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 민족-끝나지 않은 경전 지은이: 미레유 하다스-르벨 지음 출판사: 시공사 봉사자: 삼육대학교 식영 4 9733028 백지은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람이라는 인물이 인류사에 등장한다. '성서'에는 노아를 제외한 아브람의 조상들에 대해서는 짧게 다루어지고 있는 반면, 그와 그의 직계후손들의 이야기 는 '창세기' 12장 이후 37개장에 언급되고 있다. 제1장 아브라함에서 모세까지 아브라함, 첫 번째 히브리인 아브람은 히브리인으로 지칭된 첫 번째 인물이며, 나중에 아브라함이 된다. 그는 아내 사 래-이 이름은 후에 사라로 바뀐다-와 동생 하란의 아들인 조카 롯과 함께 갈대아의 우르 를 떠나 서쪽 지방에 정착하였다. 그곳은 야훼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세 기 12:7)고 약속한 가나안 지방이었다. 기독교인에게 아브라함은 성사에 속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그와 실제 역사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메소포타미아의 서쪽에 위치한 도시, 우르는 아브라함이 살았던 것으로 여겨 지는 시대(B. C. 180년대)보다도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러니까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 보다도 앞서는 수메르 시대부터 존재해 왔다. '히브리 사람' 아브라함은 헤브론이나 세겜 같은 도시 주변에서 그의 씨족과 함께 살았다. 그는 중기 청동기 시대에 해당되는 시기에 네게브 사막을 가로질러 이집트로 내려간다. 그 런데 '창세기'에 기록된 당시 문명에 대한 몇몇 기록들을 보면 이 시기가 그보다 훨씬 후대 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창세기의 저작 연대와 관련된 여 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며, 의견 또한 다양하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이동한 경로는 하느님께 봉헌을 드린 자리와 제단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중 키럇아르바(유대교의 4대 성도)라고도 하는 헤브론은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 다. 헤브론은 바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으로서, 이 나무 곁에서 천막을 치고 있던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이 출생할 것이라는 예고를 받는다. 또한 아내 사라를 묻은 막벨 라 동굴이 있는 곳도 헤브론이며, 아브라함 역시 나중에 이곳에 묻힌다. 이스라엘의 자손 아브라함에서 그의 손자 야곱에 이를 때까지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에 남아 있던 친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오늘날에도 종종 그러하듯이, 이들 이주민은 고향에 가서 아내를 구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 이사악은 자신의 사촌인 리브가와 결혼한다. 이사악과 리브 가의 아들 야곱도 외삼촌 라반의 딸이자 자신에게는 촌들인 레아 및 라헬과 결혼한다. 그 런데 이사악에게는 아버지 아브라함과 그의 몸종 하갈에게서 난 형 이스마엘이 있었으며, 야곱에게는 그보다 조금 먼저 태어나 원칙적으로 장자상속권을 지닌 쌍둥이 평 에사오가 있 었다. 그러나 '성서'의 이야기 속에는 두 경우 모두 형이 아닌 동생이 장자상속권의 명예와 특권을 얻는다. 그렇지만 이스마엘과 에사오도 각각 아랍족과 에돔족이라는 큰 민족을 이 룬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자손들은 암몬족과 모합족으로 이들도 같은 친족에 속한다. 이 러한 모든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 접경 사이에 정착한 근동의 민족 들이 고대 초기부터 친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히브리인들은 스스로를 에벨의 자손이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이스라엘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을 더욱 좋아했다.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유 명한 이야기에 따르면, 이스라엘이란 세 번째 족장 야곱이 야폭나루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끝에 받아낸 이름이다. 이를 근거로 일군의 현대 비평가들은 히브리인이 아람 출신의 야곱 의 자손과 나일강 동쪽 델타 출신의 이스라엘 자손에서 기원한다는 가정을 하기도 했다. '성 서'의 이야기에는 야곱이 한동안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아람인 라반의 집에 머무르기도 하 지만, 야곱-이스라엘 자신과 그의 열두 아들이 이집트로 내려가는 대목 또한 있다. 이집트의 이스라엘 대부분의 민족들은 신화라는 수단으로 전달되는 과거에서 영광스러운 조상의 모습을 찾 아내려고 애쓴다. 이러한 점에서 이스라엘은 예외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세 족장은 평범한 목동이었으며, 야곱-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이집트에 정착하여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집트에서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고 하는 400년 동안 종살이를 했던 기억만큼, 그후 그들의 법률이나 명절 또는 의식에 깊숙이 영향을 미친 것은 없었다. 아브라함이 예고를 받은(창세기 15:13) 400년 동안의 노예생활 기간은 성서 연대기의 대 로 사용된다. 이집트 탈출이 신왕국시대 초기(B. C. 13세기)에 일어났다고 추정할만한 근거 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이집트 자료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외국의 자료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메르넵타 비문에 서이다. 이 비문에서는 B. C. 1230년경 파라오가 싸워 이긴 적들의 목록 가운데 이스라엘 이 등장하는데, 이 자료를 통해 히브리인들이 그 당시에는 이미 이집트에 살고 있지 않았 으리라는 가정을 해볼 수 있다. 이것이 유일한 연대기적 근거이다. 히브리인들이 기억하는 힘겨운 노역은 18대 왕조 파라오들의 야심적인 건축사업(아바리스 의 세트 사원, 람세스 2세의 새로운 수도 건설)과 관계가 있는 듯 보인다. B. C. 1258년 람 세스 2세가 오론테스 강가의 카데슈에서 히타이트족을 크게 무찌르고 난 뒤 이러한 건축사 업이 이루어졌다. '출애굽기'에서 묘사한 대로 외국인 노동자로서 겪어야 했던 부당한 대우 는 이러한 불후의 건축물 뒤에 감추어진 어려운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이유 들로 미루어 이집트 탈출 당시의 파라오는 람세스 2세였을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이 집트 탈출을 그보다 2세기 앞서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가설에 따라 투트모시스 3세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집트에 내려진 열 가지 재앙을 둘러싼 기적의 이면에는 자연현상이 개입되어 있었으 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나일강이 피로 변했다는 이야기는 나일 강물이 휩쓸어간 붉은 진흙 입자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람세스 2세의 긴 통치기간에는 갖가지 자 연재해가 발생했는데, 이는 당시 부역 일꾼들을 떠나지 못하게 완강히 붙들어두었기 때문 에 받은 천벌처럼 받아들여졌다. 이집트 탈출 '성서'(민수기 1:46, 26:51)는 이스라엘의 자손 중에서 이집트를 떠나올 다시 지도자 모 세가 지휘한 사람은 자정만 해도 60만 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서연구가 들은 이 이야기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지만, 가축을 이끌고 사막을 횡단하면서 생존할 수 있는 무리는 작은 집단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수를 대폭 깎아 내리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도주하면서 람세스(타니스)를 떠나 비터호 서쪽의 수콧(테쿠)으로 간 다음, 사막 가장자리에 있는 에담을 거쳐 믹돌의 이집트 요새와 바알스본 석호 사이에 있는 비하 히롯에 도달했다. 이집트 군사들은 '갈대바다'에 이르러 그들을 거의 따라잡을 뻔했으나 이곳에서 체포하는 데는 실패한다. 그러므로 갈대바다를 그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한 홍해로 간주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길을 막는 갈대 늪지나 바알스본과 믹돌을 갈라놓는 초호 정 도로 생각해야 한다. 그후 동쪽의 사막으로 접어들었다. 거기서부터 그들이 시나이산에 이른 경로는 확인하기가 매우 어렵다. 히브리인들은 케데스바르네아에서 트란스요르단을 거쳐 동 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 많은 전투를 치러야 만 했다. 모세와 일신교 족장들에 대한 역사의 기록이 없듯이 모세에 대한 기록도 거의 남아 잇지 않다. 모세 오 경 가운데 뒤쪽에 있는 네 권의 책에서는 모세를 고집이 센 무리들 앞에서 관용과 엄격함을 적절히 구사해 그들을 점차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시키는 데 성공한 정력적인 지도자로 그 리고 있다. 그는 한때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은(황금 송아지상에 얽힌 에피소드는 아피 스 황소 숭배를 연상케 한다) 노예였던 이들에게 율법과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부과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 따르면 모세는 히브리인 형제를 알아보기 전까지 파라오의 궁전에서 이집트 왕자로 성장한 듯하다. 그의 출생과 양육에 대한 전설은, 그가 이집트인일 것이며 이집트에서 발생한 일신교를 히브리인에게 전해준 것이라는 가설을 낳게 했다. 어떤 사람 들은 파라오 아메노피스 4세나 아크나톤의 개혁(B. C. 1370년경)에서 생긴 '아마르나'종교가 위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1939년 일종의 역사 소설이라 할 수 있는 '모세와 일신교'를 쓴 프로이트가 있다. '성서'에 대한 더욱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경향에서는 모세에 대한 전설의 역사성을 부인 하고, 일신교는 훨씬 뒤에 히브리인에게서 점진적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하나의 상으로 형상화할 수 없는, 유일신에 대한 관념이 우상을 숭배하던 당시의 환경 속에서 일 반적인 것으로 통용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는 했겠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유일신에 대한 관념이 뿌리내린 시기를 뒤로 미룰 수는 없다. 르낭은 특히 사막이 일신교 사상이 개화하기에 적합하다는 낭만주의적인 생각을 펼쳤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이론을 부인한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오히려 다신교가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일신교를 모세와 연관시키든 연관시키지 않든 간에, 일신교는 "너희 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 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로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출애굽 기 20:4∼5)는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에서 그 완결된 형태가 드러나 있다. 토라 '성서'의 방대한 문집 중에서 제일 앞에 나오는 다섯 편의 책-'모세 오경'이라는 그리스어 명칭은 여기서 유래했다-을 히브리말로 토라(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교리' '가르침')라고 부른다. 매우 오래된 구전에 따르면 이 책의 저자는 모세로 알려져 있다. 모세는 뒤의 네 편,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의 주인공이다. 이 네 편의 책에서는 출생에서(출애굽기 2) 죽을 때까지 (신명기 34) 그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대변하는 신의 가르침을 적고 잇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모세는 '하느님의 사람', 다시 말해 예언자로 등장한다. 세계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대홍수 이야기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같은 족장들의 이야기 를 거쳐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 도착하는 데서 끝이 나는, 토라의 제1권 '창세기'는 서술체 인 데 반해, 다른 네 편의 책은 서술(이집트 탈출, 사막에서 히브리인의 여로, 전쟁)과 신의 명령이 뒤섞여 있다. 이 책들의 연대 규정은 극도로 미묘한 문제를 야기한다. 신자들에게는 하나의 전체를 구 성하는 계시의 대상이지만, 성서비평가들에게는 여러 경전을 기초로 하여 오랜 시간 점진 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반드시 현재의 순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이 경전은 처음에는 구전이던 것이 나중에 가서야 기록된 것이며, 매우 일찍, 아마 왕정시대(B. C. 10세기) 초부터 높이 떠받들어졌으라 여겨진다. 토라라는 히브리말은 그리스어로 노모스, 즉 법률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다. 그 이유는 이 경전이 모세와 결부된 일신교 신앙자의 생활을 지배하는 여러 도덕적, 사회적, 문화적 규율 을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약 3세기에 걸쳐 여러 지파 출신의 '판관들'이 이스라엘의 자손을 압박자의 손에서 구원 하기 위해 나타났다. 그후 유다 지파의 다윗이 첫 번째 왕 사울을 계승하여 왕조를 세웠다. 지파는 솔로몬의 통치 후 B. C.932년까지 존속하며, 바빌로니아가 침입할 때까지 다윗의 후 손이 유다 왕국을 다스렸다. 제2장 판관과 왕의 시대 여호수아 '신명기'의 마지막 줄은 매우 간략하게나마 모세의 죽음을 들려주고 있다. '하느님의 종' 모세에게는 멀리 모압 지방의 느보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것만이 허용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죽는데,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알려 져 있지 않다. 이미 후계자 로 지정된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 야훼에게 받은 지팡이를 앞세워 마른땅을 밟고 요르단강을 건넌 이야기, 길갈 진지에서 첫 과월절을 지낸 이야기, 나팔을 불어 예리고성을 점령한 이야기 등 '성서'에는 유명한 에 피소드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여호수아가 이끈 여러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그 역사 적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다. 가나안 정복은 빛나는 군사적 승리 때문이라기보다는 오랜 기 간에 걸친 점진적 침투에 따른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 '성서'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에게 땅을 나누어주었다고 이른다. 그중 르우벤 과 가드의 두 지파는 요셉의 아들인 므나세의 반쪽 지파(요셉지파는 그의 두 아들, 므나세 와 에브라임의 지파로 나누어졌다)와 함께 이미 모세시대에 요르단강 건너편 땅을 받았다. 유다 지파에게는 염해(사해)까지 이르는 헤브론 주위의 유다의 산들인 산악지방이 주어졌다. 그러나 여기에는 당시 여부스인들이 점령하고 있던 예루살렘은 포함되지 않았다. 에브라임 의 반쪽 지파는 예리고의 북서쪽 지역을 받았다. 그리고 나머지 땅은 일곱으로 나누어졌다. 한 지파만이 땅을 받지 못하였는데, 바로 레위 지파로 그들에게 한 약속에 따라 하느님이 친히 그들의 유산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들은 48개의 성읍 을 받았으며 그 가운데 여섯은 과실치사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이 피신하는 도피의 도시 가 되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세겜에 모여 하느님께 충성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였다. 판관시대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얼마 후 가나안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면서 그 지역의 신인 바 알에게 예배하였다. 그리고 오랜 기간 이웃나라 왕에게 정복당한 그들은 외부의 침입에 위협을 느꼈다. 이에 이스라엘 민족을 통치하고 군사적 행동을 지휘할 '판관'이 나타났다. 즉 아람왕과 싸워 이긴 오드니엘, 모압(트란스요르단) 왕 에글론과 싸운 에훗, 블레셋(서해 안)인과 싸운 삼갈, 가나안 왕 야빈과 군지휘관 바락을 격파시키는 예언자 드보라와 군지 휘관 판관들이다. 이들에 이어 기드온의 못된 아들 아비멜렉이 등장한다. 그후에는 암몬을 쳐부수며 에브라임 지파와도 싸우는 길르앗의 입다, 그리고 베들레헴의 입산, 엘론, 압돈이 차례로 나온다. 판관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긴 머리에 괴력을 소유 했던 나지르(하느님에게 바치는 사람), 다시 말해 삼손이다. 그는 불레셋인에게 도전하였으 나, 한 여인의 계략에 속아넘어가 사로잡힌다. 판관들 가운데 진정한 도덕적 영향력을 행 사했던 유일한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 즉 예언자 사무엘이다. 그가 살고 있던 시대에도 불 레셋인과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실로에서 불레셋에게 야훼의 궤를 빼앗기 지만 곧 다시 찾아 키럇여아림에 20년간 안치하고 히브리인들은 땅을 이부되찾는다. 히브리 인들이 "다른 모든 나라처럼 우리를 다스리게 해주십시오."(사무엘상 8:5)하고 왕을 요구하 는 것은 이때이다. 히브리인들은 외부의 위협에 직면하여 안정된 중앙집권 제도의 필요성을 느꼈다. 사울왕 베냐민 지파에는 용모가 수려하며 키가 헌칠한 젊은이가 한 명있었다. 그는 키스의 아들 사울이었다. 예언자 사무엘은 비밀리에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즉위시킨다. 그의 혁혁 한 첫 공적은 암몬인들의 속박에서 길르앗의 야베스 사람들을 구해낸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길갈에서 공식으로 왕이 되고, 통치기간 내내 불레셋인과 전투를 치른다. 골리앗이란 이름의 불레셋 거인이 이스라엘에게 도전해 왔을 때, 베들레헴의 이새의 내 아들, 목동 다윗은 돌팔매질을 하여 거인을 물리쳤다. 그때부터 그는 사울왕의 측근이 되 며, 왕의 아들 요나단과 굳은 우정을 맺는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의 군사적 성공과 인기를 점점 질투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울은 다윗을 막내딸 미갈과 결혼시키면서도 여러 번에 걸 쳐 다윗을 죽이려 시도한다. 이에 다윗은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도피하였다가 요나단과 공모하여 몸을 숨긴다. 그럼에도 사울은 통치 말년까지, 불레셋의 위협이 항상 존재하는 가 운데에서도, 다윗을 쫓는 데 전념한다. 한편 다윗은 불레셋의 시글락으로 멸망하여 거기에서 600명이라는 작은 군대의 우두머리로서 인근 부족을 토벌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는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이 전사하는 길보아 대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다윗왕과 예루살렘 천도 다윗은 유다 지파에게 왕위를 승인받아 헤브론에서 7년 반동안 통치한다. 반면 베냐민 지파는 사울의 아들인 에스바알을 왕으로 선택하였다. 그러나 에스바알은 2년 후 자신의 부하에게 암살당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전체가 다윗에게 모인다. 다윗은 단합을 유지하기 위해 중립지역을 수도로 선택하였다. 즉 북쪽 지파와 남쪽 지파 의 경계에 있는, 여부스인들이 점령하고 있던 영토인 예추살렘을 수도로 정하였던 것이다. 그는 B. C. 1004년경 이 도시를 정벌하여 시온성을 빼앗고 이를 '다윗의 도성'이라고 명명 하였다. 왕궁이 건축되고 성스러운 법궤가 안치됨으로써 예루살렘은 다윗 왕국의 정치와 종교인 수도로서 신성한 도시가 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33년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 렸다."(사무엘하 5) 다윗은 거듭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불레셋을 정복하였고, 그후 모압, 에돔, 요르단 건너편의 암몬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람을 쳐서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그의 통치 말기는 가족의 비극 때문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진다.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어 다윗을 치려하자 다윗은 광야로 도피해야 했다. 얼마 후 압살롬은 예루살렘궁을 차지하고, 요르단강 건너까지 아버지를 추격해온다. 다윗의 군대가 수세에 있 을 때 압살롬의 머리가 나뭇가지에 걸리고 말았다. 다윗은 그를 살려주라고 명명했지만 압 살롬은 요압 장군의 손에 죽는다. 또한 요압 장군은 베냐민 지파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반 란을 진압해야 했다. 인구조사를 실시한 결과, 북쪽 지파에는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이 80만 명, 유다에는 50만 명이 있었다고 한다(사무엘하 24:9). 다윗의 말년에 그의 아들 아 도니야는 권력찬탈을 기도한다. 