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노예와 노예상인  지은이: 장 메이메  출판사:(주)시공사  봉사자: 최정예  15세기에는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세 대륙 간에 대규모 교역이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4세기 동안, 1200만에서 15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마치 화물처럼 배 밑창에 실려 대서양을 건너 운송되었다. 보잘것없는 유럽 물건들과 교환되었던 이 사람들은 아프리카인들, 다시 말해 흑인들, '검둥이들'이었다. 우리는 이 교역을 업으로 삼던 유럽의 상인들을 '노예상인'이라 부른다.    제1장 노예상인이 있기 전  해상을 통한 운송 도중 150만 명에 달하는 흑인들이 목숨을 잃었다(선원들의 희생자수도 30-40만 명에 달한다). 그렇지만 이 같은 엄청난 희생을 바탕으로 많은 노예상인들이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  고대의 노예들은 거의 모두 백인이었다노예제도는 우리가 지닌 가장 오래된 문헌만큼이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B. C. 2000년, 수메르 문명에서는 황소와 마찬가지로 노예들에게 코뚜레를 채웠다. 노예는 주인의 전적인 소유물이었으므로 주인은 노예를 팔거나 죽일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여 노예에 대한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다. 노예는 가축, 또는 동산의 일부로 취급될 따름이었다.  고대시대 노예의 대부분은 백인이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그리스와 로마의 노예는 빚을 갚지 못해 재판을 받고 노예로 전락한 시민이나 전쟁포로, '야만인들'이었다. 이 야만인들은 그리스어를 모르는 사람들, 이른바 덜 '개화된' 이들이라는 이유로 그리이스인의 멸시를 받던 주변국 사람들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는 쉽사리 찾아볼 수가 없었다. 흑인노예를 거느렸던 이들은 이집트인(물론 사하라 사막이란 넘기 힘든 장벽이 버티고 있었으므로 많은 노예를 데려올 수는 없었다)과 카르타고인 정도였을 것이다.  노예는 A. D. 2세기까지만 해도 어마어마한 숫자로 기록되고 있지만(로마 제국 절정기에 로마에는 2만 시민을 부양하는 40만 노예들이 있었다. 노예 20인당 시민 한 명 꼴이다) 그 이후로는 끊임없이 줄어들었다.  중세에는 농노들이 노예를 대신했는데, 노예에 비하면 그들은 월등히 나은 신분이었다. 노예가 다른 사람의 실질적인 소유물이었던 데 반해 농노는 단지 영지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슬라브 국가로 노예를 구하러 가는 일이 있었고, 지중해 남부 연안을 회교도들이정복한 이후에는 북아프리카로 손길을 뻗기 시작했다.  중세 말, 루이 14세 시대 기독교 국가에는 갤리선을 젓는 '슈르므(자리에 묶여 노를 젓는 노예)'로 바르바리아인들, 다시 말해 북아프리카인들을 이용했다. 이 무렵 노예의 매매라는 악행은 상호적인 것이었는데, 회교도들은 '이교도'인 기독교도를 노예로 매매했고, 기도교도들 역시 마찬가지의 매매를 행했던 것이다. 17세기 초, 모로코와 리비아 사이에 위치한 아프리카의 항구에는 20만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기독교도 노예들이 있었다. 일시적으로 사라져가는 추세를 보였던 유럽의 노예제도는 지리상 발견의 결과 식민지와 식민지 농장들이 생겨나면서 또다시 되살아나게 된다.  유럽 열강들이 식민지 건설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면서 본격적인 흑인매매가 이루어졌다. 15세기에 접어들어 포르투갈인은 아프리카의 동부해안을 따라 탐험을 시작했다. 탐험 도중 그들은 여행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흑인들을 잡아들였고 그들을 노예로 팔아 넘겼다.  처음에는 얼마 되지 않던 이 노예들은 곧 주요 '상품'이 되었고 아메리카 개척에 기여하게 되었다. 자유로운 백인에 비하면 흑인노예의 노동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드는 비용은 공짜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도가 탄생하고 흑인 매매가 시작되면서 노예상인들은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인류역사상 유례가 없는 인구의 대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남녀를 합하여 1200만에서 1500만 명이 강제 이주되었다.  한편, 16세기에는 에스파냐인들과 포르투갈인들이 해양탐험을 활발히 벌였고, 이로써 그들은 '식민제국'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이 그 뒤를 이었고, 이 모든 열강들은, 원자재를 최소한으로 수입하고 그 가공품을 최대한으로 수출한다고 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따랐다. 식민지국가들은 본국에서는 생산할 수 없는 것들을 식민지에서 본국으로 공급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유럽의 온화한 기후에서는 대량재배할 수 없지만 아메리카의 열대기후에서는 생장이 빠른 작물들, 이를테면 사탕수수, 커피, 카카오, 목화, 쌀, 담배, 인디고(마디풀과 식물로 남색 염료로 쓰임:역주)등이었다. 이 열대기후를 흑인이 백인보다 잘 견뎌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 마디라섬, 아조레즈 제도의 사탕수수 대농장에 1만 명에 달하는 노예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세네갈, 모리타니, 기네아만 등지에서잡혀온 아프리카인들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기네아만에 분포한 사오 토메, 페르난도 포, 프린스섬 등 포르투갈령 섬들로 이어져, 이 섬들은 한동안 제당분야에서 세계적 주심지로 자리잡았다. 한 세기 동안, 7만 5천 명을 상회하는 흑인들이 인접 아프리카 연안 지역에서 이 지역으로 잡혀왔다.  17세기 초, 30만 명의 노예들이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인도되었지만, 대서양 횡단은 여전히 힘든 모험이었고 노예들의 몸값 역시 높이 책정되었다. 하지만 한 세기 만에 모든 사정은 일변했다.  두 번째 여행부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많은 노예들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린 것은 포르투갈인들이었다. 16세기, 그들은 브라질에 사탕수수 농장을 조성하기 위해 5만 명에 이르는 흑인들을 끌어들였다. 이어, 서인도 제도에도 그만한 수의 노예가 유입되었다.    제2장 대규모 흑인매매의 시대로  스페인의 뒤를 이어 프랑스와 영국이 남은 도서지역을 차츰 점령해 나갔다. 16세기에는 30만 명, 17세기에는 150만 명이 넘는 노예들이 아프리카에서 끌려왔다.  노예들 이용한 대규모 플랜테이션이 정착, 번성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였다. 남으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북으로 체서피크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는 노예를 이용한 플랜테이션이 점차 주요 사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메리카로 유입된, 650만 명을 웃도는 엄청난 노예의 수는 18세기까지도 증가 추세에 있었다. 북부의 대규모 플랜테이션의 경우, 백인들이 온화한 기후조건을 잘 갖춘 '13개 영국령 식민지'로 이주함에 따라 크게 번창하게 되었다. 하지만 도서지역의 열대기후는 이들에게 혹독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허리케인은 정기적으로 이 지역을 통과하며 길목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1780년 10월 12일에 불어닥친 허리케인은 시속 250km가 넘는 괴력으로 7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또한 고온다습한 기후는 세균과 병균이 창궐하기에 알맞은 환경을 마련했고, 이는 전염병의 만연을 도왔다. 기아나 지방에 정착하려는 모든 시도들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간 것은 이러한 까닭이었다. 기아나의 프랑스인들은 수세기간 10만 이상의 자국민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에 반해 흑인들은 기후에 잘 적응하여 그 수익성에서 백인보다 우위로 평가되었다.  커피, 담배, 설탕: 식민지 산물들이 유럽을 열광시켰다!  18세기, 유럽에는 새로운 기호품들이 등장했다. 커피, 담배, 설탕과 같은 식민지에서 수입된 열대작물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카카오, 인디고와 같은 염료용 식품, 목화와 쌀 따위 작물들도 각광을 받았다. 먼 곳에서 실려온 까닭에 초기에는 비싼 값에 거래되었지만, 귀족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열대작물을 선호했다. 특히 담배와 설탕은 경이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유행품들은 순식간에 일상품으로 자리잡았고, 곧 필수품이 되었다. 18세기의 유럽인들은 '프랑스식 아침식사', 즉 설탕을 넣은 카페오레를 무척 애호했다.  이렇게 되자, 커피와 설탕의 기근현상이 발생했다. 더욱 많은 노예를 식민지에 공급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삼각무역: 각 지역에 '짭짤한'수익을 안겨준 사업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대규모 교역망이 형성되었다. 그것이 바로 3단계로 이루어진 삼각무역이었다.  1단계: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노예상인들은 아프리카 동부해안, 고레(다카르 맞은편의 작은 섬)에서 모잠비크에 이르는 지역으로 흑인노예를 구하러 갔다. 그곳의 노예는 족장에게 바쳐지는 유럽 상품과 교환되었는데, 그 상품들은 양털, 목화, 브랜디, 쇠막대, 통화약, 소총, 유리구슬 따위였다.  2단계: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배편으로 수송된 노예들은 서인도 제도, 브라질, 오늘날 미합중국의 동부 해안을 형성하는 '13개 식민지'에서 매매되었다. 일부는 스페인령의 식민지인 멕시코,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에 도착했다.  3단계: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노예매매 후, 노예상인들은 화물창을 열대작물로 가득 채우고 유럽으로 돌아갔다.  채색 유리세공품을 '흑단나무'로, '흑단나무'를 설탕과 커피로, 설탕과 커피를 화폐로!아프리카, 아메리카, 유럽의 세 대륙이 모두 이득을 보았다. 아프리카에서는 많은 흑단나무(흑인노예를 점잖게 일컬을때 이 나무의 검은 빛깔에 빗대어 그렇게 불렀다)들이 유럽에서 건너온 물건과 교환되었다. 아프리카인들을 대상으로특별 직조한 엄청나게 많은 옷감이 대표적인 것이었고, 구리, 철제품, 채색 우리세공품, 무기, 화약 들도 교환되었다. 절반 이상을 물을 섞어 만든 브랜디도 빼놓을 수 없다. 종종 노예를 싣고 남는 화물창을 고무, 상아, 값비싼 목재 등의 토산물로 채우기도 했는데, 이때 그 대가로 지급된 것은 코리스였다. 고대로부터 아프리카에서 통화로 이용되었던 코리스는 인도양 연안의 몰디브 군도에서 잡히는 조개껍데기였다.  대서양을 횡단하여 아메리카에 도착한 노예들은 '인도'라 부르던 단위로 묶여져 상당히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 노예사인들은 노예를 한데 묶어서 팔기 위해 건강한 노예와 병든 노예를 골고루 섞어 묶음을 만들었다. 구매가 화폐로 이루어지는 일은 드물었다. 대부분 어음이나 열대작물로 대금을 치렀으며 구매단위로는 인도가 통용되었다. 구대륙에 가서 비싼 값으로 되팔 식민지의 작물을 가득 싣고 나면 노예사인들은 유럽으로 돌아가는 뱃길에 올랐다.  노예사인들이 싣고 온 커피와 설탕은 프랑스에서 모두 소비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럽의 다른 지역, 그중에서도 북구와 중부 유럽으로 재수송되었다. 이로써 18세기 프랑스의 대외무역은 대단한 흑자를 기록했다. 프랑스 총수출액의 5분의 1을 차지했던 것은 커피였는데, 이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중상주의 정책이 추구하던 목표가 달성된 셈이었다. 식민국의 입장에서 볼 때, 식민지는 값비싼 수입품을 드려오는 데 드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도록 했을 뿐 아니라, 국외의 금을 거두어들여 자국 통화를 증강시킬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수익을 본국에 안겨주었다.  유럽을 떠나 몇 개월, 때로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하는 항해가 끝나면 도매상인들은 결산을 했다. 손해를 보는 경우는 15-20%에 지나지 않았다.  노예매매 사업을 시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출항지로 돌아오기까지 노예선은 2-3년씩 대양을 누벼야 할 때도 있었다. 튼튼한 선박과 더없이 강인한 선원들이 필요했고 물물교환을 위해 철제 물품들, 모조보석, 싸구려 거울, 면직물, 무기등을 준비해야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반이 확고한 도매상이었다.    제3장 아프리카를 향하여!  모두가, 추악하고 가혹하기 짝이 없는 자, 고함과 채찍질을 즐기는 해적 같은 자로 여기는 그는 누구일까? 인간의 몸을 사고 파는 직업에 종사하는 자라면 인정머리없는 괴물이 아닐까?  노예감독관 그리고 노예도매상난폭하고 잔인한 자라는 속설과 달리, 17-19세기 노예도매상들은 선량한 중산층이었다. 프랑스의 경우 낭트, 라로셸, 보르도, 마르세유 등지 출신이었고, 유럽의 나머지 국가들의 경우 런던, 브리스틀, 코펜하겐, 리스본 등지 출신이었다. 당시 해상무역은 부의 획득이나 사회적 신분상승을 위한 최상의 수단이었으므로, 해상무역에 종사하는 자가 큰 부를 쌓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귀족들도 있었고 작위를 얻은 이들도 있었으며, 대부분 선장으로 종사하며 사업을 시작했다. 프랑스의 작가, 샤토브리앙의 아버지와 같은 경우가 바로 그렇다. 샤토브리앙은 그의 아버지를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는 식민지의 섬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얻은 부로 집안의 경제적 기반을 새로이 다졌다. "('무덤 너머의 회상')  그들은 점잖은 신사였고 성실한 남편이었으며 훌륭한 아버지였다. 또한 그들 대다수는 볼테르의 '캉디드'와 같은, '선량한 미개인'의 덕성을 찬양하는 철학책을 즐겨 읽었다. 만일 누군가 흑인을 사고 파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를 따지며 비난해 보았자 그들은 치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그것은 그저 무역이었을 뿐이었다. 한편으로 그들은 자질한 소매상인이 아니라 도매상인으로 대접받길 원했다.  아프리카라는 '케이크'를 나누어 먹는 유럽각국의 도매상들이 서로 다투지 않도록, 노예매매업에 뛰어든 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를 분할하고 각각 한 지역, 또는 구역을 점유했다. 프랑스는 모리타니에서 시에라리온에 이르는 지역에서 흑인매매를 독점했고 '프랑스 노예회사'를 설립했다.  노예교역의 최고 중심지였던 황금해안을 포함한 현재의 코트디부아르에서는 네덜란드가 흑인매매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이 지역의 해안에는 네덜란드 13개, 영국 9개, 덴마크 1개, 도합 23개의 요새들이 줄지어 자리잡고 있었지만 프랑스는 이 지역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가나, 토고, 다호메이에 해당하는 노예해안은 노예교역의 두번째 중심지였다. 오세강하구와 카메룬 사이의 현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에서 흑인 인구가 가장 밀집되어 있던 지역으로 프랑스와 영국이 쟁탈전을 벌이던 노예교역의 세번째 중심지였다. 18세기 중엽까지 점차 그 규모가 커진 로앙고와 앙골라가 노예교역의 네 번째 중심지였다.  이따금 노예사인들은 노예선에 실을 노예를 두 지역, 드문 경우이지만 세 지역에서 끌어와야 했다. 18세기에 이르러 이전의 교역 중심지들이 고갈되자 그들은 남쪽으로 더 내려갔다. 동부해안의 모잠비크까지 진출하는 노예상인들도 있었다.  노예상인들의 의식: 흑인들을 노예로 만들며 '흑인들을 구제한다'고 믿었다양심에 가책을 받았다는 노예도매상은 한 명도 없었다. 18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노예제도는 대규모 국제교역의 필수적 요소였던 것이다.  노예도매상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정당화했다. 아프리카에도 노예제도가 존재하고, 아랍인이나 흑인 자신들 사이에서도 이미 노예매매가 일반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구매자가 유럽인이 된다면 오히려 여러모로 좋은 일이다. 유럽인의 덕으로 흑인들은 문명에 접할 기회를 얻게 되고, 아프리카 내에서 발생하는 끊임없는 내전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흑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을 것이고 영리한 이들은 자유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하지만 아프리카인의 생각은 이와 같지 않아, 아프리카 전체는 아니더라도 내륙지역에서는 백인에 대한 적대감이 일기 시작했다. 15세기의 지도만 해도 상세히 올라있던 아프리카 종단로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곧이어 아프리카는 '미지의 땅'이 되었다. 한편 유럽인에게 흑인은 '검둥이'라는 경멸의 대상이 되었고, 기껏 대접받는다해야 몸뚱이만 커다란 어린아이나 물건으로 취급되었다. 유럽인은, 그리스인이 '야만족'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우월감을 지녔던 것이다.  18세기 말을 살았던 영국 상인이자 식민지 농장주 브라이언 에드워드를 보아도 노예상인들이 지녔던 떳떳함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동인도의 식민지 농장주들이 노예거래를 수행하면서 그 방식에서 실수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런 식의 글을 남긴 이는 그뿐만이 아니다. 