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 저자 : 막심 고리키 지음 / 안의정 옮김 출판사 : 맑은소리 차례 어느 가을날 7 마카르 츄드라 25 이제르길리 노파 59 아르히프 노인과 뇨니카 105 저자 소개 막심고리키는 현재 고리키시로 불리고 있는 볼가강 연안의 니즈니 노브고르드에서 1868년에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잃은 그는 외할머니와 함께 어린시절을 보내면서 자상한 외할머니로부터 많은 민간전설을 전해듣는다. 소학교를 3년만에 중단한채 정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하고 구두공장의 심부름꾼과 접시닦이등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였고, <유년시대>라는 소설을 통해 그때의 체험을 그대로 그려냈다. 24세가 되는 1892년 방랑생활중에 민간전설을 토대로 지은 혁명적 낭만주의 작품인 단편소설 <마카르 츄드라>를 "카프카즈"지를 통해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첫발을 내딛는다. 이때 그는, 본명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빼쉬코프'라는 본명을 버리고 막심고리키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1895년 27세때 러시아의 암울한 현실을 폭로하고 인류해방을 선도할 영웅을 기린 <이제르길리 노파>와 <어느 가을날>을 발표했다. 1905년 <피의 일요일>로 투옥되었다가 세계 지식인들의 항의로 석방되어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카프리섬에 머물면서 집필을 시작하여 1907년 국외에서 출간된 장편소설 <어머니>가 1912년 모스크바에서 그리보예도프상을 받았으며 1914년 귀국하여 <새생활>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건강문제로 다시 이탈리아로 터전을 옮긴 그는 <고백><이탈리아 이야기>들을 집필 하였다. 66세가 되던 1934년에 소비에트 작가동맹 초대의장으로 추대되었으나 1936년에 @중복된 문장 소비에트 작가동맹 초대의장으로 추대되었으나 1936년 장편소설 <끌림쌈긴의 생애>를 집필중 그의 나이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어느 가을날 ---어느 해 가을, 나는 매우 딱한 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막 도착한 낯선 @ 처지 됫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었으며, 잠 잘 집은커녕 주머니에 동전 한 닢 들어 있지 않았다. 걸치고 있던 옷가지들을 팔아 며칠을 버티다가 나는 그곳을 떠나 시골로 갔다. 나루터가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배들이 드나들던 시절에는 활기가 넘치던 고장이었으나, 내가 그곳에 당도했을 때는 거리에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조용하고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그날은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젖은 모래 위로 지친 다리를 끌면서, 누군가 먹다 버린 음식 찌꺼기라도 떨어져 있지 않나 하고, 텅 빈 가게며 창고들 사이를 하릴없이 쏘다니고 있었다.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뼈저리게 실감하면서. ---날이 저물고, 갑자기 비를 실은 북풍이 불어 닥쳤다. 바람은 텅 빈 창고와 가게들을 뒤흔들며 휘몰아쳤고, 판자로 가린 여관의 허름한 창문을 할퀴어 댔다. 강물은 사납게 물결치며 모래톱에 설레다가, 쫓고 쫓기며 다시 저만큼 밀려가곤 했다. 마치 겨울이 가까워진 것을 느끼고, 두려움에 떨며 어디론가 달아나기라도 하 려는 듯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에서는 가느다란 빗줄기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으며, 부러진 두 그루의 버드나무와 뒤집힌 쪽배 한 척이 처량하게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구멍 난 바닥을 드러낸 채 버려진 쪽배와 바람에 휘청거리는 두 그루의 고목--- 사방은 음산한 죽음의 기운에 휩싸이고, 하늘은 쉬임없이 울고 있었다. 적막과 어둠 속에 모든 것이 죽어 버리고 나만 혼자 살아 남은 것 같은, 그리고 그 너머에서 차가운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같은 느낌---. 그때 내 나이 열일곱, 한창 때였다! 나는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차갑고 축축한 모래 위를 걷고 또 걸었다. 혹시라도 먹을 것이 없을까 찾아 헤매던 나의 걸음이 강변의 한 노점 근처에 이르렀을 때, 나는 여자 하나가 비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노점 귀퉁이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다가가서 여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 보았다. 여자는 두 손으로 노점 아래쪽의 모래를 파내 구멍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뭘 하는 거죠?" 내가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묻자 그녀는 나직이 비명을 지르며 튕기듯 일어섰다. 치켜 뜬 잿빛 두 눈이 두려움에 차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가 내 또래 소녀임을 알아보았다. 귀염성스러운 얼굴, 그러나 가엾게도 그녀의 얼굴에는 세 개의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비슷한 크기의 상처가 양쪽 눈 밑에 하나씩, 그리고 콧 등에 조금 더 큰 상처 하나가 있었다. 상처들은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흉하기는 매한가지여서, 인간의 용모를 손상시키는 데 재능을 가진 어느 악랄한 예술가의 솜씨를 보는 것 같았다. 소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그녀의 두 눈에서 조금 전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없었다---. 소녀는 손에 묻은 모래를 털고 나서 머릿수건을 매만지며 말했다. "당신도 배가 고픈 모양이군요? 그럼 여길 파 봐요. 난 손의 힘이 다 빠져 버렸어요. 저 안에---." 그녀는 고갯짓으로 노점을 가리켰다. "틀림없이 빵이 있을 거에요.이 노점은 아직 장사를 하고 있으니까." 나는 모래를 파기 시작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내려다보며 서 있더니, 이윽고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나를 거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묵묵히 일을 계속했다. 그 순간 형법이나 도덕, 재산권 등등, 교양 있는 사람들이 평생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일들에 대한 생각이 내 머리 속에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가능한 한 진실에 가깝기를 바라는 희망에 충실하려면, 나는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때 내 머리 속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오로지 노점 안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으며, 나의 온 정신은 단지 모래를 파내는 데만 팔려 있었노라고---. 날이 좀더 어두워졌다. 습기를 머금은 어둠이 우리를 에워쌌고,파도는 더욱 거칠 게 울부짖었으며, 빗줄기는 북을 두드리듯 요란하게 노점의 판자를 두드려 댔다--- 어디선가 야경을 도는 딱딱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거기 혹시 널판 같은 게 있지 않아요?" 나를 거들다 말고 소녀가 물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그 밑에 널판이 있냐고 묵도 있는 거에요. 그렇다면 공연한 짓을 하는 꼴이니까. 애써 파 봤자 두터운 널판이 있으면 헛일 아니에요? 차라리 자물쇠를 부수는 게 낫지. 그다지 튼튼한 자물쇠도 아닐 텐데." 여자들이란 때로 정말 기발한 생각을 해내곤 한다. 하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생각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늘 기발한 생각을 존중하며, 가능한 한 그것을 활용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나는 노점의 판자를 더듬어 자물쇠를 고리째 뜯어냈다. 나의 공모자는 어느새 몸을 구부려 빠금히 열린 틈서리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가 탄성을 질렀다. "정말 잘했어요!" 여자들의 작은 칭찬은 같은 남자로부터 듣는 어떤 찬사보다도 남자를 우쭐하게 만드는 법이다. 설령 그 남자의 찬사가 고금의 웅변들을 한데 뭉뚱그린 것보다 훌륭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그때 나는 멋적고 두려운 마음에, 소녀의 칭찬에는 대꾸하지 않고 다만 무뚝뚝하게 물었을 뿐이었다. "그래, 뭐가 좀 있소?" 소녀는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자신이 찾아낸 것들을 하나씩 세었다. "병을 담은 광주리 하나---빈 주머니 몇 개---우산이 하나--- 양동이 하나---." 하나같이 먹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나는 한 가닥 희망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그녀가 생기 찬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아! 여기!" "뭐요?" "빵이에요---큼직한---좀 젖긴 했지만---자, 받아요!" 내 발 밑으로 커다란 빵 한 덩이가 굴러 나왔다. 곧이어 용감한 나의 공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새 빵 한 조각을 한 입 가득 우물거리고 있었다. "나도 좀 줘요. 우선---여길 떠나야 될 텐데, 어디로 갈까---?" 소녀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사방은 어둡고 축축하고 소란스러웠다. "저쪽에 쪽배가 한 척 버려져 있던데---그리로 갑시다." "가요!" 우리는 전리품을 나누어 정신없이 입 속에 구겨넣으면서 그곳을 떠났다---. 빗줄기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강물은 더욱 사납게 울부짖고, 멀리서 길게 꼬리를 끄는 기적 소리가 들여왔다. 마치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어떤 거인이 황량한 가을밤과, 이 가을 저녁의 가련한 두 주인공을 달래며 휘파람을 불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소리를 듣자 새삼스럽게 가슴이 쓰라렸지만, 나는 먹기를 멈추지 않았다. 내 왼쪽에서 걷고 있는 소녀 역시 나만큼이나 게걸스럽게 먹어 대고 있었다. "이름이 뭐요?" 나는 별 생각 없이 물어 보았다. "나타샤!" 소리내어 빵을 삼키면서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순간 왠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눈 앞에 펼쳐진 어둠을 바라보았다. 운명의 신비하고도 추악한 얼굴이 나를 향해 싸늘한 비웃음을 던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빗줄기는 쭉배의 바닥을 쉴새없이 두드려 댔다. 그 부드러운 소리가 뭔지 모를 서글픈 생각들을 끊임없이 자아냈다. 바람은 휘파람 소리를 내며 배 안으로 불어들었고, 틈서리에 걸려 있던 대패밥이 바람에 나부껴 애처롭게 울어 댔다. 물결은 강기슭에 부서지며 절망에 겨워 울부짖었다. 마치 진저리가 쳐져서 말하기조차 싫지만 또한 털어놓지 않고는 정년 견딜 수 없는 가슴 속의 괴로움과 쓸쓸함을 호소하듯이. 빗소리는 물결 소리와 어울려, 춥고 서글픈 가을이 찾아와 이제 다시는 따뜻한 여름을 볼 수 없으리라. 탄식하듯 뱃머리에 감겨들었으며, 바람은 적막한 기슭과 파도 치는 강물 위로 몰아치며 구슬픈 노래를 읊조리고 있었다---. 그곳은 앉아서 쉴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배 안은 비좁고 눅눅했으며, 바닥에 난 구멍을 통해 찬 비와 바람이 끊임없이 새어들었다. 우리는 추위에 떨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졸음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나타샤는 뱃전에 등을 기댄 채 쪼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무릎을 싸안고 그 위에 턱을 고인 채 물끄러미 강물을 내다보고 있었다. 하얀 얼굴 위에서 그녀의 두 눈은 눈 밑의 상처 때문에 더욱 크게 보였다. 그녀는 꼼짝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부동과 침묵이 내 마음에 전해져왔다. 나는 차츰 그녀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와 뭔가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었으나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불쑥 중얼거렸다. "저주받을 인생!" 그녀는 그 말을 분명하고 또렷한 음성으로 확신에 차서 내뱉었다. 그러나 그 말에서 원망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원망이 깃들어 있다고 느끼기엔 너무나도 냉랭한 말투였다. 그녀는 단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로부터 이끌어낸 단순한 결론을 소리내어 말했을 뿐이었다. 때문에 거기 대해 내가 뭐라고 반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뿐 아니라, 내 처지에 비추어도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나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 꼼짝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죽어 버릴까---" 그녀가 다시 중얼거렸다. 아까와는 달리 나직하고 생각에 잠긴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이번에 역시 원망 같은 것은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굳이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곰곰이 들여다본 나머지, 운명의 장난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죽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고요한 믿음에 도달한 것 같은 어조라고나 할까. 그 확신에 찬 말을 듣자 나는 왠지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는 그대로 울어 버릴 것만 같았다---. 여자는 울지도 않는데 여자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건 부끄러운 노릇이다.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눠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누가 때린 거요?" 나는 뭔가 좀더 그럴듯한 화제를 떠올리지 못한 채 불쑥 물었다. "파슈카가 그랬어요---" 그녀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파슈카가 누구요?" "애인이죠. 빵을 굽는---." "자주 그렇게 손찌검을 하오?" "술만 취하면 때리곤 하죠---." 그녀는 갑자기 내 쪽으로 다가앉으며 자신과 파슈카,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떤 술집의 여자'이고 파슈카는 붉은 턱수염을 기른, 손풍금을 잘 타는 빵장수이다. 그녀를 보기 위해 그는 자주 술집에 드나들었고, 그의 쾌활한 성격이며 깨끗한 옷차림에 그녀도 마음이 끌렸다. 그는 15루블이나 하는 코트와 장화 한 켤레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것들 때문에 그녀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는 곧 그녀의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다른 손님들이 그녀에게 주는 돈을 가로채기 시작했다. 그는 그 돈으로 술을 마시고는 그녀를 때렸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그는 급기야 그녀가 보는 앞에서 공공연히 그런 것이다---. "사람을 그렇게 모욕할 수는 없는 것 아니에요? 나라고 다른 사람보다 못난 것도 아닌데---. 나를 완전히 바보 취급 한 거에요. 나쁜 인간! 사흘 전에 주인한테 휴가를 얻어 그의 집을 찾아갔었죠. 술에 취한 두니카가 그와 함께 있더군요. 그도 역시 취해 있었어요. 나는 그에게 소리쳤죠. '이 사기꾼! 망나니! 당신은 악마야!' 라고 말이에요. 그는 나를 마구 때리고 발로 차고 머리채를 잡아흔들면서---정말 별별 짓을 다했어요. 그뿐만이 아니었죠. 그 몹쓴 인간은 내 옷까지 몽땅 찢어 버렸어요. 겉옷이고 속옷이고 모조리. 모두 새것이었는데---오, 하느님!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나타샤는 갑자기 찢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더욱 사납고 차가워진 바람이 사정없이 들이쳤다. 다시 이빨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도 추운지 몸을 움츠리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젖은 두 눈이 빛나고 있는게 보였다. "어째서 당신네 남자들은 다들 그 모양이죠? 모조리 짓밟아 병신으로 만들어 버렸으면 속이 시원하겠어요! 아니, 모두 죽어 버렸으면! 뻔뻔한 사람! 상판대기에 침이라도 뱉어 줄 걸! 불쌍할 것 없어요! 더러운 인간 같으니! 그저 여자들만 보면 수캐처럼 꼬리를 치며 덤비지. 하지만 이란 손아귀에 넣고 나면 금방 싫증이 나서 내던져 버리는 게 당신네 남자들이라구요!" 그녀는 온갖 욕설을 입에 담았지만, 그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거기에선 '뻔뻔하고 더러운 인간'에 대한 분노도 증오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말투는 말의 내용과는 달리 침착했고, 목소리는 슬픔에 겨워 가늘게 떨려 나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내가 그 전이나 후에 보고 듣고 읽은 어떤 웅변적이고 설득력있는 염세적인 내용의 책이나 연설보다도 강하게 나를 후려쳤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실제로 죽어가는 자의 고뇌에 찬 신음이야말로 죽음에 관한 어떤 정확하고 예술적인 묘사보다도 훨씬 자연스럽고 힘있는 것이기 때문일 터였다. 나는 몹시 고통스러웠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의 이야기 때문이라기보다 추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참으려고 해도 신음 소리가 절로 새어나왔고 아래 윗니가 서로 부딪쳐 소리를 냈다. 바로 그 순간, 차갑고 자그마한 두 손이 내 몸에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한 손을 내 목덜미 아래 밀어넣고 다른 한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는 근심에 싸인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는 것이었다. "왜 그래요?" 나는 그렇게 묻고 있는 사람이 방금 남자들을 싸잡아 욕하던 그 여인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짬을 두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네? 추워서 그래요? 몸이 얼고 있는건가요? 오, 별난 사람 같으니! 추우면 춥다고 말을 해야지, 그렇게 잠자코 앉아만 있으니! 자, 이리로 누워 봐요. 몸을 쭉 펴고---나도 누울게요. 자, 이렇게---날 안아봐요. 더 꽉--- 금방 몸이 더워질 거에요. 그 뒤엔 따로 따로 누우면 되니까. 어쨌든 밤을 새워야 하지 않겠어요? 왜 그래요, 당신? 술을 마셨나요? 아니면 일터에서 쫓겨났나요? 괜찮아요, 그깟 일이 무어 대수라고!" 그녀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그녀는 나를 격려해 주었다---. 오, 나는 저주받을 인간이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간! 당신 나는 참으로 심각하게 인류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었고, 사회 개혁과 정치적 변화를 꿈꾸고 있었으며, 온갖 현명한 사상들이 담긴 이런저런 책들을 탐독하고 있었다. 저자 자신조차도 그 사상의 궁극에는 도달할 수 없으리라 여겨지는 그런 종류의 책들 말이다. 그 무렵 나는 스스로를 어떤 '거대하고도 적극적인 힘'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사회에서 멸시받고 쫓겨난 비천한 존재, 웃음을 팔아서 연명하는 가엾은 여인이 자신의 몸으로 나를 데워 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도와 줄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는데, 그녀는 나를 도와 주었다. 하긴, 돕고자 한들 무엇으로 그녀를 도울 수 있었으랴만! 아, 나는 이 모든 것이 꿈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차가운 빗방울은 끊임없이 살갗을 파고들었고, 여인의 탐스러운 가슴이 나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으며, 따뜻하고 생기 넘치는 숨결이 향기로운 술냄새처럼 내 얼굴에 서려오고 있었던 까닭이다---. 바람은 울부짖으며 신음하고 있었다. 서로 꼭 껴안고 누워 있었지만 우리는 여전 히 추위에 떨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 고통스러운 현실보다 더 괴롭고 진저리나는 꿈을 꾸어 본 사람이 있으까! 나타샤는 오직 여자들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정겹고 부드러운 말투로 줄곧 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순진하고 편안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내 가슴 속에서는 한 가닥 따스한 불꽃이 피어올랐고, 얼어붙었던 심장도 봄눈처럼 녹아내렸다. 갑자기 내 두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눈물과 함께 그 밤 나의 심장에 들끓고 있던 온갖 괴로움과 원망과 어리석음과 더러움이 깨끗이 씻겨 나가는 것을 나는 느꼈다. 나타샤는 다시 나를 위로하러 했다. "울지 말아요! 자, 그만---하느님이 당신을 축복해 주실 거에요. 곧 다시 일터에도 나갈 수 있을 거구요. 자---." 그녀가 나에게 입맞추었다. 그것은 인생이 나에게 베푼 첫 키스엿다. 또한 그것은 더없이 알뜰한 키스였다. 뒷날 내가 얻을 수 었었던 키스들은 하나같이 너무나도 값이 비쌌고, 그러면서도 나에게 거의 아무 것도 주지 않았으니. "아이 참! 울지 말라니까. 당신은 정말 별난 사람이야. 정 갈 곳이 없다면 내가 무슨 수를 찾아볼 테니까 그만--- 그만 울어요---." 그 조용하고 정성 어린 속삭임을 나는 꿈결인 듯 듣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까지 우리는 그렇게 껴안고 누워 있었다. 날이 밝자 우리는 쪽배에서 기어나와 거리로 나갔다. 그리고 친구처럼 헤어졌다. 그후 반 년 동안이나, 그 가을날 나와 함께 하룻밤을 지낸 그녀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의 빈민가들을 샅샅이 누비고 다녔으나 나는 끝내그녀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혹 그 사이 그녀가 죽었다면---그것은 그녀를 위해 오히려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었으리라! 고이 잠들기를! 또 혹시 그녀가 살아 있다면---영혼이여, 평화롭기를! 