그러나 바쎄바는 예언자 나단, 대사제 사동, 군사령관의 도 움을 받아 자신의 아들 솔로몬을 왕으로 삼도록 늙은 다윗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솔로몬과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이 통치하는 동안(B. C. 968∼928)은 왕조의 최고 전성기였다. "이제 너는 슬기롭고 명석하게 되었다. 너 같은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열왕기상 3:12) 한 아 이를 놓고 서로 자기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두 어머니에게 솔로몬이 내린 유명한 판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의 지혜에 대한 명성은 오랫동안 지속된 행복한 시절을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다윗의 정복사업으로 확장된 나라는 솔로몬이 다스리는 40년 동안 내부적으로나 외부적 으로나 평화를 누렸다. 새로운 왕은 정적 아도니야를 제거한 후, 주위에 훌륭한 신하를 배 치하고 영토를 새로이 조직하였다. 즉 그는 영토를 12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총독을 두어, 1년에 한 달씩 번갈아가며 왕실을 위래 양식을 공급하도록 했다. 또한 솔로몬은 이웃 나라와 우호관계를 잘 유지하였다. 그는 당시 타니스서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던 파라오의 딸과 결혼하여 부인이 결혼예물로 가져온 게젤이라는 도시를 얻었다. 또한 티로 왕 히람은 그의 성실한 친구로서 대공사에 필요한 레바논산 목재를 공급하여 주었으며, 엘랏 근처에 있는 에시온게벨에다 상선대를 조직하는 일도 도와주었다. 시바 여왕의 전설적인 방문 역시 아라비아와 상업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히브리 민족은 솔로몬을 특히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왕으로 기억한다. 그는 수도를 유일한 종교중심지로 만들었다. 북쪽으로 다윗의 도성이 바라보이는 모리아산 위에 '하느님 의 집'과 왕궁을 나란히 건축하였다. 성전은 길이가 30m, 폭이 10m, 높이가 15m으로 그리 크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짓는 데 7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송백나무에 조각을 새기고 순 금을 입히는 등, 안쪽 벽의 장식을 극히 정교하게 했기 때문이다. 솔로몬 즉위 11년에 성전 을 완공하여 수개월이 지난 초막절축제 때 낙성식을 하고, 지성소에 모세의 증거판이 들어 있는 계약궤를 안치하였다. 또한 솔로몬은 여러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는 게젤의 폐허를 새로이 복구하는 한편, 므기 토, 하솔등의 도시에 요새를 세웠다. 이 도시들에서 네모난 탑으로 둘러싸인 기념문, 참호 가 설치된 성과 수도시설들이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발굴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의 지혜도 이국여인들(700명의 왕비와 300명의 후궁!) 앞에서는 무력했던 듯하다. "솔로몬은 늙어 그 여인들의 꾐에 넘어가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되었다."(열왕기상 11:4) '성서'에서는 그가 죽은 뒤, 외적이 침입하고 나라가 분열된 것도 솔로몬의 이러한 행동의 결과라고 보고 있다. 그러 나 경외 전설은 이러한 실망스런 결말을 제거해 버리고, 더 후대의 것으로 보이는 세 편의 글을 솔로몬의 저작으로 추정한다. 즉 '아가'는 솔로몬 청년기의 작품이며, '잠언'은 중년기, '코헬레트'라 부르는 '전도서'는 노년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여로보암 대 르호보암 실로 출신의 예언자 아히야는 자기가 입고 있던 새옷을 벗어서 열두 조각으로 찢었다. 그러면서 여로보암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열 조각을 받으십시오.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 느님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이십니다. '잘 들어라. 내가 솔로몬의 손안에 있는 이 나라를 찢 어 너에게 열 지파를 주리라. 그러나 한 지파만은 솔로몬에게 주어 내 종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내가 지정한 성읍인 예루살렘에서 다스리게 하리라.'"(열왕기상 11:30∼32) '성서'에서는 디르사오 사마리아를 수도로 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이룬 북쪽의 열 지파와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에 대해 충성을 지키는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 사이의 분열을 이같이 알리고 있다. 이 두 왕국은 때로는 전쟁을 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외적에 대항하여 서로 연합하면서 B. C. 721년 사마리아가 함락될 때까지 두 세기 동안 평행선을 유지하였 다. 솔로몬이 죽자 아들 르호보암이 그의 뒤를 잇는다. 그러나 그는 잘못된 조언을 듣고 과중 한 부역을 경감해 달라는 백성의 요구를 거절한다. 그때 솔로몬이 죽은 뒤 이집트 망명길 에서 돌아온 에브라임 지파의 여로보암이 열 지파로 하여금 자기를 따라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왕으로 즉위한다. 여로보암은 정치적 반란에 만족하지 않고 종교분열을 조장한다. 그는 왕국의 양끝, 북쪽 으로는 단과 남쪽으로는 베델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레위 지파가 아닌 평신도 가운데에서 사제를 선택하였다. 그는 특히 순례절을 바꾸어 한 달씩 늦추었다. 그리하여 북왕국은 우상 숭배의 길로 들어선다. 북왕국 북왕국에서는 어느 지파도 자기 조상을 왕조로 확립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왕국이 존 속했던 두 세기 동안(B. C. 928∼721), 오므리와 예후의 두 사람이 일시적으로 왕조를 세운 것을 제외하고는 각기 다른 지파와 가문에서 나온 여러 통치자들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 국은 정치적 음모와 암살에 갈가리 찢기어 쉽게 외적의 침략대상이 되었다. 오므리의 통치(B. C. 884∼874)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것이었다. 그는 모압을 지배하였고 수도를 '사마리아산 위'로 옮겼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아합은 사마리아 성읍을 확장하고 강화하였다. 아합은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였으나 '성서'는 이세벨이 끼친 나쁜 영향을 부각하고 있다. 그녀는 페니키아의 종교의식을 들여왔을 뿐 아니라, 엘리야 예 언자와 대립하는 바알 사제를 보호하였다. 예후는 특히 바알 숭배를 일소한 점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 예후 자신과 여호아하즈, 요 아스, 여로보암 2세 등의 왕들은 끊임없이 시리아 아람인들과 전쟁에 휘말렸다. 예후 왕조가 막을 내린 뒤의 어수선한 틈을 타서, 아시리아왕 디글랏빌레셀 3세가 갈리 지방을 정복하고 인구의 일부를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 샬마네셀 5세는 엘 라의 아들 호세아왕을 제압하고서 사마리아의 왕위를 빼앗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로 도망갈 것이 두려운 나머지, 아시리아의 사르곤왕은 사마 리아를 포위하고 3만 명의 포로를 메데로 잡아갔다(B. C. 721). 그리고 그곳에 동방에 살던 주민들을 이주케 했다. 그들은 사마리아 지역의 인구와 혼합되어 그들의 관습을 받아들이고 후에 사마리아의 구성원이 되었다. 사마리아 왕국의 멸망은 '사라진 열 지파'의 전설을 낳게 했다. 실제로 여러 시기에 쳐,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열 지파의 자손임 이 확인되고 있으며, 그들 스스로도 이스라엘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 유다 왕국 솔로몬이 죽은 뒤 3세기 반 동안 다윗 왕조가 계속하여 예루살렘을 다스렸지만, 궁전 내 에 혁명이나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많은 왕들이 우상숭배의 관습이 성행하도록 그대로 방치했으며, 아합왕의 딸이며 유다 여호람왕이 왕비였던 아달리야는 예루살렘에 페니키아의 종교를 도입하였다. 또한 그녀는 아들 아하지야왕이 죽자 손자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차지하였다. 이때 다른 왕자들은 모두 살해되었으나 어린 요아스는 고모이자 대사제인 여호야다의 부인 여호세바가 6년 동안 숨 겨주어 일곱 살 성전에서 왕으로 즉위한다. 라신의 희극 '아달리야'는 바로 이 이야기를 소 재로 하고 있다. 불 경건한 왕 가운데 가장 많은 악행을 저지른 자로 아합왕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심지어 친자식을 불살라(목록신을 위하여)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대조적으로 그의 아들 히즈키야는 유다 왕국의 왕 가운데 가장 경건한 왕이었다. '성서'에 나오는 세 가지 유사한 이야기(열왕 기하 18∼19, 이사야 36∼37, 역대기하 32)는 그의 통치기간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으로, B. C. 701년 아시라아 왕 산헤립의 군대가 쳐들어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던 당시의 일을 전하 고 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전염병이 아시리아의 진지를 휩쓸자, 산헤립은 니네베로 돌아 갔고 거기에서 암살되었다고 한다. 55년간이란 므나세의 긴 통치기간은 아버지 히즈키야의 그것과 달리 불경건과 악행의 연 속이었다. '성서'는 이미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 국가의 비운은 이와 같은 행위들에 따르 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시아의 개혁 므나세의 아들 아몬왕은 즉위 2년만에 음모로 희생되며, 요시야가 여덟 살의 나이에 왕위 를 계승한다. 그가 즉위한 지 18년이 되던 때에 사가들이 '요시야의 개혁'이라고 부르는 일 이 시작된다. 성전 수리공사를 하던 중, 성전에 버려져 있던 책을 발견한 대사제는 이를 즉시 왕에게 가져간다. 그 책은 바로 '토라'(혹은 '토라'의 마지막 부분인 '신명기'이었을 것으로 추측되 기도 한다)였다. 요시야는 이 책을 읽고 애통의 표시로 옷을 찢는다. 그때까지 신성한 계 명을 지키지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후 왕은 시나이산의 계약을 엄숙하게 부흥시 켜 우상을 불태우며 이방인의 제단과 분향단을 헐어버린다. 또한 우상의 제사장을 쫓아버 리고 성대하게 과월절을 지킨다. 그후 바빌로니아에 대항하여 아시라아와 동맹한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가 동쪽으로 쳐들 어오자 이를 막으려던 요시아는 므기토 전투에서 전사한다. 아시리아의 두 수도인 아수르와 니네베는 이미 함락된 뒤였다. 느고는 얼마 후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치른 가르그미스 전 투에서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 2세에게 대패한다(B. C. 605). 약 20년간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는 유다 왕국을 가운데 두고 경합을 벌였다. 느고는 요 시댜의 아들 여호아하즈를 폐위시키고 그 형제인 엘리야킴을 왕으로 세운다. 그런 뒤 그 는 엘리야킴의 이름을 여호야킴으로 바꾸고 과중한 조공을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점령한다. 여호야킴의 아들 여호야긴왕이 느부갓네살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B. C. 597년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성전의 금집기들을 탈취하고 왕과 신하들, 그리고 무기를 만드는 대장 장이를 포함하여 1만 명을 바빌론으로 잡아갔다. 그런 다음 그는 왕의 삼촌인 마다니야를 왕위에 앉히고 이름을 시드키야로 바꾼다. 새로운 왕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빌로니아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집트에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느부 갓네살은 또다시 쳐들어와 수도를 포위하게 된다. 성전의 파괴와 유배 예루살렘의 포위는 시드키야 9년 10월에 시작되어 11년 5월까지 약 18개월간 계속되었다. 주민들은 물 부족은 겪지 않았지만 기근이 극심했다. 왕은 호위병들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 였으나 예리고 근처에서 적에게 잡혀 사슬에 묶인 채 바빌로니아의 수도인 바빌론으로 끌려 간다. B. C. 587년 압달(7∼8월) 7일(예레미야에 따르면 10일) 바빌로니아의 장교 느부사라단은 성전과 왕궁, 도시 전체에 불을 지른다. 다시 사람들이 징집되어 바빌론으로 잡쳐가고 대사 제 스라야와 몇몇 왕실 관리들이 죽음을 맞는다. 예레미야의 옹호자인 게달리아가 나라의 행정을 맡게 된다. 그러나 왕가의 생존자 중 한 명이었던 이스마엘이 암몬 사람들의 지원 을 받아 유대 통치자 게달리아와 그의 지지자들을 죽인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티쉬리달 3일에 금식을 하며 이 잔악한 살인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마엘도 카레아의 아들 요하난에게 쫓겨난다. 요하난은 예레미야 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유다의 생존자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도망간다. 유다에는 이제 정복자에게 얽매인 농민들과 포도원지기들만이 남았다. 유다의 여호아긴과 시드키야왕은 귀족, 금속기술자들을 포함한 5000명 가량 되는 포로들과 함께 바빌론에 머물 렀다. 여호아긴은 에윌 므로닥왕(B. C. 561∼559)이 즉위하면서 B. C. 561년 풀려나지만 그 의 동행인들은 끝까지 석방되지 않았다. 예언자들은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 다. 예언자의 모습 '성서'에서는 다윗과 그의 후손에게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지만, 왕정기에 진정으로 위대 한 인물은 군주가 아니라 살과 피를 가진 왕에 대면하여 하늘의 왕을 대표하던 예언자들이 었다. 몇몇 위대한 인물들은 가끔 신들린 상태에서 예언을 하였다(열왕기 11:25∼26, 사무엘상 19:2∼23). '성서'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예언자의 무리(사무엘상 10:5)가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왕정기에는 제도화된 예언자 단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언자'라 는 말을 쓸 때에는, 이러한 제도화된 예언자의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독자 개인 으로서 종종 왕에게 도전하는 사명을 띠었던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예언자는 사무엘에서 예레미야에 이르기까지 왕정기를 통해 여러 명 나타났다. 죽은 뒤에도 엔도르의 여자 무당의 집에서 사울에게 나타났던 사무엘은 하느님의 대변인 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을 즉위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윗 시대의 징계를 받게 될 것 이라고 전능한 군주 앞에서 용감하게 예고하였다. 왕국이 분열된 뒤에도 남쪽과 북쪽 모두 이러한 사명을 부여받은 예언자들이 여러 명 나타났다. 여로보암왕에게는 아히야(열왕기하 14)가 대항하였고, 르호보암왕에게는 이토와 스마야(앞의 글)가, 바아사왕에게는 예후(열왕기 상16)가, 아합왕과 여호사밧왕에게는 미가야(열왕기상 22)가 대항하였다. 또한 판관 가운 데 하나였던 드보라나 요시아 시대의 훌다 같은 여자 예언자들도 있었다. 예언자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엘리야로서, 그는 아합왕과 그가 악행을 하도록 꾀었던 이세벨 왕비에게 대항하였다. 그는 광야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는데, 그 계시는 강한 바람이나 불길 속에 있지 않고 "조용하고 여린 소리"속에 있었다(열왕기상 19:12). 그 는 죽은 아이를 살려내고 식량을 늘리는 등의 기적을 행하여 인정을 받는다. 그가 불수레를 타고 승천할 때(열왕기하 2) 옆에 있었던 제자 엘사는 그를 모방하여 유사한 기적을 베푼다. 그는 메시아가 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지상에 다시 올 것이다(말라기 3:23∼24). 예언자들의 이러한 모습은 '성서' 속에 있는 일부 역사서에 나온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이 책들은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예언서('전기 예언서')로 분류된다. 다른 예언자들은 자신 의 이름을 딴 글들을 남기고 잇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같은 예언자들은 '대'예언자 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단지 그들의 글을 다른 글보다 더 길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12명의 '소'예언자들은 대부분 포로시대 이전에 사명을 완수하였다. 북왕국에는 아모스, 호세아 같 은 이들이 있었고, 남왕국에는 미가, 하바쿡, 스바니야, 그리고 특히 예레미야가 있었다. 현 대 비평가들은 보통 이사야의 아름다운 글들이 서로 다른 세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데, 그 가운데 첫 번째 시기만이 왕정기에 속한다. 정의와 마음의 정결함이 없는 제사에 대 한 비판이 실려 잇는 것은 '이사야'의 처음 부분(1장)이다. 에제키엘은 바빌로니아의 텔아비브에서 포로들을 위로하며 귀환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 어주기 위하여 노력한다. 마른 뼈가 부활하는 그의 유명한 환상은, 예루살렘도 이와 같이 회복될 것이며 백성들도 귀환하리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고레스 칙령에 따라 유대인 들은 예루살렘에 돌아갈 허락을 받는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은 일정한 자유를 누리며 성 전을 재건한다. 그후 유대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어 그리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집트 왕조의 지배를, 그 다음에는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 때 유대인들은 셀레우코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제3장 페르시아 시대에서 마카베오 반란까지 고레스 칙령과 유대인들의 귀환 사마리아 왕국의 유랑민과 유다 왕국의 유랑민의 운명은 사뭇 달랐다. 사마리아 왕국의 유랑민들은 메대 지방의 주민들과 혼합되어 버린 반면, 바빌론에 잡혀간 유대의 유랑민들은 예언자들이 키워준 귀환의 희망이 실현되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된다. 이렇게 희망은 객관 적인 역사의 현실 속에서 실현되고, 혹독한 불행이 닥쳐와도 구하지 않는 이 '티크바(희 망)'은 그후 유대인의 정신 속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고대인은 모든 불행은 과오에 대한 징벌이며, 하느님에게 돌아감을 뜻하는 회개('하느님에게 돌아감'과 '회개'는 히브리어에서 테수바라는 한 단어로 나타낸다)를 통하여 심판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이, 포로생활 이후에는 우상숭배가 더 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정치 회복보다도 종교 회복의 중요성이 한층 심화되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B.C. 539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바빌로니아를 점령하였다. 고레스는 히브리 민족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왕이었다. 그는 거대한 제국을 구성하는 다양한 민족에게 관대했다. 민 족이 다양한 만큼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저마다의 종교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각 민족이 오랫동안 살아온 영토에서 살도록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첫해에 엑바타나(하마단)에서 유 대인 포로들을 돌려보내고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허락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고레스 칙령'이다. 이러한 혜택을 받은 것은 유대인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눈에는 고레스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며, 그를 통하여 유대인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나는 고레스에게 명령한다. '너는 내 양을 쳐라' 그는 내 뜻을 받들어 이루리 라. '너는 예루살렘을 재건하여라. 성전의 기초를 놓아라.'"(이사야 44:28) 귀환과 재건의 단계 포로로 잡혀갈 때 그랬던 것처럼, 귀화도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 쳐 이루어졌다. 유다 가문과 베냐민 가문의 대표자, 사제, 레위인 들은 유다 대표자인 세스 바살의 지도를 받아 성전의 기구들을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왔다(에즈라 1:8). 또한 즈루바벨 총독과 여호수아 대사제도 5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귀환하였다. 그들은 제단을 다시 쌓고 성전 재건을 시도하였다. 지역주민들의 적대감 때문에 성전 재건 공사가 중단되었지만, 얼마 후 다리우스왕은 고레스칙령에 따라 다시 공사를 강행하였다. 마 침내 성전은 다리우스 6년(B.C. 515) 봄에 준공되었고, 사람들은 성전을 다시 지은 기쁨 속에서 과월절을 지켰다. 