역시 농장주였던 제임스 보스웰은 노예제도가 흑인들을 그들의 고장에서 겪어야만 했을 견딜 수 없는 굴종과 학살로부터 구제했으며 그들로 하여금 보다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고 단언했다.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 미국인 노예도매상, 리처드 드레이크는 모든 흑인노예 도매상들을 대변하는 듯하다. "아프리카의 노예매매에 대해 르클레르크와 논쟁을 벌였다. 그는 그러한 현실에 역겨움을 느낀다고말했는데, 나 역시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그 거래를 누군가는 맡아서 처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노예교역은 왕과 정부, 그리고 성직자들의 뒷받침을 받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과연 어느 누가 나서서 그들의 사업이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노예상인들을 나무랄 수 있었겠는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선장: 그의 협상 능력에 사업의 성공이 달려 있었다훌륭한 선장이 되려면 특출한 자질을 지녀야 했다. 그것은 바다를 아는 대단한 지식이 아니라, 흑인노예 상인들과의 협상을 이끌어가는 능숙한 솜씨와 실제적인 관리능력이었다. 사업의 성공은 흔히 선장의 자질에 따라 좌우되었다. 선장을 정한 뒤에야 노예도매상은 나머지 인원을 선발했다. 상급 사관들, 외과의사, 선원장, 통제조공, 목수, 요리사, 마지막으로 선원들, 이렇게 해서 총 35-50명 정도가 선발되었다.  인원을 정하고 나면 노예선의 뱃전에는 짐이 가득 실렸다. 짐의 종류를 보면 여행하는 동안 각 담당자들이 이용할 도구들, 이를테면 목재, 못, 밧줄, 역청, 사슬, 수갑, 수술도구함, 무기, 취사용 솥, 그리고 완두콩, 누에콩, 쌀, 노예들을 위한 식초, 절인 주정, 채소, 오리, 거위, 칠면조, 암탉, 양, 사탕과자, 사관들이 마실 포도주 따위를 들 수 있다.  "주님과 성모님의 이름으로 이 항해일지가 비롯될지어다.” 대출항을 몇 시간 앞두고... 노예선은 닻을 올릴 채비를 갖추었다. 선장은 그의 선실에서 대서양 횡단항해의 모든 세부사항을 기록할 운항일지를 펼쳤다. 첫 페이지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주님과 성모님의 이름으로 이 항해일지가 비롯될지어이다.” 항구를 떠난 지 며칠 안 되어 예기치 않은 골칫거리들이 발생한다. 소년선원이나 일반선원이 점호에서 빠지거나, 반대로 밀항자들이 발견되는것이었다. 그들은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거나 가난에 쪼들리다 못해 몰래 승선한 이들이었다. 때로는 열네 살도 채 안 되는 이들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런 청년들은 곧 밀항을 후회하곤 했다. 잠이라고 해야 갑판 위에 시트도 없이 놓인 매트리스에 누워 하루에 세 시간, 아침마다해야 하는 갑판 청소, 빈대콩과 쌀이 나오는 보잘것없는 식사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다 축제일이나 되어야 돼지기름이라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선상생활의 질서가 잡혀갔다. 선장은 노예도매상이 그에게 건네준 지침서를 읽고 또 읽었다. 지침서의 내용이란 구매할 노예의 숫자, 예정 항해로, 닻을 내리고 노예를 구입해야 할 아프리카의 해안들, 넘어서는 안 될 가격, 노예에게 먹여야 할 음식,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위생수칙 등이었다.  노예선은 곧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연안을 따라 물길을 헤쳐나갔고 이어 망망대해로 나섰다. 이윽고 아프리카의 해안이 다가왔고, 배는 고레섬을 마주보게되었다. 노예선은 이제 서서히 앞으로 나가며 일정한 간격을 두고 측연을 던져 수심을 측정했다. 끌어올린 측연이 모래와 진흙으로 가득하면 모두들 기쁨에 들떴지만 그래도 안심하기는 이르다. 암초에 뱃머리가 부서지거나 모래톱에 좌초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아프리카 도착: 노예해안에서 선장과 아프리카 국왕 사이에 긴 협상이 벌어졌다해안에 접근하면서 노예선은 그 지역 지도자에 대한 경의 표시로 예포를 쏘기 시작했다. 닻을 내린 다음날, 선장과 한두 명의 선원이 아프리카 국왕을 만나기 위해 작은 배에 몸을 실었다. 배에서 내린 선장을 맞은 이는 백인과의 교역담당 장관급인 '야보강'이었다. 그와 함께 한껏 호화로움을 과시하고 있는 왕궁으로 모두들 향했다. 왕은 몇 명의 왕비와 고위 고문들에 둘러싸인 채 침대에 드러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선장은 자신을 소개하며, 그가 프랑스 국왕의 신하임을 강조했다. 그는 아프리카의 왕에게 가지고 온 선물을 전했다. 브랜디, 금장식줄을 박아넣은 망토, 깃털장식이 달린 삼각모, 가장자리에 금술장식이 달린 원색 양산...  그런 다음에야 본격적인 협상이 이루어졌다. 노예의 숫자와 가격이 의논되고, 당직 선원은 결정된 수량대로 브랜디가 담긴 통, 피륙, 소총, 화약통, 코리스(화폐로 사용되던 작은 조가비)를 넘겨주었다. 마침내 왕은 야보강에게 매매의 시작을 알리도록 명했고, 종처럼 울리는 '공공'이 노예시장의 개장을 주민들에게 알렸다.  노예선의 승무원 중에서 몇 명이 배에서 내려 교역상품을 보관할 가건물을 세웠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또 다른 상품을 위한 보관소가 마련되었다. 팔아 넘길 포로를 가두어놓을 수용소였다. 꽤 오래 지속될 매매 역시 그곳에서 이루어진다. 아프리카의 군주들은 가격을올리기 위해 유럽인들의 경쟁심을 부추기는 능숙함을 지니고 있었다.  사슬에 묶인 사람들의 긴 행렬: 상인에게 이끌려 노예들이 도착했다. 몇 날을 걷고 걸어... 노예들은 나무로 된 형구 같은 것이 목에 씌워진 채 마치 가죽처럼 긴 행렬을 지어 도착했다. 그들을 인솔하는 이는 흑인 중개상, 또는 아랍상인이었다. 앞장을 서는 인솔자는 그의 바로 뒤를 따르는 노예의 목에 씌운 나무 형구의 손잡이를 어깨 위에 걸치고 이었다. 노예들도 마찬가지로 뒤따르는 노예의 그것을 어깨 위에 걸치고 있었다. 만일 노예상이 그 행렬을 멈추고자 한다면 그의 어깨 위에 놓인 나무 손잡이를 놓아버리면 그만이었다. 첫 번째 노예가 멈추어 서면 나머지 노예들도 따라서 멈추어 섰다.  끔찍한 운명을 목전에 두고, 공포로 일그러진 이 남녀들은 어째서 이런 처지에 놓인 것일까? 무엇보다 약탈이라 일컬을 수 있는 전쟁이 그 원인이었다.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습격해 잠들어 있는 마을을 불시에 덮쳤다. 그리고 무기를 든 병사들이 살아 남은 포로들을 팔아 넘기기 위해 그들을 해안으로 끌고 갔던 것이다. 절도, 강도, 채무 따위를 이유로 하여 형이 언도된 이들도 있었다. 가끔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어리뿐인 이들도 가족 전체를 먹여준다는 대가로 자진하여 노예가 되는 일도 있었다.  흑인 또는 아랍 상인들이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해안길을 이동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그들이 이끄는 노예의 무리는 노예선, 다시 말하여 유럽에서 온 떠다니는 감옥들이 있는 곳을 향해 모여들었다.  노예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렸다. 흑인들 하나하나를 진찰하고, 검사하고, 키를 재고, 무게를 달아보고, 여기저기를 만져보고... 마침내 중개성과 선장들이 기다리는 해안에 당도했다. 겁에 질린 흑인들의 무리가 수용소의 뜰로 들어서고 나면 문은 닫혔다. 해부에 가까운 면밀한 검사가 시작되었다.  서너 명이 하나의 조로 묶인 남녀 노예들은 벌거벗고 있었다. 백인 구매자는 노예들의 입과 눈을 꼼꼼하게 살폈다. 상태가 안 좋은 노예는 헐값에 거래되었다. 각막에 백반이 있거나 빠진 치아가 있으면 그 수에 따라 가격이 낮아지게 마련이었다. 또한 그들은 노예들로 하여금 달리고 뛰어오르고 말하거나 팔다리를 놀려보게 했고, 말 매매상처럼 궤양이나 피부병, 괴혈병, 기생충 따위 신체적 결함이나 질병의 증상을 찾아내려했다. 신체적 결함이 없고 질병의 흔적도 없는 노예는 너무 늙었거나 어리지 않으면 아메리카를 향한 공포의 뱃길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제 가격을 둘러싸고 노예상과 왕들의 꽤 오랜 협상이 시작되었다. 왕들은 수량과 지이 더 높은 교환물을 점차 요구하게 되었다. 1772년, 낭트의 노예도매상들은 17년 만에 노예의 값이 무려 두 배로 뛰어올랐다고 불평했던 것이다.  마침내 거래가 성사되면 사슬에 손목이 묶인 노예들은 작은 배에 나뉘어 실렸다. 노예를 실은 작은 배들은 곧 노예선에 이르렀고, 노예를 묶어두었던 사슬은 파도가 넘실거리는 물결까지 이어진 사다리를 기어오를 수 있도록 풀렸다.  남자 노예들은 뱃머리 쪽에 몰아놓았고 그중 힘이 세어보이는 이들은 둘씩 발목을 묶어 놓았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고물에 빽빽히 몰아놓았다.  노예선은 아프리카의 해안을 휩쓸다시피 했다. 배가 정박하는 곳에서는 매번 노예들을 새로 더 사들였으므로 몇 개월만 지나도 노예선은 콩나물 시루로 변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선장은 구매를 서둘렀다. 정박지에 오래 머무는 만큼 위험에 빠질 가능성도 커졌기 때문이다. 위험은 사방팔방에 도사리고 있었다. 열대병, 전염병, 바다에 몸을 던져 무자비한 상어들의 먹이가 되고자 하는 노예들의 자살, 흑인 부족들끼리 또는 흑인과 백인 간의 충돌...  거래는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걸렸다. 그 동안 노예선은 아프리카 해안 여기저기에 정박하며 노예들을 수집했다.  노예선이 흑인들로 가득할 때 아프리카의 해안에서 지체하는 것이 위험천만한 일임을 선장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고향땅을 다시는 볼 수 없을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절망에 사로잡힌 노예들은 폭동을 일으키게 마련이었다. 이러한 위험은 육지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잡혀간 형제자매들을 구하기 위해 나머지 부족이 노예선을 습격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선장은 노예를 선적하는 일을 재촉하여 마무리했고 선박이 노예들로 가득 차게 되면 도망치듯 서둘러 아메리카로 떠났다.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너는 일은 두렵기 그지없는 악몽이었다. 실제로 항해가 끔찍한 시련이었음은 통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노예교역이 이루어지는 동안 대서양을 '가로지른' 1200만에서 1500만 명에 이르는 흑인들 가운데 150만에서 200만 명의 노예가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끔찍한 위생환경과 빽빽히 들어찬 사람들 사이에서 몇 개월을 버텨야만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제4장 공포의 대서양 횡단  항해는 비교적 순조로울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동안 10%가 넘는 흑인이 죽어나가기 일쑤였다.  노예선은 포로로 들끓는 강제수용소와 같았다. 노예들은 참혹스러울 만큼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노예들은 짐짝처럼 함부로 배에 실렸다. 선장들은 흔히 노예선 정원의 두 배에 달하는 노예를 배에 실었다. 중갑판에 생선 말리듯이 노예들을 늘어놓으면 450명 정원인 선박에 600명 정도는 쉽게 실을 수 있었다.  기생충 방지를 위해 노예들은 완전히 벌거벗겨졌다. 1주일에 두 번은 이 인간뱃짐들을 갑판 위에 몰아놓고 물줄기를 퍼부었다. 이가 들끓기 십상인 흑인들의 곱슬머리는 보름마다 짧게 밀었다. 남자들의 가슴과 등에는 낙인을 찍었고, 둘씩 짝을 지어 서로의 손목과 손목, 발목과 발목을 사슬로 묶었다. 여자들은 남자들로부터 격리시켰고 파뉴를 걸치도록 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의 높이는 중갑판은 1. 5m정도였고, 하갑판은 0. 8m밖에 되지 않았다. 선박의 양쪽에는 판자를 엮은 얄팍한 망이 씌워진 2. 5m 정도의 환기구가 있었다. 100명 남짓한 여자들은 뱃머리 쪽, 사관실 아래에 수용되어 길이 8-9m, 폭 수미터 정도 되는 공간을 이용했다.  물론 노예들보다는 자유로웠지만 선원들도 그리 넓은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갑판 위에 달아맨 그물침대에서 교대로 잠을 잤다. '노예 적하장'은 밤이면 자물쇠가 채워졌고 승무원들은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 어둠이 깔린 뒤에는 뜻밖의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나면 하루에 두 번 정도 식사 또는 운동을 시키기 위해 노예들을 갑판 위로 데리고 나왔다. 남자들은 사슬을 채웠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자유롭게 내버려두었다.  쌀, 옥수수, 마니옥(남미의 관목으로 그 뿌리에서 식용 전분을 캐냄:역주), 누에콩은 하루 두 번 제공되는 죽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식량이었다. 맛이라고는 없는 이 죽에는 아프리카에서 구입한 고추가 조미료로 약간 첨가되었다. 노예상들은 비타민C부족에 따른 괴혈병으로 피해를 입을까 몹시 두려워했다. 따라서 실어온 과일들이 동이 난 뒤에는 두 달 이상 여행을 지체하지 않도록 애썼다.  물고기를 잡아서 식단에 변화를 주려고도 했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문제는 역시 물이었다. 물은 "대서양 횡단 도중 부패하기 일쑤였다. 걸죽해지고 진창처럼 변해서 벌레가 들끓기도 했다. "  선사의 식단은 비할 데 없이 단조로웠다열량은 충분하지만 비타민이 결핍된 식단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가능한 한 비용을 절감하고 전염병이 창궐할 만한 환경을 제공하지 말되,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노예들을 너무 잘 먹여서 힘이 넘치게는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노예 관리에 관한 지침서'는 때때로 물을 탄 브랜디로 회식을 열어서 식사의 단조로움을 깰 것, 팬 케이크나 구운 빵을 곁들이고 모두들 온순하게 굴었을 때는 삶은 쇠고기 조각을 제공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낭트의 한 선주는 그의 선장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했다. "흑인들을 관리할 때 가장 신경 써야 할 항목은 음식이오. 선상을, 지휘하는 사관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요. 죽을 너무 묽거나 진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누에콩을 충분히 익히기 위해서는 충분한 만큼 물을 준비해야만 할 것이오... 아침과 저녁을 먹여야만 하오. 외과의사는 매일 아침 노예들의 입을 검사하고, 식초나 레몬즙으로 목구멍을 헹구어 입을 씻도록 해야 하오. 물은 통제하기보다 마음껏 쓰도록 해양 더 오래 쓴다는 것을 경험했소. 물통은 모두 열어놓아야 하겠지만, 당번을 붙여 허비되는 것을 막아야 하오.”  많은 피를 흘리고 나서야 반란은 진압되었다. 설사 반란이 성공하더라도 노예들은 바다를 헤매는 운명에 처해졌다. 그들은 대형 선박을 조종할 수 없었던 것이다출항한 뒤 처음 1주일 동안은 선원들이 그들의 '뱃짐'을 주의 깊게 살폈다. 아직 그들의 고향땅이 가까이 있다고 여기는 만큼 절망에 가득한 흑인들이 더없이 위험스러운 일을 저지를 수도 있었다. 노예도매상들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노예선에서 아프리카 대륙을 볼 수 없게 되는 순간이었다. 미지의 세계로 넘어가는 그 순간 노예들은 극도의 상실감에 사로잡혔다.  가끔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전개는 거의 유사했다. 연해를 벗어나자마자 밤중에 비밀계획이 세워지고 몇몇 노예들이 사슬을 푸는 데 성공한다. 그 다음날 갑판으로 올라가기 위해 승강구를 열고, 흑인 몇이 간수들을 기습공격하여 죽인다. 그러나 곧 모든 출구가 봉쇄되고 갑판위로 일제사격이 가해진다. 간수들이 주모자들을 총살한다. 피로 범벅이 되고 갈가리 찢긴 시체들의 처참한 모습에 겁을 집어먹은 노예들의 무리는 조금 전 분노에 가득 차 뛰쳐나왔던 중 갑판으로 물러간다. 사슬의 수를 늘리는 일, 살아 남은 우두머리들을 처단하거나 공모자들 앞에서 채찍질을 하는 일만 남는다. 그리고 나면 질서가 회복된다. 반란이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노예들은 당시의 대형 범선을 조종할 줄 몰랐기 때문에, 노예선들은 바다를 떠돌다 전원이 몰살하게 마련이었다.  소설가 프로스페르 메리메는 그의 소설 '타망고'에 허기와 갈증으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이 불행한 이들의 끔찍한 이야기를 담았다. "구운 빵 한 조각을 놓고 싸움이 벌어졌다. 약한 자들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강한 자들에게 살해된 것이 아니라 죽도록 내버려졌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에 도착한 노예들은 가능한 한 비싼 값을 받기 위해 '회복과정'을 거쳤다아메리카 대륙에 정박하기 전, 노예선은 검역정선을 했다. 선상에 어떠한 전염병도 없음이 확인되기까지 40일간 아무도 땅에 발을 딛을 수 없었다.  검역정선이 끝나면 선장은 그의 '상품'을 손질했다. 영양가있는 음식과 과일, 야채를 먹여서 원기를 회복시켰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다듬었으며 야자유를 몸에 발라주었다. 눈에 띄는 결함을 고쳐놓기도 했는데, '표백'이라 불리던 이 작업의 비결을 쥐고있던 이는 노예선의 외과의사였다.  노예의 도착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광고지를 통해 알려진 노예매매는 축포와 함께 노예선의 갑판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은 흑인들과 구매자들이 접촉하기 편리한 곳이었다. 일단 새 주인과 노예가 노예선을 떠나면 선장에게는 더 이상 책임이 없었다.  노예들이 전시되면 구매자와 노예선의 선장은 흥정을 벌였다노예들은 '인도'라 불리는 단위로 묶여 갑판 위에 진열되었고, 팔리지 않는 노예가 생기지 않도록 한 무리가 다 팔린 다음에야 다음 무리를 올렸다. 병든 노예들은 '초라한 백인'으로 불렸던 군소 농장주들에게 헐값에 팔렸다. 그러나 노예의 병을 치료하게 되면 그들은 병든 노예를 사들이기를 잘했다고 여겼다.  