을 병실로 운반해 옮기기 시작했다. 더욱이 루츠크 전투 후에는 모스크바의 병원들이 어디나 초만원이었다. 부상병은 복도나 홀까 지 차지하게 되었다. 시내 병원 전체의 혼잡은 산부인과 병동까지 영향을 미쳤다. 지바고는 지쳐서 하품을 하며 창가에서 물러났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자 그 가 일하고 있는 성십자 병원에서의 일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며칠 전에 여자 환자 한 사람이 외과 병실에서 사망했는데, 지바고는 처음에 간장 포총이란 진단을 내렸으나 모두들 오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시체를 해부하게 되어 진실이 드러날 것이지만, 해부를 맡은 의사가 형편 없는 만성 주정뱅이여서 과연 제대로 밝혀낼지는 의문이었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창 밖에는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치 마술 지팡이라도 휘 두른 듯이 창문마다 일제히 불이 켜졌다. 산부인과 과장이 토냐의 입원실에서 작은 대기실을 통해서 복도로 나왔다. 무얼 물어도 언제나 어깨만 흠칫해 보이며 천장을 쳐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친구였다. 그 과묵한 몸짓은 '아 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이 세상에는 과학으로 알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말을 의미하는 듯 싶었다. 그는 지바고 앞을 지나며 미소짓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면서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듯 이 두툼한 손을 두어 번 흔들고는 담배 한 대 피우려고 휴게실 쪽으로 가 버렸다. 뒤따라 그의 조수인 여의사가 나왔다. 과장이 말수가 적은 것과는 반대로 말이 많은 여자였다. "이젠 돌아가시는 게 좋을 텐데요. 내일 성십자 병원으로 제가 전화 연락드릴께요. 그때까지 아 마 별일 없을 거예요. 내가 보기엔 자연 분만이 가능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외과 의사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겠지요. 골반이 좁아서 태아의 머리가 뒤에 위치해 있고 진통이 없어서 약간 염려 되기는 하지만, 아직은 뭐라고 단언할 순 없군요. 해산하기 시작하면서 '진통 여하'에 달려 있으니 까. 하지만 그건 그때에 가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에요..." 다음날 전화를 걸었으나, 전화를 받은 병원 수위가, 가서 물어보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고는 10분 동안이나 지바고의 애를 태우고 나서 기껏 하는 소리가 "부인을 너무 일찍 입원시 켰으니 댁으로 도로 모셔 가는 게 좋겠다는군요."하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지바고는 당장 간호원을 전화통에 불러 대라고 호통을 쳤다. "징후가 잘못 나타난 것이지 모르겠습니다. 하루 이틀 더 기다리면 알게 되겠죠"하고 간호원이 대답했다. 사흘째 되는 날에 지바고는 연락을 받았다. 간밤부터 진통이 시작되어 새벽녘에 양수가 터졌고 아침부터 짧은 간격으로 심한 진통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다. 복도를 걸어 들어갔을 때 반쯤 열린 병실 문 사이로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토냐의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것은 마치 기차 바퀴에 손발이 으스러져 수술대에 운반된 철도 사고 희생자의 비명과 흡사했다. 그에게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손가락 끝을 피가 배어나올 만큼 깨물며 창가로 다가갔다. 밖 에는 어제와 그제처럼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간호원이 병실에서 나왔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무사했군. 무사했어." 지바고는 기쁨에 못 이겨 중얼거렸다. "아드님이에요. 순산을 축하합니다." 간호원이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은 들어가실 수 없지 만 나중에 아기를 보여드릴 테니 좋은 선물을 주셔야 해요. 초산이어서 무척 고생하셨답니다. 초 산은 누구나 힘든 법이니까요." '무사했구나, 무사했어.' 지바고는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간호원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간호 원이 자기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역할을 한 것같이 축하 인사 에 포함시키는 이유를 몰랐다. 사실 내가 한 일이 무엇인가? 아버지와 아들. 아무런 노력도 없이 획득한 아버지의 지위를 자랑스럽게 여길 하등의 근거가 없었다. 이 아이는 기대하지 않던 뜻밖 의 선물인 것만 같이 여겨졌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토냐였다. 무서운 위험에 직면했던 토냐가 다행히도 무사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병원 근처에 살고 있는 환자가 있어서 왕진을 하고 30분쯤 지나서 되돌아왔다. 이번에도 대 기실과 병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지바고는 저도 모르게 대기실 안으로 슬그머니 발을 들여놓 았다. 커다란 몸집에 흰 가운을 걸친 산부인과 과장이 마치 땅에서 솟아나듯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 다. "어딜 들어오려는 겁니까?" 산모가 듣지 못하게 숨을 죽이고 속삭이듯 낮은 못소리로 말했다. "제정신이 있나요? 심리적 쇼크는 고사하고라도 출혈이 많은데다 패혈증의 위험까지 있단 말예 요! 참! 당신도 의사라면서." "아니, 그게 아니라... 그저 문틈에서 한 번 보고 싶어서..." "그렇다면 좋아요. 하지만 부인을 만났다가는 내가 당신을 그냥 두지를 않겠소." 병실 안에는 흰 가운을 입은 여자 둘이 출입문 쪽으로 잔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조산원과 간 호원이었다. 간호원의 손바닥 위에서 검붉은 고무덩어리처럼 늘어났다 오므라들었다 하면서 작은 귀여운 생명이 울고 있었다. 조산원이 탯줄을 절단하기 위해 실을 매고 있었다. 방 중앙에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분만용 침대 위에 노탸가 누워 있었다. 침대는 꽤 높이 올려져 있었다. 지바고는 흥분한 탓으로 모든 것이 확대되어 그 높이가 서서 글 쓰는 책상만큼 되리라 짐작되었다. 흔히 죽은 시신보다도 높게 천장 가까운 곳에 토냐는 다 타버린 고통의 구름에 싸인 채 지칠 대로 지쳐서 병실 한복판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마치 범선과도 같았다. 항구에 입항하여 짐을 다 부리고 나서 항구에서 쉬고 있는 범선인 것이다. 새로운 영혼을 싣고 죽음의 바다를 지나 보지도 못하던 나라, 생명의 대륙을 내왕하는 범선이었다. 이 한 영혼을 부두에 내려놓고 지금 빈 배로 조용히 정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국의 항구들, 대양의 횡당, 샹륙 등의 추억을 말끔히 털어버리고 긴장했던 마스트며 선체가 모두 휴식에 잠겨 있었다. 그리하여 그 배가 달고 있는 깃발이 어떠한 나라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또 그배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언어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자기 병원에 돌아온 지바고는 동료들로부터 축 하를 받았다. 소문이 이렇게 빨리 퍼질까! 그는 놀랐다. 쓰레기통이라고 불리고 있는 의사 대기실 로 들어섰다. 병원이 초만원 상태여서 외래인 탈의실을 겸하고 있었다. 눈덧신을 신은 채 들어오 는 사람도 있었고, 구석에는 잊어버리고 간 꾸러미들이 뒹굴고 마룻바닥에는 휴지 조각이나 담배 꽁초가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잡힌 해부 담당 조수가 창가에 서서 뿌연 액체가 든 유리병을 빛에 대고 안경 너머로 살펴보고 있었다. "축하하오."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들여다보면서 지바고의 진단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 다. "감사합니다. 수고를 끼쳐드려서 미안합니다." "천만에, 난 상관없어요. 해부는 피추스킨이 했으니까. 역시 간장 포충이었어! 당신의 진단이 정 확한 데 모두들 놀라고 있었어." 이때 원장이 들어오면서 인사를 했다. "이건 뭐야? 돼지 우리와 다를 데가 없군 그래. 그보다도 지바고, 그건 포충이 틀림없었어! 우 리들의 판단이 잘못이었지. 축하하네. 그리고 또 한가지 딴 얘긴데, 두통거리가 생겼어. 병역 면제 자 명부를 또 조사중에 있어요. 이번엔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구만. 군의관이 엄청나게 부족하다 는 거야. 자네도 멀지 않아 화약 냄새를 맡게 될지도 몰라." 6 안치포프 부처는 유라친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정착하게 되었다. 라라의 친정이 기샤 르네가 이 고장에서 평이 좋았기 때문에 라라는 이 새 고장에서 자리를 잡는 데 곤란을 덜게 된 셈이다. 라라는 무척 이도 많고 바빴다. 집안 살림과 세 살짜리 딸 카첸카를 보살펴주어야 했다. 마르푸 트카라는 빨간머리 하녀는 열심히 일하기는 했으나 라라가 거들어 주지 않으면 혼자서 아무 일도 못했다. 라라는 남편이 흥미를 가지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거들었다. 그녀는 여자중학교에서 교편 을 잡았다. 쉴새없이 일하면서 행복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꿈꾸던 생활이었던 것이다. 라라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 유라친이 좋았다. 그곳은 강 중류와 하류에 배가 다닐 수 있는 르 인바 강이 흐르고 있으며 우랄 철도가 그곳을 지나고 있었다. 유라친에서는 겨울이 가까워지면 보트의 임자들이 우선 겨울을 먼저 알린다. 그들은 모트를 강 에서 끌어올려 마차에 실어서 시내로 가져와 자기 집 뜰안에다 보관한다. 보트는 밖에 놓여져 봄 까지 겨울을 지낸다. 유라친에서는 뜰안 땅바닥에 흰배 밑창을 위로 향하게 엎어 놓게 되면, 다른 고장에서 황새가 날거나 첫눈이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겨울이 닥쳐오는 것이다. 안치포프 부부 가 세든 집 뜰안에도 보트가 놓여 있었다. 카첸카가 정자 대신 흰색을 칠한 배 밑창이 지붕이 죄 어 그 밑으로 기어들어가 놀곤 했다. 라라는 솔직이 말해서 변강의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이 지방의 고유한 사투리하며 포제 장화 에 소매 없는 융으로 만든 잿빛 웃옷을 즐겨 입는 이곳 지식칭의 순진하고 소박한 성격이 좋았 다. 라라는 이 지방 풍토와 서민 생활에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스크바 철도 노동자의 아들인 파샤는 완고한 도시인이었다. 그는 유라친 사람들을 라라보다 냉정하게 대했다. 파샤는 그들이 미개하고 무지한데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에게는 책을 빨리 읽고 여기저기서 얻은 지식을 고스란히 축척하는 비상한 능력을 지니고 있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라의 영향도 있었지만 전에도 그는 무척 많은 책을 읽었다. 시골에 온 후 몇 년 동안 다방면의 독서는 이제 라라의 지식이 그에게 미칠 수 없을 만큼 그는 성장하게 되 었다. 그는 동료 교사들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고, 그래서 그들과 는 숨통이 말힐 것만 같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러한 전시에 동료들의 평볌한 사고방식 이나 곰팡이 냄새가 나는 애국심 따위가, 조국에 대해 훨씬 복잡한 감정을 지닌 파샤에게는 전혀 공감을 줄 수 없었다. 파샤는 고전학을 전공했었다. 중학에서는 라틴어와 고대사를 담당했다. 그러나 중학 시절부터 그의 마음속에는 순수과학인 물리학과 수학에 대한 동경이 잠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제 갑자기 소생하게 되어 독학으로 대학 수준에 도달할만큼 공부했던 것이다. 앞으로 학위를 획득하고 수학 의 한 분야를 전공하여 가족과 함께 페테르부르그로 진출할 것을 꿈꾸고 있었다. 지나치게 밤늦 게까지 공부하느라 건강을 해치고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아내와의 사이는 좋았으나 좀 단순한 관계가 아니었다. 라라가 무엇이든 그를 따뜻이 보살펴주 면, 그는 오히려 마음의 부담이 되었으며, 무심코 한 ㅁ라을 그녀가 자기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 이지나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일체 비평을 삼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라라가 자기보다 좋은 집안 에서 자랐다거나, 또는 그녀가 전에 딴 남자와 관계를 가졌다든지 하는 따위를 암시하는 것으로 라라가받아들이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혹시 자기가 그녀를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고, 그 녀가 오해할까봐 항상 신경을 써왔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생활에는 일종의 어색한 분위기가 감 돌게 되었다. 더욱이 두 사람 다 상대방에게 관대하려는 경쟁이 오히려 사태를 한층 복잡하게 했 던 것이다. 하루는 부부가 손님을 초대했었따. 라라네 학교 교장과 파샤의 동료 교사 몇 사람과, 그리고 최 근에 파샤가 간여하고 있는 조전재판소 판사와 그 밖의 몇 사람들이었다. 파샤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은 모두가 꽉 막힌 바보들이었다. 그는 라라가 진심에서 그 누구 하나 환대하지 않으면서 극 진한 호의를 보여주는 그녀의 태도에 놀랐다. 손님들이 돌아가고 라라는 실내 환기를 시키고 총 소도 하고 마르푸트카와 부엌에서 접시를 닦기도 하며 오랫동안 일했다. 그러고 나서 카첸카와 남편이 잠자리를 바로하면서 얼른 옷을 벗고 불을 끄고 얘기가 어머니 품속으로 기어들어가듯 자 연스럽게 그의 곁에 가서 누웠다. 그러나 파샤는 잠든 체했으나 잠들고 있지는 않았다. 요새 그는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았으며, 이 밤도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적어도 서너 시간 안에는 잠을 못자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방안에 남은 담배 연기를 피할 겸 잠을 청하기 위하여 산책을 하려고 살그머니 일어나 잠옷 위에 슈바를 걸치고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갔다. 맑고 싸늘한 가을밤이었다. 발밑에서 얄팍한 얼음장이 부서졌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은 얼어붙 은 검은 진흙땅 위에 타오르는 알콜 램프의 불꽃처럼 파란빛을 던지고 있었다. 안치포프네 집은 거리 끝에 있었으며 강 나루터의 건너편 쪽이었다. 그 뒤쪽으로 철도가놓여 있는 평야가 있었다. 철길 근처에는 파수막이 있었고 철로에는 건널목이 놓여져 있었다. 파샤는 엎어놓은 보트에 걸터앉아서 별들을 바라보았다. 지난 몇 해 동안 줄곧 가까이서 맴돌 던 샹념이 불현 듯 무서운 힘으로 엄습해왔다. 조만간 결말을 지어야 할 것이라면 지금 당장 짓 는 편이 좋지 않은가. 언제까지 이대로 질질 끌고 나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진작부터, 결혼하기 이전에 일이 이렇 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했어야 했다. 철들기 전부터 나는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제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 나는 결혼하기 전해 겨울에 그녀가 잊어달라고 했을 때 깨끗이 단념하지 못했을까?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대상으로 제멋대로 정한 고상한 순정이며, 그녀 자신의 순정의 변신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고 상하고 훌륭한 것일지라도 그녀의 사명이 현실의 가정 생활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어리석 게도 나는 변함없이 그녀를 사랑하고 았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미칠 듯이 좋았다. 그렇지만 그것 이 곧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그녀의 아름다움과 대범한 마음씨에 감사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도대체 그것을 누가 판별할 수 있단 말인가! 귀신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럼 나는 어떡하면 좋은가? 이 위선에서 카첸카와 라라를 해방시켜야 한다. 이것은 나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혼을? 투신 자살을? 무슨 실없는 생각일 까! 그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갑갑해왔다. 난 절대로 그따위 짓을 할 순 없어! 그런데 어떻게 그 런 엄청난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몰랐다. 그는 마치 대답을 구하듯 별들을 쳐다보았다. 별들은 작게 크게, 빠르게 또 천천히, 푸르고 또 무지개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갑자기 별빛이 사라지고, 누군가 횃불을 휘두르며 들에서 대문 쪽 으로 달려오기라도 하듯, 거칠고 빠른 불빛이 집 뜰안 보트 위에 앉은 파샤의 모습을 뚜렷이 비 추었다. 군용 열차가 불꽃을 내뿜으며 누런 연기를 하늘로 올리면서 건널목을 지나 서쪽으로 달 리고 있었다. 지난 해부터 시작하여 밤낮으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었다. 파샤는 미소를 지으며 보트에서 일어나 잠자러 갔다. 그는 희망의 돌파구를 발견해냈던 것이다. 7 파샤가 자기 결심을 말할 때, 라라는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처음엔 자기 귀를 의심했었다. '쓸 데없는 소리. 공연히 한 번 해보는 소리겠지.' 그녀는 생각했다. '모르는 체하고 있으면 잊어버리 고 말 테지.' 그러나 남편은 이미 두 주일 전부터 필요한 수속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병무청에 지원서를 제출했으며, 학교에선 후임 교사를 채용했다. 옴스크에 있는 군사학교에서 입 학 허가서를 보내 왔다. 라라는 시골 아낙네마냥 울부짖으며 파샤의 두 손을 움켜잡고 그의 발밑에 몸을 던졌다. "파샤, 여보, 가지 말아요. 나와 카첸카를 누구한테 남기고 가요? 제발 가지 말아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내가 손을 쓸 테니까. 당신은 아직 정식으로 신체검사도 받지 않았으니까. 심장이 약한 당신이, 무모한 짓이에요. 결심을 번복하기가 부끄러운가요? 정신나간 짓 때문에 가족이 희생되는 건 부끄럽지 않구요? 군대에 자원을 하다니, 이해할 수 없어요! 우리 오빠를 그토록 비웃고, 이제 그것이 부러워졌단 말예요? 장교복에 긴 칼을 차고, 한 번 거드럭거리고 싶단 말이죠? 당신이 정 말 그럴 줄은 몰랐어요. 왜 갑자기 사람이 그렇게 변하지요? 제발 솔직히 말해줘요. 러시아가 필 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건가요?" 문득 그녀의 원인이 전혀 딴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대략 은 알 것 같았다. 파샤는 그녀의 태도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생을 통해 파샤에게 향한 그 녀의 아름다운 애정인 모성애에 그는 반발하고, 그러한 애정이 이성간의 평범한 사랑보다 훨씬 소중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매맞고 난 사람처럼 아무 말 없이 눈물을 삼키며 묵묵히 남편의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파샤가 떠나가 버리자 온 시내가 갑자기 조용해지고 하늘을 날던 까마귀마저 적어진 느낌이었 다. 라라가 넋을 잃고 있는 것을 보고 하녀 마르푸트카는 실없이 "마님!마님!"하고 불러대고, 카첸 카는 엄마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엄마,엄마!"하고 한없이 불렀다. 그녀의 일생을 통해 이것이 가 장 큰 패배였다. 그녀의 밝고 가장 보람찬 희망이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시베리아에서 보내 오는 남편의 편지를 통해 라라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얼마 안 가 서 자기의 잘못을 알게 되고 남겨두고 온 처자를 무척 그리워했다. 몇 달 후에 그는 교육 기간을 채우기도 전에 소위보로 임관되었고 곧 전선 부대로 배속되었다. 부임 도중에 유라친에 들를 수 도 없었고 모스크바에도 단시간 머물렀기 때문에 아무도 만나보지 못했다. 전선에서 보내 오는 편지는 옴스크의 군사학교 시절의 우울한 내용보다는 한결 명랑했다. 그는 전공을 세워 공로 포상으로나, 아니면 가벼운 부상이라도 입어서 위로 휴가차 가족과 만나게 되 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내 그러한 기회가 눈앞에 다가왔다. 브루실로프 휘하의 제 8군이 적군의 전선을 돌파하여 공격중에 있었다. 파샤한테서 서신 연락이 두절되었다. 처음에 라라는 별로 염려 하지 않았다. 파샤의 침묵을 그녀는 군사 작전과 이동 도중이어서 편지를 쓰지 못하겠거니 생각 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러시아군 부대들은 진격을 멈추고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샤 한테서는 전혀 소식이 없었다. 라라는 걱정이 되어 우선 유라친에서 조회해보았고 다음에는 모스 크바와, 이전에 편지를 주던 야전 부대의 주소에다 편지로 문이해 보았으나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했다. 지방의 다른 부인들처럼 라라도 전쟁 초부터 유라친 시립 병원에 부설된 위수병원에 다니며 일 을 도왔다.거기서 그녀는 열심히 훈련을 받아 간호원 자격을 받은 후 근무처인 학교에서 6개월간 의 휴가를 얻었다. 살던 집은 마르푸트카에게 맡기고 카첸카를 데리고 가서 리파에게 맡겼다. 리 파의 남편 프리젠단크는 독일 국적이었으므로 다른 적국인과 함께 우파 시에 억류되어 있었다. 서신으로는 아무리 알아 보아도 남편의 소식을 알 길이 없다고 깨닫고, 그녀는 자기가 직접 파 샤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녀는 리스키시를 경유하여 헝가리 국경의 메조라보르치 로 향하는 병원 열차에 간호원으로 들어갔다. 메조라보르치는 파샤에게서 받은 마지막 편지의 주 소지였던 것이다. 8 타치야나상병 원호위원회가 모금한 기금으로 이루어진 적십자 열차가 전선에 있는 사단 본부에 도착했다. 대부분은 길이가 짧고 낡은 화물차를 연결한 기다란 열차였다. 그중 1등차에는 장병에 게 줄 위문품을 가지고 온 모스크바의 저명 인사들이 타고 있었다.고르돈도 일행에 끼여 있었다. 그는 어릴 때 친구인 지바고가 바로 이 사단 소속 야전 병원에 배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병원이 가까운 촌락에 위치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전선 지구까지 여행할 수 있는 허가 를 얻어서 그 마을로 가는 보급 마차에 편승했었다. 마부는 서투른 러시아 말로 지껄이는 것으로 보아 백러시아인이 아니면 리트바니아인이었다. 모두들 적의 간첩 소동이 심해서인지 마부는 지루하도록 판에 박은 듯한 말만 했다. 일부러 온건 한 사상을 나타내려는 말투가 대화를 부자연스럽게 했다. 가는 길의 대부분을 마부는 입을 봉하 고 있었다. 부대 이동에 익숙해진 사단본부에서는 거리를 백 단위로 말하는 습관이 붙어 있어서 야전 병원이 있는 마을도 바로 이웃에 있는 것처럼 20베르스타나 25베르스타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고 말했다. 사실은 그곳까지 80베르스타가 더 되는 거리였다. 도중에 좌측 지평선 쪽에서 줄 곧 적의에 찬, 쿵쿵거리는 소리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르돈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지 진을 경험한 적이 없었지만, 멀리서 울려오는 적의 포화 소리가 화산이 진동하는 소리와 흡사하 리라 생각했다. 해질 무렵에 먼 지평선에서 갑자기 장미빛 불꽃이 솟아 오르더니 날이 샐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 고르돈이 탄 마차는 파괴된 촌락들을 통과했다. 어떤 마을은 주민이 모두 떠나서 텅 비어 있었 다. 또 어떤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깊게 땅굴을 파고 들어가 살고 있었따. 전에 집이 서 있던 자리 에는 부서진 기왓장이며 쓰레기더미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불타버린 마을이 불모의 사막처럼 한눈에 바라다보였다. 노파들이 폐허가 된 잿더미를 파헤쳐 무언가 찾아내어 거두고 있었다. 주위 엔 아직도 벽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낯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따. 노파들은 마차 위의 고르돈을 쳐다보았다. 언제 이 세상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며 평화롭고 질서 있는 생활로 될 것인지 묻고 있는 것만 같았따. 날이 어두워진 후에 정찰대를 만나 마차를 큰길에서 딴 길로 돌아가도록 명령을 받았다. 마부 가 그 길을 몰라서 두 시간 동안이나 헤매고 있었따. 새벽녘에 그들이 찾는 마을에 당도했으나 야전 병원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똑같은 이름의 마을이 또 하나 있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아침에야 겨우 목적지인 마을을 찾았다. 소독약과 요도포름 냄새가 풍겨오 는 마을길을 마차로 달리면서, 고르돈은 오후까지만 지바고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는 일행 이 기다리는 정거장으로 되돌아가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그는 부득이 여기서 한 주일도 더 머물 러 있게 되었다. 9 그 무렵 전선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갑작스런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고르돈 이 방문한 마을 남쪽에서 우리의 군부대들은 적의견고한 진지를 성공적으로 돌파하여 깊숙이 뚫 고 들어갔다. 후속 부대가돌파구를 확대하면서 그 뒤를 계속 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선봉 부대는 후방이 차단되어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 포로들 주에 안치포프 소위가 끼여 있었다. 그의소대가 모두 투항하는 바람에 그도 하는 수 없이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안치포프 소위에 관해서는 사실과는 다르게 소문이 돌고 있었다. 적의 포탄이 터질 때 그 파편 에 맞고 흙에 묻혀버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그의 친구이며 같은 연대 소속이었던 갈리울린 중위가 직접 목격했다는 것이다. 갈리울린 중위는 안치포프가 병사들과 함께 공격하고 있을 때 관측소에서 쌍안격으로 그의 전사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갈리울린의 눈에 들어온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공격 부대의전진하는 광경이었다. 마른 금작화 가 바람결에 흔들리며, 움직임 없는 골짜기가 있는 가을 들판의 무인지대를 병사들이 무리가 되 어 쏜살같이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을 참호에서 쫓아내 백병전을 벌이던지, 아니 면 수류탄을 던져 섬멸하기 위해서였다. 달리고 있는 병사들에겐 그 들판이 끝없이 계속되고 있 는 것만 같았다. 발밑의 땅은 진구렁처럼 미끄러웠다. 그들을 지휘하던 소위가 처음에는 선두에 서, 다음엔 그들과 나람히 달리고 있었따. 권총을 머리 위에 휘두르며 입이 귀까지 찢어지도록 '우라'를 외치고 있지만, 자기 귀에나 병사들의 귀에도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소대는 땅바닥에 엎드렸다가는 도 일제히 일어나 함성을 지르며 내달았다. 그럴 적마다 한두 사람이 적 탄에 맞아 밑둥이 잘린 나무처럼 뻣뻣이 쓰러지고는 다시일어나지를 못했다. "사격이 너무 원거리군. 전화로 포병대를 불러라." 갈리울린은 불안한 얼굴로 옆에 있는 포병 장교에게 말했다. "아니, 그만두시오. 이번엔 괜찮아." 이때 공격 부대는 적과 교전할 수 있는 거리까지 전진했다. 포 사격이 멎었다. 갑자기 찾아든 고요함 속에서 관측하고 있던 사람들은 자기가 마치 적의 참호 바로 앞까지 부하를 이끌고 들어 가, 이 몇 분 동안 기민성과 용기로 기적을 보이려는 안치포프가 된 것처럼 가슴이 설레이고 있 었다. 그 순간 독일 16인치 포탄 두 발이 공격 부대 바로 앞에서 터졌다. 연기와 흙먼지가 검은 구름처럼 모든 것을 뒤덮어버렸다. 안치포프 소위와 그 부하들이 전사했다고 생각한 갈리울린 중 위는 창백해진 입술고 "큰일 났구나! 이젠 틀렸어! 당했어!"하고 중얼거렸다. 다른 포탄 하나가 바 로 관측소 옆에까지 날아왔다. 관측자들이 몸을 움츠리고 안전한 거리로 급히 물러났다. 갈리울린은 안치포프와 한 엄폐호에 기거하고 있었따. 후에 안치포프의 동료들이 그가 전사한 것으로 단념하자 친구인 갈리울린이 미망인에게 전할 유품을 맡게 되었다. 그 속에는 아내의 사 진이 여러 장 들어 있었다. 기계공 출신인 갈리울린은 중위로 진급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치베르진네 셋집 수위 기 마제트진의 아들로서, 옛날에 젼습공으로 있을 때 직공장인 후들레예프한테 매맞던 바로 그 유수 프카였다. 그가 진급하게 된 것은 옛날에 그를 학대한 사람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위로 임관된 갈리울린은 무슨 영문인지 자신의 희망과는 달리 후방 소도시 경비대의 한가한 직책에 보직되었었다. 그는 반병자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역시 늙어빠진 교관들이 아침마다 그 들에게 다잊어버린 교련을 실시하고 있었따. 갈리울린의 일이라고는 부관실 앞의 위병을 교대시 키는 일이었다. 그 밖에 아무 할 일이 없었다. 이렇게 무사안일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모스크 바에서 그의 부대로 전입되어 온 늙은 보충병들 속에 너무나도 낯익을 얼굴이 끼여 있었다. 다름 아닌 후들레예프 노인이었다. "오호, 알 만한 노인이군!" 하고 갈리울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장교님." 후들레예프는 부동 자세를 취하고 경례를 붙였다. 이 정도로 끝날 수는 없었다. 갈리울린은 병사 후들레예프가 교련에서 잘못한 것을 보기가 무 섭게 호통을 쳤으나, 부하가 자기를 바로 쳐다보지 않고 곁눈질하는 것 같아서 주먹으로 턱을 한 대 쥐어박고 영창에 넣어 이틀을 빵과 물만 먹였다. 그 후부터 갈리울린의 일거 일동은 옛일에 대한 보복의 내새가 짙게 풍겼따. 그러나 이것은 장 교와 병사라는 상하 관계로 보나 곤봉에 의해 강제되는 군율이라 할지라도 갈리울린으로서는 비 열하게 생각되었다. 어쩌면 좋을까? 더 이상 두 사람이 같은 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장교 로서 자기 부하를 다른 부대로 전출시키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징계 이외의 이유로는 아무 데라도 보낼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자기 자신이 전출을 요청할 구실은 없을까? 갈리울린은 경비대 근무가따분하고 보람 없다는 것을 이유로 전선 근무를 자청하게 되었다. 이것 으로 그는 오히려 좋은 인상을 받게 된 셈이다. 그리고 최초의 전투에서 또 다른 장점을 발휘함 으로써 그는 우수한 장교로서의 소질을 인정받았고, 이내 중위로 승진하게 되었다. 갈리울린이 안치포프와 처음 사귄 것은 1905년의 일이었다. 이 무렵 파샤 안치포프는 반 년 가 량 치베르진네 집에 신세를 지고 있어서 갈리울린을 일요일마다 찾아가서 함께 놀곤 했었다. 거 기서 라라와도 한두 번 만난 일이 있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전혀 소식을 몰랐다. 인치포프가 유라 친에서 연대에 부임해 왔을 때 갈리울린은 옛 친구가 딴사람처럼 변해버린데 놀라지 않을 수 없 었다. 수줍은 응석꾸러기며 계집애 같던 그 소년이 거만하고 아는 체하며, 남과 사귀기를 싫어하 는 인간으로 변해 있었다. 안치포프는 지적이며 매우 용감하고 과묵하면서도 항상 조소적인 데가 있었다. 이따금 갈리울린은 안치포프를 바라볼 때, 마치 창문에서 안을 들여다보듯이 그의 슬픈 눈동자 속에는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확고한 사상이 보이는 듯했다. 아마도 그것은 딸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안치포프는 동화 속에 나오는 마술에 홀린 사람 같았다. 그런데 이제 그는 가고, 갈리울린의 손에는 그의 서류와 사진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변신인 수수 께끼만이 남겨진 것이다. 결국 남편의 행방을 문의하는 라라의 편지가 갈리울린에게 이첩되었다. 그는 라라에게 회답을 보내려고 했으나 시간이 없어 자세한 편지를 쓸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라라의 상처를 조금이라 도 덜어주고 싶었다. 상세하고 긴 편지를 쓰는 것을 하루 이틀 미루어오다가 라라가 간호원으로 전선 어딘가에 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제는 편지를 쓰려 해도 주소를 몰랐다. 10 "그래 오늘은 말을 구할 수 있겠어?" 고르돈이 점심 시간에 숙소로 돌아오는 지바고에게 물었 다. 그들은 갈리시아의 한 농가에 숙소를 정하고 있었다. "그래 말이 어디 있나? 그보다도 남쪽과 북쪽이 다 막혀서 아무데도 갈 수가 없어. 아주 혼란 한 상태에 있어.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돼가는 건지 알 수가 없다니까. 남쪽에서 아군은 몇 군데 서 독일군 전선 측면을 우회하거나 돌파한 모양이지만 그 일부는 거꾸로 포위당했다는 거야. 북 쪽에서는 도강이 불가능하다던 지점에서 독일군이 스벤타 강을 건너왔다네. 그것은 1개 군단 병 력의 기병 부대로서 철도를 폭파하고 병참 기지를 습격하고 있다는 거야. 내가 알기에는, 우리를 포위하려는 모양일세. 이런 형편인데 자넨 말을 얻어서 어떡하겠다는 건가? 이봐, 까르펜코!" 하 고 위생병을 불렀다. "빨리 식사를 준비해. 뭔가 오늘은? 양고기? 거좋군." 야전 병원은 의무 부대와 부속 시설을 가지고 있어서, 지적적으로 무사했던 온 마을에 분산되 어 있었다.집집마다 서구식 창살문 벽이 반짝이고 유리 한 장 부서지지 않았다. 마지막 더위가 남아 있는 황금빛 가을은 따스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낮에 군의관과 장교들은 창문을 열어놓고, 창틀과 낮은 천장에 우글거리는 파리를 잡기도 하고, 군복이나 가운 단추를 끄 르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혓바닥이 델 정도로 뜨거운 야채국이나 차를 마시기도 했다. 밤에는 페 차카 앞에 주저앉ㅇ 매운 연기에 눈을 껌벅이고 자꾸만 꺼지려는 눅눅한 장작을 입김으로 불며, 불을 제대로 피우지도 못한다고 위생병들을 나무라는 것이었다. 조용한 밤이었다. 고르돈과 지바고는 양쪽 벽 옆에 놓인 침상에 서로 마주 보고 누워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식탁과 벽면에 길쭉하고 좁다란 창문이 있었다. 불을 많이 때서 방안은 후덥지 근하게 더웠고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그들은 양쪽 창문을 열어놓고 가을밤의 신선한 공기가 흘러 들어오게 했다. 여느 때와 같이 이날 밤에도 그드른 서로 이야기를 나눴고, 또 여느 때처럼 전방 쪽 지평선 위에 장미빛 불꽃이 번쩍이고 있었다. 쉴새없이 톡탁거리듯 들려 오는 총소리를 제압 하듯, 마치 철판을 씌운 묵직한 트렁크를 마룻바닥에 마구 끌 때처럼 지축을 뒤흔드는 둔탁한 굉 음이 울려오자 지바고는 그 소리에 경의라도 표하듯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입을 열었다. "저건 베르타라고 부르는 독일군의 16인치 포일세. 60파운드나 되는 포탄을 쏘아대거든." 이렇게 말하며 다시 대화를 계속하려 했으나 화제가 무엇이었는지 이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을에 풍기는 이 냄새가 대체 뭔가?" 고르돈이 물었다. "여기 도착하면서 구역질이 날 만큼 코를 찌르는 냄새야, 쥐 냄새 같기도 하고." "그래, 그건 대마 냄새야. 여기는 대마의 산지니까. 대마 자체가 고기 썩는 냄새를 풍기지. 그 밖에도 전투 지구에서는 전사자의 시체가 대마밭 속에 방치되어 있어서 그것이 썩는 냄새가 나는 거야. 시체 냄새가 사방에서 나는 것도 당연하지. 저 소리 들리나? 또 베르타를 쏘아대는군." 지난 며칠 동안 그들은 세상 모든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르돈은 전쟁과 시대 의식에 대한 친구의 견해를 들었다. 상호 살육의 피비린내나는 논리를 받아들이며, 부상자에 익숙해지며, 더욱이 현대 전투 기술이 가져온 괴의한 살덩어리로 변한 몸서리나는 새로운 형태의 부상을 입 고, 살아 남은 불구자의 모습에 익숙해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지바고는 친구에게 이야기 했다. 고르돈 역시 날마다 지바고와 행동을 같이하며 그런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물론 그는 타인 의 용감성을 구경거리로 바라보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남들은 초인적인 노력으 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희생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한탄만 하고 있다면 그건 더욱 부도덕한 일인 것 같았다. 그는 인생에서 자기가 처한 환경 에 따라 솔직하고 성실하게 행동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전선 바로 후방의 이동 적십자대 응급치료소를 방문했을 때, 부상자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기 절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그는 체험했다. 그들은 포탄 세례를 받고 반쯤 피해를 입은 넓은 숲 속의 공지에 마차로 도착했다. 망가진 포 차가 나무 밑 덤불 위에 거꾸로 뒹굴고 있었다. 나무에 승마용 말 한 필이 매여 있었다. 숲속으로 더 들어간 곳에 산지기의 오두막이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지붕이 반쯤 날아가고 없었따. 바로 그 오두막이 응급 치료소였고,길 건너편에는 큼직한 잿빛 천막이 두 개 쳐져 있었다. "자네를 여기에 오게 하는 게 아닌데." 지바고가 말했다. "1베르스타나 2베르스나쯤 가면 참호 가 있고, 우리 포대가 바로 거기 숲 뒤에 있다네. 무슨 소리가 들리지? 자네가 아무리 태연한 체 해도 난 믿지 않아. 자넨 지금 간이 콩알만할 걸세. 하긴 그게 당연하지. 상황은 시시각각으로 달 라질 수가 있네. 여기까지 포탄이 날아올지도 몰라." 투박한 장화를 신고 흙투성이가 된 군복 앞가슴과 잔등이 온통 땀투성이가 된 지친 젊은 병사 들이 숲 옆의 길가에서 엎드려 축 늘어져 있었다. 나흘 주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많은 전사자 를 내고 전선에서 물러나온 부대의 생존자들이었다. 단기간의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후방으로 가 는 길이었다. 이제는 웃어대거나 욕지거리를 할 기력조차 없이 돌처럼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여러 대의 짐마차가 치료소를 향해 도로를 요란하게 달려왔어도 아무도 고개를 쳐들지 않았다. 스프링이 없는 탄약 운반용 마차에다 지금 부상병들을 싣고 오는 길이었다. 마차가 덜거덕거릴 때마다 부상병들의 뼈를 뒤흔들어 놓고 창자가 뒤틀렸다. 치료소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급한 부상 병은 수술대로 옮겨졌다. 반 시간 전에 포격이 잠시 멎은 사이에 참호 앞 전투장에서 엄청나게 많은 부상병이 운반되어 나온 것이었다. 마차가 응급 치료소 앞에 와서 멎자 들 것을 들고 나온 위생병들이 층계를 내려와 부상병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간호원 하나가 천막 출입구의 포장을 들추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비번인 모양이었다. 천막 뒤 숲속에서 두 사람이 큰 소리로 다투고 있었다. 울창한 숲은 그들의 고함 소 리를 쩡쩡 울렸으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환자를 운반해 왔을 때 다투던 두 사람 이 치료소를 향해 길로 나왔다. 그 중 흥분한 젊은 중위가 적십자대의 군의관에게, 여기 숲속에 전에 있었던 포대가 지금 어디로 이동했느냐고 캐묻고 있었다. 군의관은 알지도 못하고 또 알바 아니라는 것이었다. 군의관이 이 장교에게, 부상병들이 와서 바쁘니 언제까지나 그를 상대하고 있 을 수 없다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중위는 적십자대건 포병대건 할 것없이 닥치는 대로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지바고가 군의고나한테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함께 치료소로 들어갔다. 중 위는 다소 타타르 악센트가 섞인 말투로, 연전히 큰 소리로 욕을 하며 나무에 매어놓았던 말고삐 를 풀어 안장에 뛰어 오르더니 도로를 따라 숲속으로 달려갔다. 간호원은 시종 밖을 내다보고 있 었다. 갑자기 간호원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당신들은 무슨 짓을 하는 거죠? 정신이 나갔군요?" 하고 외치며 그녀는 들 것 옆을 가고 있는 두 명의 경상자가 있는 길가로 달려나갔다. 들 것 하나에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중상을 입은 환자가 누워 있었다. 커다란 포탄 파편으로 얼굴이 짓이겨지고 혀와 입술이 시뻘겋게 뭉크러졌으머, 한쪽 볼이 달아나고 아래턱 뼈 에파편이 박혀 있었다. 사람 목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목숨을 끊어서 이 무서운 고통에 종지부를 찍어달라고 애원하는 듯했다. 들것 옆을 지나가고 있던 두 경상자는 이 처절한 소리에 마음이 움직여 맨 손으로 이 무서운 파편을 잡아 빼려고 하는 것같이 간호원의 눈에 비쳤던 것이다. "안 돼요, 안 돼! 그건 외과 군의관이 특수한 기구로써 해야 돼요. 물론 뺄 필요가 있다며." 그순간 들것에 실려 층계를 올라가던 환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부르르 몸을 떨고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 죽은 병사는 늙은 보충병 기마제트진이었으며, 숲속에서 흥분하여 소리치던 젊은 장교는 그 아들인 갈리울린 중위, 간호원은 라라였다. 지바고와 고르돈은 이 정경의 목격자였다. 이 사람들은 이곳 한 자리에 모였지만 서로가 알아보지는 못했고, 또 서로 모르는 사람도 있었 다. 그리고 그 후 다시 만날 때까지는 이 일을 모르고 지냈고, 또 영원히 알 수 없게 된 사람도 있었다. 11 이 근처의 마을들은 기적적으로 무사히 남아 있었다.황폐한 바다 한가운데 홀로 성하게 떠 있 는 불가사의한 섬과도 같았다. 하루는 해질 무렵에 고르돈과 지바고가 마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 마을에서 젊 은 카자크 청년이 떠들썩하게 웃어대는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동정을 공중에 던지고는 허옇 게 수염을 기르고 기다란 카프탄을 입은 유태인 노인더러 그것을 받게 하고 있었다. 유태 노인은 두 손바닥 사이를 빠져 흙탕 속에 떨어져 버렸다. 노인이 동전을 주우려고 허리를 굽힐 때마다 카자크 청년은 노인의 궁둥이를 때리고 있었다.이렇게 해서 모두들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직은 그런 장난이 악의가 없었으나 그러다가 무슨 큰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노인의 아 내가 맞은편 농가에서 연신 한길로 달려나와 남편 쪽으로 두 주먹을 휘두르며 뭐라고 소리치다가 는 다시 두려운 듯이 집 안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창문 너머로 두 손녀 아이가 울면서 할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부는 무척 흥미를 느꼈는지 마차의 속력을 늦추고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구경을 시키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바고는 카자크를 가까이 불러서 끄짖고, 노인을 놀려대는 짓을 그만두도록 명령했다. "예, 알겠습니다."하고 카자크는 순순히 응했다. "악의헤서 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웃음거리 로..." 고르돈과 지바고는 나머지 길을 묵묵히 가고 있었다. "참으로 가공할 일이야." 숙소가 있는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에야 지바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전쟁으로 유태인들이 얼마나 처참한 일을 당했는지 자넨 상상도 할 수 없을거야. 유태인 부락에서 전투가 있을 때면 가혹한 현물 공출과 재산의 파괴만으로는 부족했는지, 학살하고 능욕 하고 또 애국심이 없다는 비난을 퍼부어댔어. 하지만 유태인들이 애국심을 지녀야 할 이유가 어 디 있을까? 적의치하에서는 유태인들도 평등한 권리를 누리지만, 우리는 그들을 박해하고 있을 / 뿐이 아닌가. 유태인에 대한 중오에는 아무런 합리적인 근거도 없어요. 유태인들의 빈궁, 단칸방 에서 우글거리며 살아야 하는 비좁은 생활, 호소할 데가 없는 그들의 무력함. 당연히 동정을 ㅂ다 아야 하고 그들의 이런 불행 자체가 오히려 중오의 근원이 되고 있어요.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야. 피할 수 없는 어떤 운명일지도 모르지." 고르돈은 대답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12 밤이 되었다. 그들은 좁고 길쭉한 창문 양쪽에 놓인 침상에 누워서 다시이야기를 나누고 있었 다. 지바고는 고르돈에게 전선에서 한 번 황제의 모습을 보았을 때의 얘기를 해주었다. 그것은 전선에서 처음 맞이하는 어느 봄날이었다.그가 소속한 연대 본부는 카르파차 산맥의 깊 숙한 계곡에 위치했었다. 그곳은 헝가리 평원으로부터의 적의 진로를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골짜기 밑엔 정거장이 하나 있었다. 지바고는 그곳의 풍경을 이렇게 생생하게 묘사했다. 아름드 리 전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산봉우리엔 솜구름이 걸려 있고, 숲속에 두꺼운 털가죽을 대고 붙 인 것처럼 여기저기에 잿빛 편암과 흑연의 벼랑이 눈에 띈다. 눅눅하고 우중충한 4월의 아침이었 다. 사방이 산으로 막혀 있어 조용하고 무더웠다. 골짜기에는 안개가자욱하며, 모든 것이 김을 토 해서 서서히 하늘로 날아오른다. 정거장의 기관차 연기, 들판의 회색빛 아지랑이, 잿빛 산줄기, 검 푸른 숲 그리고 검은 구름. 그 당시 황제는 갈리시아 지방을 순시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지바고네 연대를 방문한다는 통보 가 있었다. 황제는 이 연대의 명예 연대장이었다. 어느 시각에 도착할는지 알 수 없었다. 정거장 플랫폼에 의장대가 정렬해 섰다. 숨막히는 두 시 간이 지났다. 이윽고 수행원들을 태운 열차가 하나, 또 하나가 재빨리 통과했다. 잠시 후에 황제 의 전용 열차가 도착했다. 황제는 니콜라이 대공을 거느리고 의장대를 사열했다.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치하의 인사를 할 때마다 우렁찬 "우라"의 함성이 터져나와, 흔들리는 물통에서 튕겨나오는 물처럼 메아리에 다시 메아리쳤다.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보이는 황제는 루불리 지폐나 훈장에 그려진 그의 초상보다 훨씬 늙고 지 쳐보였다. 그의 얼굴은 주름이 많았고 좀 우울해보였다. 그는 어찌할바를 몰라 겸연쩍은 눈으로 흘금흘금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은 공손히 등을 굽히고 말보다는 눈썹이나 어깨의 움직임으로 당황하는 황제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 계곡에서의 따뜻한 잿빛 아침에 지바고는 황제가 가엾게 여겨졌다. 한편 그토록 자신없고 소심한 것이 박해자의 근본 성격이었으머, 이렇게 나약한 인물이 사람을 투옥하고 교수대에 끌어 올리고, 때로는 감형하기도 하는 그 모순을 도조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일장 연설이 마땅히 있어야 했어. 독일 황제 카이제르처럼 '짐은, 짐의 용맹스러운 군사 들과 짐의 충성스러운 백성들...' 하는 식으로 말이야. '충성스러운 백성'에 대해선 꼭 언급이 있어 야 했어. 하지만 그는 순 러시아식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웠어. 비극적이라 할 만큼 그런 진부한 격 식을 초월했다고 할까. 하긴 그따위 연극은 우리 러시아에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결국 그 따위 제스처는 연극에 불과하지 않을까? '충성스러운 백성'이란 시저 통치하에도 갈리아인이나 스 키티아인이나 이탈리아인에게도 마찬가지였지. 그러나 옛날부터 '충성스러운 백성'이란 하나의 허 구였어. 황제나 정치가들의 연설 제목에 지나지 않았어. '짐의 충성스러운 백성들이여' 하는 식으 로 말이야." "그건 그렇고, 지금은 신문 잡지 기자들이 전선에 떼지어 몰려다니고 있어요. 그들은 부상자들 을 방문하고 '견문기'따위를 쓰면서 민중의 영혼에 관해 새로운 이론을 만들었어요. 달리이 신판 이라고나 할까. 떠버리 언어 기록광에 지나지 않아. 이것도 하나의 타입이지만, 또 다른 타입이 있어요. 짤막하게 끊은 문장, 소묘, 회의주의와 염세. 어느 날 내가 읽은 것 중에 이런 것이 있었 어. '어제와 같은 잿빛 하늘이다. 아침부터 비와 진구렁이다. 창 너머로 한길을 본다. 끝없이 계속 되는 포로의 행렬. 부상병을 운반한다. 대포가 발사된다. 어제처럼 오늘도 발사. 내일은 또 오늘처 럼 발사되겠지. 매일 매시간 그치지 않고.' 어딘가, 그럴 듯하고 기지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무엇 때문에 대포는 들먹이는 걸까? 대포한테도 변화를 기대한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 얘기가 아닐 까? 어째서 그들은 자기 자신을 관찰하지 못할까? 매일같이 똑같은 문구, 똑같은 구두점, 똑같은 사실을 나열하면서 벼룩이 뛰듯이 재빠르게 저널리즘의 박애주의 탄막을 쏘아대고 있는 자기 자 신을 말이야! 또같은 반복을 집어치워야 될 일은 대포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라는 걸 왜 깨닫지 못할까? 제 아무리 자기 수첩 속에 기록해 봐야 거기서 가치 있는 것이 나올 리는 만무하니까. 인간이 사실에다가 자기 자신의 어떤 독창적인 것, 예술적인 툭성을 주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사실로서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은 왜 알지 못할까?" "그건 옳은 말이야." 고르돈이 말을 받았다. "그럼 이젠 우리가 오늘 본 그 서건에 대한 감상을 얘기해보세. 그 카자크 청년은 가엾은 유태 노인을 괴롭히고 있었지만, 그런 일들은 수없이 있었 어. 물론 비열한 짓인 이따위에 철학까지 끌어다 댈 팰요는 없을 거야. 당장에 주먹으로 그놈의 쌍통을 한 대 갈겨주면 끝나는 일이지. 그러나 유태인 문제를 청체적으로 다룰 때는 철학이 필요 하게 되고, 또 예기치 않던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새로운 것을 말하려는 것도 아닐세. 우린 다 자네 아저씨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왔으니까. '민족이란 대체 뭘까?'하고 자네가 물어봤었지. 민족을 입으로만 들먹이는 자와, 그것을 별로 의 식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의 행동이나 어엿한 행위로 국민의 보편성을 높이고 명성과 불멸성을 부 여하는 자와, 어느 쪽이 더 모든 민족에게 이바지하는 걸까? 대답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 그리고 그리스도 이후의 민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단순한 민족은 아니야, 개심한 민족, 변모한 민 족일세. 문제의 핵심은 낡은 원칙에 충실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바로 이 개념과 변모에 있다고 나는 생각해. 복음서에는 어떻게 적혀 있지? 첫째로, 복음서는 '그렇다'라고 딱 잘라 ㅁ라하지는 않았어. 소박하고 은근하게 '아주 새롭게 살기를 원합니까? 