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지구의 불꽃  모리스 크라프트  시공사  봉사자: 한기현  * 화산은 진동하고 포효하고 폭발하며 찢어진다. 자연의 엄청난 변화에 무력감을 느낀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세계에서 나온 초인간적 힘을 상정하여 자연현상을 설명했다. 이것은 인간성에 공통되는 심리과정이므로, 전혀 교류가 없었던 종족들 사이에서 유사한 신화가 발견되곤 한다.  제1장 신화와 전설  * 아틀란티스를 침몰시킨 대폭발  신화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아틀란티스 신화는 화산활동으로 탄생되었다. 플라톤은 아틀란티스의 종말을 (크리티아스)와 (티마이오스)에서 자세하게 기록했다. 그는 아틀란티스인이 예술을 사랑하고, 황소를 숭배했으며 호화로운 궁전을 건설하고, 사회정의를 추구한 사람들이었다고 기술했다. 그 문명은 이집트의 파라오 문명처럼 번성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아틀란티스는 에게해의 산토린(테라)화산섬 지역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고고학자와 지질학자의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 지역에서는 B. C. 1620년경 연속해서 대규모 화산폭발이 있었으며, 그중 어느 분출은 45Km 높이까지 솟아오르고, 섬 한가운데에 거대한 분화구를 만들기도 했다. 그것은 과거 3, 000년 사이에 발생한 것 중에서 가장 커다란 화산폭발이었으며, 강력한 열운이 바닷속으로 떨어지면서 높이가 30m에 달하는 거대한 해일이 일어나 크레타섬과 동부 지중해 연안을 휩쓸었다.  산토란섬은 30여 미터 두께까지 경석으로 뒤덮였다. 이곳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터키에도 수십 센티미터에 달하는 화산재가 날아올 정도였다. 이 참변을 겪은 문명이 크테라를 중심으로 한 미노스 문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산토린 분출에 역사적 기원을 두고 있는 그리스 신화 속의 전설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듀칼리온의 홍수 이야기는 아마도 해일을 일으킨 산토린섬의 화산분출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이야기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제우스에 복수하기 위해 아티카, 아르골리스, 살로니카만, 로데스만, 그리고 리키아(현재 터키)에서 시칠리아에 이르는 모든 지중해 연안을 넘쳐흐르게 했다고 전한다.  또 하나의 신화에서는 아르고노(Argonauts, 이아손을 따라 황금양털을 찾아 나선 용사들:역주)가 딕트에 닻을 내리려고 할 때, 청도거인 탈로스가 "돌덩어리를 그들에게 던진다.” 하지만 메데아가 이 괴물을 쓰러트리자, "피가 납물처럼 녹아 흐르고 커다란 소리를 내며 넘어진다.” 승리를 거둔 아르고노는 마을을 떠난다. 그때, "엄청난 베일이 바다를 덮는다.” 돌덩어리, 녹아 흐르는 납, 폭음, 바다에 드리워지는 베일, 이러한 모든 것이 산토린 화산이 폭발하면서 나온 용암의 분류, 지진, 화산재 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 신들의 거처, 화산  고대 그리스인은 에트나의 화산활동은, 불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연기와 불꽃이 가득 찬 땅속 대장간에서 신들의 무기를 만들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로마 사람은 그 신을 불가투스라고 불렀으며, 아이올리스섬(현재의 리파리섬)에 있는 히에라산(현재의 불카노산)의 땅속 깊은 곳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불카노(Vulcano)는 볼케이노(volcano)의 어원이 되었으며, 옛날 사람들은 그것을 '에트나' 또는 '히에라'로 불렀다.  헤파이스토스는 외눈박이 거인 키클로페스와 함께 땅속 대장간에서 일하고 있다. 이 거인의 외눈은 빨간빛을 내고 있는 둥근 에트나 분화구를 연상시킨다. 이들이 에트나 가마솥에서 제우스의 왕홀을 만들기 위하여 쇠를 내리칠 때마다 화산에서는 불꽃이 튀어나온다. 이 불꽃은 너무 강력하여 때로는 부근의 마을을 파괴한다.  * 다른 화산에도 신, 악령, 사악한 귀신, 그리고 죽은 장의 영혼이 살고 있다.  변덕이 심한 신들은 사람을 괴롭히고, 자신이 모욕을 받았다고 상상하고는 복수를 하며, 운 없는 사람들에게 분노의 벼락을 내리친다. 그러나 가끔은 사람을 돕기도 한다.  지구에서 가장 많은 화산이 분포해 있는 태평양 화산대에도 이러한 믿음은 흔하다. 일본에 있는 큰 화산들은 모두 성지이며, 그 주위를 많은 절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후지산은 순수함과 영속성을 상징하며 태양신의 왕국이다. 페루에서는 성질이 고약한 미스티 화산 분화구를 얼음으로 막아 버렸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는 불의 신이 화산을 통치한다. 미국 오리건의 인디언은 사악한 불의 신은 마자마산에서 살고 선한 눈의 신은 섀스타산에 산다고 믿고 있다(두 화산은 모두 캐스케이드 산맥에 위치한다). 그런데 어느 날 두 신이 싸우게 되었다. 길고도 처절한 싸움 끝에 불의 신이 패배하여 머리가 잘렸는데, 이 패배의 표상이 마자마산의 거대한 분화구인 크레이터 호수라고 믿고 있다.  * 화산들의 사랑  화산은 인간처럼 사랑을 하고 고통을 겪는다. '두 남자' 화산이 '한 여자' 화산을 사랑하는 아주 고전적인 사랑이야기가 전해진다.  뉴질랜드의 화산 타라나키(현재 에그몬트산)와 루아페후가 아름다운 통가리로(현재 엥가우로호)를 사랑했다. 타라나키가 연적 루아페후를 덮치자, 루아페후는 공격을 막기 위하여 분화구로부터 끓는 물을 내뿜었다. 이에 맞서 타라나키는 돌을 비처럼 퍼부어 루아페후의 분화구를 파괴했다. 루아페후는 돌을 모두 삼켜 녹여 버린 뒤, 다시 타라나키에게 뱉았다. 화상을 입은 타라나키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바다로 멀리 도망쳤는데, 왕가누이 계곡에는 이때 타라나키가 지나간 자국이 남아 있다. 그러나 마오리 사람들은 다시 싸움이 일어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에그몬트와 루아페후 산자락에 시체를 묻거나 거주지를 마련하지 않는다.  비슷한 신화가 오리건과 자바에도 있다. 오리건 사람들은 남성 화산 애덤스와 후드가 여성 화산 세인트헬렌스를 사랑한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신화에서는 연인들의 삼각관계를 볼 수 있다. 공주는 메르바부 화산을 사랑하고, 메라피 화산은 공주를 사랑하는 것이다. 질투심에 불타는 메라피는 메르바부가 공주와 만나지 못하도록, 진흙더미를 쏟아 부어 길을 봉쇄했다.  * 게으른 신도에 대한 징계  발리의 아궁 화산 산자락 끝에 자리잡은 힌두 사원 베사키에서는 100년에 한 번씩 성대한 행사가 열린다. 그런데 1963년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제식이 사제들의 무성의로 엉성하게 치러지고 말았다. 신들의 앙갚음은 끔찍한 재앙을 불러왔다. 600년 동안 잠잠하던 아궁 화산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화산재와 진흙더미에 파묻혀 1, 184명이 목숨을 잃었다. 어떤 사람들은 100년 후에 개최될 다음 베사키 행사 기간중에도 이 같은 참사가 되풀이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 화산을 잠재우기 위하여 인간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니카라과 인디오는 젊은 처녀들을 마사야 용암호에 바쳤다. 엘살바도르 일로팡고 호안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은 1879-1880년에 있었던 일로팡고의 분출은 호수에 살고 있는 여신이 화를 낸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여신은 호수에 증기선을 띄웠기 때문에 화가 났다고 한다. 그래서 손과 발을 묶은 어린아이를 제물로 호수에 던지자, 여신의 노여움이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 화산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솟아오르고 입에서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솟구친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석탄을 내뿜는다.” 히브리인의 신 야훼는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을 퍼부었다. "고 나온다. 화산이 보여주는 현상은 (성서)에서 말하는 지옥인 게헤나(Gehenna), 다시 말해 '영원한 불'이라는 개념을 연상시킨다.  1104년, 아이슬란드 남부에 있는 헤클라 화산에서 아주 격렬한 분출이 있었다. 기독교 사회에서는 무시무시한 소문이 나돌았는데, 그곳이 바로 지옥의 입구라는 얘기였다. 이것은 클레 르보 수도원의 헤르베르트 사제가 시토 수도사들 사이에 퍼뜨린 소문이었다. 사실 이보다 더 효과적으로 지옥을 보여 주고, 이교도를 두려움에 떨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1000년, 아이슬란드에서는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 의회라고 할 수 있는 알싱그(Althing)가 싱벨리르에서 소집되었다. 싱벨리르는 열하(fissure)에서 용암이 분출되어 탄생한 광대한 용암지대이며, 그곳 현무암 절벽에서는 신비한 음향효과를 내곤 한다. 안건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기독교를 채택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민족신을 숭배해야 할 것인가?'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당파마다 서로 상대방의 논거를 반박하고 나섰다. 그때 전령이 달려와서 열하에서 용암이 솟아오르고 있으며, 토로드 족장의 마을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비기독교도인들이 기뻐하며 소리를 질렀다. "놀랄 것은 없소. 우리의 신이 당신들 기독교도의 말을 듣고 화가 난 것이오.” 그러나 기독교를 지지하는 스노리는 이 소식을 자기편에 유리하게 이용했다. 스노리가 싱벨리르 계곡을 뒤덮고 있는 광활한 용암지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용암이 흘러 나올 때, 당신의 신은 누구 때문에 화가 났소?" 당시에는 아이슬란드에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았음을 들어 허점을 찔렀던 것이다. 결국 스노리 측이 승리했다. 용암 분출이 아이슬란드 바이킹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주역이었던 셈이다.  1600년 페루의 오마테 화산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곳에서 7km 떨어진 아레키파 마을은 화산재로 완전히 뒤덮여 암흑천지로 변하고 말았다. 기독교인은 세계의 종말이 왔으며, 화산폭발은 인간의 죄악을 응징하는 신의 분노라고 믿었다. 그래서인지 동거하는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빚쟁이가 빚을 갚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편, 기독교를 믿지 않던 인디오는 화산폭발이 침략자 스페인 사람들을 경계하는 신의 계시라고 생각했다. 그들 역시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믿었기 때문에 양, 닭, 돼지 들을 죽이고, 죽음을 기다리면서 마지막 축제를 열었다. 인디오는 식민지 개척자들을 몰아내려는 오마테 화산을 도와 근처에 있는 미스티 화산도 폭발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아무 움직임이 없자 의아해했다. 그들은 곧 수긍이 갈 만한 이유를 찾아냈다. 미스티 화산이 기독교로 개종했고, 스페인 사람들이 산프란시스코라는 세례명을 주었다는 것이다.  1980년 5월 18일 미국 서부에 있는 세인트헬렌스 화산이 폭발하자, 재림론자들은 신을 모독하는 사람들과 음주하는 자에 대한 하느님의 경고이며 징벌이라고 해석했다.  * 기독교와 화산활동이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에트나와 베수비오 때문이다.  에트나 화산과 베수비오 화산 인근에 있는 도시들을 화산분출의 위험에서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도시들의 수호성자였다. 성 아가사는 에트나 기슭에 자리잡은 카타니아 마을을 지켜 주며, 성 아누아리우스는 베수비오 화산 기슭에 위치한 나폴리의 수호성자이다.  성 아가사가 카타니아에서 순교한 지 1년 후인 253년 2월 5일 에트나에서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났다. 용암이 도시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주민들은 성녀의 무덤을 덮고 있던 베일을 용암이 흐르는 쪽에 펴 놓았다. 그러자 용암이 갈라지며 흐름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1669년 에트나가 다시 한번 대폭발한 때에는 수호성자도 속수무책이었던 듯하다. 이번에도 주민들은 성 아가사의 유품으로 구원을 요청했으나, 효험을 보지 못했고 카타니아의 3분의 1이 용암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1971년 산알피오 주민들은 그들 수호성자의 유품을 가지고 거대한 용암의 흐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느님의 구원을 빌었다. 그들은 구원받을 수 있었다. 나폴리에서는 베수비오의 대분출이 일어날 때마다 성 야누아리우스의 유품을 앞세운 종교행사가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영국의 고고학자 헤밀턴경은 이것을 상세히 기록한 자료를 토대로 화산활동의 연대기를 작성했다.  * 놀랄 만큼 강한 믿음  매년 부활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1943년 멕시코의 옥수수밭에서 솟아오른 파리쿠틴 화산의 폭발로 파괴된 마을의 페허를 찾아온다. 한편, 이제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일은 없어졌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외로운 노인, 실연한 사람 그리고 사업에 실패한 사람은 일본 도쿄 남쪽 오시마섬에 있는 화산 분화구에 몸을 던져 인생을 마감했다.  죄의 사함을 받고자 하는 많은 참배객이 아소, 온타케, 특히 후지산을 찾으며, 도중에 절에 들러 시주를 한다. 이 신성한 화산을 등반할 수 있는 기간이 되면 대규모 축제가 열린다. 케소도에서 열리는 연례 행사 기간에는 인도네시아 사람과 승려 수천 명이 자바 동쪽에 있는 브로모 화산의 분화구에 모인다. 그들은 기도를 하고 돈, 과일, 꽃, 쌀, 닭을 브라마신에게 제물로 바친다.  * 펠레의 분노, 태평양에서 가장 유명한 화산의 여신  타히티에서 태어난 여신 펠레는 언니인 나마카오카하이와 심하게 싸운 뒤 언니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는 오랜 도피생활 끝에 하와이에 있는 킬라우에아 화산 분화구인 할레마무마무에 정착했다. 하와이섬에서 일어나는 모든 화산폭발은 펠레가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성미가 급한 펠레는 발길질을 해대 분화구를 열고는 자기를 헐뜯는 사람들에게 용암을 쏟아 붓는다. 이렇듯 폭발이 있기 전이면 그녀는 쭈글쭈글한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따금 아름다운 처녀로 등장할 때도 있다고 한다.  펠레에 관한 신화는 다양하며 실제 분출과 자주 연관된다. 어느 날 펠레는 하와이 동쪽에 있는 젊은 추장 두 명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 추장들은 풀이 많은 언덕에서 사용하는 '홀루아(holua)'라는 하와이 썰매 경기 챔피언이었다. 펠레는 아름다운 공주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들과 썰매시합을 벌였다. 펠레의 실력은 매우 뛰어났다. 그런데 추장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도망쳤다. 화가 난 펠레가 땅바닥을 발로 차자 땅이 흔들리고 뜨거워지면서 갈라졌고, 용암이 솟아 흘러내렸다. 두 추장은 바다로 도망쳤지만 용암은 그들을 집어 삼켰다. 해변에 있는 펠레 언덕에는 암재가 널리 퍼져 있으며, 그 가운데 납작한 분화구가 두 개 있다. 이 분화구는 불행한 주인공들이 석화된 것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 신화와 지리학적 관측 결과의 일치  두 썰매 챔피언에 대한 이야기는 화산폭발로 쏟아진 용암이 바다로 흘러 들어간 실제 현상과 관계가 있다. 용융상태의 바윗덩어리가 물과 접촉하면서 해안에 두 개의 분화구가 생긴 것이다. 마찬가지로 펠레가 자기의 처소인 킬라우에아 분화구로부터 해안으로 가기 위해 이용했다고 전하는 지하통로는 땅속에 있는 마그마 통로와 일치한다.  마지막 신화는 하와이 열도의 지라학적 역사를 개괄적으로 나타내 준다. 펠레는 언니를 피하여 북서쪽으로부터 남동쪽으로 이 선 저 섬을 헤엄쳐 다니면서 오아후섬의 다이아몬드 헤드, 마우이섬의 할레아칼라, 그리고 하와이섬의 킬라우에아와 같은 화산을 생성해 놓았다. 그런데 펠레의 도피행각은 남동쪽으로 갈수록 젊어지는 화산의 나이와 일치한다.  다른 곳에서도 그렇지만 하와이에서도 '화산이 상징하는 신성'이 화산학자와 그들의 연구에 중대한 장애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화산학자들은 화산활동의 메커니즘과 기 원을 적극적으로 밝혀 내야 할 차례이다.  * 옛날부터 학자들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화산과 지진은 땅 밑에 있는 동굴에서 허리케인이 일어나 벽을 진동시키고(지진) 인화물질로 불꽃을 일으켜, 그것이 지표 위로 솟아오르는 것(화산폭발)이라고 생각했다. 2, 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화산학계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제2장 화산활동에 관한 원시이론  화산활동에 관한 최초의 이론은 B. C. 6세기경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탈레스가 제시했다. 그보다 앞서 바빌로니아인이나 페니키아인이 다른 이론을 제시했을 수도 있지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탈레스는 물이 지진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땅은 바다에 떠 있는 판이며, 폭풍이 불 때 지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는 초자연적 힘에서 냉기와 열기가 솟아 나오고, 두 요소가 결합해 불을 이룬다고 믿었다.  * 고대 자연철학자들은 불과 바람으로 화산활동을 설명했다.  그리스 비극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이스킬로스는 B. C. 479년에 일어난 에트나 화산 분출을 노래했다. 몇 년 후 서정시인 핀다로스는 에트나의 화산활동을, "깊이를 알 수 없는 땅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른 가장 순수한 불이 산꼭대기에서 쏟아져 나온다. "고 기록했다. 또 다른 고대 전설에 따르면, 에트나는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기둥이며, 그 기둥에서 괴물 카리브디스(Charybdi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로 바다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역주)의 소용돌이에 쏟아 붓는 바닷물이 솟구쳐 나온다고 한다.  B. C. 490년에 태어난 자연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그가 '모든 사물의 근본'이라고 부른 네 원소인 불, 물, 공기, 흙으로 만물일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에트나 화산이 가장자리에 앉은 채 명상을 통하여 화산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했으나 아무런 실마리도 찾아내지 못하자, 절망한 나머지 화산 분화구 속으로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전한다.  * 플라톤은 에트나를 관찰하기 위해 시칠리아를 여행했다  플라톤은 대화록 <파이돈>에서 "땅속에는 서로 통하는 관이 수없이 많이 있으며, 차갑고 뜨거운 물이 끊임없이 그 속을 흐른다. .. . 지구의 깊은 곳에서는 거대한 불줄기 피리플레게통(Pyriphlegethon)이 화산이 화구에 불을 공급한다. "고 주장했다. 그는 또 처음으로 용암의 형성에 대해, "불이 원인이 되어 땅이 녹기도 하고 식기도 하는데 이때 검정색 돌이 만들어진다. "고 설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를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하나의 생명체에 비교했다. 그에 따르면 지구의 진동, 지진, 그리고 화산활동은 헐떡거림과 경련을 동반한 열병이며, "바람이 좁은 통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생기는 마찰과 충격으로 잘게 쪼개진 공기가 불타 오르는 것"이 땅속의 불이다. 화산의 분화구 정상에 움푹 팬 곳을 '크레이터(crater, 컵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라고 명명한 이도 아리스토텔레스이다.  * 베수비오의 불은 영양결핍으로 꺼졌다.  그리스의 지질학자 스트라본은 베수비오가 화산의 근원지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베수비오는 깊은 잠에 빠져 산 정상까지 온통 초목으로 뒤덮여 있었다. "베수비오는 불을 뿜는 분화구를 가지고 있는데, 연료가 떨어지면 불이 꺼진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자연과학적인 관찰이 아니라 순수한 사색을 통해 화산활동 이론은 구성했다. 따라서 자연과학자의 안목을 가지고 화산활동, 온천 그리고 화산폭발의 광경을 기록한 역사가 포세이도니우스는 예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전하는 그의 저서는 없지만, 스트라본이 옮겨 놓으 포세이도니우스의 관찰기록은 현대 화산학에서 아주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스트라본은 또한 바다에서 일어난 화산폭발에 관해 많은 기록을 남겼다. 특히 리파리 제도 파나레아 해역에서 B. C. 126년에 발생한 폭발과 B. C. 197년 산토린 칼데라 중심부에서 솟아오른 히에라섬에 대한 기록이 유명한데, "히에라섬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는 표현을 만날 수 있다.  스트라본은 플라톤의 대화집<티마이오스>에 언급된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해일을 몰고 온 나폴리 해안의 이스치아 화산 분출을 상세히 기록했다. "바닷물이 600m 정도 뒤로 물러났다가 잠시 후 다시 밀려왔다. 그러자 섬이 물에 잠기면서 화산의 불이 꺼졌다.”  스트라본 자신도 또한 위대한 관찰자이며 지칠 줄 모르는 여행가였다. 그는 여러 화산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뜨거운 물과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불타 오르는 리파리 제도의 리파리 화산', '세 개의 분화수에서 나오는 듯한 세 갈래의 불길에 휩싸인' 불카노 화산, '둥그런' 스트롱질라 화산, '불길은 그다지 세지 않지만 무척 밝은 빛을 토해 내는' 스트롬볼리 화산, 그리고 베수비오 화산.. .  * 불길은 바람의 지시에 따라 방향을 잡는다. 장편 서사시 <에트나>에는 로마인이 화산활동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잘 드러나 있다.  베르길리우스가 지은 것으로 보이는 643행에 달하는 장편 서사시는 에트나와 그 폭발의 각 단계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로마의 학자들은 그리스인과 달리 순수한 사색보다는 자연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시도했다. 역시 시인인 루크레티우스는 에트나 화산은 가운데가 비어있으며, 그 내부에서는 강력한 바람이 해면높이까지 순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바람의 작용으로 생긴 불길이 수직으로 뻗은 열하를 타고 지표로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각을 연구하는 구조지질학의 선구인 셈이다.  얼마 후, 오비디우스는 에트나가 '숨쉬는 통로를 바꾸면서', 즉 한 동굴을 닫고 다른 동굴을 열면서 가스를 방출한다고 했다. 그는 또한 '땅으로부터 더 이상의 양분이나 지방을 제공받지 못하면, 화산은 배고픈 것을 참지 못하여 그 장소를 떠나기 때문에' 화산활동이 멈춘다고 설명했다.  같은 시대의 비트루비우스는 '거대한 불을 일으키는 것은 유황, 명반, 그리고 역청이다. ' 라고 했다. 건축가였던 비트루비우스는 베수비오 주변의 경석과 화산재를 빨리 굳는 시멘트를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했으며, 베수비오가 화산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 62년 2월 5일 격렬한 지진이 캄파니아(이탈리아 서남부 지방)를 뒤흔들었다.  네로 황제의 스승 세네카는 지진에 관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그는 화산활동에 대하여 두 가지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지금도 타당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우선, 그는 가스와 증기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지항에서 일어난 불로 공기가 압축되면서' '폭발'한다고 했다. 즉, 폭발의 기폭제가 되는 가스 압력의 원칙을 발견한 것이다. 두 번째로 화산에 불을 공급하는 곳은 개개의 화산 밑에 위치한 일종의 저장소라고 설명했다.  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화산에서 분출하는 것은 단순한 불이 아니라 마그마라고 하여, 훨씬 뒤인 18세기에 등장하는 화성론의 선구자가 되었다.  * 17년 후 베수비오는 폼페이를 멸망시켰다  37권에 달하는 백과사전인 <자연과학사>에서 대 폴리니우스가 열거한 활화산은 10여 개에 불과했다. 폴리니우스는 화산분출 전에는 지진이 일어나지만 바람이 땅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밖으로 나오려고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대기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며 바다도 잔잔하다고 했다. 마치 폭풍 직전의 고요처럼.  그는 79년 8월 24일 오랜 잠에서 깨어난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현장에서 죽었으며, 그의 조카인 소 폴리니우스는 타키투스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이 대폭발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화산학자가 되었다. 화산학에서 아주 중요한 이 문서는 화산폭발로 인한 대참변을 직접 체험을 토대로 최초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 중세에는 화산에 관심이 없었다  유럽에서 화산에 대한 지식은 수도원과 일부 학자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580년경에 비잔틴의 역사가 프로코피오는 "베수비오가 화산재를 내뿜은 후 인근 농촌에서는 풍작을 거두었다. "는 기록을 남겼다. 같은 시기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베네딕트회 수도사는 아이슬란드의 성 브렌단을 여행하고 지은 시에서 헤클라로 보이는 화산의 분출을 묘사했다. "썩은 시체보다 더한 악취를 풍기고 연기에 휩싸여 안개가 자욱한 땅에서.. . 불덩어리와 화염, 번쩍이는 불빛과 쇳덩어리, 유황과 역청을 구름에 닿을 정도로 내뿜는다. 그리고 모든 것은 심연으로 다시 떨어진다.”  화산(volcano)이라는 단어는 12세기에 들어와서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사자왕 리처드의 어린 시절 친구이며 자연주의자인 영국의 알렉산더 네컴은 땅이 불타오르고 있는 장소를 지칭하기 위하여 volcano라는 말을 사용했다. 한 세기가 지난 후 독일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최초로 실험용 화산모형을 만들었다. 청동 항아리에 두 개의 구멍을 뚫은 뒤, 그 구멍을 막은 다음 물을 가득 붓고 끓을 때까지 불로 가열한다. 수증기의 압력으로 위쪽 마개가 튀어나오면 가스가 새어 나오고, 아래쪽 마개가 튀어나오면 끓는 물일 불 위로 쏟아지면서 뜨거운 재와 불똥이 튀게 되어 있었다.  * 중세 말 볼로냐, 나폴리, 살라만카, 몽펠리에, 파리,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등에 대학교와 아카데미가 창설되면서 고전이론이 재발견되었다  16세기에 활판인쇄가 발명되어 지식이 온 유럽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위험을 느낀 교회에서는 모든 인쇄물에 대하여 검열조치를 취했다. 저작물은 <성서>에 부합되어야 했으며 지옥과 대홍수의 이념을 따라야 했다. 금지명령에 복종하든지 아니면 그것을 피해야 했다.  1538년 9월 28일 이탈리아 플레그라에안에서 화산이 하나 솟아 올라왔다. 이것을 누오보 화산이라고 이름지었다. 1주일 후 폭발이 약해지자 높이가 140m나 되는 화산을 볼 수 있었다. 전유럽의 학자들은 산맥과 지층이 얼마나 빨리 형성될 수 있는가에 대한 증빙자료로 이 사건을 인용하곤 했다.  * 16세기에 바다 저편에서 최초의 위대한 발견이 있었다. 탐험가들은 서인도 제도, 태평양과 인도양의 화산에 대하여 기록을 남겼다  중앙 아메리카 마사야(현재의 니카라과)에서는 분화구 바닥에서 10년 간 끓고 있는 용암호를 볼 수 있었다. 스페인 역사가들이 이 현상을 상세하게 기술했지만, 그들의 저술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1580년 아조레스제도상 호르헤 화산의 폭발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화산의 목격자들은 뜨거운 화산재와 바위의 구름에 대하여 '열운(ardente nuvem, 분화구에서 분출한 마그마가 고온의 크고 작은 용암조작과 화산가스를 내뿜으면서 소용돌이치며 산허리를 흘러내리는 현상)'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 당시에는 현지탐사를 하거나 실험을 해보려는 과학자가 거의 없었다. 문학, 기상학, 의학 교수인 페트루스 세베르니우스는 1571년 이러한 태도에 반기를 들고 일어섰다.  "책을 불태우자. 산에 오르고, 사막을 탐사하여 스스로 자연의 원리를 알아보자. 결코 포기하지 말고 석탄을 사서 불을 피우고 관찰과 실험을 해보자.”  *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학자들의 이론  광물학의 아버지, 즉 아그리콜라로 더 잘 알려진 독일인 게오르크 바우어는 태양광선이 지구의 중심부를 뚫고 들어가면서 발생한 땅속의 불이 지진과 화산폭발을 일으킨다는 당시의 천문학 이론을 반박했다. 그는 구름이 번개를 일으키는 것처럼 유황과 '화산의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것은 압력을 받은 수증기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 폴리니우스가 에티오피아에서 발견한 암석에 붙인 이름은 현무암(basalt)이라는 단어를 다시 사용했다. 스위스의 콘라트 게스너는 그의 저서 <화석, 암석과 수정>에서 현무암은 물 속에서의 침전현상으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개념은 28세기 수성론자들이 채택하게 된다.  독일의 유명한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는 화산활동에 대하여 눈물이나 배설물을 분출하는 인간처럼 지구도 호박, 역청, 유황 그리고 지하의 불을 배출시킨다고 했다. 같은 독일인이며 일반지라학의 창시자인 베르니르투스 바레니우스는 당시에 활동중이던 27개 화산을 토대로 세계 화산의 목록을 발행했다.  나폴리 태생인 조르다노 브루노는 많은 화산이 바다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화산활동이 물과 불이 상호작용한 결과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중에 그는 노아의 대홍수 개념을 반박했다는 이유로 화형당했다.  * 지구 형성의 역사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르네 데카르트는 지구의 구주와 기원을 밝히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용의주도한 데카르트는 그의 가설이 잘못되고 틀릴 수도 있으며, 세상을 하느님이 순간적으로 창조한 것은 자명하다고 전제했다. 이렇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면서, 그는 지구가 세 개의 연속된 층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독일의 철학자 곳프리트 라이프니츠는 원칙적으로 데카르트의 견해를 인정하면서 마그마와 백열의 개념을 제시했다.  * 지구의 내부는 미궁이다  데카르트와 동시대인으로 예수회 학자인 아타나시우스 키르허는 <지하세계>란 저작을 발간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저작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그는 지구 내부에는 수많은 불의 근원(pyrophylacia), 즉 마그마 저장소가 있으며, 이들 마그마 저장소는 동일한 숫자의 '환풍구'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정했다. 그는 광산 밑으로 내려갈수록 온도가 높아진다는 점에 착안하여, 화산의 굴뚝을 깨끗이 청소해 분출을 예방할 수 있는 기계 개발을 계획하기도 했다.  * 17세기 말 화학이 화산활동 연구에 적용되었다  영국인 화학자 로버트 후크와 의사 마틴 리스터는 분해되면서 끊임없이 열을 발산하는 숯더미처럼 유황과 황철광이 공기와 바닷물 속의 소금과 접촉하면서 땅속의 불이 타오른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약제사 니콜라 레므리는 쇳가루와 물에 젖은 유황의 혼합물은 저절로 뜨거워지면서 백열상태에 도달하여 솟구쳐 오를 정도로 강력한 수증기를 방출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소규모 인공화산을 발명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레쿠피토와 필로테오 신부는 각각 베수비오 화산과 에트나 화산 아래에 살면서 두 화산의 여러 가지 활동을 관찰하여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17세기에는 두 차례 대규모 화산폭발이 일어났다. 1631년 베수비오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열운(pyrodastic flow)이라고 부르는 화산재의 급류(torrens cineris)가 휩쓸고 지나가 4, 000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1669년에는 에트나가 카타니아 마을의 일부를 용암으로 덮어 버렸다. 