부디 그녀의 영혼에 자신이 타락한 여자라는 죄책감 따위는 깃들지 말기를! 왜냐하면 그것은 인생에 있어 아무런 가치도 없는 부질없고 헛된 괴로움에 지나지 않으므로. 마카르 츄드라 1 바다로부터 축축하고 차가운 바람이, 해안으로 밀려드는 파도 소리와 해변에 우거지 관목들의 수런거림을 실은 음울한 선율을 초원으로 날라오고 있었다. 이따금씩, 돌풍이 누렇게 시든 나뭇잎들을 휘감아와서는 모닥불 속에 던져넣어 불길을 일으키곤 했다. 그럴 때면 우리를 에워싼 가을밤의 어둠이 부르르 몸을 떨며 겁쳐진 초원을, 오른쪽으로는 끝없는 바다를, 그리고 내 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늙은 집시 마카르 츄드라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들로부터 50보쯤 떨어진 곳에서 야영하고 있는 자기네 유랑대의 말들을 지키고 있는 참이었다. 세찬 바람이 웃저고리를 풀어헤쳐 털복숭이 가슴을 사정없이 후려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아름답고 굳건한 모습으로 누워 얼굴을 내 쪽으로 향한 채 커다란 파이프를 뻑뻑 빨아 대며 입과 코로 자욱한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꿈쩍 하지 않고, 내 머리 너머 어딘가, 죽은 듯 침묵하고 있는 초원의 어둠에 눈을 고정시킨 채, 쉴새없이 입을 놀리며, 바람의 기습을 피하려고도 하지 않고, 나와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래, 늘 이렇게 돌아다닌단 말이지? 자넨 꽤 쓸 만한 팔자를 타고 났군, 친구. 그것으로 족한 걸세.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보고, 실컷 봤다 싶으면 죽고---그게 전부야!" "인생? 다른 사람들?" '그것으로 족한 것'이라는 말에 대한 나의 반반을 의심스럽게 듣고 나서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네가 살고 있는 건 인생이 아니라는 건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 말인데, 그들은 자네 없이도 잘 살아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걸세. 도대체 자네가 누군가에게 진정 필요한 존재일 수 있닥 생각하나? 자넨 빵도 아니고 지팡이도 아니야. 자네가 없으면 살 수 없을 만큼 자네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네." "자넨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배우고 또 가르쳐야 한다고 믿고 있는 모양인데, 말해 보게,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자넨? 아니야, 그건 불가능해. 먼저 자네 머리카락이 허옇게 센 다음에나 누군가에게 무언가 가르칠 궁리를 해 보는 게 나을 걸세. 도대체 누구에게 무얼 가르친단 말인가? 모든 사람들이 다 저 할 일을 알고 있는 터에. 조금 지혜로운 자는 있는 것을 얻고, 보다 어리석은 자는 얻지 못하고, 그러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저절로 배우게 되는 것이라네." "자네 같은 인간들이야말로 가소로운 족속이지. 한 굴에 모이기만 하면 으르렁거 리며 싸울 궁리들이나 하고 앉았으니---세상은 이렇게 넓은데도 말이야." 그는 초원을 향해 팔을 휘둘러 보였다. "사람들은 언제나 일을 하지. 무엇 때문에? 그리고 누굴 위해서? 그건 아무도 모 르는 거야. 땅을 일구는 사람을 보고 자네는 생각할 테지. 그는 자신의 땀을 모조리 땅에 쏟아 버리고, 이윽고는 땅에 쓰러져, 그 속에서 썩고 말것이라고, 그에게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채, 태어나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바보인 채 죽고 말 것이라고." "어째서 그래야 하지? 땅을 파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자신의 무덤도 파지 못한 채 죽어가야 하다니? 그는 자유라는 걸 알았을까? 초원의 광대함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파도치는 초원의 속삭임에 기쁨을 느낄 수 있었을까? 그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고, 평생을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서 죽어가는 거야. 그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설사 조금 영리한 인간이라 해도 제 손으로 저 자신을 해치는 짓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을거야." "이것 보라구, 나는 쉰여덟 해를 살아 오는 동안 참으로 많은 것을 보았다네. 그 걸 모두 종이에 적는다면 자네가 갖고 있는 그런 배낭이 천 개쯤 있어도 다 담을 수 없을거야. 어디, 말해 보게. 내가 가 보지 않은 곳이 있는지? 아마 말할 수 없을 걸? 돌아다니고 또 돌아다니고---그래, 그게 전부야. 한곳에 오래 머물러선 안 돼. 거기서 무얼 더 얻겠다고? 낮과 밤이 서로 쫓고 쫓기듯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처럼, 자네도 삶의 온갖 근심으로부터 도망쳐야 해. 삶에 싫증을 느끼지 않으려면 그 길밖에 없다구.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버릇은 쉽사리 생활에 권태를 느끼게 하지. 그렇고말고 말고 내게도 그런 적이 있었다네, 친구. 그랬다니까." "전에 갈라친에서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지. 나는 생각했다네. 나라는 인간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살고 있는가? 하도 갑갑해서 그런 생각을 다 해 보았다니까. 감옥이란 정말 갑갑한 곳이거든. 갑갑하고말고! 고민은 집게처럼 나의 심장을 움켜쥐고 놓아 주지 않았다네.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누가 그 답을 말해 줄 수 있겠나? 아무도 할 수 없을 걸세, 아무도! 하지만 친구! 그런 걸 구태여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볼 필요는 없는 거야. 그냥 살면 되는 거지. 그뿐이야. 쉴새없이 돌아다니고,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둘러보고---그러면 쓸데없는 고민에 사로잡히는 일 따위는 없을 걸세. 난 그때 하마터면 허리띠로 목을 매고 죽을 뻔했다니까! 봐, 이렇게!" "난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네. 자네와 같은 러시아 인이었는데, 매우 엄숙한 사람이었지. 그는 늘 말했다네. 인간은 자기 의지대로 살아선 안 되고, 하느님께 순종하면 그분이 모든 걸 이루어 주실 거라고 말이야. 그런데 그 자신은 항상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치고 다니길래, 한 번은 내가 충고했지. 하느님께 부탁해서 새옷을 한벌 얻어 입는 게 어떠냐고. 그랬더니 그는 몹시 화가 나서 마구 욕설을 퍼부어 대며 나를 내쫓는 거야. 평소에 그는 늘 설교하지 않았겠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그 말대로라면, 설사 내 충고가 그의 기분을 좀 상하게 했더라도 나를 용서해 주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선생이란 작자들은 하나같이 그 모양이라니까. 우리보고는 늘 적게 먹으라고 가르치면서 저희들은 하루에도 열 번씩 처먹어 대거든." 그는 모닥불에 침을 탁 뱉고는, 말을 멈추고 다시 파이프에 담배를 재었다. 바람은 조용히, 애처롭게 불어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말들이 울부짖었고, 막사로부터는 부드러우면서도 열정적인 노래가 흘러나왔다. 마카르의 딸, 아름다운 논카가 부르는 노래였다. 나는 그녀의 나직하고 굵은 목소리를 익히 알고 있었다. 노래를 부를 때나 "안녕!"하고 인사를 할 때나, 그 목소리는 왠지 뭔가를 갈망하며 호소하는 것처럼 들리곤 했다. 그녀의 까무잡잡하고 윤기 없는 얼굴에는 여왕의 오만함이 깃들어 있었으며, 그늘진 암갈색 눈동자에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각과, 자기 이외의 모든 존재에 대한 경멸의 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마카르가 나에게 파이프를 내밀었다. "피워 보라구! 내 딸년이 노래를 제법 잘 부르지? 어때? 저런 처녀가 자네를 사랑해 주었으면 싶지 않나? 아니라고? 좋아! 그래야지! 여자라는 동물은 믿을 게 못돼. 그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지내는 게 신상에 좋고말고. 처녀와 키스를 하면, 물론 내 파이프를 빠는 것보다야 유쾌하겠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자네의 자유는 죽어 버리는거라구! 처녀는 보이지 않는 사슬로 자네를 얽어매고, 자넨 결코 그걸 끊을 수 없을 테니까. 그뿐인가. 자넨 그녀에게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기게 될 걸세. 정말이야. 그러니 언제나 여자들을 조심해야 된다구! 그것들은 항상 사람을 속이거든. 입으로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자네를 사랑한다고 종알거리지. 그러나 자네가 바늘 끝으로 여자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그녀는 자네의 가슴을 갈갈이 찢어 버릴거야. 난 알지. 그럼,알고말고! 이봐, 친구! 내 옛날 이야기 하나 할 테니 들어 보겠나? 이 이야기를 머리 속에 새겨 두는 게 좋을 걸세. 이걸 잊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자넨 평생 자유로운 새로 살 수 있을 테니까." 옛날에, 로이코 조바르라는 젊은 집시가 있었다네. 헝가리와 보헤미아, 슬라브니아, 그 밖에 바다 근처의 모든 나라들이 그를 알고 있었지. 키는 작았지만 정말 용감한 사내였다네! 그가 지나가는 마을마다, 주민들이 대여섯씩 떼를 지어 그를 죽이고 말겠다고 하늘에 맹세하곤 했지.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갔다네. 가령 어떤 말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 하면, 일개 연대 병력을 배치해서 감시를 해도 그는 기어이 그 말을 타고 유유히 달아나고 마는 것이었어. 그가 누구를 두려워했겠나? 설사 악마가 졸개들을 거느리고 나타난다 해도, 그는 욕설을 퍼부으며 단칼에 악마를 찔러 버렸을 거야. 졸개들을 낯짝을 한 대씩 갈겨 주고 말이지.. 아무렴! 집시들은 모두 그를 알고 있거나,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네. 그는 오로지 말을 사랑할 뿐, 그 밖의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지. 하긴, 말이라는 것도 오래 가지 않고, 이내 그걸 팔아서는 그 돈을 아무나 달라는 대로 몽땅 줘 버리곤 했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그에게는 소중한 게 없었다네. 만약 자네가 그의 심장이 필요해서 달라고 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당장 심장을 꺼내 자네한테 주었을 걸세.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네, 친구! 당시 우리는 부코비나 일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이로구만. 어느 봄날 밤, 우리는 코슈트와 함께 전쟁에 나갔던 병사 다닐로, 누르 노인, 그 밖에 여럿이서 한 곳에 앉아 있었지. 다닐의 딸 랏다도 그 자리에 있었다네. 자네 내 딸 논카를 알지? 처녀 중의 처녀가 아닌가? 하지만 랏다에 비하면 그앤 아무 것도 아니야. 랏다와 비교되는 것 자체가 그애한텐 영광스러울 정도니까! 랏다에 대해선 뭐라고 이루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구만. 혹 바이얼린을 제 영혼처럼 잘 아는 이가 있다면, 그녀의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연주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애간장을 녹였다네. 정말 많기도 했지! 모라바에서는 앞머리를 민 나이 지긋한 귀족 하나가 그녀를 보고 넋이 나가 버리지 않았겠나? 그는 명절을 맞은 악마처럼 근사하게 차려 입고 있었다네. 금실로 수놓은 웃저고리에 허리에는 긴 칼을 차고 있었는데, 말이 움직일 때마다 칼이 번개처럼 번쩍거렸지. 그 칼은 온통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머리에는 하늘쌕 우단모자를 써서 마치 하늘 한 조각이 내려앉은 것처럼 보였다네. 그는 랏다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더니 마침내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었어. "어이, 아가씨! 나한테 키스해 주지 않겠나? 돈은 자루째 줄 테니!" 그러나 그녀는 들은 체도 않고 쌀쌀맞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네. 그뿐이었어. "내 말이 아가씨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용서해 주구려! 그리고 나를 한 번 정답게 쳐다봐 주기라도 하지 않겠소?" 늙은 귀족은 이내 태도를 바꾸더니, 그녀의 발치에 돈자루를 던지는 것이었어. 정 말 엄청나게 큰 돈자루였다네, 친구! 그러나 그녀는 뜻밖에도 그걸 진창으로 차던져 버리는 거야 그랬다니까! "에이, 나쁜 계집 같으니!" 그는 한숨을 내쉬며 채찍을 들어 말을 후려갈겼어. 땅에선 뿌연 먼지만 구름처럼 피어올랐지. 그런데 다음 날 그가 다시 찾아왔어. "그녀의 아비가 누구냐?" 온 막사에 그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퍼졌다네. 다닐로가 앞으로 나섰지. "달을 나에게 팔아라! 돈은 달라는 대로 주겄다!" 다닐로가 말했다네. "키우던 돼지새끼에서부터 자기 양심까지 닥치는 대로 팔아먹는 건 당신네 귀족들이나 하는 짓이지! 나는 코슈트와 함께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이오! 아무 것도 팔지 않겠소!" 화가 난 귀족이 칼집에 손을 대는 순간,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말의 귀에 꽂아넣었다네. 말은 용감한 늙은이를 태운 채 그대로 뛰어 달아나고 말았지. 우리는 그 길로 그곳을 떠났다네. 그런데 이틀쯤 가다가 돌아보니 그자가 다시 우리를 뒤쫓아오고 있는 거야! 그는 말했지. "이것 보시오! 신과 당신들 앞에 맹세코 내 양심은 깨끗하오! 부디 당신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해 주시오! 그러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들과 나누겠소! 나는 아주 부자요!" 그의 영혼은 붉게 타올라 바람결의 우모초처럼 안장 위에서 떨고 있었다네. 우리들은 생각에 잠겼지. "그렇다면 딸아, 네가 말해 보렴." 다닐로가 나직이 말했네. "만일 암독수리가 제멋대로 까마귀 둥지로 날아든다면 어떻게 될까요?" 랏다가 우리를 돌아보며 물었네. 다닐로는 빙그레 미소지었고, 우리도 따라 웃었지. "훌륭하다, 딸아! 들으셨죠, 나리? 사정이 이러니 어디 가서 말 잘 듣는 비둘기 새끼나 찾아보시지요." 그리고 우리는 다시 출발했지. 귀족은 모자를 벗어 땅바닥에 팽개치고는 지축이 울릴 정도로 말을 달려 사라져 버렸다네. 랏다가 어떤 여잔지, 이제 좀 알겠나, 친구? 그래! 한 번은, 밤이었는데, 우리는 초원을 흐르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네. 참으로 훌륭한 음악이었지! 그 소리는 우리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고, 어딘가 먼 곳으로 우리들을 데려가는 것 같았어.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왠지 더 이상 이 세상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는 거야. 모닥불 가까이 이르자 그는 말을 세우고 바이얼린을 멈추더니 웃으며 우리를 둘러보더군. "여어,조바르! 자넨가!" 다닐로가 반갑게 소리쳤네. 바로 로이코 조바르였어. 어깨에 드리운 수염은 부드럽게 굽슬거리고, 두 눈은 별처럼 밝게 타올라, 그가 한 번 웃으면 그야말로 태양이 빛나는 것 같았다네! 마치 한 개의 쇳덩이를 녹여 부어 말과 그를 함께 만들어낸 것 같았지. 그는 피 속에 잠긴 것처럼 붉은 모닥불빛 속에 서서, 흰 이를 반짝이며 웃고 있었네. 그나 나에게 말을 건네기 전에, 아니, 나라는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가 발견하기 전에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듯이 그를 사 랑하게 되었음을 부인한다면 저주를 받아도 좋아! 이보라구, 친구!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네. 그가 자네의 눈을 한 번 들여다보기만 해도 자네의 영혼까지 송두리째 그에게 사로잡히고 마는---자넨 그걸 부끄럽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게 될 걸세. 그런 사람과 함께 지낸다면 자네 자신도 훨씬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지. 하지만 친구, 그런 사람은 아주 드물다네! 드물어야지! 세상에 그런 사람이 흔하다면 아무도 그를 훌륭하다고 생각지 않을 테니까. 아무튼 친구, 이야기를 더 들어 보게. 랏다가 말했지. "로이코, 당신은 바이얼린을 정말 잘 타는군요! 누가 당신에게 그처럼 훌륭한 소리를 내는 바이얼린을 만들어 주었나요?" 로이코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네. "내 손으로 직접 만들었지! 이건 나무가 아니라, 내가 열렬히 사랑했던 젊은 처녀의 가슴으로 만든 바이얼린이라구! 그래서 이따금 거짓말을 하기도 하지만, 내 손 안에만 들어오면 늘 제대로 된 소리를 내거든."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사내들이란 늘 성급하게 처녀들의 눈을 멀게 하려고 덤비는 경향이 있지. 처녀의 눈이 자신의 가슴에 불을 당기지 못하도록 말이야. 하긴, 자네 경우라면 처녀의 눈이 오히려 비탄으로 얼어 버릴지도 모르겠네만. 아무 튼 로이코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였지.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었다네. 랏다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하품을 하고는 내뱉더군. "사람마다 조바르는 총명하고 용맹스런 젊은이라고들 말하던데, 모두 헛말이었군!" 그리고는 저쪽으로 가버리는 거야. "허어! 예쁜 아가씨가 입심이 사나운 걸!" 로이코는 눈을 껌뻑이며 말에서 내렸네. "안녕하시오, 친구들! 당신들을 보러 왔소!" "어서 오게!" 다닐로가 말했지. 우리는 돌아가며 키스를 하고 한동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에 들었다네---다들 아주 곤하게 잤지.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조바르가 헝겊으로 이마를 동여매고 있지 않겠나? 무슨 일이냐고? 그가 잠든 사이에 말이 발굽으로 그를 걷어차 버렸던 거야. 흐, 흐, 흐! 그게 어떤 말인지 알아차리고 다들 수염을 흔들며 웃어 댔다네. 다닐로도 웃었지. 그렇다면 로이코가 랏다만 못하다는 것일까? 천만에! 아무리 예쁜 처녀라도 그 속은 얕고 좁을 뿐이야, 여자의 목에 금덩어리를 걸어준들, 그녀를 보 다 나은 존재로 만들 수는 없는 법이라구! 암, 그렇고말고! 우리는 한동안 그곳에서 살았지. 그땐 사정이 괜찮았거든. 로이코도 우리와 함께 머물렀다네. 그는 우리의 친구였으니까! 그는 늙은이처럼 지혜로웠고, 세상일에 막힘이 없었으며, 러시아 어와 헝가리 어도 읽고 쓸 수 있었지. 그의 이야기라면, 우리는 평생 잠을 자지 않는 한이 었더라도 기꺼이 들으려고 했다네. 뿐만 아니라 그가 악기를 다루는 솜씨라니! 만일 이 세상에 그보다 바이얼린을 잘 켜는 사람이 있다면 내 이 자리에서 벼락을 맞아 죽어도 좋아! 그의 손이 한 번 바이얼린 줄을 튕기면 자네 심장은 뛰놀기 시작하고, 다시 한 번 튕기면 자네 심장은 얼어붙고 말 걸세. 그런데도 그 자신은 웃으면서 바이얼린을 켜고 있으니---. 그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웃다가도 울고 싶어지고, 울다가도 웃고 싶어지지. 때로는 누군가 울면서 도움을 청하는 듯, 때로는 예리한 칼로 가슴을 저미는 듯, 초원은 하늘에다 구슬픈 옛이야기를 들려 주고, 애인을 떠나보앤 처녀는 애처로이 흐느끼고, 청년은 초원을 돌아보며 처녀의 이름을 애타게 외쳐 부르는 거야. 그러다가 갑자기, 오오, 자유롭고 활기 찬 음악이 천둥처럼 월려퍼지니, 보게나, 태양도 흥겨워 춤을 추는 것 같았다네. 그랬다니까, 친구! 자네도 그의 노래를 들었다면, 자네 몸 안의 모든 핏줄이 그 노래를 이해하고, 자네의 온 몸이 그 노래의 노예가 되었을 걸세. 바로 그런 때 로이코가 "친구들이여, 칼을 들어라!"고 외쳤다면, 우리는 기꺼이 칼을 뽑아들고 떨쳐나가 그가 가리키는 사람과 싸웠을 거야. 인간을 상대해서라면 그는 참으로 못할 일이 없었다네. 모든 사람들이 그처럼 그를 좋아하고 따랐으니까. 단지 랏다만이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심지어는 그를 비웃기까지 하는 것이었네. 그녀는 무던히도 조바르의 애를 태웠지. 참으로 무던히도! 로이코는 수염을 쥐어뜯으며 부드득부드득 이를 갈았고, 심연보다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곤 했다네. 때로 그 눈 속에서는 보는 이의 마음을 오싹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무섭게 번뜩이곤 했었지. 밤이 되면 로이코는 멀리 초원으로 나가곤 했다네. 그의 바이얼린은 아침이 되도록 구슬피 흐느끼면서 그의 의지를 그곳에 매장하는 것이었지. 우리는 잠자리에 누워 그 소리를 들으면서, 일이 어떻게 되어갈 것인가, 생각하곤 했다네. 물론 우리는 알고 있었지. 두 개의 바위가 양쪽에서 굴러온다면 누구도 그 사이에 들어설 수는 없다는 것을. 또한 그것들은 반드시 부딪쳐 깨지고야 만다는 것을. 일은 결국 그런 식으로 되어갔다네. 그날 우리는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일을 의논하고 있었지. 그런데 이야기만 하고 있자니 너무 따분해서 다닐로가 로이코를 돌아보며 부탁했어. "어리, 조바르! 노래나 한 곡 불러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지 않겠나?" 조바르는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앉아, 얼굴을 위로 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랏다에게 힐끗 눈길을 주고는, 이내 바이얼린 줄을 고르기 시작했네. 그러자 바이얼린이 말을 하기 시작하는 거야. 정말 처녀의 가슴으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 그리고 조바르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네. 에헤이헤이! 가슴엔 불길이 타오르고 초원은 넓기도 하여라! 나의 준마는 바람처럼 내닫고 고삐 잡은 팔은 억세네! 랏다는 고개를 돌리며 몸을 조금 일으켰는데, 두 눈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네. 조바르의 얼굴은 저녁 노을처럼 상기되었지. 에헤이헤이, 나의 친구여! 말을 타고 달려 보지 않으려나. 초원은 짙은 어둠에 잠겼지만 거기 새벽이 우리를 기다린다네! 에헤이헤이, 달리자, 태양을 맞으러, 높은 산으로 뛰어오르자! 날쌘갈기로 어여쁜 달님을 다치질랑 말고 그렇게 노래 불렀지!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못해! 그러나 랏다는 찬물을 끼얹듯이 말하는 것이었어. "로이코, 당신은 그렇게 높이 오르지 않는 게 좋을 걸요? 자칫 떨어져서 진창에 코를 박고 수염이나 더럽히면 어쩌려고?" 로이코는 맹수처럼 사나운 눈길로 잠시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네. 그는 꾹 참고 노래를 계속했지. 에헤이헤이! 갑자기 낮이 와도 나는 그대와 잠에 취해 있으리니, 에헤이헤이! 그때는 그대와 나, 수치의 불길에 타 버려도 좋으리라! "근사한 노래야!" 다닐로가 말했지. "여태껏 이런 노래는 들어 본 적이 없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악마가 나를 제 담뱃대로 만들어도 좋아!" 누르 노인마저 수염을 어루만지며 어깨를 으쓱거렸다네. 다들 조바르의 노래에 넋을 잃고 있었지. 