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 프리아모스의 보물 지은이:에르베 뒤센 출판사:시공사 봉사자:김봄 제1장. 기원이 된 소설 한동안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의 전기를 쓰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작가 는 슐리만의 자서전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고, 이야깃거리들은 트로이 발견자가 자신의 업적 을 미화시켜 놓은 것들중에서 취했다. 작가는 미케네 발굴자가 좋아하던 레스티나 포도주와 해수욕, 그리고 아테네에서 런던까지 보내어 세탁과 다림질을 해오던 그의 셔츠들에 대해 썼다. 슐리만 부인의 심한 복통과 그리스 처가 사람들의 기질도 물론 빼놓지 않았다. 논란 의 여지가 많은 인물에게 으레 쏟아지는 비난들, 즉 사기를 쳤다거나 조작을 했다거나, 혹 은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라는 의견들은 그냥 무시하면 되었다. 그러한 악평은 사업가를 모함 하는 지식층에게 동조하는, 악의에 찬 사람들로부터 나온것이었다. 자신의 삶을 모험의 연속으로, 또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전문단체에 대해 거둔 승리로 기술 함으로써 슐리만은 하나의 신화를 창조했다. 황금을 캐는자, 개척정신, 낭만적 영웅의 신화 등이 그것이다. 바그너와 동시대인이었던 그는 또 다른‘4부극’의 주인공이었다. 전주곡은 독 일 낭만주의와 그리스-로마 신화의 영향이 한데 어우러진 전설 속에 파묻혀 지내던 가난한 유년기였다. 이 사업가는 20년동안 세 번이나 유년기의 꿈을 실현시킨다. 그가 가졌던 꿈은 호메르스의 그리스를 찾아내여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발자취를 따 라 걸어보는 것이었다. 제1막은 수습기간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제2막은 막대한 재산의 형 성기였으며, 대단원을 장식한 것은 트로이 유적의 발굴이었다. “인생의 황혼기에 나는 가난 했던 유년시절에 품었던 방대한 계획을 실현할수 있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게 시작되었 다. 그는 호메르스의 서사시를 단순히 이야기로만 보지 않았다.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슐 리만은 그 서사시가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고 믿었고, 그 서사시에서 지리적 배경을 제 공받게 된다. 그가 발굴해낸 장소들, 즉 이타카, 트로이, 미케네, 티린스가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BC2000년경의 에게해 세계를 되살려낸 그리스 선사 고고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프리아모스의 보물’과 ‘아가멤논의 마스크’, 그리고 슐리만의 순진한 소원에 따라 서사시의 세계에서 따온 이름을 단 유물들의 광채로 찬연히 빛나는 고고학의 아버지. 학자집단이 보인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자로서의 소명을 다하고 여러 언어에 능통했 던 독학자 슐리만이 사망한 지 한세기가 흘렀지만, 그와 그가 발굴해낸 것들은 여전히 관심 의 제일선에 있다. 인디애나 존스 시대에 그는 소설, 희곡, 또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 고 있다. 어빙 스톤은 <그리스의 보물>에서 그의 모험들을 서술하고 있고, 브루노 바이엔은 <알려지지 않는 에피소드들>중 일부를 무대에 올렸으며, 베치 욜라스는 얼마 전 그 작품에 곡을 붙였다. 슐리만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1972년 동독의 비밀경찰 라 슈타지는 활동 금지된 한 학회를 조사했다. 미국인 교수가 자신의 말이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150년 전 슐리만이 태어난 집의 크리스마스트리 옆에서 우상파괴적인 발 언을 했던 것이다. 월리엄 캘더에 의하면, 호메르스의 세계를 탐험한 탐험가는 현실과 허구 를 혼동했으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거짓말은 서슴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 슐리 만의 가장 큰 업적 가운데에는잘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고, 그에 대한 이런 평가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영향으로 가장 유명한 베를린 명예시민 가운데 한 사람에 대한 소송 으로 이어졌다.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지금, 예전에 베를린 박물관에 기증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혼란속에서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진 트로이의 유물이 모스크바의 푸슈킨 박물관 지하창고에서 발견되면서 또 한 번 반전이 일어난다. 슐리만을 둘러싼 신비는 여전히 풀리 지 않고 있다. 요한 루트비히 하인리히 율리우스 슐리만이 미래의 그리스 선사 고고학자가 되리라는 걸 예견해 주는 조짐은 없었다. 그는 1822년 1월 6일 메클렘부르크의 노이부코에서 태어나, 여덟살이 될 때까지는 바렌과 펜츨린 사이에 있는 안케르샤겐이라는 더 작은 도시에서 살았 다. 아버지 에른스트는 그곳에서 목사직을 맡고 있었다. 이 루터교 목사는 얼마 안가 소문 에 휩싸였다. 그는 자신의 하녀와 관계를 가졌으며, 1831년 부인이 산고로 사망한직후 그녀 와 결혼했는데, 이 사실을 알게된 상급성직자들이 이듬해 그로하여금 목사직을 그만두도록 하였다. 슐리만은 아버지가 아주 위선적이고 네로 황제보다 더 포악하며 미친 개 같다고 일 기에 썼다. 1833년 슐리만은 칼크호르스트에 목사로 있는 삼촌에게 맡겨져 노이스트렐리츠 의 직업학교에 입학한다. 3년후에에는 학업을 중단하고 퓌르슈텐베르크에 있는 식료품 가게 에서 점원으로 일하면 빚에 쪼들리고 가족을 도왔다. 그는 가게를 청소하고, 청어, 버터, 설 탕, 술, 기름을 팔았다. 슐리만은 당시 자신이 들은 유일한 그리스어는 중학교를 중퇴한 방앗간 남자가 술에 취해 낭송하던 것이라고 했다. 호메르스의 시 몇 구절을 듣기위해 그는 브랜디를 건네주었다. 슐 리만은 <일리아드>를 듣기 위해 그 대가를 치렀고, 이 첫 횡재로 무척 즐거워한다. 1841년 일어난 사고로 그는 상점을 떠난다. 큰 포도주통을 옮기다가 다리를 다친것이다. 그는 신세 계로 떠나려 했지만 아버지가 반대했다. 여름 동안 하인리히는 로스토크에서 회계학 강의를 들었다. 대양은 여전히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11월 함부르크에서 배를 타지만 예정했던 남미, 콜롬비아, 베네수엘라를 여행하지는 못했다. 그가 탄 배는 난파해 네덜란드 해안에 닿 았다.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군인이 될 뻔하다가 어느 교역회사에 들어가 사환으로 일하게 된다. 청년은 곧 돈의 흐름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원리를 깨닫고 숫자와 단어들을 능란하게 다루는 법을 터득한다. 