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고고학 암초에 걸린 유물들 지은이:장-이브 블로 출판사:(주)시공사 봉사자:박진선 제1장 말없는 논객들 초보자를 위한 호흡 바다는 인간에게 언제나 침범할 수 없는 한계지점이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인간 의 폐였는데, 호흡은 로봇 시대인 1980년대 초까지도 수중유물의 탐사에 큰 걸림돌이 었다. 바닷속에서 얼마나 견디겠는가. 기껏해야 몇 분이 아닌가? 하물며 바닷속에서의 작업은? 인류는 아가미가 없다. 수중호흡기(산소통, 호흡관, 마 스크 따위가 갖춰진 잠수구)가 상품으로 나온 지난 반세기 동안에도 바닷속은 여전히 신비한 별세계로 남아 있다. 그런 까닭에 반은 사람이며 호흡 곤란에 익숙하게 대처하 는 잠수부는 언제나 이색적인 존재였다. 그것은 단순한 상업적 이유로 발굴에 나섰던 고대의 렉스 로디아나 2000년이 지난 현재의 잠수부나 마찬가지이다. 비잔틴 제국의 법전에 따르면, 수심 15m 이내의 바닷속에서 건져 올린 유물은 3분의 1을, 수심 20m 이내의 바닷속에서 건져올린 유물은 그 절반을 잠수부에게 주었다. 네미 호수의 탄생 건축가이자 예술가이던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1446년 로마 근처에 있는 네미 호 수에서 찾으려 했던 것은 상선에 실렸던 짐이 아니었다.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화젯거 리가 되어오던 두 척의 대형 로마 선박의 잔해들을 어부들이 우연히 발견했다는 것을 알고 찾아 나섰던 거였다. 난파선의 나무조각 같은 잔해들은 보잘것없었지만, 로마 귀 족은 몸소 보러 오길 마다하지 않았다. 그때는 바야흐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이 한창 유행을 이루 고 있었던 터였다. 알베르티는 호수의 난파선이 트리야누스 황제 시대의 것이라고 생 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보롤냐 사람 프란체스코 드 마르치가 장비를 갖추고 자신이 직접 호 수 안으로 잠수해 들어가는 모험을 시도함으로써 수중탐사의 역사에 결정적인 걸음을 내닫게 된다. 이 장비는 겉을 금속으로 감싼 일종의 나무 종처럼 만든 잠수구의 표본 으로서, 이것을 통해 잠수부는 팔과 다리를 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으며, 어슴프 레한 호수 밑바닥을 더듬으며 탐사할 수 있게 되었다. 드 마르치는 고대 난파선의 나 무조각 등 자신이 건져낸 물건들을 '힘센 두 마리의 노새'에 실어왔다. 네미의 잠수부 들은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이 유물들을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상자에 든 유산 18세기에 헤르코랄네움과 폼페이에서 있었던 지상 발굴들은 골동품에 대한 세상 사 람들의 관심을 촉발시키기에 충분했다. 나폴리 주재 영국 대사 윌리엄 해밀턴 같은 정 열적인 골동품 수집가는 그리스 꽃병을 에트루리아 꽃병이라고 착각하여 자신의 저서 를 발표하기도 했다. 1802년에는 이스탄불 주재 영국 대사였던 엘진 백작 토머스 브루스 역시 비설르 시 켜 파르테논 신전의 프리즈(frieze)의 장식품인 부조를 그대로 베기고 떼어내게 했다. 그런데 이를 영국으로 운송하던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떼어냈던 대리석의 한 부분이 펠로폰네소스 남쪽의 20m 깊이에서 난파선 속에 묻혀버렸다. 비서는 유실된 수집품을 다시 찾아내기 위해서 사모스섬의 잠수부들을 고용하여 '호흡을 멈춘 상태 속의 작업' 을 2년 동안이나 계속해야 했다. 1916년 브루스는 이것을 대영박물관에 되팔았다. 유 럽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그리스와 그 전통 속에서 서양 문화의 융합처를 찾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에 브루스는 이 일을 두고 영국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지베 잠수복 1819년 독일 사람 아우구스트 지베는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청동 잠수구를 만들어 냄으로써 수중 산업시대를 열었다. 이 표본은 종 모양 잠수구를 축소해서 머리둘레의 부피가 줄어들었고, 펌프 작용을 이용하여 공기를 공급할 수 있었다. 불편한 점도 있 었다. 잠수부가 똑바로 서지 않으면 투구 속으로 물이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이 단점 을 보완하기 위해 1830년 지베는 잠수부가 밑바닥에서도 매우 움직이기 쉽도록 하면 서 투구가 방수복에 연결된 형태를 고안해 내었다. 이 형태는 한 세기가 지나도록 사 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잠수구가 제대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827년의 일이었다. 그 무렵 아네 시오푸스코니는 네미 호수에 대형 뗏목을 띄었다. 뗏목의 내부에는 공기 펌프가 갖추 어지고 폭이 열 뺌(2.5m) 정도 되는 종 모양의 잠수기가 설치되었다. 네미 호수에 수 장되어 있던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의 로마 난파선에서 나온 대리석이나 모자이크 같은 몇몇 유물들은 소문으로만 나돌던 이야기의 진상을 밝혀주었다. 이 로마 난파선은 '보 통' 배가 아니었다. 바다에서 우연히 발견된 물건들은 연대를 확인해줄 좌표가 부족하 기 때문에 인류 역사에서 붕 뜨게 마련이다. 1832년에는 이탈리아 해안 쪽에서 높이 1.15m의 유명한 그리스 청동상을 하나 건져 올렸다. 2년 뒤, 프랑스는 이 귀하고 오랜된 '피옴비노의 아폴로'를 당시 돈으로 1만 6 천 프랑을 치르고 사들여 오늘날 루브르에 소장하고 있다. 딘 형제들의 메리로즈 단순한 기술자에 지나지 않던 잠수부 딘 형제는 수중발굴과 관련한 역사탐구 영역에 서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 영국 정부와 계약을 맺고 수중에 흩어진 금속을 건져내 던 일을 하던 딘 형제들은 지베가 초기에 고안해낸 것과 흡사한 잠수구를 만들었다. 1836년 6월 어느 날 그들 형제가 영국의 스핏헤드 해군 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한 난파선 위를 잠수하고 있을 즈음, 어부들은 평소 그물에 자주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존 딘이 어부들이 일어준 지점으로 잠수 해 보니 진흙 바닥 위로 살짝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형체가 힐끗 보였다. 바로 오래된 배 한 척의 잔해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청동 대포도 끌어올렸다. 이 의외의 발견 소식을 듣고 런던탑의 대포 전문위원회는 잠수부들에게 탐사를 계속 하도록 요구 했다. 위원회에 따르면 난파선은 어쩌면 1545년에 좌초되었던 메리로즈호일 수도 있 다는 것이었다. 메리로즈호는 당시 프랑스 전함의 접근으로 포츠머스에서 떨어진 곳에 서 좌초되었던 배로 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선박이었다. 만약에 이 난파선이 상선이라 는 것이 증명된다면 발굴물은 그들의 재산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국왕의 배라면 모든 권리를 상실하게 된다. 딘 형제들을 여러 개의 대포들을 건져 올렸고, 그중에서 쇠고리로 연결되고 쇠막대로 만든 쇠 대포는 가장 많은 관심을 받으며 여러 가지 추측 을 불러일으켰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이 낡은 대포조각이 메리로즈 시대에 사용된 것 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국왕의 소유인 대포들은 위원회로 돌아갔지만, 그 잠수부들은 자잘한 물건이나마 가질 권리를 얻었다. 그들이 1840년에 경매에 내놓은 물건들 중에는 한 개당 15실링 하는 '흔해 빠진 유리병'들과 '전사들의 활'도 여덟 개 있었다. 청동과 쇠로 된 어획물 19세기 중엽에 수중유적 발굴이 활발해지자 고고학적 탐사는 새로운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유럽 국가들은 자신의 고유한 뿌리를 찾기 위해 문서기록도 없이 그저 금속이 나 돌로 된 유기물일 뿐인 선사시대의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1836년 이래 덴마 크 국립 고문화재 박물관 관장이었던 C.J. 톰센은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의 발달과정을 석기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시대 등 세 단계로 나누었다. 그리고 유럽의 호수들은 이 제 막 시작된 이 탐사작업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853-1854년에 걸친 가뭄으로 호수의 물이 줄어들었고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물이 빠진 호수에서 사람들은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나무 말뚝들을 발견하였다. 취리 히의 호수, 오페르마일랜에서 이와 같은 현상을 알렸던 페르디난트 켈러는 호수 바닥 에 늘어선 이 말뚝 숲은 물 위에 세운 고대 주거지(팔라피트)라고 발표했다. '고대 유 적 낚시'는 다른 호수들로 급속히 번져갔다. 1854년 알퐁스 모로는 레만호의 모르주에서 물 속에서도 앞을 볼 수 있는 렌즈가 장 착된 양동이 모양의 잠수구를 쓰고 물 속으로 들어가 청동기 시대 팔라피트의 말뚝 사 이에 있는 유물들의 구망을 낚아 올렸다. 그리고 1856년 사부아의 고고학자는 부르제 호수에 있는 그레진의 팔라비트 발굴을 발표했다. 또 다른 발굴이 안시와 샬렝의 호수 에서 잇달아 일어났다. 1857년 뇌사텔 호수의 러 텐에서는 주조된 쇠검들의 걸림닻을 이용해 끌어냈다. 비엔의 고고학자인 장교 슈바브가 발굴물을 옮겼는데, 그 확인과정 에서 라 텐의 발굴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곳의 팔라피트는 일반적인 경우와 사정이 달 랐던 것이다. 1868년부터 시작된 쥐라 호수 지역 수력공사 때문에 수위가 2m나 낮아 졌고, 1874년 스위스 교사 에밀 부가는 호수 경사면에서 면밀한 발굴을 시행했다. 그 결과 4000m2가 채 못 되는 면적 위에서 100여 개가 넘는 쇠검을 들이댔다. 하지만 사람들은 수상 주거지에서 나올 법한 숯더미나 음식 지꺼기 같은 일상생활의 흔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주거생활의 흔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곳 유물들이 정확히 규명하기 위해 기나긴 토론이 벌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최근 수십 년 전에 이르기까지 5세 기 동안에 걸친 라 텐의 발굴은 제2의 철기시대에 대한 규범적인 준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20개가 훨씬 넘는 팔라피트들이 뇌사텔 호수 안에서 탐지되었다. 1875년에는 부르제 호수의 팔라피트 위에서 발견한 1200가지의 유물들을 조사했다. 그 대부분은 청동으로 지느러미와 실린더 모양의 도끼, 반달 모양의 낫, 낚시대, 단검, 검, 핀, 팔지, 그리고 사암과 운모 편암으로 만든 거푸집들이었다. 스위스에서처럼 부르제 호수에도 세공품, 목공품, 곡식, 과일 등이 쏟아져 나왔다. 호수의 담수와 진흙이 이 유물들의 보존을 도왔던 것이다. 반세기 후의 고고학자 조세프 데슐레트는 "이 빛나는 발견은 청동기 시대에 관한 주요한 정보들을 주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호수 밑 발 굴은 아주 광범위한 시대와 연결되어 있다. 고고학자들은 금속기구들을 이용하여 한층 정교하게 만든, 이를테면 말뚝 양 끝에 눈금이 새겨져 있다거나 네모각으로 정성스럽 게 절단된 말뚝을 좀더 나중에 지어진 팔라필트에서 검출했다. 1860년대 말 이후 이 제르 지방에 있는 팔라드루 호수의 팔라필트에서는 중세 최고의 것으로 여겨지는 유물 이 발견되었다. 이 모든 수상탐사들은 담수의 세계에서 행해졌다. 이처럼 해양고고학은 바닷물이나 짠물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제2장 해양고고학의 여명기 스페인에서 발견한 보물 해양고고학 연구에서 가장 먼저 정리해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스페인에 정착했던 프랑 스 은행가 이폴리트 마장에 관한 것이다. 그는 1868년 3월 어느 날 '괄목할 만한 사 업'을 제의받는다. 그것은 한 세기 반 동안 신화로 전해오던 믿음에 바탕을 둔 보물사 냥에 관계된 것이었다. 그 보물은 금은을 실어 나르던 커다란 스페인 범선에 들어 있 는 것으로, 1702년 아메리카에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리스와 비고 해안에 서 영국-네덜란드 함대에 좌초되었던 것이다. 미장은 심사숙고를 한 뒤, 정보를 입수 하고, 모험 속에서 '잠수했다'. 그러나 그는 값어치가 있는 화물의 대부분이 전투가 있 기 며칠 전에 이미 하선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사이 프랑스에서는 쥘 베른이 "해저 2만 리"를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에는 사라진 함대의 역사에 관계된 이야기도 들어 있었다. 베른은 잠수함 노틸러스의 함장인 네모의 점수를 뒷받침하는 보물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꼼꼼하고 사려 깊은 성격을 지닌 은행가 마장은 프랑스에서 최상의 잠수도구를 구하 고 노련한 잠수부들을 관찰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불충분했고, 감찰 잠수부와 잠 수부들의 작업을 지휘할 작업감독이 필요했다. 바쟁은 진흙투성이 해안에서 잠수부들이 끌어올린 부서진 조각들에 발견된 이상한 점 을 알리며 "야릇한 물체가 있는데, 조각의 앞부분은 단단해서 망치로 두들기면 소리를 내는 데 반해, 뒷부분은 부서질 대로 부서져 칼에도 쓸릴 것 같다."라고 쇠 대포를 묘 사하기도 했다. 비고의 해저경험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고학 분야에서 앞으로 노출될 문제점들 을 각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사된 난파선 가운데 하나인 탐보르의 바닥에는 1.5m 높이로 돌출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을 '세게 친 후에 마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배가 우현으로 기울어진 데 다가 좌현의 골조들은 진흙 속에 파묻혀 있었다." 거두어들인 물건들은 목록으로 작성된 뒤 밀폐된 유리 진열장과 특수 창고 안으로 들 어갔다. 그러나 금은을 나르는 큰 범선에는 이폴리트 마장은 약간의 돈과 수부들이 쓰 던 하찮은 물건들, 몇 톤이나 되는 쇠 대포들, 닻, 그리고 이국적인 목재들만을 찾았을 뿐이었다. 이 목재들만 나중에 경매에 내놓았고, 수집품의 전부는 여기저기로 분산되 었다. 살인적인 수포 오늘날의 해저 발굴작업은 바다 밑에서 수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1870년 비고에서 마장이 첫 작전을 시작했을 때 다섯 달이 소요되었다. 사람들은 그 기간 동안 잠수로 보낸 744시간을 지상의 노동과 비교해 보고 남자 열 명의 열흘치 작업시간에 해당한다는 걸 알아냈다. 더구나 이 잠수 도중에 잠수부들은 설명할 수 없 는 사고들을 당해 고통을 받았다. 몇 년 뒤 소르본 대학의 폴 베르 교수는 기압력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고, 잠수부들이 겪는 사고는 수중 압력 아래서 호흡을 할 때 그들 의 혈액 속에 녹아든 가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00년 봄, 아프리카 해안에서 돌아오던 해면잡이 그리스 어부들은 나쁜 날씨에 겁 을 먹고 크레타 북쪽에 있는 안티시테르라는 조그만 섬에 피신처를 구했다. 잠수부 중 한 사람인 엘리아스 스트라디아티스거 절벽 아래로 내려갔고, 물 속 수십 미터 아래에 있는 청동과 대리석으로 만든 입상들을 발견했다. 그의 뒤를 이어 대장 콘도스도 초록 빛 금속으로 된 팔 한 쪽을 끄집어 올렸다. 얼마 후 상황을 전해 들은 그리스 당국은 그 장소로 서둘러 갔고, 같은 해 11월에는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게 된 잠수부들을 위 해 전함 한 척이 왔다. 과거 딘 형제와 메리로즈의 대포와 마찬가지로 이 입상들은 일 흔한 살밖에 되지 않은 공화국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줄 만한 유산으로서 모든 것을 희 생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40-55m가 되는 안티시테르의 수심 속에는 5분씩 하루에 두 번 정도만 잠수할 수 있 었다. 이런 식으로 잠수부들은 아홉 달을 연달아 잠수하였고, 그들 가운데 한 삶은 죽 고 다른 두 사람은 평생 동안 불구자가 되는 대가를 치룸으로써 B.C. 4세기 그리스 예 술의 가장 훌륭한 유산 중 하나가 햇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안티시테르 사건 이후 몇 년 뒤 영국인 생리학자 존 스콧 할덴은 왕실 해군의 잠수부 들과 함께 잠수를 경험했고, 1906년에는 압력으로 빚어지는 사고를 피하는 데 도움을 줄 첫 잠수 데이터를 도표로 공개했다. 할덴의 도표들은 수심 60m까지의 상황이 계산 되었지만, 안티시테르의 잠수부들을 위해서는 너무 늦은 것이었다. 그리스 골동품에 대한 공시 발굴을 둘러싸고 두 사람의 그리스 고고학자가 서로 대립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이 와 같은 유물을 실은 난파선이 B.C. 4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확신했고, 또 한 사람 은 입상 근처에서 잠수부들이 발견한 평범한 도자기를 검토한 결과, 위의 추정에는 3 세기나 착오가 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주장이 타당한 것이었고, 또한 첫 번째 주장처럼 주장한 사람의 개인적 직감 에 기초한 것이긴 하지만 반세기 뒤에는 그 확증을 얻은 것도 있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고고학자인 로저스 에드워즈가 1900년과 1901년에 건져 올린 유물을 재검토 하고, 안티시테르의 난파선에서 나온 도자기들은 에게해의 터키 중앙 연안에서 온 것 임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청동 입상들은 사고 당시의 유물임이 분명하고, 대리 석 입상의 경우 오늘날 사람들은 그것들이 모조품이라는 걸 알고 있다. 1965년에 고고학자 버지니아 그레이스는 난파선에서 건져 올린 손잡이가 둘 달린 항 아리들을 검토했고, 난파가 B.C. 80년과 70년 사이에 있었다고 추정했다. 단순한 수집벽이나 붕괴 위험에 처한 골동품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타국에서 오랫동안 자기 땅의 유물을 약탈당했던 젊은 국가 그리스는 처음으로 고고학의 문화유산의 반출 을 금지했다. 안티시테르의 작업은 이 새로운 의지의 증거로서 정부는 물 속에 있는 아주 먼 과거의 유물들을 다시 찾아내기 위하여 위험하고도 비싼 탐색활동을 재정적으 로 뒷받침했던 것이다. 현대의 고고학은 유물뿐만이 아니라 유적지나 기념물의 묘사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 고 있다. 1904년과 1907년에 군터가 나폴리 해안에서, 그리고 네그리스와 조르지아드 가 그리스에서 바다에 파묻힌 고대 주거지들에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그림으로 그려 남겨놓았던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톰슨이 1904년에서 1909년 사이에 멕시코에서 치첸이트차의 고대 마야성 우물을 발 굴하는 데 착수하다 유가탄 반도의 깊은 숲 속에서 사라져버렸던 마야 문명의 유적은 반세기 전에는(그 첫 시도는 18세가 말 스페인 군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양한 원정연구의 대상이 었다. 미국 영사 톰슨은 개발 예정인 천연 우물, 세노트가 있는 식인농장을 사들였다. 그리고 1866년 10월에 문을 연 하버드 대학의 파버디 박물관과 미국 고고학협회의 지원을 받아 잠수복을 입고 잠수를 익혔으며, 곧 호흡기를 이용해 파손되지 않은 수천 가지의 유물을 건져 올렸다. 이때 두 사람의 그리스 잠수부들이 발굴에 참여하는데, 그리스 해면어부들의 작은 공동체가 플로리다 남쪽의 키웨스트에 기지를 두고 있었던 덕분이다. 칠흑 같은 어둠에 덮힌 우물 안에서 더듬거리며 행했던 '수확작업', 즉 영사와 잠수부 의 힘겨운 발굴작업이 이루어진 시기는 미국 고고학자들이 고고학을 체계적이고 과학 적인 학문으로 만들고자 서로 다투던 시대의 말기에 해당했다. 그들이 비록 성공을 거 두지는 못했지만, 고고학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사실은 역사가인 윌리와 사블로프가 인 정한 바 있고, 이러한 지적은 미국 대륙을 넘어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디아와 그 청동 제품들 1907년 그리스의 해면잡이 잠수부는 우연히 튀니지의 마디아 부근에서 수심 39m까 지 내려가 작업하다가 고대 난파선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대리석 기둥뿐만 아니라 많 은 예술품이 들어 있었다. 많은 고대그리스 청동품들이 시장에 나오기 시작했고, 이것은 파리의 학술문화 후원 자이기도 했던 미국인 백만장자 제임스 헤이즌 하이드의 도움을 얻어 잠수탐험을 펼치 던 지방 고문화재 박물관장인 알프레드 메를랭의 주의를 끌었다. 몇 명의 그리스 잠수부와 한 명의 터키 잠수부가 다섯 번의 탐험(1908년에서 1911 년 사이와 1913년에 있었던)을 한 끝에 튀니지에 있는 바르도 박물관의 다섯 개의 전 시실은 사막에서 온 비교적 파손이 심각하지 않은 골동품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조형 예술사에 바쳐진 기념비적인 저서 "아폴로"(1904년)의 저자이자, 그 책 안에서 바닷속 의 위대한 발견을 예언했던 고고학자 잘로몬 라이나흐에 따르자면, 마디아에서 발굴된 유적은 18세기 이래로 탐색되었던 폼페이와 헤르콜라네움의 성과에 견줄 수 있는 것 이었다. 탐색이 진행되는 동안 고고학자들과 예술사가들은 물 밖에서 기다렸다. 