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 최후의 날 지은이: 로베르 엔티엔 출판사: (주)시공사 봉사자: 김나경 여러 가지 증거로 판단하건대, 서기 79년 8월 24일 이후 폼페이는 인간세계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폐허가 된 언덕 위로 잡초와 포도넝쿨이 한때 번성했던 도시를 뒤덮어 버렸다. 도시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사라졌고, 폼페이를 뒤덮은 언덕은 '도시'라는 무의미한 말로 불렸다. 제 1장. 보물찾기 폭발 직후에도 폼페이에서 값진 보물을 파내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벽면에 남긴 낙서로 알 수 있다. 18세기의 유럽 또한 사라진 도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을 발굴하려는 열정에 사 로잡혔다. 여러 나라 왕의 묵인 아랴, 파묻힌 도시의 약탈이 시작되었다. 1594년 헤르쿨라네움의 폐허가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나폴리에 부왕을 파견해서 남부 이탈리아를 지배했다. 오스트리아의 부왕들은 구덩이와 긴 터널을 파서 조각 상을 약탈한 뒤 빈의 궁전으로 빼돌렸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벽화로 장식된 벽을 허물곤 했다. 야만스러운 약탈과 도굴행위를 꾸짖고 나선 사람은 교황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양시칠리아 왕국의 왕이자 스페인 왕인 카를로스 3세가 측량사 로코 조아키노 데 알쿠비에레를 스페인에서 끌어들여 값진 조각상과 보물을 스페인 궁정으로 나 르게 했을 때부터 '보물찾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1748년, 스타비아나와 놀라 거리 근처에 있는 포르투나 아우구스타 신전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첫 번째 발굴작업장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알쿠비에레는 곧 헤르쿨라네움으로 관심을 돌렸고, 폼페이 발굴은 1754년이 되어서 야 비로소 재개되었다. 9년 뒤, 어떤 명문이 발견되었고, 'La Civita(도시)'는 폼페이라는 본 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가 고상한 것만은 아니었다. 발굴 초기에 폼페이를 여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놀란 유럽은 더 자세한 사실을 알 고 싶어했다. 헤르쿨라네움 아카데미를 설립한 카를로스 3세는 폼페이 발굴을 지원했고, 학 자들은 나폴리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고전 고대는 앙드레 드 셰니에의 예술과 시에 스 며들었고, 디드로는 1763년 살롱 전람회에서 비엥의 '목욕하는 여자 상인'을 감상할 수 있 었다. 오늘날 퐁텐블로에 전시되어 있는 이 그림은 헤르쿨라네움을 소재로 한 것 같다. 그러나 폼페이의 발굴은 본보기가 되지는 못한다. 독일의 위대한 고미술사가 빙켈만은 폼 페이에서 횡행하는 무질서에 거침없는 항의를 보냈다. 1768년 암살당한 그는 편지로써 폼페 이를 유럽에 알린 고고학의 선구자로 남아 있다. 폼페이 발굴책임자인 카를 베버는 여기저기를 무분별하게 파헤치기보다는 체계적 발굴작 업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베버의 방식에 따라 헤르쿨라네움문 가까이에서 이스타키디우스의 묘소, 여제관 마미아의 무덤, 여인숙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발견을 목격한 유럽인의 상상력은 고조되었다. 베버의 뒤를 이은 스페인 사람 프란세스코 라 베가는 1764년에 주악당과 62년 의 지진이 있은 뒤 포피디우스 켈시누스가 재건한 이시스 신전을 찾아냈고, 1767년에는 검 투사의 숙소를 발굴했다. 라 베가는 처음으로 종합적인 발굴계획을 세웠으며, 일꾼의 숫자가 적었지만, 1789년에는 주악당과 극장을 완전히 발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발굴의 목적은 여 전히 금은보석을 찾는 데 있었고 건물의 용도가 파악되고 나면 작업은 중단되곤 했다. 1770년에서 1815년 사이, 발굴은 나폴리 왕과 왕비의 후원을 받아서 활발히 진행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카롤린은 능력도 없고 경박한 페르디낭 1세와 결 혼했다. 폼페이 발굴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왕비는 남동생 요제프를 그곳에 데리고 갔다. 1771년에는 디오메데스의 별장이 발굴되었는데, 1772년에는 별장의 지하복도에서 시체 열 여덟 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어린 소녀의 시체에서 영감을 받은 낭만주의 작가 테오필 고티에는 소설 '아리아 마르첼라'를 썼다. 폼페이의 명성은 높아만 갔다. 괴테는 1787년 발굴현장을 방문했으며, 영국의 대사인 해밀턴도 발굴작업에 열렬한 관심을 쏟았다. 1798년, 나폴리를 점령한 프랑스 장군 샹피오네가 다시 발굴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발굴 된 집 한 채에 그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8지구, 2지역, 1-5번 가). 1806년, 조제프 보나파르 트는 코르시카 사람 크리스토프 살리체티에게 발굴책임을 맡겼다. 발굴이 시작되고 10년이 지나기 전에 중요한 건물들이 드러나 사람들을 들뜨게 만들었 다. 1808년, 뮈라가 나폴리 왕국의 군주가 되었다. 왕비 카롤린은 나폴레옹의 누이였다. 고고 학에 열중한 그들은 사재를 털어 발굴을 독촉했다. 학자들은 도시의 경계를 정하고 콘술 거 리 인근의 외곽 성벽을 발굴하고 원형 경기장, 바실리카(basilica)법정, 교회 따위로 사용된 장방형 회당)를 파헤쳤다. 나폴레옹 왕가는 이전에 나폴리를 통치하던 부르봉가 출신 군주 들처럼 폼페이에 열광했다. 1815년 4월 11일, 워털루의 비극이 있기 얼마 전에도 카롤린은 발굴을 감독하러 폼페이에 갔을 정도였다. 옛 왕조로 되돌아가면서 발굴이 늦어졌다. 1815년 라 베가가 죽자, 안토니오 본누치가 뒤 를 이어 발굴책임자가 되었는데, 1818년,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인부는 단지 13명 뿐이었다. 그렇지만 폼페이는 유럽의 군주들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곳이었다. 폼페이를 방문한 그들은 방금 전에 되묻은 건물의 발견자로 떠받들어졌다. 1823년, 중앙대광장, 극장구역, 검투사 숙소의 잔해, 서쪽 성벽, 헤르쿨라네움문 근처, 길게 뻗은 무덤의 길, 원형경기장, 스타비아나 거리 북쪽에 있는 집들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1824 년에는 포르투나 아우구스타 신전과 중앙대광장의 목욕탕이 계속해서 발굴되었다. 1825년에서 1830년 사이, 양시칠리아 왕국의 프랑수아 1세는 자기 형 페르디낭 1세보다 더 많은 관심을 폼페이에 기울였다. 이 시기에 중앙대광장 목욕탕의 북쪽에 있는 집, 빵집, 비극 시인의 집이 발굴되었다. 1830년에 왕위에 오른 페르디낭 2세 치세에는 목신(반우반신 의 모습을 한 신)의 집에서 이소스 전투에 출전한 알렉산더 대왕을 묘사한 모자이크가 발굴 되었다. 1853년과 1858년 사이에는 스타비아나 거리의 목욕탕들이 발굴되었다. 1861년, 부르봉 왕가를 쫓아내고 나폴리에 입성한 가리발디는 알렉상드로 뒤마에게 박물 관의 관리와 발굴의 책임을 맡겼다. 그러나 뒤마는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카보우르는 이탈리아를 통일했고, 이로써 폼페이는 새로운 운명을 맞이했다. 이탈리아의 새 왕은 폼페이의 발굴을 잘 진행시키면 새 왕조의 이름을 크게 떨칠 수 있다 고 생각했다. 1860년 12월 20일, 왕은 젊은 고전 연구가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책임자로 임 명했다. 피오렐리의 등장으로 합리적인 발굴시대가 도래한다. 비판력과 과학적 엄밀성을 지 닌 인물로 정평이 난 피오렐리는 고고학에 과학적인 접근방법을 도입했는데, 발굴일지를 꾸 준히 기록했음은 물론, 폼페이를 여러 지역과 구역으로 나누고 집집마다 고유번호를 매겨 발굴작업을 체계적으로 수행해 나갔다. 이러한 방법은 아직도 쓰인다. 피오렐리는 500명이 넘는 인부를 동원할 수 있었다. 발굴과정에서 집이 무너지는 위험을 막기 위해서, 지붕에서 시작해 조심스레 흙더미를 제 거하면서 밑으로 파헤쳐 내려가는 방법이 채택되었다. 1863년에는 죽는 순간을 그대로 간직 하고 있는 폼페이 사람들의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 석고로 본을 뜨는 방법이 고안되기도 했 다. 마침내 폼페이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이 밝혀지게 되었고, 새로운 방법을 이용해서, 그는 술집, 창녀촌, 빵집, 은행가 카이킬리우스 유쿤두스의 집(5지구, 1, 26)을 확인했다. 1875년, 문화재 관리 책임을 맡은 피오렐리는 학생들에게 발굴해 낸 물품을 출토지별로 분류하는 작 업을 완수라고 지시했다. 폼페이의 황금시기(1875-1893) 한때 피오렐리와 공동작업을 벌였던 건축가 미첼레 루지에로는 도시 북쪽을 동서로 뻗은 길의 주변 지역에 대한 발굴을 시도함으로써, 놀라문이 서 있는 시 동쪽으로 작업을 확대했 다. 그때 발굴한 것이 62년의 지진이 발생한 뒤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미완성으로 남은 중앙 목욕탕이었다. 한편, 9지구에서는 화산폭발 이후 18세기가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해 '100주 년의 집'(8, 3)이라고 부른 건물과 4, 5, 6, 7, 8 지역들이 발견되었고, 놀라 거리와 스타비 아나 거리의 5지구에서는 1, 2, 3, 4 지역이 발굴되었다. 8지구의 2지역 발굴은 복층 집들이 용암이 쌓인 비탈길 위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발굴하는 데 무척 힘들었다. 1880년대에는 성문 외곽에서 공동묘지가 발견되었다. 폼페이에서 누체리아로 가는 길로 추정되는 곳에서 몇 기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스타비아문에서도 두 기가 발견되었다. 이 밖 에도 루지에로는 '은혼식의 집' 안마당에서 발견된 600점 이상의 벽화와 '발코니의 집'을 원래의 구조대로 복원하려고 노력했다.(7지구, 12, 28) 금석학자, 줄리오 데 페트라의 등장 줄리오 데 페트라는 1893-1901년과 1906-1910년에 걸쳐 현장을 감독했다. 이 당시 발견된 가장 주목할 만한 유적지로는 오늘날 폼페이 유적지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한 베티우스의 집 (6지구, 15, 1)과 루크레티우스 프론토의 집(5지구, 4, 11), 그리고 '신비의 별장'을 들 수 있 다. 그는 도시의 북쪽 지대와 5, 6지구를 계속해서 발굴했다. 그곳에서 외성의 10, 11번 망루 와 바실리카 뒤쪽에 있는 도시의 수호여신인 비너스 폼페이아나에게 헌정된 신전의 잔해를 찾을 수 있었다. 카피톨린 3신전과 아폴로 신전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지만, 페트라의 관심 은 '파구스 아우구스투스 펠릭스 수부르바누스(Pagus Augustus Felix Suburbanus)'라고 부 르는 교외지역과 신비의 별장 같은 개인 별장의 발굴에 집중되었다. 페트라는 지붕, 지붕이 딸린 안마당, 그리고 기둥으로 둘러싸인 안마당을 복원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으며, 특히, 도 시의 생활과 분위기를 재구성할 수 있는 기본요소인 몇몇 저택의 중정을 세밀하게 복원하는 일에 주안점을 두었다. 1901년에서 1905년 사이, 역사학자 에토레 파이스는 5지구93, 4지역)와 6지구(15와 16지 역)에 걸친 북쪽 지대에서 작업을 계속하여, 스타비아나 거리와 놀라 거리를 연결하는 지역 을 완전히 발굴했으며, 베수비오문과 도시 전체에 물을 공급하던 급수탑의 잔해도 발견했다. 그는 스타비아나 거리의 끝과 놀라 거리에서 몇 채의 저택을 파헤쳤는데, 그중에서 특히 오 벨리우스 피르무스의 집(9지구, 10, 1-4)이 유명하다. 고고학자들의 열정 어린 작업과 더불어 발굴작업은 더욱 체계성을 갖추었다. 안토니오 솔지아노의 재임기간(1905-1910)에는 베수비오문과 놀라문 근처에서 발견한 무 덤 몇 기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발굴성과가 따르지 않았다. 그는 '은혼식의 집'에 있는 코린 트식 응접실(5지구, 2), '황금빛 큐피트의 집'의 기둥이 둘러싸인 안마당(6지구, 16, 7), 매음 굴의 발코니 등을 복원하는 데 많은 정열을 쏟았다. 솔지아노의 주요 관심사는 복원된 폼페 이시의 보존에 있었다.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는 오늘날까지도 이용되는 폭넓은 기술적 조처를 취했다. 비토리오 스피나촐라는 전임자가 수행했던 방법보다 더욱 체계적으로 정비된 발굴작업 계 획(1910-1924)을 세웠고, 정열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우선 그는 도시 북부 지 대 발굴을 완전히 포기하고, 대신 남부 지대를 발굴하자고 제안했다. 그이 목적은 도심지를 원형경기장과 연결하고, 아본단차 거리에서 사르니아문이라고 부르던 동문까지 발굴을 진행 하려는 것이었다. 스피나촐라의 계획은 순간순간 이루어지는 특수한 발견에 따라 만족을 얻 을 수 있는 환상에 따른 것이 아니라, 도시계획이라는 실제를 따른 영감에 찬 시도였다. 또 한 그것은 계획해서 사유저택을 파헤치는 무계획이라기보다는 도시의 동맥이라 할 수 있는 주요 간선도로를 따라 이루어진 폼페이의 상업활동을 살피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계획을 수행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이제까지 발굴작업이 600미터나 되는 도로 양측에 늘어선 건물의 정면을 파헤치는 데 집착하다 보니, 풍요로운 발굴성과를 가져올 수 있는 주거지를 발굴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고고학자들은 건물 정면 을 뒤덮고 있는 벽화, 선거벽보, 분명치 못한 낙서를 해석하여 가게와 특이한 모습을 갖춘 건물의 쓰임새를 추측해야 했으며, 더욱이 뒤쪽에서 압력을 가해 오는 축축한 흙더미의 하 중에서 건물의 정면을 보호하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했다. 따라서 스피나촐라는 원안을 수정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관심을 끄는 건물을 발견하면 그 주변의 뒷골목까지 샅샅이 조사하 리라 마음먹었다. 이렇게 해서 400미터에 달하는 첫 발굴의 흔적은 이리저리 구불구불 흐르 는 강물이 만들어 놓은 강기슭처럼 불규칙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이 모양을 확 인할 수 있다. 그러나 거리 하나를 집중 조명해 보는 방법도 상당히 중요하다. 이 방법에 따라 일관적인 복원작업이 가능할 수 있었고, 벽화와 벽보는 물론 상점의 가구까지 제대로 보존할 수 있었 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전혀 상상해 보지도 못한 폼페이의 참모습을 밝혀 주었다. 이제 까지 알려지지 않은 폼페이의 실상은 그곳을 방문한 관광객들을 열광케 하기에 충분했다. 스피나촐라는 이러한 방법을 동원해 사유저택 속에 수공업 설비를 시설한 본보기를 보여 주는 풀로니카 스테파니(1지구, 6, 7)와 아셀리나 선술집(9지구, 11, 2)을 발견했다. 또한 그 는 부유하다고 추측되는 집을 선택하여 발굴했는데, 파퀴우스 프로쿨루스의 집(1지구, 7, 1), 지하회랑의 집(1지구, 6, 2), 루키우스 케이우스 세쿤두스의 집(1지구, 6, 15), 트레비우스 발 렌스의 집(3지구, 2, 1), 피나리우스 케리알리스의 집(3지구, 4, 4), 넓은 정원을 가진 로레이 우스 티부르티누스의 집(2지구, 2, 2)이 차례차례 발굴되었다. 윤리주의자의 집(5지구, 1, 18) 도 이때 빛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이름은 아본단차 거리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 이다. 아메데오 마이우리의 재임기간에는 폼페이 유적 발굴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 는 더욱 광범위하고 세련된 발굴작업을 통해 폼페이의 역사를 더듬어 나가는 데 강조점을 두었다. 그와 함께 폼페이의 기적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 할 수 있는 과학적 고 고학의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의 후계자인 프란치시스, 체비, 그리고 이룰리체룰리 여 사도 같은 길을 갔다. 폼페이의 기적 대이변이 발생하지 않아 갑작스럽게 인간세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면, 폼페이는 역사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해석하려고 애쓰고 있는, 수세기 동안 얼어붙어 있던, 폼페이 사람들의 일상을 우 리는 그곳에서 만날 수 있다. 폼페이에서는 고대가 직접 말을 건네며, 날마다 벌어지는 생활 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노동자들은 회반죽을 이겨 신비의 별장 지하회랑을 바르고 있고, 이 시스 신전의 사제들은 예식을 위해 제단을 준비하고 있다. 폼페이는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와 아주 비슷한 남자와 여자들이 가졌 던 여러 가지 직업과 감정과 꿈과 환상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폼페이의 기적은, 끔찍한 재앙이 닥친 뒤 수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날, 그 작은 도시의 기쁨과 슬픔과 희망과 공포를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작업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발굴작업을 통해 정체를 드러낸 도시의 역사는 유구하다. 이 도시는 어떻게 기원전 10세 기, 어부들과 농부들로 형성된 소공동체에서 A.D.79년 8월 24일, 잿더미에 파묻힌 2만 명의 거주민들이 사는 번성한 도시로 발전하였던가? 제 2장. 폼페이의 생활 오스크인, 그리스인, 에트루리아인, 삼니움인, 로마인 등 다양한 지배세력과 그들의 화려 한 무용담 이탈리아 토착세력 오스크인이 형성한 초기 부락은 선사시대에 용암이 흘러 층을 이룬 가 파른 화산의 산마루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은 7, 8지구 중심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여러 차례 거주민이 바뀌면서 형성된 정돈되지 않은 도로의 모습은 원시촌락의 특성을 확연히 보 여 준다. B.C.6세기, 중요한 해상무역로로서 전략적인 위치를 차지하던 이곳에 그리스인이 정착했 다. 그들은 사르노 계곡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도리아식 신전을 짓고 아폴로신 송배 의식을 들여왔다. 그러나 그들에게 폼페이는 영구적인 정착지라기보다는 항구와 해양진출로 를 통제하는 거점이었다. B.C.524년부터 B.C.474년까지 에트루리아인이 도시를 점유했지만, 특별한 건축물의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 뒤, B.C.474년에서 B.C.424년까지, 폼페이는 다시금 강력한 그리스의 영 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들은 신전을 복구했고 성벽을 쌓아 수비를 강화했으며, 6지구 건 설을 추진하여 도시를 확장해 나갔다. 그리스 인은 피라이우스를 건설한 밀레토스의 히포다 모스의 원칙을 본떠서 도시에 기하학적 규칙성을 주었고, 남북을 축으로 삼아 소통을 원활 하게 해주는 여러 갈래의 도로를 냈다. 이 오스크-그리스 풍의 도시는 아브루치스와 칼라브리아에 살던 거칠고 잔인한 산악민인 삼니움족에게 정복당했다. 그들은 B.C.424년에 해안 지대의 그리스 식민지를 휩쓸어 버렸다. 해안지대의 평원에 자리잡은 삼니움족은 캄파니족으로 알려졌고, 이로써 폼페이는 캄파니족 의 도시가 되었다. 이들은 옛 정착민과 새로 출현한 정착민 모두에게 익숙한 오스크어를 채 용했다. 로마는 강력한 군대를 동원하여 산악지대에 남아 있던 삼니움족을 복종시켰지만, 평 원의 캄파니족과는 동맹를 맺었다. 이들은 끝까지 로마의 성실한 동맹자임을 고집했다. 기원 전 280년경의 에피로스의 왕 피로스도, 캄파니아 평원의 다른 모든 도시들이 충성을 맹세한 한니발도 로마에 대한 폼페이의 충성심을 약화시키지 못했다. 주변 부족의 공격에서 도시를 방어하고, 로마로부터 독립을 지키고자 했던 폼페이는 도시 의 수비체제를 더욱 철저히 했다. B.C.424년부터 B.C.89년까지 폼페이의 성벽은 더욱 견고해 졌다. 검은 응회암과 석회암으로 만든 평행을 이룬 이중 성벽은 흙더미로 보강되었고, 열두 개의 정방형 망루가 성벽위에 세워졌다. 남북 방향으로 쌓은 성벽은 옛 성벽 위에 증축되었 는데 이로써 도시가 남북 방향으로는 확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에 동 서 축을 중심으로 도시의 동쪽 구역이 그리스 도시를 본받아 상당히 발달했다. 삼니움족은 오늘날 알려져 있는 3,014m에 달하는 도시의 경계를 형성했다. 웅장한 성벽이 둘러쳐진 도 시의 경계 저쪽에는 공동묘지가 들어서 있다. 삼니움족은 또한 도시의 주요 간선도로를 건설했다. 그들의 목적은 세모꼴광장과 광장에 있는 기념물군을 시민광장과 연결시키려는 데 있었다. 오늘날로 보자면 템피오 디 이시데 거리와 테아트리 거리를 연결시키는 셈이 된다. 한편, 스타비아나 거리(어떤 명문에 따르면 폼페이아나 거리라고도 한다)는 북쪽에서 남으로 가로질러 사르노강의 다리를 지나 스타비 아이 마을까지 이르게 된다. B.C.90년 3월, 삼니움족의 여러 도시가 로마에 힘을 합쳐서 대항했고 이번에는 폼페이도 반란자들 편에 가담했다. 술라 장군이 지휘한 로마군과 연합군의 전쟁은 쉽사리 끝나지 않 았다. 폼페이는 로마군에 포위되었고, 성벽은 술라의 이름이 새겨진 거대한 돌덩어리로 포격 을 받았다. 응회암 성벽에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포격의 흔적이 남아있다. 기원전 90년 여 름부터 B.C.89년 가을 사이 마침내 폼페이는 항복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A.D. 8월 비운의 날까지 폼페이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평화가 지속되었다. 공공건축물 구역과 거주 구역 로마는 도시계획에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뒤(특히 62년 2월 5일의 지진이 있 은 뒤)에 복구되거나 재건되는 경우가 있기도 했지만, 폼페이의 공공건축물 구역과 거주 구 역이 지닌 삼니움 시대 고유의 특색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로마인의 생활은 도시의 기본구 조에 적응되어 나갔다. 로마 식민지, 폼페이의 심장부에 위치한 중앙대광장은 당시 종교, 정치, 상업의 중심지였 다. 카피톨린 3신전, 라레스(가정과 거리의 수호신) 신전, 베스파시아누스 신전이 모두 이곳 에서 발굴되었다. 그리고 정치에 관련한 다양한 활동은 쿠리아회, 이두정치가 건물 등에서 이루어졌고, 시장, 에우마키아 기념건물, 도량형을 담당하던 관청 따위는 도시의 상업 중심 지를 이루었다. 중앙대광장은 산책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당국은 돌을 쌓아 아본단차 거리에서 들어오는 우마차의 통행을 막았다. 현재는 극장 구역의 일부분이 된 세모꼴광장은 당시 대극장의 휴게실로 이용되기도 했고, 막간에 쏟아져 나온 관객들의 산책로로 사랑받기도 했다. 또한 근처에는 삼니움족 경기장 (palaestra), 이시스 신전, 주피터 메일리키오스 신전이 있었다. 따라서 이 구역은 종교활동 과 체육활동이 더불어 이루어졌던 공간임을 알 수 있다. 남동쪽에는 원형경기장과 도시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갖춘 경기장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폼페이에서 가장 넓은 공간으로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모여든 구경꾼들은 행상이 파는 온갖 종류의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이들 지역 이외의 나머지 지역은 대부분 거주지역이다. 거주지역은 로마 지배 시대에 폼 페이 시민들이 일상생활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공중목욕탕의 건설이 시작되면서 더 이상 확장되지 않았다. 가장 오래된 목욕탕은 삼니움 시대에 건립된 스타비아 목욕탕이다. 중앙대광장목욕탕은 로마의 식민지가 정착되던 때 들어섰고, 중앙목욕탕은 화산이 폭발되는 때에도 한창 건설이 진행중이었다. 목욕탕들은 옛날 오스크족이 도시를 지배하던 시절의 도 심지 옆을 지나는 중앙통을 따라 세워졌다. 그곳 구도심지에는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마다 매음굴의 창녀들이 유혹의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술집(thermopilia)과 상점이 즐비하게 들어차 있는 거리들은 폼페이의 왕성한 상업활동을 말해 준다. 그런데 놀랍게도, 도시 한가운데에 아직도 시골풍경을 간직한 구역(1지구)이 남 아 있었다. 그곳에는 야외용 식탁을 차려놓은 전원풍 정원과 포도밭이 있었고, 포도밭에서는 포도주를 만들어 직접 팔기도 하였다. 상업이 번성했던 활기찬 도시, 폼페이는 미식가와 고 급 포도주애호가들이 감탄할 만한 전원적 요소 또한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작은 로마 B.C.80년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로마의 장군 술라는 폼페이에 내정문제에 관한 자치권을 주어 로마와 비슷한 체제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폼페이의 최고권력가는 두 명의 이두정치가였다. 이두정치가는 합법적인 판결을 내리고 공공자금을 관리하고 시의회의 의사진행을 담당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두 명 이상의 행 정관(aediles)이 도로 보수, 시장의 관리나 감독, 질서 유지 등을 담당하며 이두정치가를 보 좌했다. 관리들에게는 중앙대광장에 사무실과 문서보관실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이 할당되 었다. 마찬가지로 중앙대광장에 있던 쿠리아회는 시의회의 모임장소였다. 시의회는 대부분 시행정관을 역임했던 100명의 10인대장으로 구성되었다. 입법기관으로 활동한 쿠리아회에서 만든 법령은 자치정부의 책임자인 두 명의 이두행정가가 수행하는 통치권과 행정권에 정당 성을 줄 수 있는 근거로 작용했다. 베티우스 피르무스를 행정관으로! 해마다 7월이 되면 폼페이 시민들은 시행정관을 뽑기 위해 투표를 했다. 봄부터 도시는 선거로 달아올랐다. 벽이란 벽은 온통 붉은색, 아니면 검은색으로 칠한 선거벽보로 뒤덮였 다. 지정게시판이 없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그들이 지지하는 특정 후보자를 위해 시민의 집 정면을 제공해 주었다. 같은 구역 주민들(vicini)은 홍보집단을 고용해 종종 지난해 적어둔 광고문구를 지우기 위해 벽에 회칠을 했다. 이럴 경우 때로는 밤샘작업이 필요했다. 오늘날의 정치관행과 달리 후보자 자신이 표를 달라고 호소하지는 않았다. 그대신 지지자 들이 그가 그 직책에 가장 적합하다고 선전하면서 표를 얻기 위하여 노력했다. 후보자는 미 사여구로 치장된 선거공약을 떠들어대지 않았고, 화려한 경력을 허풍스레 늘어놓지도 않았 으며, 공공건물의 건축 계획, 조세경감, 도로개선 따위를 약속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후 보자의 훌륭한 도덕성을 지지자들이 입증하는 일이었다. 이로써 후보자인 폼페이의 명사, 카이우스 율리우스 폴리비우스가 자신의 선거구역 술집 에서 일하는 쿠쿨라와 즈미리나라는 두 명의 창녀가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한다는 사실에 화를 내고 그녀들이 새겨 넣은 벽보를 당장에 지워 버리라고 지시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녀들처럼 천박한 사람들의 지지는 오히려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편, 선거권과 피선거권 모두 갖지 못했지만 아낙네들도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폼페이는 도시행정면에서 자치권을 가졌지만, 황제의 칙령에 복종해야 했다. 