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 혁명과 애국의 길에서 지은이: 다니엘 에므리 출판사: (주)시공사 봉사자: 박소영 제1장 소멸하는 베트남 리 왕조, 짠(진) 왕조, 레(여)왕조 등 상대적으로 오래 지속되었던 중세 왕조들의 시기가 지나자, 17세기 말엽부터 베트남 제국은 사실상 분열된다. 북부에는 찡(정)가문이, 남부에는 응웬(완)가문이 권력을 잡는 등 지방 호조게력의 영지로 분할되고 만 것이다. 제국이 그 힘을 되찾고 통일된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1776년 따이 손 형제들이 농민봉기를 일으키고 1802년 응웬 왕조가 성립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베트남의 역사는 국가존립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이다. 베트남이 겪었던 어려움의 근저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역동적이긴 하지만 주기적으로 농업생산과 인구증가의 불균형을 겪어야 했던 농경문화 내부의 긴장, 조세제도나 지방호족에 대항하는 끊임없는 농민소요, 그리고 2000년 동안 계속되어온, 엄청난 영토확장 능력과 자원을 지닌 '천하의 패자' 중국의 압력 등이 그것이다. 중국과 접한 베트남은 위태로움 속에서 버티거나 아니면 예전처럼 중국 황실에 조공을 바쳐가면서 종속된 채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중국이 강해지거나 통일되면 베트남의 독립은 제한되거나 위험에 처해졌다. B.C. 111년 한나라가 베트남을 복속시킨 이래로 939년까지 중국은 베트남의 왕을 남쪽 변방 안남('평화로운 남쪽'이라는 뜻)의 최고 관리쯤 되는 사람으로 여겼다. 이렇게 중국 군대는 여러 차례에 걸쳐 베트남을 침공했다. 그런데 역설적인 점은 이토록 특별하게 불리한 지정학적 상황이 베트남 민족을 다른 어떤 문화에도 동화되지 않는, 특히 '놈'이라 불리는 그들 고유의 문자 덕분에 자율적인 문화를 지닌 민족 공동체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불리한 지정학적 상황으로, 베트남은 오랜 역사 내내 참파와 크메르 문명을 정복하면서 남부의 삼각주 평야 쪽으로 영토를 팽창하는 '남진' 정책을 폈는데, 이것이 일찍부터 중국 문화에 동화될 위험을 막아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세기 중국 고관의 표현대로 '누에가 갉아먹는 듯한' 개간과 군사적 정복을 통해서, 1650년에서 1850년 사이에 메콩강 남쪽과 후에를 가르는 지역에 단일한 문화권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매우 긴밀하게 조직된 베트남의 삼중구조는 19세기까지 베트남의 지속성을 보장해 주었다(이 시기를 '대남' 시기라 부르기도 한다). 첫째는 유교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하늘의 권력을 위임받은 황제를 중심으로 한 관료계급이며, 둘째는 가족과 촌락이다. 가족과 촌락은 농경문화를 보존한다. 베트남인에게 농경문화는 정착과 정체성, 그리고 조상과 토지에 대한 전적인 애착으로 체험된다. 또한 가족과 촌락은 왕조의 창시자들이 때마다 고취시키는 애국심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는 지식인계급을 들 수 있다. 농촌의 엘리트라 할 지식인계급은 과거제도를 통해 언제든 중앙의 관료가 될 수 있으므로 예비 관료집단이라 할 수 있었다. 근본적으로 지식인계급과 농민계급의 긴밀한 결합이 베트남을 이끌어갔다. 왕국이 위태로워질 때마다 서로 사회적 주도권을 바꿔가면서... 이와 같은 베트남의 구조는 국가를 정체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는, 2000km에 이르는 해안선을 통해 얼마든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을 아시아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세계 변혁의 흐름에서 벗어난 채로 존속시키고 말았다. 유교사상을 가진 '대남' 엘리트들은 중국 문물을 완전히 베트남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중국의 학문과 한문, 그리고 제사의식을 통달하는 데 전적으로 매달렸으며 '중국보다 더 잘하자'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이리하여 꽉 막힌 '전통주의'가 태어나게 된다. 유럽의 제국주의가 동아시아로 들어오고 근대화를 위한 개혁이냐, 나라가 망하느냐를 선택해야 했던 때에 베트남의 엘리트들은, 소수의 소외된 선각자들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보수주의'에 빠져 있었다. 예전에는 유교국가와 농민 사이의 유대관계가 나라를 존립시켰으나, 서양의 침입 앞에서 그러한 유대관계는 오히려 나라를 쇠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860년경의 대남은, 말하자면 반동국가였던 것이다. 1840년 이후, 후에 왕조가 중국 제국의 쇠퇴에 휩쓸리게 되면서 이러한 위험한 퇴영주의 는 명을 다했음이 분명해졌다. 1860년 무렵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거대 자본주의가 몰려왔으나 엘리트 계층은 그 힘을 과소평가했다. 모종의 근대화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엘리트들은 문화적 고립주의, 군사적 저항, 그리고 중국의 원조에만 집착할 뿐이었다. 국권의 상실 프랑스의 관료들, 카톨릭 사제계층, 군인, 그리고 공화당의 지도자들은 아시아 식민지 확장을 경제성장과 정치권력에 대항해 오는 도전을 타개하기 위한 대안으로 여겼다. 아시아 침략의 최종 목표는 중국 시장이었다. 여러 세대에 걸친 수출업자들이 꿈꿔왔고, 제1차 아편전쟁(1839~1842) 이후에는 영국이 실현을 꾀했던 이른바 엘도라도(스페인 사람들이 남아메리카에 있다고 상상하던 황금의 나라:역주)의 신화가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가 양쯔강 유역을 선점하고 있던 영국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하나의 방법밖에 없었다. 중국 한가운데에서 갈라져 나오는 메콩강과 홍하를 통제하에 두는 것, 다시 말해서 인도차이나 식민지로 만드는 일이 그것이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침탈은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청나라와 격돌한 제2차 아편전쟁(1856~1860)과 더불어 시작된다. 1861년 2월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1862년 6월 5일의 조약으로 대남 남부의 세 지방이 코친차이나 식민지가 되었으며 1866년에는 그보다 서쪽에 위치한 세 지방이 다시 병합됨으로써 영토가 확장된다. 그 와중 인 1863년에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보호령에 속하게 된다. 그렇지만 제2제정의 위기와 더불어 프랑스의 공세는 중단된다. 두다르 드 라그레와 프랑시스 가르니에 등이 팀을 이루어 실시한 메콩강 탐사(1866~1868)는 확실히 메콩강의 효용성이 별로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홍하를 중국 진입의 관문으로 이용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북쪽의 삼각주 지역을 점령해야 함을 밝혀주었다. 그러나 1873년 가르니에가 감행한 하노이 습격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베트남에 강력한 반외세, 반기독교 운동만을 촉발시켰다. 1877년에 제3공화정이 견고하게 자리잡자 프랑스는 공공연히 제국주의를 표방하게 된다. 1882년 리비에르 부대가 하노이를 함락하자 북경은 그 대응으로 통킹에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자 페리 내각은 홍하 삼각주 지역의 정벌을 도모하고 후에의 요새들을 함락하면서 중국에 전면전을 선포하는 한편, 후에 조정에는 1884년 6월 6일 보호조약을 체결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퇴각하는 중국군의 뜻밖의 습격을 받아 랑손 부대가 패하고 페리 내각이 실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굴복하고 말았다. 마침내 1885년 6월 4일의 조약으로 인도차이나를 두고 프랑스와 중국 사이에 역사적인 타협이 이루어졌다. 인도차이나가 프랑스령이 된 것이다. '칸 부옹':농민과 지식인의 저항 하지만 프랑스 당국에게는 가장 힘겨운 일이 하나 남아 있었는데 이는, 1885년 7월부터 후에를 비롯한 여러 지방에서 일어난 수많은 봉기들을 진압하는 일이었다. 제국의 섭정자들이 철저히 은폐된 깊은 산 속 탄소의 진지에 어린 왕함 응히를 피신시키고 봉기를 호소한 것이다. 그리하여 근대에 들어 처음으로 베트남인들의 저항운동이 시작되는데, 그것이 바로 '칸 부옹', 즉 '임금을 돕자'는 운동이었다. 물론 이 싸움은 중국의 원조가 배제된 상태에서 미리부터 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침략자로부터 정통 왕을 수호하기 위하여 식자들과 농민들이 참여했다. 1885년 9월에는 대사 드 쿠르시의 조종으로 동 캉이 즉위했는데, 이 새로운 군주의 이름으로 10여 년 동안 득세하던 식민권력과 특권계급을 저지한 것도 이 운동이었다. 지식인이나 농민대장의 지휘를 받은 저항군들은 요새화된 마을을 근거지로 삼아 삼각주 지역에 타격을 가했다. 탕호아의 바딩 요새는 무려 두 달 동안이나 저항을 계속했다. 한편 산악지역에서는 치역한 게릴라전이 펼쳐졌다. 옌테의 밀림지역에서 활약하던 데 탐 같은 뛰어난 통솔자들이 이끈 전투가 유명하다. 저항은 촌락공동체와 지식인계급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면서 끈질기게 전개되었지만, 서구 야만인들의 침략에서 유교적 질서와 왕조, 나아가 제국을 수호하는 것이 그들이 추구한 이상의 전부였다. 이 싸움이 궁극적으로 실패로 돌아간 것은 그 때문이다. 베트남에는 여전히 근대 국가의 이념이 부재한 상태였다. 바로 그 때문에 프랑스의 식민권력은, 특히 총독 드 라네상의 주도로 베트남 왕조, 궁정, 그리고 관료들과 정치적 타협을 이루어내고 그들로 하여금 보호령 조약을 수락하도록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후 권력은 점차 프랑스 쪽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1897년에 들어서면서 마침내 식민정부가 베트남을 장악하게 된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탄생 베트남은 1000년에 가깝도록 독립을 잃은 적이 없는 나라였다. 그러나 1883년 8월 16일 고등판무관 아르망이 연이은 봉기를 미리 막기 위해 베트남 조정에 내뱉은 위협은 10년 만에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는 "안남 제국과 제국의 왕조, 군주, 조정이 반란자들을 잡아다 형을 선고할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역사 속에서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1887년, 옛 안남의 폐허 위에 베트남과 캄보디아, 메콩강 중부의 국가들-이 국가들은1893년에 라오스로 통합된다-을 포괄하는 영토를 가진 식민국가 '인도차이나 연합'이 세워졌다. 1897년부터 1902년까지 총독을 지낸 폴 두메르는 베트남의 행정구조와 양식을 확정했다. 일반 통치조직을 정비하고, 베트남을 세 지역으로 해체하여 각 지역에 서로 다른 지위를 부여했다. 이로써 베트남에는 모두 두 개의 보호령과 한 개의 식민지가 존재하게 되었다. 안남과 통킹이 보호령이고 코친차이나가 식민지였다. 뿐만 아니라 관료조직을 변형시켜 외국 권력을 집행하는 기구로 만들었고, 엄청난 초과예산인 식민지 예산을 충당하기 위하여 소금, 술, 아편을 전매함으로써,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농민들을 착취했다. 옛 표의문자는 로마자로 교체했고(이른바 '꾸옥응우'), 식민화 정책의 필요에 따라 학교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는 과거제도의 폐지를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이리하여 근대 국가가 건설되었다. 이제 베트남은 식민지로서 가치를 갖게 되고 투자가 가능해진 셈이다. 불확실한 세대 유례없는 국가적 위기와 모욕의 시기가 닥쳤다. 특히 지식인계급은 사회적 가치를 몰수당하고 문화적 지위를 박탈당한 기막힌 시대를 살아야만 했다. 어느 민요는 "이제 하늘이 낮아지고 땅은 높도다."라고 노래했다. 세계의 질서가 느닷없이 뒤집힌 것이다. 바로 이러한 극심한 혼란 속에서, 호치민은 혹독한 젊은 시절을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응웬 싱 콘은 1890년에서 1894년 사이에 태어났다. 그가 바로 열 살 무렵에는 응웬 땃 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될, 그리고 나중에는 호치민으로 불리게 도리 인물이다. 응웬 싱 콘이 태어난 곳은 응헤안주의 중심지인 빙에서 14km 떨어진 남단현 람팅면 킴리엔읍 호앙쭈 마을. 바나나 나무, 빈랑나무, 뽕나무숲과 울타리에 파묻힌 평범한 마을 킴리엔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북쪽으로 강과 나란히 뻗은 언덕의 구불구불한 곡선과 송카 사이로 끝도 없이 논이 펼쳐져 있는 곳, 이곳은 후에에서 북쪽으로 360km, 사이공에서는 1442km 떨어져 있는, 험하고 가난한 데다가 인구마저 과밀한 시골 한복판이었다. 가뭄이 잦았고 말라리아가 만연했으며 날씨는 혹독했다. 농업생산은 통킹보다도 불안정했다. 1900년 무렵에도 이 지역의 식민화 정책은 거의 가시화되지 않고 있었다. 1899년에 응헤안주의 인구 86만 명 중에서 유럽인은 불과 181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인구 1만 2천 명의 빙 벤투이에 모여 살았는데, 이곳에는 1892년 안남 삼림상업회사의 제재소와 성냥공장이 자리를 잡았고 상점이 여섯 군데, 호텔이 하나, 그리고 몇 군데의 커피농장이 밀집해 있었다. 응웬 땃 탕의 가족사는 고난에 찬 것이었다. 그는 제국관료의 둘째 아들로서, 일류 관리 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응웬 싱 후이는 시골의 평범한 지식인이었는데, 1894년에 3년마다 보는 과거에 합격, '쿠난'을 받고 후에에서 관직에 오른다. 그후 그는 1901년 5월 하늘의 별따기인 티 딩(왕궁에서 보는 시험)에 합격하여 '포방'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해에 땃 탕의 어머니가 죽는다. 그는 제국 학술원에서 근무하다가 빙딩의 관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총명하기는 했지만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는 바람에 1910년 1월 급작스럽게 면직되었다. 1911년 이후 그는 코친차이나를 떠돌다가 1929년 그곳에서 객사하고 만다. 고위 관리로서는 좀 당혹스러운 처신이지만, 이러한 것은 역사적 소외상황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지식인계급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그의 가족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역경이 닥쳤다. 이때 땃 탕이 겪은 남모르는 고통은 아마도 미래의 혁명가가, 시련에 부딪힐수록 꺽이지 않는 힘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청년기 응웬 땃 탕은 킴리엔의 평야에서보다, 아버지가 살던 동바 구역의 제국 수도 운하 기슭에서 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1910년에 집안이 몰락한 것말고도 당시 지식인 관리의 자제들 세대가 떠맡아야 했던 어려운 상황으로, 생활의 조촐한 안정은 동요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엘리트들의 사회적 지위가 박탈당한 것을 들 수 있다. 등용제도가 바뀌었기 때문에,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는 한문공부를 계속하든지, 아니면 보호령이 된 후 만들어진 꾸옥응우와 불어 교육기관에 들어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더구나 후자는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고, 설사 들어간다 해도 하급관리가 되는 길밖에는 열려 있지 않았다. 응웬 싱 후이의 두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한문교육을 받았을 터인데, 나중에는 현대식 교육과정에 들어섰다. 1920년 형 땃 닷이 경찰서에서 증언한 내용에 따르면, 땃 탕은 베트남인이 다니는 프랑스계 학교에 다녔다. 아마 동바 학교였을 것이고, 그는 거기서 초등교육 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두 형제는 모두 꾸옥혹 중등학교에 등록할 수 있었다. 땃 탕에게 이 선택은 벼슬길은 이제 완전히 물건너갔음을 의미한다. 그는 학교를 끝마치지 않고 판티에트의 둑탕 학교에서 한 달에 8피아스터의 돈을 받고 조교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는 또한 사이공에 있는 아시아 공과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이지만 극심한 경쟁 때문에 가망성은 거의 없었다. 사실 호치민은 현대식 교육과 전통적 교육 중 어떤 과정도 완전히 이수하지 않았다. 그는 두 문화의 중간에 있으면서 스스로 깨친 우수한 독학자였다. 그리고 이것은 특별한 관직이나 칭호를 갖고 있지 않았던 당시 소 인텔리겐치아의 전형에 해당한다. 이들은 혁명운동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독립운동의 여명기 또 하나 호치민에게 낯설지 않은 경험은, 1900년 이후 지식인 계급에서 광봄위하게 일어난 논쟁이다. 지식인들은 유교 윤리에서 다른 역사적 전망으로의 필연적인 교체라는 역사적 문제를 토론했다. 사회의 일반적 근대화와 새로운 문화의 창출, 그리고 근대 국가의 건설이 주요 논제였다. 1905년 무렵에 이르면 민족주의적 구도 내에서 견해를 달리하는 두 개념이 성립한다. 그 하나는 대학자이자 애국자인 판 보이 짜우가 제창한 '국가민족주의'이다. 그는 외국의 원조를 받는 비밀결사를 통해 미래에 근대화의 원동력이 될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전투를 벌이자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1908년, 1913년, 1915년, 1917년, 무장행동과 역모가 잇따랐지만 모두 실패에 그치고 말았다. 그와 함께 개혁주의적인 길이 제시되었다. 꾸앙남주의 뛰어난 지식인인 판 짜우 찡은 1906년 '폴 보 지사에게 보내는 서한'을 출간했는데, 여기서 그는 '민주주의적 민족주의'를 제시한다. 단호한 비폭력주의를 표방한 이 주장은, 사회의 전반적인 진보와, 오로지 정치적 독립에 관한 근대 지식의 보급에 우선 순위를 두었다. 민족여론을 불러일으켜 식민체제에 압력을 가하고 프랑스 좌파와 연계함으로써, 지속적으로 개혁을 수행할 수 있고, 이렇게 하다 보면 점진적인 탈식민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1905년 이래로 놀랍도록 현대적인 논쟁들이 활발히 일어났고, 이것은 사회개혁을 지지하는 수많은 선도세력을 고무했다. 특히 개혁주의자들은 1907년 하노이에 일종의 사립학교인 동 킹 응히아 툭을 세웠는데, 그후 지방의 많은 사립학교들이 이 대학을 모범으로 하여 세워졌다. 이 학교들은 대중운동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중앙 안남 지방에서 1908년 3월에서 5월까지 전개된 농민들의 조세 반대 평화시위는 이 학교들이 불러일으킨 대중적인 반향의 좋은 예가 된다. 판 짜우 찡은 강력한 탄압 정책으로 체포되어 1908년 포울로 콘도레섬에 수감되었으나, 인권연맹의 활동 덕에 풀려나 1911년 초 프랑스에 도착한다. 근대 시민사회를 태동시키려는 이 선도세력들은 그후에도 끊임없이 부활한다. 이렇듯 혁명과 개혁이라는 두 차원 속에서 민족운동이 탄생한 것이다. 청년기 호치민의 집안 분위기는 이러한 국가적 토론에 특히 민감했다. 그가 탄생한 응헤안은 애국정신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소에 아로새겨진 곳이었다. 칸 부옹 운동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새로웠고, 젊은 땃 탕의 아버지는 개혁주의자들과 같은 세대에 속하는 사람으로, 판 짜우 찡과 포방 동기생이었다. 그는 또한 판 보이 짜우와도 아는 사이여서 면직될 당시에는 프랑스 당국의 의심을 받기도 했다. 꾸옥혹의 학생이었던 땃 탕과 그의 형은 1908년 4월 9일과 12일, 후에 부근에서 일어난 농민시위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1920년 응헤안의 지사는, "1908년의 사건 때 땃 닷과 땃 탕 두 형제는 노골적으로 적대감정을 드러냈기 때문에, 이 학교의 교장은 그들을 몇 번이나 엄하게 꾸짖어야 했다."고 쓰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관료와 반정부 인사 간의 거리가 한발짝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유럽을 향하여 응웬 땃 탕은 비밀거사보다는 판 짜우 찡의 개혁주의에 더 끌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다음의 여러 가지 사실로 보아 입증된다. 우선 판 보이 짜우가 결성한 동두에 가입하기를 거부한 것, 그리고 1905년 판 짜우 찡이 판티에트에 머무를 때 세운 학교인 둑 탕에서 학생활동에 참여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학자 판 짜우 찡의 모범을 좇아 프랑스로 갈 것을 결심한 것 등이다. 그가 마르세유에 도착한 1911년 9월 15일 공화국 대통령과 식민지성 장관 앞으로 보낼 예정이었던 식민학교 지원 편지를 보아, 오늘날 우리는 그가 프랑스로 간 정확한 동기를 알고 있다. 물론 그의 생각은, 식민화 정책의 지지자가 아니었던 한 지원자의 순진함이었다. 그는 우선은 얼마간 공부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 얼마 후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어느 유럽인과 함께 사이공을 떠납니다. 5~6년 후에 돌아올 거예요."하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의 형은 1902년에, 자신은 동생 호치민의 장학금 요청이 거절된 후 다잇 총독이었던 알베르 사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고 분명히 진술했다. 하지만 그의 유럽행은 다른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 학생들이 자랑삼아 내걸던 구호, 즉 '외국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나라를 돕자'라는 말이 요약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식민지 상태 속에서도 근대적 지식의 확장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던 것이고, 서양을 부강하게 만든 신학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접근하여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고자 하는 욕구가 교육받는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커가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까지 가는 여행경비를 벌기 위해 '일꾼연합'에서 일거리를 찾던 중, 땃 탕은 하이퐁-됭케르크 노선의 6000톤급 증기선인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 선에서 사환 아니면 식당 급사장의 자리를 얻어서 1911년 6월 4일경 사이공을 떠난다. 망국의 한과 집안파탄의 서러움을 안고 단호히 선택한 망명이었다. 바야흐로 그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방랑의 문턱에 서 있었다. 제2장 서구로 가다 "프랑스로 가는 길은 반프랑스의 길이다"(사이공 통신에) 이제 단 하나의 서구만이 열려 있었다. 상선이나 대도시에서 일하는 '원주민' 하층민의 서구만이 있었던 것이다. 응웬 땃 탕은 그 하층민 중의 한 명이 되기로 했다. 공부하기 위해 일을 하기로 했다. 그는 1910년대에서 1920년대 사이에 프랑스에 온, 나중에 대부분 공산주의자가 된 1200명의 중국 유학생들처럼 '학생노동자'가 되었다. 이제부터 그는 아프리카나 미국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이름도 없이 일하는 '바', 즉3류가 되었다. 이는 또한 아버지에게 약간의 돈이나마 보내고자 하는 자식 된 도리에서 비롯된 선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그는 1911년 10월 31일 사이공에 기항했을 때, 혹은 1912년 12월 15일 뉴욕에 기항했을 때 폴 땃 탕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보냈다. 또한 이렇게 육체노동을 택한 것은, 이 관리의 아들이 육체노동을 천시하던 전통을 거부하고 생산적인 일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는 개혁주의 실천가들의 특징이었다. 여기서 역시 프랑스에 정착하면서 사진정정사로 일한 판 짜우 찡의 영향이 엿보인다. 땃 탕은 향후 10년 동안 판의 문하생이 된다. 파리에서 변호사가 될 판 반 쭈옹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이 사회의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베트남인의 존재양식을 대강이나마 파악했으며, 사회주의자, 인권연맹, 프리메이슨 등과 교류했고 1912년에는 근대적 지식을 보급하는 단체인 동포애국단을 설립했다. 땃 탕은 이 모임의 정기적인 통신회원이었다. 땃 탕은 이즈음 가장 진보한 자본주의 도시들의 정글 속에 잠겨 있었다. 뉴욕, 런던, 프랑스의 항구들. 그는 낯선 서구 땅의 모순되고 종잡을 수 없는 천의 얼굴을 보았으며 아프리카인, 아랍인, 마다가스카르인 등이 동시에 처한 식민지의 일반적 상황과 프롤레타리아의 보편적 조건, 그리고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시작될 1차 세계대전의 여명기에 유럽의 수도들에서 활기를 띠고 전개되던 아일랜드인, 인도인, 한국인, 중국인들의 민족운동에 눈을 떴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서구 사회의 풍요로움이나 새로운 동력수단도 큰 충격이었다. 1914년에서 1919년까지 런던에서 체류하던 시기에 땃 탕의 세계관은 급속도로 성숙했다. 만족을 모르는 호기심도 여전했다. 이때 그는 역학과 전기에 관한 야간강의를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어를 배웠다는 것 이외에, 이시기를 특징짓는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의 사회적 지위가 불확실했다는 것이다. 사환, 이민선 선원, 하인 등, 그는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지만 거기 매몰되지는 않았다. 그는 혼자서 부지런히 배웠고 열심히 신문을 읽었으며, 조국의 민족주의자들이 프랑스 정권에 항거하여 일으킨 거사에 관한 안타까운 소식(1915년 5월 젊은 황제 두이 딴의 거사, 1917년 8월 타이 응웬 주둔군의 반란 등)을 경청했다. 그는 또한 세계 민주주의의 세 거두인 영국, 미국, 프랑스의 정치적 관행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러나 서구를 분열시키는 분쟁에 대해서는 중립적 태도를 견지하고자 했다. 판 짜우 찡에게 보낸 1914년 8월의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운명은 우리를 뜻하지 않은 곳으로 이끌기 때문에 누가 승리를 차지할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3~4개월 후면 아시아의 운명은 바뀔 것입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말입니다. 그러니 참전한다든가 개입하면 낭패를 봅니다. 우리는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주변부로 비켜 서 있던 그는, 세계를 주도할 서구 문명의 향방을 결정할 깊은 흐름을 초연하게 관찰할 수 있었고, 그만큼 더 명석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땃 탕은 이름을 응웬 아이 꾸옥('애국')으로 고치고 정치에 입문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그가 파리에서 '안남 애국자 동맹'에 재합류했을 때, 이 젊은이의 인생행로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그의 자서전은 이 일을 1917년으로 적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1918년, 판 짜우 찡과 판 반 쭈옹이 건설한 소규모의 안남 애국자 동맹은 기껏 열댓 명의 회원을 지닌 코뮌의 일종으로, 파리13구역 고블랭 빌라 6번지에 있던 판반 쭈옹의 집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다. 여기서 응웬 땃 탕은 곧 핵심 인물이 된다. 전후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19년 1월 18일 개최된 베르사유 평화회담에서 유럽의 새로운 민족국가들이 탄생하려 할 즈음, 이들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베트남의 존재를 유럽인들에게 상기시켜 주고자 했다. 마침 기회가 매우 좋았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식민지인들이 일시적으로 이주해 왔고, 윌슨 독트린이 불러일으킨 반향, 프랑스 하원의 식민지 논쟁, 1919년 7월 파리에서 열린 범아프리카인 대회 등으로 파리는 식민지인의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1919년 4월 24일 하노이에서 당시 총독이었던 알베르 사로가 백서를 제출하면서, 인도차이나 정책이 도마 위에 올라 있었다. 알베르 사로는 백서에서, 그가 '토착시민'이라 부른 사람들에게 '토착국가에서 정치적 권리를 가시적으로 확장'할 것을 제시한 바 있었다. 아시아의 위대한 민족주의에 서광이 비치고 있었다. 당시 회의의 막후에서 활발히 벌어지고 있던 수많은 민족주의 집단의 활동사례에서 영감을 얻은 안남 애국자 동맹은, 1919년 6월 중순 응웬 아이 꾸옥이라는 가명으로 집단 서명을 하고 '안남 인민의 요구사항'을 찍어냈다. 문건의 편집자는 땃 탕을 포함, 판 반 쭈옹, 판짜우 찡, 그리고 뛰어난 화학기사이자 통킹의 고관 자제인 응웬 테 쭈이엔 등이었다. 겉으로는 온건한 문건이었지만, 어조에 서린 굴욕감의 배후는 대담한 급진성을 띠고 있었다. 