경매에 붙여진 흑인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탁자나 통 위에 올려졌다. 구매자들은 흑인의 힘과 건강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팔다리를 움직이거나 여러 가지 자세를 취하도록 요구했다.  노예의 가격은 선장과 노장주의 흥정에 따라 결정되었다. 노예 가격의 결정요소로는 나이(노예는 35-40세만 되어도 늙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건강상태, 체력, 용모를 들 수 있다. 노예시장의 변동이라 할 노예 수급 상황 또한 가격 결정요소의 하나였다. 때때로 노예구입을 위해 추첨을 하는 때도 있었다.  만족한 구매자는 현금으로 지불했다. 현금지불은 상당한 이득이 있어 10-15%의 할인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외의 경우 대금지급은 대체로 신용거래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선장들은 이러한 방식을 꺼렸다. 농장주들이 쉽사리 부채를 청산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래가 끝난 흑인에게는 그 즉시 가슴 또는 어깨 위에 불에 달군 은제 낙관으로 새로운 주인의 이니셜이 새겨졌다. 이러한 과정이 끝나면 노예들은 라 플뢰르, 마리, 장 따위 새 이름을 얻게 된다. 이제 그 노예는 다른 노예에게 맡겨져 농장으로 이끌려 갔다.  한 주 동안, 그 노예는 일도 하지 않고 배불리 잘먹기만 한다.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녹초가 되었던 노예에게 이러한 요법은 아주 유효했다. 1주일이 지나면 주인은 살이 올라 모든 힘을 농장에 바칠 준비가 된 노예를 부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따금 견디기 힘든 오랜 여행을 마친 노예선의 선장은 무인도에서 '원기회복' 작업에 착수했다.  대부분의 열대작물들, 설탕, 커피, 목화, 쌀, 인디고, 담배 따위를 재배하려면 힘 잘 쓰는 일꾼들이 다수 필요했다. 그런 까닭에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아메리카로 대량 유입되기 이전에도 여러 가지 해결책들이 모색되고 있었다.    제5장 식민지 농장에서  농장주들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실험적으로 고용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유럽인이 지니고 온 세균에 저항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시도했던 것은 백인 노동자들, 소작농들을 '계약' 방식으로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사인들이 여행경비와 의복비를 지불하며 모집한 빈민들은 7년간 주인을 위해 일할 책임이 있었다. 살아 남기만 한다면 그들은 얼마 되지 않지만 자신들의 경작지를 얻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용계약에 매인 그들의 생활은 노예와 다를 바 없었고 사망률도 높았다. 그들을 무기한으로 고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고용주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혹사했기 때문이다.  농장주들의 마지막 해결책은 결과적으로 가장 수익성이 높은 것이었다. 열대기후에 익숙한 아프리카 흑인노예들은 비용이 적게 들었을 뿐 아니라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었다.  사탕수수 '농원'에 배속된 노예들은 위험하고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제당농장에는 사탕수수 밭인 농원에서 일하는 이들과 사탕수수를 설탕으로 만드는 제당소에서 일하는 이들이 있었다. 농원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작업감독의 채찍질 소리에 동이 트기도 전에 잠을 깼다. 작업감독은 노예들의 움직임을 감시했고 게으름을 피우거나 피곤한 기색을 보이며 작업에 열중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처벌을 가했다.  정오가 되면 노예들은 두 시간 동안 작업을 멈췄다. 물론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그들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확히 오후 2시가 되면 노예감독은 노예들을 농원으로 불러모았다. 제당작업에 투입되지 않는 이들은 밤늦게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제당작업에 배속된 노예들은 작물을 거두어들이는 동안에는 별다른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일은 위험하고 고된 것이었다. 원통형 롤러에 빻을 사탕수수를 날라야 했고, 빻은 사탕수수를 가마솥에 넣고 끊임없이 저어주어야 했다. 과로와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많은 노예들의 팔은 롤러에 으스러지거나 가마솥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노예들은 농원에서의 고된 노동외에, 제분작업에 이용되는 가축에게 먹일 목초를 하루에 두 번, 거두어와야 했다. 목초지는 대부분 농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탓에 이 일 또한 힘든 것이었다. 게다가 다른 일들이 모두 끝난 밤시간에 목초지로 향해야 했다. 그리고 나서 오두막으로 돌아온 노예들은 나무를 주워모으고 식사를 준비했다. 잠자리로 쓰였던 마니옥 짚단으로 만든 깔개에 몸을 눕힐 수 있는 것은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노예들이 자신들이 먹을 야채를 심어놓은 텃밭을 돌볼 수 있는 시간은 이때뿐이었다. 고용주가 일요일을 쉬게 해주지 않으면 노예들은 보다 나은 식사를 위해 밤중에라도 텃밭을 가꾸었던 것이다.  목화밭의 노예들은 한밤중까지 고된 일과가 끝나지 않았다19세기 전반, 미국 남부에서 가장 많이 산출되는 작물은 목화였다. 1815년-1861년의 수확량은 8만 톤에서 115만 톤으로 늘었다.  수확은 8월 후반에 시작되었다. 노예들은 각각 자루 하나씩을 받았고, 그 자루에 달린 가죽끈을 목에 걸었다. 자루의 주둥이는 가슴께에 있었지만 자루 바닥은 지면에 거의 닿을 만큼 늘어져 있었다. 또 각자에게는 자루에 솜이 가득 차면 그것을 비울 커다란 바구니 하나씩이 주어졌다. 통상 하루 작업으로 200파운드 정도 수확할 수 있었는데, 정량을 채우던 노예가 정량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에는 벌을 받았다.  목화의 높이는 1. 5m 정도이고, 줄기는 사방으로 많은 잔가지를 뻗는다. 노예들은 목화섬유로 둘러싸인 씨앗들을 따모았다. 자루가 가득 차면 목화를 바구니에 비운 뒤 발로 밟아 부피를 줄였다. 노예들은 동이 트기가 바쁘게 밭으로 나갔다. 소량의 찬 고깃조각으로 허기를 채울 때 소요되는 10-15분간의 시간을 제외하면 캄캄해지기 전까지 그들에게 휴식이란 없었다. 보름달이라도 뜨는 날이면 한밤중까지 고생하기 일쑤였다.  목화는 열매가 익어 벌어지면 서둘러 따내야 했다. 시기를 놓치면 섬유가 굳어지기 때문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풍부한 노예노동력이었다. 미국 남부의 목화농장, 버지니아 또는 켄터키의 담배농장, 남부 캘리포니아의 쌀농장을 경영하는 모든 농장주들은 가장 경제적인 노동력, 가장 수익성이 높은 해결책이 노예라는 사실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노예들을 사들였다.  대규모 농장과 소규모 농장: 이 두 농장의 생활상은 전혀 딴판이었다목화 수확량의 절반은 열 명 이하의 노예를 거느린 소규모 경작자들이 생산한 것이었다. 이 농장주들은 힘겨운 경제적 조건 아래에서 살아 남기에 급급했고, 비수기를 넘기기 위해서는 사채업자들에게 많은 빚을 내야만 했다. 낡은 농기구와 농사시설을 교체할 자금도 없던 많은 농장주들은 노예들을 건강한 상태로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애쓸 뿐이었다. 어떤 농장주들은 재산증식을 위해 극도로 절제된 생활을 하며 그들의 주요 재산인 노예에 대부분을 투자했다. 1945년에 650달러를 주고 사들인 18세 노예는 5년 뒤 1000달러에 되팔 수 있었고, 남북전쟁 초기에는 2000달러까지 가격이 폭등했다.  군소 농장주들은 자급자족을 위한 밀과 돼지 이외에도 여러 가축을 기르고 많은 목화를 재배했는데, 수확 때마다 그중 60자루 정도는 내다 팔았다.  반면 50명 이상의 노예를 거느린 대농장의 생활은 전혀 달랐다. 클레망 이통이 말한 대로 "남부 전체의 번영을 그들 자신의 소득과 동일시하고 자신들만의 힘으로 남부를 이룩했다고 믿는 농장주들의 귀족의식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었다. 능력 있는 관리인, 건장한 노예들, 튼튼한 노새들, 길이 잘 든 농기구들, 이러한 이상적인 환경에서 일꾼들이 가가 5헥타르 정도의 밀밭이나 목화밭을 경작했다. 대농장주들이 막대한 수익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남부의 남쪽 지역에는 150명이 넘는 노예들을 사들여 500헥타르 이상의 농토를 경작할 만큼 번창하던 농장도 있었다.  노예들이 경작하던 제2의 주요 작물은 커피였다커피 역시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었다. 그렇지만 사탕수수와 목화 경작에 비하면 그리 고달픈 작업은 아니었다. 노예들은 핵과(다육질의 중과피와 핵인 내과피 속에 하나의 씨가 든 과실:역주)의 일종인 이 붉은 열매를 따서 껍질을 벗겼다. 그 다음은 섬세한 작업을 요하는 건조과정으로 이어진다. 과실의 과육을 제거하고 7-8일간 넓은 들판에서 말리면 열매는 녹색이 된다. 물에 젖지 않도록 해야 하므로 비가 오면 서둘러 덮어야 했고 수시로 뒤집어줘야 했으며 질이 떨어지는 열매들을 하나하나 골라내야 했다. 이 과정이 끝나면 커피를 볶는, 다시 말해서 열매 무게의 5분의 1에 상당하는 수분을 제거하는 작업이 뒤따랐다. 열매는 엷은 갈색을 띠고 윤이 났다. 건강이 좋지 않은 노예들은 커피 열매의 엷은 껍질을 분리하는 '손질' 작업에 투입되었다. 다른 노예들이 운반해온 열매들을 커다란 분쇄용기에 붓고 수력으로 움직이는 특수한 형태의 공이로 피질을 으깬 뒤 열매들을 선별하여 키질을 하고 껍질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이 일에는 자원자들이 드물었다.  삼엄한 감시, 빈번한 체벌, 끊임없이 계속되는 채찍질: 관리인은 농장이 '잘 돌아가도록'하기 위한 감시의 눈길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백인 농장주들은 늘상 반란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이유로 노예들은 항상 감시와 억압, 처벌의 대상이었다. 관리인은 농장 작업의 순조로운 진행을 책임졌다. 그는 노예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일 수확량을 감독했고, 정기적으로 흑인들의 오두막을 수색하여 훔친 물건이나 무기가 있는지 확인했다. 한편 단독으로 혹은 무리를 지어서 현상금이 붙은 도망노예를 쫓는 전문 노예사냥꾼이나 일정한 간격으로 평원을 오가는 무장 기마순찰대, '패터 롤러'들도 있었다. 노예사냥꾼들은 특별한 훈련을 받은 사냥개를 데리고 다녔다.  통행금지는 저녁 8시부터였다. 이 시간 이후에는 순찰자가 인원을 점검하는 숙영지 외부에서는 어떤 노예도 눈에 띄는 일이 없어야 했다. 농장주들은 농장을 철저히 감시했고 어느 누구도 특별한 이유 없이 농장을 떠나지 못하도록 했다. 노예들이 외부와 접촉을 갖는 일은 전면금지되었는데, 특히 자유를 찾은 흑인이나 외국인과 접촉하는 것은 더 심한 통제를 받았다.  노예들은 싸움, 욕설, 음주 등이 금지되었다. 또한 주인과 함께 있을 때에는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서 있어야 했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끼니를 주지 않는 단순한 처벌에서부터 벌겋게 달군 낙인을 찍거나 발목에 사슬 또는 쇠공을 다는 등 다양한 처벌이 따랐다. 그중에서 무엇보다 흔한 형벌은 채찍질이었다.  채찍질은 관리인 또는 그 일을 위해 고용된 '채찍꾼'이 맡았다. 이따금 채찍질을 끝낸 뒤 그 상처에 소금물을 뿌리기도 했는데 이는 고통을 배가시킬 뿐 아니라 상처 부위의 감염을 예방하는 이중 효과를 지녔다. 극도로 화가 났거나 상황이 심각할 경우 외에는 주인이 직접 나서서 노예들에게 채찍질을 하는 일은 없었다. 부인들 역시 너무도 고귀한 분들이어서 직접 벌을 주는 일은 없었다. 다만 채찍꾼들에게 이러한 글을 써보낼 뿐이었다. "낸시라는 젊은 여자 검둥이에게 채찍질을 좀 해주시겠어요? 수고비 청구는 제 앞으로 달아주시고요.”  허약한 노예는 주인집의 하인으로 삼았다온종일 밭에서 일을 해야 하는 노예들의 어린아이들은 좀더 자란 아이들이나 늙은 유모들이 돌보았다. 8-10세의 소녀들은 더 어린아이들과 갓난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다. 노예의 어린 시절은 열두번째 생일을 맞고는 끝이 난다.  이때부터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밭에서 일을 했다. 단지 힘이 덜 드는 일을 한다는 것뿐 아이들도 어른과 다를 바 없는 고달픈 생활을 견뎌내야 했다. 그다지 튼튼하지 못한 아이들은 주인집의 하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모든 농장의 백인 농장주들과 집안살림을 맡은 흑인노예의 생활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대다수 노예들은 주인 침대의 발치에서 잠을 잤고, 어린 주인과는 같은 침대에서 자기도 했다. 집 밖에서는 백인 아이들과 흑인 아이들이 함께 놀이를 했다. 흑인 유모가 백인 하인들이 맡은 일을 감독하기도 했고, 흑인 하녀가 여주인의 시중을 들었으며, 흑인 잡부가 일손이 필요한 백인 주인을 도왔다.  흑인 손에서 자란 주인의 아이들은 검둥이들의 음악을 통해서 아프리카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흑인과 백인 사이의 지배적인 감정은 백인의 경계심과 흑인의 증오로 나타났다. 한편 어느 날 먼 곳으로 팔려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노예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주었다. 주인들은 노예끼리 혼인을 시켜주곤 했는데, 혼인서약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라는 부분은 삭제될 정도였던 것이다.  이처럼 노예는 결혼을 했건 안 했건 언제든지 되팔릴 수 있었다. 또한 노예는 다른 주인 소유인 노예와 결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노예들의 결혼은 법적으로 인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부부간의 생이별도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자식들과 헤어지는 일은 견딜 수조차 없이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어느 여자 노예는 이렇게 말했다. "13명의 아이들이 있었지만 모두 떠나보냈다. 노예로 팔려간 것이다. 어미의 고통으로 눈물 지을 때, 내 하소연을 들어준 이는 예수뿐이었다.”  질병, 과로, 학대, 전염병, 자살에 이르기까지... 많은 노예들이 농장에서 죽어갔다아메리카에 도착한 첫 해에 죽음을 맞은 노예들도 있었다(후에 집단수용소에서 죽어갔듯이). 농장에서의 출산율은 매우 낮았다. 흑인들은 노예가 될 팔자인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았고, 농장주 역시 노예들을 팔아치우는 데 걸리적거리는 요소를 없애기 위해 흑인 가족의 구성원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농장주들은 아무런 보상도 없이 오랜 동안 아이들을 양육하기보다는 그 즉시 이득을 볼 수 있는 장성한 노예를 사들이는 편을 선호했다. 높은 사망률과 낮은 출생률은 흑인 인구의 급속한 감소를 초래했기 때문에 몇몇 농장주들은 7-10년 만에 농장 '작업반'을 완전히 교체해야 했다.  그러나 사정은 곧 바뀌었다. 1808년 1월, 목화농장의 인력부족이 심각한 가운데 연방법은 미국에서의 노예매매를 금지했다. 그 결과 노예 품귀현상이 벌어졌고 노예의 가격은 폭등했다. 1850년, 노예의 가격은 17세기 말의 10배에 달했다.  일부 농장주들은 노예 '사육'을 계획했다. 그들은 '종자'가 좋은 남자 노예들과 '출산'을 전담하는 여자 노예들을 선별했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 노예의 몸값은 장년기 남자 노예의 수준으로 급등했고, 여자 노예들에게 1년에 한 명의 아이를 낳도록 강요하는 농장도 있었다. 노예 사육을 주로 하던 '사육주'는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메릴랜드, 켄터키, 테네시, 미주리 등지였으며, 이들 주에서는 이른바 '유색 가축'들을 길러낸다고 떠들어대는 실정이었다. 이로써 아이를 잘 낳는 노예들은 배불리 먹고 지내며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흑인노예들의 성비가 대등해지고 아메리카의 풍토에 적응함에 따라 출산율은 증가 추세로 들어섰다.  오랫동안 미국에서는 노예들의 반란 횟수를 축소해 발표했지만 실상 그 횟수는 막대했다. 그런 만큼 흑인노예 고용주들은 늘상 반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고, 반란에 따른 진압은 극도로 잔혹하게 마련이었다. 노예들이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반란말고는 달리 없었다. 있다면 노예신분에서 면제되거나 도주하는 길뿐....    제6장 내일은 자유  흑인들의 반란은 단순한 폭동에서 시작되어 하나의 국가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산토도밍고에 수립한 이 정부는 1796년에서 1802년까지 존속했다.  혹독하게 진압되었던 흑인들의 반란은 노예사를 근거짓는 뿌리이다1526년 최초의 반란이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일어났다. 후에 가장 규모가 큰 반란 가운데 하나가 일어난 곳도 그곳이었다. 1822년, 노예신분에서 해방되어 목수가 된 덴마크 베시는 수천의 흑인들을 규합햇지만 거의 전원이 몰살당하고 말았다. 가장 격렬했던 반란은 1831년 버지니아에서 냇 터너가 일으킨 것이었다.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한 터너는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도끼로 무장한 반란세력을 이끌고 60여 명에 달하는 여러 농장주의 가족들을 학살했다. 재판을 받는 도중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도처에 공포와 슬픔을 전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1807년에서 1837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브라질의 바이아를 피로 물들인 흑인 회교도의 폭동과 같은 반란사건들이 브라질과 서인도 제도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해방된 노예와 백인들은 도주로를 제공하는 비밀결사인 '지하철도'를 조직했다노예신분에서 벗어나는 다른 길은 도주였다. 