마음의 행벅을 원합니까?'라고 권하고 있을 뿐이야. 그러나 모든 사람이 권고를 받아들여 몇천 년 동안 거기에 열중해오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유태인도 고대 그리스인도 없다고 복음서는 말하고 있는데, 그건 단지 하 나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뜻일까? 아니야, 그 정도의 것이라면 굳이 복음서를 끌어댈 것도 없겠지. 그만한 것은 그리스의 철학자나 로마의 도학자도 이미 갈파한 것이니까. 복음서에는 이렇 게 적혀 있었어. '하나님 나라라고 불리는 새로운 생활 양식이나 새로운 형태의 사회에서는 민족 이란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개성만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한 그 사실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자네는 말했었지. 옳은 말이야. 기독교 정신, 즉 개성의 신비야말로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야. 인생이나 세계에 대해 아무런 할 말도 없는 하찮은 문필가들의 얘기가 나왔지만 말이야. 그자 들은 어떤 민족-그것도 소수 민죽이나 약소 민족이라면 더욱 좋고-이 논점이 되었을 때 신바람 이 나는 거야. 왜냐하면 자기들의 명석한 생각과 수완을 발휘하여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좋은 기 회가 되니까. 이러한 심리 상태의 희생물이 되고 있는 실질적인 표본이 바로 유태인이야. 유태인 들의 민족 관념은 여러 세기를 통해서 유태인들에게 민족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강 요해왔던 것이지. 유태인이 이렇게 민족에 얽매이고 사는 동안에 딴 세계는 자기들 사이에서 자 라난 새로운 힘에 의해 해방되고 있었다. 이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야! 자넨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 는가? 생각해 보라! 이 경사, 평시의 저주에서 해방되는 날, 따분한 것들을 뛰어넘는 비약- 이것 은 애초 유태인의 땅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유태인의 언어로 선언되었으며 유태인에게 속해 있지 않았던가! 유태인은 실제 그것을 보고 들었음에도 어쩌다 그만 그것을 놓쳤단 말인가? 어쩌다 이 토록 지니고 있던 힘과 미의 영혼이 떠나가는 것을 묵과하고, 그것이 승리하여 지배를 확립한 후 에도 그들이 거부했던 그 기적의 빈 껍데기 속에 파묻혀 있다는 거야. 그들의 이러한 자기 희생 은 도대체 누구를 이롭게 했으며, 누구의 이익을 위하고, 그 순진한 노인과 아녀자들, 그 연약하 고 선량한 인간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우롱과 박해와 구타를 당하면서 살아온 것은 대체 무엇 때 문일까! 그리고 소위 민중 편이라던 문필가들이 하나같이 무능한 탓은 또 무엇일까? 유태인의 정 신적 지도자를 자처하는 자들이 온순한 염세주의와 시니컬한 지혜에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설사 사명감의 압력으로 보일러처럼 폭발할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무엇을 위 한 전쟁인지도 모르면서 살상을 계속하고 있는 이 군대를 왜 해산시켜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왜 군대를 향해 외치지 못하는가 말일세. 정신을 차려라. 그만하라, 이젠 됐어. 이전처럼 말하지 말 라. 한데 뭉치지 말고, 분산하라. 남들처럼 되라.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최초의 또 훌륭한 그리스 도교도인 것이다. 너희들은 가장 악랄하고 가장 취약한 자기를 위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다." 13 이튿날 지바고는 점심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자넨 여길 떠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모양인데, 드디어 자네 소망이 이루어졌네. 하지만 다행 이라고 말할 순 없어. 다시 우릴 만날 수 있게 할지 모르니까. 아직 동쪽으로는 길이 통해 있지만 서부는 밀리고 있어요. 우리 의무부대는 전원 후퇴 명령을 받고 내일이나 모레 출발할 예정이지 만 어디로 갈 것인지 나도 몰라. 카르페코가 자네 내의를 아직 안 빨았을 거야. 언제나 그렇다니 까! 저 녀석을 늘 제 계집한테 빨래를 맡겼다고 하지만, 그 계집이 누구며 어디 살고 있느냐고 물 으면 대답을 못하는 바보 녀석이야!" 카르펜코는 변명을 늘어놓았고, 고르돈은 지바고의 셔츠를 꺼내 입었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 나 지바고는 그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 말만 계속했다. "제기랄, 군대 생활이란 마치 짚시의 유목민 생활과 같네. 여기 처음 왔을 땐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 방안은 더럽고 천장이 낮아 환기가 잘 안 되는데다가 페치카도 여기에 있지 않고... 그런데 지금은 내가 전에 살던 방이 어떻게 생긴 방이었는지 조금도 생각이 나지 않으니 말이야. 이젠 여기서 한평생 살수도 있을 것 같아. 햇빛이 타일 바닥에 비치고, 길가의 나무 그림자가 비 친 구석의 페치카를 바라보면서 말일세." 그들은 천천히 짐을 구리기 시작했다. 밤중에 그들은 고함 소리, 총소리, 부산한 발자국 소리에 잠이 깼다. 마을 하늘이 불길한 불빛에 타고 있었다. 창밖에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분주히 오갔다. 옆방에서 집주인 내외가 잠이 깨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지바고는 위생병에게 명령했다. "카르펜코, 빨리 밖으로 달려나가서 왜 이렇게 야단인지 알아보고 와." 지바고는 재빨리 옷을 챙겨 입고 야전 병원으로 달려가 사실을 확인했다. 독일군의 전선을 돌파했다는 것이다. 아군 방 어선이 이 마을 근처로 물러났기 때문에 마을에까지 적의 포탄이 날아왔다. 후퇴 명령을 들을 것 없이 야전 병원은 즉각 철수를 개시했다. 날이 새기 전까지 모든 일이 끝나야 했다. "자넨 선발대와 함께 가게. 막 떠나려는 마차를 잡아놨어. 그럼 잘 가게. 마차까지 배웅하겠네. 자네가 마차에 타는 걸보고 싶어요." 그들은 등을 굽히고 집 옆을 뛰어서 부대가 포진하고 있는 마을 어귀까지 달려갔다. 거리에는 탄환과 포탄이 날고 있었다. 마을 앞 들판의 십자로 쪽에서 유산 탄이 화염의 우산을 펴듯 작렬 했다. "자넨 어떡하겠나?" 뛰어가면서 고르돈이 물었다. "다음 제2진과 함께 떠나가겠네. 숙소에 돌아가서 짐을 가져가야 하니까." 마을 어귀에서 그들은 헤어졌다. 선발대를 이루는 몇 대의 마차가 출발하고 서로 부딪치면서 차츰 대오를 만들고 있었다. 지바고는 떠나가는 친구에게 손을 흔들었다. 타오르는 헛간의 불빛이 그들을 비추었다. 다시 집 옆과 엄폐된 모퉁이를 따라 지바고의 발길은 숙소로 달음질쳤다. 숙소에 거의 가까워 졌을 때 유산탄이 작렬했다. 그는 파편에 맞아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은 채 한복판에 쓰러졌다. 14 전선 사령부에서 얼마 안 되는 철도변의 서쪽 조그마한 도시로 철수한 야전 병원 장교 병실에서 지바고는 상처가 치유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2월 하순의 따뜻한 날씨였다. 침대에 가까운 창문 은 그의 청에 따라 열려 있었다. 점심 시간이 되기까지 환자들은 제각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병원에 새로 배속되어 온 간호원이 오늘 이 병실을 돌 것이라는 말이 전해졌다. 지바고의 맞은편 침대에서 갈리울린이 방금 받은 <레치>와 <루스코예 슬로보>를 뒤적거리며, 검열에 걸려 공백으로 나온 기사 부분을 발견하고 격분하고 있었다. 지바고는 야전 우편국에서 한꺼번에 배달된 토냐의 편지 뭉치를 읽고 있었다. 바람결에 편지와 신문이 살랑거리고,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지바고는 편지에서 눈을 들었다. 병실에 들어온 사람은 라라였다. 지바고도 갈리울린 중위도 이내 라라를 알아보았으나 서로 다 그녀를 아는 사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는 못했다. 라라는 두 사람 다 알아보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창문은 왜 열어놓았죠? 춥지 않나요?" 그녀는 갈리울린 쪽으로 다가갔다. "기분이 어떠세요?"하고 물으면서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맥을 짚어보더니, 이내 손을 놓고 침 대 옆 의자에 앉아서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 참 뜻밖입니다. 라라 부인!" 갈리울린이 말했다. "난 당신의 주인 안치포프와 같은 연대 에 근무했고 그를 잘 압니다. 당신한테 전할 물건을 맡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어요?" 그녀는 되풀이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어디 있어! 그래 당신 은 그이를 알아요? 사실대로 빨리 말해주세요. 그이는 포탄에 맞아 그 흙에 묻혀버렸다구요? 하 나도 숨기실 건 없어요. 전 다 알고 있으니까." 갈리울린은 소문을 그녀에게 전하고 싶지 않았으며 거짓말로 그녀를 위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안치포프는 포로가 된 거예요." 하고 그는 말을 꺼냈다. "공격시에 부하를 지휘하며 너무 앞으 로 전진한 탓으로 그만 적에게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포로가 될 수밖엔 없었습니 다." 그러나 라라는 갈리울린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이 뜻하지 않았던 상봉에 그녀는 흥분돼 있 었다. 낯선 사람 앞에 눈물을 보이고 싶지가 않아서 복도로 뛰쳐나가 버렸다. 잠시 후 그녀는 병실로 되돌아왔다. 겉으론 침착한 태도였다. 갈리울린과 다시 이야기를 진전시 켰다가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 일부러 그쪽엔 시선을 피하고 지바고의 침대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어디가 불편하시죠?" 얼빠진 사람처럼 기계적으로 물었다. 지바고는 그녀의 흥분과 눈물을 바라보면서 묻고 싶었다. 전에 두 번이나, 중학 시절과 대학 시 절에 그녀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치근덕거린다는 오해를 받을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문득 관 속의 안나 부인의 얼굴과 목놓아 울던 토냐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맙소. 난 의사니까, 내 힘으로 치료할 수 있어요. 아무런 도움도 필요 없겠소." '나에게 무슨 불쾌한 일이라도 있을까?'하고 생각하며, 라라는 놀란 표정으로 이 주먹코에 특이 한 얼굴의 낯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후 며칠간 날씨는 변덕스럽게 변해서 밤에는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고 눅눅한 흙 냄새를 풍 겨주었다. 그 무렵 전선 사령부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고향에서도 불안한 소문이 전해지고 있었다. 페테르부르그와의 통신이 종내 두절되고 말았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정치 얘기를 하고 있었다. 간호원 라라는 아침저녁으로 두 차례 병실을 돌면서 갈리울린과 지바고를 비롯한 모든 환자들 을 두루 살피곤 했다. '뭔가 좀 이상하게 호기심을 끄는 사람이야.' 라라는 생각했다. '젊은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퉁명스러울 수가 있을까. 들창코가 미남일 수는 없지만 말하는 품이 아주 지적인 데가 있고, 발랄하고 마음을 사로잡는 지혜를 가졌어. 하지만 그까짓 건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일은 빨리 이곳을 떠나 카첸카가 있는 모스크바로 가는 일이야. 그리고 모스크바에 가면 간호원 은 그만 두고 유라친으로 돌아가서 다시 중학교 교사로 복직해야지. 가엾은 파샤의 소식도 알았 으니까, 이젠 희망을 가져 봐야 소용도 없는 노릇이구. 파샤를 찾는 목적이 아니라면 애당초 이런 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야.' 카첸카가 지금 어떡하고 있을까? 가련한 고아! 근간에 아주 급격하고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었 다. 전에는 여러 가지 신성한 의무 따위가 있었다. 조국에 대한 의무, 군에 대한 의무, 사회에 대 한 의무 등. 그러나 이제 전쟁에 패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불행의 근원이었으며, 신성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갑자기 변해버려서,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평생 어린애처럼 남의 손에 이끌려오기만 하다가 갑자기 보호자를 잃고 혼자서 걷는 법을 배워 야 하는 것처럼 모든 일에 자신이 없었다. 의논할 만한 가족이나 친지도 옆에 없었으며, 이런 때 는 무언가 절대적인 것, 삶과 진실과 미에 스스로 몸을 내맡기고 싶어지고, 인간이 만든 규칙이 폐기된 대신에 절대적인 것에 지배되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전에 평화롭던 시대의 인생에서는 느끼지 못했으나, 지금은 뭔가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온몸을 아낌없이 바치고 싶었다. 라라의 경 우,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카첸카였다. 남편을 잃은 지금 라라한테는 모성 이외의 아 무것도 없었다. 아버지 없는 불쌍한 카첸카를 위해 전심 전력을 기울이는 것만이 자기가 할 일이 라고 그녀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지바고는 모스크바에서 편지를 받았다. 고르돈과 두도로프가 그에겐 아무런 양해도 없이 출판 한 그의 저서가 호평을 받아 문학가로서의 전도가 촉망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금 모스크바 는 소란한 동요에 휩싸여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에 있으며, 대중의 불만이 팽배 하여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는 말도 씌어 있었다. 느지막한 밤이었다. 지바고는 졸고 있었다. 끄덕끄덕 졸다가도 그는 이내 눈을 번쩍 뜨고, 지난 며칠 동안의 흥분이 잠을 이룰 수 없게 했다. 창밖에 살랑이는 바람결도 졸리는 듯 하품을 하며 속삭이고 있었다. '토냐, 싸샤. 보고 싶구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구나, 돌아가 일하고 싶어.' 바람은 울며 뇌까린다. 바람결의 속삭임에 지바고는 자다가도 눈을 뜨며 다시 잠을 청하곤 했다. 변덕스 러운 날씨도 불안한 밤처럼 한없이 기쁨과 슬픔을 뒤바꾸고 있었다. 라라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그 사람은 파샤의 유품을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전 해주었는데, 나는 아직 그 사람이 누구며 어디서 왔는지조차 묻지 않고 있다니.' 그래서 늦었으나 인사를 하려고 다음날 아침 병실에 들렀을 때 갈리울린의 여러 가지를 자세히 물어보면서 라라는 크게 놀랐다. "브레스트스카야 거리 28번지, 치베르진네 집! 1905년 혁명이 일어난 겨울! 당신이 유수프카라구요? 아니, 만난 적이 있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아요. 어느 해였는지 그 집에 간 적이 있어요. 그게 언제더라? 눈앞에 모든 일이 다시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아요! 그때 그 근처에서 총을 쏘고 있었죠. 그걸, 그때 뭐라고 했더라? 그렇지 '주님의 뜻' 이라고 했어요. 소녀 시절에 처 음 느껴본 강렬하고 짜릿한 느낌! 용서하세요, 중위님. 성함이 누구시라구요? 아니, 벌써 말씀해 주셨는데. 고마워요, 유수프카, 다 생각이 나는군요. 정말 고마워요!" 그날 온종일 그녀는 '그 집'을 생각하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참으로 뜻밖의 일이었다. 브레스트스카야 28번지! 그리고 지금도 총을 쏘고 있지만 두려움은 그 때와 비할 것이 못 되었다. 이젠 '애들이 총을 쏜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들은 이제 다 어 른이 되어 여기 군대에 와 있었다. 그 집과, 그와 비슷한 다른 집들과, 그리고 비슷비슷한 여러 마을에 살던 소박한 사람들이 모두 여기 와 있는 것이다. 누워서 거동할 수 없는 환자를 빼 놓고는 각 병실의 환자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목발을 짚고 절룩거리거나 뛰어다니며 또 지팡이를 짚고 걸으면서 제각기 외쳐댔다. "굉장히 대단한 뉴스야! 페테르부르그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대. 페테프부르그 경비대가 반란에 가담했다는 거야. 혁명이 일어났어." 5.과거와의 고별 1 멜류제예보라고 불리는 조그마한 도시는 비옥한 흑토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거무스름한 먼지가 메뚜기떼 구름처럼 지붕 위에 떠 있었다. 그것은 이 소도시를 지나는 전투 부대와 소송대들이 지 나가면서 일으키는 먼지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선으로 가는 것과 전선에서 돌아오는 것이 서 로 교차하면서 움직이고 있어서, 사람들은 전쟁이 과연 계속되고 있는지 이미 끝나버린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매일같이 새로운 임무가 마치 버섯처럼 생겨났다. 지바고와 갈리울린,간호원 라라 그리고 뜻밖 의 몇몇 사람에게는 큰 도회지에서 온 유식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하여 모든 일을 다 떠맡기 고 있었다. 시 자치위원회 직원으로, 또는 군 의무부대와 시 위생과의 하급 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들 은 수시로 변동되는 직책을 흡사 야외 스포츠나 술래잡기 놀이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일 들을 빨리 집어치우고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 직업을 되찾아야겠다고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지바고는 라라와 함께 바쁘게 일했다. 2 비가 내리면 거무스름한 먼지는 커피의 빛깔처럼 짙은 갈색의 흙탕물로 변해버린다. 대부분의 도로는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온통 흙탕물로 뒤덮이고 만다. 도시는 그다지 크지도 않았다. 도시 어느 쪽에서 보아도 우울한 초원과 어두운 하늘이 보였고, 전쟁과 혁명의 넓은 광장을 전망할 수가 있었다. 지바고는 자기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군대에서는 혼란과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고 있소. 규율과 사기를 회복하기 위해 대책을 강구중 에 있어서 나는 근처의 주둔 부대를 순찰하고 돌아왔소. 좀더 일찍이 당신한테 소식을 전했어야 하는 건데 늦게 되었소. 당신한테 알리고 싶은 것은 나는 지금 리라라는 간호원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소식이오. 그녀는 우랄 출생이며 모스크바에서 온 여성이오. 당신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그 무서운 날 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검사를 저격했던 처녀를 기억하고 있겠지요? 그 후 아마 재판을 받게 되었지요. 또 그녀가 여학교 학생일 때, 당신의 아버지를 따라서 간 적이 있는 불결 한 여관에서 나와 미샤가 어떤 여학생을 봤다던 얘기는 당신도 들은 적이 있지요.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 여관에 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몹시 추운 날 밤이었지요. 그게 아마 프레스냐 폭동이 있었던 땐 것 같소. 그때의 그 여학생이 바로 지금의 라라란 말이오. 나는 집에 돌아가려고 무척 애썼는데 그렇게 일이 간단하지가 않소. 여기 할 일이 많아서가 아니오. 일은 쉽사리 인계해버리 면 되지만 문제는 기차를 타는 일이오. 기차는 거의 다니지 않고, 또 간혹 있다해도 초만원이기 때문에 좌석을 얻을 수 없는 형편이오. 하지만 이렇게 언제까지나 있을 수도 없는 일이오. 라라나 갈리울린 또 나는 개별적으로 행동해서 사직이나 해임이 되는 사람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다음 주에는 떠나기로 작정했소. 그러는 편이 기회를 얻기가 수월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러니까, 언제 불쑥 집에 나타나게 될는지 모르겠소. 물론 미리 전보를 치도록 애써보겠소. 그러나 출발하기 전에 아내로부터 회신을 받았다. 편지에는 눈물과 잉크 자국으로 수없이 많은 구두점이 찍혀 있었다. 비탄에 젖은 문장으로, 아내는 그에게 모스크바에 돌아올 것이 아니라 그 멋있는 간호원을 따라 바로 우랄 지방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 여자의 인생 행로에 나타나 있는 기적과 우연의 일치는, 토냐 자신과 같은 보잘것없는 인생 따위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이 었다. 쌰싸의 장래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부끄럽게 생각할 그런 인물로는 기르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직접 보시던 그러한 정신으로 그 애를 기를 것을 약속하 겠어요. 지바고는 당장 편지를 냈다. "토냐, 당신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구려. 그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오!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소. 당신이 없었더라면, 당신이나 우리 가정을 언제나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 처절하고 무 서운 싸움터에서 2년이나 되는 세월을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겠소! 그러나 이런 말을 지금 새 삼스럽게 할 필요도 없게 되었소. 우린 곧 함께 살 수 있게 되고, 인생을 재출발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이오. 혹시 나 자신의 태도에 애매한 데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는 점이오. 그렇다면 나는 당신뿐만 아니라 그 여자한테도 죄를 지은 결과가 된 셈이오. 내가 그 녀를 유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 그녀가 돌아오는 대로 나는 사과해야겠소. 지금 그 여자 는 시골에 가서 없어요. 이전에는 지방의 주요 도시나 군청 소재지 같은 곳에만 지방 소비에트가 있었는데 지금은 마을에까지도 그것이 설치되어서, 이러한 제도상의 변경을 지도하고 있는 동료 를 지원하기 위해 출장 중에 있어요. 당신에겐 흥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린 한 집에 있으면서도 라라가 어느 방을 쓰고 있는지조차 난 모르고 있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소. 3 두 갈래의 큰 길이 멜류제예보로부터 하나는 동쪽으로, 또 다른 하나는 서쪽으로 뻗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진구렁 길로서 숲 사이를 지나 즈이부시노로 통하는 길이었다. 즈이부시노는 조그마 한 곡물 집산지로서 행정상으로 멜류제예보 관할 하에 있었지만, 여러 가지 면으로 보아 앞서 있 었다. 다른 또 하나의 길은 자갈이 깔려 있었다. 겨울엔 질퍽하고 여름엔 건조한 들판을 지나 제 일 가까운 철도분기점인 비류치에 이르는 도로였다. 6월에는 즈이부시노에서 제분 업자인 블라제이코가 독립 공화국을 선포해서 두 주일간을 지탱 하고 있었다. 이 공화국은 제212보병 연대의 탈영병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 탈영병들은 폭동 이 일어났을 때 무기를 가진 채 전선을 이탈하여 비류치를 경유하여 즈이부시노에 오게 된 것이 다. 이 공화국은 혁명 임시정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러시아에서 이탈하고 있었다. 블라제이코 는 청년 시절에 톨스토이와 서신 거래도 가졌던 분리파 교도였다. 그는 여기를 신천년성 즈이부 시노 왕국이라 선포하고, 모든 노동과 재산은 집단화되어 사도회라고 불리는 지방행정부가 관장 하고 있었다. 즈이부시노는 언제나 전설과 과장의 근원지였다. 그것은 동란기 당시의 기록 문서에도 기록되 어 있었으며, 그 이후에도 주변의 울창한 숲은 도둑들의 소굴이었다. 그 고장의 번창한 상인들과 거짓말처럼 비옥한 땅은 널리 화제거리가 되어 왔었다. 이 전선에서 가까운 서부 지방 일대의 특 징인 미신과 습관, 그리고 소문들이 이즈이부시노에서 나오고 있었다. 블라제이코의 수석 보좌관에 대해선 황당무계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는 원래 귀머거리에 벙어리에 때로는 신령의 힘으로 말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7월에 즈이부시노 공화국은 붕괴되고 말았다. 혁명 임시 정부에 충성하는 군대가 즈이부시노에 쳐들어 와서 탈영병의 무리는 비류치로 물러가게 되었다. 비류치 철도를 끼고 부근의 몇 베르스 타에 달하는 산림은 한때 벌목되었고 나무 그루터기에는 산딸기가 무성해 있었으며, 조금씩 도둑 을 맞아서 줄어든 목재더미와 또 나무를 벨 때 노동자들이 지은 허물어진 오막살이 집들이 있었 다. 여기서 탈영병들이 야영하고 있었다. 4 지금 지바고가 떠나려고 하는 이 병원은 그가 부상으로 입원하고 그 후 의사로서 근무하던 자 브린스키 백작 부인의 저택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백작 부인은 자기 저택을 적십자에 제공하였 던 것이다. 2층짜리 그 집은 멜류제예보에서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큰 거리가 시작되는 광장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어 광장은 연병장이라고 불렸고, 옛날에는 여기서 병사들이 훈련을 받기도 했으나 지금은 밤마다 집회 장소가 되고 있었다. 그 저택에서는 근처 일대가 한눈에 바라다 보였 다. 광장과 한길 이외에도 근처의 농장이 보였다. 그것은 농촌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가난한 근교 농장이었다. 또한 뒤쪽에 있는 백작 부인의 오래된 정원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백작 부인은 이 지방에 '라즈돌리노예'란 큰 영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따금 볼일이 있어서 여기에 내려왔을 때 가끔 이 저택을 쓰곤 했었다. 또 여름이 되면 영지를 찾아 사방에서 오는 손님들의 집합 장소 로도 쓰였다. 결코 이 저택은 부인만의 사유물은 아니었다. 지금 그 저택은 병원으로 바뀌고, 주 인은 페테르부르그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이 댁에서 일하던 시녀 중에서 두 여인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예전에 백작의 요리사였던 할 머니 우스치냐와 백작 부인의 딸의 가정 교사였던 마드므와젤 플레리였다. 헝클어진 희끗희끗한 머리에 얼굴이 불그레한 노파 마드므와젤 플레리는 침실용 슬리퍼를 신고 낡은 가운만을 걸친 채, 자브린스키 댁의 가세가 기울지 않았던 그 때와 다름없이 병원 안을 총 총걸음으로 돌아다녔다. 서투른 러시아 말로 프랑스 말처럼 말끝을 삼키면서 손짓과 몸짓을 섞어 가며 지껄이기도 했다. 그녀는 연기하듯이 제스처를 하면서 목쉰 소리로 크게 웃고는 몹시 기침 을 하곤 했다. 그녀는 라라의 마음속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으며, 그녀와 지바고는 서로 좋아하 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노파한테는 라틴계 기질이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남녀의 중매 를 들고 싶어하는 욕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을 같이 있게 하고는 즐거워하며 손가락을 흔 들어 보이면서 의미 있는 윙크를 해 보였다. 이런 꼴을 볼 때마다 라라는 의아하게 생각하고 지 바고는 화를 냈으나, 흔히 이상한 사람에게서 보듯 마드므와젤은 자기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알 고도 그 고집을 버리지 못했다. 우스치냐는 더구나 이상한 여자였다. 볼품없이 생긴 몸집은 흡사 밑으로 퍼진 암탉 같은 인상 이었다. 그녀는 거의 악의에 가까울 정도로 냉랭하고 고지식한 여자였다. 그 고지식한 성미는 미 신에 대해 한량없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스치냐는 주문을 많이 알고 있었으며 외출할 때 면 화재나 악마가 집에 들지 않도록 난로나 열쇠 구멍에까지 주문을 외지 않고는 한 발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녀의 정열은 옳은 것에는 한사코 변호하고 나섰다. 즈이부시노 공화국이 와해된 후, 멜류제예보 집행 위원회는 지방에서의 무정부주의 경향에 대 하여 계몽 활동을 시작했다. 매일 밤 연병장에서는 평화로운 집회가 저절로 열려서, 이전 여름에 소방서 앞에 모여서 농지거리나 하면서 소일하던 실업자들이 조금씩 모여들었다. 멜류제예보 문 화협회가 집회를 권장하면서 토론을 지도하기 위하여 자체 연사나 초빙 연사를 파견하였다. 초청 된 연사들은 벙어리나 귀머거리가 말을 할 수 있다는 따위의 소문을 터무니없는 헛소리라고 강조 했다. 그러나 멜류제예보의 천박한 여직공이나 병사의 여편네들과 이전에 양반의 시종으로 있었 던 여자들은 오히려 어리석은 잠꼬대라고 하면서 그 소문을 한사코 변호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변호에 열을 올린 사람이 우스치냐였다. 처음에는 여자답게 수줍어하기도 했 지만, 차츰 그 연사들의 견해를 면박하는 데 대담해지더니 멜류제예보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견해를 말하는 연사를 야유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는 연단에서 열변가로 되었다. 저택의 열어 놓은 창문으로 광장의 웅웅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밤에는 연 설하는 말소리까지도 들렸다. 우스치냐가 자주 연설을 시작하자, 마드므와젤은 사람들이 모여 있 는 방에 뛰어 들어와선 그들에게 연설을 들어보라고 권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어 흉내를 내기도 했 다. "무질서...혼란...제정주의의 비적들...즈이부시노! 벙어리...배신자...배신자!" 마드므와젤은 입심이 좋은 떠버리 요리사를 은근히 자랑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는 다툼도 많았으나 그래도 서로 좋아하고 있었다. 5 서서히 지바고는 친지의 집이나 사무소를 찾아가 작별 인사를 하며 필요한 서류를 신청하기도 하면서 떠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 무렵 이 전선 지구에 새로 임명된 군사 위원 한 사람이 멜류제예보에 들렸다. 그 사람에 대 해선 모두들 풋나기 어린애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하여 새로운 일대 공세 작전이 계획되고 여러 가지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혁명군법회의가 설치되었고, 최근에 폐지되었던 사형 제도가 다시 부활되었다. 떠나기 전에 지바고는 경비대 사령관으로부터 확인을 받아야 했다. 언제나 사령관의 사무실은 혼잡을 이루고 있었으며,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대열이 한길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수백 명의 인파가 시끄럽게 떠들어서 전혀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날은 면회일이 아니어서 텅 비고 조용한 사무실 안에서는 서기들이 일이 점점 까다롭게 되어 간다고 신경질을 부리고 서로 비꼬는 눈초리를 던지며 묵묵히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사령관 실에서는 유쾌한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군복 단추를 끌러 제치고 무엇인가 시원한 것을 마시고 있는 모양이었다. 갈리울린이 안쪽 방에서 얼굴만 내밀고 지바고를 보더니 마치 경주의 출발이나 하듯이 몸 전체 를 굽히면서 그를 맞았다. 지바고는 어차피 사령관의 서명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마치 화가의 화실처럼 어수선했다. 오늘의 영웅이며 온 시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새로운 군사 위원이 여기 사무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임지에는 가지도 않고, 인사와 작전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이 지상 왕국에 지배자와 담소하고 있었다. "여기 또 스타 한 분이 나타나셨군." 사령관은 지바고를 소개했다. 군사 위원은 자기 이야기에 도취된 나머지 돌아보지도 않았다. 사령관은 지바고가 제출한 서류에 서명하고 나서 정중한 손짓 으로 방 중앙에 있는 낮고 푹신한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 방에서는 지바고만이 보통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을 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과장된 자세 로, 우정 태연자약하게 앉거나 단정치 못하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사령관은 거의 책상 위에 눕다 시피 주먹으로 턱을 피고 페초린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의 부관은 떡 벌어진 체구를 긴 의자 에 기대고 마치 말 위에 한쪽 안장에만 올라앉은 것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군사 위원은 창문 턱에 팔 굽을 얹고 있었으며, 앉았다 일어섰다 하기도 하며 또 재빠른 걸음걸이로 방안을 서성거 리면서 한시도 쉬지 않고 입술을 놀리고 있었다. 화제는 주로 비류치에서 일어난 탈영병 문제였 다. 군사 위원에 대한 소문은 듣던 그대로였다. 그는 날씬하고 품위 있어 보이고 이제 겨우 10대를 넘어섰을 정도였으며, 촛불처럼 고상한 이상에 불타고 있는 청년 같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는 명문 출신이며, 일부에서는 원로원 의원의 자제라고 말하고, 2월 혁명 때에는 국회로 자기 중 대를 이끌고 맨 먼저 쳐들어갔던 사람이라고들 하였다. 그의 성이 긴체였던가 킨츠였던가 지바고 는 확실히 귀담아 듣지 못했다. 발틱 지방이 억양이 섞인 페테르부르그 말투로 정확하게 말하고 있었다. 몸에 꼭 끼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꺼려서인지 나이 먹어 보이게 얼굴에 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일부러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빳빳한 계급장을 단 어깨를 구부리고 두 손을 호주머니 속에 깊숙이 넣고 있기 때문인지 어깨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두 줄기 의 직선이 쭉 뻗어 있는 것이 흡사 기병과 같은 옷차림이었다. "철길을 따라 좀더 가게 되면 거기에 카자크 연대가 있습니다. 그들은 적색이며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불러서 폭도들을 포위하면 끝장이 나는 겁니다. 군단 사령관은 지체없이 무장을 해제하나라는 것입니다." 사령관이 군사 위원에게 보고했다. "카자크라니? 농담하지 말아요!" 위원은 얼굴을 붉혔다. "지금은 1950년이 아니란 말이요. 그건 혁명 전의 추억에 지나지 않소! 그런 점에서는 나는 사령관과 의견이 맞지 않아요. 당신에 장군들 은 너무나 잔꾀를 부리는 것이 탈이오." "아직 아무 조치도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계획에 불과하고, 목안이 그렇다는 겁니다." "작전 문제에는 간섭하지 않도록 최고 사령부와 협조가 되어 있으니까, 나는 구태여 카자크를 불러드리는 명령을 취소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오. 마음대로 하시오. 그러나 나로선 상식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하니까. 거기서 그들은 야영하고 있겠죠?"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항상 진지는 견고히 하고 있습니다." "좋아요. 나는 거기 직접 가보고 싶어요. 나에게 그 불상사를 보여주시오. 그 숲 속의 탈영병을 말이오. 총을 버렸는지 또한 탈영병인지 모르지만, 그러나 여러분, 그들은 민중이라는 것을 잊어 서는 안됩니다. 민중은 어린애입니다. 여러분은 민중을 알고 민중의 심리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됩 니다. 민중을 가장 잘 이용하려면,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민중의 가장 착하고 또 가장 민감한 심 금을 잘 건드려야 합니다. 나는 가서 흉금을 터놓고 그들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러면 반드시 이 탈했던 진지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믿어지질 않습니까? 그럼 우리 내기할까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주장이 옳기를 바랍니다." "난 그놈들에게 이렇게 말할 겁니다. '형제들이여, 나를 보시오. 나는 외아들로서 나의 부모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명예도 가족도 지위도 모 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이것도 다 여러분의 자유를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자유는 세계에서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한 것과 같은 일을 다른 많은 청년들도 했습니다. 우리 의 선배 원로들은 민중의 권리를 위하여 앞장서서 싸웠고 시베리아 유형을 감수했으며 쉴리셀리 부르그 요새 감옥에 갇혔던 사실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이런 일을 했겠습니까? 또 누구의 강요로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은 어떻습니까? 이미 여러분은 평범한 일개 병사가 아닙니다. 세계 최초의 혁명군의 용사인 여러 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봅시다. 과연 우리는 영광스러운 부름에 호응하였던가? 우리의 조국 이 구두사와 같은 적에 의하여 포위되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하여 피를 흘리며 최후의 힘을 다하 고 있는 이때, 여러분은 인간의 쓰레기들과 한패가 되어서 정치적 의식을 가지지 못한 채 자유를 포기한 오합지졸이 되어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속담에도 있듯이, 식당에 뛰어든 돼지가 들어오자마자 식탁에 뛰어오른 격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나도 그놈들의 급소 를 찔러 수치를 알게 해주어야 하겠습니다!" "아니, 그건 위험합니다." 사령관은 반대하려다 말고 재빨리 부관과 의미심장한 눈짓을 했다. 갈리울린은 군사 위원의 정신없는 생각을 고치려고 애썼다. 그는 제 212연대 폭도들을 잘 알고 있었다. 전선에서 같은 사단에 소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러나 그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지바고는 몇 번이나 일어나려고 하였다. 위원의 순진한 태도에 놀랐으나 한편으로 쓴웃음이 나 왔다. 그리고 또 사령관과 그 부관의 빈정거리며 꾀만 부리는 기회주의적 교활한 잔꾀에도 염증 을 느꼈다. 한쪽의 우둔은 다른 한쪽의 교활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 표현되고 있었다. 아아, 허망하고 지루한 웅변, 얄팍한 미사 여구에서 벗어나, 아무 말 없는 대자연 속으로 숨어 서, 오래도록 뼈가 으스러지는 노동과 말 없는 깊은 잠, 참된 음악과 감정에 압도되어 언어를 잃 은 인간들끼리 의사가 소통되는 깊은 침묵 속에 젖어들 수만 있다면 얼마나 멋있는 일일까! 지바고는 라라와 만나 얘기할 일을 생각했다. 그 얘기는 반드시 즐거운 것이 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녀와 만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 나 그는 기회를 보아 일어나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살짝 방을 나왔다. 6 라라는 이미 돌아와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 준 마드므와젤은 그녀가 몹시 피곤해서 저녁 식사 를 재빨리 끝마치자 자기 방으로 돌아가면서 잠을 깨우지 말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 라면 노크해 보겠어요. 아마 그녀는 아직 잠들지 않았을 테니까." 마드므와젤이 권했다. "방은 어디지요?" 지바고가 물었다. 마드므와젤은 너무나 뜻밖이라 열렸던 입이 닫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라라는 2층 복도 끝에 있는, 백작 부인의 가구를 한데 넣어둔 몇 개의 방이 있는 바 로 맞은편에 있었다. 지바고는 아직 한 번도 거기에 가보지 못했다. 어느새 날이 빨리 어두워지고 있었다. 밖에는 집과 담이 어둠 속에 잠기기 시작했다. 나무들은 정원 구석에서 앞으로 나와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받고 있었다. 후텁지근하게 더운 밤이었 다. 몸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땀에 흠뻑 젖는다. 앞뜰로 흘러 나가는 석유 램프의 불빛이 더러운 안개처럼 나무 사이를 헤치고 스며든다. 의사는 마지막 층계에서 발을 멈춰버렸다. 여행에서 지쳐서 막 돌아왔는데 문을 두드린다는 것 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얘기는 내일로 미루기로 하자. 결심을 바꾸었을 때는 언제나 허 전한 법이다. 그는 복도 반대쪽 끝으로 걸어와 옆집 앞뜰이 바라다보이는 창가에 기대 섰다. 밤은 고요하고 신비로운 여러 가지 소리를 들려주었다. 복도 세면대에서도 물방울이 규칙적으 로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창 밖에서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들린다. 채소밭 근처에서 오이에 물을 주고 있는 소리가 들리고 우물에서 두레박의 쇠줄 소리가 들리더니 물통에 붓는 물 소리가 들려온다. 온갖 꽃들이 일제히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루 종일 의식을 잃었던 대지가 그 향기를 맡고 막 잠에서 끼는 것 같았다. 꺾여서 쌓인 나뭇가지 때문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만큼 오래된 백 작 부인의 정원에서 가득히 꽃을 피운 거대한 보리수 노목이 입을 크게 벌리고 짙은 향기를 마음 껏 뿜어내고 있었다. 오른쪽 담 너머 한길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떠들썩한 노랫가락, 술취한 병사들의 주정, 문 을 쾅쾅 여닫는 소리. 백작 부인의 정원에 있는 까치집 너머에서 큼직하고 불그레한 달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처음에 달은 즈이부시노의 새 벽돌 공장을 연상시키는 색깔이었으나, 이윽고 비류치 역의 급수탑과 같은 노란빛으로 변해갔다. 창문 바로 밑에는 갓 베어온 건초가 자스민차와 같은 싱그러운 향기에 벨라도나의 향기가 뒤섞 여 풍기고 있었다. 얼마 전에 먼 시골에서 암소 한 마리를 팔려고 가져와 여기에 매어 놓고 있었 다. 그것이 하루 종일 끌려와서 지쳐버렸는지, 아니면 동료들이 그리워서인지 새 여주인이 주는 사료는 먹으려 하지도 않았다. "자 자, 받지 말고, 이걸 줄 테니 받지 말아요." 여주인은 부드럽게 달랬으나, 암소는 화난 듯이 머리를 내저으며 목을 길게 뽑고 구슬프게 울었다. 멜류제예보의 시커먼 창고 위에는 별들이 반 짝이고, 암소를 가엾게 여기는 하늘나라에도 외양간이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동종의 실오라기 가 별과 암소를 잇고 있는 듯싶었다. 주위의 모든 것은 생존의 마술사인 효모에 의하여 발효되고 성장되고 불어나고 있었다. 삶의 즐거움이 들과 거리에, 벽과 담장에, 그리고 나무들과 인간의 살결에 부드러운 바람처럼 불어오고 있었다. 이 밀물에 밀려나지 않도록 지바고는 광장으로 연설을 들으러 나갔다. 7 달은 이미 중천에 높이 떠 있었다. 흰 분가루를 뿌린 듯 달빛은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광장 을 둘러싼 둥근 기둥이 있는 관청 석조 건물 앞에는 커다란 그림자가 검은 융단처럼 땅 위에 깔 렸다. 광장 맞은편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말하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 었으나, 지바고는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도취되어 소방서 앞 벤치에 걸터앉아 멍하니 주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광장으로는 좁다란 몇 갈래 길이 모여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시골길과 같은 진흙길이었다. 길을 따라 양쪽에는 기울어진 작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버드나무를 엮어 만든 울타리가 진흙길로 마치 새우를 잡는 어살처럼 내밀었다. 열어젖뜨려 놓은 창문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좁은 앞뜰에는 윤기 있는 수염을 드리운 옥수수의 불그스름한 이삭이 보였다. 창백하고 가느다란 접시 꽃들이, 더위에 견디지 못해 바깥 공기를 마시러 나온 잠옷바람의 여인처럼 담 너머를 기웃거리 고 있었다. 자비로운 사랑을 느끼게 하며 해맑은 달빛이 가득히 흘러 넘치는 밤이 어쩐지 이 세상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최근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잔잔한 고요함을 깨뜨리며 또박또박한 음률 의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확신에 넘침 열띤 목소리였다. 긴츠 위원이 광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시 집행위원회가 그의 권위 있는 지원을 요청한 모양이었다. 그는 열띤 목소리로, 멜류제예보 주민들이 무질서한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볼셰비키들의 파괴적인 영향에 굴복하고 있다고 비난했 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즈이부시노의 무질서한 상태를 선동한 장본인이 바로 볼셰비키라는 것이 었다. 사령관 실에서 말하던 때와 같은 정신으로 그는 강력하고 잔인한 적에 대하여, 그리고 조국 이 처해 있는 시련의 시기에 대하여 열변을 토로했다. 그의 연설 도중에 청중들의 야유가 일어나 기 시작했다. 항의하는 고함 소리가 일어나고 잇달아 조용 하라는 소리도 들렸다. 야유하는 소리가 점차 더 시끄러워지자 긴츠와 동행하여 의장석에 앉아 있던 사나이가 허락 없이 발언하지 말라고 소리치 면서 청중들에게 질서를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이때 군중 속에서 여성 한 사람이 발언하겠으니 허락해달라고 소리쳤다. 한 여인이 군중을 밀치면서 연단 대신에 엎어놓은 나무 궤짝 쪽으로 다가가더니 궤짝 위로 올 라서려고 하지도 않고 옆에 멈춰 섰다. 군중은 그 여자를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청중의 주의를 끈 그 여인은 바로 우스치냐였다. "위원 동지, 당신은 지금 즈이부시노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더러 눈을 똑바로 뜨라 고 했습니다. 눈을 날카롭게 뜨고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도 당신이 고작 한다는 소리가 볼셰 비키니 하는 따위의 소리뿐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야 한다거나 모든 사람은 다 동포라고 하 는 소리는 멘셰비키만이 아니라 신앙이 깊은 사람이면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일터나 공장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볼셰비키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친절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하는 벙어리'의 얘긴 너무 나 많이 들어서 귀에 혹이 생길 지경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말하는 벙어리'를 헐뜯고 있는데, 당신네들은 대체 뭐가 못마땅해서 그러는 겁니까? 여태까지 말 못하는 사람이 당신네 허락도 없 이 불쑥 지껄이게 된 것이 괘씸하단 말입니까? 그것이 뭐가 그렇게 이상합니까! 이보다 괴상한 일은 얼마든지 있잖습니까. 예를 들어 저 유명한 암탕나귀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발라암,발라암, 제발 내 말 들어요. 그 길로는 가지 말아요. 꼭 후회하게 될 거예요' 하고 나귀는 말했으나, 발라 암은 듣지 않고 가버렸지요.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벙어리에다 귀머거리 당나귀인 주제에 말이 야. 바보 같은 짐승이 지껄이는 소리를 뭣하러 듣는가' 하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당나귀를 욕하고 나서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고 어떻게 외었는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얘깁니다." "그래 어떻게 되었나요?" 누군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집어치워요." 우스치냐가 소리쳤다. "너무 꼬치꼬치 캐물으면 지레 늙어버려요." "우물쭈물 넘기지 말고 말해주어요" 하고 물고 늘어졌다. "좋아요. 그렇다면 가르쳐드리죠. 소금 기둥으로 변해버렸답니다." "그건 거짓말이야. 그건 로트지. 로트의 아내 이야기란 말이야."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의장은 질서를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지바고는 잠을 자려고 집으로 돌아왔다. 8 다음날 저녁에 지바고는 라라를 만났다. 식기실에서 금세 빨래한 세탁물을 쌓아놓고 다리미질 을 하고 있었다. 그 방은 위층 뒤쪽에 있어서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여기서 사모바르를 끓이기도 하고 음식을 접시에 나누어 담거나 쓰고 난 접시를 승강기에 실어 부엌으로 내려보내기도 했다. 여기에는 병 원의 자재 명세를 보관하여 식기와 의류를 확인했었다. 그리고 이곳은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집 합소로 이용되기도 했었다.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문은 열려 있었다. 방안에는 오래된 공원처럼 보리수의 꽃향기와 회양나 무의 마른 가지에서 풍기는 씁쓰레한 향기가 숯의 열기와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다리미가 식지 않도록 바꾸어 가며 난로 위에 올려놓았다. "어젯저녁엔 왜 저의 방을 노크하시지 않았죠? 마드므와젤한테서 들었어요. 하지만 노크하시지 않기를 잘했어요. 그때 저는 이미 잠들어 있었어요. 그래 어떠세요? 숯불을 조심하세요. 옷에 닿 지 않도록." "마치 병원의 빨래를 도맡아 하시는 것 같군요." "아니에요. 제것이 대부분인 걸요. 제가 멜류제예보에 아주 주저앉았다고 농을 하셨지만 이번에 는 정말 떠납니다. 물건을 정리하고 짐을 꾸리는 것만 끝나면 이내 떠날 거예요. 저는 우랄 지방 으로, 당신은 모스크바로. 훗날에 누가 '멜류제예보라는 조그마한 도시를 아십니까?' 하고 물으면, 당신은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하고 대답하시겠지요. '그럼 라라를 기억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잘 모르겠는데요" 하고 대답하실 거예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여행이 재미있었어요? 시골은 어때요?" "말을 하자면 많아요. 이놈의 다리미가 왜 이렇게 빨리 식어버릴까! 미안하지만 저것 좀 집어주 세요. 저기 난로 위에 있는 것 말예요. 그리고 이것을 도로 놓아주세요. 미안합니다. 마을은 다 다 르더군요. 주민들이 하기에 따라 다 달랐어요.