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투 지은이:체호프 옮긴이:박형규 발행처:(주)금성출판사 차례 결투 중간 이층이 있는 집 귀여운 여인 사랑에 대하여 작가와 그의 작품 머리말 러시아의 저명한 작가 체호프는 다양한 작품 경향을 갖고 있었으나, 대체로 인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그의 원숙기에 완성된 작품들이다. 특히 '결투'는 필치가 여유 있고 밝은 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의지가 박약하고 우유부단한 몽상가 라에프스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폰 코렌, 활달하고 순박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사모이렌코, 자신의 인생을 회의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나데지다, 항상 겸손하고 명랑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는 신부 등,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가 뚜렷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진심을 추구하며 사람들은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그러나 진실에 대한 갈망과 굽히지 않는 의지가 앞으로 앞으로 그들을 몰아 낸다. 그리고, 참된 진실에 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작가가 '결투'의 마지막에서 라에프스키의 마음을 통해 나타낸 이 한 마디는 읽는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만다. '등장 인물' *결투 라에프스키:우유 부단하고 몽상적인 성격의 공무원, 모든 일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결투를 하게 된 순간 성격이 일변한다. 나데지다 :라에프스키의 정부. 남편을 버리고 라에프스키를 따라 카프카즈로 왔으나 그와의 갈등으로 괴로워한다. 사모이렌코:군의관. 모든 일에 적극적이어서 이웃을 도와 주기 위해 항상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중간 이층이 있는 집 나:화가. 6, 7년 전에 겪은 슬픈 사랑을 회상한다. 벨로쿠로프 '나'가 머물러 있던 영지의 젊은 지주. 제냐(미슈시):보르차니노프 가의 둘째딸. '나'와의 사이에 진실한 사랑이 싹튼다. *귀여운 여인 올렝카(올리가):기구한 운명의 여인. 그녀는 어느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한다. *사랑에 대하여 알료힌:루가노비치의 아내 안나를 사랑하면서도 그 마음을 숨기고 있다가 이별할 때 서로 털어놓게 된다. 결투 1. 아침 여덟 시--장교와 관리, 그리고 피서객들이 대개 무더운 하루 밤을 지낸 뒤, 한 차례 해수욕을 하고, 커피나 홍차를 마시러 찻집에 들리는 시간이었다. 이반 안드레이치 라에프스키라고 하는, 한 스물 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깡마르고 금발인 젊은이가 재무성의 제모를 쓰고 슬리퍼를 끌며 해수욕을 하러 와 보니, 바닷가에는 이미 안면 있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친구인 군의관 사모이렌코의 얼굴도 보였다. 짧게 깎은 큼직한 머리, 멧돼지 목에 붉은 얼굴, 큼직한 코, 짙은 검은 눈썹, 희끗희끗한 구레나룻, 뚱뚱하고 느슨한 몸매, 게다가 군인 특유의 목쉰 듯한 굵은 목소리, 이러한 특징을 갖춘 사모이렌코는 처음 이 고장을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영락없이 탁한 목소리의 사병 출신이라는 좋지 않은 인상을 주지만, 서로 인사를 하고 2, 3일쯤 어울리다 보면 그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선량하고 매력 있어 보이고, 아니 그뿐만 아니라 미남으로까지 보이는 것이다. 사실, 이 사모이렌코라고 하는 사나이는 둔해 보이는 동작과 좀 거친 태도와는 걸맞지 않게 마음씨가 착하고, 한없이 선량하며, 부드럽고 싹싹한 사나이였다. 이 고장 사람들과는 너 나 할 것 없이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이고, 게다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돈을 빌려주거나 치료를 해 주거나 결혼 뒷바라지를 해 주거나 싸운 사람들을 화해시켜 주거나 피크닉 때에는 잔심부름을 맡고 나서서, 양고기 구이와 기가 막히게 맛있는 숭어국도 끓인다는 식으로, 일년 내내 남을 위해 뛰어다니기도 하고 참견도 하면서 혼자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고장의 소문으로도, 그는 참으로 좋은 사나이이며, 결점이 있다고 한다면 기껏 해서 두 가지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는 자기의 마음씨가 착한 것을 도리어 수줍어하며, 일부러 무서운 얼굴을 해 보이거나 거친 태도를 나타내 보이거나 하는 점,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기껏 해서 아직 5등관인 주제에, 위생 하사관이나 졸병들이 자신을 각하라고 불러 주는 것을 꽤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알렉산드르, 자네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사모이렌코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물이 어깨에 찰 때까지 걸어 나갔을 때, 라에프스키가 물었다. "말하자면 가령 말이야, 어떤 여자를 좋아하게 되어 같이 살게 되었다고 하잔 말이야. 그리고 그 여자와 그럭저럭 한 2년 남짓하게 동거한 끝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사랑이 식어서, 그 여자가 생판 남처럼 여겨지게 되었다고 하잔 말이야. 그런 경우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그건 아주 간단한 일이야. 자, 이봐요. 어디로든지 당신 마음대로 나가 줘요. 하기만 하면 처리가 되지 않나." "말로는 쉬운 일이지! 한데 그 여자가 아무 데도 갈 데가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이렇다 할 친척도 없이 외톨박이인데다가 돈도 한 푼 가진 게 없고, 게다가 생활 방편도 없다고 하면 말일세...." "까짓 것, 문제없어. 일시불로 5백 루우블리쯤 쥐어 주든가, 그렇지 않으면 한 달에 25루우블리씩 대주든가, 어쨌든 그것으로 깨끗이 해결되지 않겠나. 아주 간단한 일이야." "하긴 그래. 그럼 가령 그 5백 루우블리가 있다고 하세. 다달이 25루우블리도 대 줄 수 있다고 치고. 그렇지만 말일세, 그 문제의 여자가 교육을 받은 고상한 여자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얼굴을 맞대고 돈이나 대 주겠다고 하는 말이 나오겠나? 도대체 뭐라고 말을 꺼내지?" 사모이렌코는 무엇이라고 대답하려 했으나, 마침 그 때 큰 물결이 닥쳐와서 그들 머리를 덮치고 부서져 나가는가 싶더니, 쏴아 소리를 내면서 조약돌 위로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모래밭으로 올라와 옷을 입기 시작했다. "하긴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와 같이 산다는 건 지겨운 일인 것이 틀림없어." 사모이렌코는 장화의 모래를 털어 내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인정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어. 안 그런가? 어쨌든 나 같으면, 설사 싫어졌다고 하더라도 그런 내색은 털끝만큼도 내보이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같이 살겠어." 이같이 말하고 나자, 갑자기 자기의 말이 겸연쩍은 듯, 말소리를 바꾸어, "굳이 말을 하자면, 이 세상에 여자란 씨도 없는 게 좋아. 여자 따윈 악마의 밥이나 되라지!" 하고 말했다. 옷을 다 입고 나자, 그들은 찻집으로 갔다. 사모이렌코는 여기서는 한 집안 식구와 같은 대접을 받아서, 컵 따위도 전용의 것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가 매일 아침 나타나면 커피 한 잔, 높은 컵에 얼음을 띄운 물 한 잔, 그리고 코냐크 한 잔이 쟁반에 얹혀 나온다. 그는 먼저 코냐크를 마시고, 다음에는 따끈따끈한 커피를 마시고, 나중에 얼음을 띄운 냉수를 마시는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그 맛이 여간 아닌 것 같았다. 그 증거로는, 다 마시고 나면 영락없이 꿈꾸는 듯한 눈매가 되고, 두 손으로 구레나룻을 쓸면서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천천히 이렇게 중얼거리곤 하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멋진 경치야!"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우울한 상념 때문에, 무더위와 밤의 어둠까지 더욱 짙어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기나긴 하루 밤을 꼬박 새운 라에프스키는 피곤하여 맥이 풀렸다. 해수욕이나 커피도 전혀 기분을 돋우어 주지는 못했다. "한데 알렉산드르, 또 아까 그 얘기로 되돌아가는데 말야." 하고 그는 입을 열었다. "친구인 자네에게는 무엇 하나 숨기지 않고 까놓고 말하겠네만, 실은 말일세, 나데지다와의 관계는 싱겁게 됐어. 정말이지 싱겁게 됐단 말일세! 개인 일을 들추어 미안하네만, 나는 도저히 말하지 않을 수 없어." 이야기가 어떻게 되어 갈 거라는 걸 예감한 사모이렌코는 눈길을 내리깔고,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여자와 2년간 동거해 보니 사랑이 깨끗이 식고 말았어." 라에프스키는 말을 이어 갔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도, 지금 와서 알게 된 일이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사랑 따위는 없었던 거야. ...요컨대 요 2년 동안 나는 생각을 잘못해 왔던 거지." 라에프스키는 이야기를 할 때, 자기의 장밋빛 손등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도 하고, 손톱을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다. 지금도 그는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 "하긴 자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쯤은 나 역시 잘 알고 있어." 그러더니 그는 덧붙였다. "그런데도 내가 굳이 자네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나 같은 인생의 실패자나 쓸모 없는 자에게는 지껄이기라도 하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기 때문일세. 나는 자신의 행동을 일일이 보편화시키지 않을 수 없어. 자신의 어리석기 짝에 없는 생활의 설명이나 이유를 누군가의 학설이든가 문학상의 타이프라든가 그런 것들 속에서 찾아보지 않을 수 없어. 예를 들면, 우리 귀족 계급은 퇴화되어 가고 있다고 하는 투로 말일세.... 실제로 간밤에도 나는, 톨스토이가 말한 대로다, 참으로 지독하기 짝이 없어! 하면서 밤새껏 그 생각만 하며 자신을 달랬던 거야.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어. 정말이지 대단한 작가야. 뭐니뭐니 해도 말이야, 안 그런가!" 사모이렌코는 하고 많은 날 톨스토이를 읽어 봐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직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당황한 채 이와 같이 말했다. "맞았어, 어떤 작가거나 모두 상상에 의해서 쓰고 있지만, 톨스토이만은 있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쓰니까." "바로 그거야." 하고 라에프스키는 감탄을 하며 말했다. "우리들은 얼마만큼 문명의 해독을 입고 있을까! 나는 남의 아내를 사랑했어. 그 쪽도 나를 좋아했지.... 처음에는 키스다, 조용한 밤이다, 약속이다, 스펜서가 어떻고, 이상이 어떻고, 공통의 관심이 어떻고 하면서 정신없이 열중되어 있었지만 그건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있었을 뿐이지! 우리들은 결국 그 여자 남편한테서 도망쳐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인텔리 생활의 공허함을 벗어난다는 둥 주워섬기며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걸세. 정말이지 우리들은 미래를 이와 같은 모양으로 꿈꾸고 있었던 거야. 맨 먼저 카프카즈로 간다, 그 고장 사정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제복을 입고 관공서에 근무한다, 이윽고 자유로운 몸이 되면 땅을 좀 사서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을 한다, 포도를 재배한다, 밭을 일군다, 어쩐다고 법석이었지. 그게 내가 아니고 자네든가 그렇지 않으면 저 동물학자인 폰 코렌이었다면, 나데지다와 30년이나 같이 산 끝에, 훌륭한 포도밭이나 천 정보나 되는 옥수수 밭을 자손들에게 물려줄지도 몰라. 그렇지만 첫날부터, 나는 글렀다는 느낌이 들었어. 시내에 있으면 더워서 못 견딜 지경이지. 짜증만 나고, 말벗도 제대로 없어. 밭에 나가면, 또 거기서는 어디로 눈길을 보내나 덤불 아니면 돌 밑에 지네니 전갈이니 뱀이니 하는 따위가 숨어 있는 것만 같아. 밭 건너편에는 산과 황야만 있을 뿐이고. 서먹서먹한 사람들, 익숙하지 못한 자연, 빈약한 문화--들어보게나, 여보게, 이런 모든 것들은 털외투를 입고서 네프스키 거리를 나데지다와 팔을 끼고 거닐면서 남쪽 나라 일들을 꿈꾸는 것 같은 그런 손쉬운 일은 아니란 말일세. 여기서는 목숨을 건 싸움이 필요한데, 내가 도대체 어떤 싸움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처량한 노이로제 환자, 창백한 인텔리... 나는 첫날부터 근로 생활이라든가 포도밭이라고 하는 나의 생각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런데 연애 쪽은 어떤가 하면, 이 말은 꼭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인데, 글세 스펜서를 읽고,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좋다고 하는 여자와 사는 거란 흔해 빠진 안피사나 아크리나와 같이 사는 거나 요컨대 마찬가지라서 재미있을 것도 신나는 것도 못 돼. 여전히 변함없는 다리미질 냄새, 분이나 약 냄새, 여전히 변함없이 매일 아침의 머리 감는 종이, 여전히 변함없는 자기 기만...." "다리미가 없으면 가정을 가질 수 없어." 사모이렌코는 안면이 있는 부인에 관해서 라에프스키가 너무나 노골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바냐, 자네 오늘 어떻게 된 게 아닌가? 나데지다 씨는 교양이 있는 훌륭한 부인이고, 자네도 똑똑한 사람이 아닌가 말이야. 하기는 자네들은 물론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지만." 사모이렌코는 주위의 테이블을 두리번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자네들의 죄가 아니야. 그리고... 우리들은 마땅히 편견을 버리고, 현대 사상의 수준에 서서 사물을 생각해야만 해. 실제로 나 자신은 자유 결혼 편이지. 그렇고 말고. 그러나 그렇다 치더라도 일단 함께 살게 된 이상 죽을 때까지 백년 해로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애정이 없어도?" "어쨌든 들어보게나." 하고 사모이렌코가 말했다. "8년쯤 전의 일인데, 이 도시에서 대리업을 하던 영감이 하나 있었어.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입버릇처럼 되뇌는 말은, 가정 생활에서 중요한 건 참는 일이야, 하는 거였지. 알겠나, 바냐. 사랑이 아니라 참는 거란 말일세. 사랑이란건 아무래도 오래 가는 것은 못 돼. 자네는 이제까지 2년 남짓 애정 생활을 해 온 셈인데, 지금이야말로 자네의 가정 생활은, 말하자면 밸런스를 잡기 위해 자네가 인내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야 할 시기로 접어들었다고 봐도 좋아...." "자네는 그 대리업자인가 뭔가 하는 영감의 말을 믿고 있는 모양이네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런 충고는 넌센스야. 그 영감이라면 태연히 위선자가 되기도 하고, 인내력을 수양에 힘쓰고, 게다가 사랑하고 있지도 않은 사람을 자기 수양의 필요한 도구로 삼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직 거기까지 타락하지는 않았어. 인내력의 수양이라면 나는 아령이나 사나운 말을 사겠어. 다른 사람을 사용하는 것 같은 짓은 하지 않아." 사모이렌코는 얼음 넣은 백포도주를 주문했다. 두 사람이 한 잔씩 마지고 있을 때, 라에프스키가 불쑥 이렇게 물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뇌연화증이란 어떤 병이지?" "글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말하자면 뇌가 연해지는 것이라고 할까, 희박하게 되는 것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런 종류의 병이야." "완치되나?" "응, 치료를 게을리하지만 않는다면. 관수욕, 발포고... 그리고 무엇인가 내복약을 써야 해." "그렇군.... 그러고 보면 내 상태는 대체로 지금 얘기한 대로야. 그 여자와는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어. 내 힘으로는 벅차. 자네와 같이 있을 때에는 나도 이처럼 이론을 펴고 웃기도 하지만, 일단 집으로 돌아가면 맥이 탁 풀려서 꼼짝도 할 수 없어. 만약 누군가가, 너는 저 여자와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동거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면, 나는 권총으로 내 머리를 쏘지 않을 수 없어. 나는 그만큼 몰리고 있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헤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 여자는 의지할 만한 곳도 없고, 스스로 살아갈 힘도 없는데다가, 나나 그 여자는 한 푼도 없기 때문이지.... 그녀를 어디로 가라고 하면 좋을까. 누구한테 보내지? 뾰족한 수가 없어.... 어디, 말해 보게나. 난 어떻게 하면 좋겠나?" "으음...." 사모이렌코는 대답에 궁하여 신음 소리를 냈다. "그녀는 자네를 사랑하고 있나?" "응, 사랑하고 있어. 그런 나이의, 그 같은 기질의 여자가 사내를 필요로 하는 한에서는 말일세. 그 치에겐 나와 헤어진다는 것은 분이나 머리를 감아 올리는 종이와 헤어지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겠지. 그 치의 눈으로 보기엔, 나는 규방에 없어서는 안되는 비품 가운데 하나일 테니까 말일세." 사모이렌코는 당황하며, "바냐, 자네는 오늘 아무래도 이상한걸. 잠이 모자라는 탓인가 봐." 하고 말했다. "응, 잠을 제대로 못 잤어. 아무래도 몸의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아. 머릿속은 텅 비었고, 심장은 멈출 것만 같고, 게다가 어떻게 된 셈인지 통 기운을 차릴 수 없거든.... 그래, 도망쳐야겠어!" "어디로?" "저 쪽으로. 북쪽으로 말일세. 소나무와 버섯이 자라나고 있고, 사람과 사상이 같이 살고 있는 곳 말이야. 가령 오늘이라도 당장 모스크바 지방이든가 툴라 지방의 그 어떤 냇가에서 미역을 감고 몸을 식힌 뒤, 세 시간쯤 그 어떤 형편없는 학생이라도 좋으니 함께 그 근처를 거닐면서 마음껏 얘기를 나눌 수가 있다면 나는 설사 수명이 반으로 줄어들지라도 아깝지 않겠어! 저 건초 냄새! 생각이 나나? 그리고 저녁은 저녁대로 뜰을 산책하고 있노라면 집 안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 오지.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도 들려 오고...." 라에프스키는 즐거운 나머지 웃기 시작했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했다. 그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 앉은 채 옆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성냥갑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이미 18년 동안이나 러시아에 가 보지 못했어." 하고 사모이렌코가 말을 이었다. "저 쪽 사정이 어떤지조차 잊어버렸어. 나는 카프카즈만큼 멋진 곳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베레시차긴의 그림 가운데 굉장히 깊은 우물 속에서 사형수들이 신음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 있어. 자네가 말하는 이른바 멋진 카프카즈라는 곳은 나로서는 바로 그 우물과 마찬가지네. 가령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굴뚝 청소를 하겠느냐, 거기서 임금님이 되겠느냐, 둘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굴뚝 청소부를 택하겠어." 라에프스키는 갑자기 생각에 잠겼다. 등기 구부정한 몸매, 빤히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눈, 땀이 밴 창백한 이마, 푹 꺼진 관자놀이, 물어뜯은 손톱, 뒤꿈치가 축 처져서 솜씨 없이 꿰맨 양말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슬리퍼, 그러한 그의 모습을 보면, 사모이렌코는 저도 모르게 이 사나이가 가엾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아마 라에프스키가 애처로운 어린이를 연상케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불쑥 이렇게 물었다. "자네 어머니는 살아 계신가?" "응, 그렇지만 어머니와는 의절한 상태일세. 어머니는 우리들의 연애를 허락하시지 않았거든." 사모이렌코는 이 친구를 사랑하고 있었다. 마음놓고 함께 마시고, 웃고, 탁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아직 학생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탈하고 좋은 사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사나이의 행동 가운데 그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점은 몹시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에프스키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게다가 때를 가리지 않고 마시는 것이다. 그리고 노름을 한다,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생활 태도가 분수에 맞지 않는다, 이야기를 할 때에는 노골적인 말을 한다, 슬리퍼를 신은 채 바깥을 거닌다, 남이 있는데도 나데지다와 말다툼을 벌인다--이런 것들이 사모이렌코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라에프스키가 일찍이 대학 문과에 적을 두고 있었다는 점, 극히 한정된 사람에게밖에 통하지 않을, 돌려서 하는 비유의 말을 쓰고 있다는 점, 인텔리 부인과 동거하고 있는 점--이러한 것들은 사모이렌코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모두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라에프스키가 자기보다 한층 위의 사람이라고 보고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소한 일이지만 또 한 가지...." 하고 라에프스키는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들끼리의 얘기로만 해 두게. 지금으로서는 나데지다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있는 곳에서 말하면 곤란해. 실은 그저께 그녀의 남편이 뇌연화증으로 죽었다는 편지가 왔어." "하늘나라에서나 편히 쉬라지...." 사모이렌코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왜 그녀에게 알려 주지 않나?" "하지만 그 편지를 그녀에게 보여 준다는 것은, 어서 교회에 가서 식을 올리자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그 전에 두 사람의 관계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어. 우리들은 이 이상 같이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그녀가 납득한 뒤에 비로소 편지를 보여 줄 셈이야. 그렇게 하면 별로 위험은 없을 테니까." "여보게, 바냐." 하고 사모이렌코가 입을 열었으나, 그 순간 그의 얼굴에는 마치 무엇인가 매우 즐거운 소원이 있지만 아무래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여기는 듯한, 측은하고도 안타까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지 말고 결혼하게나!" "왜?" "그 훌륭한 부인에 대한 자네의 의무를 이행하는 걸세! 남편이 죽었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 자네가 해야 할 일을 지시한 것일세!" "그렇겐 못 하겠어. 자네는 이상한 친구군. 도대체 사랑도 없이 결혼한다는 것은 신앙도 없이 미사를 드리는 것과 같은 비열하고, 사람의 탈을 쓰고 못 할 짓이 아닌가!" "그렇지만 결혼은 자네 의무야!" "어째서 내 의무인가?" 라에프스키는 초조해져서 물었다. "어째서라니, 자네는 자네 책임 아래 그녀를 남편한테서 빼내 오지 않았나?" "그러나 아까부터 분명히 말하고 있는 일이지만, 나는 사랑하지 않는단 말일세!"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다 못해 소중히 여겨 주고, 기쁘게 해 주게나...." "소중히 여겨 주고, 기쁘게 해 주라고?" 하고 라에프스키는 일부러 상대방의 말투를 흉내내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수녀원 원장이 아니란 말이야. ...도대체 자네는 여자와 같이 사는 데 아첨이나 하고 비위나 맞추어 주면 일이 다 되는 줄 아나? 그래 가지곤 자네는 심리학자로나 생리학자로서도 낙제일세. 여자가 무엇보다도 필요로 하는 건 침실이란 말일세." "바냐, 바냐...." 사모이렌코는 당황할 뿐이었다. "자네는 나이든 어린아이고 이론가야. 나는 애늙은이며 현실가이고. 우리는 아무래도 서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군. 이런 얘기는 집어치우세. 무스타파!" 라에프스키는 큰 소리로 웨이터를 불렀다. "얼마야?" "자네, 그러면 곤란해...." 하고 군의관은 깜짝 놀라며 라에프스키의 팔을 잡고, "계산은 내가 하겠어. 내가 시켰거든. 내게 달아 놔!" 하고 무스타파를 보고 외쳤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다문 채 바닷가에 난 길을 걸어갔다. 가로수 길로 나가는 모퉁이까지 오자, 그들은 멈추어 서서 작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자네는 욕심이 지나쳐!" 사모이렌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처럼 젊고 아름답고 교양 있는 부인을 하늘에서 주셨는데, 자네는 그걸 받아들이지 않거든. 나 같으면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비록 몸이 구부정한 할머니일지라도 애교가 있고 마음씨만 착하면 불평을 하지 않을 걸세. 그러면 포도원이나 가꾸고 같이 살면서...." 사모이렌코는 여기까지 말하자, 정신이 번쩍 들어서, "아니, 그 매정한 할멈한테 차나 끓여 달라고 하겠어." 하고 말했다. 라에프스키와 헤어지자, 그는 가로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뚱뚱하고 풍채도 의젓한 자기가 얼굴에 위엄 있는 표정을 띠면서 새하얀 군복에 반짝반짝 윤이 나는 장화를 신고, 딱 편 가슴에 리본이 달린 블라디마르 훈장을 번쩍이면서 가로수 길을 유유히 활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 길 가는 사람들도 한 사람 빼놓지 않고 자기의 모습에 반해서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는 앞을 향하여 얼굴을 똑바로 들고, 이따금 양쪽으로 곁눈질하면서, 이 가로수 길은 참 훌륭하다. 저 측백나무와 유우칼리의 어린 나무, 아니 저 보잘 것 없는 영양 실조에 걸린 종려나무마저도 아주 훌륭하지 않은가, 머지 않아 틀림없이 큰 나무 그늘을 만들어 주게 되겠지, 그리고 체르케스인 역시 정직하고 손님 좋아하는 민족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카프카즈가 라에프스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정말이지 이상해.' 총을 멘 군인 다섯 명이 맞은편에서 걸어와, 그에게 경례를 했다. 가로수 길의 오른쪽 보도를, 중학생 아들을 데리고 관리 부인이 지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비츄고바 씨." 사모이렌코는 상냥한 웃음을 띠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해수욕을 다녀오시는 길인가요? 핫하하... 주인 어른께 안부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띤 채 걸어갔다. 그러다가 맞은편에서 오는 위생 하사관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엄숙한 얼굴이 되어, 그를 불러 세우고 이렇게 물었다. "병원에 환자가 도착했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각하!" "뭐라구?"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각하." "좋아, 가 봐...." 그리고 그는 유유히 몸을 흔들며 레모네이드 매점으로 걸어갔다. 진열대 건너편에는, 그루지야인인 체하고 있지만 사실은 유대인인 유방이 큰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이 할머니를 보고 그는 마치 연대라도 지휘하듯이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소다수를 부탁합니다!" 2. 라에프스키의 나데지다에 대한 혐오감은 주로 다음과 같은 점에 나타나 있었다. 그것은 곧, 그녀의 말이나 행동 모두가 그의 눈에는 속임수이거나 속임수에 가까운 것으로 비치고, 또 그가 여성과 연애를 공격한 어떤 기사를 읽을 때마다 그것은 자기와 나데지다와 그녀의 남편에게 꼭 들어맞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아침도 그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녀는 이미 옷을 갈아 입고, 머리를 빗고, 창가에 앉아 언짢은 일이라도 있는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면서 종합 잡지 책장을 뒤적이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는 그녀의 그와 같은 모습을 본 순간, 커피를 마시는 일이 뭐 그리 색다른 사건도 아닐 텐데 그처럼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지 않아도 좋은 일이 아닌가, 그리고 유행에 따라 머리를 땋은 것도 쓸데없는 시간을 보낸 것이다, 아무도 칭찬해 주지도 않을 테고, 애당초 아무 뜻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잡지를 읽고 있는 것도 속임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옷 보양을 내거나 머리 손질을 하거나 하는 것은 자신을 미인으로 보이고 싶어하기 때문이고, 독서하는 것도 자기를 똑똑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오늘 나도 해수욕 가도 좋겠어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나쁠 것도 없지! 당신이 가건 안 가건, 그 때문에 설마 지진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데..." "그게 아니라, 의사 선생님이 화를 내시지나 않을까 해서 물은 거예요." "그렇다면 그 선생에게 물어 보는 게 좋지 않겠어? 난 의사가 아니야." 오늘 아침 라에프스키가 가장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나데지다의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와 목덜미까지 내려온 고수머리였다. 그는 안나 카레니나가 남편에게 정나미가 떨어졌을 때, 무엇보다도 비위에 거슬리는 것은 남편의 귀였다고 하는 것이 생각나, '정말이지 꼭 그대로야. 틀림없이 들어맞거든!' 하고 생각했다. 몸이 나른하고 머리가 띵하여, 그는 서재로 들어가서 소파에 드러눕자 파리 때문에 얼굴에 손수건을 덮었다. 꼭 같은 한 가지 일에 대한 나른한 상념이 잔뜩 흐린 가을 저녁에 길게 뻗쳐 있는 짐마차의 행렬처럼 끝없이 머릿속에서 오락가락했다. 그는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는 어두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나데지다에 대해서나 그녀의 남편에 대해서나 죄가 있다. 남편이 죽은 것은 나 때문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또한 자기 스스로의 손으로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고원한 사상과 지식과 근로의 세계에 대해서도 나는 죄를 짓고 있다,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멋진 세계가 가능하고 또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굶주린 터키인과 게으른 아프하지아인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이 바닷가가 아니라, 오페라가 있고 극장이 있고 신문이 있고, 모든 종류의 지적 노동이 영위되고 있는 저 쪽 북국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성실, 총명, 고매, 순결할 수 있는 것은 저 쪽뿐이지 이 쪽이 아닌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는 이상도 없고, 살아가기 위한 지도 원리도 없다는 것,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자기는 겨우 이제와서야 이해하기 시작한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고, 스스로를 책망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에 그가 나데지다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었던 당시는, 나데지다와 손에 손을 맞잡고 카프카즈로 가기만 하면, 자기는 인생의 비속과 공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지금도 그것과 꼭 같이, 나데지다를 버리고 페테르스부르크로 가기만 하면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손에 들어온다고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달아나는 거다!" 그는 일어나 소파에 앉아서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달아나는 길이 있을 뿐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기가 기선을 타고 아침 식사를 들거나 시원한 맥주를 마시거나 갑판에서 부인들과 세상 이야기를 하거나 세바스토폴리에서 기차를 갈아 타고 여행을 계속하는 광경이 떠올랐다. 자유여, 오랜만일세! 역이 잇달아 눈앞을 스쳐가고, 공기가 차차 몸에 차갑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자작나무와 전나무가 보인다. 쿠르스크, 모스크바.... 역에 있는 식당에서는 양배추 수프와 양고기가 들어간 오트밀, 그리고 철갑상어와 맥주 따위가 나오기 시작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아시아의 풍물은 자취를 감추고, 러시아, 진짜 러시아가 되는 것이다. 기차 안에서는 장사 이야기나 신진 가수 이야기나, 그리고 러시아와 프랑스의 우호 관계 이야기가 나온다. 발랄하고 고상하고 지적인 생명의 약동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빨리, 빨리! 자, 도착했다. 네프스키 거리. 볼리샤야 모르스카야 거리. 언제인가 학생들과 같이 산 일이 있는 코브노 오솔길. 그리운 잿빛 하늘. 부슬부슬 내리는 비. 흠뻑 젖은 합승 마차.... "라에프스키!" 옆방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계십니까?" "여기 있어요." 라에프스키는 그에 대답하고, "무슨 일이죠?" 하고 물었다. "서류입니다!" 라에프스키는 현기증을 느끼면서 마지못해 일어나 하품을 하고,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옆방으로 갔다. 방으로 들어가자 열어 놓은 창 너머 한길에서 관청의 젊은 동료가 창틀 위에 서류를 펼쳐 놓고 있는 중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주게." 라에프스키는 상냥하게 말하고, 잉크병을 가지러 갔다. 이윽고 창가로 돌아오자, 읽어 보지도 않고 서류에 서명을 하고는, "덥군!" 하고 말했다. "네, 오늘은 출근하십니까?" "글쎄...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아서. 미안하지만 셰시코프스키에게 오후에 들러 달라고 전해 주게." 동료는 돌아갔다. 라에프스키는 또 서재의 소파 위에 드러눕고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모든 사정을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어. 여기를 떠나기 전에 빚을 갚지 않으면 안 돼. 빚은 2천 루우블리쯤 돼. 그런 돈은 가지고 있지 않아.... 그렇지만 그것은 어떻게 든 되겠지. 일부만 어떻게든 융통하고, 나머지는 페테르스부르크에 가서 보내면 되겠지. 문제는 나데지다야.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어. 그래, 그게 문제야.' 얼마 있다가 그는 사모이렌코에게 의논을 하러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가도 나쁠 건 없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어차피 규방이니 여자니 성실이니 불성실이니 하는 말만 꺼내어 그 친구는 귀찮게 할 뿐일걸. 한시라도 빨리 생활을 고쳐 세워야 할 현재, 내가 이 꺼림칙한 감옥 속에서 신음하면서 나 자신을 망치고 있는 현재. 성실이니 불성실이니 하는 따위 말을 해 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게 아닌가.... 내가 지금 이런 생활을 이 이상 계속 해 나가는 것은 비겁하고 잔혹하다고 하는 것, 그것에 비하면 다른 문제는 모두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이제 깨달을 만한 때이다. 달아나는 거다!' 하고 그는 일어나서 고쳐 앉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달아나는 일만이 있을 뿐이다!" 황량한 해안 지대, 언제 물러날지도 모르는 무더워, 영원히 똑같은 연보랏빛 연기가 감돌면서, 영원히 아무 말이 없이, 영원히 고독한 산들의 단조로움은 그를 우울하게 할 뿐이었다. 그는 그런 모든 것들에 의해서 신경이 마비되고, 모든 능력을 빼앗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기는 어쩌면 매우 총명하고 재능이 풍부한, 그리고 비할 바 없이 성실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바다와 산으로 사방이 막혀 있지만 않았다면 탁월한 지방 의회 의원이나 정치가나 웅변가나 평론가나 봉사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가령 유능한 재질을 타고난 인물, 예컨대 음악가거나 화가가 갇혀 있는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감옥의 별을 부수고, 간수를 속였다고 해서, 그것이 성실한가 불성실한가 하고 따지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그런 처지에 놓인 인물의 행위는 모두가 성실한 것이다. 오후 두 시에 라에프스키와 나데지다는 점심 식탁에 마주 앉았다. 가정부가 토마토가 들어 있는 쌀 수프를 가져왔을 때, 라에프스키가 말했다. "만날 똑같은 것이군. 양배추 수프는 못 끓이나?" "양배추가 없어요." "그거 이상하군. 사모이렌코의 집에서도 양배추 수프를 끓이고, 비츄고바의 집에서도 끓이는데, 우리 집에서만은 어찌된 영문인지 이 달착지근한 죽을 먹어야 한다니, 그건 곤란해. 그렇지 않아, 여보?" 대부분의 부부가 그러하듯이, 라에프스키와 나데지다도 처음엔 점심때마다 정해 놓고 신경질을 부리며 다투는 것이었으나, 라에프스키가 자기는 이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마음먹은 후부터는,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나데지다의 체면을 세워 주고, 친절하고 상냥한 말투로 말하고, 미소를 잊지 않고, 또 '그렇지 않아, 여보' 투의 말을 쓰는 것이었다. "이 수프는 감초 같은 맛이 나는데." 라에프스키는 미소지으면서 말을 하곤 될 수 있는 대로 듣기 좋게 말하려고 애썼으나, 마침내 참을 수가 없어 이런 말을 하고 말았다. "우리 집에선 아무도 집안 살림을 보는 사람이 없어. 당신이 아프던가, 그렇잖으면 책에서 손을 뗄 수 없다고 한다면 내가 부엌일을 보겠어." 그전의 그녀였다면, "그럼 그렇게 해 보세요." 라든가, "알겠어요. 저더러 하녀가 되라고 하시는 거군요." 라고 대꾸할 것이었으나, 지금은 다만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오늘은 기분이 어때?" 하고 그는 다정하게 물었다. "오늘은 좋은 편이에요. 하긴 조금 피곤한 듯하긴 하지만." "조심해야 해요, 여보. 나는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야." 나데지다는 웬일인지 몸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사모이렌코는 간헐열이라고 하면서 그녀에게 키니네를 복용하게 하고, 또 한 사람의 의사 우스치모비치는--키가 후리후리하고 빼빼 마른, 사람을 싫어하는 사나이로, 등 뒤로 단장을 들고, 기침을 하면서 바닷가에 난 길을 산책하는 그런 사람이었는데--이 의사는 그녀에게 부인병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따뜻한 찜질을 권하고 있었다. 전에 라에프스키가 나데지다를 사랑하고 있던 시절에는, 그녀의 병은 그에게 측은함과 두려움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의 그는 병까지도 속임수의 한 가지로 여기고 있었다. 열이 발작한 뒤에 나데지다가 나타내 보이는 졸리는 듯한 노르무레한 얼굴, 멍한 눈, 하품, 발작 때 격자 무늬의 담요를 두르고 있는 그녀가 어엿한 여자보다는 차라리 사내를 닮은 점, 그녀의 방에서 숨이 막힐 듯한 고약한 냄새가 나는 점--이러한 것들이 모두 그의 의견에 따르면 환상을 파괴하는 것이고, 연애나 결혼에 대한 항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두 번째 접시는, 그에게는 시금치와 삶은 달걀, 건강이 좋지 않은 나데지다에게는 우유를 뿌린 젤리가 나왔다. 그녀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한 얼굴로, 처음에는 우선 젤리에 가볍게 숟갈을 대어 보고, 그 다음에는 마지못해 우유를 마시기 시작하였는데, 젤리가 그녀의 목으로 넘어갈 때마다 꿀꺽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있는 동안, 그는 머리가 근질근질해지도록 심각한 혐오감을 맛보았다. 이 같은 감정을 품는 것은 개에 대해서조차도 실례가 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가 아니라, 이와 같은 감정을 자기에게 불러일으킨 나데지다에게 화가 나서 못 견딜 것 같았다. 세상에는 가끔 정부를 죽이는 사나이가 있는데, 그는 그 기분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자기는 여자를 죽이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령 지금 자기가 배심원이라고 한다면, 정부 살해의 범인은 무죄로 할 것이라고 여겨졌다. "메르시(고마와)." 식사가 끝나자 그는 이같이 말하고 나데지다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서재로 돌아가자, 그는 한 5분쯤 곁눈질로 장화 쪽을 보면서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다가, 이윽고 소파에 앉더니 중얼거렸다. "달아나는 거다, 달아나는 길만이 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청산하고 달아나는 거다!" 그리고 그는 소파에 드러누워, 나데지다의 남편이 죽은 것은 자기의 책임일지도 모른다고 조금 전에 생각한 것을 다시 떠올렸다. "좋아졌다던가 싫어졌다던가 하는 그런 일로 남을 책망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그는 장화를 신기 위해 두 발을 들어 올리며 쉴 새 없이 자신에게 되뇌었다. "사랑이나 미움은 우리들의 힘으로는 도무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녀의 남편 일만 하더라도, 어쩌면 나도 간접적으로 사인의 하나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그의 아내에 반하고, 그 아내도 내게 반했다는 것이 과연 나의 책임이란 말인가." 이윽고 그는 일어나 모자를 찾아 쓰고는 동료인 셰시코프스키의 집을 향하여 갔다. 거기서는 매일 관리들이 모여 카드놀이를 하든가 시원한 맥주를 마시던가 하는 것이었다. '나의 우유 부단은 햄릿과 꼭 같다니까.' 라에프스키는 길을 걸으면서 생각했다. '셰익스피어의 관찰은 참으로 틀림없어! 아주 정확해!' 3. 한편으로는 기분 전환을 위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고장에 호텔이 없기 때문에 새로 온 사람이나 독신자가 식사를 할 만한 곳이 없어서 몹시 곤란해하는 것을 구제하기 위해서 군의관 사모이렌코는 자택에서 식당 비슷한 것을 차리고 있었다. 당시 그의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오는 사람은, 해파리 발생학을 연구하기 위해 여름 동안 흑해에 와 있는 젊은 동물학자 폰 코렌과 최근에 갓 신학교를 나온 보좌 신부로서 병으로 요양을 간 늙은 보좌 신부의 대리로 이 고장에 파견된 포베도프 두 사람 뿐이었다. 두 사람은 점심과 저녁 식사값으로 한 달에 20루우블리씩 내고 있었는데, 사모이렌코는 매일 정각 오후 두 시에 점심을 먹으러 오라고 일러 놓고 있었다. 폰 코렌이 대개 먼저 왔다. 그는 오면 언제나 아무 말 없이 객실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앨범을 뒤적이며, 헐렁한 바지를 입고 실크 해트를 쓰고 있는 어디의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신사들이나, 둥근 철사를 넣은 스커트를 입고 베일을 쓴 숙녀들의 색 바랜 사진을 주의 깊게 점검하기 시작한다. 사모이렌코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이름을 잊어버리고 있는 사람들에 관해서 그는 언제나,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고,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다!" 하고 한숨 섞인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앨범의 점검이 끝나면, 폰 코렌은 장식 선반에서 권총을 꺼내어, 왼쪽 눈을 가늘게 뜨고 오랫동안 브론초프 공작의 초상화를 겨냥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거울 앞에 서서, 자기의 가무잡잡한 얼굴이나 넓은 이마, 검둥이처럼 곱슬곱슬한 새까만 고수머리나 큰 꽃무늬가 들어 있는 페르시아 융단처럼 빛깔이 우중충한 사라사 셔어츠, 조끼 대신의 폭 넓은 허리띠를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이와 같이 자신의 모습을 관찰할 때마다 그는 앨범의 사진이나 값비싼 장식이 달린 권총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훨씬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얼굴에서나 깨끗하게 손질한 작은 턱수염, 그리고 뛰어난 건강과 다부진 체격을 분명히 나타내 보이고 있는 떡 벌어진 어깨에서도 더할 나위 없는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셔츠 빛깔에 맞춘 넥타이에서 노란 빛깔의 구두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멋진 옷차림에서도 그는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이와 같이 앨범을 들여다보거나 거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동안에, 부엌과 그것과 이어져 있는 복도에서는 프록도 조끼도 입지 않고 가슴을 통째로 드러낸 사모이렌코가 흥분된 나머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조리대 주위를 부산스레 뛰어다니면서 샐러드와 소스와 식힌 수프에 쓸 쇠고기, 오이, 양파 등을 준비하면서 부산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안 일을 돕고 있는 졸병을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거나 나이프와 스푼을 휘두르기도 한다. "식초를 가져와!" 하고 그는 명령한다. "아니, 식초가 아니야, 올리브 기름을 가져와!" 하고 이번에는 발을 구르며 소리친다. "어디로 가는 거야, 얼빠진 놈 같으니!" "올리브 기름을 가지러 갑니다, 각하." 졸병은 얼떨떨해하면서 찢어지는 듯한 테너로 대답했다. "빨리 못 해! 찬장이야! 그리고 달리야에게 오이 항아리에 회향풀을 넣으라고 해! 회향이야, 알았어! 크림에 뚜껑을 안 덮었군, 바보 같으니라구, 파리가 꾀지 않아!" 이와 같은 그의 호령으로, 온 집 안이 진동하는 것만 같다. 이윽고 2시 15분 전인가 10분 전쯤 되면 신부가 온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턱수염을 깎고, 눈에 띌까 말까 한 정도의 콧수염을 기른, 스물 두 살쯤 되어 보이는 깡마른 젊은 사나이이다. 객실로 들어오자 성상을 향해 성호를 긋고, 싱글벙글 웃으며 폰 코렌에게 손을 내민다. "아니, 어디에 다녀오셨소?" 하고 동물학자는 쌀쌀한 태도로 묻는다. "선창가에서 둑중개를 낚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럴 줄 알았어.... 신부님, 당신은 언제까지고 일을 시작할 기미가 안 보이는군요." "괜찮지 않습니까. 일이란 곰처럼 숲 속으로 도망쳐 가진 않을 테니까요." 신부는 하얀 평복의 큼직한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며, 웃는 얼굴로 말한다. "아무래도 당신에겐 당할 수 없어!" 동물학자는 탄식한다. 그로부터 15분, 20분이 지나도록 식사 소식은 없고, 아까와 다름없이 졸병이 장화 소리를 쿵쿵 내면서 복도와 부엌 사이를 달음질쳐서 왕복하는 소리와 사모이렌코의 고함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으란 말이야! 그런 데다 넣는 놈이 어디 있어! 씻은 다음에 넣어!" 차츰 시장기를 느끼기 시작한 신부와 폰 코렌은 더 참을 수가 없어서, 2층 관람석의 구경꾼들처럼 발뒤꿈치로 바닥을 쿵쿵 구르기 시작한다. 그러는 동안 마침내 문이 열리고 기진 맥진이 된 졸병이, "식사 준비가 다 됐습니다." 하고 알려 준다. 식당에서는 부엌의 열기 때문에 새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사모이렌코가 물어뜯을 것만 같은 얼굴로 두 사람을 맞는다. 우선 심술궂은 눈초리로 두 사람을 힐끗 쏘아본 뒤 이윽고 두려워 하는 표정을 띠면서 수프 그릇의 뚜껑을 열고 각자의 접시에 나누어 준다. 두 사람이 아주 맛있게 그것을 먹기 시작했으며, 아무래도 요리가 마음에 든 기색인 것을 보고는 비로소 한시름 놓고 푹신한 자기의 안락의자에 앉는다. 매우 피로한 듯한 맥빠진 얼굴이다.... 이윽고 자기 술잔에 워트카를 천천히 따르고 이와 같이 말한다. "젊은 세대의 건강을 위하여 축배!" 사모이렌코는 라에프스키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아침부터 점심 시간까지 줄곧 더할 나위 없는 흐뭇한 기분이었음에도 마음 한 구석에는 이상하게도 무거운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라에프스키가 가엾어서 어떻게 하든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수프를 들기 전에 워트카를 한 잔 비우더니 그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오른 라에프스키를 만났어요. 그 사람도 쩔쩔매고 있더군. 물질적으로도 곤란하지만 특히 심리적으로 맥을 못 추고 있어요. 아무래도 가엾은 사람이에요." "그런 놈, 난 가엾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폰 코렌이 말을 이었다. "만약 그놈이 물에 빠졌다고 한다면 나는 지팡이로 더욱 찔러 주겠어. 자, 어서 빠져 죽어, 형제여, 빨리 빠지란 말이야, 하고요...." "설마. 당신은 그런 짓을 할 수 없어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요?" 동물학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 역시 착한 일을 할 능력은 당신만큼 있어요." "남을 물에 빠지게 하는 것이 착한 일인가요?" 하고 신부가 묻고 웃음을 터뜨렸다. "라에프스키 말인가요. 그건 그래요." "아무래도 오늘의 냉수프는 뭔가 모자라는 것 같군...." 사모이렌코는 화제를 바꾸려고 이렇게 말했다. "라에프스키는 사회에 있어서 말할 나위도 없이 해로운 사람이에요. 콜레라균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인물이죠." 폰 코렌이 말을 이었다. "그를 물에 빠지게 하는 것은 일종의 공덕이죠." "같은 동포를 그렇게 말하는 건 당신의 명예가 되지 않아요.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당신은 그 사람을 미워하는 거죠?" "의사 양반, 시시한 말씀 작작 해요. 세균을 미워하거나 경멸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에요. 그리고 어느 곳 뉘 집 뼈다귀인지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동포라고 보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좀 온당하지 못해요. 그건 일체의 판단을 포기하는 것, 인간에 대해서 공정한 관계를 가지지 않으려는 것으로 요컨대 책임 회피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라에프스키를 지저분한 놈이라고 보고 있어요. 그래서 그걸 솔직하게 드러내 놓고 성심 성의 지저분한 놈으로 다루고 있죠. 그런데 당신은 놈을 동포라고 보고 놈과 키스하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고 있지요. 동포로 본다는 것은 나나 이 신부님을 대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놈에 대해서도 취한다는 것, 즉 바꾸어 말하면 인간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요컨대 당신은 모든 인간에 대해서 무관심해요." "남을 지저분한 놈이라고 하다니!" 사모이렌코는 너무나도 귀에 거슬린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이렇게 투덜거렸다. "그건 너무 지나친 말인데!" "사람은 그의 행위에 따라서 판단해야 해요." 폰 코렌은 말을 이었다. "신부님, 어디 한번 당신의 의견을 들어 봅시다. ...이제부터는 당신을 상대로 얘기를 해야겠어요. 라에프스키의 행장은 마치 중국의 긴 두루마리처럼 훤하게 당신 앞에 펼쳐져 있으니까,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도대체 그는 이 고장에서 살게 되고부터 오늘날까지 이태 동안에 뭘 했습니까? 어디 한번 손으로 꼽아 봅시다. 첫째, 그는 이 곳 주민에게 빈트(4명이 하는 카드놀이의 일종)를 가르쳐 줬어요. 2년 전까지만 해도 이 게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고장에 한 사람도 없었던 거죠. 그런데 지금은 여자들이나 미성년자까지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빈트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둘째, 그는 이 고장 사람들에게 맥주 마시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이것도 예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이 곳 사람들이 여러 가지 워트카를 식별 할 줄 알게 되고서부터, 예를 들면 코셸료프 워트카와 스미르노프 21번을 눈을 감고도 척척 알아맞히게 되었는데, 이것도 그가 가르쳐 준 덕분이라 할 수 있죠. 셋째, 전에 이 고장에서는 남의 아내와 동거하는 경우에는 남몰래 쉬쉬 하며 살았어요. 그건 도둑이 물건을 훔치는 데 드러내 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몰래 하는 것과 같은 동기에서이고, 말하자면 간통이라고 하는 것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에프스키는 그 점에서도 선구자였어요. 그는 공공연히 남의 아내와 동거하고 있으니까요. 넷째...." 폰 코렌은 단숨에 자기의 냉수프를 마시고 졸병에게 넘겨 주었다. "나는 알게 된 지 한 달도 못 되어서 라에프스키가 어떤 사내라는 걸 알게 되었다니까요." 그는 신부를 상대로 말을 계속했다. "사실은 이리로 올 때, 그 사내와 같이 왔어요. 대개 그와 같은 인간은 우정이라든가 교제라든가 동료 의식이라든가 그런 것들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건 요컨대 빈트의 상대, 술친구, 차를 같이 마실 친구가 필요한 때문이죠. 그리고 그런 친구는 모두 수다쟁이이기 때문에, 얘길 들어주는 상대도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어요. 그것은 말하자면, 그가 매일같이 어슬렁거리며 나한테 나타나서는 내 일을 방해하고, 자기 정부 얘기를 뻔뻔스럽게도 늘어놨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애당초부터 그는 저 세상에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엉터리 거짓말로 내 얼을 쏙 뺐다니까요. 나는 그 때문에 얼마나 기분 나빴는지 모릅니다. 하긴 나도 친구로서 타이르긴 했죠. 왜 그처럼 술을 마시느냐, 어째서 분수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하면서 빚만 지고 있느냐, 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읽지 않느냐, 왜 그처럼 교양이 없고 무식하냐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단지 쓴웃음을 짓고 한숨을 내쉬며 '나는 패배자야, 쓸모 없는 사람이야.'라고 하지 않으면 '도대체 당신은 우리 농노제 시대의 유물에서 무엇을 기대하려고 하는 거요.'라든가 '우리는 퇴화되어 가고 있어요....' 하는 투의 대꾸만 하는 겁니다. 혹은 또, 오네긴이니 페초린이니 바이런의 카인이니 바잘로프니 하는 것 등에 관해 어디로 보나 당치도 않은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그들이야말로 영육이 다 같이 우리들의 선조요.' 따위 말을 하는 겁니다. 그것을 말하자면 자기가 공적인 서류 봉투를 몇 주일이나 뜯지 않고 내버려두든가, 자기가 술을 마시고 남에게도 술을 마시게 하더라도, 나쁜건 자기가 아니라 오네긴이나 페초린, 또는 패배자나 쓸모없는 사람을 만들어 낸 투르게네프라고 생각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방종하기 짝이 없는 생활 태도만 하더라도 그 원인은 그 자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외부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놈의 뻔뻔스런 점입니다! 방종하고 거짓말쟁이이고 꼴불견은 뭐 자기뿐만이 아니고, 우리들--'우리들 80년대 사람' '우리들 무기력하고 신경질적인 농노제 시대의 후예' ' 문명에 의해서 불구자가 된 우리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요컨대 말입니다.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거예요. 라에프스키와 같은 위대한 인물은 그 몰락에 있어서도 또한 위대하다. 그의 방탕, 그의 무교양, 그의 부패는 필연성이라고 하는 권위에 뒷받침된 자연 과학적 현상이고, 그 원인은 세계적이고 불가항력적이다, 사람들은 마땅히 라에프스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기는 시대, 사조, 유전 그 밖의 불쌍한 희생자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겁니다. 숱한 관리들이나 여자들은 이러한 말을 들으면 일제히 감탄의 소리를 지르는 것이지만, 나는 도대체 이 사나이는 무엇인가, 풍자가인가,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사기꾼인가, 그것을 짐작할 수도 없어서 오랫동안 궁금히 여겨 왔어요. 어쨌든 이 사나이처럼 겉보기에 인텔리 같고, 조금은 공부도 한 것 같고, 게다가 자기 가문이 좋다는 것을 남들에게 떠벌리며 돌아다니는 친구는 자기를 몹시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인 듯이 나타내 보이는 데 재능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만 해요!" 사모이렌코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그 고결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내 앞에서 욕을 먹고 있는 걸 가만히 듣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옆에서 참견을 하지 말아요, 알렉산드르." 폰 코렌이 쌀쌀하기 말했다. "곧 알게 될 테니까, 그 라에프스키라고 하는 인물은 비교적 단순한 오오거니즘이예요. 그의 정신 구조는 다음과 같아요. 아침에는 슬리퍼와 해수욕과 커피, 그리고 점심때까지 슬리퍼와 산책과 지껄이는 일. 두 시에 슬리퍼와 점심과 포도주. 다섯 시에 해수욕과 차와 포도주. 그리고 빈트와 바로 그 엉터리 거짓말. 열 시에 저녁 식사와 포도주. 한밤중이 지나서 수면과 여자. 그의 존재는 달걀이 껍질 속에 들어가 있듯이, 이 좁은 스케줄 속에 틀어박혀 있어요. 