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어머니 저자 : 막심 고리끼(최윤락 옮김) 출판사 : 열린책들 막심고리끼 막심고리끼(본명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뻬쉬꼬프)는 1868년 현재 고리끼시로 불리는 볼가 강 연안의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그는 외할머니에 의해 양 육되었고, 정규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채 어린나이에 제화점의 도제, 사환, 볼가강 증기선 의 접시닦이 등 하층 계급의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후에 그가 작가가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892년 첫단편소설 '마까르 추드라'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고, 1895년 '첼까 쉬'를 발표하여 일약 대가가 되었다. 그 뒤 1898년 '단편집'이 출판되어 10만부 이상이 팔 리는 대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1901년 학사원 회원에 추대되었다가 혁명운동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이듬해 그 지위를 받탈당하고, 1906년 뻬쩨르부르그의 '피의 일요일'의 민중 학살에 대한 항의문을 써 투옥, 세계 지식인들의 항의로 석방되어 이탈리아로 이주해야만 했다. 1912년 '어머니'로 모스끄바의 그리보예도프상을 받았고, 1914년 귀국하여 잡지 '새생활'을 창간하였으나, 신경통과 폐렴으로 다시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그는 1932년 소비에뜨 작가동 맹 제1차 대회에서 의장으로 추대되었으나 1936년 모스끄바에서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 다. 이 책의 다음 사항들은 역자와 편집자가 임의로 결정한 사항입니다. 1. 대본으로는 모스끄바 '끄니가' 출판사가 소설 '어머니' 출판 80주년을 기념하여 1986 년에 출판한 러시아어 대본을 원본으로 사용하였습니다. 2. 러시아 고유명사의 한글표기는 발음대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예) 모스크 바 -> 모스끄바, 보드카 -> 보드까 그러나 영어발음으로 굳어져 있어 의미상 혼란을 줄 수 있는 것은 영어식 발음에 따랐습 니다. 예) 라시야 -> 러시아, 시빌리 -> 시베리아 3. 러시아 인명은 모두 러시아어 발음대로 표기했습니다. 4. 러시아 이름체계는 '이름 + 부칭 + 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이름, 이름 과 부칭, 성, 애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서로 달라 독자에게 혼란을 줄 수 있으므로, 이 책에 서는 되도록 통일하여 혼란을 줄였습니다. 5. 애칭의 경우 괄호안에 본명을 밝혀두었습니다. 예) 빠샤(빠벨의 애칭), 안드류샤(안드 레이의 애칭) 차 례 제 1 부 제 2 부 고리끼와 소설 '어머니' 작가연보 제 1 부 1... 매일같이 마을로부터 떨어져 있는 노동자촌의, 열기와 기름냄새로 절어 있는 대기 속에서 공장 사이렌이 떨리는 듯한 소리로 울려 퍼지면, 그 소리를 따라 회색빛 작은 집들로부터 아직 잠에서 덜 깬 몸으로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침울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마치 질겁한 곤충처럼 거리로 뛰쳐나온다. 차디찬 어둠속에서 그들은 병든 거리를 따라 높다랗게 솟아 있는 공장의 돌담으로 나아갔고, 그러면 돌담은 수십 개의 기름기 흐르는 정방형 눈으 로 진창길을 환히 비추어 주면서 냉혹한 시선으로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진창은 사람 들이 발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괴상한 소리를 냈다. 또 거친 욕설로 새벽공기를 맹렬히 가르며 잠이 덜 깨어 목이 잠긴 듯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을 향해서 또 다른 소리들이 날아들었는데, 그것은 기계의 지독한 소란스러움과 수증기의 으르렁거림이었 다. 굵다란 막대기처럼 노동자촌 위로 우뚝 솟아 있는 검은 굴뚝들이 멀리 우울하면서도 험 상 게 보였다. 집집마다 유리창에 붉은 햇살이 맥없이 걸리는 저녁 무렵이면, 공장에서는 타다 남은 석 탄부스러기 같은 사람들이 돌덩어리처럼 묵직한 건물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는 검게 그 을은 얼굴로 끈적끈적하고 고약한 기계기름 냄새를 풍기면서 굶주린 이를 허옇게 드러내고 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목소리는 생기를 되찾아 즐겁기조 차했는데, 오늘도 이것으로 노역이 끝나고 집에서는 저녁밥과 휴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 었다. 공장은 또다시 만 하루를 통째로 삼켰다. 공장기계는 필요한 모든 힘을 인간의 육체로부 터 빨아들렸고, 시간은 흔적 하나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무덤을 향해 일 보를 더 내디딘 것이다. 하지만, 어쨋든 지금은 휴식의 즐거움과 왁자지껄한 선술집이 눈앞 에 아른거려, 그들은 비로소 나른해지며 더구나 신바람까지 나는 것이었다. 휴일만 되면 사람들은 낮 10시까지 잠을 퍼잤다. 그러고 나서 이미 결혼한 성실한 사람들 은 자기 옷 가운데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젊은애들의 교회에 대한 무관심에 욕지거리 를 해대면서 예배를 드리러 갔다. 교회에서 돌아와서는 삐로그를 실컷 먹은 다음, 다시 저 녁때까지 잠자리에 들었다. 해가 갈수록 쌓인 피로 때문에 사람들은 식욕을 잃어버려 뭔가 먹기 위해서라도 위를 찌 르는 듯한 아픔도 참아 가며 연신 보드까를 마셔야만 했다. 저녁 무렵이면 사람들은 거리거리를 하릴없이 어슬렁거렸는데 그들 가운데 방수 덧신을 갖고 있는 사람은 마른 땅에서도 그걸 신고 다녔고, 우산이 있는 사람은 햇볕이 쨍쨍 내리 쬐는 날에도 그걸 갖고 다녔다. 그들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공장과 기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아니면 작업감독관을 욕 하기 일쑤였다. 그들은 모두 일과 연관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허구 한 날 계속되는 지긋지긋한 단조로움 속에서 그나마 서툴고 무기력한 생각의 섬광이 희미하 게 반짝이는 것도 어쩌다 한 번이었다. 집에 돌아오면 그들은 아내와 다투고 때로는 주먹질 까지 했다. 젊은 친구들은 선술집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친구집을 전전하며 술판을 벌였다. 그들은 손풍금을 치거나 상스럽고 저질스러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도 하며, 때로 음담 패설도 서슬없이 늘어놓으면서 술을 퍼 마셨다. 혹독한 노동에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은 금 세 술에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선 이해할 수 없는 병 적인 흥분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에겐 탈출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이런 불안한 감정을 해소할 만한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찾아보려고 몸부림쳤 다. 그러다 보니 툭하면 야수와도 같이 서로에게 덤벼들었다. 피를 보는 싸움이 뻔한 결과 였음에도 불구라고 간혹 그들은 심한 상처를 입거나,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어느 한편이 죽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싸움을 그쳤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한의 감정이 지배적이었는데, 이러한 감정은 근육의 피로가 불치의 병이듯 만성적인 것이었다. 아버지들로부터 물려받은 이런 마음의 병 때문에 사람들은 이유 없는 잔인함으로 평생 혐오스런 행동을 서슴지 않게 되고 결국엔 그 검은 그림자를 벗어 던지지 못하고 죽어 갔다. 휴일이면 젊은이들은 친구에게 한 방 먹인 것을 자랑삼아 떠벌리기도 하고, 어떤 남에 게서 받은 모욕이 서럽고 분해서 눈물을 펑펑 쏟아가며 욕설을 퍼부어댔다. 게다가 옷은 다 찢기고 몸은 온통 먼지와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 시퍼렇게 멍든 눈을 해 가지고 밤 늦게야 집에 돌아오기 일쑤였다. 만취한 그들의 모습은 불쌍하고, 가련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심지 어 욕지기가 날 지경이었다. 가끔 젊은 친구들은 부모의 손에 실려 가다시피 집으로 끌려가 곤 했다. 부모들은 길거리의 담장 밑이나 선술집에서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고주망태가 되 어 있는 자식들을 발견하고는 추잡한 욕설을 사정없이 퍼붓거나 보드까에 취해 흐느적거리 는 자식의 야윈 몸뚱어리에 매질을 가하기도 했지만, 어쨋든 새벽공기 속을 사이렌의 성난 울부짖음이 흡사 시커먼 개울물처럼 흐르는 이른 아침이면 깨워서 일터로 또 내보내야 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자식들을 조심스럽게 자리에 뉘어야만 했다. 자식들을 욕하고 무자비하게 때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젊은 사람들이 고주망태가 되 어 서로 주먹질하는 것도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에게는 당연하게 보였다. 아버지들 역시 젊 었을 땐 똑같이 술 마시고 주먹질했다는 이유로 부모로부터 매질을 당했던 때문이었다. 삶 이란 항상 그러했다. 해가 거듭되어도 삶은 마치 더럽고 탁한 개울물이 흐르듯 그렇게 단조 롭게 흘러갔다. 어느덧 이미 오래 전에 몸에 배어 버린 습관이 그렇듯, 똑같은 생각의 반복 이 모든 일의 운명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와 같은 상태를 바꾸려 하지 않았 다. 때때로 어디선지는 모르지만 외지사람들이 이 공장촌으로 흘러 들었다. 처음에는 단지 타 지방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목을 받아, 그들이 일했던 지방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 어놓음으로 해서 피상적이나마 미묘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신기함은 사라지고 사람들 속으로 묻혀 버려 결국엔 똑같은 사람이 되어 갔다. 그들의 이야 기를 들어 보면, 어쨋든 노동자의 삶은 어디를 가나 별다른 차이가 없음이 명백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대체 무슨 할 말이 더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이 공장촌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었다. 그들과 논쟁을 하지는 않으면서도 어쨋든 사람들이 그들의 말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음은 부 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어떤 사람에게는 어렴풋한 혼란을 야기시키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뭔가 분명치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품게 하기도 했다. 그 래서 그들은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상념을 쫓아 버리기 위해 더욱더 많은 술을 마셨다. 낯선 사람들에게서 뭔가 다른 면을 눈치채고, 공장촌 사람들은 그것을 염두에 두다 보니, 결국 자신들과는 뭔가 다른 데가 있는 이 사람들을 무의식적인 경계심을 품고 대하게 되었 다. 그들은 정말 이 사람들이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 없는 우울하면서 도 규칙적인 자신들의 삶의 궤도를 파괴함으로써 삶에 파문을 던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 려움을 품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변함없는 삶의 힘에 익숙해져 있어 결코 더 나은 방향으로의 어떤 변화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변화를 단지 억압하기에 적합 한 것으로만 생각했다. 공장촌 사람들은 새로운 그 무엇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말없이 피했고, 그러다 보면 이 들은 어디론가 다시 떠나거나 공장에 그냥 남더라도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사람으로 변해 갔다. 그래서 그저 그런 공장촌 사람들과 하나같이 섞여 살 수 없는 사람들은 따로 떨어져 살아야만 했다. 2... 열쇠공 미하일 블라소프 역시 그렇게 살았다. 그는 눈이 작은 데다 온몸에 털이 많이 난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그는 짙은 눈썹 아래 작은 눈으로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냉소를 머 금고서 누구든 의심쩍게 바라보았다. 공장에서는 첫째가는 열쇠공이자 공장촌에서는 가장 힘센 장사인 그였지만, 윗사람에게 무례하게 굴었기 때문에 품삯을 제대로 쳐 받지도 못했 을뿐더러 휴일만 되면 누구에게건 행패를 부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좋게 보지도 않았 거니와 두려워하기조차 했다. 사람들 역시 그에게 뭇매를 가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해 보았 지만 매번 헛수고였다. 한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고 블라소프는 두 손에 돌과 몽둥이, 그리고 쇳덩어리를 든 채 두 발을 쩍 벌리고 서서 말없이 적들을 기다렸다. 눈에서 목까지 시커먼 수염으로 온통 뒤덮인 그의 얼굴과 털이 무 성한 두 손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사람들은 그의 작고 날 카로운 두눈을 무서워했는데, 그의 두 눈은 마치 강철 천공기처럼 사람들을 꿰뚫었다. 그렇 기 때문에 그의 시선과 마주쳤던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야만적인 힘과 무자비하게 휘 둘러댈 것만 같은 이해하기 어려운 공포를 지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 꺼져 버려, 버러지 같은 놈들아!" 그가 험상 게 소리쳤다. 그의 얼굴에선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커다랗고 누런 이빨이 번 득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비겁하게 상스런 욕지거리를 해댈 뿐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그냥 뿔뿔이 흩어졌다. "버러지 같은 놈들아!" 그들 뒤에다 대고 그가 욕을 내뱉었다. 그의 두 눈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번쩍였다. 그런 다음 다시 고개를 쳐들고 그들 뒤를 쫓으며 소리쳤다. "자, 어디 죽고 싶거든 앞으로 나서 봐!" 어느 누구도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말수가 적은 중에도(버러지 같은)이란 말은 그가 가장 즐겨 쓰는 말이었다. 그는 공장 우두머리나 경찰을 보고도 그렇게 불렀고 아내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야, 이 버러지 같은 년아! 넌 옷이 찢어진 것도 안 보이냐?" 그의 아들인 빠벨이 열 네 살 되던 해, 블라소프는 왠지 아들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다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빠벨은 두 손에 육중한 망치를 들고 딱 잘라 말했다. "건드리지 마세요..." "뭐?" 아버지는 그림자가 자작나무에 다가가듯 그렇게 아들의 고상하고 갸름한 얼굴에 가만가만 다가서며 물었다. "참을 만큼 참았어요!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빠벨이 소리치고는 망치를 휘둘렀다. 아버지는 잠깐 동안 아들을 쳐다보고 나서 털이 거칠게 난 두 손을 허리 뒤로 감추고 웃 으며 말했다. "좋아..." 그리고 깊은 한숨을 몰아 쉬고 나서 덧붙였다. "에이, 버러지 같은 놈..." 잠시 후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나한테 이젠 돈 벌어 오란 소리 하지마. 이젠 빠샤(빠벨의 애칭)가 벌어먹일 테니까..." "그럼 당신은 버는 족족 다 술 퍼 마시는 데 쓰려는 거유?" 그녀가 용기백배하여 물었다. "상관 마, 버러지 같은 년아! 내겐 숨겨 놓은 여자가 있어..." 사실 그에겐 정부란 없었다. 그로부터 그는 자기의 임종 때까지 근 두 해 동안 아들을 안 중에 두지도 않았거니와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겐 개가 한 마리 있었는데 그 개 역시 그처럼 크고 털북숭이였다. 그 개는 매일 공장 까지 그를 따라갔다가 저녁이면 대문에서 그를 기다렸다. 휴일만 되면 블라소프는 집을 나 와 술집을 전전하곤 했다. 그는 말없이, 마치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는 듯한 눈빛으로 사람 들의 얼굴을 할퀴며 돌아다녔다. 그럴 때면 그 개는 큼직하고 털이 북실북실한 꼬리를 밑으 로 내리고서 그를 쫓아다녔다. 잔뜩 취해 가지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을 때면 그는 자기 접시의 음식을 개에게 주기도 했다. 그는 개를 때리지도 욕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결코 귀여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에 혹 아내가 그걸 제때에 치우지 않으면 그 는 접시를 탁자 아래 마룻바닥에 팽개쳤다. 그리고 자기 앞에다 보드까 병을 딱 세워 놓고 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지그시 감고서 괴롭기 한량없는 거친 목소리 로 울부짖듯 노래를 불렀다. 너무나 침통해 불쾌감을 주는 노랫소리가 그의 콧수염에서 빵 부스러기들을 떨어뜨리면서 서로 뒤엉켰지만, 열쇠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퉁퉁한 손바닥으로 턱수염과 콧수염을 쓸어 내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랫 소리는 질질 늘어졌고 멜로디는 한겨울 늑대 울음소리를 연상시켰다. 그는 보드까를 연신 마셔대다가 술이 바닥나면 긴 의자에 모로 나자빠지거나 탁자에 머리를 처박고서 공장 사이 렌이 울릴 때까지 마냥 잤다. 그럴 때면 개는 그 옆에 배를 깔고 누웠다. 그는 탈장으로 죽었다. 닷새 동안이나 온몸이 새까맣게 탄 그는 두 눈을 꾹 감고 침대 위 를 데굴데굴 구르면서 이빨을 빠득빠득 갈았다. 그가 아내에게 말했다. "비소 좀 줘, 날 좀 제발 죽여 달란 말야..." 의사는 찜질약을 내오라고 시키고, 수술이 꼭 필요한데 그러려면 환자를 오늘이라도 당장 입원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꺼져 버려! 난 혼자 죽을 거란 말야... 버러지 같은 놈아!" 블라소프가 숨을 헐떡거리며 소리쳤다. 의사가 떠나고 아내가 그에게 수술에 동의하라고 울면서 설득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주먹 을 움켜쥐고 그녀를 협박하며 말했다. "난 다시 일어나고 말 걸! 그럼 넌 더 죽어 나!" 그는 아침 고장 사이렌이 울리는 바로 그 시간에 죽었다. 관 속에 그는 입을 벌린 채로 누워 있었지만 그의 두 눈썹은 잔뜩 화가 난 듯 침울해 보였다. 그의 아내, 아들, 개, 늙은 주정뱅이이자 공장에서 쫓겨 난 사기꾼 다닐로 베소프쉬꼬프, 그리고 공장촌의 몇몇 거지들 이 장례를 치렀다. 아내는 말없이 눈물을 조금 흘렸지만 빠벨은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다. 거리에서 관과 마주치는 공장촌 사람들은 멈춰 서서 성호를 긋고 서로 수군거렸다. "모르긴 몰라도 라게야는 좋아 미칠 지경일거야. 그 작자가 죽어버렸으니..." 어떤 사람들은 고쳐 말했다. "죽은 게 아니라 뒈진 거야..." 관을 묻고 사람들이 모두 떠난 후에도 개는 남아 아직 제대로 다져지지도 않은 땅에 배를 깔고 앉아서 오랫동안 아무 소리 없이 무덤 냄새를 맡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개는 죽은 채 로 발견되었다. 3... 아버지가 죽은 지 두 주일이 지난 어느 일요일 빠벨 블라스프는 몹시 술에 취해서 집에 돌아왔다. 비틀거리면서 그는 입구 반대쪽 구석으로 기어 들어와 아버지가 했던 것과 똑같 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고 어머니에게 소리쳤다. "저녁밥 줘요!" 어머니는 그에게로 다가가 그 옆에 앉아서 아들의 머리를 자기 가슴으로 끌어당겨 안았 다. 그는 한 손으로 어머니의 어깨를 잡고 밀치면서 소리쳤다. "엄마, 빨리..." "이런 바보 같긴!" 어머니는 막무가내인 아들을 달래면서 슬프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 담배 피울테야! 아버지 파이프 나한테 줘..." 말도 제대로 듣지 않는 혀를 어렵게 놀리면서 빠벨은 중얼거렸다. 그가 술에 이토록 취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보드까가 그의 몸을 쇠약하게 했지만 의식마저 잃은 것은 아니어서 그의 머릿속에선 이런 물음이 고동쳤다. (내가 술에 취했나? 내가 술에 취했단 말야?) 어머니의 다정함에 당황한 그는 그녀의 두 눈에 서려 있는 슬픔에 가슴이 뭉클해 왔다. 울고 싶었다. 이런 마음을 지워 버리려고 그는 짐직 실제 마신 것보다 훨씬 많이 마신 척했 다. 어머니는 한 손으로 땀이 배어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면서 조용히 말했다. "이럴 필요가 없는데..." 그는 구역이 나기 시작했다. 급격한 구토의 발작 후에 어머니는 그를 침대에 뉘고 창백한 이마에 물수건을 얹어 주었다. 그는 어느 정도 술이 깨긴 했지만, 아래고 주위고 할 것 없 이 모든 것이 정신없이 휘휘 돌고 눈꺼풀은 자꾸 내려앉았으며, 게다가 입에서는 불결하고 뭔가 썩은 듯한 맛이 느껴졌다. 그는 속눈썹을 통해서 어머니의 커다란 얼굴을 바라보며 두 서 없는 생각에 빠져 들었다. "(술 마시기엔 아직은 좀 이른 모양이야. 딴사람들은 아무리 마셔도 아무렇지도 않던데, 아이구 속이야...) 어딘가 멀리서 어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네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난 뭘로 먹여 살릴 거야..." 두 눈을 꼭 감고 그는 말했다. "다들 마시는데, 뭐..." 어머니는 깊은 숨을 몰아 쉬었다. 그의 말이 옳다. 그녀 역시도 그가 즐거움을 구할 곳이 라곤 술집말고는 아무데도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말했다. "그래도 넌 마시지 마라! 네 아버지는 너보다 두 배는 더 많은 술을 마셔댔어. 그러고서 얼마나 내게 손찌검을 해댔는데... 아니 그것도 모자라면 이젠 네가 이 에미한테 그렇게 하 겠단 말이냐, 응?" 어머니의 애처롭고 부드러운 말을 듣고 빠벨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어머니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였던가를 생각했다. 그 당시 어머니는 아무 말도 입밖에 내지 못했고, 맞으면 어쩌나 하는 몸서리치는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그는 근래 들어서 아버지와 부딪치는 것조 차 피하려고 집에 있는 때가 적었고, 지금도 어머니에 관한 생각은 조금도 않고 있었다. 술 이 점점 깨어 가면서 그는 어머니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는 큰 키에 등이 앞으로 굽어 있었다. 오랜 노동과 남편의 구타에 녹초가 된 그녀는 보통 때에도 마치 무엇에 걸려 넘어지지나 않을까 근심스러운 듯 말없이 허리를 굽히고 걸 어다녔기 때문에 허리가 굽었던 것이다. 주름이 져 여기저기 움푹 패이고 부어 오른 계란형 의 넓은 얼굴은, 공장촌의 대다수 여인네들의 그것처럼 애처로이 떨고 있는 새까만 두 눈 때문에 오히려 창백해 보였다. 오른쪽 눈썹 위에 상처가 있었는데, 그 상처 때문에 눈썹이 조금 위로 치켜 올려져서 그녀의 오른쪽 귀가 왼쪽 귀보다 높은 것처럼 보였다. 또 이 때문 에 그녀가 항상 남의 얘기에 조심조심 귀를 기울이는 것 같은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나타나 기도 했다. 숱이 많고 새까만 머리에서는 몇 가닥의 흰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그녀의 전체 모습은 온화하고 애처롭고 온순하게 보였다. 이윽고 그녀의 두뺨에서 천천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지마세요. 마실 것 좀 갖다 주세요." 아들은 조용히 말했다. "내 얼음물 갖다 주마..." 그러나 그녀가 물을 갖고 왔을 때 아들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잠시 그의 앞에 서 있는 동안 손에 들린 물그릇이 떨렸고 얼음은 조용히 그릇을 두드렸다. 물그릇을 탁자에 놓 고 그녀는 말없이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술에 찌든 삶의 소리들이 창문 유리에 부딛 쳤다. 가을 저녁의 무르익어 가는 어둠 속에서 하모니카가 빽빽거리는가 하면 누군가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추잡한 말로 욕지거리를 해대기도 했으며, 여인네들의 흥분한 거친 목소리가 사뭇 전율하듯 울려 퍼지기도 했다... 블라소프 씨네 작은 집에서의 삶은 이전보다도 훨씬 조용하고 평온하게 흘러서 공장촌의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것과는 좀 다른 면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집은, 공장촌 변두리 의 소택지로 내리닫는, 높진 않지만 가파른 언덕 가운데에 서 있었다. 집의 삼분의 일을 부 엌과 어머니가 쓰는 작은 방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부엌과 그 방 중간엔 얇은 칸막이가 쳐 져 있었다. 나머지 삼분의 이는 창문이 두 개 달린 정방형 방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한 쪽 구석엔 빠벨의 침대가, 그리고 입구 반대쪽 구석엔 책상과 두 개의 긴 의자가 있었다. 몇 개의 의자, 속옷 넣는 서랍 달린 장롱, 그 위에 놓여 있는 조그만 거울, 옷가지가 들어 있 는 상자, 벽시계, 그리고 구석에 성화 두 점 - 이것이 가구의 전부였다. 빠벨은 한창 나이의 젊은애들에게 필요한 건 모두 다 했다. 그는 하모니카도 사고 가슴부 위에 빳빳하게 풀을 먹인 셔츠도, 덧신도, 지팡이도 삼으로써 제 또래 모든 젊은애들이 하 는 짓이란 짓은 다 하려고 했다. 야회에도 다니고 까드릴이나 폴카를 배우기도 했으며, 휴 일만 되면 으레 폭음을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항상 보드까 때문에 여간 고통스러워하는 것 이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려 어쩔줄 몰라 했으며 얼굴은 창백해 세상 모든 일에 흥미를 잃은 듯이 보였다. 언젠가 한번은 어머니가 그에게 물었다. "그래 어떻든? 어젠 재미있게 놀았니?" 그는 괜히 흥분해서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지겨워 미칠 지경이야! 낚시나 가는 게 낫겠어. 그렇지 않으면 엽총을 사든가." 그는 지각을 한다거나 벌금을 무는 일이 없이 묵묵하게 열심히 일했다. 어머니의 그것과 같이 푸르고 커다란 그의 두 눈은 무언가 불만스러운 듯 주위를 쏘아보았다. 그는 엽총을 산다거나 낚시를 가는 일도 없었고, 점차로 모든 사람들의 평범한 길을 꺼리기 시작했다. 야회에 참석하는 횟수도 훨씬 줄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휴일마다 어디론가 외출하는 건 여 전했지만 술도 안 마시고 멀쩡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를 유심히 관 찰해 좀 결과, 아들의 거무스름한 얼굴이 한결 날카로워지고 두 눈은 무얼 쳐다볼 때고 훨 씬 심각해졌으며 입술은 이상하리만치 엄하게 꽉 다물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말없이 무슨 일인지를 열심히 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무슨 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전엔 그를 찾아오는 친구도 더러 있었는데, 이젠 집으로 찾아와 보았댔자 만날 수가 없었으므로 자연히 그들은 발길을 끊었다. 자기 아들이 공장 청년을 닮아 가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게 어머니로선 기분 좋은 일이었다곤 하지만, 아들이 무언가에 주의를 집 중하고 완고하게 어딘가 어두운 삶의 급류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 그녀 의 마음속에선 까닭 모를 두려움이 느껴졌다. "너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은가 보구나, 빠샤?" 가끔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전 건강해요." 그가 대답했다. "얼굴이 너무 안됐어!" 한숨을 내쉬며 어머니가 말했다. 그는 책들을 가져 오기 시작했는데, 책을 읽을 땐 눈에 안 띄게 읽으려고 애썼고, 다 읽 은 책은 어딘가에 숨겼다. 그는 어쩌다가 책에서 뭔가를 종이에다 베껴 쓰기도 했지만, 그 것 역시도 감추었다... 모자는 점점 말할 기회가 적어졌을 뿐더러 서로 만나기도 힘들어졌다. 아침에 그는 말없 이 차를 마시고 일을 나갔다가 정오가 되면 점심 먹으러 나타나서 식탁에 앉아 별로 중요하 지도 않은 말 몇 마디를 건네는 게 고작이었고, 그러고 나서는 저녁때까지 나타나지 않았 다. 저녁때만 되면 꼼꼼하게 세수를 하고 나서 저녁을 먹고, 그 후엔 역시 또 읽던 책들을 읽어갔다. 휴일이면 아침에 나가서 밤 늦게야 돌아왔다. 그녀는 그가 시내에 나가서 영화 구경을 다니는 줄 알았는데, 이상한 건 시내에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었다. 그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들이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또한 그가 가끔 그녀로서 는 이해 못할 어떤 새로운 말들을 쓰기도 하며, 때론 말하는 중에 그녀가 알고 있는 거칠고 격한 표현들이 튀어나온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의 행동에서도 그녀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 자주 엿보였다. 그는 멋부리는 것도 집어치우고 몸과 옷의 청결에 더욱 많은 신경을 쓰기 시작했으며 걸음걸이도 그저 자연스럽고 편안하면 그만인 듯싶었다. 그렇게 그의 겉모양이 한결 평범해지고 부드러워지자 어머니는 내심 불안했다. 더구나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도 예 전과는 어딘가 달랐다. 그는 가끔 방바닥도 쓸고 휴일이면 자기 침대를 청소하기도 했다. 어쨌든 모든 면으로 보아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 주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었다. 공장촌에 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언젠가 한번은 그가 그림 한 장을 가져 와서 벽에다 걸어 놓았는데, 그것은 세사람이 이 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경쾌하고 활기 있게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그림이었다. "이건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엠마오로 가고 있는 그림이에요." 빠벨이 설명했다. 어머니는 이 그림이 맘에 들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리스도를 존경한다는 애가 교회에는 나갈 생각을 안 하니...) 친구가 빠벨에게 예쁘게 짜 준 책꽂이에는 더욱더 많은 책이 꽂혔다. 방은 아늑한 모습을 띠었다. 그는 이제 그녀에게 깍듯이 존칭어를 써서 말하고, 부를 때도 <어머니>라고 불렀지만, 가 끔은 예전의 정다운 태도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엄마, 너무 걱정하지마. 나 오늘은 좀 늦을 거야..." 이럴 때면 어머니는 기분이 좋았다. 그의 말에서 그녀는 진지하고 강한 무엇을 느꼈던 것 이다. 그러나 그녀의 불안은 더해 갰다. 시간이 지나도 웬 영문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가슴은 평소와는 다른 어떤 예감으로 더욱 죄어들었다. 가끔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면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저 애는 왜 보통 애들과 하는 짓이 다를까. 마치 수도승 같아. 엄숙한 것도 정도가 있지 나이에 맞지 않게...) 가끔 그녀는 또 이런 생각을 했다. (혹시, 어떤 처녀한테 폭 빠진 거 아닐까?) 그러나 여자들과 사랑을 하려면 돈이 필요할텐데, 그는 버는 돈을 한 푼도 안 빼고 그녀 에게 갖다 주었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흘러 2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동안은 이상스러우면서도 뭔가 알지 못할 상념들과, 더해 가는 불안으로 일관된 침묵의 세월이었다. 4... 언젠가 한번은 저녁을 먹고 난 후에 빠벨이 창문 커튼을 내리고 구석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 위에선 함석으로 갓을 씌운 남포등이 벽에 불빛을 내리비치고 있었다. 어머니는 설거지를 하고 부엌에서 나와 그에게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어 머니의 얼굴을 의아한 듯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빠샤! 난 그저..." 그녀는 서둘러 말하고 당황한 듯 양미간을 찌푸리며 물러났다. 그러나, 그녀는 부엌 한가 운데에서 생각에 잠겨 꼼짝도 않고 한참이나 서있다가 뭔가 꺼림칙하여 손을 깨끗이 씻고 다시 아들에게로 다가갔다. "네게 물어 보고 싶은 게 있다." 그녀는 조용조용 말을 꺼냈다. "도대체 뭘 읽고 있는거냐?" 그는 책을 한 쪽으로 치웠다. "앉으세요, 어머니!" 어머니는 그의 옆에 앉아 자세를 바로하고 무슨 중요한 말이라도 기다리는 듯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녀를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고 빠벨이 크지 않은 목소리로 왠지 모르게 매우 준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전 금서들을 읽고 있어요. 그것들은 우리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고 해서 금지된 책들이에요... 그것들은 조심조심 몰래 인쇄된 것이어서 만약에 제가 갖고 있다는 게 발각되면 전 감옥에 가게돼요. 제가 진실을 알고 싶어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간단 말입니 다. 이해하시겠어요?" 그녀는 갑자기 숨이 콱콱 막혀 왔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아들을 들여다보니 그가 왠지 낯 설게만 보였다. 목소리마저도 한결 낮고 우렁차서 꼭 딴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그는 손가락 으로 솜털같이 가느다란 콧수염을 잡아당기며 부자연스럽게 구석 어딘가를 흘끗 쳐다봤다. 그녀는 아들에 대한 두려움과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거냐, 빠샤?" 그녀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들여다보며 크지 않은 목소리로 조용조용 대답 했다. "진실을 알고 싶어섭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확고한 데가 있었고 두눈은 결연히 빛났다. 그녀는 자기 아 들이 왠지 비밀스럽고 두려운 어떤 일에 제 몸을 내던지고 있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꼈다. 살아가며 생기는 모든 일이 그녀에게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고, 따로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순종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지금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죄어드는 슬픔과 근심으로 그저 울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울지 마세요." 빠벨이 부드럽고 조용히 말했지만, 그것이 그녀에겐 그가 작별인사라도 하는 듯이 들렸 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던가요? 어머닌 벌써 마흔예요. 그런데 과연 어머닌 살아 있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기만 했어요. 지금 생 각해 보면 아버진 비참한 삶에 대한 분풀이를 어머니의 옆구리에 해댄 거예요. 자기의 비참 한 삶에 대한 분풀이를 말입니다. 비참한 삶이 자기를 짓누르고 있는데도 아버진 그게 무엇 때문인지를 몰랐던 거예요. 아버진 공장이 건물 두 개로 있을 때부터 시작해서 30년 동안 일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건물이 일곱 개나 되지 않느냐고요!" 그녀는 아들의 말을 두려움과 강렬한 호기심을 가지고 들었다. 그는 어머니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탁자에 가슴을 기대고서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가 터득한 진실 에 대해서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젊은이라는 최고의 힘과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서 진리를 확고히 믿는 학생의 열정에 가득 찬 모습으로 그는 자기가 확실히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 했다. 그는 어머니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시험해 보기 위해 말했던 것이 다. 가끔 할 얘기를 찾지 못해 머뭇거릴 때면 그는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선한 두 눈이 어 슴푸레 반짝이는, 비탄에 젖은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두 눈은 두려 움과 망설임을 가득 담은 표정이었다. 어머니가 한없이 불쌍해 보여 그는 이젠 어머니와 그 녀의 삶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머닌 도대체 자그마한 기쁨이라도 느끼며 살아 보셨어요? 무슨 기억할 만한 좋은 일이 라도 있으시냐고요?" 그 말을 들은 그녀는 뭔가 새롭고 이해할 수 없는, 서글프면서도 기쁜 것을 느꼈는지 침 통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그녀의 아픈 가슴은 어느 정도 위안이 되었다. 자기 자 신과 자기 삶에 대한 그런 말들은 생전 처음 듣는 것이어서 그런지 그녀의 가슴속에서 오래 전에 잠들어 분명하지 않은 생각들을 일깨워, 삶에 대한 꺼져 버린 어렴풋한 불만을 불러일 으켰다. 그 생각이나 감정이란 것은 아주 오랜 옛날 젊었을 때나 지녀 봄직한 것들이었다. 그녀는 젊었을 때 삶에 대해서 친구들과 이야기하기도 했고, 또 장시간 동안 이것저것 모든 것에 대해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은 물론이고 모두들 불평만 할 뿐이었지 삶이 무슨 이유로 그렇듯 고통스럽고 힘이 드는지 어느 누구도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녀 앞에는 자기의 아들이 앉아 있는 것이다. 게다가 두 눈과 얼굴로 이 야기하는 아들의 모든 말이, 아들에 대한 자랑스런 마음으로 자기의 가슴을 가득 채우며 또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은 바로 지금, 자기 어머니의 삶을 분명히 이해하고 그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머니를 동정하고 잇다. 어머니를 동정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이걸 알고 있었다. 아들이 이야기한 불행한 여자의 삶이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진실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가슴속에선 잘 알 수 없는 따스한 마음으로 점차 그녀를 위로하 는 이런저런 느낌들이 조용히 몸부림쳤다. "그러면 앞으로 무얼 하려고?" 그의 말을 가로채면서 그녀가 물었다. "우선 공부를 하고, 다음엔 사람들은 가르치겠어요. 우리 같은 노동자들은 배워야만 해 요. 우리는 알고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들의 삶이 어째서 그렇듯 고통스러운가를 말예 요." 항상 심각하고 엄하던 아들의 푸른 두눈이 지금 이렇듯 온화하고 다정하게 반짝이는 걸 본다는 것이 어머니에겐 한없이 기쁜 일이었다. 비록 눈물이 볼에 패어 있는 주름살 속에서 여전히 가물가물했지만 그녀의 입술에선 만족스럽고 은은한 미소가 흘렀다. 그녀의 안에선 삶의 비참함을 그렇듯 잘 이해하는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동요하고 있었다. 아들이 젊다는 것과, 아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아들 혼자서 그녀는 물론 이고 모든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는 삶과의 싸움에 끼어들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얘야, 너 혼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니?) 그러나 그녀는 비록 아직은 좀 이해하기 어렵지만 갑자기 자기 앞에 그렇듯 지혜로운 모 습으로 나타난 아들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 방해를 받을까 봐 걱정했다. 빠벨은 어머니의 입가에 흐르는 미소와 얼굴에서 엿보이는 관심, 그리고 두 눈에 가득 찬 사랑을 보았다. 어머니에겐 그가 제 진실을 이해하라고 강요하고 자기의 어린애 같은 자부 심이 말의 힘을 빌어 자신에 대한 그의 믿음을 고양시킨 것같이 생각되었다. 잔뜩 흥분한 그는 미소를 짓거나 혹은 두 눈썹을 찌푸리며 말하기도 했는데, 간혹 증오에 가득 찬 가혹 한 말들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깜짝 놀라 머리를 가로 저으며 조용히 아들에게 물었다. "아무렴 그럴라고, 빠샤?" "그렇다니까요!" 그는 확고하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는 민중의 행복을 희구하면서 그들 안에 진리의 씨 앗을 뿌리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고, 이런 일을 한다는 이유로 삶의 적들이 사나운 짐승처럼 그들을 붙잡아 감옥에 처넣거나 멀리 강제노동을 보내고 있다는 것까지도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전 그런 사람들을 보았어요. 그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예요." 그는 열정적으로 외쳤다. 그녀의 마을안에서 그런 사람들이 공포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아들에게 묻 고 싶었다. (그게 정말이냐?) 그러나 그녀는 물어 보지도 못하고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끼면서 자기 자식에게 그토록 위 험한, 도대체 이해할 수도 없는 말과 생각을 하도록 가르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 다. 마침내 그녀는 말했다. "곧 날이 밝겠구나. 아침에 나가려면 좀 자 두어야지." "예, 지금 자겠습니다." 그는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허리를 구부리며 물었다. "그런데 절 이해하시겠어요?" "이해한다." "네가 죽게 돼!" 그는 일어나 방안을 거닐다가 말했다. "저... 어머닌 이제 제가 무슨 일을 하고, 어디를 다니는지 아셨어요. 전 어머니께 모든 걸 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어머니, 어머니께서 절 사랑하신다면 제 길을 막지 말아 주 세요." "오 사랑스런 내 아들아!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나을 걸 그랬다." 그녀는 울부짖었다. 그는 어머니의 손을 꼭 쥐었다. 그가 힘주어 말한 <어머니>란 말이 그녀를 부들부들 떨게 했고, 이 움켜쥔 두 손이 새롭고 이상한 어떤 감정을 그녀에게서 불러일으켰다. "난 이제 아무 말 않겠다." 그녀는 동강동강 끊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몸조심하거라!" 도대체 무얼 조심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녀는 흐느끼며 덧붙였다. "많이 여위었구나..." 그리고 그녀는 사랑스럽고, 따스한 눈길로 아들의 탄탄하고 건장한 몸을 껴안으며 빠르면 서도 은은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주여 함께 하소서! ... 마음대로 하거라, 난 말리지 않겠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다. 겁 없이 아무데서나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말거라! 사람들을 조심해야 돼. 모두들 서로서로 를 미워하고 있어. 탐욕과 질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모두들 나쁜 일을 즐겨 하고 남들 을 밀고 하기도 하지. 네가 그들을 비난하면 아마 그들은 증오심으로 널 파멸시키고 말 거 야!" 아들은 문에 서서 어머니의 슬픈 말을 듣고 있었다. 어머니가 말을 마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맞아요, 사람들은 나빠요. 그런데 이 세상에 진실이 있다는 걸 깨닫고 나니까 사람들이 훌륭해 보이지 뭐예요." 그는 다시 웃으며 계속 말했다. "나 자신도 그런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어렸을 땐 사람들을 무서 웠고, 조금 커서는 사람들을 증오하기 시작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잔인했기 때문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꼭 집어서 왜 미워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미웠어요. 그런데 지금 내 겐 모든 게 달라졌어요. 아마 모든 사람들이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모두 죄가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마음 이 왠지 온화해졌어요..." 그는 마치 마음속 무언가에 귀를 기울이듯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생각게 잠 겨 말했다. "이건 바로 인간에게 진리가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겁니다." 그녀는 아들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넌 무섭도록 변했구나, 오 주여!" 그가 잠자리에 들어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어머니는 자기 침대에서 조심조심 일어나 그에 게로 살며시 다가갔다. 빠벨은 가슴을 위로 하고 누워 있었다. 하얀 베개 위에는 거무스름 하고 강경하며 준엄한 얼굴이 또렷이 그려져 있었다. 맨발에 잠옷 하나만 걸친 어머니는 두 손을 가슴에 끌어당기고서 아들의 침대 옆에 서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소리 없이 움직거렸 고 두 눈에선 커다란 눈물 방울이 천천히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5... 다시 그들의 말없는 삶이 계속되었다. 그들은 서로서로 거리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지냈 다. 주중의 어느 휴일, 집을 나서며 빠벨이 말했다. "토요일에 시내에서 손님들이 절 찾아올 겁니다." "시내에서?" 되묻고 나서 어머니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어머니?" 빠벨이 나무라듯 말했다. 그녀는 앞치마로 얼굴을 훔치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르겠다. 그저..." "두려우세요?" "두려워!" 그녀는 수긍했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까지 허리를 굽히고 마치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화난 얼굴로 말했다. "우리 모두는 두려움 때문에 파멸하는 거예요!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 런 우리의 두려움을 이용해서 우리를 더욱더 겁에 질리게 하는 겁니다." 어머니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화내지 말거라. 어떻게 무섭지 않을 수가 있니? 평생 두려움 속에서 살아 정신이 온통 두려움으로 뒤덮여 버렸는 걸!" 빠벨이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절 용서하세요, 어머니.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밖으로 나갔다. 사흘동안 어머니는 공포에 벌벌 떨며 지냈다. 어떤 알지도 못하는 무서운 사람들이 집에 온다는 것을 생각할 때만다 그녀는 심장이 당장이라도 멎는 듯했다. 그들은 아들이 지금 가 고 있는 길을 가르쳐 준 바로 그 사람들인 것이다. 토요일 저녁 빠벨은 공장에서 돌아와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서는 다시 어디론가 나가 면서 어머니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사람들이 오면 제가 금방 돌아온다고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제발 두려워 마시고요." 그녀는 힘없이 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들은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보며 신신당부 를 했다. "뭐하시면, 어머니... 어디 나가 계시든지요?" 그의 말에 그녀는 마음이 상했다. 고개를 저으며 그녀는 말했다. "아니다, 그럴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이냐?" 11월 말이었다. 낮에 얼어붙은 땅에 고운 싸락눈이 내려 아들이 발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 다 사각사각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짙은 어둠이 꼼짝 않고 창문 유리에 기대어 서 서 잔뜩 악의를 품고 뭔가를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두 팔을 긴 의자에 기대고 앉은 어머니 는 문 쪽을 바라보면서 기다렸다. 그녀에겐 여기저기 어둠 속에서 이상한 옷을 입은 좋지 않은 사람들이 허리를 잔뜩 구부 리고 주위를 살피면서 집으로 살금살금 다가올 것만 같았다. 이미 누군가가 집 주위를 맴돌 며 두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오고 있는지도 몰랐다.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구슬프고 선율이 아름다운 그 소리는 한줄기 정적 속에서 비틀 거렸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단 뭔가를 찾기라고 하듯 점점 가까이 다가 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마치 나무벽을 꿰뚫고 들어가기라도 한 듯 창문 밑에서 자 취를 감추었다. 현관에서 누군가의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려 왔다. 어머니는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며 바짝 긴장하여 두 눈썹을 곧추세우고 벌떡 일어섰다. 문이 활짝 열렸다. 처음엔 털모자를 뒤집어 쓴 머리가 불쑥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다음엔 큰 키의 몸체가 허리를 굽히고 천천히 비집고 들어왔다. 그가 몸을 바로하고 오른손을 점잖 게 들어올리면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도 말없이 인사했다. "그런데 빠벨은 집에 없습니까?" 그 낯선 남자는 느릿느릿 은 털외투를 벗고 한 쪽 발을 들어올려 털모자로 장화에서 눈 을 털어 내더니 다음엔 다른 발도 들어올려 똑같이 눈을 털어 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털모 자는 구석에 집어 던지고는 기다란 두다리를 흔들면서 방안으로 들어왔다. 의자로 다가가 마치 튼튼한지 어떤지 확인이라도 하듯 그걸 들여다보더니 마침내 앉아서 손으로 입을 가리 고 하품을 했다. 공처럼 동글동글한 머리는 말쑥하게 이발을 한 데다 끝이 밑으로 말린 콧 수염만은 빼놓고는 깨끗하게 면도를 한 상태였다. 툭 튀어나온 잿빛의 커다란 두 눈으로 방 안을 찬찬히 살펴보고난 후 그는 두 발을 꼬고 의자를 흔들면서 물었다. "이 집은 사셨습니까, 아니면 세내셨습니까?" "세들어 살고 있소." "평범한 집이군요." "빠샤는 곧 올 거요." 어머니가 나지막이 말했다. "예, 전 벌써 기다리고 있는 걸요." 키 큰 사내가 조용조용 말했다. 그의 태연함과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고 소박한 얼굴은 어머니에게서 용기를 불러일으켰 다. 그 사내는 그녀를 솔직하고 친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는데, 그의 깊고 투명한 두 눈은 유쾌하게 반짝거렸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얼굴하며 새우처럼 굽은 등, 그리고 긴 다리는 우스꽝스럽긴 해도 호감을 갖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는 푸른 색 셔츠에, 장화 속에다 꾹 찔러 넣은 검은 색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그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빠벨을 안 지가 오래 되었는지를 붇고 싶었다. 바로 그때 온몸을 흔들면서 그가 먼저 그녀에게 물었다. "누가 어머니를 그렇게 만들었죠, 넨꼬[역주 : 우끄라이나 지방에서 어머니를 친근감 있 게 부를 때 쓰는 말]?" 그는 두 눈에 맑은 미소를 머금고서 다정하게 물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 물음에 마음이 상했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잠시 말이 없다가 쌀쌀하게 대꾸했다. "남의 일에 무슨 참견이오, 젊은 양반?" 그는 그녀에게로 온몸을 끌어당겼다. "아, 화내지 마세요. 전 다만 제 양어머니의 머리에도 어머님과 똑같은 흉터가 있어서 여 쭤 보았을 뿐예요. 양어머니는 제화공이었던 자기 정부한테서 구둣골로 맞았어요. 양어머닌 세탁부였고 그는 제화공이었거든요. 양어머닌 절 양아들로 삼고 난 후에 어느 길거리에서 그 지독한 술주정뱅이를 만나게 된 거예요. 불행을 자초하신 거지요. 그가 양어머니를 어찌 나 때렸던지! 무서워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어요." 그의 솔직함에 어머니는 마음이 누그러졌다. 이런 사람한테 무뚝뚝하게 대답한 걸 빠벨이 알면 자기에게 화를 내지나 않을까 염려되었다. 미안한 듯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난 사실은 화냈던 게 아니고, 그러니까 너무 갑자기 물어 봐서 그저... 내 남편이 그렇 게 날 때렸지. 하늘에서나 편히 쉬길! 혹 젊은인 따따르 사람이오?" 그 사내는 두 발을 경련이라도 인 듯 홱 잡아당기고, 심지어는 콧수염이 목덜미까지 내려 갈 만큼 크게 웃어댔다. 그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아직은." "젊은이 말하는 투가 러시아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그러오." 어머니는 그의 농담을 알아채고서 설명했다. "전 누가 뭐래도 러시아 사람입니다. 전 카네프 풀신의 우끄라이나 사람입니다." 손님은 유쾌하게 고래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서 산 지는 오래 되었소?" "한 1년간 시내에서 살다가 지금은 여기 공장으로 옮겼어요. 한 달반쯤 되었지요. 여기에 와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빠벨도 그렇고. 여기서 당분간 살까 생각중입니다." 콧수염을 잡아 뽑으며 그가 말했다. 어머니는 그 사내가 맘에 들었다. 그리고 아들에 대해 좋게 얘기해주는 그에게 조금이라 도 보답하고 싶어져서 말했다. "차라도 한잔 마시려요?" "저 혼자만 대접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곧 올테니 그때 차를 끓여 주세 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가 대답했다. 어머니는 이 말에 다시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딴사람들도 제발 이 사람만 같으면 좋으련만!) 그녀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현관에서 다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오는가 싶더니 문이 성급하게 활짝 열렸다. 어머니는 다시 일어섰다. 그러나 놀랍게도 부엌으로 들어온 사람은 별로 크지 않은 중키의 처녀였다. 그 처녀는 농부 같은 평범한 얼굴에 숱이 많은 금발머리를 길게 땋아 늘이고 있었다. 처녀 가 조용히 물었다. "늦지는 않았나요?" "천만에! 걸어왔소?" 바깥은 내다보면서 우끄라이나인이 대답했다. "물론예요! 아, 이분이 바로 빠벨 미하일로비치의 어머니시군요. 안녕하셨어요! 난 나따 샤라고 해요." "성씨는?" 어머니가 물었다. "바실리예브나예요. 어머님은요?" " 라게야 닐로브나." "자, 이제 우린 모두 아는 사이가 되었네요." "그렇군!"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미소 띤 얼굴로 처녀를 들여다보면서 어머니가 말했다. 우끄라이나인이 그녀의 외투 벗는 일을 거들어 주고서 물었다. "춥지요?" "바깥은... 보통 추운 게 아녜요. 바람이 어찌나 차가운지..." 그녀의 목소리는 표현력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또박또박했고 입은 조그만게 포동포동해서 전체적으로 보아 그녀는 동글동글하면서 건강해보였다. 외투를 벗고서 그녀는 추위에 빨개 진 조그마한 두 속으로 불그레한 뺨을 세차게 비벼대면서 빠른 걸음으로 방 안쪽으로 들어 왔다. 걸을 때마다 마룻바닥에 부딪히는 구두 소리가 들려 왔다. (덧신도 안 신고 다니다니!) 어머니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언뜻 스쳤다. "아휴, 정말... 어찌나 추운지 귀까지 꽁꽁 얼어붙은 것 같아요." 처녀가 몸을 떨면서 늘여 말했다. "가만 있어요. 내 얼른 사모바르[역주 : 안에 숯불을 넣는 러시아 특유의 물 끓이는 주전 자]를 올려 놓을게!" 어머니는 서둘러 부엌으로 달려갔다. "이제 다 됐소." 부엌에서 어머니가 소리쳤다. 어쩐지 어머니는 이 처녀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고 더구 나 진짜 어머니로서의 부드럽고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었다. 미소를 지으면서 어머니는 방안에서 들려 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울적한 일이라도 있어요, 나호드까?" 처녀가 물었다. "아, 별일 아니오. 빠벨 어머니는 참 선량한 눈을 가지셨어. 우리 어머니도 그런 눈을 가 지셨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 난 어머니 생각을 자주 하는데 꼭 어딘가에 살아계실 것만 같소." 우끄라이나인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어머님은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분은 양어머니고, 나 고아였거든. 날 낳아 주신 어머님 지금 끼예프 어느 거리에서 구 걸하고 있을지도 모르오, 보드까를 마시면서. 경찰이 취한 어머니의 뺨을 마구 때리고 있을 지도 모르지." (아아, 가엾은 사람!)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따샤가 무슨 말인지를 나지막하고 빠르게 했다. 다시 우끄라이나인의 카랑카랑한 목소 리가 들렸다. "아, 당신은 아직 어려요, 양파를 더 먹어 보아야 해! 태어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인간 을 착하게 가르친다는 것은 더 더욱 어려운 일이지." (무슨 소리지...) 어머니는 우끄라이나인에게 무슨 말이든 다정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천 천히 문이 열리고 늙은 사기꾼 다닐로의 아들, 니꼴라이 베소프쉬꼬프가 들어왔다. 베소프 쉬꼬프는 공장촌에서 사교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항상 우울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피해 다녔고 이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받았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서 물었 다. "너 니꼴라이 아니냐?" 그는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주근깨투성이의 얼굴을 함지박만한 손바닥으로 쓱 문지르고서 인사도 않고 무뚝뚝하게 물었다. "빠벨 집에 있어요?" "없다." 그는 방안을 둘러보더니 그리로 가면서 말했다. "안녕하시오, 동지들..." (이아이도?) 언짢게 생각했던 어머니는 나따샤가 그에게 다정하고 반갑게 손을 내미는 것을 보고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베소프쉬꼬프를 따라서 거의 어린애나 진배없는 젊은이 둘이 들어왔다. 그들 중 하나는 어머니가 알고 있는 젊은이였는데, 그는 나이 많은 직공 시조프의 조카 표도르였다. 그는 가늘고 뾰족한 얼굴에 높은 이마와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머리를 말쑥하게 빗어넘긴, 수줍음을 많이 타는 젊은이였는데 어머니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젊은이 역시도 무서워 보이지는 않았다. 마침내 빠벨이 두 젊은이를 데리고 나타 났다. 어머니도 그들을 알고 있었는데, 둘 다 공장사람들이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다정하 게 말했다. "사모바르를 올려 놓으셨군요. 고맙습니다." "뭐하면 가서 보드까라도 좀 사오련?" 어머니는 어떻게 하면 자기의 호의적인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지 몰라 이렇게 제안하면서 도 아직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녜요, 술은 필요 없습니다." 어머니에게 친구처럼 다정한 미소를 지으면서 빠벨이 대답했다. 갑자기 어머니는 아들이 자기를 놀리려고 위험한 모임이라느니 하며 공연히 과장해서 말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이 바로 네가 말한 금지된 일을 한다는 사람들이냐?" 어머닌가 나지막이 물었다. "네, 바로 그 사람들예요." 방안으로 들어가면서 빠벨이 대답했다. "저런!" 그녀는 아들의 다정한 대답에 외마디 소리를 지르곤 생각했다. (아직 어린애들인데 뭐...) 6... 사모바르가 끓자 어머니는 그것을 방으로 갖고 들어갔다. 손님들은 탁자 주위에 촘촘히 모여 앉았는데 나따샤만 혼자서 두 손에 책을 펴 들고 남포등 아래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 었다. "어째서 사람들이 그렇게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해하려면..." 나따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왜 그렇게 못 사는지..." 우끄라이나인이 거들었다. "그들이 애당초 삶을 어떻게 시작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음, 살펴볼 필요가 있지." 차를 끓이면서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무슨일예요, 어머니?" 미간을 찌푸리며 빠벨이 물었다. "나 말이냐?"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고 사람들이 다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걸 알고는 당황해서 설명했 다. "난 그저, 혼자하는 말이었는데... 마음쓰지 말거라." 나따샤가 웃음을 터뜨리자 빠벨도 따라 웃었다. 우끄라이나인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차 잘 마실께요. 넨꼬!" "마시지도 않고 인사부터 하는군. 젊은인." 대꾸하며 아들을 쳐다보더니 어머니가 물었다. "내가 방해가 되지나 않는지 모르겠구나?" 나따샤가 대답했다. "방해라뇨, 주인이 손님들에게 방해되는 수도 있나요?" 그리고 어린애가 보채듯 소리쳤다. "어머니! 얼른 차 마시고 싶어요! 온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게 발이 꽁꽁 얼어붙는 것 같 아요." "그래, 다 됐어요." 어머니가 서둘러 소리쳤다. 차를 다 마시고 난 다음 나따샤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땋아 늘인 머리채를 어깨 너 머로 넘기고서 누런 색 표지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차를 따 를 때 접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처녀가 유창하게 책 읽는 소리를 귀담아들었다. 처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사모바르의 묵상하는 듯한 기묘한 노래소리와 뒤섞였다. 방안에서 는 동굴 속에서 살면서 돌로 짐승을 잡아 죽이던 원시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름다운 리본 이 풀어지듯 그렇게 감돌고 있었다. 꼭 옛날 이야기에 무슨 금지될 만한 게 있는지를 물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곧 그 이야기를 쫓는 데에도 지쳐서 아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님들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빠벨은 나따샤와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빠벨만큼 잘생긴 얼굴은 그중에 찾아볼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나따샤는 책 바로 위로 낮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관자놀이위로 흘러 내리는 머리카락을 자주 뒤로 넘겨야 했다. 고개를 흔들며 목소리를 낮추고서 그녀는 청중 들의 얼굴에 부드러운 눈길을 흘리며 책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자기 얘기를 하기도 했다. 우끄라이나인은 책상모서리에 넓은 가슴을 기댄 모양으로 앉아 곤두선 콧수염 끝을 쳐다보 려고 애쓰며 곁눈질을 해대고 있었다. 베소프쉬꼬프는 두 손바닥을 각각 무릎 위에 올려 놓 고서 마치 나무막대처럼 꼿꼿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얇은 입술에 눈썹도 없는 그의 주근 깨투성이의 얼굴은 가면처럼 미동도 없었다. 실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사모바르의 놋쇠표면 에 비친 자기의 얼굴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마치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 페쟈[표도르의 애칭]는 책 읽는 것을 들으면서 마치 책의 단어들을 속 으로 따라 읽기라도 하듯 소리 안 나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의 친구는 허리를 구부리고 무 릎 위에 상자를 올려 놓은 다음 두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서 묵상하듯 잔잔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빠벨과 함꼐 들어온 젊은이들중 하나는 붉은 곱슬머리에 명랑한 푸른 눈을 가진 사 람이었다. 그는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은지 초조한 모습으로 두리번거렸다. 다른 하나는 금 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제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얼굴이 보이지 않 을 정도로 고개를 숙여 마룻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안은 왠지 이상할 정도로 아늑했 다. 어머니는 속삭이는 듯한 나따샤의 목소리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의 시끌시끌한 야회들, 항상 썩은 보드까 냄새를 푹푹 풍기던 젊은이들의 거친 말들, 그리고 그들의 저속한 농담들 을 기억해 내었다.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한 동정 어린 압박감으로 인해 상처받고 모욕당한 가슴이 저며 오는 것을 느꼈다. 고인이 된 남편이 구혼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어느 날인가 야회에 나온 남편은 어두운 현관에서 그녀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온 몸으로 벽에다 대고 누르면서 화난 목소리로 거칠게 물었다. "나한테 시집올 거지?" 그녀는 불쾌하고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거리며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마구 주무르는가 하면 흥분해서 그녀의 얼굴에 축축하고 거친 숨을 내뿜었다. 그녀 는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면서 몸을 재빠르게 옆으로 돌렸다. "어디 가려고! 대답해, 자?" 그가 윽박질렀다. 수치심과 모욕감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아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현관문을 열자 그는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그녀를 놓아주면서 말했다. "일요일에 중매쟁이를 보내지..." 그리고 그는 중매쟁이를 보냈다. 어머니는 두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아야만 하겠어." 방안에서 베소프쉬꼬프의 불만스런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도 동감이야!" 그의 빨간 머리 친구가 일어서면서 맞장구쳤다. "난 동의하지 않아." 페쟈가 소리쳤다.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주고 받는 말들은 마치 장작더미에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어머 니는 도무지 무슨 얘기들을 가지고 소리쳐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두의 얼굴은 흥분 때 문에 새빨갛게 상기될 정도였지만 누구 하나 욕설을 내뱉는 사람도, 그녀가 흔히 들어오던 저속한 말 한마디하는 사람도 없었다. (아가씨 앞이라고 모두들 수줍어하는군!) 그녀는 판단했다. 어머니는 이 젊은이들을 마치 어린애 다루듯 주의 깊게 관찰하는 나따샤의 진지한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잠깐만요, 동지들!" 갑자기 그녀가 말했다. 그러자 그들 모두는 입을 다물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모든걸 알아야만 한다는 말은 옳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이성의 빛으로 불 을 붙여야 합니다. 암흑속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들을 볼 수 있도록 말이지요. 또 우리들은 모든 것에 정직하게, 확실하게 답해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진실, 모든 거 짓을 알아야만 하는 겁니다." 우끄라이나인은 그녀의 말에 박자 맞추어 고개를 흔들어 가며 듣고 있었다. 베소프쉬꼬 프, 빨간 머리, 그리고 빠벨이 데리고 온 노동자, 이들 셋은 서로 꼭 붙어 있었는데, 왠지 어머니는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따샤가 말을 맺자 빠벨이 일어나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과연 배를 채우는 것만이 우리가 바라는 유일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세 사람 쪽을 똑바로 쳐다보며 빠벨은 자문자답했다. "우리는 우리들 목덜미에 걸터앉아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자들에게 우리가 모든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결코 바보도, 짐승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다만 배 채우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인간으로 살기를 원하는 엄연한 인간, 그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는 또 적들에게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그들이 얽매어 놓은 우리의 힘겨운 삶도, 지적으로 그들과 동등해지고 심지어 그들보다도 훨씬 위에 서는 데 하 등 방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듣고 가슴속에서 어떤 뿌듯한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얼마 나 유창하게 말을 잘하는가! "배부른 놈들은 많아도 그들 중 정직한 놈들은 하나도 없어. 우리는 이런 썩어빠진 삶의 수렁을 넘어 진정으로 좋은 미래의 나라로 가는 다리를 놓아야만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동지들!" 우끄라이나인이 말했다. "투쟁의 날이 오면 결코 손이나 치료하는 정도에 그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베소프쉬꼬프가 다소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자정이 지나서야 그들은 떠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베소프쉬꼬프와 빨간 머리 젊은이가 나갔다. 이것 역시도 어머니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리 서두르는 거야!) 별로 친절하지 못한 인사를 하며 어머니는 생각했다. "절 좀 데려다 주시겠어요, 나호드까?" 나따샤가 물었다. "아, 물론이지." 우끄라이니안이 대답했다. 나따샤가 부엌에서 외투를 입고 있을 때 어머니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양말이 너무 얇군! 괜찮다면 털양말 하나 짜 주고 싶은데." "감사합니다. 뺄라게야 닐로브나! 그런데 털양말은 너무 따가워요." 나따샤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따갑지 않도록 짜 주지." 어머니가 말했다. 나따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따샤가 이렇게 물끄러미 들여다보자 어 머니는 난처했다. "내 어리석은 짓을 용서하구려. 난 그저 진심으로 그러고 싶었을 뿐이야." 어머니는 조용히 덧붙였다. "어머닌 정말 인자하신 분이세요." 재빨리 그녀의 손은 움켜쥐면서 나따샤가 나지막이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넨꼬!" 어머니늬 눈을 쳐다보면서 우끄라이나인이 말했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서 나따샤를 따라 현관을 빠져 나갔다. 어머니는 아들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그는 방문 앞에 서서 웃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웃고 있는 거냐?" 당혹스러운 듯 어머니가 물었다. "그냥요. 즐거워서요." "물론이다. 이렇게 늙고 아는 게 없는 이 에미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더라." 약간 피곤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말했다. "오늘 모임은 정말 훌륭했어요. 어머니, 주무셔야죠." "지금 자도록 하마!" 그녀는 설거지를 하면서 흡족한 기분으로 탁자 주위를 서성거렸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땀 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녀는 모든 일이 이렇게 순조롭고 무사히 끝나서 말할 수 없이 기뻤 다. "너, 생각하는 거 참 멋지더라. 빠샤! 우끄라이나인은 또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그리고 참, 아가씨 말이다, 아휴, 정말 똑똑하더구나. 그래 뭐 하는 아가씨냐?" "학교 선생님예요." 방안을 서성이면서 빠벨이 짧게 대답했다. "저런, 저런, 가엾어라! 그러면서도 그렇게 남루한 옷을 입고 있다니, 아휴! 감기 걸린 진 오래 되었다든? 부모님들은 그래 어디 사시고?" "모스끄바에요." 대답하고 나서 빠벨은 어머니 맞은편에 멈추어 서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들어 보세요, 어머니. 나따샤의 아버지는 부자예요. 철물점을 하는데 집도 몇 채나 갖고 있다나 봐요. 그녀는 이런 길로 들어섰다는 이유로 아버지한테서 쫓겨 난 거예요. 나따샤는 안락한 가정에서 갖고 싶은 것은 모두 다 갖고 놀면서 아주 귀엽게 자랐어요. 하지만 지금 은 달라요. 한밤중에 7베르스따[역주 : 1베르스타는 1060미터]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다녀 요. 그것도 혼자 말입니다." 어머니는 이 말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방 한가운데에 꼼짝 않고 서서 두 눈썹을 찌푸리 며 말없이 아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나서 조용히 물었다. "시내로 가는 거냐?" "예, 시내로요." "아니, 무섭지도 않다든?" 빠벨이 웃었다. "그런데 왜 보냈니? 여기서 나하고 하룻밤 자도 될텐데." "사정이 좀 곤란해요! 내일 아침에 사람들 눈에 띌 수가 있어요. 우린 굳이 그럴 필요는 없거든요."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듯 창문을 응시하고 있다가 조용히 물었다.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더구나, 빠샤. 어째서 오늘 있었던 일이 위험하고 불법적인 일 이란 말이냐? 보니까 나쁜 짓거리 하는 것도 아닌 듯한데, 안 그러냐?" 그렇게 말해 놓고도 확신할 수가 없어서 어머니는 아들로부터 긍정적인 대답을 듣고 싶었 다. 그는 어머니의 두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결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우린 결코 나쁜 짓을 하지 않아요. 하지만 어찌되었든 우리들은 모두 감옥에 가게 될 거 예요. 어머니도 그 점을 알고 계셔야 합니다." 그녀의 두 손이 부르르 떨렸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아마 주님께서 어떻게든 그 길을 피하게 해 주시겠지..." "아닙니다. 어머니께 뭘 숨기겠어요. 우리들은 피하지 않을 겁니다." 아들은 다정하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주무셔야죠, 피곤하실텐데. 안녕히 주무세요." 혼자 남게 된 그녀는 창문으로 다가가 그 앞에 선 채로 거리를 내다보았다. 창 밖은 춥고 깜깜했다. 바람이 휘몰아쳐 잠든 작은 집들의 지붕위 눈을 불어 떨어뜨렸다. 바람에 흩어진 눈발이 벽에 부딪는 품이 마치 뭔가를 성급히 속삭이는 듯했고, 그런가 하면 또 바람은 눈 발을 땅에 내동댕이쳐서 온통 길거리를 뽀송뽀송한 눈구름으로 뒤덮이게 하고 있었다. "주여, 우리를 굽어살피소서!" 어머니는 조용히 기도했다. 가슴속에선 눈물이 들끓었다. 그리고 그렇게 조용하고 결연하 게 얘기하던 아들의 불행에 대한 예감이, 맹목적으로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그녀의 가 슴속에서 파닥거렸다. 그녀의 눈앞에 눈 덮인 벌판이 펼쳐졌다. 그 위로 맹렬한 바람소리를 내며 차디찬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탁 트인 벌판 한복판에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자그마한 처녀의 시꺼먼 모습이 아른거렸다. 바람이 그녀의 발 아래 옷자락을 펄럭이며 휘몰아쳤고 작은 눈뭉치를 얼굴에 흩뿌렸다. 조그만 발이 눈 속에 푹푹 빠져 걷기도 버거워 보였다. 춥 고 무서운 듯 앞으로 잔뜩 구부린 처녀의 모습이 마치 가을 바람에 하늘대는 어두운 들판의 풀포기 같았다. 오른쪽 저편 소택지 너머에는 숲이 시꺼먼 벽처럼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거기서는 벌거벗은 자작나무와 사시나무들이 애처롭게 울고 있었다. 저 멀리 처녀의 앞에는 시내의 불빛이 어슴푸레 반짝이고 있었다. "주여, 굽어살피소서!" 두려움에 몸을 떨며 어머니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7... 세월은 구슬을 꿰듯 하루하루 흘러갔다. 몇 주일이 지나고 몇 달이 흘렀다. 매주 토요일 이면 동지들이 빠벨을 찾아왔다. 매번 모임은 끝도 보이지 않는 사다리였다. 사다리는 사람 들을 높은 곳으로 천천히 끌어 올리면서 어디론가 머나먼 곳으로 이끌러 갔다. 새로 참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블라소프의 좁은 방은 사람들로 꽉차 숨이 막힐 지경이 었다. 나따샤는 토요일이면 꼭 찾아왔다. 그녀는 춥고 지친 모습이었지만 언제나 명랑하고 생기발랄했다. 어머니는 털양말을 짜서 손수 나따샤의 작은 발에 신겨 주었다. 나따샤는 처 음엔 웃어 보이더니 그 다음엔 갑자기 말이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녀가 나지 막이 말했다. "제겐 유모가 계셨어요. 정말 좋은 분이셨지요. 참 이상한 일이예요. 뺄라게야 닐로브나, 노동자들은 그토록 힘들고, 그토록 모욕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저들보다도 뜨거운 가슴, 선량한 마음씨를 갖고 있으니 말예요." 그리고 나따샤는 한 손을 들어 어딘지 멀리, 머나먼 곳을 가리켰다. 어머니가 말했다. "난 아가씨를 이해할 수가 없어. 부모다 버리고 모든 걸 다 버렸다니..." 어머니는 자기의 생각을 끝맺을 수가 없어 한숨을 내쉬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나따샤 의 얼굴을 보면서 뭔지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어머니가 그녀 앞의 마룻바닥에 앉자 처 녀는 고개를 떨구고서 묵상하듯 미소를 지었다. "제가 부모를 버렸다고요?" 나따샤가 어머니의 말을 되받았다. "그건 중요한 일이 못돼요. 저의 아버지는 아주 난폭한 사람이었어요. 오빠도 그렇고요. 게다가 술주정뱅이였답니다. 언니는 불행한 사람예요.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한테 시집을 갔으니... 돈만 많다뿐이지 정말 따분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어요. 어머니는 가엾 은 분이시죠. 제 어머닌 아주머님처럼 소박한 사람예요. 생쥐같이 몸집이 작은 분이 항상 뛰다시피 걸어다니시고 모든 사람들을 두려워하세요. 가끔 전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쯧쯧, 불쌍도 해라." 서글픈 듯 고개를 가로 저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처녀는 재빨리 고개를 쳐들고 마치 뭔가를 밀어젖히듯 손을 뻗었다. "오, 아녜요. 전 때때로 한없는 기쁨과 행복을 느끼기도 한답니다." 나따샤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두 눈은 붉게 타올랐다. 두 팔을 어머니의 어깨에 얹고서 나 따샤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나직하고 인상 깊게 말했다. "만약 어머니께서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는지 아신다면... 이해하신다면..." 부러움에 가까운 어떤 것이 어머니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마루에서 일어서며 슬픈 어조로 되풀이했다. "그런 일을 하기엔 난 이미 늙었어, 배운 것도 없고..." 빠벨은 갈수록 더 자주, 더 길게 얘기했고, 점점 더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그러는 동 안 빠벨은 더욱더 야위어만 갔다. 어머니가 보기에 빠벨이 나따샤와 이야기하거나 그녀를 바라볼 때면 그의 엄숙한 두 눈은 더욱 부드럽게 반짝이고, 목소리는 더 더욱 다정해지고 순박해지는 것 같았다. (주님의 은총이야!) 어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겨 미소 지었다. 모임이 있을 때면 언제나 논쟁은 지나치리만큼 격렬한 성격을 띠었다. 우끄라이나인은 벌 떡 일어나 마치 매달린 종처럼 흔들거리면서 둔탁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뭔가 간결하면서도 훌륭한 말을 했다. 이 때문에 모두는 한결 진정되고 진지해졌다. 베소프쉬꼬프는 언제나 모 든 사람들을 어딘지 모르게 험악한 분위기로 급히 몰아갔다. 그와 사모일로프라고 불리는 빨간 머리 젊은이가 항상 모든 논쟁의 발단이었다. 머리는 둥글둥글하고 잿물에 세수한 것 처럼 허연 머리털을 가진 이반 부낀은 그들의 의견에 찬동했다. 말쑥하고 청결해 뵈는 야꼬 프 소모프는 나직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했는데, 대체로 말을 적게 하는 편이었다. 그 와 이미가 넓은 페쟈 마진은 논쟁에서 언제나 빠벨과 우끄라이나인 편이었다. 이따금 나따샤 대신에 시내에서 니꼴라이 이바노비치가 왔다. 그는 안경을 끼고 금발의 구레나룻을 약간 기르고 있었는데, 어딘가 아주 먼 지방 출신 같았다. 그는 말투가 좀 특이 했다. 그래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이방인의 인상을 풍겼다. 그리고 그는 가정생활, 어린애 들, 장사, 경찰, 빵이나 고깃값 등 정말 평범한 것에 대한 얘기를 했다. 이건 정말 보통 사 람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런 이야기인 것이다. 그는 또 모든 곳에서 위선, 혼란, 어떤 어 리석은 짓, 그래서 가끔은 웃음이 터져나오는 그런 것들을 들추어냈다. 항상 이런 것들은 사람들에게 해만 끼치는 것들임에 분명했다. 어머니에겐, 그가 모든 사람들이 멋지고 편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어떤 먼 곳, 전혀 다른 나라에서 살다 와서 여기의 모든 것이 낯설기 때문에 그가 지금의 이런 삶에 익숙해질 수 없고 더욱이 어쩔 수 없어서 사는 그런 삶을 받 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어머니는 그러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 가 모든 것을 자기 방식대로만 바꾸려는 태평하고 완고한 희망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 졌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황달기가 좀 있었고 눈 언저리엔 가늘고 빛나는 주름이 져 있는 가 하면 목소리는 조용조용했고 두 손은 항상 따뜻했다. 어머니와 인사할 때 그는 토실토실 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듯이 덥석 움켜쥐었기 때문에 그런 힘찬 악수를 나면 어머 니의 마음은 한결 편안해지고 가벼워지는 것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내에서 왔다. 그들 가운데 비교적 자주 오는 사람은 큰 키에 균형 잡 힌 몸매를 가진 아가씨였다. 그 아가씨는 창백하고 커다란 두 눈에 얼굴은 파리했다. 사람 들은 그녀를 사샤[알렉산드라의 애칭]라고 불렀다. 그녀의 걸음걸이나 움직이는 모습은 남 자 같은 데가 많았다. 그녀는 화난 듯 짙은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고, 말할 때면 곧게 솟은 콧날이 가볍게 떨렸다. 사샤는 처음엔 큰 목소리로 격렬하게 말했다. "우리는 사회주의자들입니다." 이런 말을 등을 때면 어머니는 할 말을 잊을 정도로 놀라서 아가씨의 얼굴을 응시할 뿐이 었다. 어머니는 사회주의자들이 짜르를 암살했다는 것을 들었다.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어 머니가 젊었을 때였다. 그 당시 지주들은 짜르가 농노를 해방한 데에 앙심을 품고, 짜르를 죽이기 전까지는 머리도 자르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이 때문에 그들을 사회주의자라고 불렀 다는 말이 떠돌았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어째서 자기의 아들과 동료들이 사회주의자인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나서 어머니는 빠벨에게 물었다. "빠샤, 정말 너도 사회주의자냐?" "예. 왜 그러세요?" 그가 어머니의 앞에 서서, 항상 그렇듯이, 정직하고 확실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깊은 숨을 몰아 쉬고, 눈을 지그시 내리감으면서 물었다. "정말로 그러냐, 빠샤? 하지만 그들은 짜르에 반대해서 결국은 한분을 이미 죽이지 않았 냐?" 빠벨은 한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면서 방안을 서성거리다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우리에겐 그런 일은 필요 없어요." 그는 오랫동안 어머니에게 나지막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뭔가를 얘기했다. 그녀는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내 아들이 나쁜 일을 할 리가 없어. 아니 할 수도 없을 거야.) 그 후로 그 무시무시한 말은 더욱 자주 되풀이되었지만 그 말의 긴박감은 무디어만 갔다. 그래서 그 말들은 다른 수십 개의 이해할 수 없는 말들과 더불어 그녀의 귀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샤가 나타나면 어머니는 불안하고 거북살스러웠다. 하루는 어머니가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실룩거리며 우끄라이나인에게 말했다. "사샤는 어쩌면 그렇게 격렬할까? 무슨 일이든 다 좌지우지하려 드니, 매사를 젊은이가 처리해야 해..." 우끄라이나인이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맞아요. 어머니께서 정곡을 찌르시는군요! 빠벨?" 그런 다음 어머니에게 눈짓을 보내며 두 눈에 미소를 가득 담고 덧붙였다. "귀족 신분이거든요." 빠벨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사샤는 좋은 여자예요." "그것도 맞는 말이야. 다만 자기가 무엇을 해야만 하고, 또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또 무 엇을 할 수 있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래!" 우끄라이나인이 거들었다. 그들 둘은 어머니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무슨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사샤가 빠벨에게 가장 엄격하게 대하고 심지어 가끔은 빠벨에게 호통을 치기도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빠벨은 말없이 웃으면서 나따샤를 쳐다보던 그런 부드러운 눈길로 처녀의 얼굴을 바라보곤 했다. 이것 역시 어머니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따금 어머니는 갑작스레 모든 걸 터득하여 가는 돌발적인 기쁨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 다. 보통 이런 일은 그들이 신문이나 외국 노동자들에 대해 읽고 있는 저녁때면 흔히 일어 났다. 그럴 때면 모든 사람들의 눈은 기쁨으로 반짝거렸다. 그들은 마치 어린애들처럼 기쁘 고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며 서로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리기도 했다. "독일 청년 동지 만세!" 누군가가 기쁨에 도취한 듯이 소리쳤다. "이탈리아 노동자 만세!" 어떤 경우엔 이렇게 외치기도 했다. 그리고, 자기들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자기들의 언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딘가 머나먼 곳에 사는 동지들에게 이런 외침을 보낼 때면, 그들은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먼 곳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환희를 듣고 이해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끄라이나인은 모든 사람들을 에워싸고 있는 사랑의 감정으로 충만해서 두 눈을 반짝이 며 말했다. "그 곳의 동지들에게 편지를 쓰는 게 좋지 않을까? 여기 러시아에도 그들과 더불어 똑같 은 믿음을 지니고 따르는 그들의 동지들이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똑같은 목적을 위 해 싸우며, 또한 그들의 승리에 기뻐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말 야!" 그리고 모두는 얼굴에 함빡 웃음을 짓고서 마치 꿈을 꾸듯 오랫동안 프랑스, 영국, 그리 고 스웨덴 등 전세계 노동자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마치 자기 친구들, 그들이 존경하고 기 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느끼는 진정 가까운 친구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 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좁은 방안에서 전세계 노동자들과의 정신적 연대감이 탄생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대감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마음으로 결집시켰다. 게다가 즐겁고 활달하며, 모두를 흥분시키고 희망으로 충만된 자신의 힘으로 모두의 영혼을 동요시켰다. "젊은이들은 참 별난 사람들이야. 모두가 다 젊은이들의 친구라니, 아르메니아인도, 유대 인도, 오스트리아인도, 슬픔도 기쁨도 모두 나누어 갖는다는 말이지?" 어머니가 한번은 우끄라이나인에게 말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오, 넨꼬,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랍니다." 우쓰라이나인이 소리쳤다. "우리에겐 민족도 인종도 없고 오직 동지 아니면 적만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노동자들은 우리의 동지들이고 모든 배부른 자들, 모든 권력자들은 우리의 적입니다. 어머니께서 선한 눈으로 세상을 둘러보시고 거기에 우리와 같은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으며 우리들의 힘이 얼 마나 강한지를 아시게 될 때, 어머니의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 찰 겁니다. 위대한 피의 일요 일이 어머니의 가슴속에서 영원할 것입니다. 어머니, 프랑스인도, 독일인도, 그들이 삶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마찬가지예요. 이탈리아인도 똑같이 기뻐할 것이고요. 우리는 모두 한 어머니의 자식들입니다. 이 세상 모든 노동자들이 한 형제예요. 결코 패배를 모르는 사상의 아들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이것을 또한 하늘에 떠 있는 정의 태양이고 이 하늘은 노동자의 가슴속에 있습니다. 그가 누구이고 이름이 무엇이 든 사회주의자는 항상 정신적으로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언제까지나 영원히 우리의 형제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어린애 같지만 그러나 결연한 신념은 점점 더 자주 그들 안에서 명백해지고 강력 한 힘으로 차츰 성장하여 갔다. 이러한 신념을 보았을 때, 어머니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하늘의 태양과 같은 뭔가 위대하고 밝은 것이 세계 안에서 진정 잉태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들은 자주 노래를 불렀다. 모든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쉬운 노래들을 큰 목소리로 유 쾌하게 불렀다. 그러나 때때로 새로운 노래도 불렀는데 어쩐지 아름답긴 하지만 가락이 색 다르고 구슬픈 화음을 자아내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노래들을 마치 찬송가를 부르듯이 조용한 목소리로 진지하게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은 강렬하게 불타올랐고, 노랫소리엔 강한 힘이 넘쳐 흘렀다. 새 노래들 가운데 한 곡이 특히 어머니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감동시켰다.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비애로 가득한 의혹의 어두운 인생행로를 따라 쓸쓸히 배회하는 모욕받은 영혼의 애처로운 망설임도 들리지 않았다. 또 가난에 짓밟히고 두려움에 떠는 특징 없고 색 깔 없는 영혼의 신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더구나 그 노래에선 광활한 대지를 갈망하는 눈 먼 힘의 음울한 탄식도, 악이고 선이고 모두 분쇄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격렬하고 냉혹한 용 기의 호전적인 외침들도 만찬가지로 들리지 않았다. 그 노래는 모든 걸 파괴할 뿐 어느 것 도 창조해 낼 힘조차 없는 맹목적인 복수심과 울분을 노래하지 않았다. 이 노래를 듣고 있 노라면 옛 노예제 사회의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신랄한 가사와 거친 가락은 좋아하기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가사와 가락 이면 에는 보다 커다란 그 무엇이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가사와 가락을 들리지 않게 만들고 무 언가 무한한 생각을 해야만 할 것만 같은 예감을 가슴속에서 불러일으켰다. 어머니는 젊은 이들의 얼굴, 눈 속에서 이런 것을 보았고 그들의 가슴에서 움트고 있는 그 어떤 것을 느꼈 다. 가사와 가락 속에 넘쳐 흐르는 노래의 힘에 굴복하면서 어머니는 언제나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게다가 다른 모든 노래들을 들을 때보다도 한결 깊은 불안을 느끼며 그 노래를 들 었다. 이 노래는 다른 노래들보다 조용한 목소리로 불려졌다. 그러나 그 노랫소리는 모든 노래 들 가운데서 가장 힘이 넘쳐 흘러 마치 다가올 봄의 예언인 3월 대낮의 공기처럼 사람들을 에워쌌다. "드디어 이런 노래를 거리에서 불러야 할 때가 왔어." 베소프쉬꼬프가 씁쓸한 기분으로 말했다. 그의 아버지가 다시 도둑질을 하다가 덜미를 잡혀 감방에 처넣어졌을 때 니꼴라이는 친구 들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이젠 모임을 우리 집에서도 가질 수 있게 되었군..." 거의 매일 저녁 공장 일이 끝난 후 빠벨의 친구들 가운데 몇 명이 그의 집에 찾아와 책을 읽기도 하고 책에서 뭔가를 베껴 쓰기도 했다. 어찌나 열중했던지 세수할 시간도 없다시피 했다. 그들은 저녁 먹기가 무섭게 양손에 책을 들고서 차를 마셨다. 그들의 이야기 가운데 에는 어머니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점점 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우리도 신문을 찍어 내야겠어." 빠벨은 자주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삶은 점점 더 분주해지고 열광적이 되어 갔다. 사람들 은 더욱더 급하게 이책, 저책으로 뛰어다녔다. 마치 벌들이 이꽃, 저꽃으로 분주히 날아 다 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우리 얘기를 하기 시작했어. 빨리 몸을 숨겨야겠어..." 어느 날 베소프쉬꼬프가 말했다. "메추라기는 뭐 그물에 걸려들려고 태어났다던가!" 우쓰라이나인이 대답했다.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우끄라이나인이 점점 더 좋아졌다. 그가 그녀를 <넨꼬.라고 부를 때면, 꼭 어린애 같은 뽀송뽀송한 예쁜 손이 어머니의 뺨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빠벨이 집에 없는 일요일이면 그는 장작을 패 주곤 했다. 어느 하루는 그가 손에는 도끼를 들고, 어깨엔 널빤지를 메고 오더니 썩어 내려앉은 현관 계단을 고쳐 놓았다. 또 한번은 쓰러져 가는 울타리를 감쪽같이 수리해 놓은 적도 있었다. 일할 때면 그는 휘파람을 불었는데, 그 의 휘파람 소리는 정말 구슬펐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했다. "우끄라이나인을 우리집에다 하숙시키면 어떻겠냐? 너희 둘이 다 좋을 거 아니냐. 서로 왔다갔다 안 해도 되니까." "힘드시지 않겠어요?" 어깨를 들썩이며 빠벨이 말했다. "천만에, 괜찮아! 난 평생을 영문도 모르고 힘들어 했는 걸. 좋은 사람을 위해서라면야 얼마든지 괜찮다." "어머니 좋으실 대로 하세요. 그가 오기만 하면야 저야 좋죠." 아들이 대답했다. 그래서 우끄라이나인은 그들과 함께 살고 되었다. 8... 공장촌 변두리에 위치한 그 작은 집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수십 개가 넘는 감시의 눈초리들이 무엇을 찾기라도 하듯이 그 집 담벼락을 더듬었다. 현란한 소문의 날개 들이 그 집 상공에서 정신없이 퍼덕거렸다. 사람들은 언덕 위에 서 있는 그 집 담벼락 너머 에 숨겨져 있을 어떤 신비로운 것을 밝혀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밤이면 누군가가 창문으로 방안을 흘끔흘끔 엿보기도 하고 가끔은 창문 유리를 두들겨 보다 가 지레 겁먹고 재빠르게 저만치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하루는 길거리에서 선술집 주인 베군초프가 어머니를 불러 세웠다. 그는 언제나 까만 실 크 목도리를 목에 축 늘어뜨리고, 연보라빛 두툼한 털조끼를 걸치고 다니는 다정한 늙은이 였다. 반질반질 윤기 나는 그의 오똑한 코 위에는 거북등딱지테 안경이 걸려 있었다. 이 때 문에 사람들은 그를 <뼈눈>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를 불러 세워 놓고 그는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듣기에도 민망하고 무미건조한 질문을 단숨에 퍼부었다. "뺄라게야 닐로브나, 그 동안 잘 지냈소? 아들놈은요? 결혼할 생각은 안 한다오, 그 애 는? 내가 보기엔 장가들 나이도 되었던데. 아들놈을 빨리 장가보내면 보낼수록 부모는 안심 이 되는 거요. 처자식이 있는 사람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제 식구뿐이야. 그러니 식 초 친 버섯 같지 않겠수? 나 같으면 벌써 장가보냈을 거요. 요새는 젊은 애들을 잘 감시해 야 해. 요새 것들은 머리를 쓰기 시작한다니까. 사상인가 뭔가로 미쳐 날뛰질 않나. 비난받 을 짓도 서슴없이 저질러대는 세상이니. 젊은 놈들이 가란 교회는 안 가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엔 얼씬도 하지 않으면서 은밀하게 모이거나 구석에서 서로 소곤거리기나 하고, 무슨 못할 얘기를 한다고 서로 쏙닥거리는지, 원! 게다가 뛰어다니긴 왜 뛰어다녀? 왜들 사 람 있는 데서는 얘기를 못하는 거야? 예를 들어 선술집 같은 데서, 얼마나 좋아! 도대체 비 밀이란 게 뭐냔 말야! 비밀이 있던 곳은 옛날의 성스런 교회밖에 없어서, 구석쟁이에 모여 들어서 꾸며내는 비밀은 영 성질이 다른 거야, 망상이라고! 잘 지내구려." 그는 뽐내듯 구부린 손으로 모자를 벗어 허공에다 흔들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어머니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대로 서 있었다. 어머니의 이웃에 사는 마리야 꼬르수노바는 남편이 죽고 난 후, 공장 입구에서 음식 행상 을 하고 다녔는데, 그녀 역시도 시장에서 어머니를 보자 이렇게 말했다. "아들을 잘 감시해요. 뺄라게야." "그게 무슨 소리요?" "소문이 나돌고 있어요, 별로 좋지 않은 소문입니다. 당신 아들이 무슨 조합을 만들고 있 다던가, 뭐 흘르이스트 종파 비슷한 거라고 합디다. 맞아, 그 종파라고 그랬어. 흘르이스트 신도들처럼 서로 매질을 해댈 거래요..." 마리야는 비밀스럽게 말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그만 지껄여요, 마리아."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니라우.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수?" 마리야가 대답했다. 어머니가 밖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아들에게 모두 늘어놓자, 그는 말없이 어깨만 들썩거렸 고 게다가 우끄라이나인은 특유의 호탕하고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그녀가 말했다. "처녀들도 똑같이 너희들에게 화를 내더라. 너희들은 어디에 내놔도 훌륭한 신랑감들 아 니냐? 일을 열심히 안 하니, 그렇다고 술을 마시냐! 그런데 너희들은 처녀들을 거들떠볼 생 각도 안 하니, 원!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러더라, 시내에서 행실이 나쁜 처녀들이 너희 를 찾아온다고..." "맘대로 생각하라지요, 뭐" 탐탁치 않은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 빠벨이 소리쳤다. "어느 수렁에서고 썩은 냄새는 나는 법이야. 아, 넨꼬! 그런 말 하는 얼간이들한테 제 뼈나 골병들게 하려고 서두르는 그 결혼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설명 좀 해 주지 그러셨어 요." 우끄라이나인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뭐라고? 그 사람들도 그 고통을 모르는 게 아냐, 다 알아. 하지만 어떡하겠지, 달 리 방법이 없는 걸." "알긴 알아도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그래요. 제대로 알면야 딴방법을 찾고도 남을 겁니 다." 빠벨이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준엄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그들을 가르치려무나! 더 똑똑한 사람들을 이리로 모셔 오든가..."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어야지요." 아들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만약 애써 본다면?" 우끄라이나인이 물었다. 빠벨은 대답하기 전에 잠시 말이 없었다. "사람들은 처음엔 짝을 지어 다니다가 다음엔 그들 가운데 몇몇이 결혼을 하고, 그거로 모든 게 끝이야!" 어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빠벨의 금욕주의자다운 준엄한 태도에 어머니는 당혹스러 웠다. 그녀는 빠벨의 충고가 우끄라이나인같이 그보다 나이가 많은 동지들에게도 받아들여 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에겐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한 나머지 그의 이런 준 엄한 태도를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일었다. 언젠가 한번은 어머니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때까지도 빠벨과 우끄라이나인은 책을 읽 고 있었다. 얇은 칸막이 벽을 통해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난 나따샤가 맘에 들어. 자네도 알고 있지?" 우끄라이나인이 갑자기 낮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 "알고 있어요." 간격을 두었다가 빠벨이 대답했다. 우끄라이나인이 천천히 일어나 방안을 서성이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아무것도 신지 않은 발이 마룻바닥에 살며시 끌리는 소리도 들렸다. 구성진 휘파람 소리도 함께 어울 려 나지막이 들려 왔다. 잠시 후 다시 그의 말소리가 칸막이 벽을 울렸다. "나따샤도 그걸 눈치채고 있을까?" 빠벨은 아무 말도 없었다.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목소리를 낮추어서 우끄라이나인이 물었다. "알고 있겠죠. 그 때문에 아마 우리하고 공부하는 걸 꺼려 했을 거예요." 빠벨이 대답했다. 우끄라이나인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다. 낮은 휘파람 소리가 다시 방안을 울 렸다. 조금 있다가 그가 다시 물었다. "내가 만약 나따샤한테 말을 한다면..." "뭘요?" "바로 내가 그녀를..." 우끄라이나인이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도대체 왜 그래야만 하죠?" 빠벨이 그의 말을 낚아챘다. 어머니는 우끄라이나인이 걸음을 멈추는 것을 들었다. 분명 그는 미소 짓고 있을 것이었 다. "이봐, 빠벨! 난 만약 여자를 사랑한다면, 그걸 여자한테 얘기해야만 한다고 생각해. 그 렇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어." 빠벨이 큰소리로 책을 덮었다. 그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의미를 기대하죠?" 둘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래서?" 우끄라이나인이 물었다. 빠벨이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안드레이, 자기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명백히 설정할 필요가 있어요. 좋아요, 나따샤 가 형을 사랑한다고 칩시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게 가정해 보잔 말예요. 그리 고 둘이서 결혼을 하겠죠. 정말 멋진 결혼이야. 