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열기 가자, 엘도라도를 향해서  지은이: 미셸 르 브리  출판사: 시공사  봉사자: 윤혜정  "독자도 출판인도 모두 우리 곁을 떠나간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해안에서 시에라네바다 산맥까지 온 나라에 '금이다! 금이다!'를 외치를 경박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밭은 갈지도 않은 채 버려지고, 집은 짓다 말고 방치되는등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였다. 오로지 삽과 곡괭이를 제작하는 일만이 예외였다. 따라서 우리는 출판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  (1848년 5월 29일자 '캘리포니아'지)    제1장 파라다이스를 찾아서  1848년 1월 24일, 제임스 W. 마셜은 여느 아침처럼 자신이 콜로마 근방의 아메리칸 강가에 존 서터를 위해 건설한 제재소의 수로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수로의 밑바닥에서 예상치 못한 광채가 그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이봐, 내가 금을 발견한 것 같아!"  며칠 뒤인 28일 저녁, 마셜을 땀에 흠뻑 젖은 채 일그러진 표정으로 포트서터에 도착했다.  그가 매우 격앙되어 있었기에 서터는 불안한 나머지 한손에 장총을 든 채 그를 맞이했다. 마셜이 자신이 발견한 금조각을 그에게 보여주자, 서터는 총을 내려놓고 백과사전을 집어들었다. 질산 실험, 아르키메데스의 강도 시험 등을 거친 결과, 그것은 명백히 금이라는 결론이 섰다. 크기가 자그마치 22캐럿에 이르는 황금! 1839년 이래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스위스인 존 서터는 당시 새크라멘토강을 따라 2만 5천 헥타르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뉴헬베티아였다. 그는 약 1000명의 백인과 인디언을 고용하고 있었고, 요새, 사병, 1만 2천 마리의 가축, 1만 5천 마리의 양, 2000마리의 말, 그리고 얼마간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이런 곳에 황금광산이란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모른다. 황금광산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달랐을지 모른다. 서터는 콜로마까지 90km를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그는 1년에 200달러에 해당하는 옷가지와 생필품을 대가로 받고 15km2의 땅을 인디언들에게 빌려주고 있었다. 행정관 메이슨으로부터 이러한 사실을 묵인받기 위해 그는 대장장이 베닛을 몬터레이로 보냈다. 대부분 몰몬교도였던 서터의 노동자들도 입을 다물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행정관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라고만 말했다. 1848년 2월 2일 조인된 과달루프히달고 조약에 따라 멕시코는 1500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게 캘리포니아(비록 명목상으로는 멕시코 땅이지만 1846년 이래 미국 군사령관의 감독하에 있었다)를 팔아넘겼다. 소유권 문제를 둘러싼 혼란은 총체적이었다. 메이슨은 "기다리는 것이 좋겠어. "라고만 되풀이하여 말했다. 그러나 서터의 사람들은 그들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몬터레이로 돌아오는 길에 베닛은 그 금조각을 다른 이에게 보여주고 만다. 콜로마의 몰몬교도 중 한 사람이었던 비를러는 그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고, 그들은 신속하게 그곳으로 달려왔다. 이들은 콜로마와 서터 요새 사이의 아메리칸강에 자리잡은 작은 섬에서 금광맥을 발견하게 된다. 캘리포니아의 몰몬교 지도자였던 샘 브래넌도 1848년 4월 그곳에 도착한다. 무엇보다 먼저 그는 몰몬섬에서 채굴권을 확보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이어서 콜로마에 상점을 여는 문제를 협상한다. 그는 그렇게 하고 난뒤에야, 즉 5월 초에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간다. 그때 그는 한 손에 모자를 쥐고 휘두르고 다른 손에는 금가루가 담긴 병을 들고 있었다. "금이다! 금이다! 몰몬교도들이 아메리칸 강가에서 금을 발견했다!.” 당시 브래넌이 야기시킨 사태의 중요성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역사학자 테오도어 히텔은 이를 '십자군 전쟁 이래 가장 거대한 운동'이라고 평해 놓았다.  초기의 의혹이 사라지자, 캘리포니아 마을들은 부로가 며칠 사이에 텅 비게 된다.  6월 1일 이후, 샌프란시스코의 집들은 적어도 반은 버려졌다. "모든 것이 정지한 듯 보인다. "라고 '스타'지의 기자는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금광을 찾아 떠나간다. "공장의 소음도, 사람의 발자국 소리도 없다. 온통 어둡고 쓸쓸하다. 모든 것이 헐벗고 단조로우며 죽은 듯하다.” 오하이오 전함에 승선했던 선원들은 불과 하루사이에 145명으로 줄어든 채 항구에 조용히 정박해 있게 된다. 6월 초, 소노라 요새의 40명의 남자들도 그곳을 떠난다. 새너제이에서는 보완관만이 홀로 마을을 지키게 되었다. 하지만 그조차 곧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10명의 죄수들을 데리고 황금을 찾아 길을 떠나며,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금광에서 죄수들을 부리게 된다. 7월, 행정관 메이슨을 145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몬터레이를 떠나 시에라에서 질서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새너제이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그의 부대원 가운데 절방이 이미 그를 버리고 도망친 뒤였다. 한 달에 7달러의 봉급을 받고 있는 열악한 상황에서 어떻게 감히 황금의 부름에 저항할 수 있겠는가? 여름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서해안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금광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강가의 모래에서는 매일 4만 달러가 채취되었다.  1848년 5월 31일에 출발한 스쿠너선 루이자는 최초로 그 소식을 호놀룰루에 전한다.  허드슨 항만회사 소속의 캐나다 사냥꾼들은 하나같이 이 사건을 즉각 캐나다 밴쿠버에 이르는 북서 해안 전역에 알린다. 도박의 천국인 마닐은 범선 론이 도착하자마자 전체가 들뜨게 된다. 이어서 금을 실은 최초의 선박들이 속속 항구에 도착하면서 멀리 오스트레일리아와 중국까지 이르는 태평양 전지역이 벌집처럼 분주해진다. 7월 이후, 이주민을 실은 배 한 척이 하와이섬을 떠난다. 마키저스 제도의 요새는 당시 프랑스 국가를 대표하던 행정관을 혼자 버려둔 채 모두 떠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도시에는 벽보들이 나붙었다. 9월 12일, 범선 버지니아호는 황금을 찾아나선 최초의 칠레인 군단을 데리고 발파라이소를 떠난다.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해의 마지막 수개월 사이에 오리건을 떠났다. 또한 소노라에서는 그만큼의 멕시코인들이 길을 떠난다. 이어서 아르헨티나인이 떠나고, 오스트레일리아인, 볼리비아인, 카나크인, 중국인들이 줄줄이 그 뒤를 잇는다.  12월 5일, 포크 대통령의 의회 연설은 화약에 불을 붙인다.  당시 서부에서 동부 지역과 의사를 주고받는 일은 매우 더디고 힘들었다. 따라서 황금 발견에 대한 최초의 소문들은 전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9월말, 어처구니없게도 빌대위가 워싱턴에 도착하여 몇 개의 금조각을 상원의원들에게 증여한 것이 마침내 여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1848년 12월의 첫날, 행정관 메이슨의 공식보고서가 발표되었을 때 민심은 흥분과 기대가 뒤섞여 있는 상태였다. 이제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보고서에는 300온스의 금조각이 담긴차 상자가 딸려 있었기 때문이다. 포크 대통령은 바로 여기서 평소에 멕시코와 전쟁을 치르는데 드는 전쟁비용을 문제삼아 자신을 비난하던 이들을 침묵시킬 기회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캘리포니아를 취득하는 순간에 우리는 귀금속 광맥들이 발견되리라는 것을 이미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황금이 발견된 것에 비추어볼 때 이 광맥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풍부하고 광범위하게 널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에 매장된 풍부한 금에 대한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어서 관리들의 보고서를 확인하지 않는다면 믿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의 독립선언 이래 어느 대통령 보고서도 그토록 강한 충격을 준일은 없었다.  떠나자! 무슨 대가를 치르던 떠나자!  뉴올리언스에서 5대호까지, 세인트루이스에서 보스턴까지 미국 전역은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워싱턴에서 군중들은 국방부에 전시된 금조각들을 보러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도처에서 배들은 만원을 이루었으며, 곡괭이, 삽, 신발, 화기등을 제조하는 업자들은 폭주하는 수요를 충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신문의 지면들은 분쇄기 자재에 대한 요청이나 출항 선박들에 대한 광고, 실용적인 조언이나 증언들로 가득 채워졌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온통 황금으로 뒤덮인 산들을 발견했다. 금광의 공기는 금가루가 가득 차 있어서, 코트를 털기만 해도 돈을 벌 수 있을 지경이라고 생각했다. 여행에는 많은 경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든 것, 즉 집이나 땅을 팔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빚을 내기도 했다. 주택이 밀집되어 있지 않고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남부 지역 사람들은 혼자 떠나거나 소수의 집단으로 출발했다. 북부의 양키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목사를 중심으로 발굴대를 조직했다.  캘리포니아 : 엘도라도냐, 약속된 땅이냐?  초기 청교도 이주자의후예들에게 이 발견은 사실 신의 징후처럼 여겨졌다. 이제 정의로운 인민이 서부 야생의 대지를 식민화할 때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가장 추앙받는 선교자들의 예언에 따르면 황금은 천상의 왕국에서 보잘것없는 물질속으로 떨어져 내린 영생의 눈물처럼 돌 속에 녹아있는 것이고, 광부들의 노동은 그때부터 정신적인 금욕과 유사한 것이 되었으며, 이 정신적인 금욕을 통해 이들은 잃어버린 제국을 되찾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모두는 이교도 동방에 맞서 바로 그곳에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1849년 말, 이미 보스턴 성인 인구의 4분의 1이 바다를 통해 길을 떠났다. 1849년 한 해 동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275척의 선박 중에 121척은 뉴잉글랜드항에서 출발한 배들이었다.  이 열기가 유럽을 휘감는다. 따라서 엄청난 이민이 시작되고, 이들은 1848년의 이상을 금광으로 가져갈 것이다  사람들은 1848년을 '광란의 해'라고 일컫는다. 실제로 2년여에 걸친 경제위기 이후 몇 개월 만에 유럽 전체가 심한 몸살을 앓게 된다. 시민전쟁, 스위스의 급진파 승리, 퇴위한 루이 필리프와 프랑스에 복원된 공화국, 시칠리아 봉기, 밀라노 폭동, 덴마크 민족주의의 부활, 독일의 동요, 더블린의 청년 아일랜드 운동, 글래스고 봉기, 그리고 프라하, 빈, 베를린, 베네치아, 마드리드, 프랑크푸르트, 바데 공국, 세르비아의 보이보딘, 나폴리, 트란실바니아, 부쿠레슈티에서의 바리케이드 등이 그것을 말해 준다.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이러한 유럽의 움직임은 카톨릭 사회주의자들, 공상적 사회주의자 푸리에의 제자들, 라메네, 카베, 생시몽, 낭만적 민족주의자들, 민주주의자들과 이상주의자들을 세간의 동일한 부름과 동일한 자유의 요구 속에 뒤섞어놓았다. 메테르니히와 교황 피우스 9세는 일찌감치 도주하고, 루이 필리프는 왕위에서 물러났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포로가 되었으며, 도처에서 압박받던 민족들이 코슈트나 미츠키에비츠의 열정적인 말에 감흥을 받고 떨쳐 일어섰다. 루마니아인들, 슬로바키아인들, 공공연하게 저항하는 우크라이나인들, 그리고 카를 알베르트 뒤에 결집한 이탈리아인들 등, 사람들은 늙어빠진 유럽이 동요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6월부터는 도처에서 이런 시도들이 실패하고 난폭한 진압이 뒤따랐다. 이 순간 유럽은 마치 자기 속에 도사리고 있는 꿈과 젊은 힘을 거부하는 듯했다. 바로 이 상황에서 황금 발견 소식이 놀라운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패배하고 박해받고 절망에 빠지고 추방당한 모든 혁명가들에게 황금이란 가능성이 있는 신세계에 대한 약속처럼 여겨지게 된다. 1848년의 '광란'에 타격을 덜 받았던 영국만이 이 사태와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고, 금광기업들을 통해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독일에서 이들의 출발은 대대적이었다. 당국은 불안한 나머지 캘리포니아에서 치르는 모험을 악몽으로 묘사한 안내책자들을 배포하는 궁여지책을 쓰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을 뿐이다. 지치고, 굶주려 쓰러지고(200만 명의 사람들이 허기와 티푸스와 콜레라로 죽었다). 민족주의 운동의 좌절과 그에 뒤따른 학살을 경험했던 아일랜드는 말 그대로 텅텅 비게 된다. 스코틀랜드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 벨기에, 스위스,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그리고 중부 유럽의 모든 국가에서도 그 열병은 마찬가지였다.  "황금에 대한 꿈이 파리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주의적 꿈을 대체했다. "고 마르크스는 한탄했다.  1849년 2월부터 '토론 저널'과 '르 모니퇴르'(프랑스의 세계신보)지는 황금 탐험가들의 증언을 보도한다. 4월 15일자 '세기'지는 '1월 1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한 포경선원이 수개월 만에 30만 피아스터(레바논, 수단, 시리아, 이집트 등의 화폐 단위)에 상당하는 금가루를 모았다고 탈카와노에서 선언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5월 15일자 '헌정'지는 '금광맥을 고갈시키려면 수세기와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고, 6월 8일자 '프레스'지는 '단 1m2도 금이 덮이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술 더 떴다. 파리가 캘리포니아보다 더 심했던 것은 아니다. 버라이어티쇼 무대와 뤽상부르 극장에서는 비극과 풍자극이 계속 상연되었다. '새크라멘토의 황금 탐험가들''황금을 찾는여자들''연금술사, 또는 캘리포니아행 쾌락의 기차'등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심지어 파리의 하늘에 '캘리포니아'라고 명명된 비행선을 띄우기도 했다. 떠나자! 이민을 위한 수많은 모임들이 10여명 단위로 조직되었다. 혹자는 상인들이었고, 노동자 협업체 형식의 모임도 있었다. 이를 테면 캘리포니아, 황금 벌집, 브르타뉴인들, 박애 연합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엄청난 동요 속에서 밀로르, 즉 집시 세계에서 잘 알려진 이름으로 빌레트가 이끄는 모임인 '아메리칸'을 발견할지라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또한 변호사협회에서 쫓겨난 변호사 두 명과 '프랑스 동물협회 회원으로 자연주의 기술자', 자칭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끌던 '신세계'도 있었다. 과테말라에서 화약과 질산 제조를 감독하던 관리이자 대학의 물리학 교수이던 로시뇽이 저술한 '이민자들을 위한 실용 안내서'가 보여주듯, 이 모든 일은 수많은 안내책자와 회고록이 부추겨대는 통에 계속 증폭되었다.  금괴 복권, 혹은 어떻게 4000평에 이르는 1848년이 혁명가들을 처리할 것인가?  이 광기 속에서 1849년 8월에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불거져 나왔다. 정부가 금괴회사의 건립을 보증해 주고 이 기업이 복권을 발행하게 하여 그 이익금을 "너무 가난해 미국으로 건너갈 수 없는 5000명의 이민자들을 무료로 캘리포니아까지 수송하는 데 쓴다. "는 것이었다. 이 결정을 내린 이는 다름아닌 경찰청장 카를리에였다. 사람들은 이것이 1848년 2월 국립경찰에 소속되어 있던 젊은이들, 즉 6월 봉기를 진압하는 데 동원되고 난 뒤 공공연히 배반을 외치던 이들을 추방하려는 조치임을 금세 깨달았다. 한편 알렉상드르 뒤마는 광고 책자를 집필하도록 촉탁받는다.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복권은 구청에서 판매했고, 환상에 사로잡힌 군중은 몽마르트르대로에 전시된 금괴 앞에 장사진을 이루었다. 대다수 이민 알선업체들이 사기행각을 벌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후 수 개월 동안 정부가 보증하고 나섰지만, 금괴회사들은 그런 관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1850년 11월 16일 추첨이 진행될 때는 이미 스캔들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결제위원회는 좋든 싫든 그드르의 출발을 보장했다. 약속했던 5000명 중 순찰 헌병과 국민군들, 성가신 사회주의 투사들로 구성된 대략 4000명 정도가 조만간 금광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전세계 5대륙의 모든 희망과 욕망이 캘리포니아로 집결한다.  먼저 희방봉을 통한 길이 있는데(1849년 한 해 동안 1만 6천명이 이용), 이 길은 가장 길지만 비용이 저렴했으며, 유럽을 떠나 단 한 번만 정박하고 항해하더라도 6개월 가량이 소요되었다. 파나마를 통한 길(1849년 한 해 동안 6500명이 이용)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이들이나 대담한 이들이 선호했다. 대서양 해안의 차그레스에 정박하여, 정글과 늪지를 통과하고, 카이만 악어가 득실거리는 강을 카누를 타고 크루세스까지 거슬러 올라간 뒤, 당나귀를 타고 산을 넘어 파나마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말라리아와 황열병이 창궐하던 파나마에는 여행자들이 붐비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상당수는 돈이 없어 가끔 운항하던 샌프란시스코행 증기선을 탈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끝으로 북미의 대평원을 통한 길이 있다. 겨울을 나고 5만명의 사람들이 이 길을 이용했다. 그리고 남쪽으로 애리조나를 거쳐 산타페를 통해 샌디에이고나 로스앤젤레스까지 가는 방법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인디펜던스나 포트라라미를 거쳐 오리건 트레일을 통해 가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광활한 불모지와 가파른 산을 비껴 돌며 훔볼트강에 이르는 길인데, 동물들의 뼈와 부서진 마차의 잔해, 그리고 시체들이 즐비한 그런 길이다. 또 캘리포니아 트레일을 통해 가는 방법이 있다. 이 길은 유타와 네바다 사막을 관통해 가는 것으로, 이따금 동물까지도 미치게 만드는 살인적인 폭염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는 서부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초원의 쾌속선'의 기나긴 행렬 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성스러운 울림의 서사시였다.. . 진흙탕, 공포, 영웅주의 속에서 잉태된 놀라운 신세계.. . 꿈과 문화의 환상적인 만남은 새로운 예루살렘을 찾아 나선 초기 청교도 이주민의 후예들, 즉 퀘이커 교도, 재침례교도, 장로교도들과 사회적 유토피아를 찾아나선 유럽의 1848년 세대들이 만날 때 이루어졌던 것이다. 마치 황금의 소리가 부에 대한 단순한 집착을 넘어 울려 퍼지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이다.  "도적, 거지, 포주, 탕부, 살인자 등 모두가 그곳에 있다. 천박함은 절정에 달했고, 매춘굴 속에는 가짜 술을 섞은 술을 먹어 머리가 멍청하고 외설적인 얼굴에 말을 더듬는 이들이 있다. 방탕함, 불결함, 정신착란, 빈곤과 죽음 또한 그곳에 있다. 바로 지옥이 이 부패한 군중을 집어삼키려고 입을 벌린 채 그곳에 있다.”  (1852년 8월 5일자 '콜'지)    제2장 황금의 문  1849년의 상반기 6개월 동안 1500명의 모험가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몰려들었다. 이어 하반기 6개월 동안에는 무려 2만 5천여 명이 몰려들었다. 이들 가운데 4000명에 이르는 해군 탈영병들은 그곳에 배를 내팽개쳐 두었고, 배는 갯벌에 좌초되었다. 부두도 방파제도 없었기에 이곳에 도착하는 이들은 묵직한 짐에 눌려 휘청거리며 진흙탕 길을 걸어나와야만 했다.  화폭 위의 도시와 진흙탕의 도시  집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파커하우스에서는 이곳에 도착하는 사람들을 이불도 시트도 없는 휑한 방에 20여 명씩 몰아넣었다. 야심 찬 계획을 세운 이들은 서둘러 호텔을 건설했다. 그러나 말이 호텔이지, 이것은 판자로 만든 허술한 가건물이었다. 창고를 공동 침실로 개조하고, 배의 돛으로 텐트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포장 상자가 밤을 지내는 상자 집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마룻바닥이나 의자 위, 심지어는 말구유 등 되는 대로 아무 곳에서나 잠을 잤다. 테이블 위의 자리는 겨우내 여섯 시간당 10달러에, 흔들의자는 8달러에 임대되었다. 쥐들이 들끓어 잠자는 사람들을 공격했으나, 이들은 너무 지쳐 대항할 기력조차 없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생필품이 부족했다. 1849년 겨울 동안 계란은 개당 1달러에 거래되기도 했고, 하와이산 감자는 60센트에 거래되었다. 채소는 더욱더 희귀해서 진열장에 전시할 정도였다. 거리는 언덕 측면에 비탈진 각도로 만들어져 있어서 평평하지 않을 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했다. 온갖 쓰레기들이 집 앞에 쌓여 있고, 여름이 되면 먼지와 악취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진동했다. 겨울철이 되면 거리는 온통 진흙탕이 되어 익사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판자를 타고 나다녀야 할 정도였다. "몇몇 동네에서는 늪지가 생겨나고, 사람과 당나귀까지도 이곳에 빠져 구출할 수 없었던 경우를 목격했다. "라고 한 프랑스 황금탐험가는 말했다. 사람들은 손에 잡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가져다가 보도를 만들었다. 통, 상자, 커피나 밀가루나 담배등을 담았던 푸대, 부엌의 프라이팬, 심지어는 피아노까지 등장할 지경이었다.  투기에 현혹되어, 상품을 가득 실은 배들이 곧 전세계로부터 도착한다.  사람들은 생필품 부족에 시달려 상황이 심각했던 반면에, 일부 품목은 공급 과잉으로 말미암아 공급업체가 도산하기도 했다. 감자는 부족했지만, 담배는 적어도 50년간 공급할 수 있는 예비분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사용할 수 없는 금 추출기계들도 있었다. 게다가 구성원이 대부분 남자만으로 이루어진 도시에 5000개의 여성용 모자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저장할 장소가 도무지 마땅치 않아 상품을 거리 한복판에 그냥 쌓아놓기도 했다. 사람들은 광장에서 경매를 통해 이 물건들을 끝없이 팔고 되팔았다. 낮이 되면 사람들은 광적으로 투기를 하고, 밤이 되면 광장 주변에 들어선 유일한 목조 건물들, 즉 엘도라도에서, 베란다에서, 아케이드에서, 카지노에서, 무도장등에서 도박을 한다. 사람들은 이를 포츠마우스 광장이라고 불렀다. 황금 탐험가들은 금조각을 싣고 시에라네바다에서 내려와 단 하루 저녁에 갖고 있던 재산을 모두 날리고 알거지가 되기도 한다. 재산은 하루 만에 벌리고 탕진된다. 1849년 11월 '뉴욕 이브닝 포스트'지의 한 특파원은 "샌프란시스코 사람들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고 기록했다. 파커 호텔은 연간 11만 달러에 방을 세놓았고, 판자로 만들어진 평범한 상점은 월 3000달러에 임대되었다. 돈은 주당 5%의 이자로 대출되었다. 한 보따리의 낡은 신문을 짊어지고 도착한 어느 남자는 순식간에 신문을 1부당 10달러에 모두 팔아 치웠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못이 급한 목수에게 못 한 상자를 같은 무게의 금을 받고 교환하기도 했다. 그곳 사람들의 관심은 광산을 향해 출발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노동력은 매우 비싸 하루 품삯이 20달러에 육박했다.  1850년경부터 샌프란시스코는 '태평양의 파리'가 된다.  1849년 9월 14일, 뫼즈호가 50명의 프랑스 황금 탐험가를 싣고 항구에 도착한다. 그로부터 2년후 그들은 2만 명으로 늘어난다.  그들 중 5000명은 샌프란시스코에 머물게 되는데, 돈이 없는 사람들, 돈을 탕진한 사람들, 그리고 1848년 봉기에 쫓겨온 귀족이었던 이들은 대부분 도시인들이었다. 이것이 대부분이 농촌 출신이었던 다른 이민과 다른 점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직후의 충격에서 벗어나자, 프랑스 이민자들은 수천가지의 다양한 직종을 통해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신속하게 독점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이들은 구두닦이, 잠수부, 포도주 업자, 카페 종업원, 하인, 도박장 직원, 음악가, 이발사, 혹은 세탁부가 되었다. 1850년의 처음 몇 달 동안 로스차일드, 라자르, 딜리서트같은 은행이 지점을 개설했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판자로 만든 움막에서 시작했다. 수입업체들 또한 번성을 누렸다. 가장 중요한 기업은 피오슈사였다. 이 기업은 샌프란시스코의 역사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한다. 캘리포니아 최초의 철도 노선을 이곳에 건설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1850년 생겨난 펠릭스 베르디에의 '파리시'를 본딴 의상점들도 증가했다. 고급 레스토랑들도 1849년 이래 문을 열었는데, 그중에는 포츠마우스 광장에 있던 '지방 형제들', 그리고 미국인들이 '푸들도그'라고 부르는 유명한 '황금닭'등이 있다. 1853년 샌프란시스코에는 프랑스 신문 세 개와 연극 무대 두 곳이 있었다. 그리고 도박장도 빼놓을 수 없는데, 이곳에서 프랑스인들은 파로, 룰렛, 21놀이, 에카르테, 적과 흑, 랑스크네같은 놀이를 했다. 또한 '마담', 다시 말해 파리의 매춘부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도 있었는데, 이곳은 놀라우리만치 멋들어졌다.  열기 가득 찬 이 도시를 누가 다스릴 것인가?  도시가 어떤 행정부 아래 놓여 있는지 알고 있는가? 당국이 이런 태만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1848년 가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고역수들이 들어온다. 즉 일명 '시드니의 새끼오리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텍사스 전쟁 이후 제대한 군인집단인 '바우어리보이스'와 힘을 합쳐 자칭 사립경찰을 조직하게 된다. 이들은 '조정자'로 불리지만, 혹간에서는 '집 지키는 개'라고도 불렸다. 군사적으로 조직화된 이들은 1849년 봄부터 이방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 이들은 상인들을 공갈하고 협박하고 약탈하고 갈취하고도 처벌받지 않았다. 적어도 이러한 사태는 그들이 칠레인 캠프를 약탈하여 한 여자를 죽이고 그녀의 딸을 겁탈하려 한 1849년 7월 15일까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도가 지나쳤다. 샘브래넌은 다음날 광장에 모인 군중들에게 연설을 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100인회'를 조직하여 주범들을 체포하게 했으며, 변호사와 판사를 갖추고 '인민재판'을 열어 '집 지키는 개'들에 대한 징계를 결정, 그들의 우두머리 중 아홉 명을 감옥에 가두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도시는 너무나 빨리 변화했다. 따라서 도시 한 귀퉁이에 항상 폭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1849년 12월 24일과 1851년 6월 22일 사이에 부호들이 사는 지역에 방화사건이 여섯 건 발생했다. 그러나 놀라운 힘이 발휘되었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샌프란시스코는 몇 주 만에 다시 일어섰다. 그러나 화재의 범죄적 성격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샘 브래넌은 어렇게 예언했다. 