걸어다닐 때나 앉아 있을 때나 화가 났을 때나 글을 쓸 때나 기쁠 때에도--모든 게 포도주와 카드놀이와 슬리퍼와 여자로 귀착되는 겁니다. 특히 여자는 그의 생활 속에서 숙명적이고 압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 자신, 열 세 살 때 이미 사랑을 했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대학 1학년일 때에는 어떤 여자와 동거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여자가 그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그의 음악적인 교양은 그 여자 덕분이죠. 그리고 2년 뒤에 어떤 매음굴에서 여자를 빼내어 자기와 같은 지위로 끌어올려 주었다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정부로 삼았다고 하는 뜻이죠. 그런데 여자는 반 년쯤 그와 동거했을 뿐으로 예전 매음굴 주인 아주머니한테로 달아나고 말았어요. 그 여자가 달아난 뒤의 그의 정신적 고통은 심각한 것이었던 것 같더군요. 보기가 딱할 정도로 몹시 고민한 끝에, 마침내 대학을 집어치우고, 2년쯤 집에서 빈둥빈둥하며 지내게 되었어요. 그런데 결과는 도리어 잘 됐어요. 그는 어떤 과부와 눈이 맞았던 것인데, 그 여잔 그에게 법과를 그만두고 문과로 다시 들어가라고 권했던 거죠. 그래서 그는 그 권고에 따랐어요.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자, 이번에는 지금의 그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그 남편 있는 유부녀에게 열을 올리고, 손에 손을 맞잡고 이 카프카즈까지 도망쳐 오게 되었죠. 이상을 찾아서라고 하지만, ...뭐 그러다가 여자에 싫증이 나서 페테르스부르크로 달아날 것이 틀림없어요. 역시 이상을 찾아서 말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걸 알고 있소?" 사모이렌코는 사나운 눈초리를 하고 동물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보다도 어서 식사나 들어요." 숭어찜과 폴란드 소스가 나왔다. 사모이렌코는 두 손님에게 숭어 한 마리씩을 나누어 주고, 손수 소스를 쳐 주었다. 2분쯤 침묵이 흘렀다. "여자는 누구의 생활에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신부가 이어 말했다. "그것만은 아무래도 어쩔 수 없어요." "그건 그래요. 하지만 문제는 어느 정도까지냐 하는 거죠. 우리들의 경우라면 여자는 언제나 어머니든가 여자 형제든가 아내든가 친구들입니다. 그런데 라에프스키에게는, 여자는 모든 것이고 동시에 또한 단순한 정부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여자, 즉 여자와 동거한다는 것, 그것이 그의 인생의 행복이고 목적입니다. 즐겁다, 슬프다, 싫증이 난다, 뜻에 어긋난다--모든 것이 여자 때문입니다. 인생이 싫어졌다--그른 것은 여자이다. 새 생활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희망이 엿보인다--역시 뒤에는 여자가 있습니다.... 문학 작품이나 그림으로 말하더라도 여자가 나오지 않는 것에는 그는 만족하지 않아요. 그의 의견으로는, 우리 시대는 좋지 않은 시대며, 40년대나 60년대보다 못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잊고 연애에 도취되거나 그 정열에 빠지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저런 호색한은 짐작컨대 아마 뇌 속에 혹덩어리 같은 특수한 것이 있어서, 그것이 뇌를 압박하고 정신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내 말이 잘못인지 라에프스키가 어딘가 파티에 나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도록 하세요.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누군가가 무엇인가 일반적인 문제, 예를 들면 세포라든가 본능이라든가 그런 문제를 꺼냈다고 합시다. 그는 한쪽 구석에 앉아 있을 뿐 말도 제대로 하지 않고, 얘기에 귀를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아요. 마치 머리가 띵하고 실망을 한 것 같은 모양으로, 무슨 말을 묻거나 재미없다, 흔해 빠지고 시시껄렁한 얘기뿐이라고 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수컷과 암컷 얘기, 예컨대 거미의 암컷이 수태가 되면 수컷을 잡아먹는다고 하는 얘기가 나오면, 그의 눈은 대번에 호기심으로 빛나고, 얼굴은 밝아지는 겁니다. 요컨대 생기가 솟아난다고 할 수 있죠. 그의 사상은 어떤 고상하고 높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어떤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언제나 같은 것입니다. 그와 함께 거리를 거닐다가, 가령 당나귀를 만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곧 '이봐요, 당나귀 암컷에 낙타를 교미시키면 어떻게 되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꿈! 그는 당신에게 자기의 꿈 얘기를 했던가요? 그것을 걸작입니다! 달과 결혼할 뻔했다느니, 경찰에 호출되어 기타아와의 동거를 명령 받았다느니 하는 종류의 꿈을 꾸니까요...." 신부는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사모이렌코는 웃지 않으려고 눈썹을 찌푸리고, 아주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마침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엉터리 같은 소리!" 그는 눈물을 닦으면서 덧붙였다. "엉터리일 것이 틀림없어!" 4. 신부는 퍽 잘 웃는 편으로, 어떤 보잘것없는 일에도 배가 아프도록 웃는 버릇이 있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무래도 사람은 사람마다 우스꽝스런 면을 가지고 있고, 또 우스꽝스런 별명을 붙일 수 있다고 하는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사모이렌코에게는 땅거미, 그의 부하 졸병에게는 수오리라는 별명을 붙였고, 또 언젠가 폰 코렌이 라에프스키와 나데지다를 여우원숭이 부부라고 불렀을 때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었던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빤히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고,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다. 그와 같이 하면서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을 보면, 웃는 표정이 차츰 눈에 넘쳐 흐르고, 얼굴이 긴장되어 가는 것을 빤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음탕하고 변태적인 인물이에요." 동물학자는 계속해서 말한다. 신부는 우스꽝스런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토록 보잘 것 없는 사람은 좀처럼 볼 수 있는 게 아니죠. 몸은 생기가 없고 약골이며 노쇠해 있고, 지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먹고 마시고 깃털 이불 속에서 뒹굴거나, 거느리고 있는 마부를 정부로 삼는 것 말고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뚱뚱한 여자 장사꾼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요." 신부는 또 자지러지게 웃어대었다. "신부님, 그만 웃어요." 폰 코렌이 말했다. "아무래도 점잖지 못해요. 원래 나는...." 하고 그는 신부가 웃음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하던 말을 계속했다. "만약 그 사내가 그토록 해롭고 위험하지만 않았다면, 애써 그의 시시껄렁한 점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하지 않고, 모른 체하면서 보고만 있었을 겁니다. 그가 유해한 것은, 첫째로 그가 여자에게 인기가 있다. 따라서 자손을 만들 염려가 있다, 즉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약골이고 변태적인 라에프스키족을 한 다스나 만들어 낼 염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그는 최고도로 전염력이 강합니다. 손쉬운 예가 아까 말한 빈트와 맥주건입니다. 지금부터 1, 2년 뒤에는, 그는 카프카즈 해안을 온통 정복하고 말 겁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대중, 특히 그 중간층은 인텔리성이라든가 대학 교육이라든가 고상한 태도라든가 문학적인 말이라든가 그런 것들을 덮어놓고 믿는 것이니까요. 그가 어떤 추태를 부리든 그건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게 되죠. 그것은 그가 인텔리이고, 자유인이고, 학사이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그는 패배자이고, 필요 없는 사람이고, 노이로제 환자이고, 시대의 희생자이고, 따라서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게 됩니다. 그는 마음씨가 착하고 인정이 있는 사람, 남의 약점을 기꺼이 용서하는 사람, 얘기가 통하고, 온순하고, 솔직하고, 평민적인 사람입니다. 술을 마시고, 상스런 말을 하고, 남의 험담을 늘어놓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태입니다.... 대중이란 것은 종교 면에서나 도덕 면에서도 언제나 신인 동형설로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기와 같은 약점을 가지고 있는 이런 종류의 우상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법이죠. 그가 지니고 있는 전염력을 발휘하기 위해 얼마나 넓은 장소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이로써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는 소질이 제법 있는 배우이고, 머리가 잘 도는 위선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의 요령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요컨대 그가 곧잘 하는 변명이나 궤변, 예컨대 문명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문명에 관해서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입버릇처럼 '아아, 우리는 얼마나 문명 때문에 불구자가 되고 말았는가! 아아, 나는 그 야만인들, 문명이 뭔지도 모르는 자연인이 부럽다!' 라고 씨부렁거리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그가 하고 싶어하는 말은 일찍이 자기가 전심 전력을 기울여 문명에 봉사하고, 문명을 남김없이 이해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문명은 자기를 피곤하게 만들고, 실망시키고, 속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는 제2의 파우스트이고, 제2의 톨스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그는 쇼펜하우어나 스펜서 같은 친구들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여기고, 아버지나 되는 듯이 그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어떤가, 스펜서 군?'라고도 한답니다. 그런 때의 그가 좀 빈정거리는 소리를 섞어 가며 그럴 듯하게 지껄이는 말투는 아주 그럴 듯하죠. 그래서 모두들 그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 사기꾼은 그 누구나 할 것 없이 스펜서에 관하여 그런 투로 말할 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스펜서의 발바닥에 키스를 할 권리조차 없다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허약함과 정신적 빈곤을 정당화하고 은폐할 목적으로 문명이니, 권위니, 털끝만큼도 인연이 없는 하느님의 제단이니 하는 따위의 밑을 주위에 온통 흙탕물을 튀기며 파헤치고, 이따금 그것들을 향하여 어릿광대 같은 추파를 보냅니다. 이러한 짓을 할 수 있는 것은 자존심만이 유독 강한 비열하고 징그러운 동물뿐입니다." "콜랴, 당신이 그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조금 전의 험상궂은 표정은 온데 간데 없고, 미안한 듯한 눈빛으로 동물학자 쪽을 보면서 사모이렌코가 말했다. "그 사람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야. 물론 결점이 없는 건 아니지. 그러나 그 사람은 현대 사상의 수준에 서 있는 사람이고, 버젓이 관공서에 다니고, 조국에 이익을 가져다 주고 있지 않은가. 10년쯤 전 일인데, 이 고장에 대리업자 노인이 일하고 있었지. 그 노인은 입버릇처럼...." "그만둬요, 다 알았어요!" 하고 동물학자는 이야기를 가로막았다. "당신은 그가 관공서에 다니고 있다고 하지만, 도대체 그의 일하는 태도가 어떤지 아시오? 그가 여기 옴으로써 이 곳의 질서가 잡혔습니까? 관리들이 전보다 직무에 충실해지고, 정직하게 되고, 예의바르게 되었나요? 그렇기는커녕, 그는 인텔리이고 학사인 자기의 권위에 의해서, 관리들의 난맥상에 인가를 주었을 뿐이 아닙니까. 그가 직무에 충실한 것은 월급이 나오는 20일뿐이고, 나머지 다른 날은 슬리퍼를 질질 끌고 집 안을 돌아다니면서 '이 어르신네가 카프카즈에 있어 주는 것을 러시아 정부는 크게 감사해야 해.'라고 하는 듯한 표정을 짓기에나 급급하고 있을 뿐이 아닙니까? 못 써요, 알렉산드르, 그를 변호하는 말은 집어치워요. 당신은 철두철미 불성실해요. 만약 당신이 참으로 그를 사랑하고 또한 동포로 여긴다면 당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약점에 무관심하거나 관대한 태도를 버리고, 그의 이익을 위해서도 그가 해가 안 되도록 하는 데 애써야 해요." "무슨 뜻이죠?" "해가 안 되도록 한다는 겁니다. 그를 고치기에 불가능하니까, 해가 안 되도록 하는 수단이 꼭 한 가지 있어요." 폰 코렌은 손가락으로 목 둘레를 쓸었다. "그렇지 않으면 물에 빠져 죽게 하는 수를 쓰던가...." 그는 덧붙였다. "인류를 위해서나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그런 치들은 없애 버릴 필요가 있어요. 이건 이제 절대적이지."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요?" 사모이렌코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동물학자의 침착하고도 냉담한 얼굴을 의아한 듯이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신부님, 이 친구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 당신은 지금 제정신이오?" "나는 꼭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고집하진 않아요." 하고 폰 코렌이 말했다. "사형이 해롭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다른 수단을 생각해도 좋아요. 라에프스키를 없애 버리는 게 불가능하면, 고립시킨다던가 개인으로서의 권리를 빼앗던가 하는 것도 좋죠. 공공 사업에 사역을 시키는 것도 좋고...." "아니, 무슨 소리요?" 사모이렌코는 소름이 끼친다는 듯이 소리쳤는데, 신부가 다진 고기가 들어 있는 호박을 후추도 치지 않고 먹고 있는 것을 보자, "후추, 후추!" 하고 이번에는 비통한 목소리를 짜냈다. "뛰어난 수재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우리의 친구, 저 프라이드도 있고, 지성도 갖춘 인물을 공공 사업에 사역을 시키다니!" "프라이드 때문에 반항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면, 징역을 보내야 해요!" 사모이렌코는 더 이상 한 마디도 할 수 없어, 다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신부는 그의 어처구니없어 하는, 그야말로 우스꽝스런 얼굴을 보고 큰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런 얘기는 그만 집어치웁시다." 동물학자가 말했다. "단 한 가지 당신이 알아 둬야 할 것이 있어요, 알렉산드르, 그것은 원시 사회는 생존 경쟁과 도태에 의하여 라에프스키 같은 치한한테서는 해를 입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우리의 문화는 생존 경쟁이나 도태를 두드러지게 약화시켜 놓았으므로 허약하고 열등한 치들을 없애는 일은 우리들 자신이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단 라에프스키 족이 만연되었을 때에는 문명은 파멸되고, 인류는 완전히 퇴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들 자신의 책임이죠." "사람을 물에 빠뜨리거나 교수대에 매달지 않으면 안 된다면, 당신의 문명이나 당신의 인류도 악마에게나 주어 버리는 게 좋아요, 악마에게 말이오!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어요. 당신은 공부 깨나 했고, 뛰어난 수재이고, 조국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도이칠란트인에게 현혹되어 있어요. 알겠어요, 도이칠란트인, 도이칠란트인에게 말이오!" 사모이렌코는 전에 그가 의학을 배운 돌파아트 시를 떠난 이래 거의 도이칠란트 인을 만난 일이 없고, 도이칠란트 책에 이르러서는 한 권도 읽은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의 견해에 따르면 도이칠란트인이야말로 정계 및 학계에서 모든 악의 근원이 되는 깃이었다. 어째서 이와 같은 견해를 품게 되었는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으나, 그는 이런 견해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요, 도이칠란트인 때문이오!" 그는 또 한 번 되풀이하여 말했다. "차나 마시러 갑시다!" 세 사람은 모두 일어나 모자를 쓰고 뜰로 나가, 연두색 잎을 달고 있는 단풍나무와 배나무 몇 그루, 그리고 밤나무 한 그루가 만들고 있는 그늘 밑으로 가서 앉았다. 동물학자와 신부는 작은 테이블 곁의 벤치에 앉고, 사모이렌코는 폭이 넓은 등받이가 뒤로 젖혀진 등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졸병이 홍차와 잼과 시럽 한 병을 놓고 갔다. 몹시 무더운 날이어서 그늘인데도 30도 가까이 되었다. 열기를 품은 공기가 꽉 차고 바람 한 점 없다. 기다란 거미줄 하나가 밤나무에서 아래로 늘어져 있었는데, 어설프게 공중에 매달린 채 언제까지고 움쭉달싹도 하지 않았다. 신부는 테이블 곁의 땅바닥에 있는 기타를 들고, 음계를 맞춘 다음 가느다란 목소리로 조용히, "신학교 젊은이들이 술집 앞에 있었다...." 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으나 너무나 더워서 곧 그만두고, 이마의 땀을 닦아 내며 맑게 갠 염천을 쳐다보았다. 사모이렌코는 졸기 시작했다. 더위와 주위의 고요와 곧 온몸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든 기분 좋은 식후의 졸음 때문에 그는 술에 취한 듯이 나른해져서 두 손을 축 늘어뜨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를 가슴께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윽고 감동으로 몽롱해진 눈으로 폰 코렌과 신부 쪽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젊은 세대... 학계의 명성과 교단의 광명인가. 자락이 긴 옷을 입은 신부님도 언젠가는 대주교 자리로 오르고, 내가 손에 키스하게 되는 수가 없다고도 할 수 없지. 그야 좋은 일이지. 아무쪼록 그랬으면...." 얼마 있다가 코를 고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폰 코렌과 신부는 차를 마시고 나자 거리로 나갔다. "또 선창가에서 둑중개 낚시질을 하실 겁니까?" 동물학자가 물었다. "아닙니다. 이렇게 더워서야 어디...." "그럼, 우리 집으로 갑시다. 소포를 하나 꾸릴까 해요. 그리고 정서할 일도 좀 있고요. 겸해서 당신 일도 의논하는 게 어때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돼요, 신부님. 이대로는 글렀어요." "말씀은 지당하고, 그럴 듯하다고는 생각합니다만...." 하고 신부가 말했다. "그러나 나의 게으름은 현재의 나의 생활 환경에서 유래되고 있어요. 아시다시피 지위가 애매한 것은 감동 없는 상태를 낳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거든요. 내가 일시적으로 여기에 파견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한평생 여기에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 있는 건 하느님뿐이랍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여기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틀어박혀 살고 있고, 아내는 아내대로 아버지 집에서 할 일 없이 따분하게 지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서 이런 더위에서는 머리가 돌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러면 그럴 수가." 동물학자가 말했다. "더위 따위는 익숙해지면 아무렇지도 않아요. 부인이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죠. 자신을 속이면 안 됩니다.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안 되는 거죠." 5. 나데지다는 그 날 아침 해수욕을 하러 갔다. 그녀 뒤로는 물병과 구리 대야와 수건과 해면을 들고 가정부인 올리가가 따라 갔다. 앞바다에는 아마 외국의 화물선인 듯 두드러지게 더러워진 흰 굴뚝이 솟아 있는 낯선 기선 두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하얀 옷에 하얀 구두를 신은 사나이들이 선창가를 왔다 갔다 하며, 프랑스 말로 무엇인가 자꾸만 소리치고 있다. 배에서도 응답이 온다. 시내의 작은 교회에서는 종 소리가 힘차게 울려 오고 있다. '오늘이 일요일이구나!' 나데지다는 그 생각이 떠오르자 기뻤다. 그녀는, 자신이 나무랄 데 없이 건강하다는 것을 느끼고, 밝은 기분이 되어 있었다. 남자용의 거친 멧누에실로 짠 옷감으로 새로 지은 품이 넓은 드레스를 입고, 큼직한 밀짚모자를 머리가 꼭 케이스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모양이 되도록, 넓은 테를 귀 언저리에서 억지로 접어서 쓴 자신의 모습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또한 마음 속으로, 젊고 아름답고 지적인 여자는 온 시내를 찾아봐도 자기 혼자밖에 없다, 그리고 돈을 들이지 않고도 멋지고 고상한 의상을 해 입을 수 있는 사람도 자기 혼자뿐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이 드레스만 하더라도 겨우 22루우블리밖에 들이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참으로 매력적이 아닌가! 시내에서 남자들의 눈길을 끄는 여자는 자기 혼자뿐인데, 남자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싫든 좋든 라에프스키를 부러워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녀는 라에프스키가 최근에 자기에 대해서 쌀쌀해지고, 조심스럽게 정중히 하고 있는 태도, 때로는 매정하게 거친 태도마저 취하게 된 것을 속으로 은근히 기뻐하고 있었다. 전에는 라에프스키가 매정스럽게 대하거나, 또는 업신여기는 것 같은 쌀쌀한 눈이나 까닭 모를 무서운 눈으로 보든가 하면, 그 때마다 울거나 원망을 하거나 헤어지자던가 굶어 죽겠다고 하면서 그를 위협했던 것이지만, 지금은 다만 얼굴을 붉히고 미안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볼 뿐이며, 그가 친절한 태도로 나오지 않는 것을 오히려 기쁘게 여기는 것이었다. 그가 화를 내거나 위협을 하면, 그녀는 더욱 만족하고 더욱 기뻐했을 것이다. 그녀는 라에프스키에 대해서 그만큼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미안한 점의 첫째는, 그녀의 기분으로는 근로 생활에 대한 라에프스키의 공상에 자기가 공명하지 않았던 일이다. 라에프스키가 페테르스부르크를 떠나, 이 카프카즈까지 온 것도 그런 생활을 시작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녀는 그가 최근에 자기에 대해서 화를 내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카프카즈로 오는 도중 이렇게 상상하고 있었다. 도착하기가 무섭게 해안 어디엔가 조용한 집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 그늘이 있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고, 개울도 흐르고 있는 기분 좋은 뜰에서, 꽃과 야채를 가꾸고 오리와 닭을 칠 수도 있을 것이다. 친한 이웃 사람들을 초대하여 음식 대접을 하거나, 가난한 시골 사람들을 치료해 주거나, 그들에게 팜플렛을 나누어 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카프카즈는 험준한 산과 숲과 깊은 골짜기만 있는 곳, 오랜 시간을 들여 땅을 고르고, 부지런히 일하고, 스스로의 손으로 집을 짓지 않으면 안 되는 곳, 친한 이웃은 언제까지나 생기지 않고, 지겹게 덥기만 하고, 강도를 당할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그녀는 라에프스키에게 서둘러 대지를 사들이려는 눈치가 없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두 사람은 마치 묵계 가운데 근로 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서로 약속이나 한 것 같았다. 그가 잠자코 있는 것은, 자기가 잠자코 있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있는 증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둘째로, 그녀는 요 이태 동안에, 그에게 숨기고 아치미아노프의 가게에서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것을 3백 루우블리어치 이상이나 외상으로 사들였다. 어떤 때는 옷감, 어떤 때는 비단, 어떤 때는 패러솔이라는 식으로 조금씩 사들인 것인데, 그것이 어느 새 쌓이고 쌓여서 막대한 빚으로 되고 만 것이다. '오늘이라고 그이에게 털어놓아야지....' 하고 그녀는 결심했으나, 그 때마다 라에프스키가 기분이 좋지 않은 지금, 빚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마음을 고쳐먹곤 했다. 셋째로, 그녀는 라에프스키가 부재 중에 이미 두 차례나 경찰 서장인 키릴린을 집에서 만난 것이다. 한 번은 아침 라에프스키가 해수욕을 나간 뒤, 또 한 번은 밤중 라에프스키가 카드놀이를 한창 하고 있을 때였다. 그 생각을 한 순간, 나데지다는 얼굴이 새빨개지고, 자기의 속셈을 가정부가 알아차리지나 않을까 하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듯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지리하고 참을 수 없는 무더위, 짜증스런 대낮, 아름답고 안타까운 저녁, 잠 못 이루던 밤, 아침이나 저녁이나 남고 남는 시간을 어떻게 쓸까 하고 머리를 썩이면서 지내는 것 같은 이 곳 생활의 모든 것,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답고 젊은 여자인 자기가, 청춘을 헛되이 낭비하고 있다고 하는 그녀의 머릿속에 박혀서 떠나지 않는 생각, 성실하고 이상가 타이프이긴 하지만 하고많은 날 슬리퍼나 질질 끌면서 돌아다니고, 쉴 새 없이 손톱을 깨물고, 변덕을 일으켜 정나미가 뚝 떨어지게 하는 외곬인 라에프스키 자신--이러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더욱더 그녀를 정욕의 포로로 만들고, 낮이나 밤이나 똑같은 한 가지 일만을 생각하게 한 것이었다. 자기의 숨결이나 눈길이나 목소리나 걸음걸이에서도 그녀는 정욕만을 느꼈다. 바다도 그녀에게 사랑을 하라고 속삭인다. 저녁의 어둠과 산들도 같은 말을 그녀에게 건넨다. ...키릴린이 그녀에게 접근해 오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이미 자제력을 잃고 있었다. 그리하여 저항할 기력과 수단도 잃은 채, 그에게 몸을 내맡겼던 것이었다.... 오늘 아침 외국 배와 하얀 옷차림의 사나이들을 보고 있는 동안에, 그녀는 웬일인지 큰 살롱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의 귓속에서는 프랑스 말에 섞여 왈츠의 음악 소리가 울리고,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녀는 갑자기 춤을 추고 프랑스 말을 지껄이고 싶었다. 그녀는 자기의 바람기에 두려워 떨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바람기는 자기의 영혼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자기는 지금도 라에프스키를 사랑하고 있다. 그 증거로는 그가 집에 없으면, 자기는 안절부절 못하게 외롭고 부족감을 느끼지 않는가. 키릴린은 이렇다 하게 내세울 만한 점이 없는 미남이기는 하지만, 덜렁거리는 사나이였다. 그 사나이와는 깨끗이 관계가 끊어졌으므로, 이 이상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이미 끝난 일이고, 또한 다른 사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다. 만일 라에프스키에게 알려진다 하더라도, 그는 사실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바닷가에는 여자용 해수욕장이 하나 있을 뿐이며, 남자들은 노천에서 수영을 하게 되어 있었다. 나데지다가 해수욕장으로 들어가자, 관리 부인으로 마리아 콘스탄티노브나 비츄고바라고 하는 중년 부인과 그녀의 딸이며, 올해 열 다섯 살이 되는 중학생일 카아챠가 와 있었다. 마리아는 마음씨가 착하고 감정이 풍부하고 신경이 섬세한 여자로,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길게 빼면서 잔뜩 표정을 쓰며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서른 두 살이 될 때까지 가정 교사로 지내다가, 그 뒤 관리인 비쵸고바와 결혼했다. 그는 몸집이 작고 대머리이고, 머리를 관자놀이까지 깨끗이 빗어 내리고 있는 매우 온후한 사람이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남편에게 반해서 질투를 하고, '연애'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고, 자기는 매우 행복하다는 것을 누구에게나 털어 놓는 것이었다. "어마, 부인!" 그녀는 나데지다의 얼굴을 보자마자, 친구들 사이에서 아아먼드적이라고 불리고 있는 표정을 지으며, 감격한 듯한 말투로 이와 같이 말했다. "뵙게 되어 아주 기뻐요! 같이 해수욕을 할 수 있다니... 정말이지 멋진 일이에요!" 올리가는 곧 자기의 겉옷과 속옷을 벗고 주인이 옷을 벗는 것을 돕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제보단 덜 더워요. 그렇게 여겨지지 않으세요?" 나데지다는 벌거벗은 가정부가 자기 피부에 마구잡이로 손을 댈 때마다 몸을 움츠리면서 말했다. "어제는 얼마나 무덥던지 나는 죽을 것만 같았어요." "정말이에요, 부인. 나도 숨이 막힐 것만 같더군요. 그런데 부인, 나는 어제 세 번이나 해수욕을 하러 왔어요. ...어때요, 세 번이나 왔었어요. 우리 바깥양반도 걱정을 했을 정도였다니까요." '아니, 이처럼 박색으로 태어나는 수도 있을까?' 나데지다는 올리가와 관리 부인의 얼굴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카아챠 쪽을 힐끗 보고 생각했다. '딸아이는 그다지 못생기지는 않았구나.' "니코짐 씨는 아주 좋은 분이세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저도 그분에게 반했어요." "호호호...." 하고 마리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말씀도 잘 하셔!" 몸에 걸치고 있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자, 나데지다는 갑자기 하늘로 날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두 팔을 한번 휘두르기만 하면, 틀림없이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옷을 모두 벗어 버리자, 그녀는 올리가가 경원하는 눈빛으로 자기의 새하얀 피부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올리가는 군인의 젊은 아내로, 남편과는 떳떳하게 결혼한 사이였으므로, 자기가 주인보다 나은 사람이고, 품위도 한층 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데지다는 또한 마리아와 카아챠가 은근히 자기를 경멸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고, 자기가 그렇게 시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페테르스부르크에서는 꼭 이맘때 모두들 별장 생활이 한창이죠. 저나 주인 양반도 흉허물없이 지내는 분이 많아요! 언젠가 한번 얼굴을 내밀어야 하겠는데." "바깥양반이 아마 기사이시라죠?" 마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 남편이 아니라 라에프스키를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이는 아는 사람이 무척 많아요. 그렇지만 곤란하게도, 그이 어머님이 가문만 내세우면서 머리가 좀 모자라셔서...." 나데지다는 끝까지 말을 마치지 않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뒤로 마리아와 카아챠가 슬금슬금 뒤따랐다. "사교계란 당치도 않은 관습에 얽매여 있답니다." 하고 나데지다는 말을 이었다. "옆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수월한 곳은 아니에요." 귀족의 가정에 가정 교사로 고용되어 있었으므로, 사교계의 일이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마리아가 말했다. "정말이에요! 그런데 부인, 가라틴스키 씨 댁에서는 아침이나 점심이나 반드시 화장을 하고 식탁에 앉는 관습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마치 여배우처럼 월급말고도 옷값까지 받았죠." 그녀는 마치 나데지다를 둘러싸고 있는 물에서 딸을 지키려고나 하는 듯이, 나데지다와 카아챠 사이에 끼여들었다. 바깥 바다를 향하여 열려 있는 문 건너편 해수욕장에서 백 걸음쯤 되는 곳에서 누군가가 헤엄치고 있는 것이 문득 눈에 띄었다. "엄마, 우리 코스챠에요!" 카아챠가 말했다. "어마!" 마리아가 깜짝 놀라며 큰 소리를 냈다. "얘, 코스차야!" 하고 그녀는 외쳤다. "돌아와! 코스챠, 이리 돌아와!" 코스챠는 열 네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인데, 자기가 용감하다는 것을 어머니와 누나에게 보이고 싶은지, 한 번 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바다를 향하여 헤엄쳐 갔다. 그러나 곧 피로하여 이 쪽으로 돌아왔다. 체력에 자신이 없다는 것이, 얌전하고 긴장된 얼굴에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사내아이들이란 정말이지 곤란해요, 부인." 마리아가 마음을 놓으면서 말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목이 부러지는 일을 당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거든요. 정말이지 어머니라는 것은 재미도 있긴 하지만 괴로운 일이에요, 부인! 항상 마음을 졸이고 있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나데지다는 밀짚모자를 쓰고 바깥 바다로 헤엄쳐 나갔다. 8미터쯤 앞으로 나갔을 때, 그녀는 위를 향하여 누운 자세를 취했다. 바다가 수평선 끝까지 내다보이고, 기선과 해안의 사람들 그림자와 시가지도 눈에 들어왔다. 그런 모든 것들이 찌는 듯한 더위와 기분좋게 피부에 와 닿는 투명한 물질과 함께 그녀의 마음을 자극하고, 악착같이 살아가는 거야, 라고 그녀에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바로 그 곁을, 물결과 공기를 힘차게 가르고 돛배 한 척이 질주하고 있었다. 키를 잡고 있는 사나이가 빤히 그녀 쪽을 보고 있다. 그녀는 그와 같이 남에게 주시당하고 있는 것이 흐뭇하였다. 해수욕이 끝나자 두 사람은 옷을 입고, 같이 걷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 걸러 열이 나는데도 살이 빠지지 않아요." 나데지다는 바닷물로 짭짤해진 입술을 핥으며, 안면 있는 사람들의 인사에 웃는 얼굴로 답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에도 뚱뚱한 편이었지만 요즈음에는 더욱 뚱뚱해진 것 같아요." "그건 체질 때문이에요, 부인. 뚱뚱해지지 않는 사람은, 나같은 사람도 그렇지만 어떤 것을 먹어도 살이 찌질 않아요. 그건 그렇고, 부인, 모자가 흠뻑 젖었네요." "괜찮아요, 곧 마를 거예요." 선창 위를 왔다 갔다 하면서 프랑스 말로 지껄이고 있는 사나이들의 모습이 또 나데지다의 눈에 띄었다. 그 순간 나데지다는 웬일인지 기쁨으로 가슴이 뛰었다. 어딘가의 큰 살롱 일이 어렴풋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거기서 언젠가 춤을 춘 듯한 생각이 들지만, 어쩌면 단지 꿈을 꾼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문득 마음 속에서, 너는 소갈머리가 좁고, 천박하고, 불량하고 하찮은 여자다, 하고 희미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어렴풋이 났다. 마리아는 자기 집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나데지다에게 잠깐 들렀다 가라고 권했다. "잠깐 들어왔다 가세요, 부인!" 하고 간청을 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으나, 나데지다를 바라보는 눈매에는, '어떻든 거절해 줬으면 좋겠다. 들르지 말고 그냥 가 주어야 할 텐데.' 하는 안타까운 기대가 나타나 있었다. "네, 잠깐 들렀다 갈까요." 하고 나데지다는 말을 이었다. "저는 댁에 들러 보는 게 아주 기뻐요."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리아는 그녀를 의자에 앉게 하고, 커피를 내놓고, 버터로울을 대접하고, 그리고 옛 제자이며 지금은 모두들 결혼한 가라틴스키 집안의 딸들 사진을 내보이고, 나중에는 카아챠와 코스챠의 시험 성적표까지 보여 주었다. 두 아니는 모두 좋은 성적이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중학에서의 공부가 요즘에는 아주 어려워졌다는 것을 한숨을 섞어 가면서 투덜거렸다. 마리아는 손님을 접대하는 한편 그녀를 동정하고, 또 나데지다가 집에 와 있는 것이 카아챠나 코스챠의 성격에 나쁜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속이 상하기도 하고, 니코짐이 집에 없는 것이 아주 잘 됐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사나이는 모두 '이런 여자'를 좋아하므로, 나데지다는 니코짐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손님을 상대하면서 마리아는 오늘 저녁에 들놀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폰 코렌으로부터 여우원숭이들, 즉 라에프스키와 나데지다 두 사람에게 그 말을 하지 말라는 부탁을 단단히 받고 있음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는데, 깜빡 잊고 그 말을 입밖에 내놓아, 얼굴이 새빨개져서 당황하며 이렇게 말했다. "부인도 오시는 거죠!" 6. 그 들놀이라는 것은 가도를 따라 시내에서 7킬로미터쯤 남쪽으로 가서, 흑하와 황하라고 하는 두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술집 근처에 마차를 세우고 거기서 생선 수프나 끓이자고 하는 계획이었다. 일행은 다섯 시가 조금 지나서 출발했다. 앞장 선 무개 마차에는 사모이렌코와 라에프스키가 타고, 그것을 따르는 삼두 포장 마차에는 마리아와 나데지다, 그리고 카아챠와 코스챠가 타고 있었다. 양식과 식기가 들어 있는 바구니도 함께 실려 있었다. 세 번째 마차에는 키릴린, 그리고 나데지다에게 3백 루우블리나 외상을 준 그 상인 아들인 젊은 아치미아노프가 나란히 타고 있고, 그 맞은편 자리에는 몸집이 작고 고지식한, 관자놀이까지 머리를 깨끗이 빗어 내린 니코짐 알렉산드리치가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있었다. 맨 뒤는 폰 코렌과 신부이고, 신부의 발 밑에는 생선이 들어 있는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오른쪽!" 길 맞은편에서 짐마차나 당나귀를 탄 아프하지아인이 올 때마다 사모이렌코가 목청을 돋우어 외쳤다. "앞으로 2년이 지나서 자재와 사람이 갖추어지면, 나는 탐험을 떠나겠어요." 폰 코렌이 신부를 향하여 말을 꺼냈다. "블라디보스톡을 기점으로 해서 해안을 따라 베링 해협까지 가고, 다음에는 베링 해협에서 예니셰이 하구까지 가는 겁니다. 지도를 그리기도 하고, 동식물을 조사하거나 지질학, 인공학, 토속학 연구를 할 예정입니다. 당신이 같이 가고 안 가고는 당신 마음에 달려 있어요." "그건 무리예요." 신부가 말했다. "왜요?" "딸려 있는 사람이 있거든요. 난 가족을 거느리고 있어요." "부인도 반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 둘이서 잘 말해서 이해하도록 하면 돼요. 그리고 공공 이익을 위해 머리를 깎고 수녀가 되도록 당신이 설득하는 것도 좋아요. 그러면 당신도 머리를 깎고 수도 신부 자격으로 탐험하러 갈 수 있잖아요. 내가 힘을 써 줄 수도 있어요." 신부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당신은 전공인 신학을 잘 알고 있나요?" 동물학자가 물었다. "변변치는 못합니다." "아... 그 점에서 나 자신 신학을 잘 모르니까, 당신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는 못 되죠. 필요한 참고서는 리스트를 작성해 주면 내가 겨울 동안에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보내 드리겠어요. 그리고 교회 관계 여행자들의 수기도 읽어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친구들 중에는 훌륭한 민속학자와 동양어의 대가들이 있으니까요. 그 친구들의 방법을 머리에 넣어 두면, 당신도 일을 시작하기가 쉬울 겁니다. 그건 그렇고, 현재도 책이 없다고 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좋지 않아요. 나한테 오세요. 둘이서 컴퍼스 사용법을 배우던가 천문학 공부도 합시다. 그런 것도 익혀 두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하고 신부는 중얼거리고 웃었다. "나는 중부 러시아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원서를 냈고, 사제장으로 있는 숙부도 말을 해 주겠다고 말씀하시고 있어요. 내가 당신과 같이 탐험을 가 버리면, 상사에게 헛수고를 하게 하는 결과가 되죠." "나는 당신이 망설이는 까닭을 알 수 없군요. 당신이 주일만 근무를 하고, 나머지 날을 쉬는 일반 보좌 신부 생활을 계속해 나가면 10년이 지나도 전과 다를 바가 없고, 몸에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콧수염이나 구레나룻뿐일 겁니다. 그에 반해서 탐험을 갔다 돌아오면, 당신은 10년 뒤에는 딴사람같이 되고, 자기도 무엇인가를 수행했다고 하는 자부심도 생기고 해서 그만큼 여유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여자들이 타고 있는 마차에서 갑자기 놀라움과 찬탄의 소리가 올랐다. 가만히 보니 일행은 깎아지른 듯한 벼랑의 중턱을 뚫은 산길에 접어든 참이었다. 마치 높은 돌담에 붙여 댄 선반 위를 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어서, 모두들 마차가 당장에라도 나락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쪽에는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왼쪽은 울퉁불퉁한 바위벽인데, 그 거죽에는 검은 반점과 빨간 지맥이 돋아 보이고, 노출된 나무 뿌리가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머리 위에서도 울창하게 우거진 침엽수의 나뭇가지가 마치 무서운 것을 보려고 몸을 내민 것과 같은 모양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분 뒤에 또다시 여자들이 떠들어대는 소리와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마차는 마침, 위에서 덮칠 것 같은 거대한 바위 아래를 지나가는 참이었다. "도대체 나는 어째서 자네들과 함께 이런 곳에 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군." 라에프스키는 계속해서 말했다. "얼마나 어리석고 속된 일인지 모르겠네! 나는 살 길을 찾아서 북방으로 탈출을 해야 할 몸인데, 어쩌다가 이런 어리석은 들놀이에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니까." "저것 봐, 멋진 경치가 아닌가!" "마차가 왼쪽으로 꺾어 돌아 황하 계곡의 전망이 전개되고, 누렇고 탁한 물줄기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을 때, 사모이렌코가 외쳤다. "나에겐 조금도 흥미가 없어, 사샤." 라에프스키가 대꾸했다. "자연에 감격하고만 있는 것은 곧 상상력의 빈곤을 드러내는 일일세. 내 상상력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에 비하면, 저런 강이나 벼랑 따위는 한 푼의 가치도 없어." 마차는 이미 강 언덕을 따라서 달리고 있었다. 깎아지른 양쪽 언덕이 차차 가까워지고, 골짜기가 좁아져서 앞쪽이 협곡을 이루고 있다. 한쪽 바위산은 자연이 거대한 암석을 모아서 만든 것인데, 그것들이 굉장한 힘으로 밀고 밀리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사모이렌코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거무스름한 아름다운 산은 군데군데에 갈라져서 틈새가 생겨 있고, 거기서 무엇인가 까닭이 있는 듯싶은 습기찬 바람이 불어 온다. 틈새 저 편에는 다른 산들도 보인다. 다갈색인 것이 있는가 하면 장미색인 것도 있다. 연보랏빛인 것, 뽀오얀 것, 선명한 저녁 놀을 받은 핏빛도 있다. 틈새 옆을 지나갈 때는, 이따금 어딘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이 돌에 부딪쳐 뚝뚝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렸다. "아아, 지긋지긋한 산들이다." 라에프스키는 자꾸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보기조차 싫어졌어!" 흑하가 황하와 합류하여 먹물처럼 새까만 물이 노란 물을 더럽히면서 그것과 싸우고 있는 부근의 가도에서 좀 옆으로 비껴난 곳에, 타타르인인 케르바라이가 내고 있는 주막이 있었다. 지붕 위에 러시아 국기가 꽂혀 있고 간판에는 분필로 '유쾌한 술집'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옆에 있는 그물 울타리를 둘러친 작은 뜰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몇 개 놓여 있고, 볼품 없는 가시덤불 속에 어두운 빛깔의 멋진 측백나무 한 그루가 하는 높이 솟아 있었다. 몸집이 작고 재빨라 보이는 타타르인 케르바라이는 푸른 셔츠에 흰 앞치마를 두르고 길 위에 서 있다가, 마차를 탄 일행이 가까이 다가오자 두 손을 배에 대고 공손히 절을 하고, 하얗게 빛나는 이를 드러내어 싱긋 웃었다. "잘 있었나, 케르바라이!" 사모이렌코가 그를 보고 소리쳤다. "우리는 좀더 가겠으니, 자네는 나중에 사모바아르와 의자를 가져오게! 곧 와야 해!" 케르바라이는 짧게 깎은 머리를 흔들며 뭐라고 말을 하였는데, 그것은 맨 뒷마차를 타고 오는 사람에게만 들릴 뿐이었다. "각하, 곤돌매기가 있습니다만." "가져와, 가져와!" 폰 코렌이 그에게 말했다. 주막에서 5백 걸음쯤 더 간 곳에서 마차가 멈춰 섰다. 사모이렌코가 자리를 잡은 곳은 자그마한 풀밭이었다. 거기는 걸터앉기에 안성맞춤인 돌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폭풍으로 쓰러진 나무 한 그루가 솜털 같은 잔털이 난 뿌리를 드러낸 채 시들어서 누렇게 된 침엽을 내보이며 누워 있었다. 강에는 위태해 보이는 통나무 다리가 하나 놓여 있고, 건너편 강 언덕에는 옥수수를 말리기 위한 오두막이 서 있었는데, 네 개의 말뚝으로 지탱된 그 모양은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닭의 다리가 달린 오두막을 연상하게 했다. 문에는 작은 사다리 하나가 걸쳐져 있었다. 이 곳으로부터는 언제까지나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것이 일행이 받은 첫 인상이었다. 어느 쪽을 바라보나 첩첩한 산이 사방팔방에서 밀려 오고 있다. 주막과 어두운 빛깔의 측백나무 쪽에서 순식간에 어둠이 닥쳐와서, 그 때문에 흑하의 꾸불꾸불한 좁은 계곡은 더욱더 좁아지고, 산들은 더욱더 높아지는 것같이 느껴진다. 졸졸졸 흐르는 물 소리도 들리고, 매미가 쉴 새 없이 울고 있다. "굉장한걸!" 마리아가 즐거운 나머지 가쁜 숨을 깊이 들이쉬며 말했다. "얘들아, 봐라. 얼마나 아름다워! 그리고 이 조용함이란!" "그래요, 정말 아름답군요." 라에프스키가 맞장구를 쳤다. 그 경치는 그의 마음에 들었으나, 하늘을 쳐다보고, 주막의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푸른 연기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왜 그런지 갑자기 슬픈 생각이 들었다. "네, 정말 좋아요!" 하고 그는 되뇌었다. "라에프스키 선생님, 이 경치를 표현해 보세요." 마리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라에프스키는 이렇게 묻고 나서 말했다. "인상은 어떤 표현보다도 앞서는 것입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인상을 통해서 자연에서 받는 빛깔이나 소리의 이 풍부성은 작가가 붓으로 나타내면 곧 보기 흉하고 얼토당토 않은 것으로 되고 맙니다." "그렇던가요?" 물가에서 가장 큰 바위를 골라 그 위로 올라가 앉으려고 애쓰면서 폰 코렌이 쌀쌀한 말투로 물었다. "그렇던가요?" 라에프스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되풀이해서 말하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은요? 그리고 예를 들면 푸시킨의 '우크라이나의 밤'은 어떻고요? 자연 쪽이 찾아와 발 밑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겁니다."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당장 생각을 정리하여 반박하는 것이 귀찮아서 라에프스키는 일단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결국에 가서 뭡니까? 아름답고, 시적이면서 신성한 사랑--그것은 사람들이 즐겨 그 밑에 썩은 것을 감추고 싶어하는 장미꽃과 같은 것입니다. 로미오 역시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인 동물이에요."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곧 그것을...." 폰 코렌은 카아챠 쪽을 돌아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곧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한다는 건가요?" 라에프스키가 물었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가 당신에게 '포도송이는 참으로 아름답다.'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당신은 '그건 그래요. 하지만 포도가 입에서 씹히어 위 속에서 소화되는 것은 차마 볼 수 없는 일이에요.'하고 곧 말할 겁니다. 진부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묘한 버릇이죠." 폰 코렌이 자기를 좋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라에프스키는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폰 코렌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거북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자기 뒤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는 한 마디 대꾸 없이 딴 곳으로 자리를 피하고, 오지 말 것을 그랬다고 생각했다. "여러분, 모닥불 피울 삭정이를 주우러들 가세요!" 사모이렌코가 명령했다. 모두들 뿔뿔이 흩어져 가고, 키릴린과 아치미아노프와 니코짐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게 되었다. 케르바라이가 의자를 날라와 땅에 융단을 깔고, 그 위에 포도주 몇 병을 놓았다. 경찰서장인 키릴린은 어떤 날씨에도 제복 위에 외투를 걸치고 있는 키가 크고 풍채가 좋은 사나이인데, 거만한 태도를 보나 거드름을 피우는 걸음걸이를 보나 좀 쉰 듯한 굵은 목소리를 보나, 우선 젊은 시골 경찰서장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잠을 자고 있는 것을 억지로 깨워서 막 일으켜 세웠을 때와 같은 울적하고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기랄, 자네가 가지고 온 건 대체 뭐야?" 그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천천히 발음하면서 케르바라이에게 물었다. "내가 가져오라고 한 건 크발레리야. 그런데 자네는 뭘 가지고 왔지. 이 타타르 녀석 같으니라구. 앙? 뭐냔 말이야?" "시내에서 가져온 것이 잔뜩 있어요, 키릴린 씨." 니코짐이 공손한 말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야 그럴 테죠. 하지만 나는 내 포도주가 필요해요. 이 들놀이에 참가한 이상 내 몫을 내놓을 권리가 당연히 있다고 나는 생각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단 말예요! 이봐, 크발레리 열병 가져와!" "그렇게 많이 가져와 어떻게 하시게요?" 키릴린이 돈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니코짐은 이상해서 물었다. "스무 병이야! 아니, 서른 병 가져와!" 키릴린이 소리쳤다. "상관 말고 내버려 두세요." 아치미아노프가 니코짐에게 귀띔을 했다. "내가 지불하겠으니." 나데지다는 마음이 들뜨고 장난스런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뛰어다니기도 하고 큰 소리로 웃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놀려 주고 싶기도 하고 교태를 부리고도 싶었다. 파란 물방울 무늬가 있는 사라사의 값싼 드레스에 빨간 핌프스를 신고 같은 빛깔의 밀짚모자를 쓴 자기가 마치 나비와 같이 작고 단순하고 가볍게 훨훨 날아다니는 생물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위험한 통나무 다리를 달려서 건너 1분쯤 물 속을 들여다보다가 현기증이 나서, 와아! 하고 한 마디 소리치고는 웃으면서 건너편 강 언덕에 있는 옥수수를 말리기 위한 오두막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는 남자들이 모두, 케르바라이마저도 넋을 잃고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초저녁의 어둠이 어느 새 찾아들어와 나무나 산, 말과 마차의 구별도 할 수 없게 되고 주막 창문에 불이 켜졌을 때, 그녀는 자갈과 가시덤불 사이의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따라 언덕 꼭대기에 이르러 어떤 바위 위에 앉았다. 아래에서는 이미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팔을 걷어붙인 신부가 불 주위를 이리저리 걸어다닐 때마다 길고 시꺼먼 그림자가 역시 흔들흔들 모닥불 주위에서 움직인다. 신부는 쉴 새 없이 마른 삭정이를 불에 지피고는 기다란 지팡이를 끝에 잡아맨 스푼으로 솥 안을 휘젓고 있다. 얼굴이 적동색이 된 사모이렌코는 자택 부엌에서 하는 것과 꼭 같이 불 주위를 부산히 돌아다니며 몹시 흥분이 되어 소리치고 있다. "여러분, 소금은 어디 있어요? 잊어버리고 온 게 아닙니까? 어째서 여러분들은 모두 팔짱을 끼고 앉아서 바라보기만 하며 나만 시키고 있죠?" 폭풍으로 쓰러진 나무 위에는 라에프스키와 니코짐이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서 생각에 잠긴 채 불을 바라보고 있다. 마리아와 카아챠와 코스챠는 바구니 속에서 차 그릇과 접시를 꺼내고 있다. 폰 코렌은 팔짱을 끼고 한쪽 발을 바위 위에 올려 놓은 채 물가에 서서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있다. 모닥불의 빨간 불길이 그림자와 함께 검게 보이는 사람들 주위의 땅 위를 기고 언덕과 나무들과 다리와 옥수수를 말리기 위한 오두막 위에 활활 비친다. 건너편 강 언덕의 물 흐름으로 깊이 팬 벼랑은 모닥불에 구석구석까지 비치어 강의 수면에 흔들리는 모습이 비치고 있다. 신부는 케르바라이가 강가에서 속을 빼내어 씻고 있는 생선을 가지로 갔는데, 도중에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정말 좋구나!" 하고 그는 말했다. "사람, 그림자, 바위, 불, 저녁, 어둠, 게다가 비틀어진 나무가 한 그루--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걸. 그러면서도 얼마나 멋진가!" 건너편 강 언덕의 옥수수를 말리기 위한 오두막 근처에 일행이 아닌 사람들이 보였다. 모닥불 불빛이 끊임없이 흔들리는데다가 연기도 그 쪽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그 패거리를 모두 단번에 볼 수는 없고, 닳아서 털이 일어선 모자와 하얀 구레나룻이 보이기도 하고, 어깨에서 무릎까지 걸치고 있는 누더기옷과 허리띠에 비스듬히 찬 단도가 보이기도 하고, 마치 숯으로 그린 것같이 뚜렷하게 그어진 검고 짙은 눈썹이 두드러진 젊디젊어 보이는 거무스름한 얼굴이 보이기도 했다. 얼마 있다가 5명쯤 되는 사람이 땅바닥에 빙 둘러앉고, 다른 5명이 옥수수를 말리기 위한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문 앞에서 모닥불 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서, 두 손을 뒤로 돌려 뒷짐을 지고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인지, 사모이렌코가 삭정이를 지폈기 때문에 모닥불이 한 번 환하게 타올라 불꽃이 흩어지면서 옥수수를 말리기 위한 오두막을 뚜렷이 비췄을 때,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은 잔잔한 표정의 얼굴 둘이 오두막 문에서 보였고, 둥글게 앉아 있는 패거리도 고개를 돌려서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얼마 뒤에, 이번에는 둥글게 앉아 있던 패거리가 사순절에 부르는 찬송가를 연상하게 하는, 느릿하고 재미있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노래를 듣고 있는 동안, 신부는 10년 뒤에 탐험에서 돌아오면 자기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상상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그 때에는 이미 널리 알려진 저서와 훌륭한 경력을 가진 젊은 수도사제인 동시에 전도자이다. 자기는 수도원장으로, 그리고 이어서 감독으로 임명될 것이다. 그리고 본당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다. 금빛관을 쓰고 성모상을 가슴에 달고 설교대에 나가, 삼지 촉대와 이지 촉대에서 회중에게 축복을 내리며 이같이 말한다. '하느님이시여, 바라건대 당신의 오른손으로 손수 심으신 이 포도밭을 하늘에서 굽어보소서. 그리고 강림하시옵소서!' 그러면 아이들이 천사 같은 목소리고, '거룩한 하느님....' 하고 화창한다. "신부님, 생선은 어디 있소?" 사모이렌코의 소리가 났다. 모닥불 쪽으로 돌아오자, 신부는 이번에는 7월의 무더운 날에 십자가 행렬이 먼지투성이 길을 걸어가는 광경을 상상했다. 선두는 기를 든 농부들, 그리고 성상을 든 아낙네들과 처녀들, 그 뒤가 소년 성가대와 한쪽 뺨에 천을 대고 머리에 짚을 한 가닥 꽂은 교회에서 일하는 남자, 그리고 그 뒤에는 보좌 신부인 자기가 따르고, 자기 뒤에서 모자를 쓰고 십자가를 든 사제가 걸어오고, 맨 뒤에는 농부들과 여자들과 소년들의 무리가 풀썩풀썩 이는 먼지 속을 행진한다. 행렬 가운데에는 베일을 쓴 사제 부인과 보좌 신부 부인의 얼굴도 보인다. 성가대가 노래를 부르고, 아이들이 떠들어 대고, 메추라기가 울고 종달새가 지저귄다.... 도중에 행렬이 한 번 멈추어 서서 가축에게 성수를 뿌린다.... 그리고 또 걷기 시작하고, 이윽고 일동은 무릎을 꿇고 기우제를 올린다. 그런 뒤에 자쿠스카를 들며 모두 이야기를 한다. '그것도 나쁘진 않아....' 신부는 이렇게 생각했다. 7. 키릴린과 아치미아노프는 오솔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갔다. 도중에 아치미아노프가 뒤로 처져 멈추어 서 있는 동안에, 키릴린은 나데지다 곁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거수 경례를 하면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그렇군요!" 키릴린은 하늘을 쳐다보며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뭐가 그렇다는 거죠?"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나데지다 표도로브나가 물었다. 그녀는 아치미아노프가 자기들 두 사람 쪽을 빤히 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와 같이...." 하고 서장은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들의 사랑은 꽃이 피기도 전에 시들어 버렸다고 하는 겁니다. 도대체 그걸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부인의, 말하자면 일종의 불장난이었다고 하는 건가요? 그렇지 않으면 부인께서는 저를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괜찮은 시시한 사내라고나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건 잘못이었어요! 