도망노예들은 '마롱'이라 불렸다. "Run, nigger, run! The patrol will catch you(뛰어라, 검둥아, 뛰어! 순찰대에게 잡히겠다).” 당시의 노래가사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노예에게 탈주는 끈질긴 유혹이었다. 도망노예들이 17세기 브라질의 원시림에 수립한 뒤, 수차례의 군대원정에 저항하며 50년이 넘도록 버텼다는 도시국가 팔마레스와 잠비아 공화국을 둘러싼 이야기가 여러 농장에 떠돌았다. 이러한 전설과 같은 이야기들은 1847년 리베리아 자유 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아프리카의 해안에 국가를 설립한 이들은 과거 아메리카에서 노예생활을 했던 이들이었다. 1822년부터 1892년까지 노예신분에서 해방된 2만 2천 명의 이주민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도망노예는 인적이 드문 늪지에 숨어 살며 약탈로 연명해 갔다. 누구든 도망친 노예를 발견하면 쏴 죽여도 상관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들은 도주를 위한 조직을 정비해 갔다.  1815년경, 도망친 노예들이 캐나다나 미국 북부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연결책을 주선하고 도주로를 제공하기 위해 해방된 노예와 백인들의 비밀결사인 '지하철도'가 조직되었다. 1850년, 지하철도의 기여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녀 자신 도주한 노예였던 해리엇 터브맨은 19건의 탈주를 주도했고 그녀 혼자의 힘으로 300명의 노예들에게 자유를 찾아주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농장주들은 1850년, 모든 주의 경찰관들이 도망노예의 검거를 위해 협력하도록 하는 연방법안을 제출, 통과시켰다. 1857년, 대법원은 북부에 숨어 살던 흑인 드 레드 스콧을 노예신분으로 되돌리도록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로 비롯된 여론의 도용는 남북전쟁 발발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고,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남군과 노예제도의 폐지를 지지하는 북군은 내전을 벌였다. 결국 1865년 1월 31일의 제13차 개헌에 따라 미국 전역의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최초의 '노예 폐지론자'들은 아메리카 개신교의 한 종파인 퀘이커교도들이었다1794년 2월 4일, 혁명 프랑스는 국민의회의 법령에 의거하여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이는 노예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한 첫 사례였다. 1802년, 나폴레옹은 노예제도를 부활시켰고, 노예제도의 복구를 위해 원정군을 파견했지만, 전혀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최초로 노예폐지론을 펼쳤던 이들은 아메리카 개신교의 한 종파인 퀘이커교도들이었다. 1688년, 그들은 노예제도가 기독교 정신에 위배된다고 선언했다. 같은 해 독일계, 스위스계 퀘이커교도들이 노예매매뿐 아니라 노예제도 자체를 공박하는 '저먼타운 항의문'을 발표했다.” '백인을 노예로 부리기보다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장을 용인할 수 없다. 사람을 훔치거나 납치하는 이들, 사람을 사고 파는 이들, 이들이야말로 노예로 삼아 마땅한 이들이다.”  노예제도를 폐지하려는 투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투쟁이 결말을 맺기까지는 수세기가 걸렸고, 영국인 윌리엄 윌버포스, 프랑스인 빅토르 셸셰르, 미국인 에이브러햄 링컨의 활약이 있어야 했다.  노예제도를 폐지하려면 노예매매부터 금지해야 했다1807년, 영국의 하원의원이던 윌버포스는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영국 선박을 이용한 흑인무역을 금지시키는 법안을 가결시켰던 것이다(게다가 노예매매는 점차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것이 노예제도 폐지의 첫 단계였다. 한편, 아메리카에서의 흑인매매는 미합중국 헌법이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1808년 1월, 윌버포스와 그린빌은 노예매매 금지안을 영국 양원에서 가결시켰다. 남은 일이라고는 노예매매를 행하는 다른 국가들이 금지법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일뿐이었다. 이를 위해 영국은 33년간 28건의 협상을 체결했다.  하지만 노예매매 금지가 노예제도 자체의 폐지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 둘 사이의 차이는 명백했다. 그 일례로 영국은 노예매매를 금지한 해로부터 25년 뒤인 1833년에 이르러서야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프랑스 역시 1827년에 노예매매를 금지했고 1848년에야 그 제도를 폐지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1812년의 노예매매 금지에서 1865년의 노예제도의 폐지까지 57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물론 남북전쟁이라는 커다란 희생을 치르고 나서였다. 1850년에 매매를 금지하고 1888년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노예제도를 폐지했던 브라질처럼 다른 국가들은 훨씬 뒤에야 노예제도의 종말을 볼 수 있었다.  영국인들은 은밀한 교역까지 철저히 제지했다. 그들은 의심스러운 선박들을 수색했고 노예상인들을 잡아들였다노예매매 금지법에 모든 이들이 찬동했던 것은 아니였다. 노예매매로 재산을 모은 많은 사람들은 이에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노예매매의 법적인 금지는 노예가격의 급격한 상승을 초래했고, 그 결과 암거래가 성행하게 되었다. 영국은 유럽과 신대륙의 국가들로부터 의심스러운 선박들을 수색하고 노예상인들을 검거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는 상호협정을 체결했고 그 협정에 따라 노예를 수송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타국의 선박을 저지, 수색할 수 있는 권한을 서로에게 부여했다(이러한 협정은 빈번한 외교적 마찰을 불러오기도 했다). 1862년 링컨 대통령은 영국이 미국 선박을 조사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수색권한 협정에 조인했다. 1808년부터 대략 1870년까지 30척의 군함과 1000명의 병력이 이 경비대에 투입되었다. 1828년부터 체포된 노예상인은 영국인일 경우 사형에 처해졌다.  암거래 선박을 뒤쫓는 전함들을 따돌리기 위해 노예상인들은 새로운 선박들을 건조했다. 한층 날렵하고 재빠른 배들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선박의 내부는 더욱 좁아졌고 노예들은 이전보다 열악한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노예들은 비좁기 그지없는 공간에 빽빽히 채워졌고, 이것은 전염병이 도는 적당한 환경을 제공했다. 게다가 발각된 노예상인들은 골칫거리가 되기 쉬운 증거물을 없애기 위해 그들이 싣고 온 '뱃짐'을 바다에 던져버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1825-1865년만 해도, 1287명의 노예상인들이 체포되었지만, 100만 명이 더 되는 노예들이 아메리카로 유입되었고, 이 일에 동원된 선박들은 주로 포르투갈, 브라질, 스페인 선적이었다.    1815년, 영국의 영향을 받은 빈 회의는 흑인매매를 해적행위와 동일시하며 엄중히 규탄했다. 1818년 엑스라샤펠 조약에 따라, 유럽 열강들은 마침내 흑인매매를 금지했다. 이는 남부의 농장주들에게는 축복받은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전주곡과 같았다. 1823년,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은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협회를 창설했다.    제7장 불완전한 승리  영국 정부는 서인도 제도의 식민지에 새로운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먼저 노예들의 생활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조처들이 세워졌다. 채찍질, 일요 노예시장, 여자 노예의 구타가 금지되었고, 교리교육을 위한 하루 동안의 추가 휴가가 주어졌으며, 1823년 이후에 태어난 여자아이들을 노예신분에서 해방해 주었다. 또한 작업시간이 아홉 시간으로 축소되었고,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으며, 노예를 위한 저축은행이 마련되었다.  농장주들은 분노를 터뜨렸다. 영국 정부의 조처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던 권리 대부분을 박탈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농장주들은 '그들의 소유권에 대한 침해'에 격렬히 항의했다. 변혁의 조짐에 들뜬 노예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1808년 영국령 가이아나, 1816년 바베이도스 등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폭동이 일어났다. 1823년 가이아나에서는 노예 1만 3천 명이 백인 고용주들을 감금하고 두 명의 관리인을 살해하는 일이 일어났다. 군대가 동원되어 100명의 흑인 사망자를 낸 다음에야 사태는 진정되었다.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노예 47명이 교수형을 당했고, 세 명의 노예에게는 1000대의 채찍질형이 언도되었다. 1832년에는 자메이카에서 5만 명의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겁에 질린 농장주들은 영국에서 독립하여 미국과 합병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노예제도의 폐지가 가결되었다. 흑인들은 기쁨에 휩싸였고, 농장주들은 사업 도산을 눈앞에 두고 불안에 잠겼다1833년 8월 29일, 영국 하원에서 노예제도 폐지안이 가결되었다. 농장주들은 2000만 파운드의 배상금(그들 소유 노예들의 몸값 절반에 상당하는 금액)을 수령했다.  노예들은 예전 작업시간의 4분의 3 정도만 일을 하며 7년간 도제 노릇을 했다. 6세 미만의 모든 아동들은 즉시 노예신분의 굴레를 벗었다.  그 다음은 프랑스의 차례였다. 논쟁가 빅토르 셸셰르는 아메리카와 서인도 제도를 둘러본 뒤 노예제도의 폐지를 위해 전념했다. 무려 20년의 삶을 노예제도의 폐지에 바친 것이었다. 1848년 임시정부의 해양서 차관이던 그는 프랑스 식민지의 노예제도 폐지안을 가결시켰다. 다른 국가들도 약간의 간격을 두고 신속히 뒤를 따랐다.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인 1865년 1월 31일, 13차 개헌으로 노예제도는 폐지되었다.  농장주들은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농장주들은 아시아에서 데려온 '자유 노동자'들로 흑인들을 대체하려 했다. 중국과 인도 부근 지역에서 100만의 노동자들이 건너왔다. 이들의 유입이 두드러졌던 곳은 영국령과 네덜란드령 가이아나 지방, 트리니다드섬, 모리스섬, 그리고 남아프리카였다.  브라질 남부의 커피 농장에서 흑인노예를 대신한 무리는 유럽인들(이탈리아인, 독일인, 스페인인, 포르투갈인)이었다. 그 지역의 기후는 이들에게 적합했다. 그들은 언젠가는 작은 농자의 소유주가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일했다.  이제 해방노예들도 생계 유지가 가능할 정도이지만 작물을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 소규모 자영농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나마 농지가 없을 경우에는 전에 속해 있던 농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당당한 자유 노동자로서였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사탕무가 풍부하게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식민지에서의 사탕수수 농장은 사실상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노예교역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형세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중세 말엽만 해도 아프리카는 지중해를 향해 열려 있었고 세력을 떨치던 국가는 내륙에 자리잡은 사헬 지역과 사바나 지방에 있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아프리카는 대서양을 향해 돌아섰다. 남자 여자 구분할 것 없이 모두 노예로 잡혀가버린 내륙의 국가들은 쇠퇴했고, 노예매매업을 이용하여 이득을 챙긴 대서양 연안의 국가들이 번성했다.  한편 노예교역은 노예상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새로운 사회현상을 아메리카에 남겨주었다. 아이티, 자메이카, 트리니다드 토바고 등 흑인 국가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수립되었다. 미국은 폭증하는 흑인 청소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노예 후손들의 음악, 흑인 영가와 재즈, 아프리카-쿠바 음악, 브라질의 삼바와 같은 문화적 유산은 그야말로 전세계가 공유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서양인의 '흑단나무' 무역이 종말을 고한 뒤에도 노예제도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회교도들의 노예매매는 20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1963년까지도 노예제도가 존속했으며, 모리타니 회교공화국은 1980년에 이르러서야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1926년, 국제연맹의 주관 아래 노예문제에 관한 국제협약이 조인되었다. 1948년 12월 10일 파리에서, 국제연합은 다음과 같이 규정된 세계 인권헌장의 제4항을 채택했다. "어느 누구도 노예상태나 예속상태에 놓여서는 안 된다. 그 형태가 무엇이든 모든 노예제도와 노예매매는 금지된다.” 여기에 48개국이 찬성했고 8개국은 여러 이유로 기권했다.  오늘날에도 국제연합에는 노예제도 위원회가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메카 성지순례를 이용하여 여전히 아프리카인들이 팔려가고 있음을 가만할 때 위원회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노예제도는 인종차별주의의 뿌리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인종차별주의는 노예제도가 남긴 가장 큰 폐해이다어쨌거나 '노예제도'라는 이름은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지만 비극적이기 그지없는 이 제도의 역사가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 것은 아닐까?  1816년, 뉴올리언스에서는 공공장소에서 흑인과 백인을 격리하는 조처들이 승인되었다. 흑인사회 전체를 통제하고, 그들의 전적인 굴종을 얻기 위해 노예제도 옹호론자들은 흑인들에게 열등감을 주입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흑인을 세뇌하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들이 설복당하곤 했다.  노예제도가 남긴 가장 큰 악덕은 천부적으로 우월한 인류가 존재한다는 그릇된 생각을 심어준 것이다. 1624년 신대륙에서 태어난 첫 흑인 아기가 제임스타운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그 아이는 여느 아이들과 같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우리 모두가, 제임스타운의 그 아이가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는 아이였다고 그런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믿게 될 때, 노예제도는 인간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기록과 증언  노예상인, 농장주, 노예선 선장의 이야기와 증언 :  포획되어 농장으로 끌려오기까지, 흑인노예의 처우는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흑인법전'은 이론상으로는 흑인 학대 방지를 목표로 삼았지만 그 법이 제대로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불의와 반란-시장에서 들여온 동물만큼이라도 흑인들이 행복하다는 농장주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면, 농장주들은 쉽게 나를 그들 편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대를 받은 쪽은 동물이다. 노예들을 대할 대만큼 혹독하게 황소를 벌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자유인의 폭력에 대응할 권리가 노예에게 있을까? 만일 그랬다간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캡프랑스의 시장에서 백인 여자와 말다툼을 벌이던 흑인 여자가 감히 상대의 따귀를 쳤다. 그녀는 곧 붙잡혀서 죄값을 치렀는데, 죄값이란 교수형이었다. 백인들은 제멋대로 유색 인종을 두들겨 패고 수족을 자를 수 있다. 아버지에게 받은 노예 여섯 명의 귀를 자른 젊은이를 본 적이 있다. 자기 노예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단다. 다혈질의 어느 통 제조공은 자기 성질을 건드린 흑인들을 모두 손도끼로 찍어 죽였다. 오리 한 마리를 훔쳤다는 어느 흑인 여자를 채찍으로 50대 때리고 고춧가루가 섞인 레몬즙을 상처에 뿌려 부빈 뒤, 사슬로 묶어 보름간 벌판에 버려둔 것을 본 일도 있다. 모두가 그녀가 저지른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 어떤 흑인은 무모하게도 자기 주인과 싸움을 벌였다. 주인은 매질을 하기 위해 그를 붙잡았고, 얼굴을 땅에 박고 사지를 잡아당겨 말뚝에 잡아맸다. 