그의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랏다뿐이었어. "언젠가 모기란 녀석이 소리개를 흉내내어 저렇게 앵앵거리는 걸 들은 적이 있지." 우리 모두에게 눈덩이를 집어던지듯, 그녀는 빈정거리는 것이었어. "랏다, 너 채찍 맛 좀 보고 싶으냐?" 다닐로가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쳐들자, 조바르는 모자를 벗어 땅바닥에 집어던지고는, 얼굴빛이 흙처럼 검어져서 소리쳤다네. "그만 두시오, 달닐로! 성깔 사나운 말에는 강철 굴레가 제격이지! 딸을 내 아내로 주시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다닐로는 웃었네. "할 수만 있다면 데려가게나." "좋소!" 로이코는 말하고 나서 랏다를 돌아보았지. "이봐, 아가씨. 거만하게 굴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보라구! 나는 그대 같은 처녀들을 숱하게 보아 왔어. 정말 수도 없이 많았지! 그러나 그대처럼 내 마음을 끄는 처녀는 일찍이 없었어! 아아, 랏다, 그대는 내 영혼을 송두리째 사로잡아 버린 거야!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냐구? 나도 모르겠어, 될 대로 되라지! 어쨌든 나를 태우고, 내 뜻을 거슬러 도망친 말은 아직 없었으니까---. 하느님과 나의 양 심과 그대의 아버지,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는 그대를 내 아내로 삼겠어! 다만 한 가지 말해 두겠는데, 내 의지를 꺾을 생각일랑 말라고. 나는 자유로운 몸이고, 앞으로도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테니까." 말을 마치자 그는 이를 악물고 두 눈을 번뜩이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네. 그가 랏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생각했지. 초원의 말과도 같던 랏다가 마침내 굴레를 쓰게 될 모양이라고. 그런데 갑자기, 조바르가 두팔로 허공을 휘저으며, 뒤통수를 땅에 박고 쿵, 하며 쓰러지는 거야! 이게 웬 일인가! 마치 총알이 그의 심장을 꿰뚫은 것 같았다네. 알고 보니 그건 랏다가 가죽 채찍으로 그의 발을 걸어 잡아당긴 때문이었어. 그래서 로이코가 나자빠졌던 거지. 로이코는 땅바닥에 드러누운 채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네. 우리는 일이 어떻게 되어갈 것인지 지켜보고 있었지. 이윽고 몸을 일으킨 그는, 마치 머리가 터질까 두려워하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네. 그러다가 조용히 일어서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초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거야. 그때 누르 노인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이더군. "그를 따라가 봐." 그리하여 나는 밤의 어둠을 더듬어 초원으로 조바르를 뒤쫓아갔지. 그렇게 된 거라네, 친구. 마카르는 파이프의 재를 떨어내고 거기에 다시 담배를 채워넣었다. 나는 외투자락을 바짝 여미고 누운 채, 햇볕에 타고 바람에 거칠어진 그의 늙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험상궂은 얼굴로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뭐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흰 수염이 흔들리고,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는 늙었으나 여전히 억세고 강인한 힘을 자랑하는 한 그루의 떡갈나무처럼 보였다. 바다는 변함없이 해변에 밀려와 속삭이고, 바람은 그 속삭임을 초원으로 실어나르고 있었다. 논카는 노래를 멈추고, 검은 하늘에 모여든 먹구름은 가을밤을 더욱 어둡게 물들이고 있었다. 로이코는 고개를 떨구고 두 팔을 채찍처럼 늘어뜨린 채 한 발 두 발 힘겹게 걸음을 옮겨 놓았네. 마침내 골짜기의 시냇가에 이르자 그는 바위에 걸터앉으며 긴 한숨을 내쉬더군. 그가 한숨을 쉬는 것을 보자 애처로워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지만, 선뜻 그의 곁으로 다가갈 수는 없었다네. 말로써 슬픔을 덜어 줄 수는 없는 법이니까. 안 그런가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세 시간이 지나도록 그는 꼼짝 하지 않고 앉아 있었네. 나는 그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누워 있었지. 맑은 밤이었고, 달이 그 눈부신 은빛을 초원 구석구석에 흩뿌려, 멀리까지도 내다볼 수 있었다네. 갑자기, 랏다가 막사 쪽으로부터 총총히 걸어오는게 보이더군. 얼마나 기쁘던지! '정말 근사한 일이야! 랏다는 얼마나 대담한 처녀인가!' 나는 생각했지. 그녀가 다가갔는데도 조바르는 전혀 알지 못했어. 그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자, 그는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머리를 싸쥐고 있던 손을 풀고 고개를 들더군. 그리고 다음 순간, 번개처럼 뛰쳐 일어나며 칼을 뽑아드는 거야! '아아, 그녀를 찔러 죽이려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하마터면 막사에 다 들리도록 고함을 지르며 그들에게로 달려들 뻔했지. 그런데 갑자기 이런 소리가 들리는 거야. "칼을 버렷! 머리에 구멍을 뚫어 주기 전에!" 보니 랏다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고, 총구가 조바르의 이마를 겨누고 있었네. 정말 악마 같은 처녀가 아닌가! 나는 생각했지. 이제 두 사람의 힘이 비슷해졌으니 일이 어떻게 되어갈 것인가---. "이것 봐요!" 랏다가 총을 허리춤에 찔러넣으며 입을 열었네. "나는 당신을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 화해하러 왔으니 칼을 버려요!' 조바르는 칼을 던지고 의심스런 눈길로 랏다를 쳐다보더군 정말 이상한 광경이었다네, 둘 다 그렇게 근사해 보일 수가 없었지! 정말 용감한 사람들이었다네. 오로지 밝은 달고 나만이 그들을 지켜보았지. 그랬다네. "이봐요, 로이코, 내 말을 들어 봐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랏다가 말했네. 조바르는 팔다리를 묶인 사람처럼 어깨만 으쓱거렸지. "난 많은 청년들을 보아 왔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들보다 훨씬 용감하고, 영혼으로나 용모로나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워요. 내가 한 번 눈길을 주 기만 하면 그들은 수염을 몽땅 깎아 버리고, 내가 원한다면 내 발 아래 무릎을 끓는 일도 마다 하지 않을 거에요.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그들은 용기라곤 없는 사내들이어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들 모두를 여자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을 거에요! 이 세상에 진정 용감한 집시는 드물어요! 드물고말고요!" "로이코! 나는 이제껏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이제 당신을 사랑해요. 또한 나는 자유도 사랑해요. 어쩌면 당신보다 더 자유를 사랑하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당신이 나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나도 당신 없이는 살수 없어요. 나는 당신이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온전한 내 것이 되기를 원해요. 듣고 있나요?" 조바르는 미소지었네. "듣고 있어! 그대 말을 들으니 날아갈 것 같군! 자, 어서 계속해 보라구." "미리 말해 둘 것은, 로이코, 당신이 아무리 빠져나가려고 해도 헛수고라는 거에요. 난 당신을 정복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말 테니까. 그러니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요. 당신 앞에는 오로지 나의 키스와 사랑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에요---. 난 당신에게 뜨겁게 키스할 거에요, 로이코! 내 키스를 받는 순간부터 당신은 지금까지의 용감한 생활을 잊어버려야 해요. 집시들을 즐겁게 하던 당신의 활기찬 노래도 더 이상 초원을 헤매지 않게 되겠죠. 당신은 부드러운 사랑의 노래를, 오로지 나, 랏다를 위해서만 부르게 될거에요---. 그러니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내 말은 당신이 내일 아침이면 당신의 옛 친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복종하게 될 거라는 뜻이에요. 당신은 단지 막사의 모든 사람들이 앞에서 내 발 밑에 무릎을 끓고, 내 오른손에 키스를 하기만 하면 돼요. 그러면 나는 기꺼이 당신의 아내가 될 거에요." 그 악마 같은 처녀가 원했던 건 바로 이것이었어! 나는 풍문으로도 그런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네. 늙은 이들 말로는, 옛날 몬테니그로 사람들 사이에 그런 풍습이 있었다지만, 우리 집시들에겐 어림도 없는 일이야! 그러니 친구, 이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일을 생각할 수 있겠나? 아마 1년 내내 머리를 짜내도 그런 생각을 떠올리 수는 없을 걸세. 로이코는 펄쩍 뛰어 옆으로 물러서더니 가슴을 상한 사람처럼 초원을 향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네. 랏다는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속마음을 표정에 드러내지는 않더군. "그럼 내일까지 안녕! 내일 꼭 내가 일러 준 대로 하는 거에요. 알았죠, 로이코?" "알았어! 그렇게 하지!" 조바르는 나직한 신음을 토하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지. 그는 바람에 꺾인 나무처럼 비틀거리다가 웃는 듯, 우는 듯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네. 저주 받을 랏다는 이렇게 젊은이를 녹초로 만들어 버린거야. 나는 겨우 그가 정신을 차리도록 했지. 아아! 어떤 악마가 사람들이 슬픔으로 고통받기를 원하는가! 슬픔으로 인해 사람들의 심장이 찢어져 신음하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자 누구인가! 어디 좀 생각해 보라구---. 나는 막사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보고 들은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생각한 끝에, 일단은 일이 되어가는 걸 지켜보기로 했지. 결과는 이렇게 되었다네. 저녁에 우리들이 모닥불 가에 모여 있을 때 로이코가 왔어. 그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네. 하룻밤 사이에 그토록 무섭게 찌들렸던 거야. 그는 움푹 들어간 눈을 내리깐 채, 고개도 들지 않고 입을 열었네. "이런 일이 있었소, 친구들! 지난 밤 내내 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지난 날 내 자유로운 삶의 흔적을 찾아보았소. 그러나 거기엔 랏다가, 오직 그녀만이 살고 있을 뿐이었소. 거기, 내 마음 속에서 아름다운 랏다가 여왕처럼 미소짓고 있더군! 그녀는 나를 사랑하기보다 자신의 자유를 더 사랑하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의 자유보다 그녀를 더욱 사랑하지. 그래서 나는 랏다에게 무릎을 꿇기로 했소. 그녀를 알기 전에는 독수리가 뭇 오리들을 가지고 놀 듯 처녀들을 희롱하던 용감한 로이코 조바르를 그녀의 아름다움이 어떻게 굴복시켰는지를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말이오. 그러면 그녀는 나의 아내가 되고, 나를 사랑하고 키스해 주겠지! 이제 나는 더 이상 여러분을 위해 노래를 부르지도, 또한 나의 자유를 애석해하지도 않을 거요! 그렇지, 랏다?" 그는 눈을 들어 물끄러미 랏다를 바라보았네. 그녀는 말없이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으로 제 발을 가리켰지. 우리는 차라리 어디론가, 로이코 조바르가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는 걸 보지 않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네. 다들 뭔가 부끄럽고, 안타깝고, 한편으론 서글프기도 한 기분이었지. "자!" 랏다가 조바르를 재촉했네. "어허, 서두를 것 없어. 이제 할 테니까. 벌써부터 사람을 들볶으려 드는군---." 그는 웃음을 터뜨렸지. 마치 강철이 울리는 것 같은 웃음이었어. "이렇게 되고 말았소, 친구들! 더 이상 무엇이 남았겠소? 이제 내가 할 일은 랏다의 마음이 그녀가 내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굳센지 시험해 보는 것뿐이오. 이제부터 시험해 볼 테니, 나를 용서하시오, 친구들!" 조바르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이미 랏다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그녀의 가슴에는 조바르의 구부러진 칼이 칼자루 밑까지 깊숙이 박혀 있었다네! 우리는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지. 그때 랏다가 가슴에 박힌 칼을 뽑아 옆으로 집어던지고는, 탐스러운 검은 머리채로 상처를 누르고, 미소를 지으면서, 또렷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는 거야. "안녕, 로이코! 난 당신이 이렇게 할 줄 알았어요!" 그리고 그녀는 죽어갔다네---. 그 처녀를 이해할 수 있겠나, 친구? 나야 영원히 저주 받을 인간이지만, 그 랏다도 정말 악마 같은 여자였어! "그래, 이제 그대 발 아래 무릎을 꿇어 주지, 오만한 여왕이여!" 로이코는 온 초원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 높여 외치고는, 땅바닥에 몸을 던져 죽은 랏다의 발에 입술을 댄 채 정신을 잃고 말았다네. 우리는 모자를 벗어 들고 묵묵히 서 있었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잇었겠나, 친구! 그래, 누르 노인이 말을 하긴 했지. "조바르를 묶어야 해---." 그러나 로이코 조바르를 묶기 위해 팔을 들어올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는 걸 그도 모르지 않았다네. 그는 두 손을 내저으며 옆으로 비켜 섰지. 바로 그때 다닐로가, 랏다가 뽑아던진 칼을 집어들었어. 그는 흰 수염을 떨며, 한동안 칼을 내려다보고 있더군. 칼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랏다의 피가 묻어 있었고, 구부러지긴 했어도 그 칼은 아주 날카로웠다네. 다음 순간, 다닐로는 조바르에게로 다가가 심장 바로 맞은편 등에 깊숙이 칼을 찔러넣었지. 노병 다닐로는 역시 랏다의 아버지였어! "잘 했소!" 다닐로 쪽으로 몸을 돌려 또렷이 말한 다음, 로이코는 랏다를 따라 숨을 거두었다네. 랏다는 머리카락을 움켜 쥔 손을 가슴에 꼭 붙이고 누워 있었으며, 그녀의 발치에는 용감한 청년 로이코 조바르가 사지를 쭉 뻗고 누워 있었지. 곱슬머리에 가려져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어. 우리들은 그 자리에 서서 각자 생각에 잠겼다네. 늙은 다닐로의 수염은 부르르 떨리고, 짙은 눈썹은 보기 딱하게 일그러져 있었지.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이 없었고, 백발의 누르는 얼굴을 땅에 박고 엎드린 채 어깨를 떨며 흐느끼더군. 거기선 누구라도 울지 않을 수 없었다네, 친구! ---자네는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옆길로 들어서지 말고 언제나 똑바로 걸어가야 해. 곧장 앞만 보고 걸어가야 한다구! 그러면 헛되이 파멸하는 일은 없을 걸세. 그게 전부야, 친구! 말을 마치자 마카르는 파이프를 쌈지에 집어넣고, 저고리의 옷깃을 여몄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었으며, 바다는 쓸쓸한 듯 노한 듯 울부짖고 있었다. 말들이 한 마리, 두 마리, 스러져가는 모닥불 가까이로 다가와서는, 커다랗고 영리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울타리처럼 주위를 에워싼 채 움직이지도 않고 서 있었다. "어이! 워! 워!" 마카르는 정겹게 소리치며, 자기가 사랑하는 검은 말의 잔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 주고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잘 시간이군!" 그리고는 저고리를 머리 위까지 끌어당겨 뒤집어쓰고는 땅바닥에 사지를 쭉 뻗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초원의 어둠을 응시하는 나의 눈 앞을 왕녀처럼 아름답고 오만한 랏다의 모습이 떠돌고 있었다. 그녀는 탐스러운 검은 머리채로 가슴의 상처를 누르고 있었으며, 까무잡잡하고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는 타는 듯 붉은 피가 작은 별들처럼 방울방울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바로 뒤를 용감한 청년 로이코 조바르가 따르고 있었다. 짙고 검은 곱슬머리가 그의 얼굴을 가리고, 머리카락 밑으로는 차고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빗줄기는 더욱 사나워졌고, 바다는 저 도도한 한 쌍의 젊은 집시, 아름다운 청년 로이코 조바르와 노병 다닐로의 딸 랏다를 위한 구슬프고 장엄한 송가를 불러 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밤의 어둠 속을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미남자 로이코는 결코, 오만한 랏다와 나란히 서지는 못하였다. 이제르길리 노파 1 내가 이 이야기들을 들은 것은 뱃사라비야의 아케르만 부근 해안에서였다. 어느 날 저녁, 함께 일하던 한 떼의 몰다비아 인들이 해변으로 몰려가 버린 뒤, 이제르길리 노파와 나는 포도넝쿨의 짚은 그늘 아래 누워, 바다 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밤의 어둠 속으로 녹아드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웃으며 걸어갔다. 남자들은 구리빛 피부에 검고 덥수룩한 콧수염, 어깨까지 드리운 숱 많은 곱슬머리에 짧은 저고리와 통 넓은 바지 차림이었다. 아낙네들과 처녀들은 모두 쾌활했으며, 하나같이 날씬한 몸매와 검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피부는 사내들과 마찬가지로 구리빛으로 그을려 있었다. 그들의 비단결처럼 검고 윤기 나는 머리채는, 세게 혹은 약하게 머리카락 사이를 휘저으며 장난을 치는 바람 때문에 마구 헝클어져 있었으며, 머리에 매달아 놓은 금화들이 바람결에 서로 부딪쳐 짤랑짤랑 소리를 내곤 했다. 바람은 넓고 잔잔한 물결처럼 가볍게 일렁이다가, 이내 거센 발작을 일으키며 여인들의 머리칼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럴 때면 머리칼은 환상적인 말갈기처럼 머리 둘레에 나부껴, 여인들을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괴상한 인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로부터 점점 멀어져갔고, 밤과 환상은 그들을 더욱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었다. 누군가 바이얼린을 켜기 시작했다. 처녀 하나가 부드러운 콘트랄토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대기에는 코를 찌르는 듯한 바다 내음과, 저녁 무렵의 비에 젖은 대지가 내뿜는 땅냄새가 스며 있었다. 하늘에는 아직도 기이한 모양과 빛깔의 비구름 조각들이 유유히 노닐고 있었는데, 이쪽에는 연기덩어리처럼 부드러운 회청색의 구름조각이, 그런가 하면 저쪽에는 부서진 바위조각같이 날카로운, 검은색 혹은 갈색의 구름조각이 떠돌고 있는 식이었다. 그 구름들 사이로, 황금빛 별들이 총총히 박힌 검푸른 하늘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소리와 냄새, 비구름과 사람들--- 이것은 모두 이상하리만큼 아름답고 슬픈 것들이어서, 어느 신비한 옛이야기의 서두를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물이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하듯, 떠들썩하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차츰 멀어져 사라지는가 싶다가도, 이내 서글픈 탄식이 되어 되돌아오곤 했다. "젊은인 어째서 저들과 함께 가지 않는 거지?" 이제르길리 노파가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세월은 노파의 허리를 사정없이 구부러 놓았고, 한때 검게 반짝였을 두 눈은 생기를 잃은 채 눈물로 짓물러 있었다. 그녀의 메마른 목소리의 울림은 너무도 기이해서, 마치 뼈다귀가 서로 부딪치며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가고 싶지 않아서요." 나는 대답했다. "어련하겠나? 러시아 사람들이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늙은이가 다 되어 태어나는 걸. 하나같이 악마처럼 음험하지---그러니 처녀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젊은인 이렇게 젊고 힘이 센데도 말이야---." 달이 떠올랐다. 크고 붉은 달이었다. 그 달은 마치, 너무도 많은 인간의 살을 삼키고 피를 빨아먹어 저렇듯 살찌고 풍성해졌을 것이 분명한 대지로부터 솟아나온 것 같았고 풍성해졌을 것이 분명한 대지로부터 솟아나온 것 같았다. 포도잎이 그림자를 던져, 그물처럼 노파와 나를 덮었다. 우리들의 왼쪽으로는 구름의 그림자가 초원을 떠돌고 있었으며, 푸른 달빛이 그 모습을 더욱 투명하고 뚜렷하게 드러내 주고 있었다. "아, 저기 라르라가 가고 있군!" 나는 노파가 손가락이 굽은 떨리는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 부유하는 수많은 그림자들 중에서 유독 검고 짙은 그림자하나가 무리들보다 빠르고 낮게 초원을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것들보다 낮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한 장의 구름조각으로부터 생긴 그림자였다. "거긴 아무도 없는데요!" 내가 말했다. "젊은 사람이 늙은이보다 눈이 안 좋군. 저길 보라구, 초원을 달려가는 검은 것이 보이잖아." 나는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나 역시 그림자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건 그림자예요. 어째서 저걸 라르라라고 부르시죠?" "저게 바로 라르라니까. 그는 이제 그림자가 되어 버렸어. 그럴 만도 하지! 그는 수천년이나 살아 왔거든. 햇볕이 그의 살과 뼈와 피를 말리고, 바람이 그를 산산히 부서뜨렸어. 인간의 오만에 대한 신의 응징이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 보고 싶군요!" 나는 초원에 얽힌 한 토막의 옛이야기를 기대하며 노파에게 부탁했다. 그녀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전의 일이야. 먼 바다 저편 해 뜨는 곳에 큰 강이 흐르는 나라가 있었지. 거기에는 우거진 나뭇잎과 풀줄기가 있어, 사람들은 그 그늘에서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었다네. 그 나라의 땅은 참으로 비옥했지! 그곳에 힘센 종족이 살았는데, 가축을 기르고 사냥을 할 때면 그들은 자기들의 힘과 용기를 남김없이 드러내 보이곤 했어. 사냥이 끝나면 그들은 잔치를 베풀고 처녀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르며 즐겼지. 그런데 한 번은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가는 중에 하늘로부터 독수리 한 마리가 내려와 밤처럼 검고 부드러운 머릿결을 가진 한 처녀를 채어가 버린거야. 사내들이 독수리에게 활을 쏘아 댔으나, 안타깝게도 화살들은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지. 사람들이 처녀를 찾아 나섰지만, 그녀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어. 