식민지를 프랑스와 동등하게 대우할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민족자결의 신성한 권리를 실질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민족국가의 원리가 이상의 영역에서 현실의 영역으로 이행될 때까지', 이들은 민족독립의 전망 속에서 서구 민주주의 모델(즉 '법치국가')을 즉각적으로 인도차이나에 도입할 것을 당당히 천명했다. '선 민주정치 확립, 후 독립'이라고 도식화되기 이전에 이미 탈식민화의 시나리오를 마련한 것이다. 응웬 아이 꾸옥의 탄생으로 땃 탕은 첫 번째 변신을 겪는다. 그와 동시에, 베트남의 미숙한 민족주의에 근대 정치라는 새로운 길이 열린다. 애국자 동맹은 1919년 가을 '르 포퓔레르(인민)'지, '뤼마니테(인류)'지, '르 리베르테르(무정부주의자)'지, 노동총연맹의 기관지, '라 비 우브리에르 에 르 푀플(노동자의 삶과 민중)'지 등의 컬럼란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중집회를 개최하고 거기서 주장을 피력했으며, 인도네시아나 인도 작가들의 모범을 따라 인도차이나의 대의명분을 반식민문학의 형식으로 표현할 방법을 찾았다. 1919년 말 응웬 아이 꾸옥은, 지칠 줄 모르는 반식민계 출판물의 출판업자인 폴 비네 독통의 권고에 따라, '억압받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기 위해 국립도서관에서 쉴새없이 작업했다. 이 책은 틀림없이 훗날 그의 유명한 저서 '프랑스 식민화의 과정'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법의 정신'과 같은 서구의 저작들을 베트남 문자로 번역하는 계획도 신중하게 고려했다. 투르 대회 1919년 말, 응웬 아이 꾸옥은 여전히 판 짜우 찡과 같은 민주주의적 민족주의자였지만, 자신의 정신적 아버지인 짜우 찡과 급속히 달라져가고 있었다. 행동주의, 끊임없이 회의하는 양식, 그리고 인도, 이집트, 중국을 뒤흔든 대중운동 없이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직관 등이 사부와 다른 접이었다. 1919년의 '요구사항'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와 함께, 헌법상으로 식민화 정책의 현상유지론이 견지되자 개혁적 민족주의자들의 깊은 각성이 잇따랐고(판 짜우 찡은 1922년 '확실히 우리는 희망에만 빠져서 오류를 범했다."고 쓰고 있다. 그에 따라 1920년에는 응웬 아이 꾸옥의 이유 있는 초조함이 인정받았다. 몇 달 후 그는 조레스 이후 피식민지인들의 저항운동에 귀기울이는 유일한 프랑스 정치세력인 사회당에 가입했다. 땃 타의 열렬한 사회당 지지는 피식민지 국민의 민족적 실체를 인정하라는 그의 한결같은 신념에 기초하고 있었다. "나의 조국은 오로지 레닌의 테제만을 신봉하며, 공산주의 체제만이 모든 나라 위에 하나의 세계공화국을 건설케 할 것이다." 그는 1920년 11월 3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가입을 놓고 찬반투표를 벌인 몽뤼송 사회주의 청년대회에서 이같이 연설한다. 그는 13지부와 인도차이나 사회주의 그룹이라는 가상단체의 대표자격으로 SIFO(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의 투르 대회에 초청받는데 성공한다. 12월 27일, 그는 사회당의 코민테른 가입을 주장하는 카생-프로사르 발의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고, 레옹 블룸은 그의 발언을 반박했다. 응웬 아이 꾸옥은 놀라서 어찌할 바 모르는 좌중에게 코민테른 가입만이 '사회당이 식민지 문제에 합당한 중요성을 부여하겠다는 확실한 약속'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응웬 아이 꾸옥이 사회주의를 선택한 기원에는 자신이 겪은 생생한 체험과 레닌주의에 대한 직감적인 이해가 놓여있다. 그는 노동자들의 가난과 불안한 생활을 몸소 체험했다. 몇 해 동안, 수많은 이주민들처럼 이 고위 관리의 자제는 일종의 '프롤레타리아'적인 상황 속에 있었던 것이다. 1920년 2월, 어느 밀고자는 이렇게 지적했다. "응웬 아이 꾸옥의 물질적 생활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나는 그가 점심과 저녁을 빵 한 조각으로 때우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그는 고블랭의 빌라에 얹혀살다가 1921년 7월 14일 제17구 콩푸앙의 막다른 골목9번지의 허름한 방에 40프랑의 월세로 세들고, 사진정정사로 근근히 생활했다. 유교적 엘리트주의를 거부하고 사회의식에 눈뜬 당시 민중주의자의 처지는 대개 이러했다. 실제로 레닌의 볼셰비즘은, 노동자 투쟁과 피식민지 국민들의 민족투쟁 사이에서 균형을 꾀하는데 그 본령이 있었다. 아이 꾸옥은 코민테른의 제1구호인 '세계혁명'을 '민족해방'이라는 용어로 풀이했다. 그는 1960년에 "내가 레닌을 사랑하고 존경했던 것은 그가 자신의 동포를 해방시킨 위대한 애국자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레닌과 레닌주의를 대하는 이러한 놀라운 전망은 근본적으로 국제주의적인 것이며, 충분히 타당성이 있었다. 피식민지인에게 볼세비즘은 윌슨 독트린의 헛된 약속을 보상해 주는 해결책이었으며, 국제사회에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새로운 논단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볼세비즘은 공산주의 와 민족주의의 결합을 배척하지 않았다. 이는 1919~1920년에 코민테른이.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아시아에서 봉기할 것을 재차 호소한 데서도 드러나는 바이다. 국제 식민지 연합과 '르 파리아(천민)' 이러한 공산주의 사상의 독특한 전개는 투쟁을 고취시키는 것으로 그 일보를 내딛었다. 소수의 서인도 제도인들과 마다가스카르인, 알제리인, 베트남인(특히 응웬 테쭈이엔), 그리고 프랑스 공산당과 인권연맹 회원들과 더불어, 아이 꾸옥은 3년 넘게 식민지에서 공산당을 창설하기 위해 활동한 주도 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아이 꾸옥은 프랑스 공산당의 활동에 정기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 초기의 두 번의 전당대회(1921년 12월 마르세유와 1922년 파리)에 참여했고 17구역에 있는 지부에도 정기적으로 들렀다. 그는, 1924년 이전에는 식민지에 관한 정강도 없었던 공산당에 식민지 문제에 개입할 것을 촉구했는데, 그 한 예로 쭈이엔과 더불어 1922년 '뤼마니테'지에 '식민지에 휴머니즘을'이라는 정기기고란을 편집했다. 공산당의 태만한 식민지 정책 때문에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회의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고, 밤낮으로 그를 감시하는 경찰 끄나풀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산당의 이러한 태만은 오히려 유익한 효과를 낳기도 했다. 식민지 공산주의 운동이 자율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 꾸옥은 국제식민지연합(1921년 7월~1925년말)의 주요 제창자이자 주최자였다. 국제식민지연합은 기관지'르 파리아'와 더불어, 마그레브, 베트남을 주축으로 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특수한 공산주의가 태동하는 요람이 된다. 코민테른의 호출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의 요구에 코민테른은 신속한 대책을 내놓았다. 1923년 1월 21일 캉통(광동)에서 순 얏센가 조페가 선언한 후, 모스크바는 아시아의 혁명적 민족주의를, 특히 캉통에서 권력을 잡은 지 얼마 안 되는 국민당을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했다. 국제식민지연합은 식민지내에 공산주의자 그룹을 조직하고자 했고, 1912년 4월 동양노동자대학(KUTB)을 설립하고 식민지의 투사들을 모집했다. 바로 이러한 전망 속에서, 1923년 5월 파리에서 응웬 아이 꾸옥과 그의 동료들은 '우리의 언어로, 우리 형제들이 읽을 수 있도록' 꾸옥응우로 월2회 발행될 '베트남 혼'의 창간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1924년 6월, '르 파리아'는 이렇게 외친다. "모스크바로 가자!" 이번엔 동쪽으로 가는 새로운 망명이 시작될 참이었다. 응웬 아이 꾸옥은 이미 1923년 6월 13일 소련으로 비밀리에 떠남으로써 그 시발을 알렸다. 그는 사부아 지방으로 유람여행을 하는 사람으로 변장하고, 10월 12일로 예정된 붉은 농민 인터내셔널 설립을 위한 회의에 프랑스의 위임을 받아 식민지 대표로 참석하러 모스크바로 향한 것이다. 이날까지 그가 달려온 길은 결코 짧지 않았다. 10년 사이에 그는 청년에서 성인으로 변모해 있었다. 과거의 고관집 자식은 뒤늦게나마 허물을 벗고 투사 응웬 아이 꾸옥이 되었다. 유럽 공산주의권에서 보자면 아직 주변적인 존재에 불과했지만, 다가올 혁명을 알릴 주역이었다. 제3장 조국도, 전선도 없는 투쟁 그렇지만 그는 베트남에서 혁명적인 '요구'가 출현하는 것과 비례해서만 실제적인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면서부터 베트남의 사회 조직내에서 배태되기 시작한 유례없이 폭넓은 동요가 바로 혁명적 요구의 기원이 된 것이다. 식민정치, 황금기에서 위기로 1920년에서 1929년까지가 식민지의 황금기였다. 이 시기에는, 통킹의 광산과 코친차이나의 벼농사 지대와 같은 이미 낡은 개발지역이든, 광활한 자본주의적 고무나무 재배지가 된 '고원'의 적토지처럼 전후의 투기바람으로 형성된 신흥 개발지역이든, 모든 개발지역에 대도시와 지방의 엄청난 자본이 투입됨으로써 식민지 자본주의의 전분야에 걸쳐 눈부신 성장이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점차 대도시와 기업, 철도, 공장, 인도차이나 은행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인도차이나'가 농부들의 인도차이나에서 갈라져 나온다. 베트남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들 농부는 인도차이나의 조세수입원이지만, 나중에는 형편없는 임금으로 생계를 잇는 노무자로 대거 전이된다. 통킹과 북안남에서 이들은 뒤떨어진 기술과 농업생산성의 저하, 인구과잉, 그리고 삼각주 지역의 과잉개발로 생긴 빈곤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 1930년대를 전환점으로 하여, 식민지 개발의 필연적 귀결인 '저개발'의 구도가 정착하고 오랫동안 지속된다. 이러한 두 과정이 맞물리는 지점에 새로운 사회집단들이 형성되는데, 이들은 1920년대에 점차 지식인계급과 구관료집단을 서서히 대체하게 된다. 즉, 상인과 특히 남부의 지주들로 구성된 대부르주아지, 그리고 근대식 기업에 소속된 12만에서 30만에 이르는 안정된 노동자 계층, 마지막으로 1925년에 5000명을 헤아렸다가 10년 후 배 이상 늘게 될, 거의 완전한 근대 교육을 받은 새로운 지식인 엘리트 계층이 그것이다. 1925년 들어 역사의 한 획이 그어진다. 이때부터 식민지의 주도 세력은 인도차이나의 베트남 지역에서 인구과잉으로 농작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잇따라 1930년 여름부터 시작된 식민지 경제의 극심한 불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대한 식민지 당국의 대응은 농촌 발전전략이었다. 대규모 수리사업이 주가 된 이 전략은, 식민지 경제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농작물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농촌'전략은 이중의 이미를 지닌다. 하나는 정치적 보수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인도차이나의 정치적 지위가 변화하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입장이다. 알제리와 인도차이나는 1930년대의 경제위기 속에서 프랑스 자본주의가 펼쳐질 마지막 공간이자, 프랑스가 자신의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로 등장하면서 식민제국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좌파연합에서 민중전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파,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탈식민화 운동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정치적 개혁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정책의 절대 원칙이었다. 이렇게 식민지 정책은 꾸준히 자기 무덤을 파가고 있었다. 코민테른과 응웬 아이 꾸옥 혁명적 엘리트와 혁명이론 없는 혁명이란 없다. 베를린을 무사통과한 혁명적 엘리트 응웬 아이 꾸옥은 1923년 6월 30일 드디어 모스크바에 당도한다. 그는 코민테른 중앙 기구에서 18개월 동안 몸담으며 혁명사상을 흡수한 첫 베트남인이었다. 벌써 서른 고개를 넘었고, '인터내셔널'이 2년 전부터 양성한 수많은 사람들 중의 일개 풋내기 식민지 투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짧은 시간 내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4년부터는 공산당 수뇌부에서 식민지와 아시아 문제의 전문가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모스크바 시적은 그의 수련기였다. 여기서 그는 공산주의 간행물을 만드는 법, 자하활동을 조직하는 법, 직업혁명가들을 지도하는 원칙 등을 철저히 배웠다. 특히 당시 진행중이던 소비에트 계획을 발견한 것은 각별한 일이었다. 소비에트 계획이란, 대중적 토대를 갖추고 절대적 권력을 부여받은 혁명적 엘리트가 조도하여, 대규모 농촌사회를 산업화가 이루어진 과학적 근대 사회로 점점 가속하여 이행시킨다는 매혹적인 모델이었다. 이것은 응웬 아이 꾸옥에게 하나의 계시가 되었으며, 공산주의 혁명을 민족주의적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전범이 되었다. '낙후된' 조국을 발전과 부강함의 길로 들어서게 하여 근대 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적 과업을 성취시켜줄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렇게 코민테른의 학교에서 놀랄만한 잠재력을 지닌 정치활동가가 탄생했다. 인도차이나 국경의 혁명가 당시 소비에트 보로딘을 파견하여 중국 캉통의 순 얏센 혁명정부를 지원하고 있었다. 1925년 2월, 인도차이나 경찰국은, 1월 8일부터 보로딘의 소비에트 파견단에서 활동하던 리 투이라 불리는 한 베트남인을 주목한다. 4월초, 경찰국이 그 베트남인이 응웬 아이 꾸옥임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베트남의 공산주의 조직망이 건설되기 시작한 상태였다. 코민테른의 기획 아래 전세계에서 활동하는 지하순회투사단의 일원인 응웬 아이 꾸옥은 이제부터 조국 베트남의 운명을 이끌기 위해 전력한다. 그는 코민테른 조직원이면서 동시에 베트남 혁명가였다. 2년 만에 그는 베트남 공산당의 전신이 되는 조직을 건설했다. 여기서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결합시켰는데, 이것은 코민테른의 중국 전략과 비슷했다. 또한 조직의 '핵'이 특정한 대중조직으로 둘러싸이도록 조직을 구성했다. 판 보이 짜우와 그의 동지들과 교류하면서, 그는 이 대지도자의 측근이라 할 아홉 명의 인물들-대부분이 아이 꾸옥과 같은 고향 출신이었다-즉 '탐탐사'라고 불리는 공산청년여단을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라는 한결 광범위한 조직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는 중앙집권적이며 엄격한 규율을 갖춘 최초의 전국 규모 조직이었으며, 당시 연합중이던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지원을 받았다. 이 조직은 기관지 '청년'을 등사로 찍어냈으며, 중국 공산당의 가옥을 빌려 혁명가 양성학교를 설립했다. 약 300명에 달하는 젊은이들이 이 학교에서 교육받기 위해 베트남 국경을 넘었다. 이중에는 짠 푸, 응오 지아 뚜, 홍 퐁, 팜 반 동 등의 인물들이 끼여 있었으며, 응웬 아이 꾸옥과 중국 간부들이 이들을 가르쳤다. 이들은 교육이 끝나고 일단 조직원이 되면 인도차이나로 되돌아가 지하세포 조직을 만들었다. 비밀결사, 선전선동, 투사 이리하여 모든 혁명의 3대 구성요소가 갖춰졌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직가 응웬 아이 꾸옥의 활동에 기록될 만한 성과였다. 청년동지회의 등장으로 베트남 혁명정치사의 한 장이 열렸다. 이 시기에는 사회혁명보다는 민족해방이라는 지상명제가 강조되었다. '청년'지의 편집자들은 1928년 "나라를 잃은 것은 모든 불행 가운데 가장 큰 불행이다."라고 썼다. 그들은 "현재의 정세는 베트남 민중에게 계급혁명이 아니라 민족혁명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유한 자, 가난한 자, 관료, 평민 모두의 의무는 조국의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 단결하는 것이다....민족혁명을 승리로 이끌자, 그러면 우리는 세계혁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보았다. 전망은? "단일한 전선을 구축하는 것, 가장 강력한 혁명정당을 조직하고 여기에 대중이 지휘권을 일임하는 것, 하나의 깃발 아래 모든 혁명적 힘을 결집시키는 것." 이 글의 행간에는 훗날 월맹의 노선이 될, '혁명당은 유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미 나타나 있다. "다수의 혁명당이 공존하는 것은 운동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썼던 것이다. 응웬 아이 꾸옥 역시 유일한 혁명당이라는 직관을 품고 있었다. 중국과 달리 베트남의 민족주의는 프랑스 정치에서처럼 조직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공간이 백지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는, 애국심을 동원하여 사회와 문명의 심층구조에, 즉 가정이나 친족공동체, 지역공동체, 영웅적 인물들의 전통, 그리고 민중문학에 뿌리를 내려야만 공산주의가 민족주의 정당들을 앞지를 수 있고 치열한 경쟁 없이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뿌리내리기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이런 든든한 결합은, 공산주의 조직이 도시와 식민지 학교, 그리고 무엇보다도 태동하고 있던 민족주의 그룹에 뿌리내리는 것을 용이하게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성공에는 공산주의 자체의 강력한 매력도 작용했다. 사회의 혁명적 재건을 향한 일관된 기획, 외부 원조의 보장 등은 새로운 지식인 그룹의 정치적 요구사항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당시 많은 지식인들은 1925년을 전후하여 스스로 혁명적 인테리겐치아가 됨으로써, 역사적 소외를 항거의 행동양식으로 전환하려 하고 있었다. 이른바 '금이 간 종'으로 불리는, 사이공의 응웬 안닝파의 성상파괴 활동이나 폭발적으로 늘어난 급진적 신문, 1926~1927년에 일어난 학생들의 수업 거부가 갖는 의미가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지하단체들이 결성되는데, 청년동지회에 곧 흡수된 안남의 '딴 비엣(신베트남 혁명당)', 중국 국민당을 본보기로 하여 1927년 통킹에서 건설된 영향력 있는 '베트남 민족혁명당' 등이 그것이다. 존엄과 복지의 약속인 공산주의자는 노동자, 농민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다. 공산주의는 그들에게 새로운 형식의 연대와 저항을 보여주었다. 마침내 공사주의를 매개로, 지식인 청년과 기층 민중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1929년 무렵 청년회는 수천의 조직원을 헤아리게 되었다. 청년회는 1928~1929년에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기치를 내걸고, 노동자들의 맹렬한 활동을 이끌어낸 유일한 조직이었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깃발 아래 모인 청년 지식인들은 공장에 취업하여 세포를 심고 붉은 노조를 창립했으며, 최초로 농민연합이 결성된 응헤띵과 코친차이나의 마을로 들어가 활동의 기반을 다졌다. 공산당의 창당 1927년 4월 상하이에서 장 제스가 반공산주의 쿠데타를 일으키자, 응웬 아이 꾸옥은 한커우의 소련 영사관으로 피신해야 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예띵의 공사주의자들과 함께 스와토프로 옮겨갔고 결국 1927년 12월 소련에 다시 도착했다. 청년회는 그가 키운 젊은 지도자의 지휘 아래 있었다. 1929년 12월부터 홍콩에 정착한 그는 코우룬의 여러 셋방을 전전하면서 상하이의 인터내셔널 극동 비밀사무국과 동남아시아의 공산주의 조직을 연결하는 핵심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자격으로 그는 이 시기에 닥친 청년회의 위기를 해결하게 된다. 청년회의 위기는, 베트남의 초기 공산주의 인테리겐치아들이 민족주의의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점차 급진화 되어 갔다는 데서 온다. 이것은 1928년에 나온 코민테른의 새로운 식민지 테제에도 일부 영향을 받은 것인데, 테제는 이제부터 민족적 부르주아와의 연합을 버리고 식민지의 공산당을 건설하도록 권고했던 것이다. 1929년 5월 1일에서 9일까지 홍콩에서 진행된 회의에서 청년회는 서로 경쟁하는 세 개의 하위 공산주의 정파로 갈라졌다. 응웬 아이 꾸옥은 인터내셔널의 이름으로 이들 정파의 대표자들을 코우룬에 집결시켜서 1930년 2월 3일부터 7일까지 마침내 '노동자가 지도하는 민족해방 강령'을 기반으로 하는 '베트남 공산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소련에서 돌아온 젊은 혁명가 짠 푸가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30~1931년의 봉기 공산주의가 막 태어났다. 그러나 혁명의 시련은 이미 시작되었다. 3년간 지속될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식민주의자 간의 극적인 대립 속에 1923년 이래로 있었던 모든 긴장이 뒤섞여서 나타났다. 통킹과 북안남이 흉작과 전세계적 경제불황 또한 그 배경이 되었다. 대결은 3부작으로 진행된다. 1930년 2월 9일과 10일에 걸쳐, 옌바이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대의 베트남 출신 군인들이 베트남 민족혁명당의 주도로 폭동을 일으켰다가 보름 만에 진압되었다. 오랫동안 지속된 가차없는 탄압이 인도차이나에서 민족주의적인 조직이나 행동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이드은 중국 망명지에서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회적, 민중적 양상으로 위기의 제2국면 전개되었다. 공산당의 젊은 투사들이, 2월 4일 푸리엥에서 전개된 대규모 고무나무 농장의 파업과 3월 남딩의 제사공장 파업을 주도했다. 5월 1일은 피로 물들었다. 호치민의 고향인 남단현에서만 50구의 시체를 드러냈다. 파업의 확산과 동시에 응헤띵, 코친차이나, 꾸앙응아이 등지에서는 조세와 지방유지에 반대하는 인상적인 시위가 잇따랐다. 시위는 25개 지역으로 파급되었다. 1930년 여름,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으로 응헤띵 지역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지방 행정기구가 붕괴되고 민병대가 구성되었다. 1930년 9월이 되자 남단과 탕쭈옹의 30여현에서 자치구를 선포했다. 선언문과 일일회의, 베트남어를 알파벳 문자로 바꾸기, 노름의 근절과 조세의 폐지, 지주의 토지를 가난한 농민에게 재분배하는 일 등이 1931년 봄 쏟아져 나왔다. 한편 기근이 응헤안 지역을 덮쳐 지방 유지들에 대한 폭동이 터졌다. 비록 지역적이지만 이 일은 식민지 당국을 놀라게 했고, 1930년 10얼 홍콩에서 회동한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응웬 아이 꾸옥도 참석한 가운데,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2월 테제를 내던지고 토지혁명과 반제국주의 혁명노선을 채택했다. 아울러 베트남 공산당은 '베트남'을 빼고 '인도차이나 공산당(PCI)'이라고 개명했고 이 이름은 1931년 4월 11일 인터내셔널에서 공인을 받았다. 이리하여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한층 더 급진성을 띠게 된다. 1931년 초에 공산당은 여전히 혁명의 파고가 높아가고 있다고 단언했지만, 이제 더 이상의 지하활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했다. 엄청난 탄압이 잇따랐던 것이다(응헤띵에서만 약 3000명 사망, 총 약1만 명 체포). 여러 지역 운동들이 붕괴되고 당의 비밀조직은 와해되었으며 당을 주도하는 젊은 엘리트들이 희생되었다. 감옥과 유형지는 만원이었다. 그러나 식민정책의 위기는 완전히 드러났다. 활동을 정지당한 혁명가 인도차이나의 혁명기는 응웬 아이 꾸옥의 지하운동으로 대표되는 제1기를 마감한다. 그는 1931년 6월 6일 홍콩에서 영국 경찰에게 체포되는데, 거의 프랑스에 넘겨질 뻔했던 그는 1933년이 되어서야 석방된다. 그리고 1931년부터 1938년까지 그는 인도차이나의 상황과 연관된 모든 구체적인 고리들을 사실상 잃는다. 인도차이나 접경지대에 접근하는 것은 그에게 너무 위험했다. 특히 1932년부터 실행된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재건은, 모스크바에서 모스크에서 교육받은 젊은 간부들(러 홍 퐁, 하 후이 땁, 짠 반 지오 등)의 주도로 스탈린 노선(당의 '볼세비키화', 노동자 조직의 우선) 위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민족주의가 비판되었고, 새로운 지도자들은 개별적인 활동을 심하게 제한했다. 그러나 새로운 노선은 코친차이나의 영향력 있는 합법 전선인 '투쟁'이 사이공의 트로츠키파 '따투타우'와 연계하여 정비되는 것을 막지는 않았으며, 이들에 의해 당의 명맥이 유지되었다. 1936년, 인민전선 정책이 채택되고 이 정책은 1938년 3월 인도차이나 민주주의전선으로 확대된다. 이와 함께 곤산당은 1936~1938년의 대규모 대중운동 덕분에 확고한 노동자 농민의 기반을 지니게 된다. 응웬 아이 꾸옥은 이러한 공산당 부흥운동과 단절되어 있었다. 그는 리노프라는 이름으로 크림 지방에 머물면서, 공산당 지도자 양성을 위해 1926년에 세워진 레닌 학교에서 공부했다. 그후 스탈린 노선 인터내셔널을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하던 오토 쿠지넨과 마누일스키가 직접 권한을 행사하던 코민테른 동양사무국에서 일하고, 1932년 동양노동자대학이 세운 민족과 식민지 문제 연구소에서 베트남 학생들에게 강의하기도 했다. 응웬 아이 꾸옥은 다시 한번 코민테른의 주요 간부가 되었고, 그 자격으로 1935년 제7차 인터내셔널 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아마도 스탈린의 신임이 두터웠던 마누일스키와 친분을 나누었던 덕택에, 그는 큰 불안 없이 1936~1938년의 대대적인 숙청을 무사히 통과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스탈린주의와 어떤 불화도 없었는데, 1939년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공산당 공식 기관지인 '우리 목소리'에서 그가 보여준 지극히 정통적인 반트로츠키 입장도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는 8년 동안 조국에 별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모스크바에 은거했지만, 이것은 불명예스러운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일시적인 유예기간이었을 뿐이다. 제4장 민족 구원의 날 1941년, 응웬 아이 꾸옥은 30년이라는 길고 긴 망명생활을 마치고, 카오방 지역의 북서부에 있는 거대한 석회암 지대를 통해 다시금 조국의 땅을 밟았다. 이때 베트남에서는, 거의 1세기 동안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를 장악할 수 있게 해준 세 개의 빗장-강력한 프랑스 군대, 인도차이나를 위협하는 외부 세력의 부재라는 국제정세, 모든 독립운동 세력을 능히 제압할 만큼 강력한 식민지 억압 기구-이 막 부러져버린 상태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인도차이나 국가들에게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던 독립의 전망이 갑작스럽게 가까이 다가왔다. 모든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일본의 점령 이러한 예기치 못한 국면전환의 기원에는 두 개의 주요 요인이 자리잡고 있다. 우선 일본이 중국과 동남아로 세력을 확장한 것을 들 수 있다. 인도차이나는, 중경에 퇴각하고 있던 장 제스 정부가 연안의 철도를 통하여 중국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목이며, 동남아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전략요충지이고, 쌀을 비롯한 1차 생산품의 산지이기 때문에, 1937년 이래로 도쿄의 주요 전략목표 가운데 하나였다. 다음으로는 1940년 6월 프랑스의 식민체제가 군사적, 정치적 허탈상태에 빠진 후, 갑작스럽게 약화된 것을 들 수 있다. 식민당국은 더 이상 본국의 약화된 것을 들 수 있다. 식민당국은 더 이상 본국의 이렇다 할 원조를 받을 수 없어진 것이다. 일본 군대는 드디어 1940년 9월 22일, 최초로 랑손을 공격했다. 그런데 일본의 사령관들은 인도차이나를 다스릴 기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기서 비시 정부(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군이 수립한 프랑스의 괴뢰정부:역주)와 도쿄 사이의 타협이 이루어진다. 이리하여 1940년 7월부터 총독직을 수행하던 드쿠를 수반으로 하는 이른바 인도차이나 연방이 수립된다. 몇 차례에 걸친 프-일 협약, 특히 1941년의 협약 이후 일본 군대의 식민지 주둔이 허가되고 외국의 침입이 있을 때에는 '공동으로 방어'한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또한 일본이 프랑스의 주권을 준수한다고 약속하는 대신 인도차이나를 일본의 전시경제권 안으로 통합시킨다는 거래가 이루어졌다. 바야흐로 인도차이나에서 권력이 분리되고 이중의 식민지가 착취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당시 베트남 국내 상황은, 물자부족이 점차 심각해지다가 1944년 말에 이르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 또한 연합군의 폭격으로 남부와 북부의 통신이 두절된 상황에서 통킹 지방에 기근이 덮쳐 수백만의 희생자를 냈다. 프-일 협약은 호치민의 전략에 방향을 제시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모든 식민지 가운데 인도차이나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식민권력과 전면전을 벌인 유일한 나라이다. 