그리고는 관리인이 교대로 500대의 채찍질을 했다....  이런 그들이 지도자도, 스스로를 보호할 무기도, 힘을 한데 모을 신중한 계획도 없이 일으킨 비난은 쉽사리 진압되게 마련이었다. 뱅자맹 프로사르 '노예들의 입장', 1789년  -반대하는 아들-어느 날 방문요청을 받고 상점에 간 일이 있다. 여러 명의 노예들을 보여주었는데, 그중에는 20-22세 가량으로 보이는 여자 노예가 한 명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녀의 유방은 다소 처지긴 했지만 부풀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아이를 잃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상인에게 그런가 하고 물어보았다. 주인은 그녀가 아이를 낳은 적도 없다고 답했다. 그녀는 말을 하면 죽음으로 그 죄값을 치러야하는 처지였으므로, 나는 직접 그녀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그녀의 젖꼭지를 눌러보자 젖이 흘러나왔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음이 확인된 셈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아기가 있다고 고집했고 상인은 계속해서 내 주장을 부인했다. 내 고집에 짜증이 났던지 주인은 그렇다고해서 내가 그 여자를 사지 않을 까닭이 없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그녀의 아기를 늑대밥으로 주어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몹시 놀랐고 그 끔찍한 짓에 치를 떨며 상점을 나설 참이었다. 그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내가 그 아이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를 내게 넘겨주는 조건으로 그 아이의 엄마를 사겠다고 상인에게 말했다. 그는 곧 아이를 내게 데려왔고 나는 그 즉시 아이를 애엄마에게 돌려주었다. 어떻게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할지 모르던 그녀는 흙을 한 줌 쥐어 자신의 이마에 뿌렸다.  올바른 생각을 지닌 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모두 나처럼 처신했을 것이다. 비록 당연한 일을 한 뒤였지만 마음은 날 듯이 가벼웠다. 프뤼노 드 폼므고르쥬 '니그리시 소묘', 1789년  -식민지 농장에서의 흑인들의 생활... 흑인들이 살고 있는 오두막과 오두막 사이에는 15-20피트(옛 계량단위, 약 32. 4cm:역주) 정도의 간격이 있는데 흑인들은 그곳에 돼지와 가금류를 친다. 그들의 침대는 벽에 낸 홈안에 놓이는데 그 침대라는 것은 받침목 위에 널빤지 두세 장을 놓은 것이다. 간혹 그 위에 라타니에(종려과의 식물:역주) 잎사귀나 마니옥 짚으로 짠 거적을 덮기도 한다. 베개로 쓰이는 것은 작은 통나무이다. 살림이라고는 호리병을 잘라 만든 그릇 몇 개, 걸상 하나, 탁자 하나, 나무 집기 몇 점뿐이고, 옷이라고는 윗도리와 잠방이 한 벌이 전부이다. 신발을 신는 일도 없다. 하지만 모아둔 돈이 있으면 축일에는 한껏 차리고 뽐낸다.  흑인들의 주식은 마, 바나나, 마니옥, 감자 등이다. 주거지역마다 이러한 작물을 공동경작하는 밭이 있다. 작물은 작황에 따라 노예들에게 분배된다. 주거지역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는 노예들에게 분배된다. 주거지역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는 노예 개인에게 주어진 얼마간의 농경지도 있다. 그곳에서 난 작물은 자신들이 먹을 식량으로 쓰거나 내다 팔아도 상관이 없다. 노예들은 점심을 차려 먹고 난 뒤의 짜투리시간과 축일에 그 땅을 돌본다. 거주지역이 읍내에서 가까운 곳에 살면서 먹고 남는 식량이 있는 노예들은 일요일에 채소와 과일, 가금류를 챙겨 읍내로 나선다. 그것을 팔아 번 돈은 그들의 생활고를 다소 덜어준다. 하지만 오직 그들의 농원에서 재배한 작물로만 호구지책을 세워야 하는 경우, 탐욕스런 주인이 식량을 가꿀 여유를 주지 않고, 게다가 가뭄으로 그 보잘것없는 수확을 망치기라도 하면 그들의 생활은 정말이지 끔찍해진다. 일반 행정을 맡아보는 행정관들과 지역 담당관들이 1년에 네 차례 프랑스 식민지의 식량공급 상황을 순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도 허울에 그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뱅자맹 프로사르 '노예들의 입장', 1789년  -산토도밍고의 농장에 관한 노예상인들의 증언-"선생님, 지난 10월 1일에 보르도에서 보낸 서신을 잘 받아보았음을 알려드리며 아울러 쇼베 씨도 잘 도착하셨음을 전합니다. 쇼베씨는 도착 즉시 프리에씨가 부탁하신 대로 리모나드에 있는 샤펠 후작 소유의 경작지에 관해 조회를 했습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토질은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2) 30만에서 34만의 설탕 공급이 가능합니다.  3) 최근에 보다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4) 연간 열 명의 검둥이를 보충하여 300명을 유지하면 완벽한 관리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40만에 달하는 품질 좋은 설탕을 생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근거리에 도시와 바다를 끼고 있으므로, 생산물의 소비에 유리한 입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6)헐값으로 쳐도 110만에서 120만, 리브르 투르누와(20수 주화:역주)는 받을 수 있습니다.  7) 본 경작지에 필요한 검둥이의 수는 300명 정도입니다. 현재 이곳에 있는 검둥이들의 상태는 아주 좋습니다만 수가 모자랍니다.  결론적으로 이 경작지는 이곳 캡에서 가장 훌륭한, 수익성 높은 곳입니다. 검둥이들의 거처를 다소 손봐야 하기는 하지만 그리 심각한 정도는 아닙니다.  관리에 대해 말씀드리면 대리인에게는 통상 총수익 또는 순수익의 10% 정도를 지급하고 있습니다. 관리인에게는 다른 방식이 적용됩니다. 능력급으로 3000-4000리브르 투르누와에 합의를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이 요구하신 사항에 답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바라고 프리에 씨께서 이 제당사업을 인수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마르세유에 있는 귀사와의 거래를 희망합니다. 대우만 잘해 주시면 많은 사탕수수를 공급할 수 있을 겁니다. 저희 물건이 가장 많이 닿는 항구가 마르세유이기 때문에 1년에 20만에서 30만 정도는 공급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쇼베와 라파이가 끌로드 프리에게 보낸 편지, 캡  문학작품에 비친 노예들:  17세기 말 이후, 서양문학에서 노예제도가 차지한 비중은 적지 않았다. 몽테스키외나 볼테르같은 철학자,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와 같은 소설가, 라마르틴같은 시인 들이 노예제도를 그들 작품의 소재로 다루었다.  -선량한 흑인들-아이들은 도멩그가 그들에게 달려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 곁에 이른 이 착한 흑인은 기쁨으로 눈물을 흘렸고 아이들 역시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이윽고 정신을 가다듬은 도멩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오, 나의 어린 주인님들! 어머니께서 얼마나 걱정하시는지 아십니까? 마나님들께서 미사에서 돌아오셨을 때 주인님들이 보이지 않자 얼마나들 놀라셨던지! 농장귀퉁이에서 일을 하던 마리도 주인니들이 어디로 가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어디에 계신지 알지도 못한 채 농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요. 결국은 주인님들의 옷가지를 가져다 피데레게 냄새를 맡게 했습니다. 이 기특한 짐승이 제 뜻을 알아들었는지 즉시 주인님들의 자취를 쫓기 시작하더군요. 녀석은 쉬지 않고 꼬리를 치며 저를 누아르강까지 이끌었습니다. 바로 그곳의 한 주민에게서 주인님들이 도망친 여자 검둥이를 그 주인에게 데려다 주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검둥이의 주인은 그 여자 검둥이를 용서하기로 주인님들께 약속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용서라니요! 사슬로 발목을 묶이고 통나무까지 달고 있는 그 여자를 보았습니다. 세 개의 갈고리가 달린 쇠목걸이까지 목에 걸고 있었습니다. "...  폴과 비르지니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발이 온통 붉게 부어올랐다. 도멩그는 그들을 두고 멀리 도움을 요청하러 가야 할지 그들과 함께 그곳에서 밤을 지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가 말했다. "두 분을 모두 제 팔에 안을 수 있었던 때가 언제였나요? 이제 두 분은 너무 커버렸고 저는 너무 늙었군요.” 그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 도망친 흑인의 무리가 20보 남짓한 곳에 나타났다. 폴과 비르지니에는 다가와 우두머리가 말했다. "착한 백인 아이들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아침에 누아르강에서 너희들이 흑인 여자와 함께 가는 것을 보았다. 너희들은 악독한 주인에게 그 여자의 용서를 빌러 가는 길이었지. 그 보답으로 너희들을 우리 어깨 위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 주마.” 그가 손짓을 하자 그들 중 가장 건장한 네 명이 나뭇가지와 덩굴로 들것을 만들었고, 폴과 비르지니를 그 위에 태운 뒤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도멩그는 횃불을 들고 앞장서 걸었고 흑인들은 모두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길을 떠났다. 그들은 폴과 비르지니를 축복했다.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 '폴과 비르지니', 1787년  -흑인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들-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사들인 흑인을 노예로 부려먹으며, 이를 변명하기 위해 이 불행한 자들이 사형선고를 받은 범죄자들, 혹은 전쟁포로들이라고 말한다. 유럽인들에게 팔려오지 않았다면 죽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몇몇 작가들은 흑인매매를 마치 인류애의 발현이라도 되는 듯 우리에게 그려보인다. 과연 그런지 살펴보자.  1. 이러한 이야기는 증명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사실처럼 여겨지는 것도 아니다. 유럽인이 흑인들을 사들이기 전에 아프리카에서는 모든 죄인의 목을 잘라 죽였다고?  옛날 어느 동양의 도적 무리가 그리하였듯이, 흑인들은 결혼한 여자뿐만 아니라 아직 어린 소녀까지 쳐죽였다고 말들 하지만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그와 같은 만행을 저지른 민족은 없었다. 우리가 아프리카로 흑인들을 구하러 가는 덕분에 이제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를 죽이지 않고 팔게 되었다고? 전쟁을 벌인 양측 모두 포로를 교환하기보다는 쳐죽이는 쪽을 택했을 것이라고? 이런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을 믿게 하려면 신빙성 있는 증언이 필요한데 우리에게 증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노예무역에 관계했던 이들밖에 없다. 나는 이런 작자들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들을 믿을 수는 없다. 고대 로마에도 인간매매를 업으로 삼았던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아직까지 욕된 것으로 남아 있다.  2. 흑인을 사들이는 것이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되팔기 위해서든 노예로 부리기 위해서든 흑인들을 사들이는 일이 죄를 저지르는 것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러한 짓은 암살자에게 쫓기는 가엾은 이를 구한 뒤 팔아넘기는 자의 소행과 다를 바가 없다. 유럽인이 아프리카인으로 하여금 더 이상 죄인들을 죽이지 못하게 했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행인을 죽이는 짓을 그만두고 자기와 함께 행인을 팔아넘겨 이득을 챙기자고 강도를 설득하는 자의 소행과 같은 것이다. 이런 일을 자행한 사람을 어느 누가 도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떠한 보상을 얻기 위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자, 자신이 구한 자의 재산이나 노동력을 노리는 자.... 콩도르세 '흑인 노예제도에 관한 성찰', 2, 1781년  -설탕의 대가-그 도시로 향하던 도중 그들은 땅에 쓰러져 있는 흑인 한 사람을 만났다. 그 흑인은 푸른색 베잠방이 하나만을 아랫도리에 걸치고 있었고 왼쪽다리와 오른손이 잘리고 없었다.  캉디드가 그에게 네덜란드 말로 물었다. "오, 맙소사! 이보게, 이렇게 끔찍한 꼴로 무얼 하고 있나?"  흑인이 대답했다. "주인이신 방데르당뒤르 나리를 기다리고 있습죠. 그분은 아주 유명한 도매상입니다요.”  캉디드가 다시 물었다. "그래 그 방데르당뒤르란 양반은 자네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가?"  흑인이 말했다. "예, 나리. 이건 아무것도 아닙지요. 주인 나리는 1년에 입을 옷이라고는 딱 두 벌, 이 베잠바이만 줍니다요. 제당소에서 일할 때 소인네들이 돌절구에 손가락을 덥석 물리기라도 하면 주인 나리는 손목을 아예 끊어 버립니다요. 거기서 도망치려다 붙잡히는 날이면 다리마저 댕강 잘리고 맙지요. 소인은 두 가지를 모두 당했습니다요. 유럽의 나리들께서 설탕을 드실 수 있도록 소인들이 치르는 대가입죠. "볼테르 '캉디드', 19장  -팔아 치우려는 것이 내 아이라니!-문으로 다가서자 엘리자는 안에서 흘러 나오는 이야기를 또렷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노예상이 몇몇 노예들의 매각을 권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좀더 들어보기 위해 문 앞에 있고 싶었지만 여주인이 그녀를 불렀다. 주인에게 가봐야 했다.  그 이름들 중에는 그녀의 아이도 있었던 것 같았다. 잘못 들었던 것일까? 가슴이 터질 듯 뛰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이를 힘껏 가슴에 안았다. 영문도 모르는 아이는 놀라서 엄마를 돌아보았다.  "얘, 엘리자! 오늘 무슨 일 있었니?" 여주인이 물었다. 달라는 실크 드레스 대신 캐미솔을 내놓지를 않나 재봉대를 넘어뜨리지를 않나 엉뚱한 실수를 연발하는 그녀를 보고 한 말이었다.  갑자기 엘리자는 하던 일을 멈추었다. "아! 마님.” 하늘을 향해 눈길을 옮기며 탄식을 내뱉은 그녀는 곧 울음을 터뜨렸고 의자에 털썩 주저않아 흐느꼈다.  "이런, 엘리자, 이 가엾은 것....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아! 마님, 마님! 주인님께서 노예상과 하시는 이야기를 엿들었어요.”  "정신이 나갔구나, 그게 언제야?"  "아! 마님, 주인님께서 우리 헨리를 파시려는 걸까요?"  의자에 몸을 맡긴 그 가엾은 여인은 다시 오열을 터뜨렸다.  "그런 일은 결코 없어! 어리석은 것! 네 주인님께서 남부의 노예상과는 거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잖아. 못되게 굴지만 않으면 노예를 파는 법이 없는 분이라는 것도.... 게다가 이 바보 같은 것아, 누가 네 아들 헨리를 사려고 하겠니? 무얼 하려고? 네 눈에나 그렇지 다른 사람들 눈에도 네 아들이 예뻐보이는지 아니? 자, 이제 그만 울고 옷이나 입혀줘. 머리손질도 좀 해주고.... 전에 가르쳐준 것처럼 뒷머리를 예쁘게 땋아줄 수 있겠지? 그리고 이제 문 밖에서 엿듣는 짓은 절대 하지 마.”  "알겠습니다, 마님... 그런데 마님, 마님께선 그걸... 저, 그걸 허락하지 않으시겠지요?"  "정말 끈질기구나! 그래, 허락 않으마. 허락하지 않을게. 왜 같은 소리를 계속해? 차라리 내 아이를 팔면 팔았지 그런일은 없을 거야! 엘리자, 어쨌건 넌 그 아이를 너무 대단하게 여기는 것 같아. 네 아이를 사려고 한다는 자가 이 집에 코빼기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마.”  여주인의 확고한 어조에 한시름을 놓은 엘리자는 재빠르게 그녀에게 옷을 입혔고 쓸데없는 걱정을 한 자신을 비웃었다.  셸비 부인은 인품이나 총명함에서 흠잡을 곳 없는 훌륭한 여자였다. 특별히 숭배하는 그 어떤 것도 없는 그의 남편도 그녀에게만은 대단한 경의를 품고 있었다. 해리엇 비처 스토 '톰 아저씨의 오두막', 1850년  -흑인들을 노예로 부릴 수 있는 권리-흑인을 노예로 부릴 권리를 옹호해야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아메리카의 원주민을 몰살시킨 유럽 민족들은 그 광대한 땅을 개간하기 위해서 아프리카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야만 했다. 설탕의 원료가 되는 식물을 경작하는 데 노예를 사용하지 않으면 그 값이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노예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빛이고, 코는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져서 동정할 여지마저 없는 이들이다. 누구도 그토록 지혜로우신 하느님께서 영혼을, 그것도 착한 영혼을 그런 시꺼먼 육신에 넣어주셨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피부색이 인류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생각이다. 후손을 염려하여 거세를 서슴지 않는 아시아 사람들조차 우리 백인과는 관계를 갖지만 흑인과는 여전히 관계를 삼가고 있다.  머리카락의 색깔로 피부색을 판단하기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철학자라 할 이집트인들에게 머리카락의 색깔은 매우 중대한 사항이었다. 그들은 머리카락이 붉은 포로들은 모조리 죽였다.  흑인들이 상식에서 벗어나는 인종이라는 증거는 그들이 대개의 경우 금목걸이보다는 유리목걸이를 선호한다는 점이다. 