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중국과의 해후 지은이:드니 이요 Denis Hiault 출판사:시공사 봉사자:신영진 19세기 초, 변화를 원치 않는 중화제국과 확장 일로에 있는 서방세계 사이의 문화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중국인들에 의해 '야만인'이라고 불린 서양인들은 중국의 문호개방을 강요하면서 중국에 아편을 들여갔으며, 이어서 전쟁마저 일으켰다. 이에 청 왕조는 중국 영토의 일부를 그들에게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는데, 바로 그것이 주장강 하구에 있는 섬이었다. 홍콩의 역사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제1장 역사의 유산 고대부터 중국의 역사는 나라 밖에 관심을 보였다가 다시 나라 안으로 관심을 돌리는 시계추 같은 움직임을 반복해 왔다. 1796년에 건륭제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시계추 같은 관심의 방향이 다시 중국 안으로 파고드는 시기 였다. 당시에 중국의 인구는 약 3억 가량이었는데, 이는 전세계 인구의 약 3분의 1이나 되는 숫자였다. 외몽고와 티베트까지 '팍스 시니카(중국에 의한 세계 평화)'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조선, 미얀마, 안남 등과 같은 동남 아시아 국가들에까지 그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다. 당시에 중국이 내향성을 지향하게 된 까닭은, '종교의식'을 놓고서 로마의 종교재판소인 성청과 자금성에 있는 '천자'사이에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갈등은 교황 베네딕트 14세가 중국 황실 안에서 활동하는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이른바 '현지 적응'이라 불리던 선교방식을 포기하라고 엄명을 내린 데서 비롯되었다. 마테오 리치 신부가 장려한 선교 방법은, 바티칸이 '이교도 예식'이라고 여긴 조상 숭배와 유교 의식을 절충한 것이었다. 교황의 비타협적인 강경 일변도에 대해 중국 황제는 대부분의 선교사를 쫓아버림으로써 맞대응하였다. 이로써 중국은 뛰어난 지식의 근원인 동시에 유럽과의 교량 역할을 하는 자들을 제거한 셈이 되었다. 종교인들은 중국의 학자들에게 수학과 기술, 물리학, 제도법 들을 알려주었을 뿐 아니라, 한창 발전중인 중국의 이미지에 대해 18세기 말 유럽인들이 좋은 인상을 갖게 만드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 덕분에 유럽은 한때 '중국의 고대 문명'에 대한 열광으로 뒤덮였다. 라이프니츠, 루소, 콩도르세, 볼테르 같은 이들도 그런 취향을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국가에 대한 관심은 지적인 영역에만 그치지 않았다. 프랑스 동인도 회사,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면서 상업분야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교리상의 갈등은 유럽의 궁정에서 중국에 대한 이상향적인 인식을 순식간에 변하게 만들었다. 전날만 해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중국을 찬미하던 콩도르세도 중국을 비난하기에 이르었다. "화약을 발명했어도 그것을 이용해 국가를 방어할 줄도 모르고, 인쇄술이 발달했어도 사회적 진보를 이룰 줄 모르는,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정체된 국가"라고 하면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외교사절단 서구의 사절단들은 고립을 고집하는 중국인들의 오만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교섭을 시도해 보았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793년에 머카트니가, 그 이후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접근했지만, 중국의 황제를 설득하여 상거래를 확대시키는 데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하느님의 사절들도 다소 예의를 갖춘 정중한 말과 함께 차례차례 거절당했다. '바다에서 온 악마들'은 통상 요청을 거절하는 황제의 서신과 선물만 갖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중국 황제들은 중화제국의 관대함을 나타내고 싶어했고, 그들이 세계 정상에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 왓다. 따라서 자신들을 찾아오는 손님은 누구든지 천자 앞에서 예를 같춰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천자에게 복종의 표시로 세 번 무릎을 꿇은 다음 공손하게 아홉번 머리를 조아려야 힜다. 역사기록을 보면 중국은 군신간에 예절을 무척이나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외부의 야만인들이 조금이라도 오만한 모습을 보일 경우, 결코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 수 없으며, 환영의식도 축소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외부의 조공국들을 엄하게 다루는 길이다." 몽고, 미얀마 출신의 2등급 고관 두 명과 함께 건륭제를 알현한 머카트니는 건륭제로부터 거만한 어조의 칙령을 전달받는다. "조지 3세가 중국의 천자에게 복종하고 순종할 것을 법적으로 인정하니, 앞으로 영원한 복종을 맹세하라."는 것이었다. 그 정도였으니, 영국이 먼저 요구사항을 내세워 협상을 제안해온 태도가 중국으로서는 '황제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상거래에서도 중국은 '다른 국가에서 오는 제품들은 전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 문화의 충돌 외부와의 교류가 전혀 없었던 청 왕조로서는 서구 열강의 팽창주의에 의해 점차 윤곽을 드러낸 세계의 역학구도에 대항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무장이 너무나 허술했던 것이다. 당시 서방세계는 시로운 시장과 원자재 확보라는 욕구를 주체할 수 없어 팽창주의로 전환하고 있을 때였다. 이전 왕조인 명 왕조 때 계획된 복구작업 덕분에 견고해진 청 왕조의 중국은 서방 국가들이 자신의 세력 범위안에 침입해 오는 것을 위협이라기보다는 부차적인 일로 보았다. 정치적으로 무능했던 중국은 군사적인 면에서도 영국 여왕의 병사들이나 프랑스국, 러시아 차르의 군대에 비하면 한수 아래였다. 심지어 메이지 시대를 열면서 쇼군들에게 등을 돌리고, 서구의 영향을 받아 현대화되고 막강해진 일본군보다도 못했다. 청나라의 고관대작들과 그들의 주군이 범한 최대의 실수는 고대 <<병법>>을 저술한 손자의 전투 규범을 무시했다는 점이다. 손자는 '지피지기 백전백승' 이라는 여덟자로 전쟁의 기술을 간단하게 가르치지 않았던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전쟁에 임할 때마다 반드시 승리를 한다고 했건만... 제국의 해체 정부의 부패로 기반부터 흔들리고, 탐관오리의 횡포로 황폐해지는데다, 민중들의 반란에 대처할 수 없어 속수무책인 청왕조는 점점 힘을 잃었다. 북부 지방에서 백련파가 봉기한 1774년부터 신장 지방에 평화가 이룩된 1877년까지 1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중국은 나라 안팎에서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내부에서는 소수민족이 평등을 부르짖으며 일으킨 폭동, 반란, 봉기가 줄을 이으며 천자의 나라를 침식해 갔다. 토지의 국유화를 통해 '태평천국'을 건설하겠다는 태평군의 반란은 기근과 무자비한 탄압을 초래하여 1851-1864년 사이에 무려 2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4억 1천만 명을 넘어선 과잉 인구와 거기서 비롯된 문제들, 그리고 극심한 경제위기로 1840년부터 멸망이 더욱 가속화됐다. '야만인들이 들여온 물질, 아편' 국가를 쇠약하게 만드는 이같은 내부 요인에 더하여 19세기 초부터는 '야만인들'의 외압마저 심해져 갔다. 가장 대담하게 통상 압력을 가해온 영국인을 필두로 한 야만인들은 외국인들의 상업활동을 극도로 제한한 중국의 정책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광둥항에 묶여 있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델란드의 배들은 각기 일정 구역을 배당 받고 그 유일한 항구에서 겨울을 나도록 강요받았다. 외국 상인들은 외국 통상의 독점권을 지닌 소수의 중국 상인들하고만 협상이 가능했고, 황제의 명에 따라 중국 표준어의 기초를 배우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겨울이 지나도 '간교하고, 엉큼하며,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빨간 머리'들은 절대 마카오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는 명을 받았다. 마카오는 1557년부터 포르투갈인들에게 허용된 구역이었다. 이 같은 구속에 얽매인 영국 상인들은 견직물, 대황, 칠기, 도자기, 그리고 특히 훗날 국가적인 음료가 된 차 등을 비싼 가격에 사들이면서도 영국 상품은 아무것도 제대로 팔 수 없었다. 자연히 영국과 중국 사이의 무역은 완전히 영국 편에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1830년 영국의 상인들은 그 불균형을 바로잡는다는 구실로 영국의 새 식민지가 된 인도에서 약재용으로 재배되던 아편을 중국에 대량 수출할 계획을 세웠다. 그에 따라 수천 개의 아편 상자가 뻔뻔스러운 밀수업자들에 의해 쾌속선에 실려 들어왔다. 대표적인 밀수업자로는 존 스와이어와 윌리업 자딘이라는 영국인들을 들 수 있다. 외과의사 출신인 윌리엄 자딘은 아편 무역으로 남해 바다를 지배했다. 아편 밀무역이 어찌나 성행했던지 절정기인 1886년에는 자그마치 18만 상자(1만 톤)가 벵골과 비하르, 말바르 고원에서 실려왔다. "뼈를 말리고 심장을 갉아먹고 가정을 파괴시키는 "끈적거리는 검은 빛깔의 그 물질은 의약품 용도 외에는 사용을 금지한다는 황제의 칙령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중국 사회에 파고 들었다. 그리하여 각계각층에서 아편 중독자의 수는 수백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선교사이자 여행가로 유명한 레지 에바리스트는 1854년 아편의 폐해를 이렇게 증언했다. "황제가 내린 아편 금지령은 효력이 없었다. 사형에 처한다고 위협해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마음껏 아편을 피웠다. 심지어 제일 먼저 법을 위반하여 국민들에게 좋지 않은 본을 보여준 자들은 바로 고위관리들이었다." 마약업자들은 주장강의 삼각주 지역에 들끓고 있는 밀매자들, 은닉자들과 공모하여 큰 이득을 보았다. 마침내 도광제는 나라 전체를 피폐하게 만드는 마약 밀매업자들을 단속하기 위해서 린 쩌쉬(청렴결백하고 열의 있는 관리로서 오늘날 개혁주의 영웅들을 모신 합사묘에서 추앙받고 있음)에게 이문제를 종결지으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겼다. 린 쩌쉬는 우선 외국인 거류지를 포위한 뒤 아편 2만 291상자를 몰수하여 '유럽이 들여온 죽음의 물질'을 공개리에 몽땅 소각시켰다. 마카오에 피신했다가 이 소식을 접한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권리가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영국이 선전포고를 해올 구실만 만들어준 셈이다! 제1차 아편 전쟁(1840-1842) 불명예스러운 무역에 대해 영국 하원에서 비난을 받은 팔머스턴 외상은 다음과 같이 변명을 했다. "이 전쟁은 아편 전쟁이 될 것이다. 전쟁의 원인이 된 무역상품이 바로 아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쟁의 실제 목적은 아편 판매가 아니라 산업화되고 진보된 한 자본주의 국가가, 유교에 젖어 농업 위주의 경제로 정체된 국가로 하여금 통상 문호를 개방하게끔 하려는 합법적인 바람 때문이다."이 변명은 그도 중국의 관리들처럼 편협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군인 4000명을 태운 6척의 범선을 중국에 급파했다. 갑자기 시작된 전투는 두 국가의 전력이 결코 상대가 될 수 없음을 확연히 보여주었다. 잘 조직된 영국군에 비해 중국측은 등나무 줄기로 짠 모자와 방패, 칼이나 기껏해야 화승총으로 무장한 군인, 아니면 농부들로 구성된 민병대가 고작이었다. 찰스 엘리엇이 지휘한 영국 함대는 즉시 중국 황제의 전함을 침몰시켰고, 군함에 장착된 32개의 대포들은 광둥 지방과 연안 도시들을 폭파시켯다. 이어서 영국군은 푸젠 지방의 아모이, 저장 지방의 닝보와 같은 남부 해안의 항구들을 봉쇄하고, 양쯔강 하구를 막고 있는 주산 열도를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단번에 상하이와 난징까지 올라갔다. 1841년 1월 26일 8시 15분. 마침내 주장강의 삼각주 하구의 한 섬에 영국 국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어부들은 그 섬의 항구를 향나무가 교역되는 항구라고 해서 '항항'이라고 불렀는데, 후에 광둥사람들이 광둥 발음에 따라 '홍콩'이라고 부르게 된다. 난징 조약: 첫번째 '불평등 조약' 1842년 8월 29일. 청국측 대표 치 산은 난징이 바라보이는 먼 바다에 정박한 영국 군함 콘윌리스호에서 국제무역에 전략적으로 유리한 5개 항구의 개항을 법령으로 공포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것이 바로 광둥, 상하이, 아모이, 푸저우, 그리고 닝보를 개항하게 한 난징 조약이다. 이제 서구 열강은 이 항구들에서 치외법권 및 관세를 20퍼센트 가까이 할인하는 협정 관세권을 누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홍콩을 영국에 영구히 할양하기로 했다. 미국(10월 24일)이 광둥 남부에 있는 밍하에서 조약을 체결하여 강제로 중국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뒤를 이어 스웨덴과 벨기에도 자신의 몫을 요구해 왔다. 제2차 아편 전쟁(1856-1860)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한 침략자들은 더 많은 이익을 탐내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던 중 영국 국기를 단 선박 애로호를 청국 관헌이 수색한 사건이 일어났다. 돌발적인 사건이었지만 1856년 프랑스와 영국은 이를 구실로 연합작전을 폈다. 중국 주재 전권특사인 엘긴 경과 쿠쟁 몽토방 장군의 병사들이 베이징으로 진격, 예수회가 설계한 바로크 양식의 '여름용 궁전' 원명원을 약탈하기에 이르렀다. 난징 조약에 이은 베이징 조약(1860년 10월 24일-25일)은 추가로 11개 항구의 개방을 강요했도, 외국인들은 그곳에 무역소를 세웠다. 30척의 포함과 3000명의 군인들에게 대패한 중국은 서구 열강의 상인들이 강요하는 조약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후로 서구 열강의 선박은 양쯔강을 따라 수천 킬로미터까지 중국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갖데 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 왕조는 무거운 전쟁 배상금을 물어내야 했고, 수도 안에 상설 외국 공사관을 세워야 했으며, 선교사들의 자유로운 선교활동도 인정해야만 했다. 게다가 외국인을 '야만인'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공식적으로 금지외었으며, 외국과의 수교를 전담하는 부서를 개설해야 했다. 물론 아편 무역도 합법화되었다. 또한 베이징 조약에는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홍콩과 분리되어 있는 주룽 반도를 영구히 영국인들에게 넘긴다는 조항도 있었다. 이제 중국 황제는 여덟 자 높이의 '죽의 장막'으로 새로운 국경선을 정해야만 했다. 중국 영토의 분할 청 왕조가 쇠퇴기에 접어든 1898년 7월 1일. 중국은 당시만 해도 '신계'를 영국에 양도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홍콩과 중국 본토를 연결하는 1014km의 땅을 내주는 것이 손쉬운 해결책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땅은 좀 넓다 싶은 연병장 부지로서 그저 '완충지대'역할을 할 것으로 여겼을 법도 하다. 그러나 19세기 말에는 열강의 식민지 통치 열기가 수그러들었다. 덕분에 홍콩섬이나 주룽 반도와는 달리 세 번째로 추가된 신계라는 땅조각은 99년이라는 한정된 기간 동안 빌려주는 것으로 정해졌다. 마지막 식민지에 대한 일시적인 주권은 중국인 작가 한 쓰인의 표현을 빌리면 신계가 '임대 시간을 사는 임대 장소'의 운명을 갖게 만들었다. 거대한 중국의 지도 위에서 영국이 점령한 마지막 땅은, 1895년 일본군에게 합병당한 대만섬이라든지, 독일에 99년간 양도한 산둥 반도의 자오저우만, 일본군과 러시아군이 이중으로 점령하여 25년 동안 뤼순항(포트 아튀르)을 통제하기로 약속했던 만주땅, 마지막으로 서구 열강들 사이에서 갈라먹기 식으로 양도된 다렌, 텐진, 상하이 아모이, 광둥 등의 경우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프랑슨느 윈난, 광둥, 그리고 구왕쓰 지방에 발을 들여놓았다. 중국은 이렇듯 열강에 의해 멋대로 분할되었다. 훗날 레닌은 "서구 열강은 노상강도처럼 중국을 갈가리 분할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1921년에 중화민국을 세운 쑨 원도 그때부터 중국의 "문호가 개방되었다."고 말했다. 아무튼 서태후가 도주하고, 그녀와 손을 잡았던 의화단마저 패주함으로써, 청나라의 마지막 저항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외국인과 기독교로 개종한 중국인들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난 의화단의 봉기는 1900년에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일본,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의 군대로 구성된 원정군에 의해 베이징에서 완전히 분쇄되고 만 것이다. 8개국 연합군에게 대패한 중국은 그제서야 방어군 조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때의 치욕을 '역사의 유산'으로 보았다. 그러나 바로 이 치욕감에서 민족주의가 싹트게 되었다. 영국은 홍콩과 주룽 반도, 신계로 이루어진 식민지 영토를 전혀 주저하지 않고 넘겨받았다. 사실 이 땅은 영국이 새로이 정복한 인도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땅이었다. 그러나 중국인 난민들에 이어 악마 같은 외국인들이 홍콩을 찾은 지 180년이 지나면서, 척박했던 이 돌섬은 어느것 아시아의 4마리 용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이제 사회주의 국가 중국의 관문 홍콩은 자본주의의 천국이 되었다. 제2장 모순적인 식민지 파란 만장한 역사 초기 정복자들의 눈에 46km2면적의 홍콩섬은 군수품 보급기지와 해군기지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전략적으로 볼 때 주장강 하구에 자리잡은 홍콩섬은 주변의 수심이 깊고, 태풍의 피해를 받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쾌속선과 군함 정박에는 아주 이상적인 천혜의 항구를 제공해 주었다. 상무감독 찰스 엘리엇 사령관이 빅토이아 여왕의 이름으로 그곳을 점령한 것은 영토를 점려하지 말고 협상으로 중국의 문호를 개방시키라고 한 상관의 명령에 어긋난 행동이었다. 이로 인해 찰스 엘리엇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만주인 협상자 치 산과 함께 본국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배로 소식을 전해야 했던 당시 홍콩 점령 소식이 팔머스턴 외상의 비서에게 전해지기까지는 3개월이나 걸렸다. 팔머스턴 외상은 '척박한 돌섬으로 무인도나 다름없는'곳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격노했다. 그리고는 이 방약무인한 자를 내쫓고 새로운 상부감독 헨리 포팅거를 급파했다. 이 새로운 총독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아편 대상인 윌리엄 자딘이 틈틈이 여러 개의 창고를 건설하여 이미 복합기업체로 성장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해놓은 후였다. 