이러한 대참사를 겪은 후, 사람들은 처음으로 빙하로 형성된 퇴적층에 구멍을 뚫어 용암의 흐름을 바꾸어 보려는 시도를 했으며, 성공을 거둔 적도 있었다.  * 수성론과 화성론 사이에 벌어진 대논쟁의 발단  1707년 산토린 칼데라의 한가운데에서 솟아오른 네아 카메니섬을 보고 학자들은 열광했다. 이 사건과 1538년의 누오보 화산의 탄생에 관한 보고를 토대로 이탈리아의 리차로 모로 신부는 화산활동이 화산 밑에 있는 지각이 융기하면서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그는 모든 대륙, 섬 그리고 산들이 이렇게 해서 생겨났으며, 여러 층을 이루고 있는 암석도 모두 화산암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초화산학주의자'였다. 하지만 땅속에 있는 불은 "신이 창조했다. "고 말했다.  이와는 반대로 이집트 주재 프랑스 영사관 브누아 드마이예는 지구상의 모든 암석은 바다의 퇴적물이며, 화산에서 일어나는 불은 이러한 퇴적물 속에 들어 있던 동물의 지방이 연소하면서 발생하는 2차적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노아의 대홍수를 인정하지 않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교회의 분노를 두려워한 나머지, 이 저술을 그가 사망한 10년 후 텔리아메드(자신의 이름 Maille를 Telliamed로 거꾸로 표기했다)라는 가명으로 출판하도록 요청했다. 근본적으로 상반된 두 이론은 18세기에 일어날 화성론자와 수성론자 사이에 대논쟁을 예고한 것이다.  * 18세기는 화산학에서 아주 중요한 시대이다. 여러 가지 다양한 관찰을 통하여 과학자들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관념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계몽주의 시대 학자들은 유럽을 여행하면서 용암의 견본을 수집하고, 화산을 서로 비교하고, 새로운 화산을 발견했다. 상반되는 두 가지 이론이 등장하여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제3장 화성론자와 수성론자의 대결  "지름이 2km를 넘는 거대한 대포. 이 거대한 불구덩이에서 연기와 불꽃이 쏟아져 나오고, 역청, 용해된 금속, 화산재와 바위가 급류가 되어 흐른다. 공기나 습기에 노출될 때마다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황철광. 주위에 있는 가연성 물질이 많을수록 황철광의 폭발도 거대해진다. 이것이 바로 물리학자가 보는 화산이다.”  * 철공소 사장과 '국왕의 정원(파리 식물원의 옛 이름)'원장을 역임한 자연과학자이자, 철학자, 사업가인 조르주 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 백작은 18세기 사람들이 화산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을 훌륭하게 요약했다  그는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많은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하의 불은 바다와 인접해 있어야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다. "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에트나 화산의 장기간에 걸친 휴지 상태를 설명했다. 즉, 호머 시대에 에트나 화산이 상대적으로 잠잠했던 이유는, 당시 지중해의 물이 시칠리아에서 멀리 물러나 있었기 때문이고, 핀다로스 시대(B. C. 5세기)부터 화산이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지브롤터 해협이 끊어지면서 바닷물이 에트나 화산의 기슭에까지 흘러 넘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뷔퐁은 화산의 폭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화산과 바닷물의 접촉을 막을 수 있는 제방을 쌓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화산활동의 근원지는 지구 중심의 불과 가까운 땅속 깊은 곳이 아니라, 불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고 있는 화산의 정상 부근이라고 생각했다. 뷔퐁은 그 예로 인도네시아 몰루카에 있는 테르나테 화산을 들고 있다. 관찰자들은 테르나테 화산은 "춘분, 추분에 더욱더 맹렬한 기세로 활동하는데, 그것은 그 시기에 부는 세찬 바람이 화산이 토해 내는 물질을 더욱 활활 타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다. 라 카유 신부는 아프리카 동쪽에 위치한 프랑스령 레위니옹 제도 부르봉섬에 있는 화산도 사이클론이 부는 시기에 더욱 세차게 불길을 뿜어낸다고 주장했다.  * 뷔퐁은 화산을 본 적은 없지만 화산폭발을 직접 목격한 다른 학자들의 기록을 기초로 하여 그의 이론을 구축했다  그중에서도 피에를 부귀에와 샤를 마리 드라 콩다민은 남아메리카에서 측량과 천문학 탐사를 진행하던 1742년, 에콰도르 코토팍시 화산의 분출을 목격했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진흙더미가 흘러내려 800명의 인명과 500체의 가옥을 집어삼켰다. 화산이 가열되면서 산꼭대기의 얼음이 녹아 내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베수비오와 같은 '불의 화산'에 대비되는 이 화산을 과테말라의 아과 화산과 같이 '물의 화산'으로 분류했다.  뷔퐁은 베수비오 화산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면서 베수비오를 다룬 권위 있는 논문과 화산폭발의 연대기를 저술한 주세페 마리아 메카티 신부와 조반니 마리아 델라 토레 신부의 저술을 참고했다. 세밀한 관찰자였던 델라 토레 신부는 화산의 여러 가지 분출형태를 자세히 묘사했으며, 땅속에는 연소작용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공기가 없기 때문에 불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그는 또 화산이 타오르면서 방출하는 물질과 유황이 공기 중에 배어들면 인간은 고약해지고 사악해진다고 주장했다.  에트나에 관하여 뷔퐁은 영국의 탐험가인 패트릭 브라이던이 쓴 소설뿐 아니라, 감동적인<에트나 이야기>의 저자인 주세페 레쿠페로 주교의 관찰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다. 이 두 사람은 시칠리아에서 만나 에트나와 베수비오 화산을 비교한 적이 있었다. 레쿠페로가 에트나 화산에서 던진 돌이 땅에 떨어지는 데 21초가 걸린다고 하자, 브라이던은 베수비오에서는 9초 후에 떨어진다고 말했다. 이것으로 두 사람은 에트나가 베수비오보다 훨씬 큰 화산이라고 결론지었다. 브라이던은 에트나의 공기가 대전성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이 화산 기슭에 자라는 식물은 싱싱하고 건강하다고 주장했다.  베르톨론 신부는 '불의 미세한 입자로 구성된' 전기가 화산폭발의 원인이므로, 땅속에 쇠막대기와 같은, 폭발을 억제하는 장치를 해서 방전을 시키자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 장 에티엔 게타르는 1752년 5월 10일, 과학 아카데미에서 오베르뉴 지앙이 사화산 지대라고 발표했다  1749년 뷔퐁이 <자연사> 제1권을 출간할 때만 해도 마시프 상트랄(Massif Central, 프랑스 중앙고원)의 기원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1717년 기욤 리비에르는 베지에 지방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어떤 산의 정사에 "물에 뜨는 돌이 많이 있다. "는 사실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 화학자 가브리엘 프랑수와 베넬은 그 근처에서 화산분출의 잔재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오베르뉴 지역 퓌 산맥의 화산들을 폐광에서 쏟아져 나온 쓰레기더미가 쌓인 것이거나 로마 시대에 건설된 대장간에서 사용하던 대형 용광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발견을 토대로 의사, 식물학자, 광물학자 그리고 오를레앙공 소유의 자연사 박물관 관장 에티엔 게타르는 오베르뉴 지방이 화산지대라는 것을 밝혀 냈다.  1746년 게타르는 최초로 프랑스의 지질도를 작성했다. 1751년에도 식물학자 크레티엥 기욤 드 라무아뇽 드말레쉐르브와 함께 이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프랑스 중부 지방 탐사에 나섰다. 그는 화산을 본 적은 없었지만, 오를레앙 공작 소장품 중에서 베수비오와 부르봉섬에서 분출된 용암 표본을 관찰한 적이 있었다.  물랭 지방에서 건축물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기공이 많은 검정색 돌을 본 그들은 그것이 용암이라는 것을 알았다. 주민들은 그 용암을 볼빅 지방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흥분한 두 학자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리옴으로 달려갔다.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이 돌로 지은 것이었다. 그들은 용암이 흐를 때 생긴 통로를 따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볼빅의 채석장에 들른 뒤,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게타르는 그 언덕이 화산이 폭발할 때 분출된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상에는 깔때기 모양을 한 분화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다음날 자연사 연구에 열심인 장 프랑수와 오지와 함께 돔 모양인 퓌 산맥 정상, 퓌드돔에 올랐다. 그곳에서 게타르는 '불에 그을린 물질'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산이 화산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퓌 산맥 정상인 퓌드돔에서 분화구를 여러 개 발견했으며 몽도르산이 화산의 발화점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남쪽 오베르뉴를 답사하면서 다양한 화산활동의 흔적을 발견했다.  * "화산이 다시 불타 오르기 위해서는 미세한 움직임이나 자극만 있으면 된다"  1752년 게타르는 유명한 논문 <과거에 화산이었던 프랑스의 산들에 대하여>를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했다. 그는 오베르뉴 산악지대가 화산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퓌 산맥의 화산이 잠시 휴지중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논문에서 주민들에게 "폭발의 전조에 유의해야 하며, 지진에 대비하여 예방조치를 취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오히려 사려 깊은 행동"이라고 경고했다. 이미 5세기에 클레르몽의 주교 시두앙 아폴리네르는 지진의 진동으로 비엔의 성벽이 흔들리고, 산에서는 불이 뿜어져 나온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가.  25년 후인 1778년 파리 자연사 박물관의 지질학 담당 수석 교수직을 맡고 있던 바르텔레미 포자 드 생 퐁은 <비바레와 벨레의 사회산에 관한 연구>에서 오지가 그에게 보낸 편지를 수록했다. 오지는 게타르와 함께 퓌 산맥의 정상을 탐사하기 1년 전, 베수비오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던 아일랜드인 보울스와 동료를 그 지역으로 안내한 적이 있다고 술회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분화구와 용암을 분별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외국인이 오베르뉴 화산 지대를 최초로 발견했다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게타르에 대한 도전이었다. 사실 포자와 게타르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들 사이의 적대감은 1775년 비바레 여행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자는 이 지역 어디에서나 분화구와 화산에서 분출된 물질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게타르가 이 발견을 가로채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결국은 게타르에게 가로채이고 말았던 것이다.  * 물이냐 불이냐? 현무암의 근원에 대한 가설  이상하게도 기타르는 현무암이 수성적 기원을 가진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현무암은 바닷속에서 화학물질이 침천하여 생긴다고 주장했다. "현무암 기둥이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다면, 최근에 폭발한 베수비오난 다른 화산에서는 왜 현무암이 발견되지 않는가?" 반면, 포자는 벨레, 비바레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현무암 기둥을 자세히 관찰하여 현무암이 화성적 기원을 가지며 화산활동으로 생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게타르는 원하지는 않았지만 오랜 기간 서로 격렬한 논쟁을 전개할 화성론과 수성론, 두 학파의 원조가 되었다. 현무암에 대한 그의 견해는 수성론자(Neptinusts, 바다의 신 Neptune에서 유래)들이 수용했고, 오베르뉴 화산에 관한 그의 관찰결과는 화성론자(Plutonists, 저승의 신 Pluto에서 유래)들이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 수성론의 대가, 아브라함 고틀로프 베르너  어렸을 적부터 광물학의 신동이라 불린 베르너는 25세에 독일 프라이부르크 광산학교의 교수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40년 간 봉직했다. 탁월한 광물학자인 그는 <화석의 외적 특징에 대하여>라는 광물 분류학 관련 저서를 출판했다. 이 저서는 그 분야의 고전이 되었다. 베르너는 연구활동의 범위를 에르츠게비르게, 작센 그리고 보헤미아 지방으로 국한했다. 그는 짧은 시일 내에 지구의 성분을 다루는 지질학의 한 분과인 '지구구조학'의 권위자가 되었다. 그의 명쾌하고 다채로운 강의는 유럽 각지에서 온 많은 학생들을 매료시켰다. 베르너는 모든 시간을 학생들을 위하여 바쳤으며, 심지어는 학생들을 자기 집에 유숙시키기도 했다. 그는 답장하는 것이 두려워 편지를 개봉하지도 않을 정도로 쓰기를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소책자 두 권과 짧은 논문 몇 편만을 출판했다. 베르너의 이론을 널리 전파하고 그의 원칙과 가설을 전세계에 적용하는 일은 제자들의 몫이 되었다.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베르너를 외국인 회원으로 위촉했을 때에도 그는 감사의 편지조차 보내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과학 아카데미는 베르너를 몹시 괘씸하게 생각했지만, 드레스덴에 있는 누이가 급한 집안 일로 보낸 심부름꾼이 그의 서명 하나를 받기 위해 두 달 동안이나 여관에서 머물렀다는 사실을 알고는 베르너의 무례를 용서했다고 한다.  그의 '지구구조학' 이론은 <성서>의 <창세기>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는 지구 내부는 차가우며 지구는 옛날에는 원시의 바다로 덮여 있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므로 현무암, 흑요석, 경석, 화강암을 포함한 거의 모든 암석들은 바닷속에서 침전, 결정, 침식 작용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베르너는 화산이란 지구역사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최근의 일이며, 석탄불로 근처에 있는 암석을 녹여 용암의 흐름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가 관찰한 보헤미야의 화산 언덕들은 탄광과 인접하고 있었던 것이다.  * 화성론자의 우두머리, 스코틀랜드인 제임스 허튼  의사, 화학자이며, 수익성 높은 염화암모니아 공장을 세운 허튼은 자신의 영지인 버웍셔를 개척하기 위해 농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지질학을 연구하기 시작한 곳도 바로 이 영지에서였다. 부유한 허튼은 지질학 연구에 전념하기로 결시하고 오이스터 클럽을 창설했다. 회원 중 일부는 에든버러의 학자들이었으며, 그들은 1주일에 한 번씩 모여 당시 중요한 과학적 문제에 대해 토론했다. 가장 영향력 있는 회원으로는 탄산가스의 존재를 증명한 화학자 조지프 블랙과 수학교수인 존 플레이페어가 있었다.  허튼은 스코틀랜드의 오래된 화산의 흔적인 캐슬록, 아서스 시트, 솔즈베리 크랙스 지역을 조사했다. 관찰한 사실에 자신의 이론을 적용하고자 노력한 베르너와 반대로, 허튼은 선입견을 갖지 않고 관찰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죽기 2년 전인 1795년 화성론의 기초가 된 <지구론>을 출판했다. 그 저서에서 허튼은 세계 역사의 시작도 끝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창조론에 반대했다.  이 저작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문체로 쓰여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몇 년 후 존 플레이페어가 <허튼의 지구론 해설>에서 스승의 견해를 확실하고 명백한 필치로 상세히 설명하면서 이 저술은 지질학의 걸작이 되었다.  허튼은 화산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융해된 지구핵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하의 불을 믿지 않았다. 지구 내부의 열은 정기적인 분출로 진정이 되며, 용융상태의 물질이 지각으로 들어오면서 지표면에 동요가 일어난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스코틀랜드의 노출되어 있는 화산암들이 땅속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을 일생을 통하여 굳게 믿었으며, 이 암석들이 지표면 위로 분출되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수중에 쌓여 있는 침전물은 관입(지하의 마그마가 다른 암석의 갈라진 틈이나 지층 속을 뚫고 들어가는 현상: 역주)할 때 생기는 내부열의 작용으로 굳어져 암석으로 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현대 지질학에서 말하는 '변성(metamorphism)' 작용이다.  * 허튼의 이론은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광물학자인 리처드 커원이 북아일랜드의 현무암 내부에서 바다생물의 화석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면서 논쟁의 불을 당겼다. 허튼은 그것이 화석을 포함하고 있던 진흙이 용암과 접촉하면서 굳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좀더 강력한 공격은 에든버러 대학의 교수이며 베르너의 제자인 로버트 제임슨에게서 나왔다. 제임슨은 화성론자의 이론을 '터무니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스코틀랜드에는 화산의 흔적이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베르너 자연 역사 협회'를 창설하여 수성론자에게 유리한 저술만을 출판했다. 하지만 제임슨은 자기 주장에서 서서히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독일의 암석학자인 아미 부에와 같은 화성론자의 논문을 게재하기에 이르렀으며, 결국은 협회를 해체했다.  그렇지만 그는 생애를 마감하는 날까지 '베르너의 넌센스'에 대해서 계속 가르쳤는데, 이 말은 제임슨의 마지막 제자 중의 하나였던 유명한 영국의 진화론자 찰스 다윈이 만들어 낸 말이었다. 다윈은 "제임슨의 강의를 되돌아보면 내가 지질학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라고 기록했다.  * 독일 화산의 발견  허튼에 앞서 아일랜드에 있는 거인의 제방과 스코틀랜드 스타파섬의 현무암 각주가 화산작용으로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낸 학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독일인 루돌프 라스페였다. 라스페는 현무암이 각주의 모양을 가지게 된 것은 바다 밑에서 일어난 폭발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도서관 사서, 광물학자, 스파이, 사업과 그리고 낭만파 시인이었던 라스페는 1769년부터 친구인 요한 페르버(스웨덴의 광물학자로 이탈리아 화산암석을 수집)와 함께 독일의 화산유적을 발견했다. 5년 후에 디트리히 공작이 라인강 평원에 있는 카이저스툴이 화산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네덜란드 주재 러시아 대사였던 화산학자 디미트리갈리친 왕자는 1785년 러시아에서 발간된 화산에 대한 그의 첫 번째 논문에서 독일의 화산을 다루었다.  한편, 라스페는 완전히 다른 이유로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헤세 왕자를 섬기면서 공금을 횡령한 그는 영국으로 피신했다. 거기에서 그는 유명한 왕립협회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이 소문을 알게 된 협회에서 축출당했다. 이러한 과학자들에게 실망한 그는 저작에만 몰두하여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라는 소설을 출간했다.  * 젊은 지질학자 제임스 홀이 실험실에서 허튼의 이론을 증명했다  역설적이지만 허튼은 실험실에서의 실험에 별다른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실험을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는 것이었다. 오이스터 클럽에 속해 있던 홀은 레이트의 유리공장에서 직공들이 너무 천천히 유리를 냉각시켜 탱크 안에서 수정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수정 샘플을 조금 얻어다가 다시 녹였다. 급속하게 냉각시켰더니 용융물은 다시 유리가 되었다. 반대로, 천천히 냉각시켰더니 용융물은 다시 수정이 되었다. 그는 이번에는 현무암을 가지고 실험을 하여, 냉각속도에 따라 유리 또는 수정 같기도 하고 바위 같기도 한 용암을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화산암은 용해물질이 서서히 냉각되어 생성되었다고 유추했다.  베수비오 화산으로 여행하는 도중 홀은 솜마산의 줄무늬 암맥을 관찰하면서 가장자리로 갈수록 반투명이고, 중심부로 갈수록 수정같이 투명하다는 것에 주목했다. 여기에서 홀은 용융상태의 암석이 열하는 뚫고 지나가면서 가장자리는 주위의 차가운 바위와 접촉해 재빠르게 냉각되면서 유리로 변하고 중심부에서는 천천히 결정화된다고 추론했다. 몇 년 뒤에는 유명한 증기기관 발명가인 제임스 와트의 아들인 조지 와트가 용광로에서 인공적으로 각주형 현무암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 베수비오와 같은 활화산에서 분출된 물질을 관찰하여 과학자들은 사화산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었다. 현무암 기둥은 바닷속에서 결정화된 것이 아니라 화성적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분화도 지표면에 있는 불이 원인이 된 것이 아니라 땅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화성론자에게 승리가 돌아가면서, 화산학은 견고한 기초를 다졌다.  제4장 초기 화산학자의 시대  허튼이 스코틀랜드에서 그의 이론을 전개하기 훨씬 이정에 유럽 대륙에서는 화성론적 개념이 이미 상당히 발전하고 있었다. 이 선구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프랑스의 니콜라 데마레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열심히 노력한 끝에 왕립공장의 감독관이 된 그는 1763년에 오베르뉴를 방문했다. 두 개의 제지공장을 시찰하던 도중, 퓌 산맥의 화산을 돌아본 그는 현무암과 용암이 화산분출에 따른 동일한 산출물이 아니라는, 이제까지 인정되어 온 견해와 다른 많은 증거를 발견했다. 1765년 데마레는 자신이 회원이었던 과학 아카데미에서 그 결과를 구두로 발표했다. 그는 오베르뉴 지방을 다시 방문하고 베수비오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화산을 탐사한 뒤 자신의 견해를 굳혔다.  지금까지 발견한 것을 출판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1771년, <거대한 다면체 현무암의 기원과 본질>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뒤이어 퓌 산맥과 몽도르산에 관한 정밀한 지질학 지도를 최초로 작성했다.  * 데마레는 오베르뉴 화산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3기로 나누었다.  제1기는 활동을 멈춘 지 얼마 되지 않은 화산으로, 암재에 덮여 있는 용암의 흐름이 본래 모습 그대로는 유지하고 있다. 제2기 화산에서 용암의 흐름은 침식작용으로 변질된다. 강물의 침식작용으로 '강물과 계곡의 기복'이 바뀌게 되는데 현대 지질학에서는 이 현상을 '기복의 전화(inverted nelief)'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가장 오래된 제3기의 용암은 퇴적암사이에 층을 형성한다. 물과 접촉하면서 폭발한 용암의 파편과 퇴적암의 혼합물(데마레가 peperin이라고 부른 응회석)로 구성되어 있는 리마뉴의 화산이 여기에 속한다. 여기에서도 그는 시대를 훨씬 앞서는 정확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데마레의 관찰에서는 두가지 오류가 발견된다. 첫째는 용암 속에 현무암이 섞여 있는 것을 보고, 현무암이 화강암의 용융으로 생긴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둘째는 퓌드돔이 그곳에서 녹은 화강암 성분의 암석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데마레는 화성론자로 자처했지만 수성론자와의 논쟁에 결코 끼여들지 않았으며, "현장에 가서 직접 보라. "고 가르쳤다.  * 과학적 탐사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화산을 연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영국인 제임스 쿡 선장은 1779년에 하와이의 화산을 발견했고, 프랑스인 부갱빌은 세계를 일주했으며, 독일인 팔라스는 시베리아와 캄차카 반도를 탐험했다.  몇 년 후, 국회의원이며 뛰어난 자연과학자인 주네비에브 장 밥티스트 보리 드 생뱅상 대령은 아틀란티스의 유적이라고 생각한 카나리아 제도, 레위니옹 제도, 그리고 키클라데스 제도를 계속해서 답사했다. 1804년에 발행된 <아프리카해에 있는 네 개의 주요 선 탐사>라는 책에서, 그는 액체상태인 용암으로 가득 차 있는 푸르네즈 화산 정상에 있는 분화구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용암의 흐름, 감람석을 함유하고 있는 암석, 감람석을 함유하고 있지 않은 암석, 용암동굴, 그리고 심지어는 50년 후 하와이에서 '펠레의 머리카락'으로 부르게 되는 흑요석에 이르기까지 그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했다.  그는 푸르네즈 정상에 있는 주요 분화구에 돌로미외, 포자 드생퐁, 하우이, 라몽 등 유명 학자의 이름을 붙였다. 물론 정상에 있는 분화구에 자신의 이름을 따 보리라고 명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리는 푸르네즈 화산을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 지하에는 불이 없다  신문기자이자 정치가이며 데마레의 지지자인 몽틀로지에 백작은 <오베르뉴 화산에 대한 고찰>에서 지하의 불이 용암을 융해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펼친 최초의 프랑스인이었다. 이제 몽틀로지에 같은 학자들과 관찰자들의 연구결과가 쌓이면서 화산활동에 관한 잘못된 가정들-예를 들어 프랑스인 베르나르뎅 드 생피에르는 대양 근처에 우뚝 솟아 채소 찌꺼기와 거대한 용광로가 화산이라고 주장했으며, 이탈리아의 스키피오 브레이슬레크는 황철광이 발효되면서 증류한 지하의 석유가 연소되면서 베수비오의 분출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브레이슬레크는 포추올리에 있는 로마 시대의 시장 세라피데에 서 있는 기둥은 침식작용으로 생성된 것이며, 해양 갑각류의 화석을 포함한 것으로 보아 지층이 융기한 결과라고 보았다-은 역사의 추억거리로 묻히게 되었다.  * 데오다 드 그라테 드 돌로미외의 흥미진진한 모험  도피네(프랑스 동남부의 옛이름)의 지질학자, 몰타섬의 귀족, 파리 광산학교의 교수, 그리고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인 돌로미외는 화산을 열정적으로 탐구했으며, "암석 연구로 나의 정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할 정도로 바람둥이이기도 했다. 그는 알프스에 있는 돌로미테 지방과 백운석(돌로마이트)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돌로미외는 감옥 속에서 일생을 보낼 뻔했다. 18세 때 결투에서 상대방을 죽인 죄로 몰타섬의 법률에 따라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사면을 받았다.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가족 대부분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절친한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로슈푸코도 그의 눈앞에서 암살되었다. 공포정치에서 간신히 살아 남은 돌로미외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참가했다(1798년). 그러나 귀환 도중, 그가 탄 배가 이탈리아의 타란토에서 좌초되어 반혁명주의자에게 잡혀 다시 감방에 갇혔다.  돌로미외는 메시나의 지하독방에서 21개원 동안 굴욕적인 감방생활을 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병까지 든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마지막 힘을 내어 유언장과 광물분류표를 작성했다. 런던 왕립학회의 회장인 조지프 뱅크스, 윌리엄 해밀턴 경, 넬슨 장군 같은 영향력 있는 친구들이 그를 출옥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801년 마렝고의 승리로 상황이 바뀌자 나폴레옹은 그의 석방을 요청했고, 그는 풀려날 수 있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돌로미외는 다시 연구활동을 시작했으나 51세로 요절했다.  * 의심할 여지없이 돌로미외는 현대 화산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베수비오와 에트나의 용암이 흘러내리는 것, 스토롬볼리의 분출, 불카노의 분화구가 연기를 피우는 것을 직접 관찰한 돌로미외는 이 현상들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지구 중심이 백열의 마그마로 구성되어 유동적이며, 그 속에서 용암이 나온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는 두더지가 파낸 흙을 지표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놓아둔다는 점에서 화산활동을 잔디 밑에서 땅을 파는 두더지에 비유했다.  그의 선배들은 용융상태의 화강암을 용암의 원천으로 보았지만, 돌로미외는 지각 바로 밑에 위치한 특정한 암석에서 다양한 용암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그는 검은색 현무암, 희끄무례한 규석, 조면암, 유문암 그리고 안산암을 구분했다. 그는 리파리섬에서 나온 경석은 가스 기포로 가득 차 있는 암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황이 연소되어 용암이 흐른다는 주장과, 에트나와 베수비오에서 분출되어 곳곳에 흩어져 있는 흑색 수정은 용암의 원천인 지구 깊숙한 곳에 있던 암석이 녹지 않은 것이라고 한 주장은 틀린 것이었다.  에트나 남쪽 발디노토에서 돌로미외는 석회암 침전물과 현무암이 교차하여 존재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바닷속에서 생겼다는 것을 입증했다.  윌리엄 해밀턴, 제임스 홀과 함께 베수비오는 방문하는 영광을 가진 돌로미외는 솜마산에 있는 '수직 용암'에 주목했다. 그는 이것을 벌어진 단구를 타고 위에서 밑으로 흘러내린 용암이라 했는데, 이 역시 완전한 착오였다. 이 용암기둥은 암맥, 다시 말하면 깊은 곳에서 나온 마그마가 식으면서 열하를 가득 채운 것이었다.  확고한 신념을 지닌 화산학자였던 돌로미외는 오베르뉴도 탐사하기로 결심하고 화산의 근원지에 도달하기 위해 오베르뉴 분화구 밑에 있는 화강암에 구멍을 뚫을 기금을 모으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마시프 상트랄의 각주형 현무암 군은 용암이 냉각되면서 수축되어 형성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퓌드돔에 대해서도 "화산활동으로 팽창된 것이 들어올려져 지각 밖으로 밀려나온 것이며, 솟아오른 형태를 유지한 것으로 보아 점성상태였음에 틀림없다. "고 정확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땅속에 불이 있다는 증거로 자주 인용되는 역청을 함유한 리마뉴의 언덕들은 그것이 화산 근처에 있다는 것 말고는 화산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단언했다.  * 화산에 푹 빠진 대사  돌로미외의 화성론적 이념에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은 나폴리 주제 영국 대사로, 그 유명한 레이디 해밀턴과 결혼한 윌리엄 해밀턴 경이다. 그는 무용가, 음악가, 고고학자로도 탁월했지만, 베수비오에 빠진 화산학자였다. 그는 '화산의 키클로페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안내자 바르톨로메오푸모와 함께 60번 이상이나-심지어는 화산폭발이 한창 진행중인 동안에도-베수비오를 등정했다.  런던 왕립학회에 보낸 편지와 전속 화가인 피터 패브리스가 손으로 채색한 판화가 수록되어 있는 유명한 <플레그라에안 평원>을 저술하여, 해밀턴은 에트나 정상, 리파리 제도, 심지어는 독일 라인 강변의 화산은 물론, 1766년에서 1794년 사이의 베수비오의 폭발을 뛰어난 솜씨로 묘사했다. 