문명화된 국가에서는 금이 귀중한 것으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이들을 인간이라고 가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이들을 인간으로 가정하면 우리들 자신 또한 하느님의 자식이 아니라고 믿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프리카인에게 행하는 약간의 불공정함을 지나치게 과장했다. 만일 그 불공정함이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면, 그토록 많은 쓸데없는 협정들을 서로 맺고 있는 유럽의 군주들이 연민과 자비에 입각한 하나의 일반 협정을 세우지 않았을 리 없다.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15권, 5장, 1748년  흑인법전:  프랑스인들이 법령으로 정한 1685년의 '흑인법전'은 무엇보다 식민지에서 천주교의 세력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흑인법전은 흑인들을 여전히 동산의 일종으로 취급했고 주인의 육체적 학대에 대응하는 어떠한 보호대책도 세워주지 않았다. 다음은 그 몇몇 주요 조항들이다.  -흑인법전-...  2. 우리 식민제도의 모든 노예들은 로마 교구 천주교의 세례를 받고 그 교육을 받을 것이다. 새로 도착한 흑인을 구입한 거주민들은 늦어도 1주일 안에 위에서 밝힌 제도의 총독이나 감독관에게 그 여부를 보고해야만 한다. 이를 어길 때에는 자유재량에 따라 벌금형을 과한다. 총독 또는 감독관은 적당한 시기에 노예들을 등록하고 그들에게 세례를 내릴 수 있도록 필요한 지시사항을 하달할 것이다.  3. 로마 교구 천주교를 제외한 모든 다른 종교의 예배를 금한다. 위 사항을 위반하는 자는 우리의 명령에 거역, 반항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에 응당하는 처벌을 내릴 것이다. 또한 여하한 목적의 다른 집회를 금지한다. 우리는 이러한 집회를 불법적이고 체제 전복적인 비밀집회로 간주하고 마찬가지 처벌을 내릴 것이다. 이러한 처벌은 노예에게 집회를 허락하거나 묵인한 주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5. 개신교 신도들은 자유롭게 로마 교구 천주교 예식에 따라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우리 신도와 그들의 노예에게 어떠한 피해를 주어서도 안 되고 방해해서도 안된다. 이를 위반할 때에는 본보기로서 처벌될 것이다.  6.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신민은 로마 교구 천주교가 준수하는 주일과 축일을 어겨서는 안 된다. 이런 날에는 신민들 모두 작업을 해서는 안 되고 그들의 노예에게 작업을 시켜서도 안되다....  7. 마찬가지로 주일이나 축일에는 노예시장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상품시장이 열릴 수 없다. 이를 어길 경우 모든 물건을 압수하고 해당 상인을 자유재량에 따라 벌금형에 처한다....  11. 성직자가 주인의 허락을 증명할 수 없는 노예들의 결혼식을 주재하는 일을 엄격히 금한다. 또한 주인은 노예에게 원하지 않는 결혼을 강요할 수 없다.  12. 결혼한 노예의 주인이 각기 다를 경우,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남편의 주인이 아니라 아내의 주인이 소유한다.  13. 노예인 신랑이 자유인인 신부와 결혼하였을 경우, 그 자식들은 아버지의 노예신분과 관계없이 어머니의 신분을 획득하여 자유인이 된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자유인이고 어머니가 노예일 경우 아이들은 노예가 된다.  14. 노예의 주인들은 세례를 받은 노예의 장례를 성지 또는 그들을 위해 마련된 공동묘지에서 치러줘야 할 의무가 있다.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노예는 밤에 죽음을 맞은 장소 부근의 들판에 매장한다.  15. 노예들은 커다란 몽둥이를 포함한 어떠한 위협적인 무기도 소지할 수 없다. 이를 위반할 경우 채찍형을 내리고 그 무기는 압수하여 그 소지를 발견한 자의 소유로 한다. 하지만 주인의 명을 받고 사냥에 나선 경우와 허가증, 혹은 확인서를 소지한 경우는 예외로 한다....  18. 어떠한 이유, 어떠한 경우를 불문하고 노예의 사탕수수 매매를 금지한다. 주인의 허가를 받은 경우에도 노예는 채찍형에 처하고 그를 허락한 주인과 구매자에게는 10리브르 투르누아를 벌금으로 부과한다.  19. 노예들은 주인의 승인을 명시하는 허가증이나 확인서 없이는 어떠한 종류의 식량도 시장에 내놓아서는 안 되고, 매매를 목적으로 가정집을 가가호호 방문해서도 안 된다. 이에는 과일, 야채, 가축사료용 건초와 수가공품도 포함된다. 이에 대하여 주인은 판매금 반환 없이 구매자에게 거래된 물건의 상환을 요구할 수 있고 6리브르 투르누아에 달하는 사죄금을 받을 수 있다.  21. 식민 제도에 거주하는 모든 우리 신민들은, 주인이 발급한 허가증이나 확인서가 없는 물건을 노예들이 지니고 있다면 임의로 그것을 빼앗을 수 있다. 빼앗은 물건은 그 주인의 거주지가 본조항을 위반한 노예가 적발된 장소로부터 가까운 곳일 경우에는 즉시 주인에게 인도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즉시 예치소에 위탁하고 주인에게 통고조치한다.  22. 주인은 자신이 소유한 노예 가운데에서 10세가 넘는 노예에게 다음과 같은 양식을 매주 지급해야 한다. 파리 도량형으로 두 단지 반의 마니옥 가루, 또는 하나에 2. 5파운드 이상 나가는 카사바 열매 세 개, 또는 이에 상당하는 다른 식량, 2파운드의 절인 쇠고기, 또는 3파운드의 생선, 또는 이에 상당하는 다른 식량, 젖을 뗀 뒤 10세까지의 아이들에게는 위에서 밝힌 정량의 절반을 지급해야 한다.  노예제도의 폐지:  1865년, 흑인 해방이 최종적으로 선언되고 300만 명에 이르는 노예들이 자유를 찾았다. 하지만 노예들의 4분의 3은 문맹이었고, 땅도 돈도 일도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노예제도의 철폐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했던 한편, 새로운 문제들을 던져주었다.  -링컨의 노예해방 발표-"... 미합중국 정부와 그 권위에 대항하는 무장폭동이 진행중인 이 시기에 미합중국 육해군의 총사령관으로서 그리고 이 폭동의 진압을 위한 불가피한 전쟁의 책임자로서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본인 미합중국의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공표된 바와 같은 본인의 행동방침에 의거하여, 1863년 1월 1일부로 미합중국의 여러 주들과 이들 주의 관할지역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타인에게 귀속되어 있던 모든 이들이 자유를 되찾고 앞으로도 자유로울 것임을 선언, 명령하는 바이다. 이를 위해 육해군 당국을 포함한 미합중국 행정당국은 이들의 자유를 인정할 것이고 유지시킬 것이다.  이에 당부하거니와 자유를 얻은 이들은 합법적인 자기방어를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폭력을 자제해야 한다. 또한 생활에 필요한 경제적 수단을 얻기 위해 가능한 일자리가 있을 때마다 성실히 노동에 임하기를 요청하는 바이다.  이에 덧붙여 상기인들은 여건이 허락하는 한에서 미합중국 군대에 입대할 수 있음을 공표하여 알린다. 이들은 요새나 요새화된 진지, 여러 시설, 또 다른 장소의 주둔부대를 위해 복무할 수 있고 방위를 위해 동원된 모든 종류의 선상에서 복무할 수 있다.  본인은 군사적 필요성에 따른 본조치가 미합중국 헌법을 준수하는 합법적인 것이며 또한 정의로운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이에 대한 전인류의 분별있는 평가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가호를 빈다. "링컨 1862년  -노예제도가 철폐된 뒤의 한 노예의 증언-전쟁의 끝, 그것은 마치 군인들이 손가락을 꺾어 뚝뚝 소리를 나게 하듯 급작스레 찾아왔다. 도처에 군인들이 있었다. 기마병, 보병, 곳곳에서 무더기로 밀려드는 병사들, 그들은 모두 노래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금빛 구름 위를 걷고 있었다. 할렐루야!  언제까지나 단결하기를!  만세, 여보게들, 만세!  가난에 찌들게 되겠지.  하지만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겠네.  자유를 위한 전쟁의 함성을 목청 높여 외치네.  모두들 열광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우리를 그토록 충만하게 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충만감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자유로웠다. 백인들도 더 이상 우리의 자유에 분개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가드프리 하지슨  마지막 노예상인들:  수세기 동안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던 노예제도가 단번에 사라질리 만무하다. 아직도 갈 길이 멀고 멀다. 20세기까지도 전세계 도처에서 여러 목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노예제도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노예들과의 만남-앞서간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전해준 노정을 도중에서 변경하고 끊임없이 지도를 수정해야만 했던 말 그대로의 탐험, 그 발견의 연속, 당시에 경험한 믿을 수 없는 장관을 나는 하나하나 그려낼 수 있다. 그 강렬하고 매혹적인 기억들은 영원히 나의 기억 속에, 감각 위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내혈한이나 감각이 마비된 자가 아니라면 고독, 아름다움, 죽음의 계시와 같던 그 광경이 뇌리에 각인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용인 둘과 그 젊은 길잡이가 바위투성이인 침침한 협곡의 입국에서 우리 일해오가 다시 합류했다. 우리는 얼마 안 있어 그곳을 통과할 수 있었다. 우리 앞에는 또 하나의 텅 빈 고원이 펼쳐졌다. 그러자 길잡이는 온 길을 되돌아 협곡의 중간 지점에 있는,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만한 비밀통로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는 그 협로를 앞에 두고 당혹감을 느끼며 우뚝 멈춰 서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하찮은 총솜씨를 지닌 자라 할지라도 그곳에 들어선 우리 일행을 몰살시킬 수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오래 매달려 있을 겨를은 없었다. 그 좁은 틈바구니에서 사이드가 나타났다. 그는 우리가 데려온 통역에게 말했다. "목소리를 듣고 우리 친구들이라는 것을 알았소. 따라들 오시오.”  그 틈새의 길은 50m 가량 이어졌다. 우리가 아라구바 마을에서 이미 본 적이 있는 한 파수가 그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지형에 가려져 있던 불길이 어슴푸레함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 불길 주위에서 노예임을 알 수 있는, 아랫입술이 두꺼운 이들의 형체를 알아보고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먼 길을 걸어왔던 것은 그들을 뒤쫓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신비에 싸여 있던 그들을 마침내 발견한 참이었다.  여자 일곱, 남자 넷, 도합 열한 명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멍하니 불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간이 그들은 만신창이가 된 발을 주무르곤 했다. 그들에게는 족쇄를 채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다나킬 사막이 어느 누구보다도 간수역할을 확실히 수행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간의 모든 피로와 위험을 감수한 대가로 주어진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새로운 운명을 향해 몇 주간을 쉴새없이 걸어온 그들은, 순단의 초원에서 태어나 인간사냥꾼들에게 붙잡힌 뒤 사이드에게 팔려온 사람들이었다. 얼빠진 듯, 무관심한 태도로 그들은 잠들기 전에 제공될 먹을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셀림의 포획 솜씨-셀림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하루종일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가볍게 떨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것은 문명에 길든 사람이 원시적인 환경으로 되돌아갔을 때면 느끼게 되는 거룩한 감동이자 흥분이었다.  새벽이 밝아왔다. 셀림은 두르고 있던 면포를 풀었고 그가 미리 정해 놓은 협곡의 입구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배를 깔고 누운 그는 긴장한 근육의 깔고 누운 그는 긴장한 근육의 실룩거림조차 없이 오솔길에 눈길을 고정하고 있었다. 전날, 한 무리 염소떼가 지나갔던 곳이다.  우리는 숨조차 쉴 수 없게 하는 이름모를 공포에 사로잡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곧 그 이유를 알 듯했다.  이른 햇살이 강의 물결을 비추기 시작했을 때 산에서 희미한 방울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던 그 소리가 점점 또렷해짐에 따라 불안도 가중되었다. 염소들이 지나갔다.  순간 셀림이 뛰어올랐다. 그것은 정말 야수의 몸놀림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었다. 튀어오를 때에도, 땅에 내려닿을 때에도 소리라고는 나지 않았다. 그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한 덩어리의 근육이 공중을 가로지른 것처럼 여겨졌다.  염소떼를 뒤따르던 소녀에게는 비명을 지를 시간조차 없었다. 면포에 둘러싸여 입이 틀어막힌 그녀는 그저 작은 꾸러미에 불과했다. 조지프 케셀 '노예시장'  -길거리에서, 휴양지에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은 전세계에 있는 5000만 명의 노예들과 마주치고 있습니다-1980년 7월 5일, 마침내 노예는 공식적으로 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바로 이날, 노예제도가 잔존해 있던 마지막 국가인 모리타니 회교공화국이 인류의 요람기부터 인간을 괴롭혀온 이 재앙에 법령으로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우애로 넘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날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제네바에 있는 인권 소위원회는 그리 기뻐할 처지에 놓여 있지 않다. 여전히 열악한 생활환경에 놓여 있는 '해방된 노예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모리타니 회교공화국에만 12만 5천 명에 이르는 노예가 잔존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수차례에 걸쳐 쿠데타와 전쟁이 계속되었지만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노예상들이 노예와 젊은 처녀의 행렬을 아라비아와 인도양으로 몰아가고 있다. 유럽 여러 나라의 수도에 있는 대사들에서도 인간이 합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거부되고 있다.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거부되고 있다. 2세기 전만 해도 흑인매매의 희생자를 추산하던 단위는 10만이었다. 하지만 100만이 그 단위가 되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위험스런 조사작업을 마친 프레드 세인트 제임스는 이렇게 말한다. "어쨌거나 변하지 않은 사실은 노예들은 언제나 흑인이고 그 주인들은 언제나 백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영국에서는 1833년에, 프랑스에서는 그 15년 후에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한 세기 반이 지난 현재, 노예의 수는 당시의 11-12배로 껑충 뛰었고 그들의 생활 또한 더욱 비참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수치는 경악스러운 것인 동시에 부끄러운 것이다. 전세계의 수백만명에 달하는 인류가 착취당하고 있으며 그 절반 이상은 무자비한 고문자들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고개를 치켜 세우지 못할 이들 5000만 명이라는 순종자들의 수치에는 자발적인 남창들,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하는 아이들, 캘커타, 봄베이, 보고타, 나폴리, 방콕 또는 리우데자네이루와 같은 대도시의 입구에 들끓는 마약중독자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그 수는 거의 천문학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제4세계'라 할 이 밑바닥세계에는 금세기 초에나 상상할 수 있을 법한 말그대로의 노예들이 있다. 여자의 경우 원피스를 걷어 올리거나 블라우스를 벗어보이고 남자의 경우 바지를 벌려보인다. 모두들 이빨과 혀까지 드러내 보인 뒤에 최고 입찰가에 팔리고 있다. 시장에서 말장사가 말을 살피는 것과 다름없는 취급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공진회' 중의 하나는 마디아프라데시주의 돌푸르모레나에서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지역 신문에서는 대형 광고들이 공진회의 개회를 알린다). 게다가 그 행사를 주관하는 이는 라지브 간디의 친인척이다. 많은 경우, 경찰과 지역 당국이 국제적 명성을 날리는 노예상인과 한패를 이루고 있다.  한 지역 수사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인간시장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물 가운데에 한 명은 바하두르 랄레라는 자입니다. 언제나 베일에 가려져 있는 인물이어서 최근 사진조차 구하지 못했지요. 회교도 출신인 이 사람은 모든 사창가와 수상쩍은 유흥업소, 나이트 클럽 등을 장악하고 있는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경찰국장들, 주지사들, 부대장들이 그와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많은 이들을 매수하려 애쓰고 있고, 별다른 노력 없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 있지요. 