샌프란시스코는 최소한의 질서를 부여하는 데 성공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현대판 소돔처럼 몰락하는 길밖에 없었다.  샌프란시스코가 동시에 세 개의 시평의회를 갖고 있을 때  법, 그것은 필요하지만 문제는 어느 법이냐에 있었다. 1848년 2월 2일의 양도조약 시점까지 캘리포니아는 이론적으로 멕시코령이었으나, 실제로는 1846년의 국기 폭동사건 이래 미국의 군사적 신탁통치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역 행정부는 멕시코 지배하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에스파냐 시장의 수중에 있었다. 2월 2일 이후 어떠한 행정부가 들어서는가? 미국 이주민들은 스스로 행정부를 운영하는 것으로 양해했고, 이는 메이슨의 군사정부가 초기에 용인했던 것이다. 1848년 12월 27일, 샌프란시스코는 최초의 선거를 통해 시평의회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1월 14일의 새로운 선거는 두 번째 시평의회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1848년에 임명된 시장 리벤워스와 시평의회는 사임하려 하지 않았다. 메이슨의 후임으로 부임한 릴리 장군은 시민정부를 앞세워 리벤워스를 신임하고 다른 평의회를 해체한다. 이어 1849년 9월 1일 몬터레이에서 의회를 소집하고, 11월에는 헌법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가 미국의 31번째 주로 편입되기 위해서는 1850년 10월 18일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샌프란시스코는 이 동요의 시기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져 제대로 제정된 법도 갖추지 못했다.  1851년 6월 9일, 샘 브래넌의 주도로 148명의 명사들이 모여 유사시에 무장하고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감독위원회를 구성한다.  6월 11일,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된 젠킨스라는 범죄자는 감독위원들의 주도로 소집된 인민재판소의 판결을 받고 교수형을 당한다. 당국은 소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했지만, 그것은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몇 주 뒤에 매켄지와 위티커라는 두 명의 도적도 유사한 재판 절차를 거쳐 처형되었다. 이같은 판결에 단호하게 대항하기로 결의한 도시의 부랑자들은 한데 집결하고, 1851년 6월 22일 다시 한번 도시를 방화한다. 그러나 그들은 별 저항도 하지 못하고 신속하게 소탕되고 만다. 감독자들은 이제 600명에 이르렀고, 그후 수개월 동안 범죄율이 크게 감소했다. 그런데도 감독자들은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도시와 그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또 다른 위험 요소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방인들의 물결이었는데, 특히 프랑스인이 그들의 표적이 되었다.  프랑스인의 홍수 : 1851년 말에는 도시 인구의 5분의 1이 프랑스인이었다!  더욱이 프랑스인은 별도의 집단을 형성했고, 영어를 배우려 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그들을 조롱조로 '케즈키디즈(프랑스어로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 : 역주)'라고 불렀다. 이는 거리에서 프랑스인이 듣는 의례적인 물음이 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1848년 6월의 옛 봉기자들의 대다수가 아직도 그들의 거대한 유토피아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파리의 금괴 복권 소식이 미국 감독자들의 분노를 부추겼으리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5000명의 추가 이민, 마르세유 주재 미국 영사는 이들을 '유럽 최악의 무법자들이 있는 파리의 쓰레기들!'이라고 단언했다. 실제로 복권 추첨 당첨자들 가운데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무법자들이 다름아닌 매춘부였다. 그러나 나머지 3분의 2는 분명 1848년의 봉기자들이었다. 1852년 2월, 이 불행한 이민자들을 완전히 빈털터리인 상태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딜롱 영사가 서둘러 마련한 천막의 캠프 속으로 속속 몰려들었다. 아마도 딜롱 영사는 재빨리 이들을 도와 신속하게 광산으로 보내는 데 모든 자금을 탕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사태가 더욱 악화되는 것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시에라네바다를 혼란에 빠지게 만든다.  그 어느것도 이들의 광기를 잠재우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1849년 이래 4만 명의 황금 탐험가들, 1850년에 6만 명, 1852년에 10만 명이 이곳으로 밀려들었다. 신비주의자, 강도, 사회주의자,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시에라네바다 전체를 들어내려는 열의를 갖고 모였다! 금이 도처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단 한 해에 70톤이 넘는 금이 산에서 채취되었다! 꿈이 움트는 시대.. .    제3장 금광을 향한 길에서  최초로 황금을 찾아 나선 탐험가들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항상 금광의 원천, 즉 '마더 로드'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이들은 모든 강에 금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고, 또 금을 채취하는 광부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채굴권지(채굴할당권)에 대한 보다 엄격한 규약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보다 복잡한 분쇄술에 공동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서 최초의 캠프, 최초의 도시들이 출현하게 된다. 1849년부터 새크라멘토와 스톡턴은 황금을 향한 물결의 결정적이 두 요충지가 된다.  자신의 토지에서 발견된 황금으로 파산한 셔터 장군  생각지도 않게 몰려든 사람들은 존 서터에게 행운을 가져오지 않았다. 1850년에 그가 생산한 보리는 불과 1주일 만에 굶주린 광부들에게 약탈당했다. 메리스빌 근처의 한 섬에 자리잡은 도적단들은 그의 가축들을 도살하여 새크라멘토에 내다 팔았다. 그의 일꾼들도 광산에 매혹되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서터의 땅에 자신의 가축들을 방목하겠다고 통보해왔다. 요새는 사람들이 떠나고 파괴자들에게 약탈당했기에, 서터는 1850년 호크팜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도망가기에 앞서 이 요새를 완전히 파괴할 결심을 해야만 했다. 광부들의 말대로 모든 것이 서터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이주자들은 오리건 개척자들의 준엄한 원칙을 발전시킨다. 즉, 땅은 그 속에서 노동하는 자들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서터의 땅에 정착하고, 그의 재산권의 정당성에 맞서 대항한다. 자신들의 주장이 기각된 것에 분노한 이들은 1850년 8월에 무장한 채 대항하게 되고, 새크라멘토에서는 15일간 유혈 폭동이 발생한다. 결국 군대가 개입하여 질서를 바로잡을 때까지 여러 명이 사망했다. 서터는 그 위험에서 구원되었는가? 실제로는 어느 것도 역사의 흐름을 돌이키거나 정지시킬 수 없다. 서터는 자신의 땅에서 발견되 황금이 자신을 파산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1851년 그가 소유하고 있는 건물이 불타오른다. 하나의 전조였다.  캠프 생활 : 미리 본 지옥이냐, 파라다이스냐?  모든 증언들은 하나같이 일치한다. 약속의 땅, 황금 탐험가들의 킴프는 실제로 불결한 수 렁이었고, 항상 야만적인 상황에 근접하고 있었다. 나무를 베어낸 언덕들은 겨울에는 더 이상 진흙을 지탱해 내지 못한다. 또한 흙이 무너져 수십개의 텐트를 휩쓸어가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물론 위생시설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광부들은 저녁에 장화를 벗어 베개로 사용하고, 3~4개월 동안 그릇이나 옷을 씻지 않고 지낸다. 광부들은 들끓는 이를 잡기 위해 사냥칼로 피부를 긁어야할 지경이었다. (바로 여기서 이가 많음을 비유하는 '황금 이가 들끓는 땅'이라는 표현이 생겨난다. ) 게다가 쥐가 많고 공격적이어서, 공부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낮 동안에는 텐트를 잠그고 그 안에 뱀이나 들고양이를 풀어놓곤 했다. 사람들은 파리처럼 맥없이 쓰러져갔다. 그들의 시체는 캠프밖에 아무렇게나 방치되고, 하이에나의 식량이 되어버렸다. 실제로 시체를 묻기 위해 무덤을 파는 일은 없었다. 혹시 우연히라도 그 아래에서 금광맥이 발견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나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추위에 시달리고, 열병으로 몸을 망치는 이 모든 미치광이들은 그들이 허우적거리고 죽어가는 지옥만을 알고 있을까? 저녁이 되면 그들은 캠프나 도시의 도박 테이블 주위, 소노라나 에인젤스 캠프, 네바다 시티의 사창가에 둘러앉는다. 마치 그들이 땅에서 긁어낸 금이 그들의 손가락에 불을 지르기라도 하듯, 혹은 금을 보다 신속하게 탕진하고 내일 다시 금을 찾아 나서야만 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캠프의 불 주위에 운집한 퀘이커교도들, 몰몬교도들, 재침례교도들, 장로교도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내일 태어날 이상세계에 대해 줄기차게 토론했다. 아마도 바로 여기에 이 모든 서사시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요소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쪽에 악당이 있고 다른 한쪽에 신비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황금 탐험가들은 계몽된 자들인 동시에 무법자들이었다.  금광의 성경 : '광부들의 심계명'  황금을 향한 가공할 물결이 출렁이기 시작한 처음 몇 달 동안은 대체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금은 풍부했고, 땅은 끝이 없어 보였다. 텐트는 훤히 열려있었고, 자신의 재산을 지키느라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1849년 가을까지 범죄와 도적질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1850년 이민의 물결이 휘몰아치고, 서로 다른 언어와 인종과 문화와 관습이 혼재하고, 토지가 부족해지고, 시드니 죄수들이 들어오고, 또 다른 무법자들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이 모든 것을 휩쓸어가 버리게 된다. 광부들은 까다로운 개인주의 성향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었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규칙을 만들어야만 했다. 1849년 봄부터 채굴권지는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그곳에서 계속 발굴을 하는 한에서만 그에게 속한다고 약정되었다. 이것은 이 캠프에서 저 캠프로 끝없는 토론을 거쳐 정립되고 공통의 규칙으로 부과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광부들의 십계명'으로, 1853년 연방법으로 공식화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했다. 사람들이 채굴권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분쇄 기술이 발전하고 있었다. 세광통과 수로가 사금판과 사금홈통을 대체했고, 둑을 건설하고 강줄기를 끌어대는 작업의 성격상 광부들로 하여금 서로 협력하게 만들었다. 이 새로운 상황에서 어떻게 서로 보호될 수 있는가? 이기주의적 열정의 고리 속에서 어떻게 일정한 사회적 규범을 유지하거나 재창출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설사 사소한 갈등이 있더라도 그것을 무릅쓰고 국적별로 집결하게 된다. 또한 종교에 호소하기도 한다. 알려지지 않은 10여 명의 목사들이 쉴새없이 캠프를 전전하며 전도했던 피땀어린 노력은 그래도 일차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캠프 안의 프리메이슨단과 법원  이 새로운 상황에 대한 가장 놀라운 반응은 분명 프리메이슨단 시설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메이슨 홀'을 갖지 않은 황금 탐험가의 마을은 단 하나도 없었다. 웨스턴 스타 로지 98호는 1848년 미주리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창설했다. 1853년 마더 로드에는 이미 80개의 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그것은 긴급하게 연대해야 하는 필요성에 부응하는 것이었고, 한곳에 정착해 있지않은 사람들에게는 특히나 걸맞은 방식이었다. 프리메이슨의 광부들이 캠프에 도착하는 즉시 다른 프리메이슨 단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더 로드에서의 최초의 모임 형태는 따라서 비밀결사였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유머를 잃지 않았다. 1851년 겨울 J. H. 줌월트는 그와 마찬가지로 눈 속에 갇힌 동료들과 함께 프리메이슨단의 예식을 조롱하기 위해 그들의 의식을 패러디한 질서를 세워 독한 술을 마시고 'E Clampus Vitus'라는 엄청난 거짓말을 꾸며냈다. 이들의 거짓말은 선의였다고 믿어야 한다. 클램퍼들은 1860년경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질서와 가장 효율적인 상부상조회를 형성할 정도로까지 번창한다. 클램퍼들의 철학을 매우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마크 트웨인의 작품도 이에 기여하게 된다. 유머와 프리메이슨단이 이 모든 갈등을 해결하기에 충분할 수는 없다. 광부들의 정의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매우 단순한 것이다. 총체적인 신뢰와 그것을 어길 경우에 가해지는 가혹한 처벌에 대한 경고가 그것이다. 판결은 즉각적으로 군중의 거수로 결정된다. 감옥은 없으며, 죄를 짓거나 도적질을 한 경우에는 교수형이, 또 다른 범죄에 대해서는 채찍질이 가해진다. 이와달리 변형된 형태의 처벌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귀를 자르거나 붉은 낙인을 찍거나 머리를 깎아 추방하는 것 등이다. 몇 가지 비극적인 사건들도 발생했다. 1851년 7월 4일, 다우니빌에서 임신한 멕시코 여자 후아니타를 교수형에 처한 사건이 그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겁탈하려 덤비는 남자를 칼로 찔렀다. 술 취한 군중들은 그 죄과를 물어 그녀에게 유죄를 판결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인민재판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군중들 자신도 결백한 자를 단죄함으로써 범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어느 집단이 기반이 아주 취약한 자들에게 자신의 법을 관철시키려 할 때 그러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  시에라에서 미국 광부들이 중국인과 멕시코인들을 추방하려 할 때 야기된 최초의 사건들  미국인들은 중국인들이 중국인 자신들의 법과 재판소, 심지어 사형집행인을 갖춘 별도의 세계를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저렵한 노임으로도 일을 함으로써 노동시장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게다가 그들 황금 탐험가들은 수적인 면에서 놀라우리만치 증가일로에 있었다. 1950년 초에는 750명, 1851년에는 4000명, 1852년에는 1만 2천 명, 따라서 그들의 기를 꺾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린치와 살인이 자행되었고, 불행한 중국인들은 물러서지 않고 묵묵히 박해를 견뎌내게 된다. 경멸 어린 표현으로 '지방질'이라고 불린 멕시코인들에 대해 미국인들은 특히 그들이 인디언과 함께 캘리포니아의 소유자였다고 비난했다. 거칠기 짝이 없는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정복 행위가 신성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도덕적으로 합당하다는 자기 합리화를 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멕시코인들은 보다 나쁜 평판으로 비난받게 된다. 즉, 도둑, 겁쟁이, 게으름뱅이, 교활한 이들이 농장에서 무사안일하고 방탕한 삶을 살고 있다고 비난받는다. 날로 악화되어 가는 상황에서도 멕시코인들은 걸출한 황금 탐험가들이라는 사실이 입증된다. 그들은 건조 분쇄 기술을 사용하는 유일한 사람들이었고, 석영에서 금을 추출할 수 있는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그들을 추방해야 하는 더욱 큰 이유였던 것이다.  외국 광부들은 '과세 사건'에 발끈한다.  칠레인, 페르인, 아일랜드인, 독일인, 프랑스인도 그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수가 충분하지 않을 때 동일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초기의 즐거웠던 뒤섞임은 새로운 집단 분할로 이어진다. 북부에는 미국인이 다수를 이루고, 반면 남부와 중부의 캠프들은 유럽인과 에스파냐계 미국인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1850년 4월 13일, 캘리포니아주의 새 입법부는 어떤 외국인도 허가 없이는 발굴작업을 할 수 없으며, 그 허가액은 한 달에 20달러로 정한다고 결정했다. 이 조치는 미국과 특정 국가들 간에 발효중이던 협약에 반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1850년 여름 동안 강력한 동요가 남부의 캠프들을 사로잡았다. 소노라에 있는 그들의 본부에서 멕시코인들은 대결을 준비했다. 프랑스인들은 이 모임에서 신랄함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시에라네바다에서 보여준 바리케이드 정신 : 모클럼힐의 봉기  1850년 10월, 관리들이 그 유명한 세금을 걷겠다고 주장하자, 샌와킨 계곡에 정착해 있던 프랑스인들은 무기를 든다. 1848년 자신들의 정부에게조차 몸을 굽히지 않은 이들이 일개 보안과 앞에서 움츠러들 리가 없었다. 1851년 3월 모클럼힐에서 발생한 채굴지 제한에 대한 평범한 저항이 전면전으로 비화했다. 한 아일랜드인이 프랑스 광부가 내두른 곡괭이에 맞아 피살되었다. 그 지역에 있던 2000명의 프랑스인(모두 6000명의 발굴자들 중)은 프렌치힐로 후퇴하여 완전무장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삼색깃발(프랑스 국기)을 계양하고, 조직적으로 체계를 잡아 대응했다. 동시에 주변의 금광으로 파견하는 사절들이 급히 떠났다. 미국인 또한 한데 결집했다. 프랑스인은 점차로 응집된 집단으로 똘똘 뭉쳤고, 사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장하고 훈련받은 이들은 미국군보다 강력하지 않았는가? 딜롱 영사는 5월 3일 광부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포기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모든 힘을 발휘해야 했다. 이들에 대한 추후의 징계조치는 없었다. 심지어 프랑스인들은 국기, 군대, 군수품을 그대로 갖고 있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시민전쟁을 모면했던 것이다. 광부들에게 부과된 세금은 먼저 폐지되었다. 이 세금은 1852년에 다시 정립되지만, 그 금액은 다소 합리적인 매월 3달러로 정해졌다.  맥시코 정복에 나선 1848년 세대의 해적들 : 라우세 불봉의 오디세이  시에라네바다에서 항거한 사람들에게 모클럼힐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을 의미한다. 그때 이래로 캘리포니아의 역사는 그들이 없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새로운 공화국에 대한 꿈은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런데 당시 멕시코는 분열되고 쇠약해져 미국의 압력과 아파치족의 살인 공세로부터 북부 국경을 보호하느라 갖은 애를 다 써야 했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소노라의산에는 도처에 금이 깔려 있다고 한다. 그곳에 왜 식민지를 건설하지 않겠는가? 라우세 불봉 백작은 상인이자 발굴자로서, 여러 차례의 좌절을 겪은 이후 1850년 캘리포니아에 도착했고, 1852년 5월 19일에 1848년의 옛 친구, 모클럼힐의 반항아들, 또 새로 도착한 '금괴 복권 당첨자들'등 250명과 함께 과이마스(소노라)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멕시코인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농민과 황금 탐험가들을 기대했는데 도착한건 군대였다. 핑계, 거짓약속 등등... 라우세 불봉은 분노하여 에르모시요를 향해 행진했고, 그곳에서 10월 14일 멕시코 군대를 물리친다. 이로써 소노라의 새 주인이 탄생한다. 지친 그는 심한 병에 걸리고 만다. 그의 사람들은 분열되면서 당황한 나머지 가련하게 캘리포니아로 귀환하기 위해 협상을 벌인다. 캘리포니아에서 라우세는 병에서 회복되고 프랑스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대접한다. 그의 찬미자인 워커라는 사람은 해적단을 구성해 남부 캘리포니아를 정복하러 떠난다. 그는 니카라과의 독재자를 제거했으나, 그후 영국인들에게 교수형을 당한다. 라우세는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총독, 즉 피사로가 되기를 꿈꾼다. 이에 따라 두 번째로 군을 조직하여 1854년 소노라를 정복하러 떠나 7월 12일 과이마스에서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이번에는 패배해, 1854년 8월 12일 바다 앞에서 총살로 삶을 마감한다. 황금을 찾아 나선 프랑스의 유토피아주의자들의 신세계에 대한 꿈은 이처럼 돌연히 끝나버린다.  샌프란시스코는 번성하는 도시인데도 온갖 위험이 도사린 곳이다.  그러나 이러한 좌절은 아직 미국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샌프란시스코가 금세라도 터질 것 같은 뇌관처럼 보였기에 이 제국주의자들의 공격에 더욱 불안해했다. 부정은 여전히 각계각층에서 횡행했다. 차이나타운의 아편 흡연장은 큰 피해를 가져왔다. 바버리코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큰 매춘 지역이었다. 번창한 도시는 또 무거운 빚은 지고 있었다. 1854년 최초로 다가온 황금 생산의 둔화는 심각한 위기를 조장하게 된다. 300개의 기업이 파산하는데, 그중에는 캘리포니아의 가장 큰 은행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동체들 사이의 긴장은 극도로 심화되었다. 부지주의당(Know Nothing)은 '카톨릭 세력의 위협'에 불안해했다. 이탈리아인과 아일랜드인은 그들의 신부와 종교인들을 데려왔고, 카톨릭 학교와 대학들은 이미 많이 들어섰으며, 개신교 학교들에 비하면 질적으로 그 수준이 높았다. 그렇다면 라틴계의 연대와 여기에 프랑스 해적들과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당한 멕시코인들의 무게가 더해진다면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잖은가? 범죄자 찰스 코라를 보호하고 있다고 비난받던 아일랜드 출신 경관 제임스 P. 케이지가 1856년 5월 14일 제임스 킹 오브 윌리엄스라는 기자를 살해한 사건은 기름에 불꽃을 던진 꼴이되었다. 존경받던 몇몇 목사들은 이방인들에 대한 신성 전쟁을 설파했고, 도시의 모든 해악의 책임을 이들에게 돌렸다. 직접 민주주의와 인민재판에 대한 반응은 곧바로 린치로 이어졌다. 찰스 코라와 그를 보호한 케이지는 5월 22일 높다랗게 매달려 교수형에 처해졌다. 샌프란시스코는 한순간 깊은 수렁으르 빠져들었다. 이 위기는 1857년 선거를 통해 새로운 캘리포니아가 생겨나면서 극복되었다.  황금 물결의 덧없는 모험에 이어 산업시대가 뒤따라온다.  사람들은 강가의 모래에서 금을 찾던 초보 단계에서 차츰 공업적인 분쇄 방법으로 눈을 돌린다. 금의 대부분이 산의 가장 심연에 자리잡은 수정 지반 속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854년 이래 말라코프 디긴스의 수포(물을 분사하는 대포)가 시에라 기슭을 강타한다. 광산 제국의 사업가들은 주인으로서 그 지역을 지배한다. 의심 많은 개인주의자였던 정취어린 갱부는 이제 과거지사가 되었다. 8년 여에 걸친 무절제와 폭력의 사슬과 807톤에 달하는 황금! 그러나 캘리포니아에 불어온 황금 물결의 독특한 성격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 세계는 그 시대의 모든 꿈과 모든 욕망, 그리고 모든 유토피아의 대충돌 속에서 탄생했다.” 바다로 둘러싸인 외진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그곳은 4분의 3이 미지의 세계이다. 영국은 원주민을 몰아내고 그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얼마 안 되는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투쟁했다. 그리고 금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이전에는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었던 것에 비추어볼 때 그것은 돌발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금광은 도처에 널려 있어 무한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제4장 밸러랫의 금광에서  184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돌아온 오스트레일리아광부 에드워드 하몬드 하그레이브스는 즉시 뉴사우스웨일스 지역의 웰링턴과 배서스트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산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850년 1월 작은 만에서 금조각들을 발견한다. 그는 탐사를 계속하며  매쿼리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또 다른 고아맥을 만난다. 그는 시드니로 돌아와 이 엄청난 소식을 전한다.  뉴사우스웨일스의 행정관은 그 흐름을 통제하는데 주력한다.  5월 19일, 농민과 인근의 온순한 목동들로 구성된 400명의 발굴자들이 배서스트 근방의 서머힐크리크를 향해 길을 떠난다. 5월 말, 황금의 열기가 시드니와 멜버른, 애들레이드, 호바트를 휩쓸고 간다. 7월 초에는 1000명의 사람들이 길이가 15Km나 되는 터론의 강둑을 사찰하고, 그달 말에는 3000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 황금 탐험가들의 복장과 기술, '자발적 공산주의'를 채택했으며, 정부의 감독관들이 자신들을 배치하고 과세하며 감시한다는 데 다소 격분했다. 그러나 연말에 이르러서는 평온이 찾아왔고, 그 지역의 생산량은 10만 온스에 이르렀다.  밸러랫과 벤디고에서 : 놀라운 금광들  인근 지방인 빅토리아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아직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활기찬 이 도시의 미미한 발전이 뉴사우스웨일스의 황금 소식으로 위태로워지지나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6월, 멜버른 시당국은 300Km 이내에서 황금을 발견하는 사람에게 200파운드의 보상금을 주기로 결정했다. 8월 25일, 여섯 명의 채굴자들이 밸러랫 강가에서 30온스의 황금을 발견했다. 몇 주 만에 광부들이 수백명씩 떼를 지어 나무를 베어낸 언덕을 덮쳤다. 흥분은 절정에 이르렀는데, 광맥은 금이 풍부한 것처럼 보였다. 9월에 총독 라트로브는 뉴사우스웨일스에서와 동일한 입법조치를 취했다. 10월부터 멜버른과 질롱에서는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상점들은 문을 닫았으며, 남아 있는 여성들은 안전을 위해 자위대를 조직했다. 10월 말에 이르러 7000명의 사람들이 골드포인트에 위치한 밸러랫의 산을 파기 시작했다. 이어 벤디고크리크에서도 금이 발견되었다. 기쁨에 들뜬 갱부들은 발견에 발견을 거듭했고, 이제 간신히 발굴하기 시작한 자신들의 채굴지를 방치했다. 벤디고가 밸러랫보다 매장량이 더 많다고 하지 않던가? 12월 중순에 이르러 2만 명의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고, 산에서 주당 2톤의 황금을 채취했다. 밸러랫은 이제 막 발굴되었으나 불과 300명의 황금 탐험가밖에 남지 않았다.  1852년, 5000~7000명의 사람들이 매달 오스트레일리아의 다른 지방에서 몰려들었다.  몇 주 만에 애들레이드는 인적이 뜸해졌다. 1852년의 상반기 여섯 달 동안 죄수들이 군집해 있던 반디멘의 영지는 7만 명의 주민들 가운데 1만 명을 잃어버렸다. 어떻게 이 흐름을 멈추게 할 것인가? 총독 라트로브는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강구하기  위해 채굴허가 가격을 두 배로 인상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차라리 채굴권을 포기하고 말겠다는 광부들의 거센 항의에 직면한다. 견디기 힘든 건조한 기후와 알렉산더산의 캠프를 휩쓸고 있던 이질도 거센 황금 물결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1853년 1월, 황금 물결의 역사상 가장 풍요한 광맥들 가운데 하나가 발견됨으로써 밸러랫의 팽창이 시작된다. 