심부름을 하는 동안 기억력 연습을 하고 여가를 이용하여 외국어를 익힌 그는 몇 달 만에 영어, 불어, 포르투갈어,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고고학자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만든 어린시절의 놀랄 만한 추억들 중에서도 더욱 슐리만의 상상력을 자극한 것은 아이네이아스가 아버지 안키세스, 아들 아스카니우스와 같이 화염에 휩싸인 트로이를 빠져나가는 그림이었다. “트로이 유적과 미케네의 왕묘를 발굴해낸 곡괭이 와 삽은 이미 벼려져서 날은 세우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그의 여섯 형제와 여자친구인 루 이즈와 민나를 위해서 땅에 파묻힌 보물들을 캐내게 된다. 그런 것들은 안케르사겐에 꽤 많 았다. 자정이면 늪에서 손에 은잔을 든 젊은 여자가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어떤 산적 기사가 황금요람에 아들을 넣어 매장했으며, 그의 재산은 아직 발견되 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다. 집 정원에는 이전에 살던 사람의 망령이 나타난다고도 했고, 근 처에 있는 중세 성의 지하엔 수많은 비밀이 숨어 있었다. 히인리히는 소꿉동무이자 애인인 민나에게 미래의 발굴품들을 주기로 맹세했고, 실제로 금화 5000프랑을 그녀에게 유산으로 남긴다. 학자도 고고학자도 아니지만 고대사에 심취한 그의 부친은 그에게 헤르쿨라네움과 폼페이의 비극적인 운명, 그리고 발굴자들이 곡괭이로 그 도시를 기적적으로 다시 세상에 드러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호메로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용사들의 무훈을 전부알고 있던 이 아이가 트로이의 유적을 발견해야겠다는 야심을 품은 것은 한 장의 그림을 보고 난 후이 다. “1829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루트비히 예러의 <세계사>를 받은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나는 트로이가 불타는 광경과 그 거대한 성벽, 아이네이아스가 아버지 안키네스를 등에 업고 아들 아스키니우스의 손을 잡고 도망쳐 나오던 스케아 성문을 그린 삽화를 보았 다. ”아버지는 회의적이었지만 하인리히는 트로이가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리라고 확신했다. “만일 그러한 성벽이 존재했다면 그것이 완전히 파괴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거대 한 폐허를 남겼을 것이고 어디엔가 여전히 그 폐허가 존재할것이다. 오랜 세월 먼지로 뒤덮 힌 채 남아 있을 것이다. ” <이타카, 펠로폰네소스, 트로이>의 서문에는 트로이에 대한 야심에 관한 또 다른 일화가 언급되어있다. “나는 1832년 크리스마스에 비록 형편없는 실력이었지만 트로이 전쟁중에 일어난 주요 사건들과 오디세우스와 아기멤논의 모험담을 라틴어로 지어 아버지께 선물로 드렸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내가 말을 시작할 무렵부터 아버지 께선 호메르스의 작품에 나오는 영웅들의 무훈담들은 나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나를 열광 케 했다. ” 오늘날 어떤 이들은 어린시절 그가 호메르스 작품에 보인 이같은 애착과 그 애착이 낳은 욕 망을 의심하기도 한다. 예러의 책은 1875년에 쓴 편지에서 처음 언급되는데, 그 편지를 쓸 당시 슐리만의 나이는 53세였다. 그의 서재에는 그 유명한 삽화가 수록된 1828년판<어린이 세계사>가 발견되었지만, 그 책을 언제 구입했는지는 알수 없다. 책에 있는 ‘하인리히 슐리 만’이란 서명은 필적학자의 감정결과 어린아이의 필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슐리만 이 1857년에 초판을 발행한 이래 수차례에 걸쳐 재출판한 문집에서 어린 그를 사로잡았던 안케르샤겐에 얽힌 전설을 빌려온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 근사한 이야기도 지어잰 것이 거 의 확실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과거를 재구성하는데 발휘한 상상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호메르스 세계에 대한 열정, 그리고 그 세계를 발굴해 내려는 의지를 유년기까지 거슬러 올 라가게 할 만큼 성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슐리만의 사례에 흥미를 보였다. 그의 저서들을 읽은 프로이트는 발굴에서 층위 의 중첩 이미지를 정신적 인상의 보존문제에 관해 차용했다. 1899년 그는 한 친구에게 이렇 게 썼다. “이 사람은 프리아모스의 보물을 발굴해 냄으로써 행복을 찾았다. 어린 시절의 꿈 을 실현하는 것만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맞는 말이다. ”그전의 편지 에서 프로이트는 사업가로서, 고고학자로서 그가 거둔 성공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썼다. “행복은 선사시대의 욕구가 뒤늦게 충족되는 데에서 생겨난다. 재산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 드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해, 프로이트는 분석이 성 공적으로 끝나 만족스러웠다. 그는 환자들 중 한명의 무의식속에 내재해 있던 원초적인 장 면을 떠올리게 하는데 성공하고는, “모두가 마치 슐리만이 모든 사람들이 상상력의 산물이 라고 생각해온 트로이를 다시 세상에 드러낸 것처럼 진행되었다. ”고 했다. 이와 더불어 고 고학자의 일생도 허구에서 벗어나 더 이상 자서전의 문구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슐리만 과 그의 저서에 관한 진실은 그 동안 출간되지 않았던 고 문서, 특히 아테네의 게나디오스 도서관 자료들이 출간됨에 따라 알려지게 된다. 보존된 자료는 이 인물에 걸맞게 엄청난 양 이었다. 수만 통의 편지, 수백장의 영수증, 일기장과 회하연습 문장들, 18권의 발굴기록과 여행수첩들은 수천 페이지에 달했고 10여 개국의 언어로 쓰여져 있었다. 이 자료들과 다른 증언들을 비교한 결과는 슐리만에게 그리 이롭지 못하다. 그러나 사생활을 은페했다고 해서 그가 발굴해낸것들의 가치가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슐리만 자신이 특별한 운명을 타고났다 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든가, 혹은 남들이 그렇게 믿도록 만드는 재주를 갖고 있다든가 하 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위대한 발견자이며 우리는 그의 모험을 따라가 면 되는 것이다. 제2장. 국제적 사업가로서의 성공 슐리만은 1844년 3월 1일 암스테르담의 베르나르트 헨리슈뢰더사에 경리사원으로 취직했 다. 보수는 적었지만 그는 성실히 일했고 급료는 인상되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는 문법책 한권과 사전, 그리고 페늘롱의 <텔레마코스의 여행>번역본으로 러시아 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며칠간 러시아어의 철자와 발음을 익힌 다음, 나는 평소 에 하던대로 내가 지어낸 짧은 이야기들을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외우기 시작했다. 