아르닥사사왕 치하(B.C. 465∼423)인 B.C. 458년 '모세의 법에 통달한' 사제이자 율법학자인 에즈라도 성전에 제물을 바치고 재판을 하라는 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여러 가족을 이끌며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한편 다리우스왕 20년(B.C. 445)에 대왕 에게 술을 따르는 사람인 유대인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버려져 있다는 소식을 듣 고, 성벽을 재건하러 가도 좋다는 허락은 얻는다. 현장에 온 그는 많은 민족이 연합하여(사마리아인, 아랍인, 암몬인, 아스돗인) 성벽 건축을 방해하려는 기도와 맞닥뜨린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예루살렘에는 너희에게 돌아갈 몫이 없다. 너희에게는 아무런 연고권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는 한 손에 무기를 들고 공사를 지휘하였다. 성벽은 재건을 시작한 지 52일 만에 완성되었다. 유대의 각 지역에 사는 가족들 은 제비를 뽑아 열 가족 당 한 가족이 예루살렘에 와서 살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예루살 렘에는 다시 사람이 살게 되었다. 종교의 회복 예루살렘의 재건과 함께 종교의 부흥이 이루어졌다. '성서' 가운데 당시의 역사를 기록한 두 권의 책, '에즈라'와 '느헤미야'를 저술한 두 인물이 종교의 부흥을 주도한다. 그들의 관심사는 백성을 또다시 우상숭배로 빠지게 할 수 있는 이방인의 영향력을 근절키 고, 모세의 '토라'에 대한 지식을 다시 살려내 삶에 적용하게 하는 일이었다.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에즈라는 연 단위에 서서 해뜰 녘부터 해가 중천에 이르기까지 백성들 앞에서 엄숙하게 '토라'를 읽고 설명해 주었다(느헤미야 8:3). 8일 내내 초막 절을 성대하게 지키며 '토라'를 읽었고, 초막 절이 끝난 다음날에는 모두 단식을 했다. 에즈라는 아름다운 기도를 올렸고(느헤미야 9), 사제, 레위인, 지도자들은 모세가 받은 계명 에 복종하여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고, 첫 수확물과 제물을 성전에 바치며 레위인에게 십 일조를 주겠다고 느헤미야 앞에서 약속하였다. 이리하여 장차 수세기 동안 유대교라고 불리 게 될 생활양식이 싹텄다. 예훗 지방 페르시아가 지배하였던 두 세기(B.C. 538∼332)동안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북쪽 베 델에서 남쪽 베수르, 동쪽 예리고에 이르는, 반경 30km에 달하는 유다도(에즈라 5:8)라 하는 지방이 존재하였다. 유다도는 태수가 다스리는 유프라테스 강 서부 지방, 즉 아바르나하라 고 불리는 광활한 지역의 일부였다. 성서자료와 비문들을 살펴보면 유다 총독은 폐하라는 명칭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 난다. 알려진 총독 가운데는 세스바살(에즈라 5:14),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바벨(하깨 1:14) 처럼 가끔 바빌로니아식 이름을 갖는 이들도 있었지만, 사실상 대부분의 총독들은 유대인 이었다. 그리고 즈루바벨의 아들 하나니야(역대기상 3:19)나, 처남 엘나탄(B.C. 500년경), 특히 느헤미야(B.C. 445∼433)는 히브리식 이름이며 히즈키야란 총독의 이름은 동전에 등 장하기도 한다. 귀환을 시도하였던 5만 명 이외에도, 성전이 파괴된 뒤에 계속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그들은 대부분 농부, 포도원지기, 양치기였다. 그들이 살던 곳은 서쪽 으로 바다와 맞닿아 있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페니키아인 들에게 생선을 사야 했다. 이 작 은 민족(암 하레스,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시골 사람')은 주위 주민들에 혼합되어, "태어난 아이들의 절반이 유대 말을 못하고 아스돗말을 하였다."(느헤미야 13:24)고 한다. 포로로 잡 혀갔던 사람들은 히브리 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지만 또한 페르시아 제국의 아람어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바빌로니아에서 아람어의 사각형 문자를 가지고 돌아왔고, 이 문자가 페니키아 알파벳과 비슷한 고대 알파벳을 대체했다. B.C. 4세기에는 이집트가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페르시아와 이집트 사이의 지역은 수많은 전쟁을 겪어야 했다. 페니키아 도시국가의 반란은 가혹하게 진압되었고 시돈은 파괴되었다. 아르닥사사 3세의 군대는 B.C. 343년 이집트 재정복에 성 공한다. 그리고 10년 뒤 새로운 정복자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알렉산더 대왕이다. 창조의 시대 '성서'의 많은 부분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유배에서 돌아오 기까지를 서술하고 있는 '역대기' 같은 역사서나 '에즈라''느헤미야', 예루살렘에서 예배가 재 개되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즈가리야''하깨''말라기' 같은 예언서들도 모두 이 시기와 관련 된 기록들이다. 고레스와 동시대에 쓰였으며 고레스의 이름이 나오는 '제2이사야'(이사야의 40~55)와 이미 존재하던 원본(1∼40)과 결합하여 B.C. 5세기에 문집으로 편차된 듯한 '제3이 사야'(이사야의 56∼66)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요엘'은 교리에서 (국가들에 대한 심판의 날 을 알림), '요나'는 언어학에서 볼 때 페르시아 시대와 관련된다. 페르시아 색채가 가장 농후한 작품은 두말할 것 없이 '에스델'이다. 이것은 종종 크세르 크세스왕과 동일하게 여겨지는 아하스에로스라 불렸던 왕의 궁전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이는 사실상 역사서라기보다는 페르시아에 정착한 유대인 디아스포라(바빌론 유수 이후 흩어진 유대인의 정착지)사이의 전설에 가깝다. '룻기'는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이방인과의 결혼에 취한 조치에 대한 반동을 쓰인 듯하다. '룻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판관시대에 일어난 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 '룻기'가 쓰인 것은 페르시아 시대로 생각된다. 시로 쓰여 후일 유대 경전에서나 기독교 경전 속에서 비유적으로 해석되는 '아가'도 '편' 의 많은 부분이나 '잠언''욥기'처럼 페르시아 시대의 것이다. 현대 성서연구가들은 모세 오경이 현재의 모습으로 형성된 것은 포로시대 이후이며, 모세 오경의 서술체 부분은 나중에 덧붙여진 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모세 오경의 원천을 넷 으로 나눠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을 솔로몬 시대 이전의 것으로 보는 입장이 부정되었다. 이 보다 덜 비판적인 연구가들은 모세 오경이 기존의 경전을 바탕으로 포로시대 이후에 형성 되었음을 인정한다. 그때부터 '토라'는 더 이상 가필할 수 없는 신성한 책이 되어버린다. '토라'는 페르시아 왕실이 인정한, 유대적 생활방식의 법적 토대를 담고 있다. 페르시아 시 대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모세 오경이 형성된 것 이외에도 종교적으로 개화한 위대 한 시기였다. 이러한 사실은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문학의 차원에서 표현되고 있다. 예루살렘의 알렉산더 대왕 페르시아 제국은 마케도니아에서 달려온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에게 무릎을 굻고 만다. B.C. 332년 다리우스 3세는 이수스 전투에서 참패하고 몰락하였다. 알렉산더는 다마스쿠스 와 페니키아의 주요 도시를 점령해 티로와 가자를 파괴하고 여세를 몰아 이집트를 향하여 진군하였다. 그후 그는 다시 페르시아와 인도 쪽으로 말을 돌려 정복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전설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문에서 대사제가 알렉산더 대왕을 만났다고 한다. 대사제는 어 느 나라 편에 가담하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다가, 꿈을 꾸고 난 뒤 대왕을 맞이하러 나 갔던 것이다. 대사제를 만난 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니아를 출발하기 전에 꿈속에 나타나 동방을 정복하도록 용기를 북돋워준 인물이 대사제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전설 은 당시 알렉산더 대왕이 누렸던 인기를 잘 보여주는 것인데, 그는 성전에 제물을 바쳤으 며 도한 유대인에게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7년마다 오는 안식년에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하였고, 알렉산드리아 건설을 돕도록 유대인을 이집트로 데려갔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B.C. 323) 유다는 두세 시기에 걸쳐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배하 는 시리아의 그리스 왕국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 왕국 사이에서 분쟁의 대상이 된다. 그런 와중에 유다 땅은 적어도 다섯 차례 이상 전쟁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유적이 발굴되지 않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70인역 성서(셉투아진트) B.C. 3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에는 대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하였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B.C. 2세기)를 보면,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텔푸스(B.C. 282∼246) 때에 '토라'가 처 음으로 외국어로, 즉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유대인들과 조화롭 게 지내고, 왕의 도서관에 유대인의 유법책을 비치해 두기를 원했던 왕의 요구에 따라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래서 대사제는 예루살렘에서 72명의 학자를 보내어 번역을 하게 했다. 그후에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쓴 성서문들도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그리하여 '토라'뿐 아니라 그리스어로 된 '성서' 전체를 일컬어 '70인역 성서'(전설에 72명의 번역자가 번역에 참석하였다는 사실에 따라)라 부르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통치기간(B.C. 246∼222)에 암몬인 토비아드의 아들이자 대사제 오니아스 2세의 조카인 요셉이라는 사람은 유다 지방을 포함하는 코일레 시리아의 봉토를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부여받았다. 이처럼 초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에는 대다수 유대인들이 왕조의 호의를 누렸던 것 같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선왕들만큼 좋은 왕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셀레우코스의 지배를 반감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셀레우코스의 지배 시리아와 이집트의 두 그리스 왕국 사이에 일어난 다섯 번의 전쟁 끝에, 시리아의 왕 안 티오쿠스 3세가 B.C. 198년 파네아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코일레 시리아를 합병한다. 안티오쿠스 3세는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전쟁으로 황폐해진 예루살렘을 서둘러 재 건하고 다시 사람이 사는 도시로 만들었다. 또한 그는 유대인에게 여러 가지 세금을 면제해 주기도 하고, 2000가구의 유대인을 메소포타미아에서 데려다가 리디아와 부리기아성을 지키 게 하기도 하였다(요세푸스 고대사, 12:147∼153). 그러나 안티오쿠스 3세는 B.C. 189년 로마인들에게 패하여 아파메아 조약을 맺고(B.C. 188) 과중한 조공을 바치게 된다. 얼마 후 그는 암살되고 모든 유대인들이 내는 기부금과 기탁금이 모여드는 예루살렘 성전은 다른 성전과 더불어, 조공을 내야 했던 시리아 왕들의 탐욕의 대상이 되었다. 잠시 후 대사제 오니아스 3세는 그의 동생 야손에게 쫓겨나고 야손 은 새로운 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게 거금을 약속한다. 야손은 그밖에도 예루살렘 에 체육관과 청년훈련소를 짓고 그리스식 생활방식 생활방식을 도입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리하여 헬레니즘파 사람들은 그를 본받아 예배를 드리기보다 운동경기를 더 좋아하게 되 었다. 안티오쿠스를 만나는 사명을 띠고 파견되었던 음모가 메넬라우스는 왕에게 돈을 주는 대가로 총독 자리를 얻어낸다. 그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성전의 기물을 팔고도 왕실의 보호 덕분에 처벌을 받지 않았다. 마카베오 반란 음모가의 사제직 찬탈과 세습직이던 대사제직의 매매, 헬레니즘풍 관습들은 많은 유대인 의 감정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오던 안티오쿠스 4세는 성전을 약탈하 였고, 야손과 메넬라우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예루살렘이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이 라고 믿고 가혹하게 진압하였다. 얼마 후 그는 헬레니즘 강요정책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종교적 박해로 발전하였다. B.C. 167년 기슬레우달 15일에 그는 성전에 '멸망으로 이끄는 가 증스러운 것'을 세웠다 하는데, 이는 아마도 이방인의 제단을 일컫는 듯하다. 그리고 그는 열흘 뒤인 25일에 이 제단 위에 올림푸스의 제우스신을 위해 제물을 바친다. '마카베오상'과 '마카베오하'에 따르면,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헬레니즘 신봉자들을 대 의 고유한 관습을 오염시키는 자로 여겼던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 운동을 주도한 것은 모데인이라는 작은 마을의 제사장 마타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 요한, 시몬, 마카베오라 불리는 유다, 엘르아잘, 요나단이었다. 또한 '하시드파 사람들'(하시딤, '경건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합세하였다. 제사장 마타디아가 죽자(B.C. 166) 아들 유다가 뒤를 이어 전투를 지 휘하였다. 유다는 셀류시드 왕조의 군대를 계속 쳐부수고 B.C. 164년 성전을 되찾는 데 성 공하였다. 그리하여 기슬레우달 25일 3년 동안 더럽혀진 성전이 정화되고 8일간의 '성전 봉 헌' 축제(하누카)가 거행되었다. 한편 대사제 메넬라우스는 셀류시드 왕조의 권력에 버림받아 암살당하는데 그의 후임으로 임명된 알키모스도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유다는 3년 동안 안티오쿠스 4세의 계승자들과 전쟁을 치렀고, B.C. 161년 전쟁에서 쓰 러지기 얼마 전 로마에 사절을 보내 '동맹과 우호관계'를 요구하였다. 로마는 곧 이러한 그 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유다의 독립을 향하여 유다의 뒤를 이은 동생 요나단은 셀류시드 제국이 직면했던 끊임없는 왕조간의 싸움을 이용하여 여러 특권을 받았으며 대사제의 호칭과 '왕의 친구'라는 칭호를 얻어냈다. 동시 에 그는 계속 영토를 확장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을 시리아의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시켰으며, 사마리아-갈릴리의 세 개 주와 요파(야파), 아스돗, 아스칼론이라는 해안도시들을 영토에 첨가하였다. 이러한 영토학장은 왕위 찬탈자 트리폰의 심사를 자극하였다. 결국 요나단은 그에게 살해당하고, 그가 생전에 로마와 갱신한 조약은 사실 아무 실효도 거두지 못한 것 으로 보인다. 이제 대사제의 칭호는 하스몬 왕가(마타디아의 조상인 하스모니에서 온 이름)가 갖게 되었다. 사독의 혈통인 대사제 오니아스 3세의 아들은 요나단의 정당성을 공격하여, 이집트 레온토폴리스에 예루살렘과 같은 성전을 세웠다. 그러는 한편 헬레니즘은 유대인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고 허용할 수 있는 영역에서는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그리 스어에 대한 지식이 널리 퍼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식 이름을 사용했는데, 그 이름들은 보통 '성서'에 나오는 이름과 연관을 맺고 있다. 그리고 헬레니즘풍의 건축양식이 유행했다. 그리스 철학은 헬라어를 사용하고 70인역 성서를 가지고 있는 디아스포라의 큰 도시에서만 확산되었다. '성서'와 그리스 철학을 타협시킨 이 중에 가장 인상에 남을 인물은 알렉산드리 아의 필론(B.C. 20년∼A.D. 40년?)이다.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에세네파 유대교 내에 다양한 유파가 나타난 것은 마카베오 전쟁 이후로 추측된다. 사두가이파는 다윗 시대의 대사제였던 사독에게 애착을 느끼는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었 다. 그들은 성문화된 '토라'를 충실히 지켰으며, 새로운 신앙을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대부 분의 대사제는 십중팔구 그들 가운데에서 배출되었다. '분리된 반대파'를 의미하는 바리사이파는 신정론(신의 정의라는 의미)의 까다로운 문에 대한 해답으로 사후의 부활을 믿었고, 이것은 사두가이파와 완전히 구별되는 점이었다. 그 들은 그외에도 율법을 발전시켜 구전을 많이 개발하였고, 성서연구, 도덕적 청렴함, 친절한 태도 등으로 명성을 얻어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힘입어 바리사이파는 영향력 있는 정당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에세네파는 엄격한 규율과 철저한 순수성에 대한 명령을 지키며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그들은 개인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해결하였고, 여자의 유혹을 경계해 대다수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정설에 따르면 1947년부터 쿰란이라는 곳에서 발 견한 '사해문서'라는 기록들은 에세네파의 것으로 여겨진다. 그 기록들이 그전의 에세제파 저자들이 남긴 기록드로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신원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한 대사제에 게 그들의 스승이 박해를 받자, 그들은 성전 밖에서 생활하였고,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 또한 비판하였다. 이밖에도 쿰란 문서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기대가 지니는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로마는 하스몬 왕가의 권좌 다툼에 개입하여 그들의 하수인인 이두매 출신 헤로데를 유다 왕으로 앉힌다. 헤로데는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잔인한 왕이었지만 긴 통치기간 동안 화려한 건축물을 많이 세우는 치적을 남기기도 했다.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도 이에 포함된 다. 제4장 하스몬 왕조에서 헤로데의 통치로 하스몬 왕조의 명실상부한 창시자는 마타디아의 아들이며 유다 마카베오의 맏형인 시몬 (B.C. 143∼134)이다. 그는 대사제라는 칭호 외에도 데메드리오 2세가 그에게 '영구히'부여 한 총독의 지위까지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직위는 세습되었다. 시몬이 즉위한 뒤부터 유다는 독립의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게 되었다. 유다는 더 이상조 공을 바치지 않았고, 예루살렘 안에 군본부를 두고 주둔하던 셀레우코스이 군대도 철수하였 다. 또한 시몬은 대사제가 된 첫해부터 문서를 결재할 수 있었고, 화폐를 주조하고 요새를 자유로이 장악할 허가를 받았다(마카베오상 15장). 로마와의 동맹관계가 새로이 확인되고 마 침내 평화가 정착된 듯 보였다. 이 사실을 감안할 때, 시몬이 국민에게 큰 인기가 있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권력에 눈이 먼 사위,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두 아들과 함께 암살당한다. 정복자 요한 히르카누스 시몬은 죽기 전에 이미 아들 요한(B.C. 134∼104)에게 군통수권을 넘겨주었다. 요한은 처 음부터 어려운 상황과 맞부닥쳐야 했다. 시리아의 왕인 안티우쿠스 7세가 B.C. 133년 예루 살렘을 포위하고 다시 지배권을 회복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안티오쿠스의 경쟁 자이며 쫓겨나 있던 데메드리오 2세와 치른 전투에서 안티오쿠스가 사망하자 유대인은 완전 히 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요한은 로마와 조약을 갱신하고, 후계자 싸움으로 사분오열된 시리아 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서 영토를 사방으로 확장하였다. 그는 북쪽으로는 사마리아인을 정복하여 그리짐산의 성 소를 파괴하였다(B.C. 129). 또한 남쪽으로 이두매를 복속시키고 그곳 거주민에게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였고, 동쪽으로는 메드바를 포위하고 트란스요르단을 통제하게 된다. 그 리고 서쪽으로는 아스돗과 야브제를 점령하고 해안까지 세력을 뻗어 나갔다. 그러나 내치에서는 바리사이파의 반대를 산다. 정치권력과 대사제의 자리를 동시에 차하 였던 탓이다. 이때 요한 히르카누스는 종의 자식이므로 대사제가 되기에 부적합하다는 소 문이 퍼졌다. 그러므로 그의 후계자들은 사두가이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스몬 왕국의 절정: 알렉산더 얀내우스 요한 히르카누스에게 부족한 것은 오로지 왕이라는 칭호뿐이었다. 그가 죽자 '필렐레네'라 는 별명을 가진 장남, 유다 아리스토불은 스스로 왕관을 썼다. 