감자농사의 연이은 실패로 기아선상을 헤매다 축출된 아일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이 주를 이룬 황금 탐험가들은 매달 1만 5천 명씩 몰려들기 시작한다.  행복은 불안과 겹쳐진다. 상인들은 돈을 벌었으나 그 지역은 혼돈에 빠져든다.  안타깝게도 영국에서 건너온 '빈곤에 시달린 이주자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새로운 생활고를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멜버른은 캔버스타운의 게토 지역에 운집한 빈자들의 폭력에 물들게 된다. 도적질과 살인은 더 이상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죄수들은 무장한 도적떼를 구성하여 시골을 공포로 몰아넣고, 농가를 약탈하며, 화물 수송대를 공격하여 물품을 강탈했다. 광부들의 캠프에서는 채굴허가권료를 수금하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주류판매 금지조치를 내렸지만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기미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부패가 경찰의 상하 계층은 물론 각 조직 속으로 속속들이 파고들었다. 총독 라트로브는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한다. 1853년에는 캠프에서 범죄자들의 약탈행위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사고가 발생한다. 그 지역 인구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광부들이 자신들이 이민자라는 이유로 모든 정치적인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캠프들 사이에 탄원서가 나돌았다. 그해 겨우내 벤디고와 매키버, 알렉산더산은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각종 모임과 탄원이 이어지고 대표 파견이 계속되었다. 불안해진 그 지역의 평의회는 허가권 문제를 양보했다. 이것이 첫 번째 승리였다. 새 총독으로 임명된 찰스 호섬 경은 빅토리아가 비관적인 상황에 처한 것을 알고, 먼저 위기의 요인을 제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1854년 9월부터 그는 광산을 직접 방문하여 신속한 개혁을 추진할 것을 약속했다. 이는 주류허가권을 허용하는 것으로 시잘될 것이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이 그것을 보다 빠르게 실현시키게 된다.  반항자들의 깃발이 밸러랫에서 휘날리다.  여기에는 그럴 이유가 있었다. 그 사이에 절대자유주의적 이념, 혹은 사회주의적 이념들이 채굴권을 둘러싸고 지지 기반을 확보했는데, 이일랜드 혁명가들과 영국의 차타스트 운동가들, 그리고 캘리포니아의 초기 황금 탐험가들이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11월 11일, 밸러랫에서 선출된 개혁주의 연합은 허가권의 폐지와 감독관청의 폐지, 선거인 명부의 개혁을 요구했다. 캠프에서 회합을 계속하는 가운데 캘리포니아의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상상력에 불을 질렀다. '혁명 헌법'이 사람들의 옷자락 사이로 유포되었다. 그리고 11월 27일, 호섬은 광부 연합을 오히려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개혁에 동의한다. 그러나 강제력은 법의 권한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밸러랫은 분노로 들끓었다. 한 강경한 모임은 즉각 모든 허가권의 파기와 위협받는 광부들을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가장 미온적인 캠프에는 특사들을 파견했다. 체포되었던 광부 여덟 명도 무력을 동원해 석방시켰다. 아일랜드인 피터 랄러가 무장 광부들의 우두머리로 임명되고, 광부들은 공개적으로 충성을 맹세했다. 무기와 군수품, 그리고 말들이 징발되었다. 멜버른의 거리는 유레카에서 나무로 차단된다. 혁명 헌법이 변두리 지역에서 떠돌았다. 푸른색 바탕에 은색 별이 그려진 광부들의 공화국 깃발은 밸러랫의 언덕을 뒤덮었다. 찰스 호섬 경은 단호하게 대응했다. 12월 3일, 군대는 기습적으로 유레카의 바리케이드를 공격하여 무장해제된 30여명의 광부들을 처형하고 밸러랫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광부들은 이러한 극단적인 사태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혁명가들은 고립되었다. 피터 랄러는 부상당한 몸으로 도주했다. 12월 6일 밸러랫의 봉기자들은 가련하게도 손을 들고 말았다. 광부들의 공화국은 이렇게 종말을 고했고, 이에 따라 호섬은 승리가 확실해진 순간에 자신이 원했던 조치들을 주도적으로 집행해 나간다. 허가권 폐지와 1855년 입법의회에서 통과시킨 광부들의 선거권 인정 등이 그것이었다.  밸러랫에서 경험한 광부들의 좌절은 영웅시대의 종말을 뜻한다.  물론 다른 금광맥들이 발견되었으나, 그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궁금증은 사라지게 된다. 이제부터 금은 다른 금속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추출될 것이고 광부들의 정치적인 비중은 간과해도 될 정도였다. 난폭한 진압에 이어진 호섬의 개혁들이 위기를 중화시켰던 것이다. 1855년 선거에는 광부 유권자 가운데 8분의 1만이 투표를 한다. 완만한 퇴거 작업이 진행되었다. 캘리포니아의 유토피아는 남아 있는가? 밸러랫은 수년 동안 협동조합 체계로 조직화되는 와중에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따라서 모험가들이 그곳을 떠나게 된다. 1861년에는 이들 중 1만 5천 명이 새로이 풍요로운 광맥이 발견된 뉴질랜드로 떠난다. 오스트레일리아 서부는 신비롭고 거의 인적이 없는 그대로 남게 된다. 1892년과 1893년 쿨가디와 칼굴리에서 굉장한 금광맥이 발견된다. 어쩌면 밸러랫과 벤디고 이상의 것일지 모른다. 비참한 생활조건들, 모든 문명과 행정체계의 부재, 결국 황금의 신화로 귀결되는 것일까?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는 결단코 캘리포니아가 아니었다. 칼굴리의 금광 개발은 주로 런던에서 구성된 기업들이 담당했기 때문이다.  "데드호스트레일의 사람들, 그들은 마음이 돌처럼 굳고, 모습은 짐승으로 변했다. "고 잭 런던은 말한다. 클론다이크의 검은 지옥에서는 황금 탐험가들의 마지막 대회합이 거대한 파도를 이룬다. 고통, 공포, 빈곤의 정점을 향한 여행…, 그리고 이제 막 출렁이는가 싶던 물결이 종말을 고한다. 칠쿠트 패스의 전설을 악화시킨 이 미치광이들이 하나같이 찾으려 했던 것은 무엇인가?    제5장 클론다이크의 십자군 전쟁  종종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모든 사태가 1896년 클론다이크의 모래 속에서 발견된 몇 조각의 황금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황금을 발견했고, 알래스카에서는 대량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러시아인들이 미국에서 그 땅을 팔기 전의 일이었다. 또한 1870년대 초반 이래 사람들은 줄지어 금광으로 물려드는 채굴자들을 보게 되는데, 이들은 캘리포니아의 금광 열기 이후 북에서 남으로 미 대륙의 주요 산맥을 파헤치는 데 집착했던 이들이다. 1880년 1월, 프랑스계 캐나다인 주노는 더글러스섬에서 황금을 발견한다. 이어서 또 다른 프랑스인이 그곳에서 멀지않은 곳에서 광맥의 지반을 발견한다. 샌프란시스코의 산업가에게서 가치를 인정받은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금광들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된다. 1881년부터 주노의 도시에는 1500명의 광부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은 50만 달러에 상당하는 금을 생산했다. 아주 대담한 이들은 이미 연안의 경계선을 넘어 유콘 계곡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886년 10월, 사람들은 유콘강의 합류점인 포티마일스크리크(릴라이언스 요새에서 떨어져 있는 거리를 계산해 붙인 이름이다)에서, 1892년에는 식스티마일스에서, 1893년에는 하류로320㎞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버치크리크에서 금을 발견한다. 이처럼 황금 물결이 출렁이기 수년 전에 유콘에는 이미 수십개의 황금 탐험가들의 캠프가 들어서 있었고, 두 개의 작은 도시, 즉 포티마일스와 서클시티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이 캘리포니아의 금광 열기의 시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수 있을지 모른다.  황금 탐험가들의 공화국: 캘리포니아 갱부들의 낡은 공동체적 이상이 결국 구현된다  법도 행정부도 없는 알래스카는 미국의 관심 밖에 놓인 땅이었다. 또한 캐나다로서도 당시 유콘은 아주 멀리 떨어진 것처럼 여겨졌다. 따라서 황금 탐험가들은 유콘 계곡을 가로지르는 지도상의 국경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들의 법에 따라 생활했다. 식량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은 두 척의 작은 돛단재 뉴 래킷과 아크틱에 의존했다. 이 배들은 매년 여름 세인트마이클이라는 옛 러시아 항구를 떠나 베링해를 따라 포티마일스까지 거스러 올라온다. 이 여행은 무척 길고 힘들어서 얼듬이 얼기 전에 겨우 한 차례 이루어질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고 그들은 자유롭다. 누가 이 얼어붙은 대륙까지 세금을 받으로 오겠는가? 지상의 파라다이스라는 꿈, 초기 기독교 원리로의 복귀, 이것은 포티마일스에 정착하기 위해 아내를 데리고 도착한 영국 성공회 신부 윌리엄 봄파스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이 작은 황금 탐험가들의 공화국은 몇 년 만에 거친 야생의 삶에 놀라우리만큼 성공적으로 적응한다.  포티마일스의 영광과 불행  보안관이나 시청, 경찰이나 감옥도 없는 새로운 상황에서 광부들은 갤리포니아인들의 '십계명'을 간단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매우 활동적인 프리메이슨단 시설을 요구하고 건설했다. 유콘 개혁자 수도회가 바로 그것이다. 채국권지들은 그 집단이 선출한 사람이 기록해 두고 어느 누구도 자신이 감당해 낼 수 있는 면적 이상의 땅을 소유할 권리를 갖지 못했다. 광부들은 단지 구두로 상점에서 신용거래를 할 수 있었고, 생필품은 공유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열쇠도 자물쇠도 없기 때문에 움막들은 항상 행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따라서 행인들은 그곳에 들어가 식사를 하고 잠을 잘 수도 있었다. 다만 다음 사람들을 위해 예비 식량과 나무들을 충분히 남겨두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이처럼 원칙들은 간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그들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거친 데다가 애주가인 모험가들은 1896년까지는 평화롭게 살아간다. 그러나 미국인이 주를 이루는 포티마일스는 캐나다 영토에 속한 땅이었다. 1894년에 이미 집단의 결정에 굴복하기를 거부한 술집 주인의 구조 요청에 따라 이곳에 찰스 콘스탄틴이라는 사복 형사가 도착함으로써 '광부들의 법'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황금 탐험가들은 즉각 포티마일스를 떠나 국경을 넘어 서클시티에 정착한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이곳을 '태평양의 파리'라고 부르지 않게 된다. 1896년 이곳에는 음악실 한 군데, 연극무대 두 곳, 무도장 여덟 군데와 28곳의 술집이 있었다. 연간 황금 생산량은 100만 달러어치 이상이었다. 서클시티는 절정에 이른 듯 보였다. 하지만 어느 누가 겨울이 끝나기 전에 이곳이 유령의 도시가 되리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떻게 한 허풍선이 식료품상과 운이 없는 채국자와 무능력한 '백인 인디언'이 유콘을 향한 거대한 물결을 불러일으킬 것인가?  1896년 7월 로버트 헨더슨이라는 채굴자는 유콘에서 멀리 떨어진 한 지류의 모래에서 금조각을 몇 개 찾아냈다. 그는 지구상의 온갖 금광을 뒤지고 다니느라 33년이란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있었다. 오걸비에서 조제프 라뒤라는 한 프랑스 상인은 그를 구출한 이후 유콘강의 한 지류, 그에 따르면 '금이 썩고 있는' 인디언강을 발굴하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라뒤는 허풍선이였고, 14년간 그 강가에 사는 동안 한 조각의 금도 발견한 적이 없으면서도 그곳에 도착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헨더슨은 수개월 동안 인디언강을 파헤쳤다. 그러나 헛수고만 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언덕 뒤편에서 우연히 이름 없는 강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채굴작업을 했다. 첫 번째 사금 작업에서 800개의 금덩어리가 채취되었다. 식스티 마일스의 캠프는 이 소식에 즉시 텅 비어버리고, 라뒤는 오걸비에 홀로 남게 되었으며, 엔더슨은 식량을 구할 때면 그곳에 오곤 했다. 그가 돌아올 때 인디언강의 수위가 낮아졌고, 그는 유콘강의 다른 지류인 스론디우크를 토해 자신의 채굴지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 길에서 그는 사건의 세 번째 주인공인 조지 워싱턴 카맥을 만난다.  래빗크리크에서: 황금은 북부에서 결코 발견된 적이 없다!  카맥은 '백인 인디언'으로, 타기슈족 추장의 딸과 결혼하여 인디언식 의상을 차려입은 데서 비롯된 명칭이었다. 그는 황금보다 연어 낚시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헨더슨의 이야기를 귓전으로 듣고 가볍게 흘려버렸다. 그러나 바로 그가 모든 일을 야기시키는 주인공이 될 줄이야. 1896년 8월 6일, 그는 스론디우크의 합류지인 래빗크리크에서 황금을 발견한다. '빵 사이에 끼여 있는 치즈 조각만큼이나 두터운' 것이었다고 그는 훗날 술회한다. 그는 첫날 20온스의 금을 채취했다. 그는 자신의 채굴권지를 등록하기 위해 포티마일스로 달려가고, 이 도시는 몇 시간 후 텅비게 된다. 어어서 유콘의 모든 캠프들도 그렇게 된다. 대혹한이 몰아치기 전 사람들은 래빗크리크(뒤에 보난자크리크로 명명된다)에 채굴지를 잡으려고 강을 향해 달리고, 이어서 그것을 등록하기 위해 포티마일스로 되돌아오고, 그리고 겨울을 보낼 자재와 식량을 싣고 다시 출발하는 미친듯한 경주가 벌어진다. 오스트리아 청년 안톤 슈탄더는 보난자크리크에 뒤늦게 도착하고서도 산의 윗부분에서 더욱 풍요 한 광맥을 한 군데 발견한다. 크리스마스에 즈음하여 이 소식이 서클시티에 전해졌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 소식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광부가 한 번의 사금질로 212달러를 얻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모드들 썰매에 짐을 싣고 밤중에 유콘을 향해 떠난다. 1896∼1897년은 광란의 겨울이었다. 유콘의 모든 베테랑들, 즉 사냥꾼과 채굴가들이 그곳에 있었다. 얼어붙은 땅은 강철만큼이나 단단했고, 생필품은 턱없이 모자랐다. 얼마 안 가 사람들은 더 이상 개들을 먹여 살릴 수 없게 되자 죽여야 했다. 소금은 같은 무게의 금과 교환되었고, 계란은 개당 1달러에 판매되었다. 너무 가난해 자신들의 채굴지를 발굴할 수 없는 사람들은 직업을 구하려는 희망을 안고 포티마일스로 돌아갔다. 한 러시아인은 자신이 소유했던 채굴지의 절반을 뒤에 클론다이크의 '왕'이 될 빅 알렉스 맥도널드에게 팔기도 했다. 그러나 고집스럽게 그곳에서 버틴이들 중 여러 사람은 결국 큰돈을 번다.  도슨시티, 또는 격국 실현된 라뒤의 꿈  단 한 사람만이 황금의 열기에 굴복하지 않았으니, 그가 바로 조제프 라뒤였다.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천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캐나다 당국으로부터 유콘과 클론다이크가 만나는 접경지역의 땅을 매입한 그는 이것을 대로와 소로로 나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술집, 상점, 제재소 주위에, 그리고 그가 팔거나 세놓은 분할지 위에 텐트와 움막들이 들어차게 된다. 1897년 4월에는 1500명의 주민들이 몰려 도슨시티가 탄생했다. 불쌍한 헨더슨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세상에서 고립된 채 자신의 알량한 채굴지에 머물며 수개월 동안 이러한 물결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병들고 분노에 가득 찬 그는 얼마 뒤에 유콘을 떠나지만, 시애틀로 가는 배에서 전재산을 도난당한다.  1897년 7월 15일, 엑셀시어호가 누더기 옷에 금괴를 진 15명의 광부를 태우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부두의 군중들은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광부들을 따라가고, 마침내 그들 주위에 몰려든다. 그러는 동안 광부들은 은행에서 자신들이 가져온 부대, 기름통과 재병 등에 가득 들어찬 금가루를 쏟아놓는다. 그들 앞에는 자그마치 1톤의 금이 쌓여 있었다. 몇 시간 만에 전보를 통해 그 소식이 미국 전역으로 펴져 나갔다. 언론계의 거물 허스트는 자신이 그 소식을 최초로 보도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두 명의 기자들을 클론다이크로 급파했다. 이틀 후 시애틀은 68명의 발굴자와 2톤의 황금을 실은 포틀랜드호를 맞아들였다. 이를 본 5000명의 군중들은 하나같이 들뜨게 된다. 식료품상은 가게를 방치하고, 성직자들은 교회를 방치하고, 해군과 경찰은 그들의 직장을 버리고 떠났다. '시애틀 타임스'지는 하루 만에 기자의 절반을 잃었다. 이 도시의 시장 윌리엄D. 후드는 낡은 증기선 훔볼트를 빌린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보로 자신의 사임을 알렸다. 새크라멘토 계곡의 과수원들은 일손 부족으로 과일 수확을 중단해야만 했다. 캘리포니아 잭슨 근방의 오네이다와 켄터키 광산들은 15일 만에 일꾼 중 3분의 2를 잃었다.  "아, 클론다이크로!" 포틀랜드호가 도착한 10일 뒤 1500명의 사람들이 이미 시애틀을 떠났다  뉴욕에서는 그 소식이 전해지고 하루 만에 2000명이 이미 클론다이크행 표를 사려고 기를 썼다. 세 시간 만에 시카고의 한 직업 도박사 집단은 시애틀행 기차를 탔다. 워싱턴주의 농부들, 몬태나의 광부들, 푸제사운드의 수병들, 방랑자들, 실업자들, 태평양 연안의 빈자들은 떠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수천 명씩 몰려들었다. 이 군중들에 모험가들과 광기어린 학식 있는 발명가들이 합류했다. 샌프란시스코, 타코마, 포틀랜드, 빅토리아 해안의 모든 항구들은 개, 양, 소, 당나귀, 콜로라도에서 비싼 값에 매입한 노새, 몬태나에서 온 말 등 유콘까지 실어 나를 짐승들과 물품들로 붐비게 된다. 스코틀랜드인, 아일랜드인, 프랑스인, 독일인,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이미 도착하기 시작했다. 사각돛의 너벅선, 낡은 예인선, 스크너선, 대강 수리한 슬루프선 등 아직 물에 뜰 수 있는 배란 배는 모두 몰려들었다. 9월 1일, 9000명의 사람들이 3만 6천 톤의 화물을 싣고 이미 새애틀을 떠났다. 선박은 당국의 감독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늘어만 갔다. 1897년 여름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최초의 사람들 가운데 스무 살의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잭 런던이었다. 10월 중순부터 유콘에는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이주자들은 이전에 대북부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도슨시티가 그들을 위해 준비한 생필품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이 도도한 물결을 막을 것인가? 클론다이크가 돌연 그 세대의 모든 희망과 모든 무절제를 응축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시대는 분명히 즐거운 90년대였고, 버팔로 빌, P. T. 바넘, 밴더빌트, 그리고 록펠러의 시대였으며, 또한 위기와 실업, 빈곤의 시대이기도 했다. 또 부자들은 더욱 부자가 되고 빈자들은 더욱 가난해지는 부익부 빈익빈의 시기였고, 굶주린 자들이 워싱턴을 어슬렁거리며 배회하는 시대였으며, 수만 명의 사람들이 기적을 기다리는 시대였다. 그런데 이 기적이 돌연 '클론다이크'로 대표되게 된 것이다. 그렇다. 약속의 땅을 찾아 나서는 이 새로운 십자군들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  데드호스트레일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짐승이 되었다  세인트마이클을 통해 유콘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은 매우 길고 비용이 꽤 비쌌다. 최선의 해결책은 칠쿠트 패스나 화이트 패스를 통해 캐나다의 유콘 지역과 경계를 이루는 연안의 산들을 가로지로고, 이어서 도슨시티까지 강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었다. 7월 말부터 수천 명의 발굴자들이 다이어와 스캐그웨이의 해변에 캠프를 쳤다. 이들 중에는 모피옷을 입은 제대 군인, 양복에 도시풍의 신발을 신은 정신 나간 사람들도 끼여 있었다. 이곳은 텐트와 막사, 그리고 빈 통안에서 타는 불길, 침몰한 배의 선체, 놀란 말들의 울부짖음과 개들의 끝없는 울음 등으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보다 쉬운 길로는 먼저 스캐그웨이 위에 있는 화이트 패스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낙관론자들은 그 길을 말등에 앉아 언덕을 산책하듯이 자나갈 수 있는 길이라고 비유한다. 그러나 그곳을 지나면 곧이어 건너야 할 낭떠러지와 강바닥이 이어진다. 악마의 언덕에서는 조그만 실수로도 눈사태를 일으켜 지나는 이들을 휩쓸어가고, 서미트 언덕은 진흙탕으로 변한 가파른 경사를 수천 보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상상을 눙가하는 악몽과 같은 장애물이었다. 그해 가을 화이트 패스를 지나려던 4000명의 사람들 가운데 단지 몇백 명의 사람들만이 살아남게 된다. 9월부터 화이트 패스는 더 이상 지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길을 되돌아와야만 했던 불행한 사람들이 해로이 도착한 사람들의 파도에 합류한다. 12월, 스캐그웨이에는 그곳에 갇혀 더 나아가거나 되돌아갈 방도가 없는 이들이 5000명이나 있었다. 그리고 갱단의 두목 소피 스미스가 외부와 연결할 수 있는 길을 모두 끊어놓자, 이곳은 지옥으로 변모했고 각자는 생존을 위해 도독이 되거나 살인자가 되어야만 했다.  고통과 영웅주의, 그리고 공포를 넘어:칠크트 패스의 서사시  또 다른 길로는 다이어 해안을 통해 가는 칠쿠트 패스가 남아 있다. 화이트 패스보다 고도가 200m가량이나 높은 데다가 날카로운 얼음, 소용돌이치는 바람, 눈사태의 위험, 어떤 짐승도 오를 수 없으리만치 가파른 마지막 경사가 가로막고 서 있는 곳이다. 바로 그곳에서 2만 2천 명의 광인들이 각각 1통에 해당하는 기자재와 식량을 메고 그 물결을 전설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고개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구성된 경찰은 유콘 지역에서의 겨울 기근을 우려하여 각각의 도착자들로 하여금 등반시 최고 50파운드에 상응하는 생존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가게 했다. 이러한 대책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은 걸어서 산으로 몰려든다. 이들 일행은 곧 시프 캠프를 형성하느데, 이곳은 생명이 보잘것없는 것으로 전락하는 악몽의 도시가 된다. 버려진 말들은 주위에서 굶주림에 죽어가고, 인디언 짐꾼들은 도착자들의 물품을 약탈한다. 단단한 얼음으로 잘 다듬어진 산 중턱에는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나 있다. 이곳에는 이른 아침부터 짐에 짓눌려 기진맥진한 사람들, 반은 얼고 굶주림에 지친 불행한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그렇다고 잠시 쉬어간다든가 뒤처져 갈 수조차 없다. 대열에서 축출될 것을 두려위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개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자는 전체의 한 고리가 되어 앞사람의 걸음을 따라 걸어야만 한다. 따라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얼음 속에 거의 수직으로 깎아놓은 1500개의 계단은 행렬을 아연실색케 했다. 그곳에서는 썰매를 끄는 개들조차도 인간의 등에 들쳐 메야만 했다. 마침내 저녁이 되어 정상에 도착해도, 아침이 되면 마음 조급한 수천 명이 떠들어대는 혼란통 속에서 자신의 짐을 메고 다시 길에 접어들어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이는 보통 성인 남자들을 기준으로 3개월이 걸리는 왕복길이었다. 4만 명 이상이 중도에 포기하게 될 것이고, 반면 2만 2천 명은 겨울 내내 걸어 그곳을 지나는 데 성공할 것이다. 린드만과 베넷 호수 주위에 운집한 이들은 도슨시티를 향해 유콘강을 내려가기 위해 해빙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잭 런던은 운이 좋았다. 1897년 8월 7일 다이어에 도착한 그는 자신의 뛰어난 체력 덕분에 매등반마다 150파운드의 짐을 지고 첫눈에 내리기 전인 8월 30일 칠쿠트 패스를 건너는 데 성공한다! 린드만 호수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다른 동료 네 명과 함께 배를 건조하는 데 덤벼들고, 이들은 모두 유콘강에 도전한다. 이들은 도슨시티에서 120㎞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어퍼아일랜드의 버려진 움막에 자리를 잡고 즉각 채굴을 시작한다.  도슨시티에 관해 유포된 공포  잭슨처럼 얼음이 얼기전에 유콘강을 내려오는 데 성공했던 수천 명의 '치채커스(부드러운 발을 가진 사람들)'는 모든 것을 잃기 위해 황금의 경주에서 승리했던가? 그들이 의지하던 얼마 안 되는 사냥꾼들은 그들에게 즉시 되돌아가라고 고함쳤다. 도슨시티에는 먹을 것이 전혀 없다. 상황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했다. 9월중 기다리던 화물차 네 대는 도슨시티에서 600㎞떨어진 곳에서 부서지고 약탈당한 채 발견되었다. 그해의 마지막 두 증기선인 위어리와 벨은 거의 빈털터리가 된 채 도착했다. 서클시티에서는 무장한 한 광부위원회가 무력으로 50톤의 식량을 구입했다. 적어도 1000명의 사람들이 도슨시티를 떠나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경찰은 떠나는 이들에게는 연락선 벨의 무료 승선권과 5일분의 식량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자가 한몫을 잡을 텐데 어떻게 자신의 채굴지를 버리고 떠날 수 있겠는가? 10월 1일, 그 배에 승선한 사람은 단지 120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도슨시티는 강경증 환자처럼 움츠러들었다. 기온은 영하67℃까지 내려갔고, 나무들은 얼어서 터져 나갔으며, 하룻밤 사이에 여섯 사람이 얼어죽었다. 밀가루는 최소한 금화 75달러에 팔렸다. 식당이 문을 닫은 것은 크리스마스 전이었고, 비축 식량이 너무 적어 경찰은 죄수라도 식량을 가져오지 않는 한 감옥에 가두기를 거부했다. 5월 29일, 드디어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의 엄청난 경주가 시작되었다. 3만 명의 광인들이 7000척의 배를 타고 얼음조각과 급류에 맞서며 용감히 황금을 위해 그들의 마지막 투혼을 발휘했다. 급류를 지나갈 때는 반드시 안내자의 도움을 받도록 한 경찰의 아주 엄격한 통제 덕택에 위험은 감소되었다. 황금 탐험가들의 떠들썩한 물결이 6월 중순경에 도슨시티를 엄습했다. 7월 1일이 되자 도시에는 이미 은행 두 곳, 신문사 두 곳, 교회 다섯 곳, 극장 한 곳, 그리고 30여 채의 술집과, 심지어 전신기마저 한 대가 설치되었다. 불과 보름 사이에 가장 거대한 캐나다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수개월 동안 최악의 적대감 속에서 모든 사람들을 긴장시켰던 황금의 열기는 돌연 시들어간다  몇몇 사람은 황금을 조금밖에 발굴하지 못한다. 채굴지의 수가 1월에 5000개에서 여름에는 1만 7천 개로 증가하지만, 생산량은 그만큼 증가하지 않았다. 매장량이 풍부한 땅은 오래 전부터 다른 사람들이 확보해 두었던 것이다. 8월부터 1만 명이 세인트마이클을 통해 들어왔다. 여름내내 도슨시티에서 북적거리던 군중은 얼음이 얼기 전에 1만 명이 빠져 나가는 9월까지 축제나 긴 휴가, 혹은 카니발을 즐기는 듯한 인상이었다. 잭 런던은 클론다이크 서사시의 역설을 온몸으로 보여주며 6월 8일 도슨시티를 떠났다. 그는 이 지역에 도착차여 도슨시티에 입성하기 전까지 불과 3일밖에 발굴작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 12월 3일까지 머무른다. 그리고 11월 16일에야 채굴지를 등록하는 수고를 한다. 그는 실제로 채굴작업을 하지 않았다. 괴혈병에 걸린 그는 얼음이 녹자 유콘을 떠난다. 이처럼 그는 한푼도 없이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간 것이다. 이제 막 시작된 물결은 대략 종결되었다. 마치 이 고통스러운 서사시에서 중요한 것은 황금도, 그 부름이나 도약도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신비로운 힘은 모든 영웅들을 불러 일깨울 것이고, 잭 런던은 곧이어 황금의 땅에 대한 글을 통해 이들을 불후의 인물로 만들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 나머지는 산업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기술자 A. C. N. 