그 복합기업이 후에 얼마나 큰 힘을 갖게 되었던지, 당시 홍콩인들이 홍콩을 지배하는 권력의 순서를 말할 때면 우선 로열 자키 클럽을 꼽은 후 자딘-메디슨 상회를 꼽고, 그 다음에야 총독을 꼽을 정도였다. 중국인들이 '강력한 힘을 가진 늙은 쥐'라는 별명을 붙인 식민지 총독은 수백 병의 상인들이나 이곳으로 몰려온 한탕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엘리엇이 내세운 두 가지 약속, 즉 영국의 보호와 수출입 세금 면제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홍콩은 점점 변모해 갔다. 퀸스로드라고 정식으로 명명된 먼지투성이의 도로가 지나가는 곳에는 작은 마을이 생겼다. 홍콩이 성장하고 있나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외상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곳 식민지는 중국에 반환하기에는 너무나 발전해 있다." 1860년에 주룽 반도를 새로이 얻게 됨으로써 영국은 홍콩섬과 대륙 사이에 11km2의 '완충지대'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38년 후에는 신계마저 얻게 되어, 이 무인 비무장 지대의 범위를 더욱 넓혀 주었다. 신계의 땅은 강이 국경선을 이루고 있는 선전까지 사람들이 살지 않는 1014km2의 산과 계곡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땅은 군인들에게는 너무 넓다 싶은 연변장으로 쓰였으며, 한편으로는 묘지도 만들어졌다. 새로 생긴 공동묘지는 개장하자마자 무덤으로 가득 찼다. 20세기 이전에 기승을 구린 열병으로 목숨을 빼앗기거나 페스트균에 감염돼 죽은 사람들이 그곳에 묻혔고, 해변에 전시되어 사람들을 오싹하게 만든 참수당한 해적들의 시체도 그곳에 묻혔다. 영구 할양된 두 곳의 영토와 99년간 임대하기로 된 세 번째 영토를 사람들은 홍콩이라고 총칭해서 불렀다. 초기에 홍콩의 발전은 주도인 빅토리아시에만 한정되었다. 1847년 홍콩의 빅토리아시에 성 요한 성단이 세워졌다. 상업도시의 탄생 식민지화가 이루어질 때는 상인이나 선교사보다 군인이 먼저 들어와 정착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러나 이런 원리와는 반대로 홍콩은 군인보다 상인이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식민지 초기 시절, 선구자인 그들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그 시절의 건축물들은 해안선을 타고 늘어서 있는 발코니와 회랑이 딸린 건물, 그리고 인력거와 가마로 가득 찬 녹음 우거진 오솔길로 인해 극동의 베네치아를 연상시켰다. 영국 제국주의를 선창한 루디아드 키플링은 9세기 말경에 홍콩을 들러 이런 말을 남겼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돈벌이가 될 수 있다." 본국인 영국은 이 땅이 자국의 식민지 영토라는 것을 구석구석에 각인해 놓아서 곳곳에서 영국의 관습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1846년에 개장한 해피밸리 경마장의 경마 게임을 비롯해서, 애스턴 웨브가 설계한 최고 법원에서 가발을 쓰고 있는 판사들의 모습과, 버킹엄궁과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을 본떠 지은 건축물, 리펄스만에 있는 대형 호텔의 발코니에서 열리는 춤을 곁들인 티파티, 총덕이 주최하는 연회 등이 그것이다. 1887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동상 제막식이 성대하고 장엄하게 열렸다. 이때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영국 여왕의 모습은 장막 뒤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중국의 황후, 서태후만큼이나 낯설게 느껴젔을 것이다. 당시의 영국은 절정에 있었다. 따라서 1912년에 총독인 헨리 메이가 "이곳의 습기는 우기때의 나이지리아보다 더 끔찍하다. 편지 봉투가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궐련이 스펀지처럼 변해 버린다."고 투덜댄 것처럼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홍콩을 점령한 영국인들은 으시대며 뽐냈다. 초기에 '본토인'들은 노동력의 근원이었으며 사창가에서 쾌락을 만끽할 수 있게 해주는 매춘의 원천이었다. 이는 홍콩을 "빅토리아 여왕의 영국과 건륭제의 중국, 그 둘의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라고 정의한 영국의 역사가 프랭크 웰시의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 홍콩의 외국인이 현지 주민의 5%도 안 되었는데, 외국인과 본토인 사이에는 유색인종에 대한 격리감이 뚜렷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1870년 까지만 해도 중국인 노동자 쿨리들은 소등시간 이후에 등불과 신분증 없이는 절대로 나돌아다닐 수 없었다. 또한 빅토리아피크의 주택가에서 살 수 있는 중국인은 총독의 '허가를 받아' 그곳에 사는 외국인의 하인들뿐이었다. 초기에 홍콩이 이룩한 부는 척박한 식민지땅에 발을 딛은 모험가들의 피땀어린 노력의 결과이다. 1840년에 돈 한푼 없이 홍콩에 도착한 시계수리공 더글러스 라프레이크는 30년 후에는 더글러스 증시선 회사의 총수가 되었다. 성채 같은 모습으로 대양을 굽어보는 그의 저택은 그가 '필스' 계보의 선두주자임을 보여준다. 필스라는 말은 '런던에서 실패했으나 홍콩에 와서 성공한 자(FILTH:fail in London,try Hong Kong)'를 약간 경멸해서 부르는 말이었다. 외국상사의 경영자들인 '타이판'들과 '그웨일로스(악마 같은 외국인)' 옆에서 중국인이나 유라시아인 중개업자들 역시 급속히 부를 쌓아갔다. 이들은 중화제국과의 관계에서 필수적인 중재자들이었다. 그들 가운데서도 가장 부유한 로버트 허둥은 초기에는 자딘 밑에서 '노블 하우스'에 고용되어 있었다. 많은 영국인들이 부를 축적해 그의 뒤를 이어 타이판의 대열에 들었다. 19세기 말경에는 영국인뿐 아니라 다른 여러 국가의 사람들도 이에 합류했다. 그 지역에서 가장 번창한 가문의 하나인 이라크 출신의 유태인 카두리 가문이나, 빵집 조수 출신으로 킹 에드워드 호텔을 세운 도바브지 노브로지 가문의 경우가 그렇다. 후자는 선박회사인 스타 페리사를 세웠는데, 그 회사의 녹색과 백색 선박들은 1세기 후에 홍콩의 상징물 중 하나가 된다. 일본의 침략:촉매작용 20세기 전반부에 홍콩은 중국에 대해 양면적인 태도를 보인다. 부를 축적하느라고 너무나 바쁜 홍콩 주민들이었지만 그래도 봉건제도가 몰락했을 때와 1912년에 중화민국이 건립되었을 때 힘찬 박수를 보냈다. 또한 1925-1926년에 국민당이 반제국주의를 부르짖는 대규모 파업을 단행하고, 더욱이 일본과 영국의 생산품들을 보이콧했을 때는 그들 역시 광둥인들에게 합류했다. 홍콩인들은 홍콩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된다. 그 시기는 1941년에 일본이 갑작스럽게 진주만을 습격하고 며칠 후(엘리엇 사령관이 중국에 상륙한 지 1세기가 지난 때이기도 하다), 미카도의 군대가 홍콩을 침범하여 점령했을 때이다. 아시아인에게 전례 없이 참혹한 패배를 겪은 영국인과, 다시 한번 외부인에게 짓밟히는 아픔을 당한 홍콩인에게 이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이들이 끔찍하게 여긴 이 사건은 이제까지 '대영제국의 보물'이라고 여겨온 인도나, 심지어 말레이시아에 비해 소흘히 여긴 홍콩이라는 지역에 대해 런던 측이 전략적,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새삼 의식하게 만들었다. 일본에 대항하여 미국 및 영국과 동맹을 맺은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1942년에 홍콩울 수복하고자 협상을 벌였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은 마침내 홍콩을 되찾았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자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영국인들은 이후로 '반중국 성향의 파괴적인 활동'에 대해 너무 관대하다는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옆에 있는 대국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완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식민지 정부는 홍콩의경제적 사명에 주력하였고, 법률 제정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가는 한편, 부패 근절에 힘썼다. 그리고 경제 분야만큼은 근본적으로 반간섭주의를 내세우는 행정부의 도움을 받아 강력한 금권정치가 출현할 수 있게 하였다. 공산주의로의 전환 홍콩을 반환받을 뻔했던 때로부터 4년이 지난 후, 국공내전에 패배한 국민당은 린 뱌오가 이끈 인민해방군에 쫓겨 피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민해방군은 홍콩이 보이는 국경선에서 15정도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승리의 행진을 멈췄다. 당시 중국으로서는 홍콩을 '해방'시키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1955년 반둥 회의로 반식민지정신이 고취된 상황에서 그들이 홍콩 반환을 주장했다고 해도 큰 외교 분쟁은 없었을 것이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때 공산주의자들이 보여준 신중한 태도야말로 그들이 얼마나 일찍부터 실용주의 감각을 지녔는지 보여주는 일례라고 말한다. 그들은 홍콩을 자본주의 영역에 그대로 맡겨둘 경우 훗날 자본주의 영토를 바로 코앞에 둘 수 있다는 점과, 그곳에서 서구세계의 분위기를 가늠해볼 수 있다는 점을 그때 이미 의식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들은 중국식 마르크시즘을 선전함으로써 앞다투어 '불평등 조약'을 고발할 수 있었으며, 언제라도 홍콩을 자기 뜻에 따라 '간단하게 전화 한 통으로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규칙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미래를 위해 이러한 상황을 감수했다. 중국과의 '정체된 관계' 1946-1949년의 국공내전중에 영국은 엄격한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신중히 상황을 지켜보던 런던은 마침내 미국이 공산주의와 냉전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미국인들과 차별화할 쉽지 않은 기회를 찾자 재빨리 중국 공산당 체제를 인정했다. 따라서 영국의 현실정치에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던 홍콩으로서는 중국과의 관계가 냉전을 피해 정체 상태에 들어가기가 그만큼 용이했다고 볼 수 있다. 양측간의 대화는 홍콩 내에서 재외공관의 역할을 하고 있던 신화사 통신을 통해 공개되었다. 한국전쟁 때에 중공군을 물리치기 위해 파병된 유엔군 병력에 영국군도 포함되었으나, 그것이 중국과 홍콩의 관계에 지장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국이 이민 할당수를 강요하자 베이징은 이를 비판하고 나섰다. 1960년대에 재외자국민의 자유로운 통행이 구속받을 것을 우려한 것이다. 베이징의 진정한 경고는 1967년 여름에 나왔다. 그 전해에 마오쩌둥이 세운 홍위병의 선동으로 '영국의 돼지들'에게 반대하는 파업과 소요가 극심했을 때 총독 관저의 벽이 복수를 다짐하는 대자보로 완전히 뒤덮인 사건이 벌어졌다. "영국은 가라!"를 외치는 시위와 습격 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반식민지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저우언라이가 개입하기 전까지 51명이 사망했다. 이때만 해도 분명 '적절한 시기'는 아니었다. 베이징은 1973년에 유엔에서 앞으로 자율권과 독립권을 갖추게 될 식민지 지구의 명단에서 홍콩과 마카오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중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민의 대물결 식민지의 인구 증가는 이웃한 대국의 격변하는 상황의 영향을 받았다. 이어지는 이민의 물결로 인종 면에서 볼 때는 런던이 영국의 도시인 것 이상으로 홍콩은 중국의 도시였다. 중국 대륙에서 처음으로 난민이 몰려든 것은 1850년 난징에서 행해진 태평천국 신도들의 대학살 때였다. 이후로 서태후 치하에서 근대화된 지식인들에 대한 탄압, 내란을 일으킨 귀족들간의 갈등, 공산주의자들에게 쫓김, 그리고 국공내전으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난민들이 홍콩으로 밀려왔다. 그러다가 1949년 10월 1일, 마오 쩌둥이 톈안먼 누상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이후에 피난민의 물결은 더욱 거세어졌다. 1949년에 상하이가 몰락한 이후 중국 대륙에는 '대약진 운동'이 유토피아를 내세우는 등장했지만, 1958-1962년에 무려 3000만 명에서 5000만 명 가량 되는 중국인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농촌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때 수많은 난민들이 홍콩으로 밀려왔다. 게다가 1966-1976년까지 행해진 문화혁명의 집단적 광기 또한 난민들이 급격히 밀려오는 사회현상을 초래했다. 식민지 초기에는 제일 처음 홍콩에 도착했을 자들이 그 척박한 땅에서 견딜 수 없어서 다시 배를 타고 더 멀리 캘리포니아로 주저 없이 모험을 찾아갔건만, 이제는 수십만 명의 새로운 난민들이 들어와 뿌리를 내렸고,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놀라운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1945-1950년 사이에 홍콩 인구는 60만에서 180만으로 증가했다. 1953-1961년에는 240만에서 320만으로, 그리고 다시 1981년의 500만에서 1997년에는 620만으로 늘어났다. 난민들은 경제적, 정치적인 이유로 피난을 올 수밖에 없었던 자들로, 대부분 철저한 반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허름한 옷보따리 하나만 달랑 들고서 피난길에 들어서거나, 아니면 헤엄을 쳐서라도 '길에 황금이 깔린 도시'에 닿기 위해 상어가 우글대는 바다 속으로 두려움도 없이 뛰어들었다. 누더기를 걸치고 무식한 자들이 대부분인 광둥 농민들의 뒤를 이어 박해받는 지식인의 무리도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나 정말로 홍콩 이민의 주축을 이룬 자들은 상하이인들이다. 그들은 국민당의 심복인 '자본주의자'들로서, 산업과 금융 분야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동양의 파리'라 불린 상하이에서 중산층을 이루고 있었다. 홍위병에 의해 재산을 빼앗긴 그들은 현재와 같은 홍콩의 출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들 중에는 자딘-메디슨사, 스와이어사, 홍콩 상하이 은행 등 아편 전쟁 당시부터 번영해온 몇몇 대규모 항(상회라는 뜻)의 지도자들과 '1997년 이후'의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인 중 젠화의 부친처럼 악운을 쫓고 새 운명을 개척하길 열망하는 수많은 기업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창고 역할에 머물던 홍콩은 이들의 추진력에 힘입어 1950년부터 산업의 중심지로 활약한다. 그 출발은 그리 다양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빈약한 자본과 공간의 제약으로 밀집한 아파트 안에 쉽게 차릴 수 있는 수천 개의 소규모 공장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10년 사이에 그 숫자는 순식간에 수만 개로 늘어났고, 산업은 놀랄 정도로 다양해졌다. 초기의 직물, 의류업(가장 중요한 산업이 된다)의 뒤를 이어 플라스틱 제품과 장신구를 취급하는 산업이 가세했고, 장난감(1950년대 중반에는 세계 제일의 생산지가 된다), 가발, 전등, 하청을 받은 트랜지스터 조립 산업이 활기를 띠었다. 1960년대에는 주생산품목에 전자부품이 추가된다. 홍콩인들이 열광한 성공담들은 대개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시작된다. '슈퍼맨'이라 불리는 리 쟈청은 손목시계와 값싼 플라스틱 조화를 만들어 신분 상승을 이루더니, 30년 후에는 부동산 재벌로 홍콩에서 3위, 세계에서 50위 안에 드는 기업가로 성장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자서전 작가들은 자수성가한 기업인들에 대해 한결같이 감동적인 궤적을 그려낸다. 베이징 역시 홍콩이 이룬 기적이 자본주의 식민지의 혜택에서 온 것이 아니라 거대한 중국의 힘을 증명한다는 뜻에서 그런 이야기에 심취했다. 영광의 스무 해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자 이에 항의하여 1950년 전세계가 중국과의 무역을 금지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중국과 홍콩이 언제라도 운명공동체가 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창고업이 성행한 홍콩은 국경이 폐쇄됨으로써 사회기능이 완전히 마비될 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시련은 상업을 중시하는 두 지역간의 연대감을 확인시켜 주었다. 헨리 폭과 같은 몇몇 사람들은 이때의 활동으로 인해 중국측으로부터 '위대한 우국지사'로 인정받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중국인들에게 잉여 군수물자를 제공했던 그는 이어서 페니실린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상품을 밀수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에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차관급 지위와 더불어 중국 인민정치자문회의 부회장직과 중국 모래의 수출 독점권이 잇달아 그에게 주어졌다. 홍콩의 부동산 경기가 폭증하자 그는 모래 수출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홍콩의 놀라운 성장은 1970년대 말에 시작되었다. 그때는 문화혁명에서 살아남은 덩 샤오핑이 내부로만 향하던 중국의 시계추를 외부로 돌리고, 자급자족 유토피아를 부르짖던 마오 쩌둥의 이론에 허점이 있음을 고발하면서 개방과 개혁을 표방하던 때이다. 1978년 중국 공산당 제2기 중앙위원회 제3차 총회 때 덩 샤오핑이 투자가들에게 한 절박한 호소는 특히 '홍콩의 사랑하는 동포'들을 향한 것이었다. 도그마를 포기하고 현대화를 우선으로 하는 그의 정책은 부동산과 사회기반시설 확보, 해운교통 등에 기초한 거대한 복합기업의 통학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새로이 떠오른 실업계의 거물들 중에는 헨리 폭의 친지인 스탠리 호가 있다. 삼합회가 활약한 도박 분야에서 시작한 그는 마카오의 주요 재벌로 부상했다. 그 외에도 기반시설 부분에서 정상을 차지한 고든 우, 슈퍼맨 리 쟈청, 세계 최고의 선박회사 중 하나를 지휘하는 바오 위강 등이 있다. 도시국가 홍콩은 이들의 부 덕분에 세계 제4위의 외화 보유국이 되었다. 맨해튼과 차이나타운 홍콩의 건축업자들은 15년 이상 된 건물이면 예외없이, 심지어 식민지 시대의 유물들조차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파괴했다. 성요한 성당의 신고딕식 사각 탑이라든가, 1910년경에 건축된 최고 법원의 에드워드식 둥근 지붕, 18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총독 관저와 일본 점령시 어울리지 않는 형태로 증축된 부분 등 빅토리아시에 유물 몇 점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빅토리아시에서 리펄스만까지 북쪽 해안을 달리는 좁은 해안도로에는 100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밀집해서 살고 있다. 콘크리트와 철강으로 만든 고층 빌딩들이, 건축이 가능한 최소한의 땅만 차지하고서 산허리부터 바다를 메워 만든 소중한 땅까지 좍 뻗어 있다. 