이로써 하스몬 왕가와 바리 사이파는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그는 매우 짧은 통치기간(B.C. 104∼103) 동안, 동생 안 티고누스를 보내어 갈릴리를 정복하고 이투레아인을 유대교로 개종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 는 막내동생의 인기가 높아진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암살하였고, 얼마 후 그 자신도 자책의 괴로움으로 죽는다. 그의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구금되어 있던 다른 동생들을 석방하고, 그중의 하나인 요나단, 즉 알렉산더 얀내우스와 결혼한다. 알렉산더 얀내우스(B.C. 103∼76)는 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리면서 영토를 더욱 확장하였다. 그는 갈멜산에서 이집트 국경까지 이르는 영토의 군주가 되었고, 그의 왕국은 동북쪽으로 골란(가울라니티스)을 포함하였다. 동남쪽에서 페트라의 나바테아인이 저항했지만, 결국 그 들과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내부의 반대는 자꾸만 거세어졌고, 그는 B.C. 97년 장막절 축제 때에 성전에서 백 성들이 던진 올리브 나뭇가지 세례를 받는다. 그의 적인 바리사이파는 시리아(셀류시드 왕 조) 왕 데메드리오 3세의 도움까지 요청하여 반란을 계획하였다. 그는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B.C. 88년에 그의 명령으로 800명이 십자가형을 받았다. B.C. 76년, 죽음을 앞에 둔 그는 바리사이파의 스승인 시몬 벤 세타의 누이였던 부인 살로메에게 바리사이파와 타협 하라고 권고한다. 그때부터 권력분리가 이루어져서, 살로메는 여왕의 칭호를 갖게 되고 장자 히르카누스는 대사제의 임무만을 맡게 되었다. 형제 살해 싸움 살로메 알렉산드라 여왕은 결국 바리사이파와 화해하였고,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처벌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막내아들 아리스토불은 귀족의 지지를 받아 왕위를 엿보았던 반 면, 장자 히르카누스는 왕좌에 별다른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고문이던 이두매 인 안티파터는 그가 권력을 포기하지 않도록 부추겼다. B.C. 67년에 어머니가 사망하자, 두 숙적은 예리고 근처의 전쟁터에서 맞닥뜨리게 된다. 처음에는 히르카누스가 물러섰으나, 안 티파터는 그에게 나바테아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도록 권유한다. 결국 아리스토불 2세는 패 배하여 성전에 피신한다. B.C. 63년 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가 다마스쿠스에 도착한다. 4년 전 군사적 영광의 후광에 싸여 동방에서 도착한 그는 셀류시드 왕조를 멸망시키고 시 리아를 로마의 한 지방으로 합병하였다. 그는 유다에 대해서도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일까? 마침 히르카누스와 그의 경쟁자의 싸움은 폼페이우스의 유다 개입을 정당화해 주었다. 두 진영에서는 서로 폼페이우스와 그의 부관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그의 개입을 호소했던 것 이다. "로마는 이미 1세기 전부터 유대인의 '친구이자 동맹자'가 아닙니까?"하면서 말이다. 다마스쿠스에 그를 만나러 온 유다의 세 번째 사절단은 왕을 폐위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로서는 유대인 사이에 존재하던 종교분열이 정치분열로 심화되리라고는 예측할 수 없었 다. 폼페이우스는 다소 주저하다가 히르카누스 편에 섰다. 그는 성전에 숨은 아리스토불을 포위하고 대속죄일의 금식과 안식일의 휴식을 이용하여 성전을 점령하였다. 예루살렘의 폼페이우스 전투는 성전마저 휩쓸었다. 폼페이우스는 지성소 안까지 들어갔지만, 성스런운 기물들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으므로, 그후 성소가 정화된 즉시 사람들은 그곳에서 다시 예배를 드 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오로지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대사제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인 지 성소가 더럽혀진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폼페이우스가 사로잡은 죄수들(그 가운데에는 아리스토불 2세와 그 아들 안티고누스가 다)은 로마로 호송되어 로마 유대인 공동체의 첫 구성원이 되었다. 유다 왕국은 피보호 국 가가 되었으며 무거운 조공의 부담을 지게 되었다. 히르카누스 2세는 왕의 칭호는 갖지 않 고 대사제의 직만을 수행하였다. 유다, 갈릴리, 사마리아, 베레아, 이두매 지방만이 그의 통 치 밑에 들어갔고, 데가볼리(10개 도성들)의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마리아와 이두매의 마레 사, 해안의 큰 도시들은 다시 영향권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카이사르 '헌장'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파르살로스에서 경쟁자 폼페이우스를 물리친 후(B.C. 48), 딕타토르 (독재관)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는 로마와 동맹을 맺은 동방 국가들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의 혼란스런 상태를 해결하는 데 성공하여 클레오파트라 7세를 왕위에 앉혔다. 이에 도움을 준 동맹자들 가운데에는 히르카누스 2세도 끼여 있었다. 카이사르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히르카누스 2세에게 몇 차례 호의를 베풀었다. 우선 히르카누스는 세습적인 대사제와 총독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몇몇 영토(요파, 릿다, 이즈르 엘평원)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실권은 유다의 지방관을 임명된 안티파터에게 속해 있었다. '로마 국민의 친구이며 동맹자'라는 새로운 조약이 유다 국민과 맺어졌다. 또한, 여러 지방 의 통치자들에게 그곳에 사는 유대인의 종교활동을 방해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유대인은 그들의 종교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유다에 대한 세력을 유지하려 했던 카이사르의 정치수완을 높이 평가했다. B.C. 44녀 3월 그가 암살당하자 로마의 유대인들은 여러 날 밤 그의 화장용 장작더미 앞에 줄을 이러 참배했다(수에토니우스,''카이사르의 생애 ''). 헤로데의 상승 안티파터의 네 아들 가운데 하나인 헤로데는 B.C. 47년 산적행위를 봉쇄한다는 임무를 띠 고 갈릴리의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난폭한 성질을 가누지 못하고 오만하게 도전했던 대의회(산헤드린)에 고소당해 시리아로 망명해야 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암살당한 뒤, 맏형 파자엘과 오리엔트의 새로운 군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호감을 사서 유다의 총독으로 임 명되기에 이른다(B.C. 42). 헤로데는 B.C. 40년말에 로마에 가 두 집정관, 안토니우스와 카 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의 도움을 받아 원로원에 출두한다. 그는 여기서 유다의 왕위를 부여받는데, 이는 자신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제 유다를 정복하기만 하면 되었다. 처 음에는 어려움도 따랐지만, 그는 B.C. 37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그 동안 그는 히르카누스 2세의 손녀 마리암네와 결혼했다. 아름다운 공주와의 결합은 이두매의 한 이방인으로 남아 있던 그가 왕좌에 앉을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그 는 미래의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귀족을 무수히 죽였다. 또한 그는 예리고에 있는 궁전 의 수영장에서 부인의 동생이며 대사제인 아리스토불을 익사시켜 죽였다. 아리스토불의 인 기가 불안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후로 헤로데는 자기 마음대로 대사제를 임명하고 해임했 다. 그는 나라 안에서는 더 이상 반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으며, 외부의 로마만 신경 쓰 면 되었다. 헤로데는 로마 제국의 새 군주가 된 옥타비아누스에 힘입어 왕좌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헤로데에게 확고한 신뢰를 갖고 있었다. 헤로데 는 긴 통치 동안(B.C. 37~A.D. 4) 로마의 보호자들과 최상의 관계를 유지했고, 호화로운 접 대로 그들의 환심을 샀다. 로마 제국은 헤로데 왕국의 안정성 덕분에 한푼도 들이지 않고 시리아와 이집트 국경을 유지할 수 있었다. B.C. 30년 이후 헤로데는 지중해 연안을 되찾아 전략상 중요한 도로를 통제 아래 두었다. B.C. 20년에는 북서쪽 골란(가울라니티스)에서 하 우란(아우라니티스)까지 뻗어 있는, 제노도르에게 빼앗겼던 공국이 그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 다. 건설자 왕국의 자원은 빈약한 편이었지만, 헤로데는 대공사를 벌였다. 평화가 정착되고, 로마의 동방 무역이 발전하였다. 야파보다 더욱 안전한 항구의 개발을 원한 헤로데는 스트라토의 탑이 있던 곳에 가이사리아라는 도성을 건설했다. 로도스섬, 안티오크, 키오스섬, 라오디세, 트리폴리, 다마스쿠스, 베리투스(베이루트), 티로, 시돈, 프톨레마이오스(악고) 같은 아시아나 그리스의 여러 이방 도시들도 그의 관대함의 혜 택을 입었다. 그는 자신의 영토 위에 사마리아를 복구하여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는 세바스 테(그리스어로는 세바스토스)라는 신전을 지어 황제에게 바쳤다. 그는 예리고와 예루살렘에 도 극장과 경기장을 세웠다. 그는 특히 요새를 많이 건설하였다. 베들레헴 남부에는 헤로 디온 요새를, 예리고 근처에는 키프로스 요새(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지음)를 쌓았고, 사해 양쪽에 하스몬 왕가의 요새를 마쉐론테와 마사다를 재건하였다. 헤로디온 요새와 마사다 요새가 발굴되면서, 극히 세련된 헤로데의 궁전이 그곳에 있었음이 밝혀졌다. 예루살렘에도 역시 요새가 지어졌다. 성전의 북서쪽을 보호하는 바리스 요새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기념하여 안토니아 요새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고, 그 내부는 궁전으로 꾸몄 다. 그후 헤로데는 도시 안에 세 개의 탑이 호위하는 요새화된 큰 궁전을 세웠다. 세 개의 탑은 마리암네(부인의 이름), 파자엘(맏형의 이름), 히피코스(친구의 이름)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고, 정원과 분수로 장식했다. 그러나 헤로데의 최고 업적은 성전의 재건이었다. 헤로데의 성전 헤로데의 눈에는 하스몬 왕조 시대의 성전은 너무 보잘것없어 보였다. 그는 성전을 완전 히 다른 규모로 재건하기 위해 토지의 기복을 변화시키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 의 성벽 가운데에서 키드론 골짜기 위로 불쑥 나온 동쪽 벽만을 그대로 놓아두고, 계곡들이 가득 찬 북쪽과 남쪽, 그리고 티로페온 골짜기를 향한 서쪽으로는 벽을 확장하였다. 헤로데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광장(트라야누스가 로마에 세운 광장의 넓이보다 두 배나 더 넓은)을 조성하였다. 성전의 넓은 뜰은 이방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 었다. 그러나 신성한 성벽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층 더 특별한 정화의식이 필요하였 다. 그리하여 정화된 상태의 이스라엘 백성만 신성한 성벽 안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건물 안은 솔로몬 시대 성전의 3분이 1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리고 건물 외부는 금으로 장식한 흰색 대리석으로 다시 지었으며, 아홉 개의 문에는 부유한 신자가 부담한 금과 은을 덧입혀 해가 떠오르면, 눈부신 자태가 드러났다. 성전은 금을 입히지 않은 부분이 하얗게 빛나 멀리 서 보면 마치 눈 덮인 산처럼 보였다. 고대의 예루살렘은 '불경건한' 헤로데 치하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웅대하였다. 수세기가 흐른 뒤에도 라비 문학에서는 여전히 헤로데 시대의 찬란함에 대한 향수가 나타나고 있 다. "열 개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내려왔는데, 예루살렘이 그중 아홉을 가졌다." 비판받는 왕조 헤로데의 통치 말기에 이르러 민중은 그의 폭정에 항거하기 시작하였다. B.C. 7년에 헤 로데가 마리암네에게서 난 두 아들을 사형에 처하자, 티론이라는 늙은 군인은 공개적으로 분노를 표시했다. 그는 40명에 달하는 음모자들과 함께 반역죄로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헤로데는 잔인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신전을 짓고 로마 제국에서 애호하는 경기를개 최하는 등, 이방인의 풍습을 도입하였다. 왕의 이러한 '불경함'은 많은 백성들을 놀라게 했 다. 그리하여 그가 성전을 재건할 때에도 사람들은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가 사미아스와 폴리온 같은 바리사이파 스승들에 대해 존경심을 품고 있었음에도 불하 고, 바리사이파 쪽에서는 왕에게 적개심을 표현하였다. 이것이 헤로데가 바리사이파의 스승 들에게 복종하던 자신의 가문 사람들을 모두 죽인 이유였다. 헤로데가 성전의 큰문에 로마의 힘을 상징하는 황금 독수리를 장식했을 때, 바리사이파의 젊은이들은 율법의 제2조항을 어긴 이러한 행동에 격분하여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 를떼어내어 버렸다. 분노한 왕은 젊은이들을 그들 스승의 하나인 마티아스와 함께 산채로 화형에 처했다. 헤로데는 예리고의 원형경기장에 모였던 40명의 저명인사들도 역시 끔찍하 게 죽이려 했지만,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자신이 먼저 숨을 거두었다. 40명의 유대인 대표단은 로마의 직접 통치를 선호하기까지 하여, 로마에 있는 유대인의 도움을 받아 황제에게 헤로데 왕조를 종결시켜 주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친구 헤로데의 유언을 집행하다. 그는 왕국을 헤로데의 세 아들과 여동생에게 나누어주고 태수라는 칭호를 주었다. 그러나 유다의 태수인 아켈라오스는 국민의 분노를 사서, 10년 뒤 인 6년에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폐위하고 갈리아 지방의 빈으로 유배시킨다. 이로써 로마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로마의 유다 지배 초기, 아직 대립상황은 잠재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후 로마의 마지막 총독들이 과도한 폭정을 행하자, 거의 모든 국토가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전쟁은 베스파시아느스가 갈릴리에서 시작해, 70년에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파괴하 면서 끝이 났다. 마지막 요새였던 마사다는 73년이나 74년에 함락되었다. 제5장 로마의 지배에서 유대인의 대반란까지 로마의 통치조직 필리푸스와 헤로데 안티파스가 통치하던 태수령 두 곳은 그대로 존속된 데 비하여, 아켈 라오스의 영토에서는 6년 이래로 로마의 직접 통치가 확립되었다. 시리아 주둔 총독 퀴리니우스는 로마에 내는 세금을 제대로 거두기 위하여 호구조사를실 시하였다. 그후 기사계급의 일원인 코포누스가 유다 통치를 맡았고, 그에게는 '생사 여탈권 '을 포함한 큰 권력이 주어졌다. 국민의 감정은 가라앉히기 위해서 베토스의 아들인 대사제 여호아살이 개입하였다. 그러 나 가울라니티스의 가말라 출신 유다를 대장으로 하고 바리사이파의 스승 사독의 교사를 받은 완강한 사람들은 예속의 상징인 로마에 바치는 조공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특히 젊은 층의 지지를 받았고 나라는 소요로 들끓게 되었다. 6년부터 41년 사이에 여러 명의 총독이 유다를 통치하였다. 그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폰스 빌라도이다. 그는 티베리우스왕 치하에서 10년간(26년에서 36년까지) 총독의 자리에 있었는데 종교적으로 도발적인 행동을 많이 자행하여 백성들의 증오를 샀다. 그렇지만 37 년 과월절 축제 때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는 주민들의 환영을 받는 다. 아그리파 1세, 유대인의 왕 로마 제국이 융성할 때였지만, 유대인들은 자신의 왕을 되찾게 되었고, 소요는 잠시 가 라앉았다. 레오데와 마리암네의 손자이며 아리스토불의 아들인 헤로데 아그리파는 어렸을 때부터 로마의 안토니아(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딸이자,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어머니이 며, 칼리굴라의 할머니) 곁에서 자라났다. 티베리우스의 통치가 끝나기 부로가 몇 달 전, 아 그리파는 왕의 총애를 잃자 선물공세로 젊은 칼리굴라의 마음을 산다. 이 젊은 황제는 즉위 하자마자(37년) 우정의 표시로 아그리파를 자식이 없는 아그리파의 숙부 필리푸스가 다스 렸던 영토의 왕으로 앉혔다. 아그리파는 자신의 다른 숙부이며 헤로데 1세의 아들인, 갈릴리 와 베레아의 태수 헤로데 안티파스의 영토도 자신의 영토에 첨가시켰으며, 곧이어 가울라니 티스 북부에 있는 아빌렌의 옛 영토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아그리파는 로마에 자주 머물면서 로마 내정에 큰 역할을 행사하였다. 그는 자신의 학 창시절 동료인 클라우디우스가 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을 도와주고, 41년에 유다, 사마리아, 이두매를 자신의 영토에 포함시킨다. 이로써 그는 과거 헤로데 왕국을 거의 완전하게 되찾 았다. 아그리파 1세는 자신의 조부처럼 베리투스(베이루트)같은 이방 도시들을 포함한 대건설 사업에도 재정지원을 했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경기들을 개최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그는 헤로데가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여 창설한, 5년마다 열리는 경기를 가이사리아에서 참석하 던 도중에 갑자기 사망하였다(44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의 기억 속에 신앙심이 깊었던 왕으로 깊이 각인되었다. 죽기 전 아그리파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새로이 개발된 구역을 감싸는 제3의 성벽을 건설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의 명령으로 이 성벽 건설은 곧 중단해야 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이 공사를 중단하지 않았다면, 예루살렘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갈등과 억압 40년에 칼리굴라가 자신의 동상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세우려 하자 봉기가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동상을 세우는 임무를 띠고 파견된 시리아 특사, 페트로니우스는 대중의 평화시위에 직면하여 작업을 늦추고 현명하게 시기를 기다렸다. 그 동안 로마에서는 아그리파 1세가 황제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칼리굴라가 암살됨으로써 봉기가 일어날 위험은 사라지게 되었다. 아그리파 1세가 죽자,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리파의 아들(마찬가지로 아그리파라 불림)이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판단하여 영토를 다스릴 총독을 파견하였다. 그러자 유다의 아들들과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제4의 철학'이라고 부른 것의 신봉자인) 시카 리당이 국가의 해방을 외치며 다시 소요를 일으켰다. 마지막 총독들 네로의 통치 아래에서 마지막 총독들이 부임하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무엇보다도 로마에 우호적인 유대인을 비난했던 시카리당의 행동은 점점 난폭해져 많은 사람을 살해하 였다. 그리고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나와서 신의 징조와 기적을 제시하면서 민중을 사 막으로 이끌었다. 이집트에서 온 한 예언자는 말 한마디로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리려 시도하였으나, 결과는 그의 신도 400명만 목숨을 잃을 뿐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유대인이 얼마나 신비적인 열광에 사로잡혀 있었나 하는 사실을 잘 나타내준다. 펠릭스, 알비누스, 플로루스 같은 총독들은 갈등을 무마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약탈과 잔인 한 행동을 자행해서 갈등을 부채질하였다. 네로 황제 주위에는 펠릭스의 형제인 팔라스나 세네카의 경쟁자인 부르루스같이 썩어빠진 신하들이 판을 치고 있어서, 황제에게 진정하는 일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클라우디우스가 왕으로 임명한 아그리파 2세는 아빌라의 영토와 더불어 필리푸스의 옛 영토와 맞바꾸었다. 그는 그외에도 네로에게 갈릴리와 베레아의 일부, 게네사렛 호숫가에 위치한 티베리아와 타리쉐의 도시들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꾸만 긴박해 가는 상황 에 대처할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고, 제국의 보호 아래 있는 군주일 뿐이었다. 알렉산드리아와 디아스포라의 극성기 5세기 전부터 이미 존재해온 유대의 디아스포라가 극성기를 맞이한 것은 1세기 초였다. 20세기 사가 중 어떤 이들은 로마 제국에 거주하던 유대인의 숫자가, 지중해 연안에 거주하 던 사람만 계산해도, 인구 10명당 1명-약 800만 명-이 된다고 추산했다. 이 숫자를 축소 시킨다 해도, 파르티 치하에 살던 바빌로니아의 유대인까지 생각한다면 전체 숫자가 더 적 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유대인 가운데 일부는 좀더 시간이 지나서 개종한 사람들도 있 었다. 아마도 그들은 단호한 태도는 취하지 않지만, 1주일 가운데 제7일에는 일하지 않고, 음식금기를 지키는 유대인의 방식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어로는 세보메노아, 라틴어로는 메투엔테스, 즉 '신을 경외하는 자'라고 불렸다. 개종자 가운데에는 아디아베네(에데스를 수도로 하는 동양의 소왕국)의 여왕 헬레나와 그녀의 두 아들 모노바 주스와 이자테스도 있었다. 