과연 언제나 법이 제대로 수행되고 이러한 악습이 근절될까요/ 어쩌다 지역 행정관 또는 경찰이 교체되면 일제단속과 검거가 계속됩니다. 하지만 그때뿐이지요. 곧 단속활동이 뜸해지고 다시 안정이 찾아옵니다. 새로 부임한 공무원들도 서서히 부정에 맛을 들이게 되는 거지요. 고위 경찰관이 노예매매를 눈감아준 대가로 노예 한 명당 200달러를 챙기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그의 부하나 가까운 협력자들은 떡고물을 얻어먹는 것으로 만족하겠지요.”  국제연합의 인권 소위원회와 적십자의 위원들, 노예제도 반대협회의 회원들의 말에 따르면 금세기 말까지 이 어마어마한 수치는 계속 불어날 것이라고 한다. 거의 모든 문명화된 국가들이 공식적으로 노예제도를 폐지하였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인간을 팔아넘기는 도매상을 만나기가 점차로 어려워지고 있으며, 수단이나 사우디아라비아의 공공장소에서 청년이나 처녀를 파는 광경이 사라져간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거래는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20세기 말의 가장 커다란 불행이라 할 인간매매는 순교의 도시 베이루트에서, 매춘의 도시 마닐라에서, 가끔은 가장 근대화되었다는 우리의 대도시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프레드 세인트 제임스 '파리 마치', 1986년 3월호  -노예제도 및 노예매매의 실시 여부와 그 실시 양태에 관한 설문: 유사 관행인 인종차별주의와 식민주의를 포함하여-  이것은 1981년 4월, 국제연합의 회원국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이다.  '노예제도'란 한 개인이 누군가의 소유권에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구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노예매매'는 노예제도 아래에 개인을 구속하기 위한 포획, 취득, 양도 따위 모든 행위를 포함한다. 매매나 교환을 통한 노예의 취득행위, 매매나 교환을 통해 취득한 노예의 양도행위, 노예의 운송과 거래에 관련된 일반적인 모든 행위들이 이에 포함된다.    '노예제도와 유사한 제도와 관행'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포함한다.  a) 부채로 인한 예속  b) 농노.  c) 다음과 같은 사례를 유발할 수 있는 모든 제도와 관행.  1) 부모나 후견인, 가족, 혹은 제3자에게 현물 혹은 현금으로 대가가 치러지는 조건으로, 거분권을 지니지 못한 여자가 결혼 혹은 약혼을 강요받은 경우.  2) 한 여자의 남편이나 남편의 가족 또는 친척이 그 여자를 제3자에게 유상 또는 무상으로 양도하는 경우.  3) 남편이 죽은 뒤, 그 아내가 제3자에게 상속되는 경우.  d) 다음과 같은 사례를 유발할 수 있는 모든 제도와 관행, 아동 혹은 18세 미만의 청년이, 양친이나 부친, 모친, 후견인에 의해 청년 혹은 아동의 신체나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제3자에게 유상 또는 무상으로 양도되는 경우.  '강제 또는 의무작업'이라는 표현은 어떠한 제재조치의 위협을 받아, 자신의 뜻에 반하여 행한 개인의 모든 작업 또는 서비스를 지칭한다.  '인간매매와 타인의 성적 착취'라는 말의 의미는 인간매매와 타인의 성적 착취의 저지 및 폐지를 위한 1949년의 협정에서 규정된 의미와 같다....  질문 3  노예제도, 강제작업 또는 위에서 정의된 바와 같은 노예제도와 유사한 제도나 관행이 어떠한 형태로든 귀국에 존재하고 있는가? 존재하고 있다면,  1. 그 성격과 범위는 어떤가?  2. 이러한 폐단이 존재하는 원인 혹은 이유는 무엇인가?  3. 이러한 폐단을 일소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는 무엇인가?  4. 이러한 폐단을 일소하기 위해 취해진, 혹은 취해지고 있는 대칙들은 어떤 것인가?    질문 4  아동의 노동력 착취를 금지하고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귀국 정부가 취한 정책은 어떤 것들인가?    질문 5  노예매매를 저지 혹은 금지시키기 위하여 어떠한 법적, 행정적 조치들이 취해졌는가? 혹은 취해지고 있는가? 이와 다른 정책들이 시행되었는가?...  질문 6  귀국 정부 당국자들은 노예제도, 노예매매 혹은 노예제도와 유사한 제도와 관행에 맞설 개별적인 부서를 두고 있는가? 있다면 어떤 것들인가? 또 그것의 역할과 권한은 어떤가? 이 문제에 관한 법제의 적용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귀국에서 최근에 취한 행정조치는 어떤 것들인가? 벤자민 휘테이커가 제출한 노예제도에 관한 보고 국제연합, 뉴욕, 1984년  미국의 흑인문제:  노예제도 폐지 이후로, 흑백분리주의를 지지하는 백인과 흑백의 사회적 평등을 요구하는 백인(북부연합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은 끊임없이 심화되어 왔다. 악화 일로에 있던 이러한 갈등은 이제 증오로 자리잡았다. 한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더할 바 없이 폭력적인 대립을 불러왔던 이 증오감은 미국의 흑인과 백인 사이에 가로놓인 암울한 단절의 골을 더욱더 넓혀갈 것이다.  -만인이 함께하는 한 인물에 대한 추억-만약 마르틴 루터 킹이 오늘날 되살아난다면 믿을 수 없는 현재의 상황에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살아있었을 때에는, 대다수의 백인 미국인들이 그를 증오했고 몇몇 급진적인 흑인 형제들조차도 그에게 불신의 눈길을 던졌지만, 그가 멤피스에서 암살당한 지 18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위대한 미국인으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경의 증거로, 금월 셋째 월요일인 1월 20일이 시민의 권익을 위해 투쟁한 이 옛 지도자를 기리는 날로 지정되었다. 금년에 처음으로 시행되는 이 법정기념일은 1983년에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보다 앞서 이러한 영광을 얻은 이는 조지 워싱턴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뿐이다. '마르틴 루터 킹의 날'은 연중 치러지는 미국의 법정기념일 중 열번째가 되었다.  미국 내 흑인과 백인의 화합을 공고히 할 이날이 법정기념일로 정해지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미시간 출신의 민주당 국회의원인 M. 존 코니어스는 이 법안의 가결을 위해서 15년간이나 끈질기고도 힘겨운 노력을 했다. 그 결과 60년대에는 인종차별에 대항한 흑인들의 투쟁에 적대적이던 레이건 대통령도 이 입법안에 대한 처음의 반대입장을 수정,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비폭력의 사도인 이 흑인 목사를 '빨갱이 패거리'로 몰아붙인 그가 지난 과거사들을 청산하고, 이제 킹 목사를 '정의의 선구자'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인종차별주의 정책으로 악명을 떨쳤던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러스까지도 마르틴 루터 킹 추모사업을 조직화하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했다. 사실 1982년에 조지 윌러스가 주지사로 재선될 수 있었던 것은 인종차별주의적 정치신조를 버림으로써 흑인들의 표를 끌어들인 덕분이었다.  킹 목사의 '꿈', 백인과 흑인이 '한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우애로운 세상은 과연 실현되었는가? 미국의 몇몇 사회적, 경제적 현실은 그에 대한 확답을 주저하게 한다. 하지만 흑백차별에 항거한 마르틴 루터 킹이 몽고메리(앨라배마)에서 버스 승차 거부운동을 벌였던, 1955년 당시와 같은 제도적 인종차별은 확실히 사라졌다. 또한 1964년의 시민권 관련 법규 채택과 이후 몇 년간 이루어진 기타 법안들의 가결로 흑인들은 그들의 평등을 보장하는 법적 조항들을 확보했다. 작은 성과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마뉘엘 뤽베르 '르 몽드', 1986년 1월 20일  -할렘-  1920년대, 뉴욕의 흑인과 남부 출신 흑인들은 백인이 버리고 떠난 할렘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그곳의 빈 건물들을 차지했다. 1930년대에 할렘을 찾은 부부는 빈 단칸집을 얻거나 방이 몇 개 있는 집을 다른 사람들과 하루 여덟 시간 이용할 권리를 얻었다. 이제 어수선한 공동생활, 저임금, 빈곤이 그 부부를 갈라놓는다....  아무런 생활대책도 마련해 주지 않고 남편은 아내를 떠난다. 여자에게 남은 것은 밀린 집세와 먹여야 할 어린애뿐이지만 직업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일거리를 찾을 수가 없다. 절망에 가득한 그녀가 찾을 만한 곳은 흑인거주지역뿐이다. 비좁은 그 지역의 아이들은 거리를 집으로 삼고, 패거리를 이루며, 주먹과 칼로 생존하는 법을 배운다. 도박, 공갈, 매춘이 만연해 있는 그곳에는 구획마다 갈보집이 있고 포주들이 거리에 진을 치고 있다. ...  미국의 다른 어떤 특수 지역도 할렘을 지배하는 흥분을 알지 못한다. 시카고가 '블루스의 도시'로 알려지고 뉴올리언스의 부르봉 스트리트가 여전히 미국 음악의 명소로 남아 있음은 사실이다. 이곳 거리에서는, 아직 열네 살이지만 작은 악단을 결성한 미래의 '프로페서'(미국 속어로 악단 지휘자:역주)가 춤을 추고 있다. 그러나 독창적인 예술혼으로 빛을 발했던 그 시기의 할렘과 비교할 바는 결코 아니다.  할렘의 황금기가 막을 내린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였다. 무대에 공연을 올리기 위해서는 20%를 전쟁지원금으로 내야 했던 것이다. 클럽들은 부득이 공연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제퍼슨은 말했다. "이제 폭력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패싸움과 폭동이 끊이지 않습니다. 클럽과 댄스홀이 문을 닫자 젊은이들은 격분에 휩싸였습니다. 세상에 마지막 인사를 건넨 뒤 그들은 하루하루가 마치 세상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클로드 플레우테 '흑인 회고'  -1996년 10월, '블랙 팬더스'의 결의-  1.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 흑인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원한다.  2. 우리는 우리 흑인들의 완전고용을 원한다.  3. 우리는 백인이 흑인공동체를 수탈하는 행위를 중지하기 원한다.  4. 우리는 인간의 주거를 목적으로 마련된 주거지를 원한다.  5. 우리는 우리 흑인들의 교육을 원한다. 그 교육은 타락한 미국 사회의 본질을 우리 민족에게 일깨워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6. 우리는 모든 흑인의 병역면제를 원한다.  7. 우리는 흑인에게 가해지는 경찰의 폭력과 살해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8. 우리는 연방, 주, 군, 시 교도소와 구치소에 감금된 모든 흑인 죄수의 즉각적인 석방을 원한다.  9. 우리는 미국 헌법이 규정하는 바대로, 동족 또는 흑인공동체에서 선출된 자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법정에 출두한 모든 흑인들을 평결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10. 우리는 토지, 식량, 주택, 교육, 의복, 정의, 평화와 더불어 우리의 지상 목표인 투표를 원한다. 다시 말해서 민족의 운명에 관한 우리 흑인들의 의사를 명백하게 하기 위하여, '식민화된' 흑인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투표를 국제연합의 감독 아래 흑인 '식민지'에서 실시하고자 한다.  바비 실 '지킴목에서'  -쿠 클룩스 클란-  남북전쟁 당시에 설립된 미국의 비밀결사인 쿠 클룩스 클란은 흑인과 유태인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적 행위들을 격찬한다.  펄래스키(괭이와 도끼를 겸한 도구:역주) 행렬이 길모퉁이를 지날 때 한 흑인이 그곳에 있었다. 그때 말을 타고 있던, 키가 큰 한 사람이 대열에서 빠져 나왔다. 무시무시한 옷차림을 한 그는 말에서 내려 말을 잡고 있으라는 듯 흑인에게 말고삐를 내밀었다. 감히 거절할 생각조차 못 할 만큼 겁에 질린 흑인은 고삐를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기사는 자신의 머리를 어깨에서 빼내어 흑인이 내민 손 위에 올려놓으려 했다. 공포에 질린 흑인은 기다리고 말 것도 없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지금까지도 그 흑인은 당신을 붙들고 이야기할 것이다. "머리를 뽑았어요. 정말이에요. 머리를 뽑더라고요. 나리,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사실은 긴 옷을 머리 위까지 끌어올려 끈으로 묶어놓은 뒤, 머리 위에 큰 호박이나 마분지로 만든 가짜 머리를 올려놓은 것이었다. 그 가짜 머리를 모자와 함께 들어올려 마치 머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일은 더없이 쉬운 일이었다. 이러한 속임수에, 흑인들은 KKK단이 마음대로 자신들의 몸을 분리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많은 흑인들은 지금도 그것을 믿고 있다....  잡역부 자리를 놓고 흑인과 다툼을 벌여야 하는 하층 계급 백인들은 흑인에게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 사이에 알력이 발생하면 백인들은 클란(KKK단의 지부:역주)을 조직해서 경쟁상대인 흑인을 공격하고 학대한다. 예를 들어 어떤 백인이 한 흑인에게 땅을 빌려준다. 또 다른 어떤 백인이 그 땅을 원하지만 주인은 그 땅을 흑인에게 주려고 한다. 그 땅을 얻고 싶은 백인은 흑인을 벌하기 위해 이웃사람들을 모아들인다. 그들은 가면을 쓰고 그 흑인을 채찍질하여 초죽음으로 만든다....  백인들은 조 케네디라는 흑인을 쏴 죽이고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제1대 혼혈아:역주)인 그의 처를 폭행했다. 조 케네디에 대한 백인들의 불만은 그가 흑인이 아닌 여인과 결혼했다는 것뿐이었다.  가드프리 하지슨    흑인종에 대한 몽상과 환상: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검은색을 어두운 밤과 동일시했다. 옛사람들에게 밤은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 결과 검은색은 악과 동일시되었다. 그리고 근거없는 인종차별주의적 '이론'은 역사를 인종간의 투쟁으로 설명하려 했다. 오늘날의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생독립국가들의 정치적 지위가 향상되었음에도 독립국가들의 정치적 지위가 향상되었음에도 인종차별주의적 관행과 사고방식은 여전히 남아 있다.  흑인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그들의 동족을 대할 때의 것이고 나머지는 백인을 대할 때의 것이다. 흑인은 함께 있는 이가 흑인인가 백인인가에 따라 그 얼굴을 달리한다. 이러한 이중성이 식민제도의 직접적 결과임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흑인을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되는 과정으로 간주하는 다양한 이론들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도 이 이중성임을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이 사실들로 현재의 상황은 설명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고 또 이해하고 나면 모든 책임은 끝났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다음과 같은 요청을 못 들은 척함은 역사의 퇴보를 받아들임에 다름아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문제이다. "...  흑인은 깜깜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일련의 감정적 착오로 우리가 꺼내주어야만 할 어떤 세계 안에 자리를 잡아버린 이를 일컫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고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인간을 피부색이라는 장애에서 해방시키려고 애써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그 진척이 더딜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흑인뿐 아니라 백인까지도 그 대상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종류의 추상적 사고를 집요하게 살필 것인데, 많은 경우 그것이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전의 총독들이나 선교사들에 대해 어떠한 공감도 갖지 못할 것이다. 흑인을 저주하는 이드로가 마찬가지로 흑인을 찬양하는 이들도 우리에게는 '병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종족을 백인화하려는 흑인도 백인에 대한 증오를 외치는 흑인만큼이나 불행하다.  궁극적으로 흑인과 체크인은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이다. 진정으로 문제삼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해방일 뿐이다. ...  흑인은 백인이 되고자 한다. 백인은 주어진 인간의 조건을 실현하기 위해 애쓴다.  백인은 자신의 광휘에 갇혀 있다.  흑인은 자신의 어두움에 갇혀 있다....  여기에 밝혀야 할 사실이 있다. 하나는 백인은 자신들이 흑인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사실은 흑인은 자신들이 백인에 못지않은 풍부한 견해와 사고력을 지니고 있음을 어떻게 해서든 증명해 보이려고 애쓴다는 점이다.  하지만, 벗어날 길이 있겠는가?...  약 10년 전, 우리는 북아프리카인들이 유색 인종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우리는 그곳 토착민들과 접촉조차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 적의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짐작도 못 한 채, 아프리카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왔다. 몇 가지 사실들이 우리를 깊은 생각으로 이끌었다. 프랑스인은 유태인을 싫어하고, 유태인은 아랍인을 싫어하고, 아랍인은 흑인을 싫어하고... 