트레드골드는 구겐하임과 피어폰트 모건과 동업으로 유콘 황금회사를 건립한다. 따라서 재집단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수력 준설기와 언 땅을 녹이기 위한 증기기관 등은 1901년 이래 황금 생산량을 증가시켰다. 그 결과 1909년까지 연간 250만 온스의 금을 생산했다. 그러나 전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20세기에 들어오면 산업화된 기업의 냉혹한 법칙과 채산성이라는 개념이 자리잡는다. 또한 남아프리카 광부들을 둘러싼 골치아픈 문제가 대두한다. 유토피아, 꿈, 무절제는 사라졌는가? 황금은 다른 금속과 다름없는 것으로 전락했는가? 그러나 1980년 브라질의 세라펠라다에서 한 '가림페이루'가 엄청난 부를 발견한다.    제6장 전설에서 현실로  만일 클론다이크에서 일어난 황금을 향한 물결이 아직 낭만주의적인 19세기에 속하는 일이었다면, 남아프리카의 황금 벌판을 향한 물결은 10년 일찍 시작되었으면서도 현대에 속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황금에 관한 그 어느 것도 전설이나 몽상, 유토피아를 요구하지 않는다. 당시까지만 해도 황금의 전설에 따라다니던 성서적인 냄새가 나는 영웅적인 횡단은 아프리카인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음은 몰론이다. 이들은 1830∼1840년 사이세 케이프 식민지에서 영국인들의 마수를 피해 달아나며 이러한 횡단을 이미 경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렌지, 발, 그리고 드라켄스버그를 넘어 영토를 확보하려고 시도했다. 남아프리카 황금의 역사는 그 나라의 독특한 역사적 상황에 따라 규정된다. 백인 식민지와 아프리카 부족들 간의 끝없는 갈등, 케이프와 나탈의 영국 식민지와 트란스발과 오렌지의 보어 공화국이 불리되어 있던 데 기인한 혼란…  1853년 10월, P. J. 마레는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떠돌아다니고 난 후 크로커다일 계곡에서 몇 개의 금조각을 발견했다.  1867년, 상아 사냥꾼과 독일의 지리학자가 마타벨렐란드에서 아주 값진 발견을 한다. 이는 황금 탐험가들이 두 척의 배에 몸을 싣고 더반을 향해 오스트레일리아를 떠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고, 트란스발 공화국으로서는 영국인들의 빗발치는 항의를 무릅쓰고서라도 그 지역을 합병시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해 케이프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하자 황금은 이차적인 문제가 되었다. 먼저 발 강가를 조사하는 데 작업이 집중되었다. 1870년 6월에는 300명의 발굴자들이, 10월에는 1만 명이, 12월에는 2만 명이 120㎞ 이상 되는 강줄기에서 작업을 했다. '발굴자들의 공화국'을 세우려는 이같은 미온적인 시도는 킴벌리 지역에서 보다 중요한 광맥들이 발견되자마자 중단되었다. 이어서 킴벌리는 즉각적으로 케이프, 오렌지 자유국, 그리고 트란스발 공화국 간의 생생한 영향력 싸움의 주제가 되었고, 이러한 싸움은 1871년 케이프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1871년까지 존재하던 3700개의 개별 채굴지는 점차 98개의 인수회사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1877년에는 사업가 세실 로데스가 운영하는 드 비어스 연합 광산회사가 킴벌리 지역에서 독점적인 위치를 점하게 된다.  거대 개업의 권위를 거부한 불행한 다이아몬드 탐험가들과 개인주의자들은 황금 탐험가로 변신한다.  1873년 2월, 오스트레일리아 발굴가 맥 라클란은 라이든버그 근처의 한 강가에서 몇 개의 금조각을 발견한다. 이곳의 광부들은 결코 400명 이상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바페디 흑인 부족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영국인들이 1877년 트란스발을 합병하려는 시도의 핑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1884년 트란스발의 독립이 새롭게 인정되자마자 보어 정부는 독립 광부들을 마치 흑사병 환자처럼 경계할 것이고, 대기업들의정착을 권장하게 될 것이다. 1884년에는 바버턴 근처에서, 그리고 1886년에는 위트워터스랜드에서 연이어 황금이 발견되자, 킴벌리의 대남작들은 이미 정부의 축복 속에 이곳으로 달려들어 거대한 부동산 사업을 벌이며, 이 지역의 금광맥 전부를 소유하려 들었다. 1890년, 시안정련법이 발견되자 바위 속에 함유되어 있는 금의 75%를 추출할 수 있게 되었고, 점점 더 깊이 광맥을 파고 들어가는 데 따르는 개발의 어려움은 자본 집중을 조장했다. 1899년, 영국인과 보어인 간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기업들은 세계에서 가장 풍요한 금광맥인 랜드의 주인이었다.  고통스럽고 피어린 또 다른 역사가 시작된다  이 전쟁의 결과로 태어난 남아프리카 연합은 금광과 다이아몬드 광산을 기반으로 자신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 실제로 금 생산은 국가 생산의 45%를 차지하는데, 이는 45만 명의 흑인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착취한 대가로 이루어진 것이다. 광산들은 두 공동체간의 가장 격력한 대결장이기도 한다. 또한 바로 그곳에서 아프리카 광산노동자(A. M. W. )의 외침에 따라 10만 명의 광부들이 1946년 광산을 점령하는 최초의 거대한 흑인 파업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광산노동자 전국연합(N. U. M. W. )이 생겨나는데, 이것은 오늘날 10만 명 이상의 가입자를 보유하고 있다. 1979년, 1982년, 1986년, 1987년의 가장 격렬한 파업들이 발생했던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금은 남아프리카의 미래를 결정하는 열쇠가 된다. 이처럼 여러 가지 갈등이 뒤따랐지만, 남아프리카는 세계제일의 금 생산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러시아와 시베리아의 엄청난 광맥에서 생산되는 생산량을 휠씬 능가하고 있다.  시베리아, 혹은 스탈린의 거대한 캘리포니아 드리밍  넓은 1300만㎢에 이르러 물에 잠긴 땅의 10분의 1에 해당하며, 자그마치 4500㎞에 달하는 침엽수림 지대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강줄기는 끝없이 꼬리를 물고, 지평선 또한 끝없이 이어진 시베리아는 러시아 혁명가들에게 하나의 부름이나 도전처럼 울려 퍼진다. 사람들은 바로 그곳에서 자연과의 거대한 대결을 통해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시베리아가 소련의 캘리포니아가 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황금 탐험가들의 족적을 따라 광산기업들이 세워졌다. 그와 동시에 농업이 발전되었는데, 황금 탐험가들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수송로와 수송수단들도 그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실제로 캘리포니아의 역사를 만들었던 이 과정은 소련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라고 기술자 세레브로프스키는 1926년 설명한 바 있다.  그렇게 해서 황금 트러스트의 놀랄 만한 모험이 시작된다  스탈린으로부터 연구의 사명을 부여받고 미국으로 파견된 알렉산드르 세레브로프스키는 황금 트러스트의 책임자로, 1927년 미국 주노에서 남동부 광산의 책임을 맡고 있던 젊은 기술자 존 D. 리틀페이지를 만나 자신과 함께 모험을 감행하자고 설득한다. 존 리틀페이지는 세레브로프스키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소련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 2년간 머물게 된다. 1929년 우랄 지역과 바츠키리 지역, 카자흐스탄 지역의 광맥탐사 감독관으로 임명된 존 리틀페이지는 1930년 작업상 그를 도와줄 10명의 기술자를 충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간다. 가장 중요한 조직자이자 교육자였던 그는 1933년 황금 트러스트의 부책임자로 임명되고, 이어서 생산을 담당하는 책임감독관으로 임명된다. 그 시대에 트러스트는 대략 30만 명의 황금 탐험가들을 모아 통제하고 있었다. 황금의 특권! 시베리아는 이때 사기업이 권장되던 소련의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실제로 새로운 광맥을 발견한 사람은 누구나 3만 루블의 상금을 수여 받았다. 그리고 항상 보다 더 동쪽으로 행진하며 미지의 시베리아 복판으로 들어가 식민개척자들에게 길을 터주었던 이들은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그루지야인, 몽고인, 중국인, 한국인, 키르기스인, 아르메니아인, 북극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원주민들어었다. 1947년 존 리틀페이지는 붉은 깃발의 훈장을 달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러시아는 당시 아마도 세계 제일의 금 생산국들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지향적인 시베리아의 꿈은 이따금 악몽이 되기도 했다. 크렘린의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파라오의 꿈을 실형하려 했던 이곳은 또한 자신드에게 대항하는 이들을 가두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굴락(소련의 강제노동 수용소)의 길고 끝나지 않는 밤이 있는 시베리아인 것이다.  아마존에서 부르는 세리펠라다의 서사시  이제는 광산업체들이 가차없이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1971년 달러의 금 태환성의 종말과 도처에서 연쇄적으로 나타난 가격 폭등은 개별 기업들의 창립을 조장했다. 1980년 2월, 모든 브라질 언론은 엄청난 금괴가 아마존에 있는 세라펠라다의 동굴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노르데스트의 빈자들, 마라냥과 마투그로수의 모험가들,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 바이아, 레시페 등지의 판잣집에서 실업자들이 수천 명씩 몰려 나왔다. 이들 대부분은 생필품도 없고 장비도 갖추지 않았으나, 말라리아 같은 무서운 질병도 개의치 않았고, 한발 한발 나아가면서 숲과 뱀, 모기와 싸워 나갔다. 최초의 도착자들은 '황금 산' 토양을 10㎡크기의 바란쿠로 나누었고, 이 바란쿠를 소유한 사람들은 마음대로 그 땅을 파헤칠 수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이들은 사케이루(부대 운반자)로 일하며, 킬로그램당 4쿠르제이루의 보수를 받는다. 그들은 금을 추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산기슭에서 채취한 흙을 헝겊부대에 담아 산꼭대기까지 메고 올라가야 했다. 이것은 진흙탕을 휘저으며 살인적인 더위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노예 노동과 같은 것이었다.  처절한 투쟁이 국가를 가림페이루와 대립시킨다  세라펠라다 캠프는 어느덧 3만 명의 주민이 모여 사는 어엿한 도시가 되고, 길거리로 술이 흘러넘치고, 총으로 원한을 해결하는 곳이 된다. 이러한 일은 대통령 피구에이레두가 가림페이루(황금 탐험가)를 '소탕'하고 황금 밀매에 종지부를 찍으라는 명령을 내려, 비밀정보부의 크리우 의원이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세라펠라다에 도착한지 채 한 달도 안 되어 술과 무기, 윤락 여성들이 사라진다. 이후 세라펠라다는 국가가 통제하는 이른바 자발적 노동 캠프가 된다. 그러나 광맥들은 이미 자원이 고갈되었고, 내벽은 균열이 가 있었다. 3만 명의 가림페이루를 결집한 조합인 쿠가르(COOGAR)는 긴급 축성작업에 필요한 기금조차 없었다. 그러나 가림페이루들은 자신들의 채굴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국립회사 발레 두 리우두세에 채굴권을 양보하기보다는 차라리 손에 총을 쥐고 죽을 것을 결심했다. 사람들은 미국과 캐나다 투자자들과의 협력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1988년 1월 마라바에서 경찰과 갈등을 빚으면서 대략 100명 가량의 사망자를 발생시킨다. 세라펠라다는 종말을 맞았을까? 이미 수천 명의 황금 탐험가들이 리우네그루의 정글 속으로 덤벼들었고, 또 인디언족인 투아누스의 영역으로 몰려들었다. 1984년 이래로 그곳에서 학살 소문이 나돌았다. 1985년 초에는 4000명의 인디언이 분노하여 가림페이루의 무장군과 싸우기 위해 운집했다. 그러나 살인 행위는 조세 굴레 신부의 정부에 대한 중재 덕택에 가까스로 모면했다. 황금을 둘러싼 처절한 전설은 이미 16세기에 정복자 프란시스코 데 오렐라나가 엘도라도를 건설한 바 있었던 아마존의 녹색 지옥에서 끝나버릴 것 같지는 않다.    기록과 증언  땅속에서 금과 은을 캐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스러지게 만드는 것보다 터무니없는 일은 없다. 이 금속들은 그 자체는 절대 무용한 것이나,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부의 척도로 선택했기 때문에 부가 되었다.  (몽테스키외. '페르시아인의 편지')  서터 장군의 모험  황금의 열기는 그것을 타오르게 했던 이야기들과 전설들의 확산없이 어떻게 가능했겠는 가? 산드라의 '황금'은 많은 오류로 점철되어 있을지라도 이제 전설이 되었다. 따라서 여기 산드라가 서터에게 헌정한 일기의 초록을 소개한다.  제재소를 건설하던 중 냇가에서 금을 발견했다는 소식에 나는 무관심할 수 없었다. 나는 이 발견을 내 삶의 좋고 나쁜 여러 가지 운처럼 다소 무관심하게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나는 밤에 잠을 설쳐가며 이것이 내게 미칠 치명적인 영향과 끔찍스러운 이후의 시간들을 생각했다. 하지만 뉴헬베티가 폐허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인부들에게 자세한 작업지침을 내리고, 병사 몇 사람과 카우보이들을 데리고 7시에 출발했다. 우리는 콜로마를 향해 뻗어 있는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 올라갔다. 도중에 마부 잃은 말 한 필을 만났다. 조금 더 올라가자 마셜이 숲에서 나왔다. 그는 천둥과 비바람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었고, 밤이 되어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추위와 허기에 지쳐 있었지만 전날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는 등반을 계속하여 그 유명한 엘도라도에 도착했다. 날이 조금 개자, 저녁 무렵 비로 잔뜩 물이 불어난 수롯가를 탐색했다. 나는 수문을 작동시켜 물을 비웠다. 우리는 황금을 찾아 내려가 많은 금조각을 발견했다. 마셜과 몇몇 노동자가 금가루를 내게 가져왔다.  나는 그들에게 그 금으로 반지를 만들 거라고, 하지만 캘리포니아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나는 한참 후에야 그것으로 문장을 새긴 반지-문장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 아버지의 출판 마크인 불타는 불사조를 새겨넣게 했다-를 만들었다. 반지의 안쪽에는 다음과 같은 글과 그림을 새겨넣었다. 1848년 1월에 발견된 최초의 금. 세 개의 신부 지팡이, 발루아식 십자가, 내이름 '셔터'. 다음날 나는 콜로마의 외곽 지역을 두루 방문하면서 그 상태와 위치를 기록했다. 특히 물의 흐름을 기입해 두고 나서는 인부들을 불러모아 제재소 건설이 끝나게 되는 5~6일 이후까지 황금 발견을 비밀에 부쳐야 한다고 일러두었다. 제재소 건설을 위해 이미 2만4천 달러나 투자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약속을 받고 나서 집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 불행했고, 어떻게 이 저주받은 황금발견으로부터 벗어나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일이 결코 비밀로 남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은 그렇게 불길한 생각대로 진행되고 말았다. 2주일 남짓 지난 뒤에 나는 한 백인에게 인디언들을 붙여서 식량과 장비를 주어 콜로마로 보냈다. 위머 부인은 그에게 황금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고, 그의 아이들은 그에게 몇 개의 작은 금가루까지 주었다. 요새로 돌아오는 길에 이 사람은 곧바로 내 소관 영역 밖에 있던 상점을 찾아갔다. 그는 스미스에게 술 한 병을 주문하고, 콜로마에서 가져온 금으로 술값을 지불하려 했다. 스미스는 그에게 자신을 정신나간 사람으로 취급하냐고 따져 묻고는 나를 찾아와 정황을 캐물었다. 내가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스미스에게 모든 이야기를 해주었다. 조금 뒤 그의 동업자 브래넌도 나를 찾아와 많은 질문을 해댔다. 나는 그에게도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채 문도 닫지 않고 뛰어나갔다. 한밤에 스미스와 그는 마차에 그들의 상품을 모두 싣고, 내 말을 훔쳐 서둘러 콜로마로 떠나버렸다. 이렇게 되자 내 휘하의 노동자들도 도망치기 시작했다. 곧 나는 몇몇 충실한 기술자와 여덟명의 부상자들과 함께 숲 속에 남았다. 휘하의 몰몬교인들은 내 곁을 떠나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황금의 열기에 휩싸이게 되자 그들 또한 모든 죄책감을 상실했다. 내 창문 밖에는 끝없는 행렬이 펼쳐지고 있었다. 걸을 수 있는 사람이면 모두 샌프란시스코와 해안의 다른 주로부터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제각기 움막집이나 막사나 농가를 팽개치고 서터 요새로 몰려왔고, 이어서 콜로마를 향해 떠났다. 몬터레이와 남부의 다른 도시 사람들은 처음에 내가 신개척지에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꾸며낸 일이라고 생각했다. 길가의 행렬이 며칠 동안 잠시 행진을 멈추었으나, 곧이어 더욱 북적이는 행렬이 이어졌고, 그 도시들마저도 행진에 참여했다. 도시들은 텅 비고, 내 가련한 땅들은 그들의 손길에 헤집어졌다. 나의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풍차들은 멈추었고, 사람들은 절구마저 훔쳐가 버렸다. 피혁 공장은 페허가 되었으며, 작업중이던 가죽 가운데 상당수는 저장 탱크 속에서 곰팡이가 슬어버렸다. 아직 가공하지 않은 가죽은 부패하고 말았다. 휘하에 있던 인디언과 카나크인들마저 자식들을 데리고 떠나버렸다. 그들은 금을 긁어 모았지만, 이를 술과 바꾸어 먹었다. 또 휘하의 목자들은 소떼를 방치하고, 경작자들은 농장을,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작업을 방치했다. 내 보리들은 발밑에서 썩어갔고, 과수원에서 수확을 해줄 사람이라곤 없었으며, 축사의 젖소들은 죽어라 울어댔다. 내가 가장 신임하는 경호원들마저 도망치기에 이르렀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사람들은 나를 찿아와 자기들과 함께 콜로마에 가 황금을 찾자고 호소했다. 하느님, 이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이었는지! 나는 그들과 함께 떠났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  나는 마차에 상품과 생필품 등을 싣고, 1명의 점원과 100여 명의 인디언, 그리고 50명의 카나크인들을 데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 지금은 내 이름을 따서 명명한 급류가 흐르는 강가에 황금 캠프를 건설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곧이어 많은 사람들이 인사도 없이 우리 쪽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그곳에 술집을 차려놓고 내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캠프를 걷어 산의 더 높은 지대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모두 헛일이었다. 이 술 판매업자들은 악귀처럼 우리를 따라다녔다. 나는 내 휘하의 불쌍한 인디언들과 섬에서 온 야만인들이 새로운 쾌락에 빠져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얼마 못 가서 내 휘하의 사람들은 거의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술을 퍼마셨다. 그들은 돈이나 채굴한 금으로 도박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술에 취해 보냈다. 산 정상에서 나는 내가 비옥하게 일구었던 이 거대한 지역이 약탈과 방화에 내던져진 것을 바라보았다. 몇 발의 총성이 나의 고독마저 깨뜨리고 울려왔고, 서쪽에서는 군중들의 왁자지껄한 함성마저 들렸다. 자그마한 내항에는 언뜻 보기에도 커져가는 이름 없는 도시가 건설되고 있었고, 바다에는 선박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없었다. 나는 다시 요새로 내려와 이전에 도망쳤거나 나를 따르려 하지 않은 이들을 모두 해고하고, 모든 계약을 해약하고, 모든 계산을 마쳤다. 나는 파산한 것이다. 나는 재산관리인을 임명하고 나서 내 집을 드나드는 도적떼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강가를 향해 떠났다. 그때 나를 따라온 이들은 내가 직접 키운 인디언들뿐이었다. 만일 계획을 끝까지 실천했다면 나는 아마도 단기간 내에 세계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금의 발견은 나를 파산시키고 말았다... 금을 발견한 사람은 콜로마의 제재소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목수 마셜이었다. 그가 금을 발견한 곡괭이질 이후 모두가 나를 버렸다. 내 직원들, 노동자들, 점원들, 심지어 나의 용감한 병사들과 내가 신임하던 이들마저 내가 아주 후하게 대접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원했고, 마침내 나를 도적질하고 약탈했으며, 황금을 찾아 덤벼들었다. 금은 저주스러운 것이어서 이곳에 온 모든 이들, 그리고 그것을 주운 모든 이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들 중 대다수가 스러졌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어떻게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 되새겨보곤 한다. 지난 여러해의 세월은 지옥 같은 삶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죽이고 약탈하고 암살했다. 사람들이 모두 약탈에 열중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미치거나 자살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이 황금 때문이고, 이 황금은 술로 변해 버렸다. 나는 그들이 한참 후 어떻게 될 것인지 되묻곤 한다. 오늘에 와서 생각하기에 사람들은 여러 나라에서 왔고, 내 땅 위에 도시와 마을과 농가를 건설했고, 나의 농장을 나누어 가졌다. 그들은 저주받은 도시인 샌프란시스코를, 내가 나의 불쌍한 카나크인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선택했던 그곳을 일구었다. 물론 이 카나크인들도 황금을 찾기 위해, 그것으로 술을 마시기 위해 나를 버렸다. 만일 가브리엘에서 술 판매업자들의 왕인 샤논의 발톱에서 그들을 구해내고, 이따금 생명을 무릅쓰고 데려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미 개처럼 스러져갔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다시 고용했다. 그들은 다시 오두막집에서 나의 착한 인디언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캘리포니아는 오늘날 미합중국의 일부가 되었고, 이 주는 완전히 변모했다. 믿음직한 군인들이 워싱턴으로부터 파견되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질서를 회복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곳에는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도착하고, 아직도 황금산이 남아있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게 거의 모두 사라졌다. 묵시록의 괴물이 이제 이 지역을 떠돌고 있고, 모두가 동요하고 있다. 몰몬교도들은 이미 황금으로 가득 찬 마차를 끌고 떠나버렸다. 그런데 나는 그들을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들이 살레 호숫가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에서 방탕하고 호화롭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곳에다 내게 배운 기술로 과수원을 만들었다. 사실 금을 찾아 나서기 전에는 내 밑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실하고 좋은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마저 저주를 받은 것처럼 보인다. 이 모든 것에 대해 내가 진정 책임이 있을까? 나는 이따금 내가 처한 빈곤에 대해 생각해 보며 그렇게 느끼고는 한다. 일단의 배우들이 이 지역을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그중에는 여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이곳의 토박이가 되기도 했고, 다시 떠나기도 했는데, 그중에는 이탈리아인도 칠레인도 프랑스인도 있었다. 원래의 지주들은 모두 새로운 도착자들에게 소유권을 양도하는 일을 하던 뉴욕의 변호사들과 다투고 있다. 모두가 소송중이다. 나는 남을 흉내내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블레이즈 산드라 '황금')  광부들의 여왕  스캔들을 일으킨 고급 창녀, 페미니즘 운동가,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1세의 첩 롤라 몬테스의 전설은 일반적으로 유럽에서 행한 모험에서 그친다. 그러나 그녀는 18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마치 여왕처럼 환영을 받았고, 오스트레일리아로 가기에 앞서 그래스 계곡에서 황금 탐험가가 된다.  밀 가에서 안으로 조금 들어가 분꽃에 덮인 흰 담장 뒷편에 자리잡은 그 집은 문위의 현판이 없다면 주변의 시골 별장들과 전혀 구분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행인들이 나처럼 그곳에 멈추어 서서 기겁한 채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까. 그녀와 같은 스타가 무슨 운명의 장난으로 황금을 찾아 사람들이 한창 쇄도하는 이곳 그래스 계곡에서 퇴락해 가는 것일까? 혹자들에게 그 집은 문제 많은 고급 창녀의 집이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일관성 있는 최초의 페미니스트 중 한 사람의 집이었다. 낭만파의 하늘의 불타는 혜성이었던 그녀는 위고, 뒤마, 리스트, 상드의 친구였고 분명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동시에 가장 증오의 대상이었던 여인이다. 그녀는 수십 명에 이르는 남자들을 파산과 결투와 자살로 이끌었다. 왕자들과 왕들, 한 황제가 그녀의 발 아래 엎드렸고, 유럽의 모든 황실들은 그 싸움의 마당이었다. 그때 이후 시인, 작가, 극작가들은 끝없이 그녀를 갈망했다. 누가 그녀를 모를까? 물론 그녀는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1세의 매혹적인 첩이자, 그가 랑드펠트의 여백작으로 봉했던 롤라 몬테스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도대체 어떤 사정으로 이곳에서 2년간 머물렀을까? 그녀에 대한 전기들은 대부분 그점을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책들을 읽어보면 그녀의 삶은 마치 1848년에 끝나는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그녀는 학생봉기가 발생하고 그녀의 보호자가 퇴임함으로써 바이에른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이어서 몰락한 호사가로 황금기의 추억을 안은 채 세계를 떠돌아 다녔을는지 모른다. 마치 역사가 유럽에서 멈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1848년은 유럽 도처에서 겪은 혁명의 대좌절이나, 구세계 내부의 역동적 요소가 거부되었다는 점만으로 특징지을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해는 또한 캘리포니아에서 황금이 발견된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유럽에서 몰려들었던 이들은 단지 탐욕스러운 모험가들만이 아니고, 그중 상당수는 주로 1848년의 혁명가들처럼 급진적이거나 향수에 젖어 있는 이들로, 유럽 대륙에서 고통받거나 억압을 피해 도망쳐야만 했던 이들이다. 그 결과 이 땅은 신세계를 창조했던 구유럽이 원하지 않던 꿈의 땅이 되었다. 캘리포니아, 혹은 성공한 1848년의 혁명! 그때 아름다운 롤라가 유럽을 떠나기로 선택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일까? 그녀는 황금의 나라, 즉 그래스 계곡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는데, 그곳은 이미 콘월인, 아일랜드인, 에코세즈인, 갈루아인, 브루타뉴인들이 뒤섞여 있어, 명실상부한 캘트족의 미합중국이었다. 부연 설명하자면 그녀는 1818년에 리머릭에서 태어난 아일랜드인이었고, 본명은 엘리자 길버트였다. 1851년, 뉴욕에 도착한 여백작 롤라 몬테스는 헝가리 봉기의 영웅인 코슈트를 대동하고, 자신을 손으로 만지려는 호기심어린 사람들에게 1달러를 받았다. 그녀는 예전의 화려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어깨 위에 앵무새를 얹거나, 개를 두마리 끌며, 털을 짧게 단장시킨 말에 남장을 하고, 입에는 시가를 물고, 훼방자를 채찍으로 다스리며, 주위에 하인들을 거느리고 샌프란시스코의 거리를 지나던 1852년의 오만스러운 롤라가 아니었다. 