마디아의 난 파선은 안티시테르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B.C. 1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바다 밑바닥 에는 60여 개의 이오니아식 기둥머리와 받침돌 그리고 기둥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잠수부와 고고학자들이 예술품 이외의 다른 것을 찾기 위해 마디아로 되돌아오기까지 는 아직도 반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다. 제3장 단순한 수집을 넘어 호사스런 당수 베니토 무솔리니는 옛 로마 황제들과 같이 정치선전의 팸플릿처럼 구상한 연극적 해 프닝을 벌였다. 1세기 무렵의 황제들은 국가 최고 수뇌의 초자연적인 권력의 의미를 군중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광대한 인공 연못을 채우고 또 비우게 하는 식의 거대한 수 중연극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연출했다. 마찬가지로 1928년에 무솔리니는 독일에서 개발된 강력한 펌프를 이용해서 네미 호수의 물높이를 낮추고서는 흐뭇해했다. 그런데 거기서 사람들은 앞선 세기에 알베르티, 드 마르치, 그리고 푸스코니가 모든 노력을 바쳐 도전했다. 그 화려하게 장식된 두 척의 어마어마한 목선(71.3m와 73m)을 처음 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네미의 발굴은 다른 데서 어렴풋이 드러났던 흔적들을 단번에 밝혀냈다. 커다란 두 척의 배의 외피판 판자들은 나무 장부촉과 서로 들어맞는 우묵한 구멍에 쐐기를 박은 받침대, 그리고 장붓구멍으로 짜여 있었다. 장뭇구멍은 고대에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 던 것으로 나중에 지중해의 고대 난파선 발굴로 알려졌다. 또한 사람들은 보존상태가 아주 좋은 두 개의 닻을 찾았다. 그중 하나는 나무로 된 것으로 길이가 5.5m이고, 납 을 된 닻장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쇠로 된 것으로 3.5m였지만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납 닻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가운데에서도 가장 맹목적인 국수주의자들은, 금속으로 된 뗐다 붙였다 하는 닻장이 네미 호수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그전 세기에 소개된 영국 해 군성의 발명품인 움직이는 철 닻장의 권좌를 빼앗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 러므로 네미의 선박들의 중요한 공적은 로마적 영감이 깃들은 것이든 아니면 해양과 관련된 것이든 혹은 이도저도 아닌 아닐지라도, 선박 제조의 전모를 단번에 그것도 확 실히 밝혀주었다는 데 있었다. 사실 네미에서 발견된 선박은 수상주거를 위해 만들어졌음에도 말이다. 1928년에 호 숫물은 부분적으로 방출하면서 1931년에는 두 척의 난파선들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그것은 크기(5m와 9m) 때문에 오랫동안 고대 단정의 유일한 표본으로 알려져 왔다. 어쨌든 호수 밑에 갇혀 있던 네미의 난파선들은 바다의 선박이 항구에서 보호처를 찾 을 때 해양 역사의 한 휘장을 남겼다. 알렉산드리아의 메시지 1916년에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의 확장공사를 책임졌던 건축기사 가스통 종데는 수중 에서발견한 조형물에 대한 내용을 요약해 발표했다. 알렉산드리아 항구는 지중해, 나 일강, 이집트 북쪽 삼각지를 이어주는 요충지였다. 종데는 다음과 같은 주제에 대한 토론을 통해서 B.C. 2000년 무렵에 있었던 거대한 항구의 유적이 해저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청동기 시대의 수부들이 항구를 세 웠을까? 청동기 시대의 유물들이 지중해의 여러 바닷가에 분산되어 발견된 좀은 당시 에도 원양항해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만큼 이 의문은 적절하다. 이런저 런 사정을 고려해 볼 때 청동기 시대에 이미 배가 정박할 항구를 필요로 했던 원양선 박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1930년에 레바논의 연안에서 예수회 목사인 푸아드바르가 해양고고학계에 한 기점을 남겼다. 푸아드바르는 중동지역의 옛 교역로에 관심을 두었는데, 1925년에서 1932년까지 지 하의 폐허를 알아내기 위해서 비행기를 사용했다. 1934년에 레바논 해안의 티르 정박 소에서 찍은 사진을 보던 그는 해저구조물로 보이는 분명한 흔적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는 청동기 시대의 항만지역을 찾아낸다고 생각했다. 티르는 항구 역사의 관점으로 보면 4000년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보물창고였다. 고대 항구의 유적으로 보이는 자취들을 검토하기 위해서 푸아드바르는 해저 촬영장비 를 갖춘 잠수부들의 도움을 받았고, 그 자신은 일꾼들이 쓰는 안경을 쓰고 물 위에서 감독했다. 그 지역은 두 개의 암초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30m의 폭에 길이가 550m와 280m나 되는 광대한 것이었다.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해 보았지만 푸아드바르는 경험 의 한계를 느꼈다. 잠수부들은 잠수부들대로 해저의 형태를 확인하는 작업에 필요하다 며 잠수기술자 한 명을 요구했다. 몇 년 뒤 미국의 로버트 브레이드우드는 B.C. 9세기 의 타바트알하맘이 작은 언덕 근처인 시리아 쪽 해안 위에서 벽 하나를 발견했는데 자연물인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 벽은 최초의 인공부두로 알려진 것이었다. 벽돌을 잘 쌓아 물의 깊이 가 4m, 폭이 15m, 길이가 200m로 된 것으로 작은 원양선박을 수용하기에는 충분한 시설이었다. 가냥-쿠스토의 가동정지 장치 1937년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수족관 안의 잠수부들은 함장 르 프리외르가 발명한 잠 수구를 선보였는데, 그것은 공기의 공금을 수동으로 조절하는 것으로 단순히 공기를 압축하여 담아놓은 병이었다. 6년 뒤 기술사 에밀 가냥은 해군 대령인 장 이브 쿠스토의 요청을 받아 공기 압축병 의 압력조정기를 고안했다. 1946년에는 이것이 상업적으로 개발되어 일반 대중까지도 사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잠수부들은 물 속에서 아무 불편 없이 왔다갔다 움 직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때도 등에 짊어진 공기병의 이동거리가 제한된다는 문제 점이 있었다. 이후 쿠스토-가냥의 잠수구가 이동의 자유를 얻게 되자 프랑스의 프로방스 해안이나 안시 혹은 부르제 호수 같은 여러 지역에서 발굴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잠수부 는 수상 주민들이 남긴 역사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 즉 침전물 안에 박혀 있는 팔라비 트의 말뚝을 정확한 지형도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공개적인 대학살 1943년 덴마크의 한 잠수부는 국립박물관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피요르 드 해안에서 발견된 중세 난파선(코그)을 검토했다. 같은 때 네덜란드에서는 물이 빠 져버린 조이데르지 안에 있던 여러 시대에 걸쳐 좌초된 수십 척의 난파선을 조사했다. 유적들을 이렇게 한꺼번에 발견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레 대한 적절한 결론 을 내리지 못할 즈음 가장 최근에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별 주목을 끌지 못하던 어마어 마한 선박 한 척이 1949년에 공식적으로 파괴되었다. 1800년에 로슈포르에서 제작되고 74문의 대포를 탑재하고 있던 뒤가이-트루앵은 5 년 뒤 트라팔가르 전투에서 포획되어 잡혔고, 영국 왕실해군은 임플래커블이라는 새로 운 이름을 붙였다. 이 배는 1949년에도 물 위를 떠다녔는데, 내부는 텅 비어 있었지만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포츠머스항을 꽉 채웠다. 영국은 그것을 없애기로 결심했고, 이 사실을 프랑스에 통보했다. 영불해협 한가운데로 끌려온 임플레커블은 사람들이 퍼부은 폭약 세례를 받 다가 두 척의 전함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선들의 뱃머리에 부딪혀서 파괴되었다. 1950년에 제네바 남서쪽 알벤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고고학자 니노 람볼리아 는 아주 큰 로마 상선 한 척을 탐사했는데, 상선이 들어 있던 유물들이 이따금 40m정 도 되는 수심에서 그물에 걸려 나오곤 했다. 또한 난파선 안에는 양쪽에 손잡이가 달 린 수천 개의 항아리들이 들어 있었는데, 그것들은 거의 전부가 드레셀의 도표에서 제 1형태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알벤가의 선박은 1만개 이상의 도자기를 실어 나를 수 있 던 로마 사대의 거대한 배들 중 한 척이었다. 이 배를 구조하려면 고고학자가 비싼 값을 치러야 했지만 구조 전문회사인 소리마는 무료로 이 작업을 지원했다. 니노 람볼리아는 200여 개의 포도주 항아리를 15씩 밧줄 에 꿰거나 기중기의 쇠이빨을 물려 끌어올리는 작업을 1950년 2월 내내 했지만, 결과 는 헛수고였다. 너무 거칠게 다룬 끝에 난파선을 람볼리아 앞에서 완전히 해체되고 말 았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는 것으로 만족 할 수밖에 없었다. 1955년 아마추어들이 주최한 첫 해양고고학 발표회에서 람볼리아는 서글픈 어조로 알 벤가의 탐사작업에서 얻은 결과물과 교훈에 대한 보고를 했다. 이 이탈리아 고고학자 는 '항아리 대학살'을 얘기했던 것이다. 발굴은 결코 단순한 수집이 아니다 기술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알벤가의 경험은 전환점을 마련했다. 처음으로 고고 학자는 바닷속 예술품의 출현이나 우연한 발견이 아닌 분명한 역사적 이유를 위해서 난파선에 관심을 두었다. 1925년 이후 어부들이 알려왔던 알벤가의 난파선은 거기서 나온 항아리를 놓고 추정 해본 결과 로마 시대 해상무역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할 만한 것이었다. 람볼리아는 결 국 열성적인 잠수부들과 기중기 한 대로는 이 점을 정확히 알아낼 수 없다는 걸 여러 시행착오 끝에 증명한 셈이었다. 하지만 개척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1946년에서 1950년까지 푸아드바르는 시돈에 있었는데, 그곳은 티르보다 더 오래된 지역이었고 잠수부들은 수중사진기를 갖추고 있었다. 마디아에서는 수중호흡기를 착용한 잠수부들 이 선박의 굄목을 팠고, 1913년에 잃어버린 길이 26m의 용골을 건져냈다. 1950년대 초에도 난파선 발굴은 이어졌는데 지중해 물이 맑고, 대부분 아마추어들이 작업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해저 알프스 클럽이 동프로방스에서 활약하 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아마추어 그룹의 핵심지로 캐릴포니아가 떠올랐다. 유물이 섣불리 재취하는 일 따위 난맥이 있기는 했지만, 잠수부들이 발굴한 옛날 난 파선들은 고고학사에 별도의 지역이 존재함을 가르쳐주었다. 난파되었던 화물선들은 한 번에 수십에서 수천 개에 이르는 유물들, 게다가 대개는 파손되지 않은 비슷한 유 형의 물건들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난파선의 물건들이 몇 년 정도 차 이가 있는 경우도 있기는 하겠지만, 모두 배의 난파와 같은 시대의 것이라는 점이다. 1950년 지중해에서 '항아리를 향한 돌진'이 막 시작될 즈음, 제커 룬델이 이끌던 고 트보로크의 잠수 클럽 회원들은 주민들한테 얻은 조사 결과를 토대로 보후슬란 해안에 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해저 유적지 기초를 작성했다. 그러나 이 스웨덴 사람들은 외로 운 개척자들이었고, 실제로 해저문화재의 목록에 대한 개념이 나오려면 반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랑 콩글루에의 고난 1955년 칸에서 개최되었던 학술발표회에서 프로방스 해안의 소문화재 관리자였던 페 브낭 브누아는 그랑 콩글루에의 작은 섬에 부서져가는 바위 아래서 난파된 로마 시대 선박 칼립소에 대해 쿠스토팀의 잠수들과 함께 실시했던 탐사작업을 소개했다. 1950 년 10월의 압력 감소 사고 이후 난파지역을 밝힌 바 있는 잠수부 크리스티아니니는 ' 항아리들' 얘기를 꺼냈다. 이에 1952년 작전이 시작되었고, 직경 120mm인 튜브 흡입 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0여 개의 항아리, 접시, 램프 등 수많은 골동품들이 뭍으로 올라왔다. 7500 여 개의 캄파니아식 도자기의 발굴은 그 작업현장에 있던 고고학자 페르낭 브누아를 열광시켰다. 그는 특히 마르세유 근처 해안의 지상발굴지에서도 같은 종류의 도자기들 은 찾은 바 있었던 터였다. 그러나 브누아는 이번 해저작업에서도 잠수를 하진 않는다.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프로방스의 고고학자는 점점 더 혼란을 겪었다. 마치 100년 동안의 공백을 사이에 두고 두 번의 선적이 있었던 것처럼, 건져 올려진 유물들 간에 는 1세기라는 시간적 간극이 있었던 것이다(B.C. 2세기 초와 3세기 말-B.C. 1세기 초). 발굴한 유물을 다시 손질하고, 수십 년 전에 기록한 페르낭 브누아의 수첩을 검토해 보면서 고고학자와 여러 탐사들을 괴롭혔던 의문점들을 풀 수 있었다. 즉 알랑 콩글루 에의 난파선은 한 척이 아니라 두 척이었던 것이다. 브누아는 그걸 알고 있었을까? 물 아래의 고고학:크나큰 부재 브누아는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발굴에 참여했던 잠수 개척자인 필리프 티에즈는 1953년의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텔레비전용 카메라 한 대를 설치했다고 보고하며, "칼 립소의 뱃전에 모인 기술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의자에 편안히 앉아서 잠수부들이 헤엄 을 치며 항아리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걸 보았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1958년 발굴작 업이 마무리단계에 이르자 페르낭 브누아는 알벤가에서 열린 제2회 해양고고학 국제 심포지엄에서 "고립되어 있는 물건이나 난파선의 방향과 거리를 지도 위에 정확히 옮 겨놓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칼립소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프로방스 해안의 르방섬 근처에서 또 다른 한 척의 고대 난파선에 대한 발굴을 마친 후 타예즈는 "만약 고고학자를 한 명이라도 바닷속까지 동반했더라면, 들어올리기 전 에 한점한점의 위치를 좀더 정확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아마도 그 자리에 서 미세한 실마리를 검토하고 더 많은 정보를 유추했을 것이다. 그리고 1958년, 람볼 리아 팀이 물 속에서 발굴범위를 정하기 위해 바둑판 금속 사용함으로써 마침내 어려 움은 극복되었다. 2년 뒤 이 기술은 삼각형 모양으로 만들어져 호수의 발굴작업에 이용되었으며, 고고 학자들은 이제부터 물 아래에서 자기 전문분야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제4장 용골의 귀환 옛 선체의 여명기 고대 최초의 난파선은 1864년, 옛 마르세유 항구를 공사하는 중에 발견되었다. 낱개의 조각으로 남아 있는 이 '세자르의 갤리선'은 2세기 혹은 3세기 때의 로마 상 선이었다. 20년 뒤 사람들은 피레에프스에서 발굴작업중 길이 37m에 폭이 5.5m인 B.C. 4세기 때의 3중 노가 달린 배의 밑바닥을 발견했는데, 이로써 수십 년 전에 유행 했던, 단정의 최고 크기를 둘러싼 논란의 한 부분이 종결되었다. 1910년 런던의 카운티 홀을 건설할 때 사람들은 템스강의 고대 지층인 4,2m의 진흙 아래에서 로마 시대의 선박의 잔해를 발견했다. 야외에 전시된 난파선의 나무판을 보 호하기 위해 여로 묘책이 시행된 가운데 나무판을 글리세린으로 입히기도 하고 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로마 시대의 난파선이 상세한 연구 대상이 되기는 처음이었다. 유 적지에서 발견된 고대 난파선의 선체와 이번 연구대상이 된 선체를 비교하는 작업을 통해서, 학자들은 지중해적인 것이 영국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 다. 다른 것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난파선 한 채가 1930년에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 에 묻혀진 채 발견되었다. 최근에 있던 네미의 발굴에 끼친 영향 때문인지 위트레흐트 의 배는 처음에는 로마 시대의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의 정확한 분석을 통하여 그 배가 대략 800년경의 것임이 밝혀졌다. 866년에 메워버린 라인강의 오래된 지층 안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배의 역사도 역사이지만 위트레흐트에서 발견된 선채 는 또 다른 관점에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무척 튼튼한 이 단정은 약 4m의 폭에 18m의 길이었다. 그것은 선수재도 선미재도 없었지만, 바닥이 푹 팬 판자대기 정도 크기의 참나무 '용골'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배의 측면은 같은 방향으로 짜인 판자들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선박의 나무를 연구한 결과 위트레흐트의 배는 화려하고 현대적이면서도 스칸디나비아 서사시의 범선들에 맞 서는 매우 오래된 배임이 밝혀졌다. 바이킹들의 귀환 바이킹족의 흔적은 1850년, 노르웨이 보르의 도로 노동자들이 자갈과 모래 아래에 있던 장례기념물의 중심에서 배 한 척의 잔해를 발견했을 때 나타났다. 단정 그 자체 는 완전히 사라졌기에 그곤 유령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몇 개의 유물들을 다시 주 워 모은 결과 발굴지역은 어림잡아 900년대의 지층으로 추정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발굴은 계속 이어졌고, 미래 해양고고학의 주요한 과정과 땅 위의 발굴은 서로 연관을 갖게 되었다. 바이킹 시대보다 500년쯤 앞선 무척 좁고 긴 당정(27m)이 1863년 덴마크의 니담에서 발견되었다. 참나무 노가 달린 이 배는 외피판과 겹거죽이 입혀졌고, 뱃전은 부서지기 쉽고 낮았으며 용골은 없었다. 1867년 오슬로의 피요르드 해안 입구의 튜미릴에서 튄까지, 그리고 고크스타트(1880 년)와 오르베르그(1904년) 농장의 발굴은 바이킹 항해의 모든 것을 밝혀주었다. 바이 킹들은 거친 파도에 맞설 수 있도록 길이가 20m가 넘는 단정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 배들은 모구 돛대를 세우는 자리가 단단하고 진짜 용골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점들은 실상 매우 중요한 것인데, 특히 이집트보다도 수천년 늦게 도입된 돛이 바이킹족의 팽창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1902년 덴마크 남쪽 요르트스프링에서 보리수로 만든, 길이가 17m이지만 앞선 것들 보다 훨씬 오래된 새로운 선박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스칸디나비아의 선박 제조 기술 에 관한 여러 가지 의문점을 갑자기 제기했다. 후에 B.C.350-300년대로 추정된 이 배 는 넓은 나무판자들을 서로 엮어 만든 특성이 있었다. 이 조립봅은 통나무를 가공해서 얻은 나무판자를 이용하여, 판자들을 이어서 원래 통나무 단면보다 훨씬 넓은 선박을 제조하기 위해 23세기 존 스칸디나비아의 선박 제조자들이 사용한 방법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스칸디나비아의 선박은 오늘날의 카누와 같은 것으로서, 다음과 같이 비유할 수 있다. 사람들이 항해 야심을 채우기 위해 작은 아버지 나무를 이어서 한껏 부풀려 만든 어린 딸이라고. 사라지기 쉬운 흔적의 해부 스웨덴 칼마 항구에 가뭄이 들어 수위가 낮아졌고 이와 때를 같이 해서 고고학자 H. 아케르룬드는 1933년부터 다음해까지 작업에 나섰다. 그 결과 1250년에서 1650년대 의 것으로 추정된 26척의 난파선을 발굴할 수 있었다. 그 시대의 유럽에서 난파선을 발굴하면 최소한 중세 이전의 것일 경우에만 고고학계 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예외가 있긴 하다. 미합중국 독립전쟁중이던 1776년 에 샘플레인 호수 속에 가라앉았다가 1935년에 파손되지 않은 채 건져 올려진, 길이 17m의 포함 필라델피아가 바로 그것이다. 이 포함은 미국의 상징이었다. 1936년 영국 동쪽 해안 서턴 후의 메마른 모래에서 이와 같은 예외가 다시 출현하였 다. 처음 이 장례지에는 앵글로 색슨인들의 단정 두 척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 척은 배의 목재가 남아 있었지만, 또 다른 한 척은 목재가 전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모래가 남아 있던 자국만으로 그 형태를 재구성해야 했다. 얼마 뒤 사람들은 이 배가 닻과 네모난 돛을 갖췄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이것은 니담의 배처럼 기 원후 몇 년 동안에 해당하는 유물과 튼튼한 용골을 갖추고 험한 바다의 범선이 되었던 코크스타트와 같은 바이킹의 대유적지 사이에서 중간 단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1950년대 말, 일련의 결단성 있는 시도가 해양고고학에 과학의 성격을 띠게 해준다 바다에서의 주요 공적은 스칸디나비아와 미국의 몇몇 탐구자들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보잘것없은 쪽배에 탔던 스웨덴 기술자 앤더스 프란젠은 1629년 진수식날 스톡 홀름 앞에서 침몰했던 대전함 바사를 찾으러 나섰다. 