아무도 고쳐주지 않았던 그 문장들은 정말 엉터리였을 것이다. ”슐리만은 오디세우스의 아들의 모 험을 낭독하기 위해 “주당 4프랑을 주고 가난한 유태인을 고용했다. ”고 한다. “러시아어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그는 매일 저녁 두 시간동안 내가 낭독하는 것을 들으러 왔 다. ”러시아를 배우기 시작한지 6주가 지난후 그는 모스크바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인디고 상 인들의 대리인인 바실리 플로트니코프에게 편지를 쓸 정도가 되었다. 암스테르담에서 경매 가 있을 때면 슐리만은 대리인들과 직접 가격협상을 했다. 1846년 1월 말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슈뢰더사의 대리인으로 파견됐다. 24세의 이 야 심만만한 청년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고, 아울러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우선 인디고만을 취급했다. “사업이 워낙 성공을 거두어서 1847년 초에 나는 도매상인으로 상인 조합에 등록할수 있었다. ”그가 가진 유일한 약점은 감정적이라는 것이다. 재산은 20만 프 랑이 채 안되었지만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자랑스럽게 여긴 슐리만은 어린시절 소꿉친구였 던 민나에게 청혼한다. 하지만 때늦은 일이다. 그녀는 이미 결혼을 한 몸이었다. “민나와 나 의 관계는 달아나는 대상을 자꾸만 쫓아가는 꿈과 같았다. 거의 잡았다고 느끼는 순간, 그 것은 또 다시 도망가버린다. ” 사업 수완에도 불구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길드가 그를 받아들이기까지는 수년을 더 기다 려야했다. 그러나 1849년 그는 모스크바에 지사를 창설했고,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만 갔 다. 그는 “나는 가장 교활하고 가장 엉큼하고 가장 유능한 장사꾼으로 통한다. 지금까지는 신의 축복이 같이 했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라고 썼다. 1852년 변호사 딸인 예카테리나 페트로브나 루스킨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와의 결혼생활은 불행 했다. 그들은 세자녀를 두었는데, 세르게이는 1855년에, 나탈리아는 1859년에(이 아이는 열 살 나던 해에 죽는다), 그리고 나데슈다는 1861년에 각각 태어난다. 프랑스와 영국의 지원을 받은 터키와 러시아 사이에 일어난 크림전쟁(1854-1856)이 계속 되는 동안 슐리만은 막대한 재산을 그러모은다. 차르의 군대에 보급품과 초석, 황, 납 따위 의 군수물자를 공급했던 그는 “사업과 그로 인한 북새통속에서 그럭저럭 사는 낙을 찾았 다. ”그러나 중개상에게도 나름의 근심이 따르게 마련이었다. 그가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 각했던 1854년의 일이다. 당시는 러시아 항구가 봉쇄된 탓에 물품들을 프로이센에 하적한 다음 그것을 육로로 운송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0월 4일 슐리만의 물품창고가 있던 리투아니아의 메멜시에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불은 그의 창고에는 옮 겨붙지 않고 았았고, 그느 거의 기적적으로 재산을 보호할 수있었다. 이윤은“자본가들이 자 신들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면 할수록”더욱 커져서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160만 프랑에 달 했다. 1850년 슐리만은 행방불명된 동생을 찾기 위해서 러시아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간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그는 그곳에서 거의 2년간 머무른 것으로 되어 있다. “1849년 초 미국에 이 민간 동생 루이스의 소식이 끊어져서 이듬해 그곳으로 갔고, 그때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 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그전까지만 해도 멕시코의 지배하에 있던 이지역이 1850년 7월 4 일 미합중국의 지위를 획득했을 때 캘리포니아에 있게 된것이다. 미국에 편입되자 당시 그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모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실제로 슐림나이 신세계에 발을 디 딘 것은 1850년 12월이 되어서였고, 1851년 봄에야 캘리포니아에 가게 된다. 그리고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것은 1869년의 일이었다. 당시 그의 여행수첩에 기록된것과 달리 슐리만 은 미합중국의 대통령도, 또 파나마 지사도 만난 것 같지 않다. 혹자는 이런 거짓말들이 추 후에 고고학자의 위조행위를 예고한다고 하기도 하고, 혹자는 ‘정신병적 경향’을 언급하기도 한다. 슐리만이 살아가면서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친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당초에 출판을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닌 그의 사적 기록이 단순히 작문연습일 수 있다 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가 방문한 나라에서 흔히 사용하는 표현들과 희귀하게 쓰는 표현들을 모아놓은 수첩은 외국어 연습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대상이었다. 혼자 여행하던 슐리만은 또 다른 삶을 꿈꾸며 현실로부터 벗어났다. 영어와 에스파냐어를 차례로 익히며 그는 체험담이나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들을 적었다. 1851년 6월 3일 밤에 일어난 샌프란시스코의 화재에 대한 그의 기록은 그같은 가정을 가 능케 한다. 그날 밤 슐리만은 새크라멘토에 있었다. 설령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다 하더 라도 재난의 현장을 목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화재는 이미 한 달전에 발생한 일이었 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날짜가 아니라 슐리만의 텍스트가 새크라멘토의<데일리 유니온>지 의 5월 6일자 기사를 그대로 1인칭으로 바꿔놓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펜을 쥐고 영어연습 을 하면서 그가 의도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미래의 독자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이야기의 주체가 됨으로써 하나의 사건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슐리만은 캘리포니아에서 27세의 젊은 나이에 열병으로 숨진 동생의 유산을 상속할 수는 없었지만, 새크라멘토에서 큰 재산을 모은다. 1851년에는 한 달에 12프로의 이자를 물리며 금캐는 사람들의 물자구입을 돕기 시작한다. 그의 사업은 번창했다. 9월에는 런던 로칠드가 의 지원을 받은 샌프란시스코의 한 은행가와 합작해서 온스당 17달러를 주고 사금을 사들 었다. 8개월간 하루 평균 8000달러어치의 금이 그레고리 익스프레스사의 기선에 실려 샌프 란시스코로 들어왔고, 같은 경로를 통해서 현금이 반대방향으로 운송되었다. 