선거에서 선출된 시행정관들은 보다 광범위한 정치적 사안에 관여하거나, 황제나 그의 대 신들이 결정한 정책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그들의 행정력은 시 내정문제에 제한되었 는데, 62년의 지진이 있은 뒤 가장 시급한 문제는 도시 재건이었다. 새 황제가 등극할 때마 다 폼페이는 충성심을 보여 주어야 했다. 해마다 황제 숭배의식이 베풀어졌고, 황제의 미덕 을 칭송하는 신전이 이곳저곳에 생겼다. 로마는 공공질서가 위협받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폼페이 내정문제에 간섭하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한 예로 그로스피 형제가 이두정치가로 재직하던 59년, 원형경기장에서 폼페이 주민 과 누체리아 주민 사이에 패싸움이 일어나자 네로 황제가 형제를 즉시 해임했던 사건을 들 수 있다. 뒤를 이어 네로는 후임 이두정치가를 임명하는 한편, 그들을 감독하기 위해 입법권 을 지닌 장관을 파견했고, 모든 시합을 금지시켰다. 얼마 뒤 시합이 다시 허용되자 시민은 모두 즐거워했는데, 이로써 황제는 무한한 권능을 입증했고, 인기를 높일 수 있었다. 황제가 개입한 다른 보기가 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수에디우스 클레멘스를 파견해 토지대장을 바로잡고, 사기꾼에게 착복당한 토지를 도시에 되돌려주도록 했다. 폼페이 시민 은 그러한 행동이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성스러 운 심판'을 내리는 존엄한 군주에게 경의를 표했다. 폼페이 사람들은 어떻게 생계를 꾸려 갔을까? 그것은 쉬웠을까, 어려웠을까? 폼페이는 온 화한 날씨와 아름다운 시골풍경에 심취된 사람들이 일생 모은 돈을 가지고 은거하는 한적한 도시인가? 아니면, 부자이건 빈자이건 가리지 않고 몰아 닥친 62년의 지진이 있은 뒤, 불행 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며 열심히 일하는 시민들로 북적대는 활기찬 도시인가? 제 3장. 폼페이의 경제생활 '수익은 나의 즐거움(Lucrum gaudium)'. 이것은 목수가 살던 평범한 집 안마당에 설치 된 빗물받이 가장자리에 새겨진 명문이다. 시리쿠스나 누메리아누스 같은 명사들이 살던 부잣집 현관 바닥에서도 수익에 경의를 표하는 모자이크로 새긴 글귀(salve lucru)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업의 신, 머큐리의 모습은 여인숙 계산대, 모직물 표백공장 담벼락, 선술집 현관 등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유산계급의 토지 수입 옛날부터 캄파니아는 농업의 천국이었다.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는 포도나무와 올리브나 무 고랑 사이에서 곡식, 채소, 꼴이 함께 자라고 있는 비옥한 농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 다. 여러 종류의 밀을 재배함으로써 이곳 농부들은 1년에 두 번 수확할 수 있었고, 이로써 신비의 별장 주인같은 포도원 소유자들은 부유해질 수 있었다. 신비의 별장에는 포도압착기 와 배가 불룩 나온 토기(dolia)에 수확한 포도주와 기름을 담아 보관하는 저장실이 있었는 데, 이것은 특산품을 생산했다는 증거가 된다. 목축업도 번성했다. 중앙대광장에 건물을 가 지고 있던 에우마키아는 목초지와 양떼를 소유한 누미스트리우스라는 사람과 결혼했다. 누 미스트리우스의 별장에서는 개들이 돼지와 양을 지켰다. 근교에는 식량 조달을 담당하는 채소밭(market-garden)이 발달했다. 이중에서 폼페이 채 원(the gardems of Pompeii)은 양파와 약용식물, 글고 포도주 맛을 좋게 만드는 꿀로 오늘 날에도 유명하다. 토지 수입은 소수의 명사 손에 집중되었고, 그 결과 경제력과 정치권력이 그들에게 독점 되었다. 중요한 식품산업, 빵과 가룸의 생산 기본 식료품의 생산은 주로 소매상인이 담당했는데, 농지를 소유한 부유한 농장주가 참여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빵공장은 응회암으로 만든 맷돌이 놓여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 는데, 맷돌에는 노예가 구멍에 손잡이를 끼워 넣고 그것을 돌리는 것(mala tusatilis)과 노예 가 노새나 말을 부려 돌리는 것(mola asinaria) 두 종류가 있었다. 제빵기술자는 공장에 딸 려 있는 가게에서 팔기 전에 밀가루를 반죽해 정교한 구조를 갖춘 가마에서 빵을 구웠고, 제과기술자는 과자 만드는 틀을 보관해둔 마당에서 작업했다. 빵공장 소유주는 대부분 중간 계급이라 할 수 있는 장인이었다. 세네카가 고약한 썩은 냄새가 난다고 조롱한 가룸(garum)은 베트남의 누옥-맘 (auoc-mam)과 비슷한 소스로 물고기에 소금을 뿌려 만들었다. 가룸의 질은 어떤 물고기를 썼느냐에 따라 달랐는데 참치, 고등어, 곰치는 부잣집 밥상에 맞는 섬세한 맛을 냈고, 멸치 는 가난한 사람과 노예의 입에도 별미였다. 제빵의 경우와 달리 초기 투자규모가 컸기 때문 에, 가룸의 생산은 움브리키우스 같은 몇몇 부유한 가문에 독점되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폼페이 이두정치가인 움브리키우스 스카우루스는 가룸을 대량 생산해 소매상점에 대 주 었다. 실 잣는 사람, 표백장이, 염색장이 목양업은 양모산업을 촉진시켰다. 양모산업은 또한 특권 가문의 수중에 장악되었고 기술 자들은 모두 그들에게 고용되었다. 깨끗이 씻어 내고 기름을 빼고 보풀을 세운 뒤, 양털은 실 잣는 사람에게 보내졌다. 물레 에서 뽑아져 나온 실은 베틀에서 천으로 짜졌다. 종종 실 잣는 일과 베틀 다루는 일은 여자 노예가 수행하곤 했다. 다음에 천은 표백장이와 염색장이에게 보내졌다. 표백공장에서 표백 장이(coactiliarit)는 흙, 양잿물, 탄산수소나트륨, 소변의 혼합물을 이용해 천을 표백했다. 염 색장이는 표백이 끝난 천을 세탁하여 건조한 후 말끔하게 솔질하고서는 자주색이나 샛노랑 색으로 염색했다. 이제 시장에서 파는 일만 남는다. 헌 옷감을 손질하여 새 옷감으로 내다 파는 공장도 있었다. 폼페이에서 가장 큰 표백공장을 소유하고 있던 M. 베킬리우스 베레쿤 두스는 폼페이 산업 부르주아 중 유명한 사람이었다. 부의 집중 62년의 지진 발생 후 가장 시급한 현안은 도시의 재건이었다. 재건에 필요한 많은 양의 기와와 벽돌의 생산의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짭짤한 수출품인 포도주와 가룸의 생산이 급격 히 증대되었다. 이와 더불어 포도주와 가룸의 수출에 필수적인 암포라의 생산도 크게 증가 했다. 포도주와 가룸의 생산자는 암포라를 굽는 가마터도 소유했으며, 뿐만 아니라 도시의 재건에 필요불가결한 기와와 벽돌 생산 공장도 소유하고 있어 소수에 의한 부의 집중이 단 기간 안에 추진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상업은 황금기를 맞았다. 폼페이의 지주들은 잉여농산물을 수출했고, 사르노강을 통해 해 외산물이 들어오기도 했다. 폼페이 항구는 상업 중심지(emporium)로 부각되었다. 배를 묘사 한 그림이나 낙서, 닻 등을 새겨 넣은 모자이크 등은 선주의 집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폼 페이인은 기원전 1세기부터 포도주를 갈리아 지방에 수출했고, 폼페이에서 생산한 기와는 달마티아(유고슬라비아의 서해안)에서도 볼 수 있다. 지중해 연안에 튼튼한 상업망을 구축한 폼페이 상인들은 오리엔트, 이집트,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까지 손길을 뻗쳤고, 그들의 대상행렬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항구와 알렉산드리아까지 이르렀다. 폼페이의 은행가 폼페이 부자들의 재산상태를 좀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몇몇 집에서 찾아낸 회계장부를 연 구해야 할 것이다. 1875년 7월 3일과 5일, 발굴단은 스타비아나 거리 동쪽에 있는 은행가 L. 카이킬리우스 유쿤두스의 집에서 서판 150여 점을 찾아냈다. 서판들은 원래 얇은 밀랍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타불라이 체라타이(tabulae ceratae)'라고 불렸는데, 거기에 남아 있 는 첨필로 새긴 기록으로 내용을 해독할 수 있었다. 그것은 52년부터 62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 로 유쿤두스 자신, 그의 비서, 대출을 받은 사람이 발행한 영수증이었다. 유쿤두스는 도매업 자에게 자본을 빌려주고 수수료를 받았다. 거래액은 342 세스테르티우스(sestertius, 로마의 화폐단위로 1/4denarius, 4as)부터 3만 8,079 세스테르티우스까지 다양했으며, 건당 평균 8,502 세스테르티우스가 오갔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상당히 큰 액수였다. 식민지로부터 세 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는 청부업자이기도 한 이 은행가는 귀족계급에 속한다고는 할 수 없 었지만,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는 부유한 계층에 속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평가법 폼페이 주민의 부는 그들이 재앙을 피해 도망치던 순간 몸에 지니고 있던 보물을 돈으로 환산함으로써 계산해 볼 수도 있다. 이러한 계산에 따라 폼페이의 보통 시민이 위급한 순간 에 재빨리 현금으로 준비할 수 있는 액수는 3,000에서 1만 세스테르티우스임을 알 수 있었 다. 스물 여섯 구의 시신에서는 큰돈에 해당하는 보물이 발견되었는데, 가장 큰 액수가 9,448 세스테르티우스이고, 여섯 구의 경우는 4,000이상, 나머지는 1,000에서 4,000사이였다. 이는 부유한 시민에 관계된 경우이다. 다른 예순 구의 경우는 200 세스테르티우스 안팎이었 다. 큰 액수이건 작은 금액이건-가난한 사람들은 음식을 사먹을 수 있을 정도인 구리돈 몇 푼(as)을 지니고 있었다-이러한 발견품은 폼페이인의 생활 정도를 나타낸다. 노동자, 공장고용인, 가게점원 등 먼저, 자산이라고는 자기 몸밖에 없는 노예나 해방노예의 경우를 살펴본다. 포도 재배, 포 도따기, 밭갈이, 가을걷이, 풀말리기, 과수원 가꾸기, 채소 재배 같은 들일이 이들의 몫이었 다. 다른 근로자들은 빵공장, 가룸 공장, 표백공장, 구역질 나는 냄새를 마구 풍겨대는 무두질 공장에 고용되어 있었다. 한편, 많은 근로자들이 금고, 거울, 화로와 같은 일용잡화의 생산이 나 건축기구, 측량도구, 외과의사의 치료기구 따위 정밀기구의 제작, 가장 까다로운 손님의 욕구를 상대해야 하는 장신구의 세공 등 금속 공예 분야에 종사했다. 중앙대광장에 있는 시장, 길거리, 원형경기장 근처에 위치한 광장의 플라타너스 그늘에는 소매상, 신발장수와 옷감장수, 도자기를 팔러 다니는 행상인, 노새몰이꾼과 짐꾼이 득실거렸 다. 그곳에서는 광고꾼, 의사, 화가, 음악가, 학교 선생을 만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 3 차 산업이라고 부르는 일을 담당했다. 실업자는 없었는가? 진정한 뜻의 실업자는 아주 드물었다. 최소한의 일자리는 언제나 있 었는데, 하다못해 풀말리기, 가을걷이, 포도따기 등 계절에 따른 일거리라도 있었기 때문이 다. 물론 사르노강에 위치한 폼피에 항구에 배가 들어올 때에도 많은 일꾼이 동원되었고, 특 히 지진이 발생한 뒤에는 복구작업이 완전고용을 보장해 주었다. 고대 지중해 사회에는 공공의 자선에 힘입어 살아가는 거지나 장애인도 있었다. 특히, 폼 페이에서는 거지나 장님이나 불구자가 굶주리지 않았다. 그들의 기본적 필요를 충당해 줗 수 있는 동전 몇 닢, 빵조각, 따뜻한 국물이 언제나 제공되고 있었다. 평화가 깃들인 도시 노예가 8,000명, 자유민이 1만 2,000명(이중 어른은 4,200명)이던 폼페이의 총 인구는 2만 명이었다. 폼페이에서는 수세기 동안 그리스인, 에트루리아인, 오스크인, 라틴인 들이 그리고 부자와 빈자가 행복하게 뒤섞여 살았다. 그곳에는 계급투쟁, 인종차별이 없었다. 해방노예와 노예도 주인의 재산 일부를 나눠 받을 수 있었으며, 경제적 상호의존성은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을 보장해 주었다. 더욱이 폼페이의 기본적인 식료품 가격은 로마 제국의 다른 도시들 보다 쌌기 때문에 생활에 많은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A.D. 1세기 훨씬 전부터 고전세계의 여인들은 비록 상대적이지만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 었다. 여인들은 남편의 뜻에 고분고분 따르며 내실에 갇혀 지내지 않았다. 그들은 광장과 길 거리의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갔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에 참여했다.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여인들도 많았다. 제 4장. 여인들의 생활상 꽃술 장식이 중앙대광장의 주랑을 화려하게 수놓았고, 상인들은 포도 위에 좌판을 벌여 놓았다. 구두장이가 자기 앞에 놓은 긴 의자 위에 앉아 신발을 사려는 두 명의 여자 고객에 게 제품의 자랑을 늘어놓는다. 하녀를 거느린 부잣집 마나님이 누더기 옷을 걸친 눈먼 거지 에게 적선을 한다. 펠릭스의 집 프레스코화는 집안에 들어앉아 있는 여인만이 아니라, 거리 로 나선 여인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다. 옛날 옛날에, 여제가 될 여자가 있었다. 사비나 포파이아의 삶은 동화처럼 시작되었다. 그녀는 호화로운 집을 두 채나 가진 폼페 이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안마당 주랑을 화려한 연극용 가면으로 장식한 황금빛 규 피드의 집과 아름다운 은식기가 118점이나 발견된 메난드로스의 집이 포파이아 가문 소유였 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추종자들은 거리낌없이 그녀 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냈다. 시내 한 벽에는 다음과 같은 낙서가 아직도 간직되어 있다. "언제나 청춘을 꽃피우십시오. 사비나여, 당신의 아름다움과 순결을 영원히 간직하십시오." 포파이아는 이 충고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자신의 덕성을 네로에게 희생시키고 말았다. 그 녀는 62년, 지진이 일어나 도시를 폐허로 만든 그해에 네로와 결혼했다. 포파이아는 황제를 설득해 지진으로 커다란 피해를 입은 폼페이 시민을 도울 수 있는 조처를 취하게 유도했음 이 분명하다. 그녀는 폼페이에서 검투시합을 다시 펼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네로에게 간청했던 것이다. 네로는, 59년에 폼페이 시민들이 원형경기장에서 이웃 누체리아 주민들을 학살하자 그에 대한 벌로 검투시합을 금지했던 적이 있다. 이제 검투시합을 다시 벌일 수 있게 되자, 폼페이 시민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몇 세기 뒤에 발견된 폼페이 성벽의 낙서에 는 시민들의 흥분이 잘 담겨 있다. "황제 폐하의 결정 만세, 황제와 황후의 은혜 만세. 포파 이아 황후 만세." 몇 년이 지난 64년, 그들은 황제의 폼페이에 대한 은혜를 다시 한번 기념 함은 물론, 운 좋게도 나폴리의 지진을 피해 이곳에 온 황제의 안녕을 기리기 위하여 검투 시합을 벌였다. 대지주였던 율리아 펠릭스도 지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율리아 펠릭스의 집은 폼페이시의 한 구역 전체를 차지했다. 넓고 아름다우며, 훌륭하게 장식된 그 집은 집주인의 재력과 고상한 취미를 보여 준다. 여느 집들처럼 펠릭스의 집 방 들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고, 안마당에는 속삭이듯 물줄기를 뿜어대는 분수와 건 축물의 부자연스러움을 보충해주는 장식용 식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마당을 둘러싼 주랑은 가느다란 홈을 새겨 놓고 코린트식으로 대첩받침을 얹어 놓은 대리석 벽기둥(장식용 기둥) 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벽기둥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대리석 침상을 들여놓은 식당의 입 구로 이어진다. 식당은 가장 세련되게 구며 놓은 공간이다. 식당 안쪽 벽면은 요정의 동굴이 주는 느낌을 창조해 내려는 듯 자연석을 박아 넣었고, 벽 앞 분수에서 대리석 바닥으로 부 드럽게 흘러내리는 물은 신선한 맛을 자아낸다. 율리아 펠릭스의 우아한 취향은 호화로운 장식취미에만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밝은 색상으로 칠한 식탁이 놓인 전원풍 야외 식당에서 여름날을 보내기를 즐기기도 했다. 펠릭스의 집에는 모든 방이 벽화로 수놓아져 있다. 시끌벅적한 소음과 부산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금방이라도 되살아날 듯한 중앙대광장 의 모습과, 효과적인 빛의 사용으로 사물의 풍성함을 돋보이게 하는 한편, 여러 가지 사물의 배치를 통해 그림의 깊이를 창조해 내려는 화가들의 노력이 역력히 배어 있는 정물화들을 찾아볼 수 있다. 사치스럽고 무사태평한 생활을 영위하던 이 부유한 여인도 도시에 몰아 닥친 엄청난 재앙 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집은 62년의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불행에 맞섰고, 복구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집의 일부를 공중목욕탕, 가게, 선술집으로 세놓 았다. 율리아 펠릭스는, 막대한 재산으로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있었으나, 도시 전체의 경제생활에서는 어떤 적극적인 역할도 수행할 수 없었던 폼페이 여인들의 전형이었다. 사업가이자 여사제인 에우마키아 폼페이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여인, 에우마키아는 포도밭과 벽돌공장을 소유 했으며 시정에도 활발히 참여했던 폼페이의 전통 있는 에우마키우스 가문 출신이다. 중앙대 광장, 아본단차 거리 한 모퉁이에 서 있는 가로, 세로 60m×40m가 되는 웅장한 건물(에우 마키아 기념건물)이 에우마키아 소유 부동산이었는데, 건물의 입구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루키우스의 딸인 여사제 에우마키아는 자신과 아들 누미스트리우스 프론토의 이름으로, 로마의 영광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홀과 주랑현관, 지하회랑을 지어 헌납하 노라." 고결한 후원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표백업자 단체가 세운 에우마키아 상이 발굴작업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 사실은 이 건물이 모직물 시장으로 기능했을 것이라는 가 정을 뒷받침해준다. 건물의 주랑과 마당에는 상행위에 필요한 탁자와 다른 가구들이 배치되 었을 것이고, 건물 세 면을 둘러싼 지붕 덮인 복도와 지하회랑에는 상품을 가득 보관해 두 었을 것이다. 이처럼 에우마키아 기념 건물은 상업상의 필요에 맞춘 기능성에서 뛰어날 뿐 아니라, 그 규모와 건축미에서도 두드러진다. 2층 회랑으로 구성된 건물의 정면은 중앙대광장의 새로 지은 주랑과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중앙 출입구의 버팀대와 상인방은 띠 모양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정면과 건물 내부의 벽감에는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같은 황제들의 조상을 넣을 수 있게 고안되었으며, 곳곳에 새긴 명문은 아이네아스와 로물루스의 생애를 전해 주었다. 이 모든 것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광장에서 받은 인상을 연상케 해준다. 2층 회랑에 둘러싸인 넓은 안뜰은 세 개의 반원형 홀로 막혀 있고, 두 개의 장식기둥이 서 있는 중앙 홀에는 황금빛 풍요의 뿔을 지닌 '콘고르디아 아우구스타(숭고한 조화)'상이 놓여 있 다. 콘코르디아 아우구스타는 아우구스투스의 부인인 황후 리비아의 화신으로, 리비아가 22년 병환으로 누운 그의 아들인 티베리우스와 그녀 사이에 이루어진 감정적인 결합을 기리고 있 다. 이 조상을 세움으로써 에우마키아는 황제와 황제의 어머니에 대한 충성심을 표하고자 했으며, 또한 그들의 가족 관계를 자신의 실제 삶의 이상적인 형태로 받아들이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여사제 에우마키아가 여신 리비아 케레스 숭배의식을 도입했 음을 입증하는 증거일 수도 있다.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 광장을 재현하려 한 점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 건물은 포도재 배자, 공산품 생산자, 그리고 상인이기도 한 에우마키우스 가문의 부와 권력과 자긍심을 단 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에우마키아는 죽음을 맞이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 은 그녀가 자신과 친지들을 위해 지은 웅장한 무덤에서 잘 뒷받침되고 있다. 물건을 파는 여인, 술을 파는 여인, 몸을 파는 여인 장인이나 상인의 아낙들이 상점 운영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투박한 얼굴에 수염을 기른 제빵업자 테렌티우스 네오 곁에 영리해 보이는 여인이 서 있는 벽화가 있다. 네오의 부인으로 보이는 이 여자는 그날그날의 수입과 지출을 정리해 놓는 데 쓰일 서판과 첨필을 들고 있다. 펠트천 따위의 주용 생산자인 베킬리우스 베레쿤두스의 상 점, 벽면을 가득 메운 상품진열대에서 우아한 옷을 차려 입은 젊은 사내가 신발을 고르고 있고 계산대에는 베레쿤두스의 부인이 앉아 있다. 거친 손님들이 주로 드나드는 선술집이나 여인숙을 운영하는 여인들도 있었다. 여인숙 주 인 가운데 발레리아 헤도네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발랄하다고나 할까, 아니면 야한 분 위기를 띈 여인이었는데, 사실 그리스말로 쾌락을 뜻하는 그녀의 성, 헤도네에서 그녀의 성 품을 대충 더듬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거침없이 손님들에게 떠들어댔다. "잘생긴 군인이라면 단 1아스로 술을 마실 수 있어요. 2아스요? 그 돈이라면 거나해질 수 있겠지요. 그리고 4아스! 이 정도면 팔레르노산 고급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답니다." 노름판을 벌이던 술 꾼들 사이에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소란 피우는 자들을 여인 숙 밖으로 내몰곤 했다. 여인숙 가까이에는 아셀리나가 경영하는 '특별한' 술집이 있었다. 아셀리나는 폼페이의 구 불구불한 구시가지에 '적당한' 가격에 몸을 파는 여인들을 데리고 장사를 했다. 오리엔트 출 신 팔미라, 그리스 출신 아글라이, 유대 출신 마리아, 변방 출신 즈미리나 등의 이름이 벽에 휘갈긴 낙서를 통해 알려져 있는데, 그녀들은 낙서에서 자신들의 '비법'을 선전하며 손님을 끌고 있다. 역사 속에 묻혀 버린 여인들 스타티아와 페트로니아는 빵 굽는 일을 했고, 스페쿨라는 모직물 표백공장에 다니면서 직 물을 솔질하고 보풀을 베어내는 일을 했다. 다른 많은 여인들은 가정집의 하녀가 되거나 식 모가 되어 일했다. 이와 같이 수많은 폼페이 여인들이 익명 속으로 사라져 갔다. 폼페이 시민은 해시계와 물시계가 알려 주는 시간으로 삶의 박자를 맞출 수 있었다. 시민 들은 근무 시간을 정해 놓았고, 법정의 개정 시간을 공고했으며, 연극 시간,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질 검투시합 시간을 게시했고, 연인과의 밀회 시간, 사업상의 회식 시간, 친구들이 모일 연회 시간을 약속했다. 제 5장. 즐거운 나날 폼페이 사람들은 여가(otium)를 즐기기 위한 시간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여가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negotium), 또는 일이나 사업, 걱정거리에서 벗어남을 일컫는 것으 로 빈둥거림이 아니라 레저이다. 시민은 스포츠에 열중했고 강인한 체력과 유연성을 기를 수 있었다 B.C.5세기, 삼니움의 귀족들은 삼니움 경기장이나 운동장에서 몸을 단련했다. 폼페이의 새 주인이 된 로마인은 삼니움족의 체육시설이 비좁기만 했다. 로마인은 체력단련장, 산책로, 병사들의 연병장, 노예 매매시장, 투계장 등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대규모 경기장을 새로 건설했다. 141m×107m로 1만 5,000m제곱 이상 되는 넓은 직사각현 대지 위에 세워진 대경 기장의 주위에는 마치 요새처럼 튼튼한 성벽이 둘러쳐졌고, 경기장 중앙에는 수영장이 건축 되었다. 대경기장에 질서정연하게 열을 맞추어 세운 플라타너스는 도시의 다른 정원에서 쉽 사리 발견할 수 있는 수목의 건축학적 장식기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아마추어 운동선수라고 할 수 있는 시민들은 대경기장에 나와 원반던지기를 하거나 손에 아령 따위를 들고 높이뛰기 연습을 하거나 레슬링 경기에 열중하곤 했다. 군사 훈련의 성격 을 지닌 운동도 있었다. 그들은 완전 무장을 갖춘 상태에서 달리기 시합을 벌이기도 했고, 복잡한 기동작전을 능수능란하게 수행하면서 말을 타고 행진을 펼치는 트로이 놀이(ludus Troiae)를 즐기기도 했다. 폼페이의 청소년은 이처럼 여러 가지 스포츠에 참여함으로써 심 신을 단련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도시 생활에 적극 참여해야 할 성인이 되기 전에 겪어야 하는 준비과정이기도 했다. 폼페이 부르주아 계층 자제들은 경마회나 예비군인회 같은 단체 에 가입하여 어른들과의 유대를 도모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운동이 끝나면 남녀노소 모두 목욕탕에서 몸을 씻었다. 목욕탕은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 수단이었다 목욕탕의 숫자-폼페이시에만 세 곳이었다-와 목욕탕의 위치-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번화한 지역, 사람들이 가장 이용하기 편리한 지역-로써 목욕탕이 로마 사회에서 얼마나 중 요한 의미를 지녔는지 짐작할 수 있다. 폼페이에는 홀코니우스 네거리에 스타비아 목욕탕, 포로 거리와 놀라 거리가 만나는 지점에 중앙대광장목욕탕, 동서대로(decumamus maximus) 와 남북대로(cardo maximus)가 교차하는 곳에 중앙목욕탕이 있었다. 이 세 건축물은 삼니 움 시대부터, 중앙대광장목욕탕을 세웠던 로마 식민지 초기를 거쳐 중앙목욕탕을 세웠던 로 마 식민지 초기를 거쳐 중앙목욕탕을 한창 짓고 있을 당시인 화산폭발 직전에 이르기까지 목욕탕 건축술이 발달해 온 과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세 건물 모두 중심부에는 온탕(caldarium), 증기목욕실(tepidarium), 냉탕(frigidarium)이 동서를 축으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목욕탕 건물은 삼면이 주랑으로 둘러싸이고 나머지 한 면은 수영장, 근무자들의 숙소와 접해 있는 경기장 안뜰과 연결된다. 스타비아 목욕탕에 는 남탕과 여탕이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목욕탕 운영자들은 여성의 목욕시간과 남성의 목 욕시간을 통제하기 위해 해시계를 이용해야 했다. 중앙대광장목욕탕에서도 남탕과 여탕의 구분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목욕탕의 온탕과 현관홀, 탈의실(apodyterium)은 아치형 천장 구조로 되어 있고, 천장은 팔각형 또는 원형 회반죽 패널에 그려 넣은 벽화로 마무리되었다. 여러 명의 근무자들이 손님에게 충실한 봉사를 베풀었다. 그들은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부축하여 목욕탕의 계단을 수월히 오르거나 수영장에 안전하게 들어가도록 도와주었고, 탕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샤워처럼 물을 뿌려 주기도 했다. 