프란젠은 금속으로 된 수심측정 기 하나(든든하고 잘 다듬은 단순한 튜브 하나)만을 구비한 채, 차고 소금기 있는 발 트해의 물이 출발했다. 1956년 수심측정기로 떡갈나무 조각들을 끄집어 올린 날, 프란 젠은 자신이 옳았음을 알았다. 선박과 해저의 모든 역사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고고학 이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딛게 된 참이었다. 같은 해 덴마크에서는 두 아마추어 잠수부들이 스쿨델러브라는 촌락에서 멀리 떨어진 로스킬대 협만에서, 겹거죽을 입힌 옛 난파선들을 발견했다고 덴마크 국립박물관에 알 려왔다. 물은 깊지도 않았고(50cm에서 3m), 잠수부들은 단순히 해양고고학의 새로운 기술을 훈련하는 것처럼 작업을 시작하며 후기 바이킹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여섯 척의 난 파선을 조사했다. 세 차례의 잠수 개시 이후(1957-1959년), 덴마크 고고학자들은 그 주변의 전지역을 말려버리기 위해 금속 울타리(널판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기본적으로 같은 모델을 바탕으로 제조되었으면서도 변화와 다양성을 담고 있는 단정 들은 주로 상업이나 전쟁을 위해 사용되었다. 단정의 전체적인 면모에서 11세기 조선 공들의 완벽한 솜씨가 돋보인다. 이번에도, 가장 많이 노출되는 부분이었던 돛과 의장은 고고학적 유적지에 없었다. 이 선박들은 앞서 시기의 것보다 더 엄격한 골조를 가졌고, 바이킹과 함께 드넓은 바 다를 달렸던 부드러운 백조들이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한 시대가 마감되었다. 같은 시기에 미국인들은 스칸디나비아의 교훈을 지중해에 적용시킨다 기존의 모든 결과를 참고로 하여 1900년에 안티시테르에서 그리스 잠수부들이 손댄 바 있는 조사를 다시 시작하면서 미국인 피터 스록모턴은 아테네 국립박물관의 창고에 서 아주 중요한 것임에도 소홀히 취급받았던 증거 하나를 발굴하여 반세기 반만에 찾 아냈다. 그것은 난파된 선박이었다. 이 선박의 외피판이 장붓구멍과 나무 쐐기로 연결 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미미한 잔해들이 남아 있었는데, 이 제조법은 1910년 카운티 홀과 1864년 마르세유의 '세자르 갤리선'에서 엿보인 기술과 같은 것이다. 타키 해면잡이 잠수부들이 스록모턴에게 여러 척의 고대 난파선들이 있다고 알려왔다. 그는 이 발굴지역이 지니고 있는 엄청난 고고학적 잠재성을 알아차렸고, 연구에 착수 했다. 팬실베이니아 대학의 중동 전문가였던 조지 바스는, 스톡모턴이 터키의 겔리도 니아만 근처에서 해저 발굴지역이 있음을 알려왔을 때 탐사에 동참하기 위해 잠수법을 배운 첫 번째 지상 고고학자였다. 발굴(1959년)을 통해 페니키아의 수공품 상인의 것 인 청동 화물고 하나를 얻어앴고, 동지중해의 청동기 시대 연구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겔리도니아의 선박은 몇 가지의 흔적만 남겼을 뿐이었고, 바스의 대원들은 다 음 발굴을 위해서 터키 해면잡이 잠수부들이 여러 척의 옛 난파선들을 발견한 조그만 한 섬, 야시 아다로 향했다. 1961년부터 시작된 터키와 미국의 합동작업으로 발굴한 첫 난파선은 깊이가 37-43m 사이인 7세기의 비잔틴식 선박으로서 목재 부분이 남아 있었다. 스칸디나비아 학파는 여기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는데, 나무로 만들어진 단정의 두 가지 형태를 구분지은 O. 하슬로프 같은 몇몇 개척자들의 작업 덕분이었다. 즉 그것은 본래의 뼈대 둘레에 골조를 세우고 나서 외피판을 덮는 배와, 출발 때부터 외부에서와 마찬가지로 내부에서도 매끄로운 선체처럼 접합되어 나중에 가서야 내부 골조가 덧붙여진 배였다. 이 내부 골조는 부족하나마 아쉬운 대로 철선긴장기의 역할 을 했던 것이다. 가장 오래된 선박들-예를 들어 로마 시대의 난파선들-은 '외피판 우 선'의 원칙을 따라서 만들어졌고, 다른 선박들은 '골조 우선'의 형태였다. 난파선 발굴 전략의 초안 터키의 보드룸 박물관과 혐력한 조지 바스팀은 접근방법의 이러한 변화에 중요한 역 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런 면에서 보았을 때 야시 아다의 7세기 난파선은 과도기적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 었다. 바닥은 외피판이 우선되고, 배의 측면은 늑재 위에서(그러므로 골조 우선) 제작 된 것이다. 그때부터 미국 해양고고학 연구소의 고고학자들이 발굴할 해안지역을 선택 할 때 기준으로 삼는 것은 선박이었다. 그런 까닭에 다음번 발굴 대상으로 터키 해면 잡이 어부들이 11세기의 항아리들을 발견했던 곳인 세르스 리만의 난파선이 선택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고고학자들이 동지중해의 '외피판 우선'으로 제 작된 선적의 최종 형태를 자세히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발굴조사 결과 세르 스 리만의 난파선은 '골조 우선'의 유형이었다. 실제로 1962년에 런던의 블랙프라이어스에서 발견된 고대 연안 항해선(2-3세기)과 같은 다른 유물들의 분석을 보면 다양한 과도기적 공법, 때로는 현대적인 선박제조법 들이 존재했다는 걸 보여준다. 벨기에 해양고고학자인 루시앙 바슈는 선박 내부 골조 가 담당한 '능동적인' 혹은 '수동적인' 역할에 대해 강조한다. 외피판을 고정하는 나무 쐐기를 박는 것과 같이 그때까지는 눈에 띄지 않고 지나쳤던 세부사항들이 이제부터 잠수상태에서 도 관찰되었다. 학자들이 던진 의문점을 넘어서 난파선을 읽어내는 새로운 방법이 탄 생한 것이다. 1965년에 가봉 로페즈만의 먼바다에서 우연히 발견된 18세기 초기의 네덜란드 난파 선인 모리티우스는 자료를 통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보여주었다. 네덜란드 사람들 은 큰 선박의 밑바닥 내부는 '외피판 우선'유형의 공법을 사용해 왔다. 대략 65m2의 면적 위에 보존되어 있던 선체의 잔해에 대한 연구는, 화물고의 연구를 뒷전으로 물러 나게 할 만큼 중요해졌다. 내용물(화물)이 용기(선박)를 그늘 속에 남겨놓았던 시기가 끝난 것이다. 제5장 수중세계의 건축술 1950년대 말부터 해양고고학자들은 배를 발굴하는 일은 그것이 땅 위에서건 바닷속 에서건 공통적으로 고고학에 속하는 직업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결국 중요한 기준은 물의 세계와 연구대상과의 관계였다. '물'이라는 이 특별한 물질계에서 고고학은, 의도 했건 그렇지 않건 간에 난파 이후 영예롭게 쌓인 시간의 질서를 혼돈에서 끌어낼 것이 다. 난파의 순간부터 응고되어 버린 역사를 담고 있는 하나의 '캡슐'처럼 난파선은 고고학 자에게 땅 위의 재난 지층과 똑같은 효력을 지니고 있다. 화산의 잿더미 아래나 혹은 한 도시의 화재가 지나간 자리처럼 난파지역의 모든 물건들은 난파 순간부터 호흡을 멈추고 깊이 잠들었다. B.C. 1세기의 난파 당시 이미 여러 세기의 나이를 먹은 안티시테르 난파선의 청동 입 상과 같은 사치스런 화물고나 수부들의 장비, 혹은 선박을 특별 대우할 만큼 중요하게 여겨졌던 물건들은 무사히 마지막 여행을 마치는 경우가 드물었다. 난파의 날짜를 추정하는 것은 선박의 제조 방법이나 제작 시기를 아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현대 통계학을 살펴보면 난파가 흔히 오랜된 배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종류의 현상이 고대 선박을 포함해서 상선의 전역사에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은 가능 한 일이다. 때때로 돛배의 연령은 돛대를 세우는 자리의 우묵한 구멍 근처에 동전 하 나를 놓아두는 선박제조자들의 오랜 관습 덕분에 결정되곤 했다. 이 경우 고전학적 지 식 덕분에 그 동전의 연대를 정확히 추정할 수 있다 해도 동전이 선박제조자들 생존시 에도 골동품이었는지 아니었는지의 여부가 의문점으로 제기된다. 연대를 추정하는 현대적인 방법들은 여러 가지 정확성을 가지고서 배의 나이를 명확 하게 알기 위한 보조도구들을 낳았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탄소 14를 이용한 연대 추정 방법이 고안되어 고고학적 유적 이나 유물을 구성하는 유기물의 연령 조사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처 음부터 통계학적인 정확성이 부족한데다가(예를 들자면 고대의 경우 수십 년, 목재 돛 단배의 최후를 추정하는 경우 더 많은 시간의 오차가 있었다). 단정이 제조될 때나 나 무가 베어질 때, 목재는 이미 나이가 들어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수목연대학은 특정 지역의 날씨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나이테의 변화에 관심을 두고 베어진 순간에 가까운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했다. 이 방법은 어느 지역에서 벌목된 것인지 나무의 출처를 알아야 적용할 수 있는데, 그 것은 바다를 항해하면서 여러 지역을 돌아다녀야 아는 해상 난파선의 경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상무역이 중요해진 까닭:달구지를 이용하는 비용보다 저렴한 선박 수중 발견물이 난파선들이 지닌 역사적 가치의 탁월함이라면 우선, 땅위의 폐허와 반 대로 두꺼운 수층에 보호된 난파선들의 유물이 몇 세기 동안이나 온전히 보존되어 있 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제 수중에 묻힌 인류의 유물들은 역사적인 맥락 속으로 들어왔다. 1979년 브리스 톨 대학의 고고학자들은 A.J. 파커의 지도 아래 1500년에 기록이 끊긴 목록에 나타난, 지중해의 중세와 고대의 난파유적지를 660여 군데나 조사했다. 유적지의 수는 몇 년 뒤 1000여 개로 수정되었고, 이번에는 북대서양 근처가 대상이 외었다. 난파지역의 중 요성 정도는 해상무역의 규모와도 관련이 있다. 역사가 구스타프 글로츠는 고대 그리스 라키아다이에서 엘레우시스까지 기왓장을 운 반하는 육로로는 40드라크마가 들었지만, 코린트의 배로는 운반경로가 왕복 세 배나 더 길었는데도 그 비용이 여덟 배나 쌌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선체 추락의 또 다른 해석 우연한 사고로 바다의 심연 속에 가라앉은 난파선을 조사하던 잠수부들은 몇몇 지상 의 원칙과는 다른 현상들을 발견했다. 자연계를 지배하는 법은 엄중하지만 바닷속에서는 위반을 허락해야 했다. 딘 이후 120년이 지난 1960년대에, 잠수부 알렉산더 매키는 1545년 포츠머스 먼바 다에서 침몰한 메리로즈의 난파선은 영불해협에서 새로이 탐색한 결과 특이한 현상을 관찰했다. 지역해류가 난파선의 주변에 웅덩이를 파고, 난파된 선체를 흡수하는 현상 이 일어난 것이다. 해류에 운반된 모든 물건들은 수평선까지 영향력을 끼치며, 이 인공적으로 생긴 움푹 한 구멍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지질학자들은 지층 검사로 한 지역의 역사를 재구 성하기 위해 층위학을 이용했고, 지상고고학자들은 19세기에 이 중요한 도구를 빌려왔 지만 수중고고학자들은 도움을 청할 줄 몰랐다. 지층 검사는 담수든 염수든 물 아래에서는 실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시간분석을 할 때 외과의사가 사용하는 메스처럼 날카로운 도움을 주는 층위학은, 인 간이 자유롭게 살고 밟았던 표층 위에 남긴 유적에 대해서만 판단이 가능했다. 여행 도중에 꼼짝없이 굳어버린 방랑자인 난파선은 층위학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 다. 두 바람 사이에서 닻을 내리다 선박이 일단 난파되면 '폐쇄된 시간'에 갇히는 데 반해 발굴지역들은 계속해서 '열린 시간'에 놓이기 때문에 긴 시간에 걸쳐 한 장소에 유물이 쌓이게 된다. 정박소는 그리 눈에 띄지는 않지만, 한 장소에 다양한 시대의 유물들이 축적되어 있 다는 점에서 발굴지역으로서 중요한 곳이다. 항구가 없을 경우, 정박소는 돛배가 닻을 내리고 바다나 바람을 피했던 곳으로 특권을 부여받은 장소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발 견되는 유물들은 대개 뱃전 위로 던져진 찌꺼기들이나 혹은 본의 아니게 버려졌던 물 건들인데, 그중 특히 닻이 많았다. 정박소는 난파의 연대나 발굴 지역의 수직적인 층위를 나타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몇 가지 예외도 있다. 바람이 불면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될 수 없는 비무장 장소인 정박소는 때때로 난파에 따른 마조르카섬 남쪽 해안 위의 산조르디의 정박소에 서는 해저발굴자들이 해초가 있는 바다 밑바닥을 파면서, 고대에 두 번의 난파가 있었 음을 증명하는, 명확하게 구별되는 두 개의 층을 찾아냈던 것이다. 돌의 침묵 1960년대에 호너 프로스트는 푸아드바르의 뒤를 이어 레바논의 가장 오래된 항만 유 적지를 연구했는데, 정박소와 항구의 경계에 대해 원양항해 초기 때의 의문점을 다시 제기했다. 기술자인 가스통 종데가 알렉한드리아에 대해 세기 초에 그리고 또다시 제 기한 질문은 이러했다. 청동기 시대사람들도 항구를 건설했던 것일까? 고대 항만 구조 의 전문가인 지질학자 니콜라스 플레밍에 따르면 '청동기 시대의 인공항구를 발견한다 는 건 암탉의 이빨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 이었다. 푸아드바르의 방법에 수중 잠수구를 첨가해서, 영국인 호너 프로스트는 페니키아의 해안에서 대피소로 쓰였던, 나무 없는 작은 섬 아르와드의 바위 밑에서 부서진 옛 구 조물을 들어내는 일을 1963년-1964년에 착수하였다. B.C. 15세기의 이집트 기록에 인용된 바 있던 아르와드 지역과 서쪽으로 조금 더 가서 마슈르드의 작은 섬까지 이어 진 암초 대열은 타밭트알하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티르에서 호너 프로스트는 푸아드바르가 직접 물 아래에서 관찰할 수가 없었기 때문 에 옛 상업구역을 항만지역으로 착각했다고 설명했다. 종데나 푸아드바르 그리고 그들 이전의 다른 사람들처럼 프로스트도 물 속에서 조사 한 석재 구조물의 연대를 정확히 추정할 만큼 많은 정보를 얻지 못했다. 좀더 시간이 지났더라면 도구를 이용해 석재 구조물의 정교한 분석이 가능했겠지만, 여기서는 결론 을 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층위학조차도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고 푸아르바르 는 주장했다. 이렇게 되자, 프로스트는 수중 상황에서는 층위학이 부적합다고 결론을 내렸다. 고대의 항만 정박소 초기의 연구들은 페니키아인들의 항만 건설 솜씨를 분명히 드러내주었다. 바위에 노 련한 구멍을 팠던 페니키아인들은 천혜의 바위 형태를 보고 처음에 선택했던 지역을 정돈하기 위해 돌을 다듬었다. 단순한 부두, 방파제, 그리고 기초 공사로 파낸 구덩이 의 수준을 넘어서, 1974년의 카르타고의 발굴은 토목공학의 또 다른 면모를 밝혀있다. 이번에는 바위로 만들었고, 바다에 연결되는 통로를 이루었던 두 개의 정박소들이 그 전에 푸아를바르가 티르에서 탐색한 바 있는 '코통(해안에 팬 인공항구)'의 기술을 보 여주었다. 페니키아인들의 전통 중에는 강 항구 하나를 설치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로써 작은 하천 하나가 현재 리비아해안-B.C. 2세기에 로마와 합병되었고 원래는 카르타고의 것 이었다- 에 있는 렙티스 마그나의 항구에 모래톱을 생성시켰다. 이탈리아팀들이 1930년대에 지상에서 발굴한 지역은 80m폭의 좁은 수로 하나를 갖 춘 10헥타르의 정박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프랑스인의 최근 수중발굴은 렙티스 마그나 부두의 길이가-전에는 800m에서 1200m 정도로 추정했지만- 실제로는 1500m가 넘 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 부두는 카르타고와 오스티에 이후 동지중해의 주요 항구들 중 하나였으며 고대 항구의 중요성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오스티에는 기원후 42년부터 클로디우스 황제 때 공사가 시작되어, 반세기 뒤 완공된 어마어마한 규모의 복합구조물이었는데, 이는 130헥타르가 넘는 두 곳의 정박소를 포 함하고 있다. 그전에는 제국의 항구로서 로마 공화국의 중심항구는 수도에서 아주 멀 리 떨어진 나폴리만의 푸테올리(푸졸레스)였다. 사람들이 로마인에게 바다에서 나는 시멘트의 주요소를 제공해 주던, 불그스름한 화산 가루인 푸졸란을 채취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푸테올리에서였다. 플라비우스 요제푸스는 "유대 전쟁"이라는 책에서 헤로데왕의 명령에 따라 12년(B.C. 22-10년)에 걸쳐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며 완성되었던 세마스토스 항구 얘기를 적 고 있다. 이 항구는 카이사레이아 오른쪽, 지대가 낮고 사방으로 개방된 해안에 건설 한 것으로, 요제푸스는 여기에 적용한 토목공학의 성공사례들을 언급했던 것이다. 헤로데와 평면 구조지질학 1975년, 원자력 발전소 건립을 위한 부지 설정을 검토하던 이스라엘 전기회사의 요 청으로, 고고학자 아브너 라반과 하이파 대학의 동료들은 그 지역의 바다 맡 지각운동 을 살피기 위해서 잠수를 하며 헤로데 항구의 구조를 탐사하였다. 옛 항구의 폐허가 된 잔해는 2000년 동안에 5m에서 6m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북쪽으로 30km 지 점에 떨어져 있는 아틀리트에서는 어떤 침하도 탐지되지 않은 만큼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은 편이라 아브너 라반 일행의 조사결과는 지질학자들에게 중요했다. 탐사의 주된 요지는 동지중해 해안이 곧은 형태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 이 장소에서 있었던 대륙 평면의 절단 때문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데 있었다. 아브너 라반이 지휘 하던 잠수부들은 그때부터 카이사레이아의 항만지역이 점차적으로 침하되었고, 틀림없 이 2세기 후반부터는 사라졌다는 걸 증명해 보였다. 1990년대 초반에 라반은 물 속에서 화산가루가 가득 든, 엄청나게 큰 나무 상자들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러나 라반과 잠수부들이 큰 항만지역에서 일어난 점차적인 침하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었던 것은 항아리 덕분이었다. 이 항아리는 기원 후 3세기와 4세 기의 난파선에서 나온 것으로 옛 항구의 유적지에 있던 유물이었다. 고고학적 유적지의 침수에 대한 의문은 오래 전부터 지질학자들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유적지의 침수 문제는 독자적인 운동에 따른 두 가지 현상이 섞여 있는 만큼 복잡하 다. 그 현상 중 하나는 바닷가 대륙 표면의 운동 때문에 야기된 침수이고, 다른 하나 는 기후 변화가 함몰지역의 집중된 빙산을 녹여서 생겼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해양유물 연구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그리스인 포키온 네그리스는 이 침 수를 최근 바다 수위가 상승한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크레타섬의 팔라사르 나에서 발견된 정반대의 예도 알고 있었다. 19세기 이후 앞의 것과는 다른 움직임이 탐지되었는데, 이것이 마로 옛 하천을 융기시켰던 것이다. 처음에는 바다 수위와 똑같 은 위치에 있었던 옛 양어장이 오늘날에는 5m나 물 아래로 내려가 있는 것이 발견되 었다. 1960년대 초기에 지질학자 니콜라스 플레밍은 리비아의 아폴로니아에서 잠수를 하면 서, 차츰차픔 물에 가라앉은 옛날 구조물에 대해 세분화된 연구를 하였다. 얕은 수심 덕분에 수로가 열렸고, 이 때문에 선거에 연결된 내부 선거를 분명히 볼 수 있었는데, 그것들의 크기(6m폭에 31m길이)로 그 곳에 정박했던 단정들의 최고 크기를 결정지을 수 있었 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잠수를 하면서 아폴로니아 옛 항구에 인 접한 쓰레기처리장의 층위학적 고찰을 개시하였다. 1m 아래 부근에서 발견된 도자기 들은, B.C. 4세기 이후부터 A.D. 7세기에 아랍인들이 도착하기까지 약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의 그 지역 역사의 연속을 층층이 담아냈다. 바다가 천천히 상승해 가는 사 이 유물을 담고 있던 그 지역은 이렇게 버려졌던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프리카 대륙의 표면이 발칸반도와 그리스 아래인 북쪽을 향해 기 울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 현상 때문에 고대 말기부터 물의 높이가 4m나 높 아지게 외었고, 그 결과 아폴로니아와 렙티스 마그나를 비롯한 리비아의 옛 연안지역 의 침하가 생긴 것이다. 지질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공동작업의 이해관계를 유지해 왔고, 특히 물의 높이가 원지면이나 수면의 높이를 표시해 주는 증거물로 쓰이는 바닷가의 모든 지역에서는 더욱 그 관계가 밀접했다. 이것은 초기 항해시대 이후의 해안 연구뿐만 아니라, 지금은 바다 밑이 되어버린 과 거의 지표면을 인간이 걸어다녔던 시기의 연구, 즉 선사시대 연구에도 해당하는 것이 다. 오늘날 연구가들은 1만 8천 년 전 구석기 시대 마지막 빙하가 되었을 때는 바다 높 이가 120-130m 정도 낮았음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유적지는 잠수로 다시 찾아볼 수 있고, 따라서 발굴 가능한 지역도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이 시기의 유물이나 유적이 잠수탐사를 통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바이아, 잠겨진 도시 물 아래의 층위학을 체계적으로 이용한 첫 번째 사람은 물 아래의 수상도시 발굴자들 이다. 관련된 시기는 후기 선사시대에서 중세까지 이어진다. 화산폭발로 물레 잠겨버린 나폴리 근처의 도시 바이아 같은 지역의 경우 층위학이 바 다에서 아주 효과적인 도구임을 밝혀졌다. 이 지역의 옛 해안선은 선이 400m 정도가 된다. 1956년 이후 바이아의 수중 잔해물 에 관심을 갖은 고고학자 니노 람볼리아는 진흙과 미역으로 가려진 온천 건물과 포석 이 깔린 길을 분명히 드러내보였다. 