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잘 돼가고 있어 요. 그런데 어떤 마을에 가면 사람들이 한결같이 주정뱅이로 보이는 곳도 있었어요. 그런 마을일 수록 형편없이 황폐해서 보기에도 안됐어요." "그럴 리가 있나요! 주정뱅이라니? 잘못 보신 거겠지! 남자란 남자는 모조리 군대에 나가 버렸 으니까 마을에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요. 새 혁명 위원회는 어땠습니까?" "주정뱅이에 대해선 당신이 잘 모르고 계시는 거예요. 그건 그렇지가 않아요. 위원회 말인가요? 위원회는 큰 골칫거리가 될 것 같아요. 지시를 실행할 수도 없고, 일을 할 만한 사람도 없었어요. 지금 농민들의 제일 큰 관심거리는 토지 문제예요... 가즈돌리노예에도 들렀는데 아주 좋은 고장 이더군요. 올 봄에 화재와 약탈을 당해서 창고가 불타버렸고, 과수원도 타고 집도 여러 채 타 버 렸다는 거예요. 즈이부시노에는 가질 않았어요. 갈 수도 없었구요. 사람들은 '말하는 벙어리'가 정 말 있다고 말했어요. 그 사람의 얼굴 생김새까지 말해주더군요. 젊고 유식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어젯저녁에 우스치냐가 광장에서 그 사람을 변호하더군요." "제가 돌아와 보니까, 라즈돌리노예에서 또 넝마를 한 짐이나 보내 오지 않았겠어요. 저는 몇 번이나 그냥 두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여기 있는 것만으론 부족한 줄 아나봐요. 그런데 오늘 아침 에 경비대 사령부에서 사람이 사령관의 쪽지를 가지고 왔었는데, 백작 부인의 은잔 한 질과 유리 컵을 빌려달라는 거예요. 생사에 관계되는 일이나 하루 저녁만 빌려주면 곧 반환하겠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빌려주기만 하면 반쯤은 돌아오지 않거든요. 왜 빌려달라는 건지 대략 짐작은 가 요. 아마 손님이 와서 파티를 하려는 거겠죠." "그럴 겁니다. 신임 군사 위원이 도착했으니까. 이 전선 지구에 파견된 사람이었어요.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났지요. 탈영병을 처리할 모양인데 포위해서 무장 해제시키겠다나요. 그런데 위원이 란 사람은 아직 풋내기에 일하는 것도 어렸어요. 이쪽에선 카자크를 불러오려고 하는데, 그는 감 상적인 호소로서 체포할 생각이었어요. 민중은 어린애와 같다느니 하면서 떠들고, 마치 그것을 무 슨 어린애 장난같이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갈리울린이 만류하며 그곳에 가서는 안 된다, 야수를 건드리면 큰일이 난다고 하면서, 이 일을 자기한테 맡겨달라고 했지만 요지부동이더군요. 한 번 이렇다고 생각한 이상 그것을 절대로 포기할 순 없다는 겁니다. 봐요, 잠시 다리미를 놓고. 이제 이 고장은 곧 큰 소동이 일어날 겁니다. 우리 힘으론 막을 길이 없어요. 소동이 일어나기 전에 여 길 떠납시다!" "일어나긴 뭐가 일어나겠어요! 당신은 괜히 지나치게 생각하시는군 요. 어차피 저는 떠나긴 하 지만, 지금 당장 떠날 순 없어요. 재산 목록을 다 점검해서 깨끗이 인계해야 하니까요. 뭘 훔쳐 가지고 도망쳤다는 소린 듣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누구한테 인계하지요? 그것도 문제구요. 제가 그 재산 점검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마 모르실 거예요. 그런데도 저한테 돌아오는 건 욕뿐 이거든요. 저는 자브린스키 백작 부인의 물건을 죄다 병원 재산으로 기록해버렸어요. 그런데 그것 제가 횡령하려고 일부러 그랬다고 욕하는 거예요! 정말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 그릇이나 융단 따위에 애를 쓸 건 하나도 없어됴. 그까짓 것들 내버려두어요. 지금은 그런 것에 마음을 쓸 때가 아닙니다! 어제 당신을 만났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아는 아주 충격을 받았 어요! 당신에게 솔직히 얘기할 수 있었을 거예요. 어떤 난처한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었을 거구! 아니, 정말 나는 가슴에 담은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었어요. 아내와 자식,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서 이야기하고 싶었답니다. 어른이 다된 남녀가 뭐가 두려워 이야길 나눌 수 없단 말입니까? 남 의 눈치를 본다는 건 치사한 일입니다. 어서 다리미질을 계속해요. 나에겐 개의치 말고 내의나 깨끗이 다려요. 나는 이대로 이야길 계 속할 테니까. 오래 전부터 꼭 하고 싶었던 얘깁니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한 번 생각해보아요. 그런데 당신과 나는 이런 시대에 같 이 살고 있지 않아요. 이런 일은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단 한 번밖엔 없는 일이지요. 생각해보아 요. 온 러시아가 송두리째 뒤집혀서 당신이나 나나 그밖에 모든 사람이 밝은 빛 아래 노출돼 있 어요! 이제 우리를 엿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자유! 참된 자유예요! 이건 말만의 자유가 아니 라 뜻밖에 찾아온 자유, 예기치 않았던 자유, 우연한 자유 그리고 또 오해에서 오는 자유이지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위대해요! 그리고 자기의 위대함을 알고 어리둥절해 있는 형편이에 요. 아시겠어요? 자기의 무게에 짓눌리고 자기의 위대함에 압도당하고 있는 거지요. 일은 계속하면서, 듣고만 있어요. 따분하지 않습니까? 다리미를 바꿔드리지요. 어젯저녁 나는 광장에서 집회를 구경했어요. 볼 만하더군요! 우리 조국 러시아는 지금 가만히 있지를 않고 요동하고 있어요. 진정해 있질 못한단 말입니다. 입을 열기 시작하더니 멈출 줄을 몰 라요. 사람들만이 아니라 별과 나무들도 한데 모여서 이야길 하며, 꽃들이 밤에 철학을 말하고, 석조 건물이 집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복음서에 있는 그대로가 아닙니까? 사도들이 살고 있던 바로 그 시대 그대로지요. 성 바오로의 말을 기억하시지요? 여러 가지 방언으로 예언 할 것이니 해득할 재능을 달라고 기도하라." "별과 나무들이 집회를 연다는 의미는 알겠어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거든요." "그것은 부분적으론 전쟁 탓이라 하겠지만 나머지는 혁명 때문이에요. 전쟁은 인생의 인위적인 중단-마치 얼마 동안 인생을 유보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참으로 바보스러운 짓입니다! 혁명은 싫든 좋든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너무나 긴 세월을 한숨만으로 살아왔으니까. 지금은 모 든 사람이 소생하고 재생하고 변신해버렸어요. 우린 모두 다 두 개의 혁명을 경험했어요. 그 하나 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혁명인 거예요. 제가 보기엔 사회주의 는 바다와 같으며 개인적인 개개의 혁명이 그 바다로 흘러들고 있어요. 그 바다란 인생의 바다, 독창성의 바다예요. 제가 말하는 인생이란 당신이 그림에서 인생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내부에서 경험하려는 거예요. 추상적인 인생이 아니라 실제에서 얻는 인생을 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억제할 수 없는 열기에 떨리고 있었다. 라라는 다리미에서 손을 떼고 심각한 표 정으로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지바고는 당황하여 다음 말의 실마리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쑥 스러운 침묵이 흘러간 뒤 문득 머리에 떠오른 말을 이어갔다. "요즘 나는 성실하게 살며 보람찬 생활을 해야겠다는 의욕이 솟구쳐요! 이러한 기쁨에 넘치는 가운데서도 나는 당신을 알 수 없는 슬픔에 젖은 시선을 보게 됩니다. 어딘지 먼 곳을 바라다보 는 당신의 눈동자를. 난 당신의 그런 시선을 보게 됩니다. 어딘지 먼 곳을 바라다보는 당신의 눈 동자를. 난 당신의 그런 시선을 보면 견딜 수 없어요! 당신의 얼굴이 행운을 즐기며 누구한테도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는 표정을 가져주기를 바랍니다. 만일 당신과 아주 가까운 당신의 친구나 당신의 남편이-군인이라면 더욱 좋겠지만-나의 손을 잡고, 당신의 운명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거 나 괜히 당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난 그 손을 뿌리치고 상대방을 때리 려고 덤벼들지 몰라요...아니, 이거 쓸데없는 소릴 해서... 죄송합니다." 다시금 지바고의 음성이 마음속의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는 손을 흔들고 마음을 억제할 수 없이 몹시 겸연쩍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기대어 서서 볼을 어루만지며, 멍한 시선 으로 어둠에 잠긴 정원을 내다보면서 가슴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라라는 테이블과 다른 창문 사이에 놓인 다리미대를 돌아 지바고의 뒤에서 몇 걸음 떨어진 방 한가운데 멈춰 섰다. "언제나 전 이런 일이 있을까봐 두려웠어요."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조용히 말했다. "제가 나빴 어요... 하지만 그런 말씀하시면 안 돼요. 어머나, 선생님 때문에 큰일이 났군요!" 그녀는 크게 소 리치고 다리미대로 달려갔다. 셔츠 위에 올려놓은 다리미 밑에서 매콤한 연기의 가느다란 실오라 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라라는 다리미를 내려놓으면서 화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선생님, 제발 마드므와젤한테 가서 물을 좀 마시고 오세요. 그리고 여태껏 제가 알던 그런 훌 륭한 분이 되어서 돌아와 주세요, 네! 아시겠지요?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죠? 부탁이에요." 그 후 두 사람 사이에 이런 이야기는 다시 있지 않았다. 일주일 후 라라는 마침내 병원을 떠나 고 말았다. 9 얼마 후 지바고도 역시 집으로 떠났다. 이곳을 떠나기 전날 밤 심한 폭우가 내렸다. 거센 바람과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서 지붕을 부술 것만 같고, 바람이 바뀔 때마다 비바람 이 한 걸음 한 걸음 두들겨 때리며 나가듯이 거리를 휩쓸었다. 우레 소리가 그칠 사이가 없었고, 계속 번쩍이는 번갯불에 비치는 한길이 저 멀리로 사라져가 고, 휘어진 나뭇가지들도 똑같은 방향으로 달려가듯 흔들리고 있었다. 한밤중에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바드므와젤은 잠을 땠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일어나 귀를 기울었다. 노크 소리가 계속 들렸다. 이제 병원에는 일어나 문을 열어줄 사람이 하나도 남질 않았단 말인가? 모든 일을 내가 다 도 맡다니. 책임감이 있는 천성을 타고났어도 이 늙은 사람이 아니면 안된단 말인가? 그래, 이 저택은 부유한 귀족의 소유이지만 병원은 어디까지나 민중의 것이 아닌가? 그 민중은 도대체 누구한테 병원을 돌보게 하려는 걸까? 그 위생병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군 간부와 간호 원, 의사는 다 어디로 도망쳐버렸을까. 책임 있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다. 하지만 집에는 아직 환자가 남아 있었다. 전에 응접실이던 외과 병실에는 다리를 자른 환자 두 사람이 있고, 아래층 세탁소 옆 창고에는 이질 환자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스치니아마저 어디론가 초대를 받 고 갔었다. 폭우가 있으리라고 뻔히 알면서도 나가버렸어. 외박할 좋은 구실을 찾은 셈이지. 다행히 문의 노크 소리가 멎었다. 아무도 나가 보지 않았더니 단념한 것 같았다. 이 비바람에 어떻게 나갈 수가 있어야지... 혹시 그게 우스치니아가 아니었을까? 아내야, 그녀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니, 큰일이군, 또 두들겨대는군! 돼지 같은 것들! 아마 지바고가 그 소릴 듣고서 나오겠지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어림도 없어요. 그는 내일 출발할 사람인데, 마음은 이미 모스크바나 여행에 있을 텐데. 그런데 갈리울린은 뭣하 고 있을까! 이렇게 시끄러운데 그대로 코를 골며 잠들어 있을까? 아니면 자는 체하고 이 불쌍한 노파더러 나가보란 말인가? 이렇게 험악한 세상에, 그것도 한밤중에 어디서 굴러온 말 뼈다귀인 지도 모를 놈에게 문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어림도 없는 소리야! 갈리울린-마드므와젤은 문득 생각났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것 참, 난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양 이군. 나와 지바고 둘이서 그를 숨겨주었고 민간인으로 변장시켜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도망하기 위해서 이 근처의 길과 동네를 가르쳐주었지. 그때 역에서 무서운 린치 사건이 일어나 폭도들이 긴츠 위원을 살해하고 비류치 역에서 멜류제예보까지 갈리울린을 뒤쫓아와서 총을 쏘면서 온통 읍내의 집을 샅샅이 뒤졌지! 만일 자동차를 타고 온 군인들이 없었더라면, 이 고장은 돌멩이 하나 제대로 남아나지 않았을 거야. 때마침 이곳을 통과하던 장갑 사단이 그 악당 놈들을 몰아냈기에 다행이었지. 폭우는 기세가 꺾이면서 물러가 버렸다. 천둥소리가 뜸해지면서 그 소리도 멀리서 들려왔다. 이 따금 비도 멎고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도랑으로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먼데서 번개가 소 리도 없이 마드므와젤의 방을 이따금 비추며 무엇을 찾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얼마 동안 잠잠하더니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누군가 급한 볼일이 있어서 제 멋대로 두들겨대는 것 같았다. 다시 바람이 세차게 불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기다려요!" 마드므와젤은 누군지 모를 사람을 향해 소리지르고는 제 목소리에 놀라 몸을 떨었다. 누가 두들기고 있는지 언뜻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슬리퍼를 끌고 옷을 어깨에 걸치고 지바고 를 깨우려고 황급히 그의 방으로 갔다. 그 사람과 같이 나가면 그다지 무섭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지바고도 역시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서 이미 손에 촛불을 들고 나오려는 참이었다. 두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하로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의사 선생님,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무서워서 혼자 갈 수가 없어요." 그녀 는 프랑스어로 말하고 나서 다시 러시아어로 덧붙였다. "아마 라르나와 가야르 중위가 아닐까 요?" 지바고도 문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뜬 순간, 갈리울린이 도망가다가 길이 막혀서 숨으려고 되 돌아온 것이 아닐지, 아니면 라라가 여행에 무슨 어려운 일이 생겨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생 각했다. 현관에서 지바고는 촛불을 마드므와젤에게 주고 빗장을 빼고 손잡이를 돌렸다. 거센 바깥바람 이 그의 손에서 문을 빼앗아 열면서 촛불을 꺼버리고 길가의 차가운 빗방울을 날려 넣었다. "누구요? 누구요? 아무도 없어요?" 바깥 어둠을 향해 지바고와 그녀가 소리질렀으나 대꾸가 없었다. 갑자기 또 딴 곳에서 노크 소 리가 들렸다 - 뒷문이 아니면 정원으로 향한 창문이 아닐까? "바람 때문이군." 지바고가 말했다. "하지만 확실히 알아보아야 하니까 뒤쪽으로 돌아가 보고 오십시오. 정말 누가 왔을지도 모르니까.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마드므와젤이 집안으로 사라져 갔을 때 그는 밖으로 나가 현관 처마 밑에 섰다. 눈이 어둠에 익혀지자 어렴풋이 날이 밝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먹구름이 하늘에 너무나 낮게 떠서 쫓기듯이 달리고 있었다. 조각구름이 나무 끝에 잡힐 것만 같았다. 나무들은 하늘을 쓸고 있는 빗자루처럼 한 방향으로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비에 젖 은 저택의 판자 벽이 잿빛에서 검은빛으로 변색해 있었다. "어떻습니까?" 의사가 돌아온 마드므와젤에게 물었다. "당신이 말하던 대로 아무도 없었어요." 그녀는 집안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오는 길이었다. 나뭇 가지가 주방의 창문을 두드려서 창문 유리 한 장이 깨지고 마룻바닥엔 빗물이 흥건히 괴어 있었 다. 라라가 사용하던 방도 흡사 바다와 같이, 아니 진짜 바다가 돼 있었다. " 그리고 이쪽 덧문이 부서져서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어요. 그래서 소리가 났던가 봐요." 그들은 잠시 말을 주고받고는 문을 잠그고 공연히 잠을 설친 것을 후회하면서 각기 자기 방으 로 돌아왔다. 그들은 아까 이런 상상을 하고 있었다. 문을 열어 주면 라라가 비에 흠뻑 젖어 덜덜 떨면서 뛰어든다. 그녀가 비옷을 벗고 있는 사이 에 두 사람은 이것저것 묻는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그리고 밤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부엌 난로 앞에서 불을 쬐면서 머리를 빗고 웃으며 자기의 모험담을 들려준다. 두 사람은 이러한 정경이 꼭 일어나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현관문을 닫아걸고 난 후에도 그녀 의 비에 젖은 모습이 거리의 집 모퉁이에 꼭 서 있을 것만 같아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그녀의 환상이 오랫동안 두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다. 10 비류치 역의 통신사 콜랴 프롤렌코는 역에서 일어난 병사들의 소요 사건에 간접적인 책임이 있 다고 보았다. 콜랴는 멜류제예보에서 잘 알려진 시계공의 아들이었으며 어려서부터 그 고장에서는 누구한테나 낯익은 아이였다. 소년 시절에 그는 라즈돌리노예의 하인들 집에 놀러가서 백작 부인의 두 양녀 들과 함께 놀았다. 그녀는 콜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때 그는 프랑스 말도 좀 배웠었다. 멜류제예보에서는 어떤 날씨에도 가벼운 차림으로 모자도 쓰지 않고 여름 운동화 바람에 자전 거를 달리는 콜랴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는 전주와 전선을 쳐다보며 상태를 조사하면서 곧잘 두 손을 놓고 한길에서 자전거를 달리곤 했다. 멜류제예보에서는 역의 교환대에서 지선으로 연결된 전화를 몇 집만 가지고 있었다. 역의 교환 대는 콜랴의 소관이었음, 그는 몹시 바쁘게 지냈다. 전화나 전보를 취급하는 일뿐만 아니라 역장 포바리힌이 자리에 없을 때에는 철도 신호도 처리해야 했다. 신호는 교환대가 있는 바로 그 방에 서 보내지도록 장치되어 있었다. 그는 한꺼번에 몇 개의 기계 장치를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어느새 애매하고 무뚝뚝하게 아무렇 게나 대답하는 이상한 버릇이 몸에 배어버렸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을 수도 있고 대화를 끊어버릴 수도 있었다. 소동이 일어난 그날에도 그는 이런 버릇이 좀 지나쳤던 것이다. 사실 콜랴는 꼭 전해야 할 말을 전하지 않음으로써 갈리울린의 선의를 짓밟고 무의식적으로나 마 이 사건을 치명적인 것으로 크게 만들어버렸다. 갈리울린이 시내에서 전화를 걸어와 역이나 그 근처에 긴츠 위원이 있을 테니까 찾아서 전화를 받게 해달라고 콜랴에게 부탁했었다. 갈리울린은 긴츠 위원에게 자기가 갈 테니까 도착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콜랴는 가까이 오고 있는 열차에 신호를 해야 하니까 자리를 뜰 수 없다는 구실로 위원을 불러올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비 퓨치로 출동 명령을 받은 카자크 부대의 수송 열차를 연착시키기 위하여 온갖 힘을 다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고서도 그는 막상 카자크 부대가 도착하자 당황한 빛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기관차는 어두컴컴한 플랫폼의 지붕밑으로 천천히 들어와서 관리실 큰 창문 앞에 멈춰 섰다. 콜랴는 파란 바탕에 노란 색으로 철도 회사의 머릿글자를 수놓은 묵직한 면직 커튼을 젖히고 창 문턱에 놓인 큰 주전자를 들어 맑은 유리컵에 물을 따라 두세 모금 마시고 나서 바깥을 내다보았 다. 기관사실에서 기관사가 그를 보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더러운 녀석! 기생충 같은 놈!" 콜랴는 속으로 괘씸하게 생각하면서 욕을 퍼부었다. 그는 혓바 닥을 쑥 내밀고 주먹을 휘둘러 보였다. 기관사는 알았다는 듯이 어깨를 흠칫해 보이고 객차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내가 뭣을 할 수 있겠는가? 너 같으면 어떻게 할 도리가 있겠는가? 별수 없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너는 더러운 짐승들과 한패거리야." 콜랴는 몸짓으로 대 답했다. 화물 찻간에서 말들을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말들은 내려오지 않으려고 버둥거렸다. 말발굽 소 리는 나무 발판에서 돌 바닥 플랫폼으로 옮아왔다. 말들은 앞발을 치켜들며 선로 몇 개를 건너서 끌려갔다. 선로 끝에 내버려진 나무 객차가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페인트칠이 비에 씻겨 모두 벗겨지고, 벌레와 습기가 그 내부를 썩히고 있어서 객차의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숲 속의 수목과 비슷 한 모양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이끼와 자작나무 숲은 바로 그 차량 뒤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구 름이 낮게 떠가고 있었다. 명령이 내리자 카자크들은 말에 올라 숲 속 공지를 향하여 질주해갔다. 제 212연대 폭도들은 포위되었다. 말에 탄 기병들은 들판에서보다 숲 속에서 더 키가 크고 사 납게 보였다. 폭도들은 움막집에 총을 숨기고 있었으나 기병한테 위압되고 말았다. 카자크들은 사 벨을 뽑았다. 말들이 에워싼 둥근 포위망 한가운데 재목더미가 있었다. 긴츠 위원은 이 재목더미 위에 올라 서서 포위된 사람들을 향해 연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제나름대로 병사의 의무에 대하여, 조 국의 의미에 대하여, 또 그 밖에 여러 가지 고상한 제목에 대하여 말했다. 그러나 청중은 아무런 공감도 보이질 않았다. 청중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그들은 전쟁으로 너무나 많은 공포에 시달 려 와서 웬만한 것에는 느낌이 없었고, 더욱이 지쳐 있었다. 위원이 늘어놓는 문구들은 벌써 이전 에 지겹도록 들었던 소리들이었다. 4개월씩이나 좌익과 우익에서 이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하는 바람에 순진했던 이들이 이제는 연사의 외국인 냄새를 풍기는 이름과 발틱 지방의 말투에 냉소를 지었다. 긴츠는 자기 연설이 장황해진 것을 깨닫고 당황했으나, 자기에게 감사해야 마땅할 처지에 무관 심하거나 오히려 적의를 품고 지루함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이 괘씸한 청중에게 자기의 입 장을 명백히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점 초조해진 그는 주저할 것 없이 그들에게 좀더 강력한 어조로 위협을 주리라 다짐했다. 여기 저기서 술렁거리는 것도 아랑곳없이 혁명 군법회의가 설치 된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탈영병이 사형을 바라지 않는다면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주모 자를 끄집어내라, 이것이 싫다면 너희들은 비열한 배신자가 될 것이며 무책임한 오합지졸이라고 공격했다. 군중은 이런 얘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수백 명의 고함 소리가 일시에 터져나왔다. "좋아, 똑같은 소리. 다 들었어." 별로 성난 것 같지 도 않은 목소리와 증오에 찬 발광적인 고함 소리가 뒤섞여 터져나왔다. "저 뻔뻔스러운 놈! 옛날 과 똑같군! 장교들의 못된 버릇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군! 우리가 배신자라구? 그럼 당신은 뭐요? 저따위 녀석은 상대도 안 돼. 저놈은 독일의 스파이란 말이야. 용케 숨어 들어왔군. 증명서를 내 보여라, 이 귀족놈! 그런데 너희들은 바보처럼 입만 벌리고 있으니." 폭도들은 카자크 병사를 향 해 몸을 돌렸다. "너희들은 질서를 회복하러 온 거지, 자 우릴 마음대로 체포해 보지." 그러나 카자크병도 긴츠의 서투른 연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의 눈엔 전부가 돼지로 보이는 모양이군." 카자크들이 투덜거렸다. "저 혼자 양반인 체하고!" 처음에는 한 사람 두 사람이 그러더니 차츰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 넣으 면서 말에서 내렸다. 대부분이 말에서 내리자 그들은 한 떼로 몰려 공지의 중앙에 나가서는 제 212연대 병사들과 한데 어울려 한패가 되고 말았다. "조용히 이곳을 떠나십시오." 카자크 장교가 긴츠를 염려하여 말했다. "당신의 차는 건널목에 있습니다.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빨리 떠나시오." 긴츠는 시키는 대로했다. 그러나 몰래 빠져나가는 것은 체면상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되어 떳 떳하게 옆쪽으로 향했다. 가슴은 두근거렸지만 위신을 꺾이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의젓한 걸음걸 이로 걸었다. 역 가까이 까지 걸어갔다. 선로가 보이는 숲 언저리까지 나와서 처음으로 뒤돌아보았다. 소총을 가진 병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어쩌자는 걸까?"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뒤따르는 사람들도 걸음을 빨리 했다. 그래서 그들과의 거리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2중 벽으로 된 객차 뒤쪽을 돌자 뛰기 시작했다. 카자크를 싣고 온 기차는 대피 선에 옮겨져 있었다. 선로에 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선로를 가로질러 높은 플랫폼에 뛰어올라갔다. 그 순간 병사들도 낡은 객차의 뒤에서 달려왔다. 포바리힌과 콜랴가 소리지르며 손을 흔들어 역 건물 안으로 숨으라고 했다. 거기로 도망쳐 들어갔다면 살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대로 이어내려 오면서 박혀버린 자존심, 그를 자기 희생으로 몰아 놓은 자존심, 그리고 여기서 잘못 들먹이던 명예심이 안전하게 도피할 수 있는 길을 막고 말았다. 가슴이 몹시 두근거리며 공포를 억누르기 위하여 온 신경을 긴장시켰다 - 나는 놈들에게 "이성을 찾으라. 내 가 스파이가 아니라는 것은 너희들도 알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해야겠다. 감동을 줄 만한 몇 마디만 하면 그들은 제정신을 차릴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 용감한 행동이나 감격스러운 연설은 그의 가슴속에서 무대나 연단 혹은 의자 위에 올라서서 군중을 향하여 호소하는 행위와 무의식적으로 결부되는 것이었다. 역 건물의 문가에 종이 달려 있는 바로 밑에 방화수 통이 하나 있었다. 단단한 뚜껑이 닫혀 있 었다. 긴츠는 뚜껑 위로 뛰어올라가 다가오고 있는 군중을 향하여 격한 어조로 횡설수설하면서 연설을 시작했다. 어색한 목소리, 쉽게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문에서 두 발짝을 두고 서서 정신나 간 사람처럼 대담한 몸짓으로 병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들은 문득 발을 멈추고 손에 쥔 총을 내렸다. 그런데 긴츠가 올라선 뚜껑이 갑자기 빠지면서 한 발은 물 속에 또 한 발은 물통 가에 걸려 밑으로 늘어졌다. 물통 언저리에 걸터앉아 허우적거리는 긴츠의 모양을 바라보던 병사 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앞에 섰던 한 병사가 긴츠의 턱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다른 놈들은 뛰어가서 이미 죽은 그의 몸에 총검을 쑥쑥 찔러댔다. 11 마드므와젤은 콜랴에게 전화를 걸어서 의사 선생이 모스크바로 돌아가시는데 기차의 좋은 좌석 을 부탁하면서, 만일 안 될 경우 재미없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콜랴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전화 연결을 해주고 있었으나, 그의 말에 가끔 소수점을 섞어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다른 전화로 는 암호문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프스코프, 프스코프, 들려요? 폭도가 어쨌다구? 응원을?... 무슨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거요. 마 드므와젤? 전화를 끊어주시오. 프스코프, 프스코프, 36포인트 제로,포바리힌한테 부탁하세요. 그건 모두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오, 거짓말. 35... 제기랄... 전화 끊어주시오, 마드므와젤..." 마르므와젤은 전화통에 대고 계속 말하고 있었다. "프스코프, 프스코프라니, 날 속이려고 해도 속아넘어가나. 그게 무슨 소리람, 거짓말쟁이. 당신 어디 두고 봅시다. 알겠어, 내일 의사 선생을 꼭 차에 태워야 해요. 난 이 이상 더 싱거운 사람과 는 얘기하기 싫으니까." 12 지바고가 떠나던 그날은 몹시 무더웠다. 이틀 전에 있었던 것 같은 폭우가 또 가까이 오고 있 었다. 교외 역 부근의 해바라기 씨 껍데기가 흩어져 있는 곳에서 시꺼먼 하늘이 소리 없이 위협 하여 오두막집과 거위의 무리가 허옇게 떨고 있었다. 역 앞 넓은 들판의 잡초들은 몇 주일씩이나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덮이면서 마구 짓 밟혀버렸다. 남루한 회색 모직 외투를 입은 노인들은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모여든 사람들 사이를 서성대 며 무슨 소식이나 소문을 알려고 찾아다녔다. 열 네댓 살쯤 돼 보이는 얌전한 소년 소녀들이 팔 을 베고 누워서 마치 가축을 지키기나 하듯이 껍질을 벗긴 나무작대기를 휘두르고, 그들의 동생 들이 셔츠의 옷깃을 팔락거리며 붉은 엉덩이를 드러내고 아장아장 뛰놀고 있었다. 어머니들은 두 발을 앞으로 쭉 뻗고 앉아서 갈색 농부 옷의 밋밋한 젖가슴에 아기를 껴안고 있었다. "총격전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양 떼와 같이 흩어져버렸어요." 역장이 냉담한 말투로 지바고에게 말했다. 그들은 출입구 앞 땅바닥이나 구내의 마루에 누워 있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흩어져버렸어요! 그래서 다시 땅을 볼 수가 있었어요. 기뻤습니다! 넉 달 동 안이나 땅바닥을 볼 수가 없어서 잊어먹을 지경이었다니까. 긴츠 위원이 쓰러진 장소가 바로 여 깁니다. 참 놀라운 일이었어요. 난 전쟁에서 여러 가지 무서운 일들을 봐서 이런 일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되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가련한 생각이 듭니다. 정말 무의미한 짓이에요. 무엇 때문이 지요? 그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겁니까? 하지만 생각하면 놈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분이 부유 한 집안의 아들이라고 생떼를 쓰더군요. 자, 오른쪽으로 갑시다. 내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이 기차 에는 탈수가 없어요. 밟혀 죽을 겁니다. 지방 열차에 타시지요. 지금 편성 중에 있습니다. 타시기 전까지는 모르는 체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편성도 되기 전에 엉망진창이 될 겁니다. 오늘 밤에 수히니치에서 바꿔 타면 됩니다." 13 '비밀'열차가 철도 차고 뒤에서 뒷걸음질로 정거장으로 들어오자 군중들이 일시에 선로에 꽉 들 어찼다. 사람들은 완두콩처럼 언덕을 굴러 내려와서 제방을 기어오르며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승강 구나 완충기에 뛰어오르는가 하면, 창문을 넘어 기어들기도 하고 지붕으로 기어오르기도 했다. 기 차가 아직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 어느새 만원이 되어 버리고, 플랫폼에 정거했을 때에는 안에 꽉 찼을 뿐만 아니라 꼭대기에서 밑까지 승객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기적적으로 플랫폼까지 나온 지바고는 저절로 객실 복도에까지 떼밀려 들어가 버렸다. 수히니치까지 줄곧 자기 짐짝 위에 앉아서 갔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개고 햇볕이 따스하게 흐르는 들판에는 기차의 바퀴 소리에 간간이 귀뚜 라미 우는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가리고 있는 승객들 옷 때문에 차안은 어두컴컴했다. 마루와 의자 위에 사람의 그림자 가 두 겹 세 겹으로 비쳤다. 사람의 그림자는 맞은편 차창을 지나 기차가 달리고 있는 그림자와 함께 비치고 있었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떠들고 노래 부르고 싸움질을 하고 또 카드놀이를 하면서 야단법석들이었 다. 기차가 정거할 때마다 우르르 몰려드는 밖의 군중들의 아우성으로 소란은 더한층 심해졌다. 폭풍의 바다와 같은 들끓는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귀청을 찢는 듯하다가도 잔잔한 바다처럼 조용 해지기도 했다. 수수께끼처럼 조용한 플랫폼을 부산히 뛰어 다니는 발소리와 화차 밖에서 웅성거 리며 다투는 소리, 띄엄띄엄 들려오는 말소리, 서로 이별을 고하는 소리, 정거장 뜰에서 들려오는 조용한 닭 울음소리, 소리고 나뭇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차안에서 전해 준 전보가 멜류제예보에서 멀리 보내온 석별의 인사와도 같이 익숙한 향 기를 창문에서 풍겨주었다. 이 향기는 정원의 꽃이나 야생화보다도 높은 곳에서 풍겨 들어오면서 무엇보다도 그것을 남몰래 자랑하고 있는 듯싶었다. 사람들이 창문을 가리고 있어서 의사는 나무들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어딘가 바로 옆 에 무거운 가지를 차량의 지붕 위에 드리운 밤처럼 울창하게 우거진 잎들이 달리는 기차에서 날 린 먼지에 뒤덮이며, 조그맣게 반짝이는 촛불의 불꽃이 별똥처럼 날리고 있는 광경을 머리 6속에 그려보았다. 여행 도중에는 이따금 정거장에 사람들이 웅성댔고, 어디에나 보리수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풍기는 보리수의 향기는 기차를 앞질러 북쪽으로 먼저 여행하면서, 아무리 작은 정거장에 도착하여도 뒤에서 오는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모든 소문을 먼저 알고 그들의 질문 에 대답해주는 듯싶었다. 14 그날 밤 수히니치에서는 아직도 전쟁 전의 친절한 마음씨를 잃지 않고 있는 한 역부가 지바고 를 안내하여 어두운 선로를 넘어서 방금 도착한 임시 열차 뒤쪽에 달린 2등차에 태워주었다. 차장의 열쇠로 칸막이 좌석 문을 열고 지바고의 짐을 안으로 넣으려고 하는데, 차장이 달려와 서 짐을 밖으로 내던지려 했다. 그러나 지바고가 간곡히 부탁을 하자 차장은 그대로 물러가 다시 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이상한 열차는 후에 '특별 열차'였다는 것을 알았다. 정거장마다 잠깐씩 정거할 뿐 꽤 빨리 달렸다. 무장한 경비병 비슷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찻간은 거의 비어 있다시피 했다. 지바고가 차지한 칸막이 좌석에는 조그마한 탁자 위에 양초가 촛물을 흘리며 반쯤 열린 차창에 서 흘러 들어오는 바람결에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촛불이 켜 있는 칸막이 안에는 승객 한 사람밖에는 없었다. 그는 금발의 청년이었으며 팔과 다 리의 길이로 봐서 매우 장신의 사나이였다. 창가의 구석진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아 있었으나, 지 바고가 들어오자 겸손하게 일어섰다가 다시 앉았다. 그의 좌석 밑에는 뭔가 깔개와 같은 것이 들어차 있었다. 그 한쪽 구석이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귀가 축 늘어진 사냥개가 기어 나왔다. 지바고한테 다가와서 냄새를 맡아보고는 발을 꼬고 있는 키다리 주인 모양으로 엉성한 다리를 이리저리 내두르며 찻간 안을 기어다녔다. 그러 나 얼마 후 주인의 명령으로 좌석 밑에 기어 들어가 다시 깔개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때 비로소 지바고는 케이스에 들어 있는 쌍연발총이라든지 가죽 탄띠, 그리고 잔뜩 들어 있 는 사냥 주머니가 못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청년은 사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매우 말하기를 좋아했으며 상냥하게 웃으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지바고와 이야기를 시작했 다. 말하면서도 그는 지바고의 입을 유심히 바라다보고 있었다. 듣기에 귀에 거슬릴 만큼 거친 그의 목소리는 마치 양철통을 울리는 것 같았다. 그는 말하는 데 또 한 가지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제대로 러시아말을 하면서도 '우'하는 모음을 프랑스어의 '유'나 독일어의 '위'처럼 어색하게 발음하는 것이었다. 이 부정확한 '우'를 발음하면서도 그는 몹 시 애를 썼으며 다른 음보다 높게 발음했다. 만나서 처음부터 지바고는 그의 발음이 어색하다고 느꼈다. 그는 간혹 그 결점을 바르게 하려고 했으나 으레 어색한 소리가 되곤 했다. 지바고는 의 아하게 생각했다. '웬일일까? 어디선가 책에서 본 것 같다. 의사로서 알아두어야 할 일인데 잘 생각이 나질 않는 군.' 지바고는 생각했다. 침대 대신에 선반 위에 기어올라갔다. 청년은 잠자는 데 촛불이 방해가 될 테니 끄자고 했다. 지바고는 감사하다고 했다. 그가 불을 끄자 찻간은 캄캄해졌다. "창문을 닫을까요?" 지바고가 물었다. "도둑이 무섭지 않습니까? " 대답이 없었다. 더 높은 소리로 다시 한 번 물었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어느새 찻간을 나가버렸나 생각하고 성냥을 그었다. 그렇게 금방 잠들지는 않았으리라 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년은 눈을 뜨고 침상에 않아 있었다. 몸을 쑥 내밀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냥불이 꺼졌다. 지바고는 다시 성냥을 긋고 또 한 번 물어 보았다. "좋도록 하세요." 청년은 이내 대답을 했다. "나는 도둑놈이 욕심을 낼 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열어 두시지요, 더우니까." '이상한 사람이군!' 지바고는 생각했다 '이상한 사람이야. 어두운 데서는 말을 하지 않는군. 그리 고 이번엔 아주 정확한 발음이었어. 놀라운 일이야!' 15 지난 한 주일 동안에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과 그리고 여행을 준비하느라고 아침 일찍 일어 나 떠나와서, 지바고는 편안한 자리에 길게 몸을 펴기만 하면 이내 잠들 것만 같았으나 막상 눕 고 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피곤했기 때문에 오히려 잠을 청하지 못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였다. 어둠 속에서 갖가지 상념이 소용돌이쳐 왔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도 정리해 보면 두 가지 뚜 렷한 갈래로, 서로 얽혔다가 풀어지곤 하는 두 개의 실뭉치로 나눌 수가 있었다. 그 하나는 토냐와 집에 대한 생각이다. 지극히 자질구레한 것에 이르기까지도 모든 것이 애정 과 따스함에 젖어들고 시적인 분위기에 잠기는 예전의 그 차분한 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상념이었 다. 2년 동안이나 그 생활에서 떨어져 있다가 지금 야간 급행 열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다. 이 상념에는 혁명에 대한 그의 충성과 찬미의 마음도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중간 계급이 받아 들일 수 있는 혁명이었고, 블로크의 추종자였던 1905년 당시의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었던 혁명 이었다. 전쟁이 있기 전인 1913년부터 1914년 사이에 지평선 위에 나타나 러시아의 사상과 예술과 또 러시아의 생활에 등장한 그 사상은, 러시아 전체와 지바고 자신에 관련된 새로운 질서의 선구자 로서 또 양속으로서 이렇게 오래도록 가슴속에 간직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금 그러한 것들이 다시 소생되고 계속되기를 바라며 다시 그러한 풍토로 돌아간 다는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 이상으로 가슴이 벅차오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상념의 또 한 갈래에는 좀 다른 새로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구세대에 연유하는 낯익은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의하여 결정되고 강요되는 마치 지진과도 같이 당돌한 것이었다. 전쟁과 그로 인한 유혈, 공포, 방황, 야만성, 시련과 전쟁이 가르쳐주는 세속적인 지혜 등은 이 새로운 것에 포함된다. 전쟁의 물결에 휩쓸린 쓸쓸한 작은 도시나 거기서 만났던 사람들도 또한 이 범주에 속한다. 또 1905년의 혁명과 같은 대학의 관념적인 혁명이 아니라 오늘의 새로운 혼란 과 전쟁이 가져온 피비린내 나는, 거칠고 원시적인 병사들에 의한 혁명, 직업적 혁명가인 볼셰비 키들이 지도하는 혁명이 여기에 속한다. 이 새로운 상념 속에서 전쟁 덕분에 정처 없이 방황하는 간호원 라라도 들어 있었다. 지바고로 서는 알 길 없는 복잡한 과거를 지닌 라라. 누굴 원망치도 않으나 그녀의 깊은 침묵이 그것을 말 해주고 있으며 수수께끼와 같은 그녀의 눈동자엔 무엇인가 감춰져 있었다. 그리고 지바고는 일생 을 통해서 자기 가족과 친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해 온 것과는 반 대로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기차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열린 차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지바고의 머리카락을 헝클 어뜨리고 먼지를 날렸다. 밤중에도 낮과 같이 정거장마다 사람들이 모였고 보리수의 꽃향기가 풍 겨 왔었다. 이따금 어둠 속에서 역으로 달려오는 마차의 달음질 소리와 기차 바퀴의 소음이 이야기 소리와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에 뒤섞여 들려왔다. 이런 때에는, 밤의 그림자가 설레이면서 저마다 머리를 맞대고 나무 잎사귀를 팔락이며 서로 속삭여대는 소리의 뜻을 지바고는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은 러시아의 약동과 흥분이 점점 더 넓게 파문을 일으키는 소리이며, 혁명과 이에 따르는 숙명적인 고난의 시기 그리고 아마도 끝내는 혁 명의 위대성에 대한 소리일 것이다. 16 지바고는 다음날 오전 열 한 시가 넘어서야 잠에서 깼다. "마르키스! 마르키스!" 그는 자기 사냥개를 부드럽게 부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사람과 단둘 뿐이며 그 후 다른 사람은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었다. 어려서부터 귀에 익은 정거장 이름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칼루가 지방을 지나 모스크바로 꽤 들어와 있었다. 전쟁 전과 같은 여유 있는 기분으로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한 후에 청년이 초대하는 아침 식사시 간에 맞춰서 찻간으로 돌아왔다. 이제 상대방을 좀더 잘 관찰할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바고의 관심을 끈 것은 그 청년이 지나치게 떠벌리며 도무지 침착하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청년은 이야기를 좋아했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며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언어 능력의 기능, 다시 말해서 단어를 발음해서 소리를 낸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말을 하면서 마치 용수철처럼 엉덩이를 들썩이고 별다른 이유 없이 귀청이 찢 어질 정도로 큰 소리로 웃어대며 만족스러운 듯이 양손을 비벼대곤 했다. 이렇게 하고도 자기 기 쁨을 표현하는데 부적한 것 같으면 무릎을 탁탁 치면서 눈물이 날 만큼 웃어댔다. 그의 말투는 어젯밤과 같이 여전히 이상한 데가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자가 당착되어 있었다. 묻지도 않은 것을 고백하는가 하면 아무런 저의도 없는 질문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자 기 신상에 대해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리를 횡설수설했다. 거짓말도 조금씩 섞어가면서 지 나치게 과격한 의견을 꺼내며, 보통 상식에 속하는 견해를 부인하면서 지바고를 어리둥절하게 만 들었다. 그 청년의 견해는 지바고가 오랫동안 알고 있던 것과 비슷한 데가 많았다. 지난 세기의 허무주 의자가 그와 유사한 과격한 사상을 주장하였고, 좀 후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의 주인공들도 주장했으며, 더욱이 최근에는 그의 직접적인 아류에 솔하는 시골 지식 계급의 그것과 비슷한 사 상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시골의 지식층은 때로는 도회지보다 앞서고 있을 경우 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뿌리까지 파헤치는 습관을 아직 버리지 않고 있었으나, 도 시의 지식층은 이런 태도는 이미 낡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의 말에 의하면 그는 저명한 혁명가의 조카가 되지만 자기의 부모는 반대로 형편없는 반동 이라고 했으며, 그의 말을 빌면 외고집 장이라고 했다. 양친은 전선 가까운 곳에 큰 영지를 가지 고 있었으며 청년은 거기에서 자랐다고 했다. 양친은 일생 동안 삼촌과는 앙숙이었으나, 이제는 오히려 삼천 덕택에 불쾌한 꼴을 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 자신의 사상은 삼촌과 같으며 인생이나 정치, 예술 할 것 없이 과격론자였다. 이런 점에서 청년은 표트르 베르호벤스키의 냄새를 풍겼다. 좌익사상을 닮았다고 하기보다는 경박하고 천박스 러운 점이 닮았었다. '이제 아마 자기는 미래파라고 나오겠지' 하고 지바고가 생각하고 있자, 실제 로 얘기는 현대 예술로 옮겨갔다. '이번에는 스포츠 얘기겠지-경마나 스케이트, 그리고 레슬링 같 은...' 또 지바고가 생각했던 대로 얘기는 사냥으로 옮겨갔다. 청년은 자기 고향에서 사냥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나는 사격의 명수랍니다. 만일 신체의 결함만 없었더라면 군대에서 명사수가 되 었을 겁니다." 그는 자랑했다. 지바고가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아니 거짓말인 줄 아십니까? 내 실력을 의심하는 것같은데..." 하고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아직도 당신은 알아차리지 못했군요? 난 당신이 나의 결점을 짐작하리라 생각했어요." 그는 호주머니에서 두 장의 카드를 꺼내서 지바고에게 주었다. 한 장은 그의 명함이었다. 그는 두 개의 성을 가지고 있었다. 막심 아리스타르호비치 클린초프=포고레브시크였다. 그러나 삼촌의 성을 기념하여 간단히 포고레브시크라고만 불러 달라고 했다. 또 하나의 카드에는 네모진 부호가 그려져 있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맞춰놓은 두 손과 손가 락을 구부린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농아자의 알파벳이었다. 이윽고 모든 것이 명백해졌 다. 포고레브시크는 가르트만이나 오스트로그라도프 농아학교에 다닌 재주가 뛰어난 학생이었으 며, 선생의 목 근육을 바라보고는 어렵지 않게 상대방의 이야기를 알아내는 농아 자였던 것이다. 고향의 지명이나 사냥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지바고는 물어보았다. "이런 말을 묻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혹시 당신은 즈이부시노 공화국이나 그 수립에 무슨 관계 를 가졌지 않습니까?" "잘 아시는군요...블라제아코를 아십니까? 무슨 관계가 있느냐구요? 있지요! 물론 있지요!" 포고 레브시크는 즐거운 듯이 소리치더니 몸을 좌우로 흔들고 양쪽 무릎을 탁탁 치면서 웃어댔다. 그 러고는 다시 꿈 같은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청년의 이론을 실제에 적용할 기회를 준 사람은 블라제이코였으며 장소를 제공한 곳은 즈이부 시노였던 것이다. 그러나 청년의 이론이 지바고에겐 납득되지 않았다. 포고레브시크의 철학은 무 정부주의의 원리와 사냥꾼의 허풍이 뒤범벅돼 있었다. 청년은 마치 철학자와도 같은 초연한 태도로 장차 비참한 사태가 일어나고야 말 것이라고 예언 했다. 지바고는 마음속으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이 보기 싫은 젊은 친구가 점잔을 빼 면서 오만한 얼굴로 예언하는 데는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잠깐만, 잠깐만." 지바고는 머뭇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아마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태로 봐서는 즉 혼란과 파괴, 그리고 적군의 압력 같은 것이 바로 눈앞에 있는 데 그러한 위험한 실험을 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국은 새로운 동란에서 회복 돼야 하 지 않습니까. 적어도 평화와 질서를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건 어린애와 같은 생각입니다." 포고레브시크가 말했다. "당신이 무질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 은 당신이 갈망하고 있는 질서와 같은 정상적인 상태입니다. 파괴는 광범한 창조적 계획에 있어 서는 불가결한 예비 단계라는 것입니다. 사회는 아직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아주 산산조각이 되어버린 곳에서 진정한 혁명적 정부가 아주 새로운 기초 위에서 사회를 다시 건설하 게 되는 것입니다." 지바고는 불쾌한 마음을 참으며 통로로 나왔다. 기차도 속도를 더 빨리 하면서 모스크바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별장들이 산재해 있는 자 작나무 숲을 지나고 있었다. 교외의 지붕 없는 작은 정거장과 피서객의 무리가 먼지 구름과 함께 멀리 뒤로 물러났다. 기관차가 울려대는 기적 소리가 주변의 숲속으로 달려가 산울림이 되어 되 돌아온다. 며칠만에 처음으로 지바고는 자기가 어디에 있으며, 그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그리고 한 두 사간 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들을 뚜렷이 알게 되었다. 3년간의 변화, 행방 불명과 변혁, 전쟁과 혁명, 파괴와 죽음의 광경, 포격, 폭파된 교량, 화재, 폐허 등 모든 것이 갑자기 거대하고 공허하고 무의미한 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오랜 중단 끝에 처음 찾아온 실제의 사건이 이 급행 열차의 여행이며, 미칠 듯이 고대하던 집에 가까이 가 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기 집은 편안하게 예전과 다름이 없을는지, 돌멩이 하나라도 그립지 않 은 것이라곤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인생이고 유익한 경험이며, 모든 탐구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 이거야말로 예술이 지향하는 것-자기 집으로, 단란한 가정으로, 진실한 자기로, 참된 존재 로의 복귀인 것이다. 자작나무 숲을 뒤로하고, 기차는 나뭇잎 터널을 빠져나와 넓고 밝은 곳으로 나왔다. 