목욕을 마친 이들은 이 발사, 향수 뿌리는 사람, 안마사(이들은 주로 흑인이다)에게 몸을 맡기곤 했다. 중앙목욕탕이 세워진 뒤로 폼페이 시민들은 더욱 많은 시간을 목욕탕에서 보냈다. 크라수스 프루지가 세 운 목욕탕 건물에는 해수욕탕도 있었는데, 이곳에는 특권층만 드나들 수 있었다. 폼페이 시민은 구경거리를 찾아 대극장, 주악당, 원형경기장으로 모여들었다 B.C.200년경, 삼니움 시대부터 존속한 대극장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넓은 공연장소였다. 편자 모양의 계단식 관중석(cavea)은 5,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석조 좌석으로 구성 되었고, 네 개의 반원형 벽이 관중석을 지탱하고 있다. 극장의 남쪽에 위치한 이오니아식 주 랑으로 둘러싸인 정원은, 관람객이 공연 막간을 보낼 수 있는 상쾌한 산책길이 되어 주었다. 대극장의 방대한 공간은 한족으로 스타비아나 거리와 연결되어 있으며, 다른 한쪽의 폭넓은 계단을 통해서는 세모꼴광장과 이어진다. 63년부터 68년까지 폼페이 사람들은 대극장에 로마풍의 무대를 증축했다. 중앙의 거대한 반원형 벽감 양쪽으로 직사각형 벽감이 딸려 있는 무대에는 세 개의 통로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귀족용 출입구였고, 나머지 둘은 관습에 따라 세운 것으로 하나는 도시로 연결되었 고, 다른 하나는 성밖의 교외로 이어졌다. 무대 뒤편에는 연극이 시작되면 내려질 막을 걸어 놓기 위한 홈이 패여 있었다. 오늘날의 연극과 달리 막이 올라가는 것은 연극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술라 통치기에 세운 주악당은 두 번째로 꼽을 수 있는 문화의 전당이다. 실내공연장인 주 악당에서는 음악연주, 시낭송, 강연 등이 행해졌다. 주악당에 지붕을 씌운 것은 음향학적 효 과를 고려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또한 건축기술의 발전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사실은 완벽한 원형을 이룬 주악당의 계단식 관중석이 어째서 대극장의 계단식 관중석과 대 조적으로 경사가 가파르게 설계되었는지도 설명해준다. 한편, 건축가는 가로와 세로가 28.6m×34.8m이고 높이가 6m인 네모꼴 무대를 설계해 넣었는데, 이 때문에 원형 관중석이 대극장과 비교하여 어색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39열로 이루어진 계단식 관중석은 1,300명의 관객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으며 관객들의 동선도 쉽게 확보할 수 있다.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시합을 구경하기 위해 2만 명의 관객이 밀려들곤 했다 주악당이 건설된 것과 같은 시기(B.C.75년경-B.C.70년)에 폼페이 사람들은 성벽을 등지고 타워형으로 원형경기장을 건설했다. 35열의 관중석은 2만 명에 달하는 관중을 수용할 수 있 었는데 관중들은 엄격한 사회적 서열에 따라-높은 계급일수록 낮은 자리에 앉았다-배정된 자리에 앉았다. 원형경기장은 모든 시민이 한자리에 모여 검투시합에서 승리한 영웅에게 갈 채를 보내는 공간이었다. 검투시합을 주선하는 일은 '흥행의 왕'이라 불린 알레이우스 니지디우스 마이우스 같은 폼페이 명사들에게 독점되어 있었다. 흥행사들은 한정된 시간에 가능한 한 많은 검투사를 동원해 시합을 벌이려고 노력했다. 닷새 동안 서른 번의 시합, 또는 나흘 동안 마흔 번의 시 합이 열리기도 했다.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면 검투시합의 열기는 더욱 고조 되었고, 폼페이 사람들의 달력은 시합이 벌어지는 날짜로 가득 차곤 했다. 4월에는 4, 8, 9, 10, 11, 12, 20일, 5월에는 2, 12, 13, 14, 16, 31일에 시합이 열렸다. 시합은 놀라, 누체리아, 푸촐레스 같은 이웃 마을에서 열리기도 했는데, 그것은 아폴로 경기(7월 6일-13일)같은 정 기적인 축제나 베스파시아누스 신전의 제단봉헌식이나 공문서보관소 준공식같이 특별히 기 념할 만한 날에 맞추어 개최되었다. 로마 제국 통치 아래서 사람들은 시합에 더욱더 열광했다. A.D.62년 이후 대극장의 사각 형 주랑이 검투사의 숙소로 개조될 지경이었다. 주랑에는 2층짜리 개인용 숙소가 들어섰고, 대극장 안뜰에서는 날마다 검투사들의 훈련이 실시되었다. 특수 학교에서 격투기술을 익힌 전문 싸움꾼인 검투사들은 검투시합의 대가로 흥행사에게 큰돈을 받았다. 검투사들은 날마 다 죽음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풍기는 병적인 매력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끌었 다. 카푸아 검투사 학교를 졸업한 훌륭한 검투사들이 대중이나 행정관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연애행각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발굴단은 검투사 숙소를 발견하던 중, 79년 8월 24일 갑작스레 폭발한 베수비오 화산이 내뱉은 화산재 속에 보석으로 온몸을 치장한 채 파묻힌 부잣집 여인을 발견했다. 여인의 사체는 그녀의 검투사 연인과 함께 굳어 있었다. 검투시합만이 유일한 볼거리는 아니었다. 다른 유형의 격투(venatio)도 벌어졌다. 사람과 사자의 싸움, 야생동물과 가축의 싸움, 사자와 영양의 싸움 따위를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기는 검투시합이 끝난 뒤 펼쳐지곤 했다.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시합은 폼페이 사람들 의 잔인성과 살육취미를 드러내는 증거일 수도 있으나, 맹수에 맞서 싸우는 강인한 투사의 용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처럼 거칠고 불안한 오락 외에도, 극장에서는 폼페이 시만들에게 더욱더 정제된 오락 을 제공했다 폼페이인은 순수비극과 순수희극을 즐겼으나,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희비극이라도 마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비극시인 세네카의 작품에 등장하는 페이소스(pathos)와 미사여구, 서 정주의와 폭력을 사랑했지만, 메난드로스의 작품을 각색한 풍속희극을 더욱 선호했다. 당시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한 풍속희극은 부유한 부르주아 계층의 일상생활을 표현했을 뿐만 아 니라, 사회에서 그 역할을 더욱 넓혀 가고 있는 노예와 해방노예를 다루고 있다. 메난드로스 의 이름을 붙인 집에서 발견된 벡화에는 머리에 월계관을 쓴 메난드로스가 다음과 같이 씌 어 있는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들고 앉아 있다. "메난드로스는 4막으로 구성된 신희극을 최 초로 썼다." 대중의 사랑을 각별히 받았던 익살극이 있는데, 여기서는 온갖 종류의 직업이 풍자되곤 했다. 석탄장수, 점쟁이, 화가, 도자기공 등 누구든지 희곡작가의 풍자대상이 되었다. 또한 간통에 얽힌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다룬 어릿광대극이나 대사 없이 춤과 몸짓만으로 표현하 는 무언극 같은 새로운 형태의 연극도 크게 유행했다. 한편, 주악당은 이러한 통속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있었다. 월계관과 가면을 쓰고 자신의 신작시를 낭송하는 시인에게 갈채를 보내는 사람들은 소수 상류층 인사들이었다. 이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대극장 위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공연은 원형경기장에서 펼쳐지는 흥미 돋우는 구경거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고급문화는 학교 근처를 맴도는 학구파나 풍부한 장서에 파묻혀 내밀한 연구에 몰두하는 소수 지식인의 즐거움일 따름이었다. 민중은 가벼운 주제를 다루는 드라마나 폭소를 자아내 는 익살극을 원했고, 폭력본능을 만족시켜 주는 잔인한 시합을 즐겼다. 집과 거리에서 은밀한 방식으로든 공공연한 행위이든 폼페이 사람들은 언제나 신과 함께 했다. 도시 곳곳에 세워진 신전과 예배당에서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신에게 참배했다. 집으 로 돌아와서도 그들은 많은 시간과 정력을 신을 숭배하는 데 보냈다. 제 6장. 사람과 신 열렬한 숭배대상, 풍부한 포도 수확을 약속하는 헤르쿨레스, 디오니소스, 비너스 이들 세 신은, 가장이 온 가족과 노예를 거느리고 조상과 가정의 수호신 라레스를 날마다 경배하는 집안에 설치된 성감에 모셔지곤 했다. 성감의 그림에는 폼페이의 전설적 창건자인 헤르쿨레 스가 등장하기 일쑤인데, 다른 성감이나 안뜰 정원에는 주신제를 형상화한 조상이나 디오니 소스 연극가면 또는 흉상을 놓아두어 포도주의 신을 찬양했다. 폼페이 사람들은 비너스 여 신도 받들었다. 폼페이의 공식 여신인 비너스를 그들은 비너스 폼페이아나(Pompeiana)라 불 렀으며, 여신이 행운과 번영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했다. 디오니소스와 연관되는 비너스 숭배의식은 나중에 농업의 여신 케레스 숭배의식과 결합된다. 성감에서 숭배의 대상이던 여 신은 중앙대광장 가까이 있는 대신전에 모셔진다. 주피터, 주노, 미네르바, 이들 3신 숭배는 폼페이가 로마의 통치권에 속해 있었음을 상 징한다. 술라가 이 도시를 로마의 식민지로 만들었을 때부터, 3신은 폼페이에서 크게 숭상받았다. 카피톨린 3신전이 중앙대광장에 건설되었고, 가장의 성상안치소에는 3신상을 모셔 놓기 위 한 좌대가 갖추어졌다. 신관은 공식적인 숭배의식을 주관했고, 개인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 로 3신을 숭배했다. 이집트에서 건너온 여신 이시스 로마의 종교는 이방에서 들어온 신들도 관대하게 포용했다. 시칠리아 항구나 키클라데스 델로스항에서 무역에 종사하던 폼페이인은 이집트의 신들을 발견하고, 새로운 숭배의식을 캄파니아 지방에 소개했다. 이 새로운 숭배의식은 명문부호 가문에 의지해 생계를 유지하던 하층민, 노예와 해방노예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후에 신분의 속박에서 벗어났을 때에도 이 들의 후손들은 계속해서 이 신들을 섬겼고, 결국에는 귀족들마저 이방신앙을 받아들이게 되 었다. 점차로 귀족들 사이에 파고든 새로운 숭배의식은 마침내 제 2의 공식 종교로 인정되었다. 62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된 이시스 신전을 재건한 관대한 후원자가 있었다. 그 는 바로 여섯 살 난 어린아이 N.포피디우스 켈시누스로 해방노예인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그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켈시누스가 시의회에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귀 족들의 과장된 몸짓에 불과했지만, 이 또한 그들이 이시스 숭배에 얼마나 열광적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로레이우스 티부르티누스와 율리아 펠릭스는 자신의 저택 정원에 이시 스에게 봉헌한 성감과 파라오와 다른 이집트 신의 조상들을 배치해 두었고, 포파이우스 하 비투스 같은 명사도 이시스 여신을 열렬히 숭배했다. 이시스 신전에서는 남녀 사제들이 날마다 예식을 봉현했다. 해가 뜨기 전, 신전 앞에 모인 신자들에게 여신의 초상화를 보여 주면, 이들은 감사의 기도를 올리면서 시스트럼을 흔들어 여신을 기렸다. 해가 뜬 뒤에도 신자들은 기도를 올리느라 깊은 명상에 잠기느라 자리를 뜰 줄 몰랐으며, 예식은 새로이 해가 떠오를 것을 기원하면서 끝났다. 그리고 오후 2시가 되면 떠오를 것을 기원하면서 끝났다. 그리고 오후 2시가 되면 성수를 경배하는 두 번째 의식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매일 예식이 베풀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시스를 위한 화려한 축제가 거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출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3월 5일의 이시스의 배(navigium Isidis)축제였 다. 겨울을 나고 항해를 다시 시작하는 이 시기에 뱃사람의 수호신인 이시스 여신에게 경배 를 보냈음은 당연한 일이다. 두 번째로 성대한 의식인 이시아 축제(Isia, 11월 13일부터 16일 까지 행해짐)는 이시스가 오시리스(Osiris, 이시스의 오빠이며 남편, 심판관)의 시체를 찾은 것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대중의 열광은 이시스 숭배자들의 비밀 입문의식으로 표현되었는 데, 이들은 과거를 잊어버리고, '새로 태어남'으로써 순수한 삶을 지향할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폼페이인 모두가 이와 같은 종교에 열광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악 령을 쫓기 위해 요술단지나 악마적 요소에 의지했는데, 이러한 특별한 성향은 디오니소스 숭배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다. 70년대, 그리스도교는 아직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 하고 있었다. 황제, 지상의 신 모든 신적인 속성을 부여받은 황제에 대한 숭배는 다른 종교의식보다 막강한 영향력을 행 사했다. 마르스의 연인이자 로물루스의 어머니, 비너스의 후손인 황제는 오나벽한 권위를 한 몸에 갖출 수 있었다. 노예와 해방노예의 종교집단인 머큐리와 그의 어머니 마이아를 섬기 는 '머큐리와 마이우스교단(ministri Mecuri et Maiae)'은, B.C. 14년부터 B.C. 2년 사이에 ' 머큐리와 마이아를 위한 아우구스투스 교단(ministri augusti Mecuri et Maiae)'으로 변질되 었고, B.C. 2년 이후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아우구스투스 교단(ministri Augusti)'으로 발전 했다. 신성한 존재가 된 황제는 사회계급이나 민족의 차이를 떠나 모든 로마 시민이 황제 숭배 의식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따라서 경제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해방 노예는 '아우구스투스 숭배단(augustales)'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훗날 황제 수 호신으로 알려지게 된 네거리의 수호신(lares compitales)을 모신 신전에서 로마의 구역행정 관(vicomagist)이 집행하는 것과 동일한 의식을 베풀었다. 아우구스투스 숭배단과 아우구스투스 교단, 남성 사제와 여성 사제가 이루는 정교한 성직 자 계급사회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대광장에 세워진 조상과 개선문은 황제의 영광을 웅변해 준다. 그런데 황제 숭배의식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뜻밖이 다. 폼페이 사람들은 시장 예배소(macellum)에서 라레스 신전과 베스파시아누스 신전에서 에우마키아 기념건물과 체육관-청년들은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속죄의식을 치러야 했다-에 서 의식을 거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혼합주의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곳은 아폴로와 다이아나 또는 머큐리와 마이아 의식을 집행하던 아폴로 신전이었는데, 결국 이곳에서도 황제 숭배의 식이 치러졌다. 이로써 다른 신에게 쏟는 열광은 점차 사그라들었고, 황제 유일 숭배가 곳곳 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개인적인 종교생활 폼페이 시민은 자기 집안에 은밀한 장소를 만들어 놓고 많은 여가시간을 종교적 정진에 할애했다. 신비의 별장 벽화는 특정 종교의 입문자만이 영접할 수 있는 고귀한 세계를 일깨 워 준다. 62년 지진이 휩쓸고 지난 뒤, 가정의 수호신을 모신 성감을 복원하고 더욱 우아하 게 장식하는 것이 유행했다는 사실에서도 개인의 종교생활이 얼마나 활기찼나 하는 점을 쉽 게 확인할 수 있다. 폼페이인에게는 종교적 경건함이 넘쳐흘렀지만, 그들은 결코 편협하지 않았다. 모든 신성함에 스며든 황제숭배라는 대전제 아래에서 그들은 종교적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사랑의 여신 비너스에게 은총을 받은 폼페이인이었지만, 그들이 비너스만을 숭배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또한 그들은 죽음의 공포라는 굴레를 훌훌 벗어 던지고 마음껏 태평스 런 삶을 즐길 수도 없었다. 성문 밖에 즐비한 무덤들이 모든 인간은 '죽어야 할 운명'임을 일깨워 주곤 했던 것이다. 제 7장. 폼페이 사람들의 사랑과 죽음 로마에서 폼페이만큼 사랑을 찬양한 도시는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신을 거 듭하는 비너스야말로 폼페이의 가장 유력한 수호자였다. 비너스 폼페이아나, 비너스 마리나, 그리고 조개껍질에서 탄생하는 비너스가 자연스레 아름다운 알몸을 드러낸다. 또 다른 곳에 서 여신은 마르스와 비너스의 사랑이라는 비유 방식을 통해 더욱 은밀하고 에로틱하게 묘사 된다. 창녀촌이나 으슥한 뒷골목처럼 문란한 구역에서는 세속화된 비너스가 등장한다. 주택, 상 점, 공공건물의 벽면 여기저기에 휘갈겨 놓은 낙서는 거리낌없이 성애를 표현하는 사람들을 상상케 해준다. 호색한의 모험담, 능숙한 창녀들의 체험에서 습득한 충고, 에로틱한 문양이 조각된 램프의 불빛이 감도는 카운터에 던지고 나온 서너 푼짜리 추억, 뚜쟁이와 닥치는 대 로 몸을 파는 소년 소녀들의 별명을 곁들인 명단, 어스름한 방에서 이루어지는 창녀들의 성 교기술을 묘사한 현란한 그림 따위... 한편, 외설스럽게 표현된 남성의 상징과 수간 장면과 함께, 님프에게 습격당하는 힐라스, 샘물에 얼굴을 비추는 나르시스, 헤로와 네안드로스의 이야기와 같은 목가적 이미지를 띠는 낭만적 사랑도 등장한다. 베티우스 집 식당에서는 페 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아폴로와 다프네,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의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사랑을 감상할 수 있다. 뮤즈는 황홀경에 빠져 사랑의 시를 읊조리고... 때로는 어색한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폼페이 사람들은 매력적이고 은밀하며 변죽 울리는 시를 통해 의사표현하기를 즐겼다. 서둘러 사랑하는 연인을 찾아가는 여인은 목마른 노새몰 이꾼이 잠시 목을 축이려 해도 안달이다. "노새 몰이꾼이여, 그대가 사랑의 불길을 느낀다면,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비너스에게 달 려갈 것 아니오. 나는 젊고 아름다운 소년을 사랑하오. 그러니 좋은 일 해주는 셈치고, 어서 길을 재촉해 주오. 물일랑 그만 마시고, 길을 떠나오. 고삐를 잡아채 빨리 폼페이로 데려다 주오. 달콤한 사랑이 나를 기다리는 그곳으로." 또한 비너스는 사랑을 갈구하는 사내들이 기원을 비는 대상이었다. "아, 나의 여신 비너스 여! 나를 잊지 마소서." 죽음의 복수를 청하는 대상도 비너스였다. "여신이시여. 저의 경쟁자 를 멸하여 주소서!" 그러나 잔인한 실연의 상처를 경험해 크게 낙담한 사람이 역신에게 모 질게 복수하겠노라고 저주를 퍼붓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아 폼페이인의 사랑은, 즐길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는 점이 다를 뿐 점잖고 부드러웠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꿀벌과 같다. 그의 삶은 꿀과 같이 달콤하다." 그리고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은 삶의 방식(the art of living)이기도 하다. "사랑하 는 연인이여 영원하라! 사랑할 줄 모르는 자에게 죽음을, 사랑을 훼방놓는 자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네로 시대 이후, 염세에 찌들고 삶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삶에 부여할 새로운 의미를 추구하고 있었다. 그들의 노력은 폼페이 사람들의 사랑 속에서 구체적인 이상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치풍조나 퇴폐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쾌락과 절제의 완벽한 조화 였다. 익시온과 디르케에게 내린 형벌은 자기규제와 신에 대한 복종을 강조한다. 그리고 베 티우스의 집 벽화는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정당한 사랑과 불륜으로 맺어진 불행한 사랑을 대 비시키고 있으며, 지상의 연인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천상의 연인을 보여 주고 있다. 신을 받드는 숭배이든 산자나 죽은자에 대한 존경이든 사랑은 경건함이다 화려한 무덤이 늘어서 있는 폼페이 가도는 죽은자의 거리인 양 생각되기도 한다. 또한 이 곳에서 죽음이라는 상념은 그다지 슬픈 일이 아니다. 무덤과 무덤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실편백나무 사이에는 냉기가 깃들여 있지 않다. 공동묘지 곁의 과수원에는 한창 꽃이 만발 하고, 화사한 햇살 아래 드러나는 비문은 부자와 빈자, 행정관과 시민의 이름을 자랑하고 있 다. 그리고 상점과 여인숙, 호화로운 시골별장이 공동묘지 옆에 들어선 것을 보면 삶과 죽음 이 공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밀려온다. 가끔 거행되는 장례식과 슬픔에 가득 찬 유족들이 흘리는 눈물, 고인을 찾아 참배 나온 친척이나 친구들, 이들 말고 그 어느 것도 이 거리에서 슬픔을 연상케 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거리는 방문객들을 상념과 회상에 젖게 만들고 있다. 죽은 이에게 바치는 의식으로 무덤 건축술이 풍성하게 발전했다 귀족들은 높은 지위와 업적을 영원토록 후손에게 전하고 싶어했다. 따라서 무덤을 조사해 보면 무덤 주인이 생전에 어떤 사회계층에 속해 있던 인물인지 확인할 수 있다. 폼페이 사 회의 명사들은 웅장한 그들의 무덤에 홀로 묻히기를 원치 않았다. 명사의 무덤 현실 천장에 마련해 놓은 작은 벽감에서는 친척들 것으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고, 무덤 둘레의 벽에 서는 명사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비천한 사람들의 유골이 다수 출토되었 던 것이다. 이 유골들은 암포라나 작은 항아리에 들어 있었는데, 화장한 노예나 해방노예의 유골을 보관하기에는 그것으로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들은 암포라나 항아리 주둥이를 막 고, 헌주를 흘려 붓기 위해 관을 박았다. 대리석으로 세운 묘비에서 노예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부인 리비아의 노예를 위해 세운 대리석 묘비는 머리를 땋아 늘인 노예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었다. 살아 있는 폼페이에 평화가 흘렀듯이, 이곳 공동 묘지, 죽음의 세계에도 평화가 깃들여 있다. 폼페이는 노예제에 기반을 둔 사회였지만, 죽음 은 계급 간의 차별을 폐지했다. 무덤 건축은 놀라운 다양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중 많은 것들이 장엄미를 자랑한다. 헤 르쿨라네움문 밖의 공동묘지에는 반원주의 무덤 외곽을 둘러싼 이스타키디우스의 무덤이 서 있다. 아치형 천장 구조를 지닌 현실에는 잉니아풍 기둥이 둘러서 있는데, 이 기둥 사이에는 집안 사람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상을 세워 놓았다. 가룸을 제조하고 직접 내다 팔기까지 하던 부유한 상인 움브리키우스 스카우루스의 무덤은 검투사의 모습과 사냥감으로 등장하던 짐승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누체리아문 밖의 공동묘지에는 남편의 영광을 기억하기 위해 아낙네들이 세운 기념물도 몇 채 보인다. 베이아 바르킬라가 아그레스티누스 에퀴티우스 풀케르를 위하여 세운 것과 에우마키아의 웅장한 기념물이 그것이다. 나이볼레이아티케가 남편을 위해 세운 무덤도 빼 놓을 수 없는데, 항구로 들어오는 배를 묘사한 얕은 부조가 돋보인다. 79년 8월 24일 아침, 엄청난 재앙이 도시를 송두리째 죽음의 세계로 밀어 넣었다 무덤 건축이 웅장미를 간직하고 있다 해도, 무덤 장식이 화려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해 도, 수미터나 되는 재와 속돌이 도시 전체를 뒤덮은 79년 여름의 죽음을 잊을 수는 없을 것 이다. 1961년, 누체리아문 근처에서 발굴된 주검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감동과 슬픔을 주었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불덩어리를 피해 처마 밑에 몸을 숨겼던 일가족 세 명이 한데 엉켜 국어 있었던 것이다. 무릎을 세우고 웅크린 여인은 치명적인 가스를 들이마시지 않으려는 듯 옷 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고, 아이의 손을 잡은 남편의 아내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 고 마침내 사내에게도 죽음이 닥쳤다. 제 8장. 기록과 증언 폼페이의 몰락 그리고 부활의 역사, 폼페이를 방문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기억의 저편에 서 현실로 끌어들인 사람들의 이야기. 캄파니아의 지진 세네카 '자연학 문제집'6 : 네로의 스승이자 대철학자 세네카는 영혼의 작용에 관한 지 식을 다룬 '대화'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만년에 이르러 자연세계에도 깊은 관심을 보 인 그는 '자연학 문제집'을 저술했는데, 이는 자연현상을 기술한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 폼페이를 강타한 62년의 지진이 묘사되고 있다. 폼페이는 외해에서 깊숙이 자리잡은 아름다운 만에 소렌토와 스타비아 해안, 그리고 헤르 쿨라네움 해안으로 둘러싸여 자리잡고 있다. 그 유명한 캄파니아의 도시가 인근 지역을 휩 쓴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사실 지진은 한겨울에 일어났는데, 옛사람들은 겨울에는 이러 한 재앙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신하지 않았던가! 지진은 2월 5일, 발생했다. 레굴루 스와 베르기니우스가 집정관으로 재임하고 있던 때였다. 이전에도 비슷한 조짐이 몇 차례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캄파니아 지방은 엄청난 피해 를 감수해야 했다. 헬쿨라네움의 일부 지역은 폐허가 되었고, 요행히 무너져 내리지 않은 건 물조차 심하게 흔들렸다. 누체리아 식민지는 큰 타격을 입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해 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나폴리의 공공건물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많은 거주지가 파괴되었다. 몇 곳의 별장이 주저앉았고, 사태를 무사히 넘긴 장원들도 심하게 흔들렸다. 재 앙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수백 마리 양떼가 한꺼번에 몰살당했고, 조상에는 금이 갔으며, 사람들은 얼빠진 듯 헤매고 다녔다. 이 저술의 주제는 그 같은 설명을 필요로 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이번에 발생한 대재앙 또한 지진의 원인에 대해 논구할 것을 우리에게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정신이 혼란된 사람들에게 기운을 되찾아 주고, 그들을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어 야 한다. 