그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20년 뒤에, 풍요롭 게 장식되어 있는, 님프를 모시던 신전을 역시 잠수를 통해 발굴했다. 바이아에서 발견된, 벽면 사이에 넣는 건축자재의 성분과 쓰임새를 분석한 결과 우리 는 이 지역이 3세기 무렵에 역사에서 지워진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 곳은 옛 기념물 들이 물에 잠겼다가 다시 대기 중에 나타나고 또 침수되는 등 지질학적 현상이 활발했 던 화산지역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오늘날 바이아만에 쉬웠다 가는 상선들이 닻을 끌 면서 고대의 도시에 자국을 낸다는 것이다. 고대의 도시는 정박소가 된 것이다. 아침 나절이 끝날 때의 파도:포트로얄 예외적인 경우에, 항구나 도시, 혹은 마을이었다가 물에 잠겨버린 지상지역은 갑작스 러운 난파의 시기와 그 피해 정도, 또 침수 전의 역사에 대해서 짜맞출 수가 있다. 1692년 6월 7일 정오 직전, 2000여 채의 건축물을 포함하여 5000여 채의 주거지가 있는 도시를 거의 완전히 부서버린 무시무시한 파도와 연이은 세 차례의 진동이 있었 던 자메이카 섬에 포트로얄이 그 경우이다. 초음파 탐사를 이용해 마을의 유적지도가 작성되기 위해서는 국립 지리학협회와 워싱 턴의 스미스소니언 연구소에 후원을 받은 실업가 에드윈 린크가 1959년 연구를 시작 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25년 뒤 고고학자 D.L. 헤밀턴은 수중에서 폐허가 된 건물을 방위기점을 이용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북쪽 세 개의 방은 처음에 지어졌고, 남쪽의 방 세 개를 더 짓기 전에 한동안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한때는 움직일 수 있었지만 우연한 사고로 응고되어 버린 난파선과는 반대로, 지형학 적인 지표들은 그 옛날의 건축가들에게나 오늘날의 고고학자에게 똑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제6장:우연 또는 집요함 항아리 1981년, 프랑스 지중해 연안에서 조사된 200여 척의 난파선들 중 3분의 2가 고대의 성박이었다. 잠수부들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중세에는 난파가 없어 공백기에 속한다. 난파선들은 르네상스 이후에 다시 나타났지만, 이번에는 항아리 없는 채였다. 이는 로 마인들의 상업활동이 시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항아리나 대포를 실은 난파선들은 다른 운송선, 즉 눈에 잘 띄지 않는 가죽부대나 나쿠통 같은 것들을 실은 선박보다는 탐지가 췋씬 쉽기 때문이다. 대포나 항아리는 크기가 커서 잠수부들의 눈에 잘 띄었다. 오랜 기간 보존이 잘 되고 발굴이 쉬운, 도자기인 항아리는 그 형태가 오랜 시간 다양하게 변화했기 때문에 연대 를 추정하기 쉽고, 따라서 고대 상업의 규모를 안느 데 시계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그러셀 1'을 보기로 하자. 프랑스 지중해의 고대 난파선 속에서 단골로 나 타나는 이 항아리는 약 1세기 동안 이탈리아 포도주를 골 지방에 대량으로 수립하는 데 이용되었다. 고고학자 앙드레 테르니아에 따르면 이 교역은 연간 1200만에서 1500만 리터에 해당하는 것이고, 1세기 동안 골 지방에서 총 5500만에서 6500만 개 의 항아리들이 포도주 수송에 이용되었다. 이 숫자들은 현대의 잠수부들이 발굴작업한 결과 밝혀진 것이다. '드러셀 1' 항아리를 은 44척의 난파선들이 1980년대 초 프랑스 지중해에서 발굴되어 알려졌다. 술통 처음에는 포도주와 식용유를 운반하기 위해 이용되었던 항아리는 로마인들이 즐겨 먹 는 생선으로 만든 식품을 수출하는 데도 쓰였다. 거대한 도시인 로마는 엄청나게 먹고 마셨다. 2세기 무렵 골 지방은 바닥이 납작한 항아리에 많은 포도주를 담아 로마에 제공했고, 갈리아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A.D. 3세기부터 화폐의 가치도 떨어지고 도 시 인구가 감소하면서 경제생활이 침체되자, 항아리의 형태는 더 천천히 변화했고 특 징도 점점 흐릿해졌다. 난파선은 더 드물어졌다. 지중해에서 조사된 1000여 개가 넘는 난파선 가운데 4세기의 것은 54개만이 보고되 어 있을 뿐이다. 수중환경 속에서 잘못 조사된 것일까? 아니다. 로마가 분열되었고, 뒤 를 이어 비잔틴도 역시 같은 길을 밟았다. 분열이나 해상무역의 쇠퇴로, 회교도의 지 중해는 난파선의 발견을 통해서나 겨우 그 모습을 엿볼 수 있을 정도였으며, 그 경향 은 르네상스가 동틀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바다 아래에서, 항아리를 실은 다른 난파선들이 그 이후의 혹은 그것과 동시 대의 새로운 난파선들의 출현을 어느 정도로 알려주느냐를 알아보는 문제가 남는다. 항아리가 술통에 자리를 내준 과정은 획일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사실 이탈리아에서 는 술통이 처음부터 운반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포도주의 숙성을 위해 마련된 단순한 양조통이었는데, 2세기에서 3세기 무렵부터 항아리를 대신하기 시작됐다. 로마에서는 술통이 4세기에도 빈번히 사용되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중세에 가서나 술통의 '혁명' 을 볼 수가 있었다. 항아리와 같은 의미 있는 지표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대포가 항해 역사 안에 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대포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데다 크기가 컸고 대포의 중요한 부분들은 물 속에도 쉽사리 탐지되었다. 배의 화물고에는 술통과 다른 여러 가지 통들 이 옛날의 도자기 그릇을 대체에 실렸다. 중요한 점이라면 르네상스 시대의 선박들은 문서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제노바의 상선 1979년 4월에 잠수부 알랭 비스키는 르네상스 시대 큰 선박의 자취를 빌프랑슈쉬르 메이만에서 찾아냈다. 함장인 막스 게루트의 지도 아래 1982년에서 1990년까지 8년 이상 지속된 수 중발굴 결과 전형적인 지중해식 제조의 세부사항과 같은 종류의 난파 선에서는 처음으로 대포 현창을 발견할 수 있었다. 1m가 넘는 진흙 아래에서 배의 고 물 쪽을 한층 더 높인 막강한 제노바 상선들의 잔해가 있었다. 빌프랑슈쉬르메릉의 난파선에서 발견된 술ㅌㅇ오이나 작은 통들은 무척이나 다양한 크기를 지녀 화물고 도면의 복잡함을 확인해 주었는데, 선주만이 경험으로 얼마만큼의 곡식 혹은 포도주나 식용유를 자신의 배에 실을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도면과 문서, 스리고 유물들을 종합해 역사적으로 연구한 결과, 빌프랑슈쉬르메르에 서 발굴된 난파된 로멜리나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때부터 고고학적 발굴도 문서자료 와 연결되기 시작했다. 표적의 선택 다른 수많은 수중 발굴지역처럼 빌프랑슈쉬메르의 난파선을 발견한 것도 우연이었다. 그러나 초기 수중탐사 작업이 시작되기 전인 1950년대 초에 앤더스 프란젠이 문서들 을 검토하다가 '표적'으로 삼았던 바사는 그 경우가 아주 달랐다. 1960년대에 미국인 조지 바스는 우연에 의존하는 초보적 해양고고학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는 터키 남쪽의 난파선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그 다음 순서로 발굴해야 할 중요한 지역들을 추리기로 했다. 모든 방법이 시도되었다. 측면 음파탐지기, 선상 감시기와 함께 끌어올리 수 있는 캡 슐, 고분해 비디오 카메라와 자력계, 심지어는 제너럴 일랙트릭사가 고안한 소형 잠수 함 아슈라까지 동원되었다. 이처럼 갖가지 장비들을 갖추고시도했지만 결국 바스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도구는 따로 있었다. 겔리도니아만과 야시 아다, 세르스리만의 난파 선을 발굴했던 해면잠수부들의 눈이 바로 그것이었다. 착시 그런데 이 방법의 경우, 고고학자는 자기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잠수들에게 직접적으 로 의존해야 했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해안에 따라 난파선의 수가 다르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모래가 많고 풍광이 단조로워 보이는 낮은 해안에서는 특별한 발굴 물이 훨씬 드물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반면에 마르세유 주변에서 발견된 여러 척의 고 대 난파선들은 그 지역의 상업적 중요성의 반영일 뿐만 아니라 해안 밑 바위투성이 바 닥에 매혹적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활동이 활발한 잠수부 공동체가 그 지역을 자 주 찾았고, 1년 내내 탐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고고학자 미셸 루르는 피서 철이 짧고 잠수부들이 숫자가 적다는 점이 틀림없이 브르타뉴 지역에서 발굴된 난파선 의 수가 상대적으로 족은 이유라고 생각했다. 북아메리카 스포츠 잠수의 요람지인 캘리포니아에서는 보기 드물게 강력한 잠수부 단 체의 등장으로, 박격포와 물 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그 지역 마지막 선사시대의 보 석품들이 발굴되었다.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돌아오는 길목이었던 플로리다로 말하자면 1950년대부터, 곧바로 보물사냥꾼으로 변신한 소수의 아마추어들을 끌어들 였다. 3m, 5m, 5m의 깊이의 물 속에 있던 난파선들은 단지 마스크만을 착용했던 수영객들 의 힘으로 위치가 탐지되었고, 연이어 들어온 잠수부들이 흑연막대기, 흡입기 혹는 물 총 같은 것으로 발굴을 시작했다. 스크림만의 늑대들 직업 잠수부들인 아서 매키, 건축청부인 킵 와그너, 그리고 잠수도구 판매인 멜빈 피 셔 등 이와 같은 탐사를 시작한 목적은 귀중품 사냥에 있었다. 하지만 세월에 흐름에 따라 이 잠수부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던 항아리를 스페인 항아리로 바꿀 만큼 그곳의 문화를 지중해의 잠수들에게 얻었다. 보통 크기가 작고 손잡이가 없는, 안달루시아산 스페인 항아리는 식민무역의 확산을 동반했다. 이 항아리는 남아메리카의 파타고니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캐나다에서도, 필 리핀에도, 케냐에서도 똑같이 찾아볼 수가 있었다. 이러한 확산은 16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 식민항해의 역사에서도 안달루시아, 세비야, 그리고 카딕스가 기항지로 이용되 는 특권을 누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 속에도 감쪽같이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옛 베티카(현재의 안달루시아 지방)란는 곳에서 식용유를 운반하기 위해서 제작한 항아리와 같은 장소, 그리고 같은 목적을 위 해 만들어졌으며 또한 같은 종류의 반죽이 사용된, 지중해에서 발굴된 스페인 항아리 는 자주 특이한 형태의 옛날 항아리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플로리다 바다에서 건져 올려진 항아리들은 식민지의 난파선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 다. 그러나 터키에서 조지 바스 팀이 옛 난파선을 찾기 위한 지표로 항아리에 의존했 던 것에 반해, 플로리다 난파선의 귀중품 사냥꾼들은 1960년 이후부터 전기탐사 기술 을 도입한 결과 목재로 된 난파선은 쉿덩어리로 된 물건들과 닻, 대포, 못, 그리고 쐐 기 혹은 선구들 덕분에 발견되었다. 자력 장기판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잠수함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사용된 것이 바로 자력계이 다. 자력계는 자장이 국부적으로 비정상적인 변동을 일으키면 민감하게 반응했다. 자 력계가 식민시대의 난파선을 탐지하는 데 얼마만한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텍사스 사람 인 바르토 아널드 3세가 행한 실험으로 증명된 바 있다. 고고학자였던 바르토는 1970 년대에 실험을 실시했는데, 그 대상은 16세기 중반에 텍사스의 파르도섬 해안에 침몰 했던 스페인 난파선이었다. 물 속에서 유물이 분산되어 있는 수치를 통계 낸 자료를 근거로 자력계는 난파선에 연관된 거의 모든 잔해의 소재지를 알려준다. 식민시대의 목재 선박과 그 이후의 선박을 탐색하는 데 자력계는 가장 강력한 도구였다. 비밀 방어 자력계로 목재 난파선을 탐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배 안에 못이나 대포와 같은 철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대나 민간인의 사용을 목적으로, 원자핵 사무국이 그르노블에 개발한 원자력 공명 자력계는 놀랄 만큼 민감한 성능을 가지고 있는데, 약 100m 거리에 있는 난파선 메두 사의 위치를 탐지해 냈다. 1816년에 서아프리카 공화국 모리타니 해안에서 48km 떨 어진, 아르갱 어장의 최고 깊은 곳에서 난파된 이 프랑스 범선은 대포 같은 다양한 형 태의 철물이 50톤이나 들어 있었다. 좀더 깊숙이 가라앉은 난파선의 탐사를 위해 자력계 대신 측면수중 전파탐지기를 이 용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수중 레이더로 측면 주사를 통해 해저 밑바닥의 드넓은 표면 을 탐사하여 난파선 조각이나 바위 등 모든 돌출물을 찾아내 기계화면이나 기록지에 가시적으로 투영하는 기구이다. 예를 들어 이 기구를 이용하면 찬물 속에서 비교적 잘 보존된 난파선의 경우 운이 좋으면 닻의 모습도 화면에 담을 수 있다. 이 방법을 통해 로버트 발라드 팀은 19세기 초 온타리오 호수에 가라앉은 두 척의 삼각돛 선박의 영 상을 수치와 함께 제공하여, 난파선을 3차원 영상으로 재현하는 기술을 과시하였다. 군대나 원양산업에서 가져온 다른 기구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해주는 한편, 광학섬유와 숫자시준표의 사용은 측면수중 전파탐지기를 이용하여 어떤 수심에서도 탐사가 가능하도록 해주었다. 바다 침전물 아래에 숨겨진 난파선들의 운명 이 달라졌다. 10년 전만 해도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탐사자들은 나무로만 된 물질이 나 배의 밑바닥과 같이 자력계나 측면수중 전파탐지기로는 탐지가 불가능한 유물까지 도 진흙 밑에서 센티미터 단위까지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하구의 진흙과 늪에 묻힌 모든 고고학적 유물들 역시 군사적인 탐사의 목적으로 생겨난 이 기술의 개발을 기다렸다. 제7장 철의 눈물 바사의 혁명 바사의 구조작업은 크나큰 위험부담을 안은 채 시작되었다. 30m가 넘는 깊이의 물 속에서 스웨덴 해군 잠수부들은 떡갈나무로 만든 이 큰 선박의 용골 아래로 굵은 금속 밧줄을 밀어넣기 위해 진흙 속에 터널을 팠다. 들어올리고 내리는 작업을 계속한 결과 난파선은 조금씩조금씩 땅 가까이로 끌어져서 17m의 수심에 놓여졌고, 잠수부들이 오 랫동안 강화작업을 한 끝에 1961년에 본격적으로 다시 물에 띄워졌다. 바다 가운데 떠 오른 17세기 초 선박의 모습은, 해양역사에 관심을 갖는 전세계 아마 추어 탐험가에게 모든 난파선은 다시 띄울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그런 희망은 사라지고, 스웨덴의 바사 구조작업이 유일한 실험이었음이 판명났 다. 바사의 발굴작업은 놀랄 만한 기술과 지정지원의 결과였던 것이다. 1982년에 난파 선 메리로즈가 10년간의 힘든 발굴작업 끝에 다시 띄워졌을 때도 지켜보던 모든 사람 들은 그것이 바사의 보존상태와는 거리가 먼 것임을 분명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게다 가 바사의 경우 지역역사의 상징이라는 이름으로 작업이 이루어진 것에 반해, 튜더 왕 조시대에 건조되고 그 반쪽만 다시 빛을 보게 된 이 영국 선박은 거의 국가적으로 합 의된 노력에 따라 영불해협의 진흙탕 속에서 올라왔다. 값비싸고 끈질긴 작업들:보존을 위한 첫 시도들 바사의 경험은 과거에 발굴된 유물들이 일으켰던 현상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은 바다 밑에서 끌어올린 모든 물건들은 비록 겉보기에는 양호한 상태라고 할지라도, 안타깝게 도 대기속에서는 손상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1840년 잠수부 딘 가족이 발굴한 난파선 메리로즈에서 나온 물건들이 경매에 부쳐졌 을 때, 사람들은 직경이 32리브르인 굵은 쇠 포환의 무게가 19리브르를 넘지 않는다 는 사실에 크게 주목했다. 30년 뒤 비고에서 은행가 마장과 그가 고용한 기술자들은 1702년 발굴된 난파선에서 나온 포환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포환은 부서지기 쉽게 변 했고 아주 조그마한 충격에도 깨지면서 내부가 중심에서 주변으로 퍼지는 무수한 빛으 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라고 그 이상한 특이점들을 기록하였다. 실제로 일단 대기중에 노출된 포환은 곧 뜨거워지고 액체 같은 것이 흘러 나와 방울 방울 맺힌 뒤, 산화물덩어리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목재의 경우는 더 미묘했다. 1850년 이후 덴마크에서는 물기를 잔득 먹은 오래된 나 무의 파손을 막기 위해서는 명반을 사용했다. 방법은 개선되어, 1904년에 노르웨이의 오세베르그무덤에서 발견한 바이킹 선박에 사람들은 크레오소트와 아마 기름을 칠했다. 전문가들은 이어지는 반세기 동안 나무 보존 기술분야는 침체기에 빠졌다고 말했다. 폴리에틸렌글리콜은 이미 1859년에 화학자들이 합성에 성공했지만 상업화된 것은 1939년에 이르러서였다. 가죽이나 종이처럼 모든 종류의 식물섬유를 이용해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미국의 유니언 카바이드 회사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만큼 나무는 등한 시되었던 것이다. 나무를 처리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스웨덴과 미국의 두 연구팀은 젖은 나무를 망가지지도 변하 지도 않은 원래의 형태 속에 보존하기 위해 마침내 PEG 사용을 제의했다. 1956년에 보도된 한 기사를 보면 고고학 분야가 폴리에틸렌 글리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내 용이 등장한다. 앤더스 프란젠이 막 바사를 발견했던 무렵이었다. 1961년의 난파선 끌어올리기는 거대한 실험의 시연무대로 변했다. 대상이 된 나무는 대부분 떡갈나무였고 700m2였다. 첫 번째 시도의 결과 PEG를 희석하고 가열하여 대 략 섭씨 65도 정도 만들어야 알 수 있었다. 마침내 한 방법에 초점이 모아졌다. 처리 한 지 17개월 뒤에 나무조각 하나하나는 6개월 동안의 건조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 이다. 이 과정을 마치면 PEG는 나무조각 무게의 40%를 나타내게 된다. 이런 식으로 전부를 처리하는 데는 20년이 필요하다. PEG로 처리작업을 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이 막대해 연구자들이 대안을 찾았는데, 몇 해 전 캐나다 사람들에게 전수받았던 기압탈수법이 가장 그럴듯한 대안으로 받아들 여졌다. 특히 탈수 전에 PEG를 스며들게 하지 못하여 부분적으로 실패했음에도 불구 하고, 마르세유의 옛 난파선은 곧바로 처리되어 이 방법은 만족스런 미래를 점치게 했 다. 의학계와 산업계에서 탄생한 탈수법은, 얼음을 녹이지 않고 기화시켜 나무의 팽팽 함을 최대한 제한하는 원리를 이용했다. 철의 적 바다에서 끌어올린 금속의 처리를 연구하던 학자들은 대기중에 건져 올려진 금속을 상하게 만드는 주요파괴 요인을 없애는 여러 가지 기술을 개발하는 데 전력하기 시작 했다. 이 파괴요인은 바로 소금(염화나트륨)으로, 마르는 과정에서 결정체를 형성하면 서 금속의 구조를 파괴했다. 그것은 전기분해에 기초한 보존기술은 점진적이었지만 효과적으로 소금기를 제공했다. 바다에서 건져져 항구의 잔디 위에 보존되어 있던, 몇몇 쇠닻들에 게는 강우량이 적은 건조한 지역에 놓인 이 두꺼운 주조 철 앞에서는 이 '상징적인 처 리방법'이 열 번 중에 한 번밖에는 기능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보존 없는 발굴은 문화재 파괴이다."라고 보존기술 개척자의 한사람인 오스트레일리 아인 콜리 퍼슨은 결론지었다 1960년대 초 이스라엘에서는 잠수가 스포츠로 개발된 이래 잠수부의 수가 약 3000 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사반세기 뒤에 두사람의 이스라엘 고고학자는 바다 밑에서 잠들어 있던 자료의 60%가 이미 일반 대중의 수집 대상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 다고 주장했다. 프랑스DRASM(해양고고학 탐사국)의 뤼크 롱은 목록에 기록된 B.C. 6 세기에서 7세기에 만들어진 600여 척의 옛 난파선들 중 5%미만 정도만이 아직도 손 대지 않은 채 그대로 보존되고 있을 뿐이라며 경고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수심 100m 가 넘는 곳에 있는 난파선까지도 약탈의 손길이 닿았던 것이다. 이러한 파괴의 과정에는 산업화가 한몫을 담당하기도 했다. 1970년대 초, 18세기 중 반의 전함이었던 쥐스트가 루아르강 하구를 치우던 준설기에 파괴되었다. 파리 해양박 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전함의 몇몇 부속품들은 그 동안 진흙이 나무와 동아줄을 얼마 나 단단히 보호해주었는지를 보여준다. 바사를 구해낼 때는 전국가적으로 관심이 고조 되어 구조와 보존 작업이 쉽사리 이루어졌지만 낭트 바로 가까이에 있던 쥐스트는 그 런 혜택을 입지 못했다. 파손되지 않았던 유물이 준설기에 잘려 나가 이 선박은 다시 한번 난파를 당하는 험한 운명을 겪었다. 15년 뒤 네덜란드에서 고고학자 티스마알르 벨드와 그의 동료들은 로테르담 항구의 걸림닻을 가지고 잠수하여 발굴고고학이 땅에 서처럼 물 아래에서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음을 증명하였다. 땅과 물이라는 정신적인 울타리는 오늘날 여전히 문화유산 관리의 형태고서 그 절정 에 달하고 있으며, 난파선 사냥도 더불어 계속되고 있다. 