저를 상관 말아 주세요!" 나데지다는 날카롭게 말했다. 그녀는 이와 같이 아름답고, 황홀한 밤에 사나이를 보는 것이 두려워, 당황하면서 몇 번이고 자신의 마음에 물어 보는 것이었다. '이런 사나이를 한때나마 마음에 들어서 친하게 지냈다니, 정말이지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그런가요!" 키릴린은 이와 같이 말하고, 서서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기분이 좋아지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다만 이 기회에 분명히 말씀드려 두지만, 저는 신사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아무도 의심할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남의 노리갯감이나 될 사람은 아닙니다! 안녕!" 그는 거수 경례를 하고는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저 쪽으로 가버렸다. 얼마 있다가 아치미아노프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기분좋은 밤이군요, 안녕하십니까!" 그는 약간 아르메니아 사투리를 섞어 가면서 말했다. 그는 매우 호남이고, 유행에 맞는 옷차림을 하고, 태도도 양가의 도령답게 깨끗하였으나, 나데지다는 그의 아버지에게 3백 루우블리의 빚이 있기 때문에 이 청년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들놀이에 상점 집 아들을 부른 것도 탐탁하지 않았고, 하필이면 자기가 이처럼 맑은 심정이 되어 있는 오늘 밤 같은 때에 그가 접근해 온 것도 불쾌했다. "뭐니뭐니 해도 들놀이는 성공이군요." 그는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그래요." 그녀는 맞장구를 치고, 갑자기 바로 그 빚 생각이 떠오르기라도 했는지, 이와 같이 쏘아붙였다. "아, 참, 가게로 돌아가시면, 2, 3일 안에 라에프스키가 찾아 뵙고, 3백...이었던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진 않지만, 어쨌든 갚겠다고 말씀드려 주세요." "외상을 3백 루우블리어치 더 드려도 괜찮습니다. 매일처럼 외상값 말씀만 하시는 걸 그만두신다면 말씀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흥이 깨지는 말씀만 하십니까." 나데지다는 웃었다. 만일 자기가 별로 행실이 좋지 않은 여자였다면,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1분 동안에 그 빚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하는 우스운 생각이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령 이 젊고 훤칠한 얼굴을 한 멍텅구리의 머릿속을 약간 돌게 만들어 놓으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홀딱 반하게 만들어 마음껏 우려 내고, 막판에 가서 냉큼 차 버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보고 싶어졌다. "실례입니다만, 충고하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아치미아노프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제발 부탁인데, 저 키릴린에게 마음을 주지 않도록 하세요. 그놈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부인에 관한 터무니없는 말을 퍼뜨리고 있거든요." "바보 같은 것들이 어떤 말들을 하고 다니든 나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요." 나데지다는 쌀쌀하게 받아넘기기는 하였으나,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젊고 훤칠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치미아노프를 데리고 놀아 줄까 하는 야릇한 생각은 갑자기 매력을 잃고 말았다. "그만 내려가 봐야겠군." 하고 그녀가 말했다. "부르고 있어요." 아래에서는 이미 생선 수프가 되어 있었다. 일동은 그것을 각자의 접시에 덜어, 들놀이가 아니고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묘한 모습들을 하고 그것을 먹었다. 이 수프는 기가 막히게 맛이 있다, 집에서는 이렇게 맛있는 것을 먹어 본 일이 없다고 모두들 생각했다. 들놀이 때는 언제나 그렇지만, 냅킨과 종이 꾸러미와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필요 없게 된 기름종이 따위에 뒤섞이어, 어디에 누구의 컵이 있고, 어디에 누구의 빵이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게 되고, 포도주를 깔개나 자기 무릎에 엎지르고, 소금을 흘리고, 게다가 주위가 아주 어두워지고, 모닥불도 전보다 밝지 않은데도 일어나서 나무를 지필 만큼 기운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포도주를 마시고 코스챠, 카아챠도 컵에 반 잔씩 따라 받았다. 나데지다는 한 잔을 비운 뒤에 또 한잔을 마시고, 취하여 키릴린의 일 같은 것은 잊고 말았다. "굉장한 들놀이군. 황홀한 밤이야." 포도주 술기운이 거나하게 돈 라에프스키가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역시 멋진 겨울을 택하겠어. '서리는 바다닧 깃에 은백 가루를 뿌린다'고나 할까." "오이를 거꾸로 먹어도 제멋이니까요." 폰 코렌이 불쑥 말했다. 라에프스키는 더 이상 참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에는 모닥불의 열기가 다가들고, 가슴과 얼굴에는 폰 코렌의 증오가 밀려 온다. 이 빈틈없고 머리 좋은 사나이가 자기를 미워하는 데는 아마도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자, 그는 맥이 빠지고 비참한 기분이 되는 것이었다. 그 증오에 저항할 힘도 잃은 채, 그는 아첨하는 듯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연을 무척 좋아합니다. 자연 과학을 공부하지 못한 것이 서운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부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어마, 저는 서운할 것도 없고 부러울 것도 없어요." 하고 나데지다가 말했다. "백성들은 고통을 받고 있는데, 장수풍뎅이가 어떠니 무당벌레가 어떠니 하는 연구를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사람 속을 모르겠어요." 라에프스키는 그녀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연 과학에 관해서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개미의 촉각이라든지 진디의 발이라든가 하는 것을 연구하고 있는 작자가 의젓한 말을 하고, 학자인 체 심각한 얼굴을 짓는 꼴은 아무래도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작자들이 그 같은 촉각이라든가 발이라든가 또는 외형질이라고 하는 것(웬 까닭인지 그는 그것을 굴과 같은 모양을 한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었다)의 연구를 바탕으로 해서 인류의 기원과 생명에 관한 문제 해결에 참견하는 것도, 그는 평소부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나데지다의 말에도 예의 속임수가 느껴지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그녀에게 반대하려는 마음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무당벌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론에 있어!" 8.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행이 마차를 타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밤도 깊어져서 이미 열 시가 지나 있었다. 모두 마차에 탔으나, 다만 나데지다와 아치미아노프만은 아직 타지 않고, 강 건너편에서 뜀박질을 하면서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빨리들 타요!" 사모이렌코가 소리쳤다. "여자들에겐 포도주를 마시게 하는 게 아니야." 폰 코렌이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나데지다를 부르러 간 라에프스키는 들놀이며 폰 코렌의 적의며 자신의 상념 따위로 몹시 지쳐 있었다. 자기가 새털처럼 홀가분해진 것 같아서, 명랑하고 즐거운 기분이 된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그의 두 손을 잡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을 때,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거친 말로 나무랐다. "뭐야, 이런 추태가. 꼭... 창녀 같잖아." 저도 모르게 몹시 난폭한 투로 말해 버려 그녀가 가엾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녀는 그의 언짢고 지친 얼굴에서 자기에 대한 미움과 연민의 정과 노여움을 읽어 내가, 그만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분위기에 말려들어 도에 지나쳤다는 느낌이 들어, 자기는 느린뱅이이고, 뚱뚱하고, 덜렁거리는 주정꾼이라고 생각하면서, 슬픈 기분으로 되는 대로 아무 마차에 아치미아노프와 같이 탔다. 라에프스키는 키릴린과, 동물학자는 사모이렌코와, 신부는 부인들과 각각 같은 마차를 탔다. 일행을 귀로에 올랐다. "그 치들은 늘 저래요, 저 여우원숭이들 말이에요." 폰 코렌은 망토로 몸을 감싸며 말했다. "당신도 들었죠.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이상, 장수풍뎅이나 무당벌레 연구를 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우원숭이들은 우리들 모두를 그처럼 보는 거죠. 그들은 10세대에 걸쳐서 채찍과 주먹으로 줄곧 위협을 받아 온 교활한 노예 종족입니다. 폭력 앞에서만은 그들은 벌벌 떨고, 감동하고, 그리고 향을 피우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일단 아무에게도 덜미를 잡힐 걱정이 없는 자유로운 천지로 들어가기만 하면, 여우원숭이는 반드시 본색을 드러내어 판을 치게 되는 겁니다. 보세요, 그림 전람회나 박물관이나 극장에서, 또는 학문을 논할 때에 여우원숭이가 얼마나 뻔뻔스런 행동으로 나오는지, 털을 곤두세우고 뒷발로 일어서고, 욕설을 퍼붓고, 트집을 잡아요.... 트집은 틀림없이 잡는 겁니다. 그게 노예들의 특징입니다! 어쨌든 조심해서 들어 보세요. 자유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사기꾼들보다도 더욱 나쁘게 말하니까요. 그것은 인간 사회의 4분의 3까지를 노예들, 저 여우원숭이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죠. 노예가 당신에게 손을 내밀고, 당신이 일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충심으로 감사하는 따위의 일은 있을 수 없어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알아 낼 수가 없군요!" 사모이렌코는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그 부인은 가엾게도, 사람이 좋아서 당신을 상대로 재치 있는 말을 해 보고 싶었을 뿐 아닙니까. 그런데도 당신은 대번에 과장된 결론을 끌어내려고 해요. 남편에 대해 감정이 있어서 아내까지 보기 싫어지는 거죠. 그처럼 훌륭한 부인인데!" "그만둬요. 그 여자는 세상에 흔히 있는 정부예요. 음탕하고, 상스럽고. 자, 들어 봐요, 알렉산드르. 가령 당신이 평범한 여자를 만났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 여자가 남편과 별거하고, 다만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빈둥빈둥 놀 뿐 이렇다 할 일도 하지 않고 지낸다고 해요. 그런 경우 당신은 그 여자를 향해, 가서 일 좀 해요, 하고 말할 테죠. 그런데도 당신은 어째서 이번 경우에 한해서는 꽁무니를 빼고 있는 거요.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요. 나데지다가 선원이 아니라 관리의 정부라고 하는 이유 때문이오?" "그렇다면 내가 그 부인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겁니까? 매질이라도 하라는 거요?" 사모이렌코는 발끈해서 물었다. "악덕을 감쌀 것은 못 돼요. 우리는 숨어서 악덕을 욕할 뿐이지만, 그래 가지고는 뒤에서 눈을 흘기는 것이나 별차가 없어요. 나는 동물학자입니다. 또는 사회학자죠. 이 두 가지는 마찬가지니까요. 사회는 우리들이 하는 말을 신용해요. 그래서 우리는, 그 나데지다 이바노브나와 같은 여자의 존재가 현재 및 장래의 사회에 무서운 해독을 끼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사회에 대해 경고할 의무가 있어요." "표도로브나입니다." 하고 사모이렌코는 정정하고 물었다. "그럼 사회는 어떻게 하면 좋소?" "어떻게 하느냐구요? 그건 사회가 정할 문제죠. 내 생각으로는 가장 손쉽고 빠른 방법은 완력이죠. 군대의 힘으로 남편에게 돌려 보내는 겁니다. 만일 남편이 맡지 않는다면 강제 노동을 시키든가 교도소로 보내는 거죠." "허어, 참." 하고 사모이렌코는 탄식하고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바로 며칠 전에 당신은 이런 말을 했어요. 라에프스키 같은 작자는 없애 버릴 필요가 있다고.... 그래서 당신에게 물어 보는 것인데, 만일 그... 만일의 경우예요, 국가든가 사회가 그를 없애 버릴 것을 당신에게 맡겼다면 당신은... 나설 용기가 있소?" "겁이 나서 손을 떨지는 않을 겁니다." 9. 집으로 돌아오자, 라에프스키와 나데지다는 깜깜하고 무더운, 답답한 자기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 다 아무 말이 없었다. 라에프스키는 촛불을 켜고, 나데지다는 자리에 앉았는데, 망토와 모자를 벗으려고도 하지 않고, 슬픈 듯한, 미안해하는 듯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자기가 먼저 말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자 따분하고 아무 쓸모 없는 골치 아픈 것이 될 것이 뻔하다. 그리고 그는 아까 발끈해서 난폭한 말을 하고 만 것이 마음에 걸리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별 생각 없이 주머니를 뒤지자, 내일 그녀에게 읽어 주리라 마음먹고 있던 편지가 있었다. 그는 문득 지금 이 편지를 보이면, 그것이 그녀의 주의를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럭저럭 두 사람의 관계를 청산할 때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편지를 내 주자. 어차피 될 대로 되라지.' 그는 편지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읽어 봐요. 당신에게 관계 있는 일이야." 이렇게 말하고, 그는 서재로 가서 어둠 속에서 베개도 베지 않고 소파에 누웠다. 나데지다는 편지를 다 읽고 난 순간, 천장이 갑자기 아래로 내려앉고, 사방의 벽이 자기를 향하여 밀려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위가 갑자기 좁고, 어둡고, 무서운 것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서둘러 세 차례 성호를 긋고, 이와 같이 뇌었다. "주여, 안식을 내려 주소서...."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바냐." 그녀가 불렀다. "이반 안드레이치!"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라에프스키가 방으로 들어와, 자기 의자 뒤에 서 있는 줄 알고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면서 이와 같이 말했다. "그이가 죽은 것을 어째서 더 일찍 알려 주지 않았나요. 일찍 알려 줬다면 저는 들놀이 따위는 가지 않았을 것이고, 그 따위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사내들이란, 나를 보고 실없는 소리들만 해요. 정말이지 못 할 짓이에요, 못 할 짓이에요! 바냐, 저를 구해 줘요. 저는 미쳤어요.... 파멸했어요." 라에프스키는 그녀가 흐느껴 울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곧 숨이 막힐 것만 같고, 심장이 몹시 뛰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벌떡 일어나 한동안 방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이윽고 어둠 속에서 테이블 곁에 놓여 있는 안락의자를 더듬어, 그 위에 앉았다. '꼭 감옥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달아나야만 해...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단 말야." 카드놀이를 하러 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레스토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 도시에는 없다. 그는 다시 드러누워,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으나, 그러다가 사모이렌코에게라면 갈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데지다의 곁을 지나쳐 가지 않아도 되도록, 그는 창문으로 해서 안뜰로 내려가 울타리를 넘어 한길로 나갔다. 어두웠다. 막 어떤 기선이 도착한 모양이며, 등불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대형의 객선인 것 같았다. 얼마 후 닻을 내리는 소리가 나고, 해안에서 기선을 향하여 빨간 불이 곧장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세관의 라안치가 가고 있는 것이다. '배의 손님들은 선실에서 편히 잠을 자고 있겠지....' 라에프스키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의 안식이 부러웠다. 사모이렌코의 집 창문은 열린 채로 있었다. 라에프스키는 창문 하나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또 다른 창문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안은 깜깜하고 조용하기만 했다. "알렉산드르, 자나?" 하고 그는 불렀다. "알렉산드르!" 기침 소리에 이어서, 깜짝 놀랄 만한 큰 소리로 안에서 대답이 울려 왔다. "누구냐, 어느 놈이냐?" "날세, 알렉산드르. 미안하이." 얼마 있자 방문이 열리고 안에서 희미한 등불이 비껴 나오는가 싶더니, 새하얀 옷을 입고 새하얀 나이트 캡을 쓴 사모이렌코의 거구가 나타났다. "웬일이야, 도대체?" 하고 그는 선잠에서 깨어 크게 숨을 쉬고, 몸의 여기저기를 긁적거리면서 물었다. "잠깐 기다려. 곧 바깥문을 열겠으니." "괜찮아. 창문으로 들어가겠어." 라에프스키는 창문으로 기어들어가자, 사모이렌코 곁으로 가서,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알렉산드르."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날 살려 줘! 부탁하네, 부탁이야, 봐 줘! 내 처지는 참담해. 이런 상태가 이틀 동안 계속된다면, 나는 내 손으로 내 목을 죄어 죽겠어... 개처럼 말일세!" "아니, 잠깐만... 그건 대체 무슨 얘기야?" "그보다도 어서 촛불이나 켜 주게." "알았어." 사모이렌코는 촛불을 켜면서 한숨을 쉬었다. "정말 놀랐어.... 그리고 벌써 한 시가 지났네, 여보게." "미안해. 하지만 나는 도무지 집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라에프스키는 불이 켜지고 사모이렌코가 곁에 있는 바람에, 기분이 한결 가라앉은 것을 느끼면서 말했다. "알렉산드르, 자네는 나의 단 하나밖에 없는, 게다가 더할 나위 없는 친구일세. 나는 모든 희망을 자네에게 걸고 있어.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꼭 자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돼. 나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여기를 벗어날 필요가 있어. 돈 좀 꾸어 주게!" "이건 정말 놀랐는걸!" 사모이렌코는 몸의 여기저기를 긁적거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간신히 잠이 들었는가 싶자, 뱃고동 소리가 나며 기선이 들어온다. 그 다음엔 자네 아닌가. 많이 필요한가?" "적어도 3백 루우블리는 있어야겠어. 그녀에게 백은 남겨 놓고 가지 않으면 안 되고, 내 여비에 2백은 들 테니까. 자네에겐 벌써 4백 정도나 꾸었지만, 모두 저 쪽에 가서 우송하겠어, 모두를...." 사모이렌코는 한 손으로 양쪽의 구레나룻을 잡고 두 다리를 버티고 서서 생각에 잠겼다. "그래...." 그는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3백이나... 글쎄... 하지만 내게는 그만한 돈이 없어. 누구한테 꾸어야 해." "꿔 주게, 부탁일세!" 라에프스키는, 사모이렌코의 표정으로 보아 그가 돈을 꾸어줄 생각이 있다는 것, 반드시 꾸어 줄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꿔 주게, 반드시 갚겠어.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하면 곧 보내지. 그 점은 조금도 걱정할 것 없어. 그건 그렇고, 사샤." 하고 차츰 기운이 나서 말했다. "포도주라도 들자구!" "그렇군... 포도주를 마시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두 사람은 식당으로 갔다. "그런데 나데지다는 어떻게 되는 건가?" 사모이렌코는 술병 세 개와 복숭아가 들어 있는 접시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물었다. "그 사람은 여기 남아 있을 건가?" "모든 걸 끝장 내겠어, 모든 걸 말일세." 라에프스키는 저도 모르게 기쁨으로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끼면서 말했다. "그녀에겐 나중에 돈을 보내 줄 작정이야. 그러면 그녀는 내게 오지... 그런 뒤에 두 사람의 관계를 청산하는 걸세. 자네 건강을 위해...." "잠깐 기다려!" 사모이렌코가 말했다. "먼저 이것을 마시게나. 우리 포도밭에서 딴 것으로 만든 거야. 그리고 이 쪽 것은 나발리체의 포도밭 것이고, 나머지 한 가지는 아하투로프의 것이야. ...세 병 모두 마셔 본 뒤 기탄 없이 말해 주게. 우리 집 것은 아무래도 신맛이 지나친 것 같아. 어떤가, 그렇지 않은가?" "어쨌든 자네 덕분에 기분이 풀렸네. 알렉산드르, 은혜는 잊지 않겠어. 나는 되살아난 기분이야." "신맛은 어떻지?" "글쎄, 난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그렇지만 어쨌든 자네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놀라운 인물일세!" 그의 창백하고 흥분된, 착하디착해 보이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사모이렌코는 문득 저런 인간은 없애 버려야만 한다고 말한 폰 코렌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라에프스키가 누구나 모욕하거나 없애 버릴 수 있는, 연약하고 의지할 데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 저 쪽으로 가면 어머니와 화해를 하게. 지금처럼 나가면 못 써." 하고 그는 말했다. "음, 꼭 그러겠어." 두 사람은 얼마 동안 잠자코 있었다. 한 병은 비우고 나자, 사모이렌코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폰 코렌과도 화해를 하지 않으면 안 돼. 자네들 두 사람은 참으로 훌륭하고 똑똑한 사람들인데, 마치 늑대처럼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거든." "그래. 그는 틀림없이 훌륭하고 똑똑해." 지금은 누구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추어주거나 용서하고 싶은 기분이 된 라에프스키가 맞장구를 쳤다. "멋진 사내야. 그러나 그와 친해진다는 것은 나로서는 못 할 일이야. 아무래도 그렇게 안 돼! 성격이 너무나 다르거든. 나는 게으르고, 마음 약하고, 남의 말에 귀가 솔깃해지는 성격의 사람이니까, 어쩌면 그에게 손을 내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어. 그렇지만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야. 나를 아주 경멸하는 듯한 얼굴로 말이야." 라에프스키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 방 한 구석에서 다른 구석으로 왔다 갔다 하였다. 그러더니 방 한복판에 멈추어 서서 말을 이었다. "나는 폰 코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거든. 그는 강인하고 격렬한 전제 군주적인 성격의 사내야. 자네도 들었겠지만, 그는 노상 탐험 얘기만 하고 있는데, 그건 결코 그저 지껄이는 게 아니야. 그에게는 사막이든가 달밤 같은 게 꼭 필요한 거야. 주위에는 천막 속이건 노천이건 가리지 않고, 무리한 행군 때문에 굶주리거나 병에 걸려 기진 맥진하게 지친 카자흐든가 안내인, 인부, 의사나 사제가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그 혼자만은 자지 않고, 스탠리처럼 접는 의자에 걸터앉아서, 자기는 사막의 왕자이고, 이들의 상전이라는 생각에 젖어 있는 걸세. 그는 어떤 목표를 향하여 곁눈질도 하지 않고 나아가는 거지. 부하들이 잇달아 신음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로지 앞으로만 나아가지. 그리고 마침내는 그 자신도 쓰러지는데, 그래도 그가 전제 군주이고 사막의 왕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왜냐 하면, 3, 40마일 앞에서도 대상들의 눈에 띄는 무덤 표지의 십자가가 사막에 군림하고 있기 때문일세. 나는 그 사내가 군인이 안 된 것을 참으로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어. 군인이었다면 틀림없이 우수하고 천재적인 사령관이 되었을 걸세. 그는 자기의 기병대를 강에 빠뜨려 그 시체로 다리를 놓는 것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낼 인물인데, 싸움터에서 일체의 축성술이나 전술 이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호담성일세. 정말이지 나는 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네! 도대체 그는 어째서 이런 데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지 아나? 여기에 그가 무슨 볼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바다의 동물을 연구하고 있겠지." "천만에, 그게 아닐세. 자넨 아주 잘못 알고 있어!" 라에프스키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나는 같은 기선에 탔던 어떤 학자한테서 들었네만 흑해에는 동물이 거의 없다는 걸세. 그것은 이 바닷속엔 황화수소가 너무 많기 때문에 유기체의 서식이 불가능하다는 거지. 그래서 제대로 된 동물학자는 모두 나폴리라든가 빌프랑시의 생물학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어. 그런데 폰 코렌은 자주 독립형의 완고한 사내야. 그가 흑해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여기에는 아무도 일을 하러 오지 않기 때문이지. 그가 대학과 인연을 끊고, 학자나 동료를 우습게 여기는 것도 그가 무엇보다도 먼저 전제 군주이고, 동물학자는 둘째 문제이기 때문일세. 어쨌든 두고 보게나. 그 사내는 불원간 거물이 될 걸세. 현재 이미 그 사냐는 탐험 여행에서 돌아오면, 대학에서 음모가나 무능 교수를 내쫓아 학자들을 떨게 해 주려고 열심히 공상하고 있어. 전제가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싸움터나 학계나 다름이 없으니까 말일세. 그가 이미 두 해 여름이나 이 고약한 냄새가 나는 시골 도시에서 살고 있는 것도, 큰 도시에서 이류 가는 인물이 되기보다는 지방에서 일류가 되는 게 낫기 때문일세. 그는 여기서는 왕자거든, 제일인자지. 주민 모두를 꽉 눌러 싫든 좋든 자기의 권위에 따르게 하는 거지. 모든 사람을 엄격하게 감독하고, 남의 일에 일일이 간섭을 하는 거야. 그에게는 모든 것이 필요하고,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고 있어. 그런데 나만은 그의 세력 범위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으므로 그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나를 미워하는 걸세. 그 사내는 자네를 보고 나를 없애 버려야 한다느니, 공공사업에 사역을 시켜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지 않던가?" "그런 말을 했어." 사모이렌코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라에프스키도 웃고 포도주 잔을 비웠다. "그 사내는 이상마저 전제적이야." 그는 웃고 나서 복숭아를 먹으며 말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공공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경우에는 자기의 동포, 나라든가 너라든가 어쨌든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을 염두에 두고 있어. 그런데 폰 코렌에게는, 인간은 개나 마찬가지로 시시한 것, 생애의 목적으로 삼기에는 너무 작은 존재라네. 그가 일을 하거나 목숨을 걸고 탐험으로 나서거나 하는 것도 동포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고, 인류라든가 그런 추상 개념 때문일세. 그는 인종 개량을 위해서 뛰어다니고 있는데, 그 점에서 우리들은 그를 위해서는 단순한 노예, 대포의 밥, 또는 하찮은 짐승에 지나지 않아. 그는, 어떤 사람은 없애 버리거나 징역을 보내거나 하고, 어떤 사람은 규율로 묶어 놓고, 아라크체예프 식으로 북 소리로 일어나고 자도록 만들고 싶은 걸세. 환관을 붙여 두고 우리들의 순결과 보수적인 도덕의 테두리 밖으로 빠져나가는 사람은 모조리 총살하고 싶은 거지.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이 인종 개량을 위해서인 걸세. 그렇다면 인종 개량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환상이야, 신기루지... 예로부터 전제 군주는 언제나 환상가였으니까. 나는 말일세, 여보게, 그에 관한 것이라면 하나에서 열까지 알고 있어. 나는 그를 존중해. 그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하진 않아.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그와 같은 인물이거든. 만일 이 세계가 우리 같은 사람에게만 맡겨진다면, 우리들은 모든 선량함이나 선의에도 불구하고 파리가 저기 있는 그림에 만들어 놓은 것과 같은 얼룩을 이 세계에 만들어 놓는 것이 될 걸세. 그럴 것이 틀림없어." 라에프스키는 사모이렌코와 나란히 앉아, 열의를 띠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시시껄렁하고 하찮은 타락한 인간이야! 내가 숨쉬고 있는 이 공기, 이 술, 사랑, 요컨대 생활 자체를 나는 이제까지 허위와 안일과 무기력에 의해서 꾸려 왔어. 이제까지 나는 남이나 나 자신도 속이고, 그리고 그 때문에 괴로워해 왔는데, 그와 같은 나의 괴로움은 실은 값싸고 흔해 빠진 것에 지나지 않았어. 폰 코렌의 미움 앞에서, 나는 얌전히 머리를 숙이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이따금 스스로를 미워하고, 경멸하고 싶을 정도이니까." 라에프스키는 또다시 감정이 격해져서, 방 안 이 구석 저 구석을 한 차례 왔다 갔다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의 결점을 확실히 인정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게 기뻐. 그런 능력은 내가 갱생하여 다른 인간이 되기 위해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아아, 내가 얼마나 열렬히, 얼마나 안타깝게 자신의 갱생을 갈망하고 있는지, 자네가 그걸 알아 주었으면 해. 맹세코 말하네만, 나는 꼭 참된 인간이 되어 보이겠어! 틀림없이! 포도주 기운이 돌아서 그런지, 그렇잖으면 사실이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오늘 밤 자네하고 함께 지낸 시간처럼 즐겁고 홀가분한 때를 보낸 일은 그야말로 별로 없었던 것 같네." "그건 그렇고, 그만 잠잘 시간일세." 하고 사모이렌코가 말했다. "알았어... 미안해. 곧 자겠어." 라에프스키는 자기 모자를 찾으려고, 세간이 놓여 있는 근처와 창가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고맙네...."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시름없이 말했다. "고마워.... 사랑과 다정한 말은 적선보다 나은 걸세. 덕분에 되살아났네." 모자를 찾아내자, 그는 문득 멈추어 서서, 미안한 듯이 사모이렌코를 바라보았다. "알렉산드르!" 하고 그는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지?" "자네, 미안하네만 오늘 밤 여기서 재워 주게!" "아, 좋아.... 염려할 건 없어." 라에프스키는 소파에 누웠으나, 그 뒤에도 오랫동안 군의관을 상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10. 들놀이가 있고 나서 사흘쯤 지난 어느 날, 난데없이 마리아가 나데지다한테 불쑥 나타나더니, 인사도 하지 않고 모자도 벗지 않은 채,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 자기 가슴에 대고 몹시 흥분되어 이와 같이 말했다. "부인, 저는 그만 정신을 못 차리겠고 숨도 못 쉴 것만 같아요. 우리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그 친절하신 의사 선생님이 어제 우리 주인 양반 니코짐에게 가르쳐 주셨는데, 저, 바깥 양반께서 돌아가셨다더군요. 어서 말씀 좀 해 보세요, 부인... 어서요. 그 얘기 정말인가요?" "네, 정말이에요. 그인 죽었어요." 나데지다 표도로브나가 대답했다. "원 세상에 그런 변이 어디 있어요, 부인! 그렇지만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나중에는 반드시 좋은 일도 있는 법이에요. 바깥 양반께서는 나무랄 데 없을 만큼 훌륭하시고, 성인과 같은 분이셨겠죠. 그런 분은 이 세상에서보다 하늘나라에서 더 필요한가봐요." 마리아의 얼굴은, 마치 살갗 밑에서 수많은 작은 바늘이 돋아나기라도 한 것같이 온갖 선과 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바로 그 아아먼드 웃음을 짓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말했다. "이제는 부인도 자유로운 몸이 되셨군요. 앞으로는 가슴을 탁 펴고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실 수가 있게 됐어요. 이제부터는 하느님이나 세상 사람들도 부인과 라에프스키 씨 사이를 축복해 주실 거예요. 참으로 멋진 일이에요. 저는 어찌나 기쁜지 몸이 떨려서 말도 제대로 못 할 지경이라니까요. 그런데 부인, 제가 중매쟁이 노릇을 하겠어요.... 저나 니코짐도 두 분을 무척 좋아했거든요. 그러니 두 분의 떳떳한 정식 결합을 우리들이 축복하게 해 주세요. 그건 그렇고, 식은 언제쯤 올리실 셈이신가요?" "저는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나데지다는 손을 빼면서 말했다. "어마, 부인, 그럴 리가 있겠어요. 이미 생각해 두셨을 게 틀림없어요." "하지만 정말 생각해 본 적이 없는걸요." 나데지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 식을 꼭 올려야만 하는 거죠? 그럴 필요는 조금도 없다고 봐요. 우리들은 앞으로도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살아갈 생각이에요." "어머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마리아는 놀라운 듯이 말했다. "정말이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거죠!" "식을 올렸다고 해서 더 잘 될 건 하나도 없잖아요. 도리어 나빠진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죠. 두 사람 다 자기의 자유를 잃고 말거든요." "어머나, 부인! 무슨 말씀을!" 마리아는 뒷걸음을 치고 두 손의 손가락을 깍지 끼어 흔들면서 소리쳤다. "그런 당치도 않은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니에요! 정신 차리세요! 마음을 가라앉히시고요!" "하지만 어떻게 해서 마음을 가라앉히면 좋을지 모르겠군요. 저는 아직껏 생활이라는 것을 해 본 일이 없어요. 그런데 마음을 가라앉히라고 하시다니!" 나데지다는 자기가 정말로 아직까지 생활이라는 것을 해 본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기숙사 생활의 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랑하지도 않는 사내에게 시집을 갔고, 그 뒤 라에프스키와 같이 살게 되고부터는 이처럼 권태스럽고 한적한 바닷가 도시에서, 무엇인가 좀 좋은 일이 일어날 법도 하다고 여기면서 이제까지 둘이서 지내온 것이다. 이것을 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식을 올리는 게 좋을지 모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키릴린과 아치미아노프 생각을 하자, 얼굴을 붉히고 이렇게 말했다. "역시 식을 올릴 수 없어요. 비록 라에프스키가 무릎을 꿇고 애원하더라도 저는 거절할 거예요." 마리아는 1분쯤 아무 말 없이 소파에 앉은 채, 슬프기도 하고 진지하기도 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한 곳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일어나더니 쌀쌀하게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부인. 수선을 피워서 미안합니다. 참으로 말씀드리기 거북합니다만, 만나 뵈올 수 있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라에프스키 씨를 깊이 존경하고 있습니다만, 두 분께서 저희 집에 오시더라도 다시는 만나 뵐 수가 없겠어요." 짐짓 점잔을 빼고 이렇게 말하였으나, 말을 마치고 나자 반대로 자신이 자기의 점잔 뺀 데 압도되어 또다시 얼굴이 떨리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아아먼드적 웃음을 띠며, 그녀는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나데지다 쪽으로 두 손을 내밀고, 애원하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부인, 하다 못해 1분이라도 좋으니 부인의 어머니나 언니가 되게 해 주세요! 저는 어머니가 된 셈으로 무엇이건 탁 터놓고 말씀드리겠어요." 나데지다는 마치 친어머니가 되살아나서 눈앞에 서 있는 것같은 따뜻함과 기쁨과 자기에 대한 배려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녀는 느닷없이 마리아를 껴안고, 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두 사람을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얼마 동안 흐느껴 울었다. 서로 얼굴도 보지 않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의 어머니예요."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흉허물없이 마음먹은 대로 솔직히 말씀드리겠어요." "어서 말씀해 주세요!" "나를 믿어 줘요. 이 고장의 여자들 중에서 당신과 교제를 한 것은 나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처음 뵌 날부터 벌써 대단한 분이 들어왔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당신을 스스럼없이 대할 수가 없었어요. 아주 좋아하는, 그 착하디착한 라에프스키 씨가 마치 친자식처럼 여겨지고 가엾어서 못 견딜 지경이었어요. 아직 젊은 몸으로 타관에 와 계시다, 세상 물정도 잘 모르신다, 몸도 약하시다, 어머니도 안 계시다, 그런 생각을 하자 저는 가슴이 아팠던 것이지요. 우리 주인은 그분과 어울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저는 열심히 부탁을 드려서 마침내 허락을 받았던 거예요. 그리하여 라에프스키 씨가 저희 집에 오시게 되었습니다만, 물론 당신도 함께였었죠. 그분이 기분이 상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기분이 상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제게는 딸도 있고 아들도 있어요. ...아시겠죠, 아이들의 얼룩지기 쉬운 깨끗한 영혼, '이 어린이 하나라도 그릇된 길로 들게 하는 자는...'인 거예요. 정말이지 저는 당신을 오시도록 하기는 했지만 아이들이 걱정이 되어서 잠시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었답니다. 당신도 어머니가 되면 제 걱정을 이해하시게 될 거예요. 그리고 제가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드리는 건 뭣하지만, 어엿한 부인처럼 대접한다고 해서 모두들 이상하게 여기고, 빈정거리는 거예요. 네, 험담을 늘어놓기도 하고, 오해를 하는 분도 물론 있었어요. 그러나 당신도 불행하고, 비참하고, 분별없는 분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불쌍해서 못 견딜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무엇 때문이죠? 네?" 하고 나데지다는 온몸을 떨면서 물었다. "제가 어느 분한테라도 몹쓸 짓을 했나요?" "당신은 끔찍한 죄인이에요. 제단 앞에서 주인 양반에게 맹세한 것을 깼으니까요. 훌륭한 젊은 남자 분을 유혹하기도 하고요. 그분은 당신을 만나지만 않았다면, 틀림없이 어울리는 양가의 규수와 정식으로 결혼을 하시고, 지금쯤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생활을 하고 계실 거예요. 말하자면 당신은 그분의 청춘을 망친 거예요. 아니, 아무 말씀도 하지 마세요. 아무 말씀도 마시라니까요! 우리들이 죄를 짓는 것은 남자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저는 도무지 믿을 수 없어요. 나쁜 것은 언제나 여자예요. 남자는 가정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고, 마음으로써가 아니라 머리로써 살기 때문에 그처럼 무엇이든지 알 수는 없지만, 여자는 하나에서 열까지 알 수 있으니까요. 가정 일은 모두 여자 손에 달려 있는 거죠. 여자는 많은 것을 부여받고 있으므로, 그만큼 요구받는 것도 많은 거예요. 어때요, 안 그래요? 만일 여자가 이 점에서 남자보다 바보던가, 남자보다 약하고 하면, 하느님이 아이들의 교육을 여자에게 맡기실 리는 없거든요. 그리고 또 당신은 조심성이라고 하는 것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나쁜 길로 발을 들여 놓으셨던 거예요. 그런데 다른 여자였다면 세상에서 멀리 떠나 집에 틀어박혀서, 남의 눈에 띄는 것은, 교회에서 창백한 얼굴로 검은 상복을 입고 울고 있을 때뿐이 될 거예요. 그런 여자를 보면 누구나 진심으로 겸손해져서, '하느님이시여, 죄를 지은 천사가 여기에 다시 주님 곁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이라는 분은 조심해야 할 것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마치 죄를 자랑하듯이 우쭐거리며 지내고, 당치않은 일만 하고, 장난을 치거나 웃거나 하고 계셨죠. 저는 그런 당신을 보면 두려워서 몸이 떨렸어요. 당신이 우리 집에 오셨을 때만 해도, 우리 집에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지나 않을까 하고, 안절부절 못했다니까요. 아니, 아무 말씀도 마세요. 아무 말씀도 마시라니까요!" 나데지다가 무슨 말인가 하고 싶어하는 눈치를 보고, 마리아가 소리쳤다. "부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믿어 주세요. 저는 당신을 속인다거나 당신의 마음의 눈에서 조금이라도 진실을 감춘다거나 하는 일은 생각도 않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잘 들으시고.... 하느님은 큰 죄인에게 표지를 붙이십니다. 당신에게도 그게 붙어 있었어요.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당신의 옷은 언제나 너무 지나친 것이었으니까요!" 자기의 옷차림 취미에 관해서는 평소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던 나데지다는 이 말을 듣자 울음을 뚝 그치고, 이상하다는 듯이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랑곳없이, "그렇고 말고요, 그건 너무 지나친 것이었어요! 하고 말을 이었다. "옷차림에 대한 취미가 야한 것을 보면, 누구나 그 행실을 알 수 있는 법입니다. 모두들 당신을 보고는 웃던가 어깨를 으쓱거릴 거예요. 저는 정말이지 가슴이 아프고 아파서....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리는 건 뭣하지만, 당신에게는 정말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면이 없으신 것 같아요! 해수욕장에서 같이 있을 때마다 저는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어요. 윗도리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지만 스커어트와 시미즈의 경우는.... 정말이지 저는 그 생각만 해도 얼굴이 빨개져요! 라에프스키 씨만 하더라도 가엾게, 넥타이 하나 만족스럽게 매 줄 사람이 없지 않아요. 와이셔츠나 구두를 보더라도, 집에서 아무도 그분의 뒷바라지를 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시장하신 것 같더군요. 정말이지 집에서 사모바아르나 커피 시중을 드는 사람이 없으면, 누구든지 어쩔 수 없이 월급의 절반을 찻집에 뿌리게 돼요. 그리고 댁의 집안 꼴도 한심스럽고요! 이 고장의 어느 집이든지 파리 한 마리 꾀는 일이 없었는데, 당신 집은 어디나 파리가 들끓고 접시나 그릇 따위에는 파리가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는 게 아닙니까! 창문이나 테이블 위는 어떻지요? 자, 보세요. 어디나 먼지투성이이고 죽은 파리투성이, 컵투성이... 컵을 이토록 많이 어디다 다 쓰시는 거죠? 그리고 댁에서는 이 시간에도 설거지를 하지 않고 있더군요. 그리고 댁의 침실로 말할 것 같으면, 들어가기가 싫을 정도예요. 속옷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지 않나, 벽에는 여러 가지 고무 제품이 걸려 있지 않나, 무슨 그릇인지 뒹굴고 있지 않나.... 들어 봐요, 바깥양반에게는 무엇 하나도 보여서는 안 돼요. 아내라는 사람은 바깥양반 앞에서는 천사와 같이 깔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제 경우에는 매일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냉수로 세수를 하고, 주인 양반 니코짐에게 잠이 덜 깬 얼굴을 보이지 않도록 항상 주의하고 있답니다." "모두 시시한 일들이에요." 하고 나데지다는 크게 소리내어 흐느꼈다. "제가 행복하다면 모르지만요. 하지만 저는 이처럼 불행한 걸요!" 마리아는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앞길에도 끔찍한 불행이 기다리고 있어요. 적적한 노경, 질병,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의 대답.... 아아, 몸서리쳐져요, 끔찍해요! 지금이라면 운명이 스스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지만, 당신은 경박하게도 그것을 뿌리치려 하고 있어요. 결혼을 하세요.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하세요!" "네, 그래야만 할 거예요." 나데지다가 말했다. "하지만 할 수가 없어요!" "왜요?" "할 수 없어요! 아아, 그걸 이해해 주셨으면 좋으련만!" 나데지다는 무엇이나 다 털어놓고 싶었다. 키릴린의 일, 어젯저녁 선창가에서 젊은 미남인 아치미아노프와 마주치자, 3백 루우블리의 빚을 덜기 위해 예의 미치광이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 웃음이 터질 뻔했었다는 일, 밤이 이슥해서, 자기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여자다, 창녀다, 하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온 일,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또 그녀는 지금 마리아 앞에서 빚은 꼭 갚겠다고 맹세하고 싶었다. 그러나 북받치는 울음과 수치심 때문에 입이 열리지 않았다. "저는 이 고장을 떠나겠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라에프스키를 남겨 두고 혼자 떠나겠어요." "어디로요?" "러시아로요."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 살아가실 작정이시죠? 아무 것도 가지신 게 없으시잖아요." "번역을 하든가, 그렇잖으면... 그렇잖으면 자그마한 도서관이라도 열죠." "그건 꿈이에요. 자그마한 도서관이라 하더라도 돈이 들어요. 하지만 저는 이만 가 봐야겠군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잘 생각해 보도록 하세요. 그리고 내일은 명랑한 얼굴을 하고 저희 집에 놀러 오세요. 그러면 멋있을 거예요! 안녕! 자, 키스하게 해 줘요." 마리아는 나데지다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성호를 긋고, 조용히 걸어 나갔다. 이미 바깥은 어둠이 깔려 가고 있었고, 올리가가 부엌에서 불을 켰다. 나데지다는 아직 울음을 그치지 않고 침실로 가서 침대에 누웠다. 열이 몹시 났다. 누운 채 그녀는 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구겨 발치로 밀어 놓고, 담요를 덮고 몸을 웅크렸다. 무엇인가 마시고 싶었으나 아무도 가져다 주는 사람이 없었다. "갚고 말 테야!"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열에 들떠 있는 동안, 그녀는 자기가 앓고 있는 여자 곁에 앉아 있고, 그 여자가 어느 새 자기로 변하는 것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갚고 말 테야. 생각만 해도 한심한 일이야. 내가 돈 때문에 그런 짓을.... 여기를 떠나,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그 사람에게 부치겠어. 처음에 백... 그리고, 또, 백... 또, 백...." 밤이 이슥해서 라에프스키가 돌아왔다. "처음엔 백이에요...." 나데지다 표도로브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또 백...." "키니네라도 먹어." 그는 이렇게 말하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내일은 수요일이니까 배가 떠난다. 그러나 나는 안 떠나겠어. 나는 토요일까지는 여기 있지 않으면 안 돼.' 나데지다는 일어나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제가 지금 무엇이라고 헛소리를 하지 않았어요?" 하고 웃음을 짓고, 촛불이 눈부셔서 눈을 가늘게 뜨면서 그녀는 물었다. "응,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내일 아침 의사를 불러야겠군. 어서 자도록 해요." 그는 베개를 집어들고 문 쪽으로 갔다. 여기를 떠나, 나데지다를 혼자 내버려두겠다고 마음먹고부터, 그는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엾은 생각과 죄책감이 드는 것이었다. 그녀를 보자, 병에 걸렸거나 늙어 빠져서 죽여 버리기로 되어 있는 말을 볼 때와 같이 좀 창피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는 방문께에서 멈추어 서서,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들놀이 때는 화가 나서 그만 난폭한 말을 했소. 미안하오." 이렇게 말하고 그는 서재로 가서 누웠으나,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축제일이라고 해서 견장과 훈장을 단 완전한 예복 차림의 사모이렌코가 나데지다의 맥을 짚어 보고, 혀를 보고 침실에서 나왔을 때, 문간에 서 있던 라에프스키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래, 어떤가. 어때?" 얼굴에는 공포와 극도의 불안과 희망의 빛이 서려 있었다. "안심하게, 위험하진 않으니까." 사모이렌코가 말했다. "보통 열이야." "그게 아니야." 라에프스키는 초조한지 미간을 찌푸렸다. "돈은 됐나?" "미안해." 사모이렌코는 방문 쪽을 돌아다보고는, 당황하며 속삭였다. "정말 미안하게 됐어! 모두들 놀고 있는 돈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여기서 5루우블리, 저기서 10루우블리 하는 식으로 긁어 모은 돈뿐이야. 그런데 모두 110루우블리밖에 되지 않아. 오늘도 여기저기 알아볼 작정일세. 조금만 더 참아 주게." "그렇지만 아무리 늦어지더라도 토요일까지일세!" 라에프스키는 초조감에 몸을 떨며 속삭였다. "제발 부탁이네, 토요일까지는 어떻게든 해 줘! 만일 토요일에 떠나지 못한다면, 나는 한 푼도 필요 없단 말일세! 그건 그렇고 모를 일이군, 의사에게 돈이 없다니!" "그런 말을 하면 곤란해." 사모이렌코는 빠른 말로 속삭였는데, 너무 힘을 주어 말했기 때문에 목에서 휴우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꾸러 온단 말이야. 꿔 준 돈이 이미 7천에 이르고 있어. 그런 주제에 나도 빚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겠어. 이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어쨌든 토요일까지는 융통해 주겠지? 그 때까진 되겠지?" "어떻게 해 보겠네." "부탁해. 금요일 오전 안으로 내 손으로 들어오게 해 주게나." 사모이렌코는 의자에 앉아, 키니네 용액, 취화칼리, 대황액, 겐티아나팅크, 증류수를 합제하고, 여기에 쓴맛을 없애는 등피 시럽을 넣는다는 처방을 써 주고 돌아갔다. 11. "마치 나를 체포하러 온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군요." 정장을 하고, 방으로 들어온 사모이렌코를 보고 폰 코렌은 이렇게 말했다. "뭘요, 지나는 길에 잠깐 들러 동물학의 경의를 나타내려고 한 것뿐인걸요." 사모이렌코는, 동물학자가 집에 있는 널빤지를 주워 모아서 제 손으로 만든 큰 테이블을 향해 앉으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신부님!" 하고 창가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베끼고 있는 보좌 신부에게도 인사를 하고, "나는 1분 동안만 있을 생각이에요. 그런 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서 점심 준비를 해야겠어. 시간이 거의 다 됐거든요. 방해가 되지 않습니까?" "아니, 전혀." 하고 동물학자는 잔 글씨로 써 놓은 서류를 테이블 위에 펼쳐 놓으며 말했다. "우리 둘이 베끼고 있는 중이오." "그래요... 아니, 이건...." 사모이렌코는 탄식을 하고, 바싹 마른 죽은 지네가 얹혀 있는 먼지투성이 책을 조심스럽게 테이블에서 옆으로 밀어 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단한 놈이군! 어때요, 작은 초록빛 장수풍뎅이인가 뭔가가 볼일이 있어서 바깥을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이런 징그러운 놈을 만났다고 하면 틀림없이 간이 콩알만해지겠죠!" "아마, 그럴 테죠." "이놈은 적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서 독이라도 가지고 있나요?" "네, 제 몸을 지키기 위해서도 그렇고, 스스로 공격을 하기 위해서도 가지고 있어요." "허, 그렇군요, 그래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말씀으로는 모든 자연 현상이란 목적에만 합당하면 설명이 된다 이거지요." 하고 사모이렌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게 한 가지 있어요. 남들보다 뛰어난 수재인 당신한테 배워야겠어요. 아시겠어요, 이런 동물이 있지 않아요. 크기는 기껏해서 쥐만하고, 겉보기로는 좀 예뻐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아시겠어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비열하고 부도덕해요. 가령 그 동물이 숲 속을 돌아다니고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새를 발견합니다. 잡아서 먹어 치웁니다. 좀더 앞으로 가면 이번에도 풀 속에 알이 들어 있는 작은 둥우리를 발견합니다. 배가 잔뜩 부르기 때문에 더 먹고 싶지도 않지만, 그래도 알을 하나 깨물어 버리고는 나머지는 뒷발로 하나도 남기지 않고 둥우리 밖으로 던져 버립니다. 그리고 개구리를 만납니다. 이놈을 어디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자, 하고 마음먹게 됩니다. 개구리를 곯리다가 죽인 뒤, 입맛을 다시면서 걸어가자, 저 쪽에서 장수풍뎅이가 옵니다. 그 장수풍뎅이도 발로 짓밟아 죽입니다.... 이와 같이 길에서 만난 것을 닥치는 대로 모조리 때려부수고,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른 동물의 구멍에 얼굴을 들이밉니다. 할 일 없이 개미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달팽이를 깨물어 찌부러뜨립니다.... 쥐를 만나면, 쥐와도 한바탕 싸웁니다. 작은 뱀이든가 생쥐를 발견하면, 죄어 죽이지 않고서는 못 배깁니다. 하고많은 날 그런 짓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은, 도대체 이런 동물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런 것이 생겨난 겁니까?" "당신이 어떤 동물을 가리키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고 폰 코렌이 말했다. "아마 식충 동물의 일종인 듯싶군요. 그렇지만 놀랄 것은 없어요. 새가 그놈에게 잡힌 것은 조심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놈이 둥우리를 못 쓰게 만들어 놓은 것은 새가 솜씨가 없어 둥우리 만드는 법이 서투르고, 그럴 듯하게 카무플라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개구리는 피부 빛깔에 아마 결함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야 발견될 리가 없으니까요. 모든 것이 다 그렇지요. 당신이 말한 그 동물에게 당하는 것은 약하고, 솜씨가 없고, 조심성이 없는 놈들뿐--말하자면, 요컨대 자연이 자손에게 전할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 결함을 가진 놈들뿐입니다. 솜씨가 있고, 조심성이 있고, 강하고, 충분히 발달된 놈들만 살아 남는 거죠. 그러므로 당신이 말한 그 동물은, 자신은 그런 줄도 모르고 종의 완성이라는 위대한 이상에 봉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군요, 응, 그래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선생." 하고 사모이렌코도 친근한 듯한 투로 말했다. "백 루우블리쯤 꾸어 줬으면 좋겠는데요!" "좋아요. 식충 동물 중에는 아주 재미있는 놈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두더지가 그겁니다. 이놈은 해충을 잡아먹으니까 유익하다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실제로 그런 얘기가 있을 정도죠. 어떤 도이칠란트인이 두더지 가죽으로 만든 털가죽 외투를 빌헬름 1세에게 바쳤는데, 황제는 유익한 동물을 이처럼 많이 죽인 것은 괘씸한 일이라고 해서 그 사람을 견책하도록 명령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두더지는 그 잔혹성에 있어서 당신이 말하는 그 동물에 조금도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주 해로운 동물입니다. 어쨌든 목초지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니까요." 폰 코렌은 문갑을 열쇠로 열고 안에서 백 루우블리짜리 한 장을 꺼냈다. "두더지는 가슴팍이 박쥐와 같은 정도로 튼튼해요." 하고 그는 문갑에 열쇠를 채우며 말을 이었다. "골격이나 근육도 몹시 발달해 있고, 입 속의 구조도 이상할 만큼 튼튼하게 되어 있어요. 가령 두더지가 코끼리만큼 크다면 비교가 안 될 만큼 크나큰 파괴력을 가진 무적의 동물이 되었을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흙 속에서 두 마리의 두더지가 만났을 때예요. 그 두 마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주위의 흙을 파서 빈 터를 만드는 겁니다. 마음껏 겨루어 보기 위해서 그런 빈 터가 필요한 거죠. 그리고 그것이 다 되었다 싶으면, 두 마리는 처참한 싸움을 시작해요. 그리고 그 싸움은 약한 놈이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는 겁니다. 자, 백 루우블리 받아요." 폰 코렌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러나 조건이 있어요. 라에프스키 때문에 꾸는 것이면 곤란해요." "라에프스키면 어떻소?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소?" 사모이렌코는 흥분해서 말했다. "라에프스키 때문이라면 나는 꾸어 줄 수 없어요. 당신이 돈을 꾸어 주는 걸 좋아하는 걸 나도 알고 있죠. 당신은 강도인 케림일지라도, 부탁을 하면 꾸어 줄 겁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면에서 당신을 도와 줄 순 없단 말입니다." "맞았어! 나는 라에프스키를 위해서 부탁하고 있는 거요!" 사모이렌코는 일어서서 오른손을 빙빙 휘두르며 말했다. "그렇고말고! 라에프스키 때문이라고! 그러나 내가 돈을 이렇게 쓰건 말건 그걸 내게 가르쳐 줄 권리를 그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거요. 돈을 꾸어 줄 수 없다는 거요? 그렇죠?" 