하기야 이러한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마구 뒤흔들리고, 세 상의 가장 견고한 부분이 붕괴된다면, "이것은 확실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 는가?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우주의 유일한 부분, 모든 것의 중심이며, 모든 것에 받침점을 제공하는 유일한 부분이 출렁거린다면, 대지가 그 고유한 덕성인 안정감을 잃는다면, 우리의 두려움을 어디서 달랠 수 있을까? 모든 피조물이 몸을 보호할 수 있는 피난처는 어디 있을 까? 피조물의 발 밑에 있고, 땅속 깊은 곳에서 오는 것이 두려움의 원인이라면, 공포에 떨고 있는 인간이 어디에 몸을 숨길 수 있을까? 건물이 갈라지면서 무너져 내린다면 사람들은 미 칠 지경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뛰쳐나갈 것이다. 그러나 온 세상이 무너져 내 린다면, 어디에서 구원의 손길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사람의 말대로, 우리를 보호 해주고, 우리를 떠받치고 있는 이 땅이 쪼개지고 흔들린다면, 무엇이 그 토대가 될 것이며, 어디에 집을 지어야 한다는 말인가? 79년 8월 24일, 폼페이 소 폴리니우스 '타키투스에게 보낸 편지' : 트라야누스 황제(97-117)의 친구 소 플리니 우스는 미세눔에 기지를 둔 지중해 함대 사령관 대 플리니우스의 조카이다. 아저씨 대 플리 니우스는 백과사전같이 박학다식한 인물로 '박물지'37권을 남겼다. 서간 문학가로서 그 재 능을 널리 인정받은 소 플리니우스는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두 통의 편지(6, 16과 20)를 보내 (104년) 79년 8월 24일, 스타비아 인근 해안에서 맞은 아저씨의 최후와, 미세눔에 남은 17세 의 젊은이가 맛본 감정-폼페이 시민이 겪은 감정과 마찬가지였을 것이 틀림없는-을 묘사했 다. 아저씨는 미세눔 함대 지휘관이셨습니다. 9월 초하룻날의 아흐레 전(8월 24일), 오후 1시 쯤에, 어머니는 아저씨께 예사롭지 않은 커다란 먹구름이 나타났다고 알려 드렸습니다. 아저 씨는 일광욕과 냉탕을 하고, 누워서 가볍게 식사를 마친 뒤,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아저씨 는 신발을 청하여 신으신 뒤, 먹구름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아저 씨는 학자의 날카로움으로 그 현상이 자세히 연구해 볼 만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아저씨는 출항준비를 서두르라고 지시하고서 제가 원하면 따라 나서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공부하는 편이 낫겠다고 말씀드리자, 아저씨는 작문 주제를 내주셨습니다. 아저씨가 집을 나설 때, 카스쿠스의 아내 렉티나로부터 전갈이 왔습니다. 여인의 집은 산 자락에 놓여 있어서 바다를 통해서만 몸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저씨가 아니면 그 누 구도 이 불길한 운명에서 자신을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저씨는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학문적 탐구심으로 시작하고자 했던 일을 영웅적 행동으 로 마무리지으려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아저씨는 전함들에게 출항할 것을 명령했고, 렉티 나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사실, 몸을 피하기에는 바닷가가 가장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을 함께 구하기로 결심하고, 직접 배에 오르셨습니 다. 아저씨는 서둘러 재앙에서 몸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위험지대의 중심을 향하여 단단히 키를 잡고 돌진했습니다. 아저씨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비극의 세세한 추이와 사소한 변화를 눈으로 보는 대로 받아 적게 하거나 직접 기록하셨습니다. 배가 해안으로 다 가갈수록 더욱 뜨겁고 커다란 잿덩어리가 배 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고, 이어서 불꽃에 시꺼멓게 그을린 속돌과 자갈이 잇달아 쏟아졌습니다. 갑작스런 화산 분출이 내뱉은 파편더 미로 수심이 얕아지더니 결국 아저씨의 선단은 더 이상 해안으로 접근할 수 없는 지경이 되 었습니다. 아저씨는 뒤로 물러서야 할 것인지 잠시 머뭇거리셨습니다. 그러나 되돌아가야 한 다고 충고하던 키잡이에게 아저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용기있는 자만이 행운을 차지 할 수 있는 법이야. 폼포니아누스의 집으로 향하라." 폼포니아누스의 집은 아저씨가 계시던 위험지역, 다시 말해 만의 북부 지역과는 반대쪽인 만의 남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아직은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재앙은 그곳으로 점점 더 바짝 다가서고 있었습니다. 폼포니아누스는 배 몇 척에 자기 짐을 싣고, 맞바람이 잦아지면 도망 치기로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순풍이 불어와 아저씨는 그에게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떨고 있는 친구를 껴안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아저씨는 침착한 모습을 보여야 친구분이 안정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서  목욕할 채비를 갖추라고 분부를 내렸습니다. 목욕을 마친 아저씨는 편안하게 누워 식사를 했습니다. 아저씨는 시종 명랑한 표정이었는데, 아마도 자신을 자제하려고 무진 애를 쓰셨을 것입니다. ... 이윽고 아저씨는 자리에 드셔서 곤히 잠드셨습니다. 몸집만큼이나 요란한 숨소리는 문 앞 을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들릴 지경이었습니다. 이 무렵 아저씨의 침실로 통하는 안마당에는 속돌 섞인 재가 계속해서 쌓여 가고 있었습니다. 만일 아저씨가 방에 좀더 머무셨다면 잿더 미에 갇혀 밖으로 나오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저씨는 잠에서 깨어나, 온밤을 뜬눈으로 지 새운 폼포니아누스와 그의 다른 가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집 안에 꼼짝 않고 있을지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긴 채 밖으로 나갈지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 이 지진이 더욱 거세지면서 건물이 마구 흔들려 기초부분부터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기 때 문입니다.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구멍이 숭숭 뚫려 그다지 무거운 편은 아니었지만, 속돌이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어 느쪽이 더 위험한지를 따져 본 뒤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아저씨의 경우는 언제나 그 렇듯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고자 했던 것이나. 그들의 경우는 공포 중에 덜한 공포를 선택 하는 꼴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파편에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베개를 둘러 쓰고 천으로 동여맸습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벌써 날이 밝았겠지만, 그 어느 밤보다도 더 어둡고 더 답답한 칠흑 같 은 어둠이 사방을 내리누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횃불이나 등불을 밝혀 간신히 앞을 분 간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고자 해안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파도는 거칠고 사나운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바닷가에 넓은 천을 깔고 누워 계셨 습니다. 아저씨는 여러 차례 냉수를 마셨습니다. 곧이어 불길을 알리는 유황 냄새가 밀려들 자 사람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습니다. 아저씨는 젊은 노예 두 명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지만 곧 다시 쓰러지셨습니다. 자욱한 연기 때문에 호흡이 곤란한 듯했습니다. 선천적으로 약하고 자주 부어 오르던 기관지가 막힌 것 같았습니다. ... 날이 밝았습니다. 아저씨가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아저씨의 시신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아저 씨는 깊은 잠 속에 빠진 듯했습니다. 당신이 간청한 바에 따라, 아저씨의 죽음에 대해 기술한 편지를 보냈는데, 징조처럼, 땅속 이 흔들림을 느꼈지만, 그것은 캄파니아 지방에서는 늘상 있는 일이라서 별로 무섭지 않았 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땅의 꿈틀거림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어서 마치 대지가 대번에 뒤집히 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제게 뛰어들어오셨습니다. ... 제가 만용을 부린 것인지 아니 면 경험이 부족한 탓이었는지, (저는 그때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저는 티투스리비우스의 책 을 한 권 가져오라고 하여, 어머니와 함께 앉아 책을 읽으며 요약했습니다. 그때 아저씨 친 구 한 분이 오셨습니다. 스페인에서 돌아와 아저씨를 뵈러 온 것입니다. 친구분은 책을 읽고 있는 제 모습을 보시고, 어찌 그다지도 무사태평하냐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욱 열심히 책읽기에 집중했습니다. 대낮이었건만 빛은 희미했고 밖은 여전히 어둠침침했습니다. 마당에 앉아 있었지만 웬지 답답할 뿐이었으며, 건물은 심하게 흔들려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위험 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시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공포에 질린 군중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끄 는 대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우와좌왕할 따름이었고, 서로 밀고 제치고 하는 그들의 모습은 바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건물이 있는 지역을 벗어난 우리는 일순간 매우 놀라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끌고 온 수레들이 평평한 땅 위에서도 마구 뒤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수 레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았음에도 말입니다. 바다는 더욱 끔찍했습니다. 땅덩어리가 경련을 일으킨 탓에 바다는 오그라드는 것 같았는데, 해안선이 뒤로 밀려나 바다 밑바닥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곳의 바다생물은 벌써 말라붙어 있었습니다. 저쪽 하늘에서는 번개보다 더 큰 섬광을 토해 내며 뱀처럼 꿈틀거리는 섬쩍지근한 먹구름이 우지끈하며 쪼개지고 있었습니 다. 스페인에서 온 아저씨의 친구분이 다급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을 주어 말씀하셨습 니다. "만일 그대 아저씨가 살아 계신다면, 당신들이 구원받기를 바라실 것이오. 그리고 아 저씨가 돌아가셨다 해도 그분은 당신들이 살아 남기를 바라실 것이오. 그러니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도망칩시다." 우리는 아저씨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도 알지도 못한 채 우리의 안전함만을 바랄 수 없노라고 친구분께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우리를 남기고 황급히 저편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잠시 뒤, 먹구름이 내려오더니 땅과 바다를 뒤덮었습니다. 먹구름은 카프리를 감싸더니 이 내 미세눔의 곶도 휘감아 버렸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당신을 남겨 두고 서둘러 도망 가라고 제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절대로 혼자 가지 않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머 니를 부축하여 걸음을 옮길 수 있도록 도와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마지못해 몸을 움직이셨 지만, 당신이 저의 걸음을 늦춘다고 자책하셨습니다. 이때, 재가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뒤를 돌아 다 보았습니다. 우리 뒤로 검고 짙은 연기가 홍수처럼 땅 위로 퍼지면서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아직은 길을 잡을 만하니 들로 나가요." 사방이 어두워지면 길거리에서 군중들에게 짓밟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겨우 의견의 일 치를 보았을 때는 이미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달빛도 어슴푸레한 구름도 한 점 없 는 세상은 밀폐된 방처럼 온통 짙은 어둠만이 내리누르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아낙들의 울부짖음과 아기들의 칭얼거림, 그리고 사내들의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떤 이는, 아버지, 어머니를 소리쳐 찾았고, 어떤 이는 남편과 아내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으며, 어떤 이는 자식 을 잃어버린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불행한 처지를 한탄하는 소리, 친지들의 죽음 을 애도하는 소리,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지쳐 죽음을 재촉하는 소리도 들려 왔습니다. 하늘 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신은 없으며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이라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헛소문을 퍼뜨려 공포를 확산시키는 어 리석은 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미세눔에서 이러저러한 건물들이 주저앉았고, 또 이러이 러한 사람들이 불에 타 죽었다."고 떠들고 다녔던 것입니다. 불길하게 한쪽이 밝아 왔는데, 그것은 먼동이 트는 것이 아니라 불길이 조여 오는 것이었 습니다. 그러나 불길은 멀리서 멈추었습니다. 잿더미가 무겁게 날아들더니 다시 한번 암흑이 사방을 뒤덮었습니다. 잿더미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 우리는 가끔 일어나 몸을 털어야 했습 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급 박한 위험 속에서도 나약함을 드러내는 말은 단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습 니다. 결국, 암흑이 걷히고 일식 때처럼 검은 납빛을 띠고 있었지만 태양이 제 모습을 드러 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공포에 질린 우리 눈앞에 온 세상은 눈에 덮인 듯 재를 두텁게 뒤집어쓰고 다가섰습니다. 우리는 미세눔에 돌아와 어떻게든 기운을 되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희망과 두려움이 교차 하는 가운데-물론 우리를 지배한 것은 두려움 쪽이었습니다-하룻밤을 지샜습니다. ... 위험 에서 간신히 벗어났고, 위험이 다시 몰아 닥칠 것이 불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우리는 아저씨 의 소식을 듣기 전에는 그곳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사건의 전모는 이상과 같습니다. 저는 이야기할 가치도 없는 사건을 당신의 저술에 적어 넣게 할 뜻이 전혀 없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당신도 당신의 저술에 이 정보를 인 용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이 글을 읽을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이 사건들이 편지 한 장 의 가치도 지니지 않는다 해도, 당신께서 이것을 청하셨으니 보내는 것입니다. 폼페이의 선구자 빙켈만 '서한집': 프러시아 제화공의 아들 요한 요아힘 빙켈만은 독학으로 방대한 지식 을 습득했고, 고전고대 예술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가질 수 있었다. 1757년, 로마에 파견된 그 는 저명한 고고학자로 변신했다. 1762년, 그는 헤르쿨라네움과 폼페이의 발굴작업이 체계적 으로 수행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엘보이프 공이 자기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판 우물이 현재 진행중인 발굴에 계기를 마 련한 셈이다. 그는 이곳에 영구히 머무르기 위하여 이 집을 지었던 것으로, 그것은 프란치스 코 수도원 뒤, 해안 용암지대 위에 서 있다. 집은 얼마 안 있어 나폴리 팔레티 가문의 소유 가 되었고, 다시 현재의 스페인 국왕에게 넘어갔다. 스페인 국왕은 낚시를 즐기며 쉴 수 있 는 별장으로 이용하려고 이 집을 구입했다. 문제의 우물은 맨발의 키르멜 수도회 정원 근처 에서 함몰되었다고 한다. 인부들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 용암을 뚫어 땅 위로 솟아오른 바위 까지 굴착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베수비오 화산재에 파묻힌 세 개의 대형 여인상을 발견 했다. 오스트리아 부왕이 조상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으며, 로마로 가져가 손질을 하 도록 조처했다. 여인상을 선사받은 오이게네 공은 빈에 있는 자신의 저택 정원에 여인상을 세워 놓았다. 이러한 골동품이 발견되자 엘보이프 공에게 더 이상 우물을 파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 다. 그후 이곳에 유물이 묻혀 있다는 사실은 세상의 관심 저편으로 잊혀졌고 30년이라는 세 월이 흘렀다. 마침내 현 스페인 국왕이 나폴리를 정복했고, '보물창고'를 아무 방해 없이 소유할 수 있었다. 그는 봄 별장으로 포르티치를 선택했고, 우물 바닥에서부터 발굴작업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인부들은 몇 채의 건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용암층을 수직으로 뚫고 내려간 우물은 극장(처음으로 발견된 건물)한가운데로 이르렀다. 빛은 오로지 이 우물을 통 해서만 극장 안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곳에서 찾은 명문에는 헤르쿨라네움이라는 도시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로써 사람들은 그들이 파 내려간 곳이 어디인지 확인할 수 있었 다. 국왕은 발굴을 계속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알쿠비에레라는 토목기사가 발굴책임을 맡았는데, 현재 대령이고 나폴리 토목단 단장으로 있는 그 스페인 사람은 당시 국왕을 수행하여 나폴리로 왔다. 이탈리아 속담을 인용하자면 "달이 가재에 별로 아는 바가 없다."는 것처럼 고대 유물에 대해 무지했던 그는 무능력으로 말미암아 많은 고대유물의 발굴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무능한 인물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은 일꾼들이 두 뼘 크기가 되는 청동 글자들을 발견했다(그것이 극장에 걸렸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건물에 걸렸던 것인지 는 잘 모르겠다.) 그는 청동비문의 탁본을 떠 놓지도 않고 벽에서 떼어 내라고 인부에게 지 시했다. 글자들을 바구니에 함부로 처박아 놓은 알쿠비에레는 바구니째 국왕에게 바치고 말 았다. 그 뒤 글자들은 여러 해 동안 금고 속에 처박혀 있었고, 사람들은 제멋대로 글자들을 늘어놓으려는 시도를 했다. 어떤 사람들은 글자들이 'IMP.AUG.'라는 단어를 만든다고 믿을 정도였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사람들이 이 토목기사의 명령에 따라서 말 네 마리가 끄는 청동제 2륜마차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덧붙이기로 하겠다. 알쿠비에레 선생은 점점 더 지체가 높아졌고, 발굴 감독과 지휘는 현재 소령인 스위스인 카를 베버에게 위임되었다. 그뒤에 이루어진 훌륭한 작업은 모두 이 지적인 사람의 노력 덕 택이다. 그의 첫 번째 과업은 지하통로와 지하통로로 연결되는 건물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표시한 지도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지도를 작성한 다음 여기에 발굴에 관련된 사항을 자세하게 기록해 넣었다. 이제 무겁게 내리덮고 있던 모든 방해물을 벗어 던진 듯 옛 도시 가 도면 위에 나타났다. 건물의 내부, 침실과 정원, 유물이 발굴된 모든 지점이 우리의 눈앞 에 펼쳐져 있다. 그러나 도면들은 공개되지 않았다. 헤르쿨라네움에서 벌인 발굴작업을 성공으로 끝막음할 수 있었던 탓에 사람들은 다른 곳 도 파 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발굴단은 고대 스타비아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 고, 언덕 위에 건설되어 있는 폼페이의 웅장한 원형경기장을 발굴할 수 있었다. 원형 경기장 의 일부가 땅 위로 노출되어 있어 눈에 잘 띄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게다가 이 지역에는 용암층이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발굴작업 비용은 헤루쿨라네움에서의 경우보다 훨씬 적 었다. 폼페이에서의 작업은 무척 희망찬 것이었다. 한걸음 한걸음 사라졌던 거대한 도시 속 으로 전진해 들어감을 확신할 수 있었고, 또한 직선으로 곧게 뻗은 도시의 간선도로를 발견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 조상에게 알려지지 않은 굉장한 보물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 이 있었음에도 작업속도는 더디기 그지없었다. 전체 지하작업장에 고용된 일꾼은 알제리인 노예와 튀니스인 노예를 모두 합해도 기껏 50명 정도였다. 내가 지난번 여행 중 폼페이를 방문했을 때는 겨우 여덟 명의 일꾼이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소홀함을 만회하고자 함인지 그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그 방법에 따르면 발굴지 구석구석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정한 구덩이 양쪽에 서 일직선상으로 인부들은 양쪽을 번갈아 가며 여섯 뺨쯤 되는 정육면체 구멍을 파며 조사 를 벌인다. 구멍을 팔 때 생기는 흙으로 마지막 팠던 반대편 구멍을 메웠다. 이 방법은 작업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멍을 팔 때 나오는 흙으로 다른 구멍을 메움으로써 갱도를 든든하게 지탱할 수 있는 효율성도 가질 수 있을 법하다. 이 같은 작업을 스쳐 지나가면서 건성으로 볼 뿐 자세히 검사할 기회가 없는 이방인, 특 히 여행자들은 구멍을 메우지 않아서, 앞서 설명했던 베버의 도면에서 그럴 수 있듯이, 헤르 쿨라네움 지하도시 전체를 구경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들은 궁정과 작업지휘자의 악 취미를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발굴장소에 대한 합리적인 조사나 그 밖의 다른 환경 을 무시하고 내린 편견이다... 폼페이는 고대 건물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것이 분명하다. 폼페이는 마구 파헤쳐질 것이며, 거꾸로 뒤집힐지도 모른다. 빠른 시일 내에 그곳의 농토 또한 쓸모 없는 땅이 될 것이다. 실제로 폼페이는 이 지방에서 가장 훌륭한 포도주 생산지였지만, 오늘 날 우리가 맛볼 수 있는 포도주는 아주 형편없다. 그러나 포도밭을 몽땅 파헤친다고 해서 반드시 이 고장에 큰 피해가 따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작업에 임하는 태도가 이토록 게으르다는 사실로 볼 때 정말로 귀중한 유물 을 발굴할 기회는 우리 다음 세대의 차지가 될 것 같다... 게다가 현재의 발굴성과에 만족해 하는 왕실은 일정 깊이 이하로 발굴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헤르쿨라네움의 재산 보고서 케일뤼 백작 : 고고학자이자 작가요 판화가인 케일뤼 백작은 헤르쿨라네움과 폼페이에 열 광했다. 그도 빙켈만처럼 발굴지를 공개하지 않는 나폴리 왕궁의 태도에 분노를 터트리곤 했다. 케일뤼는 빙켈만의 소책자를 번역해 고대유적지를 더 널리 알렸고, 이로써 외국인에게 품고 있던 나폴리 군주의 의구심을 한층 더 증폭시켰다. 헤르쿨라네움에서 찾아낸 모든 예술 작품은 시칠리아 왕 폐하께서 포르티치에서 건설한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군중의 명령에 충실한 전시실 책임자는 관람 중 어떤 사항도 기록 하지 못한다고 일러주었고 그에 따른 감시를 또한 철저했다. 따라서 느긋하게 전시실을 둘 러보면서 중요한 사항을 머릿속에 주워 담을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그러했으므로 더욱 중 요한 요소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희생되어야 했던 세세한 점들은 무시해야 했 다. 이러한 점들이 무엇인지는 포르티치 박물관에서 관람할 수 있었던 전체 소장품에 대한 나의 간략한 설명을 읽고 독자 스스로 판단할 수 있으리라. 700여 점의 그림, 그리고 청동이나 대리석으로 만든, 크기가 천차만별인 흉상과 조상 350 점, 거의가 청동제품이며 모양과 크기가 서로 다른 일상 생활에 쓰인 듯한 항아리 700점, 청 동제 삼발이 20여 점, 실내를 밝힌 등불 받침대와 촛대 40여 점, 필사본 800점, 등잔, 도구, 반지, 팔지, 목걸이, 거울 등 소품 600여 점 따위가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오늘날 골동품가게라면 대부분 진열해 놓았을 청동 또는 대리석으로 제작된 작은 조 상도 조상의 총수에 모두 포함해 계산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우아한 형태를 갖추었거나, 고 대 신들의 속성을 형상화시켰거나,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위대한 인물의 행위나 저작물을 표현했을 경우에만 우리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에피구로스, 제논, 데모스테네스,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 헤르마쿠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작은 흉상들에 관해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 겠다. 