그러면서 세월이 흐르고, 세상일이 흔히 그렇듯이, 사람들은 처녀의 일을 까마득하게 잊어갔지." 노파는 한숨을 내쉬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노파의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마치 인간들로부터 영원히 잊혀진 시대가 그녀의 가슴 속에서 추억의 그림자가 되어 늘어놓는 넋두리처럼 들렸다. 바다 역시 그 옛날 어느 기슭에선가 생겨났을, 이 옛 전설의 서두를 고요히 반추하고 있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어느 날, 처녀가 몹시도 찌들고 여윈 모습으로 다시 마을에 나타난 거야. 그녀는 스무 해 전의 그녀 자신처럼 아름답고 건장한 청년 하나를 동반하고 있었지. 그동안 어디 있었느냐고 사람들이 묻자, 그녀는 독수리에게 이끌려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거기서 독수리와 부부가 되어 살았노라고 대답했어. 그러니 청년은 독수리의 아들이었지. 아버지인 독수리는 이미 세상에 없었어. 그는 자신의 몸이 허약해졌음을 깨닫자, 마지막으로 하늘 높이 날아올라서는, 날개를 접고 뾰족한 바위산에 떨어져 장중하게 죽고 말았다는 것이었지---. 사람들은 놀라서 독수리의 자식을 쳐다보았어. 그들은 청년이 자신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지. 다만 그 눈이 새들의 왕에게서나 볼 수 있음직한 싸늘하고 거만한 빛을 띠고 있을 뿐---. 사람들이 말을 건넸으나, 그는 마음이 내키면 대답하고, 그렇지 않으면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 종족의 장로들을 보고도 그는 전혀 어려워하는 빛이 없었지. 사람들은 몹시 기분이 상했지만, 끝을 갈지 않은 화살처럼 그가 아직 다듬어지지 않아서 그러려니 생각하고, 좋은 말로 그를 타일렀어. 그 또래 청년들은 물론 그보다 두 배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장로들을 공경한다 해도 자신은 그리 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어. 오! --- 사람들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서 말했지. '너 같은 인간은 필요없다! 어디든 갈 데로 가 버려!' 그는 씽긋 웃고 나서 발 가는 대로 걸음을 옮겨 놓았어. 아름다운 처녀 하나가 아까부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는 그쪽으로 다가가서 처녀를 덥썩 껴안았지. 처녀의 아버지는 그를 질책한 장로들 가운데 하나였어. 그는 참으로 잘생긴 청년이었으나, 처녀는 아버지가 두려워 그를 밀쳐 버렸지. 그러자 그는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처녀를 냅다 후려갈기는 거야. 처녀가 쓰러지자 그는 그녀의 가슴을 발로 짓밟았지. 처녀는 허공에 피를 뿜으며 가쁜숨을 몰아쉬다가 뱀처럼 몸을 뒤틀며 죽어갔다네. 사람들은 눈을 부릅뜨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처녀와, 그 옆에 머리를 쳐들고, 마치 그녀에게 천벌이라도 내려 주었다는 듯이 오만하게 버티고 서 있는 청년을 바라보았지. 이윽고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그를 잡아 묶었어. 그 자리에서 그를 죽여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지. 그건 너무도 간단하고 성에 차지 않는 노릇이었기 때문이야." 밤은 더욱 깊어가고, 사방은 뭔지 모를 조용한 소리들로 가득 찼다. 초원에서는 들쥐가 구슬프게 울어 대고, 포도 잎 상로는 귀뚜라미 울음 소리가 맑게 떨려나왔다. 잎사귀들은 한숨을 쉬며 수런거렸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붉은 핏빛이었던 달은 대지에서 멀여져감에 따라 점점 창백해져서 초원을 푸르스름한 어둠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죄에 합당한 벌을 의논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지. 네 마리의 말에 사지를 묶어 그를 갈갈이 찢어 죽이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그가 저지른 죄에 비하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어. 모든 사람들이 활을 들고 화살로 그를 쏘아 죽이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 불에 태워 죽이는 건 연기 때문에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제외되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왔지만, 모든 사람들의 기분에 합당한 방법은 끝내 찾을 수 없었어. 그 한쪽 구석에 그의 어머니는 조용히 무릎을 끓고 앉아 있었지. 용서를 구하는 눈물 한 방울, 말 한 마디 없이 말이야. 사람들이 의논을 끝내지 못하고 있던 중에, 한 지혜로운 이가 한참 동안이나 무언가를 생각한 끝에 입을 열었어.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그에게 한 번 물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사람들이 묻자 그는 대답했지. '우선 나를 묶은 밧줄부터 풀어라! 이렇게 묶인 채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을테다!' 사람들은 그를 풀어 주었지. 그러자 그가 묻는 거야. '도대체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지?' 마치 아랫사람들에게 묻는 것 같은 말투였어. '이미 말하지 않았나?' 지혜로운 이가 말했지. '내가 왜 너희들에게 나의 행동을 설명해야 한단 말이냐?' '그건 우리가 알기를 원하기 때문이지. 너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살아가야하니, 보다 많은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단 말이다.' '그렇다면 좋아, 말하지. 어째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녀가 나를 떠밀었다는 사실이야. 나에겐 그녀가 필요한데도 말이지!' '그러나 그 여자는 너의 것이 아니지 않느냐?' 사람들이 말했지. '흥, 그래서 너희들은 제 것만 제 마음대로 한다는 거냐?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모두 다 같이 한 개의 입과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도, 가축이니 아내니 땅이니 해서 저마다 많은 것을 손아귀에 넣고 있는 것 같던데---.' 그래서 사람들은 설명해 주었지. 무언가를 얻으려면 마땅히 그에 대한 값을,가령 지혜라든가 노력이라든가, 심지어는 목숨까지를 대가로 치러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야. 그러나 그는 무엇이든 갖고 싶은 대로 가지면 그만이지, 대가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다고 대꾸하는 거야. 참을성있게 그와 이야기를 나눈 끝에, 사람들은 알게 되었지. 그는 스스로 지상에서 제일 가는 존재로 여기고 있으며, 자기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야. 그가 스스로 고독한 운명을 택했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꼈지. 그에게는 가족도 어머니도 아내도 없었으며, 그는 이러한 것들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았어.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에 대해 다시 의논을 시작했지. 그러나 이번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 예의 지혜로운 이가 말했지. '여러분, 내 얘길 들어 보시오! 여기 한 가지 방법이 있소. 지난 천 년 동안 이런 일을 없었으니 여러분이 듣기에 좀 이상할지 모르지만, 형벌은 바로 이 사람 속에 있소! 그것이야말로 저 사람에게 내려진 형벌이요!' 바로 이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이 울리는 거야. 그것은 하늘이 지혜로운 이의 말에 동의한다는 표시였지. 사람들은 놀라 땅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이윽고 일어나서 흩어졌어. 그때부터 그 청년에게는 '버림 받아 소외된 자'라는 뜻의 '라르라'라는 이름이 붙여졌지. 청년은 자기를 버려 두고 멀어져가는 사람들의 등 뒤에서 큰 소리로 웃어 댔어. 마침내 그는 자기 아버지처럼 자유롭게 혼자 남게 된 거지. 그는 새처럼 자유로운 생활을 시작했어. 그는 자주 마을로 내려와 가축이며 처녀들, 그 밖에 필요한 것을을 훔쳐가곤 했지. 사람들은 활을 쏘았으나, 어떤 화살도 보다 큰 징벌을 위해 만들어진 그의 살갗을 뚫을 수는 없었어. 그는 날쌔고 탐욕스러우며 잔인했지. 그러나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멀리서만 이따금씩 그를 볼 수 있었어.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혼자서 사람들 주변을 맴돌았지. 그러던 어느 날, 왠일인지 그가 사람들 가까이로 다가왔어. 사람들이 그를 보고 일제히 덤벼들었지만, 그는 전혀 피할 기색이 없는 듯,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네. 그때 사람들 중의 누군가가 홀연히 생각한 바 있어 고함을 질렀지. '그를 다치지 마시오! 그는 스스로 죽으려고 하는 것이오!' 사람들은 동작을 멈췄어. 그를 죽임으로써, 그들에게 온갖 패악을 저질렀던 인간을, 그의 운명으로부터 풀어 주고 싶지않았던 것이지. 그들은 멈춰 서서 그를 비웃었네. 그는 사람들의 비웃는 소리를 들으며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가, 갑자기 돌멩이를 집어들고 사람들에게 달려들었지.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공격을 피하기만 할뿐 좀처럼 그를 상대해 주지 않았어. 마침내 그는 기진맥진해서 처참한 외마디를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졌지. 사람들은 멀찍이 비켜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다네. 이윽고 그가 다시 일어났어. 그는 사람들 중의 누군가가 싸우다 떨어뜨린 칼을 집어 제 가슴을 찔렀지. 그러나 바위를 내려친 것처럼 칼만 휘어질 뿐이었어. 그는 다시 땅바닥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도 땅만 우묵하게 패일 뿐이었지. '저자는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고소하다는 듯 말했다네. 그들은 그를 혼자 남겨 두고 가 버렸지. 그는 땅 위에 반듯이 누워 하늘을 쳐다보았어. 하늘 높은 곳에서 독수리들이 힘차게 날고 있는 것이 점처럼 바라보였지. 그의 두 눈은 슬픔으로 가득찼어. 그것은 온 세상 사람들을 그 속에 가라앉히고도 남을 만큼 깊은 슬픔이었지. 그때부터 그는 오로지 죽음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저렇게 혼자서 떠돌고 있는 거야. 그는 온 세상를 돌아다니고 또 돌아다녔지. 젊은이도 보았듯이, 이제 그는 그림자가 되어 버렸어. 그는 영원히 저 모양으로 살아가겠지. 그는 사람들의 말도, 행동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저렇게 마냥 무언가를 찾으며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그에게는 생명도 없으려니와, 죽음마저 그를 외면했지. 또한 사람들 사이에도 그가 설 자리는 없었던 거야---. 이것이야말로 오만한 자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가 아니겠나!" 노파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더니, 머리를 가슴에 파묻고 몇 번인가 이상하게 흔들었다. 나는 조용히 노파를 바라보았다. 노파는 아직도 몽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왠지 그 모습이 가엾게 느껴졌다. 노파는 이야기의 마지막을 몹시 흥분되고 무엇엔가 위협을 느끼는 듯한 말투로 끝맺었다. 그리고 그 말투에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노예의 비굴함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해변으로부터 다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부르는 방법이 기묘했다. 처음에는 콘트랄토가 들려오다가, 두세 음절쯤에서부터 다른 목소리가 끼여들어 그 노래를 처음부터 부르는 것이었다. 처음의 목소리는 여기에 상관하지 않고 계속 노래를 불러나갔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의 목소리도 같은 간격으로 끼여들었다.그러다가 갑자기 남자들의 합창이 같은 노래를 처음부터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여자들의 목소리는 서로 완전히 동떨어진 것처럼 들렸다. 마치 여러 줄기의 시냇물이 제각기 속살대며 흘러가듯이. 그러다가 냇물들은 어딘가 높은 곳에서 골짜기로 떨어져 출렁출렁 물거품을일구면서, 힘차게 솟구치는 남성 합창의 늠름한 파도에 섞여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휩싸이는 것도 잠시뿐, 냇물은 이내 파도를 빠져나와 오히려 그것을 뒤덮으면서, 다시금 맑고 높은 목소리가 되어, 하나 둘 꼬리를 물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그 목소리들 ㄸ문에 파도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2 "어디 다른 곳에서 저렇게 노래 부르는 걸 들어 본 적이 있나?" 이제르길리 노파가 고개를 들고, 이가 다 빠져 버린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처음이에요." "앞으로도 다른 곳에선 들을 수 없을 걸? 우린 노래부르길 좋아하지. 아름다운 사람들, 삶을 즐길 줄 아는 아름다운 사람들만이 제대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법이야. 우린 삶을 사랑한다네. 저기서 노래 부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왜 피곤하지 않겠나? 그러나 해가 떠서부터 질 때까지 일을 하고도, 달만 뜨면 저렇게들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르는 거야. 살아갈 줄 모르는 사람들은 누워서 잠을 청하지만, 진정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은 저렇게 노래를 부르지." "하지만 건강을 생각한다면---." "건강이란 늘 삶 속에서 충족되는 법이지. 그래, 젊은인 돈을 가지고서도 쓰지 않겠다는 건가? 건강이란 돈이나 같은 거야. 내가 젊어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아나? 나는 해가 떠서부터 저물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융단을 짰어. 그때 나는 햇살처럼 싱싱했지만, 하루 종일 바위처럼 꼼짝 못하고 앉아 있어야만 했으니! 그러고 있노라면 나중엔 그야말로 뼈마디가 부서져나가는 것 같았어. 그래도 밤만 되면, 나는 곧장 애인을 만나러 달려가곤 했지. 그 사랑이 계속된 석 달 동안, 나는 매일 밤 그를 만나 사랑을 속삭였어. 이것 보게나, 그러고도 나는 이날 이때껏 이렇게 살아 있지 않나? 오, 그땐 정말 얼마나 열렬히 사랑했던지! 얼마나 뜨겁게 키스하곤 했던지!" 나는 노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는 빛을 잃어, 젊은 날의 추억도 이제 더는 그 눈에 생기를 불어넣지 못했다. 달빛이 그녀의 말라서 갈라진 입술과, 잿빛 솜털로 뒤덮인 뾰족한 턱과, 주름 잡힌 매부리코를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양쪽 볼에는 검은 고랑 같은 주름살이 잡히고, 낡아빠진 붉은색 머릿수건 아래로는 회색 머리칼 한가닥이 흘러내려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며 목, 양 손의 피부는 온통 주름살투성이였다. 그래서 그녀가 몸을 움직일 ㄸ마다 그 바싹 말라비틀어진 피부가 산산히 흩어져, 금세 퀭한 눈동자를 껍뻑이는 앙상한 해골 하나가 눈 앞에 나타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노파는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예의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와 둘이서 브를라트 강 기슭에 있는 팔라치야라는 마을에서 살고 있었지. 그 사람이 우리 마을에 나타난 건 내가 열다섯 달 되던 해였어. 훤칠한 키에 검은 콧수염을 가진, 아주 쾌활한 사람이었지. 그는 나룻배의 난간에 걸터앉아 우리 집 창문을 향해 소리치곤 했어. '이봐요, 혹시 술 같은 것 없소?---먹다 남은 것이라도 있으면 한 잔 주구려!' 나는 창문 안쪽의 물푸레나무 가지 사이로 그를 바라보았지. 강물은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데, 그는 새하얀 루바시카에 폭이 넓은 허리띠를 매고, 한 발은 나룻배에, 다른 한 발은 강기슭에 걸친 채 서 있는 거야. 그런 모습으로 서서 몸을 흔들며, 그는 무슨 노래인가를 부르고 있었지. 그러다 나를 발견하곤 소리치는 거야. '허어, 여기에 저런 미인이 살고 있었나? 난 까맣게 몰랐는데!' 그는 나 말고도 수많은 미인들을 알고 있는 것 같았어. 나는 술과 구운 돼지고기를 그에게 갖다 주었지---. 그리고 나흘이 지나서는 나의 모든 걸 그에게 주어 버렸어---. 우리는 매일 밤 뱃놀이를 나갔지. 그가 우리 집 창문 아래 서서 들쥐처럼 조용히 휘파람을 불면, 나는 물고기처럼 가볍게 창문을 뛰어넘어 강가로 달려가곤 했어. 그리고 우리는 배를 탔지. 그는 푸르드에서 온 어부였어. 우리 일을 눈치챈 어머니가 나를 때리곤 하자, 그는 도부루드자나 더 멀리 다뉴브 강 어귀로 도망을 치자고 나를 꾀었지. 그러나 그땐 벌써 그에게 싫증이 나기 시작하던 참이었어. 그가 아는 것이라곤 노래와 키스뿐이었거든! 그런 건 이미 따분한 일이 되어 버렸지. 당시 카르파치아와 우크라이나 인 도적들이 떼를 지어 그 지방을 오르내리곤 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제법 귀여운 청년들도 섞여 있었어. 내겐 그쪽이 훨씬 재미있어 보였지. 가령 어떤 여자가 자기의 카르파치아 청년을 기다리다지쳐, 그가 이미 감옥에서 죽었거나, 어느 싸움판에선가 맞아 죽었으려니 생각하고 있을 때, 청년이 불쑥 들어서는거야. 혼자서, 혹은 친구 두셋과 함께,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홀연히 나타나는 거지. 선물까지 한 아름 안고서 말이야.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청년은 여자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친구들 앞에서 그녀를 자랑하는 거야. 여자가 얼마나 행복하고 흡족했겠나! 나도 그런 우크라이나 사람과 사귀고 있던 친구한테 부탁해서 그들을 본 적이 있지---그녀의 이름이 뭐였더라? 모르겠어. 이젠 모든 걸 잊어버리기 시작했으니까. 세월이 그렇게 흘렀으니 잊을 만도 하지! 아무튼 그 친구가 나에게 어떤 청년을 소개시켜 주었어. 정말 멋진 사람이었지---그는 붉은 머리였어. 수염도, 머리카락도 온통 붉은색이었지. 마치 머리가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그는 매우 우울해 보이다가도 ㄸ로는 한없이 다정스럽고, 그러다가 또 어느 ㄸ는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며 소동을 피우곤 했어. 한 번은 그가 내 얼굴을 후려갈기길래, 나도 성이 나서 고양이처럼 달려들어 그의 뺨을 물어뜯어 버렸지---. 그 때문에 그의 볼에는 커다란 흉터가 생기고 말았어. 그래도 내가 거기에 키스를 하면 그는 무척이나 즐거워하곤 했었지---." "그럼 어부는 어떻게 됐죠?" "어부? 아, 그래---그 사람도 있었지. 그도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패거리에 끼여들었어. 처음에는 나를 타이르기도 하고, 강물에 처넣어 버리겠다고 난리를 치기도 하더니, 그후론 더 이상 시끄럽게 굴지 않더군. 그러다가 결국 그들과 한 패가 되어, 다른 여자와 시시덕거리고 다니게 되었지. ---뒤에 그는 나와 사귀던 우크라이나 청년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어. 나는 그 처형 장면을 보러 갔었지. 형은 도부루드자에서 집행되었어. 보니, 어부는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서 눈물을 짜며 교수대에 올라가는데, 그 우크라이나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파이프를 뻑뻑 빨고 있는 거야. 그가 호주머니에 양 손을 찌르고 담배를 피우며 내 쪽으로 걸어오더군. 콧수염 한 가닥은 어깨 위에, 다른 한 가닥은 가슴에 늘어뜨리고 말이야. 나를 보자 그는 파이프를 입에서 빼들고 소리쳤어. '잘 있어!' 그후 꼬박 1년이 지나도록 그를 잊을 수 없었지. 오, 하필이면 그 일은 그들이 막 카르파치아의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던 때에 일어났어. 작별 인사를 하러 어떤 루마니아인의 집에 들렀다가 거기서 붙잡힌 거야. 붙잡힌 건 그들 두 사람뿐이었지만---몇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고, 나머지는 달아나고---물론 그 루마니아 놈도 나중에 보답을 받았지---집도, 방앗간도, 곡식도 모조리 불타 버렸거든. 거지가 된 거야." "당신이 불을 질렀나요?" "글세, 그 우크라이나 인에겐 친구가 많았으니까---나 혼자는 아니었지---친구들 중의 하나는 그들의 제사까지 지내 주었어---." 해안의 노래 소리는 이제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출렁이는 물결 소리가 노파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격렬하면서도 아련한 그 소리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와 훌륭한 화음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밤공기는 한결 부드러워지고, 달은 더 멀리까지 담청색 달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밤의 주민들이 내는 온갖 자잘한 소음들은 거칠어진 파도의 철썩거리는 소리에 묻혀 조용히 가라앉았다---바람이 강해졌던 것이다. "나는 한때 터키 사람을 사랑한 적도 있었어. 스쿠타르에서였지. 나는 꼭 한 주일을 그의 할렘에 머물렸어.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더군. 여길 봐도 여자, 저길 봐도 여자---여자뿐이었거든. 그에게는 아내가 여덟 명이나 있었으니까. 그들은 하루 종일 먹고 자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지껄어 대는게 고작이었어. 때로는 누군가를 욕하거나, 암탉처럼 쓸데없이 킥킥거리기도 했지만. 그 터키 사람은 이미 젊은 나이가 아니었지. 머리는 거의 반백이었고---하지만 그는 엄청난 부자인데다 무척이나 점잖은 사람이었어. 그가 말하는 모습은 마치 제왕 같았지. 쏘는 듯한 검은 눈빛은 사람의 영혼을 꿰뚫어보는 듯했어. 그는 기도 드리기를 무척이나 좋아했지.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부쿠레시티에서였어. 그는 제후처럼 늠름한 모습으로 장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위엄에 찬 눈길로 이것저것을 둘러보고 있더군. 나는 그에게 살짝 미소를 보냈지. 그날 밤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데, 사람들이 나를 잡아 그에게로 데기로 갔어. 그는 백단과 종려를 사고 파는 사람이었는데, 부쿠레시티에 온 것도 무언가를 사기 위해서였어. '나를 따라 가지 않겠나?' 그가 묻더군. '네, 가겠어요.' '좋아!' 그렇게 해서 나는 그의 집으로 가게 되었지. 그는 대단한 부자였어.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눈이검고 늘씬한 몸매를 가진 소년이었지. 그때 아마 열여섯 살쯤되었을 거야. 나는 그와 함께 그곳을 떠나 불가리아의 롬팔란카로 도망쳤지. 거기서 나는 한 불가리아 여인에게 칼로 가슴을 찔린 일도 있었어. 내가 그녀의 약혼자인지 남편인지 하는 사내를 꼬였던가 어쨌던가---글세, 그때 일은 까맣게 잊어버려서---. 그 즈음 한 번은 병에 걸려 어느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신세를 진 적도 있었지. 