중심지인 센트럴 지구는 은행 건물의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우뚝 솟은 두 은행 건물의 실루엣은 맨해튼을 동양에 옮겨놓은 것처럼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은행의 하나로 꼽히는 홍콩 상하이 은행이 자리잡고 있는 건물은 노먼 포스터경이 지은 메카노 타워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쭉쭉 뻗은 죽순처럼 생긴 차이나 은행의 건물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이에 푸른빛이 도는 비대칭각주형 건물인 차이나 은행은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미드를 설계한 거장 레오 밍페이의 작품으로, 발전하는 중국을 대변하는 상징물이다. 우뚝 솟은 고급주택지 피크는 비벌리힐스에 비견된다. 신흥재벌이 몰려 있는 그곳은 롤스로이스를 소유한 주민 비율이 가장 높다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피크 아래에는 중국인들의 도시가 밀집해서 사방으로 펼쳐져 있다. 센트럴 지구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웨스턴은 광둥의 빈민가와 닮았다. 그곳에는 전자계산기 대신 여전히 주판이 사용되며, 시장 음식점에서는 뱀탕과 옻나무 껍질을 넣고 삶은 오리고기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완차이시는 밤이면 네온사인으로 뒤덮인다. 그곳은 수많은 사창가와 심야 업소가 버젓이 영업을 하는 구역이다. 이곳의 환락가는 베트남 전쟁의 유물로, 당시에 미군은 이곳에서 기항했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상하이'라고 불리는 노스포인트는 '해방구'라고 정식으로 명명된 곳으로, 대륙의 본토인들의 탈출을 용이하게 해준다. 주룽 반도의 지협을 건너온 본토인들로 인해 이곳의 인구는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1km2당 5000명이 모여 살기 때문에 주민들은 비좁고 비위생적이며 조잡한 빈민 주택단지 안을 꽉꽉 채우고 있다. 특히 몽콕과 같은 곳은 새잡이들과 점쟁이들, 그리고 거리의 경극 가수들, 삼합회 회원들로 인해 인구밀도가 1m2당 1.17명이라는 인구 폭발의 양상을 보인다! 이처럼 잡다한 집단이 모여드는 현상이 마온산이나 투언문, 판링 등 베드타운 신도시에서는 하나의 규칙처럼 되어버렸다. 이 베드타운 신도시에서는 하나의 규칙처럼 되어버렸다. 이 베드타운들은 신계를 따라서 국경선까지 이어지면서 꿈틀대는 용처럼 뻗어 있다. 1970-1990년까지의 '영광의 스무 해' 덕택에 홍콩 인구의 3분의 1은 앞에 열거한 도시들처럼 급 성장한 신흥도시 양편으로 이동했다. 사톈이라는 도시만 해도 인구수가 50만 명에 이른다. 그러나 모두가 잠을 자기 위해 밤에만 몰려들기 때문에 오히려 텅 빈 도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계최고의 지역 1980년부터 홍콩의 1인당 국민소득이 본국인 영국을 넘어설 정도로 증가했다. 따라서 홍콩인들도 이곳에서 뿌리내리기가 용이해졌다. 따라서 홍콩인들도 이곳에서 뿌리내리가 용이해졌다. 1996년의 설문조사 때 조사에 응한 홍콩 주민의 30%가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했으며, 28%가 '홍콩의 중국인' ,35%가 '홍콩인' ,그리고 5%만이 자신을 영국인이라고 답했다. 그들의 대답은 홍콩인들에게 두 개의 위상이 혼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하나는 번영을 가져온 식민지가 준 위상이며, 다른 하나는 긴 역사로부터 흘러나온 위상이다. 전자는 자치주의적인 감정을 살찌웠으며, 후자는 독립을 요구하는 모든 시도를 금지시키고 있다. 홍콩인들이 대륙에 닻을 내린 것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 동서 양쪽의 독일인들이 유지한 관계에 비견되는, 동족의식에서 비롯된 관계에 의해 확고해졌다. '중국인'들은 고급 공무원이나 사업가를 제외하고는 초보적인 '칭글리시(Chinglish)'로 자신을 소개할 수 있을 뿐이다. 영국 여왕의 탄신 기념일을 지키는 경우는 없어도, 음력 설과 우란절, 관등절 등은 반드시 기념하고 축제를 벌인다. 그리고 사적인 경우든 공적인 경우든 간에 집이나 건물을 짓든지 혹은 이전할 때는 반드시 풍수지리 전문가인 지관의 충고를 귀담아 듣는다. 풍수지리는 불길한 기운을 뽑아내거나 해로운 용을 쫓아내게 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홍콩인들은 이념적인 면에서 공산당 체제를 혐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을 악의 제국으로 생각하는 일은 결코 없다. 1997년 이전의 오랜 세월에 걸쳐 설문조사에서 나타난 그들의 희망사항은 "전 세계에서 최고의 지역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곳은 중국 안에 있지 않고도 중국인이 될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지역이다. 자본주의의 천국 세계 최고의 w역이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사업경영은 개인에게 맡긴 채 공공의 공간을 관리하는 일에만 관여하는 정부의 도움을 톡톡히 받을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 30년간 경직되어 있던 식민지 정부는 영국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총독 한 사람에게 절대적인 우월성을 보장해 주었다. 그는 재정 비서와 비서실장(작은 정부의 수반에 있는 비서)을 휘하에 두고서 행정부를 지휘하며, 또한 행정평의회(Exco. 4인의 전직 공무원과 그들이 지명한 10인, 도합 14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문기관의 역할을 한다)와 입법평의회(Legco. 문서에 동의하고, 과반수 결정으로 수정을 가하거나 채택하는 일을 맡고 있다)a를 두고 있다. 입법평회의는 사실 1985년에 이르러서야 현대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제한적으로 이루어져 직접선거로 56명의 의원 중 26명을 선출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그 외의 입법제도는 영국엣 주로 통용되는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한편 300만 명이라는 인민해방군의 수에 비해 상징적인 병력인 8500명으로 구성된 군은 무엇보다도 불법 이민을 막는 일을 최우선적인 임무로 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 열망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 도시평의회, 지역평의회, 그리고 구평의회만큼은 전원 투표에 의해 선출된다. 이에 비해서 홍콩인들의 자치주의가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은 단연 사업 분야에서다. 홍콩의 사업가들은 급진 자유주의적이며, 상투적인 관습을 깨뜨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에 도전하며, 기술 혁신을 꾀하는 선구자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발전하는 시장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나게 뉴연한 r들은 서구에 널리 퍼져 있는 NH(non invented here)신드롬, 즉 기술이전을 제한하는 신드롬에서 벗어나 있다. 초고속으로 부를 이룩한 사업의 대가인 그들은 과시할 수 있는 돈이야말로 사회적 성공을 나타내는 최상의 증거물이라 생각한다. 초기에 독학으로 사업기술을 익힌 홍콩의 사업가들은, 미국에서 손꼽히는 권위 있는 대학이나 혹은 '옥스브리지'대학에서 교육받은 그들의 후계자들과 이런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난다. 유교 사상의 지배를 받는 사업 그러나 그들의 사업정신은 지극히 중국적인 성격과 맞물려 있다. 각회(guanxis)의 회원들에게 도움을 호소할 때 특히 그 중국적인 성격들이 나타나는데, 회란 중국과의 시장을 여는 데 필수적인 조직망으로 친지, 선후배, 동향인들로 구성된다. 또한 노동과 조력의 윤리, 그리고 연장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충성심 등이 합쳐져 조화를 이루면서, 가족간의 신유교적 가치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복합기업체 안에서도 그같은 중국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족장은 마치 '천상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자'처럼 행동한다. 그는 완전한 전제군주로서 신속한 경정을 담당하며 당대에 가장 높은 자리에 잇는 고관들과 협상한다. 승진과 상속은 대개 친족 특혜주의의견고한 규칙에 따르게 마련이다. '임대한 시간을 살아가는 임대 장소'인 홍콩은 99년이라는 신계 지역의 임대 기한이 만기되는 1997년 6월 30일 자정에 중국과 랑데부를 했다. 홍콩 반환에 관한 중국과 영국 간의 협상에서 나온 결론은 양국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준비작업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있었다. '1국가 2체제'라는 공식으로 요약된 타협안은 중국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거의 식민지 홍콩에게 50년간 자본주의를 유예해 주기로 했다. 제3장 1국가 2체제 임대 만기 중국과 영국은 홍콩 문제에 관하여 1979년까지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 중국으로부터 조차한 지역에 관하여 1920년부터 영국 외무부가 "어떤 경우에도 중국인들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하라"고 충고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머레이 매클로즈는 베이징의 중국 공관으로 고위관리들을 방문한 기회를 이용해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고자 했다. 그는 99년간의 임대 기간이 끝나는 시일을 앞두고 신계 지역 임대이 유효성에 관해 덩 샤오핑의 심중을 떠보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 중국 실권자의 대답은 마치 선문답을 하듯 알쏭달쏭한 것이었다. "중국으로서는 홍콩에서의 주권을 회복할 시간이 왔습니다."일단 이렇게 잘라 말하고 덩 샤오핑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주의를 계속해서 실시하는 한, 홍콩은 계속해서 자본주의를 실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주민들은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국가적 자존심과 연결된 국가의 위신으로 볼때나 서류상으로 공개된 것으로 볼 때나 이 말은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런던 측에서는 홍콩에 대한 위임권을 연장하겠다는 생각과 공동주권에 대한 꿈을 직시 버려야만 했다. 중국인들이 국제적인 계약 이행을 과연 준수할 것인지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던 마거릿 대처 수상이 저지른 외교적 언어의 실수는, 홍콩에서의 사회 안정도를 나타내는 주식시장의 항센 지수를 순식간에 붕괴시켜 버렸다. 뿐만 아니라 홍콩 반환을 '10억의 중국인들의 사건'으로 여기고 있는 베이징과의 회담을 급진전하게 만들었다. 선수를 친 중국 공산당 1982년부터 중국 공산당은 자신의 영토 안에 홍콩 특별행정구(RAS)를 만들도록 허용함으로써 중국 체제를 수정했다. 동시에 외교적 압력과 경제적 협박을 가하여, 영국과의 협상 장소와 날짜, 홍콩의 형태까지 자신들이 정한 내용을 강요했다. 모든 협상은 독점적으로 베이징에서 이루어지되, 2년 내에 모드 s협상이 종결되도록 한 것이다. "홍콩 문제는 영국과 중국, 두 정부들 간의 일이다." 이는 사실상 누구보다도 이 일에 관련되어 있고, 95%가 이 타협안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홍콩인 600만 명을 젖혀놓고 있다는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중국의 지도부가 선언한 말이다. 마거릿 대처 역시 홍콩인들의 뜻을 물어보는 것을 소흘히 했다. 그녀는 홍콩의3개 퍼즐 조각들이 이후로 분리될 수 없는 단 하나의 통합체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외무부 고위관리들'의 의견을 따랐다. 도시국가 홍콩과 그 홍콩이 의존하고 있는 주룽 반도는 영구히 영국에 양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계의 조차 기간이 만료될 때 함께 반환하기로 확정되었다. 양편에서 비공개리에 진행된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자, 런던과 베이징은 덩 샤오핑이 정의내린 '1국가 2체제'라는 고도로 실용적인 타협 공식에 뜻을 같이했다. 공동 선명 1984년 12월 19일, 드디어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날 양국의 총리,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와 89년 봄 톈안먼 사태때 정치적 희생물이 되고 만 자오 쯔양, 두 사람은 중영 공동성명에 직접 서명했으며, 일 통해서 50년 동안 '홍콩 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 이 순간, 작은 거인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덩 샤오핑은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독창적인 걸작품'에 대한 그의 정성과 '놀라운 행정적 반응'을 보인 '철의 여인(사실 그녀의 반공산주의정신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다)'에 의해 그 놀랍고 뛰어난 공식이 만들어진 뒷면에는 덩 샤오핑이 주요한 건축가 역할을 했음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런던과 아시아의 모든 언론들은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다체제 국가와 '머리가 둘 달린 용'을 만들기로 한 이 조약에 대해 아낌없이 갈채를 보냈다. 공동성명의 서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시작된다. "고대부터 중국 본토의 일부를 이루고 있던 홍콩은 1840년 아편 전쟁이 끝나면서 대영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공동성명은 1997년 6월 30일 자정을 알리는 열두번째의 시계 종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유니언잭이 내려질 것임을 규정하고 있었다. 그 시간 이후로 홍콩 지역은 홍콩 특별행정구 법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고 '중국 홍콩'이라는 공식 명칭 아래, 50년 동안 경제, 입법, 행정 분야에서 고도의 자치권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베이징은 홍콩의 현행 자본주의 사회-경제 제도와 재정적 독립, 세무제도, 그리고 사법제도 및 교육제도, 언론집회의 자유, 독립관세 지구, 자유항, 국제금융의 중심지로서의 지위, 여러 가지 국제조약의 준수(중국이 가입하지 않은 국제무역기구들을 포함하여)등을 보존할 것을 약속했다. 홍콩은 자체 화폐와 자체 경찰, 심지어 국경선까지도 그대로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세금을 중국 중앙 정부에 보내지 않고, 자체 내에서 재정 관리를 할 것이다. 새로운 국가 원수는 외교 부문과 홍콩 특별행정구의 방어만을 책임지기로 했다. 협약을 임의로 적용하는 베이징 공동성명의 조항 중에는 미니 헌장으로 사용될 기본법의 적용을 완전히 베이징에 맡김으로써 기본법 작성의 책임을 중국에 맡긴다는 규정이 있다. 매우 모호한 뜻을 지니고 있는 이 조항을 이용해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한 약속을 제한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모호함은 특히 사법 분야의 최종 심리권에서 두드러진다. 마찬가지로 '현지에서 선거나 협상을 통해'행정부 책임자를 임명한 과정과 입법평의회에서 행하는 보통선거를 점진적으로 도입하는 시기에 관한 본래의 조약도 모호성을 띠게 되었다. 이후로 홍콩에서 벌어질 사건의 통제를 담당하게 된 중국은 홍콩인들을 합류시키는 데 동의했다. 그리하여 1985년 7월 1일, 기본법 작성을 위한 1차 회의를 개최한 기초위원회 59명 중에 대부분 사업가들로 구성된 23명의 홍콩인이 포함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원 홍콩인으로 구성된 180명의 기본법 자문위원회 위원들 중에는 심지어 민주 인사들도 몇 명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 기본법은 제안하는 권한만 갖고 있을 뿐이다. 1990년 4월 4일 기본법이 발표되다. 기본법은 톈안먼 사태때 민주주의 지지자들이 벌인 반체제운동을 유혈 진압한 중국 지도부의 경화된 방침을 더욱 견고하게 해준 셈이 되었다. 1989년 5월 20일 중국의 수도에서 선포된 계엄령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마침내 100만 명의 홍콩인들을 거리로 나서게 만들었다. 1989년 6월 4일 톈안먼 대학살의 뒤를 이어서 대규모 시위가 재개되었다. 사회 안정과 항센 지수는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기본법은 1984년의 중국측 약속들을 약화시켰다. 홍콩의 입법평의회에서 직접, 보통 선거가 치러질 가능성이 의심스러워졌으며, 법률의 검토를 전국 인민대표대회에 맡김으로써 자치적으로 법률을 제정한다고 볼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자들이 특히 우려한 두 가지 조항마저 도입되었다. 첫 번째 조항은 '국가전복' 기도를 추방한다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홍콩특별행정구 안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발포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중앙 정부에게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홍콩 주민들의 자치권을 옥죄이는 것은 식민지에서 시작된 민주주의가 중국 전역에 전파될 가능성에 대해 중국이 두려워하고 있음을 뜻한다. 식민지의 주민들은 모금, 기증 같은 활동을 통해서, 혹은 많은 '반 혁명주의자들'이 베이징의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않게 도와준 단체인 '옐로 버드'를 지원함으로써 1989년 봄의 반 체제인사들을 향해 그들의 유대감을 한껏 표현했다. 영국인들이 계속해서 양보를 해준 덕에 홍콩에 대한 주권 장악이 용이해진 중국은 '작업단'을 파견해 홍콩에 있는 조합들을 없애버렸다. 이들 '작업단'은 또한 몇몇 신문의 사설 노선을 수정했을 뿐 아니라, 신화사 통신에 대해 숙청작업을 실시했다. 결국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었던 신화사의 홍콩지사장 수 쟈툰은 미국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홍콩과 마카오 담당 판공실 주임 구 핑은 '향인치향(홍콩인이 홍콩을 다스린다)'의 기치에 대해 홍콩인들이 품고 있는 의심을 일소시킬 책임을 맡았다. 그는 "홍콩에게 맡겨진 것은 경제적 사명이지, 제2의 권력 중심지가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베이징은 홍콩 내의 민주화와 관련된 모든 시도를 저지할 수 있는 권한을 손에 넣었고, 1997년이라는 상한선 이후의 장래를 설계하는 모든 계획에 대한 감독권까지 가로챘다. 이같이 베이징의 전통적인'전투적 외교는 1990-1992년 사이에 영연방과의 관계에 위기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이는 첵랍콕공항의 건설과 재정에 대해 중국측이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빚어진 것이었다. 시민의식의 각성과 민주화에 대한 투자 홍콩의 여론은 난민의식의 흔적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난민의식은 운명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감정과 양립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홍콩 반환이라는 기정사실 또한 선거인 명부의 저조한 등록률이 보여주는 체념적인 태도를 더욱 부추겼다. 그러나 중산층의 출현은 뒤늦게나마 홍콩 내에 정치적 분위기가 형성되게 해주었다. 