지식인 신부와 노동자 신랑이라! 어린애가 태어날 거고, 형은 그러면 밤낮없이 오직 일만 해야겠죠... 처자식을 위해서. 형의 삶은 평 생 빵조각과 애들, 그리고 집 마련을 위한 지긋지긋한 고역이 되고 말 거예요. 일 때문에 형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둘 다 파멸이라고요." 그리고는 잠잠해졌다. 잠시 후 빠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시작했다. "모든 걸 포기하는 게 더 나을 거예요, 안드레이. 더 이상 나따샤를 괴롭히지 말아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일초 일초를 일정한 간격으로 잘라 내는 회중시계 소리가 똑똑히 들 려 왔다. 우끄라이나인이 말했다. "가슴의 반은 사랑, 가슴의 반은 괴로움이라... 이게 진정 인간의 마음이라 할 수 있을 까, 응?" 책장을 넘기는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아마 빠벨이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누워서 눈을 감았다. 숨소리가 새어 나갈까 조마조마했다. 그녀는 우끄라이나인이 가엾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아들이 가엾은 건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에 대해 생각했다. (가엾은 것 같으니...) 갑자기 우끄라이나인이 물었다. "자넨 내가 나따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나?" "그렇게 하는 게 더 나을 거예요." 빠벨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면, 좋아!" 우끄라이나인이 말했다. 몇 분이 지나서 우울한 목소리로 그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빠샤, 그게 바로 자네 문제였더라도 마찬가지로 힘들었을 거야..." "난 벌써 힘들어 하고 있어요." 바람이 담벼락을 스쳤다. 회중시계가 시간의 흐름을 정확하게 계산해 주고 있었다. "지금 한 말, 농담은 아니겠지!" 우끄라이나인이 천천히 말했다. 어머니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보니 안드레이는 밤새 키가 조금 작아져 한결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빠벨은 변함없이 야윈 모습에 꼿꼿하고 말이 없었다. 이전엔 어머니는 우끄라이나인을 안드레이 아 니시모비치라고 불렀다. 그러나 오늘은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 안드류샤(안드레이의 애칭), 장화 좀 수선해야 되지 않겠니? 그러다간 발가락에 감 기 걸리겠다!" "그렇지 않아도 임금을 받으면 새 장화를 사려고 해요."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함빡 웃었다. 그러다 별안간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긴 팔을 얹고서 물었다. "이제 어머닌 저의 친어머닌 셈예요. 단지 제가 못생겼다는 이유로 어머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렇죠?" 어머니는 말없이 그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어머니는 그에게 다정한 말을 많이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애처로움에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아 말이 혀 끝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9... 공장촌에서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들이 푸른 잉크로 씌어진 전단 을 뿌리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이 전단들은 공장의 모든 제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빼쩨르부르그와 남러시아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서도 쓰고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이 익을 위한 투쟁에 적극 동참할 것을 한결같이 호소하고 있었다. 공장에서 상당한 임금을 받는 중년의 사람들은 욕설을 퍼부어댔다. "선동가놈들! 이런짓을 하는 놈들은 그저 몽둥이가 약이야!" 그리고 그들은 전단들을 공장사무실로 가져 갔다. 젊은 사람들은 선전 삐라를 열심히 읽 었다. "모두 진실이야!" 매일 매일의 노동에 지칠 대로 지쳐 매사에 무관심해진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지못해 반응 을 보였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건 불가능해." 그러나 전단은 사람들을 너무도 흥분시킨 나머지 만약에 한 주라도 전단이 나오지 않으면 사람들은 여기저기 모여서 서로 수군대기 일쑤였다. "이젠 전단이 안 나올 모양이지..." 그러나 다음 월요일이면 전단은 어김없이 다시 뿌려졌고, 그와 동시에 노동자들은 또다시 술렁대기 시작했다. 공장과 선술집에는 낯선 사람들이 새롭게 눈에 띄었다. 그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이것저것 캐묻기도 하고 무슨 냄새라도 맡으려는 듯 여기저기를 조사하고 다녔다. 그래서 그들은 이 내 모든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의심쩍은 눈초리로 신중한 행동을 하는 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지나치리만큼 치근덕거리기도 했다.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이 모든 소요를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걸 이해했다. 그녀는 사람들 이 그의 주위에 모여드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어머니의 마음 안에선 빠벨의 운명 앞에 닥 친 위험과 그에 대한 자부심이 한데 뒤섞였다. 하루는 저녁때 마리야 꼬르수노바가 밖에서 창문을 두드렸다. 어머니가 창문을 열자 그녀 는 속삭이듯 하면서도 큰소리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조심해요, 뺄라게야. 모든일이 다 끝날 때가 되었나 봐요. 오늘 밤에 이 집을 수색하기 로 했다는구랴. 마진과 베소프쉬꼬프네 집도 물론이고..." 어머니의 두툼한 입술이 격렬하게 떨리면서 동시에 주름진 코가 두려움에 벌름거렸다. 그 리고 두 눈은 거리에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뒤쫓기라도 하는 듯이 이쪽 저쪽으로 빠르 게 굴러 다녔다. "이봐요, 난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수. 그리고 오늘 빠벨 어머니를 보지도 못한거고. 알아들었수?" 그녀는 총총 걸음으로 사라졌다. 어머니는 창문을 닫고서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생각이 아들에게 닥쳐 올 위험에 까지 미치자 어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옷도 입는 둥 마는 둥 걸치고 무의식중에 머리에 수건을 꽉 조여 매고서 페쟈 마진의 집으로 달려갔다. 마진이 아파서 오 늘 일하러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마진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창가에 앉아 왼손으로 오른손을 움켜쥐고 엄지 손가락을 이상하게 구부리면서 책 을 읽고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이 이번엔..." 똑똑치 않은 발음으로 그가 웅얼거렸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떨리는 손으로 얼굴에서 땀을 씻어 내면서 어머니가 물었다. "진정하세요,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투박해 보이는 손으로 곱슬머리를 긁적이면서 페쟈가 대답했다. "이보게, 자네도 두려운가 보군!" 그녀가 소리쳤다. "저요?" 그의 두 뺨이 새빨개졌다. 짐짓 억지로 웃어 보이면서 그가 말했다. "예, 조금은요... 빠벨에게 전해야겠어요. 지금 곧 빠벨에게로 갈테니 어머님은 집에 가 계세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그들이 때리기야 하겠어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는 책들을 죄다 모아 가슴에 안고 숨길 곳을 찾느라 한참 동 안 집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벽난로 속도 들여다보고 밑을 들춰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물통 안에까지도 죄다 들여다보았다. 어머니 생각엔 빠벨이 일도 팽개치고 곧장 집으로 달 려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마침내 지칠 대로 지친 어머니는 책들을 부엌 에 있는 긴 의자에 내려 놓고서는 깔고 앉아 있었다. 일어서기가 무서웠다. 공장에서 빠벨 과 우끄라이나인이 올 때까지 그냥 그렇게 앉아 있었다. "얘기 들었니?" 일어설 생각도 앉고 그녀는 소리쳤다. "예, 들었어요. 두려우세요?" 웃으면서 빠벨이 말했다. "그래 두려워, 두렵고말고!" "두려워하실 필요 없어요. 그래 보았댔자 아무 소용없어요." 우끄라이나인이 말했다. "사모바르도 아직 안 올려 놓으셨군요!" 빠벨이 말했다. 어머니는 일어나서 책들을 가리키며 무슨 죄라도 지은 듯 기가 죽은 어조로 설명했다. "여기 이것들 때문에 내가..." 빠벨과 우끄라이나인은 웃기 시작했다. 그제야 어머니는 어느 정도 힘이 솟았다. 빠벨은 책 몇 권을 집어 들고 그것들을 숨기기 위해 밖으로 갖고 나갔다. 우끄라이나인이 사모바르 를 올려 놓으면서 말했다. "전혀 무서워할 게 없어요. 넨꼬, 외려 사소한 일로 법석을 떠는 그 자들이 부끄러운 거 예요.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긴 칼을 허리에 차고 장화에 박차를 달고서 집 안에 들어와서는 여기저기를 샅샅이 뒤집니다. 침대 밑도 들여다보고 난로 밑도 들여다보고, 지하실이 있으 면 지하실에도 기어 내려가고 다락방에도 꾸역꾸역 올라갑니다. 거기서 그렇지 않아도 추한 얼굴에 거미줄을 잔뜩 뒤집어쓰고는 코를 킁킁거리며 법석을 떠는 겁니다. 짜증이 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니까 그저 험악한 표정을 짓고서 사람들한테 쓸데없는 화를 내는 거예 요. 아주 악질적인 놈들입니다. 그게 다 돼먹지 못한 짓이라는 거 그자들도 다 알아요! 한 번은 내 방을 온통 벌집 쑤시듯이 쑤셔 놓고서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으니까 괜히 쑥스러운 지 그냥 가더라고요. 또 한번은 절 잡아갔어요. 감방에 처넣고서 넉 달 동안을 잡아 두더군 요. 그냥 앉아 있는 거죠, 뭐. 그러다 심심하면 불러서 군인들을 딸려 가지고 거리를 이리 저리 끌고 다니질 않나, 이것저것 시시콜콜 캐묻질 않나. 어찌나 미련한지 앞뒤도 하나 맞 지 않는 황당무계한 소리만 지껄여댑니다. 그러고 나선 군인들보고 다시 감방으로 데려가라 고 하죠. 이러저리 끌고 다니기만 하면서도 그래도 봉급을 거저 받아 처먹기는 좀 미안한 생각이 드는가 봐요, 참. 결국엔 내보낼 수밖에 없죠. 그게 전부예요." "넌 항상 그렇게 말하더구나, 안드류샤!" 어머니가 소리쳤다. 안드레이는 사모바르 옆에 약간 무릎을 구부리고 서서 사모바르에 연신 입김을 불어대고 있었다. 사모바르 앞에 오래 서 있어 벌개진 얼굴을 쳐들고 두 손으로 콧수염을 쓸어 내리 면서 그가 물었다. "제가 어떻게 얘기한다는 말씀이시죠?" "네 말을 듣다 보면, 널 괴롭혔던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하는 소리야..."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일어나 웃음 띤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과연 이 세상 어느 천지에 고통받지 않는 영혼이 있겠어요? 전 하두 고통을 당해 놔서 이젠 모욕감 느끼는 데에도 지쳤어요. 사람들이 오죽 했으면 그랬겠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 요. 제가 당한 고통, 그로 인한 손해, 말해 무엇하겠어요. 이러니저러니 자세히 얘기해 보 았댔자 시간만 아까울 뿐이지요. 그런 게 바로 삶입니다. 전 예전에 사람들한테 화낸 적이 많았어요.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그럴 필요가 하나도 없었는데 말예요. 모든 사람들은 이 웃이 날 치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해요. 그러다 보니 맞기 전에 먼저 상대편을 때려눕히려 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런 게 삶예요, 넨꼬!" 그의 말은 왠지 힘이 넘쳐 흘러 어머니의 수색에 대한 공포를 저편으로 밀어 놓았다. 그 의 툭 불거진 두 눈엔 맑은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의 온몸은 비록 볼품은 없었지만 탄력성 은 그만이었다. "네게 주님의 은총 계시길, 안드류사!" 우끄라이나인은 성큼성큼 사모바르에 다가가 다시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중얼거렸다. "은총이 내린다면 거절은 않겠어요. 하지만 절대 구걸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빠벨이 밖에서 들어오면서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찾아내지 못할 거야." 그리고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두 손을 정성껏 힘차게 닦으면서 그가 말문을 열었다. "어머니, 만약 어머니께서 그들에게 놀란 모습을 보여 주면 그들은 <그래 저 할멈이 벌벌 떠는 걸 보니 이 집에 뭔가 있는 게 틀림없어> 하고 생각할 거예요. 어머니께서도 이해하시 겠지만, 우리는 나쁜 짓은 할 생각도 안 해요. 진리가 우리 편이거든요. 단지 우리에게 죄 사 있다면 진리를 위해 평생을 바칠 각오를 했다는 것뿐, 아무 죄도 없어요. 무서울 게 무 엇이 있겠어요?" "빠샤, 나도 마음을 굳게 먹으마." 그녀가 약속했다. 그러나 이미 그녀를 엄습해 오는 불안을 떨쳐 버릴수가 없었다. (그자들이 차라리 빨리 왔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날 밤 그들은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미리부터 자기가 가졌던 두려 움에 머쓱해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게 익살을 부렸다. (호랑인 올 생각도 않는데 도망부터 쳤군!) 10... 고오의 밤 이후, 거의 한 달이 지나서야 헌병들이 들이닥쳤다. 니꼴라이 베소프쉬꼬프가 찾아와 빠벨, 안드레이와 함께 자신들의 신문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 운 꽤 늦은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잠자리에 들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밖에서 불만스러운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바로 그때 안드레이가 조심스럽게 발걸음 을 옮겨 놓으면서 부엌을 빠져 나가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 에서 양동이가 떨어지는 둔탁한 쇳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갑자기 문이 활짝 열렸다. 부엌으 로 달려온 우끄라이나인이 다급한 속삭임이 들려 왔다. "박차소리가 들려!" 어머니는 떨리는 두 손으로 옷을 챙기면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방문 앞에 빠벨이 나 타나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는 누워 계세요. 몸도 불편하실텐데!" 현관에서 조심스럽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빠벨이 문으로 다가가 손으로 활짝 열어젖뜨리면서 소리쳤다. "거기 누구요?" 회색 옷을 입은 키 큰 사내가 재빠르게 문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사내의 뒤를 따라서 다 른 한 사내가 또 들어왔다. 헌병 둘이 빠벨을 밀어젖히고, 그의 양 옆에 나란히 버티어 섰 다. 이내 조롱 섞인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네 놈들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아니야, 안 그래?" 까만 콧수염이 드문드문 난 장교가 소리쳤다. 그는 키만 컸지 깡마른 체격의 소유자였다. 페쟈낀이라고 불리는 이곳 지방 경관이 어머니가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이 할멈이 그의 어머닌가 봅니다, 각하!" 그러고 나서 빠벨을 향해 손직을 하면서 덧붙였다. "바로 이잡니다!" "빠벨 블라소프인가?" 두 눈을 찡그리며 장교가 물었다. 빠벨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콧수염을 비비꼬면서 장교가 말했다. "네 집을 수색해야겠다. 할망구, 일어나! ...거긴, 누구야?" 방안을 둘러보다 말고 그가 물었다. 그리고는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당신들 성씨가 뭐야?"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관에서 익히 잘 아는 두 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늙은 주물공 뜨베랴꼬프와 그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는 화부 르이빈이었다. 그는 까무잡잡한 피부를 한 기골이 장대한 사내였다. "잘 지냈소, 빌로브나?" 어머니는 옷을 입고 기운을 차려 조용히 말했다. "아니, 웬일이오! 이 오밤중에 방문을 다 하고, 잠도 없소? 다들 자는 시간에..." 방안에서 왠지 매스꺼운 구두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헌병 둘과 공장감독관 르이스낀은 책장에 있는 책이란 책은 죄다 끄집어내다가 장교 바로 앞의 탁자 위에 내팽개쳤다. 그들은 일부러 그러는지는 몰라도 두발을 연신 쿵쿵거렸다. 나머지 둘은 벽마다 주먹으로 두드려 보기도 하고 의자 밑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꼴사납게 난로 위로 기어 올 라가기도 했다. 우끄라이나인과 베소프쉬꼬프는 서로 꼭 붙어 구석에 서 있었다. 곰보 자국 이 덕지덕지 보이는 니꼴라이의 얼굴이 새빨간 얼룩으로 뒤덮였고 그의 작은 두 눈은 장교 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우끄라이나인이 콧수염을 비비꼬았다. 어머니가 방안으로 들 어왔을 때,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두려움을 억제하느라 애쓰면서 어머니는 보통 때 허리를 굽힌 모습과는 달리 허리를 곧게 펴고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고서는 걸었다. 어머니의 그러한 행동은 너무나 엄숙해 보여 한편 우습기까지 했다. 그 녀는 짐짓 태연하게 걸음을 크게 떼어놓고 있었지만, 두 눈썹의 파리한 떨림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장교는 흰 손의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빠르게 책들을 집어 책장을 넘겨 보거나 흔들어 보 았다. 다 뒤진 책을 옆으로 치우는 그의 눈놀림은 정말 빈틈이 없을 정도였다. 때때로 책이 마룻바닥에 떨어지기도 했다.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땀을 흘리며 일에 열중인 헌병들의 니 숨소리와 박차의 딸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간간이 나지막이 묻는 소리 도 들렸다. "여기 살펴봤어?" 어머니는 빠벨과 나란히 벽에 바짝 기대어 서서 빠벨이 하듯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런 자세로 장교를 응시했다. 그녀의 무릎은 덜덜 떨렸고 두 눈은 짙은 안개가 뒤덮인 듯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책을 마룻바닥에 내던지는 거요?" 어머니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뜨베랴꼬프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를 까 딱거렸고, 르이스낀은 알아듣지 못할 오리소리를 내면서 베소프쉬꼬프를 주의 깊게 쳐다보 았다. 장교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미동도 없는 마마자국 난 얼굴에 예리한 시선을 순식간에 찔러 넣었다. 그의 손가락은 한결 더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때때로 그는 두 눈을 왕방울만하게 뜨고 눈동자를 부라렸다. 그 모양이 마치 참을 수 없는 고통 때문에 막 악의에 찬 비명을 지르려고 하는 무력한 환자 같았다. 베소프쉬꼬프가 다시 말했다. "이봐요, 군인 양반! 책 좀 집어 올리시오." 모든 헌병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그에게로 쏠렸다. 잠시 후 그들은 다시 장교를 쳐다보았 다. 장교는 다시 고개를 쳐들고 니꼴라이의 넓은 얼굴을 훑어보고는,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좋아... 집어 올려..." 헌병 하나가 몸을 굽히고, 베소프쉬꼬프를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너절하게 마루에 흩어진 책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니꼴라이는 좀 잠자코 있는 건데 그랬어!" 어머니는 빠벨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는 어깨를 움츠렸다. 우끄라이나인은 고개를 떨구었다. "이 성경은 누가 읽는 거야." "나요." 빠벨이 말했다. "그럼, 이 책들은 누구 거야?" "내 거요." 빠벨이 대답했다. "그래?" 장교가 의자를 뒤로 젖히면서 말했다. 그는 가느다란 손가락들로 뼛소리를 내면서 탁자 밑으로 두 발을 뻗었다.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니꼴라이에게 물었다. "당신이 바로 안드레이 나호드까군?" "그렇소!"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면서 베소프쉬꼬프가 대답했다. 우끄라이나인이 팔을 뻗어 그의 어깨 를 뒤로 잡아 끌었다. "이 사람이 잘못 알아들었소. 내가 안드레이요." 장교는 팔을 들어 작은 손가락으로 베소프쉬꼬프를 위협하면서 말했다. "네 처신이나 잘해!" 그는 자기가 가져 온 서류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창문을 통해 밝은 달밤이 생기 없는 눈으로 방안을 엿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창 문 너머에서 눈 밟는 소리를 내며 서성거렸다. "이봐, 나호드까! 이전에 정치범이라고 해서 취조받은 일이 있지?" 장교가 물었다. "로스또프에서 끌려갔었고 또 사라또프에서도 그랬소... 하지만 거기 헌병들은 나한테 반 말을 쓰진 않았고. <당신>이라고 부르면 불렀지..." 장교는 오른쪽 눈을 찡긋거리더니 손으로 한두 번 비비고 변변찮은 이빨을 드러내면서 말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혹시 아는지 모르겠군, 나호드까. 공장 안에서 불온전단을 뿌리고 다니는 불한 당 같은 놈들 말야, 응?" 우끄라이나인은 다리를 흔들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막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그때 다시 니꼴라이의 성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리보고 불한당이라고 하는 놈들은 처음 보는군..."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몇 초 동안 붙박인 듯 꼼짝도 안 했다. 어머니의 얼굴에 난 상처가 하얗게 변하고 오른쪽 눈썹이 위로 뻗쳤다. 르이빈의 검은 수 염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두 눈을 내리깔고서 그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 돼지 같은 놈들을 밖으로 끌러내!" 장교가 명령했다. 헌병 둘이 베소프쉬꼬프의 양 팔을 거머쥐고 난폭하게 부엌으로 끌고 갔다. 그는 우뚝 선 채 두 발로 완강히 버티면서 외쳤다. "잠깐... 옷을 입어야 할 것 아냐!" 마당에서 공장 감독관이 나서며 말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야 당연하지. 여기엔 분명 그런 데에 통달한 놈이 있어..."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장교가 소리쳤다. 어머니는 그의 파리하게 떨리는 째지는 듯한 목소리를 듣고 공포에 질려 그의 누렇게 뜬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어머니는 인간에 대해 관료적인 경멸로 가득 찬, 정말 하등의 연민도 필요 없는 적의 얼굴을 보았다. 전에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적잖이 보았었 지만 지금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바로 이런 족속들을 깨부수기 위해 전단이 필요한 거구나!) 어머니는 생각했다. "안드레이 아니시모비치 나호드까 씨, 이 사생아 같은 놈! 너를 체포한다." "무슨 이유로?" 우끄라이나인이 조용히 물었다. "그건 가서 말씀드리죠." 악의에 찬 정중함으로 장교가 대답했다. 그리고 빠벨을 돌아보곤 물었다. "넌 읽고 쓸 줄 아나?" "그러소." "그럼 네겐 묻지 않겠다." 근엄한 어조로 말하고 나서 이번엔 어머니에게 물었다. "이봐 할망구, 대답해 봐!"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이 작자에 대한 적개심을 느꼈다. 갑자기 그녀는 찬물에 뛰어든 것처럼 온몸을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내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나 여 전히 적개심으로 두 뺨이 벌갰다. 그녀는 눈썹을 내리깔았다. "소리칠 필요가 뭐가 있누!" 그에게 팔을 뻗으면서 어머니는 말문을 열었다. "아직 나이도 젊은 사람이... 그러니 고통을 알면 얼마나 알까." "진정하세요, 어머니!" 빠벨이 그녀를 말렸다. "기다려라, 빠벨! 당신들, 왜 사람을 잡아가는 거요?" 탁자 쪽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어머니가 소리쳤다. "이건 할멈이 참견할 일이 아니야. 닥치지 못해! 베소프쉬꼬프를 끌어와, 그 놈도 체포한 다!" 장교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리고 어떤 서류를 코 바로 앞에까지 갖다 대고는 읽기 시작했다. 베소프쉬꼬프가 끌려 들어왔다. "모자 벗어!" 장교가 읽다 말고 소리쳤다. 르이빈이 어머니에게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 다. "흥분할 것 없어요, 아주머니..." "두 손을 이렇게 잡고서 어떻게 모자를 벗으라는 거야?" 조서 읽는 것을 가로채면서 베소프쉬꼬프가 말했다. 장교는 조서를 탁자 위에 던졌다. "서명해!" 모두가 조서에 서명하는 것을 보자 어머니는 흥분이 가라앉았지만, 울분과 무력감이 뒤섞 인 착잡한 마음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은 지난 20여 년간의 결혼생활에서 쏟은 눈 물, 바로 그 설움이었다. 그러나 요즈막에 와서는 그 쓰고 가슴 아픈 눈물의 기억을 거의 잊고 있었다. 장교는 어머니를 보고 성가시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아직 울 때가 아니오, 할멈. 눈물을 아끼라고. 그러다간 나중에 흘릴 눈물조차 남아나질 않겠소." 다시 울분에 못 이겨 그녀가 말했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눈물은 마르지 않아! 네게도 에미가 있다면 이런 것쯤은 알 거 다, 이놈!" 장교는 반짝거리는 자물쇠가 달린, 새로 장만한 듯한 가방에다 서류들을 서둘러 챙겨 넣 었다. "앞으로!" 그가 명령했다. "잘 가시오, 안드레이. 잘 가게 니꼴라이!" 빠벨은 동지들의 손을 꼭 쥐고는 조용하고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좋지. 우린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장교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베소프쉬꼬프가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 쉬었다. 그의 퉁퉁한 목 언저리는 핏발이 서 시뻘 개졌고 두 눈은 극도의 증오심으로 빛났다. 우끄라이나인은 은밀한 미소를 띠고 머리를 저 으면서 어머니에게 무슨 말인지를 속삭였다. 그녀는 그를 위해 성호를 그어 주고 역시 속삭 였다. "주님은 누가 옳은지 보고 계실 거야." 마침내 회색 제복을 입은 일당들이 모두 현관을 빠져 나갔다. 요란한 박차소리를 내면서 그들은 사라졌다. 맨 마지막으로 나간 것은 르이빈 이었는데, 그는 어두운 눈으로 빠벨을 돌아보고 묵상하듯 말했다. "으-음, 잘 있게!" 그리고 수염이 들썩일 정도의 기침을 몇 번 하고서 천천히 현관을 빠져 나갔다. 빠벨은 뒷짐을 지고 마룻바닥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책과 옷가지들을 넘어 방안을 왔다갔다했 다. 얼마 후 착잡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 놈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셨지요?" 엉망진창이 된 방안을 어머니는 사뭇 망설임이 가득한 눈길로 둘러보면서 안타까운 듯 속 삭였다. "니꼴라이는 어째서 그자들한테 욕지거리를 한다지?" "겁에 질렸던 것 같아요." 빠벨이 나지막이 말했다.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모두 잡아갔구나." 손을 내저으면서 어머니는 중얼거렸다. 아들은 잡혀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도 어머니의 안쓰러움은 조금 덜했다. 그러나 어머 니는 자신이 목격했던 사건에 대한 생각을 여전히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누런 얼굴을 한 그자가 우리를 조롱했어. 겁을 주려고 말야..." "맞아요, 엄마! 우선 방안을 좀 치워야겠어요." 빠벨은 무엇을 결심이라도 한 듯 소리쳤다. 빠벨을 가끔 그녀를 엄마라고 불렀는데, 그런 경우는 그가 그녀에게 아주 친근감을 느낄 때였다. 어머니는 다가가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 놈들은 널 모욕했어." "그래요! 그건 정말 괴로운 일예요. 차라리 함께 잡혀 가는 건데 그랬어요..." 그의 두 눈엔 눈물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의 아픔을 위로해 주고 싶어서 그녀는 한 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려라. 그들은 너마저도 잡아갈 게다." "그러겠죠." 어머니는 잠시 아무 말 없다가 우울하게 말을 꺼냈다. "가엾어라, 빠벨. 그래 얼마나 고통스럽냐! 그러면서도 매번 넌 이 에미를 위로할 생각만 하는구나. 난 이제 네가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아도 나쁜 게 뭔지 다 안다." 그는 어머니를 쳐다보며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어머니. 어머니께서 익숙해지시는 길밖엔..."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고 소름 끼치는 공포를 애써 억제하면서 잠시 후 말문을 열었다. "그 놈들이 잡아간 애들을 고문하진 않을까? 사지를 찢고 뼈를 으깨는 건 아닌지 몰라? 이런 생각을 하면... 오, 빠샤, 너무나 끔찍하구나!" "그들은 영혼을 으깰 거예요... 추잡한 손으로 영혼을 으깬다, 이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예요." 11... 그 이튿날 부낀, 사모일로프, 소모프, 그리고 그 밖의 다섯 명이 더 체포되어 갔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저녁때 페쟈 마진이 찾아왔다. 그의 집도 수색을 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게 큰 자랑이라도 되는 듯, 심지어 자신이 무슨 영웅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해 있었 다. "무섭더냐, 페쟈?" 어머니가 물었다. 창백해진 그의 얼굴은 더욱 뾰족하게 보였다. 콧구멍도 사뭇 떨렸다. "무서웠어요, 장교가 때릴까봐. 그는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고 체격이 아주 좋았어 요. 손가락에도 털이 나 있더라고요. 게다가 코에는 검은 안경이 걸쳐져 있어서 마치 눈이 없는 사람 같았어요. 발을 쾅쾅 구르면서 호통을 쳤어요. 저를 감옥에 처넣겠다고 말하면서 말예요. 전 한번도 맞아 본 적이 없었어요. 어머니한테고 아버지한테고 말예요. 전 외아들 이거든요. 부모님들은 절 무척이나 사랑하세요."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빠른 손놀림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빨갛 게 충혈된 눈으로 빠벨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만약에 날 때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난 마치 칼처럼 온몸을 던져서 그 놈을 찌를 거야. 이빨로 물어뜯어 버릴 거야.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릴꺼야." "넌 체격도 작고 허약하잖니! 그런데 어떻게 싸울 수가 있겠어?" 어머니가 말했다. "그래도 싸울 겁니다." 페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나가자 어머니가 빠벨에게 말했다. "저 애가 제일 먼저 쓰러지겠군!" 빠벨은 대답이 없었다. 몇 분이 지나 부엌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르이빈이 들어왔다. "안녕들 하시오!" 웃으면서 그가 말했다. "이렇게 다시 왔소. 어제는 내 발로 온 게 아니지만 오늘은 내 발로 왔소." 그는 빠벨과 힘찬 악수를 하고는 팔을 어머니의 어깨에 얹으면서 물었다. "차 한잔 마실 수 있을까요?" 빠벨은 새까만 수염이 빽빽이 난 그의 시커멓고 넓은 얼굴과 까만 두눈을 묵묵히 응시했 다. 침착한 시선에서 의미심장한 그 무엇인가가 번뜩였다. 어머니는 사모바르를 올려 놓기 위해 부엌으로 나갔다. 르이빈은 자리에 앉아 수염을 쓰 다듬으면서 빠벨에게 어두운 시선을 던졌다. 한 팔을 탁자 위에 올려 놓은 채로였다. "이를테면 그런 거네." 그는 마치 중단되었던 대화를 계속하듯이 말문을 열었다. "자네에게 모든 걸 솔직히 털어놓겠네. 난 오랫동안 자네를 지켜 보았지. 우린 바로 이웃 에 살고 있지 않은가. 자네 집에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걸 보았어. 이건 중요한 문제야. 추태를 부리지 않는 사람들은 금방 눈에 띄게 되어 있어. 그게 바로 뭐겠는가? 이를테면 나 역시도 그런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 눈에는 거슬린다. 그 말이야." 그의 말에는 일정한 무게가 있었다. 그러나 거침이 없었다. 그는 시커먼 손으로 수염을 쓸어 내리면서 주의 깊게 빠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네에 대한 말들이 나돌기 시작하더군. 우리 주인네들은 자네를 이단자라고 불렀지. 자 네가 교회에도 다니지 않는다고 말이야. 나 역시도 교회엔 다니지 않네. 얼마가 지나 전단 들이 나돌았지. 그건 자네가 생각해 낸 거지?" "맞아요, 접니다." 빠벨이 대답했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부엌에서 방안을 들여다보면서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 혼자는 아니잖아!" 빠벨이 웃었다. 르이빈도 마찬기지였다. "그렇겠지요." 르이빈이 말했다. 어머니는 그들이 자기 말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보고 언짢은 듯 입을 삐쭉이 고서 다시 부엌으로 갔다. "전단이라, 이건 정말 생각 잘한 거야. 전단들로 인해 사람들이 들끓고 있어. 열아홉 번 인가 나왔지, 아마?" "맞습니다." "요컨대, 나는 그걸 죄다 읽어 보았다네. 암 읽고말고. 때때로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있고, 또 어떤 건 좀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 하지만 뭐 사람이 하는 일인데, 말을 많이 하다 보면 더러 잘못 쓴 말도 있을 수 있고, 쓸데없는 말을 써야 하는 경우가 없 을 수야 없겠지." 르이빈은 웃었다. 희고 튼튼해 보이는 이가 보였다. "얼마 후엔 수색이 시작되었지. 아무래도 이 수색이 내 마음을 자네들에게로 쏠리게 한 것 같아. 자네는 물론이고 우끄라이나인과 니꼴라이도. 하여튼 자네들 모두의 정체가 이젠 드러난 셈일세."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창 밖을 내다보면서 손가락을 탁자에 내려놓 았다. "자네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두 밝혀졌네. 이를 테면 <당신들 할테면 해 보시 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겠습니다> 뭐 이런 식인 거야. 우끄라이나인 역시 괜찮은 젊은이 야. 언젠가 한번은 공장에서 그가 얘기하는 걸 들은적이 있어. 난 그때, 죽음 외에 그를 물 리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란 생각을 했지. 정말 강인한 친구야! 어때, 빠벨, 자 넨 나를 믿겠나?" "믿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빠벨이 말했다. "됐어. 이보게. 내 나이 마흔일세. 자네보다는 갑절이나 더 먹었지. 자네보다 수십 배나 더 경험이 많다고 할 수 있어. 3년 남짓 군복무도 했고, 결혼도 두 번이나 했지. 한 여자는 죽었고 또 한 여자는 내쫓아버렸네. 까프까즈에 가 보기도 했고, 또 성령부정파 신자들도 알지.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삶을 극복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일세. 그들은 극복할 수가 없어." 어머니는 그의 힘있는 말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아들에게 중년의 사람이 찾아와 고백하 듯 이야기하는 걸 본다는 것은 어머니에겐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보기에 빠벨 이 손님을 너무 무례하게 대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꿔 볼 심사로 르이빈에게 물었다. "뭐 좀 들겠수, 미하일 이바노비치?"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저녁은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보게 빠벨, 자네는 이를테면, 삶이 제멋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나?" 빠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진 채 방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삶은 올바르게 진행되고 있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저씨로 하여금 제게 찾아오게 하고 또 마음을 열게 한 것은 바로 그 삶이 아니던가요? 그리고 평생을 노동으로 먹고 사는 우리들을 지금 이 순간에도 적잖이 단결케 하고, 시간이 지나 모든 노동자들을 단결케 할 것도 또한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삶은 지금 우리를 부당하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하지 만 삶은 또한 삶의 괴로운 의미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그때를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을 인간에게 제시해 준답니다." 르이빈이 빠벨의 말을 가로챘다. "옳은 말이야. 인간은 새로 태어나야만 해. 만약 어떤 사람이 때가 덕지덕지하다면 목욕 탕에 데려가 때를 박박 밀고 새 옷을 입혀 주어야만 하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디에 내놓아 도 전혀 손색이 없는 사람이 될 걸세. 그렇다고 치세. 하지만 인간의 속마음은 어떻게 깨끗 이 한다지? 그게 바로 문제야." 빠벨은 권력에 대해서, 공장에 대해서 그리고 외국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어떻게 주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격한 어조로 열렬히 말하기 시작했다. 르이빈은 가끔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치기도 했다. 그 모양이 마치 빠벨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는 것 같았다. 게다 가 빠벨의 이야기 도중에 소리를 지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 그리고 한번은 웃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어이구, 자네는 젊어. 아직 사람들을 많이 모르는구만!" 그럴 때면 빠벨은 그의 앞에 우뚝 서서 심각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이가 많다느니 적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말도록 합시다! 누구의 생각이 옳은가 하는 것을 가리는 게 더 중요한 문젭니다." "요컨대, 자네 말대로라면 신이 우리를 속였다는 말이구만? 맞는 소리야! 나 역시도 우리 네 종교라는 것이 거짓된 것이라고 생각하네." 이 대목에서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아들이 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거나, 그녀가 아직 까지는 자애롭고 성스런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ale음과 관련이 있는 모든 것 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그녀는 아들의 두 눈을 쫓느라 열심이었다. 마치 <빠 벨, 불신앙이라는 날카롭고 신랄한 말로 이 에미의 가슴을 후비지는 말아 다오> 하며 아들 에게 말없이 애원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이런 불신앙 이면에 존재하는 그의 엄연한 믿 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어머니의 마음은 한결 진정되었다. (너의 생각을 어디서부터 이해하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어머니는 생각했다. 어머니는 르이빈도 중년의 남자이기 때문에 빠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분이 언짢고 어 쩌면 모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르이빈이 자신의 문제를 빠벨에게 그렇 지도 않다는 듯 제기했을 때 어머니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짧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 했다. "주님에 대해서 얘기할 때는 둘 다 한번 더 생각하고 신중하게 얘기하구려." 그녀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서 힘있고 열띤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젊은 사람들이야 하고픈 생각할 수가 있소. 하지만 나는 이제 늙어서, 주님마저 내게서 떠나가면, 내 불안한 마음을 의지할 곳이라곤 아무데도 없게 되고 말거요."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접시를 닦는 그녀의 손가락이 사뭇 떨렸다. "저희들을 아직 이해 못하세요. 어머니!" 빠벨이 조용히 그리고 다정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르이빈도 낮고 굵은 목소리로 천천히 덧붙였다. 그러고 나서 웃으면서 빠벨을 쳐다보았 다. "나는 어머니께서 사마귀를 떼어 버리기엔 너무 늙으셨다는 걸 잊었었네." 바벨이 계속했다. "저는 어머니께서 믿으시는 자애롭고 인정 많은 신에 대해서 말하는게 아닙니다. 전 그 이름을 빌어 사제들이 몽둥이로 그러듯이 우리를 위협하는 신에 대해서 말하는 겁니다. 소 수 사악한 무리들이 그 이름을 빌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네들의 뜻에 따르도록 강요 하고자 안달하는 바로 그 신에 대해서 말입니다." "바로 그거야, 암 그렇고말고!"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르이빈이 소리쳤다. "그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바꿔치기된 신 앞에서 맹세하도록 만들었어. 일단 자기네들의 손에 들어온 것이면 모두 다 우리들과 싸우도록 만들어 놓았단 말일세. 명심하세요, 아주머 니. 신은 인간을 창조할 때 자기와 닮은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 결국 인간이 신을 닮았다 는 결론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신을 닮지 못하고 사나운 짐승이 되어 버렸어 요. 교회는 허수아비를 흔들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셈이지요. 우리는 신을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그자들은 신에게 거짓과 중상의 옷을 입히고 얼굴을 일그러뜨려 놓았습니다. 그게 뭡니까. 바로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려는 수작인 것입니다." 그는 조용조용 말했다. 그의 말 한마디가 정신이 아찔할 정도의 충격으로 어머니의 뇌리 에 박혔다. 검은 턱수염이 난 그의 넓은 얼굴이 어머니를 놀라게 했다. 애처롭기도 했다. 그의 검은 눈빛은 어머니를 흥분시켜 그녀의 가슴 깊숙이 숨어 있던 공포의 감정을 일깨웠 다. "안되겠어. 밖으로 나가는 게 낫겠어." 무엇인가를 부정하듯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도저히 듣고 있을 기운이 없어." 그리고 어머니는 르이빈의 말소리를 뒤로 한 채 서둘러 부엌으로 나갔다. "보았는가, 빠벨! 만물의 근원은 머리가 아니고 바로 이 가슴이야! 가슴은 인간 영혼에 있어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지. 그 외엔 어떤 것도 자라날 수 없어..." "인류를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성뿐입니다." 빠벨이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이성은 힘을 주지 않네. 가슴이 힘을 주는 거야. 머리가 아니란 말야, 알겠나?" 르이빈도 단호한 어조로 크게 소리쳤다. 어머니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기도도 하지 않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는 한기를 느꼈 다. 기분도 좋지 않았다. 처음엔 그토록 믿음직스럽고 지혜로워 보이던 르이빈조차도 이제 는 그녀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단자! 선동가! 그는 도대체 왜 찾아왔을까?) 어머니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르이빈은 여전히 확고하면서도 침착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을 했다. "성스러운 자리는 비워 놓아서는 안돼. 신이 살고 있는 곳, 바로 거기가 가장 약한 지점 이야. 영혼에서 신을 떠나보내면 가슴 안에 상처만 남을 걸세, 정말이네. 빠벨, 새로운 믿 음을 생각해 내야만 해... 인간에게 친구처럼 다정한 신을 창조해 내야만 한단 말일세." "그리스도가 있지 않습니까!" 빠벨이 소리쳤다. "그리스도는 정신적으로 너무나 허약했어. <이 술잔이 나를 지나치게 해 주십시오> 했잖 은가! 그리고 그는 가이사를 용인했지. 신이 어떻게 자기 피조물을 위에 군림하는 한 인간 의 권력을 용인할 수 있단 말인가. 신은 전지전능한 거야! 그는 자신의 영혼을 둘로 나누지 못했어. 신적인 영혼과 인간적인 영혼, 이렇게 둘로 말일세. 하지만 그리스도는 상거래도, 결혼도, 어느 하나 반대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것은 옳지 못한 일 이야. 자신의 의지로 모든 걸 다 창조하면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무화과나무를 비난한다 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말이야! 영혼도 마찬가지야. 자기의 의지에 따라서 악한 열매를 맺 는 것은 없어. 내가 스스로 나의 영혼에 악의 씨앗을 뿌릴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라고! 물 론 아닐밖에!" 방에선 두 사람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왔다. 마치 둘이 부둥켜안고 무슨 열띤 시합이 라도 하는 것 같았다. 빠벨이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그의 구두뒷굽에 마룻바닥 히는 소 리가 요란했다. 빠벨이 이야기할 때는 모든 다른 소리가 그의 말에 묻히었다. 그러나 르이 빈의 무거운 목소리가 천천히 은은하게 흐를 때면 시계 흔들리는 소리와 예리한 발톱으로 담벼락을 할퀴는 싸락눈의 타닥이는 소리가 함께 들려 왔다. "내 직업이 화부니까 화부의 입장에서 내 생각을 말한다면 신은 불꽃이라고도 할 수 있 네. 그렇지! 그리고 신은 가슴 안에서 살아. 이런 말이 있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 씀은 신이야. 그렇기 때문에 말씀은 곧 영혼인 셈이지..." "말씀은 곧 이성입니다." 빠벨이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옳은 소리야! 요컨대 신은 가슴과 이성 안에 있지 결코 교회 안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거 야. 교회는 신의 무덤일 뿐이야." 어머니는 그새 잠이 들어 르이빈이 돌아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르이빈은 그날 이후 자주 찾아오기 시작했다. 만일 빠벨의 집에 친구들이 찾아와 있는 날이면 르이빈은 구석에 말없이 앉아 가끔 이렇게 탄성을 지를 뿐이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한번은 구석에 앉아 어두운 시선으로 모두를 바라보면서 르이빈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 다. "우리 한번 이런 얘기를 해 보았으면 합니다. 지금 있는 게 무엇이고 우리가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앞으로 있게 될 것이 무엇인가를 말입니다. 일단 민중들이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 고 나면 그들은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게 될 겁니다. 상당히 많은 요소들, 심지어 이전에는 전혀 바라지도 않던 많은 요소들이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앉게 되었다고 생 각해 봅시다. 그리고 스스로 상황판단을 내리도록 시간을 주어 보시오. 그러면 아마 민중들 은 모든 것을 거부하려 할 겁니다. 인생도, 모든 지식나부랭이도, 모두 말입니다. 아마 그 들은 교회의 신 같은 자신의 적을 정확히 이해하게 될 겁니다. 책을 그들의 손에 쥐어주기 만 해도 그들은 거기서 스스로 해답을 구하게 될 겁니다. 별게 아니라오." 그러나 빠벨이 르이빈과 또 둘이 있을 때는 그들의 논쟁은 끝이 없었다. 그러나 그 논쟁 은 결코 도를 넘어서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의 이야기를 두려움에 떨며 들었다. 그러 면서도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려고 그의 말을 쫓느라 여념이 없었다. 때때로 어머니는 넓은 어깨에 검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이 농부와 체격이 당당하고 키가 큰 자기의 아들에 눈이 멀 정도의 강렬한 인상을 받기도 했다. 그들은 탈출구를 찾아 이리저리 분주히 돌아다니기도 했고, 힘은 세지만 눈이 먼 양손을 들어 모든 걸 움켜잡으려 하기도 했다. 또 비틀거리면서 이 자리 저 자리를 왔다갔다하고, 어떨 땐 마룻바닥에 엎드 려 두 발로 바닥을 마구 문질러대기도 했다. 그들은 모든 문제에 정면으로 충돌하여 그것을 느끼면서 가끔은 그것들을 한 쪽으로 치워 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믿음이나 희망 따위를 잃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직함과 불요불굴의 용기로 무서운 말들을 어떻게 들어야만 하는가를 어머니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이제 그런 말들은 더 이상 처음과 같은 힘으로 그녀에게 강한 충격을 주지 못했다. 어머니는 이제 그런 말들을 거부하며 반론을 펼 줄도 알게 되었다. 그 리고 어쩌다 어머니는 신을 부정하는 말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신에 대한 강한 믿음 역시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마치 모 든 걸 용서하겠다는 관대함의 극치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록 르이빈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그렇다고 이전의 적대감을 그대로 느끼지는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씩 어머니는 속옷과 책들을 감방에 갇혀 있는 우끄라이나인에게 가져다 주 었다. 한 번은 면회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어머니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감동 어린 목 소리로 있었던 일을 죄다 이야기했다. "그 애는 거기에서도 집에 있는 거나 진배없더라. 여전히 모든 사람들한테 다정하게 대해 주고 다른 사람들의 농담도 모두 받아주면서 말야. 그게 참 힘들고 고달픈 일일텐데도 전혀 내색을 앉더구나..." 르이빈이 말했다. "그래야만 합니다. 우리는 피부가 우리를 감싸고 있듯이 그렇게 고통의 가죽을 뒤집어쓰 고 있습니다. 고통으로 숨을 쉬고 고통으로 짠 옷을 입고 사는 셈이지요. 뭔가 자부심을 가 질 만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너나할것없이 눈이 먼 건 아닙 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 눈을 스스로 감고 있다니까요, 정말! 어리석다고 느끼면 뭐합니까? 이겨 낼 생각은 않고 그저 이빨이나 드러내고 생긋거리기에 바쁘니..." 12... 블라소프의 잿빛 작은 집은 날이 갈수록 한층 더 공장촌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런 관심 속에는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조심성과 무의식적인 적대감도 있었지만 한편 심뢰에 근거한 호기심도 생기기 시작했다. 때때로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 주의 깊게 방안을 둘러보면서 빠벨에게 이렇게 말을 거는 경우도 있었다. "이보게, 친구! 지금 책을 읽고 있군 그래. 자넨 법률도 아주 잘 안다면서? 괜찮다면 내 게 설명 좀 해 주겠나..." 그는 빠벨에게 경찰이나 공장관리인들의 부정을 얘기하기도 했다. 처리가 복잡한 경우에 빠벨은 시내 법률 변호사에게 보내는 쪽지를 써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주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 때는 성심성의껏 해결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점차로 사람들 사이에는 이 젊고 진지한 사람을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쉽고도 용기 있게 이야기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말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또 그는 일치하지 않는 모든 문제들의 밑바닥까지 아주 집요하게 파고들어 언제 어디서고 모든 사람들을 얽매어 놓고 있 는 평범한 실마리를 찾아 주었다. 특히 <소택지 기금>과 관련된 사건이 있고 난 후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빠벨의 주가가 더 욱 뛰어올랐다. 공장의 뒤편으로 전나무와 자작나무로 무성한 소택지가 널찍하게 뻗어 있었다. 그 모양이 마치 녹슬어 못쓰게 된 반지 같았다. 여름만 되면 소택지에서 눅눅하고 누르스름한 수증기 가 피어오르고 거기서 생긴 모기떼며 온갖 병원균들이 공장촌으로 날아들었다. 소택지는 공 장소유였다. 새로 부임한 사장은 거기서 이익을 끌어낼 요량으로 소택지를 바싹 말려서 이 탄을 채취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조치를 취하게 되면 이 지역 주민들 의 건강 상태도 훨씬 좋아지고 모든 사람들의 생활 여건도 향상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러한 명분으로 사장은 임금에서 1루블마다 1꼬뻬이까씩을 공제하여 소택지를 메우는 공사비 용으로 충당한다고 노동자들에게 공고했다. 노동자들이 이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들을 노하게 한 것은 사무실 근무자는 공제 에서 제외된다는 발표였다. 빠벨은 기금 징수에 대한 사장의 공고문이 나붙던 토요일엔 몸 이 불편하여 일터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일에 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 이 튿날 아침 예배가 끝나고 나서야 노인다운 풍채가 그대로 엿보이는 주물공 시조프와 키가 크고 험상 게 생긴 열쇠공 마호찐이 찾아와 그에게 사장의 결정에 대해서 죄다 이야기해 주었다. 시조프가 침착하게 말했다. "나이가 좀 든 사람들 몇몇이 우선 모여서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해 보다가 아무래도 자네 한테 가 보아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왔네. 자넨 그래도 우리들 중에서 배운 사람 아닌 가? 그건 그렇고, 사장이 우리들 돈으로 모기떼와 싸울 수 있는 무슨 권리라도 있는가?" 작은 눈을 반짝거리면서 마호찐이 말했다. "생각해 보게나! 4년 전에도 그 사기꾼놈들이 목욕탕을 짓는다고 돈을 뜯어 간 적이 있 네. 그때 3800루블이 걷혔다더군. 그 놈들이 그걸 어디에 썼는 줄 아나? 또 만약 제대로 썼 다면 그 목욕탕은 어디에 있느냔 말일세. 내 얘기는!" 빠벨은 세금의 부당선과, 그 공사를 함으로써 사장이 갈취하게 되는 이익을 설명했다. 두 노인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돌아갔다. 그들을 돌려보내고 어머니는 웃으면서 말했다. "빠샤. 네가 아는게 많으니까 이제 노인들까지도 너를 찾아오는구나."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듯 빠벨은 대답도 않고 구석에 앉아 뭔가를 쓰기 시작 했다. 몇 분 후에 그가 말했다. "어머니께 부탁이 있어요. 시내에 가셔서 이 쪽지 좀 전해 주세요..." "위험한 일이냐?" "예. 거기에선 우리들을 위한 신문이 인쇄되고 있어요. 그 <소택지 지금> 이야기가 제1면 에 실려야만 합니다." "알았다. 알았어! 지금 당장 가도록 하마." 이 일은 아들이 어머니에게 한 첫 번째 부탁이었다. 어머니는 빠벨이 자기에게 그렇게 모 든 일을 툭 털어놓고 이야기해 주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외투를 걸치면서 그녀가 말했다. "알겠다, 빠샤! 그 놈들이 하는 짓이란 강도짓이나 별반 다를 게 없어! 그 사람 이름이 뭐라고? 이고르 이바노비치라고 했냐?" 그녀는 저녁 늦게야 돌아왔다. 지치긴 했지만 상당히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그녀는 아들 에게 말했다. "사샤도 만났단다! 네 안부를 묻더라. 이고르 이바노비치, 사람 참 솔직하더구나. 게다가 농담도 어찌나 잘 하던지! 사람 참 좋더라." "그들이 마음에 드셨다니 기뻐요." 빠벨이 나지막히 말했다. "솔직한 사람들이더라, 빠샤! 사람이 솔직하면 되지 무엇이 더 필요하겠니! 게다가 모두 들 네 생각을 많이 하는 눈치더라." 월요일에도 빠벨은 머리가 아파 역시 일터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점심 먹을 시간이 되 었을 때 페쟈 마진이 막 뛰어왔다. 그의 표정은 흥분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행복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피곤해 보이기도 하는 게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공 장에서 일어났던 일을 말해 주었다. "나와 봐! 공장 전체가 들고일어났어. 그래서 자넬 부르러 온 거야. 시조프와 마호찐이 자네만큼 설명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했어. 정말 자네도 가서 보면 놀랄 거야!" 빠벨은 말없이 옷을 입었다. "여인네들도 합세했어. 소리지르고 난리야!" "나도 가 보자. 그들이 뭣 때문에 그러는 거야? 가 봐야겠다." 어머니가 말했다. "가요!" 빠벨이 말했다. 그들은 거리를 따라서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어머니는 어찌나 흥분했던지 숨이 가빠 올 정도였다. 또 뭔가 중요한 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공장 정문 앞에는 한 무리의 여인네들이 지키고 서서 입에 담기도 부끄러울 정도의 지독한 욕설을 퍼붓고 있 었다. 그들 셋이 공장 뜰로 눈에 안 띄게 비집고 들어갔을 때 그들은 곧바로 빽빽하게 들어 차 잔뜩 흥분한 채로 시끄럽게 소리질러대는 군중들 속에 묻혀버렸다. 어머니는 모든 사람 들의 고개가 한 방향, 즉 단조부 공장의 담벼락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곳, 고철더 미 위해 빨간 별독을 배경으로 시조프, 마호찐, 발로프, 그리고 나이가 지긋한 다섯 명의 영향력 있는 노동자들이 손을 내저으면서 서 있었다. "블라소프가 온다!" 누군가가 외쳤다. "블라소프? 그를 이리로 데리고 옵시다." "좀 조용히 하시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외침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르이빈의 침착한 목소리가 울렸다. "우리는 일어서야 합니다. 단지 돈 때문이 아니라 바로 정의, 그 자체를 위해서 말입니 다! 우리가 그토록 값어치 있게 여기는 것은 동전, 그게 아닙니다. 동전이란 무게가 좀 있 다뿐이지 다른 것처럼 둥글기는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동전에는 바로 인간의 피가 들어 있습니다. 사장의 지폐에 들어 있지 않은 인간의 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가치 라는 건 단순히 동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피, 바로 진실에 깃들어 있는 것입니 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파문을 던져 군중들의 가슴속에서 열렬한 외침들을 불러일으켰 다. "옳소, 르이빈!" "확실하군, 화부!" "블라소프가 왔다!" 육중한 공장기계 돌아가는 소리, 수증기의 힘겨운 듯한 탄식의 소리, 그리고 전선의 사각 거리는 소리를 무색케 하면서 사람들의 외침이 요란한 격동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여기저 기 급히 내달리는 사람들, 손을 흔드는 사람들로 장관을 이루었다. 그들은 서로 열렬하고 신랄한 말로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지친 가슴들 속에서 졸린 듯 숨어 있던 흥분이 잠에서 깨어나 탈출구를 찾았다. 흥분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검은 날개를 활짝 펴고 사람들을 한층 강력하게 낚아채면서 공기중을 날아 사람들로 하여금 바로 자신들의 문제에 열중하게 만들 고 서로서로를 마구 충돌시키면서 결국엔 그 자신이 타는 듯한 분노로 바뀌어 갔다. 군중의 머리 위에선 그을음과 먼지로 이루어진 구름이 미친듯 소용돌이쳤다. 얼마 후 상기된 사람 들의 얼굴이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두 뺨은 시꺼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시꺼먼 얼굴에 서는 두 눈이 빛났으며 또 이도 번뜩거렸다. 시조프와 마호찐이 서 있던 곳에 빠벨이 등장했다. 이내 그의 외침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지들!" 어머니는 보았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고 입술이 떨리고 있는 것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군중을 밀어젖히며 앞으로 나섰다. 사람들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어딜 자꾸 끼어드는 거야?" 그녀는 이리저리 떠밀렸다. 어머니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양 어깨와 팔꿈치로 사람들을 밀어 헤치면서 그녀는 아들 에게로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어머니는 아들의 옆에 나란히 서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편, 빠벨은 가슴 안에서 우러나오는, 그가 습관적으로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의미를 한 껏 담아 내곤 했던 말들을 선택할 때마다, 투쟁의 기쁨으로 일어나는 경련이 자신의 목을 압박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진실에 대한 꿈의 불꽃으로 불타오른 자신의 심장을 사람들에 게 던져 주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동지들!" 그가 반복하는 이 말속에는 환희와 힘이 넘쳐 있었다. "우리가 누굽니까? 교회와 공장을 짓고, 쇠사슬과 돈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 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살아 있는 힙입니다. 태어나서 죽는 그날까지도 우리는 모든 사 람들을 먹여 살리고 기쁨을 안겨다 주는 바로 그런 살아 있는 힘인 것입니다." "옳소!" 르이빈이 외쳤다. "우리에겐 언제 어디서고 일이 우선이었고 삶이란 나중 문제였습니다. 우리에게 마음을 썼던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잘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있습니까? 과연 우리를 사람을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 누군가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마치 메아리 같았다. 빠벨은 자신을 억제해 가며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더욱 쉽게 말하기 시작했다. 군중은 천천히 그에게로 가까이 모여들었다. 얼핏 보아 마치 시꺼먼 하나의 몸뚱어리로 착각할 정 도였다. 군중은 수백의 주의깊은 눈으로 그의 얼굴을 일제히 쳐다보았다. 마치 그의 말 한 마디 한마디를 죄다 빨아들리려 하는 것 같았다. "우리 스스로가 서로 동지라고 느끼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우리들의 더 나은 몫을 쟁 취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바람, 즉 우리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한다는 그 바람으로 굳게 결합한 한 가족과 같은 친구로서 서로를 느껴야만 합니다." "본론을 얘기해라!" 어딘지 어머니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야비하게 소리쳤다. "거, 끼어들지 마쇼!" 서로 다른 곳에서 두 고함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 왔다. 연기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들이 잔뜩 의심을 품은 듯, 불쾌한 듯 찌푸려졌다. 수많은 날 들이 빠벨의 얼굴을 생각에 잠긴 듯 진지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자인 것 같군, 바보가 아니라면!" 누군가가 말했다. "와! 저렇게 말한다는 게 보통 용기 가지고 되는 게 아냐!" 어머니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키 큰 애꾸눈의 노동자가 말했다. "동지들! 드디어 우리 자신말고는 우리를 도울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가 왔습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이게 바로 우리의 강령입니 다. 우리의 적을 쳐부수기 위해서!"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동지들!" 마호찐이 외쳤다. 그러고 나서 그는 불끈 쥔 주먹을 공중에 높이 쳐들었다. "사장을 소환합시다!" 빠벨이 계속했다. 군중은 폭풍이 몰아치듯 들끓었다. 그들은 동요되기 시작했다. 이내 여기저기서 고함소리 가 튀어나왔다. "사장을 소환하자!" "대표를 사장에게 보냅시다!" 어머니는 앞으로 헤집고 나가 바로 밑에서 아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자부심이 역력했다. 빠벨이 나이 많고 존경 받는 노동자들 가운데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들 그의 말에 따르고 동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화를 내지도 않고 욕설을 하지도 않아 더욱 마음이 흡족했다. 마치 함석지붕에 우박이 쏟아지듯, 외침과 욕설들, 독설들이 빗발쳤다. 위에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빠벨의 품이 그들 중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것 같 았다. "대표를 뽑읍시다!" "시조프요!" "블라소프요!" "르이빈이오! 이 사람의 말발은 당해 낼 사람이 없을 거야!" 느닷없이 군중 속에서 그리 크지 않은 외침소리가 울렸다. "사장이 제 발로 나온다!" "사장이야!" 군중이 끝이 뾰족한 턱수염에 길쭉한 얼굴을 한 키 큰 남자에게 길을 터 주었다. "좀 들어갑시다!" 그가 제 앞을 막고 서 있는 노동자들을 신속한 손놀림으로 밀어젖히면서 말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몸을 직접 건드리지는 않고 시늉만 할뿐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람들 을 지배하는 군주의 능숙한 시선으로 노동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유심히 관찰했다. 그가 다가가자 사람들은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인사에는 아랑곳하지 도 않은 채 그는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군중들 사이엔 정적만이 감돌았다. 어쩌다가 당혹스러움에 어쩔줄 몰라 하는 사람들의 모기소리 같은 수군거림과 어 색한 웃음소리만 간간이 들려 올 뿐이었다. 그 소리들은 마치 장난치다 들킨 어린 아이들의 초조함 바로 그것이었다. 사장은 준엄한 시선을 어머니의 얼굴에 흘리면서 그녀의 곁을 지나 고철더미 앞에 우뚝 섰다. 위에서 누군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내민 손도 잡지 않고 느긋하게, 그러면서도 힘찬 몸놀림으로 위로 뛰어올랐다. 그가 빠벨과 시조프 앞에 서서 물었다. "이건 무슨 집회야! 왜들 작업을 중단했지?" 몇 초 동안은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의 고개가 영근 이삭처럼 떨구어졌다. 시조프도 모자 를 벗어 허공에 대고 흔들더니 어깨를 움츠리고 이내 고개를 떨구어 버렸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야 할 것 아냐?" 사장이 소리쳤다. 빠벨이 그와 나란히 서서 시조프와 르이빈을 가리키며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세사람은 동지들로부터 1퍼센트 공제조치 철회는 당신에게 요구하라는 위임을 받았 습니다." "무슨 이유로?" 빠벨은 쳐다보지도 않고 사장이 물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강요된 그 공제가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빠벨이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소택지를 메우고자 하는 내 계획이 단지 노동자들을 착취하려는 것 일 뿐 결코 자네들의 작업환경 개선을 위한 배려가 될 수는 없다 그 말이지? 그런가?" "그렇습니다!" 빠벨이 대답했다. "당신도 같은 생각이오?" 사장이 르이빈에게 물었다. "우리 모두가 같은 생각이오?" 르이빈이 대답했다. "이보쇼, 당신은 어떻소?" 사장이 이번엔 다시 시조프를 보고 물었다. "나도 마찬가지요. 우리는 한푼이라도 깎이는 걸 원치 않소." 시조프는 다시 고개를 떨구고 죄지은 듯 어색하게 웃었다. 사장은 천천히 군중을 둘러보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잠시 후 예리한 눈초리로 빠벨을 노 려보면서 말했다. "자네 꽤나 유식해 보이는데, 아니 그래, 자네 같은 사람이 정말로 이 조치가 얼마나 유 익한지를 이해할 수 없단 말인가?" 빠벨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만일 공장 돈으로 소택지를 메운다면 그거야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지요." "공장이 무슨 자선사업하는 덴 줄 알나? 난 여러분 모두에게 즉시 작업을 시작할 것을 명 령한다!" 사장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고 고철더미를 조심스레 발로 더듬으면서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군중 틈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사장이 멈추어 서서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모두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어딘가 멀리서 침묵을 깨는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혼자서나 가서, 일 실컷 하시오." "만약 15분 내로 작업을 시작하지 않으면 모두에게 벌금딱지를 떼도록 명령하겠다!" 사장은 똑똑한 목소리로 거칠게 대답했다. 그는 다시 군중을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무딘 불평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점점 눈에서 멀어질수록 다시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갔다. "사랑한테 가서 다시 말해!" "정의 찾더니, 겨우 그거야! 에라, 같잖은 재판관아..." 사람들이 빠벨을 향해 소리쳤다. "에이, 법률가 양반, 도대체 지금 뭐하는 거야?" "말만...말만 많이 해야 뭐 해, 사장이 오니까 모두 허산 걸!" "이보게나, 블라소프.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외침소리가 더욱 거칠어지자 빠벨이 소리쳤다. "동지들, 난 사장이 공제를 철회할 때까지 작업을 중단할 것을 제안합니다." 격양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바본 줄 알아?" "파업하자는 거야?" "돈 몇 푼 때문에?" "파업을 왜 못해?" "우린 모두 목이 달아날 거야..." "어느 놈이 일하겠다는 거야?" "꽤나 많을 걸!" "배신자가 되겠단 소린가?" 13... 빠벨은 아래로 내려와서 나란히 서 있었다.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서로 말다툼을 하기도하고 흥분해서 소리치 기도 했다. 르이빈이 빠벨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사람들을 파업까지 이끌긴 힘들걸세. 돈이라면 환장을 하면서도 겁이 너무 많아. 기껏해 야 한 300명 남짓 자네 편에 설까. 그 이상은 어려운 거야. 쇠스랑 하나로 퍼 올리기에는 퇴비 양이 너무 많아." 빠벨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눈앞에서 군중의 거대하고 시꺼먼 얼굴이 흔들거렸다. 그 의 두 눈을 까다롭게 응시하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빠벨에겐 그의 발이 사람들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생각되었다. 마치 오랜 가뭄으로 황폐해진 땅에 내린 하나의 빗 방울같이. 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다. 서글펐다. 어머니와 시조프가 그를 따랐다. 르 이빈은 그와 나란히 걸으면서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네, 얘기는 잘했는데, 그들의 가슴에다 대고 얘기하지를 못했어. 그게 문제야! 그들의 가슴에다 대고 말을 해야 해. 그래서 그들의 가슴에 불을 당겨야 한다고. 가슴 깊숙한 곳에 말야. 자네는 이성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지 못했어. 결국 신발이 발에 맞지 않는 거야. 너무 볼이 좁고 작아!" 시조프가 어머니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이제 무덤에나 가야 하오, 닐로브나! 새로운 세대의 민중이 자라 나고 있어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소? 그저 무릎을 꿇고 기기나 하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이나 하면서 살아온 게 아니오? 하지만 요즈막의 사람들은, 내가 잘은 모르지만 제정신들 을 차려가는 것 같소. 물론 어쩌다 일을 좀 그르치는 경우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우리네 와 다르다는 건 확실해요. 젊은이들을 보구려. 사장이란 사람과 얘기하는 데도 전혀 거리낌 이 없고 마치 너나 나나 똑같은 사람아니냐는 투 아니오..., 그래야만 하고! 그럼 다으멩 또 만나세, 빠벨 블라소프. 자네가 한 일은 잘한 일이야,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신께서 도 우실 걸세. 아마 자넨 뭔가 하여튼 방도를 찾아내고야 말 거야. 신의 가호가 있길 비네!" 그리고 그는 총총 사라졌다. 르이빈이 중얼거렸다.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전진! 자넨 이제 이미 이전의 자네가 아냐. 시멘트가 될 걸 세., 그러니 자네가 틈을 메워야만 해. 자넨 보았나, 빠벨? 자넬 대표로 뽑자고 소리치던 사람들 말일세. 자넬 보고 사회주의자다 선동가다 하면서 소리친 사람들도 바로 그들이었 어! 그들이 생각하는 건 뻔하네. 이를테면 당장 자기가 해고당하는 건 싫으니 자네에게 모 든 책임을 지우겠다는 거야." "그들로 봐서는 당연한 거죠!" 빠벨이 말했다. "늑대들이 서로를 물고 뜯는 것이 당연한 거나 별반 다를 게 없지..." 르이빈의 얼굴이 침울해 보였다. 또 그의 목소리도 유난히 떨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맨살의 말을 믿지 않아. 그러니 말에 피를 물들이려고 노력해야만 하네..." 그날 하루종일 빠벨은 우울하고 몹시 피곤했다. 도무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의 두 눈은 마치 무엇인가를 찾는 듯 붉게 불타올랐다. 어머니가 이것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 "어디 아픈 데라도 있니, 빠샤, 응?" "머리가 아파요." 생각에 잠겨 그가 말했다. "좀 누우려무나, 가서 의사를 불러 오마..." 그는 어머니를 쳐다보고 성가시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아녜요, 그럴 필요 없어요." 잠시 가만히 있다가 그는 갑자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전 너무 어리고 약해지기까지 해요. 그게 문제예요! 사람들은 저를 믿지 못하고 제 진실 을 지지하지 않아요. 정말 어떻게 밀고 나가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제 자신에게 실망했 어요. 이제 제 자신이 혐오스럽기까지 해요." 어머니는 그의 얼굴을 우울한 심정으로 쳐다보았다. 어떻게든 위로를 해 주고 싶어 차분 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너무 서두르지 말아라! 사람들이 오늘 비록 너를 이해하지 못했다 해도 내일은 이 해하게 될 게다..." "이해를 해야만 했어요!" "누가 뭐래도 나만은 네가 옳다는 걸 안다..." 빠벨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머닌 훌륭하신 분이세요..." 그 말을 하고 그는 돌아섰다. 어머니는 그의 나직한 말에 몸이 데기라도 한 듯이 손을 가 슴에 얹고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의 다정함을 행여 흘릴세라 가슴에 품고 방을 나갔다. 한밤중이었다. 어머니는 벌써 잠자리에 들었고 빠벨은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바 로 그때 헌병들이 들이닥쳐 마당이고 다락방이고 할 것 없이 여기저기 구석구석을 열심히 뒤지기 시작했다. 얼굴이 누렇게 뜬 장교는 처음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모욕적이고 조롱 기 섞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그 하는 모양이 조소를 즐기며 가슴에 상처를 입히려고 애 쓰는 바로 그것이었다. 어머니는 구석에 말없이 앉아서 한순간도 아들의 얼굴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표정에는 자신의 흥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 러나 장교가 웃음을 터뜨릴 때면 그의 손가락들은 이상스럽게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어머니 역시 장교에게 대답도 하지 않고 그의 농지거리를 모두 참아 내는 아들의 괴로움과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첫 번째 집수색을 당하던 때처럼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회색제복을 입고 발에는 박차를 단 밤손님들에 대해 억누를 길 없는 증오심을 느 꼈다. 바로 이 증오심이 불안을 집어삼켰던 것이다. 빠벨이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겨우 어머니에게 속삭였다. "저를 잡아갈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나지막한 소리로 대꾸했다. "알겠다..." 그녀는 그들이 아들을 감옥에 집어 처넣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바로 오늘 그가 노동자들 에게 한 말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를 했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위해 들고 일어나게 되면 결국 아들을 오래 잡아 두지는 못하리라는 것 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끌어안고 맘놓고 울고 싶었다. 그러나 장교가 그의 옆에 서서 두 눈을 부라리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입술도 부르르 떨렸고 콧수염도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치 그 모양이 어머니의 눈물과 하소연, 그 애원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말을 되도록 적게 하려고 애를 쓰면서 있는 힘을 다해 아들의 손을 쥐었다. 그리 고 숨을 억제하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이야기했다. "잘 가거라, 빠샤. 필요한 건 모두 챙겼니?" "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스도가 너와 함께 하시길..." 그가 잡혀 가자 어머니는 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고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벽에 등을 기대었다. 슬픈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무력감을 생각하면 그저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오래오래 흐느껴 울었다. 마치 상처받은 가슴의 고통을 그 울음에 담아 흘려 보내기라도 하듯이. 그녀의 눈앞에는 붙박여있는 얼룩 과도 같이 드문드문 콧수염을 기른 누런 얼굴이 우뚝 서서 잔뜩 찡그린 두 눈으로 만족스럽 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가슴속에서는 진실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자기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간 사람들에 대한 울분과 적개심이 시꺼먼 소용돌이가 되어 휘돌고 있었다. 날씨가 몹시 추웠다.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치고 있었다. 밤 동안은 눈 없는 넓고 시뻘건 얼굴에 긴 팔을 가진 회색빛 모습들이 집 주위를 어슬렁대고 누구를 잡으려는 듯 몰래 숨어 잇는 것 같았다. (나도 함께 잡아갈 일이지.) 그녀는 생각했다. 노동자들을 일터로 부르는 공장 사이렌이 울부짖는 소리를 내었다. 오늘은 왠지 그 울부 짖음이 공허하고 음울하며 망설이는 듯했다. 문이 열리고 르이빈이 들어왔다. 그는 그녀 앞 에 우뚝 서서 손바닥으로 수염에 흐르는 빗방울을 훔쳐내면서 물었다. "빠벨을 잡아갔지요?" "그래요, 잡아갔소. 저주받을 놈들 같으니!"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르이빈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예상했던 일입니다. 우리 집도 수색을 했어요. 여기저기 안 뒤진 데가 없지요. 정말 엉 망으로 해 놓았어요. 욕을 한참 퍼붓더니만 더 이상 해를 끼치진 않더군요. 그러더니 빠벨 을 잡아갔어요. 사장이 눈을 한번 끔뻑하니까 헌병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급기야는 사람이 하나 없어진 겁니다. 그들은 한통속이오. 한 쪽 놈들이 민중의 젖을 짜낼 때 또 다른 똑 놈 들은 뿔로 민중을 들이받고 있는 거요..." "당신들이 빠벨 같은 사람을 위해 들고일어나야만 해요! 그게 다 모두를 위해 한 일 아니 냔 말이오." 벌떡 일어서면서 어머니가 외쳤다. "누가 들고일어나야 한단 말입니까?" "모두가 다!" "그렇지 않아요!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얼굴엔 웃음을 그득 담고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놓으면서 가 버렸다. 그의 희망 없는 말이 어머니의 슬픔만 더하게 해 놓았다. (혹시 때리거나 고문을 한다면...) 어머니의 눈앞에는 갈기갈기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아들의 모 습이 떠올랐다. 공포가 차디찬 돌덩이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숨이 콱콱 막혔다. 두 눈이 아 팠다. 그녀는 벽난로에 불을 지피지고, 저녁상을 차리지도, 차를 마시지도 않고 있다가 저녁 늦 게서야 빵 한 조각을 뜯어먹었을 뿐이었다. 잠자리에 들자 지금의 삶이라는 것이 그렇듯 공 허하고 외로울 수가 없었다. 요즈막에 들어 그녀는 뭔가 의미 있고 좋은, 어떤 것에 대해 부단히 기대하는 삶에 익숙해 있었다. 그녀의 주위엔 요란한 삶이 마련되어 있었고 항상 젊 은이들이 분주히 드나들었으며, 그녀 앞엔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한결 의미 있는 삶의 창조 자인 아들의 진지한 얼굴이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이런 아들이 잡혀 가고 나니 이젠 낙이 라고는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14... 이 이튿날은 시간이 느릿느릿 기어갔다. 밤엔 꿈조차 꾸지 않았다. 그 다음날은 더 더욱 지겨웠다.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렸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저녁이 찾아왔다. 그리고 밤이다. 비가 한숨을 크게 내쉬고 이내 창문 유리에 물방울을 튀겼다. 배수관은 물 내려가 는 소리로 요란했고 마루 밑에선 뭔가가 장난을 치고 있었다. 지붕 위에서 물방울이 주룩주 룩 떨어졌다. 물방울 듣는 그 음울한 소리가 시계 똑딱이는 소리와 묘하게도 엉키었다. 집 전체가 조용히 흔들리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쓸데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마치 우수로 무감 각해지듯이... 누군가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린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그녀는 이렇게 문 두드리 는 소리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별로 놀랄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가슴을 찌르는 듯한 짜릿한 기쁨에 몸이 사뭇 떨렸다. 당혹감이 얽힌 희망으로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그 녀는 얼른 숄을 두르고 문을 열었다... 사모일로프가 들어오고 그의 뒤를 따라서 어떤 사람이 또 하나 들어왔다. 그는 외투깃으 로 얼굴을 가리고 모자를 눈 밑에까지 내려 쓰고 있었다. "주무시는 걸 저희가 깨우지나 않았나요?" 인사도 않고 사모일로프가 물었다. 그는 평소와는 달리 무언가 근심스런 것이라도 있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자지 않았소."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고 무엇을 기대하는 듯한 눈빛으로 말없이 그 두사람을 응시했다. 사모일로프의 동행은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거운 털모자를 벗은 다음, 어머니에게 넓적한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짧았다. 말하는 품이 너무나 다정해 마치 오랜 친구에게 하는 것 같았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어머님! 절 못 알아보시겠어요?" "이게 누구요? 이고르 이바노비치?" 소리쳐 대답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별안간 기쁨이 깃들었다. "네, 바로 알아보셨습니다." 그가 커다란 머리를 아래도 떨구면서 대답했다. 마치 신부의 그것같이 긴 머리카락이 하 늘거렸다. 그의 통통한 얼굴은 선량한 표정을 지으며 웃고 있었고, 그의 작고 귀여운 잿빛 두 눈은 어머니의 얼굴을 다정하면서도 맑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양이 꼭 사모바르를 닮 았다. 동글동글한 얼굴, 작은 키, 게다가 투실투실한 목과 짧은 팔이 그러했다. 더구나 가 슴에선 줄곧 무엇인가가 콸콸거리고, 어떨 땐 가르릉거리는 소리도 났다... "방으로 들어가요, 옷 입고 갈테니!"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님께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사모일로프가 눈을 들어 어머니를 힐끔 쳐다보면서 걱정스러운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고르 이바노비치가 방안에 들어가서 밖에다 대고 말했다. "어머님, 오늘 아침에 어머님도 잘 아시는 니꼴라이 이바노비치가 감옥에서 풀려났습니 다..." "그 사람 감옥에 간 줄은 몰랐는 걸?" 어머니가 대꾸했다. "두 달하고도 열하루만에 풀려난 거예요. 거기서 우끄라이나인을 만났다더군요. 어머님께 안부 전하더랍니다. 또 빠벨도 어머님께 안부 전하면서 너무 걱정하시지 말라고 신신당부하 더랍니다. 그리고 이런 길을 가는 사람들한테는 꼼꼼한 우리 당국이 만들어 운영하는 훌륭 한 유식처라고 하더라는군요. 그럼 어머님, 제가 찾아온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 여 기서 몇 명의 동지가 잡혀 갔는지 어머님은 알고 계십니까?" "모르겠는걸! 그럼 빠샤말고도 또 있단 말이오?" 이고르 이바노비치가 침착한 어조로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빠벨은 마흔아홉 번째로 잡혀 간거랍니다. 한 열 명은 더 당국에 의해 잡혀 간다고 봐야 만 합니다. 이를테면 여기 이 양반도 예외는 아닙니다..." "맞습니다. 저도 잡혀 갈 거예요." 사모일로프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어머니는 호흡이 한결 수월해진 것을 느꼈다. (적어도 거기에 빠벨이 혼자 있는 건 아니구나!) 이런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머니는 옷을 갈아입고 방안에 들어가 손님들에게 건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많이 잡아갔다니 오래 잡아 두지는 않겠구만..." "물론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번 일만 성공적으로 해치운다면 분명 그들을 아주 바보로 만 들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바로 이거예요. 만약 우리가 지금 공장 안에다 전단 뿌리는 일 을 그만둔다면, 헌병들은 이런 상황을 걸고 넘어져 빠벨과 동지들에게 그 화살을 돌리고 결 국 그들을 감옥에 처넣는 데 이용해 먹을 거라는 거죠..." 이고르 이바노비치가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어머니가 놀라서 소리쳤다. 이고르 이바노비치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건 매우 간단합니다! 가끔 헌병들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갈 때가 있어요. 어머님, 한번 생각해 보세요! 빠벨을 잡아들이기 전엔 전단과 유인물들이 나돌았다, 그런데 빠벨을 잡아 들이자 전단과 유인물들이 없어졌다, 그렇다면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고 다닌 놈은 바로 빠 벨이란 놈이다, 뭐 이렇게 생각 않겠어요? 아마 그 놈들은 모두를 먹어 치우기 위해 달려들 기 시작할 겁니다. 헌병놈들이 인간의 피를 말리는 짓거리를 얼마나 좋아한다고요. 그러니 뭐 하나 말 않고 견뎌 낼 수가 없어요." "알았소, 알았어! 아아, 하느님 맙소사!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소?" 어머니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엌에서 사모일로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그 놈들은 거의 모든 사람들을 잡아갈 겁니다. 뒈져 버려라. 빌어먹을! ...이제 우 리는 예전처럼 하던 일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어요. 일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동지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일할 사람이 없어!" 이고르가 웃으며 말하곤 덧붙였다. "우리는 최고의 문학작품을 갖고 있어요. 제 작품이죠! ...그런데 하나 문제가 있어요. 바로 그것을 어떻게 공장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느냐 하는 겁니다." "정문에서 들어가는 사람마다 몸수색을 하기 시작했어요." 사모일로프가 말했다. 어머니는 그들이 자기에게서 뭔가를 원하고, 또 기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자 서둘러 물 었다. "그럼 어쩐다지? 할 일이 뭐요?" 사모일로프가 문지방 위에 나타나 말했다. "뺄라게야 닐로브나, 행상을 하는 꼬르수노바를 아시죠?" "알지, 그런데?" "그 여자한테 얘기해 보면 어떨까요? 혹시 그 여자가 그 일을 해 줄는지도 모르잖아요?" 어머니가 손을 내저었다. "오, 안될 말이오. 그 여편넨 입이 가벼워 놔서 안돼! 그 놈들이 만약 유인물이 나를 통 해서, 우리 집에서 나온다는 걸 듣게 되는 날이면... 안돼 , 안될 말이라고!"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이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걸 내게 주시오, 내게 달란 말이오! 내가 그 일을 해 보겠고. 내게도 수가 있을 거야. 우선 날 조수로 써 달라고 마리야한테 부탁해 보겠소. 나도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면 난 음식을 공장 안으로 가져 갈 수 있을테고 모든 게 생각대로 잘될 거요." 가슴 위에다 두 팔을 얹고서 그녀는 모든 일이 무사히, 그리고 감쪽같이 진행되리라는 성 급한 확신을 가졌다. 결국 승리감에 도취되어 소리쳤다. "그 놈들은 알게 될 거야. 빠벨이 없어도, 비록 감옥에 있더라도 손만은 공장에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암 알게 되고말고!" 그들 세 사람은 갑자기 기운이 솟았다. 이고르는 두 손을 힘차게 비비면서 얼굴 가득 웃 음을 띠고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어머님! 어머님은 이 일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지 모르실 거예요. 너무 훌 륭하셔서 눈이 부실 정도랍니다." "이 일만 성공한다면 당장 감방에 가더라도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기분일 겁니다." 두 손을 비비면서 사모일로프가 말했다. "어머님이 지금 얼마나 아름다우신줄 아십니까?" 이고르가 목이 잠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머니는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만약 이제라도 공장에 유인물이 계속해서 뿌려진다면 당국은 그 동안 뿌려졌던 것들이 자기 아들이 한짓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은 명백한 일이었 다. 그리고, 임무를 완수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심 느끼면서 그녀는 기쁨에 온몸을 떨었 다. "자네, 다음에 빠벨을 만나러 가거든 정말 훌륭하신 어머님을 두었노라고 말해 주게 나..." 이고르가 말했다. "난 곧 빠벨을 만나게 될 겁니다!" 사모일로프가 웃으면서 다짐을 했다. "그 애를 만나거든 이렇게 말해 주게. 이 에미는 해야 할 일은 어느 것이나 가리지 않고 하겠다고 말일세. 그 애가 이런 내 마음을 알 수 있도록..." "헌데 만약에라도 그 놈들이 이 사람을 감방에 집어 넣지 않으면요?" 이고르가 사모일로프를 가리키며 물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으라고!" 그들 둘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어머니는 금세 자기가 실수한 것을 알아차리고, 어느 표정으로도 그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다만 나직하고 적잖이 계면쩍은 웃음만을 지 어 보일 뿐이었다. "제 일에 눈이 먼 사람은 남의 어려움을 보지 못하는 법이야!" 두 눈을 넌지시 내리깔며 그녀가 말했다. 이고르가 소리쳤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어머님, 빠벨에 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슬퍼하실 필요 도 없고요. 빠벨은 더욱 훌륭해진 모습으로 감옥에서 돌아올 겁니다. 그 안에선 쉴 수도 있 고 공부도 한답니다. 우리의 동지들은 자유의 몸으로는 결코 그럴 만한 시간적 여우가 없거 든요. 저는 세 번이나 감옥에 갔었는데, 그때마다 그다지 만족스러웠다고는 할수 없어도 지 적인 면으로나 가슴의 열정으로 볼 때는 유익했다는 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어요." "숨쉬는 모양이 꽤나 힘들어 보이는구려!" 그녀는 이고르의 평범한 얼굴을 다정스레 바라보면서 말을 건넸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답니다." 그가 손가락을 위로 쳐들면서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결정된 거지요, 어머님? 내일 저희가 인쇄물을 어머님께 갖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어둠의 시대를 불사를 수레바퀴는 다시 돌게 될 것입니다. 자유언론 만세, 그리고 어머니 사랑 만세! 그럼 또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우리 어머니 같으면 엄두도 못낼 일입니다. 정말예요!" 사모일로프가 어머니의 손을 굳게 잡으며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날이 오겠지." 어머니는 그를 유쾌하게 해 주려는 마음으로 말했다. 그들이 떠나고 나자 그녀는 문을 잠그고 방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앉아 빗소리에 맞추 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말없는 기도였다. 오직 빠벨에 의해 그녀의 삶 속으로 이끌려진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생각뿐이었다. 그들은 마치 그녀와 성모상 사이를 헤매는 것 같았다. 평범하고 이상하리만치 서로 친밀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외로워 보이는 그들이었다. 아침 일찍 그녀는 마리야 꼬르수노바를 찾아갔다. 언제나 그렇듯이 능청맞고 수다스런 행상 아낙은 그녀를 동정 어린 눈으로 맞아 주었다. "그래 얼마나 상심되시우?" 그녀가 어머니의 어깨를 투실투실한 손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 "그렇다고 절대 절망하면 안돼요! 그자들이 빠벨을 잡아갔다지만 대수로운 일은 아녜요! 부끄러워할 필요는 하나도 없다, 이 말씀입니다. 예전에도 감방에 처넣는 경우가 허다했어 요. 하지만 옛날엔 도둑질을 했다는 명목이었고 지금이야 엄연히 옳은 걸 옳다고 말한 것 때문아니우? 빠벨이 설사 좀 벗어나는 말은 했다 해도 그게 다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한 일 이니 결국 다들 빠벨을 이해하게 될 거유. 너무 염려 말아요. 비록 말은 안 해도 모두들 누 가 옳은지는 알고 있을 거라우. 나도 사람들을 모아서 당신을 찾아가려 했지만 어디 시간이 있어야지요. 하루 온종일 음식을 만들고, 그걸 돌아다니며 팔아 목구멍에 풀칠하는 신세니. 당신도 알겠지만 이게 거지가 아니고 무어란 말이우! 남정네들이란 그저 무엇 하나 못 뜯어 먹어 안달이니, 저주받을 종자들! 여기서도 갉아먹고 저기서도 갉아먹고 마치 빵 갉아먹는 바퀴벌레 같다니까요. 겨우겨우 한 10루블쯤 모았나 싶으면 웬 빌어먹을 것들이 나타나 돈 을 고스란히 핥아먹는 겁니다. 여편네란 참 못해 먹을 짓이라우. 이 세상에서 반드시 없어 져야만 할 거예요. 혼자 사는 게 힘들다면 같이 사는 건 얼마나 짜증나는 일이냐 말입니 다." "난 당신을 도와줄 일이 없나 해서 찾아왔소!" 어머니가 그녀의 수다를 가로채면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유?" 마리야가 놀라 되물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설명을 듣고 나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럼요! 도와줄 일이 있을 거유. 이전엔 당신이 날 남편에게서 숨겨 주곤 했지 않수? 이 젠 내가 당신을 가난으로부터 숨겨 줘야 하는구랴... 누구나 할 것 없이 당신을 도와야만 해요. 당신 아들이 공적인 일로 고생을 하고 있으니 말이우. 아들 하나는 참 잘 두었수. 훌 륭한 젊은이야.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다 그런다니까요. 모두들 그 애를 동정하고 있다 우. 나도 자신있게 말할 수가 있어요. 이번에 사람들을 잡아간 일 때문에 당국도 좋을 거 하나 없을 거유. 지금 공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한번 보시우. 모두들 말하는 게 심상치 않은 눈칩니다. 아마 웃대가리에 있는 것들은 사람 발뒤꿈치를 한 대 걷어차면 멀리 달아나지 못하려니 생각했는가 봅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떤가 봐요. 열 사람을 치니까 백 사람이 들고 일어서지 않수!" 결국 이튿날 점심 때 어머니는 마리야가 만든 음식을 담은 항아리 두 개를 들고 공장에 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대신 마리야 자신은 시장에 나가 음식을 팔기로 했다. 15... 노동자들은 나타난 음식행상을 이내 알아보았다. 몇몇이서 그녀에게 다가와 마치 격려라 도 하듯이 말했다. "일을 시작하셨군요, 닐로브나?"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빠벨이 곧 석방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녀를 위로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불길한 말로 그녀의 슬픈 가슴을 불안케 하기도 했다. 게다가 사장과 헌 병들에게 분개한 어조로 욕설을 퍼부음으로써 그녀의 공감을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엔 무슨 통쾌한 일이라도 만난 듯 기뻐하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출근계원 이사이 고르보프 같은 사람은 악다문 이빨을 드러내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가 만약 통치자라면 당신 아들을 교수형에 처해 버릴텐데!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직을 못하도록 말야!" 이런 악독한 협박을 당할 때면, 그녀는 시체의 차디참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사이 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주근깨투성이의 작은 얼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눈을 땅으로 내리깔았다. 나오느니 한숨뿐이었다. 공장 안에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무언 가를 서로 속닥거리고 잔뜩 겁먹은 작업감독들이 여기저기 눈치를 살피며 돌아다니고 있었 던 것이다. 가끔 욕설과 신경질적인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경찰 둘이 사모일로프를 끌 고 어머니의 옆을 지나쳤다. 그리고리 사모일로프는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또 한 손 으로는 자기의 빨간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지나갔다. 약 백 명 남짓한 노동자들이 무리를 지어 그의 뒤를 따르며 경찰에게 욕설과 야유를 퍼붓 고 있었다. "산책하러 가는 건가, 그리샤[그리고리의 애칭]!" 누군가가 사모일로프에게 소리쳤다. "우리 형제들을 공경할 줄도 아는군! 호위까지 해 주시니 말야..." 다른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 곧 이어 지독한 욕설이 뒤따랐다. "도둑놈들을 잡아들여선 이젠 이문이 남지 않는가 보군! 그래서 이제부턴 우리 선량한 형 제들을 잡아가시겠다 이거지..." 키가 큰 애꾸눈 노동자가 큰소리로 신랄하게 말했다. "한반중엔 잡아간다면 또 몰라! 이 벌건 대낮에, 이 뻔뻔스런 놈들, 개만도 못한 놈들 같 으니!" 군중 속에서 누군가의 맞장구치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들은 침통한 얼굴로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빠른 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 마치 그들을 따르는 고함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세 명의 노동자가 커다란 쇠막대기 를 나르다가 그들과 마주치자 그들을 향해 쇠막대기를 흔들어 보이면서 소리쳤다. "조심해! 사람 잡는 어부놈들아!" 어머니의 옆을 지나가면서 사모일로프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우리를 억지로 잡아간답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심지어 얼굴엔 웃음을 띠기까지 하면서 감옥으로 끌 려가는 이 정직하고 착실한 젊은이들을 보면서 어머니는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그녀의 마 음에선 그들에 대한 자애로운 어머니의 사랑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공장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마리야의 집에서 그녀의 일도 돕고 또 그녀의 수다도 들어주면 서 하루 온종일을 보냈다.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왔다. 텅 비고 썰렁했으며, 결코 편안하다 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방안을 이 구석 저 구석 들쑤시고 다녔지만 어디 하나 쉴곳도 없었고 더구나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이내 어둠이 밀려 오고 그녀의 마음은 불안해졌다. 유인물을 가져 오기로 했던 이고르 이바노비치가 아직 오지 않 았기 때문이었다. 창 밖에는 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잿빛의 묵직한 눈송이였다. 창문 유리 에 사뿐히 내려 앉았다가 소리 없이 아래로 흘러내리거나 축축한 자국을 남긴 채 녹아 내리 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 생각이 간절했다... 조심스럽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재빨리 문으로 다가가 빗장을 열었다. 사샤가 들어왔다. 어머니는 그녀를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언뜻 보기에 살이 찌기라도 한 듯 처녀의 몸이 비대해 보였다. 어머니는 때 마침 적적한 밤을 함께 해 주기 위해 사람이 찾아왔음을 기뻐하면서 인사했 다. "잘 지냈소? 처녀를 본 지가 꽤 오래 되었구려. 그래 어디 멀리 떠나기라도 했었나?" "아녜요. 전 감옥에 있었어요. 니꼴라이 이바노비치와 함께 있었어요. 그를 기억하시죠?" 처녀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단 말이오! 어제 이고르 이바노비치가 내게 얘기해 주었지, 그가 풀 려났다고. 하지만 처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나... 처녀가 감옥에 있다는 걸 누구 하나 말해 주는 사람이 있었어야지..." "뭐 좋은 일이라고 말하겠어요. 