여자들만 있는 수도원이었는데, 한 폴란드 처녀가 내 병 시중을 들어 주었어. 아마 아르체르팔란카 부근이었다고 기억되는데, 그 처녀의 오빠라는 사람이 자주 찾아오곤 했었지. 그도 수도사였어---그런데 이 사람이 나한테 넋이 빠져서는 찰거머리처럼 내 곁에 누어붙어 있는 거야---병이 나은 뒤 그와 함께 그의 고향인 폴란드로 갔지." "가만---그 터키 소년은 어떻게 됐죠?" "그애? 그앤 죽어 버렸어. 향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사랑 때문이었는지--- 아무튼 햇볕을 너무 많이 쬔 나무처럼 빼ㅃ 마르기 시작하더니---나중엔 몸이 얼음덩어리처럼 투명해져서 자리에 누워만 있었지. 그의 상태는 점점 나빠져서 마침내는 거의 움직일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어. 그는 자리에 누운 채, 마치 구걸하듯 애처롭게 부탁하더군. 자기 옆에 눕기만 하면 그의 몸은 이내 따뜻해지곤 했어.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눈을 떠 보니 그의 몸이 싸늘한 거야. 끝내 죽어 버린 거지---나는 울었어. 왜냐고? 내가 그애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때 벌써 나는 그애의 두 곱이나 나이를 먹었었지." 노파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바싹 마른 입술로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세 번 성호를 그었는데, 노파의 그런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그뒤에 폴란드로 떠나셨던 거군요---." 나는 슬며시 노파를 일깨웠다. "그래, 그 작달막한 폴란드 인과 함께 떠났지. 그는 정말 우스꽝스럽고 비열한 사내였어. 내가 필요할 때면 숫고양이처럼 아양을 떨며 온갖 달콤한 말을 늘어놓다가도,변덕이 나면 채찍으로 후려갈기듯이 험한 말을 퍼부어 대곤했지. 한 번은 둘이서 강가를 걷고 있는데, 그자가 또 무례하게 모욕적인 소리를 내뱉는 거야. 얼마나 화가 너던지! 나는 머리 끝까지 열을 받아서, 마치 어린아이를 들어올리듯 그의 두 손을 붙잡아 번쩍 쳐들어서는 숨통이 끊어지도록 옆구리를 짓눌러 주었어. 몸집이 작은 사내였으니까. 그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군. 나는 그자의 몸뚱이를 공중에 한 번 휘둘러 그대로 강물에 집어던져 버렸지. 그는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어. 가관이더군. 나는 그자가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꼴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그곳을 떠나 버렸지. 그뒤론 한 번도 만나지 못했어. 그런 점에서 나는 상당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 한 번 사랑했던 사람을 뒷날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으니까. 헤어진 사람과 다시 만난다는 건 바람직한 일이 못 돼. 그건 죽은 사람과 만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노파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되살아나는 사람들을 눈 앞에 그려 보았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을 가진 우크라이나 인이 파이프를 뻑뻑 빨아 대며 태연히 교수대에 오르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분명 사물을 꿰뚫어볼 수 있는 차고 푸른 눈동자를 가졌으리라. 그 옆에서는 푸르드 출신의 검은 콧수염을 단 어부가 죽음을 두려워하며 울고 있다.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며 창백하게 질린 그의 얼굴에선 한ㄸ 그처럼 명랑했던 두 눈이 생기를 잃은 채 맥없이 껌뻑이고, 눈물에 젖은 콧수염은 일그러진 입가에 슬프게 드리워져 있다. 그 저쪽에는 숙명론자이면서 폭군이기도 한 위엄 있는 터키인이, 그리고 그 옆에는 숱한 키스에 시들어 버린 동방의 꽃을 닮은 그의 아들이 서 있다. 그 뒤에 서 있는 폴란드인은 허영심이 많고, 여인들에게 다정스러우면서도 난폭하며, 자상하면서도 냉혹하다---이 모든 사람들은, 지금은 이미 창백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그들이 사랑했던 여인만이 홀로 남아,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 역시, 오랜 세월에 바래어 살과 피는 마르고, 희망은 사라지고, 두 눈의 빛마저 꺼지고 말았으니, 또한 그림자나 다름없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노파는 다시 입을 열었다. "폴란드에선 무척 힘들었었지. 거기 사람들은 냉혹하고, 하나같이 거짓말쟁이들이었어. 나는 그들의 독설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들은 늘 무언가에 대해 툴툴거리고 있었지. 무얼 그리 툴툴거렸을까? 그들이 하도 거짓말을 잘 하니까, 신이 그렇게 고약한 혀를 내려 준 모양이야. 그때 나는 어디로 가겠다는 목적도 없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곤 했지. 한 번은 폴란드 사람들이 러시아에 반란을 일으키려고 모여 있는 곳을 지나가기도 했어. 나는 보흐니아까지 걸어갔지. 거기서 한 유태인이 나를 사 주었어. 그 자신이 나를 어찌 해 보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가지고 장사를 하기 위해서였지.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어.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할 줄 아는게 아무 것도 없었으니.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만큼의 돈만 모이면 나를 옭아맨 쇠사슬이 아무리 튼튼하더라도 단숨에 끊어 버리고 돌아가리라 생각했지. 그럴 작정으로 그곳에서 하루하루를 살았어. 돈 많은 신사들이 숱하게 찾아와 술을 마시며 놀다 가곤 했지. 아마도 돈깨나 썼을 거야. 때로는 나를 놓고 그 사람들끼리 싸움을 벌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재산을 완전히 털어먹기까지 했지. 한번은 나를 만나러 끈질기게 들락거리곤 하던 한 신사가 하인에게 돈자루를 들려 찾아온 적도 있었어. 그가 내 머리 위에서 자루를 풀어헤치자 금화가 우수수 떨어지더군. 금화들이 짤랑거리며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기분은 괜찮았지만, 나는 주저없이 그를 내쫓아 버렸어. 그는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얼굴에 커다란 베개 같은 배를 가진 사내였지. 내 머리위에 황금을 덮어씌우기 위해 그가 땅도, 집도 말도 모두 팔아 버렸다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어. 사실 그때 난 상처투성이 얼굴을 가진 한 훌륭한 신사를 사랑하고 있었거든. 그의 얼굴에 난 십자 모양의 상처는 그리스 인들을 위해 터키 군대와 싸우다가 얻은 것이었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어---. 그리스 인들의 일이 폴란드 사람인 그와 무슨 상관이 있었겠나? 그런데도 그는 그리스 사람들을 도와 그들의 적과 싸웠던 거야. 그의 한쪽 눈은 칼에 찔려 튀어나가 버렸고, 왼쪽 손의 손가락 두 개도 잘려나가고 말았지---. 폴란드 사람인 그가 그리스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거야! 이 세상을 위해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고, 그것이 가능한 장소를 찾아내는 법이지. 그걸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게으름뱅이나 겁쟁이가 아니면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인간이야.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가길원하지.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삶은 결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야금야금 그를 삼켜 버리지 않을 거야---. 아무튼 이 상처투성이 신사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었어. 그는 무슨 일이든 하려고만 하면 세상 끝까지라도 갈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지. 아마 그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 사람들에 의해 살해되었을 거야. 그런데 참, 러시아 사람들은 어째서 그렇게 마자르 인들을 못살게 구는거지? 아니, 됐어---. 그런 얘긴 그만 두자고---." 내 말을 가로막은 이제르길리 노파는 자신도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나는 한 마자르 인과도 사귀어 본 적이 있어. 그는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내 곁을 떠나가 버렸지. 그때는 겨울이었어. 봄이 되어 눈이 녹은 다음에야 나는 그가 머리에 화살을 맞고 들판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지. 어째서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그래,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있었지? 오라, 폴란드---그래, 나는 그곳에 서 내 생의 마지막 불장난을 벌였었어. 나는 어떤 귀족을 알게 되었지. 그는 정말 보기 드문 미남이었어. 악마처럼 아름다운 사내였지. 그때 나는 이미 나이게 꽤 들었었어. 마흔쯤 됐을까? 하지만 그는 여자들에게 한창 인기가 있을 나이였지. 나는 점점 그에게 마음이 끌렸어.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나에게 접근해온 거야. 나는 그를 거절했지. 나는 한 번도 누군가의 노예가 되어 본 적은 없었으니까. 당시 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어. 말이든, 돈이든, 하인이든, 없는 게 없었지. 그 도도한 악마는 내가 스스로 제 손아귀에 굴러들기를 바랬어. 우린 가끔 말다툼을 하기도 했지---. 그 때문에 병까지 얻었던 기억이 나는군. 그런 상태가 오래 계속되었어. 결국 사내는 내 앞에 무릎을 끓었지. 그러나 내 마음을 얻자마자 그는 나를 차던져 버렸어. 그때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깨달았지. 그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었어. 나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는 보기만 하면 나를 비웃는 거야. 참으로 비열한 인간이었지!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를 비웃는 말을 하고 다녔어. 나는 그런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지. 내 가슴은 갈갈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 그러나 그가 가까이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지. 그를 볼 수라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는 러시아 인들과 싸우기 위해 떠나 버렸던 거야. 괴로워서 미칠 것 같더군. 차라리 죽어 버릴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그를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지. 그가 바르샤바 근처의 숲속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거든. 그러나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ㄸ 그들은 이미 러시아군에게 격멸된 뒤였어. 나는 그가 포로가 되어 가까운 마을에 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 이제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겠구나,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어. 못 견디게 그가 보고 싶은 거야. 나는 어떻게든 그를 만나 보기로 결심했어. 그래서 거지 행색을 하고 얼굴을 가린 채 다리를 절뚝거리며 그가 붙잡혀 있는 마을을 찾아갔지. 가는 곳마다 카자크 인들과 병사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어. 나는 간신히 폴란드 사람들이 갇혀 있는 곳을 알아냈지. 그러나 그곳에 접근한다는 건 몹시 위험한 일이었어. 나는 밤이 되기를 기다려 그들이 있는 곳으로 기어들었지. 채소밭을 따라 기어가다 보니 저 앞쪽에 보초가 서 있는 게 보이더군---그리고 폴란드 사람들의 노래 소리가 들렸어---오오! 성모여---나의 아르카데크도 저 속에 섞여 노래를 부르고 있겠지! 전에는 사내들이 나를 찾아왔으나, 지금은 내가 뱀처럼 땅바닥을 기어 사내 있는 곳으로 숨어들고 있구나, 목숨까지 내걸고---그런 생각을 하자 견딜 수 없이 비참한 기분이 들더군. 그때 보초가 무슨 기척을 들었던지 내 쪽으로 돌아서는 거야. 이젠 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 나는 땅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다가갔어. 그때 내겐 작은 칼 하나도 없었지. 나를 지킬 것이라곤 손과 혓바닥뿐이었어. '잠깐만요---.' 나는 작은 소리로 말을 걸었지. '인정이 있는 분이라면 잠깐 제 말을 들어주세요. 보시다시피 당신께 드릴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몸이지만, 부디 제 부탁 좀 들어주세요---.' 그는 총을 내리고 나직이 말했어. '썩 물러가시오! 여긴 무엇 하러 왔소?' 나는 아들이 이곳에 갇혀 있다고 말했지. '병사님, 어미에게 아들이 어떤 것인지 당신도 잘 아실 거예요. 당신도 한 어머니의 아들일 테니까. 제게도 당신 같은 아들이 있는데, 지금 여기 갇혀 있어요.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 애를 만나게 해 주실 수 없나요? 그 앤 곧 죽게 될지도 몰라요. 혹 내일이라도 당신이 죽게 된다면 당신 어머니는 얼마나 슬퍼할까요? 그 어머니를 보지 못하고 죽게 된다면 당신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프겠어요? 지금 제 아들이 그런 처지에 있어요. 제 아들을 당신 자신이라 생각하고 저를 당신 어머니라 여겨, 부디 저희 모자를 만나게 해 주세요!' 나는 말을 하면서 슬쩍슬쩍 그를 훔쳐보았어. 그는 비쩍 마르고 몸집이 작은 남자였는데, 계속 기침을 하고 있더군. 나는 진창에 고꾸라졌어. 나는 그의 머리를 비틀어,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진흙에 얼굴을 처박아 버렸지.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등을 타고 앉은 나를 떨구기 위해 몸을 비비적거릴 뿐이었어. 나는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진흙탕 속에 더욱 깊이 밀어넣었지. 마침내 그는 숨이 멎었어요! 나는 곧장 폴란드 사람들이 노래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지. '아르카데크!' 나는 벽의 틈 사이로 속삭였어. 곧 아르카데크의 눈이 내 눈앞에 나타났지. '거길 빠져나올 수 있겠어요?' '널판을 뜯어내면 될 것 같은데.' '그럼, 서둘러요.' 아르카데크와 그의 동료 세 명이 곳간의 널판 밑으로 기어나왔어. '보초는 어디 있지?' 아르카데크가 묻더군. '저기 늘어져 있어요.' 우리는 땅바닥을 기어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지.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바람은 계속해서 불었어. 우리는 마을을 벗어난 뒤에도 오랫동안 말없이 산길을 걸었지. 오, 그렇게 침묵 속에서 그와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했던지! 그것은 내 생애 최후의 아름다운 순간이었어! 또한 그것은 파란만장했던 내 인생의 마지막 불꽃이었지! 우리는 초원으로 나와서야 걸음을 멈추었어. 네 사람 모두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모르더군. 그들은 고맙다는 말을 수도 없이 되풀이했어. 나는 그런 말을 귓가로 흘리며 나의 아르카데크만 바라보고 있었지. 이제 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나를 덥썩 껴안으며 정답게 속삭였어---글세,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자신을 구해 줘서 고맙다고, 이제부터는 영원히 나만을 사랑하겠다고---대충 그런 말이었을 거야. 그리고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미소를 지으며 말하겠지. '나의 여왕이여!' 알겠나, 그자가 얼마나 뻔뻔스러운 거짓말쟁이인지? 나는 그를 발길로 걷어차 버렸어. 그리고는 얼굴을 한 대 갈겨 주려는데, 그가 잽싸게 내 주먹을 피하면서 벌떡 일어서더군. 그는 얼굴빛이 하얗게 질린 채 내 앞에 서 있었어. 다른 세 사람도 어두운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지. 아무도 말이 없었어. 나는 잠자코 그들을 노려보았지. 지금도 기억나지만, 그때 내 기분은 몹시 괴로웠어. 모든 것이 귀찮고---나는 그들에게 말했지. '가고 싶은 대로 가 버려요!' 그러자 그 비열한 사내들은 말하는 거야. '돌아가서 저들에게 우리가 간 곳을 알려 주려는 것 아니오?' 더러운 인간들 같으니!---아무튼 그들은 떠나갔어. 나도 그곳을 떠났지. 다음 날 나는 러시아 군대에 붙잡혔지만 곧 석방되었어. 그때 나는 깨달았지. 이제는 어딘가에 둥지를 틀고 딱따구리처럼 살아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이야. 날개는 약해지고 깃털은 윤기를 잃고---마침내 때가 온 것이었지! 나는 거기서 갈리시아로 갔다가 도부루드자로 되돌아왔어. 그리고 이럭저럭 30여 년을 이곳에서 살아오고 있는 거지. 몰다비아 출신의 남편이 있었지만, 그도 1년 전에 죽고 말았어. 그래서 이렇게 나 혼자 살고 있는 거지---아니, 혼자는 아니군. 저들이 있으니까." 노파는 손을 들어 바다 쪽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곳은 조용했다. 다만 이따금씩dl 무언가 짤막하고 불확실한 소리가 들리다가는 이내 스러지곤 할뿐이었다. "저들은 나를 좋아하지. 나는 저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고---저들에겐 그런 게 필요하거든. 다들 아직 젊으니까. 나도 저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좋아. 저 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게도 한때 저런 시절이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물 론 내가 젊었을 때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강하고 정열적이었지---세상 사는 것도 지금보다 훨씬 근사하고 즐거웠어. 정말이야---." 노파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 옆에 앉아 있으려니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노파는 꾸벅꾸벅 졸면서 입 속으로 뭔가 중얼거렸다. 기도라도 드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바다로부터 험준한 산맥처럼 커다란 먹구름이 피어올랐다. 그 꼭대기에서 조각구름 몇 점이 떨어져나와 앞으로 달려나가며 별빛을 하나 둘 꺼뜨렸다. 바다는 흐느끼고, 우리들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는 포도덤불들이 서로 키스하고, 속삭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초원 멀리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기는 콧구멍을 간지럽히는 이상한 냄새로 신경을 건드렸다. 구름으로부터 층층의 짙은 그림자들이 떨어져 땅 위를 기어다니며, 사라졌다가는 다시 나타나고, 나타났다가는 다시 사라지곤 했다. 달이 있던 자리에는 단지 우유빛의 희미한 반점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무언가 무시무시한 것을 감추고 있는 듯 어둡고 괴괴한 초원 저편에서 작고 파란 불길이 깜빡거렸다. 그것들은 여기저기서 갑자기 나타났다가는 이내 사라지곤 했다. 마치 사람들이 성냥불을 켜들고 초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 그리고 바람이 그 성냥불들을 순식간에 불어 꺼버리는 듯했다. 그 기 괴하고 파란 불꽃들은 마치 어떤 오래된 이야기를 암시해 주는 것 같았다. "불빛이 보이나?" 이제르길리 모파가 물었다. '저 푸른 불꽃 말입니까?" 나는 초원을 가리켰다. "푸르다고?---그래, 그것---지금도 날아다니고 있구만요!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볼 수가 없어. 이제 나는 많은 것을 보지 못하거든." "저 불꽃들은 뭐죠?" 나는 노파에게 물었다. 거기 대해 약간 들은 바가 있긴했지만, 이제르길리 노파는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저것들은 단코의 뜨거운 심장에서 나온 거야. 어느 땐가, 이 세상에 마치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하나의 심장이 있었지---어디, 그 이야기를 해 볼까? 이것 역시 아주 오래된 이야기인데---모든 것이 오랜 옛일이로구만! 젊은인 옛날 일을 다 알고 있나? 하긴 요즈음은 일도, 사람도, 이야기도 옛날 같은 건 아무 것도 없으니---어째서 그럴까? 어디, 말해 보게. 말 못하는군. 젊은인 모르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아는 게 없어. 옛날 일을 주의깊게 돌아보면 거기서 모든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텐데---옛날을 돌아보지 않고는 제대로 살아나갈 수 없어. 내가 세상일을 모르는 줄 아나? 천만에! 비록 두눈은 흐려졌지만, 나는 모든 걸 꿰뚫어볼 수 있다구! 요즘 사람들은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삶을 흉내내고 있을 뿐이야. 나는 흉내를 내는 데 한평생을 써 버리고 마는 사람들을 숱하게 보아 왔지. 흉내나 내면서 하루하루를 허송하다가,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ㅇ게 되면 사람들은 팔자를 원망하기 시작하지. 그런데 팔자라는 게 도대체 뭔가? 그건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야! 요즘도 숱한 사람들을 보고 있지만, 옛날 사람들처럼 강한 사람은 볼 수가 없어!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가 버렸을까! 아름다운 사람들도 점점 줄어만 가고 있으니---." 노파는 그들이 어디로 가 버렸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듯, 그리고 마치 그 해답을 찾기라도 하려는 듯 생각에 잠긴 얼굴로 어두운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뭔가 질문을 하면 그녀의 이야기가 또 다른 길로 새 버릴까 두려워 잠자코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노파는 드디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3 "옛날 이 세상에 어떤 종족이 살고 있었지. 그들의 마을은 사람이 뚫고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울창한 숲으로 삼면이 막혀 있었고, 나머지 한쪽은 초원으로 이어져 있었어. 그들은 아주 쾌활하고 힘이 세며 담대한 사람들이었지. 어디선가 다른 종족이 나타나 이들을 깊은 숲속으로 쫓아 버렸던 거야. 그곳에는 오직 늪과 어둠만이 존재할 뿐이었어. 너무도 오래된 삼림이어서 나뭇가지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얽혀 있었고, 햇빛이 그 틈을 뚫고 들어와 늪지를 비추는 일은 거의 없었지. 어쩌다 햇빛이 수면을 비출 때면 늪에서는 지독한 악취가 피어올랐어. 