아람어를 간직하고 있는 바빌로니아인을 제외하면, 로마의 디아스포라를 포함하는 대부분 의 디아스포라는 그리스어를 사용하였다. 그리스어를 쓰는 가장 뛰어난 공동체는 말할 것도 없이 알렉산드리아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는 세기의 전환기에 가장 위대한 그리스어 작가이 며 철학가, 주석가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을 배출했다. 번영을 자랑하던 이 유대인의 공동체는 도시의 전 구역에 분산되어 있었는데, 왕궁에서가 까운 델타 지역(그리스 자모의 제4자 '델타'에서 따온 명칭으로 제4구역)에 가장 밀집해 있 었다. 따라서 그보다 나쁜 지역에 사는 이집트 원주민들 가운데에는 이를 질투하는 사람들 이 많았다. 또한 유대인의 공동체는 로마의 지배아래에서 그리스인의 적대감에 부딪혔다. 그들은 과거에 그 지역의 주인이었다는 우월감을 몹시 나타내고 싶어해서 도시국가의 권리 를 유대인과 공유하려 하지 않았다. 총독 플라쿠스는 황제를 신격화하려는 이집트 민중의 요구를 들어주거나, 그들이 유대인에게 극심한 적대감을 갖도록 방치함으로써 잃었던 칼리 굴라의 총애를 되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러한 '유대인 박해'가 심화 되자, 필론 같은 몇몇 저명인사들이 유대인의 권리를 옹호하려 로마의 칼리굴라를 찾아갔으 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클라우디우스는 유대인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하도록 명령하는 편지를 알렉산드리아로 보내(41년) 일시적으로 갈등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가 운데에서도 그는 편지에 "유대인들은 이미 갖고 있는 권리 이상은 찾지 말라."는 말을 덧 붙였다. 유다 전쟁을 틈타서 66년에 반유대 폭동이 일어났다. 당시 총독이던 티베리우스 알렉산더 는 유대인의 보복을 미리 근절하기 위해 자신의 옛 동료인 유대교인들을 잔인하게 진압하 였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5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반란의 진행 시카리당의 자극과 총독들의 과도한 행동 때문에 대중의 감정은 더욱 격해졌다. 가이사리아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정치적 평등이란 주제를 놓고 펠릭스 시대 이후 계속 대립해 왔다. 네로는 원한에 사무친 유대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66년 그 일로 새로 이 말썽이 일어나자, 플로루스는 자신에게 기대를 걸었던 유대인의 희망을 배신하였다. 플로루스가 감히 성전의 보물에 손을 대자 예루살렘은 갈등으로 뒤덮인다. 소요를 진압는 과정에서 수백만 명의 인구가 죽었다. 시리아 총독의 특사와 아그리파 2세는 평화를 되찾으 려 애썼으나 허사였다. 그때 일군의 시카리당이 로마의 마사다 요새를 빼앗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예루살렘에서는 몇몇 젊은 사제들이 아우구스투스 이후로 황실의 재산으로 바치 던 황제를 위한 희생제사를 중지하기로 결정하였다. 바로 이들이 젤롯당, 즉 '하느님께 열 심인 자들'의 핵심 구성원이었다. 그러자 이러한 대담함에 질린 인사들은 아그리파 2세 편 으로 돌아섰다. 예루살렘에서는 로마 군대와 싸우기 전에 먼저 왕실 군대와 전쟁이 벌어졌다. 66년 한여 름, 7일간의 전쟁 끝에 유대인 반란자들에게 승리가 돌아갔다. 그들은 부채증서가 보관된 고 문서관을 불태웠다. 이러한 행위는 반란에 사회적 차원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후 그들은 로마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던 안토니아 요새를 탈취하였다. 시카리 당원 므나헴은 마사다 에서 도착하여 아그리파 편에 속한 성직자 귀족 두 사람을 암살했으나, 그의 주장은 젤롯 당의 미움을 사서 그 역시 목숨을 잃었다. 시리아 총독 세스티우스가 후퇴하고 반란자들은 첫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로마의 개은 질서를 회복시키기는커녕, 전쟁을 주장하는 당파를 더욱 자극해 추종자가 늘어났다. 그사이에 오래 전부터 유대인에 대한 이방인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켜왔던 도시인 테가볼리 의 가이사리아, 다마스쿠스, 알렉산드리아 같은 곳에서는 수천 유대인들이 보호를 받지 못 하고 살육당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전투 66년 겨울 동안 예루살렘에서는 로마의 반격에 대비하여 저항이 조직화되었다. 마타디아 의 아들인 젊은 귀족 요셉(나중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라고 알려짐)은 로마에서 중요한 외 교임무를 마치고 막 돌아와 갈릴리 전역의 지휘권을 맡았다. 그러나 그의 업무수행이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중요 적수였던 기스칼라의 요한은 그를 양심을 속이는 자로 의심하여 예루살렘에 조사위원회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네로 는 갈릴리로 노련한 장군 베스파시아누스를 보낸다. 67년 봄 요셉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포위 당한 요타파타 요새에 갇히게 되었다. 방어자의 영웅적 용맹이나 계략도 로마의 공격 앞에서는 오래 버틸 수 없었다. 포위 당하고 47일 만 에 요셉은 도시의 인사 40명과 함께 은신처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적에게 발각 당한 것을 알고 그들은 투항하기보다는 자결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요셉만은 자결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제비를 뽑아 순서대로 옆사람을 죽이자고 설득한다. 그는 이러한 속임수를 써서 살아 남아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항복한다. 그리고 그가 황제가 되리라는 예언을 한다. 2년 후 베스파시아누스가 실제로 황제가 되자 요셉은 감옥에서 풀려난다. 그는 알렉산드리아까지 황제로 모시고 가며 황제는 그곳에서 로마로 향한다. 그 동안에 베스파시아누스는 가말라 함락 뒤에 엄청난 살육이 일어나는 가울라니티스를 포함하여 갈릴리 전역을 복속시킨다. 그는 사해 근처와 유다까지 진격하였다. 이제 수도인 예루살렘은 함락시키는 일만 남았다. 로마로 떠나면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임무를 그의 아들인 티투스에게 일임하고, 이집트 총독 티베리우스 알렉산더와 로마의 새로운 시민이 된 통역자 티투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게 그를 돕도록 명령하였다. 예루살렘 포위공격 그 동안 예루살렘에서는 포위공격을 견딜 수 있도록 준비하는 대신에, 온건파를 제거한 뒤 남은 세 도당이 서로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소수 젤롯당의 지도자인 시몬의 아들 엘르아잘은 성전으로 피신하였다. 갈릴리에서 망명한 기스칼라의 요한의 부하들은 성전 바깥뜰을 점령하고 두 도당과 싸웠는데, 특히 시몬 바 기오라의 군대와 대적했다. 요한과 시몬은 상대를 약화시키기 의해서는 도성에 쌓아놓은 식료품에 불을 지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마도 주민들을 절망상태에 빠뜨린 뒤 사력을 다해 싸우게 만들려고 그런 것 같 다. 세 도당은 로마군이 성을 에워싸자 비로소 힘을 합해 포위군과 대결하였다. 기근은 전투만큼이나 많은 희생자를 냈다. 티투스는 탈주자를 잡기 위해 참호의 벽으로도 시를 둘러쌌다. 계곡으로 먹을 것을 찾으러 나왔다가 잡힌 사람들을 주민들의 눈앞에서 십 자가에 매달렸다. 때로 아랍인이나 시리아인 조수 혹은 로마군인들을 잡힌 사람들이 삼켰을 지도 모르는 금전을 찾기 위해, 그들의 배를 가르기도 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투항 하라'는 권유는 그때까지도 신의 개입을 기대하던 극한주의자들을 격앙케 할뿐이었다. 로마의 작전은 결국 유대인의 저항을 압도하였다. 안토니아 요새가 함락되자 성전을 지는 자들은 엿새 이상을 버티지 못하였다. 한 로마 병사가 던진 불붙은 짚수세미 때문에 성소 에 불이 났다. 기이한 우연의 일치로 그날은 첫 성전이 파괴된 날과 같은 날인 압달 9일이 었다. 그리고 그후 화재는 아래 도시로 번졌다. 유다의 군대는 세 군데 헤로데 요새의 보호를 받는 위 도시에서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러 나 곧 로마인들이 이곳을 공격하여 골목골목으로 쏟아져 내려와, 불을 지르고 학살을 자행 하며 약탈하였다. 티투스는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이제 더 이상 옛날 예루살렘 의 영화를 상기시킬 만한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로마의 승리 공략이 끝나자 티투스는 병사들에게 전리품을 나누어주는 화려한 의례를 거행하면서, 승리를 기념하여 제사를 지냈다. 그런 뒤 그는 그 지역의 큰 도시들에서 유대 포로 가운데 건장한 사람들을 서로 싸우게 하거나 맹수와 싸우게 하는 거대한 경기를 조직했다. 또한 그는 많은 포로를 죽였다. 로마에서 선보인 승리의 행렬 가운데에는 키와 미모를 기준으로 선택된 700명의 포로와 반란의 주동자인 기스칼라의 요한과 기오라의 시몬이 줄지어 끌려갔고, 예루살렘에서 가 져온 전리품과 성전의 기물들도 선보였다. 시몬은 광장에서 참수되었고, 군중은 관습에 따 라 적의 대장이 맞은 종말에 환호를 보냈다. 요한은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승리를 기념해 유다에아 카프타라고 새겨 넣은 동전을 발행했고, 해마 다 성전에 바치던 반 세겔(고대 헤브라이의 중량 단위로 약 6g:역주)을 특별 금고인 피스 쿠스 유다이쿠스에서 받아 카피톨리나 주피터 신전에 쓰도록 했다. 마사다 헤로데가 지은 요새들은 하나하나 함락되었다. 처음에는 헤로디온 요새가, 그 다음에는 사 해 동쪽 기슭에 있는 베레아의 마쉐론테가 함락되었다. 66년에 시카리당이 점령한 사해 서쪽 기슭에 있는 마사다는 식량과 물과 무기가 잘 보급되어 난공불락의 요새같이 보였다. 73년 새로운 통치자 플라비우스 실바는 프레텐시스 제10연대와 지원부대를 이끌고 와서 이 곳을 포위하였다. 포위 당한 사람들의 수는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하여 960명이었으며, 포위 한 사람은 거의 열 배에 가까운 숫자였다. 실바는 가장 가파른 서쪽 면에 흙을 돋우어 올라 가 전쟁기구들을 끌어올리게 했다. 시카리당의 두목 엘르아잘 벤 야이르는 이러한 전법 앞 에 패배할 것을 예감하고 동료들에게 명예롭게 자결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상이 이러한 집 단자살을 증언한 유일한 동시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기록이다. 유대인이 로마에 대항해 일으킨 대반란은 이렇게 끝아 났고, 그 결과는 2000년 이상 동안 계속될 유대인의 운명을 결정하였다. 성전은 비록 파괴되었지만, 기도와 연구에 집중된 유대인의 생활은 계속되었다. 바르 코 크바의 반란 이후, 유대인들은 로마가 인정한 원로원 최고의원의 지배를 받으면서 갈릴리 에서 생활하였다. 소위 '예루살렘'탈무드를 이루는 구전 율법이니 미쉬나와 게마라가 편집 된 곳도 이곳 갈릴리였다. 비잔틴의 법률이 유대인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면서 바빌로 니아 아카데미는 더욱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제6장 정치의 패배와 정신의 재건 70년에 두 번째 성전이 무너지고 난 뒤 유대교가 처한 상황은 처음 겪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역사가 반복되는 듯했다. 파국이 다가오기 전부터 벌써 유대교는 생존하기 위한 조 직을 확보해 두었다. 멸망 이후 로마에 대한 반란이 비극적으로 끝난 것은 단순한 군사적 패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었다. 이러한 결말에는 수많은 질문을 제기하는 신학적 차원이 있었다. 왜 하느님은 이러한 사건을 원하였을까? 그의 백성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 아직도 질문들과 비교할 때 사건 자체는 이차적인 중요성밖에 갖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러한 질문들을 제기한 사람들은 플 라비우스 요세푸스나 그의 경쟁자였던 티베리아의 유스투스같이 로마에 망명한 유대인들이 었다. 어떤 이들은 이들과는 매우 다른 성격의 글로써 자신의 고통과 혼란을 표현하였다. 예를 들면 오늘날 '제2바룩서'와 '제2에즈라서'라고 부르는 1세기말의 묵시록과 같은 글이 바 로 그것이었다. 이 두 권의 책에서는 천상의 예루살렘과 왕국에 대한 희망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인생이 아직도 살 가치가 있는지 회의를 느끼며 계속 비탄에 잠겨 지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라비들은 유대인의 생활이 온통 애통으로 가득 차지 않도록 슬픔을 통제해야 하겠 다. 압달 9일은 모든 굴욕을 상징하는 날이 되었다. 야브네와 그곳의 현자들 유대교의 유파들 중 사두가이파는 성전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시카리 당원과 젤롯 당원들 은 전투에서 죽었다. 에세네파는 많은 수가 전투에 참가했으며, 쿰란의 에세네파는 68년 베 스파시아누스의 군대가 진격해 오자 귀중한 책들을 동굴에 정성껏 감춘 뒤 도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바리사이파와 그들의 지지자들만이 남았다. 바리사이파의 영적 스승들 가운데 몇몇은 반란의 과열된 흥분 속에서도 중도를 지켰다. 비록 일부 바리사이파가 반란에 참가 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아직도 다시 조직을 정비할 수 있을 만큼 숫자가 충분했다. 멸망 후에 유대교를 재건했다고 전해지는 인물은 라비 요하난 벤 자카이이다. 전해 내 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로마인과 타협하려 했던 온건한 사람이었다. 그는 포위된 예 루살렘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로마의 장군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제국의 황제가 될 것 이라고 예언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갈릴리의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 된 말일 수도 있다.) 장군은 이에 대한 답례로 '야브네와 그곳의 현자들'을 그에게 부여하 였다. 이와 같이 라비 요하난은 해안평야에 있는 야브네에 바리사이파의 스승이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어주기를 요구했다. 야브네와 브네이 바락 같은 야브네 주위의 지방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 사실상 유대교의 정신적인 등대 역할을 했다. 산헤드린이 야브네에 다시 생겨 우선은 라비 요하난의 주재 아 래, 그후에는 유명한 현자 힐렐의 후손인 원로원의 최고의원 가말리엘 2세의 주재 아래 있 었다. 새로운 반란 힘겹게 되찾은 생활을 새로운 갈등이 다시 위협하였다. 특별한 이유 없이-아마도 알렉산 드리아인의 해묵은 경쟁심이 더욱 심해진 까닭에-이집트의 유대인들은 2년 이상(115~117) 을 로마 권력과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 전쟁은 키레나이카와 키프로스까지 번졌다. 그리하여 과거에 번영했던, 헬라어를 쓰는 세 공동체가 사라져버렸다. 132년에는 유다에서 바르 코크바(아람어로 '별의 아들')라는 별명을 지닌 카리스마적인 우두머리 시몬 바르 코시바가 이끄는 2차 반란이 일어났다. 위대한 라비 아키바가 그를 지 지했음이 증명해 주듯이, 이 반란은 메시아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봉기가 촉발된 계 기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의 폐허를 복구하여 엘리아 카피톨리나(자신의 가족 엘 리아 일가의 이름을 따서 지음)라는 로마식 도시를 건설하여 성소가 있던 자리에 주피터와 주노와 미네르바에게 바치는 신전을 지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라비들의 구전에 따 르면 하드리아누스('불경한 자'라는 별명이 붙여졌다)는 유대 종교를 반대하여 많은 박해 를 하였다고 한다. 전쟁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지간에,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2차 전쟁은 엄 청난 살상을 불러왔다. 전쟁의 마지막 보루는 베타르로서, 전쟁은 유다 위쪽으로는 퍼지지 않았던 것 같다. 바르 코크바가 예루살렘의 탈환에 성공하였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는 '이스라엘의 분활'과 '예루살렘의 자유'를 발행 연대로 하여 동전을 주조하였다. 로마 군대의 희생도 어마어마하게 컸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는 원로원에 보내 는 편지에서 보통 의례적으로 사용하는 인사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하드리아누스 는 3년 반이나 저항한 유대인들에 대한 복수로, 그때부터 유대인이 예루살렘, 즉 엘리아 카 피톨리나에 거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는 유다라는 이름 자체를 말살해 버리고, 그곳을 로마의 새로운 한 지방으로 편입하여 팔레스타인이라고 명명하였다. 이것은 불레셋이라는 그리스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실제로는 그보다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마쉬나 생존자들은 반란의 피해를 입지 않았던 북쪽의 갈릴리에 정착하였다. 정착민 가운데에는 지식인 라비 메이르와 엘리사 벤 아부야 같은 라비 아키바의 제자들이 있었다. 엘리사는 자 신의 스승이 고통을 겪고 많은 편자들이 불명예스럽게 죽는 것을 보고 신앙을 잃어버리고 이방인의 생활방식을 택했다고 전해진다. 라비 유다 벤 바바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우 사와 쉐파람 사이 갈릴리산에서 다음 세대의 교사들에게 서품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갈릴 리의 여러 지역, 즉 우사, 벧 쉐아림, 티베리아, 세포리스, 그리고 로마의 행정중심지였던 가이사리아도 고대 회당이 발견된 골란의 촌락과 함께 유대인의 활동중심지가 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200년경에, 힐렐의 후손이며 원로원 최고의원인 라비 유다 하 나시('왕' 이라는 뜻)의 지도 아래 미쉬나가 완성되었다. 그는 메시아 모험주의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 지는 묵시론적 전통과 결별하고, 구전으로 내려오는 옛 현자(탄나임)들의 가르침 가운데에서 율법의 적용과 관계된 것만을 보존하였다. 미쉬나는 여섯 개의 '조(sedarim)'로 나뉘었으며, 각 조는 중심 주제와 연결된 여러 개의 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미 쉬나의 마지막 두 개 항은 성전에 관계된 규칙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많은 불행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바빌론 유수'시대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성소 를 되찾으리라는 희망의 잃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탈무드의 완성 갈릴리와 다롬(남부, 브엘세바 근처)의 학교에서 편집된 미쉬나는 앞에 위치한 네 가지 '조'에 대해 무수한 논쟁과 구전 주석들을 자아냈다. 그리하여 아모라임이라 불리는 스승들 의 지도 아래 게마라가 만들어졌다. 게마라는 미쉬나에서 '제외된' 가르침을 수집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게마라는 아람어로는 바라이타('제외된 것'이라는 의미)라고 불리고 있다. 3세기와 4세기 말 사이에 만들어진 갈릴리의 게마라가 마쉬나에 첨가되어 이른바 '팔레 스타인 탈무드',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예루살렘 탈무드'(비록 이 시기에 유대인들은 예루 살렘에 접근할 수 없었지만)라고 부르는 것이 형성되었다. 바빌로니아 네하르데아의 유대 지식인들은 갈릴리 스승들에게 받은 그들의 지식은 더욱 환전하게 만들어 그 가르침을 고향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특히 수라와 품페디타이 유명한 두 아카데미에서 그 지역의 아모라임(교사들)이 추가로 게마라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 빌로니아 탈무드'의 게마라이다. 기독교의 출현 라비들이 쓴 문서에는 기독교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으며, 기독교 교리를 논박하기 위해 쓴 자료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1세기에 예수에 대해 공공연하게 언급한 유일한 유대인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로서, 그는 신학자들이 '플라비우스의 증언'이라고 부르는 유명한 대목 을 썼다. 이것은 역사가들이 볼 때 기독교라는 환경 속에서도 존속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예수는 '현명한 자', 진리의 친구로 소개되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세례 요한 에 대해서도 호감을 갖고 말하고 있으며, 62년 사두가이파의 대사제가 야곱('예수의 형제' 야곱)을 처형할 때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극렬하게 반대하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런데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이 저서는 70년 이후에 로마에서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기독교 공동체는 기독교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한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후 네로 치하에서 박해를 받기 시 작하였다. 요세푸스는 주로 유다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관심을 가졌고, 유다 지방의 기독교인 들은 반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에 예루살렘을 피하여 펠라로 은신하였다. 대부분의 '신약성서'테스트가 탄생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는 1세기말에 이르러서야 유대교 와 기독교의 진정한 분리가 이루어진다. '신약성서'의 텍스트는 살아 남은 유대인인 바리사 이파의 사상에 적대적이었다.