이번에는 슐리만이 열병에 걸렸다. 10월 처음, 1852년 1월에 두 번째로 걸린데 이어 3월말 세 번째로 걸리자 그는 서둘러 떠났다. 그의 동업자는 그가 자루의 내용물을 속였으며, 다 른 곳과도 그와 비슷한 거래를 해왔다고 비난했다. 4월 7일 슐리만은 그의 몫을 동업자에게 되팔고 새크라멘토의 <데일리 유니온>지의 광고란에 소유주의 변경을 알렸다. 슐리만은 그가 처음 도착했을 때 보다 훨씬 더 부유한 재산가가 되어 캘리포니아를 떠난다. 미국에 있는 그의 재산은 35만달러를 상회했다. 1852년 5월 19일 슐리만은 뉴욕을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다. 러시아는 다시 평 화로워지고 그는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1856년에는 <폴과 비르지니>의 번역본을 가지고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예전 같으면 “언어의 매력 때문에 사업을 포기하게 될까 봐”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석달 동안 그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즐겨 읽으며, 신학공 부를 하는 그리스 학생 테오클레토스 빔포스에게 지도를 받았다. 이 두 사람은 그 후 친구 가 되고 운명은 그들의 미래를 뒤바꿔놓았다. 1858년 여름 슐리만은 학교를 그만둔 뒤 쳐다 보지도 않던 라틴어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 언어도 역시 자유자 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고대세계에 대한 이런 열정은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슐리만은 그 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썼다. “저는 사업을 하지 않고는 살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하기 전에 저는 기꺼이 남유럽 국가들, 특히 제가 그리도 좋아하는 호메로스의 나 라를 가보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독일어로 말하듯 요즘의 그리스어로 말할 것입나 다. ”이것은 호메로스의 시와 시인이 태어난 나라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최초의 확실한 증거이다. 1857년 경제위기를 모면한 슐리만은 사업을 처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이를 포기하 고 여행을 떠난다. 그는 스웨덴과 덴마크, 그리고 근동지방으로 이어지고 이 여행에 대한 기록을 6개 국어로 남겼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면서 트로아스 에 대해 처음 언급했다. 그러나 여행자에게<일리아드>의 평원보다 더 깊은 인상을 심어주 었던 것은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간 일과 카이로와 예루살렘 사이의 사막, 페트라를 방문한 일이었다. 사실 슐리만은 서둘러 돌아왔어야 했다. “시리아에 이어 나는 1859년 여름 아테 네를 방문했다. 하지만 이타가로 떠나려던 차에 병이 나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올수 밖 에 없었다. ”특히 그는 파산한 채권자인 스테판 솔로비예프가 사기죄로 고소를 하는 바람에 이에 대처해야 했다. 몸도 완쾌되고 걱정거리도 해결한 뒤 그는 8월 다시 에스파냐로 떠난 다. 소송은 상당히 오래 계속되었고 슐리만은 다시 사업을 시작할수 밖에 없었다. 그는 대 량으로 수입하였고 점원들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는 항상 상점에 있으면서 상품을 소매상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도매거래를 했다. ”인디고 상인은 다른 상품도 취급하 기 시작했다. 1861년 남북전쟁 초기에 미국 항구들이 봉쇄됨에 따라 기름, 차, 면화 등의 무역은 상당한 이득을 남겼다. 2년 뒤 슐리만은 상고심에서 승소하고 12월에 상트페테르부 르크에 있는 회사를 처분했다. “당시 나는 예전 같으면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정도의 재 산을 갖게 되었다. ”이제 고고학자의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3장. 운명을 찾아서 1864년 5월에 쓴 편지에 슐리만은 “나는 세상을 보고 싶은 거대한 욕망을 품고 있었다. ” 라고 적고 있다. 아시아 여행은 12월에 시작해 6개월간 지속된다. 그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 쳐 일본으로 갔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여정을 마감한다. 그의 지적 형성기에서 결정적인 역 할을 한 이 여행은 이중의 단절, 즉 러시아 사업계와, 이미 오래 전부터 관계가 악화된 부 인과의 결별을 가져온다. 이 긴 여행을 통해 그의 미래를 예견할수 있다. 그는 이 여행을 정리하여 1867년<오늘날의 중국과 일본>이라는 첫 저서를 발표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신문에 기고할 목적으로 쓴 이글은 슐리만의 여행수첩과 여행중에 오간 편지들을 토대로 하고 있다. 사적인 기록, 편지, 신문기사들은 그 책의 집필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고고학 서 적들의 출판도 같은 과정ㅇ르 거치게 될 것이다. 슐리만은 거의 언제나 열광적이다. “노련한 여행자도 새로운 나라에 도착하는 순간은 마음 속에 극도의 호기심이 인다. 새로운 느낌은 더 즐거운 무엇인가를 주기 때문이다. ”그는 기 꺼이 힘든 일정을 택해 쉬지 않고 걸어서 단 하루 만에 만리장성을 보았다. 아시아의 연극 을 보고 찬탄을 금치 못하는가 하면, 아름다운 유적과 다양한 의상에 민감한 그는 자연풍경 에 전율하기도 한다. 나무와 꽃, 그리고 새들을 묘사하기를 즐기던 이 낭만적인 영혼의 소 유자는 히말라야의 산들 앞에서 넋을 잃었다. “너무나 웅대하고 장엄한 파노라마가 펼쳐졌 다. 그곳에서 나는 풍경의 아름다움에 그만 몸이 얼어붙어버렸다. ” 상인 출신인 그는 돈을 아껴 쓸 줄도 알았다. 그는 인도 열차의 이등칸만을 고집했고 식사 가 형편없다고 불평하며 방값도 깎았다. 이윤을 잊지 않고 있었던 이 사업가는 추천서와 신 용장을 사용하여 인디고와 차를 사들이는가 하면 양잠농가를 방문하기도 한다. 요코하마에 서 환율 때문에 몹시 화가 났던 그느 “일본 정부는 교활하게도 이 교묘한 부정부패의 수단 을 만들어내서 외국 상인들이 가장 부당한 불이익ㅇ르 당하도록 한다. ”고 흥분한다. 여행은 그로 하여금 마침내 글쓰기의 즐거움을 발견하게 했다. “글을 쓰면 늘 너무나 행복 하고, 만족스럽고, 명상에 잠길수 있게 된다. 사회로 돌아올 때면 수많은 애깃거리를 갖게 되는데, 그것들은 오랜 연구와 명상의 산물처럼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만든다. 사실 사람들 은 항상 작가를 찾고 있고 작가는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는다. ” 1866년 초 세계일주를 마치고 프랑스에 도착한 슐리만은“나는 여생ㅇ르 인문학, 특히 내 가 가장 매력을 느끼고 있는 고고학에 바치기 위해 파리에 정착했다. ”고 쓰고 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는 3월에 모스크바에 갔다가 10월 중순까지 바이에른 지방과 스위스 등지 로 여행을 한다. 