비스듬한 분지에서 널따란 언덕으로 펼쳐진 들에 검푸른 감자밭 이랑이 가로로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감 자밭 끝의 언덕 위에 온실에서 들어낸 유리 형틀이 있었다. 들 반대쪽에 달리고 있는 열차의 후 미에는 검은 자색 구름이 하늘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 구름장 사이에서 비치는 햇살이 열차 바퀴의 덜거덕 소리가 사방에 퍼지듯이 온상 유리에 눈부시게 반사되었다. 갑자기 굵직한 빗방울이 햇빛에 반짝이면서 구름 사이에서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급하게 대 지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질주하는 기차 바퀴 소리와 경쟁하듯, 마치 비가 뒤떨어질세라 따 라가기에 있는 것 같았다. 지바고가 미처 주의를 돌리기도 전에 언덕 어귀에서 성구세주 교회가 보이고, 다음 순간 벌써 도시의 종루와 굴뚝과 지붕과 건물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스크바입니다." 지바고는 찻간으로 돌아와서 말했다. "내릴 채비를 해야지요." 포고레브시크는 벌떡 일어나더니 사냥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중 굵직한 오리 한 마리를 꺼냈 다. "이거 받으십시오." 그는 말했다. "기념으로 드리는 거니까. 덕분에 온종일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의사가 아무리 사양을 해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럼, 좋습니다." 지바고는 하는 수없이 오리를 받기로 했다. "당신이 내 아내에게 보내는 선물 로서 받겠습니다." "부인한 테요? 그거 참 영광입니다! 부인한테, 부인한테 꼭 전해주십시오." 포 고레브시크는 부인이란 말을 생전 처음 쓰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못 기쁜 듯이 온몸을 흔들며 웃 어대는 바람에 사냥개까지 덩달아 일어나 그와 기쁨을 나누려는 듯 멍멍 짖어댔다. 기차는 정거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차안이 캄캄해졌다. 귀머거리 청년은 무슨 인쇄된 포스터 종이에 싼 들오리를 의사 앞에 내미는 것이었다. 6.모스크바의 숙영지 1 좁은 기차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을 때, 지바고는 움직이고 있는 것은 기차뿐이고 시간은 정 지되어 있는 것 같아서 아직 정오가 못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태운 마차가 스몰렌스 크 광장의 혼잡을 누비고 있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몇 년 후에 의사는 그날의 기억이 뚜렷이 남아서인지, 혹은 후의 경험이 살을 붙여서 혼돈하고 있는지 똑똑히는 모르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별로 붐빌 이유가 없었고 사람들은 습 관적인 타성으로 시장에 나와 있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텅 빈 노점들은 닫혀 있 기는 하였으나 잠그지도 않았고, 청소를 하지 않아서 너저분하게 흩어진 광장에서는 팔고 사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때만 하더라도 점잖은 옷차림을 한 수척한 노인이나 노파들이 벽에 기대서서 행인들 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무한테도 필요 없는 조화나 유리 뚜껑과 주둥이가 달린 둥근 커피병, 검은 레이스가 달린 야회복, 폐지된 관청 제복 따위를 벌여놓고 그저 서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더 긴요한 물건만을 사고 있었다. 곰팡이 냄새 나는 배급품 검은 빵, 지저분한 설탕 덩어리, 포장된 채로 반으로 자른 1온스 짜리 싸구려 담배 같은 것들이었다. 온 시장에서는 이런 잡동사니가 매매되었고 사람의 손으로 넘어갈 때마다 그 값이 자꾸만 뛰어 오르고 있었다. 마차는 광장으로 통하는 좁다란 길로 접어들었다. 서쪽으로 기운 해가 잔등에 비쳤다. 앞에서 빈 마차 하나가 덜컥거리며 가고 있었다.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먼지 기둥이 석양빛을 받아 청동 색으로 보였다. 마침내 지바고가 탄 마차는 길을 막고 있던 짐마차를 피해서 앞질렀다. 마차는 속 력을 내면서 달렸다. 의사는 담장이나 벽에서 떨어진 낡은 신문이나 포스터 등이 인도나 차도에 산더미처럼 흩어져 뒹굴고 있는 것을 보고 올랐다. 바람이 이것들을 한쪽으로 불어제치면 지나던 말과 마차 바퀴가 그것을 또 다른 쪽으로 밀어붙이곤 했다. 네거리를 몇 개 지나고 의사는 집이 모퉁이에 보였다. 마차가 멈춰 섰다. 지바고는 숨가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마차에서 내려 현관에 다가가서 초인종을 눌 렀다.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눌렀다. 여전히 응답이 없어서, 짧게 연거푸 눌러댔다. 한참 종 을 누르고 있는데 문이 토냐의 손으로 소리 없이 열리고, 그녀가 활짝 열어젖뜨린 문을 잡고 서 있었다. 너무나 뜻밖이라서 이 순간 서로의 입에서 터져나온 외침 소리도 듣지 못한 듯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토냐가 문을 활짝 열었다는 것은 환영을 뜻하는 것이며 포옹을 기다리 는 표시인 것이다. 잠시 후 제정신으로 돌아온 그들은 뜨겁게 부둥켜안았다. 이윽고 서로들 예기 에 바빴다. "무엇보다도, 다들 별고 없소?" "네, 네, 잘 있어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제가 그 동안 실없는 편지 많이 드려서 미안해요. 하 지만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어요. 왜 전보를 치시지 않고서? 짐은 마르켈더러 옮기게 할 테니까 요. 예고로브나가 문을 열러 나오지 않아서 걱정하셨죠? 시골에 갔어요." "당신 좀 수척해졌군, 하지만 싱싱하고 예뻐요! 잠깐만, 마차를 보내고 오겠어." "예고로브나는 밀가루를 구하러 보냈어요. 다른 하인들은 다 내보내고 지금은 싸샤를 돌보는 뉴샤라는 계집애 하나만 있어요. 고르돈이나 두도로프도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던데요." "싸샤는 잘 있어요?" "잘 있어요. 금방 잠이 깼는데. 당신이 여행엣 돌아오는 길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보실 수 있게 할 텐데." "아버님 집에 계시오?" "당신한테 알리지 않았던가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시소비에트에 나가 계신답니다. 의장이랍 니다. 놀라셨죠? 마차 삯은 주었나요? 마르켈! 마르켈!" 두 사람은 고리짝과 트렁크를 내버려 둔 채 길 한복판에 서서 오가는 통행일 방해하고 있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그들을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훑어보기도 하고 인도에서 멀어 져가는 마차와 활짝 열린 현관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마르켈은 젊은 주인을 맞으러 대문에서 뛰어 들어왔다. 셔츠 위에 조끼를 입고 손에는 수위 모 자를 들고 달려오면서 외쳤다. "아이구, 서방님 아니십니까! 우리의 빛이 돌아오셨군요! 유리 안드레예비치, 우릴 잊으시진 않 았군요. 하나님이 우리의 기원을 저버리시지 않았어! 하여튼 잘 오셨습니다.!" 그는 구경꾼들에게 호통을 쳤다. "무슨 볼일이 생겼다고 이렇게 서 있는 거요? 가시오, 가요! 무슨 구경거리가 있단 말이오!" " 잘 있었나, 마르켈! 한 번 안아 보세. 모자를 쓰게나. 뭐 달라진 것은 없었나? 마누라와 딸들 도 다 잘 있고?" "잘 지내고 있답니다. 하나님 덕분에 잘들 자라고 있지요. 달라진 것이라면 서방님이 전선에서 바쁘게 지내시는 동안에 우리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는 거예요. 난장판이었지요. 어찌할 도리 가 없었어요. 길거리는 지저분하고 지붕은 못 고친 채 버려 두었구요, 집에 칠도 하지 못했답니 다. 뱃속은 사순절 단식 때처럼 텅 비었고요. 이것이 다 참된 평화- 그들이 말하는 무병합, 무배 상의 덕택이랍니다." "여보, 마르켈은 언제나 저렇다니 까요. 저 사람 예기를 드려야겠군요. 당신이 좋아할 줄 알고 저렇게 수다를 떤답니다. 저 사람의 뱃속은 훤히 들여다보이는 걸요. 가만히 있어요, 마르켈, 난 다 알고 있으니까. 당신이 얼마나 능청스럽고 또 약아빠진 사람인지. 당신도 우리가 어떤 사람인 지 잘 알지요." 마르켈은 짐을 안으로 들여다 놓고 계속 지껄였다. "아씨는 너무하세요. 서방님도 다 들으셨죠? 언제나 저러신 답니다. 저더러, 너의 뱃속은 굴뚝 처럼 시커멓다, 요즘은 어린애뿐만 아니라 강아지들까지도 뭐가 어떻게 되어 돌아가는지 잘 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렇지만 서방님, 정말 그걸 아는 사람은 1백 40년 동안이나 돌 밑에 놓여 있는 석공의 예언서를 본 사람뿐이에요. 그리고 이건 저의 생각인데, 우리는 한마디 콧노래 에 팔려 왔던 처지에 무슨 불평이 있겠어요? 보세요, 아씨가 저더러 가라고 손짓하고 계시잖아 요." "그렇게 거드름 피우지 말고, 이제 됐어. 어서 서방님의 짐을 마루에다 날라요, 마르켈. 서방님 이 시킬 일이 있으면 다시 부를 테니까." 2 "드디어 쫓았어. 시원하게 됐어. 당신이 그 사람을 믿는다면 믿어보세요. 하지만 그것은 거짓 연극에 지나지 않아요. 당신은 그 사람의 말만 듣고 다른 바보들과 같은 바보로 아시겠지만 속으 로는 칼을 갈고 있는 흉칙한 사람이에요. 그 칼을 누구한테 던질 것인지 아직 그것을 결정하지 못했을 뿐이고,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심술꾼이에요." "그건 좀 지나친 얘기 같군! 내가 보기엔 그저 주정뱅이고 좀 허풍이 있을 뿐인 것 같소." "그럼 언제 그가 맑은 정신일 때가 있나요? 어쨌든 마르켈의 얘긴 그만 해둡시다. 싸샤가 다시 잠들지 않았는지 걱정이에요. 혹시 당신은 기차에서 티푸스를... 당신 몸에 이는 없겠지요?" "그렇지 않을 거요. 편한 여행을 했으니까. 전쟁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여행했소. 하지만 우선 간단히 씻고 나중에 또 다시 씻기로 하지. 그런데 왜 그리로 가오? 응접실을 지나서 다니지 않 소? 지금 당신은 딴 생각을 하고 있군 그래." "그렇군요, 당신은 아직 모르시죠. 아버님과 의논한 끝에 아래층 일부를 농업 아카데미에 내주 기로 했어요. 어차피 겨울에는 난방도 큰일이고 2층도 너무 큰 편이니까. 그래서 우린 내주기로 했어요. 아직 이사를 오진 않았지만 도서실과 식물 표본실, 종자 표본들은 옮겨왔어요. 쥐를 끌어 들였는지 몰라요. 하기야 그것도 곡식은 곡식이니까요. 아직까지 방은 깨끗이 쓰고 있어요. 지금 은 '방'이라고 말하지 않고 '거주 면적' 이라고 한답니다. 이리로 오세요. 어리둥절하시는군! 뒤쪽 층계로 올라가야 해요. 아시겠어요? 자, 내가 안내할 테니 따라오세요." "방을 내 주길 잘했어. 내가 있던 병원도 개인 주택이었어. 방들이 쭉 연결되어 있었고, 여기저 기에 모자이크 마루가 깔렸고 화분에 심은 종려나무가 마치 유령처럼 침대 위에 손을 뻗치고 있 어서 부상병들이 잠을 깨는 순간에 곧잘 놀라곤 했다오. 물론 정상적이 아닌 전투 신경증인 사람 이었지만. 그래서 화분을 들어내지 않을 수가 없었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돈 많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는 뭔가 불건전한 데가 있었다는 거요. 가구도 지나치게 많고, 방도 많고, 취미도 지나 치게 섬세하고 허례 허식이 너무 많아요. 우리가 쓸 방이 적어진 것은 아주 잘된 일이오. 우린 아 직 방을 더 줄여도 무방할 것 같소." "그 종이 꾸러미는 뭐예요? 새 부리 같은 것이 툭 튀어나와 있군요. 오리군요! 아이, 귀여워! 어 디서 구했지요? 믿어지질 않는군요. 요즘은 귀한 물건이에요." "기차에서 얻었다오. 설명하자면 얘기가 길어요. 다음에 합시다. 어떻게 할까? 부엌에 둘까?" "네, 그렇게 해요. 뉴샤한테 빨리 털을 뽑고 씻으라 하겠어요. 올 겨울에는 기근이나 연료 부족 등 여러 가지 무서운 얘기가 돌고 있어요." "그래, 가는 곳마다 그런 얘기뿐이더군. 하지만 나는 금방 기차 차창에서 밖을 내다보면서 평화 로운 가정 생활과 일하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더 가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오. 그 밖의 것은 우리 힘으론 어쩔 수도 없는 일이오. 어쨌든 많은 사람에게 어려운 시기가 닥쳐올 거요. 어 떤 사람은 불행을 피하려고 남부 지방인 카프카스나 그보다 더 먼 곳으로 가려고 애쓰고 있다 하 지만, 난 그따위 짓은 하고 싶지 않아요. 떳떳한 사나이라면 이를 악물고 조국에 닥쳐온 운명을 함께 감수해야 해요. 이건 재론할 여지도 없는 일이지. 하지만 당신의 경우는 달라. 난 당신을 고 생시키고 싶지가 않아요. 핀란드나 어디 안전한 곳으로 당신을 보내고 싶어요. 이거 참 어찌된 일 이요, 한 층계마다 이렇게 반시간씩이나 실없는 얘길 하다보면 위층까지 언제 다 올라갈지 모르 겠군." "잠깐만, 진작 말씀드려야 하는 건데. 좋은 소식 전해 드리죠. 니콜라이 아저씨가 돌아오셨어 요." "누구, 니콜라이라니?" "니콜라이 아저씨 말예요." "토냐, 그럴 리가! 어찌된 일이오?" "네 그래요, 스위스에 계셨대요. 런던으로 가는 길에 핀란드를 경유해서 오셨대요." "당신! 날 놀려대는 건 아니겠지? 당신이 만났단 말이오? 어디 계시는데? 곧 만날 수 있어요?" "어지간히 급하시군요! 지금 시골 어떤 사람의 별장에 가 계세요. 모레 돌아오신다고 약속했어 요. 많이 변했더군요. 당신 실망하실 거예요. 오는 도중에 페테르부르그에 들린 것 좋은데 볼셰비 키한테 물들어버렸어요. 아버지는 아저씨와 언성을 높이면서까지 논쟁했답니다. 참, 층계마다 잃 게 멈춰 서다간 정말 안 되겠네요? 빨리 올라갑시다. 당신도 고난과 위험이 닥쳐올 것이란 소문 을 들으셨단 말이죠? 정말 어떤 고난이나 불행이 일어날 건지 예측할 수 없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무슨 방도가 있겠소? 힘껏 살아 나가야지, 이 세상에 종말이 오는 것 도 아니니까. 우리도 남들처럼 정세나 관망합시다." "땔감이나 물, 등불도 없이 살아야 하고, 돈도 없고 물자 배급도 없어지리라고 하더군요. 또 멈 춰 섰군요! 자, 갑시다. 아르바트 거리엔 신문을 태워서 음식을 끓일 수 있는 작은 철제 난로를 팔고 있어요. 그 상점 주소를 알고 있어요. 다 팔리기 전에 하나 사기로 해요." "그럼, 사야지. 여보, 그래 니콜라이 아저씨가 돌아온 게 틀림없단 말이지! 정말 믿을 수 없군!"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2층 한쪽 구석을 우리가 차지하고, 그러니까 아버지와 싸샤, 그리고 뉴 샤와 함께 두 개나 세 개의 방을 차지하여 같이 쓰고, 나머지는 전부 내주도록 해요. 칸막이로 막 고 출입문을 따로 내면 딴 집과 같이 될 거예요. 그리고 가운데 방에 작은 난로를 놓고 창문으로 연통을 뽑아요. 그 방에서 빨래니 취사니 손님 접대니 하면 어떨까요. 그렇게 하면 연료를 절약할 수도 있고, 이럭저럭 겨울을 나게 될 것 같군요." "그렇군, 문제없을 거요. 그리고 좋은 생각이 있는데, 뭔지 알겠소? 우리 집들이 축하 연회를 차립시다 오리 요리를 만들고 니콜라이 아저씨도 초대합시다." "좋아요. 그럼 전 고르돈한테 알콜을 부탁하지요. 실험실이나 어디서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여 기가 아까 말씀드린 방이에요. 마음에 드세요? 트렁크를 여기 두고 고리짝을 가져오세요. 연회에 아저씨와 고르돈 외에 두도로프와 슈라도 함께 부르도록 해요. 좋겠죠? 욕실은 잊어버리시진 않 았죠? 몸에 소독약을 뿌리셔야 해요. 난 싸샤한테 가서 뉴샤를 아래층으로 내려보내겠어요. 그리 고 준비가 되면 제가 부르러 오겠어요." 3 모스크바에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어린 아들이었다. 싸샤가 출생하자마자 그는 군에 소집되어 아들 얼굴조차 익힐 여유가 없었다. 토냐가 아직 병원 산실에 있던 어느 날, 그가 면회하러 찾아갔었다. 이미 군복 차림을 하고 모 스크바를 떠나는 작별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애기한테 젖먹이는 시간이어서 병실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대합실에 앉아 있는데, 산실 저편 복도 끝에 있는 육아 실에서 십여 명 가량의 애기들이 합창 하듯 울어대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간호원 여럿이 복도를 바쁜 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갓난아기가 감기 들지 않게 물건을 싸듯이 둘둘 말아서 두 팔에 하나씩 안고 어머니한테로 옮기고 있었다. "응아, 응아." 애기들은 다 똑같은 음률로 냉담하리만큼 거의 무감동하게 의무적으로 지르듯 울 어댔다. 그 중에서 목소리 하나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그것은 다른 목소리보다 더 큰 고통을 나 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깊이 있고 침울한 반항이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지바고는 장인 에게 경의를 표시하는 뜻에서, 아들이름을 알렉산드르라고 짓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무슨 까닭인 지 몰라도 그의 주의를 끌고 있는 특징을 가진 울음소리가 마치 자기 자식이라는 생각에 견딜 수 가 없었다. 아마도 그 울음은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특정한 인간이 장차의 개성과 운명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알렉산드르라는 애기 이름이 가지는 독특한 뉘앙스 때문이라 고 지바고는 생각하였다. 그의 상상은 틀리지 않았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바로 싸샤의 울음 소리였던 것이다. 이 것이 자기애기에 대한 최초의 지식이었다. 다음은 토냐가 전선으로 부쳐준 사진이었다. 입술은 마치 큐피드의 활 모양으로 또렷하고 귀엽 고 토실토실한 애기가 담요 위에 엉거주춤 서서 농부 춤이라도 추듯이 주먹을 치켜올린 사진이었 다. 그때 싸샤는 만 한 살로서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지금은 두 살이니까 말도 곧잘 하겠 지. 지바고는 마루에서 트렁크를 집어들고 끈을 풀어서 창가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 방은 전에 무엇을 하던 방이었을까? 그는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아마 토냐가 가구를 들어냈든지 아 니면 벽지를 새로 발라서 단장했는지도 모르겠다. 트렁크에서 면도 기구를 끄집어냈다. 창문 맞은편 교회탑 기둥 사이로 밝은 달이 둥글게 떠오 르고 있었다. 트렁크 속에 개어 놓은 의복과 책 그리고 세면 도구 위에 달빛이 반사되어 방안이 훤해지면서 불현듯 그는 생각이 떠올랐다. 안나 부인이 망가진 책상이나 의자, 낡은 서류 따위를 보관하던 창고 자리였다. 그녀는 여기다 가족의 기록 서류를 보관하고, 여름에는 겨울옷을 넣은 트렁크를 두었던 곳이다. 그녀가 살아 있 었을 때에는 구석구석에 고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어서 어린애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었다. 그 러나 성탄절과 부활절 때만은 많은 애들이 파티에 오면 2층 전체가 개방되곤 했다. 그때는 창고 까지 개방해 놓고 애들은 변장하느라 숯덩이로 얼굴을 검게 칠하고 산적놀이를 하면서 놀았던 것 이다. 잠시 동안 그는 서서 이런 생각에 잠기다가 현관에 놓아둔 고리짝을 가져오려고 뒤쪽 층계를 내려갔다. 밑의 부엌에서 뉴샤가 난로 곁에 웅크리고 앉아서 신문지 위에 오리 털을 뽑고 있었다. 그가 고리짝을 들고 들어오자 뉴샤는 수줍은 듯이 날씬한 몸짓으로 일어서서 얼굴을 붉히며 앞치마의 털을 털고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고리짝을 받다 들려고 했다. 그는 고맙다고 말하고 자기가 할 수 있다면서 뒤쪽 층계를 올라갔다. 두 방쯤 건너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젠 들어오세요, 유라!" 이전에 토냐와 그가 공부방으로 쓰던 방에 들어갔다. 어린이 침대 위의 애기는 사진에서 보던 것같이 그렇게 예쁘지는 않았으나 지바고의 어머니 마리아 니콜라예브나를 그대로 꼭 닮은 얼굴 이었다. 어머니 초상보다도 더 닮았다고 할 수 있을 것같았다. "아빠가 오셨다. 너의 아빠야. 손을 흔들어 인사해야지." 그가 애기한테 키스하고 껴안아 올리기 쉽게 토냐는 침대의 그네 줄을 낮췄다. 싸샤는 털북숭이 얼굴의 낯선 사람이 자기한테 다가와서 몸을 기울이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싫 었지만 참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벌떡 일어나 한 손으로 엄마 목을 부둥켜안고 또 한 손을 크게 휘둘러 아빠의 얼굴을 찰싹 후려갈겼다. 그러고는 자기의 대담한 행동에 놀란 듯이 어머니 가슴 팍을 파고들어 옷에 얼굴을 파묻고는 지리하게 훌쩍였다. "자, 자, 그러면 못써!" 토냐가 꾸짖었다. "아빠를 때리다니, 싸샤. 아빠가 어떻게 생각할까? 싸 샤는 나쁜 애라고 그러시겠지. 자, 아빠한테 뽀뽀해 드려야지. 뽀뽀할 줄 알지. 울지 말구. 바보처 럼!" "그냥 둬요." 지바고는 말했다. "공연히 신경 쓸 거 없어. 당신이 지금 뭘 생각하는지 난 알아 요. 이런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고 나쁜 징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부질없는 생각이오. 당연하 지 않소, 이 애는 날 본 적도 없으니까. 내일쯤 실컷 보고 나면 떨더질 수가 없을 거요." 그러면서도 그는 침울한 마음으로 방을 나오면서 어떤 좋지 않은 예감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4 그 후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는 몹시 외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단지 자기 자신이 바라던 것을 얻었을 따름이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친구들이 예전보다 희미한 존재가 되어 빛을 잃고 있었다. 누구나 자기 주견 이나 독자적인 세계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기억엔 친구들이 훨씬 뚜렷한 존재로 남아 있 었던 것은 아마 지난날 그가 친구들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구질서 아래에서 생활이 안정된 사람들은 남을 희생시키면서 어리석은 장난이나 괴상한 짓을 마음놓고 할 수 있었던 반면에,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 어 있었다. 그런 시대에는 소수의 특권 계급의 어리석고 지금 하층 계급이 들고일어나 상층 계급 의 특권을 없애 버리자 특권 계급은 갑자기 빛을 잃어버리고 거리낌없이 제 나름의 사상을 내동 댕이치고는- 그따위 사상은 애당초 있지도 않았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지바고가 친근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내와 장인, 그리고 두세 명의 동요로서, 미사 여구 따위나 뇌까리는 족속과 달리 착실히 노력하고 일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가 집으로 돌아와서 얼마 후에 오리와 알콜의 연회가 열렸다. 그때까지 그는 연회에 초청한 사람들을 벌써 다 만나봤기 때문에 사실상 이 연회에서 그들을 처음 만나 보는 것은 아니었다. 이 굶주렸던 시기에 기름진 오리 한 마리는 지나친 사치였으나, 여기에 빵을 곁들이지 못한 점 이 호사한 연회의 흠이 되었으며 사람들의 신경에 거슬렸다. 고르돈은 유리 병마개가 닫힌 약병에 알코올을 담아왔다. 알콜은 암거래 상인의 좋은 상품이었 다. 토냐는 그 병을 손에서 놓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조금씩 알콜을 물에 타서 좀 독하게도 하고 또 약하게도 만들었다. 그래서 같은 도수의 술을 마시는 것보다 도수가 다른 편이 빨리 취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 역시 화를 돋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슬픈 일은 연회가 시대 조건에 동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이 집에서는 먹고 마시고 있는데, 같은 시간에 길 건너의 집들에도 그렇다고 할 수는 없었다. 창밖에는 어둡고 굶주 린 모스크바가 말없이 늘어져 있었다. 모든 상점이 텅 비었고 사람들은 이미 오리나 보드카 따위 에 대해서 생각마저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웃 사람들과 같은 생활 속에서 아무런 파란도 없이 지 내고 그 속에 융화된 생활만이 참된 생활이며 혼자만의 행복은 행복이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날 연회 상에 나온 오리나 술도 이들만이 즐기는 것이므로 참된 오리나 술이 되지 못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손님들은 또한 씁쓸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르돈이 어두운 사상에 골몰하면서 우울하고 제멋대로 표현하던 학창 시절이 좋았다. 그는 지바고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중학 시절에는 많은 동료들이 그를 좋아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새로운 개성을 익히려 했으나 그 노력의 결과는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어버렸 다. 그는 낙천가 흉내를 내려고 쾌활하게 농담하며 곧잘 "재미있군!","유쾌하군!" 하고 감탄사를 연발하지만, 예전엔 그에게 이러한 어휘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인생을 즐거운 것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두도로프를 기다리는 동안에 고르돈은 두도로프의 우스운 결혼 내력에 대해 얘기했다. 친구들 간에는 다 알려진 얘기지만 지바고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두도로프는 결혼 후 1년쯤 지나서 아내와 갈라서게 외었는데, 그 경위가 믿기 어려울 만큼 색 다르다는 것이었다. 두도로프는 무슨 착오 때문에 군대에 징집되었다.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병사로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거리에서 장교에게 경례를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멍하니 있었기 때문에 번번 이 처벌을 받았다. 그래서 징집 해제 후에도 그는 오랫동안 장교만 눈에 띄면 무의식적으로 손을 번쩍 올리게 되고 사방에 계급장이 눈에 어른거렸다. 제대하고 돌아올 무렵에는 그의 거동이 여러 가지로 이상한 데가 있었다. 하루는 볼가강 선창 가에서 기선을 기다리다가 두 처녀와 알게 되었다. 그 처녀들은 자매였다. 그런데 거기에 군인들 이 많이 눈에 띄게 되면서 그는 갑자기 군대 생활이 머리에 떠올라 머리가 이상해져서 느닷없이 동생 되는 처녀에게 마음이 끌려 즉석에서 결혼 신청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재미있지 않아요?" 하고 고르돈이 질문했다. 이때 그는 하던 얘기를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의 목 소리가 현관에서 들리더니 그가 곧 방안으로 들어왔다. 두도로프도 지난날의 그 사람과는 달리 아주 변해 있었다. 예전엔 좀 경망스럽고 촐랑거리는 편이었으나 지금은 의젓한 학자가 되었다. 중학 시절에 그는 정치범의 도망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나 예술학교를 이리저리 옮겨 다녔으나, 끝내 인문과학을 공부하고 전쟁 중에 동료 들보다는 몇 해 뒤늦게 서야 대학을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대학에서 러시아 역사 와 일반 역사 이 두 과목을 강의 맡았고, 이미 두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그 책들은 이반 뇌제의 토지 정책에 관한 것과 두 번째는 성 주스트에 관한 연구였다. 연회가 끝날 무렵에 슈라가 뛰어들어 한층 더 시끄러웠을 때, 지바고와는 소년 시절부터 친구 였던 두도로프는 예전처럼 친한 말투가 아니라 점잖은 말투로 물었다. "당신 마야코프스키의 <전쟁과 평화>와 <등뼈 피리>를 읽어보았소?"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리에 지바고의 대답을 듣지 못한 그는 얼마 후 다시 물어댔다. "<등뼈 피리>와 <인간>을 읽어 봤어요? "아까 말했는데 듣지 못한 것은 당신 탓이오. 당신 나름대로 생각해요. 다시 말하지만, 난 마야 콥스키를 좋아했어요.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오히려 그는 서정시를 쓰는 도스토예프스끼라고 말하는 편이 옳아요,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반항적인 청년-'미성년'이라 든지 이폴리트, 라스콜리니코프와 같은 인물이 시인이 된 것과 같아.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다 집 어삼키려는 그 시적 에너지, 절대 타협을 모르는 꿋꿋한 기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나 그 배경 인 공간을 향해 던지는 대담한 도전! 참 멋있어!" 그러나 이 밤의 주인공은 누구보다도 니콜라이 아저씨였다. 또냐가 아저씨는 모스크바를 떠났 다고 한 것은 잘못이었으며, 지바고가 돌아온 날에 이미 시내로 돌아와 있었다. 이들은 벌써 두세 번 만나서 실컷 얘기를 나누며 웃고 즐겼던 것이다. 첫 대면은 이슬비 내리는 침울하게 어둑어둑한 밤이었다.지바고는 아저씨가 유숙하고 계시는 여관을 찾아갔었다. 여관은 시 당국의 추천 없이는 손님을 받을 수 없게 되었지만, 니콜라이는 저 명 인사로서 예전의 연줄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 여관은 직원이 모두 도망쳐버리고 난 정신병원 같았다. 층계나 복도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모 든 것이 뒤죽박죽 되어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큰방의 창 밖으로 혼란기의 거대한 광장이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이 몸서리치게 내다보였다. 그건 여느때 보던 광장이 아니라 마치 악몽 속에서 몽 롱하게 나타나는 광장 같았다. 이것은 인상적이며 잊을 수 없는 의미 있는 상봉이 아닌가! 그의 소년 시절의 우상이며 그의 마음을 지배하던 스승과 재회하게 되는 것이다. 아저씨의 머리가 꽤 희끗했으며 낙낙한 외국제 양복이 몸에 잘 맞았다. 그는 나이에 비해 퍽이 나 젊었고 또 단정하게 보였다. 그러나 아마 이웃을 휩쓸고 있는 커다란 사건들에 눌려 다소 빛을 잃고 좀 작아져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바고는 이러한 척도로 아저씨를 본다는 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바고는 아저씨가 냉혈적이면서도 농담하듯 그리고 차분한 태도로 정치를 말하는 데 적이 놀 랐다. 그의 능력은 현재의 러시아의 누구보다도 뛰어났으나 어딘지 외래자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 만 그것은 낡아 고리타분했으며 따분하게 생각되었다. 그들 재회의 처음 몇 시간은 정치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서로 울고 웃으며 포옹하고 열띤 대 화가 이따금 끊기곤 했으나 정치와는 무관한 얘기였다. 이것은 두 예술가의 재상봉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가까운 친척이었고, 두 사람 사이 에는 다시 지난날의 회상이 숨가쁘게 되살아나서 헤어진 사이의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나, 일단 창 조적 정신에 대한 중요한 대목에 화제가 미치게 되자 두 사람을 잇고 있던 모든 관계는 말끔히 사라지고, 친척이라든지 연령 차이 따위는 다 잊어버리고 오직 기본적인 힘의 대립, 에너지의 대 립, 원리의 대립뿐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니콜라이는 창작의 문제를 이토록 자유스럽고 또 심각하게 얘기할 수 있는 기 회를 별로 갖지 못했었다. 지바고 역시 이렇게 예리하고 발랄한 견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대화는 감동에 넘쳐 있었다. 이들은 서로 상대방의 통찰력에 놀라면서 흥분하여 방안을 서성거리고, 또 어쩌다 서로 완전히 이해가 된 점을 발견하고는 아주 좋아하면서 묵묵히 창가에 다가가서 손가락으로 유리를 탁탁 튕기곤 했다. 이것이 처음 상봉이었다. 그 후 지바고는 두세 번 다른 좌석에서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으나 그 때는 알아볼 수도 없게 사람이 아주 달라져 있었다. 니콜라이는 모스크바에서 방문객으로 자처하였으며 또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페테르부르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어딘지 확실치 않았다. 그는 사 교계의 인기 있는 정치가의 역할이 몹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마 국민의회 전야에 파리에서 날리던 마담 롤랑의 정치 살롱 같은 것이 모스크바에도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모스크바의 조용한 뒷골목에 살고 있는 여자 친구들을 찾아가 환대 받으며, 그들과 그들 의 남편들이 시대에 뒤져 있음을 은근히 놀려댔다. 그는 이전에 교회에서 금지하던 책자나 오르 피스교의 서적에 정통한 듯이 신문에 나 있는 지식으로 아는 체했었다. 그는 스위스에서 젊은 애인과 하던 일을 채 끝맺지 못했으며, 또 아직 정리되지 않은 저술을 남겨둔 채 조국의 혼란 속에 잠시 젖어보려고 돌아왔다는 소문이 들렀다. 만일 무사히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다시 서둘러 사랑하는 알프스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는 볼셰비키에 호의를 보였고, 그와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의 사회혁명당 좌파의 이름을 곧잘 입밖에 꺼내곤 했다. 그 한 사람은 미로쉬카 포모르라는 가명으로 글을 쓰고 있는 저널리스트였고, 또 한 사람은 실비아 코체리라는 정치 평론가였다. "무서운 일입니다. 당신도 어지간히 타락했군요, 니콜라이 선생." 그로메코 교수는 그를 마땅치 않게 나무랐다. "당신이 마음에 든다는 미로쉬까는 쓰레기통과 같은 사람이란 말이오! 또 리쟈도 포코리도 마찬가지구." "코체리 실비아입니다." 니콜라이가 정정했다. "포코리이든 포푸리이든 이름은 달라도 알맹이만은 같으니까." "그러나 코체리는 코체리지요." 니콜라이는 무던히 참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드디어 벌어졌 다. "그런 걸 가지고 다투어봐야 무슨 소용이오? 너무나 명백한 걸 논증한다는 거도 창피한 일이 오, 아주 초보적인 것이지요. 역사책을 보시오. 여러 세기 동안에 민중은 어려운 생활을 보내왔어 요. 봉건 제도의 농노라든지 자본주의 제도의 산업 노동자라든지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 도 부당하고 부정한 생태에 있었어요. 이러한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일이지요. 세계는 민중을 계몽하고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한 봉기를 준비해왔어요. 낡은 질서를 부분적으로 땜질해 본들 아무런 소용도 없고, 근본적으로 기초까지 파헤치고 들어 가야 한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 결과는 건물이 완전히 허물어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오? 무서운 일이라고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어요. 어차피 그건 시간 문제지요. 저항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하는 말은 그게 아니오." 그로메코 교수는 화가 나서 언성을 높였다. "당신이 말하는 포 푸리니 미로쉬카 같은 사람은 양심이 없는 사람이란 말이오. 그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 오, 그건 그렇고 당신의 얘기는 논리에 닿지도 않소. 너무 비약하고 있단 말이오, 잠깐만 기다려 요. 내가 뭘 보여주겠소." 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요란스런 소리로 웅변을 토하면서 문제의 논문이 실린 잡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로메코 교수는 이야기 도중에 이따금 문득 말을 중단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러한 중단은 이 야기가 막혔을 때 중얼거리거나 헛기침을 하며 슬쩍 넘어가게 했다. 무엇인가 잊어버린 것을 찾 을 때- 말하자면 어두울 때 현관에서 덧신 한 짝을 찾거나 수건을 어깨에 걸고 욕실 문가에 서 있을 때, 또 식탁에서 무거운 접시를 옮길 때라든지 손님 술잔에 술을 따를 때 갑자기 혓바닥이 부드러워져서 잘 돌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지바고는 그의 장인의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했다. 귀에 익은 옛 모스크바 어조로 부드러운 말 씨에 그로메코 집안의 독특한 목젖을 울리며 나오는 음성이 듣기 좋았다. 그로메코 교수는 나비 넥타이가 목에 비죽이 나와 있는 것과 흡사하게 콧수염을 기른 윗입술이 아랫입술 위로 비어져 나와 있었다. 그의 입술과 넥타이는 뭔가 닮았고, 어딘지 모르게 순박하고 미더운 표정을 엿보이게 한다. 그날 밤 슈라는 연회가 끝날 무렵에야 찾아왔다. 그녀는 집회에서 바로 오는 길이라면서 재킷 에 노동자 모자 차림이었다.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와서는 한 사람씩 악수를 나누고 느닷없이 불 평과 비난을 퍼부었다. "토냐 잘 있었어? 그로메코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참 너무들 합니다. 모스크바가 온통 유라가 돌라온 사실을 다 알고 있는데 나한테만 감추고 있었으니. 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죠. 도대체 어디 있어요? 왜 이렇게 담장처럼 막고 서 있는 거요. 자, 좀 봅시다. 안녕하시오? 난 당 신의 글을 읽어 봤지만 한 마디도 이해할 수가 없더군. 하지만 훌륭하다는 것은 금방 알았어요. 안녕하십니까, 니콜라이 선생님. 유라, 나중에 당신한테 꼭 해야 할 특별히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건 또 누구야, 꽥꽥거리는 거위, 고고치카가 아닌가?" 고고치카는 그로메코 집안의 먼 인척이며, 새로운 등장 인물에 대해선 열렬한 경의를 보내는 사나이였다. 그를 고고치 카라고 부르는 것은 웃기기 위해서이고 홀쭉하고 귀가 커서 촌충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술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군요? 난 당신들을 쫓아버려야겠어 요. 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세상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실제 민중 집회에 가보시오. 책에 씌어 있는 그런 것이 아니고 진짜 노동자 그리고 진짜 병사들 말이에요. 만일 그들에게 최후의 승리까지 전쟁을 계속하라고 호소해보십시오. 그들은 반드시 최후의 승리 가지 싸워 나갈 것입니다. 저는 이제 금방 한 수병의 연설을 들었어요. 유라, 당신이 그걸 들었다 면 열광하고 말았을 거요. 그 대단한 정열! 그 순진함!" 슈라는 이야기를 멈췄다. 모두들 제각기 떠들어댔다. 슈라는 지바고 옆에 가까이 앉으며 그의 손 을 붙잡고 그의 얼굴에 가까이 대고, 떠들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메가폰으로 얘기하듯이 큰 소리 로 말했다. "언제 한 번 나와 같이 가요, 유라. 난 당신한테 참된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어요. 당신은 안테 우스와도 같이 굳게 발을 땅에 딛고 있어야 해요. 뭘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거요? 당신은 내가 고참병이란 걸 알지요, 고참 베스투제프였다는 걸 알고 있지요? 감옥의 맛도 보고 바리케이드에 서 사운 일도 있어요. 물론 당신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우린 민중을 전혀 모르고 있었 단 말이오, 나는 지금 그들에게 도서관을 지어주기 위해서 그 기금을 모으는 중이에요." 슈라는 꽤 많이 마셨는지 취기가 올랐으며, 지바고도 역시 머리가 빙빙 돌았다. 어느새 슈라와 는 반대쪽 책상 끝으로 옮겨와 자기도 모르게 연설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는 잠시 조용해지길 기 다렸다. "여러분, 한마디 말씀드리겠습니다... 미샤! 고고치카!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또냐, 어떡하지, 들 으려 하지 않는군! 여러분, 한두 마디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전대미문의 엄청난 일이 닥쳐오고 있 습니다. 이러한 사태가 오기 전에 저는 여러분에게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가호로 우 리는 서로를 잃어서는 안 되며 우리의 영혼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고고치카, 박수는 나중에 쳐주어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구석에선 떠들지 마시고 경청해주시기 바랍니다. 전쟁 3년째인 오늘, 누구나 전선과 후방의 구분이 곧 없어지리라고 믿습니다. 피의 바다가 우릴 향하여 밀어닥쳐 오고 있으며, 전쟁은 옆에서 구경하던 모든 것들을 삼켜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 홍수가 바로 혁명인 것입니다. 혁명 시기에는 전선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인생이 정지되며 개인적인 것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고, 죽이고 죽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살아 남아서 이 시기의 기록이나 회고록을 읽을 수 있다면, 남들이 1세기에 걸쳐서 경험 하였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가 이5년이나 10년 동안에 경험했다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민 중이 자발적으로 들고일어나 한데 뭉쳐 나가며 무든 것이 민중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것인지는 나 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극적인 거대한 사건은 증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증명이 없이도 난 알 수 있다고 믿습니다. 거대한 사태의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용렬한 짓입니다. 원인 따윈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건의 여유를 가리는 일은 부부 싸움 정도가 아닐까요. 서로 상대방의 머리끄덩이를 쥐어뜯고 그릇을 부수고 나서 누가 먼저 싸움을 시작했는지 생각해내려고 있는 격입니다. 실로 위대한 것은 마치 우주와 같이 그 시초가 없는 법입니다. 그것은 항상 저 만큼에 있다고 생각했 는데 느닷없이 나타나선 우리와 대결하는 것입니다. 저도 역시 러시아는 세계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왕국이 될 운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 랫동안 멍하니 있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기억의 대부분이 영영 사라지고 난 후일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에 일어난 사건이나 뒤에 계속된 사태를 망각하고 그렇게 된 이유조차 알 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사물의 질서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으며, 지평선에 보이는 숲 이나 머리 위를 떠다니는 구름처럼 친숙해질 것입니다." 그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를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는 동안 술은 말끔히 깨고 말았다. 그러나 여전히 술에 취해 있어서 주위에서 말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그들은 알았으나 저절로 치밀 어 오르는 슬픔을 쫓아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기분을 알겠습니다. 저는 그것에 보답할 길이 없습니 다. 마치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은 사랑을 주겠다고 생각하면서 지금 허둥지둥 사랑을 조금 나타낸 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람들은 괜히 하는 소리로 들었는지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재난이 닥 쳐올 것이라는 예감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그가 선을 위하여 제아무리 애쓴다 한들 미래에 대해 아주 무력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손님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모두들 지쳐서 까칠한 얼굴들이었다. 턱을 떨면서 하품하는 모습들이 흡사 말처럼 보였다. 돌아가지 전에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눅눅한 하늘엔 지저분한 토색 완두빛 구름이 가 렸고, 노란 새벽놀이 물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얘기하는 사이에 소나기가 왔었군." 누군가가 말했다. "이리로 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겨우 뛰어왔다오." 슈라가 덧붙였다. 아직도 어둠이 깔린 텅 빈 골목길에는 나무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비에 젖은 참새들이 신나게 지저귀고 있었다. 하늘을 삽으로 주욱 긋듯이 천둥소리가 울렸다가는 다시 조용해진다. 이윽고 가을에 잘 영근 감자를 부드러운 땅속에서 파내어 집어던지듯이 사이를 두고 천둥소리가 크게 네 번 울렸다. 천둥은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방을 맑게 했다. 이윽고 생명의 모든 요소가 뚜렷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전류, 물, 공기, 그리고 환희의 기대, 땅과 하늘. 길거리는 돌아가는 손님들의 말소리로 가득 찼다. 그들은 집안에서 시작한 흥분된 토론을 거리 에 나와서도 계속했다. 말소리는 차츰 멀어져갔다. "너무 늦었군." 지바고가 말했다. "이젠 자러 갑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당신과 아버님뿐이오." 5 8월이 지나 9월도 마지막으로 접어들었다. 피할 수 없는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겨울은 가까워 오고 인간 세계에는 일종의 가사 상태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누구나 그것을 화제로 삼고 있었다. 엄동을 대비하여 식량이나 땔감을 마련해야 할 시기였다. 그런데 유물론이 득세하고 있는 이 시기에는 물질이 추상적인 관념으로 변하면서 식량이나 장작 대신에 영양 문제와 연료 보급 문제 가 우세했다. 도시의 사람들은 미지의 것에 직면하여 어린애처럼 꼼짝도 못했다. 그 미지의 것이란 바로 도 시 자신이 생산한, 도시인의 창조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존의 관습을 말끔히 쓸어버리고 그 지 나간 자리엔 폐허만이 남게 되었다. 어디서나 사람들은 자신을 기만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일상 생활의 타성으로 절름 발을 끌며 허둥지둥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바고는 사실 그대로의 인생을 볼뿐이었다. 이미 인생에 사형 선고가 내렸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는 자기와 주위의 운명이 이미 결판이 난 것으로 보고 있었다. 앞으로는 여러 가지 시련이 다가올 것이며, 어쩌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 도 모를 일이었다. 마지막 남은 나날이 그의 눈앞을 스치고 있었다. 일상 생활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쫓겨 분주하게 지내지 않았더라면 아마 미치고 말았을 것이다. 처자식의 일이나 수입의 길을 터야 하는 일, 그리고 평상시의 일과인 환자 치료, 이런 것들이 그 를 구원해주었던 것이다. 거대한 괴물과 같은 미래의 메키니즘 앞에서 그는 보잘것없는 무력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미래를 걱정하며 사랑을 기울여 남몰래 자랑스럽게 느끼곤 했다. 그리고 마치 마지막 이별을 고하기라도 하듯 나무와 구름, 길가는 사람들의 모습, 재난을 벗어나려는 필사의 노력을 쏟고 있는 위대한 러시아의 도시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었 다. 그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 한 몸을 희생할 각오였으나 너무나 무력하여 어쩔 수 없는 처지였었다. 러시아 의사협회의 약국 근처 스타로코뉴센느이 모퉁이에서 아르바트 거리를 횡단할 때, 그는 가끔 거리 복판에 멈춰 서서 하늘과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그는 다시 이전에 근무하던 병원으로 돌아가 일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여전히 성십자병원이라 고 불렀으나 그 이름의 단체는 이미 해산되고 없었다. 하지만 이 병원에 적합한 이름은 아직 생 각지 않고들 있었다. 병원에는 이미 파벌이 생기게 되었다. 온건파에 대해서 지바고는 그들을 우둔한 사람들이라고 나무랐으며, 그들 자신은 지바고를 위험 인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혁신파의 눈에는 지바고가 미온적인 인물로 보였다. 그러한 결과 그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게 되어 전자로부터는 떨어져 있었고 후자로부터는 기피되고 있었다. 그는 병원에서 정상적인 직무 외에 원장 지시에 따라 일반 통계 업무를 맡고 있었다. 질문서와 그 밖의 서류들이 끊임없이 그의 손을 거쳐갔다. 사망률, 직원의 재산 상태, 그들의 정치 의식 수 준, 선거 참가율, 그리고 계속 부족 되고 있는 연료, 식량과 약품의 부족 등을 점검하여 보고해야 했다. 지바고는 의무실 창가에 놓인 낡은 책상에 앉아서 일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도면이나 서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한쪽 구석에 밀어놓고 이따금 의 학에 관한 저술 메모를 하든지, <민중 놀이>라는 표제의 일기장에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것들을 적어 놓곤 했다. 그것은 민중의 대다수가 자기의 실존을 거부하고 미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에서 영감을 얻어 산문, 시, 그 밖에 여러 가지를 써넣는 우울한 일기였다. 성모 승천제 이후에 계속되는 화창한 가을 크림색 햇볕이 흰 벽의 방안에 가득히 넘쳤다. 아침 엔 서리가 내리고 박새 까치들이 숲의 밝은 잎새로 날아들었다. 이런 날이면 하늘은 끝없이 높고, 하늘과 땅 사이의 투명한 공간을 통하여 차갑고 검푸른 빛이 북쪽에서 흘러온다. 그래서 이 세상 의 모든 것들이 더 잘 보이고 더 잘 들리게 된다. 먼 곳에서 울리는 음향은 얼어붙은 공명 상태 에서 더 잘 전해진다. 지평선은 마치 앞으로 몇 해 동안의 인생의 모든 것을 보여주듯 활짝 열려 져 있다. 이러한 맑은 분위기가 다급히 황혼이 깃들이는 늦가을의 잠시 동안이 아니었다면 아마 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재빨리 저물어 가는 가을 석양이 무르익은 능금 알처럼 감미롭고 물기 있는 빛을 지금 막 의무 실 방에 비치고 있었다. 지바고는 책상에 앉아서 뭔가 쓰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생각에 잠기며 펜에 잉크를 묻히곤 했 다. 진기하고 조용한 새들이 높은 창문을 소리 없이 날아 지나면서 펜을 든 손이며, 책상, 마루와 벽에 그림자를 던지고 사라져갔다. 해부의가 들어왔다. 예전에 그는 뚱뚱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살이 쑥빠져 버려서 피부가 주머 니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단풍잎이 거의 다 떨어지고 말았어. 비바람에도 끄떡없던 것이 하루 아침 서리에 당해 버렸 어!" 지바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름도 모를 진기한 새들이 창문 가까이도 날아갔다고 생각했으나, 실 은 그것이 진한 포도주 빛깔의 단풍잎이었다. 나무에서 땅 위로 떨어지는 구부러진 별처럼 생긴 단풍잎들이 병원 잔디 위를 덮고 있었다. "창문 틈새를 막았어?" 