신부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흥분하지 말고 침착하게 생각해 봐요." 동물학자가 말했다. "라에프스키 씨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은, 내 생각으로는 잡초에 물을 주거나 메뚜기에게 먹이를 주는 것과 같이 바보짓이란 말입니다." "내가 볼 때에는, 우리는 동포를 도와 줄 의무가 있어요!" 사모이렌코가 외쳤다. "그렇다면 저 담 밑에서 굶주린 채 자고 있는 터어키인이나 도와 주는 게 어때요! 그 치는 노동자니까, 당신이 말한 라에프스키보다는 필요하고 유익한 사람이에요. 이 백 루우블리를 그 치에게나 줘요! 그렇지 않으면 내 탐험 여행에 백 루우블리 회사하든가!" "당신은 꾸어 주겠다는 거요, 안 꾸어 주겠다는 거요? 어느 쪽이요?" "숨기지 말고 말해 봐요. 그놈은 뭣 때문에 그런 돈이 필요한 거요?" "그건 비밀도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 사람은 토요일에 페테르스부르크로 떠나지 않으면 안 돼요." "허어!" 폰 코렌은 길게 빼는 듯이 말했다. "그렇군... 좋아요, 알았어. 그러면 여자도 같이 떠나는 거요? 그건 어떻소?" "그 여자는 당분간 여기에 남아 있어요. 그가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일을 다 처리한 뒤에 이리로 돈을 부칠 겁니다. 그러면 그 여자도 떠난다는 계획이오." "그럴 듯해!" 동물학자는 높은 소리로 짧게 웃었다. "그럴 듯해! 희한한 생각이야." 그는 사모이렌코 곁으로 뚜벅뚜벅 걸어와서 상대방의 눈을 정면에서 빤히 쏘아보며 이렇게 물었다. "알겠어요. 정직하게 대답해 줘요. 놈은 계집에게 싫증이 난 거죠? 그렇죠? 어때요, 싫증이 났죠? 그렇죠?" "그렇소." 사모이렌코는 마지못해 대답하고 진땀을 뺐다. "듣기에도 지저분한 얘기가 아닙니까!" 폰 코렌이 말했다. 지저분하다고 여기는 기색이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알렉산드르, 이건 당신이 그놈과 한통속이거나, 그렇잖으면 실례지만 당신이 얼이 빠졌거나 둘 중의 하나요. 도대체 당신은 그놈이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당신을 어린아이같이 속이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단 말이오? 그놈이 여자와 손을 끊고 여기에 내버려 둔 채 달아나 버릴 작정이라는 것이, 유리 속을 들여다보는 것같이 훤하지 않소. 여자는 당신 집으로 굴러 들어오겠지. 당신은 제 돈을 들여서 여자를 페테르스부르크로 보내야 할거요. 그것도 유리 속을 들여다보는 것같이 훤해. 아니, 당신은 이렇게 단순한 일까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 잘난 친구의 몇 가지 장점에 눈이 어두워졌단 말이오?" 폰 코렌은 정말 딱하다는 듯이 사모이렌코를 보면서 말했다. 베끼는 일에 열중하고 있던 신부는 손을 멈추고 두 사람 쪽을 힐끗 돌아다보더니, 다시 베끼는 일을 계속했다. "그건 다만 가정에 지나지 않아요." 사모이렌코는 앉으면서 말했다. "가정이라구? 그렇다면 놈은 어째서 계집을 데리고 가지 않고 혼자 떠나는 거요. 계집을 먼저 보내고 자기는 나중에 떠나면 어째서 안 된다는 거요. 그놈에게 물어 봐요.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구!" 사모이렌코는 저도 모르게 마음 속에 떠오른 친구에 대한 의혹과 미심쩍은 생각에 압도되어, 갑자기 맥이 빠지고 목소리도 작아졌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어요!" 그는 라에프스키가 자기 집에서 자고 간 며칠 전날 밤의 일을 생각하면서 말했다. "그처럼 괴로워하고 있었는걸!"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도둑이나 방화범도 괴로워해요!" "가령 당신의 말이 옳다 하더라도...." 하고 사모이렌코는 망설이는 듯이 말했다. "가령 그렇다고 가정하더라고... 어쨌든 그 사람은 아직 젊어요. 타관에 와 있는... 대학 출신자요. 우리도 대학을 나왔어요. 우리말고는 그 사람에게 힘이 되어 줄 사람이 여기엔 없어요." "일찌기 당신과 그놈이 각각 다른 시기에 대학에 적을 두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이제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는 그 이유만으로 놈이 파렴치한 짓을 하는 걸 원조하겠다는 겁니까! 미친 소리 작작 해요!" "잠깐만! 어디 좀 냉정히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하면 좋지 않을까...." 하고 사모이렌코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계속 생각에 잠겨 말했다. "아시겠어요, 이렇게 하자는 거예요. 돈을 꾸어 준다. 그러나 1주일 만에 나데지다에게 여비를 부쳐 준다고 하는 것을 그 사람에게 하늘을 두고 엄숙하게 맹세하게 하는 거예요." "그놈은 물론 맹세도 할 것이고, 눈물 또한 흘리겠지요. 그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런 마음이 내킬 겁니다. 그러나 그 따위 맹세 같은 것에 얼마만한 가치가 있다는 겁니까? 그놈이 맹세를 지킬 기색은 우선 없다고 봐야 해요. 그리고 1, 2년 뒤에 놈이 새 계집과 팔이라도 끼고 네프스키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을 당신이 마주쳤다고 해요. 그러면 놈은, 나는 문명 때문에 불구자가 된 사람이다, 루우진의 재판이다, 하는 따위 변명으로 얼렁뚱땅 넘길 것이 뻔하죠. 당신에게 해로운 말은 안 해요. 그놈과 손을 끊어요. 수렁에서 빠져 나와요. 어째서 두 손으로 진흙탕 속을 휘젓고 있는 겁니까?" 사모이렌코는 잠깐 생각해 보다가, 잘라 말했다. "나는 어쨌든 그 친구에게 돈을 꾸어 줄 생각이에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좋아요. 단순히 가정 때문에 남의 부탁을 거절하는 그런 짓을 나로서는 할 수 없어요." "좋아요. 그놈과 키스라도 하구료." "그런 내게 백 루우블리 꾸어 줘요." 사모이렌코는 눈치를 보며 말했다. "못 꿔 주겠어요." 침묵이 흘렀다. 사모이렌코는 맥에 탁 풀리고, 창피스럽고, 아첨하는 표정을 지었다. 견장과 훈장을 달고 있는 이 체통 큰 사나이가 그와 같이 가엾어 보이고, 어린아이같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얼굴을 짓는 것은,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에게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이 곳 주교님은 마차가 아니라 말을 타시고 교구를 돌아다니세요." 신부가 펜을 놓으며 말했다. "말을 타고 계신 모습은 뭐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감동적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에서 성서적인 위대성이 넘쳐 흐르고 있죠." "좋은 분이오?" 화제가 바뀐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폰 코렌이 물었다. "그야 물론이죠. 좋은 분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주교의 자리에 오를 수가 있겠어요." "주교 가운데는 매우 훌륭하고 재능 있는 분이 있어요." 폰 코렌이 말했다. "다만 스스로 국사를 자처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유감스런 일이지만, 다른 민족의 러시아화에 열성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학문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는 사람도 있죠. 이런 것들은 그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니에요. 교구 감독국에 더욱 자구 얼굴을 내미는 편이 좋겠어요." "속세 사람이 주교님을 이렇다 저렇다 말한 순 없어요." "어째서인가요, 신부님. 주교라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아닙니까?" "같다고도 할 수 있고 같지 않다고도 할 수 있어요." 신부는 못마땅해하는 얼굴이 되어 펜을 들었다. "만일 당신이 주교님과 같다고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서 스스로 주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주교가 아니라는 것은 곧 주교님과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죠." "신부님, 당치도 않은 이론을 집어치워요." 사모이렌코가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것 봐요, 지금 생각이 떠올랐는데...." 하고 이번에는 코렌을 향해 말했다. "그 백 루우블리를 꾸어 주지 않아도 좋아요. 당신은 앞으로 겨울까지 석 달 동안 우리 집에 식사를 하러 올 게 아니오. 그러니 석 달 동안의 식비를 선불해 주지 않겠소?" "못 하겠어요." 사모이렌코는 눈을 깜박이며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고 지네가 얹혀 있는 책을 무심코 끌어당겨서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들었다. 폰 코렌은 그가 딱하게 여겨졌다. "아무래도 그러고 싶다면, 죽을 때까지 그런 신사들과 어울리는 게 좋겠지!" 동물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정말 화가 난다는 듯이 무슨 서류인가를 방 한쪽 구석으로 차 던졌다. "그만큼 말해도 모른단 말이오? 그런 태도는 친절도 아니고 호의도 아니에요. 비겁한 일이고, 방종한 일이고, 세상에 해독을 끼치는 일이지! 이성이 명하는 행위를 당신네들의 무기력하고 쓸모 없는 심장이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중학 시절에 장티푸스를 앓았을 때, 숙모가 동정해서 내게 식초에 담근 버섯을 지겹도록 먹여 준 일이 있어요. 그 덕분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 당신이나 그 숙모도 알아 주었으면 싶은 것은, 인간에 대한 애정은 심장이던가 위장이던가 허리던가 그런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여기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고 폰 코렌은 이마를 탁 쳤다. "가져가요!" 하고 그는 말하면서, 백 루우블리짜리 지폐를 내던졌다. "너무 화낼 건 없어요, 콜랴." 사모이렌코는 그 지폐를 집어 넣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 기분은 잘 알아요. 하지만 내 처지도 생각해 줘요." "당신은 늙어 빠진 할멈이야, 틀림없어!" 신부는 웃었다. "알겠소, 알렉산드르, 이것이 마지막 부탁이오." 폰 코렌은 열을 띠며 말을 이었다. "그 쓸모 없는 놈에게 돈을 줄 때, 계집과 같이 떠나던가, 그렇잖으면 계집을 먼저 떠나게 하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조건을 붙여요. 그래서 싫다고 하면, 돈을 꾸어 주지 말도록 해요. 그놈에게 사정을 봐 줄 게 없어. 분명히 그렇게 말해요. 만일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나는 맹세해도 좋아. 그놈의 직장에 달려가, 놈을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당신과는 절교야. 그걸 잊지 말아요!" "좋아요. 부인과 같이 떠나던가 부인을 먼저 떠나게 하는 게 그 사람에게도 좋은 일일 테니까." 하고 사모이렌코가 말했다. "그 사람은 오히려 기뻐할걸. 그럼 또 만납시다." 그는 상냥하게 인사를 하고 나갔으나, 방문을 닫기 전에 폰 코렌 쪽을 돌아다보며, 무서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알겠소, 당신은 도이칠란트인 때문에 버렸어! 그렇고말고! 도이칠란트인 때문이야!" 12. 그 다음 날 목요일에, 마리아는 아들 코스챠의 생일 잔치를 차렸다. 초대된 사람들은 낮에는 피로시키를, 그리고 저녁에는 코코아를 대접받았다. 밤이 되어 라에프스키와 나데지다가 모습을 나타내자, 전부터 객실에 앉아서 코코아를 마시고 있던 동물학자가 사모이렌코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저 치에게 그 얘길 했소?" "아니, 아직 안 했어요." "이것 봐요, 사정 봐 줄 것 없어요. 그건 그렇다 치고, 저 친구들의 뻔뻔스러운 태도에는 질렸어. 이 집안 사람들이 저 치들의 동거 생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 철면피하게도 나타나는군." "남의 편견을 일일이 신경 쓰다간 아무데도 못 가요." 하고 사모이렌코가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불순한 남녀 관계나 나쁜 행실을 좋지 않게 보는 것을 당신은 편견이라고 하는 거요?" "물론이죠, 편견이고 까닭 없는 증오입니다. 군인들은 바람둥이 여자를 보면 웃던가 휘파람을 불던가 하는데, 시험삼아 그들에게 물어 봐요, 그들 자신은 도대체 어떤가고." "아니, 그 휘파람은 무의미한 게 아니에요. 처녀가 남몰래 낳은 아기를 목을 졸라 죽이고 쇠고랑을 차거나, 안나 카레니나가 철도 자살을 하거나, 시골에서 간통을 저지를 자의 집 문에 타르를 칠하거나, 웬일인지는 모르지만 당신에게나 내게도 카아차의 순결이 호감이 가고, 누구든지 순결한 사람 따위는 존재치 않는 줄 알면서 그것에 대한 막연한 요구를 마음속에 느끼거나--도대체 이런 것들이 편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야말로 자연 도태를 벗어나서 살아 남은 단 하나의 것이 아닙니까. 이성 관계를 조정하는 이 신비한 힘이 만일 없었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라에프스키 같은 치들이 때를 만난 듯이 설쳐서, 인류는 2년만에 퇴화하고 말 것입니다." 라에프스키가 객실로 들어왔다. 그는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폰 코렌은 악수를 하면서 아첨하는 듯한 웃음을 띠었다. 그러고 나서 적당한 틈을 타서 사모이렌코에게 말했다. "알렉산드르, 미안하네만 자네에게 잠깐 할 얘기가 있네." 사모이렌코는 일어서서 그의 허리에 팔을 감고, 니코짐의 서재로 들어갔다. "내일이 금요일이야...." 라에프스키는 손톱을 깨물며 말했다. "약속한 건 어떻게 됐나?" "2백 루우블리는 마련되었어. 나머지는 오늘 내일 안으로 어떻게 마련해 보겠어. 염려 말게." "고맙네!" 라에프스키는 이렇게 말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의 두 손은 기쁨으로 떨고 있었다. "은혜는 잊지 않겠어, 알렉산드르. 나는 하느님의 이름에 걸고, 자신의 행복에 걸고, 아니 자네가 바라는 일체의 것에 걸고 맹세해도 좋아. 이 돈은 저 쪽에 도착하는 대로 반드시 부쳐 주겠어. 전에 꾼 것도 부칠 테야." "그건 알았어, 바냐...." 사모이렌코는 상대방의 윗도리 단추를 만지작거리면서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자네 집안 일에까지 참견하는 건 안됐지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자네는 나데지다 씨와 여기를 함께 떠나면 안 되는 건가?" "자네도 이상한 사람이군.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우리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아무래도 여기 남아 있을 필요가 있어. 그렇지 않으면 빚쟁이들이 들고 일어날 걸세. 어쨌든 나는 곳곳의 가게에 적어도 7백 루우블리는 외상값이 있어. 좀 기다려 주게. 돈을 부쳐 주고 그 치들의 입을 틀어막겠어. 그런 뒤에 나데지다는 여기를 떠나는 거지. 그럴 예정일세." "그렇군... 그렇다면 왜 그녀를 먼저 떠나게 하지 않지?" "이건 놀랐는걸. 그걸 말이라고 하나?" 라에프스키는 몸을 떨었다. "그녀는 여자 아닌가. 혼자 저 쪽에 가서 뭘 한다는 건가? 뭘 한단 말이지? 그런 짓을 하면 불필요한 시간만 들고, 돈을 낭비할 뿐일세." '하긴 옳은 말이야....' 하고 사모이렌코는 생각했다. 그러나 폰 코렌과의 이야기가 머리에 떠올라서, 눈을 내리깔고 거북한 듯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네 의견에 찬성할 수 없어. 나데지다와 함께 떠나던가, 그렇잖으면 그녀를 먼저 떠나게 하든가,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으로 하게나.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나는 돈을 꾸어 줄 수 없어. 이게 내 결론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방문에 등을 부딪치자, 얼굴이 빨개지고 몹시 당황하면서 응접실로 나갔다. '금요일....' 라에프스키는 응접실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금요일....' 그는 코코아 잔을 받아 들었다. 뜨거운 코코아 때문에 입술과 혀를 데었으나,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금요일... 금요일....' '금요일'이라는 말이, 웬일인지 머릿속에 꼭 박히어 떠나지 않았다. 그는 금요일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단 한 가지, 그것은 머릿속이 아니라 어딘가 심장 아래쪽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토요일이 되면 떠날 수 없게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눈앞에선 관자놀이까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내린 얌전한 니코짐이 서서 쉴 새 없이 권하고 있었다. "자, 어서 좀 드세요. 자, 어서요...." 마리아는 손님들에게 카아챠의 성적표를 보였다. 그리고 한 마디 한 마디를 길게 빼는 듯한 말투로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요즈음에는 공부가 너무 너무 어려워졌다고 하더군요! 숙제가 얼마나 많은지...." "엄마!" 수줍기도 하고, 칭찬이 거북하기도 하여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진 카아챠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라에프스키도 성적표를 보고 칭찬해 주었다. 그러나 도덕, 국어, 품행, 5점, 4점 따위의 글자가 눈앞에서 춤을 추며, 그것이 머리에 박혀 떠나지 않는 바로 그 금요일과 니코짐의 단정하게 빗은 머리와 카아챠의 새빨간 뺨과 한데 어울려, 견디기 어려운 끝없는 우울감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하마터면 절망의 소리를 크게 지를 뻔하면서 마음 속으로 자신에게 물어 보는 것이었다. '정말, 정말로 나는 떠날 수 없게 되는 것일까?' 일동은 카드 테이블을 두 개 나란히 놓고, 우편놀이를 하게 되었다. 라에프스키도 테이블 앞에 앉았다. '금요일... 금요일....' 그는 웃음을 띠고 호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내어 생각했다. '금요일....' 자기가 놓인 상태에 관해서 잘 생각해 보려고 했으나, 생각하는 것이 무섭기도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그토록 오랫동안 조심해서 감추고 있던 속임수를 군의관에게 들켰다고 자인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장래의 일을 생각하는 경우, 그는 언제나 자기의 상념을 어느 정도 이상으로는 발전시키지 않으려고 애써 왔다. 기차를 타고 출발한다--그것으로 생활 문제는 해결된 것이라고 보고, 그 앞의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해 왔다. 다만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에, 들판에서 보는 멀리 있는 한 점의 불처럼 이런 생각이 번뜩이는 일이 있기는 했다. 나는 페테르스부르크의 어느 골목길에서 먼 장래의 어느 날, 나데지다와 헤어지고 빚을 갚기 위해 무엇인가 한 가지 작은 거짓말을 할 것 같다. 그러나 거짓말은 단 한 번뿐이고, 그 뒤로는 완전한 갱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면 되지 않는가. 작은 하나의 거짓말을 대상으로 해서 커다란 진실을 얻는 것이니까. 그런데 지금 군의로부터 거절당하고, 게다가 자기의 속임수가 에둘러 하는 말로 가차없이 지적되고 보니, 거짓말이 필요한 것은 먼 장래에 한한 일이 아니고, 오늘도 내일도 한 달 뒤에도, 아니 어쩌면 생애가 끝날 때까지도 필요한 것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정말이지 만일 여기를 떠나려고 생각한다면 나데지다에게나 채권자들에게 상사에게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돈을 장만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에게 나데지다와는 이젠 손을 끊었다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어머니는 5백 루우블리 이상은 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5백 루우블리 이상은 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기는 이미 군의를 속인 셈이 된다. 그에게 빨리 돈을 부쳐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나데지다가 페테르스부르크로 오면, 그녀와 헤어지기 위해 크고 작은 여러 가지 거짓말을 할 필요가 생긴다. 그러다 보면 또한 눈물, 권태, 지겨운 생활, 회한이라는 것이 쌓이게 되고, 갱생 따위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있는 것은 속임수뿐이고,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라에프스키의 상상 속에서 순식간에 큼직한 거짓말의 산이 생겼다. 그 산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사소한 거짓말을 하는 것을 그만두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대담한 수단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일어서서 모자를 쓰고 돈을 가지지 않고 그대로 훌쩍 떠나는 것 같은 일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라에프스키는, 자기는 아무래도 그런 짓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금요일, 금요일....' 그는 줄곧 생각했다. '금요일....' 모두들 짤막한 글을 편지로 써서 그것을 둘로 접어, 니코짐의 낡은 실크 해트에 넣었다. 편지 쪽지가 다 모이자, 우편 배달역인 코스챠가 테이블을 돌면서 그것을 나누어주었다. 신부와 카아챠와 코스챠는 재미있는 편지를 받자, 자기들도 될 수 있는 대로 재미있는 것을 쓰려고 애쓰고 있었던만큼,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얘기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나데지다가 받은 편지에는 이런 글이 씌어져 있었다. 그녀의 눈은 마리아의 눈길과 마주쳤다. 마리아는 아아먼드적인 웃음을 짓고 끄덕여 보였다. '무슨 얘기를 할 게 있다는 거야!' 하고 나데지다는 생각했다. '다 털어놓고 얘기할 수 없는 바에는 얘기를 해 봤자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 곳으로 손님으로 오기 전에 그녀는 라에프스키의 넥타이를 매 주었는데, 이 아무 것도 아닌 일이 그녀의 마음을 상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차게 했다. 라에프스키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불안스런 빛, 공허한 눈매, 창백함, 그가 최근에 보이게 된 이상한 변화, 자기가 그에 대해서 무섭고 꺼림칙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런 모든 일들이, 웬일인지 둘이 같이 사는 것도 얼마 안 가서 끝장 날 것이라고 그녀에게 일러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성상을 우러러볼 때처럼 의경과 회한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용서해 붜요, 용서해 줘요....' 하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는 아치미아노프가 앉아 검은 은근한 눈을 그녀에게서 떼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욕망으로 마음이 산란하고, 그와 같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우수와 비애조차 자기가 불순한 정욕에 무릎을 꿇고 말 것을 가로막지 못하는 것이나 아닐까, 자기는 알코올 중독에 걸린 여자처럼 이젠 더 버티고 서 있을 힘을 상실한 것이나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자기로서도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고, 라에프스키의 얼굴에도 흙칠을 하게 되는 그런 생활을 더 이상 계속해 나가지 않기 위해서도, 그녀는 여기를 떠나야 한다고 결심했다. 자기를 가게 해 달라고 그에게 울면서 애원해 보자. 만일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가 모르게 떠나자. 저지른 일들은 말하지 않기로 하자. 그 사람은 나의 깨끗한 추억만을 간직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좋아합니다, 좋아합니다, 좋아합니다.' 하는 편지가 왔다. --아치미아노프가 보낸 것이었다. 어딘가 시골에서 살면서 일을 하자. 라에프스키에게, '미지의 사람으로부터'라고 하여 돈이나 수놓은 속옷이나 담배를 보내 주자. 그리고 그가 노인이 되어, 무거운 병에라도 걸려 시중들어 줄 사람이 필요하게 되기라도 한다면, 비로소 그에게 돌아 가자. 노인이 되어, 내가 무슨 까닭으로 그의 아내가 되기를 거절하고 그를 버렸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나의 희생의 가치를 인정하고, 나를 용서해 줄 것이다. '당신의 코는 깁니다.' 하는 편지가 왔다. 이것은 신부나 코스챠가 보낸 것임에 틀림없다. 나데지다는, 라에프스키와 헤어질 때 세게 그를 껴안고 손에 키스하며 언제까지나 그를 잊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자기의 모습과 시골로 가서 낯선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어딘가에 사랑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 순정적이고 고상하며 고결한 그 사람은 나에 대해서 언제까지나 깨끗한 추억만을 간직하고 있으리라--이렇게 매일같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오늘 안으로 만나 주지 않는다면 저는 맹세코 적당한 조처를 취하겠습니다. 신사에 대해서 그와 같은 태도로 나오시는 게 아니라는 것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키릴린이 보낸 편지였다. 13. 라에프스키는 편지를 두 통 받았다. 그 중의 하나를 펼쳐 보니까, '떠나는 것은 그만둬요.' 라고 씌어져 있었다. '도대체 누가 썼을까....' 그는 생각해 보았다. '물론 사모이렌코는 아니다. ...신부도 아니다. 내가 떠나고 싶어하는 것을 그 사람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혹시 폰 코렌일까?' 동물학자는 테이블에 몸을 숙이고 피라미드를 그리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눈가에 미소가 떠올라 있는 것 같다. '사모이렌코가 지껄였군.' 하고 라에프스키는 짐작했다. 또 하나의 편지에는 좀 전의 것과 꼭 같으나, 길거나 꼬불꼬불하게 꼬리를 달아서 일부러 달라 보이게 한 글씨로, '아무개는 토요일에는 떠나지 못합니다.' 라고 씌어져 있었다. '시시한 장난을 치는군.' 하고 라에프스키는 생각했다. '금요일, 금요일....' 무엇인가가 목구멍으로 치밀었다. 그는 목에 손을 갖다 대고 헛기침을 하였다. 그러나 목에서 나온 것은 기침이 아니라 웃음이었다. "하하하!" 하고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 이럴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하하!" 그는 억지로 참으며 손으로 입을 막아 보았다. 그러나 웃음이 팔과 목덜미를 밀고 치밀기 때문에 도저히 손으로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거 우습게 되어 가는군!' 하고 그는 몸을 흔들며 배꼽이 빠지게 웃으며 생각했다. '미치기라도 했나?' 웃음소리는 차츰 높아져 가서 나중에는 어쩐지 개가 짖는 소리와 비슷해졌다. 라에프스키는 테이블에서 일어서려고 했으나, 다리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고, 오른손은 저절로 아주 기묘한 꼴로 테이블 위를 뛰어다니고, 거기에 있던 종이쪽을 모조리 움켜쥐기 시작했다. 일동의 이상해하는 눈길, 사모이렌코의 깜짝 놀라는 듯한 정색을 한 얼굴, 동물학자의 냉소와 혐오로 가득 찬 시선이 문득 눈에 띄었다. 그 때 그는, 이것은 히스테리구나, 하고 깨달았다. '무슨 추태람, 이게 무슨 치욕이야.' 그는 뜨거운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아아, 창피해! 이런 일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는데....' 미처 제정신이 들기도 전에 그는 양쪽 겨드랑이를 부축당하고 뒤통수를 받치는 사람에 의해서 옆방으로 끌리어갔다. 눈앞에 컵들이 보이는가 싶은 순간, 그것이 탁, 하고 이에 부딪치고, 물이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가만히 보니 거기는 작은 방인데, 한복판에 침대가 두 개 나란히 놓여 있고, 깨끗하고 눈과 같이 하얀 커버가 씌워져 있었다. 그는 침대 한쪽에 쓰러져서 소리내어 웃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괜찮아...." 사모이렌코의 목소리가 났다. "흔히 있는 일이야.... 암, 흔히 있는 일이고말고...." 공포에 질린 나머지 얼어붙은 나데지다가 온몸을 떨며, 무엇인가 끔찍한 사건을 예감하면서 침대 곁에 서서 자꾸만 물었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죠? 부탁이에요, 말씀해 보세요." '키릴린이 무엇이라고 써 보낸 것이 아닐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 것도 아니야...." 하고 라에프스키가 우는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저리 가 줘... 응." 그의 얼굴에는 증오의 빛이나 혐오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나데지다는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응접실로 갔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부인." 마리아가 곁에 와 앉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곧 나으실 거예요. 남자분들도 약하기로는 우리들 죄 많은 여자와 다름없어요. 두 분 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때예요.... 무리 아니죠. 그건 그렇고, 주인, 요전번 얘기의 대답을 듣고 싶군요." "천만에요, 얘기란, 저는 도저히 할 수 없어요...." 나데지다는 라에프스키가 흐느껴 울고 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말했다. "저는 기분이 좋지 않아서... 이만 실례해야겠어요." 마리아가 깜짝 놀란 듯한 목소리를 냈다. "제가 밤참도 대접하지 않고 돌아가시게 할 줄 아세요? 같이 들도록 하세요. 그 뒤라면 말리지 않겠어요." "저는 기분이 좋지 않아서...." 하고 나데지다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쓰러지지 않으려는 듯이 두 손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잡았다. "저 사람은 발작을 일으킨 거야!" 하고 폰 코렌이 응접실로 들어서면서 아주 유쾌하다는 듯이 말했으나, 나데지다의 모습을 보더니 당황하며 나가 버렸다. 히스테리가 멈추어지자, 라에프스키는 남의 침대에 걸터앉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창피한 일이야, 여자처럼 울다니! 모두들 나를 보고 이상하고 꼴불견인 사내라고 여기고 있겠지. 뒷문으로 나가도록 해야겠어. 그게 아니지, 그런 짓을 하면, 나는 자신의 히스테리에 중대한 뜻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번 일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는 게 좋겠군.' 그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얼마 동안 그대로 앉아 있다가, 이윽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또 왔습니다." 그는 싱글벙글하면서 말했다. 속으로는 창피해서 얼굴도 제대로 못 들 것 같았고, 자기가 들어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까지 창피스런 느낌이 들게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흔히 이런 일이 있습니다." 하고 그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여기에 앉아 있으니까 갑자기 옆구리가 몹시 쑤셔서.... 억지로 참으려고 했더니 그만 신경이 더는 견디지 못하게 되었죠. 그래서 그런 추태를 부렸습니다. 어쨌든 세상은 노이로제 시대라 어쩔 수 없어요!" 밤참을 들 때, 그는 포도주를 마시고 대화에도 끼였으나, 이따금 경련과 같은 한숨을 내쉬고는 아직도 아픔이 깨끗이 가시지 않았다는 듯이 옆구리를 만졌다. 그러나 나데지다말고는 아무도 그것을 곧이듣는 사람이 없었고, 그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아홉 시가 지나서 모두들 가로수 길로 산책을 나갔다. 나데지다는 키릴린이 말을 걸어 올까 봐 겁이 나서, 마리아와 아이들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다. 공포와 울적한 기분 때문에 몸과 마음이 나른하고, 열병에 걸린 것이나 아닐까 하는 예감에 사로잡혀서 간신히 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는데,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키릴린이든가 아치미아노프, 혹은 두 사람 모두 따라올 것이 틀림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키릴린은 니코짐과 나란히 걸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희롱을, 나는 용서하지 않으리!" 그 일행은 가로수 길에서 찻집 쪽으로 꺾어들고, 그리고 해안 거리로 나와 오랫동안 바다가 인광을 반짝이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폰 코렌은 인광이 어째서 일어나는지 설명해 주었다. 14. "그건 그렇고, 벌써 빈트 시간이군.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겠군요." 하고 라에프스키는 말했다. "그럼 먼저 실례합니다, 여러분." "저도 같이 돌아가겠어요. 기다려 줘요." 나데지다는 이렇게 말하면서 라에프스키의 팔을 잡았다. 두 사람은 일행과 헤어져 걷기 시작했다. 키릴린도 작별 인사를 하고, 같은 방향이라고 하면서 나란히 걸었다. '어차피 될 대로 되는 수밖에 없는 일이야.' 하고 나데지다는 생각했다. '될 대로 되라지....' 그녀는, 온갖 불쾌한 옛 생각이 머릿속에서 고개를 들고 나와 어둠 속을 자기와 같이 나란히 걸어가면서 괴로운 듯이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어떤가 하면, 잉크 속에 빠진 파리와 같이 죽을 힘을 다하여 포도를 기어가면서, 라에프스키의 옆구리와 손을 검게 더럽혀 주고 있는 것같이 여겨지는 것이었다. '만일 키릴린이....' 하고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무엇인가 추잡한 짓을 한다 하더라도 나쁜 것은 그가 아니라 나뿐인 것이다. 전에는 나를 보고 키릴린과 같은 말버릇으로 나오는 사내는 한 사람도 없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실이라도 자르는 것같이 그 시절을 끝나게 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게 한 것은 다름없는 내가 아닌가--그것을 도대체 누가 나쁘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정욕에 미쳐서, 아마도 다만 키가 후리후리하다고 하는 이유 하나만으로, 낯선 사내에게 추파를 보내고 두 번의 밀회로 싫증이 나서 차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그 사내는....' 하고 그녀는 다시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제멋대로 행동할 권리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여보, 나는 여기서 헤어지겠소." 하고 라에프스키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다음은 키릴린 씨에게 바래다 달라고 해요." 그는 키릴린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빠른 걸음으로 가로수 길을 가로질러, 거리 건너편의 창문에 불빛이 보이는 셰시코프스키네 집 쪽으로 갔다. 이윽고 작은 문을 쾅 닫는 소리가 났다. "그러면 이야기를 분명히 해 둘까요." 키릴린이 입을 열었다. "나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흔해 빠진 아치카소프라든가, 라치카소프라든가, 자치카소프 같은 작자들과는 다릅니다.... 나는 진지하게 생각해 주기를 요구하고 싶습니다!" 나데지다는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나에 대한 태도를 갑자기 바꾼 것을, 나는 처음에는 애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고 키릴린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당신은 신사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모르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다만, 저 아르메니아인 애송이와 같이 나를 노리갯감으로 삼으려고 생각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신사니까 신사로서 대접해 주시기를 요구합니다. 그럼 같이 가실까요?" "저는 기분이 좋지 않아서...." 나데지다는 그렇게 말하고 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눈물을 감추려고 얼굴을 돌렸다.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아요. 그러나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키릴린은 잠깐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이윽고 또박또박 잘라 말했다. "되풀이해서 말씀드립니다만, 부인, 부인께서 만일 오늘 밤 만나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오늘 밤 안으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겠습니다." "오늘 밤은 용서해 주세요." 하고 나데지다는 말했으나,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슬프고 가냘프게 들려, 자기 목소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당신한테 따끔한 맛을 보여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난폭한 말을 해서 실례입니다만, 당신한테 아무래도 따끔한 맛을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감스럽지만, 따끔한 맛을 보여 주지 않을 수 없어요. 나는 밀회를 두 번 요구합니다. 오늘과 내일 말입니다. 모레는 당신은 완전히 자유입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어디건 같이 가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은...." 나데지다는 자기 집 문 쪽으로 걸어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 밤은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온몸을 떨면서 속삭였다. 눈앞의 어둠 속에서는 하얀 여름 옷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옳으신 말씀이에요. 저는 몹쓸 여자예요. 제가 나빠요. 그렇지만 오늘만은 용서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그의 찬 손이 닿자, 몸을 떨었다. "제발 부탁해요...." "슬픈 일이군!" 키릴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슬픈 일이야! 나는 당신을 이대로 돌려 보낼 순 없어요. 당신한테 따끔한 맛을 보여 주고 싶고, 깨닫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그리고 부인, 나는 여자를 조금도 믿지 않아요." "저는 기분이 좋지 않아서...." 나데지다는 규칙적으로 들려 오는 물결 소리를 듣고, 별들이 깔려 있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모든 것을 끝내고 바다니 별이니, 그리고 남자며 열병 따위가 있는 저주스런 삶의 감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저희 집에서는 곤란하지만...." 그녀는 쌀쌀하게 말했다. "저희 집만 아니면 어디라도 좋아요." "뮤리도프네 집으로 갑시다. 거기가 제일 좋아요." "어딘가요, 거긴?" "성터 근처입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한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이윽고 산 쪽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깜깜했다. 포도에는 군데군데 불빛이 켜져 있는 창문에서 비치는 파르스름한 불빛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파리처럼 잉크 속에 빠졌다가는 밝은 곳으로 기어나오는 일을 거듭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키릴린은 뒤에서 따라왔다. 도중에서 한 번 발이 걸리어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그리고 웃었다. '취했어....' 하고 나데지다는 생각했다. '어차피 마찬가지야... 마찬가지야... 아무러면 어때.' 아치미아노프도 일찌감치 일행과 헤어지고는 뱃놀이를 하자고 나데지다에게 말하려고 나데지다 뒤를 따랐다. 그는 그녀의 집 곁에까지 가서 울타리 사이로 들여다보았다. 창문은 넓게 열려져 있는 채였으나,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나데지다!" 하고 그는 불렀다. 1분쯤 지났다. 그는 다시 한 번 불렀다. "누구신가요?" 하고 올리가의 목소리가 났다. "나데지다는 댁에 안 계십니까?" "네,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이상하다... 정말 이상해." 아치미아노프는 몹시 불안해지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틀림없이 집 쪽으로 갔는데...." 그는 가로수 길을 얼마 동안 어슬렁거리다가 큰길로 나와 셰시코프스키네 집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라에프스키가 윗도리를 벗고 테이블에 앉아 카드를 한 장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상하다, 이상해...." 아치미아노프는 중얼거렸다. 그는 라에프스키가 일으킨 히스테리를 생각하자 얼굴이 뜨듯해졌다. "만일 집에 없다면 어디에 간 것일까?" 그는 또 나데지다의 집으로 가서 어두운 창문을 쳐다보았다. '나를 속였어, 속인 거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오늘 낮에 비츄고프 집에서 만났을 때, 저녁때 같이 뱃놀이를 가자고 스스로 말을 꺼내고, 약속까지 한 것은 그녀 쪽이 아니었던가. 키릴린이 살고 있는 집의 창문은 깜깜하고, 문 앞의 벤치에는 순경 하나가 앉아서 졸고 있었다. 창문과 순경의 모습을 보았을 때, 아치미아노프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고 걸었으나,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또다시 나데지다의 집 앞에 와 있었다. 그는 벤치에 앉아 모자를 벗었다. 질투와 분노로 머리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시내 교회의 시계는 정오와 자정, 하루에 두 번 시간을 알린다. 그 시계가 자정을 알린 지 얼마 안 되어, 바삐 걷는 발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런 내일 밤에 또 뮤리도프네 집에서!" 하는 목소리가 아치미아노프의 귀에 들렸다. 키릴린의 목소리였다. "여덟 시입니다. 그럼 내일 또 만나요!" 울타리 앞에 나데지다의 모습이 나타났다. 벤치에 앉아서 아치미아노프가 앉아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녀는 그림자처럼 옆을 지나서 쪽문을 열고 들어가, 문도 잠그지 않고 집 안으로 사라졌다. 자기 방에 들어가자 촛불을 켜고 재빨리 옷을 벗었으나, 자리로 들어가지는 않고 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의자를 껴안듯이 하며 이마를 댔다. 라에프스키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두 시가 지나서였다. 15. 거짓말을 단번에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하기로 마음먹고, 라에프스키는 다음 날 오후 한 시가 지나서 사모이렌코의 집으로 갔다. 토요일에는 어김없이 떠나기 위해 돈을 꾸려는 것이었다. 어제의 히스테리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괴로운 정신 상태에 있었는데, 게다가 심한 굴욕감마저 더해진 지금에 와서는 이 도시에 도저히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만일 사모이렌코가 끝까지 그 조건을 고집한다면 어떻게 할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일단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돈을 받은 뒤, 출발 때 가서 나데지다가 떠나기를 마다한다고 하면 될 것이다. 나데지다에게는 오늘 밤 안으로, 그것은 모두 당신을 위해서 하는 조처라고 납득시킨다. 만일 틀림없이 폰 코렌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모이렌코가 돈의 융통을 딱 잘라 거절하든가, 또는 무엇인가 새로운 조건을 들고 나온다면 오늘 안으로, 화물선이라도 좋다. 경우에 따라서는 돛배라도 좋다, 어쨌든 그런 것이라도 타고 노브이 아폰이든가 노보르시스크로 떠나버리자, 그리고 거기서, 창피를 무릅쓰고 어머니에게 전보를 치고, 여비가 올 때까지 거기서 지내면 된다. 사모이렌코의 집으로 가니 응접실에 폰 코렌이 와 있었다. 동물학자는 점심을 들러 왔던 것이며, 예의 그 앨범을 펼치고, 실크 해트를 쓴 신사와 모자를 쓰고 있는 숙녀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때를 잘못 맞춰 왔군.' 라에프스키는 그를 보고 생각했다. '훼방을 놓을지도 몰라.'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시오." 하고 폰 코렌은 얼굴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알렉산드르는 있습니까?" "있소, 부엌에." 라에프스키는 부엌으로 갔으나, 문 이쪽에서 사모이렌코가 샐러드 만들기에 눈코 뜰 새 없는 것을 보자, 응접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동물학자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언제나 거북한 느낌이 들곤 했는데, 오늘은 특히 히스테리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 겁이 났다. 1분 남짓 침묵이 흘렀다. 폰 코렌은 갑자기 라에프스키 쪽으로 눈을 돌리고 물었다. "어제 그 일이 있은 뒤 기분은 어떠시오?" "아주 좋습니다." 라에프스키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어제까지 나는 히스테리라는 것은 여자들만 발작하는 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당신이 무도병에 걸린 줄 알았었지요." 라에프스키는 아첨하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몹시도 무례한 말버릇이군. 내가 괴로워하고 있는 줄 빤히 알고 있으면서....'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웃음거리였죠." 그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오늘도 나 혼자서 아침 내내 웃고 있었거든요. 히스테리 발작이라고 하는 놈은 이상한 것이어서,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뱃속으로는 웃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울고 마는 것이니까요. 이 노이로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신경의 노예 같은 것이에요. 신경이 주인 행세하고, 우리를 마음대로 놀리는 것입니다. 문명의 혜택이 이런 경우에는 도리어 원수가 되는 셈이죠." 라에프스키는 지껄이면서도 불쾌하기만 했다. 폰 코렌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주의 깊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마치 연구라도 하고 있는 듯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뚫어져라 하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폰 코렌을 싫어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래도 아첨하는 듯한 웃음을 얼굴에서 지워 버릴 수가 없는 자신에 대해서도, 그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면...."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발작에는 매우 근본적인 직접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 몇 가지 있었어요. 최근 나는 건강 상태가 말이 아니죠. 그래서 속을 썩이고 있는데다 설상가상으로 돈 걱정이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죠. ...얘기할 만한 상대도 없어요. 공통의 화제도 없군요.... 정말이지 현지사보다도 딱한 처지입니다." "그래요, 당신 처지는 절망적이군요." 하고 폰 코렌이 말했다. 이 침착하기 짝이 없는 쌀쌀한 말에는 조소나 무리한 예언 같지도 않은 투가 들어 있어서, 라에프스키의 신경을 몹시 건드렸다. 그는 조소와 혐오로 가득했던 어제의 동물학자의 눈길을 생각하고 잠깐 잠자코 있다가, 웃음이 걷힌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내 처지를 알고 계십니까?" "방금 당신 자신이 말하지 않았소. 그리고 당신의 친구들이 당신을 몹시 동정해서 하루 종일 당신 얘기만 하니까요." "친구라면? 사모이렌코인가요?" "네, 그 사람도 그렇죠." "알렉산드르를 비롯하여 내 친구 모두에게 남의 걱정은 작작 하라고 부탁하고 싶군요." "저기 사모이렌코가 나오고 있으니, 어디 부탁해 보는 게 어때요, 남의 걱정은 작작 하라고요."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어째서 당신이 그런 말투로 나오는지...." 라에프스키는 중얼거렸다. 그는 동물학자가 자기를 증오하고, 경멸하고, 우롱하고 있다는 것, 동물학자야말로 자기의 최대의 적이요, 불구 대천의 적이라는 것을 지금에야 비로소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한 말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나 쓰도록 하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하고 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증오의 감정이 어제의 웃음의 충동과 마찬가지로 가슴과 목을 죄었기 때문에 큰 소리를 낼 힘이 없었던 것이다. 사모이렌코가 들어왔다. 윗도리는 벗은 채였고, 부엌의 열기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있었다. "아, 왔군." 하고 그는 말했다. "자네, 점심은 들었나? 사양 말고 말하게. 들었나?" "알렉산드르." 라에프스키는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일신상의 일로 무엇인가 자네에게 부탁한 것은 사실이지만, 경솔해도 좋고, 남의 비밀을 존중하지 않아도 좋다고까지는 말하지 않았네." "무슨 소리야, 그건?" 사모이렌코는 알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였다. "돈이 없다면...." 하고 목소리를 높이어, 흥분한 나머지 쉴 새 없이 발을 구르며 라에프스키는 말을 이었다. "꾸어 주지 않으면 되는 걸세. 거절하면 된단 말이야. 그렇지만 내 처지가 절망적이라거니 어떻다거니 하면서 나팔을 불고 다닐 필요가 어디 있나? 사소한 일을 크게 떠벌려 대는 그런 자선이나 우정은 나는 질색일세! 자신의 자선을 자랑하는 거라면 어떻게 하건 그건 자네의 자유지만, 내 비밀을 떠벌리고 다닐 권리를 아무도 자네에게 주진 않았을 거야!" "비밀이라고?" 사모이렌코는 영문을 몰라서, 차츰 신경질적으로 되어 가면서 말했다. "싸움을 걸러 온 거라면 돌아가 주게. 나중에 다시 와 줬으면 좋겠어!" 그는 친한 사람에게 화가 나면, 마음 속으로 백을 세면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하는 가르침이 생각나서 곧 세기 시작했다. "남의 걱정일랑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해!" 라에프스키는 말을 이었다. "그냥 내버려두란 말이야. 내가 어떤 사람이건,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건, 그게 다른 사람에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래, 나는 떠날 작정이야! 빚도 지고, 술도 마셔. 남의 아내와 동거도 하고 히스테리도 일으켜. 아무개처럼 심오한 사상도 지니지 못한 저속한 인간이야. 그러나, 그게 누구에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남의 인격을 존중하게!" "여보게, 실례지만...." 사모이렌코는 서른 다섯까지 세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남의 인격을 존중하게!" 하고 라에프스키는 상대의 말을 가로막았다. "남의 일을 언제나 이러쿵저러쿵 헐뜯거나 하고, 늘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남의 말을 엿듣기도 하는 그런 우정이라면 소용 없어! 돈을 꾸어 주는 데도 일일이 조건을 달고, 꼭 어린아이 대하듯 하지를 않나!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는 건가! 나는 아무 것도 필요 없어!" 흥분한 나머지 몸을 비틀거리고, 또 히스테리가 발작되는 것이나 아닌가 걱정하면서 라에프스키는 소리쳤다. '이러면 토요일에는 떠나지 못한다.' 고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에 스쳤다. "아무 것도 필요 없어! 다만 제발 남의 걱정일랑 말아 줘. 나는 어린애도 아니고 미치지도 않았어. 그러니까 그러한 감시는 사양하겠어." 신부가 들어오다가, 라에프스키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두 손을 흔들어 대며, 보론초프 공작의 초상을 향하여 기묘한 연설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문간에 못 박힌 듯이 멈추어 섰다. "늘 내 마음속까지 엿보려 하는 건...." 하고 라에프스키는 말을 이었다. "내 인격의 존엄에 대한 모욕이야. 나는 풋내기 탐정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어. 그런 스파이 행위는 그만두어 줬으면 해! 이젠 신물이 나!" "뭐... 뭐라구?" 백까지 다 세고, 얼굴이 홍조가 된 사모이렌코는 라에프스키에게 대들 듯이 물었다. "신물이 난단 말이야!" 라에프스키는 가쁜 숨을 내쉬고, 모자를 손에 들며 말했다. "나는 러시아의 의사야, 상류 계급이야, 오등관이고!" 사모이렌코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똑똑하게 말했다. "스파이 짓을 한 일은 한 번도 없어. 나를 모욕하는 사람은 누구거나 용서 못 해!" 하고 목소리를 떨며 마지막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닥쳐!" 하고 소리쳤다. 신부는 군의관이 이처럼 엄숙하게 소리치고 시뻘겋게 무서운 얼굴을 한 것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일이 없었으므로, 손으로 입을 막고 현관으로 달려 나가서는 배꼽을 쥐고 웃었다. 안개를 통해서 보는 것같이, 라에프스키는 폰 코렌이 일어서서 두 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사태가 어떻게 되어 가는가를 기다리는 듯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침착한 자세는, 라에프스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뻔뻔스럽고 무례한 것으로 여겨졌다. "아까 그 말을 취소해!" 사모이렌코가 소리쳤다. 라에프스키는 그 말이 어떤 말이었는지 이미 잊어버렸으므로, 이렇게 대답했다. "가만 내버려 둬! 나는 아무 것도 필요가 없어! 내가 필요한 건 자네나 유태계 도이칠란트 이민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 뿐이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대항 수단을 쓰겠어! 결투도 하겠어!" "이제 알겠어." 폰 코렌이 테이블 저 쪽에서 나오며 말했다. "라에프스키 씨는 떠나기 전에 결투로 기분 전환을 하시겠다는 거군. 그 희망을 내가 들어 주겠어. 라에프스키 씨, 나는 당신의 도전에 응합니다." "도전?" 라에프스키는 동물학자에게 다가서서, 증오에 찬 눈빛으로 그의 거무스름한 이마와 고수머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전? 좋아! 나는 당신이 꼴도 보기 싫어! 구역질 나!" "유쾌한 일이야. 내일 아침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케르바라이의 가게 근처에서 하는 거야. 세부적인 점은 모두 당신에게 맡기겠어. 그렇지만 지금은 그냥 돌아가 줘." "구역질이 나!" 괴로운 듯이 숨을 몰아쉬면서 라에프스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터 그랬어! 결투! 좋아!" "알렉산드르, 이 친구를 내쫓아 보내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나가겠어." 폰 코렌이 말했다. "물어뜯으려고 덤빌 것만 같군." 폰 코렌의 침착한 태도는 군의의 흥분을 가라앉게 했다. 그는 제정신으로 돌아가자, 흠칫하며 두 손으로 라에프스키의 허리를 껴안듯이 하여 동물학자의 곁에서 떼어놓으며, 상냥하나 흥분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은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야.... 조금 흥분했을 뿐이지. 그만 참아. 이젠 됐어. 자, 참으라구." 이 같은 다정하고 우정이 깃든 소리를 듣자, 라에프스키는 이제까지 자기의 생활에 과거에는 없었던 기괴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라고 느꼈다. 마치 기차에 치일 뻔했던 것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한 손을 휘두르며 방에서 뛰어나갔다. '남의 미움을 피부로 느끼고,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가장 비참하고 비열하고 처량한 얼굴을 드러낸다.... 아아, 괴로운 일이다!' 그는 얼마 뒤 찻집 의자에 앉으면서 생각했다. 조금 전 온몸에 받은 남의 미움으로 마치 몸이 온통 녹이 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아, 부끄러운 일이야!' 코냐크를 탄 냉수를 마시자 그는 좀 기운이 났다. 폰 코렌의 침착하고도 사람을 깔보는 듯한 얼굴이나 간밤의 눈초리, 융단과 비슷한 셔츠와 목소리, 하얀 손 등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러자 무겁게 가라앉은 외곬으로 탐욕스런 증오가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치며, 모욕의 앙갚음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는 마음 속에서 폰 코렌을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두 발로 마구 짓밟았다. 이제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사소한 점까지 생각해 내서는, 자기가 어찌하여 그같이 시시한 자에게 아첨하는 듯한 웃음을 보일 마음이 생겼었는지, 도대체 저런 어디서 굴러 먹던 놈인지 모르는 시시한 놈의 의견을 존중할 마음이 생긴 것은 무슨 까닭인지 스스로도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놈이 살고 있는 이 시시한 고장만 하더라도 아마 지도에조차 나와 있지 않을 것이고,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상당한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누구 하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하찮은 고장이 갑자기 함몰되거나 화재로 깨끗이 타 버린다 하더라도, 그 신문 보도는 헌 가구를 판매한다는 광고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독자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을 것이다. 내일 폰 코렌을 죽이든 살려 주든 무익하고 흥미 없는 일이라는 것은 어차피 마찬가지이다. 다리든가 손을 쏘아 부상을 입게 하고 그런 뒤에 웃어 주자. 그리고 그가, 다리 하나가 떨어져 나간 곤충이 풀숲으로 숨어 들어가듯이 아픔을 꾹 참고 그놈과 다를 바 없는 시시한 놈들 속으로 살금살금 숨어 들어가는 것을 바라다 보자. 라에프스키는 셰시코프스키의 집으로 가서 자초지종을 모두 이야기하고 입회인이 되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둘이서 우체국장한테 가서 역시 입회인이 되어 달라고 하고 그 길로 점심을 들기 위해 둘러앉았다. 