그의 저작은 전 유럽에서 커다란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해밀턴 경은 화산활동을 지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현상으로 이해했다.  해밀턴은 운 좋게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는 광경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는 뷔퐁이 주장하는 것처럼 화산의 원천이 지표 가까운 곳이 아니라 지구 깊숙한 곳에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는 공기가 없기 때문에 연소가 지속될 수 없는 바닷속에서도 화산폭발이 있다는 점에서, 화산의 불은 아주 특수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화산의 분화구는 화산재와 용암이 쌓이면서 커다랗게 된다고 주장했다.  용암의 분출과 그 성분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용암을 '석화된 밧줄' 형태를 가진 승상용암(petrifed cable)과 '강이 녹으면서 눈과 얼음찌꺼기로 가득 찬 겨울의 템스강을 연상시킨다. '고 한 괴상용암(scoriaceous lava)두 가지로 구분했다. 경화된 용암을 파내는 채석장에서, 그는 용암이 밑바닥과 정상 부분에서는 암재화되는 반면, 중간 부분에서는 부피가 커지거나 네모난 기둥이 형성된 것을 목격했다. 그는 또한 활화산에는 현무암 기둥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이러한 구조가 발견되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화산활동이 있었다고 정확한 추론을 하기도 했다.  해밀턴은 화산재로 구성된 버섯구름을 내뿜는 것이 특징인 베수비오 화산의 분출을 현대적 이론으로 설명했다. 버섯구름은 뜨거운 용암이 물과 접촉하면서 발생하는데, 오늘날에는 전자기유체역학(hydromagenutics)의 개념으로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많은 관찰을 통하여 그는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을 두 번이나 사전에 예측할 수 있었다. 그는 화산폭발이 시작되기 전에는 지진의 발생빈도가 증가하는 사실과 우물이 마른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폭발을 예측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용암이 분출할 위치도 예측했는데, 베수비오의 산허리에 위치한 그 지점에는 겨울에도 눈이 쌓이지 않았다.  화산폭발이 생명과 재산에 큰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그는 화산폭발의 위험이 크다고 하며, 왕과 신하들에게 서둘러서 포르티치궁을 떠나도록 조언했으며, 심지어는 용암이 흐르는 방향을 바꾸어 놓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해밀턴은 또한 목장에 떨어진 화산재의 위험성과, 플레그라에안 평원에 있는 '개의 동굴'과 같이 동물을 질식시켜 죽일 수 있는, 화산에서 분출되는 탄산가스의 유해성을 강조했다. 그는 또 나폴리에 있는 주택의 지붕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화산재가 떨어지는 대로 곧바로 쓸어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밀턴과 동시대 사람으로 이탈리아 화산폭발 메커니즘에 흥미를 가진 화산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혈액순환에 관한 업적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라차로 스팔란차니였다. 그는 가스를 함유하고 있는 물질을 녹여서 가스를 추출하는 방법을 화산암에 적용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그는 돌로미외의 견해와 반대로 용암 속의 유황이 용해를 일으키는 것이 아님을 입증했다.  * 1783년 두 번의 화산폭발이 아이슬란드와 일본을 휩쓸었다  아이슬란드 남부 지방 라키 화산의 폭발은 12세제곱 킬로미터의 현무암을 토해 내 역사상 가장 큰 분출로 기록되었다. 또한 이 폭발에서 5억 톤이 넘는 유독가스가 분출되었고, 목초지와 물이 오염되어 소 1만 1, 000마리, 양 20만 마리, 그리고 말 2만 8, 000마리가 죽었다. 또한 뒤따른 기근으로 아이슬란드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1만 500명이 죽었다.  1783 에서1784년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으며, 여름이 되었는데도 땅이 언 채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어느 화산학자도 그것과 라키 화산의 폭발을 연관시키지 못했다. 다행히도 지진이 일어난 곳 가까이에 살고 있던 욘 스타인그림스 사제가 그 폭발에 대해 아주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같은 해 일본에서도 혼슈섬의 아사마 화산이 갑자기 폭발하면서 1, 200여 명이 사망했다.  * 수성론의 최후 반격  수성론의 창립자인 베르너의 가장 재능 있는 제자들이 수성론의 무덤을 팠다는 사실은 아니러니이다. 프라이부르크 광산학교를 졸업한 뒤, 그들은 베르너의 이론을 이탈리아에서 시베리아, 멕시코에서 안데스 산맥에 이르는 전세계의 지질현상에 적용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은 갈수록 환멸을 느꼈다. 이들 중의 한 명이 프랑스의 장 프랑수와 도뷔송 드 부아쟁이다. 열렬한 수성론자였던 그는 작센의 현무암에 관한 논문에서, 그것이 수성의 기원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시프 상트랄의 사화산에서 용암의 흐름을 조사하던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이곳저곳 모두가 현무암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오베르뉴에는 화성의 현무암이 있다. "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고, 이 결론은 작센의 현무암에까지 적용되었다.  알렉산더 폰 홈볼트도 똑같은 길을 걷었다. 베르너의 제자였던 홈볼트는 천문학자, 지구물리학자, 지질학자, 인류학자, 외교관, 용감하고 도전적인 자유주의자였고, 막대한 재산가이면서도 사회적 불평등, 국수주의, 식민주의를 공격했으며, 위대한 탐험가이기도 했다. 그가 젊은 시절 저술한 <라인강의 현무암>은 수성론의 대표작이었다. 그러나 1794년 독일에 있는 아이펠 화산 분화구를 탐사하고, 그것에 대해 저술하면서 그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 진실을 찾아 홈볼트는 베를린, 파리, 남아메리카 북부의 오리노코강, 나폴리로 향한다  1799년 그는 중남미로 떠났다. 5년 동안 1만km를 여행하면서 오리노코강 주변의 습기 찬 숲과 안데스와 멕시코의 화산을 탐사했다. 그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수증기를 뿜어 올리고 있는 푸라체(콜롬비아에 있는 높이 4, 950m의 화산)와 청색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피친차(에콰도르에 있는 높이 4, 787m의 화산)를 등반했다. 그곳에서 강력한 지진이 일어나자 키토 주민들은 이교도인 홈볼트가 분화구에 화약을 집어 넣어 지진을 일으켰다고 비난했다. 뛰어난 등반가였던 홈볼트는 그 당시에 인간이 정복한 가장 높은 산인 침보라소(높이 6, 267m)를 정복하기도 했다.  멕시코에 간 그는 1759년에 새로 생긴 호룰로 화산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호룰로 화산의 용암류는 점점이 흩어져 있는 수천 개에 달하는 원추화산으로 아직도 연기를 뿜어 올리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 원정에서 돌아온 그는 친구인 시몬 볼리바르, 탄산칼륨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루이 조제프 게이 뤼삭, 레오폴트 본 부흐 등과 함께 폭발하고 있는 베수비오를 직접 관찰했다.  홈볼트는 남은 생애를 그가 사랑하는 파리와 증오하는 베를린에서 살았다. 그는 베를린의 과학 아카데미를 나환자 수용소에 비교했다. 어느 회원이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화산 분화구라고 주장한 뒤로는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그는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신세계의 화산에 대해 연구했기 때문에 더욱 독창적이었다  홈볼트는 현재까지도 유효한 몇 개의 개념을 발표했다. 지구표면의 화산분포를 연구한 끝에 그는 화산들은 지구 밑 깊숙한 곳에 있는 단층에서 '화산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곳의 지각 표피는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화산들은 최소한 지역 단위로 서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키토의 고원, 피친차, 코토팍시 그리고 퉁구라우아는 '동일한 마그마 근원'을 가지고 있다. "지하의 불은 어떤 때는 이 화산구에서, 다른 때는 저 화산구에서 분출된다.” 그리고 높은 화산은 낮은 화산보다 용암이 올라가기 힘들기 때문에 폭발의 빈도가 낮다.  그는 화산활동으로 생기는 지진은 소규모로 어느 한 지역에서만 지진을 일으킨다고 했으며, 따라서 가장 파괴적인 지진은 화산활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지진을 대규모 구조지진(tectonic earthquake)과 소규모 화산지진(volcanic seism)으로 구분한 것이다. 끝으로, 홈볼트는 그 당시에 널리 알려진 개념처럼 용암은 연소의 산물이 아니며 '금속, 알칼리, 흙의 혼합물이 용융된 액체'로 '수증기의 팽창' 때문에 지표면으로 올라온 것이라고 했다. 수성론자였던 홈볼트는 열렬한 화성론자가 되었다.  * 홈볼트의 친구이며 베르너의 수제자인 레오폴트 폰 부흐도 진영을 바꾼다  그는 스승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스승의 사후에야 화성론자임을 선언했다. 부유한 귀족 출신으로 비사교적이고 내성적이던 폰 부흐는 19세기 초의 가장 유명한 지질학자가 되었다. 그는 근무하던 광산에서 베르너의 주장과 다른 현상들을 발견했다. 불에 타거나 다른 바위를 녹이는 석탄의 원료가 없는 곳에서 많은 현무암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1797년 그는 개인적인 연구에 전념하고, 여행을 다니기 위해 광산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2년 후 폰 부흐는 단지 실크 윗도리와 양말, 공책, 기압계, 그리고 망치를 들고 이탈리아로 도보여행을 떠났다. 그는 먼저 로마 근처의 알바인 언덕을 조사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보베 계곡의 현무암 근원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베르너의 개념이 전혀 적용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 그는 자신이 '숭고한 산'이라고 명명한 베수비오를 조사했다. 그리고 분출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1805년 베수비오에 다시 돌아왔다. 이때도 역시 석탄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화산활동을 좀더 연구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방문한 오베르뉴에서 그는 퓌드파리우와 퓌드돔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화산을 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클레르몽페랑에 가십시오.” 폰 부흐는 마시프 상트랄의 현무암이 화성암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냈지만 독일의 현무암들은 베르너가 강의한 것과 같이 수성암이라는 주장을 고수했다.  카나리아 제도에 장기간에 걸쳐 체류하고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를 탐사하면서 그는 스승의 견해와 달리 화산활동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중요한 현상이며, 화산의 근원이 지구의 심장부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화산을 찾아 유럽을 종횡으로 돌아다녔다. 폰 부흐를 찾아 파리로 온 어느 지질학자가 우산을 들고 호텔 앞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하고 물었다.  "외출하십니까? 동행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런데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베를린에 갑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베르너 이론에 종말을 고할 수 있는 많은 관찰을 했다. 수성론은 스스로 사멸한 것이다. 화성론 만세! 결국 허튼이 승리한 것이다.  * 화산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팽창에 따른 결과인가, 아니면 화산재와 용암이 축적된 결과인가? 이것이 화산학자 사이에 벌어진 마지막 논쟁이었다. 일단 논쟁이 종결되자, 화산학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전세계의 화산활동 지역에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가스와 암석에 관한 연구, 지구물리학이 보편화되었다.  제5장 현대 화산학의 태동  화성론자와 수성론자 간의 논쟁이 시들해지자 레오폴트 폰 부흐의 '융기분화구' 이론을 둘러싼 또 다른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는 이 가설을 마시프 상트랄에서 세웠으며 1842년에 <오베르뉴 화산의 관찰>이란 제목으로 출판된 저서에서 처음으로 다루었다. 부흐는 퓌드돔, 사르쿠이, 그리고 퓌쇼핀과 같은 돔 모양 화산은 지하 수증기에 의하여 '융기하여 변화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암재로 구성된 분화구가 있는 화산은 분출중 용암이 집적되면서 생성되었다고 했다.  * 부흐는 퓌드돔을 내적인 화산동력의 힘으로 솟아오른 도미테. 즉 '융기'또는 '풍선'같은 것으로 보았다  부흐는 경솔하게도 다음과 같은 오류를 범했다. 화강암이 '도미테(domite, 그가 만들어 낸 용어이다)'로 변하고, 도미테가 녹으면서 현무암을 생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끔찍한 퇴보였다. 그렇게 솟아오른 산은 결국 폭발하고, 화산의 돔형 정상은 함몰되면서 수직 내벽을 가진 원형의 '융기분화구(uplifted crater)'가 형성된다. 이러한 융기분화구를 아조레스 제도에서는 콜드론(cauldron), 카나리아 제도에서는 칼데라(caldera)라고 부른다. 부흐는 융기분화구를 생성하는 활동과 분출분화구를 생성하는 활동을 구분했다.  폰 부흐는 자기의 이론을 몽도르, 캉탈 같은 다른 화산 단충지괴에도 적용했으며, 융기되었던 거대한 암상이 중앙부터 함몰되면서 형성되었다고 정확하게 추정했다. 그는 베수비오가 '지구 깊숙한 곳에서 만들어진 후 돌출한 것'이지 용암류가 축적되면서 형성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증거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베수비오 화산은 한 조각의 경석도 분출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테레니페섬, 그랜카나리아섬, 라스팔마스섬의 화산을 탐사한 후 융기분화구 이론을 발전시켰다.  * 융기분화구 이론은 대단한 성공을 거둔다  멕시코의 호룰로 화산분출이 진행되는 동안 품볼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기술했다. "3, 000∼4, 000제곱미터 평야가 160m높이로 풍선처럼 솟아올랐다. 그리고 폭격을 맞은 것처럼 돔 모양 평야의 가운데에서 2∼3m쯤 되는 작은 원추화산들이 수천개 솟아올랐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것이었다.  프랑스의 두 지질학자 아르망 뒤프레누아와 레옹 엘리 드보몽은 융기분화구 가설을 증명하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들은 이 가설을 폰 부흐와 함께 탐사한 바 있는 몽도르, 캉탈, 베수비오, 그리고 에트나에 적용했다. 이들은 거대하고 두터운 용암류는 평평한 지면에서만 흘러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경사가 6도 이상 되는 지면에서는 용암은 덩어리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조각조각 갈라지기 때문에 더 이상 흘러 나갈 수가 없다. 그런데 많은 화산의 경우 용암은 경사가 30도 이상인 언덕을 흘러내린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거대한 용암이 수평방향으로 퍼져 나간 뒤에 화산이 솟아올랐다고 생각했다.  플레그라에안 평원과 베수비오 화산에 이 이론을 적용하기 위하여 노력하던 뒤프레누이는 솜마산에서 조개류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이 이론을 결정적으로 증명해 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화산이 바다에서 솟아오를 때, 이 조개들도 같이 들어올려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조개는 마그마가 상승하면서 화산 하부지층에서 솟아 나온 석회암 속에 섞여 있던 것이다. 그는 또한 누오보 화산의 분화구는 거대한 기포의 형상으로 땅속에서 솟아 나왔으며, 기포가 터지면서 생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에레리 드 보몽은 에트나 화산의 동쪽 등성이에 있는 보배 계곡 저지대에 융기현상이 집중적으로 일어나 에트나 화산이 커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용암의 분출은 '감상하기 좋은 장면'에 불과하며, 폭발 이전에 융기현상이 발생한다고 했는데, 이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이 마지막 주장은 1세기가 지난 뒤, 화산변형에 대한 측정이 진행됨에 따라 확인되었다.  1815년 인도네시아 동쪽 숨바와에 있는 탐보라 화산의 산봉우리가 거대한 폭발과 함께 떨어져 나가면서 1만 명이 즉사했으며, 그 뒤를 이은 기근으로 8만 2, 000명이 죽었다. 자바의 영국 총독이던 토머스 래플스 경은 이 지각대변동과 이것이 기후에 미친 영향을 기록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을 휩쓴 수성론과 화성론 사이의 논쟁 때문에 래플스 경의 기록은 유럽 화산학계에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 폰부흐의 이론에 대한 반론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들은 완강하고도 끈질기게 거장의 이론을 거부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반대자는 조지 플렛 스크로프였다. 그는 영국 출신으로 농민의 빈곤을 몰아내자는 투쟁을 전개한 정치가, 경제학자, 타고난 화산학자였다. 스크로프는 20세 때 이탈리아로 가서 에트나를 등반하고, 리파리 제도를 탐사했으며, 1822년에는 베수비오에서 강력한 분출을 목격했다. 스크로프는 오베르뉴에서 6개월 간 머문 뒤, 아이펠로 갔다. 독일의 지질학자 요한 슈타이닝거는 아이펠 화산이 해저에서 생성되었다는 세밀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스크로프가 <화산에 대한 고찰(1825)>을 출판한 때는 그의 나이가 30세도 채 되지 않았을 때이다. 이 저서에서 그는 현대 화산학의 기초를 확실히 세웠다. 그는 화산재와 용암의 층이 축적되면서 화산 분화구가 형성되는 것을 오랜 동안 연구했다. 그리고 두터운 용암류는 경사가 30도 이상인 언덕에서도 균일하게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여 융기분화구 이론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스크로프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땅속 깊숙한 곳에서 지각의 중량 때문에 압력을 받고 있는 마그마가 가스와 물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밝힌 점이다.  압력이 조금만 낮아져도 가스는 마그마에서 빠져 나오고 물은 수증기로 변화하면서 용융상태의 물질을 솟아오르게 만들어 결국 분출이 뒤따른다. 그는 또 화산이 여러 종류의 용암을 연속적으로 분출한다면(예를 들어 현무암에 이어 조면암을 분출한다면). 그것은 화학작용으로 마그마의 구성 자체가 천천히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용암의 유동성은 광물학적 성분, 포함하고 있는 가스의 종류, 온도 등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다. 이것만으로도 현대 화산학은 한 단계 발전을 본 것이다.  그는 지구의 열이 밑바닥 깊은 곳에서 일어난 격심한 마찰이나 암석 무게의 작용으로 생긴다고 주장한 물리학자 로버트 말레의 주장이나, 침투된 물, 칼슘, 그리고 나트륨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한 그의 동료이자 '융기분화구'이론의 열렬한 지지자인 찰스 도비니의 주장에 반대했다. 스크로프는 지구가 탄생한 순간에 발생한 열이 지구 심장부에 있는 마그마를 만들었다고 믿었다.  그는 퓌 산맥의 화산들의 생성은 그리 오랜 일은 아니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카이사르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게르고비에에서 베르센게토릭스와 격전을 벌인 바 있다)의 시대보다는 앞선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카이사르가 그 지역을 정복할 당시 쓰인 어떤 기록에서도 화산의 분출이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스크로프는 바슈 산맥과 라솔라 산맥에서 분출된 용암층 밑에 있던 탄화된 나무를 생사튀르냉에서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1세기 반이 경과한 뒤 이 나무의 탄소 14를 이용한 최초의 방사능 연대측정을 통하여 퓌 산맥이 7, 600년 전에 형성되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었다.  * 스크로프는 찰스 라이엘이라는 강력한 우군을 만났다  <지질학 원론>(지학에 관한 최초의 현대적 저서)의 저자인 스코틀랜드의 지질학자 라이엘은 스크로프의 논문을 읽고는, 그 문제를 더 연구하기 위해 오베르뉴와 이탈리아를 탐사하기로 결심했다.  마시프 상트랄에서는 스크로프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확인했다. 라이엘은 베수비오를 등정하고 이스치아섬을 탐사했다. 그리고 이스치아섬의 고도 900m 지점에서 연체동물을 발견하고, 그것은 그 화산섬이 융기작용으로 형성되었다는 증거라고 정확하게 설명했다.  그는 그 다음 에트나로 가서 침식으로 산등성이가 움푹 패어 있는 보베 계곡을 여러 차레 탐사했다. 라이엘은 암맥과 경사가 45도나 되는 언덕에 두껍게 쌓여 있는 용암류의 층을 기록했다. 그러나 엘리 드보몽이 주장한 것과 같은 융기분화구에 대한 증거는 찾지 못했다. 그는 에트나 화산의 밑바닥에서 흘러 나온 용암의 흐름 사이에서 발견된 바다의 침전물로 보아, 에트나가 융기작용으로 형성된 것은 분명하지만, 부흐 학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 융기는 순간적이 아니라 매우 천천히 점진적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에트나 화산에 대한 설명, 용암류의 형태학, 기생화산에 관한 그의 관찰은 매우 정확하며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시칠리아의 자연과학자인 레쿠페로와 페라라의 연구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구, 그리고 젬멜라로 형제의 저작을 토대로 이론을 전개했다. 젬멜라로 형제는 1824년에 에트나의 화산지도를 출판했으며, 1803∼1865년 사이의 모든 화산활동을 기록했다.  같은 시기에 독일의 볼프강 사르토리우스 폰 발터샤우젠 공작은 에트나에 대한 세밀한 지도를 작성하여 1845년 지도책을 출간했다. 이제 에트나는 베수비오만큼 널리 연구되었다.  * 1831년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 사이 지중해에서 화산이 탄생했다. 이제 융기분화구 이론은 종말을 맞이한다  이 사건은 정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시칠리아와 튀니지를 잇는 산맥이 나타나 지중해 연안에서 정치지리학적 논쟁거리로 대두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시칠리아 정부는 전함을 파견하여 이 새로운 작은 섬을 시칠리아 왕의 이름을 따 페르디난데아라고 명명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함대를 파견한 영국은 그곳을 그레이엄이라고 불렀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프랑스 지리학회의 창립자 콩스탕 프레보와 아미 부에를 급파했다. 플레쉬란 배를 타고 현장에 도착한 프레보는 화산이 7월에 탄생했다 하여 줄리아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지리학회에 제출한 논문에서 줄리아에서는 융기분화구의 특징인 부풀어 오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용암의 축적으로 생겼다고 주장했다. 그는 줄리아의 분출을 샴페인을 터뜨리는 순간에 비유하는 삽화를 남겼다.  라이엘이 게오르크 하르퉁과 카나리아 제도를 탐사하면서, 융기분화구 이론은 확실한 타격을 받았다. 그들은 그랜카나리아 화산과 라스팔마스 화산의 칼데라도 하르퉁이 연구한 마데이라 제도와 아조레스 제도처럼 융기가 아니고 함몰과 침식작용으로 생성되었음을 알아냈다.  하지만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은 콜레주 드 프랑스의 암석학 교수 페르디낭 푸케였다. 1866년 그는 막 분출을 시작한 산토린 화산으로 칼데라와 분출을 연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엘리 드 보몽과 생트 클레르 드빌은 산토린은 갑자기 생겨난 거대한 융기의 가장 좋은 예가 된다고 생각했다.  푸케는 칼데라 벽을 층위학적으로 조사했다. 그는 30m 경석 아래층에서 B. C. 2000년경의 고고학 유물을 발견하여, 그것으로 거대한 폭발적인 분출에 뒤이어 섬이 함몰되었음을 입증했다. 그는 "융기분화구 이론은 완전히 폐기되어야 하며, 이제부터 그 이론은 과학의 발달사를 수놓은 숭고한 유물로 간주되어야 한다. "고 말했다.  * 반세기 만에 가스에 대한 연구는 선사시대에서 현대로 넘어간다  화산의 열은 알칼리성 금속이 바닷물에 산화되면서 발생한다고 오판한 영국의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는 1822년 수정 함유물에서 추출한 화산암 가스를 실험실에서 연구했다.  약 10년 후에 탐험가 장 밥티스트 부생고가 남아메리카의 두 화산 톨리마와 푸라체에서 화산분연을 채취했다.  1846년 독일 화학자 로베르트 분젠은 사르토리우스 폰 발터샤우젠과 프랑스 광물학자 알프레드 데 클루아조와 함께 아이슬란드의 화산을 탐사했다. 사르토리우스는 에트나의 남쪽 팔라고니아 근처에서 본 것과 매우 유사한 노란 응회암을 그곳에서 발견했는데, 그것은 해저에서 화산이 분화할 때 생긴 팔라고나이트(Palagonites, 화산 물질로 이루어진 암석)였다. 그후 분젠과 데클루아조는 온천의 원천지를 조사하고, 온천이 산성인지 알칼리성인지를 구분했으며, 간헐온천(Grand Geyser)의 작동원리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다. 1845년 그들은 분출 직후의 헤클라 화산에 등정하여, 아직도 연기가 나는 용암류에서 가스를 채취했다.  * 광물학자인 생트 클레르 드빌은 화산가스 분석의 진정한 선구자였다  1842년 카나리아 제도, 앤틸리스 제도, 케이프베르데 제도를 항해하면서 드빌은 서인도 제도의 과달루페섬에 있는 수프리에르 화산에 대한 저작을 남겼다. 그는 수프리에르 화산의 분화구에서 솟아오르는 유황 성분의 분연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고 유황의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연구를 계속해, 1855년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 현장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폭발시점에서부터 폭발이 잠잠해질 때까지 분화의 각 단계별로 뿜어져 나오는 가스의 표본을 채취하기도 했다. 그리고 실험실에 돌아와서 채취한 표본의 성분을 분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화산에서는 화산 나름대로 특정한 가스, 즉 에트나에서는 아황산가스, 베수비오에서는 염산가스, 그리고 안데스의 분화구에서는 탄산가스가 방출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채취해 온 가스를 가지고 모든 화산에서 동일한 가스가 방출되며, 단지 각 단계별로 그 구성비율이 달라질 뿐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또 가스의 화학적 성분과 온도 사이에 긴밀한 상관관계가 성립한다는 점을 밝히기도 했다.  그의 제자인 푸케는 산토린의 가스, 1865년 에트나의 분화시 분출된 가스, 아조레스의 온천, 그리고 투스카니의 화산 가스를 연구했다. 그는 수소가스가 지구 속 깊은 곳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냈다.  그는 또한 산토린에서 용암류가 뿜어 내는 불꽃은 수소, 메탄의 화합물이라는 것과 화산의 활동과정에서 수증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 화산에는 물이 있는가? 그렇다면 물은 어디에서 오는가?  20세기 초 프랑스의 화학자인 에밀 고티에는 화강암과 화산유리에 대한 실험을 통하여 화산의 물은 수정이 용해되면서 방출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이 문제는 아직도 완전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오늘날 많은 화산학자들은 지표수(빗물 또는 바닷물)가 지각을 뚫고 땅속으로 스며 들어갔다가 화산을 통하여 다시 밖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활발하다.  한편, 스위스의 약제사 알베르트 브룬은 1911년 화산가스는 물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하고 공기 중의 습기가 뜨거운 화산의 버섯구름과 접촉하면서 응결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미국의 지질학자인 아서 데이와 어니스트 셰퍼드는 응결현상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화산에 존재하는 물의 총량이 응결현상만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부족한 설명이라고 반박했다. 그들은 하와이 킬라우에아 화산의 용암호에서 순수한 가스의 표본을 채취하여, 가스의 주성분은 수증기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들이 사용한 분석방법은 현재까지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 마침내 화산암의 비밀을 밝히다  그때까지 화산암 연구(암석학)는 눈으로 관찰하거나 확대경을 사용하여 이루어졌다. 수성론자와 화성론자가 논쟁을 벌였던 시기에 암석학이 조금만 더 진보되어 있었다면 지구의 깊은 곳에서 채취된 화성암과 지표면에 있는 화산암을 구분할 수 있었을 것이고, 허튼의 학설에 깔려 있는 진리를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광물학자 피에르 코르디에는 광물을 분리시키기 위하여 암석을 작은 조각으로 부순 뒤 현미경을 가지고 분석하여, 비중에 따라 구분하는 현대적 방법을 최초로 도입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화학자 월리엄니콜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1828년 화석이 된 나무를 빛이 투과할 정도의 얇은 조각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그는 유리와 같은 조각에서 찾아볼 수 있는 편광성분을 발견했다. 그 뒤 그는 편광현미경을 발명했다.  하지만 과학계는 니콜의 작업보다는 로베르트 분젠이 처음으로 도입한 암석학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다. 분젠은 여러 번에 걸쳐 아이슬란드 화산암의 화학적 분석을 실시한 바 있었다.  1950년 영국의 지질학자인 헨리 소비는 니콜의 연구에서 영감을 얻어, 화산암석에서 떼어 낸 300분의 1mm의 얇은 조각들을 관찰하기 위하여 편광현미경을 사용했다. 그 결과 그는 마침내 결정구조를 관찰할 수 있었다. 이 발견은 암석학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고, 현대 암석학이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독일의 암석학자인 페르디난트 치르켈과 카를로젠부쉬, 그 뒤를 이어 미국인 헨리 워싱턴은 현미경 관찰과 화학적 분석을 근거로 화산암을 새로운 방법으로 분류할 것을 제안했다.  19세기 말 푸케와 오퀴스트 미셀 레비는 암석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으며 수백 개에 달하는 광물질의 광학적 특성을 밝혀 냈다. 물론 반대자도 많아 "현미경을 가지고 산을 연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1제곱미터도 되지 않는 조각을 가지고 어떻게 암석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가 있는가?"라고 반박하는 지질학자도 있었다.  푸케와 미셀 레비는 연구를 계속한 끝에, 실험실 용광로에서 처음으로 광물과 암석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들은 안산암과 현무암은 물론 장석, 감람석, 휘석 등 많은 암석을 인공적으로 만들었으며, 냉각의 속도가 결정화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미국 워싱턴에 있는 카네기 재단 연구소에 근무하는 미국인 암석학자 노먼 보엔이 용융상태의 규산염을 연구하는 실험적 암석학(experimental petrology)을 발전시켰다.  * 화산학 연구는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1831년 찰스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항해를 떠났다. 그의 휴대품 속에는 그가 존경하고 있던 라이엘이 지은 <지질학 원론>이 들어 있었다. 5년 간이나 계속되는 이 여행중 그는 남아메리카와 태평양의 여러 섬을 탐사했다. 