이들의 출현은 아시아인들이 정부의 사업 경영에 대해 대체적으로 무관심하다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게다가 인구의 12분의 1이 수돗물도, 전기도 공급받지 못한 채 최악의 경우 1평짜리 감옥 같은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홍콩 사회의 지극히 불공평한 면도 사회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1985년부터 증가하기 시작한 압력단체의 숫자가 그 점을 증명해 준다. 그 압력단체들의 활동중에서 가장 주목을 끈 것은 데이야만의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반대파들을 불러모은 것이었다. 1990년 변호사 마틴리의 지도하에 홍콩 민주동맹(UDHK)이 탄생해서, 91년과 95년에 치러진 입법평의회 선거때에 대다수 지지를 얻었던 것도 주목할 만하다. 조합 운동가인 라우 친석이나 교사인 스웨토 와와 함께 마틴리는 직접대표제를 강화하고, 입법부 분서에서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일련의 조항들을 삭제하는 등 식민지 체제가 해체되기 전에 권리 확보를 위해 애쓰면서 제한된 시간 내에서 최선을 다해 활동했다. 그러나 민주인사들을 모으려는 시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중국의 반격이 격렬해지고,지원을 약속한 실업계 거물들의 모임이 베이징 쪽으로 돌아섬으로써 중단되고 말았다. 또한 기본법 제23항 안에서 '국가 전복의 기도'를 금지하는 규정들을 도입한 것이나, 1997년 초에 기본적인 자유와 선거체제를 보호하는 일련의 법이 재검토되는 것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에 관해 영국측이 항의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도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크리스 패튼:베이징의 검은 야수 그러나 민주인사들은 스물여덟번째이자 마지막 통치자로서 크리스 패튼이라는 뜻밖의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1992년 10월 7일에 발표된 그의 시정 연설에 대하여 중국 당국은, 말기에 민주주의로 전향한 식민지 정부의 '이중성'과 '위선'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비난하고 나섰다. 사실 홍콩에서 보통선거가 도입된 것은 1982년에 이르러서였다. 중국은 의회제도의 씨앗을 뿌리려고 하는 크리스 패튼의 열망은 홍콩을 '독립된 혹은 반정도 독립된 지역'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음모'라고 주장했다. 패튼은 영국 보수당의 옛 당수이자, 1992년 영국 선거에서 마거릿 대처 총리의 승리를 이끌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처럼 역량 있는 패튼의 야망은 결국 홍콩의 입법평의회가 통제하는 듯한 외형을 만드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새 총독은 현지 주민의 대표자다운 태도를 취했다. 홍콩 문제를 의도적으로 국제화하기 위해 애씀으로써 여러 가지 터부를 깨부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홍콩의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주요 국가들, 특히 호주, 캐나다, 그리고 미국의 정부들이 영국의 대표자가 전수한 개혁계획에 동의하도록, 그리고 일련의 사건들에 보증인의 자격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보트 피플'의 탈출 민주인사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사실 덩 샤오핑의 약속에 설득당한 수많은 홍콩인들도 함께 느끼고 있는 것이다. 덩 샤오핑은 "홍콩을 파괴하는 데 드는 비용은 베이징으로서는 너무나 막대한 것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불행한 사태를 예언한 자들로 인해 1984-1994년이라는 10년 사이에만 60만 명이 서둘러 홍콩을 탈출했고, 100만 명이 넘는 주민들은 언제라고 즉시 짐을 꾸려 떠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홍콩인들의 이민 행렬은 톈안먼 사태 이후 2년 동안에 절정에 달했다. 이 기간 중에는 여권을 발급받겠다는 열망이 홍콩인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 영국과 함께 미국, 캐나다, 호주가 가장 선호하는 이민 목적지였다. 금융계 전문가들, 고등 교육기관의 교사들, 법조계 인사들, 의사들과 같은 고급 두뇌유출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심지어 홍콩 성공의 열쇠라고 여겨졌던 '최소한의 간섭과 최대한의 지지'라는 행정제도를 그때까지 보증해 주든 고위 공직자들마저 홍콩을 떠나고 말았을 정도였다. 1993년 여름 행정평의회의 전직 책임자이자 영국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유일한 중국 여인인 던 남작부인마저 홍콩을 떠났다는 사실은 중국에 대한 홍콩인들의 불신이 언 정도였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1992년부터 이런 탈출이 줄어든 것은 홍콩의 안정성이 다시 회복되었음을 증명해 준다. 이와 같은 안정성 회복은 한편으로는 중국인으로서의 숙명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이민자들이 선택한 국가들이 경제적 난관에 처함으로써 갖게 된 위기감과 연결된 것이었다. 모든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를 보장해 주는 여권을 뒷주머니에 꽂은 채 홍콩에는 다시 많은 수의 보트 피플이 모여들었다. 금권정치는 영국 식민지 시대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 금권정치가 홍콩 특별행정구 제도의 중심에 다시 자리잡게 된다. 앞으로 일어날 동맹관계의 반전들이 볼 만하다. 실업계의 거물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멀리 떨어져 있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내일 그들은 안정, 현실주의, 그리고 이익 추구라는 미명하에 붉은 황제 앞에 무릎굻고 머리를 조아리게 될 것이다. 제4장 연합전선의 구성 홍콩귀족의 정복 중국은 영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홍콩의 실업계 거물들이 거리를 유지하도록 치밀한 계획을 세웠었다. 그리고 1984년 이후에는, 그때까지 영국 봉건군주의 열성적인 협력자였던 보수파에게 우호정책을 펴는 소위 연합전선 전략을 반복했다. 영국인들이 그랬듯이 중국도 홍콩 내의 다양한 결정기관들 안에 홍콩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경제 엘리트들을 영입했다. 자신들이 얻어낼 수 있는 이득을 생각하고 금방 설득된 홍콩의 재벌들은 공식, 비공식의 여러 위원회들을 소집했으며, 천천히 이동을 준비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 주도권은 때로는 중국 당국에 주어지기도 했고, 또 때로는 이해 관계자들에게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리하여 1985년에 홍콩 개발을 위한 재단이 발족된 것은 투자가들을 안심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20명의 설립 회원들은 5000억 프랑의 투자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의 개인 재산을 모두 합하면 프랑스 지불 준비금 총액과 맞먹을 정도이다. 그들이 내세운 '(홍콩을)더욱더!'라는 슬로건은 모든 복잡한 요소를 제거하고 오직 이익만 추구한다는 홍콩 기업인들의 정신을 나타내는 동시에 중국 전체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한다는 뜻도 품고 있다. 준비위원회와 금권정치의 승리 홍콩인들이 중국인들의 '진정한 동국인'으로서 지위가 격상되었음을 보여주는 첫 출발은, 1995년에 준비위원회의 위원 150명이 홍콩인으로 지명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뒤를 이어서 1997년 초, 선거의 책임자들인 추선위원회 위원 400명이 지명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1980년대에 중국인들에 의해 파산 상태에서 벗어난 해운업자 등 젠화를 홍콩 특별행정구의 초대 행정장관으로 선출했다. 준비위원회에서는 현재 베이징에서 활약중인 주요 그룹의 지도자들이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주식 자본의 36%를 보유한 자들이다. 귀금속 상인 출신으로 부동산 백만장자가 괸 리 쟈청, 리 자오지, 부동산 개발업자인 대부호 천 위퉁, 각 분야의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언론사를 소유하기까지 한 로버트 쿡, 영화사와 중국 텔레비전 방송사를 갖고 있는 샤오 이푸, 헨리 폭, T.T.수이 등이 바로 그들이다. 1996년 4월 베이징에서 열린 준비위원회의 개회식은 민주인사들의 두려움을 더욱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그 회의에서는 중국 정부의 뜻에 따라 주창된 임시입법회의 창립이라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계획을 거수로 표결, 단 한 표가 빠지는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 '제2의 주방'이라는 별칭하에 중국인들이 제안한 이 제2의 입법평회의는 과도기를 순조롭게 넘기게 한다는 공식 임무를 띠고 있다. 이를 비방하는 자들은, 임기 만료를 앞둔 식민지 정부를 배제한 채 일을 추진하려는 중국인들의 책략이라고 보고 있다. 만기일이 지나서 해야 할 일들을 앞당겨 한 중국인들은, 중국 정부와의 약속을 어기고 입법평의회의 모든 위원을 민주인사들로 선출한 1995년 9월의 선거를 무효로 여기고 있음을 드러냈다. 또한 패튼 총독이 일방적으로 선거 규칙을 깨뜨렸다고 비방하면서, 1997년 7월 1일부터 모든 집회를 해산하기를 원한다는 것도 드러냈다. 합리성의 선택 사실 홍콩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기정사실 앞에 굴복한다는 것 외의 다른 시각은 전혀 갖고 있니 않다. 역사를 바로잡은 홍콩은 번영을 누릴 수 있게 해준 식민지 정부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예전에는 자신과 자신의 선조들이 어떻게든 피하려고 한 대상이 앞으로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현실 앞에 시간이 되기 전에 미리 새 주인에게 충성을 약속하고 있다. 중재자를 찾는 중국 정부의 집요한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유명 인사들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당들과 균형을 이루기 위해 1990년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모임에 가입했다. 사업가들과 대학가의 사람들(반대파들이 '44인의 무리들'이라고 부린 자들)은 베이징의 자문위원이라는 직함을 받아들였다. 홍콩 개발을 위한 만주연합, 자유민주연맹, 혹은 사업 및 직업 연맹 등을 비롯한 다른 수많은 모임들이 '일치'와 '안정'을 설파하고 있다. 이 두 단어는 중국의 특권층이 늘상 들먹거리는 주요 정치용어로서 조화와 복종이라는 유교적 개념에 부응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들에게 반기를 들고자 하는 자들에게 은근히 경고를 보내는 것이기도 하다. 홍콩 공산당의 지하활동 베이징이 가장 신임하고 있는 중개하고 있는 중개자들을 밝혀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홍콩 공산당은 '홍콩 작업위원회(Hong Kong Work Committee)'라는 이름을 내건 비밀 건물 안에서 보호받고 있으며, 그 인원수와 활동은 철저하게 국가 기밀로 비밀이 지켜진다. 그런 이유에서 이미 영국의 묵인을 얻은 이들이지만 중요한 문제가 있으면 국경선 너머 선전시에서 모임을 갖는다. 민심을 끌기 위한 전쟁터와 같은 치열한 현 상황에서, 중국에게는 210만 명의 회원들로 으뜸가는 베이징 지지자들의 조합 연맹과 홍콩 공산당의 도움이 필수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1997년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홍콩 내의 수많은 기업체들의 수뇌부에 뜻밖에 발령된 '붉은 황태자들', 곧 중국 지도부의 자녀들이 앞으로 이들의 역할을 대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상부상조하는 삼합회들 중국의 여러 마피아들과 청 왕조 때부터 비밀 결사조직인 삼합회(이들 중 가장 큰 세력인 신의안파는 대부분 광둥에서 이민온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들 사이의 상조활동은, 1980년대 초에 홍콩 법질서의 붕괴를 낳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겨준다. 국경을 넘나들며, 필요에 따라서는 중국으로부터 밀수된 무기를 공급받기도 하는 이들의 협력체는 오랫동안 홍콩에서 활동을 제약받아 왔다. 그러나 베이징이 그 동안 '불건전한 술책들'이라고 점잖게 비난해 오던 범죄들, 즉 밀수, 매춘 조직망, 불법 이민을 위한 서류 위조 등이 이제 이들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들은 그 동안 수많은 연안 항해선, 작은 나룻배들, 순시함들을 이용해서 본토 내륙을 대상으로 많은 수익을 올려왔다. 이득이 많은 호화로운 대형 승용차, 담배, 비디오, TV 수상기 등이 그들의 불법 무역의 주요 품목이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문호가 활짝 열림로써 그들의 이익도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기간에 제2의 경제 주체자들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용의 머리들(삼합회의 두목들)'은 본토 대륙에서 핵심적인 개발 분야나 불법 기업체에 투자해 왔다. 신의안파의 두목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추측되는 자로서, 홍콩 영화산업의 일부를 관리하고 있는 형 와경은 광둥의 권력자들과의 친분에 힘입어 푸저우 공항의 종합백화점 건설과 사인섬의 컨테이너항 개발, 그리고 특히 메드타운인 선전시 개발에 자본을 투자할 수 있었다. 몇년 전부터 국경 너머에서 대표적인 베드타운으로 부상한 선전시는 현재 홍콩의 복사판임을 자처하고 있다. 비교적 개끗하게 남아 있는 홍콩과는 달리 선전은 조직화된 범죄의 중심지가 되었다. 상당히 많은 중국의 다른 대도시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곳에서도 눈부신 경제 발전에 발맞춰 부패 또한 급속도고 펴져 나갔다. 1997년의 만기일이 다가오면서 한가지 두려움이 홍콩의 정치계와 사업계 전반에 파고들었다. 그것은 선전의 범죄집단과 그들의 범죄행위가 역방향으로 국경을 넘어와 비합법적인 제2의 전선을 구축하며 홍콩가지 타락시키고 나아가 홍콩의 경제 기능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등 한마디로 법질서를 무너뜨려서 홍콩이 선전 같은 범죄도시로 변하지 않으까 하는 두려움이다. 압력과 자체 검열:"당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중국이 홍콩을 통제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 중 하나가 아시아에서 가장 자유로운 홍콩 언론이란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약 650개에 달하는 이들 언론매체는 세계에서 가장 수준 높은 독자층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또한 가장 번창하고 있다. 홍콩 언론의 독립성은 기본법에 의해 분명히 보장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지도부가 내놓은 여러 가지 선언들은 과연 언론의 독립성이 지켜질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홍콩의 친중국계 신문인 '대공보'는 "사고방식이 편파적이거나, 정부 당국에 적대적인 자들만이 불안감을 느낄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한편 외무부 장관인 첸 지천은 이렇게 약속했다. "애국적인 방송매체는 검열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사실 언론사주들에게 1997년 이후는 미지수가 3개나 등장하는 방정식과도 같다. 평균적으로 신뢰할 만한 논설의 수준을 어떻게 유지하면서, 불분명한 잠재력을 지닌 시장을 어떻게 뚫고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다. 기적 같은 해결책을 기다리는 중에 자체 검열이라는 방식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신문기자들 사이에서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라는 말로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국경 너머의 특파원이라는 직업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는 첫 번째 사건이 벌어졌다. '명보'의 베이징 특파원 이 양이 '국가기밀 누설'이라는 죄목으로 12년간 징역을 살게 된 것이다. 그는 빚의 일부를 갚기 위해 금을 팔려고 한 중국은행의 의도를 파헤친 기사를 썼었다. 식민지의 종말 '연합전선'의 출현은 1997년까지, 그리고 그 이후까지도 책임감을 행사하기로 약속한 영국 정부를 즉시 소외시켰다. 식민지 정부는 해외에 거주하는 300만 명의 영국계 홍콩인들에 대한 영사의 의무를 내세워 '사후' 감독권을 주장했다. 특히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홍콩 반환 전후에 터져나온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할 공식적인 책임을 맡은 중영 연합 연락기구를 2000년까지 연장하자고 제안했다. 식민지 정부는 홍콩에 1000여 개 상당의 영국 기업들이 정착하고 있는 현실을 이유로 내세우며, 유엔에서 서명한 공동성명의 요청에 따라 자율권의 약속을 준수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도덕적 의무를 떠맡고 싶어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영국으로서는 치명적인 다음과 같은 원리를 반론으로 내세우며 즉각 영국측의 주장을 일축했다. "어떤 나라든, 특히 대영제국은 중국 내부의 일에 간섭할 수 없다." 존 메이저 정부는 중국이 '반환 협정을 위반'한 것에 항의하는 일련의 주장을 폈으나,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했다. 톈아먼 광장에 세워놓은 거대한 전자시계의 깜빡이는 불빛이 만기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상기시킨 가운데, 식민지의 상징을 없애려는 새로운 열정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 예로 캐세이 퍼시픽 항공은 비행기 꼬리 부분에 그려진 유니언잭을 지워버렸으며, 홍콩 달러의 지폐에서도 왕관을 쓴 엘리자베스 2세의 옆모습이 사라졌다. 또한 로열 자키 클럽과 로열 골프 클럽도 왕실을 상징하는 모든 상징물들을 제거했다. 베이징의 공격적인 정책은 경제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국은 번영이 가져다준 영국의 정당성을 이어받을 의무가 있다. 홍콩과의 경제적 유대가 갖는 중요성, 그리고 점점 더 견고해질 둘 사이의 통합, 이 두 가지는 앞으로의 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1997년은, '평소와 같은 영업' 추구를 담보로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기보다는, 어쩌면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해일지도 모른다. 제5장 통합된 홍콩 당연한 동반자 10여 년간 10%가까이 유지되는 성장률,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값싼 노동력, 성장에 있어서 필수적인 발전가능성, 그리고 인류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잠재적 시장 등으로 인해 홍콩 반환이 주는 살벌한 느낌과는 아랑곳없이 중국은 지극히 당연한 동반자로 인정받고 있다. 홍콩은 1923년부터 쑨 원이 모범적인 예로 늘상 인용하던 곳이다. 