실물 크기 조상은 40여 점에 이르는데, 그중 절반 가까이가 청동제이며, 나머지는 대 리석으로 제작되었다. 헤르쿨라네움 마을을 뒤덮은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을 당시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재산을 챙겨 가지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겨우 작은 은제 단지 가 발견되었을 뿐, 금은보석류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러한 사정을 설명해주고 있다. 한편, 청동제 항아리는 대량으로 발견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항아리들은 뛰어난 공 예기술을 보여 주며, 그 장식문양은 매우 매력적이다. 수백 가지에 이르는 장식문양은 그 하 나하나가 높은 취향을 담고 있다. 항아리의 테두리나 목을 둘러 은으로 상감한 나뭇잎 문양 이 있고, 물병, 사발, 받침접시 따위에서는 끈처럼 꼬아 붙인 앙증맞은 모습의 손잡이를 볼 수 있다. 한푼이라도 더 많은 수익을 올리려고 상품의 역사적 가치를 과장하는 골동품상은 이러한 그릇이나 항아리가 제기로 사용되었던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헤르쿨라네 움에서 날마다 출토되는 양이 엄청난 것으로 볼 때, 이 물건들은 시민들의 일상 생화에 쓰 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인은 일상용품이라도 아름답게 만들어 쓰기를 원했고, 따라서 이 작은 물품들에까지 큰 예술작품에 파고들었던 그리스풍의 예술기법이 녹아들어 있다. 그중에서 특별히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공식적인 길이로 거의 11푸스 (1푸스는 약 27mm)가 되는 청동으로 만든 발을 두 개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저울 모양을 한 유물이다.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한 덩어리의 빵이 있다. 빵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아무 방 해를 받지 않고 조사한다고 해도 읽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유리로 덮어 놓았으니 글자를 해독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러나 나는 두 줄로 새겨져 있는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둘째 줄에서 병아리콩을 뜻하는 라틴말을 찾아낼 수 있 었는데, 아마도 빵 위에 새긴 문구는 빵을 만들 때 사용한 밀가루의 종류를 밝히라는 치안 당국의 명령에 따라 새겨 넣었을 것이다. 몇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 나머지 유물들 가운데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필 사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필사본은 너비가 30cm 정도 되는 기다란 종이띠를 말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사람들은 이 띠를 긴 쪽을 가로로 하여 여러 단으로 나누어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한 단씩 메워 나가는 방식으로 글을 적어 넣었다. 필사본은 두루마리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작품의 첫째 단이나 첫째 쪽이 가장 먼저 펼쳐지고 마지막 부분 은 두루마리 안쪽에 들어 있다. 헤르쿨라네움의 필사본은 궁전같이 화려한 한 저택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저택은 아직도 발굴이 진행중이다. 이집트산 파피루스로 제작된 필사본은 석탄처럼 검은색이다. 필사본 펼 치는 방법을 알리 없었던 사람들도 확신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원통을 반으로 쪼개듯 필사 본을 축을 따라 세로로 자르기로 결정했다. 이 작업으로 몇 개의 문장을 확인할 수 있었지 만, 그 필사본은 완전히 파손되고 말았다. 겹겹이 들러붙은 파피루스를 떼어 내다가 그만 산 산조각을 내고 말았던 것이다. 어리석게도 그들은 필사본의 한 단 또는 한 페이지를 보존하 기 위해 그 안에 담겨 있던 100페이지가 넘는 기록을 망가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무렵 부지런하고 끈기 있는 수도사가 한 사람 나타나서 두루마리를 완전히 펼칠 수 있 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는 오랜 시간 정성껏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여 마침내 성공했다. 그는 두루마리의 가장 바깥인 필사본의 첫 부분을 찾아내어 거기에 명주실을 여러 가닥 붙이고, 명주실 가닥들을 작은 틀 속에 맞물려 넣은 핀에 감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핀을 돌렸다. 그러자 필사본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서서히 펼쳐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 필사본의 바깥 겹은 찢어지거나 썩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보존할 수가 없다. 시커멓게 그을은 부 분을 만날 때까지 여러 겹을 펼쳐야 한다. 몇 단을 펼치고 나면, 사람들은 그것을 오려 천 위에 붙인다. 이렇게 고된 작업을 통해 필사본 하나를 완전히 펼치는 데 여러 달이 걸린다. 그리고 이 작업을 통해 그들은 필로디오루스라는 사람이 음악에 대해 혹평한 그리스어 논문 뒷부분 38단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스트라본과 같은 고대 저술가들이 인용하곤 했던 인물로 다행스럽게도 그의 이름과 작품의 제목이 필사본 맨 끝에서 발견되었다. 남아 있는 38단 중 일부는 훼손되기도 했지만, 글씨는 수려함을 자랑할 만하고 읽기에도 그리 어려움 이 따르지 않는다. 그리스어 필사본에 포함되어 있던 두 단으로 이루어진 파피루스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것 은 사람들이 두루마리를 펼칠 수 있는 비밀을 파악하기 전에 떼어낸 것이다. 두 단 모두 철 학 논문의 한 부분으로 보였다. 내가 가장 주의 깊게 검토한 것은 28줄 짜리였다. 나는 그중 23줄을 암기할 수 있는데, 그것을 당장 아카데미에 보고할 생각이다. 나는 또한 글자꼴과 한 행에 몇 자가 들어 있는지 파악하려고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고 믿지 않는 다. 이탈리아 여행기 1787년 3월 18일, 나폴리에서 괴테, '이탈리아 여행기': 18세기 중반 이후, 많은 미술가와 문학가들이 낯선 고장에서의 신선한 경험을 찾아, 그리고 고대유물을 감상하기 위해, 이탈리 아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독일의 문호 괴테, 프랑스의 스탕달과 이폴리트 텐, 미국의 마크 트웨인 등은 그 시대를 밝혀 줄 풍부한 인상, 감상, 연구결과를 지니고 고국으로 돌아 오곤 했다. 헤르쿨라네움의 지하도시 티슈바인과 함께 마차를 타고 폼페이를 돌아다녔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그림을 통해 익숙해 있던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 속에 있던 조각들은 이제 하나로 결합되어 너무나도 멋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폼페이를 찾는 사람은 저마다 도시가 비좁고 소규모인 데 놀라게 됩니다. 곧게 뻗었으며 양편에 보도를 갖추었지만, 좁은 거리, 창문도 없는 작은 집으로는 현관이나 주랑을 통해서 나 빛이 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공공건물, 성문 바에 위치한 공동묘지, 신전과 별장 모두 진짜 건물이라기 보다는 모형 건축물이나 인형의 집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방과 복도, 주랑 은 화려한 벽화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퇴색했지만, 평평한 벽면 위로 세부묘사 가 풍부한 프레스코화가 한껏 펼쳐져 있습니다. 그윽함을 더하는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가장 자리를 장식한 프레스코화 가운데 어떤 것은 어린아이와 요정의 상냥하고 매력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고 또 어떤 것은 화려한 화환에서 야생동물과 집짐승이 솟아 나오는 모습을 그 리고 있습니다. 돌멩이와 화산재에 뒤덮이고, 도굴꾼에게 약탈당한 도시는 이제 완전히 파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시는 오늘날의 가장 정열적인 예술애호가조차 느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요구할 수 없는 예술적 본능과 예술에 대한 사랑을 도시 전주민이 공유하고 있었 음을 여전히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폼페이와 베수비오 화산과의 거리를 비교해 보고는 폼페이를 덮고 있는 잿덩어리와 돌덩 어리가 폭발에 의해서이건 바람에 실려서이건 이곳까지 날아올 수는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 었습니다. 돌멩이와 재가 구름처럼 잠시 공중에 떠다니다가, 결국 이 불행한 도시 위에 떨어 진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봅니다. 저 옛날 폼페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생하게 느껴 보고자 한다면 눈사태로 파묻혀 버린 산마을을 상상해 볼 수도 있겠지요. 건물 사이의 공간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질 로 메워지고, 곧 이어 건물마저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땅속으로 파묻혀 버 렸겠지요. 이윽고 사람들이 도시의 무덤 위에 포도밭을 일구고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어느 날 농부의 쟁기 끝에 이 엄청난 보물이 걸려들었을 것입니다. 미라로 변해 버린 도시는 우리에게 다소 불쾌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해변간 소박 한 여인숙의 정자에서 소찬으로 식사를 하고, 쪽빛 하늘과 바다의 반짝거리는 물결을 즐기 면서, 이러한 감정들은 말끔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나는 이내 무성한 포도나무잎이 우리가 있던 정자를 뒤덮을 때쯤 이곳을 다시 찾아 즐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 다. 우리는 헤르쿨라네움과 포르티치 박물관을 방문하기 위해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습니 다. 베수비오 화산의 발치에 자리하고 있는 이 고대도시는 화산이 폭발할 때 흘러내린 용암 을 뒤집어쓰고 땅속 깊숙이 18m 지점에 숨어 있습니다. 헤르쿨라네움은 우물을 파던 중 발 견되었습니다. 인부들이 우연히 대리석을 깔아놓은 건물 바닥을 건드렸던 것입니다. 독일의 광부들이 체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유물발굴을 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도적 같은 자들에 의해 함부로 파헤쳐진 결과, 고대의 위대한 예술품들이 다량으 로 파괴되거나 분실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60계단을 밟고 내려가 천장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는 횃불이 사방을 밝혀 주고 있 었으며, 우리는 먼 옛날에 푸른 대지 위에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솟아 있었을 원형 경기장 을 한껏 감상했습니다. 안내인은 이곳에서 발견된 이러저러한 보물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우리는 영향력 있는 분의 추천장을 가지고 갔기에 박물관측의 따뜻한 환영을 받을 수 있 었습니다. 그러나 전시품을 관찰했고, 고대인이 이 유물들을 일상생활의 도구로 사용하던 바 로 그 시절로 생생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물들은 폼페이에 대한 나의 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나는 폼페이의 작은 집과 좁은 방들이 당시에는 더욱 좁 아도 보이고 더욱 넓게도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좀더 좁은 이유는 이처럼 귀한 물품이 꽉 들어차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좀더 넓은 이유는 유물들이 단지 일상생활의 필요에 따라서만 제작되었던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넓은 집의 물리적 공간이 제공할 수 없는, 우리 의 마음을 풍성하고 신선하게 해주는 예술성과 우아함으로 장식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았던 너무나도 아름다운 유물을 몇 가지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단지 주둥이는 무척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고리를 이룬 반원형 손잡이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손잡이를 쥐고 단지를 들거나 운반했을 것입니다. 등잔은 심지 의 수만큼 다양한 가면과 화환으로 장식되어 있어 각 심지에 불을 붙이면 심지마다 다른 예 술품을 비추는 형상이 됩니다. 등잔을 받쳐 놓았을 높고 날씬한 청동제 받침도 눈에 띄었습 니다. 또한 온갖 형상이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는 샹들리에는 부드럽게 흔들리며 더없는 놀 라움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안내인을 따라 이 방 저 방을 둘러보며 우리는 짧은 시간이지만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마 음속에 새기려고 노력했습니다. 언젠가 그곳에 다시 가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프레스코화의 신비 1817년 3월 5일, 나폴리에서 스탕달, '로마, 나폴리, 피렌체' : 스탕달은 골동품보다는 당 시 이탈리아의 생활과 풍습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폼페이 미술을 다룬 스탕달의 글에서도 이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포르티치의 고대미술 박물관을 나설 때, 영국 해군 장교 세 명이 들어서는 것을 보았습니 다. 이 박물관에는 220개의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리를 향해 바삐 길을 재촉했 는데, 마달레나 다리에 미처 이르기도 전에, 박물관 앞에서 만난 영국인 장교 세 명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저녁 나절에 몇 마디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림 이 아주 훌륭하며,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소재를 담고 있을 것이라고 내게 말했습니 다. 사실 그들이 전시관을 둘러보았던 것은 불과 3,4분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정한 예술애호가들에게 무한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전시품들은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에 서 떼어 내 온 프레스코화입니다. 그림들은 명암효과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을 뿐더러 색채 의 다양한 사용이란 면에서 아쉬움을 주었지만, 구성과 기법에서 크게 뒤떨어지지는 않습니 다. '오레스테스와 이피게니아가 타우리스에서 서로 남매 사이임을 확인하는 장면'과 '아테 네 젊은이들이 미노타우로스에게서 자신들을 구해 준 테세우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장면 '을 묘사한 그림은 특별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과장된 표현을 생략한 두 그림에는 고상한 간결미가 흘러 넘치고 있었습니다. 라파엘의 작품'산타 세실리아'만한 크기로 제작된 반 쯤은 떨어져 나간 프레스코화들을 주목해 볼 만한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들은 한때 헤르쿨라네움의 목욕탕을 장식하던 것입니다. 물론 이 그림들이 15세기 작품보다 위 대하다고 주장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예술적 호기심의 대상 일 따름입니다. 이폴리트 텐'이탈리아 여행기': 이폴리트 텐(1828-1893)은 1860년대에 이탈리아를 방문 했다. 역사가였던 텐은 역사의 맥락 속에서 인간과 유적의 정확한 자리와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나폴리의 박물관에서-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그림 대부분은 나폴리의 박물관 으로 옮겨졌다. 원근법을 무시하고 제작된 이런 그림들은 주로 벽면을 장식하는 데 쓰였는 데, 어두운 배경에 사람을 하나 또는 둘 그려 넣고서 동물이나 별로 아름답지 않은 경치, 아 니면 건물을 곁들여 놓았다. 색채는 별로 쓰지 않았다. 색채는 거의 희미했는데, 이는 시간 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퇴색했다기보다는 (그 중에는 매우 선명한 그림도 있었다)제작자 의 의도에 따라 지워지거나 농담이 떨어진 듯했다. 이 어둠침침한 전시실 안에는 그림말고 사람의 눈을 홀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관람객을 즐겁게 하는 것은 인체의 율동과 형 상이었으며, 고대인의 건강하고 시적인 율동을 담은 이미지는 그들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나 는 최근 각광받는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보다 이 그림들에서 더 많은 기쁨을 얻었다. 이 그 림들은 더욱 자연스럽고 더욱 생동감 넘친다. 알몸으로 등장하는 남자나 여자, 마르스와 비너스, 엔디미온을 찾아낸 다이아나, 아가멤논 이 빼앗아 간 브리세이스, 무희, 목신, 켄타우루스, 여자를 납치하는 전사(여자는 납치당하면 서도 아주 태연하다!) 등 그림의 소재들은 별다른 매력을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도 족하다. 그들은 그대로 아름답고 행복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화가들은 그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도 소유하지 못한 특권을 향유할 수 있었다. 여 유 있는 사회관습에 따른 생활, 원형경기장과 목욕탕에서 언제든지 감상할 수 있는 알몸, 육 신의 힘과 빠른 발걸음을 계발할 수 있는 분위기... 오늘날의 우리가 표정이 풍부한 얼굴과 마름질이 잘 된 바지를 말하듯이, 그들은 아름다운 가슴과 미끈한 목, 그리고 근육이 풍부한 팔에 대해 말했다. 헤르쿨라네움과 폼페이에서 보낸 며칠-가장 강렬하고 가장 오래 남아있는 인상은 불그스 름한 잿빛을 띤, 반쯤 무너지고 황폐해진 도시에 관한 것이다. 바위 언덕 위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고, 두터운 벽과 눈부신 대기 속에서 희끄무레한 빛을 발하는 푸르스름한 포석이 늘 어서 있는 도시의 풍경이다. 이 모든 것을 바다와 산과 끝없는 경치가 둘러싸고 있다. 높은 지대에는 신전들이 있다. 비너스 신전, 아우구스투스 신전, 머큐리 신전, 아직 완공되 지 않은 신전도 몇 개 있다. 조금 떨어진 높은 곳에 포세이돈 신전도 보인다. 그들은 이처럼 모든 신을 높은 곳에, 그 자체가 신이라 할 수 있는 맑은 공기 속에 모셔 놓고 있다. 중앙대 광장과 쿠리아회가 나란히 있는데, 이곳은 모든 결정을 내리고 제물을 바치던 장소이다. 먼 발치로 산들이 이루어 낸 웅장한 윤곽선이 바라보이며, 동족 태양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 든 아지랑이 속에는 아름다운 나무들과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있다. 한바퀴 둘러보면 그다 지 끙끙대지 않고서도 이 신전들을 다시 세워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둥과 코린트 양식의 기 둥머리, 깔끔한 배치와 대리석 기둥줄기 사이로 돋보이는 쪽빛 벽면이 한데 어우러진 신전. 어린 시절부터 이 같은 장관을 보고자란 사람은 얼마나 강한 인상을 받겠는가! 모든 거리는 비좁다. 한걸음에 건널 수 있는 골목길이 대부분이며, 큰 거리라야 수레가 한 대 정도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이다. 수레바퀴 자국을 아직 찾아볼 수 있다. 띄엄띄엄 큰 돌을 놓아서, 행인이 징검다리처럼 밟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이 사실들은 모든 것이 우리와 달 랐음을 보여 준다. 이곳에서는, 우리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짐을 많이 실은 짐수레 나 허겁지겁 달려가는 마차 따위로 발생하는 복잡한 교통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수 레는 곡물과 기름과 생필품을 실어 날랐을 테지만, 물자수송은 대부분 노예들의 임무였다. 그리고 부자들은 가마를 타고 다녔다. 오늘날 사용되는 편의시설이나 도구가 있을 리 없었 고 있었다 해도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집의 한가운데에는 응접실처럼 큰 정원이 들어서 있다. 정원의 중앙에는 분수를 갖춘 흰 대리석 연못이 있고, 주변은 주랑으로 둘러져 있다. 한낮의 더운 시간을 보내기에 이처럼 매 력적이고 소박하고 훌륭한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흰 기둥 사이로 보이는 푸른 나뭇잎, 푸 른 하늘을 배경으로 드러나는 붉은 기와, 꽃 속에서 어렴풋이 빛나며 속삭이는 물방울, 태양 빛이 만들어 내는 주랑의 그림자... 몸을 쉬고, 건강한 꿈을 꾸고, 꾸밈이나 기교 없이, 자연 과 삶에서 좀더 아름다운 것을 즐기기에 이보다 더 훌륭한 장소가 어디 있을까? 분수 둘레 는 사자머리, 어린아이, 도마뱀, 사냥개, 목신 등 밝은 표정을 한 작은 조상들로 장식되어 있 다. 가장 넓은 집은 디오메데스의 집인데, 그곳에는 옛날에도 그러했을 것이 분명한 오렌지 와 레몬이 싱그러운 푸른 싹을 틔우고 있으며, 물고기가 뛰노는 연못이 반짝거리고, 작은 주 랑은 여름철 식당을 둘러싸고 있다. 상상 속에서 고대의 풍습과 생활을 재구성하려고 노력 할수록, 그것은 더욱 아름답게 다가섬은 물론, 그곳의 기후와 인간의 본성에도 더욱 잘 들어 맞는 것 같다. 아낙들은 마당과 주랑의 뒤편 맨 안쪽에 있는 규방에 거주했는데 이곳은 바 깥의 공공생활과 차단된 안식처였다. 아낙들은 비좁은 방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들은 그곳에 서 나태함을 만끽하거나, 자기 아버지나 남편이 일과 대화를 끝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면 서 모직물을 짜곤 했다. 무심한 두 눈을 굴려 희미한 벽면을 훑어보면, 오늘날의 그림들처럼 고고학적인 호기심이나 특이한 예술적 주제, 또는 이국정서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을 미화한 그림들, 예를 들어 쉬고 있는 모습, 침대에서 일어나는 모습, 낮잠자 는 모습, 여러 가지 직업, 파리스를 둘러싼 여신들, 날씬한 몸매와 우아함을 갖춘 행운의 여 신, 깜짝 놀라 의자 위로 쓰러지는 데이다미아 등을 담은 벽화들이 눈에 들어온다. 풍습, 직 업, 옷, 기념물, 이 모두가 한곳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동물은 단 하나의 줄기를 가졌으며, 그 줄기는 다른 어느 것과도 접목되지 않았다. 대극장은 언덕 꼭대기에 있으며, 관중석은 파로스섬에서 가져온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대 극장 맞은편으로 베수비오 화산이 보이고 찬란한 아침 햇살이 바다 위로 넘실댄다. 대극장 은 천막으로 지붕을 삼았다는데, 지금은 이 천막을 볼 수 없어 아쉬운 느낌이 든다. 희미한 가스등불 아래 악취가 풍겨 나오는 새장과 같은 비좁은 방안에 사람들을 몰아 넣는 오늘날 의 야간극장과 이 극장을 비교해 보라. 훈련으로 육신을 단련하는 자연의 생활과 연미복으 로 치장한 복잡한 인공의 생활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확연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밝은 햇빛 아래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원형경기장에서도 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러 나 이곳에는 피비린내 나는 옛 로마의 오점이 남아 있다. 목욕탕마저도 아름다움을 띠고 있 다. 냉탕의 수평 돌출부에는 매력적인 경쾌함을 자랑하는 큐피드들이 말에 뛰어오르거나 2 륜마차를 몰고 있다. 갓돌을 힘센 어깨로 받치고 벽을 따라 늘어선 헤라클레스의 상이 있고, 인물상 부조와 황금빛을 띠는 아치형 천장으로 장식된 건조실은 아주 쾌적하게 보인다. 이 모든 형태는 생동감과 건강미를 간직하고 있으며 전혀 과장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 목욕탕 의 인공적이고 멋없는 구조,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장식과 얼마나 대조적인 광경인가! 오늘 날의 목욕탕은 단지 몸을 씻는 곳이다. 그러나 옛날의 목욕탕은 즐거움과 건강을 위해 설립 된 장소였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여러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며, 근육을 풀고 피부를 매끈하 게 다듬었다. 그들은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다시 풀어지는 과정을 되풀이 경험하면서 살 속 으로 동물적 쾌감이 스며드는 것을 맛보았다. 현대인과 달리 그들은 정신을 통해 사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통해 살았던 것이다. 공동묘지 사이로 뻗은 길을 따라서 도시를 빠져 나온다. 그곳의 무덤들은 거의 완전한 형 태로 남아 있는데, 가장 고귀한 자태를 뽐내는 공동묘지는 비통함보다는 장엄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에게 죽음은 고통스러운 미신이나 지옥이라는 허구와 관련되어 있지 않았다. 일상 가운데 하나인 죽음은 삶의 종지부로서, 햄릿의 경우처럼 의문을 제기할 대상이 아니라 평 온히 받아들여야 할 공포가 아닌 엄숙함이었다. 그들은 조상을 화장한 재나 초상화를 집 안 에 모시고는 드나들면서 조상에게 인사를 하였다. 산자와 죽은자의 교류였다. 플라톤의 '대 화'에서 히피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장 고귀한 인간의 미덕은 건강하게 잘사는 것 이고, 노령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며, 부모가 죽었을 때 장사 지내는 것이며, 자신이 죽 었을 때 자식들이 훌륭히 장사 지내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역사는 사람의 의식을 지배하는 대여섯 가지 관념, 즉 죽음, 명성, 복지, 조국, 사 랑, 행복의 역사일 것이다. 