문화유산의 발굴과 유통산업 은 비고의 갤리선과 같이 집단적인 상상의 세계에 근거한 주변적인 것이지만, 역사적 인 출처가 모호한 데서 매력을 느낀 투자가들을 물어오기 위한 색다른 형태의 금융시 장을 형성한다. 경매에 부쳐진 문화유산 논란의 속사정은 훨씬 더 복접하다. 베트남 정부는, 1992년 런던에서 경매에 부쳐진 옛 중국 도자기 저장고를 다시 찾는 일을, 한 발굴작업 회사에 맡겼다. 1년 뒤 포르투 갈은. 바닷속에 있는 자기 나라 문화유산의 일부를 산업적으로 '양도'하는 방법으로 상 업세계에 내놓으려 했다. 반면, 그리스나 터키와 같은 나라들은 오래 전부터 이와는 만대로 자국위 문화재 유 출을 금지하는 문화정책을 펴 선구자적인 길을 걸었다. 1900년에 안티시테르의 난파선 구조작업에 든 비용을 살펴보면 자기 나라의 고고학 적 유산에 대한 아테네 사람들의 일치된 관심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60년 뒤 외국 대학의 자원 덕분으로 국가적 문화유산이 흩어지지 않고, 최초 의 거대한 수중작업장을 탄생시킨 곳도 터키에서였고, 이는 잠수를 통한 해양고고학의 과학화에 공헌하였다. 고철과 학자들 1989년부터 자기 나라 해안에서 발굴한 고고학적 유산의 개인 소유에 관해 아주 엄 격한 법률을 적용한 프랑스는, 해양학기술자들의 중계로 국제 해상에서는 정반대의 입 장에 서게 되었다. 1987년과 1993년에 두 차례에 걸쳐 타이타닉의 2600점에 달하는 물건들을 잠수함 노틸러스의 도움을 받아 되찾도록 북아메리카의 한 기업에게 허락했던 IFREMER(프랑 스 해양개발연구소)는 말을 번복하며 그 물건들에 손을 댈 수 없다고 했다. 그 선두에 선 사람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성역을 주장하는 미국인 해양학자 로버트 발라드였다. 1912년에 좌초되었던 난파 여객선 타이타닉은 고고학상 최초로 '상업적인' 참관의 재 상이 되었고, 그 몇 년 동안 자연적으로 파손된 비율이 더 높아졌다. 1991년 아나톨리 사가레비치의 지휘 아래 러시아 과학협회의 선박 아카데믹켈디슈의 호위를 받아서 잠 수함 미르 2와 함께 타이타닉으로 내려갔던 러시아 과학자들이 이를 확인하였다. 이때 채취한 표본 몇 점을 캐나다 실험소에서 분석했는데. 이 녹이 슨 표본들은 산소 가 없는 환경에서도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다양한 박테리아와 박테리아 때문에 녹이 슨 듯이 보이는 이상한 종유석들을 드러냈다 오스트레일리아 고고학자들 또한 최근의 난파선에 관심을 가지고 1872년에 침몰되었 던 첫 오스트레일리아 연안 항해기선 중 하나인, 난파선 SS 잔토를 끌어올리면서 다 시 한번 더 개척자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배는 실험소에서 보존처리되고 수리되 었으며, 이 발굴과정은 이 방면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외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고고학자는, 가벼운 합금으로 된 자동차의 크랭크축 덮개를 바다 깊 숙한 곳에 있는 철이나 강철로 된 유물 주변에 놓아둠으로써, 수중 얼룩 반점에 대처 하기 위한 효과적이고도 처방을 개발했다. 아연의 양극이 배의 추진기를 보호하는 것 처럼, 자동차 산업시대가 낳은 이 폐품들이 음극의 보호를 통해 짠물 안에서 일어나는 부식을 막았던 것이다. 제3형태의 난파선들 갑자기 물 아래서 새로운 개념이 탄생했다. 그것은 유물을 '원위치에서 보존한다'는 것으로, 대기중에 끌어올려진 엄청난 규모의 유물을 보존하는 데 따르는 까다로운 문 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더할 나의 없는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안정되게 자리잡은 난파선은 잠수복을 입고 방문학 수 있는 기념물이 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스페인 갤리선 사냥이 한창 유행을 이룰 때 약탈당하고 파괴 되었던, 플로리다 산호섬의 식민지 난파선들은 이제 잠수부들의 정기적인 방문을 맞아 잘 정돈되었다. 한류가 흐르는 곳에서도 이와 똑같은 경우가 있는데, 1755년에 브레스 트에서 만들어졌고 1758년에 캐나다의 루이즈부르 공략 때 침몰했던 전함 셀레브르가 바로 그것으로, 이는 전혀 손상되지 않은 상태였다. 1970년대에 CNRS의 팀이 마드라그 드 지앙의 옛 선박을 발굴했을 때처럼, 규모가 큰 수중 발굴작업을 할 때 취하는 작업경향은 확고해졌다. 그때부터 발굴지역은, 지식 의 저장고가 되었고, 각 세대는 자신들의 기술과 해결하고 싶은 역사적 의문점에 따라 발굴지역의 일부분만을 선택적으로 택해 탐사하였던 것이다. 가령 유물 전체를 분해해야 하는 발굴작업을 할 때도 이와 같은 경향은 지배적이었다. 스위스에서 베아 아르놀트는, 오랜 세월 난파되어 있던 통나무 배들을 건져 올려 실험 소에서 거푸집을 이용해 세밀하게 분해, 복원한 위, 그토록 오랜 동안 그 배들을 안전 하게 보호해준 호수의 물 밑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퀘벡의 고고학자인 로베르 그르니 에는 라브라도의 레드만에서 난파되었던 16세기 바스크족의 포경선 한 척의 골조를 한 부분씩 떼어내어 분해했는데, 그것은 곧바로 다시 그 모든 부분을 수십 년 동안의 보존기능을 갖춘 바닷속 깊은 곳 플라스틱 탱크 아래에 넣어두기 위해서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 자리가 부족한 까닭으로 부득이 병원 문 앞에서 살아남을 운이 있는 부상자들을 선택해야만 했던 의사들처럼 말이다. 이미 고인이 된 해양고고학자 피터 스록모턴은 발굴물이 증가해 유물 전체를 연구할 수도, 그렇다고 보존할 수도 없 는 상황 앞에서 이와 같은 진퇴양난에 맞서야만 했다. 밤의 일꾼 30여 년 전부터 산업상, 혹운 군사적인 연구로 아주 깊은 곳의 여러 고고학적 발굴지 역들이 탐사되었다. 1964년 낭트에기지를 둔 해양학 연구팀의 선박인 아말테가 지브 롤터 해협 400m 깊이에서 로마 난파선 한 척의 위치를 잡아냈다. 실제로 그것은 선박 의 외형적인 흔적은 사라지고 항아리 무덤에 지나지 않았다. 1971년 미합중국의 우드숄 연구소 해양학자들이 잠수함 앨빈을 동반하고 북대서양에 서 실시한 실험은 몇몇 아주 깊은 곳에서 박테리아 활동이 유기적인 재료를 놀라우리 만치 잘 보존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11개월 전에 물 속으로 가라앉은 샌 드위치가 손상되지 않은 채 끌어올려졌던 것이다. 미국인 해양학자 월러드 배스컴은 바다 깊숙한 곳에서 손상되지 않은 목재 난파선을 꿈꾸며, 시칠리아와 튀니지 사이의 해협처럼 수심이 깊은 지역의 고고학적 잠재성에 주목했다. 마치 바사나 앨빈의 샌드위치와 같이. 하지만 GISMER(국립 해양중재 그룹)가 1977년에 베나곶 먼바다 328m의 깊이에서 옛 난파선 한 척의 위치를 파악했을 때, 잠수함의 승무원들은 폭이 약 6m에 길이가 15m인 항아리 무덤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3년 뒤 CNEXO(대양개발 국립 센 터)-오늘날은 IFREMER(프랑스 해양개발연구소)-의 잠수접시 이사아가 고고학자 뤼크 롱의의 지휘 아래 몇 개의 항아리들을 채취할 때도 나무로 된 유물은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1988년에 해양학자 로버트 발라드와 우드숄 연구소의 한 팀은 옛날 배스컴이 추측한 지역인, 시칠리아와 튀니지 사이의 750-800m의 깊이에서 옛 유물들의 위치를 파악했 다. 그 다음해에는 고고학자들과 함께 미국 해양학자들이 48개의 표본을 채취하였는데, 그중에 28개가 항아리였다. 이시스라는 이름을 지닌 4세기 말의 난파선 중 한 척은, 이 시기에 해당하는 지중해 난파지역을 40여 군데 정도로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더욱 커다란 흥미를 주었다. 이번 에는 그전의 경우처럼 선박 그자체는 없었고 바다 유기체의 활동을 알게 해주는 몇 개 의 나무조각만이 있었다. 원격조정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잠수 로봇(ROV)은 오늘날 아주 깊은 바닷속에서도 잠 수부 없이, 따라서 인명을 잃을 위험도 없이, 최소의 비용으로 작업이 가능하게 해주 었다. ROV만 바닷물 속으로 들여보내고 모든 기술자들이 밖에 있어도 되므로 24시간 내내 수중 깊은 곳에서 고고학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아를 사람 가장 최근에 고고학적 탐사가 질적인 도약을 이룬 것은 뤼크 롱과 프랑스 해양개발연 구소 연구원들이 리옹만의 662m의 깊이에서 B.C. 1세기의 난파선을 비파괴적인 방법 으로 연구할 때였다. 1981년 카마르그 해안에서 80km쯤 떨어진 곳에서 잠수접시 시 아나가 발견한 아를 IV라는 난파선은 얼마 뒤 항공지도 제작법에서 이용하던 기술을 빌려온 프랑스 해양개발연구소의 잠수함 노틸러스의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되었다. '모든 발굴은 파괴이다'라는 낡은 격언에서 해방되고 보존의 제약에서 벗어난 깊은 물 속에서 아를 IV 난파선을 탐사하는 일은 발굴이 이제는 유물의 운명을 생각해 볼 때 최후에 취해야 할 선택이었던 지난날을 극복하고 '고통 없는' 고고학의 길로 접어들었 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깊은 물 속에 있는 발굴지역이 비록 초보적인 연구단계이긴 하지만 유네스코 같은 국 제기구도 관심을 표명할 만큼,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고 가장 나중에 '발굴'을 선택하 는 것도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모든 해양 난파선은 고고학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역시 실험소가 될 수 있다. 생물학 자나 지질학자들에게는 지층이나 혹은 해양 유기체들의 변화를 가늠해볼 수 있는 풍부 한 연대 추정의 지표를 제공해 주는 등 바닷속 깊은 곳의 난파선은, 자연사의 창고로 서 조만간 해양학의 각종 분과에 고고학을 병합시키면서, 그 동안 지나치게 비쌌던 비 용의 문제를 극복하도록 해줄 것이다. 기록과 증언 세계에서 가장 큰 박물관 해양고고학에서 크나큰 발견이 처음 시작된 곳은 서양문화의 요람인 지중해였다. 선 사시대에 대한 탐사가 탄생한 곳도 유럽에서였고, 인류사의 먼 과거에 속하는 물 아래 의 수상도시의 발굴이 처음 시작된 곳도 유럽에서였다. 지난 세기말 이래로 '선박고고 학'이 귀족 칭호를 얻은 곳 또한 유럽, 특히 스칸디나비아였다. 그러나 유업 중심의 지 역 편중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얼마나 많은 숫자의 고고학 유적지가 유명해지고 학문 적 연구대상으로 조명을 받는가의 문제는, 지역에 따른 과거 역사의 두께와도 관련 있 지만, 그 바다 주변이 얼마만한 매력이 있어서 많은 잠수부 공동체가 존재하는가도 관 련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인류의 문화유산들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며 깊은 물 속에서 잠들어 있 다. 그리고 먼 옛날 청동기 시대에 많은 선박들이 험한 파도를 헤치며 지중해를 항해 했음을 가정할 때, 어쩌면 같은 순간에 아시아의 남동쪽 섬에 살던 주민들도 지중해의 고대 선박과 아무 상관도 없는 카누를 타고 태평양을 누비며 아주 먼 지역까지 모험을 감행했을 수도 있음을 역사와 고고학은 말해 주고 있다. 장 이브 블로 1995년 10월 빙하시대와 대륙붕에서의 인간의 거주 바다 밑의 잠수부들은 자신들이 잠수복을 입고 헤엄쳐 다니는 영역을 그 옛날 선사시 대 사람들은 걸어서 다녔다는 사실을 흔히 모르고 있다. 2만 년 전에는 마지막 빙하의 가장 추운 때였고, 바다의 수위는 오늘날보다도 100m 이상이나 얕았던 것이다. 이상 이 지질학자이자 고고학자, 잠수부인 N. 플레밍이 이끌어낸 결론이다. 고고학적인 문제 수십 년 전부터 고고학자들은 바다 높이가 전반적으로 낮아져 구석기 시대 인간들은 (B.C. 1만 년) 더 넓은 활동공간을 누렸으며, 대륙과 섬 사이의 대이동과 몇몇 해류의 축소와 지협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더 유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지금 모든 이들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1969년에 출판된 그레이엄 클락의 "세계의 선사시대"를 인용하겠다. "탄소 14를 이용해 연대추정을 해보면 일본 제도에서 홍적세 말기부터 인구가 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는데, 빙하시대가 한창일 무렵(B.C. 2만 년) 일본의 주용 섬들은 한국을 매개로 사할린 섬과 애하의 하구까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는 홍적세 때 "인간은 바다를 헤엄치지 않고도, 왈라스 산의 동쪽에 있는 인도네시 아 대부분의 지역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그리고 물이 낮았던 당시에는 사울 고원 의 넓은 지협을 통해 뉴기니와 연결되었던 오스트레일리아를 약식 단정이나 단순한 뗏 목을 타고 차지했고,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붙어 있던 타스마니아에도 아무 어 려움 없이 정착했다. 빙하기가 끝날 무렵에 해협을 그토록 쉽게 넘다들 수 있었다는 단순한 사실은 당시 인간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차지한 경과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만약 모두가 이러한 사실에 동의한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클락의 저서를 다시 한 번 더 인용하도록 하자. "중석기 시대(B.C 1만 년-6000년)의 인류는 사냥거리 의 축소에 따른 손실을 낚시를 발전시키는 것으로 보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증 명해줄 수 있는 주요 증거는 빙하가 끝을 맺고, 대양의 수위가 상승함에 따라 물에 잠 겨버리고 말았다." 요컨데 모든 진지한 고고학자들은 과거의 대륙붕이 인간들, 사냥꾼들, 그리고 어부들 의 손으로 개척되었다는 것과 대륙 사이의 이동이 훨씬 쉬웠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인 간이 실제로 바다를 사이에 둔 두 지역에서 살았다는 것 이외의 그 어떤 구체적인 증 거도 가지고 있지 않아 더 이상의 증명은 어렵다. 물의 높이가 가장 낮았던 때에 인간 이 맨발로 불완전한 뗏목을 타고 물 위를 건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좀더 수준 높은 단정을 이용하여 훨씬 광대한 공간을 건넜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들이 이의 없이 이 의견을 받아들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강해줄 아무런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이같은 추론은 과학적이지 못하다...세기 초의 영국인 해학가 힐레르 벨록이 예의바르게 빈정대는 한 편의 시에 덧붙여 세균을 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듯이, "그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을 의심하지 말자. 지식의 비밀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현학자들은 마치 그것이 자신들의 의무인 양 자신 있게 단언 한다." 이렇게 하여 아직 증명되지 않은 역사를 규명해 보려던 인류는 암묵적인 합의를 이뤘 고, 증거의일부분이 바다 밑 깊은 곳에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힐레르의 재담에 이어 다시 한번 아이러니컬한 인용을 해본다. 그러기 위해 마크 트웨인의 시간 에 대한 언급을 환기해 보도록 하자. "모든 사람이 시간에 대해 말하지만, 어느 누구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말을 비유해 말해 보자면 누구나 밝혀지지 않은 역사에 대해 말하지만 쉽사리 그 증거를 확보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점차 하나둘 밝혀온 사실 중에는 인류가 구석기, 중석기, 신석기에 대륙붕에서 살았고, 그 문명의 유적이 바닷물 에 침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니콜라스 c. 플레밍 "오세아누스" 우드숄 해양학회 28권 1호, 1985년 봄 사라빈과 수상지역의 문제점 19세기 유럽의 호수에서 발견되었던 수상가옥들은 물 위에 세운 수상 주거지역에 대 한 생각을 오랫동안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점차 발굴 당시의 지표들이 검토되고 그리 고 종종 지나치게 단순화한 이 생각은 샤라빈의 신석기 유적지 위에서처럼 그 모순점 을 드러냈다. 몇 세기 전부터 스위스 호수 주변의 어부들과 주밍들은 강 주변에 잠겨져 있다가 가 뭄이 되면 들어나는 말뚝과 옛날 물건들의 출현에 주목했다. 1853년과 1854년 겨울, 모든 호수들의 수위가 낮아지자 고고학자들은 이 현상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취리히 호수에서 관찰하고 다양한 발굴물을 1954년 말에 처음으로 발표했던 사람은 F. 켈러 였다. 그는 민속학적 비교의 도움을 받아 물에 잠긴 유적지의 출현을 걸명하기 위해서 세운 가설 가운데에서 물 위의 평평한 곳에 세워진 마을, 즉 그 유명한 '수상도시'라는 개념을 끌어냈다.이것은 단지 몇 군데의 지역에 대한 관찰에 의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지지를 받 았다. 그러나 곧이어, 실제는 이와 차이가 있고, 더 복잡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한 세기가 훨씬 지나서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프랑스에서 행한 과학적인 연 구작업은 점차적으로 의문점들을 밝혔다. 만일 몇 가지의 세부사항이 논란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면, 더 이상 어떠한 선사학자도 지난 세기에 세워진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 게 될 형국이었다. 많은 고고학적 사실과 발굴의 확인, 날씨 변화와 호수의 물높이에 대한 연구는 단순화한 도식을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우리는 수상가옥의 일반적 인 문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사라빈에서의 발굴을 통해 얻은 몇몇 주요 자 료와 그것에 대한 분석 및 해석만을 염두해 두기로 하자. 물가의 한 마을 두 번이나 되풀이하여, 인간들은 모든 식물이 사라진 호상 백악 위에 자리를 잡았고, 수목기후학에 따르면 그들이 자리잡기 몇 년 전에 가벼운 가뭄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진흙 주거지는 땅 위에 평평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 땅이 습기의 증가 때문에 더욱 물러지자 주거지는 집체의 무게 때문에 땅속으로 가라앉게 되었다. 일상생활에서 나오는 찌꺼기(짚가리들, 부싯돌 조가과 도구, 사금파리, 뼈, 나무탄, 곡식알갱이 등)처 럼 집을 지을 때 생긴 찌쩌기는, 만약에 있었다면 다른 나무들처럼 판자 위에 보존되 어 있어야 할 텐데 보이지 않았다. 첫 주거지를 파괴한 요인들이 바닥을 덮었는데, 만 약 조금이라도 물이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축들이 흔히 습기 차지만(기생 충의 알의 보존이 보여주듯), 물로 덮여있지 는 않은 백악 위에 배설물을 쌓으며 집 주변을 맴돌았다. 침적학은 거주지층에서 호상기지의 퇴적물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고, 만약 계절적인 홍수가 있었다 해도 짧은 기간 동안이었을 것이다. 다른 프랑스 지역들(쥐라의 호수들, 안시의 호수)이나 스위스 지역과는 반대로 샤라 빈의 토질은 항상 건조하고 딱딱해서 마을과 후배지 사이의 10m 정도 되는 거리의 통행을 위해 통나무로 된 둑을 건설할 필요가 없었다. 샤라빈이 그렇게 된 이유는 원인은 분명하다. 마을이 강변 아주 가까이에 있는 단단 한 땅 위에 세워졌던 것이고, 그리고 일상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전도의 일시적인 호수 범람만이 때때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물의 높이가 두번째 마을의 끝까 지 계속적으로 높아졌을 때, 사람들은 물 위에서 조금도 살아보지 못한 채 완전히 떠 았다. 에매 보케 "고고학 연구" 1994년 12월 1999호 세상에서 가장 낡은 난파선 1960년에 젊은 미국인 고고학자 조지 바스는 유럽인 전문가들과 함께(그들 가운데 수중잠수구를 착용하고 잠수에 나선 잠수의 개척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고대 난파 선에 열광한 프랑스인 프레데리크 뒤마였다), 얼마 전 터키의 겔리도니아만 근처에서 터키 해면잠수부들이 발견한 그때까지 알려진 바로는 가장 오래된 난파선을 발굴했다. 바다 아래에서 청동상을 보앗고, 발굴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인류학자이자 잠수부 그 리고 여행기자인 피터 스록모턴은 막 잠수를 익힌 바스에게 이 의외의 발견물을 알렸 다. 난파선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더 작아보였다. 우리 아래에 흩어져 있는 이 덩 ㅇ어리들은 지나치게 짐을 실었던 배 한 척이 만을 우회하곧자 시도하면서 뱃전에 던 진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사실일까? 이 원정의 단장인 보지 바스와 펠라델피아 대학의 박물관장인 로드니 영은 선박의 난 파선 조각에 관심을 가지며 청동으로 된 도구들과 구리덩어리말고도 다른 무언가를 더 찾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박물관의 재산을 이 원정에 투자했다. 몇 톤이나 되는 모래와 바위들이 치워지지 않는 한 그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경험 풍부한 고고학자이자 잠수부인 바스는 선박의 선체가 아직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와 의견을 같이했다. 만약에 우리가 이 부분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현대 고고학이 시작될 때부터 학자들이 제기했던 청동기 시대의 선박에 관한 의문점에 대답을 할 수 가 있을 것이다... 