이렇게 된 것은 식민정부가 연합군의 적인 일본군의 동반세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원조를 받아 통킹에서 거둔 승리를 제외하면 성과는 미미했다. 유예된 식민권력 1940년을 기점으로 무장봉기가 잇따랐다. 그중 가장 위협적인 것은 역시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활동이었다. 1939년 11월 이래로 다시 반제국주의 노선을 채택한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40년 제국주의의 패배를 혁명으로 전화한다는 레닌주의의 도식에 따라 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1940년 11월 22일 코친차이나에서 대대적인 봉기가 일어난다. 이 봉기는 12개 지역에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5000명 이상이 체포되었고 106명이 처형되었다. 이렇게 10년 만에 두 번째로 공산주의 봉기가 진압되었다. 남쪽에서는 1939년의 탄압으로 이미 공산당이 힘을 잃어 1943년까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지만 식민당국은 별로 숨돌릴 겨를이 없었다. 우선 일본 군대가 '대동아공영'을 내세워 비공산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차 남베트남 지도자가 될 응오 딩 디엠 같은 인물, 지지기반은 취약했지만 작가 응웬 뚜옹 땀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의 '다이 비에트(대 베트남)'과 같은 소규모 그룹, 그리고 특히 코친차이나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던 천년왕국교파 등이 그에 속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943년을 기점으로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용솟음쳐 오른 대중적 민족주의의 물결이 크게 작용했다. 비시 정권은 이에 대해 60만의 젊은이들을 몰아 '스포츠와 젊은이'라는 모임으로 유도해 보려 했지만, 이 모임 역시 1945년 사이공에서 결성된 '팜 응옥 탁 박사의 청년전위대'같은 조직으로 자율편성되었다. 그렇지만 이 운동 가운데 어떤 것도 움터 오르는 민족적 기상을 정치적 차원으로 전화시킬 힘은 없었다. 정치적 기획은 아예 없거나 혼돈스러울 뿐이었고, 간부와 주도 세력은 즉흥적으로 행동했으며,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등 허약함을 드러낼 뿐이었다. 또한 일본을 상대로 한 잦은 타협은 연합군의 승리 이후 이들의 미래에 정치적 장애로 작용하게 된다. 물론 중국에서는 부 홍 캉과 쭈옹 보이 콩이 이끄는 베트남 민족혁명당의 잔여세력이 짱 파 쿠에이 장국 등 남주 군벌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나 베트남 본국에 투쟁조직을 심지는 못했다. 비공산주의적 민족주의의 이러한 역사적 무능은 남부 베트남의 영향력 있는 공산주의 세력의 부재와 맞물리면서, 1941년의 인도차이나 공산당 전략 수정에 계기를 제공한다. 호치민의 귀국과 월맹 주도권이 웅웬 아이 꾸옥에게로 왔다. 1940년 4월 유난에 도착한 호치민은 풍 찌 키엔 등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외무국 간부뿐만 아니라 보 응웬 잡이나 팜 반 동과 같은 재중국 투사들과도 재회한다. 이들은 12월에 중앙위원회 위원인 쭈옹 찡과 호앙 꾸옥 비에트의 주선으로 회동한다. 1940년 5월부터 응웬 아이 꾸옥은 다양한 가명으로 쿤밍에서 중국 공산당의 지방조직과 함께 일했다. 그러다가 인도차이나의 봉기 이후에는 조직원들과 함께 베트남에 실제 투쟁거점을 확보하는 일에 주력했다. 1941년 2월초에 그는 등나무로 만든 여행가방과 타자기를 들고 108번 이정표를 통하여 국경을 넘어 팍보의 작은 마을인 콕보의 동굴로 숨어들었다. 이곳은 눙 지방의 석회암 지대인 쭈옹하 지방의 한 마을이었다. 거기서 그는 '투 아저씨'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물질적 기반도 없고 주위 인물들도 몇 명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을 경악시킬 만큼 엄청난 통찰력과 믿기지 않는 정세판단력의 소유자인, 그는 코민테른 정책과 모순되지 않으면서도 완벽에 가까운 자율적 주도권을 발휘할 만한 공산혁명을 신중히 기획했다. 1941년 5월 10일부터 19일까지 팍보에서 열린 당중앙위원회의 8차 회의에서 거둔 성과는, 어떤 의미에서는 베트남 공산주의의 재건이었다. 토지혁명이 연기되고 일본과 프랑스 파시즘에 대한 저항이 명확히 선언되어, 다시 민족해방이 계급투쟁보다 우위에 놓여졌다. 이제 혁명은 '민족해방 혁명'이 된 것이다. 민족해방 혁명은 국가적 이해와 연합군의 명분 모두에 힘입어 이중으로 정당화되었다. '구국'이라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요약되었다. 일본군이 패배하고 '중국, 영국. 미국군이 인도차이나로 진주하는 '둘도 없는 기회를 놓치지 말 것이 천명되었다. 이 기회를 활용할 줄 아는 당이 오랫동안 헤게모니를 거머쥐게 될 것이다. 이 기획의 정치적 기재를 '베트남 독립동맹'(줄여서 베트맹, 즉 월맹)이라는, 인도차이나 공산당 주도의 정치적 연합전선이 구축되었다. 또한 풍부한 독립투쟁사, 신화와 전통 등 베트남의 민족주체성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일과 더불어, 각 지역에 기반을 두고 주민들과 연계된 유격대를 단위로 하는 군대가 편성되었다. 때가 오면 전면적 봉기로 이어질 이것이 바로 '부분적 봉기전략'이었다. 시대가 바뀌었고, 사람들이 바뀌었다. 중국의 감시를 따돌릴 필요에 따라, 응웬 아이 꾸옥은 다시 이름을 바꾼다. 이것이 그 이후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이름이 되었으니, 바로 호치민(뜻을 밝힘)이다. 1942년 8월의 일이었다. 비에트박의 지하조직원들 일본군의 패배가 확실시되자 월맹의 전사들은 18개월간의 기초를 다진 후 1943년 봄, 두 지역의 '해방구'를 조직해 내는 데 성공했다. 1943년 말에는 행정기구, 정치, 군사 훈련소, 지하 정기간행물(이것은 팍보 시절부터 유포된 것으로, 쉬운 용어로 쓰여졌다)을 갖추고서 소월맹공화국이 태동하고 있었다. 자율 방어조직과 지역단위, 그리고 보 응웬 잡이 지휘하는 19개의 소월맹공화국에 흡수되었다. 동시에 호치민은 베트남의 미래가 세계 열강들의 손에 달렸다는 점을 간파하고, 남중국에서 민족주의 세력과 OSS(미국 정보국)를 중심으로, 군사원조와 월맹전선의 정치적 승인을 얻기 위한 결정적인 활약을 했다. 여기서 비밀전략과 기만전술이 톡톡히 구사되었다. 연합군의 합법적인 승인을 얻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국도 정보망의 구축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응웬 하이 딴의 '동맹회'(민족주의 파 연합:역주)를 통하여 인도차이나에 진입할 것을 노리고 망명중인 빈약한 민족주의 세력을 연합하려 했다. 게다가 루스벨트의 정책은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프랑스의 힘을 약화시키고 인도차이나 반도에 국제적인 신탁통치를 실시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1942년 8월 29일, 호치민은 민족주의 책임자들을 마나러 중경에 갔다가 그만 프-일파의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고 말았다. 구앙시 전역에 걸쳐 18개나 되는 감옥을 여기저기 끌려다니던 그는 1943년 9월 10일에야 풀려났다. 동지들은 호치민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한편 그의 협상수완 덕분에 월맹은 중국 전쟁수뇌부의 멸시를 뚫고 1944년 3월 25일부터 28일 사이에 리우주에서 열린 동맹회 재건회의에서 승인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회의는 월맹을 임시 과도정부의 일원으로 지명했다. 뿐만 아니라 호치민은 1944년 쿤밍으로 가서 중국에 있는 미국 수뇌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1944년 9월에 있은 일본군의 공격으로 중국 군대가 퇴각한 이후에 미국은 장 생트니가 이끄는 자유 프랑스 대표단의 노여움에도 불구하고 패티 대령이 이끄는 낙하산 부대를 월맹 지역에 침투시키고 약간의 무기원조를 해주었다. 월맹은 이제 인도차이나에서 미국의 주요한 거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든든한 보증은 호치민에게 더할 나위 없는 승리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1945년 8월 8월 혁명. 세 개의 주요한 사건이 이 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먼저 이른바 '메이' 작전. 1945년 3월 9일 아침 일본군은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당국과 군대에 공격을 개시했다. 24시간만에 일본군은 식민권력을 끝장내고 프랑스 군대와 관료들을 감금시켰다. 일본의 '간주곡'은 그후 5개월간 지속된다. 3월 11일, 베트남의 바오 다이 황제는 독립을 선언하고 존경받는 학자인 짱 쫑 킴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를 구성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국정을 책임지도록 했다. 그러나 바오 다이가 독립을 선언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거의 없었다. 프랑스인이 앉았던 고위급 관료 자리에 일본인이 들어앉은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짱 쫑 킴의 정부는 정국을 장악하지 못했으며 기아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두 번째로 7월 말 8월초에 있었던 포츠담 회담의 결정. 포츠담 회담에서는, 베트남의 북위 16도선 이북까지 중국 군대가 주둔하고 그 이남에서는 영국군이 주둔하여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기로 했던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권력행사를 포기했다. 세 번째 사건으로는 8월 6일의 히로시마 원폭투하와 14일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들 수 있다. 기회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 중국군의 하노이 진주(9월 9일), 영국군의 사이공 입항(9월 12일) 같은 사건이 진행되면서 정치권력의 공백이 형성되었고 베트남에 호기가 찾아왔다. 월맹의 전사들은 서둘러 일을 진행시켰다. 여러 단위로 편성되어 있던 군대가 민족해방군으로 재편성된 것이 4월이었다. 응웬 잡이 지휘하는 민족해방군은 5000정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월맹은 1945년 6월부터 비에트 박의 6개 지역 100만 명의 주민 대부분을 통솔했다. 그리고 마을주민으로 구성된 수비대를 마을에 침투시켜 전선과 설득, 무력시위를 두루 활용하여 지주의 곳간과 관공서의 곡식창고를 습격하는 이른바 '쌀 재분배 전쟁'을 곳곳에서 수행해 나갔다. 기아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혁명파에 가담했으며 도시에서는 대낮에 월맹 선동가들의 선동이 잇따랐다. 부르주아지조차 월맹에 기울었다. 호치민은 6월에 하노이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딴 짜오 마을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거기서 7월 16일 미군 소령 A. K. 토머서를 만났고, 8월 11일 그의 무전기로 일본의 항복이 임박했음을 전해 들었다. 신속히 움직여야 했다. 중앙위원회가 소집된 후, 8월 16일과 17일에 열린 인민민족회의에서는 민족적 봉기가 호소되었으며 호치민을 의장으로 민족해방위원회가 창건되었다. 8월 16일에는 응웬 잡의 군대가 하노이로 진주했다. 하노이, 후에, 사이공:혁명, 해방, 권력장악 모든 것이 동요했다. 수도에서는 16일부터 당장 시위가 시작되었다. 그 다음날에 극장 앞에서 진행된 집회에서 월맹의 시위원회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운동의 선두에 설 수 있었다. 19일, 장사진을 이룬 군중 앞에서 위원회는 제국 대표인 팜 케토아이와 일본 군대의 중립을 약속받았고, 병영과 공공건물을 몰수했다. 오후 4시가 되어 위원회는 시를 장악했다. 이같은 순조로운 권력장악은 8월 18일에서 28일 사이에 북부와 중부의 다른 모든 도시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호치민은 8월 21을 은밀히 하노이에 들어왔고, 다음날인 22일 패티 대령의 미국 대표단이 프랑스의 장 생트니와 함께 들어왔다. 26일에는 보 응웬 잡의 군대가 군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하노이에 입성했다. 후에에서는 예전의 의용군 대장 따 꾸앙 부를 선두로 하는 청년회가 시를 장악하고 8월 22일 월맹위원회를 세웠다. 23일에는 바오 다이가 왕위를 내놓았으며 25일에는 호치민의 사절에게 황제의 보검과 인장을 건네주었다. 한편 사이공에서는 일단 민족전선으로 단일화된 민족주의 종파와 트로츠키주의 종파에 유리한 방향으로 권력장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전위청년단'이라는 이름으로 짠 반 자우의 지도 아래 1943~1944년 세포망과 지하노조를 재편성하여 8월 25일 권력을 장악하고 '남부 집행위원회'를 구성했다. 8월 29일 마침내 호치민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를 보위하는 15명의 장관 중 내무장관 보 응웬 잡, 재무장관 팜 반 동 등 9명이 공산주의자였으며 응웬 망 하, 응웬 반 또 등의 무소속 인사들은 전문 장관직을 부여받았다. 전황제 바오 다이도 '상임 고문'직을 수락했다. 독립 인민의 동의를 얻는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9월 2일 이루어졌다. 호치민은 총독궁 앞에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을 마주하고 베트남 민주공화국(RDV)의 독립선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이 선언문은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1789년 프랑스의 인권선언을 모두 참조해 작성되었다. 군중과 호치민 사이에 완벽한 화답이 이루어졌다. 호치민이 몇 구절을 마이크로 연설한 뒤 즉석에서 "동지 여러분, 내 말이 잘 들립니까?" 하고 말하면 군중은 거대한 함성으로 그에 답하는 식이었다. 호치민은 민족 전체에게, 심지어는 적들에게까지도 독립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혁명은 정신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 군대가 진주해 왔을 때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 후였다. 월맹이 북부와 중부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남쪽에서는 9월초에 남부위원회를 확대하여 결성한 동맹이 빠르게 깨지고 있었다. 9월 2일 사이공의 선언은 총격전으로 끝나고 말았다. 23일에는 영국군의 양도를 받아 재무장한 프랑스 군대가 시가지로 진주했다. 10월 3일, 드 골 정부가 파견한 르클레르크 장군의 파견대가 들어왔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혁명파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호치민의 정부는 9월부터 두 세력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다르장리외 제독이 이끄는 고등판무국과 파견대를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의 신식민주의가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루 한 장국이 이끄는 중국군(공산당이 아니라 장 제스 일파임:역주)이 있었다. 당시 중경은 차라리 중립적이었던 반면 루 한의 군대는 프랑스에 매우 적대적이었으며 중국 신탁통치안에 호의적이었다. 중국군은 9월 16일 응웬 하이 딴옹이 이끄는 동맹회의 민족주의자들과 결탁했다. 그리고 나서 10월에는 부 홍 캉과 응웬 뚜옹 땀이 주도한 다이 비에트와 베트남 민족혁명당과 결탁했다. 한편 미군은 1945년 여름이 되기 전부터 이미 프랑스군의 재진주를 묵인했다. 미국 편인 영국이 이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1946년 12월까지 군사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차원에서 물고 물리는 삼파전이 전개되었다. 게릴라전이 전개되기 시작한 코친차이나만은 예외였다. 그런데 주요 대립세력인 베트남과 프랑스 모두 시간벌기를 원했다. 상대방을 이길만한 힘이 모두에게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들 모두에게 치명적이 위협이 될 중국의 중재를 사전에 제거할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1945년 가을에 이르러 베트남과 프랑스의 대결은 서로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민족해방이냐 신식민주의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던 것이다. 파리와 고등판무국은 탈식민화를 가져오는 것은 무엇이든 배제하고 1945년 3월 24일의 정부선언에서 규정된 '인도차이나 연방'이라는 개념을 실행시키려 했다. 이는 세 개로 분리된 베트남(통킹, 안남, 코친차이나:역주)과 캄보디아, 라오스를 통틀어 연방정부가 이끄는 '하나의 인도차이나'로 통합시킨다는 것이었다. 베트남 전체의 정치적 통솔력을 복원하기 위해서 이 지역의 실권자인 베트남 민주공화국과 대결하는 일은 프랑스로서는 피할 수 없었다.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연방의 요체이며 나아가 인도차이나 연방은 '프랑스 연합'의 주춧돌이었던 것이다. 1946년 3월 6일의 협정 호치민과 그의 동지들은 자신들의 계획과 프랑승l 전략이 양립할 수 있다는 환상을 결코 가져본 적이 없었지만, 당장 프랑스를 무력화시킬 이렇다 할 군사적 방도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1945년 9월부터 적수인 프랑스(다르장리외와 그의 고문단, 장 생트니), 중국과 끝없이 계속된 협상에서 호치민은 적들 사이의 모순관계를 이용했다. 그는 프랑스와 중국의 이해관계를 이용하여 중국의 퇴각을 유도했다. 프랑스 쪽에서는 당시 베트남과 중국 군대를 동시에상대할 많한 군사적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1946년 2월 임화의 '붉은 군대'가 만주를 장악한 상황에서 남경의 중국 정부 역시 내전의 확장이라는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인도차이나를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1946년 2월 26일 맺어진 프랑스-중국 협정에 따라 3월 1일에서 15일 사이에 중국 군대를 프랑스 파견대가 교체하게 되었다. 그들이 베트남의 속셈을 알 리 없었다. 프랑스와 중국을 대립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동시에, 호치민은 비공산 민족주의자들을 상대로 전개해온 술책과 교섭을 통해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작업을 잊지 않았다. 1946년 1월 6일에 실시된 제헌의회 선거는 월맹의 승리로 끝났다. 새로운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는 투표를 통해 합법성을 획득하고, 민족주의 지도자들(응웬 하이 딴, 응웬 뚜옹 땀)과 독자노선을 걷는 인물들(후잉 툭캉, 판 앙, 부 딩 호에)을 끌어들여 한층 강화되었다. 3월 2일 의회가 지명한 새 내각은 돌아온 프랑스군을 직접 상대할 수는 없어도 그와 협상할 힘은 갖추고 있었다. 1946년 3월 6일 호치민과 생트니 간의 '예비협약'에서, '자유국 베트남'과 베트남이 "인도차이나 연방과 프랑스 연합의 일원이 된다."는 내용이 승인되었다. 이 협약은 베트남과 인도차이나의 장래 지위에 대한 베트남-프랑스간의 협약이 시작됨을 예견하고 있다. 또한 이 회담은 곧 있을 통킹, 안남, 코친차이나의 통일에 관한 국민투표 결과를 프랑스가 받아들일 것과 북위 16도선 이북에서 베트남과 프랑스 군대가 공존할 것을 예견하고 있다. 아직 '독립'의 개념이 완전히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지만, 약자 베트남이 정치적 방법을 통하여 강자의 승인을 얻어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치민의 전략은 과오를 범한 꼴이 되었다. 3월 6일 르클레르크 장군의 부대가 하이퐁에 입항하는 것을 수락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선언에 명시된 미국과 프랑스간의 대립이라는 변수를 잃고 말았으며 소련에게도 아무런 기대를 걸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신식민주의 프랑스와 사활을 건 맞대결만이 남았다. 지상명령: 시간을 벌라. 기근의 후유증, 1945년 8월 홍하의 엄청난 범람, 9개 지역을 강타한 흉년, 10월이면 되풀이되는 가뭄, 기아등, 새 정부는 당시의 지난한 현실저인 어려움을 떠맡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새 정부는 유지회의를 인민위원회로 교체하고 구관료제도를 폐지하는 한편, 보 응웬 잡이 열정적으로 주도하여 부족하지만 행정제도의 골격을 갖추었고, 경찰, 인민군의 전신, 의용군을 창설하였다. 끝으로 도시 청년들을 중심으로 행정과 정치를 담당할 새로운 인물을 대거 모집하였다. 민족주의 세력은, 이미 공산당이 장악한 사회적 공간 안에 자신들의 조직을 심으려 노력했지만, 겨우 소수의 반대세력 구실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극한주의적인 전략을 구사하고 폭력사태를 격화시켰다. 민족주의 세력은 홍하를 따라 빙옌-라오카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1946년 6월 18일에서 26일까지 9일 동안 월맹의 민병조직에 소탕되어 랑손을 잃는다. 또 한 번 그들의 지도자는 중국으로 피신해야 했다. 큰아버지 호치민 집권자들은 이 유리한 국면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국민적 합의를 추구하면서 만장일치의 상징을 구축하려 했다. 가장 강력한 상징은 바로 카리스마적인 호치민이었다. 이것은 호치민 개인의 단호한 행동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민족적 역량을 결집시키는 연설의 황금규칙, 즉 단결과 공동체와 조국애를 끌어내는 언어를 완벽하고도 직관적으로 소화해 냈다. 그리하여 그는 오랫동안 좌절되었던 근대 국가를 향한 베트남인의 갈망과 꿈을 이끌어낼 줄 알았다. 그가 연설문의 서식을 꾸미고, 연설문을 쓰고, 편찬하는 동안 언론과 라디오와 출판사들은 마침내, 늘 엷은 카키색 옷을 입고 미소를 띤, 깡마르고 가냘픈 '공산주의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대통령의 이미지를 만들어 대중화시켰다. 그의 최초의 전기가 나왔다. 일화와 제담, 계시가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그의 생일은 1946년부터 공식적으로 경축되었다. 이리하여 개인이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이 자리잡았으며, 약간은 전제군주적인 전통 속에서 민족통합의 구심점이자 최고 지도자인 유일한 인물, '큰아버지 호'가 탄생했다. 퐁텐블로: 협상의 좌절 호치민의 전문부야는 외무영역이었고, 1946년 3월 6일 이후로는 불가능에 도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4월 17일에서 5월 11일까지 달라트에서 열린 첫 번째 회담에서, 베트남 독립과 당시 준비중이던 연방의 권한 규정은 실패로 끝났다. 또한 코친차이나의 지위에 대한 협상도 실패했다. 코친차이나에는 3월 25일부터 다르장리외의 주도로 구성되고 있던 자치공화국이 6월 1일을 기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시각으로는 신식민주의의 동반자인 베트남이 중요했다. 그 동안 프랑스의 파견부대는 중부 고원지대에 '자치지구'를 형성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호치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실제 협상 카드를 던졌다. 1946년 5월 31일부터 10월 20일까지, 그가 프랑스 정부 초청으로 프랑스에 그토록 오래 머문 의미와 '유혹의 운동'을 펼친 의미가 여기에 있었다. 한편 7월 6일부터 8월 1일까지 개최된 퐁텐블로 회담에서는 독립을 향한 평화적 이행이라는 개념을 내걸고 비공산주의의 여론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퐁텐블로 회담 역시 달라트에서처럼 베트남의 통일이라는 안건은 진전을 보지 못하고, 대신 1946년 10월 30일에 효력을 발휘할 타협안에 최종적으로 서명하는 것으로 그쳤다. 이 타협안은 관세동맹과 화폐단일화를 베트남이 받아들이고 1947년 1월에 있을 결정적인 협상의 서막으로 쌍방이 모든 적대행위를 중지하기로 했다. 1946년말, 호치민이 프랑스 좌파의 부상을 등에 업고 내기를 하고 있음이 확실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서방여행이 된 이 여행에서 호치민은, 국제사회가 내리는 결정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갖는 무게는 보잘것없는 것임을 평가할 수 있었다. 협상은 재개되지 않았다. 프랑스 정치인사들이 너무 갈팡질팡하고 분열되어 있었다 손치더라도, 탈식민주의에 대한 그들의 개인적인 의지와 프랑스의 정치실세 사이의 세력관계에 대한 평가는 너무나 낙관적인 것이었다. 쿠테타의 시나리오 1946년 가을, 코친차이나 자치공화국이 응웬 빙이 재조직한 남부 게릴라의 탈환작전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인도차이나 연방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산될 징후가 보이자 결국 하노이 의회는 11월 8일 투표를 실시했다. 당시 하노이 정부는 통합헌법에 따라 개편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 투표로 고등판무국과 발뤼이 장군은 남부의 저항을 약화시키기 위해 북부의 월맹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호치민은 여전히 끝까지 협상을 고수했다. 그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프랑스 국민의 분열을 최대한 활용할 것,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재정복정책이 가망없는 것으로 보일 만큼의 세력관계를 창출해 내기 위해 시간을 끌 것, 응웬 잡에게 최초의 정규군을 창설할 준비를 시킬 것, 또한 프랑스의 11월13일 선거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이 승리를 거두고 12월 12일 레옹 블룸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가 구성되는 유리한 정세에 힘입어 길이 트인 최종 협상의 기회를 보존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반대로 발뤼이와 다르장리외는 북부를 다시 손아귀에 넣거나 최소한 북부를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와 단절시킬 필요가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더 지체하지만 않으면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고 선수를 치게 된다. 1946년 11월 23일, 관세분쟁이 있고 나서 프랑스 함대가 하이퐁을 포격하여 수천의 희생자를 냈다. 도시 전체와 중국 국경지대의 요충지인 랑손이 재점령당했다. 베트남 미주공화국의 봉쇄가 임박한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측이 심사숙고한 극단적 행동이었다. 그 뒤 베트남 수뇌부의 분열이 있었을까? 호치민이 타협불가론자들의 압력에 양보해야만 했을까? 그게 아니라 사실은 베트남 지도부는 하이퐁의 시나리오가 필연적으로 하노이에서도 반복될 것을 예상했으므로, 겉으로는 프랑스측과 협상을 벌이고 이를 방패막으로 사용하면서 안으로는 반격준비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마지막 협상에서도 같은 시나리오가 적용되었다. 어떤 기습이라도 피하기 위해 정치국은 틀림없이 선제공격을 결정했을 것이다. 12월 19일 20기를 기해, 그날 낮에 있었던 비교적 호의적인 접촉에도 불구하고 뚜베의 의용군은 하노이에서 수개의 프랑스 진지와 가옥을 공격했다. 아마도 예비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22시에 호치민과 그의 정부는 레옹 블룸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고 베트남 인민에게 저항할 것을 호소하고 난 뒤 하노이에서 철수했다. 호소는 엄중했다. "총이 있는 자는 총을 써라! 칼이 있는 자는 칼을 써라! 칼도 없으면 곡괭이 막대기라도 들어라! 식민주의와 싸워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모두가 전력하자!" 하노이는 부옹 투아 부가 지휘하는 이름 높은 수도 연대의 영웅적 투쟁으로 방위되었다. 후일 부옹은 유명한 1949년의 308도선 분할을 사전에 주도한 사람이기도 하다. 1947년 1월 18일 그의 부대가 도시를 빠져나갈 때, 병사들은 벽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돌아오리라!" 제5장 첫 번째 저항 프랑스로서는 해볼 만한 도박이었음이 틀림없다. 미국과 민족주의 중국이 잇달아 철수한 뒤(중국은 내전 초기에는 거의 승산이 없어보이던 공산혁명을 겪었다). 베트남 민주공화국과 6만 명의 헐벗은 병사로 구성된 군대가 어떻게 전문적으로 훈련된 프랑스 파견대에 오랫동안 저항하겠는가? 1946년 중국의 영향력은 1885년처럼 프랑스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릴라로 축소되어 가끔씩 군사적 기습이나 하는, 애초에 그랬듯이 산 속에서 활동하는 이 공산주의 월맹은 곧 응징되지 않겠는가? 당시 마르코스가 이끌던 그리스의 붉은 게릴라가 그렇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금방 도박에서 지고 말았다. 1947년은 1885년이 아니었다. 중국이라는 변수로는, 더구나 프랑스 당국이 잘못 평가한 이 변수로는 충분치 못했다. 반면 그보다 훨씬 더 잘못 평가된 베트남 요인이 결정적이었음이 판명되었다. 베트남은 끈질기고도 합당한 정책으로 마오 쩌둥의 승리 이후 중국측의 태도변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8년 가깝게 시련을 겪으며 군은 준엄한 명령체계 속에서 움직이게 되었으며 베트남군 자신도 예측하기 힘든 위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인도차이나 전쟁은 시간벌기 전쟁이자 정치적 전쟁이었다. 