이고르 이바노비치가 오기 전에 옷이나 갈아입어야겠어 요!" 방안을 둘러보면서 처녀가 말했다. "죄다 젖었구만..." "유인물과 전단을 가져 왔어요..." "어디, 줘 봐요." 어머니는 서둘러 말했다. 처녀가 재빨리 외투의 단추를 끄르고 몸을 흔들자 마치 나무에서 잎사귀가 떨어지듯 처녀 의 몸에서 종이 다발들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면서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어머니는 얼굴에 웃음을 담고 바닥에서 종이 뭉치들을 주워 들면서 말했다. "어쩐지 보니까 처녀의 몸이 많이 불었더라고. 그래서 시집가서 애를 가졌나 생각했지. 아휴, 많이도 가져 왔구려! 걸어서 왔소?" "예." 사샤가 대답했다. 사샤는 이젠 예전처럼 다시 균형 잡힌 가냘픈 몸매가 되었다. 어머니는 그녀의 양 볼이 움푹 들어가고, 커진 두 눈 밑에는 어두운 주름이 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제 막 풀려난 모양인데 쉬지도 못하고. 안 그래요, 처녀?" 한숨을 내쉬고 고래를 가로 저으면서 어머니가 말했다. 처녀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대답했다. "해야 될 일인 걸요. 빠벨 미하일로비치가 어떤지나 말씀해 주세요. 아무 일 없죠? 그렇 게 흥분하진 않았겠죠?" 사샤는 어머니의 얼굴을 애써 외면하면서 물었다. 고개를 떨구고 나서 머리카락을 매만지 는 그녀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아무 일도 없어. 그 애는 쉽게 자신을 내버리는 짓은 하지 않을 거라오." 어머니가 대답했다. "빠벨 건강은 염려 없겠죠?" 처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감기 한번 걸려 본 적이 없는 애라오. 이런 온몸을 떨고 있군. 내 얼른 차를 끓여 주리다, 딸기쨈도 내오고." "그거 멋진 생각이세요! 너무 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모르겠어요. 밤도 늦었는데. 제가 할께요..." "피곤하지 않누?" 어머니가 사모바르를 준비하면서 나무라듯 말했다. 사샤도 부엌으로 나가 긴 의자에 앉아 서 두 손을 포개 뒷머리를 받친 채 말했다. "어쨌거나 감옥은 사람을 쇠약하게 만드는 곳예요. 그 망할 놈의 지루함이란! 아무 일도 안 하고 앉아 있는 것보다 지긋지긋한 일은 없어요. 알고 계시겠지만 얼마나 할 일이 많아 요. 그런데 짐승처럼 우리에 갇혀 앉아 있으려니..." "이 모든 고생을 누가 보상해 줄까?" 어머니가 물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고 스스로 대답했다. "아무도 없어, 주님말고는! 그런데 처녀도 주님을 믿지 않지?" "믿지 않습니다." 처녀가 고개를 저으면서 짧게 대답했다. "난 도무지 믿어지질 않아!" 갑자기 흥분해서 어머니가 외쳤다. 그리고 어머니는 숯검정이 묻은 손을 재빨리 앞치마에 문지르면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자신의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주님에 대한 믿음없이 그나마도 삶이란 게 가능할까?" 현관에서 누군가가 발소리를 내면서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처녀가 재빨리 일어나 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직 문을 열지 마세요. 만약에 헌병이면 어머닌 절 모르시는 척하는 거예요! 제가 잘못 알고 이 집을 찾아들어 들어서자마자 정신을 잃고 쓰러진 거예요. 어머니께서 옷을 벗겨 보 니 전단이 나온 겁니다. 아시겠어요?" "기특한 사람 같으니, 왜 그래야만 하지?" 어머니가 감동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요!" 귀를 기울여 보더니 사샤가 말했다. "이고르인 것 같아요..." 정말 이고르였다. 그는 온통 비에 젖은 몸으로 지친 듯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어이구, 차 한잔 끓여 주시겠어요? 그게 이 세상에서 최고예요, 어머님! 벌써 와 있었었 군요, 사샤?" 그가 말했다. 목이 잠긴 그의 목소리가 좁은 부엌 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육중한 외투를 벗으면서도 말을 끊지 않고 계속했다. "어머님, 여기 이 아가씬 당국에선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랍니다. 감방간수한테 모욕을 당 하고서 만약 사과를 하지 않으면 굶어 죽겠노라고 대놓고 큰소리쳤답니다. 여드레 동안이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를 않았는데 정말 숨이 넘어가기 바로 직전까지 갔어요. 대단한 여자죠? 우리네 위라면 어땠겠어요?" 그는 짧은 두 손으로 볼품없이 축 늘어진 배를 움켜쥐고서 방으로 들어왔다. 손을 뒤로 해서 문을 닫고는 거기서도 줄곧 무슨 얘긴지를 계속했다. "정말 처녀는 여드레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단 말이야?" 어머니가 놀란 듯 물었다. "간수가 제 앞에서 잘못을 빌어야만 했어요." 추운 듯 어깨를 움츠리며 처녀가 대답했다. 그녀의 태연함과 완고함은 어머니의 마음에 책망 비슷한 그 무엇을 불러일으켰다. (저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머니가 다시 물었다. "그러다 정말 죽으면 어쩌려고?" "그럼 어쩔 수 없죠, 뭐! 하지만 결국 그자는 미안하다고 말했어요. 인간은 모욕을 용서 하면 안됩니다." 처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가 천천히 대꾸했다. "맞아..., 한평생 모욕만 당하고 사는 게 우리네 여자들이지..." "그렇다면 전 짐을 하나 벗은 셈이군요." 문을 열면서 이고르가 말했다. "사모바르는 준비되었나요? 뱃속에 뭐 좀 집어 넣어야겠어요..." 그가 사모바르를 가져 오면서 말했다. "저의 아버지는 하루에 차를 최소한 스무 잔은 마셨어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일생 동안 병 한번 앓아 보신 적이 없었어요. 일흔셋까지 사시면서 말입니다." "체중이 8뿌드[역주:구러시아의 중량 단위, 1뿌드는 16.38킬로그램]나 나가셨어요. 보스 끄레스끄 마을에서 집사를 보았답니다." "그럼 아버님이 이반이오?" 어머니가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을 어떻게 아시죠?" "나도 보스끄레스끄 출신이라오!" "제 고향분이시라고요? 어느 분의 따님이셨지요?" "당신에 이웃이지! 세레긴 씨네라고." "다리를 절으시던 닐 씨 말씀이시군요? 어쩐지... 저도 그분을 잘 알아요. 그분이 제 귀 를 얼마나 많이 잡아다니셨다고요..."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서 끝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렸 다. 사샤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둘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어머니는 정신이 들었다. "오, 미안해요. 얘기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그만! 고향사람을 보니 너무 기뻐서..." "아녜요, 오히려 괜한 방해를 했으니 제가 사과를 드려야지요. 그런데 벌써 11시네요. 전 갈 길이 멀어서..." "어딜 간다고 그래? 시내까지?" 어머니가 놀란 듯 물었다. "예." "그게 무슨 소리야? 칠흑 같이 어둔 데나 날도 은데. 거기다 몸이 피곤해서 되겠어! 여 기서 하룻밤 자도록 해요. 이고르 이바노비치가 부엌에서 자고 우린 여기서 함께 자면 되잖 아..." "아녜요. 가야만 해요." 사샤가 잘라 말했다. "그렇습니다. 어머님. 아가씨는 얼른 떠나야만 해요.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요. 그리고 만 약 그녀가 내일 가다가 거리에서 사람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좋을 게 없어요." 이고르가 말했다. "여자 몸으로 어떻게 간담? 그것도 혼자서 말야." "가야 해요." 웃으면서 이고르가 말했다. 처녀는 손수 차를 따르고 흑빵 한 조각을 집어 소금을 친 다음 먹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바라보는 눈이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도대체 당신들은 어떻게 왔다갔다하는 거지? 처녀도 그렇고 나따샤도 그렇고, 나라면 못 다녀, 무서워서 원!" 어머니가 말했다. "사샤도 역시 무섭답니다. 사샤, 그렇지요?" 이고르가 말했다. "물론예요!" 처녀가 대답했다. 어머니는 처녀와 이고르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군!" 차를 다 마시고 나서 사샤는 말없이 이고르의 손을 잡고 부엌으로 향했다. 어머니도 그녀 를 전송하기 위해 따라 나갔다. 부엌에서 사샤가 말했다. "빠벨 미하일로비치를 만나시거든 제가 안부 전하더라고 말씀해 주세요. 꼭요!" 그녀는 손잡이를 잡다 말고 별안간 돌아서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제게 키스해 주시지 않겠어요?" 어머니는 말없이 그녀를 포옹하고 뜨거운 키스를 해 주었다. "고맙습니다!" 처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 다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방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떨리는 마음으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속에선 여전히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혹 쁘르조로프씨 생각나세요?" 이고르가 물었다. 그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 찻잔을 연신 불어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땀이 흥건하 게 배어선지 불그스레하게 보였고, 한편으로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각나, 생각나고말고!" 어머니가 허리를 탁자에 가까이 가져 가면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리 고 자리에 앉아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이고르를 쳐다보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아, 가엾어라, 사샤! 어떻게 혼자 시내까지 걸어간담?" "그녀는 몹시 피곤할 거예요. 감옥이란 놈이 그녀를 온통 뒤흔들어 놓았어요. 예전엔 정 말 강한 여자였는데... 더구나 곱게 자랐거든요. 건강을 꽤 해친 것 같아요..." "어떤 처년지 좀 자세히 얘기해 주구려." 어머니가 나직이 물었다. "어떤 지주의 딸이랍니다. 아버지란 사람은 돈이라면 그저 사족을 못쓰는 사람이었대요. 그녀 입으로 그러더군요. 저, 어머님, 둘이서 결혼하고 싶어하는 거 알고 계세요?" "누구를 말하는 거지?" "누군 누구예요. 사샤하고 빠벨이지요... 하지만 그게 그리 쉽진 않아요. 빠벨이 밖에 있 으면 그녀가 감옥에 들어가고, 또 다음엔 그 반대로 되곤 하니..." "난 몰랐어."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어머니가 대답했다. "빠샤가 어디 제 얘기를 하는 적이 있어야지..." 이제 어머니는 한결 그녀에게 동정이 갔다. 적잖이 원망 섞인 시선으로 이고르를 보면서 말했다. "좀 바래다 줄 걸 그랬어!" 이고르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럴 순 없어요. 저도 이곳에서 할 일이 태산 같아요. 내일 아침부터 하루 온종일 여기 저기를 끝도 없이 돌아다녀야 해요. 천식을 앓고 있는 저 같은 사람한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참 좋은 처녀야." 어머니는 이고르가 자기에게 말해 준 것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얼버무리듯 말했다. 한편 그런 얘기를 아들에게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것이 조금 섭섭했다. 그래서 입술을 꼭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좋은 여자예요!" 이고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에, 어머님께선 그녀를 동정하시나 본데,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어머님께서 우리 같은 모반자들을 모조리 동정하기 시작하신다면 어머님의 가슴은 남아 나지를 않을 겁 니다.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치고 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얼마전 에 제 동지 하나가 유형에서 돌아왔답니다. 그가 니즈니 노브고로드로 유형을 떠나자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스몰렌스끄에서 그를 기다렸어요. 그런데 그가 스몰렌스끄로 가 보니까 아 내와 자식들은 이미 모스끄바의 감옥에 들어가 있더라는 겁니다. 이번엔 아내와 자식들이 시베리아로 갈 차례지요. 저도 아내가 있었어요. 훌륭한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5년여에 걸 친 그런 생활에 그녀는 무덤으로 간 지 벌써 오랩니다..." 그는 차 한잔을 단숨에 모두 마셔 버리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감방과 유형지에서 보낸 수 없이 많은 나날들을 하나한 열거하면서 이런저런 비참한 생활, 감옥에서 받은 학대, 그리고 시베리아에서 겪었던 배고픔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어머니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고통과 박해,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조소로 가득찬 이런 삶을 그 렇게도 간단한 말로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젠 우리가 해야 할 일로 돌아가죠." 목소리를 차분해졌고 얼굴 표정도 한결 진지해졌다. 그는 공장 안으로 유인물을 실어 나 르는 방법에 대한 어머니의 복안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가 자질구레한 일까 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에 대한 이야기를 일단 마무리 짓고 그들은 다시 고향 마을에 대한 기억을 더듬기 시작 했다. 그가 농담으로 익살을 떨 때면 어머니는 생각에 잠겨 과거를 헤매는 것이었다. 마치 그녀는 작은 언덕이 단조롭게 머리를 내밀고 있고, 두려운 듯 떨고 있는 가는 사시나무와 키 작은 전나무, 그리고 숲 가운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듯한 흰 자작나무로 빙둘러쳐진 소택지 비슷한 어떤 곳을 방황하는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자작나무들은 느릿느릿 자라나 썩어빠진 진흙탕 속에 뿌리를 내리고 5년 내내 서 있다가 결국 쓰러져 썩어 버리는 것이었 다. 그녀는 그런 정경을 그려 보다가 이내 들뜬 참을 수 없는 가엾음에 온몸이 마비되는 것 을 느꼈다. 그녀의 앞에는 처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준엄하고 강인한 얼굴이었다. 처녀는 지금 지친 몸을 이끌고 혼자서 휘몰아치는 눈발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한편 아들은 감 옥에 갇혀 있다. 아직 잠들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어머니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에겐 어머니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는 것이다. 현란하게 뒤엉킨 구름처럼 무거운 상념들이 그녀의 위로 기어 올라와 가슴을 강하게 짓눌렀다. "고단하시겠습니다, 어머님! 이젠 그만 주무세요." 이고르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니는 이고르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허리를 약간 굽힌 조심스런 걸음걸이로 부엌 으로 갔다. 가슴안엔 살점을 도려내는 듯한 쓰디쓴 감정이 가득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이고르가 말했다. "만약에 그자들이 어머님을 붙들고 이런 불온 문서들을 어디서 구했느냐고 묻는다면, 어 머님께선 어떻게 말씀하시겠어요?" "<당신들이 상관할 바 이니오>하고 말하지." "그런 식으로는 그들은 따돌리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그 놈들은 옳다구나, 하나 제대로 걸렸군 하고 확신할 겁니다. 그리고는 아주 집요하게 캐물을 거예요, 끈질기게!" "그래도 말하지 않겠어!" "그럼 감옥에 가시게 될텐데요." 그녀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떤가? 그렇게라도 해서 내가 쓸모 있는 인간이 된다면 주님께 감사하겠소. 내가 그 누구한테 쓸모 있겠나? 아무도 날 필요로 하지 않는다오. 그들이 이 늙은이를 고문이야 하겠나..." 이고르가 어머니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흠! 고문이야 않겠죠. 하지만 필요한 인물은 스스로 자신을 돌보아야만 합니다..." "그런 걸 갖고 설교할 필요는 없다오." 어머니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이고르는 말없이 방안을 왔다갔다하다가 어머니에게 다가와 말했다.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어머님! 어머님께는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손을 내저으면서 어머니가 대답했다.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 아니오! 아마도 그걸 이해할 줄 아는 사람들만큼은 한결 수월하겠 지... 하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오. 좋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이오..." "어머님, 그걸 이해하신다면 결국 어머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인물이 되셨다는 걸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이고르가 심각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그를 쳐다보고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정오가 되자 어머니는 태연하고 능숙하게 유인물들을 가슴에 숨겼다. 그 모습이 어찌나 세련되고 편안해 보였던지 이고르가 만족스럽게 감탄할 정도였다. "사람 좋은 독일 사람이 맥주 한잔을 들이키고 하는 말대로 <훌륭합니다>, 어머님. 유인 물을 품안에 넣었는데도 전혀 달라진 게 없어요. 그저 키가 좀 큰 나무랄 데 없는 중년부인 이십니다. 수많은 신들이 어머님의 첫 출발을 축복하실 겁니다." 30분이 지나자 어머니는 짐의 무게 때문에 몸을 구부리고 있었지만 침착하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공장 문 앞에 서 있었다. 노동자들의 야유에 잔뜩 독이 오른 수위 둘이 공장 안으 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몸을 하나하나 거칠게 수색하고 있었다. 그들은 연신 욕설을 주고받 았다. 한쪽에는 다리가 가는 순경 하나가 서 있었다. 시뻘건 얼굴에 두 눈을 재빨리 놀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양 어깨에 받쳐 든 막대기를 기우뚱거리면서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가 첩자라는 걸 직감했다. 큰 키에 머리는 곱슬거리고 모자를 뒤통수에다 삐딱하게 눌러쓴 젊은이가 몸수색을 하던 수위에게 소리쳤다. "빌어먹을 놈의 자식아, 호주머니만 뒤지지 말고 머리도 뒤져 보시지!" 수위 가운데 하나가 대답했다. "네 놈 머리를 뒤져 보았댔자 이밖에 더 나오겠어..." "우릴랑 놔 두고 이나 잡으면 되잖아." 노동자가 대꾸했다. 첩자는 그를 재빨리 훑어보고 침을 세게 내뱉었다. "나 좀 먼저 나가면 안되겠소? 봐서 알겠지만 짐이 무거워서 등이 부서질 것만 같구려!" 어머니가 물었다. "들어가, 들어가란 말야! 별게 다 시비군..." 수위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어머니는 자리를 잡고 음식통들을 땅바닥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얼굴의 땀을 훔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바로 열쇠공 구세프 형제가 그녀에게로 다가와 그중 형 바실리가 양미간을 찌푸리며 큰 소리로 물었다. "삐로그 있습니까?" "내일 가져 오겠소." 그녀가 대답했다. 이거 미리 정해 둔 암호였다. 두 형제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반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정말 존경스럽니다, 어머니..." 바실 리가 음식통을 들여다보면서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전단 한 묶음이 눈깜짝할 사이에 그의 품속으로 사라졌다. 큰소리로 그가 말했다. "이반! 집에까지 갈 것 없이 여기 아주머니한테서 먹자!" 그리고는 재빨리 유인물을 장화 목부분에다 찔러 넣으며 덧붙였다. "새로 오신 아주머니 음식 좀 팔아 드리라고..." "그럼, 그래야지!" 이반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어머니는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면서 고함을 질렀다. "양배추 수프, 뜨거운 국수 있어요!" 그러면서 눈에 안 띄게 전단을 꺼내 한 다발 한 다발 형제의 손에 찔러 주었다. 전단 뭉 치가 그녀의 손에서 사라질 때마다 저만치서 헌병장교의 얼굴이 누런 점으로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마치 깜깜한 방안에 켜진 성냥불처럼. 어머니는 고소한 기분을 느끼며 속으로 그에 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보쇼, 이리 와서 한술 떠 보시지...) 마지막 다발을 건네주면서 만족스러운 듯 또 덧붙였다. (이리 오시라니까...) 노동자들이 손에 접시를 들고 모여들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이반 구세프가 커다란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전단 넘겨주는 일을 태연하게 그만두고 양배추 수 프와 국수를 떠 주었다. 구세프가 그녀에게 농담을 걸었다. "솜씨가 이만저만하지 않으시네요, 닐로브나!" 화부 하나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궁하면 쥐라도 잡는 법이야. 빌어먹을. 사람을 잡아갔으니, 죽일 놈들! 여기 국수 3꼬뻬 이까어치만 주십시오. 염려 마세요, 아주머니! 입에 풀칠이야 못하겠습니까?" "말이라도 고맙구려!" 어머니는 웃어 보이면서 대답했다. 그는 한편으로 비켜 서면서 중얼거렸다. "말하는 데 돈 드는 것도 아닌데요..." 어머니는 소리를 질렀다. "따끈따끈합니다, 양배추 수프요, 국수요, 야채죽도 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이 첫 경험을 어떻게 아들에게 이야기하면 좋을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 때 여전히 그녀의 앞에는 누런 얼굴의 장교가 떠올랐다. 잔뜩 의혹을 품은 악랄해 뵈는 얼 굴이었다. 얼굴에선 까만 콧수염이 당혹스러운 듯 움직였고 위아래로 신경질적으로 일그러 진 입술 사이에서는 악다문 허연 이빨이 버뜩였다. 어머니의 가슴속에선 희열이 마치 새처 럼 노래를 불렀고 두 눈썹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음식을 떠 주면서 자 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더 있어요, 더들 들어요..." 16...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진흙탕을 달리는 말발굽소리에 이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부엌 문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누군가가 날 렵한 동작으로 현관을 지나가고 있었다. 눈앞이 깜깜해진 그녀는 문설주에 기대어 서서 발 로 문을 열었다. "안녕하셨어요, 넨꼬!"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오고, 이내 여위고 긴 두 팔이 어깨 위에 얹혀졌다. 그녀의 가슴 안에선 허탈한 실망감과 안드레이를 만난 기쁨이 뒤엉켜 활활 타올랐다. 두 감정은 하나의 커다랗고 뜨거운 감정으로 불타올라 그녀를 뜨거운 물결로 휘감는가 싶더니 다시 위로 들어올렸다. 그녀는 안드레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꼭 끌어안은 그의 두 팔 은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그저 흐느낄 뿐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보면 서 노래하듯 말했다. "눈물을 그치세요, 넨꼬. 저를 더 이상 울리시면 안됩니다. 틀림없어요, 빠벨은 곧 풀려 날 겁니다. 그들은 빠벨에게서 손톱만한 꼬투리도 찾아내지 못합니다. 동지들 모두가 삶은 물고기인 양 입을 다물고 있거든요..." 그는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그에게 바싹 다가앉아 다람쥐같 이 재빠른 동작으로 얼굴의 눈물을 훔쳐내고 그가 하는 이야기를 온 가슴으로 열심히 듣고 있었다. "빠벨이 어머님께 안부 전하라더군요. 빠벨은 짐작한 대로 쾌활하고 건강도 염려 없습니 다. 거긴 초만원이에요! 100명도 넘는 사람들이 잡혀 왔더군요. 우리 마을 사람도 있고 시 내에서 온 사람도 많아요. 그래서 딴때 같으면 독방으로 쓰이던 곳에 서너 명씩 같이 갇혀 있어요. 간방 간수들도 그런 대로 괜찮았어요. 그 사람들도 빌어먹을 헌병놈들이 하두 많은 일을 만들어 놓아서 지칠 대로 지쳐 있었어요. 그래서 간수들은 그렇게 심하게 명령조로 말 하는 법도 없고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랍니다. <되도록이면 조용히 해 주세요, 여러분. 우 리들을 난처하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니 모든 일이 순조로워요. 동지들은 이야기도 나누고 책도 서로 빌려 보고, 게다가 음식도 나누어 먹는답니다. 괜찮은 감방이에요. 오래 되어서 더럽긴 하지만 그런 대로 지낼 만은 해요. 형사사건으로 들어온 사람도 있었는데 역 시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우릴 많이 도와주었거든요. 요번에 저하고 부낀말고도 네 명이 더 풀려났습니다. 곧 빠벨도 나오게 될 겁니다. 틀림없어요! 베소프쉬꼬프가 가장 오래 있게 될 것 같아요. 그에게는 정나미가 떨어져 있거든요. 모든 사람들한테 욕을 퍼붓는데, 지치 지도 않아요. 헌병들이 가만 놔 두지 않을 것 같아요. 조만간 재판에 회부되든지 매질을 당 할 거예요. 빠벨이 <그만해, 니꼴라이! 그들은 자네가 아무리 욕을 한다고 해도 달라지진 않아> 하고 말리면, 그는 <종기를 후벼 내듯 이땅에서 저 놈들을 확 후벼 낼 거야!>하고 소 리지르며 더 아우성입니다. 빠벨을 잘 참아 내고 있답니다. 전혀 흔들림이 없이 꿋꿋하게 요. 곧 그가 풀려날 거라고 확신합니다..." 어머니는 진정이 되는 듯 다정스레 웃으면서 말했다. "곧! 나도 알아, 그 애가 곧 나올 거라는 걸!" "그렇다면 모든 게 잘될 겁니다. 자 그럼 차 한잔만 끓여 주세요. 어떻게 지내셨는지 얘 기도 해 주시고요." 그는 활짝 웃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 모습이 그렇게 친근하고 멋드러질 수 없었 다. 그리고 두 눈엔 사랑스럽고 어딘가 조금은 우울한 불꽃이 반짝였다. "난 너를 너무너무 사랑한단다, 안드류샤!" 깊은 한숨을 내쉬고 어머니는 새까만 덤불처럼 머리카락이 덥수룩한 얼굴을 웃음이 나는 듯 바라보면서 말했다. "전 과분한 사랑을 바라지 않습니다. 전 어머니가 절 사랑하신다는 걸 알아요. 어머니의 가슴은 한없이 깊으시니까 말입니다." 우끄라이나인이 의자를 흔들면서 말했다. "그렇지 않아, 난 널 특별히 사랑한단다! 만약 네게 어머니가 계시다면 사람들은 네 어머 니를 부러워할 거야. 너 같은 아들을 두셨으니..." 어머니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우끄라이나인은 고개를 저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세차게 비볐다. "어디에 계신지는 잘 몰라도 제겐 어머니가 계십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참, 내가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 아나?" 그녀는 만족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서두르는 말투로 소리쳤다. 그리고 약간 과장을 섞어 가며 자기가 공장 안으로 유인물을 나른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처음엔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더니 다음엔 발을 동동 구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리고 자기 머리를 마구 두드리며 기뻐 어쩔 줄 몰라 소리쳤다. "아니, 이런! 와, 이건 농담이 아니라 진짜군요. 빠벨이 알면 기뻐하겠죠, 네? 정말 훌륭 하십니다, 넨꼬! 빠벨을 위해서도 그렇고, 모두를 위해서도 마찬가집니다." 그는 감격한 나머지 손가락을 딱딱거리고 휘파람을 불고 온몸을 흔들며 어쩔 줄을 몰랐 다. 그가 어찌나 기뻐했던지 어머니의 마음속에서도 뭔가 힘있게 솟는 것이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안드류샤!" 어머니는 마치 그녀의 가슴이 터져 거기서 냇물이 솟구치듯 오싹할 정도의 기쁨으로 가득 찬 말들을 술술 쏟아 내었다. "내 지난 삶을 되돌아볼 때면 언제나 <오, 예수 그리스도여>였다네! 그렇다면 왜 살았던 가? 매질... 노동... 남편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두려움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아 는 게 없었어. 그러다 보니 빠샤가 어떻게 커 가는지도 보지 못했거니와 남편이 살아 있을 땐 내가 아들을 사랑했는지 어쨌는지도 알 수 없었다네! 나의 모든 관심, 나의 모든 생각은 오로지 한 가지에 대한 것뿐이었지. 짐승만도 못한 이 몸뚱어리의 배를 채우는 일과 남편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매질로 윽박지르지 않도록, 그리고 단 한번만이라도 날 가련하게 생 각해 주도록 남편의 비위를 맞춰 주는 일뿐이었어. 하지만 내 기억에 그는 한번도 날 가엾 게 생각해 준 적은 없었어. 남편은 늘 날 때렸지. 마치 자기 아내를 때리는 게 아니고 자기 가 원한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때리듯이 말이야. 20년을 그렇게 살았어. 결혼하기 이 전의 삶은 도무지 기억할 수가 없어.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눈먼 사람처럼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이고르 이바노비치가 여기에 온 적이 있었어. 우린 한 고향출신이야. 그 사람 이 이것저것을 얘기해 주어서 고향집이며 사람들 생각이 조금 되살아나는가 했지만, 사람들 이 어떻게 살았고 그들이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그리고 누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모두 잊어버렸어! 화재가 난 것은 기억해. 두 번이나 났었지. 그러나 모 든 일은 나를 밀어젖혔어. 나의 영혼은 틈 하나 없는 곳에 갇혀 버렸던 거야. 장님이 다 된 나는 어느 것 하나 볼 수도 없었지..." 그녀는 호흡을 멈추고 긴 한숨을 마치 물에서 끌어올려진 물고기처럼 탐욕스럽게 집어삼 켰다. 그리고 몸을 조금 앞으로 굽히고 목소리를 약간 낮추어 말을 계속했다. "남편이 세상을 뜨자 그제서야 난 아들의 존재를 의식했어. 하지만 빠벨은 이런 일을 하 고 있었지. 처음엔 너무 두려웠지만 차차 빠벨을 동정하기 시작했던 거야... 빠벨이 만약 잘못되는 날이면 난 어떻게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겠나? 공포스러울 만큼의 불안을 맛보았 고 어쩌다 아들의 운명을 생각할라치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조용히 고개를 흔들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우리 여인네들의 사랑이란 순수하지 못해!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사랑하기 때문이야. 너 를 볼 때면 어머니 생각에 괴로워하고 있는 게 보여. 그렇다면 어머니란 존재는 네겐 도대 체 무어냐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민중을 위해 고통을 당하고, 감옥에 가고 또 시베리아에 도 가지. 죽기도 하고... 젊은 처녀들이 어두운 밤의 진창길을 혼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랑곳없이 시내에서 이곳까지 7베르스따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온단 말야. 과연 누가 그들 을 거리로 내쫓았고 누가 그들을 괴롭힌단 말인가? 그들은 사랑을 하고 있어. 그들은 정말 순수한 사랑을 하고 있단 말일세! 그들은 믿고 있어. 믿고 있단 말일세. 안드류샤! 하지만 난 그렇지 못해. 난 나만을 사랑해, 나와 가까운 사람만을 말이야." 우끄라이나인은 고개를 돌리고 늘 하던 대로 두 손으로 머리와 볼, 그리고 눈을 세차게 비벼대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모든 사람들은 가까이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하지 만 마음이 넓은 사람에게는 먼 것도 가까워지지요. 어머닌 많은 걸 사랑하실 수 있어요. 어 머니의 모성애는 위대한 것이니..." "주님께 기원합니다!"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역시도 그렇게 사는 게 좋다는 걸 느껴. 정말 난 널 사랑해. 어쩌면 빠샤보다도 널 더 사랑하는지도 몰라. 빠샤는 너무나 말이 없어... 사샤와 결혼하고 싶어하면서도 내겐 한 마디도 없었어. 제 어민데도 말야..." "그건 그렇지 않아요! 제가 잘 아는 일인데, 그건 그렇지 않아요. 빠벨도 그렇고 사쉔까 도 그렇고 서로 사랑하고 있는 건 사실예요. 하지만 결혼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절대로요! 그녀가 원할는지는 몰라도 빠벨에겐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을 거예요." "어떻게?" 어머니는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말했다. 슬픔에 잠긴 그녀의 두 눈이 우끄라이나인이 얼 굴에 고정되었다. "어떻게 자신을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빠벨은 좀처럼 보기 드문 사람입니다. 강철 같은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우끄라이나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빠벨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어!" 어머니는 신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건 불안하고 무서운 일이야. 하지만 또 그렇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어. 세 상은 달라졌거든. 공포도 이전의 공포와는 달라. 이젠 모든 사람들한테 불안을 느껴야 해. 그리고 나의 감정도 달라졌어. 마음의 눈을 활짝 열고 바라보니까 그래 이젠 슬픔도 기쁨도 함께 볼 수가 있어. 난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아. 너희들이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게 그렇게 화가 치밀고 가슴 아플 수가 없어.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어? 난 하여튼 너희 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거든, 정말이야! 그리고 너희들이 민중을 위해 어려운 생 활에 몸을 내던지고 진리를 위해 고통스러운 삶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너희들 의 진리라는 걸 나도 이해해. 배부른 자들이 있는 한 민중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것, 진리도 없고 기쁨도 없고 도대체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걸 말야. 이젠 나도 엄연 히 너희들 가운데 하나야. 이따금 밤이면 과거의 일들이 생각난단다. 발 아래 뭉개져 버린 내 청춘, 죽도록 매질당한 젊은 열정, 내 자신이 그렇듯 가엾을 수가 없어, 가슴이 저미도 록! 하지만 내 삶은 나아지기 시작했어. 차차로 내 자신을, 진짜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 지." 우끄라이나인은 일어서서 발을 끌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방안을 조심스럽게 거닐기 시작했 다. 큰 키에 여윈 몸이었다. 얼굴엔 생각에 잠긴 표정이 역력했다. "좋은 말씀이십니다. 훌륭하세요. 께르치에 시를 쓰는 한 젊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이런 시를 썼지요. <죄없이 죽어간 이들이여-- 진리가 너희들을 부활케 하리라!> 그 리고 그 자신은 경찰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는 진리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진리의 씨를 뿌리고 다녔습니다. 이제 보니 어머니 역시 죄 없이 죽어간 이들 가운데 한 분이시군요..." "지금 난 말을 하고, 그 말을 내 자신이 듣고 있지만 나 자신을 믿을수가 없어. 일평생 난 오직 하나만을 생각해 왔거든. 어떻게 하면 하루를 무사히 보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무도 날 견딜수 없게 하루를 눈에 띄지 않게 지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 말야. 하지 만 이젠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할 수가 있어. 비록 너희들이 하는 일을 다 이해하진 못한다 해도 모두에게서 친근함이 느껴지고 동정이 가. 그리고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안드류샤, 너에게는 특히..." 그가 어머니에게 다가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손을 잡은 자기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곤 손을 놓고 재빨리 옆으로 돌아 섰다. 어머니는 격한 흥분 탓에 고단했는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없이 잔을 닦았다. 그 녀의 가슴에선 활력을 되찾아 따뜻해진 감정이 조용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우끄라이나인이 방안을 거닐며 말했다. "베소프쉬꼬프에게도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넨꼬!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 있어요. 정말 부정한 노인네지요. 나꼴라이는 창을 통해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욕설을 퍼붓는답니다. 그건 잘하는 짓이 아닙니다. 니꼴라이는 천성이 착해서 개나 쥐 같은 온갖 동물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유독 사람은 좋아하지 않아요. 그 무엇인가가 인간을 망쳐 놓았어요." "그의 어머니는 어디론지 종적을 감추었고, 아버지는 사기꾼에다 술주정뱅이야." 어머니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자러 가는 안드레이의 등뒤에다 어머니는 몰래 성호를 그어 주었다. 그가 잠자리에 든 지 30분이 지나서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자는 거니, 안드류샤?" "아녜요, 왜 그러세요?" "잘 자거라!" "고맙습니다. 넨꼬. 고마워요!" 그는 감격한 어조로 대답했다. 17... 그 이튿날 어머니가 짐을 메고 공장문을 들어섰을 때, 수위 둘이 난폭한 말로 그녀를 불 러 세웠다. 그들은 음식통을 땅바닥에 내려놓으라고 명랑한 다음 꼼꼼하게 조사를 했다. "음식 시겠소!" 어머니는 그들이 무례하게 그녀의 웃옷을 검사하는 동안 태연하게 말했다. "입다물지 못해!" 수위 하나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하나가 어머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자신만만한 어투로 말했다. "담장 위로 집어던졌어, 틀림없어!" 그녀에게 노인 시조프가 첫 번째로 다가와 주위를 둘러보면서 크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 다. "들으셨소, 아주머니?" "뭘 말입니까?" "전단 말입니다. 그게 다시 나타났어요. 빵에다 소금 치듯이 여기저기에 죄다 뿌려졌어 요. 이제 그 놈들이 당신을 잡아갈 거요. 수색도 하고! 그 놈들이 내 조카 마진을 감옥에 처넣었지요. 하지만 그런들 뭣해? 당신 아들도 잡아갔지만 지금대로라면 걔네들이 한 짓이 아니란건 분명하지 않소!" 그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언제 우리 집에 들르시구려. 혼자 지내기가 꽤 적적할텐데..."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음식 이름을 외쳐대면서 공장 안에 감돌고 있는 심상치 않 은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모두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모였다간 흩어지고 또 공장 여기저기를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을음으로 가득 찬 공기 중에서는 어떤 활기차고 대담한 기운이 느껴졌다.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고함소리와 더불어 조소하는 듯한 함성도 들 려 왔다. 중년의 노동자들은 조심스럽게 경멸하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관리인들이 걱 정스러운 표정으로 왔다갔다했고 경찰들이 분주히 뛰어다녔다. 그들이 다가오면 노동자들은 느릿느릿 흩어지거나, 혹은 그 자리에 그냥 남아서 하던 이야기를 중단하고 흥분해서 초조 한 빛이 역력한 얼굴들을 말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모두 세수를 깨끗이 한 모습들이었다. 구세프 형제의 모습도 보였는데, 그 형 은 큰 키 덕택에 눈에 쉽게 띄었고 그 뒤를 따라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동생도 보였다. 그는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소목공장 감독 바빌로프와 출퇴근 기록계 이사이사 서두르지 않는 걸음걸이로 어머니의 옆을 지나쳤다. 키도 작고 체격도 볼품없는 기록계원은, 고개를 위로 꼿꼿이 들고 목을 왼 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인 채로 불쾌한 듯 꼼짝도 않는 감독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턱수염이 흔들릴 정도로 잽싸게 말을 했다. "이반 이바노비치, 놈들이 비웃고 있습니다. 즐거운가 보지요? 친애하는 사장 말대로라면 이건 국가 전복과 관계되는 일일텐데. 이반 이바노비치, 풀 몇 포기 뽑는 거론 어림도 없겠 어요. 아주 갈아엎어 버리는게 차라리..." 바빌로프는 뒷짐은 지고 걷고 있었다. 손가락엔 힘이 가 있었다. 그가 큰소리로 말했다. "제 놈들 맘대로 쓰고 지랄해 보라지, 개새끼들. 대신 내 얘기만 썼단 봐라!" 바실리 구세프가 다가와 말했다. "난 그럼 여기서 점심이나 또 사 먹어야겠군, 맛있던데." 그리고, 눈을 찡긋해 보이고 목소리를 약간 낮추어 조용조용하게 덧붙였다. "적중했어요... 아아, 어머님! 아주 잘됐습니다." 어머니는 다정하게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머니는 공장촌에서는 둘째가라면 서 러워할 망나니인 이 젊은이가 자기에게 몰래 말할땐 깍듯한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또한 공장 안에 감돌고 있는 흥분도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만약에 내가 아니었더라면...) 멀지 않은 곳에 날품팔이 노동자 셋이 멈추어 서더니 그 가운데 하나가 크지 않은 목소리 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듣기라도 해야 할텐데! 난 읽을 줄은 모르지만 보니까 정말 노골적이더라고!" 다른 사내가 대꾸했다. 세 번째 사내가 주위를 살피더니 제안을 했다. "기관실로 가세나..." 한 쪽 눈을 찡긋거리며 구세프가 속삭였다. "드디어 효력이 나타나고 있어요, 어머님."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읽을 줄 모르는 공장사람들은 참 안됐어! 나도 젊었을 때는 읽을 줄은 알았는데 다 잊었 지..." 그녀가 안드레이에게 말했다. "다시 배우세요." 우끄라이나인이 제안했다. "이 나이에? 누굴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작정했나..." 그러나 안드레이는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가져 와 칼 끝으로 표지에 쓰여 있는 글자를 가 리키며 물었다. "이게 무슨 글자지요?" "에르!" 어머니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이 글자는요?" "아 던가..." 어머니는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게 언짢았다. 안드레이의 두 눈이 은연중에 조롱하 는 것 같아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침착했으며 얼굴은 진지했다. "안드류샤, 정말로 내게 글을 가르쳐 줄 생각이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물었다. "그렇다니까요. 전에 읽을 줄 아셨다면 쉽게 기억해 내실 수 있을 겁니다. 기적이 일어나 지 않는다고 해서 기분 나빠할 것도 없고, 만약 일어난다면 나쁠 건 없지 않겠어요.!" "하지만 성모상만 바라본다면 해서 성인이 되는 건 아니라는 말도 있지!" 우끄라이나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격언은 많아요. <제대로 알지 못할 바엔 아주 모르는 게 낫다>는 격언을 볼까 요. 격언으로 창자를 채울 생각만 해요. 영혼에 굴레를 씌워서 통제하는 데 더 편리하게 하 는 겁니다. 이건 무슨 글자죠?" "엘!" "맞습니다.! 마치 사람들이 두 다리를 쭉 벌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이 글자는 요?" 어머니는 눈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두 눈썹을 힘들여 움직거리면서 잊어버렸던 글자들을 기억해 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잃을 정도로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곧 눈이 피로해졌다. 처음엔 피곤해서 흐르는 눈물인 듯싶었으나 나중엔 슬픔을 못 이겨 눈 물이 흘렀다. 그녀가 흐느껴 울면서 말했다. "내가 글을 배우다니! 나이 마흔에 이제서야 글을 배우게 되다니..." 우끄라이나인이 다정스런 목소리로 조용조용 말했다. "눈물을 그치셔야만 합니다. 어머닌 달리 방법이 없으셨던 거예요. 하지만 이제는 헛살아 오셨다는 걸 아시잖아요! 수많은 삶들이 어머니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 지만 그들은 짐승처럼 살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이 잘 살기라도 하는 양 우쭐대 고 있어요. 오늘도 노동을 한 그 대가로 먹고, 내일도 마찬가지로 노동의 대가로 또 먹고, 그것이 훌륭한 삶입니까! 그들은 일평생 일을 하고 먹기만 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애들도 생기게 되죠. 처음엔 귀여우니까 이래저래 달래다가 나중엔 자라서 먹는 양이 많아지겠죠. 그럼 화가 치밀어 애들한테 욕을 퍼붓는 겁니다. <좀 빠릿빠릿해져 봐라, 걸신 들린 것같이 처먹기만... 이젠 컸으니 밥벌이를 해야 될 것 아냐!> 그러니 자식놈들이 차라 리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기나 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지요. 하지만 자식들도 제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노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도둑이 보리죽을 훔치듯 삶을 훔치게 되 는 거랍니다. 참된 사람만이 인간의 이성에 묶여진 쇠사슬을 끊을수 있습니다. 지금 제 앞 에 계신 어머니도 역시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계신 겁니다." "뭐, 내가 어떻다고? 내가 어떻게?"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왜요? 이건 마치 빗물과 같아서 빗방울 하나하나가 싹을 틔우는 겁니다. 어머니께 서 읽기 시작하시면..." 그는 큰소리로 웃으면서 일어나 방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그래요. 어머니는 배우셔야 해요. 그래서 빠벨이 돌아오면 깜짝 놀라게 하는 겁니다." "아아, 안드류샤! 내가 지금 젊기라도 하면 모든 게 수월하겠지. 하지만 이 나이가 되니 안타까운 마음만 태산이지, 기력이 없어. 머리도 다 굳어 버렸고..." 18... 저녁때 우끄라이나인은 외출을 하고 어머니는 탁자 가까이에 앉아 양말을 꿰매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벌떡 일어나 방안을 망설이듯 거닐다가 부엌으로 나가 걸쇠로 문을 잠그고 심 각하게 양미간을 찌푸리면서 방으로 돌아왔다. 창문 커튼을 내리고 책장에서 책을 한 권 집 어 든 다음, 다시 탁자 가까이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책 쪽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거리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오자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손바닥으로 책을 덮고 바깥 소리에 귀를 곤두세웠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중얼거렸다. "살, 살, 살고 있는, 땅, 우리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 책장에 책을 집어 넣고 떨리는 목소리 로 물었다. "게 누구요?" "접니다..." 르이빈이 들어왔다. 턱수염을 점잖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전에는 물을 필요도 없이 들여보내시더니. 혼자시오? 그렇군요. 난 우끄라이나인이 집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내 오늘 그 사람을 보았는데... 감옥이란 데가 사람 망쳐 놓는 데는 아니더군요." 그는 자리에 앉아 어머니에게 말했다. "우리 얘기나 좀 합시다..." 그는 어머니에게 어렴풋한 불안을 느끼게 하면서 의미심장하고 비밀스럽게 쳐다보았다. "무슨 일을 하든 돈이 들게 마련이지요." 그가 그 특유의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공짜로 태어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을 때도 돈이 들지요. 암요. 그러니 전단과 유 인물을 만드는 데도 돈이 든다는 건 당연하지요. 전단 만드는 돈은 어디서 나는지 혹 알고 계십니까?" "모르오." 뭔가 위험을 느끼면서 어머니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러시겠죠. 저도 역시 모릅니다. 두 번째로 그럼 전단은 누가 만듭니까?" "글깨나 배웠다는 사람들..." "지식인들입니다!" 르이빈이 단호하게 말했다. 텁석부리 얼굴이 일그러지고 벌겋게 상기되었다. "말하자면, 지식인들이 전단을 만들어 뿌리고 다닌 겁니다. 하지만 전단에는 자기들에 반 대하는 내용이 씌어 있습니다. 이제 어디 말씀해보세요. 왜 그들이 돈을 허비해 가며 민중 들로 하여금 자기들에 대항해 들고 일어나도록 하는 건지 말입니다. 예?" 어머니는 두 눈을 찡그리고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요?" 르이빈이 곰처럼 의자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아, 나 역시도 그 생각만 하면 온몸이 오싹해진답니다." "뭐라도 알아낸 게 있소?"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속고 있는 겁니다. 비록 아는 건 별로 없지만 속임수라는 게 있다 는 건 확신합니다. 지식인들은 똑똑한 척합니다. 하지만 난 진실을 알고 싶은 거요. 그리고 난 이제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어요. 그래서 안됐지만 지식인들과는 더 이상 함께 일을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때가 되면 그들은 날 앞으로 밀쳐 내고 내 뼈마디를 다리 건너듯 짓 밟고 나아갈 겁니다." 그가 내뱉은 침통한 말에 어머니의 가슴은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녀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주여! 그렇다면 빠샤 역시도 그걸 모른단 말인가?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그녀의 앞에는 이고르와 니꼴라이 이바노비치, 그리고 사샤의 진지하고 순결한 얼굴들이 어렴풋이 가물거렸다. 가슴이 심하게 고통쳤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난 믿을 수가 없어요. 그들은 바로 양심 때문에 몸을 내던지고 있는거요." "누구 말씀하시는 겁니까?" 르이빈이 생각에 잠긴 듯 물었다. "모두,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 얘기요." 고개를 떨구며 르이빈이 말했다. "아주머니, 바로 눈앞만 보지 마시고 더 멀리 내다보세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던 사 람들, 그들은 어쩌면 아무것도 모를 겁니다. 그들에겐 믿음이란 게 있지요, 또 그래야만 합 니다! 하지만 그들 뒤에는 제 이익밖에 모르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 이란 무익하게 자기 자신을 거스르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농사꾼다운 무게 있는 확신을 갖고 그가 덧붙였다. "지식인들한테선 결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어요." "그럼 뭐 결심한 거라도 있단 말이오?" 어머니는 다시 의혹에 사로잡혀 물었다. "저 말입니까?" 르이빈은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잠시 말이 없더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지식인들한테서 더 이상의 것을 기대해선 안됩니다. 그렇고말고요."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침통한 표정이었다. "제 동료들에게 갈까 합니다.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서요. 전 이런 일에나 쓸모 있어요. 그들에게 무얼 얘기해 주어야 하는지도 전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저는 곧 떠납니다. 전 ale음이란 걸 잊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가야만 해요." 그는 고개를 떨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혼자서 여기저기 농촌을 돌아다니겠어요. 그래서 민중들에게 반란을 가르치겠습니다. 민 중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이 깨닫기만 한다면 자기들이 나아갈 길을 알아서 개척하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전 그들을 깨우치도록 노력할 겁니다. 그 사람들이 있다는 그 자체 외에는 그들에게 희망이란 없습니다. 바로 자신들 외에는 이성도 필요없습 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그가 가엾어졌고 한 인간에 대한 공포를 아울러 느꼈다. 항상 불쾌하게만 느껴 졌던 그가 지금은 왠지 갑자기 가깝게 느껴졌다.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한테 붙잡히게 될텐데..." 르이빈은 그녀를 쳐다보면서 개의치 않는 듯이 말했다. "잡아갈 때가 있으면 풀어줄 때도 있겠죠. 그럼 전 다시..." "딴사람도 아닌 농부들 자신이 당신을 붙잡아 감옥에 보낼텐데도..." "감옥에 갔다가 나오고, 또 계속하고, 그러면 농부들도 한 번, 두 번, 이렇게 몇 번인가 를 나를 잡아 처넣다가 마침내는 날 잡아 처넣을게 아니라 얘기를 들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 닫게 될 겁니다. 전 그들에게 <여러분 저를 믿지 마십시오. 그저 제 말을 들어만 주십시오> 라고 말하겠어요. 귀를 기울이다 보면 믿게 될테니 말입니다." 그는 마치 말을 내뱉기 전에 한마디 한마디 음미라도 하는 듯이 느릿느릿 말을 했다. "전 요즘 들어 닥치는 대로 진탕 마셔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 둘 알게 되더군요..." "그러다간 파멸하고 말 거요, 미하일 이바노비치!" 슬픈 듯 머리를 저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그는 깊숙이 패인 새까만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치 무엇인가 묻는 듯 했다. 그의 강인해 뵈는 체구는 앞으로 쏠려 있었고 두 팔은 의자의 팔걸이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검게 그을린 얼굴은 새까만 턱수염 속에서 파리해 보였다. "혹 그리스도가 밀알에 대해 한 얘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죽음 없이는 새 이삭으로 부활치 못하리라 그랬죠. 전 아직 죽으려면 멀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꾀가 많은 사람인데요!"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사뭇 주저하더니 천천히 일어섰다. "선술집에라도 가서 사람들이나 만나 봐야 할까 봅니다. 우끄라이나인이 어째 안 오는군 요. 바쁜가 보죠?" "그런가 보오." 웃으면서 어머니가 말했다. "그래야만 합니다. 그 사람 오거든 제 얘기나 해 주세요..."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천히 부엌으로 걸어 나가 서로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간 단한 말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자.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잘 가시오. 공장 일은 언제 그만두시오?" "벌써 그만뒀습니다." "그럼 언제 떠나십니까?" "내일 아침 일찍 떠납니다. 자, 그럼..." 르이빈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놓으며 굼뜬 동작으 로 현관을 빠져 나갔다. 어머니는 한동안 문 앞에 서서 무거운 발걸음과 그녀의 가슴속에서 눈을 뜬 의혹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제정신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 리고 커튼을 걷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창 너머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우뚝 서있었다. (나는 밤을 살고 있는 거야!) 어머니는 생각했다. 어머니는 착실한 농부에게 동정이 갔다. 마음이 넓고 강인해 뵈는 그 농부에게. 안드레이는 되살아난 사람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가 르이 빈의 얘기를 해 주자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그렇다면 농촌을 돌아다니며 진리를 전파하고 민중을 일깨우는 것도 좋을 거예요. 우리 와 같이 일한다는 건 그에겐 힘든 일일 겁니다. 그의 머리에는 농부들에 대한 생각이 꽉 차 있을테니까요. 거기엔 우리 노동자들이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이 없을 겁니다..."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사람 말이, 지식인들에겐 무슨 꿍꿍이 속이 있을 거라는 거야. 그들이 우릴 속이고 있다던가!" "그게 마음에 걸리시는군요?" 웃으면서 우끄라이나인이 외쳤다. "아아, 넨꼬, 돈이 문젭니다. 우리에게 돈만 있다면! 우리는 아직 남이 주는 돈에 의지하 고 있는 형편입니다. 니꼴라이 이바노비치를 보세요, 그 사람은 매달 75루블을 벌어서 우리 에게 50루블을 내놓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가난한 학생들도 때로는, 많 지는 않지만 돈을 보내 옵니다. 한푼 두푼 모은 돈을 말입니다. 물론 지식인도 여러 종류가 있어요. 우리를 속이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우리에게서 떠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훌륭한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길을 갈 겁니다..." 그는 손뼉을 한번 치고는 힘있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꿈꾸는 최후의 잔칫날은 아직 멀었다 해도 우리는 조촐한 우리들만의 메이데이 행사를 치를 겁니다. 정말 멋질 겁니다!" 그의 활기찬 모습을 대하자 르이빈 때문에 싹텄던 불안이 누그러졌다. 우끄라이나인은 손 으로 머리를 비비고 마룻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방안을 서성이다가 말을 이었다. "어머니도 언젠가는 어머니의 가슴에 놀랄 만한 그 무엇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어딜 가든지간에 보이느니 동지뿐일 때가 있을 겁니다. 모두가 하나의 불꽃 으로 활활 타오르고, 활기에 넘쳐 있고, 선량하다 못해 훌륭해 보이는 그날, 그날 말입니 다. 말 없이도 서로 통하는...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쳐대며 각자의 가슴이 자신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겁니다. 모든 노래가 마치 시냇물처럼 내달려 하나의 강물이 되고, 그 강물이 다 시 새로운 삶을 노래하는 환희의 바다로 넓고 자유롭게 흘러 들어가는 바로 그날은 오고야 말 겁니다." 어머니는 행여 그를 방해하지나 않을까, 그의 말을 막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꼼짝 않 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녀는 늘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보다도 그가 이야기할때 훨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말을 한결 쉽게 했고, 그러 다 보디 자연히 그의 말이 가슴에 주는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빠벨은 그가 꿈꾸는 미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하지만 우끄라이나인 가슴의 일부는 항상 미래에 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 속에선 이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미래의 잔 칫날에 대한 전설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이 전설은 어머니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 아들이 하는 일, 그리고 그의 모든 동지들을 환하게 비추어 주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냉정하고 추한 것뿐입니다." 고개를 들면서 우끄라이나인이 말했다. "모두가 지쳐 있고 애태우고 있습니다.." 그는 깊은 시름에 잠겨 말을 이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미는 일이지만 인간을 믿지 말아야 하고 인간과 투쟁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증오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사랑만을 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요? 만약에 성난 야수와 같이 어머니를 쫓아 다니고 어머니의 살아 있는 정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어머니의 인간적인 얼굴에 발길질을 해대는 사람이 있다고 쳐요. 그래도 그 인간을 용서해야만 합니까?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 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저는 제게 떨어지는 모든 모욕들을 참아 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폭압자를 묵인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등을 치라고 가르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두 눈이 싸늘한 불꽃으로 활활 타올랐다. 그는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한결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어떠한 불의도 용서치 않을 겁니다. 비록 그것이 제게 직접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해도 말입니다. 저는 이 세상 혼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사 오늘 나를 모 욕하는 건 그대로 받아줄 수도 있고, 폐부만 찌르지 않는다면 그냥 웃어 넘길 수도 있는 문 젭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일, 그 능욕자는 나에게 제 힘을 시험도 해 보았겠다. 당장 다른 사람의 가죽을 벗기려고 달려갈 겁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색안경 쓰고 바라보게 되고 가슴을 꽉 움켜잡고 사람들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내 편, 저 사람은 적, 당연한 거예요. 그러니 어디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장교와 사샤를 떠올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체로 거르지 않은 밀가루로 빵을 만들면 어떤 빵이 될까..." "온갖 슬픔의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을 겁니다." "그래!" 어머니가 대꾸했다. 그녀의 기억속엔 마치 이끼로 뒤덮인 큼직한 바위만큼이나 육중하고 음울한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나따샤와 결혼한 우끄라이나인, 그리고 사야의 남편으로서의 아들을 상상해보았다. "왜냐고요?" 우끄라이나인이 물었다.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그건 물어 보나마나 자명한 겁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평등하지가 않다는 데 있어요. 모두들 평등하게 해 보자고요! 이성으로 만들어 낸 모든 것, 손으로 가공한 모든 것을 똑같 이 나누잔 말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공포와 질투의 노예로 속박하지 않도록, 탐욕과 무지의 포로로 억압하지 않도록 말이죠." 그들은 그 이후에도 그와 같은 대화를 자주 나누었다. 우끄라이나인은 다시 공장에 일자리를 구해, 받은 품삯 전부를 어머니에게 갖다 주었다. 그녀는 그의 돈을 빠벨에게서 받듯이 아무 거리낌없이 받았다. 이따금 안드레이는 두 눈에 웃음을 담고서 어머니에게 제안을 하고 했다. "책을 읽을까요, 넨꼬? 예?" 그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끝내 거절했다. 그의 눈웃음에 어머니는 당혹감과 게다가 어 느 정도는 모욕감마저도 느꼈다. 그녀는 생각했다. (눈웃음치는 까닭이 뭐지?)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어머니는 유인물에 씌어 있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저런 글들에 대해서 그에게 묻는 일이 더욱 잦아졌다. 질문을 던질 때면 어머니는 공연히 딴전을 피웠 고, 목소리를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흔적이 역력했다. 그는 그녀가 혼자서 몰래 글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녀의 수줍음을 이해했다. 그래서 함께 책 읽자는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나자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눈이 침침하구나, 안드류샤. 안경이 있어야만 할 것 같다." "그거가 뭐 어려운 일입니까! 돌아오는 일요일에 함께 시내에 나가서 의사에게 보이고 안 경을 맞추도록 하지요." 19... 어머니는 벌써 세 번이나 빠벨과의 면회신청을 하고 왔다. 그러나 매번 자줏빛 뺨과 코를 가진, 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 헌병 책임자는 퇴짜를 놓았다. 그러면서도 말은 다정하게 했 다. "앞으로 일주일은 더 기다리셔야 합니다, 부인! 일주일 후에나 오시면 될까, 지금은 불가 능합니다..." 뚱뚱하고 배가 불룩 나온 그의 모습은 저장된 지 너무 오래라 이미 잔털이 송긋송긋한 곰 팡이로 뒤덮인 익은 살구를 연상시켰다. 그는 항상 희번덕거리는 이빨을 날카롭고 누런 이 쑤시개로 쑤셔댔다. 그의 별로 크지 않은 푸르스름한 두 눈은 사냥한 척 눈웃음을 치고 있 었고 목소리는 늘 친구를 대하듯 친절했다. "아주 예의가 바르던데! 늘 웃고 있는 게..." 생각에 잠긴 듯 그녀가 우끄라이나인에게 말했다. "맞습니다. 맞아요! 그자들에겐 다정한 척하는 거, 웃는 거 빼놓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그들은 흔히 말하지요. <원, 사람 하나는 정말 똑똑하고 착실한데 우리에겐 위험한 인물이 니 어쩝니까. 교수형에 처할 밖에요!> 그 놈들은 웃으면서 교수형을 집행하고 그게 지나면 다시 웃는답니다." "우리 집을 수색했던 그 사람은 좀 미련한 사람이었어. 금방 나쁜 놈이라는 걸 알 수 있 었잖아..." "그런 놈들은 죄다 인간이랄 수 없는 놈들입니다. 사람들의 귀를 후려쳐서 망쳐 놓는 망 치라고나 할까요. 도구에 불과한 거지요. 그 도구같은 놈들 때문에 우린 속고 있습니다. 마 치 우리의 삶이 한결 편리해 지기라도 한 것처럼. 바로 그 도구들은 우리들의 손을 깔고 뭉 개기 편리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자기들에게 하달된 것이 왜 필요한지조차도 생각을 한 다거나 물어보지도 않고 그저 모든 걸 처리하고 보는 거예요." 마침내 아들과의 면회가 허용되었다. 일요일에 어머니는 교도소 사무실 구석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천장이 낮은 비좁고 지저분한 사무실안에는 그녀말고도 면회를 기다리는 사람 이 몇 더 있었다. 서로 아는 척하는 걸 보면 그들은 필시 여기에 찾아온 것이 처음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들 사이에는 나직나직하고 거미줄처럼 끈적거리는 이야기들이 굼벵이가 움 직이듯 느릿느릿 뒤엉키고 있었다. "그 얘기 들으셨소?" 얼굴이 쭈굴쭈굴한 뚱뚱한 여인이 말문을 열었다. 여행용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있 었다. "오늘 아침 미사 때 성당 사찰이란 사람이 성가대 아이의 귀를 완전히 찢어 놓았대요..." 퇴역자 군복을 차려 입은 중년의 남자가 헛기침을 한번 한 다음 대꾸했다. "성가대 아이들은 대개가 불량배놈들이라오." 체구가 작고 머리가 벗겨진 사내가 사무실 안을 번잡스레 뛰어다녔다. 다리는 짧은 데다 반대로 팔은 길고, 턱뼈가 앞으로 툭 튀어나온 사내였다. 그는 설 생각도 않고 오싹할 정도 의 째지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생활비가 자꾸만 치솟으니 사람들이 점점 극악해집니다. 쇠고기값이 두배나 올라서 1푼 뜨당 14꼬뻬이까가 됐고 빵은 두 배 반이 올랐으니..." 이따금 무거운 가죽장화를 신고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죄수들이 끌려 들어왔 다. 방안이 어둠침침해서 그런지 그들은 방으로 들어오며 눈을 깜빡거렸다. 발에 족쇄가 채 워져 있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어 심지어는 불쾌하기까지 했다. 그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길들여져 자신들의 처지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는 사람, 느릿 느릿 주위를 엿보는 사람, 게다가 고단한 듯 조심스럽게 면회 온 사람을 바라보는 이도 있 었다. 어머니의 가슴은 초조감에 떨고 있었다. 어머니는 망설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토 록 지독한 단조로움은 생전 처음이었다. 어머니의 옆 자리에는 조그만 체구의 노파가 앉아 있었다. 비록 얼굴은 주름투성이였지만 눈만은 젊은이의 눈 바로 그것이었다. 가는 목을 좌우로 돌려 가면서 노파는 사람들의 대화 에 귀를 곤두세우고 이상하리만치 도전적인 눈으로 모두를 노려보고 있었다. "누굴 만나러 오셨습니까?" 노파가 큰소리로 재빨리 대꾸했다. "아들놈이라오. 학생이지. 헌데 댁은 누굴 만나러 왔소?" "저도 아들을 만나러 왔습니다. 노동자지요." "성이 어떻게 되나?" "블라소프입니다." "들어본 기억이 없군. 오래 됐소?" "일곱 주 됐어요." "내 아들놈은 열달이라오." 노파의 목소리에서 어머니는 자부심 비슷한 어떤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가 벗겨진 노인이 황급히 혀짤배기 소리를 했다. "그래요. 맞는 소리요! 참는 데도 한도가 있는 법이지..., 모두들 흥분해 고함치고 있어 요. 물가는 세상 모르고 치솟고 있으니. 그러다 보니까 사람값은 아주 똥값이 되어 가는 겁 니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라도 목소릴 높이려고 드냔 말요." 퇴역군인이 끼어들었다. "말한번 잘 했소. 정말 꼴불견이야! 드디어 힘찬 목소리가 울릴 날이 오고야 만 거요. 침 묵은 필요가 없어. 정말 필요한 건 힘찬 목소리란 말입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끼어든 그들의 대화는 그럴수록 열기를 더해 갔다. 저마다 자기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하느라 열을 올렸다. 그러나 모두들 속삭이듯이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그들 모두에게서 어떤 이해 못할 그 무엇을 느꼈다. 적어도 집에서 오가는 대화는 이와 달리 한결 명료하고 솔직하며, 목소리도 더 크리라는 것은 명백했다. 네모 모양의 불그레한 턱수염을 기른 뚱뚱한 간수가 그녀의 성을 큰소리로 불렀다. 머리 에서 발끝까지 죽 훑어보더니 다리를 절며 걸어가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따라와요..." 어머니는 뒤를 따라 걸어갔다. 좀 빨리 걷도록 뒤에서 그 간수의 등을 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조그만 방에 빠벨이 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보더니 웃으면서 한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이따금 눈을 찡긋거리며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이렇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잘 지냈냐... 잘 지냈어?" "전 괜찮아요. 염려 마세요. 어머니!" 어머니의 손을 꼭 잡으며 빠벨이 말했다. "오냐, 미안하다." "저 아주머니가 자네 어머니셨구만!" 한숨을 내쉬며 간수가 끼어들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좀 떨어지쇼들. 거리를 약간이라도 두란 말요..." 그리고 크게 하품을 했다. 빠벨은 어머니의 건강과 집안일에 대해서 물었다. 그녀는 아들 의 두 눈에서 몇 가지의 다른 질문들을 구하며 잔뜩 기다렸지만 빠벨은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늘상 그렇듯이 침착했다. 변한 게 있다면 얼굴이 좀 여위었고 눈도 조금 커진 것밖에 없었다. "사샤가 안부 전하더구나!" 그녀가 말했다. 빠벨의 눈꺼풀이 약간 떨리는가 싶더니 얼굴에서 다정한 미소가 엿보였다. 날카로운 비애 가 어머니의 가슴을 고통스럽게 자극했다. "그래 곧 풀려날 것 같으냐? 잡아 두는 이유가 뭐라던? 그렇지 않아도 지금 다시 전단들 이 뿌려지고 있는데..." 화가 치미는 듯 흥분한 어머니가 물었다. 빠벨의 두 눈이 기쁨으로 빛났다. "다시오?" 그가 재빨리 물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위반이오! 집안 얘기나 하란 말이오..." 간수가 느릿느릿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아니 그럼 이게 집안 얘기가 아니란 말이오?" 어머니가 반박했다.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금지돼 있소." 간수가 귀찮다는 듯이 내뱉었다. "어머니, 집안 얘기나 해요. 요즘 뭐 하고 지내세요?" 빠벨이 말했다. 어머니는 자신 안에 감추어져 있는 어떤 젊은 혈기를 느끼면서 대답했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공장에 나르고 지내지..." 잠깐 말을 멈추고 웃으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양배추 수프라든가 죽, 그리고 마리야네 음식들은 되다. 거기다 그 밖의 먹을거리를..." 바벨은 눈치를 챘다. 그의 얼굴이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떨리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머 리를 긁적이며 여태껏 그녀가 한번도 그에게서 들어 본 적이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 다. "소일거리가 생기셨다니 정말 잘된 일입니다. 적적하진 않으시겠어요." "그 놈의 전단이란 게 다시 뿌려지니까 이 늙은이도 뒤지더구나!" 그녀의 말에는 자부심이 없지 않았다. "또 그 얘기시네!" 감수가 화를 벌컥 내며 끼어들었다. "안된다고 아까 얘기했잖소! 자유를 박탈한 이유가 뭔데, 그건 아무것도 알아서는 안되기 때문이오. 그러니 제 처신이나 잘 하라고! 하여튼 뭐가 금지된 건지 명심하란 말이오." "그러죠, 뭐. 그만두세요, 어머니! 마뜨베이 이바노비치는 좋은 사람이에요. 이 사람 어 짢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린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오늘 이 사람이 여기 입회인으로 와 있 는 것도 다행이에요. 보통 부소장이 입회하거든요." 빠벨이 말했다. "시간이 다 됐소!" 시계를 보면서 간수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고마워요. 전 어머니를 존경해요.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곧 나가 게 되겠죠..." 빠벨이 말했다. 그는 어머니를 뜨겁게 포옹했다. 그리고 키스도 해 주었다. 감동한 어머니는 끝없는 행복 감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만 갑시다!" 간수가 말했다. 간수는 어머니를 데리고 나가면서 중얼거렸다. "울지 마시오, 곧 풀려날 거요! 모두 나게 될 겁니다. 여긴 너무 사람이 많아요..."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웃으면서 우끄라이나인에게 자초지종을 죄다 늘어놓았다. 흥분 때 문에 눈썹이 일그러질 정도였다. "내가 아주 교묘하게 말해 주었더니 빠벨이 이해하더구나!" 그리고 서글픈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알아들었어. 그렇지 않다면 그 애가 그렇게 다정하게 굴었을 리가 없어. 하여튼 여 태껏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어." 우끄라이나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 어머니! 누구든지 갈망하는 게 있지만 어머니는 오직 사랑만을..." "아니다, 안드류샤. 그 사람들 얘기를 안 할 수가 없구나!" 갑자기 그녀가 의아스럽다는 듯 얘기했다. "어찌나 익숙해 있던지! 생이별을 당한 자식들이 감옥에 가 있는 데도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와 가지고는 그냥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들이나 지껄여대 면서 말이다, 응? 적어도 글깨나 배웠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길들여져 버리면 미천한 민중들이야 말해 뭣 하겠어..." 우끄라이나인이 잔뜩 웃음을 머금고서 대꾸했다. "그야 물론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법이란 우리네 경우보다 한결 관대하죠. 그럴수록 그들 에겐 우리에게보다도 법이란 게 더욱 필요한 겁니다. 그러니 법이 아무리 그들의 이마를 두 들겨 팬다 해도 그들은 이맛살을 찡그리긴 하지만 더 이상은 아무 짓도 안 하는 겁니다. 남 의 몽둥이보다도 제 몽둥이로 때리는 게 수월한 법이거든요." 20... 어느 날 저녁 어머니는 탁자 옆에 앉아 양말을 꿰매고 있었고, 우끄라이나인은 로마시대 의 노예반란에 대한 책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우 끄라이나인이 문을 열어 주자 겨드랑이 밑에 작은 보따리를 낀 베소프쉬꼬프가 모자를 뒤통 수에다 삐딱하게 붙여 쓰고 들어왔다. 무릎까지 온통 흙탕물투성이였다. "지나는 길에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게 보이길래 인사나 하고 갈 생각으로 들렀습니다. 금 방 감옥에서 나오는 길입니다." 그가 예사롭지 않은 목소리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어머니의 손을 잡은 자기 손에 힘을 주 면서 말을 이었다. "빠벨이 안부 전하더군요..." 그 다음, 머뭇거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우울하고 의심쩍은 눈길로 방안을 두리번거 렸다. 어머니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얼굴이며 짧게 깎은 머 리, 게다가 가늘게 쭉 찢어진 두 눈이 항상 어머니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어머니는 그런 마음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듯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생기 있는 목소 리로 말을 걸었다. "얼굴이 많이 여위었구나. 안드류샤, 차 좀 끓이려무나..." "벌써 사모바르를 올려 놓았어요." 우끄라이나인이 부엌에서 대답했다. "그래, 빠벨은 잘 있나? 다른 사람들도 풀려난 거야, 아니면 자네 혼자만 나왔어?" 베소프쉬꼬프가 고개를 떨구고 대답했다. "빠벨은 그냥 있어요. 잘 버티고 있죠. 저만 혼자 나왔어요." 그는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이빨 사이로 느릿느릿 말들을 뱉어 냈다. "그 놈들한테 소리쳤지요. <날 내보내 줘. 그렇지 않으면 누구든지 한 놈 죽이고 나 역시 콱 죽어 버리겠어> 하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풀어주더군요." "으-음, 그랬구나!" 어머니는 이렇게 대꾸하고도 자기의 시선이 그의 가늘고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치자 얼른 눈을 떼고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헌데 페쟈 마진은 어떻게 지내던가?" 우끄라이나인이 부엌에서 소리쳤다. "여전히 시를 쓰나?" "쓰다마다.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고래를 저으면 베소프쉬꼬프가 대꾸했다. "그 사람은 카나리아가 아니오? 독방에 가두었는데 거기서도 노래를 부르더군요. 하여튼 분명한 건 하나 있어요. 뭐냐면 난 집에 가고 싶지 않다는 거야...."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생길 턱이 있겠니?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 난로불이 지퍼져 있 길 한가, 잠시만 있어도 얼어 죽고 말텐데..." 어머니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두 눈을 찡그렸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그 중 한 개 비에 불을 붙여 물었는데,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바로 자기 코앞에서 흩어 지는 희뿌연 연기를 쳐다보면서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험상 은 개 같았다. "그래요, 분명 썰렁할 겁니다. 마룻바닥엔 얼어 죽은 바퀴벌레들이 나뒹굴고 있겠죠. 쥐 새끼들도 얼어 죽었을 거예요. 뺄라게야 닐로브나, 오늘 밤 여기서 좀 재워 주세요, 괜찮겠 죠?" 그녀를 쳐다볼 생각도 않고 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몰론 괜찮고말고, 가엾은 것!" 어머니가 재빨리 대꾸했다. 사실 어머니는 그와 같이 있는 게 거북살스럽고 불편했다. "지금 우리는 자식들이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뭘 부끄럽게 여긴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어머니가 물었다. 그는 어머니를 쳐다보더니 두 눈을 감았다. 그러고 있는 그의 주근깨투성이의 얼굴은 얼 핏 장님을 연상시켰다. "제 말은, 자식들이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는 반복해서 말하고 거친 한숨을 몰아 쉬었다. "빠벨은 어머니를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요. 하지만 전 아버지가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있는 한 저는 절대로 집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작정입니다. 저에겐 아버지도 없고... 집도 절도 없는 셈입니다. 경찰의 감시를 계속 받느니 차라리 시베리아로 떠나겠어요. 전 거기서 유형당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게 한다거나, 하여튼 사람들을 도망 시킬 궁리를 할까 합니다..." 어머니는 동정심이 넘치는 가슴을 지녔기에 한 인간으로서의 그가 얼마나 심한 고통을 겨 꼬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고통은 어머니에게만 연민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래, 벌써 마음을 정했다면... 떠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어머니는 그의 침묵을 어색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애써 끼어들었다. 안드레이가 부엌에서 나와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설교를 그렇게 하고 있나, 응?"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내 먹을 것 좀 내오마..." 베소프쉬꼬프가 우끄라이나인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그저 몇 놈 죽여 버리는 게 어때요?" "그거 좋지! 하지만 뭘 위해서!" 우끄라이나인이 물었다. "그런 놈들 아주 뿌리를 뽑아 버리게..."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우끄라이나인은 다리를 떨면서 방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베소프쉬꼬프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베소프쉬꼬프는 엉덩이를 의자 깊숙이 처박고 꼿꼿하게 안장 있었다.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그의 흙빛 얼굴의 불그레한 사마귀가 내비치고 있었다. "우선 이사이 고르보프, 그 아둔한 녀석의 목을 비틀어 놓아야겠어요. 두고 보라고요." "무엇 때문에?" 우끄라이나인이 물었다. "그 놈은 여태껏 밀고만 하고 다닌 밀정이란 말요. 그놈 때문에 아버지가 파멸한 거고, 또 그 놈이 나불대고 다니는 바람에 아버지가 경찰의 꼭두각시가 된 거라고." 베소프쉬꼬프가 안드레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눈길엔 음울한 증오심이 역력했다. "옳은 소리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자네를 비난하는 사람이라도 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놈들말고." 베소프쉬꼬프가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어리석은 놈들이나 똑똑한 놈들이나 더럽기는 매한가지예요. 형님도 그렇고 빠벨도 그렇 고 모두 똑똑한 사람들예요. 그런데 내가 과연 당신들에게 페쟈 마진이나 사모일로프와 똑 같은 존재요? 아니면 빠벨과 형님의 관계 같은 존재라도 된단 말요? 우리 한번 톡 까놓고 얘기해 봅시다. 난 당신들을 믿지 않아요. 당신들도 마찬가질테고... 그리고 당신들은 누구 나 할 것 없이 다 나만 따로 떼어놓고, 결국은 고립시키려 들고 있어요." "자네 가슴앓일 많이 했구만, 니꼴라이!" 우끄라이나인이 그의 옆에 바싹 다가 앉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 "마음이 아파요. 당신들도 마음이 아프기도 마차가질테지만.. 그래도 당신들의 아픔이란 건 내 아픔에 비하면 점잖은 편이에요. 우린 모두 서로에게 불한당일 수밖에 없어. 그건 내 가 단언해요. 뭐 내게 할말이라도 있어요? 있으면 해봐요." 그는 안드레이의 얼굴에 날카로운 시선을 고정시키고, 이빨을 드러내고는 대답을 기다렸 다. 그의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은 못박은 듯 꼼짝도 하지 않는 가운데 두툼한 입술만이 부르 르 떨리고 있었다. 마치 어떤 뜨거운 것에 덴 듯이 그렇게. "자네에게는 할 말이 없네." 우끄라이나인은 푸른 눈이 자아내는 비감한 미소로 베소프쉬꼬프 적의에 가득 찬 시선 을 따뜻하게 애무하며 말문을 열었다. "내가 아는 바로는, 가슴엔 온통 상처를 입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순간에 그 인간과 논쟁을 벌인다는 건 그를 모욕하는 거나 다를 게 없어.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네, 동지!" "난 논쟁 따윈 하진 않아요. 할 수도 없어." 베소프쉬꼬프가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우끄라이나인이 말을 이었다. "난 우리 모두가... 맨발로 깨진 유리조각을 밟으며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저 나 름대로 모두들 암흑의 시대를 들이마시며 살고 있다는 건 자네가 다를 바가 없어..." "형님은 내게 말할 자격이 없어요! 내 영혼은 울부짖고 있어요. 마치 늑대처럼..." 베소프쉬꼬프가 느릿느릿 대꾸했다. "나도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네. 하지만 또 한 가지는 확신해. 그건 자네가 뭐든 극복해 낼 거라는 거지.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어쨋든 극복하고야 말 거야." 그는 웃음을 지어 보이고, 베소프쉬꼬프의 어깨를 두르리며 계속했다. "이보게나, 이건 어릴 때 앓았던 홍역과 비슷하지. 우리 모두는 홍역을 앓고 있는 거야. 강한 사람은 좀 덜하게, 대신 약한 사람은 좀 심하게. 홍역이란 놈은 인간이 자신을 발견한 다손 치더라도 그 안에서 아직 삶이나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보지 못한 때에 바로 우리의 형제들에게 고통을 주게 된다네. 자네 혼자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먹음직스러운 먹이라고 생각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네만 집어삼키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시간이 좀 지나면 자네는, 다른 사람들의 가슴속에 들어 있는 왠지 좋아 보이는 영혼이란 것도 자네 영혼의 한 조각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럼 한결 마음이 가벼워질 걸 세. 휴일 교회 종소리에 묻혀 자네가 가지고 있는 작은 종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종루에 올라 가 보게! 거기서 좀 더 귀기울여 보면, 자네의 종소리는 훌륭한 화음을 이루어 들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걸세. 교회의 종소리도 없이 자네만의 종소리를 들으려고 집착하다 보면 오래 된 교회의 종이 자네 종소리를 제 둔탁한 소리로 집어삼키고 마는 거야, 마치 파리를 기름에 빠뜨리듯이. 내 말 이해하겠나?" "이해할 것도 같아요. 하지만 난 믿어지지 않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베소프쉬꼬프가 대꾸했다. 우끄라이나인은 허허 웃고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란스레 방안을 오락가락했다. "나 역시도 전엔 믿을 수가 없었어. 이, 벽창호 같은 친구야!" "내가 왜 벽창호야?" 베소프쉬꼬프가 우끄라이나인을 보면서 침통하게 웃었다. "왜 웃나?" 그의 바로 앞에 멈춰 선 우끄라이나인이 깜짝 놀라 물었다. "방금 형님을 화나게 하는 사람을 누군지 몰라도 바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개를 저으며 베소프쉬꼬프가 말했다. "날 어떻게 화나게 하는데?" 어깨를 들썩이며 우끄라이나인이 물었다. "나도 몰라!" 베소프쉬꼬프가 이빨을 드러내고 대답했다. 그 모양이 선량해 보이기도 하고 관대해 보이 기도 했다. "난 그저 형님을 화나게 한 사람은 반드시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만 할거라는 생각을 했 을 뿐예요." "그냥 자넬 어디로든지 집어던질까 보다!" 우끄라이나인이 웃으며 말했다. "안드류샤!" 부엌에서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안드레이가 부엌으로 나갔다. 방안에 혼자 남은 베소프쉬꼬프는 방안을 한번 휘 둘러보고는 무거운 장화를 신고 있는 한 쪽 발을 뻗어 찬찬히 살펴본 다음, 허리를 숙여 손으로 퉁퉁한 장딴지를 만져 보았다. 한 손을 얼굴 높이까지 들어올려 손바닥을 유심히 살펴본 다음, 손을 뒤집었다. 손은 퉁퉁 했고 짧은 손가락에는 누런 털이 덮여 있었다. 손을 허공에다 한번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 났다. 안드레이가 사모바르를 가지고 들어왔을 때 베소프쉬꼬프는 거울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 다. "내 얼굴을 본지도 꽤 오래 됐군..." 그가 고개를 흔들며 실없이 웃으면서 덧붙였다. "내가 봐도 못생긴 낯짝이야!" "그게 어쨌단 말인가?" 안드레이가 의아스럽다는 듯 그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사샤가 말하더군요.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라고!" 베소프쉬꼬프가 느릿느릿 말했다. "그건 당치도 않은 소리야. 사샤의 코는 낚시바늘 같고 광대뼈는 제멋대로 튀어나왔지만 마음 하나만은 반짝이는 별 아닌가?" 베소프쉬꼬프는 큼직한 감자 하나를 집어 들고 빵조각에다 소금을 골고루 친 다음, 마치 태평한 황소처럼 느릿느릿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이곳 일은 잘돼 가요?" 그가 음식으로 가득 찬 입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안드레이가 공장 내의 선전 활동에 대해서 활기에 넘쳐 이야기를 하자 그는 다시 침통한 얼굴을 하고 가르릉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하루가 급한 판국에..." 어머니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가슴에선 불안함이 고개를 들었다. "사람이란 건 달리는 말과 달라서 채찍질할 수 없는 거야!" 안드레이가 말했다. 베소프쉬꼬프가 고집스럽게 머리를 저었다. "너무 오래 걸려! 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내가 할 일은 뭐죠?" 그는 힘없이 두 팔을 벌리고 묵묵히 우끄라이나인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우리 모두는 배우고 또 남들을 가르쳐야 해. 그게 바로 우리의 할 일이야." 안드레이가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베소프쉬꼬프가 다시 물었다. "그럼 투쟁은 언제 하죠?" 우끄라이나인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때가 오려면 아직 몇번은 더 맞아야 할 거야. 그게 내가 아는 전부라네. 언제 싸우게 될는지는 나도 몰라. 우선 머리를 무장하고 그 다음에 주먹으로 싸우는게 옳은 순서라고 생 까해, 나는..." 베소프쉬꼬프는 다시 먹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곁눈질로 그의 넓 적한 얼굴을 훔쳐보며 얼굴에서 베소프쉬꼬프의 네모나고 까다로운 모습과 어울릴만한 그 무엇을 찾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눈의 찌르는 듯한 시선과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겁먹은 듯 눈썹을 움직거렸 다. 안드레이는 안정을 찾지 못하고 갑자기 이야기를 시작하는가 하면 웃음을 터뜨리고, 그 러다가는 느닷없이 하던 말을 멈추고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의 불안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그러나 베소프쉬꼬프는 입을 꾹 다물고 자리 에 앉아서 우끄라이나인이 그에게 뭐든 묻기라도 하면 짧게 대답을 했는데, 그것도 마지못 해 하는 눈치였다. 작은 방은 어머니와 우끄라이나인, 둘에게도 너무 비좁아 숨이 콱콱 막힐 지경이었다. 그 들은 서로 번갈아 가면서 찾아온 손님을 곁눈질로 살폈다. 마침내 베소프쉬꼬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전 좀 자야 할까 봐요. 내내 앉아 있기만 하다가 나가라길래 그냥 나온 거예요. 피곤하 군요." 그가 부엌으로 나가 한참을 밤 못 이루고 뒤척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죽은 것처럼 조용해 졌다. 어머니는 그 정적에 귀를 곧두세우고 있다가 안드레이에게 속삭였다. "저 애는 생각이 너무 극단적이야." "까다로운 친구죠." 우끄라이나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괜찮아질 겁니다. 저도 저럴 때가 있었거든요. 원래 가슴 안에 불꽃이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으면 그을음이 많이 쌓이는 법이에요." 어머니는 사라사 커튼으로 가리워진, 침대가 놓여져 있는 구석으로 걸어갔고, 안드레이는 탁자 옆에 앉아서 그녀의 숨소리며 기도하느라 부스럭거리를 소리 따위를 한참 동안 듣고 있었다. 책장을 빠르게 넘기면서 그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이마를 쥐어뜯는가 하면 길다란 손가락으로 콧수염을 말기도 했고, 이따금 발꿈치와 발꿈치를 가볍게 부딛치기도 했다. 회 중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창문너머에선 바람의 숨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나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오 주여! 세상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나이다. 과연 행복한 사람들 이 사는 곳이 있나이까?" "곧 있게 될 겁니다. 그렇고말고요! 곧 행복한 사람들이 많아질 겁니다, 많아질 거예요." 우끄라이나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21...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복잡하고 파란만장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찾아오는 사람마다 어 떤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왔기 때문에 어머니는 더 이상 그러한 소식에 불안해 하지 않았다. 저녁만 되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불안한 듯 잔뜩 긴장한 채 안드레이와 늦은 밤 까지 소곤대다가, 외투깃을 올리고 모자는 눈 아래까지 눌러쓴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경우가 더욱 빈번해졌다. 모두에게서 절제된 흥분이 느껴졌고, 그 래서 그런지 모두들 노래부르고 웃음을 터뜨리고 싶어 안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그런 적은 한번도 없었다. 늘 쫓기듯 매사를 서둘렀다. 항상 시무룩하고 심각한 표 정을 짓고 있는 사람, 청춘의 정열이 번뜩이는 활달한 사람, 그런가 하면 생각에 잠겨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사람, 하여튼 그들 모두가 어머니가 보기에는 한결같이 불요불굴의 의지를 갖고 확신에 차 있는 사람들이었다. 비록 그들이 나름대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곤 해도 어 머니의 눈엔 모든 얼굴이 하나의 얼굴로 보였던 것이다. 여위고, 침착하면서도 결연하며 청 명한 얼굴, 바로 그것이었다. 새까만 눈동자에서 배어 나오는 심오하면서도 다정하고, 그런 가 하면 준열한 그들의 눈매는 다름아닌 엠마오로 향하는 그리스도의 눈매, 바로 그것이었 다.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빠벨의 주위에 운집해 있는 군중을 상상하고 그수를 헤아려 보기도 했다. 에워싼 군중들 때문에 빠벨을 보지 못하는 적들의 모습도 그려 보았다. 하루는 시내 에서 곱슬머리에 성격이 활달한 처녀 하나가 찾아왔다. 그녀는 안드레이에게 줄 것이라며 꾸러미 하나를 내려놓고, 떠날 때 청명한 두 눈을 반짝이며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안녕히 계세요, 동지!" "잘 가시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어머니가 대꾸했다. 그리고 처녀를 배웅하고 나서 창 가로 다가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봄에 피는 꽃처럼 청신하고, 나 비처럼 경쾌하게 그녀의 동지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 보였다. "동지!" 손님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어머니가 되뇌었다. "아휴,고 깜찍한 것! 주께서 평생 함께할 성실한 동지를 그대에게 내릴지어다!" 그녀는 흔히 시내에서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어떤 어린아이 같은 면을 발견하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했다. 하지만 그들의 신념에 어쩔 줄 모를 만큼 경탄한 그녀는 그 신념의 깊이를 한층 명백하게 느꼈을 뿐만 아니라, 정의는 끝끝내 승리하리라는 그들의 꿈에 매료되어 절로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알지 못할 슬픔에 긴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그들의 솔직함과 자신을 돌보지 않는 아름답고 대범한 마음씨였다. 어머니는 이미 그들이 삶에 대해서 하도 많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지금껏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모든 사람들의 불행의 믿을 만한 근거들을 폭로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결국 그녀 역시도 그들의 생각에 자연 동의하게 되는 것 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그들이 과연 자기들 생각대로 삶을 변혁할 수 있을까, 또 그들에게 모든 노동자들을 자신의 등불로 끌어들일 만한 힘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당장 오늘 배부르기를 바라기 때문에, 당장 먹어치울 수만 있다면 심지어 내일까지만이라도 자기 정찬을 미루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멀고 험난한 길을 가려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고, 마지막까지 남아 모든 사람이 한 형제같이 살아가는 정말 옛날 이야기 같은 미래의 나라를 보려는 시선 또한 적을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토록 훌륭한 사람들이 얼굴엔 수염을 기 르고, 때로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겐 아직 어린아이로 느껴지는 것 이었다. (귀여운 것들!)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이미 선량하고 진지하며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사람들한테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에 자신의 몸을 돌보지도 않고 그 일에 정진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더라도 그런 삶을 사랑할 수 있으려니 마음먹는 것이었다. 한숨을 내쉬면서 지 난 날을 뒤돌아보았다. 거기엔 그녀의 과거가 어둡고 가느다란 띠처럼 끝없이 이어져 이었 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가 이 새로운 삶의 건설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는 인식을 하 게 되었다. 전혀 꺼릴 게 없었다. 여태껏 그녀는 한번도 자신이 누구에겐가 필요한 존재라 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자기의 존재를 분명히 깨 닫고 있었다. 너무나 새롭고 유쾌해서 절로 고개가 쳐들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유인물을 공장안으로 실어 나르면서 이일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 다. 그녀는 이제 경찰들의 눈에도 익숙해져서 전혀 의심을 받지 않게 되었다. 몸수색을 당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늘상 공장에 유인물이 나돌고 난 다음날이었다. 이젠 몸에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을 때, 경찰과 수위의 의심을 불러일으킬 줄도 알아서, 만약 그들 이 그녀를 붙잡아 온몸을 샅샅이 뒤지고 나면 모욕을 당한 척 가장한 채, 그들과 말싸움을 해서 창피를 톡톡히 준 다음에, 자신의 교묘함을 뿌듯해 하면서 유유히 그 자리를 뜨는 것 이었다. 그녀는 이러한 놀이에 더없는 즐거움을 느꼈다. 베소프쉬꼬프는 공장으로부터 퇴짜를 맞고 목재상에 일꾼으로 들아가 통나무와 널빤지, 그리고 장작 따위를 운반하며 공장촌을 돌아다녔다. 어머니는 거의 말마다 그를 보았다. 과 로 탓에 벌벌 떨리는 다리로 터벅터벅 땅을 짚어 가면서 한 쌍의 검정색 말이 앞서서 지나 갔다. 두 필의 말은 늙어빠진 데다 뼈만 앙상했고, 연신 피로에 지친 듯 애처롭게 고개를 흔들어댔으며, 흐리멍텅한 눈은 거의 탈진상태에 빠져 깜빡거렸다. 말들의 뒤를 따라서 물 제 젖은 길다란 통나무와 널빤지 묶음이 그 끝을 땅바닥에 질질 걸리며 실려 가고 있었고, 그 옆에는 말 고삐를 늦춘 니꼴라이가 다 떨어진 누더기를 추하게 걸쳐 입고, 게다가 무거 운 장화마저 질질 끌면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뒤통수에 바짝 모자를 붙여 쓰고 꼴사 납게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흡사 땅에서 뿌리째 뽑혀 길게 누워 있는 나무 같았다. 그는 또 한 자기 발밑만 바라보며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행여나 그의 말들이 눈이 먼 듯 마주 달려 오는 짐마차나 사람들과 부딪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상대방은 지독히도 험악한 고함소리로 허공을 잡아 째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면서 귀 가 멍멍할 정도의 찌어지는 듯한 휘파람을 불거나 가르릉거리는 목소리로 말에게 중얼거리 는 게 고작이었다. "워, 워!" 안드레이의 동지들이 빠벨의 집에 모여 외국 신문이나 혹은 팜플릿의 최신호를 읽을 때 면, 베소프쉬꼬프도 줄곧 찾아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말없 이 듣기만 했다. 독서가 끝나고 젊은이들은 장시간 열띤 논쟁을 벌였지만 베소프쉬꼬프만큼 은 논쟁에 한번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이후에도 그냥 남아서 안드레이와 단 둘이 마주앉아 침통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누가 가장 비난받아야 할 몸일까요?" "맨 먼저 <이건 내 거야>라고 말했던 자가 아닐까! 그 인간은 수천년 전에 골로 갔을테니 까 그 작자에게 화낼 필요는 없겠지." 비록 농담으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의 눈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면 부자놈들? 혹은 그 놈들을 후원하는 놈들?" 우끄라이나인은 머리를 움켜쥐고 콧수염을 잡아당긴 다음, 쉬운 말로 삶이라는 것과 민중 에 대해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늘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 으로 비난받아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이끌어졌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 베소프쉬꼬프는 항상 불만이었다. 두툼한 입술을 굳게 다물고 베소프쉬꼬프는 고개를 저으며 그건 그렇지 않다며 못내 의문이 간다는 투로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불만족스러운 우울한 기 분으로 나가곤 했다. 한번은 그가 이렇게 말했다. "아니예요. 