과학자 다윈은 태평양의 환상 산호초는 오래된 화산의 정상이 천천히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것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10년 뒤 미국의 광물학자이며 동물학자인 제임스 대너가 그의 동료인 찰스 월크스가 이끄는 탐사에 참가했다. 선박 여섯 척으로 구성된 탐사대는 남태평양을 돌아보기 위해 출발했다. 항해는 3년 예정이었으나 6년이나 계속되었다. 피코크호에 승선한 대너는 지질학 연구로 쉴 틈이 없었다. 그는 대서양, 남아메리카의 해안을 탐사했으며, 뉴질랜드와 수많은 태평양의 여러 섬에 상륙했다. 하와이에서 그는 당시 그곳에 거주하던 성직자 윌리엄 엘리스와 티투스 코안이 이미 그 분출 모습을 기술한 적이 있는 킬리우에아와 마우나로아 화산을 관찰했다.  '뛰어난 화산 관측자'였던 코안은 1835년에서 1882년 사이에 분화한 모든 화산활동을 아주 자세하게 기술했다.  19세기 중반부터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는 화산지대에 관한 풍부한 관찰결과가 축적되기 시작했다. 페르디난트 폰 호호스테터는 뉴질랜드의 화산을, 프란츠 융훈은 인도네시아의 화산을, 카를 폰 제바흐, 오귀스트 돌피스와 외젠 드 몽세라는 남아메리카의 화산을, 페르디난트 하이든은 미국의 옐로스톤을, 알퐁스 스튀벨은 에콰도르와 콜롬비아의 화산을, 에드문트 노이만과 존 밀턴은 일본의 화산을, 아치발드 가이키에는 스코틀랜드의 화산을, 발터 폰 크네벨, 한스 레크, 토르발두르 토로드센은 아이슬란드의 화산을, 미겔 사데라 마소 신부는 필리핀의 화산을 연구했다.  * 지진계와 화산관측소  19세기가 끝날 즈음 현대 화산학이 태동했다. 현대 화산학은 활화산의 연구에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고, 대규모 화산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에 화산관측소를 설립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1880년에는 영국의 과학자인 토머스 그레이와 알프레드 어윙 경이 수직방향 지진계를 발명해 화산의 지구물리학적 연구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1841년 양시칠리아 왕국 페르디난트 2세가 최초의 화산관측소를 베수비오에 설치했다. 이 관측소의 초대 소장인 마세도니오 멜로니는 화산암의 자성을 연구하는 전문가였고, 그의 후계자들 또한 위대한 화산학자들이었다. 1872년의 분출시 사용한 초기의 지진계 발명가이며 위대한 화산학자 루이지 팔미에리, 화산 측면의 변형을 처음으로 측정하고 1906년의 베수비오 대분출을 관찰한 라파엘로 마테우치, 지진강도를 분류하여 지진 계급을 만든 주세페 메르칼리 등이 그들이다. 베수비오에는 몇 해가 지나기도 전에 커다란 관측소 두 개가 새로 세워졌다. 하나는 독일인 이마누엘 프리트렌더가 세운 사설관측소이고, 다른 하나는 교황의 재정지원을 받아 세운 관측소로 조반니 바티스타 알파노가 책임을 맡았다. 알파노는 성 야누아리우스의 피라고 부르는 액화 연구로 널리 알려진 신부였다.  * 1883년 8월 26일부터 8월 28일까지 크라카티우가 폭발했다  인도네시아에서 화산이 폭발하면서 뒤이어 해일이 일어나 3만 6, 000명이 죽자 네덜란드 정부는 지질학자 로저 베르빅을 파견하여 원인을 조사하도록 했다.  런던 왕립학회는 화산학자 존 주드가 이끄는 위원회를 설치, 크라카타우 제도의 분화 이후에 나타난 지형학적 변화와 해일, 대기권 상층으로 올라간 화산재, 기압에 미친 충격파 등의 영향을 연구하도록 했다. 이렇게 대규모로 연구가 시도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 1902년 세인트 빈센트의 수프리에르 화산, 마르티니크섬의 펠레 화산, 콰테말라에 있는 산타마리아 화산이 폭발했다  엄청난 대재앙이었다. 각각 1, 500명, 2만 8, 000명, 6, 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들 대참사는 언론에서 대서특필했으며, 여기에서 자극을 받은 젊은 화산학자들이 20세기 초에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독일의 지리학자 카를 사퍼는 과테말라에 있는 산타마리아 화산 연구로 명성을 얻었다. 수프리에르 화산의 분화에 대해서는 외과의사이며 화산학자였던 영국인 템페스트 엔더슨과 지질학자인 존 플렛이 아주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들은 5월 8일 분화한 펠레 화산도 방문했다. 7월 9일에는 생피에르만에서 200도에서 900도나 되는 화산재, 암석, 그리고 가스가 엄청난 속도로 산둥성이를 타고 내려오는 것을 목격했다.  * 광물학자인 프랑수아 앙투안 알프레드 리크루아는 열운과 용암첨탐(Spine of Lava)의 생성 연구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프랑스 정부는 파리 자연사 박물관의 교수였던 라크루아를 마르티니크섬으로 파견했다. 라크루아는 현장 관찰 결과를 자신의 기념비적인 저술인 <펠레 화산과 그 분출>에 발표했다. 그는 이 책으로 명성을 얻어 1904년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는 "나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화산분출의 힘에 밀려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고 농담조로 회고했다. 그는 분화의 양식을 하와이식, 스트롬볼리식, 펠레식, 불칸식으로 구분하자고 제안했다. 이 분류방법은 오늘날에도 적용하고 있으며 그가 촬영한 펠레 화산과 그 열운 사진은 아직도 유명하다.  * "원인을 알 수 없는 지하현상으로 수천 명이 죽어 가고 있고, 지질학자들이 아직도 그 비밀을 파헤치지 못했다면 이것이야말로 나의 필생의 연구과제이다"  미국의 암석학자 토머스 재거는 1902년 펠레 화산이 분출했을 때 현장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과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생피에르의 폐허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때 그는 화산학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1906년 분화중인 베수비오를 돌아본 뒤, 화산활동을 연구하고 인명 손실을 막기 위해서는 상설 화산관측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3년 뒤 그는 동료인 레지날드 데일리와 함께 하와이의 킬라우에아 화산에 가는 길에 일본에 들러서 분출하고 있는 타루마이와 아사마 화산을 관찰했다.  * 토마스 재거는 아직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킬리우에아 등성이에 화산관측소를 세웠다  현재까지도 이 관측소는 분화를 예측하고 감시하는 최고의 관측소 중의 하나이다. 재거의 계획이 결실을 맺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한편, 1911년 그의 동료의 프랭크 페렛과 어니스트 셰퍼드는 킬라우에아 화산 용암호의 온도를 처음으로 측정했다.  마침내 1912년 관측소가 완공되자 재거는 하와이에 정착했다. 이것은 그가 지질학 과정을 맡고 있던 메사추세츠 공대의 동료들에게는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그는 킬라우에아와 마우나로아 화산의 관측기록을 <화산에 관한 편지>라는 저술로 남겼다.  처음 몇 해 동안은 지방신문인 호놀룰루<애드버타이저>의 지원을 받은 아마추어 화산학자 협회가 관측소 경비를 일부 지원해 주었다. 하지만 5년 뒤 자금이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재거는 돼지를 키워 부족한 경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 1919년에 관측소는 국립연구소가 되어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 화산학의 천재인 프랭크 페렛  전직 엔지니어, 전기 모터 발명가, 그리고 토매스 재거의 조수인 그는 발명품을 판매하기 위해 작은 기업을 설립했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네팔에 간 그는 그곳에서 베수비오 화산관측소 소장인 라파엘로 마테우치를 만났다. 그는 마테우치의 도움으로 1906년에는 베수비오 분화를 관측할 수 있었으며 그후 화산활동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  페렛의 독창성은 놀랄 만하다. 지진계가 없는 상황에서 그는 시멘트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침대의 금속 물체를 이로 꽉 물어 베수비오 화산 산기슭을 지속적으로 흔들고 있는 미세한 진동을 측정했다. 진동에 민감한 이는 미세한 진동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페렛은 분출현상 연구로 위대한 화산학자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1907년 리파리 제도 스트롬볼리 화산의 분화가 최악의 고비는 넘겼으므로 섬주민 4, 000명을 대파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탈리아 당국자에게 정확히 통보할 수 있었다. 다음해 그는 에트나 화산의 분출을 예측했다. 1914년에는 일본에 있으면서 사쿠라지마 화산폭발을 목격했다.  1929년에서 1930년까지 펠레 화산이 다시 분출하는 동안 페렛은 폭발현장에서 3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작은 움막 안에서 열운을 관측하고 사진을 촬영했다. 한번은 열운의 구름이 그를 감싸기도 했지만 그는 살아날 수 있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화산의 분출을 가까이에서 관찰한 결과 그는 펠레 화산의 활동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생피에르 마을은 더 이상 위험하지 않으니 그곳 주민을 대피시킬 필요가 없다고 지역 당국자에게 확신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확한 예측 때문에 그는 그 지역에서 대접을 받았으며 동상이 세워질 정도였다. 페렛은 가스가 모든 화산분출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며, 마그마는 가스를 운반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정확했다.  1932년 알프레드 라크루아의 주장에 따라 프랑스 당국은 1902년 펠레산에서 9km 떨어진 모른데 카데에 세운 기상학 관측소를 화산관측소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1902년 펠레 화산에서 대폭발이 일어난 후에도 주요한 화산폭발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남서 알레스카의 오지에 있는 만 개의 연기(Ten Thousand Smokes) 계곡에서 1912년 일어난 분화를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약 15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경석이 광대한 계곡을 가득 채웠으며, 캐트마이 화산이 함몰해 거대한 칼데라가 생겼다. 그 현장은 접근하기가 어려웠지 때문에 4년이 지난 후에야 로버트 그리그스가 이끄는 국립 지질학 연구소 탐사팀이 처음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그후 카네기 재단의 지구물리학 실험실에서 파견된 C. 페너. E. 알렌, E. 지에스 등이 그 화산의 분출물을 연구했다. 페너는 퇴적물을 검토한 뒤 펠레 화산이 분화할 당시 발생한 열운과 대비될 만큼 거대한 규모의 모래 분출이 엄청난 온도와 빠르기로 퍼져 나갔음을 밝혀 냈다. 알렌과 지에스는 퇴적물에서 빠져 나온 가스와 승화물을 철저히 분석했다.  1914년 일본의 사쿠라지마 화산이 갑자기 활동을 재개했다. 지질학적인 분지로 고토와 지진학자인 후시기치 오모리는 이 화산활동을 연구하여 유명해졌다.  *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는 화산들  1928년 일본 최초의 화산관측소가 규슈에 있는 아소 화산에 세워졌다.  그뒤를 이어 도쿄 북서부 지역에 위치한 아사마 화산에 관측소가 세워졌다. 아사마 관측소에서 다케시 미나카미는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는 오늘날에도 유용한 화산에서 발원한 지진현상을 연구했다. 그 다음에는 사쿠라지마와 우수에 관측소가 세워졌다. 이들 관측소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관측소로 매순간마다 수천 가지에 달하는 정보를 처리하고 있다.  2차 세계적인 발발하기 전 네덜란드에서는 인도네시아의 화산지대에 많은 관측소를 세웠다. 뒤를 이어 러시아는 캄차카 반도, 오스트레일리아는 뉴기니의 라바울 등에 여러 관측소를 세웠다.  처음으로 학문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화산 가운데 하나인 에트나 화산은 한동안 현대 관학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95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스위스의 화산학자 알프레트 리트만의 주도로 에트나 화산을 감시하기 위한 국제 화산연구소가 설립되었다.  1943년 두 개의 새로운 화산이 탄생했는데, 멕시코의 옥수수밭 가운데서 솟아오른 파리쿠틴 화산과 일본의 쇼와신잔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화산의 생성은 전쟁 때문에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63년 화산섬인 서트시가 아이슬란드 남쪽 대서양에서 솟아오를 때 아이슬란드의 화산학자들은 해저분출의 각 단계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아이슬란드 화산학자들도 화산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테프라 연대학(Tephrochnology)을 발전시킨 시구르두르 토라린손의 업적은 괄목할 만하다. 테프라 연대학은 화산분출물의 퇴적층을 연구하여 층서학적 방법으로 측정하는 학문이다.  * 1980년대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 세 가지  1980년 5월 18일 미국 서부 워싱턴주에 있는 세인트헬렌스 화산이 격렬하게 폭발했다. 화산재가 25km 높이까지 솟아올랐으며, 시속 1, 000km, 300도에 달하는 돌풍을 일으켜 화산의 북쪽 30km에 이르는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화산폭발의 파괴력은 엄청났지만 희생자는 적었다. 이는 화산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당국에서 피해 예상지역을 폐쇠한 덕분이었다. 화산재와 화산력이 포함되어 있는 폭발적 분출이 이번 경우처럼 자세히 연구된 적은 없었다. 캐스케이드 관측소는 세인트헬렌스 분출을 폭발적 화산활동이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용암류가 발생하는 하와이의 분출적 화산활동과 대비된다.  1982년 멕시코 엘치촌에서 일어난 대폭발로 화산재와 유황가스의 기둥이 35km 높이까지 솟아올랐으며, 화산폭발로 야기되는 기상변화 연구에 하나의 전환점을 제공했다.  끝으로 1985년 11월 13일 콜롬비아 네바도 델 루이스 화산이 폭발하면서 정상의 빙하를 녹여 거대한 진흙더미가 쏟아져 내려 인근의 아르메로시와 2만 2, 000명에 달하는 주민을 덮쳐 1902년 펠레 화산의 폭발 이래 최대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그 분화는 화산학자들도 예측은 하고 있었으나 위험이 임박했다는 것을 당국에 설득시키지 못했다.  이와 같은 사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하다. 화산학은 단순한 과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도주의적 의무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화산학자들은 위험지역의 주민에게 위험을 알려 주어야 하며 너무 늦기 전에 위험지역 주민을 대피시키도록 당국자를 설득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 엄청난 진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화산학은 유년기에 있다  우리는 마그마의 열은 대부분 암석의 자연적 방사능에서 생기며 화산의 분포는 지각구조에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화산암에 있는 방사능을 통하여 그 암석의 나이를 알 수 있으며, 또 그들의 과거를 추적할 수도 있다. 미량원소와 동위원소에 관련된 지구화학적 연구는 마그마 저장소의 비밀에 한걸음씩 접근하도록 도와 주고 있다. 주민을 적기에 대피시킬 수 있도록 분화를 예측하는 것도 실현되고 있다. 하지만 1, 000개 이상의 화산 중에서 화산관측소에서 감시하고 있는 활화산은 150개에 불과하다.  오늘날에는 용암류와 진흙의 흐름이 가져오는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것이 가능해졌다. 위성을 통한 화산 감시도 희망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화산이 왜 분출하는가를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일반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만만치 않은 과제가 미래의 화산학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기록과 증언  대지의 여신은 만족을 모른다. 대지의 여신은 거꾸로 들지도 않는다. 그녀는 계절을 따라 작은 수레를 규칙적으로 밀고 있다. 비, 눈, 서리, 화창한 날씨.. . 그리고 그녀는 결코 취하는 법이 없다. 가끔 조그만 화산을 터뜨려 기분을 삭이는 것을 제외하면.  자크 프레베르  <에트나>  고대 로마 시인의 에트나 분출에 관한 지구물리학적 설명. 시인은 불카누스의 대장간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 화산분출로 무너진 산, 그리고 붕괴의 원인이 되는 바람  에트나 화산 이편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가공할 만한 거대한 입구들이 있으며, 저편에는 화산에서 피를 공급받기에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지가 길게 늘어져 있다. 다른 곳에서는 커다랗고 울퉁불퉁한 바위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 혼란은 극에 달한다.  불에 탄 모래가 내뿜는 연기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거대한 불덩어리를 날쌔게 몰아내고 있다. 더 깊은 곳에서는 지반까지 뒤흔들면서 돌풍을 일으킨다. 에트나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창백한 불꽃이 새까만 비와 섞여 흘러 나온다. 엄청난 파괴를 몰고 오는 것은 바람이다. 무거운 바윗덩어리들이 회오리바람에 실려 솟아올랐다가 다시 심연 속으로 굴러 떨어진다. 불에는 항상 자연의 속도와 영원한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폭발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는 원군이 필요하다. 불 그 자체로는 동적인 힘이 없는 것이다. 불은 바람의 명령에 따른다. 바람은 사령관이며 불은 그 명령에 복종하는 군대이다.  * 유황, 황산알루미늄, 역청,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인 용암이 분화를 일으킨다  이제 화재를 일으키는 물질, 즉 무엇이 불꽃의 연료가 되고, 무엇이 에트나 화산 분출의 양식이 되었는지 살펴보자. 어느 한 순간 액화된 뜨거운 유황이 타오른다. 또 어느 순간에는 그 액체는 황산알루미늄으로 가득 차게 된다. 부근에 기름투성이 역청이 있다면 주위의 모든 것은 폭발적인 불꽃을 일으킨다.  * 강력하지만 순종적인 규암  그러나 화산에서 타오르는 불꽃의 강력한 원천은 규암이다. 에트나 자신이 바로 규암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규암을 손 위에 올려놓고 그 강도를 시험해 보면, 그것이 스스로 불에 타오르거나 불을 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의문이 든다면, 쇠로 규암을 때려 보자. 그러면 규암이 불꽃을 내며 튀어오를 것이다. 이번에는 규암을 뜨거운 불 속으로 던지면, 당장에 특성이 드러난다. 쉽게 힘을 빼앗기는 것이다. 규암은 쇠보다 더 빨리 용해되는데, 이것은 규암이 변화하기 쉬운 성질을 가졌을 뿐 아니라 불의 압력에 약하기 때문이다.  불꽃을 일으키는 다른 모든 물질은 일단 점화되면 불에 타 없어진다. 재생할 수 있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다시는 불꽃을 일으킬 수 없는 재와 흙만 남는다. 그러나 연약해 보이는 규암은 수만 번 반복해서 불을 일으키고, 수천 번 다시 그 힘을 회복한다.  * 분화의 여러 단계  그대는 공포에 떨거나 신성한 사건현장에서 도망치려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안전한 언덕 위에서 모든 것을 살펴볼 수도 있으리라. 거대한 불덩어리가 갑자기 솟구쳐 오르며 빠르게 날아간다. 바윗덩어리가 이곳저곳 굴러다니고, 검은 모래 또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다닌다. 그들은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낸다-패잔병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전투에 앞서 무장을 갖추고 있는 용감한 전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바윗돌이 떨어져 하나둘씩 쌓이면서 피라미드처럼 뾰족한 탐을 이룬다. 돌멩이는 용광로에서 달구어져 석회가 되고 그 안에서 바윗덩어리가 토해 낸 수분은 분기공에서 수증기가 되어 높이 솟아오른다. 이렇게 모든 실체를 잃은 용암은 가볍기 이를 데 없는 경석이 된다. 액화된 용암은 더욱 뜨겁게 부글거리며 끓는다. 그리고 마침내 완만한 용암류가 산등성이를 타고 흘러내린다. 용암류는 12마일 가까운 거리를 흘러 내린다. 어떠한 것도 용암의 흐름과 불덩이를 막을 수 없으며, 어떠한 그릇도 이것을 담을 수 없다.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레 벨 레트르 출판사  79년, 베수비오 화산 분화  소 플리니우스는 미세눔에 기지를 둔 지중해 함대 사령관 대 플리니우스의 조카이다. 아저씨 대 플리니우스는 백과사전같이 박학다식한 인물로 <박물지> 37권을 남겼다. 서간문학가로서 그 재능을 널리 인정받은 소 플리니우스는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두 통의 편지를 보대(104년) 79년 8월 24일, 스타비아 인근 해안에서 최후를 맞은 아저씨의 모습과 미세눔에 18세의 젊은이가 맛본 감정과 폭발한 베수비오 화산의 각 단계를 자세히 묘사했다.  * 첫 번째 편지에서 발췌  아저씨(대 플리니우스)는 그때 미세눔(나폴리만에 있는 항구)에서 함대를 지휘하고 계셨습니다. 8월 24일 오후 1시경, 어머니께서는 이상하게 생긴 커다란 구름을 가리키면서 아저씨에게 나와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소나무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 말고는 더 이상 상세하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무의 줄기처럼 하늘 높이 솟아 있었으며 꼭대기는 나뭇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플리니우스상): 저는 그 구름이 순간적인 돌풍에 밀려 높이 솟아올랐다가, 그 힘이 없어지자 수평으로 퍼지면서 흩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아래로 떨어지려는 자체의 중량으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연기는 한 순간에는 흰색이었으나, 다음 순간에는 군데군데가 검정색으로 변하는 것이, 마치 흙이나 타다 남은 석탄 부스러기가 들어올려진 것 같았습니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넘쳤던 아저씨는 좀더 가까이에서 그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아저씨는 가벼운 배를 준비하도록 명령했으며, 원하면 저도 따라와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  아저씨는 다른 사람들이 빠져 나오고 있는 장소로 서둘러서 출발하셨습니다. 그리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방향타를 손에 잡고 위험한 곳을 향해 갔으며, 눈앞에서 열운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면서 움직이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고 기록하셨습니다. 가까이 갈수록 점점 더 뜨거워졌으며 화산암재와 경석, 불에 그을리고 까맣게 탄 돌부스러기가 배 위에 떨어지기 시작했니다. 이윽고 바다 밑바닥이 솟아올랐으며 흘러내린 바윗덩어리로 해안이 가로막혔습니다. 잠시 되돌아갈 것인지를 생각한 뒤에 아저씨는 방향을 잡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선장에게 "행운은 용감한 자의 것이다. 품포니아누스한테 가자. "고 말씀하셨습니다. 폼포니아누스의 집은 나폴리만의 반대편에 있는 스타비아에 있었습니다.. .  그동안에도 베수비오 화산은 여러 곳에서 불타 오르고 있었으며, 사방으로 퍼져 가며 타오르는 불빛은 밤의 어둠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났습니다. 하지만 아저씨께서는 두려움을 쫓기 위해서인지, 그 불은 시골사람들이 놀란 나머지 켜 놓은 채 떠난 것이라고 계속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저씨는 휴식을 취했는데, 그동안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좀 뚱뚱한 편이어서 약간은 무겁고 요란하게 숨쉬는 편이었던 아저씨의 숨소리가 옆방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들에게까지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저씨 침실로 가는 통로가 경석과 화산재로 꽉 막혀 버렸기 때문에 조금만 더 그곳에 계셨더라면 빠져 나오지 못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깨우자 아저씨는 밖으로 나와 폼포니아누스 등과 함께 밤을 세우셨습니다. 그들은 집 안에 계속 있을 것인지 밖으로 나갈 것인지 상의했습니다. 집이 계속되는 격렬한 진동 때문에 초석이 부서져 나간 것처럼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밖으로 나간다 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구멍이 숭숭 뚫리고 가볍다 하더라고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경석이 두렵지 않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두 가지 상황을 비교하고 사람들은 그래도 밖에 있는 편이 덜 위험하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어느쪽이 더 위험한지를 따져 본 뒤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아저씨의 경우는 언제나 그렇듯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고자 했던 것이나, 그들의 경우는 공포 중에 덜한 공포를 선택하는 꼴이었습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벌써 날이 밝았겠지만, 그 어느 밤보다도 더 어둡고 더 답답한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내리누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횃불이나 등불을 밝혀 간신히 앞을 분간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고자 해안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파도는 거칠고 사나운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바닷가에 넓은 천을 깔고 누워 계셨습니다. 아저씨는 여러 차례 냉수를 마셨습니다. 곧 이어 불길을 알리는 유황 냄새가 밀려들자 사람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습니다. 아저씨는 젊은 노예 두 명의 부축을 받아 일이었지만 곧 다시 쓰러지셨습니다. 제 짐작으로는 유독가스가 원래 약하고 자주 부어오르던 아저씨의 기도를 막아 숨을 쉴 수 없게 만든 것 같았습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아저씨가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아저씨의 시신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채였고, 마치 깊은 잠 속에 빠진 듯했습니다.. .  * 두 번째 편지에서 발췌  아저씨가 출발한 뒤, 저는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  여러 날 동안, 마치 어떤 징조처럼,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은 캄파니아 지방에서는 늘상 있는 일이라서 별로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은 땅이 어쩌나 심하게 요동치는지 마치 대지가 뒤집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제 방으로 뛰어들어오셨을 때, 저는 저대로 어머니가 잠드셨으면 깨워 드리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참이었습니다.. .  대낮인데도 빛은 희미했고 밖은 여전히 어두컴컴했습니다. 마당에 앉아 있었는데 왠지 답답하고 건물은 심하게 흔들려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시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공포에 질린 군중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우왕좌왕할 따름이었고, 서로 밀고 제치고 하는 모습은 바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건물이 있는 지역을 벗어난 우리는 일순간 매우 놀라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끌고 온 수레들이 평평한 땅 위에서도 마구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수레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았는데도 말입니다. 바다는 더욱 끔찍했습니다. 땅덩어리가 경련을 일으킨 탓에 바다는 오그라드는 것 같았는데(해일을 선행하는 물의 후진), 해안선이 뒤로 밀려나 바다 밑바닥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곳 바다생물은 벌써 말라붙어 있었습니다. 저쪽 하늘에서는 번개보다 더 큰 섬광을 토해내며(화산재의 기둥이 일으키는 정전기) 뱀처럼 꿈틀거리는 섬쩍지근한 먹구름이 우지끈하며 쪼개지고 있었습니다.. . 잠시 뒤, 먹구름(화산가스)이 내려오더니 땅과 바다를 뒤덮었습니다. 먹구름은 카프리를 감싸더니 이내 미세늄의 곶도 휘감아 버렸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당신을 남겨 두고 서둘러 도망가려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절대로 혼자 가지 않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머니를 부축하여 걸음을 옮길 수 있도록 도와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마지못해 몸을 움직이셨지만, 당신 때문에 늦어진다고 자책하셨습니다.  이때, 재가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우리 뒤로 검고 짙은 연기가 파도처럼(화산재의 흐름)땅 위로 퍼지면서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아직은 길을 잡을 만하니 들로 나가요.” 사방이 어두워지면 길거리에서 군중들에게 짓밟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겨우 의견의 일치를 보았을 때는 이미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달빛도 어슴푸레한 구름도 한 점 없는 세상은 밀폐된 방처럼 온통 짙은 어둠만이 내리누르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아낙들의 울부짖음과 아기들의 칭얼거림, 그리고 사내들의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떤 이는 아버지, 어머니를 소리쳐 찾았고, 어떤 이는 남편과 아내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으며, 어떤 이는 자식을 잃어버린 모양이었습니다. 하늘을 향해 두 손 모아 기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신은 없으며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이라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  불길하게 한쪽이 밝아 왔는데, 그것은 먼동이 트는 것이 아니라 불길이 조여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길은 멀리서 멈추었습니다. 잿더미가 무겁게 날아들더니 다시 한번 암흑이 사방을 뒤덮었습니다. 잿더미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가끔 일어나 몸을 털어야 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급박한 위험 속에서도 나약함을 드러내는 말은 단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암흑이 걷히고, 일식 때처럼 검은 납빛을 띠고 있었지만 태양이 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공포에 질린 우리 눈앞에 온 세상은 눈에 덮인 듯 재를 두텁게 뒤집어쓰고 다가섰습니다.  우리는 미세눔에 돌아와 어떻게든 기운을 차리려고 애썼습니다. 희망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가운데-물론 우리를 지배한 것은 두려운 쪽이었습니다-하룻밤을 지샜습니다. 위험에서 간신히 벗어났고, 위험이 다시 몰아 닥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우리는 아저씨의 소식을 듣기 전에는 그곳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  소 플리니우스 <타키투스에게 보낸 편지>  프랑스의 화산  1751년 장 에티엔 게타르는, 프랑스 중앙 고원지대, 마시프 상트랄에 화산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 내어, 프랑스 화산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쌓았다. 게타르는 이렇게 추론했다. "오베르뉴 지방과 도피네 지역에 있는 많은 산들은 화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점이다.”  