게다가 1992년에 덩 샤오핑은 '중국 본토에 13-14개의 홍콩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동국인들을 초청함으로써, 자기 나름대로 홍콩을 본딴 중국 경제의 활성화를 뒷받침했다. 그때 동국인 홍콩 기업가들이 보여준 반응은 열렬한 것이었다. 이로써 중국과 홍콩 상호간의 관계에 순식간에 등식이 성립되었으며, 전반적인 두 지역 사이의 작업이 '사실상' 확연히 구분되었다. 우선 거대한 중국 땅에 마지 자그마한 혹처럼 붙어 있는 자본주의 세계인 홍콩은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이자 기술과 정보의 중심지로 활약하게 되었다. 이런 홍콩을 매개로 하여 이제 중국은 세계경제에의 통합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그 대신 산업화의 모델이 되는 동시에 산업화를 실현하는 인력 및 기술 수단들을 제공한 홍콩은, 공급자이자 고객이며 또한 중국의 중개자로서 교역량이 증가하는 혜택을 톡톡히 입고 있다. 홍콩은 중국의 성장을 유도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넉넉한 보상으로 전세계에서 8위의 무역도시, 4위의 금융도시, 그리고 1위의 해운도시로서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다지게 된 것이다. 중국의 엘도라도를 정복하며 세 차례에 걸쳐 본토 내륙에 투자의 대파도가 몰아치는 동안 홍콩은 마침내 그 거대한 땅에 닻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 첫 번째 투자의 물결은 1978년 덩 샤오핑이 내세운 개방정책이 실시되면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에 두 번째로 투자의 물결이 몰려왔을 때에는 지역간의 구분을 없애는 지방색 타파도 가능했다. 그리고 1992년 화남 지방을 돌아보는 작은 거인의 순회여행 내용을 담은 기록영화(남순강화)의 메시지가 나간 이후, 세 번째 투자 붐이 일었다. 이때에는 투자금의 액수가 갑작스럽게 두 배로 뛰어올랐다. 그 메시지는 진정 독재자의 낙원의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였던 것이다. 중국 대륙에 투자 붐이 일 때마다 매번 홍콩의 사업가들이 단연 선구자 역할을 하여, 1990년대 초에는 홍콩인이 '외국인' 투자의 70%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참여율이 높았다. 그 결과 투자되는 산업 분야와 지역도 점점 더 다양해졌다. 홍콩에서 들여온 자금은 대륙 도시의 풍경을 새롭게 만드는 데 이바지하여, 아시아 경제성장 지역에서 어김없이 볼 수 있는 표징인 고층 빌딩의 숲이 도시를 가득 메웠다. 홍콩의 자본은 중국 발전에서 가장 큰 난점이 되고 있는 사회 간접시설 분야에 투자되어 고속도로를 만들고 전력 중앙처리장치를 건설하며 항구와 공항 재정비 등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기울어 가는 청 왕조 시대처럼 이념적으로 실패한 사회주의 체제는 외국의 자극을 받아 추진하게 된 현대화에 반드시 필요한 지역이 출현할 수 있도록 권장했다. 중국과의 협력을 적극 권장하는 자들 중에는 홍콩의 거대 기업중 하나인 복합기업체 뉴 월드를 들 수 있다. 그 대표인 리 자오지((포브스))지의 발표에 따르면 세계13위의 부호는 1990년대에 자신의 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중심축으로 중국을 선택했다. 마카오의 상당 부분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 스탠리 호도 이와 비슷한 목표를 세웠다. 중국과 홍콩 가에 맺어진 이같은 경제 계약은 사람과 자본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해주었다. 수천 대의 중형 트럭과 수만명의 노동자가 국경을 넘나든 1990년의 무역은 주목할 만했다. 그리고 1993년에 홍콩을 방문한 '대륙의 사촌들'의 수는 1700만명을 넘어섰다. 이것은 그 전해와 비교해볼 때 50%가 증가된 숫자이다. 고속도로망과 철도망의 발달, 교량 건설, 수많은 항구 재정비 및 첵랍콕 신공항 건설 등으로 중국과 홍콩사이의 거리는 더욱더 좁아지고 있다. 지역 구분 없애기: '홍콩의 배후지' 광둥 지방 국경을 넘어간 첫 번째 사업은 의류업이다. 그 분야의 눈부신 성장은, 단순하고 규격화된 제품들을 생산해 내는 사업으로 신속하게 이어졌으며, 다시 장난감 사업으로 넘어갔다. 찬 가문은 이 '두번째 기회'의 혜택을 봤다. 광둥 지방에서 만들어진 3억 개의 닌자 거북이 인형들은 그들로 하여금 불과 몇 년 만에 부동산제국을 건설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홍콩 발달의 영향은 우선 화남 지방에 미쳤다. 그 다음엔 광둥 지방과 인접한 곳으로 펴져 나갔는데, 지역 구분을 무시한 기업들의 3분의 2가 광둥 지방으로 모여들었다. '새가 나무에 앉듯이' 강력한 세제상의 혜택과 값싼 임금(홍콩 임금의 5분의 1의 수준), 편리한 교통에 이끌려 이곳을 찾아온 새로운 기업들은 300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그 성장은 아주 괄목할 만한 것이다. 그래서 구매력을 갖춘 6500만 명의 소비시장을 지닌데다, 중국 전체 국민 총생산의 평균 수준보다 70%가 높은 국민 총생산액을 벌어들이는 이 홍콩의 배후지는 머지않아 자신도 홍콩처럼 용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 경제 기적에 의한 이익 배당금이 분배되면서 여기에 자연스럽게 따를 권한에 대해 위협을 느낀 메이징의 지오층은 투자가들이 이제 북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푸젠성의 남쪽 지방과 상하이를 돌아, 아편 전쟁 당시에 '악마 같은 외국인들'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 진출하라고 권장하다. 홍콩을 사들이는 중국 1990년대 초에 중국은 최초로 홍콩 내의 토지를 소유한 국가이자 최초의 '외국인 투자자'(1995년에는 1000억 프랑이 넘었다)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대기업들의 계열회사를 포함하여 약 2000여 개의 중국 기업들이 홍콩에서 가장 몫이 좋은 곳에 번창하는 회사들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의 재산은 주식 자본의 10%를 차지한다. 홍콩 자본주의의 기초를 배운 태자당, 즉 고급 간부들의 자제들은 기간산업 분야인 항공산업과 전기총신산업을 대륙내에서도 통제할 수 있도록 주식의 공개매입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는 덩 샤오핑의 장남인 덩 지펑이라든가, 중국 부총리 룽 리전의 아들 래리 융도 포함되어 있다. '붉은 백만장자'인 래리 융은 홍콩 자키 클럽 사무소에서도 인정을 받아, 자딘의 뒤를 이어 대표직을 맡고 있다. 이제 화남 지방은 영국 여왕의 초상화가 그려진 홍콩달러 통화량의 4분의 1이 넘는 막대한 양이 통용되는 홍콩 달러 권역으로 바뀌었다. 그러는 동안 차이나 은행도 중앙 협동은행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회'라는 무기 홍콩의 중국인들은 이제 대만의 중국인들과 함께 '동국인'이라는 특권적인 신분을 인정받고 있다. '중국의 동국인'이라는 신분은, 외국국적(싱가포르나 혹은 특히 말레이시아)을 취득하고 있는 중국 이민들의 후손이라든가, 혹은 이민을 갔지만 그곳 국가의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고 있는 '재외 중국인들'로 부터 홍콩인들을 분리시켜 준다. 이런 이유로 홍콩인들은 세계 곳곳에 분산된 약5700만 명의 중국인들 가운데서 특별한 혜택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중국에는 없는 자본과 충분한 노하우를 사용할 수 있는 그들의 복합기업체들은, 거의 경쟁력이 없는 시장에서 당연히 얻게 되는 특별한 혜택을 누릴 때도 종종 있다. 홍콩 산업의 또 다른 성공 수단이 되고 있는 '회'는 같은 가문, 같은 파벌, 혹은 은혜를 입은 사람들간의 의리로 맺어진 조직망을 갖고 있으며, 절대적인 보장을 얻기 못할 때는 투자의 위험을 대폭 줄이는 신중함도 갖고 있다. '회'에서 얻는 효과는 사업가가 태어난 지방, 혹은 고향마을에 투자하여 그곳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할 때 가장 극대화된다. '상하이 사람'들은 화동 지방의 주요 도시인 상하이와 그곳의 경제특별구인 푸둥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덩 샤오핑의 오랜 친구인 헨리 폭은, 순드 근처에 40만이 넘는 주민이 사는 신도시를 건설했다. 그곳은 그의 고향이다. 고든 우는 광둥의 고속도로가 자신의 고향 마을인 파신을 지나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돈을 들여 30km의 연결도로를 덧붙이기도 했다. 타협안 모색 그러나 경제전략들은 현재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으며, 때로는 양면성을 띠기도 한다. 홍콩의 재벌들은 과열된 경제 상황에서 낙오한 자들을 보며 자못 신중해졌다. 이제 그들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혼합물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것이 과연 '경제 개혁'과 '정치의 현대화'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의 신화를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홍콩인들은 국가 전체의 발전을 보장해 주는 구조적 자본주의에다 중국의 체제를 결합시키기보다는, 부의 축재가 확실하다고 보이는 카지노 자본주의에 더 많이 결합시키고 있다. 그들은 금융, 재정, 회계 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국제무역의 기준에 부합하려는 노력이 완전히 성공할 때까지 신중한 태도를 취할 것이다. 홍콩 반환이 이루어지기 넌 달 전에 작은 거인이 사망하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경제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같은 경제적 돌발사건들은 식민지의 사업가들로 하여금 동반자의 수를 증가시켜 위험을 분산시키고, 투자 대상국을 아시아와 서구의 여러 나라로 다양화시키며, 자본 회수 기간을 최대한 축소하게 만들었다. 유서 깊은 두 재벌사인 스와이어사와 자딘사의 대립된 시각들은 이런 전략들을 증명해 준다. 전자는 심도 있는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베이진과의 협력관계를 더욱 깊이 추진해 나간 반면에 후자는 '식민지라는 원죄'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를 피하기 위해 준비조치를 확대했다. 자딘은 크리스 패튼의 민주화 노력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며, 공동선언을 체결한 해에는 버뮤다 군도로 사업체를 이전시켰다. 자딘 그룹은 1997년에도 여전히 홍콩에서 제1위의 기업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1988-1992년 사이에 중국-홍콩 지역 내에서의 투자를 30%를 줄였다. 가라오케와 마오를 교환하는 무역 경제 통합이 이루어지자 그에 대한 필연적 귀결에서 1997년에는 자연히 두 지역의 문화도 만남을 갖게 되었다. 문화의 만남은 홍콩 상업주의의 왕성한 식욕에 힘입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텔레비전 방송, 달콤하고 가벼운 음악, 미국식 유행, 홍콩에서 제작된 쿵푸 영화 등은 홍콩 반환 이전부터 '홍콩을 바라보는 광둥인들을 매혹시켰고, 그런가 하면 '다른 지방의 중국인들이 광둥 지방에 눈길을 돌리게'했다. 홍콩의 공급자들은 1985년부터 중국의 가라오케 영업소 안에서 군림하고 있는 노래방 기계 20여만 대의 대부분과 TV수상기 대부분, 그밖의 수많은 소비재들을 중국에 공급했다. 많은 재벌들은 무역을 통하여 중국에서 쇠퇴해 가고 있는 '사회주의 문화'가 중국 대륙 안에서 다시 회복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넥타이 사업으로 거부가 된 찬 선쯔 같은 이는 "중국의 공산당 없이는 진정한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시대에 뒤떨어진 베이징의 상투적인 말을 끄집어내며 밤에 문을 여는 가라오케 바를 열었다. 이렇듯 공산당의 상징물들을 새삼스럽게 끄집어내는 태도는, 어제까지만 해도 멸시받았던 한 체제가 오늘은 아주 평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치 마귀를 쫓는 이 주문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무사히 넘길 수 있게 해준다는 듯이. 50년의 유예기간? '중국 홍콩' 특별행정구의 출현과 함께, 덩 샤오핑 이후의 고위 공직자들은 개방의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그들은 '악마 같은 외국인들'이 몰려운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시계추의 움직임을 가속화할 수도 있고, 반대로 저지할 수도 있다. 중영조약은, 서류상으로 식민지를 지배하던 영국의 마지막 꽃잎이 떨어짐과 동시에 이 세계에서 식민지 시대가 사라지게 해주었다. '시험에 들어가는' 앞으로의 50년은 역사적인 문화충돌을 피하도록 해줄 것이다. 만일 50년의 유예기간이 지켜지지 않아서 문화적 충돌이 일어나고 만다면, 그것이야말로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공산체제의 종식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 될 것이다. 중국이 망사에 젖어 주권을 휘두른다거나 혹은 경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탓으로 이 지극히 중요한 약속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장애물은 너무나 많다. 통제가 잘 되지 않는 불법 이민, 부패의 만연, 사법과 재정과 방송매체 분야에 나타날 수 있는 간섭주의 등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여버릴 수도 있으며, 예전에 포르투갈령이었던 고아나 베네치아가 그랬던 것처럼, 이 상업도시가 위험에 빠져 몰락해 버리게 몰고 갈 수도 있다. 현대화의 추구라는 베에 몸을 실은 마지막 붉은 제국의 상속자들은 이 도박이 가져다줄 이익이 어떤 것이니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다. 마카오와 대만까지 재통합하려는 그들의 소망을 넘어서서 그들은 세계의 중심이 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어쨌든 매우 중요한 역할을 위해 예전의 중화제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기록과 증언 중화제국과 '붉은 머리의 야만인들' "천자의 나라는 부를 늘리기 위해서 외부 야만인들의 상품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영국의 국왕 조지 3세가 중국의 건륭제에게 파견한 머카트니의 외교(1792-1793)는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중국은 다음의 서신에 나타나 있듯이 영국과의 통상을 거절했다. 황국이 하늘로부터 위임받은 권리에 근거하여, 황국의 황제인 천자는 영국의 국왕에게 다음과 같은 특별서신을 보내는 바이다. 영국의 국왕이여, 당신은 멀리서 우리 황국의 명성과 영향력을 감탄해 마지않고, 또한 우리이 문명과 번영을 갈망하던 중, 마침내 우리에게 이처럼 사절을 보내게 되었소, 귀국의 사절은 멀고 먼 바닷길을 헤치고 와서, 우리에게 공손하게 경하의 인사말을 건넨 후 국서와 할게 공물을 전하였소. 영국의 국왕이여, 나, 황국의 천자는, 귀국의 예의바르고 공손한 태도에서 진지함을 보았기에, 귀국의 사절과 그 수행원들을 접견실로 안내하도록 대신들에게 명령하였으며, 다른 조공국의 사절들에게 하듯이 그들에게도 연회를 베풀고, 귀국의 공물에 대한 답례의 선물을 전달하였소. 또한 특별서신을 보냄과 동시에 비단과 귀중품들을 하사하는 바요, 나, 천자는 귀국의 사절이 우리 황국과 통상을 원한다는 뜻을 어제, 대신들을 통해 전달받았소. 귀국이 요청한 사항들은 이미 정해져 지켜오던 규칙들을 수정해 달라는 것이데, 그러나 지금은 그 문제를 허락할 때가 아님을 알리지 않을 수 없소. 서방의 야만국들의 상품들과 귀국의 상품들은 이제까지 마카오엣 우리의 상품들과 교환되어 왔으며, 이것은 어제 오늘 시작된 일이 아니니, 이미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온 것이오. 우리 황국의 산물들은 항상 넘쳐나고 있으며, 황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산물은 아무것도 없은즉, 따라서 우리 황국은 부를 늘리기 위해서 외부의 야만국들의 상품에 의지할 하등의 필요가 없소. 그러나 서방의 야만국들과 귀국에서는 황국이 생산해 내는 차와 도자기, 비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리하여 우리 황국은 너그러운 온정을 베풀어, 서방 국가들 및 귀국의 상인들이 일용품을 공급받고, 이윤을 남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카오에 통상관을 열 것을 허락했던 바요. 이렇듯 우리의 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귀국의 사절은 많은 요구를 해왔으니, 그 요구들은 기존의 전례들을 넘어서는 것이며, 먼 곳에서 온 사람들에게 큰 호의를 베풀어 통상을 열고, 사방으로부터 찾아오는 야만인들을 돕고자 하여 황국이 행하고 있는 법도에 완전히 역행하는 것이오. 황국은 수만 개의 왕국들을 똑같이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을 통치하고 있소. 귀국, 영국은 광둥에서 통상을 하고 있는 유일한 국가가 아니니, 만일 모두가 귀국의 옳지 못한 선례를 따라서 당치도 않은 요구 사항을 들어 달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성가시게 한다면, 우리가 그들의 모든 요구를 어떻게 다 들어줄 수 있겠소? 섬나라인 까닭으로 바다에 둘러싸여 있어서 미개한 다른 국가들과의 접촉이 쉽지 않은 귀국이 아마도 황국의 규칙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에, 이에 나, 천자는 귀국의 사절과 그의 수행원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 전에, 귀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라고 대신들에게 명령했소. 그러나 그들이 귀국으로 돌아갔을 때, 이런 사실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혹여라도 잘못 전하는 바가 있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이에 이같은 특별서신을 통하여 귀국의 요구사항에 조목조목 답변을 하였소. 영국 국왕이여, 그대가 이 점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오. 귀국의 사절은 귀국의 상선들이 저장 지방의 닝보항, 저우산 지역과 더불어 헤베이 지방의 텐진항, 그리고 광둥 지방의 몇몇 지역에서 짐을 풀고 상거래를 하겠다고 선언했소. 그러나 통상을 하기 위해서 황국에 오는 서방 국가들은 언제나 마카오에만 머물러야 하느니, 그곳에는 물품을 받아들이고 유통시키는 통상관들이 있으며, 그것이 통례가 되어온 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이오. 수년 동안 귀국도 이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이와 같은 관습에 복종해 왔소. 저장 지방의 닝보항, 허베이 지방의 텐진항, 그리고 그외의 다른 항구에는 통상관이 개설되어 있지 않은즉, 귀국의 선박들이 굳이 이런 지역에 간다고 해도, 상품을 유통시킬 방법을 전혀 찾을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소. 그곳에서는 귀국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통역자를 구할 수 없기에 더욱 그러하오. 다시 한번 이르노니, 귀국의 요구들은 모든 점에 있어서 시기가 적절하지 못하오. 통상이 허가된 마카오 지역 외에는, 텐진항과 닝보항 및 저우산 지역에서 짐을 풀고 통상을 하겠다는 귀국 사절의 요구를 들어주기란 불가능한 것임을 알리는 바요.알랭 페이르피트 (세번째 특별 서신) (문화적 충격, 중국인들의 시각) 파야르 출판사, 1991년 불평등한 난징 조약과 홍콩의 이양 많은 상황이 변했다. 진보된 군사력과 기술 발달에 힘을 입은 영국은 중국은 자국과 통상을 시작하도록 강요하게 된다. 1차 아편 전쟁이 끝나자, 영국인들은 자신들에게만 유리한 조건들을 중화제국에 들이밀었고, 마침내 1842년에 난징 조약 체결을 강요한다. 그것은 영국의 사자가 중국이라는 용에게 입힌 첫 번째 상처였다. 제2조 중국의 황제는 영국의 신하들이 상업활동의 필요에 따라서 그들의 가족과 부하들과 함께 광둥과 아모이, 푸저우, 닝보, 상하이에 거주할 것을 허가한다. 