해부의가 물었다.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지바고는 대답도 없이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참 타라슈크가 있어야 하는 건데." 해부의가 말을 잇는다. "틀림없는 사람이었는데... 신발도 꿰 매 주고, 시계도 고쳐 주고, 무엇이든 못하는 일이라곤 없었어. 그리고 필요한 물건은 죄다 구해 주었지. 이제 그 사람이 없으니까 창문도 우리가 붙여야 한다니까." "빠데가 없어요." "그건 만들 수가 있지. 가르쳐 드릴까?" 해부의는 아마유와 분필로 빠데 만드는 방법을 설명했 다. "그럼 난 가요. 당신은 남아서 일하겠소?" 그는 다른 창가로 가서 시험관과 표본들을 만지작거린다. "눈이 나빠져요." 잠시 그는 잠잠했다. "어두워졌어요. 불도 켜지 못하는데 이젠 돌아갑시다." "좀더 있다가 가지요. 한 20분 후에." "그 사람의 마누라는 여기 간호원이라오." "누구의 마누라?" "타라슈크의 마누라 말이오." "아, 그래요?" "그는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떠돌아다니기만 하니까. 지난여름에 마누라를 만나러 병원에 두어 번 찾아오긴 했었지. 지금 어디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있을 테지. 그는 길거리나 기차에서 흔 히 눈에 띄는 볼셰비키 병사의 한 사람이라오. 그들은 어떤 점에서 표가 나는지 아시겠소? 타라 슈크를 보아요. 그는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할 수 있어요. 무엇이든 훌륭히 해치운단 말이오. 군대에 있을 때도 그랬었지. 그래서 우수한 저격수가 되었다오. 그의 손과 눈은 제 1급품이란 말 이오. 여러 가지 훈장도 받았지만 그건 용기나 기지가 있어서가 아니었소. 언제나 겨냥한 것은 다 맞췄단 말이오. 말하자면 뭣이든 열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전쟁을 하는 것도 열중한 탓이었어요. 그는 소총이 그에게 권력과 영예를 안겨다 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 자신도 권력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무기를 가진 사람은 보통 사람과는 달라요. 옛날엔 이런 패거리들이 병사에서 산적으 로 변했었지. 지금 타라슈크한테서 청을 빼앗으려 해보아요. 그건 안 될 말이지! 그런데 느닷없이 '너희들의 총부리를 주인에게 돌리라...' 라는 슬로건이 나왔었지. 타라슈크는 시키는 대로했을 뿐 이지요. 이것이 마르크스주의라는 겁니다." "그래서 극히 순수한 현실 생활에서 우러나왔다는 거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해부의는 시험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난로 수리공은 뭐라고 하던가요?" 얼마 후에 그는 물었다. "보내줘서 고마워요.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더군. 헤겔이나 크로체에 관하여 오랫동안 얘길 하였 어." "그랬을 테지! 하이델베르그대학에서 철할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거든. 그런데 난로는 어떻게 됐는데?" "말도 말아요." "아직도 연기가 난단 말이오?" "여전해요." "연통을 잘못 달았을 거요. 연통 구멍에다 제대로 연결시켜야 해요. 창문으로 연통을 뽑았나 요?" "연통 구멍에다 연결했는데도 여전히 연기가 나더군요." "그렇다면 공기 구멍을 제대로 내지 않은 모양이로군. 타라슈크가 있었다면 문제 아닌데! 그렇 지만 어떻게 되겠지. 모스크바도 하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니까. 난로를 고치는 일은 피아노 치 는 것과는 달라요. 숙련이 필요하거든. 장작은 마련됐어요?" "어디 마련할 수 있어야죠." "교회 수위를 보내 드리죠. 그는 나무 도둑이라오. 울타리를 부숴서 장작을 만들어요. 그러나 거래할 물건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빈대약이 좋겠군." 그들은 외투를 걸어 둔 방으로 내려가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갔다. "빈대약은 뭣에 쓰려고?" 지바고가 말했다. "우리 집엔 빈대가 없어요." "그런 얘기가 아니오. 난 지금 장작 얘기를 하고 있어요. 나무 장사를 크게 하는 노파가 있는 데, 그 노파는 장사하는 요령이 좋아요. 여러 집에서 땔 만한 장작을 한꺼번에 몽땅 사들이는 겁 니다. 어두우니 발 조심해요! 이전엔 난 이 근처에서 눈을 감고서도 당신을 데리고 갈 수도 있었 을 텐데. 마치 손바닥 보듯 했지요. 난 이 근처에서 태어났거든요. 그러나 울타리를 뜯어서 장작 으로 때기 시작한 후부터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대낮에도 몰라보게 됐고, 마치 처음 보는 거 리처럼 됐단 말이오. 예전에는 눈에 띄지도 않던 둥근 정원용 탁자나 반쯤 찌그러진 벤치 등이 보였고, 또 구식 건물이 눈에 띄었어. 언젠가 삼거리를 지나다 보니까 거기 공지에서 나이 많고 점잖은 노파가 막대기로 땅을 헤쳐가면서 무엇인가 찾고 있었어- 아마 백 세쯤 돼 보였어. '안녕 하십니까, 할머니. 낚시하시려고 지렁이를 파고 계십니까?' 하고 물어보았지요. 물론 농담이었지 만. 그런데 노파는 정색을 하면서 '아니라오, 지렁이가 아니라 버섯을 캔 다오' 하고 대답하더군 요. 사실이야, 당신도 알다시피 이 도시는 매일같이 숲처럼 변하고 있어요. 가는 곳마다 나뭇잎 썩는 냄새와 버섯 냄새가 풍기고 있어요." "당신이 말하고 있는 데가 어딘지 알 만해요. 세레브랸나야 거리와 몰르노프스카야 거리 사이 가 아닌가요? 거기서는 정말 이상한 일들이 곧잘 일어나곤 하지요. 20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하던 사람을 우연히 만나는가 하면 또 무엇인가 찾아내기도 하고, 모퉁이에는 소매치기가 있다고들 해 요. 놀랄 일도 아니지, 사방이 뚫려있으니까. 그곳 스몰렌스크 광장 부근은 옛날에도 도둑놈의 소 굴로 통하는 길이 그물처럼 뻗어 있었거든요. 눈 깜짝할 새에 껍데기를 홀랑 벗겨 가지고 사라진 다오." "저렇게 가로등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으니, 사고등이라고 하는 것도 당연해요.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해요." 6 그 장소에서 지바고는 여러 가지 이상한 일을 보았다. 10월의 시가전이 있기 직전의 춥고 캄캄 한 밤에 지바고는 어떤 사람이 의식을 잃고 인도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는 팔을 벌린 채 머리는 인도 돌 위에 놓고 두 다리는 도랑에 처박고 있었다. 이따금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바고가 그를 일으키려고 하자 "지갑, 지갑" 하면서 몇 마디 중얼거렸다. 날 치기를 당했던 것이다. 머리를 얻어맞고 피가 낭자했으나 얼핏 보기엔 두 개골은 무사한 것 같았 다. 지바고는 가까운 아르바트 거리의 약국에 뛰어가서 전화로 적십자병원 응급용 마차를 불러 그 를 어느 병원으로 옮겨갔다. 그가 저명한 정치 지도자였음이 판명되었다. 지바고는 그가 회복될 때까지 치료해 주었다. 훗날 그 사람은 여러 가지로 지바고를 보살펴주었으며, 많은 의혹이 지배하던 그 시기에 여러 번 그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7 일요일이었다. 지바고는 집에서 쉬고 있었다. 토냐의 의견대로 식구들은 이미 2층 방 셋으로 겨 울을 나기 위해 옮겼다. 이날 차가운 바람이 불고 하늘엔 눈구름이 낮게 떠서 어둑어둑했다. 아침부터 난로에 나무를 지폈으나 연기만 내고 타질 않았다. 뉴샤는 젖은 나무와 씨름을 했다. 토냐는 난로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면서 되지도 않는 일을 이것저것 참견하고 있었다. 게다가 또 더욱 아무것도 모르는 지바고까지 참견하려 들었으나, 아내가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잡아 방 에서 밀어냈다. "참견하지 마세요. 우두머리가 없으면 안 되는 것 같지만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불 에 기름을 붓는 거나 다름없어요." "기름이라면 나쁠 것 없지. 오히려 난로가 잘 탈걸! 그런데 기름도 불도 없으니 탈이야." "농담하실 때가 아니예요." 난로의 상태가 나쁘기 때문에 모든 일요일 계획이 뒤틀리게 되었다. 저녁때까지 자질구레한 일 들을 처리하고 한가하게 밤을 보내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고 보면 저녁 식사도 늦어지고 더운물 로 머리를 감을 수도 없었고 여러 가지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연기가 점점 더 심하게 나오게 되 자 숨쉬기조차 어려워졌다. 거센 바람이 거꾸로 방안에 연기를 휘몰아 넣었다. 마치 깊은 숲속의 동화책에서 본 괴물과도 같은 시커먼 연기구름이 방안에 자욱했다. 결국 지바고는 식구들을 옆방으로 쫓아버리고 창문 꼭대기의 통기 창을 열었다. 그러고 나서 난로에 지폈던 나무의 반쯤을 도로 집어내어 남은 것을 적당히 사이를 두고 성기게 놓고는 그 사 이에 나무 부스러기와 자작나무 껍질 따위를 채워 넣었다. 신선한 공기가 통기 창으로 흘러 들어왔다. 커튼이 펄럭거리며 책상 위의 서류가 바람에 날렸 다. 현관 쪽에서 문이 바람에 쾅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방안 구석구석에서 남은 연기 를 고양이가 쥐를 쫓듯이 쫓기 시작했다. 나무에 불이 확 당기며 불꽃이 탁탁 튕겼다. 난로는 벌겋게 달아올라 마치 폐병 환자의 불그레 한 볼처럼 철판 동체에 붉은 반점이 생겼다. 방안의 연기가 차츰 맑아지더니 이윽고 아주 사라져버렸다. 방안이 점점 밝아왔다. 지바고는 해 부의한테서 최근에 배운 대로 만들어 발랐던 기름기 있는 빠데가 창문에 흘러 내렸다. 그 냄새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난로 옆에서 말린 전나무 껍질의 씁쓸한 냄새와 포플러 나무의 화장수 같은 달콤한 향기가 풍겨왔다. 이때 통기 창에서 불어 들어오는 바람처럼 니콜라이 아저씨가 숨을 헐떡이면서 방안으로 뛰어 들어와 알린다. "시가전이 벌어졌어. 임시 정부를 지지하는 사관생도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경비대 병사들간 에 교전이 벌어지고 있어요. 온통 시내 전체에 전투가 벌어져서 봉기의 초점이 어딘지 알 수가 없어. 이리로 오는 도중에도 두세 번 휘말려들 뻔했지. 한 번은 볼샤야 드미트로프카의 모퉁이에 서, 또 한 번은 니키트스키 문이 있는 데서였어. 이제는 곧바로 다닐 순 없고 돌아서 다녀야 해. 빨리 외투를 입어라, 유라! 같이 나가지. 구경을 해야 돼. 이것이 바로 역사란 말이야. 일생에 단 한 번 밖에 없는 이이야."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니콜라이 아저씨는 그냥 눌러앉은 채 두 시간 동안이나 잡담만 하고 있 었다. 이윽고 저녁 식사가 끝나고 이제 막 집으로 돌아가려고 지바고를 데리고 나서는데, 뜻밖에 도 이번엔 고르돈이 니콜라이 아저씨와 똑같은 모양으로 들어와선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나 사태는 전보다 악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더 자세한 것을 알게 되었다. 고르돈의 말에 의 하면 소총에 의한 교전이 치열해져서 유탄에 맞아 죽은 통행인도 있다는 것이었다. 시내 교통은 마비 상태였으며, 고르돈은 기적적으로 뒷골목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지금쯤은 완전히 통행 이 차단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아저씨는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기어이 밖으로 나간 그는 1분도 채 못 되어 되돌아오고 말았다. 골목길에서 나갈 수가 없고 총탄이 빗발처럼 날아와서 벽돌에 부딪 치는 소리가 요란했고, 거리에는 사람이 없고 통행이 차단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 무렵에 싸샤는 감기가 들었다. "난로 가에 아이를 가깝게 해선 안 된다고 수백 번 말하지 않았어!" 지바고는 불끈 화를 냈다. "추운 것보다 너무 덥게 하는 것이 훨씬 나빠요." 싸샤는 목구멍을 앓아서 열이 심했다. 아이는 특히 입속을 들여다보는 것을 싫어했다. 지바고가 목구멍을 보려고 하면 손을 내밀면서 이를 악물고 숨이 막힐 듯이 울어댔다. 위협도 하고 달래도 보았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하품을 하는 사이에 재빨리 스푼을 입속에 밀어넣고 혓바닥을 눌 러서 빨간 목구멍 속에 허옇게 덮인 반점과 부어오른 편도선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얼마 후 똑같은 방법으로 표본을 받아서 마침 집에 있는 현미경으로 조사해보았다. 다행히 디 프테이라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 밤에 후두 카타르의 증세가 나타났다. 열이 너무 심해서 호흡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지바고는 어린애의 고통을 덜어 줄 방도도 없었고, 또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 다. 또냐는 아이가 죽는 줄로만 알았다. 그들은 교대로 아이를 껴안고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 동 안에 아이가 잠들었다. 우유와 탄산수가 필요했지만 시가전이 한창 치열했다. 포소리와 총소리가 한시도 멎질 않았다. 만일 지바고가 목숨을 걸고 교전 지대를 빠져나간다 해도 저쪽 거리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 다. 정세가 분명해질 때까지 온 거리의 생활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승패의 판가름은 이미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노동자와 병사들 편이 우세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사관생도의 몇 개의 작은 집단이 아직도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으나 서로 연 락이 끊기고 본부와는 차단된 상태에 놓였다. 시브체프 지구를 점령한 병사들이 부대는 시중앙을 향하여 계속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독일 전선에 참가했던 병사들과 미성년 노동자들이 길거리에 참호를 파고 버티고 있었다. 그들 은 근처의 주민들과도 아는 사이가 되어 참호 밖으로 나와서 대문 가에 서서 사람들과 얘기를 나 누기도 했다. 이러한 곳은 교통이 회복돼 가고 있었다. 지바고네 집에 발이 묶인 고르돈과 니콜라이 아저씨는 사흘 동안의 감금에서 해방되었다. 지바 고는 싸샤가 앓고 있는 동안에 그들과 함께 있어서 마음 든든했었다. 아내도 난리 통에 그들의 기식을 그다지 귀찮게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주인 측의 신세를 갚기 위해서 무슨 위안 이 될 만한 이야길 들려주느라 애썼다. 지바고는 사흘 동안의 무의미한 객설을 듣느라 지쳐버렸 고 그들이 돌아가게 된 것이 더없이 기뻤다. 8 손님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시가전이 아직도 계속되어 거리 몇 군데 가 여전히 차단되고 있어서 지바고는 병원에 나갈 수가 없었다. 빨리 병원에 나가 의무실 책상 서랍에 넣어 둔 원고를 계속 쓰고 싶었다. 아침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개인 참호에서 나와 가까운 곳에 빵을 사러 가곤 했다. 우유 병을 들고 가는 사람을 보면 우르르 몰려와서 어디서 샀느냐고 귀찮게 했다. 이따금 총소리가 온통 시 내에 울려 퍼지며 다시 군중을 흩어지게 했다. 양편이 타협을 하는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타협이 진척되는 여하에 따라 시가전의 양상이 달라져 갔다. 구력, 10월 말경, 어느 날 밤 열 시쯤 되었을 때 지바고는 꼭 가야 할 곳은 아니었으나 어느 친 구 집을 찾아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이곳은 평시에 붐비는 곳이었으나 텅 비어 있어서 거의 사 람이 보이질 않았다. 그는 빠른 발걸음으로 걸었다. 첫눈이 날리면서 싸락눈이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고 지바고의 눈에 날아들었다. 그는 골목길을 하도 여러 번 굽어 돌았기 때문에 몇 번쯤 돌았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눈 송이가 차츰 굵어지고 바람이 눈보라로 변했다. 들판에선 이런 눈보라가 울부짖으며 온 들판을 눈의 포장으로 뒤덮어 버릴 테지만, 도시에서는 길이라도 잃은 듯 하염없이 헤매기만 했다. 정신 세계와 물질 세계, 말하자면 지상과 하늘의 소란은 어딘가 비슷한 데가 있었다. 어디선가 섬에서 고립된 저항자들이 최후의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눈보라도 회오리바람을 일으키 곤 사라져 축축한 차도와 인도에 자욱히 날렸다. 잉크 냄새가 풍기는 신문을 한아름 옆구리에 낀 신문 팔이 소년이 "최신호!"라고 외치면서 달 려와 네거리에서 지바고를 따라잡았다. "거스름돈은 괜찮아." 지바고가 말했다. 소년은 눅눅한 신문 한 장을 다발 속에서 뽑아 지바고 의 손에 쥐어주고는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지바고는 가로등 밑에 멈춰 서서 표제를 훑어보았다. 한쪽 면만 인쇄된 호외였는데 페테르부르 그에서의 공식 발표가 실려 있었다. 인민위원회의가 조직되고 러시아에 소비에트 정권과 프롤레 타리아 독재가 수립되었다고 보도되었다. 그 밑에 신 정부의 최초의 포고문이 몇 개 있었으며 전 화나 전보로 수신된 짧은 뉴스 기사가 많이 실려 있었다. 눈보라는 지바고의 눈을 때리고 가볍게 휘날리는 회색 눈 알갱이가 신문지를 덮었다. 그렇지만 읽을 수 없게 한 것은 눈보라가 아니었다. 이 역사적인 사실에 충격을 받은 지바고는 잠시 동안 제정신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나머지를 읽기 위해 좀 밝고 눈보라가 몰아치지 않은 장소를 찾으려고 주위를 살폈다. 바로 그 세레브랸나야 거리와 몰르차노프까 네거리에 5층 건물의 현관 유리문으로부터 밝은 빛이 흘러나 오고 있었다. 지바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층계 입구의 전등불 밑에서 신문을 읽었다. 머리 위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층계를 내려오다가 망설이듯 자주 멈춰 서곤 했 다. 잠시 후 마음을 바꿨는지 다시 뛰어 올라갔다. 어디선가 문이 열리고 말소리가 요란스럽게 들 려왔다. 이윽고 문이 쿵하고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이번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내려오는 당당 한 발소리가 들렸다. 지바고는 신문에 정신이 쏠려서 쳐다볼 겨를도 없었으나 층계 밑에서 갑자기 발소리가 멈췄기 때문에 얼굴을 들었다. 시베리아식 털을 밖으로 한 딱딱한 순록 가죽 외투를 입고, 또 순록 가죽 모자를 쓴 열 여덟 살 가량의 청년이 서 있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키르기스 사람처럼 눈이 가느다랗고 귀공자다운 면 모에 총명하고 조심성 있고 냉랭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청년은 지바고를 어느 다른 사람으로 분명히 오인하고 있었다. 청년은 지바고를 보자 무슨 말 을 건네 보고 싶은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렸다. 지바고는 청년에게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것을 깨 우쳐 주기 위해 오히려 쌀쌀한 눈초리로 그를 훑어보았다. 어리둥절해진 청년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입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는 다시 한 번 뒤돌아보고 는 육중한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문은 청년의 뒤에서 쿵 소리를 내면서 닫혔다. 10분쯤 지나서 지바고는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지바고는 조금 전의 그 청년에 대해서나 또 친구 집으로 찾아가려던 생각을 말끔히 잊어버렸다. 그는 신문 기사가 머리에 가득했으며 곧바로 집으로 행했다. 그러나 도중에서 또 하나의 사건에 마음이 사로잡히고 말았다. 여느 때라면 하잘 것없는 일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 무렵에는 엄청나게 큰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어두운 보도의 골목길에 높이 쌓아 올린 나무더미에 부딪쳤던 것이다. 이 거리에는 정부의 시설들이 있었고 정부가 교외의 집들을 부수어서 나무를 연료로 공 급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모두 뜰 안에 운반할 수가 없어서 일부는 밖에 쌓아놓고 있었다. 소총을 든 보초가 나무 더미 가까이에 있었다. 그는 뜰 안을 걸어다니며 가끔 바깥 거리로 나오 곤 했다. 지바고는 크게 결심하고 보초가 뒤돌아서는 사이에, 바람이 눈보라를 휘몰아칠 때 가로등 불빛 을 피하면서 컴컴한 그늘로 몸을 숨기면서 제일 밑에 깔린 무거운 대들보 하나를 조심스럽게 빼 냈다. 그는 그것을 겨우 짊어질 수 있었으나 곧 그 무게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내 것이라고 생 각하면 무거운 것이라곤 없는 법이다.' 어두운 담벼락에 바싹 붙어서 무사히 집까지 가지고 왔다. 때마침 집에는 땔감이 하나도 없었다. 대들보를 쪼개서 쌓아놓았다. 지바고는 난로에 불을 붙이 고 나서 말없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장인 그로메코 교수도 안락의자를 끌어다 놓고 불을 쬐었다. 지바고는 외투 옆주머니에서 신문을 끄집어내서 펴들었다. "이것 보셨어요? 이거 보십시오." 그는 여전히 쪼그리고 앉은 채 불을 뒤적거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멋있는 외과 수술이야! 메스를 들어 단번에 썩고 헐어 버린 종기를 도려내고야 말았어. 간단하 고도 분명한 쾌재였지. 몇 세기에 걸쳐 신주처럼 모시던 낡고 부정한 괴물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거야. 그처럼 아무런 두려움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가는 데에 러시아 민족의 양상이 있지. 푸슈킨의 타협 없는 명석함과 톨스토이의 사실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충실성을 생각하게 하는군." "푸슈킨이라니? 잠깐만, 다 읽고 나서. 한꺼번에 읽고 듣고 할 순 없지 않는가?" 그로메코 교수 는 자기에게 하는 얘긴 줄 알았던 것 같았다. "그런데 참된 천재란 무엇일까요? 누구한테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새 시대를 발족시키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을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우선 기초를 닦고 새시대를 이룩하기에 앞서 구시대가 끝나기를 기다릴 테지. 그리고 적당한 시기에 깨끗한 페이지부터 시작하려고 하겠지. 하지만 여기서는 그따위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새로운 것, 이 역사적인 놀라움, 이 계시는 일 상 생활 따위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 그 속으로 아무런 거리낌없이 파고드는 거야. 그것은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도중에서 시작하는 거지. 아무런 예정도 있을 수 없고, 부닥치는 첫날에, 그것도 교통이 한창 번잡할 때에. 이것이 참된 천재인 것이오. 참으로 위대한 것만이 때 와 장소에 개의치 않아요." 9 걱정스러웠던 겨울이 닥쳐왔다. 그 후의 두 겨울만큼 지독한 추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침울하 고 굶주리고 추운 겨울이었다. 낯익은 모든 것이 파괴돼 버리고 일체의 존재를 기초에서부터 다 시 쌓아 올리면서, 또 동시에 사라져 가는 생활을 위하여 비인간적인 힘에 기대어야 하는 모든 것에 무진 애를 썼던 겨울이었다. 이러한 겨울이 3년을 계속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1917년에서 1918년에 걸쳐서 일어난 것처럼 생각되는 모든 일들이 실은 그해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부는 그 후에 일어난 일이었는지도 모 른다. 그러나 잇달아 찾아온 3년간의 겨울이 하나로 엉켜서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낡은 생활과 새 질서는 아직도 융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1년 후에 내란이 일어났을 때처럼 공 공연한 갈등은 없었으나, 양자 사이엔 아무런 연계도 없었고 서로 대립만 계속되고 있었다. 주택관리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조직, 그리고 관공서 등 도처에서 새로운 선거가 실시되 었다. 독재 권력을 부여받은 위원들이 각각 임명되었다. 검은 가죽 상의를 입고, 위엄을 과시하는 연발 권총으로 무장한 철의 의지의 사나이다. 그들은 수염도 잘 깎지 않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았다. 그들은 이른바 부르주아 족속이나 싸구려 정부 채권 따위나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중산층을 잘 알고 있었다. 털끝만큼 동정하는 기색도 없이 조소하듯 미소를 지으면서 마치 범죄 현장에서 붙 잡은 좀도둑을 다루는 말투였다. 그들은 계획에 따라서 모든 것을 뜯어고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회사나 기업들은 점차 볼셰 비키 체제로 변모되고 있었다. 성십자병원도 지금은 제 2개혁 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병원 내용도 많이 달라졌다. 해고된 직 원도 있었고 대우가 나빠서 그만둔 직원도 많았다. 이들은 상류 사회에 단골 환자를 가진 수입이 좋은 의사들이었으며 또 말 깨나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기 수입을 위해서 병원을 그만두 면서도 표면상으로는 정치적 동기에서 저항을 표방하며, 남아 있는 의사들을 경멸하고 심지어는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지바고는 병원에 머물러 있기로 했다. 밤이 되면 지바고 부부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수요일엔 의사 조합에 가서 언 감자를 가져오는 걸 잊어서는 안되오, 거기에 두포대가 있으니 까. 몇 시에 병원에서 나올 수 있는지 알릴 테니 썰매를 가지고 같이 가기로 합시다." "알았어요. 아직 날짜가 있으니까. 이젠 쉬세요, 밤도 늦었어요. 주무세요, 당신은 아무 일이나 혼자선 할 수 없어요." "전염병이 돌고 있소, 피곤하면 저항력을 약하게 하니까. 당신과 아버님은 너무 지쳐 있어서 큰 일이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할 텐데, 어떡하면 좋지? 우린 더욱 건강에 조심해야 하오, 여보, 당 신 졸고 있소?" "아뇨." "나는 걱정 없소. 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사람이니까. 그러나 혹시 내가 병으로 스러지게 되면 바보처럼 집에 그냥 두지 말고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하오." "여보, 무슨 말씀을 하세요! 걱정할 건 없어요. 불길한 얘긴 그만두세요." "이젠 믿을 만한 사람이나 친구가 없다는 걸 명심해요. 만일 무슨 일이 생길 경우엔 피추즈킨 한테 부탁해요. 물론 그가 살아 남았을 경우의 얘기지만, 당신 자는 거요?" "아뇨." "봉급이 적어서 다들 병원을 그만뒀다오. 그러고서도 사상과 주장이 달라서, 시민의 양심에 따 라 그만둔 것으로 되니까 견딜 수가 없어요. 오가다 만나면 고작 손을 내밀고 눈썹을 치켜올리면 서 한다는 소리가 '아니 그래, 당신은 그놈들과 함께 있단 말이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소. '그렇소. 하지만 나는 우리의 궁핍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에게 궁핍을 강요 하면서 영광을 안겨다 주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있어요.' 10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평상시 음식은 옥수수와 청어 대가리를 넣어 끓인 수프였다. 청어 몸체 는 다음에 구워서 먹었으며 통밀과 귀리로 죽을 만들어 먹었다. 토냐는 아는 대학 여교수에게서 난로에 사용하는 고기 굽는 기구로 빵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 다. 그래서 빵의 일부분은 팔아서 예전처럼 페치카로 난방할 수 있는 비용을 뽑으려는 것이었다. 철제 난로는 연기만 나고 방이 따스하지 않아서였다. 토냐가 만들어 낸 빵은 좋았으나 장사가 잘 되지 않아서 다시 철제 난로를 쓰게 되었다. 지바 고의 살림 형편은 말할 수 없이 옹색해 갔다. 어느 날 아침 지바고가 출근한 후에 토냐는 낡은 겨울 외투를 걸치고 물건을 구하러 나섰다. 집엔 장작이 겨우 두 개비가 남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몸이 어찌나 쇠약했는지 따뜻한 날에도 외 투를 입고 떨었다. 반시간쯤 근처의 골목길에서 서성거렸다. 모스크바 근교의 농촌에서 농부들이 채소나 감자를 팔러 오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짐을 가지고 오는 농부들을 낚아야 했다. 토냐는 구하려던 물건을 마침내 발견했다. 아르먀크를 입은 건장한 젊은이가 마치 장난감 다루듯 가볍게 썰매를 끌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라 그로메코 댁 앞뜰로 들어왔다. 포장을 덮은 썰매 안에는 사진에서 본 19세기 시골집 난간대만큼이나 가느다란 자작나무 장작 이 실려 있었다. 토냐는 그 가격을 잘 알고 있었다. 자작나무는 이름뿐이고 질이 나쁜 장작이었으 며, 그것은 베어낸 지가 얼마 안 되는 생나무였다. 하지만 토냐는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어서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젊은 농부는 대여섯 아름의 장작을 방안으로 옮겨 놓고 그 대가로 토냐의 거울 달린 작은 옷장 을 들어내어 썰매에 실었다. 그는 제 색시에게 선물로 줄 생각 같았다. 앞으로 감자와 교환할 때 는 무엇을 가져가겠는가 물었더니 농부는 문 옆의 피아노를 가리켰다. 집에 돌아온 지바고는 부인이 사들인 것에 대하여 아무런 탓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옷장을 부 숴서 장작으로 쓰는 편이 나았겠지만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책상 위의 종이 쪽지를 보셨어요?" 아내가 물었다. "병원에서 온 거 말이오? 얘긴 벌써 들었소, 급한 환자니까 가야지. 그런데 좀 쉬었다 가겠소, 너무 먼 곳이어서... 개선문 근방인 것 같더군. 주소는 알고 있어요." "왕진료로는 괴상한 것을 주겠다고 했어요. 읽어 보셨어요? 독일제 코냑 한 병과 여자용 양말 한 켤레예요! 대체 그는 어떤 부류의 사람일까요? 아마 속물이겠죠. 우리가 요즘 어떻게 살고 있 는지 모르나 봐요. 벼락부잔 지도 몰라요." "아마, 매점자일 거요." 매점자라든지 이권자, 대리인이란 소상인들을 부르는 명칭이었다. 정부는 개인 상업을 철폐시켰 으나 경제 사정이 곤란한 시기에는 그러한 상인을 인정하고, 여러 가지 물자의 조달을 위촉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전의 자본가도 아니고 망해버린 회사의 간부들도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은 아직도 심 한 타격에서 재기하지 못했다. 이들과는 반대로 그들은 새로운 범주에 속하는 기업가들로서 전쟁 과 혁명 덕분에 벼락부자가 된 뜨내기들이었다. 지바고는 우유를 조금 넣은 뜨거운 물에 하얀 설탕을 타서 마시고 왕진에 나섰다. 차도와 보도는 온통 깊은 눈에 뒤덮이고, 곳에 따라선 1층집 창문 높이까지 눈이 쌓였다.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사람들의 조용한 그림자가 여기저기서 얼마 안 되는 양식을 들거나 썰매에 싣 고 끌면서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 밖에 나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기저기에 이전의 상 점 간판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이것들은 새로 생긴 조그만 소비조합 상점이나 협동조합 상점 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상점들도 텅 비었고 앞문을 닫아걸고 창문에는 빗장을 지르거나 나무 판자에 못질을 해 놓았다. 앞문을 닫아걸고 안이 텅 비어 있는 까닭은 팔 물건이 없을뿐더러 상업을 위시한 사회 생활 여 러 영역의 재건이란 한낱 탁상의 계획에 불과했으며, 못을 박아 놓은 상점 따위의 사소한 일엔 아직 손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11 지바고가 방문한 집은 트베르 성문 근처 브레스트스카야 거리 변두리에 있었다. 병사를 연상하게 되는 낡은 벽돌 건물로서 앞뜰이 있고 뜰을 향한 벽에는 세 개의 나무 층계가 있었다. 그날은 마침 이 집 거주자들의 총회가 있어서 지구 소비에트에서 여성 대표들이 참석하고 있었 다. 그런데 갑자기 군사위원단이 무기 소지 허가증을 점검하며 무허가 무기를 압수하기 위하여 나왔다. 거주자들은 각기 자기 거처로 되돌아가려고 했으나, 군사위원단의 책임자는 검사엔 별로 사간이 걸리지 안으니까 곧 집회를 계속할 수 있으니 돌아가지 말라고 지구 소비에트 대표에게 말했다. 의사가 도착했을 무렵에 검사는 거의 끝나 가고 있었으나 왕진을 하게 된 집은 아직 수색을 받 고 있지 않았다 지바고가 층계 입구에 서서 소총을 들고 있는 병사와 들어가겠다 안 된다 하고 시비하고 있는 걸 군사위원단 책임자가 보고는, 환자의 치료가 끝난 때까지 수색을 연기하도록 명령했다. 집주인이 의사를 맞았다. 핏기 없는 얼굴에 어두운 시름이 엿보이는 점잖고 젊은 사람이었다. 부인의 병과 가택 수색이 겹치고 의사와 대표에게 인사를 하느라고 몹시 당황하는 눈치였다. 의사에게 시간과 수고를 덜기 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히 설명하려고 했으나, 덤비면 덤빌 수록 오히려 횡설수설 말이 길어질 뿐이었다. 급작스런 인플레 때문에 미리 장만해놓은 것인지 집안에는 값비싼 가구와 싸구려 가구들이 어 수선하게 놓여서 발을 들여놓을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가구는 세트로 된 것도 있었지만 낱개 로 된 것도 있었다. 주인은 아내의 병이 신경성 쇼크에서 온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여러 가지 횡설수설하는 설명 에 의하면 이 부부는 얼마 전에 고물 시계 하나를 샀다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자명종 시계이 긴 하지만 시계에서 울려 나오는 멜로디만 들어도 시계공의 멋있는 솜씨를 알 수 있었다. 주인 이 지바고를 옆방으로 안내해서 시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고칠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몇 년동안이나 태엽을 감아 주지 않았던 시계가 느닷없이 혼자 움직 이기 시작하면서 복잡한 미뉴엣 한 곡을 울리더니 이내 멈춰 섰다는 것이다. 부인은 새파랗게 질 려서 자기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 고열에 신음하면서 식음을 전폐한 채 남편도 알아보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했다. "그래서 신경성 쇼크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지바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환자를 좀 봅시 다."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는 도자기 샨데리야, 넓은 더블 베드, 그리고 그 옆에 마호가니 탁 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침대 한쪽에 검은 큰 눈동자의 몸집이 작은 여인이 턱 위까지 이불을 올려 덮고 누워 있었다.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이불에서 한 손을 내밀고 잠옷의 넓 은 소매를 겨드랑이 밑까지 흘러내리며 나가라는 시늉으로 손을 내저었다. 남편도 알아보지 못하 고 혼자인 줄 알고 있는지 낮은 목소리로 서글픈 노래를 부르더니 설움이 북받쳐 어린애처럼 훌 쩍이면서 집으로 보내달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의사가 침대 가까이 가자 그녀는 뒤돌아 눕더니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의사는 말을 건네었다. "진찰해봐야 하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을 것 같군요. 티푸스가 틀림없어요. 그리고 중태입니다. 환자는 몹시 괴로울 겁니다. 병원에 입원시키도록 하십시오. 집에서도 잘 보살필 순 있겠지만 적 어도 몇 주일은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하겠어요. 마차나 짐차라도 좋으니 옮길 수 있겠지요? 물론 환자의 몸을 잘 감싸주어야 합니다. 입원 지시서를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정말 티푸스가 틀림없습니까? 큰일 났군요!" "그렇게 생각됩니다." "선생님, 입원을 시키면 처는 죽고 말 겁니다. 집에서 치료를 받을 순 없을까요? 되도록 자주 왕진하시면 원하시는 대로 무엇이든 다 드리겠습니다." "방금 말씀드렸지만 부인한테 중요한 것은 계속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일입니다. 제발 내 말 대로 하십시오. 부인을 위해서 드리는 말입니다. 여하튼 마차를 구하도록 하십시오. 지시서를 드 리지요. 주택위원회 방에서 쓰는 편이 좋겠군요. 주택위원회의 도장도 찍어야 하고, 그 밖에도 약 간의 수속이 필요하니까. 12 따뜻한 숄을 걸치거나 슈바를 입은 거주인들이 심문과 수색을 마치고 난로도 없는 지하실로 하 나 둘 되돌아왔다. 여긴 예전에 계란 창고로 쓰이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주택위원회가 차지하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사무용 책상 하나와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의자가 부족해서 빈 계란 상자 를 뒤집어 의자 대용으로 나란히 놓았다. 이러한 빈 상자 더미가 천장까지 높이 쌓아 올려져 있 었고, 한 구석에는 부서진 계란에서 노른자위가 대팻밥더미에 흘러내려서 여러 군데 마른 덩어리 가 되어 있었다. 쥐들이 무리지어 그 속을 휘젓고 다니며 이따금 돌을 깐 바닥 한가운데로 뛰어 나왔다간 도먕쳐 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뚱뚱한 한 여인이 상자 위로 뛰어올라가 호들갑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치맛자 락을 요염하게 손가락을 펴서 쳐들고 멋진 장화를 탕탕 구르면서 술 취한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올랴, 올랴, 여기 이것봐! 쥐들이 우글거리고 있어요! 쉿, 저리 갓! 아이, 이것 좀 보라구, 이 쥐 새끼가 내 말을 알아듣나봐. 성을 내면서. 아이! 저놈이 상자에 기어올라요, 내 치마 밑으로 기어 들어와요. 어마, 어마, 무서워! 여보세요, 쫓아주어요. 아 참, 지금은 여보세요가 아니라 동무들이 라고 불러야지!" 시끄러운 여인의 털외투 앞깃이 헤쳐지면서 그 속에서 세 겹으로 처진 살과 턱과 명주옷을 입 은 풍만한 가슴과 배가 보였다. 그녀는 한때 상인이나 점원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여왕이었으나 지금은 퉁퉁 부어오른 눈꺼풀 밑에 작은 돼지 눈이 잘 뜨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연적의 유산 세례를 받은 일이 있었으나 위기를 모면하여 한두 방울이 뺨과 입술 가장자리에 묻어서 오 히려 그럴듯한 조그마한 흠이 남아 있었다. "떠들지 말아요, 흐라푸기나! 회의를 진행할 수 없어요." 의장으로 선출되어 책상에 앉아 있던 지구 소비에트 여성 대표가 말했다. 대표는 오래 전부터 이 집의 모든 거주자들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그녀 는 수위인 파치마 할머니와 잠깐 낮은 목소리로 사담을 나눴다. 이 노파는 이전에 이 더러운 지 하실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살았으나 지금은 딸과 둘이서 2층 방 두 개를 쓰고 있었다. "할머니 어떻게 지내세요?" 대표가 물었다. 파치마 할머니는 이렇게 거주인이 많고 큰집을 자기 혼자서 보살필 수는 도저히 없는데다가 거 주인들이 순번으로 안뜰이나 통로를 청소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누구 하나 청소하는 사람이 없다 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내가 혼내줄 테니 편하게 될 겁니다. 한데 여기 위원회는 뭘 하는 거죠? 도대체 돼먹지 않았어요. 범죄 분자를 숨기거나 불순 분자를 등록도 하지 않고 거주시키고 있으니 말예요. 이런 위원회는 없애 버리고 새로 선거해야 돼요. 할머니를 주택 관리인으로 임명 할 테니 염려 마세요." 수위 할머니는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고 애원했으나 대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방안을 둘 러보고 인원이 다 출석했다고 생각되자, 대표는 정숙할 것을 요구하면서 간단한 개회사를 했다. 주택위원회의 태만성을 신랄하게 비난한 다음 새로운 위원을 선출하기 위한 후보자를 추천하도록 제의하고 나서 다음 문제로 넘어간 후 그녀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동무들, 솔직히 말해서 이 집은 큼직해서 숙박소로 적당하겠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지방 대표들을 유숙시킬 적당한 장소가 없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지방에서 올라오는 삶들을 위한 지구 소비에트 숙박소로서 이 집을 접수하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유형 되기까지 여기서 살던 치 베르진 동무를 기념하여 치베르진 숙박소로 부르기로 결정하였소. 이의 없지요? 그러나 이사해야 할 날짜에 대해서는 서두르지 않아도 좋습니다. 아직도 1년이나 남았으니까. 근로자에게는 별도로 주택을 마련해주겠소. 그 밖의 사람은 저마다 찾아봐요. 12개월의 여유를 주겠소." "우리들 중에 근로자가 아닌 사람이 누구요? 누가 근로자가 아니란 말이오! 모두 다 근로자지 요." 이구동성으로 떠들어대는 소리 가운데서 유독 지친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러시아 민족 우 위의 배타주의요! 지금 러시아에 사는 민족은 평등하단 말이오! 난 당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겠 소!" "한꺼번에 말하지 말고 한 사람씩 말해요! 누구의 질문이 먼저요? 발드이킨씨, 도대체 이것이 민족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흐라푸기나를 보아요. 그녀의 경우 민족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이오. 하지만 흐라푸기나도 함께 퇴거시킬 테니 두고보아요." "퇴거라니! 어디 한 번 쫓아내 보라지! 소파나 부숴 보라지! 침대 홑이불이나 구기라고 해!" 흐 라푸기나는 싸움을 하듯이 정신없이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뱀 같은 년! 창피한 줄도 몰라!" 수위 할머니가 분개했다. "가만있어요, 할머니. 내가 처리할 테니." 대표가 말했다. "이봐요, 흐라푸기나. 당신이 하고 있 는 짓은 다 알고 있어. 잠자코 있지 않으면 밀주를 만들어 비밀 주점을 하고 있는 걸 당국이 알 아서 붙잡아가기 전에 지금 당장 내 손으로 넘겨버릴 테니까." 소란은 극도에 달해 있었다. 누구와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이때 의사가 문간에서 처음 만났던 사람을 붙들고 주택 위원 한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두 손을 나팔처럼 입에 대 고 소리쳤다. "갈-리울-리나! 이리 오시오, 누가 보잡니다." 지바고는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약간 허리가 굽어진 여윈 여인이 그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수위 노파였다. 아들 갈리울린 중위의 모습과 너무 닮은 데 그는 놀랐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자기 소개는 하지 않고 말했다. "이 주택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 티푸스에 걸렸습니다. 전염을 막기 위해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우선 환자는 입원시켜야 하겠습니다. 제가 입원 지시서를 쓸 테니 위원회에서 확 인해주어야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할머니는 환자를 '어떻게 옮기겠는가'를 묻는 줄 알았다. "지구 소비에트에서 제미나 동무를 모시기 위해 마차가 오기로 돼 있습니다. 대표의 한 사람이 죠. 매우 친절한 사람이랍니다. 제가 부탁드리죠. 틀림없이 마차를 쓰게 할겁니다. 걱정 마세요, 의사 동무. 꼭 입원시켜야죠." "그것 참 다행이군요. 제가 말씀드린 것은 어디서 입원 지시서를 작성할 수 있는지 묻는 겁니 다. 하여튼 마차편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혹시 갈리울린 중위의 어머님 되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전선에서 같은 부대에 있었답니다." 노파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의사의 손을 부둥켜 잡으며 말했다. "밖으로 나가 정원에서 얘기합시다." 문 밖으로 나가자마자 재빨리 말을 꺼냈다. "제발 말소리를 낮춰요. 들통이 나면 전 파멸이라오. 유수프카(갈리울린)는 길을 잘못 들었어요. 생각해 봐요. 지금 그 애는 무슨 꼴이오? 그 애는 견습공이고 노동자였답니다. 요즘 세상은 신분 이 낮은 편이 훨씬 잘 되고 있다는 걸 그 애는 왜 모를까요? 장님도 다 아는 일을 그 애는 모르 고 있다니. 선생님한테 말해도 괜찮겠지만 그 애는 이걸 부정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오. 그 애 애비는 병사였는데 전사하고 말았답니다. 얼굴과 팔다리를 날려보냈다 우." 노파는 더 말할 힘이 없었으나 손을 흔들며 다시 말을 이었다. "갑시다. 마차를 준비해야죠. 당신이 누구인지 나는 잘 알고 있어요. 그 애는 2,3일 여기에 있었 어요. 그 애한테서 들었어요. 라라를 아시지요? 좋은 처녀였지요. 그녀는 여기 자주 찾아왔다오. 그런데 지금 양반 행세하던 사람들이 다 어찌 됐는지? 물론 한데 뭉치는 건 당연하지만 유수프카 는 확실히 길을 잘못 들었어요. 이리로 오세요. 마차 편을 좀 부탁해야지. 제미나 동무는 꼭 편의 를 보아주실 겁니다. 제미나 동무가 누군지 아세요? 라라의 어머니 밑에서 재봉일을 하던 올랴 제미나예요. 그 여자도 바로 이 집에서 살았지요. 자, 갑시다." 13 벌써 밤이 되었다. 사방은 컴컴해졌다. 제미나의 회중 전지의 동그란 불빛만이 네댓 걸음 앞에 서 눈 더미를 뛰어가면서 길을 밝혀준다기보다 오히려 분간키 어렵게 만들었다. 어둠이 사방에 깔렸다. 많은 사람이 라라를 잘 알고 있고, 그녀가 처녀때 자주 찾아왔고, 그녀의 남편 파샤가 살 았다는 집을 지나서 갔다. "회중 전지가 없어도 길을 아시겠지요, 의사 동무? 어때요? 전지를 드릴까요?" 제미나는 자못 생색을 내며 익살을 부린다. "어린 처녀 시절에 나는 라라와 다툰 일이 있어요. 그들은 양장점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 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일하고 있었지요. 금년에 그녀가 모스크바를 지나는 도중에 들렀더군요. '어디로 가는 거지, 바보처럼. 여기에 와요. 나하고 같이 살아요. 일자리도 구 해줄 테니' 하고 권했으나 소용이 없었어요. 제 마음이 내키는 대로하랄 수밖에요. 라라는 진정으 로 파샤를 좋아서 결혼한 게 아니고 마지못해 결혼한 거죠. 결혼한 후부터 머리가 좀 돈 것 같더 니 결국 가버렸어요." "당신은 라라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심하세요, 미끄러워요. 밖에다 구정물을 버리지 말라고 그렇게 얘길 했지만 도무지 들어먹지 않아요.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으셨지요? 생각한다는 건 무슨 뜻이죠? 왜 내가 라라를 생각 하지 않으면 안 되요? 생각할 틈이 없어요. 여기가 우리 집이랍니다. 라라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게 하나 있어요. 군대에 갔던 그녀의 오빠는 아마 총살되었을 거예요. 옛날 나의 주인이었던 라라 의 어머니만은 구해내도록 하겠어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두 사람은 헤어졌다. 제미나의 회중 전지의 작은 불빛이 좁은 돌문 안으로 비쳐 들어가면서 때 묻은 담과 더러운 층계를 비치는 동안 지바고는 혼자 어둠 속에 삼켜 들어갔다. 오른쪽은 사도바 야 트리움팔리나야 거리이며 왼쪽은 사도바야 카레트나야 거리였다. 어두운 두 밤거리는 이미 거 리가 아니라 석조 건물의 밀림을 지나는 통로였다. 마치 시베리아나 우랄의 인적 없는 밀림을 뚫 고 지나가는 통로와도 같았다. 집은 밝고 따뜻했다. "왜 이렇게 늦으셨지요?" 토냐는 그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당신이 나가신 사이에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뭐라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군요. 어제 아버님이 자명종 시계를 고 장냈는데, 당신에게는 얘기하는 걸 잊었어요. 그것이 집에 있는 마지막 시계인데 몹시 마음에 걸 렸지만 별 도리가 없었어요. 고치려고 무던히 애도 썼으나 허탕이었어요. 근처 시계 방은 엄청난 수리 비를 내야 한 대요. 빵 3파운드나 말예요.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고 아버님은 풀이 죽어 보였어요. 그런데 말예요, 놀라지 마세요. 한 시간쯤 전에 갑자기 종이 울렸어요. 귀청이 찢 어질 만큼 큰 소리로 말예요. 우린 새파랗게 질렸어요. 저절로 가기 시작하다니 글쎄 이럴 수가 있어요!" "내가 티푸스에 걸릴 때가 왔군." 지바고는 웃으면서 환자의 자명종 시계 이야기를 했다. 14 그러나 그가 티푸스에 걸린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그 동안 지바고의 살림 형편은 극도로 비참했다. 그들은 돈 한푼 없이 굶주리는 형편에 이르렀다. 지바고는 이전에 강도에게 피습되어 도와주었던 당원을 만나러 갔었다. 그는 의사를 위하여 하는 데까지 돌봐주었으나, 내란이 시작되 는 바람에 거의 지방에 가 있었다. 게다가 그는 그 당시 사람들이 궁핍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생각했으며, 그 자신도 말 은 하지 않아도 굶주려 있는 형편이었다. 지바고는 트베르 성문 근처의 상인과 연락을 하려고 했으나 그 후 몇 달 동안 그 사람은 자취 가 없었고 티푸스가 완쾌한 그 아내의 소식조차 묘연했다. 지바고가 방문했을 때 갈리울린의 어머니는 외출하였고 대부분의 거주인은 새 사람들이었다. 제미나는 전선에 나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공정 가격으로 장작을 배급받았으나 그것을 빈다프스키 정거장에서 운반해와야 했다. 듯밖에 생긴 보물처럼 장작을 실은 마차를 지켜보면서 메샨스카야 거리를 돌아오는 길에서 그는 거리의 모습이 달라져버렸다고 느꼈다. 그의 발이 겨우 움직여지며 휘청거렸다. 이젠 틀렸구 나, 티푸스에 걸린 것을 알았다. 의사는 길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마부가 그를 들어올렸다. 의사 는 어떻게 자기가 장작 위에 눕혀지고 집까지 왔는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15 그는 두 주일 동안 열이 심해서 정신을 잃고 있었다. 지바고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토냐가 책 상 위에 두 개의 거리를 세워 놓고 있었다. 왼쪽에는 사도바야 카레트나야 거리, 오른쪽에는 사도 바야 트리움플리나야 거리였다. 거기에 탁상 전등을 비춰서 오렌지색 불빛이 거리를 따뜻하게 비 치고 있었다. 거리가 환해졌다. 글을 쓸 수 있겠다. 그리하여 지바고는 글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전부터 언제나 쓰고 싶어하면서도 쓰지 못했던 것이었다. 지금은 술술 펜을 움 직여 가며 말하고 싶은 것을 그대로 열심히 적어 내려갔다. 그런데 이따금 한 청년이 그것을 방 해했다. 키르기스 사람같이 눈매가 가느다랗고, 우랄이나 시베리아 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순록의 털가죽 외투를 입은 청년이었다. 이 청년은 그의 죽음의 정령, 다시 말해서 그의 죽음 자체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러나 청년이 시를 쓰고 있는 그를 돕고 있으니 어떻게 그의 죽음일 수 있겠는 가. 죽음이 도움이 되리라는 가능성이 있을까. 그의 시의 주제는 장례식도 부활제도 아니고 그 중간의 날이었다. 제목은 <곤혹>. 사흘 동안 미친 듯 울부짖으며, 벌레가 우글거리는 암흑의 대지가 사랑의 불멸의 화신에 암석을 들고 공격 하며-마치 파도가 해안에 밀려왔다 간 부서지듯 - 사흘 동안 대지의 시꺼먼 폭풍이 휘몰아쳐서, 밀려 오가는 모습을 그는 항상 그려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두 줄의 시구가 머리 속을 자꾸 맴돌았다. 