그 시절 캘리포니아의 기자들은 분명히 상상력이 빈약했을 터이지만, 뱅크로프트 도서관의 자료들은 그녀에 대한 당시의 대접이 허리우드의 초대작들 중 가장 기상천외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항구에 몰려든 열광하는 관중, 만원이 되어버린 시의회, 창문가의 깃발, 기사들의 축포와 팡파레, 그녀의 걸음마다 장미꽃을 뿌리는 학교 어린이들, 어떤것도 부족함이 없엇고, 왕의 첩을 환호 속에 호텔로 영접하기 위해 4두 마차가 있던 도심에서는 일단의 광기마저있었다. 그녀는 공인된 애인을 두 명 동반한 채 도착했고, 그 애인들은 도자기로 만든 개들처럼 서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 중 패트릭 파티 헐은 아일랜드 출신의 젊은 기자로 생시몽 사상의 주창가였고, 샘 브래넌은 백만장자에다 캘리포니아 몰몬교의 창시자였으며 이 신국가의 왕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구체제의 잔재? 천만에! 환영에 사로잡히고 황금의 열기에 불타는, 신세계를 발견한 수많은 광인들이 그들의 일원이라고 인정함으로써 그녀는 오히려 정복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즐기기 위해 살롱에서 그곳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황금을 향한 조급한 마음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얼마 후 그녀는 교만한 브래넌의 사치스러운 보호에 안녕을 고한다. 그녀가 도착한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아 샌프란시스코는 그녀가 패트릭 파티 헐과 결혼하고 금광을 찾아 떠난다는 신문기사를 접하고 놀란다. 그 여행은 휴식을 위한 여행이 아니었다. 길도 없고 머무를 곳도 없으며, 안락함이란 전혀 없었다. 오늘날 캘리포니아의 주도인 새크라맨토는 당시에는 브래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강변에 낡은 움막들이 군집해 있는 곳이었다. 자긍심에 가득찬 롤라는 신속하게 자신이 이제는 바이에른 왕궁의 세련된 법도와 멀어진 것을 알았다. 호텔에는 방들이 없었고, 공동침실만이 있었다. 음식은 삶의 회색 곰 다리, 당나귀 스테이크였고, 야채는 당연히 생소했다. 그녀의 유명한 스파이더 춤으로 말하면, 이 매혹적인 타란텔라 춤은 유럽의 모든 멋쟁이들을 매혹시켰지만, 그녀는 호기심에서 발동한 성공이 끝난 후 그녀의 춤이 이 거친 지역의 취향에 비추어 너무 단조롭다는 것을 시인해야 했다. 이 지역은 양성적인 조야라 (그의 익살은 사르데냐 왕이 서명한 증명서가 공인하는 한편, 광고에 명시되어 있었다)의 익살이나 아랍인으로 변장한 130kg의 댄서 헬렌 웨스턴의 익살에 익숙해져 있었다. 또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올레 불을 잊을 수 없는데, 그는 '홈 스위트 홈'을 들려주어 건장한 광부들의 눈물을 불러낼 줄 알았다. 이런 적들 앞에서 가련한 헐은 모험가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점차로 씁쓸한 감정으로 샌프란시스코 사무실의 안락함과 마리스빌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롤라 몬테스는 격분하여 그와 그의 짐을 호텔 창 밖으로 내던지고, 홀로 신비스러운 황금의 땅 마더 로더를 향해 떠난다. 15일 뒤 그녀는 그래스 계곡에 도착했다. 비록 충격이 대단했지만 그녀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이 약속의 땅에서 그녀가 본 것은 야만으로 돌아가고, 얼빠진 짐승 같은 일당들의 손에 페허가 되어버린 불결한 시궁창 이었다. 사람들에 따르면 그녀는 고개를 세우고 거침없이 주변의 무질서와 불결함과 소음에 신경 쓰지 않고 도시로 들어갔다. 각지에서 몰려온 캘트인들이 뒤섞인 이 군중 가운데에는 독일인, 이탈리아인, 프랑스인, 미국인, 그리고 소란스러운 탈주 선원이나 시드니 감옥을 탈출한 죄수들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어린 오리들이라고 불렀다. 롤라 몬테스는 이곳에서 2년을 지냈다. 그녀는 지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이 부랑자들에게 즉시 살해되고 겁탈당하고 추방되고 짓밟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의 여왕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한 남자의 여인이 될 수 없었던 그녀는 따라서 모든 남자들의 여인이 되었고, 그들의 우상, 혹은 행운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밀 가의 정직한 여인들도 이 추잡한 창녀를 추방하려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들은 남편을 걱정해야 할 필요가 없음을 알아채고 오히려 그녀를 자신들의 보호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화려한 롤라가 직접 정원을 가꾸려 자신의 손을 녹색으로 물들였을 때, 그것은 중요한 승리였다. 그녀는 자신을 조롱하는 이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신부가 그녀를 문제삼자 그녀는 무대복 차림으로 문 앞에 나가 그 유명한 스파이더 춤을 추며, 신부가 도대체 무엇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지 알게 만들었다. 그녀는 얼마 후 신부에게 사회사업에 써 달라며 거액의 돈을 보내 쉽사리 그를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그녀는 황금을 찾아 나서고, 계곡을 벗어나 외출하고, 숲으로 들어가고, 사냥하고, 낚시하는 데 하등의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이제 여왕이었다. 사람들은 그 지역의 가장 높은 지역에 롤라의 산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이어서 롤라 디긴스가 생겨나게 된다. 이따금 그녀는 캠프로 내려와 특별하 저녁을 보내는데, 이때 그녀는 1인당 100달러를 받고 여전히 스파이더 춤울 추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문학모임을 열었고, 그 모임에는 지나는 예술가들과 사교계정신을 지탱하고 있는 몇몇 황금 탐험가들이 참석했다. 증언에 따르면 그들 중에는 빅토르 위고의 두 조카, 독일 남작 넷, 프랑스 공작 둘,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귀족 서클 단원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모든 것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던 이웃집의 작은 소녀가 있는데, 그녀는 뒤에 서부의 대스타가 되는 로타 크래브트리 였다. 그녀의 애정생활은? 소극적으로 우아한 삶으로 돌아가기를 고집했던 패트릭 헐의 고집에 역정이 났던 그녀는 그를 향해 자신이 거처에서 기르던 곰을 풀어놓기에 이르고, 신속하게 이혼 수속을 밟는다. 그러나 이 불행한 아일랜드 남자는 곧이어 세상과 이별하는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광산 재국의 지배인 (아마도 그녀에게 밀가의 집을 주었던 인물) 이후 그녀는 한독일 남작과 살에 빠져 천연금괴들을 버려두고 그와 함께 회색곰 사냥꾼이 된다. 그녀는 또한 핀드레이의 후작을 만나는데, 그는 유명한 사냥꾼으로 얼마후 에는 멕시코 아파치 산중의 코코스페라에서 1848년 혁명동지들과 함께 농촌공동체를 건설한 인물이다. 이곳의 모험 시대가 상업에 자리를 내어주고 막을 내리자, 그녀는 이 곳에 왔을 때처럼 사라져 버린다. 사람들은 얼마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다시 황금을 찾아 나선 그녀를 발견한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뒤에 눈부신 추억들을 남겨 놓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캐리포니아의 로빈 후드인 호아킴 무리에타의 첩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그녀가 은밀한 사명을 띤 선동가로 이 신국가를 자신이 지배할 제국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내가 더 이상 무었을 알겠는가? 간단히 말해 그녀는 사람들을 꿈꾸게 했다. 매년 봄이 되면, 그녀의 집 정원의 분꽃과 나팔꽃이 다시 피어나고, 그래스 계곡은 그저 추억을 기린다. 그러나 말해다오! 한 아일랜드 공주가 머나먼 캘트 왕국의 마더 로드 한 복판에서 부랑아들을 지배했던 이 모험이 바이에른 왕국에서 경험한 모험보다 가치가 없는 것일까?  (미셜 르 브리 '황금의 문')  샌프란시스코의 한 프랑스인  1849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특이한 인물들 중 쥘 드 프랑스는 각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신념에 찬 공화주의자이고, 사랑스러운 사기꾼이자 최초의 프랑스어 신문인 '캘리포니아인'의 창간자였고, 희곡'캘리포니아의 미스터 고고'의 작가이기도 했던 그는 어린이들을 돌보며 생활비를 벌었다. 숱한 기행과 요서 받을 수 없는 행위들로 보아 그가 도시에서 추방되었던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그는 하바나에서 삶을 마감한다. 지난해, 요즘과 같은 시기에 샌프란시스코는 하나의 거대한 시궁창에 지나지 않았고, 곳곳에서 짐승과 사람들이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허술한 막대와 텐트들이 사방에 늘어선 이 거대한 늪지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기괴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빽빽히 밀집되어 있고 분주한 군중은 철학적 번뇌에서 벗어나 진창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포도주를 운반하느라 이 길을 자주 지나다니는 사람이 성큼성큼 진창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포도주의 무게보다는 향기가 훨씬 더 익숙하다. 또 한편에서는 석탄을 나르는 환전원이 밀가루를 나르는 한 유명인사에게 웃음을 건네고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의사가 시가를 팔고, 그 아래 편에서는 군수가 오렌지를 사라고 외치고 있었다. 직업이 없는 모든 이민자는 소매치기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점심과 저녁을 먹는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다. 바로 여기에 놀라운 변화의 비밀이 있다. 대규모로 정착된 상업을 제외하고, 모든 조건들이 진흑탕 속에 뒤섞여 있었고, 혹여라도 평등이 어느 한구석에 존재했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이든지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샌프란시스코는 거대한 광인들의 거처였다. 각 민족의 온갖 인간 쓰레기들이 300~400개의 도박장에서 만났다. 수개월 전만 해도 놀음, 주정, 방탕 등이 샌프란시스코의 유일한 신이었다. 한 판의 카드놀이에 1000피아스터를 거는 것은 보통이었고, 나태는 정상적인 상태이고, 방탕은 오락 행위였다. 또한 기꺼이 우리는 근엄한 미국 문명에로의 진지한 귀환을 천명한다.  샌프란시스코는 잿더미에서 다시 태어난다.  세 번이나 도시의 3분의 2가 불탔으나, 세 번 모두 샌프란시스코는 잿더미에서 부활해 더 부유하고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다. 불이 쓸어간 석면처럼 세 번 모두 우리는 샌프란시스코가 더 찬란하고 더 방비가 잘된 도시로 그 화염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았다! 세계 어느 곳에서 샌프란시스코의 그것에 비길 만한 나무복도를 발견할 수 있을까? 광택을 내는 사람의 붓질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다발로 거리를 가로질러 놓인 이 거대한 판자들은 어디서 왔는가?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걸려 도시의 행정당국은 이 놀라운 작업을 마쳤을까? 그것은 고작 세 달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엄청난 선불을 지급하며 신속하게 추진되었던 소유주들의 개별적인 작업들도 도시 미화에 적잖이 기여했다. 벽돌로 지은 멋진 집들은 오늘날 중심거리의 모퉁이에 지어졌고, 그로써 화재에서 참사를 모면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주도로인 몽고메리가는 지난해에는 편안히 지나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진흙탕길이었다.  오늘날의 그 거리를 보라! 사방에서 상인들로 들끓는 이 거리는 워프 센트럴의 상업활동을 지탱하고 있다. 이 워프 센트럴은 여전히 경이로운 미국인들의 창조물이었다. 평상시처럼 신속하게 끝난 이 거대한 작업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제2의 도시를 주었고, 놀란 여행자는 오늘날 바다를 향해 당당하게 전진하는, 그리고 그 선박들 앞에 펼쳐져 있는 새로운 베네치아를 볼 수 있다. 이 끝없는 부두와 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접안시설은 초대형 선박도 좌현과 우현으로 정박할 수 있게 했고, 돛을 세 개나 단 매우 무거운 선박과 초대형 증기선, 수면 아래로 들어가는 배의 깊이가 아주 깊은 배들도 소형 보트나 수송선들의 도움 없이 짐을 하역하고 싣고 다른 배로 옮기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스쿠너선(삼각 돛을 단 배)과 스루프선(외돛을 단 배)들이 스톡턴, 새크라멘토, 푸에블로 등지에서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직업들  지식과 노동은 멋진 샌프란시스코 내포의 모든 구석에 노동자, 정원사, 사냥꾼들을 배치했고, 이들은 이곳에 풍요한 식량을 공급했다. 오리와 야생 거위들이 번식했고, 노루, 영양 사슴 등은 70~80달러에 팔렸고, 600kg의 곰은 200달러에 매매되었다. 우리는 미식가들이 즐기는 야채나 샐러드조차 없었지만 어느날 샌프란시스코는 녹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한 명의 프랑스인, 두세 명의 프랑스인이 우리가 오늘날 즐겨 먹는 이 초롱꽃과 식물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샐러드 업종이 탄생했다. 이 기발한 사람은 단지 칼 한 자루와 손수건으로 무장하고 조용히 하루에 6~8달러를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 명의 외과 의사와 한 명의 수의사를 알고 있었는데, 이들 중 한 사람은 메스를, 다른 한 사람은 수의침을 아주 잘 사용했다. 이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들의 새로운 직업인 샐러드업에 종사했다. 청과업에 이어 다른 음식업종들이 신속하게 나타났다. 그들 중에는 홍합이나 게나 바닷가재, 기타 조개류들을 찾는 이들이 있었고, 야외의 식당, 노점식당들, 작은 과자들과 저렴한 가격의 선술집들이 생겨났다. 대부분 문학이나 과학 바슐리에(프랑스의 고등학교 졸업자)였던 이 업자들이 힘든 노동보다 이러한 직업을 선호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 유식한 노동자들의 수가 점증했고, 그 결과 경쟁이 가속화됨에 따라 이윤이 줄게 되었다. 광산으로 떠나기에 필요한 자본을 모은 초기의 업자들은 참지 못하고 떠나버렸고, 다른 이들은 힘겹게 그들의 작은 사업을 계속하며 동일한 목표에 이르기 위해 오늘날까지도 일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에게 이 목표란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으니...  그러나 신이시여! 도대체 세계 각지에서 몰려와 캘리포니아 해안에 수많은 불행한 사람들 내려놓는 배들의 홍수에 대해 무엇을 탓해야 합니까? 유럽은 정신이 이상한가요. 그리고 특히나 프랑스는 미쳐버렸는가요? 사람들은 말하더군요.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황금이라고요. 바로 황금이 사람들의 이성과 영혼을 앗아간다고 말입니다...  (쥘 드 프랑스 '퍼블릭 배런스'지 1851년 1월 28일)  광부의 십계명  허칭스는 다음의 십계명을 처음에는 장난삼아 집필했다. 1853년에는 이것을 편지지 뒷면에 인쇄했고, 이어서 판화로 장식하여 팔았다. 이것은 그에게 부를 안겨주었다. 시에라네바다를 달리는 모든 마차에서 이 십계명을 볼 수 있었다.  단 하나의 채굴지만 가져라.  II  채굴권을 허위로 작성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채굴권을 강탈하는 가련한 사람을 흉내내지 말라.  III  너의 채굴지역이 고갈되기 전까지는 새로운 채굴지를 찾지 마라. 너의 돈도, 너의 금가루도, 너의 영예로운 이름도 헛되이 노름판의 탁자 위에 올려놓지 마라. 몬티, 21(카드놀이의 일종), 포커 등은 네가 놀음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이 잃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줄 것이기 때문이다.  IV  안식일에 너의 친구들이 집에서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지 마라. 네가 이곳에서 하고 있는 것과 그것을 비교하는 것이 네게 해로울까 두렵다. 몸이 버티는 한 6일 내내 땅속을 뒤지거나 파라. 그러나 마지막날은 일요일이니, 어찌 되었든 네 더러운 셔츠와 양말을 빨고, 신발들을 정돈하고, 옷들을 정돈하고, 1주일 동안 사용할 장작을 패고, 빵을 굽고, 돼지고기와 강낭콩을 삶아라. 그래야만 지친 긴 하루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단지 6일만 일한다면 2년 안에 너의 육신이 탈진될 만큼 고되지는 않다. 그러나 일요일마저 고되게 일한다면 너는 6개월이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V  네 아버지의 축복과 네 어머니의 사랑 덕택에 도착한 이 나라에 홀로 남아 있게 될 때, 잘못을 범하거나 번민하지 않으려면, 너의 황금이나 그것을 보다 빨리 얻을 수단이나, 너의 연로한 부모들의 가르침과 격언을 내팽개치고 그것을 탕진할 방법을 생각하지 마라.  VI  약을 사고 진찰을 받을 돈이 있더라도, 비를 맞아가면서까지 일을 해서 육신을 망가뜨리지 마라. 또한 술에 강심제를 넣어 마시고, 진 칵테일을 마시고, 펀치를 위스키에 넣어 마시고, 럼주에 그로그를 넣어 마시고, 계란을 술에 섞어 먹어 술에 얼큰히 취하거나,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네 자신을 망치지 마라. 지갑의 돈과 등에 걸친 망토를 팔아 술을 마시는 동안, 너는 너 자신을 망치고 장을 상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VII  광맥을 만나지 못하고, 금을 얻을 수 있는 보다 확실한 크레바스를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꾸준히 저축해서 얼마간의 돈을 마련하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마라. 네가 집으로 돌아간 후 하루에 4달러조차 제대로 쓸 수 없고, 5센트를 위해 수치스럽게 일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이는 네가 당해 마땅한 일일 테니까.  VIII  동료의 곡괭이나 삽, 사금통을 훔치지 마라. 그의 허락 없이는 그의 도구를 가져오지 말고, 그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빌리지 마라. 빌린 후에는 망가뜨리지말고 고스란히 돌려 줄 것이며, 그것들을 돌려주기를 꺼리거나 미루지 말며, 그가 물을 사용할 때 그와 수다를 떨지 마라. 네 채굴지역을 넓히기 위해 그의 영역으로 들어가지 말고, 광맥을 좇아 그의 흙벽을 무너뜨리지 말며, 그의 선별기에서 돌을 씻지 말며, 그의 제수관의 물로 네가 채굴한 것을 씻지 마라. 회사의 사금통에서 표본을 꺼내 너의 사금통이나 네 지갑에 넣지 마라. 옆에서 작업하는 동료를 괴롭히지 말며, 방 동료의 금가루를 훔치지 마라. 그는 분명 네가 저지른 일을 알아챌 것이고, 즉시 동료들을 불러모아 법이 금하지 않는 한 네 목을 매달거나 50번의 채찍질로 벌하거나, 너의 머리를 깍고 붉게 달군 쇠로 빰 위에 v자 낙인을 찍을 것이다. 그로써 모든 이들, 특히 캘리포니아인들이 너를 보며 그것을 읽을 것이다.  IX  나귀와 생필품을 마련한 친구로부터 그가 팔 수 없는 연장이나 이불 등을 얻을 목적으로 이웃의 동료에게 광맥에 관한 헛소문을 퍼뜨리지 마라. 그 친구는 모든 것을 잃은 채, 얼마 뒤에 장총만을 갖고 돌아와 너를 향해 발포할 것이고, 너는 쓰러져 개처럼 죽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X  너는 적절하지 않은 결혼은 하지 말며, 미혼자의 행복을 탐내지 말며, 곁에 없는 젊은 처자들을 잊지 말며, 너의 첫사랑도 잊지 마라. 반대로 너는 정절을 지키며 너의 귀환을 고대하는 그녀를 생각하라. 그리고 직접 만날 날을 기다리며 네가 보내는 편지에 키스를 가득 담아라.  그리고 나는 너의 아내를 위한 또 하나의 계명을 덧붙인다. 만일 네 자신의 생명보다 아끼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다면, 그들이 너의 정신 속에 계속 머물게 하여 네 자신의 마음을 굳건히 만들어 이제 이정도면 됐어, 집으로 돌아가야지!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까지 너의 길을 가도록 하라. 그러면 네가 집을 향해 길을 가는 동안 그들은 너를 맞이하기 위해 네 앞으로 다가올 것이고, 너는 충만한 가슴으로 그들과 네 주 앞에 무릎 꿇고 건강하게 돌아올 수 있게 해주신 것에 감사하라. 아멘. 모든 것이 이처럼 이루어지기를...  (J. M. 허칭스'광부들의 십계명')  로링 캠프의 행운  브렛 하트의 이 중편 소설은 시에라의 작업 캠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로, 거친 측면과 감상적인 측면이 얽혀 있다. 이 작품은 아마도 그의 친구인 마크 트웨인의 소설 ' 캘러베라스의 도약하는 개구리 '와 더불어 로키 산맥의 서부 지역에서 가장 많이 읽힌 작품 중 하나였을 것이다.  로링 캠프가 술렁거리고 있었다. 싸움 때문이 아니었다. 싸움이란 1850년 당시 캠프의 사람들을 전부 끌어 모을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지층과 광맥을 내팽개치고, 기억에 따르면 터틀가게에서 도박에 빠진 사람들, 즉 프랑스인 페트와 카나크인 조가 계산대 위로 총질을 하며 서로 죽어 나자빠진 순간에도 내기를 계속했던 바로 그들조차 모였다. 캠프 사람들은 모두 숲 가장자리에 있던 마차 앞으로 몰려들었다. 낮은 목소리로 주고받는 대화 속에 줄곧 한 여자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모두에게 친숙한 체로키 샐이었다. 그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적게 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그녀는 다소 우매했고 미덕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시 로링 캠프에서 생활하는 유일한 여자였다. 그녀는 다른 여성들의 보살핌을 매우 간절히 필요로 하는 위기 속에서 몸부림쳤다. 비록 방탕하고 퇴폐적이어서 대책 없는 여자였을지라도 그녀 역시 순교자적 고통을 겪었다. 비록 이 캠프가 다감한 여자들의 손길에 다소 온순해졌다 할지라도 난폭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절대고독 속에서 캠프는 한마디로 가공할 상황에 놓여 있었다. 같은 여자들의 도움과 따스함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그녀에게 가해진 이 형벌은, 아마도 다소는 거의 경멸적인 남자들의 얼굴을 마주칠 수 밖에 없다는 한계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구경꾼들 중 몇몇은 그녀의 고통에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샌디 팁턴은 심지어 샐에게는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야. 라고 말했고, 한동안 자신의 소매 안에 두자의 속임수 카드와 주사위가 들어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였다. 그 상황은 전례가 없던 것임을 말해야 하겠다. 죽음이란 로링 캠프에서는 친숙한 것이었으나, 탄생이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 올 수 없는 길로 떠났지만, 아직 아무도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감동이 생겨났던 것이다. 켄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시민이 구경꾼 중 하 사람을 보고 말했다. "스텀피, 들어가봐! 가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알아봐. 이런 일에 경험이 있는 건 너밖에 없어". 그 선택은 아마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스텀피는 사실 두 집 살림을 하는 가장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망명자의 도시였던 로링 캠프는 그 비합법성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군중은 찬성했고 스텀피는 다수의 결정 앞에 복종하는 지혜를 보였다. 이 급조된 산파가 들어간 후 다시 문이 닫혔다. 로링 캠프의 모든 이들은 밖에 앉아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출산을 기다렸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 중 몇몇은 검찰이 수배하고 있던 도망자들에다 상당수는 범죄자였다. 어찌 되었던 이들 모두는 법도 신앙도 없는 이들이었다. 육체적인 특징으로 말하면, 어떤 것도 그들이 지나온 삶의 파란이나 그들의 기질을 감추지 못했다. 최고의 불한당은 금발의 라파엘 이었고, 도박사였던 오크허스트는 햄릿의 멜랑콜리한 외관과 지적 몽상을 과시했다. 이들 중 가장 용감한 이는 겨우 5피트의 키에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고 소극적이고 부자연스럽던 인물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붙인 강인한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개념 정의라기보다는 차라리 구분이었다. 아마도 그는 손가락, 발가락, 귓등의 자잘한 세부사항에 관해서는 몇 가지 흠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소한 결함 때문에 그 거대한 힘이 감소되지는 않았다. 가장 건강했던 그는 오른손에 세 손가락만 남아 있었고, 최고의 포수는 애꾸였다. 그러한 것들이 움막을 둘러싸고 흩어져 있는 사람들의 면모였다. 캠프는 두 개의 언덕과 강 사이에 위치한 삼각 계곡에 자리하고 있었다. 유일한 출구는 지금 막 떠오른 달이 비추는, 움막 정면에 위치한 언덕들 중 한 언덕의 정상으로 나 있는 가파른 오솔길뿐이었다. 고통스러운 분만 침상에서 고통에 횝싸인 여인은 그 오솔길이 빚어낸 굴곡을 볼 수 있었고, 그 은빛 선은 별까지 이어지다가 사 라졌다. 솔가지를 태우는 모닥불은 그 모임에 친밀감을 주었다. 차츰 로링 캠프의 주인들에게 자연스러운 가벼움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내기가 벌어졌다. 다섯 중 셋은 샐이 분만을 잘하고 아이도 살아난다는 데 걸었다! 이어서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아기 이방인의 성별이나 얼굴 등에 대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내기들이 벌어졌다. 이 소란스러운 논의의 와중에서 문에 가장 인접한 무리로부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순간 캠프는 침묵했고, 모두 귀를 집중했다.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나 강이 만들어내는 물소리, 모닥불의 마른 나뭇가지 타들어가는 소리를 집어삼키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날카롭고 애처로운 외침, 캠프에선 들어본 적이 없는 외침이었다. 바람도 강물도 모닥불도 소리내기를 그쳤다. 대자연이 그 외침을 듣기 위해 침묵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캠프의 모든 이들이 하나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들은 폭약을 터뜨리자고 제안했으나 산모의 상태를 고려하자는 여론이 지배적이어서 결국 몇 발의 총성을 내는 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급조된 산파의 잘못 때문이든, 다른 이유에서든 체로키 샐은 숨을 거두었다! 함 시간 만에 그녀의 영혼은 별을 향해 뻗어 있는 가파른 오솔길을 올라갔다. 원죄와 수치심을 벗어버리고 로링 캠프를 떠난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운명은 달랐다. 아이가 살 수 있을까? 사람들은 스텀피에게 물었다. 대답은 의심스러웠다. 이곳에서 채로키 샐과 같은 성을 가진 유일한 창조물은 당나귀 한 마리밖에 없었고, 그 또한 어머니였다. 아이에게 당나귀 젖을 먹이자는 의견에 다소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실험이 강행되었다. 좌우간 이러한 육아법은 늑대가 키운 로마의 건설자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의 그것보다는 덜 위험했다. 세부사항이 해결되자, 다음의 행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이미 길게 늘어선 애타는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이불이 덮인 산모의 시신이 있는 침상 곁에 소나무로 만든 식탁이 있었고, 바로 그 위의 양초상자 안에서 번쩍이는 붉은 강보에 싸인 로링 캠프의 신생아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양초상자 옆에는 모자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용도는 사람들이 곧 이해하게 될 것이다.  스텀피가 공식적인 치사와 권위 섞인 묘한 말투로 말했다. 