그리고 영국 여왕은 위에 열거한 도시나 마을에서 거주할 세무사들과 자문장교들을 지명하도록 한다. 이들은 전술한 상인들과 중국 당국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며, 또한 이후에 명시할 법과 중국 정부가 제안한 법들을 영국의 신하들이 제대로 준수하고 있는지 감독한다. 제3조 영국 신하들이 선박을 손질하고 수리하며, 또한 이를 위한 물자를 공급받기 위해 상점을 열 수 있는 항구가 반 듯 필요하므로 중국 황제는 영국 여왕에게 홍콩섬을 양도하기로 한다. 홍콩섬은 앞으로 영원토록 영국 여왕과 이후 세습되는 영국 군주들의 소유가 되며, 영국 여왕이 선포하는 법과 규칙에 따라 통치된다. 제4조 중국의 총사령관에 의해 투옥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당했던 영국의 원정군 사령관과 그의 부하들의 생명에 대한 보상금으로 중국의 황제는 1893년 3월에 광둥에서 파기된 아편 대금에 해당되는 600만 달러를 지불할 것을 수락한다. 제5조 중국 정부는 광둥에서 무역을 하고 있는 영국 상인들이 공행(정부에서 인가한 상회)에 소속된 상인들과만 협상하도록 이제까지 제한해 왔다. 그러나 이후부터 중국의 황제는 영국 상인들이 머물고 있는 모든 항구에서 이 의무를 철폐하도록 지시하며, 영국 상인들이 원하는 사람들과 상거래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또한 공행의 상인들이 영국 신하들에게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으나 지불 능력이 없어서 갚지 못하고 있으므로, 중국 황제는 이 채무액 300만 달러를 영국 정부에게 분할하여 지불할 것을 수락한다. 제8조 중국 황제는 현재 중화제국의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을 영국 여왕의 신하들(유럽 출신뿐만 아니라, 인도인 신하들까지도)모두를 아무런 조건 없이 석방시켜줄 것을 수락한다. 제9조 중국 황제는 영국의 신탁통치를 받는 국가에서 살았거나, 영국인과 상거래를 하거나 혹은 협상을 맺은 일이 있거나, 혹은 영국 여왕이나 여왕의 대신들을 위해 일한 일이 있는 중국의 신하들 모두에게 완전하고도 전면적인 사면을 내림과 동시에, 그들의 활동을 보장해줄 것을 서명한 후 이를 선포한다. 또한 중국 황제는 위에 열거한 이유로 현재 감금되어 있을 수도 있는 모든 중국이 신하들을 풀어주도록 한다. 제10조 중국 황제는 조약의 제2조에 따라 모든 항구도시에서 수출입의 관세비와 그밖의 다른 세금 액수를 공정하고 일정하게 정한 뒤 그 액수를 유지하며,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게 한다. 중국 황제는 또한 영국 상인들이 이후에 결정되는 세비에 따라 이상 열거한 항구에서 고정된 세금을 일단 지불했을 경우, 통과세로서 상품 가격의 5%를 넘지 않는 선에서 추가 요금을 지불한 뒤에는 그 상품을 중화제국 안의 어떤 도시나 지방으로든지 중국인들에 의해 수송할 수 있게 한다. 중국 여행의 첫인상 극동의 제노바, 홍콩 뤼도빅 드 보부아르 백작은 자신의 어릴 적 친구이자 주양빌 영주으 아들인 팡티에브르 공작과 함께 세계를 알기 위해 긴 여행길에 올랐다. 이 여행은 1865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이들은 샴 왕국에서 한동안 체류한 후 1867년 초, 드디어 홍콩에 도착한다. 41에서 7를 오르내리는 급작스러운 기온 변화에 불쾌감을 느낀 1주일을 보내고 마침내 우리는 오늘 저녁 홍콩섬의 바위절벽 앞에 서게 되었다. 우리는 '설퍼운하'를 지나 다시 좁고 위험한 수로를 지났다. 돛이 펄럭이고 활대가 마구 흔들리며 기계가 요동하는 바람에 우리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그같은 험란한 여정을 헤쳐나온 후에야 비로소 어둠이 드리워진 하늘 아래 너무나 고요한 모습을 드러낸 홍콩의 정박지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 순간 우리 눈에 비친 홍콩항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장엄했다. 사방에 기암이 솟아 잇고 거센 바람을 막아주는 좋은 산들 가운데에는 거울처럼 맑고 고요한 호수가 자리잡고 있었다. 산허리에는 층층이 들어선 영국 상인들의 주택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반짝거렸다. 영국 상인들은 25년에 걸친 홍콩 생활로 이미 하나의 커다란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수천 개의 불빛이 이 장엄한 풍경속에서 반짝이는 동안 수백 척의 정크선이 수많은 쾌속선 사이에서 닻을 내린 채 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크선 위에서는 알록달록한 등불과 날개 달린 용들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고 배 위에서 쏘아올리는 신호탄들과 폭죽, 그리고 돌출한 뒷갑판의 끄트머리에 걸려 있는 마지막 남은 햇빛 때문에 바다는 온통 불붙은 것처럼 보였다. 방콕이 아시아이 베네치아하면, 바위 절벽 위에 커튼을 쳐놓은 듯 자리잡고 있는 홍콩은 극동의 제노바처럼 느껴졌다. 1867년 2월 9일, 햇살이 눈부신 정오 무렵에 우리가 탄 삼팡이 드디어 항구에 닿았다. 삼팡을 끌어올리는 수부들은 뜻박에도 여인들이었다. 낡아서 반들반들 윤이 나는 폭넓ㅇ느 밪를 입은 중국 여인들은 아기를 포대기로 싸서 등에 업고 끈으로 단단히 동여매고 있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단단한 근육을 지닌 이 여자 뱃사공들은 무거운 아편 상자를 힘차게 들어다 옮겼다. 각각 4000프랑어치의 아편이 들어 있는 아편 상자는 우리의 주요한 짐이다. 여인들은 고음으로 부르는 노래의 박자에 맞춰 몸을 움직이며 짐을 낡은 거릇배에 옮겨 실었다. 아편은 그 거릇배 위에서 수요자들에게 공급될 참었다. 우리는 물 위에 떠 있는 많은 배들 중 두 척을 골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8명의 여인들이 우리의 짐들을 작은 배에 옮겨 실은 후 다시 노를저어 부둣가에 내려주었다... 우리는 도시와 정박지를 굽어보며 우뚝 솟은 총독부 관사를 따라 걸으며 활기찬 거리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중국인 노무자 쿨리들은 서로 부딪히며 몸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 곳에는 황국의 부유한 중개상들도 북적대고 있었다. 하얀 천으로 만든 장화를 신은 그들은 팔이 보이지 않게 소매가 길게 늘어진 하늘색 외투를 입고 보도 위를 걷고 있었다. 외투의 뒷자락이 어찌나 긴지 장딴지까지 내려왔다. 두 명의 몸종을 거느린 상류층 여인들도 눈에 띄었다. 그 귀부인들은 꽉 조여서 자그마하게 만든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녀들의 발은 기껏해야 8-10cm 정도로 보였다... 이곳의 길은 러시아의 산들을 닮았다. 대부분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층계로 된 그 길이 길어지면 유럽인들은 가마를 타고 오른다. 그래서인지 곳곳에서 삯가마들이 모여 있었다. 근육이 잘 발달된 2-4명의 쿨리들은 합의하에 서로 교대해 가며 가마를 메고 가는데 아주 헐 값의 급료를 받고 일을 한다. 우리는 각각 걸음이 빠른 사나이들이 메고 가는 가마를 타고 산을 올랐다. 이렇게 해서 배에서 내린 지 3시간만에 우리는 빅토리아피크(1825피트)라고 불리는, 홍콩섬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주변의 수많은 섬들이 한눈에 들어왔고, 멀리 대양까지 보였다. 그러나 중국 땅에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이 해안들은 얼마나 척박한 땅이었던가! 회색빛 바위와 헐벗은 산들은 혼돈 그 자체로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총독은 우리를 축제용 가마에 태워서 주변을 구경시켜 주었다. 가마꾼들은 모두 진홍색 오페라 하우스 복장을 하고 있었고, 그들의 뾰족한 모자 위에는 영국의 문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우리는 완전 무장을 한 인도인 용병들의 호위까지 받으며 유럽인이 사는 동네를 지나서 중국인 빈민들의 움막이 밀집한 동네를 지났다. 홍콩에서 가장 눈에 뛰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감옥 안에도 들어가 보았는데, 그곳은 창고 도시인 홍콩에서 가장 눈에 뛰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감옥 안에도 들어가 보았는데, 그곳은 창고 도시인 홍콩에서 창고 다음으로 홍콩다운 특징을 지닌 건물이었다. 왜냐하면 홍콩에는 가장 부유한 중국인 상인들이 모여 있다고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관헌들의 눈을 피해 도망왔거나, 혹은 한및천 잡으려고 찾아온 도적패나 건달패들의 피난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100보마다 한 명씩 서 있는 인도인 용병들은 악당들을 때려잡기 위해 모두 프낭섬의 법관이라고 불리는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이 몽둥이가 악당들에 대한 첫 번째 경고인 셈이고, 두 번째 경고는 실탄이 장전된 카빈총이다. 게다가 중국인은 저녁 8시 이후에는 유럽인들이 정한 통행암호와 등불 없이는 절대로 돌아다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각별한 치안제도에도 불구하고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홍콩처럼 위험한 도시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두려움에 떠는 우리에게 사람들은 이곳에서 발생한 대담한 범죄들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뤼도빅 드 보부아르 (세계 여행, 쟈바, 샴, 광둥), 1869년 홍콩의 리포터, 케셀 작가인 조제프 케셀은 1957년 홍콩을 방문했다. 1949년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가 된 반면에 홍콩은 아시아 대륙과는 너무나 다른 도시로 변했다. 그러나 다양한 옷을 걸치고 달러를 사용하는 이 거대한 도시에서 케셀은 화려한 치장 뒤에 숨은 홍콩의 또 다른 모습, 중국을 발견했다. 국경에서 땅은 약간 더 기복이 심해졌다. 그리 높지는 않아도 수평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봉우리마다 망루가 하나씩 서 있었다. 우리들을 향해 장교가 말했다. "가까이 오세요. 이곳이 우리가 중국을 관찰할 수 있는 제일 끝 지점입니다." 그곳은 국경선이었다. 즉 서구인들이 사회주의 땅 중국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진입로였다. 다시 말하면 혁명을 통해 변화되고 수정되고 재구성된 거대한 나라로 들어서는 문턱이었다. 용과 자금성의 나라, 몽고의 대상들과 건장한 체격을 가진 만주인들의 나라, 양쯔강과 황하, 만리장성이 있고 천자가 살았으며, 마오 쩌둥이 태어난 나라. 나는 이 이상적인 무대의 주요 광경을 모두 단숨에 받아들이려는 듯이 주위를 응시하며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단순하고도 깨끗한 자연의 선은 너무나 완벽해서 예술가가 깊은 생각 끝에 그려놓은 선처럼 보였다. 두 개의 판이한 세계를 나누고 있는 로우강 위에는 다리가 하나 걸려 있었고, 그 다리 위에 몇 개의 바리케이드가 세워져 있었다. 이쪽 바리케이드에는 두 사내가 부동자세로 꽂꽂이 서 있었다. 그들의 근육과 신경은 바짝 신장한 것처럼 보였다.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얹은 채 정면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그들은 푸른색 제복에 평평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서있는 다른 두 명의 사내들은, 뻣뻣하게 서있는 모습, 감시하는 눈빛, 위협적인 태도가 영락없이 앞의 두 사람을 판에 박아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단지 저편의 사람들은 카키색 마포로 만든 제복에다 둥근 모자, 그리고 푹신해 보이는 신을 신고 있었다는 점이 달라 보였을 뿐이다. 나는 다시 반대편 보초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환상을 본 것 같았다. 바리케이드 양쪽에 똑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꼿꼿하게 서 있는 마네킹을 본 것 같았던 것이다. 평평한 군모 아래서와 마찬가지로 둥근 군모 아래에서도 똑같이 노란 피부와 높이 솟은 광대뼈, 위로 올라간 눈매를 본 것이다. 키와 몸의 골격 역시 똑같았다. 바리케이트 양쪽에서 같은 광둥 지방 출신의 중국인들이 그들이 태어난 지방을 감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초소 뒤에는 고향의 들판이 무심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다른 둘은 새로운 체제로부터 서구인보다 강한 민족이라는 의식을 매일 주입받는 많은 국민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보초병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도대체 어떻게, 무엇 때문에 홍콩은 영국 땅으로 남아 있는가? 떠 다니는 도시 우리는 여행은 택시를 타고 꽤 긴 코스를 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택시는 홍콩시 밖의 한 소박한 마을로 향했다. 그 마을 은 큰 섬의 윤곽선을 그리고 있는 수많은 작은 만중 하나에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는 그 마을에 들어서기 전에 택시에서 내려 현란한 빛깔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도로를 걸어서 지나야만 했다. 생선 시장을 지나 강가에 이르니 또 하나의 마을이 나타났다. 처음에 본 마을과 인접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그것은 물 위에 떠 있는 마을이었다. 멀리서 보면 집채만한 파도가 몰려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뱃전과 뱃전을 연결한 소형 보트들이 다닥다닥 모여 이루어진 한 마을이다.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수백, 수천의 배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무거운 짐을 잔뜩 실은 정크선이 있는가 하면, 돛대 옆에 그물을 널어 말리는 고깃배도 있었다. 멋진 모습을 자랑하는 경주용 배와, 여러쌍의 작은 노가 붙어 있어서 마음대로 저을 수 있는 켜다란 삼팡배도 있었다... 서로 바짝 붙어 있는 이 배들은 수천개의 돛과 뱃머리를 가진 엄청나게 큰 한 척의 배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곳의 주민들은 익숙하게 이 배에서 저 배로 옮겨다녔다. 거대한 정크선 선장에서부터 초라한 삼팡배의 뱃사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뱃사람들에게 이 끝없는 배의 행렬은 일터이자 교통수단이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머무르는 주거지이기도 하다. 식사, 잠, 노동, 사랑, 이 모든 것이 이 배 위에서 이루어진다. 수 많은 세대를 내려오면서 그들은 이처럼 양서류처럼 살아왔다. "그들은 이렇게 2000년을 살아왔지. 이 섬의 해안에서만 말이야." 조르주가 말해 주었다. "2000년이라! 온 주민이..." 얼마나 멋지고 놀라운 사람들인가! 그들은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가운처럼 길고 폭이 넓은 짙은 감색 상의와 역시 같은 색상에 나팔처럼 펄럭이는 긴 바지가 그들의 복장이다. 이 풍성한 옷은 그들의 마른 체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다 바람 때문에 더욱 펄럭이며 몸에 휘감겼다. 움직일 때마다 옷이 주는 넉넉함과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듯했다. 만데 빼곡이 들어찬 소형 배들 사이에서 기동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좁은 공간에서 한가족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리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좁은 공간엣 한가족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여유와 유연성이 필요하리라. 그 작은 배에 거적으로 덮개를 만들고 그 안에서 10명의 가족이 살아가는 경우도 있으니까. 하지만 생활공간은 답답하고 좁아도 바람과 바다가 그들의 육체와 정신에 제공해준 풍요로움 덕택에 그들의 얼굴에는 건강함과 자유로움이 넘쳤다. 공동의 생활, 협동이 필요한 작업, 똑같이 궁핍하고 위험한 삶이 서로 이웃한 이 뱃사람들 사이에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유쾌하고도 순수하고 깊고 아름다운 유대감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갑판이 높다란 서구의 옛 선박을 닮은 중국의 정크선들이 바다에 빽빽하게 들으찬 소형 배들 위로 위풍당당하게 솟아 있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주룽 : 천국으로 가는 길 이 영국령 섬을 마주보는 해협 건너편에는 홍콩의 변두리라 할 수 있는 주룽 반도가 자리잡고 있다. 분명 홍콩의 변두리 지역이긴 하지만 이곳의 면적과 인구는 홍콩을 훨씬 웃돌고 있다. 그런 현상은 특히 중국 혁명 이후 두드러졌다. 주룽은 중국 대륙의 곳곳에서 밀려온 200-300만 명의 난민 대부분을 흡수했다. 주룽의 중심지는 초기만 해도 고작 페리호 선창과 몇 개의 대형 호텔, 역으로 어우러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시 곳곳에 대형 상업시설이 들어서 있으며, 수많은 공장들이 활기차게 돌아가는 신개발구역이 수킬로미터에 걸쳐 퍼져 있다. 구중심지의 역에서 출발한 철도는 광둥 지방을 지나 텐진,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철도, 유럽 철도를 지남으로써 극동의 바다에서 대서양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대형 호텔과 상가들은 모두 페리호 부두를 중심으로 모여 있다. 유럽인과 중국인들의 중산층과 소시민들이 살고 있는 작은 구역을 지나는 동안, 나는 그곳으로 안내해준 조르주 덕분에 주룽시라는 반짝이는 메달의 뒷면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화려한 겉모습을 갖춘 홍콩이라는 낙원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주룽의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때는 밤이었다. 거리는 음울하고 어두우며 단조로웠다. 길가에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더러운 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앞으로 나갈수록 피폐하고 빈곤한 모습이 점점 더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가니 갑자기 창문에서 생생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건물들이 보였다. 그곳에서는 매층마다 구르고 부딪히고 고함치는 소음이 터져나왔다. 자갈만한 우박이 대리석 바닥에 쉴새없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 같기도 했고, 혹은 기관총 여러 대를 쏘는 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조르주를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해 하는 나에게 그가 말해 주었다. "마작이야." 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그가 다시 말했다. "마작을 하는 집들이란 말일세." 마작이라니! 옆사람 말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요란한 소리를 쉴새없이 내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마작 테이블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야 하는 걸까? "이 거리에는 각 건물의 매층마다 마작을 하는 도박장들이 있네. 이 동네의 모든 거리들이 다 그렇지." 도시의 일부를 점령한 도박장에서 새어나오는 탁탁거리는 엄청난 굉음을 뚫고 말을 전하기 위해 내 친구는 목청을 한껏 높여야만 했다. 