싸움의 두 당사자 모두 적을 괴멸시키기보다는 상대방이 군사적으로 아군을 이기지 못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문제였으며, 적이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정치적 세력관계를 창출하는 것이 문제였다. 전쟁 중에 다른 수단을 동원하여 정치를 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 자체가 정치를 만들어갔다. 두 적수는 결과적으로 이러한 상황과 세력관계를 구축하기에 딱 알맞은 리듬과 시간을 획득해야만 했다. 프랑스의 짧은 식민지 전쟁 프랑스 인민공화당이 인도차이나 정책에 대한 실권을 쥔 제4공화국 시기의 정부들은 고등판무국의 '완결사항'을 하나같이 은폐하고 있었다. 판무국으로서는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이기는 것이 급선무였다. 사실상 판무국은 최단 시일 내에 베트남 여론과 프랑스 정치세력이 호치민 정부에게 품고 있는 신뢰감을 박탈하고, 신바오다이주의를 서서히 지향함으로써 이들을 다시 결합시켜야 했다. 신바오다이주의의 구축은 다르장리외와 그의 후임자 에밀 볼레르, 그리고 발뤼이 장군이 1947년 3월부터 추진해 오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6개월 후, 호치민 정부가 이미 들어와 있었던 박칸 지역에서 있었던 '레아 작전'이 거의 실패로 돌아가자 프랑스 사령부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했다. 파견대는 꼭대기를 타격하는 것만으로는 월맹조직을 박살낼 수 없었다. 홍하의 삼각주와 중국 국경을 잇는 도로축의 재점령에 성공했지만, 주민들을 접수하지 못한 채 부대의 배치만 늘이는 꼴이 되었다. 프랑스는 이중의 난관에 봉착했다. 군사적으로는 참모부가 해결할 수 없는 전략상의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병력을 분산시키는 분할 주둔의 전략을 택하여 거점 중심의 전투를 하자니 병력이 분산되는 탓에 결정적인 공격을 가할 수가 없고, 신속한 이동에 초점을 맞추는 이동전투를 하자니 한 지역의 실제적인 점령이 어렵게 된 것이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두 선택 사이에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인도차이나 연방이라는 신식민주의 구상을 계속 밀고 나가는 것은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과 타협하는 것을 모조리 불가능하게 만들고, 반대로 독립을 받아들이는 것은 '프랑스 연합'이라는 거대 구도의 신식민주의와 배치되어 사실상 탈식민화를 수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에게는 1947년 중반에도 반공산주의 파트너를 찾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직 분할된 상태의 어느 한 지역에 자치권을 부여하느냐는 문제가 그것이다. 바오 다이가 선포한 '통일국가로 독립'이라는 원칙은, 1949년 5월 5일의 상하이 함락이 1년도 남지 않은 1948년 6월 5일에서야 받아들여지게 된다. 베트남의 긴 전쟁 월맹의 베트남전 전략은 '긴 전쟁'이었고, 그 형태는 신출귀몰하는 게릴라전이었다. 이 전쟁은, 월맹에 연계된 소수 민족들이 거주하는 비에트 박의 정글을 지키고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영토를 북서쪽의 타이 방향으로 늘이기 위한 끊임없는 빨치산 작전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1948년 봄 월맹은 타이 방향으로 첫 번째 공격을 감행한다. 프랑스 군대와 프랑스군 소속의 베트남 보충대를 함정에 빠뜨리면서, 통신망을 보존하려는 목적으로 시지프스의 돌굴리기 같은 소모전 속에 적을 몰아넣어 탈진시키는 동시에, 자꾸 헛 공격을 유도하여 적의 공격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이 월맹의 공격작전이었다. 게릴라전의 막후에서는 전분야에 걸친 묘책들이 강구되었으며 극심한 물자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필수적인 임시방책들이 고안되었다. 이른바 '전시 농업경제'가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해방구와 삼각주 지역을 연계하여 쌀과 공업생산품을 비밀리에 교환하고, 해방구의 자급자족을 이루는 방법이 모색되었다. 그리고 소개된 도시의 기계를 이용하여 페니실린등 의약품과 무기들을 지역단위로 생산하는 체계가 계통적으로 조직되었다. 이 일은 뛰어난 공학자인 짠 딩응이아가 주도했는데, 그는 또한 뛰어난 바추카포를 제작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리고 민간인들이 도보나 인력거, 삼판(중국식 나룻배:역주)을 이용하여 전쟁물자를 운송하는 엄청난 민간 병참조직이 세밀한 단위로 짜여졌다. 그러나 저항력의 핵심은 뭐니뭐니 해도, 저마다 품고 있는 애국적인 적개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홍보를 하여 농민과 도시인민을 지속적으로 동원하는 것이었다. 1948년 6월, 그 최초로 호치민은 다음과 같은 세 개의 구호를 부르짖었다. "기아 타파, 무지 타파, 침략자 타도!" 게다가 혁명정부는 1945년부터 1946년에 걸쳐 시골 구석구석을 아우르면서 '항쟁행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유지들이 중심이 되었던 옛 행정기구를 대체했다. 이제 새로운 유력자는 '간부'였다. 호치민은 정책이나 작전을 세울 때 이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도움을 받았다. 지칠 줄 모르는 공공 교육자이고자 했던 호치민은 많은 교서를 냈는데, 그의 교서의 주요 주제는 '대단합' '혁명의 4대 덕행, 즉 근면, 절약, 청렴, 정직' '새로운 베트남인의 모태가 되는 교육의 가치'등이다. 그는 지식인들에게 주는 1953년 9월 25일의 '정치교서'에서 이렇게 천명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기억하자. '수신'과 '제가'는 바로 자기를 개혁함이다. 자기 개혁은 멀고 험난하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각자의 내적 혁명이다." 베트남은 극단적인 효율성을 바탕으로 돌아가는 국가였다. 민족전쟁은 그 위급성 때문에 혹독한 통치방식이 필연적이었고, 심지어 반공산주의자의 눈에조차도 이런 통치방식은 정당한 것으로 보였다. 희생과 영웅주의적 행동이 요구되는 이 어려운 시기에 '당-국가' 통일체는 아마도 최고의 신뢰도에 도달했을 것이다. 1949년 8월~1950년 10월, 국면전환 힘의 균형이 깨어졌고 전략의 전략의 주도권이 자리를 바꾸었다. 세 가지 주요한 사실이 여기에 개입했다. 첫째 사실은, 무엇보다도 1949년 여름을 기점으로 베트남 저항군이 대규모의 정규 부대를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국공 내전의 모든 전선에서 승리를 거둔 중국 인민군이 1949년 12월 10일 통킹의 접경지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1950년 4월 1일, 베트남-중국간에 상호원조에 관한 협정이 합의에 이르러 75밀리 포와 12.7구경 기관총을 포함한 중국의 물자들이 8월부터 도착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원조가 없었더라면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승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제는 승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실이 베트남의 승리를 결정적으로 보장해 주었다. 프랑스군이 1950년 9월에서 11월에 걸쳐 국경원정을 단행한 것이다. 결과는 9개 대대가 섬멸당한 프랑스의 참패였다. 프랑스는 75년 전 베트남 독립의 운명을 바꿔놓았던 750km의 베트남-중국 국경지대의 모든 통제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제 프랑스의 베트남 재정복은 불가능한 것이 되었고 1885년의 꿈은 날아가 버렸다. 인도차이나, 냉전의 전선이 되다. 그런데 1년 만에 전투의 전망과 의미가 바뀌었다. 처음으로 식민지군에 패배한 프랑스 제국주의는 이제 방어하는 입장에 있었다. 물론 아직도 드 라트르 장군을 비롯한 지휘관들의 열정적인 추진력 아래, 프랑스군은 보 응웬 잡이 지휘하는 베트남군의 공격을 물리칠 수는 있었다. 그리하여 1951년의 마오케 전투, 다이 전투, 호아빙 전투 등에서 전술상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궁극적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프랑스의 정책은 미국의 이른바 '봉쇄정책', 즉 아시아에서 더 이상 공산혁명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둑을 쌓는 정책에 합류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전쟁이 그 꼬투리를 제공했다. 드 라트르의 활약이 갖는 의의는 그것이었다. 전쟁을 베트남 내전으로 만들고 미국을 개입시키는 것. 1951년 9월 워싱턴에서 드 라트르는 "통킹을 잃으면 수에즈 이쪽으로는 더 이상 아무 방어망도 없다."고 발표했다. 1952년부터 미국은 무상으로 9만 4천 톤에 이르는 물자를 공급했으며 1953년이 되자 지출비용의 40 퍼센트를 미국이 물었다. 반면 베트남 인민공화국은 이번엔 '사회주의 진영'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주로 중국에서 지원되는 매달 1000톤에 달하는 군사물자가 베트남의 40만 병력을 무장시켰으며 이제 근대전과 게릴라 작전(북쪽 삼각주 지역에서만 6만의 베트남군이 900명의 프랑스 주둔군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그리고 대규모 공격작전이 혼합된 전쟁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불평등한 전쟁이 아니었다. 1953년 5월부터 보 응웬 잡의 참모부가 전략적 주도권을 쥐었다. 이를 되찾기 위해, 프랑스는 7월에 '나바르 안'을 채택했다. 전쟁의 국제화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으며, 그만큼 구속도 있었다. 베트남 민주공화국은 비밀결사 국가의 단계를 벗어나 국제무대를 관통할 기회를 얻었다. 미국이 바오 다이의 왕국을 승인하기 몇 주 전에, 중국과 소련은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인정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1941년에 시작된 일련의 과정이 완결되었다. 즉 혁명은 이제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국가들이 공유하는 연합관계 속에 편입되어야만 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바오 다이가 이끄는 반공산권력의 위협에 직면하여 베트남 인민공화국은 이러한 대가를 치르고 생존을 보장받은 것이다. 호치민과 그의 동지들은 이와는 다른 전개과정, 이를테면 '중립국'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한 적이 없었던 만큼, 큰 저항없이 이 필연적 귀결을 받아들인다. 정세에대한 뛰어난 전략가이자 분석가인 호치민. 그가 보기에, 우선은 중국과 새로운 관계를 협상하고 혁명전쟁의 마오주의적 모범을 베트남에 토착시키는 것이 최선이었던 것이다. 디엔비엔푸, 그리고 제네바 중국과 소련의 원조로, 베트남 정치국은 1953년 9월, 라오스 북쪽에서 라이짜우와 퐁살리 방향, 중부와 남부의 타켓과 사바나켓, 아또페우 방향, 그리고 전 게릴라 전선, 이 세 개의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나바르 장군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수뇌부는 여기에 대응, 11월에 디엔베엔푸의 육공군 합동기지 정비에 착수하여 12월 3일 이 기지를 보 응웬 잡의 보병부대도 물러서고 말 난공불락의 요새로 바꾸어 놓았다. 북서쪽에서 오는 공격을 막고 이 승리로 1954년 2월로 예정된 협상을 준비해야만 했던 것이다. 한편 중국의 전문가들은 대규모 인해전술을 권했고, 보 응웬 잡은 이 전술에 착오가 없다는 조건하에, 필요한 병력을 '인도차이나의 베르됭'으로 불리는 이 곳 디엔비엔푸에 배치했다. 극히 짧은 시간 동안 포병부대를 비롯, 모든 물자를 집중시켰는데, 이것이 프랑스의 예측을 무력하게 만들고 1954년 3월 13일의 경이적 사건을 만들어냈다. 프랑스의 화력이 우세하다는 신화가 무너지고 만 것이다. 또한 두터운 참호망을 교묘히 전진시키면서 적군을 포위해 가는 작전과 병사들의 높은 자질, 베트남 지휘부의 능력이 승리의 나머지 비결이었다. 디엔비엔푸 전략은 외교적 주도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5월 1일에는 100문의 야포라는 엄청난 화력으로 잔여 병력에 대한 결정적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인도차이나 문제로 제네바 회담이 열리기 8일 전이었다. 회담이 열릴 5월 8일은 프랑스가 전투에서 항복한 다음날이었다. 이 승리는 실로 지구 전체의 식민주의에 조종을 울렸다. 그런데 베트남 민주공화국은 이 승리에서 충분한 이득을 보지 못했다. 제네바에서 열강들은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인정했지만, 베트남 민주공화국은 소련과 특히 중국의 압력에 굴복해야만 했다. 6월 23일 제네바에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가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베트남의 분할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7월 20일 협정으로 17도선에 임시 군사분계선이 그어졌고, 프랑스 연합(남)과 베트남 민주공화국(북) 군대가 각각 주둔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에는 월맹의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통일문제는 1956년 7월로 예정된 선거로 이월되었다. 1955년 7월 20일부터 바오 다이가 지명한 응오 딩 디엠의 정부와 베트남 민주공화국 당국자들이 선거를 논의했다. 미국과 그 동맹자인 응오 딩 디엠은 협정을 준수할 것을 약속하면서도 거기에 서명하지는 않았다. 이리하여 제네바 회담은 긴 전쟁의 한 휴지기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제6장 또 다른 전쟁 어제는 산산조각이 났던 베트남이 이제 남북으로 갈라졌다. 17도선 이북에는 당-국가 통일체인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고, 남쪽에서 미국은 군대-국가 통일체인 한 국가를 뿌리내리려 안간힘을 썼다. 이 두 국가는 숙명적인 적대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베트남에 두 정부, 나중에는 두 개의 베트남으로 분할. 베트남 민주공화국, 미래를 위한 국가 형태(1954~1965) 1990만 명의 주민이 사는 2만 3천km 제곱의 비좁은 땅에 정착한 당-국가 통일체의 구조는 오랫동안 저개발을 탈피하기 위한 최선의 국가형태인 것처럼 보였다. 엄청난 빈곤 속에서 강력한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5~1956년의 토지개혁이 야기시킨 농민들의 저항이라든지, 군 출신 지식인 단체의 저항 등이 있었다. 저술가 판 코이, 문헌학자 다 두이 앙, 철학자 짠 둑 타오, 생물학자 당 반 응오 등을 중심으로 하는 지식인 단체는 중국의 '백화'를 모범삼아 1956년 몇 종의 정기 간행물을 발간했다. 특히 '냔반(인본)'지가 유명하다. 이들은 온건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당의 문화적 독점을 비판하면서 다원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주의를 희망했다. 응오딩디엠주의에 대한 최선의 대응인 베트남 이북의 민주화, 이것이 베트남의 통일을 향해 평화적이고 중도적인 길을 닦을 것인가? 아니었다. 토지개혁과 국유화 작업은 잘 이루어졌지만 지식인들의 항거는 1956년과 1958년 사이에 점차 와해되었다.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자 민주화는 또 한 번 연기되고 말았다. 큰아버지 총통 두 전쟁이 교차하는 휴지기에 호치민이라는 역사적 인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베트남 정치문화의 중심 지주가 된다. 그는 국가의 원수이자 총서기(1956~1960)이고 당총재였으며, 베트남 주도 세력의 핵이었다. 이들 주도 세력은 그를 통해서 단합과 보기 드문 안정성을 확고히 다졌다. 또한 그는 일당 독재체제에서 가능한 두 노선, 즉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와 실용주의 사이에서 이상주의에 맞서 실용주의를 주창했다. 관료체제를 수호하고 당의 투쟁과 국가의 운명을 동일시하며 전통을 영구히 영웅시한 그의 정치담화는 공리가 되었다. 베트남의 소장 역사학파는 그의 끊임없는 '발명'들의 연구에 매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만장일치주의'-장기적으로 볼 때, 사회적 삶을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게 되면서 지성이 불구가 되고 유치해지는 근원인-를 넘어서, '큰아버지'는 결정적인 동인이었다. 그는 다른 어떤 공산주의 지도자보다도 민족의 미래를 국제적 차원에서 생각하고 떠맡았다. "미국의 국경이 17도선까지 이르렀다"(응오 딩 디엠, 1957년 5월 13일) 1955년에 전쟁은 제개되었다. 응오 딩 디엠 정군이, 제네바 협약이 1956년 7월로 정한 선거를 치르기 위해 합의에 들어가자는 북측의 제안을 거부하고 바오 다이를 제거하면서 남부공화국 헌법을 제정한 후에, 베트남 남쪽의 수뇌부와 치안기구, 그리고 지방행정을 장악했을 때였다. 응오 딩 디엠 정권은 미국의 전문가들(랜드스케일 대령, 콜린스 장군 등)의 조언을 받았지만, 결국 남부의 종파들(이들은 1956년에 전투를 개시했다)과 좌익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이중의 격렬한 저항세력에 직면하고 말았다. 정부의 탄압과 경찰권 남용, 군대를 동원한 정보사찰에 맞서 남쪽의 좌익들은 1958년 3월에 결선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FNL, 베트공)의 기치 아래 무장하여 자율방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2월 1일에 푸로이의 대학살이 자행되고 1959년 10월 사이공 정부는 반공법을 도입했다. 그리고 제 15차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회는 1959년 1월 남쪽에서 무장투쟁을 재개할 것을 비밀리에 결정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북한이 한 것처럼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형태상으로는 자발적인 민중혁명이 되도록 했다. 1960년 12월 20일, 남부의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공식적으로 창립되었다. 전쟁의 확대 두 번째 항쟁이 개시되었다. 이번이 가장 힘든 것이었다. 베트콩들은 신속하게 중요 지역을 접수하여, 농민들을 7000개의 '전략마을'로 옮기려 했던 테일러 장군의 반봉기계획을 무산시켰으며, 1963년 1월 압박에서 응오 딩 디엠 군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도시가 동요했다. 그해 5월에 불교 신도들의 시위와 스님들의 분신자살이 잇따랐다. 이어 응오 딩 디엠 정부가 고립되고 마침내 11월 1일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정부가 전복되었으며, 응오 딩 디엠의 형제들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존슨 행정부와 국방성의 맥나마라 팀으로서는 단 하나의 출구밖에는 없었다. 불교 신도들이 중립주의를 저지시키고 정치,군사적 공동상태를 메우기 위해 미국 전투부대를 남베트남에 직접 개입시켜 진압하는 것-그 때는 미국 대사와 CIA가 취약한 군사기구를 가진 새로운 반공정부를 세웠을 때였다. 1964년에서 1965년 사이에 무려 일곱 번의 쿠데타가 발생한 후에야 응웬 반 티에우 장군의 정부가 들어선다-그리고 남베트남의 봉기를 군사적으로 약화시키기 위해 동시에 북베트남을 치는 것. 이것은 1946년 당시 프랑스의 다르장리외 장군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계산이었으므로, 똑같은 실패를 볼 것이 뻔했다. 1964년 8월 2일 통킹만의 사건이 있고 나서, 1965년 2월 7일 미국의 북베트남 폭격이 개시되었다. 강자에 대항하는 약자 베트남은 버텼다. 그렇지만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다. 기록에 따르면 1961년에서 1975년 사이에 231만 3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남베트남은 완전히 황폐해졌다. 남부처럼 북베트남 역시 유례없는 전시동원으로 체제를 유지했으며, 새로운 외세에 맞서 국가와 일체가 된 전시 공산주의와 당-국가 통일체의 효율성이 나라를 지탱했다. 미국의 웨스트모어랜드 장군과 그 후임 에이브럼스 장군이 남베트남의 논과 정글에서 베트콩의 거점들을 공격했지만 한번도 그들의 결의를 꺾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용맹한 투쟁 저쪽에서는 국가의 정통성을 둘러싼 결정적인 싸움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남베트남에서 세워진 일련의 정권들은 1946년의 '코친차이나 공화국'의 복제판이었다. 그들 스스로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눈에 그들은 민족분할의 원흉으로 비쳤다. 반면 베트남 민주공화국은 민족의 재화합이라는 카드를 행사하고 있었다. 1963년 이후로 남쪽의 군사정권은 '외세와 거래하는 고객정권'이라는 본래의 역할에서 손을 씻는데 한순간도 성공하지 못했다. 1946년의 논리가 다른 사다리를 타고 재생산되고 있었다고, 역사는 머뭇거리며 말한다. 국제사회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과 민족해방전선은 곧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1965년경 호치민은 서구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고, 날로 거세어가던 미국 반전운동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의 모든 공적 활동과 그가 발표한 성명, 그가 참석한 회합은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의 논리 속에서 사고되었으며, 애국적 단합의 새로운 표어가 만들어졌다. '남쪽으로 진군'. 호루시초프와 마오 쩌둥 사이에서 호치민은 특히 중도파들(1966년 7월에는 생트니, 그리고 1년 후에는 오브라크)과 동시에 접촉했으며, 1968년에는 파리에서 협상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비밀외교에 능했는데, 싸움의 재개를 준비하고 추진하면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상대적 고립을 깨고, 미국과 상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중국과 소련의 원조(1966~1975)를 얻어낸 것이 모두 그의 비밀외교 덕택이었다. 그와 더불어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중소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면서 베트남 반도를 유일한 팽창의 창구로 여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신탁통치를 피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그렇다면 베트남의 선택은? 바로 선택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었다. 베트남은 소련과 중국이라는 두 적대자 사이에서 세심하게 항해해 나갔다. 소련과 동맹을 맺어서 당 중심부로 침투하는 마오주의의 영향을 상쇄했다. 또한 소련이나 중국, 어느 한쪽이 베트남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포기한 쪽이 팽팽한 이념전에서도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호치민은 이 점을 십분 활용하여 쌍방이 모두 하노이를 지지하도록 유도했다. 이러한 팽팽한 등거리외교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호치민뿐이었다. 그는 끝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피했으며 마오 쩌둥의 문화혁명의 한복판에서 중국과 완전히 절연하는 사태를 사전에 예방했다. 호치민 이후의 베트남은? 그는 1969년까지는 중요 업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1965년부터 몸이 나빠져 1967년 봄부터는 중국 의료진의 치료를 받은 것이 확실하다. 그는 1968년 1월부터 3월까지 계속된 구정대공세가 절반은 승리를 거두는 것을 보았으며, 1968년 5월 10일 파리 회담이 열리는 것도 보았고, 미국의 새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오른팔인 헨리 키신저와 레 독 토의 회견, 베트남 민주공화국 및 민족해방전선의 대표들과 남베트남 파견단 사이의 회담이 개최되는 것까지 보았으나 그 끝은 보지 못했다. 호치민은 1969년 9월 2일 9시 47분에 숨을 거둔다. 협상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전쟁은 1972년의 파리 협정에 이르기까지 3년 동안 더 지속된다. 파리 협정으로 잠깐 동안 잠잠하던 전쟁은 정세가 베트남 인민공화국에 유리해지자 재개되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 닉슨이 하야하게 된 것이다. 1975년 3월 베트남의 마지막 공격이 감행되었다. 이른바 '호치민 작전'이라 불리는 이것은, 팜 반 동의 표현에 따르면 '전쟁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것이었다. 4월 30일 사이공이 탈환되었다. 이로써 남베트남의 수도는 그후부터 '호치민시'가 되었으며, 1976년 7월 2일에는 그해 4월에 선출된 국민의회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창건을 선언했다. 그러나 호치민이 이끈 역사적 계획이 완수되는 듯하자마자 크메르 루즈와 중국 등을 상대로 한 전쟁이 포고되었다. 어떠한 승리도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호치민의 신화는 그의 삶이 끝나면서 오히려 '큰아버지의 신화'로 정점을 이룬다. 이 신화는 공산주의 정권이 정세에 따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부고는 24시간동안 지연되었고, 전국적 행사 분위기를 흐리지 않기 위해 9월 3일이 공식적인 날짜로 확정되었다. 정치국은 1965년 5월에 그가 써놓은 유언장을 1968년과 1969년의 이본을 통해 수정했으며 그 교훈성을 과장했다. 보통 사람처럼 화장해 달라는 그의 청정한 유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방부처리되어서 파라오의 미라처럼 거대한 묘에 전시되어 인민에게 공개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지난 시대 '제왕'의 장례식이 그러했던 것처럼 신성한 행렬의 호위를 받으며 장대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적 신화의 운명은 허약했다. 1975년 이후 단합이 느슨해진 나라를 수호하고자 하는 이 신화의 미덕은 단지 불확실한 희망일 뿐이었고, 결코 진정한 국가적 합의를 이루어낼 수 없었다. 이제 더 이상 '민족투쟁'이 아닌, '발전과 민주화'라는 말로 권력의 정통성 문제가 제기되는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신화, 또한 죽다... 1990년에 호치민 탄생 100주념 기념 행사가 펼쳐졌다. 그가 물려준 국가 존립을 위한 정치학은 그 효력을 다했다. 미래를 위한 정치학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그것은 1919년경 판 짜우 찡과 그의 젊은 제자 응웬 아이 꾸옥이 꿈꾸었던 바와 같은 민주주의적 발상과 맥을 같이할는지도... 새로운 사회가 태동하고 있으며 그 새로운 사회는 '세계혁명에 진정으로 기여하는' 베트남이라는 호치민의 역사적 전망과 점차 무관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만일 그 자신의 소망대로 그의 재가 남부, 중부, 북부 베트남의 세 언덕에 조촐히 뿌려진다면, 내일 그의 신화 또한 무관심 속에서 소멸되고 남은 재를 뿌리리라고 오늘,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기록과 증언 공인 호치민, 그도 개인적 욕망이나 불안한 존재의 느낌으로 지새운 밤이 있었을 테지만, 우리는 공식 문서와 한 혁명가의 글쓰기를 통해 뜻을 밝히는(치민) 애국자(아이 꾸옥)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아버지와 아들 모든 사람을 하나의 수수께끼라 할 수 있지만, 호치민의 유년기와 청년기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이 불투명하다. 우선 그의 생년월일로 시작해 보자. 1945년 이후로 알려진 그의 출생일, 즉 1890년 5월 19일은 월맹의 설립일인 1945년 5월 19일과 맞춰진 것으로서, 1911년에 호치민 스스로 말한 1892년생, 또 파리 경찰국에서 1920년에 그가 밝힌 1894년 1월 15일생보다 더 신빙성 있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다. 1920년 안남경찰국에서 있은 소상한 심문에서 그의 형과 누이는 각각 1890년과 1893년경에 그가 태어났다고 말했다. 또한 1931년 경찰국이 비밀리에 작성하고 킴리엔의 증인이 증명하는 그의 출생증명서에서는 탕타이의 여섯 번째 해 세 번째 달이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1894년 4월일 것이다. 그의 아버지인 응웬 싱 후이는 킴리엔의 한 농부 아들로서 그곳에서 1920년 무렵까지, 모두 농부인 두 사촌과 두 조카들 그리고 첩 하나를 거느리고 살았다. 1862년에 응웬 싱 삭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응웬 싱 후이는 나중에 얻은 이름이다). 1885년경 비교적 유복한 농촌 선비의 딸인 호앙 티 로안과 결혼하여 처음에는 그 시골에서 호앙 쭈라는 장인과 장모와 함께, 그들이 준 얼마 안 되는 땅을 가지고 살았다. 싱 후이가 공부에 전념하던 시기인 1887년에 딸인 응웬 티 탕이 태어나고, 1896년부터 응우네 땃 닷이라고 불릴 아들 응웬 싱 캄, 그리고 둘째 아들인 응웬 싱 콘-호치민-이 잇달아 태어났다. 그는 열 살 가량 되었을 때 응웬 땃 탕이라는 이름('그의 운명 끝까지 갈')을 가졌다. 그리고 셋째 아들은 얼마 못 살고 죽었다. 