그런데 고대문명은 두 관념의 지배를 받았다. 첫째는 사람에 대 한 것이고, 둘째는 도시에 대한 것이다. 전자는 육체를 단련하여 절제할 줄 아는 용감하고 완전한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관념이며, 후자는 모든 구성원이 사랑과 존경을 보낼 수 있 는 소규모 배타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 두 관념에서 다른 모든 관념이 파생되었 다. 마크 트웨인'때묻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로 떠난 여행' : 작가이기에 앞서 신문기자인 마크 트웨인은 미국인 여행자들과 함께 지중해를 유람하는 정기여객선 퀘이커 시티호에 올 랐다. 그는 성지를 순례하고 이집트를 방문한 뒤에, 동반자들과 함께 폼페이에 닿았다. 그들은 '폼파이에(Pom-pay-e)'로 발음한다. 나는 은광에서 그러하듯이 횃불을 들고 습 기차고 어두운 계단을 따라서 폼페이의 지하세계로 내려갈 것이며, 머리 위에는 용암이 있 고, 양쪽으로는 바위 속을 파내어 사람의 집처럼 만든 황폐한 감옥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어 두운 굴속을 통과할 것이라고 상상해 왔다. 그러나 조금도 그렇지 않다. 내가 보기에 적어도 파묻힌 도시의 절반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벽돌로 단단하게 지은(지붕 없는)집들이 타는 듯한 햇볕을 받으며 1,800년 전에 있던 그대로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해지기 쉬운 양탄자 위에 그리는 동물, 새, 꽃으로 장식한 정교한 모자이크 는 어느 한 조각도 빛이 바래거나 떨어져 나가지 않은 채이고, 포장도로 또한 옛 모양 그 대로이다. 어떤 응접실과 침실 벽에 걸려 있는 다채로운 색으로 그린 프레스코화는 술에 취해 사랑을 나누는 비너스, 디오니소스, 아도니스 같은 신들을 등장시킨다. 또한 비좁은 거리와 보도에는 굳은 용암으로 아름다운 타일을 만들어 포장해 놓았으며, 어떤 거리는 수레바퀴 자국이 깊게 패여 있고 또 어떤 거리는 폼페이 시민들의 오가는 발길에 몹시 닳아 있다. 빵집, 신전, 재판소, 목욕탕, 극장들은 벌써 말끔히 치워져 땅속 깊이 자리잡은 은광 처럼 보이지 않는다. 부러진 채 땅에 뒹구는 기둥, 문짝이 떨어져 나간 출입구, 파손되어 닳 아버린 벽 상부를 보면 놀랍게도 화마가 휩쓸고 간 현대 도시의 한 구역이 떠오른다. 불에 그을린 들보와 깨진 유리창과 잿더미가 그곳에 있었다면, 꼭 그 모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마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처럼, 오늘도 해는 옛 폼페 이 위를 환하게 비춘다. 그리고 도로는 폼페이 전성기에 그 시민들이 활보했던 때보다 100 배나 깨끗하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나는 상인의 거리와 적어도 200년 동안 한 번도 보수 공사를 받지 않았음을 보았다. 수세대의 납세자들이 몰고 다닌 마차의 바퀴가 포도 위 에 남겨 놓은 12-25cm깊이가 되는 자국을 보았다. 이러한 표시를 통해 도로건설국이 결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들이 도로 보수공사를 한 번도 실시하지 않았 으며, 도로 청소 또한 시도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는 폼페이 도로건설국 의 마지막 행정관의 이름을 알아내어 그에게 비난을 퍼붓고 싶다. 나는 기분이 상해 있는 데, 바퀴자국 속에 발이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와 용암이 달라붙어 있는 불행한 해골 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그 주인공의 불운이 어느 정도 그 행정관의 탓일 수 있다는 데 생 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옛적에 주인이 살아 있을 때라면 이해하지 못할 라틴말로 쓰인 공식적인 초대장을 받지 않고서는 절대로 들어가지 못했을 몇 채의 웅장한 집을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분명 당 시에 우리가 살아 있었다 해도 초대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집을 지었다. 땅바닥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모자이크로 아름다운 모습을 담은 장식을 만들 어 놓았다. 현관에서 우리는 라틴말로 쓰인 환영문구, '개조심'이라는 글귀와 함께 그려 넣 은 개의 그림, 때로는 아무런 글귀도 없이 그저 곰이나 목신을 그려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곧이어 우리는 복도로 들어가는데, 나는 거기에 외투걸이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한가운데 대리석으로 만든 커다란 연못과 분수가 만들어진 방을 만난다. 이방 양쪽 으로 손님용 방이 있고, 분수 뒤로는 응접실이 있다. 이곳을 둘러본 뒤에 작은 정원과 식 당, 그리고 또 다른 장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바닥은 모자이크화로 덮여 있었고, 벽은 회반 죽을 입히고 그림을 그려 넣거나 프레스코화를 그려 넣거나 부조를 새겨 놓았다. 여기저기 크고 작은 조상, 물고기가 노니는 연못, 안마당을 둘러싼 멋진 주랑 어딘가 비밀스런 장소에 서 솟아나는 샘물을 흩뿌려 꽃밭을 적셔 주고 공기를 신선하게 만들어 주는 작은 폭포가 눈 에 띄었다. 정적에 묻힌 죽은자의 도시를 거닌다는 것, 한때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팔고, 수레를 몰거나 걸어다니고, 온갖 소음과 번잡한 교통과 쾌락으로 가득 찼으나, 이제는 완전 히 폐허가 된 도시를 어슬렁댄다는 것은 기묘하고 멋스러운 유희일 수 있다. 그들은 게으르 지 않았고 바쁘게 살았다. 우리는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길모퉁이에 신전이 하나 있었는 데, 그 주위를 돌아서 가는 것보다 신전의 기둥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이 이 거리에서 다른 거리로 통하는 지름길이었다. 시간을 아끼려고 여러 세대에 걸쳐 뻔질나게 이곳을 지나다닌 사람들은 건물 바닥의 포석에 깊은 자국을 내어놓아 이곳이 지름길로 쓰였음을 증명하고 있 다! 현대인의 일상이 그렇듯이 그들은 질러갈 수 있는 곳을 놔두고 절대 돌아가지 않았다. 어디서나 우리는 이 낡은 집들이 파멸의 밤을 맞이하기 전까지 얼마나 오랜 동안 서 있었 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드는 사물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역시 오래 전에 죽은 주민들을 상기시켜 주고, 우리 눈앞에서 산 사람들을 등장시킨다... 빵집에는 곡식을 가는 맷돌과 빵굽는 가마가 있다. 폼페이를 발굴한 사람들은 빵장수가 상황이 급박하여 빨리 도망쳐야 했기 때문에 미처 꺼내지 못하고 그대로 놓아둔 잘 구운 빵 을 이 가마 속에서 찾았다고 한다. 어떤 집(여자 관람객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유일한 건물)에는 작은 방들과 대리석을 다 듬어 만든 작은 침대가 여럿 옛날 그대로 놓여 있다. 그 집 벽에서 우리는 마치 어제 그린 것처럼 아주 생생한 그림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어찌 감히 글로 묘사할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여기저기서 우리는 외설스러운 내용을 담은 재기 넘치는 라틴어 문장을 볼 수 있었는데 아마도 그날 밤이 지나가기 전에 미친 듯이 쏟아지는 불벼락 소에서 하늘을 향 해 구원을 외치며 쳐들었을 바로 그 손들이 새겨 놓았을 것이다. 어느 주요 도로에 있는 돌로 만든 커다란 물통에는 수도관이 연결되어 물을 공급하고 있 었는데, 캄파니아의 일꾼들이 더위에 지치고 목이 마를 때 이 수도관 끝에 다가서기 위해 몸을 구부릴 때 오른손을 거기 올려놓았던 탓에, 돌은 2-5cm정도 깊게 패어 있었다. 수천, 수만 사람의 손이 그곳을 짚어, 쇠처럼 단단한 돌을 닳게 만들었음을 상상해 보라! 폼페이에는 커다란 광고판이 있었다. 사람들은 금방 닳아 없어질 파피루스 종이가 아니라, 단단한 돌 위에 검투사의 시합, 선거일등을 알리는 내용을 적어 게시했다. 목욕탕과 편의시 설을 갖춘 집 몇 채와 수백 개의 가게를 세놓으면서 ,세입자는 빌린 집이나 가게를 부도덕 한 목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단 광고를 붙이는 부유한 부인의 모습을 그려 보 았다. 폼페이의 긴 복도 가운데 한곳에서 한 손에는 금조각 10개, 다른 손에는 커다란 열쇠를 쥔 남자의 해골을 찾아냈다. 그는 돈을 쥐고 문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바로 문턱을 넘으려 는 순간, 소나기처럼 퍼붓는 불덩어리에 휩싸이고 말았던 것이다. 1분의 여유만 더 있었어도 그는 살아 남았을지 모른다. 나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소녀 두 명의 해골을 보았다. 여인은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팔을 크게 벌리고 있었는데, 나는 형태 없는 여인의 얼굴 에서 하늘이 이 거리에 불을 퍼부을 때, 그 얼굴에 나타났을 절망적인 표정을 추측해 보았 다. 소녀들과 남자는 재가 쏟아질 때 잿더미에 파묻히지 않으려고 애쓴 것처럼 머리를 팔로 감싼 채 엎드려 있었다. 어떤 집에서는 해골이 무려 18구나 발견되었다. 그들은 모두 앉아 있었고, 벽에 검게 그을린 자국은 그들의 모습과 거동을 알려주는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들 가운데 어떤 여인은 아직도 율리아디 디오메데스라고 자신의 이름을 새긴 목걸이를 걸고 있 었다. 무엇보다 오늘날 폼페이를 찾는 이에게 시적인 감동을 주는 것은 갑옷을 입은 위대한 로 마 병사의 모습이다. 그는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로마의 병사라는 영광스러운 이 름을 충실히 지킨다는 자부심을 느끼도록 만드는 굳센 용기를 가슴에 가득 채운 채, 맹위를 떨치는 지옥의 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시가 파괴될 때까지,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성문 의 초소에서 단 한 발자국도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폼페이 최후의 날 에드워드 불워 리턴 '폼페이 최후의 날' : 불워 리턴은 폼페이의 최후를 극화시켰다. 주 인공 글라우쿠스와 이오네의 사랑은 이집트인 아르바체스의 방해를 받는다. 이집트인은 글 라우쿠스를 원형경기장의 맹수 앞에 내던진다. 투기장에 선 주인공은 갑자기 불덩어리가 쏟 아져 내리는 것을 본다. 아비규환-검게 드리운 구름은 커다란 납덩어리처럼 무거워 보였다. 사방은 캄캄한 한밤중 에 밀폐된 좁은 방에 갇혀 있을 때처럼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지자 베수비오산이 내뿜는 불빛이 한층 더 뚜렷해지고, 거세 게 타오르는 불꽃의 번뜩임도 더욱 강해졌다. 그 빛깔은 보통 불빛처럼 단조로운 것은 아니 었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변화하는 색채는 무지갯빛보다 훨씬 더 찬란했다. 맑은 남국의 하늘처럼 쪽빛으로 반짝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잔디처럼 짙은 초록으로 둔갑하여 끊임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다시 어느 순간엔가 눈동자를 태울 듯한 새빨간 불길이 구름기둥을 뚫고 혀를 날름대면서 아득한 곳까지 붉게 물들이고, 또다시 갑자기 유령을 연상케 하는 퍼 런 형체로 바뀌곤 했다. 억수 같은 불비가 그칠 줄 모르고 쏟아져 내리고, 때로는 발밑에서 땅이 흔들렸는데, 이번 에는 먼 곳에서 해일이 몰려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너무나 엄청난 재앙으로 공포에 떨고 있는 시민들은, 멀리 분화구에서 쉭쉭거리며 솟구쳐 함부로 움직이는 가스 소리마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번개처럼 허공을 찢어놓는 화산의 불빛 때문에 구름이 괴수나 무시무시한 짐승 모양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구름이 만들어 내는 괴수는 삽시에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만, 겁에 질려 갈팡질팡하는 시민들의 눈에는 그 것들이 폼페이에 재앙을 내리는 거인으로, 고난과 죽음을 빚어내는 거대한 손으로 보이기도 했다. 여러 곳에 질척질척한 잿더미가 무릎까지 쌓였고, 콜타르 비슷한 끈적끈적한 액체가 집안 으로 흘러들어 악취를 풍기면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게다가 공중에서 처박히는 돌덩어리 에 강타당한 건물들이 파괴되어 흩어지는 잔해가 거리를 계속 메우고 있었다. 지진 또한 더 욱 거세져서 가만히 서 있어도 발이 휘청거리고 미끄러져서 나동그라지기 일쑤였고, 평지에 도 수레를 세워 둘 수가 없을 정도였다. 고무공처럼 등등 떠다니는 큰 돌들이 공중에서 서로 부딪치는 일도 있었다. 돌끼리 부딪 치면 산산조각이 나며 불꽃이 튀었는데, 그 불꽃으로 곳곳에 화재가 일어났다. 불에 휩싸인 집과 포도밭이 어둠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극도의 공포 속에서 시민들은 희망없는 암흑에 서 구출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암흑을 떨쳐 버리려고 신전이나, 시장, 아니면 광장 에 횃불을 켜 넣기도 했지만, 횃불은 계속 퍼붓는 화산재와 바람에 일순간도 버티기 힘들어 한다.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암흑세계일터이다. 이처럼 미미한 횃불이었지만 그 빛을 좇아 피난민의 움직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어떤 이는 바닷가 쪽으로 급히 가는가 하면, 어떤 이는 반대로 바닷가에서 되돌아오기도 했 다. 썰물이 휩쓸고 나간 뒤였다. 게다가 바닷가에는 몸을 숨길 마땅한 건물이나 나무가 없었 기 때문에 돌, 재, 진흙, 불덩이 등이 마구 퍼부어대도 피할 곳이 없었다. 여기서 많은 사람 들이 부상당하거나 목숨을 잃었다. 공포에 가득 찬 사람들은 정신없이 허둥댈 따름이었다. 기진맥진한 그들은 낯익은 사람을 만나도 반가워할 줄을 몰랐으며, 인사를 나누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서로의 고통을 의논하거나 서로의 처지에 대해 충고할 정도로 여유를 지 니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제고 제 머리 위에 떨어질 불덩어리들만이 그들의 현실 이었다. 그들은 그럴듯한 피난처로 몸을 숨겼다가 다시 도망가고 도망갔다가 다시 피난처를 찾고 하는 일에만 매달려야 했다. 문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요소는 몽땅 마비되고 파괴되었다. 뜻밖의 횡재를 만났다는 듯이 회심의 미소를 띠고 욕심껏 한 짐 가득 짊어진 도둑이 재판소 앞을 머쓱한 얼굴로 지나갔 다. 어둠 속에서 부인은 남편을 부르고 아이는 부모를 애타게 찾았지만, 모든 것이 속수무책 이었다. 군중은 본능에 따라 밀려다닐 뿐이었다. 자기보존이라는 원시법칙 말고 모든 사회준 칙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비규환 한가운데에서 글라우쿠스가 이오네와 장님 소녀 니디아를 데리고 걷고 있었다. 갑자기 바다로 달리는 수백 명의 무리가 그들 곁을 지나갔다. 글라우쿠스와 이오네는 어둠 속에서 군중에 밀리오 쭉쭉 앞으로 나갔고 니디아를 놓치고 말았다. 간신히 길가에 비켜 서 서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큰 소리로 니디아를 불렀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 다. 이오네와 함께 오던 길을 되돌아가며 두리번거렸으나 역시 찾을 수가 없었다. 눈먼 소녀 는 군중 속에 묻혀 어디론가 밀려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친구, 그들의 보호자를 잃다니! 니디아는 그들의 길잡이였다. 완벽한 어둠에 길들여진 그녀는 폼페이 골목골목을 훤히 알고 있었고, 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인 바다로 그들을 안내해 줄 참이었다. 그들은 앞이 막막했다. 미궁 속을 맴도는 기분이었다. 지치고 낙담한 그들은 그래도 쉬지 않고 걸음을 옮 겼다. 화산재는 계속 머리 위로 퍼붓고, 부서진 돌멩이들이 발치에서 불꽃을 튀겨댔다. "이제 한발짝도 걷지 못하겠어요. 자꾸만 재 속에 빠져 들어가요. 나의 가장 아끼고 사랑 하는 분, 당신이나 어서 피하세요. 나는 운명에 맡기고 어서 혼자 가세요." "그런 말일랑 하지 말아요, 내 사랑. 당신과 같이 죽을 수 있다면, 당신과 함께 사는 것보 다 더 행복할 것이오. 그런데 어디로 가야 좋을 지 모르겠군요. 같은 길을 빙빙 돌고 있는 것만 같소. 여기는 한 시간쯤 전에 지났던 곳 같소." "저기 저 지붕을 보세요. 날아온 돌이 부숴 버렸어요. 이곳에 있다가는 돌에 맞아 죽고 말 겠어요." "오, 번개가 이렇게 고마울 수가! 저쪽에 행운의 신을 모신 신전이 보이는군요. 저 현관 아래에 피해 있으면 돌벼락은 면할 것 같군요." 글라우쿠스는 연인의 팔을 끌고 간신히 신전까지 왔다. "거기 누구요?" 어둠 속에서 먼저 온 사람의 무뚝뚝한 소리가 들려 왔다. "에잇, 아무러면 어떻소. 세상에 미쳐 돌아가는데 적과 동지가 따로 있겠소." 이오네는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다가 비명을 지르며 글라우쿠스의 팔에 매달렸다. 글라우 쿠스도 그쪽을 보고 그녀가 비명을 지르는 이유를 알았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 두 개의 큰 눈이 불을 내뿜고 있었다. 그 때, 또 불꽃이 공중으로 치솟으며 섬광이 신전을 비스듬히 비 추어 그 매서운 눈동자의 주인공을 뚜렷이 보게 해주었다. 그것은 글라우쿠스와 싸우기로 되어 있던 사자였다. 그리고 사자 옆에는 거인 니제르가 우뚝 서 있었다. 이 검투사는 사자 가 곁에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다. 불빛이 사자와 거인을 확실히 보여 주었는데, 둘 다 극도의 공포 속에서 자신의 본능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사자는 검투사에게 기댈 듯 가까이 붙어 있었으나, 검투사는 사자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이 위험을 피해 위험 속에 들어앉아 있는 동안 횃불을 치켜 든 한 무리의 사람들 이 신전 앞을 지나갔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이었다. 엄청난 재난이 불러온 공포도 그들의 신앙심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신에 대한 외경심이 공포를 떨쳐 버리게 했다. 그들 은 초기 그리스도쿄의 오류를 그대로 받아들여 오랜 동인 최후의 심판날이 가까웠다고 믿어 왔기 때문에,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무리를 이끄는 듯한 연장자가 날카 롭게 울리는 큰 소리로 말했다. "보라! 신은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내려오셨다! 신은 하늘에서 불을 내리신다! 강한 자, 권 세 있는 자, 우상을 섬기는 자, 새나 짐승을 믿는 자, 신의 자녀의 죽음을 비웃는 자에게 천 벌이 있을 것이다. 회개하라!" 뒤를 이어 신도들이 저음으로 소리높이 외쳤다. "그리스도를 믿으시오! 회개하시오!" 신도들이 천천히 행진했다. 그들이 손에 손에 높이 든 횃불은 바람에 힘들게 펄럭이면서 도 꺼지지 않았고, 그들의 성가소리는 엄숙한 위엄과 경고를 띠고 드높이 울려 퍼지며 모퉁 이로 사라져 갔다. 주위는 다시 어둠이 지배하고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화산재가 멎는 때도 있었다. 글라우쿠스와 이오네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 손에 자루를 든 노인이 젊은이에게 기대어 신전 앞을 지나갔다. 젊은이의 손에 들려 있는 횃불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그들의 얼굴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욕심 쟁이 노인과 놈팽이 아들이었다. "아버지, 빨리 가거라. 네 맘대로 가거라." "굶주리며 도망칠 수는 없는 일! 돈주머니나 이리 주세요." 욕심쟁이 노인의 아들은 아버지가 들고 있는 돈주머니를 빼앗으려고 했다. "네놈이 아비의 것을 빼앗으려고? 이 날강도야." "아무렴. 이 위급한 상황에 부모 자식이 어디 있어? 이 구두쇠, 차라리 죽어 버려!" 아버지를 때려눕힌 아들은 돈주머니를 빼앗아 들고 뭐라고 소리치면서 달아나 버렸다. "오, 신들이여!" 글라우쿠스가 외쳤다. "신들은 어둠 속에서는 눈을 감고 계시는가? 이런 죄악이 많아지면 죄 없는 사람도, 죄 있는 사람도 모두 한꺼번에 멸망해 버리고 말겠어요. 자, 이오네 빨리 갑시다." 이오네와 글라우쿠스는 마치 토굴 속을 탈출하려는 사람처럼 더듬더듬 암흑 속을 헤쳐 나 갔다. 이따금씩 뱉어 내는 베수비오 화산의 불빛이 거리를 비춰줄 때면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불빛에 드러나는 거리의 모습은 어느것 하나 그들에게 희망이나 기운을 줄 수 없었다. 뜨거운 잿더미와 무너지는 도시의 잔해, 그리고 여기저기 나 뒹구는 시체들만이 눈에 뜨일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실적이고 가장 생생한 공포는 운명을 옥죄어 오는 화산이 질러대는 끔찍한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소리였다. 폼페이의 환상 지크문트 프로이트 '옌센의 '그라디바'에 나타난 망상과 몽상' : 빌헬름 옌센의 소설 ' 그라디바'에는 고고학자 노르베르트 아놀크 박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라디바는 아가 씨가 걷고 있는 것을 표현한 얕은 부조이다. 이 앞에서 아놀트 박사는 깊은 몽상에 잠긴다. 프로이트는 이 소설을 마치 자기 환자의 이야기를 대하듯 읽고 난 후,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아놀트 박사도 다른 고고학자처럼 그 참상을 직접 목격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라고 프로이트 는 믿었다. 꿈속에서 아놀트 박사는 79년 8월 24일 폼페이에서 그라디바를 만났다. 그는 그녀가 어린 시절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여자 친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이름은 조에 베르 트강으로서, '조에'는 '생명'을 뜻한다 불현듯 그는 오늘 자기가 방문한 것이 쓸데없는 일임을 깨달았다. 그는 자기가 찾던 여자 를 만나지 못했다. 그가 죽어서 땅에 묻히고 잊혀져야만,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될 때 비 로소 그녀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과를 주고 있는 파리스의 판결(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황금사과를 준 것으로, 이 사과는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돌아가게 된다. 나중에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을 그려 놓은 벽을 따라가고 있을 때, 그는 자기 앞에 그라디바가 지난밤에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지난밤처럼 바로 그 노란색 기둥 사이의 층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기 상상력 때문에 일어난 환상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어제 실제로 보았던 것을 다시금 환상으로 보는, 환영의 노리개가 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상상에서 나온 꿈 같은 허상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제자리에 달라붙은 채 슬픈 목소리로 외쳤다. "오, 그대가 존재한다면 그대가 살아있다면 좋으련만!" 바로 그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텅 빈 정적을 깨고 들려 왔다. "앉지 그러세요, 당신은 매우 지쳐 보여요." 순간 노르베르트 아놀트의 심장은 멈추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머릿속에서 이유를 찾 아 보려고 애썼다. 허상은 말을 할 수 없지만, 환청이 그를 기만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한 손으로 기둥을 짚고 기댄 채 환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것은 그라디바였다. "그대여, 흰 꽃을 가져오셨나요?" 그의 온몸이 오싹해 왔다.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진실로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그대'라 는 표현을 써서 말했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다시금 입을 열어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어젯밤 이렇게 말했지요. 그대는 내가 잠들려 하고 있을 때 나를 불렀으며, 그대 는 내 곁에 서서 내 얼굴이 대리석처럼 변했노라고 말씀하셨지요. 언제 이 모든 일이 일어 났나요? 나는 그걸 기억해 낼 수 없어요. 그러니 그대가 내게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셨으면 해요." 노르베르트는 이제 침착해졌고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그대가 대광장의 아폴로 신전 층계에 앉아 있던 밤이지요. 그리고 바로 그날 밤 베수비 오 화산재가 당신을 덮어 버렸어요." "아, 그래요. 이제 알겠군요. 그걸 잊고 있었어요. 그러나 나는 어떤 것이 중요한 지 생각 해 봤어야 했겠지요. 그대가 어젯밤에 말씀하셨을 때, 그건 정말 뜻밖의 일이라 나는 몹시 당황했어요. 그러나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면, 이 일은 거의 2,000년 전에 일어났어요. 그대는 그때 살아 계셨나요? 그대는 그렇게 늙어 보이지 않아요." 아직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 그는 다소 우물거리면서 대답했다. "아니, 정말, 나는 79년도에 살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아마... 그래요. 그건 아마도 폼페이 가 파괴되던 시절로 나를 데려갔던 꿈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정신적인 경향일 거예요. 그러 나 나는 첫눈에 그대를 알아보았지요." 옆에 서 있던 그녀가 놀라는 기색으로 되물었다. "나를 꿈속에서 알아보셨다구요? 어떻게 알아보셨나요?' "무엇보다도 그대만이 보여 주는 특유의 걸음걸이를 보고서..." "그대가 눈치챘다는 말인가요? 내가 정말 특별한 방식으로 걷는가요?" 그녀의 놀라움은 점점 더해 갔다. 그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대도 알고 있나 보지요.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걸음걸이를 가진 여인이 지요. 그러나 또 한 가지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나눈 그대를 알아보았소. 그대의 몸, 그대 의 얼굴, 그대의 몸가짐, 그대의 옷, 이런 것이 로마의 얕은 부조에 표현해 놓은 인물과 일 치하거든요." 그녀가 전에 쓰던 어조와 비슷한 어조로 되받았다. "아, 그렇군요. 로마에 있는 얕은 부조에 나타난 내 모습이요. 나는 그걸 생각하지 못했어 요. 그리고 깨닫지도 못했지요. 그건 어떻게 생겼나요? 그대는 실제로 그걸 보셨나요?" 