우리 역시도 비난을 받아야만 해요! 단언하건대, 우리의 모든 삶을 더러운 땅 을 갈아엎듯이 싹 갈아엎어야만 해요. 인정사정 볼 것 없어." "언젠가 기록계 이사이가 너희들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더라." 어머니가 기억을 더듬어 끼어들었다. "이사이가요?" 베소프쉬꼬프는 이렇게 되묻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렇다니까, 악독한 놈! 사람들 하는 얘길 죄다 엿듣고 또 얼마나 꼬치꼬치 캐묻는지. 요즘은 우리 동네에 나타나서는 우리집 창문을 들여다보기도 한다니까." "창문을 엿본다고요?" 베소프쉬꼬프가 재차 물었다. 어머니는 벌써 침대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우끄라이나인이 서두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문을 여는 것으로 보아 베소프쉬꼬프가 뭔가 쓸데없는 소리를 지 껄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와서 실컷 들여다보라고 해! 그 놈 시간도 많겠다, 그러니 하는 짓이라곤..." "오냐, 두고 보자! 바로 그 놈이 죽일 놈예요." 베소프쉬꼬프가 가르릉거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무엇 때문에?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해서?" 우끄라이나인이 재빠르게 물었다. 베소프쉬꼬프는 대꾸도 없이 그냥 밖으로 나가 버렸다. 우끄라이나인은 거미다리처럼 가는 다리를 질질 끌며 방안을 맥없이 천천히 서성거렸다. 그는 장화를 벗고 있었다. 항상 장화소리에 어머니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것을 염려해 서 장화를 벗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잠들지 않고 있다가 베소프쉬꼬프가 나가자 떨 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저 애가 두렵다!" 우끄라이나인이 느릿느릿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성미가 급한 친구예요. 넨꼬, 이사이 얘기는 꺼내지 말 걸 그랬나 봐요. 그런데 이사이란 놈 정말로 첩자노릇을 하고 다니나 보요?" "의심의 여지가 없어. 그 놈의 대부가 헌병이라니까!" "두고 보세요! 그 놈 니꼴라이한테 한번 호되게 당할 거예요." 그는 두려운 듯이 계속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그 잘난 나리님들이 우리네 민중의 가슴에 심어 놓은 감정이 어떤 것인가를 보세요. 만약 니꼴라이 같은 친구들이 심한 모욕감을 느낀 나머지 제정신을 잃게 되는 날이라도 온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크게 벌어지고 말 겁니다. 하늘엔 피가 튀 고 땅은 비누거품 같은 피거품으로 뒤덮이겠죠..." "너무 무시무시하고나, 안드류샤!" 어머니가 나직한 비명을 질렀다. "그 놈들이 파리를 삼키지만 않았어도 토해 낼 필요는 없는 겁니다." 안드레이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는가 싶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어쨌든 마침내는 넨꼬, 그 놈들이 뿌려 놓았던 핏방울 하나하나가 모여 호수가 되어 흐 르고, 결국엔 민중들의 눈물로 씻길 날이 올 겁니다." 그는 느닷없이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덧붙였다. "정의란 단순한 위로로 무마될 성질의 것이 아니지요. 22... 그런던 어느 일요일, 가게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와 문을 열던 어머니는 온몸이 마비될 듯 한, 흡사 따뜻한 여름비와도 같은 기쁨에 휩싸여 문지방에 우뚝 서 버렸다. 방안에서 빠벨 의 활기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게 아닌가! "어머닌가 오셨군!" 우끄라이나인이 소리쳤다. 어머니는 재빨리 홱 돌아서는 빠벨을 보았다. 그리고 벌겋게 불타오르는 그의 얼굴도 보 았다. 마치 그녀에게 미래에 대한 약속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결국 돌아왔구나..., 네가 집에 돌아오다니!" 뜻밖의 만남에 망연자실해진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고 서 있기만 하다가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창백해진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빠벨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이는가 하면, 입술도 떨 리고 있었다. 얼마 동안 빠벨은 말이 없었고, 어머니 역시 말없이 아들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우끄라이나인이 조용히 휘파람을 불며 그들 옆을 지나 고개를 떨군 채 마당으로 나갔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빠벨이 어머니의 손을 떨리는 손가락을 꼭 감싸쥐고, 속에서 우러나오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고마워요, 어머니!" 아들의 부드러운 표정과 목소리에 너무도 기쁜 나머지 흥분한 어머니는 아들의 머리를 어 루만지며 심장의 고동을 억제하느라 애쓰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널 도우셨어! 안 그러냐...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우리들의 위대한 일을 도우셨다니 고맙지 않고요! 한 인간으로 태어나 자기 어머니를 정 신적인 동지로 부를 수 있다는 건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행복이에요." 어머니는 말없이 그의 말을 열린 가슴으로 하나도 빼놓지 않고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면서 아들에게 넋을 잃고 있었다. 바로 앞에 서 있는 아들이 그렇게 똑똑해 뵈고 가깝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어머니, 전 제가 얼마나 어머니의 속을 썩여 드렸고, 또 힘드시게 했는지를 잘 알아요. 전 어머니가 지금 당장은 저희들을 이해하지 못하시고 또한 저희들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 일 수는 없다고 해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셨듯이 말없이 참아 주시리란 생각을 했어요. 제가 못난놈이었어요..." "안드류샤가 내게 너무 많은 걸 이해시켜 주었단다." 어머니가 안드레이의 이야기를 꺼냈다. "안드레이가 어머니 얘기도 해 주었는 걸요." 웃으면서 빠벨이 말했다. "그리고 이고르도. 그 사람은 우리 고향사람이더구나. 안드류샤는 나한테 글도 가르치려 고 했지." "어머닌 부끄러워서 혼자 몰래 공부하고 계시다면서요?" "안드류샤가 그것도 알고 있었구나!" 어머니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어머니는 가슴에 넘쳐 흐르는 기쁨을 주체할 길이 없는 듯 빠벨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안드류샤를 부르는 게 어떻겠냐! 우리에게 방해가 될까봐 일부러 나갔어. 안드류샤한테 는 어머니가 없잖니..." "안드레이요?" 빠벨은 현관문을 열면서 되물었다. "안드레이, 어디 있어요?" "여기 있네. 장작을 패야 되겠어." "놔 두고 얼른 들어오세요." 그는 곧장 들어오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가면서 주인이나 된 듯이 말했다. "니꼴라이한테 땔감 좀 가져다 달라고 해야겠어요. 장작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빠벨이 어때졌는지 좀 보세요. 넨꼬! 벌을 주기는커녕 반란자를 실컷 먹여 주기만 한 것 같아요." 어머니는 웃음을 떠뜨렸다. 아직껏 심장이 멎을 듯한 기쁨에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있는 그 녀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벌써 어떤 인색하고 조심스러운 그 무엇이 늘상 하던 대로의 차분 한 아들을 보고자 하는 바람을 슬슬 꼬드기고 있었다. 어찌나 기쁘던지 어머니는 여태껏 살 아오며 처음으로 맛보는 이 기쁨이 지금 이 순간처럼 생생하고 강렬하게 그녀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주기를 바라는 아음이 간절했다. 그리고, 행복이 조금이라도 식어 버리지나 않 을까 하는 두려움에, 그녀는 이내 그 행복을 서둘러 감추어 버렸다. 마치 새 사냥꾼이 우연 히 손에 넣게 된 희귀한 새를 감추어 버리듯이. "저녁이나 먹도록 하자꾸나! 얘야, 빠샤, 아직 아무것도 안 먹었지?" 그녀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말했다. "그래요. 어제 간수한테 내가 풀려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오늘 아침엔 아무것도 마시지 도, 먹지도 않았어요." 빠벨이 계속해서 얘기했다. "여기 와서 맨 처음에 시조프 노인을 만났어요. 그 노인 저를 보시더니 길을 건너오셔서 인사를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 노인한테 <어르신네, 저를 대할 때 조심하세요. 전 경 찰의 감시를 받는 위험한 사람이랍니다>했더니 상관없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분이 자기 조카에 대해서 어떻게 물으셨는지 아세요? <표도르 그 녀석 제 앞가림이나 제대로 하 던가?> 그러길래 제가 대답했죠. <감방에서 앞가림을 잘하는 게 어떻게 하는 건데요?> 그랬 더니 노인이 다시 물으시는 거예요. <이를테면 그 녀석이 동지를 팔아먹는 쓸데없는 말이나 지껄이고 있지 않은가 해서...> 그래서 또 제가 페쟈는 정직하고 영리한 사람이라고 말씀드 렸더니 그분이 턱수염을 어루만지면서 자랑스러운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네 시조 프 가문에선 못된 인간들을 안 키우지>!" "그 노인, 보기보다는 머리가 잘 돌아가신다네." 고개를 끄덕이며 우끄라이나인이 대꾸했다. "우린 참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참 괜찮은 농부시더군. 그래 페쟈는 곧 나올 것 같던 가?" "제 생각엔, 모두들 나오게 될 것 같아요. 그 자들이 믿는 거라곤 이사이의 진술밖에는 없는데, 사실 그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어머니는 방안을 왔다갔다하면서 아들을 쳐다보았다. 안드레이는 두손을 등뒤로 하고 창 문 옆에 서서 빠벨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빠벨은 방안에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서성거 렸다. 제멋대로 자란 턱수염, 그리고 두 뺨까지 내려올 만큼 무성하고 빽빽하게 자란 새까 만 곱슬머리 덕택에 검게 그을린 얼굴이 환해 보이기까지 했다. "앉으려무나!" 따뜻한 요리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안드레이는 르이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가 이야기를 끝마치고 나자 빠벨이 유감스럽다는 듯 소리쳤다. "내가 집에만 있더라도 그렇게 떠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텐데! 그분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 그 분의 머리는 반란과 혼란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어요." 우끄라이나인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렇긴 하지만, 나이가 사십 줄에 접어든 데다, 나름대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마음 안에 도사리고 있는 곰이란 놈과 싸워 왔으니 생각을 바꾼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야..." 그들은 서로 이런 식의 이야기로, 어머니가 이해하지 못할 말로 논쟁을 시작했다. 저녁식 사는 이미 끝났지만 그들은 여전히 <비오듯 쏟아지는 싸라기눈 같은> 이상한 말들을 서로 격렬하게 퍼붓고 있었다. 물론 가끔 쉬운 말도 들렸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곧장 걸어 나가야만 해. 한 발자국도 후퇴함이 없이!" 빠벨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다 보면 우릴 아직도 적으로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맞닥뜨리게 될텐데..." 어머니는 그들의 논쟁을 유심히 듣고서, 빠벨은 농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반면에 우 끄라이나인은 농민들에게도 선이라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을 옹호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에겐 안드레이가 하는 말이 훨씬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래서 그 가 옳은 것도 같았지만, 그러면서도 매번 그가 빠벨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면, 혹시나 빠벨이 그 말에 기분이 상하지나 않을까 염려되는 마음에 숨을 죽이고 아들의 대답을 애타 게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목소리를 높여 논쟁을 하면서도 한번도 서로의 기분을 상 하게 하지는 않았다. 이따금 어머니가 아들에게 묻곤 했다. "정말 그러냐, 빠샤?" 빠벨은 웃으면서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래요." 그러면 우끄라이나인이 짐짓 비아냥거리는 투로 끼어드는 것이었다. "이보세요, 나리. 배가 터지도록 잡숩긴 했지만 제대로 씹질 않아서 혹시 목구멍에 고기 조각이라도 걸린 게 아닌지요! 목구멍 청소라도 하시지요." "농담하지 말아요." 빠벨이 대꾸했다. 그러자 우끄라이나인이 말했따. "내가 어때서? 난 장례식에 온 것처럼 엄숙한데... 어머니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23... 봄이 성큼 다가왔다. 눈이 녹으면서 그 동안 눈 속에 가려 있던 진창과 그을음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날이 갈수록 눈에 띄느니 진창이었고, 공장촌 전체는 마치 빨지 않은 누 더기를 걸친 것 같았다. 낮이면 지붕 위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회색벽에서는 지쳐 땀이 흥 건하듯 습기가 배어 나왔으며, 밤이 가까워 오면 가는 곳마다 허연 고드름이 희미하게 반짝 이는 것이었다. 해가 나는 날이 갈수록 잦아졌다. 그리고 소택지로 치달리는 시냇물이 졸졸 소리를 내며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메이데이를 축하하는 기념제가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공장과 공장촌에는 이 기념제의 의미를 설명하는 전단들이 뿌려졌다. 그래서 선전에 동요 되지 않던 젊은이들조차도 전단을 읽고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이 행사는 꼭 치러야만 해!" 베소프쉬꼬프는 우울한 미소를 지으면서 외쳐댔다. "때가 왔어! 더 이상 숨바꼭질은 필요 없어." 페쟈 마진도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전보다 훨씬 빼빼해진 그는 행동할 때나 말할 때 신경질적으로 몸을 떠는 게 흡사 새장에 갇힌 종달새 같았다. 페쟈 마진은, 항상 말이 없고 나이에 맞지 않게 진중한 야꼬프소모프와 함께 다녔는데, 그는 지금 시내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감방에 있는 동안 얼굴이 더욱 붉어진 사모일로프, 바시리 구세프, 부낀, 드라구노프, 그리고 그 밖의 몇몇 사람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열변한 반면, 빠벨, 우끄라이 나인, 소모프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무장에 반대 입장을 취했다. 늘 지친 모습에 땀이 흥 건하고 게다가 숨까지 몰아 쉬는 이고르가 한번은 나타나 농담조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본질적인 제도를 변혁하는 과업은 정녕 위대한 과업입니다. 동지들, 그러나 그 과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위해서는 새 장화를 한 켤레 장만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다 해지고 물에 젖은 자기 구두를 가리키며 말했다. "덧신마저 고칠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낡아서 날마다 나는 발을 흠뻑 적신답니다. 나는 우 리가 낡은 세계와 공개적으로, 그리고 명백히 인연을 끊기 이전에는 땅속으로 들어가고 싶 은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때문에 사모일로프 동지가 제안한 무장시위에는 절대 반대하 며, 대신 나를 튼튼한 장화로 무장시켜 줄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심지 어 따귀를 한 대 후려갈기는 것보다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해서는 한결 유익하다는 걸 절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렇듯 그럴듯한 말로 각국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을 변혁시키기 위해 어떻게 노력 했는가 하는 투쟁 사례들을 노동자들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어머니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데 푹 빠져 그 가운데에서 어떤 깨달음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체구는 작지만 배가 불 룩하고 불그레한 낯짝을 가진 사람들, 뻔뻔스럽고 탐욕스러운 사람들, 그리고 교환하고 잔 인한 사람들이 민중을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속이길 좋아하는, 그런 의미에서 민중의 가장 교활한 적이라는 것이었다. 짜르 치하에서 살기가 어려울 때면 그들은 짜르 권력에 대항하 도록 민중을 부추기다가도, 막상 민중들이 들고일어나 왕의 손에서 그 권력을 빼앗기라도 하면 그들은 속임수를 써서 그 권력을 다시 강탈하고 민중을 개집으로 내쫓는 것이었다. 어 쩌다 민중이 그들에게 싸움이라도 걸면 그들은 수천, 수만의 민중을 학살했던 것이다. 한번은 어머니가 용기를 내어 그의 이야기를 듣고 깨달은 어떤 이의 삶을 그에게 말하고, 당혹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물은 적이 있었다. "정말 그러오, 이고르 이바노비치?" 그는 껄걸 웃고 나서, 두 눈을 치켜 뜨고는 씩씩거리면서 손으로 가슴을 비벼댔다. "예, 그렇습니다, 어머님! 어머님의 말씀은 역사라는 황소에다 뿔을 붙이신 격입니다. 이 누르스름한 바탕에 몇 가지의 장식들, 이를테면 수를 놓으신 겁니다. 그러면서도 눈꼽만치 도 전체를 바꾸어 놓지 않으셨어요! 다시 말해 살이 디룩디룩 찐 놈들이 가장 흉악한 놈들 이고 민중을 갉아먹는 가장 해로운 독충이라는 거지요. 프랑스 사람들은 그들을 일컬어 부 르주아라는 아주 적절한 명칭을 갖다 붙였습니다. 부르주아가 어떤 놈들인지 잘 기억해 두 세요. 그 놈들은 우리 민중을 씹어먹다 못해 아주 피를 빨아먹는 놈들이랍니다..." "부자들을 말하는 건가?" "바로 맞추셨습니다! 부자라는 게 그들의 불행이지요. 어머니도 아시겠지만 만약에 어린 애가 먹는 음식에 구리를 조금씩 넣는다면 뼈의 성장이 억제되어 그 어린아이는 난쟁이가 되고 말 겁니다. 그것과 마찬가지 이치로 인간이 한번 돈 맛을 알게 되면 저도 모르게 영혼 은 더 이상 크질 못하고 시들어 정말 어린애들이 5꼬뻬이까를 주고 사기에도 아까울 정도의 죽은 영혼이 되는 거지요..." 한번은 빠벨이 이고르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이렇게 말을 꺼냈다. "안드레이, 가슴앓이를 많이 한 사람들이 농담을 잘 한다는 걸 알아요?" 우끄라이나인이 입을 다물고 있다가 두 눈을 찡그리면서 대꾸했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전 러시아가 폭소로 망해 버렸게..." 나따샤가 다시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도 다른 도시 어떤 감방에 갇혀 있었지만 변 한 데는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가 있을 때 우끄라이나인이 기분이 한결 좋아져서 농 지거리도 잘하고 그녀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도록 만들면서 자기 특유의 익살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짐짓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녀가 가고 나면 우끄라이나인은 금세 끝없이 우울한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고 한동안 발을 질질 끌면서 방안을 서성이는 것 이었다. 사샤는 자주 찾아오면서도 항상 침통한 표정에, 서두르는 폼이 왠지 어색해 보일 정도로 단호했다. 하루는 우연한 기회에 어머니는, 빠벨이 사샤를 바래다 준다고 현관을 빠져 나가 문밖에 서 나누는 빠른 대화를 듣게 되었다. "당신이 깃발을 들 거예요?" 처녀가 조용히 물었다. "그렇소." "결정된 일인가요?" "그래요, 그건 내 의무요." "다시 감옥에 가려고?" 빠벨은 말이 없었다. "당신이 하지 않으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뭐요?"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면..." "안돼요!" 그가 큰소리로 말했다. "생각을 좀 해보세요. 당신은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고 모든 사람들이 좋아해요... 당 신과 안드레이는 여기에선 중요 인물이란 말예요. 자유로운 몸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만약 당신이 계속 고집한다면 멀리, 오랫동안 유형을 당하게 될 건 뻔하단 말입니다." 어머니는 처녀의 목소리에서 익히 잘 아는 우수와 공포의 감정이 울리고 있다는 걸 느꼈 다. 그리고 사샤의 말들은 그녀의 가슴에 흡사 얼음물을 끼얹듯 찡하는 그 무엇으로 다가왔 다. "안돼요, 난 이미 결정했소. 어떠한 이유가 있다 해도 난 결정한 일을 번복할 수는 없 고." "제가 이렇게 애원하는데도요?" 빠벨은 갑자기 빠르게 말을 내뱉었을땐, 거기엔 어떤 특별한 위엄이 있었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돼요, 당신이 그러다니? 그러면 안돼요." "저도 인간이에요." 그녀가 나직하게 대꾸했다. "좋은 사람이지요. 내겐 소중한 사람이오.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런 말 을 해서는 안돼요." 그 역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는데, 왠지 숨이 콱콱 막히는 듯했다. "안녕!" 처녀가 말했다. 그녀의 구두소리를 듣고 어머니는 그녀가 거의 뛰다시피 빠르게 걸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빠벨은 그녀를 따라 마당까지 나갔다. 숨이 가빠 올 정도로 무거운 놀라움이 어머니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이해할 수 없어도 그녀의 앞에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빠샤가 무슨 일을 하려는 걸까?) 빠벨은 안드레이와 함께 돌아왔다. 우끄라이나인이 머리를 설래설래 흔들면서 말했다. "어휴, 이사이 놈, 이사이 그 놈을 그냥..." "터무니 없는 생각을 버리도록 그 사람한테 충고라도 해야겠어." 빠벨이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빠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이 뭐냐?" 어머니가 목소리를 낮추어 외쳤다. "언제요? 지금요?" "아니... 메이데이에." 빠벨이 목소리를 낮추어 외쳤다. "아하! 저는 우리의 깃발을 들 겁니다. 깃발을 들고 맨앞에 설 거예요. 그렇게 되면 필시 전 다시 감옥에 가게 될 겁니다." 어머니는 두 눈이 뜨거워지고 입 안이 바짝바짝 타 들어갔다. 빠벨이 그녀의 손을 어루만 졌다. "해야만 해요, 이해해 주세요." "난 아무 말도 않겠다."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아들의 눈길과 자기의 눈길이 똑바로 마주 치자 그녀의 고개는 다시 떨구어졌다. 그는 그녀의 손을 놓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책망하듯 입을 열었다. "슬퍼하시기보다는 기뻐하셔야만 해요. 언제나 우린 기쁜 마음으로 자기 자식을 사지에 보내는 어머니를 갖게 될까요..." 우끄라이나인이 두런거리기 시작했다. "뛰어, 뛰어! 우리댁 나리께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내달리셨다네..."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든?" 어머니가 되풀이해 말했다. "난 네 일에 간섭 않겠다. 다만 에미가 돼서 돕지 못하는 내 마음이 미어질 뿐이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떨어졌다. 그러면서 내뱉은 매몰찬 말이 어머니의 가슴을 더욱 미어지 게 만들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사랑도 있어요..." 몸을 부르르 떤 어머니는 아들이 또 어떤 말로 그녀의 가슴을 쥐어짤 것 같은 두려움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이 무슨 필요가 있냐, 빠샤! 난 이해한다.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냐. 다 동지들 을 위하는 일인 걸..." "아녜요. 그건 바로 나 자신을 위해 하는 일입니다." 문간에 안드레이가 서 있었다. 그는 문 높이가 너무 낮아서 무릎을 어정쩡하게 구부리고 한 쪽 어깨를 문설주에 기대고 다른 쪽 어깨와 목, 그리고 머리는 앞으로 쭉 내밀고 서 있 었다. "이보게, 그만 좀 떠벌리게나!" 우끄라이나인이 툭 불거져 나온 두 눈으로 빠벨의 얼굴을 쏘아보며 우울한 듯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그는 흡사 바위 틈에 도사리고 있는 도마뱀 같았다. 어머니는 그저 울고만 싶었지만 그래도 아들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않아 갑작스레 이렇 게 중얼거렸다. "오, 얘야. 내 깜박 잊은 게 있구나..." 그리고는 현관 밖으로 빠져 나가 구석에 머리를 박고서 아들에게서 받은 서운함에 하염없 이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흡사 가슴에서 눈물이 피가 되어 흐르는 것 같았다. 제대로 닫히지 않고 벌어진 문틈으로 어렴풋하게 다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넌 어머니 속을 태워야만 속이 시원하니?" 우끄라이나인이 따지며 물었다. "형은 그런 말할 자격이 없어!" 빠벨이 소리쳤다. "그럼 망나니짓 하는 얼간이를 보고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동지된 도리란 말인가? 어 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내 말 무슨 말인지나 알겠어?" "사람이란 말을 딱 부러지게 할 줄 알아야 해.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어머니한테도 그래야만 하나?"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야. 난 발에 족쇄를 채워 구속하려 드는 사랑이나 우정 따위는 원치 않아..." "영웅 하나 나셨군! 가서 코나 닦아라. 가서 사쉔까에게도 죄다 얘기하지, 그래. 아니 벌 써 얘기를 했어야만 했는지도 모르지..." "난 벌써 얘기했어..." "정말? 이젠 거짓말까지! 그녀에게라면야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다정스레 얘기했을 것 아 닌가. 난 듣지 않았어도 다 알만 해. 그러면서 어머니 앞에서 영웅심이나 발동하고... 너의 그 돼먹지 못한 영웅심은 반푼어치도 못돼." 어머니는 재빨리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우끄라이나인이 빠벨 을 나무라는 데에 깜짝 놀라 성급하게 문을 열고 비애와 두려움으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 키고 부엌으로 들어가면서 말문을 열었다. "우-- 춥구나! 봄날씨가 이러니..." 부엌에서 이것저것 잡다한 물건들을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하면서 방안에서 들려 오는 한결 낮추어진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쓰던 그녀가 보다 큰소리로 말을 이었다. "모든 게 변했어. 사람들은 한결 뜨거워지고, 그와 반대로 날씨는 한결 쌀쌀해지고. 예전 같으면 이맘때쯤이면 따뜻했는데, 하늘도 맑고 햇살도 따사롭고..." 방안에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한가운데에 멈춰 서서 반응을 기다렸다. "들었나? 넌 이걸 알아야만 해, 제기랄! 어머니의 가슴은 네 그것보다 풍요로우셔..." 우끄라이나인의 나직한 목소리였다. "차 한잔씩들 하겠니?"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감 추기 위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소리쳤다. "너무 추워 얼어 죽겠다." 빠벨이 그녀에게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곁눈으로 힐끔 어머니를 쳐다보는 웃음띤 얼굴 가운데 그의 입술이 죄지은 듯 떨리고 있었다. "절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 전 아직 어린애예요. 바보천치이기도 하고요..." 그가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 울리지 말아 다오." 그녀는 아들의 머리를 가슴에 안으며 비통한 어조로 소리쳤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주님이 함께하실 거야. 네 인생은 너의 것이야. 하지만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 다오. 제 아들을 아끼지 않는 에미가 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겠니? 없고말 고... 이 에미에겐 너나 할것없이 다들 가엾게 보인단다. 너희들 모두가 다 내 혈육이나 진 배없고 또한 훌륭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에미말고 누가 너희들을 걱정하겠어? 네가 앞으로 걸어 나가면 다른 사람들이 네 뒤를 따를 거야. 모든걸 내던지고 함께 나아가는 거야, 빠 샤!" 그녀의 가슴에선 활활 타오르는 듯한 어떤 생각이 몸부림쳤고, 비애와 고난으로 가득 찬 기쁨의 감정이 불붙듯 치솟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손을 흔들며 찌를 듯한 고통으로 활활 타오르는 두 눈으로 아들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됐어요, 어머니! 용서해 주세요. 이제야 뭔가를 알 것 같아요." 그가 고개를 떨구며 속삭였다. 그리고 웃음띤 얼굴, 반짝이는 두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면 서 당혹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기쁨이 배어 나오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어머니의 솔직한 말씀 결코 잊지 않겠어요." 그녀는 아들을 밀치고 방안을 둘러보며 안드레이에게 위로하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로 말 을 걸었다. "안드류샤! 빠벨을 비난하지 말아라. 아무래도 네가 나이가 더 들었잖니..." 우끄라이나인이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서서 꼼짝도 않은 채 괴상하고 우스꽝스럽게 으르 렁거렸다. "우--우--우! 빠벨을 욕하지 않을께요. 대신 두들겨 패 주겠어요." 그녀는 천천히 그가 있는 데로 걸어가 팔을 뻗으며 말했다. "이런, 사랑스런 사람 같으니..." 우끄라이나인은 홱 돌아서서 고개를 숙이고 하던 버릇대로 뒷짐을 진채 그녀를 지나쳐 부 엌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그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가, 빠벨 그렇지 않음 네 대갈통을 물어뜯어 버릴테다. 제가 농담을 한 거예요, 넨꼬. 제가 한 말 곧이 듣지 마세요. 이제 사모바르나 올려 놓을께요. 석탄이 이게 뭐야..., 다 젖어 버렸잖아, 제기랄!"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어머니가 부엌에 나가 보니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사모 바르에 입김을 불어넣고 있었다. 어머니를 쳐다볼 생각도 않고 우끄라이나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어머니, 너무 걱정 마세요. 빠벨 맘 상하는 짓은 안 해요. 전 삶은 순무처럼 물러터진 놈이잖아요. 저... 저기 영웅양반 귀 막아! 전 빠벨을 좋아해요. 하지만 빠벨이 입고 다니 는 조끼는 좋아하지 않아요. 어머니도 아시다시피 빠벨은 새 조끼를 떡 하니 입고 꽤나 마 음에 드는지 배는 쑥 내밀고서 사람들을 밀친단 말입니다. 마치 내가 어떤 조끼를 입고 있 는지 좀 봐 달라고 말하듯이 말입니다. 정말 좋은 조끼라는건 알지만 도대체 왜 사람들을 미냔 말예요. 그렇지 않아도 비좁은 데서." 빠벨이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얼마나 더 지껄여댈 거야? 날 한방 호되게 쳤으면 됐지, 그러고도 성이 안 찬단 말야?" 우끄라이나인은 바닥에 주저앉아 사모바르를 감싸듯이 두 다리를 쭉 뻗고서 빠벨을 응시 했따. 어머니는 문간에 서서 안드레이의 둥글둥글한 뒤통수와 약간 구부러진 빼빼한 목에 단정하면서도 우수가 깃든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바닥에 버틴 채 몸통 을 뒤로 약간 젖히고서 약간 상기된 눈으로 모자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눈을 껌뻑이면서 크 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참 좋은 분들예요, 정말!" 빠벨이 몸을 굽혀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우끄라이나인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잡아 당기지 마! 날 아주 넘어뜨리려고 작정했나..." "뭘 그렇게 꺼라누? 서로 키스하고 아주 뜨겁고 힘차게 안아 봐..." 어머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고 싶어?" 빠벨이 물었다. "괜찮지!" 우끄라이나인이 일어나면서 대답했다. 워낙 힘차게 서로 끌어안다 보니 얼마 동안은 숨이 콱콱 막힐 정도였다. 그들은 비록 몸 은 두 개였지만 우정으로 뜨겁게 불타오른 하나의 영혼이었다. 어머니의 두 뺨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이미 그 눈물은 행복의 눈물이었다.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면서 당혹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여자들이란 시도 때도 없이 울어서 탈이야. 슬퍼도 눈물, 기뻐도 눈물, 그저 눈물 흘리 는 게 일이라니까..." 우끄라이나인도 빠벨을 가볍게 밀치고 손가락으로 눈을 비벼대면서 말문을 열었다. "이만하면 됐어. 송아지가 너무 까불어대면 도살장으로 간다네. 근데 이 놈의 석탄은 왜 또 말썽이야! 하두 불어댔더니 눈에 티가 다 들어갔네..." 빠벨은 고개를 떨군 채 창가에 앉아서 조용히 말했다. "그런 눈물은 전혀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어머니가 그에게로 다가가 나란히 옆에 앉았다. 그녀의 가슴은 활기넘치는 감정으로 따뜻 하고 부드럽게 감싸였다. 여전히 우울하면서도 한편 기쁘고 마음이 안정되었다. "제가 식기 치울께요. 그냥 앉아 계세요, 넨꼬! 좀 쉬세요. 저희들이 너무 어머니 가슴을 아프게 해 드렸어요..." 방으로 들어가면서 우끄라이나인이 말했다. 그리고 방안에서 그의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우린 이제야 삶이라는 걸 멋들어지게 느낀 거야. 참되고 인간적인 삶을..." "그래요!" 어머니를 쳐다보면서 빠벨이 대꾸했다. "모든 게 달라졌어! 슬픔도 달라졌고, 기쁨도 달라졌고..." 어머니가 말했다. "또 그래야만 해요! 왜냐하면요, 인자하신 넨꼬, 새로운 마음이 성장하고 있고, 더구나 그 새로운 마음을 삶 속에서 성장하기 때문이지요. 앞만 보고 걸어가던 한 사람이 이성의 등불로 삶을 비추고 이렇게 외쳐댑니다. <아, 여러분! 민국의 민중이여, 한 가족으로 단결 합시다!> 그리고 그가 절규할 때마다 모든 이들의 강건한 가슴은 하나의 거대한 가슴, 은종 만큼 힘차고 소리가 잘 나는 가슴으로 모여지는 겁니다..." 어머니는 떨리는 입술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입술을 옥다물고, 또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두 눈을 꼭 감았다. "안드류샤를 내버려두거라..." 문간에 서서 우끄라이나인이 계속했다. "혹시 알고 계세요? 민중의 앞길엔 아직도 수많은 고통이 가로놓여 있고 아직도 끝도 없 이 피를 플려야만 한다는 것을. 하지만 이 모든 것, 모든 고통, 그리고 나의 피는 내 가슴 속에, 내 골수에 벌써부터 박혀 있는 희망에 비하면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 까? 전 이미 부자입니다. 밤하늘에 빛을 발하는 별과 같은. 전 참고 또 참았습니다. 왜냐하 면 내 몸 안에는 어느 누구도, 어느 무엇도 결코 압살할 수 없는 기쁨이 자라 숨을 쉬고 있 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쁨에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차를 마시고 삶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화를 나누며 자정까지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생각이 분명하게 와 닿을 때면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과거에서 무언가 를 끄집어냈는데, 그것들은 늘상 고통스럽고 잔혹한 것 일색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가 슴에서 끄집어낸 이런 고통스런 바위로 생각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따뜻한 대화의 급류 속에서 두려움이 그녀의 마음을 족이자, 그녀는 이제 아버지가 자기 에게 거칠게 말을 내뱉던 그날을 회상했다. "왜 그리 주둥아릴 비죽거리고 있는 거야! 네 년한테 장가들겠다는 바보천치가 있다면서? 그럼 가란 말이다. 처녀들이란 죄다 시집을 가고 그러다 여편네가 되면 자식새끼를 낳는 거 고, 자식새끼들이란 모두 부모에겐 가엾어 보이게 마련이란 말이다. 네 년은 누가 인간이 아니라든?" 그런 말을 듣고 나서 그녀는 자신 앞에, 주위에 어둡고 황량한 벌판이 끝도 없이 뻗쳐 있 는,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는 인생의 가시밭길이 놓여져 있다는 것을 앎과 동시에 이 가시 밭길을 가야만 하는 숙명으로 가슴엔 맹목적인 복종이 가득 채워졌었다. 지금도 그러했다. 그러나, 새로운 고통의 도래를 느끼면서 그녀는 누군지 모를 어떤 사람에게 중얼거렸다. (여기 있소, 데려 가시오!) 그러고 나자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고통은 한결 누그러졌다. 그 고통은 흡사 떨 면서 노래를 하는 팽팽한 현과도 같았다. 하지만 닥쳐 올 슬픔의 예감으로 떨리는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녀에게서 모든 것을 가져 가지 말았으면, 빼앗아 가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이, 강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 렇다고 시나브로 사그러들지도 않을 듯이 잠재해 있었다. 무엇이 앙금이 남아 있었던 것이 다... 24... 이튿날 아침 일찍, 빠벨과 안드레이가 집을 나가자마자 꼬르수노바가 찾아와 창문을 소란 스럽게 두드리고는 숨넘어갈 듯이 소리쳤다. "이사이가 죽었다오! 가 봅시다..." 어머니는 몸이 후들후들 떨리면서 뇌리에 살인자의 이름이 전광석화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누가 죽였답니까?" 어깨에 숄을 걸치면서 어머니가 짧게 물었다. "아니, 그자가 그럼 여태껏 이사이 옆에 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유? 후려치고 내뺐 지." 마리야가 대꾸했다. 그리로 가는 도중에 마리야가 말했다. "지금 범인 찾느라 뒤지고 야단났을 거유. 당신들 어제 집에 붙어 있길 참 다행으로 아 슈. 그건 내가 증인이 되어 줄 수 있수. 자정이 조금 지나서 아주머니 댁을 지나가다가 창 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니까 모두들 탁자 앞에 빙 둘러앉아 있더구만..." "그게 뭔 소리요, 마리야? 그럼 그 애들을 의심이라도 한단 말이오." 어머니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럼 누가 이사이를 죽였겠수? 필시 당신들이겠지." 꼬르수노바가 확신이라도 하듯 뇌까렸다. "이사이가 당신들 꽁무니를 밟고 다녔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없는 형편이니..." 어머니는 멈춰 섰다. 숨이 막혔다. 얼른 가슴에 손을 댔다. "왜 그러우? 너무 걱정 말아요. 도둑이 제 발 저린다 안 합니까! 얼른 가 보기나 합시다. 그새 치웠을라!" 어머니는 베소프쉬꼬프에 대한 고통스러운 생각에 비트적거렸다. (그래, 어쩔 수 없었을 거야!) 그녀는 어렴풋이 이런 생각을 했다. 공장 담벼락 가까이, 얼마 전 불타버린 주택지 자리에 사람들이 떼거지로 모여들어서 석 탄을 발로 짓밟아 먼지를 피우며 흡사 땅벌레와도 같이 웅성대고 있었다. 여인네들이 많이 보였고 애들은 더없이 많았다. 그리고 구멍가게 주인들, 술집 접대부들, 경찰, 그리고 헌병 빼뜰린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빽빽하게 난 허연 수염에 키가 크고 가슴에는 견장을 달고 다니는 노인네였다. 이사이는 불에 탄 통나무에 기대고 벗겨진 오른쪽 어깨로 늘어뜨리고서 반쯤 누운 상태로 땅바닥에 나자빠져 있었다. 오른손은 바지주머니에 찌르고 왼손으로는 무른 땅을 손가락을 벌려 움켜쥔채였다. 어머니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이사이의 한 쪽 눈은, 지친 듯 축 쳐진 다리 사이에 놓여 있는 모자를 응시하고 있고, 입은 놀란 듯 반쯤 벌려져 있었으며, 불그레한 턱을 옆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뾰족한 머리에 주근깨가 덕지덕지하고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온 얼굴을 하고 있는 비쩍 마른 몸뚱어리는 죽음으로 압착된 듯 더욱더 왜소해 보였다. 어머니는 성호 를 긋고,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 있을 땐 그토록 혐오스럽던 그도 이젠 애잔한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았군!" 누군가가 작은 소리로 지껄였다. "주먹으로 내리친 게 분명해..." 독기 품은 커다란 목소리도 들렸다. "주둥아릴 하두 나불대서 입을 막은 거야..." 헌병이 몸을 부르르 떨고서 두 손으로 여자들을 밀치며 위협하듯 물었다. "거기 지껄이는 게 누구야, 앙?" 사람들은 그 말 한마디에 뿔뿔이 흩어졌다. 곧장 줄행랑을 놓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 고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집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아무도 불쌍히 여기질 않는구나!) 그녀 앞엔 흡사 그림자와도 같은 니꼴라이의 넓은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의 가늘게 째진 두 눈은 잔인하리만치 싸늘하게 그녀를 보려보고 있었고, 오른손은 마치 그녀를 치기라도 할 것처럼 높이 치켜 올려져 있었다. 잔인하리만치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째진 눈, 게다가 그녀를 치기라도 할 것처럼 높이 치켜든 손... 아들과 안드레이가 저녁을 먹으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만사를 제쳐놓고 그들에 게 물었다. "거 뭐냐, 아직 잡히지 않았지? 이사이 죽인 범인 말이다." "글쎄요!" 우끄라이나인 대꾸했다. 어머니가 보기에 그들 둘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니꼴라이에 대한 말은 없든?" 어머니가 나직이 물었다. 빠벨이 엄중한 시선을 어머니의 얼굴에 고정시키며 또렷하게 말했다. "아무 말도 없어요. 생각조차 하기 힘들어요 그 사람 지금 여기 없거든요. 어제 정오쯤에 강을 건너간 뒤 돌아오지 않았어요. 나도 지금 궁금해서 찾아보고 있는 중인데..." "오, 하늘이 도우신 게로구나! 하느님이 도우신 게야." 안심이 된다는 듯 한숨을 쉬고 어머니가 말했다. 우끄라이나인이 어머니를 쳐다보고 고개를 떨구었다. 어머니가 생각에 잠긴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사람 죽어 있는 걸 봤지. 그 사람 얼굴 표정이 흡사 무엇에 깜짝 놀란 것 같더구나. 불쌍하게 생각해 주는 사람도 없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주는 사람도 없더라. 어찌나 왜소 해 뵈고 보잘 것 없어 보이던지, 마치 무슨 파편이 널브러져 있는 것 같더라니까..." 저녁식사를 하다 말고 빠벨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뭐가?" 우끄라이나인이 물었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만 동물을 죽인다는 거. 사실은 그것도 이미 추잡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이야. 짐승이나 야수 따위를 죽인다... 이것도 이해할 만해! 나 같아도 사람들을 괴롭히 는 짐승이 되어 버린 인간을 죽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가련한 인간을 죽이겠다고 어 떻게 손을 쳐드는가 말야..." 우끄라이나인이 어깨를 한번 움찔하더니 조금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놈은 짐승만도 못한 놈이었어. 모기가 피가 얼마나 된다고... 그래도 우린 모기를 죽 여 버리잖아." "그야 그렇지! 난 그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고... 어쨌든 난 그런일에는 찬성할 수가 없 어요." "그럼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뭔가?" 안드레이가 또 한번 어깨를 움찔하면서 되물었다. "형 같으면 그런 인간을 죽일 수 있겠어?" 한참을 말이 없던 빠벨이 생각에 잠겨 물었다. 우끄라이나인은 둥그런 눈으로 빠벨을 한번 쳐다보고 나서 어머니에게 이내 시선을 옮기 더니 슬픈 듯, 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했다. "동지들을 위하고 운동을 위해서라면 나 뭐든지 할 수 있어. 살인마저도. 비록 내 자식이 라도 말일세..." "오, 안드류샤!" 어머니가 나직한 비명을 질렀다. 그는 그녀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잖아요... 그게 바로 삶이에요." "그래... 그게 바로 삶이란 거지..." 빠벨이 천천히 말꼬리를 늘였다. 마음안에 자리하고 있는 누군가의 충동질에 복종이라도 하듯 갑작스레 흥분한 안드레이가 벌떡 이어나더니 양손을 내저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가지고 무슨 일인들 할 수 있겠어? 민중이 사랑으로 어루러지는 바로 그때를 앞당 기기 위해 인간을 증오해야만 해. 삶의 발전을 방해하는 자들, 인간을 돈으로 팔아 넘기는 자들은 제거해야 마땅해. 인간을 팔아 자신들의 안위와 존중을 사는 그런 놈들 말일세. 만 약 정직한 민중의 앞길에 유다 같은 놈이 버티고 서서 민중을 배신할 날만 꼽고 있는데도 그런 인간을 없애지 않는다면 나 또한 유다나 별반 다를 게 없는 놈 아닌가! 내게 그럴 권 리가 없나? 그렇다면 그들, 유리의 지배자인 그들은 군대다, 사형집행인이다, 또 공공건물, 감방, 강제노동 따위의 그네들의 안위를 보장해 주는 온갖 부정한 것들을 손아귀에 움켜쥘 권리라도 갖고 있다는 건가? 두 손에 그들이 갖고 있던 몽둥이를 빼앗아 들어야 할 때가 왔 다고 난 생각해. 틀린 생각인가? 난 절대 거절하지 않고 그걸 움켜쥘 걸세. 그게 바로 삶인 걸 어쩌겠나. 하지만 나도 지금의 삶을 거부하려 했지. 실제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진 않았 어. 난 알아, 그들의 피는 그 어떠한 것도 창조해 낼 수 없거니와 전혀 이롭지 못하다는 것 을! 우리의 피가 거듭되는 소낙비로 대지에 뿌려질 때 비로소 진리가 제대로 자라날 뿐이 지. 그들의 썩은 피는 뿌려지더라도 흔적조차 남지 않는 거라고 난 확실해! 하지만 난 내 죄악을 떠맡을 용의가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면 나 자신도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 난 내 얘기를 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나의 죄악은 내 육신과 함께 죽어 없어지고 말 것 이고 미래에 오점으로 남게 되지도 않겠지. 나말고는 아무도 더럽혀지지 않을 거야, 아무 도!" 그는 앞으로 내민 손을 흔들며 방안을 왔다갔다했다. 허공에 대고 손을 흔드는 폼이 마치 자신의 목을 베는 시늉 같았다. 어머니는 슬픔과 불안을 동시에 갖고 그를 쳐다보면서 그의 마음 안에서 그를 고통스럽게 하던 그 무엇인가가 꺾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겐 더 이상 살인데 대한 어둡고 두려운 생각은 없었다. <베소프쉬꼬프가 살인을 하지 않았다면 빠 벨으 l동지들 그 어느 누구도 그것을 할만한 사람은 없어> 하고 어머니는 생각했다. 빠벨은 고개를 숙이고 내내 우끄라이나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우끄라이나인이 다시 고집스럽고 힘있게 말을 이어 나갔다. "앞으로 똑바로 나아가다 보면 자기 자신과는 배치되는 일이 있게 마련이야. 모든 것, 감 정마저도 죄다 버릴 수 있어야 해. 삶을 내팽개치고 운동을 위해 한 목숨 내던질 수 있어야 해. 이게 바로 현실이야. 많은 걸 버리게. 자네 삶에 있어 소중한 모든 것을 버리게. 죄다 버리라고. 그럴 때만이 가장 귀중한 것, 바로 진실이라는 게 자라나게 될 거야..." 그는 방 한가운데에서 우뚝 멈춰 섰다. 창백한 얼굴, 반쯤 감긴 눈, 그러면서도 승리를 약속이라도 하듯 손을 높이 쳐들고 말을 계속했다. "난 알아. 사람들이 서로를 아끼고 누구나가 타인에게 반짝이는 별이 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해방된 민중들이 온누리를 활보하고 해방으로 위대해진 모든 사람이 가슴을 활짝 여 는, 그리고 개개인의 가슴이 질투에 초연해지고 모든 이가 악의 없이 되는 그날, 바로 그날 이 오면 삶은 지금의 삶이 아닌, 인간에 대한 봉사로 변할 것이고 인간의 모습은 고상하게 끌어올려질 거야. 해방 민중에 걸맞는 더없는 고상함에 다 다르게 되지! 또 그날이 오면 모 두 아름다움을 위한 진리와 해방으로 살아 넓은 가슴으로 세계를 포옹하는 사람들, 세계를 심오한 사랑으로 덥혀 주는 사람들이 최고의 찬사를 받게 되고, 가장 해방된 사람들이 최고 의 아름다움으로 간주되어 존경받게 될 거야.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위 대한 사람 아닌가..." 그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자세를 바로하고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형언할 수 없는 슬 픔을 담아 외쳤다. "그래서, 이런 삶을 위해서 난 모든 각오가 되어 있네." 그의 얼굴이 경련이 일 듯 부르르 떨리고 있었고, 눈에선 고통이 그득한 커다란 눈물 방 울이 줄지어 흘러내렸다. 빠벨은 고개를 들어 둥그렇게 뜬 눈으로 그의 창백해진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고, 어머니 는 마음 한구석에서 칠흑 같은 불안이 자라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며 탁자에서 몸을 약간 일으켰다.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안드레이?" 빠벨이 나직이 물었다. 우끄라이나인은 머리를 젓고 현을 팽팽하게 죄듯 몸을 곧추세우고서 어머니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전 모든 걸 보았기 때문에 다 알아요..."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 재빨리 그에게로 바투 다가가 그의 두 손을 움켜쥐었다. 그가 오른 손을 빼려고 애썼다. 그러나 어머니가 족쇄를 채우듯 단단히 그 손을 움켜잡고 격정적인 어 조로 속삭였다. "오, 불쌍한 것, 말소리를 낮추거라! 가엾은 것..." 우끄라이나인이 거칠게 중얼거렸다. "잠깐만요! 제가 말씀드릴께요. 그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럴 필요 없다! 아서라, 안드류샤..." 눈물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녀가 속삭였다. 빠벨이 눈물 고인 눈으로 동지를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파리해진 얼굴에 쓴웃음을 짓고서 나직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했다. "어머닌 형이 한 일을 두러워하셔..." "난 두렵지 않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구나!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해도 믿을 수가 없 어." "잠깐만요!" 우끄라이나인이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머리를 저으며 잡힌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내가 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가 분명 그렇게 했을 거야..." "그만 둬, 안드레이!" 빠벨이 말을 가로챘다. 한 손으로 안드레이의 손을 움켜쥔 빠벨은 다른 손을 그의 어깨에 얹었다. 흡사 그의 큰 몸체가 떨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 같았다. 우끄라이나인이 고개를 숙이고 자꾸 끊어지는 목 소리로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정말 그럴 마음이 있어 그런 게 아냐, 빠벨. 아주 우연한 일이었어. 자 네가 앞서 먼저 가고 난 드라구노프와 함께 길모퉁이에 남아 있을 때였어. 이사이가 저쪽 길모퉁이에서 나오더니 한 켠으로 비켜 서서는 우릴 조롱하듯 쳐다보는 거야... 드라구노프 가 말하더군. <자네 알아? 저 놈이 밤새껏 내 뒤를 밟고 있어. 언제 한번 요절을 내벌릴테 야.> 그 말을 남기고 드라구노프는 먼저 가고 나도 집에 갈 생각이었어... 그런데 이사이가 내게로 다가오는 거야..." 우끄라이나인이 깊은 한숨을 몰아 쉬었다. "그 자식만큼 날 지독하게 모욕한 사람은 여태껏 한 명도 없었어." 어머니는 말없이 그의 손을 탁자 쪽으로 끌어당겼다. 결국 안드레이를 의자에 앉혔다. 그 리고 그녀 자신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빠벨도 침통한 표정 으로 턱수염을 잡아당기며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 놈이 내게 우리들 모두에 대해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다느니, 우리 모두가 헌병 수첩에 올라 있다느니, 5월 이전에 모두 잡아가겠다드니 하면서 별별 소리를 다 지껄여대는 거야. 난 대꾸도 않고 그저 웃고 있었지만 안에선 피가 끓더라고. 이런 말도 하더군. 나같 이 똑똑한 사람이 그런 길을 택하다니 딱하기 이를 데 없고 내가 다른 길로 들어섰더라면 더 나았을 거라던가 뭐라던가... "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왼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충혈된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알 만해." 빠벨이 말했다. "가만히 들어 보니 차라리 콩밥 신세나 지라는 소리더라고, 응?" 우끄라이나인이 불끈 쥔 주먹을 흔들었다. "콩밥이 어째? 망할 자식 같으니!" 그가 치를 떨며 말했다. "그놈이 차라리 내 뺨을 한 대 후려갈기기라도 했으면 마음이나 편했을 거야. 하긴 그럴 놈도 못되지만. 그런데 그 놈이 내 가슴에다 대고 더러운 가래침을 탁 뱉을 때는 정말 참을 수가 없더라고." 안드레이가 발작적으로 빠벨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면서 더욱 거칠어진 목소리로 험악하 게 말했다. "난 그 놈의 뒤통수를 한 방 후려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 자리를 떴어. 그때 뒤에서 <누구 본 사람 있나?> 하는 드라구노프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리더군. 아마 골목에서 날 기 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우끄라이나인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뭔가 예감이 불길하긴 했지만 난 돌아다보지 않았어... 고꾸라지는 소리가 들리더군... 그래도 지나가다 두꺼비 한 마리 발로 걷어찼거니 생각하고 태연하게 앞만 보고 걸어갔지 오늘 일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사이가 죽었다고 소리치는 거야. 믿어지지 않더군. 그런 데 손이 쑤셔서 작업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다지 아픈 건 아니었지만 왠지 손이 짧아진 것 같은 게..." 그가 힐끔 자기 손을 쳐다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 평생 이 오점을 지워 버리진 못할 거야..." "네 마음만 깨끗하다면야, 가엾은 것!" 어머니가 나직이 말했다. "죄의식은 느끼지 않아요, 전혀!" 우끄라이나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저 역겹습니다. 저에겐 전혀 쓸데없는 일이었거든요." "난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 형이 살인을 한 건 아니라 쳐도 만약에 정말 그랬다면..." 빠벨이 어깨를 움찔하면서 말했다. "들어보게, 형제여. 자네가 살인이 벌어지는 걸 안다해도 막을 순 없어..." 빠벨이 단호하게 말했다. "난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그가 생각하느라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덧붙였다. "이를테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냐. 하지만 제대로 와 닿지가 않아." 공장 사이렌이 울렸다. 우끄라이나인이 머리를 삐뚜름하게 기울이고 고압적인 울부짖음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더니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난 일하러 가지 않겠네..." "나도." 빠벨이 대꾸했다. "목욕이나 하러 가야겠다!" 우끄라이나인이 웃으면서 말을 하고는 말없이 서둘러 목욕가방을 챙기더니 침통한 표정을 하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인자한 시선으로 그를 배웅하고 나서 아들에게 말했다. "어떡할 거냐, 빠샤! 사람이 죽인다는 게 잘못이라는 것쯤은 나도 알지만 어느 누구도 죄 인 취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이사이 그 사람한테는 안된 소리지만 정말 하잘것없는 못대 가리 같은 인간이었어.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널 교수형시키겠다고 위협하던 생각이 나더구 나. 그래도 죽었다니까 미운 마음도 기쁜 마음도 다 없어졌지만 솔직히 불쌍하긴 하다. 하 지만 이제 동정나부랭이를 한다고 해서..." 그녀는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놀라 웃으며 말했다. "나 원 참! 내 얘기 듣고 있냐, 빠샤...?" 빠벨은 필시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방안을 천천히 거닐다가 생 각에 잠겨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게 바로 삶이지요. 어머니도 아시잖아요? 사람들이 어떤 경우 서로 모순된 입장을 취 하게 되는지 말입니다.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어도 때려야 하는 거! 누구를 때리냐고요? 살 가치도 없는 가련한 인간인지 누구겠어요. 그런 자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쓸모 없는 것들이 고 때문에 바보천지죠. 경찰, 헌병, 첩자 따위의 모든 족속들이 우리의 적입니다. 하지만 고혈을 빨리고 사람 대접 못 받기는 그자들도 우리와 다를 게 없어요. 다 그런 거예요. 똑 같아요. 사람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힘에 의해 서로 적대시하는 두 패로 갈려서 무지와 공포에 눈이 멀게 되고 손과 발에는 족쇄가 채워지고 결국엔 서로 피를 빨고, 말리 고, 패는 사이로 변하게 되는 겁니다. 마침내 사람들을 무기로, 몽둥이로, 돌로 만들어 놓 고는 이렇게 떠듭니다. <이게 바로 정부다!>" 그가 어머니에게 바투 다가왔다. "그건 명백한 범죄예요, 어머니! 수백만 민중을 압살하는 가장 추악한 살인이자 영혼의 압살인 거죠. 영혼이 죽음을 당하고 있다는 걸 이해하시겠어요? 우리와 그들과의 차이를 보 셔서 아시겠지만 어쨌든 인간을 친다는 것, 그것은 인간을 친다는 것, 그것은 인간을 거스 르는 행위이자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중요한 건 인간을 거스른다는 거죠! 그런데도 그자들은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고.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가슴 한번 떠는 일 없 이 기꺼이 살인을 저지릅니다. 오로지 하나, 은이나 금, 쓰레기만도 못한 종잇조각, 그들에 게 민중에 대한 지배를 보장해 주는 그런 모든 보잘것없는 허접쓰레기를 지키기 위해 민중 과 그 모든 것을 죽도록 짓밟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민중을 압살하고 그들의 영혼을 일 그러뜨리는 짓을 하는 이유가 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이해가 갈 수도 있지만, 그자 들도 그런 짓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재산을 위해서 서슴없이 자행한다는 데에 문 제가 있는 겁니다. 오로지 그들의 관심은 자신의 내부가 아닌 외부의 것에 팔려 있어요..." 그는 그녀의 손을 거머쥐고 허리를 굽힌 다음 손을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이 모든 추악함과 이 썩어빠진 극악함을 느끼신다면, 어머닌 우리의 진실을 이해하시고 진실이 얼마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아시게 될 겁니다." 어머니는 어찌나 흥분되던지 자신의 마음과 아들의 마음을 하나의 불꽃으로 승화시키고 싶은 간절한 바람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잠깐만, 빠샤, 잠깐만!" 가빠 오는 호흡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숨을 헐떡이면서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나도 느낄 수가 있다, 잠깐만... 25... 현관에서 누군가의 시끄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모자는 깜짝 놀라 서로 쳐다보았다. 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르이빈이 굼뜨게 들어왔다. "날세! 여기저기 떠돌다가 지나는 길에 자네 소식도 궁금하고 해서..." 그가 고개를 들고 얼굴에 웃음을 피우면서 말했다. 타르가 잔뜩 묻은 털가죽 반외투, 짚신짝, 허리 뒤로 삐죽이 나온 검정색 벙어리장갑, 털 모자, 이게 그의 차림새의 전부였다. "잘들 지냈소? 언제 나왔나, 빠벨? 어쨌든 다행일세. 어떻게 지냈소, 닐로브나?" 그는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졌고 얼굴에도 턱수염이 더 무성했다. 어머니는 그저 기쁜 마음에 그에게로 다가가 크고 새까만 그의 손을 잡고 건강한 타르 냄 새를 맡으며 말했다. "오, 난 또 누구시라고. 다시 만나니... 너무 반갑구려!" 바벨도 미소를 짓고 르이빈을 쳐다보았다. "농사꾼 티가 줄줄 흐르네요." 르이빈이 천천히 옷을 벗으면서 말했다. "그래, 난 농사꾼이 대 됐지 뭐. 자넨 점점 신사가 되어가는 반면 난 거꾸로 되어 가고 있지. 안 그런가?" 얼룩무늬 셔츠를 추스리면서 그는 방안으로 들어와 세심하게 살펴보더니 말했다. "가구라고 해야 더 는 것도 없고, 대신 책이 좀 많아졌구만, 좋은 일이지! 자. 이제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나 얘기해 주게." 그는 다리를 쭉 뻗고 무릎 위에 손바닥을 올려 놓고 앉아서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빠벨을 찬찬히 뜯어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얼굴엔 선량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요." 빠벨이 대답했다. "우린 밭 갈고, 씨 뿌리고, 뽐낼 것도 없지만, 수확을 하면 술도 담가 먹고 취해서 꼼짝 도 못하는 때도 있고, 뭐 그래." 르이빈이 익살을 부렸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미하일 이바노비치?" 빱레이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별 일 없이 잘 지내고 있어. 일단 에질리게이보에다 자리를 잡았어. 에질리게이보라고 들어 보았나? 좋은 마을이지. 한 해에 장이 두 번 서는게, 거주자들은 한 이천 명 남짓 될 까. 하여튼 지독히 가난한 곳이야! 농사 지을 땅뙈기도 없어서 도지를 얻어 부쳐 먹고 살 아. 난 한 고리대금업자에게 날품팔이 농사꾼으로 고용되어 시체에 붙어 있는 파리마냥 거 기에 얹혀 살고 있네. 석탄을 때서 타르를 만들어 내는 일을 한다네. 임금은 여기서 일할 때보다 4분의 1밖에 받지 못하는데 등은 두배로 바스러지지. 그렇다네. 그 작자, 고리대금 업자 밑에서 일곱이 일하고 있어. 참 괜찮은 친구들이야. 나만 빼고 죄다 원래부터 그 곳 사람들인데 모두 젊고 읽고 쓸 줄도 알지. 그 가운데 예핌이란 청년이 있는데 정말 열정적 인 사람이라네." "그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그러세요?" 빠벨이 활기에 넘쳐 물었다. "입다물고 있을 수야 없지. 난 여기서 나온 유인물을 죄다 갖고 갔었네. 서른네 장일 걸 세. 하지만 난 주로 성경으로 효과를 보고 있다네. 거기서도 끄집어낼 수 있는 게 있거든. 두툼한 책인데 합법적이겠다, 게다가 종무원에서 찍어낸 거라서 신뢰를 주기에 안성맞춤이 지." 그는 빠벨에게 눈짓을 하더니 웃으면서 계속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난 자네에게 책 좀 빌어 가려고 들렀어. 여기엔 예핌하고 둘이서 왔네. 타르를 운반하다가 먼 길로 삥 돌아서 자네에게 들른 걸세. 예핌이 당도하기 전에 얼 른 책을 좀 주게. 그 사람이 너무 많이 아는 것도 안 좋아..." 어머니는 르이빈을 보면서 그가 벗어 던진 것은 신사복뿐만이 아니라 무언가가 더있을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덜 믿음직스러워졌고 두눈도 이미 이전의 솔직함이 아닌 교활한 기 색이 담겨 있었다. 바벨이 말했다. "어머니! 책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 거기 가면 다 알아서 줄 거예요. 농민들을 위한 것라 고만 말씀하세요." "그러마! 사모바르가 끓거든 다녀오마." 르이빈이 웃으면서 물었다. "아니 당신도 이 운동에 가담했오, 닐로브나? 그렇군. 거긴 이런 종류의 책 애호가가 많 이 있어. 선생 하나가 대단한 열성이야. 사람들이 참 좋은 젊은이라더군. 비록 성직자 신분 이긴 해도 말이지. 마을에서 7 베르스따나 떨어진 곳에 여선생도 있네. 하지만 그들은 금서 를 보지도 않는데 워낙 평범한 사람들이라서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어.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금서가 필요한 건 바로 나야. 난 그들이 그 책에 손을 대도록 할 걸게. 그래 야 만약에라도 책이 금서라는 게 관할 경찰서나 사제에게 발각되더라도 선생들이 뿌린 줄 알 것 아닌가! 난 어느 시기까지는 열외가 되는 거지." 자신의 교활함에 흡족한 듯 그는 기분 좋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런! 눈매는 꼭 곰인데 하는 짓이란 여우구만...) 어머니는 생각했다. "만약에 선생들이 금서를 배포했다는 의심을 받게 되면 결국 그들은 감옥에 가게 될텐데, 이 점에 대한 아저씨의 생각은 어떠세요?" 빠벨이 물었다. "감옥에 가겠지, 그게 어쨌다는 건가?" 르이빈이 되물었다. "책을 배포한 건 아저씨지 그들이 아니란 거지요. 감옥에 갈 사람은 바로 아저씨란 얘깁 니다..." 르이빈이 껄껄 웃으면서 손으로 무릎을 쳤다. "이런! 내가 그런 일을 했다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비천한 농사꾼이 이런 일을 한다, 그게 있을 법한 얘긴가? 책이란 지식인들의 것이니까 대답 또한 그들이 해야만 한다 고..." 어머니는 빠벨이 르이빈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빠벨이 눈을 찌푸린, 이를 테면 화가 나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어머니가 조심스러우면서도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미하일 이바노비치는 일을 자기가 하되 그에 대한 벌은 다른 사람이 지게 하겠다는 생각 인 모양인데..." "맞소! 어느 시기까지는." 르이빈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맞장구치고 나섰다. "어머니! 예를 들어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안드레이라고 쳐요, 제가 관계된 어떤 일을 해서 그 때문에 제가 감옥에 간다면, 무슨 말씀을 하시겠어요?" 빠벨이 무뚝뚝하게 소리쳤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 아들을 주저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고개를 내두르면서 대답했다. "아무려면 동지를 잘못되라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을라고?" 르이빈이 말꼬리를 늘였다. "에이그! 나도 자넬 이해하네, 빠벨!" 그가 시큰둥한 눈짓을 보내며 어머니에게로 돌아섰다. "이건 정말 미묘한 문젭니다, 아주머니." 그리고 다시 타이르듯이 빠벨에게 말했다. "자넨 생각하는 게 아직 풋내기 티를 못 벗었어, 동지! 비밀리에 하는 일에는 체면이란 없는 거야. 생각해 보게나. 첫째로, 그들이 감옥에 처넣는 사람은 책을 갖고 있다 발각된 사람일 뿐이지 선생은 아냐. 둘째로, 비록 선생들이 합법적인 책을 사람들에게 읽힌다 해도 그 안의 요점은 금서에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다만 다른 나라 말로 쓰였다거나 진실이 적다는 거지. 말하자면 내가 하는 대로 따라 하고 싶으면서도 단지 샛길로 가고 대 신 난 큰 길로 간다는 데에 차이가 있는거지. 그러니 우리는 당국 입장에서 보면 하나같이 죄인인 셈이야. 틀림없지? 그리고 세 번째로, 나 같은 사람이 그 사람들과 무슨 관계가 있 나? 걸어 다니는 사람은 말타고 다니는 사람과는 동지가 될 수가 없다고. 난 농부들을 거스 르지도 않을 거고 그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하나는 사재의 아들이고 또 하나는 지주의 딸인데, 그들이 왜 농부를 부추기겠다는 건지 난 도무지 알다가 도 모를일이야. 나나 농부들에겐 그들, 지식인들의 생각이라는 게 정말 불가사의한 것일 수 밖에 없어.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나으리가 되어 가지고 농부의 등가죽을 생으 로 벗기더니, 별안간 잠에서 깨어나 농부의 눈을 비벼 준다 이거지. 난 옛날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네만 꼭 옛날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그들과 난 거리가 멀어. 자네도 그 런 경험이 있겠지만, 겨울 벌판을 여행하다 먼 발치에 무슨 짐승인지 아른거린다고 해서 그 게 무언지 어떻게 알아? 늑대인지 여우인지 아니면 그냥 개새끼인지 알 수가 없는 거야! 거 리가 멀어서 그래." 어머니는 아들을 살폈다. 그의 얼굴이 우울해 보였다. 르이빈의 까만 눈이 섬광같이 반짝거렸다. 그는 바벨을 적이 만족스러운 눈길로 쳐다보고 흥분한 듯 손가락으로 턱수염을 쓸어 내리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농지거리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삶은 가혹한 거야. 우린 개지 양이 아냐. 제 짖던 대로 짖어야 해..." "자신을 민중을 위해 내던지고 평생을 감옥에서 고역을 치르는 나리님네들도 있다오..." 어머니가 아는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르이빈이 대꾸했다. "그들은 특별한 경우이고 존경도 전혀 딴거예요. 농부는 제 아무리 부자가 되어 봐야 술 집 주인인데 반해 지주는 가난해 봐야 농부가 되는 거라오. 돈주머니가 비어야 마지못해 영 혼이 순수해지지. 자네가 나한테 설교했던 거 기억나나, 빠벨? 살기 위해선 생각해야 한다 고. 또 만약 노동자가 <아니오> 하면 고용주는 <예> 하고, 반대로 노동자가 <예> 하면 고용 주는 본성상 어쩔 수 없이 <아니오> 하고 소리친다는 말일세! 맞는 소리야. 농부의 본성과 지주나으리의 본성은 같을 수가 없어. 농부가 배부르면 지주는 밤새 잠을 못 이루는 법이거 든. 물론, 어딜 가나 어리석은 자들은 있게 마련이라 농부 전체를 깡그리 옹호해야 한다는 데에는 찬성하지 않네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울하면서도 여전히 힘이 있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생기를 잃 었고 턱수염은 사뭇 떨렸다. 흡사 안 들리게 이빨을 가는 것 같았다. 조금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난 이 공장 저 공장을 전전하며 자그만치 5년을 허송세월했지. 농촌을 까맣게 잊고서 말 일세. 거기에 당도해서 둘러보니까 정말 살 곳이 아니더군. 이해할 수 있겠나?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자넨 여기서만 살았으니 그 참상을 보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그 곳은 굻주림이란 검은 그림자가 사람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고 빵 한 조각에 대한 희망도 가져 볼 수 없는 곳이야, 전혀! 굶주림은 영혼을 먹어 치우고 인간의 모습을 아예 지워 버렸어. 사람이, 사는 게 아니라 헤어날 수 없는 가나의 질 곡 속에서 썩어 가고 있는 거야... 사방 엔 까마귀 같은 정부 당국이 감시의 눈길을 드리우고 있으니 빵 조각 하난들 남아 나는 게 있겠는가? 깡그리 빼앗아 가고도 성이 차지 않아 한 방 후려갈겨야만 한다니까..." 르이빈은 손으로 탁자를 집고 빠벨 쪽으로 허리를 굽힌 채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생활을 다시 접하게 되니 심지어 구역이 다 나더군. 정말 눈이 가물거리는 게 보이 는 게 없는 거야. 하지만 난 이를 악물었지. <안돼, 이건 장난이 아니다. 난 남아야 해! 난 네 놈들에게 빵을 주려고 온 게 아니다. 한판 소동을 벌일테니 두고 봐라!> 난 그 인간들, 그 더러운 쓰레기들에 대한 혐오감으로 들끓었어. 그 혐오감으로 내 가슴은 마치 칼로 도려 내는 듯한 아픔을 맛보았다네." 그의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는 천천히 빠벨에게 몸을 숙여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날 좀 도와주게! 책을 주게. 그걸 다 읽고 나면 적어도 인간이라면 피가 끓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책 말일세. 사람들의 머릿속에 고슴도치를, 가시덤불을 들어앉혀야만 해. 자네에 게 글을 써주는 시내 사람에게 농촌을 위한 글도 써 달라고 말 좀 해 주게. 농촌에 펄펄 끓 는 물을 끼얹고 민중으로 하여금 죽음 속에라도 뛰어들도록 말일세!" 르이빈은 계속했다. "죽음이 죽음을 정복하게 할지어다. 오, 다시 말해, 민중을 되살리는 죽음, 바로 그거지. 그리고 수천이 죽어 온누리에 수많은 민중이 되살아나게 하라! 바로 그걸세. 죽는 건 문제 도 아냐. 되살아날 수만 있다면! 민중이 반란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어머니가 사모바르를 들고 와서 르이빈을 곁눈질로 힐끔거렸다. 그의 무겁고 힘있는 말들 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리고 그에게는 남편을 생각게 하는 그 무엇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녀의 남편도 똑같이 이빨을 갈고, 손을 내젓고, 소매를 걷어붙였었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역시 참을 수 없는 악의가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악의가! 또 말도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 은 말을 한다. 그래서 무섭기는 덜하다. "해야만 할 일이지요. 우리에게 자료를 주세요. 그럼 우리가 당신들을 위한 신문을 찍어 내겠어요..." 어머니는 웃는 얼굴로 아들을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없이 옷을 갈아입고서 집을 빠져 나갔다. "수고해 주게. 필요한 건 죄다 보내 주겠네. 송아지도 이해할 수 있도록 되도록 쉽게 써 주게나." 르이빈이 소리쳤다. 부엌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르이빈이 부엌 쪽을 살피며 말했다. "예핌이군! 이리 오게나, 예핌! 여기는 예핌이고 이 사람이 빠벨이라네. 내가 자네에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그는 빠벨 맞은편에 섰다. 손에는 모자를 들고 의심쩍은 잿빛 눈으로 빠벨을 힐끔거렸다. 이마색 머리에 넓은 얼굴을 하고 짧은 털가죽 반외투를 입고 있었다. 균형 잡힌 몸매를 보 아 필시 힘도 셀 것이 분명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가 목이 약간 잠긴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빠벨의 팔을 잡았다 놓고는 두 손으 로 곧게 뻗은 머리칼을 쓸어 내렸다. 그가 흡사 수색이라도 하는 듯이 천천히 방안을 둘러 보더니 책들이 꽂혀 있는 선반으로 다가갔다. "구경이나 좀 하게나!" 빠벨에게 눈짓을 해 보이며 르이빈이 말했다. 예핌은 홱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중얼거리며 책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휴, 책이 굉장히 많군요! 하지만 제 생각엔 읽을 시간이 없을 것 같군요. 시골에 사신 다면 책 읽을 시간은 넉넉할텐데..." "읽을 마음이 없는 거 아니오?" 빠벨이 물었다. "왜요? 마음이야 굴뚝 같지요. 민중들도 머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지질학> 이라, 이거 뭐죠?" 턱을 만지작거리며 젊은이가 대꾸했다. 빠벨이 설명하자, 젊은이가 책을 도로 선반에 꽂으며 말했다. "우리에겐 필요 없는 책이군." 르이빈이 요란하게 한숨을 내쉬고서 끼어들었다. "농부에게 관심이 있는 건 땅이 어떻게 생겨났는지가 아니라 누가 땅을 소유하고 있는가 하는 것, 이를테면 민중의 발 아래 있던 땅이 어떻게 지주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일게. 땅이 돌고 있네, 서 있네 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지. 땅이 빨래줄에 걸려 있더라도 먹을 것만 내놓으면 그만이고, 땅이 하늘에 못질되어 있대도 사람을 먹여 살리기 만 하면 그만인 걸세." "[노예제의 역사]라..." 예핌이 다시 책 제목을 읽고서 빠벨에게 물었다. "우리들 얘기요?" "노동제에 관한 책도 있지요." 빠벨이 그에게 다른 책을 건네주며 말했다. 예핌은 책을 받아 몇 번 들춰보더니 한쪽으로 치우며 태연히 말했다. "이건 시대에 뒤떨어졌군!" "당신네는 분여지를 소유하고 있소?" 빠벨이 물었다. "우리요? 갖고 있지요. 우리 집은 삼형젠데. 4 제샤찌나[역주 : 미터법 이전의; 러시아 지적단위. 1 제샤찌나는 1.092 헤타르]의 분여지를 갖고 있지요. 순 모래땅이라 놋그릇 닦 는 데는 좋을지 몰라도 농사지을 땅은 못돼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계속했다. "그런 토지는 내겐 필요 없어요. 그게 어디 땅입니까? 밥을 먹여 주기는커녕 손만 묶이는 걸. 날품팔이로 다닌 지 4년이랍니다. 금년 가을엔 군대나 가렵니다. 이하일 아저씨는 가지 말라고 하시죠. 아저씨 말씀이. 지금 군대는 민중을 패는 군대라는 겁니다. 하지만 난 그래 도 군대에 갈 생각입니다. 스 까 라진 시대에도, 뿌가초프 시대에도 군대는 민중을 쳤었 죠. 하지만 그런 시대는 지났어요.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가 유심히 빠벨을 쳐다보며 물었다. 빠벨이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도 여전해요. 단지 옛날보다는 어려워졌다는 것뿐이죠. 군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할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건 배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예핌이 되물었다. "만일 당국에서 알게 되는 날엔 총살당할 거요." 빠벨이 의혹이 가득한 눈길로 예핌을 쳐다보며 말을 맺었다. "자비를 베푸는 짓 따위는 하지 않겠죠." 젊은이는 태연히 맞장구를 치고서 다시 책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차 얼른 마시게, 예핌. 곧 떠나야 하니까." 르이빈이 서두르듯 말했다. "다 마셔 갑니다." 젊은이는 대답을 하자마자 다시 물었다. "혁명이란 봉기를 뜻합니까?" 안드레이가 얼굴이 벌개진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왔다. 침통한 표정이었다. 말없이 예 핌의 손을 잡더니 르이빈의 옆에 앉아 그를 쳐다보고 미소만 지어 보였다. "무슨 일로 그렇게 우울한가?"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 치며 르이빈이 물었다. "아무 일도 아녜요." 우끄라이나인이 대꾸했다. "댁도 노동자십니까?" 예핌이 안드레이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물었다. "그렇소. 그런데?" "이 친구는 공장 노동자를 처음 본다네. 공장 노동자는 어딘가 다른데가 있다는 거야..." 르이빈이 설명했다. "어디가요?" 빠벨이 물었다. 예핌이 안드레이를 유심히 쳐다보고 나서 말했다. "당신들의 뼈는 날카로워요. 농부들의 뼈는 둥글둥글한데..." 르이빈이 거들었다. "농부들은 서 있는 폼이 훨씬 안정되어 있어! 농부들은 발 아래 땅을 느끼지, 비록 그들 의 땅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들은 바로 대지를 느끼는 거라고. 그에 반해 공장 노동자는 새 라고 할 수 있어. 고향도, 집도 절도 없이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 발길 머무는 곳이 고 향이요 집인셈이지. 여편네조차도 그들을 한 곳에 붙잡아 둘 수가 없어. 조금이라도 심사가 뒤틀리는 날엔 그 즉시 아내의 옆구리를 걷어차고 지체없이 새 사랑을 찾아 떠나 버리거든. 하지만 내 주위의 농부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더 낫게 고쳐 보려고 애를 쓴단 말이야. 어머 니가 오셨군!" 예핌이 빠벨에게 다가가 물었다. "제게 책 한 권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지요." 빠벨이 기꺼운 마음으로 대꾸했다. 젊은이의 두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그가 재빠르게 말을 꺼냈다. "다 보고 돌려드리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여남은 명이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타 르를 운반하고 있으니까 나중에 그들 편에 보내 드리지요." 르이빈은 벌써 옷을 입고 허리띠까지 단단히 졸라매고서 예핌에게 말했다. "떠날 시간이네!" "잠깐만요, 조금 더 읽고요."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책을 가리키면서 예핌이 소리쳤다. 그들이 떠나자 빠벨은 생기 도는 얼굴로 안드레이를 보고 소리쳤다. "그 사람들 어때?" "뭐, 먹구름 같다고나 할까..." 우끄라이나인이 말꼬리를 흐렸다. "미하일 말이냐? 그 사람 공장 생활은 해 보지도 않은 것 같더구나. 농부가 아주 제대로 되었어. 그런데 왜 그렇게 사람이 극단적이람!" 어머니가 소리쳤다. "형이 집에 없어서 안타깝더군!" 빠벨이 안드레이에게 말했다. 안드레이는 탁자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자기 찻잔을 찡그린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형이 그 두 심장의 박동을 들었으면 좋았을 걸. 형은 늘 심장에 대해서 얘기하곤 했잖 아! 르이빈이 열이 올라서는 날 꺼꾸러뜨렸어, 날 한방 먹였다고... 난 그 사람에게 반박조 차 하지 못했어. 그 사람,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강하던지 더구나 민중의 가치를 전 혀 인정하려 들지를 않아. 어머니 말씀대로 정말 자기 안에 두려우리만치 굉장한 힘을 간직 하고 있는 사람임이 분명해..." 우끄라이나인이 우울하게 대꾸했다. "나도 익히 그건 경험으로 알고 있지. 지배자들이란 사람들이 민중을 이때껏 독살해 오고 있어. 민중이 만일에 봉기라도 하는 날이면 지배자들은 연거푸 모든 것을 파멸시킬 거야. 그자들은 헐벗은 땅을 원해. 만약 그렇지 않으면 민중을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을테니까. 깡그리 찢어 버릴 거야." 그는 천천히 이야기를 했다. 마음은 딴데 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는 그를 조심스 럽게 건드려 보았다. "기운내라, 안드류샤!" "괜찮아요, 넨꼬!" 우끄라이나인은 나직한 목소리로 다정스레 대꾸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흥분한 그가 손으 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게 있다네, 빠벨. 만약 농부들이 들고 일어서게 되면 그들은 제땅을 발가벗기고 말 거야 흡사 역병이 휩쓸고 간 것처럼 모든 걸 깡그리 불질러 버리겠지. 오욕의 흔적들을 잿 더미 속에 묻어 버리기 위해서라도 말일세..." "그렇게 되는 날엔 그들이 바로 우리의 방해물이 되겠군요." 빠벨이 나직이 말했다. "그걸 용납지 않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지. 빠벨, 그들을 저지하는게 우리의 임무란 말일 세. 우리는 최대한 그들과 접근해서 그들이 우리를 믿게 하고 우리의 길에 동참할 수 있도 록 해야 해." "르이빈이 농부를 위한 신문을 찍어 달라고 제안해 온 걸 알고 있어요?" "암, 그래야지!" 빠벨이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과 논쟁을 하지 않았던 게 영 마음에 걸리는데!" 우끄라이나인이 머리를 쓸어 넘기고 말했따. "아직 기회는 많아. 자네는 계속 자네 피리나 부는 거야. 그러면 두발을 아직 대지에 박 고 있지 못한 사람들은 자네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출걸세. 르이빈이 한 말은 옳아. 우리가 발 밑의 땅을 못 느끼고 있고 또 그럴 필요도 없노라고 했겠다. 그럼 결국 대지를 뒤흔드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이란 소리군. 우리가 한 번 대지를 흔들면 민중의 손 발에 채워진 족쇄가 느슨해지고, 두 번 흔들면 민중은 해방이 될 거야." 어머니는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너한테는 안드류샤, 모든 일이 간단하구나!" "그럼요. 간단한 일예요. 삶이란 마찬가지요." 얼마 지나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들판에 나가 봐야겠어. 산책이나..." "금방 목욕해 놓고서? 바람에 날라가겠다." 어머니가 선수치며 말했다. "괜찮아요, 바람 좀 쐬기 위해서라도 산책을 해야겠어요." "조심해요, 감기들겠어. 좀 눕는 게 나을텐데." 빠벨이 다정스레 말했다. "아냐, 다녀올게!"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서 말없이 집을 나섰다. "무척 힘이 드나 보구나!" 한숨 섞인 목소리로 어머니가 말했다. "제가 보기에 그 일이 있고 나서 어머니께서 안드레이에게 여러모로 에전보다 더 잘해 주 시는 것 같아요. 말씀도 많이 하시고. 안 그래요?" 그녀는 놀란 듯 그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그래? 나도 미처 깨닫지 못한 일이구나. 어쨌든 안드류샤가 내겐 너무나 가까운 사람이 된 것은 사실이야.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다." "인자하신 마음을 가지셨어요, 어머니!" "너만이라도, 아니 어떻게든 너희들 모두들 도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할 수 있을는지, 원..." "너무 염려 마세요, 어머닌 하시고도 남을 분이세요." 어머니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계속했다. "하지만 두려움이란 놈을 지워 버릴 수가 없구나!" "됐어요, 어머니. 그런 얘기는 그만하기로 해요. 대신 제가 어머니께 입이 마르도록 말해 도 모자랄 정도로 감사해 하고 있다는 건 아셔야 해요." 어머니는 부엌으로 나갔다. 눈물을 보여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였다. 우끄라이나인은 저녁 늦게 지친 모습으로 돌아와, 곧바로 잠자리에 들면서 말했다. "한 10 베르스따는 걸었나 봐,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도와줄까?" 빠벨이 물었다. "그냥 내버려둬, 자야겠어." 그리고는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며칠인가가 지나서 베소프쉬꼬프가 찾아왔다. 언제나 그렇듯 추한 누더기 차림에다 얼굴 엔 불만이 가득찬 채였다. "누가 이사이를 죽였는지 혹 못 들었어?" 그가 방안을 굼뜨게 서성이며 빠벨에게 물었다. "못 들었어." 빠벨이 딱 잘라 대꾸했다. "제 할 일도 분간 못하는 사람이 있어. 내가 그 놈을 해치우려고 이때껏 별렀는데. 그 일 은 내 일이었어. 내가 아주 적격이었다고." "집어치워, 니꼴라이! 그건 얘길랑!" 빠벨이 우정 어린 말투로 말했다. "왜 그러냐, 응! 마음씨는 곱기 한량없는 애가 왜 그렇게 으르렁거리는 거야. 도대체 왜 그래?" 어머니가 다정스레 끼어들었다. "전 그런 일말고는 어디에도 쓸모 없는 놈입니다. 내 설 자리가 어딘가 하는 생각을 골백 번도 더해 봤지만 내가 설 자리는 없었어.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며 살아야만 하는데 난 그 수가 없어. 난 모든걸 보고,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을 갖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 아. 벙어리 같은 영혼이지." 그는 고개를 푹 떨구고 빠벨에게로 다가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긁으며 어린애처럼 말했다. 예전의 그답지 않게 목소리에는 애절함이 깃들어있었다. "내게 무슨 일이든 좋으니 힘겨운 일을 시켜 주게, 형제들. 무턱대고 이렇게 살 수는 없 지 않은가! 자넨 운동에 흠씬 취해 있어. 나도 운동이 성장해 나가는 걸 알아. 하지만 난 이방인인 걸 뭐! 난 널빤지나 통나무를 운반해. 과연 내 인생이 그 짓이나 하다 끝나야 옳 단 말이야? 나에게 버거운 일을 맡겨 주게." 빠벨이 그의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맡기고말고..." 그때 마침 휘장 뒤에서 우끄라이나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니꼴라이, 내 자네에게 조판기술을 가르쳐 줄테니 우리에게 와서 식자공으로 일할 생각 없나? 어때?" 베소프쉬꼬프가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형님이 절 가르친다면, 그 보답으로 형님에게 칼 한 자루를 선사하겠어요..." "사양하겠네, 그 칼일랑 지옥에나 가져 가시지!" 우끄라이나인이 소리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칼이에요." 베소프쉬꼬프가 고집을 부렸다. 빠벨도 역시 따라 웃었다. 그때, 베소프쉬꼬프가 방 한가운데에 우뚝 멈추어 서더니 질문을 던졌다. "제가 그 일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를 말인가? 자, 우리 들판에 나가 바람이나 쏘이세. 달도 밝고 정말 멋진 밤 아닌가! 안 가려나들?" 침대에서 일어서며 우끄라이나인이 대꾸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빠벨이 맞장구를 쳤다. "나도 가지. 난 형님이 웃을 때면 정말 좋수." 베소프쉬꼬프가 끼어들었다. "나도 자네가 좋은 선물을 준다니 기분이 좋군." 우끄라이나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부엌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어머니가 나무라듯 말했다. "두툼하게 옷 좀 껴입고 나가렴..." 그들 셋 모두가 집은 나서자 창문을 통해 그들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이내 성상을 올려다 보며 나직이 기도했다. "주여, 저들을 도우소서!" 26... 세월은 그날 그날의 꼬리를 물로 빠르게 흘러 어머니에게 메이데이에 대한 생각을 가질 여유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밤마다 소음에 지치고 세월의 무상함에 절로 나오는 한숨을 뒤로 하고 잠자리에 들면 늘 가슴을 조용히 짓누르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새벽 어스름에 짐승 울음소리 같은 공장 사이렌이 울려대면, 아들과 안드레이는 급히 차 를 마시고 빵 한 조각을 입에 물고서 어머니에게 몇가지 당부의 말을 남긴 채,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하루 온종일 점심식사 준비를 하고, 성명서를 위한 연보라빛 풀 을 쑤느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집안을 뱅뱅 돌았다. 간혹 몇몇 사람들이 찾아와 빠벨에게 전해 주라며 쪽지를 그녀의 손에 건네주고는 그녀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고서 총총히 사 라지는 때도 있었다. 노동자들에게 메이데이 기념식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전단들이 거의 매일 밤 담장이란 담장엔 죄다 나붙었는데, 심지어 경찰서 정문에도 붙어 있곤 했으며 공장에도 매일 뿌려졌 다. 아침이면 경찰은 욕지거리를 입에 달고서 공장촌을 휘젓고 다니며 담벼락에 붙어 있는 연보라빛 성명서들을 잡아뜯는다. 긁어낸다 하며 야단이었지만 점심 때가 되면 전단들은 다 시 거리에 뿌려져 지나는 사람들의 발 아래서 나뒹굴었다. 시내에서 밀파된 사복 형사들이 길모퉁이에 웅크리고 서서 상기된 얼굴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점심 먹으러 갔다오는 노동 자들을 세심히 살폈다. 모든 사람들은 경찰의 무력감을 본다는 게 신나는 일이어서 심지어 중년의 노동자들도 서로 웃는 얼굴로 수군대는 것이었다. "뭔 일이 일어나고 말 걸, 안 그런가?" 가는 곳 어디서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여서는 선동적인 격문이 어쩌니 저쩌니 하며 열 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삶은 비등점에 다다라 올 봄엔 모든 사람들에게 전에 없던 각별 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사람들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가져다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다가올 돌발사건에 염증을 느끼는지 모반자들을 심한 욕설로 매 도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복잡한 불안과 희망을 동시에 느끼기도 했고,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이게 바로 모두들 들고일어나게 하는 힘이라는 걸 예리하게 의식하는 사람들도 있 었다. 빠벨과 안드레이는 거의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공장 사이렌이 울리기 바로 직전에야 지치고 피로하고 창백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어머니는 그들이 숲속이나 소택지 어딘가에서 집회를 갖고 있다는 것과, 밤마다 말탄 경찰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공장촌 구석 구석을 뒤질 뿐만 아니라 사복 형사들도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뒤 아 이 사람 저 사람 을 마구잡이로 체포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들이나 안드레이도 모두 어느 날 밤엔 체포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내심 짐작한 그녀는 차라리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마저도 갖 게 되었다. 그렇게 되는 것이 그들로 보아서도 나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기록계 이사이 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는 이상하게도 시들해졌다. 한 이틀 지방 경찰이 동 기다 뭐다 해서 사람들에게 꼬치꼬치 깨묻고 한 열명 심문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살인사건 에 대해서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리야 꼬르수노바는 어머니와 이야기하는 도중에 경찰의 견해도 은연중 비쳤다. 그녀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그렇듯이 경찰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관절 무슨 재주로 범인을 찾아내겠수? 그날 아침 이사이가 만난 사람만도 백 명이 넘 을테고 그 가운데 적어도 아홉 명은 이사이를 쳤을 가능성이 있는데 말이우. 7년 남짓 누구 하나 그 사람한테 당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라고..." 우끄라이나인의 모습이 눈에 띌 정도로 달라졌다. 수척해진 얼굴, 패인 양 볼, 천근만근 이나 나가듯, 툭 튀어나온 두 눈을 반쯤 내리덮은 눈꺼풀, 게다가 인중엔 잔주름이 패어 있 기도 했다. 그는 일상적인 잡다한 일에 대해서는 한결 말수가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일 단 미칠듯한 환희에 취하기만 하면 미래에 대해서, 자유와 이성이 승리하는 그날, 아름답고 찬연한 바로 그날의 축제에 대한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것이었다. 이사이 죽음에 대한 수사가 시들해지자 떨떠름하면서도 비통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입을 여는 것이었다. "그자들은 민중들은 고사하고 민중들을 못살게 구는 데 개처럼 이용해 먹던 자들한테조차 일말의 동정심도 갖고 있지 않아. 그자들이 진정바라는 건 유다고 아니고 오로지 돈일 뿐이 야..." "그만 하면 됐어, 안드레이!" 빠벨이 단호히 말을 하자 어머니도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 썩어빠진 고목을 한 방 치니까 그대로 산산이 부서져 버린 거야." "어머니 말씀이 옳은 것은 알지만 그것으로는 위안이 되질 않아요." 우끄라이나인이 침통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는 보통 이런 식으로 말을 했는데, 그의 입을 통해서 흘러 나오는 말들은 비록 신랄하 고 거칠었지만 나름대로 특별하면서도 보편타당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 드디어 그날, 5월 1일은 찾아왔다. 공장 사이렌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울부짖었다. 준열하면서도 고압적으로 온 밤을 뜬눈으 로 지새운 어머니는 침대에서 일어나 어제 저녁부터 준비해 놓은 사모바르에 불을 지피고 늘 그렇듯이 아들과 안드레이가 자고 있는 방 문을 두드리려고 하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라 도 떠오른 듯 손을 내젓고 마치 이를 앓고 있는 사람처럼 턱에 손을 대고서 창가에 앉았다. 희뿌연 담청색 하늘에선 뭉실뭉실 뭉개구름이 장미 및 아침노을을 받으며 떼지어 유영하고 있었다. 마치 공명하는 짐승의 울부짖음에 놀란 새떼가 잔뜩 무리지어 날아가듯이. 어머니 는 구름을 바라보며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머리는 무겁기 그지없고, 꿈도 없는 밤을 태운 두 눈을 까칠까칠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의 평정이 가슴에 자리하고 있었 고 심장의 박동은 규칙적이었으며 예나 다를 바 없는 잡다한 생각으로 머리는 꽉 차 있었 다. (사모바르를 너무 일찍 올려 놨어, 다 끓어 증발해 버리겠는 걸! 오늘은 잠이나 더 자도 록 내버려둬야겠다. 둘 다 고단할텐데...) 발랄하게 뛰어놀던 어린애 같은 햇살이 창문으로 방안을 엿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 로 햇살을 받쳐 들고 밝은 햇살이 손의 표면에 누워 있는 것을 느끼고, 다른 한 손으로는 조용조용 햇살을 더듬으며 다정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사모바르에서 증기 배출관을 벗기고 세수를 말끔 히 한 다음, 정성스레 성호를 그으며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이면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밝아 오른쪽 눈썹이 때론 천천히 위로 치켜 올라가는가 하면 또 이내 내리깔 리곤 했다... 두 번째 사이렌이 조금 낮게 울렸다. 그 떨림으로 볼 때 그렇게 자신 만만하지 못하고 그 저 답답하고 눅눅한 소리였다. 어머니는 오늘따라 사이렌 소리가 길게 느껴졌다. "빠벨! 듣고 있나?" 그들 가운데 하나가 맨발을 마룻바닥에 끌었고 또 누군가가 달디단 하품을 늘어지게 했 다. "사모바르가 준비되었다!" 어머니가 소리쳤다. "예, 곧 일어나요." 빠벨이 유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해가 떠오르고 있어. 그리고 구름도 끼었고. 오늘은 구름이란 놈은 필요가 없는데..." 우끄라이나인이 말했다. 그들은 부엌으로 나왔다. 잠 때문에 머리는 온통 헝클어져 있었지만 기분은 좋아 보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넨꼬! 기분은 어떠세요?" 어머니는 그에게 다가가 귀에다 속삭였다. "얘야, 안드류샤, 오늘일랑 빠벨 옆에 꼭 붙어 다니도록 해라." "물론예요. 우리가 함께 있는 한 우린 어디고 붙어 다닐 거예요, 그점은 염려 놓으셔도 돼요." "무슨 얘길 그리 속닥거리는 겁니까?" 빠벨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빠샤!" "어머니께서 나보고 세수 좀 깨끗이 하라고, 처녀들이 볼 거라고 그러시네." 세수하러 현관을 빠져 나가면서 우끄라이나인이 대답했다. <일어나라, 깃발을 올리자, 노동자들이여!> 빠벨이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해가 중천에 떠올라 제 빛을 발하자, 구름은 바람에 쫓겨 줄달음질 쳐 버렸다. 어머니는 찻잔을 준비하면서 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고개만 갸웃거렸다. 오늘 같은 날 아침 애들은 농담이 나오고 웃음이 나올까? 정오가 되면 무엇이 저희들을 기다릴는지 누가 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어머니 자신의 마음도 거의 기쁨이랄 수 있을 정도로 왠지 평온하기만 하였다. 그들은 시간을 빨리빨리 보내려고 차를 오래동안 마셨다. 그리고 바벨은 늘 하던 대로 설 탕 한 숟갈을 차에 넣고 천천히, 꼼꼼하게 휘젓고는 자기가 좋아하는 빵 한 조각을 떼어 내 소금을 쳤다. 우끄라이나인은 탁자 아래서 두 발을 흔들었는데, 그는 한 번도 발을 편히 놓 아 둔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 천장과 벽의 습기에 반사되는 햇빛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땐데, 한 열 살 남짓 되었을 거야. 그때 난 유리잔으로 태양을 잡고 싶었지. 그 래서 유리잔을 들고 태양을 쫓다가 그만 벽에 부딪치는 바람에 쨍그랑 했지, 뭐! 손까지 베 이고 그것 때문에 또 얼마나 맞았던지. 실컷 두들겨 맞고서 마당에 나갔더니 태양이란 놈이 이번엔 웅덩이 속에 있는 거야. 그래서 또 달려가서 발로 마구 짓밟았지. 바지니 뭐니 할 것 없이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는 바람에 또 맞았어... 그러고도 내가 어쨌는 줄 아나? 난 태양을 보고 이렇게 소리쳤어. <아플 줄 알지, 이 빨간 악마야! 난 하나도 아프지 않아!> 그리고 혀를 내밀어 놀려 주었지. 그랬더니 좀 위안이 되더라고." "형은 어째서 태양을 빨갛다고 생각했어?" 빠벨이 웃으면서 물었다. "우리 집 맞은 편에 대장장이 아저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 아저씬 빨간 턱수염을 기른 늘 쾌활하고 선량한 아저씨였어. 그래서 난 태양이 아저씨를 닮았으려니 생각한 거지..." 어머니가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는지 입을 열었다. "오늘 행진할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 안 하냐?" "일단 결정된 거를 얘기해 봐야 머리만 더 복잡해질 뿐예요. 만약, 우리가 모두 잡혀 가 면 니꼴라이 이바노비치가 찾아와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를 어머니께 말씀드릴 거예요." 우끄라이나인이 죄송스러운 듯 대꾸했다. "알았다!" 어머니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그만 거리로 나갑시다!" 빠벨이 꿈꾸듯 중얼거렸다. "아냐, 때가 될 때까지는 집에 있는 게 나아. 공연히 경찰 눈에 띄어 애태우게 할 필요가 있나? 그 놈들은 자네를 잘 알고 있단 말일세." 안드레이가 대꾸했다. 페쟈 마진이 양 볼이 벌개진 얼굴로 뛰어왔다. 그는 설레임과 기쁨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 고, 그 때문에 기다림의 지루함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그가 입을 열었다. "시작됐어!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모두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얼굴이 한결같이 도끼 같은 얼굴이야. 공장 문 앞에 베소프쉬꼬프가 구세프 형제, 사모일로프와 함 께 버티고 서서 연설을 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고. 나가세! 시간이 됐어. 벌써 열 시야..." "가야지!" 빠벨이 단호하게 말했다. 페쟈가 다짐을 두어 말했다. "점심식사 시간이 지나면 공장 전체가 들고 일어날 거래."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달음질로 집을 나섰다. "바람 앞에 등불 격이군!" 어머니는 나직한 말로 그를 배웅하고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나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 다. "어디 가시려고요, 넨꼬?" "너희들하고 같이 갈란다!" 어머니가 대꾸했다. 안드레이가 제 콧수염을 잡아 당기며 빠벨의 눈치를 살폈다. 빠벨은 재빠른 동작으로 머 리카락을 쓸어 넘기고서 어머니가 있는 부엌으로 나갔다. "전 어머니께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겠어요. 그러니 어머니도 제게 아무 말씀 마세요. 됐 죠?" "오냐, 됐다. 주께서 너희와 함께하실 게야."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27... 그녀가 거리로 나가 허공에 울리는 떨리면서도 기대에 찬 사람들의 왁자지껄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여기저기 창문에서, 혹은 대문에서 무더기로 모여 있는 사람들이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아들과 안드레이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녀의 눈에선 어렴풋한 얼룩 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금방 투명한 초록빛으로 되었다가는 또 어둑한 잿빛으로 변하곤 하 면서 가물거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 애들에게 인사를 나누는 그 목소리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몇 마디의 말들이 끊겼다 이어졌다 하면서 그녀의 귀에 들려 왔다. "저기 가는 사람들이 주동자들이라는군." "우린 누가 주동자인지 몰랐어..." "난 허튼 소리는 하지 않아." 다른 집 문에서 누군가가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경찰이 저 놈들을 잡아 처넣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이야." "그렇지 않아도 한 번 잡혀 갔었지." 한 여인네의 호전적인 목소리가 창문에서 거리로 놀란 듯 날뛰었다. "두고 봐! 네 놈들도 자식새끼를 키워 봐야 알아. 네 놈들이 뭘 알아?" 공장으로부터 매월 장해수당을 받고있는 절름발이 조시모프의 집을 지날 때, 그가 창문에 서 고개를 쑥 내밀고서 소리쳤다. "빠벨, 이 놈! 네 놈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테다! 두고 봐, 네 놈 심상에 무슨 일이 있는 지..." 어머니는 몸이 떨려 걸음을 멈추었다. 이 소리에 어머니의 가슴에선 날카로운 혐오감이 일었다. 어머니는 병신의 부어오른 듯한 두꺼운 낯짝을 쳐다보며 아들에게서 뒤처지지 않으 려고 열심히 걸음을 옮겨 아들의 뒤를 쫓았다. 빠벨과 안드레이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을 배웅하는 환성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태연하게 걷고 있었다. 