식사를 하면서 그들은 우스갯소리를 마구 하면서 웃었다. 라에프스키는 사격 솜씨가 전혀 없는 자신을 비웃고 임금님의 사수라거니 빌헬름 텔이라거니 하고 불렀다. "신사인 체하는 그놈에게 한바탕 본때를 보여 줘야 해." 그는 몇 번이나 이렇게 되뇌이는 것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나자 카드놀이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았다. 라에프스키는 카드놀이를 하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결투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의미한 짓이다.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도리어 분규를 일으킬 뿐이다. 그렇지만 결투가 없으면 곤란한 경우도 때로는 있다. 예컨대 지금과 같은 경우 사실 폰 코렌을 치안 판사에게 고소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내일 있을 결투의 또 한 가지 좋은 점은 그 뒤에는 그만이 고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얼큰하게 취해서, 카드놀이에 열중했다.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해가 저물고 주위가 어두워지자, 그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점심을 들 때나 카드놀이를 할 때에도 결투가 중지될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웬 까닭인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은 내일 아침 그의 생활에서 처음으로 일어날 미지의 그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이고, 앞으로 다가오려 하고 있는 밤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했다. ...이 밤은 길고 잠 못 이루는 밤이 되리라고 하는 것, 폰 코렌과 그 증오에 관한 일뿐만이 아니라, 이제부터 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짓말의 산, 피해서 지나갈 힘이나 재능을 그는 알고 있었다. 마치 갑작스런 병에라도 걸린 것같이, 그는 갑자기 카드놀이와 카드놀이 상대에게도 완전히 흥미를 잃고, 안절부절 못하며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 잠자리 속으로 들어가, 꼼짝도 하지 않고 오늘 밤에 대비하여 자기의 마음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셰시코프스키와 우체국장은 그를 배웅하고, 결투에 관하여 의논을 하려고 폰 코렌의 집으로 갔다. 자기 집 앞까지 왔을 때 라에프스키는 아치미아노프를 만났다. 청년을 헐떡이며 흥분되어 있었다. "저는 당신을 찾았어요, 라에프스키 씨." 하고 그는 말했다. "부탁이에요, 곧 저와 같이 가 주세요...." "어디로?" "당신은 모르는 사람인데, 어떤 신사와 매우 중대한 일로 당신을 꼭 만나 보고 싶다는 겁니다. 1분이라도 좋으니 꼭 와 달라고 말했어요. 꼭 말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라고 합니다...." 흥분된 나머지 아치미아노프는 심한 아르메니아 사투리로 지껄였기 때문에 '사느냐'라는 말이 이상한 뜻으로 들렸다. "도대체 누굽니까, 그 사람은?" 라에프스키가 물었다. "이름을 말하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나는 바쁘다고 말해 줘요. 내일이라도 괜찮다면...." "당치도 않은 말씀!" 하고 아치미아노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덧붙여 말했다. "그 얘기는 당신에게 아주 중대한 일... 어쨌든 아주 중대한 얘깁니다! 만일 가시지 않으면 큰일이 납니다." "아무래도 이상하군...." 라에프스키는 중얼거렸다. 아치미아노프가 어째서 그처럼 흥분되어 있는지, 그리고 또 이 권태스럽고, 아무에게도 볼일이라고는 없는 이 고장에 무슨 비밀이 있을 수 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든 가 봅시다. 어차피 마찬가지니까." 아치미아노프가 앞장서서 빠른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그는 그 뒤를 따랐다. 한길로 나가 이윽고 어떤 골목길에 이르렀다. "어디까지 갈 거요?" 라에프스키가 말했다. "다 왔습니다. 조금밖엔 안 남았어요. 바로 저기예요." 성터 가까이에서, 두 사람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빈 터와 빈 터 사이의 샛길을 빠져 나간 다음 어떤 넓은 마당으로 들어가, 그 안에 있는 외딴집 쪽으로 향했다. "저건 아마 뮤리도프네 집일 텐데?" 라에프스키가 물었다. "그래요." "그런데 왜 뒤로 돌아가는 거죠? 까닭을 모르겠군요. 한길에서도 들어갈 수 있는데. 그 쪽이 가까워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라에프스키는 이것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치미아노프는 그를 뒷문으로 안내하고 조용히 걸으며, 말도 하지 말라고 하는 듯한 신호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여깁니다, 여깁니다...." 아치미아노프는 살며시 문을 열고, 발끝으로 복도로 들어서면서 말했다. "조용히, 조용히. 부탁입니다.... 소리를 내면 곤란해요." 그는 귀를 기울이고, 괴로운 듯이 숨을 내쉬더니 속삭이는 것처럼 말했다. "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세요....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라에프스키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으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이 낮은 방인데 창문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 촛불이 하나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옆방에서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가 났다. "자네, 뮤리트카인가?" 라에프스키가 그 방 쪽을 돌아다보니, 키릴린의 모습이 보였다. 그 곁에 나데지다가 있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이 그는 그대로 뒷걸음질을 쳐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새 한길까지 나와 있었다. 폰 코렌에 대한 증오도 불안한 생각도 깨끗이 그의 마음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걸으면서, 그는 노상 어색하게 오른손을 흔들고, 될 수 있는 대로 거침없이 걸어가려고 조심스럽게 발치를 살피면서 갔다. 집으로 돌아와 서재로 들어가자, 두 손을 비비고, 신사복과 와이셔츠가 갑갑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딱딱하게 어깨와 목을 움직이면서, 한동안 방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다가, 이윽고 촛불을 켜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16. "당신이 말하는 인문 과학이라는 것은 그 운동 과정에서 정밀 과학과 만나 그것과 나란히 나아가는 경우에만 비로소 인간의 사상을 만족시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만남이 어디서 일어나느냐, 현미경 밑에서인지 새로운 햄릿의 독백 속에서인지 그렇잖으면 새로운 종교 속에서인지 나는 몰라요. 그러나 그것이 일어나기에 앞서, 지구는 얼음의 층으로 덮이고 말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모든 인문적인 학문 가운데서 가장 견고하고 생명이 긴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크리스트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조차도 해석이 가지각색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들은 모두 모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군인과 범죄자와 미치광이만은 예외라고 합니다. 즉, 첫째 사람은 전쟁에서 죽여도 좋다, 둘째 사람은 격리 또는 처형해도 좋다, 그리고 셋째 사람은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해석자들은, 모든 이웃을 예외 없이 플러스, 마이너스의 차별 없이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결핵 환자거나 살인범이나 지랄병 환자가 당신한테 와서 딸을 신부로 달라고 하면 딸을 주라고 하는 것이 됩니다. 크레틴병의 백치가 심신이 건전한 사람에게 전쟁을 걸어 오면 목을 내맡겨라 하는 것이 됩니다. 이 사랑을 위한 예술이라고 하는 설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하는 설교와 마찬가지로, 만일 그것이 힘을 떨칠 수 있다면 결국에는 인류를 완전한 파멸로 이끌고, 그리하여 이제까지 지상에 나타났던 가장 엄청난 죄악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해석은 구구합니다. 그렇지만 구구하다고 하면 진지한 사상가는 그 가운데 어느 하나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온갖 잡다한 해석 위에 또한 자기의 해석을 서둘러 덧붙이려고 합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일지라도,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문제를 철학적 또는 이른바 기독교적인 기초 위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됩니다. 그런 짓을 하면 문제의 해결은 멀어질 뿐입니다." 신부는 동물학자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이윽고 잠깐 생각해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에게나 태어날 때부터 갖추어져 있는 도덕률이라는 것은 철학자가 생각해 낸 것일까요, 그렇잖으면 하느님이 육체와 함께 창조하신 걸까요?" "모르겠군요. 그러나 도덕률이라는 것은 모든 민족, 모든 시대를 통해서 고도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는 점에서 보면, 당연히 인류와 유기적으로 결부되어 있다고 인정해도 좋을 겁니다. 도덕률은 결코 생각해 낸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존재하고, 장래에도 존재하는 겁니다. 그것을 장래에는 현미경에 대고 볼 때가 오리라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그 유기적인 결합은 현재 이미 뚜렷한 증거에 의하여 증명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뇌의 중대한 질환과 일체의, 이른바 정신병이란 내가 알고 있는 한으로는 무엇보다도 먼저 도덕률의 도착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니까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렇군요. 위가 먹을 것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 감정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바란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들의 천성은 이기심이라고 하는 것에 의해서 양심과 이성의 목소리에 반항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가 나오는 게 아닙니까.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이런 문제를 철학적 기초 위에다 놓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그 해결은 도대체 누구에게 부탁해야 합니까?" "우리가 약간이나마 지니고 있는 정밀 과학의 지식에 의지하는 겁니다. 명중, 그리고 사실의 논리를 믿는 겁니다. 그것도 물론 빈약한 겁니다. 그러나 그 대신 철학처럼 불안하지도 않고, 애매하지도 않으니까요. 가령, 도덕률은 당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요구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래도 되지 않습니까. 사랑이란 현재 및 장래에 있어서, 어쨌든 인류에게 해를 끼치거나 위험을 가져올 염려가 있거나 하는 일체의 것을 제거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지식과 명증은, 인류의 위험은 정신적, 육체적 이상자에게서 유래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 이상자와 싸우면 됩니다. 비록 그들을 정상적인 자리까지 끌어올릴 만한 힘이 당신에게는 없다 하더라도 그들을 해가 없게 하는, 즉 없애 버리는 힘과 재능쯤은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강자가 약자를 정복하는 거군요?" "바로 그겁니다." "그러나 그 강자는 우리의 구주 예수 크리스트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 않습니까!" 신부는 격한 어조로 말했다. "그겁니다, 문제는. 크리스트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강자가 아닙니다. 약자예요. 인류의 문화는 생존 경쟁과 자연 도태의 효과를 약화시켰고, 또 지금 그것을 제로에 가까워지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약자가 급격히 불어나 강자를 압도할 기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어디 한 가지 생각해 보세요. 가령 미발달된, 발육 부진한 형태에서의 인도적 사상을 꿀벌에게 용케 불어넣었다고 하면 어떻게 되지요? 어떤 결과가 되지요?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수펄이 살아 남아서 꿀을 먹어 치우고, 꿀벌을 타락시키고, 목을 졸라 죽인다--요컨대 약자가 강자를 압도하여, 강자가 퇴화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꼭 같은 일이 현재 인류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약자가 강자를 압박하고 있는 겁니다. 문화라는 것을 아직 모르는 야만인이라면 가장 강하고 슬기로운 자, 가장 덕망이 높은 자가 앞장을 서서 걸어갑니다. 그가 추장이 되고, 지배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문화인은 크리스트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지금도 여전히 못박는 일을 그만두지 않고 있습니다. 즉, 우리들에게는 무엇인가 빠져 있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이 '무엇'을 우리는 되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오해는 무한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떤 기준으로 강자와 약자를 구별합니까?" "지식과 명증입니다. 결핵과 나력은 환자의 그 증상으로 구별이 되고, 부도덕한 자와 미치광이는 그 행위로 구별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틀리는 수도 있어요!" "그건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홍수가 질 것 같은 때에 발이 젖는 것을 걱정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철학입니다." 신부는 웃었다. "철학이라니요. 정말이지 당신은 너무나도 신학교적인 철학에 중독되어서, 모든 것을 안개 속에서만 보려고 해요. 당신의 젊은 머릿속에 잔뜩 들어 있는 추상적인 학문만 하더라도, 당신의 지성을 명증에서 이끌어 내고 말기 때문에 비로소 추상적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악마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돼요. 그리고 만일 정말로 악마 같으면 악마라고 말하면 되는 겁니다. 설명을 찾으려고 칸트나 헤겔에게 가지 않아도 좋아요." 동물학자는 잠깐 동안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2 더하기 2는 4입니다. 돌을 돌입니다. 내일은 결투가 있습니다. 결투가 어리석고 불합리하다든가, 결투는 시대에 뒤떨어졌다던가, 귀족적인 결투일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술집에서 주정꾼이 하는 싸움질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든가 하는 그런 것을 여기서 당신과 내가 아무리 말해 봤자, 우리는 그것을 중지하거나 하지 않을 겁니다. 가서 싸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세상에는 우리의 판단력보다 더욱 강한 힘이 존재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목청을 돋우어, 전쟁은 약탈 행위이다, 만행이다, 비참한 일이다, 형제를 죽이는 일이다, 하고 외칩니다. 피를 보면 기절을 하고 맙니다.l 그러나 일단 프랑스거나 도이칠란트라 우리 나라를 모욕했다고 하면, 우리는 곧 정신의 앙양을 느끼고, 마음 속으로 '만세'를 외치며 적진으로 쇄도할 겁니다. 당신들은 우리의 무운을 하느님에게 빌고, 우리들의 용기는 국민 모두의, 게다가 마음에서 우러난 열광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이런 사실도 또한 우리나 우리의 철학보다 높지는 않을지 모르나, 적어도 보다 강한 힘이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힘을 저지할 수 없는 것은 바다 건너에서 솟아오는 저 구름을 막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위선은 집어치우는 게 좋죠. 그 힘을 향해, 마음속으로만 강한 체하거나, '아아, 어리석다! 아아, 시대에 뒤진 일이다! 아아, 성서에 어긋난다!' 하고 말하는 것은 그만두는 게 좋죠. 그보다는 그 힘을 똑바로 보면서 합리적인 정당성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그 힘이 허약하고 나력을 앓고 있는 타락한 종족을 없애 버리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경우에, 복음서를 곡해하여 만들어 놓은 당신네들의 환약이나 인용구로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집어치우는 것이 좋은 거죠. 레스코프의 작품에, 신앙심이 깊은 다닐라라고 하는 사내가 마을 밖에서 문둥병 환자를 발견하고, 사랑과 크리스트의 이름으로 그에게 음식을 주고, 몸을 녹여 준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다닐라가 만일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문둥병 환자를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가서 웅덩이 속에 처넣고, 자기는 건강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을 시작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크리스트가 말한 사랑은 슬기롭고 유익한 것이었을 겁니다." "당신은 이상한 분이군요!" 신부는 웃으면서 덧붙였다. "크리스트를 믿고 있지도 않으면서 어째서 말끝마다 크리스트, 크리스트 하고 있는 건가요?" "아니, 나는 믿고 있어요. 다만 당신 식으로가 아니라 물론 내 식으로 믿고 있을 뿐이죠. 참, 신부님, 신부님!" 동물학자는 웃으면서 신부의 허리를 껴안고 즐거운 듯이 말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내일 결투에 나오시겠죠?" "직분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보겠지만." "그 직분이 어떻다는 겁니까?" "저는 성직자입니다. 제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아, 신부님, 신부님." 폰 코렌은 웃으면서 거듭 불렀다. "당신과 얘기를 하고 있으면 정말 즐거워지는군요." "당신은 신앙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고 신부가 말했다. "도대체 그건 어떤 신앙입니까? 제게는 신부가 된 숙부가 한 분 계십니다. 그런데 그 숙부님의 신앙이 얼마나 두터운지, 혼자서 들판으로 기우제를 지내러 갈 때에는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맞지 않으려고 우산과 가죽 비옷을 들고 나갈 정도입니다. 이것이 신앙이라는 거예요! 이 숙부님이 크리스트의 말씀을 할 때에는 후광이 비치고,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눈물을 흘릴 정도죠. 이 숙부님이라면 저 구름이라면 저 구름을 멈추게 할 수 도 있을 것이고, 당신이 말씀하시는 그 힘이라는 것도 모두 물리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고말고요. 신앙은 산을 옮기기도 하니까요." 신부는 동물학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말이지...." 그는 말을 이었다. "지금 당신은 늘 공부만 하고 계십니다. 바닷속을 알아보거나 강자와 약자를 구별하거나 책을 쓰거나 결투를 하거나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모든 게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보세요. 어딘가의 약하디 약한 할아버지가 성령을 받고 단 한 마디 무엇이라고 중얼거리던가, 또는 아라비아에서 새로운 마호멧이 칼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달려오던가 하면 곧 일대 소동이 벌어지고, 유럽은 엉망이 되어 버릴 거예요." "신부님, 그와 같은 얘기가 하늘에 갈퀴로 씌어져 있기라도 한 거요?" "행위가 따르지 않는 신앙은 한 마디 말로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따르지 않는 행위는 더욱 나쁩니다. 그야말로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아요." 바닷가로 난 길에 군의관이 나타났다. 신부와 동물학자가 있는 것을 보자 곁으로 다가왔다. "준비는 다 된 것 같아요."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입회인은 고보로프스키와 보이코가 맡기로 되었어요. 새벽 다섯 시에 와 줄 거예요. 날씨가 기분 나쁘게 흐렸는걸." 하고 하늘을 쳐다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아무 것도 안 보이는군. 이래 가지고는 금방 비가 한바탕 쏟아지겠는걸." "당신도 같이 가 주겠죠?" 하고 폰 코렌이 물었다. "아니,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지금도 벌써 녹초가 됐는걸. 그 대신 우스치모비치가 갈 거요. 얘기는 이미 되어 있어요." 멀리 바다 위에서 번갯불이 번쩍 빛나고, 곧 이어 둔한 천둥소리가 났다. "소나기가 쏟아지기 전의 무더위란 지독한 거군!" 폰 코렌이 말했다. "나는 내기를 해도 좋아, 당신은 벌써 라에프스키의 집에 가서 놈의 가슴을 끌어안고 한바탕 울고 왔죠?" "뭣 하러 내가 그 사람 집에 간단 말입니까." 군의관은 당황하면서 말했다. "또 그런 소리를!" 날이 저물기 전에 그는 라에프스키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가로수 길과 한길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해 보았다. 그는 자기가 발끈 화를 낸 일과 그 뒤에 갑자기 발작적으로 친절한 태도를 보인 것이 창피스러웠다. 라에프스키에게 농담으로 돌리며 사과를 하고, 주의를 주고, 안심을 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결투는 야만스런 중세의 유물이기는 하지만, 이 결투는 두 사람의 화해 수단으로서 하느님 자신이 지시한 것이라는 것, 즉 내일은 다 같이 훌륭한 인물이고 뛰어난 수재인 두 사람이 사격을 교환한 뒤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고 친구가 되는 날이라는 것, 그런 말을 그에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라에프스키를 끝내 만나지 못했다. "내가 뭣 하러 그 사람 집에 갈 까닭이 있단 말이오!" 사모이렌코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내가 그 사람을 모욕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를 모욕한 게 아니오. 당신에게 물어 보고 싶은 말인데, 도대체 그 사람은 어째서 내게 덤벼들었던 거요? 내가 그에게 무슨 몹쓸 짓을 했다는 거요? 내가 그에게 무슨 몹쓸 짓을 했다는 거요? 내가 응접실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갑자기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스파이라고 대들질 않았소. 정말 어처구니없었어! 어디 말해 봐요. 왜 그런 일이 벌어졌던 거요? 당신이 뭐라고 했소?" "놈의 처지는 절망적이라고 해 줬어요. 또 사실이 그러니까, 어떠한 궁지에 몰린다 하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발견할 수 있는 건 정직한 사람이거나 사기꾼뿐이지. 동시에 정직한 사람이기도 하고 사기꾼이기도 한 사람에게는 빠져 나갈 구멍이 없어요. 그건 그렇고, 벌써 열 한 시군. 내일은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안 돼요." 갑자기 바람이 일었다. 바닷가에 난 길 위에 먼지가 일고, 빙글빙글 회오리바람이 되는가 싶더니, 휘이 하는 소리를 내어 물결 소리를 지웠다. "질풍이군!" 신부가 말했다. "어서 가 봐야겠어. 눈에 먼지가 잔뜩 들어갔어." 그들이 걷기 시작하자, 사모이렌코가 한숨을 내쉬고, 제모를 눌러쓰며 말했다. "오늘 밤엔 아무래도 눈을 붙일 수 없겠군." "그처럼 흥분할 것 없어요." 동물학자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안심해도 돼요. 어차피 진짜 결투로는 되지 않을 것 같은걸. 라에프스키는 너그럽게도 하늘을 쏠 거요. 그놈으로서는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어떤가 하면, 틀림없이 전혀 쏘지 않게 될 거요. 라에프스키 때문에 재판을 받게 되어 시간 낭비를 하는 건 손해가 되니까. 그건 그렇고, 결투는 어떤 죄가 되는 거요?" "구류. 그렇지만 상대가 죽었을 경우에는 3년 이하의 요새 금고형을 받지요." "페트로파블로프스크에서 말이오?" "아니, 틀림없이 군의 요새일 거요." "사실은, 그 애송이에게 단단히 맛을 보여 줘야 하는 건데." 뒤쪽 바다 위에서 번갯불이 번쩍이며 한 순간 지붕과 산들을 환히 비췄다. 가로수 길 근처에서 세 사람은 헤어졌다. 군의관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발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폰 코렌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내일은 날씨가 나쁘지 말아야 할 텐데." "글쎄, 아마 괜찮을 거요!" "그럼, 안녕!" "뭐라구? 뭐라고 말했소?" 바람 소리와 물결 소리와 천둥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니오!" 하고 동물학자는 소리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17. ...우수에 잠긴 내 가슴에 괴로운 생각들이 소용돌이친다. 추억은 말없이 내 앞에 긴 두루마리를 펼친다. 지겨운 나의 삶의 이야기에, 나는 몸을 떨며, 저주의 소리를 지르고, 비탄의 뜨거운 눈물을 뿌린다. 그러나 슬픈 글자는 지워질 리 없다. --푸시킨 내일 아침 죽게 되든, 혹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든--말하자면 목숨을 부지하여 살아나더라도, 어차피 자기는 파멸인 것이다. 창피를 당한 그녀도 절망과 수치심 때문에 자살을 하든 또는 비참한 생존을 더 계속해 나가든, 역시 어차피 파멸인 것이다. 라에프스키는 그 날 밤늦도록 테이블 앞에 앉아서, 여전히 손을 비비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창문이 열리며 콰당 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센 바람이 방 안으로 불어 들어와 테이블 위의 종이를 날렸다. 라에프스키는 창문을 닫고 허리를 굽혀 마룻바닥에서 종이를 집어 들려고 했다. 그는 자기의 몸 안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 전에는 없었던 일종의 딱딱함을 느끼고, 자기의 동작이 마치 남의 동작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양팔꿈치를 펴고, 어깨를 가볍게 떨며 불안한 발걸음으로 걷고 있다가, 이윽고 테이블 앞에 앉자, 또다시 손을 비비기 시작했다. 유연성을 잃고 있었다. 죽기 전날 밤에는 집안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써 놓지 않으면 안 된다. 라에프스키는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펜을 들고 떨리는 손으로 글을 썼다. '어머니!' 당신이 믿고 있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제가 망신을 시킨 저 불행한 여자, 고독하고 가난하고 약한 여자를 맡아서 친절히 위로해 주십시오. 모든 것을 잊으시고,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희생적인 행위에 의해서, 당신의 아들이 저지른 죄를 조금이라도 속죄해 주십시오--그는 이렇게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뚱뚱해진 그의 어머니가 레이스로 된 모자를 쓰고 아침에 집에서 뜰로 나오는 모습, 같이 살고 있는 여자가 그 뒤에서 개를 데리고 따라가는 모습, 같이 살고 있는 여자가 그 뒤에서 개를 데리고 따라가는 모습, 어머니가 거친 목소리로 정원사나 하녀들을 야단치고 있는 모습, 그리고 거만하고 심술궂은 어머니의 얼굴 따위가 머리에 떠오르자 막 써 놓은 글씨를 지워 버렸다. 세 개 있는 창문 모두에 번갯불이 번쩍이고, 그 뒤에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천둥소리가 울렸다. 처음에는 낮은 소리였으나, 이윽고 숨 막할 듯한 큰 소리로 변하여, 창문의 유리가 덜커덩거릴 정도로 심하게 울렸다. 라에프스키는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가서 이마를 유리창에 댔다. 바깥은 무시무시하고도 아름다운 뇌우가 퍼붓고 있었다. 수평선에서는 번갯불이 하얀 줄을 긋고 끊임없이 검은 구름 속에서 바다로 떨어져 내리어, 드넓은 바다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검은 물결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번갯불은 쉴 새 없이 번쩍거렸고, 아마 지붕 위에서도 그럴 것이 틀림없었다. "뇌우!" 하고 라에프스키는 중얼거렸다. 그는 누구에든가, 무엇에든가, 번갯불이어도 좋고 먹구름이어도 좋으니, 어쨌든 기도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운 뇌우!" 그는 어렸을 때의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 무렵, 자기는 뇌우가 몰아치면 흔히 모자도 쓰지 않고 뜰로 뛰어나갔던 것이다. 그러면 푸른 눈의, 얼굴이 새하얀 금발의 여자 아이 둘이 자기 뒤를 쫓아왔다. 세 사람은 모두 비를 맞으면서 어찌나 즐거운지 낄낄거리고 웃는다. 그러나 요란한 천둥소리가 울리면 여자 아이들은 그 때마다 천진 난만하게 소년의 가슴에 매달린다. 소년은 성호를 긋고 서둘러,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고 되뇐다. 아아, 너희들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들, 아름답고 깨끗한 생활의 새싹들은? 나는 이제 뇌우를 두려워하거나 자연을 사랑할 수도 없게 되었다. 하느님을 잃었다. 일찌기 내가 알고 있었던 천진 난만한 소녀들도 모두 나와 내 패거리들 때문에 몸을 망치고 말았다. 일생 동안 나는 우리 집 뜰에 한 그루의 나무도 심지 않았고, 한 포기의 풀도 키우지 않았고, 목숨이 있는 것 가운데서 살면서도 파리 한 마리 구하지 않았다. 다만 파괴하고 멸망시키고, 그리고 끊임없이 거짓말만 해 왔을 뿐이다.... '나의 과거 가운데서 악덕이 아닌 것이란 무엇일까?" 벼랑에서 떨어지던 사람이 나뭇가지에 매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밝은 옛 기억에 매달리려고 애쓰면서, 그는 이렇게 자문하였다. 고교는? 대학은? 그러나 이것 또한 엉터리였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배운 것도 모두 잊고 말았다. 사회에 대한 봉사는? 그것도 또한 말이 아니다. 관청에 나가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월급이나 거저 타먹었기 때문이다. 자기 근무는 재판 사태로까지 되지는 않았지만, 실은 꺼림칙한 공금 낭비였던 것이다. 진리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것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의 양심은 악덕과 거짓에 얽매여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렇잖으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이방인처럼 또는 다른 유성에서 고용되어 온 사람처럼 사람들과의 공동 생활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들의 괴로움이나 사상이나 종교나 학문이나 탐구나 투쟁에도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을 단 한 마디도 한 일이 없었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독창적인 것을 단 한 줄도 쓴 일이 없었다. 무엇 하나 남을 위해서 한 일이 없었다. 다만 그들의 빵을 먹고, 그들의 포도주를 마시고, 자기의 구역질나는 기생충 같은 생활을 그들과 자기 자신에게 변명하기 위해 언제나 자기가 그들보다 높고 뛰어난 사람인 것 같은 얼굴을 해 왔을 뿐이었다. 거짓이다, 거짓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거짓인 것이다.... 그는 간밤에 뮤리도프의 집에서 본 일을 생생하게 기억해 내고, 혐오감과 비통함으로 등골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키릴린과 아치미아노프는 구역질나는 치들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들은 내가 시작한 것을 이어받았을 뿐이다. 그들은 나와 동류이고, 제자인 셈이다. 나를 형제 이상으로 믿어 주던 젊고 약하디 약한 여자로부터 나는 남편을 빼앗고, 친구와 고향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녀를 이리로--무더위와 열병과 권태 속으로 데리고 왔다. 하고많은 날, 그녀는 나의 무위와 배덕과 허위를 거울처럼 자기 마음속에 비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으로, 아니 그것만으로 그녀의 약하고, 게으르고, 비참한 생활은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그녀에게 신물이 났고 진저리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버릴 용기도 없는 채, 마치 거미처럼 그녀를 더욱더 거짓으로 꽁꽁 얽매려고 애써 왔던 것이다.... 그 마무리를 그 두 사람이 했던 것이다. 라에프스키는 테이블 앞에 앉아 보기도 하고, 창가로 가 보기도 했다. 촛불을 꺼 보기도 하고, 다시 켜 보기도 했다. 소리를 내어 자신을 저주하고, 울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며 용서를 빌기도 했다. 절망한 끝에 몇 번이나 테이블 곁으로 달려가서, '어머니!' 하고 썼다. 어머니말고는 단 한 사람의 식구도, 단 한 사람의 가까운 친구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어머니에게 살려 달라고 할 것인가. 그리고 어머니는 어디 있는 것인가. 그는 나데지다에게 달려가서, 그녀의 발 앞에 몸을 내던져 그녀의 손과 발에 키스하고, 간절히 용서해 달라고 빌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희생이었다. 그는 그녀를 죽은 사람처럼 두려워했다. "생활은 파멸이야!" 그는 손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무엇 때문에 나는 아직껏 살고 있는 것인가. 아아...." 그는 빛이 희미해진 자기의 별을 하늘에서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별을 떨어지고, 그 빛은 밤의 어둠이 삼켜 버렸다. 별은 이제 하늘로 되돌아갈 수 없다. 인생은 한 번 주어질 뿐이지 되풀이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지나간 세월을 다시 돌아오게 할 수만 있다면, 그는 지난날의 허위를 진실로, 무위를 근로로, 권태를 환희로 바꾸고, 자기가 순결을 빼앗은 사람들에게 그 순결을 되돌려 줄 것이다. 하느님과 정의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떨어진 별을 다시 하늘로 되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는 절망에 빠진 것이다. 뇌우가 물러간 뒤, 열어 놓은 창가에 앉아서, 앞으로 자신의 신상에 일어날 일들을 냉정히 생각해 보았다. 폰 코렌은 아마도 나를 죽일 것이다. 그의 명석하고 냉혹한 세계관은 허약자나 열등한 사람의 절멸을 털끝만큼도 망설이지 않는다. 가령 그의 세계관이 막상 그 때 가서 흔들린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의 마음에 불러일으킨 증오와 혐오감이 그를 부채질할 것이다. 만일 그가 잘못 쏘던가 또는 미운 적을 웃음거리로 삼기 위해서 그저 상처만 입히던가 공포를 쏘던가 하면, 그 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페테르스부르크로 간다는 것은?' 라에프스키는 자문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다름아니라, 현재 내가 저주하고 있는 옛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철새처럼 장소를 바꿈으로써 구원을 받으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디로 가든, 대지는 언제나 같은 대지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구원을 청하는 것은? 그러나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청할 것인가? 사모이렌코의 온정이나 관대라 할지라도, 신부의 웃음이나 폰 코렌의 증오와 마찬가지로 남을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원을 자기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거기서도 구원을 찾을 수 없다면 그 때에는 시간을 낭비하는 짓은 그만두고 자살해야 한다. 그것으로 만사는 끝나는 것이다....' 마차 소리가 들려 왔다. 이미 날이 새고 있었다. 반포장 마차는 일단 지나갔다가 방향을 바꾸어 축축한 모래땅에 차바퀴 소리를 내면서, 집 앞에서 멈추었다. 타고 있는 사람은 둘이었다. "잠깐 기다려 주게, 곧 나갈 테니!" 라에프스키는 창 너머로 소리쳤다. "일어나 있었어. 벌써 시간이 되었는가?" "응, 네 시야. 아직 시간은 있어...." 라에프스키는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고, 호주머니에 담배 몇 개비를 넣었는데, 그 때 문득 멈추어 서서 생각에 잠겼다. 아직 무엇인가 해야만 할 일이 남아 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한 길에서는 입회인들의 낮은 이야기 소리와 말의 콧소리가 들려 왔는데, 주위가 죽은 듯이 조용하고, 하늘만이 희끄무레해지고 있는 습기 찬 새벽녘에 들려 오는 이와 같은 소리는, 라에프스키의 마음은 불길한 예감과 비슷한 우수로 가득 차게 했다.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침실로 발길을 옮겼다. 나데지다는 격자 무늬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자기 침대에 길게 누워 있었다. 까딱도 하지 않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특히 머리 모양이 이집트의 미이라와 비슷했다. 아무 말 없이 그녀만 바라보면서, 라에프스키는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고, 만일 하늘이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정말 하느님이 있는 것이라면, 하느님은 그녀를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 만일 하느님이 없다고 한다면 그녀는 깨끗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좋다. 더 이상 살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녀는 갑자기 일어나더니 침대 위에 앉았다. 창백한 얼굴을 들고, 겁에 질려서 라에프스키 쪽을 보면서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었군요. 소나기는 그쳤나요?" "응, 그쳤어." 그녀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리하여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온몸을 떨었다. "괴로워 죽겠어요!" 그녀는 말했다. "얼마나 괴로운지를 알아 주신다면...! 저는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는 거의 눈을 감다시피 하고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당장에라도 저를 죽이시던가, 그렇지 않으면 저 천둥치는 빗속으로 내쫓아 버릴 거라고 말예요. 하지만 당신은 언제까지고 망설이고... 망설이고 계시는군요...." 그는 그녀를 와락 껴안고, 그녀의 무릎과 손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그녀가 무엇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지난 일을 생각하여 몸을 떨었을 때,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이 불행하고 행실 나쁜 여자야말로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몹시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깥으로 나가 마차를 탈 때 그는 살아서 집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18. 신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굵은 마디투성이인 지팡이를 들고 살그머니 집을 나왔다. 바깥은 깜깜해서 길을 걷기 시작한 처음 몇 분 동안은 자기의 지팡이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는 별 하나 없었고, 또 비가 내릴 것 같기만 했다. 축축한 모래와 바다 냄새가 났다. '이래 가지고는 체첸인이 습격해 올 리는 없겠지.' 자기의 지팡이가 포도를 짚고 가는 소리와 그 때마다 밤의 고요를 깨뜨리는 높고 쓸쓸하게 울리는 메아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보좌 신부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시내를 벗어나자, 길과 지팡이도 보이게 되었다. 깜깜한 하늘 군데군데에 희끄무레한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윽고 별 하나가 얼굴을 내밀고, 하나밖에 없는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신부는 자갈투성이인 높은 벼랑 위를 걸어가고 있었으므로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바다는 아래쪽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나른한 듯이 무겁게 바위를 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물결 소리가 마치 휴우 하고 한숨을 토해 내고 있는 듯이 들렸다. 그리고 그 물결의 느릿한 소리! 한 번 물결이 기슭을 때리고부터, 신부가 여덟 걸음을 걸어가야 겨우 다음 물결이 몰아친다. 그리고 또 여섯 걸음 걸어가면 세 번째 물결 소리가 난다고 하는 투이다. 똑똑히 보이는 것이라고는 무엇 하나도 없고, 어둠 속에서 나른하고 졸리는 듯한 바다 소리만이 들려 올 뿐이었다. 하느님이 혼돈 위를 달리고 있을 무렵의, 한없이 아득하고 상상을 초월한 '시간'이 들려 올 뿐이었다. 신부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비신자들과 어울리고, 그 결투까지를 보러 가는 것을 하느님이 벌하시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결투가 장난이나 다름없는, 해롭지 않고 우스꽝스런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결투 자체가 이교적인 구경거리임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런 자리에 나가는 것은 틀림없이 성직자로서의 길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채질하는 것 같은 강한 호기심이 그 같은 회의를 억눌러, 그는 또 걷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은 비신자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좋은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구원을 받겠지.'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자신을 달랬다. "틀림없이 구원을 받아!" 하고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말했다. 사람을 올바르게 판단하려면, 어떠한 자를 가지고 그 사람의 가치를 재면 좋을 것인가. 신부는 자기와는 원수 사이인 신학교의 학생 과장 생각을 했다. 그는 믿음이 깊고, 결투를 한 일도 없고, 정결한 맹세에 어긋난 짓을 한 일도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언젠가 나에게 모래가 들어 있는 빵을 먹게 한 일이 있고, 어떤 때는 떨어져 나가지나 않을까 하고 여겨질 만큼 세게 내 귀를 잡아당기지 않았던가. 그와 같은 냉혹한 학생 과장, 게다가 정부의 밀가루를 횡령하는 부정을 저지르고 있는 인물을 모두들 존경하고, 학교에서도 그의 평안과 구원을 기도하기도 했지만, 만일 세상이 그처럼 편리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면, 폰 코렌이나 라에프스키와 같은 인물을 비신자라고 하는 까닭만으로 경원하는 것은 과연 지당한 일일까? 신부는 이 문제를 풀려고 하였으나, 문득 오늘의 사모이렌코의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우스꽝스런 얼굴이 머리에 떠오른 순간 생각이 끊어지고 말았다. 내일에는 또 얼마나 많은 우스운 일이 벌어질까! 신부는 자기가 덤불 속에서 몸을 감추고 엿보고 있는 모습과 내일 점심때에 폰 코렌이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하면, 자기가 웃으면서 결투 광경을 자세히 들려주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그려보았다. '어떻게 그처럼 하나에서 열까지 알고 있소?' 하고 동물학자가 물을 것이다. '바로 그 점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도 모든 것이 훤하다, 하는 거죠.' 결투 이야기를 재미있고 우습게 편지로 쓰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장인은 그것을 읽고 웃음을 터뜨릴 것이 틀림없다. 장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스운 이야기를 듣거나 읽거나 하는 것을 원래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보다 좋아하니까 말이다. 황하의 계곡이 눈앞에 펼쳐졌다. 강물은 비 때문에 넓게 불어났고 물살도 사나와져서, 요전번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날이 밝았다. 잔뜩 찌푸린 잿빛의 아침, 소나기구름을 따라붙으려고 서쪽으로 달리는 구름, 안개에 싸인 산들, 축축하게 젖은 나무들--모든 것이 흥이 깨져서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는 냇물로 얼굴을 씻고, 아침 기도를 올리자, 장인 집에서 아침마다 식탁에 나오는, 신 크림을 바른 따끈따끈한 둥근 빵에 차를 곁들여 먹고 싶었다. 아내와 그녀가 피아노를 치는 '돌아오지 않는 옛날'이라는 곡이 생각났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신부는 한 주일만에 소개를 받고, 혼담이 오가다가 결혼을 했다. 그러나 한 달도 채 같이 살아 보기 전에 이리 파견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도 그녀가 도대체 어떤 여자인지 짐작도 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그녀가 없자 왠지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소식 없이 지났군. 아내에게 편지를 써 보내야겠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술집 깃발이 비를 맞아서 축 처져 있었다. 술집 자체도 지붕이 젖어서 어둡고 또한 낮아진 것 같았다. 입구 쪽에는 짐마차 한 대가 서 있었고, 케르바라이와 어떤 아프하지아인 둘과 케르바라이의 아내, 혹은 딸인 듯한 헐렁한 바지를 입은 젊은 타타르 여자가 가게 안에서 무엇인가 든 부대를 들고 나와서는 옥수숫대를 깐 그 짐마차에 싣고 있었다. 짐마차 곁에는 머리를 숙이고 있는 당나귀 두 마리가 서 있었다. 부대를 다 싣자, 두 아프하지아인과 타타르 여자가 그 위에 짚을 덮고, 케르바라이가 서둘러 당나귀를 마차에 맸다. '밀수인가...?' 하고 신부는 생각했다. 아, 저기에 마른 잎을 단 채로 쓰러져 있는 그 나무가 있다. 아, 모닥불을 피웠던 검은 자리도 보인다. 들놀이 때의 일이 하나도 빠짐없이 생각났다. 모닥불, 아프하지아인의 노래, 대주고의 자리와 십자가 행렬에 관한 황홀한 공상.... 흑하도 비 때문에 더욱 빛깔이 검어졌고, 강의 넓이가 넓어져 있었다. 신부는 탁류의 소용돌이가 거의 닿을 것 같은 위험스런 다리를 조심스럽게 건너고, 사닥다리를 타고 건초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멋진 사나이야!' 짚 위에 몸을 누이고 폰 코렌 일을 되새기며 그는 생각했다. '멋진 사나이야. 부디 무사해야 할 터인데. 잔인한 점이 옥의 티이기는 하지만....' 어째서 그는 라에프스키를 미워하고 또 라에프스키는 그를 미워하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두 사람은 결투 같은 것을 하는 것일까? 만일 그 두 사람이 자기와 같이 어릴 때부터 가난했다고 한다면, 배우지도 못하고, 마음이 비뚤어지고, 돈 모으기에 급급한 사람들과 한 조각의 빵에도 눈이 시뻘개지고, 야비하고, 무례하며, 마룻바닥에 함부로 침을 뱉고, 식사 때에나 기도 때에도 태연히 트림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자라났다고 한다면, 그리고 어릴 때부터 좋은 환경과 뛰어난 사람들 속에서 귀여움을 받고 자라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두 사람은 얼마나 서로 의지하고, 얼마나 기꺼이 상대방의 결점을 용서해 주고, 장점을 서로 존중할 것인가. 겉치레뿐인 신사들도 세상에는 퍽 많지 않은가! 하긴 라에프스키는 비상식적이고, 방종하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의 것을 훔친다거나 보아란 듯이 마룻바닥에 침을 뱉거나 아내에게, '밥만 잔뜩 처먹으면서도 일도 하지 않는다.' 하고 고함을 치거나 아이를 고삐로 때리거나 하인에게 냄새가 고약한 소금에 절인 고기를 먹이거나 하는 따위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를 관대하게 대우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하는 것일까? 게다가 그는 환자가 상처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있듯이 남보다 먼저 자기 자신의 결점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심풀이나 사소한 오해에서, 퇴화라거나 사멸이라거나 유전이라거나 그와 같은 알 수도 없는 것을 서로 들추어 내기보다는 조금만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아주 무식하고 탐욕과 잔소리와 불결과 욕설과 째지는 듯한 목소리로 거리라는 거리가 온통 신음하고 있는 방향으로, 그 증오와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마차 소리가 났으므로, 신부의 생각은 중도에서 끊어졌다. 그는 문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반포장마차가 오는 것을 보았다. 마차에는 라에프스키, 셰시코프스키, 그리고 우체국장, 이렇게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멈춰!" 셰시코프스키가 소리쳤다. 세 사람은 모두 마차에서 내려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아직 안 왔군." 셰시코프스키는 옷에 묻은 흙을 떨면서 말했다. "어쨌든 좋아. 저 쪽에서 늦어지는 동안 이 쪽에선 적당한 장소나 찾아 놓기로 하지. 여기는 몸 하나 꼼짝할 수 없으니." 그들은 강의 상류를 향하여 걸어가, 이윽고 보이지 않게 되었다. 타타르인 마부는 마차 속으로 들어가 목을 웅크리고 잠을 잤다. 10분쯤 사정을 살펴보고 나서 신부는 건초 오두막에서 나와 들키지 않도록 검은 모자를 벗고 몸을 낮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덤불과 옥수수밭 사이를 지나 강가를 걸어갔다. 나무들과 덤불에서 큰 물방울이 그에게 떨어졌다. 풀과 옥수수도 흠뻑 젖어 있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 그는 젖어 흙투성이가 된 옷자락을 걷어 올리며 투덜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말 걸 그랬어." 곧 사람 소리가 나고,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라에프스키는 두 손을 팔 소매에 찌르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고 숲 가장자리에 있는 풀밭을 빠른 걸음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입회인들은 물가에 서서 담배를 말고 있었다. '이상한걸....' 신부는 마치 사람이 달라진 것 같은 라에프스키의 걸음걸이를 보고 생각했다. '꼭 노인네 같아.' "정말이지 예의도 모르는 놈들이야." 우체국장이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투덜거렸다. "학자식으로 하면 지각을 해도 좋은지 모르지만, 우리네 식으로 말하면 이건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야." 구레나룻을 기른 뚱뚱한 셰시코프스키가 갑자기 귀를 기울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왔어요!" 19. "난생 처음 봤어요! 정말 근사하지 않습니까!" 폰 코렌은 풀밭으로 모습을 나타내기가 무섭게, 두 손으로 동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보세요. 초록빛 광선입니다!" 동쪽 하늘에서는 산들 사이에서 초록빛을 띤 두 줄기 광선이 비치고 있어서,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을 이루고 있었다. 해가 떠오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안녕들 하시오!" 라에프스키의 입회인들에게 인사를 하며 동물학자는 말을 이었다. "지각을 하지 않았나요?" 그의 뒤에 역시 입회인들이 따르고 있었다. 하얀 제복을 입은, 키가 비슷한 아주 젊은 두 삶의 사관 보이코와 고보로프스키, 그리고 빼빼 마른 몸매에 사람을 싫어하는 의사 우스치모비치가 입회인들인데, 우스치모비치는 한 손에 무슨 꾸러미를 들고, 또 한 손을 뒤로 돌리고 있었는데, 그의 버릇대로 등에 지팡이가 늘어져 있었다. 그는 꾸러미를 땅에 놓더니 아무에게도 인사 한 마디 하지 않고, 빈 손을 뒤로 돌리고 풀밭을 걷기 시작했다. 라에프스키는,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여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는 사람이 느끼는 정신적 피로와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죽이던가 집으로 데리고 갔으면 하고 바랐다.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는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그 동트는 광경이나 초록빛 광선, 축축한 공기, 흠뻑 젖은 장화를 신은 사람들도 자기의 생활에는 부질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져 거북하기만 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간밤에 내가 맛본 기분, 여러 가지 상념이나 죄의 감정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투가 벌어지기 전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폰 코렌은 눈에 띄게 흥분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숨기려고 초록빛 광선에 가장 흥미를 느끼고 있는 체하고 있었다. 입회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기들이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서로 묻고 있기라도 하듯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러분, 더 이상 앞으로 갈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하고 셰시코프스키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좋지 않을까요?" "물론입니다." 폰 코렌이 동의했다. 침묵이 흘렀다. 우스치모비치는 줄곧 서성거리고 있더니, 갑자기 라에프스키 쪽으로 휙 몸을 돌리고, 그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조건을 아마 당신에게 아직 전하지 않았나 보군요. 어느 쪽이나 15루우블리씩 지불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쪽인가 사망했을 경우에는 살아 남은 분이 30루우블리 전액을 지불하셔야 합니다." 라에프스키는 전부터 이 사나이를 알고 있었지만, 그의 흐리멍덩한 눈과 무서워 보이는 콧수염, 뼈와 가죽만 남아 있는 결핵 환자 같은 목덜미를 똑똑히 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이 놈은 고리 대금업자야, 의사가 아니다! 숨결에서도 쇠고기 냄새와 같은 불쾌한 냄새가 났다. '세상에는 참으로 별의별 인간이 다 있는 법이야.' 하고 라에프스키는 생각하고 대꾸를 했다. "좋아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걷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돈을 받으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고, 다만 밉기 때문에 그런 요구를 한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제 슬슬 시작하던가, 이미 시작된 일이 끝나야 할 때라고 느끼면서도, 시작하려고 하거나 끝내려고 하지도 않고 거닐거나 서성거리거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젊은 사관들은 결투에 입회하는 것은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으나,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군인도 아닌 사람이 벌이는 필요 없는 이 결투를 지금은 별로 신용하지 않고, 자기들의 제복을 주의 깊게 점검하거나, 소매 끝의 주름을 펴고 있었다. 셰시코프스키는 그들 곁으로 가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나는 이 결투가 성립되지 않도록 온 힘을 기울일 작정입니다. 두 사람을 화해시켜야만 해요." 그는 얼굴이 벌개져서 말을 이었다. "간밤에 키릴린이 우리 집에 왔었는데, 어제 나데지다와 함께 있는 장면을 라에프스키에게 들켰다고 하면서 투덜거리고 있었어요." "그래요. 우리도 그 얘길 들었어요." 하고 보이코가 말했다. "그래서 보시다시피... 라에프스키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래 가지고는 권총이나 잡을 수 있겠어요? 저 사람과 결투를 한다는 것은 인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마치 술 취한 사람이나 티푸스 환자와 결투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화해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여러분, 하다 못해 결투를 며칠 연기하도록 하는 게.... 아무래도 너무나 끔찍한 일이어서 눈 뜨고 차마 볼 수 없군요." "폰 코렌에게 당신이 직접 말해 보세요." "나는 결투 규칙도 모르고, 흥미도 없어서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저 친구는 라에프스키가 겁을 집어먹고 나를 보낸 것이라고 여길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생각하라고 내버려두지. 어디 한번 얘기해 볼까." 셰시코프스키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아, 마치 한쪽 발이 마비라도 된 듯이 가볍게 다리를 절며 폰 코렌 쪽으로 다가갔다. 헛기침을 하면서 걸어가고 있는 동안, 귀찮아 못 견디겠다는 듯한 기색이 온몸에 나타나 있었다. "실은 당신에게 긴히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만...." 그는 동물학자의 셔츠의 꽃무늬를 주의 깊게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들끼리 하는 얘기입니다.... 