신사 여러분, 앞문으로 입장해 테이블을 한바퀴 돈 다음 뒷문으로 퇴장해 주시면서 이 어린 고아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은 분들은 상자 옆의 모자에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처음 입장한 이는 모자를 꽉 눌러쓰고 있다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모자를 벗었다. 이 행동은 부지불식간에 타인의 모범이 되었다. 이런 공동체에서 선행은 악행과 마찬가지로 전염성을 갖고 있었다. 이 행렬이 지나가는 동안에 온갖 촌평과 비판적 관찰 아마도 간접적으로 스텀피, 혹은 그의 연출을 겨냥한 이 쏟아졌다. "아니 요만해? 아기가 이렇게 작으니 모형 같아! 총보다도 크지 않다니". 그들이 기부한 물건들은 특징이 있었다. 은제 담배상자, 에스파냐 금화, 은제 해군 권총, 금괴, 수놓인 멋진 여성용 손수건(도박사인 오크허스트가 기부했다), 다이아몬드를 장식한 넥타이 핀, 다이아몬드를 박은 반지, 고무줄 총, 성경(기부자 미상), 황금 박차, 은제 차스푼(유감스럽게도 위에 새겨진 이름 약자가 기부자의 이름과 달랐다), 외과 의사용 가위 한 벌, 외과용 란세트, 영국 돈 5 파운드 지페 한 장과 금화와 은화등 대략 200달러. 이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스텀피는 왼편에 놓인 주검만큼이나 깊은 침묵을 지켰고, 오른편에 놓인 신생아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는 심각함을 보였다. 이 호기심 어린 행렬이 멈춘 것은 딱 한 번, 작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뿐이다. 켄턱은 아기가 몸을 돌리자 호기심이 발동하여 몸을 반쯤 기울여 들여다보았고, 아기는 고통스러운 경련 속에서 돌연 그의 손가락 중 하나를 꽉 잡았다. 켄턱은 당황하여 놀란 기색을 나타냈고, 가벼운 홍기가 빰의 구릿빛 피부를 물들였다. 그는 멋진 꼬마 녀석! 이라고 말하고는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손을 뺐다. 그가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는 그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지 않게 벌린 채 밖으로 나와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것을 관찰하다가 팁턴에게 자신의 손가락을 보이며 되풀이해서 말했다. "멋진 꼬마녀석. 그 녀석이 꽉 쥐더라고.” 새벽 4시경이 되어서야 캠프는 휴식에 들어갔다. 한 줄기 빛이 밤새 켄턱과 스텀피가 지키고 있는 움막을 밝히고 있었다. 켄턱은 얼큰하게 술을 마시고 들떠 자신의 모험담을 이야기하다가 변함없이 새로운 도착자(아기)에 대한 표현, 즉 멋진 꼬마녀석 이라는 말로 얘기를 맺었다. 그는 다소 정중하지 못한 이 단어들이 감상벽에 대한 모든 의혹을 미리 떨쳐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강한 성욕에 대한 수치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그는 생각에 잠겨 휘파람을 불며 강가로 내려갔다. 협곡을 올라 여전히 태평스러움을 가장한 채 휘파람을 불면서 움박 앞을 지나 거대한 세쿼이아 앞에 멈추었다. 그러다가 다시 되돌아 한 번 더 움막을 지나갔다. 이어 둑방길 중간에서 산책을 멈추고 다시 되돌아갔고, 이번에는 문을 두드려보았다. 스텀피가 문을 열었다. 켄턱은 "아기는 어떤가?" 라고 묻고는 양초상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없어. 스텀피가 대답했다.” "별다른 일이 없어?" "아무 일도.” 잠시 아주 거북한 침묵이 흘렀다. 그 와중에도 스텀피는 계속 문을 잡고 있었다. 그러자 켄턱이 스텀피에게 문제의 손가락을 똑바로 겨누었다. 그리고 그 녀석이 이걸 꽉 쥐었어. 그 멋진 꼬마 녀석이 말이야. 라고 말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채로키 샐은 로링 캠프의 한쪽 귀퉁이 척박한 묘지에 묻혔다. 산모를 묻고 나서, 캠프는 아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 공식적인 모임을 가졌다. 사람들은 열렬하게 만장일치로 아기를 입양시킨다는 결정을 내렸으나, 그를 부양하기 위한 방법과 수단을 놓고 즉시 뜨거운 토론이 벌어졌다. 놀라운 사실은 연사들이 로링 캠프의 모든 일상적인 토론 속에서 그토록 남발하던 무자비한 인신 공격에 관한 것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팁턴은 아기를 그곳에서 40km 떨어진 레드도그로 보내, 그곳에 있는 여자들에게 돌보게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사람들이 모두 거부했고, 캠프는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그들의 새로운 재산(아기)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톰 라이더는 게다가 레드도그의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그를 훔쳐가고, 그를 디른 아이로 바꿔치기할 수도 있는 위인들이다. 고 말했다. 캠프로 유모를 데려오자는 제안도 거부당했다. 그 중 한 사람은 어떤 정숙한 여자도 그곳에 머물도록 설득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곳에서는 더 이상 여자가 필요 없다고 덧붙였다. 작고한 산모에 대한 이 암시는 표면화 되기는 매우 곤란한 것으로, 캠프가 쇠퇴의 길에 들어섰다는 징조였다. 스텀피는 침묵하고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그를 대체할 유모를 선택하는 데 간여하지 않으려는 모종의 신중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의 입장을 묻자, 그는 자신과 지미 (앞서 언급했던 당나귀)로도 아기를 키우기에 충분하다고 단언했다. 이 계획 속에는 독창적이고 독자적이며 영웅적인 어떤 요소가 존재하고 있었고, 이것이 모두를 매혹시켰다. 따라서 스텀피는 아이를 양육할 아버지로 재임명 되었다. 이들은 서둘러 새크라맨트로 사람을 보내 유아용품 들을 사오게 했다. 심부름을 하기로 결정된 사람에게 금가루가 든 주머니를 손에 쥐어주며 회계사가 말했다. 조심해. 그리고 가급적이면 질이 좋은 것으로 레이스며 자수제품이며 장식들을 사오게. 가격이 비싸도 상관없네. 기이한 것은 아기가 잘 자라주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산의 신선한 기후가 아기를 괴롭히던 물질적 결핍을 보상해 주었던 것은 아닐까? 자연은 자비로운 품안에서 양식을 제공해 주었다. 시에라 언덕의 깨끗한 기후. 즉 몸에 좋고 매혹적인 부드러운 향기로 가득 찬 공기속에서 아기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양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련된 화학용은 당나귀 젖을 개량시키기도 했다. 따라서 스텀피는 아이의 통통한 얼굴이 젖과 자신의 적절한 보살핌 덕분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버릇처럼 말하고는 했다. 나와 당나귀는 얘의 아버지와 어머니야. 이어서 그는 요람에 싸여 있는 아기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지 않니? 네가 커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아기가 1개월이 되자, 이들은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줄 필요성을 느꼈다. 사람들은 아이를 이런저런 이름으로 다양하게 불러왔다. 그 녀석 스텀피의 아이 코요테(이는 아기의 힘찬 목소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때로는 켄턱이 사용했던 애칭인 멋진 꼬마 녀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모든 호칭이 모호하고 만족스럽지 않았다. 따라서 다른 어떤 이름을 지어줄 때라고 느끼게 되었다. 도박사들과 모험가들은 대부분 미신을 믿고 있었다. 어느 화창한 날 오크허스트는 아기가 로링 캠프에 행운을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근자에 이 캠프의 주민들에게 모든 일이 잘 풀렸던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행운은 모두의 동의하에 아기의 이름이 되었고, 부르기 편하도록 토미라는 이름이 덧붙여였다. 그러나 그의 친모에 대해서는 어떠한 암시도 없었고, 누군지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조차 없었다. 오크허스트가 철학적으로 말했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어". 그를 '행운'이라고 부르자. 그러면 아기도 좋은 출발을 하게 될 거야.  기나긴 여름날의 낮 동안에 사람들은 '행운'을 로링 캠프의 황금이 나오는 협곡으로 데리고 다녔다. 그들은 아기를 소나무 가지 사이에 펼쳐진 모포 위에 눕히고 그 아래에서 작업을 했다. 얼마 후 이 사람들은 그들의 투박한 방식대로 꽃다발과 향내 나는 가지들로 장식을 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거의 항상 '행운'에게 인동덩굴다발이나 야생 진달래나 화려한 색채의 나비나리꽃이 핀 가지들을 가져다 주었다. 캠프의 남자들은 돌연 미에 대한 감각과 그토록 오랫동안 발로 짓밟으면서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작은 사물들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되었다. 빛나는 운모의 광채, 무지개빛 수정조각, 급류가 갈고 닦은 묘한 색조의 자갈이 이제 그들의 눈에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숲과 언덕에 감추어져 있는 토미를 기쁘게 만드는 많은 보물들을 발견하는 것은 너무도 멋진 일이었다. 사람들은 요정의 선물과 흡사한 장난감들에 둘러싸여 있는 토미가 만족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여름은 로링 캠프의 황금시대였다. 당시는 호시절이었고, 행운은 각자와 함께 있었다. 캠프는 그의 특권을 소중히 여겼고, 이방인들을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민을 조장하기보다 혹은 끼리끼리 떨어져 있기보다는 캠프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주변 땅을 모두 매입했다. 이러한 시도, 그리고 쉽게 총질을 하기로 평판이 자자했던 주민들은 그들의 경계를 불가침의 것으로 만들었다. 연락원- 외부세계와의 유일한 끈-은 이따금 캠프에 관한 경이로운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연락원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로링 캠프에는 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레드도그의 가장 멋진 길을 능가하는 것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집 주변에 포도덩쿨과 꽃들을 가꾸고 하루에도 두 번씩 몸을 씻는다. 이들은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냉랭하지만, 한 인디언 아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사람들은 오래도록 1851년 겨울의 이 구릉 지역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눈이 시에라 지역을 두터운 코트처럼 뒤덮고, 모든 물줄기는 강을 이루고, 강은 호수가 되었다. 협곡과 길들은 언덕을 내려오는 거친 급류에 휩쓸려 길을 가로막는 거대한 나무들을 뽑아버리고, 쓰레기와 잔해들이 평원을 뒤덮었다.  레드도그는 두 차례나 물에 잠겼다. 로링 캠프도 위협 받고 있었다. 스텀피가 말했다. 이 지역에 금을 끌어온 것이 바로 물이야. 이 지역은 물에 잠겼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발생할 거야. 그리고 그날 밤, 북부 푸어셰의 급류가 돌연 그의 보금자리를 떠나 로링 캠프의 삼각 계곡을 덮쳤다. 나무들이 부러지는 소란. 마을 집어삼킬 듯 달려드는 물살과 함께 시시각각 덮쳐오는 암흑 속에서, 그리고 물이 마치 하나의 급류처럼 도처에서 밀려드는 이 가공할 무질서의 홍수 속에서 캠프의 구성원들 모두를 집결시키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아침이 밝았을 때 강에 가장 가까이 있던 스텀피의 움막은 휩슬려가고 없었다. 협곡의 위쪽에서 사람들은 불행한 집주인의 육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자긍심, 희망, 기쁨이었던 로링 캠프의 행운은 사라지고 없엇다. 그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던 사람들의 귀에 강가에서 그들을 부르는 음성이 들려왔다. 강을 거슬러 오는 구조선이었다. 배를 모는 사람들은 3km 가량 하루에서 한 남자와 거의 탈진한 아이를 구조했다고 하면서, 혹시 그들을 알아볼 수 있는 이가 여기에 있는지를 물었다. 이들은 단번에 켄턱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참혹하게 부상을 입었으나 여전히 로링캠프의 행운을 안고 있었다. 기이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들을 향해 어느 누군가가 몸을 기울였다. 아이의 몸이 차갑게 식고, 맥박이 더 이상 뛰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아이가 죽었다.” 켄턱이 눈을 뜨고 희미한 목소리로 반복해 말했다.  "죽었어.”  "그렇다네 이 친구야, 자네도 죽어가고 있어.”  죽어가는 켄턱의 눈가에 웃음이 번져갔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죽는다. 그가 나를 데려가고 있네. 친구들에게 전해주게. 이제 내가 '행운'과 함께하고 있다고.”  이 건강한 남자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나 해초에라도 매달리듯 연약한 아기에게 매달리면서 미지의 대양을 향해 끝없이 흐르는 암흑의 물줄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브렛 하트 '로링 캠프의 행운')  캠프의 한 여인  셜리 부인은 본명이 루이즈 아멜리아 크냅 스미스 클랩이며, 1851년 9월에서 1852년 11월 사이에 남편과 함께 리치 바와 인디언 바에서 살았다. 당시 그녀가 매사추세츠에 있던 여동생에게 보낸 33통의 편지는 아마도 광산생활에 관해 기록한 증언들 중 가장 아름다운 기록일 것이다.  광산의 거주지역  통나무 집 주위의 인디언 바  (바 : 두 강줄기가 합류하여 생긴 모래톱)1852년 8월4일 ... 다음날 감독위원회는 안식일에 폭동을 선동했다고 의심받던 5~6명의 에스파니아인들에게 채찍형을, 다른 이들에게는 그날 저녁 안으로 그곳을 떠나라는 추방령을 내렸단다. 그들의 전재산은 부상자들을 위해 쓴다는 명목으로 압수당했어. 아 메리! 이 불쌍한 이들을 때리는 첫번째 채찍 소리를 들었을 때 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상상해봐. 나는 이처럼 무시무시한 소리를 듣게 될 줄 상상조차 못했어. 소리를 듣는 즉시 숄에 머리를 묻었지만, 나는 내 기억 속에서 이 순간의 환멸과 공포를 지우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단다. 이런 일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나는 지금껏 19세기에도 인간들이 개처럼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어.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그 같은 야만을 행하면 비난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 일에 직면해서는 간섭하지도 않고, 이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비열한 인간성을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더더욱 생각지도 못했지. 이 불행한 사람들 중 한 명은 훌륭한 교육을 받은 젊은 에스파냐 청년이었는데, 판사들이 자신에게 매우 감동적인 언어로 사형을 선고할 것을 탄원했단다. 그는 그들로부터 짤막한 발언 기회를 얻어냈고, 그들에게 마치 신사(존경할 만한 인물)에게 말하듯 발언했지. 그는 생명을 박탈당하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고역수에게 언도된 형벌처럼 결코 지울 수 없는 상흔, 즉 그에게 언도된 형벌과 비교할 수 없다는 점을 그들에게 보여주었지. 그의 간청에 대한 무관심을 보고 그는 앞으로 만날 모든 미국인을 제거하겠다는 맹세를 했어. 자신의 불명예에 대한 격앙된 의식은 불굴의 용기를 가진 한 사람만을 절망으로 몰고 갔고, 그의 용기는 자신의 생명과 더불어 끝나게 될 터이지만, 그가 말하듯 기다려야만 했지. 내 보잘것없는 의견과 이 분야의 권위자의 의견에 따르면, 이 처벌은 필요 이상으로 가혹한 것이었지만, 군중의 분노와 흥분을 잠재우려면 감독위원회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을 지경이었단다. 모든 하층민은 집요하게 죄수들의 사형을 요구했고, 위원회의 여러 구성원들이 분명 이러한 여론에 동조했어. 다름아닌 의회의 휘그당 후보가 이 죄수들은 도망치는 편이 나았을 거야. 피의 복수자들이 그들을 찾아 나섰으니까.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내가 전율(지금 전해 오는 것만큼이나 강렬한)로 얼마나 떨었는지 잊을 수 없을거야. 피의 복수자들은 도박으로 시간을 보내는 대략 여섯 명의 망나니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이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이든 그 표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든, 그렇게 된 것은 정말 다행이야. 소위 희생자들이 그곳에서 3km 떨어진 언덕에서 불안에 떨지 않고 아침까지 잠을 잘 수 있으니까 말이야. 재판과정에서 밝혀진 다음의 사실들은 이 씁쓸한 사건에 대한 모든 의혹을 해결해 주지. 에스파니아 출신인 늙은 광부 일곱명은 독립기념일(7월4일)에 자신들의 동포들에게 행해졌던 잔인한 형벌과 에스파냐인들을 제거하라라는 외침에 분노한 나머지, 이런한 충돌을 주동했다고 보는 일곱 명의 미국인에게 복수하려는 구상으로 모였지. 이들은 모두 단단히 무장한 채 자신들이 당시 머물던 컨플루언트에서 와서 각기 한 명의 미국인과 결투를 하고. 이 영예로운 결투를 통해 에스파냐 인종들에게 오만하게 굴던 신중치 못한 공격자들에게 그 오만함에 대해 해명하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거야. 인디언 바에 도착해서 그들이 했던 첫번째 일은 당시 그들이 엄청난 양의 샴페인과 브로드산 포도주를 마셨던 훔볼트로 저녁식사를 하러 가는 것이었어. 그리고 나서 그들은 피사로와 옥슬레이를 다치게 만든 사건을 유발한 잔혹한 주범인 영국인의 집으로 찾아갔고. 그곳에서 한 사람이 영국인의 동료와 익살맞은 대화를 나누었지. 영국인은 곧 분노하여 에스파냐 사람을 난폭하게 구타했고. 이어 그를 막사 밖으로 내동댕이쳤단다. 따라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지만. 양진영이 모두 존경하던 한칠레 신사의 노력 덕택에 피를 보지 않고 끝나게 되었어. 그 사람은 에스파냐인들이 계획했던 결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는데, 만일 이런한 계획을 알았더라면 다음에 일어난 일들을 그의 현명한 제안으로 막을 수 있었을 거야.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그는 리치 바로 향해 갔어. 그가 떠나고 잠시뒤, 모두가 말하기를, 술 취하면 위험스러운 인물이었던 톰 소머스가 도밍고(일곱 명의 에스파냐인 중 한명)에게 가공할 주먹질을 했고, 그는 땅에 쓰러졌단다. 그러나 명백한 도발 의도는 갖고 있지 않았어. 도밍고는 어두운 과거가 있고 그 무모함으로 평판이 나 있던 사람이었기에, 분노에 격해지고 복수심과 술에 사로잡혀 즉시 칼을 뽑아들었고, 톰 소머스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고 말았단다... 불길한 안식일이 지나고 화요일이 되자, 누군가가 리치 바에서 20KM 가량 떨어진곳에서 목장을 운영하던, 그 지역에서 잘 알려진 베이컨씨의 살해 소식을 갖고 왔단다. 그는 돈 때문에 자신의 하인에게 살해되었던 거야. 그런데 그 하인은 불과 세 달 전 우리 집의 요리사였단다. 그는 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의심받는 유력한 인물이었던 셈이지. 감독위원회가 임명한 일단의 사람들이 즉시 그를 체포하기 위해 떠났다. 그 불행한 사람은 새크라멘토에서 체포되고, 그에게서 도난당한 금의 일부를 찾았지. 다음 일요일, 그는 결박당한 채 리치 바로 이송되었고, 광부들이 주도하는 소송에서 오후 4시에 교수형에 처한다는 판결을 받았단다. 그의 자백을 받아내려는 온갖 노력은 헛수고였지. 그는 자신이 죄가 있든 결백하든 결국은 교수형에 처해지게 될 거라고 말했단다. 아주 정확한 이야기지. 그는 조용한 무관심과 함께, 소설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최선의 대의에 걸맞게 반항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 했어. 조시는 훌륭한 요리사로 퍽 깔끔하고 공손했으며 우리집에서 매우 높이 평가받았지. 하지만 그의 범죄와 참혹한 죽음은 너도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이 모든 추악한 일 때문에 생긴 나의 고뇌를 더 한층 가중시켰단다. 토요일 저녁 8시경 언덕에 조용히 살던 두 부인과 수다를 떨던 있던 중-모두의 한결 같은 의견에 따르면 이 부인들은 지금까지 남자 일색이던 우리 모임을 잘 바꾸어 놓고 있단다-우리는 격렬한 함성과 함께 열린 움막의 문 앞으로 숨이 끊어질 듯 달려오는 300~400명의 사람들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어. 지난주의 사건들로 이미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우리 여인네들은 당연히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 사람들은 우리에게 즉시 헨리 쿡이 알코올 중독에 따른 섬망증이 발작한 상태에서 양쪽 귀 밑으로 목이 베어졌다고 알려주었지. 이 가련한 사람은 그가 절망적인 범죄를 저지를 때 혼자 있었고, 발작 속에서 피 묻은 면도칼을 땅에 내던지고는 언덕으로 오르려고 시도했단다. 사람들은 의식을 읽은 그를 발견하고 훔볼트의 레스토랑으로 데려왔어. 그런데 그곳에서 하마터면 불쌍한 요리사 파가니니 네드가 누명을 쓰고 교수형을 당할 뻔했지. 쿡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비난했기 때문이야. 하층민들은 이 불쌍한 녀석을 판사도 배심원도 없이 교수형에 처하기를 원했고. 이 모범적인 인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친구들의 열정적인 노력이 필요했단다. 불쌍한 네드! 그들이 정상적인 분위기를 되찾는 데는 48시간이 걸렸단다... 하층민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구성원들을 존중하는 별난 논리와 함께 불쌍한 헨리를 처벌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는데, 그들에 따르면 자신들의 사고방식은 매우 투명하고 설득력 있는 것으로 자기 손으로 스스로에게 상해를 입힐 정도로 냉혹한 사람은 그 이웃을 살해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었지. 그들은 F씨를 폭행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헨리의 부상을 치료했고, 헨리가 살아날지도 모른다고 말했기 때문이란다. 결국 그들은 헨리가 회복되면 즉시 금광에서 떠나게 한다고 결정하고서야 양보를 했어. 그렇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것이 헨리가 살아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단다... 사회의 분위기는 현재 감독위원회가 설치된 이래 어느 때보다도 나쁘다. 망나니들은 몽고인들이라는 이름하에 패거리를 만들었고, 매일 밤 거리를 행진하며,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으며, 집에 불법침입해 지친 광부들을 침대에서 끌어내 강물에 던져버린단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가장 견딜 수 없는 방식으로 잠을 앗아가 버리는 거지. 거의 매일 밤 그들은 위험천만하게 움막 곁에서 쾌락의 불을 피우고, 공동체 전체의 생명(혹은 그 재산들, 긍정적으로 보면 잠들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이 무사하지)을 위험속으로 몰아넣고 있어. 그들은 새벽 5시경이 되어야 철수하지만, 모두가 기다리던 철수에 앞서 그들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모두 강물에 집어넣겠다는 포고를 게시하지... 불쌍한 피사로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리고 그의 친구들 중 한 사람이 그들에게 점잖게 희생자가 평화롭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반 시간만 조용히 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놓고 전보다 더 크게 소리 지르고 비웃음으로써 그를 모욕할 따름이었단다. 그가 누워 있던 집은 나뭇가지로 지어져서 소음을 막을 수 없었지. 분명 이 몽고인들이 젊었더라면 죽어가는 사람이 그들의 경망스러움과 모욕에 대한 생각으로 뒤얽혀 있게 만드는 가공할 잔혹함을 보이지 않았을지 몰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게으르단다. 신이시여, 이 자들을 용서하세요.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단다. 지치고 불쌍한 광부들은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이 악마의 소굴 속에서 잠잘 수 없기에 불평하고 중얼거리지만, 또한 수적으로도 망나니들보다 훨씬 우세하지만, 너무나 소심해서 이들과 맞서지 못하고 있단다. 그들은 모두 창피스러운 일이야. 무언가 해야 할 텐데. 무언가 해야 해라고들 말하지만 실제로는 망나니들이 승리하기를 기다리고 있단다. 너는 분명 감독위원회가 왜 이 사태에 개입하지 않는지 궁금해하겠지. 그런데 이곳에서 사람들은 위원회의 일부 구성원들이 바로 몽고인들의 지도자라고 말한단다.  ( 셜리부인'셸리의 편지')  모험에서 글쓰기로  잭 런던이 1897년 클론다이크에 도착했을 때 주머니에는 단지 4달러 50센트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뒤에 그를 유명하게 만들 수십 가지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버닝 데이라이트'는 모든 것이 의문스럽던 1919년에 쓴 소설로 가상의 역사적 사실(잘 정돈된!)을 능란하게 섞어 그 시대의 의미를 재검토하고 있다. '버닝 데이라이트'는 독자들로 하여금 엘람 하르미슈의 카맥과 래듀의 모습을 다시 발견하게 해준다.  한 달이 흐르고 보난자는 조용했다. 몇몇 사람들은 땅을 구획하고 난 뒤 다들 포티마일과 서클시티로 돌아갔다. 아직 희먕을 가진 이들은 추운 다음 겨울을 대비해 나무움막을 지었다. 카맥과 그의 인디언 부모들은 채금작업을 하기 위해 물줄기를 끌어대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근처 숲으로 나무를 베러 가야 했기에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네 사람은 보난자의 위를 향해 강줄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댄 맥길버리, 데이브 매케이, 데이브 에드워드, 해리 워. 그들은 홀로 일하며,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며, 그 자체로 완전한 팀을 구성하고 있었다. 카맥이 발견했던 곳을 성공적으로 탐사하고, 쓸데없이 수많은 장소와 강줄기를 온통 뒤졌던 데이라이트는 바위 아래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카맥은 물살을 따라 주위에 물구덩이를 파헤치는 조용한 네 남자를 발견했다. 댐을 건설하기 위해 나무를 베는 톱질 소리도 들렸다. 그는 그들이 초대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들이 채금작업을  어떻게 시작하는가를 지켜볼 요량이었다. 그러면서 그들 중 한 사람이 다섯 시간 동안 그 도랑에서 상당량의 흙을 거르며, 13. 5온스의 금을 추출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강바닥에서 나오는 것은 야금이었다. 크기는 핀의 머리만한 것에서부터 1달러짜리 천연금괴까지 매우 다양했다. 그날 처음으로 눈보라가 쳤다. 북극의 겨울이 임박해온 것이다. 데이라이트는 음산한 빛 속에서 꺼져가는 이 짧고 추운 여름의 끝을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체험했고, 눈 내리는 드넓은 대지에서 미래의 황금도시가 들어서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금은 강바닥에 매장되어 있었고, 그는 이것을 알게 되었다. 카맥이 발견한 것은 확인되었다. 데이라이트는 이미 얻은 세 건의 채굴권 외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또 하나의 채굴권을 확보 했다. 이 채굴권은 그에게 하나의 광맥에서 다른 광맥으로 뻗어 있는 3km 가량 되는 띠모양의 땅을 제공해 주었다.  그날 저녁 그는 클론다이크 하구의 캠프로 돌아와 그곳에서 자신이 다이아에 남겨두었던 인디언 카마를 만나게 된다. 카마는 카누를 타고 그해의 마지막 우편물을 가져왔다. 그는 데이라이트가 맡긴 200달러어치의 금가루를 갖고 있었으며, 그 대가로 그가 포티마일을 가로지를 때 필요로 할 채굴권을 자신의 이름으로 정해 주었다. 다음날 아침, 카마는 데이라이트가 하류에서 함께 일하던 옛 동지들에게 보내는 여러 통의 편지를 가져갔는데, 이는 그들에게 채굴지를 할당해 주기 위해 서둘러 오게 하려는 것이었다. 보난자의 사람들도 같은 취지에서 카마에게 편지를 위탁했다.  데이라이트는 익살맞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분명 여태껏 보지 못한 가장 멋진 대혼란이 일어날 거야. 