그들은 미로노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사람은 중년의 나이에 검소한 사람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의 착실하고 청렴한 삶 때문에 그를 존경하는 터였다. "아저씨도 오늘 일하지 않기로 작정하셨습니까, 다닐로 이바노비치?" 빠벨이 물었다. "우리 마누라가 해산하려고 한다네. 그리고 꽤나 시끄러운 날이기도 해서!" 미로노프는 둘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설명을 했다. 그리고 되물었다. "이보게, 젊은이들! 사람들이 그러는데 자네들이 사자에게 소란을 피우려 한다던데, 그래 사장 사무실 유리창이라도 깰 참인가?" "아니 우리가 술에 취하기라도 했습니까?" 빠벨이 소리쳤다. "우리는 단지 깃발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노래를 부르려고 합니다. 우리의 노래를 들어 보세요, 그 안엔 우리의 신념이 들어 있습니다." 우끄라이나인이 말했다. "나도 자네들의 신념을 익히 알고 있네." 미로노프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전단을 읽어 봤거든. 아, 닐로브나!" 그가 어머니에게 어지러워 보이는 눈웃음을 보내며 소리쳤다. "당신도 폭동을 일으키는 일에 가담했소?" "비록 죽음이 앞에 가로놓여 있다 해도 진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야만 하지요." "뭐라고요. 사람들이 공장에 불온한 전단들을 실어 나른 게 당신이라고 하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구려!" 미로노프가 말했다. "누가 그런 소릴 해요?" 빠벨이 물었다. "벌써 다 아는 얘긴데, 뭘! 그럼, 부디 건투를 비오." 어머니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 대한 말들이 오간다는 게 적이 기뻤던 것이다. 빠벨이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어머니도 감옥에 가시겠군요..." 태양은 더 높이 떠올라 봄날의 활기 넘치는 신선함에 따스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구름은 한결 느릿느릿 유영하고 그 그림자도 더불어 더욱 엷고 투명해졌다. 또 그림자는 거리와 지 붕마다 슬며시 기어오르고 사람들을 감쌌다. 흡사 담벼락과 지붕의 진흙과 먼지를 훔쳐내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지루함을 제거해 주면서 온 마을을 말끔히 청소해 주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활기에 넘쳐 목소리는 더욱 크게 울려퍼지고 기계 소음은 더욱 멀리서 아련하게 들리 게 되었다. 다시 사방에서 가지가지 목소리들이 들려 왔다. 창 문에서, 집 대문에서 때로는 불안하고 욕지거리가 섞인 말들이, 또 때로는 신중하면서도 활기에 넘치는 목소리들이 땅 위를 기고 허공을 날라 어머니의 귀를 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어머니는 반박하고, 감사하고, 설명하고 싶었고, 이날의 이상하게도 복잡한 삶 속으로 깊이 개입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저만치 떨어진 길거리의 좁은 모퉁이에 수백 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 베 소프쉬꼬프의 소리가 울려 나오고 있었다. "놈들은 열매에서 즙을 짜내듯 우리의 고혈을 짜내고 있습니다!" 또박또박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들 머리에 떨어졌다 "옳소!" 몇 사람의 목소리가 이내 우렁찬 메아리를 남기고 맞장구를 쳤다. "저 친구 애쓰고 있군! 가서 좀 거들어야겠어." 우끄라이나인이 말했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 빠벨이 말릴 겨를도 없이 군중 속으로 헤집고 들어갔다. 마치 코르크 따개가 마개를 비집고 들어가듯 막대기 같은 하늘 하늘한 몸뚱이를 흔들거리면서. "동지들! 이 세상에는 유대인, 독일인, 영국인, 그리고 따따르인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민족이 있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난 이 말을 믿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오직 두 개의 민족, 두 개의 종족, 다름아닌 배부른 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사 람들은 옷차림새도, 하는 말도 가지각색입니다. 부유한 프랑스인, 독일인, 영국인이 노동자 들은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한번 보십시오. 그럼 그자들 모두가 하나같이 노동자들에게는 불한당이요, 목에 뼈다구가 걸려 뒈질 놈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큰소리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반면에 프랑스의 노동자, 따따르 노동자, 터키 노동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우리 러시아 노동자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개새끼 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말없이 줄지어 모여들어 목을 빼 고 발뒤꿈치를 세우고서 길모퉁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외국의 노동자들은 이미 이런 진리를 깨닫고 화창한 오늘, 메이데이에..." "경찰이다!" 누군가가 외쳤다. 거리의 한 쪽 골목에서 네 명의 말탄 경찰들이 채찍을 마구 휘두르면서 군중을 향해 곧장 돌진해 오고 있었다. 외침소리가 울렸다. "해산하라!" 사람들은 마지못해 그들에게 길을 내주면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사람도 여남은 명 있었다. "저 놈들은 돼지새끼마냥 말 위에 올아앉아 그저 꿀꿀거릴 줄밖에 몰라. 우리도 주모자 다, 이것들아!" 누군가의 도전적인 째지는 듯한 목소리라 툭 튀어나왔다. 우끄라이나인은 골목 한복판에 혼자 남았다. 두 마리의 말이 대가리를 흔들면서 그를 향 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가 옆으로 비켜 섬과 동시에 어머니가 그의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빠샤 옆에 붙어 있기로 약속해 놓구선 혼자 결딴을 내려고 하면 어쩌누." "제가 잘못했어요." 우끄라이나인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불안하고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피로감에 휩싸인 어머니는 고개를 들어 빙글빙글 돌려 보 았다. 이상하게도 슬픔과 기쁨의 감정이 교차하는 것이었다. 어서 점심시간을 알리는 사이 렌이 울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들은 광장에 위치하고 있는 교회로 빠져 나갔다. 교회 주위, 그리고 담장 안에는 활기 에 넘쳐 있는 젊은이들, 게다가 어린아이들까지 약 500명 남짓한 사람들이 앉거나 선 채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군중은 한 무리가 되어 움직이면서 불안스레 머리를 위로 쳐들고 있 는 사람, 먼발치를 살피는 사람, 별별 사람이 다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초조하게 뭔가 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잔뜩 고조된 분위기 그대로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쓸데없는 만용으로 자신을 내몰기도 했 다. 여인네들의 잔뜩 짓눌린 듯한 목소리가 울리자 사내들은 화를 내며 그들을 외면해 버렸 다. 때론 크지 않은 욕설이 들려오기도 했다. 한껏 적의로 가득 찬 서로간의 충돌에서 나오 는 삭막한 아우성이 수많은 군중을 휘감았다. 여자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이 까! 네 몸 생각도 하렴." "그만두세요!" 대답소리가 들려 왔다. 위엄있는 시조프의 목소리가 나직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튀어나왔다. "아니오, 우린 젊은 애들을 버려서는 안돼요. 그 애들은 우리보다 분별력도 더 있고, 또 얼마나들 용감하게 살고 있나 말이오! 막말로 소택지 기금을 막은 게 누구요? 그 애들 아니 오. 그걸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 일 때문에 감옥에 끌려간 건 그 애들이지만 이익은 우리 모두가 보지 않았소." 사이렌의 암울한 울부짖음이 울려 퍼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입에 삼켜 버렸다. 군중은 깜짝 놀라, 앉아 있던 사람들은 벌떡 일어서고, 잠시였지만 모두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꼼 짝 하지 않아 긴장감이 감돌았다. 많은 사람들의 얼굴 역시 파리해졌다. "동지들!" 빠벨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힘있게 울렸다. 어머니는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고 눈앞이 아찔했다. 어머니는 느닷없이 재빠른 동작으로 아들의 뒤에 버티고 섰다. 모든 사람들이 빠벨에게 시선을 돌리고 금세 그를 에워쌌다. 흡 사 자석에 빨려드는 쇳조각 같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두눈, 자랑스럽고 용감하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두 눈 만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동지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떳떳하게 선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 리의 깃발, 이성과 진실과 해방의 깃발을 높이 들것입니다." 허옇고 기다란 깃대가 허공에 불쑥 떠오르더니 아래로 굽어지며 군중을 둘로 나누고는 군 중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잠시 후 위로 쳐든 사람들의 얼굴 위로 넓게 펼쳐진 노동 자들의 깃발이 흡사 새빨간 새가 비상하듯 솟구치는 것이었다. 빠벨이 손을 위로 높이 쳐들 자 깃대가 흔들렸다. 그때 수십 개의 손이 허옇고 미끈미끈한 깃대를 움켜쥐었다. 그 가운 데는 어머니의 손도 있었다. "노동자 만세!" 그가 외쳤다. "사회 민주주의 노동당 만세, 우리의 당, 우리의 동지, 우리의 정신적 조국 만세!" 군중은 들끓어 한층 고조되어 있었고, 깃발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비 집고 깃발로 모여들었다. 페쟈와 사모일로프, 그리고 구세프 형제가 빠벨의 곁에 붙었다. 고개를 푹 숙인 베소프쉬꼬프가 군중을 밀어젖히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잘 알지 못하 는 젊은이들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두 눈을 번뜩이며 그녀를 자꾸 떠다밀고 있었다. "전세계 노동자 만세!" 빠벨이 외쳤다. 모두가 기운이 솟고 기쁨에 싸여 정신을 아찔하게 할 정도의 소리로 수천 의 메아리를 만들며 그의 구호에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베소프쉬꼬프의 손과 그 밖의 몇 명의 손을 더 잡았다. 터져 나오려는 눈물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끝내 울지는 않았다.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덜덜거리는 입술로 겨우 말을 내뱉었다. "오, 사랑스런..." 베소프쉬꼬프의 곰보자국 난 얼굴에 함빡 웃음이 피었다. 그는 깃발을 쳐다보고 깃발에 팔을 뻗으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느닷없이 어머니의 목을 감싸안고 입을 맞추고 나서 웃 었다. "동지들!" 우끄라이나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군중의 웅성거림을 억제시키며 소리쳤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신, 빛과 진실의 신, 이성과 선의 신 이름으로 교회행렬처럼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멀고도 험합니다만, 면류관만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누가 진리의 힘을 믿지 못합니까, 진리를 위해 죽음을 무릅쓸 용기가 없는 자 또한 누구며,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고통을 두려워하는 자가 과연 누구란 말입니까? 우리들 가운데 그런 사 람 있으면 옆으로 비켜 서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승리를 믿는 사람들만을 초대하고자 합니 다. 우리의 목적지가 보이지 않고 우리와 함께 나아가기를 꺼리는 사람들 앞에는 오직 고통 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대열을 맞추십시오. 동지들! 해방 노동자의 축제 만세! 메이 데이 만세!" 군중은 더욱 모여들어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빠벨이 깃발을 흔들자 깃발은 공중에서 펄럭이며 앞으로 헤엄쳐 나갔다. 햇빛을 받아 벌겋게 물든 데다 함빡 웃음을 지은 모양 그 대로였다. <낡은 세계를 깨부수자...> 페쟈 마진의 목소리가 메아리치자 수십 명의 목소리가 거센 파도를 이루며 그의 목소리를 받쳐 주었다. <우리들의 발로 그 잔재를 짓밟아 버리세...> 어머니는 격렬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페쟈의 뒤를 따랐다. 그의 머리 너머로 아들과 깃 발이 보였다. 그녀의 주위에선 기쁨에 넘치는 듯한 얼굴들 다채로운 눈동자들이 명멸하고 있었으며 앞장을 서서 나아가고 있는 것은 그녀의 아들과 안드레이였다. 두 사람의 목소리 가 들려 왔다. 안드레이의 부드럽고 눅눅한 목소리가 아들의 낮고 굵은 음성과 조화를 이루 며 다른 함성들과 뒤엉켜 버렸다. <일어나세, 깨어나세, 노동자들이여, 투쟁으로 떨쳐 일어나세, 굶주린 민중이여...> 그리고 노동자들이 환호성을 울리며 붉은 깃발로 달려와서는 군중과 합세해서 앞으로 전 진해 나갔다. 그들의 함성은 이내 노랫소리에 묻혀 버렸는데, 그 노래는 바로 전에 집에서 조용조용 부르곤 했던 노래였다. 그러나 이제 거리에 나온 그 노래는 무서운 힘으로 일률적 으로 곧바로 흘러 넘치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선 강철 같은 용기가 꿈틀거려 그녀는 사람들에게 미래를 향한 머나먼 길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면서 그 길 앞에 가로놓여 있는 난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 안에 불질러진 거대하면서도 온순한 불길 속에서는 지난 과거의 암울한 찌꺼기, 길들 여진 감정의 고통스런 응어리가 녹아 내렸고, 새로운 그 무엇에 대한 저주받을 공포도 잿더 미로 변해 버렸다. 놀란 듯하면서도 기뻐 들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이 어머니의 옆에서 흔들거리더니 불쑥 떨 리는 목소리로 울먹이면서 소리쳤다. "미쨔, 어딜 가는 거니?" 어머니가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말했다. "그냥 내버려두시구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나도 처음엔 겁이 났었지만, 보시 오. 저기 앞장서 걸어가는 게 내 아들이라오. 깃발을 들고 가는 애가 바로 내 아들이란 말 이오." "어디로 가는 거요, 그래? 저기 군인들이 있는데. 도적놈들 같으니..." 그리고 느닷없이 뼈가 앙상한 손으로 어머니의 손을 덥석 쥐고서 키크고 빼빼한 여인네가 소리쳤다. "이봐요,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미쨔도 부르고..." "걱정하지 말아요!" 어머니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생각했다. (이건 성스러운 일이라오... 한번 생각해 보시오. 만약에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위해 죽음 을 당하시지 않았다면 어디 그리스도가 계시기나 하겠소!) 이런 생각이 어머니의 뇌리를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자, 어머니는 자신의 명백하고도 간 단한 진실에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그 여인네의 손은 꼭 눌러 잡고 얼굴을 바라보면서 확 신에 가득 찬 미소를 흘리며 반복했다.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위해 죽음을 당하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란 없었을 거요, 오 하느 님!" 시조프가 어머니 곁에 나타났다. 그는 모자를 벗어 노랫가락에 맞추어 흔들면서 말했다. "정말 숨기는 거 없이 당당하지 않소, 아주머니? 안 그래요? 노래까지 만들고. 이게 무슨 노랩니까, 예?" <짜르에겐 전쟁터에 내보낼 병사가 필요하다네, 자식까지도 기꺼이 바치리로다...> "아무것도 무서워하는 것 같지 않아요. 하지만 무덤 속에 잠들어 있는 내 자식놈도..." 시조프가 말했다. 어머니는 가슴이 너무도 세차게 요동질쳐서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담장 쪽으로 바짝 밀쳐대며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한 마디로 사람의 물결이었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을 보자 어머니는 흡족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일어나세, 깨어나세, 노동자들이여...> 흡사 거대한 청동 트럼펫이 허공에 대고 노래를 불러 어떤 사람의 가슴에 투쟁의 준비를 호소하고, 또 어떤 사람의 가슴엔 어렴풋한 기쁨, 어떤 새로운 그 무엇에 대한 예감, 강렬 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면서 사람들을 일깨우는 것 같았다. 그럼으로 해서 여기선 어렴풋한 희망의 설레임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또 저기에선 해가 갈수록 누적되어 온 적 의의 신랄한 돌차구를 열어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공중에서 빨간 깃발이 펄 럭이며 나부끼는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진합시다! 참 장한 일이야, 젊은이들이!" 누군가의 승리에 도취된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분명 그 사람은 어떤 커다란 그 무엇을 느끼면서도 흔히 쓰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어 서툰 말로 대신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적의에 가득 차 쏟아지는 빛에 혼비백 산하여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뱀이 쉬쉬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단자놈들!" 누군가가 창문에서 불끈 쥔 주먹으로 을러대며 발작적인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그리고 송곳으로 가슴을 쑤시는 듯한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집요하게도 어머니의 귀에서 쟁쟁거렸다. "황제폐하에 대해, 짜르의 위대함에 대해 반기를 들다니! 반역을 하자는 거야?" 흥분에 도취된 얼굴들이 어머니를 빠르게 앞질러 갔다.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깡총거리거나 내달리면서 노래가 이끄는 시꺼먼 용암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 데 그 노래는 소리의 중압으로 제 앞에 놓여 있는 모든 걸 갈아엎으면서 길을 말끔히 청소 하는 것 같았다. 멀리 붉은 깃발을 쳐다보자 보이지도 않는 아들의 얼굴, 구리빛 이마, 그 리고 믿음의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는 두 눈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군중의 맨 끝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에 둘러싸여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전혀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무관심한 시선을 앞으로 던지며 마치 이 구경거리의 결말을 익 히 알고 있는 관중처럼 냉담한 호기심만을 갖고 있는 터였다. 그들은 걸어가면서 크지 않은 목소리로, 하지만 확신에 가득 차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분명 1개 중대가 학교 쪽에 있고 다른 중대가 공장 쪽에 있어..." "지사가 왔어..." "정말?" "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정말 왔다니까!" 누군가가 유쾌한 듯 지독한 욕설을 퍼붓고는 쾌재를 불렀다. "어쨌든 놈들이 우리의 형제들을 무서워하기 시작했어. 군대도 그렇고 지사도 그렇고." "이봐요들!" 어머니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어머니의 귀에 들려 오는 말들은 모두 냉담해서 죽은 거나 진배없는 것들뿐이었 다. 어머니는 이 사람들에게서 벗어나려고 빠른 걸음을 더 다그쳤다. 굼벵이처럼 느린 그들 의 걸음걸이를 앞지르는 것은 손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마치 무엇인가에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군중이 제대로 몸을 가누 지도 못하고 뒤로 쏠려 버렸다. 여기저기서 불안에 떠는 듯한 신음소리가 마구 튀어나왔다. 노랫소리도 처음엔 사뭇 떨리는 듯했지만 이내 더욱 빨라지고 더욱 커졌다. 또 다시 노랫소 리가 거대한 파도처럼 위아래로 넘실거렸다. 목소리들이 너나할것없이 화음에서 빠져 나와 저마다의 환호성으로 바뀌어 버렸다. 노랫소리를 종전의 높이로 끌어올리고, 또 앞으로 떠 밀러 내려고 애쓰면서. <일어나세, 깨어나세, 노동자들이여, 적을 향해 나가세, 굶주린 민중이여...> 그러나 이 함성에는 일률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확신은 없었으며 이미 불안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통에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어서 어머니는 군중 을 밀어젖히며 빠르게 앞으로 밀고 나가 보았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그녀 쪽으로 뒷걸음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잔뜩 찡그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부끄러운 듯 웃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조롱하는 듯한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얼굴을 우울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은 말없이 그들에게 질문을 퍼붓고 뭔가를 호소 하고 있었다. 빠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지들! 병사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릴 치지않을 겁니다. 무엇 때 문에 우릴 친단 말입니까? 우리가 모두에게 절실한 진실을 퍼뜨리기 때문입니까? 이 진실은 그들에게도 역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아직 이것을 깨닫고 있진 못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나란히 어깨를 걸고 일어서고. 약탈과 살인의 깃발이 아닌 우리 해방의 깃발 아래, 포부도 당당히 행진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진실을 하루라도 빨리 깨닫게 하기 위해 우리는 전진해야만 합니다. 전진합시다. 동지들! 언제고 전진뿐인 것입니 다." 빠벨의 목소리는 단호하게 울려 퍼졌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들의 가슴에 똑똑히 아로새겨졌다. 그러나 군중의 대열은 허물어져 한 사람 한 사람 좌우 양편에 늘어서 있는 집으로 떨어져 나가거나 담벼락에 바싹 붙어 버렸다. 이제 군중은 빠벨을 정점으로 해서 쐐 기 모양이 되었다. 그리고 빠벨의 머리 위에선 노동자의 깃발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군 중은 검은 새의 모양 바로 그것이었다. 양 날개를 한껏 벌리고 비상해서 하늘을 날 채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새였다. 빠벨이 그 새의 부리였음은... 28... 어머니가 보니 거리의 끝에 얼굴 없는 천편일률적인 사람들이 광장으로 빠져 나가는 길목 을 회색 담장을 친 것처럼 막고 서 있었다. 그들 개개인의 어깨 위에선 줄지어 늘어선 날카 로운 총검들이 싸늘하면서도 예리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물고, 꼼짝도 안 하고 버텨선 그 벽으로부터 노동자들에게로 싸늘한 바람이 불어 왔다. 그 바람은 어머니의 가슴을 응시하다가는 이윽고 심장을 꿰뚫어 버렸다. 그녀는 군중 속을 밀고 들어갔다. 낯이 익은 사람들이 깃발 있는 대열의 앞에 서서 잘 모 르는 사람들과 뒤엉켜 있었다. 마치 그들에게 의지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키가 크고 면도를 말쑥하게 한 사내와 꽉 붙어 섰다. 애꾸눈인 그는 그녀를 보려고 갑자기 고개 를 돌렸다. "당신 뭐요? 누구길래 그러오?" 그가 물었다. "빠벨 블라소프의 에미요." 그녀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아랫입술이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 대꾸했다. 애꾸눈이 말했다. "아하!" 빠벨이 소리쳤다. "동지들! 기운을 내서 전진합시다. 우리에겐 다른 길이란 없습니다." 잠잠해졌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깃발은 높이 솟구쳐 흔들거리며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나부끼다가 경쾌하게 병사들로 만들어져 있는 회색 벽을 향해 움직여 나갔다. 어머니는 몸 이 부들부들 떨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빠벨과 안드레이, 사모일로프, 페쟈 이렇게 넷이서만 군중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는 것이 아 닌가! 그러나 공기중에선 페쟈 마진의 맑은 목소리가 느릿느릿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대 머리 위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네...> 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투쟁 속에... 파멸의...> 굵고 낮은 목소리가 두 번의 무거운 탄식으로 응답했다. 사람들이 잔걸음으로 땅을 때리 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단호하고 과단성 있는 새로운 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대 모든 걸 바쳤네, 그를 위해서...> 페쟈의 목소리가 밝은 색 리본처럼 굽이쳤다. <해방을 위해...> 우정 어린 동지들의 노랫소리가 뒤를 따랐다. 한편에서 누군가가 기분 나쁜 고함을 질렀다. "아하---! 장송곡을 부르고 있군, 개새끼들..." "저 놈을 때려 죽여라!" 성난 고함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리를 빽빽 이 메우고 있던 군중이 이젠 선 자리에서 주저주저하면서 깃발을 든 사람들이 무리를 벗어 나는 것을 멍하니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이었다. 한 열명 남짓한 사람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 전진하고 있었는데, 걸음 하나하나마다 마치 길 한복판이 불에 달구어져 발바닥이 데기라도 한 것처럼 옆으로 비켜 서는 것이었다. <전제정치는 멸망하리...> 페쟈의 귀에는 그 노랫소리가 예전처럼 들렸다. <민중은 부활하리라...> 힘있는 목소리들이 어우러니 합창이 확고하면서도 준열하게 선창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화음이 제대로 맞춰진 노랫소리를 뚫고 나직한 말 한마디가 툭 튀었다. "명령이 떨어진다..." "앞에 --- 총!" 앞쪽으로 날카로운 명령소리가 들렸다. 군인들이 일제히 공중에서 총검을 흔들더니 밑으로 내려 깃발을 향해 쭉 내뻗고는 교활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앞으로 --- 가!" "온다!" 애꾸눈 사내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는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큰 걸음으로 성큼성 큼 길 옆으로 비켜 섰다. 어머니는 눈도 꿈쩍 않고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물결과도 비슷한 회색의 병사들이 앞뒤로 줄을 맞추면서 거리가 꽉 차도록 산개대형으로 벌려 서고는 은빛으로 번쩍 거리는 파도가 일렁이듯 총검을 앞으로 내뻗고서 오싹하리만큼 일사분란하게 전진해 왔다. 그녀는 큰 걸음으로 아들에게 바투 나가가 바로 옆에 버티고 서서 안드레이가 빠벨의 앞으 로 걸어가 자기의 기다한 몸으로 그를 둘러싸는 것을 보았다. "내 옆으로 와, 동지!" 빠벨이 거칠게 소리쳤다. 안드레이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손으로 뒷집을 지고 고개를 위로 쳐든 채였다. 빠벨 은 그를 어깨로 밀치고 다시 소리쳤다. "옆으로 서! 그래선 안돼! 선두는 깃발이 서야 한다고." "해산하라!" 키가 작은 장교 하나가 허연 구두를 휘두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무릎을 굽 히지도 않고 두 발을 높이 들어올렸다가 발뒤꿈치로 땅바닥을 신경질적으로 내리밟았다. 어 머니의 눈에 번쩍번쩍 광이 나도록 잘 닦여진 장화가 얼핏 보였다. 장교의 바로 왼쪽 조금 뒤에서 큰 키에 면도를 말끔히 하고 두툼한 백발의 콧수염을 기른 사내가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 그는 붉은 색 밑줄을 댄 기다란 회색 외투와 재 봉선에 노란 줄을 수놓은 바지차림이었다. 그도 역시 우끄라이나인과 마찬가지로 뒷짐을 진 자세로 짙은 백발의 눈썹을 위로 치켜 뜨고 빠벨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끝없이 많은 것들을 보았다. 가슴 한구석엔 숨을 쉴 때마다 제멋대로 찢겨 나올 채비도 되어 있음직한 우렁찬 외침이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외침에 숨이 콱콱 막혔지 만 어머니는 가슴을 손으로 쥐어뜯으며 그걸 억지로 참았다. 사람들에 이리 쏠리고 저리 쏠 리면서도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아무 생각도 없이, 거의 아무런 의식도 없이 앞으 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뒤에 사람들의 숫자가 갈수록 적어지는 것을 느꼈다. 차갑고 거센 파도가 들이덮쳐 그들을 말끔히 쓸어 가 버린 것이었다. 붉은 깃발을 든 사람들과 촘촘한 쇠사슬처럼 빽빽이 들어서 있는 회색 군복의 사람들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져 병사들의 얼굴이 한결 똑똑히 보였다. 그들은 산개대형으로 길을 가 득 메우고 더럽고 누르스레한 땅바닥을 향해 몰골사나운 모습으로 잔뜩 몸을 숙이고 있었 다. 온갖 잡다한 색깔로 번뜩이며 흩뿌려져 있는 눈들, 그리고 그 바로 앞에서 잔인하게 빛 나고 있는 가늘고 날카로운 총검들... 아직 찌르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의 가슴, 가슴 을 향해서 총검을 겨누고 한 사람씩 떼어내면서 군중의 대오를 깨부수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의 뒤에서 들려 오는 달아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의기소침한 떨리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 왔다. "흩어지게, 젊은이들!" "블라소프, 뛰어!" "뒤로 빠벨!" "깃발을 내던져, 빠벨! 이리 주게, 내가 갖고 있을테니!" 베소프쉬꼬프가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손으로 깃대를 움켜잡았다. 깃발이 뒤쪽으로 기우뚱했다. "그만둬!" 빠벨이 외쳤다. 베소프쉬꼬프는 마치 데기라도 한 것처럼 손을 축 늘어뜨렸다. 노랫소리도 스멀스멀 사그 러들었다.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빠벨을 단단히 에워쌌지만 빠벨은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 고 있었다. 갑작스레 침묵이 흘렀다. 마치 침묵이 이대로 내려와 투명한 구름이 되어 사람 들을 감싸안은 듯싶었다. 깃발 밑에는 스물 남짓한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꿋꿋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왠지 어머니는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면서도 그들에게 무슨 말인가를 해야 만 할 것 같은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저걸 뺏어 버려, 중위!" 키가 큰 영감태기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팔을 뻗어 깃발을 가리켰다. 키가 땅딸한 장교가 빠벨에게 달려들어 한 손으로 깃대를 낚아채며 째지는 목소리로 고함 을 쳤다. "내려!" "손을 치워!" 빠벨이 큰소리로 말했다. 깃발이 공중에서 좌우로 흔들리며 뻘겋게 나부끼더니 다시 곧게 세워졌다. 장교는 깃대에 서 떨어져 나가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베소프쉬꼬프가 움켜쥔 주먹을 휘두르며 의아 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어머니의 곁을 미끄러지듯 지나쳐 갔다. "저 놈들을 붙잡아!" 늙은이가 발로 땅을 구르며 째지는 목소리로 고함쳤다. 병사 몇 명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개머리판을 휘두르자 깃발이 부르 르 떨리더니 땅으로 기울어져 결국엔 일단의 회색병사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억!" 누군가가 비통한 신음소리를 냈다. 어머니는 야수와도 같은 성난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그러나 병사들 사이에서 빠벨의 또 렷또렷한 목소리만이 들려 올 뿐이었다. "안녕히 계세요,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사랑하는..." (죽진 않았어. 날 잊고 있지는 않았어.) 두 가지의 생각이 얼핏 떠올랐다. "안녕히 계세요, 넨꼬!" 그녀는 발돋움을 하고 손을 흔들면서 둘을 보려고 했지만 병사들의 머리 위로 안드레이의 둥글넓적한 얼굴만이 보였다. 웃음띤 얼굴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내 사랑하는... 안드류샤!... 빠샤!" 그녀는 외쳤다. "잘들 있으시오, 동지들!" 그들은 병사들에 둘러싸여 외치고 있었다. 몇번인가 동강동강 끊어지는 대답들이 메아리 쳤다. 그 대답은 창문에서, 어딘선가 높은 곳에서, 지붕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29... 어머니의 가슴을 떠다미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바로 앞에 서 있는 장교를 어릿 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불그레한 얼굴에 억지 웃음까지 짓고서 소리치는 것이었다. "꺼져 버려, 이 할망구야!" 어머니는 그자를 아래위로 살피다 그자의 발 밑에 깃대가 짓밟혀 있는 것을 보았다. 깃대 는 두 쪽으로 동강난 채였는데, 한 쪽에 그래도 빨간 깃발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어머 니는 허리를 숙이고 그것을 들어올렸다. 장교는 어머니의 손에서 깃대를 낚아채더니 옆으로 냅다 집어던지고 나서 발로 마구 짓이기면서 소리쳤다. "꺼져 버리란 말 안 들려?" 병사들 사이에서 돌발적으로 노랫소리가 튀어나왔다. <일어나세, 깨어나세, 노동자들이여...> 사위가 온통 빙글빙글 돌고 흔들리고 전율하고 있었고, 공기중엔 전기줄의 둔탁한 소음과 도 비슷한 근심스런 소음이 가득 차 있었다. 장교가 한걸음에 달려가 노기 띤 목소리로 부 르짖었다. "노래 중지시켜, 끄라이노프 상사!" 어머니는 위태롭게 비칠거리며 깃대가 부러져 널브러져 있는 곳으로 다가가 다시 주워 들 었다. "아가리 닥치지 못해!" 노랫소리는 길을 잃고 망설이다 두려움에 떨고 설움에 찢겨 스멀스멀 사위어 갔다. 누군 가가 어머니의 어깨를 자고는 틀어 등을 세차게 밀었다. "가라고, 꺼져 버리란 말야..." "거리를 싹 쓸어 버리겠다!" 장교가 소리쳤다. 어머니는 한 열 발짝 떨어진 곳에 군중들이 빽빽이 모여 선 것을 보았다. 그들은 으르렁 거리고, 투덜대고, 휘파람을 불며 야단이었지만, 그러면서도 느릿느릿 길거리 한복판을 빠 져 나와 집으로들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꺼져 버려, 제기랄!" 콧수염을 기른 새파랗게 젊은 병사가 어머니의 귀에다 바짝 대고 소리를 지르고는 어머니 를 행길로 떠다밀었다. 어머니는 깃대에 몸을 의지하고서 비칠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떼어놓으며 걸음을 옮겼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한 쪽 팔로 벽과 담장을 더듬었다. 앞에서 사람들이 뒷걸음질을 치고 있 었고 바로 뒤에선 병사들이 꽥꽥 고함을 쳐대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꺼져, 꺼지라고..." 병사들이 앞질러 가자 어머니는 멈추어 서서 사위를 둘러보았다. 저쪽 길모퉁이에선 역시 병사들이 광장으로 빠져 나가는 출구를 차단하고서 촘촘한 쇠고랑처럼 버티어 서 있었다. 광장은 휑뎅그렁 비었다. 전면에도 회색 군복의 모습들이 사람들에게 천천히 접근하며 왔다 갔다 야단이었다... 어머니는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다시 생각을 고쳐 먹고 무턱대고 앞으로 걸어가 골목길에 다다라서는 바짝 몸을 웅크리었다. 좁고 텅 빈 골목길이었다.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힘겹게 숨을 고르고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앞 쪽 어딘가에서 사 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던 것이다. 깃대에 몸을 의지하고서 어머니도 다시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눈썹이 치켜 떠지고 갑자기 땀이 솟았으며 입술이 파르르 떨리었다. 손을 내둘렀다. 가슴엔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이 불꽃처럼 활활 타올라 얘기하고 싶다는, 부르짖고 싶다는 고집스러우면서도 거역할 수 없는 바람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골목길은 갑자기 왼쪽으로 꼬부라졌다. 어머니는 구석에서 저만치 떨어진 곳에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의 힘차고 우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형제들이 만용을 부리느라 총검에 맞서 앞으로 걸어 나갔습니까?" "무슨 소리야, 엉? 그들은 그저 앞으로 나갈 뿐 꿈쩍도 안 하고 있었소! 우리의 형제들은 꿈쩍도 안 했어. 게다가 전혀 두려워하지도 않았어..." "바로 그겁니다. 빠벨 블라소프를 보시오!" "우끄라이나인은 또 어떻고?" "뒷짐을 지고서 웃기까지 하더라고, 세상에..." "오, 여러분, 장하시오!" 어머니가 그때 군중을 헤집으면서 소리쳤다. 사람들이 존경스런 눈길을 보내며 어머니에 게 길을 내주었다. 누군가가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보십시오, 깃발을 들고 있어요! 손에 깃발을 들고 있단 말입니다!" "조용히!" 누군가의 목소리가 엄하게 튀어나왔다. 어머니는 두 팔을 크게 벌렸다. "내 말 좀 들어 보시오, 그리스도를 위하여! 여러분은 모두 혈육이나 마찬가지요, 모두 성실한 사람들이라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두려워 말고 한번 둘러봐요. 평화를 위해 우리의 자식들, 우리의 피붙이들이 나아가고 있어요, 진신을 위해서 나아간단 말이오. 모두를 위해서!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여러분의 어린 자식을 위해서 일신의 몸을 성스런 길바닥에 내던지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밝게 빛날 새날을 추구하고 진실과 정의가... 선 의 가득 넘치는 전혀 딴세상을 바라고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심장이 찢어지고 가슴은 메어지며 목구멍이 바싹바싹 마르는 게 타는 듯했다. 마음 깊숙 한 곳에서는 모든 것, 모든 사람들을 포옹하고도 남을 사랑의 말들이 꿈틀거렸고, 혀는 더 욱 강렬하게, 더욱 자유롭게 움직이며 활활 타올랐다. 그녀는 모두들 입을 꾹 다물고서 자기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 기를 빽빽이 둘러싼 사람들이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 안에선 이제서야 뚜렷해진 갈망, 사람들을 저리로, 아들과 안드레이, 그리고 병사들 손에 질질 끌 려가 외로이 버려진 모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떠다밀고 싶은 갈망이 움트고 있었다. 주위의 침울하면서도 바짝 긴장된 얼굴들을 휘 둘러보고 나서 어머니는 부드러운 목소리 로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의 어린 자식들이 행복을 향한 세계로 나아가고 있어요. 그들은 모든 사람들, 그리 스도의 진리를 위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이라오. 우리들을 악과 거짓, 그리고 탐욕으로 가득 채우고, 속박하고, 질식시키려는 모든 의도들에 대항하고 있는 거예요.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의 나이어린 핏덩이들은 전민중을 위해, 전노동자들을 위해 싸워 나가고 있는 것이라 오. 그들을 버리고 떠나서는 안되고, 욕을 해도 안되고 외로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서도 결 코 안되는 것입니다. 자기 몸 돌보듯... 자식들의 가슴을 가슴으로 믿어 줍시다. 우리 자식 들은 진리를 창조하고 진리를 위해 죽어 갈 겁니다. 그들을 믿읍시다!" 목소리가 갑자기 끊기고 그녀가 힘없이 비칠거렸다.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잡아 주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이오. 이보시오, 여러분! 이 분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하오!" 누군가가 목메인, 그러나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다른 사람이 또 동정 어린 말로 거들었다. "에그,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군!" 힘있는,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가 그 말을 맞받았다. "저분은 쓰러지지 않아. 우리를, 바로 우리를 일깨우는 거야. 명심하라고!" 군중들 머리 위로 높은 가락의 떨리는 목소리라 튀어 날아올랐다. "여러분! 하나도 더럽혀진 데 없는 순수한 영혼을 지닌 나의 미쨔가 무슨 일을 했소? 그 애는 동지들을 위해서,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행진을 한 것이오. 저분의 말씀이 옳 다면 어찌 우리가 우리의 자식들을 내버릴 수 있단 말이오? 그 애들이 우리에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소?" 어머니는 이 말에 온몸을 부르르 떨고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응답했다. "집으로 갑시다, 닐로브나! 가요! 너무 기진맥진하셨소." 시조프가 큰소리로 말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턱수염은 쭈뻣쭈뻣해지며 사뭇 떨렸다. 갑자기 미간을 찌푸린 그가 엄한 눈길로 모두를 쏘아보더니 몸을 곧추세우고서 똑똑하게 말했다. "내 아들 마뜨베이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공장에서 몸을 망쳤소. 그애가 지금 살아 있다면 난 그 애를 그들이 가는 길로 기꺼이 내보냈을거요.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이겠지. <가거라 얘야, 마뜨베이! 가거라. 그게 바로 옳은 일이요 거룩한 일이다> 하고." 그가 와락 덮쳐 드는 슬픔을 못 이겨 말을 중단하고 잠시 입을 다물자 모두들 비통한 표 정으로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은 뭔가 거대하고 새로운, 그러나 지금에 와선 결코 놀 라지도 않을 그 무엇에 꽉 감싸인 듯했다. 시조프가 손을 들더니 흔들면서 계속했다. "지금 여러분에게 말을 하고 있는 나는 여러분이 알다시피 늙은이라오. 나이 쉰셋에 이곳 에서 노동을 한지도 어언 서른아홉 해째요. 그놈들이 바로 오늘 내 조카애도 잡아갔소. 정 직하고 아주 똑똑한 애라오. 그애 역시 블라소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깃발을 앞세워 행진 을 했어요..." 그는 손을 흔들고 몸을 움츠리고서,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 아주머니가 바로 진실을 말씀하셨소. 우리의 자식들은 거룩한 삶을 이성으로 살고자 했지만 우린 그 애들을 버리고 그 애들 곁을 떠났소! 갑시다, 닐로브나..." "오 친애하는 여러분! 자식들을 위한 삶을, 그러면 하늘 또한 그 애들을 굽어 살필 것입 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어머니가 말했다. "갑시다, 닐로브나! 자, 지팡이를 집어요." 시조프가 그녀에게 두 동강이가 난 깃대를 쥐어 주며 말했다. 어머니를 쳐다보는 모든 이들의 눈길마다 슬픔과 존경의 빛이 그득했다. 어머니를 전송하 는 건 바로 그들의 동정 어린 말소리였다. 시조프가 말없이 사람들을 비켜 세웠다. 사람들 은 입을 다물고 그녀에게 길을 내주고는 어머니를 따르고 싶은 설명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 어 서두름도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몇 마디 주고받는 말들이 얼핏얼핏 들릴 뿐이 었다. 집에 당도한 어머니는 대문 옆에서 두 동강 난 깃대에 몸을 기댄 채 사람들에게로 몸을 돌려 세우고 짧은 말 한마디를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여러분, 고맙소..." 그리고 다시 자기의 생각, 자기의 가슴이 싹을 틔운 듯한 느낌이 드는 새로운 생각을 기 억해 내고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당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그분은 계시지도 않았을 겁니다..." 군중은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시조프도 고개 를 떨구고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사람들은 문간에 서서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제 2 부 1... 그날 하루의 나머지 시간들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어릿어릿한 기억과 몸과 마음 을 강하게 짓누르는 피곤의 응어리 속에서 지나갔다. 키 작은 장교가 잿빛 점으로 깝신거리 기도 하고, 빠벨의 구릿빛 얼굴이 어른거리기도 했으며 안드레이의 웃음기를 머금은 두 눈 동자가 얼핏 스치기도 했다. 그녀는 방안을 서성이고 창가에 앉아 한참 거리를 내다보다가는 다시 일어나 미간을 찌푸 리고 깜짝 놀라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간 또 방안을 아무 의미도 없이 왔다갔다했다. 그러면서 알지 못할 그 무엇을 찾고 있었다. 물을 마셔 보았지만 여전히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고 더구나 가슴 가득한 고뇌와 울분의 뜨거운 불길은 꺼질 줄을 몰랐다. 그날 하루는 완전히 둘로 갈라졌다. 처음엔 그래도 내용이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던 시간이었는지 몰라 고 이제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녀 앞엔 황량한 황무지만이 펼쳐져 있었다. 어렴풋한 의문 이 얼핏 떠올랐다. (이젠 무얼 어떻게 한다지...) 미라야 꼬르수노바가 찾아왔다. 그녀는 손을 흔들기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 며, 우는가 싶다간 어느새 미칠 듯이 기뻐 날뛰기도 했다. 또 발을 구르는가 싶더니 금세 뭔가를 제안하기도 하고, 약속을 하는가 하면, 누군가에게 욕설을 퍼붓는 등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수선에도 어머니는 꿈쩍하지 않았다. "아유, 사람들이 화나니까 대단합디다. 공장이 들고일어나고, 마침내는 모두들 들고 일 어났어." "그래요, 그래." 어머니가 머리를 흔들며 나직이 말했다. 어머니의 두 눈은 안드레이, 빠벨과 함께 자신을 떠나 버린 지난 과거의 일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울수도 없었다. 심장이 오그라들다 못해 멎는 듯싶었고, 입술은 물론이거니와 입안까지도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손이 떨리고 등가죽이 오싹하는 소름 때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녁때 헌병들이 찾아왔다. 어머니는 놀람도 두려움이 없이 그들을 맞아들였다. 왁자지껄 떠들며 들어오는 그들의 얼굴엔 은연중 뜻 모를 흐뭇함과 만족감이 퍼졌다. 누런 얼굴의 장 교가 이빨을 자랑스레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예, 안녕하시오? 세 번째 만남인가요, 그렇죠?"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물고서 바싹 마른 혀 끝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장교는 설교조로 장황 한 사설을 늘어놓았다. 어머니는 제 말에 제가 도취되는 장교에게서 경멸감을 느꼈다. 그의 말은 한마디도 그녀에게 와 닿지 않았으며 신경 쓸 일도 전혀 못되었다. 그러다 장교가 <그 건 당신 잘못이오, 아주머니, 자식으로 하여금 신과 짜르에 대한 경의심을 갖게 하지 못한 건 말이오> 라고 말했을 때 어머니는 문 옆에 서서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대꾸 했다. "맞소, 자식들이 바로 우리의 심판관이라오. 우리가 자식들을 그런길로 들어서게 한 것에 대해선 그 애들이 심판할 거요. 그것도 진실에 따라서." "뭐라고? 크게 말해 보시오!" 장교가 소리쳤다. "내 말은 심판관은 바로 우리의 자식들이라는 거요!" 어머니가 숨을 가다듬으며 힘들여 반복했다. 그러자 장교는 화가 치미는지 무슨 말인가를 빠르게 지껄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그냥 허 공을 맴돌 뿐 어머니에겐 아무 자극도 주지 못했다. 마리야 꼬르수노바는 집수색의 입회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어머니 옆에 나란히 서 있었는데 어머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장교가 몇 가지 질문을 던지자 당황한 나머지 어 찌할 바를 몰라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두서 없이 대꾸하는 것이었다.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요, 나으리! 전 일자무식꾼에다 행상으로 밥이나 빌어먹고, 워낙 미련한지라 아는 것도 없는 아주 무식쟁이 여편넵니다요..." "그만, 입 닥쳐!" 콧수염을 들먹거리며 장교가 호통을 쳤다. 그녀는 알았다는 듯 연신 허리를 굽히고는 그 의 눈에 띄지 않게 손가락으로 엿먹으라는 시늉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속삭였다. "에라, 이거나 처먹으라지!" 어머니의 몸수색을 하라는 명령이 마리야에게 떨어졌다. 마리야는 눈을 끔벅이다가 휘둥 그래진 눈으로 장교를 바라보며 놀란 듯 말했다. "나으리,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습죠, 이것만은..." 장교는 발을 구르며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마리야는 눈을 내리깔고서 나지막이 어머니에 게 말했다. "어쩌겠수, 단추 끄르시구랴, 뺄라게야 닐로브나..." 낭패감에 사로잡혀 어머니의 몸을 더듬던 그녀는 핏대 오른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유, 저런 나쁜 놈이 어딨담, 안 그렇수?" "거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마리야가 어머니의 몸수색을 하고 있는 구석을 응시하면서 장교가 엄하게 소리쳤다. "여편네 살림걱정 했습죠, 나으리!" 마리야가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장교가 조서에 서명하라고 명령을 하자 어머니는 서툰 손을 놀려 눈에 잘 띄는 굵은 인쇄 체 글씨로 조서에 서명을 했다. <노동자의 미망인 뺄라게야 블라소바.> "도대체 뭐라고 쓴 거야? 이게 뭐야?" 이렇게 호통을 친 장교는 혐오스러울 정도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이내 코웃음치면서 말했다. "미개한 인간 같으니..." 그들은 돌아갔다. 어머니는 팔짱을 끼고 창가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어디를 쳐다보는 것도 아니면서 오랫동안 바로 앞만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눈썹은 치켜 올 라가고 입술은 꼭 다물어 이가다 아플 정도로 그렇게 아래턱을 바투 잡아당긴 채로였다. 남 포등에 기름이 다 되어 가는지 불꽃이 심지 타 들어가는 소리를 내면서 가물가물 사위어 갔 다. 어머니는 남포등을 불어 끄고서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슬프디슬픈 공허감만이 먹구름처럼 그녀의 가슴에 가득했다. 심장의 고동이 점점 약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 자니 오금이 저리고 두 눈이 피로해졌다. 술 취한 마리야가 창문 밑에 멈춰 선 채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뺄라게야! 잠들었수? 오, 나의 지지리도 불행한 순교자여, 주무시구랴!" 어머니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흡사 깊디깊은 호수의 심연으로 빠져 들 듯 빠르게 깊은 꿈속으로 빠져 들었다. 꿈에 시내로 향하는 길 어귀, 소택지 너머에 누런 모래언덕이 나타났다. 그 끄트머리, 모 래를 퍼 올린 작은 구덩이와 잇닿아 있는 낭떠러지 위에 빠벨이 서 있고 그 옆에선 안드레 이가 조용하면서도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일어나세, 깨어나세, 노동자들이여...> 어머니는 모래언덕의 옆길을 따라서 걷다가 손바닥을 이마에 대고서 아들을 바라보았다. 담청색 하늘을 배경으로 아들의 모습이 또렷한 선으로 그려졌다. 그녀는 아들에게 다가가기 가 부끄러웠다. 왜냐하면 임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팔에는 갓난아기가 안 겨 있었다. 앞으로 계속 걸어 나갔다. 들판에선 많은 아이들이 빨간 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 다. 아기는 자꾸 어머니의 손을 밀치고 아이들 노는 데로 가려 하다가는 큰소리로 울기 시 작했다. 그녀는 아기에게 젖을 물려 주고 되돌아와 보니 모래언덕엔 벌써 병사들이 버티어 서서 총검을 어머니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들판 한복판에 서 있는 교회, 뜬 구름 같은 희뿌연 교회로 줄달음질쳤다. 마치 구름으로 지어진 듯한 아주 높은 교회였다. 거기선 누군가의 장례식이 행해지고 있었는데, 새까맣고 큼직한 관은 빈틈없이 뚜껑이 꽉 닫혀 있었다. 그리고 하얀 승복을 걸친 사제와 부제가 노래를 부르며 교회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부제가 향을 들고 와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웃어 보이는데, 새빨간 머리카락, 희색이 만면 한 것이 꼭 사모일로프였다. 위쪽 둥근 지붕에는 두루마리 같은 햇살이 내리비치고, 양쪽 성가대석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조용조용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저 놈들을 잡아라!" 사제가 교회 한복판에 멈추어 서서는 느닷없이 소리쳤다. 승복이 벗겨지고 얼굴엔 희끗희 끗한 콧수염이 나타났다. 모두가 도망가느라고 정신없었고 부제도 향을 내던지고 두 손으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줄달음을 치는데, 그 모습은 꼭 우끄라이나인이었다. 어머니는 안고 있던 아기를 사람들의 발 밑, 마룻바닥에 떨어뜨렸다. 사람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벌 거벗은 아기를 쳐다보면서 그 옆을 지나쳐 뛰어갔다.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그들에게 애원 하다시피 소리쳤다. "아기를 버리지 마시오! 아기를 데려가시오..."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우끄라이나인이 뒷짐을 진 채 웃으면서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는 허리를 굽혀 아기를 안아 올려서는 널빤지 더미 위에 뉘었다. 그 옆에선 베소프 쉬꼬프가 천천히 걸어가면서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난 힘든 일을 맡았어요..." 거리는 진흙투성이였다. 집집마다 창문으로 사람들이 얼굴을 내밀고 휘파람을 분다. 고함 을 친다. 손을 흔든다 하며 야단들이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씨 때문에 응달 하나 찾 아볼 수 없었다. "가십시다, 넨꼬! 삶이란 바로 그런 거예요." 우끄라이나인이 말했다. 그리고는 노래를 불러 이런저런 소음들을 죄다 자기 목소리로 삼켜버렸다. 어머니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러나 갑자기 뭔가에 발이 걸려 넘어지며 끝없는 심연으로 빨려 들어갔 다. 심연은 그녀를 향해 겁에 질린 듯 흠칫흠칫 울부짖고 있었다. 어머니는 오한으로 떨며 잠에서 깼다. 흡사 누군가의 거칠거칠하고 우악스런 손이 가슴을 움켜잡고 손장난을 하면서 짓누르는 것 같았다. 공장 사이렌이 사람들을 고집스럽게 일터로 부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게 두 번째 사이렌이려니 생각했다. 방안에는 책이며 옷가지가 너저분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모든 게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넘어지고 뒤집어진 채였을 뿐 아니라 마룻바닥은 온통 발자국으로 엉망이었다.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도 올리지 않고 방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 보니 천 조각이 매달려 있는 막대기가 눈에 띄었다. 어머니는 그걸 보자마자 적을 잡듯 꽉 움켜잡고 벽난로 속에 집어 넣으려다가 호흡을 가다듬고서 깃대에서 깃발을 떼내어 차곡 차곡 조그맣게 접어서 주머니 속에 찔러 넣었다. 깃대는 무릎으로 꺾어서 여섯 등분을 해 놓았다. 그런 다음, 창문과 마루를 찬물로 닦고 사모바르를 올려 놓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부엌 창가에 앉아 다시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이젠 무얼 어떻게 한다지?) 여태껏 기도도 울리지 않은 것을 생각해 낸 어머니는 성상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다시 자 리에 앉았다. 마음은 여전히 휑뎅그렁하였다. 사위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해 흡사 어제 거리에서 함성을 질러대던 그 많은 사람들이 오늘 은 모두 제 집에 들어앉아 예사롭지 못했던 하루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언젠가 젊었을 때 보았던 광경이 떠올랐다. 자우사일로프 씨의 오래 된 공원에 수련이 무성한 커다란 연못이 하나 있었다. 날씨가 흐 린 가을 어느 날, 그녀는 연못을 거닐다 그 한복판에 조그만 배가 하나 떠 있는 것을 보았 다. 연못은 시커멓고 고요했으며, 작은 배는 흡사 풀칠이라도 한 듯, 누런 낙엽으로 움침하 게 덮여 있는 물 위에 찰싹 붙어 있었다. 사공도 없고 노도 없는 배 하나가, 썩은 낙엽으로 뒤덮인 거무튀튀한 물 위에 외로이 떠 있는 걸 보니 하염없는 슬픔과 어찌할 바 모를 비애 가 밀려들었다. 어머니는 한참을 연못가에 붙박인 듯 서서 누가 왜 저 배를 가운데로 밀어 놓았을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그날 저녁 사람들은 그 연못서 자우사일로프의 아내가 빠져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여자는 작은 키에 항상 풀어 헤쳐진 새까만 머리를 흩날리며 빠 른 걸음으로 걷던 여자였다. 어머니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들이 어제 낮에 받았던 인상 위 에 겹쳐지며 떠올랐다. 이것저것 두서 없이 생각하면서 그녀는 차갑게 식은 찻잔에 두 눈을 고정시킨 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음은 누구든 지혜롭고 솔직한 사람을 만나 많은 것을 묻고 싶은 욕망으로 불타올랐다. 마치 그런 바람에 응답이라도 하듯 점심을 먹고 난 후에 니꼴라이 이바노비치가 갑자기 불쑥 찾아왔다. 그러나 막상 그를 보자 갑자기 불안해진 어머니는 그의 인사를 받는 둥 마 는 둥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 봐요. 쓸데없이 뭐하러 찾아왔소. 위험해요. 행여 사람들 눈에 띄기라도 하는 날 이면 그냥 잡혀 가 버릴텐데..."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전 빠벨과 안드레이, 이들 두 사람과 사전에 약속한 게 있습니다. 만약에라도 그들이 체포되면 다음날로 어머니를 시내로 이사시키기로 말이죠." 어머니의 손을 힘주어 부여잡은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 어머니의 얼굴에 자기의 얼굴을 바투 들이댄 채 다급한 목소리로 설명을 했다. "그들이 벌써 집을 수색하던가요?" 그가 다정하면서도 근심 어린 어조로 말했다. "하고말고. 속속들이 다 뒤지고 더듬고 난리였는 걸. 부끄러움이나 양심이라곤 털끝만큼 도 없는 사람들이오." "그 놈들이 뭘 부끄러워하겠어요?" 니꼴라이가 어깨를 들먹이며 말을 하고 나서 어머니가 왜 시내로 옮겨야만 하는가를 조목 조목 설명했다. 어머니는 친구처럼 진심으로 염려해 주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창백한 미소 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이해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 사람에 대한 다정스런 심뢰의 감정에 어머니 자신도 깜짝 놀랐다. "빠샤도 원하는 일이라면야 뭘 꺼려 하겠소만..." 그가 어머니의 말을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그 일에 관해서라면 아무 염려 마세요. 전 혼자 몸에다가, 하나 있는 누이도 어쩌다가 한번씩밖에 찾아오지 않으니까요." "공짜로 밥만 축내긴 싫은데."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원하신다면 하실 일을 찾아볼께요." 그녀에게 있어 일의 개념이란 이제는, 아들과 안드레이가 동지들과 더불어 하고 있는 일 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니꼴라이에게 바싹 다가앉아 그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한번 물었다. "할 만한 일이 있겠소?" "제 살림이란 단촐하고 손님도 없어서..." "내가 하는 말은 그런 집안일 같은 거 말고, 거 있지 않아요!" 어머니가 나직이 말했다. 어머니는 슬픈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니꼴라이가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 쉬웠다. 그는 안경 너머로 웃으면서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아, 참! 빠벨을 면회하실 때 저번에 신문을 찍어 내 주었으면 하던 그 농부들의 주소라 도 물어봐 주신다면..." 어머니가 기뻐 소리쳤다. "내가 그 사람들 알지! 당신이 말한 걸 다 할 수 있어요. 내가 불온문서들을 가지고 다닌 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소? 내가 공장에다 그것들을 실어 날랐다니까, 고맙게도!" 어머니는 불현 듯 어깨에 배낭을 메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서 숲과 논밭을 지나 어딘가 로 떠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봐요, 그 일이라면 내게 맡겨주오, 제발 부탁이오! 당신들을 위한 거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어요. 마을 마을 죄다 돌아다니다 보면 길도 훤해질 거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쉬지 않고 돌아다닐테요. 순례자처럼. 그런다고 그런 내 운명이 불쌍하다고 할 수 있겠소?" 하지만 집도 절도 없는 순례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농가 창문 밑에서 구걸하고 다닐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복받치는 설움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니꼴라이가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잡고서 자신의 따뜻한 손으로 어루만졌다. 잠시 후 시 계를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해요." "이보시오, 니꼴라이! 우리의 자식들, 정말 심장 한 조각을 떼어 주어도 아깝지 않을 우 리의 자식들은 자유니 삶이니 하는 것도 모두 버리고, 게다가 목숨까지 내던지는 마당에, 에미된 사람으로 어떻게 그냥 보고만 있으란 말이오?" 니꼴라이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는 다정한 눈길로 어머니를 찬찬히 쳐다보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도 그런 말씀 들어 보긴 처음입니다." "내가 무슨 말인들 할 줄 알겠소?" 어머니는 아타깝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으며 힘없이 두 팔을 내려뜨렸다. "이 에미의 심정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도무지 난..." 가슴속에 복받치는 설움에 절로 몸이 솟구쳤다. 뜨겁게 밀려드는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 밀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 날이 올 거야... 그 악독하고... 양심이란 털끝만치도 없 는 그 놈들까지도..." 니꼴라이도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럼 일단 결정된 겁니다, 저 있는 시내로 이사하시기로." 어머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언제면 되느냐고요? 빠를수록 좋아요." 그리고는 덧붙였다. "전 어머님이 걱정예요, 정말입니다." 어머니는 놀란 듯 그를 쳐다보았다. 난 도대체 이 사람에게 무어란 말인가? 그는 그녀 앞 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당혹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새우등에 근시의 눈, 평범한 검은 조끼의 차림새, 이 모두가 그에겐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돈 갖고 계신 거 있으세요?" 눈을 끔벅이며 그가 물었다. "없는데..." 그는 재빨리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열고는 어머니 앞에 내밀었다. "자요, 여기 있어요. 필요한 만큼 가져 가세요..." 어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모든 게 정말 딴판이야. 돈도 아무 가치가 없어. 사람들은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심 지어는 제 영혼마저 팔아 치우는데 당신들에겐 그냥 돈일 뿐이니! 가만히 보면 당신들에게 돈이란 건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 때나 필요한 것 같구려..." 니꼴라이가 나직이 말했다. "지긋지긋하리만치 치사하고 더러운 게 바로 돈예요. 줄 때건 받을 때선 항상 거북살스럽 다니까요..." 그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자신의 손에 힘을 주고서 다시 한번 다짐을 했다. "되도록이면 빨리 오셔야 해요."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조용히 떠났다. 그를 배웅하면서 그녀는 얼핏 이런 생각을 했다. (정말 선량한 사람이야, 그렇게 걱정해 주지 않아도 될텐데...)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뭔가 불쾌하기도 하고 좀 놀랍기도 한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 가 없었다. 2... 어머니는 그가 다녀간 지 사흘이 지나서 그에게로 이사를 했다. 짐이라고는 궤짝 두 개인 걸 짐마차에 싣고 공장촌을 떠나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서 뒤를 돌아다보니 이젠 그 곳도 마 지막이라는 생각이 불현 듯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곳은 그녀의 삶에 있어 가장 어둡고 괴 로운 시절을 보냈던 곳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도 빠르게 하루하루를 집어 삼키면서 슬픔과 기쁨의 어떤 새로움으로 충만되기 시작했던 곳이기도 했던 것이다. 매연으로 검댕이 천지가 되어 버린 땅위에는 공장건물이 검붉은 색깔의 거대한 거미와도 같이 꿈틀거리면서 제 굴뚝을 하늘높이 쳐들고 있었다. 공장 가까이엔 단층짜리 노동자들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잿빛의 납작코가 되어 버린 집들은 소택지 가장자리에 새카 맣게 옹기종기 모여들어 조막만하고 어릿어릿한 창문으로 서로서로를 애처럼 바라보고 있었 다. 그 위로는 교회가 높이 솟아 있었는데 그 교회 역시도 공장 색깔에 눌려 검붉은 빛을 띠었고 그 종탑은 공장굴뚝보다도 더 낮았다.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고 외투깃을 여미었다. 목이 콱콱 막혔다. "이랏!" 마부가 채찍으로 말잔등으로 후려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마부는 다리가 굽어 있었는데 왠 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얼굴과 머리엔 드문드문 빛 바랜 머리카락들이 나 풀거렸고 두 눈은 이렇다 할 특색도 없이 그냥 멀건했다. 마치 옆에서 허리를 가누지 못하고 제멋대로 비칠비칠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뭇사람들로 하여금 이 마부는 마차가 오른쪽으로 가든 왼쪽으로 가든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는 생 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랏!" 그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연신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진흙이 덕지덕지 붙어 무겁다무거운 장화를 질질 끔여 우스꽝스럽게도 제 굽은 발을 털레털레 내던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주위 를 둘러보았다. 들판은 마음만큼이나 황량했다. 괴로운 듯 연신 머리를 내두르면서 말은 햇빛에 뜨거워진 깊은 모래땅을 힘들게 지나가고 있었다. 발이 푹푹 빠졌고 걸을 때마다 철떡철떡소리가 났다. 칠은 홀딱 벗겨지고 거의 망 가질 듯한 마차는 모든 소음을 먼지와 함께 뒤에 남겨 놓고서 삐걱거리며 굴러가고 있었다. 니꼴라이 이바노비치는 도시 변두리,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는 황량한 거리에 오래 되어 낡을 대로 낡은 시커먼 2층집에 붙여 지은 사랑채에서 살고 있었다. 녹색으로 칠을 해 놓은 조그만 사랑채였다. 사랑채 바로 앞에는 자그마한 정원이 있었는데 라일락과 아카시아 나뭇 가지들, 그리고 갓 심은 백양목의 은빛 잎사귀들이 창문으로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방 안은 조용하고 깔끔했으며 마룻바닥엔 온갖 무늬의 그림자들이 소리없이 떨리고 있었다. 또 벽이란 벽엔 책들로 꽉 찬 선반들이 줄지어 튀어나와 있을 뿐만아니라 그 사이사이엔 어딘 가 엄해 보이는 사람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이 방이 쓰시기에 괜찮을 거예요." 니꼴라이가 어머니를 그리 크지 않은 방으로 인도하며 말을 건넸다. 창문 하나는 정원으 로 나 있고, 또 하나는 풀로 무성한 마당으로 나 있는 방이었다. 그리고 벽은 죄다 cot장과 선반으로 빈틈이 없었다. "난 부엌이 좋은데! 밝고 깨끗한 부엌이라면..." 어머니가 말했다. 니꼴라이는 좀 놀라는 눈치였다. 그가 당황한 듯 굉장히 난처해 하며 설득을 하는 바람에 어머니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내 기분은 좋아졌다. 그나마 있는 세 개의 방이 모두 나름대로의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숨쉬기는 편하고 상쾌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게 되는 분위기였다. 아마도 벽에서 빤히 내려다보는 초상화 속 인물들의 명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일 듯 싶었다. "꽃에 물을 주어야겠군!" 창가에 놓여 있는 화분의 흙을 만져 보며 어머니가 말했다. "예, 맞아요! 꽃을 좋아하긴 하는데 바쁘다 보니 신경 쓸 사이가 있어야지요..." 주인이 죄지은 사람처럼 말했다. 그를 어느 정도 관찰하다 보니 어머니는 그가 자기의 보금자리인 이집에서도 걸음걸이를 조심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와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전에 이미 다 보았던 물건도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는 가냘픈 오른손 손가락으로 안경까지 고쳐 써 가면서 무슨 큰 흥미거리라도 바라보듯이 실눈 을 뜨고 입을 실룩거리면서 유심히 살피는 것이었다. 가끔 물건을 손에 들고 바로 코앞에까 지 들이대고서 두 눈으로 꼼꼼히 더듬거리는 걸 보면서, 그가 어머니와 함께 자기 방에 들 어갈 때도 어머니나 마찬가지로 전혀 낯설고 서툰 사람처럼 행동했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이 집이 꼭 내 집이나 된 듯이 마음이 포 근해졌다. 어머니는 틈나는 대로 니꼴라이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뭐가 어디에 놓여 있 는디, 또 여기에서의 생활방식 같은 것을 물었다. 그럴 때면 그는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이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닌데 달리 어떻게 할 방 도가 없었다는 식의 그런 대답이었다. 꽃에 물을 주고 피아노 위에 너저분하게 흐트러져 있는 악보를 차곡차곡 쌓아 놓은 다음, 어머니는 사모바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좀 닦아야겠어..." 그는 손가락으로 광택이라곤 전혀 없는 금속을 문지르고서 손가락을 코밑에다 내고 신중 하게 냄새를 맡아 보았다. 어머니는 그걸 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미니는 잠자리에 들어 지난 날들을 생각해 보다가 놀란 듯 베개에서 머리를 들고 주위 를 둘러보았다. 생전 처음 남의 집에서 자 보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어색한 기분이 들 지 않았다. 니꼴라이에 대해서 찬찬히 생각해 보면서 어머니는 그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 든 최선을 다하고 그의 삶에 뭔가 따뜻하고 다정한 그 무엇을 불어넣고 주고 싶은 욕망이 불현 듯 생겼다. 니꼴라이의 서툴고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미숙함, 그리고 일상적 인 평범한 일과도 벽을 쌓고 지내는 고독이라 할 수 있는 성격, 그에 덧붙여 두 눈에 반짝 이는 어린애 같은 영특함, 이 모든 것이 어머니의 가슴에 강하게 와 닿았다. 다음엔 생각이 벌써 아들에게까지 미쳤다. 그녀의 앞에는 다시 새로운 의미를 일깨워 주고 새로운 소리들 로 온통 감싸인 메이데이, 그날이 아스라이 펼쳐졌다. 게다가 그날의 슬픔은 예전의 슬픔과 는 질적으로 달라, 턱이 얼얼 할 정도로 호되게 한 방을 날려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게 하는 슬픔이 아니라 수십 개의 날카로운 꼬챙이로 가슴을 찌르고 굽었던 허리를 다시 곧추세우게 하는 그런 은밀한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슬픔이었다. <애들이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아가고 있는 거야> 하고 어머나는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도시 밤거리의 소음들에 귀를 기울이며 생각했다. 그 소음들은 열려진 창문으로 정원에서 들려 오는 낙엽소리와 함께 기어들어와 마치 먼 곳에서 날아 들어와서 지치고 창 백해진 것처럼 방안에서는 스멀스멀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어머니는 사모바르를 깨끗이 씻어 물을 끓이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이 것저것 설거지를 끝낸 다음 부엌에 앉아서 니꼴라이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기침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가 한 손엔 안경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목을 어루만지면서 들어섰다. 아침 인사를 하고 그녀는 사모바르를 방으로 가지고 갔다. 니꼴라이는 마룻바닥에 비누거품 을 튀게 하면서 세수를 하고 있었다. 자신도 못마땅한 듯 했다.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니꼴라이가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전 지방자치회에서 매우 끔찍한 일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네 농민들이 어떻게 피폐해 가 고 있는가를 관찰하는 일예요..." 그리고는 죄지은 사람처럼 멋쩍게 웃어 보이며 반복했다. "굶주림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사람들은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무덤행이고, 아이들은 태 어날 때부터 너무나 쇠약해서 가을 파리마냥 그냥 죽어 가기 일쑤예요. 우린 다 알아요, 그 비참함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 알지요. 그러면서도 그런 그들을 그냥 지켜 보면서 우 린 월급을 받고 있어요. 그냥 그런 거예요. 특별히 무슨 큰 일이라고 날을 받아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그럼 전엔 학생이었소?" 어머니가 그에게 물었다. "아네요, 전 선생이었답니다. 저희 아버지가 뱌뜨까에 있는 공장 관리인이셨기 때문에 전 선생이 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전 농부들에게 책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지요. 그 때문에 감 옥에 가기도 했지만요. 감옥에서 나와서는 서점에서 한동안 점원 노릇을 했는데 그 짓도 제 가 조심을 덜 하는 바람에 그만두게 되자 다시 감옥에 가는 신세가 되었다가 결국엔 아르한 겔스끄로 유형을 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그 지방 지사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백해 연안 촌구석으로 보내져 거기서 한 5년 살게 되었었죠." 그의 이야기는 따스한 햇빛이 꽉 들어찬 방안에 조용조용하면서도 온화하게 울려 퍼졌다. 어머니는 이미 그런 이야기라면 여러 번 들었지만 그래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 다. 그런 고통을 당하고도 어떻게 그리도 태연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 그런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단 말인가? "누이가 오늘 올 거예요!" 그가 말했다. "결혼을 했다고 했던가?" "과부지요. 남편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했는데, 2년 전에 외 국에서 그만 폐병으로 죽고 말았답니다..." "손아래 누이요?" "아네요, 저보다 여섯 살 위예요. 제가 신세를 많이 지고 있지요. 이제 누이가 치는 피아 노 소리를 들으실 수 있을 거예요. 저게 누이 피아노지요... 여기 있는 대부분은 다 누이 물건이고, 제 거라면 책들이나 있을까..." "누이가 사는 곳은 어딘데?" 그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딱 어디라고 할 수 없어요. 용감한 사람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거기가 바로 누이 사는 데예요." "그럼 누이도 역시 이 운동에?" "물론예요." 그가 이내 일을 하러 집을 나서자 어머니는 사람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일매일 침착 하면서도 결연한 의지로 벌여 나가는 <이 운동> 에 대한 생각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그녀 는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다 보면 마치 한밤중에 거대한 산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자신을 발 견하는 것이었다. 정오 쯤 검은 색 외투를 걸친, 키가 크고 균형 잡힌 몸매의 부인이 찾아왔다. 어머니가 문을 열어 주기 무섭게 그 여자는 마룻바닥에 누런색의 조그만 손가방을 집어 던지고서 다 급하게 어머니의 손을 잡고는 물었다. "아주머니가 빠벨 미하일로비치의 어머니시군요, 그렇죠?" "그렇소만..." 어머니는 그 여자의 값비싼 옷차림에 당황해 하면서 대답했다. "제가 상상했던 그대로세요. 동생이 아주머니께서 옮겨 와 같이 사시기로 했다고 편지를 썼더군요." 거울 앞에서 모자를 벗으며 그 부인이 말했다. "빠벨 미하일로비치와는 오랜 친구 사이예요. 빠벨이 어머님 말씀을 어찌나 하던지..." 그녀의 목소리는 좀 똑똑지 못했고 게다가 말도 느리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임만은 민 첩하고 어딘가 힘이 있어 보였다. 왕방울만한 회색 눈은 어린애처럼 초롱초롱 빛나며 눈웃 음을 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이는 못 속이는지 관자놀이에는 이미 잔주름이 패였고 귀 언 저리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배가 고프네요. 우선 커피라도 한잔 마셨으면 좋겠군요..." 부인이 말했다. "내 얼른 끓여 오리다." 어머니는 대답을 하고 선반에서 커피잔을 꺼내면서 조용히 물었다. "정말 빠샤가 내 얘길 합디까?" "그럼요,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그녀는 조그만 가죽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뽑아 피워 물고 방안을 서성이며 물었다. "빠벨 일이 몹시 걱정되시죠?" 어머니는 커피 주전자 밑에서 알콜 램프의 불꽃이 떨고 있는 것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 다. 부인은 만난 당혹감은 기쁨의 심연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 얘길 많이 했구나, 기특한 녀석!) 어머니는 이런 생각을 하고는 천천히 말했다. "물론이라오, 맘이 편칠 못해요. 하지만 이전엔 더 나쁜 경우도 있었소. 지금은 빠샤 혼 자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는데 뭐... " 그리고 그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오?" "소피야예요." 부인이 대답했다. 어머니는 찬찬히 그 여자를 살펴보았다. 부인에게선 얼핏 뭔가 자유 분방하고 지나치리만 치 활달하면서도 조급한 면이 엿보였다. 그녀는 황급히 커피를 다 마시고는 똑똑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는 모두들 감옥에 오래 있지는 않을 거라는 거예요. 곧 형을 언도받게 될테니까요. 유 형에 처해지는 대로 우린 곧바로 빠벨 미하일로비치를 탈출시킬 계획을 세울 겁니다. 빠벨 은 여기에서 꼭 필요한 인물이거든요." 어머니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소피야를 쳐다보았다. 소피야는 담배 꽁초를 버릴 만한 곳이 없는지 두리번거리더니 화분에 담겨 있는 흙에다 결국 비벼 꺼 버렸다. "그러면 꽃에 별로 안 좋을텐데!" 어머니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니꼴라이도 늘 나한테 그런 말을 하곤 했죠." 그리고는 화분에서 담배꽁초를 꺼내 창 밖으로 홱 집어 던졌다. 어머니는 당혹스런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면서 미안해 하며 말했다. "내가 오히려 미안하구려! 난 그저 생각 없이 한 소린데. 내가 어떻게 부인을 훈계하겠 소?"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제가 잘못하는 게 있으면 당연히 따끔하게 야단을 해 주셔 야죠." 어깨를 들먹이며 소피야가 대꾸했다. "커피가 준비되었나요? 고맙게 잘 마시겠습니다. 그런데 왜 잔이 하나뿐이죠? 아주머니는 안 마시세요?" 그리고는 갑자기 어머니의 어깨를 와락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고 어머니의 두 눈을 들여다 보면서 놀란 듯 물었다. "제가 좀 불편하게 해 드렸나요?" 어머니 웃으면서 대답했다. "난 그저 담배꽁초에 대해서 한마디했을 뿐인데 불편하냐 어떠냐 하고 물어 보면 나 어쩌 라고 그러오?" 그리고 어머니는 자기의 놀라움을 감출 생각도 안 하고 마치 따지듯이 말했다. "어제 여기로 옮겨 왔는데, 내 집에 와 있는 것 같다오. 무서울 것도 하나 없고, 뭐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그냥 하고..." "그러셔야만 해요." "난 지금 하두 머리가 어지러워서 나 자신에게 낯설 정도라오. 전에는 상대방이 마음을 터놓고 대해 주지 않으면 말도 못하고 끙끙 앓았는데 이젠 마음을 활짝 열어서 그런지 이전 에 생각지도 못했던 얘기까지도 서슴없이 털어놓게 되었다오..." 소피야는 담배 한 대를 다시 피워 물고 아무 말 없이 잿빛 시선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들 여다보았다. 한없이 다정스런 눈길이었다. "참 아까 탈출 계획이 어떠니 얘길했는데, 그럼 빠샤는 어떻게 되는 거지요? 빠샤는 평생 도망자로 사는 거요?" 어머니는 흥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건 아무 일도 아네요." 소피야는 자기 잔에 커피를 하나 가득 다시 따르고서 대꾸했다. "그런 식으로 도망쳐 사는 사람이 한 열 명 남짓 되는데 그들과 함께 살아갈 거예요. 지 금도 막 한 사람을 만나 배웅하고 오는 길인데, 그사람 역시 참 중요한 인물이지요. 5년 유 형에 처해졌는데 지금까지 한 석달 반 가량 유형지에서 보냈던가 그래요..." 어머니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고개를 저으면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조용히 이야 기했다. "분명한 건, 그날, 그 5월 1일이란 날이 날 참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거요. 왠지 무슨 일 에도 서툴다는 느낌이 드는가 하면, 마치 동시에 두길을 걷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도 한다오. 그러다 보니 모든 걸 이해할 것 같다가도 졸지에 안개 속으로 빠져 드는 기분 같기도 해요. 막상 지금 당신, 부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부인이 이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빠샤를 잘 안다..., 게다가 빠샤를 인정해 주고...,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으면서도..." "천만에요,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바로 전데요, 뭐!" 소피야가 웃었다. "뭐라고요? 나한테 말이오? 빠샤한테 그 운동이란 것에 대해서는 전혀 도움을 주지도 못 했는데도?" 한숨을 몰아 쉬며 어머니가 말했다. 소피야는 담배꽁초를 자기 찻잔 받침에 비벼 끄고 머리를 흔들었다. 숱이 많은 금발 머리 채가 등에서 굽이쳤다. 그녀는 이런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자, 이젠 이런 화려함도 제게서 깡그리 벗겨질 때가 되었군요..." 3... 저녁때 니꼴라이가 집으로 돌아왔다. 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소피야는 때때로 웃음을 지으면서 자기가 도망자를 어떻게 마나 위험한 순간에 어떻게 숨겨 주었으며, 첩자들의 눈 길이 얼마나 무서웠던가, 그리고 그 도망자가 얼마나 행동을 재치 있게 했던가 하는 것들을 시시콜콜 죄다 이야기했다. 그녀의 말투에서 어머니는 어려운 일을 끝내 놓고 만족해 하는 노동자의 뿌듯함을 느꼈다. 그녀는 이미 헐렁한 감청색 부인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옷 때문인지 키도 더 커 보였 고, 눈도 어딘가 모르게 은은해졌으며 동작 역시 더욱 안정감이 있었다. "소피야,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어." 식사가 끝난 후 니꼴라이가 입을 열었다. "누이도 알겠지만, 우리가 농촌신문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최근의 검거사건 때문에 그 쪽 사람들과 연락이 끊어져 버렸어. 이제 뺄라게야 닐로브나만이 어떻게 하면 신문을 배포할 사람을 찾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줄 수 있게 됐어. 누이가 빠벨 어머님과 같이 그리로 가 줘야겠어. 되도록 빨리." "좋아!"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소피야가 대답했다. "같이 가 주시겠죠, 뺄라게야 닐로브나?"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갑시다..." "먼가요?" "80 베르스따 가량 되지..." "멋진 여행이 되겠는 걸... 그건 그렇고 피아노 좀 쳤으면 좋겠는데. 어때요, 뺄라게야 닐로브나. 잘은 못 치는 솜씨지만 들어 주실 수 있겠죠?" "그런 거라면 나한테 물어 볼 필요도 없어요. 그냥 내가 없다 생각하구려!" 어머니는 푹신한 소파의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으며 대답했다. 어머니는 두 남매가 일부러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동시에 자기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대화속으로 끼어들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자, 들어 봐, 니꼴라이! 그리그의 곡인데 오늘 사 왔어... 창문도 좀 닫아 주고." 그녀는 악보를 펼치고 왼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힘들이지 않고 두들렸다. 피아노 건반들이 표현력이 풍부한 낮고 굵직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깊은 숨을 한번 몰아 쉬자 성량이 풍부한 음이 하나 더 조금 전의 음에 겹쳐 흘러 나왔다. 오른 손 손가락 밑에 서 이상하리만치 투명한 현의 외침이 맑게 울려 퍼지며 흘러 나와 놀란 새떼처럼 우왕좌왕 정신없이 파득거리기도 하고 서로 마구 부딛치기도 하면서 낮은 운율의 은은한 화음으로 내 리깔리고 있었다. 처음엔 어머니는 이들 소리에 별 감동을 받아 않아 음악이 흐르긴 흐르는데도 시간이 지 날수록 어머니의 귀에는 그저 정신없는 불협화음으로만 들렸다. 어머니의 귀는 여러 가지 운율 속에 복잡하게 얽혀 떨리고 있는 그 진정한 멜로디를 포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 구 졸음이 밀려와 반쯤 감긴 게슴츠레한 눈으로 니꼴라이를 보니, 그는 발을 꼰채 넓은 의 자의 다른 쪽 귀퉁이에 앉아서 소피야의 진지한 얼굴의 옆 모습과 숱이 많은 금발머리를 넋 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이 처음엔 소피야의 머리와 어깨를 따스하게 비추다가 다음엔 피아노 건반에 드리워 져 여인의 손가락 밑에서 떨다가는 손가락을 따뜻하게 감싸는 것이었다. 음악이 방안에 가 득 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머니의 가슴을 일깨웠다. 왠지 그녀의 앞에는 오래 전에 잊혀져 버린 아득한 과거의 울분 하나가 새삼스레 아련히 떠올랐다. 너무나도 가슴이 저리도록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한번은 남편이 밤 늦게 곤드레만드레 취해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녀의 손을 와락 움 켜잡고 침대에서 끌어내 마룻바닥에다 내팽개친 다음 옆구리를 한 방 걷어차면서 이렇게 말 한 적이 있었다. "멀리 꺼져 버려, 염병할 년아. 너만 보면 머리가 뽀개질 것 같다고!" 그녀는 남편의 주먹질을 막으려고 재빨리 손으로 두 살 난 아들을 끌어안고 무릎을 꿇은 채 아들의 몸을 방패 삼아 와락 감싸안았다. 아기는 울어대며 매달렸고 놀랐는지 그녀의 손 에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 게다가 제대로 젖도 먹지 못하고 열이 펄펄 끓었다. "꺼져 버려!" 남편이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뛰어갔다. 어깨에 윗도리 하나를 걸치는 둥 마는 둥하고 등 에 업은 아이를 수건으로 감싸고는 반항이고 불평이고 그 흔한 말 한마디 못한 채 거리로 뛰쳐나왔다. 신발도 신지 않았고 윗도리는 하나 걸쳤지만 그 안에는 그냥 내의만 달랑 입고 있었다. 때는 5월이었는데, 밤인지라 바람이 꽤 싸늘했다. 거리의 차디찬 먼지들이 발 끝에 와 부딪쳐 발가락 사이엔 뽀얀 먼지가 수북이 쌓였다. 아이는 발버둥치면서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어머니는 가슴을 풀어헤치고 아들을 바짝 끌어당겼다. 두려움에 쫓겨 거리를 하염 없이 걸어 내려갔다. 나지막이 아기를 달래면서... "오 -- 오 --오..., 오 -- 오 -- 오..." 벌써 날은 밝아 오고 있었다. 누군가 거리를 지나다 자기를, 그것도 반쯤 벗은 거나 진배 없는 자기를 보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 두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그녀는 소택지 있 는 곳으로 달려가 그냥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주위엔 어린 사시나무가 무성했다. 밤공기를 이불 삼아 덮어쓰고 휘둥그래진 두 눈으로 어둠 속을 바라보면서 꼼짝도 하지 않 고 그대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잔뜩 겁에 질린 채 잠든 아기를 안고 가슴속에서 꿈틀거리 는 분노의 감정을 삭이느라 나지막하게 노래를 부르면서... "오 -- 오 --오..., 오 -- 오 --오..., 오 -- 오 --오..." 그러고 있는 갑자기 들새 한 마리가 머리위를 날더니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 바람에 그녀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위에 벌벌 떨면서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매질과 새로운 울분의 습관적인 공포를 맞이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은은한, 그러면서도 평범하고 싸늘한 느낌을 주는 화음이 숨을 내쉬고는 서서 히 사위어 갔다. 소피야는 몸을 홱 돌리고는 니꼴라이에게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 맘에 들어?" "썩 좋은데! 아주 멋진 곡이군..." 니꼴라이가 방금 잠에서 깨어난 듯 움찔하며 대꾸했다. 어머니의 가슴속에선 추억의 메아리가 저리도록 울려 퍼졌다. 얼핏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봐, 여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양이란 다정스럽고 단란하기 이를 데 없어. 서로 욕을 하 나, 술을 마시나, 그렇다고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빵 한 조각에 아 웅다웅 잡아먹으려 달려들길 하나...) 소피야는 담배 한 대를 피웠다. 그녀는 담배를 많이 피웠는데 줄담배라 할 수 있을 정도 였다. "이 곡은 죽은 꼬스쨔가 참 좋아했었어." 그녀는 담배 연기를 황급히 내뿜으며 말을 하고는 다시 그렇게 높지 않으면서 왠지 슬픈 화음을 눌렀다. "난 정말 이 곡을 그이한테 쳐 주는 걸 좋아했어. 그인 정말 민감한 사람이었지. 누구에 게나 다정다감해서 그이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니까..." (남편 생각이 꽤나 날 거야. 그런데도 저렇듯 늘 웃고 있으니...) 어머니는 얼핏 이런 생각을 했다. "그이와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지..." 소피야야가 나직이 말했다. 마치 그의 생각이 절로 자아내질 듯한 경쾌한 음을 누르고 있 었다. "그이는 정말 삶을 살아 나갈 줄 아는 사람이었어..." "그--래! 노래하는 듯한 영혼의 소유자였어." 니꼴라이가 턱수염을 문지르며 말했다. 소피야는 이제 막 불을 붙인 담배를 어디론가 집어 던지고 어머니에게로 몸을 돌리고는 물었다. "제가 너무 시끄럽게 굴어서 혹 아주머니께 폐가 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아니겠죠?" 어머니는 화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나에겐 그런 거 묻지 않아도 돼요. 난 아무것도 이해하질 못한다오. 그냥 앉아서 듣고 나 자신에 대해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면 그만인 거지..." 소피야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이해하셔야만 해요. 여자라면 음악을 이해 못 할 이유가 없거든요, 그것 도 슬픔에 싸인 여자라면 특히 더..." 그녀는 힘차게 건반을 두드렸다. 그러자 커다란 고함소리, 마치 누군가가 충격적인 소식 을 듣고 외치는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울렸다. 그녀가 가슴으로 건반을 두드렸기에 이렇듯 강렬한 소리가 울려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젊은이의 목소리가 놀란 듯 몸부림을 치다 정신을 잃고 황급히 줄달음을 쳤다. 그리고는 다시 모든 사람들의 귀를 먹게 할 정도로 커 다란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분명 그 소리는 삶에 대한 불평이 아니라 분노, 바로 그것이었다. 잠시 후엔 누군가 강인하면서도 정다운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설복하기도 하고 호소하기도 하면서 간단한 혁명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가슴은 이 사람들에게 뭔가 좋은 말을 해 주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채워졌다. 어머니는 음악에 완전히 도취되어 두 남매에게 무엇이든 긴요한 일을 해 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얼핏 잔잔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뭐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찾기라도 하듯이 두리번거리고는 사모바르를 올려 놓기 위해 부엌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충동이 식을 줄을 몰라 차를 따르면서 입을 열었다. 당혹스러운 듯한 미소를 머금은 낯빛에 마치 두 남매나 자기에게 균등한 따스한 사랑의 말로 자기의 감 정을 씻어 내리기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우리들, 바로 어둡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모든 걸 느낄줄 안다오. 단지 그걸 표현하는 데 무진 애를 먹어서 그렇지. 사실 우리네 같은 사람에겐 이해는 하는데 말을 하 지 못한다는 게 큰 부끄러움이라오. 그러다 보니 그 부끄러움 때문에 우린 우리 자신들의 생각에 화가 치미는 거지. 삶이란 게 어떤가 보시오. 그저 사방에서 죽도록 얻어 터지는 일 말고 뭐가 있느냐 말야. 그러니 그저 좀 쉬고 싶은 마음만 간절하게 되고 결국 생각 따윈 귀찮게 되어 버리는 거라오." 니꼴라이는 안경을 닦으면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소피야는 눈을 크게 뜨고, 불 을 붙여 입에 문 담배를 피울 생각도 잊어버린채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피 야는 피아노 옆에 반쯤 몸을 틀고 앉아 가끔 오른손의 가냘픈 손가락으로 건반을 튀기곤 했 다. 화음이 어머니의 말 속으로 조심스레 섞여 들어갔다. 어머니는 자신의 감정을 쉬우면서 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감싸고 있었다. "난 이제서야 나나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무슨 말이든 할 수가 있게 되었소. 왜냐하면 이해하고 비교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거든. 이전엔 그냥 살았던 거라오. 뭐 비교할 만한 거리가 있었어야지. 우리네 살아가는 게 뭐 하나 특이한 것도 없고, 죄다 그 타령이었거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사는 모양을 보면서부터 내 자신이 살아왔던 것을 돌이켜보게 되었 고. 지독히도 비참하고 암담했던..." 어머니는 목소리를 약간 낮추어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어쩌면 내가 괜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정말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는지도 몰라요. 그런 거라면 당신들이 벌써 다 아는 걸테니까." "당신들한테는 그저 내 가슴을 활짝 열어 보이고 싶어요. 앞으로도 당신들이 계속해서 선 한 마음을 갖고, 또 하는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빌고 있는지를 보여 주 기 위해서라도 말이오." "우린 벌써 다 보고 있는 걸요." 나직한 목소리로 니꼴라이가 말했다. 어머니는 아무리 해도 자신의 욕망을 채울 길이 없어 다시 그들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새로웠던 것이 무엇이었고 지극히 소중한 것으로 자리잡아 버린 것은 무엇이었고... 뭐, 그 런, 그런 얘기들... 모욕과 감당해 내기 어려웠던 고통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 야기를 하면서도 말투엔 전혀 악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고 입가엔 내내 안타까운 듯한 미 소가 흐르고 있었다. 암울했던 지난 날들을 마치 잿빛 두루마리를 펼치듯 그렇게 이야기를 하였고 그 가운데에서도 남편의 매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그 매질의 동기가 너무 사소 했던 데에, 그리고 그러면서도 반항 한번 해 보지 못한 자신의 무기력함에 내심 놀라기도 했다... 두 남매는 한 인간, 즉 가축 취급을 당하고 그러면서도 아무 불평도 하지 못했던 한 인간 의 진솔한 이야기를 깊은 생각에 잠겨 말없이 듣고 있었다. 수천의 사람들이 그녀의 입을 빌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평범하다는 것, 그리고 순박하다는 것, 그게 그녀가 살아온 방법의 전부였다. 그러나 중요한 건 평범과 순박이라는 것이 이땅에 살고 있는 일일 이 헤아릴 수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는 한낱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니꼴라이는 팔꿈치를 탁자에 올려 놓고 손바닥으로 턱을 괸채, 꼼짝도 하지 않고 안경 너머로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한 탓인지 두 눈이 잔뜩 찡그려 있었다. 소피야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때로는 깜짝 놀라 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기도 했다. 얼굴은 한결 더 초췌해 보였고 파랗게 질려 있었으며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언젠가 한번은 나 자신이 그렇게 불행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어요. 정말 열병에 걸린 채 삶을 살아가는 것 같았어요." 소피야가 고개를 떨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형지에 있는거나 진배없었어요. 시골 군단위의 아주 작은 마을이었는데, 할 일은 아무 것도 없고 나 자신말고는 생각할 만한 것도 없었지요. 하여튼 모든 일을 내 불행한 신세에 다 꿰어 맞추고 하릴없이 빈둥거리다 급기야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싸우고 학교를 쫓겨났죠. 그 후로 받았던 모욕, 감옥, 나와 절친했던 동지의 배신, 남편의 체포, 다시 감옥, 그리고 유형, 남편의 죽음... 그 당시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바로 나려니 생각했어요. 하지만 내 모든 불행, 아니 거기다 열곱 이상을 한 대도 아주머니의 삶의 단 한 달에도 미 치지 못할 것 같군요. 뺄라게야 닐로브나! 아주머니의 고통이란 한없는 세월 중에 어느 하 루라도 피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그런... 도대체 그런 힘, 도저히 상상 못한 고통을 견뎌 낼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익숙해진 게지." 어머니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 제가 인생을 나름대로는 안다고 생각했었어요." 니꼴라이가 생각에 잠겨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막상, 책에서 읽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갖고 있는 반 토막짜리 인 상들을 통해서도 엄두도 못 낼 이야기들을 직접 듣게 되니 정말 삶이라는 게 끔찍하구나 하 는 것을 새삼 느끼겠어요. 사소한 것 같으면서도 끔찍한 일들이며 그런 시간들이 쌓이고 쌓 여 결국 인생이라는, 더구나 끔찍한 놈을 만들어 놓다니!" 이야기가 흐르고 흘러 결국 비참하고 암울한 민중의 삶으로 귀결되어 무르익고 있을 때, 어머니는 지난 추억거리들을 생각하며 미소를 짓기도 하고, 과거의 암울함 속에서 매일매일 의 치욕들을 끄집어내어 어느정도 두려움이라 말할 수 있는 한 편의 고통스러운 장면을 만 들기도 했다. 바로 그 속에서 바로 그녀의 청춘은 뭉개져 버렸던 것이다. 결국 어머니가 입 을 열었다. "이를 어째, 좀 쉬어야들 할텐데, 괜히 내가 이야기를 꺼내 가지고! 진작 귀띔이라도 해 주지 않고서..." 남매는 말없이 어머니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예전보다 인사를 하는 니꼴라이의 고 개가 더 숙여지고 마주잡은 손에도 한결 힘이 가는 것 같았다. 소피야는 방까지 어머니를 따라와 문 앞에 서서는 조용히 말했다. "쉬세요, 안녕히 주무세요." 그녀의 목소리에선 뭔가 훈훈한 기운이 새어 나왔고 잿빛 두 눈은 어머니의 얼굴을 더욱 부드럽게 애무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소피야의 손을 자기 손으로 꼭 감싸쥐고 대답했다. "고맙소들..." 4... 며칠이 지나서 어머니와 소피야는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 같은 옷차림을 하고서 니꼴라 이 앞에 나타났다. 거의 누더기가 다 된 무명 옷에 역시 무명 외투를 걸치고 어깨엔 배낭을 메고 있었으며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옷 탓인지 소피야의 키가 조금 커 보였고 창 백한 낯빛은 더욱 엄숙해 보였다. 작별 인사를 나눌 때 니꼴라이는 누이의 손을 꼭 쥐었다. 그 모습에서 어머니는 다시 한 번 그들 남매의 솔직하고 다정한 관계를 엿볼 수 있었다. 두 남매 사이에선 키스도, 그렇다고 다정한 말 한마디도 오가는 법이 없었지만 그들은 가 슴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마음으로 끔찍이도 서로를 생각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반면에 어 머니가 살던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키스도 많이 하고 다정한 말도 흔히들 하면서도 늘 굶주 린 개들처럼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두 여인은 말없이 거리를 지나 들녘으로 빠져 나왔다. 그리곤 어깨를 맞대고 오래된 자작 나무가 양 옆으로 죽 늘어서 있는 넓고 평범한 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고단하진 않우?" 어머니가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 소피야에게 물었다. "제가 별로 걸어다니질 않았으려니 생각하시나 보죠? 걷는 거라면 그래도 일가견이 있는 몸예요..." 