그 악취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가자 여자들과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남자들은 고민에 빠졌지. 어떻게든 숲을 빠져나가야겠는데, 거기에는 두가지 길이 있을 뿐이었어. 하나는 뒤로 가는 길이었지. 그런데 거기에는 힘세고 흉악한 적의 무리가 있었어. 다른 한 길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거기에는 또한 천 길 만 길이나 되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억센 가지를 겯고 갈구리 같은 뿌리를 진창에 박은 채 버티고 서 있었지. 돌처럼 단단한 그 나무들은 낮이면 희미한 어둠 속에 꼼짝 않고 서있다가도 모닥불을 피우는 밤이 되면 더욱 빽빽하게 사람들 주위를 에워싸는 것이었어. 드넓은 초원에서의 생활이 몸에 밴 그들에게, 밤낮없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짙은 어둠의 고리는 숨이 막힐 정도로 괴로운 것이었지. 바람이 삼림 위를 스쳐, 마치 장송곡을 부르듯 온 숲이 음산하게 울부짖을 때면, 주위는 더욱 괴괴한 어둠에 잠기곤 했어. 그들은 자기들을 쫓아낸 무리들과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을 만큼 강한 종족이었으나, 그런 싸움에 생명을 버릴 수는 없었지. 왜냐하면 그들에겐 선조들이 남긴 여러 가지 가르침이 있었는데, 그들이 죽어 버린다면, 그 가르침도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었어.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음산한 숲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늪에서 나는 악취를 견디며 기나긴 밤을 고민으로 지샜던 거야. 그들이 말없이 앉아 있을 때면, 모닥불빛에 비친 그림자들이 그들 주위에서 소리없이 춤을 추곤 했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라, 마치 숲과 늪의 악령들이 승리의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어. 그들은 언제까지고 말없이 앉아 생각에 잠기곤 했지. 이런 우울한 생각들만큼 사람의 몸과 마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은 없어. 그들은 생각 때문에 날로 쇠약해져갔지. 두려움이 그들 속에서 자라나 억센 손들을 묶어 버렸고, 여자들은 점점 더 겁에 질려서, 악취 에 질식해 죽은 시체들과 공포로 얼어붙은 사람들의 운명에 눈물을 흘렸어. 그리하여 숲속에서는 비겁한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지. 처음에는 조심스러운 소리들이었으나, 그 소리는 점점 높아졌어. ---사람들은 적에게로 가서 자신들의 자유를 바치기를 원했지.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그들은 평생을 노예로 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어. ---그런데 여기 단코라는 사람이 나타나 홀로 그들 모두를 구했던 거야." 노파는 단코의 불타오르는 심장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수도 없이 되풀이한 것 같았다. 그녀는 마치 노래를 부르듯 이야기에 운율을 붙여서 말했고, 그녀의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는 초원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늪의 악취에 질식당해 죽어가는 숲의 소리들을 오히려 선명하게 그려 보여 주고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단코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어. 참으로 아름답고 용감한 청년이었지.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어. '생각만으로는 길가의 돌멩이 하나 움직이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어ㅉ서 우리는 고민과 슬픔으로 힘을 낭비하고만 있는 겁니까? 자, 일어나서 저 숲을 뚫고 나갑시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끝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숲이라고 끝이 없겠습니까? 자, 갑시다, 여러분!' 사람들은 그를 쳐다보았어. 그리고 그가 그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사람임을 알아보았지. 그의 두 눈에서는 넘치는 힘과 생기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자네가 앞장서게!' 사람들이 말했어. 그리하여 그가 모든 사람들을 이끌게 되었던 거지---." 노파는 이야기를 멈추고 짙은 어둠에 잠겨 있는 초원을 바라보았다. 불타는 단코의 심장에서 나온 파란 불꽃이 초원 멀리서 반짝 피어올랐다간 이내 꺼져 버렸다. "단코는 사람들을 이끌고 나아갔어. 모든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랐지. 그만큼 그를 믿었던 거야. 그건 참으로 힘든 길이었지! 사방은 캄캄했고, 늪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탐욕스러운 입을 벌려 사람들을 삼켜 버렸어. 거기다 나무들이 철벽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었지. 나뭇가지는 뱀처럼 엉겨 있고 뿌리는 발 디딜 틈 없이 뻗어 있어 그들은 한발짝씩 떼어 놓을 때마다 숱한 땀과 피를 흘려야만 했어.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나아갔지. ---숲은 더욱 울창해지고, 힘은 점점 빠졌어! 마침내 사람들은 단코를 원망하면서, 저런 애숭이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 수 있겠느냐고 투덜거리기 시작했지. 그러나 그는 의연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앞장서서 나아갔어. 그러던 어느 날 천둥이 숲을 울리고, 나무들이 음산하게 술렁대기 사작했지. 세상이 생겨난 이래의 모든 밤이 그곳에 모여든 것처럼, 숲은 삽시간에 암흑천지로 변했어. 거목들 사이로 울리는 무시무시한 천둥소리에 쫓기며, 그 작은 인간들은 걷고 또 걸었지. 천 길 만 길이나 되는 거대한 나무들은 몸부림치며 성난 노래를 부르고, 번개는 나무 위를 날아 사라지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어. 차가운 섬광 속에 모습을 드러낸 나무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짐승처럼 길을 막고 서서, 그 길고 우툴두툴한 손가락을 뻗어 가련한 어둠의 포로들을 다시금 빽빽한 그물 속에 가두는 것이었지. 또한 나뭇가지 너머 어둠 저편에서는 무언가 거무스름하고 무시무시한 것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어. 참으로 험난한 길이었지. 기진맥진한 사람들은 더욱 의기소침해졌어. 그러나 자신들의 무능을 인정하기는 부끄러웠으므로, 그들은 단코가 자기들을 이끌 능력이 없다고 비난하면서, 그에게 화를 내고 욕설을 퍼부었지. 세상일이란 늘 그런 법이니까! 지치고 분노한 사람들은 사납게 울부짖는 숲의 어둠 속에 멈추어 서서 단코를 재판하기에 이르렀어. '너는 우리들에게 해만 끼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공연히 우리를 이끌고 나와 이 꼴로 만들었으니, 너는 죽어 마땅하다!' '나에게 앞장 서라고 말한 것은 당신들이오! 바로 그래서 내가 당신들을 이끌고 나온 것이오!' 단코는 가슴을 내밀며 소리쳤어. '당신들을 인도할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당신들을 이끌고 온 거요! 그런데 당신들을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무슨 일을 했소? 당신들은 그저 뒤따라오기만 했지, 먼 길을 가는 데 필요한 힘을 아껴 두지도 않았소. 당신들은 단지 양떼처럼 걷기만 했을 뿐이란 말이오!' 그 말은 사람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지. '너는 죽어야 한다! 너는 죽일 놈이다!' 그들은 아우성쳤어. 숲은 그들의 고함에 맞장구치며 술렁거렸고, 이따금씩 섬광이 어둠을 갈갈이 찢어 놓곤 했지. 단코는 이제껏 자신의 노력을 바쳐 온 그 사람들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어. 그들은 한 떼의 짐승처럼 보였지. 그를 에워싸고 있는 어느 얼굴에서도 감사의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어. 그들의 용서를 구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지. 순간, 그의 심장에서도 분노의 화염이 솟구쳤으나, 동정심 때문에 그것은 이내 꺼지고 말았어. 그는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생각했지, 자기가 없으면 그들은 모두 죽고 말 것이라고 그의 심장은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이끌겠다는 열망으로 다시금 활활 불타올랐어. 그러나 그의 두 눈에 이글거리는 빛을 분노의 불길로 착각한 사람들은 그가 갑자기 자기들에게 달려들지나 않을까하여 승냥이처럼 긴장했지. 그리고 여차하면 그를 덮쳐 사로잡을 계산으로 더욱 빽빽히 단코를 에워쌌어. 단코도 그들의 속셈을 알아차렸지. 그의 심 장은 슬픔으로 더욱 붉게 타올랐어. 숲은 여전히 음울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천둥은 더욱 사납게 울부짖었으며,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지. '이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단코는 천둥처럼 부르짖었어. 그리고는 갑자기 가슴을 찢어 그 속에서 자신의 심장을 끄집어내서는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었지. 그것은 태양처럼, 아니 태양보다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어. 사람들을 향한 이 위대한 사랑의 횃불 앞에서 숲은 고요해졌지. 그 빛에 쫓겨 산산히 부서진 어둠은 늪의 썩은 아가리 속으로 흔적도 없이 스며들었고, 놀란 사람들은 화석처럼 그 자리에 못박혀 버렸어. '자, 갑시다!' 단코는 소리치며 타오르는 심장을 높이 쳐들고 앞장 서서 달리기 시작했어. 사람들은 홀린 듯 그 뒤를 따라 돌진했지. 숲이 다시금 수상하게 술렁대기 시작했지만, 그 소리는 달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에 파묻혀 버렸어. 불타는 심장의 기적에 압도된 사람들은 빠르고 용감하게 앞을 향해 내달렸지. 도중에도 계속해서 쓰러지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그들은 더 이상 눈물을 흘리거나 누구를 원망하는 일없이 기꺼이 죽어갔어. 단코는 의연히 앞장 서서 달렸고, 그의 심장은 한결같이 눈부시게 타올랐지. 돌연, 그들의 눈 앞을 가로막고 있던 숲이 활짝 열렸어. 열린 숲은 울창한 모습 그대로 물러나 멀어지고, 사람들은 순식간에 찬란한 햇볕과 비에 씻긴 청신한 대기의 바다로 빠져들었지. 뇌우는 아직도 그들 뒤쪽의 숲에서 포효하고 있었으나, 이곳은 태양이 빛나고, 초원이 숨쉬며, 풀잎은 빗방울을 머금어 반짝이고, 강물은 황금빛으로 구비치고 있었어. ---석양을 받아 붉게 물든 강물은 마치 단코의 가슴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선혈처럼 보였지. 용사 단코는 드넓게 펼쳐진 자유의 대지에 시선을 던지며 의연히 미소지었어. 그리고는 쓰러져 죽어갔지. 기쁨과 희망에 들뜬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고, 주검 옆에서 그의 용감한 심장이 아직도 붉게 타오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어. 오직 그 중의 신중한 한 사람만이 이런 사실을 알아차렸으나, 왠지 두려운 마음에 그 심장을 발로 짓밟아 버렸지. ---그러자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꽃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갔던 거야. ---바로 그것이 소나기가 오기 직전에 나타나는 초원의 푸른 불꽃들이지!" 노파가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초원은 괴괴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심장을 불사른 용사 단코의 위대한 사랑에 대지도 감동한 것 같았다. 이제 노파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 늙은 여인의 기억 속에 아직도 얼마나 많은 추억들이 깃들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또한 나는 불타는 단코의 위대한 심장과, 이토록 아름답고 힘찬 전설을 창조해낸 인간의 상상력에 대해 생각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든 노파의 누더기를 풀어헤치고 메마른 가슴을 드러냈다. 나는 그녀의 늙은 몸을 살며시 덮어 준 뒤, 그 옆의 대지에 몸을 눕혔다. 초원은 고요하고 어두웠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느릿느릿 쓸쓸하게 기어다니고 있었으며, 바다는 스산하고 구슬프게 설레이고 있었다---. 아르히프 노인과 뇨니카 나룻배를 기다리면서, 두 사람은 강언덕 아래 그늘진 곳에 누워 그들의 발 밑을 흘러가는 쿠반 강의 빠르고 혼탁한 물결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뇨니카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으나, 아르히프 노인은 가슴을 짓누르는 둔중한 아픔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검은 갈색의 대지를 배경 삼아 움츠리고 있는 그들의 남루한 모습을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은 두 개의 가련한 흙덩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피로에 지치고 햇볕에 그을린 그들의 먼지투성이 얼굴은 두 사람이 걸치고 있는 갈색 누더기 색깔과 거의 흡사했다. 뼈만 남은 아르히프 노인의 길쭉한 몸집은 강기슭을 따라 누런 댕기처럼 뻗어 있는 좁다란 모랫벌에 가로놓여 있었다. 뇨니카는 그 옆에 쪼그리고 누워 있었는데, 누더기에 싸인 소년의 작고 허약한 몸매는 강물에 떠내려온 말라비틀어진 고목과도 같은 할아버지로부터 부러져나온 작은 나뭇가지처럼 보였다. 노인은 팔베개를 한 채, 햇볕이 쏟아지고, 버드나무들이 드문드문 둘러서 있는 맞은편 언덕을 바라보았다. 그 나무들 사이로 나룻배의 검은 현이 삐죽 나타났다. 그곳은 호젓하고 적막했으며, 길은 잿빛 띠처럼 강으로부터 광야의 오지로 뻗어, 하염없는 우울과 권테를 자아내고 있었다. 노인의 시뻘겋게 부어오른 얼굴은 수심으로 굳어 있었다. 그는 손자를 힐끗힐끗 돌아보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기침을 참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목을 찢으며 터져나오는 기침은 그의 몸을 들썩거리게 했고, 그의 노안으로부터 굵은 눈물방울을 짜내는 것이었다. 초원에는 그의 기침 소리와 모래톱에 밀려드는 조용한 물결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강 양쪽으로는 광막한 갈색 초원이 펼쳐져 있었으며, 저 멀리 내리쬐는 햇볕 너머, 노인의 눈에는 보일락말락한 지평선 위로 밀밭의 금빛 바다가 황홀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눈부시게 맑은 하늘이 바로 그 위에 맞닿아 있었고, 백양나무 세 그루가 그림처럼 아득히 늘어서서 작아졌다가는 다시 커지곤 했다. 하늘과, 하늘을 이고 있는 밀밭은 조용히 흔들리며 가라앉았다 떠오르기를 되풀이했고,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그 모든 것이 신기루의 찬란한 은막 뒤로 숨어 버렸다---. 이 흐느적거리는, 투명하고 매혹적인 장막은 이따금 멀리로부터 바로 강가에까지 흘러온곤 했는데, 그럴 때면 그것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강줄기인 듯, 혹은 하늘 그 자체인 듯 말고 고요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런 현상을 본 적이 없는 아르히프 노인은 그때마다 더위와 초원이 다리 힘을 앗아가듯이 시력마저 빼앗아 가는 모양이라 생각하며 서글픔에 잠기는 것이었다. 오늘 그는 근래의 그 어느 날보다도 기분이 언짢았다. 그는 자신이 머지 않아 죽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죽음이야 갚아야 할 빚처럼 피할 수 없는 것이니 무심히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그는 여기가 아닌 저 먼 곳, 고향에서 죽고 싶었고, 거기다 손자에 대한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뇨니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문제를 생각했고, 그럴 때마다 가슴이 싸늘하게 얼어붙으면서 당장이라도 고향인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러시아는 너무 멀어---아무래도 거기에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서 죽게 될 거야. 이곳 쿠반 사람들은 그런 대로 동냥 인심이 후한 편이데---미련하고 남을 비웃기를 즐기지만 살림들은 넉넉하니까. 거지를 싫어하는 건 그들이 잘 살기 때문이지---. 눈물 어린 눈길로 손자를 바라보며 노인은 꺼칠한 손으로 손자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뇨니카가 몸을 눈이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생각에 잠긴 듯한 그 눈은 가늘고 핏기 없는 입술과 뾰족한 코를 가진, 천연두 자국이 남아 있는 그의 여윈 얼굴에는 너무 큰 듯이 보였다. "배가 와?" 손자는 묻고 나서, 손을 눈 위에 대고 햇볕을 반사하는 강을 바라보았다. "아니다. 무엇 하러 오겠니? 아무도 부르지 않으니까 그냥 서 있는 거야." 노인은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느릿느릿 말했다. "좀 잤니?" 뇨니카는 막연히 머리를 끄덕이며 모래 위로 몸을 뻗었다. 그들은 잠시 침묵했다. "헤엄이라도 칠 줄 알면 미역이나 감을 텐데." 물끄러미 강을 바라보며 뇨니카가 중얼거렸다. "물살이 무척 빠른데! 우리 고향에는 저런 강이 없잖아. 왜 저렇게 빨리 달리는 거지? 늦을까봐 달음질을 치는 것 같아---." 뇨니카는 겁이 난다는 듯 강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자." 노인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허리띠를 이어서 다리에 묶어 줄 테니 물에 들어가 헤엄을 쳐보렴." "허리띠를---." 뇨니카는 알 만하다는 듯 말꼬리를 끌었다.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강물에 떠내려가려고? 그러면 둘 다 빠져 죽을 거야!" "그렇겠구나! 그럴 거야, 물살이 저렇게 세니까. 봄이오면 여기도 물이 가득 들어차겠지. 그때쯤이면 네 녀석은 어떻게 될지---." 뇨니카는 말하기가 싫어져서, 심각한 얼굴로 마른 흙덩이를 쥐어 가루가 되도록 부수며 잠자코 앉아 있었다. 노인은 그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뭔가 생각에 잠겼다. "이것 봐---이 흙덩이를 쥐고 비볐더니 이렇게 먼지가 되어 버렸어---아주 작아져서 보이지도 않아---." 뇨니카가 손의 먼지를 털며 낮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응? 뭐라고 했니?" 아르히프는 이렇게 묻고,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손자의 커다랗고 퀭한 눈을 바라보며 다시 기침을 했다. "그게 어쨌다고?" 기침이 가라앉자 그가 물었다. "그냥---." 뇨니카는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이와 같다는 거야---." 그는 손을 들어 강 건너를 가리켰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이 위에 세워졌지. 우린 수많은 도시를 지나왔잖아! 도시마다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어!" 생각의 갈피를 잡을 수 없는지 뇨니카는 주위를 돌아보며 입을 다물었다. 노인 역시 잠자코 앉아 있다가, 손자 곁으로 다가앉으며 정답게 말했다. "너는 정말 영리하구나! 네 말이 맞다. 모든 게 먼지지---도시도, 사람도, 너와 나도---오, 뇨니카! 네게 공부를 시킬 수 있었더라면! 넌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네 앞날이 어떻게 되려는지---." 노인은 손자의 머리를 꼭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잠깐---." 구부러지고 부들부들 떨리는 할아버지의 손가락으로부터 자신의 아마빛 머리칼을 빼내며 뇨니카가 소리쳤다. "방금 뭐라고 했어? 먼지라고? 도시도, 다른 모든 것도?" "그래,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야. 귀여운 녀석---모든 건 흙이란다. 그리고 흙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죽어가게 마련이지. ---그러므로 사람은 노동과 겸손으로 살아가야 하는 거야. 여기 있는 나도 얼마 안 있으면 죽게 될 텐데---내가 없어지면 넌 어디로 가려느냐?" 뇨니카는 할아버지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것이 한두번이 아니어서 이젠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귀찮았다. 그는 말없이 돌아누우면서 풀잎을 뜯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에게는 이것이 가슴 아픈 일이었다. "왜 잠자코 있니? 내가 없어지면 어쩔 거냐?" 그는 손자에게로 몸을 기울이며 조용히 묻고 나서 다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벌써 말했잖아---." 뇨니카는 할아버지를 멍하니 올려가보며 볼멘 소리로 대꾸했다. 이런 이야기는 매번 말다툼으로 끝나곤 했기 때문에 그는 더욱 이런 화제를 싫어했다. 할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처음에 뇨니카는 그런 얘기를 새겨 들었고, 자기 앞에 닥쳐올 새로운 현실이 두려워 울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얘기를 듣기도 싫증이 나서 할아버지가 말을 해도 못 들은 척 제 생각에만 골몰하곤 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걸 알아차리고, 화를 내면서, 뇨니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저를 걱정하는 할아비의 마음을 전혀 알아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심지어는 그가 제 할아버지의 죽을 날이 빨리 닥쳐오기만을 바라고 있다고 꾸짖는 것이었다. "뭐라고 했는데? 너는 아직 철이 없어 세상을 몰라. 네가 지금 몇 살이냐? 겨우 열한 살 아니냐? 게다가 너는 몸이 약해서 노동을 하기는 글렀어. 그래, 어디로 갈 참이냐? 누군가 선량한 사람들이 도와 주려니 생각하고 있느거냐? 네게 혹 돈이라도 있으면 모르지. 네가 그 돈을 다 써 버리도록 도와 줄지도 세상은 그런 거야. 동냥을 하기도 수월한 일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거지를 사람으로 보는 줄 아니? 그들은 빵 한 조각을 천 루블쯤이나 되는 것으로 여기지. 그걸 주고는 눈앞에 금방이라도 천당 문이 열릴 듯이 생각한다니까. 그들이 어ㅉ서 그 한 조각 이나마 나눠 줄 생각을 하는지 아니? 그건 단지 제 양심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가엾게 여겨서가 아니야. 남에게 한 조각 던져 주고 나면 제가 먹기가 부끄럽지 않으니까. 이유는 단지 그뿐이란다. 배부른 인간들은 짐승이나 다름없어. 그들은 결코 굶주린 사람들을 동정하지 않는단다. 배부른 자와 굶주린 자는 서로가 눈에 든 가시 같은 존재니까. 때문에 서로를 가엾이 여길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란다---." 분노와 슬픔이 노인을 엄습했다. 