슐리만은 부인과 화해를 하려는 희망을 품어보지만 결국 별거로 귀착된다. 그는 오스만이 재정비한 제2제정하의 파리에 부동산 투자를 한다. 대학이 개강하자 소르본 의 학생이 된 이 부유한 자산가는 동양어 강의를 듣고 이집트학과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와 아랍 철학가들, 고전시, 근대 불문학과 비교문법을 배웠다. 사업상의 이유로 문헌학 공부를 중단한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철도에 투자하고 쿠바의 땅을 사들인다. 숫자와 주소들이 잔 뜩 적힌 일기장에서 슐리만은 미국 기업정신을 찬양하는 한편 이렇게 불안감을 내비치기도 한다. “노예에게 주어진 자유는 그들의 생산력을 3분의 2로 줄어들게 할 것이다. ”그는 그 가 방문한 대학과 공장들(특히 육류가공계)과 묘지 등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 있다. 죽음의 강박관념, 특히 실종되어 끝내 무덤을 찾지 못한 동생의 기억이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1868년 1월 말, 슐리만은 다시 소르본 대학과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를 듣기 시작하고 학자들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한다. 4월에 그는 아이들이 있는 러시아에서 사업을 재개할 것 을 고려하게 된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스위스와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오데사, 키예프, 모스크바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르는 여행계획에 대해 쓰고 있다. 그의 동 업자들이 다시 자신을 고소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러시아에 가는 것을 미루려 했지만 어쨌든 그는 출발했다. 남쪽을 향해서 고대 로마와 폼페이의 유적들이 그의 호기심을 부추기고 있 었다. 모든 것은 단순한 관광에서 시작되었다. 슐리만은 5월 5일 ‘평범한 관광객’으로 포폴로 광 장에 도착한다. 그는 “학술적인 연구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지식”이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다 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행수첩은 고고학에 대한 열정이 급속히 커가는 모습을 보 여준다. 슐리만은 로마에 체류하는 4주 동안 고대문면의 유적과 다른 일 사이를 오가며 시 간을 보냈다. 그를 고대문명의 유적으로 인도한 것은 클레오파트라나 네로 황제같은 인물들 이었다. 네로에게 끌린 그는 네로의 별장인 도무스 아우레아를 찬찬히 구경하기도 하고 카 이토르와 폴룩스의 신전을 보고 감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은 순진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열광이었다. 그는 “레무스와 로물루스가 버려져 있었던 무화과나무를 보았 다”고 믿었다. 나폴리만에서 보낸 20일 동안 이 고고학의 초심자는 고대문명과 친숙해진다. 그는 바이아에, 스타비아, 쿠마, 카푸아에 처음 가보았다. 특히 그의 주의를 끈 곳은 폼페이 였다. 슐리만은 그곳을 두 차례 방문하고 그곳에 대한 설명회에 참가하였으며, 나폴리 박물 관에서 발굴 당시 출토된 그림들을 감상했다. 층위학에 관심을 가지고(이것은 당시 참신한 생각이었다)발국작업을 지휘했던 주제페 피오렐리와의 만남은 인상적이었다. 7월 1일 슐리 만은 메시나애 있었는데, 호메로스의 시에 관심이 많았던 슐리만은 아베르노 호수가 <오디 세이>에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여행수첩에 적고 있다. 그는 키클롭스의 동굴이 시칠리아섬에 있다고 한 경비의 의견도 적고 있지만 그가 가장 길게 언급한 것은 에트나산에서 자신이 겪 은 불운이었다. 정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의 안내자는 밤에 그를 두고 슬쩍 떠나버렸다. 그 바람에 혼자 등반을 계속해야 했던 슐리만은 다음날에야 간신히 다시 호텔 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 여행은 7월 6일 케르키라를 경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타카에 들른 다음, 슐리만 은 아테네에서 트로아스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는 같은 독일인 건축가 에른스트 칠러를 만 난다. 슐리만은 그에게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당시 진행중이었던 조사활동과 고대 트 로이의 위치를 둘러싼 다양한 가정들을 알게 된 슐리만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는 배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아르골리스와 티린스, 미케네를 방문한다. 그는 머지 않아 아가멤논의 무덤을 드러내보이리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9월 파리에서 슐리만은<이타카, 펠로폰네소스, 트로이>를 집필한다. 이 책은 4월 로스토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준비한 논문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1869년 초에 자비 로 출판한다. 이 책은 문학자료와 여행수첩을 조합한 것으로 군데군데 서정적인 문체로 쓰여지기도 했다. 화자가 이타카에서 호메로스의 시집을 베개삼아 돌 위에서 자는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섬주 민들이 공개낭독을 하면서 그들의 손님을 열렬히 맞이하는 장면도 있었다. 그곳의 “언덕, 바위, 샘, 올리브나무 하나하나에서 호메로스와 <오디세이>의 숨결이 느껴졌다. 우리는 단 숨에 수천 년을 뛰어넘어 그리스의 문학과 무예면에서 가장 출중했던 시대로 돌아가 있는 것이다. ”이같은 열광은 영어판 관광안내 책자에서 베낀 것이었고 그것은 이타카 남부에서 개들에게 공격받은 감동적인 이야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슐리만이 이 섬에서 그의 첫 발굴작업을 벌였고 자신의 방법을 시험해본 것은 사실 이다. 아에토스산에서 오디세우스의 궁전을 찾으며 그는 당시 풍경 속에서 호메로스 서사시 의 배경을 되찾고자 했다. 그는 땅과 책을 일치시키려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이 초심자는 좌절하지 않았다. 호메로스 시대의 이타카 수도의 터, 에우마이오스이 외양간, 아스테리스의 섬, 헥토르의 무덤에 대해 거의 모든 고고학자들이 범한 오류를 확인한 데에 서 자신감을 얻은 그는 이제는 <일리아드>와<오디세이>에 나오는 장소들을 확인하고자 하 는 야심을 품게 되었다. 항아리 몇 개를 발굴해 내곤 슐리만은 천진하게 “어쩌면 이 항아리 다섯 개안에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와 그의 자식들의 유해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라고 외쳤다. 결점이 없진 않았지만 <이타카, 펠로폰네소스, 트로이>는 대학의 논문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끌었다. 