나는 결투 규칙도 모르고, 흥미도 없어서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만, 입회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알았어요, 그래서요?" "입회인이 화해를 권하는 경우, 대개는 거절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요컨대 그 권고는 단순한 절차로 보는 거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죠. 그렇지만 나는 라에프스키 씨의 사정을 한번 눈여겨보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오늘 정상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기분이 뒤틀려서 보기에도 딱할 정도입니다. 사실은 불행한 일을 당했거든요. 나는 남의 말을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질색입니다만." 셰시코프스키는 얼굴을 붉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제부터 결투를 하려는 마당이므로 아무래도 귀띔을 해 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실은 어젯밤 저 사람은 뮤리도프네 집에서 부인이... 어떤 신사와 함께 있는 것을 봤던 거예요." "지저분한 얘기군!" 동물학자는 중얼거렸다. 그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눈살을 찌푸리고, 큰 소리를 내며 침을 뱉었다. "퉤!"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그 이상 듣기를 거부하는 듯이 셰시코프스키의 곁을 떠나, 잘못해서 저도 모르게 쓰디쓴 것을 맛보았을 때와 같이 또 한 번 큰 소리를 내서 침을 뱉더니, 미워 죽겠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오늘 아침 비로소 라에프스키 쪽을 보았다. 좀 전까지의 흥분과 어색한 표정을 사라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한번 흔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까, 네? 왜 시작하지 않는 거죠?" 셰시코프스키는 사관들과 눈길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했다. "여러분!" 그는 누구를 향해 하는 것도 아닌 큰 소리로 다시 외쳤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화해를 제안합니다!" "절차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끝내는 게 어때요?" 그리고 폰 코렌은 이어서 말했다. "화해 이야기는 이미 나왔어요. 그 다음에 또 무슨 절차가 남아 있는 겁니까? 서둘러 주었으면 좋겠군요, 여러분. 시간이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또 화해를 주장합니다." 셰시코프스키는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람처럼 아주 미안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얼굴을 붉히고 한 손을 심장 위에 대고 말을 이었다. "여러분, 우리는 모욕과 결투 사이에 인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약점 때문에 우리들이 때로 서로 주고 있는 모욕과 결투 사이에는 무엇 한 가지 공통점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교양이 있는 분들이므로 물론 결투를 시대에 뒤떨어진 헛된 절차라고 보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결투를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여기에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눈앞에서 인간이 서로 총질을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점입니다." 셰시코프스키는 얼굴의 땀을 닦고, 또 말을 이었다. "여러분, 여러분의 오해를 풀고, 서로 악수를 해 주세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화해 기념으로 한잔 드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저는 진심으로 그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폰 코렌은 잠자코 있었다. 라에프스키는 모두가 자기 쪽을 보고 있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폰 코렌 씨에 대해서 원한을 품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일 그분이 제가 나쁘다고 한다면, 저는 사과해도 괜찮습니다." 폰 코렌은 발끈하여 말했다. "아무래도 여러분은 라에프스키 씨가 관대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기사로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고 계신 것 같지만, 나는 여러분과 그리고 라에프스키 씨에게 그 같은 만족감을 줄 수는 없군요. 도대체 화해하는 뜻에서 한잔 한다든가, 모두가 회식을 한다든가, 결투는 시대에 뒤떨어진 절차라고 하는 그런 설명을 듣기 위해서라면, 무엇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시내에서 1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올 필요가 있었겠습니다. 결투는 결투입니다. 그것을 실제 이상으로 어리석고 부자연스런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저는 싸울 것을 희망합니다!" 침묵이 찾아왔다. 사관 보이코가 상자에서 권총 두 자루를 꺼내어, 한 자루를 폰 코렌에게, 다른 한 자루를 라에프스키에게 건네 주었다. 그런 뒤에 사소한 혼란이 일어나서, 동물학자와 입회인을 재미있게 했다. 즉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결투의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 입회인들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아무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윽고 보이코가 생각을 해내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여러분, 레르몬토프에 어떻게 씌어 있는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 없습니까?" 폰 코렌이 웃으면서 물었다. "아마 투르게네프의 작품에서도 바잘로프가 누군가와 서로 총질을 하는 대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생각해 보고 말고 할 게 없지 않습니까." 우스치모비치가 걸음을 멈추고 조급한 듯이 말했다. "거리를 재세요. 문제는 그것뿐이에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이렇게 재는 것이라고 하는 듯이 세 걸음쯤 걸어 보였다. 보이코가 걸음 수를 세고, 그의 동료가 칼을 뽑아 땅바닥을 긁어 양쪽 끝에 경계를 나타내는 줄을 그었다. 두 사람의 적수는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제자리에 가서 섰다. '두더지다.' 하고 덤불 속에 앉아 있던 신부가 생각했다. 셰시코프스키가 무슨 말인가를 하고 보이코가 무엇이라고 설명을 했으나, 라에프스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들리지 않았다기보다는, 들리기는 했으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때가 되자 그는 공이치기를 올리고, 싸늘하고 무거운 권총 총부리를 위로 올렸다. 외투 단추 벗기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으므로, 어깨와 겨드랑이 밑이 몹시 갑갑하였고, 그리고 소맷부리가 양철로라도 되어 있는 것 같아서, 손을 들어 올리려고 하자 몹시 부자연스런 꼴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거무스름한 이마와 고수머리에 대하여 어제 느끼고 있었던 자기의 증오를 되새기며, 어제도, 그 심한 증오와 노여움의 순간에서도, 사람을 쏘는 일은 자기로서는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총알이 어떤 찰나에 폰 코렌에게 맞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는 권총을 더욱 더 높이 올렸다. 이와 같은 관대성을 과시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고 관대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느끼고는 있었으나 다른 방법을 알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할 길이 없었다. 어차피 이 쪽에서는 공포를 쏠 것이라고 미리부터 확신하고 있는 듯한 폰 코렌의 창백하고 비웃는 듯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라에프스키는 생각했다. 아아, 고마운 일이다. 이제 곧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조금만 힘을 들여서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깨에 강한 반동이 왔는가 싶더니 총 소리가 우리며 산울림이 되어 되돌아왔다. "탕!" 이번에는 폰 코렌이 공이치기를 올리고, 우스치모비치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두 손으로 뒷짐을 지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알 바가 아니라는 듯한 얼굴을 하고, 여전히 걸어다니고 있었다. "의사 선생." 하고 동물학자가 말했다. "제발 부탁이에요.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일일랑 그만 두시지 않겠소. 눈앞이 어른거려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의사는 멈추어 섰다. 폰 코렌은 라에프스키에게 겨냥을 하기 시작했다. '이젠 끝장이다!' 하고 라에프스키는 생각했다. 정확하게 자기의 얼굴로 향해진 총부리, 폰 코렌의 자세와 온몸에 나타나 있는 증오와 모멸의 표정, 한 신사가 대낮에 여러 명의 신사들 눈앞에서 막 행하려고 하고 있는 살인, 이 고요, 라에프스키로 하여금 도망치지도 못하고 꼿꼿이 서 있게 하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힘--그것은 모두 얼마나 신비스럽고 불가해하고 끔찍한 일인가! 폰 코렌이 겨냥을 하고 있는 시간은, 라에프스키에게는 밤보다도 길게 여겨졌다. 그는 애원하는 듯한 눈으로 입회인들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빨리 쏴 다오.' 하고 라에프스키는 생각하였다. 겁에 질려서 파르르 떨고 있는 자기의 비참한 얼굴은 폰 코렌의 마음속에 더욱더 큰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곧 죽여 줄 테다.' 이마를 겨냥하고, 이미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건드리며 폰 코렌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 물론 죽여 주는 거다....' "죽인다!" 하고 갑자기 어딘가 매우 가까운 곳에서 절망적으로 부르짖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총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에프스키가 서 있는 채 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자, 사람들은 부르짖음 소리가 난 쪽을 돌아다보고, 거기에 서 있는 신부를 발견했다. 그는 얼굴이 창백한 채 젖은 머리가 이마와 뺨에 달라붙었고, 온몸이 흠뻑 젖어서 흙투성이가 된 채 건너편 강가에 있는 옥수수밭에 서서, 어쩐 일인지 기묘한 웃음을 띠고 젖은 모자를 흔들고 있었다. 셰시코프스키는 기쁜 나머지 웃음을 터뜨렸으나, 이윽고 울기 시작하며 그 자리를 뜨고 말았다. 20. 얼마 뒤에 폰 코렌과 신부는 다리께에서 만났다. 신부는 흥분된 채 괴로운 듯이 숨을 몰아쉬면서,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가 공포에 쫓긴 것도 창피스러웠고, 흙투성이가 되어 있는 옷도 창피스러웠다. "당신이 죽일 생각인 것같이 내게는 보였거든요.... 참으로 인간성에 어긋나는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죠!" 그는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왜 이런 데 왔소?" 하고 동물학자가 물었다. "그건 묻지 마세요!" 하고 신부는 손을 젓고 말을 이었다. "악마가 부채질을 했어요. 가 봐라, 가 봐. 하고요.... 그래서 온 겁니다. 그렇지만 어찌나 무서운지 옥수수밭 속에서 자칫 죽을 뻔했어요. 하지만 잘 됐어요. 정말, 잘 됐어요....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군요." 신부가 중얼거렸다. "우리 주머니거미 아저씨도 아주 만족하겠죠.... 나는 어찌나 우스웠던지! 그런데 이것 한 가지만은 꼭 부탁하고 싶은데, 내가 여기 왔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상사의 꾸중을 듣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신부가 결투의 입회인이 됐다고 하면 곤란하거든요." "여러분!" 하고 폰 코렌이 말했다. "신부님은 여러분이 여기서 자기를 봤다는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해요. 골치 아픈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요." "참으로 인간성에 거슬리는 일이에요!" 신부는 한숨을 내쉬었다. "실례한 점은 제발 용서해 주세요. 어쨌든 아까 당신의 얼굴을 보고, 이건 틀림없이 죽이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내게는 저 파렴치한의 숨통을 끊어 버리고 싶은 강한 유혹이 있었어요." 폰 코렌이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이 바로 곁에서 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그만 실패하고 만 겁니다. 그건 그렇고, 저런 절차는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에서 열까지 귀찮군요. 그 덕분에 나는 몹시 지쳤어요, 신부님. 함께 마차를 타고 갑시다...." "아니, 고맙습니다만 저는 걸어가겠습니다. 옷을 말려야 하거든요. 아주 흠뻑 젖었고, 몸이 얼었거든요." "그럼 좋으실 대로 하시오." 지쳐 빠진 동물학자는 마차에 올라타면서 힘없이 말했다. 눈은 거의 감겨져 있었다. "좋으실 대로...." 모두들 마차 둘레를 서성거리거나 마차에 타거나 하는 동안, 케르바라이는 길가에 선 채 두 손을 배에 대고 공손히 절을 하고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 차, 마셔." 하고 신부는 케르바라이에게 말했다. "나, 먹고 싶어." 케르바라이는 러시아말을 잘 했으나, 신부는 서투른 러시아말로 하는 것을 타타르인이 오히려 더 잘 알아 들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오믈렛, 만들고, 치즈, 줘요...." "자, 어서 들어가십시오, 신부님." 하고 케르바라이는 절을 하면서 말했다. "무엇이든 드리겠습니다.... 치즈도 있고 포도주도 있습죠. 뭐든지 드시고 싶으신 대로 드세요." "타타르 말로 하느님은 뭐라고 하나요?" 신부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서 물었다. "당신의 하느님이나 우리 하느님이나 마찬가지예요." 신부의 질문을 알아 듣지 못하고 케르바라이가 말했다. "하느님은 누구의 하느님이나 마찬가지예요. 사람만이 다릅죠. 어떤 사람은 러시아인, 어떤 사람은 터키인, 어떤 사람은 영국인.... 가지가지 많은 사람이 있지만 하느님은 마찬가지예요." "그래요, 알았어요. 만일 모든 나라 사람이 유일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면, 왜 당신네들 회교도는 기독교도를 영원한 적으로 보고 있는 거죠?" "화내실 건 없습니다요." 케르바라이는 두 손을 배에다 대면서 말했다. "당신은 신부님, 저는 회교도. 당신은 식사를 하고 싶고, 전 식사를 만들어 드리고... 당신의 하느님이 어떠시니, 나의 하느님이 어떠니, 그런 골치 아픈 얘길 하는 건 부자들뿐이지 우리 같은 가난한 사람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요. 자, 어서 들기나 하세요." 술집에서 신학 문답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라에프스키는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속에서 회상에 잠겨 있었다. '모든 건 끝났어.' 그는 지난 일을 생각하고, 손가락 끝으로 목덜미를 살짝 만지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오른쪽 목덜미의 컬러를 댄 부분에, 길이와 굵기가 모두 새끼 손가락만하게 부은 상처가 나 있었고 그 자리에 인두라도 댄 것같이 따끔따끔 아팠다. 총알이 스친 것이다. 이윽고 집에 돌아와서부터는 그를 위한 길고, 이상하고, 달콤하고, 그리고 잠결과 같은 몽롱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는 감옥이나 병원에서 나온 사람처럼 그전부터 자주 보아서 낯이 익었을 사물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는, 테이블과 창문과 의자와 햇빛과 바다가 오랫동안 맛본 일이 없는 어린이와 같은 생생한 기쁨을 그의 가슴속에 불러일으키는 것에 새삼 놀라는 것이었다. 핏기를 잃고 몹시 수척한 나데지다는 그의 다정한 목소리와 기묘한 걸음걸이가 납득이 가지 않아서, 서둘러 자기 신변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이 양반은 아마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내가 말하는 것을 알아 듣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만일 죄다 알게 되면 틀림없이 욕설을 마구 퍼부은 끝에 나를 죽였을 것이다,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고,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내게는 당신말고는 아무도 없어...."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몸을 착 붙이고 아무 말 없이 있는가 하면 정답게 얘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21. 석 달 남짓 지났다. 폰 코렌이 떠나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아침 일찍부터 차갑고 굵은 빗발이 내리고, 북동풍이 불고, 바다에서는 높은 물결이 물보라를 튀기고 있었다. 이런 날씨로는 배가 닻을 내릴 수 있는 곳까지 도저히 들어올 수 없으리라는 이야기였다. 시간표대로라면 아침 아홉 시가 지나서는 배가 이미 도착되어 있을 것이지만, 폰 코렌이 정오에 점심을 먹은 뒤에 바닷가에 난 길에 나가 보았을 때에도, 그의 망원경에 비치는 것은 잿빛 물결과 수평선을 뒤덮고 있는 비뿐이었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비는 그치고, 바람도 눈에 띄게 약해지기 시작했다. 폰 코렌은 오늘은 떠날 수 없다고 단념하고, 사모이렌코를 상대로 장기를 두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두워진 뒤에 졸병이 와서 해상에 등불이 나타나고 횃불이 보였다고 보고했다. 폰 코렌은 당황했다. 작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사모이렌코와 신부와 키스를 나누고, 아무런 볼일도 없는데도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왔다 갔다 하고, 졸병과 여자 요리사에게도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군의 집이나 자기 집에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고 온 것 같은 기분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 한길에서는 그와 사모이렌코가 나란히 걷고, 그 뒤에 상자를 든 신부, 맨 뒤에는 트렁크 두 개를 들고 있는 졸병이 따랐다. 사모이렌코와 졸병만이 앞바다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등불을 알아보았으나, 다른 두 사람은 깜깜한 어둠을 아무리 바라보아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배는 먼 앞바다 쪽에 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빨리, 빨리! 꾸물거리다간 배가 떠나요." 하고 폰 코렌이 재촉했다. 라에프스키가 결투를 한 뒤 얼마 안 되어서 이사해 온, 창문이 세 개 있는 작은 집을 지나갔을 때, 폰 코렌은 아무래도 창문 안을 들여다보지 않고는 못 배겼다. 라에프스키는 창문으로 등을 돌리고 테이블 앞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놀라운걸." 동물학자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속박해 버렸군!" "음, 놀랄 만한 일이에요." 사모이렌코가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저렇게 아침부터 밤까지 앉은 채 계속 일만 하고 있는 거예요. 빚을 모두 갚을 작정입니다. 그렇지만 살림살이는 엉망이에요. 거지보다도 못한 걸요." 30초 가량 침묵이 흘렀다. 동물학자와 군의와 신부는 창밖에 서서, 라에프스키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저렇게 지내면서 결국은 떠나지 않았어요, 불쌍하게도." 하고 사모이렌코가 말했다. "당신도 기억하고 있을 테죠, 그 때 돈 때문에 쩔쩔매고 있던 일을." "정말이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속박해 버렸군요." 폰 코렌이 또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결혼을 하고, 한 조각의 빵을 위해서 저렇게 하루 종일 일만 하며, 얼굴 표정도 어딘가 모르게 전과는 다르고, 걸음걸이까지가.... 도무지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도 변하다니,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동물학자는 사모이렌코의 옷소매를 잡고, 아주 감동한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봐요, 저 사람에게도, 그리고 부인에게도 전해 줬으면 해요. 내가 떠날 때 두 사람에 대해서 감탄하고, 안부 전해 달라더라고 말해 줘요. ...그리고 만일 가능하다면, 나를 나쁘게 여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 줘요. 저 사람은 내 마음을 이해하고 있어요. 그 때 만일 내가 저와 같은 변화를 미리 짐작만 했었더라도, 저 사내의 썩 좋은 친구가 되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요." "잠깐 들러 인사를 하고 가는 게 어때요?" "아니, 그건 곤란해요." "왜요? 어쩌면 다시는 저 사람을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동물학자는 잠깐 생각해 보다가 대답했다. "그건 그래." 사모이렌코는 손가락 끝으로 창문을 살짝 두드렸다. 라에프스키는 깜짝 놀라서 이 쪽을 쳐다보았다. "바냐, 폰 코렌 씨가 자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다네." 사모이렌코가 말했다. "지금 떠나는 길이야." 라에프스키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문을 열려고 현관으로 나왔다. 사모이렌코와 폰 코렌과 신부는 안으로 들어왔다. "꼭 1분 동안만." 현관에서 덧신을 벗을 때부터 이미 감정에 못 이겨,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남의 집으로 들어온 것을 동물학자는 후회했다. '어쩐지 주제넘은 짓을 했어. 어리석은 짓이야.' 하고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이렇게 입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라에프스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말했다. "지금 떠나는 길인데, 어쩐지 당신을 만나 보고 싶었던 겁니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고 해서." "아, 감사합니다. 자, 어서 앉으세요." 라에프스키는 이렇게 말하고, 겸연쩍은 듯이 손님들에게 의자를 권하였으나, 그것이 마치 그들의 길을 막으려 하고 있는 것같이 보여서, 자신은 손을 비비며 방 한복판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실수를 했군. 구경꾼들은 바깥에서 기다리라고 할걸.' 폰 코렌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또렷한 말투로 말했다. "나를 너무 좋지 않게 여기지 마세요. 라에프스키 씨. 과거를 잊는다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에요. 너무나도 우울한 과거니까요.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사과를 한다거나, 나를 나쁘게 여기지 말아 달라든가 하는 일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나는 성심 성의껏 행동했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리고 그 뒤에도 나의 신념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하긴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신에 대한 나의 생각은 잘못되었던 것이고 나로서는 그것을 알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러나 평탄한 길에서도 넘어지는 수는 있는 법이고, 결국 그게 인간의 운명인 겁니다. 기본적인 것에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하더라도 지엽적인 경우에 이르면 잘못을 저질러요. 참된 진실을 아는 사람은 없는 법이죠." "그래요. 진실을 아는 사람은 없어요...." 라에프스키가 말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부디 건강하시길 빌겠어요." 폰 코렌은 라에프스키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에프스키는 그 손을 잡고 머리를 숙였다. "제발 나를 나쁘게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폰 코렌이 말했다. "부인에게 잘 전해 줘요. 작별 인사를 못 해 섭섭하다고요." "아내는 집에 있어요." 라에프스키는 문 쪽으로 가서 옆방을 향해 소리쳤다. "나자, 폰 코렌 선생이 인사를 하시겠대요." 나데지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문간에 서서 겁먹은 눈으로 손님을 바라보았다. 미안해하는 것 같고, 무엇에 놀란 듯한 얼굴을 하고, 두 손은 여학생이 야단을 맞고 있을 때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부인, 저는 지금 떠나갑니다." 하고 폰 코렌이 말했다. "그래서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그녀는 망설이는 기색으로 손을 내밀었고, 라에프스키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건 그렇고, 두 사람의 안색이 말이 아니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가 봐.' "저는 모스크바와 페테르스부르크에도 갈 예정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그 곳에서 보내 드릴 게 없겠습니까?" "글쎄요." 하고 나데지다는 말하고, 불안스런 눈으로 남편의 눈을 바라보았다. "별로 없어요...." "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라에프스키는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모두에게 안부나 전해 주세요." 폰 코렌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그리고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까 이리로 들어올 때에는 도움이 될 만한 말, 위로의 말, 중요한 말들이 얼마든지 입에서 나올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라에프스키와 그의 아내와 악수를 나누고, 무거운 마음으로 그들과 헤어졌다. "정말 좋은 사람들이야!" 신부가 따라오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정말 좋은 사람들이야. 참으로 하느님의 오른손이 이 포도를 심으셨어! 주님, 주님! 한 사람이 수천의 적을 이기면, 한 사람은 수만의 적을 이깁니다..." 그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말을 이었다. "폰 코렌 씨! 당신은 오늘, 사람의 적 가운데 제일 큰 것을 이겼어요. 오만을 이겼단 말씀이에요." "제발 그만해 둬요, 신부님! 나나 그 사람이 승리자일 수 없어요! 승리자라면 독수리처럼 보일 터인데, 그 사람은 비참하고, 두려워 떨고, 다 죽어 가고, 게다가 중국인형처럼 굽실굽실 절만 하고 있고, 나는 나대로 우울하기만 한 걸요."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라에프스키가 배웅을 하러 뒤쫓아왔던 것이다. 부두에는 트렁크를 둘 든 졸병이 서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네 명의 노잡이가 서 있었다. "역시 바람이 불고 있군, 떨리는걸!" 사모이렌코가 말했다. "이래 가지고는 앞바다는 거칠 거예요. 거참, 안됐는걸! 재수 없는 때 떠나게 됐어요, 코랴." "나는 뱃멀미를 하진 않아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이 바보 같은 녀석들이 당신을 엎어 버리지나 말았으면 하는 거죠. 출장소 보트를 타고 가는 게 좋겠는데. 출장소 보트는 어디 있지?" 그는 노잡이들을 보고 소리쳤다. "이미 나갔습니다, 각하." "그럼 세관 것은?" "그것도 나갔어요." "왜 보고하지 않았지?" 사모이렌코는 신경질을 부렸다. "이 얼간이들 같으니라구!" "아무거나 마찬가지요, 화내지 말아요." 폰 코렌이 말했다. "그럼 안녕히들 계세요. 건강하게 지내요." 사모이렌코는 폰 코렌을 껴안고 세 번 성호를 그었다. "코랴, 날 잊지 말아요. 편지를 꼭 보내 줘요. 내년 봄엔 기다리고 있겠어요." "잘 있어요, 신부님." 폰 코렌은 신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신부님과 알게 된 것을 고맙게 여기고 있어요. 탐험 문제도 생각해 두세요." "알았습니다. 세계 끝까지도 가겠어요!" 하고 신부는 웃으면서, "내가 싫어하고 있을 줄 알았나요?" 하고 말했다. 폰 코렌은 어둠 속에서 라에프스키를 알아보고,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노잡이들은 이미 내려가서 보트를 잡고 있었다. 방파제가 큰 물결을 막고는 있었으나, 그래도 보트는 쉴새 없이 말뚝에 부딪치고 있었다. 폰 코렌은 사닥다리를 내려가 보트로 뛰어내려 키 옆에 앉았다. "편지 해 줘요!" 사모이렌코가 그를 향해서 소리쳤다. "몸조심해요!" '참으로 진실을 아는 사람은 없어.' 라에프스키는 외투 깃을 세우고 두 손을 소매 속에 찔러 넣으며 생각했다. 보트는 거센 물결에 희롱 당하면서 재빠르게 부두를 돌아 앞바다로 빠져 나갔다. "편지 보내요!" 사모이렌코가 소리쳤다. "당신은 대단한 날씨를 만났어!" '그렇다, 참된 진실을 아는 사람은 없어.' 라에프스키는 거칠게 설치는 어두운 바다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보트는 밀려 되돌아오고 있어.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거야. 그러나 노잡이들은 까딱도 안 해. 한결같이 노를 젓고 높은 물결도 겁내지 않아. 보트는 끊임없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이제는 보이지도 않게 되었군. 앞으로 반 시간만 있으면 노잡이들을 배의 등불을 똑똑히 볼 수 있겠지. 인생도 이것과 마찬가지야. 진실을 추구하며 사람들은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지. 고뇌나 과실이나 삶의 권태가 그들을 도로 뒤로 밀어 낸다. 그러나 진실에 대한 갈망과 굽히지 않는 의지가 앞으로 앞으로 그들을 몰아 낸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은 참된 진실에 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잘 가요오!" 사모이렌코가 소리쳤다. "이젠 보이지도 않는군. 소리도 들리지가 않아요." 신부가 말했다. "가는 길이 순탄하기를."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결투--끝 중간 이층이 있는 집 '어느 화가의 이야기' 1. 6, 7년쯤 전의 일입니다. 당시 나는 T 지방 어떤 군에 있는, 벨로쿠로프라고 하는 젊은 지주의 영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 벨로쿠로프라고 하는 사람은, 아침에는 몹시 일찌기 일어나 소매 없는 외투를 걸치고는 근처를 산책하고, 밤에는 맥주를 마시면서 어디를 가나 마음에 맞는 사람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나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그런 사내였습니다. 그는 뜰에 있는 별채에 살았고, 나는 안채에 있는 주랑이 딸린 넓은 거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 거실에는 내가 침대 대신으로 쓰고 있는 폭이 넓은 소파와 혼자서 점치는 카드 패를 늘어놓는 테이블이 놓여 있을 뿐이고, 그 밖에는 가구라고 이름붙일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구식의 아모소프식 벽난로는 하고많은 날, 화창하게 갠 날에도 무언가 으르렁거리는 것과 비슷한 소리를 내고 있었고, 소나기가 쏟아질 때에는 집 전체가 흔들리며 당장에라도 산산조각으로 무너져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한밤중에 열 개쯤 되는 커다란 창문이 한꺼번에 환히 번갯불에 비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정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였습니다. 어쨌든 나라는 사람은 늘 안일 무사한 생활을 누릴 운명을 타고난 사내입니다. 그래서 이 때도 일다운 일은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방의 창문을 통해서 하늘과 새들을 내다보거나 가로수 길을 바라다본다. 그리고 우체국에서 보내 온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낮잠을 잔다. 이런 생활이 판에 박은 듯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훌쩍 밖으로 나가서, 밤늦도록 어디고 할 것 없이 쏘다니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러한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나도 모르게 어떤 낯선 장원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미 해가 질 무렵이어서 꽃이 핀 호밀밭 위로 저녁 햇살의 그림자가 길게 꼬리를 끌고 있었습니다. 두 줄로 빽빽이 심어 놓은 키 큰 전나무의 고목이 짙푸른 아름다운 가로수 길을 이루며, 마치 끊어진 데가 없는 두 개의 벽처럼 이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어렵지 않게 울타리를 넘어서, 5센티미터 가까이나 쌓여 있어서 땅이 보이지 않는 전나무의 침엽 위를 미끄러지듯이 걸어갔습니다. 주위는 고요하고 어둠침침했으며, 다만 높은 나뭇가지의 군데군데에 선명한 금빛이 흔들리고, 거미줄이 무지개처럼 반짝이는 것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침엽이 숨이 막힐 것같이 강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길이 꼬부라지자 보리수의 가로수가 나왔는데, 황량하고 쓸쓸한 느낌이 들기는 여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 해의 낙엽이 발 밑에서 바삭바삭 소리를 내고, 나무들 사이에는 황혼의 어둑어둑한 그림자가 깃들여 있었습니다. 오른쪽의 해묵은 과수원에서는 꾀꼬리 한 마리가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울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것은 늙은 할멈 꾀꼬리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보리수 가로수 길에서 빠져 나와, 테라스와 중간 이층이 있는 하얗게 칠을 한 집 옆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때 뜻밖에도 내 눈앞에는 안채와 널찍한 못의 광경이 펼쳐진 것입니다. 못에는 수영장이 마련되어 있었고, 못가에는 푸른 버드나무 숲도 있었습니다. 못 건너편에는 마을이 있고, 그 높고 뾰족한 종루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저녁 햇빛을 받아 불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친근감이 드는 다정스런 입김을 느끼고 한 순간 황홀해졌습니다. 언젠가 어렸을 시절에 이와 꼭 같은 파노라마를 본 일이 있는 것 같은 그러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택에서 들판으로 나가는 곳에 하얀 돌문이 있었습니다. 젊은 여자 두 사람이 사자의 상이 새겨져 있는 오래 되고 묵직한 그 문 곁에 서 있었습니다. 한 여자는 몇 살인가 나이가 위인 듯, 빗질을 하지 않은 탐스런 밤색 머리를 늘어뜨리고, 작은 입매는 조금 극성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녀는 약간 화사하면서도 창백한 얼굴빛의 매우 아름다운 아가씨였으나,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나 같은 것은 상관도 않겠다는 태도였습니다. 또 한 여자는 아직 애젊은 아가씨로, 나이는 기껏해야 열 일고여덟쯤 되었을까, 역시 화사하고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다만 입매와 눈을 큰 편이었습니다. 그 아가씨는 내가 곁을 지나가자, 의아스러운 듯이 이 쪽을 보면서 무엇이라고 두어 마디 영어로 말하고는, 멋쩍은 듯한 기색이었습니다. 나는 이 두 사람의 사랑스런 여자들과는 훨씬 전부터 안면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 날 저녁 때 마치 무엇인가 즐거운 꿈이라도 꾼 것 같은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 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낮에 나와 벨로쿠로프가 집 주변을 산책하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풀 소리를 내면서 용수철이 달린 마차가 한 대 달려왔습니다. 보니까 타고 있는 사람은 요전에 본 아가씨들 가운데 하나였는데, 나이가 많은 아가씨였습니다. 화재 때문에 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선자 명단을 들고 의연금을 부탁하러 온 것입니다. 이 쪽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하면서, 얌전한 말투로 샤노보 마을에서 집 몇 채가 불에 타서 남자가 몇 명, 여자가 몇 명, 애들이 몇 명 집을 잃었다는 것과 자기도 한 위원으로 되어 있는 이재민 구제 위원회가 우선 시초로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가 하는 것 따위를 자세히 설명한 후에, 우리들로부터 서명을 받고는 명단을 챙기고 곧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벨로쿠로프 씨는 저희들을 깨끗이 잊어버리셨나 봐요." 벨로쿠로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면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번 놀러 오세요. 그리고 만일 아무개 씨가(하고 내 성을 대고) 자신의 천재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보내고 있는지 보시고 싶으시다면, 부디 저희들 집으로 오시게 하세요. 어머니와 저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거예요." 나는 절을 했습니다. 그녀가 가 버리자, 벨로쿠로프가 소문을 들려 주었습니다. 그 소문이란 이러합니다. 그 아가씨는 양가 태생으로, 이름을 리자 보르차니노바라 하고, 또한 현재 그녀가 어머니와 여동생과 같이 살고 있는 영지는 못 건너편에 있는 마을과 마찬가지로, 셸코프카라고 불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전에 모스크바에서 요직에 있었는데, 삼등관까지 올랐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많은 재산이 있는데도 보르차니노프 집안 사람들은 여름이나 겨울에도 시골 구석에 처박혀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리자는 영지인 셸코프카의 자치회 초등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으면서 25루우블리의 월급은 받고 있다고 합니다. 용돈으로 쓰는 것은 그 돈뿐이고, 그와 같이 자기의 수입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집안이야." 벨로쿠로프가 말했습니다. "그렇지, 언젠가 한번 놀러 가 볼까. 자네가 가면 퍽 기뻐할 걸세." 어느 날 오후, 마침 경축일이었는데, 우리들은 보르차니노프 집안 생각이 나서, 셸코프카에 있는 그녀들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녀들, 즉 어머니와 두 아가씨들은 다행히 집에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꽤 미인이었을 것 같은 어머니 에카테리나는 지금은 나이에 맞지 않게 얼굴이 푸석하고, 천식을 앓고 있는 듯한 침울하고 어수선한 부인으로, 내가 지루해할까 봐 쉴 새 없이 그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내가 셸코프카로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딸로부터 듣자, 언젠가 모스크바 전람회에서 본 두세 점의 내 풍경화에 대한 기억을 급히 살린 모양인지, 그 때 그 그림 속에서 무엇을 표현할 생각이었느냐고, 자꾸만 내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리자, 또는 이 집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하면 리다는 나보다도 벨로쿠로프와 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얌전한 표정으로 웃는 일 한 번 없이, 벨로쿠로프가 어째서 자치회에서 일하지 않느냐, 어째서 한 번도 자치회의 모임에 얼굴을 내밀지 않느냐고 묻고 있었습니다. "잘 하시는 건 아녜요, 벨로쿠로프 씨." 그녀는 비난하는 듯한 투로 말했습니다. "창피하지도 않으세요." "정말이다, 리다야. 정말이고 말고, 잘 하는 짓이 못 돼요." 어머니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저희들 군은 완전히 발라긴의 손아귀에 들어 있어요." 리다는 나를 바라다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자신이 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군에서의 지위란 지위는 모두 자기 조카들이나 사위들에게 나누어 주고 제멋대로 쥐어 흔들고 있어요. 그러니까 싸우지 않으면 안돼요. 젊은 사람들이 단결해서 강력한 조직을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런데도 이 곳 젊은 사람들이란 실제로 보시다시피 얘기가 안 되거든요. 창피한 일이에요, 벨로쿠로프 씨." 동생 제냐는, 자치회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동안만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녀는 심각한 이야기에는 끼여들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집에서 아직 어린아이로 여기고 있고, 이름도 어린 계집아이처럼 미슈시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을 그녀가 어렸을 때 가정 교사인 미스 아무개를 그렇게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내 쪽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앨범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이분은 숙부님, 이분은 대부님이 되어 주셨던 분이에요." 하고 일일이 사진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아이들이 하는 것같이 내게 어깨를 비비대는 것이었습니다. 가냘프고, 아직 충분히 발육되지 않은 가슴과 호리호리한 어깨, 땋아 늘인 머리, 꼭 죄게 허리띠를 맨 여윈 몸매가 그 때마다 똑똑히 내 눈에 띄었습니다. 우리들은 크로케나 테니스를 하기도 하고, 안뜰을 산책하기도 하고, 차를 마시기도 한 뒤, 오랫동안 밤참 테이블에 앉아 있었습니다. 주랑이 있는 휑뎅그렁하게 넓기만 한 거실에 있다가 와서 그런지, 벽에 석판화도 걸려 있지 않고, 하인들에게도 친절하게 말을 건네는 이 아담하고 편한 집은 어쩐지 별천지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리다와 미슈시가 있는 덕분에 온 집안에 젊고 맑은 기분이 넘쳐 흐르고, 고상한 분위기가 구석구석에까지 배어 있었습니다. 밤참 때, 리다는 또 벨로쿠로프를 상대로 자치회와 발라긴과 학교 도서관 이야기를 했습니다. 활기차고, 순진하고, 강한 신념의 소유자인 이 아가씨의 이야기는 듣는 이로 하여금 지루한 느낌을 주는 일이 없었습니다. 하긴 말수가 많고, 게다가 목소리도 좀 큰 점은 있었지만, 그것은 교실에서 학생을 상대로 이야기할 때의 말투가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한편 우리 벨로쿠로프 쪽은 어떤 대화이든지 논쟁을 벌이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학생 시절의 버릇이 아직도 채 가시지 않아서, 남을 지루하게 하는 맥빠진 장황한 소리를 늘어놓았고, 게다가 자신을 머리 좋은 진보적인 사람으로 보이려고 하는 속셈이 드러나 보였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몸짓에 지나치게 힘을 주어, 소맷자락으로 소스 병을 넘어뜨려 테이블 보에 소스를 쏟아 놓기도 하였는데, 나말고는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올 때 주위는 깜깜하고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교양이 있다는 것은 말일세, 테이블 보 위세 소스를 엎지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남이 그런 짓을 해도 보고서도 못 본 체하는 것이란 말일세." 벨로쿠로프는 이렇게 말하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집은 정말이지 훌륭하고 지성적인 집안이야. 그렇지만 나는 그와 같이 훌륭한 사람들에게 완전히 뒤떨어지고 말았어. 정말이지 여간 뒤떨어진 게 아니라니까. 이렇게 된 것도 모두 일, 일, 일 때문이야!" 그는 모범적인 농장주가 되려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모른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이 친구는 얼마나 사귀기 어렵고, 무식한 사내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는 굳어져서 줄곧 '말하자면, 말하자면'을 연발하고, 일하는 태도도 말투와 똑같기 때문에 느릿느릿하고, 시간을 끌기만 해서 제때에 일을 끝낸 예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 사나이는 언젠가 내가 우체국에 가서 부쳐 달라고 부탁한 편지를 몇 주일 동안이나 호주머니에 넣어 둔 채 돌아다닌 일도 있었습니다. 이 한 가지 일만으로 나는 그의 사무적인 재능을 믿지 않기로 작정하고 말았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제일 괴로운 것은...." 하고 그는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제일 괴로운 것은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을 해도 아무도 동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일세. 털끝만큼도 알아 주지 않는 것이란 말일세!" 2. 나는 보르차니노프가로 자주 놀러 가게 되었습니다. 놀러 가면 대개 테라스 아래쪽 계단에 앉아서, 자기의 신세에 대한 털어놓을 길 없는 불만에 시달리곤 하였습니다. 생활에 아무런 변화도 없이 세월이 빨리 흘러가는 것이 억울하다, 요즈음 몹시 답답하게 느껴지는 자기의 이 심장을 단번에 가슴에서 도려내 버린다면 얼마나 시원할까, 하는 생각을 언제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때 테라스 위쪽에서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와 옷 스치는 소리, 책장을 넘기는 소리 따위가 들려 왔습니다. 리다는 낮 동안에는 환자를 진찰하기도 하고, 팜플렛을 돌리기도 하며 지냅니다. 읍내로도 자주 나갔는데, 그런 때에는 파라솔을 받을 뿐 모자는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큰 소리로 자치회화 학교 이야기를 합니다. 이러한 일들에 나는 얼마 안 가서 익숙해지고 말았습니다. 저 델리킷한 작은 입매를 하고, 언제나 변함없이 엄한 표정을 하고 있는 해맑고 아름다운 아가씨는, 사무적인 이야기가 시작될 때마다 무뚝뚝하게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얘긴 선생님에게 재미 없겠죠." 나는 그녀의 호감을 사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내가 풍경화가이기 때문에 민중의 괴로운 생활을 작품으로 그리지도 않고, 그녀가 굳게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듯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잊혀지지도 않는 일입니다만, 전에 바이칼호 근처를 마차로 지나갔을 때, 나는 푸른 빛깔의 올이 굵은 무명 셔츠에 바지 차림으로 말을 타고 가던 브리야아트인 아가씨를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파이프를 팔지 않겠느냐고 부탁해 보았습니다. 내가 말을 하는 동안, 그녀는 마치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유럽인과 같은 나의 얼굴과 내 모자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곧 나의 말에 싫증이 났는지, 큰 소리로 무엇이라고 외치기가 무섭게 말을 달려 도망쳐 갔습니다. 그 아가씨와 마찬가지로 리다도 나를 인연 없는 중생으로 보고 경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긴 리다는 나를 싫어하는 눈치를 결코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것을 마음 속에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테라스의 아래쪽 계단에 앉아 초조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의사도 아닌 주제에 농민들을 치료하는 것은 그들을 속여 먹는 것과 마찬가지라느니, 2천 헥타아르나 되는 땅을 가졌다면 남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라느니 하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동생 미슈사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나와 마찬가지로 무위의 생활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면, 곧 독서를 하기 시작합니다. 테라스에 내놓은 안락의자에 다리가 거의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몸을 깊숙이 파묻고 책을 읽는 것입니다. 때로는 책을 들고 보리수 가로수에 숨기도 하고, 문을 나와 들판으로 가는 일도 있습니다. 언제나 정신없이 책을 들여다보며, 아침부터 밤까지 읽고 있었습니다. 이따금 얼굴빛이 몹시 창백해져서 몹시 피로한 듯한, 방심한 듯한 눈매를 하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녀가 독서에 얼마나 머리를 쓰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징후로 간신히 알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내가 곁을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면, 조금 얼굴을 붉히면서 읽는 것을 멈추고, 그 서글서글한 큰 눈으로 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봅니다. 그리고 사소한 일, 예컨대 하인 방에서 그을음에 불이 붙었다던가, 머슴이 못에서 큰 고기를 잡았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여느 날에는 대개 밝은 빛깔의 블라우스에 짙은 감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함께 산책을 하기도 하고, 잼을 만들 버찌를 따기도 하고, 보트를 타기도 하였습니다. 그녀가 버찌를 따려고 뛰어오르거나 보트를 저을 때는 그녀의 가냘픈 두 팔이 넓은 소매 속에서 알른알른 비쳐 보였습니다. 때로는 내가 스케치를 하고, 그녀가 곁에 서서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7월의 어느 일요일 오전, 나는 보르차니노프 가에 갔습니다. 그 집에 좀 떨어져 있는 정원 안을 거닐다가 그 여름에는 유난히 많이 돋아 있는 흰 버섯을 발견하고는 그 곁에 표를 해 두었습니다. 나중에 제냐와 같이 딸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따뜻한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제냐와 어머니가 모두 밝은 빛깔의 나들이옷을 입고 교회에서 돌아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제냐는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하려고 자꾸만 모자에 손을 갖다 대었습니다. 그리고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는 것 같았습니다. 속세의 고생을 모르고 언제나 변함없는 무위의 생활을 어떻게든 변명하려고 하고 있는 사내인 나에게 있어서 그 곳 장원에서의 매년 여름의 경축일 아침은 언제나 더할 나위 없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아직 이슬이 맺혀 있는 푸른 뜰은 온통 햇빛을 받아서 매우 행복한 듯이 보입니다. 집 둘레에서는 물푸레나무와 협죽도의 향기가 풍기고 교회에서 막 돌아온 젊은 사람들이 뜰에서 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모두가 산뜻한 옷차림을 하고 즐거워 보였습니다. 저 건강하고 싱싱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은 긴 여름날 하루를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낼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한평생 이랬으면 좋겠다고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때도 나는 같은 것을 생각하고 이와 같이 아무 할 일 없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진종일 한 해 여름 내내 한가로이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뜰을 거닐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냐가 바구니를 들고 왔습니다. 마치 뜰로 나오면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가 그렇지 않으면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에게 무엇을 물을 때마다 그녀는 내 얼굴이 잘 보이도록 몸을 앞으로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읍내에서 기적이 있었어요." 그녀가 말했습니다. "다리를 저는 페라게야가 요 1년 동안 계속 몸이 좋지 않았는데, 아무리 의사 선생님에게 보이고 약을 써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어요. 그런데 어제 어떤 할머니가 한 마디 속삭인 것만으로 깨끗이 나았다고 하는 거예요." "나는 별로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데요." 나는 말했습니다. "환자나 할머니 주변에서만 기적을 찾다니, 우리들의 할 짓이 아니에요. 건강 역시 일종의 기적이 아닙니까. 그리고 인생 자체도 그렇지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란 두렵지 않으세요?" "두렵긴요. 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는 용감히 맞서서, 결코 그것에 지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와 같은 현상보다도 한층 높은 곳에 있어요. 인간은 호랑이나 사자나 별보다도 높은, 자연 가운데 그 어느 것보다도 높은, 인간에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보이는 것과 비교해서까지도 더욱 높은 존재라는 자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무엇이나 두려워하는 쥐와 마찬가지가 되어 버리고 말죠." 제냐는, 내가 예술가이기 때문에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또한 알고 있지 못한 것도 정확히 추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 영원한 것, 아름다운 것인 세계, 내가 속속들이 통달하고 있을 지고의 세계로, 내게 이끌려 가고 싶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와 나는 하느님이라든가 영생이라든가 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자신과 자신의 상상력이 죽음으로써 그만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을 아무래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인간을 불멸입니다." 라든가, "그렇습니다, 우리들 앞길에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열심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대로 순진스럽게 믿고, 증명을 해 보라는 요구 같은 것을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리다 언니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저는 언니를 무척 좋아해요. 언니를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목숨을 버려도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내 소매를 건드리고, "하지만, 왜 선생님은 언니와 말다툼만 하시는 거죠? 그리고 늘 어쩔 줄 몰라 하시고." "그건 언니가 억지 말을 하기 때문이에요." 제냐는 그렇지 않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고, 눈에는 눈물이 핑그르 돌았습니다. "저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그녀가 말했습니다. 리다는 막 외출했다가 돌아온 참이었습니다. 손에 채찍을 들고 현관의 계단 어귀에 서서, 날씬한 아름다운 몸에 햇빛을 받으면서 하인에게 무엇인가 이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재빨리 입을 놀리면서 두세 사람의 환자를 모두 진찰하고 나자, 사무적인, 무엇인가 마음 쓰이는 일이 있는 듯한 태도로 이 방 저 방 돌아다니고 벽장문을 하나하나 열어 보고 그 뒤 중간 이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집안 사람들은 한참이나 그녀를 찾고 식사를 하라고 불렀으나 그녀가 내려온 것은 우리들이 이미 수프를 다 먹고 난 뒤였습니다. 웬일인지 나는 이와 같은 하찮은 일들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리운 느낌도 듭니다. 별로 이렇다 할 색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 날에 있었던 일은 하나에서 열까지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식사가 끝나자, 제냐는 그 푹신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고, 나는 테라스 아래쪽 계단에 앉아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고, 얼마 안 가서 빗방울이 돋고 있었습니다. 더위가 몹시 심했고, 바람 한 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날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있는 테라스에 졸리는 듯한 얼굴을 하고 손에 부채를 든 제냐의 어머니가 나왔습니다. "어마, 엄마." 제냐가 어머니의 손에 키스를 하며 말했습니다. "낮잠은 몸에 해로워요." 이 두 사람은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뜰로 내려갔는가 싶으면 다른 한 사람은 곧 테라스에서 나와 나무숲 쪽을 바라보면서, "제나야." 라든가, "엄마, 어디 가셨죠?" 하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같이 기도를 드리고, 똑같이 신앙심이 두텁고, 가만히 있을 때에도 서로 마음이 잘 통하고 있었습니다. 남들에 대한 태도도 이 두 사람은 같았습니다. 에카테리나도 곧 내게 친절해지고, 내가 2, 3일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으면, 곧 안부를 물으러 사람을 보낼 정도였습니다. 