조제프 케셀,((홍콩과 마카오))갈리마르 출판사, 1975년 반환조약 홍콩 문제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과 대영제국의 공동성명 1997년 6월 30일에 실시하기로 합의한 공동성명이 1984년 12월 19일에 중화인민공화국과 대영제국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그 주요한 조항들을 아래에 예시한다. 대영제국과 북아일랜드 정부,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양국의 정부, 양국의 국민 사이에 최근에 들어 맺게 된 선린우호 관계를 만족스럽게 검토했으며, 또한 과거로부터 내려온 홍콩에 관한 협상규정이 홍콩의 번영과 안정을 유지하고, 새로운 기초 위에 서게 된 양국가 사이의 관계를 강화하고 발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를 위하여 양국 정부의 사절들은 회담을 마친 후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기로 합의했다. 1.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홍콩 지역(홍콩섬, 주룽반도, 신계를 포함한 지역을 이하 홍콩으로 지칭하기로 한다)이 중국 대륙에 재통합되는 것이 모든 중국 국민들의 한결같은 염원이라는 사실과, 1997년 7월 1일부터 홍콩에 대한 주권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다시 행사하기고 결정했음을 선언한다. 2.대영제국 정부는 1997년 7월 1일부터 홍콩을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할 것을 선언한다. 3.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홍콩에 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본 정책이 다음과 같음을 선언한다.3-1.홍콩 주민의 단결 유지 및 홍콩 영토의 보존을 위하여, 또한 홍콩의 역사와 현실을 고려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31조의 조항들에 근거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홍콩에서 그 주권을 행사하게 될 때 홍콩 특별행정구를 창설하기로 결정했다.3-2.홍콩 특별행정구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권한하에 위치한다. 홍콩 특별행정구는 인민 중앙정부가 책임지는 외교 업무와 국방 문제만을 제외하고는 고도의 자치권을 누린다.3-3.홍콩 특별행정구는 독립된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 및 최종 결정권을 지닌다. 현재 홍콩 특별행정구에서 실행중인 법은 기본적으로 불변한다.3-4.홍콩 특별행정구 행정부는 홍콩시 안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행정부 장관은 현지에서 실시되는 협의와 선거 결과를 참작하여 인민 중앙정부가 지명한다. 주요 관리는 홍콩 특별행정구의 행정장관의 지명을 받은 자를 인민 중앙정부에서 임명한다. 이전에 홍콩의 행정부와 경찰국의 각종 부서에서 근무했던 중국 시민과 외국 시민은 그들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영국 시민 및 외국 시민은 자문위원의 역할을 맡을 수 있으며, 혹은 홍콩 특별행정구의 행정부 안에서 몇몇 직책을 담당할 수 있다.3-5.홍콩에서 현재 유지되고 있는 사회-경제 제도는 변하지 않으며, 생활방식 또한 변하지 않는다. 개인생활 및 의사 표현, 언론에 관한 권리와 자유를 비롯하여, 집회의 권리와 단체 결정의 권리, 파업의 권리, 여행과 주거 이전의 권리, 통신의 권리, 직업 선택의 권리, 학문 연구에 이바지할 권리 및 종교 생활의 권리를 법으로 보호한다. 사유재산의 권리, 기업을 소유할 권리, 합법적인 상속의 권리 및 외국 투자의 권리도 법에 의해 보호받는다.3-6.홍콩 특별행정구는 계속해서 자유항과 독립관세지구의지위를 유지한다.3-7.홍콩 특별행정구는 국제 금융의 중심이자, 금과 유가증권의 교환시장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한다. 자본금은 자유롭게 유통될 수 있다. 홍콩 달러는 계속해서 사용되며, 자유롭게 교환될 수 있다.3-8.홍콩 특별행정구는 독립된 재정을 소유한다. 인민 중앙정부는 홍콩 특별행정구에서 세금을 징수하지 않을 것이다.3-9.홍콩 특별행정구는 대영제국을 비롯한 제3국들과 상호적으로 유익한 경제관계를 수립한다. 이때 대영제국과 제3국이 홍콩에서 얻게 되는 이익은 정식으로 인정된다.3-10.홍콩 특별행정구는 '중국 홍콩'이라는 공식명칭하에서 독립된 경제 및 문화 관계를 유지, 발전시킬 수 있으며, 자격을 갖춘 국가기구 및 지방지국, 국제기구들과 적절한 협약을 체결할 수 있다. 홍콩 특별행정구 행정부는 홍콩 입출국에 필요한 여행서류를 자체적으로 발급할 권리를 갖는다.3-11.홍콩 특별행정구 내에서의 공공질서 유지는 홍콩 특별행정구 행정부가 책임진다.3-12.이상에서 언급하고, 본 공동성명의 부속문건 1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한 중화인민공화국 정책의 여러 방침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가 규정한 홍콩 특별행정구의 기본법 안에서 재언급되며, 향후 50년 내에는 변하지 않는다. 1997년 이후 홍콩의 위상:국제법에 대한 도전? 1991년 11월 28일, 홍콩 대학에서 아시아 연구소가 한 세미날ㄹ 개최했다. 지슬렌 카바놀은 홍콩의 위상이 국제법에 기여한 공로를 주제로 하여 당시 토의된 내용을((중국 장래의 전망))제1호(1992년 3월호)에 요약해서 게재했다. 다음은 그 글 중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1997년 이후 홍콩의 위상은 국제법에 관한 몇 가지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오늘날 한쪽에서는 국가들이 해체되어 세인들의 주목을 집중시키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해체된 국가가 재통합되어 그에 못지않은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를 요구하고, 또 실제로 인정받고 있는 비국가적인 다양한 주권 집단들이 점점 더 많이 출현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특별히 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지금과 같은 중요한 시기에, 이렇듯 변화무쌍한 국제무대에 국제법이 관여하고 있는 만큼, 국제법에 대한 전세계인의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중국이 내세운 '1국가 2체제'의 방침, 영중 공동성명, 홍콩의 자치권을 정립하는 법으로서의 기본법 등은 다음과 같이 적어도 국제법의 두가지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1.국제적 사명을 띠고 있는 자치제: 국제법에 있어서 자치권에 대한 개념의 개선 및 향상 ....중국 정부에게 있어서 1984년의 협정과 기본법의 목적은, 중국 안에 있는 홍콩을 소유함으로써 중국 밖에 있는 홍콩이 가져다줄 이점을 유지하는데 있다. 다시 말해 소수 민족을 보호하거나 홍콩 주민의 인류학적, 문화적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 또는 종합의 방법으로서, 홍콩의 정치적 자치권을 정립하는 것보다는 홍콩의 경제적 특수성, 국제 경제에서의 관계를 창조하는 능력, 그리고 국제 경제의 차원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분리된 홍콩의 특징을 홍콩이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151항은 법적 기초를 구성하는데, 홍콩은 그러한 기초에 의거해서 조약을 해결할 수 있는 사법적 힘(treaty-making power)을 부여받는다. 그 능력은 홍콩 특별행정구 안에서 제한되고 특수화된 것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도 사실상 현실적이고, 상당수의 분야에서 자치력을 가진다. 홍콩 특별행정구는 중국 영토에 속해 있으면서도 국제적 사명을 띠고서 자치권이라는 특혜를 누리게 됨으로써 국가의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국제법은 이런 위상을 갖게 된 홍콩 특별행정구에게, 홍콩 특별행정구의 이름을 국제회의에 참여하고, 국제 기구에 가입하며, 또한 국제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해 주고 있다. 게다가 홍콩의 지위가 갖는 국제적 소명은, 홍콩이 전반에 걸친 자치권을 누리게 될 것을 가장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것이다... 2.다체제 국가의 국제 무대에서의 다수 대표와 국제적 책임 ....홍콩의 뒤를 이어서 마카오마저 중국에 반환되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세 부분의 영토, 혹은 체제로 구성된다. 이 세 부분의 영토, 혹은 체제는 국제무대에서 각각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각각 다른 대표를 내세울 수 있다...중영 공동성명과 중포 공동성명이라는 합법적인 문서를 통하여, 이들 세 부분의 영토, 혹은 체제는 단 한 개의 국가에 속하며, 논쟁의 여지가 없는 단 하나의 주권, 즉 국제적인 차원에서 복수 형태로 나타나는 중화인민공화국 주권 아래 있다고 규정된다. 공동성명 및 홍콩 특별행정구의 국제적 의무와 권리에 관해 명시한 기본법 제6장은 지도 방침의 한 가지 전형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 전형의 논리는 국가, 혹은 영토가 오랫동안 서로 분리되어 있다가 이미 맺은 국제적 관계나 혹은 뚜렷한 국제적 이익의 전부, 혹은 일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시 합쳐질 경우, 그 국가 혹은 영토에서 이전에 취득한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약 이행이 국가보다 우선하도록 하는 국제법과 비교할 때, 기본법은 탄력성 있는 두 개의 축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그 하나는, 홍콩 특별행정구의 특별한 이익을 고려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과거에 체결한 조약들(153조 1항)을 체계적으로 비 적용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홍콩이 이전에 적용해 왔던 조약들을 가능한 유지하는 것이다... 홍콩에서 이전에 적용되었던 조약을 그대로 유지할 때, 중화인민공화국이 잠여한 조약일 경우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분리되어 홍콩에 적용되며, 중화인민공화국은 권리 주장을 삼간다. 따라서 홍콩 특별행정구는 그 조약의 서명자로서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한다. 가라서 중국에는 두 대표자가 나올 수 있으며, 나아가 마카오 역시 홍콩과 같은 길을 걷게 될 경우, 세 대표자가 나올 수 있다. 조약의 적용에 관하여서는, 분명히 이전에 홍콩에서 적용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참여하지 않은 조약들에 대해서만 기본법에 명백하게 언급되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도 참여한 조약의 경우에는 아무런 언급도 되어 있지 않다. 3.홍콩의 예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 ...자치제의 모범적인 표범으로서 국제적 사명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국제적으로 그 기여도가 높이 평가되는 홍콩은 스스로 본보기가 됨으로써 이미 국제적으로 그 능력이 인정된 자치령들을 더 높은 수준에서 인정받도록 끌어올릴 수 있다. 또한 홍콩은 국가 외의 국제법을 준수하는 시민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미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사실이지만, 국가들만이 국제법을 준수하는 시민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미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사실이지만, 국가들만이 국제법을 독점하는 시대가 끝났음을 규범적인 방법으로 공식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상당수의 미묘한 상황 혹은 갈등들이 샐보게 완화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예를 들면, 캐나다와 퀘벡, 프랑스와 해외 속령들, 뉴칼레도니아, 유고슬라비아, 티베트, 타이완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미래의 모습은?대조적인 두 개의 시각 중국군이 주둔하다 중국군과 영국군이 서로 대치해온 지 50년이 지난 지금, 인민해방군이 홍콩의 국경선을 넘어왔다. 군의 일간지는 북경의 공식 연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월 28일, 정부와 국가 중앙군사위원회는 전세계에 엄숙하게 선언하기를,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인 홍콩의 기본법'에 따라서, 홍콩에 주둔하게 될 인민해방군이 구성되었다고 했다. 그것은 우리 국가의 정치적 생명에 관한 사건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중국 정부는 1997년 7월 1일, 홍콩에 대한 주권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 홍콩에는 우리 중국군이 주둔할 것이고, 특별행정구 방어라는 책임을 맡게 될 것이다. 홍콩은 고대로부터 우리 국가의 신성한 영토의 일부이다. 영국의 식민주의자들은 1840년 이후부터, 부패한 청 왕조의 정부에게 3개의 불평등 조약을 잇달아 체결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나서 두 차례의 아편 전쟁과 1895년에 있었던 반일본 전쟁 후에, 중화제국의 권력자들에 의해 진행된 국가의 분열과 세력권 구성을 이용하여, 홍콩섬과 주룽반도, 신계, 이 세 부분을 포함하는 홍콩 지역을 삼켜버렸다. 중국 국민은 이 3개의 불평등 조약에 줄곧 반대해 왔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 이후에도 우리 정부의 입장은 여전히 똑같았다. 1982년 9월부터 중국 정부와 영국 정부는 우리의 동지 덩 샤오핑이 내놓은 '1국가 2체제'라는 장엄한 계획에 기초를 둔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중국 정부는 하늘이 명했고, 땅이 순종했던 규칙들을 따라, 중국이 통치하는 영토 안에 중국군을 파견해 주둔시킬 것이다. 우리의 동지 덩 샤오핑은 중영 협상 초기에 이미 그 점을 분명하게 밝힌 바 있다. "나는 중국이 홍콩에 군대를 주둔시킬 권리가 있다고 이미 말한 일이 있다. 이제 나는 다시 이렇게 묻고 싶다. 이 방법 외에, 홍콩의 주권회복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존재하는가라고." 홍콩의 주둔군은 중국의안전과 홍콩의 번영을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법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특별구를 보호할 책임을 지위 중앙정부가 파견한 군대는 주둔 지역의 문제들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홍콩 특별행정구의 행정부는 치안을 유지하고, 천재지병이 일어났을 경우 국민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주둔군의 도움을 중앙정부에 요구할 수 있다." 홍콩에 주둔하는 인민해방군은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명예 업무를 완수한다. 우리의 군이 보여주게 될 훌륭한 이미지는 우리 군이 동국인인 홍콩인들로부터 폭넓은 지지와 신뢰를 얻을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우리 군 전체의 명성과 위신을 드높일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홍콩 주둔군의 각 소대, 각 병사들은 우리 군의 명예를 눈동자처럼 소중하게 지켜야 한다. 이는 열려진 '창'이라고 할 수 있는 홍콩 주둔군을 통해서, 우리 군이 관할 지방과 국가에 충실하고, 국민을 사랑하여 진심으로 국민에게 봉사하며, 매우 엄격한 규율을 갖고 어떤 작은 약탈행위도 범할 수 없도록 철저히 훈련받았으며, 전투에서는 매우 막강한 군대임을 우리의 동국인 홍콩인들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홍콩의 주둔군은 분명 생소하고도 거친 시련들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격렬했던 전쟁터에서 호사스럽고, 평화로운 도시들 안에 주둔하게 된 지금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에서 우리 군은 '난장 거리의 뛰어난 제8부대'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당시의 공산군은 1949년 상하이에서 탁월한 성실성을 보여 뛰어나게 돋보였다)전설처럼 훌륭한 전통을 지속해 왔다. 홍콩에 주둔한다는 것은 단순히 군대가 맡고 있는 여러 가지 가명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곳에서 실현될 '1국가 2체제'라는 정책상의 기본 원리 때문에 홍콩은 자본주의 체제와 변함없는 생활방식을 이후 50년간 유지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군대는 복잡한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군은 국내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받게 될 것이며, 그것들을 존경해야 한다. 홍콩의 주둔군은 장 쩌민 총서기가 발표한 임반 지침, 즉 '올바른 정치, 군의 우월성, 완벽한 행동가짐, 엄격한 훈련, 강력한 군사술' 등을 글자 그대로 철저히 준수해야 한다. 군의 목소리는 수천 마리의 말이 달리며 내는 말발굽 소리처럼 우렁차고, 군의 힘은 수많은 산까지도 옮길 수 있을 만큼 막강하다. 과연 역사의 흐름은 그 누구도 바꾸어놓을 수 없다. 1997년 7월 1일까지는 아직 17개월이 더 남아 있지만, 홍콩에 주둔하게 될 인민해방군은 우리 영토의 성스러운 한 부분에 드디어 영웅적인 발자국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이 위대한 사건에 직접 참여하게 되는 만큼, 홍콩 주둔군의 각 구성원들은, 중국 현대사에 들어와 1세기 동안 감내해 왔던 치욕을 드디어 씻을 수 있게 된 이 장엄한 사건을 직접 겪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며, 이 얼마나 신성한 임무인가! 지에팡준 바오, 베이징 (꾸리에 앵떼르나시오날) 1996년 2월 홍콩인은 1997년 7월 1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낙관론자들과 비관론자들이 홍콩의 미래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영국 식민지가 중국 품에 돌아돌 날이 임박하자, 온 세계의 펜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홍콩은 과연 새로운 체제안에서 이제까지의 전설적인 번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가? 아니면 정치적인 간섭과 더불어 비싼 사무실 임대료, 인상된 인건비,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분야에서의 취약성 등과 같이 더욱 현실적인 문제들과 부딪혀 기업들이 속속 탈출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가?... 인구 630만 명의 홍콩 지역은 1800개 이상의 다국적 기업들을 수용하고 있으며, 그중 700뎌 개가 홍콩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 홍콩의 높지 않은 세금률(16.5%에 불과하다)은 많은 기업체들이 일어서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현제 홍콩은 전세계 해운업의 8%를 담당하고 있다. 또한 홍콩항은 컨테이너 무역에서 세계 1위를 자랑하고 있으며, 홍콩의 비행장 역시 적하량에 있어서 2위, 국제 통과무역에서 3위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증권거래량은 세계 8위에 올라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외국인이 중국에 투자할 때 홍콩을 중개자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1994년에는 외국인 투자액 338억 달러의 70%가 홍콩과 마카오를 면세 통과했다. 