소피야는 흡사 어린 시절에 심했던 장난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이 자기가 맡고 있는 혁명 과업에 대해서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녀는 첩자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가명과 위조증명을 사용하고 또 변장마저 해야만 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양의 금서를 여러 도시 를 돌아다니며 배포해야만 했고, 유형당한 동지의 탈출 계획을 세우고 그들을 외국까지 수 행해 주어야만 했다. 한번은 집에다 비밀 인쇄소를 꾸며 놓고 있었는데 어떻게 냄새를 맡았 는지 헌병들이 들이닥친 일이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가까스로 여몸 종으로 변장을 하고 집은 나서다 대문간에서 헌병들과 정면으로 맞부딪치긴 했지만 변장을 한 덕택에 겨우 밖으로 빠져 나와 한겨울에 겉옷도 제대로 걸치지도 않고 머리에 수건 하나 만을 달랑 뒤집어쓰고서, 게다가 손엔 석유통을 들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시내 거리를 뚜 렷한 목적도 없이, 그냥 시간을 버느라 왔다갔다하던 일도 있었다. 또 한번은 아는 사람을 만나러 낯선 도시에 간 일이 있는데 그 집 현관 계단을 올라서는 순간 찾아가려던 집이 수 색을 당하고 있다는 걸 얼핏 눈치챘다. 돌아가기엔 너무 때가 늦었다고 판단한 그녀는 아는 사람 바로 아래층 집의 초인종을 대담하게 누르고는 여행용 가방을 든 채 생판 알지도 못하 는 사람 집에 들어가 자기 처지를 솔직히 설명해 주었다. "원하신다면 절 헌병에게 넘길 수도 있으시겠죠. 하지만 전 그런 어리석은 행동은 안 하 시리라 믿습니다." 그녀는 자신 있는 어조로 또박또박 이야기를 했다. 그 집 사람들은 너무도 놀라 혹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밤잠을 설쳤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를 헌병에게 넘길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오히려 이튿날 아침 그녀와 함께 헌병들의 어리석음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녀가 수녀로 변장을 하고 기차에 올라타 일등칸에 자리를 잡았는데 공교롭게도 그녀를 잡으려고 하는 첩자와 동석을 하게 되 었다. 그 첩자는 자기의 능숙함을 자랑하면서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녀에게 연신 떠벌 리더라는 것이다. 그 첩자는 자기가 찾는 여자가 분명 이 열차 이등칸에 타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는 매 역마다 자리를 비웠는데 다시 자리로 돌아올 때면 으레 이런 말을 했다. "확실한 거는 아니지만 그 여자 아마 잠에 깊이 빠졌을 거요. 그 사람들도 꽤나 지쳐 있 겠지. 그 사람들 생활이라는 게 고달프기는 우리나 매한가질테니까." 어머니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은 한없이 다정스러웠다. 큰 키에 삐쩍 마른 몸매를 한 소피야는 경쾌하면서도 의연한 안정된 걸음을 떼어놓으며 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녀의 걸음걸이나 말하는 폼, 그리고 비록 부드럽 진 않지만 그래도 건강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 자체에서 풍기는 분위기 등 전반적으로 좀 뻣뻣해 뵈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정신적인 건강함, 불요불굴의 의지가 자연스레 배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두 눈은 무슨 사물을 보든지간에 젊은이다운 패기가 넘쳐 있었고, 또한 어느 곳에서건 어린애처럼 마냥 기뻐할 만한 어떤 구석을 발견해 내곤 했다. "좀 보세요, 정말 멋진 소나무네요." 소피야가 나무를 가리키며 외쳤다. 어머니가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니 다른 나무들보다 키 가 큰 편도 못되고 그렇다고 잎이 유달리 무성하다고 할 수도 없는 그저 그런 나무일 뿐이 었다. "좋은 나무구려!" 어머니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니는 여인의 귀 바로 위에서 바람이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종달새예요!" 소피야의 잿빛 눈이 부드럽게 반짝였고 몸은 마치 땅을 박차고 올라 높디높은 청명한 하 늘에서 어렴풋이 들려 오는 음악소리에 가 닿기라도 하려는 듯 움찔거렸다. 때로 그녀는 나 긋나긋한 허리를 구부려 들꽃을 꺾는가 하면 가늘고 민첩한 손가락을 놀려 하늘거리는 꽃잎 을 애무라도 하듯 만져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조용히 아름다운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었 다. 이 모든 것이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여 해맑은 눈망울을 가진 그 여인에게 더욱 숨김 없는 친근감을 느끼도록 만든 탓에 어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바싹 붙어서 발을 맞추어 가며 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 소피야의 말 속엔 어떤 단호함이 얼핏얼핏 엿보 여 어머니는 자신이 무슨 짐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빠져 들 때가 많았고 또한 늘 조심스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르이빈 같은 사람은 이 여자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겠는 걸...) 얼마가 지나 소피야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무도 솔직하고 진심 어린 이야기였기에 어머니는 미소를 머금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봐요, 아직도 어쩌면 그렇게 새색시같이 젊어 뵐까?" 어머니가 감탄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제 나이 벌써 서른둘인 걸요?" 소피야가 외쳤다. 어머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이 얘기 하자는 게 아니라오. 얼굴만 이렇게 봐서는 더 들어 보이지. 하지만 눈을 쳐 다본다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거요. 처녀가 아닌가 하고. 사 는 게 여간 불안하고 힘들고 위험했겠소? 그런데도 마음은 언제나 웃고 있으니..." "전 제가 힘들게 살아왔다고 느끼지도 않거니와 지금보다 더 낫고 더 재미있는 삶이란 상 상할 수도 없어요... 전 아주머니를 닐로브나라고 부르겠어요. 어쩐지 뺄라게야라는 이름은 아주머니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어머니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맘대로 부르구려! 그렇게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불러요. 난 부인을 내내 보고 듣고 생각 해 왔어요. 난 부인이 가장 인간적인 마음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고 있는 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오.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인 앞에서 기쁨이다 슬픔이다 다 제쳐 놓고 모든 걸 탁터놓게 되고 저절로 마음을 활짝 열게 되리란 기분이 들어요. 그러면서 당신들 모두를 생각해 보건대, 모두들 하나같이 악을 극복하고 있는 거요. 그것도 확실하게 말이 지!" "우리는 승리할 거예요. 노동자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지요." 소피야가 큰 소리로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그들에겐 가능성이란 가능성은 죄다 잠재해 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하는 한 모든 것은 이루어질 겁니다. 단지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들의 의식 엔 아직도 해방이란 개념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머니의 마음은 착찹하기만 했다. 왠지 모르게 소피야란 여인 에 대해서 친구로서의 연민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무례함을 초래할 정도는 못되 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서 뭐가 다른 좀더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럼 봉사에 대한 대가는 누구에게 기대하는 거요?" 어머니는 조용한 목소리로 좀 우울한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소피야는 어머니에게 일부러 내보이기라도 하는 듯한 자부심을 가지고 대꾸했다. "우린 이미 보상을 받았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는 삶을 발견했어요. 온 정성 을 다해서 소중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 외에 무얼 더 바랄 수 있겠어요?" 어머니는 그녀를 쳐다보던 눈길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을 다시 해 보았다. (맞아, 르이빈은 이 여자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거야...) 가슴 가득히 상큼한 공기를 호흡하면서 그들은 빠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민첩한 발걸음으 로 걷고 있었다. 어머니에겐 흡사 순례 행진을 하고 있는 듯이 생각되었다. 어린 시절 휴일 이며 영헙이 나타난다던 성상을 보려고 마을을 벗어나 한참 먼 수도원으로 가곤 했던 생각 도 났다. 가끔 소피야는 그리 크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늘과 사랑에 대한 어떤 새로운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불쑥 들녘과 숲, 그리고 볼가 강에 대한 시를 읊조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늘 미소를 머금고 그걸 들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운에 맞추어 고래를 까딱거리거나 그 음악에 흠뻑 빠져 버리기가 일쑤였다. 어머니의 가슴은 따뜻함과 고요함, 그리고는 상념들로 가득 차는 것이었다. 마치 여름 밤 자그마하고 오래된 정원에 홀로 남아 있는 것처럼. 5... 사흘 걸려 그들은 마침내 시골 마을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들녘에서 일을 하고 있는 농부 에게 타르를 만드는 공장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고 다시 수풀이 우거진 험한 산길을 따라 내려갔다. 길 한복판엔 마치 계단처럼 나무 뿌리들이 줄지어 튀어나와 있었고, 한참을 더 내려가 당도한 둥근 공터엔 석탄 찌꺼기와 톱밥이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타르 또한 여기저기 난잡하게 끼얹어져 있었다. "이제 다 왔나 보군!" 어머니가 불안스러운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면 말했다. 가느다란 통나무와 나뭇가지들로 엉성하게 지은 임시막사 같은 집 옆에 대패질조차 하지 않아 꺼칠꺼칠한 널빤지 세 개로 만든 탁자가 있었는데, 그걸 떠받치고 있는 삼각대는 땅속 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 탁자를 가운데 두고 온몸이 온통 시커멓고 가슴 부분이 해질 대로 다 해진 셔츠를 걸치고 있는 르이빈과 예핌, 그리고 그들말고도 젊은 친구 둘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 일행이 오는 걸 처음 본 사람은 르이빈이었는데, 그는 손을 눈 위로 가져 간 상태로 그들이 더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시오, 미하일 형제!" 어머니가 멀리서 소리쳤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도 두르는 기색도 없이 걸어 나오더니, 어머니인 것을 알아보 고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웃으며 시커먼 손으로 턱수염을 쓸어 내리고 있었다. "순례중이라오." 어머니가 한 발짝 더 그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뭐, 그냥 지나는 길에 형제나 한번 만나 볼까 해서 들렀소. 이 사람은 안나라는 내 친구 라오..." 어머니는 자기의 수완에 짐짓 만족해 하며 심각하면서도 엄해 뵈는 소피야의 얼굴을 곁눈 질로 힐끔거렸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이렇게 일단 대꾸를 한 르이빈은 시덥지 않은 듯한 미소를 흘리며 그녀의 손을 잡아 흔들 고 소피야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거짓말 같은 건 안 해도 돼요. 여긴 도시가 아닙니다. 거짓말은 필요가 없어요. 모두 다 우리 편이랍니다." 예핌은 그냥 자리에 앉은 채로 두 순례자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동지들에게 앵앵거리는 목 소리로 뭔가를 속닥거렸다. 여인네들이 탁자 쪽으로 다가가자 그는 벌떡 일어나 말없이 고 개만 까딱했고, 그의 동지들은 여전히 꼼짝 않고 있었다. 마치 손님이 오거나 말거나 관심 조차 없다는 듯이. "우린 여기서 수도승들처럼 살지요." 르이빈이 가볍게 어머니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주인 나으리란 양반은 이 마을엔 있지도 않고 마나 님께선 병원 시세를 지고 있는 지 오래라 결국 내가 관리인이랄 수 있지요. 이리 앉으십시 오. 몹시 시장하시지요? 예핌, 여기 우유 좀 내오게나!" 전혀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예핌이 움막으로 걸어갔다. 순례자들이 어깨에 메고 있던 배 낭을 벗으려 하자 젊은이들 중 키가 크고 마른 사내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주었다. 나머지 한 사내는 다부진 체격에 털북숭이였는데,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듯이 탁자에 팔꿈치를 괴 고서 그들을 쳐다보며 머리를 긁적거리는가 하면 고양이 울음 같은 소리로 콧노래를 조용히 흥얼거리기도 했다. 역한 타르 냄새가 숨막힐 듯한 낙엽 썩는 냄새와 섞여서 여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아니 었다. 르이빈이 키가 큰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은 야꼬프이고, 저 친구는 이그나뜨라고 합니다. 참, 아드님은 그래, 어떻게 지 냅니까?" 어머니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옥에 가 있소." 르이빈이 소리쳤다. "또 감옥에 갔어요? 그가 좋다면야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이그나뜨는 노래를 그쳤고, 야꼬프는 어머니의 손에서 지팡이를 받아 들고 말했다. "앉으세요." "아이고, 여태 서 계셨군요? 좀 앉으십시오." 르이빈이 소피야에게 자리를 권했다. 소피야는 말없이 그루터기 위에 앉아 르이빈을 주의 깊게 쳐다보았다. "언제 잡혀 간 겁니까?" 르이빈이 어머니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묻고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정말 팔자도 기구하시군요, 닐로브나!" "천만에요!" 그녀가 말했다. "예? 이력이 나신 모양이군요?" "이력이 난 게 아니고, 이제야 없어서는 안될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지요." "그렇군요! 자, 이야기 좀 해 주시오..." 예핌이 우유병을 가져 와 식탁에서 잔을 집어 들고 물에 헹군 다음, 우유를 따르더니 소 피야에게 내밀고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행동 하나 한를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했다. 어머니가 자기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끝내자 모두들 잠시 동 안 말이 없었다. 서로에게 눈길조차 주는 법이 없었다. 이그나뜨는 자리에 앉은 채 널빤지 에다 손톱으로 무슨 무늰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고, 예핌은 르이빈의 바로 뒤에 서서 그의 어깨 위에 팔꿈치를 괴고 있었으며, 나무 줄기에 기대 선 야꼬프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떨 구고 있었다. 소피야는 곁눈질로 농부들을 살폈다. "으 -- 으 -- 음!" 르이빈이 천천히 침통하게 말꼬리를 늘였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노골적으로 일을 할 수가 있담!" "여기서, 음... 우리가 만약 그런 행진을 한다면 농부들은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맞고 말 거야." 예핌이 스산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얻어맞다뿐이겠나!" 이그나뜨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고는 말을 이었다. "아니, 그래도 난 공장으로 갈테야. 아무렴 여기보다야 낫겠지..." "빠벨이 재판을 받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럼 혹 무슨 형을 박았는지는 못 들으셨 습니까?" 르이빈이 물었다. "강제노동 아니면 시베리아 종신유형이겠지요..." 어머니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새 젊은이들이 모두 곧바로 그녀를 쳐다보았으나 르이빈만은 고개를 떨구며 천천히 물었 다. "그럼 빠벨은 처음 그 일을 계획할 때부터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았답디까?" "물론 알고 있었지요." 소피야가 큰소리로 말했다. 모두는 일제히 입을 다물고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한결같이 스산한 생각에 온몸이 마비되 어 버린 것 같았다. "그랬을 거야." 르이빈은 냉담하면서도 위엄 있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 역시 그가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오. 앞 뒤 안 가리고 무턱대고 무슨 일을 할 사 람이 아니지. 얼마나 신중한 사람이라고. 이보게, 젊은이들 이제 알겠나? 그 사람은 자기가 총검에 찔리고 강제노동에 처해지리라는 걸 알면서도 자기의 길을 간 걸세. 이를테면 어머 니가 누워 있는 그 길로 어머닐 밟고 지나간 거지. 닐로브나, 당신을 밟고 지나갔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어머니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을 한 다음 깊은 한숨을 몰아 쉬는 것이었다. 소피야가 말없이 어머니의 손을 어루만지며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르이 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그가 모든 사람들을 새까만 눈으로 둘러보며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섯 사람 은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가는 햇살이 황금빛 댕기처럼 대기에 매달려 있었다. 어딘선 가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어머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메이데이에 대한 회상, 아 들과 안드레이에 대한 걱정스런 마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조그맣고 비좁은 빈터에는 타르가 덕지덕지 묻은 나무통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뿌리째 뽑힌 그루터기들이 거 꾸로 솟아 있기도 했다. 빈터 주위에 무성히 자라 있는 참나무들과 자작나무들은 어느새 사 방에서 빈터를 덮치고 어두우면서도 따뜻한 그림자를 땅바닥에 드리우고 있었다. 그저 정적 만이 감돌 뿐이었다. 느닥없이 야꼬프가 나무에서 물러서더니 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내 걸음을 멈추고는 머리를 흔들면서 무뚝뚝하면서도 큰소리로 물었다. "그럼 우리가 군대에 가는 게 빠벨 같은 친구들에게 총부리라도 겨누려고 그러는 거란 말 입니까?" "자넨 자네가 총부리를 겨누게 될 사람들이 과연 누가 되리라고 생각하나?" 르이빈이 침울한 목소리로 반문하곤 계속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들의 목을 죄도록 알게 모르게 강요받고 있는 거야. 여 기에 바로 문제의 핵심이 있는 거라고." "전 누가 뭐래도 군대에 갈 겁니다." 예핌이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누가 말리나! 가라고." 이그나뜨가 외쳤다. 그리고는 예핌을 쳐다보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만약에 날 쏠 날이 오거든 꼭 머리를 겨냥해 주게나... 괜히 불구 만들 생각일랑 말고 그대로 즉사를 시켜 달란 말일세." "그런 것쯤이야 나도 알지." 예핌이 거칠게 소리쳤다. "잠깐만, 이보게들!" 르이빈이 그들을 쳐다보면서 입을 열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여기에 바로 그 어머님이 계시네!" 그가 어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의 아들은 지금 자기의 몸을 내던졌어..." "왜 그런 얘기를 하고 그러시오?" 침통한 표정의 어머니가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슬픈 듯 대꾸했다. "해야만 합니다. 당신의 머리카락이 헛되이 세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해야만 하는 얘깁 니다. 자, 봐. 그렇다고 이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같은가, 자네들 눈에는? 닐로브나, 책 가지고 오셨소?" 어머니는 그를 쳐다보고 잠시 말이 없다가 이윽고 대답을 했다. "가져 왔소... 르이빈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치며 말했다. ""그럼 그렇지! 처음 당신을 보는 순간 금방 알아챘지요. 그 일 때문이 아니라면 뭐 하려 고 여기까지 오셨겠어요? 자네들, 보았나? 아들이 대오에서 제거되니까 그 어머니가 자식의 자리에 우뚝 서신 거라네." 그는 손으로 누굴 위협이라도 하는 듯한 시늉을 하면서 상스럽기 그지없는 욕설을 해댔 다. 어머니는 그가 욕설을 퍼붓는 데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나서야 얼굴이 많이도 변한 걸 알았다. 한결 퀭해진 얼굴에 턱수염은 제멋대로 자라 있었고 그 아래에선 튀어나온 턱뼈가 절로 느껴졌다. 푸르스름한 두 눈의 흰자위 부분엔 뻘겋게 핏 발이서 마치 오랫동안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았고 코도 전보다 한결 푸석푸석해 보이는 데다 아주 탐욕스럽게 구부러져 있었다. 타르가 덕지덕지 묻은 채로 풀어헤쳐져 있 는 셔츠깃은 무성히 자라 있는 시꺼먼 가슴의 털을 드러내고 있어, 어찌되었든 전체적인 모 습으로 볼 때 전보다 훨씬 음산하고 침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어찌나 타르가 많이 묻어 있던지 원래는 그 셔츠가 빨간 색일 것이라는 추측을 겨우 이끌어 낼 수 있는 정도였 다. 충혈된 두 눈에서 엿보이는 마른 섬광은 그의 검은 얼굴에 타는 듯한 분노의 불길을 드 러내고 있었다. 소피야는 파리해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농부들에게 눈길을 붙 박아 놓고 있었다. 이그나뜨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연신 머리를 내두르고 있었고, 야꼬프는 다시 움집 옆에 바짝 기대어 서서 시꺼먼 손가락으로 통나무 껍질을 열심히 벗겨 내고 있었 다. 예핌은 어머니의 등뒤에서 탁자의 세로 방향을 따라서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 르이빈이 말을 이었다. "요전에, 지방 서기란 자가 한 번은 날 부르더니 이런 말을 합디다. <이 파렴치한 놈아, 그래 사제한테 뭐라고 지껄였어?> 그래서 내가 말했죠. <내가 왜 파렴치한 놈인가? 매일매 일 뼈빠지게 일해서 먹고 살고, 사람들한테 해가 되는 일이라곤 털끝 만큼도 한 일이 없는 데!> 하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한바탕 부산을 떨고는 개패듯 패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사흘 낮밤을 잡혀 있었소. 그 놈들이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란 고작 그런 거지요, 안 그렇 소? 용서고 뭐고 필요가 없어, 망할놈의 새끼들! <꼭 내가 아니더라도 네 놈, 아니면 네 놈 의 자식 놈들한테 누구든지 내가 받은 이 치욕에 대한 복수를 해 주고 말테니, 꼭 기억해 둬라! 네 놈들이 민중의 가슴을 쇠발톱으로 들쑤셔 놓고 거기에 악의를 심어 놓았으니 용서 는 꿈도 꾸지 마라, 이 망할 놈의 새끼들!> 그런 생각이 듭디다." 그는 들끓어오르는 증오심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머니를 놀라게 하 는 여러 소리들이 전율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사제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쇼?" 그가 한결 진정된 어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마을 집회가 끝나고 그자가 농부들과 함께 길거리에 빙 둘러앉아서 하는 말이, 사람들이 란 가축의 무리와 같아서 늘 그들을 위해서는 목동이 있어야만 한다는 거요. 내가 그래서 비아냥거리는 투로 끼어들었지. <여우를 숲의 우두머리로 삼으면, 새는 한 마리도 안 남고 깃털만 널려 있을 것이 아니오.> 그러자 그 작자가 날 힐끔 째려보더니 하는 말이 민중들은 참아야만 하고 또 그 인내력을 주십사고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라더군요. 그래서 내가 다시 그 말을 받아서 민중들은 기도를 많이 하지만 하느님에겐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듣지를 못 하는 것 같다고 말했죠. 사실이 그렇지 뭐! 그자가 어떤 기도를 하느냐고 따져 물으며 내게 트집을 잡더군요. 난 평생 한 가지 기도만을 하고 사는데, 민중이면 다 똑같을 거라고 말했 죠. <주요, 주인 나으리께도 벽돌 나르는 법과 돌을 쌓는 법, 그리고 장작 패는 법 따위를 가르쳐 주옵소서!> 그랬더니 그자가 내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게 하더군요. 당신은 귀족마 나님이시오?" 르이빈이 하던 말을 끊고 불쑥 소피야에게 물었다. "무슨 이유로 날 귀족마나님이라 하는 거지요?" 소피야는 그의 예기치 않은 질문에 당혹스러워하며 되물었다. 르이빈이 웃었다. "이유라..., 딱 보니 태생이 그럴 것 같아서이죠. 그게 바로 이유요. 무명 수건을 머리에 둘렀다고 해서 귀족의 죄과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우린 사제가 아무리 거적을 뒤집 어썼더라도 금방 알아본다오. 당시는 지금 젖은 탁자 위에 팔꿈치를 올려 놓고는 깜짝 놀라 얼굴을 찌푸리고 있어요. 게다가 당신은 노동자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곧은 허리를 갖고 있고..." 어머니는 그가 무게 있는 목소리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소피야를 모욕할까 봐 지레 겁먹 고 서둘러 나무라는 듯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이 부인은 내 친구요, 미하일 이바노비치, 참 좋은 사람이라오. 이일을 하느라 머리카락 이 다 샜다오. 그러니 너무 그렇게 다그치지 말구려..." 르이빈이 깊은 한숨을 몰아 쉬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모욕으로 들렸소?" 소피야가 그를 노려보더니 무뚝뚝하게 되물었다. "내게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신 모양이네요?" "내가요? 그렇소. 얼마 전에 여기에 야꼬프의 사촌되는 사람이 새로 왔는데, 폐병 환자 요. 그 사람을 불러도 괜찮겠소?" "상관없어요. 불러오세요." 소피야가 대꾸했다. 르이빈이 그녀를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목소리를 한결 낮추어 말했다. "예핌, 자네가 좀 가 주겠나? 가서 어두워지거든 건너오라고 일러주게, 지금 당장!" 예핌이 아무 말 없이 모자를 썼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눈길조차 주지않고 서두르는 기색 도 없이 숲속으로 이내 사라졌다. 르이빈이 고갯짓으로 그의 뒷모습을 가리키면서 목쉰 소 리로 말했다. "저 친군 지금 고민에 빠져 있소. 저 친군 군대엘 가야 해요, 여기 야꼬프도 그렇고. 야 꼬프는 별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자기는 갈 수 없노라고 말하는데, 저 친구는 그러지도 못 하고 그냥 군대에 가려고 하지요... 저 친구 생각은 군인들을 선동하겠다는 겁니다. 난 그 건 이마로 벽을 들이받는 격일 뿐 아니라 군인들이란 그저 총검을 손에 들고 행군이나 할 줄 아는 족속들이라고 충고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어요. 이그나뜨도 마음을 돌려 보겠다고 여러모로 애써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이그나뜨가 르이빈을 보지도 않고 침통한 어투로 말했다. "그렇다고 그게 꼭 허사인 건 아네요. 군대라는 곳은 일단 가게 되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곳이니, 그 친군 아마 다른 군인들이나 별반 다를게 없는 일개 군인이 될 겁니다..." "설마 그럴까! 하지만, 무엇보다 입대를 피해 도망가는 게 상책일세. 러시아가 얼마나 넓 은데 어디서 찾아낼 거야? 신분증 하나 구해서 이 마을 저 마을 촌구석을 돌아다니면..." 르이빈이 생각에 잠겨 대꾸했다. "난 그럴 거예요. 일단 싸우기로 마음먹었으면 정면으로 부딪치는 거예요." 이그나뜨가 장작으로 발을 두드리며 말했다. 대화가 끊겼다. 꿀벌과 땅벌들이 분주히 주위를 맴돌며 날갯짓 소리로 정적을 더해 주었 다. 새들이 지저귀고, 어딘가 멀리선 길을 잃고 들판을 헤매는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르이빈이 입을 열었다. "자, 일을 시작해 볼까... 좀 쉬시겠소들? 집안에 판자로 짠 침상이 있어요. 이분들한테 마른 나뭇잎 좀 모아다 드리게나, 야꼬프. 참 아주머니께선 가지고 오신 책들을 주세요..." 어머니와 소피야는 자루를 풀기 시작했다. 르이빈이 그들 머리 위로 머리를 숙이고 흐뭇 한 듯 말했다. "어이구, 많이도 가지고 오셨소. 이 일 한 지 오래 되었나 봅니다 그려. 그래 이름이 어 떻게 되시오?" 그가 소피야를 보며 물었다. "안나 이바노브나! 12년째지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아무것도 아니오. 감옥엔 가 보았소?" "물론입니다." "언제 본 적이라도...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이 소피야에게 어찌 그리 심한 말들을 할 수 가 있소?" 어머니가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나무라듯이 말했다. 르이빈이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책꾸러미 하나를 손에 집어 들고는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너무 날 몰아세우지 말아요. 농부와 귀족의 관계를 물과 기름의 관계와 같아서 서로 함 께하기가 어렵고 밀어내기만 하지요." "난 귀족마나님이 아니라 그냥 인간일 뿐예요." 소피야가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럴 수도 물론 이겠죠. 개도 예전엔 늑대였다는 말도 있으니까. 가서 이걸 감춰야겠 소." 르이빈이 말했다. 이그나뜨와 야꼬프가 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우리에게 주세요." 이그나뜨가 말했다. "모두 같은 종류요?" 르이빈이 소피야에게 물었다. "달라요. 여기 신문도 있고..." "오..." 세 사람은 서둘러 움막 안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농부들이 불붙고 있어." 생각에 잠긴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어머니가 나지막이 말했다. 소피야가 대꾸했다. "그래요 저도 이런 얼굴을 보긴 난생 처음예요. 마치 그들의 얼굴은 대순교자의 얼굴 같 아요. 우리도 안으로 들어가요, 저들을 더 보고 싶어요..." "르이빈이 좀 까다롭게 군다고 해서 화내지 말아요..." 어머니가 나지막이 말했다. 소피야는 웃어 보였다. 그들이 문에 들어서자, 이그나뜨는 고개를 쳐들고 그들을 힘끔 쳐다보고는 이내 곱슬거리 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무릎 위에 놓여 있는 신문에 바싹 고개를 수그렸다. 르이빈은 선 채로 지붕의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으로 신문을 비추어 가며 읽고 있었다. 야꼬프 역시 무릎을 꿇고 앉아 판자로 짠 침상에 가슴을 바투 기대고서 신문을 읽고 있었 다. "미하일 아저씨, 우리네 농부들을 욕하는 대목이 많아요." 야꼬프가 신문을 계속 읽으면서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중얼거리자 르이빈이 몸을 돌려 그 를 쳐다보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다 우릴 위해서 그러는 걸세!" 이그나뜨가 깊은 숨을 몰아 쉬고 나서 고개를 쳐들고는 잔뜩 찡그린 눈을 해 가지고 말했 다. "여기 이렇게 씌어 있어요. <농부들은 인간이기를 그만두었다>, 물론, 포기했지요." 그의 순박하고 환한 얼굴에 모욕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제기, 이 내 옷을 걸치고 온종일 뒹굴어 보라지, 정말 볼 만할 거야. 잘난 체하는 나쁜 놈들 같으니!" "난 좀 누워야겠는 걸." 어머니가 소피야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좀 고단하기도 하거니와 남새 때문에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라오. 당신은 어떻소?" "괜찮아요." 어머니는 침상에 눕자마자 금세 잠이 쏟아졌다. 소피야는 그녀의 바로 옆에 걸터앉아 책 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피면서 땅벌들이 어머니의 얼굴 위를 빙빙 돌 때면 벌들을 저만치로 쫓아 보내곤 하였다. 어머니는 반쯤 감은 눈으로 소피야가 하는 모양을 보았다. 왠지 흡족했다. 르이빈이 다가와 은은한 속삭임으로 물었다. "아주머닌 잠드셨소?" "예." 그는 잠시 말없이 가만히 있다가 어머니의 잠든 얼굴을 유심히 내려다보고는 한숨을 내쉬 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분은 자식을 위해서, 자식의 길을 따라 나선 최초의 어머니일거요, 최초의 어머니!" "주무시는 데 방해가 될지도 모르니 우린 밖으로 나가죠." 소피야가 제안했다. "그럽시다. 우리도 일을 해야 하니까 물론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이야길랑 저녁때 까지 미루도록 합시다. 가세, 젊은 친구들!" 세 사람은 움막에 소피야만을 남겨두고 모두 나갔다. 어머니는 얼핏 생각했다. (주님의 은총이야! 벌써 다들 친구가 되어 버렸군...) 이런 생각을 하다가 어머니는 숲과 타르의 자극적인 냄새를 호흡하며 스르르 잠이 들었 다. 6... 작업을 끝낸 흡족한 낯빛의 일꾼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목소리에 잠이 깬 어머니는 움막 밖으로 나와 얼굴엔 한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하 품을 하였다. "모두들 일을 하고 돌아오는데 난 무슨 대단한 귀부인이나 된 양 늘어지게 잠만 잤구려!" 다정한 눈길로 모두를 둘러보며 어머니가 말했다. "아주머니의 경우는 용서가 되지요." 르이빈이 대답했다. 그는 한결 조용해졌는데, 이는 피로감이 흥분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 았기 때문이었다. "이그나뜨, 차 좀 끓여 내오게!" 그가 이그나뜨를 향해 소리치고는 말을 이었다. "여기서 우린 번갈아 가며 주인이 되지요. 오늘은 이그나뜨가 우리에게 마실 거며 먹을 걸 준비해 줄 차례랍니다." "오늘은 내 순번을 사양하고 싶은 걸요." 이그나뜨가 귀를 쫑긋거리며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장작이며 나뭇가지를 모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손님에겐 흥미를 갖기 마련이지!" 예핌이 소피야와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했다. "내 도와줄께, 이그나뜨!" 야꼬프가 움막으로 들어가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큰 빵 한 덩이를 가지고 나와 조각조각 쪼개서 탁자 위에 나누어 놓기 시작했다. "가만! 기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예핌이 조용히 소리쳤다. 르이빈이 가만히 귀를 기울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누가 오는 것 같군..." 그리고는 소피야를 보고 설명했다. "이제야 증인이 오는가 봅니다. 난 그 사람을 데리고 도시를 돌아다니며 광장에다 세워 놓고 민중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도록 했어요. 그가 하는 말은 오직 하나지만 모두가 들어 두어야만 하는 말입니다..." 정적과 어둠이 더욱 짙어지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한결 은은해졌다. 소피야와 어머니는 농 부들을 지켜 보았다. 모두들 천천히 거동을 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놓고 있었고 웬지 이 상스런 조심성이 엿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도 이 여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숲속에서 빈터 쪽으로 키가 큰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천천 히 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는데 그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 왔다. "접니다." 그 사내는 이렇게 말을 하고는 세차게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는 발 뒤꿈치까지 내려오는, 누더기가 다된 긴 외투를 걸치고 있었고 쭈그러진 둥근 모 자 밑으로 꺼칠꺼칠하고 누런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헝클어진 채로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 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핏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에는 금빛 턱수염이 무성히 자라 있었 고 입은 반쯤 벌려진 채였으며 이마 밑에 두 눈은 푹 패여서 어느 모로 보나 병색이 완연했 다. 게다가 어두운 눈빛이 병색을 더해 주고 있었다. 르이빈이 소피야를 소개시켜 주자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책을 가져 오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예, 들으신 대로입니다." "감사합니다... 민중을 위하는 일이 따로 없어요. 민중 자신은 아직 진실을 이해할 줄 몰 라요. 그래서 그걸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제가 주제넘는 짓인 줄 알면서도 이런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걸신들린 듯 짧은 호흡으로 대기를 들이마시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목소리는 토 막토막 끊어졌고 축 처진 손에 달라붙은 앙상한 손가락들은 외투의 단추를 잡으려고 애쓰면 서 가슴 위를 더듬고 있었다. "이토록 늦은 시간에 숲속에 계시는 건 몸에 해로워요. 게다가 이 숲은 활엽수림이라서 습기도 많으니 호흡이 곤란한 건 당연해요." 소피야가 말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이젠 건강에 좋고 자시고도 없어요. 제게 좋은 일이란 오직 죽는 일뿐 이랍니다..." 그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대꾸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괴로움 그 자체였고, 그의 모습은 이미 자신의 무기력과 차 마 보지 못할 억울함을 일깨우는 그런 아무 쓸모 없는 연민만을 불러일으킬 따름이었다. 그 는 나무통에 걸터앉았는데, 어찌나 조심스럽게 무릎을 구부리는지 흡사 두 다리가 부러질 걸 두려워 하는 사람 같았다. 비오듯 땀이 흐르는 이마를 훔치는 것을 보니 머리카락은 윤 기 하나 없이 푸석푸석한 게 마치 죽은 사람의 그것 같았다.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주위의 모든 것은 사뭇 전율하였으며 또한 불안스레 흔들리고 있 었다. 놀란 그림자가 겁먹은 듯 숲속으로 내달았고 불길 바로 위에선 심각한 표정을 한 이 그나뜨의 둥근 얼굴이 불빛에 가물거렸다. 불꽃이 차츰 사위어 갔다. 연기 냄새가 진동을 하고 정적과 어둠이 병자의 거치 말소리에 귀를 곤두세우고 경청을 하느라 빈터에서 다시 결합하였다. "하지만 전 민중들을 위해서라면 범죄의 증인으로서 아직도 유익한 일을 할 수가 있습니 다... 자, 저를 보세요. 제 나이 겨우 스물여덟입니다. 하지만 전 죽어 가고 있어요. 10년 전만 해도 12 뿌드 정도 되는 짐을 어깨에 짊어지는 일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죠. 정말 아 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토록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전 할 칠십까지는 중도에 꺼 꾸러지는 일 없이 거뜬히 살 수 있으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0년을 살고는 막다른 골목 에 들어서고 말았어요. 지주들이 절 강탈하고는 40년이란 인생을 훔쳐갔습니다. 40년이란 인생을!" "이게 바로 이 사람이 매일 흥얼거리다시피 하는 노래랍니다." 르이빈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다시 모닥불이 타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불길이 한결 강했고 밝았다. 그림자들이 다시 숲속을 향해 허우적거렸고 그러다간 다시 되돌아와서는 소리 없이 적의를 잔뜩 품고 너울너 울 춤을 추는 모닥불 주위에서 가물거렸다. 불길 속에선 마른 나뭇가지들이 탁탁 소리를 내 며 끊임없는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고, 나뭇잎들 또한 따뜻해진 대기의 높은 파도에 겁먹은 듯 연신 부스럭거리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쾌활하고 활달한 불길의 혀바닥들이 찧고 까불며 장난을 치다가는 서로 얼싸안기도 하고, 누렇고 시뻘건 불길이 이번엔 솟구치기도 했으며 불붙은 잎들이 불꽃을 뿌리며 날아오르면 하늘에선 별들이 마치 유혹이라도 하는 듯 반짝거 리며 미소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나의 노래일 수만은 없어 수천의 사람들이 그 노래를 부르고 있답니다. 비록 자신들의 비참한 삶 속에서 민중들에게 유익한 교훈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노동에 지친 얼마나 많은 불구자들이 말없이 굶주림에 허덕이다 죽어 가고 있습니까..." 그는 허리를 구부리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하면서 연신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야꼬프가 끄바스[역주 : 곡류, 주로 나맥과 엿기름으로 만든 러시아인 상용의 청량음료] 통을 탁자 위에 올려 놓고 푸성귀 한 다발을 던져 놓으며 병자에게 말했다. "이리 와요, 사벨리! 우유를 좀 가져 왔어요..." 사벨리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거절을 했지만 야꼬프가 그의 겨드랑이 밑에 손을 집어 넣 고 일으켜서 탁자로 데려왔다 소피야가 르이빈에게 낮은 목소리로 나무라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이봐요. 당신은 뭐하려고 저 사람을 이리로 불러왔어요? 금세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데..." "그럴지도 모르지요." 르이빈이 맞장구를 치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기력이 있을 때까지 이야기를 하게 내버려둬요. 여태껏 하찮은 일로 인생을 망쳤 으니 사람들을 위해서는 좀더 참아 보도록 내버려두는 게 잘하는 것이오. 아무 일 없을 거 요. 괜찮아." "당신은 흡사 그런 데에 재미라도 붙인 사람 같군요." 소피야가 외쳤다. 르이빈은 그녀를 쳐다보더니 비통한 어조로 대꾸했다. "십자가에 매달려 신음하는 그리스도를 즐기는 사람들은 바로 지주 나으리들이오. 우린 인간에게서 뭔가라도 배우고자 하고, 역시 당신도 그런데서 뭔가 조금이라도 배우는 것이 있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오..." 어머니가 움찔 두 눈썹을 치켜세우고 그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둬요..." 탁자에 걸터앉은 병자가 다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노동으로 사람들은 폐인이 되다시피 했어요. 도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입니까? 인간으로 서의 삶이란 이미 강탈당한 지 오랩니다. 무엇 때문인가요? 내 얘길 해 볼까요? 내 주인, 난 네페도프 공자에서 인생을 망쳐 버렸는데, 그 내 주인이란 작자는 어떤 가수란 년한테 홀딱 빠져서 금세숫대야에 금요강을 선물로 주었어요. 바로 그 요강에는 내 힘, 내 인생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바로 그런 짓거리를 위해 내 인생은 달아나 버린 겁니다. 그 놈은 나 를 죽도록 일을 시켜먹고는 고작 한다는 짓이 내 피를 빨아 제 애인년을 즐겁게 해 준 거지 요. 내 피를 갖고 그 년에게 금으로 만든 요강을 사 주었단 말입니다." "인간이란 자고로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본따서 창조되었건만, 겨우 그런 데다 인생을 허 비하다니..." 예핌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입만 다물고 있다고 해서 잘하는 짓이 아닌 거지!" 르이빈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걸 그냥 참아서는 안돼!" 야꼬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이그나뜨는 웃고 있었다. 어머니는 젊은이들 셋 모두가 굶주린 영혼이 무언가를 탐욕스럽게 갈구하는 듯한 강렬한 열망으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고, 매번 르이빈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몰래 매복해 있 는 사람의 눈초리로 그의 얼굴을 응시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사벨리의 이야기는 그들의 얼 굴에 이상스러우리만치 날카로운 경멸의 미소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병자에 대한 연민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저 사람 하는 말이 과연 진실일까?" 소피야가 큰소리로 대꾸했다. "그럼요, 진실이고 말고요. 그런 선물 사건이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어요. 모스끄바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랍니다..." "그런데도 그 놈은 사형에 처해지지도 않았지요. 아무 벌도 받지 않았소." 르이빈이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놈은 마땅히 죽여 없애야만 해요. 민중들 앞에 끌어내다가 사지를 쫙쫙 찢어서 그 더러운 살덩이들을 개에게나 던져 버려야 해요. 민중들이 한번 들고일어나기만 하면 웬만한 사형은 민중들의 손으로 집행될 겁니다. 민중이 흘린 피가 대체 얼맙니까. 그러니 자신의 오욕을 씻어 버리기 위해서라도 마땅히 그래야 해요. 그 피는 말할 필요도 없이 민중의 피 며 민중의 몸 안에서 자라나 살 것이니 그 피의 주인이 민중이 되는 건 당연한 거지요." "쌀쌀하군!" 병자가 말했다. 야꼬프가 그를 부축해 일으키고는 모닥불 가까이로 옮겨 앉혔다. 모닥불은 더욱 밝게 타올랐고, 얼굴 없는 그림자들이 그 주위에서 활기 넘치는 불꽃놀이 를 놀란 눈으로 지켜 보며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사벨리는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창백 하고, 말라 앙상한 손을 뻗어 불을 쬐고 있었다. 르이빈이 고개를 그의 쪽으로 기울인 채 소피야에게 말을 건넸다. "이건 책보다도 한결 신랄하답니다. 기계에 손이 잘리거나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 건 일정 부분 노동자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설명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처럼 인간에게서 완 전히 피를 빨아먹을 대로 빨아 먹고 죽은 개새끼 버리듯 팽개친다는 건 어떤 말로도 설명되 어질 수 없는 겁니다. 온갖 종류의 살인을 난 다 이해할 수 있지만 장난 삼아 저질러대는 학대는 결코 용납할 수 없어요. 민중이 학대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뭐며 우리 모두 가 고통을 당해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 놈들은 장난 삼아, 단순히 즐 기려고, 이땅에서 좀 더 편히 살아 보겠다고, 그리고는 우리의 피를 빨아 저희들에게 필요 한 모든 것, 이를테면 가수년, 말들, 은장도, 순금접시, 값비싼 장난감 따위를 사려고 그 짓거리를 한다 이겁니다. 네 놈들은 일, 일, 일, 그저 일이나 죽도록 해라, 그러면 난 네 놈들 노동의 대가로 돈이나 실컷 모아서 애인한테 순금 요강이나 선물할란다, 뭐 이런 식이 오." 어머니는 듣고 보았다. 다시 한번 그녀의 앞에 펼쳐진 어둠 속에서 빠벨, 그리고 그와 함 께 걸어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길이 밝게 빛나는 줄무늬처럼 곧게 뻗어 있고 왠지 어른거 리는 것을. 저녁식사를 마치고 모두들 모닥불 주위에 빙 둘러앉았다. 그들 앞에는 나뭇가지를 조급히 먹어 치우며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고 뒤에는 어둠이 숲과 하늘을 집어삼킨 채 드리워져 있 었다. 병자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불길을 응시한 채로 연신 기침을 해대고 있었는데, 온몸을 부르르 떠는 폼이 흡사 얼마 남지 않은 삶이 질병으로 못 쓰게 된 몸뚱어리를 내던지려고 기를 쓰면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가슴으로부터 찢겨져 도망가려는 것 같았다. 불꽃이 그의 얼굴에서 흔들리며 죽은 살가죽을 더없이 파리하게 만들었다. 단지 커다랗게 뜬 두 눈 만이 타오르는 불길처럼 이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때요? 안으로 들어가는 게, 사벨리?" 야꼬프가 그에게 허리를 굽히며 은근히 권했다. "왜? 난 좀더 앉아 있고 싶네. 사람들과 이렇게 함께 있을 시간도 내겐 얼마 남지 않았 어..." 그가 힘겹게 대꾸했다. 그는 모두를 둘러보고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파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 다. "여러분들과 함께 있다는 게 여간 기쁘지 않아요. 전 여러분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답니다.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 강탈당한 사람들을 위해서, 탐욕의 희생물로 스러져 간 민 중을 위해서 복수를 해 줄 것이다..." 그에게 대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내 머리를 힘없이 가슴에 떨구고 꾸벅꾸 벅 졸기 시작했다. 르이빈이 잠깐 그를 쳐다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우리들을 찾아와 이렇게 앉아서는 늘 한 가지, 인간에 대한 조롱에 관한 이야 기를 하곤 한답니다. 그 조롱엔 그의 영혼의 전부가 들어 있습니다. 흡사 영혼에 두 눈을 얻어맞아 더 이상 아무것도 볼수 없는 사람처럼." "그 이상 더 무얼 바랄 수 있단 말이오? 수천의 사람들이 매일매일 노동으로 죽어 가고 그 덕택에 주인놈들은 장난 삼아, 즐기려고 돈을 물쓰듯 쓰는데, 또 무슨 할 이야기가 있겠 어요..." 어머니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이제 그런 얘기 듣는 것도 지겨워요, 한번만 들어도 잊어 먹지 않을 이야기를 저 사람은 늘 이야기하니, 그것도 그것 하나에 대해서만!" 이그나뜨가 나지막이 끼어들었다. "그 한 가지에 모든 이치가 압축된 채로 다 들어 있는 거라네, 모든 삶도 그렇고, 기억해 두게나!" 르이빈이 침통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난 그의 운명에 대해서 열 번도 더 들었지만 때론 의문 나는 점이 생기기도 해. 인간이 면 누구나 인간의 추악함, 인간의 용맹을 믿고 싶지 않은, 그래서 모든 사람, 없는 자나 있 는 자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가엾은 그런 때도 있곤 한 거야. 어차피 가진 자도 길을 헤매긴 마찬가질테니까. 한 쪽이 굶주림에 눈을 멀었다면 다른 한 쪽은 황금에 눈이 멀었다는 차이 가 있을 뿐이지. 에흐, 생각해 보라고, 사람이란 다 형제인거야. 기지개를 한번 켜고 솔직 히 생각해 보라고. 자기 자신이라고 봐주지 말고 한번 잘 생각해 보란 말일세." 병자는 몸을 한번 뒤척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야꼬프가 살며 시 자리에서 일어나 움집으로 들어가 털가죽 외투를 가져 와서는 사촌에게 덮어 주고 소피 야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불그스레한 불길의 불꽃은 거친 미소를 지으며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시커먼 모습들을 밝게 비추어 주고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나직한 나무 타는 소리, 그리고 불꽃의 속삭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소피야가 삶의 권리를 찾기 위한 민중의 전세계적 투쟁, 옛날 독일 농민들의 투쟁, 아일 랜드인들의 불행, 그리고 자유를 위한 빈번한 전투에서 이룩한 프랑스 노동자들의 위대한 공훈 따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융단 같은 밤공기로 뒤덮인 숲속에서도, 나무들로 울타리가 쳐지고 새까만 하늘로 덮인 비좁은 빈터에서도, 모닥불의 불꽃 앞에서도, 그리고 잔뜩 적의를 품은 채 놀라 어떨 줄 모 르는 그림자 무리에서도 배부르고 탐욕스러운 자들의 세계를 뒤흔들었던 사건들이 되살아났 고, 온누리의 민중들이 전투에 지쳐 피를 흘리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고일어났으며 자 유와 진리를 위해 몸바친 투사들의 이름이 되새겨지고 있었다. 소피야의 낭랑한 목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치 먼 과거로부터 거슬러 흘러 나오듯 그 목소리는 희망을 일깨우고 확신을 불러일으켜, 모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신적 형제들에 대한 소식에 말없이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여인의 여위고 창백한 낯빛을 바라보았다. 그들 앞에는 전세계 모든 민중들의 성스러운 과업, 즉 자유를 위한 간 단없는 투쟁이 한결 선명하게 비추어졌다. 세계의 민중들은 암울과 피로 얼룩진 장막으로 드리워진 머나먼 과거 속에서, 그리고 전혀 알지 못할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 자신들의 희망 과 사상을 발견하였고, 마음속으로는 이성과 감정으로 세계와 관계하며 그 안에서 친구들을 보았던 것이다. 세계 안의 친구들은 이미 오래 전에 동지애로 결연히 이 세상의 참진리의 쟁취를 위한 결의를 다져 왔고 헤아릴 수조차 없는 고통으로 자신들의 결의를 각인하여 왔 으며, 새롭고 기쁨에 넘치는 삶의 승리를 위해 자신들의 피를 강물이 되도록 쏟았던 바로 그런 동지였다. 모든 이들과의 정신적 유대감이 생성, 발전하였으며, 모두를 이해하고, 모 두를 자신 안에서 하나로 결속하고자 하는 타오르는 듯한 갈망으로 가득 찬 세상의 새로운 가슴들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확신에 찬 소피야의 목소리가 울렸다. "만국의 노동자들이 고개를 쳐들고 <이젠 됐어> 라고 단호히 말할 그날이 다가오고 있어 요. 그럼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삶을 원치 않게 될 겁니다. 그날이 오면 자신들의 탐욕으로 가진 자, 행세를 하던 자들의 헛된 힘은 삽시간에 무너져 내리고 그들의 발 밑에서 땅덩어 리가 뿌리째 흔들려 결국 그들이 발디디고 의지할 곳이라곤 하나도 남아 나지 않게 될겁니 다..." "반드시 그렇게 되고말고! 제 몸을 아껴선 안돼, 그럼 모든 걸 극복하게 될 거야." 르이빈이 고개를 떨구며 맞장구를 쳤다. 어머니가 양미간을 높이 치켜세우고 얼굴엔 기쁨으로 어쩔 줄은 몰라 차라리 경악이라 말 할 수 밖에 없는 웃음을 흘리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머니는 모든 단호하고, 카랑카랑 하며 분방한 기질, 적어도 소피야, 어머니는 모든 단호하고, 카랑카랑하며 분방한 기질, 적 어도 소피야에게는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사라져 그녀가 내뱉는 열렬함면서도 매끄러운 이야기의 급류 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음을 보았다. 밤의 정적, 불꽃 의 장단, 소피야의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도 농부들의 준열한 관심이 마음에 들었다. 그들 은 자기들을 세계와 이어 주는 밝은 실마리를 잡아뜯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이 야기의 고요한 흐름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어쩌 다가 한번씩 누군가가 나뭇가지를 조심스럽게 모닥불에 얹어 놓기도 했고, 모닥불에서 불티 나 연기가 올라올 때면 그것들이 소피야에게로 가지 못하도록 손을 부채 삼아 허공에서 내 젓는게 고작이었다. 한번은 야꼬프가 일어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탁을 했다. "잠깐만 기다렸다가 말씀을 계속해 주세요..." 그리고는 안으로 뛰어 들어가 옷가지를 몇 벌 가지고 나오더니 이그나뜨와 함께 말없이 소피야의 발과 어깨를 감싸 주기도 했다. 소피야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승리의 날을 그리는가 하면,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힘에 대한 믿음을 심어 주기도 하고, 혹은 그들에게 배부른 자들의 바보 같은 장난을 위한 무익한 고역에 일생을 빼앗겨 버린 모든 이들과의 유 대감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소피야가 하는 말들은 어머니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러 나 소피야의 이야기가 불러일으킨 어떤 거대한, 그래서 모든 이들을 포옹하고도 남을 감정 이, 위험을 무릅쓰고 노동의 족쇄로 발목이 묶여 버린 사람들에게로 달려가게 했고, 또 그 들을 위해서 고결한 이성이라는 선물, 진리에 대한 사랑이라는 선물을 가지고 온 사람들에 대한 감사하리만치 간절한 마음으로 어머니의 가슴이 충만되게 했다. (도와주소서, 주여!) 그녀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생각했다. 새벽 어스름, 소피야는 고단한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내 다시 미소를 지으면서 자 기를 둘러싼 진지하면서도 밝게 빛나는 얼굴들을 일일이 둘러보았다. "이젠 그만 떠날 시간이라오." 어머니가 말했다. "시간이 다 됐군요." 소피야는 피로한 기색으로 말을 받았다. 젊은이들 가운데 하나가 요란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르이빈이 평소와는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떠나신다니 섭섭하군요. 좋은 말씀,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거대한 일이 민중들 서로 서로를 한 가족처럼 가깝게 해 줄 겁니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수백만이 바로 그걸 원 하고 있다는 걸 아신다면 마음은 한결 더 선하게 될 것입니다. 선함 속에 바로 거대한 힘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선을 베푸셨으니 필시 복 받으실 거예요." 예핌은 살며시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분들은 떠나셔야만 해요. 미하일 아저씨, 딴사람들 눈에 띄기 전에 말이죠. 우리가 이 책들을 돌리면 당국에선 이 책들의 출처를 캐내려 들 게 아니겠어요? 누구건 기억을 더듬어 만약에라도 여기에 이상한 사람들이 왔네 마네 하고 떠들기라도 하는 날이면..." "저,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친히 이런 어려운 일을 다 하시고!" 르이빈이 예핌의 이야기를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전 당신을 볼때마다 빠벨 생각을 한답니다. 지금 가시는 이 길은 너무나도 훌륭하신 길 입니다." 한결 마음이 진정된 그의 얼굴에선 웃음이 피었다. 너무도 선한 웃음이었다. 공기나 꽤나 찼지만 그는 셔츠 하나만 달랑 입고 더구나 윗단추를 풀어헤쳐 가슴을 온통 드러낸 채 있었 다. 어머니는 그의 당당한 풍채를 보고 다정스레 충고를 해 주었다. "뭘 좀 걸치지 그러시오, 날도 쌀쌀한데!" "안은 불덩이 같은 걸요." 그가 대꾸했다. 젊은이 셋은 모닥불 가에 서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들의 발 옆에는 털가 죽 외투로 몸을 감싼 병자가 누워 있었다. 하늘이 밝아짐에 따라 밤그림자도 더불어 사위어 갔으며 나뭇잎들이 태양을 기다리며 떨 고 있었다. "자, 이젠 작별의 순간이 온 것 같습니다. 뵙고 싶으면 시내에 가서 어떻게 찾으면 될까 요?" 르이빈이 소피야의 손을 거머쥐며 말했다. "우선 날 찾으시구려!" 어머니가 말했다. 젊은이들이 천천히 무더기로 소피야에게 다가가서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서투르 긴 해도 다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너나할것없이 감사하는, 다정한 만족감을 숨기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는데, 아마도 이제껏 접해 보지 못한 어떤 새로움에 굉장히 당혹스러워하는 게 분명했다. 밤잠을 못 잔 탓에 퀭한 두 눈에 미소를 머금고서 그들은 말없이 소피야의 얼 굴을 쳐다보았다. 두 발을 연신 바꾸어 디디는 폼이 무언가를 주저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 다. "가실 땐 가시더라도 뭐 좀 드시지 않겠어요?" 야꼬프가 물었다. "남은 게 좀 있을까?" 예핌이 말했다. 이그나뜨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없어, 내가 아까 그걸 몽땅 엎질렀거든..." 셋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우유에 대해서였지만, 어머니는, 그들이 말은 하지 않지만 소피야 그녀에게 좋은, 훌륭한 어떤 것을 안겨 주려고 딴생각들을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 었다. 이에 감동한 소피야는 당혹감과 어색함, 그리고 수줍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결 국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 한마디밖에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동지들!" 그들은 서로 눈길을 교환했는데, 이 한마디 말에 적잖이 동요되는 눈치였다. 병자의 둔탁한 기침소리가 들렸다. 장작더미의 타다 남은 불길마저 꺼져 버렸다. "안녕히 가십시오." 농부들이 속삭이듯 작별인사를 했다. 구슬픈 작별의 말이 여인들의 귓전에 오래도록 울렸 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여명의 숲길을 따라 걸었다. 어머니가 소피야의 뒤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 "모든 것이 훌륭해, 마치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랄까. 정말 좋아! 사람들은 진리를 알고자 한다오, 소피야. 그들은 바라고 있단 말이오. 꼭 휴일 이른 새벽 교회에 와 있는 것 같구 려... 신부도 아직 오지 않고 사방은 어둡고 조용해, 사원 안은 왠지 모르게 섬뜩하기도 하 지만, 사람들은 벌써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지... 성상 앞엔 촛불이 켜지고 등불마저 켜져 차츰차츰 어둠을 몰아내고 있지. 교회를 밝게 비추면서." "그렇다마다요! 다만 여기서 교회란 세상 전부를 말함이지요." 소피야가 기쁜 마음으로 대꾸했다. "세상 전부라!" 어머니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되풀이했다. "그 말 참 근사하군, 믿기는 좀 어렵지만... 하여튼 당신이 하는 얘기는 모두 멋있구려. 정말 근사해. 난 말을 별로 잘하지 못하니, 내 말을 듣노라면 답답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거요..." 소피야는 잠시 말이 없다가, 나직막한 목소리로 아쉬운 듯 대답했다. "그들에게 좀더 솔직했어야 하는 건데..." 그들은 길을 걸으며 르이빈과 병자에 대해서, 그리고 소심한 탓인지 말도 없고 매사에 서 투르면서도 여인들에 대해서 세심한 배려로 고마운 우정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해 주었던 젊 은이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탁 트인 들판에 들어서자 맨 먼저 떠오르는 태양이 그들을 맞아 주었다. 아직 보이지는 않았지만 태양은 이미 하늘에 투명한 부채살 모양의 장미빛 햇 살을 펼치고 있었고,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들은 활기 넘치는 봄의 기쁨을 알리는 갖가지 색 깔의 불꽃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새들도 갓 잠에서 깨어나 즐거운 지저귐으로 아침에 청신 한 봄기운을 마구 불어넣고 있었다. 살찐 까마귀떼가 까악까악 분주히 울며 굼뜬 날개짓을 해대면서 날아올랐고 어디선가 꾀꼬리들의 구성진 울음소리가 들렸다. 먼동이 터 오며 밤그 림자가 언덕 너머로 사라지고 태양을 맞았다.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말이 많은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몇 마디의 쉬운 말로 다른 사람을 이해시킬 수 있는 경우지요. 바로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게 명백해진다오." 어머니가 생각에 잠겨 이야기를 꺼냈다. "이를테면 그 병자가 바로 그런 경우랄 수 있어요. 나는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공장, 아니 그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 있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착취당하고 있는지를 비로소 알 수 있었 어요.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 있어서인지 그걸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 는 것 같습디다. 그런데 그가 불쑥 그런 비굴한 삶을 돌아보게 했지요. 세상에나! 어찌 평 생 죽도록 일만 할 수 있겠소? 그것도 주인들이 제 자신을 조롱거리로 만드는 것을 그대로 보아 넘기면서 말이오. 그건 정말 당치도 않은 소리요." 어머니의 생각은 어떤 한 사건에까지 미쳤는데, 그 사건은 어렴풋하나, 날카로운 섬광으 로 언젠가 알기는 했었지만 곧바로 잊혀진 일련의 비슷한 사실들에 대해서 어머니를 일깨웠 다. "분명한 건, 그자들은 이미 모든 걸 배불리 처먹었고, 이젠 정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는 거요. 어떤 지방관리 하나를 내가 아는데 그자는 말을 타고 시골길을 걸어가면서 농부들 에게 말한테 인사를 하라고 강요했어요. 그리고 인사를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그 자리서 체포했다오. 도대체 그럴 필요가 뭐가 있느냐 말이오? 이해할래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막힌 일이지." 소피야는 나지막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침처럼 활기 넘치는 노래를... 7... 닐로브나의 생활은 이상스러울 만큼 평온하게 흘러갔다. 그녀는 간혹 그런 평온함에 화들 짝 놀라기도 했다. 아들은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었고, 그녀는 무거운 형벌이 그를 기다리 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매번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의지와는 무관하게 안드레이, 페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아들의 얼굴은 모든 사람들을 자기의 운명 과 동일한 운명 속으로 흡수하면서 그녀의 두 눈에 확대되어 나타나서는 어느새 본능적으로 빠벨에 대한 근심을 증대시키고, 한편으론 모든 방면으로 퍼뜨리며 관조적인 감정을 불러일 으키는 것이었다. 그 근심들은 가늘고 불규칙적인 광선과도 같이 여기저기로 퍼져 어느 것 하나 그대로 놓아 두지 않고 다 건드리며 죄다 밝게 비추고 하나의 광경으로 모으느라 바삐 뛰어다녀서는 그녀가 어떤 하나의 생각에 몰두하는 것을 방해할 뿐 아니라 철저하게 아들에 대한 근심과 공포의 감정이 하나로 결합되는 것 또한 방해하였다. 소피야는 곧바로 어딘가로 길을 떠났다가는 약 닷새가 지나서 쾌활하고 생기발랄한 모습 으로 돌아왔지만, 다시 얼마 안 있어 사라져서는 두 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마치 그녀는 간혹 니꼴라이를 엿보면서 동생의 집을 자신의 활달함과 소란으로 채우기 위해 넓은 원을 그으며 삶을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녀가 피우는 소란은 어머니에게도 이해되기 시작했다. 소란에 귀를 기울이면서 어머니 는 따뜻한 물결이 그녀의 가슴에 와 부딪치고 심장 속으로 녹아 드는 걸 느꼈다. 또한 심장 이 고르게 고동치고, 흡사 충분히 비를 맞아 축축하고 깊게 개간된 대지의 알곡처럼 심장 안에선 근심의 물결이 빠르고 활달하게 굽이치고 소리의 힘에 의해 일깨워진 여러 말들이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기분에 감싸이기도 했다. 어머니에게는 소피야의 단정치 못함을 참고 견디기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소피야는 여 기저기에 작의 물건들, 담배꽁초, 재를 어지럽게 늘어놓았고 게다가 그녀의 자유분방한 말 투엔 정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니꼴라이의 태연한 확신, 예의 그가 하 는 말의 온화한 심각성과 더불어 지나칠 정도의 언짢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소피야는 흡 사, 자신을 성인으로 사칭하려 안달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난감을 쳐다보는 소 녀 같았다. 그녀는 노동의 신성함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단정치 못한 성격으 로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잡일에 대한 부담을 한껏 지워 주었고, 자유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 서도 너무나 강한 신경질적인 성격, 논쟁으로 어머니도 알아챌 정도로 모든 사람을 압박했 다. 논쟁을 하다 보면 많은 모순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것을 보고 조심 성을 갖고 바짝 긴장해서, 남 모르는 주의를 기울여 그녀를 대할 수 밖에 없었다. 니꼴라이 가 은근히 일깨워 주는 가슴 속의 한없는 따뜻함과는 대조적이었다. 항상 근심스런 표정의 그는 매일매일 단조로우면서도 유유한 생활을 이어 나갔다. 아침 여덟 시면 그는 늘 차를 마시고, 신문을 읽어 내려가면서 새로운 소식들을 어머니에게 들려 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어떻게 삶의 거대한 기계뭉치가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갈아서 돈을 만들어 내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게 되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안드레이와의 어떤 고통점을 느꼈다. 우끄라이나인처럼 그도 모든 걸 역한 삶의 구조 탓으로 돌리면서 그 들에 대해서 악의 없이 이야기하곤 했지만 그에게 있어서 새로운 삶에 대한 믿음은 안드레 이의 경우처럼 그렇게 열렬하지도 명백하지도 않았다. 그는 항상 청렴결백하면서 준열한 심 판관의 목소리로 조용조용 말을 했고 심지어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할 때에도, 비록 조용히 유감의 미소를 지었지만 두 눈만은 차갑고 결연하게 빛났다. 두 눈에서 빛나는 광채를 보면 서 어머니는, 이 사람은 어느 누구도, 어떤 일도 용서하지 않고 또 용서할 수도 없다는 걸 이해했다. 또한 그러한 결연함이 고통스러울 것임을 느끼자 니꼴라이가 한없이 가련한 생각 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아홉시에 그는 출근을 했다. 어머니는 방들을 청소하고 점심을 준비하고 세수를 한 다음,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자기 방에 들어앉아 이책 저책을 뒤적거리며 여러 그림들을 자세 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이미 책을 읽을 줄 알게 되었지만, 항상 지나친 긴장을 해서인지 조금만 읽다보면 금방 지치고 문맥을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림을 들여다보는 일 은 그녀를 사로잡아 그때만큼은 마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림들은 그녀 앞에 새롭 고 경이로운 세계, 그러면서도 이해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세계를 펼쳐 보였다. 거대한 도시들, 아름다운 건물, 자동차, 선박, 기념비, 인간이 창조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귀, 그리고 깜짝 놀랄 정도로 다양한 자연의 창조물들이 나타났다. 매일매일 눈앞에 거대하고 익히 본 적도 없고 경이로운 그 무엇을 펼쳐 내 보이며 삶은 끝없이 확장되어 나갔고, 한결 강력하게 자원의 풍부함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름다움으로, 갓 깨어난 굶주린 여인의 영 혼을 자극했다. 그녀는 특히 이절판 대형 동물그림책 보기를 좋아했다. 그책은 비록 외국어 로 쓰여 있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대지의 아름다움, 풍요로움, 그리고 광활함에 대한 한결 선명한 지식을 제공해 주었다. "대지는 정말 굉장해!" 그녀가 니꼴라이에게 말했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황홀케 한 것은 곤충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나비였다. 그녀는 너무도 놀란 눈으로 나비를 묘사한 그림들을 들여다보고는 따지듯 물었다. "얼마나 아름다워, 니꼴라이 이바노비치, 안 그러오? 가는 곳마다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 이 그 황홀함을 뽐내고 있나 말이오. 하지만 모든 것이 우리들로부터 차단되어 있고 곁을 뽐내고 있나 말이오. 하지만 모든 것이 우리들로부터 차단되어 있고 곁을 스쳐 날아가되 눈 에는 보이질 않아요. 사람들은 그저 허우적거릴 뿐, 아는 것 하나 없고 어느 것에도 도취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할 시간도, 욕망도 없어요. 대지가 얼마나 풍요로운지 얼마나 많은 경이로움이 그 대지 안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를 사람들이 안다면, 얼마나 큰 기쁨을 얻 게 될까! 모든 건 모두를 위해서, 하나하나 또한 전체를 위해서, 안 그러오?" "물론이지요." 니꼴라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그림책 하나를 더 가져 왔다. 저녁마다 그의 집은 손님들로 들끓었다. 알렉세이 바실리예비치는 창백한 얼굴에 검은 턱 수염을 기른 고결한 농부로 믿음직스럽고 게다가 말수도 적었다. 로만 빼뜨로비치는 부스럼 투성이의 동그란 머리의 소유자로 늘 무엇이 그리도 유감인지 입술을 올려 고리를 내는 친 구였다. 또 이반 다닐로비치는 작은 키, 왜소한 체격에 뾰족한 턱수염을 기른데다 목소리마 저도 가늘고 높았으며, 성격 또한 걸핏하면 화나 내고 야단스러웠으며 송곳처럼 날카로웠 다. 그리고 항시 자기 자신, 동지들, 그리고 점점 나빠만 가는 자기의 병에 대해서 농담을 즐기는 이고르가 있었다. 간혹 먼 도시들에서 찾아오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곤 했다. 니꼴라이는 그들과 장시간에 걸친 평온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언제나 하나의 주제, 세계의 노동자들에 대해서였다. 논쟁을 하다 보면 서로 열이 올라 손을 내젓기도 하고 몇 잔의 차 를 연거푸 마시기도 했다. 가끔 니꼴라이는 그 시끄러운 와중에도 그 안에서 이야기되는 내 용을 기초로 해서 성명서를 작성해서는 동지들에게 읽어 주고 그 자리에서 인쇄체 글자로 옮겨 적었다.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찢겨진 초고 뭉치들을 주워 모아 소각시켰다. 그녀는 모 인이 있을 때면 차 끓이는 일을 주로 맡았는데, 모인 사람들의 열렬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삶과 운명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에게 진실에 대한 사상 의 씨를 뿌리고 그들의 정신을 궐기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 아주 열띤 논쟁을 벌였다. 자 주 그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서로 의견차이를 보이다가는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서로를 책망하기도, 모욕하기도 했지만, 이내 또다시 주제로 돌아가 열띤 논쟁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자기가 이 사람들보다 노동자의 삶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이 자신들 의 것이라고 여기는 과제의 중대성을 한결 더 명백히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어떤 때는, 남녀관계의 극적인 면을 이해조차 못하면서 신랑신부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들을 대하는 어른처럼, 관대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서글픈 감정으로 모든 사람들을 대하기도 했 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말과 이전의 아들의 말, 그리고 안드레이의 말을 비교하 기도 했는데, 그럴때면 어떤 차이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엔 그것이 이해되지 않 았다. 간혹 그녀는 여기서 외쳐지고 있는 말들이 공장촌에서의 그것들보다 훨씬 더 힘이 있 다는 걸 느끼면서 자신에게 가만히 속삭이는 것이었다. (많이 알면 알수록 목소리가 커지는 법이지...) 그러나 그녀는 지나치리만치 자주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 전부가 망치 고의로 그러하듯 서로를 흥분시키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열을 내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실제로 예외 없이 누구나 자기의 말이 다른 사람의 말보다 진리에 가깝고 가치 있다는 것을 동지들에게 증명 해 보이기를 원했고, 이 점에 대해서 설혹 남이 비난하기라도 하면 거꾸로 진실에의 접근을 증명해 보이려 애쓰며 더욱더 날카롭고 끈덕지게 논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어머니에겐 개개 인이 남들보다 더 높이 뛰어오르고 싶어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근심스러운 슬픔이 움틋움틋 솟아나는 것이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간 청하는 듯한 눈길로 모두를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모두 빠샤나 동지들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어...) 항상 잔뜩 긴장된 상태에서 논쟁에 귀를 기울이면서 어머니는, 비록 다 이해할 수는 없다 지만, 말들 뒤에 숨겨져 있는 감정을 포착하려 애썼고, 일찍이 공장촌에선 선에 대해서 이 야기할 때 그것을 뭉뚱그려 전체적으로 다루는 데 반해, 여기서는 모든 것이 조각조각 찢겨 지고 잘게 부서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선 사람들의 감정이 한결 깊고 강렬했다면 여기는 모든 걸 잘게 부수는 예리한 사고가 통하는 곳이었다. 또 여기서는 대부분 옛것의 파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반해, 거기선 사람들이 새로운 것에 대한 꿈만을 꿀 뿐이어서 이 때문에 아들과 안드레이의 말이 그녀에겐 더 친근감 있고 이해도 잘되었다. 그녀는 니꼴라이를 찾아오는 사람이 그 누구든 노동자이기만 하면, 니꼴라이가 보통 때완 달리, 대하는 데 있어 전혀 거리낌이 없어지고 얼굴엔 어떤 유쾌함이 엿보이며 말을 할 때 에도 평소와는 딴판으로 나그나근해지고 큰 관심을 The는다는 걸 눈치챘다. (남을 이해하려고 무던 애쓰는구나!) 어머니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 때문에 어머니의 비애감이 덜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손님으로 찾아온 노동자도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잔뜩 긴장한 채, 그녀나 평범한 여인과 이야기를 나 눌 때처럼 그렇게 싹싹하면서도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못함을 보았다. 언젠가 한 번은 니꼴라이가 외출을 하고 집에 없을 때 그녀가 어떤 젊은이에게 말했다. "젊은인 뭣 때문에 그리 주눅이 들어 있는가? 차 들어요, 어린아이가 시험 치는 것도 아 닌데..." 그러자 그 젊은이가 씩 웃었다. "어색하기도 하고 또 중요한 건 제 분수를 아는 거 아니겠어요? 어쨌든 그분은 우리하곤 다른 분이세요..." 가끔 사샤도 찾아왔는데, 한번도 오래 머무르는 적이 없었고, 항상 웃지도 않고 사무적으 로 이야기를 했으며 매번 떠날 때가 되면 어머니에게 이런 물음을 던졌다. "빠벨 미하일로비치는 어때요, 건강하죠?" "덕택에! 아무 일 없어, 기운도 좋아 보이고." "그 사람한테 안부 전해 주세요." 처녀는 이런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한번은 어머니가, 빠벨이 너무 오래 잡혀 있고 또 재판이 자꾸 미루어지기만 한다고 하면 서 그녀에게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사샤는 얼굴을 찡그리고 말없이 손가락만 꼼지 락거렸다. "오, 불쌍한 것! 난 네가 빠벨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안단다..." 그러나 어머니는 처녀의 심각한 얼굴, 꽉 다문 입술, 그리고 흡사 사전에 친절을 사양하 겠다는 듯한 냉랭하고 사무적인 말 때문에 한마디의 말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한숨을 내 쉬고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내민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가엾은 것...) 한번은 나따샤가 찾아왔다. 그녀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무엇이 그리도 반가운지 키스를 하 고는 다짜고짜 묻지도 않는 말을 꺼냈다.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셨답니다, 불쌍하신 어머니가..."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재빨리 눈물을 훔치곤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불쌍해 죽겠어요. 이젠 쉰도 안된 나이에 벌써 가시다니. 아직도 사실 날이 창 창한데...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사시느니 차라리 돌아가시는 데 더 나 아요, 항상 어머니는 혼자였어요. 모두에게 외면만 당하시고, 어느 누구에게도 쓸모 없는 분이셨고, 아버지의 호통에 놀라기만 하셨는데, 그걸 보고 어찌 산다고 할 수 있겠어요? 사 람이란 그래도 뭔가 기대할 만한 좋은 일이 있어야만 산다고 할 수 있는 건데, 어머니가 기 대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어요. 모욕 말고는..." 생각에 잠겨 있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말이 옳아, 나따샤! 사람이란 뭔가 좋은 걸 기대하며 살게 마련인데, 기대할 게 없다면 그게 어디 삶이야?" 그리고는 처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아가씨 혼자뿐이로군?" "그래요." 나따샤가 힘없이 대꾸했다. 어머니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불쑥 웃으며 말했다. "너무 상심 말아요. 선량한 사람은 혼자 살지 않아. 주위에 항상 사람들이 모여드는 법이 거든..." 8... 나따샤는 방직공장 부속학교에 교사로 취직을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녀에게 금서, 성 명서, 신문 따위를 공급해 주었다. 이런 일이 바로 그녀의 일이었다. 한 달에도 몇 차례씩 그녀는 수녀, 레이스와 손으로 짠 베천을 뒤집어 쓴 행상아낙, 부자집 마나님, 혹은 순례하는 여행자로 변장하고서 등에는 가 바을 짊어지고 양손에는 손가방을 들고 이 지방 저 지방을 분주히도 돌아다녔다. 기차안에 서건 배안에서건, 여관에서건, 싸구려 여인숙에서건 구별 없이 어디에서나 그녀는 소박하면 서도 침착하게 처신을 했기 때문에 아무리 생면부지의 사라이라도 그녀와 일단 이야기를 나 누다 보면 그녀의 상냥하면서도 붙임성 있는 말, 그리고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 그러는 듯한 신뢰할 만한 태도에 아무 거리낌없이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인생, 불의, 그리고 의혹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매번 어느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신랄한 불만을 포착할 때마다 그녀의 가슴 은 기쁨으로 사정없이 설레었다. 그 분말이란 구차한 운명에 저항하면서 이미 기억에 새겨 둔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절실히 갈구하는 그런 불만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눈앞에는 인간 의 삶, 그것도 배부름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번거로우면서도 불안한 삶의 광경이 점점 더 광범위하고 다채롭게 펼쳐지는 것이었다. 어디를 가나 인간을 속이고, 무언가를 우려 내고, 저만을 위해 더욱 많은 것을 착취하고, 피를 빨아먹고자 하는 지독히 적나라하고 파렴치할 정도로 노골적인 욕망이 명백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는, 이 세상엔 없는 것이 없 다지만 항상 궁핍하고, 그저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재물의 주변에서 죽지 않을 정도로 배를 채우며 사는 민중들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도시들마다 정작 하느님에겐 하등 쓸모도 없는 금은보화로 가득한 사원들도 많이 세워져 있는 반면에, 바로 그 입구에는 동전 한닢이 라도 어떻게 손에 쥐어 볼 수 없을까 고대하며 벌벌 떨고 있는 거지들이 바글바글했다. 전 에도 그녀는 그러한 것, 이를테면 돈많은 교회들, 금실로 바느질한 사제복, 그런가 하면 구 차한 민중들의 판잣집이나 웃음거리밖에는 안되는 누더기 옷들을 보아왔지만, 그때는 그것 이 당연하게 생각되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것이 구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결 코 화해할 수 없는 모욕적인 일이며, 교회 또한 있는 자들에게보다는 없는 자들에게 더 가 깝고 필요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묘사한 그림을 보아도, 그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아도 그는 가난한 사람들 의 친구로 옷도 검소하게 차려 입었음을 알 수 있는데도 빈민이 마음의 위안을 받기 위해 찾는 교회에 가 보면 그리스도는 빈민의 눈에는 혐오스러우리만치 사치스럽게 보이는 금과 실크로 온몸을 두르고 있는 게 지금의 실정임을 또한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르이빈의 말을 떠올렸다. "놈들은 하느님마저 우리를 속이는 데 써먹고 있어." 그녀는 어느덧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를 많이 하지 않게 된 반면 그리스도와 민중들 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민중들은 심지어 그리스도를 알고 있지도 않다는 듯 그의 이름조차도 입에 올리지 않으면서 그의 유훈에 따라 삶을 살아 가며, 그리스도나 마찬가지로 세상을 가난한 이들의 왕국으로 여기면서 이 세상 모든 재물 을 사람들에게 똑같이 분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해서인지 그녀의 마음속에선 이런 생각이 더욱 성숙하였고, 그녀 자신 또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에 몰두하고 가슴으로 감싸안음으로 해서 더욱 성숙하여 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의 얼굴은 암흑의 세상, 모든 삶,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고른 등불로 비추어 주는 찬란한 기도 의 얼굴색을 띠어만 갔다. 그리고 그녀가 항상 불명료한 사랑으로 대했던 그리스도 자신도 -- 그런데 또한 그 사랑은 복잡한 감정으로, 그 안의 두려움은 희망과, 감동은 비애와 밀접 히 연관되어 있었다 -- 이제는 그녀에게 있어선 한결 가까운 영 다른 의미로 와 닿았으니, 그리스도가 더 높고 훌륭하며 그 얼굴엔 더 기쁘고 밝은 미소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실제 로 그는 삶을 위해 부활했고, 뜨거운 피로 물들었다지만 또 그 피로 인해 되살아 났다. 사 람들은 그 피를 그리스도의 이름에 무자비하게도 쏟아 부었던 것이다. 불행한 친구의 순결 한 이름을 큰소리로 한 번 불러 보지도 못하면서, 여행을 마치고 니꼴라이에게로 돌아올 때 면, 그녀는 언제나 길을 걸으며 보고 들은 것으로 뭔가 깨어나고 있는 듯한 흥분에 싸여 어 찌할 바를 몰랐고 완수한 과업에 대한 용기와 만족감으로 충만되곤 했다. 그녀는 저녁때마다 니꼴라이게 말했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많은 일들을 본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라오. 당신은 세상살이 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을 거요. 민중들은 삼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내동 댕이쳐져 그 곳에서 심한 모욕을 감수하며 우글거리며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바람 도 없이 그저 이런 질문만을 계속 던지고 있어요. 무엇 때문에? 왜 나를 멀리 몰아내는 거 야? 세상엔 없는 것 없이 많은데 왜 나만 유독 굶주려 있담? 그리고 세상엔 똑똑한 사람이 도처에 깔렸는데 왜 나만 유독 바보에다 까막눈일까? 그래, 그럼 그분, 자비로운 하느님은 어디 계신 거야? 부자니 거지니 하는 차별도 없고 모두가 어린 양이며 모두가 사랑스런 아 들이 되게 하시는 그분은. 민중은 조금씩 자기의 삶에 반기를 들고 있어요. 제 앞가림 제가 하지 않으면 불의에 목을 졸리고 말 것임을 느끼기 시작한 거라오." 그녀는 점점 더 자주 자신의 언어로 삶의 불공평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때로는 이러한 충동을 그냥 삭인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니꼴라이는 그림책에 정신을 온통 빼앗기고 있는 그녀를 볼 때면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뭔가 경이로운 것을 이야기해 주곤 했다. 그러면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깜짝 놀란 그녀는 의심이 간다는 투로 니꼴라이에게 묻는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이지?" 그러면 그는 자기 예언의 진리에 대한 굽힐 줄 모르는 확신을 가지고 불굴의 의지로, 그 녀의 얼굴을 안경 너머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랑의 욕망이란 측정할 수 없고, 그 능력 또한 끝이 없답니다. 하지만 세계는 아직도 인간의 영혼을 살찌우는 일에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 어느 누구 나 예속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바람은 갖고 있으면서도 지식이 아니라 돈을 모 으는 데만 눈이 뻘게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민중들이 탐욕을 압살하는 날, 그들이 강제 노동의 쇠사슬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그날은 오고 말 것입니다..." 그녀는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전적으로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의미에 활기 를 불어넣어 주는 평온한 믿음의 감정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선명하게 그녀의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이 세상엔 해방된 민중이 너무 적어요. 그게 바로 이땅의 불행이랍니다." 그가 말했다. 그 말을 어머니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탐욕과 악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킨 사람들 을 익히 알고 있었고, 만약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어둡고 무서운 삶의 얼굴은 한결 더 상냥해지고 소백해져 결국엔 선하고 밝은 얼굴이 될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잔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니꼴라이가 우울하게 말했다. 그녀는 우끄라이나인의 말을 떠올리며 수긍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9... 하루는, 시간에 있어서는 항시 일 초의 오차도 없는 니꼴라이가 훨씬 늦은 시간에 직장에 서 돌아와 씻지도 않고 조금은 흥분된 어조로 두 손을 비비며 다급하게 말했다. "혹 소문을 들으셨어요, 닐로브나? 오늘 우리 동지 가운데 하나가 탈옥을 했다는군요. 그 런데 그게 누군지는 알아내지 못했어요..." 어머니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꼈다. 흥분에 사로잡혀 속삭이듯 물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설마 빠샤는 아니겠지?" 니꼴라이가 어깨를 움츠리며 대꾸했다. "장담할 수야 없죠. 하지만 그가 숨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를 어디서 찾느냐 하는 것도 또한 문제지요. 전 지금 이거리 저 거리를 헤매다 오는 길입니다. 혹시나 그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가만있을 수야 없는 일 아니겠어요? 그래서 지금 또 나가 보려고 해요..." "나도 가겠소!" 어머니가 소리쳤다. "어머님은 이고르한테 가 보세요. 그 사람이라면 뭔가 들은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니꼴라이가 서둘러 집을 빠져 나가면서 제안했다. 그녀는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기대감에 사로잡혀 그의 뒤를 따라서 서둘러 거리로 빠져 나갔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흡사 그녀에게 걷지 말고 달리라고 강요하 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한 줄기 가능성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도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빠샤가 있는 곳으로 난 가야만 해!) 아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언뜻언뜻 그녀를 설레게 했다. 무더운 날씨였다. 그녀는 너무나 힘이 들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고르 집 현관에 이르렀을 때는 더 이상 걸을 힘조차 없어 그냥 그 자리에 서 버렸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눈 을 뜨는 순간 깜짝 놀라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문 앞에 니꼴라이 베소프쉬꼬프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서 있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정신을 차려 쳐다 보니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분명 있었는데!" 그녀는 웅얼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마당 저편에서 천천 히 발걸음을 옮겨 놓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 문 앞에 선 채로 그녀는 허리를 구부려서 아래 응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다시 그녀에게 웃음짓고 있는 마마자국투성이의 얼굴이 보이는 게 안니가! "니꼴라이, 니꼴라이..." 그녀는 그를 보곤 실망감으로 가슴이 아파 왔다. "그냥 올라가세요, 올라가요." 그가 손을 내저으며 나지막이 대꾸했다. 그녀는 재빨리 계단을 뛰어올라 이고르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파에 누워 있는 그 를 발견하고 숨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니꼴라이가 도망쳤어..., 감옥에서..." "어떤 니꼴라이 말씀이세요? 니꼴라이가 둘이나 있으니..." 이고르가 베개에서 고개를 들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베소프쉬꼬프가... 이리오 오고 있어요." "기적이로군요." 그는 벌써 방안에 들어와 방 문을 잠그고 모자를 벗은 다음, 잔잔하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넘기고 있었다. 이고르가 팔꿈치를 소파에 기댄 채 몸을 일으키고는 고개를 흔들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빙긋 웃으며 베소프쉬꼬프는 어머니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어머님을 보지 못했더라면 다시 감옥으로 갈 뻔했어요. 시내엔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고 해서 공장촌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랬더라면 지금쯤 붙들렸을 거예요. 여기저기를 돌아 다니다 보니 괜히 바보 같은 짓을 했다 싶더군요. 도대체 뭐 하러 도망쳤나 하고요. 그런데 갑자기 어머님이 뛰어가시는 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님 뒤를 줄곧 따라왔지요..." "어떻게 도망친 거야?" 어머니가 물었다. 그는 겸연쩍은지 소파 한 귀퉁이에 걸터앉아 당혹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문을 열었 다. "뜻밖에 기회가 왔어요. 산책을 하고 있는데, 죄수들이 간수를 두들겨 패기 사작하더군 요. 그때 거기엔 그 놈 혼자였는데, 워낙은 헌병 출신으로 공금을 착복했다가 걸려 쫓겨 난 다음에는 첩자노릇도 하고 밀고도 하고, 하여튼 그 놈한테 걸려서 온전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대요. 죄수들이 그 놈을 팬다 어쩐다 한바탕 소란이 일자 다른 간수들이 깜짝 놀라 마 구 뛰어오고 호각을 불고 난리였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문이 열려 있고 멀리 들판과 시내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래서 걷기 시작했죠. 서두르지도 않고...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았어요. 얼마를 정신없이 걷다 정신이 들어서는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 았죠. 뒤를 돌아보니 감옥문은 벌써 닫혀 있었어요..." "흠!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 정중하게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할 걸 그랬 군. 죄송합니다, 내가 잠깐 정신을 딴데 팔다 보니 그만..." 이고르가 말했다. "그래요." 베소프쉬꼬프가 웃으며 계속했다. "그것 또한 바보 같은 짓이에요. 무엇보다도 동지들한테 좋은 일은 못되겠죠. 난 아무에 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걸었죠. 걷다 보니 어린아이의 장례행렬이 보이더 군요. 관의 뒤를 따랐어요, 아무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숙인채. 묘지 위에 앉아서 맑 은 공기를 쐬다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어요..." "한 가지 생각?" 이고르는 이렇게 묻고 한숨을 쉰 다음 덧붙였다. "내 생각엔, 고작 상쾌하다는 생각뿐이었을 것 같은데..." 베소프쉬꼬프가 머리를 흔들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 머리는 전처럼 그렇게 텅 비어 있지 않아요. 그건 그렇고, 이고르 이 바노비치, 안색이 아주 나빠 보이는군요..." "누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그만인 거야. 계속하게나!" 이고르가 심하게 기침을 하며 대꾸했다. "그 다음엔 지방 박물관으로 갔어요. 거기서 계속 서성거리며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결 국엔 이런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죠. <아. 이제 어디로 간담?>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해서 화 가 치밀기도 했답니다. 게다가 배는 얼마나 고프던지! 다시 거리로 나와 하염없이 걷는데, 정말 그렇게 지긋지긋한 경우는 다신 없을 거예요..., 보니까 경찰들이 모든 사람들을 샅샅 이 조사하더군요. 이제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내 쪽으로 뛰어 오시는 게 보이지 않겠어요? 그래 살짝 몸을 숨겼다가 줄곧 뒤를 따랐던 거예요. 이게 전부 예요." "그런데도 난 전혀 몰랐는 걸!" 어머니가 죄지은 사람처럼 말했다. 그녀는 베소프쉬꼬프를 유심히 살폈다. 그가 예전보다 한결 싹싹해 보였다. "아마 동지들은 내 걱정을 하고 있을 거예요..." 머리를 긁적이며 베소프쉬꼬프가 말했다. "하지만 간수들도 불쌍하지 않은가? 모르긴 몰라도 그들 역시 자네 걱정 꽤나 할 걸세." 이고르가 끼어들었다. 그는 입을 열고 마치 공기를 씹기라도 하듯 그렇게 입술을 움직거 리기 시작했다. "이제 농담은 집어 치우기로 하고, 자네를 숨겨야겠는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이겠지만 쉬 운 일은 결코 아니야. 내가 몸이라도 좀 성하면 어떻게..." 그는 긴 한숨을 몰아 쉰 다음, 두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 가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 다. "심하게 앓고 계시는군요, 이고르 이바노비치!" 베소프쉬꼬프가 이렇게 말하곤 고개를 떨구었다.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고 떨리는 마음으 로 작고 비좁은 방을 둘러보았다. 이고르가 대꾸했다. "이건 내 개인적인 문제야. 어머님, 빠벨에 대해서도 물어 보세요, 어려워하실 필요가 뭐 있습니까?" 베소프쉬꼬프의 얼굴 가득 웃음이 피었다. "빠벨은 건강하게 아주 잘 있어요. 거기선 우리들 가운데 제일 윗사람이나 마찬가지랍니 다. 도맡아서 간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거의 아랫사람에게 명령하듯 한답니다. 그래서 모두들 존경하지요..." 어머니는 베소프쉬꼬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또 연신 곁눈질로 퉁퉁 붓 고 파리한 이고르의 얼굴을 살폈다. 굳어 무표정해진 얼굴이 이상스레 납작해 보였는데, 유 독 두 눈만 살아 유쾌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먹을 것 좀 갖다 주시겠어요? 정말 배가 고파 죽을 지경예요." 베소프쉬꼬프가 갑자기 소리쳤다. "어머님, 선반 위에 빵이 있고요, 복도로 나가시면 왼쪽으로 두 번째 문이 보일 거예요, 그 문을 두드리도록 하세요. 여자가 문을 열거 주거든, 이고르가 시켜서 왔는데 가진 음식 있거든 죄다 가져 오란다고 말씀하세요." "왜요? 왜 전부 다예요?" 베소프쉬꼬프가 그럴 필요 없다는 투로 끼어들었다. "신경 쓸 것 없어. 많지도 않을 걸 뭐..." 어머니가 복도로 나가 문을 두드리고 뒤따르는 정적에 귀를 기울이며 슬픈 마음으로 이고 르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죽어 가고 있어...) "누구세요?" 문 안쪽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이고르 이바노비치가 보내서 왔는데요. 부탁이 있습니다만..." 어머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 나가지요." 문은 열리지 않고 대답소리만 들렸다. 그녀는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러 자 문이 홱 열리고 키가 크고 안경을 낀 부인이 복도로 나왔다. 구겨진 윗도리 소매를 급히 여미며 그녀가 거친 목소리로 어머니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죠?" "전 이고르 이바노비치가 보내서 온 사람입니다만..." "아, 네, 어서오세요. 오, 맞아. 한번 뵌적이 있는 것 같군요. 안녕하셨습니까? 여긴 워 낙 어두워서..." 부인이 조용히 소리쳤다. 어머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종종 니꼴라이 방에 와 있는 걸 본 기억이 났다. <모두 동지들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어머니의 머리를 스쳤다. 그녀는 어머니의 옷소매를 끌어 앞장을 서게 하고 자신은 그 뒤를 따라 걸으면서 물었다. "더 나빠졌던가요?" "그래요, 누워 있어요. 당신보고 먹을 것 좀 가져 오라고 그러더군요..." "이젠, 먹어 봐야 소용없을텐데..." 그들이 이고르의 방에 들어서자, 맨 먼저 그의 목쉰 소리가 그들을 맞았다. "난 조상들에게로 가려 하네, 친구. 류드밀라 바실리예브나, 이 사람은 간수의 허락도 없 이 감옥을 나와 버렸다오. 대단한 친구지! 우선 먹을 것 좀 주고, 그 다음엔 어디에든 한동 안 숨겨 주어요."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병자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위엄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 었다. "이고르, 손님들이 찾아왔으면 그 즉시 절 불렀어야 할 것 아네요. 그리고 당신은 약을 두 번이나 먹지 않았어요. 왜 멋대로 그러는 거예요? 동지, 나한테 와 있도록 하세요. 이제 곧 병원에서 사람이 올 거예요. 당신을 데리러 말예요." "결국 날 병원에 보낼 거요?" 이고르가 물었다. "그래요. 난 거기서 당신과 함께 있겠어요." "거기 가서까지? 오, 맙소사!" "고집 부리지 말아요..." 이야기를 하면서 여인은 이고르의 가슴 위로 이불을 고쳐 덮어 주소 베소프쉬꼬프를 뚫어 지게 쳐다본 다음, 눈대중으로 병에 들어 있는 약을 어림짐작해 보았다. 그녀는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거침없이 이야기를 했고 거동 하나하나가 경쾌했으며 얼굴은 창백했다. 또 새까만 눈썹은 위로 치켜 올려져 미간에서 거의 맞붙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어머니 에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만해 보이는 데다 눈길엔 미소도 없었고 광채도 없었던 것 이다. 그리고 말할 때면 흡사 명령하는 투였다. 그녀가 계속해서 말했다. "우린 나갔다 올께요. 전 곧 돌아오겠어요. 당신이 이고르에게 이 약을 먹여 주도록 하세 요. 