가볍게 스치는 기쁨 눈떠야 할 때 그의 바로 옆에 그를 스칠 듯이 지옥과 파괴와 부패가 있었으며, 그것들과 함께 봄과 생명이, 그리고 막달레나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눈을 떠야 할 때다. 눈을 뜨고 일어날 때다. 소생할 때인 것이다. 16 그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음이 편안해서 무엇이든지 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아 무런 생각도 없이, 사물의 관련을 알지 못하고, 무슨 일에도 놀라는 법이 없었다. 아내는 흰 빵과 버터를 먹여주었고 설탕을 넣은 차도 따라주었고 커피도 내놓았다. 지바고는 이러한 물건들이 구 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걸 까맣게 잊고, 회복기의 환자에게는 마땅히 있어야 할 음식들이라고 생 각하여 시나 동화를 즐기듯이 음미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생각하는 힘이 생기자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는 아내한테 물었다. "이것을 어디서 구했소?" "예브그라프가 가져왔어요." "예브그라프라니?" "예브그라프 지바고 말예요." "예브그라프 지바고?" "그래요, 당신 동생 예브그라프가 옴스크에서 왔어요. 당신의 이복 동생 모르세요? 앓고 있는 동안에 매일같이 왔어요." "순록 가죽 외투를 입지 않았어?" "그래요, 그럼 보셨군요, 줄곧 의식을 잃고 있었는데. 예브그라프는 어떤 집 층계에서 당신을 보았대요. 당신을 알아보고 말을 걸려고 했나 봐요. 그런데 당신이 얼마나 무섭게 노려보는지 말 도 못한 모양이에요. 예브그라프는 당신을 존경하고 있어요. 당신이 쓰신 글은 죄다 읽었구요. 쌀, 건포도, 설탕 모두가 그가 갖다 준 거예요. 그리고 옴스크로 되돌아가 버렸어요. 우리를 그리고 데리고 가고 싶다는 거예요. 그는 좀 이상한 데가 있고 신비스럽게 보였어요. 보기에 정부와 무슨 줄이 닿아 있는 것 같더군요. 우린 1,2년쯤 도시에서 떠나 '땅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대요. 내가 크류게르의 영지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참 좋은 생각이라고 했어요. 거기 가면 채소도 가꿀 수 있고 주위엔 숲이 우거져 있어요. 싸워보지도 않고 양처럼 죽어간다는 건 무의미하긴 하 지만." 그해 4월 지바고는 온 가족과 함께 멀리 우랄 지방의 유라친 근처에 있는 바르이키노 농원 영 지를 향해 길을 떠났다. 7.여로 1 3월말에야 그해 들어 처음으로 따뜻한 날씨가 찾아들었다. 제법 봄인가 싶었지만, 그 후에는 반드시 추운 날씨가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지바고네는 떠날 준비에 한참 부산했다. 거리의 참새보다 더 많이 함께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부활제 준비로 대청소를 한다고 소문을 냈던 것이다. 지바고 자신은 떠나는 데 반대였었다. 그는 이사해 봐야 별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준비하는 일 을 방해하지는 않고 결정적인 순간에 아내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바랬다. 그러나 준비가 진행되어 거의 끝날 무렵에 이르러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때가 왔다. 그는 다시 한 번 아내와 장인에게 가족 회의를 해서 그이 걱정되는 점을 이야기했다. "그래 내 말이 틀렸단 말이오? 그래도 떠나야 한단 말이오?" 지바고는 끝내 반대 의견을 말했다. "앞으로 한두 해만 지나면 새로운 토지 소유 제도가 이루어져서 모스크바 근교에서 채소밭을 가꿀 수 있다고 당신은 말하지만 그때까지 어떻게 지내지요? 그게 제일 문제인데 한 마디도 말씀 이 없군요." 토냐가 말했다. "그건 믿을 수 없는 소리야." 장인이 토냐 편을 들었다. "알았어요. 내가 졌습니다." 지바고가 수그러졌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눈을 가린 채 아무것도 모르는 곳으로 가는 거나 같다는 말입니다. 바르이키노에 살던 세분 중에서 어머님과 할머님은 돌아가셨고, 남은 크류게르 할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인질로 그 집에 갇혀 있는 거나 다르지 않 습니다. "할아버지는 전쟁 마지막 해에 임야와 공장을 가매각해서 개인명의가 아니면 은행에 재산을 등 기 이전시켰다고 했어요. 사실 우리는 그 진상을 전혀 모르고 있어요. 지금 그 농장이 누구의 것 으로 돼 있는지조차도 몰라요. 이 땅이 우리의 소유인지, 남의 소유가 돼 버렸는지조차도. 다만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벌목을 하고 있는지? 공장은 움직이고 있는지? 결국 그 일대의 권력자 는 누구일까? 또 어찌될 것인가, 우리가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 늙은 관리인 미쿨리츠인이 우리를 도와주리라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바르이키노에 그 노인이 살고 잇는지조차 모르고, 우린 다만 그 노인의 이름이나 알고 있을 뿐이죠. 이것도 그의 이름이 발음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다는 것뿐이지. 하지만 더 이상 논의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 들은 이미 마음을 정했고 나도 동의했으니까요. 이제는 여행을 어떻게 할 것인지 알아보는 일이 남았을 뿐이지요. 더 이상 주저할 필요는 없습니다." 2 지바고는 야로슬라브 역으로 문의하러 갔다. 조금 높게 된 나무 난간 사이의 통로를 따라 여행자 대열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돌 바닥 위 에는 회색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나란히 누워서 기침을 하거나 침을 뱉으며 이리저리 몸을 뒤치 락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지껄거리는 소리가 높고 둥근 천장에 부자연스럽게 큰 소리로 울려 펴 졌다. 대부분은 티푸스에 걸렸다가 위기를 벗어나 다음날로 병원에서 쫓겨난 환자들이었다. 지바고는 의사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하는 도리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으나, 병원에서 쫓겨난 사람이 이 렇게 많으며, 갈 곳이 없어서 역에 머무르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우선 여행 증명서를 받아야 해요." 안내원이 말했다. "그리고 기차가 있는지 없는지 매일 와서 알아보아야 해요. 요즘은 차가 드물어서 운이 좋아야 탈 수 있는 형편이랍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에 엄지손가락을 비비면서) 말하자면 약간의...기름을 치지 않으면 기 차도 움직이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또 이것 말이오. (목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굴도 좀 있어야지 요." 3 이 무렵 그로메코 교수는 여러 차례의 요청에 못 이겨 최고경제회의 고문역을 맡고 있었고, 지 바고도 정부 요인의 환자를 치료해 준 일이 있었다. 둘 다 당시의 최고 보수를 받고 있었다. 그것 은 그때 개설된 배급소의 들어온 물건을 우선적으로 살 수 있는 배급표였다. 배급소는 시모노프수도원 옆의 전의 군대 창고 자리에 있었다. 지바고와 그의 장인은 수도원과 병사의 앞뜰을 지나 낮은 석조 문을 지나서 둥근 천장의 지하실로 내려갔다. 경사진 지하실 바닥 은 점차 넓어져서 벽과 벽 사이에 진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진열대 저편에서 점원이 혼자서 침 착하게 물건을 저울에 달기도 하고 재 보기도 하며 물건을 내주고 있었다. 물건을 내주고서는 연 필로 품목표에서 삭제하고 때로는 안쪽에서 없는 물건을 보충하기도 했다. 손님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점원은 배급표를 흘끔 보고는 "담을 그릇"하고 말했다. 교수와 의 사는 자루 대신 크고 작은 베갯잎 몇 개를 내 들고 밀가루와 곡식, 마카로니, 설탕, 기름, 비누, 성냥 그리고 카프카스 치즈 등을 받았다. 종이에 포장한 것들이 가득 담기는 것을 보고 그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점원의 대단한 선심에 기가 질렸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염려까지 해주어 서 재빨리 물건을 자루에 쑤셔 넣고 어깨에 멨다. 그들은 하늘에라도 올라가듯이 지하실을 나왔다. 그것은 귀중한 식량을 듬뿍 얻었다 해서가 아 니었다. 자기들도 세상에서 쓸모 없는 인간이 아니라 얼마든지 유익한 구실을 할 수 있으며, 집에 돌아가면 토냐한테 자랑하며 칭찬을 받게 되리라는 생각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4 남자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관공서에 다니면서 여행 증명서 교부를 신청하거나 다시 돌아왔을 때 쓸 수 있도록 주거 등록을 하고 있는 동안에, 토냐는 가지고 갈 짐을 챙기고 있었다. 지금은 정식으로 지바고네한테 할당된 방 셋을 들락거리면서 아주 조그만 물건까지도 스무 번 이나 손으로 무게를 달아보고는 가져갈 짐 속에 챙겨 넣었다. 자기들이 가서 사용할 물건은 극히 적었으며, 대부분은 여행 도중에 쓸것과 그곳에 도착하여 처음 얼마 동안 통화 역할을 할 물건들 이었다. 열린 통기 창으로부터 봄의 산들바람에 갓 자른 흰빵 냄새가 풍겨 왔다. 뜰에는 닭울음소리와 아이들이 떠들며 놀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방의 통풍이 좋아질수록 겨울옷을 담은 채 뚜껑을 열 어둔 트렁크에서 나프탈렌 냄새가 점점 심하게 코를 찔렀다. 가지고 갈 것과 두고 갈 것을 골라서 나누는 일은, 이때까지 모스크바를 떠난 사람들이 이곳에 남아 있는 친지에게 전해 온 경험을 거울삼아 빈틈없는 이론이 성립되어 있었다. 그 이론의 단순 한 법칙이 토냐의 머리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 지저귀는 참새 소리와 아이들의 재잘거리 는 소리에 섞여, 밖에서 들려오는 어떤 신비로운 목소리와도 같이 되풀이되어 그녀의 귀에 속삭 이고 있는 듯싶었다. "옷감이 제일이에요." 신비로운 목소리가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도중에서 짐 조사를 당하게 될 테니까 가봉해서 의복처럼 보이게 하지 않으면 위험해요. 옷감, 양복감, 의복, 그다지 낡지 않은 것이면 외투도 좋구요. 트렁크나 고리짝은 안돼요. 정거장에는 짐꾼이 없으니까. 쓸모 없는 물건 을 가지고 가지 않도록 조심할 것. 여자란 어린애도 들고 갈 수 있도록 보따리를 조그마하게 꾸 릴 것. 소금이나 담배가 좋지만 위험해요. 돈은 지폐가 좋아요. 가장 어려운 것은 서류 같은 것, 등등." 5 출발 전날은 눈보라가 불어왔다. 잿빛 구름이 눈을 토하면서 하늘로 치달아 올라갔다 간 하얀 회오리바람이 되어 땅에 되돌아와서 깊고 어두운 거리로 사라지며 흰 보자기처럼 뒤덮인다. 짐을 꾸리는 일은 다 끝났다. 여러 가지 물건을 남겨둔 방은 전에 점원으로 일하던 부부에게 부탁했다. 그들은 예고로브나의 친척이었고, 지난겨울에 토냐가 낡은 옷가지와 가구를 감자와 땔 감과 바꾸는 데 애를 써준 사람들이었다. 마르켈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의 정치 클럽으로 선택한 민경대 사무실에서 그의 옛 주 인한테 피를 빨렸다고 까지는 말하지 않았으나, 오랫동안 그를 무지 속에 묶어두고 인간의 조상 이 원숭이였다는 것을 고의로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비난한 적이 있었다. 토냐는 그들 부부를 데리고 마지막으로 집안을 살펴보면서 자물쇠에 열쇠를 맞춰 보기도 하고 서랍과 장문을 닫기도 하면서 부부에게 마지막 지시를 하고 있었다. 의자나 책상 따위는 벽가로 옮겨놓고, 창문 커튼이 떼어지고, 한쪽 구석에는 꾸러미가 수북히 쌓였다. 휑한 창문으로 바라보이는 눈보라는 지바고 일가에게 지나간 슬픈 사연들을 생각하게 했 다. 지바고는 그의 소년 시절과 어머니의 죽음을 회상하였고, 토냐와 장인은 안나 부인의 죽음과 장례식 때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집에서의 마지막 밤이며, 다시는 이 집에 오지 못할 것이라고 세 사람은 저마다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감정을 억제하며, 슬픈 회상에 솟구치는 눈 물을 삼키면서 이 지붕밑에서 지내온 세월을 되새겨 보았다. 하지만 토냐는 남들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모든 것을 맡기고 가는 그 부 인과 쉴새없이 이야기했다. 토냐는 그들 부부의 회의를 크게 생각하고 있었다. 호의를 모르는 사 람이란 말을 듣게 될까봐 그녀는 옆방으로 가서 머릿수건이며 블라우스, 또는 명주나 무늬 있는 비단 천을 들고 나와서 그 부인에게 선물로 주었다. 흰 체크 무늬와 물방울무늬가 있는 어두운 빛깔의 옷감은 그 이별의 밤에 커튼을 벗긴 창문에서 바라다 보이는, 벽돌 건물에 흰 눈이 내리 는 거리 풍경과 흡사했다. 6 새벽녘에 그들은 역으로 나갔다. 여느 때라면 아직도 잠자고 있을 시각이었으나, 남한테 친절한 일이라면 언제나 발 벗고 나서는 제보로트키나가 "일어나요! 일어나! 동무들! 빨리, 빨리!"하고 문 을 두들기며 외쳐서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깨웠다. 그들은 뒷문 층계로 우르르 나와서 사진이라도 찍듯이 반원형으로 늘어섰다. 하품을 하거나 추 워서 벌벌 떨면서 바쁘게 걸쳐 입은 외투를 여미는 사람도 있었고, 엉겁결에 맨발에 끌고 나온 커다란 방한화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도 있었다. 술을 구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때인데도 마르켈은 어디서 마셨는지 지독한 밀주에 곤드레가 되 어서 뒷층계 난간에 송장처럼 기대 서 있었다. 난간이 그의 체중을 지탱하지 못해 금세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는 역까지 짐을 날라다 주겠다고 우겼으나 굳이 사양하자 버럭 화를 내는 바람에 겨우 만류했다. 뜰 안은 아직도 어둑어둑했다. 바람은 잠잠해졌으나 눈은 간밤보다 훨씬 더 내리고 있었다. 굵 직한 솜눈송이가 천천히 내리며 땅위에 앉기 싫은 듯 너풀너풀 공중에서 춤추고 있었다. 골목을 나와서 아르바트 거리에 이르렀을 때에야 날이 좀 훤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눈이 거리 넓이만큼이나 넓고 흰 장막처럼 내리고 있었다. 이 장막의 아랫자락이 발길에 채여서 걸어 가는 사람들은 앞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잃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시브체프에서 오는 행인은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조랑말이 끄는 마차가 뒤에서 쫓아왔다. 마부도 역시 흰 가루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 당시 찻삯이 엄청나게 비싸서 짐과 가족은 역까지 타고 갔으나, 지 바고만은 자기가 원해서 가벼운 걸음으로 역까지 걸어갔던 것이다. 7 역에서는 나무 난간 사이에 끼여 길게 늘어선 대역 속에 토냐와 장인의 모습이 보였다. 대열은 플랫폼 입구까지 늘어서 있었으나 실제로 기차를 타려면 반 베르스타쯤 철길을 더 가서 타게 되어 있었다. 청소부가 부족해서 역은 몹시 지저분했고 플랫폼 앞의 선로는 쓰레기와 얼음 이 덮여서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차는 멀리 떨어진 곳에 정거하게 되어 있었다. 뉴샤아 싸샤는 엄마와 할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고 밖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이따금 어른들 사이 에 끼일 때가 되었나 알아보려고 기웃거렸다. 둘 다 석유냄새를 몹시 풍기고 있었다. 티푸스를 전 염하는 이를 막기 위해 목이며 팔뚝, 무릎, 발목에 석유를 듬뿍 발랐던 것이다. 토냐가 남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가 가까이 오자 여행 증명서에다 스탬프를 찍어주는 곳을 큰 소리로 일러주었다. 그는 그리로 향했다. "어디 봅시다, 뭘 찍었는지." 그가 돌아오자 토냐가 물었다. 그는 난간 너머로 한 뭉치의 서류를 내보였다. "그건 특등 석인데요." 줄에 섰던 한 사람이 뒤에서 그녀의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토냐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세상 물정을 잘 알아서 무척 형식을 따지고 또 존중하는 부류의 사 람 같았다. "이 스탬프가 찍혀 있는 당신들은 1등 좌석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한단 말입니다. 물론 열차에 객차가 붙어 있을 경우의 얘깁니다만." 이윽고 줄 전체가 벌집처럼 이 화제에 끼여들었다. "객차라니! 무슨 소리야! 요즘은 화물차에 끼여 타기만 해도 고맙다고 해야지!" "이 사람들이 하는 소릴 듣지 마시오. 내가 설명해드리지요. 간단해요. 요즘의 열차는 단 한 가 지 종류밖엔 없어요. 군용 차량, 죄수 호송 차량, 가축 수송 차량과 객차 등이 언제나 섞여 있어 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군중을 향해 외쳤다. "왜 이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합니까? 말이야 아 무리 해봐도 축날 것은 없지만, 이 사람이 알아듣도록 똑똑히 말해야 할 게 아니오!" 그는 사방에서 야유를 받았다. "이봐, 무슨 소리야! 똑똑한 체 말아요. 1등석이 다 뭐야! 말하기 전에 저 친구 얼굴을 좀 봐요. 저런 사람이 어떻게 1등석을 탄단 말이오. 1등석엔 수병들이 가득차 있는데. 그들은 매서운 눈초 리와 권총을 가지고 있어요. 첫눈에 벌써, 이거 유산 계급이로군, 게다가 의사 선생-예전의 양반 이로군, 하면서 총을 빼들고 파리 잡듯 때려잡을 거요." 새로운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지바고에게 쏠렸던 동정이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되었을지 모른다. 얼마 동안 사람들은 역의 두꺼운 유리 창문을 통해 꽤 떨어진 곳에 지붕이 있는 선로 쪽을 바 라보고 있었다. 멀리 지붕 너머에는 눈 내리는 것만 보였다. 너무나 멀리서 보는 그 눈은 물고기 한테 던져준 빵 부스러기가 물 속으로 가라앉듯 천천히 땅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이따금 몇 사람이 선로를 따라 멀리 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철도원이 출근하는 길인가 생각되었으나. 이윽고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기관차 연기가 오르고 있는 곳으로 가까이 향하고 있었다. "이놈들아, 문을 열어라." 대열 속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물결은 넘실거리면서 문에 부딪치고 서로 밀고 당기고 했다. "무슨 짓들이냐! 우리를 여기에 가두어놓고 저놈들은 돌아서 먼저 보내기냐! 빨리 문을 열지 않 으면 문을 부수겠다. 자, 여러분, 밀어 봅시다." "바보 같은 놈들, 부러워할 것 없어요." 아는 체하던 그 사람이 말했다. "저것은 페트로그라드에서 강제 노동으로 징집된 사람들이에요. 북쪽 볼로그다로가게 되어 있 었지만 변경되어 동부 전선으로 보내어지고 있는 거요. 제 마음대로 여행하는 게 아니라 호송돼 간단 말이오, 참호를 파는 데 쓸 사람들이오." 8 기차를 타고 사흘이 지났으나 아직도 모스크바에서 그다지 멀리 가지 못했다. 창밖은 여전히 겨울 풍경이었다. 선로, 들, 숲, 마을의 지붕 모든 것이 눈에 덮여 있었다. 지바고 일행은 다행히 화물차의 윗단 왼쪽 한 구석을 차지했다. 그곳은 다른 사람들과 막혀 있 지는 않았으나 가족끼리 한군데를 차지하고, 천장 가까이엔 때묻은 길쭉한 창문이 나 있었다. 토냐는 여태껏 화물을 타고 여행한 적은 없었다. 올라타자, 지바고는 부인을 윗단에 밀어 올리 고 겨우 움직이는 창문을 열어주었다. 나중에는 토냐 혼자서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화물차는 흡 사 바퀴를 단 헛간과 같았다. 토냐는 처음에 덜커덕하는 순간에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 아닌지 걱 정되었다. 그러나 사흘 동안 기차가 속력이나 방향을 바꿀 때마다 그들이 앞 뒤 좌우로 흔들리고, 사흘 동안이나 자동식 장난감 북의 북채처럼 차바퀴가 덜컹거렸으나 아무 사고도 없었다. 그녀는 공연한 걱정을 했던 것이다. 열차는 스물 세 개의 차량으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지바고네는 14호 차량이었다. 너무 길어서 시골 역에 정거할 때는 앞이나 중앙이나 아니면 뒤의 몇 개의 차량만이 짧은 플랫폼에 닿을 뿐이 었다. 수병들은 앞쪽에, 일반 승객은 중앙, 그리고 징집 노무자들은 뒤쪽 차량에 타고 있었다. 승객 수는 약 5백 명 정도였으며, 각기 다른 연령, 신분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군중이 차지한 여덟개 찻간은 잡다한 광경이었다. 옷을 잘 입은 부호와 페트로그라드의 부유한 변호사, 증권 중매인 등의 착취 계급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부,마루닦이,목욕탕 때밀리 꾼,타타프인,고물상,도망친 정신병자, 상인, 수도승 등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변호사와 증권 중매인이 외투를 벗어 던지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난로를 에워싸고는 짤막하고 굵직한 토막나무에 걸터앉아 쉴새 없이 지껄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잘 어울렸으며 태 연한 태도였다. 그들 뒤에는 세력 있는 친척들이 있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매수하는 방법도 있었 다. 그 밖의 사람들은 장화를 신고 소매가 긴 외투 단추를 끌러 놓고 있는 사람, 맨발에다 긴 셔츠 를 바지 위로 축 늘어뜨린 사람, 수염을 기르고 있는 사람이나 수염이 없는 사람들이 숨막힐 듯 찻간이 반쯤 열린 문간에 서서 옆기둥이나 통로에 못을 박아 놓은 널빤지에 기대어 연도에 보이 는 농부들과 마을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징집된 사람들에게 배당된 차량이 부족해서 일반 인 차량에까지 그들이 밀려 들어왔었다. 그런 사람들은 14호 차량에도 있었다. 9 기차가 역에 가까이 왔을 때마다 토냐는 천장에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일어나서 는 약간 열린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며 혹시 내릴 필요가 있겠는지 알아보곤 했다. 역의 크기나 정차 예정 시간에 따라 유리하게 물물교환을 할 수 있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기차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는 바람에 그녀는 졸다가 정신이 들었다. 흔들 리며 기차가 지나가는 연결 지점의 숫자로 미루어보아 꽤 튼 역으로 짐작되어 오래 정차하리라고 생각되었다. 토냐는 눈을 비비며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 짐 꾸러미 속을 휘저어 수탉과 말발굽과 바퀴 등을 수놓은 타월 한 장을 끄집어냈다. 그때 지바고도 잠을 깨고, 먼저 아래로 뛰어내려 아내를 부축하여 마루에 내려오게 했다. 신 호수 사무실과 신호등이 차창을 스쳐 지나가고 나무들이 환영이라도 하듯이 소복이 눈이 쌓인 가 지를 기차 쪽으로 내밀고 있었다. 기차가 정거하기 전부터 수병은 발자국도 나 있지 않은 눈 위 로 뛰어내려 역 모퉁이를 돌아서 쏜살같이 달려갔다. 대개는 역 근처에서 농촌 여자들이 음식을 암거래하고 있었다. 검은 제복과 나팔바지, 차양이 없는 모자에 팔락이는 리본 등이 달려가는 수병들 모습에 스피 드 감을 더해 주는 것 같았다. 마치 경주하고 있는 스키나 스케이트 선수에게 길을 비켜주듯이 사람들이 비켜 주었다. 모퉁이를 돌면 가까운 농촌에서 온 시골 처녀나 아낙네들이 역 담벼락에 한 줄로 늘어서서 오 이, 치즈, 삶은 쇠고기를 담은 접시, 냅킨에 싼 따뜻하고 먹음직한 호밀 핫케이크 따위를 팔고 있 었다. 끝을 양피 외투에 밀어 넣은 숄로 머리를 감싼 여인들은 수병들의 농담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속으론 겁에 질려 있었다. 투기 행위나 암시장을 단속하는 부대는 대개 수병들로 편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골 여자들의 걱정은 곧 사라졌다. 기차가 서고 일반 승객이 군중에 뒤섞이자 거래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토냐는 어깨에 타월을 걸치고서 마치 세수하러 가듯이 역 뒤로 갔다. 장사 아낙네들이 몇 번이 나 그녀를 불러 물었다. "여보세요, 타월로 뭘 바꿀 거요?" 그러나 토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남편과 함께 더 걸어갔다. 줄의 맨 끝에 빨간 무늬의 검은 숄을 쓴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수놓은 타월을 보자 조심스럽 게 주위를 두루 살피고는 토냐 옆으로 다가와서 숨겼던 물건을 보이면서 열심히 속삭이는 것이었 다. "보세요. 이런 것 오래 보지 못했지요? 마음에 없어요? 너무 오래 생각하면 놓쳐요. 당신의 타 월과는 반 마리하고 바꿉시다. 어때요?" 토냐는 마지막 얘기를 듣지 못했다. 무슨 반 마리인지 몰라서 되물었다. 시골 여자는 머리에서 꼬리 끝까지 통째로 구워서 둘로 자른 토끼 고기를 손에 들어 보이며 이 절반과 바꾸자는 것이었 다. "이 절반을 당신의 타월과 바꾸자는 거예요. 뭘 그렇게 들여다봐요? 개고기는 아녜요. 우리 주 인이 사냥꾼이라오, 틀림없는 토끼예요." 그녀가 되풀이했다. 교환이 이루어졌다. 서로 자기가 이득을 봤다고 생각했다. 토냐는 불쌍한 시골 여인을 속이기나 한 것처럼 부끄러움을 느꼈고, 시골 여인은 자기대로 만족하게 생각하면서 물건을 다 팔아버린 친구를 불러서 마음이 변하기 전에 눈길을 재빨리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바로 그때 군중 속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한 노파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이놈! 어디로 도망치는 거야? 돈 내라! 언제 줬어? 저 사기꾼 같은 놈, 불러도 돌아다보지도 않고 거기 섰거라! 여러분! 도둑놈 잡아요! 저놈 봐요. 저놈 잡아요!" "어떤 놈이오?" "저놈이오. 수염 깎은 놈, 싱글벙글하는 놈 말이오!" "그래요, 그래, 그놈을 잡아줘요!" "팔꿈치를 기운 놈 말이오?" "그래요, 그래! 난 도둑맞았단 말예요!" "무엇을 훔쳤는데?" "저 사람이 우유와 만두를 산다면서 잔뜩 처먹고는 돈도 내지 않고 그대로 도망쳤다오. 그래서 할머니가 소리치고 있답니다." "그걸 왜 그냥 두지요, 잡지도 않구요?" "잡아요? 온몸에 탄띠를 감고 있는데, 그놈이 오히려 임자를 잡겠소." 10 14호 차량에도 징집 노무자 몇 사람이 타고 있었다. 호송병 보로뉴크가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 다. 그 중 세 사람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한 사람은 페트로그라드 국영 주점의 출납 계원이었던 프로호르 프리툴리예프인데, 그는 찻간에서 출납계로 불리었다. 또 한 사람은 철물 상에서 일하던 열 여섯 살 난 소년 바샤 브르이킨이었다. 세 번째는 백발의 혁명적 협동조합주의자 코스트예드 아무르스키였는데, 이 사람은 혁명 전에도 줄곧 투옥되었으나 지금은 또 새로운 징역거리를 찾아 낸 것이었다. 징집되었을 때 그들은 서로 생소한 얼굴이었으나 점차 가까이 사귀게 되었다. 출납계와 바샤는 같은 바트스킨 지방 출신이었다. 열차가 얼마 후 그들의 고향 마을을 통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프리툴리예프는 말므이즈 읍의 건달이었고 머리를 짧게 깎은 곰보였으며 땅딸보였다. 회색 스 웨터는 땀에 절어 겨드랑이 밑이 검게 보였고, 마치 뚱뚱한 여자가 입은 블라우스처럼 몸에 꼭 끼었다. 그는 몇 시간 동안이나 돌처럼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주근깨투성이 손에 붙은 사마귀를 피가 나서 곪을 때까지 긁으면서 명상에 잠겨 있었다. 지난가을 어느 날 그는 네프스키 거리를 걸어가다가 리체이느이 거리 모퉁이에서 민경대에 걸 렸었다. 신분 증명서를 내보여야 했으나 4급 배급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발각되었다. 이것은 노동 자가 아닌 사람에게 발급한 배급표였으며 실제로 아무것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붙잡 혀서 같은 이유로 잡혀온 많은 사람들과 함께 유치장으로 호송되었다. 그의 일행은 먼젓번과 같 이 아르한겔리스크 전선에 참호를 파기 위해 호송될 예정이었으나 도중에서 방향을 바꾸어 모스 크바를 지나 동부로 보내지게 되었던 것이다. 프리툴리예프는 전쟁 전에 루가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아내는 거기서 살고 있었다. 아 내는 풍문에 좋지 않은 소식을 듣고서 볼로그다로 뛰어갔었다. 그를 찾아서 석방시키려 했던 것 이다. 그러나 그의 일행은 볼로그다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노고는 허사가 되고 소식이 끊 기고 말았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프리툴리예프는 차구노바라는 여자와 동거 생활을 하고 있었다. 붙잡혔을 때는 그녀와 금방 작별하고 그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돌아서는 길이었다. 리체이느이 거리를 바라보니 사람들 속에 사라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차구노 바는 몸집이 풍만한데다가 손이 아름다웠으며 머리를 굵직하게 묶고 있었다. 이따금 깊은 한숨을 쉬면서 머리채를 어깨에 내흔들었다. 그녀는 지금 프리툴리예프를 따라가려고 자원해서 호송대와 행동을 같이하고 있었다. 프리툴리예프처럼 그렇게 못난 사내한테 여자가 반하다니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확실히 여자 들이 그에게 매달려 떨어지질 못했다. 좀 앞쪽 찻간에는 오그르이즈코바라는 그의 또 다른 여자 친구가 타고 있었다. 눈썹이 희고 깡마른 처녀였는데 용케도 기차에 탔었다. 차구노바는 이 처녀 를 '떠버리'니 '주전자 주둥이'니 하면서 악담을 했다. 연적 관계에 있는 이 두 여자는 서로 피해 다녔다. 오그르이즈코바는 절대 상대방의 찻간으로는 가지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애인을 만나는 지는 수수께끼였다. 승객들이 다 밖으로 나와서 기관차의 연료를 보충하고 있을 때 멀리서 애인 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11 바샤의 내력은 이와는 전혀 달랐다. 아버지는 전사했다. 어머니는 바샤를 아저씨 댁에서 기술을 배우라고 페트로그라드로 보냈다. 그의 삼촌은 아프락시느이에 철물 상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지난겨울 어느 날 소비에트에서 알 아볼 일이 있다며 아저씨를 불러갔다. 그런데 그는 사무실 입구를 잘못 알고 노동징집위원회 사 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사무실 안에는 징집 노무자로 가득차 있었다. 잠시 후 적위군 병사들이 들 어와서는 그들을 둘러싸고 세묘노프스키 영내로 데리고 가서 하룻밤을 지낸 다음날 아침 볼로그 다 행 열차로 호송해버렸다. 이 대량 체포 소식이 시내에 파다하게 전해지자 다음날 역에는 가족들이 작별 인사를 하려고 모여들었다. 바샤와 아주머니도 나갔다. 아저씨는 역에서 감시병에게 아내를 잠깐만 만날 수 있도 록 내보내 달라고 애걸했으나, 꼭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이는 안 된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아저씨 와 아주머니는 바샤를 인질로 할 것을 제의하게 되었다. 그 감시병이 지금 14호 찻간에 타고 있 는 보로뉴크였다. 보로뉴크가 동의하여 바샤를 인질로 끌고 들어가고 그의 아저씨를 내보냈다. 바 샤가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본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속았다는 것이 판명되자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던 바샤는 왈칵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는 보 로뉴크의 발밑에 몸을 내던지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추며 놓아달라고 애걸했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 다. 보로뉴크가 끄덕도 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냉정해서가 아니라 동란기에는 특히 규율이 엄 했기 때문이었다. 감시병은 맡은 인원수에 대해 목숨을 걸고 책임을 져야 했다. 인원수는 점호로 써 확인된다. 그리하여 바샤는 노무대의 일원이 된 것이다. 협동조합주의자 코스토예드는 제정시대에도 또 현정부 치하에서도 죄수들의 존경을 받으며 언 제나 변함없이 그들과 사이가 좋았다. 그는 바샤의 기구한 수난에 대하여 가끔 호송 대장과 담판 하기도 했으나, 대장은 터무니없는 착오였다고 시인은 하면서도 도착할 때까지는 바샤에 대한 사 건 조사가 수속상 어려운 일이라고 회피하고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하면 힘을 써주겠노라고 약속 했다. 바샤는 단정한 용모에 귀염성 있는 소년으로 마치 그림에서 보는 왕실의 시종 동자나 천사 같 았다. 그는 너무나 천진난만하고 순진했다. 나이 많은 사람들한테 바싹 다가앉아서 무릎 위에 두 손을 얹고 빤히 쳐다보며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다. 바샤는 기쁨과 슬픔을 감출 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얼굴 표정만 봐도 얘기의 내용을 알 수가 있었다. 12 지바고는 협동조합주의자 코스토예드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는 구석에 앉아서 크게 씩씩 거리면서 토끼 다리를 뜯고 있었다. 문틈에서 불어 들어오는 바람과 냉기를 피해 "어디서 바람이 분담?"하면서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다 겨우 바람 없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여기가 좋군." 그는 뼈다귀를 뜯고 나서 손가락을 빨아 깨끗이 하고는 손수건으로 닦고 나서 토냐에게 감사하다는 말 을 했다. "이 창문은 안 되겠소. 발라야겠군요. 그런데 먼저 하던 얘기로 돌아갑시다. 의사 선생, 당신의 생각은 틀렸어요. 토끼 고기는 맛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농민들이 부유하다고 결론짓는 것은 실례입니다만, 경솔한 생각입니다." "그럼 저 역들을 보십시오. 나무도 울타리도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 암시장들! 저 여 인들! 얼마나 좋습니까! 어디선가 생활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으며 행복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 두가 다 비참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으로 설명은 충분하겠지요?"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당신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지 게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어디든 철길에서 1백 베르스타만 떨어진 곳에 가 보시오. 도처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고 있어요. 누구를 반대하는 가고 물어보았소? 적색이다 백색이다 할 것 없이 여하 튼 권력의 자리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 반대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농민들은 모든 권력의 적이며 자기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하시겠지요. 그러나 그건 모르는 말씀입니다. 농민들 은 당신이나 나보다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더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들은 전혀 다른 것을 원하고 있답니다. 혁명에 눈을 떴을 때, 농민들은 옛날부터 지녀온 오랜 꿈이 실현된다고 생각했지요. 그 꿈이란 그들이 완전히 독립되어 누구에게도 의무를 지지 않고 자기 땅에서 자기 손으로 일하는 것이었습 니다. 그런데 낡은 국가의 박해를 새 국가의 박해로 바꾸어 놓은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 은 알게 되었어요. 혁명적 초국가라는 훨씬 더 가혹한 멍에가 씌워졌단 말입니다. 농촌이 술렁이고 조용하지 못한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농민이 잘돼 나간다고 말하고 있으니! 아닙니다. 당신이 모르는 일이 얼마든지 있어요. 그리고 내가 보기엔 당신은 알려 고도 하지 않는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사실 나는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일들을 굳이 알아서 골치를 썩혀야 한단 말입니까! 시대는 나를 고려에 넣지도 않습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 나든 간에 다만 그것에 순응해야 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왜 내가 사실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말입니 까? 나의 생각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오늘날 러시아 어디에 현실이 있습니까? 내가 보기엔 현실은 지금 너무나도 위협을 받아서 숨어버린 것입니다. 나는 농민이 부유하고 잘 돼 나간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것이 착각이라면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무엇을 가지고 살아 나가야 하며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그런데 난 살아가야 한단 말입니다. 가족이 있 지 않습니까." 지바고는 손을 내저으며 코스토예드와의 논쟁의 마무리를 장인한테 맡기고 저만큼 침상의 끝에 가서 머리를 수그려 밑을 내려다보았다. 프리툴리예프, 차구노바, 보로뉴크, 바샤네 사람이 얘기하고 있었다. 기차가 고향 역에 점점 가 까워지자 프리툴리예프는 자기 집 마을로 가는 길을 찾고 있었다. 말을 타고 갈 때에는 이 길로 가고, 걸어서 갈 때는 저 길로 간다고 하면서 그의 이야기는 자상했다. 귀에 익은 마을 이름이 나 올 때마다 바샤는 신나는 얘기나 듣듯이 눈을 반짝이면서 입속으로 되풀이했다. "수호이 브로드에서 내리나요?" 그는 너무나 흥분해서 목이 멘 소리로 물었다. "우리 고향 역이 군! 그래요! 그 다음은 부이스코예로 가는 거지요?" "그래, 다음이 부이스코예지."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에요. 부이스코예 마을, 알고 있어요. 거기서 한길을 오른편으로 돌아가 다가 다시 오른편으로 돌면 베레첸니크에 닿지요. 당신네는 강에서 왼쪽으로 가지요? 펠가 강을 아시죠? 그래요, 우리는 그 강을 따라가면 오른편 언덕에 강을 내려다보는 마을이 있어요. 그것이 우리 동네예요. 베레첸니크라는 마을, 언덕 위 가파른 곳이라서 눈이 빙빙 돌아 현기증이 날 정도 예요. 아래는 맷돌을 만드는 채석장이 있어요. 베레첸니크에는 우리 어머니가 계시고 또 누이동생 알렌카와 아리쉬카도... 우리 어머니는 차구노바 아주머니와 닮아서 아직 젊고 말쑥해요. 보로뉴쿠 아저씨! 보로뉴크 아저씨! 제발 부탁이에요...네! 부탁해요, 아저씨!" "뭐라구? 아저씨, 아저씨 하지 않아도 내가 아주머니가 아니란 건 나도 알고 있어. 그래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냐? 내가 미쳤어? 너를 놓아주었다 간 나는 끝장이야. 아멘, 총살이란 말이야." 차구노바는 바샤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창 밖을 내다보면서 묵묵히 있었다. 이따금 그 녀는 머리를 수그려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보같이 남들이 듣고 있는 데서 보로뉴크한테 할 소리가 아니예요. 걱정 말고 참아요. 잘 될 거니까." 13 열차가 중부 러시아 지역에서 동부로 향하고 있을 무렵 괴상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무장 폭 도들이 소란을 부렸던 지방을 지나 최근에 폭동이 진압된 마을들을 지나고 있었다. 기차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자주 정거했고, 치안 순찰대가 승객의 신분 증명서와 짐을 조사했 다. 한 번은 밤중에 정거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누구 한 사람 기웃거리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보지 도 않았다. 지바고는 무슨 사고가 난 줄 알고 밖으로 나가 보았다. 캄캄한 밤이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기차는 역에서 중간쯤 되는 들판에 멈춰 서 있었다. 선로 양쪽에는 전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다른 승객들도 내려와서 눈 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몸을 녹이 고 있었다. 지바고가 물어보았더니, 별로 일이 생긴 것이 아니고 기관사가 이 근처는 위험하기 때 문에 먼저 선로차로 조사를 하지 않고서는 더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고 우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승객 대표가 기관사를 설득하기 위해 나갔다. 때에 따라서는 뭘 좀 쥐어주어야 했다. 수병도 한 몫 끼여들고 있어서 잘될 것이라고 했다. 굴뚝에서 불꽃이 오르고 화통 안에서 석탄이 우글거리며 타오르는 불빛에 마치 횃불을 밝혀놓 은 듯이 때때로 기차의 앞부분의 눈이 밝게 반짝였다. 몇 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기관차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기관사로 보이는 앞장선 그림자가 기관차 끝머리까지 가더니 완충기를 뛰어넘어 마치 땅속으로 꺼져 들어간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뒤쫓아가던 수병도 똑같이 공중에 떠올랐다가 사라져버렸다. 지바고와 몇 사람이 호기심에서 그리로 가 보았다. 완충기 앞에 뻗어 있는 선로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기관사는 허리춤까지 눈에 파묻 혔다. 사냥 몰이꾼들처럼 쫓아가던 수병들이 둥글게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도 허리까지 눈에 파묻혀 있었다. "고맙소! 수병 동무들! 훌륭한 해연들이 총을 가지고 자기의 형제인 노동자를 쫓다니! 그것도 내가 기차를 세울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 때문에 말이오. 승객 동무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말해 주시오. 어떤 놈이 레일의 나사못을 빼 놓았는지 알 게 뭐요! 내가 내 목숨을 위해 그러는 줄 아 시오? 당신들이 무사하기를 염려해서 하는 일인데, 그 대접이 이것이란 말이오? 자, 쏘려면 쏴 보 시오. 승객 동무들, 증인이 돼 주시오. 난 달아나지 않습니다." 듣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진정해요... 이 사람들은 그런 생각은 아닐 거요...누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나...정말 그럴 생각은 아닐 거요." 또 다른 사람이 튼 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그렇구말구, 가브랄카! 굽히질 말아요!" 제일 먼저 눈을 헤치고 나온 수병은 얼굴이 납작하게 놀린 것같이 보일 정도로 머리통이 큰 붉 은 머리카락의 거인이었다. 그는 승객들을 향하여 보로뉴크와 같은 우크라이나 사투리를 써가면 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몇 마디 침착한 말이 기묘한 이 밤의 광경과 조화되었다. "용서하시오, 뭘 이렇게까지 떠들고 있습니까? 추워서 감기 드시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여러분. 바람이 찹니다. 자리로 돌아가서 몸을 녹이는 것이 어떨까요?" 군중들은 차차 흩어져 갔다. 거인은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기관사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이제 히스테리는 그만 부려요, 기관사 동무. 눈 속에서 나오시오. 어서 가봅시다." 14 다음날에 기차는 탈선할까봐 두려워 아주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곳을 지나 기차는 폐허가 된 역에 멈춰 섰다. 검게 그을린 역사 전면에서 니즈니 켈리메스 역 이름을 겨우 알아볼 수가 있었다. 비단 화재의 흔적은 역 건물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 었다. 역 뒤편에는 눈으로 뒤덮인 인기척 없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도 화재를 당했던 것이다. 맨 끝의 지붕은 검게 그을렸고 다음 집은 한쪽 모퉁이의 기둥이 넘어져서 기울어 있었다. 부서진 썰 매, 녹슨 쇳조각, 산산이 부서진 가구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눈은 연기 때문에 더럽혀지고 군 데군데 얼어붙은 웅덩이에는 반쯤 타다 남은 목재가 밖으로 튀어나와 새까만 땅이 들여다보였다. 모든 것이 화재와 그 화재를 끄려고 애쓴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마을과 역은 처음 인상처럼 전혀 사람의 자취가 없지는 않았다. 역장이 폐허 속에서 나타났다. 차장이 열차에서 뛰어 내려가더니 그를 위로했다. "전부 타 버렸군요?" "안녕하십니까. 잘 오셨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화재를 당했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한 일이 있었 답니다." "알 수 없군요." "모르는 것이 좋을 거예요." "스트렐리니코프 말인가요?" "바로 그 사람이오." "왜요, 당신들이 무엇을 했기에?" "우리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웃 때문에 함께 당하게 되었답니다. 저 마을이 보입니까? 니즈 니 켈리메스는 우스치 냄지 지구에 있는데, 다 그들의 탓이랍니다." "무슨 죄가 있다구?" "일곱 가지 큰 죄목이지요. 첫째는 빈농위원회를 해산시킨 것, 둘째는 적위군에 말을 보급하는 것을 거절한 죄인데, 그놈들 전보가 타타르 기병이었고, 세 번째는 동원령에 항거한 것, 뭐 이런 죄목입니다." "그랬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포 사격을 받았나요?" "그야 물론이지요." "장갑 열차로부터?" "물론." "그것 참 안됐습니다. 동정합니다. 하긴 우리들이 알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지나간 얘깁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정보도 또한 당신들에겐 반가운 것이 못 되 겠어요. 당신들은 여기서 이삼 일 더 정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농담 마시오! 전선으로 보충병을 수송중입니다. 한시도 더 지체할 수 없어요." "농담이 아니예요. 꼭 한 주일 동안 눈보라가 계속돼서 이 선로에는 눈이 쌓여버렸습니다. 눈을 치울 사람도 없어요. 마을 사람의 반수는 도망갔답니다. 남은 사람한테 시켜야 하는데 손이 부족 합니다." "제기랄,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서든지 눈을 치워야 하지요." "눈은 깊은가요?" "그다지 깊지는 않습니다. 제일 나쁜 곳은 여기서 3킬로미터쯤 되는 곳이 어렵습니다. 그 저쪽 은 숲이 있어서 선로에는 눈이 그렇게 많이 쌓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쪽은 들판이 돼서 바람에 조금은 날려갔지요." "제기랄, 골칫덩이로군! 승객을 모두 동원합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수병과 적위군의 군인은 쓸 수 없지만 징집 노무자와 그 밖의 승객을 합치면 7백명 정도는 될 겁니다." "됐습니다. 삽을 얻는 대로 곧 시작합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게 좀 부족하니 가까운 마을에 서 빌어오도록 하지요. 잘 될 거예요." "큰일인데, 해 내겠습니까?" "물론이지요. 군대가 많다면 도시도 점령하는데. 선로도 길지 않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15 철길은 눈을 치우는 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 지바고의 온 가족, 뉴사까지 참석했다. 이 사흘 동 안 이 여행 중에서 제일 즐거운 날이었다. 주위의 풍경은 차분하여 무슨 비밀이라도 간직한 것 같았으며 푸가초프 반란에 대한 푸쉬킨의 이야기와 아크사코프가 묘사한 고장을 연상케 했다. 불타고 난 자리가 한층 더 신비로운 분위기 를 보이고 있었다. 남아 있는 마을 사람들은 조심성이 많았다. 스파이가 두려워서 여객을 가까이 하지 않고 그들끼리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제설 작업에 동원된 사람은 몇 개 반으로 나뉘어서, 징집 노무자는 일반 민간인과는 격리되어 있었다. 무장한 병사들이 각 작업반을 감시했다. 각 작업반이 동시에 몇 군데서 눈을 치웠다. 눈 더미가 각 반의 접촉을 차단하고 작업이 끝나 는 최후의 순간가지 그 눈 더미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작업하는 사람들은 온종일 밖에서 지내고 다만 잠을 자기 위해 돌아왔다. 맑은 날씨였으나 몹 시 추웠다. 삽이 부족하여 작업 시간은 짧게, 자주 교대하곤 했다. 지바고가 맡은 노선 근처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동쪽에 보이는 들판은 계곡으로 비스듬 히 뻗어 내렸고, 멀리까지 서서히 뻗으며 기복을 이루고 있었다. 언덕 위에는 풍설에 시달린 한 채의 외딴집이 있었다. 그 주위의 수목들은 한여름이면 울창하 게 우거질 것 같았으나, 지금은 흰 성에가 레이스처럼 방풍구실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은 여러 가지 지형을 고르게 그리고 둥글게 만들었으나 개울 바닥의 굴곡을 완전히 덮을 수 는 없었다. 봄이 되면 철둑 선로 밑의 육교로 흘러내리겠지만, 지금은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쓴 어 린애처럼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저 언덕 위 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을까? 지바고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토지위원회에 접수 되어 빈집으로 폐허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이때까지 살던 사람은 어찌되었을까? 외 국으로 도망친 것일까? 아니면 농민들한테 죽었을까? 혹은 또 덕망이 있어서 그 고을에서 무슨 기술 전문가로 있게 된 것일까?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스트렐리니코프가 그대로 두었을까? 그렇 지 않으면 부농과 운명을 같이했을까? 언덕 위의 집은 지바고의 호기심을 돋우었으나 슬픈 침묵만 지킬 따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무엇을 함부로 물을 수도 없고, 물어도 대꾸해 주지도 않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태양만이 눈부신 햇빛을 새하얀 눈 위에 뿌리고 있었다. 삽날이 아름답게 그리고 부드럽게 눈의 표면을 베고 들어 갔다. 한 삽 한 삽 퍼낼 때마다 다이아몬드와 같은 맑은 무지갯빛을 던졌다. 어렸을 때 집 뜰 안 에서 털실 모자를 내려쓰고 검은 양털 외투의 곱슬거리는 털이 엉긴 구멍에 후크를 잠그고, 반짝 이는 눈으로 네모난 피라밋이나 슈크림 과자를 만들고 또 요새와 동굴을 만들어 놀던 생각이 났 다. 아, 그때의 생활은 얼마나 달콤하고 얼마나 모든 것이 아름다웠던가! 그러나 이 사흘 동안의 바깥 생활도 얼마나 만족스러운 인상을 주었는지 모른다. 별다른 이유 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밤이 되면 작업하러 나갔던 사람들에게 갓 구워 낸 따뜻한 빵을 배급했 다. 어디서 가져오는지 또 누구의 명령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맛있는 까칠까칠한 빵 껍질은, 위쪽 은 반질거렸고 옆은 갈라졌으며 밑쪽은 숯불에 구워 낸 자국이 있었다. 16 눈 덮인 산으로 등산해서 잠시 머물렀던 대피소에 애착을 느끼듯이 사람들은 폐허가 되어버린 역에 애착을 느끼는 것이었다. 타 버린 형체와 장소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태양이 과거에 충실하려고 언제나처럼 창문 밖의 해묵은 자작나무 뒤로 떨어질 무렵에 사람들 은 불탄 자리로 모두 되돌아오곤 했다. 