그는 장대를 밀며 유콘강의 수마일을 거슬러 올라오는 채굴선을 타고 달려드는 포티마일과 서클시티의 군중들을 예상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보장하는 이 새로운 소식을 의심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첫 출발한 개척자들이 도착하면서 보난자의 채굴장은 깨어나고, 거짓과 진실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각자는 진실을 다소 포장하며 거짓말을 했다. 카맥이 2달러 반의 황금을 추출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던 이들은 실제 그곳에서 2달러 반의 황금을 얻었으나, 1온스밖에 얻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곧이어 그 위선은 합리화되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자랑하려 할 때 5온스나 10온스가 12온스로 바뀌고는 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런 식이었다. 진실은 과장된 허풍을 넘어 끈질기게 퍼져 나갔다. 12월의 어느 날 데이라이트는 강바닥에서 사금판을 가득 퍼내어 움막으로 가져갔다. 천으로 덮은 나무통안에는 그가 채굴한 것을 씻는 데 사용할 물이 들어 있었는데, 주위에 불을 놓아 물이 얼어붙지 않도록 했다. 사금판에는 흙과 자갈만이 남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것을 원형으로 움직여가며 저었다. 가벼운 마그마 조각들이 물에 녹자. 표면에 아무것도 뜨지 않을 때까지 그것들을 손가락으로 계속 건져냈다. 신속하게 바닥을 살펴보기 위해 물을 비우자 치즈가 녹아 있는 것 같은 형태의 바닥이 드러났다. 그것은 금, 금가루, 야금, 첨전물, 천연금과 온갖 형태의 금조각들이었다. 그는 혼자서 사금판을 내려놓은 채 생각에 잠겼다. 이어서 작업을 끝내고 그 내용물의 무게를 달아보았다. 온스당 16달러니까 사금판에는 700달러 이상의 금이 담긴 셈이다. 그는 이 정도까지 기대하지 않았다. 그가 예상했던 최고의 기대치라야 채굴권당 2~3만 달러 이상을 넘지 않았는데, 이곳에서는 장소마다 듬성듬성 채굴을 한다 해도 적어도 50만 달러어치의 가치가 있었다. 그날 사람들은 그가 웅덩이에서 작업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작업을 하지 않을 것이다. 장갑을 끼고 머리에는 이불보따리를 이고, 등에는 가벼운 여행 장비를 짊어진 채 길을 떠나, 그는 며칠동안이고 강줄기를 따라 계곡을 걸어 인근의 모든 지역을 탐험했다. 각각의 강가에서 한 개의 채굴권을 살 권리가 있었지만, 그는 신중하게 자신의 행운을 관리했다. 그는 헝커에서만 한 개의 채굴권을 확보했다. 그는 만과 강줄기를 포함하여 시냇물까지, 이미 끝에서 끝까지 조사한 적이 있는 보난자를 발견했다. 그는 실패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이 작은 물줄기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이 강줄기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애덤스였고, 가장 평가받지 못한 것은 엘도라도였다. 엘도라도는 카맥의 채굴지 바로 위로 보난자를 향해 있었다. 데이라이트조차도 엘도라도는 좋아하지 않았다. 어째든 그는 자신의 계획에 충실하게 채굴지의 반을 곡물 반 포대와 바꾸었다. 석 달 후 그의 채굴지는 넓어졌고, 세번째 채굴지를 위해 4만 달러를 지불했다. 비록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지만, 분명 그는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던 강줄기에서 네번째 채굴지를 확보하기 위해 14만 달러를 지불했다.  한번에 700달러를 퍼내고는 깊은 생각에 잠겼던 그날 이후 데이라이트는 더 이상 곡괭이나 삽을 잡지 않았다. 그 멋진 사금작업을 했던 날 저녁, 그는 조래듀에게 말했다.  "조, 나는 더 이상 힘든일로 녹초가 되고 싶지 않아. 이제 머리를 써서 일을 할거고, 금을 채굴할 거야. 만일 곡물을 잘 보관할 줄 안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싹트게 할 수도 있을 거야, 내가 사금판 바닥에서 700달러를 퍼냇을 때, 이번에는 진짜 보고를 가졌다고 느꼈어.”  "그러면 네 곡식은 어디다 심을래?"  래듀가 물었다.  데이라이트는 손으로 산을 둘러싼 전지역과 강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야, 너는 지붕 위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게 될 거야. 볼 줄 아는 사람에게 이곳에는 수백만 달러가 깔려 있어. 나는 단 한 번의 사금질로 700달러를 건지는 이 멋진 날이 올 줄 몰랐어. 이 모든 금이 내 눈앞에서 황홀하게 빛날 때 나는 그것이 내게 소리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네. 이것 봐. 버닝 데이라이트! 마침내 네가 우리를 꺼내주러 왔구나. 네 행운의 날이 왔어. 이렇게 말이야.”  옛 유콘강의 영웅, 데이라이트는 카맥의 발견에 앞서 이제 새로운 엘도라도의 거인이 되었다. 이 뜻밖의 발견과 작업방식에 대한 소문은 그 지역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는 정확하게 보는 안목이 있었고, 이 행운을 놓치지 않았다. 이는 다른 어떤 탐험가보다 많은 채굴지를 확보해 두었기 때문이다. 일말의 시기심을 갖고 있던 이들은 그이 파산이 임박하고, 그가 벌어들인 금의 증발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들은 신랄하게 말했다. 그는 지나치게 투기를 했어. 이 지역이 황금으로 가들 차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충적지의 광산은 그렇지 않지. 그이 재산은 수백만 달러로 추정되었다. 혹자들은 악감정 때문에 그가 언젠가는 도랑에서 금을 퍼내는 행운이 끝나기를 기도했다. 그들은 그이 직관적인 투자 배후에 냉철한 판단과 능란한 계산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망각했던 것이다.  그는 말했다. "보난자에는 단순한 우연치고는 금이 너무도 많아. 틀림없이 거대한 광맥이 근처에 있어. 우리 것처럼 풍요한 다른 물 웅덩이들이 더 있을 거야. 너희들은 인디언 강가를 감시하고 있어. 클론다이크에서 흘러와서 다른 강줄기로 이어지는 강들에는 이곳에 있는 금 못지않게 금이 흐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도슨은 1896년 겨울 동안 신속하게 세를 확장했고. 이 도시의 채굴지를 판 돈은 데이라이트에게 몰렸다. 그는 이 돈을 이윤이 더 큰 사업에 투자했다. 그는 위험스러운 파롤리 게임(두 배로 돈을 거는 게임)을 했다. 이러한 장소에서 모두를 거는 것보다 위험한 도박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도박에 임했다.  그는 술집 무스혼에서 옛 동료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횡재 소식이 밖에 전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어. 사람들은 그 소식을 내년 봄이 되어서야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계절이 세 번 바뀔 거야. 여름이 되면 그들은 이곳을 보러 올 거고, 가을이 되면 이곳에 정착할 것이고, 다음해 봄에 그들은 5만 명에 이르게 될거야. 그렇게 되면 너희들은 더 이상 이 지역을 알아보지도 못하게 되겠지. 1897년 여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최초의 이동이 시작될 거야. 이 기회에 너희들은 무엇을 할래?"  "그러면 너는 무엇을 할래?"  한 친구가 물었다.  "별다르게 할일이 없어. 나는 이미 조치를 취했거든. 유콘강 상류에 건설자재를 실은 12개의 팀을 갖고 있지. 해빙이 되면 뗏목에 실려 내려오는 자재들을 보게 될 거야. 사람들은 움막을 지을 테고, 그러면 내년 가을에 그것들은 비싸질 거야. 건설 자재값이 폭등하게 되는 거지. 수로를 통해 도착하는 두 개의 제재소로 갖추고 있다네. 그것들은 호수가 녹는 즉시 그곳에 설치될 거야. 만일 너희들이 지금부터라도 목재에 투자를 하고 싶다면, 계약을 위해 마일당 300달러로 너희들에게 양도해 주지.”  그해 겨울 모퉁이의 일부 땅이 1만~3만달러에 팔렸다. 데이라이트는 도처에 있는 신개척자들에게 뗏목으로 오라고 요구했다. 1897년 여름 동안 제재소는 세 군데서 밤낮으로 일해 운반용 목재를 만들었다. 부지런히 작업을 했는데도 이 제재소로는 부족했다. 땅을 가득 채운 움막들은 1000달러 이상에 판매되었다. 중심지 상가에 위치한 2층집들은 그에게 4~5만 달러씩 벌어주었다. 이 새로운 자본 유입은 즉시 다른 사업에 투자되었다. 데이라이트는 그이 자본을 굴리고 또 굴렸고, 그가 하는 일은 모두 황금사업으로 변했다.  시간인 흘러 그는 옛날처럼 소란스럽게 흥청망청 밤을 보냈다. 그각 그렇게 한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그는 이러한 습관을 버릴 수 없었고, 또 그의 부가 그렇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동일한 기쁨을 맛볼 수는 없었다. 권력에 대한 갈망이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고, 이것이 새로운 정열이 되었다. 알래스카 지역이 가장 부유한 황금 탐험가가 된 그는 더 큰 부를 소유하러 했다. 그는 큰 도박을 했고,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를 선호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가 했던 도박은 창의적이었다. 엘도라도 광산의 채굴장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두 개의 거대한 제재소와 강을 가득 메우며 엘란스산 아래로 내려오는 거대한 뗏목을 감독하는 데 더 큰 기쁨을 느꼈다. 어쨌든 황금은 저울 속에서 마저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했다. 그것은 사물, 그것들을 만드는 힘을 상징했다. 그러나 제재소는 사물 그 자체로서 구체적으로 지각할 수 있었고, 그의 재산을 증식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땀방울 어린 그의 꿈을 실현하는 것있었다. 여름에 유입된 이들과 더불어 주요 일간지와 잡지의 특파원들이 도착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데이라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속속들이 기술했고, 이로써 그는 미국인들에게 알래스카의 화신 그 자체로 소개되었다. 몇 달 뒤 에스파냐 전쟁이 대중의 관심을 끌고, 그가 외부세계에서 빠르게 잊혀져 갔을지라도, 그는 클론다이크에서 여전히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도슨 거리를 지날 때면 모두 그를 바라보았고, 술집에서도 신참자들이 존경심을 갖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으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그 지역 최고의 부호일 뿐 아니라, 모험가 버닝 데이라이트, 즉 신대륙의 역사에서 칠쿠트를 가로질러 유콘으로 내려와 그보다 연상인 두 거인, 알마요와 잭 매퀘스천을 만난 모험가였다. 그는 수천번의 멋진 모험을 한 영웅이었고, 북극해의 얼음 속에 갇힌 포경선원들을 구하기 위해 거대한 야생림을 가로질렀고, 60일 만에 서클시티에서 사해까지 우편물을 전달해 주었고, 1891년 겨울 죽어가는 타나나의 모든 부족을 구출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 더 근본적으로 신참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적 자발성에 놀라곤 했다. 그가 했던 많은 것들은 무의식적인 것까지 모든 이의 감탄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의 마지막 모험을 이야기했는데, 이를테면 그가 대니시크리크의 힘든 경마에서 이겼다든지, 놀라운 대담성으로 설퍼크리크의 기록을 깼다든지, 혹은 마지막 순간에 불참한 알래스카의 채굴자를 대신한 그가 여왕 탄신일의 조정경기에서 우승했다든지 하는 것들이었다. 어느 날 저녁 무슨혼에서 그는 잭 컨스에게 이전에 포커 게임에서 진 패배를 설욕하겠다고 게임을 제안했다. 이들은 상한가 없이 아침 8시까지 도박을 했다. 그가 게임을 끝냈을 때 백만장자인 잭 컨스에게 23만 달러나 땄다. 물론 잭 컨스는 이러한 손실을 감수할 수 있는 재력가였다. 그러나 참관자들은 도박의 규모에 놀랐고, 참석했던 10여명의 기자들은 그날로 미 대륙의 방방곡곡에 이 놀라운 기사를 발송했다. 6000명의 개척자들이 1897년 도슨에 도착해 채광충적지에서 일했다. 봄에는 수로를 통해서 10만 여명이 운집했다. 어느 날 저녁 프렌치힐에서 수쿠쿰힐로 가는 길에 멈추어선 데이라이트는 한 번 더 미래를 예견하게 된다. 그의 발 아래에는 엘도라도의 가장 부유한 지역이 펼쳐져 있었다. 보난자의 도처에서 풍경은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으나, 이 지역은 헐벗은 방대한 지역이 되었다. 나무가 모두 베어진 언덕들은 헐벗은 옆구리를 드러냈고, 눈조차도 그것을 가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 아래 사방으로 보이지 않는 움막들이 솟아 있었으며, 두터운 연기는 계곡을 뒤덮어 음침한 날씨에 우울한 황혼의 느낌마저 주었다. 눈속에서 연기가 수많은 구멍을 통해 솟아올랐다. 깊은 바위 아래나 얼어붙은 광천 속, 혹은 자갈밭에 틀어박힌 사람들은 엎드려서 파고 긁으며, 불을 피워 얼음 표면을 녹이고 있었다. 바로 그곳에서 새로운 웅덩이들이 붉은 연기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자취가 구멍 밖 으로 나타나거나 그 속으로 사라졌고, 이어 나무받침대 위에 앉아 있거나 자갈더미를 표면으로 끌어내 이내 얼어붙게 만들었다. 수문들, 댐의 일부, 수차 등 황금을 찾아 나선 광란의 군대가 쏟아놓은 온갖 쓰레기들이 뒤섞여 있었다.  "이 무슨 파괴란 말인가!"  데이라이트는 큰 목소리로, 그러나 힘없이 말했다.  그는 헐벗은 언덕을 다시 찾았다. 엄청난 목재의 낭비와 무질서가 힘들여 작업한 성과를 하찮은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각자는 자신을 위해 일하고, 바로 그로부터 엄청난 혼란이 생겨났던 것이다. 아주 친숙한 이 광산에서 그는 2달러를 벌기 위해 1달러를 투여했고, 태양과 열정에 사로잡혀 쓰레기 속에 나머지 1달러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얼마 뒤 그의 채굴지는 모두 팔려 바닥나고 가치는 떨어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으로 벌어들인 금은 과거에 캐내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분별력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생동감 있는 상상력으로 상류에서 하류까지, 이 산에서 다른 산에 이르는 중심적이고 판별 가능한 방향을 기재한 엘도라도 지도를 만들었다. 얼음을 녹이기 위해 이후 사용할 증기는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급류, 계곡의 물줄기를 통제해야 했고, 캘리포니아에서 했던 것처럼 도랑을 만들어야 했다. 바로 거기에 또 다른 거대한 계획을 준비하는 모든 요소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는 당시 버려졌거나 고갈된 것으로 간주된 채굴지를 매입하기 위한 협상에 종사할 많은 전문가들을 고용했던 구겐해머나 영국 은행들의 시스템을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전문가들은 영세 채굴권자들이 마음대로 황금을 채굴해 내도록 내버려두었다. 그 뒤에도 그들이 수백만 달러를 충분히 채굴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기를 뿜어내는 구멍을 생각하면서, 이 조야한 노력의 목격자인 데이라이트는 구겐해머와 다른 회사들이 자신과 함께 지원해야 할 새로운 방식의 계획을 정립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의 기쁨에는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 북극의 긴 밤은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듣기는 했지만 어린아이처럼 잘 모르는 광활한 세계를 알고 싶어했다. 그 세계에서도 도박을 할 수 있었다. 테이블은 훨씬 크다. 그런데 왜 그는 수백만 달러를 갖고도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없겠는가? 그날 밤 그는 언덕 위에서 클론다이크에서의 도박을 영광스럽게 매듭짓고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의 충복들은 전문가들과 그들이 어느 지역을 매입하는지를 감시했고, 데이라이트도 그곳에서 매입했다. 그들은 발굴자들이 방치한 강을 탐내고 있었는데, 마치 우연처럼 그가 소유하고 있는 채굴지가 그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데이라이트는 그들의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해 교묘하게 이 채굴지를 분할했다. 전투, 꿈, 타협, 승리, 패배가 이어졌다. 1898년 6만 명이 클론다이크에 있었고, 그들의 사업과 부는 데이라이트가 전개한 전투로 타격을 입었다. 보다 거대한 도박이 그를 더욱 세계 옭아맸다. 이곳에서 그는 점차 구겐해머의 압박을 받지만, 결국에는 분노 어린 승리를 거두었다. 가장 힘겨운 싸움은 오피의 채굴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이 채굴지의 금 함유도는 낮았지만, 지역이 워낙 광활한 탓에 낮추어 생각할 수는 없었다. 중심부에 위치한 일곱개의 채굴지 블록의 소유권은 그에게 속해 있었다. 그로부터 이 땅을 매입하려고 시도했던 전문가들은 이 채굴권이 그에게 너무 과중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매입하려 했을 때 그 지역에서 그들의 지분을 재매입한 이가 바로 데이라이트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계획이었고, 그는 이 계획을 미국 엔지니어들로 하여금 추진하게 했다. 그는 그곳에서 80km 떨어진 링커빌리의 비탈 위에 물탱크와 나무로 만든 거대한 관을 건설했는데, 그것은 120km에 달하는 길이로 그 지역을 지나 오피까지 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300만 달러가 투입될 것으로 평가된 그 저장 탱크와 수로작업에는 거의 400만 달러가 소요되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빛과 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전기장치들을 설치했다. 이 사업 덕택에 자신들의 기대 이상으로 부유해진 알래스카의 채굴자들은 그의 파산을 예견하여 씁쓸하게 머리를 저었고, 이처럼 터무니없는 계획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데이라이트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재정을 지원하기 위해 나머지 재산과 도시의 불하지를 판매했다. 그는 이것들을 적기에, 즉 당시의 부동산 붐이 절정일 때 팔았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두 제재소를 팔았다. 하여튼 그는 여러 강줄기에 흩어져 있던 자신의 재산들은 모두 처분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신세지지 않고, 자신의 수로작업을 마치고 준설기를 제작하여 기계들을 들여왔으며, 화려한 오피의 개척시대를 열었다. 5년 전만 해도 인디언식으로 끈을 맨 개들을 데리고 인디언 강에서부터 이 지역을 가로질러 조용한 대지를 종횡으로 누볐던 그는 원주민처럼 살며 열정을 품고 있었지만, 오늘날은 작업을 위해 노동자들을 부르는 날카로운 기계소리를 듣고 있다. 그는 이들이 흰 전등 불빛 아래서 힘들게 작업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과업을 달성하자 그는 떠날 준비를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구겐해머와 영국 은행들, 그리고 최근에 생긴 한 프랑스 회사가 오피와 그 시설을 매입하고자 경합을 벌였다. 결국 구겐해머가 그것을 취득한 대가로 데이라이트에게 100만 달러를 지불했다. 사람들은 도처에서 그의 재산이 2000만~3000만 달러에 이른다고 수군거렸으나, 오직 그만이 정확한 숫자를 알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채굴권 판매와 소득을 모두 계산할 때, 그는 1100만 달러의 순익을 남겼다. 그의 다른 탐험들처럼 그의 출발은 유콘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 지역 전체가 주최자였고, 도슨은 축제의 장이었다. 그날 밤 사람들은 그의 황금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의 황금가루도 받지 않았다. 음료수는 무료였고 술집은 열려 있었다. 임시고용원들이 술에 취한 사람들을 부축했고, 술은 넘쳐흘렀다. 부득이 돈을 내겠다고 고집하는 이들은 완강한 거부에 부딪혔다. 나이 든 신참자들은 그러한 모욕에 맞서서 데이라이트의 이름을 수호하는 데 신경을 썼다. 그가 자신의 밤이라고 불렀던 그 밤 동안에 버닝 데이라이트는 호의와 우정에 흠뻑 젖어서 몸을 아끼지 않았고 늑대처럼 괴성을 질렀으며, 싸움에서 사람들의 손을 으깨고 힘 자랑을 했다. 그의 그을린 얼굴은 술로 붉어지고 검은 눈은 반짝였다. 가죽신에 작업복과 실크 모포를 걸치고 귀마개는 모자 위에 매달려 있었으며, 벙어리 장갑은 어깨위로 늘어진 끈에 매달려 있었다. 일찍이 도슨은 이러한 대향연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데이라이트는 이 밤을 기억에 남을 날로 만들고자 했고 뜻대로 성공했다. 도시의 대부분이 음울해졌다. 날씨는 춥고 아직 유콘이 얼어붙지는 않았지만 기온이 영하 25C 이하로 떨어졌으며, 더 내려갈 것이었다. 이것이 인명 구조대가 왜 거리를 돌아다니며 취해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눈 속에서 한 시간의 수면은 치명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수백 수천명을 열광시켰던 데이라이트가 장난처럼 이 구조대를 조직했다. 그는 도슨이 아무런 사고 없이 대향연을 화려하게 보내기를 원했다. 그리고 과거의 밤들처럼 논쟁과 싸움은 금지되었다. 이를 어기는 자들은 그와 대결해야 했기에, 아무도 그러한 위험을 무릎쓰려 하지 않았다. 그 지역의 많은 행정관들은 이 축제를 망치는 이들을 관찰해 두었다가 눈 속으로 내던지고 침대로 몰아넣었다. 그 세계에서 대기업가가 사라질 때, 그가 과거에 지휘했던 바퀴는 한순간 멈추었다. 그러나 클론다이크는 그 지휘자의 출발을 즐겁게 축하했기에 48시간 동안 어떤 바퀴도 돌지 않았다. 심지어 수천 명의 임노동자들이 있던 거대한 오피마저도 폐쇄되었다. 그 밤이 지난 다음날 아무도 일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지도 몰랐다. 다음날 새벽부터 도슨은 그에게 안녕을 고했다. 부두에는 손에 장갑을 끼고 귀마개를 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기온이 영하 30C 아래를 맴돌았다. 얼음은 더 두껍게 얼고, 유콘강에는 두터운 얼음 조각들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시애틀교에서 데이라이트는 안녕의 손짓을 했다. 밧줄이 풀리고 정기선이 강 중앙에 이르자, 데이라이트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은 시선이 축축하게 젖어 떨리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결국 이곳은 그의 고향, 즉 그가 진정으로 알고 있던 유일한 땅이었다. 그가 떠나는 것은 북극의 이 거친 땅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모자를 벗어 흔들었다. 그는 소리쳤다. "여러분, 모두 안녕! 안녕! 안녕!"  (잭 런던 '버닝 데이라이트')  세상에서 가장 살인적인 황금  황금,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 남아프리카와 동의어로, 인종 차별과 더불어 그 나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전세계에서 채굴되는 이 노란색 귀금속의 43%가 지난 95년 동안에 이 엘도라도에서 생산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명칭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채금층은 오렌지 자유주와 트란스발 지방 간의 국경을 따라 말발굽 모양으로 길이 480km의 아치를 형성하고 있다. 리프라 불리는 황금띠는 발강 아래에 펼쳐지고 있다. 말발굽 모양을 하고 있는 아치는 행운의 마스코트로, 일곱 군데 중요한 개발구역을 탐스러운 커브 위에 꽃피게 했다. 55개의 광산은 6개 거대 산업 그룹에서 분점되어 있는데, 그들의 작업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금가루가 담긴 바위들을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 일은 점차로 깊숙한 지층 속에 묻혀 있는 퇴적물을 추출해야 했는데, 작업의 주인공은 남아프리카 흑인 노동자들이고, 그들의 엄청난 땀과 피를 대가로 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모자를 쓰고, 장화를 신고, 장갑을 끼고 밑으로 파들어가기 시작했다.  기중기는 불과 몇 분 만에 땅속으로 내려간다. 거기에는 가슴 조일 시간조차 없으나 마치 내면 세계의 소리를 듣기 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침묵이 부과된다. 땅속으로의 여행, 기중기를 구성하고 있는 대동맥을 통해서 안과 밖 사이의 끝없는 왕래가 이어진다. 노동력을 집어삼키고 지친 사람들을 뱉어놓는 영속적인 허파와 그들의 피로의 대가는 바로 광석이었다. 황금은 먼 곳, 즉 수킬로미터 깊이의 아주 먼 곳에 있다.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면 이어서 작은 기차를 타고 작업장들의 미로를 지나야 한다. 오솔길의 미궁들은 갱도에 접근하면 할수록 좁아진다. 암흑을 향한 여행의 끝은 항상 도보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여전히 항상 내려간다. 열기는 높아지고, 인공조명은 점점 희미해진다. 남아프리카의 황금광들은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고, 평균 2000~3000m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웨스턴딥레벨의 황금광은 곧 4265m의 층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깊이에서 느끼는 압력은 엄청나다. 3600m 미만에서 느끼는 압력은 마치 사람이 머리 위에 1만m의 물을 이고 있는 것과 같다. 기온은 60C에 이를 수 있는데, 지상에서 공기를 펌프로 공급하고 배출하여 기온을 조절한다. 어떤 이들은 얼음을 사용하기도 한다. 견디기 어렵고 힘들며 위험한 작업이어서, 매년 600명 가량의 광부들이 작업 중 사망한다. 대부분 낙석으로 생기는 사고사이다. 1911년 이래 대략 4만 4천 명 가량이 남아프리카의 광산에서 죽었다. 그중 백인이 3000명이고, 유색인종이 4만 1천명이다. 세계에서 희생자를 가장 많이 낸 광산들 대부분은 깊이 때문만이 아니라 광맥의 협소함 때문에 기계화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지하에서 금을 뒤덮고 있는 수정을 추출할 수 있는 길은 광부들이 쪼그려 앉거나 주저앉아서 작업하는 방법뿐이다. 그 진척 속도에 따라 터널이 오솔길이 되고 단층이 되기 때문이다. 무릎은 고무보호대로 싸고, 이마에는 모자보다 큰 천조각을 두른 광부들은 34C의 기온에서 공기 해머의 폭발음을 들으며 작업한다. 그들은 1m 높이의 검은 회색의 벽 위에 붉은 칠로 새겨진 수정 부위를 쉬지 않고 뚫는다. 바위를 상대로 한 전장인 이 측면의 한복판에는 넓이 2~3cm의 보다 칙칙한 그물망이 내면벽을 모두 지나고 있는데, 리프는 그 속에 사람들이 찾으려고 하는 금조각을 가두고 있는 유명한 광맥층이다. 이 깊은 지하 바닥에서 광부들은 물 웅덩이 속을 걸어다니며 파나칼로라고 부르는 초보적인 에스페란토어를 수단으로 해서 의사소통을 한다. 이 언어는 다른 6개의 언어에서 빌려와 만든 것으로, 모든 인종과 모든 종족으로 하여금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46만 명에 이르는 흑인 노동자들의 80%는 남아프리카 국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대부분 홈랜드(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자치구역)나 인접 국가에서 돈벌이를 위해 이곳에 왔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갱신할 수 있는 1년짜리 계약을 하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세계속에 잠긴다. 그들은 미혼자들의 막사인 호스텔의 더럽고 보잘것없는 방에 몰려 살며, 1년에 단 한 번 아내와 아이들을 보러 귀가한다. 생산의 필요에 따라 이동하고, 사소한 잘못에도 해고되는 흑인 광부들은 노동조합. 특히 광부노동자 전국연합(NUM) 덕택에 조직화되고 자신들의 요구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 조직은 1982년에 창설된 이래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강력한 광부위원회에 대항해서 시작된 전투들은 생긴 지 얼마되지 않은 미숙한 노동조합에게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이 노동조합은 임금과 안전조치들을 개선하기 위해 싸우고, 백인들에게만 13개의 특정 직업을 할당하는 1911년의 직업보호법을 폐지시키기 위해 싸운다. 흑인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작업에 필요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주장할 수 없게 되어 있다.  황금이 그 나라의 부를 보장했던 것은 흑인 광부들의 노동력과 힘 덕택이다.  흑인 광부들은 금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못했거나 기껏해야 사진으로만 보았을 뿐이다. 1984년, 그들은 지하에서 1000억 톤 이상의 자갈과 흙을 퍼냈다. 광산 회사들은 1톤의 흙에서 대략 8~10g 정도의 금을 추출했다. 사실 이 정도의 양은 얼마 되지 않고 금을 채굴하는 생산단가가 끝없이 상승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 해도, 이 업계는 항상 높은 이윤을 남겼다. 이윤 통계가 그것을 입증해 준다 1984년 56억 랜드(남아프리카 공화국 화폐 단위). 