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 지만, 당시 기독교 교회는 이방인들 쪽에서 먼저 발전을 이룩하고 있었다. 당시의 시대정신에 따를 때, 유대인 반란의 계속적인 실패는 하느님이 그들을 버렸으며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생각을 확인해 주는 증거로 보였다. 2세기에 들어오면 '반유대적인' 특징들이 더욱더 증가하기 시작한다. 70인역 성서가 기독 교인의 '구약성서'가 되어버리자, 유대인들은 개종자 아킬라로 하여금 '성서'를 그리스어로 새로이 번역하게 하였다. 실천적인 면에서, 초대 기독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출신의 기독교인에게는 할례와 음식에 대한 규칙 가운데 몇 가지(목 졸라 잡은 고기와 피를 먹지 못하게 하는 것)를 보존 하도록 하였다. 안식일은 몇몇 유대-기독교적 세계 내에서는 6세기까지 유지되었지만, 다 른 곳에서는 2세기부터 천지창조의 첫날이며, 그리스도가 부활한 날인 '일요일'로 대체되었 다. 유대의 2대 축제인 과월절과 오순절은 예수의 생애 및 사도들과 관계된 새로운 의미 를 갖게 되었다. 예루살렘이 유대인들의 소망의 중심으로 계속 남아 있었던 반면, 기독교의 중심지는 안티오크, 로마, 알렉산드리아가 되었다. 비잔틴 제국과 유대교 바르 코크바의 반란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는 로마 제국에서 '합법적인 종교'로서 지닐 수 있는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소아시아와 로마에 2세기와 4세기 사이에 유대인이 살았던 흔적은 회당, 비석, 카타콤 등에 많이 남아 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은 원로원의 최고의원이 있어, 그들에게 특별세를 바쳤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한 후, 그의 어머니 헬레나는 예루살렘을 기독교 도시 로 만들려고 했다. 골고다가 있던 곳에서는 비너스 신전이 후일 성묘교회가 되는 아나스타 시스('부활'을 의미) 원형교회로 바뀌었다. 성전 뜰에 세워졌던 이방인들의 건축물들을 밀어 버리고, 그곳을 유대인이 겪은 굴욕의 표시로 삼기 위해 폐허로 남겨놓았다. 유대인들이 성 도에 체류하는 것을 금지했고, 1년에 한 번, 압달 9일에 서쪽 벽에 가서 울 수 있는 권리만 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이 벽은 '통곡의 벽'으로 불리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배교자'라고 불렀던 율리아누스 황제는 이교주의를 부활하려 했다. 유대 인들은 그가 통치한 짧은 기간(361~363)동안 성전을 재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 수 있었으나, 지진이 나서 그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4세기에 들어서자 기독교는 이교주의와 이단을 제거했고, 팔레스타인의 유대교는 이른바 '예루살렘 탈무드'를 중심으로 하여 재정립되었다. 그리하여 4세기는 두 종교가 창설되는 새로운 세기가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의 명령으로 편찬해 438년에 공포한 테오도시우스 법전에서는 이방인의 지배 아래에서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지위를 유대인에게 보장해 주었 지만,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결혼과 유대교로 개종을 권유하는 모든 일이 금지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국가가 개입할 여지도 없이 유대인의 시나고그에 불을 지르고 그곳의 재산 을 약탈하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또한 교회의 압력이 점점 강화되어 유대인에게 더욱더 차별적인 조치가 내려졌다. 유스티니아주스 법전에도 가혹한 조치가 규정되어서, 이것이 700 년 동안 비잔틴 제국에서 유대인이 지위를 규정하게 된다. 유대인의 희망 유대교의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신비'는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살아 남 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비잔틴 제국의 두 법전에서 공포된 칙령들은 여러 종교회의 때마다 확인되고 확대되어 유대인의 생활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다. 르낭의 표현에 따르면, 개종의 유혹에 저항한 유대인들에게 탈무드에 규정된 생활양식은 공동체의 단합을 유지하는 '쇠사슬'같은 것이었 다. 신자의 생활을 인도하는 할라카(전통적인 법과 규례에 대한 설명)에 라비들이 비유를 윤 리적 메시지로 발전시키거나, 신성한 이야기를 보충해서 설명한 설교에서 비롯된 하가다를 덧붙였다. 그중 일부는 탈무드에 포함되었고, 대부분은 4세기와 10세기 사이에 미드라쉬 안 에 수집되었다. 시나고그의 기도가 중요성의 띠게 되고 예배가 발전되었다. '토라'연구에 대한 외경심 역 시 줄어들지 않았다. 이러한 외경심은 또한 신성한 언어인 히브리어에 대한 강한 사랑을 낳았다. 그리하여 히브리어는 구어로서는 아니더라도 문어로 보존되었다. 출생지나 거주장소 에 상관없이 유대인은 자기들이 신성한 계시의 언어, 약속의 땅, 유일한 성도 예루살렘,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전파하는 사명을 지닌 유일한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명이 자신들의 추방을 정당화한다고 여겼다. 신자들은 이 추방생활이 구원을 얻기 전 에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믿었다. 구원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자신의 땅을 돌아가는 것이 그 첫 신호가 될 것이었다. 무수한 고난 이 메시아 적인 모험 때문에 초래되었고, 그리하여 이제는 그러한 사건들에서 교훈을 얻게 되었다. 즉 이제 더 이상 '때를 계산하려 하지 않으며' '종말을 앞당기려 하지도 않고' 역 사의 주인인 하느님에게 자신을 맡기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추억과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배웠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바로 이러 한 것이 불행한 삶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시 말해 저 멀리에 어렴풋이 보이는 빛이, 아무 리 고통스런 상황에서라도 구원자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릴 수 있는 힘을 그들에게 주는 것 이다. 예언자 하바쿡이 "쉬 오지 않더라도 기다려라. 기어이 오고야 만다."고 말하지 않았던 가. 기록과 증언 성경 텍스트와 역사적 텍스트들을 통해 본 고대 유대의 여러 모습. 히브리 성서와 그리스 성서 히브리 성서는 기독교인의 구약이다. 바이블(Bible)은 '책들'을 뜻하는 그리스어 '타비블 리아(ta biblia)에서 유래했다. 히브리말로 성서는 타나크(TaNaKb)라고 하는데, 이 말은 성 서의 세 가지 구성부분, 즉 모세 오경 또는 토라, 예언서 또는 네비임(Nebiim), 성문서 또 는 케투빔(Ktubim)의 첫자를 따서 합성한 것이다. 오직 토라만이 3세기에 그리스어로 번역 되었다. 그후 그리스 성서 전체를 70인역 성서, 즉 셉투아진트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리스 어 번역에는 수세기가 걸렸다. 히브리 성서 토라 '율법'이라고 부적절하게 번역된 이 히브리어는 사실상 '교육'을 의미한다. 토라는 프랑스어로는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제목에 따라 지칭되고, 히브리어로는 첫 절의 첫 번째 중요한 단어로 지칭되는 다음 다섯 권의 책을 포함한다. ,창세기=Bereshit(시작). ,출애굽기=shemot(이름들). ,레위기(사제들에 관한 율법들)=Vayiqra(그리고 그는 불렀다). ,민수기=Bamidbar(사막에서). ,신명기(율법의 반복)=Debarim(말들). 성서 비판에 따를 때 다음과 같은 출전들을 구분해야 한다. J:야훼계, 10세기. E:엘로임계, 9~8세기. D:신명기계, 7세기. P:주교계, 이주시기. 또한 페르시아 시대에 수정된 것들도 고려해야 한다. 예언서 예언서에는 예언자들(예컨대 나단, 엘리야, 엘리사)이 출현하는 역사서들과 예언이 담겨진 시집들이 포함된다. 역사서 또는 최초의 예언자들은 다음과 같다. ,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상, 하). ,열왕기(상, 하). 엄밀한 의미의 예언서들은 그 길이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누어진다: ,대 예언자: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열두 소 예언자: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 미가, 나훔, 하바쿡, 스바니야, 하 깨, 즈가리야, 말라기. 이 텍스트들 중 몇 가지의 연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아 모스와 호세아가 8세기의 북왕국에서 예언되었다는 것, 첫 번째 이사야와 미가는 8세기 유다 왕국에서 예언되었다는 것, 스바니아와 예레미야 그리고 특히 나훔과 하박쿡은 6세기 초에 예언되었다는 것이다. 에제키엘과 두 번째 이사야는 바빌로니아로 잡혀간 유대 민족 을 위로하는 것이고96세기), 하깨와 즈가리야는 유배에서 돌아온 뒤의 재건 예언서들이다 (538년부터). 성문서 이 세 번째 부분의 수집이 완료되는 것은 제법 늦은 시기인 100년경이다. 이 부분에 포 함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편(그중 일부분은 다윗왕이 쓴 것으로 여겨짐), ,잠언(전통적으로 솔로몬왕이 쓴 것으로 여겨짐), ,욥기, 다섯 가지 두루마리 -아가(솔로몬이 쓴 것으로 여겨짐), -룻기, -애가(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예레미야가 쓴 것으로 여겨짐, 히브리어 제목은 여겨 짐), -전도서(솔로몬이 쓴 것으로 여겨지는 지혜서, 히브리어 제목은 여겨짐), -에스델(부림절 축제의 기원을 이루는 반전설적 이야기), ,다니엘(기독교 성서에서는 예언서로 분류된 계시록으로, 에피파네스 안티오쿠스 4세에 대 한 반란 때 씌어졌다), ,에즈라와 느헤미야, ,역대기 상, 하, (에즈라와 느헤미야 그리고 역대기는 이집트에서 귀환한 이후의 역사서들이다). 미레유 아다스 르벨 70인역 성서의 역사 비공식 텍스트로는 처음으로 알려진 토라를 그리스어로 번역할 필요성이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그리스어 사용권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전설을 통해 전하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주 도권 행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집트 인구의 개별 구성원들은 자신의 고유한 법에 따라 심판받았다. 반면 토라는 유대인들의 노모스(법)로 기능했다. 아리스테아스가 자기 동 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한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대사제 엘리아잘에게 보낸 편지는 70인 역 성서 번역의 정황을 알게 해준다. 지상의 모든 유대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도록 우리는 너희들이 히브리 텍스트라 부르는 너희들의 율법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책은 다른 '왕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도서관에 꽂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우리는 너에게 각 부족에 서 여섯 명씩, 타인에게 모범이 될만하며 번역을 잘해낼 수 있으며 율법에 정통한 장로들을 선발해줄 것을 당부한다. 이는 사업의 중요성에 비추어보아 다수의 합의를 대변할 수 있는 텍스트를 만들어내기 위함이다. 이 사업의 완성은 우리에게 커다란 영예를 가져다 줄 것으 로 생각한다. 이런 취지에서 우리는 너와 협의할 수 있도록 대근위대의 안드레와 우리 왕 실의 아리스테아스를 보낸다. 그들은 지성소에 바치는 예물과 희생제물과 그 외의 것을 위 해 은화 100탈란트를 가져간다. 너 또한, 네가 바라는 것을 적어주기 바란다. 그러한 우정 의 표시는 기쁨을 줄 것이며 우리는 네가 바라는 것을 서둘러 들어줄 것이다. 건강을 빌며. '필로크라테에게 보내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토라의 그리스어 번역 그들은 곧 거창한 사명을 띤 임무의 완수를 위해 작업을 시작하였다. 신탁으로 받은 율 법들을 삭제하거나 추가하거나 수정하지 않고 원래의 형식과 틀을 세심하게 유지하면서 완 벽하게 번역한다는 것이 얼마나 방대한 작업인지 서로 가늠해본 다음, 그들은 도시 밖의 가까운 곳에 가장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 나섰다. 왜냐하면 살아 잇는 모든 종류의 피조물 이 가득 찬 성 내부에서는 질병, 죽음, 건강한 사람들의 불순한 행동들 때문에 그들의 마음 이 허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주위의 모든 장소들 중 파로스섬이 고요함, 고독, 율법과 영혼 사이의 직접적 교류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성스러운 책을 하늘로 향해 들고서 하느님에게 자신들의 작업에 맞 는 능력을 달라고 부탁했다. 하느님은 기도를 들어주어, 그들 대부분이, 심지어 전부가 그 들의 행동을 개선해 하느님의 현명하고 숭고한 지시를 따를 수 있게 하였다. 그들은 자연만 가득 찬 은신처에 정주하여, 마치 하느님이 그들의 정신을 소유한 것처럼, 모드가 같은 망, 같은 모양으로, 마치 보이지 않는 입김이 지시하는 것처럼, 예언을 하였다. 그러나 모든 언어는-특히 그리스어는-풍부한 단어를 갖고 있다. 따라서 동일한 사상도 용어 를 바꾸고, 동의어를 사용하며, 고유한 단어를 찾으려 할 때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 다. 그렇지만 이 율법의 번역에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 칼데아어의 단어는 그 지시 된 사물에 정확히 상용하는 동일한 그리스어로 옮겨졌다... 그리스어를 아는 칼데아인과 칼 데아어를 아는 그히스인이 칼데아판과 그 번역본의 두 판본을 앞에 놓고 비교할 때마다, 그 들은 그 두 판본을 마치 오누이를 보는 듯, 그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도 동일한 하나의 작품 을 보는 듯, 감탄과 찬양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번역자들을 번역자가 아니라 사제 그리고 예언자들이라고 불렀다. 영혼이 순수했던 이 예언자들은 모든 자들 중에서 가 장 순수한 정신, 즉 모세의 정신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바로 그 때문에 오늘날 까지도 파로스섬에서는 매년 축제와 찬양의 행사를 한다. 이때 유대인뿐 아니라 수많은 사 람들도 최초로 번역이 행해졌던 그 장소를 숭배하고 항상 새롭게 태어나는 이 고대의 은사 를 하느님께 감사하기 위해 긴 여행을 한다. 필론'모세의 삶' 그리스어 성서 그리스어 성서는 기독교가 물려받은 성서이다. 모세 오경 외에도 그리스어 성서는 다음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역사서들(열거된 순서에 따라 포함되어 있다). 여호수아, 판관기, 룻기, 네 권의 통치서 (1, 2권: 사무엘, 3, 4권: 열왕기), 역대기 1, 2권, 네 권의 에즈라(그중 3, 4군은 외경), 에스 델(여섯 이상의 단편이 B. C. 1세기 그리스의 것임), 유딧(B. C. 2세기 헬레니즘풍 소설), 토비트(B. C. 2세기 계몽소설), 마카베오 1, 2권과 외경인 3, 4권. ,시서: 욥, 시편, 솔로몬의 잠언, 전도서, 아가, 지혜서(B. C. 1세기), 예수 벤 시락서(시락의 아들인 예수의 지혜서, B. C. 190년), 솔로몬의 시편(B. C. 140년경). ,열두 명의 작은 예언자들: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 미가, 나훔, 하바쿡, 스바 니야, 하깨, 즈가리야, 말라기. ,위대한 네 명의 예언자: 이사야, 예레미아 + 애가 + 바룩 + 예레미아의 편지, 에제키엘, 다니엘 1∼12(3, 24∼30: 불 가마의 세 아이 노래는 그리스에 고유한 것) + 다니엘 13(정숙 한 수잔나) + 다니엘 14(벨과 용). 제2성서: 카톨릭이 이차적으로 정경으로 받아들였다(1546년의 트렌트 종교회의와 1870년 의 바티칸 종교회의). 개신교에서 외경이라 부르는 것으로서, 오직 그리스어로만 보존된 책 들을 포괄한다. (루터는 라틴어 성서의 번역자인 제롬의 의견에 따라 이 책들을 그의 성경 제일 끝에 위치시키고, 성스럽지는 않지만 읽어두면 좋은 책으로 간주한다.) 외경: 카톨릭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책들(에녹서, 에즈라 3, 4권, 열두 족장의 유언집, 아 리스테아스의 편지, 마카베오 3, 4권, 희년서). 이 책들은 계시록의 경향을 갖는 경우가 많 다. 슈테피그라프: 개신교에서 카톨릭 외경을 부르는 말. 사실상 이 용어는 정경에 포함되었지 만 유명한 인물들이 쓴 것으로 잘못 여겨지고 있는(사기의 의도가 아니라 작품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한 문학과정에 따라) 특정한 글들을 지칭하는 데 적합하다. 미레유 아다스 르벨 왕위 '성서'에서 왕위에 대한 태도는 일정하지 않다. 히브리 민족이 왕을 달라고 요구했을 때 사무엘은 그들을 심하게 비판한다. 또한 다윗, 솔로몬, 그리고 바빌로니아의 정복에 이르는 남왕국 모든 왕들의 지파인 유다 지파에 매우 호의적인 전통이 있었다. 바로 이 전통 속에 서 메시아(히브리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마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간주된다. 왕을 요구하는 히브리 민족 그러자 모든 이스라엘 장로들이 한곳에 모여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가 건의하였다. "당신 은 이제 늙고, 아드님들은 당신의 길을 따르지 않으니, 다른 모든 나라처럼 왕을 세워 우리 를 다스리게 해주십시오." 사무엘이 "우리를 다스릴 왕을 세워주시오."하는 말을 듣고 마 음이 언짢아 야훼께 기도하였다.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백성이 하는 말을 그대로 들어주어라. 그들은 너를 배 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왕으로 모시기 싫어서 나를 배척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집 트에서 데리고 나온 이후 이날 이때까지 나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런 짓을 해 왔다. 너한테도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들의 말을 들어주어라. 그러나 엄 히 경고하여 왕이 그들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를 일러주어라."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달라는 백성에게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낱낱이 일러주었다. 사무엘은 이렇게 일러주었다. "왕이 너희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알려주겠다. 그는 너희 아들들을 데 려다가 병거대나 기마대의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다. 천인대장이나 오십 인대장을 시키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게 하거나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보병의 무기와 기 병의 장비를 만들게도 할 것이다. 또 너희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를 만들게도 하고 요리나 과자를 굽는 일도 시킬 것이다.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에서 좋은 것을 빼앗아 자 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곡식과 포도에서도 십분의 일세를 거두어 자기의 내시와 신하들 에게 줄 것이다. 너희의 남종, 여종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좋은 소와 당나귀를 끌어다가 부려먹고 양떼에서도 십분의 일세를 거두어갈 것이며 너희들마저 종으로 삼으리라. 그때에 가서야 너희는 너희들이 스스로 뽑아 세운 왕에게 등을 돌리고 울부짖겠지만, 그날에 야훼 께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무엘이 이렇게 말해 주었건만 백성은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왕을 모셔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다스려줄 왕,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를 이끌고 나가 싸워줄 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무엘이 백성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야훼께 아뢰니, 야훼께서는 "그들의 말대로 왕을 세 워주어라"하고 대답하셨다. '사무엘상' 8장 4∼22절 솔로몬의 지혜 더구나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와 슬기를 한없이 주셨으므로 그의 박식하기가 바다의 모래벌판 같았다. 솔로몬의 지혜는 동방의 어떤 사람도 따를 수 없었고 지혜 있는 이집트 의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민족으로부터 사람들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고 그의 지혜의 소식을 들은 세상의 모든 왕들이 또한 그리하였다. '열왕기상', 5장 9∼14절 솔로몬의 성전 봉헌기도 "그러나 하느님, 하느님께서 이 땅에 사람과 같이 자리잡으시기를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꼭대기 하늘도 주를 모시지 못할 터인데 소인이 지은 이 전이야말로 말해 무엇하 겠습니까? 그러나 나의 하느님 야훼여, 소인의 기도와 간청에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이날 당신 앞에 서 울부짖으며 드리는 이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곳입니다. 밤낮으로 이 전을 보살펴주십시오. 소인이 이 곳을 바라보며 올리 는 기도를 부디 들어주십시오...”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아닌 외국인이라도 그가 당신의 명성을 듣고 멀리서 찾아오거 든, 당신께서 손을 펼치사 위력을 드러내시어 널리 알려진 당신의 명성을 듣고 와서 당신 께서 사시는 전을 바라보며 기도드리거든 당신께서는 자리잡으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 외국인의 청을 들어 그대로 이루어주십시오. 