사람들은 아랍인에게 말했다. "당신네들이 가난한 것은 유태인들이 당신들을 속여서 모든 것을 빼앗았기 때문이오.” 또 유태인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상 백인이고 베르그송과 아인슈타인을 배출한 당신들이 겨우 아랍인들과 비교될 수는 없소.” 그리고 흑인에게 말한다. "당신들은 프랑스 제국에서 가장 훌륭한 병사들이오. 아랍인들은 자신들이 당신들보다 우수하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소. "프랑츠 파농 '검은 피부, 흰 가면'  -'인종'이라는 애매모호한 개념: 피부색깔은 유전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피부색이 인종을 규정하기 위한 특징으로 자연스레 자리를 잡은 것은 그것이 가장 쉽게 눈에 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종은 엄격한 유전학적 결론에 지배되는 유전형질과 관련을 갖는다. 그런데 이 결정론은 크나큰 오해를 사고 있다.  우선 알려진 바와 달리 단 한 가지 피부색소의 농도가 여러 가지 피부색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멜라닌 색소는 그 분량만 다를 뿐 흑인종, 황인종은 물론 백인종 역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널리 인정되는 이들 인종들 간의 차이점은 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양적인 것이다. 같은 인종 내부에서도 이러한 차이는 매우 큰 폭으로 분포한다. 같은 인종에 속하는 두 개인 사이의 차이가 명백히 구분되는 두 '인종' 간의 평균적인 차이를 훨씬 능가할 수도 있다. '인종의 구적법'이란 최근의 연구에서 앙드레 랑가니는 모든 이들을 가장 피부색이 밝은 인류(북유럽인)에서 가장 짙은 인류(차드의 사라인)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배열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 중간단계로 정한 것은 두 종족(북아프리카인과 부시맨)이었다.  흑인과 백인의 결합, 그리고 그 혼혈 후손들 간의 결합에 대한 연구는 피부색의 결정이 지극히 멘델적인 방식으로 진행됨을 보여주었다. 그에 따르면 부가적 기능을 지닌 네 쌍의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물론 실제적 메커니즘은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겠지만, 이 간 단한 모델은 경험적 현상들을 훌륭히 설명한다. 이 연구의 관점에 따르면 '순수한 백인'은 밝은 피부색을 지니게 하는 여덟 개의 n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모든 중간 피부색은 b유전자의 수 x와 n유전자의 수8-x의 값으로 결정된다.  '니그로'에 속하는 미국인, '아메리칸 니그로' 그룹을 통해 이러한 유전적 모델을 확인할 수 있다. 매우 잡다한 이 그룹은 17세기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아프리카 선조들 중에 노예로 붙잡혀왔던 북아메리카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백인 주인의 아이를 낳은 젊은 흑인 여인은 한 명의 '아메리칸 니그로'를 세상에 내놓은 셈이 된다. 아메리카로 흘러들어온 많은 노예들의 고향인 베닌만 지역의 아프리카인들, 유럽의 앵글로-색슨 족들, 그리고 '아메리칸 니그로' 그룹, 이 세 그룹 각각에서 발견되는 특정 유전자의 빈도 비교 결과, 약 25%의 '순수한 백인' 유전자가 '아메리칸 니그로' 그룹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결국, 우리는 가장 명백하고 비교하기 쉬운 형질인 피부색이 우리가 지닌 유전형질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이 어떠한 생물학적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므로 피부색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의미 있는 인종분류 수단이 될 수 없다. 알베르 자카르 '다양성 찬양'  -1837년, 역사가이자 외교관이었던 프레데리크 포르탈은 색채 상징주의적 분위기로 흑인을 묘사했다-  "악과 허위의 상징인 검정은 색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색조들과 그것들이 표현하는 것의 부정일 뿐이다. 예를 들어 신성한 사랑을 의미하는 붉은색은 검정과 섞일 경우, 악마의 사랑, 이기주의, 증오, 타락한 인간의 모든 열정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검정은 오류, 허무, 모든 부정의 상징이다. 검정은 세상의 빛을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검정은 모든 죄악과 허위의 주범에게 주어졌다.”  포르탈의 영향을 받은 몽타베르는 예술가를 위한 일종의 개론을 작성했다. 여기에는 흑과 백, 두 색채에 결부된 여러 대립적 상징들이 일목요연하게 목록으로 정리되어 있다.  "백은 신 혹은 신성의 상징이다. 혹은 악마 혹은 악령의 상징이다.  백은 최고의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혹은 추악함이다.  백은 완벽을 의미한다. 혹은 결점을 의미한다.  백은 무죄의 상징이다. 혹은 유죄, 원죄, 혹은 정신적 타락의 상징이다.  길한 색, 백은 행복을 가리킨다. 불길한 색, 검정은 불행을 가리킨다.  선과 악의 투쟁은 흑과 백의 대립으로 상징된다.”  윌리엄 B. 코헨 '프랑스인과 아프리카인'  영화 속의 흑인들:  영화는 흑인과 백인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스포츠, 재즈, 그리고 최근의 오페라 무대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흑인 엘리트들에게 돌파구를 열어주었다.  -보다 검게 세탁한 할리우드-  에드윈 S. 포터의 영화 (톰 아저씨의 오두막)를 통해 상투적인 전형이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톰의 역할을 맡은 것은 얼굴을 검게 칠한 백인이었다. 두 번째로 영화화된 '톰 아저씨의 오두막'(윌리엄 로버트 데일리, 1914)은 실제로 흑인 배우인 샘 루카스를 기용했지만, 여러 전형들과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 노예제도를 비판하는, 해리엇 비처 스토의 이 소설이 적지 않은 역사적 가치를 지녔던 것은 사실이지만 1914년을 사는 사람들은 이미 그 주제에 식상해 있었다.  고정된 양식에 최초로 변화를 가져온 것은 데이비드 워크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5)이었다. 그의 방식에 따라(의도된 바는 아니었다) 그리피스는 전형들을 수정했다. 흑인은 더 이상 순종적이고 '착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피스는 남북전쟁과 그 전쟁 직후를 다루었다. 그는 무시해서는 안 될 새로운 부류의 시민들, '흑인들'의 도착을 바라보며 남부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를 묘사하고 있다.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겠지만, '국가의 탄생'은 그 인종차별적, 분리주의적 시작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에밋 J. 스캇, 조지 앤 노블 존슨, 오스카 미쇼 등 최초의 흑인 독립영화인들이 출현한 것도 바로 이 작품에 대한 반발의 일환으로서였다. 할리우드에서는 전형들이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킹 비더의 '소 레드 더 로즈'(1935), 데이비드 버틀러의 '미약한 반항'(1936)과 같은 영화에서 흑인의 모습은 대충 성실한 노예 혹은 하인으로서 여전히 묘사되었다. 하지만 존 M. 스탈의 '생명 모방'은 이러한 답습에서 벗어난 작품이었다. 1934년 작인 이 영화에서는 두 가지를 주목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상점을 함께 경영하는 흑인 여자와 백인 여자의 결합, 흑인 여자가 낳은 한결 흰 피부를 지닌 딸을 통한 인종적 장벽의 초월이다. 한편 '전원 흑인 배역'으로 제작된 앤드류 스톤의 '폭풍우'(1934)와 같은 뮤지컬 영화는 재즈를 통해 그럭저럭 흑인들의 내면세계를 표현해 주었다.  미국의 참전은 할리우드가 유통시킨 전형에 진정한 변모를 가져왔다. 1944년, 흑인 극작가 칼턴 모스와 스튜어트 헤이슬러, 프랭크 캐프러가 제작한 홍보영화 '흑인 병사'가 상영되었다. 이 영화의 제작목적은 흑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진정한 미국인임을 스스로 깨닫게 하여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에 맞서는 현대판 십자군에 참여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미합중국 건국과정에서 흑인들이 차지한 중요성이 재평가되기에 이르렀고, 흑인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찬양되었다. 또한 거북살스런 사건들은 불문에 붙여졌다(이를테면 남북전쟁), 어쨌든 '흑인 병사'는 대중매체를 통해 전달되어 흑인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쇄신하는 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조국을 위해 피를 뿌렸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이전과 같은 전형들이 스크린 위에서 그들의 모습을 왜곡하는 것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았다. 군대 내부에서의 인종차별을 적나라하게 다룬 마크 로브슨의 '용사들이 머무는 곳'(1949), 자신의 환자를 죽였다는 협의로 기소된 한 젊은 흑인 인턴이 겪는 힘겨움을 보여준 조지프 L. 맨키비츠의 '노 웨이 아웃'(1950). 아미앵에서 상영된 이 두 영화는 이러한 움직임을 나타내는 열의로 가득한 것이긴 했어도 여전히 소극적이라 할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들 중에서, 다수집단의 인종적 편견을 극명하게 드러낸 영화는, 세기 초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흑인 권투 세계 챔피언의 일대기를 그린 마틴 릿의 '반란자'뿐이다. 이 영화에서 증오에 가득 찬 백인 관리인과 뒷거래자들은 챔피언을 외국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서 타이틀을 잃게 하고 그의 영광을 산산조각낸다.  반면 가장 극명하게 인종문제를 다룬 작품은 시드니 마이어스의 '침묵하는 자'(1948), 존 캐서비츠의 '그림자'(1959), 마이클 로머와 로버트 영의 '진정한 사나이'(1964)와 같은 백인 독립영화들이었다.  특히, 로저 코먼의 '불청객'(1961)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사건의 배경은 흑인과 백인 아동의 합반을 내용으로 하는 교육법이 통과된 직후의 남부이다. 한 인종차별주의자가 폭력의 불씨를 심어놓고 사람들을 선동한다. 하지만 결국 그의 가면은 벗겨지고, 그는 쫓겨난다. 우리는 여기서 이 영화와 그보다 10년 앞서 맨키비츠가 제작한 '노 웨이 아웃'이란 영화와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주목할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문제를 야기시키는 자는 '나쁜 사람'이다. 그러나 맨키비츠의 영화에서는 아무도 그를 인정하지 않지만, 코먼의 영화에서는 백인 군중들이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한다. 이런 측면에서 '불청객'이 한층 더 솔직하게 인종차별주의를 그려냈다고 할 수 있다.  이 짧은 회고의 마지막 자을 고든 팍스에 대한 찬사로 마감해야겠다. 할리우드에서 고예산 영화를 제작하는 데 성공한 흑인 영화인, 고든 팍스는 초특급 흑인 배우들이 출연한 탐정영화 '새프트'(1970)의 감독으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그가 상투적인 흑인의 모습(헤픈 웃음, 무사태평함)을 다른 모습(육체적 힘, 공격성 등등)으로 대치했다고 여기는 순수 영화인들에게는 다소 비방적으로 들리겠지만, 고든 팍스는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 영화, 연극 등에서의 흑인에 대한 관심을 개발시키기:역주)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어쨌거나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흑인 사회의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 인물들은 흑인들도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  그는 아미앵에서 명백히 말했다.  "저의 생애를 돌이켜볼 때 저는 그 무엇에 관해서도 제가 비난받을 만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특히 상업적인 영화들을 제작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말입니다. 1960년대에 저는 '블랙팬더스'에 접근이 허용된 유일한 기자였습니다. 말콤 엑스와 함께 저는 미국을 누볐지요. 저는 그의 딸의 대부이기도 합니다. 저는 흑인들의 이익을 위해 제 의무를 다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의무를 다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의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가로서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편성에 입각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차지한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일은 피해야 하지요. 하지만 백인들은 흑인들이 흑인 거주지역에 처박혀 있는 것말고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영화를 만드는 일은 헛수고일 뿐입니다. 허공에 호소하는 것이지요. 저는 젊은 흑인들이 뛰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한 명의 흑인이 전체를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더군다나 백인들이 구해 주기를 기다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고든 팍스가 흑인들에게 남긴 교훈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할렘에서 헤어나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는 것, 지나친 야합은 피하되 모든 인류가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을 실현시키라는 것이다.  라파엘 바상 '스타픽스', 1986년 3월호  재즈:  재즈는 이제 칠순을 넘겼다. 재즈가 태어난 곳이 아프리카는 아니었다. 하지만 재즈를 창시한 이들은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잡혀온 노예의 후손들이었다. 위대한 고전 재즈는 정확히 말하기 어려운 여러 장소에서 복잡한 탄생과정을 겪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순수한 음악과 춤곡이 되기 이전의 재즈는 노래, 리듬, 시, 종교였다는 것이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일군의 흑인들이 서인도 제도에서 자유롭게 찾아들었고, 그들의 이국적인 리듬은 뉴올리언스라는 모태에 잠겨들었다. 다른 일군의 흑인들은 쿠바를 비롯한 카리브 해안의 섬들로 향하거나 라틴계 언어를 쓰는 나라들로 내려갔다. 오늘날 그들은 아프리카-쿠바 리듬을 현대 재즈에 융합하기 위해 돌아오게 되었다.... 아프리카 흑인들이 재즈의 핵심요소인 스윙의 바탕을 이루는 독창적인 창법을 창안할 수 있었던 것은 영어 덕택이었다. 대체로 흑인들의목소리는 인후에서 비롯되는 부드러운 소리이다. 발음의 분절이 명확하지 못한 그들 고유의 언어는 자음을 많이 사용했다. 우리에게 그들의 말은 모두 연결된 것으로, 얼버무리는 듯한 것으로 들린다. 악센트가 있는 음절이 주로 단어의 끝에 있는 라틴계 언어들을 접한 흑인들은 별다른 리듬의 변화 없이 이 언어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영어는 이러한 수월한 발음과 관계가 멀었다. 그들은 약한 음절들은 아예 발음하지 않다시피 했고 주강세 음절은 그와 반대로 더욱 강하게 발음했다....  흑인 영가를 탄생시킨 것은 18세기 말경에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제3, 제4세대 노예들이라고 여겨진다. 흑인 영가의 작곡자들은 알려져 있지 않다. 고스펠은 더욱 최근에야 생겨난 것으로 작곡자가 있는 고스펠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고스펠은 한결 율동적이고 '신들림'이라는 아프리카적 전통에 부합할 만큼 주술적이다. 일반적으로 고스펠은 전도사나 영감을 받은 신도와 청중 또는 합창단이 서로 주고받는 방식으로 부른다.  네 박자로 된 네 소절 혹은 여덟 소절을 단위로 진행되는 고스펠은 흑인공동체 내부에서 탄생했고, 오랜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이것들을 수집해서 악보로 옮기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그때부터 많은 직업 합창단들이 감동적인 노래들을 선별하여 널리 전파하기 시작했다....  블루스 스타일의 노래는 노예제도가 폐지되기 이전에도 존재했다. 오래 전부터 전해져온 노동요, 초기 영가, 축제 음악, 기분풀이 음악 등이 모두 같은 형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블루스적 울림을 지닌 것들이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 나타난 최초의 직업적인 블루스 가수들은 과거의 노예들로서 음악교육이라곤 받아본 적이 없었던, 한마디로 가수라는 명칭이 무색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기타를 둘러메고 남부를 전전하며 노래를 불렀다. 때로는 우수에 잠겨서 때로는 의연히 불행을 초극하는 듯한 유머를 배합하여, 거칠고 강렬하게 때로는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블루스를 연주했다. ...  1920년대 초부터 초기 블루스들이 녹음되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이름을 날렸다. 블루스의 여명기를 열었던 이들 중 몇몇은 오늘날까지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앙드레 프랑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