나의 스케치를 역시 감탄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무엇 한 가지 숨기는 일 없이 세세하게 여러 가지 일들을 내게 이야기해 주는 것도 미슈시와 꼭 같았습니다. 집안의 비밀까지도 나에게 털어놓는 일이 흔히 있었습니다. 그녀는 딸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었으나, 리다 쪽은 전혀 어머니를 따르는 눈치가 보이지 않았고, 언제나 진지한 이야기만 했습니다. 집안 사람들과는 관계없이 자기만의 생활을 하고 있는 리다는, 어머니에게나 동생에게나 마치 수병들에게 있어서 언제나 자기 방에만 있는 제독이 그러하듯이, 일종의 신성하고 어느 정도 수수께끼와 같은 인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우리 리다는 훌륭한 애예요. 그렇게 여기지 않으세요?" 어머니는 흔히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때 비가 듣고 있는 동안, 우리들은 리다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 리다는 훌륭한 애예요."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고, 겁먹은 얼굴을 하며 주위를 살펴본 뒤, 마치 음모 의논이라도 하려는 사람같이, 작은 소리로 덧붙였습니다. "요즈음 그런 애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어요. 그렇지만 선생님, 나는 요즘에는 좀 걱정이 돼요. 학교 일이든 구급 상자 일이든 팜플렛 일이든 그것들은 모두 좋은 일임에 틀림없어요.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나서지 않아도 되지 않겠어요. 이미 제 나이도 스물 네 살이니까, 이제는 진지하게 제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나이인데, 찍히면 팜플렛이다, 구급 상자다 하고 법석을 피우고 있을 뿐이지 세월이 자꾸만 흘러가고 있는 걸 모르고 있다니까요. 그 애도 이젠 시집을 가야 할 나이인데." 그러자 독서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얼굴빛이 창백해지고, 머리 모양이 흐트러진 제냐가 얼굴을 들고, 어머니 쪽을 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그렇지만 엄마, 세상 일이란 모두 하느님 뜻대로 되어 가는 거예요." 그리고 또다시 열심히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벨로쿠로프가 소매 없는 외투와 수놓은 스모크 차림으로 왔습니다. 우리들은 크로케와 테니스를 하고, 어두워진 뒤에는 오랫동안 밤참 테이블에 앉아 있었습니다. 리다는 그 날 밤에도 학교 일이라든가 온 군을 손아귀에 넣은 발라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날 밤 보르차니노프 가를 물러난 나의 마음 속에는, 길고 긴 하루를 아물 일도 하지 않고 지냈다고 하는 인상과 비록 얼마나 오래 계속되든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에 끝장이 있다고 하는 우울한 의식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제냐가 문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그녀와 함께 지낸 탓인지, 나는 그녀가 없으면 아무래도 적적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 사랑스런 집안의 사람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가까운 사람들같이 여겨지는 것이었습니다. 한여름을 통하여 제작 의욕이 솟은 것도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여보게, 자네는 어째서 그와 같이 따분한 생활을 하고 있는 건가?" 나는 벨로쿠로프와 집으로 오며 말했습니다. "하긴 내 생활 역시 시시하고 답답하고, 단조로운 것임에는 틀림없어. 그렇지만 그것은 내가 화가이고 괴팍한 사람이기 때문이야. 나는 어릴 때부터 남들을 부러워하고,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 일에 자신을 가지지 목하고, 늘 초조해하면서 살아 왔어. 나는 언제나 비참한 떠돌이에 지나지 않아. 그렇지만 자네는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람이고, 지주에, 팔자 좋은 사람이 아닌가. 그런 자네가 어째서 아무 재미도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건가? 자네가 제대로 생활을 즐기고 있지 않는 건 무슨 까닭이지? 예를 들자면, 자네는 어째서 이제까지 리다든가 제냐를 사랑하지 않은 건가 말일세?" "자네는 잊어버린 것 같은데, 내게는 달리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벨로쿠로프가 대답했습니다. 이 좋아하는 여자란, 벨로쿠로프와 함께 별채에서 살고 있는 여자 친구인 류보피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이를 잔뜩 주어 살찌게 한 거위를 찜 쪄 먹게 닮은, 뚱뚱하고 몹시 거드름을 피우는 이 여자가 장식 구슬이 알린 러시아식 옷을 입고, 애용하는 양산을 들고 뜰을 산책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하녀가 쉴 새 없이 식사와 차 시간을 알리러 가는 것을 나는 매일같이 보아 왔습니다. 3년쯤 전에 그녀는 별채 하나를 여름철 별장으로 얻은 것인데, 그대로 벨로쿠로프 집에 눌러앉게 되고, 이젠 거기를 떠날 기색이 없었던 것입니다. 벨로쿠로프는 자기보다 열 살쯤 손위인 이 여자에게 완전히 쥐어 지내게 되어, 외출할 때마다 그녀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습니다. 그녀는 곧잘 남자 같은 목소리로 울었습니다. 내가 사람을 보내어, 우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면 이 집에서 나가겠다고 말하게 하면, 비로소 울음을 그치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벨로쿠로프는 소파에 앉아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나는 마치 사랑이라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리다가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병원이나 학교에 열중하고 있는 자치회 사람뿐이야."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아마, 그런 아가씨가 좋아하게만 된다면, 자치회에 들어가도 나쁘지 않겠지.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옛이야기에 나오는 것같이 쇠구두가 닳아 빠지도록 걸어도 좋겠지. 그런데 미슈시는 어떠냔 말이야. 참으로 매력적인 아가씨야. 그 미슈시는 말이야!" 벨로쿠로프는, "그렇지만, 그렇지만...." 하고 일일이 말을 길게 끌면서, 세기병, 즉 페시미즘 얘기를 지루하게 늘어놓았습니다. 마치 내가 자기와 논쟁이라도 하고 있는 듯이 단호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기척 없고, 단조롭고, 훨훨 타오르는 것 같은 뜨거운 광야를 비록 몇백 킬로미터 걷는다 하더라도, 누군가 붙잡고 앉아서 달갑지 않은 긴 이야기를 시작하고, 그래서 언제 놓아줄지 모를 우울한 기분이 되지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문제는 페시미즘이라든가 옵티미즘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고 나는 초조해하면서 말했습니다. "백 명 가운데 99명은 저능이라고 하는 걸세." 벨로쿠로프는 자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발끈하여 돌아갔습니다. 3. "마로조모보에 요전번 공작님이 와 계시는데, 어머니에게 안부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리다가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장갑을 벗으면서 어머니를 보고 말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얘기들을 들려 주셨어요. 그리고 지방 위원회에서 마로조모보의 보건소 설치 문제를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하지만 너무 믿지는 말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정말이지 저는 이런 얘길 선생님이 재미있어할리 없다는 것을 언제나 깜빡 잊곤 해요." 나는 자신이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 재미 없다는 거죠?" 나는 이렇게 묻고 어깨를 으쓱거렸습니다. "당신은 제 의견 따위는 듣고 싶지도 않다고 여기실지 모르지만, 나는 그 문제에 몹시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정말요?" "정말이고 말고요. 나는 마로조모보에 보건소 따위는 전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뭐가 필요하죠? 풍경화인가요?" "풍경화도 필요 없습니다. 거기에 필요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그녀는 장갑을 다 벗자, 거기에 필요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그녀는 장갑을 다 벗자, 우체국에서 막 배달된 신문을 펼쳤습니다. 1분쯤 지난 뒤에, 그녀는 분명히 자제하려고 애쓰면서,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난 주, 안나가 산욕열로 죽었어요. 근처에 보건소가 있었다면 죽지 않아도 되었을 거예요. 풍경화가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이런 일들에 관해서는 무엇인가 신념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나는 매우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요." 하고 나는 대답하였는데, 그녀는 내 말을 전혀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신문으로 몸을 가리었습니다. "나는 보건소나 학교나 도서관, 구급 상자들도, 현재의 조건 밑에서는 민중의 노예화에 도움이 될 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민중은 어처구니없이 큰 쇠사슬에 얽매여 있어요. 당신네들은 그 쇠사슬을 끊어 버리려고는 하지 않고, 다만 쇠사슬에 새로운 고리를 덧붙일 뿐이지요. 이것이 내 신념입니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고, 경멸하는 듯한 웃음을 띄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사상의 요점을 파악하려고 애쓰면서,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안나가 산욕열로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숱한 안나나 마블라나 페라게야 들이 모두 아침 일찍부터 깜깜해질 때까지 등을 구부린 채 일을 하고, 그 힘겨운 노동 때문에 병이 나고, 한평생 허기진 채 앓고 있는 자식들 일을 생각하여 두려워하고, 일생 동안 죽음이나 질병에 대해 애를 태워 평생토록 의사의 신세를 지고, 그만한 나이도 아닌데 체력의 소모로 빨리 늙어 버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속이 뒤집힐 것같이 고약한 냄새가 나는 곳에서 흙투성이가 되어 죽어 간다는 바로 그 점입니다. 아이들은 또 아이들대로 자라나면 어머니와 같은 일을 되풀이합니다. 이와 같이 몇백 년이 지나도록, 수십 억에 이르는 인간이 동물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그것은 단 한 조각의 빵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느끼고 있는 공포감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상태의 가장 두려운 점은 그들이 영혼 문제를 생각해 볼 틈이 없다고 하는 것, 자기들의 모습이 하느님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볼 틈도 없다고 하는 점입니다. 굶주림, 추위, 동물적 공포, 끊임없는 노동이 쉴 새 없이 눈사태와 같이 밀어닥쳐서, 정신적인 활동으로의 길을 완전히 막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정신적인 활동이야말로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것이며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병원이나 학교에서 그들을 구원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들의 명예를 벗겨 주지는 못하고, 반대로 그들을 더욱더 노예 상태로 몰아넣을 뿐입니다. 왜냐 하면 당신네들은 그들의 생활 속에 새로운 편견을 가져다주어, 그들의 욕구를 더욱 증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치회에 발포고나 팜플렛 대금을 내지 않으면 안 되고, 따라서 전보다도 더욱 뼈가 빠지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저는 선생님과 논쟁을 하고 싶진 않아요." 리다는 신문을 내려놓으면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말씀하신 의견은 전에도 들은 일이 있어요. 단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인간은 다만 팔짱만 끼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하긴 저희들 역시 인류 전체를 구원할 수는 없고, 또한 잘못된 것도 퍽 많을지 몰라요. 그렇지만 저희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고, 그런 한도에서 저희들은 정당해요. 교양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높고, 가장 신성한 임무는 이웃 사람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저희들은 힘껏 봉사를 하려 하고 있어요. 선생님의 마음에는 안 들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어요." "네 말이 옳다, 리다야, 네 말이 옳아."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리다가 있는 자리에서는 그녀는 언제나 어려워했습니다. 얘기하는 도중에도 자기가 무엇인가 부질없는 짓이나 당치도 않은 말을 하지나 않을까 하고 조심하면서, 딸의 얼굴을 불안스럽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결코 딸의 말에 거슬리는 일 없이, 언제나 맞장구만 치고 있었습니다. "네 말이 옳다니까, 리다야, 네 말이 옳아요." "농민 교육, 시시한 교훈이나 잔소리가 씌어 있는 팜플렛, 보건소, 그런 것으로 문맹과 사망률을 줄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 방 창문으로 새어 나가는 빛이 저 큰 뜰을 환히 비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나는 말을 이었습니다. "당신네들은 그들에게 한 가지도 주지 못합니다. 다만 그들의 생활에 간섭하고, 더욱더 욕구를 증대시키고, 더욱더 많이 일하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머나! 그렇지만 어쨌든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이 역시 필요하지 않을까요?" 리다는 화가 난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는데, 나의 주장을 시시한 것이라고 여기고, 경멸하고 있다는 것은 그녀의 말투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필요한 것은 인간을 괴로운 육체 노동에서 해방시켜 주는 일입니다."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들의 멍에를 벗겨 주고, 한숨 돌리게 해 주는 일입니다. 한평생을 아궁이 앞이든가 구유 옆이든가 밭에서 지내는 일이 없도록, 영혼과 하느님에 대해서도 생각할 여유를 가지고 자기의 정신적 능력을 좀더 넓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정신적인 활동에 종사할 사명, 즉 끊임없이 진리든가 인생의 뜻을 탐구할 사명이 있죠. 그들을 위해서 동물적인 거친 일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주세요. 그들이 자유롭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그렇게 하면, 팜플렛이든가 구급 상자는 결국 얼마나 사람을 웃긴 것인지 아시게 될 겁니다. 인간이 일단 자신의 진정한 사명을 자각했을 때에 인간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그런 하찮은 것이 아니라 종교와 과학과 예술뿐입니다." "노동에서 인간을 해방시킨다고요!" 리다는 엷은 웃음을 띠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그런 게 가능할까요?" "가능하죠. 그들의 노동의 한 부분을 대신 져 주면 됩니다. 만일 우리들이 도시에서나 농촌에서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협정을 맺고, 인류 전체가 육체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들이고 있는 노력을 부담할 것을 약속한다면, 아마 우리들은 혼자서 하루에 두세 시간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할 겁니다. 자, 생각해 보세요.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하루에 세 시간 일하기만 하면 되고, 나머지 시간은 무엇에 쓰든 좋은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자기의 체력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도록, 즉 그다지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기계를 발명하여 기계에 일을 시킨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하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의 양을 극한으로까지 줄이도록 힘쓰는 것이죠. 자신과 아이들을 단련시켜서 굶주림이나 추위를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도록 합니다. 안나나 마블라나 페라게야처럼 늘 아이들의 건강을 걱정하여 두려워 떨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런 시간을 힘을 합쳐서 학문이나 예술에 바치는 겁니다." "그렇지만 말씀하시는 것에 모순이 있어요." 리다가 말했습니다. "말끝마다 학문, 학문 하시지만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부정하고 계시잖아요." "읽고 쓰는 일 말입니까? 술집 간판 정도라면 읽을 수 있다든가, 이해하지도 못할 책을 이따금 읽는다든가--이와 같은 읽고 쓰기라면, 우리 나라에는 류우리크(전설적인 러시아 건국자) 때부터 있었습니다. 고골리의 페트루슈카('죽은 영혼'의 주인공 치치코프의 하인 이름이다)는 훨씬 전부터 글자를 읽을 수 있었으나, 농촌 자체는 류우리크 때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읽고 쓰는 능력 따위가 아니라 정신적 능력을 발휘하는 자유입니다. 초등 학교가 아니라 대학이 필요한 거죠." "의학도 부정하시는 거군요?" "부정합니다. 의학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것은 기껏해 봤자 자연 현상으로서의 질병 연구를 위한 것이지, 치료를 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만일 정말로 치료를 하려고 한다면, 질병이 아니라 질병의 원인을 치료해야 할 겁니다. 질병의 주요 원인, 즉 육체 노동을 없애 보십시오. 그러면 질병도 없어집니다. 치료하는 학문, 그런 학문을 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고 나는 흥분이 되어 말을 계속했습니다. "학문이나 예술은 그것이 진짜인 한 일시적이고 개인적인 목적이 아니라 영원한 것, 일반적인 것을 지향하고 있을 겁니다. 말하자면 진리나 인생의 뜻을 탐구하고, 하느님이나 영혼을 탐구하는 것이 학문과 예술인 것입니다. 구급 상자라든가 도서실이라든가 그러한 일상적인 요구에 얽매여 있으면, 학문과 예술은 인생을 복잡하고 번거로운 것들로 만들뿐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의사나 약제사, 법률가, 즉 읽고 쓰기를 할 줄 아는 작자들은 남아 돌아갈 정도로 많지만, 생물학자나 철학자, 시인은 도무지 눈에 띄지 않습니다. 모든 지성과 모든 정신적 에너지가 온통 일시적인 눈앞의 수요 충족에 쏠리고 있는 것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학자나 작가, 또는 예술가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여 그 덕분에 생활은 날이 갈수록 풍부해지고, 육체적인 요구는 증대하기만 하는데 진리로의 길은 아직도 멀고, 인간은 지금도 여전히 영악스럽기 짝이 없고, 악랄하기 이를 데 없는 동물입니다. 이대로 나간다면, 인류의 대부분은 퇴화되어 모든 생활 능력을 영원히 잃고 말 때가 반드시 올 게 틀림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예술가의 인생은 넌센스입니다. 재능있는 예술가일수록 더욱더 이상하고 까닭을 알 수 없는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왜냐 하면, 조금만 알아보면 곧 알 수 있는 일입니다만, 예술가는 요컨대 현존 질서를 유지하면서 영악하고 악랄한 동물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나는 일을 하고 싶지 않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셈입니다. ...일을 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지구 전체가 지옥 속으로 떨어져 버리는 게 오히려 낫죠!" "미슈시야, 저리 가거라." 리다가 동생을 보고 말했습니다. 내 말을 듣게 한다는 것은, 그녀와 같이 젊은 아가씨에게 좋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제냐는 슬픈 듯한 눈으로, 어머니와 언니 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밖으로 나갔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무관심을 변명하려고 할 때에는 대개 그런 말을 하며 얼버무리는 거예요." 리다가 말했습니다. "병원이나 학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치료라든가 가르치는 것보다 간단한 거니까요." "옳은 말이다, 리다야, 네 말이 정말 옳아." 어머니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더 이상 일을 안 하시겠다고 위협하고 계시는데...." 하고 리다는 말을 이었습니다. "자신의 일에 큰 가치를 인정하고 계신 것을 그것으로 잘 알 수 있어요. 그건 그렇고, 이젠 논쟁을 그만 하도록 해요. 우리들은 어차피 의견이 맞을 리가 없어요. 도서실이나 구급 상자에 관해서 선생님은 아까부터 코웃음을 치고 계시지만, 그 중에서 제일 불완전한 것이라 할지라도, 저는 이 세상에 있는 온갖 풍경화보다는 더욱 귀중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으니까요." 이와 같이 말하고 나자 어머니 쪽을 바라보고, 이제까지와는 전혀 달라진 말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작님은 무척 여위셨더군요. 요전번 우리 집에 오셨을 때와 비교하면 아주 딴 분 같아요. 비시로 전지 요양을 하라는 말을 들었대요." 리다는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를 상대로 공작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타는 듯한 빨간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흥분을 감추기 위해, 눈이 나쁜 사람이 그러하듯이 테이블 위로 몸을 구부리고, 신문을 읽고 있는 체하였습니다. 나는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였습니다. 4. 바깥은 고요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못 건너편 마을은 이미 모두 잠들어 버린 것 같았습니다. 작은 불빛 하나 보이지 않고, 다만 수면에 비친 파르스름한 별빛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을 뿐입니다. 사자 상이 있는 문 곁에서, 제냐가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나를 배웅하기 위해 기다려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군요." 나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려고 애쓰면서 말했습니다. 빤히 내 쪽으로 쏠려 있는, 어둡고 슬픈 듯한 눈이 보였습니다. "술집 주인도 말 도둑도 모두 단꿈을 한창 꾸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교양 있는 인간은 서로 화를 내며 논쟁만 벌이고 있는 거죠." 비애로 가득 찼다고 하는 것은, 이미 가을의 조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붉은 빛이 도는 보랏빛 구름에 싸여서 차츰 높이 올라가고 있는 달이 길과 그 양쪽의 거뭇거뭇한 겨울 보리밭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별똥이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냐는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길을 걸으면서 될 수 있는 대로 하늘을 보지 않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웬일인지 별똥을 보는 것이 겁이 났던 것입니다. "말씀하신 대로인 것 같아요." 습기 찬 차가운 밤 공기에 몸을 떨면서 그녀는 말했습니다. "만일 인간이 모두 힘을 합하여 정신적인 활동에 몰두할 수만 있다면, 얼마 안 가서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될 거예요." "되고 말고요. 우리는 최고의 존재이거든요. 만일 우리들이 인간의 천재적인 힘을 남김없이 인식하고 최고의 목적을 위해서만 살게 된다면, 우리는 결국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을 테죠. 인류는 퇴화하여 천재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테니까요." 문이 보이지 않게 되자 제냐는 걸음을 멈추고 당황하여 나의 손을 잡았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깨에 엷은 블라우스 하나만을 걸치고 있을 뿐이므로, 추위로 몸을 움츠리고 있었습니다. "내일 또 오세요."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불만을 품은 채 이대로 홀로 남게 되나 하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습니다. 나는 아까부터 별똥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1분만 더 있어 줘요."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부탁입니다." 나는 제냐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제냐가 언제나 나를 마중 나와 주고 배웅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며, 또한 다정하고 황홀한 눈매로 나를 보아주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창백한 얼굴, 연약한 목덜미, 가냘픈 양팔, 게으른 버릇, 독서 취미,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귀엽게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머리는 어떤가 하면, 나는 그녀가 보통 이상으로 머리가 좋은 아가씨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사물을 보는 눈이 넓은 것이 나를 열중하게 하였습니다. 하긴 그것은, 그녀의 사고 방식이 나를 싫어하고 있는 엄한 표정의 미인인 리다와는 달랐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예술가로서 그녀의 호감을 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재능에 의해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나는 그녀 한 사람만을 위해서 제작하는 것을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나의 작은 여왕인 것이다. 이 여왕과 함께 나는 이들 나무들이나 들판, 안개, 저녁 놀 등 자연 전체의 지배자가 되자, 나는 이런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멋지고 매혹적인 자연, 그러나 그 자연 한가운데에 있으면서, 나는 이제까지 자신을 절망적으로 고독하고 불필요한 인간인 것같이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1분만 더 있어 줘요." 나는 애원하다시피 말했습니다. "제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리고 외투를 벗어서 몹시 추워하는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습니다. 그녀는 남자의 외투를 입어 꼴 사납고 보기 싫은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 싫어서 외투를 벗어 땅바닥에 놓았습니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껴안고 얼굴과 어깨에 손에 닥치는 대로 키스를 하였습니다. "내일 또요!" 그녀는 속삭이듯이 말하고 밤의 고요를 깨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이 조심스럽게 나를 껴안고 키스를 받았습니다. "저희 집에서는 어떤 일이든지 서로 숨기지 않기로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머니와 언니에게 모든 것을 깨끗이 얘기해야만 해요.... 저는 겁이 나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어머니는 문제없어요. 선생님을 좋아하고 계시니까요. 그렇지만 리다 언니가 걱정이에요!" 그녀는 문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안녕." 하고 그녀는 소리쳤습니다. 그로부터 2분쯤 그녀가 달려가는 발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까닭도 없었습니다. 나는 얼마 동안 생각에 잠긴 채 그 자리에서 서성거리고 있다가, 이윽고 온 길을 되돌아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을 다시 한 번 바라볼 생각이었습니다. 그립고 소박한 낡은 집. 그 중간 이층의 창문이 마치 두 개의 눈처럼 나를 바라보고, 그리고 나의 마음을 알아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는 테라스 앞을 지나 테니스 코트 곁 오래 된 느릅나무 그늘에 있는 벤치로 가서 거기에 앉아 어둠 속에서 집을 바라다보았습니다. 미슈시가 살고 있는 중간 이층 창문에 갑자기 환하게 불빛이 켜지더니, 이윽고 그것이 부드러운 초록빛으로 변했습니다. 램프에 갓을 씌웠던 것입니다.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한없이 부드럽고 차분한 기분에 젖어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감, 자신을 잊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에게도 가능했다고 하는 만족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같은 이 시간에, 나를 싫어하고 있는, 아니 미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리다가 눈앞에 보이는 저 집 어느 방엔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웬일인지 마음이 놓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벤치에 앉은 채, 제냐가 나오지나 않을까 하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중간 이층에서는 사람 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한 시감쯤 지났습니다. 초록빛 불빛은 꺼지고,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달은 이미 집 위로 높이 떠올라 고요 속에 잠겨 있는 뜰과 오솔길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집 앞 화단에서 자라나고 있는 달리아와 장미가 밤눈에도 선명하게, 게다가 똑같은 한 가지 빛깔로 보였습니다. 추위가 매운 심해졌습니다. 나는 뜰에서 나오자, 길에 떨어져 있던 외투를 집어 들고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 날, 점심을 마친 뒤 보르차니노프 가로 가 보니, 뜰로 난 유리문이 열린 채로 있었습니다. 나는 테라스 위에 앉아서, 곧 화단 건너편의 테니스 코트나 가로수 길 어딘가에 제냐의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어쩌면 집 안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날지도 모른다, 하고 생각하면서 얼마 동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응접실을 지나 식당으로 가 보았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식당에서 긴 복도를 지나 현관까지 갔다가, 거기서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복도로 난 방문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방문 너머에서 리다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 마리의 까마귀에게, 어느 곳에서... 하느님이...." 그녀는 발음을 길게 빼면서 큰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받아쓰기라도 하고 있는 것인가 봅니다. "하느님이 치즈 한 조각, 주셨습니다.... 한 마리의 까마귀에... 어느 곳에서... 누구세요?" 내 발 소리를 들었는지, 그녀는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접니다." "어마, 미안해요. 지금은 좀 바빠요. 다샤의 공부를 봐 주고 있거든요." "어머니는 뜰에 계신가요?" "아뇨. 엄마는 오늘 아침 동생과 같이 떠나셨어요. 펜자 지방에 계시는 숙모님 댁으로요. 겨울이 되면 둘이서 외국으로 떠나실 거예요." 잠깐 잠잠하다가 다시 말소리가 났습니다. "한 마리의 까마귀에게, 어느 곳에서... 하느님이 치즈를 한 조각 주셨습니다. 썼니?" 나는 현관으로 나가 멍청하니 선 채 못과 마을 쪽을 바라다보았습니다. 리다의 목소리는 그 곳까지 들려 왔습니다. "치즈를, 한 조각...한 마리의 까마귀에게, 어느 곳에서, 하느님이, 치즈를 한 조각, 주셨습니다...." 나는 처음에 이 곳에 왔을 때와 같은 길을 걸어 이 정원을 떠났습니다. 순서만이 그 때와 반대였습니다. 저택에서 나오자 다음은 옆에 있는 정원, 그 다음은 보리수의 가로수.... 거기까지 왔을 때, 한 사내아이가 뒤쪽에서 쫓아와 무엇인가 씌어 있는 쪽지를 내게 주었습니다. '언니에게 자초 지종을 얘기했더니, 언니는 헤어져야만 한다고 하며 제 말을 들어 주지 않는 것입니다.' 쪽지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습니다. '언니의 말을 듣지 않고, 언니를 화나게 할 마음은 아무래도 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빕니다. 정말이지 무엇이라고 말씀드려야 좋을지 죄송할 뿐입니다. 어머니와 제가 얼마나 가슴 아프게 울고 있는지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어두운 전나무의 가로수, 무너져 내린 생울타리... 그 때는 호밀꽃이 한창 피고, 메추라기가 울고 있었으나, 지금은 역시 그 들판을 암소와 앞발을 맨 말 떼가 거닐고 있습니다. 언덕 위 여기저기에서 겨울보리의 선명한 초록빛이 보입니다. 나는 삭막하고 허전한 기분에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보르차니노프 가에서 지껄인 것을 하나에서 열까지 창피스럽게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전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 시시하게 여겨졌습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짐을 꾸리고 그 날 밤 안으로 페테르스부르크로 떠났습니다. 보르차니노프 가의 사람들과는 그 뒤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습니다. 최근에 크림 반도로 여행했을 때, 기차 속에서 벨로쿠로프를 만났습니다. 여전히 소매 없는 외투에 수놓은 스모크 차림이었는데,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고 내가 묻자, 신통치 않은 대답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벨로쿠로프는 그 영지를 팔고 류보피의 명의로 좀 작은 다른 것을 샀다고 합니다. 보르차니노프 집안 사람들에 관해서는 별로 알고 있지 않았습니다. 리다는 여전히 셸코프카에서 살고 있으며,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동지들을 조금씩 규합하여 마침내 서클을 하나 만들고, 요전번 자치회 선거에서는 그녀의 서클이 조직의 힘을 발휘하여, 그 때까지 온 군을 손아귀에 넣고 있던 발라긴을 '떨어뜨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벨로쿠로프가 이야기해 준 것은 그런 정도의 것이었습니다. 제냐에 관해서는 집에 없는 것은 틀림없으나, 어디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간 이층이 있는 그 집의 기억도 요즈음에는 차츰 희미해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아주 이따금 글을 쓰거나 읽고 있을 때에, 그 날 밤 창문에 비쳤던 초록빛 불빛과 한밤중 추위에 곱은 손을 문지르며 사랑에 취해서 들길을 돌아올 때에 들은 나 자신의 발 소리가 문득 머리에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미슈시, 당신은 어디 있는가? --중간 이층이 있는 집--끝 귀여운 여인 전직 팔등관 프레미얀니코프의 딸 올렝카는 안뜰에 면한 자기 집 바깥 계단에 앉아,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더운 날에 파리까지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그렇지만 이제 곧 저녁때가 된다고 생각하니 즐겁기만 했다. 동녘 하늘로부터 검은 비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이고, 같은 방향에서 이따금 습한 공기가 흘러왔다. 안뜰 한복판에는 쿠우킨이라고 부르는, 유원지 '치볼리'의 소유주 겸 경영자이며, 같은 안뜰에 면한 별채를 빌어 살고 있는 사나이가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오겠군!"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또 비야! 지겹게도 비만 내리려 하는군. 꼭 심통을 부리는 것 같다니까! 이래 가지고는 끝장이야! 파산이야! 매일 끔찍한 손해를 보고 있거든!" 그는 두 손의 손가락을 깍지 끼고 비틀었다. 그리고 올렝카를 보고 말을 계속했다. "글쎄, 올리가 씨, 이게 바로 우리들의 생활이에요. 정말이지 물고만 싶어요! 일만 한다, 정력을 쏟는다, 갖은 고생을 다 한다, 밤에 눈도 못 붙인다, 조금이라도 나아지려고 매일같이 끙끙거린다--그런데 어떻습니까? 첫째로는 구경꾼인데, 이게 무지몽매하다 이 말씀이에요. 나로서는 최고급 오페레타라든가 선녀극이라든가 유행가의 이름난 가수를 내보내지만, 도대체 그 치들은 그런 것을 바라고 있는 건가요? 조금이라도 알아 줍니까? 놈들이 보고 싶어하는 건 시시껄렁한 것이나 보여 주면 그만이에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글쎄 이 날씨 좀 보세요. 거의 매일 밤 비가 내리지 않습니까? 5월 10일부터 시작해서 5월, 6월 동안 줄곧 내리고 있으니, 정말 손을 쓸 수가 없어요! 구경꾼들은 전혀 몰려들지 않는데, 나로서는 땅세를 꼬박꼬박 내고 있거든요. 연예인들에게도 급료를 지불하고 있죠." 그 다음 날에도 저녁때가 되자 또 비구름이 몰려왔다. 쿠우킨은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를 내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좋아! 쏟아지고 싶으면 맘껏 쏟아져 봐! 유원지를 온통 물바다로 만들어 보란 말이야! 나를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못살게 해 봐! 연예인들도 나를 고소하려거든 고소해 보란 말야! 재판소가 다 뭐야!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내도 까딱하지 않아! 단두대일지라도 겁날 것 없어! 하하하!"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올렝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색을 하고 쿠우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때로는 눈에 눈물이 글썽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쿠우킨의 불행에 마음이 움직여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키가 작고, 깡마르고, 누르무레한 얼굴을 한 사나이인데, 얼마 안 되는 귀밑 털을 정성스럽게 매만지고, 기운 없는 거칠거칠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할 때 입을 일그러뜨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얼굴에는 언제나 절망의 빛을 띠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였다. 전에는 자기 아빠를 사랑한 일도 있다. 그 아빠도 지금은 병에 걸려서,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안락의자에 앉은 채 괴로운 듯이 숨을 쉬고 있었다. 자기의 숙모도 사랑한 적이 있다. 2년에 한 번쯤, 생각난 듯이 브랸스크에서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보다 훨씬 전 단기 여학교의 학생이었을 시절, 프랑스어 남선생을 사랑한 적도 있었다. 올렝카는 조용하고, 마음씨 착하고 동정심이 많은 아가씨인데, 잔잔하고 부드러운 눈을 가졌고, 게다가 매우 건강했다. 그녀의 토실토실한 장밋빛 뺨과 검은 점이 하나 붙어 있는 매끈한 흰 목덜미라든가, 무엇인가 즐거운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에 얼굴에 띠는 상냥하고 순진한 미소를 보면 남자들은, '고것 아주 반반한걸....' 하고 생각하며 자신도 그만 따라 웃음을 지었고, 여자 손님인 경우에는 그 정도로는 참을 수 없어,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고 어찌나 기쁜지 제정신을 잊고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정말 귀여운 분이군요!' 그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살아 온 이 집은 유언장으로는 그녀의 명의로 되어 있었는데, 시 변두리의 집시 마을 안에 있었고, 유원지 '치볼리'는 바로 그 근처였다. 매일 밤늦도록 유원지 안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펑펑 터지는 불꽃 소리가 들려 왔는데, 그것이 그녀에게는 쿠우킨이 가장 힘겨운 적, 즉 냉담한 구경꾼을 공략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결혼을 신청하고, 두 사람은 교회에서 예식을 올렸다. 그녀의 목덜미와 토실토실하게 살찐 건강해 보이는 어깨를 새삼스레 찬찬히 바라보다가, 그는 두 손의 손가락을 깍지 끼고 비틀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귀여운 여자야!" 그는 행복했다. 그러나 결혼식 당일에도 낮과 밤이 이슥해서 두 차례 비가 내렸으므로, 절망의 빛이 그의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결혼한 뒤 그들은 즐겁게 살았다. 그녀는 그의 사무실 창구에 앉아서 유원지 안의 질서에 신경을 쓰기도 하고, 지출을 장부에 적기도 하고, 급료를 지불하기도 했다. 그녀의 장밋빛 뺨과 귀엽고 천진난만한, 후광과 같은 미소는 또는 창구에, 또는 분장실에, 또는 식당에 쉴 새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와서는 알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것, 가장 소중하고 또한 필요한 것은 연극이다, 정말로 즐기고 싶다면, 그리고 교양 있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극장에 가는 길밖에 없다고 말하게 되었다. "하지만 구경꾼들이 그걸 알겠어요?" 하고 그녀는 말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시시껄렁한 어릿광대 짓이란 말이에요. 실제로 어제 우리가 '개작 파우스트'를 내놓았는데, 관람석이 텅텅 비어 있었어요. 그게 아니고 만일 저와 바네치카(쿠우킨의 이름 이반의 애칭)가 무엇인가 시시한 것이라도 내놓았더라면 아마 초만원이 되었을 거예요. 내일은 저와 바네치카가 '지옥의 오르페우스'를 해 보겠어요. 오세요, 네." 이와 같이 연극이나 배우에 관해서 쿠우킨이 한 말을 그녀도 그대로 따라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구경꾼들을 가리켜, 그녀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예술에 대해서 냉담하고, 게다가 무식하다고 경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연습에 말참견을 하기도 하고, 배우들의 연기를 고쳐 주고, 악사들의 품행에는 늘 신경을 쓰는 것이었고, 지방 신문에 자기들의 연극에 대한 혹평이라도 나면 눈물을 흘리며 분해하고 나중에 따지려고 신문사로 가는 것이었다. 배우들은 그녀를 잘 따르고, 뒤에서는 '저와 바네치카'라든가, '귀여운 여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녀 쪽에서도 그들을 보살펴 주고, 조금씩이라면 급료의 선불도 해 주었다. 때로는 보기 좋게 속아넘어가는 일도 있었으나 혼자서 몰래 울 뿐이고 남편에게는 잠자코 있었다. 그 해 겨울에도 그들은 즐겁게 지냈다. 시내 극장을 겨울 내내 쓰겠다는 약속으로 빌어, 짧은 기간씩 우크라이나의 극단이나 마술사나 그 고장의 아마츄어 극단에 다시 빌려주었다. 올렝카는 뚱뚱해지고, 온몸이 만족스러움으로 빛나고 있었으나, 쿠우킨 쪽은 살이 빠지고 누래질 뿐이며, 사업이 겨우내 꽤 잘 되어 나갔는데도 크게 손해를 봤다고 우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밤중이 되면 그는 흔히 기침을 했다. 그러면 그녀는 그에게 딸기즙이라든가 보리수꽃을 짠 즙을 먹어 주기도 하고, 오 드 콜로뉴를 갈아서 주기도 하고, 자기의 부드러운 숄로 덮어 주기도 했다. "당신은 정말 멋진 분이세요!" 그녀는 그의 머리를 쓸어 주면서 진심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멋진 분이세요!" 대재기로 접어들어, 그는 단원을 모집하려고 모스크바로 여행을 떠났는데, 그녀는 그가 집에 없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언제나 창가에 앉아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때, 그녀는 자신의 신세를 닭장에 수탉에 없으면 역시 밤을 지새며 마음이 들떠 있는 암탉들에 비교해 보는 것이었다. 쿠우킨은 모스크바에서 시간이 걸려, 부활절 무렵에야 돌아가게 되었다고 소식을 알려 왔는데, 어느 편지에나 '치볼리'의 일에 대해서 미리 여러 가지로 지시를 적어 놓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월요일 전날 밤늦게 문을 황급히 두들기는 불길한 소리가 났다. 잠이 덜 깬 하녀가 맨발로 마당에 괸 물을 첨벙거리면서 문을 열어 주려고 달려갔다. "문 좀 열어 주세요, 부탁합니다!" 하고 문 밖에서 누군가가 얼빠진 사람같이 낮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전보입니다!" 올렝카는 전에도 남편으로부터 전보를 받은 일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웬일인지 몹시 당황했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는 전보 봉투를 뜯고 다음과 같은 전문을 읽었다. '쿠우킨 씨 오늘 급서, 지시를 기다림, 장례는 화요일.' 이런 투로, 그 전보에는 '장례'라든가 하는 글이 들어 있었고, 서명은 오페레타 극단의 무대 감독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여보!" 올렝카는 엉엉 소리를 내어 울면서 말했다. "바네치카, 사랑하는 당신을 만나게 됐단 말인가요? 어쩌자고 저는 당신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었던가요! 이 불쌍한 올렝카는, 이 가엾고 불행한 올렝카는 앞으로 누굴 믿고 살란 말입니까?" 쿠우킨은 화요일에 모스크바의 바간코보 묘지에 매장되었다. 올렝카는 수요일에 돌아왔는데, 자기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쓰러져서 한길과 이웃집까지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울었다. "귀여운 여자야!" 하고 이웃 여자들은 성호를 그으며 말을 주고받았다. "귀여운 올리가야. 저걸 들어 봐요, 저렇게 울고 있어요!"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올렝카는 상복 차림으로 미사에 나갔다가 슬픈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우연히 그녀와 나란히 걷고 있던 사람은 역시 교회에서 돌아오는 이웃집 사람으로, 상인 바바카에프의 목재 저장소 관리인으로 있는 바실리 안드레이치 푸스트발로프라고 하는 사나이였다. 그는 밀짚모자를 쓰고, 흰 조끼에 금줄을 드리우고 있어서, 상인이라기보다 지주 같았다. "무슨 일에나 법도라는 것이 있는 겁니다, 올리가 씨." 그는 침착한 말투로 동정하는 듯이 말했다. "만일 누군가 집안 사람이 죽는다면, 그것은 곧 하느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그런 경우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참고 견뎌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올렝카를 샛문 근처까지 바래다주고, 그는 인사를 하고 돌아가 잤다. 그 뒤 그녀의 귀에는 하루 종일 상인의 침착한 말소리가 들려 오고, 눈을 감으면 곧 그의 검은 수염이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가 몹시 좋아졌다. 게다가 그로서도 그녀로부터 이만저만 인상을 받은 게 아닌 것 같았으며, 그 증거로는, 얼마쯤 지나서 별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도 아닌 어느 부인이 그녀의 집으로 커피를 마시러 와서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곧 푸스트발로프 이야기를 시작하고, 그 사람은 훌륭하고 믿음직스런 분이라든가, 그 사람에게라면 어떤 아가씨도 기꺼이 시집을 갈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나자, 이번에는 장본인인 푸스트발로프가 찾아왔다. 그는 오래 앉아 있지는 않고, 10분쯤 있었을 뿐이며 말수도 적었으나, 올렝카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어 밤새껏 뜬눈으로 지새우다가 마치 열병 환자같이 몸이 달아올라 아침이 되기가 무섭게 예의 그 부인을 부르러 심부름을 보냈다. 이윽고 혼담이 성립되고, 얼마 안 가서 예식이 올려졌다. 푸스트발로프와 올렝카는 결혼을 한 뒤 행복하게 살았다. 그는 대개 점심때까지 목재 저장소에 있다가 일을 보러 외출했다. 그러면 그 뒤 올렝카가 그 대신 저녁때까지 사무실에 앉아서 계산서를 쓰고, 목재를 고객에게 팔거나 하는 것이었다. "요즘에는 목재값이 해마다 2할씩이나 올라요." 그녀는 아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말씀이에요, 전에는 이 고장의 목재에 손대고 있었지만, 지금은 바세치카가 해마다 모기료프 지방까지 사러 나가야 한다니까요. 그 운임이 얼마나 비싼지!" 그녀는 자기가 오래 전부터 목재 장사를 하고 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목재인 것 같이 여겨지는 것이었다. 도리목이라든가 통나무, 각목, 판자, 널빤지 등과 같은 말이 웬일인지 친근감이 들고, 감동적인 울림을 지니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매일 밤 그녀가 잠을 자고 있으면, 널빤지나 각목 더미 또는 변두리 어딘가 먼 곳으로 목재를 싣고 가는 짐마차의 긴 행렬이 꿈에 나타났다. 지름 22 센티미터, 높이 8 미터 반인 통나무가 곤두서서 1개 연대만큼이나 목재 저장소로 밀어닥치는 광경, 통나무나 도리목, 배판이 서로 맞부딪쳐, 메마른 나무 소리가 메아리치면서 모두 쓰러졌는가 싶으면, 다시 일어서서 차곡차곡 쌓여 가는 광경이 꿈 속에 나타나는 일도 있었다. 올렝카가 꿈 속에서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면 푸스트발로프는 그녀에게 다정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올렝카, 왜 그러는 거요, 여보. 성호를 그어요!" 남편이 생각하는 것은 곧 그녀가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니, 당신은 하고많은 날 댁이 아니면 사무실에만 틀어박혀 있군요." 아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때로는 연극이든가 서커스 같은 것을 구경하러 가는 게 어때요. 귀여운 부인." "나와 바세치카는 연극 같은 것을 구경하러 갈 틈이 없어요." 그녀는 의젓하게 말했다. "우리들은 일복을 타고난 사람들이라, 부질없는 일에 시간을 보낼 만한 여유가 없는 걸요. 그까짓 연극 같은 게 어디가 좋아요?" 토요일이 되면 푸스트발로프와 그녀는 밤 미사에 나가고, 또 경축일에는 아침 미사에 나갔다. 교회에서 돌아올 때는 정답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감동한 얼굴을 하고 걸어왔다. 두 사람 주위에는 기분좋은 향기가 풍기고, 그녀의 비단옷은 사르륵사르륵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집으로 돌아오면 그들은 빵과 여러 가지 잼과 차를 마시고, 그 뒤에 피로시키를 먹었다. 매일 점심때만 되면, 안뜰과 문 밖의 한길을 가릴 것 없이 보르시치나 영과 오리고기 구이 따위의 군침도는 냄새가 풍기고, 육식을 금하는 날에는 그것이 생선 냄새로 바뀌어, 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식욕을 돋우는 것이었다. 사무실에서는 언제나 사모바아르가 끓고 있었고, 단골 손님들은 반드시 차와 둥근 빵대접을 받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부부는 같이 목욕탕에 갔다가,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덕분에 호강을 하고 있어요." 올렝카는 아는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말했다. "고마운 일이에요. 여러분들도 저와 바세치카처럼 지내시도록 기도를 드리고 있는 걸요." 푸스트발로프가 모기료프 지방으로 목재를 사들이러 가면, 그녀는 너무나 적적한 나머지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지새우는 것이었다. 이따금 저녁 같은 때에 그녀의 집으로 스미르닌이라고 하는 연대 소속의 젊은 수의이며, 그녀의 집 별채를 빌어서 살고 있는 사내가 찾아왔다. 그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든가, 트럼프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그녀도 심심풀이가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그녀의 흥미를 끈 것은 그 자신의 가정 생활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일찌기 결혼을 하여 아들도 하나 있었으나, 아내가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헤어지고, 지금은 그녀를 몹시 미워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들의 양육비로 한 달에 40루우블리씩 송금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올렝카는 한숨을 쉬고 머리를 젓고는, 이 사나이가 자꾸만 가엾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당신에게 하느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그가 돌아갈 때 그를 계단까지 배웅하면서 그녀는 말했다. "적적함을 풀어 주어 고마워요. 부디 평안히 지내도록 하세요. 기도 드리겠어요." 그녀는 언제나 남편을 따라, 매우 의젓하고 사려 깊은 듯한 말투로 인사를 했다. 수의가 아래 문 밖으로 사라진 뒤에도 그녀는 또 한 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이렇게 말했다. "이봐요, 스미르닌 씨, 부인과 화해하세요. 아드님 때문이라고 생각하시구요!" 그리고 푸스트발로프가 돌아오면, 그녀는 도란도란 이 수의의 일이나 그의 불행한 가정 생활에 관해서 남편에게 들려 주고, 그들은 함께 한숨을 쉬기도 하고, 머리를 젓기도 하면서, 그 아들은 틀림없이 아버지를 그리워 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일종의 기묘한 연상 작용에 의하여, 성상 앞에 서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공손히 절을 하고는, 부디 아기를 점지해 주십사 하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부부는 조용히 아무 탈 없이, 서로 사랑하면서 6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겨울날, 푸스트발로프는 목재 저장소에서 뜨거운 차를 잔뜩 마시고는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목재를 내주려고 밖으로 나간 것이 원인이 되어, 감기에 걸려 그만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리고 곳곳의 용하다는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았으나 넉 달을 앓은 끝에 마침내 죽고 말았다. 이리하여 올렝카는 다시 과부가 되었다. "저는 누구를 믿고 살면 좋아요, 네, 여보?" 남편의 장례식이 끝나자 그녀는 엉엉 울면서 이렇게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당신이 돌아가셨으니,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에요. 불쌍하고 불행한 저는요. 친절하신 여러분들, 부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이 세상에서 외토리가 된 저를 말씀이에요..." 그녀는 하얀 상장이 달린 검은 옷을 입고, 모자와 장갑은 한평생 쓰지 않기로 마음먹고, 외출도 이따금 교회든가 남편 무덤에 다녀오는 정도로 그치고, 그 밖에는 수녀처럼 집 안에 틀어박혀서 지냈다. 그녀가 마침내 상장을 떼고, 창의 덧문도 열게 된 것은 여섯 달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 무렵이 되자, 아침마다 그녀가 하녀를 데리고 시장에 식료품을 사러 가는 모습이 가끔 눈에 띄게 되었으나, 그녀가 지금 집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짐작을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짐작의 근거가 된 것은, 예컨대 그녀는 자택 뜰에서 예의 수의사를 상대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든가, 그 때 수의사는 그녀에게 신문을 읽어 주었다든가, 그리고 또 그녀가 어떤 아는 부인을 만나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든가 하는 그러한 종류의 것들이었다. "이 고장에서는 가축 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병이 퍼지고 있다는 거예요. 간단히 말하면, 사람들이 우유를 마시고 병이 났다든가 말과 소에서 감염되었다든가 그런 얘기만 늘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가축의 건강에 대해서도 사실은 사람의 건강과 마찬가지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대요." 이와 같은 그녀의 말은 예의 수의사의 말 그대로이며, 그녀는 지금으로서는 모든 일에 그와 같은 의견이었다. 그녀는 누구든가 의지하지 않고서는 1년도 살아갈 수 없는 여자이고, 또한 지금 자기의 새로운 행복을 자기 집 별채에서 찾아 낸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눈으로 보나 분명했다. 이러한 일은 다른 여자였다면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을 것이지만, 올렝카에 이르면 누구 하나 나쁘게 여기려고 하지 않고, 그녀의 신상에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나 과연 있을 법한 일이라고 수긍하는 것이었다. 그녀도 수의도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변화에 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오로지 비밀로 하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그것은 두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수의에게 연대의 동료들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그녀는 차를 내놓든가 밤참을 내놓은 끝에 소와 양의 페스트 이야기, 가축의 결핵 이야기 따위를 하기 때문에 수의는 그만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손님이 돌아간 뒤에 그녀의 손을 잡고 화를 내며 나무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아주 놀란 눈으로 걱정스럽게 그를 쳐다보고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볼로데치카(수의사 스미르닌의 이름인 블라디미르의 애칭), 그러면 저는 무슨 얘기를 하면 되는 거죠?" 