지구가 부글부글 끓고 있던 저 먼 옛날이라면, 이 나라에도 내가 방금 전에 설명한 것과 같은 무시무시한 화산이 있었으며, 화산은 가벼운 자극이나 변동만으로 불을 토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현재 우리의 안전한 삶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실을 알아내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 지식을 가지고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불행을 상기할 수 있다면, 과거 불타 올랐던 프랑스의 화산지대를 둘러보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닐까? 그리고 이 지식을 활용해서 이들 지역과 화산의 영향을 받은 적이 없는 지역을 비교하는 작업을 통해, 활동이 정지된 화산지대에 살고 있는 주민들 사이에 적당한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지진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해 사전준비를 갖추게 만드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현명한 조치라는 점을 인식시켜야 하지 않을까?.. .  오늘날 폭발하는 화산만큼이나 가공할 위력을 보인 화산이었을 것으로 믿어지는 산으로는, 리옴에서 약 8km 떨어진 볼빅, 클레르몽 근처의 퓌드돔, 그리고 몽도르산이다. 볼빅의 화산은 용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베수비오 화산과 마찬가지로 용해된 물질로 구성된 서로 다른 용암층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어마어마한 규모를 이루고 있었다. 그 덕분에 볼빅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까지 채석장이 자리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비시의 공동우물을 덮고 있는 건물, 몽도르에 있는 카이사르 목욕탕 안의 세면대, 클레르몽의 집들, 그리고 부르봉 지역과 물랭 마을 공동우물에 있는 세면대는 모두 이 돌로 만든 것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용암을 발견한 곳은 바로 물랭이다. 나는 용암을 보는 순간 그것이 화산암이라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그 돌을 채취해 온 지역 부근에 화산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 곳을 탐문하고 이들 지역에서 용암을 건축재로 사용한 것을 발견하면서, 화산을 찾아야겠다는 욕구는 더욱 강렬해졌다.  마침내 리옴에 도착했는데 리옴의 건축물 대부분이 용암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채석장은 너무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8km밖에 안 되는 곳에 채석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을 살펴보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나서 서둘러 채석장으로 달려갔다. 볼빅 시내를 굽어보고 있는 산을 오르기도 전에, 나는 그 산이 화산폭발 당시 분출된 여러 가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산은 우리가 현재 화산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 동일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원추형으로 우뚝 선 산의 밑자락은 회백색 바위와 아주 단단하고 매끌매끌한 연분홍색 화강암이고, 다른 부분은 무질서하게 겹겹이 쌓여 있는 검정색이나 붉은색 경석더미이다. 경석은 둥근 모양을 띠고 있는데, 자갈만한 것, 사람머리만한 것 등 크기가 다양하다. 산의 3분의 2 높이 이상 되는 지역에서는 삐죽삐죽 제멋대로 솟아 나온 불규칙한 암석들을 볼 수 있다. 진자주 또는 지저분한 검정색을 지닌 이들 바위는 화산암의 암재처럼 보인다. 단단한 이 바위들의 스펀지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경석과는 다르다.  바위와 산의 정상 사이에는 경석이 깔려 있고, 정상에는 부드러운 화산재암(ash stone)이 있다. 화산재암은 경석처럼 조그맣지 않고 커다란 덩어리를 이루고 있어 바위처럼 보인다. 정상 바로 밑에서 마치 '깔대기형 바람구멍'처럼 보이는 원추형 모양을 한 제법 큰 구멍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내가 풍로라고 부른 이유는, 이 구멍이 화산의 입구에 해당하고 실제로 불을 뿜어 내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 구멍은 암재처럼 남서쪽을 향하고 있다. 산의 북쪽과 동쪽 사면은 경석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 같았고, 서쪽 협곡에는 암석층이 지평층까지 기울어져 있는데, 암석층은 산 높이만큼 퍼져 있는 듯했다.. .  이들 돌은 스펀지 형태이지만 단단하며, 작고 불규칙한 구멍은 모양과 크기가 다양하다. 구멍의 숫자에 따라 그 돌의 강도와 품질이 결정된다.. .  클레르몽을 지나자마자 퓌드돔이라고 부르는 산까지 완만한 경사가 이어진다. 퓌드돔은 원추화산으로 볼빅에서처럼 조그만 정점으로 끝난다. 이 산의 북쪽과 서쪽에는 모양이 이것과 비슷한 산들이 몇 개 더 있지만 그다지 높은 산들은 아니다. 그래도 파리 부근의 산에 비하면 높은 편에 속한다. 이들 다양한 원추화산이 사과나무에 사과 열리듯 하나의 산자락에 늘어서 있는 것이다.. .  겉보기에 산은 무척 아름다워 즐거운 기분을 주나, 자세히 살펴보면 처절하고 끔찍한 물질을 보여 준다. 이 물질은 가장 단단한 사물도 녹여 버릴 수 있는 강한 불을 일으키고, 그 단단한 사물을 거친 유리, 여러 형태와 크기를 가진 화산찌꺼기로 만든다. 퓌드돔이 볼빅처럼 한때 화산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었다. 풀이나 나무가 자라고 있지 않은 지역은 경석과 용암 파편, 화산찌꺼기의 하나인 자갈과 모래, 화산재와 뒤섞여 있는 작은 경석으로 온통 뒤덮여 있는 것이다.. .  나는 퓌드돔 정상에서 '깔때기형 바람구멍'을 발견했다. 그리고 부근에서 가장 높은 이 정상에서 각 봉우리들의 꼭대기에는 안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멍이 있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구멍들이 '깔대기형 바람구멍'이거나 화산의 입구라고 생각했다. 산을 내려가기 전에 '깔때기형 바람구멍'을 살펴보았다.  정상, 그리고 정상과 퓌드돔 사이의 전지역에는 그곳 산지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경석더미가 널려 있다. 따라서 나는 다른 곳에는 가 볼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게다가 이번 탐사에 동행해 준 클레르몽의 약제사인 오지 씨가 나의 견해를 뒷받침해 주었다. 자연사에 조예가 깊은 그는, 이 산지의 이곳저곳을 여러 번 살펴보았으며, 모든 지역이 퓌드돔과 동일한 구조와 동일한 물질로 되어 있다고 확인해 주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은 그 물질들의 정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  그러나 '깔때기형 바람구멍'이 여러 차례에 걸쳐 발생한 화산분출이 남긴 흔적이라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또한 오늘날 불을 내뿜고 있는 화산을 관찰함으로써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조명해 볼 수도 있다.  그 산에는 한 개 또는 두 개의 분화구가 있었으며 이 분화구를 통해 폭발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분화가 계속되는 동안 다른 분화구를 생성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가연성물질은 산 전체에 두루 퍼져 단 한 번에 또는 연속해서 불타 오르지 않은 한, 이미 정해진 통로를 따라 밖으로 빠져 나갔을 것이다. 게다가 퓌드돔 정상에 있는 '깔때기형 바람구멍'이 한 번의 분화로 이루어졌든지 아니면 여러 번의 분화로 이루어졌든지, 이 산 전체가 불덩어리가 되어 타오른 적이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이러한 것을 살펴보면서 화산현상으로 생성된 암석의 성질을 파악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으며, 이제까지 진행한 연구 이상으로 이 조사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또한 내가 사화산이라고 주장하는 화산이 정말로 사화산이라는 점을 스스로 확신하기 위해서도 이 임무와 씨름을 해야 했다. 이제까지 내가 이 산들이 화산이라고 주장한 근거는 경석과 용암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돌들이 화산암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했지 않은가.  나는 이 돌들을 현재 불타 오르고 있는 활화산에서 채취한 유사한 물질들과 비교하고, 아주 미세한 비정형적 부분이라도 그들 간에 상관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면서 좀더 확실한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다.  활화산에서 채취한 견본은 몽티니와 노레 신부에게서 입수한 베수비오 화산에서 나온 돌과, 인도 회사의 외과의사인 리외토드가 보내 준 부르봉섬의 화산에서 나온 돌이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베수비오 화산에서 채취한 표면용암의 조각은-화산의 입구에서 분출되는 부글거리는 분류 위에 떠오르는 찌꺼기가 식으면서 용암이 된-비정형이며, 결절상을 이루고 있고, 진회색 바탕에 검정색 점이 뒤덮여 있다. 이러한 돌들은 프랑스 사회산에서 수없이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베수비오 화산의 돌처럼 검정색 점이 박힌 것도 있고, 벽개석 광물일 수도 있지만 흰색 점이 박힌 것도 있으며, 어떤 것에는 진한 황색점이 박혀 있기도 하다.. .  이 산지에 역청(bitumen)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화산 주위에서는 거의 언제나 역청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베수비오, 에트나, 헤다에는 역청질 샘이나 석탄, 패갈탄, 역청, 채석장이 있다.. .  일부 검정색 경석이 가볍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해준다. 경석들은 역청을 증류시킨 후 남는 암재의 가벼움과 외양을 가지고 있다.. .  이제까지 조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이번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산들이 한때 불타 올랐으며, 다시 불타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드러난다. 오늘날 이 나라의 국민이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정경은 16세기 에트나가 불을 내뿜기 시작하기 전에 카타니아 주민이 평화롭게 살던 상황과 비슷하다.  장 에티엔 게타르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기록>  화산학자 윌리엄 해밀턴 경  나폴리 주재 영국대사이며, 런던 왕립학회 회원이던 해밀턴 경은 부인과 함께 그의 '위대한 자연 실험장'인 베수비오 화산에 매료되어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1764년에서부터 1794년까지 화산의 활동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 1767년, 해밀턴은 화산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성 아누아리우스가 화산폭발을 멈추게 했다  아트리오 디 카발로라고 불리는 솜마산과 베수비오 산 사이로 난 계곡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정오 무렵, 용암을 관찰하고 있는데, 약 4분의 1km쯤 떨어진 산 속에서 갑자기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산이 굉음을 내며 쪼개지고, 새로 생긴 입구로부터 불타 오르는 용액이 샘물처럼 높이 솟아 나와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 밀려 내려왔다. 경석 돌더미들이 우리 머리 위로 쏟아지는 가운데, 땅이 동시에 흔들렸으며, 순식간에 검은 연기와 화산재가 세상을 캄캄한 어둠으로 몰았다. 산꼭대기에서 일어나는 폭발은 내가 이제까지 들은 어떤 소리보다도 컸으며, 유황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안내자는 겁이 나서 도망쳤으며, 나 역시 마음이 평화롭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하겠다. 나는 바짝 붙어서 따라갔으며, 약 3km 정도의 거리를 쉬지 않고 뛰어가는 동안에도, 우리 발 밑의 땅은 계속 진동하고 있었으며 또 다른 새로운 입구가 벌어지면서 우리의 퇴로를 차단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또한 우리가 솜마산을 지나는 동안, 격렬한 폭발로 떨어져 나온 바위들이 우리들 머리 위로 쏟아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더욱이 우박처럼 우리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경석들은 매우 커서, 그것이 떨어지는 곳에 상당한 충격을 가하고 있었다.  잠깐 휴식을 취하고 나자, 땅이 아직도 심하게 진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창문, 문틀, 심지어 집의 초석까지 뒤흔들어대는 지진으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  10월 20일 화요일, 하루종일 화산재가 나폴리에 떨어졌다. 산의 양쪽으로 용암은 아주 격렬하게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동안 소리는 그다지 들리지 않았다. 밤 9시가 되자 전과 같이 폭발을 동반하는 이상하게 우르르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해서 약 네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마치 산이 조각조각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으며, 실제로 산은 꼭대기에서 아래 부분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  22일 목요일 오전 10시경, 끔찍한 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게다가 전날보다 더 격렬했다. 노인들은 이런 소리는 이제까지 들은 적이 없다며, 두렵다고 했다. 우리는 매순간 끔찍한 재난을 당할 것이라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화산재와 화산전(cinders)이 너무 많이 떨어져 내려 눈이 따가웠기 때문에, 길을 다니는 사람들은 우산을 쓰거나 모자를 흔들며 다녀야 했다. 집의 지붕과 발코니는 이런 화산분출물로 두껍게 뒤덮여 있었다. 나폴리에서 80km 떨어진 곳에 정박해 있던 선박도 화산분출물로 뒤덮이는 정도였다.  이러한 공포의 와중에서 사람들은 흥분하고 초조해했기 때문에, 추기경은 성 야누아리우스의 두상을 가지고 나와 베수비오 방향으로는 나폴리의 맨 끝에 해당되는 막달레나 다리까지 행진해 나가야 했다. 그런데 성지의 두상이 화산에 다다르자 곧바로 폭발이 멈추는 것을 목격했다. 바로 그 순간 전날부터 계속되는 폭음이 그쳤다는 것이다.  윌리엄 해밀턴 <플레그라에안 평원>  * 1779년, 1, 000m가 넘는 고지에 있는 용암호, 그리고 화산재에 매몰된 도시  8월 5일 목요일 오후 2시경, 베수비오 화산 전면을 관찰할 수 있는 나폴리만에 있는 나의 파우실리포 저택(화산으로부터 직선거리로 약 5km떨어진)에서 화산이 격렬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8월 7일 토요일.. . 화산의 움직임이 격렬해졌다. 8월 8일 일요일, 오전 9시경, 커다란 폭음이 들리면서 포르티치와 그 주위에 있는 집들을 뒤흔들어 시민들이 놀라서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 폭발의 진동으로 창문이 깨지고 벽이 갈라졌다. 그렇지만 이 폭음은 나폴리에 있던 우리에게는 아주 약하게 들렸다. 한 순간에 불붙은 용암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높이는 점점 높아졌기 때문에 시민들은 놀란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 거대한 불기둥은 높이가 1, 130m 정도로 수직으로 솟아올랐으며, 그 높이는 베수비오 화산 높이의 세 배는 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새까만 연기가 끊이지 않고 빠르게 계속 솟구쳐 나왔으며, 그 사이사이로 붉고 뜨거운 용암이 보이기도 했다. 분화구로부터 연기가 솟아 나오는 순간, 연기 속에서 나는 밝고 창백한 섬광이 지그재그로 춤추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남서쪽으로 부는 바람은 약했지만 불기둥 밖으로 연기와 구름 같은 것을 날리고 있었다. 이것들이 후면에 검고 커다란 커튼 같은 것을 만들었으며(이 표현이 적당한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걷히자 맑은 하늘이 드러나며 별들이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거대한 불기둥은 어둠과 대조를 이루어 장관을 연출했으며, 잔잔하고 고요한 바다에 비친 불기둥은 더욱 아름다웠다.. .  저녁 5시경에 분화는 멈추었다. 비가 약간 왔는데, 화산의 부식성 소금기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포도밭이 큰 피해를 입었다.. .  검은 화산 모래 더미, 화산재, 불탄 나무, 부서진 집, 그리고 겁먹어 유령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흩어져 있는 주민들밖에 보이지 않는 황량하고 비참한 풍경.. .  베수비오에서 약 1. 6km 떨어진 오타이아노에는 약 1만 2, 000명이 살고 있었는데, 이 마을에서 벌어진 광경보다 더 비참한 광경은 본 적이 없다. 지붕은 다 날아가고, 검은 암재와 화산재로 반쯤 파묻히고, 산쪽으로 난 유리창은 모두 깨졌으며, 몇 채의 집은 불에 탔고, 거리는 화산재로 덮여 있었는데, 좁은 거리에 쌓인 화산재의 두께는 적어도 1. 2m는 되었다.  윌리엄 해밀턴 <플레그라에안 평원 부록>  * 1794년, 토레 델 그레코가 파괴되고 용암이 바다로 흘러내리다  6월 17일 아침 배를 타고 토레 델 그레코 마을에 도착해 보니 용암의 흐름은 이미 멈추어 있었지만, 연기를 내뿜고 있는 암재에서 나온 불덩어리가 만든 조그만 강이 바다로 떨어질 때마다 휙휙 소리가 나며 하얀 증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  바다의 물은 냄비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 . 바다는 계속 연기를 피웠고.. . 선원들은 배 밑바닥의 송진이 녹아 바다 위로 뜨는 것을 보고 놀랐다. 물이 스며들기 시작하자 우리는 뜨거운 용암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배를 대었다.  당시 토레 델 그레코 마을의 주민수는 1만 8, 000명이었는데, 이들 모두는 (나이가 들거나 병약하여 움직일 수가 없어 자기 집에서 용암에 묻혀 죽은 15명을 제외하고) 카스텔라마레(옛 스타비아)와 나폴리로 피신했다. 용암의 급류가 너무나 빨리 마을에 쏟아져 내렸기 때문에 주민들은 간신히 목숨만을 건질 수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집 안에 있는 동안 용암이 집을 둘러싸는 바람에 그 다음날에서야 비로소 지붕을 뚫고 나와 불그스름한 용암 위를 밟으며 걸어 나올 수 있었다.  늙은 수녀 여섯 명이 바로 이런 방법으로 6월16일 수도원에서 살아 나왔는데, 90세의 수녀 한 분은 수도원에 갇혀 있을 때 자기 방 창문에 흘러내린 백열하는 용암의 불을 쬐고 있었으며 무척 기분이 편안했다고 한다.. . 수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갇혀 살고 있던 수도원을 떠나려 하지 않았던 것이며, 알고 있는 지식의 범위도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  토레 델 그레코 주민들은 용암이 처음으로 바다로 흘러갈 당시를 이야기해 주었다. 어마어마한 높이의 용암이 바다로 흘러갔다고 한다.. . 그리고 많은 물고기들이 익은 채 바다 위에 떠 있었다고 한다.  윌리엄 해밀턴 <플레그라에안 평원 부록>  지옥에 대한 신부의 기록  19세기 중반까지 교회의 수도자들은 아주 훌륭한 화산폭발의 관찰자였다. 베수비와 에트나의 활동에 대한 대부분의 저술뿐 아니라 전세계에 걸친 대부분의 화산폭발을 가져온 지각의 대변동에 대한 기록은 모두 그들이 이룩한 업적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여러 폭발에 대하여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1730년에서 1736년 사이 카나리아 제도에 있는 란사로테섬에 용암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야이사 마을의 안드레스 로렌소 쿠르벨로 신부는 이 대변동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1730년 9월 1일 저녁 9시에서 10시 사이에 야이사에서 약 8km 떨어진 티만파야 근처의 당이 갑자기 갈라졌다. 첫날 밤에는 땅 속에서 커다란 산이 솟아 올랐으며, 그 꼭대기엣 불이 치솟아 19일 간이나 계속 불타 올랐다.. .  그리고 용암이 티만파야, 로데오, 만차 블랑카의 일부에까지 흘러내렸다. 처음에는 용암이 물처럼 빠른 속도로 마을의 북쪽까지 흘러내렸으나, 곧 속도가 느려져 꿀처럼 천천히 흘러내렸다.. .  9월 11일 용암이 또다시 세차게 분출하면서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용암은 산타카타리나산에서 마소까지 흘러내려와,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뒤덮은 뒤, 바다로 흘러갔다. 용암은 굉음을 내며 6일 동안 계속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바다 위에는 죽은 고기들이 떠올랐다. 곧 평온함이 찾아왔다. 그러나 10월 18일, 아직도 불타고 있는 산타카타리나 화산에 세 개의 새로운 분화구가 생겼으며 그 분화구에서 솟아 나오는 진한 연기가 온 섬을 뒤덮었다.. .  이런 현상을 동반하는 우레소리와 폭발소리, 그리고 대규모 화산재와 섬을 뒤덮는 짙은 연기 때문에 야이사와 그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몇 번씩 피난을 가야 했다.. .  10월 28일까지는 이런 화산활동이 10일 간이나 지속되었고, 전지역에 걸쳐 농축된 작은 방울이 떨어지면서 유독가스를 내뿜어 가축이 죽어 넘어졌다. 10월 30일,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  그러나 11월 1일, 연기와 화산재가 다시 나타났다.. .  11월 27일, 새로운 용암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바다 쪽으로 쏟아져 내려와, 12월 1일에는 해안까지 도달했으며, 바닷속에 조가만 섬을 만들었다. 그 주위는 수없이 많은 죽은 고기로 완전히 덮여 있었다.. .  12월 16일, 용암은.. . 추파데로에 도달했으며, 17일에는 추파데로가 거대한 불길에 휩싸였다. 그것은 비옥했던 배가 드 우고를 휩쓸었다.. .  1731년 1월 7일, 새로운 폭발이 일어나 위에서 언급한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매우 진한 연기를 동반한 용암이 화산의 두 군데 출구로부터 흘러 내려왔다. 연기 사이로 붉고 푸른빛의 밝은 섬광이 보였으며, 그때마다 천둥소리가 들렸다. 이 섬에는 지금까지 이런 폭풍이 없었기 때문에 이 광경은 주민들에게 너무나 무서운 것이었다.. .  2월 3일, 새로운 원추화산이 솟아올라 로데오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  3월 7일, 또 다른 원추화산이 솟아오르고, 그곳에서 용암이 흘러 탕가파 마을까지 흘러 내려가서 마을을 완전히 파괴했다.. .  사람들이 이제 불행은 끝났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균열이 생기고, 새로운 원추화산이 솟아올랐다. 해저 분출까지도 있었다.. .  정말로 끔찍한 일이었다. 주민들은 모든 희망을 버리고, 야이사의 신부와 함께 그랜카나리아섬으로 피난을 갔다. 땅은 1736년 4월 16일까지 계속해서 불타 오르는 현무암을 토해 내어, 마을과 초원 등 200제곱킬로미터가 넘는 지역을 뒤덮었으며, 400여 채의 집을 파괴하고 거대한 균열 위에 30개 이상의 원추화산을 만들었다. 비옥하고 풍요로웠던 섬의 서부 지역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과 그 역사>라는 저술을 남긴 조반니 마리아 델라 토레 신부는 베수비오 화산의 분화를 자세하게 기록했으며, 직접 몇 가지 진기한 실험을 하기도 했다. 1767년의 분화 기간에는 다음과 같은 위험한 탐험을 강행하기도 했다.  산은 무시무시한 굉음을 냈다. 그리고 폭발 때마다 솜마산의 절벽에서 떨어져 나온 돌이 수없이 우리 주위에 떨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뛰다시피 걸었다. 그러나 성 야누아리우스와 성 안토니에게 가호를 빌던 안내인은 우리들을 내버려둔 채 재빨리 수도원으로 도망쳤다. 곧 유황 구름이 우리를 둘러쌌기 때문에 그처럼 도망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만약 10분 정도만 그 현상이 계속되었다면 우리는 모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것은 빨리 지나갔다.  나는 용암을 쏟아 내고 있는 거대한 출구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질식할 것 같은 연기를 밀어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순간 우리는 연기 사이로, 불타 오르고 있는 용암덩어리가 세 개의 산을 가르고 있던 거대한 계곡을 완전히 뒤덮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관에 놀라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는 그 광경을 즐기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긴급회의 끝에 우리는 되돌아가는 것은 너무나 어려울 뿐 아니라 위험하고, 부끄러운 일이며, 파라오와 그의 군대를 집어삼킨 홍해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그 불구덩이 속을 건너갈 수 있는 방도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  그래서 우리는 솜마산 언저리에 아직도 안전한 통로가 있는지 살펴보았으나, 놀랍게도 (두려움은 아니고) 그곳도 용암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는 없었다. 우리는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가, 우리 생각에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용암의 끝을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길은 매우 위험했으며, 돌이 우리 주위로 마구 떨어졌다. 그리고 용암이 내뿜는 열은 참기 어려운 정도로 뜨거웠으며, 산등성이의 숲은 벌써 불타 오르고 있었다.. .  오타야네를 거쳐 포르티치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 9시경이었으며, 우리는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1783년 존 스타인그림슨 신부는 아이슬란드 남부에 있는 프레스트 바키에서 라키 화산의 대규모 분화를 관찰했다. 25km 이상에 걸친 폭발적인 균열로 135개의 화구가 생겨났으며, 580제곱킬로미터에 걸친 땅이 용암으로 뒤덮였다. 섬에 살고 있던 1만 명 이상의 사람과 60% 이상의 가축이 오염된 물과 기후변화로 죽었다.  나는 동료들과 함께 빙하의 크레바스(Crevasse, 빙하의 갈라진 틈)로 갔다. 불타고 있는 강은 이제 해빙사의 강물만큼이나 불어나 있었다. 이 흐름의 중간에 바위와 돌더미들이 힘차게 굴러 내려왔는데, 마치 거대한 바퀴가 헤엄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맹렬한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그 흐름이 전면 또는 측면에서 부딪치거나, 돌들끼리 서로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으며, 여기저기에서 무시무시한 불꽃이 날름거리고 있었다.  나는 또 지하의 분화도 관찰했다. 먼저 땅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풀어오르다가, 폭발음을 내며 조각조각 찢어지는 것이 마치 성난 짐승이 먹이를 물어뜯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용암의 작은 구멍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때로는 요란한 굉음, 불꽃, 모래의 분출, 옅고 짙은 연기와 함께 돌무더기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높이 솟아올랐다. 이렇게 신의 표상, 하느님의 분노를 두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가!  9일에는 화산재가 시다 방향으로 날아가 온 땅을 검게 만들었다. 10일에도 화산재가 계속 떨어졌다.  11일과 12일, 비가 세차게 퍼붓고 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화산재가 흩날렸기 때문에 땅이 다시 나타났다. 메덜란드 같은 곳에서는 모래가 떨어지지 않아 가축이 살아 남았다. 몇몇 시골사람들은 다시 돌아와서는 가축을 데리고 피난처를 찾아 서쪽 멀리까지 갔다고 하는데, 그것은 별로 소용없는 일이리라. 하느님이 벌하시기로 마음먹으면 아무도 그분의 섭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성신강림축일 후 다섯 번째 일요일인 7월 20일, 땅속이 우르르거리며 움직이는 가운데 천둥과 번개가 치는 잔뜩 찌푸린 날씨였다. 하지만 아직은 지낼 만했다. 나는 그 도시가 폐허로 변할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두려움에 떨며, 그리고 또 그곳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우면서도 고통스러운 생각을 하며 시다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 그러니까 지역 주민과 그곳을 방문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교회로 갔다.  천둥과 번개가 점점 더 빈번해지고, 강력해졌기 때문에 교회에 있는 모든 것이 번쩍거렸으며, 교회의 종소리도 들렸다. 땅의 진동도 더 잦아졌다. 우리들은 비탄에 잠겨, 하느님께 바친 이 교회를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드렸다. 우리의 연약함에 비하여 하느님의 전능하신 힘은 너무나 위대했다. 교회를 찾은 모든 사람들의 심정과 마찬가지로 나도 교회 안에 들어서자 어느 정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평상시와 같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었는데, 미사가 끝나기 전에 교회를 떠나거나 도망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느님께 기도드리기에 이처럼 안성맞춤인 시간이 또 언제이겠는가!.. .  미사가 끝난 후 우리는 용암이 어느 정도나 흘러내렸는지 살펴보러 나갔다. 우리가 도착한 뒤로는 눈에 뛸 만한 변화는 없었다. 용암은 동일한 위치에서 겹겹이 쌓이면서 부풀어 올라와 있었으며, 이제 폭은 150m, 깊이는 40m에 달했다. 더 이상 변화가 없다면 세상의 종말이 올 대까지 그곳에 그대로 있을 것처럼 보였다.  홀차강과 피야다라강은 용암이 만든 제방 위로 넘쳐흘렀으며, 격렬하게 부서지는 파도 때문에 강바닥을 따라 앞으로 흘러 내려가던 용암의 불이 꺼졌다. 그 강물은 작은 폭포를 이루며 용암이 쌓여 있는 사이를 흘러내렸다. 수도원 밑으로 흐르는 이 강물의 흐름은 노도와 같아서 하루 종일 말 한 마리 강을 건너지 못했다.  그 뒤 우리는 교회를 떠나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와 교회를 보호하고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오늘 살아 있는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하느님의 그 역사를 보고, 또 듣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의 숭고한 이름을 찬양하게 하소서.” 그날 이후 우리 교구에서는 불 때문에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여행자들이 분화구를 정복하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이 따를 것이 분명하지만, 분출하는 화산은 많은 여행자들을 끌어드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 여행사들은 화산의 장관을 감상하고 진한 감동을 맛보고자 한다. 안내자를 따라 다니는 화산 관람은 베수비오에서 시작되어 에트나로 퍼졌으며, 현재는 전세계의 거의 모든 화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베수비오 등정  베수비오가 관광명소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부터이며, 이때 이후로 마부, 안내인, 그리고 짐꾼들까지 동원되는 진정한 의미의 관광산업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몸이 약하거나 부유한 외국인들은, 걸어서 정상에 오르기보다는 네 명의 튼튼한 젊은이가 지고 가는 특별히 제작된 의자에 편안히 앉아서 산에 오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베수비오는 레지나, 산세바스티아노, 그리고 보스코트레카스 등 세 방향에서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코스는 레지나 방향이다.  레지나에서 만남의 장소는 폰타나 델 콜리 모치라고 부르는 광장이며, 그곳에는 17세기의 분수가 있다. 시세로니 델 레알 베수비오라는 표지가 있는 상점에서 요금을 정한 뒤, 사람들은 말이나 나귀를 타고 오르게 된다.. . 1840년경의 요금은 다음과 같았다. 