그는 자신이 얕은 부조에 얼마나 푹 빠졌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자기 방 에 걸어 놓고 지내는 복제주조물을 독일에서 찾아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그는 그것을 매일 바라보았으며 그것은 어떤 젊은 폼페이 여인이 자기가 태어난 그 도시의 포도 위를 걷고 있는 모습이리라는 생각을 떠올려 주었고, 그의 꿈은 이러한 그의 생각에 확신을 가져다주었으며, 이제 자신이 이 죽은 도시에 다시 와서 발굴작업을 하여 그 녀의 흔적을 찾아내겠다고 굳게 결심하게 된 것도 꿈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 다. 그리고, 어제, 그가 메르쿠리우스 거리의 모퉁이에 멈추었을 때, 그녀가 갑자기 자기 앞 에 나타나서, 얕은 부조의 여인상처럼 포도 위를 걸어가고 있었으며, 그녀는 아폴로 신전을 향하여 가는 것처럼 보였는데, 가던 길을 되돌아 걷더니, 멜레아그로스의 집 앞에서 사라졌 다고 덧붙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래요, 아폴로의 신전을 찾아가려 했지요, 하지만 나는 이곳에 왔어요." 그가 말을 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그대가 당신의 조상이 살던 집으로 되돌아가려는 멜레아그로스의 후손일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내가 그대에게 그리스말로 말했을 때, 그대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소." "그것이 그리스말이었던가요? 나는 몰랐어요, 아니 잊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대가 오늘 다 시 오셨을 때, 나는 그대가 말씀하신 것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어요. 그대는 어떤 사람이 그 곳에 있었고, 아직도 살고 있었으면 하고 바라신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나는 당신이 말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어요." 노르베르트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진정 그녀가 아니고, 오늘 그녀를 만난 장소 와 똑같은 곳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았음은 단지 환상이라고 확신했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우리의 대화를 생각해 보면, 우리 둘 다 마찬가지 환상에 빠져 있는 것 같지만, 그대는 지나친 상상을 삼가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잠시 말을 멈추었던 그녀가 이렇게 덧붙였다. "그대가 아까 이야기했던, 내 특유한 걸음걸이란 무엇을 말하나요?" 이 점에 대한 궁금증이 그녀를 사로잡았음이 분명했다. 그가 말을 꺼냈다. "그대가 알고 싶다면..." 그러나 그는 갑작스레 말을 멈췄다. 그 순간 간밤에 그녀에게 예전에 아폴로 신전의 층계 에서 그랬듯이 계단에 누워 잠을 자라고 요구했을 때, 그녀가 갑자기 일어나서 떠난 일이 두려움과 함께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조용하고 평화로운 눈길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 말도 잇지 않고 가만히 있자 그녀가 말했다. "그대가 그곳에 누군가 살아 있기를 바랄 때 나를 기억해 주어서 고마워요. 그러므로 나 는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거예요." 이 말을 들은 노르베르트는 두려움이 사라졌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가 마치 부조 속에서 그랬듯이 내 곁을 걷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 할 것이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일어섰고 그의 요구를 들어줄 채비를 차렸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벽과 기둥 사이를 왔다갔다 맴돌았다. 그녀는 그가 마음속에 새겨놓은 조용하고 유연한 태 도를 잘 보여주었다. 그녀는 발바닥을 거의 수직으로 세웠다. 그 순간 그는 그녀가 발이 드 러나 보이는 옷 밑에 샌들 대신 투명한 모랫빛 나는 얇은 가죽신을 신었음을 처음으로 깨달 았다. 그녀가 제자리로 되돌아와 앉았을 때, 그는 그녀가 신은 신발이 얕은 부조에서 신은 신발과 다르다는 사실을 얼떨결에 말해 버렸다. 그녀가 대답했다. "모든 것은 시간이 흐르면 변하게 마련이지요. 샌들은 더 이상 편하지 않아요. 이 신이 먼 지와 빗물을 더 잘 막아 주지요. 그런데 어째서 내게 걸어 보라고 하셨지요?" 그는 그녀가 걸을 때 뒤에 오는 발이 각별히 수직을 이루는데, 그 모양이 특별하다고 대 답하고, 고향에서 여러 주 동안 현대 여성의 걸음걸이를 지켜보았노라고 덧붙였다. 그는 단 한 번 그녀와 유사한 걸음걸이를 보았으나, 군중 속으로 묻혀 버리는 바람에 자세한 관찰을 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참 안됐군요. 왜냐하면 이 같은 확인은 분명히 커다란 과학적 가치를 가진 것일 터이며, 만일 그대가 그 같은 사실을 증명했더라면, 아마도 여기까지 먼 길을 d지 않아도 되었을 테 니까요. 그런데 그대가 말씀하시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라디바란 여자는 과연 누구입니 까?" 그녀가 되물었다. "내가 얕은 부조 속의 그대에게 붙인 이름이랍니다. 그대의 진짜 이름을 몰랐으니까요, 지 금도 모르지요." 그의 마지막 말은 물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조에에요." 그는 고통스럽게 외쳤다. "이름이 아주 예쁘네요. 그러나 내 귀에는 아주 씁쓸한 빈정거림처럼 들립니다. 조에는 생 명을 뜻하니까요." "운명을 따르는 수밖에 없지요. 나는 오래 전부터 죽음에 익숙해졌어요. 오늘로써 내 시간 도 다한 것 같군요. 그대는 내 죽음을 애도하는 꽃을 가지고 오셨군요, 오서 그 꽃을 주세 요." 그는 일어나면서 손을 뻗은 그녀에게 수선화 한 송이를 내밀었다. 그녀가 꽃가지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사람들은 행운이 따르는 사람에게 장미를 선사하지요. 그러나 내게는 그대 손 에서 나온 망각의 꽃이면 그만이지요. 나는 내일 같은 시각에 이곳에 다시 올 수 있도록 허 락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만일 그대가 다시 한번 멜레아그로스의 집 앞을 지나친다면 우 리는 다시 양귀비가 피어 있는 정원 가장자리에 앉을 수 있을 거예요. 문지방 위에는 '하 베 (Have)'라는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잊지 마세요. '하베'예요." 그녀는 가 버렸다. 어젯밤처럼 땅속으로 꺼지듯이 현관의 모퉁이로 사라졌다. 프로이트는 아놀트 박사와 그라디바의 두 번째 만남을 한줄 한줄 분석했다. 꿈속의 아가 씨는 정신치료사 역할을 하면서 실제로 다시 나타난다. 왜냐하면 자기 친구의 망상을 보고, 그녀는 그의 말을 반박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그가 현실과 다시 접촉하게 만들 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튿날,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아놀트는 점심때 멜레아그로스의 집으로 되돌아가야 했 고, 이 시간을 기다리면서, 그는 낡은 성벽을 끼고 나 있는, 평소 익숙하지 못한 길로 폼페 이에 도착했다. 수선화 꽃가지가 저 세상의 말을 전해 주는 것처럼 보여, 그는 꽃을 꺾어 들 고 갔다. 한편, 모든 고대의 과학은 이 기다림 속에서 그에게 마치 이 세상에 대해 가장 헛 되고 가장 무심한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는 또 다른 근심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문제를 아는 일이다. "그라디바가 비록 유령의 시간인 정오에만 되살아난다 해도, 죽은 동시에 살아 있는 그라디바 같은 존재의 육신이 나타나는 것은 어떤 본질을 가진 것일까?" 그는 또한 자신이 찾는 여자를 더 이상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을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아마 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그녀는 되돌아올 허락을 받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 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기둥 사이에서 다시 볼 때, 그는 그녀를 자기 상상의 속임수로 여 긴다. 이 때문에 그는 괴로움의 소리를 지른다. "오, 그대가 존재한다면, 그대가 살아 있다면 좋으련만!" 단지, 이번에 그는 너무 비판적인 정신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환영은 그가 이 흰 꽃을 그녀에게 가지고 왔는지 묻고, 이야기 상대를 다시금 당황케 만들면서 긴 대화로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우리 다른 독자들은 살아 있는 존재인 그라디바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소설가는 우리에게 지난밤에 그녀의 눈길 속에 나타난 마지못한 태도와 차 가움은 사라지고, 호기심 많고 또한 호기심을 끄는 표현이 생겼음을 알려 준다. 그녀는 아놀 트를 철저히 연구하고, 그가 간밤에 한 말의 뜻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녀가 잠들기 위해 몸 을 뻗었을 때, 어떻게 그가 그녀의 곁에 있었는가? 그녀는 자신이 고향과 함께 사라졌다는 사실과, 얕은 부조의 여자가 발모양을 가지고 고고학자를 매료시키는 꿈이 있었음을 이렇게 해서 알게 된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발걸음을 연구하도록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녀는 모 든 점에서 얕은 부조 위의 여자와 똑같으나, 한 가지 점에서만 다르다. 그녀는 샌들 대신 노 란 모랫빛 나는 얇은 가죽신을 신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 신이 먼지와 빗물을 막아 주기 때 문에 오늘날에는 더 잘 맞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확실히 자기 친구의 망상에 잘 적응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반박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사실상 모든 내용을 말해 준다. 단 한 번, 그녀는 애정을 느끼는 상태에서 자기가 맡은 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돌에 새긴 모습에 정신이 팔린 그가 첫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고 단언할 때이다. 이처럼 대 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얕은 부조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던 그녀는 아놀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곧 그 주제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망상과도 같은 모호한 말만 제외한다 면 그의 말속에는 실제와 현실에 대한 암시가 포함되어 있을 것 같았다. 예를 들어, 그가 거 리에서 그라디바의 발걸음을 확증하게 되지 못한 점에 대해서 그녀가 애석해할 때가 그렇 다. "참 안됐군요. 왜냐하면 이 같은 확인은 분명히 커다란 과학적 가치를 가진 것을 터이며, 만일 그대가 그 같은 사실을 증명했더라면, 아마도 여기까지 먼 길을 오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요." 그녀는 또한 그가 자기의 얕은 부조에 그라디바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은 조에라고 말한다. "이름이 아주 예쁘네요. 그러나 내 귀에는 아주 씁쓸한 빈정거림처럼 들립니다. 조에는 생 명을 뜻하니까요." "운명을 따르는 수밖에 없지요. 나는 오랠 전부터 죽음에 익숙해졌어요. 오늘로써 내 시간 도 다한 것 같군요. 그대는 내 죽음을 애도하는 꽃을 가지고 오셨군요. 어서 그 꽃을 주세 요." 이처럼 그녀는 그에게 수선화 꽃가지를 달라고 한 뒤에, 자신이 다음날 정오, 같은 장소로 그를 다시 보러 오겠다고 약속하고 떠난다. "고마워요. 사람들은 행운이 따르는 사람에게 장미를 선사하지요. 그러나 내게는 그대 손 에서 나온 망각의 꽃이면 그만이지요." 오랜 죽음 뒤에 짧은 순간 되살아나는 여인에게 서글픔이 어리고 있다. 우리는 희망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희망을 품을 수도 있다. 아가씨가 아놀트의 망상을 그처럼 완전히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분명히 그를 해방시켜 줄 마음을 가졌기 때문 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사람은 반대에 부딪힐 경우 스스로 길을 끊고 갇혀 버리고 만다. 따라서 진정한 망상을 치료하려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망상을 가진 사람과 같은 처지에 서 서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로 환자를 철저히 연구해야 한다. 조에가 망상 치료에 적합한 인물이라면, 우리는 우리 주인공이 품은 망상을 그녀가 어떻게 다스리는지 볼 수 있을 것이 다. 우리는 그 망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도 알기를 원한다. 망상을 치료하고 관찰하는 일 이 함께 일어나는 예나 그에 소용되는 기간은 별로 흥미롭지 않지만, 망상이 깨지는 과정에 서 비로소 망상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음은 무척 흥미롭다. 우리는 이같은 병리현상을 흔한 사랑이야기쯤으로 치부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망상을 치료하는 사랑의 힘을 과 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주인공이 그라디바에게 사로잡혔다는 사실은, 그것이 비록 과거와 무생물을 향한 열정이라 해도, 또한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아메데오 마이우리의 활약 보물창고 같은 폼페이는 오랫동안 사람들을 유혹해 왔다. 최근에 고고학자들은 과학적인 방식으로 유적지를 발굴해서 다시 복원하고 보호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37년 동안 발굴 작업을 지휘한 마이우리는 폼페이의 옛 모습을 되살려 놓았다. 로베르 에티엔 : 1924년부터 1961년까지 37년 동안 한눈 팔지 않고 이 위대한 학자는 과 학적인 방법으로 도시를 완벽하게 밝혀 낸다. 그는 유적지의 하부지층을 발굴하여 새로운 역사적 발전의 진상을 제공했고 과거 여러 차례 발굴된 집을 복원함으로써 그의 선배들보다 더 훌륭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1924년부터 1941년까지, 그는 아본단차 거리 근처를 발굴했는데, 그는 그곳의 전체 모습을 복원하고자 그 거리의 한쪽 편에서 여러 군데의 지역(insulae)을 파헤쳤다. 이때 발굴한 곳 은 6, 7지역, 6지역과 10지역 사이의 거리, 메난드로스의 집이 2/3이나 차지하고 있는 10지 역(1지구, 10지역, 4번호, 이하 '1, 10, 4'로 표기)과 8지역이다. 마이우리는 아본단차 거리를 140m나 발굴하여 원형경기장을 찾아냈으며, 이와 함께, 폼페 이 젊은이들이 심신을 연마하던 체육관도 발굴했다. 동시에 그는 신비의 별장을 완전히 발 굴하는 데 성공했고, 이미 뮈라가 1813-1914년에 찾아낸 도시 외벽을 빙 둘러 조성되어 있 던 8m 넓이의 호를 파헤쳤다. 이로써 그는 성벽과 망루의 구조를 연구할 수 있었음은 물론 10번 망루를 복원할 수도 있었다. 이어서 마이우리는 스쿠올레 거리와 세모꼴광장 사이 지역, 즉 도시 남부 지역으로 발굴 작업을 확대해 나갔다. 우선 언덕에 가득 쌓인 화산잿더미를 치워야 했는데, 이 작업을 통해 폼페이의 가장 독특한 면모가 빛을 볼 수 있었다. 언덕의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깎은 대지 위에 세운 집들이 탁 트인 전망을 만끽하며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이우리는 수평적 전체상으로 폼페이를 밝히는 발굴작업에 만족할 수 없었다. 중 앙대광장, 신전, 성벽, 가장 오래된 집 따위 가장 주요한 지점, 지형적으로도 가장 비중 있는 지점의 발굴을 수직적으로 심화하는 것만이 아직도 불명료한 채 남아 있는 도시의 기원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이우리는 여러 해 동안 로마 시대 이전과 더 나아가 삼니움 시대 이전의 지층을 체계적으로 파헤쳐 나갔다. 특히 그는 삼니움 시대 이전 의 성곽을 발견하여, 쿠메 전투(B.C. 474-450)를 치른 뒤, 이 도시에 널리 확산된 그리스 문 화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 시대와 삼니움 시대 세모꼴광장에 세워진 도리아식 신전의 역사를 밝혀 냈으며, 에트루리아 시대(B.C. 525-474)에 이곳 주민이 향유한 에트루리아적 요소가 신전의 양식과 아폴로 숭배에 나타나고 있음을 증명했다. 시민광장의 발굴로 삼니움 전기에 건축된 상점군을 찾아낼 수도 있었다. 상점군이 에워싼 탁 트인 광장 의 위치는 그 방향이 틀릴 뿐 중앙대광장의 위치와 일치했다. 와과의사의 집(6, 1, 9-10)과 같은 사유저택의 하부지층에서 발견된 초기 거주지의 유적을 통해, 마이우리는 석회암을 깔 아 놓은 안마당의 건축 연대를 삼니움 시대 중반 또는 후반까지 소급시겼다. 이 사실은 폼 페이의 안마당이 달린 집은 도시 주거계획 발달과정의 초기보다는 말기와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결국 마이우리는 건축학적 조사와 분석을 통하여 A.D. 62년의 지진을 겪은 뒤에 재건된 건물들을 지적할 수 있었다. 마이우리가 메난드로스의 집(1, 10, 4)과 신비의 별장, 그리고 연인들의 집(1, 7, 7)과 윤리 주의자의 집(5, 1, 18)같은 소박한 집의 지붕을 다시 만들어 놓은 데 대해 여행자들은 그에 게 감사해야 한다. 바실리카의 법정, 이스타키디우스의 묘, 세모꼴광장을 둘러싼 주랑, 세모 꼴광장의 성스러운 우물 주위에 삼니움 행정관 누메리우스 트레비우스가 세운 매우 아름다 운 단주식 신전 따위도 마이우리가 복원한 기념물이다. 1943년 9월, 여러 차례 폭격은 폼페이가 겪어야 했던 또 하나의 참변이었다. 그러나 다른 곳과 같이 여기서도, 파괴는 고고학적 성과의 밑거름이 되었다. 박물관 아래에서 지진에도 전혀 손상되지 않은 식당 벽화를 간직한 별장이 나타났고, 아본디오 외고가 성벽 밖 폭탄 웅덩이에는 로마 지배 이전 또는 로마 시대로 소급할 수 있는 디오니소스 신전이 숨어 있었 던 것이다. 1951년, 새로운 재원 덕분에, 그리고 폼페이에서 파낸 화산재 찌꺼기로 도시 주변의 농지 를 비옥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발굴이 다시 시작되었다. 성벽에 안 쪽 66헥타르 가운데 26헥타르에 해당하는 지역이 아직 발굴 안 된 상태였고, 성곽 외부와 교외지역도 발굴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누체리아문에 이르는 남북종단로 양편의 1, 2지구 를 발굴할 필요가 있었다. 그곳에서 1지구 9지역, 2지구 3지역, 1755-1757년에 발굴되었다가 다시 묻힌 율리아 펠릭스의 집이 속해 있는 2지구 4지역을 파헤쳤다. 2지구 5지역은 포도밭 으로 덮여 있었다. 1지구와 2지구를 접하며 동서로 뻗은 아본단차 거리는 중앙대광장에서 시작해 사르니아문에 이르렀으며, 그 거리는 1,080m나 되었다. 마리네문과 대극장, 그리고 스타비아문과 원형경기장 사이의 성벽을 따라 수세기에 걸쳐 쌓인 50만 미터제곱이 넘는 흙을 퍼냈다. 이렇게 해서 8지구의 아름다운 집들이 다시 모습 을 드러낼 수 있었는데, 이 집들은 계곡 아래 펼쳐진 산과 바다의 경관을 즐길 수 있도록 큰 창과 테라스를 조성하고 있었다. 성벽 또한 돋보였으며, 특히 누체리아문 밖에 자리잡은 공동묘지에서는 폼페이 사회를 구성한 다양한 계층의 이러저러한 면모를 밝힐 수 있는 비문 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 20년 동안, A. 프란치시스, F. 제비, 최근에는 마담 이룰리 체룰리가 발굴을 계속해 오고 있다. 이들의 노력으로 6지구와 8지구의 서쪽에 있는 파비우스 루푸스의 집과 율리우 스 폴리비우스의 집(9, 13, 1-3)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발굴책임자들은 화려한 영광 못 지않게 무거운 고민거리를 짊어지고 있다. 해마다 100만 명이 넘게 찾아오는 관광객으로부 터 유적을 보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폼페이의 기적을 수호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마침내 이 탈리아 정부로 하여금 오랜 무관심을 떨쳐 버리고, 1976년에 특별법을 제정한 이래 계속해 서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하도록 이끌었다. 동시대인이 평가하는 마이우리 귀도 피오베네'이탈리아 여행기' : 이탈리아의 작가 귀도 피오베네는 '이탈리아 여행기 '에서 고명한 고고학자의 초상을 생생하게 재현해 놓았다. 평균보다 작은 키, 한쪽 어깨는 약간 처져있다. 고고학의 왕자인 마이우리가 당신을 흘겨 보는 듯하다. 당신을 압도해 오는 맑은 눈은 비스듬한 시선을 던진다. 시선은 열정적이며 강 렬하지만, 부드러움과 풍부한 호소력을 지닌다. 타고난 온화함을 갖춘 우아한 태도, 눈에 보 이지는 않지만 매력적인 따뜻함, 이것이 마이우리가 지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상냥함이다. 나폴리는 이러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이방인을 맞이한다. 나폴리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연극에 서 아르덴숲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을 이끌어 주는 날개 달린 요정을 안내자로 가진 듯한 인 상을 간직할 수 있다. 마이우리는 고고학을 훌륭히 가르치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여러 시간 동안 종종걸음으로 산책을 즐긴다. 고고학자는 책상에 파묻혀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의 연인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박학한 지식을 마구 늘어놓아 상대방을 골치 아프게 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 중에서 상대방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만 골라서 이야기할 줄 아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그 런데 나는 이 기술이 점점 빛을 잃어 가는 시점에 그를 방문하지 않았나 걱정이 된다.). 한 마다로 그는 이 영예로운 도시의 위대한 영주이다. 마이우리는 자신이 발굴한 영지에서 방 문객을 접견하면서 주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보스코레알레의 보물 프랑수아 바라트'고고학', 54호, 1973년 1월 : 1895년, 폼페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보스코 레알레에 있는 큰 별장을 발굴하던 인부가 포도주통에서 한 무더기의 은제품을 찾아냈다. 화산이 폭발할 때 노예가 급히 숨겨 놓으려 했던 것으로 보이는 은제품 중 완전한 식기 한 벌이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오랜 동안 공화제 아래의 로마 사회에서는 귀금속으로 식기를 만들어 사용하는 행위를 비 난했다. 폴리니우스는 로마 원로원 의원에게 초대받은 카르타고의 대사들이 식사 때마다 겨 우 두세 가지 은그릇으로 손님을 치르는 것에 무척 놀라워했다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제국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엄청난 보물은 오리엔트의 정복과 카르타고 전쟁의 결과로 '충 속의 파괴자, 황금'이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다는 사실을 증언해 준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은제품은 사치품목이었다. 은술잔을 한 점 구입하는 것도 꽤 큰 투 자였는데, 은술잔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일은 병사나 상점주인에게 무척 행복한 일이 었다. 따라서 보스코레알레에서 출토된 109점으로 이루어진 은식기 한 벌은 부유한 재산가 들의 전유물일 뿐이었고, 그들조차 한 번에 한 벌 전체를 구입할 수는 없었을 것이 분명하 다. 예술품으로 분류될 수 있는 특히 주목할 만한 은제품-부조를 새겨 넣은 세 점의 피알레 (phiales, 신주를 담는 손잡이가 없는 큰 잔)-은 조상대대로 전래되어 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올리브 가지 문양으로 장식된 화병 밑에 전소유주의 것으로 판단되는 이름이 세 개 나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다른 제품들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보스코레알레의 마지막 주인 소유로 된 것 같다. 1세기 초에 이르면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 용도로 은제품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보스코 레알레의 보물 중에 하나인 여성이 화장할 때 쓰였을 정교하게 장식된 세 점의 거울에서 이 러한 사실이 확인된다. 그러나 보스코레알레의 보물 중 대다수는 식기, 술잔, 장식소품 들이 다. 1세기 로마 식기의 전형적인 일습을 보여 주는 메난드로스의 집 출토품처럼 다양성을 지 니고 있지는 않지만, 보스코레알레 출토품은 중요한 품목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중 대다수가 한 짝을 이루고 있었다. 제품 뒷면에 새겨 넣은 무게표시는 종종 단일 제품의 무게를 나타 내는 것이 아니라, 한 짝 전체의 무게를 나타내고 있다. 문자 또한 그림이나 모자이크 따위 장식문양을 통해 그릇이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살펴볼 수 있다. 그릇 가운데 어떤 그릇들은 풍부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그릇들이 장식용으로 이용되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날마다 하루 세 끼 식탁에 등장하지는 않았을 지라도 중요한 연회에서는 긴요하게 쓰였을 것이다. 그러한 그릇들은 연회를 베푸는 주인의 자랑거리였다. 페트로니우스가 쓴 '사티리콘'에 등장하는 벼락부자 트리말키오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은식기! 오, 나의 은식기! 오, 나의 사랑!" 위대한 예술성과 능숙한 장인정신 헬레니즘 예술의 위대한 중심지인 페르가몬과 알렉산드리아의 금속공예술은 놀랄만큼 높 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것은 제국 초기 로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다양한 금속공 예품이 전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와 장인이 이탈리아로 건너와, 금속공예술과 장식기 법을 보급시켰다. B.C. 13년, 아우구스투스의 로마 귀환을 기리기 위해 세운 평화의 제단 (Ara Pacis)을 둘러싼 벽면 하단에서 볼 수 있는 정교하고 우아한 소용돌이치는 나뭇잎 장 식은 페르가몬 은제품의 장식기법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수직으로 뻗은 중앙의 줄기 양쪽으로 대칭을 이루며 휘감아 도는 나무줄기 문양은 보스코레알레의 물병에서도 발 견된다. 물병에서는 나뭇잎 사이사이에 동물의 무리를 새겨 넣거나 화환 위로 동물의 무리 를 등장시켜 구성에 활기를 주고 있다. 