궁핍한 그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의 보통 선비 가족이었다. 그곳은 농민들의 공동체가 특별히 굳건했으며, 계산의 차이는 아주 작았다. 1930년에 남단현에서는 지주의 70%가 1마우(반 헥타르) 미만의 땅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주 1만 2천 명 중 겨우 220명이 소작인들에게 땅을 빌려주고 지세를 받아 살았다. 반면, 킴리엔에서는 학문이 높이 평가되었다. 1635년 이래로 과거급제자가 53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호치민의 가문이 '주요 문관'의 자리에 올랐던 것은 오직 응웬 싱 후이 대에 와서이다. 응웬 싱 후이의 인간성을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그 자식들의 운명에 영향을 준 몇몇 결정적인 요소들을 볼 수 있다. 장황하게 미화된 공식 전기가 말하는 대로, 애국자였던 선비는 보호령 제도에 부역을 거부해서 제재를 받았을까? 아니면 프랑스의 자료들이 말하는 것처럼 술을 좋아해서 해임된 난폭한 관리였을까? 겉보기에는 모순이지만, 실상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보완적인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괴테는 파우스트에게, "아뿔싸, 두 개의 영혼이 내 마음속에 같이 사네."라고 말하게 하지 않았던가. 1920년 초 안남의 비밀경찰은 응웬 아이 꾸옥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비밀문서를 수집하여 내사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혁명의 길에 오른 한 젊은이의 숨은 고통인 어려운 집안사정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시련이 닥치기 전까지는 학자로서 매우 눈부신 성공을 했다. 응웬 싱 후이는 서른한 살 되던 1894년에, 3년마다 치르는 대단히 어려운 과거에 급제하여 '쿠난'을 받고(1888년 남딩의 과거에서는 8136명의 응시자 중 168명이 급제했다) 킴리엔으로 금의환향한다. 1895년 그는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후에로 떠나는데, 그곳에서 개간국에 들어가 '항따우'라는 벼슬에 오른다(총무부의 대리대사에 해당). 그는 아마도 후에에서 농업과정을 이수했을 것이고, 장차 코친차이나의 입헌주의를 이끌어갈 농학자 부이 꾸앙 찌에우 교수의 강의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1897년경 빙딩과 1900년경 탕호아의 과거시험에서 시험관이 된다. 부모가 사망하자 그는 베트남의 의무적이 긴 장례식(관리들의 경우 25개월동안 휴직하는 데 이를 위반할 경우 매우 엄중한 처벌을 받느다)을 치르기 위해 위로 두 아이들을 데리고 킴리엔에 돌아온다. 땃 탕과 함께 후에에 혼자 남이 있던 그의 부인은 1901년 2월 10일에 죽는다. 부모상이 끝나자 그는 1901년 5월 티호이라는 후에의 아주 어려운 문과과거에 응시하고, 그후 황실에서 보는 과거 티딩에 응시한다. 그는 '포방'의 칭호를 받는데, 그것은 황제 면전에서 보는 과거의 1급과 2급에는 붙고, '띠엔시'라는 칭호를 받는 3급 시험에서는 떨어진 사람들에게 수여되는 이름이다. 띠엔시들에게 수여되는 위용을 갖춘 의복과 상아 판자, 구두 대신에, 포방은 은으로 장식된 챙이 달린 두건에 푸른 새틴 천의 긴 웃옷, 꿩이 수놓아진 초록 비단의 긴 조제복을 입는다. 이들은 황제가 급제자들에게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고, 나라에서 내어준 말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가지며, 2급 도지사 자격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킴리엔에서 1년동안 머문 후에, 싱 후이는 황립학술원 교재교정관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1902년 아들들과 함께 후에로 돌아가는데, 이는 7등급 관리 중 두 번째 서열의 고관 직위이다. 그는 의전부에서 '투아비엔(기안작성자)'이 되어 1909년 5월까지 그 직책을 수행하게 된다. 그는 1888년에 새로 만들어진 현인 방케현의 2급 도지사가 된다. 빙케는 꾸이논의 북서쪽에서 약 20km 떨어진 빙딩주에 있으며, 10년 전부터 개간이 시작된 지역이었다. 6등급 관리 중 두 번째 서열로 승진, 47개 현의 우두머리 고관이 된 응웬 싱 후이는 꽤 좋은 평가를 얻는다. 1911년 프랑스의 한 공무원이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그를 악평하는 기록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인의 면모 뒤에 가려진 한 개인의 모습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는 후에에 있을 때 격분하기 잘했고 술을 매우 좋아했는데, 이는 그가 그 자신의 열망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매우 베트남적인 불행한 의식(팟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딸인 응웬 티 탕이 1920년에 경찰국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1960년경 그녀가 처음으로 후에에 갔을 때 "늘ㄹ 고주망태가 되어 그녀를 때리는 아버지의 난폭함을 견디다 못해, 그녀는 결국 이듬해 킴리엔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그후에는 두 하녀와 함께 부모의 집에서 살았다..." 1910년 1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터졌다. 그가 등나무 태형을 과한 죄수가 죽은 것이다. 싱 후이는 100대의 태형(쭈옹)을 판결했는데, 이것은 황제의 권한을 남용한 것이므로 대단히 큰 잘못이었다. 응웬 싱 후이는 조사위원회 앞에서 죄수가 매를 잘못 맞아 죽은 것이라고 항변했지만, 위원회는 1910년 9월 17일 그를 '쭈옹'에 처한다. 그러나 그는 이형벌을 면하는 대신에 관직이 네 등급 강등(따라서 여덟 번째 관급의 두 번째 서열로)된다. 게다가 당시에 그는 다소간 다른 혐의도 가지고 있었다. 한 식민지 관리는 1911년 3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응웬 싱 후이는 판 보이 짜우와 판 짜우 찡, 그밖의 여러 사람들과 공모한 혐의를 강하게 받고 있었다. 2년 전에 동바에 있던 그의 아들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우리는 그 아들이 코친차이나에 있다고 믿었다. 응웬 싱 후이는 아들도 만나고 판 짜우 찡과 상의도 할 겸 거기 갈 계획이었다." 아마도 그는 판 짜우 찡에게 아들을 맡기려고 했을 것이다. 당시 판 짜우 찡은 포울로 콘도레섬에서 나와, 월 수당을 받고 친아들과 함께 프랑스로 갈 수 있는 허가를 막 얻어놓은 상태였다. 1911년 1월, 그는 빙투안으로 가기 위해 공등판무관에게 통행증 두 장을 신청하지만 거절당한다. 틀림없이 그는 그것에 아들 땃 탕을 만나러 가려 했을 것이다. 당시 땃 탕은 판티에트의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거기서는 기차로 사이공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쨋든 그는 1911년 2월 26일 투란에서 사이공으로 가는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장차 기자가 될 이엡 반 키에게 잠시 중국어 교습을 하고, 록닝에 있는 레바쿠 대농장에서 감시인으로 지낸 후, 그는 불법으로 사주를 봐주고 한의사 노릇을 하며 밑바닥 생활을 한다. 1923년 경찰기록에는 그가 '미신을 신봉하는 알코올 중독자'라고 나와 있다. 그는 다시는 조상들의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자식들도 다시 볼 수 없었다. 1922년 4월, 그는 사이공을 떠나 내지로 향하는데, 정보제공자들의 말에 따르면 '늙고, 초라한 옷차림에 불교의식에 투신해 의사노릇을 포기한' 방랑하는 행상이었다고 한다(그러나 이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그는 왕은 물론 가장의 권위마저 무너뜨리자고 주장하는 자신의 '나쁜' 아들에 관한 얘기는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았다." 사덱 지방 호이호아안 마을의 돌팔이의사로서 반정부단체의 유력한 혐의자들과 왕래했던 그는 1929년 11월 29일에 죽었다. 행동이 유별났지만, 역사적 소외의 시기에 한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고관 한 명이 자신을 묶어 놓았던 닻줄을 푼 것이다. 1910년의 비극적인 사건이 젊은 응웬 땃 탕의 여정에 많은 짐을 지웠으나, 당시의 교육받은 엘리트들처럼 그도 지식의 새로운 조류에 매혹을 느꼈다. 그때부터 그는 벼슬길과 멀어지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1905년에 이름높은 꾸옥혹 중등학교에 그와 그의 형을 등록시켰다. 이는 어쩌면 1908년인지도 모른다. 응헤안 출신의 응웬 싱 콘이라는 자가 고등판무관의 요청으로 1908년 8월 7일에 입학허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2학년과 3학년의 보충과정을 밟는다. 1897년에 생겨 1905년에는 중국학자인 E. 노르드만이 운영하던 꾸옥혹 중등학교는 고관 아들들 사이에서 커다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1908년, 초등과정 30명 모집에 180명의 지원자가 있었다). 또한 왕족과 고관들이 받는 '고등과정'이외에, 호치민의 직업이 되었을 뻔한 교사, 그리고 서기와 직원을 양산하기 위한 보충 분과들이 있었다. 과정은 4년이었는데 1주일에 34시간의 수엉ㅂ이 있었고, 프랑스 초등교육 모델에 맞춰 1905년에 과목이 개편되었다. 즉 불어, '꾸옥응우', 수학, 과학, 행정, 그림, 체육, 교육, 노래가 있었고, 공화주의적, 칸트주의적인 관용, 법윤리 등을 강조한 도덕, 프랑스의 골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도차이나와 세계의 있는 그대로를 다루는 역사, 그리고 지리과목이 있었다. 그러난 땃 탕은 꾸옥혹의 전과정을 마치지 않았다. 틀림없이 그는 이미 개혁주의자들의 민족주의에 매료되었을텐데, 1909년 혹은 1910년에 판티에트로 떠나 근대주의자들이 설립한 학교에서 교사를 했던 데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어쨋것 그는 이어 발생한 아버지의 파면 때문에도 생활비를 벌어야했다. 1910년에 벼슬길은 그의 삶에서 완전히 떠나갔다. 응헤안의 도이 꾸이엔(두이딴 동맹의 일원)과 암 보, 이 두 명의 모반자들에게 어렵게 지원금을 대주려 한 그의 형과 누이도 벼슬길에서 멀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형잉 응웬 땃 닷은 도이 꾸이엔에게 은신처와 함께 돈을 제공한 혐의로 1914년 9월 25일에 빙의 법정에서 3년형을 받고, 다음에는 1915년에 탈출모의와 반역죄로 9년의 강제노동형을 받는다. 바응오이(캉호아)에 감금된 그는 1920년 구정날 특사를 받아 코라오(투아티엔)의 집으로 돌아온다. 코 바끄 리엔(백련)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누이 응웬 티 탕은 킴리엔에 머물고 있었는데, 1918년 2월 6일과 7일에 빙의 토착민 근위대가 보초를 섰을 때 일어난 소총 세 자루 도난사건에 연루되어 냐짱에서 9년간 강제노동형에 처해진다. 그녀는 1930년에 후에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 호치민은 형제들과 같은 길을 가지는 않았다. 그는 프랑스로 갔고 여기에는 분명 두 개의 동기가 있었다. 그 하나는 효심에서 나온 것으로, 아버지의 복권을 위해 그곳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이었다. 판 짜우 찡은 인도차이나 인권동맹의 활약으로 포울로 콘도레섬에서 구출되지 않았던가? 다른 동기는, 당시 알베르 사로를 비롯하여 새로 부임한 식민지 책임자들이 개혁주의자들에게 제시한 허울 좋은 조처들을 충분히 활용하여 식민학교에 입학함으로써, 새로운 엘리트 계층에 편입되려는 강한 욕망이었다. 1889년 이래로 식민학교는 식민지에서 근무할 프랑스 행정가들을 양성하는데, 프랑스 정부 장학금을 받는 인도차이나 젊은이들을 위한 토착민 분과도 사실상 포함하고 있었다. 인도차이나 젊은이들은 꼭 식민지 관리가 되지 않더라도 다른 학교에 들어가 근대 문화에 입문할 수 있었다. 1910년의 시행령은 기술공무원의 양성에서 이러한 분과별 특수화를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의 입구는 파면된 관리의 아들에게는 여전히 좁은 문으로 남아. 위와 같은 시류에도 불구하고 땃 탕은 장학금을 받을 수도 등록을 할 수도 없었다. 20세기 초 황금시대의 식민 프랑스는 자신에게 협조하는 토착민의 자식들을 위해서만 학교의 최고 과정을 개방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밥벌이를 스스로 해야 했고, 보호령 당국의 중개를 통해, 사회의 주변을 떠도는 아버지에게 가끔씩 약간의 돈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파리-모스크바-캉통: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의 태동 응웬 아이 꾸옥이 안남 애국자 동맹에서 프랑스 공산당으로 전환하기까지는 기껏해야 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에 그는 판 짜우 찡과 판 반 쭈옹이 가까이했던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했으며, 그들이 틀림없이 가담했을 인권동맹과 프리 메이슨단 등, 프랑스 사회주의와 공생하는 조직들을 거쳤다. <뤼마니테>지는 1919년 8월 2일부터 응웬 아이 꾸옥의 짧은 기사를 싣고, 장 롱게와 폴 바이앙 쿠튀리에의 <르 포퓔레르>지는 9월 4일부터 그의 기사를 발표한다. 1919년 말 선거운동 기간에 그는 주의 깊게 정치적 회합에 참가하고, 파리에서 가장 활동적인 지구였다. 몽마르트 지역, 즉 SFIO(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의 파리 9지구 회원이 된다. 이 지구는 그가 자주 드나들었던 파리 외곽지역 결사의 창설자인 레오 폴데스, 특히 그의 비서인 보리스 수바린, 그리고 폴 루이스, 세베린이 속한 곳이었다. 그의 가입은 신속했고 전투적이었다. 2월 11일에 그는 청년 사회주의자의 20지구 앞에서 아시아 볼셰비키에 대한 강연회를 갖고, 크레믈린-비세트르에서 있었던 2000명이 모인 메이 데이 회합에서는 '안남 사회당의 비서'로서 연설을 한다. 그는 특히 프랑스 사회주의 조직들을 분열시킨 코민테른 가입 문제에 대한 역사적 토론에 참여한다. 이렇게 그가 혁명적 급진주의로 전환한 것에 관하여 주목할 만한 점은, 응웬 아이 꾸옥이 1920년대 공산주의를 독창적이고 민족주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러한 전환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즉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 그것의 역사관, 그것의 기획-식민지 사회를 발전과 '진보'의 시대로 들여놓는 근대적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기획-이 볼셰비즘이 담론과 실천강령 속에 파고들고서 '민족주의적 공산주의'라 불려 마땅한 것을 생산했다. 이러한 혼합주의는 몇몇 상황들이 통합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프랑스 공산당에는 따라서 <르 파리아>는 식민지에 관한 몇몇 모순적인 글들을 발표하는데, 그중 하나가 본국(프랑스) 민주주의를 식민지에 확장시키는 것으로 그치는 동화주의적 주장이다. 다음으로는, 응웬 아이 꾸옥이나 그의 동지들과 공산주의와의 접촉이 대단히 자율적인 상황에서 이뤄졌다는 것을 얘기할 수 있다. 응웬 아이 꾸옥이 그 발기인 중 하나였던 '국제식민지연합'을 보자. 동양언어학교의 복습 교사였던 사뮈엘 스테파니의 노력으로 '안남 애국자 동맹'과 '마다가스카르 토착민들의 시민권 쟁취를 위한 동맹'이 통합되어, '식민지 출신 사회주의자 동맹'이 1921년 3월에 빛을 보았다. 이 모임은 7월에 '국제식민지연합'이 되고, 1922년 4월부터 1926년 4월까지 <르 파리아>지를 발행하게 된다. 동시에 프랑스 공산당은 해외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아직은 배아단계인 '식민지 연구위원회'를 만들었는데(1921년 4월), 응웬 아이 꾸옥을 비롯한 식민지 투사들이 이 위원회의 중심이 된다. 서인도제도인 불롱쿠르, 모네르빌, 알제리인 하디 압델 카데르, 그리고 몇몇 아프리카인과 마다가스카르인, 특히 변호사인 앙리 사로트와 기술자인 응웬 테쭈이엔과 함께, 응웬 아이 꾸옥은 국제식민지연합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1922년 11월에, 출자금을 내는 회원이 100명에서 200명인 이 작은 조직의 비서 보좌관이 된다. 마르셰오파트리아르슈 거리 3번지에서 연중무휴로 근무하고 회의를 다수 주재하며, 집회를 중재하고 동지들의 무질서한 활동에 진지함을 부여하려 애쓰는 꼼꼼하고 끈질긴 이 활동가는 1923년 3월부터 아예 거기에서 살았다. 그는 즐겨 다음과 같이 말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국제식민지연합은 불셰비즘, 무정부주의, 범아프리카주의, 민족주의, 간디즘 등 하나의 사상을 형성할 수 있는 극도로 상반된 사조들에게 다같이 열려 있는 절충적인 문화적 환경을 조성했다. 국제식민지연합의 투쟁으로 식민지인들이 인권과 시민권을 쟁취할 때, 그것의 담론은 전체적으로 무정부주의적 바닉민주의의 주제와 언어와 단어들의 장이 되리라고 <르 파리아>는 간파했다. 1920년에서 1921년 사이에, <르 리베르테르>의 반식민주의란인 <파리아(천민) 이야기>가 국제식민지연합 기관지에 그 상징적인 이름을 제공했다.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급진적 하원이었던 폴 비녜 독통은 1921년 <르 리베르테르>에서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지속적인 운동을 전개한다. 이 운동은 폴 비녜 독통에게 정보를 주던 응웬 아이 꾸옥에게 <프랑스 식민화의 과정>에서 나타난 모든 주제와 날카롭고 냉소적인 야유, 격렬함,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것에 대한 경멸투의 고발 등을 제공한다. 응웬 아이 꾸옥은 1921년 9월 30일자 <르 리베르테르>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대목을 다시 정리하는 내 손은 떨리고, 잉크가 번질 정도로 눈물이 흘러내려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계속 쓸 수가 없다. 아! 불쌍한 프랑스, 불쌍한 인도차이나! 짓밟힌 휴머니티여!" 1920년부터 1923년 사이에 장래의 호치민이 썼던 수많은 글들은 역설적이다. 근대적 민족주의 국가 설립, 지배당하는 문화의 가치회복 등 민족주의의 주요한 문제들이 무정부주의적 용어로 서술된 것이다. 그러나 역설은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식민지 문제에 무관심한 프랑스 공산당과 이와는 모순적으로, 1921년 봄 동방(기본적으로 아시아 국가들) 전략을 채택한 코민테른을 서로 접합하는 무정부주의의 매개는, 공산주의 운동 한가운데에서 식민지 공산주의의 특수성과 주도적 자율성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인터내셔널-비록 스탈린주의에 물들었을지라도-과 호치민이 지속적으로 일치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된 것이다. 1921년부터 떠오른 것은 국제식민지연합과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식민지에 독특한 공산주의 독해였다. 공산주의 독해, 이것은 다소간 다행스럽게도 식민지인들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문학적인 유사성을 갖춘 것이다. 이와 같이, '일치'에 대한 전적으로 유교적인 개념인 '민족적 일체주의'는 아이 꾸옥의 확고부동한 준거가 된다. 1922년에 <르뷔 코뮤니스트>에 기고한 인도에 관한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 나라에 불행이 닥치면 카스트 계급과 종교의 차이가 사라진다. 부자와 가난한 자, 귀족과 농부, 회교도와 불교도, 이 모두가 하나의 노력 안에서 하나가 된다." 그는 친구인 응웬 테 쭈이엔처럼, 대개 비유가 많고 암시적인 문체와 무례한 듯 예민한 유머 감각, 베트남 전통에서처럼 양가적인 뜻을 가지며 개인주의적이고 반항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두 사람 모두 '사촌에게 주는 편지' 스리즈에서와 같이, 후에의 궁중에서 쓰던 낡은 관습을 '해석하는' 베트남식 고유어법과 아이러니와 인과응보로 가득한 일화와 동화로 표현하는 것을 즐긴다. 한 선비가 황제의 행렬이 지나가는 앞에다 불한당을 적발하는 속담, "덥수룩한 수염, 움푹 팬 눈(람 라우, 사우 맛)" 얘기를 하며 비난을 던진다. 더욱 근본적으로, 이미 제3세계 공산주의의 핵심부에서는 다가올 식민지 혁명의 자율성이라는 사상이 굳어진다. "당신들의 자주 독립은 스스로의 노력없이 이뤄지지 않는다." 1922년 5월 국제 동맹 선언문은 공표한다. 이렇게 공산주의를 민족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응웬 아이 꾸옥이 모스크바에 머물렀던 1923년 6월부터 1924년 말까지, 중국의 국민당과 코민테른의 연합이 이뤄진 상황에서 더욱 공고해진다. 코민테른의 사령부는 공산주의와 식민지 민족주의를 결합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환영했다. 그에게 모스크바 체재 기간은 대단한 중요성을 갖는데, 왜냐하면 그 동안 그는 공산주의 국제기구의 지도자가 되는 데 필요한 자질과 민족적 공산주의를 쉽게 조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그는 단명한 크레스틴테른(붉은 농민 인터내셔널)에서 활동하면서부터 공산주의 기구의 비밀을 낱낱이 파악하게 된다. 1923년 10월 12일에서 15일까지 지노비에브와 칼리닌과 농민 위원이 스미르노프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크레스틴테른의 단 한 차례 대회에서 아이 꾸옥은 사무국의 식민지 농민대표로 선출되었고, 1923년 11월에는 '식민지 농민들에게 보내는 호소'를 작성했다. 두 번째로 그는 그때부터 반식민주의 논쟁뿐만 아니라 세력관계에 대한 해박한 분석에 능숙한 공산주의 저널리스트가 되는 훈련을 쌓는다. 1923년 7월 이후로 그가 <르 파리아>와 다른 프랑스 공산주의 언론에 보낸 27개의 기사를 보면, 그중 9개는 아직도 이 마지막 수련의 단계를 보이고 있으며 8개는 제국주의의 극동아시아 침입에 대한 것이고, 5개는 소련의 식민지 국가지지, 2개는 아시아 농부들의 상황을 다룬 것이다. 1924년 4월에서 1928년 8월까지 코민테른의 주요 정기간행물 <임프레코르(국제통신)>에서 본명으로, 혹은 '왕'이라는 가명으로 발표된 20개의 글 중, 11편이 중국이나 인도의 현재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직 프랑스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성문화 단계에 있던 마르크스-레닌주의, 즉 스탈린적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한다. 제국주의와 이윤의 개념, 민족투쟁과 서구 노동자 계급투쟁의 비분리원칙, 노동자 농민 연대의 개념, 중앙집권적인 스탈린적 정당의 모델 등이 그것이다. 어쨋건, 응웬 아이 꾸옥은 더 이상 이론가적 기질을 보이지 않으며, 마오 쩌둥과는 달리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대체로 짧고 도식적인 그의 글들은 묘미를 주지는 않으나, 날카로운 풍자를 가미하여 사실을 충실하게 제시한다. 그가 받아들인 마르크스주의는 레닌의 수정을 거쳐 사물화되고 스탈린이 단순화한 것으로서, 도구적 가치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공산주의는 식민지로 전락한 사회가 재생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단순화된 실용적인 것이었다. "중국처럼 베트남의 전설에도 '마술가방' 이야기가 있다. 큰 곤경에 처했을 때 그 가방을 열기만 하면 된다. 베트남의 혁명가와 민중에게 레닌주의는 마술가방이며 나침반일 뿐 아니라, 최종적 승리,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향한 길을 밝혀주는 진실한 태양이다."라고 그는 1960년 4월에 쓰고 있다. 그 결과로, 그의 유교적 토대와 예전의 민족주의 문제의식이 제거되기는커녕, 반대로 세 단계의 혼합을 거쳐서 레닌-스탈린주의라는 새로운 문화가 정착된다. 우선, 제3세계 민중주의와 식민지 민중의 혁명적 '다수'에게 거의 메시아에 견줄만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둘째로, 사회학적으로 동질적인 식민지 농민들의 파괴적인 잠재력을 공산주의를 통해서 견고히 하는 것이다. "식민지 농민들의 봉기가 임박했다. 이미 몇몇 식민지에는 봉기가 있었으나, 매번 그들의 항거는 피로 물들었다. 그들이 지금 체념해야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조직과 지도력의 부재 때문이다. 인터내셔널은 그들을 결집시켜야만 하며, 그들에게 지도자를 제공하고 혁명의 길에 앞장서 그들을 이끌어야만 한다." 1924년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그가 선언한 말이다. 끝으로, 공산주의 실천을 유교윤리와 본능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레닌이 서구 노동자에게 우두머리요, 지도자, 스승이라면, 동양 민중에게 그는 더 위대하고 더 고귀한 그 무엇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천재라서가 아니라 사치를 경멸하고 노동을 사랑하며 사생활이 청렴하고 인간됨이 소박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시아 민중에게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위대함과 숭고함을 지닌 그의 스승의 면모 때문이다." 이러한 특수한 공산주의 문화는 호치민에게 완전히 자리잡는다. 1925년부터 1930년까지, 이러한 문화는 청년동지회의 이데올로기에 영감을 불어넣게 된다. <청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에 공자가 우리 시대에 산다면..., 그 초인은 필시, 재빨리 레닌의 계승자가 될 것이다." 1940년 이후에 월맹의 이데올로기적 지주가 되기 위하여. 영국의 죄수, '애국자 응웬의 재판' 1924년 말 캉통에 도착한 이후로, 응웬 아이 꾸옥은 강력한 인도차이나 경찰국의 직접적인 감시를 받는다. 1927년 말까지 3년 동안, 그는 중국 국민당에 파견된 소련 대표자인 보로딘의 측근에서 투쟁하며 청년회의 발전에 힘을 쏟는다. 전투적이며 강도 높은 투쟁의 시간이다. "나쁜 요소들이 제거된 이 작은 공동체에, 응웬 아이 꾸옥은 그 당시까지 회원들이 무시했던 노동과 학습의 버릇을 들였다. 이들 중 누구도 무위도식하며 지내지 않는다. ... 매주 한 번씩 있는 회합에서 모든 회원들은 당의 사업에 견해를 표현할 권리를 가진다. ... 발언은 경청된다. 예전에 안남 애국자 동맹에서 종종 알력의 원인이었던 우선권 문제는 위원회 내부에서 전혀 제기되지 않는다. 지식의 유무와 나이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한다." 1925년 11월 <피노>에 실린 청년회에 대한 글이다. ... 응웬 아이 꾸옥은 조직의 지도부에 침투한 베트남 비밀경찰들의 긴밀한 감시를 당했다. 1927년 장 제스가 일으킨 정변으로 중국 공산주의가 붕괴하자 모스크바로 돌아간 그는, 몇 달 뒤 코민테른의 동남아시아 대표로 다시 아시아에 온다. 그는 1929년 비밀리에 상하이에 정착하고 코민테른의 동양사무국과 관계를 맺으며 일한다. 오랫동안 인도차이나 공산주의의 해외 토대를 구성하게 될 3만 명의 이주자들이 사는 곳, 시암의 북동쪽, 피치트에서 가까운 반동이라는 마을에 그는 1928년 8월 비밀리에 다시 나타나고, 그때부터 이 지역 관할권을 부여받게 된다. 두 번에 걸친 시암 체류기간 동안(1928년 8월~1929년 9월, 1930년 3월~4월), 그는 싱가포르의 중국 이민자들이 1928년에 만든, 그때까지 오리무중이던 남해 공산주의 연맹에 현실성을 부여하고, 1930년 4월 20일에 시암(실제로는 중화 베트남) 공산당을 세우는 방콕의 의회를 주재하고, 아마도 같은 달에 싱가포르의 의회를 주재하는데, 거기에서 말레이시아 공산당이 나오게 된다. 시암의 지하활동 시기는 호치민의 생애 중 잘 알려지지 않은 시기이다. 그는 1929년 12월에 홍콩에 정착하면서 시암 시기를 마감한다. 홍콩에서 그는 책임자들과 일일이 연락을 취하고, 그가 만든 베트남과 중국의 해상 비밀조직을 통해 토대와 기본 지침과 정치적 문헌을 전달하고, 모스크바 '중앙' 사령부를 위해 정기적인 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상하이의 동방사무국과 인도차이나-시암-말레이시아 군소 공산주의 단체들 사이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결국 프랑스 공산당에서 '프리트 동지'가 수행한 것과 같은 임무이다. 이런 점에서, 1930~1931년 당시 인도차이나에서 있었던 사건들에서 아이 꾸옥의 역할을 평가하기는 더욱 어렵다. 중국을 본보기로 하여 농촌의 소베에트를 건설하라는, 상하이와 홍콩에서 보낸 지령이 있었을까?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1931년 5월, 당원이 1828명에 지나지 않았던 안남과 통킹 정당에 응웬 아이 꾸옥이 보낸, '무장폭동주의'를 경계하라는 간단한 지령이 있었다. 응웬 아이 꾸옥, 그는 모험에 열을 올리기보다는 정치적 하부조직을 튼튼히 만드는 데 전념한, 인내심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 자신도, 결국 체포라는 뜻하지 않은 폭풍우를 만난다. 마침내 1931년 6월에 싱가포르의 영국 경찰은 인도차이나 비밀경찰과 공조체제를 벌여, 코민테른의 지하조직에 대한 이례적인 일제검거에 성공한다. 경찰은 6월 1일에 싱가포르에서 식민지 내의 인터내셔널 대표자인 프랑스인 조제프 뒤크루(일명 세르주르파랑)를 체포했다. 그의 서류 중에, 약품이나 열을 가하면 글씨가 나타나는 은현 잉크로 쓴 편지가 있었는데 여기서 성 만초라는 이름과 코우룬, 탐카우가 186번지라는 주소가 쓰여 있었다. 6월 6일 새벽 2시에 홍콩 경찰은 성 만초와 그의 조카라는 젊은 여인 리 웅 투안을 체포하고, 혁명에 관계된 수많은 문서를 압수했다. 이 여인은 사실, 얼마 전에 체포되었고 6월 30일에 프랑스에 인도될 인도차이나 공산당 해외지도자 중 하나인 호 뚱 마우의 부인 레 티 땀이었다. 다행히도 성 만초에게는 자신의 편지를 태울 시간이 있었다. 역시 주소가 뒤크로의 집에서 발견된 눌랑이 검거되자, 6월 15일 상하이의 동방사무국은 국제적인 인가하에 철거되었다. 응웬 아이 꾸옥이 영어로 작성한 21건의 서류들은 하노이로 발송되었다. 