그리하시면 이 지상의 모든 백성들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당신의 이름을 알게 되고 당신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소인이 지은 이 전이 당신의 성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열왕기상', 8장 27∼30절, 41∼43절 바빌론으로부터의 귀환 고레스 칙령은 B. C. 583년부터 유다 포로들의 귀환을 허용했다. 바빌로니아의 텔아비브 로부터 예언자 에제키엘은 그 유명한 마른 뼈의 환상을 통하여 예루살렘의 부활을 알린다. 많은 시적인 텍스트들이 귀환의 기쁨을 노래하고, 제2이사야는, 진귀한 돌들로 완전히 새롭 게 단장하고 신의 영원한 보호를 보장받은 예루살렘에 대한 휘황찬란한 환상을 통해 위안의 소식을 전한다. 고레스 칙령 "페르샤 황제 고레스의 칙령이다. 하늘을 내신 하느님 야훼께서는 세상 모든 나라를 나에 게 맡기셨다. 그리고 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당신 성전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지워주셨다. 나는 그 하느님께서 너의 가운데 있는 당신의 모든 백성과 함께 계시기를 비는 바이다. 그 하느님은 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계시는 분이시니, 유다인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 가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성전을 짓도록 하여주어라. 원주민들은, 여기저기 몸붙여 살다가 아직 살아 남은 유다인이 있거든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에 가져다 바치도록 자원예물도 들려보내고 금과 은 과 세간과 가축도 주어서 보내어라.” 유다 가문의 어른들, 베냐민 가문 어른들, 사제들, 레위인들은 모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야훼의 성전을 다시 세울 마음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길을 떠날 채비를 하게 되었다. '에즈라', 1장 2∼5절 마른 뼈의 환상 야훼께서 손으로 나를 잡으시자 야훼의 기운이 나를 밖으로 이끌어내셨다. 그래서 들 한 가운데 이끌려 나가보니 거기에 뼈들이 가득히 널려 있는 것이었다. 그분이 나를 그리로 두 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돌 바닥에는 뼈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것들을 모두 말라 있었다.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였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것 같으냐?" 내가 "주 야훼여, 당 신께서 아시옵니다."하고 아뢰니, 그분이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내 말을 전하 여라. '이 마른 뼈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넣어 너희들을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내가 말씀을 전하는 동안 뼈들이 움직이며 서로 붙 는 소리가 났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뼈들에게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 이 씌워졌다. 그러나 아직 숨쉬는 기척은 없었다. 야훼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였다. "숨을 향 해 내 말을 전하여라. 너 사람아,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숨이 불어왔다. 그러자 모두들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 다. 그러자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다. 뼈는 마르고 희망은 사라져 끝장이 났다고 넋두리하던 것들이다. 이제 너는 이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 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네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 운을 불어넣어 살려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나 야훼가 한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야훼가 하는 말이다.'" '에제키엘' 37장 1∼14절 귀환의 기쁨 먼 곳에서 돌아가는 이 사람들을 보아라. 북에서도 서에서도 돌아가고 시님족의 나라에서 도 돌아간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를 질러라. 야훼 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그 천대받는 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셨다. "'야훼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너 시온은 말하였었지.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 찌 잊으랴! 자기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너는 나의 두 손바닥에 새겨져 있고 너 시온의 성벽은 항상 나 의 눈앞에 있다. 너를 다시 일으킬 자들이 서둘러 모이니 너를 허물고 짓밟던 자들이 달아 나리라..." "그날 그들은 깨달으리라. '나 여기 있다'고 말한 것이 바로 나임을.”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 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외치며 "너희 하느님께서 왕권을 잡으셨다."고 시온을 향해 이 르는구나. 들어라, 저 소리, 보초의 외치는 소리.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야훼와 눈이 마주쳐 모두 함께 환성을 올리는구나. '이사야', 49장 12∼17절, 52장 7∼8절 성전 예루살렘의 성전은 유대인이 예배를 드리는 유일한 장소이다. 매년 수십만 명의 순례자들 이 3대 축제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 성전으로 모여든다. 성전은 신자들이 내는 약간의 세금으로, 즉 20세를 넘은 모든 사람들이 내는 반 세겔(Sheqel, 화페단위)을 통해 유지된다. 지상의 유일한 성전 가장 뛰어난, 하느님의 진정한 성전은 이 세상 전체일 것이다. 그 지성소는 사물의 본질 중에서 가장 순수한 부분인 하늘이고, 그 봉헌물은 별들이고, 사제로는 그 권능의 봉사자인 천사들로서, 그들은 우리들처럼 합리적 본질과 비합리적 본질이 혼합된 것이 아니라, 모든 비합리적 요소에서 벗어나 순전한 정신으로 단자(monad)처럼 순수한 지성으로 이루어진 비 육체적 영혼이다. 또 하나의 성전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신앙심에서 예물을 바 치고자 열망하고, 제사를 통하여 그들이 받은 은총에 감사하고, 그들의 잘못에 대한 관용과 용서를 빌고자 하는 자들의 열정을 부수어 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지만 율법은 한 장소에서든 여러 장소에든 여러 개의 성전 짓는 것을 금하였다. 하느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성전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율법은 또한 자기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지하 고, 비록 지구의 끝이라 하여도 그 장소로 몸소 올 것을 명령한다. 이처럼 율법은 늘 감정을 시험하는데, 이러한 시험은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스러운 정신으로 제사 드릴 준비가 되 어 있지 않은 자는, 조국과 친구와 가족을 떠나서 다른 나라로 여행하는 것을 감수하지 못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 가장 좋은 증거이다. 수천의 도시에서 출 발한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이는 육로를 통해 또 어떤 이는 해로를 통해, 사방에서 축제 때 마다 성전으로 모여든다. 마치 성전이 공동의 피난처이며, 인생의 동요와 풍랑으로부터 안전 한 항구이기라도 하듯이, 그들은 성전에서 평온함을 찾고자 하며, 어릴 때부터 그들을 지배 해 왔던 근심의 질곡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잠시 동안만이라도 깊 고 진정한 기쁨을 맛보고자 한다. 아름다움 소망으로 가득 찬 그들은 반드시 필요한 이 휴 식을 하느님을 영예와 신앙을 바친다. 게다가 그들은 영혼 결합의 가장 확실한 수단인 제사 와 통음으로 마음을 나누면서 알지 못하던 사람들과 새롭게 우정을 맺는다. 알렉산드리라의 필론 '데 스페시알리부스 레지부스' "그 한가운데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찬란한 지성소가 있다" 이 성전의 바깥쪽 성벽은 매우 높고 두터우며, 화려하게 장식된 네 개의 회랑으로 보강되 어 있다. 각각의 회랑은 이중이고, 양질의 풍부한 나무와 돌, 숙련된 장인, 건축가의 정성은 이 회랑을 완벽하게 완성된 작품으로 만들었다. 안쪽의 벽은 보다 낮으며 간결한 스타일로 되어 있다. 한가운데에는 지성소가 있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찬란하다. 그렇지만 이는 우 리가 직접 본 것만 가지고 판단한 것이고, 그 가장 깊은 부분은 대사제를 제외하고는 출입 이 금지되어 있다. 대사제는 오직 1년에 한 번만 그 깊은 곳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도 또한 그곳에서 아무 것도 식별하지 못한다. 대사제는 그곳에 향과 불씨가 담긴 향로를 가지고 들 어가는데, 그것은 모든 것을 감싸는 두터운 연기를 자연스럽게 내보낸다. 흐릿한 시선은 거 기서 멈추는데,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지성소는 매우 넓고 높다. 낮은 장 소에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지성소는 가장 높은 산들보다 더 높다. 건물의 장식은 유명하 여, 모든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낸다. 특히 이방의 여행객들은 공공건물의 일반 장시고가 비 교할 수 없는 그 아름다움과 장려함에 충격을 받는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데 스페시알리부스 레지부스' 사원에 선, 아우구스투스의 사위 마르쿠스 아그리파 유다의 왕인 아그리파 1세는 젊은 칼리굴라가 성전에 자기 동상을 지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편지를 써서 황제의 할아버지였던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그 성전에 대해 지녔 던 경외심을 일깨워준다. 나의 할아버지 헤로데가 그 지방을 통치하던 시절에 너의 외할아버지 마르쿠스 아그리파 는 유다에 도착하자마자 바다에서 수도로 곧장 올라가겠다고 고집하였다...지성소와 사제들 의 차림새와 주민들의 헌신을 보았을 때 그는 매우 감동하였다. 우리가 말로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보다 더 숭고하고 더 뛰어난 무엇인가를 보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주위의 친 밀한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는 오로지 이 성전과 그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찬양하는 말만 하 였다. 어쨌건, 그는 헤로데를 위해 우리의 도시에 체류할 때, 매일 지성소에 들려 그 형식들, 의식의 예법과 규칙, 그리고 성스런 장식품을 걸치고 의례를 집전하고 있는 대사제의 장엄 함을 관조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그는 허용된 모든 봉납물로 지성소를 장식했고 남용될 소 지가 없는 모든 호의를 주민들에게 베풀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레가티오 아드 카이움' 유대교의 여러 흐름들 역사학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그 시대 유대교를 관통했던 여러 흐름들에 대한 주된 증 인이다. 그는 자신의 길을 선택하기 이전에 접근했던 세 가지 흐름, 즉 바리사이파, 사두가 이파, 에세네파를 열거한다. 그는 또한 개인 또는 공동체 유대 금욕주의가 존재했음을 입증 해 주고 잇다. 에세네파에 대한 그의 긴 설명은, 1974년부터 쿰란에서 발견한 글들이 유대교 의 이 흐름에서 비롯된 것임을 증명하였다. 바리사이파 바리사이파는 생활의 안락함을 경멸했고, 어떠한 나태함도 거부했다. 이성이 올바르다고 판단한 것 또는 그렇다고 전해진 것에 맞추어 살려고 했고, 그 올바른 것이 요구하는 것을 수행하기 위해 투쟁했다. 나이 든 사람을 존중했고, 나이 든 사람의 의견을 오만하게 거스르 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은 숙명의 결과로 일어난다고 믿었지만, 인간의 의지가 가지고 잇는 지배 력을 모두 부인하지는 않았다. 하느님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결정된 숙명을 완화시켜서, 인 간이 선이나 악을 지향할 수 있도록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혼의 불멸성을 믿었 고, 살면서 선 또는 악을 행한 자는 땅 밑에서 보상받거나 고통을 당하리라고 믿었다. 악을 저지른 자는 영원한 감옥에 갇히는 반면, 선을 행한 자는 부활할 능력을 갖는다고 보았다. 하느님께 드리는 모든 기도와 제사가 그들의 해석에 따라 행해졌으므로, 민중들은 커다란 신뢰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도시는, 생활과 교리에서 선을 향한 노력에 존경심을 표하면 서 그들의 커다란 선행을 증언하였다. 사두가이파 사두가이파의 교리에 따르면 영혼은 육신과 함께 죽는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추종하고 있는 지혜로운 스승에 대항하여 논쟁하는 것 이 선행이다. 그들의 교리는 최고의 품위를 가진 소수가 채택하였는데, 사실상 그들은 어떠 한 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재판관이 되는 경우 에는 바리사이파의 제안을 따랐는데, 그렇지 않으면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 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고대 유대사'] 에세네파 이 교파는 다른 교파들보다도 더욱 유달리 상호간의 사랑을 중시했다. 그들은 죄와 쾌락 을 멀리하는 생활에 충실했고, 선은 자기를 제어하고 열정을 거부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결혼을 기피했지만 공부할 수 있는 나이가 된 남의 아이를 입양하여 자기 가족처럼 대하며 자신들의 교리를 교육시켰다. 물론 그들은 결혼 그 자체나 출산을 정죄한 것은 아니 지만, 여자들의 유혹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였다. 어떠한 여자도 오직 한 남자에게 충 실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를 혐오했다. 그들의 재산 공동체는 경탄을 자아낼 만하다. 그들 중에서 다른 자 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자를 발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의 율법에 따른 때, 교단에 속 하는 자는 모두 공동체를 위해 재산을 헌납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누구도 특별히 가난 하거나 혐오스럽게 부유하지 않았다. 각자의 재산은 한데 섞여서, 모두들 형제처럼 하나의 동일한 재산만을 가질 뿐이었다. 그들은 기름을 더럽게 여겨서, 피부에 기름이 닿았을 경우 몸을 씻어야만 했다. 그들은 피부를 건조하게 유지하고 항상 하얗게 입는 것을 의무로 삼았 다. 공동체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는 선거를 통해 선출되고, 각자는 성원 전체가 부여한 자신 의 고유한 임무를 지녔다. 그들은 특정한 도시에서 살지 않고, 아무데서나 무리를 지어 지냈다. 다른 곳에서 교파의 성원들이 오면, 공동체의 모든 자원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내주었다. 그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의 집에도 친한 친구의 집처럼 들어갔다. 그래서 그들은 여행할 때, 강도에 대비한 방어 용 무기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다. 모든 거주지에서 교파의 성원은 접 대자의 역할을 맡아. 찾아온 이들에게 옷과 필요한 물건을 제공한다. 그들의 옷 입는 방식과 행동하는 방식을 보면, 마치 엄격한 선생 밑에서 공부하는 어린이가 생각난다. 그들은 옷과 신발을 완전히 누더기가 되어 줄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사용한 후에 새것으로 간다. 그들은 서로간에 아무것도 사거나 팔지 않고, 부족한 자에게 자기 것을 주고, 자기가 필요한 것은 남에게 받는다. 게다가 그들은 호혜성이 없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는 완전한 권 리를 갖는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심을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들은 해뜨기 전, 속된 말을 입에 담지 않으며 하느님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기도를 한다. 이때 그들은 마치 기도 가 하늘에 상달되기를 간청하듯이 기도한다. 그후 상급자는 아랫사람들을 각자의 일터로 내보내고, 일터로 간 사람들은 다섯 시간 동 나 고되게 일한다. 그후 그들은 다시 같은 장소에 모여 아마로 된 옷을 두르고 찬물에서 목 욕을 한다. 이러한 정화를 마친 뒤 교파에 속하지 않는 어떠한 이방인들도 들어올 수 없는 사적인 장소에 모인다. 모든 더러움에서 깨끗해진 그들은 지성소의 성벽 안과도 같은 식당으로 모인다. 조용히 앉아 있으면, 빵 굽는 자가 각자에게 빵을 하나씩 나누어주고, 요리사는 그릇에 오직 한 가 지 요리를 담아준다. 사제는 음식을 축복하는데, 기도가 끝나기 전에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점심식사가 끝난 다음 사제는 식후기도를 한다. 즉, 그들은 생명을 주는 하느님을 식전과 식후에 찬양한다. 그후 그들은 성스럽게 여기는 의복을 벗고 다시 저녁때까지 일하러 나간다. 식당에 돌아 와서는 다시 같은 방식으로 저녁식사를 한다. 손님이 있을 경우는 그들의 옆자리에 앉게 한 다. 그들의 처소에서는 크게 떠들어대는 고함소리나 어수선한 무질서를 찾아볼 수 없으며, 서 로에게 돌려가며 말을 양보한다. 외부인이 보면, 내부를 지배하는 침묵은 마치 그들이 어떤 무섭고 신비로운 의식을 행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 침묵은 엄격한 절제에서 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침묵은, 하루분 음식은 자연의 요구에 상응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따르 고 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로마인에 대한 유대인의 전쟁' 한 로마인이 본 에세네파 에세네파들은 강가에서 떨어져서 서쪽 아스팔트 호수의 피해를 받지 않는 곳에 살고 있었 다. 그들은 세상의 어떤 종족보다도 고립된 종족으로, 사랑을 포기하고 여자 없이, 또 돈도 없이 종료나무 사회 속에서 산다. 이러한 공동체는 점점 확산되고 있다. 삶에 지친 자들이 재산을 포기하고 그들의 풍속을 추종하여 그 공동체들을 자주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종족 안에서는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지만 그 종족은 수 세기 동안 존재했다. 삶에 대한 다른 자들의 회개가 그들에게 번식력을 가져다주었기 때문 이다. 그들 밑에는 땅이 비옥하고 종려나무 재배가 잘되는, 예루살렘 바로 다음가는 엔제디 의 취락이 있다. 그 다음에는 아스팔트 호수에서 약간 떨어진 암석 위에 마사다의 성채가 있다. 대 플리니우스 '자연사' 유대 금욕주의 요세푸스의 스승인 금욕주의자 바누스는 세례 요한을 많이 닮았다. 나는 그 경험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바누스란 사람이 사막에 살면서 나무에서 나는 것을 옷으로 삼고, 땅에서 저절로 생산되는 것을 음식으로 삼으며, 밤낮 찬물로 목욕 재개한다는 말을 듣고서, 나는 그의 경쟁자가 되었다. 그와 더불어 3년을 살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 하고 난 뒤, 나는 다시 내가 살던 도시로 돌아왔다. 당시 열 아홉 살이던 나는 바리사이파의 원칙에 따라 살기 시작했다. 바리사이파는 그리스인들이 스토아 학파라 부르던 것과 흡사한 면을 많이 갖고 있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자서전' 제4의 철학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제4의 철학'의 신봉자들에게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글 뒷부분은 그들로부터 시카리파가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매우 유사한 이데올로기를 갖 고 잇던 젤롯당은 66년에야 나타난다. 플라비루스 요세푸스는 이 유파에게 전쟁의 부분적 책임을 돌렸으며, 결코 그들을 객관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제4의 철학파의 성립자는 갈릴리인 유다이다. 그의 신봉자들은 일반적으로 바리사이파의 교리에 찬성하였지만, 자유에 대한 꺾이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하느님만이 유일한 지도자이자 주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자도 주인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고, 부모나 친구가 지극히 끔찍하게 죽음을 당하고 고통을 받아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 모든 악 을 감수해 내는, 불굴의 단호함에 대해서는 많은 자들이 증언하고 있으므로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또한 내가 그들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들이 고통을 감내하면서 고통에 대해 갖는 경멸적 태도에 대해 너무 약한 관념을 제공할까봐 두렵다. 이러한 광기는 제시우스 플 로루스의 통치 때 민중 사이에 번창하기 시작했다. 이는 제시우스 플로루스가 폭력을 과도 하게 사용하여 민중을 로마인에 대항한 반란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고대 유대사'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그리스인'에 속해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은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시민권을 거부 당하고, '이집트인'의 신분으로 하락해 세금을 내게 된다. 