한 마리의 나귀로 하룻밤 방문하는 데는 2두카트 40그라니, 한 마리의 말로 하룻밤 방문하는 데는 3두카트, 한 마리의 당나귀로 하루 낮 방문하는 데는 1두카트 20그라니, 한 마리의 말로 하루 낱 방문하는 데는 1두카트 50그라니, 하지만 이것이 지정된 가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때로는 끊임없는 언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것이 너무도 심해졌기 때문에 1846년 9월 3일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발표되었다. "안내인이 그들의 서비스의 대가로 제시되는 가격에 만족하지 않는 경우 안내인은 방문객의 수송을 위한 의자와 동물의 대절료에 추가하여 낮 동안의 등정에 대하여는 10카르린, 밤 동안의 등정에 대하여는 12카르린 이하의 요금을 추가로 요구할 수 있으며, 이 대절료는 노새, 말, 그리고 나귀 한 마리당 8카르린, 여덟 명의 짐꾼을 갖춘 의자당 4두카트를 초과하지 못한다. 단, 이들 동물은 단단하고 적절한 안장을 갖추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방문객은 베수비오의 붉게 타오르는 불빛을 보기 위해 한밤중에 등정하기를 원했다.  모든 등정은 램프나 횃불을 든 젊은이를 앞세우고 방문객과 안내인이 그 뒤를 따르는 기묘한 행렬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많은 주택가 옆으로 난 길을 지나서 수도원에 도착했다. 물론 1848년 이후 관측소까지 길다운 길이 닦인 뒤로는, 용암으로 길이 막히지 않은 경우 여기까지의 여행은 마차로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수도원에서 잠시 멈추고 휴식을 취하여 원기를 회복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방문객을 접대하면서 수도원에서는 <베수비오 수도원 앨범>이라는 제목이 적힌 커다란 책을 내놓고, 모든 사람의 서명을 요청했다. 이 앨범은 곧 값비싼 방명록이 되었다. 괴체, 몬티, 바이런, 뒤마, 말리반, 알리에리, 라마르틴, 그리고 플로베르 등 저명한 인사들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짧은 시나 경구를 쓰기도 했다.. .  일단 수도원을 지나면 진짜 등반이 시작되었다. 이 단계에서는 넘어지거나, 불타 오르는 용암 속으로 빠질 위험이 항상 있을 뿐 아니라, 갑자기 떨어져 내리는 화산암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여행자와 연결되어 있는 안내인이 협력하는 것이 절대적이었다. 안내인들은 방문객을 겁주기 위해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었으며 이것은 일종의 의식이 되었다.  베수비오 안내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수많은 저술이 있다. 용암으로 본을 떠준다고 동전을 한 뒤에 그 동전을 잃어버렸다고 한다든지, 불타 오르는 바윗덩어리에서 담뱃불을 붙인다는 등, 그들의 순진한 속임수나 농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여행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불평을 할 근거를 찾지 못했다. 오히려 이 건장한 짐꾼이 메고 가는 의자에 앉아서 외국의 여자 방문객들은 자신이 마치 여왕이라도 된 듯한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  하지만 일단 분화구에 도착하고 나면, 한편에서는 원추화산, 또 다른 한편에서는 초원의 풍경이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에 사소한 다툼은 사라진다. 여행자로서 그들은 느낌을 종이 위에 기록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문학가였다면 이 느낌은 더욱 강렬했을 것이다. 따라서 19세기에는 '분화의 그 순간 베수비오의 정상에서'와 같이 아주 낭만적으로 일기를 쓰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샤토브리앙처럼 화산의 분기공과 용암의 흐름 사이에서 일기를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나는 여기 베수비오의 정상에 있는 화산의 분출구에 앉아서 이 글을 쓴다. 나는 이 분화구의 밑바닥까지 내려갈 준비가 끝났다.”  비토리오 팔리오티 <베수비오, 분화의 역사>  에트나의 인상  드디어 에트나 화산을 보았다!  나흘 낮, 사흘 밤 동안 불을 내뿜고 있는 이 거대한 거물을 밟으며 돌아다녔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나는 스팔란자니의 말대로 자연의 비밀스러운 화학실험실 안에 있는 거대한 연구소를 떠난다.  간신히 사막, 협곡, 가스, 유황, 화산재, 암재, 그리고 용암으로부터 도망치면서, 나는 놀라고, 도취되고, 유황의 증기에 숨이 막히고, 화산의 열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나는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지경이다. 97시간도 안 되는 동안 내가 시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았다.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았고 내가 감내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맛보았다.  피로, 갈증, 전율, 최고의 열, 극심한 추위, 이 모든 것을 차례차례로 경험했다.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나에게 밀려온 적도 있었다.  나는 아무도 걸어 본 적이 없는 협곡의 밑바닥을 최초로 걸어보았으며, 닷새 사이에 다섯 살이나 더 먹은 것 같고, 구두도 두 켤레나 닳아 없어졌다.  하지만 마침내 나는 에트나를 보았다. 이제 죽는다 해도, 맨발로 걸어다녀야 한다고 해도 내 발이나 구두에 대한 미련은 없다.  그러나 현재 내 상태를 보건대 얼마 동안은 쉬어야 할 것 같다. 내가 지금 다녀온 곳에서 막 돌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시 그곳에 가기를 주저할 것이다. 그러나 내 구두가 만들어지는 동안 그리고 불쌍한 내 다리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 독자들은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관찰을 할 수 있으리라.  A. 드 구르비용 <에트나 화산 기행문>  * 일본의 키리시마에서 있었던 일  지금까지 나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화산은 잠잠하다. 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또 산에는 아무런 진동도 없다. 경사가 아주 급했으므로 나는 얼굴을 거의 땅에 대고 올라갔다. 내가 분화구의 언저리에 막 도달하려는 순간, 그리고 그것을 만지려는 순간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들렸다. 그 소리는 너무나 커다랗고, 온 사방을 꽉 채웠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 어느 곳에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급한 김에 저만치 떨어져 있는 안내인에게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안내인은 팔을 위로 올리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분화구를 쳐다보았다. 두껍고 진한 하얀 수증기, 연기, 그리고 회색 화산재의 기둥이 번개처럼 번쩍이며 붉은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는 바윗덩어리와 함께 하늘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분출물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장소를 찾아보았다.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10분 아니 그 이상이 필요하리라. 그리고 몇 초 내로 땅은 불타 오르는 바위와 암재로 덮일 것이다. 도망간다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죽음은 확실했다. 나는 시계를 꺼냈다. 8시 35분, 1분 이내로 모든 것은 끝이다. 그 기둥은 하늘 높이 1km 이상 솟아오른 뒤, 커다란 돌무더기들의 바깥쪽으로 원을 그리며 떨어졌다. 모든 방향에서 강렬한 폭음이 들렸기 때문에 화산이 우르르거리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것은 불타 오르는 돌이 공중에서 폭발하는 소리였다. 그 덩어리는 비스듬히 떨어졌다. 정말로 너무나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나는 불덩어리 한가운데에 있었다. 하늘도 땅도 사라지고 내 눈앞, 내 머리 위, 그리고 내 밑에 있는 것이라고는 구르고, 꺾이고, 쪼개지고, 떨어지는 거대한 불의 장막뿐이었다.. .  돌멩이가 내 머리를 때렸다. 나는 굴면서 앞으로 넘어졌다. 내 오른편에는 화산 분화구가 있었다. 나는 그런 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왜 움직이겠는가? 죽어 가는 마당에 어디에 있느냐, 서 있느냐 누워 있느냐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돌덩이가 쏟아져 내리며 내 등을 때렸다. 마치 지팡이로 두들겨 맞는 것처럼,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호두알 크기만한 화산재의 뭉치 때문에 나는 꼼짝못하고 땅위에 엎드려 있었다. 불타는 돌들이 내 주위로 떨어지자 땅속에 깊은 구덩이가 패었는데 그 조각들이 나를 덮쳤다. 그러나 나는 돌에 맞아 죽을 팔자는 아니었다. 화장되는 것이 내 운명이었다.  분화구가 부풀어오르면서 불타는 화산재, 자갈, 바위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몇 추 지나지 않아, 격류가 나를 덮쳤다. 나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아니 고통을 덜 받으면서 죽으려고 손으로 눈을 감쌌다. 불의 폭포가 내 몸을 지나갔다. 불타는 수증기만을 들이마실 수 있었다. 바윗덩어리가 오른편에 쌓이며, 점차 압력을 가했다. '아! 질식하는구나. ' 그때 갑자기 돌더미가 좀더 강력한 더미에 밀려 왼편 궁둥이 옆으로 떨어졌다. 발과 왼손이 그 조각들에 부딪혀 심하게 다쳤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서 있었다. 죽음이 나를 놓아주기로 한 이상 도망을 쳐야 했다.  나는 연기가 나고 있는 모자를 우산 옆에 높아두고, 목 뒤의 피범벅 속에 박혀 있는 시계를 꺼낸 뒤 천천히 고통을 참으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하늘에서는 계속 돌덩어리가 쏟아지고 있었으며,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연기 속에서는 화산재와 돌조각들이 산등성이를 타고 쏟아져 내려 발 사이로 굴러갔다.. .  나는 안내인을 다시 볼 수 없었다. 내가 대강 방향을 가르쳐 주자 마을사람 몇이 그를 데리러 갔다. 그날 밤 그 사람들이 가져온 소식에 따르면 그가 불행을 당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마을사람들은 안내인이 산등성이 저편에 쓰러져 있었으나, 격렬한 폭발에 막혀 그곳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틀 뒤에 잠시 분출이 멈췄을 때, 몇몇 용감한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 그의 시체를 가져올 수 있었다. 머리가 몸통에서 6m 앞에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갑자기 죽음을 당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의 시계는 반쯤 녹은 채 시신 옆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다니엘 리에브르  화산의 역사  베르길리우스(B. C. 70 내지 19)에서 말라파르트(1898내지1957)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의 작가들은 자기 나라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화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화산은 수백 권에 이르는 책의 주제가 되었고 쥘 베른, 알렉상드르 뒤마, 샤토브리앙 같은 프랑스 작가뿐 아니라 마크웨인 등 외국작가들까지도 매료시켰다. ,  * 플레그라에안 평원  생농 신부는 <그림 여행기>에서 3년 간의 이탈리아 생활(1759내지1761)을 기록했다. 약 500장의 그림을 곁들인 그의 책은 역사 지리학적 가치뿐 아니라 예술적 가치도 크다.  여행자에게 신기하면서도 가장 흥미로운 현상은 유명한 '개의 동굴'이다. 이 이름은 끊임없이 그 동굴의 바닥에서 약 1. 5피트의 높이로 솟아오르는 공기, 즉 유독성이 있는 공기를 이용하여 매일 개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 .  동굴에서 죽음을 초래하는 이 유명한 증기의 특성에 대하여 살펴보기 전에, 여행자를 따라가서 그가 목격한 실험에 대하여 들어보자.  "유독성 증기는 지상에서 약 10인치 되는 곳에서 나오고 있었고 그 안에 들어가는 모든 것을 질식시켰다. 내가 동굴에 들어설 때, 모자위로 떨어진 거미를 가지고 첫 번째 실험을 해 보았다. 나는 거미줄을 뽑아내고 있는 거미를 잡아 그 증기 속에 내려놓았다. 거미는 처음에는 자신이 짜놓은 줄을 따라 올라가려고 했으나, 내가 계속 아래로 떨어뜨리자 움직임이 둔해지더니 곧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내가 동굴 밖으로 거미를 꺼내자 거미는 다시 살아났으나, 다시 증기 속으로 밀어넣자 이번에는 완전히 죽어 버렸다.”  "다음은 보통 실험용으로 사용하는 개의 차례였다. 주인이 개의 네 발을 든 채로 데리고 와서 땅 위에 내려놓았다. 처음에는 그 개도 다른 동물처럼 숨을 쉬려고 애를 썼으나, 금방 허파가 당겨지고, 위장이 들어갔으며, 눈이 튀어나오고, 허옇게 변색된 혀가 두껍게 말리며 입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움직이지 않았다. 상태를 보아 2분만 더 그곳에 놓아 두었더라면 즉시 질식하여 죽었을 것이다. 이 가여운 동물의 운명을 보고 우리는 모두 무서워졌다. 그 개를 동굴 밖으로 내놓자 신선한 공기를 마신 허파는 처음 유독한 증기 속으로 던졌을 때와 같은 운동을 했다. 그리고 약 30초 후에는 비틀거리며 일어섰으며, 얼마 뒤에는 우리가 던져 준 빵을 맛있게 먹었다. 개는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 동굴 입구를 보고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느 개든지 이러한 시련을 열두 번에서 열다섯 번까지 견딜 수 있다고 하는데, 그 뒤에는 공수병에 걸린 개들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발작을 일으키며 죽는다고 한다.”  J. C. 드 생농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그림 여행기>  * 베수비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로 유명한 루이즈 비제 그브룅은 프랑스 혁명 초기에 이탈리아로 이민왔다.  이젠 내가 무척 좋아하는 베수비오의 모습에 대하여 이야기해야겠다. 내가 베수비오에 완전히 매료되기 전, 나는 이 화산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이 화산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를 아주 성대하게 맞아 주었고, 축복해 주었기 때문이다. 생앙주성의 불꽃놀이를 제외한다면 베수비오의 불꽃보다 더 아름다운 불꽃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첫 번째 여행에서 나와 동료들은 노아의 대홍수에 비길 만한 비를 동반하고 있는 무서운 폭풍에 휩싸였다. 우리들은 비에 흠씬 젖었지만, 그래도 정상을 향하여 계속 전진했으며, 그곳에서 우리 발 밑으로 흐르는 거대한 용암의 흐름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마치 지옥의 입구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는데, 나를 질식시킬 듯한 그 불의 흐름은 뱀처럼 구불거리며 나아가고 있었으며, 그 둘레가 3마일이나 되었다. 그날은 일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갈 수 가없었으며, 연기와 수많은 화산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 산의 정상은 보이지가 않아, 우리는 나귀를 타고 용암을 따라 내려갔다.. .  하늘에서 들려 오는 천둥소리가 산과 어우러져 내 는 소음은 무시무시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구름 밑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돌아가려고 움직이면 벼락이 떨어지지나 않을까 겁이 났다. 나는 서운한 기분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옷은 온통 화산재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피곤했다. 그래서 몸을 씻자마자 바로 달콤한 잠 속에 빠져들었다.  첫 번째 시도에 겁먹지 않고, 나는 며칠 뒤 두 번째 베수비오 등정을 떠났다. 날씨는 완벽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우리는 산 위에 올랐으며, 오래된 용암의 흐름과 바다에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화산은 이전보다 더 화가 나 있는 듯했으며, 낮과 마찬가지로 불을 볼 수는 없었다. 우리는 화산재가 쏟아져 내리는 것과 분화구에서 용암이 용솟음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대한 연기가 태양 빛에 반사되며 만들어 내는 그 색조가 너무나 아름다워, 나는 그림을 그렸다.  비제 르브룅 <회상>  샤토브리앙은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때의 경험을 <이탈리아 여행기>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1804년 1월 5일  나는 1월 5일 아침 7시 나폴리를 떠나 포르티치로 출발했다. 태양은 지난 밤의 구름을 쫓아 버렸으나 베수비오 화산은 언제나처럼 안개에 덮여 있었다. 나는 안내인과 함께 그 산까 지 여행을 시작했는데, 그는 노새를 두 마리 가져와 한 마리는 내가, 한 마리는 그 자신이 사용했다.  처음 우리는 포플러 나무로 경계를 세운 포도밭 사이로 난 제법 넓은 길을 통해 올라갔다. 오래지 않아, 나는 차가운 겨울공기를 느끼기 시작했으나 계속 전진했다. 대기의 중간층까지 덮고 있는 수증기 아래로 나무의 끝부분이 보였다. 그것은 수도원의 느릅나무였다. 탐스럽고 풍요로운 포도나무 한가운데, 왼쪽과 오른쪽에는 보잘것없는 포도원 일꾼들의 처소가 보였다. 다른 편에는 메마른 땅, 헐벗은 포도나무, 파라솔과 같은 소나무, 그루터기에 있는 알로에 몇포기, 셀 수 없이 많은 돌들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 하지만 새는 한 마리도 없었다.  첫 번째 고원은 헐벗은 평원이었으며, 그곳에서는 베수비오의 두 봉우리, 즉 왼편으로는 솜마산이, 오른편으로는 지금 우리가 목표로 삼아 가고 있는 분화구가 보였다. 이들 두 봉우리는 하얀 구름에 덮여 있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솜마산은 한쪽은 앞쪽에서 부터 낮아지고 있었으며, 다른 편에서는 내가 오르려고 하는 원추화산의 계곡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1766년에서 1769년 사이에 흐른 용암이 내가 건너고 있는 초원을 덮고 있었다. 그곳은 연기로 가득 찬 사막이었으며, 용광로에서 나온 찌꺼기를 뿌려 놓은 것처럼 검은 땅 위에 하얗게 드러나 보이는 용암은 마치 말라붙은 이끼처럼 보였다.. .  심연은 불꺼진 석탄덩어리처럼 진한 검정색이었다. 하지만 내가 종종 목격한 하느님의 섭리는 가장 혐오스러운 물체에서조차 은총과 즐거움이 풍겨 나오게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몇 군데에서 용암은 하늘색, 군청색, 노란색, 그리고 주황색을 띠고 있었다. 현무암은 불의 작용으로 뒤틀리고, 구부러지고, 끝부분에서 다시 구부러진 모습을 하고 있어, 마치 야자나무나 아칸서스 나뭇잎과 비슷해 보였다. 흘러내리다가 바위 위에서 식어 버린 화산 분출물들은 장미, 회전 분수, 그리고 리본 등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 주고있었다. 바위도 마찬가지로 나무, 동물, 마노(시칠리아에 있는 강 이름. 이 강 주위에 마노란 보석이 많이 있음:역주)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히 푸른 돌 위에 새겨진 하얀 백조의 모습이 내 눈길을 끌었다. 날개 속으로 머리를 숙이고, 긴 목을 비단처럼 등쪽으로 구부리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에, 잔잔한 호수에서 잠자고 있는 백조를 보았다고 맹세할 수 있을 정도였다.. .  대 플리니우스는 화산을 연구하고 싶은 열정 때문에 내가 지금 조용히 앉아 있는 화산의 한가운데에서 죽었다. 나는 주위에 있는 심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아래에 불의 바다가 있으며, 화산이 곧바로 내부로부터 솟구쳐 나와 내 주위의 바위들과 함께 나를 공중으로 솟구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샤토브리앙 <이탈리아여행기>  "베수비오 화산이 미국에서 온 옛 친구와의 재회의 기쁨으로 잠에서 깨어나다.” 이것은 나폴리 해안에 새로 도착한 미 제5군 사령부가 나폴리에서 발간한 1944년 3월 19일자 <성조>지의 헤드라인이었다. 며칠 뒤에 베수비오 화산분화로 포지오마리나에 있던 연합군 항공기가 거의 모두 파괴되었지만! 열변을 토하던 내레이터이며 소설가였던 쿠르치오 말라파르트는 그의 작품 <피부>의 한 장 전부를 1944년의 베수비오 분화를 기술하는데 바치고 있다. 그는 몇몇 마을을 파괴시킨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함께, 나폴리 시민과 미국인들이 공포에 떠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썼다.  큰 상처를 입어 동쪽으로 찢겨진 하늘은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이 피가 바다를 붉게 물들였다. 지평선은 불의 심연 속으로 무너져 내린다. 지축을 흔드는 충격으로 땅이 진동했으며, 집이 흔들렸다. 지붕과 테라스의 코니스(cornice, 건물이나 벽의 꼭대기에서 수평으로 돌출한 부분)에서 떨어진 타일이나 회벽이 길에 떨어지며 내는 둔탁한 소리는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표상처럼 들렸다. 뼈가 부서지고 갈라지는 듯한 기분 나쁜 찢어지는 소리가 공기에 실려 울려 퍼졌다. 두려움에 떨며 이곳 저곳으로 뛰어다니며, 또 눈먼 사람처럼 길거리에서 비틀거리는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고 하늘에서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베수비오가 울부짖으며 어둠 속으로 피와 불을 뿜어내었다. 헤르쿨라네움과 폼페이가 재와 돌의 무덤 속으로 산 채로 파묻힌 이래 이렇게 무서운 소리가 하늘에서 들린 적은 없었다. 거대한 불덩이가 화산의 입에서 나와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거대하고 웅장한 연기와 불꽃더미가 희미한 별에 닿을 듯이 창공으로 솟아올랐다. 베수비오의 등성이에는 용암이 마을을 향해 흘러내리고 있었고, 푸른 포도밭 사이로 흩어지고 있었다.. .  진흙더미가 검은 뱀처럼 구불거리며 솜마산의 등성이를 타고 천천히 흘러내려오다 용암의 흐름 속으로 섞였으며, 그곳에서는 빨갛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물 속에 집어넣을 때처럼 진홍빛 수증기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며 요란하게 쉭쉭소리를 냈다.  오징어의 먹통처럼 새까만 화산재와 백열의 돌을 품어 잔뜩 부풀어오른 거대한 검정구름(나폴리에서는 이 구름을 오징어와 같다는 의미에서 seccia라고 부른다)은 어렵게 베수비오의 정상을 빠져 나와서는, 북서쪽에서 부는 바람에 밀려(나폴리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카스텔라마레 디 스타비아 쪽으로 흘러갔다. 돌덩어리를 품어 부풀어 있는 거대한 검은 구름이 하늘을 휩쓸며 내는 소음은 돌덩이를 가득 실은 채 울퉁불퉁한 길을 굴러 내려가는 수레처럼 요란했다. 가끔 구름이 찢어지며 돌이 땅이나 바다로 쏟아져 내리기도 했다.. .  미군들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한 장면에서처럼 군중들과 뒤섞여 이리저리 밀고 치면서 두려움과 분노에 떨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땀과 화산재에 젖어 더러웠으며 군복도 엉망이었다. 이들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비열해졌으며, 이제는 더 이상 용감한 군인이 아니었다. 더 이상 의기양양한 승자가 아니라 자연이 맹목적인 분노에 내맡겨진 비참한 패잔병에 불과했다. 천국과 지상을 불태우고 있는 불 때문에 그들의 영혼도 한갓 잿더미로 변해 버린 것이다.  오랫동안 헤맨 뒤에 우리는 앙즈뱅성이 굽어보고 있는 넓은 광장에 다다랐는데, 성의 입구는 해안 쪽으로 나있었다. 그곳에서는 베수비오가 자주색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투구를 쓴 카이사르의 유령이 용암과 화산재의 왕좌에 앉아 가마를 탄 채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마는 용암으로 뒤덮여있었으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불덩이는 천상의 둥근 장을 뚫고 거대한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피가 강물처럼 그의 붉은 목구멍에서 흘러나왔으며, 땅과 하늘, 바다가 전율했다.  광장으로 뛰어들어온 군중은 마그네슘을 터뜨려 찍은 사진에서처럼 검고 하얀 그림자를 드리운 납작하고 번들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집앞 에 나와 서 있는 군중들의 모습에서는 얼이 빠져 초췌하고 긴장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불빛이 벽을 환하게 비추었으며, 테라스의 홈통과 코니스를 밝혔다. 보라색에 가까운 어두운 색깔은 하늘의 붉은 빛에 투영되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여러 갈래의 통로를 따라 광장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은 불붙은 돌덩어리를 품어 부풀어오른 채, 유성처럼 휘파람 소리를 내며 바다를 향해 굴러가고 있는 검은 구름을 쳐다보면서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 1944년 4월 1일 며칠 동안 땅을 뒤흔들고 불을 토해 낸 뒤 베수비오 화산은 조용해졌다. 조금씩 조금씩 조용해진 것이 아니라 갑자기 잠잠해졌다. 정상의 앞머리 부분은 구름에 둘러싸여 있었고, 화산이 갑자기 굉음을 내더니 불의 흐름이 냉정한 죽은 앞에 마비된 것이다. 나폴리의 신, 그리고 나폴리 사람들의 수호신이 죽은 것이다. 거대한 검은 베일이 시내, 바다, 그리고 파우실리프 위로 드리워졌다. 거리에서 사람들은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걸어다녔으며, 조용조용히 속삭였다. 마치 죽은 자를 다시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처럼.. .  때때로 석양의 찬란한 빛, 달빛에 반사된 은빛, 솟아오르는 해의 섬광으로 화산의 하얀 유령이 다시 불타 오를 것처럼 보이는 경우, 산고를 겪는 여인들이 지르는 비명과 같은 소리가 마을에서 흘러 나왔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창가로 나오거나, 길 밖으로 쏟아져 나왔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 서로를 껴안았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나 화산의 혈관을 말라붙게 하고, 지는 해의 검붉은 핏빛, 이 태양의 반사광, 새벽의 수줍은 빛들이 벌거벗은 시체가 되어 나폴리의 하늘을 덮고 있는 죽은 신, 즉 베수비오 화산의 부활을 알려줄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곧 실망과 분노가 뒤따랐다. 눈물조차 말라 버린, 기도하기 위해 잡고 있던 손을 푼 군중들은 화산을 향해 탄원과 분노의 주먹을 흔들었다.” 이 저주받을 화산아,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라. 이 망할 자식아, 우리를 불쌍히 여겨라.”  말라파르트 <피부>  * 에트나 화산  베르길리우스는 이 화산을 신들이 머무는 장소라고 말했다.  바람은 태양이 지면서 잠잠해졌으나, 우리는 길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키클로페스 해안을 따라 내려갔다. 그곳에는 입구에 바람이 잘 닿지 않는 거대한 항구가 있었으며, 항구 옆에서는 에트나 화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백열을 내며 타오르는 검은 연기를 하늘로 쏟아붓고 있었다. 또한 번쩍거리며 타고 있는 불덩이를 하늘로 토해 냈는데, 불덩이는 마치 하늘에 반짝이는 별에 닿을 듯했다. 그리고 화산 저 깊은 곳에서 튀어나와 들끓고 있는 바윗덩어리들은 우르르거리는 소리를 내며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풍문에는 벼락을 맞아 반쯤은 얼이 빠진 엔셀라두스(Enceladus, 손이 100개나 되는 그리스 신화의 거인으로 인간을 위해 신들과 전쟁을 했다:역주)의 몸체를 이 화산이 그 거대한 무게로 짓누르고 있으며, 그를 타고 앉아 있는 거대한 에트나 화산이 숨을 내쉴 때마다 불꽃이 솟는다고 한다.  그리고 엔셀라두스가 지친 몸을 뒤척일 때마다 시칠리아 전체가 요동하고 신음하며, 하늘이 검은 연기로 뒤덮인다고 한다. 그날 밤 우리는 숲속에서 두려움에 떨면서 지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 그 소리가 나는지 보지 못했다. 불빛도 별도 보이지 않았으며 성좌도 흐릿했다. 수증기가 하늘을 가로막고 있었으며, 달도 그날 밤 내내 검은 구른 속에 갇혀 있었다.  베르길리우스 <아에네이스> 제3권  알렉상드르 뒤마는 많은 시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그는 4년 간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관장과 폼페이 발굴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에트나는 물론 베수비오에 대하여도 잘 알고 있었으며, 그의 이러한 지식은 시칠리아 기행문인 <스페로나르>에 기록되어 있다.  저녁을 먹은 후, 제멜라로 씨는 에트나 화산에 오를 때 주의할 사항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우리는 럼주 한 병하고 닭 두세 마리를 요리한 것이면 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제멜라로 씨는 우리 차림새를 쳐다보았다. 벨벳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 자댕과 양복을 입고 있는 나를 보더니 그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외투나 덧옷이 없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등에 지고 있는 것밖에는 없다고 대답했다. 제멜라로 씨는 "역시 프랑스 사람답군.” 이렇게 중얼거리며 일어서더니, "그런 차림새로 출발하는 독일 사람이나 영국 사람은 결코 볼 수 없을 게요. 잠시 기다려요.” 하더니 군용 코트 비슷한 머리덮개가 달린 커다란 두 벌 찾아 주면서, 우리가 니콜로시에서 8km도 가기 전에 자기의 예견을 고맙게 생각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  산의 3분의 1 정도를 오른 뒤에는 400피트를 올라가는 데 거의 30분 정도나 걸렸다. 동쪽은 점점 밝아져 왔다. 해돋이를 볼 수 있는 시간까지 화산의 정상에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힘이 솟았다.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더욱 넓어지는 거대한 지평선을 감상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지 않고, 새로운 열정을 가지고 전진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위험해졌다. 한 발자국 나아갈 때마다, 산은 더욱 가파라지고 지반이 약해졌으며, 공기도 희박해졌다. 잠시 후 우리의 오른쪽 땅속에서 우르르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안내인은 우리를 열하로 안내했는데, 그곳에서는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꺼운 유황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그 열하의 옆으로 갔을 때,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바닥에는 붉은 용암이 백열을 내뿜으며 끓고 있었다. 발로 땅을 구르자, 먼곳으로부터 북치는 듯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다행히 땅 위는 아주 고요했다. 연기에서는 유황냄새가 지독하게 풍기고 있었으므로 만약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연기가 우리쪽으로 불어왔다면, 우리는 아마도 질식해 죽었을 것이다.  용광로의 옆에서 얼마 동안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힘이 덜 들도록 사선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귀에서 피가 나올 것처럼 머릿속이 윙윙거리기 시작했다.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공기가 점점 희박해져서 나는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처럼 헐떡였다. 누워서 쉬고 싶었으나 땅에서 나오는 유황냄새가 너무나 지독했기 때문에, 그 생각마저도 금방 사라졌다. 넥타이를 입에 대고 숨을 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나서, 그렇게 해 보았더니 숨쉬기가 훨씬 수월했다.  조금씩 조금씩 오르다 보니 어느새 4분의 3정도의 높이까지 올라와 있었으며, 몇백 피트 위로는 정상이 보였다. 마지막 힘을 다해 반은 걷고 반은 네 발로 가면서 그 짧은 거리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너무나 경사가 급했기 때문에 중간에서는 아래를 내려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보다 몇 발자국 앞에 가던 자댕이 마침내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분화구에 도착한 것이다. 몇 초 후에는 나도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두 개의 심연 사이에 서 있었다.  일단 정상에 도착하자 격렬하고 운동할 필요가 없어져서 숨쉬기가 훨씬 편안해졌다. 