비밀경찰의 '펠릭스'가 재빨리, 빅토리아 감옥에 구류된 성 만초가 바로 응웬 아이 꾸옥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아이 꾸옥은 8월 12일 홍콩의 법정에서, 8월 18일에 하이퐁행 랑제르호를 타고 식민지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영국 법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어떤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9년 10월 11일에 그는 이미 빙의 고관 재판소에서 치러졌던 결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바 있기 때문에, 프랑스는 그를 인도받으려 했다. 6월 16일부터 홍콩의 프랑스 영사 뒤포르 드 라 프라드는 죄수들을 인도받기 위해 판사 및 관계자들과 끊임없이 접촉했다. 하노이 정부는 더욱 깊숙이 개입했다. 영국에 방대한 자료들을 제공하며, 응웬 아이 꾸옥에게 비밀리에 구명약속을 하고 영국 경찰에게 1만 5천 피아스터의 상여금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어쨋든 그의 인도에 적극적이었다. 위험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1931년 7월부터 코민테른이 하노이와 파리의 집중적인 압력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활발한 활동을 벌인 덕에 아이 꾸옥은 가까스로 프랑스 호송을 모면하게 된다. 언론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영국 식민지의 주요 신문들 <홍콩 데일리 프레스> <홍콩 텔레그래프>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애국자 응웬의 재판'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의 기사 제목)에 관한 일련의 기사들을 실었다. 이러한 언론의 선전들은 8월 17일에 있을 2심에 즈음한 것이어서 영국 판사들을 난처하게 했다. '부르주아 법'을 솜씨 좋게 이용한 것이다. F. H. 로스비나 N. 프릿 같은 런던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건을 담당했다. 그들은 황제의 고문이며, 1912년에 변호사단에 등록한 전직 관리인 홍콩의 유능한 변호사 F. C. 젠킨에게 사건을 맡겼고(그는 1936년 자살한다),젠킨은 A. M. L. 소아레스와 F. H. 로스비와 동반하여 아이 꾸옥의 변호를 맡았다. 그는 응웬 아이 꾸옥이 협박을 받았으며 그가 체포될 때 위반사항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인신보호 법규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포영장은 6월 12일에서야 발행되었고 6일의 불법구류가 있었다는 점, 아이 꾸옥이 6월 25일에 가서야 변호사의 도움을 받은 점, 7월 10일부터 시작된 경찰심문에서 "당신은 공산주의자인가?"라는 등의 법에 저촉되는 질문이 있었던 점. 응웬 아이 꾸옥은 스스로가 "안남의 민족주의자이지 공산주의자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젠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8월 17일의 2심에서는, 제네랄 메칭거호를 타고 9월 초에 떠나라는 두 번째 추방판정이 내려졌고, 자치령 최고 법원이 9월 11일에 이것을 확인했다. 다음날, 젠킨은 대영제국 최고 재판소인 황제의 추밀원 앞에서 호소하여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아이 꾸옥을 어디로 추방할 것인가? 로스비와 젠킨이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경고했기 때문에 홍콩 총독 윌리엄 필 경과 런던 정부는 쉽사리 행동할 수 없었다. 소송은 장기 국면에 들어갔다. 한편 1925년부터 청년당에 침투하여 날마다 아이 꾸옥을 감시해 왔던 베트남 비밀경찰 요원들은 감옥까지 찾아와 눈을 부라리며 그를 감시했다. 그러는 사이 아이 꾸옥은 감옥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고, 홍콩 병원에서 두 차례나 폐결핵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인터내셔널 쪽에서는 그의 석방을 위한 어떤 여론의 움직임도 없었고, 단지 공산주의 신문에 몇 개의 기사만 났을 뿐이다. 마치 모스크바가 재판이라는 카드패에 내기를 걸고 어디까지나 신중하게 처신하고 있으며, 그렇게만 하면 그가 일단 석방되어 '유용한 어둠' 속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듯이. 공산주의 신문은 심지어 그가 죽었다는 보도를 하기조차 했는데, <공산주의 평론>지는 사망날짜를 1932년 6월 26일로 알렸고, 코민테른은 그의 추모식을 갖는 등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정보가 어두웠고 그가 격리되어 있던 탓이다. 일본의 왕자 쿠옹데는 1931년 12월 17일에 콕에게 300엔을 동봉하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기도 했다. "몸조리를 잘하십시오, 조국을 위해서 말입니다!" 1932년 6월 28일에 열린 추밀원 판결에서 추방이 확정되었지만 행선지는 그가 선택하도록 했고, 영국 정부는 그의 행선지를 비밀에 부쳤다. 1933년 1월 6일 추방지 싱가포르에 도착한 응웬 아이 꾸옥은, 그러나 호상호를 타고 1월 11일 홍콩으로 되돌아간다. 1월 19일에 다시 체포된 그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다시 한번 홍콩을 떠나라는 재촉을 받는다. 그는 중국 상인으로 변장하고 캉통의 프랑스 조계인 지아멘에서 몇 달을 보냈을 것이며, 폴 바이앙 쿠튀리에와 접촉하는 데 성공하고 암스테르담-플레이엘 조직을 위해 중국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직의 도움으로 그는 상하이에서 소련 선박을 탈 수 있었을 것이다. 1933년 7월 응웬 아이 꾸옥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내린다. '인신보호 법규'와 '부르주아 법'이 그를 구한 것이다. 이렇게 인도차이나 혁명가 응웬 아이 꾸옥은 위기를 겪은 끝에, 동아시아의 지하활동 시기 제1장을 마감한다. 월맹의 초기(1941~1945) 1941년 5월 팍보에서 열린 인도차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8차 총회에서 탄생한 월맹(베트남 독립동맹)은, 결성 당시부터 가변적인 애국전선으로, 공산당 관할구에서 조차도 지하조직으로 있어야 했던 공산당 기구를 은폐, 보호하기 위한 조직으로 생각되었고, 또 그렇게 조직되었다. 우선 월맹은 베트남에서 추방되어 중국으로 간 민족주의자들과 국민당의 주도권에 대항하려는 맞불이었다. 이들은 1936년부터 남중국에서 일시적인 동맹들을 조직했고-공산주의자들은 여기에 가입하여 세력을 약화시켰다-1942년 띠엔친에서 중국의 보호 아래, 응웬 하이딴이 이끄는 동맹회(베트남 혁명 동맹)를 조직했다. 중국인들에게 이러한 '전선'은 중국이 베트남으로 들어올 때를 대비한 정치적 부속기관쯤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월맹을 민족주의자들의 활동과 구분짓는 것은 국내활동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트로츠키주의자따 투 타우, 그리고 민족주의자로 1932년에 사형당한 응웬 타이 혹 등 반대파에서 예외적인 인물들이 없었던 것이 아님에도,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광범위한 인적 자원을 확보한 유일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월맹의 태동기부터 응웬 아이 꾸옥의 개인적인 정치적 견해가 결정적이었다. 이미 청년회와 함께 대략의 윤곽을 잡은 그의 견해는 1938년 말부터 1940년 초 사이에, 공산 중국 해방구에서 8차 대장정이 한창일 때, 호 꾸앙이라는 가명으로 연안에서 지낸, 잘 알려지지 않은 기간 동안에 현실화되었다. 그는 거기에서, 연장된 혁명전쟁, 국민당과 분쟁이 그치지 않는 민족전선, 그리고 도시에서 온 훈련된 혁명가 지식인이 농민을 동원하고 편성하는 등 마오주의 실천에 익숙해졌다. 게다가 월맹의 100명 남짓한 젊은 간부들은 리우키아오에 있던 군사학교에서 공부하게 된다. 1941년에 응웬 아이 꾸옥은 마오주의적 혁명을 베트남에 공고히 뿌리박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것은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지도부를 새로운 정치지도부가 장악했기 때문이다. 중앙위원회의 8차 회기에서는 중앙위원회원 네 명만이 참석했는데, 1940년 11월에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쭈옥 찡과 호앙 꾸옥 비에트, 그리고 통킹의 지역위원회 서기인 호앙 반 투가 있었다. 여기에, 시암과 중국에서 투쟁하던 호앙 반 호안, 그리고 하노이의 탕롱 학교의 역사교수였던 보 응웬 잡, 1936년에 포울로 콘도레섬에서 석방된 팜 반 동, 1924년 캉통 코뮌의 고참이며 응웬 아이 꾸옥과 함께 국경을 넘어 팍보에 정착한 풍 찌 키엔 같은 새로운 인물이 가세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북쪽 출신이었고, 그들 중 누구도 유럽이나 소비에트 동맹에 대해 알지 못했다. 베트남의 공산주의는 큰 지리적 변동을 보았으며, 새로운 지도자단이 이제 곧 호치민이라고 불릴 응웬 아이 꾸옥을 중심으로 합쳐졌다. 시대가 바뀌고 인물이 바뀐 것이다. 1943년 말, 월맹은 이미 정부가 11월에 개시한 군사작전에 대항하여 살아 남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월맹의 세포들은 끈질긴 조직활동과 정치교육을 통해 차츰차츰 마을에서 마을로 주민을 포섭해 갔다. 팜플렛과 신문들이 수공업으로 대량 복사되고 유통되었다. 그러나 아지곧 세력침투는 제한되었고 운동은 위험했으며 암살이 빈번했다. 박송의 게릴라를 지휘하던 풍 찌 키엔은 1941년에 매복에 걸렸다. '맑지만 사람을 죽이는 물은 가진 나라'의 놀라울 만큼 아름다우나 말라리아가 만연한 자연 속에서 열병은 끊임없이 조직원들을 위협했다. 1945년 8월 혁명 전야에 호치민은 열병으로 쓰러졌다. 한편 월맹은 1943년부터 삼각주 내로 인원을 분산시키고, 호앙 반 투는 쭈옹 찡과 함께 하노이의 변두리에 있는 푸투옹에 중앙위원회의 상임사무국을 개설하는데, 그곳에서 그는 1943년 체포되고 고문당한 후 1944년 5월 24일에 총살형에 처해졌다. 북쪽과의 유대가 매우 어려워진 남쪽의 월맹은 그다지 영향력 없는 군소 단체들의 형태로 존속할 뿐이었다. 1943~1944년에 오래된 인도차이나 공산당 지하조직은 짠 반 자우의 지휘 밑에 결속, 겉으로는 '젊은 전위'로 가장하고 강력한 조합과 군대조직을 자율적으로 재구성했다. 1944~1945년에 베트남 전역에 국가통일을 이루자는 열망이 확산되자, 식민주의는 더 이상 지탱될 수 없었다. 그리고 월맹은 큰 파도가 몰고 올 정치적 결과를 집중시킬 준비가 된 유일한 조직이었다. 1945~1946년,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정책의 목표 의혹을 가중시키는 요소. 1945년에서 1946년 사이에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정책, 즉 신식민주의 정책의 궁극 목표는, 스스로를 유럽과 아시아에서 이제 막 완수된 '해방'의 마지막 일화로 제시하는 것이다. 마치 19세기 말이 스스로를 해방과 진보의 전령인 양 생각하고 싶어했던 것과 같다. 사람들은 종종, 고위급 위원들과 군부와 파리의 정부를 분열, 대립시켰던 정부의 우유부단함과 심한 갈등을 강조하며, 한마디로 1946년의 상황들이 베트남 민족주의 사상이 가진 힘을 자각한 흐클레르크파와 다르장리외파의 대립과정으로 요약된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것에는 일리가 있다. 많은 역사가들은, 1945에서 1946년 사이의 인도차이나에는 진정한 프랑스의 정책이 부재했으며, 전쟁은 마치 어떤 목표나 내깃거리가 없이도 일어날 수 있다는 듯이 일련의 주저와 실책과 과오들로 점철되었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생각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인도차이나 전쟁은 '전쟁은 다른 수단을 통한 정치의 연장일 뿐'이라는 크라우제비츠의 가르침에 모순되지 않는다. 아래에서 인용할, 매우 잘 알려진 자료들에서 나타나는 것은, 1945년에서 1946년 사이에, 드 골에서 펠릭스 고뱅, 조르주 비도 그리고, 장관들의 대다수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점에서는 이들 내각과 다를 바 없었던 레옹 블룸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내각들이 대략 다음 네 개의 근본 목표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1.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인도차이나의 지배권을 회복한다. 왜냐하면 인도차이나 민중의 독립을 인정하는 것은, 전쟁기간에 비시 정부를 위해서나 자유 프랑스를 위해서나 대단한 중요성을 가졌고, 1945년에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을 회복시키는 하나의 열쇠가 된 제국, 즉 '프랑스 연합'의 이름 아래 변화와 재건중에 있는 식민제국을 단기간에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2. '인도차이나 연방'을 실시하여 인도차이나 식민지의 정치,경제적 구조를 근대화한다. 3.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무력하게 만든다. 또한 베트남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감소시킨 후 제거한다. 1946년에 알제리를 포함한 프랑스 식민지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수용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프랑스 지도층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들은 당시 파리 정부 내의 공산주의적 요소도 제거하려 했다. 4. 결국, 독립과 탈식민화를 향한 모든 과정은 비록 점진적인 것일지라도 모두 거부한다. 즉, 1930년대의 위기 이후에 취했던 최소한의 선택들을 계속하면서, 용어의 엄격한 의미에서 신식민주의 정책을 취한다. 알베르 사로, '식민지의 중대함과 지역권', 파리, 1931년 "나는 식민지에서 정치적, 행정적 평등을 확립하고 그곳에 우리 정부의 형태를 변형없이 옮겨놓겠다고 꿈꾸는 본국 이론가들의 제안에 동조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우리의 식민지 전체를 우리 자신의 풍습에 익숙한 사회적 환경이나 정치적 관행에 맞추겠다는 분별없는 의견에 단호히 반대한다. 나는 '자치정부'나 토착주민에게 집단적으로 실시하는 보통선거처럼, 서구의 제도를 이식하여 여기에 일제히 동화시키려는 세계를 인정할 수 없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 스스로 수세기에 걸친 연구와 교육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던 정치, 사회적인 지침을 발달단계가 몹시 다른 이질 적인 종족들에게 엄격하게 획일적으로 강요한다는 것은 정말로 미친 짓이다. ... 우선, 유럽의 식민지 지배권을 포기하지 말자. ... 유럽은 그곳에 있으며 그곳에 있어야만 한다. 나는 사력을 다해, ... 내 조국을 위하듯 유럽을 위해, 식민지에서 서양의 보호를 축출하려는 모든 양상들을 배척한다. ... 우리가 지금 있는 이곳에, 우리는 남아 머물러야 한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이익이 명령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휴머니티와 문명의 질서가 내리는 명령인 것이다." 브라자빌에서 열린 아프리카 회담 선언문 발췌, 1944년 "프랑스가 식민지에서 완수한 식민지화 작업은, 제국의 프랑스권에 속하지 않은 모든 지역의 자율적인 사상과 발전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멀리 떨어진 식민지 내의 임시적 자치정부의 구성이라도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 인도차이나에 대한 임시정부의 선언, 1945년 3월 24일 "공화국 정부는 언제나, 인도차이나가 프랑스 연합 조직에서 특수한 위치를 점유하며 그 발전과 능력의 수준에 적합한 자유를 누려왔다고 생각해 왔다. 그에 대한 약속은 1943년 12월 8일의 선언에서 이루어졌다. 곧이어 정부는 브라자빌에서 일반 원칙들을 발표하여 정부의 의도를 명시한다. 오늘날의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하여, 인도차이나인과 프랑스인, 지식인과 인도차이나의 민중이 혼합되어 있는 군대, 적들의 책동을 악용할 줄 모르는 군대는 그 용기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모든 프랑스 공동체의 대의명분의 승리를 위해 항쟁한다. 이렇게 하여 인도차이나는 마땅히 누려야 할 위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 새로운 자격을 획득한다. 과거의 취지들 속에서의 절차에 의해 추인된 정부는 지금부터, 앞으로 인도차이나가 침입자들로부터 해방될 경우 어떤 위상을 가지게 될지를 규정해야 한다는 것을 고려한다. 인도차이나 연방은 프랑스 및 연방의 다른 나라들과 함께, 그 대외적 이익을 프랑스가 대표할 '프랑스 연합'을 구성할 것이다. 이 연방의 중심에서 인도차이나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인도차이나 연방에 소속된 사람들은 인도차이나의 시민이 될 것이며, 프랑스 연합의 시민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종과 종교, 출신의 차별 없이 능력에 따라 인도차이나 및 프랑스 연합의 모든 직위와 위치를 점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조건을 따르는 인도차이나 연방은 프랑스 연합의 연합기구들에 참여하며, 이와 같은 프랑스 연합 시민들의 지위는 제헌국회에서 명시될 것이다. 인도차이나는 총독과 장관으로 구성된 적절한 연방정부를 가진다. 장관은 인도차이나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뿐만 아니라 인도차이나인들 가운데서도 선출된다. 연방정부의 최고 실려자들로 구성될 최고 행정재판소는 법과 연방규칙들을 제정한다. 총독 곁에는 연방의 가장 저명한 인사들로 이루어진 참사원을 두어 연방법과 규칙들을 준비하게 한다. 연방의 각 나라에 가장 적합한 선거를 통해 구성되며 프랑스의 국익을 대변할 국회는 연방의 예산안과 모든 세금을 의결할 것이며 법안을 심의할 것이다. 인도차이나 연방에 관계될 통상조약과 우호관계는 국회의 심사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언론과 집회결사의 자유, 사상과 신앙의 자유, 또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의 자유는 인도차이난 법률의 근간을 이룰 것이다. 인도차이나 연방을 구성하며 문명과 종족, 전통에서 서로 차별화되는 5개국은 연방 내에서 그들의 고유한 특성을 고수하게 될 것이다. 총독은 각 나라 이익의 중재자가 된다. 지역정부는 개선과 아울러 개혁될 것이다. 각 나라의 관직과 일자리는 그 거주민들에게 특별히 열려 있을 것이다. 프랑스 연합의 일반 방위체제에서, 인도차이나 연방은 본국의 도움을 받아 육해공군을 창설할 것이다. 이에 인도차이나인들은, 본국인이나 다른 프랑스 연합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자격으로 모든 계급에 오를 수 있다. 사회적 문화적인 진보는 정치적이며 행정적인 진보와 동등한 의미에서 추구, 촉진된다. 프랑스 연합은 효과적인 초등 의무교육과 중등, 고등 교육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지역 언어 및 사상의 연구는 프랑스 문화와 긴밀한 연관을 가질 것이다. 독립적이며 효과적인 노동의 평가와 노조의 발전을 통해, 복지와 사회교육 그리고 인도차이나 노동자들의 해방이 지속적으로 추구될 것이다. 인도차이나 연방은 프랑스 연합의 틀 내에서 농,상,산업의 발전과 특히 그 인구의 상황에 맞는 산업화를 실현할 경제적 자율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차별적인 규제를 배제한 이러한 자율권에 힘입어 인도차이나는 모든 다른 나라들과 특히, 프랑스 연합 전체가 그러하듯 중국과 우호적이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힘쓰며 통상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이렇게 검토된 인도차이나의 법규는 해방된 인도차이나의 유능한 행정기관의 자문을 거친 후에 완성될 것이다. 또한 프랑스 연합의 평화체제 속에서, 인도차이나 연방은 그 모든 자원의 개발에 필요한 조직과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인도차이나 연방은 태평양 지역에서 맡은 역할을 완수할 것이며, 전프랑스 연합에서 인도차이나 연방 인재들의 역량을 힘껏 발휘할 것이다. 정치부 연방 위원 레옹 피뇽의 비밀문서 발췌, 1947년 1월 4일 "한 가지는 확실하다. 호치민 정부와 다시 협상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오래 전부터 예측해 왔고 또 통고했던 바대로, 지금 우리는 호치민 정부가 단 하나의 목적만을 추구한다는 것을 매우 명백히 인식한다. 그 단 하나의 목적이란, 베트남의 독립이 궁극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인정되지 않은 한, 무슨 짓을 해서라도 프랑스가 베트남에 다시 정착하는 것-무슨 명목이든 간에-을 저지하는 것이다. 프랑스는 그간 지켜온 권리와 입장을 고려하여 베트남 독립이 주는 주된 위험성을 설정해 왔다. 따라서 베트남의 독립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호치민 정부는 우리에게 불시에 엄청난 재난을 입히려고 침략의 도움을 빌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와 교섭하는 것은 항복이나 다름없으며, 그것은 안남 전지역에서뿐만 아니라 인도차이나의 다른 나라들과 극동아시아에서까지 단기간에 프랑스의 영향력이 제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위신은 이러한 포기에 저항할 수 없을 것이며, 만약 우리가 수행해야 할 가장 높은 요직들과 함께 우리에게 고유한 영역을 벗어나게 된다면, 우리는 프랑스 제국의 붕괴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호치민 정부와 협상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위치와 교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와 싸우지 않을 수 없다." 1945~1946: 혁명 속의 인도차이나 은행 인도차이나에서 상황은 가장 혼란스럽다. 인도차이나 은행장 장 로랑은 대독 레지스탕스 운동을 함께한 인연으로 장 생트니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프랑스의 통제권을 벗어난 지역에서 북베트남의 실제 상황을 살피고 은행의 이익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그는 하노이에서 하노이 지점장인 베이랭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중국 고위층들과 폭넓게 교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랑은 아주 값진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가 1945년 12월 8일에 에밀 미노에게 보낸 편지로 보아, 로랑은 별로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 월맹운동의 정확한 성격을 파악했으며, 사이공의 정치권과 식민군대가 통킹의 상황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혼자 알고 계십시오. 1. 고등판무관은 통킹에서 일어난 일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등판무관의 대표들은 통킹에 간 적이 전혀 없으며, 여기에 올 생각도 거의 없는 모양입니다. 따라서 명령을 내리는 것은 사이공 정부측의 의견이죠. 그들은 인도차이나 문제를 군사문제로 여깁니다. 장갑차와 유격대, 전격전 같은 것들로 말이죠. 제 생각엔 이것은 정치적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산타도밍고의 원정대를 다시 파견해야 하는 위험에 처할 겁니다. 2. 통킹은 언제나 인도차이나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그곳은 자신들의 사실상의 정부를 존속시키려고 애쓰는 안남 인텔리겐치아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저항운동에 국가차원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이 정부입니다. 따라서 정부가 없다면, 이들의 운동이란 것은 단지 포울로 콘도레에서 탈옥한 자들의 약탈행위에 지나지 않겠지요."(1945년 12월 8일, 에밀 미노에게 보내는 장 로랑의 자필 편지) 통킹의 은행지점들은 위험에 처해 있었다. 월맹 정부와 중국 군대의 영향권 안에 있었으며, 또한 코친차이나에 근거를 둔 프랑스 당국의 지시도 받고 있었다. 은행을 서로 손아귀에 넣으려는 적대적인 술책에 직며나여, 장 로랑에게는 베트남 혁명파들의 통제에서 자신의 은행을 구해내야 한다는 단 한가지 걱정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1945년 말의 상황에서 월맹을 위압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중국 점령 당국의 이해타산적인 지지를 확실히 해두기로 했다. 11월 14일, 중국군 수뇌부가 프랑스 사절단을 소집하여, 점령비용 명목으로 매달 5500만 피아스트르를 요구한다고 통고했을 때, 장 로랑은 '만일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은행과 북부의 지점들이 안남의 통제권 속으로 들어가면,' 월맹은 현금보유고를 모조리 강탈하여 저항운동의 자금으로 쓸 것이기 때문에 '점령비용이 얼마가 되든, 프랑스 경제에는 이것보다 훨씬 더 비싸게 먹힐 것'임을 강조하며 이를 수락하라고 권고했다. 하노이에 주둔해 있는 휴전 위원회 프랑스측 대표단장인 알레상드리 장군도 로랑과 의견을 같이하여, 마침내 고등판무관에게서 은행은 4500만 피아스트르를 납부하라는 지령을 얻어냈다. ... 전쟁이 종결된 지 몇 달 후, 인도차이나 은행의 책임자들은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무력으로 주권을 회복하리라는 기대는 현실성이 없음을 깨달았다. 장 로랑의 여행과 폴 가네의 편지들을 통해서 그들은 눈을 떴고, 그래서 이번에는,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정주할 권리를 인정받는 협상의 결과에 희망을 걸었다. 은행의 고문서실에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정치를 수립하는 것에 관해 정치권과 은행 고위층들 간에 있었던 접촉을 언급한 문서는 보존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확실히 모종의 접촉이 있긴 했다. 에밀 미노, 장 로랑, 그리고 다른 주요 행정가들이 자문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있음직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 로랑 같은 영향력 있는 인사가 내각에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은행은 공권력의 은혜를 별로 입지 못한다. 바다 건너 프랑스 중앙은행이 헐뜯고, 식민체제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파들이 비판을 퍼부었다(이들은 은행이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제도라고 보았다). 이처럼 점점 가중되는 압력을 받아 자신의 특권을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도차이나 은행은 인기 있는 협상상대자가 되지 못했다. 또 다른 관점으로는, 인도차이나 문제에 관해서 당시 지도층에는 혼란이 만연했다고 볼 수 있다. 내각이 불안정하고, 식민지와 본국 간의 거리가 너무 멀었으며, 몇몇 세력가들의 손에서 좌지우지되어, 1945~1946년 사이에 베트남 민중의 다양한 위탁기관에 대한 프랑스 당국의 정책에는 거의 일관성이 없었다. 그 한 예로,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수석 대표인 티에르 다르장리외 자신도, 1946년 봄에 있었던 호치민과의 협상에서 프랑스 정부측의 실제 의도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명확한 것이 하나도 없는 분위기 속에서, 은행 역시 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호치민의 글 베트남 주권 회복의 찬가 지금 위대한 프랑스가 승리를 자축할 때 그리고 기쁨이 민중에게 퍼져 모든 것이 즐거움으로 충만할 때(기쁨이 세상에 가득할 때) 어찌 우리의 마음이 나라 안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으랴? 인간인 우리들은 우리 조국과 민족을 사랑해야 하고, 유럽인들을 바라보아 우리의 모범으로 삼아야 하리. 그들의 집은 부서지고 그들에게 소중한 재산은 고갈되었을지 몰라도 그들은 나라를 구했네. 그러한 민족을 그 누가 존경하지 않으리오? 그들의 충성심에 관한 소문이 세계 만방에 끊임없이 알려지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 그들은 열을 얻었으니 우리 역시 열 개쯤 얻어야 하리, 그러면 우리는 진정 성공한 것이리. 이 피눈물 젖은 한 장의 종이가 우리 감정을 나타내니 모두 나서서 자유를 요구하세. 우리 마음을 모으세! 우리를 이해해줄 것을 바라며. 서명: 응웬 아이 꾸옥 인도차이나의 미래 감히 확언합니다만, 만일 프랑스 정부가 인도차이나 정책을 바꾸지 않는다면... 인도차이나 민중, 특히 안남과 통킹의 안남 사람들은 무력을 써서라도 당국이 현행 행정양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도록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불행한 상황을 조금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예견할 수 있어요. 눈앞에 선히 보이는군요. 피가 낭자하겠지요. 틀림없이 수많은 안남인들이 죽어갈 겁니다. ... 모든 진보는 혁명을 필요로 하지요. ... 정부가 현상황을 변화시켜 주기를 기대하다가는 아마 평생 기다리기만 할 것입니다. - 응웬 아이 꾸옥과 판 짜우 찡과의 대화 공산주의와 아시아 공산주의 체제가 일반적으로 아시아에, 특수하게는 인도차이나에 적용될 수 있을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관심을 끄는 문제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긍정적인 답변을 할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리적으로 아시아 대륙의 현상황을 검토해야만 한다. 프랑스의 80배가 넘는 드넓은 땅덩어리(4500만km제곱)와 8억의 인구를 지닌 이 거대한 대륙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아시아의 모든 나라 가운데 일본만이 유일하게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라는 전염병에 심각하게 감염되었다. 러일전쟁과 한일합방에 이어 '극우파'전쟁에 동조하면서 이 병은 점점 더 염려스러운 것이 되었다. 