며칠이 지난 뒤 난파선은 자와 줄자 그리고 도구상자와 함께 어울려, 어느 고고학적 유적지와 흡사해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지역들이 곧 별명을 얻었다. '바위'는 발굴지역을 지배하던 짐차 크기의 덩어리 였다. '고원'은 모래 위에 한 무더기의 덩어리를 잡아두고 있는 바위였다. '작은 협곡'은 바위와 '절벽' 사이를 지나갔다... 어느 날 뒤마는 평평한 수중 언덕이 밑으로 푹 팬 것을 보고 주목하였다. 그는 앞 돌 출부를 튕겨 나가게 하여 덩어리의 한쪽을 밝은 데로 내놓았다. 우리가 바위로 간주했 던 것의 일부분은 실제로는 구리로서, 사암의 작용으로 한 덩어리로 붙어버린 것이었 다. 또 다른 부분을 떼어내면서 사람들은 수중 언덕의 반이 금속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을 발견했다. 우리들이 이 발견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뒤마는 잡은 협곡 입구에서 이상한 모양의 돌 하나를 주목하고 망치로 두드렸다. 황산동이 푸른 '연기'의 구름을 일으켰다. 뒤마는 응고물에 덮여 있는 금속물질 무더기 아래에서 또 다른 덩어리 하나를 발견했 다. 지중해 밑의 모든 물건들을 덮고 있는 사암의 증가현상에 익숙해 있음에도, 우리는 여기저기 부분적으로 두께가 20cm에 이르는 예상 밖의 지층을 발견했다. 우리는 작은협곡을 재점검한 결과 그것이 금속으로 뒤덮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 저기에 덩어리들이 다섯 층으로 쌓여 있었다. 우리는 환희에 넘쳐 미칠 듯이 즐거워했 고 우리의 스폰서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보를 보냈다... 그 덩어리에서 떼어낸 응고물 중 여러 개가 3000년 전 제철소에서 만들어졌을 때처 럼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테일러 양은 그중 어떤 것들은 전형적인 키프로스섬 의 것이었다고 말했다. 다른 것들은 지금까지 샤르덴에서만 발견된 유형이었다... 덩어리들의 대부분이 내가 첫 여행중에 보았던 '소'형상을 하고 있는 낯익은 형태였다. 그러나 원반 모양의 다른 것들도 찾아냈다. 어떤 것들은 반으로, 또 다른 것은 4등분 으로, 8등분으로 혹은 어쩌면 물물교환의 단위처럼 작은 조각으로 깨어져 있었다... 작은 협곡 입구 바위무더기에도 물건들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것을 가까스로 끌어올렸고 구리는 형태가 부서져 녹색 얼룩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실망은 무더기 내부를 탐색하면서 사라졌다. 그 안에서 작은 협곡까지 이어진 널빤지 무더기를 찾은 것이다. 나무와 밀집된 덩어리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이 경우 구리와 청동조각과 놀랄 만큼 약한 유기물질들이-모래 성분의 석층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선박의 손상되지 않은 황단면이었다. 마침내! 그때부터 우리는 뱃전에 서 던진 쓰레기가 아닌 선박의 잔해를 상대하게 되었다. 피터 스록모턴 (고대 난파선 발굴물, 청동기 시대의 화물고) "내셔널 지오 그래픽" 1962년 5월 5호, 121권 바다에서 솟아나온 청동기시대 겔리도니아만에서 B.C 1200년경의 난파선을 발견한 지 24년 만에 조지 바스는 청동 기 시대를 밝혀줄 더 오래된 동지중해의 난파선을 발굴하는 작업의 준비를 시작했다. 1984년 그 여름에 나는 처음으로 화물고를 훑어보면서 어떠한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 지중해 수면 아래 45m쯤 되는 위치에 있는 바위의 돌출부 위에 나의 잠수용 물갈퀴 들을 놓은 채 서 있었다. 그때까지 알려진 것들 중에 가장 오래된 난파선이 내 아래에 있었고, 그릇과 구리덩 어리의 형태는 B.C. 13세기 초 혹은 14세기 정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그것 의 발굴방법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5분도 없었다. 화물고의 물건들과 모래덮개 아래 선박 선체의 윤곽을 생각해 내기 위한 5분. '공중전 화 부스'라고 별명이 붙은-우리 잠수부들이 위험할 경우에 피신하는 곳이고 또 물 밖 으로 전화도 하는 곳-공기로 가득 찬 우리의 플렉시글라스 덮개를 어디에 놓아야 할 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5분. 우리가 어떤 채취기술을 이용해야 할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5분... 우리는 조심스럽게 난파선의 도면을 세우는 한편, 배의 주요 화물고가 구리덩어리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200여 개로 겔리도니아만에서 우리가 찾아냈던 것 들보다도 여섯 배나 더 많았던 것이다. 이 덩어리 각각의 무게는 27kg쯤 되었고, 1탤 런트(고대 그리스의 무게 단위)에 맞먹는 것이었다. 몇 달 뒤에 타브 엘아마르나의 서판 위에 씌어 있는 한 구절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알리시야의 왕이 이집트 파라오에게 구리 200탤런트를 선사하겠다는 약속이 언급되어 있었다. 우연의 일치로 나는 어리둥절했고, 자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약속했 던 적재화물은 내가 보기에 키프로스와 일치하는 곳인 알리시야를 결코 떠난 적이 없 었단 말인가?그것은 이집트에 도착했던가? 혹은 그 선물이 오늘날 울루 부룬이라는 이 름으로 알려진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바다 깊숙이에서 종말을 맞았단 말인가? 나는 불현 듯, B.C. 14세기에서 청동기 말기까지, 대략 1600년에서 1050년 사이의 기간에 울루 부룬의 선박이 왕실 적재화물을 운반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 지만, 이 화물고에서 찾은 우리의 행운은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곧 난파선은 우리의 기대를 채워줬다. 첫 잠수로 손잡이가 넷 달린 낯익은 형 태와 함께 원반 형태의 구리덩어리들, 돌 곤봉 한 개, 유리진주가 가득 찬 항아리 한 개, 그리고 웅황이 가득 찬 항아리 두 개, 옛날에 안료로 쓰이던 노란색 황화비소 등 을 얻었다. 우리는 또한 순도 99.5%-물질의 본질 그 자체-의 주석임을 알 수 있는, 잘 부서지고 회색빛을 띤 물질의 표본을 얻어냈는데, 이 시기의 것으로서 가공되지 않은 상태의 것 을 발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이것이 주석덩어리의 찌꺼기라면, 그것은 이제까지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오 래되었을 게야." 어느 날 저녁 나는 식사를 끝낸 뒤 팀의 한 대원에게 이렇게 말하였 다. 그리고 나서 "만약 우리가 이 덩어리들을 출처가 알려진 주석들과 함께 화학적으 로 비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청동기 시대의 가장 커다란 신비 중 하나를 풀 수가 있 었을 텐데."하고 덧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진짜 주석덩어리를 찾아냈다. 조지 바스 (고대 난파선의 출현, 청동기 시대의 광휘) "내셔널 지오그래픽" 1987년 12월 제6호, 172권 고대 난파선에 대한 조사 그랑 콩글루에:하나 혹은 두 척의 선박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커다란 무역항 입구인 마르세유에 위치한 그랑 콩글루에의 바위는 선박을 보호하는 역할을 아주 잘 해냈다. 난파의 불운을 겪은 지역은 해저발굴 에 대한 주요 실험대상으로 1952년에 선택되었다. 적절한 방법이 부족한 탓에 발굴자 들은 눈앞에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두 개의 고대 난파선이 겹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로마의 항아리들과 그랑 콩글루에의 '난파선'에서 나온 세스티우스의 표지를 단 항아리들이 라치오타 어부들의 그물 속에 처음으로 건져 올려진 것은 1936년이었 다. 마르세유의 동쪽으로 섬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암초의 끄트머리 쪽 깊이 32-45m 사이에 위치한 이 지층은 1952년에서 1957년에 걸쳐 갈고도 잦은 중단을 겪으며 발 굴이 진행되었다. 발굴작업은 단장 장 이브 쿠스토와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 담당 책 임자인 페르낭 브누아가 긴밀한 협조를 이루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잠수할 줄 모르는 고고학자와 직업적이든 무료봉사이든 작업방법을 잘 모르는 잠수부가 함께 참여한 이 작업은 어쨌든 해양고고학 분야에 오래 남을 최초의 대작업이었다. 그때부터 비슷한 유형의 작업에서 공동으로 사용해 전통처럼 자리잡게 된 작업기술이 하나둘 정리되었 던 것이다. 발굴유적지의 물 표면에 정박한 칼립소는 움직이는 기지로 이용되었고, 잠수구를 착 용하고 지층 청소작업을 하는 잠수부들을 위해 강력흡입기를 이용해 공기를 공급했다. 1957년에 중단되었던 이 기나긴 발굴은 1961년에 이브 지로가 다시 시작한다. 그해 에 F. 브누아는 "갈리아"의 19번 부록에 (마르세유 그랑 콩글루에의 난파선)이라는 제 목으로 발굴작업 결과의 주요 사항을 발표하였다... 그의 저술이 발표되기 전에도 같은 난파선 안에서 연대가 틀린 물건이 발견을 두고 기나긴 논쟁이 일어났다. 수백 개나 되는 드러셀 1 항아리와 캄파니아식의 도자기 화 물고 하나, 그리고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간주되었던 그리스 혹은 그리스-로마 항아리들 은 두 척의 난파선이 겹쳐져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만들었다... F. 브누아가 한 출판물에서 지층이 동일하다는 사실에 대한 한치의 의심도 몇 년 전 자기 손으로 써서 발굴일지에 기록한 증언과는 너무 대조되었다... F. 브누아의 태도는 발굴과 적재를 둘러싼 해석에 여러 어려움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 여준다. 1961년의 출판물 안에서 침묵으로 지나쳤던 이러한 모순들은 우리가 보기에 두 척의 난파선이 겹쳐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이 모순들은 잠수부들 사 이에 대립과 F. 브누아의 애매한 태도와 발굴지역의 연구가 거의 일상적으로 부딪쳐 혼란이 일어난다는 것을 중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발굴 내내 대부분의 지중해에서 연대기적으로 차이가 나는 두 가지 계열의 자료들은 나무로 된 유물을 기준으로 분명하게 분리되었다. 보고기록을 보면 만약 골 조의 이 요소들이 같은 배의 갑판으로 오랫동안 간주되었다면, 그것들이 배 밑바닥이 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발굴일자 발췌문 1952년 8월 16일: '그랑 콩글루에 북쪽에 있는 배 한 척에 관계된 것인데, 화물이 28-44m 사이의 경사 위에서 층층이 겹쳐져 있다. 접시는 위에 있었고, 아래에는 목이 길고 주둥이가 수직인 항아리와 항아리의 불룩한 부분이 균형 잡힌 여러 가지 유형의 항아리가 있었다. 접시는 4세기에서 2세기 사이의 프로방스 오피다에서 유통된 유형이 었다. 1952년 8월 22일: '한쪽에는 항아리들이, 다른 한쪽에는 빽빽히 쌓인 접시들과 다른 항아리들이 번갈아 있었다...절벽의 큰 바위덩이들이 겹쳐져 있어 들어올려야 했고...표 면층에서 한 바구니의 물건을 끌어올렸다. 새로운 형태들, 생선 접시...20가지의 다른 유형들.' 1952년 8월 말(프레데리크 뒤마의 발췌문등): '잠수를 할 때마다 난파선은 더 크게 보였고, 어느 날 저녁 자크와 나는 끈으로 그것을 재보았다: 8m에 20m였다. 하지만 그것이 모래 아래 어디까지 뻗어있단 말인가? 잠수부들이 그들의 느낌을 서로 교환하 며, 10여 톤이나 나가는 바위 하나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크(쿠스토)는 경사면 더 높은 곳에서 항아리들을 보았다. 나는 좀더 낮은 곳에서 보았다. 바위가 난파선 위로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8월은 끝났다...고고학의 기초적인 법칙도 모르면서 우리는 이 거대 한 배의 짐을 내렸다. 남은 유물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난파선에 손을 대지는 않았고, 그러므로 구멍을 하나 뚫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리를 잡기 위 해 선체의 나무에 이르러야 했다.'... 1952년 9월 25일: '항아리 위에 넘어져 있는 큰 덩어리 두 개를 밧줄로 매달아 올렸 다...내면층은 단지 팽이 모양 항아리처럼 보인다. 배는 북이탈리아 기항지에서 SES 항아리, 즉 캄파니아의 그릇을 두 번째로 실어 올렸다.'... 1952년 10월 13-18일: '항아리의 내면층 진흙을 치우다.' 1952년 10월 19일: '맨 위층은 로마식 항아리, 내면층은 팽이 모양의 항아리였다. 치워야할 진흙이 배의 축에서 수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952년 10월 26일: '남동쪽에 있던 난파선의 부분이 흡입기로 제거됨. 함장과 뒤마가 끌어올린 납이 박힌 구리판의 조각들, 단단한 쐐기가 조이고 있는 알 수 없는 것들.' 1952년 10월 29일: '납판, 아마도 큰 범선의 갑판이었을 나무.'... 1953년 3월 1일: (프레데리크 뒤마의 발췌문들): '베베르는 좀조개에게 갉아먹힌 거무 스름한 골조를 나에게 보여준다. 그는 용골을 알아본 것이다. 1953년 3월 4일: '칼립소 항구와의 관계: 캄파니아식 접기들, 새로운 형태들.' 1953년 3월 5일: '용골로 간주했던 것 아래에 있는 항아리층: 난파선이 둘로 쪼개진 것인가 혹은 두 개의 난파선이 하나로 포개어진 것인가? 의문점은 복잡하다.' 1953년 3월 6일: '랄르망에게 전화 통신: 확인.' 1953년 3월 13일: '배 위의(혹은 아래의) 마지막 지적 사항들: 용골(떡갈나무)은 그 속을 후벼 파고 사는 조개가 갉아먹었다. 모래 속에는 버캐만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골조 부분들, 바위에 칠해져 있던 나의 방탄은 배의 꼬리(?)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스 항아 리와 칠이 아직 남아 있는 몇 개의 캄파니아식 접시 아래에 고대 이탈리아 수직 항아 리가 족재되어 있다. 붉은 테두리와 네 개의 종려맆 장식이 있는, 가장자리가 넓적하 게...벌어진 잔.'... 1953년 4월 27일: '배의 조감도를 보면 화물창 위의 항아리들이 적재되어 있고 아래 에 선원들 숙소와 도기가 적재되어 있으며 갑판도 하나 있었던 것 같다. 그전에 본 적 이 없는 네모진 나무는 용골이 아니라 갑판의 나무였다.' 2963년 4월 28일: '겹쳐진 갑판들-2열 혹은 3열의 이탈리아식. 갑판(틈막기와 납땜 작업이 된 큰 조각들). 그리스식 항아리와 캄파니아식 접시들-배의 외피판은 떡갈나무 로 된 골조를 가졌을 것이다.' 1953년 5월 6일: '배의 바닥이라고 추측했던 것이 사실은 중갑판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난파선 두 척이 겹쳐진 것이라고 가정했고 세스티우스의 항아리는 바위에 기 대어 남쪽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그리스 항아리나 접시가 섞여 있지 않 았고, 다만 접시는 아랫부분에 있었다. 이것을 보면 화물고의 위치사 상이했던 것 같 다.' 1953년 5월 11일: '전신에 따른 결론: 매우 유사한 배의 중갑판 두 개- 결론: 한 척 의 난파선.' 뤼크 롱 (그랑 콩글루에의 난파선들, 페르낭 브누아의 발굴일지 연구 1987년, CNRS, "아르케노티카", 제7호 툴롱에서 멀리 떨어진 베나만, 328m 깊이의 난파선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해양 석유시추 산업과 군사적인 기술은 소형 잠수함 시대를 개척하였다. 그 덕분에 아주 깊은 바다에 묻힌 난파선을 발굴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현대적인 탐사의 대상이 되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만나게 되었다. 한 척의 잠수함을 한나절 동안 사용할 때 드는 비용은 대개 하루에 5-25만 프랑 정 도가 들기 때문에 깊은 곳의 난파선에 무료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것을 거절하기란 고고학자들로서는 힘든 일이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개인이나 시민 단체 혹은 군인조직이 후원하는 이러한 탐사는 그 범위가 제한되어 있고, 연속성 또한 결여되었다. 툴롱 동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곳. 328m의 깊이에서 국립 해양중재 그룹(GISMER)의 잠수함, 그리퐁이 1977년에 발견한 베나만의 '난파선 4'는 이런 조건 하에서 고고학적 평가를 하게 됐다. 그것은 B.C. 130-110년경에 난파된 것으로 추정되는 '옛날'의 드레 셀 1A 유형인 이탈리아식 포도주 항아리의 무덤에 관계된 것이었다. 첫 번째 과학적 탐사가 같은 해 있었고, DRASM의 한 고고학자는 그리퐁 안에 군인 들 옆에서 자리 하나를 차지했다. 1980년 DRASM은 시범 잠수 때 CNEXO(대양개발 국립 센터로서 오늘날은 IFREMER)를 통해 잠수접시 시아나를 이용하여 발굴지역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실행했다. 총 두 번의 작전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발굴지 역의 영역을 근사치에 가깝게 견적하고 사진 촬영과 비디오 녹화를 할 수 있었다. 거의 응결되지 않은 항아리들은 약 5-6m의 폭 15m의 길이로 계란형의 덩어리를 구 성하고 있었다. 무덤 가운데를 항해 그릇들이 서로서로 밀착되어 있었고 두 개의 층으 로 겹쳐진 것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거기서 모든 층이 섞여져 대충 평방 미터당 다섯 개의 항아리가 있었다. 이 지층의 둘레와 끝 지점들에 쌓인 항아리들이 뒤죽박죽 으로 경사져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점차적으로 물을 먹인 선박의 목재가 무거운 짐 의 무게를 받아 휘어지고, 선박의 벽이 함몰된 순간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발굴지 역의 규모와 경사지 가운데 있는 그릇들로 미루어보면, 화물창의 짐은 대략 300-350 개 사이였다. 침전물 속에 파묻힌 세 번째 층은 틀림없이 500개 이상의 유물을 포함하고 있을 것 이다. 게다가 전문가들의 관찰은 배 안의 물건들이 일반적으로 모여 있는 선박 뒤쪽 부분을 구체적으로 나타냄으로써, 상자에 함께 넣은 단지-술잔 여러 점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했다.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행해졌던 이 두 번의 잠수를 하는 동안 잠수함의 원격조정기를 이용하여 한 번에 몇 개씩, 총 14개 정도의 항아리를 건질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릇 에 대한 정확한 시료채취를 구성하였고, 그 어떤 흔적도 불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각 항아리는 난파선 근처에서 기지 선박인 노르와 때문에 상당한 어렴움을 겪고 서, 트랙터가 끄는 지질학자의 그물 속에 들어왔다... 이제까지 한번도 이 지역에서 보고되지 않았던 아름답고 하얀 로르고노스(뱀 모양의 머리털이 흉칙하여 이를 본 사람들은 돌로 변했다는 세 자매 괴물:역주)가 항아리 위 에 새겨 있어 생물학자들에게는 흥미로운 정보를 가져다 주었다. 뤼크 롱 (지중해인의 관심 유적지 100군데) "지중해의 해양고고학 문화유산 보호 기 술 자료", 제5호, 마르세유 A.M.P.I.H 1995년 선박 제조의 진보 프랑스 지중해에서 발굴되었던 4세기 난파선 한 척에서 J.C. 네그렐과 그의 동료들은 성박 제조기술의 작지만 명백해 보이는 진보를 확인했다. 2세기 말까지 상용되었던 배 밑바닥의 이중 납이 사라졌으며, 무엇보다도 잠수부-고고학자들이 주의를 끈 것은 선 박 내부 구조의 조합방법이었다. 고고학자는 골조 부속품들을 잇는 금속 볼트의 출현 에 주목했다. 내용골은 뱃바닥 마루널과 용골에 쇠로 된 볼트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볼 트는 고리 모양으로서 주조된 납이 덮여 있었다. (수중 발굴자의 결론) 모나코에서 볼트가 구리로 되어 있었고, 야시 아다에서는 4세 기의 로마 선박에서 쇠로 된 볼트를 찾아낼 수 있었다. 용골과 늑재 그리고 내용골 사 이의 이러한 강력한 결함은 뤼크의 난파선 세 군데에서 다시 발견되었고, 이 특징은 최근 선박에서 점차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술의 진보를 확인해 주었다. 골조 를 위하여 외피판의 구조적 역할이 줄어들고, 단순한 외피판은 더 얇아졌으며, 조립은 계속 장부와 장붓구멍으로 했지만 선박의 뼈대는 용골과 늑재 그리고 내용골의 결합으 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골조들은 더 이상 단순한 보강이 아니라, 전체 의 견고성으로 뒷받침하는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납으로 된 배 외피판이 제거되었고, 더욱 내구성이 강한 쇠장식을 박는 것이 도압되었다. 7게시의 선체는 장부와 장붓구멍 을 지니고 있는 외피판보다는 골조의 뼈대로 내구성을 보장받고 있었다. J.C. 네그렐 (마르세유 정박소 안에서의 동로마 제국의 선체) 1973년 2월 "고고학" 제55호 원칙을 지키는 단순함, 바보스러움: KISS 해양고고학의 지도제작법에 쓰이는 숫자 처리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영국인 닉 룰르는 고고학 연구과정에서 생기는 수중측량의 문제를 다룬 논문에서 자신이 물 아래서의 'KISS' 원칙을 옹호하는 이유와 그토록 단순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물 속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함정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수중작업의 문제점, 심리학적 결과 나는 아직 이 주제에 관해 발표한 연구를 찾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수를 시작하 면서부터 나의 이성이 흐릿해지고 있음을 확신했다. 