홍콩의 강력한 라이벌인 싱가포르조차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최고의 자리를 홍콩에게 내주어야만 했다. "홍콩은 중국에게는 분명 특혜를 입은 출입항이다."라고 말한 홍콩의 싱가포르 경제개발연구소의 동아시아 부장인 하우 팩 후아는 그 부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전세계인들이 이곳에 오는 것은 사업 때문만이 아니라, 홍콩이 중국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길목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가는 길목, 이 유리한 조건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홍콩은 155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지나오면서 가장 열망해 마지 않았던 기간산업 발전이라는 계획에 착수했다. 앞으로 10년의 세월 동안, 홍콩은 이 엄청난 계획을 위해 500억 달러를 투자할 것이다... 즈씨에 의하면, 기간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계획들은 세계적 규모를 지닌 경제 지역으로서의 홍콩의 경제력을 확실하게 보장해줄 것이라 한다. 이 부분에서 재정은 조금도 문제되지 않는다. 홍콩의 외환 보유고 622억 달러는 세계 7위의 액수이다. 홍콩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싶다면, 미래의 특별행정구를 형성하고 있는 235개의 섬중에서 가장 큰 섬인 만터우섬의 로푸타우봉에 올라가서 숨이 멎을 만큼 장엄해서 감탄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파노라마를 내려다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신계의 북쪽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투언문 마을이 있다. 현재 그곳에는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투입되어 주장강 주변에 7억 달러의 공사비가 드는 터미널 공사에 착수했다. 그 항구 터미널이 완성되는 2000년도에는 광둥성의 공장들에서 오는 연간 850만 톤의 하물을 취급하게 될 것이다. 서쪽에는 새로운 공항이 문을 열게 된다. 1248헥타르나 되는 부지의 대부분은 최근에 바다를 메워 만든 간척지이다. 두 개의 활주로를 갖게 되는 첵랍콕 공항은 매년 3500만 명의 승객과 300만 톤의 하물을 운송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공항이 점차적으로 확장된다면 2040년에는 위의 수치가 각각 8700만 명과 900만 톤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곳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투입되어 공항으로 승객을 날라다줄 철도와 고속도로의 건설에 전력하고 있다. 물론 1997년 이후에 대해 찬란한 전망을 낙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정치가 경제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지를 예측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홍콩이 지금 돌아가게 된 체제는 부패를 막을 만한 능력(혹은 바람)을 보여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모든 정치적 자유에 대해 확연한 적대감정을 갖고 있는 체제이다. 또한 그 체제의 지도층은 경제개혁의 리듬이나 방침에 동의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비롯하여 언론, 집회, 종교는 베이징에서의 정치의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불게 되느냐에 따라 견제 받을 위험이 크다. 그런가 하면 중국 대륙에 있는 기업들이, 마치 과거에 영국 국적을 지닌 그들의 동족들이 특권을 누렸던 것처럼, 1997년 이후에 엄청난 혜택을 누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경제 분야에서 정치보다 더 심각한 위험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인플레일 것이다. 봉급과 수당의 수준이 인상되자 최근 수년 사이에 이미 여러 개의 다국적 기업이 본거지를 홍콩 밖으로 옮겼다... 수많은 기업들은 비용 문제는 젖혀둔 해 1997년 이후에 대해 낙관론을 펼치고 있다. 1995년에 미국 상공부가 주도한 연구는, 질문에 응한 533개 상사들의 91%가 21세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의 경제 전망을 '유리하다'혹은 '매우 유리하다'로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 가운데 겨우 20개의 상사만이 향후 몇 년 내에 그들의 본거지를 이동할 뜻을 밝혔다. 어째서 이 같은 낙관주의가 생기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는 이렇다. 모든 시선이 홍콩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은 법치국가이자 매우 역량 있는 행정부로서의 홍콩이 지니고 잇는 전통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홍콩은 여전히 안전한 구역으로 남게 될 것이며, 외국의 투자가들은 그 안전지대에서부터 출발하여 중국 내에서까지 활동을 펼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게다가 타이완을 자신의 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베이징이 홍콩을 '1국가 2체제'의 성공사례로서 들이밀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신뢰감을 갖자."고 확신에 차서 말하는 호프웰 홀딩 엔지니어링의 회장인 고든 우는 이렇게 말한다. "어찌됐든 우리가 중국에 꼭 필요한 존재일 동안은 우리의 번영도 보존될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현지의 기업들이 최선을 다하는 'D시스템'이라고 부른다... "중국은 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서야 하며, 홍콩과 싱가포르의 경험으로부터 필요한 교훈을 끌어내야 한다."홍콩이 두려워하는 것, 그것은 공리공론에 빠져 있는 공산주의이다. 10억 인구의 소비시장을 소유한 새로운 중국은 아마도 여러 개의 사업 중심지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홍콩은 제몫의 케이크 조각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앨런 청 (아시아 주식회사), 홍콩 (쿠리에 앵떼르나시오날) 1997년 2월 반환 이후 홍콩의 문화 교과서의 '수정' 베이징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제시하고 있는 역사관을 존중하기 위해, 그리고 '동국인' 홍콩인들의 머리 속에서 '식민주의 사상'을 몰아내기 위해, 홍콩 어린이들의 교과서를 검토했다. 중국 정부는 반환 이후에 홍콩 어린이들의 교과서(특히 홍콩 정치제도의 미래, 홍콩의 정부 구조, 그리고 제3국들과의 관계에 대한 기술)가 기본법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3월에 중국의 부서기 겸 외무부 장관인 첸지천은 인민대표회에서 홍콩 반환을 위한 준비위원회(베이징이 임명했음)의 입장을 재확인했다."현재 홍콩에서 사용되고 있는 몇몇 교과서의 내용은 중국의 역사와 일치되지 않을뿐더러 현실과도 일치하지 않으며, 더욱이 1국가 2체제의 원리나 기본법의 정신에도 모순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들의 교과서를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첸지천은 부적당한 교과서가 어떤 것인지, 혹은 어떤 부분을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 등에 관해 상세한 내용은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교과서발행사와 교육기관들이 '교과서를 개편해야 한다.'고 규정한 준비위원회의 해결책에 일임했으며, 홍콩이 식민지라는 사실과 '두 개의 종국이 존재한다'는 식의 내용은 모두 교과서에서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중국 대륙에서는 홍콩 반환으로 인해 교과서이건 일반대중을 상대로 한 저서이건 간에 홍콩에 관한 출판물이 급증했다. '97 홍콩'은 홍콩 출판사와 이웃 지방인 광둥성 정부가 공동 기획하여 태어난 책이다. 중국 정부의 지휘 아래, 홍콩과 마카오 담당 판공실 주임 루 핑이 감수한 이 책은 홍콩 현지에서 출판된 저서들과 똑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으나, 사실에 대한 해석은 판이하게 다르다. 링키 퍼블리싱이 출간한 '오늘의 홍콩(Today's Hong Kong)'은 다음과 같이 아편 전쟁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다. "1840년, 중국과 영국 사이에 아편 전쟁(또는 1차 중영 무역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중국이 패했으며, 1842년에 체결된 난징 조약에 의해 홍콩섬이 영국에 할양되었다. 그후로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초대 총독은 헨리 포팅거 경이었다."이에 비해 '97 홍콩'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홍콩은 줄곧 중국의 영토였다. 1840년에 홍콩섬은 무력에 의해 영국에게 점령당했고, 그 이후로 지난 150년 동안 영국의 구속 아래 있었다. 폭력을 사용한 영국은 3개의 불평등 조약을 내세워 홍콩을 통치해 왔다. 영국은 난징 조약을 비준하기 1년 7개월 전에 무력으로 홍콩섬을 점령한 뒤, 그곳에 영국 국기를 게양했다. 중국 땅의 일부가 경매에 의해 영국 상인들에게 넘어간 후부터, 영국군이 홍콩을 지휘하기 시작했으며, 홍콩의 모든 주민들이 자동적으로 영국 국왕의 신하가 된다고 선언했다." '영국 지배하의 홍콩'이라는 부분에서도 두 책은 많은 차이점을 보여준다. '오늘의 홍콩'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영국인들은 홍콩을 소유한 이후에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를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홍콩섬의 경제적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도로와 항구를 개설하는가 하면, 방파제와 창고도 건설했다."하지만 '97 홍콩'에 수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91년 6월 7일에 대영제국은 홍콩을 자유항으로 선언했다. 그로 인해 영국이 바라던 대로 홍콩은 자유항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영국은 상품 중에서 가장 질이 좋지 않은 아편을 중국의 최상품들, 즉 차, 쌀, 면화, 가죽 등과 교환하게 되었다." 홍콩 발전을 위한 민주연맹의 회장이면서, 준비위원회 안에서 문화 분야를 담당한 부서에서 일한 바 있는 창 욕싱은 '97 홍콩'의 내용이 완벽하다고 평가한다. 그때까지 중국의 출판물들은 줄곧 홍콩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97 홍콩'에서는 홍콩섬이 여전히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사회로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의 홍콩'은 이와는 반대로 특히 홍콩 주민들이 누리고 있는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상기시키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주고 있다. "물론 그들은 포르노그라피 등과 같은 부정적인 면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며, 출판물은 그것을 아무런 과장없이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등 교직자는 오늘날 홍콩의 교과서들이 오로지 사실만을 담고 있으며, 사실에 대한 균형잡힌 해석은 조금도 담지 않았다고 강조해 말한다. 이는 식민지 지배의 결과이다. "홍콩 어린이들의 대부분은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과거에 그들의 교과서는 언제나 중국을 '이웃 나라'라고만 묘사해 왔었다."라고 설명한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중국 대륙의 교과서들은 너무나 민족주의 냄새를 풍긴다. 그래서 나는 홍콩의 역사에 대해 최상금의 표현으로 일관한 그들의 관점 역시 그리 객관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홍콩 현지의 출판물들은 모든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97 홍콩'을 견본으로 삼을 것이가? 그것은 두고 볼 문제이다. 그러나 창씨는 왜 그들이 그렇게 하는지 납득하지 못한다."교과서 수정은 준비위원회에서 언급한 것을 고치느 선에서 그칠 것이다. 나는 이같은 교과서 검토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는 또한 탐 춘유의 견해이기도 하다. 이제 열 살인 이 학생은 홍콩 반환 이후에 홍콩의 행정과 역사를 다루는 교과서에 어떤 변화가 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미 TV가 이점에 관해 폭넓게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실제로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혹시나 학교 선생님들이 지금보다 더 엄격해지지나 않으까 하는 것 뿐이다. 케빈 큉 (쿠리에 앵떼르나시오날) 1997년 4월 중국 시장은 홍콩 영화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것인가? "1997년 7월 1일부터 홍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야. 그러니 외국으로 갈 수밖에 없지."라고, 영국으로 이민 온 한 홍콩인이 단언하듯 말했다. 그러자 그 남자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베이징 출신의 아가씨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그런데도 당신은 뻔뻔스럽게 중국인 행세를 하고 있군요."그러면서 그녀는 말을 끝맺기 전에 들고 있던 찻잔의 차를 그의 얼굴에 끼얹어 버린다. 이 장면은 (1997년을 위한 행복한 사건)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인데, 이 영화는 2월 7일 중국의 설날을 겨냥해 홍콩의 한 영화관에서 상영되었다. "그것은 1997년을 축하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고 나면, 상황은 지금보다 더욱 나아진다'는 것이다."라고 이 영화의 제작자이자 배우인 메이몽 웡은 설명한다. 반환되기 몇 달 전부터, 홍콩 현지의 수많은 영화 제작자들이 베이징에 시선을 도리고 있다. '중국'이라는 용어는 이 영화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웡의 경력이 바로 그런 점을 뒷받침해 주는 훌륭한 예가 된다. 그는 중국 본토에서 이미 상영된 2개의 작품 덕분에 중국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최근에는 공영방송인 OCTV의 요구에 따라, 시청률이 높은 시간대에 15회로 구성된 연속극 한 편을 방영했다. 중국은 이 연속극으로 그에게 상을 안겨주었다. 그의 새로운 작품인 (아침의 포옹)은 전국에서 방영될 것이다. 배급망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국가에서 그것은 하나의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제7예술인 영화는 홍콩에서 항상 대중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쳐왔다. 예전의 영화들은 대개 중국인을 건달로, 그리고 중국 여인을 창녀로 등장시켰다. 웡의 말에 의하면, 바로 그런 영화인들의 태도가 중국인들의 이미지를 어둡게 만들어버렸다. 이런 의미에서, 1996년 11월 홍콩에서 상영된 피터 찬의 작품(달콤한 꿀)이 2명의 중국 거류민들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것은 예외적인 일에 속한다. 웡은 이렇게 설명한다. "본토 대륙의 중국인들과 홍콩인들 사이의 차이점을 구분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중국 국민을 뿐이다. 최근에 비로서 홍콩에 돌아온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오래 전부터 홍콩에 있어 왔던 사람들이 있다. 그 차이일 뿐이다." 영국 식민지에서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여배우인 아니타 유언에게 스스로를 홍콩인으로 여기고 있는지 아닌지를 물어보았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저 중국인이라고 생각해요. 홍콩에 살고 있는 중국인 말이에요."중국 반환 이후에도 홍콩에 그대로 남아 있기로 활실한 결정을 내린 아니타 유언은 1996년 9월부터 한 가지 목표를 세웠다. "우리가 중국인인 이상, 표준 중국어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원활한 의사소통에 있어서 표준 중국어가 아주 주요한 언어라고 확신하거든요." ...아니타 유언만이 표준 중국어를 배우는 데 열심인 것은 아니다. 이 새로운 '모국어'는 이미 영화계에서 유행하고 있다. 여성 감독인 안 후이의 최근 작품인 (반생의 운명)은 영어와 표준 중국어 두 가지로 동시 촬영되었는데, 홍콩 상영을 위해서 광둥어로 더빙될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그 영화를 상영할 계획을 갖고 있다. 중국 시장이 과연 홍콩 영화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것인가? 홍콩의 가장 큰 제작사이자 배급사인 골든 하베스트의 부회장 카이 란은 이 점에서 매우 회의적이다. "중구에는 해적판들이 매우 많다. 게다가 외국 자본이 부족하고 배급망이 충분히 발달되지 못했다. 시장은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점에 너무 기대를 걸어서도 안 된다. 차라리 할리우드를 겨냥하는 것이 더 낫다."그러나 할리우드를 뚫고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재능과 의지를 소유한 배우나 감독들은 이미 그곳에 가 있는 실정이다. 현재 홍콩 제작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분야는 액션 영화이다. 왜냐하면 코미디물이나 애정물과 같이 내면의 문제를 다룬 작품을 미국에 수출하기란 진정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콩에 남고자 하는 감독들은 웡 감독이나 창 감독과 같이 내면적인 영화들을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중국 시작을 겨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홍콩인들은 중국인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베이징 당국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수 키 같은 감독은 이미 '전향'을 한 상태이다. 그는 1989년 6윌 텐안먼 사태를 다룬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태양이 없는)이후에 오락물로 방향을 전환했으며, 더 이상 정치성을 띤 영화를 찍지 않았다...."최근에 홍콩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도시가 외었습니다."라고 수 키는 설명한다. "뉴스 시간에 슬픈 소식밖에는 접하지 못하니까요. 사람들이 우울한 현실에 대해서 유쾌한 기분을 주는 코미디물을 찾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죠."그렇게 말하는 그 역시 7월 1일 이후에도 식민지를 떠나지 않고 남을 것이다. 사하코 나가모토 (아에라), 도쿄 (쿠리에 앵떼르나시오날) 1997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