슐리만은 사실 혁신적인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그는 호메로스의 트로이를 히사를 리크 언덕에서 찾을 것을 제안했다. 그것은 옛 전통을 따른 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주장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1795년 르슈발리에가 프랑스 대사인 슈아죌 구피에를 위해 트로아스를 조 사한 이래 학자들은 부나르바시 근방에서만 조사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슐리만은 그 지역을 제외해야 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들이 무슨 의견을 내놓든 간에 고대작가들은 호메로스의 트로이를 계승한 그리스-로마의 도시 일리온이 결코 그곳에 있다고 하지 않았다. 부나르바 시의 지형은<일리아드>에 묘사된 것과 잘 들어맞지 않았다. 조사결과는 설득력이 없었다. 슐리만은 서서히 히사를리크 언덕 위에 트로이의 유적이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여행수첩은 그가 우선 트로이 유적이 부나르바시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트 로아스를 떠날 무렵 프랭크 캘버트와 만난 이후 그는 그 가정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시작한 다. 다르다넬스 지역의 미국 부영사인 캘버트는 고대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히사를리크 언덕 중 일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가 그곳에서 한 지형조사는 희망적이었다. <이타카, 펠로폰네소스, 트로이>에서 슐리만은 이 독창적인 탐험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슐리만은 그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자신을 위해 남겨두었다. 홀로 학계 에 대항한 그는 명석함과 대담성, 그리고 직감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하지 않았던 슐리만은 파리에서 생각할 여유를 가 진 뒤 확신을 가지게 되는데 그의 생각은 옳았다. 그가 책을 쓰는 동안 읽었던 책과 미국인 과의 서신교환을 통해 점차 믿음을 갖게 된 히사를리크의 가정은 정확한 것이었음이 드러난 다. 제4장. 호메로스의 세계, 약속의 땅 슐리만은 고고학에 새로 몸을 담으면서 아울러 호적도 함께 정리한다. 1869년 미국 시민이 된 슐리만은 같은 해 러시아 여성인 첫 부인과 이혼하고 아테네에서 재혼을 한다. 그는 친 구인 프랭크 캘버트의 도움을 받아 1870년 4월 히사를리크 언덕에서 조사활동을 시작하는 데, 20년간 일곱 차례에 걸쳐 불규칙하게 진행된 발굴작업에서 트로이의 유적과 ‘프리아모 스의 보물들’을 발굴해 냈고 연속적으로 세워진 주거지들의 페허가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는 발굴해낸 수천개의 유물들을 재빨리, 그리고 요란스럽게 발표했다. 그는 도 자기들과 층위학에 극히 학구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런 면에서 슐리만은 이 분야의 선구자 였다. 델로스와 올림피아, 그리고 델포이가 아직도 고고학자들의 곡괭이질을 기다리고 있던 시대에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 문명을 되살릴 발굴작업에 착수했다. 이 대담한 개척자 덕택 에 최초의 올림픽 경기가 열렸던 BC776년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그리스의 과거를 이제는 BC10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수 있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슐리만은 1874년부터 아르골리스에서 미케네 무덤의 황금과 ‘아가멤논의 마스 크’를 발굴했다. 그가 마침내 꿈을 실현한 것이다. 호메로스의 텍스트들은 역사적으로 실재 한 현실을 옮겨 놓은 것이었고, 슐리만은 그 텍스트들을 그가 발견해낸,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는 그리스를 해석하는데 사용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BC1000년대의 유적들과 <일리아드 >와<오디세이>에 묘사된 세계를 서로 대응시킨다. 실재한 역사와 서사시를 한데 섞어버린 그의 방법에 결함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고고학은 슐리만의 노력 덕분에 어엿하게 자 리를 잡은 과학으로 승격한다. 발굴작업은 가정을 확인하는 실험의 위상을 갖게 된 것이다. 슐리만은 1869년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다. 갓 미국 시민이 된 그는 이혼에 유리한 법 제 때문에 인디애나폴리스로 갔다. 6월에 이혼이 확정되자 그는 3개월 후 아테네에서 포목 상의 딸 소피아 카스트로메노스와 재혼을 했다. 그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친구 빔포스가 갖고 있던 사진첩에서 이 열일곱 산 처녀를 보고 결혼상대자로 선택했다. 슐리만 은 그리스 정교회 신부이자 약혼녀의 삼촌인 친구 테오클레토스 빔포스에게 이렇게 쓰고 있 다. “성격이 나와 완벽하게 일치하고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여자라야 나를 존중할수 있으 리라 생각하오. 난 평생 제자가 될 그녀가 우선 나를 사랑하기를 감히 바란다오. 왜냐하면 사랑은 존경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나는 훌륭한 선생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며, 모든 여 가시간을 바쳐 그녀가 문헌학과 고고학 지식을 탐구하는 것을 도울 것이오. ” 피그말리온처럼 슐리만은 그의 피조물을 교육시켜 재색을 겸비하도록 하는데 온 힘을 쏟았 다. 사실 하인리히와 소피아는 <여인학교>를 일상적으로 연기하게 된다. 파리로 신혼여행을 떠난 슐리만 부부는 1870년 2월 초 아테네로 돌아오지만 아주 실망스러 운 소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로 떠나기전 터키 당국에 신청한 히사를리크 언 덕의 발굴허가가 그때까지 나오지 않은 것이다. 하인리히는 혼자 키를라데스 제도로 떠난다. 고고학자로서의 교육과정을 마무리하는 이 여행을 통해 그는 주요 지역에 대한 지식을 보완 했다. 그는 시로스, 델로스, 파로스, 낙소스, 테라를 방문한다. 1866년 테라에서 화산활동이 다시 시작됨으로써 과학적인 연구가 발전하게 되었다. 아테네 주재 프랑스 연구원이 주도한 그연구에는 화산학자와 고고학자가 공동으로 참여했는데, 조사 도중 발견된 유물은 전문가 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것들은 이미 알려져 있는 그 어느것과도 비슷하지 않았다. 지질학 적 조사 결과 그것은 BC1500-1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 만 당시로서는 비교의 근거가 부족했다. 머지않아 트로이나 미케네에서의 발굴작업은 그러 한 비교의 근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트로아스의 발굴허가 소식이 들리지 않자, 슐리만은 한달을 더 참고 기다리면서 아티카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가족과 더불어 여러 차례 관광을 간다. 