큰 숟가락 하납니다. 말을 시키지 마세요..." 그리고 그녀는 베소프쉬꼬프를 앞세우고 집을 나섰다. "굉장한 여자야!" 이고르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멋진 여자요... 어머님께선 저 여자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녀는 이만저만 지친 게 아 니거든요..." "그만 이야기 하구려. 자, 약을 들어야지..." 어머니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약을 단숨에 마셔 버리고 한쪽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죽는 건 마찬가지예요. 말을 하나 안 하나..." 다른 눈으로 그가 어머니를 바라보았는데, 입술이 웃음으로 살며시 떨렸다. 어머니는 고 개를 떨구었다.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안쓰러움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신경 쓰실 것 없어요. 당연한 일인 걸요, 뭐. 만족스럽게 살았으면 죽어야 하는 의 무도 잇따라 찾아오는 법이지요..." 어머니는 그의 머리에 가만히 손을 얹고 다시 속삭였다. "이야기하지 말고 그래도 있어요, 응..." 그는 흡사 심장의 고동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고집스럽게 계 속했다. "입을 다물고 있다해서 무슨 소용입니까, 어머님? 제가 침묵을 지켜서 무얼 바라겠어요? 죽음을 앞둔 고통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시간만큼이라도 좋은 사람과 더불어 이 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을 맛보렵니다. 저승엔 여기 이승만큼 그렇게 좋은 사람들이 없을 것 같아요..."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곧 그 부인이 돌아올텐데, 그러면 아마 당신에게 말을 시켰다고 날 나무랄 거요.." "그녀는 부인이 아니고 혁명투사요, 동지며. 뛰어난 사람이랍니다. 그녀는 틀림없이 어머 님을 나무랄 겁니다. 그녀는 누구에게든지 꾸지람을 주고, 또 항상 그러니까요..." 그리고 이고르는 입술을 천천히 움직여 천천히 자기 이웃의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늘어놓 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엔 미소가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그가 일부러 농담 반 진담 반으 로 자신을 노리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축축하고 시퍼런 반점으로 뒤덮인 그의 얼굴을 쳐 다보며 불안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죽어 가고 있어...) 류드밀라가 들어와 문을 조심스레 닫고는 어머니는 보고 말했다. "당신 친구분 옷을 갈아입혀야겠어요. 가능한 한 빨리 갔다 오도록 하세요, 뺄라게야 닐 로브나. 지금 곧바로 가셔서 그에게 입힐 만한 옷을 구해 죄다 가져 오도록 하세요, 소피야 가 여기 없는 게 유감이군요. 사람 숨기는 일이라면 그녀가 전문인데." "내일 올 거요!" 어머니가 어깨에 수건을 두르면서 말했다. 매번, 어떤 임무를 부여받을 때면 그녀는 그일을 그 즉시 훌륭히 완수하고픈 강한 열망에 휩싸였다. 그래서 그녀는 벌써 자기의 임무 외에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곧바로 그녀는 조심스러운 듯 두 눈을 내리깔고 사무적으로 물어Te. "어떤 식으로 옷을 가라입히면 좋겠소?" "아무래도 괜찮아요. 그 사람은 밤에 나다니게 될테니까..." "밤에는 좋지 않아요. 거리엔 사람들도 훨씬 적고 감시의 눈초리가 더 많은 데다 그 사람 은 민첩하질 못하다오..." 이고르가 목쉰 소리로 웃어댔다. "그런데 병원으로 당신을 찾아가도 괜찮겠소?" 어머니가 물었다. 그는 세찬 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류드밀라가 새까만 눈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쳐 다보며 계속했다. "저와 교대로 간호하고 싶으세요? 그래요? 좋아요. 우선 얼른 다녀오세요." 부드러우면서, 하지만 위엄 있게 어머니의 손을 움켜쥔 채, 그녀는 어머니를 문 뒤로 데 려가 조용히 말했다. "제가 당신을 마구 내몬다고 화내지 마세요. 그 사람한텐 말하는 것이 무척이나 해롭거든 요... 전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갖고 있답니다..." 그녀는 손가락이 으스러질 정도로 세차게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지친 듯 눈꺼풀을 내 리깔았다. 이 말에 어머니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혼자 말하듯 중얼거렸다. "별 말씀을..." "조심하세요, 첩자들이 없더라도 말이죠." 여인이 조용히 말했다. 손을 얼굴로 가져간 그녀는 어머니의 머리수건을 고쳐 매어 주어 . 입술이 살포시 떨리고 낯빛이 부드럽게 되었다. "알고 있어요..." 어머니는 적잖은 자부심을 갖고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녀는 대문을 나와 잠시 멈춰 서서 수건을 고쳐 쓰는 척하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주 의 깊게 주의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벌써 거리의 군중 속에서 첩자를 거의 정확히 구별해 날 수가 있었다. 무사태평을 가장한 듯한 걸음걸이, 부자연스러울 만큼 허물없이 구는 행 동, 얼굴에 씌어 있는 피곤과 지루함의 표정, 그리고 나름대로 이 모든 것 뒤에 감추려고 애를 썼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 그대로 엿보이는, 불안하면서도 기분 나쁘게 날카로운 눈빛 에 그녀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번엔 그녀를 낯익은 얼굴을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서두르지도 않고 거리를 걸어 내려가다가 마차를 하나 불러 세워 시장으로 가 달라고 말했다. 베소프쉬꼬프가 갈아 입을 옷을 사면서 그녀는 옷 파는 여자와 박정하게 흥정을 했고 더구나 자기 남편이 술주정 꾼이어서 한 달에 거의 한 번씩은 새 옷을 사 입혀야 한다고 남편 욕을 쏟아 부으며 온갖 수다를 다 떨었다. 상인들은 이 수다에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기 꾀 에 흐뭇해 했다. 그녀는 오면서 경찰들이 베소프쉬꼬프에게 갈아입힐 옷이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시장에 형사를 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토록 천연스런 신중함으 로 일을 처리한 그녀는 이고르의 집으로 돌아온 다음 베소프쉬꼬프를 시내 변두리까지 보호 하여 데리고 갔다. 그들은 서로 거리의 양편으로 갈라져서 걸었다. 어머니는 베소프쉬꼬프 가 고개를 푹 숙이고 적황색의 긴 옷자락이 발에 밟히지 않게 하려고 애쓰면서 무거운 바럴 음을 옮기고 있는 것을 보는 게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론 재미있기도 했다. 그는 또 코끝까 지 푹 뒤집어쓴 모자를 연신 고쳐 쓰고 있었다. 한적한 길거리를 내려오다가 그들은 사샤와 마주쳤다. 어머니는 고갯짓으로 베소프쉬꼬프에게 작별인사를 보내고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빠샤는 아직 감옥에 그래도 있어. 그리고 안드류샤도...) 그녀는 슬픈 마음으로 생각했다. 10... 집에 돌아오자마자 니꼴라이의 떨리는 음성이 어머니를 맞았다. "어머님, 알고 계세요? 이고르가 몹시 위독하다는군요, 몹시! 이고르는 병원으로 실려 갔 고, 여기에 류드밀라가 다녀갔는데 어머님보고 병원으로 오시라더군요..." "병원으로?" 안경을 신경질저긍로 고쳐 쓴 니꼴라이는 어머니가 옷 입는 것을 도와주며 앙상한 손으로 어머니의 손을 뜨겁게 움켜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요. 이 꾸러미를 들고 가세요. 베소프쉬꼬프 일은 잘 처리하셨어요?" "모든 일이 다 순조롭게 되었는데..." "저 역시 이고르에게 가겠어요..." 어찌나 피곤한지 어머니는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근심스러운 듯 수선을 피우는 니꼴라이를 보니 왠지 어떤 슬픈 일이 조만간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죽어 가고 있어.) 뭔지 알 수 없는 생각이 어머니의 머리를 둔탁하게 두드렸다. 하지만 그녀가 작지만 깨끗하고 밝은 병실에 도착해 이고르가 새하얀 베개에 기댄 채 침 상에 앉아 쉰 목소리로 너털웃음을 짓는 것을 보는 순간,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 다. 그녀는 웃으면서 문에 기대어 서서 이고르가 의사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치료, 그건 개혁이지..."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말게, 이고르!" 의사가 째지는 목소리로 근심스러운 듯 소리쳤다. "하지만 난 혁명가라서 개혁은 딱 질색이야..." 의사는 조심스레 이고르의 팔을 그의 무릎에 올려 놓고 의자에서 일어나 깊은 생각에 잠 긴 표정으로 턱수염을 잡아당기며 환자의 얼굴에 난 종기를 손가락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의사를 잘 알고 있었는데, 그는 니꼴라이의 가장 가까운 동지들 가운데 하나로 이름은 이반 다니로비치였다. 어머니는 이고르에게 다가섰다. 그가 그녀에게 혀를 내밀었 다. 그 바람에 의사가 돌아보았다. "아, 닐로브나! 안녕하셨습니까! 손에 든 건 뭐죠?" "아마 책일 거요." "책을 읽으면 안돼요." 작은 키의 의사가 말했다. "의사양반은 날 노리개감으로 만들려고 한다니까!" 이고르가 투덜거렸다.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짧고 거친 숨소리가 이고르의 가슴에서 찢어져 나왔고 얼굴엔 작 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제대로 말도 듣지 않는 무거운 손을 천천히 들어올려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이상하리만치 꼼짝도 하지 않는 퉁퉁 부어오른 볼 때문에 그의 둥글고 선해 뵈는 얼굴이 전혀 딴사람의 얼굴로 변해 버렸고, 죽은 듯 푸르둥둥한 얼 굴은 말이 아니었다. 움푹 패인 두 눈만이 관대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반짝일 따름이었다. "에이, 의사양반! 난 너무 피곤해, 누워도 괜찮겠지..." 그가 물었다. "안돼요." 의사가 잘라 말했다. "그럼 당신 나가고 나면 눕지, 뭐..." "닐로브나, 이 사람 눕지 못하도록 하세요. 베개를 고쳐 받쳐 주시고 되도록 말을 시키지 마세요. 해롭습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병실을 빠져 나갔다. 이고르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손가락만을 조 용히 움직일 따름이었다. 작은 병실의 하얀 벽으로부터 마른 냉기, 어슴푸레한 슬픔이 배어 나왔다. 커다란 창을 통해서는 울창한 보리수 나뭇가지들이 보였고, 뿌옇게 먼지가 내려앉 은 잎들 사이로는 다가올 가을의 차디찬 접촉이랄 수 있는 누런 반점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죽음이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마지못해..." 이고르가 두 눈을 꼭 감은 채 움직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죽음이란 놈도 절 데려가는 게 조금은 안됐나 보죠? 전 그래도 붙임성이 꽤나 있는 놈이 었지요..." "말하지 말아요, 이고르 이바노비치!" 어머니가 살며시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애원하듯 말했다. "잠깐만요. 그렇지 않아도 곧 입을 다물게 될텐데요..." 숨을 헐떡이기도 하고 간신히 한마디씩 말을 뱉어 내면서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기력 이 빠질 때면 긴 시간 동안 말이 끊기기도 했다. "어머님이 제 곁에 계신 게 여간 좋지 않아요. 어머님의 얼굴을 볼 수 있어 기분이 너무 좋아요. 전 가끔 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기도 한답니다. 닐로브나의 종말은 어떻 게 다가올 것인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감옥과 온갖 비열이 어머님을 기다 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을 거예요. 어머님은 감옥이 두렵지 않으세 요?" "두렵지 않아."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야 지당하신 말씀이지요. 하지만 누가 뭐래도 감옥은 필요치 않아요. 저를 불구로 만 든 곳도 바로 그 감옥이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전 죽고 싶지 않아요..." 아직 더 살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말이 입 안 에서만 맴돌았다. "전 아직도 일을 할 수 있을지도... 하지만,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살 의미가 없는 거예 요. 산다는 게 어리석은 일인 셈이죠..." (옳은 소리요. 하지만 그런다고 위안이 되는 것은 아니지.)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안드레이의 말을 떠올리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하루 온종일 너무 뛰어다녀서 그런지 배가 무척이나 고팠다. 환자의 단조로우면서도 눅눅한 속삭 임이 방안을 가득 메우며 미끄러운 벽을 힘없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창문에 잇닿은 보리수 나뭇가지들이 흡사 낮게 깔린 먹구름 같았고 그 슬픈 흙빛으로 무언가를 놀라게 하는 것 같 았다. 모든 것들이 음울한 정적 속에서, 음침한 밤의 기다림 속에서 이상스럽게 사위어 갔 다. "왜 이리 기분이 좋지 않을까!" 이고르는 이렇게 말하고 두 눈을 감더니 조용해졌다. "잠을 청해 봐요. 아마 기분이 나아질 거야." 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잠시 후, 어머니는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고 주위를 둘러본 다음, 몇 분 동안 차 디찬 슬픔에 휩싸인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문 여닫는 소리에 잠을 깼다. 깜짝 놀란 그녀는 자신을 멀뚱히 쳐다 보고 있는 이고르의 두 눈을 발견했다. "깜빡 졸았구만, 미안해요."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죄송한 걸요..." 그 역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창문을 통해 저녁 어스름이 새어 들었고 어두운 한기가 눈을 자극했다. 모든 것이 이상스 럽게 빛을 잃었고 환자의 얼굴도 흙빛으로 변해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류드밀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 앉아서 속삭이고 있군요. 여긴 스위치가 어디 있지?" 병실 안이 갑자기 허옇고 낯선 불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병실 한가운데에 키가 큰 류드밀 라가 서 있었는데, 온통 까만 옷차림에 꼿꼿한 모습이었다. 이고르가 온몸을 움직여 보려고 애쓰며 손을 가슴께로 끌어올렸다. "왜 그래요?" 류드밀라가 그에게 뛰어가며 소리쳤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눈으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왠지 두 눈이 크고 이상스레 반짝거렸 다. 입을 크게 벌린 그는 고개를 위로 쳐들고 한 쪽 팔을 앞으로 뻗었다. 어머니는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고 숨을 죽이며 이고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그는 발작적으로 격렬 하게 목을 움직여 고래를 뒤로 젖히더니 크게 소리쳤다. "숨이 막혀, 정말..." 그의 몸이 가볍게 떨렸고 부릅뜬 두 눈에는 침대 위에서 타고 있는 싸늘한 램프의 불빛이 죽은 듯 비쳤다. "이보게나!" 어머니가 속삭였다. 류드밀라가 천천히 침대로부터 떨어져 창가에 선 채로 어딘지 먼 허공을 쳐다보며 어머니 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의외의 큰 목소리로 말했다. "죽었어요..." 그녀는 허리를 굽혀 팔꿈치를 창턱에 기대고 있다가 느닷없이, 흡사 누구에게인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 무릎을 꿇고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이고르의 육중한 두 손을 포개어 그의 가슴 위에 올려 놓고 이상하리만치 무거 운 그의 머리를 베개 위에 똑바로 놓은 다음, 눈물을 닦으며 류드밀라에게로 다가가 그녀 위로 몸을 굽혀 말없이 그녀의 무성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류드밀라는 천천히 몸을 돌 려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윤기 없는 두 눈이 병자의 그것처럼 퀘하게 보였다. 류드 밀라는 일어서서 떨리는 입술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유형을 갈 때도 같이 걸어서 가고 감옥에도 같이 있었습니다... 간혹 정말 참기 힘들고 혐오스럽기까지 해서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타락하기도 했지요..." 그녀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슬픔에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했다. 부드러우면서 도 슬픔에 찬 감정으로 인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얼굴을 어머니에게 가까이 대고 눈물도 없 이 신음하면서 빠른 입놀림을 계속했다. "그런데 그는 언제나 한결같이 쾌활하고 농담을 즐기고 웃음을 잃지 않고 남자답게 자신 의 욕망을 억제할 줄도 알면서... 약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려고 애썼지요. 정말 선하고 동정심도 많고 자상한 사람이었어요... 그 곳 시베리아에서는 게으름 때문에 몸을 망치고 결국 삶을 추하게 만든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삶을 추하게 하는 것들과 얼마나 잘 싸워 나 갔던지... 당신도 그런 그를 보았다면 훌륭한 동지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그의 개인적 삶은 힘들고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서 어떠한 불평 도 들을 수 없었어요. 어느 누구도 결코! 전 여태껏 그와 친하게 사귀어 오면서 많은 면에 서 신세를 졌어요. 그는 모든 힘을 동원해서 할 수 있는 전부를 저에게 베풀었어요. 그리고 그 자신은 항상 외롭고 지쳐 있으면서도 단 한번도 사랑이나 관심 따위의 보답을 요구하지 않았죠..." 그녀는 이고르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혀 그의 손에 키스를 하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울 하게 말했다. "동지여! 오, 비할 데 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친구여! 무어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 좋을지..., 잘 가요. 나 역시 당신처럼 일하겠어요,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의심치 않고 내 전생애를 바쳐서... 편히 잠드세요." 흐느끼느라 그녀의 몸이 사뭇 떨렸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그녀는 이고르 발 밑 침대에 머리를 파묻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그녀는 왠지 흐 느낌을 억제하고 류드밀라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특별히 힘이 넘치는 위로의 말로. 또 그 녀는 이고르에 대해서 사랑과 슬픔이 담긴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그녀는 이고르의 퉁퉁 부은 얼굴, 내리 덮인 눈꺼풀에 졸리운 듯 가려져 있는 두 눈, 그리고 애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흙빛 입술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정적만이, 그리 고 울적한 기운만이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이반 다닐로비치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종종걸음으로 황급히 병실안으로 들어와서는 갑 작스레 병실 한가운데에 멈춰 서서, 두 손을 호주머니에 재빨리 찔러 넣더니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오래 되었나요..."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발을 구르다 이마를 훔치고 나서야 이고르에게 다가 가 그의 팔을 만져 보고 한편으로 비켜 섰다. "놀랄 일도 아냐. 이런 심장으로라면 일이 나도 한 반 년 전엔 일어났어야 했어, 적어 도..." 그의 목소리는 억지로 태연한 척하려는 빛이 역력했지만 어쨌든 너무커서 조금은 부자연 스러웠다. 벽에 기대어 선 채로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턱수염을 말아 올리면서 침대 옆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연신 두눈을 깜빡거리면서. "또 한 사람이..." 그가 조용히 웅얼거렸다. 류드밀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께로 다가가더니 창문을 열어 젖뜨렸다. 몇 분이 지나 그들 세 사람은 창문 옆에 꼭 붙어 서서 가을 밤의 음울한 얼굴을 서로 쳐다보았다. 시꺼먼 나무 꼭대기 위로는 별무리가 멀리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하늘을 비추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류드밀라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어머니의 어깨에 바짝 몸을 당겼다. 의사는 고개를 아 래로 떨구고 손수건으로 코안경을 닦았다. 창문너머 정적 속에선 도시의 저녁 소음이 지친 듯 숨을 쉬었고 그때마다 찬 공기가 사람들의 얼굴에 와 부딪쳤으며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류드밀라가 사뭇 몸을 떨었다. 그녀의 볼을 따라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병원 복 도에서는 피로에 지치고 화들짝 놀라는 소리들, 황망히 재촉하는 발걸음 소리, 신음소리, 음울한 속삭임 따위가 서로 섞여 허위적거렸다. 세 사람은 붙박인 듯 창가에 서서 어둠 속 을 바라볼 뿐 아무도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자기가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끼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놓으며 문 쪽 으로 다가가 이고르에게 인사를 했다. "가십니까?" "그렇습니다..." 거리에 나와서 그녀는 휴드밀라 생각을 했다. 류드밀라의 눈에 글썽이던 눈물이 떠올랐 다. (제대로 실컷 울지도 못하고...) 죽기 바로 전 이고르가 내뱉던 말을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천천히 거리를 따라 걸으면서 그녀는 그의 총명한 눈, 그가 자주 하던 농담들, 그리고 인생에 대한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사람이 너무 좋아. 그토록 어려운 삶을 산 사람이 너무도 쉽게 죽었어... 그렇다면 난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을 하직할 것인가?) 또 그녀는 류드밀라와 하얗고 지나치게 밝은 병실 창문 옆에 서 있던 의사, 그리고 그들 위에 있던 이고르의 죽은 눈을 생각했다. 그러자 사람들에 대한 복받치는 연민 때문에 무거 운 한숨이 절로 나오고 걸음이 빨라졌다. 어떤 복잡한 감정이 그녀를 괴롭혔던 것이다. (서둘러야겠군!) 그녀는 우울하지만 건강한 힘, 마음 안에서 그녀를 부추기는 힘에 어쩔 수 없이 이끌리면 서 생각했다. 11.. 다음날 하루 온종일 어머니는 장례식 준비를 하느라 무척 바빴다. 저녁때, 그녀와 니꼴라 이, 그리고 소피야가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사샤가 나타났다. 이상하리만치 유난을 떠는 폼 이 기분이 꽤나 좋아 보였다. 두 뺨은 발그레하게 홍조를 띠고 두 눈은 유쾌하게 빛나고 있 어 어머니는 그녀가 어떤 기쁜 희망으로 충만되어 있음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그 런 기분이 날카로우면서도 급격하게, 죽은 이에 대한 슬픈 회상의 분위기 속으로 끼어들어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모든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또한 아연하게 했다. 흡사 어둠 속에 서 예기치 않게 반짝이는 불빛과도 같이. 니꼴라이가 생각에 잠겨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 리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어째 예전의 당신 모습이 아닌 것 같군요. 사샤..." "그래요? 아마 그럴지도 모르죠." 그녀가 유쾌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꾸했다. 어머니는 무언의 꾸짖음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고, 소피야 또한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우린 이고르 이바노비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사샤가 대꾸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죠, 안 그래요?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띠지 않고, 또 농담을 하지 않는 그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일은 또 얼마나 열성적으로 했나요. 가히 혁명의 예술가 라 할 만한 사람이었지요. 흡사 위대한 장인처럼 그는 혁명사상을 아주 능숙하게 다루었으 니 말예요. 그는 너무도 간결하게, 그러면서도 힘이 넘치는 붓으로 항상 거짓과 폭력, 그리 고 불의라는 못된 그림을 아주 명쾌하게 그렸죠." 그녀는 두 눈에 생각에 잠긴 듯한 우울한 미소를 머금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런 미소로도 그녀의 눈매에 서려 있는 시쁨이 감추어질 수는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무언가 를 이해 못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사샤가 몰고 온 기쁨의 감정 때문에 동지에 대한 슬픔의 기분이 달리 바뀌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슬픔을 곱씹고픈 자신들만의 비장한 권리를 무의식적으로 방어하 면서 그들은 사샤에게 자신들의 기분을 애써 이해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죽었어요." 소피야가 그녀를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고집스럽게 말했다. 사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황망히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두 눈썹이 잔뜩 찡그 려졌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고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죽어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가 큰소리로 외치고는 다시 못 믿겠다는 눈빛으로 모두 를 둘러보았다. "무슨 소리예요, 죽다니? 뭐가 죽었단 말예요? 이고르에 대한 나의 존경심이, 아니면 동 지에 대한 내 사랑이 죽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그의 사상활동에 대한 기억이? 그런 활동 이 죽고, 그가 내 가슴속에 불어넣어 주었던 그 감정이 한순간 사라져 버리고, 용감하고 고 결한 인간으로서의 그에 대한 내 생각이 산산히 부서졌단 말입니까? 대체 이 모든게 죽었다 는 말이 어떻게 통해요? 전 알아요, 이것은 나에게 있어 결단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우린 사람에 대해서 너무 서둘러 이야기하는 습성에 물들어 있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그는 죽 었어> 라고 말이죠. 인간의 입은 죽었더라도 그의 말만은 산 자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는 법이지요." 잔뜩 흥분한 그녀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한층 나지막한 목소리로 더욱 심각해져서 말을 이었다. 눈물이 글썽한 두눈에 미소를 담아 동지들을 바라보면서. "제가 어쩌면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동지들, 난 고결한 사 람들의 불멸을 믿어요. 내게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행복을 주었던 바로 그런 사람들의 불멸을, 그리고 난 그런 사람들이 준 삶으로 해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되었고 결국엔 놀랍도 록 복잡한 삶의 성격, 현상의 다양함과 내 심장만큼이나 소중한 사상의 성장에 넋을 잃고 말았답니다. 우린 어쩌면 감정표현에 지나치게 인색해서 생각만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도 모릅니다. 이 때문에 우린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서 평가나 할 줄 알지 느끼지는 못하 는 것이죠..."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소피야가 웃으면서 물었다. "네 있었죠." 사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매우 좋은 일이! 난 밤에 베소프쉬꼬프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난 예전엔 그를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는 무례하면서도 음침해 보였거든요. 정말 그랬어요. 틀 림없이 그 사람 안에는 모든 사람에 대한 확고하면서도 뭔가 알 수 없는 짜증이 자리잡고 있어 정말 늘 불쾌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의식한 나머지 무례하면서도 신경질적으로 나, 나 라고 말하곤 했어요. 그럴때마다 왠지 화가 나면서 그의 속물근성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지 요."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다시 모두를 감싸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제는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동지들!> 하고 말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할 때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요. 비록 어쩔 줄을 몰라 한다지만 얼마나 부드러운 사랑 을 담은 말을 하는지, 정말 어떻게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랍니다. 놀랄 만큼 솔직해지 고 성실해졌어요. 또 일에 대한 욕망에 가득 차 있기도 하고요. 그는 자신을 발견한 겁니 다. 그리고 자신의 힘을 보게 되고 자기에겐 이젠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는 걸 깨닫게 된 거죠. 중요한 건 그의 안에 진정 동지애적인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랍니다..." 어머니는 사샤의 말을 유심히 들었다. 왠지 한결 누그러진 유쾌한 기분으로 준열한 처녀 를 바라본다는 게 그저 좋기만 했다. 그러나 동시에 어딘가 모르게 그녀의 마음속에선 서운 함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럼 빠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지?) 사샤가 계속했다. "그는 온통 동지들에 대한 생각뿐예요. 그가 내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동지들을 탈옥 시켜야만 하는 필요성을 제게 확인시켜 주었어요. 그래요! 그의 말에 따르면, 그건 식은 죽 먹기라는 거예요..." 소피야가 고개를 들고 활기 있게 말했다. "그럼 당신 생각은 어때요, 사샤? 그건 단지 생각일 뿐이랍니다." 어머니의 손에 들린 찻잔이 떨렸다. 사샤는 눈썹을 찌푸리고 자신의 유쾌한 기분을 억제 하느라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심각한 목소리로, 하지만 즐거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두둥 지게 말했다. "사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린 마땅히 시도해 보아야만 합니다. 그건 우리의 의무예요..." 그녀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다시 말이 없었다. <오, 내 사랑하는 사샤!> 하고 어머니는 웃으며 생각했다. 소피야도 웃었고, 니꼴라이 역 시 부드러운 눈길로 사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조용히 웃었다. 그때 사샤가 고개를 들고 심 각한 눈으로 모두를 쳐다보았다.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두 눈은 번뜩였다. 그리곤 마음이 상했는지 무뚝뚝하게 말했다. "웃고 계시는군요. 전 여러분들을 이해해요... 당신들은 제가 저만의 이해관계 때문에 이 런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왜 그래요, 사샤?" 소피야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가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어머니는 소피야의 이 질문이 전혀 쓸데없고 사샤의 기분만 상하게 할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한숨을 내쉬고 눈썹을 찌푸리면서 나무라는 눈빛으로 소피야를 쳐다보았다. 사샤가 소리쳤다. "아네요, 전 빠지겠어요. 여러분들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그 문제의 결정에 전 참여치 않 겠어요..." "그만해요, 사샤!" 니꼴라이가 침착하게 말했다. 어머니 역시 그녀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져 주었다. 사 샤가 어머니의 팔을 잡고 시뻘개진 얼굴을 위로 들고는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머니는 그저 웃고만 있을 뿐 사샤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도무지 생각 이 나지 않았다. 나오느니 씁쓸한 한숨뿐이었다. 소피야가 사샤의 옆에 나란히 앉아 어깨를 감싸안고 호기심 가득한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럴 땐 꼭 어린애 같아요..." "그래요, 제가 생각해도 제가 너무 바보짓을 한 것 같아요..." "사샤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소피야가 계속했다. 하지만 니꼴라이가 사무적이면서도 심각한 어조로 그녀의 말을 가로 막았다. "가능한 한 동지들을 탈옥시켜야 한다는 데에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어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갇혀 있는 우리의 동지들이 그걸 원하는지 어떤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사샤가 고개를 떨구었다. 소피야는 담배를 피워 물며 동생을 쳐다보고 재빠르게 구석 어디로 성냥을 집어 던졌다. "어쩐지 그들이 탈옥을 원치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그건 결코 가능한 일 이 못돼요..." 어머니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누구라도 좋으니 탈옥이 가능하다는 한마디만 이라도 해 주길 은근히 바랬다. "제가 베소프쉬꼬프를 한번 만나 봐야겠어요." 소피야가 말했다. "내일 제가 시간과 장소를 연락해 드릴께요." 사샤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앞으로 뭐 한답디까?" 소피야가 방안을 서성이며 물었다. "새로 만들 인쇄소에 식자공으로 자리를 주선해 주기로 결정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전 까지는 산속 사람들과 같이 지내게 될 겁니다." 사샤의 두 눈썹이 잔뜩 찌푸려지고 얼굴은 평상시의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갔으며 목소리 또한 무뚝뚝해졌다. 니꼴라이가 접시를 닦고 있는 어머니에게로 다가가 말을 꺼냈다. "모레 면회를 가시게 되거든 쪽지를 꼭 빠벨에게 전하도록 하세요. 이해하시겠죠?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알겠소, 알았어요. 내 틀림없이 전하지..." 어머니가 서둘러 대꾸했다. "전 이만 가겠습니다." 사샤가 말없이 빠른 동작으로 모두의 손을 잡았다 놓고 왠지 무거워 보이는 발길을 재촉 했다. 여전히 매몰차고 무뚝뚝했다. 소피야는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의자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흔들며 웃음띤 얼굴로 물었다. "닐로브나, 저런 딸자식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 안 드세요?" "오, 제발! 단 하루만이라도 둘이 함께 있는 걸 보았으면!"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맞아요. 아주 작은 행복이라도 모두에겐 좋은 거예요..." 니꼴라이가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작은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하는 것이겠지요. 하긴 그것마저도 많으면 별게 아니지만..." 소피야가 피아노 앞에 앉아 뭔가 슬픈 곡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12... 이튿날 이른 아침 수십 명의 남녀가 병원 문 앞에 서서 동지의 관이 거리로 운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주변에는 첩자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함성소리에 귀를 곤 두세우고 사람들의 얼굴, 태도와 말을 주시하면서 서성거리고 있었고, 그 맞은편 거리에서 는 연발 권총을 허리에 찬 한 무리의 경찰들이 역시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첩자들 의 파렴치한 행위, 경찰의 비웃음, 그리고 자신들의 힘을 한껏 과시하기나 할 것 같은 경찰 의 만반의 채비에 군중들은 잔뜩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초조함을 숨기느라 농지거리를 했고 어떤 사람들은 모욕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불쾌한 표정으로 땅만 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단지 말로밖에는 무장할 것이 없는 민중들을 위협할 줄이나 아는 정부에 대해서 이리저리 돌려 비웃기도 했다. 희뿌연 가을 하늘이, 누런 낙엽들이 나뒹구는 잿빛 자갈길을 음울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은 연신 낙엽들을 불어 올려 사람들의 발 밑으로 내팽개쳤다. 어머니는 군중들 속에서 서서 낯익은 얼굴들을 하나 둘 헤아려 보며 슬픔에 가득 차 이런 생각을 했다. (너희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구나, 많이 없어. 그리고 노동자들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도 없으니...) 병원 문이 열리고 화환과 리본으로 장식을 한 관이 거리로 운구되어 나왔다. 사람들이 한 결같이 모자를 벗었다. 흡사 시꺼먼 새떼가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불그 레한 얼굴에 새까만 수염을 무성하게 기른 키 큰 경찰장교가 재빨리 군중 사이로 비집고 들 어오고 그 뒤를 따라서 병사들이 함부로 사람들을 밀어대고 보도에 무거운 군화 발소리를 내면서 줄을 맞춰 걸어 들어왔다. 장교가 명령조의 씩씩거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리본을 떼시오!" 장교의 주위로 젊은 남녀들이 빽빽하게 몰려들어 삿대질을 해대며 무어라고 그에게 고함 을 치는가 하면 잔뜩 흥분한 나머지 서로 밀고 밀리는 몸싸움을 하느라 아우성이었다. 어머 니의 눈앞에 흥분에 못 이겨 입술을 바르르 떨고 있는 창백한 얼굴들이 어른거렸다. 한 여 인의 얼굴에서는 울분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도 했다. "폭력은 물러가라!" 젊은 사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 이내 다시 시끌벅적한 소음 속으로 사라졌다. 어머니 역시 가슴 쓰린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옆에 서 있던 허름한 옷차 림의 젊은이에게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사람 장사도 못 지내게 하면 어쩌자는 거야? 동지들이 저리도 원하는데. 이게 말이나 되 는 소리야." 증오심은 더욱 고조되었고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는 관뚜껑이 흔들렸으며 리본은 바람에 날려 사람들의 머리와 얼굴을 덮어씌우곤 했다. 그리고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신경질적으 로 들려 왔다. 어머니는 충돌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에, 서둘러 양 옆의 사람들에게 나지막한 목 소리로 말했다. "놈들 하자는 대로 하게 둡시다. 지금은 그냥 리본을 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일단 양보 를 하는 거지, 뭐. 어쩔 도리가 없을 것 같은데..." 누군가의 소란스러움을 압도하는 크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러분 가시는 님의 마지막 길을 방해하지 맙시다. 그것도 저 놈들의 괴롭힘에 끝내 목 숨을 잃은 분의!" 누군가가 카랑카랑한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투쟁에 몸 바쳐서...> "리본을 떼라! 야꼬블레프, 칼로 베어 버려!" 칼 뽑는 금속성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곧 이어 터져 나올 비명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나 주위는 한결 조용해졌다. 처음에 사람들은 흡사 궁지에 몰 린 늑대처럼 으르렁거렸지만 금세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은 입을 꾹 다문 채 거리에 발자국소리만을 흩뿌리며 앞으로 움직여 나갈 뿐이었다. 앞에서는 강탈을 당한 관뚜껑이 마구 짓밟힌 화환과 더불어 허공을 미끄러져 가고 있었 고, 양 옆으로 말탄 경찰들이 비칠거리며 따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인도를 따라 걷고 있었 는데 빽빽이 둘러싼 군중들 때문에 관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군중이 늘어 그 넓은 거리 를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군중의 뒤에서도 잿빛의 말을 탄 경찰들이 눈에 띄었고, 그 양 옆으로 역시 경찰들이 칼에 손을 얹고서 따라 걷고 있었다. 도처에서 어머니가 익히 알 고 있는 첩자의 날카로운 눈이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느라 번뜩이고 있었다. <안녕, 우리 동지여, 안녕...> 아름다운 두 목소리라 서글프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안됩니다!" 고함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고함소리는 준열하면서도 뭔가 인상적인 느낌이 있었다. 슬픈 노래가 멈추고 이야기 소리도 한층 낮아졌으며, 다만 보도에 구르는 의연한 발걸음 소리만이 답답하면서도 단조롭 게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소리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솟아올라 투명한 하늘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멀리서 맨 처음 들려오는 천중소리와도 같이 공기를 진동시켰다. 차디찬 바람은 점점 거세어지더니만 한껏 적의를 품고 거리의 먼지와 쓰레기를 사람들의 정 면으로 날렸고, 외투와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하는가 하면 눈도 뜨지 못하게 하고 가슴에 부 딪치면서 발 밑으로 나뒹굴었다. 사제도 없고 가슴을 저미는 노래도 없는 이 무언의 장례식, 생각에 깊이 잠긴 얼굴들, 그 리고 찌푸린 눈썹들은 어머니의 가슴에 무서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생각은 그녀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면서 서글픈 구절을 상기시켰다. (너희들 가운데 진실의 편에 서는 자는 적으리니...)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마치 이고르가 아니고 다른 가까운 사람, 정말 그녀에 게 필요한 사람의 장례식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왠지 우울하고 꺼림직했다. 가슴은 이 고르를 전송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동의할 수 없다는 떨림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물론, 이고르는 신을 믿지 않았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랬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하던 생각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아서 답답함을 지워 버리고자 한 숨을 내쉬었다. (오,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여! 도대체 왜 저를 이토록...) 장례행렬이 묘지에 도착했다. 장례행렬은 자그맣고 하얀 십자가들이 여기저기 꽂혀 있는 탁 트인 공간으로 나올 때까지 묘들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서 길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사 람들은 묘 주위에 모여서 숙연한 분위기로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묘들 사이에서 산 사람들이 이토록 숙연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무서운 생각이 들어 어머니의 가슴은 떨리고 막연한 기대감으로 벅차 올랐다. 십자가 사이로 바람이 윙윙 소리를 내며 지 나다니고 관뚜껑 위에서는 엉망이 다된 꽃들이 구슬프게 떨고 있었다. 경찰들이 바짝 긴장해서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자신들의 상관을 쳐다보고 있었다. 묘 위 로, 모자를 쓰지 않아 긴 머리카락이 나풀대는 키크고 젊은 사람이 우뚝 섰다. 눈썹은 새까 맣고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그와 동시에 경찰 우두머리의 씩씩거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 다. "여러분..." "동지들!" 검은 눈썹의 사내가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찰이 소리쳤다. "허락해 주시오! 왜 연설을 허락할 수 없는지 설명해 주겠소..." "많이도 말고 몇 마디만 하겠소!" 젊은이가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동지들! 우리의 스승이자 친구인 이분의 무덤 옆에서 우리 맹세합시다! 그분의 유언을 잊지 말 것을,. 그리고 우리 모두 우리 조국의 재난의 씨앗을 묻을, 조국을 압박하는 악의 무리, 즉 전제를 매장할 무덤을 파도록 합시다! 지치지 말고 파도록 합시다!" "체포하라!" 경찰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고함소리에 파묻히고 말 았다. "전제타도!" 경찰들이 군중을 밀치고 연설을 한 사람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빽빽 이 둘러싸여 손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자유여, 만세!" 어머니는 사람들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 잔뜩 겁에 질려 십자가에 딱 붙어서 돌발적 인 사태를 기대하며 눈을 감았다. 돌풍처럼 터져 나오는 함성에 정신이 다 아찔해질 정도로 발 밑의 땅이 흔들렸다. 바람과 공포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경찰의 호각소리가 허공 을 찢고 난폭한 명령의 목소리가 들렸으며 여인들의 히스테릭한 비명이 들렸다. 그런가 하 면 나무 울타리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마른 땅을 디디는 무거운 발소리가 둔탁 하게 울렸다. 한동안 계속되었다. 어머니는 참을 수 없는 두려움에 두 눈을 꼭 감고 선 채 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두 손을 앞으로 뻗으면서 내달렸 다.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무덤들 사이 좁은 길에서 경찰들이 장발의 사내를 에워 싸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사람들을 마구 패며 물리치고 있었다. 허공에서는 경찰들이 뽑아 든 칼들이 사람들의 머리 아래위로 쌩쌩거리며 번뜩이고 있었다. 몽둥이들, 벽돌조각들이 마구 날아다니고 서로 뒤엉킨 사람들의 비명이 야만적인 춤을 추며 빙글빙글 돌았다. 젊은 이의 창백한 얼굴이 갑자기 나타났다. 악의에 찬 분노의 돌풍 위로 그의 신념에 찬 목소리 가 울려 퍼졌다. "동지들! 무엇 때문에 기력을 낭비하십니까?" 그의 승리였다. 사내들은 막대기를 집어 던지고, 하나 둘 군중에서 떨어져 나갔다. 어머 니는 믿기 힘든 힘으로 겨우 앞으로 빠져 나갔다. 그리고 모자를 뒤통수 쪽으로 삐딱하게 눌러쓴 니꼴라이가 완전히 악이 바친 사람들 쪽으로 물러서는 것을 보았다. 그의 질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들 정신 나갔소! 진정들 해요!" 그의 한 쪽 손이 뻘겋게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니꼴라이 이바노비치, 도망쳐!" 그녀가 그에게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그리 가면 경찰들한테 맞게 돼요..." 소피야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모자도 쓰지 않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거의 어린애라고 한 젊은이를 잡고 있었다. 그는 맞아서 피가 흐르는 이마를 손으로 훔치고 떨리는 입술로 중얼거렸다. "놓아주세요, 아무렇지도 않은 걸요..." "이 아이 좀 맡아 주세요.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가세요! 여기 손수건이 있어요, 얼굴을 싸 매세요..." 소피야는 젊은이의 손을 어머니의 손에 넘겨주면서 빠르게 말하고는 이런 말을 남기고 앞 으로 뛰어 나갔다. "얼른 빠져 나가세요. 체포될 거예요..." 사람들은 공동묘지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들 뒤를 따라서 경찰들이 우왕좌왕 무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무거운 군화소리가 울리고 군복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마구 욕지거리를 해대는가 하면 칼을 휘두르기도 했다. 젊은이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쫓았다. "얼른 가자꾸나!" 어머니가 손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 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젊은이가 피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아프지 않아요. 그 놈이 절 칼자루로 후려쳤어요... 그래서 저도 그 놈을 막대기로 후려갈겼지요, 뭐! 그 놈도 비명을 지르더군요..." 그리고 피 묻은 주먹을 휘두르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두고 보자, 예전의 우리가 아닐테니. 네 놈들을 주먹 한 방 쓰지 않고 죽여 버릴테다. 우리 전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나는 날에!" "서둘러!" 어머니가 공동묘지 담장에 조그맣게 나 있는 쪽문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울타리 너머 들판에 경찰들이 숨어 있다가는 느닷없이 덮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경찰들이 보 이기만 하면 몸을 날려 한바탕 붙어 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바깥 들 판을 살펴보니 회색 옷을 차려 입은 가을 황혼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너무나도 고요하 고 적막해서 금방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우선 네 머리부터 동여매자꾸나." 그녀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전 부끄러워요. 한 일이 없거든요. 정당한 싸움이었어요. 그 놈이 저 를 치고, 전 그 놈을 치고..." 어머니는 서둘러 상처를 동여맸다. 흐르는 피를 보자 어머니의 가슴은 안쓰러움으로 한없 이 저미었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피의 축축하면서도 따뜻한 촉감에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젊은이의 손을 잡은 채 서둘러 들판을 가로질렀다. 헝겊 사 이로 입을 삐죽이 내밀고서 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절 어디로 끌고 가십니까, 동지?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러나 어머니는 그가 비칠거리고 다리는 풀려 후들거리고 두 팔은 힘없이 축 늘어져 있 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가 맥빠진 목소리로 말하더니 대답할 새도 주지 않고 물었 다. "전 양철공 이반입니다만, 당신은 누구시지요? 이고르 이바노비치가 이끌던 모임엔 양철 공이 셋 있었고, 모임 전체로 치면 모두 열둘이 있었지요. 정말 우린 그분을 사랑했어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비록 제가 하느님을 믿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어머니는 거리에서 마부를 불러 이반을 마차에다 태우고 그에게 속삭였다. "이제 입을 조심해야 해." 그리고 손수건으로 그의 입을 감쌌다. 그는 손을 얼굴로 가져 가 보았지만, 이미 입을 자유롭게 놀릴 수는 없었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팔을 무릎 위에 맥없이 떨어뜨렸다. 그러면서도 연신 수건을 통해서 무어라고 중얼 거렸다. "전 당신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오늘의 이 뭇매를 잊지 않을 겁니다... 이고르가 우릴 가르치기 전까지는 찌또비치라는 학생이... 정치경제학을 가르쳐 주었답니 다... 그러다가는 그 사람도 붙잡혀 갔지요..." 어머니는 이반을 껴안고 그의 머리를 가슴으로 바투 끌어당겼다. 갑자기 젊은이의 몸이 축 처지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어머니는 공포에 질려서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사 방을 곁눈질로 힐끔힐끔 쳐다볼뿐이었다. 골목 어딘가에서 경찰이 튀어나와 이반의 상처 난 머리를 보고 그를 우악스럽게 붙담아 마구 매질을 가할 것만 같았다. "술에 취했소?" 마부가 얼굴엔 인자한 미소를 듬뿍 담은 채 마부석에서 몸을 돌리며 물었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셨답니다!" 어머니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들이오?" "예, 제화공이랍니다. 난 식당에서 일합니다..." "힘드시겠습니다, 정말..." 말에 채찍을 휘두르고 나서 마부는 다시 뒤를 돌아보고 한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 었다. "그런데 방금, 혹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공동묘지에서 치고 받고 난리였다는군 요... 이를테면, 여태껏 반정부 활동을 해온 탓에 정부가 일찍이 점찍어 놓았던 그런 사람 가운데 어떤 정치적 인물의 장례식이 있었대요. 뜻을 같이 하던 사람들이 그를 묻었지요. 암,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런데 거기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답니다. <전제타도!> 라고 말이지요. 이유인즉, 정부 때문에 민중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는 거예요... 경찰들이 사람들을 개패듯 패기 시작했지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정말 죽이겠다고 덤벼들어 패더라는 거예요. 경찰도 이젠 끝장예요..."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슬픔에 잠긴 듯 고개를 흔들며 이상스런 목소리로 말을 했다. "놈들은 죽은 사람에게도 고통을 주고 이미 잠든 사람 또한 깨우고도 남을 놈들이지요." 마차가 자갈길을 달리느라 몹시도 털털거렸고, 그럴 때마다 이반의 머리가 어머니의 가슴 에 살며시 부딪쳤다. 마부가 반쯤 돌아앉은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민중들이 동요하고 있고, 머지않아 봉기가 일어나고 말 겁니다. 암요. 어젯밤만 해도 우 리 이웃집에 헌병들이 들이닥쳐 밤새 난리를 피우더니만 아침에 편자공 한 사람을 잡아갔답 니다. 사람들 말로는, 밤에 강으로 데려가서 몰래 물에 빠뜨릴 거라고 그러더군요. 정말 그 만한 사람도 드물 거예요..." "그 사람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편자공 말씀이신가요? 사벨리였는데 보통 예프첸꼬라고 부르곤 했답니다. 젊은 데다가 아는 건 또 얼마나 많았던지. 그러니 무얼 많이 알아도 안되나 봅니다. 그는 시간만 있으면 우리를 찾아와서 말을 걸곤 했어요. <당신들, 마부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지요. <아마 개도 우리보다는 나을 거요.>" "세워 주세요!" 어머니가 말했다. 이반이 마차가 갑자기 서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마부가 말했다. "아주 곤드레가 되었군, 젊은이! 에이그, 술, 그 놈의 술..." 간신히 마차에서 내린 이반은 몸을 비칠거리면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말했다. "괜찮아요, 혼자 걸을 수 있어요." 13... 소피야는 벌써 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권련을 입에 물고 어머니를 맞았는데, 그 모 양이 수떨하면서도 잔뜩 흥분해 있었다. 다친 사람을 소파에 뉘며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머리에 싸맨 수건을 풀고 이것저것 잡다 한 일을 처리해 나갔다. 담배연기 속에서 두 눈이 번뜩였다. "이반 다니로비치, 여기 환자가 실려 왔어요. 피곤하시겠어요, 닐로브나? 그리고 놀라셨 죠, 그렇죠? 이젠 좀 쉬세요. 니꼴라이! 닐로브나에게 포트와인 한잔 갖다 드려!" 어찌나 놀라운 일이었던지 어머니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가슴을 저미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내겐 신경 쓰지 말아요..." 하지만 상태로 보아 어머니는 사실 따뜻한 보살핌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옆방에서 손에 붕대를 감은 니꼴라이와 의사 이반 다닐로비치가 건너왔다. 온통 너절한 차림에 머리는 고슴도치처럼 산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젊은이에게로 다가가 허리를 구부리면서 말했다. "물 좀 가져와요, 아주 많이. 깨끗한 가제하고 약솜도." 어머니가 부엌으로 갔다. 그러나 니꼴라이가 왼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데리고 가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어머님한테 한 소리가 아니고 소피야한테 한 소리예요. 많이 놀라셨죠, 어머님? 그렇 죠?" 어머니는 그의 진지하면서도 정감 어린 눈길을 접하자 못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흐느 끼듯 소리쳤다.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었어, 니꼴라이! 놈들이 사람들을 마구 패대기를 쳤어. 패대기를 쳤다고!" "저도 보았습니다." 포도주를 따라 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니꼴라이 말을 이었다. "서로가 약간 흥분했던 거예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놈들이 비록 사람들을 사 정없이 두들겨 팼다지만, 제가 보니, 치명상을 입은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인 것 같더군요. 바로 내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지요, 그래, 전 그 사람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빼냈답니다..." 니꼴라의 얼굴과 목소리, 그리고 방안의 따뜻하고 밝은 분위기에 어머니는 어느 정도 마 음이 놓였다. 그녀는 감사하는 눈길로 그를 보며 물었다. "당신도 역시 맞았구려?" "전 무언가에 손이 걸리는가 싶더니만 살갗이 찢어져 있더군요. 차 드세요. 날씨도 찬데 너무 옷을 얇게 입으셨어요..." 찻잔을 집으려고 손을 뻗으니 손가락에 말라 붙은 핏자국이 엉겨 있는 게 눈이 띄었다. 자신도 모르게 얼른 손을 무릎 뒤로 감추었다. 치마도 축축했다. 두눈을 크게 뜨고 눈썹을 치켜 올리고서 그녀는 곁눈질로 자기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눈앞이 갑자기 아찔해지고 가슴 이 두근거렸다. (놈들이 혹 빠샤도 이 지경으로? 그러고도 남을 놀들이지.) 이반 다닐로비치가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조끼바람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니꼴라이의 조용한 질문에 자신의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굴에 난 상처는 별게 아닌데 두개골을 다쳤어. 심한 건 아니고, 하여튼 아주 건강한 친구야. 그런데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게 어떻겠어?" "무엇 때문에? 여기에 그냥 두세나!" 니꼴라이가 소리쳤다. "오늘하고 내일은 그냥 여기에 두어도 괜찮겠지만, 내 생각에 그 다음엔 병원에 제대로 입원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아. 이젠 왕진 올 시간도 없어. 자네도 공동묘지에서 있었던 일을 가지고 유인물을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 "물론이지!" 어머니는 조용히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어디 가세요, 닐로브나?" 그가 당황해 하며 어머니를 붙잡아 세우곤 말했다. "소피야 혼자 다 알아서 할 거예요." 그녀는 그를 쳐다보고 움찔 놀라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 몸도 온통 피투성이라서..." 자기 방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이 사람들의 침착함에 대해서, 끔찍한 일을 당하고서도 금방 참고 이겨내는 이들의 능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런 생각을 하 자 정신도 다시 맑아지고 두려움도 사라졌다. 환자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갔을 땐 소피야가 허리를 굽히고서 환자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짓이야, 동지!" "폐를 끼치게 되었군요." 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입다물고 있어, 그게 좋을 거야..." 어머니는 소피야 뒤에 서서 두 손을 그녀의 어깨에 올려 놓고 아픈 사람의 얼굴을 미소를 머금은 눈길로 쳐다보다가 그가 마차 안에서 무슨 헛소리를 했고 또 그 때문에 얼마나 놀랐 는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반이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그의 두 눈이 열병을 앓는 이의 눈처럼 불탔다. 그가 입술을 움직여 소리를 내다가 당혹스러운 듯 소리쳤다. "아... 정말 바보 같으니!" "자, 우린 이제 나갈게." 소피야가 그의 옷 매무새를 고쳐 주면서 말했다. "푹 쉬도록 해요." 소피야와 어머니는 부엌으로 가서 거기서 오랫동안 그날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 를 나누었다. 둘은 벌써 장래에 대한 확신을 갖고 기대했고 내일 할 일의 방법을 모색하면 서 그날의 일을 먼 옛날의 일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도 자신의 불만을 전혀 감추려 들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신경질적으로 몸을 꼼지락거리고 있던 의사는 자신의 가늘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힘을 주어 가면서 이야기를 했다. "선전이야, 선전! 요즘은 선전이 너무 없어. 젊은 노동자들이 옳아, 선동의 범위를 더욱 넓히는 일이 필요해. 노동자들이 옳아. 말하자면..." 니꼴라이가 찌푸린 얼굴을 해 가지고 그에게 대꾸했다. "도처에서 서적이 충분치 못하다는 불평의 소리가 일고 있는데도 우린 여전히 인쇄소 하 나 변변한 걸 갖고 있지 못해. 류드밀라는 이젠 거의 탈진한 상태여서 우리가 그녀를 도와 줄 사람을 구해 주지 못하면 그녀는 틀림없이 앓아 눕고 말 거야..." "그럼, 베소프쉬꼬프는 어때?" 소피야가 물었다. "그 사람은 시내에서 살 수가 없어. 새 인쇄소가 차려지지 않는 한 일을 할 수가 없다고. 그 사람말고 한 사람이 더 필요한데..." "내가 하면 안되겠소?" 어머니가 조용히 물었다. 모두 그녀를 쳐다보았다.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좋은 생각예요." 소피야가 소리쳤다. "안돼요. 어머님이 하시기엔 너무나도 힘든 일예요, 닐로브나! 그렇게 되면 시내를 벗어 나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빠벨 면회 가시는 것도 그만두셔야 해요. 그리고 대개..." 니꼴라이가 매정하게 잘라 말했다. 어머니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빠샤를 위해서도 그리 크게 나쁠 것도 없는 일이라오. 면회를 해 보았댔자 찢어지느니 가슴이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요. 바보처럼 아들을 마주하고 서 있고, 간수놈들은 입만 쳐다보면서 혹 무슨 쓸데없는 소리나 하지 않을까 귀를 곤두세우고 있으니..." 최근의 사건들로 인해 심신이 피곤하던 터에 지금 도시의 이런저런 사건에서 멀리 벗어나 도시 밖에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렇게 하고 싶 었다. 그러나 니꼴라이가 화제를 바꾸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이반?" 그가 의사를 보고 물었다. 떨구었던 고개를 들면서 의사가 언짢은 기분으로 대꾸했다. "우린 수가 너무 적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한결 정열적으로 일할 필요가 있어... 빠벨과 안드레이를 설득해서 탈옥시켜야만 해.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감옥에 틀어박 혀 있다는 건 우리에겐 너무나도 큰 손실이야..." 니꼴라이가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어머니를 한번 힐끔 쳐다 보았다. 그녀는 그들이 자기가 있는데서 그녀의 아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거북살스럽 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자기 방으로 건너갔다. 그녀의 가슴 한구석엔 그들이 그녀의 바람에 대해서 냉대하는 것 같아 왠지 그들에 대한 남모르는 모욕감이 일었다. 뜬 눈으로 침대에 누워 있자니 나지막한 속삭임이 들려 오는 게 불안했다. 지난날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였고 상서롭지 못한 징조들로 가득 차 있어서 아들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우울한 인상들은 모두 떨쳐 버리고 빠벨에 대해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정말 아들이 자유의 몸이 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함과 동시에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녀는 그녀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이 점점 첨예화되고 격렬한 충돌이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사람들의 무언의 인내에도 이젠 한계가 생겨 격분이 눈에 띄게 고조 되고 신랄한 말들이 울려 퍼지며, 도처에서 뭔가 새로운 동요가 일고 있었던 것이다. 선전 삐라가 나돌 때마다 시장바닥에서, 상점가에서, 그리고 하인들과 직공들 사이에서도 격렬한 견해들이 나타났고, 누군가 체포라도 되는 날이면, 맘놓고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짙 은 의혹들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 때로는 체포 동기에 대한 동정의 견해들이 무의식적으로 일었다. 가면 갈수록 자주 그녀는 예전엔 그녀 자신이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폭동이 니 사회주의니 혁명 운동이니 하는 말들이 일반사람들 사이에도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는 사 실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그들이 제대로 그런 말들을 사용하지 못하고 우스갯소리처럼 사 용한다고는 해도 그 이면엔 뭔가 알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자리하고 잇었고 또한 증오심과 더불어 공포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희망과 위협이 뒤섞인 채로 고정된 어두운 삶에서도, 느리지만 광범위한 원을 그리며 동요가 머리를 들고, 잠자던 생각들이 깨어나고, 매일매일 의 사건들에 대해서 일상적이면서도 태평하게 대하던 태도들이 밑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었 다. 이 모든 것들을 그녀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명확히 보았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보 다도 삶의 비참한 얼굴을 훨씬 잘 알고 있었고 얼굴에 패여 있는 망설임과 격분의 주름살을 누구보다도 정확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런 것들이 기쁘기도 하거니와 자신 이 생각해도 놀랍기까지 했다. 기쁨의 원인은 다름아닌 그저 이 일을 자기 아들의 일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면서도 만약에 아들이 감옥에서 나와 모든 사람들의 앞에 서고 그러다 보 면 가장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을 생각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더욱이 그것은 죽음을 의미했던 것이다. 가끔 아들의 형상은 그녀의 눈앞에 옛날 이야기에나 나오는 영웅의 모습으로 떠올라 마치 그녀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모든 고결하고 용감 무쌍한 말들, 그녀가 마음에 꼭 들어 했던 모든 사람들, 그녀가 알고 있던 영웅적이고 밝은 그 무엇을 모두 자신 안에 하나로 결합시 키기나 한 것 같은 착각 속으로 그녀를 빠뜨리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감정이 복받 쳐 어쩔 수 없는 자부심에 나직한 환호성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생각에 도 취된 나머지 희망에 가득 차서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모든 일이 잘될 거야, 모든 일이!) 그녀의 사랑, 곧 어머니의 사랑이 거의 고통이랄 수 있을 정도로 가슴에 강한 불길을 던 져 인간적인 면의 성장을 방해하고 결국엔 그것을 불태워 버렸으며, 위대한 감정의 자리인 불안의 잿더미 속에선 이런 우울한 생각이 겁먹은 듯 몸부림쳤다. (빠샤는 죽게 되겠지..., 파멸하게 될 거야...) 14... 정오쯤에 어머니는 감옥 면회실에서 빠벨과 마주앉아 눈물 어린 눈으로 그의 수염 난 얼 굴을 바라보며 손가락 사이에 꽉 쥐고 있던 쪽지를 그에게 전해 줄 기회만은 엿보고 있었 다. "전 잘 지내요. 모두들 별일 없겠죠. 어머니는 어떠세요?"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잘 지내고 있단다. 이고르 이바노비치가 죽었어." 그녀가 무심코 말했다. "예?" 빠벨이 소리를 치더니만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장례식 날에 경찰이 마구 폭력을 휘두르다가 급기야는 사람 하나를 잡아갔단다." 그녀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감옥 부간수가 당혹스러운 듯 얇은 입술을 삐죽이다 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말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다 알 만한 양반들이! 정치적인 문제를 거론해서는 안됩 니다..." 어머니 역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치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고 난 그저 싸움이야기를 한 것뿐이오. 사실 싸움이 있었어 요. 정말입니다. 심지어 한 친구는 머리를 다치기까지 했어요..." "마찬가집니다. 조용히 하세요. 이를테면 사적인 얘기, 가족이나 집 얘기말고는 하지 마 시오." 부간수는 난처해졌는지 자기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면서 우울한 어조로 귀찮은 듯 덧붙였다. "모두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 책임이라고요..." 어머니는 주위를 둘러보고 재빨리 빠벨의 손에 쪽지를 찔러 넣어 준 다음, 홀가분한 마음 으로 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빠벨이 미소를 지었다. "저도 역시 말문이 막히네요..." 간수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럼 너희는 뭣 하러 왔소? 할 얘기도 없으면서 괜히 면회는 와서 내 신경만 건드리 고..." "재판이 곧 열릴까?"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어머니가 물었다. "며칠 전 검사가 왔었는데 곧 열리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만..." 그들은 서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말들을 나누었다. 어머니는 빠벨이 사랑을 듬뿍 담은 부드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예전이나 다름없이 침착하고 태연 한 게 전혀 변한 데가 없었다. 다만 수염이 길게 자랐고, 팔목이 야위어 나이가 한결 들어 보였다. 어머니는 그를 즐겁게 해 주고 싶었고 또 베소프쉬꼬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목소리를 전혀 바꾸지 않고 똑같은 어조로 쓸데없고 아무런 재미도 없는 이야기를 하듯이 말을 이어 나갔다. "일전에 네 교자를 만났단다..." 빠벨이 말없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길로 어머니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베소프 쉬꼬프의 곰보자국 난 얼굴을 상기시켜 주느라고 손가락으로 자기 볼을 콕콕 찍었다. "별일 없이 잘 지낸다, 몸도 건강하고. 그리고 곧 일자리도 구하게 될 게다." 아들이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눈에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그것 참 잘됐네요." "그래, 그래!" 그녀는 아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는 생각에 너무나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작별인사를 나누면서 그는 어머니의 손을 힘있게 잡았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아들에 대한 애정 어린 친근감이 취기가 돌 듯 가슴에 밀려 왔다. 어머니는 도저히 대답 할 기운이 없어 무언의 악수로 대신했다. 집에서 그녀는 사샤를 만났다. 그 처녀는 어머니가 빠벨을 면회하고 오는 날이면 어김없 이 닐로브나의 집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결코 빠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고, 만약에라도 어머니가 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라치면 그냥 어머니의 얼굴만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 더 이상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어머니를 보자마자 질문을 던 지며 유난을 떨었다. "그는 잘 있어요?" "그래 아주 건강하더구나." "쪽지는 전하셨겠죠?" "물론이지! 아주 감쪽같이 찔러 넣었지..." "그가 읽어 보던가요?" "거기서? 그럴 수야 없었지." "그래요. 제가 잠시 깜빡했어요." 처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한 주일 더 기다려야겠군요, 한 주일 더! 그가 동의할 것 같던가요?"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어머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잘은 모르겠다만..." 어머니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별 위험만 없다면야 왜 도망치기를 거부하겠냐?" 사샤는 고개를 젓고는 무뚝뚝하게 물었다. "환자한테 뭘 먹어야 할지 아세요? 배가 고프다는군요." "아무거나 괜찮아, 뭐든! 내가 곧..." 그녀는 부엌으로 갔다. 사샤도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도와드릴까요?" "고맙군!" 어머니가 뻬치까 위로 허리를 굽혀 냄비를 집었다. 처녀가 조용히 말했다. "잠깐만요..."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두 눈은 슬픔에 잠겨 휘둥그래졌다. 그리고 파르르 떨리는 입 술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격렬한 어조였다. "어머니께 부탁이 있어요. 전 그가 동의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요. 그를 설득시켜 주세 요. 그는 정말 없어선 안될 사람예요. 그러니 그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가 절대적으로 우리 일에 필요하고 또 혹 병이나 나지 않을까 제가 걱정하고 있노라고 말예요. 아시잖아요. 재 판이 여지껏 열리지 못하고..." 너무나도 힘들게 이야기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녀는 똑바로 서서 한 쪽 옆을 바라보 고 있었다. 목소리는 불규칙하게 울렸다. 피로한 듯 눈썹을 내리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 고, 꽉 움켜쥔 주먹에서는 심지어 뼈마디 소리가 들리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처음엔 그녀의 갑작스런 감정폭발에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지만 이내 그 감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슬픈 감정에 사로잡힌 어머니는 격정적으로 사샤를 껴안고 나지막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 사랑스러운 것! 빠벨은 자신 외에는 어느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않을 거야, 어느 누 구의 이야기도." 둘은 서로 꼭 껴안고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사샤는 조심스럽게 자기의 어깨에서 어머니의 손을 내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어머니 말씀이 옳아요, 모두 부질없는 짓예요. 신경만 날카로워지고..." 그러더니 갑자기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참, 환자에게 먹을 걸 갖다 주어야지요..." 이반의 침대 옆에 앉아서 그녀는 걱정스러운 것이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머리가 많이 아파요?" "많이 아프지는 않아요. 단지 모든 게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에요. 그리고 기운이 없어 요." 황망히 담요를 턱까지 끌어다 덮으면서 이반이 대답했다. 그리고 밝은 빛에 눈이 부시기 라도 한 것처럼 눈을 게슴츠레 떴다. 자기 앞이라 그가 먹을 생각도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눈 치챈 사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이반은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굉장한 미인이군요!" 그의 눈은 맑고 명랑했으며, 이는 작고 고르며, 목소리는 아직도 천진스러웠다. "몇 살이지?" 어머니가 생각에 잠겨 물었다. "열일곱인데요..." "부모님은 어디 계시고?" "시골에요. 전 열살 때 학교를 마치자마자 이리로 왔어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동지?" 어머니는 이 동지란 말을 들을 때면 항상 허둥대고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는 웃으며 되물 었다. "이름은 알아서 뭘 해?" 젊은이가 잠시 당혹감에 말을 잊고 있다가 이내 설명을 했다. "저번에 말씀드렸었지요, 우리 모임에 나오던 대학생. 우리와 같이 책을 읽었던 사람인 데, 그가 항상 우리에게 노동자인 빠벨 블라소프의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곤 했어요. 알고 계시죠, 메이데이 시위행진에 대해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가 번쩍 뜨였다. "그분은 우리 당의 깃발을 처음 공개적으로 들어올린 분예요." 젊은이는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의 자랑스러워하는 태도가 어머니의 가슴에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와 닿았다. "저는 그때 거기 없었어요. 우린 그때 거기서 독자적인 시위행진을 벌이려고 생각했었는 데 그만 실패하고 말았어요. 그땐 우린 수가 너무 적었거든요. 하지만 올해는 해내고야 말 거예요. 두고 보세요." 그는 장래 닥쳐 올 사건을 생각하며 어찌나 흥분을 했는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는 숟가락을 공중에서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 블라소바란 분, 제가 말씀드린 그 어머니 말예요. 그분도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우리편이 되었어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정말 기적 같은 일이라는군요." 어머니의 얼굴에 가득 웃음이 피었다. 젊은이의 열정적인 찬사를 듣고 있자니 절로 기분 이 좋아졌던 것이다. 즐거우면서도 한편 멋쩍었다. 그녀는 심지어 자기가 바로 그 블라소바 라는 걸 말하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고서, 애수에 잠겨 자신을 애써 책망하며 속으로 중얼거 렸다. (아이구, 이 바보 같은 할망구 좀 보라지!) "더 먹어라! 좋은 일을 하려면 어서 몸이 나아야지." 그녀는 그에게 허리를 굽히면서 갑작스럽게 흥분을 못 이겨 말했다. 문이 열리고 눅눅한 가을 찬바람과 함께 소피야가 들어왔다. 얼굴이 벌건 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첩자놈들이 나를 무슨 부잣집 새색시나 되는 줄 아는지, 계속 날 주시하지 않겠어요. 정 말 그런 것 같더라구요. 난 이제 여기를 떠나야겠어요... 좀 어때, 바냐[이반의 애칭]? 빠 벨을 어때요? 닐로브나, 사샤가 왔군요?." 담배를 피워 물로 그녀는 잿빛 눈길로 어머니와 젊은이를 더듬으며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질문을 퍼부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쳐다보고 속으로 웃으면서 생각했다. (난 좋은 사람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왔어.) 소피야는 다시 이반에게 허리를 굽히더니 말했다. "빨리 나아야지, 도련님!" 다시 식당으로 들어가서는 거기서 사샤에게 말했다. "벌써 그녀는 3백 부나 준비해 놨더군! 그러다간 과로 때문에 몸을 해치고 말 거야. 그게 바로 영웅주의지. 사샤도 알겠지만,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고, 그들의 동지가 되고, 그들과 더불어 일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야?" "맞아요." 처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녁때 차를 마시며 소피야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닐로브나, 한번 더 시골에 다녀오셔야겠어요." "갖다 오지 뭐! 언제?" "3일쯤 후에요. 다녀오실 수 있죠?" "그럼..." "마차를 타고 가세요." 니꼴라이가 나직한 목소리로 충고해 주었다. "우편 마차를 세내세요. 그리고 되도록 지난 번하곤 다른 길로 가세요. 니꼴스끄 지방을 거쳐 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는 입을 다물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얼굴 표정은 그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 는 항상 침착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니꼴스끄를 지나가려면 길이 너무 먼데... 또 마차를 세내자면 비용도 너무 많이 들 고..." "다들 아는지 모르겠지만..." 니꼴라이가 계속했다. "난 이번 여행에는 전적으로 반댑니다. 거긴 지금 조용하지가 못해요. 벌써 체포가 시작 되었고 어떤 선생 하나가 잡혀 들어갔다는 말도 있어요. 좀더 신중할 필요가 있어요. 시간 을 두고 좀더 생각해 보는 것이..." 소피야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책자 배포하는 일을 거르지 않고 계속해 나가는 것도 우리에겐 중요한 일이야. 여행이 두렵지 않으시죠, 닐로브나?" 그녀가 불쑥 물었다. 어머니는 기분이 좀 언짢았다. "내가 언제 두려워한 적이 있었나? 처음에도 이 일을 전혀 두려움 없이 해치웠는데. 이제 와서 난데없는..." 어머니는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매번 두렵진 않느냐, 불편한 점은 없 느냐, 이 일, 아니면 저 일을 할 수 있느냐,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녀는 그런 말 속에 숨겨져 있는 강한 요구를 들어야 했고, 또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아무래도 자기를 경계하고 있고, 그들 서로간에 대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를 대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나한테 무섭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오. 당신들 서로는 두려움에 대 해서는 묻지 않아." 그녀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니꼴라이가 황망히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쓰고는 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당 혹감으로 빚어진 침묵에 어머니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미안한 마음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에게 뭔가 한마디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소피야가 그녀의 손을 어루 만지면서 조용히 말했다. "절 용서하세요. 다신 그런 소리 하지 않을께요." 어머니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만가 지나서 셋 모두는 시골여행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다정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15... 이튿날 새벽, 어머니는 우편 사륜마차에 몸을 싣고 가을비에 씻겨 내려간 도로를 따라 덜 커덩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습기 찬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흙탕물이 튀었다. 한편 마부석 에서 그녀를 향해 비스듬히 앉아 있던 마부는 명상에 잠기듯 코맹맹이 소리로 불평을 늘어 놓고 있었다. "제가 그 사람, 그러니까 형님보고 하는 말이, 우리 반으로 나눕시다, 했습지요. 그래서 우리는 나누기 시작했답니다..." 그는 갑자기 왼쪽 말에 채찍질을 가하며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이랏, 네 에미는 마녀다!" 살찐 가을 까마귀들이 벌거벗은 경작지에서 근심스러운 듯 뛰어다니고, 찬 바람이 휘파람 소리는 내며 그들을 덮쳤다. 까마귀들은 바람에 제 옆구리를 노출시키고, 바람이 깃털을 날 려 넘어뜨리려고 할 때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감힘을 쓰다가는 결국 푸드득 날개짓을 하 며 새로운 장소로 날아가곤 했다. "그런데 저를 속였어요, 그 사람이. 나중에 알고 보니 전 빈털털이지 뭡니까." 마부가 말했다. 어머니는 꿈을 꾸듯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머니의 머릿속에선 최근에 겪은 일련의 사 건들이 잇따라 떠올랐고 그 생각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어디고 자신이 끼어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전에는 삶이라는 것이 어딘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구 때문에, 또 무엇을 위해서 진행되는지도 모르는 채 흘러가 버렸다면, 지금은 많은 것들이 바로 그녀의 눈앞에서 벌어 지고 더욱이 그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녀의 가슴속에선 자신에 대한 불신과 만족, 그리고 의혹과 조용한 우수의 감정의 복잡하게 뒤얽혔다. 주위의 풍경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하늘에선 먹구름이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앞지르며 떠다니고, 길가엔 비에 젖은 나무들이 제 꼭대기를 나풀거리며 반짝이고, 들판과 언덕이 원 을 그리며 나타났다가는 다시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마부의 코맹맹이 소리, 마차방울 소리, 축축한 바람의 속삭임과 휘파람 소리가 마치 굽이 쳐 흐르는 시냇물처럼 하나로 모여 흘러갔다. "부자는 전국에서도 골 아플거예요. 정말 그럴 겁니다... 일단 착취를 시작하면 정부당국 이야 당연히 금방 친구가 되지요." 마부가 마부석에서 몸을 비비 틀며 중얼거렸다. 마차가 역에 도착했을 때 마부는 말을 풀고 절망적인 소리로 어머니에게 말했다. "한 5 꼬뻬이까는 주셔야 술이라도 한잔 걸칠텐데!" 어머니가 동전 한 닢을 주자 마부는 동전을 손바닥 위에서 톡톡 튀기면서 똑같은 어조로 어머니에게 말했다. "한 세 닢은 있어야 보드까 한잔이라도 걸칠 수 있고, 두 닢 정도 더 주신다면 빵 한조각 이나마 맛볼 수 있을텐데..." 정오가 지나서 어머니는 마차에 시달리고 추위에 떨다가 니꼴스끄 큰 마을에 도착한 다 음, 역사에 들어가 차를 시키고는 무거운 여행가방을 의자 밑에 밀어 넣고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창문을 통해서 밟혀 더러워진 융단과 같은 누런 잔디로 뒤덮인 그리 크지 않 은 광장과 지붕이 축 늘어진 짙은 잿빛의 관청건물이 내다보였다. 관청 현관 계단에는 턱수 염을 길게 기른 대머리 농부가 내의 하나만을 걸치고 앉아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돼지 한 마리가 꿀꿀거리며 잔디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듯 귀를 흔 들면서 돼지는 주둥이를 땅바닥에 처박고 연신 머리를 흔들었다. 먹구름이 떼를 지어 떠다니며 서로에게 마구 덤벼들었다. 사위가 어둑하고 침울하고 적적 해서 흡사 인생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갑자기 까자끄군 하사 하나가 말을 타고 광장으로 쏜살같이 달려와 관청계단 옆에다 밤색 말을 매고는 허공에 가죽채찍을 휘두르면서 농부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고함소리는 유리창 을 흔들 정도로 우렁찼지만 무슨 말인지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농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어 멀리 손짓을 하자, 하사는 말고삐를 답아당겨 농 부에게 주고는 손으로 울타리는 잡고 계단을 올라가 관청문으로 사라졌다. 다시 정적이 계속되었다. 말이 징 박은 발굽으로 두 번 부드러운 흙을 차 올렸다. 어린 소녀 하나가 역사 안으로 들어왔다. 짧고 노란 머리를 목까지 땋아 늘인, 동그란 얼굴에 상 냥스런 눈을 가진 소녀였다. 그녀는 손을 뻗어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쟁반에 접시들을 담아 가지고 입술을 깨물며 다가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면서 인사를 했다. "안녕, 귀염둥이 아가씨!" 어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소녀가 접시와 찻잔을 탁자에 올려 놓으면서 갑자기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강도를 잡았는데, 지금 이리로 데려오고 있는 중이랍니다." "어떤 강돈데?" "잘 모르겠어요..." "그가 무슨 짓을 했다든?" "잘 몰라요. 전 다만 잡았다는 말만 들었어요. 관청수위가 경찰서장을 부르러 달려갔어 요." 창 밖을 내다보니 광장에 농부들이 서성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천천히 혹 은 점잖게 왔다갔다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황망히 외투단추를 채우며 달음질을 치 기도 했다. 사람들은 모두 관청계단 옆에 멈추어 서서 왼편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소녀 역시 거리를 내다보고는 문을 소리나게 닫고 역사에서 뛰어나갔다. 몸을 한번 부르 르 떤 어머니는 여행가방을 의자 밑으로 깊숙이 밀어 넣고 숄을 머리에 두르면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좀더 빨리 걷거나 아니면 차라리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면서... 관청계단을 걸어 올라가던 그녀의 눈에 깜짝 놀랄 광경이 들어왔다. 심장이 멎고 숨이 막 히는 듯했으며 두 발 역시 말을 듣지 않았다. 광장 한가운데서 두 팔을 등뒤로 포박당한 르 이빈이 두 명의 경찰에 이끌려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놀란 어머니는 르이빈에 게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르이빈이 연신 무어라고 말을 하고 있어 그의 목소리는 들렸지만, 그 말들은 그녀 가슴 안에 패여 있는 전율하는 암흑의 공간 속에서 아무런 메아 리 없이 이내 그냥 사라졌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심호흡을 크게 해 보았다. 풍성한 은빛 수염을 기른 농부 하나가 계단 옆에 서서 푸른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었다. 기침을 한번 하고 두려움에 힘이 쭉 빠진 손으로 목을 만지면서 그녀는 용기백배하여 간신히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오?" "우선 좀 지켜 봅시다." 농부가 대꾸를 하고 돌아섰다. 농부 하나가 더 다가와 그들과 나란히 섰다. 경찰들이 군중 앞에 멈추어 섰고, 군중은 어느새 많이 불어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갑 자기 군중 머리 위로 르이빈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농부의 삶에 대한 진실이 씌어져 있는 신뢰할 만한 책들에 대해 서 혹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붙잡혀 고역을 치르는 건 바로 그 책들 때문 이랍니다. 내가 바로 그것들을 사람들에게 배포한 장본인입니다." 사람들이 르이빈을 더욱 빽빽하게 에워쌌다. 그의 목소리가 조용하면서도 침착하게 울려 퍼졌다. 어머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들어 본 얘기요?" 옆에 섰던 다른 농부가 푸른 눈을 가진 농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 는 묻는 말에 대답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더니 다시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옆에 섰던 다른 농부 역시 그녀를 쳐다보았는데, 그 농부는 푸른 눈의 농부보다 한결 젊어 보였고 까맣고 드문드문한 턱수염에 얼굴이 야위고 주근깨가 끼어 있었다. 그런 다음 두 농 부는 계단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무서워들 하고 있군!" 어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신경을 더욱 곤두세웠다. 계단 꼭대기에서 그녀는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새까만 미하일 이바노비치 르이빈의 얼굴을 또렷이 바라보며 그의 불타는 눈빛을 알아보았다. 그녀 는 르이빈도 자기를 알아보았으면 하는 마음에 발뒤꿈치를 들고 르이빈 쪽으로 목을 쭉 내 밀었다. 사람들은 찡그린 눈으로 미심쩍게 그를 바라볼 뿐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늘어서 있는 군중 뒤편에서 숨죽인 말소리가 간간이 들려 올 뿐이었다. "농부 여러분!" 르이빈이 가슴이 터질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책자들을 믿으시오, 여러분! 난 그 책자들 때문에 어쩌면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놈 들은 내가 그것을 어디서 구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때리고 가혹한 고문을 했습니다. 그러고 도 또 매질을 가할테지만 난 그래도 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책자들 안에는 진실이 담 겨 있고, 그 진실은 우리에게 있어 빵보다도 더 값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저 사람, 저런 말하는 이유가 뭐야?" 계단 옆에 서 있던 농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조용히 지껄였다. 푸른 눈의 농부가 천천히 대답했다.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다 부질없는 짓이지. 사람이 태어나 한 번 죽지 어디 두 번 죽는다 든가..." 사람들이 입을 꾹 다물고 흡사 길가에 버려진 육중한 돌멩이처럼 꼼짝 않고서 서로를 곁 눈질로 힐끔거렸다. 갑자기 하사가 계단 옆에 나타나더니 비틀거리며 술 취한 목소리로 불호령을 내렸다. "지금 지껄이고 있는 놈이 누구야?" 그는 느닷없이 계단에서 풀쩍 뛰어내려 와서는 르이빈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이리저리 흔 들면서 소리쳤다. "바로 네 놈이지? 그렇지? 이런 개새끼!" 군중들이 웅성거리며 서서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가눌 길이 없는 슬픔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다시 르이빈의 목소리가 울렸다. "자, 보시오! 선량한 사람들이..." "입닥쳐!" 하사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 르이빈이 비틀하더니 옆으로 고꾸라졌다. "그래, 네 놈들은 항상 사람 손을 묶어 놓고서 멋대로 깔고 뭉개는 놈들이지..." "경찰! 저 놈을 끌고 가. 그리고 나머지는 해산시켜!" 하사는 흡사 고깃덩어리 앞에 쇠사슬로 매 놓은 개처럼 르이빈에게로 달려들어 얼굴이며 가슴이며 배며 닥치는대로 주먹질을 해댔다. "때리지 마라!" 군중 가운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왜 사람을 때리는 거야?" 다른 목소리가 곧바로 뒤따랐다. "갑시다!" 푸른 눈의 농부가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둘은 전혀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관청 쪽으로 발걸음을 떼었고 어머니는 그런 그들을 선량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한시름 놓았 다. 하사가 다시 계단 위로 뛰어오르더니만 위협이나 하듯 주먹을 휘둘러 가며 미친 듯이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저 놈을 이리 끌고 와! 내 다시 말하는데..." "안돼!" 군중 속에서 힘있는 목소리 하나가 울렸다. 어머니는 그 목소리의 장본인이 푸른 눈의 농 부, 바로 그 사람임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냥 놔 두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그냥 놔 두면 놈들은 저 사람을 죽도록 때리고 나 서 필시 우리가 죽였노라고 할 게 뻔합니다, 그냥 놔 두어서는 안됩니다." "농부 여러분!" 르이빈의 목소리가 울렸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이 어떤 상태인지 보지도 못했습니까? 놈들이 어떻게 여러분을 약 탈하고 어떻게 속이며 또 어떻게 피를 빨아 가는가를 여러분은 모르고 있단 말입니까? 모든 일이 다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첫째가는 힘인 것입니다. 그 런데 도대체 여러분이 가진 권리가 뭐가 있습니까? 굶어 죽을 권리밖에 더 있습니까? 그게 여러분이 갖고 있는 유일한 권리 아닙니까?" 농부들이 갑자기 서로의 말을 가로채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다 옳은 소리야!" "서장을 불러! 서장은 어디 있는 거야?" 하사가 달려갔다. "술주정뱅이 같은 놈!" "어차피 한통속인데 불러서 뭐해..."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시끌시끌해졌다. "말을 계속 하시오! 우리가 때리지 못하도록 하겠소..." "손을 풀어줘아..." "이봐요들, 죄가 없다면야..." "이 손 좀 풀어주시오." 르이빈이 다른 목소리들을 압도하면서 침착하지만 우렁찬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난 도망치지 않습니다, 여러분! 난 나의 진실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진 실이 바로 내 몸 안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몇몇 사람이 군중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나와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 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꾸 불어났다. 대부분 서둘러 옷을 걸치고 뛰어나온 흥분된 얼굴의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이 르이빈의 주위에서 시커먼 거품과도 같이 들끓었다. 르이빈은 숲속 의 작은 예배당처럼 그들 사이에 서서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로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 려 가며 군중에게 소리쳤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우린 서로서로 도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우리 를 도와주겠습니까?" 그는 턱수염을 쓸어내리고 피투성이가 된 손을 다시 쳐들었다. "여기 내 피가 있습니다. 진실을 위해 흘린 피 말입니다!" 어머니는 계단을 내려갔다가 빽빽이 둘러싼 사람들 때문에 르이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다시 계단에 올라섰다. 가슴 안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솟아오르고 분명하진 않지만 뭔가 유 쾌한 것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보시오! 책자들을 찾아서 읽으십시오. 그리고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이 바로 신을 믿지 않는 폭도라고 지껄이는 정부와 사제들을 믿지 마십시오. 진리는 은밀하게 이 땅에 퍼져 민 중 안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중입니다. 정부당국에겐 진리란 칼이자 불이어서 그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허나 진리는 그들의 목을 베고 불태울 것입니다. 진리가 여러 분의 좋은 친구라면 정부당국에겐 철천지 원수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진리가 제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려 하는 것입니다." 다시 군중 속에서 몇 마디의 외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귀를 기울입시다, 여러분!" "아, 형제여! 그대는 죽게 될 것이오..." "누가 그대를 일러바쳤소?" "사제다!" 경찰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농부 둘이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봐요!" 뭔가 위험을 알리는 듯한 급박한 소리가 울렸다. 16... 얼굴이 동그랗고 키가 큰 건장한 체격의 지방 경찰서장이 군중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군모를 삐딱하게 쓰고 콧수염이 한 쪽은 치켜 올라가고 다른 한 쪽은 아래로 축 처져서, 얼 굴이 마치 애꾸눈 사내를 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무의미하면서도 죽은 미소를 짓고 있어서 아주 밉살스럽게 보였다. 그는 왼손엔 군도를 들고 오른손은 공중을 향해 마구 휘두르고 있 었다. 그의 군화발소리가 둔탁하면서도 억세게 들려 왔다. 사람들이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 사람들의 표정엔 우울하면서도 의기소침한 빛이 역력했고, 시끌벅적하던 아우성소리도 언제 그랬나 싶게 땅속으로 꺼져 버렸다. 어머니는 이마의 피부가 푸르르 떨리고 두 눈에 핏발이 서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군중 속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에 막 앞으로 몸을 숙이 려던 찰나, 흠칫 그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야?" 경찰서장이 르이빈 앞에 서서 그를 찬찬히 살펴보며 물었다. "이 자는 왜 묶지도 않았어? 이봐, 어서 묶어!" 그의 목소리는 우렁차고 카랑카랑했지만 별다른 특색은 없었다. "묶었습니다만 사람들이 풀어주었습니다." 경찰 하나가 대답했다. "뭐라고? 사람들? 누구를 말하는 거야?" 경찰서장은 자기 앞에 반원을 그리며 빙 둘러서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여전 히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게 누구야? 누구냐고?" 그가 칼을 크게 휘두르며 푸른 눈을 가진 농부의 가슴을 겨냥했다. "너야, 추마꼬프? 또 누구야? 미쉰 너야?" 그리고 오른손으로 옆에 선 사람의 턱수염을 잡아당겼다. "해산해, 버러지 같은 놈들아! 안 그러면 네 놈들한테 아주 본때를 보여줄테다!" 그의 목소리에도, 얼굴표정에도 흥분이나 협박의 기미는 전혀 담지 않고서 태연하게 이 야기하면서, 우악스럽고 긴 손으로 그저 그렇다는 듯한 동작으로 사람들을 밀쳤다. 