이 생각은 유명한 '마르티니법' 원 칙에 속한 것으로, 그곳은 물 속으로 10여m씩 들어가는 것은 두 배의 마르티니를 마 시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부식 바다는 정말 장비들이 쉽게 떨어져 부서지고, 아주 작은 틈새에 있던 모래 알갱이 하 나 때문에 물이 들어오기도 하며, 모든 것이 금새 부식해 버리는 아주 힘든 환경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수중지도 제작을 위해 사용되는 모든 기술은 매우 튼튼한 장비체 제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해양고고학자들이 도구와 줄자를 선호하는 것은 순전히 재정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정확성에 대한 일화 직업 잠수부가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 주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직업 잠수부가 소리 가 나지 않도록 쿠션을 댄 방에 맨몸으로 있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두 개의 베어링을 준다면, 그는 첫 번째 것은 깨뜨려버리고 두 번째 것은 잃어버릴 방법을 재빨리 찾을 것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일화가 얼마만큼 실제생활의 문제를 반영한 것인지 또 수중작업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중 요한 것은 위에서 인용된 모든 어려움들이 물 속에서의 실수 비율을 높인다는 것이다. 나는 여러 지역의 지도제작 때 있었던 실수의 비율을 연구했다. 여기서 실수는 비체계 적인 시행착오로 정의된다... 11개의 발굴지역에 대해 12번의 측정작업이 있었을 때 줄자를 이용한 3731번의 측 정 가운데 151번(4%)의 측정이 실수로 인정되었다...그러므로 대규모 발굴지역의 이러 한 계획이 몇 주, 몇 달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닌 것이다. 닉 룰루 "수중 발굴지역의 3차원 지도제작을 위한 해안탐구의 몇 가지 기술" 새로운 기술이 발굴을 가속화한다 겔리도니아만에서 청동기 시대의 난파선 연구 이후 조지 바스와 그의 팀은 터키 옆의 작은 바위섬인 야시 아다에 이르렀다. 더 깊은 곳에 묻힌 좀더 최근의 난파선은 선체 의 나무가 일부분 보존되어 있었으며, 잠수로 해결해야 하는 채취작업이 많아졌다. 우리가 작업할 난파선은 청동기 시대의 난파선보다 9m나 더 낮은, 수심 36m의 가장 깊은 곳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수중탐수구를 착용한 고고학자들이 효과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한계점까지 잠수를 해야만 했다. 바다 잠수도표에 기반하여, 우리는 이 깊이에서 머무는 최대 시간을 매일 43분간, 3 시간과 6시간 간격으로 두 번 나눠진 잠수로 확정했다. 이렇게 하여 잠수부들은 하루 에 3시간 이상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금속줄로 된 바둑판 모양의 구획 위를 돌면서 우리는 제도연필을 이용하여 아래 있는 물건들을 플라스틱 판 위에 그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채취의 가장 좋은 방법 을 고안해 냈으며, 2주 동안 15명의 잠수부들이 가장 완벽하고 유용한 장비를 만드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우선 튜브의 앵글철로 된 디딤대 하나를 난파선 전체에다 놓았다. 발굴지역의 경사면 을 알기 위해서 디딤대를 아홉 개의 거대한 계단으로 쌓았다. 그리고 나서 카메라의 지속적인 초점거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높이가 3.6m인 두 개의 움직이는 탑을 세웠다. 아 방법으로 우리는 디딤대의 각 층을 사진으로 재빨리 찍을 수가 있었다. 그 결과 나무판과 쐐기의 위치를 거의 cm 단위까지 측정할 수 있었다. 물 아래서의 오랜 스케 치 작업은 실제로 배제되었던 것이다. 조지 바스 (해양고고학) "내셔널 지오그래픽" 1963년 9월, 제 124/1호 중세의 공백 수중잠수구의 출현 때부터 프랑스 남쪽의 초기 스포츠 잠수가들은 에스텔의 작은 항 구 출구에서 난파선 '묘지,의 위치를 파악했다. 유적지에 대한 확인은 복잡한 검증으로 이어졌다. "더구나 이 이상한 묘지, 이 난파선들은 전혀 다른 두 시대에 속해 있었는데, 하나는 B.C. 1세기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1944년에서 1954년의 것이었다. 이 중간 에 해당하는 어떠한 난파선도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고, 아직 아무도 왜 그런지를 이 해하지 못했다." (디미트리 레비코프, "바닷속 비행기 안에서", 1963년) 100여 척의 고대 난파선들이 지중해 주변에서 발견된 것은 B.C. 1세기 때의 패권을 숫자상으로 확인해줄 뿐이었다(A.J. 파커가 세기별로 그린 난파선의 곡선을 보라, '난파 선을 통해 본 고대 경제', "트라시아 폰타카 3", 소조폴, 1985년). 유럽 광상 활동의 결과로 수천 년에 걸쳐 그린란드 빙하에 가라앉은 납의 흔적에 대 한 빙하학자들의 관찰도 역시 결과가 같았다. 약 2000년 전 로마 시대 경제활동이 절 정에 이르렀을 때 납의 소요량은 최대였고 그리고 곧이어 감소했다. 대기중에 산출되 고 남북극 주위에 침전된 납의 흔적은 르네상스 시대에 가서야 로마 시대의 최대치를 회복했다. 그때는 세계적인 범위로 항해의 활동영역을 넓혔을 것이다. 해상이든 아니든, 경제활동 곡선 위에서 눈에 띄는 중세의 공백기로 말하자면, 여성 역사학자인 크리스티안 빌렝 간도지의 지적이 그 이유를 명백히 밝혀준다. "중세 때는 태풍 속을 견디자면 큰 범선이 필요했고 납연판들이 성공을 거두는 일은 거의 드물었 다. 변화무쌍하고 불안정한 세계의 상징인 이 바다와 과감히 맞서기 위해서는 중세의 사람들에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던 것이다." ('중세의 선박들', "고고학", 1978년 1월, 제114호) 장 이브 블로 1965년 9월 왜 메리로즈를 찾는가 역사가이자 잠수가인 영국 작가 알렉산더 애키는 고고학자가 갖춰야 할 조건을 주장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메리로즈를 탐사하러 떠나는 동기들은 모든 고고학적 탐사의 존재이유와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점을 정의해 준다. 현장의 잠수 클럽에서조차 사람들은 나를 실용적 감각이 없는 그저 다정한 망상가로 만 취급했다. 나는 솔랑 하구 지역에 잠재해 있는 풍부함을 칭찬했고, 5000년 훨씬 이 전부터 상업적 통로로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그 지역의 중요성을 찬양했다. 수많은 배 들이 여기에 잠겼고, 그 난파선들은 보호자인 진흙, 오래 전부터 내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던 그 진흙 속에 묻혀진 채 잊혀졌다는 걸 나는 확신했다. 1965년 나는 토즈와 발드리에게 이 지역 난파선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고, 북서 유 럽의 난파선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메리로즈의 탐사를 위해 합법적인 활동을 조직하 자고 제의했다. 해상 역사가들이 잘 알고 있듯이 바이킹 시대 말기(1100년 무렵)에서 18세기 초에 이 르는 하나의 '공백'이 길게 존재하고 있었다. 이후의 시기와 넬슨의 시대까지의 것은 대영 해양 박물관이 매우 많은 모형과 더불어 2만 5천 개 이상의 선박 제조 도안을 서장하고 있다. 이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소장품에 바진 것이라고는 선장실 바닥의 양 탄자 빛깔이 무엇인지 하는 것뿐이었다. 그만큼 상세한 정보가 있었다. 이 시기의 난 파선들에 관go 새로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한편 메리로즈호는 완전히 다른 수수께끼를 제기했다. 이 선박은 어떠한 도안도 있지 않았고, 자매선의 도안도 없었으며, 모형도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박은 포대의 현창을 갖추고 무거운 공격용 대포로 무장되었 던 영국의 첫 전함이었다. 이 모델은 기술 현상이 빨랐던 시대의 전함 발달의 한 단계 를 뚜렷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함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고 그다지 명 백하지 않은 도면 하나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선체만이 유일한 정보의 창고였고, 대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모델이 생소한 것이었다. 더구나 선원들이 있었는데-적어 도 400여 명의 남자들 그리고 어쩌면 700여 명까지도 추정할 수 있다.-나는 그 나머 지 사람들도 난파선 안이나 바로 근처에 아직도 묻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가 아직도 자신의 제복과 장비 그리고 개인, 소지품까지도 갖춘 상태로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우리는 군인들, 튜더 왕조 시대의 해군들, 귀족들, 소시민들, 총수들, 수부들, 대포병 들, 미늘창을 가진 병사들, 장교들, 사병들의 완벽한 표본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들 모 두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쓰러져버렸던 것이다. 늙은이나 병든 사람들이 수의에 싸여 매장되어 있는 공동묘지와 달리 메리로즈의 유물들이 사실적이고 자세한 것이 많 아 철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메리로즈의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살아나게 할 수가 있 다. 대륙 위의 어떤 곳도 찬란했던 시절의 튜더 왕조 시대의 정확한 모습을 이보다 더 자세히 제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알렉산더 매키 "우리는 어떻게 메리로즈를 되찾았는가" 물에서 구제된 바사 스웨덴 해군의 기함이 스톡홀름 항구 안 바닷물 속에서 300여 년을 보낸 뒤 1961년 물 위로 인양되었다. ...여러 세기가 지나면서 재앙의 지역은 잊혀졌다. 서른여덟 살의 엔지니어 엔지니어 앤더슨 프란젠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유령과 같은 이 배를 찾아 나서기까지는 300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야 했다. 앤더스 프란젠은 벌트해의 염분-특히 스톡홀름 항구의 그것은-과 같은 농도에서라면 나무를 갉아먹을 좀조개들이 서식할 수 없다고 생각했 던 것이다. 5년에 걸친 문서와 자료에 대하 연구를 마친 후에 앤더스 프란젠은 1956년 8월 25 일 중요한 실마리 하나를 건져냈다. 자기가 만든 작은 채취기가 거무스름한 참나무 조 각 하나를 끌어올렸던 것이다. 며칠 뒤 잠수부인 페르 에드빈 팔팅이 밑으로 내려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는 손으로 더듬어 나갔다. "너무 어두워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지만, 나 는 무언가 커다란 물체를 느꼈다. 그것은 배의 외피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자, 현창 하나,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 두 개가 정돈되어 있다. 바사일 수도 있다." 첫 번째 해결해야 될 문제는 난파선을 다시 띄우는 데 따르는 비용과 기술적인 어려 움을 해결할 도움의 손길이었다. 아돌프 귀스타프 6세는 기술과 재정적 지원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스웨덴 해군이 필요한 배아 인적 자원을 제공해줄 것이다. 그리고 이 계통의 전문 회사인 넵튠이 해결책을 찾아내고, 이번 작업을 무료로 실행해 줄 것이다. 대중적인 기부운동도 시작되었다. 2년 동안 잠수부들은 바사 아래로 여섯 개의 터널을 팠고, 그곳으로 물이 가득 찬 부 교 위에 각 끄트머리가 연결된 굵은 케이블이 지나갔다. 케이블이 한 번 지나가고 고 정되면 부교들은 속에 있던 액체의 일부분을 비워냈고-아르키메데스의 도움으로-모습 을 드러냈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은 선체를 부수지 않고서 진흙에서 바사를 건져낼 수 있었다. 난파선은 좀더 얕은 곳으로 인도되었지만, 여전히 물에 잠겨 있었다. 바사의 재료인 100톤의 떡갈나무는 물을 먹어(1kg의 나무에 1.5kg의 물), 잔뜩 수축되어 있어 자칫 하다가는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건조될 수가 없었다. 두 명의 잠수부들이 2년 동안 선체의 모든 터진 구멍을 막는 방수작업을 하였다. 실험소도 특별히 하나 세웠다. 1961년 4월 24s일, 마침내 바사는 물과 그 노인들이 어렸을 때, 두 척의 함대가 난 파했던 곳 근처였다. 그 주민들이 말하기를 아직도 말리콜로(바니코로)에는 많은 잔해 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정보와 손에 쥐고 있는 물건들을 종합해본 결과 딜롱 선장은 난파된 두 척의 선박이 라페루즈에서 불운을 당한 바로 그 선박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왜 냐하면 원주민들이 말하는 시대에 그곳에서 침몰했다는 다른 선박에 관한 이야기를 들 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827년 6월 23일 딜롱 선장은 벵갈로 떠났고, 같은 해 9월 8일 바니로코 근처에 도 착했다. r는 이 섬이 사방 3.2km에 달하는 암초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아냈다. 그곳의 원주민들은 딜롱 선장이 투코피아에서 알아낸 사실을 새롭게 얘기했고 또 덧붙이기도 했는데,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선박을 침몰시킨 것은 그들의 얼굴 앞에 있던 두 개의 종려나무 가지로 다가온 긴 코의 유령들이었다고 했다. 원주민들이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그들의 뿔 달린 모자 때문이었다. 그들의 대장 은 그 원주민이 알 수 없는 도구를 가지고 쉴 새 없이 태양을 쳐다보고 신호를 보내기 에 바빴고, 그들은 배를 난파시키고 나서 다섯 달 뒤에 섬을 떠났고, 그들이 떠나고 난 후에는 드 사람의 백인들만 남았는데, 한 명은 대장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시중 드는 이었다고 한다. 3년 전 첫 번째 사람은 죽었고, 다른 사람은 자신이 애착을 가지 고 있던 야만인 대장과 떠났다는 것이다. 굽힐 줄 모르는 끈기를 가지고 탐사를 계속하던 딜롱 선장은 난파현장으로 가기에 이 르렀고, 그곳에서 쇳조각 몇 개를 주웠다. 그는 난파된 사람들이 남겼을 수도 있는 기 록을 나무와 바위 위에서 찾아보았으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그는 작은 강물을 거슬 러 올라가 그들이 나무들을 쓰러뜨렸다는 숲까지 가보았지만 그곳에서 특별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한편 무엇보다 라페루즈가 이 섬에서 난파했다는 확신을 그에게 주었던 것은, 오늘날 피라미드 위에 놓여져 있는 물건들을 암초 위에서 발견한 점과 원주민들로부터 사들인 물건 때문이었다. 그 물건들이란 피라미드의 벽기둥처럼 이용하던 네 개의 작은 대표 들과 은으로 만든 숟가락 조각, 여러 개의 투석기들, 두 개의 종 등이었는데, 두 개의 종 중에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있는 굵은 종에는 '바생이 내게 만들어주었다.'라는 글이 적혀져 있었다. 더 아래에 있는 또 다른 하나는 세 송이의 백합으로 장식되어 있 었다... 1826년 라페루즈를 찾은 임무를 띠고 프랑스에서 나온 뒤몽 뒤르빌은 딜롱 선장이 불행을 만난 항해자들의 흔적을 바니코로섬에서 찾아냈다는 것을 알았다. r는 이 섬으 로 향했고 1828년 2월 21일에 도착했다. 에두아르 샤르통 "현대와 옛날의 여행자들", 1869년 1827년의 수집품들 피터 딜로은 아주 상세한 방법으로 날마다 딜온은 아주 상세한 방법으로 날마다 자기 가 수집한 물건들을 기록하고, 자신의 근거에 대해 생길 수 있는 후일의 모든 논쟁을 피하기 위하여 세심하게 목록을 작성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예를 들면 레세프가 밝힌 가장 '고상한' 물건들이 북서마을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난파가 있은 후 수주일 뒤에 선박의 뒷부분에 원주 민들이 바로 드나들 수 있도록 되었다는 걸 확인해 주는 아주 특징적인 잔해들을 알아 낼 수 있었다. 타네마에서 9월 16일, "나무로 만든 커다란 키나 그것을 움직이는 기계, 한마디로 말 하자면, 프랑스 사람들이 전투키라고 부르는 것이 부러지는 것을 고치기 위해서 사람 들이 전함의 포좌에 설치한 선미재의 쇠붙이 두 개와 큰 선박의 조종 키 잡이." 아마에서 9월 20일, "구리 합판과 납 혹은 주석으로 된 d저 꼴의 고리가 달린 큰 선 박의 선미재 쇠붙이 하나." 선체의 피복판을 위한 구리의 사용 이후 오랫동안의 전해 현상이 가져온 피해에 대한 언급이 이어짐. 참고로 이스트로라브와 부솔린 선체들은 벌레를 막기 위해서 배 밑에 큰 목이 박혀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특수한 못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배의 뒷이름과 조각, 굉장히 많은 양의 물건들, 학자들과 사령관들의 생활에 관련된 귀족스런 도구들, '배의 후미에 설치되었던 화장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납 조각', 그리고 아스트로라브의 풍차에 있는 맷돌 등 최소한의 것들만 덧붙이자. 이 목록을 끝내기 전에 나는 수집한 물건들의 모양을 내가 소유한 능력을 다해 표현 하고자 했던 딜롱의 묘사 솜씨에 대해 주목한다. "스페인의 노새몰이꾼들이 쓰던 것과 흡사한 그것은-합금한 두 개의 작은 종들은 그것들 각 위에 새겨진 '2번'이라는 숫자 와 함께 유럽 성당의 종을 토대로 만들어졌다-안에 방울이 달렸고 청동이나 구리로 된 네 개의 종 그리고 스코트랜드 산악인들이 사용하는 맷돌과 비슷한 둥근 돌이 하나 있었다." 난파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선박에서 나온 의장품일 수 있도록 그 확실성 여부는 가능성이 희박해진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것들 중 하나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청동 도르래로 보는 것을 딜롱은 '제일 접장을 위한 굵은 구리 동아 줄의 큰 물레'로 묘사했다. 의장품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이 감소한 것은 닻을 단 선박이 사라진 뒤에 매우 자 연스러운 일이지만 해양고고학을 하는 탐사자들에는 설명될 수가 없는 것이다. 프랑수아 벨레크 (라페루즈 원정의 난파, 잘못 알려진 서류에 대한 새로운 분석) "넵 튜니아", 제149호, 1983년 메두사의 구리못 1981년 모리타니아 먼 바다에서 난파된 프랑스 해양 범선, 메듀사를 찾는 작업은 해 양고고학에서 지구물릭학을 기술을 적용하도록 했다. '비정상적인' 자력을 일단 찾게 나면, 유적지에 대한 명확한 확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난파선이 제조된 연대를 두고 우리가 내린 결론은 1780년과 1820년 사이였지만, 여 전히 그 배의 국적을 몰랐다. 새로운 요소들이 자꾸 나타나 그 유물의 성격과 연대 추정을 가능하게 할 것이었다. 난파선 주변에서 열 문의 대포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18구경 대포로서 메두사와 비 슷한 유형에 속하는 프랑스 함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대포 근처에서는 두 점의 가 벼운 대포 부속품인, 청동투석기가 발견되었다. 이 투석기는 1786년 이후의 프랑스 함 포에서 발견되는 특징인 쇠시리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중 하나는 포의 정면 위에 킬로그램으로 된 무게 표시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 을 보고 우리는 1801년부터 1820년대 것으로 보이는 유물에 대해 새로이 연대를 추 정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미터 제도가 1801년에 합법적으로 되었고(11월 3일 헌장), 1840년에 (1837년 7월 4일 법안) 의무화가 되었다. 아르갱 지층의 유적지에서 프랑스식으로 통일된 단위가 새겨진 대포가 나옴으로써 그 난파선의 국적을 알 수 있 는 실마리를 얻었지만, 그것이 결정적이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건이 됫받침되어야 했 다. 그렇지만 아르갱 지층 위에서 탐사가 끝날 무렵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구식 닻을 가진 선박의 난파 잔해가 있는 지역은 이론적으로 메두사 주변으로 서, 근처에서 다른 난파선은 발견되지 않은 제한된 지역에 국한된다. 유적지의 표면점 검(즉 2*2m의 측정)을 통해 이 선적은 틀림없이 제1제정 말기 혹은 왕정복고 초기의 프랑스 전함으로 추정되었고, 돛대가 세 개 달렸고 포를 장비한 쾌속범선과 관계 있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었다. 메두사를 제외하고는 그 시대에 아르갱 지층 지역에서 그 어떤 프랑스 전함도 사라진 저이 없었던 터였다. 이러한 결과를 종합해 본 결과, 1980년 12월 4일 위의 지역이 메두사 난파선 잔해가 있는 그곳임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본격적인 발굴이 없다 보니 설사 그 지역 에서 개별적인 유물 몇 점을 찾아냈다고 해도 그것들은 유적지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결 정적인 단서가 되지는 못했다. 한 개의 못을 제외하고는...