더 이상 기다릴수 없었던 그는 4월 10일 다르다넬스행 배를 탔고, 비록 허가를 받지 못했지만 인공 지층의 깊이를 측정하 기 위해서 히사를리크 언덕 북서쪽 모퉁이에서 예비 발굴을 시작했다. 5미터 정도 파들어가 자 로마와 그리스 시대의 벽들이 연속해서 드러났다. 그러나 4월이 다 갈 무렵 발굴작업은 땅 소유주들의 항의로 중단된다. 소피아는 이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듬해에도 역시 불참하고 그해 5월 아테네에 서 안드로마크를 출산했다. 그러나 슐리만은 “오로지 호메로스만을 꿈꾸며 <일리아드>를 거의 외다시피 하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는 아침부터 저녁까기 발굴작업을 늘 같이했다. ”고 쓰고 있다. 그녀는 1872년 발굴작업에 6월 한달간 참여한다. 발굴현장에서의 생활은 위험 하기 짝이 없었다. 1873년 3월 우연히 그들 집에 발생한 화재에 대해서 슐리만은 “이날 밤 하마터면 아내와 나, 그리고 옆방에서 자고 있던 감독관 포티다스는 불에 타죽을 뻔했다. ” 고 상기하고 있다. 4월의 편지는 소피아가 강간당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편 옆에 남아 있었고 5월에 아버지 장례를 치르기 위해 아테네로 떠난다. 지도가 수록된 <트로이의 유적>은 1874년 1월에 출판된다. 슐리만은 “이 책은 트로이 발 굴작업의 일지라고 할 만한 것으로 작업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에서 내가 직접 기록한 것이 다. ”라고 밝혔다. 그는 <타임스>지에 기고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런던으로 보낸 기사 원고 들을 다시 활용했다. 슐리만은 커뮤니케이션과 논쟁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 신의 연구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고 그것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언론을 활용했다. 연구한 것 을 현장에서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슐리만이 세 차례나 콘스탄티노플에 다녀오고, 또 미국 외교관이 후의를 베풀어 개입한 끝에 1871년 9월 드디어 발국허가가 나 온다. 하지만 이 발굴에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슐리만은 그 이듬해부터 발굴한 것 의 절반을 빼앗기게 된다. 1871년 10월 11일에 시작해 11월만 폭우 때문에 중단한 첫 발굴작업은 엉망이었다. 그가 발굴에 동원한 수단은 형편없었다. 슐리만은 첫날 8명의 인부를 뽑았는데 이튿날은 35명으 로 늘어났고 그다음엔 평균 80명의 인부들이 일했다. 그들은 파낸 흙을 바구니로 실어내야 했다. 슐리만은 8대의 손수레와 4대의 우차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일리아드>의 층으로 보였던 가장 오래된 층에 다다르는데 급급해서 그는 10미터나 파들어갔고, 그로 인해 BC1000년 이후의 유물을 파괴해 버렸다. 결국 고대 그리스의 한 건축물의 잔해가 사라지 고 단 3개의 비문만이 남았다. 슐리만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층위학을 이해하게 된다. ‘중첩된 페허들’은 히사를리크 언덕의 복잡한 역사를 증거한다. 그것은 선사시대부터 재정로 마 시대에 이르는 것이었다. 자신의 경험부족에서 교훈을 얻은 슐리만은 1872년 4월 발굴작업을 재개하면서 전략을 수 정한다. 이번 작업은 훨씬 더 조직적으로 진행했다. 그는 영국에서 들여온 장비를 갖추고 페이라이에우스에서 라미아에 이르는 철도를 건설한 기술자 아돌프 로랑과 아테네에서 페이 라이에우스를 연결하는 철도건설에 고용되었던 아테네 직공장들의 도움을 받았다. 하루 평 균 150명의 인부가 300입방미터의 흙을 실어냈다. 긴구덩이들이 파헤쳐졌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발굴현장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것으로, 가로 40미터, 깊이가 15미터가 넘었다. 8월 중순 말라리아가 현장을 강타하면서 작업이 중단된다. 그러나 슐리만은 이미 승리를 거두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가 역사적은 큰 문제를 해결해 냈음을, 처녀지에 세워진 고도의 문명과 거대한 건축물들을 발견함으로써 그 일을 해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고대 전시대를 통해서 일리움이라 불렸으며, 고대 문명세계에 서 트로이를 계승하여 호메로스의 도시가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세워졌다고 여기던 고대도 시가 묻혀 있는 지하 깊은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가 거둔 성공은 그의 주장을 여러 모로 정당화시켜 주었디. 히사를리크의 위치는 <일리아드>에서 프리아모스왕의 성채가 있었던 곳과 일치했다. 발굴한 성벽의 파편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신이며 후에 트라키아의 왕이 된 루시마쿠스가 일리온에 건설한 바 있는 요새와 연관지을수 있었고, 마지막으로 기초와 벽이 뒤얽혀 있는 모습은 히사를리크에 적어도 세 층위의 선사시대 유적이 존재했음을 증명 해 주었다. 슐리만은 그중 첫 번째 것이 트로이 전쟁 시대의 유적이라고 생각했다. 몇몇 도자기의 문양들은 번번이 틀린 가정들은 내놓은 발굴자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는 장식적인 요소 몇 가지를 트로이 문자의 기호로 해석하고 사람 모양을 한 병 한 세트를 가 지고 그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그병을 “투구 같은 것을 쓴 올빼미 얼굴을 한 트로이의 미네르바”로 생각했고, 손잡이가 두 개 달린 잔들이<일리아드>에 나오는 그 유명한 병의 형태를 보여준다고 믿었다. 발굴한 모든 유물들이 호메르스 서사시의 역사성을 증거하는 것 으로 간주하려다가 슐리만은 오류를 범하고 만다. 오늘날 이 도자기류는 BC2600-180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부들을 깐깐하게 관리하던 작업책임자는 그들의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는 키니네 를 복용하도록 하거나 상처에 아르니카를 바르거나 해수욕 처방을 내리는 등, 의사 역할까 지 담당했다. 포도주 값이 인상되고 지출이 늘어나는 것을 걱정하던 슐리만이지마, 1872년의 가장 중요한 출토물인 ‘태양의 메토프’의 경우에서 볼수 있듯이, 그는 여전히 이해관계에 밝았다. 슐리만 이 발견한 이 건축물 조각은 그리스 이전 시대에 일리온을 굽어보던 아테나 신전의 것이었 다. 그것은 히사를리크의 프랭크 캘버트 소유지에서 발굴했다. 슐리만은 애초에 ‘발굴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분배가 어렵게 되자 슐리만은 동업자이나 친구에게 배상을 해주기로 했 다. 힘든 협상 끝에 슐리만은 그에게 1250프랑을 주기로 한다. 캘버트는 처음에 그것의 10 배의 금액을 요구했으나 싸우는 데 지쳐 양보했다. 그러나 그가 속았다는 것은 깨닫고 슐리 만에게 보상을 요구하자 슐리만은“이미 결정한 일은 신성한 것으로 재론하지 않으며 더 이 상 재론할 수도 없는 것이 관례이다. ”라는 원칙을 내세워 거절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후 그는 이 조각품의 가치를 10만 프랑으로 추정한다. 