이것은 헬레니즘 시대에 고유한 나뭇잎 문양이 그 본질적 특징인 구성에서의 유연성을 잃지 않고, 상상력이 풍부히 가미된 장식기법을 통해 기하학적으로 해석된 훌륭한 본보기이다. 소재는 다르지만 같은 장식적 취향을 엿볼 수 있는 두 짝의 물잔이 있는데, 한 짝은 올리 브 나뭇잎으로, 또 다른 한 짝은 플라타너스 가지로 장식되었다. 전자의 러푸세이(repousse 안쪽을 쳐서 겉으로 무늬를 도드라지게 하는 기법) 기법으로 처리한 둥근 올리브 형태는, 부드럽고 평평한 올리브잎의 날카로운 예각과 대주를 이룬다. 한편, 후자의 둥근 플라타너스 잎 외곽선은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술잔을 장식한 올리브 문양은 메난드로스의 집 출토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보 스코레알레의 보물이 장식기술면에서나 예술적인 표현면에서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유 연한 선과 세부의 섬세한 표현에서 이 금은세공품이 높은 예술적 수준과 특별한 품격을 지 녔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탁월한 기법, 소재 선정에서의 섬세한 감수성, 자연취향이 또다시 드러나는 작품으로서 두 루미와 황새를 새겨 넣은 술잔을 예로 들 수 있다. 헬레니즘 예술,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일강 유역의 예술에서 빌려 온 이 주제는 순간의 동작들을 만화적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 다. '황새 일가의 불행'에는 달갑지 않은 방문객과 드잡이질하는 부모, 먹이를 빼앗으려는 손님과 부모의 싸움, 그리고 배고픈 아기 황새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잔칫상에 올릴 음식을 표현해 넣은 꽃병에는 식욕을 돋우는 여러 가지 장면이 등장한다. 은식기는 화려한 장식을 가지고 있다 트리말키오의 집에서 열린 잔치를 묘사한 페트로니우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식기의 풍부한 다양성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식기는 로마뿐만 아니라 지방의 여러 도시에도 널리 퍼져 있었고, 야만인도 즐겨 찾게 되었다. 술잔, 잔받침, 쟁반 따위 평범한 그릇을 설명 하고 나서, 페트로니우스는 화려한 식탁보와 신화적 장면을 장식해 넣은 값진 꽃병에 대해 서도 장황한 묘사를 들려준다. 자유민, 트리말키오의 잔칫상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해 골의 등장이다. 페트로니우스는 해골이 장식되어 있는 술잔을 빌려 인생의 덧없음을 한바탕 늘어놓는다. 이제 쾌락주의자의 금언이 대식가와 입맞춤한다. 그러나 이 장면은, 저 유명한 해골술잔이 일러주듯, 로마 사람들의 연회석상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손님이다. 두 술잔에는 각각 네 개의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리스의 시인 소포클레스와 메난드로스,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과 에피쿠로스, 그리고 이름 모를 인물의 해골이 표현되어 있다. 표현 된 형상은 뚜렷하지만 각각 설명을 달고, 교훈을 제시하는 명문을 새겨 넣어 내용을 보충하 고 있다. 한 해골이 무거운 지갑(슬기)과 인간 영혼의 상징인 나비를 저울 양편에 놓고 무게 를 다는 장면이 있는데, 명문에는 "살아 있을 때 즐겨라, 삶은 한 편의 연극이다."라고 일러 준다. 폼페이인은 블랙 유머(black humour)를 즐겼다 친구에게 헌주하는 해골 옆에는 "쓰레 기를 공경하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조롱도 등장한다. 제논이 비난하는 눈초리로 바라보 고 있고, 에피쿠로스가 커다란 케이크의 큰 조각을 쥐고 있다. 디오니소스와 관련된 장면이 표현되어 있는 다른 술잔은 완전히 새로운 정신을 담고 있 다. 물론 소재의 기원은 동일하지만, 헬레니즘 예술과 디오니소스 축제의 술잔치는 디오니소 스가 인도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7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조직한 행렬을 떠올리게 해준다. 그러나 여기서 주제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표현된다. 폼페이의 그림이나 훨씬 뒤에 석관 장식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종교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없는 것 이다. 이 경우에 금속공예사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요소는 소재의 회화적이고 감성적인 면인데, 억센 사자나 코끼리와 대조를 이루는 사랑의 신, 가면이나 화환으로 변장하고 음료 수 그릇에 자주 등장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요소가 그것이다. 헬레니즘 예술, 로마 예술, 그리고 고전주의 양식으로의 융합 보스코레알레의 보물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어떤 알렉산드리아 여인의 얼굴을 돋을 새김 기법으로 장식해 넣은 피알레(phiale, 주둥이가 나팔처럼 벌어진 운두가 얕은 잔)이다. 여인은 이집트 도시를 의인화하는 코끼리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클레오파트 라 7세안 것 같다. 여인은 그리스-로마, 이집트 종교의 다양한 특징을 나타내는 요소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것은 로마 공화정 말기의 특정 사회계층에서 모든 종류의 종교를 활발 히 믿었음을 말해 주는 증거이다. 정교한 금박을 입혀 악센트를 돋운 더할 나위 없이 훌륭 한 예술품인 이 피알레는 방문객들의 호기심을 끌기 위해 장식장에 진열되었으리라고 생각 된다. 리푸세이 기법으로 아우구스트 황제 부부를 새겨 넣은 다른 두 점의 피알레도 마찬가 지 용도로 쓰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보스코레알레의 보물 대부분에서 사용된 금속공예술의 장식기법은 일반적 으로 말해 헬레니즘 예술의 소형 미술품에서 차용해 왔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어떤 장식소 재는 로마 예술에서 응용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 예술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포도주병(oenochoe)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희생자의 목을 따는 승리자'라는 소재 는 트라야누스 대광장과 람프사코스에서 출토된 금화(B.C. 4세기)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개인소장품이 된 보스코레알레의 보물 두 점에서는 로마 고유의 장식요소를 이용하려는 장인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B.C. 3세기와 B.C. 2세기의 화가, 조각가는 자신의 로마 전통적 표현양식을 당대의 사건을 표현하기를 즐겼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로마 예술은 그리스의 전통적 요소와 전혀 다른 발전모습을 간직한 로마의 전통적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과감 히 병렬시키기도 했다. 예를 들어 B.C. 1세기 초, 일반적으로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제단이라고 부르는 기념물이 건조되었는데, 여기에는 스코파스 양식으로 제작된 네레이데스 와 트리톤과 함께 호구조사와 희생의식(그 의미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을 표현한 부조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절충주의, 말하자면 두 가지 서로 다른 예술전통을 제멋대로 병 렬시키는 양식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고전주의 양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융합 의 가장 눈부신 결과물을 들자면, 권력이 인정하는 공식예술 분야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평 화의 제단이며, 소형 예술품 분야에서는 보스코레알레의 보물이다. 실제로 보스코레알레의 보물 중 술잔 두 개의 한 면에는 아우구스쿠스-원로원 위원이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훌륭 한 갑옷을 바치는 장면?-가 다른 면에는 티베리우스가 등장한다. 보스코레알레의 보물은 제국 초기 로마 귀족사회와 부르주아 사회의 세련미를 나타낸 것 으로 해석할 수 있다. 소형 예술품 사용자의 증가와 사치 풍조가 결합되면서 이러한 제품의 생산은 급격히 증대되었다. 매우 놓은 기술수준과 함께 장식소재의 선택과 그 표현기법-여 러 가지 금속세공술이 동원되었는데, 정교한 자신감을 보여주는 보스코레알레의 보물은 금 속공예가의 예술성과 캄파니아 지방 대지주의 호화로운 생활을 증명해 주고 있다. 폼페이의 두 번째 죽음 앙리 드 생블랑카 '과학과 미래' 1986년 3월 :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에도 살아 남은 폼페이가 사람들의 손에 파괴되고 있다. 이탈리아 정부는 유럽 공동체가 폼페이 유적 복원 에 쓰라고 제공한 360억 리라를 유용하게 쓰지 못했다. 식물의 번성, 습기의 공격, 문화파괴 주의, 여행자의 끊임없는 발길 등에 오염되어 폼페이는 유령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전혀 새 로운 고고학적 비극이 전개되고 있는 셈이다. 1979년 부활절 휴가를 맞은 수많은 사람들이 폼페이를 방문한다. 여러 건물 가운데, 일반 에게 개방되지 않은 사유저택 한 채가 있는데, 그곳 안마당에는 돌을 다듬어 만든 기둥이 여럿 서 있다. 사람들은 얌전히 구경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는가 보다. 한 무리의 관 광객이 안마당에 들어가서는 서로 내기라도 하는 듯 돌기둥을 밀어대기 시작한다. 마침내 기둥들이 땅바닥에 드러눕고 만다. 관광객이 벌이는 이러한 '재미'는 흔한 일이다. 누가 기 둥을 먼저 넘어뜨릴 수 있는지 시합을 벌이는 일조차 있다는 보고도 있는 판이다. 베수비오 화산이 도시를 파괴한 지 1900년이 지난 뒤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 두 가지 사건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폼페이를 잘 아는 고고학자들은 그 점에 대해서 여러 차례 지적했다. 1980년 의 지진으로 유명한 유적지가 다수 파괴된 뒤에도 폼페이의 어리석음으로 폼페이는 끊임없 이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폼페이를 파묻은 재앙이 있기 17년 전, 한 차례의 지진이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화산이 분 출했을 때, 몇몇 건물은 재건축이 완료된 상태였으나 복구가 한창 진행중인 건물도 있었다. 정면의 일부가 파괴된 양모 시장이 그러했다. 사람들은 벽돌로 이 부분을 복원하고, 겉칠을 하려던 참이었다. 도시의 두 번째 탄생은 18세기의 점진적인 발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폼페이의 부활은 두 번째 죽음이기도 했다. 200년 넘게 계속되었고, 19세기에도 진 행된 초기 발굴작업이 파괴행위-조상들을 제멋대로 옮겨 놓고 비문을 무식하게 뜯어내다 니!-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재앙에서 살아남은 유적지가 변덕스러운 날씨와 식물과 사람에 게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폼페이는 아름다운 자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사진가들은 그곳 에서 작업하기를 즐겼다. 그러나 1980년 11월 23일의 지진으로 기둥들이 쓰러지고, 벽면 전 체나 벽면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으며, 2층 이상 건물의 위층이 주저앉았고, 어떤 건물들은 기울어지고 말았다. 그후 많은 구역의 출입이 통제되었고 곳곳에 받침대가 설치되었다. 그리 고 이탈리아 전역에서 그러했듯이, 갑자기 입장료가 150에서 4,000리라로 올랐다. "폼페이를 구하자." 이러한 구호가 전세계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귀기울이는 자가 과연 있을 것인가? 1983년, 폼페이 관리 당국이 유적지 파괴요소에 대한 기술적 평가와 동원될 수 있는 가능 한 복원방법을 제출해 달라고 프랑스의 고고학자 장 피에르 아당에게 의뢰했다. 아당은 보 고서를 작성했고, 나폴리의 장 베라르 연구소와 파리의 국립 과학연구소(CNRS)에서 발간되 었다. 1984년, 유럽 공동체는 폼페이 복구사업에 쓸 360억 리라에 달하는 기금을 마련했고, 1985년 초에 기금의 일부가 이탈리아 정부에게 지급되었다. 폼페이는 되살아날 것인가? 1985년에는 총감독관이 새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당의 제안사 항을 모두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결과는 유적지에서의 고고학적 작업을 전면 동결 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자기 시간과 자기 비용을 들여 현장확인을 하러 이 지역을 방문하는 고고학자들의 발걸음은 계속되었으나, 그들이 안고 돌아오는 것은 실망감뿐이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의 노력에도, 입장료가 몇 배나 올랐음에도, 막대한 예산 동원에도, 일 반에게 공개하는 구역을 현격하게 줄였음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악화되 었다. 아당의 보고서는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전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하다고 인정되 는 피렌체나 로마의 복원기구에 작업을 의뢰한 사실도 없었으며 계약을 체결한 것도 아니었 다. 360억 리라는 기술적이고 행정적인 문제 때문에 그대로 썩고 있었다. 폼페이는 오염되고 있다. 가장 심각한 원인은 사람이다 때때로 피해는 사람들의 무지로 생긴다. 유적지에는 해마다 거의 50만에 달하는 인파가 몰린다. 주변 지역의 큰 공원 꼴이 된 나폴리에는 여기저기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개방일이 면 폼페이에는 4,500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든다. 부활절 월요일에는 거의 2만 2,000명이 몰려든다. 관광객은 이곳저곳 기웃대며 돌아다니는데, 그들의 발걸음 밑으로 거리가 마멸된 다. 특히 돌로 마무리하지 않은 보도가 많이 마멸된다. 보도 속에는 납으로 만든 수도관이 지나고 있다. 수도관은 62년 지진 뒤에 임시로 설치했기 때문에 별로 깊지 않게 묻어 놓았 다. 관광객은 조금씩 조금씩 땅을 깎아 내고 마침내 수도관이 드러난다. 수많은 발이 수도관 을 짓밟고 다닌다. 수도관은 금이 가고 부서지고 이윽고 사라져 버린다. 석재로 마무리한 보도도 역시 몸살을 앓는다. 포석 이음새나 조약돌 모자이크에 균열이 생긴다. 사람들이 짓밟고 두드려대는 가운데 포석은 조금씩 마모된다. 단단한 용암으로 만든 차도의 포석만이 본래의 상태를 유지한다. 차도의 포석은 수레가 지나가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응회암이나 석회암처럼 닳기 쉬운 돌로 만든 보도의 가장자리 는 계속 패어 변형되고 만다. 이러한 사정은 로마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당시에는 훼손 된 부분을 복원하는 작업이 따랐다. 폼페이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보도로 걸어다닐 것이 아 니라, 차도를 이용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유명한 아본단차 거리의 보도는 사람들의 끊 임없는 발길로 닳아 버려 차도와 높이가 같거나 그보다 더 낮아졌다. 이처럼 파괴에는 직접적이지 않고 대체로 고의가 아닌 원인과 더불어 좀 덜 순진한 원인 도 있다 사방에 낙서가 속속 늘어나고 있는데, 야만인들(?)은 상태가 양호한 그림을 골라 낙서하기 를 즐기는 것 같다. 또한 그들은 그림이 그려진 석고벽의 껍질을 즐겨 벗겨 내곤 한다. 그들 은 출입이 금지된 곳을 함부로 들어가 문화파괴 행위를 자행한다. 사람들은 회반죽 그림이나 도기 조각, 또는 대리석 조각을 주워 모은다. 이것은 그들이 가 장 즐기는 일이다. 특히 그림이 주요 대상이다. 그림을 전체로 떼어다가 파는 것은 어려울 것이므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전체 그림 중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장식적인 요소, 인물, 동물 따위, 또는 작은 그림을 잘라 낸다. d런 행위는 어제 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전통은 여행객에 의해서이건 그 지역에 사는 주민에 의해서이건 충실히(?) 존속되면서 캄파 니아 지방에서 하나의 전통을 이루고 있다. 폼페이에 관한 저작을 읽을 때면, 독자들은 작은 조각상 따위 소품들이 별로 출토되지 않 는다는 사실에 매우 놀란다. 이것은 최근에 발굴을 시작한 곳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헤르쿨라네움의 어떤 집에서 다양한 소품들이 발견된 적이 있는데, 이 것은 놀라울 만큼 드문 일이다.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둘 다 베수비오 화산의 재앙을 받아 들여야 했지 않은가! 다른 나라들도 헤르쿨라네움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 그러나 폼 페이는 사정이 달랐다. 그곳에서의 유물의 유출은 걱정할 만한 수준에 달했다. 실제로 이제 는 주머니나 가방에 넣어 갈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이제 관계당국은 고대 유물의 복제품을 현장에 전시하는 이조차 포기해야 할 지경에 몰렸다. 하물며, 폼페이인이 사용하던 가구-관광객에게 특별한 역사적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 분명하지만-를 어 떻게 제자리에 전시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복원작업이 파괴를 가져올 수도 있다. 장 피에르 아당은 이렇게 말한다. "확실히 모든 것이 고고학자와 관계당국이 모르는 사이 에 진행된다. 그렇다고 그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우리는 나폴리에 가까이 있음을 잊지 말아 야 한다. 또 유적지의 책임자들은 실제로 폼페이를 복원하는 데 나폴리 지방의 사업체를 동 원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 건축기술에 정통해 있는 이 사업체들이라도 복원작업에 관해서는 백지상태나 다름없다." 복원작업을 위해서는 아주 세심한 배려와 기술상의 전문지식이 필요 하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모두 충족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복원작업이 상태의 악화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를 가속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더 좋은 방법을 알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이것은 옛날 방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일 것 이다. 사람들은 상인방을 단단한 나무로 다시 만들고, 곰팡이가 쏠지 않도록 적절히 처리하 는 방법을 몰랐을 것이다. 충분히 약품처리를 하지 않은 부드러운 나무는 빨리 썩을 것이며, 해충이 모여들 것이며, 참담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더 한심한 예도 있다. 폼페이 북서부 에 있는 멜레아그로스의 집을 복원할 때에는 5m 곱하기 11m짜리 방에 5톤이 넘는 기와를 얹기 위한 목적으로 서까래와 지붕널을 이었으나, 삼각보강재를 세우지 않았다. 결국 강철로 보강했지만 지붕은 무너져 내려앉았다. 치명적인 현대 건축재료의 이용 보고서에 따르면 콘크리트의 배합이 잘못된 경우가 많았다. 거듭되는 실수의 결과인가, 재 료원가를 낮추기 위한 어리석음인가? 콘크리트가 떨어져 나가고 철골이 앙상하게 드러나 부 식되고 마침내 건물 자체의 파괴를 재촉하는 것이다. 고대의 석조건물을 보호하기 위해 입 힌 모르타르에서도 유사한 실수가 발견된다. 모래 함유량이 많은 저질 모르타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금이 가기 쉬우며, 여기에 습기와 식물이 침투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무능력과 불성실의 불명료한 배합은 벽화 복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대의 복원가들은 그림의 표면인 회반죽과 대리석 벽면을 고착시키기 위해 철사를 이용했다. 그러 나 이것은 보기에도 흉할 뿐만 아니라, 철사에 녹이 슬면 회반죽이 파괴되고 만다. 그러나 현대 복원가들에게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있다고 해도 옛날 방식보다 더 나은 점이 없다. 화반죽을 완전히 떼어 내지 않고 대리석에 다시 붙여 놓기 위해, 그들은 강화해야 할 표 면 가장자리의 떨어져 나갈 듯한 부분을 오히려 제거해 버렸다. 그리고 회반죽과 대리석 사 이에 철막대를 집어넣어 고대인이 발라 놓은 모르타르를 제거했고, 그 사이는 액체 콘크리 트를 흘려 넣어 빈틈을 막았다. 이때 옛날 모르타르를 완전히 긁어 내지 않으면 곤란한 문 제가 발생한다. 배합이 다른 모르타르가 서로 달리 작용해 표면에 금이 생기는 것이다. 결국 벽면 전체 표면이 떨어져 버린다. 새로운 모르타르를 흘려 넣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1979년에 복원한 피그미족의 집 겉 칠한 벽면에 대해서 여러 차례 관찰이 있었다. 이 벽면의 처리해야 할 높이는 1.5m인데, 회 반죽이 가장 잘 흘러 들어갔을 경우 22cm까지 흘렀고, 반대 경우는 4cm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하중을 잔뜩 받고 있는 석재에 적절한 처리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들은 얼마 뒤 똑 같은 작업을 반복해야 했다. 한 번 더 인부들은 회반죽의 가장 자리를 긁어댔고, 마침내 벽 화 전체는 사라지고 말았다. 1세기 폼페이 건설자들이 20세기 복원가들의 일을 쉽게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파리에서 실시한 분석 결과는 아주 세심하게 처리한 회반죽 벽면도 그 아래층에 있는 것과 동일한 성 분으로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원가를 절약하기 위해 회반죽의 석회 함량을 떨어뜨린 고대 모르타르는 쉽게 부서지고 만다. 그것은 바람에 침식되기도 한다. 또한 습한 곳에서는 물을 빨아 올려 벽화의 상태를 망친다. 벽과 겉칠의 재료에서 보이는 석회 함량의 차이가 회반죽 표면을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다. 끝으로 여러 가지 잡석을 함부로 사용하여 벽을 쌓아 올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기름진 땅도 무서운 적이다 농부들은 베수비오 화산 인근의 농토를 무척 높이 평가해 왔는데,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기름진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의 땅은 수미터 두께인데, 베수비오 화산 덕분에 빨리 흡수되 는 암염 또한 풍부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의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캄파니아의 어떤 지역에서는 밀을 두 번 수확하고 세 번째는 기장을 거둔 뒤, 가끔 네 번째로 채소를 거두어 들일 수 있다고 보고했다. 오늘날에도 이 지역 농부들은 조생종 채소류를 여러 번 수확하고 있으며, 과수원에서조차 채소를 기른다. 똑같은 토양이 별로 두텁지는 않지만, 폼페이 유적 지 밑에도 깔려 있다. 그런데 이 비옥한 토양이 또 하나의 재앙을 가져오고 있다. 국립 자연사 박물관의 에모냉은 유적지에서 31종의 기생식물을 구별해 냈다. 아칸서스에 서 야생당근, 위험한 회향, 메꽃, 찔레를 거쳐 망초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잡초가 무성하다. 우선 식물은 맨땅을 침범한다. 관광객이 방문하는 지역에서는, 식물과의 싸움이 그럭저럭 수 월한 편이다. 관광객의 발걸음이 원군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반면,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고 울타리를 두른 집 속에 있는 헐벗은 땅-주랑으로 둘러싸인 안마당, 정원, 안마당-은 금세 식물로 뒤덮이고, 잇달아 벽까지 공격을 받는다. 식물의 공격은 파손이 심한 집들과 아직 발 굴이 진행되지 않은 구력에서 특히 기술을 부린다. 식물은 회반죽을 발라 놓은 바닥에도 들어선다. 모자이크로 장식된 바닥에 치명적인 타격 을 줄 수도 있다. 모자이크로 장식된 바닥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도 있다. 작은 모자이크 조각이 하나라도 빠질라치면 식물은 그 자리를 공략해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관광객은 말 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집 대여섯 채를 둘러볼 뿐 다른 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 대여섯 채 를 둘러볼 뿐 다른 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파괴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폼페이 유럽 순회전을 대비하여 아직도 원형 그대로 돌이나 대리석 바닥을 간직하고 있는 발굴지역의 단 면도가 제작되었다. 전체 유적지 면적에 비해 그런 지역은 무척 좁았다. 이 지역의 집들 바 닥은 일반인 거주지의 경우에는 모르타르로, 부유층 거주지의 경우에는 모자이크로 마감되 어 있었다. 그런데 수천 평방미터에 달하는 이 지역의 바닥 마감재도 계속 훼손되어 왔음이 분명하고 머지않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처럼 마감재가 파괴되어 떨어져 나가 버린다면, 석조구조물 자체도 더 이상 버티기 힘 들 것이다. 대리석 벽 꼭대기에 찔레, 회향, 금작화 따위가 뿌리를 내리고 곧 무성해진다. 그 후 결과는 뻔하다. 건물 내벽을 따라서 쥐오줌풀, 멜리티스풀, 미역취 따위가 달라붙어 뿌리 를 내리고 벽면을 뒤덮어 버린다. 뿌리가 굵어지며 더욱 단단히 자리를 잡고, 이렇게 해서 생긴 틈으로 습기가 침투한다. 담쟁이 덩굴 또한 치명적이다. 견고히 달라붙은 담쟁이덩굴은 벽면에 압력을 가하고 모르타르 따위로 마감한 겉면을 더 단단히 들러붙기 때문에 인부들이 담쟁이 덩굴을 해체하려다가 겉면을 파손하기가 일쑤이다. 치명적인 실수, 복원할 수 없는 고고학적 대재앙 이러한 재앙에 맞서 싸우려면, 끈질기고 세심한 청소부와 복원전문가가 필요할 것이다. 오 늘날 폼페이의 출입금지 구역을 둘러보면, 잡초로 뒤덮인 벽, 균열이 생긴 대리석 구조물, 금이 간 기둥, 조각이 하나 둘씩 빠져 달아나고 있는 모자이크 등을 금방 찾아볼 수 있다. 식물의 공격과 습기의 침투, 사람들의 약탈과 무관심은 폼페이 지각구조의 불안정만큼 유적 지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파괴는 눈에 띄지 않는 점진적 비극이다. 그러나 그 뒤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폼페이는 잘못된 복원작업을 웅변해 주는 슬픈 본보기가 되고 말았다. 다시 말 해 폼페이야말로 고고학적 대재앙의 증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