일본이 치유 불가능한 서구화의 심연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다시 말해 일본 열도에 자본주의가 깊숙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사회당이 막 창립되었다. 모든 부르주아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미카도 정권은 사회주의 운동과 싸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노동자들의 힘이 그렇듯, 일본 사회당의 힘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일본의 도시에서 사회주의 대회 개최가 금지되자, 파업과 민중시위가 일어났다. 유럽과 미국 자본의 황금송아지 노릇을 해왔고 지금도 그러한 중국은 이제 깨어나고 있다. 남부에서 혁명가 순 얏센이 정권을 잡음으로써 중국이 재조직되어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두 자매(새로운 중국과 노동자의 나라 러시아)가 민주주의와 인류애의 공익을 위해 손을 맞잡고 다정하게 전진할 것을 기대하는 것도 지나친 일은 아닐 것이다. 다음으로는 고통받고 있는 아시아 국가를 살펴보자. 불쌍한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 인구가 굉장히 많고 매우 풍요로운 나라인 인도는 영국 착취자들의 노예가 되어 있다. 다행히도 해방을 향한 의지가 억압받는 민중을 일깨워서, 혁명운동이 강력한 힌두교도와 한국의 모든 영혼을 격려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서서히, 그러나 현명하게 궁극적인 해방의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면 인도차이나는 어떤가? 인도차이나는 프랑스 자본주의에 착취당하고 있으며 몇몇 비곗덩어리들의 배를 불리는 데 봉사하고 있다! 그들은 인도차이나 사람들을 정당한 이유도 없이 제국주의의 푸줏간에서 살해하도록 명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술과 아편으로 인도차이나인들을 중독시킨다. 그들은 인도차이나인들을 무지 속으로 몰아 넣었으며(1000개의 마약판매소가 있는 지역에 학교는 단 10개뿐이다), 부르주아 문명의 단맛을 보도록 여러 음모들을 꾸며놓았다. 사형대에서, 감옥에서, 혹은 유형지에서 말이다! 7만 5천km제곱, 한줌의 제국주의 악당들의 잔인한 착취에 매어 있는 2000만 명의 인구, 그것이 베트남의 현실이다. 공산주의가 유럽에서보다 아시아에서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역사적 이유를 보자. 아시아인들은, 서양인들은 비록 우리를 후진적 민족이라고 여기지만, 현사회를 변혁할 필요성을 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미 5000년 전(B.C. 2697)에 황제 호앙 데는 띵디엔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것은 경작지를 수직과 수평으로 각각 두 개의 선을 따라 나누는 것으로, 여기서 생긴 9개의 땅 중 8개는 경작자들에게 나누어주고, 가운데 있는 나머지 땅은 공동경작하여 그 생산물은 모두가 필요할 때 쓰는 제도이다. 그리고 땅을 나눈 선은 물을 대는 수로로 이용되었다. 히아 왕조(B.C. 551년)는 국제주의를 권했으며 재산의 공유를 설파했다. 그는 특히 세계평화는 보편공화국이 세워질 때에만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적게 가지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공평하게 가지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했고, 평등이 가난을 사라지게 할 것이라고도 했다. ... 사유재산 제도는 어떠한가 보자. 안남의 법은 토지의 완전한 매매를 금하고 있다. 게다가 경작지의 4분의 1은 의무적으로 공공재산으로 남기도록 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 땅을 3년마다 분할하여 주민들 각자에게 한 부분씩 나눠준다. 그렇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머지 4분의 3에 해당하는 땅은 매매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극빈자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동지들 중에 공산주의를 전파하기를 열망하며, 진정 모든 노동자들이 착취의 질곡에서 벗어나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공동 전당에 들어설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들을 위해 우리에게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여기서 밝히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효율적으로 우리를 도울 수 있도록 말이다. 공산주의자가 되기에 우리에게 부족한 것들은 바로 가장 기본적인 행동의 조건들이다. 출판의 자유 여행의 자유 교육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우리를 개화시킨다는 식민주의자들은 야만스럽게도 이 모든 것들을 금지하고 있다. 박해받고 억압당한 수억의 아시아인들이 깨어나 탐욕스러운 식민자들의 야비한 착취에서 벗어나게 되는 날, 우리 아시아인들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자본주의의 존재조건인 제국주의를 소멸시킴으로써, 서양의 형제들을 도와 총체적인 해방을 이룰 것이다. - 응웬 아이 꾸옥 1924년 응웬 아이 꾸옥이 본 혁명가의 팔랑스케르(푸리에가 주창한 공동생활 단체), KUTB(동양 노동자 대학) 이 대학은 오늘날 1025명의 학생을 헤아리며 그중 151명은 젊은 여성이다. ... 150명의 교수가 사회과학, 수학, 사적등을 가르친다. 62개국에서 온 젊은이들은 연구실에서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다. 4만7천여 권의 책이 있는 두 도서관에서는 젊은 혁명가들이 연구를 심화하고 사고를 키운다. 이들 학생들은 모두 시련을 겪었고 시련에 처한 조국을 본 사람들이다. 그들 모두는 '고등 문명'의 지배 속에서 살았으며 외래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를 겪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열정적이고 진지하다. 이 대학의 지붕 아래 식민지 민중의 미래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설립에 부치는 호소 노동자, 농민, 군인, 그리고 청년 학생이여! 억압고 착취의 굴레에 묶인 동포여!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설립되었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노동계급의 당이다. 당의 인도 아래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억압받고 착취당한 사람들을 위하여 혁명을 선도할 것이다. 바로 지금부터 우리의 임무는 당에 가입하여 당을 돕고 당을 따라 다음과 같은 강령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1. 프랑스 제국주의, 베트남의 봉건제와 반동적 부르주아를 전복시킬 것.2. 인도차이나의 완전무결한 독립을 쟁취할 것.3. 노동자, 농민, 그리고 군인들의 정부를 구성할 것. 4. 제국주의적 은행과 회사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 재산을 노동자, 농민, 군인들의 정부의 통제하에 둘 것.5. 제국주의자들과 베트남의 반동 부르주아들의 모든 농장 및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줄 것.6. 여덟 시간 노동제를 채택할 것.7. 가난한 사람들에게 타격을 주는 강요된 부채와 봉건적 인두세, 부당한 세금등을 탕감할 것.8. 다수를 위한 민주적인 자유를 실현할 것. 9.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기회를 줄 것.10. 남녀평등을 실현할 것. 옥중시(1942~1943년) 옥중일기 몸은 감옥에 있으나 정신은 감옥에 있지 않으니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정신건강을 잘 유지할 일이다. 저녁 해가 떨어지고 저녁식사가 끝난 후 곳곳에서 찬가와 노랫소리 들릴 때, 어스름하고 쓸쓸한 칭시의 감옥은 이내 고귀한 도량으로 변한다. 내 자신을 격려함 겨울의 추위와 비탄과 죽음이 없다면 어느 누가 감미로운 찬란함을 지닌 봄을 볼 수 있으랴. 운명은 내 정신과 심장을 굳건히 하기 위해 나를 불행의 구덩이에 다시 넣은 것이다. 벼 찧는 노래 내리찧는 절구대 밑에서 볍씨는 빻아지지만, 고통이 지나면 그 흰빛이 감탄스럽다! 진정한 인간이 되려면 불행이라는 절구가 있어야 한다. 잠들 길 없어라! 하룻밤 새고 또 하루... 사흘 밤을 꼬박 새운다... 잠들 길 없어라... 고통스럽게 뒤척인다... 나흘, 닷새 밤...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별빛만이 머릿속을 맴돈다. 어느 저녁의 대기 장미꽃은 자신이 무얼 하는지도 모르고 피었다간 시든다. 이 밀폐된 곳의 한가운데 세상의 모든 불의가 울부짖게 하기 위해서는, 감옥에 장미향이 떠도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밤이 오는 시간 숲 속을 누비던 새도 지쳐 자기 둥지를 찾는구나. 천천히 구름 한 조각 외로운 하늘을 떠도네. 마을 처녀가 옥수수를 찧는 동안 불그레한 불씨 하나 피어나네. 실패의 놀이 출발의 균형이 불확실한 결과를 가져온다. 승리는 결국 한편으로 기운다. 한수 한수 준비하고 계획을 잘 숨겨라. 그러면 위대한 장군이 될 만하다. 우리 민족의 역사 국면이 우리에게 유리하다. 떨쳐 일어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되찾으세. 그들은 적고 우리는 많으니 한 심장으로 뭉친다면 승리는 우리 것! 용의 아들과 불멸의 자손들에게 호소하노니 재빨리 강건하게 뭉쳐라. 남녀노소, 빈부 가릴 것 없이 뭉치자. 누구는 힘을 가져오고 누구는 돈을 가져오고, 우리 함께 우리 주권을 되찾으세. 민족을 위해, 그리고 가정을 위해. 원대한 포부와 덕과 영광이 있네. 우리의 월맹이 있어 우리 투쟁을 이끌어준다. 이 과업이 완수되면 베트남의 이름은 락 홍의 이름과 똑같이 빛날지니 하나됨이라는 말을 기억하세. 하나된 감정과 하나된 힘과 하나된 용기와 하나된 맹세를! 호랑이와 코끼리의 전투 그렇다. 우리는 싸우러 나가야 한다. 프랑스인은 조약 하나에 서명을 해놓고 깃발을 흔들고 있지만 그건 다 가장무도회에 불과하다. ... -그러나 당신들은 무기, 특히 근대식 무기가 없지 않은가? -꼭 필요하다면 마련할 수도 있다. ... 혹시 최근에 누더기를 걸친 부대가 근대식 부대를 상대로 무엇을 했는지 잊은건 아닌가? 또한 독일군을 상대한 저 유고슬리비아 빨치산들의 영웅적 투쟁을 잊을 수 있는가? 인간의 정신은 인간이 가진 무기보다 강하다. 이 전쟁은 호랑이와 코끼리와의 싸움일 것이다. 어느 때고 호랑이가 멈춰 선다면 코끼리는 힘센 상아로 호랑이를 뚫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호랑이는 멈춰 서지 않는다. 낮에는 정글 깊숙이 몸을 숨겼다가 밤이면 나타나서는 코끼리의 등에 올라타 등을 죽죽 찢어놓고는 또다시 어두운 정글로 사라진다. 그렇게 코끼리는 서서히 힘이 빠지고 출혈이 지속되어 죽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나라는 그 민중에 기반한다. 국가적 항쟁과 국가의 재건을 위한 본질적 힘은 민중에게서 나온다. 마찬가지로 군대의 모든 전투원들, 그리고 정부조직에서 일하든 민간조직에서 일하든 모든 관료들은, 민중과 관계를 맺을 때나 그들과 공동생활을 할 때, 다음 열두 가지 조항을 염두에 두고 실행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할' 여섯 가지 1. 주민의 정원, 토지, 경작지에 해를 입힐 만한 어떤 짓도 하지 말 것. 또한 주민의 집과 가구를 더럽히거나 파손하지 말 것. 2. 사람들이 팔거나 빌려주기 싫어하는 것을 사자거나 빌려달라고 지나치게 우기지 말 것. 3. 산에 사는 우리 동포가 기르는 가금을 가져오지 말 것. 4.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 말 것. 5. 민중의 믿음이나 풍속을 해치는 일을 하지 말 것. 즉 조상의 제단 앞에서 자지 말 것, 화덕에 발을 올려놓지 말 것. 집에서 음악을 연주하지 말 것 등등. 6. 주민들을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어떤 짓도, 어떤 말도 하지 말 것. '해야 할' 여섯 가지 1.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도울 것(수확, 땔나무 하기, 물긷기, 가구 수선 등). 2. 자신이 가진 운송수단을 이용해 시장에서 멀리 사는 주민들에게 물품들을 사다 줄 것(칼, 소금, 실, 바늘, 붓, 종이등). 3. 여가시간을 활용하여 재미있고 간단하지만 항쟁에 도움이 되는 일화들을 국가방위의 기밀을 누설하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해줄 것. 4. 알파벳과 일상 위생의 개념을 가르칠 것. 5. 주민들을 잘 이해하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공감을 사기 위해 지역의 풍속을 배울 것. 그리고 나서 점차 왜 미신을 보다 멀리해야 하는지 설명할 것. 6. 주민들에게 우리가 진지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규율을 잘 지킨다는 인상을 남길 것. 교육한다는 것 아무나 교육의 직무를 맡을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대장장이나 조립공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교육자 자신이 대장일이나 조립에 몸을 담은 사람이어야만 하듯이, 대중조직에 속해 있는 교육자는 이념, 윤리, 일에 관한 지식등 어느 모로 보나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교육자는 임무를 확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언제나 먼저 배워야만 한다. 레닌은 우리에게 "배우고, 또 배우고, 늘 배우라."고 권고하고 있다. 우리 각자는 이 충고를 명심하고 실행에 옮겨야만 하며, 다른 누구보다도 교육자는 더 그렇게 해야만 한다. 모든 것을 아는 체하는 교육자는 가장 무식한 사람보다도 못하다. 회의실에 걸려 있는 "공부하고 또 공부하며 가르치고 또 가르치라."는 말은 공자의 말이다. 공자는 봉건시대 사람인지라 그의 교의에는 옳지 못한 것도 많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속에 함축된 교훈을 이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진정한 혁명가만이 지난 세대에서 전수된 귀중한 지식들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레닌이 가르쳐준 말처럼 말이다. 제네바 협상을 위하여 협상에 임할 때에는 서로 합리적인 양보를 해야만 한다. 과거에 우리는 프랑스 파견대를 끝까지 쫓아 섬멸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협상중에 있으며, 규정된 날짜에 프랑스 군대가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프랑스인은 이를 받아들였다. 예전에는 우리에게 프랑스 연합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상호평등과 자유로운 동의라는 원칙 아래 경우에 따라서는 프랑스 연합에 참여하는 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 예전에 우리는 국가의 통일을 위해 괴뢰정부와 군대의 섬멸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관대한 조치를 앞세운다. 즉, 나라 전체에 걸쳐 보통선거를 실시하여 국가의 재통일을 이룬다는 것이다. 평화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전쟁을 끝장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휴전협정이 필요하다. 휴전협정을 하려면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바로 지역의 경계를 다시 정하는 것이다. 즉 적군은 점진적으로 철수하기 위해 모두 한군데 집결해야만 한다. 이에 따라 아군 역시 다른 장소에 집결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군사력을 확립,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조건을 모두 결집시키고, 또 이것이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쳐서 나라 전체의 통일을 촉발시킬 만한 넓은 지역이 필요하다. 군대의 재집결에 따라 지역을 분할하는 것이 나라의 분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조국의 통일에 이르기 위한 임시조치일 뿐이다. 경계가 획정되고 각 집결지가 정해지면, 일시적으로 적군이 점령할 지역에서 그때까지 자유롭게 살던 주민들의 불만이 생길 소지가 있다. 일부는 적에게 착취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사태를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나라 전체의 영구적 이익을 위해 일시적일 뿐인 현상황을 견뎌야 한다는 점을 이해시켜야 한다. 국민에게 호소함 마지막으로 미국의 침략자들은 하노이와 하이퐁 주변을 공격했다. 이것으로써 그들은 침략의 아주 심각한 새로운 단계를 넘어버렸다. 이것은 절망에 찬 행위요 치명적으로 상처입은 야수의 발작이다. 존슨과 그의 하수인들은 남베트남에서 침략전을 강화시키기 위해 50만, 100만, 아니 그보다 더 많은 병력을 보낼 수 있다느니, 북쪽에 공격을 더 퍼붓기 위해 수천의 비행기를 띄울 수 있다느니 떠들어대지만, 그들이 아무리 악을 써봐야 그들은 국가의 안녕을 위해 미국의 침략을 무찌르고자 하는 우리의 강철 같은 의지를 결코 꺾을 수는 없다. 그들이 더 공격적이면 공격적일수록, 그들의 죄악은 더 무거워진다. 전쟁은 아직도 5년, 10년, 20년, 아니면 그 이상 지속도리 수도 있고, 적의 폭격에 깔린 다른 수많은 도시와 지역들처럼 하노이, 하이퐁도 파괴될 지 모르지만, 우리 베트남 사람들은 절대로 기가 꺾이지 않을 것이다. '독립과 자유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며 승리한 이후 우리나라를 더 좋고 더 크고 더 아름다운 나라로 재건할 것이다. 호치민 유언장의 원본 호치민의 유언장에는 네 개의 이본이 있다. 아래의 것은 1965년 5월 15일 작성된 원본으로, 호치민이 사망한 이후 정치국은 원본 작성 당시에는 진행중이던 전쟁에 관한 부분을 머리말로 옮겨놓는 등 이를 재편집했다. 그리하여 이 유언장은 정치적 무기로 탈바꿈하게 된다. 특히 호치민이 화장을 요구한 부분은 삭제되었으며 대신 그는 커다란 묘에 안치되었다. 베트남 민주공화국 독립, 자유, 행복 (비밀) 75회 생일에 부쳐 일찍이 중국 당나라의 위대한 시인인 두보는 "인생칠십고래희"라 했다. 올해 나는 일흔다섯이다. 아직 정신이 말짱하고 건강이 좋지만 나는 이미 그 '자고로 드문' 사람들에 속한다. 내가 몇 달이나, 몇 년이나 더 살 것이며 당과 혁명과업에 얼마나 더 봉사할 수 있을 것인지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으랴. 그리하여 존경하는 카를 마르크스, 블라지미르 일리치 레닌, 그리고 먼저 간 우리 혁명 제위들을 만나러 갈 날에 대비하여 간단하게 몇 자 적는 것이니 모든 동포들과 당의 동지들은 놀라지 말 것이다. '먼저 당에 대해 말하겠다.' 우리 당은 긴밀한 단합력과 노동자 계급과 민중, 조국에 대한 전적인 헌신 덕분에 창립 이래로 우리 민족을 단결시키고 조직하여 열과 성을 다해 그들을 투쟁으로 이끌었으며 승리에 승리를 거듭할 수 있게 했다. '하나됨'은 당과 민족의 지극히 고귀한 전통이다. 중앙위원회에서 하위세포에 이르는 모든 동지들은 당의 단합과 하나됨을 눈동자처럼 소중히 간직하자. 당차원에서 광범위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성실한 '자아비판과 비판'을 정기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단합과 하나됨을 굳건히 발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동지들의 유대는 동포애적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권력을 쥐고 있는 당이다. 당원 각자와 관료들 각자가 '혁명윤리'를 깊이 체화해야 하고, 근검절약과 청렴, 공명정대, 공적인 일에 헌신하는 등 진정한 모범을 보여야 한다. 당의 완벽한 순수성을 지켜야 하고 스스로 지도적 위치에 설 만한 격을 지녀야 하며 인민에 진정 충실한 공복이 되어야 한다. '노동청년단원과 우리 젊은이들'은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으며 모든 임무를 열성적으로 수행한다. 그들은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우리 당의 그들에게 '고양된 혁명적 윤리'를 차근차근 가르쳐 그들을 사회주의 건설의 '붉은', 그리고 '숙련된' 전수자로 양성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장래의 혁명세대들을 육성하고 교육하는 일은 지극히 중요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산악지대와 평야에 사는 우리 노동자 인민들은 수세기 동안 수많은 고초를 견뎌왔다. 그들은 봉건제도와 식민지의 착취와 억압을 겪었으며 게다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겪었다. 그럼에도 우리 민중은 언제나 영웅적 투쟁과 용기와 열성, 그리고 근면함으로 놀랄 만한 모범을 보여왔다. 그들은 당이 창립된 이래로 당을 따랐으며 늘 충성을 바쳐왔다. 당은 끊임없이 '만중의 삶의 수준을 높이고'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훌륭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미국의 침략에 맞선 항쟁'은 아직 몇 년 더 지속될 것이다. 우리 동포는 아직 수많은 목숨과 재산의 희생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완전한 승리의 그날까지 침략자 미국에 항거해야 한다. '우리의 강, 우리의 산, 우리 국민들은 언제나 변치 않으리니, 양키를 무찔러 지금보다 열 배 더 아름다운 나라를 세우리라!' 난관과 궁핍이 아무리 심하다 해도 우리 민족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미제국주의자들은 틀림없이 줄행랑을 칠 것이다. 우리 조국은 분명 다시 통일될 것이다. 우리 북과 남의 동포들은 확실히 한 지붕 아래 모여 살 것이다. 우리나라는 영웅적인 전투를 통하여 두 거대한 제국주의자들(프랑스 제국주의자와 미제국주의자)을 무찌르고 민족 해방운동에 값진 기여를 한 작은 나라라는 빛나는 영광을 누릴 것이다.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관하여' : 일생을 혁명에 바친 나로서는 국제 공산주의와 노동자 운동이 성장해 가는 것을 보며 긍지를 느낄수록, 형제 당파 간의 불화를 보는 것이 더욱 고통스럽다. 나는 형제 당파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토대 위에 이성과 가슴이 요구하는 대로 다시 화합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 당이 모든 힘을 기울여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를 빈다. 나는 형제 당과 국가들이 반드시 다시 단합하게 될 것을 강력히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 개인적 문제에 관하여 :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 달라. 나는 화장이 점차 일반화되기를 바란다. 위생상 좋고 땅도 절약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전기가 풍부해지고 '전기화장'도 할 수 있고, 여러모로 그게 더 나을 것이다. 재는 언덕에 뿌려 달라. 탐다오와 바비 근처에 좋은 언덕이 있는 듯하다. 재가 뿌려진 곳 위에는 단순하고 넓고 튼튼하며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언덕에 '짙푸른 나무 숲'을 꾸미도록 하라.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나무를 심는 것이다. 나무가 잘 자라려면 나무 하나 하나에 수고를 들여야만 할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고, 그러면 경치가 더 좋아지고 농업에도 이로울 것이다. 만일 내가 나라가 통일되기 전에 죽게 되면 재의 일부를 남베트남 동지들에게 전해주라. 마지막으로 우리 인민 모두에게, 우리 당과 군인 모두에게, 내 조카와 사촌들,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에게 끝없는 애정을 보낸다. 또한 내 동지들과 친구들과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에게도 형제로서 같은 축복을 보낸다. 내 마지막 희망은 우리 당과 인민 전체가 단단히 뭉쳐 평화 베트남, 통일된 독립 민주 베트남, 번영된 베트남을 건설하여 세계혁명에 값진 기여를 하는 날까지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포올로 콘도레섬의 감옥 수백 명의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1930년에서 1934년에 걸쳐 포울로 콘도레에 도착했을 때, 이곳은 반역과 난잡, 태만, 난폭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매우 잘 조직된 이들이 이 감옥을 공산주의 대학으로 탈바꿈시켰고 혹독한 단식투쟁을 이끌었다. 인도차이나의 추억 감미로운 하노이 생활 사이공에서도 그렇지만 하노이나 하이퐁에 새로 도착한 유럽인이 치러야 할 큰일은, 조금도 곤란하지 않도록 지어진 '공관', 혹은 임대한 집으로 짐을 옮기는 것과, 식민지에 사는 본국인들의 생활에 적응된 하인들을 선택하는 일이다. 먼저 하인들을 고용해야 하는데 대개는 지원자가 넘치는 형편이다. 하인을 고르기 위해서는 직관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먼저 온 사람들의 충고를 다소간 참작하는 것이 좋다. 보통 훌륭한 요리사는 중국인뿐이며 말레이시아인은 착실한 마부라는 점, 카톨릭 신자는 피하라는 점, 그리고 봉급은 관례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점등은 받아들일 만하다. 대부호이든 말단 공무원이든 하나의 '하인단'을 구성하는 여섯 명의 하인을 다룰 때는 품위 있는 말투를 써야 한다. 그들은 가르쳐야 할 '몸집만 큰 아이' 취급한다든가, 체벌 등 가혹행위를 규칙삼아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 대가를 받는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하인에게 호령하는 일에 금방 싫증을 느껴 그 특권을 포기하는데, 그러면 친절한 봉사를 받게 된다. '벱'은 부엌에서 최고 실세로 군림하며 간섭을 못 견딘다. 또한 "간단한 부엌살림 집기는 그에게 맡겨버리고, 장보는 비용을 많이 불러 남겨먹는 것도 눈감아줘라. 그러면 남들보다 못할 것도 더할 것도 없이 그런대로 먹는 일은 말썽없이 해결된다." '아마'는 항상 중국 여자인데, 아이를 돌보는 일을 맡으며 다른 사람과 함께하려들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이 절대 실수하지 않고 늘 주의를 기울이며 양심적으로 일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장난꾸러기들의 모든 변덕을 다 받아주는 그들의 교육방식에 적응해야 한다. 그러니 그들의 아이들이함부로 말썽을 피워도 놀라지 마라! 다른 하인들의 임무는 그렇게 딱 구분되어 있지는 않다. '사이스'(마부), 빨래꾼, 세 쿨리(인력거꾼), 정원사 쿨리등. 그리고 소년 선원으로, 배의 물을 퍼내는 등 잡일을 담당하는 천덕꾸러기 '베콘'이 있다. 이제 집안일은 신경 쓰지 않고, 나으리는 일에 전념하고 마님은 한가로이 노닐어도 된다. 1885년에 하노이에 공공 교통수단이 처음 생겼다. 세 마리 노새가 끄는 정기 마차가 프랑스인 거류지와 성곽 사이의 세 방향을 매일 세 번 연결해 준다. 이 마차는 관리와 군인들만이 이용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걸어가거나 말을 타고 가야 했다. 당시에는 마차가, 주교 퓌지니에 각하 마차와 버들가지로 차체를 만든 리비에르 장국 소속의 4륜마차, 단 두 대 만 있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는 4인승 마차와 4륜무개차는 더 이상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요즘은 마차 대신 이상적이며 경제적인 인력거를 많이 사용한다. 보날 공사가 일본에서 두 대를 처음 들여왔는데 곧 여섯 대가 되었다. 인기가 좋아 전날에 미리 예약을 해야만 이용할 수 있다. 시간당 15센트(0.6프랑), 한나절 내내 쓰면 1피아스트르(4프랑)이다. 그후 코친차이나에서 온 어느 서기가 최초로 인력거 운송회사를 차렸고, 유명 인사들은 50피아스트르 하는 '나리'용 개인 인력거를 장만하고 싶어한다. 점심식사 후에는 낮잠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많이 자서 때로는 "오전 9시에 낮잠을 자기 시작해서 해가 질 무렵에야 깬다."고 쓸 정도이다. 1891년에 신문들은 '대낮의 휴식 세 시간'을 지속시켜야 할지, 금지해야 할지 논쟁을 일으킨 적도 있다. 그후 1900년에 쿠르투아 박사는 "낮잠을 자면 멍청해진다. 낮잠보다 건강에 더 해로운 것은 없다. 낮잠은 대부분의 경우 식욕부진과 여러 질환을 일으키며, 사람을 지적, 신체적으로 급속히 쇠약하게 한다."며 낮잠을 비판했다. 그렇지만 그도, 무더운 날에는 "집에서 긴 의자에 몸을 누이고 재미난 신문이나 소설을 읽는 것이 현명하고, 강가에 산다면 피곤하지 않을 만큼 노를 젖는 것은 더욱 좋다."고 덧붙인다. 또 "5월에서 11월 사이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집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니 참! 물론 "유럽인이 낮잠 자는 일을 그만두는 것은 상당히 힘들겠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녁 6시가 되면 한두 잔의 압생트를 앞에 놓고 모임을 갖는다. 1900년경 사람들은 꼭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곳이나 훌륭하게 보여야 할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이 밤 생활의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점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안락함은 작위적이고 넉넉함은 표면적이다. 모두들 사교생활에 필요한 그 모든 것들을 다 갖고 싶어하고, 극장에 경마장에 그리고 모든 무도회에 가고 싶어하며, 좋은 옷을 입고 멋들어진 홀에서 사람들을 맞이하고 싶어한다. 가계부가 압박해 와도 마님은 신경 쓰지 않고 바깥 양반은 카페나 모임에 나가고 없다. 현금거래를 하지 않는 이 고장에서는 물건 사기가 쉽고 따라서 계산서는 단골 거래처에 고통스럽게 남아 있다. 