그의 입술은 떨리고, 흐릿한 노안은 속눈썹과 눈 꺼풀의 테두리 안에서 빠르게 움직였으며, 검은 얼굴에는 주름살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뇨니카는 할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고, 왠지 약간 두렵기까지 했다. "그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거냐고 묻고 있는 거다. 너는 힘없는 어린애야. 하지만 세상은 사나운 짐승이란 말이다. 그놈은 너를 단숨에 삼켜 버릴 게다. 나는 그게 두려워---나는 너를 너무도 사랑한단 말이다, 뇨니카!---내겐 너밖에 없고, 네게도 나 말고는 아무도 없어---그런데 내가 어떻게 죽을 수 있단 말이냐? 너를 혼자 남겨 두고 죽을 수는 없다---대관절 누구에게 너를 맡긴단 말이냐---하느님! 당신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을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더 이상 살아갈 기력도 없지만,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저 어린 것을 돌봐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늙은 손으로 7년이나 저 아이를 길렀는데---하느님, 도와 주십시오!" 노인은 떨리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강물은 노인의 울음 소리를 지워버릴려는 듯 강기슭에 부딪치며 저 멀리, 빠른 속도로 흘러갔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타는 듯한 열기를 내뿜으며 혼탁한 물결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 밝게 미소지었다. "그만 울어, 할아버지." 뇨니카는 앞쪽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리고는 할아버지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다. "나도 이제 알 만큼은 알아. 그대로 삼켜지지는 않을 테니까---어디 주막에라도 일자리를 얻든지---." "너를 못살게 굴 텐데." 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신음하듯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뇨니카는 약간 격분하여 부르짖었다. "하지만 어때? 나도 잠자코 당하지만은 않을 거야---." 여기서 뇨니카는 문득 말을 멈추고 잠시 묵묵히 있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니면 수도원으로 가든지---." "수도원이라고---."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다소 활기를 찾는 듯하더니 다시 터져나오는 기침 때문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때 그들의 머리 위에서 사람의 고함 소리와 시끄러운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나룻배! 여보시오, 나룻---!" 우렁찬 목소리가 허공을 뒤흔들었다. 두 사람은 배낭과 지팡이를 챙겨 들고 벌떡 일어섰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모래 위를 달려왔다. 한 카자크 인이 그 위에 서 있었다. 그는 보풀이 인 털모자를 한쪽 귀에 비스듬히 걸쳐 쓰고 있었는데, 벌린 입으로 공기를 들이마시며 고함을 질러 대는 통에 앞으로 쑥 내민 가슴이 더욱 불룩해져 있었다. 하얀 이는 충혈된 눈 가장자리에서 드리운 비단결같은 검은 수염 속에서 반짝이고, 옷깃을 열어젖힌 저고리와 어ㄲ에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는 등걸이 밑으로는 햇볕에 그을린 털투성이 몸통이 들여다보였다. 그의 크고 다부진 몸매와, 그와 마찬가지로 살집이 좋은 커다란 얼룩무늬 말, 그리고 두툼한 쇠테를 씌운 수레바퀴, 그모든 것에서 포만과 건강과 힘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봐요! 이보시오!" 노인과 손자는 모자를 벗어들고 깊숙이 허리를 구부렸다. "안녕하시오!" 카자크 인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한 마디 내뱉고는, 수풀 사이로 검은 나룻배 한 척이 느릿느릿 기어나오고 있는 강 건너를 바라보다가 다시 거지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러시아에서 왔소?" "거기서 왔습죠, 나리." 아르히프는 허리를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거긴 먹을 것이 없다지? 그렇지 않소?" 그가 마차에서 뛰어내려 말굴레를 살피며 물었다. "기근으로 바퀴벌레들까지 굶어 죽고 있습죠." "허어, 바퀴벌레까지 굶어 죽는다? 그러니까 빵 부스러기조차 남기지 않고 먹어 버렸단 말이오? 잘도 먹어댔구만. 한데 당신네는 무척 게으론 모양이지? 부지런히 일을 하면 기근이란 있을 수 없을 텐데." "나리, 거기엔 중대한 이유가 있습죠. 문제는 땅입니다요. 아무리 땅을 쥐어짜 봐도 나오는 게 없거든요." "땅이라고?" 카자크 인은 머리를 흔들었다. "땅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낳아 인간들에게 주어 왔소. 땅이 아니라 손이 문제겠지. 손만 부지런하면 돌담에서도 소출을 낼 수 있는 법이니까." 나룻배가 도착했다. 두 명의 건장하고 얼굴이 불그스레한 카자크 인이 굵은 다리를 나룻배의 바닥에 버티면서 강강에 배를 갖다 대고, 헐떡이며 닻줄을 던지더니, 마주 보며길게 숨을 내쉬었다. "무척 덥죠?" 마차를 타고 온 카자크 인이 말을 배 위로 끌어올리고 나서 한 손으로 모자를 만지며 이빨을 드러내 보였다. "덥군요.' 사공 중의 한 사람이 통 넓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르면서 대답하더니 마차 있는 데로 다가가 안을 힐끔 들여다보고는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다른 한 명은 뱃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씩씩거리며 장화를 벗기 시작했다. 노인과 뇨니카는 나룻배에 올라 뱃전에 몸을 기대고 서서 카자크 인들을 바라보았다. "자, 갑시다!" 마차 주인이 말했다. "그런데 뭐 마실 것 좀 없소?" 마차 안을 들여다보던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그의 동료는 장화를 벗어 들고 그 속을 살피고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데---뭘 말하는 거지? 쿠반에는 물이 없단 말이오?" "물이 아니라---." "그럼 술 말이오? 술을 가지고 다니지 않소." "술을 안 가지고 다니다니!" 마실 것을 찾던 사람은 나룻배 바닥에 눈길을 던진 채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자, 어서 갑시다!" 카자크 인은 손에 침을 뱉더니 닻줄을 끌어올렸다. 마차 주인도 그를 거들었다. "여보, 노인! 당신은 보고만 있을 거요?" 장화를 뒤적거리던 사공이 아르히프를 돌아보며 말했다. "도울 힘이 있어야지!" 노인은 고개를 흔들며 가련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도울 필요 없소. 둘이서 배 하나 못 저으려고!" 그렇게 말한 카자크 인은 자기 말이 옳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느긋하게 다리를 뻗고 갑판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의 동료가 투덜대며 욕을 퍼부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화가 나서 갑판에 대고 발을 쾅쾅 굴렀다. 나룻배는 거친 소리를 내며 뱃전에 부딪치는 물살을 가르고 기우뚱거리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강물을 바라보던 뇨니카는 달음질치는 물결에 지친 머리와 두 눈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시름 없는 혼잣말과 나룻배의 삐걱거리는 소리, 출렁이는 파도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나른한 졸음이 밀려왔다. 잠을 부르는 피곤에 떠밀려 그가 막 갑판에 몸을 누이려고 할 때 갑자기 무엇인가가 그를 흔들어 넘어뜨렸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둘러보니, 카자크 인이 강기슭의 타고 남은 나무 그루터기에 닻줄을 묶으면서 그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새 잠들었었니? 허약한 녀석이군. 마을까지 태워다 줄 테니 마차에 타거라. 노인도 이리 앉으시오." 노인은 짐짓 콧소리로 울먹이며 카자크 인에게 감사를 표한 다음 기침을 하며 마차에 기어올랐다. 뇨니카도 마차에 뛰어올랐다. 카자크 인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상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다가 중간에 휘파람으로 바꾸어 곡을 끝맺었다. 마치 실을 뽑아내듯 목구멍에서 노래를 뽑아내다가 매듭에 걸리자 그것을 툭 끊어 버린 것 같았다. 마차 바퀴는 애처롭게 삐걱이면서 먼지를 휘말아올렸고, 노인은 머리를 흔들며 쉴새없이 기침을 해 댔다. 뇨니카는 이제 곧 마을에 당도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여---.'하고 노래를 부르게 될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마을 아이들은 다시 그를 놀려 댈 것이고, 아낙네들은 성가시게 러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오리라. 그런 ㄸ면 더욱 깊숙이 허리를 구부리고, 더욱 심하게 기침을 해 대면서, 있지도 않은 일을 처량하게 읊어내리는 할아버지를 보는 것도 언짢았다. 러시아에서는 거리마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지만,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기에---뇨니카도 할아버지도 그런 것을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더 많은 동냥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동냥하러 가는 길이오?' 카자크 인이 움츠리고 있는 두 사람을 어깨 너머로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요, 나리." "그러면 노인, 일어나 보시오. 내가 사는 곳을 가리켜 줄 테니. 그리고 오늘밤엔 우리 집에 와서 쉬도록 하시오." 노인은 몸을 일으키려다 넘어져 마차 모서리에 옆구리를 찧으며 모진 신음 소리를 냈다. "저런! 연세가 많이 드셨군." 카자크 인이 정말 안됐다는 듯 말했다. "일어날 필요 없소! 밤에 잘 때가 되면 그냥 체르누이, 안드레이 체르누이를 찾으시오. 그게 바로 나요. 자, 그럼 여기서 내리시오! 다음에 봅시다!" 노인과 손자는 백양나무가 우거진 숲 근처에 이르렀다. 그 뒤로는 지붕과 울타리들이 보이고, 양쪽으로 비슷한 숲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푸른 잎사귀는 뿌연 먼지로 덮이고, 굵고 매끈한 나무껍질은 더위에 갈라져 있었다. 골목이 뻗어 있었다. 그들은 먼 길을 숱하게 걸어 본 사람들의 걸음걸이로 터덜터덜 골목을 걷기 시작했다. "얘, 뇨니카, 어떻게 가는 것이 좋겠니? 같이 갈까, 따로따로 갈까?" 노인은 묻고 나서,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같이 가는 게 낫겠다. 너 혼자 가면 많이 주지 않을 테니까. 너는 방법을 몰라---." "많이 얻으면 뭐해? 다 먹지도 못할 걸---." 뇨니카가 주위를 돌아보며 음울하게 대꾸했다. "뭘 하다니! 그걸 모르겠니? 개중에는 돈을 주는 사람도 있을 게다. 돈이란 좋은 거야. 무엇이든 살 수 있으니까. 내가 죽더라도 돈만 있으면 굶어 죽는 일은 없을 게다." 노인은 정답게 웃으며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번 길에서 내가 얼마나 벌었는지 아니?" "얼마나 벌었는데?" 뇨니카는 무심하게 물었다. "자그마치 11루블 50카페이카나 된단다. ---보여 줄까?" 그러나 돈의 액수도, 할아버지의 들뜬 목소리도 뇨니카에게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너는 역시 철부지야, 철부지!" 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따로따로 갈까?" "응---." "그래, 그럼 있다 교회에서 보자." "응." 노인은 골목 왼쪽으로 꺾어들고, 뇨니카는 곧장 걸었다. 열 발짝쯤 걸었을 ㄸ,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외쳐 대는 소리를 들었다. "도와 주십시오, 나리들! 적선하십시오!" 그것은 망가진 바이얼린의 제일 굵은 현에서부터 가는 현까지를 손바닥으로 긁어 내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뇨니카는 진저리를 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할아버지가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는 언제나 마음이 언짢았고, 슬픔이 치밀었으며, 혹 사람들이 거절하지나 않을까, 그래서 할아버지가 금방이라도 목놓아 울게 되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한 기분까지 드는 것이었다. 그의 귓가에는 계속해서 마을의 무더운 공기 속을 떠돌던 할아버지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주위는 한밤중처럼 고요했다. 뇨니카는 울타리 가까이로 다가가 길 쪽으로 뻗은 앵두나무 그늘에 앉았다. 어디선가 꿀벌 한 마리가 날아와 윙윙대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어깨에서 배낭을 내려 베개 삼아 베고 누웠다. 그리고는 얼굴 위에 드리운 나뭇잎 사이로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무성한 잡초와 담장의 격자무늬 그늘로 행인들의 눈을 피하여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저녁 무렵의 서늘한 대기 속에 울려퍼지는 이상한 소리에 그는 잠을 깼다.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울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거침없이 울어대는 그 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들려왔다. 그 울음 소리는 가느다란 단조가 되어 사라지는가 싶다가 다시금 터져나오면서 점점 더 가까이 흘러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잡초 사이로 거리를 내다보았다. 깨끗한 옷차림을 한 일곱 살 가량의 계집아이가 하얀 치맛자락으로 쉴새없이 눈물을 훔치면서 너무 울어 부어오른 얼굴로 그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소녀는 맨발로 먼지를 일으키며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가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 같은 걸음걸이였다. 소녀의 크고 검은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고, 장미빛의 자그마한 두 귀가 헝클어진 밤색 머리칼 사이로 살짝 내다보였다. 소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뇨니카에게는 그 모습이 무척 재미있게 느껴졌다. "얘, 너 왜 우니?" 그는 소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얼른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소녀는 놀라서 울음을 삼키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몇 초간 뇨니카를 쳐다보다가, 얼굴을 찡그리고, 입을 삐쭉거리고, 가슴을 들먹거리더니, 다시 소리내어 울면서 걸어가 버렸다. 뇨니카는 왠지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은 느낌에 소녀의 뒤를 따라갔다. "울지 마라, 다 큰 아이가 부끄럽지도 않니?" 소녀를 뒤따라가며 그는 말했다. 그리고 소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물었다. "그래, 도대체 무슨 일로 우는 거니?" "저어---." 소녀는 말끝을 흐렸다. "만일---." 그러다가 소녀는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이런! 얘---이러지 마. 왜 그래?" 뇨니카는 소녀를 달랬다. 그러나 이것은 소녀에게도 그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소녀의 가느다란 장미빛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자 뇨니카도 왠지 울고 싶어졌다. 그는 소녀에게로 몸을 굽혀 하마터면 그녀의 머리칼을 만질 뻔했으나, 곧 자신의 대담함에 놀라 황급히 손을 거두어들였다. 소녀는 계속 울기만 할 뿐 도무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내 말 좀 들어 봐---." 뇨니카는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어떻게든 소녀를 도와 주고 싶다는 간절한 욕구에 쫓겨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이러니? 누가 때린 거야? 그렇다면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아니면 무슨 다른 일이니? 제발 말 좀 해 보렴! 응?" 소녀는 얼굴에서 손을 떼지도 않은 채 슬프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으윽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어ㄲ를 들먹거리며 느릿느릿 말하기 시작했다. "스카프를 잃어버렸어---. 아버지가 장에서 사다 주신건데---하늘색 바탕에 꽃을 수놓은 거야---. 그런데 머리에 쓰고 다니다가 그만 잃어버렸어---." 소녀는 신음하듯 윽, 윽, 흐느끼면서 다시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뇨니카는 소녀를 도와 줄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긴 채 어둠이 짙어가는 하늘을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은 몹시도 괴로웠고, 소녀가 너무도 가여웠다. "울지 마---. 혹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니---."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나 소녀가 자신의 위로를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는 소녀에게서 물러섰다. 그는 생각했다. 스카프를 잃어버린 일 때문에 저애는 아버지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되겠지---그러자 몸짐이 커다랗고 얼굴빛이 검은 카자크 인이 소녀를 마구 두들겨 패는 모습과, 그녀가 눈물을 머금고 공포와 아픔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아버지의 발 밑에 쓰러지는 광경이 눈 앞에 선연하게 떠올랐다---. 뇨니카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섯 걸음도 못 가서 다시 돌아와 울타리에 몸을 기대며 소녀와 마주 섰다. 그는 뭔가 다정하고 좋은 말을 생각해 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니? 그만 울고---돌아가서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잃어버렸다고---어차피 잃어버린 걸 어쩌겠니?" 그는 조용하고 연민에 찬 어조로 말을 시작했으나 끝에 가서는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그러나 그 말 끝에 소녀가 일어서는 것을 보자 그는 뛸 듯이 기뻤다. "그래, 그래야지!"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서 가 봐---나도 같이 가 줄까? 가서 너 대신 모든 걸 얘기해 줄게. 어때?" 뇨니카는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싫어---." 소녀는 여전히 흐느끼면서, 옷에 묻은 흙을 천천히 털어내며 말했다. "아니, 같이 가야겠어!" 뇨니카는 큰 소리로 말하고 모자를 귀까지 눌러 썼다. 이제 그는 두 다리를 넓게 벌려 대지를 버티고 서 있었으며, 그가 걸치고 있는 누더기마저 왠지 기운차게 너풀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지팡이를 들어 힘차게 땅을 두드리면서 소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애수를 머금은 커다란 두 눈이 자신감과 대담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소녀는 작은 얼굴을 눈물로 적시며 그를 흘겨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안 돼, 오지 마. ---엄마는 거지를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는 두어 번 뒤를 돌아보며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뇨니카는 쓸쓸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취했던 단호하고 도전적인 자세를 풀고, 다시 허리를 구부리며 몸에서 힘을 ㅃ다. 그리고는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배낭을 어깨에 메고, 어느새 골목 어귀를 돌아 멀어져가고 있는 소녀를 향해 소리쳤다. "잘 가!" 소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한 번 뒤돌아보고는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황혼이 깃들자 대기는 소낙비를 예고하는 짜증스럽고 후덥지근한 열기로 가득 찼다. 태양은 벌써 저만큼 기울었고, 백양나무 꼭대기는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높다랗게,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그 나무들은 가지를 에워싼 땅거미 ㄸ문에 한층 칙칙하고 키가 커진 듯이 보였다. 그 위를 덮고 있는 하늘 역시 어두워지고, 빌로드처럼 부드러워져서, 마치 땅 위에 낮게 드리워진 것처럼 보였다. 어딘가 멀리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고, 더욱 먼 곳에서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들은 낮고 은은했지만, 역시 더위에 찌들린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뇨니카는 더욱 쓸쓸해졌고, 왠지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어서 할아버지에게로 가고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며 종종걸음으로 골목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동냥을 할 생각은 나지 않았다. 걷고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게 느껴질 정도로 심장이 몹시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의 생각은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부잣집 아이라면 지금쯤 매를 맞고 있겠지. 부자들이란 모두 인색하니까. 하지만 가난한 집 아이라면 얻어맞지는 않을 거야. 가난한 집 아이들은 자라면 돈을 벌어오거든. 그러니 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의 머리 속을 어지럽혔으며, 마치 그런 생각들을 뒤따르는 그림자처럼 괴롭고 짓누르는 듯한 슬픔의 감정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무거워지면서 그의 온몸을 에워쌌다. 저녁빛은 더욱 숨막히게 짙어졌다. 뇨니카의 맞은편에서 카자크 인 남자와 여자들이 걸어왔으나, 러시아에서 흘러들어온 굶주린 사람들의 무리에 익숙해진 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뇨니카 역시 흐릿한 눈길로 그들의 너머로 십자가를 번쩍이며 서 있는 교회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곳은 하늘색으로 칠한 다섯 개의 둥근 탑을 거느린, 나지막하나 넓은 교회였다. 