게다가 우리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너무나 장관이어서, 그렇게 심했던 고통도 금방 사라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주위가 8km, 깊이가 900피트나 되는 거대한 분화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구멍의 벽은 위에서 아래까지 유황, 황산, 알루미늄, 그리고 다른 파헤쳐진 물질로 덮여 있었다. 밑바닥에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무엇인지 끓고 있는 것이 보였으며, 협곡에서는 꼬리를 땅에 세우고 서 있는 거대한 뱀처럼 보이는 섬세하면서 구불구불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분화구의 가장자리는 울퉁불퉁했으며 높이도 제각각이었다. 우리는 가장 높은 지점에 있었다.  안내인은 우리가 그 장관을 잠시 바라보도록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약한 암반이 우리 발밑에서 무너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분화구 근처로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때때로 우리 옷자락을 잡아 주면서 엠페도클레스에 관한 우스갯소리를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사고를 방지하고, 주위를 돌아보기 위하여 분화구에서 약 20피트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  칼라브리아, 피초로부터 카포 델레 아르미, 스킬라로부터 레지오에 이르는 해협, 에트루리아와 에게해, 왼쪽에서 손에 닿을 듯이 보이는 아이올리스섬들, 오른편에 있는 옅은 안개처럼 수평선에 떠오르는 말타,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시칠리아섬, 그리고 우르르거리며, 불꽃과 연기를 내뿜고 있는 거대한 분화구: 머리 위는 천국이요 발밑은 지옥이다. 이런 장관은 피로, 위험, 고통 등 모든 것을 잊게 했다. 나는 정말로 육체와 마음의 눈을 통한 완벽한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위대한 하느님을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본적이 없다.  알렉상드르 뒤마 <스페로나르>  * 스네펠에서 스트롬볼리까지, 화산의 뱃속에서  쥘 베른이 지은 <지구 중심부로의 여행>에서 리덴브록 교수와 동료들은 아이슬란드의 분화구를 통하여 땅속으로 들어갔다가 스트롬볼리 화산을 통하여 밖으로 나온다. 이 저명한 작가는 50년 이상이나 앞서서 놀라운 과학적 성과로 기록될 수 있는 몇 가지를 상상했으나, 땅속 여행은 아직까지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스네펠의 분화구는 원추화산이 뒤집힌 모양처럼 보인다. 벌어진 입구는 지름이 약 2km, 깊이는 약 2마일 정도 될 것 같았다. 이만한 분화구가 불꽃과 우레로 가득 차 있을 때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깔때기 모양으로 움푹 팬 밑바닥은 둘레가 약 500피트가 되며, 그 때문에 정상으로부터의 경사는 그다지 심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밑바닥까지 올 수가 있었다. 퍼뜩 이 분화구가 화약이 장전되어 있는 거대한 대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났다.  "조그만 충격으로도 폭발할지 모르는 대포의 안쪽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미친 놈이나 할 짓이니. ".. .  분화구 아래에는 세 개의 맨틀이 있었는데 스네펠 화산이 폭발할 때, 가운데에서 용암과 수증기를 뿜어 냈었다. 각각의 맨틀은 지름이 약 100피트 정도가 되었지만 나는 그쪽에 눈길을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  우리는 순서대로 조심조심 내려갔다. 한스가 제일 앞에 서고, 그 다음이 삼촌, 내가 제일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완벽한 정적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때때로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돌멩이 소리를 뺀다면.. .  열기는 아직도 상당했다. 무의식중에 우리가 걷고 있는 이 조용한 길을 따라 가면서 스네펠 화산이 용암을 토해 낼 때의 열기를 떠올렸다. 쉭쉭소리를 내며 솟아오르는 뜨거운 바윗덩어리들과 그들을 감싸고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연기, 수증기, 고약한 유황냄새가 눈에 선했다!  "이 오래된 화산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생각에 잠겼다.. .  "무엇을 생각하고 계세요?"  "물위로 커다란 덩어리가 떠오르고 있구나.”  "또 물고기들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저녁 8시경에 우리는 그 괴물과 약 8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괴물같이 거무스름한 물결이 바다로 퍼졌다. 이것은 환상이 아닐까? 길이가 1, 000트와즈(toise, 길이의 당위로 약 2m:역주)도 넘는 것 같았다. 퀴비에도 블루멍바크도 예견하지 못한 이 괴물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잠든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바다마저도 그 괴물을 들어올릴 수 없는 것처럼 괴물의 옆구리에서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높이가 500피트는 됨직한 물기둥이 솟아오르더니 귀를 찢는 듯한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우리는 미친 사람처럼 이 거대한 물체를 향해 뛰어갔다. 갑자기 한스가 일어서더니 불안한 듯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  "홀므!"  "섬이다!"  삼촌도 소리쳤다.  "섬이라구요!"  어깨를 으쓱하며 나도 외쳤다.  "물론이지.”  커다란 소리로 웃으면서 교수님도 말했다.  "그런데 저 물기둥은 뭘까요?"  "간헐온천이란다.”  한스가 말했다.  "그래. 틀림없어. 아이슬란드의 게이셔와 비슷해 보이는 구나. ".. .  삼촌이 말했다.  "우리가 위로 올라가고 있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소리쳤다.  "우리가 올라가고 있다구. 위로 올라가고 있단 말이야.”  나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간신히 벽을 만질 수 있었다. 내 손은 즉시 피범벅이 되었다. 살갗이 찢어져 살이 드러났다. 우리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  그러나 앞으로 나아갈수록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거워졌다. 나는 한증막에서 목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끓는 쇳물이 넘쳐 흐르는 순간, 용광로에서 솟구쳐 나오는 뜨거운 수증기에나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스, 삼촌과 나는 윗도리와 조끼를 벗어야 했다. 옷을 벗으니 고통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불안했다.  "진짜로 불덩이를 향해 올라가고 있나요?"  내가 소리쳤다. 점점 더 뜨거워졌다.  "아냐. 이럴 수는 없어.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  삼촌이 대답했다.  "하지만, " 벽을 더듬으면서 내가 말했다. "이 벽은 정말로 뜨거워요.”  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물이 약간 손을 스쳤다. 나는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손을 뺐다.  "물이 끓고 있어요!"  내가 소리쳤다.  "모든 것이 너무도 분명하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지진 말이냐? 아니냐, 그보다 훨씬 더 중대한 사태인 것 같구나.”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고함을 질렀다.  "화산이 분출하고 있구나.”  "화산이 분출한다구요.” 내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럼 지금 우리가 끓어오르고 있는 화산기둥 속에 있다는 말씀인가요?".. .  "맙소사!" 절망적인 소리로 말했다. "분출의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군요. 그렇죠? 운명이 우리를 끓어오르는 용암, 불타고 있는 바위, 끓는 물, 온갖 폭발물로 가득 찬 이곳으로 몰아 넣었군요?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 화산암 찌꺼기와 화산재의 더미, 사납게 소용돌이치는 불꽃과 함께 이 속에서 들어올려져 밖으로 내던져지는 것이군요.”  "그래.” 교수님이 나를 안경 아래로 쳐다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지하의 내부에서 밖으로 빠져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란다.”  땅밑에 쌓인 수증기가 압축되면서 생긴 거대한 힘이 우리를 위로 밀어올렸다. 도대체 또 어떤 위험이 닥칠지 겁이 났다.  곧 희미하고 음산한 빛이 수직으로 뻗은 통로를 뚫고 들어오면서 점점 넓어져 갔다. 거대한 동굴처럼 생긴 왼편, 오른편의 길고 어두운 회랑이 보였으며, 그곳에서는 엄청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번쩍거리고 있는 불길이 우리를 삼킬 것처럼 날름거렸다.  "보세요. 삼촌!"  내가 소리를 질렀다.  "그래, 네가 보고 있는 것이 유황의 불꽃이란다. 화산이 분출할 때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  "하지만 저 불꽃이 우리를 감싸 버리면 어떡하지요?"  나는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게다.”  삼촌이 조용하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가 질식해 버리지 않을까요?"  내가 소리를 질렀다.  "질식하지는 않는단다. 통로가 빠른 속도로 넓어지고 있는 게 보이지? 필요하다면 뗏목을 타고 빠져 나가 옆에 있는 바위 틈 속으로 대피할 수도 있고.”  "하지만 그놈의 물이 점점 올라오고 있잖아요!"  나는 절망적으로 말했다.  "물은 더 이상 없단다.” 삼촌이 말했다. "하지만 끈적끈적한 용암이 우리를 분화구 쪽으로 밀어올리고 있구나.”  물기둥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들끓고 있는 것 같은 많은 분출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온도는 참을 수 없을 정도까지 올라갔다.. .  아침 8시경에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 우리는 모두 놀랐다. 위로 올라가던 것이 갑자기 멈추고, 뗏목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요?"  이러한 변화에 놀란 내가 투덜거렸다.  "그냥 멈춘 거야.”  삼촌이 대답해 주었다.  "화산분출이 멈춘 건가요?"  내가 물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  "좋아.” 삼촌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10분 내로 다시 출발하도록 하자.”  "10분 내로요?"  "그래. 정확하게. 우리는 화산과 함께 행동해야 할 것 같구나. 화산의 분출은 간헐적이잖니? 화산과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단다. ".. .  나는 그 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끊임없는 폭발, 거대한 화산암의 요동, 뗏목이 방적추 돌 듯이 돌던 것 등이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뗏목은 떨어지는 화산재를 맞으며 뜨거운 용암 위를 떠돌아다녔다. 거대한 불꽃은 소리를 내며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지하의 불을 돋우고 있던 거대한 환풍기가 폭풍을 몰아낸 것 같았다. 불꽃 사이로 언뜻 보이는 한스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모습이 마치 총구에 매달려 있으며, 총이 발사되면서 사지가 흩어져 버릴 운명에 처해 있는 사형수와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안내인이 내 벨트를 꽉 잡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손으로는 삼촌을 부축하고 있었다. 나는 심하게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으며 몹시 피곤했다. 잠시 후 주위를 돌아보니 내가 누워 있는 곳에서 2야드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커다란 구덩이가 있는 것이 보였다. 한 발자국만 잘못 디뎠더라면, 그 구덩이에 빠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분화구의 등성이를 정신없이 굴러내리고 있는 나를 한스가 구한 것이다.. .  "자, 잘 보렴.”  우리의 머리 바로 위, 저 먼 곳에 화산의 분화구가 보였다. 우리는 약 25분 전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힘차게 솟구쳐 오른 경석, 화산재, 그리고 용암이 뒤섞인 불기둥과 함께 그곳에서 빠져 나온 것이다. 나는 산속에서 자연의 꿈틀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콧구멍을 통하여 때때로 불과 공기를 뿜어대고 있는 커다란 고래와 같았다. 가파른 비탈을 따라 화산에서 솟아오른 물체들이 700 내지 800피트 아래까지 흩어져 있었는데, 그 화산의 높이는 300투와즈에 불과했다. 화산의 아랫부분에는 눈부신 초록색 숲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올리브, 무화과,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나무 등을 알아볼 수 있었다.. .  스트롬볼리! 이 말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대단한가!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지중해의 한가운데였다. 그 옛날 신화에 나오는 동양의 군도. 아이올로스(바람의 신)가 바람과 폭풍을 쇠사슬로 묶어 두었던 곳인 고대의 스토롱질로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그 푸른 산들은 바로 칼라브리아(Calabria, 시칠리아를 마주보고 있는 이탈리아 해안)의 산이 아닌가! 남쪽 수평선에 솟아올라 있는 웅장한 화산은 바로 에트나였다.  "스트롬볼리, 스트롬볼리.”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쥘 베른 <지구 중심부로의 여행>  * 킬라우에아의 용암호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화산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하와이에 있는 킬라우에아 분화구에 비하면 베수비오는 단지 어린아이의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킬라우에아 분화구를 보았다. 그 뒤 베수비오를 보았는데, 이곳에 비하면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주전자 같다고나 할까? 베수비오는 재미난 모습의 분화구를 가지고 있는데 그 높이는 3, 600피트, 지름은 1, 000피트에 불과하며, 그 화산의 불꽃은 웅장하지 못하고, 수수하며, 그리고 성질도 온순하다. 그런데 킬라우에아는 중심 분화구의 깊이는 어떤 곳에서는 800피트 또 다른 곳에서는 1, 300피트에 달하기도 하며, 그 둘레는 10마일이나 된다.. .  처음 산정상을 올려다보니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분화구 위쪽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는데, 밑에서 타오르는 불빛에 반사되어 장관을 이루었다. 그 반사되는 불빛은 넓이가 2km, 높이는 1km나 되었다. 깜깜한 밤중에 30 내지 40개 블록에 있는 모든 건물이 한꺼번에 불타 오르며, 그 불빛이 구름에 반사되는 광경을 멀리 떨어져서 구경한다고 생각하면, 지금의 이 광경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될 것이다.  분화구 위로는 거대한 구름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랐으며 구름기둥 주위는 진분홍색이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옅은 분홍색으로 색깔이 엷어졌다. 불기둥은 마치 횃불처럼 타오르며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  백열의 광채를 내며 부글거리다가 때로는 분노하듯 용솟음치는 용암의 검은 표면 이곳 저곳에서는 지름이 약 100피트에 달하는 구덩이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 이들 흐름은 다른 흐름과 만나 섞이고, 또 서로 가로지르면서 이리저리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 마치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가 지나간 자국을 보는 듯했다.. . 간혹 커다란 지표 덩어리가 마그마에 뽑혀 나와서는 방물에 떨어진 뒤, 강물 위를 뗏목처럼 천천히 떠내려갔다. 때로는 지표 밑에서 끓고 있던 용암이 지각을 뚫고 나오면서 500피트에서 1, 000피트에 달하는 불줄기를 뿜어 올리는 것이 마치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면 차가워진 용암은 산산조각이 나면서 해빙기의 큰 강에 떠오르는 얼음 조각처럼 솟아올랐다가 다시 부글부글 끓는 냄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다음 순간에는 넓은 지역에 걸쳐 한 순간 붉은 광채가 비추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식으면서 다시 검정색의 평지로 되었다. 이 짧은 순간 찢겨진 조각조각 주위로는 하얀 광채가 번쩍거렸으며, 안쪽으로는 북극의 오로라 광채에 의해 처음에는 찬란하던 노란 빛이 점점 붉어지다가 나중에는 새까만 색으로 변하면서 멋진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떤 물줄기들은 이 환상적인 동그란 조각들과 섞이면서 마치 돛을 내린 배가 동아줄에 이끌려 가는 것같이 보였다. 물론 그 동아줄은 불에 휩싸여 있었지만.. .  그 다음날은 분화구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2마일 떨어진 북쪽 호수에 더 가까이 접근하여 수심을 측정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  오래 걸어야 했지만 재미가 있었다. 북쪽 호수에 10시와 11시 사이에 도착하여 돌출되어 있는 거대한 용암 덩어리 위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피곤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먼길을 걸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광경이었다. 우리들 아래로는 끝이 없어 보이는 불의 바다가 가볍게 출렁이고 있었다. 그 빛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쳐다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빛은 햇빛처럼 강하지는 않았지만 한낮에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처럼 눈이 부셨다. 속이 비오 있고 하얗게 달아오른 용암기둥이나 분연구는 높이가 1 내지 5피트에 달했으며 크레바스를 따라 여기저기 불규칙하게 놓여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용암 조각, 귀중한 금속 조각이 흰색, 빨간색, 황금색으로 터져 나오면서 화려하게 수놓았으며, 끊임없는 폭발 광경은 어느 것과도 비길 수 없는 장관을 이루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분출은 미세한 수증기 막 때문에 여기에서 수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휘어진 모습으로 뿜어져 나오는 불의 분수는 멀리 떨어져서 볼수록 더욱더 신비롭고 아름답게 보였다. 때때로 우리 코 바로 밑에서는 헐떡거리던 호수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려고 힘을 한군데로 모으는 것처럼 숨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집채만한 새빨간 용암 덩어리가 줄이 끊어진 풍선처럼 솟아올라왔다가는 터지면서 반으로 갈라졌고, 그 중심에서는 희미한 초록색 증기가 나와 한순간 하늘을 떠돌아다니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마치 천벌을 받은 영혼이 감옥에서 빠져 나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용암 기둥이 굉음을 내며 부글부글 끓는 호수 속으로 다시 떨어지자, 세찬 파도가 호숫가로 밀려왔으며 우리가 자리잡고 있던 밑바닥이 진동했다. 우리가 앉아 있던 용암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호수 속으로 잠겨 버리자 주위의 땅이 지진이 난 것처럼 진동했다. 우리는 그것이 경고를 하지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마크 트웨인 <어려움을 헤치고>  열운의 관찰  우리는 흔히 파리 자연사박물관의 교수인 알프레드 라크루아가 1903년 처음으로 펠레 호산의 '열운'을 관찰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또 그 용어를 사용했다고 말한다. 그는 열운데 대하여 "고온의 조밀한 구름으로, 땅위를 훑고 지나가면서 동물을 태우거나 질식시키고, 식물을 파괴시킨다. 그것의 파괴행위는 넓은 지역에 거쳐 이루어진다. "고 설명했다. 1902년 마르티니크섬에 있는 생피에르 마을이 이런 현상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2만 8, 000명의 사망자를 냈다. 하지만 라크루아가 최초로 열운에 흥미를 갖고 기록을 남긴 사람은 아니다.  4, 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1631년의 베수비오 화산의 분화시, 목격자들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백열의 화산재'와 '번갯불치듯이 번쩍거리며 타오르는 구름'에 대해 증언했다. 그들은 굴러떨어지는 돌에 맞아 찌그러지고, 산산조각이 나고, 화산재로 갈가리 찢어진 나무부스러기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 파괴적인 격류는 어찌나 빠르던지, "두 아이를 깨워, 팔로 껴안으려고 하던 아버지가 아이들이 그 분류에 떠내려가는 것을 쳐다볼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고 한다. 토레 델 그레코에서는 내장이 모두 불타 버렸는데도 겉옷이 멀쩡했기 때문에 마치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희생자도 발견되었다. 위에 말한 모든 것은 열운의 파괴적인 힘을 잘 보여 준다.  아조레스에서도 1580년과 1808년의 상호르헤섬 분화를 목격한 사람들은 이런 화산 현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1808년의 폭발을 목격한 인근 마을의 주앙 이나시오 다 실베이라 신부가 기록을 남겼다. 신부는 최초로 ardente nuvem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것은 포르투갈말로 열운(nuee ardente)을 의미한다.  "5월 17일, 화산에서 솟구쳐 오른 불의 태풍이 농장, 포도밭, 숲, 울타리를 가로질로 왔다. 그때 형성된 강력한 열운의 분류는 30명 이상의 사람들을 불태우고 교회 밑까지 흘러왔다. 어떤 사람들은 손과 발에서 떨어져 나온 살이 그대로 달려 있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검게 타고 물질이 생겨,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리가 부러진 채,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 . 그 열운은 .. . 번지로 가득 차 있었으며.. . 그 무게로 인해 산의 경사를 타고 바다쪽으로 느릿느릿 흘러갔다. 그것은 매우 강력한 힘으로 이동하고 있었으며, 아주 조금만 페 안으로 들어가도 사망하는 정도였다.”  라크루아의 스승인 페르디낭 푸케는 1867년에 아조레스 제도를 탐사한 수에 과학지에 열운이던 용어를 썼으며, 1868년에는 1580년과 1808년에 있었던 상호르헤 화산의 분출을 기술했다. 또 다른 자연주의 학자인 테오도르 울프는 1902년의 페레 화산의 대분화를 기록하면서 열운이란 용어를 썼다.  박물학자인 테오드르 울프는 에콰도르의 코토팍시산 기슭에 살고 있는 인디오의 말을 빌어 그 화산이 1877년에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분화구에서 솟아오른 (연기와 수증기로 가득 차 있으며 밤에는 백열로 번쩍이는)새까맣고 거대한 덩어리가 사방으로 쏟아져 내렸는데, 원추화산의 등성이에서는 매우 빠른 속도로 흘러내렸다. 그것은 마치 밥솥에서 끓어오른 물이 넘쳐 불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15분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끓어오르며 번쩍이는 커다란 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 소리는 아래로 내려올수록 더욱 요란해졌으며, 산사태로 인해 주위의 얼음이 녹아 한 시간 동안이나 거대한 진흙의 분류가 흘러내렸다.  펠레 화산의 열운을 가까이에서 살펴본 최초의 화산학자는 템페스트 엔더스과 존 플렛이었다. 이들은 1902년 7월 9일 저녁 마르티니크의 생피에르를 출발하는 배에 타고 있었다.  900도나 되는 불그스름한 구름이 분화구의 틈새에서 나와 블랑슈강이 흐르는 계곡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그들의 기록을 보자.  "눈 깜짝할 사이에, 백열의 산사태가 빠른 속도로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와서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검붉은 색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는데, 마치 눈사태처럼 보였다. 불꽃을 튀기면서 구르는 거대한 바윗덩어리처럼 보였다.”  백열의 구름사태는 계속 바다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들은 뒤를 따라갔다.  "그것은 커다랗고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표면에는 수많은 작은 돌기들로 덮여 있었다. 작은 돌기들은 굉장한 힘으로 커지고 숫자도 늘어갔다. 구름은 시커멓고, 밀집되어 있었으며, 단단했다. 그리고 너무나 밝게 번쩍였기 때문에 악마처럼 보였다. 그것은 엄청난 속도로 모습을 바꾸었으며 가까이 올수록 커졌지만 둥근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옆으로 퍼지거나 위로 솟아오르지 않고 구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바다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 구름은 폭이 약 3km, 높이가 약 1. 5km 정도였다. 다행히 그들과 약 1. 5km 되는 거리에서 그 구름은 에너지와 속도를 잃고 흩어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앤더슨과 플렛은 이 관찰기록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1902년 10월과 1903년 3월 사이에 라크루아는 펠레 화산에서 여러 번 열운을 관찰했다. 그는 1902년 12월 16일과 1903년 1월 25일 열운을 촬영하고 자세하게 기록했다.  "열운이 나타나기 전에는 대개 둔탁하게 우르르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 소리는 열운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 틈이 갈라지면서, 돔형의 표면에서 단단한 물질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이다. .. . 열운이 나타나는 순간, 그 흐름은 작지만 밀도가 아주 높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돋아나는 새싹처럼 금방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 . 골이 깊게 팬 수많은 나선들은 끊임없이 원을 그리고 뒤엉키면서 확산되었다.. . 흐름은 앞으로 나아갈수록 커졌으며 때로는 높이가 4, 000m가 되는 수직의 벽을 만들면서 전율할 만큼 장엄한 모습으로 전진했다. .. . 열운은 (때로는 초속 11∼25m나 되었다) 때로는 천천히 또는 완전히 정지하기도 하면서 해안에서 3km나 떨어진 바닷속으로 흘러가 그곳의 경사를 완만하게 했다. .. . 열운은 수증기와 가스가 부유하고 있는 다양한 고형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 . 분화구를 나오는 순간 열운의 온도는 1, 100도정도, 6km나 이동한 뒤에도 200도가 되었다.  1929년의 펠레 화산의 분출 기간중, 미국의 용감한 화산학자 프랭크 페렛은 화산의 정상 부근에 오두막을 짓고 30m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열운을 수십 차례 관찰했다. 그중 하나는 그를 둘러싸기도 했지만, 그는 살아 남았다. 열운이 솟아오르고 있는 끈적끈적한 용암의 돔을 관찰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최초로 목격한 광경은.. . 비스듬하게 나아가고 있는, 하지만 굉장히 빠른 속도로 부피가 불어나기 때문에 마치 눈 깜작할 사이에 온 하늘을 덮어 버릴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덩어리였다. .. . 그 구름은 갑자기 수직적 확장을 멈추더니, 산등성이를 따라 수평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 . 그 순간 먼지와 재가 회선을 이루면 하늘 위로 솟아올랐는데, 마치 양배추처럼 보였다.  "이들 회선은 구르고, 분출하는 등 믿을 수 없는 움직임을 보여 주며, 백열을 내뿜는 덩어리 위로 솟아올랐는데, 전면에서 보면 역기가 분사되는 것이 돌진하는 사자 같았다.” 그후 전세계의 화산학자들이 열운을 연구했다. 열운으로 1500년 이후로 6만 명 이상이 죽었다.  모리스 크라프트  화산의 탄생  새로운 화산이 나타나는 것은 흔하지 않은 현상이다. 1세기 동안 지상에서는 겨우 몇 개의 화산이 새로 탄생하지만, 바닷속에서는 10여 개가 넘는 화산이 탄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에 바다에서 솟아오른 화산으로는 1948년 인도네시아의 플로레스에 있는 아낙 라나카에서 돌출한 돔형 화산이 있다. 새로 생겨나는 화산들을 처음부터 관측하는 경우 이것은 아주 훌륭한 이야깃거리가 된다.  * 파리쿠틴 화산  이 화산은 멕시코 미초아칸에 있는 밭 한가운데서 솟았다. 밭에는 지름 5m 정도의 구멍이 있었는데, 주인인 디오니시오 풀리도는 그 안에 잡동사니들을 계속 집어 넣어도 구멍을 메울 수가 없었다. 1943년 2월 5일부터 파리쿠틴 마을 주민과 2∼3km 떨어진 소도시 산후안 파랑가리큐티로 주민들은 땅이 흔들리고 땅속에서 우르르거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소리는 점점 커졌다. 2월 19일 하루 동안에 진동이 300번이나 있었다.  2월 20일 오후 4시경, 디오니시오는 아내와 아들, 벙어리이자 귀머거리인 이웃과 함께 밭을 갈 준비를 하다가 요란한 우르르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때 밭에 있는 구멍을 가로지르며 50cm 정도의 깊이로 땅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나무들이 흔들리고 벌어진 틈으로 땅이 솟아올랐다. 틈에서 쉭쉭소리를 내며 연기가 솟아오르고, 독한 유황냄새가 퍼져 나갔다. 그는 두려움에 떨며 파리큐틴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디오니시오가 밭으로 가보았더니, 화산재와 암재로 이루어진 원추화산이 10m나 솟아올라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계속 분출하고 있었다. 어찌나 빠르게 커지는지 정오에는 45m나 되었다. 일주일 후 밭 한가운데에는 파리쿠틴이라고 이름붙인 새로운 화산이 150m나 솟아올랐다. 폭발소리는 350km 떨어진 곳까지 들렸고 계속 화산재와 용암 덩어리가 1, 000m까지 솟구쳐 나왔다. 1년 뒤, 화산의 높이는 336m에 달했으며 디오니시오의 밭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1944년 7월, 원추화산에서 용암이 흘러 나왔으며, 8개월 뒤에는 10km나 떨어진 산후안까지 도달했다. 9월 말, 화산재에 완전히 파묻혀 1년 간이나 버려 둔 파리쿠틴 마을은 용암의 흐름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디오니시오는 우르르거리며 계속 무엇인가를 토해 내는 화산을, 그것에 푹 빠져 있는 화가인 에이틀 박사에게 400프랑을 받고 팔았다. 에이틀 박사는 1만 1, 000장의 소묘와 1, 000장에 달하는 파리쿠틴 화산은 9년 12일 동안이나 굉음을 내며 용암을 쏟아 내었다.  * 화산의 연쇄작용  파리쿠틴 화산이 태어난 해에, 또 다른 화산이 일본 훗카이도 남부에 나타났다. 1943년 12월 24일부터 우수 화산 부근에서 지진에 의한 진동이 강해졌다. 1944년 1월 말에는 땅이 점점 솟아올랐다. 그리고 부근에 있는 도로, 집, 관개용 수로가 갈라졌다. 솟아오른 지역에서는 샘물이 마르고, 그 샘물은 주위의 다른 지역으로 넘쳐 흘렀다. 지름이 4km나 되는 부풀어오른 중심은 후카바 마을 근처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6월 중순, 땅이 50m 이상 솟아오르고, 지진에 의한 진동이 점점 증가하더니 하룻만에 75m가 되었다! 후카바는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있는 거대한 피스톤 운동의 정점에 있었다.  6월 23일, 진흙과 모래로 이루어진 수증기의 분출이 있었으며 지름이 50m에 달하는 분화구가 나타났다. 그것은 3개월 동안이나 활동을 했다. 7월 2일, 거대한 폭발로 오래된 바위가 부서지면서 200만 톤의 화산재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농작물과 삼림이 큰 피해를 입었고, 후카바 주민들도 집을 버리고 떠나야 했다. 땅은 계속 솟아올라서 10월에는 150m나 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쇼와신잔(쇼와 시대의 새로운 산)이라고 불렀다. 