이 못은 'F. R.'이라는 머릿글자를 지녔는데, 절단부가 네모 인 이 구리못은,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할 만한 심도 깊은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실 제로 그 시대의 전함에 박힌 쐐기 속에서 국가의 소유를 나타내는 병기 마크를 발견하 는 일은 흔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포나 구리못 위에서 영국 해군 마크인 가지가 세 군데로 갈라진 화살이나 또는 전통적인 브로드 애로(넓은 화살) 표시를 찾을 수가 있 는 것이다. 'F. R.'이라는 문자는 '포도주 드 로슈포르(로슈포르의 철공소)'를 암시하는데, 로슈포 르는 프랑스 혁명 전의 구체제 시절에 툴롱과 함께 청동 대포를 만들기 위하여 구리 제련 작업을 하던 유일한 병기고였다. 하지만 만약 메두사가 아프리카 해안으로 떠나 기 위해 실제로 1816년 로슈포르에서 무장되었다면, 그것은 선박제조자들이 국가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구리와 같은 재료들을 스스로 장만해야 했던 시대였던 만큼 팽베프 의 개인 선박제조소에서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 지상에서 탐문은 이 문제 에서 멈춘다... 우리들의 연대기적 추적 속에 10년이라는 부정확한 공백이 남아 있는데, 두 척의 고 대 난파선인 '플라니에 3'과 '포르-방드르 3'의 발굴 후 몇 년 뒤에 얻은 3년에서 10 년 정도의, 역사적으로 그럴듯한 공백과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그러나 문자기록 덕분 에 위에서 언급한 선박의 연대기를 긍정적으로 확인하게 되었고, 역사적인 시대의 유 적지와 관련해 아직도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이 간격을 줄어들을 수 있었다. 이르갱 지층의 난파선의 경우 이러한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는 요소는 'F. R.'이라고 찍힌 구리못이었다. 로슈포르 항구의 문자기록을 연구한 결과 'F. R.'='로슈포르 철공소 '라는 가정은 잘못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그것은 구리못이 처음으로 주조된 것이 메 두사가 난파된 해인, 1816년에서야 이루어졌다는 것이 확인되었을 때였다. 게다가 파리 해양박물관의 연구조사를 통해 아르갱 지층의 그 못과 같은 성질의, 그 리고 '로밀리'라는 글자가 분명히 새겨진 구리못이 로슈포르 선박박물관에도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에콜 샤르트의 고전학교 졸업생이자, 낭트에 있는 루아르-아틀란티스 도립문서실에서 새롭게 들어온 자료의 분류작업을 하던 M. 브윈테르슈가 아르갱의 구리못과 같은 크 기의 구리못 한 뭉치를 메두사의 제작자인 크뤼시 부자가 주문했다는 흔적을 찾아낸 것도 그 즈음이었다. 메두사는 1807년에 팽뵈프에서 제조되기 시작했으며, 주문한 해는 1806년이었고, 외 로에 있는 해군용 전문 구리 제품 제작 공장 제작 공장인 로밀리의 철공소에서 주문되 었던 것이다...이것은 프랑스에서 구리 제련업의 발달과 세분화 그리고 정치적인 사건 들과 기술적 혁신의 압박감 아래에서 혁명 초기 시대부터 시작된 개인 산업의 역할을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로밀리 철공소는 선박의 외피판과 같은 금속으로 쐐기를 박는 작업이 출현한 것과 때 를 같이하여 구리가 해군 선박제조에 무더기로 도입되었던 1781년에 생겼다. 이 로밀 리 철공소는 공화정 시대 시절 대포 주조 과정에서 성당에 있는 종의 구리(주석이 포 함된)를 사용했고, 이 사실은 그후 10년 동안 행해진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이미 인정받은 연대기를 더욱 확실하게 증명해 주는 이와 같은 국부적 요 소들을 부각시키는 일 또한 역사적인 시대에 관해 해양고고학이 해야 할 임무 가운데 하나이다. 장 이브 블로 (메두사) "탐구", 제141호, 1983년 2월 인류 문화유산의 보전 넵투누스의 공증인들 문화유산의 의미가 분명하게 정의되어 있는 지상의 고고학과는 반대로, 해양고고학의 영역은, 예를 들어 참여자의 역할과 같은 문제에서, 오늘날 고고학적 유적지의 상업적 개발에 예정된 소규모의 산업과 대중, 공공단체 각각의 역할에 대해 논쟁이 빈번히 일 어나는 때로는 법정투쟁까지 불러오는 격렬한 토론장이 되고 있다. 리스본 문화사무국의 요청으로 최근 구성된 입법이 증명하듯이 때때로 신화는 한곳에 오랫동안 뿌리를 박고 있다. 포르투갈의 예는 유럽의 문화적 영토 한가운데에 빛나는 전례를 열었다. 그것은 광산이나 유전과 마찬가지로, 수중유적지를 발굴하기 위해서 허가받은 사람들에게 양도될 수 있는 인가의 형식으로 약 150만 달러의 은행보증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허가받은 이들의 보수는 수중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수집품의 일부분으로 설정되었다. 1993년 포르투갈 입법에 도입된 이 '산업적인' 요소는 식민무역 선박의 반성에 대한 입지 문제가 원인이 되어 논쟁을 벌이던 아조레스 지역의회와 유네스코로부터 불만 섞 인 반응을 일으켰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물건들, 죽 동양적인 유형의 도자기들, 귀금 속으로 된 동전들 혹은 비슷비슷한 화물고들이 겨냥하고 있는 것이 명백한 포르투갈 법 때문에 '상업적인' 가능성이 없는 유적지의 탐사는 단기간 동안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1993년에 리스본에서 채택한 법은 예외적인 행정적 승인을 얻어야 하는 만큼 '비상업적인' 유적지는 아주 미미한 역할만을 담당해야 했다. 어쨌든 포르투갈의 경우, 고고학적 발굴물의 규정에 대한 낡은 논쟁을 자기 나름대로 해결하면서, 땅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점을 제기했다. 사람들이 유물을 팔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였다. 영국의 고고학자 마거릿 룰른는 고고학 발굴물이 각기 사전에 연구되어 '혈통서'를 받 는 조건이라면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메리로즈 발굴에 참여한 여성 단장의 이런 입장은 앵글로-색슨 학술회에서 이미 낡 은 것이 되어버린 논쟁에 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1986년도 "국제 해양고고학 잡지"라 는 과학 정기 간행물 안의 사설에서 '해양고고학의 위기'로 제목을 붙인 글을 통해 영 국 해양고고학회의 대표인 발레리 팬윅은 수중유적지에서 빼온 수집품들이 경매에 부 쳐지는 걸 염려했고, 발굴보험에 상업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보증하는 회사들과 밀착해 계약관계를 맺은 고고학자들을 비난했다. 4년 뒤, 같은 정기간행물은 싱가포르 의 산업가인 마이클 해처가 두 척의 고대 화물고들을 발굴한 뒤 1983년에서 1986년 사이에 19만 개의 도자기들이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 말려 나갔다는 걸 상기시켰다. 마 거릿 룰르의 입장과 포르투갈 최근 입법은 이 논쟁들이 동남아시아나 혹은 카리브 지 역에 국한되지 않고, 이제부터 유럽인의 문화영역에서 싹트게 될 것임을 시사했다. 규모가 큰 발굴작업을 둘러싸고 일어난 최근 두 가지 일이 과거의 논쟁을 압도하고 있다. 그 하나는 북아메리카 회사인 RMS 타이타닉 회사가 잠수한 노틸러스와 프랑스 IFREMER(프랑스 해양개발연구소)의 협조를 받아 타이타닉의 유적지 위에서 유물 수 집작업을 이끈 일에서 시작되었다. 유물을 모은다는 단순한 사실은, 여객 난파선(1921 년 난파 당시 1523명의 사망자들이 있었다)에 침범할 수 없는 성전의 지위를 부여하 고자 하는 앵글로-색슨 정치, 문화 모임의 반대와 부딪치게 되었다. 타이타닉 난파선에서 건져 올린 물건들을 판매하는 대신에, 뉴욕인 회사는 수집품들 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고 그리니치 해양박물관과 함께 조직했던 것처럼 많은 대중들을 상대로 수집품 전시회를 조직하여 주주들에게 보상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 전시회를 관람한 27196명의 관람객들에게 물은 의견조사 결과를 보면, "나중에 다시 탐사를 한 다면, 타이타닉 유적지에서 새로운 유물들을 끌어 올려야만 할까?"라는 질문에 대해 72%의 긍정적인 대답이 나왔다. 고대 난파선 발굴을 목적으로 프랑스 금융가인 프랑코 고디오가 운영하는 월드 와이 드 퍼스트는 필리핀 탐사를 할 때 위와 비슷한 원칙하에 작업하는 듯했다. 월드 와이 드 퍼스트는 1600년에 마닐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침몰한 스페인 전함 '산 디에 고'의 물건들을 최근에 소개하기도 했던 바로 그 회사이다. 이러한 계획들은, 반세기 전 탐사 출발 때부터 무료봉사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과거를 개척하는 일은 오랫동안 계속되는-물 속에서든 땅 위에서든-정열적인 직업이었고, 행정적으로 복잡한 미로 속에서 쇠퇴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해양고고학적 활동에 몸을 담고 있는 여러 아마추어들로서는 해양고고학에 관한 최근 의 프랑스 입법이 그전보다 더 구속적이고 번거롭게 되자 국가 영토 안에서 잠수로 찾 아낸 새로운 고고학적 유적지를 찾았다고 해도 신고하는 비율이 낮아지는 사태가 일어 났다. 근본적인 문제는 아웃사이더들(잠수부들, 어부들, 혹은 휴일을 즐기는 뱃사공들) 의 발견과 수없는 발굴작업장의 주동자와 선동자, 처음 언급했던 사람들의 에너지로 전세계에서 줄곧 유지되어 오던 학문이 미래에 맞게 될 사회적 문제이다. 장 이브 블로 1995년 8월, 산타 리타에서 앨라배마의 경우:새로운 법적 여건 남부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난, 1872년에 미합중국 정부는 제네바에서 대영제국으 로부터 1억 55000만 달러 상당의 금을 받아냈다. 그것은 1864년에, 셰르부르 먼바다 에서 진수 때 침몰했던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군 소속 군함 앨라배마에 대한 미국의 지원에 해당하는 변상이었던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난파선의 최근 위치 파악에 주도적 으로 나서기 전에 법조인들로 하여금 새롭게 앨라배마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했다. 1864년 6월 19일 앨라배마 CSS는 키어사주 USS에 대항해서 한 시간 동안 전투를 벌인 끝에 셰르부르에서 11.2km 떨어진 곳에서 침몰했다. 그보다 두 시간 앞서 프랑 스 해군 함대 소속인 라 쿠론은 전투가 국제수역에서 벌어지도록 자기 나라 수역에서 4.8km 떨어진 곳으로 앨라배마를 인도했다. 한편 1962년 프랑스가 자국의 수역 제한 기준을 19.3km로 넓히자, 미국은 이 결정 을 법적으로 인정하면서 만일 난파선이 발견되는 경우에 앨라배마에 대한 자신들의 소 유권 회복을 주장했다. 1984년 11월에 지뢰를 찾던 전투기 시르세는 '앨라배마'라고 확신할 만한 난파선 한 척을 발견했다. 이 소식은 1987년 9월 찰스턴에서 미국에 정식으로 알려졌고, 동시에 게루트 함대의 선장이 이끄는 미국-프랑스 공동조사단의 발굴계획이 구성되었다. 프랑스 외무성과 미국무성 사이에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이 문제는 갑작스럽게 논 쟁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영국 리버풀의 한 조사단은 다시 물에 뜬 앨라배마 난파선 을 애초에 제작지인 버킨헤드의 4번 부두로 끌어다 줄 것을 요구했고, 미국의 여러 조 사단들은 이 난파선을 미국으로 가져갈 계획을 갖고 있었기에,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 던 것이었다. 'CSS 앨라배마 보존을 위한 법령'이라고 이름 붙은 첫 법안 S.2093은 19988년 2월 23알 앨라배마주 상원의원 호텔 헤플린이 제출했다. 두 번째 법안은 'CSS앨라배마 보존령'이라고 이름 붙은 H.R. 1563으로 이는 1989년 3월 22일 조지아주 대표인 월터 B. 존스와 조지아주와 노스캐롤라이나주 여러 대표들 의 이름으로 'CSS 앨라배마의 이권과 권리를 보존하고 격려하기 위하여'라는 이름으로 제출되었다. 1988년 게루트 함대의 함장은 발굴지역에 대한 탐색을 위해 첫 번째 허가를 문화성 으로부터 얻어냈다. 1989년 10월 3일, 마침내 관련된 두 국가는 합의에 이르렀다. 난파선에 대한 소유권 문제를 명문으로 해결하지 않은 채, 이 합의는 발굴허가를 위해 관할 프랑스 당국에 의견을 제출하고, 난파선의 발굴신청 심사를 책임진 '앨라배마와 관련하여 미국-프랑 스 동수의 대표로 구성된 과학위원회'를 만들었다. 얼마 뒤 문화성과 외무부가 난파선 의 소유자를 미국에 알려주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난파선이 프랑스 영토 안의 바다에 놓여 있다는 사실과, 난 파된 전함은 그것이 어디에서 발견되더라도 규정된 절차에 따라 적군에게 돌려지지 않 은 한에서는 그 전함이 달고 있는 깃발로 그 소유권을 판가름한다는 원칙이 모든 강력 한 해양국가들 사이에서 인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앨라배마의 경우 제기되는 문제는 아메리카 연방군 국가(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파) 의 전함이 미합중국 정부의 소유물로 인정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앨라배마는 해 적선이 아니라 전함이라는 증거가 많았고 공식 명령 문서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은 북부 미합중국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고 반란군 취 급을 받고 있었다. 한편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들은 연합군을 공식적으로 인정하 지 않았다 해도 교전상태라는 것은 인정했다. 이리하여 이것은 동등한 입장에서 두 나라의 전함을 대하도록 하는 미묘한 문제를 만 들어냈다. 이 태도는 공식적인 인정에 가까운 것인데, 왜냐하면 전함을 갖춘다는 것은 그것에 국가소유의 자격을 준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인정은 외무성의 결정을 이끄는 요인 이 되었고, 앨라배마를 미합중국의 가장 빛나는 역사적 문화유산 중의 하나로 만든 양 식을 작성하는 데에 이르게 하였다. 두 나라의 대표들로 구성된 이 협의회가 처음으로 구성되기 위해서 2년이라는 시간 이, 그리고 1994년 발굴단 구성을 위해서는 5년이 걸렸다. 이 발굴단은 해마다 발굴 지역을 평가하는 작업을 계속했고, 마침내 진정한 발굴에로 이르는 첫 허가를 얻어냈 던 것이다. 1995년 3월 23일 7년 간의 잠수 후에 앨라배마 CSS 협회의 회장이자 고고학적인 계획을 지지하던 울란 보넬 박사는 미국 정부와 함께 '동의서'에 서명을 했다. 동의서 의 내용은 각자의 의무와 권리를 정하고 이 협회의 지도자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위에서 살펴본 기나긴 소송은 해양고고학적 유적지의 발굴에 관계된 최초의 국제적 ' 협력'을 구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판례가 모든 국가들, 즉 전함 유적이 있는 수역을 가진 나라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실 전통적인 해상국가들이 이 판례의 상호적용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다른 대부분의 국가들은 자 기들 영토 안에서 발 견된 난파선이 자기들 소유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막스 게뤁, 1995년 8월 25일, 파리 타이타닉, 부식의 역사 심오하고 현대적인 시대의 상징이 된 타이타닉은 또한 아주 구체적인 논쟁의 도가니 가 되기도 했다. 국제수역에 있던 이 난파선은 과학자나 산업가들과 같은 다양한 그룹 이 정기적으로 방문했고, 물건들로 가득 찬 다락방이었지만, 이 유물들이 천천히 파괴 되어 가는 것을 막는 일이 보존가들에게는 커다란 도전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만이 있는 대서양의 밑바닥에서 사람들은 그곳이 물리적 화학적 변형 만이 존재하고 시간은 정지된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겨우 몇 센티미터 침전물로 덮인 단단한 받침들 위에서 어마어마한 덩어리의 충돌소리가 지나간 뒤, 타이타닉의 골조는 깊게 가라앉아 바닷속의 지층을 이루며 조용한 환경 속에서 연원한 잠을 잘 거라고 믿 었다. 그러나 수중 카메라에 담긴 아름다운 난파선의 모습과 이따금씩 발굴된 매우 아름다 운 물건들의 모습은 실재로는 그것들을 서서히 갉아먹는 악성 질병을 숨기고 있는 것 이었다. 느린 산화(염화물과 황화물의 작용으로 인한 화학분해, 즉 각각 다른 금속의 결합으 로 생간 전기부식)를 막는 방법은 물건이 공기중에 드러냈을 때 아주 활발한 촉매작용 을 할 수 있는 화학 약종을 금속에 주입시키는 것이다. 이런 화학 약종 중 가장 유명 한 것은 염화음이온으로, 대서양에서 건져낸 쇠로 된 물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 가는 오래 전부터 연구되어 왔다. 부식을 막으려면 물질의 구멍에 공기 속의 산소가 최대한 닿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 지 않을 경우 파괴의 순환은 계속되게 마련이다. 금속물질의 보존은 그리하여 이중의 배려가 뒤따라야 한다. -산소를 피해서 물건을 놓는다 -해로운 물질(염화물)을 제거하는 과정을 시작한다. 물에서 나와 방금 공기와 접촉한 물건을 위해서는 연수(칼슘 등 광물질을 포함하지 않거나 아주 조금만 포함한 물)를 새로 채워 저장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주의해야 할 좀은 과학적 기록과 사진촬영을 위해 대기상태에서 노출되는 일은 최소한의 시간으로 제한한다는 것이다! 타이타닉에서 올라온 물건들의 보존처리는, 전기 화학 기술의 작업 덕분에, 순수하게 고고학적인 성분구조와 유물의 보존을 지향하는 E.D.F.(프랑스 전력공사)의 기술적인 학술 보호활동의 일상적인 범위를 약간 벗어나 있는 것이었다. 한편 뉴펀들랜드 남동쪽으로 약 4000m 깊이의 지점에서 75일간 있다가 다양하게 변 질된 금속견본은 E.D.F.의 보존전문가들에게 특히 흥미로운 연구분야를 제공해 주었다. 사실 이 경험은 이러한 영역에서 유일한 것이었는데, 특히 금속 분야에서 발굴된 물 건들의 원래 모습은 어떻고 부식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에 대한 이론적 조건을 둘러싸 고 혼동을 일으켰다. 이렇게 하여 부식의 여러 유형에 대한 이해는 변질을 정확하게 예측하게 하고, E.D.F. 실험소에서 정해진 약화된 전기분해 무염요법 처리를 더욱 정 확하게 사용하도록 해주었다. 그것은 RMS 타이타닉에서 나온 커다란 규모의 구리혼합물에 관한 일련의 관찰과 분 석에 대한 진단에도 사용되었다. 탐사방법이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현행 관습에 따라 모든 구리 혼합물을 청동류의 목록에 포함시킨다는 원칙이 생겼다. 따라서 유물이 부 식된 상태에 따라 혼합물의 이름이 정해졌는데,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이름들이 어떤 명에서 중요한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가장 특징적인 물건들 틈에서 혼합물을 점검하는 것은 이리하여 우리의 첫 번째 과제가 되었다. 두 번째는 매몰상황 의 물리화학적 연구와 하층토에 있던 유물의 위치가 주는 영향에 대한 연구로 구성된 다. 이 논문도 이 주제에 대한 우리들의 관찰과 결론에 도움을 받은 것이다. 타이타닉에서 떠올라온 여러 가지 구리혼합물의 의미는 의미심장하다. 이런 식으로 살펴보면 모터 부분, 항해에 필요한 무거운 장비, 장식부품들, 샹들리에, 의자의 팔걸 이 부분, 목욕탕 부품들, 갑판의 종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것들의 재료는 일반용이냐 혹은 항해용이냐에 따라, 즉 사용기능에 따른 구성성분 의 몇 가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구리-주석, 혹은 구리-아연의 혼합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아연의 혼합물은 일반적으로 아연이 주석을 대신함으로써 구리-주석의 혼합물을 대처한 것인데, 이는 청동과의 관계에서 아연이 부식에 강한 저 항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구리혼합물의 여러 가지 보존상태는 난파선에서 일어난 부 식현상의 복합성을 확인해 주었다. 폴 마르티키안과 노엘 라쿠드로 (타이타닉, 부식의 역사) "넵튜니아", 제178호 항해자와 그의 유골 난파선에서 찾을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가라앉았던 인간이었다. 난파선을 이끌었던 사람은 사라지고 물건만 발견되는 이 명백한 역설은 유기체를 먹고 사는 해 양벌레에게 그 책임의 일부를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난파를 연구하는 고고학자는 해양의 범위를 넘어서야 한다. 왜냐하면 한 척의 단정이 완전히 난파되는 사고가 일어나면 그 부근의 주민들은 며칠 뒤나 몇 주 뒤 어 떻게 해서라도 희생자들 시신을 해안가로 끌러내고 그들을 묻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고고학적 지역과 난파의 지점이 이중성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따금 씩 잊어버린다. 따라서 인간의 유골은 발견하고 그 보존상태의 분석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고고학 '물 속에서 죽음'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물 속이 아니라 땅 위에서 이뤄지고 있다. 갑작스런 죽음, 난파선의 나무조각이나 해변의 바위에 갈기갈기 찢긴 육체, 부서진 두개골, 바다 진흙이 가득 찬 내장들, 이러한 난파를 연구하는 고고학은 물 속 선박에 생명을 준 사람들, 말하자면 주인 혹은 노예, 수부 또는 죄수와 같은 사람들의 상세한 초상을 땅 위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장 이브 블로 1995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