수표거래가 더 많은 지출을 만드는 것이다." 그 결과 수입물품의 가격은 비싸다. 그중 포도주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1888년의 경우 수입액 230만 프랑). 포도주는 하이퐁에서 큰 통 하나에 33에서 40피아스트르(132~160프랑), 고급품일 경우 45~70피아스트르(180~280프랑)에 팔린다. "포도주는 병에 담기만 하면, 바다를 건너도 품질은 훌륭히 보존된다. 그렇지 않으면 알코올 도수를 높여야 한다." 의학적 관점에서 포도주의 소비를 권장하고 있지만 "발스나 부상의 광천수로 희석시켜서 마셔야 한다." 농축우유는 스위스나 영국에서 오고, 자연우유는 노르망디에서, 분유는 미국과 호주에서 온다. 통조림과 맥주는 프랑스에서, 철물은 독일에서 온다. 여기에 사치품들, 옷감이나 향수, 보석 등 안 사고는 못 배기는 물건들이 추가된다. 또한 유럽인이 진 부채가 위험한 수준까지 이르러 한 신문이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영업허가를 받은 156명의 상인들 중에서 무작위로 골라보았다. 어느 포도주상은 12만 피아스트르의 외상장부가 있으며, 한 명뿐인 약사는 외상값이 10만 피아스트르 이상이었다. 어느 큰 호텔은 20만 피아스트르의 채권증서를 가지고 있으며, 어느 재단사는 10만 피아스트르, 한 서적상은 2만 5천... 어떤 사람들은 함부로 중국 식료품상에게 물건값을 치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500명 이하의 개인에게 35만 피아스트르의 빚이 있으며, 따라서 개인당 700피아스트르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들은 한 달에 평균 150피아스트르씩을 번다. 대출이 상업을 말살하고 있으며 사람들도 빚 때문에 죽어간다. 최근 자살률이 높아졌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인도차이나에서 보낸 어린 시절 상당히 높은, 고원 같은 평원이 있었어요. 북쪽에는 코끼리 산맥이 있었고, 남쪽은 마을도, 주민도 없는 물의 고장, 일종의 늪지대였어요. 바닷가에 홍수의 숲이 잇었는데, 물이 불면 수백 헥타르에 걸쳐 이 나무만 높이 솟아 있곤 했죠. 그래요. 제 어린 시절이었죠. 책에서 조제프라고 나오는 제 남동생과 함께 보낸 날들이었습니다. 제게는 오빠와 남동생이 있었는데, 장남인 오빠는 어렸을 때 같이 살지 못했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우리 삼남매를 키우기가 힘드셔서, 오빠는 (내 기억으로는) 전기 학교에 다니러 프랑스로 갔어요. 어머니는 어린 우리 두 남매만 직접 키우셨죠. 이해하시겠지만, 어머니는 극도의 절박감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먹고 사는 일이 너무 힘들어 절박감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정말 완전히 자유로웠는데, 둑 위에서 뛰노는 나와 내 동생만큼 자유로운 아이들을 이제껏 본 적이 없어요. 어머니는 우리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었고, 암 더 이상 자식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 우리들은 집에서 달아나 하루종일 밖에서, 그냥 나무 몇 그루 있는 곳이 아니라(웃음) 진짜 숲에서, 강에서, 바다로 나가는 조그만 급류인 '락'이라 불리는 곳에서 뛰어놀 수 있었죠. 사냥도 했어요. 여기 어린이들의 생활과 아주 달랐죠. 거진 베트남 사람이었어요. 지금 새삼 깨닫지만 우리가 당시 프랑스 사람, 아니 프랑스 국적이었다는 것은 옳지 않아요. 우리는 베트남 아이들처럼 베트남어를 썼고 신발은 전혀 신지 않았죠. 반은 벗고 살았고 강에서 멱도 감았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어요. 절대로 베트남어를 쓰지 않으셨죠. 어머니가 베트남어를 배운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으니까요. 나는 대학 입학 자격시험을 베트남어로 통과했죠.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나는 내가 프랑스인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어머니는 우리에게 "너희는 프랑스인이다."하고 여러 번 말씀하시곤 했죠. 어느 날 어머니가 사이공에 다녀오셨는데 레네트 사과를 가지고 오셨더군요. 그걸 뭐라 부르죠? 그 빨간 사과 말이에요. 미셜 포르트: 모르겠는데요. 마르그리트 뒤라스: 아무튼 어머니는 그 사과를 억지로 먹이시더군요. 우리는 그걸 삼킬 수가 없어서 "이거 못 먹는 목화 같아" 했죠. 프랑스 음식은 먹을 수가 없었어요. 열 살 때 프놈펜에서 비프스테이크를 억지로 먹었다가 토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식욕부진까지 걸렸어요. 우리는 정말 가시덤불이 무성한 밀림에서 살았던 거예요. 아, 이런 일은 종종 있지요. 당신이 어떤 곳에서 태어나고, 거기서 살고, 그곳 말을 쓰게 되는 것 등이요. 당신이 처음 배운 놀이가 베트남 아이들의 놀이라면요. 어느날 당신은 베트남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고, 따라서 베트남 아이들을 더 이상 만나지 말아야 하고, 신발을 신어야만 하고 스테이크를 먹어야 하고, 행실도 조심해야 하지요. 내가 이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의 일입니다. 아마도 지금일지도 모르겠네요. 추억의 인도차이나 열다섯 살 반. 강을 건너는 중이다. 나는 사이공에 다시 들어가고 있다. 나는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버스를 탈 때면 그렇다. 그날 아침 나는 어머니가 여학교 교장을 하고 있는 사덱에서 버스를 탔다. 방학이 끝나는 날이었는데, 어느 방학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방학을 지내러 어머니가 사는 조그만 관사로 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은 사이공의 기숙사로 돌아오게 되어 있던 날이다. 토착민용 버스가 사덱 시장 광장을 출발했다. 늘 그렇듯이 어머니는 나를 바래다 주었고 나를 운전사에게 데려다 준다. 교통사고, 방화, 강간, 도적떼, 나룻배의 치명적 고장 따위에 대비해 그녀는 언제나 사이공의 운전사들에게 나를 맡긴다. 다른 때처럼 운전사는 백인 전용석인 운전사 옆자리에 나를 앉힌다. ... 나는 나룻배를 타고 메콩강의 지류를 건넌다. 나룻배는 빈롱과 사덱 사이, 코친차이나 남부에 '새'라고 불리는, 진창과 논이 광활하게이 펼쳐진 평야 한가운데 떠 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린다. 나룻배 난간으로 간다. 나는 강을 바라본다. 대양으로 흘러내리는 메콩강과 그 지류들, 흐르고 흘러 마침내는 대양의 구덩이들로 숨어들어가 버리는 그 물의 영토들, 그것만큼 아름답고 거대하며 원시적인 강을 평생 어디서도 보기 힘들 거라고 어머니는 가끔 내게 말했다. 저 막막함 속을 강물은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마치 대지가 대양 쪽으로 기울어지기라도 한 듯. ... 그곳은 메콩강에서 끝나는 빈롱 거리들 중의 어느 하나였다. 그 거리는 저녁이면 언제나 황량하다. 매일 저녁 그렇듯 그날 저녁에도 정전이 일어난다. 모든 것은 정전으로 시작된다. 거리에 닿자마자, 내 뒤로 정면 현관이 닫히자마자, 갑자기 정전이 된다. 나는 달린다. 어둠이 무서워 달린다. 점점 더 빨리. 그러다가 언뜻 내 뒤로 다른 달음박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리고는 갑자기 누군가 나를 따라 달리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계속 달리면서도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본다. 아주 마른, 마치 송장처럼 마른, 키가 매우 큰 여자가 웃으며 달리고 있다. 그녀는 맨발로 나를 따라잡으려고 내 뒤를 쫓아 달려온다. 나는 그녀를 알아본다. 거류지의 미친 여자, 빈롱의 미친 여자이다.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밤이면 말을 하고 낮이면 잠을 잔다. 이 거리, 정원 앞에서, 그녀는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외치면서 달린다. 어찌나 무서웠던지 소리도 칠 수 없다. 분명 여덟 살 때의 일이다. 그녀의 울부짖는 듯한 웃음소리와 기뻐 날뛰며 내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히 나를 놀리며 즐거워하고 있다. 이 기억은 내 공포의 중심을 이룬다. 이 공포가 나의 이해력과 힘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해도, 그것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내달음질칠 수 있는 것은 그 여자를 송두리째 알고 있다는, 즉 제아무리 가볍게라도 그 여자의 손이 내 몸에 스치게 되면 이번에는 내 자신도 마치 송장과도 같은 아주 흉측한 상태, 미친 상태로 바뀌고 만다는 확신을 머릿속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다 보면 이웃집 정원이 보이고, 집이 보이고, 나는 계단을 올라 현관 입구에서 쓰러져 버린다. 그리고는 여러 날 동안, 나는 그날 일어났던 일을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다. 혁명의 서막: 20년대의 반란 빙, 찡, 포, 힌, 밍... 이들의 이름을 부르니 이들은 마치 독일 시에 나오는 밤의 퍼레이드에서처럼 앞으로 나오는 듯하고, 그러면 또 다른 플러시천으로 된 소파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가 "밤마다 12시가 되면 북치는 사람이 자기 무덤을 버리고... 종횡으로 행진한다."는 독일 시를 들려주는 장면이 떠오른다. 독일어 덕분에 되살아난 프랑스인 망령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나는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빙, 찡, 포, 한, 밍. 거의 꿈결같은 글을 쓰면서, 우리가 서로 마났던 지점에 가까워질 때, 내 어찌 당신들 주변에서 멈추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오래 전에, 당신들은 어떤 형식으로 당신 나라를 사랑했나? 사실 나는 그걸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당신들이 프랑스의 운명, 당신들이 주변에서 보던 사람드이 정말 제대로 대표하지 못했던 그 프랑스의 운명을 함께 나누길 원했다고 믿어왔다. 우리는 당신들을 얼마나 도와주지 못했던가! 너무나 자주 우리는 광적인 유치함의 소치로 우리의 이해와 당신들의 이해를 혼동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당신들 곁에서 싸우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설사 그것이 당신들을 사랑하는 것일 뿐이라도. 오늘날 살아 있거나 죽었거나 우리 친구였던 당신들, 당신들이 영웅이 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내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당신들, 우리가 함께한 작은 경험을 말하기 전에 이렇게 찬사를 보낸다. 판 짜우 찡은 내가 만났다기보다는 그저 몇 번 보았을 정도이지만, 당시 이미 자기 신념에 몸바친 사람이 누리는 명성으로 자자했다. 그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던 호치민처럼 응헤안 출신이다. 거의 모든 위대한 혁명가들이 이곳 출신이며, 서사적이며 서정적인 시를 쓴 아름다운 시임 킴 반 키에우 역시 이곳 출신이다. 제1차 세계대전 위엄과 도도함이 가득 찬 편지를 보내서 정의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이 격문을 보낸 후, 그는 농민대중을 해방시키고 경제발전에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한 긴 여정에 들어간다. 끝내 이 거물 지식인은 자기 민족을 위한 근대식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는 무모함의 극치였다. 그후 그에게 사형 이하의 형벌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인권연맹이 판사들에게 압력을 행사하자, 판사들은 짜우 찡을 포울로 콘도레의 감옥으로 보내는 것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시체가 그를 도와 그는 사면되었지만 추방당했다.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는 파리에서 사진사로 정착했고 사진정정사로 응웬 아이 꾸옥이라는 인물을 고용했다. 아이 꾸옥 역시 손재주가 뛰어나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도 했다. 나중에 아이 꾸옥은 호치민으로 이름을 바꾼다. 서른 고개를 넘은 응웬 판 롱. 부이 꾸앙 찌에우와 함께 입헌주의 당의 설립자. 이 당은 프랑스가 인정한 최초의 식민지 정당이다. 독학자이자 전 세무서 서기인 그는 나중에 교육자가 되었고 그후 안남에서 가장 훌륭한 신문인 <라 트리뷘 앵디젠>의 주필이 되었다. 그는 약간 고풍이긴 하지만 아주 깔끔한 프랑스어를 구사했다. ... 그의 요구는 특히 자국인들의 교육문제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고 있었다. 또한 이 사람은 체질적으로 윤리적으로 상당히 유연했지만 자기가 잘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큼은 엄격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드물고도 두드러진 경우였다. 한 때 그는 혁명의 나라인 프랑스에 희망을 걸었으며, 자기가 증오하는 것이 프랑스 자체가 아니라 몇몇 프랑스인들의 추잡한 이해관계라는 점을 이해했다. 또한 그보다 젊은 빙도 있다. 그는 아마 우리 또래일 것이다. 그의 과거는 잘 모르지만, 교사였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는 것은 알고 있다. 빙도 인정한 바대로 그의 어머니는 독재적이었으며, 아들에게 자신이 정한 여자와 결혼 할 것을 강요했다(이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지만 젊은 사람들은 싫어했다). 빙의 삶은 반항과 복종의 연속이었다. 그는 우리와 함께 일하기로 했으나 어머니의 분노를 두려워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역정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자유를 원한 그는, 나도 잠깐 본 적이 있는 수줍고 어여쁜 젊은 부인과 어머니가 있는 집을 나오고 싶어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하고 출판사에 왔다. 그의 어머니가 문자 그대로 드러누워 그가 가는 길을 막았다는 것이다. 또한 힌도 있다. 안남 중부의 산골 출신인 그는 다리가 짧고 갈색 피부에 딱 바라지고 단단한 몸매와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렇게 섬세하지 못한 신체적 특성은 봉건적 인물의 전형으로 보였다. 그를 키운 삼촌은 황제의 주요 대신 네 명 가운데 하나로, 후에 왕조의 유력한 지지자였다. 그래서 당연히 그의 삼촌은, 너무나 과격하게 진정한 주권을 원하는 조카를 저주했다. 당시 힌은 이미 궁궐을 떠나 있었다. 우리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민족에 봉사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는 무일푼의 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조건>에 나오는 쳉은 대부분 힌을 모델로 삼았다. ... 다른 사람들과 섞여 지내지만 약간은 외톨이기도 한, 자신이 한 약속에 철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청년 응웬 안닝. 그는 몇 달 일찍 워스와 함께 프랑스에 갔다가 1925년 말 판 쭈찡과 같은 배를 타고 사이공으로 돌아왔다. <금이 간 종>이라는 잡지를 주도했는데 이 잡지는 그가 없는 동안 출간이 지연되다가 그가 돌아오자마자 즉시 출간이 재개되었다. 그는 어느 날 이렇게 썼다. "우리를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견고한 문화유산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그렇다. 당신네들은 정말 그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이며, 우리의 가장 큰 부끄러움은 우리가 집단적으로 당신들과 관련을 맺는 동안 의도적이든 아니든 당신들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는 점이다. 나는 당신이 죽기 전에 그 영광스럽고 견고한 유산을 알아보았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오늘 당신이 죽었다는 것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이 지성과 젊음, 용기, 희생정신, 고귀한 미소, 그리고 너무나 자주 이유 있는 분노를 품었던 자임을 세상이 알게 되기를... 그들 모두와 우리 세 명의 유럽인을, 이미 살아 있는 전설이 된 위대한 판 보이 짜우-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앙드레와 나는 이 인물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의 그림자가 내려다본다. 밤 12시가 되면 북 치는 자는 자신의 무덤을 버리고 종횡으로 행진하나니. 사슬에 매인 인도차이나 인도차이나가 사냥금지령이 내려진 지역이라는 사실, 그것도 현지사가 자기 친구들을 위해 탐욕스럽게 금지령을 내린 지역이라는 사실은 아마 사냥감인 토끼가 안남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슬프게도 진실이 입증되는 수많은 사건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반복되고 있다. 최근 물의를 일으킨 사건 하나를 상기해 보는 것만으로도 족히 그것을 알 수 있다. 코냑 씨의 친구들은 가난한 농부들이 개간한 드넓은 논에 눈독을 들였다. 그리고 이 논의 판매가 결정되었는데, 입찰규정서에 표면적 500헥타르가 넘는(거의 전체에 해당하는) 지역을 하나의 단위로 묶을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조항이 실려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막대한 입찰가를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입찰자인 컨소시움이 경쟁자 없이 전체 논을 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평야를 사냥하기 위해 지사의 친ㄴ구인 유트로프 씨가 카마우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판매가 개시되었고 117헥타르만이 낙찰될 줄 알았는데 4876헥타르가 낙찰되었다. 이 일은 보기보다 훨씬 가증스런 일이다. 몇 가지 설명을 첨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간단명료하게 작성하고 서명한 공식 탄원서를 50건이 넘게 당신에게 보냈다. 우리는 77건의 탄원을 받았지만 20건이 넘는 것을 프랑스로 보냈다. 코친차이나의 지사는, 정치에 별 흥미가 없는 이 고장에서 끊임없이 정치적 농간을 부린다. 더 자세히 말하며, 공정하게 처리해야 할 모든 선거와 공공 계약에 폭력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그는 프랑스인을 이간시켜 서로 반목시킨다. 그는 결국 모든 안남 엘리트들의 미움을 사는 결과를 초래했다. 총독께서는 잘못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오늘날 많은 안남 엘리트들이 당신에게 열렬한 경의를 표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당신을 자신들의 해방자로 보기 때문이다. 그는 프랑스 학위를 받은 안남 엘리트를 '가짜 엘리트'라 부른다. 그러면 진짜 엘리트는 어디 있나? 코친차이나에? 우리를 혐오하고 중국 문화를 신봉하는 지식인들 가운데? 그가 예쁜 메달을 수여한 소년들 가운데? 나는 학위가 만들어내는 것 이상의 엘리트들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지사에 대한 이들의 감정은 여기서 말하지 않는 편이 더 낫겠다. 위기가 다가오는 현 상황에서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대학 출신 엘리트들에게 맡겨 안정된 정부를 구성하는 길뿐이다. 여전히 민중은 수동적이며 아무 움직임도 없지만 우리 외국인을 혐오한다. 그들을 수동적인 상태로 놔두느냐 아니면 우리에 대항하여 들고일어나게 하느냐는 오직 대졸자들과 귀화자, 그리고 중간자적 위치의 토착민이 일으킬 운동의 향방에 달렸다. 다시 한 번 반복하건데 코냑 지사는 이 나라에서 전쟁만큼의 해약을 저질렀다. 그의 폭력과 난폭함이 토착민들에게 불러일으킬 적대감은 이제 프랑스인 전체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그가 매수한 신문과 그의 협박으로 열리는 환영식의 지휘자가 모두 그를 칭송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최소한 단 하나의 목소리만이라도 총독 각하께 진실을 말하길 바란다. 프랑스에게 넓은 폐허의 광경만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프랑스의 역할을 제시해 주는 고귀하고도 슬픈 직책을 맡은 당신에게 말이다. 전쟁/전쟁들 전쟁의 마지막날 밤 평화가 임박했다. 굴욕적인 평화가. 가운데에 공산주의의 별이 새겨진 붉은 깃발하나가 긴 장대 끝에서 펄럭이고 있다. 그 깃발은, 쭌자로 향하는 기자들을 태운 수송대가 통과하는 길을 지시한다. 왜냐하면 거기서 제네바 협정을 대신할 평화회담이 열리기 때문이다. 원칙상 회동장소는 제3의 지역으로 잡아야 한다. 그러나 처음 보는 월맹 막사는 우리가 적군의 영토에 들어와 있음을 증명한다. 패배한 프랑스인이 자신을 패퇴시킨 자들의 지역에서 협상을 하는 것이다. 군기 아래 작고 못생긴, 옷이 너무 커 어색한 여섯 명의 호치민 군인들은 우리를 보지도 않는 것 같다. 그들은 계급장도 없는 푸른색 군복 속에 파묻혀 있다. 그들의 얼굴은 대나무모자와, 위장용으로 모자에 꽃은 풀잎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존재들에서 인간적 감정의 흔적이 지워진 채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표정의 조각들만을 감지할 뿐이다. 그들은 죽음을 위해 자원한 비인격체들이다. 갑자기 이들은 경기관총의 총부리를 우리 쪽으로 틀더니 우리의 출입증을 자세히 검사한다. 말 한마디, 몸짓 하나 없다. 경멸이나 우월감을 표시하지도 않는다. 그리고는 우리를 통과시키기 위해 차단목을 걷는 것이 전부이다. 몇 미터 저쪽에 제법 건장한 프랑스 헌병들이 혈색이 좋은 얼굴로 가죽 용품등 좋은 장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 보인다. 기자들은 불편해하며 어떻게 저렇게 하얗고 영양좋은 거구들이 가난하기 이를데 없고 볼품없는 황색인들에게 질 수가 있느냐고 의아해한다. 지뢰로 팬 길 위에 서 있는 이 헌병들은 프랑스의 새로운 무능력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우리는 싸웠다. 전쟁은 디엔비엔푸 이후에도, 평화협상을 위해 국제사회가 제네바에 모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정글에서 나온 월맹의 사단들이 삼각주 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프랑스군은 철수했고 움츠러들었으며 하노이에서 하이퐁에 이르는 길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코니 장군은 지휘부에 걸린 거대한 지도에다 여전히 프랑스령인 곳을 표시하면서 말했다. "이거 꼭 매독 걸린 성기같이 생겼군." 언제나 맹렬하고 어두운 전투가 펼쳐졌다. 그의 부관인 바뉘상 장군은 기동부대와 탱크, 그리고 마지막 남은 대대들을 투입하여 세찬 반격을 가했다. 여전히 몇 번의 승리를 쟁취하기도 했고, 버티기도 했지만 적은 끊임없이 밀려와 방어선을 침투했다. 프랑스군은 신념을 잃은 후에도 용감히 싸웠다. 디엔비엔푸는 파견대의 모든 장병들에게 승리를 약속해 주는 최고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예견되었기는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재앙이 있은 후, 군인들은 스스로에게 혐오를 느꼈다. 몇 시간 만에 부대는 침울함 속에 빠졌다. 통킹의 뜨거운 여름, 장교와 사병들은 쇄도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여전히 움직였지만, 이것은 규율에 따른 것 이상이 아니었다. 지난 8년 동안 전사는 파견대의 큰 유행이었다. 멸시를 품고 거침없이 죽어가는 것이 품위를 지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죽음이 두려워졌다. 상식이 우세해지고, 각자는 살아 돌아가기를 원하며, 다가올 평화까지 남은 날들을 세기 시작했다. 다음과 같은 글을 본 일이 있는데, 예전 같으면 이런 글을 쓴 작가는 비난받았을 것이다. "지금 자기 가죽에 구멍을 내는 것은 너무 멍청한 일이다." 가장 쓸데없는 죽음조차 기꺼이 받아들였던 영웅시대의 프랑스인들이 이 인도차이나 전쟁의 가련한 막바지에 이르러 더 이상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 앞에서 그들이 느낀 안도감은 굴욕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러한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들은 마지막 한 주까지도 계속해서 무수한 죽음을 감내한다. 그들의 부대가 초소의 철조망 안에 무리져 있다. 죽음의 자원병들이 플라스틱 폭탄과 함께 진지에서 튀어나왔다. 이미 제네바에서 모든 것이 정리되었기 때문에 이럴 필요는 없었지만, 응웬 잡 사령관은 이를 명령했고 정치국은 이것이 민중의 복지를 위해 이롭다는 처방을 내렸다. 끝내 전쟁의 마지막날이 다가왔다. 1954년 7월 26일. 내일 8시부터 휴전이 개시된다. 나는 통킹의 신성한 길, 하노이에서 하이퐁에 이르는 주요 간선도로를 지프차로 다녀본다. 패배한 전투도로. 잔해들이 가득하다. 예전의 복병이 무언가 설치한 듯한 수상쩍은 수많은 흔적 사이를, 불타버려 그슬린 땅 한가운데를 달린다. '피아노 건반'처럼 팬 곳이나 폭약 구멍을 자갈이 메우고 있다. 온갖 잔해들, 트럭의 뼈대, 철도 위에 뒤집혀진 기차 차체 등이 길 옆으로 밀쳐져 있고, 주위에는 폐허가 된 집들. 더 멀리 마을과 초록빛 논물이 화염에 휩싸여 있다. 주민은 안 보이고-이것은 바로 근처에 월맹군이 있다는 신호이다-프랑스군의 위용을 헛되이 과시하는 진열품들만이 보인다. 콘크리트 초소, 발사중인 포대, 망을 보는 탱크 등이 수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배치도 못 미더운 것이, 병사들의 얼굴에 공포가 서려 있기 때문이다. 인도차이나에서 나는 어떤 것이 불안의 징조인지를 파악하는 법을 신물나게 배웠다. 전투모를 쓴 초췌한 모습에 눈이 고정되어 있으면 적이 바로 옆에, 울타리의 잔해 뒤에, 대나무숲 속에, 논 속에 흙탕 속에, 바로 몇 미터 옆에 떼지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안녕 1969년 9월 9일 아침 8시. 호치민의 장례식이 막 끝났다. 침울한 군중이 아무말 없이 거리를 빠져 나간다. 그들은 마치 홍하의 물이 빠지면서 삼각주가 밑바닥을 드러내듯, 시외로 마을로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 새벽의 미광이 비추기도 전에, 바딩 광장에 정연하게 늘어서 있거나 사거리와 스피커 근처에 모여 있던 군중은 불멸의 인간으로 믿었던 사람의 장례사가 낭독되는 것을 침묵 속에서 경청했다. 노동당의 제1서기인 fp 두안이 이따금 감정이 격하여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경건한 마음으로 동료들과 함께 작성한 추도사를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나서 인터내셔널가를 포함한 애국 찬가들이 연주되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군사화되어 있는 이 나라에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티없이 하얀 옷을 입은 군악대가 연주를 맡았다. 노래가 <지도자 찬가>에 이르렀을 때, 그때까지 망자의 이름으로 레 두안이 선창한 통일의 맹세를 함께 따라한 것 이외에는 침묵을 깬 일이 없던 군중이, 경애하는 수령의 찬가에 흐느낌으로 반주했고, 이것으로 식을 마감했다. 식은 인민공화국의 가장 완벽한 형식으로 장관을 이루었지만, 유언장에서 인민의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말라는 호치민의 유언에 따라 이례적으로 신속하게(35분) 진행되었다. 단장에서 팜 반 동이 갑자기 휘청한 것도 이 <지도자 찬가>의 첫 곡조가 울려퍼직 무렵이었다. 북베트남 행정부 우두머리인 그가 격한 흐느낌 속에서 부축을 받았다. 그는 호치민의 죽음으로 투쟁의 동지 한 명을 잃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살펴준 사상적 지도자요 대장이요 아버지를 잃은 것이다. 세계의 수많은 공산당 대표들 외에도 30여 개국에서 파견된 대표단이 늦여름에 내리쬐는 통킹의 견대기 힘든 햇볕을 받으며 장례식에 참석했다. 나는 서방에서 유일하게 파견된 프랑스 대표단을 이끌고 있었다. 전날, 우리는 늙은 투사의 가냘픈 유해가 잠들어 있는 유리관 앞의 행렬 속에 서 있다가 우리 차례가 되자, 바딩궁 대회의장을 뒤덮은 꽃의 바다에 엄숙한 화관을 보탠 바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가 옛날의 적에게, 그리고 과거를 잊고 단호히 미래로 향하자는 그의 결심에 보내는 존경의 표시였다. 장례식의 격조 높은 간결함, 대표단들이 단상으로 나아갈 때 울린 장례행렬의 장중한 곡조, 도저히 무감각할 수는 없었다. 내 차례가 되어 유리관 쪽으로 몸을 기울일 때 억누를 길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고 이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재무부 소속 자동차를 타고 메종 드 프랑스로 향하는 동안 내내 지속되었다. 그런데!... 가는 길에 다른 나무들보다 더 가늘고 더 어린 짱찌가의 나무를 보는 순간, 나는 슬픔을 버리라면 버렸을 것이다. 유혈이 낭자한 과거가 떠오른 것이다. 갑자기 어둠 속에 잠긴 이 거리가 다시 보였고, 요새에서 나를 기다리는 모를리에르 장군을 만나러 내가 타고 가던 장갑차가 보였다. 그리고 밑에서 지뢰가 터지면서 장갑차가 요동치며 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유탄을 맞아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채 화염에 휩싸인 장갑차가 부서지며 거리의 인도 쪽으로 나뒹굴어 나무를 들이받고 가게 입구를 부수었다. 나의 동료와 나는 온통 몰골이 엉망이 되어 짱찌 거리의 인도에 볏짚단처럼 내던져졌다. 거리는 곧 피와 화염에 휩싸였다. 23년 전인 1946년 12월 19일에 일어난 일이다. 짱찌가가 아직도 보르니 데보르드가로 불릴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