지형이 엄청나게 달라져 철로가 변경되었고, 근처의 강은 댐이 되었다.  마침내 1944년 11월 1일, 점도가 높고 온도가 1, 000도에 달하며 지름이 300m나 되는 용암으로 된 불덩어리의 돔이 솟아 나와 계속 자랐다. 1945년 9월에는 쇼와신잔의 정점보다 100m, 1943년 이전의 지표면보다는 300m나 높게 되었다.  그곳에서 약 1km 떨어진 마을인 소베츠의 우체국장인 미마츠씨는 정기적으로 변하는 화산의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 덕분으로 일본의 화산학자들은 단속적으로 생긴 돔의 성장속도를 연구할 수 있었다.  모리스 크라프트 <어느 화산학자에 대한 질문>  세인트 헬렌스화산의 거대한 폭발  두 개의 커다란 화산폭발이 1980년대에 있었다. 1980년 미국 서부에 있는 세인트 헬렌스 화산의 대폭발과 1985년 진흙사태가 나면서 2만 2, 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콜롬비아의 네바도 델 루이스의 재폭발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세인트 헬렌스 분화로 화산학자들은 최초로 지각 대변동의 모든 단계를 관할할 수 있었으며, 화산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5월 18일 오전 8시 32분, 화산의 땅밑 1. 6km 지점에서 진도 5. 7의 지진이 발생했다. 10초 후 세인트 헬렌스의 북쪽 등성이에 있는 연약한 지반이 무너지면서 산사태가 났다. 15초가 채 되기 전에, 3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암반이 떨어져 나오면서 시속 250km의 속도로 언덕을 굴러 내려가 엄청난 산사태를 일으켰다. 일부분은 스프릿 호수로 굴러떨어졌지만, 대부분은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투틀강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20여km나 흘러갔으며, 그 지역 전체를 두께가 수백 미터에 달하는 얼음, 물, 그리고 각종 크기의 화산찌꺼기로 덮어 버렸다. 이 사태는 360m에 달하는 언덕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했으며, 스피릿 호수에 덜어진 암반은 60m나 되는 물기둥을 솟아오르게 할 정도였다.  * 엄청난 피해  산사태가 일어난 몇 초 뒤 마그마층의 간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300도에 달하는 화산재, 가스, 암반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열운이 솟아오르며 화산의 북쪽 30km, 부채꼴 170도에 달하는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열운의 속도는 처음에는 시속 350km였으나 몇 초 뒤에는 시속 1, 100km가 되었으며 훨씬 느린 속도로 그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는 산사태를 앞질렀다. 이 열운은 겨우 1분 30초 동안 진행되었다. 연면적 60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이 완전히 파괴되고, 높이가 30m나 되는 수백만 그루의 소나무가 뿌리가 뽑힌 채 열운의 진행방향으로 성냥개비처럼 쓰러졌으며, 57명이 사망했다.  상류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자 무너져 내린 산허리에서 수직폭발 현상이 일어나 15분 간 25km 높이의 거대한 화산재 기둥이 솟아오르고 버섯모양으로 흩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17시 30분까지 계속되었다.. .  화산학자들은 8시 40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태가 미세한 화산재와 경석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러한 사태는 마치 냄비에서 우유가 끓어 넘치는 것과 같이 새로운 분화구에서 넘쳐흘러 화산의 북쪽 등성이를 시속 100 내지 700km로 뒤덮고 스피릿 호수로 급하게 흘러내려갔다. 스피릿 호수에는 조그만 분화구가 많이 있어서 물과 300 내지 400도의 경석의 마찰로 수증기 폭발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날 아침내내 진흙더미가 세인트 헬렌스 주변에 뻗어 있는 계곡을 덮쳤으며 화산에서 40km까지 길을 막았다.. .  가장 큰 덩어리로 6, 000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진흙더미는 강으로 떨어졌다. 북쪽 끝에서 시속 100 내지 150km로 진행하더니 금방 속도가 느려졌고 온도는 30 내지 100도 사이였다. 19시경 가장 심하게 유출될 때는 두께가 20m였고 심지어 높이 90m의 언덕 위를 지나가기도 했다.. .  5월 18일 저녁 화산분출이 멈추자 화산학자들은 화산의 고도가 430m나 유실된 것을 확인하였다. 즉, 내장이 달아난 것이다. 철마와 같은 거대한 분화구가 옛날의 산정상에 북쪽을 향하여 생겼는데, 길이는 302km, 폭은 1. 6km, 깊이는 700m에 달했다. 3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사태였지만, 화산폭발시 1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화산분출물을 쏟아 내었으며, 이것은 절반 이상이 분연구에서 나온 새로운 마그마로 구성되어 있었다.. .  피해액은 엄청나서 약 10억 달러로 추정된다. 수백만 헥타르에 달하는 숲, 250여 채의 가옥, 일곱 개의 큰 다리, 300km에 달하는 도로, 20km에 달하는 철도, 수백 개의 트럭과 장비가 파괴되었다.  카티아 크라프트와 모리스 크라프트 <가장 아름다운 화산들>  화산학과 판구조론  20년 전 처음으로 등장한 판구조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물리학계에 파문을 일으켰던 것처럼 지구학계에서는 혁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판구조론 덕분에 화산학자들 은 지구표면의 화산 분포와 그들이 분출하고 있는 마그마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화산은 지구 표면의 특정 부분에서 용암 또는 부분적으로 가스를 잃어버린 마그마가 축적되면서 생긴다. 고온의 규산염 용액과 결정물의 혼합물로 용해된 가스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마그마는 지구 내부의 열과 화학작용으로 만들어진다.  * 지구의 내부구조  지구의 지표와 중심부 사이는 물리, 화학적 성분에 따라 확연히 구분되는 세 개의 동심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지각(lithosphere)은 70 내지 100km두께이며, 상부는 지구의 표면(대륙 또는 해양)을 구성한다.  -맨틀(mantle)은 부피가 가장 크고(83%), 어느 곳에서는 두께가 2, 800km나 된다.  -핵(core)은 반지름이 약 3, 500km이며, 단단한 중심부분을 용액상태의 외피가 감사고 있다.  지구의 가장 바깥쪽 층으로 지각과 맨틀 상부를 합한 암권(lithosphere)과 암권 바로 아래에 위치한 약 600km 두께의 가소성층인 연약권(asthenosphere)을 별도로 구분하기도 한다.  연약권은 맨 위쪽에 적은 비율이지만 용해된 규산염을 함유하고 있어서 이 때문에 가소성을 갖는다. 연약권에는 휘석과 석류석도 있지만 대부분(60%)은 감람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온도는 약 1, 300 내지 1, 400도이고 압력은 40kbar정도이다. 이 온도는 지구에 존재하는 칼륨, 우라늄, 토륨과 같은 자연 방사성 물질이 붕괴하면서 방출하는 열로 유지된다.  짧은 시간단위(초단위)에서 보면 맨틀(예를 들면 지진 맨틀)의 물리적 속성은 고체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단위(지학적 시간단위인 100만년)로 보면 맨틀은 가소성이며 대류현상(convection)을 보이고 있다. 암권이 이 운동에 가담하고 있으며, 이 암권이 쪼개지면서 연간 1km 미만에서 20cm 이상의 속도로 서로간의 위치가 변화한다.  관의 주위에서는 세 가지의 상대적 운동, 즉 분리(separation), 중첩(convergence), 휘어짐(sideways slip)이 일어난다. 대부분의 지표에서 일어나는 화산활동은 판의 분리 또는 중첩과 관계가 있다.  * 해령의 화산활동  판위 확장(distension)하면서 암권에 틈새가 생기면, 지각의 하중으로 압착이 일어나며, 이 압력에 의해 상층부 맨틀의 일부분이 용해되며 현무암의 마그마를 만든다. 마그마가 수직의 열하를 따라 분출하여 5 내지 10km에 달하는 두께가 얇은 지층 속으로 흘러들어갔다가 확장된 열하의 중심부인 단층(폭이 10km가 될 때도 있다)의 표면을 따라 흘러내린다. 해저에서 발생하는 현무암의 용암은 침상용암이라고 부르는 베개를 쌓아놓은 것 같은 독특한 형태의 화산암을 만든다. 암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대륙판(육지)또는 새로운 해양판(해저)은 단층의 축근처, 판의 끝부분에 고온의 물질이 축적되면서 형성된다.  해령(ridges)은 단층(rift)에서 두 개의 판이 들어올려질 때 만들어진다. 판이 젊고 형성중에 있는 경우, 그 판의 축을 이루는 끝부분은 온도가 낮으며 무겁기 때문에 밑으로 내려앉는 오래된 부분(차갑고 무거운)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고온이며 가볍다. 따라서 그 부분을 확장하는 해령이라고 부르는데, 폭은 1, 000km에 달하며, 지표에서 약 2, 500m 아래쪽에 있다.  해령은 6만km를 넘는 고리를 형성하여 지구를 둘러싸고 있다. 이것이 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화산체계이다. 사실 해저면(지구표면의 3분의 2에 달하는)의 거의 대부분은 계속 확장하고 있는 혜령에서 과거 2억 년 이상에 걸쳐 방출된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확장하는 혜령 중 두 개만이 지상에 있는데, 아이슬란드와 동부 아프리카의 아프리카 대지구대가 그것이다.  * 침강대(subduction zone)에서의 화산활동  판과 판의 중첩(convergence)이 산맥 형성과 지하 화산활동의 주요 원인이 된다. 이러한 중첩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일어난다.  두 개의 해양판의 중첩  이 경우, 한 해양판이 다른 해양판의 밑으로 지나가면서 맨틀 속으로 빠진다. 이러한 운동을 침강작용(subduction)이라고 하며, 일련의 화산섬을 만든다. 예를 들면, 서인도 제도의 소앤틸리스 열도, 필리핀의 마리아나 제도, 쿠릴 열도, 알루샨 열도, 그리고 통가를 들 수 있다. 또한 과달루페에 있는 펠레 화산과 수프리에르 화산도 이렇게 해서 형성되었다.  해양판과 대륙판의 중첩  이 경우에는 밀도가 높은 해양판이 대륙의 지표를 받치고 있는 암권 밑을 지나가면서 맨틀 속으로 빠진다. 이 결과로 코딜레라(cordillera)형 화산대가 형성된다. 예를 들면, 안데스 산맥과 인도네시아가 그것이다. 이 또한 침강작용의 결과이다.  침강작용으로 없어진 해양판의 질량과 새로 생긴 해령의 질량은 동일하다.  아래로 내려가는 판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형과 마찰로 700km 아래쪽까지 지진을 일으킨다. 맨틀과 접촉하면서 다시 가열이 되면서, 침강된 물질의 일부가 용해되어 안산암 마그마를 만든다. 이것이 태평양 화산대라고 부르는 코딜레라와 화산호를 생성시킨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들 화산은 폭발적인 분출이 특징인데, 이것은 안산암 마그마에 가스가 풍부하고 점착성(viscosity)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휴지기간이 수 세기나 계속되는 경우도 있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특히 더 위험하다.  끝으로 두 개의 대륙판이 충돌하면서 대규모로 접히는 경우, 알프스나 히말라야 같은 산맥이 생길 수 있다. 이 경우 지진은 아주 중요하지만 화산활동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 판 내부에서의 화산활동과 열점  화산활동의 또 다른 원인은 맨틀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물질이 솟아 올라와 암권의 기저부에 도달하면서 가스발염기(blowtorch)처럼 암권을 뚫고 나오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이들 기둥이 솟아오르는 표면을 열점(hot spot)이라고 하며, 이러한 화산활동에서 나오는 마그마는 처음에는 알칼리성으로 액체상태인 현무암인데, 용암의 흐름 또는 용암호(fountain)의 형태로 지표면으로 솟아오른다. 화산기둥(column)은 지구핵에 대하여 고정되어 있으며, 이 발열점 위로 판이 움직이면서 지표면에 화산열도와 같은 흔적을 남긴다. 하와이와 타히티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현재 땅 위에는 수백 개의 열점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와이, 티베스티 산맥, 히티, 레위니옹섬 등. 푸르네즈 정상에 있는 활화산도 이 유형에 속한다. 이들은 화산학자의 큰 관심을 끌고 있는데, 빈번히 폭발하여 화산활동을 관측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관측방법을 완성시킬 수 있는 훌륭한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해저면, 특히 태평양의 해저면에는 생성의 역사가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해저 화산구조가 있다. 프랑스와 연면적이 비슷한 지역에서 높이가 1, 000m가 넘는 100여 개의 화산이 발견되기도 했다.  끝으로 몇몇 대륙판의 열하분출로 독특한 형태의 알칼리성 화상활동을 모여 주는 지구대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아프리카 대지구대나 라인 계곡과 같은 대륙단층이다.  * 프랑스의 활화산  프랑스의 화산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는 펠레, 수프리에르, 푸르네즈 세 화산 이외에도 많은 화산이 해외에 있다.  태형양의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있는 화산으로는 소시에테 제도와 타히티의 동쪽(중요한 것만 해도 메헤티아, 로카르, 테아히티아, 마우아 피하)의 열점을 형성하는 해저화산, 오스트레일리아 열점을 형성하는 맥도널드의 해저화산 등이다. 이 화산들은 원자력위원회 산하 지구물리학 탐사실험실의 지원 아래 감시를 받고 있는데, 최근에 들어와 활발한 화산활동을 보이고 있다.  인도양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테르제도, 프랑스령 남극, 암스테르담, 세인트폴, 케르겔렌 제도의 화산이 가장 최근까지 활동했으며, 아직까지도 연기를 내뿜고 있다.  파리 지구물리학 연구소  화산활동의 감시와 분화의 예측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분화하여 2, 000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만약 오늘날 다시 분화한다면-우리가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면-20만 명의 희생자를 낼지도 모른다. 토양이 비옥하기 때문에 활화산 근처의 인구밀도는 심각한 수준까지 높아졌다. 따라서 분화 가능성이 있는 수천개의 화산을 관찰하여 분화시기를 예측하는 것이 시급하다.  불행하기도 150여 개 화산을 감시하기 위해 현재 약 30여 개의 화산관측소 및 연구소가 있을 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정확한 예측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최근에 와서는 지형의 변형상태를 위성으로 탐지하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화산감시는 마그마의 상승을 수반하는 여러 현상을 연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마그마는 거대한 압력을 가해 열하를 만들고(이 때문에 지진이 일어난다). 구조적 변형을 일으키며(측정가능할 정도의 기하학적 변형), 지구의 자장에 변화를 가져온다. 게다가 마그마에서 분출되는 가스는 마그마보다 유동성이 크기 때문에 먼저 지표에 도달한다.  화산의 휴지기간중 이들 지표의 변화를 알면, 분화의 조짐을 미리 포착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정확한 예측도 할 수가 있다. 더욱이 지난 2, 000년 간 축적된 화산분출에 대한 지학적, 화산학적 연구활동의 결과로 그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으며, 미래의 폭발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 지진과 화산활동  판과 판 사이의 경계에서는 판이 압력을 받는 경우 격렬한 지진이 일어난다. 화산의 마그마가 불안정하게 되면 화산구조 내부에 지진충격(seismic shocks)을 가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화산이 폭발하기 전에 지진이 일어난다. 1976년에 과달루페에 있는 수프리에르 화산이 폭발한 대에도 대규모 지진을 동반했다. 지진학은 이러한 형태의 관측을 통해 화산분화의 시기를 예측하게 되었다. 과학자들은 푸르네즈 화산에서 지진활동이 증가하는 것을 관찰하여 지난 수년 간 분화장소, 분화시기 등에 대하여 예측을 하고 경고할 수 있었다.  앤틸리스와 레위니옹 화산에 설치된 모든 지진관측소에는 지진파로 인한 지표의 움직임을 측정하는 지진계가 장치되어 있다. 이 지진계는 자체 발전장비를 갖추고 있으며(태양열 또는 풍력발전장치) 관측장소에서 측정된 수치를 라디오 안테나를 통해 계속해서 송신하고 있다. 이 자료를 분석하여 시간대별로 지진활동의 변동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이러한 관측소를 통하여 과학자는 일반인들이 감지할 수 없는 미세한 진동과 화산활동에 선행하거나 수반하는 미세한 지진의 진동까지 감지할 수 있다.  또한 화산 단층지괴(massif)의 여러 곳에 관측소를 설치해서 정확하게 진원지를 알아내고, 지진의 중심부를 계속 추적할 수 있다. 만약에 정상 이상의 지진이나 일련의 지진이 감지되면 곧바로 경보를 울리게 된다. 지진진동의 횟수가 늘어나거나 진도가 강해지면 화산분화가 임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모든 관측망을 통한 감시가 더욱 철저해진다.  * 변형과 화산활동  용암이 깊고 좁은 열하를 빠져 나오거나, 이전의 분화에서 생긴 용암의 찌꺼기(plug)를 밀어내려면 강한 압력이 있어야 한다. 이 압력은 마그마가 심층부로부터 마그마 저장소로 분출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 압력으로 화산의 전체 구조가 변형된다. 즉, 화산이 폭발하기 전이나 폭발 도중에 화산을 팽창시키거나 분할해 지형을 변화시킨다. 따라서 이러한 변형을 감시하기 위해 화산의 기하학적 변화를 연구한다. 이러한 연구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지형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마그마 저장소 내부의 압력이 변화하여 생기는 구조의 전반적 변형을 연구하는 지형적 연구방법이며, 다른 하나는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는 않는 방법이지만 지구물리학적 연구가 있다.  단층(faults)에 대한 감시  단층에 대한 감시, 즉 그 지방의 전반적인 판의 진화와 마그마가 침투하여 열하가 벌어지는 현상에 대한 연구는 현지에서 해야 한다. 이러한 감시는 대규모 시설공사(댐이나 터널 등)를 감독하는 방법에서 도출한 도량형학적(mertological)방법과 지구물리학적(geophysical)방법을 모두 이용한다.  첫 번째 방법은 열하 양 끝부분의 상대적 위치의 변화를 밀리미터의 백분의 일 단위까지 관측하며, 두 번째 방법은 이들 움직임을 기록하고 무선으로 전달해 준다.  이 두 가지 방법이 모두 화산관측에서 활용되고 있다. 푸르네즈 화산의 정상은 아주 세밀하게 관찰되었다. 그 화산의 빈번한 분화로 축적된 중요한 결과를 통하여 화산분화의 각 단계별 기하학적 진화에 대하여 알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화산분화의 진화과정을 알게됨으로써 분화시기를 예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자기측정(Magnetometry)과 화산활동  화산은 대부분 단층(faults), 대수층(aquifers), 비틀린 지대 (distorted zones) 등 복잡한 지질학적 구조를 가진 지역에서 일어난다. 이런 구조는 시간이 경과하면서 지표상의 자장구조를 변화시킨다. 이들 변형의 공간적 배치 및 변형의 정도는 각양 각색이다. 따라서 휴지상태에 있는 화산단층괴의 자장 특성을 자세하게 관측해야 한다. 그리고 후면 자장대로 인한 편차를 제거하기 위하여 과학자들은 동시에 모든 자장 관측소에서 측정된 수치와 준거지점(reference point)으로 선정된 어느 한 관측소에서 측정된 수치 간의 차이를 계산한다.  이들 차이에 대한 날짜별, 공간별 진화를 감시함으로서 화산활동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다.  * 유체지구화학(Geochemistry of Fluids)과 화산활동  마그마는 용해된 가스와 때로는 결정화(cystallization)로 생겨난 광물질을 포함하고 있는 용해된 규산염으로 가득 찬 용액이다. 마그마 저장소 안에서, 이들 성분은 고온이고 압력이 중간 정도일 때 열역학적 균형을 이룬다. 마그마가 상승하고 지표의 틈이 벌어지면 상부에 감압작용을 한다. 용해된 규산염 안에 있는 가스의 용해도는 압력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감압은 미세한 거품을 발생시켜 마그마에서 가스를 제거한다.  이들 미세한 거품의 발생과 성장 속도는 여러 가지 요인, 즉 감압율, 상승속도, 마그마의 점도, 마그마의 내부 구성요소 간의 팽창속도 등에 의해 결정된다. 이들 거품은 1m까지 자라기도 하는데, 이 현상 때문에 마그마가 갈라진다.  한편, 가스마다 용해도가 다르기 때문에, 감압에 따른 가스 제거도 달라지며, 분화단계에서 마그마의 화학적 구성도 다르다. 화산 가스의 화학적 성분을 분석하면 분화과정의 진화에 대하여 알 수 있다.  더욱이 이들 화산괴는 프랑스의 화산이 위치하고 있는 적도 부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경사가 급격한 단층을 형성한다. 빗물은 쉽게 화산암에 스며들어 지하수면을 높게 한다. 지하수도 화산활동에서 나온 물질이 이동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체지구화학은 이러한 현상을 관찰하여 화산을 감시하고 있다.  마그마는 지층이나 암석을 뚫고 들어가면서 그 주위에 있는 열을 비정상 상태로 만든다. 마그마는 열을 내뿜을 뿐 아니라, 스며드는 물과 접촉하면서 화학적 성분을 이동시킨다. 마그마의 상승은 여러 가지 불안정한 물질(이산화탄소, 아황산가스, 황화수소, 알칼리 할로겐 등)의 분출을 동반하며, 이들 물질은 마그마를 따라 이동한다. 이들은 이 체계의 실질적인 칸막이 역할을 하는 지하수면과 만나면서 부분적으로 용해된다.  화학적 구성의 변화와 지하수면 아래에서 올라오는 지하수의 온도는 과학자들이 화산활동의 진전상태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지표가 된다. 따라서 유체지구화학적 감시는 정기적으로 샘플을 채취하여 화학적으로 분석할 뿐 아니라 물리적 특성, 온도, 전도성의 측정 등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 지질학(Geology)과 화산활동  지질학적 연구는 화산관측소 내부에서 이루어지는데 각 화산의 최근 분화역사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다. 활화산의 과거는 대개 그 화산의 미래를 결정하며 과학자들이 가증한 시나리오를 가정할 수 있게 한다.  거기에 사용되고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현장에서 견본 수집, 각각의 분출에서 나온 분출물의 분포도 작성, 분출 단계별로 구성된 단면도 수집  -실험실에서 연구하기 위한, 각각의 분출물의 완벽한 견본 추출  -분출물의 본질을 결정하기 위한 상세한 암석분류학적 연구 및 현미경과 전자현미경을 이용한 분석  -마그마의 주요성분 및 미량성분에 대한 화학적 구성, 동위원소 비율 등 마그마의 진화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지구화학적 연구  -광물에 포함된 방사능의 불균형 상태를 이용한 나무화산의 탄소연대 측정법을 통한 분출일자의 기록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과학자들은 마그마와 분화의 역사가 잘 나타나 있는 상세한 화산의 지질학적 지도를 그릴 수 있다.  * 프랑스의 활화산과 관측소  파리의 지구물리학 연구소, CNRS, 클레르몽페랑 화산연구소, 각종 과학 단체와 여러 대학의 화산연구팀이 프랑스 각지의 화산에 대하여 관측하고, 모형을 만들고 실험을 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세 개의 화산, 다시 말해 마르티니크섬의 펠레 화산, 과달루페섬의 수프리에르 화산, 레위니옹섬의 푸르네즈 화산은 파리 지구과학 관측소에 소속된 관측소에서 감시하고 있다.  * 펠레 화산 관측소(마르티니크)  펠레 화산은 소앤틸리스 열도 주변에 최근 형성된 화산열도에 있는 화산이다. 이 화산은 카리판 밑으로 대서양판이 침강되면서 생겼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앤틸리스 열도를 발견한 이후로 네 번의 화산분출이 있었다. 1792년과 1851년의 분출은 수증기 폭발에 의한 것이었고 1902년과 1929년의 분출은 마그마 폭발에 의한 것이었다.  펠레 화산의 분출은 상대적으로 빈도가 낮은데, 이는 카리브판 밑으로 대서양판이 침강되는 빈도가 낮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이 화산의 분출은 파괴적이고 격렬하다. 1902년의 분화로 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처한 뒤, 이 화산의 감시는 필수불가결하게 되었다. 그래서 1902년에 폭발한 이후에 라크루아가 관측소를 세웠다. 그것은 지구물리학적 측정을 위한 일부 장비만을 갖춘 오두막집에 불과했으나 1925년까지 활동을 했다. 그러나 화산이 더 이상 활동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활동을 중단했는데, 4년 후인 1929∼1932년에 대분화가 일어난 것이다.  대분화가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현재의 관측소 설치가 결정되었다. 장비 중에서는 '케르뱅 피카르(Quervain Piccard)'라는 무게가 20톤이나 되는 지진계가 가장 눈에 띄었으며, 중력계, 전계측정기, 자장기록기와 화학 실험실 등을 갖추었다.  1976년 수프리에르 화산이 폭발한 것을 계기로 펠레 화산 관측소의 관측망도 전부 현대화되었다. 현재의 관측망에는 약 20여 개에 달하는 지구물리학 감시소가 포함되어 있다(이곳에서는 지진, 자장, 경사를 측정한다). 각 감시소에서는 무선을 통하여 모든 자료를 관측소로 송신하며, 그 자료는 관측소에서 컴퓨터에 의해 자동처리된다. 여기에 관측소에서 정기적으로 측정한 자료가 추가된다(물의 지화학, 고저측량 및 거리변화.. ).  * 수프리에르 화산 관측소(과달루페)  펠레 화산과 마찬가지로 과달루페의 수프리에르 화산도 최근 소앤틸리스 화산열도에 생긴 화산 중의 하나이다. 그 화산은 저지대 남쪽에 형성된 화산대에 속한다. 이 화산대는 병렬상태의 두 체계로 이루어졌다.  -그랑데쿠베르트에 있는 삼중화산. 엄밀한 의미에서 이 화산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은 수프리에르 화산이다.  -삼중화산의 남서쪽에 위치한 마들렌에 있는 작은 규모의 화산. 지난 3, 000년 동안 마그마 분출이 세 번에 걸쳐 연속적으로 일어났으며, 이때 아믹돔, 에셀과 세테른의 암재 화산고, 그리고 1440년의 폭발로 수프리에르돔이 생겨났다.  수프리에르돔은 이때부터 여러 번에 걸친 수증기 분출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했던 것은 1797 내지 1798년과 1976 내지 1977년 사이에 있었던 분화였다. 수프리에르 화산은 전반적으로 펠레 화산과 비슷한 정도로 위험하다. 1976∼1977년의 분출은 경미했지만 경제적, 사회적 혼란을 가져왔으며 정부에서도 화산감시망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개발된 연구 프로그램을 여러 각도로 활용하여 화산의 역사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과거에 발생했던 대참사를 보여 줌으로써, 질적으로 우수한 감시의 필요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파리 지구과학연구소에서는 화산관측소를 설치하기 위하여 수프리에르 화산 기슭에 위치한 생클로드 고지대에 있는 파르나스 영지를 1950년에 사들였다. 같은 해에는 마잉카 솜 지진계 두 대를 설치했다. 1952년의 지진으로 뚫린 지하실에는 1956년에 전자지진계를 설치했다. 그해에 수프리에르 화산에서는 수증기 분출이 있었다. 1964년에 건물을 개조하고 귀중한 지진장비를 장착했다. 각 시험소와 관측소는 유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1975년에는 무선으로 연결된 곳도 생겼다.  수프리에르 화산에서 지진의 급격한 변화를 감지하고 1976년 3월부터는 지표면의 분출이 임박했음을 예고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감시망 덕분이었다. 1976년 7월과 8월 사이에는 생클로드, 바스, 테르 지역을 소개시키면서 생사를 요새에 있는 거대한 화약고 안에 관측소를 세웠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 관측소는 남아 있으며, 지구화학 실험실과 관리실만 파르나스로 되돌아갔다.  1976년의 폭발을 계기로 현대적인 관측망이 수프리에르 화산뿐 아니라 펠레 화산에 설치되었고, 몇 년 후에는 레위니옹의 푸르네즈 화산 정상에도 설치되었다. 수프리에르 화산에서는 주로 지진, 화산 변형에 대한 연구, 분기공과 인근지역 수원지의 화학적 구성을 연구한다.  생샤를에 자리잡고 있는 관측소는 15개의 지구물리학 감시소로부터 무선으로 송신받은 정보를 처리하며, 10여 군데의 '지구화학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표본을 채취하여 분석한다. 1989년에는 수프리에르 화산에서 남동쪽으로 10km떨어진 안데스형의 돔이 있는 우엘몽에 현대식 관측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 푸르네즈 화산 관측소(레위니옹)  레위니옹선은 판 내부에 열점을 가지고 있는 화산이다. 이 섬은 전체 높이가 7, 500m에 달하며, 그중 3, 000m는 물에 잠겨 있다. 바다 밑에 박혀있는 밑부분의 지름은 240km나 된다.  눈봉우리(Le Piton des Neiges)  이 화산의 활동은 약 200만 년 전부터 시작되었고 약 45만 년 전에 활동을 멈추었다. 화산의 활동시에는 현무암 용암이 흘러내린 것으로 보인다. 약 10만 년 동안 활동을 멈추었다가, 두 가지 형태로 활동이 재개되었다.  눈봉우리에서 마그마가 분화하면서(조면암) 일어나는 분출은 대부분 폭발적이다. 동시에 남동쪽 산등성이에서 현무암을 방출하는 새로운 중심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바로 푸르네즈 봉우리이다. 7만 년에서 2만 년 사이에 일어난 최후의 혼합분출(현무암과 조면암이 섞임) 이후 눈봉우리의 활동은 멈추었지만 푸르네즈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푸르네즈 봉우리(Le Piton de la Foumaise)  푸르네즈 봉우리는 현무암의 흐름이 쌓여서 생겼다. 푸르네즈의 역사는 복잡하다. 푸르네즈는 연속적으로 형성된 3개의 칼데라가 특징인데, 가장 나중의 것은 바다를 향해 동쪽으로 입구가 나있으며 푸케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재 분화는 대부분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그 활동의 결과로 생긴 화산의 정상에는 돌로미외와 보리 분화구가 있다.  여러 방향으로 갈라져 있는 칼데라인 앙클로는 약 4, 700년 전에 형성되었다. 이것은 화산 밑에 있는 마그마 저장소와 연결되어 있는 함몰된 작은 칼데라의 융합과 화산의 등성이인 동쪽 그랑 브륄아 레스트가 붕괴되어 생겼다.  남동쪽과 북동쪽을 향한 연약한 방사선형 지대 혹은 단층지대는(rift zone) 앙클로의 외곽까지 뻗쳐 있다. 이곳이 1977년의 피통 생로즈와 1986년의 생필리프 같은 용암분류의 원천지가 되었다.  푸르네즈 봉우리의 휴지기간은 2년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분출의 위험도 크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분출이 앙클로의 내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위험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며, 이 때문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분출이 앙클로 밖에서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최근의 분출에서처럼 인명과 문화유산을 파괴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분출의 형태를 예측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관광객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한밤중에 그 산을 오른다. 그래서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정상을 오르다 길을 잃고 추위에 얼어 죽는다.  1665년에 레위니옹섬이 프랑스령이 된 이후 푸르네즈 화산은 활동을 멈춘 적이 없다. 50년 전부터 폭발하는 빈도가 더 잦아졌지만 그 때문에 관측소의 숫자를 늘리지는 않았다. 1977년에 피통 생로즈 마을의 일부가 파괴되면서 라크루아가 1936년부터 푸르네즈 봉우리에 설치하기를 원했던 관측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화산의 정상에서 15km 떨어져 있는 카프레 평원에 1979년에 건설한 관측소에는 1980년부터 화산활동을 감시하기 위한 장비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현재 화산의 주위로는 50여 개에 달하는 지구물리학 감시소가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곳에서 수집된 정보는 중계소를 거쳐 관측소로 전달된다.  그중 몇몇 감시소는 독자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등록을 갱신해야 한다. 감시소에 설치된 장비로는 지구물리학적 정보를 포착할 수 있는 지진계, 자장계, 경사계, 그리고 거리측정계(열하나 돌로미외 분화구를 가로지르는) 등이 있다. 그리고 고도, 거리, 중력, 등 많은 측정치들은 정기적으로 점검을 받는다.  관측소가 설치된 이후 일어난 20여 차례의 중요한 분화에 대하여 앤틸리스 같은 곳에서 수집된 수많은 정보가 관측소와 파리 지구물리학 연구소에서 처리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문 과학지와 연례 보고서에 발표를 한다. 이들 화산폭발은 모두 예측이 되었으며 관계 당국에서는 사전에 경보를 발할 수 있었다.  파리 지구물리학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