플라쿠스 총독은 로마에 잘 보 이기 위해 칼리굴라의 상을 시나고그에 세우게 했다. 게다가 그는 유대인과 이교도의 갈등 을 부채질했고 폭동이 발생하도록 방관했다. 41년 클라우디우스의 중재가 있었지만 알렉산 드리아 공동체는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로마에 대한 유다의 반란이 폭발했던 66년 폭동과 115년부터 117년 사이에 일어난 유대인과 이교도 사이의 투쟁은 알렉산드리아 공동체를 결 정적으로 붕괴시켰다. 38년 8월의 반유대 폭동 알렉산드리아에는 알파벳의 앞쪽 다섯 문자로 부르던 다섯 구역이 있었다. 그중 두 구역 은 '유대인 구역'이라고 불렀는데, 상당히 많은 유대인이 그 구역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 지만 도처의 다른 구역에도 적지 않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인은 네 구역에 살고 잇던 유대인을 집에서 쫓아내고 단 한 구역의 몹시 좁은 지역으로 몰아넣었다. 모래 밭 위에, 쓰레기더미 위에, 무덤들 사이에 완전히 헐벗은 유대인이 넘쳐 났다. 사람들은 유 대인의 빈집을 습격하여 마치 전쟁 때처럼 노획물을 나눴다. 아무도 이를 말리지 않자, 그 들은 드루질라를 애도하느라 닫은 유대인의 작업장까지도 습격하여 눈에 뛰는 대로 엄청나 게 많은 것들을 약탈해 갔다.... 약탈과 몰수를 당하고 갑작스럽게 추방된 유대인은 마치 적에게 포위당한 듯한 상황에 처 했고 생필품조차 얻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조작된 기아 속에서 아내와 어린 자식 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어떤 이들은 평생 처음으로 친척과 아는 사람을 찾아 가 한끼의 음식을 동냥하기도 했다. 고상한 자긍심을 가지고 잇던 사람들은 비천하고 굴욕 적인 조건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자신과 가족을 위해 먹을 것을 사야 할 때에만 시장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층계급을 동원한 습격 때 붙잡혔던 불행한 자들은 무참히 살해되어 질 질 끌려 다니며 온 도시를 통해 짓밟혀, 매장할 수 있는 조각조차도 남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자들이 도시 한복판에서 늙은이, 젊은이, 순진무구한 어린이에 대해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가족 전체를 불태워 죽인 데서 습격 은 절정에 이르렀다. 태울 나무가 없을 때는, 인간을 가장 처참하고 가장 서서히 죽이는 방 식으로, 가시덤불을 태워 그 연기로 사람을 죽였다. 그러면 반쯤 태워진 시체들이 뒤죽박죽 뒤섞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레가티오 아드 카이움'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에게 보내는 클라우디우스의 편지 황제이자 주교회의 의장이며 호민관의 권한을 가졌고, 집정관으로 임명된 티베리우스 클 라우디우스 세자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는 알렉산드리아인의 도시에 인사한다.... 나는 분규와 폭동,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유대인에 대한 전쟁의 소식을 들었다. 나는 범 죄자에 대한 조사를 운치 않았다... 그러나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에 대해서는 준엄한 엄격성을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간단하게 말하겠다. 여러분들이 가증 할 만한 상호적 광란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너그러운 군주가 정당하게 분노할 때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알렉산드리아인에게 한번 더 요구하건대, 오래 전부터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유대인에게 온화함과 인간성을 갖고 대할 것이며, 유대인들 이 전통적으로 자신의 신에게 드리는 예배를 모욕하지 말 것이다. 그들의 관습은 성스런 아 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지켜져 오고 있는 것이며, 나 자신도 양측의 말을 들은 후 인정해 주 었던 것이므로, 그들의 관습에 따라 살 수 있도록 내버려둘 것이다. 다른 한편 나는 유대인 들에게 엄격하게 명령하건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잇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지려 하지 말라. 또한 마치 상이한 두 도시에 살고 있듯(사실과 전혀 다르게), 두 명의 대사를 나에게 보내지 말라. 그리고 체육 경기와 코스메트 경기를 방해하지 말라. 살고 있는 도시가 자신의 도시가 아닌 만큼, 풍부한 재화로 편익을 도모하면서 자기에게 속한 것을 누리는 데 만족해야 한 다...그러한 행위들을 이제 그만두고 서로 온화함과 인간성을 갖고 화합하여 산다면, 나는 과 거에 그랬던 것처럼 조상 대대로 우리에게 속했던 집을 대하듯이 여러분의 도시를 호의를 다해 대할 것이다. '코르푸스 파피로룸 유다이카룸'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시나고그 115∼117년 분쟁 때 파괴되었던 이 시나고그는 탈무드 속에 전설과 같은 추억을 남겼다. 라비 유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이중 주랑을 보지 못한 자는 생전에 이스라엘의 영화를 보지 못한 자이다. 서로 마주보고 잇는 이중 주랑이 있는 곳은 일종의 회당이었다. 그 회당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의) 숫자의 두 배를 수용할 수 있었다. 70명의 조상을 위해 진귀한 돌들과 진주를 박은 70개의 고딕형 금의자가 있었고, 그 각각은 25만 개의 금화 위에 있었다. 가운데에는 시나고그의 성가대원들을 위한 나무단이 있었다. 누군가가 토라를 읽을 준비를 할 때면 문지기가 직물을 흔들었고, 그러면 사람들은 '아멘'이 라고 대답했다...누가 이를 파괴했는가? 불경건한 트라야누스가 그랬다. 예루살렘 탈무드, '수카' 마사다 시카라파가 66년부터 77년까지 장악했던 마사다는 로마에 마지막까지 저항한 요새였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 사실 대부분을 확인한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이야기는 로마 장군 플라 비우스 실바가 행한 공격과 마사다의 마지막 수호자들이 집단 자살한 이야기를 전하는 유일 한 것이다. 그 이야기는 위대한 문학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시카리파에서 자결하도록 고무하는 엘리아잘 벤 야이르의 연설과 용감한 적을 보는 로마인의 반응을 소개 한다. 엘리아잘 벤 야이르의 연설 아! 성스러운 도시가 적의 손에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보기 전에 우리 모두가 죽었더라 면! 그러나 우리는 적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귀한 희망에 속았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그 희망은 사라지고 우리는 고난 속에 홀로 남겨졌기 때문에, 이제 서둘러 고결하게 죽어야 한다... 자기 손이 묶여 있을 때 강제로 끌려가는 아내를 보고 아이가 '아버지'라고 외치는 소리를 받아들일 자가 이 가운데 누가 있는가? 아니다. 우리의 손이 자유롭고 또 검 을 쥐고 잇는 한, 손은 우리에게 고결한 봉사를 해줄 수 잇다. 적의 노예가 되지 말고 죽자, 아이들과 아내와 함께 자유인으로 이 삶을 떠나자! 최후의 시카리파가 행한 집단자결 엘리아잘 벤 야이르는 선동을 계속하고자 하였지만, 모두들 그를 가로막았다. 그들은 아무 도 가로막을 수 없는 격정에 사로잡혀 열렬하게 자결을 실행에 옮기고자 하였다... 통념과 정반대로 그들은 그 일을 해야 할 때가 다가와도 전혀 야해지지 않았고, 연설을 들으면서 내린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당연히 모두 개인적 감회와 감정이 일었지만, 그들이 사랑하 는 자들을 위해 최선의 결정을 내린 그 대의가 결국은 승리했다. 그들은 아내에게 애무와 키스를 하고 아이들을 팔로 껴안고 눈물 속에서 포옹을 하면서 동시에 마치 다른 사람의 손 을 빌리듯이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했다. 그들이 적들의 손에 당할 수모를 생각하면서, 죽일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되새기며 스스로를 위로했다...그리고 그들은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목을 칠 열 명을 추첨해서 뽑은 후, 죽어 누워 있는 자기의 아내와 아이들을 팔로 껴안고 그 옆에 누워 그 비통한 임무를 맡은 자들의 검을 향해 목을 내밀었다. 누워 잇는 사람들을 모두 죽인 다음, 그 열 명은 흔들리지 않고 동일한 방법으로 추첨을 했다. 추첨된 자는 나머 지 아홉 명을 죽이고 최후로 스스로를 죽여야 했다. 그들은 서로간에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누가 실행하고 누가 죽음을 당하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나머지 아홉 명의 목 을 벤 후, 그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누가 빠져 아직 자신의 팔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 지 시체더미를 관찰하여 모두가 죽었음을 확인했다. 그런 다음 궁전에 불을 지르고 강인한 팔로 자신의 검을 몸 속 깊숙이 찔러 동료들 옆에 쓰러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은 뒤 어떠 한 영혼도 살아서 적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확신과 함께 영원히 잠들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자결에 완전히 몰두해 있을 때, 한 나이든 여인과 에리아잘의 친척이며 현저 히 뛰어난 지성과 교양을 지녔던 또 다른 한 여인이 몰래 지하의 수로에 숨었다. 죽은 자의 수는 여자와 아이들을 합쳐 960명이었다. 이 비극은 크산티쿠스 달 15일(73년 5월 3일)에 일 어났다. 마사다의 '침묵' 로마인들은 아직도 전투에 대기하여 새벽부터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흙을 쌓아 만 든 육교로 공격용 다리를 설치한 뒤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전진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맞서 야 할 적이 보이지 않았다. 도처에 감도는 끔찍한 고독과 함께 내부는 불타고 있었으며 침 묵이 소리 없이 흘렀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서 그들은 활을 쏠 때처럼 고 함을 지르면서 누군가가 머리를 내밀기를 기다렸다. 두 불쌍한 여인들이 그 고함소리를 들 었다. 그녀들은 수로에서 나와서, 벌어진 일들을 로마인에게 설명했다. 그녀들 중 하나가 연 설의 내용과 자결의 진행과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곧이들을 수가 없었 으며, 그처럼 대단한 용기를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불을 끄면서 불길 사이로 통로를 만들 어 궁전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거기에서 수많은 시체를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적의 패배 앞 에서 의당 느껴야 할 어떠한 기쁨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 결정의 고결함과 흔들리지 않고 자결을 실행했던 자들이 보여준 죽음에 대한 경멸 앞에서 로마인들은 경외감에 사로잡혔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다 전쟁' 탈무드 바리사이파는 토라에 담긴 성문화된 율법과 모세로 거슬러 올라가는 구전된 율법의 존재 를 인정한다. 70년의 재난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바리사이파는, 성전 없는 유대교의 삶을 조직하고, 유다와 갈릴리에서 수많은 아카데미를 만든다. 아카데미에서 라비들은 전수된 모 든 전승에 새로운 해석을 첨가하면서 체계화한다. 두 가지 탈무드가 있다. 갈릴리에서 완성한 이른바 '예루살렘 탈무드'가 그 하나이고, 다 른 하나는 한 세기 뒤에 바빌로니아의 아카데미에서 취합한 '바빌로니아 탈무드'이다. 두 가지 탈무드는 모두 미쉬나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각각 고유한 게마라를 가진다(그 하나는 팔레스타인 아람어로 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바빌로니아 아람어로 되어 있다). 게마 라는 각 지역 아모라(교사)들 사이에 논쟁을 싣고 잇다. 어렵고 종종 함축적인 그 논쟁들은 많은 여담을 포함하면서 여러 페이지에 걸쳐 진행되기 때문에 탈무드에 대한 일관성 잇는 독서와 개인학습을 어렵게 한다. '예루살렘 탈무드'는 비잔틴 제국의 법이 점점 유대인에게 가혹해지고 있을 때, 티베리아 에서 서둘러 취합되어 미완의 상태로 전해졌고 그리하여 연구를 소홀히 했다. 오늘날에 이 르기까지 탈무드를 연구한다고 하면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연구를 뜻한다. 바빌로니아 탈무 드는 수라의 랍 아쉬(342∼427)와 그의 제자이자 마지막 아모라로서 499년에 죽은 라비나 2 세에 의해 틀이 잡혔다. 미쉬나와 게마라 미쉬나('교육')는 200년경 원로원 최고위원 유다 1세의 지도를 받아 편찬된다. '성서'에 사용된 히브리어와 다른 히브리어로 편찬된 미쉬나의 핵심 내용은 할라카이다. 경건한 사람 은 항상 토라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할 때, 할라카란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할로크)'을 가 르쳐주는 규칙들이다. 미쉬나는 아람어로 탄니움이라 불리는 박사들의 작품이다. '탄니움'이라는 말은 미쉬나 밖 에 방치된 전승들과 결부된 것이다. 그 전승들은(아람어로 '제외된 것'을 뜻하는) '바라이 타'라고 부르며, 성서 텍스트에 계속 주석을 단 총체, 즉 미드라쉬에 보존되어 있거나, 또 하난의 미쉬나인 토세프다('추가')나 탈무드의 인용문 속에 보존되어 있다. 그들이 다른 과학과 접하지 못하고 있을 때, 꾸준한 탈무드 연구는 유대인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탈무드는 그들의 분산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을 유지해 주는 통일성의 한 요소가 되었다. 미레유 하다스 르벨 힐렐과 샴마이 헤로데 시대의 가장 유명하고 권위 있었던 라비인 힐렐과 샴마이는 바리사이파 내에 있는 두 학파의 시조를 이룬다. 원로원 최고위원들이 4세기 동안 힐렐의 후손들 중에서 선택되었 으므로 탈무드는 힐렐을 매우 호의적으로 다룬다. 우리의 스승들은 가르치기를 "힐렐처럼 온화해야지, 샴마이처럼 공격적이면 안 된다."고 했다. 한 우상숭배자가 샴마이에게 와서 물었다. "당신들에게는 몇 가지의 율법이 있습니 까?" 샴마이는 "둘이 있다. 하나는 성문화된 것이고 하나는 구전된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교도가 말하기를 "나는 성문화된 것은 받아들이지만 구전된 것은 거부합니다. 나에게 씌 어진 율법만을 가르친다는 조건으로 나를 유대교에 받아들여주십시오."라고 했다. 샴마니는 화가 치솟아 그를 야단쳐서 쫓아냈다. 그 우상숭배자는 힐렐을 찾아가서 똑같은 부탁을 했 고, 힐렐은 이를 수락했다. 첫날 힐렐은 그에게 알파벳을 가르쳤고, 둘째 날도 알파벳을 가 르쳤으나 순서를 바꿔서 하였다. 이교도는 말하길 "어제 당신은 나에게 다른 순서로 가르쳤 는데요."라고 했다. 힐렐은 대답했다. "그렇다면 너는 나를 믿었구나? 그것은 구전된 법을 믿은 것이 아닌가?" 다른 이교도가 샴마이에게 와서 말했다. "나는 유대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재 가 한쪽 발로 서 있는 동안 나에게 모든 율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샴마이는 손에 들고 있 던 자로 그를 때려서 내쫓았다. 그 우상숭배자는 힐렐에게 가서 같은 말을 했다. 스승은 그 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너에게 행하기를 원치 않는 것을 너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아 라. 이게 율법의 전부이다. 나머지는 단지 주석일 뿐이다. 가서 연구하라."(샤바트 30a) 3년 동안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는 서로 논쟁하였다. 각 학파는 말하기를, "우리의 결정 이 율법을 이룬다."고 했다. 그때 하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학파의 말이 모두 살아 있 는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나 힐렐 학파의 말만이 율법을 이룬다." 두 학파의 말이 모두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어떻게 해서 힐렐 학파의 말만이 율법이 될 자격이 있는가? 왜 냐하면 힐렐주의자는 온화하고 참을성이 있으며, 자신의 가르침을 가지고 샴마이의 가르침 을 교육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힐렐 학파는 자신의 말을 가르친다...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르쳐준다. 자신을 낮추는 자는 하느님을 높이고, 자신을 높이는 자는 하느님을 낮 춘다. 권위는 권위를 뒤쫓는 자에게서 도망치고, 권위에서 도망치는 자를 뒤쫓는다(에루빈, 13b). 에드몬드 플레그 '기원에서 오늘날까지 유대 문집', 1951년 테오도시우스 2세 법전과 유대인의 지위 비잔틴 황제들은 유대교에게 종교상 합법적 지위를 부여했다. 많은 법들이 시나고그에 대 한 약탈이나 방화를 금지하고 있는데, 이는 그러한 약탈이나 방화가 빈번했음을 말해 준다. 그렇지만 다른 법들은 제국 내에서 유대인의 존재를 제약하였다. 유대교로 개종하면 모두 엄하게 처벌받았다. 원로제도의 유지에 사용되는 모금을 압수하여 제국의 회계에 편입시킨 후, 황제는 415년에 원로회의 자체를 없애버렸다. 398년 2월 3일 로마법과 일반법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유대인들은 미신에서 유래한 문제가 아닌, 공청회, 법률, 권리에서 유래한 모든 문제에 대해 통상의 방식으로 법원에 출입할 수 있다. 모두들 로마법에 따라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방어할 수도 있다. 즉, 그들은 우리 법의 보호를 받 는다. 409년 7월 26일 우리는 유대인들이 자신의 율법에 따라 신봉하는 안식일이나 그와 비슷한 다른 날에 그들 을 법원에 소환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왜냐하면 특수한 자들의 세무관리 와 의례행위는 다른 날에도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388년 3월 14일 어떤 유대교인도 기독교인 여성과 결혼할 수 없고, 어떤 기독교인도 유대인 여성과 결혼 할 수 없다. 누군가가 이러한 일을 한다면, 간통과 동일한 범죄로 간주될 것이고 고발할 권 리가 공중의 이름으로 부여된다. 335년 10월 22일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을 모욕하면서 공격하거나 불안하게 하는 것이 금지된다. 그러한 모욕행위가 일어난다면 범죄의 성격에 따라 처벌받을 것이다. 357년 7월 3일 정립된 존엄한 법에 딸라 우리는 기도교인이 유대인으로 개종하고, 그 신성모독적인 회합 에 참여한다는 고발이 들어와 사실로 확인하면, 그의 재산을 국고로 몰수할 것을 명령한다. 393년 9월 29일 유대인의 교파가 어떤 법으로든 금지된 적이 없음은 명백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회 합이 여러 곳에서 금지되었다는 것을 알고 심히 충격을 받았다. 396년 4월 24일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유명한 원로의원을 모욕한다면 형벌의 선고를 받을 것이다. 399년 4월 1일 시나고그의 우두머리들이나 유대인 사제들 또는 그들이 스스로 아포스톨리(사도)라고 부 르는 자들-원로의원은 정해진 날짜에 금과 화폐를 걷으러 이 사람들을 보낸다-은 원로에게 각각의 시나고그에서 모은 총액을 전해야 한다. 또한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모아졌으리라 예상되는 금액을 우리의 회계에 충실히 편입해야 한다. 415년 10월 20일 가말리엘은 명예로운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너희의 저명한 권위자는 다음의 사항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전하는 도청의 유언추가서를 가말리엘에세서 박탈하도록 저명한 성무장에게 지시하였다. 그는 도청으로 이 송되기 이전에 지녔던 명에를 회복할 것이다. 앞으로 그는 어떠한 시나고그도 세워서는 안 되고, 만약 방치되어 저항 없이 파괴할 수 있는 시나고그가 있다면 그는 그것을 파괴해야 한다. 그는 기독교인들 사이의 분쟁을 심판할 권리를 갖지 못하며, 기독교인과 유대인 사이의 분쟁이 발생했을 때는 지역의 통치자들이 해결한다. 만약 그 자신 또는 다른 유대인이 기독 교인이나 교파의 성원을, 자유인이건 노예건 간에, 유대교의 영향을 미쳐서 망치려든다면 엄 격한 법의 처벌을 받을 것이다. 그가 만약 기독교 신앙을 지닌 노예를 데리고 있다면, 콘스 탄티누스법에 따라 그 노예들을 교회에 양도해야 한다. 418년 3월 10일 유대교의 미신 속에서 살고 있는 자들에게는 제국의 공무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 한다. 423년 2월 15일 앞으로는 유대인의 어떠한 시나고그도 약탈하거나 불로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 린다. 만약 이 법이 발효된 이후에 시나고그가 약탈당하거나 교회가 압류하거나 어떤 비의 에 봉헌된다면, 침탈된 시나고그의 크기에 맞먹는 새로운 것을 지을 수 있도록 땅을 제공할 것을 명령한다. 429년 5월 30일 두 팔레스타인의 산페드린에 임명된 자와 다른 지방에 잇는 최초의 유대 시민들은 원로제 도의 종식 이후 세금의 명목으로 걷어들인 모든 것을 시나고그의 연레조공은 왕관의 금에 대한 명목으로 과거 원로의원들이 요구하던 비율과 같은 비율로 팔란티니의 강제하에 바쳐 져야 한다. 417년 4월 10일 유대인은 기독교인 노예를 사서도 안되고 선물 받아서도 안 된다. 이를 지키지 않는 자는 파렴치하게 모은 재산을 몰수당할 것이며, 그 노예는 자유를 얻을 것이다. 423년 4월 9일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떠한 유대인도 기독교인 노예를 사 는 만용을 부리는 일이 없어야한다. 신앙에 매우 돈독한 종복이 극도로 불경건한 주인에게 소유되어 부패된다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다. '유대적 사실에 대면한 기독교인' '신학 논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