바로 그곳은 벽이 방안으로 무너져 있었으나 창문을 향하고 있는 모퉁이는 그대로였으며, 커피 색의 벽종이와 동그란 바람구멍이 있는 타일 난로와 쇠줄에 묶인 뚜껑, 그리고 검은 액자에 놓여 벽에 걸어두었던 사무 용구의 목록표 같은 것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불타 덜어지듯 져 가는 석 양은 난로의 타일을 어루만지며 벽종이에 따스한 갈색 빛을 던지고, 여인의 숄처럼 벽 위에 자작 나무 그림자를 걸어 놓았다. 건물 뒤 대합실의 불탄 자리에 못질한 문짝에는 아직도 고시문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2월 혁 명의 초기나 그 직전에 붙인 것 같았다. 환자 승객에게 임시 약품 및 붕대 지급을 하지 못함. 사정에 의하여 이 문은 폐쇄함 -우스치 넴지 지구의무관 제설한 선로 사이의 눈 더미를 마지막으로 치워 버리자 화살처럼 저 멀리로 달리고 있는 철길 이 쭉 내다보였다. 철길 양쪽에는 퍼낸 눈 더미가 허옇게 늘어서서 검푸른 숲의 벽과 경계를 만 들고 있었다. 시선이 닿는 먼 곳까지 삽을 든 사람들의 무리가 철길을 따라 띄엄띄엄 늘어서 있었다. 처음으 로 자기들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은 어마어마한 그 수에 놀라는 것이었다. 17 시간이 늦어 해가 저물었으나 기차는 몇 시간 후에는 출발한다는 소문이었다. 지바고 부처는 다시 한 번 눈을 치운 선로의 전망을 즐기기 위해서 찻간에서 내렸다. 철둑에는 이제 아무도 없 었다. 그들은 먼 곳을 바라다보면서 잠시 서 있다가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는 찻간으로 되돌아왔 다. 돌아오는 도중에 여자 둘이서 말다툼하는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오그르이즈코바와 차 구노바의 목소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열차 앞쪽에서 뒤로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으나, 그들은 역 쪽에서 지바고 부처보다 앞서거나 혹은 뒤떨어지면서 나란히 가는 적은 없었다. 두 여자는 몹시 흥분해 있었으나 차츰 힘이 다 빠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목소리가 고함 소리로 높아졌다가는 속삭이듯 낮아지는 것으로 보아 발이 잘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고 쉴새없이 눈구덩이로 넘어지는 것 같았다. 차구노바가 오그르이즈코바를 쫓고 상대를 잡을 때마다 주먹으 로 때리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연적한테 심한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부드럽고 상냥한 음성이 남성의 거칠고 거슬리는 욕설보다도 오히려 더 추악하고 상스럽게 들렸다. "이 게으름뱅이 년아. 더러운 창부년." 차구노바이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언제 봐도 히히 덕거리며 요망스런 년, 우리 바보 영감으로 부족해서 젖비린내 나는 애한테까지 추파를 던지는 거냐!" "그래, 바샤도 네 남편이냐?" "뭐라고? 다시 한 번 지껄여보라구! 더러운 페스트야! 까불면 죽여버린다!" "손대지 말라구.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널 죽이고 싶단 말이야. 이 더러운 색골, 암내나는 고양이, 뻔뻔스러운 암캐!" "그래, 너 같은 대단한 귀부인에 비하면 나는 암코양이나 암캐밖엔 못 되겠지. 그렇지만 너는 시궁창에서 나서 하수구로 시집가 쥐새끼를 배고 고슴도치를 낳는 귀부인이란 말이지... 사람 살 려요! 누구 없어요! 사람 살려요! 불쌍한 사람 살려 주세요!" "빨리 갑시다." 토냐는 남편을 재촉했다. "메스꺼워서 더 들을 수 없어요. 무슨 일이 날 거예 요." 18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었다. 날씨도, 경치도 다 변했다. 벌판은 끝이 나고 선로는 기복 이 샘해지면서 산악지대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줄곧 불어오던 북풍이 잠잠해지고 페치카에서 불 어오는 것 같은 따뜻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산의 경사면을 따라 낭떠러지에는 숲이 우거지고 철길이 숲을 지난 때 기차는 급경사를 오르 고, 숲이 깊은 곳에서부터는 다시 가파른 경사를 내려가야 했다. 기차는 앞장을 서서 손님을 인도 하는 늙은 산림 간수처럼 기어가듯 겨우겨우 숲속으로 들어갔다. 손님은 머리를 이쪽저쪽으로 돌 리면서 시선이 미치는 곳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볼 만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숲은 아직도 편안한 겨울잠에 깊이 빠져 있었다. 겨우 여 기저기서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답답한 껍데기를 벗어버리려는 듯이 가지의 잔설을 털어 버리고 있었다. 지바고는 잠에 취해 있었다. 이 며칠 동안 그는 침상에 누운 채 지내고 있었으며, 자고 있지 않 을 때는 명상에 잠기거나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별로 들을 만한 이야깃거 리도 없었다. 19 자바고가 실컷 잠자고 있는 동안에 어느덧 봄이 찾아와 온 땅 위에 내린 엄청난 눈을 녹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지바고가 집을 떠나던 날에 내렸던 눈을 녹이고, 그후 우스치 넴지에서 사흘 동 안 철길에서 치웠던 한없이 길고 두껍게 쌓인 눈을 녹이고 있었다. 눈은 우선 속으로부터 남몰래 조용히 녹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작업이 반쯤 되어 갈 무렵에는 이미 그것을 더 감출 수가 없게 되어 기적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밑에서 물이 콸콸 흘러나온다. 산림은 그 알 수 없는 깊은 속으로부터 움직이기 시작하면 모든 것에 눈 이 뜨이게 된다. 물은 어디서나 제멋대로 흐르며 놀고 있었다. 바위 밑으로 흘러서 모든 웅덩이에 넘쳐흐르고 또 퍼져 간다. 물은 숲속을 소리내어 흐르면서 안개를 일으켜 증발하는가 하면, 수목 사이를 흘러 길을 막고 있는 눈 속에 스며들며 넓은 땅 위로 재빨리 달려가 언덕에서 몸을 내던져 오색의 영 롱한 물안개를 그린다. 땅은 축축이 젖어든다. 아찔하게 좁은 곳에 자리잡은 늙은 소나무가 구름 에서 물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수염에 붙은 맥주의 흰 거품처럼 물은 거품을 일으켜 소나무뿌리 에 하얗게 말라붙는다. 봄에 취하고 그 향기에 아찔한 하늘이 구름에 뒤덮여 있었다. 솜털구름이 양쪽 끝은 낮게 숲 위로 드리우고, 그 구름에서 따뜻한 흙과 땀 냄새를 풍기는 비가 땅위로 마지막 얼음의 검은 갑 옷을 씻으면서 쏟아졌다. 지바고는 잠을 깨면서 지지개를 켜고 한 족 팔꿈치를 짚으며 일어나 주위를 돌아보며 귀를 기 울이는 것이었다. 20 광산 지대로 가까워지면서 주민들의 수는 차츰 많이 보였고, 기차가 정거하는 역도 자주 있었 다. 작은 역에서 타고 내리는 승객들도 많아졌다. 자리를 잡고 한잠 자려는 사람들 대신에 가까운 거리를 여행하는 사람은 문가에나 중간 아무데나 자리를 잡고 앉아서 자기들끼리 지방 문제를 낮 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잠도 자질 않았다. 지난 사흘 동안의 이런 승객들이 말하는 눈치로 보아 백위군이 우세한 상태이며, 유라친은 이 미 점령되어 있거나 점령중인 것을 알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이름을 잘못 알았거나 아니면 옛 친구의 이름과 같은지 몰라도, 멜류제예보에서 헤어진 갈리울린이란 사람이 백위군을 지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가족에게는 쓸데없는 걱정이 되지 않도록 이 확실치 않은 소문을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었 다. 21 한밤중이 지나서 지바고는 왠지 행복감에 젖어 눈을 뜨게 되었다. 그 행복감은 그의 꿈을 깨울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기차는 멈춰 서고 있었다. 정거장은 백야의 희끄무레한 어둠에 잠겼다. 이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 걷잡을 수 없는 강력한 것이 활짝 트인 광경을 암시하고 있었다. 정거장은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하면서 그림자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찻간을 지나 플랫폼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전쟁 전처럼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지바고는 흐뭇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난데없이 고함 소리와 소란한 발자국 소리로 플랫폼이 떠들썩했다. 또 가까운 곳에 폭포가 있었다. 폭포는 상쾌하고 자유로운 입김으로 백야의 광막함을 더해 주었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가 그의 꿈에 행복감을 가져다 준 것이었다. 끊임없는 물소리는 모든 소리를 억누르고 고요한 환각을 느끼게 했다. 폭포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마음의 편안과 자극을 받으면서 지바고는 깊이 잠들고 있었다. 그 의 침상 밑에서는 두 사람이 얘기하고 있었다. "그래 좀 잠잠해졌나? 그들은 아직도 집어치우지 않았나?" "상인들 얘긴가?" "그래, 그 양곡 상인들 말일세." "조용해졌어. 참 온순한 놈들이지. 놈들 중에서 몇 놈만 벌금을 물게 하니까 잠잠해졌어." "너의 동네에서는 얼마냐?" "4만 정도라면 참새 눈물이지." "4루블 리가 아니라, 4만 후드란 말이야." "그건 대단한걸." "4만 푸드의 최상급 밀가루라니." "생각해봐. 별로 놀랄 것도 없어. 땅이 아주 비옥한데다 곡물의 중심지란 말이야. 여기서부터 르인바 강을 따라 유라친까지는 마을마다 곡물 창고가 곳곳에 있다네. 쉐르스토비프의 형제나 페 레까트치코프 형제는 다 큰 중간 상인이 아닌가!" "큰소리 내지 말아. 사람들이 깨겠네." "그래." 그는 하품을 했다. "한잠 청할까? 움직이기 시작하는가봐." 그러나 기차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다른 기차가 뒤에서 달려와서 귀가 찢어질 만큼 요란한 소리를 냈다. 폭포의 물소리가 사라져버렸다. 옆 노선을 구식 급행 열차가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으르렁거리고, 지적을 울리면서 차 후미의 등불만 간들거리며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다시 그들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틀렸어. 곧 떠나기는 글렀어." "그래 이내 떠나지는 않겠군.: "저건 장갑 급행열차야. 스트렐리니코프일걸세." "그럴 거야." "반혁명에 대해선 그는 맹수나 같다구." "그가 갈레예프를 쫓고 있는 중일 거야." "그건 또 누군데?" "아따만 갈레예프 말일세. 체코인의 엄호 부대를 이끌고 유라친 밖에 있다네." "듣지 못한 이름이야." "갈릴레예프 공작이라고 하던데. 난 그 이름을 똑똑히는 기억하지 못하네." "그런 이름의 공작은 없어요. 알리 쿠리반이겠지. 자넨 혼동하고 있는 게로군." "그럴지도 몰라." "쿠리반이겠군." 22 새벽녘에 지바고는 다시 눈을 떴다. 또 그는 무슨 즐거운 꿈을 꿨었다. 넘치는 행복과 해방감에 들떠 있었다. 기차는 여전히 멈춰 서 있었다. 그대로 그 정거장인지 또 다른 정거장인지 알 수 없 었으나 다시 폭포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폭포인지는 몰라도 먼저와 같은 폭포라고만 느껴졌다. 이윽고 그는 다시 잠들기 시작했다. 깊이 잠들면서 뛰어 다니는 발소리와 떠들썩한 소음을 어 렴풋이 들었다. 코스토예드가 호송 대장과 다투고 있었다. 서로 큰소리를 질러댔다. 공기는 전보다 더 상쾌했다. 어딘지 모르게 새로운 입김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이때까지 없었 던 신기한 것. 봄다운, 거무스레 흰, 얄팍하고 아롱거리는 것. 축축한 진눈깨비가 땅에 내리며 검 게 물들이는 5월의 눈송이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투명하고 거무스름하고 그리고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것이었다. '들 벚꽃이구나!'하고 지바고는 꿈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23 다음날 아침 토냐가 말했다. "정말 당신은 변했어요. 마치 모순덩어리 같아요. 파리 한 마리 때문에 새벽까지 한잠도 못 이 루시던 양반이 그 소동도 아랑곳없이 주무시다니. 아무리 깨워도 소용없었지요. 놀라운 일이었어 요! 프리툴리예프와 바샤가 도망쳤어요! 그리고 차구노바와 오그르이즈코바도 함께! 꿈에도 생각 지 못했어요! 좀 기다리세요. 그것뿐 아내예요. 보로뉴크도 도망쳤어요. 자, 들어보세요. 그들이 어 떻게 도망쳤는지, 함께 갔는지, 따로 갔는지, 또 누가 먼저 도망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보로뉴크 는 다른 친구가 없어진 것을 알자 자기 생명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도망친 거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된 거지요? 모두 자유 의사에 의해서 사라진 걸까요? 그렇지 않으면 누구한테 당한 것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 여자들을 의심한다면 차구노바가 혹시 오그르이즈토바를 죽인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면 그 반대일지도 몰라. 전혀 알 수 없어요. 호송 대장은 미치광이가 돼서 찻간을 돌아다니고 있어 요. '기차를 출발시켜선 안 돼. 죄수를 찾을 때까지는 조금도 움직이지 말 것. 법에 의하여 명령한 다.' 그러니까 사령관은 소리를 지르며 '나는 전선에 보충병을 수송하고 있는 거야. 너희들 같은 건 알바 아니야. 무슨 소릴 하고 있어!' 그래서 두 사람은 코스토예드한테 갔어요. '당신은 협동주 의자이고 교육을 받는 사람인데 1개 병사인 무지한 사람이 철없는 짓을 하고 있는데도 가만히 보 고만 있었단 말이오! 무슨 나로드니크가 그렇소!' 그러니까 코스토예드는 '그거 재미있는 말이오. 죄수가 그래 경비병을 감시해야 한다는 뜻이군. 그렇다면 암탉이 울겠소.' 하고 대꾸했어요. 나는 당신을 마구 흔들어 깨웠어요. '여보, 일어나세요. 도망자가 생겼어요.' 그러나 당신은 조금도 대답 이 없더군요. 아마 귓전에서 대포를 쏴도 듣지 못했을 거예요...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지요...보세 요. 여보, 경치가 참 아름답지요!" 창문 틈새로 끝없이 넘실거리는 봄의 홍수가 넓은 들판에 한눈으로 보였다. 어디선지 강물이 넘쳐서 물이 철둑 밑까지 와 있었다. 침상에서 바라다 보이는 좁다란 시야는 기차가 마치 물위로 미끄러져 가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에 부드러운 수면이 푸른 줄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 곳을 제외한 수면에는 따뜻한 아침 햇빛이 파이 빵을 구울 때 칠하는 녹은 버터와도 같은 매끄럽고 기름기 있는 빛을 던지고 있었다. 이 끝없는 범람에 흰 구름이 숲과 함께 물 속에 잠겨 있었다. 홍수의 복판에는 길쭉한 땅덩이가 보이고, 수면에 비치는 그림자가 이중으로 떴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땅과 하늘 사이에 떠 있었다. "저것 봐! 오리 떼야." 그로메토 교수가 외쳤다. "어디요?" "저기 섬 있는데. 더 오른쪽. 저런! 날아가 버렸군. 우리가 그것들을 놀라게 했나?" "아, 이제 알겠어요." 지바고가 말했다. "저 장인한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중에 하기로 하 지요... 징집 노동자와 여자들은 잘했어요. 살인 같은 건 없었을 겁니다. 그들은 물처럼 속박이 싫 었던 거예요." 24 북국의 백야는 끝나고 있었다. 산과 잡목 숲 그리고 골짜기가 마치 가공적으로 만들어놓은 것 같은 인상을 주면서 뚜렷이 떠올랐다. 들벚꽃이 여기저기 조금 피어 있는 숲은 금방 나무 잎사귀가 돋아 나오고 있었다. 숲은 산 절 벽 아래 계곡 사이에 약간 있었다. 폭포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잡목 숲 저쪽 골짜기 끝에서만 바라다 볼 수 있었다. 바 샤는 폭포를 바라보고 그 경치를 즐기면서 두려움을 느껴서인지 아주 지쳐 버렸다. 이 부근에는 폭포를 따를 만한 다른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폭포는 주위의 모든 것을 위압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생명과 의식을 가지고 있는 생물과도 같이 그 고장에서 조공을 받아들이는 용이나 마왕과도 같은 존재였다. 폭포는 내려오면서 반쯤 높이에서 바위에 부딪쳐 두 갈래로 갈라진다. 기둥은 좌우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발이 미끄러져, 다시 서서 자세를 바로 잡는 형국이었다. 바샤는 잡목 숲 땅 위에 양털 외투를 깔고 누었다. 날이 밝아 올 무렵에 새 한 마리가 묵직한 날개를 움직이며 산에서 날아와 숲 주위를 서서히 선회하면서 바샤가 있는 근처 소나무 꼭대기에 앉았다. 그는 새의 검푸른 목과 회색과 푸른색의 가슴팍에 정신이 팔려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론 쟈라고 우랄 지방에서 부르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윽고 일어나 외투를 집어 입고는 공터를 지 나 동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가세요, 아주머니. 아니, 꽤 추웠던 것 같군요! 이가 떨리는 소리가 들려요. 뭘 보고 그렇게 무 서워하지요? 자, 갑시다. 마을까지 가야 해요. 우릴 숨겨줄 거예요. 그들은 자기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은 해치지 않아요. 이렇게 가다가는 굶어 죽기 꼭 알맞아요. 벌써 이틀 동안이나 아무것 도 먹지를 못했어요. 보로뉴크아저씨는 큰 소동을 쳤겠지요. 틀림없이 모두들 우릴 찾아 헤맸을 거예요. 자, 가요. 아주머니는 이틀 동안이나 한 마디도 말이 없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정 말 왜 그렇게 슬퍼하지요? 아주머니가 오그르이즈코바 아주머니를 기차에서 밀어 떨어뜨리지 않 았다는 것을 저는 알아요. 그저 옆에서 붙잡으려 한 것뿐이에요. 내가 봤어요. 그 아주머니와 프 리툴리예프 아저씨는 꼭 우리를 따라올 거예요. 그렇게 되면 또 일행이 될 수 있지 않아요? 그러 지 말고 좀 말해 봐요." 차구노바는 일어나서 바샤의 손을 꼭 잡고 조용히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가요." 25 기차는 가파른 언덕길을 온 차체를 흔들어 삐걱거리면서 올라가고 있었다. 철둑 밑에는 싱싱한 관목이 무성한 숲이었다. 그 나무들의 높이는 열차의 높이만 했다. 그 밑은 들판이었고 금방 홍수 가 빠져나가서 풀밭에는 모래나 통나무가 흩어져 있었다. 상류 어딘가에 쌓아둔 통나무들이 홍수 에 밀려 내려온 것 같았다. 제방 밑 어린 나무숲은 아직도 겨울과 같이 벌거숭이였다. 나무에는 새싹이 군데군데 맺혀 있 었으나 그것이 다른 부분과는 꼭 조화되지는 않았다. 그 새싹은 어떤 여분의 것, 어떤 혼란, 어쩌 면 더러운 나무를 부풀어오르게 하는 염증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혼란과 여분, 그리고 더러움은 생명의 신호인 것이다. 이미 나무들은 앞서가며 녹색 불꽃을 태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자작나무에 싹이 돋아나, 뾰족한 잎사귀의 가시 화살을 온몸에 받은 순교자의 모습 처럼 우뚝 서 있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와니스의 원료가 되는 반짝이는 송진 냄새를 느끼게 했다. 얼마 후 기차는 홍수에 흘러내린 통나무를 쌓았던 장소까지 다다랐다. 선로가 돌아가는 숲속에 서 나무를 벌채해낸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사방에 나무조각과 톱밥이 깔렸고 한가운데에 나무더 미가 있었다. 기관의 브레이크 소리가 들리고 기차는 크게 반원을 그리더니 얼마 후 등을 구부리 면서 언덕 위에 덜커덕 멈추고 말았다. 화물차의 문이 활짝 열리고 타고 있던 승객들이 우루루 나왔다. 수병들만 앞간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잡일에서 제외되고 있었다. 이 공자의 나무는 기관차에 쓸 만한 장작이었기 때문에 큰 통나무를 적당히 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관차에 가지고 다니는 톱이 있었다. 이 톱을 원하는 두 사람에게 한 개씩 분배했다. 의 사와 그 장인한테도 톱이 지급되었다. 병사들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문에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들은 단기 훈련을 말 끝마친 중년 노동자와 해군 사관학교를 갓 나온 소년 같은 사람들이 혼성된 기묘한 집단이었다. 해군 사병들 은 무슨 착오 때문에 그들과 함께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런 걱정도 없 이 나이 많은 병사들과 맞장구를 치면서 농담을 하거나 바보 같은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시련의 시기가 가까워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을 따라와 농담을 하거나 웃음을 주고받았다. "이봐요, 할아버지, 난 게으름뱅이가 아니라오. 애기가 되어서 일 못 해요. 유 모가 말려서 말요." "여보, 스커트를 베겠네요. 감기 들겠어." "이봐, 색시, 숲에 가지 말구 내 마누라나 되라구." 26 숲속에는 여러 개의 발판이 십자 모양으로 나무를 묶어서 땅에 박혀 있었다. 지바고와 그의 장 인이 그 중 하나에 톱을 걸었다. 봄은 아직 일러서 대지는 여섯 달 전 눈에 파묻혔던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눈 밑에 깔려 있 었다. 숲은 축축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으며, 지난해의 나뭇잎들이 수북히 쌓여 있어서 마치 누가 몇 년동안 모아 둔 편지며 계산서며 영수증 따위를 마구 찢어서 흩어놓은 채 버려둔 방안 같았다. "천천히 하시지요, 피곤해지시겠어요." 지바고는 장인에게 말하고 톱을 천천히 율동적으로 움직 였다. "좀 쉬는 게 어떨까요?" 숲은 다른 톱질하는 소리에 메아리쳤다. 저 멀리 어디선가 첫 꾀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따금 티티새가 파리에서 먼지를 불어내듯 우는소리가 들렸다. 기관차가 내뿜는 증기에서는 육아 실 알콜 램프에 데우는 우윳병에서 나는 소리가 하늘 위로 사라졌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었지?" 장인이 물었다. "생각나는가? 섬 옆을 통과할 때 오리 떼가 날아 갔었지. 그때 자네가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그랬지요. 어떻게 간단히 말씀드릴까요? 저는 그때, 우리의 목적지가 점점 가까워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지방 곳곳이 뒤끓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리고 도착했을 때는 어떤 사태 가 일어날지 알 수 없어요. 미리 얘기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나 생각했는데... 제가 말씀드리는 것 은 저희들의 신념에 대한 건 아닙니다. 봄의 숲속에서 우리의 신념을 5분 동안에 말할 수는 없어 요.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지요. 장인 어른과 나와 토냐, 그리고 많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요즘은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단지 그 의식하는 정도가 다를 뿐입 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일정한 사정에 놓여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할 것인지를 미리 정해두는 편이 좋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서로 낯을 붉히지 않아도 되고 또 서로 창피하게 생각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자네 생각을 알았네. 잘 말해주었어. 그렇다면 내 의견을 말하지. 자네가 최초의 정부 포고문 이 실린 신문을 나한테 가져다주었던 그 눈보라 치던 밤이 생각나겠지? 정부의 포고문은 아주 강 경한 것이었어. 그 소박한 맛이 우리 마음을 끌게 되었어. 그러나 그러한 것은 입안자의 가슴에만 본래의 순수성이 있게 마련이야. 그것도 처음 공포한 날 단 하루뿐이지. 이튿날에는 정치의 궤변 은 그것을 싹바꿔놓고 말지. 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그들의 철학은 나와는 아무런 상 관이 없어요. 그들의 제도는 우리와는 적대적인 것이지. 나는 내가 모든 이러한 변동에 동의하느 냐는 질문을 받은 일은 없어요. 하지만 그들은 나를 믿어 왔고, 나 자신의 행동은 그것이 자유 의 사에 의하여 나온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로 하여금 어떤 의무를 가지게 하였어. 우리가 채소를 심기에 적당하게 도착하겠느냐고 토냐는 자주 묻고 있지만, 나는 우랄 지방의 지질도 풍토도 아무것도 몰라요. 여름이 너무 짧아서 무엇이든지 자랄 것 같지가 않군. 하지만 우 리는 채소를 가꾸기 위해서 우랄까지 멀리 가고 있는 것은 아닐세. 우리는 솔직하게 현실과 대결 해야 하니까. 우리의 목적은 전혀 다르지. 우리는 현대식으로 살아가려는 거야. 다시 말해서 크류 게르 할아버지의 재산과 공장 그리고 기계를 탕진하는 데 한 몫 끼어들려고 가는 거지. 우린 그 의 재산을 다시 일으키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남들과 똑같이 그 재산을 물처럼 써버리고 단돈 한 닢의 생활비를 얻기 위해서 수천 루불리를 써버리는 데 합세하러 가고 있어요. 만일 자네가 황금비를 뿌려준다 해도 나는 옛날과 같은 조건으로 땅을 도로 찾지는 않겠네. 그것은 발가벗고 다니거나 알파벳을 잊어버리려고 애쓰는 거나 같단 말일세. 지금은 달라졌어. 러시아에서 사유 재 산의 시대는 이미 끝나버렸어. 우리 그로메코 집안은 한 세대 이전에 욕심을 잃고 말았어." 27 더위와 무더운 공기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잠을 깨우지 않도록 살짝 침 상에서 내려와 찻간의 문을 열었다. 끈끈하고 축축한 열기는 얼굴에 땅굴 속이 거미줄이 닿는 것 같았다. '안개로군. 내일은 몹시 덥겠어. 그래서 이렇게 숨이 답답하고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 같군.' 의사는 생각했다. 의사는 화물차를 떠나기 전에 문가에 서서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기차는 차를 바꿔 타 는 아주 큰 정거장에서 멈춰 서고 있었다. 안개와 고요만이 깃들여 공허하고 허전한 느낌마저 감 돌고 있었다. 마치 기차가 길을 잃어 버림받은 것 같았다. 역의 제일 끝에 머물러 있는 것같이 역 의 건물과의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는 선로가 착잡하게 밀집되어 있었다. 구내의 저편에서 땅이 입을 크게 벌리고 역 전체를 삼켜버린다 해도 차안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 할 것이다. 멀리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두어 번 들려왔다. 그의 뒤에서 음률적으로 물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옷을 물에 헹구는 소리가 아니면 흠뻑 젖 은 깃발이 바람결에 나부끼는 소리 같았다. 멀리 앞쪽에선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전선에 있었던 경험이 있는 의사는 귀를 바싹 기울였다. 조용하게 메아리치며 길게 계속되는 소리를 듣고 나서 장거리포라고 생각했다. '틀림없는 대포 소리다. 전투 지구에 가까이 온 거야.' 지바고는 머리를 저으면서 찻간에서 뛰어내렸다.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찻간으로부터 앞쪽으로 두 번째 찻간에서 기차가 끊겨져 있었다. 앞의 것은 기관차에 끌려서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 수병들이 어제 일부러 그렇게 위세를 부리고 있었군.' 의사는 생각했다. '도착하자마 자 전투에 투입될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게로군.' 선로를 넘어 역의 중심을 바라보려고 앞 차량을 돌았으나 총을 든 보초병이 앞을 가로막아 섰다. "어디 가는 거요? 통행증을 봅시다!" "여기가 무슨 역이오?" "무슨 역이든... 당신은 뭣하는 사람이오?" "모스크바에서 온 의사요. 우리 가족은 이 기차에 타고 있어요. 이것이 신분 증명서요." "증명서가 무슨 소용이오. 이 어두운 데서 글자가 보이나. 안개를 봐요. 증명서 같은 건 보지 않아도 당신이 어떤 의사인지 다 알고 있어. 당신 같은 의사놈들이 우리한테 20인치 포를 쏴대고 있단 말이야. 죽기 전에 어서 돌아가라구." '사람을 잘못 알고 있군.' 지바고는 생각했다.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이 없겠어. 괜히 시끄럽기 전에 돌아가야 하겠다.' 그는 방향을 바꾸어 걸어갔다. 이번에는 포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뒤는 동쪽이었다. 안개가 흐르는 속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어 서, 그것은 김이 서려 오르는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나체가 희멀겋게 보이는 것 같았다. 지바고는 기차의 끝까지 가서 제일 뒤쪽 차량을 지나쳤다. 부드러운 모래에 발이 점점 깊이 빠 졌다. 철벅철벅 물을 퉁기는 단조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급경사가 진땅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발을 멈추고 앞쪽 희미한 그림자에 눈이 갔다. 안개 때문인지 그 물체는 더 크게 보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순간 강 언덕에 있는 작은 배의 동체가 어둠 속에서 쑥 떠올랐다. 그는 넓은 강 언덕에 서 있었고, 강물은 어선의 뱃전과 강변의 선창가 널빤지에 잔물결을 출렁이며 천천히 흐르고 있 었다. "누구의 허가를 받고 여기를 서성거리는 거요?" 소총을 가진 다른 보초가 물었다. 지바고는 이제 절대 질문을 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서도 불쑥 물었다. "이 강의 이름이 뭡니까?" 보초는 대답 대신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다른 보초를 부르려다 말았다. 아까 만났던 보초가 가 만히 지바고를 뒤따라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두 보초병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생각할 것도 없어. 첫눈에 수상했다니까. '여기가 무슨 역이냐? 이것이 무슨 강인가?' 물으면서 뭘 속이고 있지! 당장 끌고 가서 한방 먹여줄까? 아니면 다시 기차 있는 데로 끌고 갈까?" "기차로 데려가지. 대장이 뭐라고 할지 알아 봐야지. 너의 신분 증명서를 보자." 두 번째 보초가 소리질렀다. 서류뭉치를 빼앗아 쥐고 누군가를 불렀다. "이놈을 감시해주게." 보초 둘은 역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까지도 잘 몰랐으나 이 세 번째 사람은 어부였다. 그는 강가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지바고 곁으로 다가와서는 과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말했다. "당신을 대장한테 끌고 간다는 것은 운이 좋았어요. 목숨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을 나쁘게 생각지는 마시오. 자기의 임무를 다하고 잇는 것뿐이니까. 지금은 민중의 시 대랍니다. 지금은 별로 신통치가 않지만 앞으론 잘돼 갈 겁니다. 그들은 사람을 잘못 알고 있어 요. 누굴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서 당신으로 그 사람으로 오인하고 있는 겁니다. '그놈이야, 노동자 의 적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잘못 알았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대장을 만나게 해 달라고 말하시오. 그놈들 멋대로 하게 해서는 안 되오. 그놈들은 미치광이처럼 정치와 결부시키는 데,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어리석은 짓이죠. 만일 같이 가자고 해도 가면 안 돼요. 대장을 만나 게 해달라고 하세요." 지바고는 어부에게서, 강은 르인바라는 유명한 수로이며 강가의 역이 유라친 교외의 공업 지대 인 라즈빌리예 마을의 역이라는 것을 알았다. 유라친 2베르스타 정도 상류에 있으며 지금은 백위 군이 탈환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다. 라즈빌리예에서는 최근 폭동이 일어나서 진압되긴 했으나 역 구역과 그 주변이 아주 조용한 것 은 주민들을 피난하도록 명령하고 엄중히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역에 있는 몇 대의 기차는 사령부가 사용하고 있어서 군사 위원 스트렐리니코프의 특별 열차도 섞여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보초가 보고하러 간 곳이 바로 특별 열차였던 것이다. 그들이 걸어간 방향에서 다른 경비병 한 사람이 걸어왔다. 그는 총의 개머리판을 땅에 질질 끌 면서 마치 술 취한 친구를 부축하듯 하여 걸어왔다. 이 경비병이 지바고를 군사위원한테로 데리 고 갔다. 28 두 대의 연결된 특등 차의 한쪽에서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경비병이 보초에게 암 호를 말하고는 지바고를 데리고 들어서자 웃음소리와 떠들던 소리가 뚝 끊겼다. 경비병에게 연행되어 좁은 통로를 지나 중앙의 널찍한 찻간으로 들어갔다. 깨끗하고 아늑한 방 이었다. 깨끗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묵묵히 일하고 있었다. 스트렐리니코프는 유명한 비당원 군사 전문가로서 이 지방의 자랑과 공포의 대상이었으나, 지바고는 그의 배경을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뜻밖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스트렐리니코프의 활동의 중심은 여기가 아니고 전선 사령부나 군사 작전지구 가까이에 있을 것 같았다. 여기는 그의 개인 거실, 사무실, 침실일 것이다. 그래서 이곳은 코르크의 마룻바닥에 부드러운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증기 목욕탕을 연사에 할 만큼 조용한 곳이었다. 사무실은 열차의 중앙부에 있는 전의 식당차였다. 융단이 깔리고 책상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잠깐 기다리게." 입구 책상에 앉은 젊은 장교가 말했다. 경비병은 복도 마룻바닥에 붙어 있는 철판에 총 개머리 판을 부딪쳐 철거덕 소리를 내며 나가버렸다. 그 후부터 지바고에게 주의를 쏟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출입구에서 바라보니 그의 증명서가 방안 구석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책상에는 나 이가 들어 보이는 제정 시대 대령 같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군의 통계 가사로서 무슨 통계 처리 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무슨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참고서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야전 지도를 대조하기도 하며 무엇을 오려 붙이기도 했다. 그는 창문을 모조리 둘러보고 나서 "오늘은 무덥겠 군"하는 폼이 마치 창문마다 다 조사한 후가 아니라면 결론을 얻을 수가 없다는 말투였다. 전기 기술병이 마룻바닥을 기어다니면서 끊긴 전화선을 정비하고 있었다. 기술병이 문 앞쪽까 지 이르렀을 때 젊은 장교가 일어서며 비켜주었다. 옆 책상에는 군용 가죽 상의를 입은 타자수가 타자기와 씨름하고 있었다. 타자기가 고장난 모양이었다. 젊은 장교가 옆으로 가서 들여다보면서 고장 원인을 찾고 있는 사이에 기술병은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조사하고 있었다. 통계 기사도 일어나서 그들 가까이 갔다. 온 방안 사람들이 타자기 하나에 매달렸다. 지바고는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자들이 나의 운명을 나 이상으로 잘 알고 있을 텐데, 죽음의 위협에 직면한 사람의 눈앞에서 이렇게 하찮은 일에 열중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누가 그걸 안단 말인가?' 그는 생각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태연할 수가 있을까? 총 알이 날아오고 사람이 죽어 나자빠지고 있는 판에 태연히 날씨가 무덥겠다는 걱정을 하고 있으 니. 그것도 전투의 열기가 아니라 기온을 말이다. 이들은 아마 너무 많은 것을 경험해서 이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29 창문에서는 철길과 언덕 좀 위에 있는 정거장과 라즈빌리예의 교외 지구가 내다보였다. 아무 칠도 하지 않은 세 개의 나무 계단이 플랫폼과 역 건물을 연결하고 있었다. 선로 끝에는 낡은 기관차의 고철이 무덤처럼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탄수차가 달려 있지 않은 기관차가 많 은 고장 차량 사이에서 마치 장화의 윗부분이나 찻잔 모양으로 생긴 굴뚝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이 기관차의 무덤과 위쪽 인간의 묘지, 노선 위에 이어진 레일, 녹슨 양철 지붕, 교외 상점의 간 판 등이 한데 어울려 아침의 온기가 허옇게 타 붙은 하늘 아래서 한 폭의 황폐하고 낡은 정경의 그림을 이루고 있었다. 모스크바에만 살았기 때문에 지바고는 다른 도시에 많은 상점 간판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에서 글자를 분간할 수 있을 만큼 아주 큰 것이었다. 간판은 기울어진 단층 건물의 창문을 가릴 만큼 낮게 걸려 있어서 납작한 건물은 마치 아버지의 모자를 쓴 마을 아이의 얼굴처럼 가려져 있었다. 안개는 서쪽으로부터 차차 개기 시작하여 동쪽에 지금 남아 있는 안개는 무대의 장막처럼 하늘 하늘 움직이면서 흩어져 가고 있었다. 라즈빌리예로부터 3베르스타쯤 더 가서 언덕 위에 지방의 큰 도시가 있었다. 햇빛이 도시를 노 랗게 물들이고, 도시의 윤곽이 멀리서 단조롭게 보였다. 도시는 집과 집, 거리와 거리가 층층으로 되어 언덕에 들러붙어 보이고 맨 꼭대기 중앙에는 큰 교회당이 솟아 있어서 마치 싸구려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유라친이다.' 지바고는 가슴이 설레었다. '장모나 간호원 리라한테서 자주 들었던 고장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그 도시를 바라보게 될 줄은 정말 꿈엔들 생각지 못한 일이 아닌가!' 이때 군인들의 주의는 타자기로부터 창밖으로 쏠렸다. 지바고도 그쪽을 바라보았다. 포로의 한 떼거리가 호송되어 역의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그 중에 중학생 제복을 입고 머리에 부상을 입은 소년도 있었다. 응급처치는 받았으나 붕대에서 피가 스며 나오고 있는데다가 소년 자신이 자꾸 손으로 만져서 검게 땀 흘린 얼굴에 피가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는 행렬 맨 뒤의 두 병사 사이에 끼여 있었지만,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된 것은 그이 씩씩하고 귀여운 용모나 아주 나이 어린 반란의 패배를 애처롭게 생각하는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이상한 느낌을 준 것은 그 소년과 호송병들의 우스꽝스러운 동작이었다. 소년은 지금도 학생모를 쓰고 있었다. 모자는 붕대를 감은 머리에서 자꾸 미끄러져 내려왔으나, 벗어서 손에 들면 되는 것을 벗어질 때마다 붕대나 상처에도 불고하고 다시 집어쓰곤 했다. 그리 고 호송병들은 소년이 하고 있는 동작을 열심히 돕고 있었다. 이 상식에 벗어난 행동에서 지바고는 어떤 상징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는 뛰어나가서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말을 소년에게 던지고 싶은 충격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는 소년과 이 찻간 안의 사람 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인간의 구원은 형식을 충실히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형식 을 내동댕이치는 데 있다고. 지가보는 얼굴을 돌렸다. 그때 스트렐리니코프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방 한가운데 섰다. 의사로서 많은 사람을 대해 온 지바고가 여태까지 이 사나이만큼 뚜렷한 개성을 지닌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들 두 사람의 인생 행로가 교차하여 여태까지 서로 모르고 지 내온 것은 대체 무슨 조화였을까?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사나이가 의지의 화신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완전할 정도로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의 존재가 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모든 것을 더없이 정확 하고 완벽한 것 같았다. 균형 잡힌 단정한 머리, 성급한 걸음걸이, 긴 다리, 진흙투성이여야 할 텐 데도 잘 닦여진 장화, 구겨져 있어야 할 옷이 금방 다려 입은 것 같은 회색 빛의 말쑥한 군복 등 모든 것이 그럴싸했다. 그의 명석한 머리와 극히 자연스러운 태도는 이 세상의 어떤 사태에서도 침착하리라는 인상을 풍겼다. 지바고는 생각했다. 분명히 그는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반드시 독창적 인 재능이 아니라도 좋다. 그의 모든 동작에서 엿볼 수 있는 그 재능은 어쩌면 모방의 재능인지 도 모른다. 그 당시에는 누구든지 남을 모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역사상의 영웅을 모방하고, 전선 이나 시가전에서 명성을 떨친 인물, 민중의 믿음을 모았던 인물, 아니면 탁월한 혁명 동지들을 모 방하고 있었다. 스트렐리니코프는 낯선 사람을 보고, 놀라서 불쾌하게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예의바르게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마치 친구를 대하듯이 부하에게 말했다. "다 함께 축하하세. 우린 놈들을 격퇴하였어. 이건 생명을 걸고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전쟁 놀이라도 하는 것 같군. 하기야 놈들도 우리와 같은 러시아인들이니까. 그들은 다만 그릇된 생각을 머리 속에 잔뜩 가지고 깨끗하게 청산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우리가 두들겨 준거지. 그 놈들의 사령관은 나의 오랜 친구인데 나보다 더 분명한 프롤레타리아 출신이지. 그와 나는 한 집 에서 자랐고 예전엔 그의 신세도 많이 졌어. 그런데 나는 그를 강 너머나 더 멀리 격퇴하고 나서 기뻐하니 말이야! 구리얀! 빨리 연결해주게. 전화를 해야 돼. 전보나 전령 만으론 안되겠어. 오늘 은 꽤 무더운걸. 그래도 한 시간은 잤을 거야. 아, 그렇지..."그는 의사의 일 때문에 일어났다는 걸 상기하고 지바고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스트렐리니코프는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이? 천만에! 하나도 닮지 않 았어. 바보들 같으니!' 그는 웃으며 지바고에게 말했다.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당신을 다른 사람과 잘못 알았던 것 같습니다. 보초병들이 실수한 것이 니 용서하시오. 돌아가도 좋습니다. 이 동무의 서류는 어디 있어? 아, 여기 있군. 어디 좀 봅시 다...지바고 ...지바고, 의사 지바고... 모스크바... 내 방으로 잠깐 가실까요? 여긴 사무실입니다. 내 방은 옆이구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30 도대체 스트렐리니코프란 어떤 인물일까? 그가 지금의 지위까지 올라가 그것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범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당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널리 알려진 인물도 아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자 곧 지방에 가서 학교 교사가 되었다. 전쟁 중에는 포로가 되어 실종으로 보고되었고 전사한 것으 로 되어 있었다. 그가 독일 군에게서 도망쳐 돌아온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그를 추천하고 보증한 사람은 진보적인 정치 사상을 가진 철도 종업원 치베르진이었다. 스트렐리니코프는 소년 시절에 치베르진네 집에서 살았다. 임명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스트렐리니코프에 탄복하고 있었다. 그 당시만큼 터무니없는 미사 여구나 극단적인 정치 견해가 판을 치는 시대에, 어느 누구보다도 분 방한 그의 혁명적 정열은 그것이 순진하기 때문에 돋보였다. 그의 열광은 여태까지의 그의 생활 의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다. 스트렐리니코프는 당국의 신임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지난 수개월 동안의 그의 전투 기록에는 니즈니 켈리메스와 우스치 넴지의 작전, 식량 징발대 에 대한 무장 저항을 시도한 구바소프 농민 봉기의 진압, 그리고 메드베지 포임 역으로 가는 구 호 식량 열차를 약탈한 제 14보병 연대병사들의 토벌 등이 있었다. 그 밖에도 투르카투예에서 폭 동을 일으키고 백위군에 투항한 '스첸까 라진르틴 우스의 반란을 진압했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는 적의 허점을 찌르고, 심문, 재판, 형 선고 등 재빠르고 엄격하게 일을 처리했던 것이다. 그는 이 지방 전체의 징병 기피 경향을 완전히 막아내고 모병 기관을 훌륭히 재조직했었다. 그 결과는 징병이 철저하게 진척되어 적위군 징집 본부는 언제나 붐비고 있었다. 북부에서 백위군의 최후의 압박이 강력해지고 정세가 어려웠을 시기에 그가 군사, 전략, 작전상 의 새로운 임무를 맞게 되었다. 그의 개입은 즉각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다. 스트렐리니코프는 자기를 라스트렐리니코프가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런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모스크바 재생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노동자였으며 1905년 혁명에 참가하여 투옥되었었 다. 스트렐리니코프 자신은 혁명 운동에 참가한 경험은 없었다. 그것은 첫째로 그가 나이가 어렸 고, 둘째로는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청년은 부유한 집안 자식보다는 고등 교육을 높이 평가하고 더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 운동에 말려들 지 않았다. 개학에서 깊은 교육을 쌓아 인문과학의 학위를 받은 다음 독학으로 과학과 수학까지 공부했었다. 그는 병역을 면제받았으나 군대에 자원하여 임관했고, 전선에 나가서 포로가 외었으나 풍문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1917년에 탈주하여 귀국했던 것이다. 그는 두 가지 특 징과 두 가지 정열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명석한 두뇌와 논리적 사고력, 또 하나는 깊은 정신 적 순결과 정의감이었다. 또한 그는 정열가인 동시에 명예를 존중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새 세계를 개척할 만한 과학자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지성에는 미지의 세계로의 대담한 비약 능력이 결핍되어 있었고, 논리적인 해석을 초월할 만한 통찰력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가 훌륭하게 되려면 원칙적인 것 외에 그 원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음가짐도 필요할 것이 다. 사소한 행위에 의하여 훌륭하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트렐리니코프는 어릴 때부터 숭고한 동경을 가슴에 안고 이 세상을 모든 사람들이 엄격히 규 범을 지키면서 완벽을 향해 달리는 거대한 경기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자기의 세계관이 너무나 단순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불만을 안고, 인생을 왜곡하는 암흑의 세력과 맞싸워 인생의 챔피언이 되고 복수를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욕망에 불타고 있었다. 스트렐리니코프는 실망의 고배를 마시고 혁명에 의하여 무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31 스트렐리니코프는 자기 사무실에 들어서자 다시 중얼거렸다. "지바고... 지바고... 상인이군. 아니 면 귀족... 그렇지, 모스크바의 의사... 바르이키노에 가는 도중이라... 이상한데. 왜 당신이 그런 벽 촌으로 가기 위해 모스크바를 떠날 생각을 했지요?" "그냥 조용하게 살 곳을 찾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래요? 매우 낭만적이시군요! 바르이키노라고 하셨지요? 나는 그 근처 일대를 대충 알고 있 어요. 이전에는 크류게르네 영지였지요. 당신은 그의 친척은 아니겠지요? 설마 크류게르의 상속인 은 아니겠지요?" "농담하시는군요. 그의 상속인과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하긴 내 처가 그의 상속인이긴 하지 만..." "그것 보시오! 하지만 당신이 백위군에 향수를 느끼고 있다면 아마 실망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이미 그 지역을 소탕해 버렸으니까." "여전히 저를 희롱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또 당신은 의사입니다. 군의관이구요. 그리고 지금은 전쟁 중이에요. 내가 고려하는 것 은 오직 전쟁뿐입니다. 당신은 탈영병이란 말이오. 녹색군도 역시 숲속에 숨을 곳을 찾고 있어요. 당신과 똑같단 말입니다. 어떻게 변명하겠습니까?" "나는 두 번이나 부상해서 의병 제대한 사람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당신이 '소비에트 분자'이며 '동조자', '완전히 충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교육 인민위원회나 보건 인민위원회의 증명서를 나에게 제시할 순서가 아닐까요? 지금은 묵시록의 시대입니다. 최후의 심판이란 말입니다. 지금은 '동조나'나 소비에트에 충성스러운 의사 선생님들의 시대가 아니라 검을 든 천사와 날개 달린 짐승의 시대란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까 당신을 석방한다고 약속했습니다. 일단 약속한 것을 번복하진 않겠어요. 하지만 기억해두시오, 이 번 만이라는 것을. 아무래도 당신과 나는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그때는 지금과는 다를 겁니다. 조심하시오." 위협과 도전에도 지바고는 끄덕하지 않았다.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겠습니다. 당신의 입장에서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한테 토론을 걸어온 문제는 내가 일생동안 상상 속의 비난자와 토론해온 것들입 니다. 따라서 내가 아직까지 거기에 대해 어떤 결론을 얻지 못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겁니다. 다만 여기서 지금 간단히 설명할 수 없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나를 석방시킬 생각이라면 이대로 물러가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석방시키지 않겠다면 처분대로 하십시오. 나는 변명하 고 싶지 않습니다." 그때 이야기는 전화 때문에 중단되었다. 전화선이 복구되었던 것이다. 스트렐리니코프는 수화기 를 집어들었다. "고맙네, 구리얀. 수고스럽지만 누가 지가보 동무를 기차까지 보내주게. 앞으로 이런 시시한 일 을 나한테까지 가져오지 않도록 라즈빌리예의 체카의 수송부를 부탁해." 지바고가 떠나자 스트렐리니코프는 역에다 전화를 걸었다. "호송된 포로 중에 중학생이 있었지? 그래, 모자를 자꾸 다시 쓰던 녀석 말이야. 머리에 붕대를 감고. 보기 흉하지 않은가... 음, 음...필요하다면 치료해 주게...그렇구말구... 음식도 요구하면 주라 고. 그렇지. 그건 그렇고, 용건을 말하겠는데... 통화중이야... 전화를 끊지 마. 제기랄, 혼선됐군. 이 거 봐, 구리얀! 구리얀! 저쪽에서 전화를 끊고 말았어. 