예측에 따르면, 남아프리카의 생산량이 전세계의 생산량과 비교할 때 감소중인 추세에 있지만, 프레토리아는 여전히 오랫동안 세계 제일의 기업으로 남게 될 것이다. 황금은 상당 부분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경제강국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것은 순국민생산의 12. 5%를 차지하고 예산의 13%를 차지한다. 이 두 숫자는 인종차별주의 국가에서 노란 금속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셸 볼 리샤르 '오트르망' 1985년 11월)  시베리아의 황금 트러스트 모험  1933년 모스크바 당국은 황금산업을 재조직하기로 결정한다. 옛 탐광자들은 반사회주의분자인 범법자들로, 강제로 이끌려와 금광에 투입되었다. 동시에 새로운 채광지를 열고 가능한 한 빨리 금 생산량을 증대하려는 목적에서 채굴체계가 유입되었다.  바이칼 호수 주위의 광맥들  1930년 가을 이르쿠츠크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나는 그 도시가 지난 3년 동안에 이룩한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고 무척 놀랐다. 바이칼 호수 주위 채광지들은 소련뿐만이 아닌 세계에서 가장 값진 채광지의 하나로 발돋움했다. 특히 그중 한 곳은 1928년에야 발견되었는데, 세계적으로 으뜸가는 선두 그룹에 속하고 있다. 100% 기계화되고, 2개의 거대한 청화시설(복대기-광석을 찧어 금을 잡고 난 뒤에 남아 처진 광석가루를 복대기탕에 넣고 약품을 탄 물을 부어 복대기금을 잡는 시설)을 갖춘 이 기업은 미국과 알라스카에 있는 어느 기업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동력은 거대한 증기기관이 공급해준다. 바이칼 호수 지역은 또한 제정 러시아 차르 지하에서 황금광산의 중심지였다. 금광의 채굴작업에는 당시 정치적인 이유로 유배된 이들을 포함한 고역수들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광맥들이 발견됨으로써 이 지역은 1928년 이후에 혁명 전보다 훨씬 더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황금 트러스트의 기업가들도 자신들이 이 지역에서 육성한 작은 근대도시에 대해 각별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1933년 내가 이 미래의 중심지에 도착했을 때, 금은 계획했던 생산량만큼 채굴되지 않았다. 발굴방식이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업과 관련을 맺고 있는 이들의 우호적인 협조를 받아가면서 이 지역에서의 작업을 가속화시켰다. 그 결과 연말에 이르러 우리는 땅에서 원하는 양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1933년 한 해 동안 계획을 세우고, 가능한 한 시간을 단축해 가며 진행중인 조사를 재개하고, 황금 트러스트 협조자들의 보고서를 조절하기 위해 그것을 적용했다. 세부계획을 즉각 전체적으로 응용하지는 않았지만, 점진적으로 발전해 가는 가운데 우리가 황금을 향한 물결이라고 부를 만한 운동이 일어났다.  당국자들은 이 운동이 캘리포니아와 알래스카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따라서 그것을 감시하고 지속적으로 조절했다. 새로운 행정구역은 이러한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황금 트러스트 근처에 창설되었다. 답사부는 발굴자들을 관리했을 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 분양되는 채굴권도 관리했다. 그는 소련에 거주하는 사람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황금을 찾아 나설 권리를 가질 수 있고, 이 일이 가장 영광스러운 일로 간주될 것이라는 점과, 발굴자와 계약자들이 국가에 대한 봉사의 대가를 충분히 보상받게 되리라는 점을 널리 주지시켰다.  빨리 부자가 되겠다는 갈망이 그 효과를 발휘했다.  발굴자들 가운데 베테랑들은 그들이 탐사할 수 있는 장소를 아주 쉽게 찾아냈다. 그에 따라 상당량의 돈을 장만했다.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에 살고 있던 중국인들은 1927년 이전에는 황금탐사를 밀수나 불법 영업에 연계시켰다. 따라서 그들은 옛날에 하던 일을 재개하도 록 허용하는 기회를 잡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지나치게 이윤에 관심을 갖고 있는 중국인들은 결코 자발적으로 공산주의 이론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능숙한 탐사자이자 안내자들이 되었다. 매우 짧은 시간 안에 횡금 트러스트는 답사부의 통제를 받으며 일을 하는 수십만 명에 이르는 남녀들을 조직해 냈다. 이들은 잘 알려진 지역의 트러스트에서 자신들의 장비와 노동력, 그리고 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협조를 하는 대가로 신용을 얻게 된다. 그사이에 트러스트는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개척되지 않은 인적 없는 영토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룰 것을 권장했다. 이 마지막 목표는 그들의 상황을 합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확정된 테두리를 벗어난 지역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롭게 금을 채취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 필요한 생필품과 연장들을 가져갈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트러스트는 이들에게 장비를 제공했다. 답사부는 지속적으로 발굴작업을 감시하기 위해 지방으로 감독관들을 파견했다. 답사부는 감독관들이 여는 새로운 채금장을 개발하기 위한 기금도 갖고 있었다. 만일 한 지역이 채산성이 있다고 확인되면, 트러스트는 그곳에 사무실을 열고, 집을 몇 채 건설하고, 오직 금을 대가로만 파는 상점들을 짓는다... 체계를 운용하는 방식에 따르면 운이 좋은 감독관은 다른 여러 나라에서처럼 언젠가는 부유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소련 감독관들에게 허용된 보상은 아마도 다른 곳에 비해 대단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작업을 개시하는 초반부터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채금장에서 횡재하게 된 행운에 대한 소문이 신속하게 퍼져 나간 것과, 수백개의 협동조합이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것. 수천 명의 감독관들이 점차로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게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황금 트러스트는 채굴지를 통제하기 위한 완벽한 체계와 감독관들을 조직했다.  감독관들과 지리학자들은 지속적으로 시골로 내려갔다. 그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며 여러 채굴지역을 감독하는 동시에 개발조건들을 관찰한다. 트러스트는 또한 자체 기술자들을 양성하고, 이따금 채굴집단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가장 효율적인 작업방식과 법에 걸맞는 안전조치에 대해 조언할 수 있게 한다. 만일 채굴권자들이 이러한 조치를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매우 많은 벌금을 물게 되기 때문에, 기술자 한 명의 도움을 받는 것이 그것을 보장하는 최선의 방법이 된다. 이 기술자들은 봉급을 받고 고용된 자들이지만, 지폐가 아닌 황금 루블로 지불받기도 한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한 사금지가 할당되면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 있는 자갈을 제거하고 그것을 씻는다. 광맥이 할당되면 사람들은 트러스트가 위탁해 놓은 작업기계에 광석을 넣고, 광석을 가루로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력은 채굴권자들이 제공한다. 채굴권자들은 금을 취득하면 그것을 황금을 받는 상점 중 하나로 가져가고, 그에 상응하는 신용장이나 신용권을 받는다. 소련에서 횡금을 향한 이러한 물결은 다른 나라에서의 움직임과 비교될 수 없다. 이곳에서는 황금 물결이 당국의 엄격한 통제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소련 정부는 이 노란 금속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들은 여러 소식통에 따르면 채굴지를 둘러싸고 수많은 범죄와 폭력이 발생했다. 도처에 밀수꾼들이 수두룩하게 있었고, 이들은 총질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대궁핍기에는 아편뿐 아니라, 생필품과 의복 등을 중국과 만주로부터 수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밀수꾼들과 감독관들이 조우하는 곳에 단순 약탈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황금과 밀수품을 도적질하기 위해 살인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1928년 내가 몸소 겪었던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작은 광산도시에 이르렀을 때 양질의 금을 지닌 세 명의 감독관들이 그곳에 도착했다. 이 시기에 그들은 아직 법을 어기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금을 정부 직영 상점에 위탁하고, 그 대가로 많은 돈을 받았다. 그들은 곧바로 싸구려 식당으로 들어가서 그곳에 있는 술을 모두 샀다. 그리고 자동차에 보드카 병들을 싣고,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거리를 지나며 거리 양편에 매걸음마다 술병들을 늘어놓았다. 마을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마침내 모든 병을 늘어놓고는 소리쳤다.  "이리 오세요. 모두 이리 오세요! 우리와 함께 마음껏 마십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마을 사람이 술에 만취했다.  황금 트러스트는 이러한 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미연에 방지했다. 따라서 더 이상 과거의 채금지역에서 상습적으로 야기되었던 비열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다.  황금 트러스트는 상점과 식당에서 술을 팔았으나 불법 매매는 용납하지 않았고, 여성들도 남자들과 더불어 흙을 뒤지거나 금을 씻는 일을 했다. 발굴자들은 다른 소련 시민들처럼 조심스럽게 처신할 줄 알고 있었는데, 지나치게 소란스럽게 굴 경우 귀찮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반 행위를 반복하게 되면 채금장에서 추방당하고, 일단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발굴자건 채굴권자건 간에 양질의 노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황금을 향한 물결에 대한 소련의 정책은 소련과 일본의 관계가 매우 팽팽하게 맞서던 시기에, 그리고 소련으로서는 극동지역의 인구가 살지 않는 공간을 가급적 빠른 시간 내에 사람들을 정착시켜 그들이 살아가는 데 만족스럽도록 만드는 일에 중점을 둔 시점에 형성되었다. 바로 1933년 당국은 시베리아를 포함한 극동지역의 농가에 채굴권을 양도했다. 이는 그들을 몇 년 전 가혹한 처벌을 받은 바 있는 러시아의 부농과 같은 전철을 밟게 했다.  효용성과 사회주의적 원리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기로에서 공산당국은 실용적으로 여겨지는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그들이 타협책을 보다 체계적으로 취하게 만든 데는 일본의 위협이 작용했다.  황금을 향한 물결은 성공한 것으로 판정된다.  카자흐스탄은 동쪽과 남쪽으로 중단 없이 계속 팽창되었다. 꺽이지 않는 불굴의 용기를 가진 일단의 남녀들은 시베리아 동쪽 지방이나 알타이 산맥, 이르쿠츠크의 북쪽 지방 등, 지리학적으로 아직 개발이 덜 된 지역 속으로 항상 보다 깊숙이 전진했다. 발굴자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맵찬 눈보라 속에서, 혹은 열대의 후끈한 열기 속에서 고된 노동을 했고, 백인들이 한번도 방문해본 적이 없는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 발굴자들은 소련의 다양한 인종 집단을 망라하고 있었다. 러시아인들, 우크라이나인들, 그루지야인들, 몽고인들, 중국인들, 한국인들, 카자흐인들, 키르기스인들, 아르메니아인들, 그리고 북극과 중앙아시아의 원주민들.  읽고 쓸 줄 알든 모르든, 고립된 이 지역에서 떠나든 그렇지 않든, 이 남자와 여자들은 24시간 만에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행운은 단지 운수와 생명력, 그리고 그들의 용기에 따라 판이하게 달랐다.  (존 리틀페이지 '시베리아 금광의 발견')  프랑스의 황금  프랑스의 지하에는 금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다. 실제로 프랑스의 60여 개 지역에서 채굴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채금 단가가 매우 높아 생산량은 적은 편이다. 한편 사금 채집가들에게는 강바닥을 두루 조사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프랑스, 황금의 나라?  프랑스는 서유럽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황금광산을 두 군데 개발하고 있다. 첫번째 광산은 살시뉴(오드)에 있고, 1908년에 발견되었으며, 해마다 1. 5톤이상의 금을 생산한다. 두번째는 생티리에라페르슈(오트비엔) 지역의 별칭인 부르네이에 감추어져 있다. 지질 및 광물 조사국(B. R. G. M)이 1978년에 그것을 발견했다. 이 광산은 1980년 이래 개장되었으며, 연간 생산량은 600kg 정도이다. 끝으로 수 개월 안에 루에즈 광산이라 불리는 작은 광산이 망에서 수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사르트 지역에서 개발될 것이다. 이 광맥은 2톤 가량의 황금 매장량을 갖고 있는데, 프랑스 광물 조사 과정에서 지질 및 광물 조사국이 발견했다.  우리의 광물자원을 발견하기 위한 캠페인은 1974년에 시작되었고, 다른 10개의 채굴광맥에 대한 단서도 이미 발견되었다. 한 예로 리무쟁은 이 분야에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데, 우리는 여러 장소에서 갈로로망들이 개발했던 광산들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중 리모주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로리에라 마을이 그런 예이다. 아리에주는 잘 알려진 강으로, 그 이름은 라틴어로 아우룸, 즉 금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강바닥에 얼마간의 금조각이 남아있다. 그러한 조사를 통해 보슈와 브르타뉴, 라포르트오무안, 보드네, 케뤼오 등지에서 다른 광맥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단서에 불과하다. 몇 온스의 금이 광산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금광맥이 개발되려면, 톤당 8~12g 정도의 금이 함유된 광물에 적어도 2000톤의 금이 매장되어 있어야 한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금광은 당분간 살시뉴, 부르네이, 루에즈 세 곳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한 조사가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지질학자들은 10여 년 안에 프랑스의 지하자원에 대한 조사를 마칠 것이다. 지질 및 광물 조사국 국장인 모리스 알레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에는 분명 그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금세기 말 이전에 보다 발전된 발굴방법이 발견될 것이고, 그러한 방법들은 보다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프랑스의 지하자원을 발굴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다가오는 수년 안에 분명히 다른 광백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사금 채취가 다시 유행하고 있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 지질화학자들, 지질물리학자들, 그리고 다른 지질학자들이 추진하는 발굴작업을 기다리지 않고, 미숙한 황금 탐험가들이 프랑스의 강바닥을 체로 거르며 값진 금속을 찾아 나서고 있다. 로마인들은 골족을 갈리카 아우리페라(채굴하는 골족)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게다가 프랑스의 황금을 잊어버리게 만든 미국의 황금을 향한 물결이 일기 전까지 사금 채취자라는 직업은 프랑스에서 매우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그들 중 대략 10여 명은 심지어 이것을 직업으로 생활한다. 직업적인 사금 채취자가 된다는 것은 항상 모험이고, 우리는 그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사금 채취자들은 은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금의 시세에 비추어 볼 때, 전문가 한 사람의 소득은 대략 월 800프랑에서 10만 프랑 사이이다. 따라서 온갖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황금을 둘러싼 세계에는 발명가도 존재한다. 지질 및 광물 조사국을 퇴직한 한 화학기술자는 80~90% 가량의 황금을 추출할 기계를 개발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아직 구체화시키지 못한 상태이다. 이 모든 것을 따져보면 아마추어 황금 탐험가로 만족하는 것이 보다 현명할 것이다. 최근 들어 취미생활로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몰라보게 많아졌다. 수백 명의 아마추어들이 강가를 뒤지며 몇 조각의 금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아직도 알리에, 오드, 두브, 비엔의 강가에서는 금가루를 발견할 수 있다. 황금 탐험가들의 역사에서 미국 사금 채취자들의 철망 체와 고대의 양피를 대체한 천조각을 가진 이들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몇몇 평가에 따르면 아마추어 사금 채취자들이 추출하는 양은 연간 100kg 가량으로 증가했다.  ( 마르틴 카스텔로 '르 피가로' 1985년 9월 25일)  황금의 지배  황금은 지난 150여 년간 경제를 뒤바꾸어놓았다. 19세기에 추출된 대량의 금(1만 1500톤)이 인류가 그때까지 확보한 양에 맞먹는다는 사실을 아는가? 몇몇 나라들이 이러한 모험을 통해서 생겨났을 뿐 아니라, 화폐체계도 지속적으로 변화되었다. 금본위제는 점진적으로 19세기 말까지 공통된 척도가 되었다.  19세기에 땅속에서 황금을 캐낸 이들은 사심 없는 몽상가들이었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 반대로, 캘리포니아와 클론다이크의 광부들이 자신들의 꿈을 좇는 과정에서 사용한 비용의 총액은 그들이 추출한 금의 가치를 훨씬 능가했다. 산업시대로 이행하면서 금은 다른것과 다름없는 금속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고, 금을 개발하는 것은 열정적인 일이기보다는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대가와 관계가 깊은 일이 되었다.  생산비용과 1914년 전쟁이 가져온 생산 제한은 금융체계의 균형을 흔들어 놓았다.  1922년 금환본위 제도는 변화의 시작이었다. 국제시장에서 화폐는 금과 관련성을 가지면서도 금을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1929년의 공황, 파운드의 평가절하 등은 돌연 금값을 폭등하게 만들었는데(그만큼 중앙은행의 화폐가치를 폭락시켰고), 이는 그 해체과정의 한 단계에 불과했다. 1934년 루스벨트는 달러를 수호하기 위해 새로운 시세를 정해야 했다. 온스당 35달러로, 이는 40% 가량 인상된 것이었다.  1930~1940년 : 새로운 황금의 붐  이때는 위기의 시대였으나 황금에게는 좋은 시대였다. 당시까지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처에서 폐쇄된 광산들이 작업을 개시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수천 명의 실업자들이 곡괭이와 사금통을 들고 시에라네바다로 몰려들었다. 전세계의 연간 생산량은 1930년 600톤에서 1940년 1400톤으로 증가했다. 미국은 1940년대 캐나다에게, 이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게 추월당한 금 생산량을 배가 시켰다. 뀉 다시 생산단가 문제로 생산이 제한될 때까지.  화폐의 왕 . 달러의 불행  황금의 역할의 종말? 제2차 세께대전 직후 브레턴우즈 협정은 어째든 금에게 중대한 타격을 가한 것처럼 보인다. 유일하게 금과 태환성을 가졌던 달러는 국제적 교환을 위한 화폐가 되었다. 그러나 해마다 늘어나는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로 금의 부족 사태와 정치세력 관계로 생긴 이 체제를 지속적으로 지탱할 수 없었다. 1971년 8월15일 닉슨 대통령은 달러의 태환성을 중지시켜 이 사태를 해결해야만 했다. 즉각 급등 사태가 야기되었다. 온스당 35달러 하던 금은 1980년 온스당 850달러까지 폭등했고, 최근 들어 다소 안정세를 보이며 온스당 350~450달러를 유지하고 있다.  세계도처에서 황금을 찾는 새로운 물결이 시작되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점점 리프의 바닥으로 깊이 내려가고 있고, 그 광맥은 발강을 통해 480km의 길이로 뻗어 있다. 극서 지역과 오렌지 지방에서는 새 광맥이 발견되고 있다. 캐나다는 생산량이 1940년대 이래 감소하고 있었으나, 기술발달과 더불어 파일캐딜락 지역의 개발을 재개하고 있다. 이 지역은 애티비비를 가로질러 온타리오까지 펼쳐져 있고, 1981년 온타리오에서 발견되었던 헤믈로의 근사한 광맥에 대한 개발도 시작되고 있다. 이곳의 매장량은 약 2000만 온스 가량으로 추정된다. 오스트레일리아는 1940년까지의 폭락과 자발적인 생산감축 이후 캘구를리의 광산 등을 다시 열고 있으며, 이후 연간 60톤의 생산량을 기대하고 있다. 방치되었던 광산들은 알래스카에서, 유타, 네바다, 남부의 다코다, 캘리포니아에서 다시 가동되고 있다. 지질학자들은 아이다호(듀이), 네바다(코르테스 골드), 애리조나(클레멘틴)에서 새로운 광맥을 발견했다. 식스틴 투 원의 전설은 앨러거니(캘리포니아)에서 되풀이되었고, 홈스테이크 마이닝사는 네이파 계곡에서 300만 온스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광맥을 발견했다-지난 5년간 캘리포니아의 생산량은 열 배로 증가했다. 새로운 나라들이 이 대량 생산국 대열에 들기 시작했다. 파푸아뉴기니(1984년에 18톤), 필리핀(34톤), 중국(50톤 가량), 브라질, 페루, 칠레, 콜롬비아, 자이르, 가나, 짐바브웨 등... 경제학자 케인즈에 이어 1970년대에 금의 지배의 종말을 예견했던 이들에 따르면, 이 야만적 유물은 그 대가를 치렀다. 일찍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노란 금속을 찾아서 지구의 땅을 긁어댄 적이 없었다! 역설적으로 기술이 발달했는데도 개별 발굴자들에게 기회가 다시 주어지고 있다. 강가의 모래를 제거하기 위한 기계장치, 금속탐지기, 혼합시키는 사람들, 수정을 분쇄할 수 있는 바위분쇄기, 천공기 등은 오늘날 각각의 광부에게 19세기 30명의 광부들의 화력에 해당하는 힘을 주고 있다!'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1986년 여름동안 100만 명의 사람들이 시에라네바다의 강으로 금을 찾아 나섰다. 황금을 향한 물결이 있던 시대보다도 많은 수의 사람이다. 황금에 대한 거대한 꿈은 아직 사라질 단계가 아니다.  (미셸 르 브리)  금의 특성: 변질되지 않고 유연하고 내구성 있는 금속  화학에서 Au로 표기되는 황금은 무겁고 밀도가 19. 5인 금속이다. 그리고 금은 멘델레예 프의 분류 중 79번째 원소이다. 금은 산소에 닿아도 변질되지 않으며, 원자량은 196. 967이고, 용해점은 1064。C , 비등점은 2960。C이다. 자연적인 조건에서 그것은 오직 수은과만 결합한다. 특수한 온도와 압력하에서 몇몇 희귀한 성분과 결합한다. (브롬, 염소, 특히 요오드). 금은 금속 중 가장 유연하고 늘이기 쉽다. 금은 냉온에서 두께가 10분의1 미크론(100만분의 1mm)도 되지 않는 얇은 판으로 가공되거나 지름이 1미크론도 되지 않는 실로 가공되기도 한다. 단 1kg, 의 금으로 우리는 3km길이의 실을 만들거나 면적이 1m2인 판을 만들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내구성이 있는데, 유연성의 한도는 1mm2당 4kg에 달하고, 파열 한도는 13kg이다, 또한 금은 전기와 열의 전도가 매우 뛰어나다. 그리고 은, 구리, 니켈, 백금, 팔라듐 같은 다른 금속들과 쉽게 혼합된다.  몇 가지 정의  트로이 온스: 샹파뉴 지방의 트로이라는 도시명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곳의 시장은 12~16세기 사이에 가장 커다란 상업적 거래가 이루어지던 곳이다. 트로이 온스는 금과 다른 귀금속의 거래 단위이다. 1온스는 31. 10kg이고, 반대로 1kg의 금은 32. 15온스이다. 트로이 온스를 무게 온스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무게 온스는 향신료나 양념, 색소 등을 달기 위해 사용하는 척도로 1온스는 28. 349g에 해당한다.  캐럿: 혼합물 속에 포함된 금의 비율은 캐럿이나 밀리엠으로 표시된다. 금의 캐럿(다이아몬드나 보석의 캐럿과 혼동하지 말 것)은 매우 오래된 척도이다. 혼합물의 금속은 24등분되고, 그중 금이 들어 있는 부분의 수가 캐럿의 수와 일치한다. 이처럼 세공된 금은 24캐럿 혹은 1000밀리엠이라고 불린다. 18캐럿의 금은 750밀리엠의 금에 상응한다. 우리는 또한 14캐럿의 금(585밀리엠)과 9캐럿의 금(365밀리엠)을 구분하기도 한다. 오직 프랑스에서만 18캐럿 이상의 금만이 보석가게에서 이용된다.  프랑스 어디에서 금을 발견할 수 있는가  알사스로겐  게름생과 생루이 사이의 강가를 발굴하고, 또한 발과 브레이사슈 사이를 조사하라. 그곳에서 금조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지류 중 하나인 일 강가를 빼놓지 마라.  황금 정보  세계의 금 생산량(톤)  1980년 1985년  소련을 포함한 세계 1201 1483  서구 세계 942 1213  남아프리카 공화국 675 673  캐나다 50. 6 86  미국 27. 6 79  브라질 35 63  오스트레일리아 17 57  파푸아뉴기니 14. 3 33  필리핀 22 38  유럽 8. 6 15  소련 258 270  오베류뉴  오트루아르의 알라뇽 지방의 알리에 강가를 조사하라.  브르타뉴  북부 연안: 플레스탱의 해변가와 루데아크 근처의 물줄기들  피니스테르:리스 해변가의 모래, 두아르네네스 근처의 강과 올른강  일에빌렌: 랑데옹의 분지와 비트레 주변지역  모르비앙: 블라베의 분지 전부, 강과 그 지류들을 잊지 말 것  랑그독루시용  오드:현재 개발하고 있는 프랑스 유일의 진짜 광산이 살시뉴에 있다.  금 생산량은 연간 1. 5톤 가량이고 1톤의 과석에 12g의 금이 함유되어 있다.  오브강을 조사하라.  가르드: 세즈와 가니에르 강가  에로:에로와 오르브의 강가  프랑슈 콩테  두브: 중세부터 사금을 채취하던 지역으로 두브강과 오뇽강을 조사하라, .  프로방스와 코트다쥐르  알프스마리팀:티네의 지층, 베쥐비의 강  오트, 바스 알프스:바르셀로네트 주변, 로망슈의 높은 계곡  코르스:아스코의 강  남부 피레네  아리에주: 프랑스의 엘도라도, 아리에주의 강(크랑파냐크에서 사베르뒹까지), 그리고 인 근의 개울  리무쟁  오트비엔 지방의 골족의 황금광 중 하나였다. 비엔의 강과 생티리에 근처의 시내를 조사 하라.  론알프스  19세기 말 한 목동이 아르데슈의 아볼 근처에서 500kg가량의 금괴를 발견했다.  라이크와 말레스 근처의 가니에르 강가를 조사하라.  도움말: 당신이 최초로 사금채취 작업을 할 때, 지질 및 광물 조사국이 1/50000로 작성한 600장에 달하는 지질학 지도의 도움을 받아 작업을 하고 길을 찾으면 수월하다. 과거와 현재의 광맥에 대한 표시가 되어 있다. 가격 53프랑(B. R. G. M. , 편집 및 영업소 45060 Orleans Cedex. 전화: 38638001).  용어해설  아라스트라 당나귀들이 돌리는 돌절구로, 채굴광석을 부수기 위해 칠레인이 발명해낸 것.  아르고노트 때로 황금 탐험가, 특히 캘리포니아 황금 탐험가를 지칭함. 그리스 신화에서 차용함.  바 강바닥의 모래와 자갈톱, 광의로는 종종 금이 풍부하게 매장된 지역 주위에 정착한 광부의 캠프를 지칭함.  바테 나무나 쇠로 만든 프라이팬 모양을 한 것으로, 광부가 금을 추출하기 위해 강바닥에서 건져낸 자갈들을 씻는 데 쓴다.  클레임 채굴권  콩빅트 도형수  크래들(또는 로커) 대개 양철상자로, 구멍이 뚫려 있어 채를 대신한다.  디거 발굴자  디긴스 캘리포니아를 향한 대물결 초기에 이미 개발중인 채굴지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  플륌 물을 금광까지 대기 위해 사용한 수로를 의미하며, 대부분 나무로 되어 있다.  롱-톰 4m 가량의 길이를 가진 개량된 선광대, 마더 로드 본 광맥으로 캘리포니아에서는 다우니빌에서 마리포사까지 시에라네 바다를 따라 이어지는 지역을 지칭한다. 대물결의 초창기에는 금의 상당수가 이곳에서 추출되었다.  너겟 성냥의 머리보다 큰 온갖 종류의 금조각 온스 1파운드이 16분의 1, 혹은 28. 349kg에 해당하는 영국의 질량 척도(약자 OZ).  필그림 순례자. 뉴잉글랜드의 정초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종교적 박해를 피해 미국에 도착한 영국의 분리파들이다.  플라세르 에스파냐어로, 황금광맥을 지칭한다.  슬뤼스(슬뤼스 박스) 개량된 선광대로, 이따금 수백 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다. 이 속에서 강한 물줄기를 이용해 흙과 자갈을 씻어내고 금을 찾는다. 무거운 것은 모래톱 바닥에 올려놓는다.  스탬프 밀 금이 함유된 돌을 부숴 가루를 만드는데 이용하는 물레방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