그리고 눈물이 글썽해져서 그를 꼭 껴안고, 제발 화를 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행복했다. 그렇지만 그 행복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수의사는 연대를 따라 영원히 가 버린 것이다. 그의 연대는 어딘가 몹시 먼 곳으로, 조금만 더 가면 시베리아라고 하는 곳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리하여 올렝카는 외토리가 되고 말았다. 이번에야말로 그녀는 완전히 외토리였다. 아버지는 오래 전에 죽어서, 그가 애용하던 안락의자는 다리 하나가 떨어져 나간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다락방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몸이 수척해지고, 얼굴도 전만 못했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도 이제는 전처럼 그녀에게 눈길을 보내거나 웃음짓거나 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덧 한창 나이는 지나가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고, 이제는 미지의, 그리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마음 편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려는 것 같았다. 저녁때가 되면 올렝카는 바깥 계단에 앉아서 '치볼리'에서 들려 오고 있는 음악과, 불꽃을 쏘아 올리는 소리를 멍청히 듣고 있었으며, 생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이젠 아무 것도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휑뎅그렁한 자기 집 안뜰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먹고 마시는 일도 마치 귀찮아서 마지못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곤란한 것은 무슨 일에 대해서나 이제는 의견이라는 것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주위의 여러 가지 것들도 눈에 들어오고, 자기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도 모두 납득이 가는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무엇 하나 의견을 정리할 수가 없어 무슨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이같이 아무런 의견도 없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가령 병이 놓여 있거나 비가 내리거나 농부가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것이 눈에 띈다고 하더라도, 그 병이나 비나 농부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이고, 그것들에 어떠한 뜻이 있는 것인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쿠우킨과 푸스트발로프, 그리고 수의사가 있었던 시절에는 올렝카는 무엇이나 설명할 수 있었고, 어떤 일에 대해서도 말하려고 생각만 한다면 의견을 말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머리 속이나 마음 속도 안뜰과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쑥을 지나치게 먹었을 때와 같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기분 나쁘고 뒷맛이 개운치 않은 느낌이었다. 읍은 차츰 사방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집시 마을도 이제는 집시 거리라고 불리게 되었고, 유원지 '치볼리'나 목재 저장소가 있었던 근처에도 집들이 들어서서 골목길이 몇 개나 생겼다. 세월은 얼마나 빠른 것인가! 올렝카의 집은 낡아 버렸고, 지붕은 삭았고, 헛간은 기울어지고, 안뜰도 잡초와 가시 돋친 풀들이 잔뜩 우거져 있었다. 올렝카 자신도 늙어서 볼품이 없어졌다. 여름철에는 바깥 계단에 앉아서 지낸다. 마음속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고, 따분하고 쑥을 먹은 것 같은 뒷맛이 난다. 겨울철에는 창가에 앉아서 눈을 바라보며 지낸다. 봄 기운이 돌아 교회당의 종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올 무렵이 되자, 갑자기 옛날 일들이 생각나서 가슴이 달콤하게 죄어들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동안의 일이고, 이윽고 또다시 마음이 텅 비어 버리고,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모르게 된다. 검은 새끼고양이 블루이스카가 재롱을 떨며 조용히 목구멍에서 가르랑가르랑 소리를 내지만, 올렝카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그와 같은 고양이의 재롱 따위가 아닌 것이다. 바라는 것은 사랑이다. 그녀의 모든 것, 그녀의 온몸과 온 정신을 지배하여 그녀에게 사상과 생활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식어 가는 피를 따스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검은 고양이 블루이스카를 옷자락에서 떨어 버리고, 화가 치미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저리 가라니까. 이리 오면 못 써!" 이와 같이 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간다. 아무런 즐거움도 없고 아무런 의견도 없다. 모든 일이 하녀인 마블라가 하는 말대로면 되는 것이다. 7월의 어느 무더운 날 저녁 가까이, 마침 읍내에서 기르고 있는 가축의 행렬이 지나가는 바람에 안뜰에 온통 희뿌연 먼지가 가득 찼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샛문을 두들겼다. 올렝카는 자신이 문을 열어 주려고 나갔다가, 힐끗 눈에 띈 것을 보자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문 밖에 수의사 스미르닌이,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게다가 평복 차림이 된 스미르닌이 서 있었던 것이다. 순간, 그녀는 온갖 것들을 단번에 머릿속에 떠올리며,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상대방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그리고 흥분된 나머지, 그 뒤에 어떻게 해서 둘이 안으로 들어갔는지, 앉아서 차를 마셨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아, 당신!" 그녀는 기쁨에 떨면서 말을 더듬었다. "스미르닌 씨! 어디서 오시는 길인가요?" "실은 이 읍에 주저앉아 살 생각이오." 그가 말했다. "군대에서 나왔어. 한번 자유로운 몸을 돼서 운수에 맡겨 버리자, 얼마 동안 주저앉아서 살아 보자. 그런 생각으로 온 거요. 그리고 아들놈도 중학교에 보낼 시기가 되었고, 크게 자랐더군. 나는 나대로 아내와 화해를 했어요." "그럼 부인께선 어디에?" 올렝카가 물었다. "아들과 같이 여관에 있어요. 나는 이렇게 돌아다니며 살 집을 찾고 있는 거요." "어마, 그러시다면 저희 집으로 오세요! 여기라도 그런대로 사실 수 있잖아요. 네, 그게 좋아요. 그리고 전, 집세는 한푼도 받지 않겠어요!" 올렝카는 흥분이 되어 또 울었다. '여기서 사세요. 저는 별채에서 살아도 충분해요. 어쨌든 잘 됐어요!" 다음 날이 되자, 벌써 지붕에 새로 칠을 하고, 벽도 하얗게 칠하는 작업이 시작되고, 올렝카는 두 손을 허리에 짚고 안뜰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지휘를 했다. 얼굴은 예전과 같이 웃음으로 빛나고, 마치 오랫동안 잠을 자다가 깨어난 듯이 몸 전체가 싱싱한 활기로 넘쳐 흘러 보였다. 이윽고 수의사의 아내가 마차를 타고 왔는데, 그녀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고집이 세어 보이는 듯한 표정을 한 깡마르고 못생긴 부인이었다. 그녀와 같이 온 사내아이는 이름이 사아샤라고 하며, 나이에 비해 키가 작고(이미 열 살이었다), 뚱뚱하게 살찐 아이였으며, 맑은 하늘빛 눈을 하고, 양볼에 보조개가 패어 있었다. 이 아이는 안뜰로 들어오자마자, 곧 고양이를 뒤쫓기 시작했고, 금세 밝고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를 곳곳에 뿌렸다. "아줌마, 이건 아줌마네 고양인가요?" 그는 올렝카에게 물었다. "새끼를 낳으면 한 마리만 우리에게 줘요. 엄마는 쥐를 무척 무서워하니까요." 올렝카는 그와 이야기를 하고 차를 주었으며, 그러다가 갑자기 마치 이 소년이 피를 나눈 자기 아들이기라도 한 듯이, 가슴속에서 심장이 훈훈하게 고동치고 달콤하게 죄어들었다. 그 날 저녁 그가 식당에 앉아 복습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연민의 정이 깃든 눈길로 황홀한 듯이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속삭였다. "귀엽게도 생겼군.... 얘야, 너는 정말 똑똑하고 아주 희멀겋게 생겼구나." "섬이란 육지의 일부로서..." 하고 소년은 목청을 돋우어 읽었다. "사면이 물로 둘러싸인 것을 가리킨다. "섬이란 육지의 일부로서...." 하고 그녀는 따라서 읽었다. 그리고 이것이 침묵과 아무 생각도 없이 보낸 긴 세월이 지나간 뒤에, 그녀가 확신을 가지고 입밖에 내놓은 최초의 의견이었다. 이리하여 이제는 자신의 의견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그녀는 밤참을 들 때 사아샤의 부모를 상대로, 요즘의 중학교 아이들이 공부 때문에 고생을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중학의 고전 교육 쪽이 실업 학교의 교육보다는 낫다, 왜냐 하면, 중학부터는 어느 길로나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어서, 마음만 먹는다면 의사가 될 수도 있고, 기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고 말했다. 사아샤는 중학에 다니게 되었다. 어머니는 할리코프에 있는 여동생 집에 가더니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고, 아버지는 매일 어디론가 가축 검사를 하러 나가, 사흘 동안이나 집을 비우는 일도 흔히 있었다. 올렝카에게는, 사아샤가 버림을 받아 집안에서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 굶어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자기의 별채로 데려다가 작은 방 하나 내주었다. 사아샤가 이와 같이 그녀의 별채에서 살게 되고부터 벌써 반년이 되었다. 매일 아침 올렝카는 그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는 한 손을 얼굴에 대고, 숨소리도 내지 않고 곯아떨어져 있다. 그녀는 그를 깨우는 것이 가엾게 여겨지기만 했다. "사아샤야." 그녀는 슬픈 듯이 말했다. "착하지, 어서 일어나. 벌써 학교 갈 시간이란다." 그는 일어나 옷을 입고 기도를 드리고, 그리고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신다. 차는 언제나 석 잔이고, 그 밖에 큼직한 둥근 빵 두 개, 프랑스빵 반쪽에 버터를 발라먹는다. 아직 잠이 덜 깨어서 기분이 좋지 않다. "사아샤야, 너 우화 암송을 잘 못 하지?" 올렝카는 이렇게 말하고는, 마치 먼 여행으로라도 떠나 보내는 듯한 눈길로 그를 바라본다. "정말이지 딱한 아이구나. 착하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그냥 내버려 둬 줘요. 부탁이에요." 하고 사아샤가 말한다. 그리고 그는 학교를 향해 거리를 걸어갔다. 자그마한 몸매 큰 모자. 등에는 란도셀. 뒤에서 올렝카가 발 소리를 죽여 가며 따라간다. "사아샤야!" 도중에서 그녀가 불러 세운다. 그가 돌아다보자, 그녀는 대추야자나 캐러멜을 손에 쥐어 준다. 중학교가 있는 옆골목으로 접어들자, 그는 뒤에서 키가 큰 뚱뚱한 여자가 따라오는 것을 창피하다고 느낀다. 그는 뒤를 돌아다보고 이렇게 말한다. "아줌마, 집으로 돌아가요. 난 혼자서도 갈 수 있어."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그가 중학교의 현관으로 사라질 때까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바라다본다. 아아, 그녀는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까지 그녀가 가슴에 품고 있던 사랑 가운데서 그 어느 것 하나도 이만큼 깊은 것은 없었다. 어머니와 같은 감정이 마음속에서 더욱더 불타오르고 있는 지금처럼 그녀가 헌신적으로 자기 욕망을 떠나서, 게다가 마음 흐뭇하게 영혼을 바칠 마음이 내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 소년, 양볼의 그 보조개, 그 모자를 위해서라면 그녀는 온 생애를 바칠 것이다. 서슴지 않고 감동의 눈물을 글썽거리며 바칠 것이다. 어째서? 그러나 그 까닭을 도대체 누가 알겠는가. 사아샤를 중학교까지 바래다 준 뒤,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고, 사랑이 넘쳐흐르는 마음을 품고 조용히 돌아온다. 요 반년 동안에 완전히 젊을 되찾은 그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감돌고 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에 기쁨을 느끼고 이렇게 말을 건넨다. "안녕하십니까, 귀여운 올리가! 기분은 어떠세요, 귀여운 양반." "요즘에는 중학교 공부가 퍽 어려워졌어요." 하고 그녀는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말을 붙인다. "여간 힘든 게 아니에요. 어제는 1학년 반에서 우화 암송에 라틴어 번역, 그리고 무엇인가 숙제가 또 한 가지 나왔어요.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무리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녀는 선생들에 대한 것, 수업에 대한 것, 교과서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모두가 사아샤가 이야기하는 것과 꼭 같다. 두 시가 지나서 두 사람은 같이 점심을 먹고, 밤에는 같이 예습을 하고, 같이 눈물을 흘린다. 그를 재울 시간이 되자, 그녀는 오랫동안 그를 위해 성호를 긋고는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자기도 잠자리에 들어가 아득한 장래의 일을 공상한다. 사아샤는 대학을 나와 의사나 기사가 될 것이다, 큰 집과 말과 마차를 가지게 될 것이다, 결혼하여 아기도 낳을 것이다.... 꾸벅꾸벅 졸면서 언제까지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감은 눈에서 흘러 나오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옆에서 자고 있는 검은 고양이가 목구멍에서 소리를 낸다. "가르랑... 가르랑... 가르랑...." 갑자기 요란하게 샛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올렝카는 깜짝 놀라서 눈을 뜨고, 겁에 질려서 숨도 못 쉰다. 심장이 몹시 뛴다. 30초 지나자, 또 문을 두드리는 소리. '할리코프에서 전보가 온 거야.' 그녀는 몸을 덜덜 떨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사아샤의 어머니가 사아샤를 할리코프에 있는 자기 집으로 보내 달라는 거겠지.... 아아, 어떻게 하나!' 그녀는 체념을 한다. 머리에서도 발에서도 손에서도 핏기가 걷히고, 그녀는 이 세상에 자기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 1분이 지나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 온다. 수의가 클럽에서 돌아온 것이다. '아, 잘 됐어.'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꽉 막혔던 가슴이 이제 조금씩 풀리고, 다시 마음이 놓인다. 그녀는 누워서 사아샤의 일을 생각한다. 그 사아샤는 옆방에서 곤하게 자고 있고, 이따금 이런 잠꼬대를 한다. "어디 두고 봐! 저리 가지 못해! 정말 그럴 테야!" --귀여운 여인--끝 사랑에 대하여 이튿날 아침 식사에는 특별히 맛있는 피로시키, 그리고 새우와 양고기 커틀릿이 나왔다. 그들이 그것을 먹고 있으려니까, 쿡인 니카놀이 점심에는 무엇을 들겠느냐고 손님에게 물어 보기 위해 2층으로 올라왔다. 얼굴이 통통하게 살찌고 눈이 작은 중키의 사나이였다. 얼굴은 면도를 하였는데, 콧수염은 면도를 했다기보다는 털 하나하나를 뽑아 냈는가 싶을 만큼 면도를 한 자국이 매끈매끈했다. 알료힌은, 미인인 페라게야가 이 쿡에게 홀딱 반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술을 좋아하고 성미가 괄괄한 사나이여서, 그녀는 결혼할 생각은 없었으나 그저 아무 조건 없이 잘 사는 것에는 찬성이었다. 그러나 이 사나이는 매우 신앙심이 깊어서, 그저 아무렇게나 살림을 차린다는 것으로서는 종교상의 신앙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래도 정식으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면 안 된다고 우기고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술에 취해서는 그녀에게 욕을 몹시 하고, 나중에는 손찌검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가 술을 잔뜩 마셨다고 하면, 그녀는 2층에 숨어서 엉엉 운다. 그런 때에는 알료힌이나 하인들도 집을 비우지 않기로 하고 있었다. 만약의 경우에는 그녀를 지켜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이들의 화제에 올랐다. "사랑이란 것은 어떻게 해서 생겨날까요?" 알료힌이 말했다. "어째서 저 페라게야가 자기의 성격이나 용모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내에게 반하지 않고, 하고많은 사람 가운데서 그 도깨비상을 한 니카놀(이 근처에서는 그를 도깨비상이라고 부르고 있어요)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사랑은 개인의 행복 문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면 모르는 일투성이이고, 따라서 또한 어떤 것이나 좋을 대로 논할 수 있지요. 이제까지 사랑에 관해서 언급한 다시 없는 진리는 단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위대하고 신비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밖에는 사람이 사랑에 관해서 말하거나 글로 쓰거나 한 것은 어느 것이나 다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고, 단지 제기한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므로 문제 그 자체는 여전히 미해결인 채 남아 있는 셈입니다. 어떤 특정한 경우에 어떤 해석이 성립되는 것 같더군요. 그 해석은 다른 일의 경우에는 이미 응용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하나의 경우를 따로따로 해석해서 일반적인 결론을 끌어 내는 것을 단념하고 만다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즉 의사들이 흔히 말하고 있듯이, 개개의 경우를 각각 개별화시켜 볼 필요가 있는 셈입니다." "정말 그래요." 부르킨이 맞장구를 쳤다. "우리들 러시아의 신사들은 이런 종류의 미해결인 채로 되어 있는 문제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요.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이상화해서 장미나 밤꾀꼬리로 꾸미든가 하는데, 우리 러시아인은 자기의 사랑을 이러한 숙명적인 문제로 꾸며요. 더구나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가장 시시한 것을 고르고 있어요. 예전에 모스크바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을 무렵 나는 어떤 사랑스런 여성과 살림을 차린 일이 있는데, 이 여자는 내가 껴안고 키스를 해 줄 때마다, 이 사내는 한 달에 수당을 얼마나 줄까, 쇠고기는 지금 한 파운드에 얼마나 할까, 그런 일들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우리도 이 여자와 마찬가지여서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이 사랑은 법도에 합당한가 아니한가, 멋이 있는가 없는가, 혹은 이렇게 되어 가다가 도대체 나중에 가서는 어떻게 될까 하는 따위를 생각하고, 줄곧 이런 의문으로 골치를 앓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만 이런 것만 생각하고 있다 보면 차차 침착하지 못하고, 흥이 깨지고, 초조한 기분이 되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알료힌은 아무래도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이 소피노에 살면서 영지를 경영하게 된 지가 퍽 오래 되었죠." 알료힌이 얘기를 시작하였다. "실은 대학을 졸업하고부터 여기서 쭈욱 살고 있습니다. 나는 자신이 받은 교육으로 말할 것 같으면 창백한 인텔리, 그리고 타고난 취미로 봐서도 서생입니다만, 내가 이 곳으로 왔을 당시 이 영지에는 막대한 빚이 있었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빚을 지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어느 정도는 내 교육에 돈을 너무 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빚을 다 갚을 때까지는 여기 주저앉아서 일을 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사실 그렇게 마음먹고 일을 시작했을 때, 어느 정도 탐탁지 않게 여겨지는 기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어쨌든 이 고장은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손해가 안 되도록 농사를 지으려면 농노나 삯군(어느쪽으로나 비슷하지요)에게 일을 시키든가, 그렇지 않으면 농사꾼 농법으로 나가든가, 즉 온 집안 사람들이 총동원되어 들일을 하든가, 그 어느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어요. 그 중간 방법은 없는 거죠. 그러나 당시 나는 그런 자질구레한 구별에는 구애받지 않고 있었어요. 손바닥만한 땅을 놀리지 않고, 이웃 마을에서 농사꾼이란 농사꾼은 남자나 여자를 가리지 않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동원해서, 앞뒤를 가리지 않고 일을 시작했던 겁니다. 나 스스로 밭을 일구기도 하고 씨를 뿌리기도 하고 김을 매기도 했는데, 좋아서 그런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너무나 배고픈 나머지 야채밭에서 오이를 훔쳐 먹는 시골 고양이 같은 신경질적인 얼굴을 하게 되었죠. 몸은 욱신욱신 쑤시고, 길을 걸어갈 때에도 그만 꾸벅꾸벅 조는 꼬락서니였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나는 이와 같은 노동 생활을 자신의 문화적인 습관과 잘 조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외면적인 규율을 지켜 생활해 나가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2층의 이 호화로운 방을 내 거실로 삼고, 아침과 점심을 먹은 뒤에는 리쾨르가 든 커피를 마시고, 밤에는 잠을 자기 전에 자리 속에서 '유럽 통보'를 읽기로 하였죠. 그런데 그렇게 하는 동안 이 교구의 신부, 이반 신부라고 합니다만, 그분이 놀러 와서 집에 있는 리쾨르를 단번에 모두 마셔 버리고 '유럽 통보'도 사제의 딸들이 빌어 가고 말았어요. 그것은 여름철에, 특히 김을 매 주어야 할 때에 나는 바빠서 내 침실까지 올라갈 틈이 없어서 헛간에 있는 썰매 위라든가, 숲속의 초소 한 구석이라든가, 그런데서 매일 밤 자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도무지 독서를 할 겨를이 없었던 거죠. 그러다가 나는 차츰 아래층에 있는 날이 많아졌고, 식사 따위도 하인들이 있는 부엌에서 들게 되었죠. 사치스런 생활을 하고 있던 예전과 비교해서 달라지지 않은 것은, 글쎄요, 하인들이 많다는 정도겠지요. 그것은, 그 하인들이 모두 아버지 대부터 집에서 부리고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어쩐지 차마 내보낼 수가 없었던 겁니다. 처음 몇 해 동안, 나는 이 고장에서 명예 치안 판사로 뽑혔습니다. 이따금 시내에 나가서 판사 회의나 지방 법원의 회의에 출석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매우 기분 전환이 되었죠. 겨울철에는 특히 그러했지만, 아무데도 나가지 않고 2, 3개월 여기에 틀어박혀 있으면, 나중에는 검은 프록 코트가 그리워집니다. 그런데 지방 법원에 나가 보면, 프록 차림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복 차림의 사람도 있고, 그 중에는 연미복을 입은 사람도 있다는 식이지요. 그리고 모두가 법률가이고, 교양이 몸에 밴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야기 상대로는 부족할 것이었습니다. 썰매 위에서 자든가, 하인들과 같이 부엌에서 식사를 하든가 한 뒤 말끔한 내의를 입고, 가벼운 구두를 신고, 가슴에는 시계줄 같은 것을 늘어뜨리고 안락의자에 앉는 것은 참으로 호사스런 기분이 드는 겁니다! 시내에서는 어디를 가나 환대해 주었기 때문에 자진해서 여러 사람들과 사귀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귄 사람들 중에서 가장 두텁게 교제하고,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제일 재미있었던 사람은 지방 법원의 차장으로 있는 루가노비치입니다. 두 분 다 그 사람을 알고 계시죠. 참으로 좋은 사람입니다. 마침 그 유명한 방화 사건 직후의 일이었는데, 심리가 이틀이나 계속되어 모두 기진 맥진이 되어 있을 때 이 루가노비치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하는 거였어요. '어떠세요, 언젠가 우리 집에 오셔서 식사나 같이 합시다.' 이것은 뜻밖의 일이었어요. 왜냐 하면 나는 루가노비치와는 겨우 안면이나 있는 사이, 그것도 공식 석상에서 만났을 뿐이고 집에는 한 번도 놀러 간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옷을 갈아 입기 위해 잠시 호텔에 들렀다가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에 루가노비치의 아내 안나와 알게 되었던 겁니다. 당시는 아직 퍽 젊어서, 기껏해서 스물 두 살쯤 되었을 겁니다. 마침 반 년쯤 전에 처음으로 아기를 낳았던 겁니다. 퍽 오래 전의 일이기 때문에 그 여자의 어디가 그처럼 매력적이었는지, 어디가 그처럼 마음에 들었는지, 이제 와서는 나 자신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것같이 여겨지지만, 그날 밤 같이 식사를 했을 때에는 모든 것이 어떻게도 할 수 없을만큼 분명했던 것입니다. 나는 그 때까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것 같은 젊고, 아름답고, 자상하고, 지적이고, 매력 있는 사람을 만났던 겁니다. 첫눈에 나는 그녀가 옛날부터 알고 있던 가까운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녀의 얼굴이라든가 서글서글하고 현명해 보이는 눈을 마치 언젠가 어린 시절에 어머니의 장롱 위에 있던 앨범 속에서 본 일이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죠. 방화 사건의 피고는 4명의 유대인이었으며 공동 모의라고 인정되었으나, 내 생각으로는 전혀 사실 무근이었습니다. 식사하는 동안 나는 몹시 흥분이 되어, 기분이 무겁기만 했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은 잊어버렸으나, 안나가 쉴 새 없이 머리를 저으며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드미트리, 어째서 그렇게 된 거죠?' 루가노비치는 그야말로 호인으로, 사람이 일단 재판에 회부되면 그것은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한 증거다, 판결의 정당성에 대해 의심을 나타내는 것은 합법적인 절차를 밟은 서면에 의해서만 해야 하는 것이며, 식사를 하는 자리나 사적인 대화를 할 때에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의견을 고수하고 있는 소박한 정신의 소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이나 나는 방화 따위를 범할 리는 없으니까.' 하고 그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재판에 회부될 리도 없고, 감옥에 들어갈 일도 없는 거지.' 그리고 이 부부는 한결같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음식을 들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 예컨대 둘이서 함께 커피를 끓인다든가 단 한 마디를 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마음이 통하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의 생활이 아무런 근심 걱정 없는 평화로운 것이라는 것, 두 사람 모두 손님이 온 것을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식사를 마친 뒤 부부는 같이 피아노를 쳤는데, 그러다가 날이 저물어 나는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초봄에 있었던 일이에요. 그리고 나는 아무데에도 나가지 않고 한여름을 소피노에서 지내고, 시내 일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만, 그 우아한 금발 부인의 모습을 언제나 눈앞에 선했습니다. 그다지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가을이 깊어질 무렵 시내에서 자선 흥행이 있었어요. 지사가 있는 관람석으로 가서 흘낏 보자, 지사 부인 곁에 안나가 앉아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또다시 그 아름답고, 그 사랑스런, 다정스런 눈길에서 가슴이 불붙는 것 같은 강한 인상을 받고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요전번과 똑같은 친밀감이 되살아나는 거였죠. 우리들은 얼마 동안 나란히 앉아 있다가, 그 다음에 로비를 서성거렸습니다. '좀 여위셨군요.' 하고 그녀가 말했어요. '어디 편찮으시기라도 하셨나요?' '네, 사실은 어깨를 좀 앓았습니다. 비가 내리는 밤 같은 날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어쩐지 피로하신 것같이 보여요. 요전 봄에 저희 집에 식사를 하러 오셨을 때에는 보다 젊어 보이시고 건강하신 모습이었는데. 그 때에는 의기 충천하셔서, 쉴 새 없이 여러 가지 말씀을 해 주셨기 때문에 퍽 재미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금쯤 마음이 끌리는 것 같은 기분이 있었죠. 그리고 뭐랄까, 여름 동안 내내 선생님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도 집을 나서기 전에 여기서 뵐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어요.' 이렇게 말하더니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피로한 기색을 하고 계시는군요.' 하고 또 되풀이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늙어 보이세요.' 다음 날, 나는 루가노비치의 집에 점심 식사를 초대받아 갔습니다. 점심을 마친 뒤 그들 두 사람은 겨우살이 준비 일로 여러 가지 지시를 해 두기 위해 별장으로 갔고, 나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내로 돌아와 그들의 집으로 가서 밤이 이슥한 자정이 되었을 무렵, 조용한 가정적 분위기 속에서 차를 마셨습니다. 난로는 훈훈하게 타오르고, 젊은 어머니는 딸애가 자고 있는지 어떤지를 보러 가기 위해 줄곧 자리를 떴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시내로 나갈 때마다 반드시 루가노비치 부부를 방문하게 되었던 겁니다. 얼마 안 가서 두 사람은 나와 흉허물없이 지내게 되었고, 나도 스스럼없이 어울리게 되었죠. 나는 그 집에 가면 대개는 한 집안 식구처럼 안내도 청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 가는 거였어요. '누구시죠?' 안쪽 방에서 느릿한 말투로 이렇게 묻는 소리가 들려 옵니다. 그 목소리가 내게는 여간 아름답게 울리는 게 아니었어요. '알료힌 나리십니다.' 하고 하녀나 유모가 대답했다. 안나는 걱정스런 얼굴로 응접실로 나와서는 정해 놓고 이렇게 묻는 것이었어요. '어째서 이렇게 오랫동안 오시지 않으셨죠?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어요?' 그녀의 눈매, 악수를 하려고 내민 우아하고 품위 있는 손, 그녀의 평상복 차림, 머리를 땋은 모양, 목소리, 발 소리, 방문할 때마다 나는 이와 같은 일체의 것이 무엇인가 새로운, 나의 생활에는 흔치 않은 중대한 것이라고 하는 결코 변하는 일 없는 인상을 받는 것이었어요. 우리들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든가, 제각기 자신의 일을 생각하면서 한참이나 잠자코 있기도 했죠. 그녀가 나를 위해 피아노를 쳐 주는 일도 있었습니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에는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유모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이와 놀거나 서재에서 터어키식 소파에 누워 신문을 읽거나 합니다. 안나가 돌아오면 현관까지 나가서 그녀를 맞고 장을 봐 온 꾸러미를 모두 받아 듭니다. 웬일인지 나는 언제까지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이 장 봐 온 꾸러미에 애착을 느끼며 의기 양양해져서 그것을 안으로 날랐던 것이죠. '여자는 고생스런 일이 없으면 돼지새끼를 산다'고 하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루가노비치 부부는 생활에 아무런 고생이 없었기 때문에 나와 교제하게 됐던 거죠. 내가 오랫동안 시내 출입을 하지 않고 있으면, 그들은 내가 앓는 것이려니, 그렇지 않으면 내 신변에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났으려니 생각하고 두 사람 다 몹시 속을 태웁니다. 그들은 또한 고등 교육도 받았고 외국어도 몇 가지 알고 있는 내가 학문이나 문학 분야에서 일하지 않고, 시골에 틀어박혀서 새앙쥐처럼 돌아다니고, 뼛골이 빠지게 일하면서도 한 푼도 없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내심 괴로워하고 있는 줄 알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하거나 웃거나 먹거나 하는 것은 그 괴로움을 감추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었던 겁니다. 기분이 좋아서 한창 떠벌리고 있을 때조차도 나는 그들의 살피는 듯한 시선을 몸에 느끼는 거였죠. 특히 감동이 된 것은 내가 빚쟁이들에게 들볶이거나, 정기 지불 때 돈이 모자라든가 해서 참으로 마음이 시무룩해져 있을 때의 그들의 태도였습니다. 그런 때, 부부는 창가로 가서 얼마 동안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이야기하다가, 남편이 내 곁으로 와서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봐요, 알료힌 씨, 당신이 만일 현재 돈에 옹색하신다면, 이것은 나나 내 아내도 부탁하는 바이지만, 염려하지 마시고 부디 우리 돈을 써 주세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흥분된 나머지 귀 밑이 새빨개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런 일도 흔히 있었죠. 역시 창가에서 아내와 소곤거린 뒤, 귀 밑이 새빨개지면서 내 곁으로 와서 이렇게 말하는 거죠. '이것은 나와 아내의 부탁인데, 부디 이 선물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커프스 버튼이든가 담뱃갑이든가 하는 것을 내게 주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답례로 나는 시골로 돌아가면, 털을 뽑은 닭이든가 버터든가 꽃 따위를 보내 줍니다. 덧붙여 말씀드려 두지만, 그들은 두 사람 다 적지 않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나는 흔히 남들로부터 돈을 꾸었죠. 별로 사람을 가리지 않고, 꿀 수만 있으면 누구한테서든지 꾸었어요. 그러나 루가노비치 부부한테서만은 비록 어떤 일이 있든 절대로 돈을 꾸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죠. 하긴 이런 얘기를 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겠죠! 나는 불행했었어요. 집에서나 밭에서나 헛간에서도 나는 늘 그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젊고 아름답고 총명한 여자, 멋대가리도 없고 거의 늙은이나 다름없는 사내와 결혼하여 그의 자식까지 낳은 그녀는 도대체 어떤 속셈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멋대가리도 없는 마음 착한 사내, 재미도 없는 상식적인 토론만 하고 무도회나 야회에 나가더라도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아서 훌륭한 사람들 곁에 멍청히 서 있는 채, 마치 팔리기 위해서 끌려 나온 것같이 공손하고 무감동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내, 그런 주제에 자기에게는 행복하게 되고, 아내에게는 아이를 낳게 할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사내, 도대체 그 사내는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어떻게든 그것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또, 나는 도대체 그녀는 내가 아니라 하필이면 그런 사내를 만나게 되었을까, 어째서 우리들 인생에 이같이 끔찍한 잘못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하는 것을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시내로 나가서 그녀를 만날 때마다, 그녀 쪽에서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눈빛을 보고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흔히, 아침부터 무엇인가 특별한 예감이 들었다는 것을 스스로 내게 털어 놓았습니다. 내가 오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거죠. 우리들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말없이 시간을 보내는 일도 있었는데, 서로 사랑을 고백하는 일은 없었죠. 즉, 우리들은 자기에 대해서 자신의 비밀을 폭로하는 계기가 될 것 같은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깊고 짙은 사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만일 이 사랑을 이겨 낼 만한 힘이 자기들에게 없는 경우, 그것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거나 자문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이 조용하고 슬픈 사랑이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과 자신에게 그토록 깊은 사랑과 믿음을 주고 있는 이 집안 전체의 행복한 생활의 흐름을 갑자기 무참하게 끊어 버리고 만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같이 여겨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도, 이 사랑은 이 세상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나를 따라올 것을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그녀를 어디로 데리고 가면 좋단 말인가? 만일 나의 생활이 아름답고 흥미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만일 내가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인물이라든가 또는 유명한 학자거나 배우라고 한다면 그 때에는 얘기가 다르다. 그러나 현실로는 그녀를 너무나도 흔해 빠지고 틀에 박힌 환경으로부터 또 하나의 마찬가지이거나 혹은 더 나아가 그 이상의 틀에 박힌 환경으로 데리고 갈 뿐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들의 행복은 얼마나 오래 간다고 할 수 있는가? 내가 병들거나 죽거나 혹은 단순히 서로의 사랑이 식거나 했을 경우에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녀 쪽에서도 어쩐지 이와 꼭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과 자기 어머니 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 사위를 친아들처럼 사랑하고 있었던 겁니다. 만일 그녀가 자기의 감정에 지고 만다면, 거짓말을 하든가 모든 사실을 고백하든가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데, 그녀의 입장으로서는 어느 쪽이든 똑같이 무섭고 곤란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를 괴롭히고 있던 의문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사랑이 과연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가,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괴롭고 온갖 불행으로 가득 차 있는 나의 생활을 더욱더 곤경으로 빠뜨리게 하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따금 남편에게 나의 결혼 상대는 뒷바라지를 잘 해 주는 아내로서, 나의 한 팔이 되어 줄 수 있는 머리가 좋고 다부진 아가씨가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곧 그런 아가씨는 온 시내를 뒤져 봐도 찾아 낼 수 없을 거라고 덧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월은 한 해, 또 한 해가 흘러갔습니다. 안나에게는 이미 아이가 둘 있었습니다. 루가노비치의 집에 내가 가면, 하녀는 애교 있는 미소를 보이고 아이들은 깡충깡충 뛰며 내 목에 매달립니다. 모두 나를 인격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른이고 아이이고 나만 보면 자기들 앞에 하나의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듯이 느낍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나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저절로 일종의 독특한 매력을 더하는 겁니다. 마지막 몇 해 동안, 안나는 전보다도 자주 친정어머니와 여동생을 방문하러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에는 웬일인지 기분이 언짢은 날이 많았던 겁니다. 또, 자기의 인생을 망쳤다는 불만스런 의식이 얼굴에 뚜렷이 나타나고, 남편과 아이들과도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부터 신경 장애에 대한 치료도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잠자코 있었습니다.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그녀는 나에 대해서 이상하게도 화를 잘 내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거나 동의하지 않고 논쟁을 하게 되면, 언제나 나의 상대방 편을 드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인가를 떨어뜨리거나 하는 날이면 무뚝뚝하게, '잘 하셨군요.' 하고 말하는 겁니다. 같이 극장에 가는 도중, 내가 오페라 글래스를 잊고 오기라도 하면 그녀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잊어버리고 오실 줄 빤히 알고 있었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들의 인생에는 시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종언을 고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들에게도 해어져야 할 때가 찾아왔습니다. 루가노비치가 서부의 어느 지방 법원 원장으로 임명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간과 말과 별장도 팔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별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정원과 초록빛 지붕을 돌아다보고, 이것이 마지막인가 하고 생각했을 때, 모두들 슬픈 마음이 되었습니다. 8월말에, 의사의 권고로 크림 반도로 떠나는 안나를 모두가 역으로 배웅을 하러 가고, 그보다 조금 뒤에 루가노비치가 아이들과 함께 서부의 어떤 지방으로 부임하기로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여럿이서 안나를 배웅하러 갔습니다. 그녀가 남편과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곧 세 번째 벨이 울리려고 할 때에, 나는 그녀가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한 바구니를 그물 선반에 얹어 주기 위해 그녀가 든 객차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작별의 말을 했죠. 그 칸막이 방에서 문득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그만 자제심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는 그녀를 껴안고,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눈물로 젖은 그녀의 얼굴과 어깨와 손에 키스를 하며--아아, 우리는 얼마나 불행했습니까!--나는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 찢어지는 것 같은 가슴의 아픔과 더불어, 나는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고 있는 그 모두가 참으로 무의미하고 하찮은 것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상 그 사랑에 관해서 생각하는 경우에, 평범한 뜻으로서의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라든가 죄라든가 미덕이라든가 그런 것보다는 보다 높은, 더욱 중요한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싫다면, 차라리 전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게 좋다. 내가 깨달은 것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마지막 키스를 하고, 악수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이별이었습니다. 기차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옆 칸막이 방으로 가서 자리에 앉고--그 방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습니다--기차가 다음 역에 도착할 때까지 거기에 앉아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걸어서 소피노의 집으로 돌아왔던 겁니다...." 알료힌이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 비가 그치고, 햇빛이 구름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부르킨과 이반 이바노비치는 발코니로 가 보았다. 정원과 웅덩이의 아름다운 광경이 거기서 내다 보였다. 웅덩이는 바야흐로 햇빛을 받아 거울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광경을 넋을 잃고 보면서도 그 선량하고 총명한 눈을 가진 사내, 그들에게 그토록 솔직하게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은 사내가 이 드넓은 영지 않을 그야말로 생쥐처럼 돌아다니고 있을 뿐, 학문이라든가 또는 무엇이든가 생활을 보다 쾌적하게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아쉽게 여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들은 알료힌이 기차의 칸막이 방에서 그 젊은 유부녀와 이별을 하면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에 키스를 하였을 때, 그녀의 얼굴은 아마 애절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두 사람 다 시내에서 그녀를 종종 보는 일이 있었고, 부르킨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녀와 아는 사이이며, 전부터 그녀를 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에 대하여--끝 작가와 그의 작품 '체호프(Chekhov)'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는 1860년 1월 남 러시아의 아조프 해에 면한 작은 항구 도시 타간로그에서 상인 파벨 체호프의 삼남으로 출생했다. 위로 형이 둘 있고, 밑으로는 남동생 둘과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체호프의 조부 에골은 원래 농노였으나 돈을 모으는 데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는지 농노 해방이 되기 20년 전인 1841년에 집안 식구들의 몸값 3,500루우블리를 지불하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안톤의 아버지 파벨은 이 에골의 차남이었는데 타간로그의 상가에서 13년간 일을 한 후에 1857년에 자립하여 조그마한 식료 잡화점을 차렸다. 파벨은 예술적 재능도 있었는지 성상화도 그렸고, 바이올린도 켰을 뿐만 아니라, 직공들을 모아서 조직한 사설 성가대의 상임 지휘자이기도 했다. 안톤은 일곱 살 때부터 10년간 이 성가대의 알토로 참가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하느님에게 봉사하면 절대로 건강이 상하지 않는다고 하며 어린 안톤에게 무리하게 연습을 시켰고, 수면 부족이나 과로를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 체호프에겐 이 체험은 플러스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레스코프를 빼놓으면 러시아 성직자의 독특한 말투를 체호프만큼 작품 속에 실감 있게 재현해 낸 작가는 없기 때문이다. 체호프는 아홉 살 때 타간로그 고등 학교에 입학했다. 8년제 학교였으나 그는 이 학교를 졸업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성가대 연습을 해야 하고 아버지의 가게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없어 두 번이나 낙제를 했던 것이다. 1876년, 아버지 파벨은 사업에 실패하여 파산하고는 1년쯤전부터 장남과 차남이 공부하러 가 있는 모스크바로 도망치다시피 떠났고, 몇 달 뒤에는 어머니도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떠났다. 이리하여 열 여섯 살 난 안톤은 이미 채권자 손에 넘어간 집에 혼자 남아서 아르바이트로 가정 교사 노릇을 하면서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 지내게 되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자신이 벌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의 빈민가에서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가족들에게도 돈을 보내줘야 했기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나, 그는 이와 같은 가혹한 시련에 꺾이지 않았다. 체호프는 1879년 타간로그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이리하여 그는 모스크바에 나와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으나, 아버지와 두 형은 생활력이 없었기 때문에 안톤은 자진해서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을 맡았다. 기계를 돕기 위해 체호프가 취한 수단은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저속한 주간지에 투고하는 일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첫 작품은 1880년 3월에 주간지 '잠자리'에 실린 패러디 투로 쓴 작품이다. 2년 후인 1882년에 우연한 기회로 페테르스부르크의 언론인 레이킨이 주간으로 있는 주간지 '단편'의 정기 기고자가 된 후부터는 작품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 많을 때는 유머, 콩트, 일화, 스케치, 대화, 단편 소설 따위를 맹렬한 스피드로 한 달에 열 편이나 썼다. 1882년부터 1886년까지 '안토샤체혼테'나 그 밖의 필명으로 각종 신문 잡지에 실린 작품이 500편 가까이 된다. 이 작품들은 모두 돈을 벌기 위해 마구 갈겨 쓴 것이며, 작가 자신도 별로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체호프는 언제부터 본격적인 작품을 쓸 마음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1885년말에 페테르스부르크에 가서 작가들에게 대환영을 받은 일과 이듬해 초에 수도의 보수계 대신문인 '새시대'에서 원고를 청탁해 온 일, 그리고 역시 그 해 3월에 문단의 대가 가운데 한 사람인 그리고로비치가 그의 재능을 칭찬하면서 남작을 하지 말라고 훈계하는 편지를 보내 온 일 등이 작가로서의 자각과 책임감을 느끼게 한 것 같다. 그래서 이 해에는 '추도 예배' '아뉴타' '장난' '코러스 걸' '바니카' 등 훌륭한 작품을 잇달아 썼다. 체호프의 문체는 이 때 확립되었으며, 그 후 변하는 일이 없었다. 그의 문체의 특징은 간결성과 객관성이다. 체호프만큼 작품에 주관적 요소가 들어가는 것을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거부한 작가는 드물다. 체호프의 작품이 독자의 인생관에 따라 때로는 희극적이고 때로는 시니컬하고 때로는 잔혹하고 비극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이러한 주관적 요소를 섞지 않는 창작 태도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체호프의 작품에는 이러한 객관성 외에 얼른 보기에 그것과 모순되는 서정적인 요소가 있는데, 이 두 가지 요소가 미묘하게 결합한 것이야말로 이 작가의 문체의 가장 큰 특색이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1886년경부터 체호프는 악에 대한 무저항, 육체 노동에 참가, 생활의 간소화 등을 주장하는 톨스토이의 사상에 강하게 끌리게 되어 그 영향을 받은 작품도 몇 편 썼으나, 몇 해 후에는 톨스토이주의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 계기가 된 것이 1890년에 그가 시도한 사할린 섬에 대한 조사 여행이었다. 체호프는 1890년 4월 21일에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시베리아를 횡단한 후 7월 11일에 사할린 섬에 도착했다. 사할린에 3개월간 머물러 있으면서 약 1만 명의 도형수 및 주민의 신상 조사서를 작성한 후 그 곳을 떠나 동지나해, 태평양, 수에즈, 오데사를 거쳐, 12월 8일 모스크바에 돌아왔다. 체호프는 1892년에 모스크바 남쪽에 있는 메리호보 마을로 이사했다. 그는 이 곳에서 7년 동안 살며 비로소 창작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체호프가 작가로서 원숙기를 맞이하여 역작을 잇달아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은 이 메리호보 시대였다. 체호프가 사할린 여행에서 돌아온 이듬해부터 그가 사망한 1904년까지 13년 동안에 쓴 작품은 모두 50여 편인데, 양적으로는 적지만 그 대부분이 매우 높은 예술적 완성도를 보여 주고 있다. 이 50여 편의 작품들이야말로 러시아 문학에 대한 체호프의 최대의 기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작품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보기로 한다. '결투'(1891년) --원숙기의 작품 중 가장 길다. 필치가 마지막까지 여유가 있고 밝은 톤을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구성이 잘된 점과 각 인물의 성격 파악이 잘된 점이 인상에 남는다. 발표 당시에는 평이 별로 좋지 않았으나 대표작의 하나로 꼽아도 좋은 작품이다.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인 라에프스키에 대한 묘사는 당시의 러시아의 인텔리겐차에 대한 작가의 복잡한 심정을 나타내고 있어서 매우 흥미가 있다. 체호프는 인텔리겐차야말로 나라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자로서 크게 기대하고 있었던 반면, 그 부정적인 면에 대해 비판적이었음은, '나는 위선적이고, 속임수가 많고, 히스테리컬 하고, 교양이 없고, 게으른 우리 나라의 인텔리겐차를 믿지 않습니다'라고 써 놓은 것을 봐도 분명하며, 폰 코렌 또한 라에프스키가 지닌 그러한 면을 증오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면 작가는 라에프스키의 도덕적 갱생을 동정을 담아서 그리고, 동시에 사모이렌코와 신부의 입을 빌어 그가 성실하고 겸허하며 또한 델리커시한 인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칠칠치 못한 형제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그들은 다시 일어서기를 절실히 바라는--이것이 라에프스키 및 러시아의 지식인 전부에 대한 작가의 심정이었다고 생각된다. '6호실'(1862년)--체호프로서는 보기 드물게 정면으로 사상 문제를 다룬 것이다. 어떤 종류의 세계관이 그 소유주에게 어떠한 파멸적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그린 것이다. '결투'와는 딴판으로 유달리 어둡고 비극적인 긴박감을 자아내며, 특히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수위의 폭력 아래 떠는 광인들에 대한 냉철한 묘사는 독자에게 압도적인 인상을 준다. '중간 이층이 있는 집'(1896년)--부드럽고 서정적 필치로 쓴 불행한 사랑 이야기이다. 주인공의 '회상'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이 이 작품의 서정성을 더한층 높이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이 소설에서는 당시의 지식인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심각한 사상상의 문제를 넌지시 제시하고 있다. '귀여운 여인'(1899년)--'개를 데리고 있는 아주머니' '골짜기'와 함께 만년의 작품이며, 메리호보에서 얄타로 이사한 후에 쓴 것이다. 이 작품은 톨스토이가 감동해서 칭찬하는 평론을 쓴 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개를 데리고 있는 아주머니'(1899년)--연애를 주제로 한 작품 중에서 뛰어난 것이다. 특히 연애가 영혼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작용, 이기주의마저 극복하고 인간을 딴사람처럼 변하게 하는 힘이 있음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린 작품은 별로 찾아보기 힘든다. '골짜기'(1900년)--체호프의 만년을 장식하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엄밀한 객관성과 청결한 서정주의가 혼연히 결합된 것을 특징으로 하는 체호프의 문체는 이들 작품에서 완벽한 경지에 이른 느낌이 있다. 이와 같은 예술적 완성은 단순히 기법상의 정진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고, 만년의 체호프가 도달한 인생관조의 깊이와 넓이를 말해 주는 것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1897년에 체호프는 모스크바에서 심한 결핵성 객혈을 했다. 이 때부터 본격적인 요양 생활에 들어간다. 이듬해에 아버지 파벨이 사망한 것을 기회로 기후가 따뜻한 크림 반도에 가서 영주하기로 결심하고, 6년 동안 살았던 메리호보의 집을 팔고 얄타에 새로 지은 집에서 살았다. 불치의 병에 차차 좀먹혀 들어가는 불행한 만년이었으나 얄타 시절은 그 때까지의 생활 못지않게 다채롭고 충실한 것이었다. 특히 희곡 '갈매기'의 상연을 계기로 하여 모스크바 예술 극장과의 친밀한 우정과 톨스토이 및 고르키와의 교우가 이 시기의 체호프의 생활을 밝게 해 주었다. 얄타 시절은 체호프의 대표적인 4편의 희곡--'갈매기'(1896년), '바냐 아저씨'(1897년), '세 자매'(1901년), '벚꽃 동산'(1904년)--이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서 각광을 받아 극작가로서의 그의 명성이 높아진 시절이다. 체호프는 학생 시절부터 이미 희곡을 썼으나, 세계의 극단에 세 바람을 불어넣은 독창적인 '체호프극'의 수법이 확립된 것은 '갈매기' 이후였다. 체호프는 1904년 1월, 창작 생활 15주년의 축하를 겸해서 예술 극장에서 '벚꽃 동산'이 초연 되었을 때 참석한 후부터 건강이 극도로 약화되어 6월에 아내와 함께 도이칠란트의 광천지 바덴바일러에 전지했는데, 그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7월 2일 오전 세 시에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향년 4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