다시 연결해주게." 그는 잠시 그의 통화를 끝맺으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혹시 '내가 가르친 학생인지도 모르지. 우 리와 싸우다니! 많이 컸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포로가 된 소년이 그가 가르친 학생일 수 있는가 를 확인해 보려고 그는 교사를 그만둔 후의 횟수를 손가락으로 세어보았다. 그리고 차창 너머 지 평선 쪽으로 시선을 옮겨 전에 살던 유라친의 한 모퉁이를 더듬었다. '저기에 아내와 딸이 아직도 살고 있을까? 만날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이라도? 하지만 만나서 어떡하지? 아내와 딸은 별개의 인생에 속해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나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고 나서 중단 되었던 예전의 인생으로 되돌아갈 수가 있다. 언젠가는 돌아갈 날이 있겠지. 꼭 돌아간다. 그러나 언제일까? 아아, 언제일까?' 8.도착 1 지바고네 가족을 태우고 온 기차는 정거장에서 여러 대의 열차가 서 있는 뒤쪽 대피선에 머물 러 있었다. 여태까지는 모스크바와의 인연이 끊기지 않고 계속돼 왔으나, 오늘 아침에는 뚝 단절 되어 끝나버린 느낌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모스크바 사람들보다 더 친절했다. 정거장 구내에는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고 적 위군 부대에 의하여 포위되었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지방 여객들이 노선으로 용케 뚫고 들어왔 다. 말하자면 '침투'해온 것이다. 그들은 벌써 차안에 빽빽이 차 있었고 화물차 문간에도 꽉 차 있 었다. 어떤 사람들은 차 옆에서, 또 자기 객차 출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다 서로 잘 아는 사이여사, 만나자마자 손을 흔들고 인사를 나누며 큰 소리로 담 소했다. 말씨와 옷차림, 음식이나 습관이 대도시와는 좀 다른 데가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해서 먹고살까? 그들의 관심이나 문자의 형편은 어떨까? 그리고 이 어려운 시기 를 어떻게 이겨나가고 어떤 방법으로 법망을 벗어나고 있을까? 지바고는 궁금히 여겨졌다. 이러 한 의문은 얼마 가지 않아서 명백히 풀리게 되었다. 2 소총을 땅바닥에 끌고 다니거나, 지팡이처럼 짚고 다니는 보초병의 호위를 받으며 지바고는 자 기 객차로 되돌아왔다. 무더운 날씨였다. 햇볕은 선로와 객차 지붕 위를 뜨겁게 내리쬐었다. 기름 에 절어 시커멓게 된 땅덩이가 금박처럼 누렇게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보초병의 소총이 모래 위에 끌리며 고랑을 긋다가 철길 침목에 부딪쳐 땡그랑 소리를 내곤 했 다. "날씨가 풀렸군요. 씨를 뿌릴 때가 됐는데. 귀리, 보리, 수수 다 좋을 때라오. 하지만 메밀은 아 직 일러요. 우리 고향에서는 아쿨리나의 날에 파종해요. 난 이 지방 사람이 아니고 땀보프 지방의 모르슈에서 살았어요. 여보, 의사 동무! 이놈의 내란과 반혁명 소동이 없었다면, 내가 이런 철에 낯선 땅에 와서 빈둥거리고 있겠소? 계급 투쟁이 우리들 사이를 검은 고양이처럼 날뛰고 있으니. 보란 말이오, 돼 가는 꼴을." 3 의사를 끌어올리려고 찻간에서 여러 사람이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혼자 올라갈 수 있어요." 지바고는 차에 껑충 뛰어올랐다. 그는 몸의 균형을 바로잡더니 아내를 껴안았다. "아이, 이젠 됐어. 고마워요, 고마워." 토냐는 자꾸 되풀이했다. "무사한 줄은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다니?" "다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보초들이 일러주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견뎠겠어요? 아버님과 저는 미칠 것만 같았 어요. 저기서 깊이 주무시고 계시니 깨우진 마세요. 그렇게 흥분하시더니 세상 모르고 주무세요. 이제 새 손님이 몇 사람 생겼어요. 곧 소개해드리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뭐라 하는지 아세요? 모 두들 당신이 잘 빠져나왔다고 인사들이에요. 저기 저 분."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더니, 아내는 되돌아보며 찻간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새 손님 한 사람을 어깨 너머로 남편에게 소개했다. "삼제바코프라고 합니다." 폭신한 모자를 벗어 사람들의 머리 위로 쳐들고 붐비는 속을 뚫고 다 가왔다. '삼제바토프?' 지바고는 생각했다. '고대 민화에 나오는, 텁수룩한 수염에 짧은 소매의 적삼을 입고 장식이 달린 혁대를 맨 용사와 같은 이름이군. 헌데 희끗희끗한 고수머리, 콧수염, 턱수염, 이런 걸 보니 시골 예술가 클럽이 생각났다.' "그래 스트렐리니코프가 한바탕 을러대지 않던가요? 솔직히 말해주어요." 삼제바토프의 말이었 다. "아니오, 왜 그러시죠? 진지하게 얘기를 나눴습니다. 확실히 그는 패기 있고 뛰어난 인물이었어 요." "그렇겠지. 어떤 위인인지 짐작은 갑니다. 이 지방의 사람은 아니고, 당신들과 같은 모스크바 사람이에요. 우리한테서 신기한 것은 다 도시에서 수입한 것이니까. 우리로선 생각이 미치지 못하 는 거예요." "여보, 이 삼제바토프 씨는 모르는 게 없어요. 당신에 대해서도, 당신 아버님에 대해서도 알고 계세요. 우리 할아버지까지도. 정말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학교 선생을 하던 라라 안치 포프도 만나본 적이 있으시죠?" 토냐는 거리낌없이 물었다. 그랬더니 삼제바토프 역시 거침없이 대답했다. "라라 말씀이죠..." 지바고는 둘이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들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말 을 이었다. "이분은 볼셰비키래요. 유라, 조심하세요. 볼계비키들과는 말을 조심해야 하니까." "아니, 정말이오? 뜻밖인데요. 얼른 보아 예술가로 알았는데." "저의 부친은 여관을 경영하셨다오. 트로이카를 일곱 대나 가지 셨어요. 그리고 저는 고등 교육 을 받았고, 또 사실 저는 사회민주당원이랍니다." "여보, 안핌 예피모비치의 말을 들어보세요. 리언 말을 해서 미안합니다만, 당신의 이름을 발음 하려면 혀가 잘 돌지 않아요. 그런데 여보, 들어봐요. 우리는 아주 운이 좋았어요. 유라친 역에선 차를 내리지 못한데요. 거리에 불이 나고, 다리가 끊겨서 갈 수 없게 됐대요. 이 차는 다른 노선 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노선이 바로 우리가 가는 토르파냐야 노선이란 말예요. 당신 생각해 보 세요! 차를 갈아타느라고 짐짝을 이 정거장에서 저 정거장으로 온 거리를 끌고 다니지 않아도 돼 요. 그 대신 정말로 떠나기 전까지는 또 얼마 동안 기차가 선로를 바꾸느라고 왔다갔다할 거래요. 이분이 다 얘기해주셨어요." 4 토냐가 미리 말한 대로였다. 객차를 딴 열차에 연결시켰다고 하더니, 다시 떼어버렸다. 다른 열 차가 앞을 막고 있어서 자바고가 타고 있는 기타는 오랫동안 앞뒤로 움직이고 나서 들판으로 나 갔다. 저 멀리 도시의 반쯤은 경사지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가 지붕과 공장 굴뚝, 종합 위의 십자가가 지평선 위에 보인다. 이때 교외 지구의 한 군데에서 불이 났다. 바람결에 나부끼는 말의 갈기처럼 검은 연기가 하늘에서 너풀거렸다. 의사와 삼제바토프는 다리를 화물차 밖으로 내려뜨리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삼제바토프는 줄 곧 먼 곳을 손짓해 가면서 지바고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가끔 차가 요란스럽게 덜커덩 소리를 내 면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다시 묻곤 했다. 그러면 그의 귓전에 입을 대고 큰 소리로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저것은 영화관 '자이언트'가 불타고 있는 겁니다. 사관생도들이 그곳을 점령하고 있었으나 투 항해버렸어요. 그러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오, 종탑 위에 검은 점들이 보이지요? 저 사람들 이 우리편인데, 체코군을 저격하고 있어요." "저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 당신은 저곳까지 잘 보이나 보군요." "저기 불타고 있는 곳은 직공들이 살고 있는 호호리키 지구죠. 그 저쪽은 상가인 콜로제예보 지구인데, 우리 집이 거기에 있어서 걱정되는군요. 그러나 대단치 않은 불이 돼서 퍼지진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직까지 중심부는 무사하답니다." "뭐라구요? 안 들려요." "중심부, 도시의 중심부 말입니다. 교회당과 도서관 등이 있어요. 우리의 삼제바토프란 성은 산 도나토를 러시아 식으로 바꿔부르게 된 거래요. 우린 제미토프 가문의 후손이라오." "또 안 들려요!" "삼제바토프는 산 도나토에서 온 말이라고요. 우리는 제미토프 가문의 한 줄기로서, 제미토프 산 도나토 공작의 가문이라고들 하지요. 그러나 헛소리인지도 몰라요. 그저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 는 말이지요. 이곳 지명은 스피리킨 니즈라고 불리고 별장지에다 유원지죠, 정말 괴상한 이름이 죠?" 눈앞에는 들판이 펼쳐지고 여러 지선의 철길이 엇갈려 있었다. 전신주가 거인의 큰 걸음처럼 지평선에 뻗어나가 있고, 리본처럼 구부러진 넓은 한길이 철길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견주면서 지 평선 너머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저것이 유명한 간선 도로입니다.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있어요. 죄수들의 노래에서 불려지던 길 이죠. 지금은 빨치산의 작전 근거지로 돼 있어요. 하지만 그리 나쁜 고장은 아니랍니다. 이제 곧 정이 들게 될 거예요. 거리의 진기한 일들에 마음이 끌리게 되면서 말이에요. 네거리의 펌프장 같 은 곳은, 물을 길러온 여자들이 늘 줄을 짓고 있어서 겨우내 야외 집합소가 된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내에서 살게 되지 않을 겁니다. 바르이키노로 가는 길입니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볼일로 읍에 나오게 되는 일이 있지 않겠어요. 전 부인을 보고 한눈에 누 구인지 알아봤어요. 크류게르 영감님을 그대로 닮았더군요. 눈매, 코, 입술 할 것 없이 할아버지 그대로인걸. 여기 사람들은 누구나 다 크류게르를 잘 알고 있답니다." 들판 저쪽에는 붉고 둥근 석유 탱크와 높이 세워진 게시판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유라의 눈에 띄었다. '모로베트친킨 회사. 파종기, 탈곡기' 이라고 씌어있었다. "건실한 회사였지요. 일류 농기구 제작 회사지요." "뭐라구요? 들리질 않아요." "좋은 회사라구요. 아시겠어요? 좋은 회사란 말입니다. 농기구를 만드는 주식회사였지요. 우리 아버님도 주를 가지고 계셨답니다." "아버님은 여관업을 하셨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래요, 그렇다고 주를 가질 수 없는 건 아니지요. 그리고 그분은 빼놓지 않고 좋은 기업에는 투자해왔거든요. '자이언트' 영화관에도 투자했었지요."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것 같은 말투군요?" "아버님이 빈틈없는 분이란 걸 말이죠? 물론이죠." "그렇다면 당신의 사회 민주주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허참, 그게 무슨 상관이오?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해서 얼치기나 코흘리개 같은 노릇을 해야 할까요? 마르크스주의는 진정한 과학이며, 현실의 이론이며, 역사 철학이에요."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라구요? 잘 알지 못하는 분과 마르크스주의를 논한다는 것은 놈 경솔한 노릇이긴 하지만, 굳이 말씀드리나면,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으로서는 너무나 빈약합니다. 과학이라 면 균형이 잡혀 있어야 하는데, 마르크스주의에 객관성이 있습니까? 마르크스주의만큼 자기 본위 면서 또 사실을 떠난 운동은 없을 겁니다. 누구나 셀제에 있어서는 자기를 나타내려고 무진 애를 쓰지요. 그리하여 권력을 잡은 자들은 자기들이 절대로 틀림이 없다는 신화를 꾸미는 데 급급한 나머지, 진리를 무시하는 데에는 온갖 수단을 다 쓰거든요. 난 정치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나는 진실을 가볍게 여기는 자들을 싫어합니다." 삼제바토프는 유라의 말을 재치 있는 기인의 허튼 소리로 들어 넘기듯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반박하여 들지 않았다. 아직도 기차는 선로를 바꾸고 있었다. 허리띠에 우유통을 매단 아니 많은 여인이 신호수 당번 을 하고 있었다. 신호를 할 때면, 뜨개질을 집어치우고 몸을 굽혀 레버를 움직여서 기차를 후퇴세 켰다. 기차가 서서히 뒤로 물러가고 있을 때, 그녀는 똑바로 앉아서 기차를 향해 주먹을 내흔들었 다. 삼제바토프는 그녀의 거동을 자기한테 하는 짓으로 생각했다. "저 여자가 왜 저럴까? 낯익은 얼굴이야, 글라샤가 아닌가? 꼭 닮았어. 아니야, 나이가 너무 많 아 보이는걸. 어쨌든 왜 나더러 야단이지? 조국이 난리판에 있고 철도가 혼란 상태에 있으니까, 저 여딘도 고충을 겪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날 원망하고 있는 게로군! 에이, 제기랄! 그 여자 때문 에 머리를 썩히다니!" 마침내 그녀는 기를 흔들면서 기관사에게 뭐라고 소리지르고, 기차는 신호기를 지나 넓은 평야 로 나서게 되었다. 14호 차량이 지나가자 그녀는 화물차 바닥에 걸터앉아 서로 지껄이며 자기 신 경을 건드렸던 두 사람에게 혓바닥을 내밀었다. 삼제바토프는 다시 생각에 잠겨버렸다. 5 불타고 있는 교외와 둥근 석유 탱크, 전신주, 광고판들이 멀리 사라지고 숲과 높고 나지막한 언 덕의 경치가 보이고 이따금 넓은 한길이 보였다. 삼제바토프는 말을 꺼냈다. "우리 자리고 갑시다. 저는 곧 내려야합니다. 당신은 여기서 두 번째 정거장에서 내려야합니다. 지나치지 않도록 하시오." "이 고장을 당신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군요?" "잘 알고말고요. 1백 리 사방까지는 별로 모르는 일이 없어요. 저는 변호사올시다. 20년 동안 경험과 사업 그리고 여행뿐이랍니다." "지금도요?" "물론이죠." "요즘 같은 때에 어디 일거리가 있나요?" "얼마든지 있어요. 끝맺지 못한 과거의 거래라든지, 영업이나 계약 위반이니 하는 따위예요. 바 빠서 못 견딜 지경이랍니다." "그러나 그따위는 지금 모두 폐지되지 않았어요?" "명목상으론 그렇지요.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여러 가지 물건이 필요하고, 서로의 이 해 관계가 다르지 않습니까. 기업체 국유화라든지, 시 소비에트의 연료 문제, 지방경제회의에서는 운송 문제 등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살아나가야 하지요. 과도기의 특징은 이론과 실제 사이에 간격이 있드는 점이죠. 이런 때에는 나와 같이 약삭빠르고 재간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참 으로 모르는 게 다행이죠. 저의 아버님은 늘 말씀하시지만, 이따금 따끔하게 갈겨주는 것이 오히 려 약이 된다고 하셨죠. 이 지방의 반수는 제가 먹여 살리는 셈이죠. 곧 바르이키노에 제가 가게 될 겁니다. 그러나 당분간은 안 되겠습니다. 말을 타지 않고는 갈 수 없는데, 지금은 저의 말이 다리를 절고 있어요. 이 덜컥거리는 기차의 기어가는 꼴을 좀 보시오, 그래도 이름만은 기차라오. 바르이키노에서 저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찾아가는 미쿨리츠인 씨에 대해서는 제 다섯 손가락을 보듯 환히 알고 있어요." "우리가 왜 거기로 가는지 아십니까? 뭘하러 가는지?" "대개 짐작은 갑니다. 향토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영원한 동경이겠죠. 자기 손으로 꿈을 실현하 려는 거 말이오." "안 될까요? 못마땅하다는 말씀이신가요?" "천진하고 낭만적이긴 하지만, 어떻습니까? 잘 해보시지요. 그러나 저는 믿질 않습니다, 유토리 아나 미술 공예 같은 것은." "미쿨리츠인은 우리를 어떻게 대할 것 같습니까?" "당신들을 집안에 넣지도 않고, 빗자루를 휘둘러 쫓아낼 겁니다. 당연하지요. 그 사람은 지금 궁지에 몰려 있으니까. 공장은 서 있고, 노동자들은 도망쳐 버렸구요. 생계가 막막하고 식량이 떨 어진데다 당신네들이 훌쩍 나타나 보시오. 그 사람이 당신을 죽인다 해도 저는 그 사람을 나무랄 순 없어요." "그것 봐요. 당신이 볼셰비키라는 것을 당신 자신이 부정하지는 못하는군요. 지금의 현실은 사 람이 사는 게 아니라 미친 짓이고, 터무니 없는 악몽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소." "물론 그래요. 하지만 이것은 역사의 필연성이며, 이 고비를 이겨나가야 합니다." "왜 필연성이란 말이오?" "당신은 철부지 어린애가 아니면 괜히 이러시는 겁니까? 마치 달나라에서나 온 사람 같군요. 식성이 좋은 기생충들이 굶주린 노동자들의 등에 앉아섲 구을 때까지 부려먹어 왔어요. 그래, 이 런 일이 언제까지나 그대로 갈 줄 알아요? 그 밖에 불법과 횡포는 더 말할 나위도 없어요. 당신 은 민중의 분노, 정의와 진리에 대한 욕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잖으면 제정 국회 의 의회 절차를 밟아서 일대 혁신이 가능할 것 같소? 독재 없이 해나갈 수 잇다고 생각하시로?" "우린 서로 입장이 아르니까, 여기서 백년 떠들어봐야 의견의 일치는 못 볼 겁니다. 저도 한때 는 열렬한 혁명주의자였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폭력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해 요. 선을 가지고 선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런 이갸기는 이제 그만둡시다. 미쿨리츠인 댁 말인데, 우리가 그런 대접을 받을 거라면 뭣하러 가지요? 되돌아가고 말 일이지." "공연한 말씀. 우선 갈 데가 그 사람 집 아니면 없는 것도 아닐 테고, 다음은 미쿨리츠인 씨는 아주 착한 사람이예요. 처음에는 야단법석으로 거절하겠지만 결국 누그러지고, 나중에는 자기 셔 츠까지 벗어주고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까지도 나눠 먹을 위인이죠." 삼제바토프가 이야기했다. 6 미쿨리츠인은 지금부터 25년 전에 페트로그라드에서 이곳에 왔었다. 그는 공과 대학 학생이었 는데. 이곳으로 유배되어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된 것이다. 여기에 와서는 크류게르 회사 지배인이 되었고 또 결혼도 했다. 그 당시 투체프 댁에는 딸이 넷 있었는데 아그리피나, 아브도차, 글라피 라, 세라피마였다. 이들의 뒤꽁무니를 유라친의 온 남학생들이 줄줄 따르고 있었다. 이들을 부르 기 쉽게 세베란카라고 불렀다. 미쿨리츠인은 그 맏딸과 결혼했던 것이다. 얼마 안 되어 그들 사이 에 아들 하나가 태어났다. 우직한 아버지는 자유를 동경한 나머지 아들의 이름을 리베리라고 유 별나게 붙였다. 리베리를 약칭하여 리프카로 불렀으며, 개구장이로 컸으나 재간동이였다. 전쟁이 시작외었을 때 그 아이는 열 여섯 살이었으나, 나이를 속이고 지원병이 되어서 출전했다. 병약한 그의 어머니는 그 충격 때문에 자리에 누운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재작년, 혁명 전 해에 세상을 떠 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자 리베리는 훈장을 셋이나 받은 영웅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리고 물론 철저한 볼 셰비키 전선 대표가 되어 있었다. "당신은 '산림 의용대' 소식을 달어봤어요?" "아니 못 들었어요." "그렇다면 얘기해도 소용이 없겠군. 얘기할 흥미의 반은 없어진 거나 같으니까. 게다가 당신은 창밖의 한길을 내다볼 재미도 없어질 거고. 요즘 한길에서 제일 눈에 띄는 것이 뭡니까? 빨치산 이지요? 빨치산은 혁명군의 중추가 되고 있어요. 혁명군의 세력을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어요. 하나는 혁명의 지도권을 장악한 정치 조직이고, 또 하나는 전쟁 후 구권력에 항거하였던 보통 사 병들이오. 빨치산 부대는 이 양자가 합류하여 탄생하게 되었답니다. 대개는 중류 농민이지만, 별 별 족속들이 다 끼여 있어요. 빈농, 교회에서 쫓겨난 신부, 자기 아버지에게 총부리를 돌렸던 부 농의 자식들이 있고, 또 꿈 같은 걸 생각하는 무정부주의자, 정치 따위에 눈이 먼 빈민, 여자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다 퇴학당한 조숙한 남학생들도 섞여 있구요. 또한 자유를 주고 순환시켜준 다는 약속에 끌려서 온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의 포로들. 이렇게 이루어진 민중의 큰 부대의 하 나가 산림 의용대란 말이오. 그 지휘관이 레스느이치 동무이고, 그 사람이 바로 미쿨리츠인의 아 들 리프카, 즉 리베리란 말이오." "정말 그래요?" "정말이고말고. 그렇다면 얘길 계속할까요? 미쿨리츠인은 상처하고 나서 재혼하게 되었다오. 새 부인 레노치카는 할교를 갓 졸업하고 결혼했지요. 레노치카는 천성이 순진한 여자이지만 지나치 게 순진한 체하지요. 아직 젊은 여자가 벌써부터 더 젊은 체하면서 재잘거리고 까불고 아양을 떨 면서 애티를 부리곤 해요. 사람을 만나면 곧잘 시험을 치르려고 든다오. '수보로프의 생일이 언제 냐?' 라든지, '어찌하면 두 개의 삼각형이 같게 되는가?' 따위로. 그리고 이런 질문에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면 아주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한답니다. 하여간 몇 시간 후에는 당신도 그 여자를 확인하게 될 겁니다. 남편이라는 사람도 괴물이라오. 본래 선원이 되려고 대학에서 조선 공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어 요. 그의 몸가짐이나 버릇이 선원과 똑같다오. 언제나 말쑥하게 면도를 하고는 입에서 파이프를 떼는 법이 없고, 파이프를 문 채 다정한 목소리로 천천히 이야기를 합니다. 파이프를 피우는 사람 에게서 흔히 보듯 아래턱이 앞으로 나와있고, 사늘한 잿빛 눈을 가진 사람이오. 그렇지, 잊을 뻔 했군. 그는 한때 사회 혁명 당원이었으며 제헌 국뢰의 대의원으로 지방에서 선출되었지요." "그것 참 큰 문제로군. 아버지와 아들이 견원지간의 정적이 되었으니 말이오!" "하긴 그렇지만, 그러나 실제 밀림과 바르이카노 사이에 싸음은 없습니다. 어쨌든 얘기를 좀더 할까요? 툰체프 댁의 나머지 세 따님들, 그러니까 미쿨리츠인의 첫 부인의 동생들은 지금도 유라 친에 살고 있는데 셋 다 노처녀라오. 세월이 변하면 처녀들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제일 손위의 아브도차는 시립 도서관에서 도서계 직원으로 있지요. 좀 검은 피부에 예쁘장한 아가씨인데 몹시 수줍음을 타서 걸핏하면 얼굴이 새빨개진다오. 도서관은 묘지처럼 조용한 곳이 랍니다. 그녀는 1년 내내 감기에 걸려서 연방 재채기를 하면서 구멍이라도 있으면 그 속으로 숨 어버릴 표정이었어요. 아마 신경이 과민한 상태 같아요. 그 밑의 동생 글라피라는 이 집안의 복덩이랍니다. 활발하고 일 잘하는,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 로 척척 해내는 여자지요. 사람들 얘기는, 산림 의용대장 레스느이치가 그의 이모를 꼭 닮았다는 겁니다. 한때는 양재사 일을 하는가 하면, 양말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고, 그런가 했더니 또 어느 새 미용사 노릇을 하고 있었어요. 아까 신호대 옆에서 우리한테 주먹을 휘두르던 여자 보았지요? 그때 나는 글라피라가 이번에는 철도의 일을 하게 된 줄로만 알았어요. 그러나 조금 다르다고 생 각됐어요. 나이가 좀 많아서. 그 다음 막내딸 시무슈카는 이 집의 십자가랍니다. 두퉁거리예요. 교양이 있고 독서도 많이 했 답니다. 철학을 공부하고 시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혁명이 일어난 후, 세상이 뒤끓어 연설이다, 시 위 행렬이다 하는 북새통에 머리가 돌아서 지금은 종교 미치광이가 다 됐답니다. 두 언니가 일하 러 나갈 때면 으레 시무슈카를 방에 가두어 놓았지만, 그녀는 창문을 뛰어넘어, 길거리에 나와 사 람들을 모아놓고는 그리스도의 제2의 강림이나, 세상의 종말이 닥쳐왔다느니 한다는 겁니다. 이제 그만 지껄여야겠군. 난 여기서 내려야겠습니다. 당신네는 다음 정거장이오. 이젠 내릴 준빌르 하 세요." 삼제바토프가 기차에서 내리고 나자 토냐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렵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몰라도, 내 생각은 그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 무슨 좋은 인 연인 것 같아요. 틀림없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럴지도 몰라. 그런데 토냐, 모두가 당신이 크류게르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스트렐 리니코프까지도 내가 바르이키노 이야기를 하니까, 대뜸 불쾌한 얼굴로 우리가 크류게르의 재산 상속인인가 묻기까지 하더군. 우리는 남의 눈을 피하려고 모스크바에서 도망쳐왔는데, 여기 오니까 오히려 드러나 보이니 말 이오. 이제는 별 도리가 없어, 일은 이미 저질러진 거니까. 하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숨어서 행동 을 조심하는 게 좋겠어. 도무지 불쾌한 예감만 자꾸 들어요. 이제 다 왔나보오. 내릴 채비를 서둘 러요." 7 토르파나야 역 플랫폼에서 토냐는 찻간에 두고 내리는 짐이 없도록 가족과 짐을 몇 번이나 다 시 세어 보곤 했다. 그녀는 플랫폼의 단단히 다져진 모래땅을 밟고 감촉하면서도, 기차가 역을 지 나쳐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기차가 눈앞에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도 그녀의 귓전에는 차바퀴의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그녀는 주위의 것을 보거나 듣거나 의식 하지 못했다. 더 여행을 계속할 승객들이 높은 화물 찻간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토냐는 여념이 없었 다. 그녀는 기차가 움직이는 것도 모르고, 기차가 사라진 노선 너머에 푸른 들판과 파란 하늘이 시선을 끌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기차가 떠나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역의 건물은 석조였다. 입구 양쪽에 벤치가 두 개 놓여 있었다. 토르파나야 역에 내린 모스크바 손님은 지바고네 가족밖엔 없었다. 그들은 짐을 내려좋고 벤치에 걸터앉았다. 한적하고 조용한 정 돈된 역이 그들의 가슴을 짜릿하게 했다. 군중들에 둘러싸여 욕지거리가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 하게 느껴졌다. 역사는 이 외딴 시골 생활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곳은 아직 수도의 야만 생활로 변하진 않았다. 역은 자작나무 숲이 우거져 그 속에 감춰져 있었다. 기차가 그 속으로 들어올 때 찻간에는 어 둠이 깃들이게 되었다.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나무 그림자가 그들의 손과 얼굴에 그리고 플랫폼의 깨끗하고 눅눅한 모 래 위에, 또 땅과 지붕 위에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숲속에서는 우짖는 새소리가 시원하게 들려 왔다. 맑고 깨끗한 그 울음 소리는 온 숲속에 울려 메아리쳤다. 숲을 꿰뚫고 있는 두 갈래의 길. 철길과 시골길은 긴 팔소매처럼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그림자 가 깃들어 있었다. 이때까지 멍멍했던 토냐의 눈과 귀가 트이게 되었다. 한꺼번에 그녀는 모든 것 을 의식하게 되었다. 울려 퍼지는 새의 울음소리와 맑은 숲의 고요와 조용히 흐르는 정적이 감돌 았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무사히 도착하게 된 것이 꿈이 아니었구나. 남편을 잡아간 스트렐리니코프는 아량을 베푼 채 석방해놓고, 우리가 차에서 내리는 즉시 우리를 잡아두라고 전 보를 칠 수도 있었다. 그들은 고상한 감정을 가졌다고 믿을 순 없고, 모두가 다 기만이야.' 그러나 눈앞의 신비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아, 참 아름답구나!" 하고 탄식 이 터져나오면서 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어 아무 말 없이 점차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토냐의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듣고 역장 제복을 입은 노인이 역 구내에서 천천히 다가왔다. 위가 빨간 제모를 쓰고, 그 챙에 한 손을 얹어 인사를 하면서 정중히 물었다. "젊은 귀부인께 진정제라도 드릴까요? 정거장 구급 약통에 조금 있을 겁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여행에서 오는 불안과 걱정 때문이겠지요. 흔히 있는 일이죠. 게다가 아프리카와 같은 이 더위 는 여기에서도 흔히 있는 일은 아니랍니다. 더욱이 유라친에서 일어난 사건은 말씀드릴 것도 없 구요." "기차를 타고 오면서 불붙는 것을 보았어요." "실례입니다마는 러시아에서 오셨나요?" "모스크바에서 왔어요." "모스크바에서요? 그렇다면 부인의 심경이 과민하신 것도 당연하지요. 모스크바는 쑥밭이 되었 다더군요." "괜히 과장해서 하는 소리지요. 그러나 정말 여러 가지 일을 다 구경했다오. 이애가 내 딸애고, 이 사람이 내 사위고, 그리고 애들이고, 저 사람은 유모 뉴샤올시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매우 반갑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참이랍니다. 삼제바토프 씨가 삼카에 서 전화를 걸어왔었다오. 지바고 선생이 가족을 데리고 모스크바에서 오시니까, 잘 돌봐드리라고 했어요. 바로 그분들이시군요?" "아니오, 지바고는 내 사위랍니다. 저기 저 사람이오, 나는 농학 교수 그로메코라고 합니다." "실례했습니다. 뵙게 되어서 대단히 반갑습니다." "그러시다면 삼제바토프를 아시나요?" "모를 리가 있습니까, 우리 생명의 은인이지요.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 릅니다. 벌써 다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에게 되도록 편의를 봐드리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 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드렸답니다. 그러면 말이든 뭣이든 필요하신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어디 로 가시는 겁니까?" "우린 바르이키노에 갑니다. 여기서 먼가요?" "바르이키노? 그렇군, 저는 아까부터 선생님 따님을 어디서 뵌 분이라 생각했어요. 바르이키노 로 가시는군요! 그러면 다 알겠어요! 크류게르 노인과 저와 둘이서 이 길을 닦았답니다. 곧 말과 사람을 불러서 마차를 알아보겠습니다. 도나트! 도나트! 이 짐들을 잠깐 대합실에 갖다두어요. 그 리고 말은 있어요? 찻집에 가서 얼른 알아봐요. 오늘 아침 바커스가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아직도 있는지 보고 와요. 바르이키노에 가실 손님이 제 분 계시다고 하고, 지금 막 도착하셨는데 짐도 얼마 없고 급하다고 해요. 그런데 부인, 이건 아버지와 같은 사람의 충고인데, 크류게르 노인과 얼마나 가까운 관계인지 묻지는 않겠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아주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이런 시기에는 말입니다." 바커스라는 이름을 듣자 그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무쇠로 만든 내장을 끼웠다는 대장장이 이야기와 이 지방의 많은 전설을 안나 부인이 이야기하던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8 그들을 태운 말은 최근 새끼를 낳은 흰 말이었으며, 마부는 헝클어진 백발에 마치 콘도르처럼 생긱 노인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노인의 모든 것은 흰 것뿐이었다. 그의 새 신발은 양말보다 희 고, 셔츠나 바지는 오래 입어서 희끗희끗 바랬다. 장난감같이 생긴 검은 새끼말이 흰 어미말을 따 라서 짧게 곱슬거리는 갈기를 흔들며 뼈가 연한 다리를 내차면서 달려가고 있었다. 마차가 바퀴 자국에 덜컹거리고 흔들릴때마다 타고 있는 사람들이 마차 옆으로 달라붙었다. 그들은 마음이 편 하고 여행도 거의 끝나가면서 꾼이 실현돼 가고 있었다. 화사한 하루가 아름답게 저물어가는 시 간은 끝없이 넓고 화려한 한 나절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마차는 때로는 숲속을 빠져나가며, 때로는 넓은 들판으로 달리고 있었다. 숲을 지날 때 차바퀴 가 나무 뿌리에 부딪쳐 심하게 흔들릴 적마다, 그들은 상을 찌푸리며 서로 어깨를 맞대고 붙어 앉았다. 그러다가도 하늘이 탁 트인 넓은 들판으로 나오게 되면, 그들은 다시 꼿꼿한 자세로 고쳐 앉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산이 많은 지대로서, 산들은 언제나 변함 없는 표정을 지으며 저 멀리에서 오만한 그림 자처럼 검은 모습으로 말없이 길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미빛 따스한 빛이 들판으로 여행자의 뒤를 따라, 그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마음에 흡족했으며 신기하기만 했다. 더욱이 괴산한 늙은 마부의 끊임없 이 지껄거리는 말투가 마음에 들었다. 고대 러시아 어체와 타타르의 사투리, 거기에 지방 사투리, 그의 독특하고 괴상한 말투가 기묘하게 뒤범벅되어 있었다. 새끼말이 뒤로 떨어질 때마다 어미말은 걸음을 멈추며 기다렸다. 그러면 새끼말은 파도치듯 예 쁘게 춤추며 따라와서는 긴 다리를 지나칠 정도로 붙이고 이상한 걸음걸이로 마차에 접근하여 긴 목을 내밀어 끌채 밑으로 작은 머리를 갖다대고 어미 젖을 빨아댔다. 토냐는 마차의 동요로 이빨이 마주쳐서 갑작스레 크게 움직이면 혀끝이라도 깨물어 버릴 것 같 아 두려워하며 남편에게 소리질렀다. "이상하죠. 어머님이 말씀하시던 바커스가 이 사람일지도 몰 라요. 당신 생각나시죠? 싸움에서 복부가 망가지니까, 제손으로 새 것을 만들어 끼웠다는 대장장 이 이야기 말이에요. 철의 배를 가진 바커스 얘기는 물론 엉터리 이야기지만. 하지만 혹시 이 사 람의 얘긴지도 몰라요. 이 사람이 바로 그 바커스가 아닌까요?" "그럴 리가 있겠어? 우선 당신의 말과 같이 터무니없는 전설에 지나지 않아요. 벌써 백 년이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고 어머님도 말씀하셨어요. 너무 큰 소리로 얘기하지 말아요. 노인이 들으 면 기분이 상해요." "듣지는 못해요. 귀가 먹었나 봐요. 들었다 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거예요. 머리가 좀 이상하더군요." "이봐, 표도르 네페드이치!" 어찌된 일인지 노인은 남자 이름으로 말을 불렀다. 그 말이 암말이 라는 것은 자기뿐만 아니라 타고 있는 사람들도 물론 다 알고 있었다. "웬걸 이렇게 덥담! 뜨거운 가마솥에 들어앉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처럼! 제기랄, 이놈아! 너보고 하는 소리야, 마제파!" 노인은 이전에 여기 공장에 다닐 때 지어 부르던 노래 몇 구절을 느닷없이 부르는 것이었다. 잘 있거라, 사무실아 잘 있거라, 굴라 광산아 주인이 빵도 이젠 그만, 물을 마시는 것도 역겨워졌다네. 물가에 백조가 헤엄쳐 지나가며 물 위에 여울을 남기는데 내가 흔들리는 건 술 탓이 아니야 바냐가 군대에 갔기 때문이지. 하나 나 마샤는 꺾이진 않아, 그리고 나 마샤는 바보가 아니야. 나는 간다, 세랴바로. 센체추리하에 일하러 간다. "제기랄, 망할 놈의 짐승아! 여러분, 이 썩은 망아지를 보아요. 내가 채찍질하면, 오히려 날 깔 보지 않소! 이것 봐 페쟈, 넌 가려는 거냐? 저 숲을 여기선 따이가라고 부르고 끝이 없는 곳이란 다. 그 안에는 농민들이 힘이 있고 산림 의용대가 있단다. 이야, 페쟈, 도 멈췄군, 빌어먹을 놈!" 그는 갑자기 몸을 뒤돌려 토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젊은 부인, 당신이 누군지 내가 모르고 있는 줄 아시오? 부인, 나는 그것쯤은 훤히 알고 있다 오. 천지가 뒤바뀌기 전에는 나의 눈은 틀림이 없단 말이오! 나는 여우한테 홀리지나 않았나 싶었 단 말이오. 당신은 그리코프와 꼭 닮았어요. 당신은 그리코프의 손녀가 아니시오? 그 집안 일이라 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단 말이예요. 난 일생 동안을 그의 밑에서 일해 왔으니까. 여러 가지 일 을 닥치는 대로 해왔습지요. 탄광에서 목수 일도 하고, 땅 위에선 원치에 붙어 일하기도 하고,마 구간에서도 일했답니다. 이랴, 가자! 또 서다니, 다리가 없나! 내 말이 안 들려? 헌데 당신은 내가 그 대장장이 바커스가 아니냐고 물으셨지요. 당신은 정말 어리석은 분이군요. 그렇게 큰 눈을 가진 귀부인이면서 바보군요. 당신이 말하는 바커스란 포타노고프라는 철의 내장 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벌써 50년 전에 죽어버렸어요. 내 성은 매호닌이라오. 둘 다 이름은 같아도 성은 달라요." 이윽고 노인은 미쿨리츠인 집안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으나, 그것은 거의 삼제바토프한테서 이미 들었던 대로였다. 그는 미쿨리츠인 부부를 미쿨리치와 미쿨리치나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 미꿀리 치나를 관리인의 후처라고 부르고, 첫째 부인을 천사니 백의천사니 하고 불렀다. 이야기는 빨치산 부대의 지도자 리베리에 이르자, 그의 명성이 모스크바에 알려져 있지 못한 점과 산림 의용대가 알려지고 있지 않다는 소리를 듣고는 자기 귀를 의심하듯 놀랐다. "듣지 못했어요? 레스느이치 동무의 이야기도 못 들었단 말이오? 제기랄! 모스크바에서는 귀를 뒀다 어디에 쓴담!" 날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마차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면서 앞으로 내달았다. 나무도 없는 평탄 한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명아주와 꽃송이가 달린 버들풀, 엉겅퀴의 홀쭉한 줄기가 쓸쓸하게 자라고 있었다. 언덕 위에 제멋대로 자라난 화초의 망령 같은 그림자들이 들판을 감시 하는 경비병처럼 보였다. 멀리 전방에는 들판의 높은 언덕이 이어져서, 그것이 마치 벽처럼 길을 가로지르고 그 너머에 는 골짜기 아니면 시내가 흐를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그쪽 하늘이 성벽으로 둘러싸이고 길이 성문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그 언덕 위에 기다란 흰 단층집이 보였다. "저 위에 집이 보이지요?" 바커스가 말했다. "미쿨리치와 미쿨리치나가 살고 있는 집이예요. 그 리고 그 아래 골짜기를 슈치마라고 불러요." 언덕 저쪽에서 두 방의 총성이 들리고 그 뒤를 이어 메아리가 울렸다. "저건, 뭐 뭐예요? 빨치산이 우릴 보고 총질하는 건 아니겠지요, 할아버지?" "천만에요. 빨치산이라니. 스체파느이치가 계곡에서 이리떼를 쫓고 있을 겁니다." 9 미쿨리치인 부부와의 최초의 해후는 관리인의 집 마당에서 있었다. 침묵으로 시작되었다가 떠 들썩하게 혼란에 빠진 이 해후는 고통스러운 광경이었다. 엘레나 프로클로브나는 숲 속의 산책에서 돌아와 마당을 지나고 있었다. 그녀의 금발처럼 석양 의 황금빛이 숲속 나무에서 나무로 옮겨가면서 그녀의 뒤를 좇고 있었다. 그녀는 가뿐한 여름 옷 을 입고 있었다. 산책에서 돌아와 얼굴의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목에 고무줄로 매단 밀짚 모자 가 그녀의 등뒤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골짜기에서 금방 기어 올라와서는 그녀를 만나려고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 든 총의 삽탄 장치가 제대로 돼 있지 않는 걸로 보아서 집에 돌 아와 총을 고치려는 것 같았다. 이 평화스러운 정경을 갑자기 뒤흔들면서 바커스는 바퀴 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면서 자갈길을 달려 마차의 선물을 날라왔다. 손님들은 재빨리 마차에서 내렸다. 그로메코 교수는 모자를 벗어들었다 썼다 하면서 설명을 시 작했다. 부부는 아연 실색하여 얼마 동안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손님들은 몹시 무안한 기분에 창 피한 나머지 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얼굴이었다. 무슨 설명을 한다 해도 당사자들뿐만이 아니라 사센까나 뉴샤, 바커스에게까지도 사태는 뻔한 것이었다. 그들의 괴로움은 대화와 황금빛 석양, 엘레나 프로클로브나의 주위를 감돌아 얼굴과 목덜미에 달라붙는 모기들에게까지도 전해진 것 같았다. 침묵은 드디어 마쿨리츠인에 의하여 깨뜨려졌다. "나는 알 수 없어요.정말 모를 일입니다.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 같군요. 남부에는 백위군이 있 고, 식량도 충분한 고장이지요? 그런데 하필 여기, 우리 집을 찾아오게 된 이유는 뭣입니까?" "이것이 미쿨리츠인에게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생각해 보셨어요?" "레노치카, 참견하지 말아요. 정말 우리 집사람 말이 맞아요. 당신네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짐이 될지 생각해보았어요?" "아니, 당신들은 우릴 오해하고 있어요.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우리는 당신들의 평화스러운 생 활에 뛰어들어서 시끄럽게 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우리가 고작 바라는 것은 아주 작은 거 예요. 아무도 살지 않는 낡은 집 한 구석을 차지하고 쓸모없이 버려진 황폐한 땅에 채소나 좀 가 꿀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숲에서 나무나 끌어오면 되구요. 이것이 다 랍니다.지나친 요구일까요? 부담이 된단 말입니까?" "그건 그래요. 하지만 세상은 넓답니다. 왜 이런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는 주지 않고, 하필 우리 가 받아야 합니까?" "그건 우리가 당신네를 알고, 당신네들도 우릴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우리는 서로 남 남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크류게르 때문이군요! 당신네들은 그분과 친척이 되시죠? 그러나 지금 그런 걸 다 다질 땐가요?" 그는 균형이 잡힌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넘기고 큰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다니고 있 었다. 여름에는 루바시카를 입고 수술이 달린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그는 아주 옛날 같으면 하적 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현대에 와서그러한 인물은 만년 대학생으로서 책 속에 파묻혀 사는 몽상 가로 되었을 것이다. 미쿨리츠인은 해방 운동과 혁명에 청춘을 바쳤다. 유일한 걱정거리는 혁명이 일어날 땎지 살아 갈 수가 있을까, 또 설사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온건하여 철저한 것이 못 되지나 않나 걱정이 되 었다. 그런데 막상 혁명이 일어나고 보니 이때까지 생각했던 그의 미지근한 꿈보다 그것은 더 격 렬한 것이었다. 그는 스바토고르 바가트이리에서 최초의 공장위원회를 조직한 한 사람이었으나, 시대 조류를 타지 못하고 버림받고 있었다. 그래서 앞장서서 일하지 못하고 벽촌에 쫓겨나 있었 다. 이 부락에서는 노동자의 일부가 멘셰비키 편에 서서 이 고장을 떠나버렸다. 거기에 지금 이 구질구질한 크류게르의 집안 사람들이 불청객으로 밀어닥친 것은 운명의 장난이거나, 참을 수 없 는 고의적인 모략이 아닌가. "일이 참 괴상하게 되어가는군. 이것이 나를 얼마나 위험에 몰아넣게 되는지 아십니까? 난 정 말 정신이 없어요. 뭐가 뭔지 알 수 없군요. 통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찌될지 예측할 수 없어요." "여러분이 여기 오시지 않아도 우린 화산 꼭대기에 앉아 있는 거나 다름 없었어요. 아시겠어 요?" "잠깐, 레노치카. 집사람이 말한 대로 여러분이 오지 않아도 우리는 개처럼 살아온 미치광이의 집안이랍니다. 줄곧 앞뒤의 불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나의 아들놈이 공산당 볼셰비키 가 되어서 민중의 총아라고 떠벌여대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또 딴 패들은 내가 제헌 국회위원으 로 당선된 것을 이러쿵저러쿵하는데 그 틈바구니에 끼어서 꿈쩍도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오. 다들 나를 적대시하기 때문에 배겨날 도리가 없어요. 이런 판국에 도 당신들이 찾아들었소! 고맙게도 당신들 때문에 총살대 위에 서게 됐단 말이오!" "무슨 소릴 하시오! 정신 차려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잠시 후 미쿨리츠인은 좀 누그러졌다. "자, 밖에서 다투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집안으로 들어갑시다. 물론 들어간다고 좋은 일이 있을 건 아니지만, 쓸데없이 이러고 있을 순 없지 않아 요. 그리고 우린 야만적인 이교도가 아니니까, 당신네들을 숲속으로 쫓아서 미하일로 포타프이치 의 밥이 되게 할 수는 없어요. 여보, 서재 옆방으로 이분들을 안내해요.아주 자리잡을 곳은 나중 에 정원 어디에 찾아보기로 하지요. 자, 들어오십시오. 바커스, 이분들의 짐을 옮겨 주구려." 바커스는 투덜거리면서 시키는 대로 짐을 들고 왔다. "어찌된 노릇입니까! 순례자보다 짐이 적 으니! 작은 보따리뿐이고, 트렁크 하나 없으니." 10 밤에 날씨가 차가워졌다. 손님들은 세수하고, 여자들은 옆방에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쌰사의 말재롱을 즐거워하던 예전의 습관대로, 어린애는 오늘 저녁에도 재롱을 부려댔으나 아무도 못 들 은 척하면서 상대해주질 않았다. 싸샤는 검은 새끼말을 집 안에 들여놓지 않은게 불만이었다. 짜 증을 내는 아이에게 조용하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금세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싸샤는 아빠 와 엄마가 농으로 하는 말을 곧이 듣고서 애기를 파는 상점에 자기를 데려가지나 않나 걱정이 되 었다. 어린애는 정말 무서워서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순진한 재롱을 부렸으나, 다른 때와 는 달리 조금도 신이 나지 않았다. 남의 집 신세를 지고 있는 탓인지 어른들은 그저 묵묵히 자기 일에만 여념이 없었다. 이래서 싸샤는 화가 나서 실쭉했다. 간신히 밥을 먹고 잠자리에 누었다. 마침내 잠들자, 이 집 하녀 우스치냐는 뉴샤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가서 저녁을 주고 집안의 할 소리 안 할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토냐와 남자들은 미쿨리츠인 부부와 차를 같이 들기로 했 다. 그로메꼬 교수와 지바고는 바람을 쏘이려고 베란다로 나갔다. "별도 많군!" 그로메코 교수가 말했다. 바깥은 몹시 어두웠다. 불과 두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도 사위와 장인이 서로 알아볼 수가 없었 다. 방아느이 등잔 불빛이 창문으로 새어나와 그들 뒤에서 골짜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빛에 크 고 작은 나무들이 차가운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빛의 밖에 있었으 므로 그 주위의 어둠이 한층 진하게 느껴졌다. "내일은 아침부터 우리한테 빌려준다는 별채를 보고 와야겠네. 그리고 웬만하면 곧 수리를 시 작해야겠어. 그럭저럭 정리도 되고 따뜻한 계절이 오면, 시간을 허송하지 말고, 밭을 가꾸어야 해. 씨감자를 줄 듯이 말하던 것 같았는데, 잘못 들은게 아닌지 몰라?" "말하는 걸 저도 들었어요. 다른 씨앗도 주겠다고 하더군요. 저도 들었어요. 우리한테 빌려주겠 다던 장소는 공원을 지나서 있어요. 어딘지 모르시겠어요? 주인집 뒤에 있는 별채인데, 엉겅퀴 때 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주인집 큰채는 석조 건물이고 별채는 목조랍니다. 생각나세요? 마차에서 제가 가르쳐드렸는데, 묘상하기에 알맞은 곳이었어요. 이전에 화원 자리 같았으며, 멀리서 자세히 는 알 수 없었으나 아마 화원이 있었던 자리라면 거름이 잘 돼 있어서 거름기가 지금도 남아 있 을지도 모르겠어요." "글세, 난 잘 모르겠어. 내일 가보세. 잡초가 우거져서 아마 돌처럼 굳어 있을지도 몰라요. 이 집 채소밭이 어디 있을 텐데. 그것을 우리도 같이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내일 알아보기로 하지. 아마 아침마다 아직은 서리가 있을 걸세. 오늘 밤엔 틀림없이 서리가 내릴 거야. 어찌됐든 우리가 여기에 있게 되어 다행이야! 서로들 감사해야겠어. 여긴 좋은 곳이야, 마음에 들었어." "사람들이 좋았어요. 더욱이 주인 양반은 좋은 분이었어요. 부인은 건방진 데가 있는데다가 자 기 불만 같은 게 있더군요.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말이 많고, 아주 어리석게 보여요. 마치 나쁜 인상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서 일부러 상대방의 주의를 딴곳으로 돌려보려는 듯이 서두르는 것 같 았어요. 그리고 모자를 목에 걸어두고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다니는 꼴은 오히려 그 여자에게 잘 어울려요." "자, 돌아가세. 예의가 없다고 하지 않겠나." 식당에는 천장에 걸려 있는 등잔불 아래 놓인 둥근 식탁에 주인 부처와 토냐가 사모바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거기로 가면서 두 사람은 미쿨리츠인의 서재를 지났다. 서재에는 골짜기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별채만큼 큰 창문이 있었다. 지바고는 아까 날이 밝을 때, 이 창문에서 골짜기와 바커스의 마차를 타고 오던 저편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창가에는 널따 란 제도용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총을 놓아두고도 여유가 있어 보일 정도로 꽤 넓 은 책상이었다. 지금 지나오면서 지바고는 다시 한 번 전망이 좋은 창문, 책상의 크기와 위치, 그리고 가구와 설비가 잘 된 이 방의 널찍한 면적을 부러워했다. 그는 식당에 들어서자 서재 이야기부터 꺼냈다. "참 좋군요. 서재가 훌륭합니다. 영감이 떠올라 연구에 열을 낼 수 있을것만 같군요." "차는 글라스로 하실까요, 찻잔으로 하실까요? 그리고 어떤 걸 좋아하세요. 지하게 할까요?" "유라, 이걸 보아요, 실체경이예요. 미쿨리츠인 씨의 아드님이 만든 거랍니다." "그애는 아직 어린애랍니다. 지금도 차분하질 못해요. 소비에트 정권을 위해서 코무치로부터 점 차 지역을 탈환증이랍니다." "코무치가 뭡니까?" "시베리아 정부의 군대인데 제헌 의회를 부활시키기 위하여 싸우고 있지요." "우리는 하루 종일 선생님의 아드님 칭찬을 들어왔답니다. 무척 자랑스럽겠습니다." "이 우랄 지방 풍경 사진도 그 애가 제손으로 직접 만든 사진기로 찍은 거랍니다." "먹음직스러운 케이크군요. 사카린을 넣어 만드셨나요?" "천만에! 이런 벽촌에 사카린이 다 뭡니까? 순전히 설탕으로 만든 겁니다. 제가 차에 설탕을 타 는 걸 보시지 않았어요?" "그렇군요. 전 사진을 보고 있어서 못 봤어요. 차도 진짜 같군요." "그럼요. 소형차랍니다." "어디서 구하셨어요?" "마법사 비슷한 사람이 여기 오지요.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인데, 새로운 타입의 사람이지요. 아 주 좌익이며, 지방경제위원회의 공식 대표랍니다. 그는 우리 목재를 읍으로 가져가서, 자기가 아 는 사람을 통해서 밀가루나 버터를 갖다주어요. 설탕 그릇 좀 줘요. 시베르카, 그럼 재미있는 문 제를 낼까요? 그리보예도프가 사망한 해를 기억하고 있어요?" "그는 1795년에 출생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피살된 해는 정확히 알 순 없소." "차를 더 드시겠어요?" "그만하겠어요." "이번엔 우스운 문제를 내겠는데, 님베겐 조약이 체결된 시기와 국가는요?" "레노치카, 그분들을 괴롭히지 말아요. 오시느라고 피곤하실 텐데..." "그럼, 이것만 물어보겠어요. 렌즈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리고 어느 경우에 영상이 제대로 또 반대로 나타나지요?" "물리학에 대해서 어쩌면 그렇게 많이 알고 계시죠?" "유라친 우리 학교에는 훌륭한 과학 선생이 계셨어요. 남자 학교와 우리 학교를 같이 가르쳤어 요. 그 선생이 어떻게나 좋았든지 말할 수도 없었어요. 얼마나 똑똑히 설명하시는지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말이에요. 안치포프라는 분이었는데 어떤 여선생과 부부였어요. 여학생들이 모두 넋을 잃고 그 선생을 사모했어요. 선생은 군에 자원했는데 돌아오지 못하고 얼마 후 전사했다는 거예 요. 어떤 사람들은 천벌을 받아야 할 군사 위원 스트렐리니코프가 안치포프 선생이 되살아난 망 령이라고 하지만, 그건 허튼 소문이죠. 어림도 없는 소리지. 한 잔 더 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