사람들 이 고개를 떨구거나 딴데로 얼굴을 돌리고서 그에게서 멀찌감치 물러났다. "뭐야?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어서 묶어!" 그가 경찰들을 보고 소리쳤다. 아주 몰염치한 말로 마구 욕설을 퍼붓더니만 다시 르이빈을 쳐다보고서 큰소리로 말했다. "손을 뒤로 해, 이 새끼야!" "내 손을 묶을 필요까진 없소." 르이빈이 입을 열었다. "난 도망칠 생각도 없는데 손은 묶어서 뭐 한단 말이오?" "뭐야?" 경찰서장이 그에게 성큼 다가서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만큼 사람들을 괴롭히고도 성이 안 차냐,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아! 곧 네 놈들에게도 맑고 밝은 새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르이빈이 목청을 돋우며 말했다. 경찰서장이 그의 앞에 서서 콧수염을 씰룩이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더니만 한발짝을 물 러서서는 코맹맹이 소리로 놀라서 소리쳤다. "아니, 이런 개새끼! 뭐라고?" 그리고는 느닷없이 르이빈의 얼굴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주먹 가지고는 진리를 죽일 수 없다! 넌 날 칠 권리가 없어, 이 놈아!" 르이빈이 그에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권리가 없다고? 내게?" 경찰서장이 한마디 한마디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다시 그는 르이빈의 머리를 향해서 주먹을 날렸다.르이빈이 살짝 피하는 바람에 주먹이 허공을 갈러 경찰서장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크게 비웃 는가 싶더니 다시 르이빈의 격분한 외침소리가 울렸다. "다시 말하지만, 네 놈은 날 칠 권리가 없어. 이 망할 자식아!" 경찰서장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입을 꾹 다문 침울한 표정으로 더욱 빽빽이 모 여 섰다. "니끼따!" 경찰서장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큰소리로 불렀다. "헤이, 니끼따!" 짧은 외투 차림에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의 농부 하나가 군중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머리카락이 마구 헝크러진 큼지막한 머리를 떨구고서 땅을 쳐다보고 있었다. "니끼따!" 경찰서장이 콧수염을 비비 꼬면서 전혀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말했다. "이봐, 놈의 귀쌈을 보기 좋게 한 대 갈겨 줘!" 농부는 앞으로 발짝 나가 르이빈 앞에 서서는 고개를 쳐들었다. 르이빈의 엄중하면서 도 믿음직한 말이 그의 얼굴을 정통으로 강타했다. "자, 여러분, 똑똑히 보시오. 저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 어떻게 여러분 자신의 손으로 여 러분의 목을 짓누르게 하는지를! 똑똑히 보시오. 그리고 생각해 보시오." 농부는 천천히 손을 들어 르이빈의 머리를 힘없이 쳤다. "정말 그렇게 나올 거야, 이 개새꺄?" 경찰서장이 눈을 부라렸다. "헤이, 니끼따!" "하늘이 무섭지도 않냐!" 군중 속에서 여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명령이다, 후려갈겨!" 경찰서장이 농부의 머리를 밀면서 호통을 쳤다. 농부는 한 쪽으로 몇 발짝 비켜 서서는 고개를 떨구고는 침울하게 말했다. "더 이상은 못 하겠소..." "뭐라고?" 얼굴을 부를 떨던 경찰서장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는 욕지거리를 퍼부으면서 느닷없이 르 이빈에게 달려들었다. 첫 번째 주먹이 허공을 가르고, 르이빈은 손을 흔들며 몸을 낮추었지 만, 두 번째 주먹에 그대로 땅바닥에 나자빠졌다. 경찰서장은 펄쩍펄쩍 뛰며 가슴이며 옆구 리, 머리 할 것 없이 마구 발길질을 해댔다. 군중이 흥분한 나머지 술렁대기 시작하고 여기저기서 욕이 튀어나오기 시작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경찰서장에게 달려들기도 했다. 그러자 분위기를 간파한 경찰서장이 벌떡 일어나 칼집에서 군도를 뽑아 들었다. "네 놈들이 정말 그런다 이거지? 폭동을 일으키겠다고? 어, 어? 저 놈이 뭔데 그러는 거 야?"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째지는 듯한 소리가 나고 나중에는 목소리가 아주 쉬어 버렸다. 목 소리도 그렇고 그는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지 목을 움츠리고 등을 꾸부정하게 하고서, 사방 으로 눈을 돌리며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짚어 가면서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뒷걸음질치면 서 그는 목쉰 소리로 떨면서 소리쳤다. "좋아! 난 갈테니 어디 저 놈을 데리고 가 봐. 자, 네 놈들, 알기나 하는 거야? 이 저주 받을 놈의 개새끼들아! 저 놈은 정치범이다, 짜르에 반대해서 폭동을 일으킨 놈이라고, 알 기나 해? 그런데도 네 놈들이 저 놈을 두둔해, 엉? 네 놈들은 모두 폭도다! 아암!" 어머니는 두려움과 동정심에 휩싸인 채로 꼼짝도 않고 눈도 깜박이지 않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서 있었다. 마치 무서운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머릿속에선 성난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로 웅웅거렸고, 경찰서장의 목소리가 사뭇 떨렸으며, 그런가 하면 누군가의 속삭임도 느껴졌다. "그가 잘못을 저질렀으면 우선은 재판을 받게 해야 할 것 아냐!" "용서해 주시지요, 나리..." "대체 네 놈들은 뭐하는 놈들이야! 네 놈들에겐 법도 없단 말인가?" "누가 아니래? 다들 그런 식으로 때리기부터 해 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 사람들은 두 패로 갈라졌다. 한 패는 경찰서장을 에워싸고 서서 소리치기도 하고 또 그를 설득하기도 했다. 또 한 패는 수는 적어도 맞은 사람 주위에 남아서 볼멘소리로 침울하게 수군거리고 있었다. 몇몇 사람이 그를 땅에서 일으켜 세우려 하자 경찰들이 다시 그의 손을 묶으려고 했다. "잠깐 기다려, 이 빌어먹을 놈아!" 사람들이 경찰들에게 소리쳤다. 르이빈이 얼굴과 수염에 묻어 있는 진흙과 피를 말없이 훔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길이 얼굴을 스치자, 어머니는 깜짝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흔들면서 그에게로 몸을 쭉 내밀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그의 눈이 어머니의 얼굴에 와서 멎었다. 그가 머리를 쳐들고 허리를 곧추세우고서 선혈이 낭자한 두 뺨을 부르르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날 알아봤어. 아냐, 과연 날 알아봤을까?) 어머니는 슬픔과 어떤 야릇한 기쁨에 놀란 나머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푸른 눈의 농부가 르이빈의 옆에 서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음을 알았 다. 그의 시선과 마주친 순간 그녀를 닥쳐 올 위험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이러다간 나까지 잡혀 가겠군!) 농부가 무어라고 소곤거리자 르이빈은 머리를 젓고서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또박또박 용감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난 이 세상에서 혼자 몸이 아니고 놈들은 또 진리 전부를 잡아 처넣지는 못할테니까 말이오. 내가 살던 곳에는 나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그들이 보금자리를 박살냈다지만 그 곳에선 더 많은 친구이자 동지들이 생겨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구나!) 어머니는 얼른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독수리들이 자유롭게 창공을 날고 민중들은 해방될 것입니다." 어떤 여인이 물통을 들고 와 목놓아 울면서 르이빈의 얼굴을 씻어 주었다. 그녀의 가냘프 면서 애처로운 목소리가 르이빈의 말과 뒤섞여서 어머니는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가 없었다. 한 패의 농부들이 경찰서장 앞으로 걸어 나와서는 그 가운데 누군가가 크게 소 리쳤다. "자, 나도 체포해 가시오. 또 누가 같이 가겠소?" 이어 종전과는 달리, 한결 비굴해진 경찰서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네 놈을 칠 수 있어도 네 놈은 날 칠 수 없을 거다, 이 무식쟁이야!" "그래서! 네 놈은 무슨 신이라도 된다더냐?" 르이빈이 소리쳤다. 이때 그리 크지 않은 흐트러진 외침소리가 그의 목소리를 덮어 버렸다. "말대꾸하지 말아요, 아저씨! 그건 곧 정부당국에 거스르는 행위예요!" "진정하십시오, 나으리! 이 사람은 정신이 나간 사람예요..." "입닥치지 못해, 바보 같은 놈아!" "가능한 한 곧 너를 시내로 호송하겠다." "거기에 가면 법이야 있겠지." 뭔가 애원하고 간청하는 듯한 군중의 함성이 분명치 않은 허망함에 뒤섞여 절망적이고 애 처롭게 들렸다. 경찰들이 르이빈의 팔을 잡고 관청 현관으로 끌고 올라가 문을 꽝 닫고는 사라져 버렸다. 농부들이 광장 여기저기로 느릿느릿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푸른 눈 의 농부가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면서 곁눈질로 자기를 힐끔거리는 것을 보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음울한 감정이 가슴을 저며 와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도망칠 필요가 없지, 없어!) 그리고 층계 난간을 꼭 잡고서 무작정 기다렸다. 경찰서장이 관청 게단 위에 서서 두 손을 내저으면서 지껄이고 있었다. 여전히 목소리는 공허하고 인정머리가 없었다. "머저리 새끼들아! 뭐가 뭔지도 모르는 것들이 이런 일에 끼어들어? 정부가 하는 일에! 짐승 같은 놈들! 나보고 고맙다고 해야 해. 무릎을 꿇고 내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고. 내 말 한마디면 모두 중노동이라는 거 몰라?" 스무명 남짓한 농부들이 모자를 벗고 서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점점 어둠이 짙게 깔 리고 먹구름마저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푸른 눈의 농부가 계단을 걸어 올라오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큰 일 하나 치렀군요..." "그래요." 그녀가 나지막이 대꾸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뭐하시는 분이죠?" "여자들 레이스를 사러 다닙니다, 베천도 사고요..." 농부는 천천히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곤 관청 쪽을 둘러보더니 크지 않은 목소리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여기선 그런 거 살 수 없을텐데요..." 어머니는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역사로 다시 들어갈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농부의 얼굴 은 아주 잘생기고 생각이 깊어 보였으며 눈은 어딘지 음울해 보였다. 넓은 어깨와 건장한 체격의 그는 헝겊 조각을 댄 외투를 입고 있었고 안에는 깨끗한 면내의에다 집에서 손수 박 은 것 같은 바지를 입고 잇었으며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어머니는 왠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갑자기 어떤 어렴풋한 생각이 떠올라 이 렇게 물었다. 물론 자신도 그래 놓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오늘 댁에서 하루 묵어도 괜찮겠소?" 그런 질문을 해 놓고 나니 근육과 뼈마디가 저려 왔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잡고 농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섬뜩한 생각이 불현 듯 머리를 스쳤다. (내가 니꼴라이 이바노비치를 파멸시키는 건 아닐까? 빠샤를 다신 못 볼지도 몰라! 어쩌 면 놈들이 모두를 잡아 죽일지도...) 땅을 쳐다보고 있던 농부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외투자락을 여미며 대답했다. "하룻밤 묵으시겠다고요? 좋아요, 안될 게 뭐 있겠습니까? 다만 집이 누추한 게 탈이 지..." "난 그런 거 가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머니는 되는 대로 대답했다. "좋도록 하십시오." 농부는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그녀를 훑어보며 반복했따. 이미 어둠은 짙어져 그의 두 눈이 더욱 차갑게 번뜩였고 얼굴은 매우 창백해 보였다. 어 머니는 흡사 산을 내려가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럼 곧 갈테니 내 여행가방 좀 들어다 주시오..." "좋습니다." 그는 어깨를 추켜 올리고 다시 외투자락을 여미면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저기 마차가 오는군요..." 관청 계단에 르이빈이, 두 손을 다시 묶이고 머리와 얼굴에는 뭔가 희끗한 것을 감은 모 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안녕히들 계시오, 여러분!" 그의 목소리가 저녁 어스름의 한기 속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진리를 찾아 그것을 간직하시오. 그리고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을 믿고 진리를 위한 일에 자신을 바치기를 두려워하지 마시오." "입 닥쳐, 이 개새꺄!" 어디선가 경찰서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찰! 말 빨리 안 몰고 뭐하는 거야. 이 머저리 같은 놈아!" "무엇이 당신들을 슬프게 합니까? 당신들의 삶은 대체 어떻습니까?" 마차가 출발했다. 양 옆에 경찰 둘을 앉히고 르이빈은 계속해서 소리쳤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굶어 죽어 갑니까? 자유를 위해 투쟁하시오. 자유가 빵과 진리를 줄 것입니다! 안녕히들 계시오, 여러분!" 마차바퀴 소리, 말발굽 소리, 경찰서장의 목소리가 그의 말을 휘감아 혼란시키고 급기야 는 덮쳐 버렸다. "물론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한 농부는 다시 어머니를 보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역사에 조금만 앉아 계세요. 제가 곧 가겠습니다..." 어머니는 역사로 돌아와 사모바르 앞에 놓여 있는 탁자에 앉아서 빵 한 조각을 집어 들고 들여다보다가는 도로 접시에 천천히 갖다 놓았다.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명치 끝 이 다시 쓰려 왔다. 속이 메스꺼워 기운이 쪽 빠지고 심장에선 피가 말랐으며 정신이 아찔 아찔 했다. 눈앞에 푸른 눈을 가진 농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뭔가 석연치 않은 탓에 왠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가 어쩌면 배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 슴 깊은 곳에 잠재하고 있어 자신도 모르게 숨이 자꾸 막혔다. (그가 날 알아본 게 분명해! 뭔가 낌새를 챈 거야...) 이렇게 생각하자 온몸의 기운이 일순간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더 이상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참기 힘든 우울함, 그리고 질펀한 구토의 감 정 속으로 점점 빠져 들 뿐이었다. 조금 전의 왁자지껄함을 대신해서 창 밖에 흐르는 겁먹은 정적이 짓밟히고 겁에 질린 무 엇인가를 발가벗기고 가슴 안에 고독감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하면서 온통 머리를 잿빛으 로 부드러운 어스름으로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까 그 소녀가 들어와 문 옆에 서서 물었다. "계란 부침 좀 갖다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별로 생각이 없구나. 그냥 고함소리에 조금 놀랐을 뿐이란다." 소녀가 탁자로 다가와 흥분했지만 그래도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경찰서장이란 작자, 얼마나 심하게 때리던지! 전 가까이서 다 보았는데, 이빨이 다 부러져서 침을 퉤 뱉으니까 정말 시꺼먼 피가 튀었어요. 보니까 눈도 안 보이던데 아마 빠 져 달아났을 거예요! 하사 그 사람 여기 이 자리에서 술을 곤드레가 되도록 마셨는데 그래 도 계속 술을 달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 사람들 패거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 도 수염을 기른 사람이 나이도 제일 많고, 말하자면 대장격이라더군요. 들리는 말에 의하 면, 세 사람이 잡히고 한 사람이 도망갔다던가. 선생도 한 명 잡혔는데, 그 선생도 그때 그 들과 함께 있더래요. 그 사람들은 하느님도 믿지 않을뿐더러 만나는 사람마다 교회를 헐라 고 설득한다더군요. 정말 그런 사람들이래요. 농부들이 두 패로 나뉘어, 한 패는 그들을 동 정하는데, 한 패는 그들을 죽여 버려야 한다고 말한답니다. 이곳엔 그런 표독스러운 농부들 도 있어요, 에그머니나!" 어머니는 소녀의 빠르면서도 두서 없는 이야기에 온 신경을 집중시켜 귀기울이면서 자신 의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우울한 예감을 지워 버리려고 애썼다. 소녀는 아마도 남이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걸 꽤나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숨까지 헐떡여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마구 지껄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그러는데, 이게 다 흉년이 든 탓이래요. 2년이나 연거푸 흉작이니 오죽 기진맥 진들 했겠어요. 요즘 그 때문에 그런 농부들이 생긴 거래요. 얼마나 끔찍한 일예요. 집회 때면 언성 높여 싸우는 일은 예사예요. 최근에 체납금 때문에 바슈꼬프란 사람이 팔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사람이 책임자의 면상을 후려갈겼답니다. 이게 네 놈한테 줄 체납금이 다, 하면서요..." 문 밖에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손으로 탁자를 집고서 자리에서 일어 났다. 푸른 눈의 농부가 들어와서는 모자도 벗지 않고 대뜸 물었다. "짐은 어디 있습니까?" 그는 여행가방을 가볍게 들어올려 흔들어 보면서 말했다. "속은 비었군요! 마리까, 우리 집으로 안내 좀 해 드려." 그러고 나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여기서 하룻밤 묵으실 거예요?" 소녀가 물었다. "그래! 난 레이스를 취급하는데, 여기서 레이스를 좀 살 수 없을까하고..." "우리들은 레이스를 뜨지 않아요. 찐꼬프라든가 다리이나에나 가야 있을까 여긴 없어요." 소녀가 설명해 주었다. "내일 가 보도록 하지..." 찻값을 소녀에게 지불하면서 3 꼬뻬이까를 집어 주니 소녀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거리에 나와서 소녀는 맨발로 젖은 땅을 소리나게 밟아 가며 입을 열었다. "원하신다면 제가 다리이나로 달려가서 레이스 좀 이리 가져 오시라고 거기 아는 아주머 니께 말씀드릴께요. 그럼 일부러 거기까지 가실 필요는 없잖아요. 기껏해야 12 베르사따밖 에 안되는데요..." "그럴 필요까진 없단다, 얘야!" 어머니가 소녀 옆에서 나란히 걸음을 옮겨 놓으면서 대꾸했다. 찬 공기를 쐬자 정신이 맑 아지면서 무언가 어렴풋한 결심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었다. 혼란스럽긴 하지만 일단 마음속 에서 정리가 되니 어쩔 도리없이 거듭거듭 다짐하면서 자신에게 이악스럽게 반문했다. (어쩐다? 내가 진정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날은 어둠고, 습했으며 싸늘했다. 농가 창문들이 꼼짝도 하지 않는 불그레한 빛처럼 희미 하게 반짝거렸다. 정적 속에서 졸린 듯한 가축의 울음소리와 짧은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어둡고 짓눌린 묵상이 마음을 뒤덮고 있었다. 소녀가 말했다. "여기예요! 너무 초라한 숙소를 택하셨군요.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거든요." 소녀는 문을 더듬어 찾아내고는 활짝 열어젖뜨리고 안채를 향해서 입심 좋게 소리쳤다. "따찌야나 아줌마!" 그리고는 어느새 줄행랑을 놓았다. 어둠 속에서 소녀의 목소리만 들려 왔다. "안녕히 계세요." 17... 어머니는 문턱에 서서 이마에 손을 올리고 주위에 살폈다. 농가는 어둡고 협소했지만 깨 끗하게 정돈되어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뻬치까 뒤에서 젊은 여인이 빠끔 내다보고는 말없이 인사를 하고 다시 사라졌다. 방 앞쪽 구석에 놓인 탁자 위에서는 남포불이 타고 있 었다. 농가 주인이 탁자 앞에 앉아 그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면서 어머니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들어오십시오. 따찌야나, 가서 뾰뜨르 좀 불러오구려, 얼른!" 여인은 손님을 거들떠볼 생각도 않고 서둘러 걸어 나갔다. 어머니는 주인 맞은편 긴 의자 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여행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가끔 남포등의 불꽃이 탁탁 소리를 탈 뿐, 농가는 참기 힘든 정적으로 뒤덮여 있었다. 어머니의 눈에는 농부의 얼 굴이 영문을 몰라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잔뜩 뭔가를 근심스러워하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괜 한 불쾌감이 일었다. "내 여행가방은 어디 있지요?"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큰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농부가 어깨를 움찔하며 생각에 잠신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서 침울하게 말을 이었다. "아깐 애 앞이라서 일부러 가방이 비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만 아니었어요. 가방은 비 어 있기는커녕 꽉 차서 무겁기까지 하더군요." "그래요? 그런데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에게로 다가와서는 허리를 굽히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 다. "아까 그 사람, 아는 사람입니까?" 어머니는 깜짝 놀랐지만, 힘을 주어 대답했다. "그렇소?" 그녀의 간결한 대답 한마디에 그녀의 속마음을 휜히 내보이고 또 외부로부터의 모든 것도 명백해진 셈이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긴 의자에 몸을 착 붙이고서 자세를 가다 듬었다. 농부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당신이 신호를 보내니까 그 사람 역시 신호를 보내더군요. 그래 그 사람 귀에다 대고 물었죠. 계단 위에 서 있는 부인을 아느냐고요." "그가 뭐라든가요?" 어머니가 재빨리 물었다. "그 사람이요? 우리 편은 많다고 했어요. 맞아요? 많다는 말을 했어요..." 그가 손님의 눈을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쳐다보다가 다시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대단한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곧 죽어도 남이 아닌 나임을 당당하게 말하던 그 용기! 숱하게 얻어맞으면서도 할 말은 다 차지 않던가요!" 주저하는 듯한 힘없는 그의 목소리, 윤곽이 뚜렷치 않은 얼굴, 그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큰 눈에 어머니는 왠지 마음이 놓였다. 두려움과 우울함 대신 르이빈에 대한 가슴을 에는 듯한 애틋한 동정이 그녀의 가슴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저며 오는 가슴의 아픔을 더 이 상 억제하지 못하고 갑작스러우면서도 쓰디쓴 증오심으로 가득 찬 분노를 폭발시키고 말았 다. "날강도놈들, 미친놈들!" 그리곤 결국 흐느껴 울고야 말았다. 농부가 그녀에게서 한 발 물러서며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웃대가리놈들은 제 측근을 규합시키느라 아주 혈안이 되어 있어요, 그래요." 그러더니 불쑥 다시 어머니에게로 몸을 돌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순전히 제 추측입니다만, 여행 가방 속에 혹 유인물들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맞 죠?" "맞소, 그 사람한테 가져 가던 중이었지요." 눈물을 닦으며 어머니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턱수염을 한 손에 모아 쥔 채로 시선은 딴데를 향하고서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유인물이라면 우리도 받아 본 적이 있습니다. 서적들도 마찬가지로요. 그 사람, 우린 알 아요. 전에도 본 적이 있습니다." 농부는 가만히 서서 잠시 생각을 하더니 불쑥 물었다. "이제 어쩔 셈이세요? 이 여행가방 말입니다." 어머니가 그를 쳐다보다 말고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에게 주고 가겠소." 그는 놀라지도, 거절하지도 않고 다만 짧게 되풀이할 뿐이었따. "우리에게..." 그가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움켜쥐었던 턱수염을 놓고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면서 자 리에 앉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머니의 눈앞에 르이빈이 뭇매를 맞던 장면이 무자비할 정도로 집요하 게 떠올라, 곧 그의 모습이 여타의 생각들을 방해하는가 하면 인간에 대한 고통과 모욕감이 다른 모든 감정을 가렸다. 이미 여행 가방은 안중에도 없었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아무 생각 도 할 수 없었다. 두 눈에선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얼굴은 일그러졌지만 농가 주인한 테 말을 할 때만큼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고 나왔다. "놈들은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목을 조이는가 하면 사람들을 진흙 구덩이에 처넣고 지근 지근 짓밟고 있어요, 저주받을 놈들!" "힘이죠. 놈들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농부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놈들은 어디서 그런 힘을 얻었단 말이오? 우리에게서 뺏어 간 겁니다. 민중들에게 서, 죄다 우리에게서 뺏어간 거요." 어머니가 한껏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어머니는 농부의 밝지만 이해할 수 없는 얼굴에 괜히 속이 상했다. 그가 생각에 잠긴 채로 대꾸했다. "맞아요. 톱니바퀴라고나 할까..." 그는 바짝 긴장한 채로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유심히 귀기울이면서 나직히 말했다. "그들이 오는군요." "누가?" "아마 우리 쪽 사람들일 겁니다." 그의 아내가 들어오고 그녀의 뒤를 따라서 농부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그는 구석에 모자 를 집어 던지고 재빨리 주인에게로 다가와서는 물었다. "무슨 일이 있나?"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이 뻬치까 옆에 서서 말했다. "스째빤! 손님들 오시느라 피곤하실텐데 뭐라도 드시도록 해야죠?" "고맙습니다만 별로 들고 싶은 생각이 없군요." 어머니가 대답했다. 농부는 어머니에게로 다가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빠르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럼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전 뾰뜨르 이고르프 랴비닌이란 사람인데 보통들 쉴로라고 부른답니다. 전 어느 정도 당신들이 하는 일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읽고 쓸 줄은 알아요. 이를테면 멍텅구린 아닌 셈이죠." 그는 어머니의 내민 손을 꽉 잡고 세차게 흔들고는 주인을 쳐다보았다. "이보게나 스째빤! 바르바라 니꼴라예브나는 좋은 여자야, 정말일세. 가끔 이 모든 것이 어리석은 잠꼬대에 불과하다고 말하긴 해도 말이지. 어린애에 불과한 학생들이 아직은 어리 석어서 민중들을 불안케 한다는 거야. 하지만 자네나 나나 아주 건실한 농부 하나가 마치 그래야 당연한 듯이 체포되는 걸 보지 않았나. 그리고 여기 이렇게 주인의 피라곤 한 방울 도 섞이지 않은 것 같은 초로의 부인이 우리를 찾아 주었고, 무례를 용서하세요. 당신은 태 생이 어디시죠?"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빠른 어조로 똑똑하게 말했다. 턱수염이 신경질적으로 떨리고, 가늘 게 뜬 두 눈은 어머니의 얼굴과 몸 전체를 더듬었다. 옷은 헤어지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져서 흡사 지금 막싸움을 했다가 적을 보기 좋게 물리치고는 승리의 기쁨에 어 쩔 줄 몰라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그의 활달함과 솔직하면서도 간결하게 핵심을 찌르는 말주변에 홀딱 반해 버렸다. 어머니가 부드러운 눈길로 얼굴을 쳐다보며 물음에 대답을 하 자 그는 다시 한 번 어머니의 손을 힘있게 흔들면서 과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스째빤, 내가 그 일은 정말 순결한 일이라고 하지 않던가? 훌륭한 일이기도 하고, 되풀 이하지만, 그건 바로 민중이 제 몫을 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해. 하지만 여기 부인 께서는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걸세. 그걸 얘기한다는 건 그녀로 봐선 득이 될 게 없거든. 이분을 존경하노라고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네. 좋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우리에게 선을 베풀고 싶어하겠지. 하지만 조금이면 돼. 왜냐면 그게 지나치다 보면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있거든. 그런데 민중들은 곧장 나아가고 싶어해. 그들은 어떤 손해도 두려울 게 없어. 내 말 알아듣겠나? 삶 전체가 그들에게 해악이었고 어디를 가나 손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 으니 어디 믿을 데가 있나, 게다가 주위를 둘러보면 귓가엔 그저 <꼼짝 마!> 소리만 쟁쟁하 니 어디..." "알만 해!" 스쩨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즉시 덧붙였다. "이분은 짐 걱정을 하고 계시다네." 뾰뜨르는 능청스레 어머니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안심하라는 시늉으로 손을 흔들면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염려하지 마세요. 모든 일이 다 잘될 겁니다. 아주머니! 가방은 우리 집에 있습니다. 아 까 스째빤이 제게 와서 당신에 대해서 얘기해 주더군요. 당신 역시 이런 일을 하고 있고 아 까 그 사람을 알더라고 말이죠. 제가 그래서 말했습니다. <조심해, 스째빤! 이런 중차대한 일은 함부로 떠벌리는 게 아냐!>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주머니도 아까 그 주위를 서성 대는 우리를 한눈에 알아보셨을 거예요. 정직한 사람의 얼굴은 눈에 잘 띄거든요.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 거리를 나다니는 사람중에 그런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지요. 가방은 우리 집에 잘 있으니까..." 그는 어머니 옆에 앉아 그녀의 눈을 애원하는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만약 당신이 그 속에 든 걸 빼내고 싶으시다면 우리가 기꺼이 도와드리겠어요. 우리에겐 책자들이 필요합니다." "이분은 그걸 몽땅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셔." 스쩨빤이 끼어들었다. "훌륭하십니다, 아주머니! 우린 그걸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낼 것입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웃음을 터뜨리며 방안을 왔다갔다하다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이를테면 절호의 기회라고나 할까요? 아주 간단한 일이랍니다. 어떤 곳에 놓자마자 게눈 감추듯 없어질테고 다른 곳이야 잘 포장을 해서 보내 버리면 되니까요. 별거 아네요. 그리 고 아주머니, 신문은 이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글쎄 신문은, 그 일은 제가 알아서 하 지요. 사람들의 정신을 번쩍 뜨이게 하지요. 주인나리들한테야 썩 유쾌한 일은 못되죠. 전 여기서 7 베르스따 떨어진 어떤 부인 집에서 목수일을 보고 있어요. 사람이야 좋죠. 갖가지 책들을 나한테 갖다 주는데 어떤 땐 책을 읽다 보면 정신이 번쩍 들 때도 있어요. 여하튼 고마운 부인이지요. 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내가 여러 장의 신문을 읽어 보라고 갖다 준 적 이 있었는데 어지간히 기분이 상했던 모양예요. <집어쳐요, 뾰뜨르! 이런 일이라면 아무것 도 모르는 어린애들이나 해야 어울려요. 그런 일을 하다간 고통스럽기만 하고 결국 기다리 는 건 감방신세 아니면 시베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다시 갑작스럽게 하던 말을 중단하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 다.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주머니? 아까 그 사람은 친척이라도 됩니까?" "아니오." 어머니가 대답했다. 뾰드르가 소리 없이 웃으며 뭔가 매우 만족스럽기라도 한 듯 고개를 뒤로 젖혔는데, 바로 그 다음 순간 어머니는 르이빈에 대해서 너무 무심하게 말한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친척은 아니지만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로 친 오라비처럼 존경하는 사람이라오." 그녀는 필요한 말을 제때에 찾지 못해 기분도 엉망이고 나오느니 한숨뿐이었다. 슬프고도 예정된 정적이 농가를 가득 채웠다. 뾰도르는 무언가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기라도 하듯 한 쪽 어깨에 고개를 쑤셔 박고 서 있었다. 스쩨빤은 탁자 위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서 손가락 으로 연신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어둠 속에서 뻬치까에 바짝 기대어 서 있 었는데, 어머니는 그녀의 붙박인 시선을 느끼고 간혹 그녀의 얼굴을 곁눈질로 힐끔거였다. 타원형의 검게 그을린 얼굴에 오똑한 코, 그리고 무엇인가에 잘린 듯한 짧은 턱이 눈에 들 어왔다. 초록빛의 눈동자가 신중하면서도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 친구에 대해서 한마디 하자면..." 뾰뜨르가 나지막이 말을 시작했다. "뭔가 특징이 있어. 정말이야. 자신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어. 뭐 당연한 거지. 이봐 요, 따찌야나! 안 그래요? 당신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런 사람..." "그는 결혼했나요?" 따찌야나가 그의 말을 가로채며 묻고는 그리 크지 않은 얇은 두 입술을 꼭 다물었다. "홀아비라오." 어머니가 우울하게 대꾸했다. "그러니 용감할밖에! 결혼했다면 그런 일에 뛰어든다는 게 얼마나 어렵겠어? 우선 두려움 이 앞설 거라고." 따찌야나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요? 난 결혼했어도 못할 일이 없어." 뽀뜨르가 소리쳤다. 여인이 그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입술을 오물락거리며 말했다. "장하시구려, 대장부 나리! 그래서, 어쨌다는 거예요? 그저 말만하고 이따금 책 읽는 일 말고 뭐 하는 일이 있어요? 당신이나 스째빤이나 만나면 구석에 숨어서 소곤거리기나 하는 데 그래서야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예요?"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도 여기선 누룩과 같은 존재라오. 그러니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고..." 농부가 기분이 상했는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쩨빤이 말없이 아내를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따찌야나가 물었다. "농부들은 왜 결혼을 하는 거지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나서서 일할 일꾼들이 필요하다던 데 대체 무슨 일예요?" "이제 그만 좀 해 둬!" 스쩨빤이 볼멘 소리로 말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네요? 허구헌날 굶 주린 배를 채우기에 급급하고, 애들이라도 태어나는 날이면 먹이는 건 둘째 치고 돌볼 시간 도 없으니... 빵조각 하나 제대로 얻지도 못하는 그 놈의 일은 해서 뭣 하느냐 말예요." 그녀는 어머니에게로 다가와 그 옆에 앉아서는 고집스럽게 말을 계속했다. 그렇다고 막무 가내의 푸념만도 아니었고 슬퍼하는 기색도 없었다. "저도 애가 둘이나 있었어요. 하나는 겨우 두 살 때 끓는 물에 데서 죽었고 또 한 놈은 그 놈의 저주받을 일 때문에 사산해 버렸답니다. 그러니 제게 무슨 낙이 있었겠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농부에게 결혼이란 아무 쓰잘 데 없는 짓이란 말입니다. 제 손만 올가미로 묶는 셈이죠. 집안에 매이지만 않는다면 농부들도 모든 이들을 위해 생활을 알차게 꾸밀 수 있을 거예요. 진리를 위한 의로운 길에 곧바로 떨쳐 나갈 수가 있을 겁니다. 제가 어디 틀 린 말 했습니까, 아주머니?" "옳은 소리요, 옳은 소리고 말고, 달리 우리네 인생을 견뎌 낼 방법이 없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혹 남편이 계신가요?" "죽었소. 아들이 하나 있지만..." "아들이 어디 있지요? 함께 사시나요?" "감옥에 있소." 어머니가 대답했다. 이런 말을 할 때면 매번 고통스럽기만 하던 것이 이제는 왠지 한없는 자부심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이번이 두 번째라오. 모두가 하느님의 진리를 알게 되고 그것을 세상에 공공연히 퍼뜨린 때문이지요. 그 애는 아직 젊고 미남인 데다 총명하기까지 하답니다. 신문도 다 그애가 만 들었지요. 그리고 만든 신문을 미하일 이바노비치에게 보냈답니다. 나이가 두 배도 넘는 미 하일 같은 사람에게 말입니다. 지금은 그 때문에 잡혀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데 만약 시베 리아로 유형을 가게 되면 탈출해서 하던 일을 계속하게 될 거요." 말을 하면 할수록 그녀의 가슴에 더욱더 커다란 자부심이 생겨나 영웅의 모습을 만들어 내려 하다 보니 적절한 말도 떠오르지 않고 목이 메어 왔다. 그날 그녀가 직접 보았던 그 암담했던 상황, 그리고 머리를 짓누르는 무자비한 공포와 잔인함을 어떻게든 제대로 이야기 해 주어야만 했다. 무의식적으로 건강한 영혼의 이러한 요구에 복종하면서 그녀는 직접 목 도했던 순수하고 고결한 모든 것을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히 빛나는 하나의 불길로 합쳐야 했다. "벌써 그런 사람들은 많이 태어났지만 앞으로도 더욱 많은 이들이 태어나, 모두가 하나같 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민중의 해방을 위해, 진리를 위해 떨쳐 일어설 것입니다." 그녀는 조심을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비록 이름까지는 들먹이지 않았지만 탐욕의 사슬로 부터 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은밀한 운동에 대해서 알고 있는 대로 죄다 이 야기를 해 버렸다. 그녀에게 정말 소중한 형상들을 그리면서, 그녀는 말 속에 온 힘을, 그 리고 늦게나마 그녀의 가슴 안에서 삶의 떨리는 충격으로 일깨워진 한없는 사랑을 쏟아 부 었고, 그냐 자신은 끓어오르는 기쁨으로 기억 속에 되살아 나 그녀의 감정으로 꾸며져 밝게 빛나는 바로 그 사람들을 넋을 잃고 바라 보았다. "운동의 물결이 온 세상, 모든 도시를 휩쓸고 지나가고 있어요. 사실 선량한 사람들의 힘 이란 측량할 수도, 뭐라고 평가할 수도 없는 거랍니다. 운동의 물결은 더욱 거세어지고 우 리 승리의 그 시간까지 높아만 갈 것입니다." 그녀의 말엔 전혀 거침이 없었다. 그녀는 실에 각양가객의 구슬을 꿰듯 그렇게 여태껏 살 아온 날들의 피와 오욕을 가슴속에서 말끔히 씻어 버리려는 강렬한 욕망을 하나하나 죄다 털어 버렸다. 그녀는 농부들이 그녀 자신의 말이 닿는 곳에 마치 뿌리를 내리고 자란 것처 럼 꼼짝도 하지 않고 넋을 잃고 서서 그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음을 알았고, 그녀 와 나란히 앉아 있는 여인의 뚝뚝 끊어지는 숨소리를 들었다. 이 모든 것 때문에 사람들에 게 말하고 굳게 약속했던 것에 대한 그녀의 믿음의 힘은 더욱 강해지는 것이었다.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빈곤과 불의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 모두가 배부른 자들, 그리고 그들의 아첨꾼들을 물리쳤습니다. 모두, 전민중은 민중 그들을 위해 감옥에서 죽어 가면서도 죽음의 고통을 달게 받고 있는 사람들을 맞으러 떨쳐 일어서야 합니다. 그들은 정 말 아무런 사심도 없이 모든 민중의 행복으로 가는 길이 어디에 뻗어 있는지를 설명해 주 고, 또 바로 그 길이 고난의 길이 되리란 걸 솔직히 말해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길에 동 참할 것을 강요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한 번 그들 옆에 서 보기만이라도 한다면 결 코 그들을 버릴 수 없을 겁니다. 옳은 게 뭔가를, 그리고 딴길도 아닌 바로 이 길이 우리의 나아갈 길임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간직하고 있던 욕망을 실현시켰다는 게 너무나도 기뻤다. 바로 지금 그녀는 진리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라면 어디든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겐 조그만 일에 만족해 서, 가던 길을 그만두는 경우란 있을 수도 없어요. 그들은 모든 기만과 악, 그리고 모든 탐 욕을 물리칠 때까지는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체 민중이 하나 되는 그날까지, 한 목소리로 <나는 주권자니 모두의 평등을 위해 법을 만들겠노라> 고 소리 치는 그날까지 팔짱끼고 구경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하느라 지친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더 이상의 말이 필 요 없음을 대번에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농부들이 뭔가를 더 기대하는 듯이 그녀를 쳐 다보았다. 뾰뜨르는 팔짱을 낀 채로 서서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에선 미소가 파르르 떨렸다. 스쩨빤은 한 손을 탁자에 기댄 채 상체를 앞으로 쭉 내밀 고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서 잔뜩 귀기울여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내려 앉아 그 때문에 얼굴이 한결 멋스럽게 보였다. 그의 아내는 어머니 옆에 앉아 서 몸을 굽히고 팔꿈치를 무릎에 올린 채 자기 발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뽀뜨르가 속삭이듯 말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긴 의자에 앉았다. 스쩨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아내를 한번 쳐다보고 흡사 뭔가를 가슴에 안으려는 사람처 럼 허공에 손을 쭉 내밀었다. "기왕 사람이 돼서 무슨 일을 시작하면..."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겨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온 영혼을 바칠 수 있어야 해." 뽀뜨르가 머뭇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고 말고, 뒤를 돌아다보지 말아야 해." "이 일은 정말 곳곳으로 번져 나가고 있어." 스쩨빤이 말을 이었다. "세상 구석구석까지." 뽀뜨르가 다시 덧붙였다. 18... 어머니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서 그들의 나직나직한 말에 귀를 기울였 다. 따찌야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농부들의 얼굴을 불만과 멸시에 가득 차서 쳐다보는 그녀의 초록색 두 눈이 쌀쌀맞게 번뜩였다. "말씀을 듣고 보니 얼마나 한 많은 삶을 살아오셨는가를 조금이나마 알 것도 같군요." 그녀가 어머니 쪽으로 돌아앉으며 말했다. "말해 뭐 하겠소." 어머니가 대답했다. "말씀도 하도 잘 하셔서, 꼭 가슴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해요. 그게 얼마 나 대단한 일예요? 그런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삶을 틈새로라도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으련 만! 보통 어떻게들 살아요? 분명 양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겠죠? 저 역시 글을 읽고 쓸 줄 알아서 책들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한답니다. 언젠가는 잠 한숨 안 자고 책을 읽은 적도 있었 어요. 그래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생각을 하지 않으면 헛된 삶을 살게 될테고, 그렇다고 생각을 한다 해도 역시 마찬가질테니까요." 그녀는 두 눈에 냉소를 머금고서 이야기를 했는데, 간혹 팽팽한 실을 잡아당기듯 그렇게 위태롭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농부들은 너나할것없이 말이 없었다. 바 람이 유리창을 더듬고 지붕 위에서 지푸라기 소리를 냈으며, 굴뚝에선 이상한 흐느낌 소리 가 들려 오기도 했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다 마지못해 그러기라도 하듯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 남포불이 흔들리다 잠시 꺼질 듯 불꽃이 눕더니 이내 살아나 방안을 밝혀 주었다. "저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건 당신의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익히 듣고 보았던 일을 듣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켜요. 사실 여태껏 그런 얘기를 들어 본 적도 없거니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도 없거든요..." "따찌야나, 이제 뭐라도 먹고 불을 그만 꺼야 되지 않을까? 사람들이 추마꼬프네 집에 이 렇게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걸 알게 되면, 우리야 아무 상관없지만 혹 손님께 무슨 해라 도 미치지 않을까 해서..." 스쩨빤이 우울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따찌야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뻬치까 쪽으로 걸어갔다. "옳은 소리야. 자, 친구들! 이젠 정신을 똑바로 차리세. 유인물들이 사람들 사이에 나돌 기 시작하면 이젠..." 뾰뜨르가 웃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내 얘기를 하자는 게 아냐. 내가 체포된다 한들 그리 대수로운 일도 못돼." 그의 아내가 탁자로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 "좀 비켜 봐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편으로 비켜서 그녀가 탁자에 식탁보를 씌우는 것을 보면서 미소 띤 눈으로 말했다. "우리 같은 친구들의 값어치는 굉장한 거야. 금전 수십, 수백 냥하고도 바꿀 수 없을 만 큼..." 어머니는 갑자기 그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면서 점점 마음에 쏙 들었다. 일장 연설을 늘어 놓고 난 후 그녀는 고통의 진흙탕에서 빠져 나와 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왠지 가슴이 뿌듯한 게 누구에게고 선과 사랑을 마음껏 전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어머니가 말했다. "그 판단은 그다지 옳게 여겨지지는 않는군요, 주인양반! 나 아닌 남이 내려 주는 가치에 동의할 필요는 없어요. 그들은 피 외에 어느 것 하나 필요로 하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요. 스스로 자기 자신의 가치를 부여해야만 합니다. 적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들을 위해 서..." "우리에게 무슨 친구가 있습니까? 그날그날 살아가기가 바쁘다 보니..." 농부가 나직한 목소리로 힘있게 외쳤다. "내 말뜻은 민중들에겐 친구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있겠죠. 하지만 여기엔 없어요, 그게 바로 문젭니다." 스쩨빤이 시름에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여기서도 만드세요." 어머니가 말했다. 스쩨빤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 여기서도 만들면 되지..." "자리에 앉으세요." 따찌야나가 어머니에게 자리를 권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어머니의 말에 기가 죽어 있던 뾰또르가 기분을 풀고 활발하게 이야 기를 했다. "아주머니,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내일 아침 되도록 빨리 여기를 떠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음 정거장으로 계속가세요, 시내쪽으로가 아니고요. 우편마차를 우선 빌어야 겠군요..." "왜? 내가 모셔다 드리고 싶은데." 스쩨빤이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만일의 경우, 놈들이 아주머니가 이 집에서 잤는지 물러 볼지도 몰라. 여기서 잤다. 어디로 떠났느냐? 내가 모셔다 드렸다. 오, 그래 네 놈이 데려다 주었어? 그 럼 감방으로나 가실까! 뭐 이럴지도 모르는 일이야. 이해가 가나? 감방에 서둘러 들어갈 필 요는 없잖아? 다 차례가 돌아올 거야. 사람들이 그러는데 때가 오면 짜르도 별 수 없이 죽 는다더군. 그런데 또 쉽게 생각하면, 부인 하나가 하룻밤 신세를 지고 말을 빌어 떠났다. 하룻밤 지나는 길에 신세 좀 졌기로서니 무슨 대단한 일이야? 어디 여기를 지나는 사람이 한둘이냐고..." "뾰뜨르, 당신은 어디서 무서워하는 법을 다 배웠수? 따찌야나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물었다. 뾰또르가 무릎을 치며 소리쳤다. "남자는 모름지기 모르는 게 있어선 안되는 법이오. 두려워할 줄도 알아야 할뿐더러 용감 해질 줄도 알아야 해. 당신도 알잖소? 이 유인물 때문에 바가노프가 경찰한테 얼마나 많이 두들겨 맞았는지. 이젠 바가노프도 옛날의 그가 아니어서 억만금을 준다 해도 일단 손에 들 어온 유인물은 절대 놈들한테 빼앗기지 않을 것이오, 그럼! 아주머니 절 믿으세요. 어떤 속 임수에도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재치가 있는지는 모든 사람들이 익 히 잘 아는 사림입니다. 서적과 유인물들을 저는 아주 감쪽같이 배포하겠습니다. 아주머니 맘에 꼭 들게 말입니다. 물론 우리 민중들은 배운 것도 없고 겁도 많아요. 하지만 위도 이 제 눈을 뜨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똑바로 쳐다볼 때가 되었습니다. 서적은 우리에게 간 단히 답을 내려줍니다. 생각하라! 그리고 단결하라! 못 배운 자들이 배까지 부를 때 그런 경우가 나타나지요. 전 여기서 안 가 본 데 없이 다 가 보면서 많은 것을 보았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어요. 사는 거야 문제가 아닌데, 웅덩이 속에 주저앉아 살지 않으려면 많이 알아 야 해요. 그만한 힘을 길러야 한단 말입니다. 당국도 냄새를 얼마나 잘 맡는지 농부들 사이 에 떠도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결코 놓치지 않아요. 농부들이 잘 웃지도 않고 붙임성이라고 는 전혀 없지만 전반적으로 권위라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들이 서서히 무르익어 가 고 있답니다. 최근에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시골마을인 스몰랴꼬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 가 하면, 당국에서 세금을 거두겠다고 사람들이 파견된 거예요. 그런데 농부들이 완강하게 반대를 하고 나섰지요. 급기야는 경찰서장이 직접 나와 말을 했어요. <네 놈들은 다 개새끼 들이야! 네 놈들이 하고 있는 짓이 짜르에 대한 반역이라는 걸 알기나 하고 이러는 거야?> 거기에 스삐바낀이란 농부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이렇게 대꾸했답니다. <그 놈의 짜르, 어 디 한 군데 써먹지 않는 데가 없군! 마지막 속옷 한 벌까지 다 벗겨 가는 판국에 무슨 놈의 얼어 죽을 짜르야...> 이 정도예요, 아주머니! 물론, 스삐바낀은 감옥에 갔지만 그 말만은 여전히 남아서 심지어 어린애들도 그 얘길 다 안다니까요. 말이 혼자 살아서 외치고 있는 셈이지요." 그는 뭘 먹을 생각도 않고 쉴 새 없이 검은 눈을 유쾌하게 반짝거리며 빠르게 속삭였다. 그는 거침없이 시골생활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어머니에게 다 털어 놓았다. 마치 돈지갑 에서 동정이 좌르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스쩨빤이 두세 번 그에게 말했다. "좀 들면서 얘기하지..." 그러면 뾰뜨르는 빵조각과 숟가락을 잡고서 방울새가 노래라도 하듯 다시 그렇게 이야기 에 푹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마침내 식사가 다 끝나자 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군요." 그는 어머니 앞에 서서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주머니! 어쩌면 다시 못 뵐지도 모르겠군요. <모든 게 참 좋았다> 는 말씀만은 드려야 되겠군요. 당신을 만나 당신의 이야기를 듣게 되어 정말 영광이었습니 다. 탁월하십니다. 여행가방 속에 유인물말고 또 들어 있는 게 있습니까? 털실로 짠 숄요? 어깨숄이라시네, 스쩨빤. 기억해 두게나! 이 사람이 곧 가방을 갖다 드릴 겁니다. 가세, 스 쩨빤! 안녕히 계세요. 행운을 빕니다." 그들이 나가자 바퀴벌레들이 기어다니고 지붕 위로 바람이 휘몰아쳐 굴뚝의 작은 덮개를 두드리고 가라비가 단조롭게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따찌야나가 부엌과 창고 에서 가져온 옷가지들을 긴 의자에 깔아서 어머니의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활달한 사람이로군요." 어머니가 말했다. "말이 얼마나 많은지 멀리서 가만히 들어 보면 그 사람 목소리만 들려요." "그럼 당신 남편은 어떻소?" "대단한 사람은 못돼요. 사람이야 좋죠. 술도 안 마시고 남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그저 그래요. 그런데 성격이 좀 소극적이라서..." 그녀는 자세를 바로하고 이번엔 자기 쪽에서 갑자기 물었다. "지금 필요한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들고일어나는 거겠죠? 당연하겠죠. 이런 생각을 다들 하고 있지만 각자 마음속으로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다들 소리내서 외칠 날이 와야 할텐 데... 그러려면 우선 누군가 하나가 나설 결심을 해야만 할테고..." 그녀는 의자에 앉아서 다시 불쑥 질문을 던졌다. "말씀 좀 해 주세요. 젊은 여자들도 이 일에 가담하고 있나요? 노동자들 하는 대로 하고 책도 읽나 말예요? 혹 수다스럽다거나 겁이 많다거나 하진 않나요?" 그러자 그녀는 어머니의 대답을 주의 깊게 듣고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다음, 눈 을 내리깔고 고개를 떨구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떤 책에선가 의미 없는 삶이란 말을 본 적이 있어요. 난 그 말뜻을 금방 이해할 수 있 었어요. 전 그런 삶을 익히 알고 있거든요. 생각은 있되 서로 연결이 되어 있지 못하고 목 동 없는 양떼마냥 뿔뿔이 흩어져 있는 그런 삶 말이죠. 하려고도 안 하고 또 그런 뿔뿔이 흩어진 것들을 한 군데로 끌어 모은 사람도 없는... 이게 바로 의미 없는 삶이 아니고 뭐겠 어요. 전 정말 그런 삶을 뛰쳐 나오고 싶었어요. 뭔가를 점점 깨닫게 되면서 느껴야만 하는 그런 고통을 저도..." 어머니는 여인의 공허한 푸른 눈빛에서 그 고통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야윈 얼굴과 목소리에서도 마찬가지의 고통이 느껴졌다. 그녀를 어루만져 위로해 주고 싶었다. "당신은 벌써 할 일을 알고 있구려..." 따지야나가 가만히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죠. 잠자리가 준비되었어요. 누우세요." 그녀는 뻬치까 쪽으로 다가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어머니는 옷도 먹 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뼈마디가 안 쑤시는 곳이 없이 무척이나 피곤해서 저절로 신음소 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따찌야나가 불을 껐다. 오두막에 짙은 어둠이 가득해지자 그 녀의 낮고 단조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흡사 숨막히는 어둠 속에서 뭔가를 긁어 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기도를 하지 않으시는군요. 저 역시 하느님은 없다고 생각해요. 기적도 없고요." 어머니는 긴 의자 위에서 불안스레 몸을 뒤척였다. 한없이 깊은 어둠이 창문을 통해 정면 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들릴락말락하는 사각거림이 정적을 조심스럽게 깨뜨렸다. 그녀는 거 의 속삭이는 듯한 겁먹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하느님에 대해선 난 잘 모르지만, 그리스도는 믿지... 그리고 그의 말도 믿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이 말을 믿어요." 따찌야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검은 색의 뻬치까 때문에 잿빛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어머니는 슬픈 마음에 눈을 감았다. "내 아이들의 죽음에 대해서 전 하느님이건 사람이건 그 누구도 용서할 수 없어요." 어머니는 이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저며 오는 것 같은 아픔 때문에 뒤숭숭한 마음으로 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은 아직 젊어요, 아직 아이를 가질 수가 있을거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여인은 금방 대답을 못하고 조금 뜸을 들인 후에야 속삭이듯 대답했다. "아네요. 전 끝난 몸예요. 의사가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한 걸요..." 쥐새끼 한 마리가 마룻바닥을 가로질러 질주했다. 뭔가 크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보이지 않는 소리 때문에 정적이 깨졌다. 가을비가 야윈 손바닥으로 지붕을 더듬듯 그렇게 초가지붕을 때리고 커다란 물방울들이 땅바닥에 떨 어지며 음산한 소리를 내 깊어 가는 가을밤의 정취를 더해 주었다. 뚜벅뚜벅 공허한 발자국 소리가 길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현관에서 들렸다. 그 소리에 어머니는 사정없이 쏟아지던 졸음이 깼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낮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따찌야나, 벌써 잠든 거야?" "아네요." "아주머니는 주무시나?" "그런 것 같아요." 잠깐 불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이내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 농부가 어머니의 침대로 다가 와 염소가죽으로 된 담요를 다시 덮어 주고 발까지 가지런히 싸 주었다. 티없이 맑은 그의 친절에 가슴이 찡했다. 어머니는 감았던 눈을 뜨고 빙그레 웃었다. 스쩨빤이 말없이 옷을 벗고 다락방으로 기어 올라갔다. 조용해졌다. 어머니는 꼼짝도 않고 누워서 졸음에 취한 정적의 부드러운 동요에 귀를 기울렸다. 그녀 바로 앞의 어둠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르이빈의 얼굴이 가물거렸다. 다락방에서 속삭임이 들려 왔다. "당신은 어떤 사람들이 이 일에 뛰어들고 있는지 아세요? 더 이상은 당할 고통도 없는 늙 은 사람들까지 일을 하고 있어요. 이젠 그 사람들은 쉴 때가 되었어요. 당신은 젊고 현명하 잖아요, 네, 스쩨빤!" 굵고 어두운 농부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런 일에 아무 생각도 없이 달려들어선 안돼." "그런 소린 전에도 들었어요." 말소리가 끊어졌다가 다시 스쩨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하도록 합시다. 먼저 농부들을 만나서 개별적으로 이야기를 해 보아야겠소. 마꼬 프라든가 알레샤 같은 사람 말이오. 알레샤 그 사람 활달하고 글도 읽고 쓸 줄 안다고. 그 러다 한번 된통 당하긴 했지만. 쇼린도 있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세르게이도 있고, 또 끄 냐제프란 사람, 얼마나 정직하고 용감하오? 이 정도면 무슨 일을 벌이고도 남아. 그리고 아 주머니가 말했던 사람들도 한번 만나 봐야 되겠어. 난 이제 도끼를 메고 시내로 가서 장작 을 패 주고 돈을 좀 마련해 놓아야겠소. 조심해야 하오. 그녀가 말했잖소. 사람의 가치란 자신이 부여하는 것이라고. 옳은 소리요. 바로 그 농부가 그런 경우 아니오. 그 사람 정말 하느님 앞에서도 떡 버티고 설 사람이야. 그러니 고작 경찰서장 따위가 어떻게... 그런데, 니끼따던가, 응? 정말 어찌나 부끄럽던지!" "바로 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 데도 당신들은 그저 입만 크게 벌리고서..." "두고 보구려! 당신도, 우리가 그 녀석들을 때리지 않고 가만히 있은 데 대해서 하느님한 테 감사할 날이 있을 거요. 어찌되었든 인간을 때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는 오랫동안 속삭였는데, 이제는 목소리가 작아져서 무슨 말을 하는지 어머니의 귀에 통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그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을 시작했는데 그러자마자 금세 그의 아내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말소릴 낮춰요. 깨시겠어요." 어머니는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마음껏 꿈나라를 여행했다. 아침 잿빛 어둠이 오두막의 창문을 들여다보고 마을 위로 구릿빛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 져 싸늘한 정적을 사정없이 흔들어 깨울 때쯤 해서 어머니는 따찌야나가 깨우는 바람에 눈 을 떴다. "사모바르를 준비했으니 차 한잔 드시고 길을 떠나세요. 새벽이라 날씨가 꽤 싸늘할 거예 요. 그리고 잠도 깨실 겸 해서..." 헝클어진 턱수염을 쓸어 내리며 시내에서 어떻게 하면 만나 뵐 수 있겠는가를 간절히 물 어 보는 스쩨빤의 얼굴이 왠지 어제보다도 더 의지가 굳어 보이는 게 여러모로 어머니로 하 여금 그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도록 만들었다. 차를 마시면서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잘된 일이오?" "뭐가요?" 따찌야나가 물었다. "우리가 알게 된 것 말이오. 너무 쉽게 일이..." 어머니는 잔뜩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워낙 이런 일은 아주 간단하게 풀려 나가는 법이라오." 그들은 어머니와 헤어지면서 온갖 격식을 다 차려 성의를 다해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고 심지어는 말도 아꼈다. 그 대신 아낌없는 정을 나누고 염려를 해 주었다. 마차를 타고 오면서 어머니는 줄곧 농부를 생각했다. 그는 분명 조심 조심 소리도 내지 않고 두더지처럼 열심히 쉬지 않고 일을 할 것이고, 그 옆에서 그의 아내는 여전히 불만에 가득 찬 넋두리를 늘어놓을 것이며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분노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녀의 초록빛 눈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결코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피 묻은 얼굴, 충혈된 눈빛, 그리고 그가 외치던 말들과 더불어 르이빈을 떠올리자 어머 니의 가슴은 사나운 짐승 바로 앞에 서 있을 때처럼 고통스런 무력감에 짓눌려 왔다. 시내 까지 오는 동안 줄곧 머리는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지고 옷은 다 찢긴, 그리고 손은 등뒤로 묶었으되 눈만은 진리에 대한 원한과 믿음으로 불타오르는 검은 턱수염의 르이빈의 모습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날씨마저 짓궂기만 했던 그날의 르이빈의 모습을 머리에 떠올릴때 면 언제나 그와 더불어 무력하게 땅 위에 박혀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골마을들이 함 께 연상되었다. 사람들은 나약한 마음으로 진리의 날이 도래하길 몰래 기다리진 않으면, 차 라리 아무런 기대도 없이 그저 평생을 일만 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었다. 삶이란 개간도 안 한 울퉁불퉁한 들판으로 자유롭고 정직한 손들을 통해 알찬 수확을 약 속하며 말없이 그 일꾼을 기다리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게 진리와 이성의 씨를 뿌려 주시오. 그러면 난 당신에게 백 배의 보답을 드리리다!) 어머니는 이번 일을 제대로 해냈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전해 오는 기쁨의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는 괜히 부끄러워져 애써 태연한 척 했다. 19... 집에 당도하니 덥수룩한 모습의 니꼴라이가 양손에 책을 들고서 문을 열어 주었다. "벌써 다녀오시는 거예요?" 그가 반갑게 소리치며 맞아 주었다. "빨리도 다녀오셨네요." 그의 눈이 안경 너머에서 부드러우면서도 생기 있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옷을 벗 는 것을 도와주고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어젯밤에 가택수색이 있었어요.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러는지 궁금한 게, 혹 어머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하지만 잡혀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어머님께서 붙들렸다면 그 놈들이 절 가만 놔둘 리 없었겠지만 말이죠." 그는 어머니를 식당으로 안내하면서 잔뜩 흥분해 가지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놈들은 저보고 직장을 그만두라더군요. 별로 놀랄 일도 아니죠, 뭐. 사실 말이 없는 농부들의 숫자나 세고 있는 게 구역질이 나도록 싫었거든요." 방안은 누군가 힘센 사람이 발작을 일으킨 나머지 난폭하게 벽을 밖에서 안으로 밀어붙여 그 안의 모든 것을 온통 벌집 쑤시듯 쑤셔 놓은 것처럼 그렇게 엉망이었다. 벽에 걸려 있던 초상화들이 마룻바닥 여기저기서 나뒹구는가 하면 벽지는 찢어져 너덜너덜하고 마룻바닥엔 널빤지 하나가 뽑혀져 있었으며 창문 받침대로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게다가 부엌 바닥엔 여기저기 재가 뿌려져 있었다. 어머니는 전에도 당해본 일이라서 알고 있는 광경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니꼴라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탁자 위에는 싸늘하게 식은 사모바르와 설거지도 하지 않은 접시들, 먹다 남은 소시지, 종이에 싼 치즈조각들, 그리고 온통 빵부스러기를 뒤집어쓴 책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가 하면 사모바르용 숯검댕이들도 그 가운데서 한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빙그레 웃었 다. 니꼴라이 역시 멋쩍은 듯이 따라 웃었다. "제가 진작 치웠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괜찮아요, 닐로브나! 신경쓰지 마세요. 제 생각 에 놈들이 다시 들이닥칠 것 같거든요. 그래서 그냥 놔 두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여행은 어땠어요?" 느닷없는 질문에 깜짝 놀라 가슴이 뜨끔거리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순전히 르이빈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는 왠지 가슴이 떨려 선뜻 르이빈의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의 자에서 앞으로 몸을 굽히고 그녀는 혹시나 그 당혹스럽던 일에 대해서 한 가지라도 빠뜨리 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 되도록 침착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니꼴라이에게 죄다 털어 놓았다. "르이빈이 붙잡혔어..." 니꼴라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예?" 어머니는 손을 뻗어 그의 말을 가로막고서 흡사 판사 앞에서 고문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 고 있는 사람처럼 말을 이어 나갔다. 니꼴라이는 몸을 의자 뒤로 젖혔는데, 얼굴은 새파랗 게 질려 있었고 두 입술은 앙다물어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안경을 벗어 탁자 위에다 놓고 마치 얼굴에 거미줄이라도 쳐져 있는 것처럼 손으로 얼굴을 우악스럽게 잡아뜯었다.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고 광대뼈는 이상스레 툭 불거져 나왔으며 콧구멍이 벌렁벌렁했다. 어머니는 여태껏 그렇게 침울한 표정의 니꼴라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두 주먹을 호주머니 에 찔러 넣고서 방안을 왔다갔다했다. 잠시 후 그가 악문 잇새로 중얼거렸다. "걸물이었는데... 감옥 생활이 꽤나 견디기 힘들 거예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모르긴 몰라도 제대로 그런 생활에 적응을 못할 거예요." 그는 흥분을 억제하느라 손을 더 깊숙이 찔러 넣었지만 어머니의 눈은 속일 수 없이 어머 니는 전해 오는 그의 흥분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의 눈이 칼끝처럼 날카롭게 찢어졌다. 다 시 그는 방안을 왔다갔다하면서 분노를 담은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보세요, 얼마나 끔찍스러운 일입니까! 어리석은 놈들, 민중을 압살하는 권위, 그 파멸을 바로 눈앞에 둔 권위를 지킨답시고 닥치는 대로 때리고 목 조르고 짓밟아대니... 포악성이 날로 더해지고 이젠 잔혹함이 삶의 법칙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한 쪽에선 법이 있 는지 없는지 아랑곳없이 주먹질을 해대며 야수로 돌변해서는 학대라는 음탕한 병을 끙끙 앓 고 있습니다. 노예의 감정과 짐승의 습성의 힘을 죄다 발휘할 이유가 주어져 있는 노예의 감정과 짐승의 습성의 힘들 죄다 발휘할 이유가 주어져 있는 노예의 가장 혐오스러운 병이 바로 그 병입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쪽에선 복수심에 불타고, 어떤 사람들은 정신이 이상 해질 정도로 맞아서 귀머거리가 되고 장님이 되는 것이 지금의 실정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민중을, 민중 전체를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서, 하던 말을 중단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게 누구든지간에 야수 같은 생활 속에 묻혀 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점점 야수가 되 어 가는 법이랍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그는 흥분을 어느 정도 가라앉혀 거의 평상시의 그로 돌아와서 굳은 의지의 광채 를 두 눈에서 번뜩이며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로 촉촉히 젖어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하지만 우린 이렇게 시간을 허비해선 안됩니다. 닐로브나! 친애하는 동지, 제 손을 잡아 주세요." 슬픈 미소를 지으며 그는 어머니에게로 다가와 허리를 굽혀 어머니의 손을 잡으면서 물었 다. "갖고 가셨던 가방은 어디에 있죠?" "부엌에!" 그녀가 대답했다. "지금 대문 옆에는 첩자들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 유인물을 눈치 못 채게 대량으로 빼 돌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요. 그렇다고 마땅히 숨길 데도 없는 형편이고, 낌새를 보니 오늘 밤에 다시 들이닥칠 모양이에요. 저,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인데... 공들인 건 아깝지만 죄다 태워 버리는 게 어떻겠어요?" "뭘?" "뭐긴요, 가방 속에 들어 있는 것 다지요." 그녀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씁쓸한 기분도 없지 않았지만 어쨌든 성공적으로 맡은 바 일을 완수한 데 대한 자부심으로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흘렀다.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오, 한 장의 전단도 말이야."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점점 활기를 띠어 가면서 푸마꼬프를 만났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니꼴라이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엔 불안한 듯 얼굴을 찌푸리 더니 조금 지나서는 깜짝 놀라며 마침내는 이야기를 가로막고 나섰다. "들어 보세요, 정말 멋진 일입니다. 어머님은 정말 행복한 분이십니다." 그는 어머니의 손을 꽉 움켜쥐고 조용히 소리쳤다. "어머님은 지금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절 감동시켰습니다. 전 진정 친어머니를 사 랑하듯 그렇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눈에 미소를 머금고 그의 시선을 열심히 쫓았다. 어떻게 그토록 열 정적이 되고 생기가 흘러 넘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는 두 손을 비비며 이렇게 말하고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계속했다. "요즘은 정말 살맛이 납니다. 내내 노동자들과 더불어 책을 읽고, 이야기도 하고, 그리고 여러 가지를 보았습니다. 마음속에 뭔가 놀랄 만치 건강하고 깨끗한 그 무엇이 자라나고 있 어요. 얼마나 좋은 사람들예요, 닐로브나! 전 요즘 젊은 노동자들에 대해서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씩씩하고 예민할 수 없어요. 게다가 뭔가 알고자 하는 욕구들이 어찌나 대단한지... 그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민주화가 실현된 이땅, 러시아의 미래가 확실히 보여요." 그가 흡사 선서라도 하듯 손을 쳐들고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하던 말을 계속했다. "전 여기 이렇게 앉아서 글을 쓰고 있지만 장부나 주판알 위엔 곰팡이가 슬었습니다. 이 런 삶의 순간들이 거의 일년 내내 계속된다는 건 정말 추악한 일입니다. 이젠 저도 노동자 들 사이에 있는 것에 익숙해져서 한시라도 그들을 떠나 있으면 마음이 편칠 못해요. 전 그 래서 요즘 바짝 긴장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조만간 그들과 더불어 보고 일하는 그런 삶을 자유롭게 영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머님은 이해하실 거예요. 새로 발흥하는 생각의 요람은 바로 창조의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 얼굴이라는 걸 말입니다. 이건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젊고 굳건한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한다면 자연 삶이라는 것을 풍요롭게 살게 되는 법입니다." 그녀는 당혹스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그냥 빙그레 웃었다. 그의 기쁨이 어머니의 가 슴을 감싸안았다. 어머니는 그 기쁨이 어떠리라는 걸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어머님은 정말 좋으신 분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민중들을 명백하게 그릴 수 있단 말입니까! 언제 그런 눈을 갖고 계셨어요?" 니꼴라이는 웃는 얼굴을 한 쪽으로 돌린 채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머리를 긁적 거리다가 이내 돌아앉아 어머니를 쳐다보면서 그녀의 간결하면서 막힘이 없는,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소리쳤다. "정말 훌륭한 일입니다. 까딱 잘못했으면 모두 감옥신세를 지게 될 뻔했군요. 어쨌든 분 명한 건, 농민들이 들끓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더구나 그것도 자연스럽게 말이죠. 전 어머 님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시골마을로 달려갈 특별한 사람들이 필요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아직 부족해요. 삶이 수백의 그런 손들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이런 때 빠샤라도 곁에 있다면. 그리고 안드류샤도!" 어머니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가 어머니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저, 닐로브나! 솔직히 말씀드리기 거북살스러운 말씀입니다만, 그래도 말씀을 드리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빠벨을 잘 아는데, 그 사람 탈옥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재판을 받 고 싶어해요. 그래서 최선을 다해 보겠다는 생각이지요. 그는 결코 피하지 않을 거예요. 또 그럴 필요도 물론 없고요. 그는 시베리아에 가서나 도망칠 거예요." 어머니는 긴 한숨을 몰아 쉬고 조용히 대답했다. "나도 뭐가 뭔지... 어쨌든 빠샤는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을 다하는 건지 잘 알테니까..." "물론이지요." 니꼴라이가 다음 순간 안경너머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말씀하신 농부들이 하루 빨리 우리들을 찾아오면 좋으련만! 아시겠지만, 르이빈에 대한 유인물을 만들어서 시골에 뿌려야 해요. 분명 그런 용감한 행동은 그 사람을 더욱 강하게 할 것입니다. 전 오늘 그걸 쓰고 류드밀라가 재빠르게 인쇄를 할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어떻게 이 유인물들을 그리고 가져 가느냐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내가 가져 가지..." "그건 알된 말씀이십니다." 니꼴라이가 황급히 소리쳤다. "제 생각에 이런 일이라면 베소프쉬꼬프가 적격일 것 같은데, 안 그래요? 한번 말이나 해 볼까요?" "그래, 잘 말해서 하게 하지 뭐."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염려할 것 없어요." 니꼴라이는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탁자를 치우면서 살짝 엿보니 새까만 글씨로 종이를 가득 메워 나가는 그의 손이 펜과 함께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가끔 목줄기 가 경련을 일으켰고 그럴 때마다 그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어머니를 감동시켰다. "이제 다 되었군!"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것들 좀 어디에다 잘 감추어 두세요. 헌병들이 들이닥치면 어머님도 꼼짝없이 수색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요." "개나 물어갈 놈들!"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녁때 의사 이반 다닐로비치가 찾아왔다. "경찰이 웬일로 저렇게 설쳐대는 거야?" 방안을 왔다갔다하며 그가 입을 열었다. "간밤에 일곱 군데나 수색이 있었다는구만. 환자는 어디 있지, 응?" "어제 나가서 아직 안 돌아왔어. 자네도 알다시피 오늘은 토요일 아닌가. 토요일엔 독서 모임에 있는데 빠질 수가 없다더군..." 니꼴라이가 대답했다. "저런, 멍청하기는, 그 머리를 해 가지고 앉아서 책을 읽겠다고... 그 깨진 머리로..." "만류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네..." "동지들 앞에서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게지. <이보게나 친구들, 날 좀 보라고. 난 벌써 피 를 흘렸단 말씀이야> 하고 말이오..."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의사는 어머니를 쳐다보고 인상을 찌푸리고는 이를 앙다물고 말했다. "으--, 피에 굶주리셨어..." "이보게, 이반, 여기 있어 보았댔자 할 일도 없을테니 이만 돌아가주게. 우리는 지금 손 님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거든. 닐로브나, 이 사람한테 그 종이나 집어 주세요." "새로 작성한 건가?" 의사가 말했다. "자! 가져 가서 인쇄소에 넘기도록 하게." "그러지. 이제 됐나?" "됐어. 대문 앞에 첩자가 있네." "봤어. 우리 집 앞에도 마찬가지야. 자, 잘 있게나! 맹렬부인도 안녕히 계시고요. 아참, 친구, 공동묘지에서 있었던 일이 탈없이 잘 마무리된 것 알고 있던가? 온 시내가 그 얘기로 떠들썩했지. 그것에 대해서 쓴 자네의 유인물이 참 훌륭했어, 나온 시기도 좋았고. 내가 입 버릇처럼 그러지 않던가. 서툰 평화보다는 멋진 투쟁이 훨씬 낫다고..." "알았으니 어서 가기나 해." "별로 친절치 못하군! 손을 주세요, 닐로브나. 누가 뭐래도 그 젊은 친구는 바보 같은 행 동을 한 겁니다. 어디 사는지 혹 알고 계세요?" 니꼴라이가 그의 주소를 적어 주었다. "내일 찾아가 봐야겠군. 훌륭한 젊은이야, 안 그런가?" "그야 이를 말인가." "잘 보살펴 주어야 해. 아주 건강한 머리를 갖고 있거든." 의사가 나가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 젊은이들이 커서 나중에 쁘롤레따리아 인쨀리겐찌야가 되어야해. 그래서 계급모순 이 사라지게 될 그 곳을 향해 우리가 나아갈 때, 우리를 대신해야만 하지..." "자네 정말 쓸데없는 말 자꾸 지껄일텐가, 이반..." "기분이 좋아서 그래. 딴 이유는 없어. 자네는 뭐 감옥에 가게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나도 자네가 그 곳에서나마 편히 쉴 수 있도록 빌어 주지." "고맙군. 하지만 내가 지쳐 쓰러지려면 아직 멀었어." 어머니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걱정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의사를 보내고, 니꼴라이와 어머니는 차와 함께 간단한 요기를 하면서 밤에 찾아오기로 되어 있는 손님들을 기다렸다. 니꼴라이는 유형생활을 했던 동지들에 대해서 오랫동안 이야 기를 했다. 그들 가운데는 이미 거기서 빠져 나와 현재 남의 이름으로 일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도 물론 끼어 있었다. 발가벗은 방안의 벽들이, 세계의 변혁이라는 위대한 사업에 온 힘을 사심 없이 바친 이름 없는 영웅들의 이야기에 놀라기라도 한 듯, 그리고 못 믿겠다는 듯 그의 목소리를 떼밀었다. 따스한 밤 그림자가 본 적 없는 사람들에 대한 사람의 감정으 로 가슴에 불을 지르며 여인을 부드럽게 감싸자 그 사람들은 그녀의 상상 속에서 지칠 줄 모르는 남자다운 힘이 철철 넘치는 하나의 거대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피로도 모르고 자신의 일에 홀딱 반한 손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거 짓의 곰팡이를 씻어 내고 사람들 눈앞에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삶의 진리를 드러내 보이면서 대지 위를 걸어다녔다. 그러면 위대한 진리가 죽음에서 되살아나 모든 사람들을 한꺼번에 상냥하게 자신에게로 부르고 누구 하나 차별 없이, 자신의 파렴치한 힘으로 전세계를 노예 로 만들고 윽박질렀던 괴물 삼형제, 탐욕과 악, 그리고 거짓으로부터의 해방을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는 것이다. 이런 형상은, 그녀가 살아오며 그래도 은혜로운 날이었다고 생각되는 날에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 성상 앞에 서 있던 때의 바로 그런 감정을 그녀의 영혼 에 불어넣어 주었다. 이제 그녀는 그런 날들은 잊은 지 오래였지만 그 때문에 불러일으켜진 감정만은 그대로 남아 더욱 폭이 넓어져서 한결 밝고 즐겁게 되는가 하면 영혼 저 깊숙한 곳에서 자라나 무엇보다도 밝게 활활 타올랐다. "헌병들은 오늘 안 오려나!" 니꼴라이가 느닷없이 하던 말을 중단하고 말했다. 어머니도 그를 쳐다보고 잠시 말이 없다가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망할 놈들 같으니!" "말해 뭐하겠어요. 이제 주무셔야죠, 닐로브나. 모르긴 몰라도 무척 고단하실 거예요. 놀 랄 만큼 강해지셨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렇게 많은 동요와 혼란을 겪으시고도 다 대수롭지 않게 극복해 내시는 걸 보면! 머리카락만 몰라보게 세셨어요. 이제 가서 쉬세요."" 20... 어머니는 부엌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집요하고 불안스 레 계속되었다. 아직도 깜깜하고 고요했다. 정적 속에서 고집 센 두드림이 불안감을 불러일 으켰다. 황급히 옷을 주워입은 어머니는 재빨리 부엌으로 달려나가 문 앞에 서서 물었다. "게 누구요?" "저예요!" 누구 목소린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누구라고요?" "문부터 여세요." 문 밖에서 부탁의 목소리가 나직이 들렸다. 어머니가 빗장을 벗기고 발로 문을 밀자 이그나뜨가 안심할 듯 중얼거리며 안으로 들어왔 다. "휴, 제대로 찾아왔군!" 그는 허리까지 진흙투성이였는데, 얼굴은 허옇게 질려 있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으며 곱슬 머리는 모자 밑으로 빠져 나와 제멋대로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우리들 있는 곳에 난리가 한바탕 벌어졌습니다." "나도 알고 있어요..." 이그나뜨가 깜짝 놀라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어머니는 간단히 설명을 하고 서둘러 물었다. "둘만 붙들러 갔소? 다른 동지들은?" "그들은 거기에 없었어요. 그들은 입대를 했습니다. 자원해서요. 미하일 아저씨를 포함해 서 다섯 명이 잡혀 갔습니다." 그는 코로 한숨을 길게 내쉬고서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저만 남았습니다. 놈들은 지금 저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 겁니다." "어떻게 도망쳤지?" 어머니가 물었다.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저 말씀이신가요?" 긴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며 이그나뜨가 말했다. "그들이 들이닥치기 몇 분 전에 꼬마 하나가 창문을 막 두드리면서 하는 말이, 놈들이 그 기로 오고 있다는 게 아니겠어요?" 그는 풀어헤쳐진 옷자락으로 얼굴을 훔치고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미하일 아저씨가 쇠망치로 후려친다 해서 눈 하나 깜짝한 사람인가요? 아저씨가 제게 말씀하시더군요. <이그나뜨! 서둘러서 도시로 가! 중년 부인 기억나지?> 그리곤 쪽지 를 하나 써 주셨어요. <자, 서둘러!> 전 숲속을 기었습니다. 그들이 오는 소리가 들리더군 요. 여러명이었어요. 사방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더군요. 망할 놈의 자식들! 작업장을 쫙 에워싸더군요. 전 관목 숲 아래 누워 있었는데, 놈들이 바로 옆을 지나갔어요. 전 이때 다 싶어 벌떡 일어나 날 살려라 줄달음질을 쳤습니다. 이틀 밤 하루 낮을 쉬지 않고 걸었습 니다." 스스로 만족스러운지 그의 갈색 눈엔 미소가 흐르고 불그레한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내, 차를 좀 내오지!" 어머니가 사모바르를 들고 서둘러 말했다. "쪽지 먼저 받으세요..." 그는 어렵게 발을 들어, 인상을 쓰고 신음소리를 내면서 간신히 의자위에 올려 놓았다. 니꼴라이가 문에 나타났다. "안녕하시오, 동지! 괜찮다면, 내가 도와드리리다." 그가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허리를 구부리고 흙탕물이 묻어 있는 각반을 재빨리 끄르기 시작했다. "아네요, 됐습니다." 이그나뜨가 깜짝 놀라 말하곤 눈을 껌뻑이며 어머니를 보았다. 그의 시선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알콜로 다리를 좀 씻어 내야겠어..." "그래야겠어요!" 니꼴라이가 맞장구를 쳤다. 이그나뜨가 당혹스러운 듯 콧김을 뿜었다. 니꼴라이가 쪽지를 찾아내어 펼치고는 깨알 같은 글씨가 씌어져 있는 종이쪽지에다 얼굴 을 바짝 들이대고서 쭉 읽어 내려갔다. <아주머님, 이 일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순 없습니다. 그 키 큰 부인에게 잊지 말고 우리 의 일을 글로 적으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르이빈> 니꼴라이는 쪽지를 든 손을 천천히 내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훌륭합니다..." 이그나뜨는 신발 벗은 발을 흙투성이의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면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어 머니는 눈물로 축축해진 얼굴을 애써 가리고 물 한 대야를 가지고 그에게 다가가 마룻바닥 에 앉아 그의 발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가 깜짝 놀라 소리치면서 재빨리 의자 밑으로 감추었다. "왜 그러세요?" "발을 이리 내요, 어서..." "저는 얼른 알콜을 가져 오겠습니다." 니꼴라이가 말했다. 이그나뜨는 발을 의자 밑으로 더욱 깊숙이 집어 넣고 투덜거렸다. "무얼 하시려는 거예요? 병원도 아닌데..." 어머니는 벌써 나머지 신발도 마저 벗기기 시작했다. 이그나뜨는 더욱 크게 씩씩거리고 목을 비틀고 우스꽝스럽게 입술을 오무리고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알고 있나?"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하일 이바노비치가 얼마나 맞았던지..." "뭐라고요?" 그는 흠칫 놀라며 나직이 외쳤다. "정말이야. 처음 데려올 때부터 보니 벌써 많이 맞은 것 같더라고. 그런데 니꼴스끄에서 도, 하사한테 맞은 건 그렇다 치고 경찰서장이란 놈이 나와서는 어찌나 세게 발길질을 해댔 는지 피가 다 튀더라고."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죠!" 양미간을 찌푸리며 이그나뜨가 대꾸했다. 그의 어깨가 떨렸다. "사실 저도 그 놈들이 무서워요. 마치 악마 같아요. 농부들은 가만히 있었나요?" "농부 하나가 경찰서장이 명령하니까 르이빈을 때리더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 랬고, 때리지 말라고 하면서 편들어 주는 사람도 있긴 했지..." "그럴 거예요. 농부들도 이젠 어디에 누가, 왜 서 있는지를 깨닫기 시작했거든요." "거기에도 똑똑한 사람이 많던데..." "어디엔들 그런 사람이 없겠어요? 부족하다뿐이지! 가는 곳마다 있긴 있는데 찾는 게 어 려워서 그래요." 니꼴라이는 일콜통을 가져다 주고 사모바르에 석탄을 조금 집어 넣고는 말없이 방을 나갔 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가 나가는 것을 쳐다보던 이그나뜨가 어머니에게 나직이 물었 다. "주인 나으린가 본데, 의사예요?" "이런 일에 주인이 어디 있어, 모두 동지일 뿐이야..." "제겐 이해가 가지 않아요." 이그나뜨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이상할 게 뭐 있누?" "하여튼 그래요. 한 쪽에선 얼굴에 주먹질을 해대고, 다른 쪽에선 발을 씻겨 주고, 그럼 그 중간엔 뭐가 있는 거예요?" 방문이 열리고 문지방에 선 니꼴라이가 말했다. "그 중간에는 얼굴에 주먹질을 하는 사람에게 아첨하고, 그러면서 또 주먹질당한 사람들 의 피를 빠는,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간이란 바로 그런 거예요." "그럴듯하군요."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제자리걸음을 몇 번 하다가 두 발을 딱 바닥에 대고 서서 말했다. "마치 갓 담금질된 쇳덩이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식당에 앉아 차를 마셨는데, 그 자리에서 이그나뜨가 믿음직스러운 목 소리로 말을 꺼냈다. "전 유인물 배포하는 일을 맡아 했었어요. 걷는 데는 자신이 있었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읽던가요?" 니꼴라이가 물었다. "그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면 죄다 읽었어요. 실지어 부자들도 읽었는 걸요. 물론 그것을 우리가 가져다 주지는 않았지만요... 그들도 아마 이해하고 있을 거예요. 농민들이 지주와 부자 밑에서 제 피를 가지고 대지를 씻어 내고 있다는 것을요. 다시 말해, 농민 스스로가 토지를 분배해 나눠 가질 것이고, 이젠 더 이상 주인도 일꾼도 존재하지 않게 하려고 토지 를 분배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이 때문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서로 치고 받고 난리겠어요." 그는 심지어 니꼴라이에게도 모욕감을 느끼는지 아주 미심쩍은 눈으로 유심히 그를 쳐다 보았다. 니꼴라이는 말없이 웃고만 있어TEk. "만약 오늘 전세계를 위한답시고 막 치고 받고 싸워서 어느 쪽이 이기든 판가름이 났다고 쳐요. 그래 보았댔자 내일이면 다시 한 쪽은 부자, 다른 쪽은 가난뱅이로 나누어지게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끝인가요?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부라는 건 바람에 날리기 쉬운 모래와 같아서 온순하게 바닥에 누워 있지 못하고 다시 여기저기로 날리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죠. 그러니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성낼 필요 없어요." 어머니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좀더 빨리 르이빈의 체포에 관한 전단을 그 곳에 보낼수 있겠소?" 이그나뜨가 바짝 긴장을 했다. "전단이 있어요?" 그가 물었다. "물론이오." "절 주세요, 제가 가져 가겠어요." 젊은이가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어머니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아까 너무나도 지쳤고 무서워죽겠노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일은 일 아닙니까! 왜 웃으시는 거예요? 아니 당신도!" "아유, 요 귀여운 것 같으니!" 넘쳐나는 기쁨을 억제하면서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쳤다. 그는 웃으면서 무 척 당혹스러워했다. "사실, 어린애죠, 뭐!" 니꼴라이가 찡그린 눈에 선량한 미소를 흘리며 이그나뜨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리 안 가게 될 거요." "왜요? 그럼 전 어디로 가게 되죠?" 이그나뜨가 조심스러운 듯 물었다. "당신 대신에 딴사람이 가게 될텐데, 당신은 그 사람한테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를 소상하게 말해 주도록 하세요, 그럼 됐어요?" "좋습니다!" 이그나뜨는 대답은 하면서도 뭔가 내키지 않는 것이 있는 듯한 눈치였다. "그리고 당신에겐 적당한 신분증을 하나 만들어 주고 산림간수로 일하도록 해 주겠소." 젊은이는 위로 머리를 힘차게 쳐들고 불안한 듯 물었다. "그러다 만일 농부들이 땔감이라도 마련하겠다고 산에 올라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전 어떻게 해야 되죠? 붙잡아요? 전 그런 일이라면 죽어도 못해요..." 어머니도 웃고 니꼴라이도 따라 웃었다. 이 때문에 다시 이그나뜨는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게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눈치였다. 니꼴라이가 그를 안심시켰다. "염려하지 말아요. 농부들을 붙잡아야 할 일은 생기지 않을 거요. 우리를 믿으시오." "뭐, 그렇다면야!" 이그나뜨가 조금 안심이 되는지 기쁘게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전 공장에 취직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들은 죄다 똑똑하다던데..." 어머니가 탁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생각에 잠겨 창 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에그, 이 놈의 인생! 하루에도 다섯 번씩 웃고 또 울어야 하니! 다된 거야, 이그나뜨? 그럼 가서 자야지..." "별로 자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군소리 하지 말고 어서 가서 자..." "그렇게 엄하신 줄 예전에 몰랐습니다. 알겠어요, 가지요... 차 잘마셨습니다. 그리고 친 절 감사드려요..." 어머니의 침대에 누운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이제 침대에서 타르냄새가 진동을 하게 될 겁니다..., 아, 그건 뭐 대수로운 일도 아니 죠... 잠이 올 것 같이 않아요... 아까 그분 중간이란 것에 대해서 너무나 옳은 말씀을 하 셨어요, 정말!" 그러다가 느닷없이 코고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가 잠이 든 것이었다. 두 눈썹은 높이 치켜 올리고 입은 반쯤 벌리고서. 21... 저녁때 그는 조그만 지하실방에서 베소프쉬꼬프와 마주앉아서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해 가 지고 낮은 음성으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가운데 창문을 네 번..." "네 번요?" 베소프쉬꼬프가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처음에 세 번, 이렇게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손가락을 구부려 탁자를 두드리면서 셈을 하였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한 번." "알겠어요." "붉은 머리의 농부가 문을 열고 산파에 대해서 물을 겁니다. 그러면 <예, 공장주인이 보 내서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세요. 그렇게만 말하면 그 쪽에서 다 알아서 할 겁니다." 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둘 다 건장한 체구에 눈에 선 비장함의 불꽃이 튀었다. 어머니는 팔짱을 끼고 탁자 옆에 서서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았 다. 비밀스러운 노크, 암호와 대답이 왠지 우스운 생각이 들어서 어머니는 이런 생각을 했 다. (아직 어린애들이야...) 벽에서는 마룻바닥에 너절하게 어질러져 있는 찌그러진 물통, 지붕용함석 쪼가리들을 비 추며 램프가 타고 있었다. 곰팡이 냄새, 기름물감 남새, 그리고 눅눅한 냄새가 방안에 가득 했다. 이그나뜨는 털이 북실북실한 두툼한 가을 외투차림이었는데, 그는 그옷에 만족해 하고 있 었다. 어머닌가 가만히 보니, 그는 손바닥으로 조심스레 자기 옷을 어루만지면서 자기 차림 새를 보기도, 또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가슴은 부드럽게 고통쳤 다. (애들하고는! 꼭 친자식 같은 생각이 드니...) 이그나뜨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어때요? 기억할 수 있겠어요? 먼저 무라또프한테 가서 물어 보도록 하세요..." "기억하다마다요!" 베소프쉬꼬프가 말했다. 그러나 이그나뜨는 아직도 그를 믿을 수가 없는지 다시 한 번 노크며 암호들을 일일이 반 복하고 나서야 마침내 손을 내밀었다. "그들한테 안부 전해 주십시오. 가서 보면 금방 알겠지만, 다 좋은 사람들이랍니다." 그는 흡족한 눈으로 자신을 둘러보고 손으로 외투를 매만지고 나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가도 되겠습니까?" "제대로 잘 찾아갈 수 있겠어?" "그럼요, 찾고말고요. 안녕히 계세요, 동지들!" 그리고, 그는 어깨를 추켜세우고 가슴을 쭉 내밀고서 방을 빠져 나갔다. 새로 산 모자는 비딱하게 기울여 쓰고 양손은 한껏 폼을 잡으며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였다. 관자놀이 부근엔 곱슬머리가 빠져 나와 더펄더펄 흔들리고 있었다. 베소프쉬꼬프가 발걸음도 가볍게 어머니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이제 저도 할 일이 생겼군요! 얼마나 지루하던지... 왜 감옥을 뛰쳐 나왔나 싶기도 했답 니다. 숨는 일 밖에 더 있어요? 감옥 안에선 차라리 배우는 거라도 있죠. 빠벨이 얼마나 많 은 걸 우리들 머릿속에 채워 넣어 주었다고요. 그건 정말 유일한 만족이었어요. 닐로브나, 그런데 탈옥건에 대해선 다들 어떻게 결정을 보았어요?" "나도 잘 몰라!"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베소프쉬꼬프가 그녀의 어깨 위에 둔중한 손을 올려 놓고 어머니의 얼굴 가까이에 제 얼 굴을 바짝 디밀고서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한테 말씀하세요, 그건 아주 손쉬운 일이라고! 그들은 어머니 말씀을 들을 거 예요. 직접 보시면 아시겠지만, 감옥벽 가까이에 가로등이 있는데 맞은편은 텅 빈 공터요, 왼편은 공동묘지, 그리고 오른편이 바로 길거리로 해서 시가지로 통하는 쪽입니다. 점등원 이 낮에 매일같이 와서 등을 닦습니다. 그걸 이용해서 우선 사다리를 벽에 걸치고 기어 올 라가서 다시 줄사다리 고리를 벽 윗부분에 걸고서 그걸 감옥뜰 쪽으로 늘어뜨립니다. 줄행 랑치는 일만 남는 거죠. 미리 그 일이 진행되는 시간을 알아 두었다가 벽 뒤에 숨어서 그 시간에 딴사람들을 시켜서 소란을 일으키거나 아니면 직접 소란을 일으켜 놓고, 꼭 탈출하 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사다리를 타고 벽을 넘게 하면 되는 거예요. 하나둘씩, 어때요, 완 벽하죠!" 그는 어머니 얼굴 바로 앞에서 손을 휘둘러 자시의 계획을 상세히 설명했는데, 그에겐 그 모든 일이 간단하고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그녀는 그를 답답하고 서툰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이전에 베소프쉬꼬프의 눈에선 음울한 사악함과 불신밖에 보이는 게 없었다면, 지금은 눈빛도 날카롭지만 그래도 어딘가 둥글둥글하면서도 따뜻한, 아니면 어떤 확고함이라는 것이 깃들어 있다고 해도 무방할만큼 예전과는 다른데가 있었으므로 어머니의 마음 또한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탈옥을 할 수 있다는 생각만 하루 왼종일, 그것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 보세요. 일단 그러기로 마음먹은 사람 눈에 보이는 게 뭐 있겠어요? 감옥이 다 뭐냔 말입니다..." "그러다 총에라도 맞으면!" 어머니가 새파랗게 질려서 중얼거렸다. "누가 총을 쏜단 말예요? 군인은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나마 간수들이 갖고 있는 권총도 못 박는 데나 쓸까..." "그렇담, 정말 간단하군 그래, 간단해..." "얼마나 완벽한지 한번 들어 보세요. 어머니는 그저 얘기만 하면 됩니다. 전 모든 준비를 다 끝내 놨어요. 줄사다리, 그걸 거는 데 쓸 걸쇠 따위 말예요. 그리고 이 집 주인장이 점 등원이 되어 주기로 말이 다 되어 있어요." 문 밖에는 누군가의 기침소리, 그리고 쇠 덜컹거리는 소리가 즐렸다. "그가 오는군요." 베소프쉬꼬프가 말했다. 열려진 문으로 양철 목욕통이 들어오고 목이 잠김 소리가 들렸다. "제발 좀 들어가다오, 제기랄..." 잠시 후 모자도 쓰지 않은 백발의 둥근 머리가 나타났는데, 눈은 툭 불거져 나오고 수염 이 덥수룩하긴 해도 인상은 좋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베소프쉬꼬프가 목욕통 들어놓는 것을 거들자 키가 크고 허리가 굽은 사람이 기침을 하면 서 문 안으로 들어섰다. 면도를 깨끗이 한 볼을 부풀리고 가래침을 뱉고 나서 거친 목소리 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쇼..." "오셨으니, 물어 보세요." 베소프쉬꼬프가 말했다. "나한테? 뭘?" "탈옥에 대해서죠..." "아하!" 시꺼먼 손가락으로 콧수염을 쓸어내리며 주인이라는 사람이 말했다. "이보세요, 야꼬프 바실리예비치, 그게 간단한 일이라는 걸 여기 계신 이분이 믿질 않아 요." "으음, 믿지 않는다고? 그럴 마음이 없으신 게지. 우리는 마음이 있으니 믿는 거고." 주인이란 사람이 태연히 말을 하고는 허리를 구부리고 심하게 마른 기침을 하기 시작했 다. 그리고 기침을 하고 가슴을 비벼대면서 방 한가운데 한참을 서서 숨을 헐떡이며 휘둥그 래진 두 눈으로 어머니는 훑어보았다. "결정은 빠샤와 동지들이 해." 어머니가 말했다. 베소프쉬꼬프가 고개를 떨구고 생각에 잠겼다. "누구야, 빠샤가?" 주인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내 아들입니다." "성이 어떻게 되오?" "블라소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쌈지를 RJ내 들고 파이프를 후--- 하고 분 다음 끊어지는 소리 로 말했다. "들은 적이 있소. 내 조카가 그 사람을 알지요. 그 애도 감옥에 있는데, 예프첸꼬라고 혹 들어 보셨소? 내 성은 고분이오. 곧 젊은 사람들은 죄다 감옥에 가게 될테고, 그러면 우리 같은 늙은이들만의 세상이 되겠지. 헌병이란 놈이 와서 한다는 소리가, 조카애가 시베리아 로 가게 될 거라던가... 그렇게만 되어 봐라, 이 빌어먹을 놈들!"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서 그는 마룻바닥에 침을 뱉으며 베소프쉬꼬프를 향해 돌아앉았다. "원하지 않는다고? 남이 간여할 일이 아닌 건 사실이오. 인간이란 자유로워서, 앉아 있기 지치면 걷는 거고, 걷다 지치면 앉는 거지. 도둑질을 해 가도 아무 말 못하고, 때려도 참 고, 죽인다고 덤비면 그냥 죽어 주고, 안 봐도 뻔하지. 하지만 난 예프첸꼬를 구해 내고 말 겠어. 꼭 구해낼 거라고." 그의 간결하면서도 신랄한 말들이 어머니를 좀 망설이게 했는데, 마지막 말 한마디가 어 머니를 일깨웠다. 차가운 비바람을 맞으며 거리를 걸어 내려가면서 어머니는 베소프쉬꼬프를 생각했다. (완전히 딴사람이 됐어, 정말!) 그리고 기도문을 외우듯 고분이란 사람에 대해서도 신중히 생각해 보았다. (분명한 건, 새롭게 삶을 시작한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나니 아들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탈옥에 응한다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