교회 주위에는 백양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나무의 꼭대기들은, 푸른 잎새 사이로 석양을 받아 장미빛으로 물든 십자가보다 훨씬 높이 솟아 있었다. 아르히프 노인이 배낭의 무게 때문에 허리를 구부린 채 손을 이마에 대고 사방을 휘둘러보며 교회 입구 계단으로 나왔다. 그의 뒤에는 이마까지 모자를 눌러쓰고 손에 길다란 막대기를 든 마을 사람이 무거운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뭐냐? 배낭이 비어 있지 않니?" 교회 울타리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손자에게로 다가서며 노인이 물었다. "이걸 봐라, 얼마나 많은지!" 그는 헐떡거리며 물건이 가득 담긴 배낭을 땅바닥에 내려 놓았다. "여기 사람들은 꽤나 후하더라! 정말 후해!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시무룩하냐?" "머리가 아파---." 할아버지 옆에 나란히 앉으며 뇨니카는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피곤한 모양이구나. 배도 고플 테고---어서 자러 가자. 그 카자크 인 이름이 뭐였지?" "안드레이 체르누이." "그래, 그래, 안드레이 체르누이란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 물어 보자꾸나. 저기 한 사람 오는군. 그래, 몸집이 두툼한 게 호인처럼 보이는데? 여기 사람들은 날마다 밀빵을 먹고 사는 모양이야---. 안녕하십니까, 선량하신 어르신!" 카자크 인은 그들에게로 다가와 느린 말투로 노인의 인사에 답했다. "당신도 안녕하슈!" 그리고는 두 다리를 떡 벌리고 서서 표정 없는 커다란 눈을 두 거지에게 고정시킨 채 말없이 서 있었다. 뇨니카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노인도 늙은이 다운 눈길로 의심스레 바라보는데, 카자크 인은 그대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이윽고 혀를 반쯤 내밀어 자신의 콧수염 끝을 핥기 시작했다. 매주 익숙한 동작으로 콧수염을 입 속에 말아들여 질글질근 씹고 있던 그는 다시 혀를 놀려 그것을 뱉어내고는 마침내 느린 어조로 이제는 고통스러울 지경이 되어 버린 침묵을 깨뜨리며 말했다. "자, 함께 민경소로 갑시다." "거긴 왜요?" 노인은 깜짝 놀란 듯이 말했다. 뇨니카의 가슴도 덜컥 내려앉았다. "가야 하니까---이건 명령이오. 갑시다!" 그는 두 사람을 등지고 걸어가다가 그들이 제자리에 선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는 거요!" 뇨니카는 할아버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노인이 입술과 머리를 떨며 두려운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급한 손길로 품 속을 뒤지느 것을 보고 그는 타마니에서 처럼 할아버지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을 눈치챘다. 타마니에서의 사건을 생각할 ㄸ마다 그는 진저리가 쳐졌다. 거기서 할아버지는 남의 집 울타리 안에 널어 놓은 빨래를 훔쳤는데, 뇨니카도 그와 함께 붙잡혔다. 사람들은 비웃고 욕하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했으며, 한밤중에 그들을 마을에서 내쫓았다. 그와 할아버지는 어느 바닷가의 모래밭에서 밤을 새웠다. 바다는 밤새도록 무섭게 으르렁거렸고, 밀려드는 파도에 모래가 쏴쏴 휩쓸렸다---. 할아버지는 밤새 신음하면서, 자신은 도둑이라고, 용서해 달라고, 입속말로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었다. "뇨니카---." 옆구리를 찔린 뇨니카는 흠칫 몸을 떨며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더욱 훌쭉해지고 잿빛으로 질린 채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카자크 인은 다섯 걸음쯤 앞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담배를 피워 물고 들고 있던 막대기로 우엉 꼭지를 휘갈겨 떨어뜨리면서 그들 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걸 받아라! ---숲속에 던져! ---그리고 어디다 던졌는지 잘 봐 두어라! 이 다음에 찾을 수 있게---." 할아버지는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손자에게 바싹 다가서서 그의 손에 둘둘 감은 헝겊조각 같은 것을 쥐어 주었다. 뇨니카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는 두려움에 떨며 옆걸음질로 잡초가 빽빽하게 자라 있는 울타리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옆으로 뻗어 그 손을 힐끗 바라본 뒤 들고 있던 것을 잡초덤불 속으로 집어던졌다. 헝겊조각이 떨어지면서 활짝 펴지자 꽃을 수놓은 푸른 스카프가 뇨니카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길에서 울고 있던 소녀의 모습이 그 위에 겹쳐졌다. 소녀는 카자크 인과 할아버지와 주위의 모든 것을 지우면서 그의 앞을 막아섰다. ---뇨니카의 귀가에는 다시 소녀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고, 반짝이는 굵은 눈물이 바로 그의 앞, 땅바닥 위에 떨어지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이렇게 거의 넋이 나간 상태로 그는 할아버지를 따라 민경소로 갔다. 그곳은 온갖 소리들로 대단히 시끄러웠으나, 그는 그 소리들을 알아 들을 수 없었으며, 알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안개 속에서처럼 그는 할아버지의 배낭에서 빵조각들이 작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높은 모자를 쓴 여러 개의 머리들이 그 위로 기울어졌다. 모자들은 음울하고 침침하게 흔들리며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안개를 뚫고 뭔가 무서운 것으로 그를 위협하는 듯했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두 건장한 사내들의 손아귀 속에서 팽이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건 부당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죄가 없다는 건 하느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할아버지는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뇨니카는 울음을 터뜨리며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뇨니카를 일으켜 걸상에 앉히고, 그의 작은 몸에 걸치고 있는 누더기를 샅샅이 뒤졌다. "빌어먹을 다닐로브나가 거짓말을 했어!" 누군가가 탁하고 격앙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이놈들이 어디다 감춰 버렸는지도 모르잖아!" 한층 높은 목소리가 그에게 대꾸했다. 그 모든 소리들이 뇨니카의 머리를 사정없이 때리는 것 같았고, 그는 바닥 없는 시꺼먼 심연의 아가리 속으로 빠져들 듯 의식을 잃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머리는 할아버지의 무릎위에 놓여 있었고, 어느 때보다도 창백하고 초라하며 주름이 가득한 할아버지의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인의 껌뻑이는 두 눈으로부터 가느다란 눈물 줄기가 뇨니카의 이마에 떨어져 뺨에서 목을 타고 흐르며 그를 간지럽혔다---. "정신이 들었구나, 내 새끼! 여길 떠나자. 어서 가자꾸나. 그 망할 놈들이 우릴 놓아 주었단다." 뇨니카는 일어섰다. 머리 속에 무엇이 가득 차서 금방이라도 머리가 어ㄲ로부터 떨어져나갈 것만 같았다. 그는 손으로 머리를 잡고 나직한 신음을 토하며 좌우로 흔들어보았다. "머리가 아프냐? 귀여운 것! ---놈들이 우리를 이렇게 괴롭히는구나. 짐승 같은 놈들! 칼이 없어졌다는 둥, 계집애가 수건을 잃어버렸다는 등하면서 우리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려 들지 뭐냐! ---오, 하느님 아버지, 어째서 저희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겁니까!" 할아버지의 목멘 소리가 뇨니카를 쥐어뜯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할아버지로부터 떼어 놓는 맹렬한 불꽃이 가슴 속에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서서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그들은 마을 어귀에 서 있는 구부러진 백양나무 가지 아래 짙은 그늘 속에 앉아 있었다. 밤이 되어 달이 떠올랐다. 어스름한 은빛이 넓은 초원에 폭우처럼 쏟아져 벌판을 낮보다 더 쓸쓸하고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멀리 벌판과 하늘이 맞닿은 곳에서는 구름덩이들이 피어올라 달을 가리고 대지에 짙은 그림자를 던지며 조용히 떠다녔다. 그림자들은 첩첩이 땅을 덮고 생각에 잠긴 듯 천천히 기어가다가는 태양의 작열로 인해 갈라터진 땅 속으로 스며들 듯 졸지에 사라지곤 했다---. 마을 쪽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찬란한 황금빛 별들과 눈짓을 주고받듯 마을 여기저기에서 등불이 반짝이고 있었다. "얘야, 그만 가자! 가야 한다!" 노인이 말했다.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가---." 뇨니카가 나직이 대꾸했다. 그는 초원이 좋았다. 낮에 초원을 걸을 때면 그는 하늘이 초원의 넓은 가슴에 기대어 있는 그 먼 곳을 바라보기를 즐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걸하지 않아도 스스로 빵을 내어 주는, 그가 일찍이 보지 못했던 선량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신비하고도 거대한 도시를 상상해 보곤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초원이 그의 눈앞에 점점 넓게 펼쳐지면서 그 품 속에서 그가 익히고 알고 있는 건물이며 사람이며 그밖에 그가 익히 알고 있는 건물이며 사람이며 그밖에 그가 아는 모든 것들이 살고 있는 낯익은 마을을 드러내 보이면 그는 슬픈 생각이 들었고, 때로는 무엇에 속은 것처럼 분한 기분까지 들었다. 지금도 그는 구름떼가 천천히 기어 다니는 그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 구름들이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는 그 도시의 수천 개의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처럼 보였다. 노인의 메마른 기침 소리가 그의 명상을 깨뜨렸다. 그는 탐욕스럽게 공기를 들이마시는 할아버지의 눈물에 젖은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흐르는 달빛에 드러난 누더기 같은 모자와 눈썹과 수염이 짓는 기괴한 그림자에 덮인 이 얼굴은 경련하듯 움직이는 입과 뭔가 남모를 기쁨으로 빛나는 눈으로 인해 더욱 기이하고 불쌍하게 보였으며, 뇨니카의 가슴 속에 새로운 감정, 즉 그를 할아버지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하는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래, 좀더 앉아 있다 가자꾸나." 노인이 바보같이 웃으면서 중얼거리더니 손을 품 속에 집어넣었다. 뇨니카는 돌아앉아 다시 먼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얘,뇨니카! ---좀 보렴!" 갑자기 노인이 환희에 겨워 흐느꼈다. 그리고 숨이 넘어갈 듯한 기침 때문에 몸을 움츠리며 뭔가 길다랗고 빛나는 것을 손자에게 내밀어 보였다. "은으로 만든 거야! 전부 은이란다! ---50루블은 문제없을 거야!" 노인의 손과 입술은 탐욕으로 떨리고, 얼굴은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뇨니카는 몸서리를 치며 그 손을 밀어버렸다. "빨리 치워! 할아버지---. 어서!" 그는 재빨리 주위를 살피며 애원하듯 중얼거렸다. "왜 그러니, 얘야? 무엇이 무섭다고? ---내가 창문으로 들여다 보았더니 이게 걸려 있더구나. 그래서 덥썩 잡아떼어 품에 넣은 거야---. 그리고 수풀 속에 감춰 두었지. ---마을에서 나올 ㄸ 모자를 떨어뜨린 척하고 엎드려서 주웠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여기 수건도 가지고 왔다. 이것 보렴!"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누더기 속에서 스카프를 꺼내 뇨니카의 면전에 흔들어 보였다. 뇨니카의 눈 앞에 안개 같은 장막이 펼쳐지고, 이런 광경이 떠올랐다. 그와 할아버지가 빠른 걸음으로 마을 길을 걸어간다. 그들은 마주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겁먹은 모습으로 걷고 있다. 뇨니카에게는 그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들어 자기들을 때리고 침을 뱉고 욕을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주위의 모든 것, 울타리와 집들과 나무들이 이상한 안개 속에서 바람에 흔들이고, 누군가의 무시무시한 호통 소리가 들려온다. ---그 무서운 길을 끝없이 이어지고, 마을에서 들판으로 나가는 길을 늘어선 집들에 가려져 문의 검은 눈으로 그들을 비웃는다---. 갑자기 어느 창문에서 소리가 울려나온다. "도둑이야, 도둑! 하나는 늙은 놈이고 하나는 작은 놈이다!" 뇨니카는 곁눈질로, 자신이 도와 주려고 했던 소녀가 그 창문 안에 서 있는 것을 본다. 그와 눈길이 마주치자 소녀는 날름 혀를 내밀어 보인다. 소녀의 푸른 눈이 날카롭게 반짝이며 바늘처럼 뇨니카를 찌른다. 이러한 광경은 소년의 뇌리에 갑자기 떠올랐다가, 그가 할아버지의 얼굴에 던진 악의에 찬 미소를 남긴 채 이내 사라졌다. 노인은 기침 때문에 중간중간 말을 끊으면서 줄곧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따금 손을 내젓기도 하고 머리를 흔들기도 했으며 주름투성이 얼굴에 맺힌 굵은 땀방울을 문지르기도 했다. 찢어진 누더기 같은 구름이 달을 가려 뇨니카에게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 울고 있는 소녀를 자기 앞에 불러다 놓고, 둘을 비교해 보기라도 하려는 듯 할아버지를 그 옆에 세웠다. 노인에게 피해를 입고 울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고 청순하고 아름다운 소녀에 비하면, 힘없는,꺽꺽거리는 목소리를 가진, 누더기를 걸친, 욕심 많은 노인은 너무도 보잘 것 없고 쓸모 없는 존재로 그에게 비쳐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할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그 아이를 울린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권리로? 노인이 중얼거렸다. "100루블만 모여도 마음놓고 죽을 수 있을 텐데---." "그만!" 갑자기 뇨니카의 가슴 속에서 무엇이 폭발했다. "그만 하란 말이야! 밤낮 죽는다 하면서 죽지는 않고, 멀쩡하게 도둑질이나 하고 있잖아!" 뇨니카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벌떡 일어섰다. "할아버지는 도둑이야! 늙은 도둑!" 그는 작고 여윈 주먹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대로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어린애 물건까지 훔치다니! ---좋기도 하겠어! ---늙다리! ---죽어도 이 죄만은 용서받지 못할 거야!" 갑자기 천지가 요동하면서 눈부신 푸른 빛에 싸인 초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를 휘감고 있던 안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천둥이 하늘과 땅을 울리며 광야를 달려갔다. 사방이 캄캄해졌다. 어딘가 먼 곳에서 희미하나 위협적으로 번개가 치고, 얼마 안 있어 다시 낮은 천둥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나서는 끝없는 정적이 밀려들었다. 뇨니카는 성호를 그었다. 노인은 그가 등을 기대고 있는 나무등걸처럼 말없이 앉아 있었다. 하늘이 다시 몸을 떨며 푸른 불길을 내뿜더니 대지에 금속성의 강력한 타격을 가했다. 마치 수천 개의 철판이 서로 부딪치면서 지상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 마을로 가!" 뇨니카가 겁에 질려 부르짖었다. 그의 외침은 천둥 소리에 묻혀 조그만 종을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뭐가 무섭다고 그러니---.' 노인은 꿈쩍 않고 앉아 목 쉰 소리로 말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굵은 빗방울이 대지에 떨어지는 소리는 무언가를 예언하듯 신비롭게 들렸다. 멀리서는 빗줄기가 빽빽한 장대비로 변하여 거대한 옷솔로 대지를 문지르는 듯한 빗소리가 간단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여기 할아버지와 손자가 앉아 있는 곳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아직 토막토막 끊어지는 소리를 내며 아무런 반향도 없이 땅 속으로 사그라들곤 했지만, 천둥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고, 섬광은 더욱 빈번하게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나는 안 간다! 이 늙은 도둑개를 그냥 내버려 두렴---. 여기서 비나 흠씬 맞고 있다가 벼락이나 맞아 뒈져 버리게---." 노인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마을로는 안 가. ---혼자 가거라! 가 버려!" 노인은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외쳤다. "할아버지! 용서해 줘---! 그에게 다가서며 뇨니카는 빌기 시작했다. "안 갈 테다!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나는 7년이나 너를 길렀어! ---모든 것이 오직 너 하나를 위해서였다. ---사는 것도 너 때문이었어---. 나 같은 늙은이에게 무엇이 필요했겠니? 나는 곧 죽을 몸이다---. 이제 곧 죽게 되겠지---. 나더러 도둑놈이라고? 그래, 나는 도둑질을 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건 오직 너를---너를 위해서였다. 자, 가져가거라. ---다 가져가. ---나는 다만 네가 이 세상에 혼자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그래서 돈을 모으고 도둑질도 했던 거다! 하느님은 죄다 알고 계시겠지. 암, 아시고말고! 그분께서 나에게 벌을 내려 주실거다. 도둑질이나 하고 다니는 이 늙은 수캐를 그분은 용서하시지 않을 거야. 벌써 이렇게 벌을 내리셨는 걸. 주여, 당신은 저를 벌하셨습니다! 어린 손자의 손으로 저를 치셨습니다! 주여, 당신은 공평하십니다! 정의로우신 주여, 당신을 믿나이다! 오, 주여---!" 노인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외침이 되어 뇨니카의 가슴속에 싸늘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천둥이 초원과 하늘을 뒤흔들었다. 하늘은 섬광 속에서 몸서리를 치고, 초원과 하늘을 뒤흔들었다. 하늘은 섬광 속에서 몸서리를 치고, 초원은 푸른 불길로 타오르다가 이내 무거운 암흑 속으로 가라앉으며 몸을 떨었다. 비는 줄기차게 퍼붓고 있었으며, 빗방울들은 번갯불에 강철조각처럼 번쩍이며 마을의 등불들을 지웠다. 뇨니카는 두려움과 추위, 그리고 할아버지의 고함이 야기한 슬픔과 죄책감 때문에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젖은 머리칼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눈에 스며들었지만 그는 눈을 깜빡이는 것이 두려워 줄곧 눈에 스며들었지만 그는 눈을 깜빡이는 것이 두려워 줄곧 눈을 부릅뜬 채 앞을 응시하면서 거센 소리들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뇨니카는 할아버지가 다만 움직이지 않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왠지 할아버지가 죽어 버린 것처럼, 그래서 자기만을 이곳에 남겨 두고 어디론가 가 버린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앉았다. 그리하여 그의 팔굽이 할아버지에게 닿았을 때, 그는 뭔지모를 공포를 예감하는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번개는 하늘을 찢으며, 나뭇가지에서 흘러내리는 빗물로 온몸을 흠뻑 적신 채 웅크리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비추었다. 노인은 손을 허공에 내저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여전히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뇨니카는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 두려움에 차서 고함을 질렀다---. 푸른 섬광에 비친 그 얼굴은 죽은 사람의 얼굴 같았고, 그 위에서 정처없이 움직이는 두 눈은 이미 정기를 잃고 있었다. "할아버지! ---빨리 가!" 할아버지의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그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노인은 몸을 숙여 앙상하게 뼈만 남은 손으로 그를 부둥켜 가슴에 꼭 껴안았다. 그리고는 그의 몸을 꽉 조이면서 갑자기 덫에 걸린 이리처럼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 소리에 반쯤 정신이 나간 뇨니카는 그를 뿌리치고 벌떡 일어나 눈을 부릅뜬 채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번갯불에 눈이 부셔 넘어졌다가는 다시 일어나기를 되풀이하면서, 그는 화살처럼 질주하여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어둠은 섬광의 푸른 빛을 받아 사라졌다가 다시금 두려움에 질려 미쳐 버린 소년을 집어삼킬 듯이 에워싸곤 했다. 비는 단조롭고 처량한 소리를 내며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초원의 어디에도 빗소리와 섬광과 진동하는 천둥소리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마을 아이들이 들판으로 나가다가 질겁을 해서 되돌아왔다. 그들은 백양나무 밑에 어제의 거지들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옆에 칼이 버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에 찔려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이든 카자크 인들이 그곳에 당도하여 살펴본 결과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노인은 아직 살아 있었다. 사람들이 다가가자 그는 일어나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의 혀는 이미 굳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눈물 어린 눈으로 무언가를 묻고, 무리 속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지만 끝내 아무 것도 찾지 못하고,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했다. 저녁 무렵 그는 죽었다. 그는 첫째로 이방인이요, 둘째는 도둑이며, 셋째는 회개하지 못한 채 죽었다는 이유로 마을 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자신이 누워 있던 백양나무 밑에 매장되었다. 그의 옆 진흙탕 속에서 단검 외에 스카프 하나가 발견되었다. 2, 3일 지나 뇨니카가 발견되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광야의 어느 골짜기 위를 까마귀떼가 맴돌고 있어, 가보니 비 온 뒤에 생긴 협곡의 진흙탕 속에 한 소년이 두 팔을 벌리고 얼굴을 박은 채 죽어 있었다. 그는 어린아이였으므로 사람들은 처음에 그를 마을 묘지에 묻기로 했으나 다시 의논한 끝에 노인이 묻힌 백양나무 아래 할아버지와 나란히 묻어 주었다. 그리고는 흙을 쌓고 그 위에 거칠게 만든 돌십자가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