고고학자는 여전히 이해타산에 밝았 다. 3차 발굴작업은 1873년 2월에서 6월까지 진행되었다. 슐리만은 가장 나중에 형성된 구조 물을 파괴한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반성한다. 그는 아카이아 원정 이전에는 역사가 없었 던 것처럼 트로이가 처녀지에 건설되었다고 가정한 것이 오류였음을 깨달았다. 선사시대의 제1층위는 호메로스의 트로이라고 하기에 너무 빈약했다. 제2층위는 좀더 발달한 문명을 보 여주었다. 반경 100미터 정도의 성채와 그 안에 보호된 집등, 유적들은 위용을 자랑했다. 슐리만은 몇 주에 걸쳐 문짝 한 개와 이 두 번째 건축물의 성벽 일부를 발굴해 냈다. 호메 로스에 깊이 빠진 그는 그것이 스케아의 문이며, 그 연장선상에 있는 주거시설은<일리아드 >의 트로이 왕자들이 살던 궁의 유적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자신이 발굴해낸 250개의 황금 유물을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명명했다. 이 보석류와 항아리들을 아테네로 은밀히 옮긴 사건은 거센 비난을 받았다. 소송을 피하기 위해서 슐리만은 터키 재판부 및 정부와 타협하 여 배상금으로 금화 1만 프랑과 추가로 콘스탄티노플의 황실박물관에 4만 프랑을 기증했다. 그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자 자기가 그 유물의 소유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베를린 에서처럼 파리에서도 사람들은 그 유물이 진품인지 의심스러워했다. 다른 고고학자들은 이 떠들썩한 발표를 듣고 자기들과 같은 부류가 아닌 이 남자를 의심했다. 영국에서 여러 학술 단체가 슐리만을 초청한 것은 그의 자존심을 만족시켰다. 탤버트 경이 그를 직접 접견했을 뿐 아니라, 슐리만은 빅토리아 여왕의 대리인인 윌리엄 글래드스턴 총리가 배석한 자리에서 아내와 함께 영국 왕립 고고학회의 명예회원이 되었다. 석달 후인 1877년 12월 소피아가 안드로마크의 남동생 아가멤논을 출산할 무렵 그는 런던에서 그 유물들을 전시했다. 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슐리만이 측정한 발굴품의 연대에 오류가 있었음이 드러났 다. 그것들은 트로이가 멸망했다고 추정하는 BC 1250년경의 것이 아니라, 트로이와 미케네 지역의 지층 비교로 알수 있지만, 그보다 1000년은 족히 앞선 것들이었다. 권위를 인정받은 학자를 영입하기 위해 그는 상당한 보수를 주고 빌헬름 되르펠트를 고용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건축가이자 고고학자인 이 29세의 젊은이를 알고 있었고, 되르펠트는 1876년부터 슐리만의 한 동료를 위해서 미케네의 왕묘에 대한 기사의 삽화를 그려주고 있었다. 1875년 시작된 올림피아 발굴작업의 기술책임자는 이미 명성이 자자한 이였다. 체계적으로 작업을 진행하는 그의 자질과 엄격함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슐리만은 아테네의 권위 있는 독 일 고고학연구소의 건축가로 막 발령난 사람을 비난했던 일을 잊어버렸다. 그는 올림피아 성전의 발굴에 관해서 위에서 한층 한층 걷어내는 것은 완전히 일을 거꾸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바 있지 않았던가?그는 나중에 이에 대해 시간가 돈을 무한정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곧 최하층으로 가야 한다고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기까지 했다. 슐리만은 기꺼이 자신의 생 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아랫사람의 경험과 방법을 이용했다. 덕분에 그는 고고학자 가 금 캐는 사람과는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873년 5월 말 혹은 6월 중순에 있었던 ‘프리아모스의 보물’의 발견담은 그 자체에 조작된 느낌을 풍긴다. 슐리만은 목숨을 걸고 언제 무너져내려 매몰될지 모르는 성벽 밑에서 칼을 가지고 소중한 유물들, 금과 장신구들을 발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전에 슐리만은 이미 추가 휴식을 허락하면서 인부들을 멀리하는 신중함을 보인다. 그는 항상 자신의 숄과 치마 로 출토된 유물들을 감싸 안전한 곳으로 옮길 태세가 되어 있었던 사랑하는 아내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소피아가 자신의 남편이 발굴품을 옮길 당시 그곳 에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편지도 있다. 게다가 언제 그것을 발견했다는 말인가?자신 의 주장에 대한 추적이 불가능하도록 이 발굴자는 서로 다른 보고서에서 모순된 이야기를 하는 치밀함을 잊지 않는다. 보물에 대한 대목은 6월 17일 아테네에서 쓴 것으로 되어있다. 나중에 슐리만은 그것을 고쳐, 장소란에다 트로이를 대신 써넣었다. 소위 ‘프리아모스의 보 물’이라는 것이 사실은 1873년 3월 부터 4월사이에 여러 발굴현장에서 발굴한 유물들로 이 루어진 이질적인 보물들의 집합체임을 드러내보이는 증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1874년 2월부터 트로이 탐사와 병행하여 슐리만은 미케네에서 조사를 벌이기 시작한다. 한 세기 앞서 프랑스 외교관 루이 세바스티앵 포벨은 높이 솟은 둥근 천장이 있으며 대부분 고대부터 도굴당한, 성채 근처의 무덤들 가운데 한 군데를 묘사한 적이 있었다. 그는 1805 년경 영국인 도드웰보다 앞서 미케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지키는 ‘사자의 문’을 그린바 있다. 새로 설립된 그리스 고고학회는 1840년 그 구조와 통로를 밝히는 작업을 착수했다. 또 한 번 슐리만은 자신이 읽은 고대 텍스트들을 토대로 자신의 직감을 따라갔다. 미케네의 ‘풍부한 황금’을 노래한 호메로스를 믿고 그는 아가멤논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그는 제정로 마 시대의 찬란한 과거를 찾아 그 지역을 방문한 바 있는 파우사니아스의 책을 다시 읽었다. 이 영웅 시대의 분묘에 대해 지리학자가 쓴 대목이 오래전부터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 었다. 1869년 이래, 그리고 자신의 저서 <이타카, 펠로폰네소스, 트로이>에 기술한 것처럼 슐리만은 그것에 대해 독창적인 지형 해석을 제시했다. 왕묘가 ‘사자의 문’근처, 아크로폴리 스 밖이 아니라 그 주위에 있다는 것이었다. 문헌학자들은 빈정거리며 그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타임스>지도 마찬가지로 “트로이를 파괴한 자가 밤을 틈타서 무덤을 만들어내지 않는 한 성벽 안에서는 무덤을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라며 비웃었다. 그 리스 신문들도 가뜩이나 좋지 않는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킨 이 모험가를 우호적으 로 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위조 혐의를 받고 있는 이 야심가가 정부를 상대로 벌이는 술수 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불안해진 장관은 나우플리온의 경찰국장에게 작업을 감시하라고 명령했고, 곧 그 작업을 중단시켰다. 2년에 걸친 협상 끝에 작업이 다시 재개된다. 슐리만은 영국 총리 글래드스턴을 비롯하여 아테네 주재 프랑스 연구원 원장인 뷔르누프와 그에게 호의적인 그리스 고고학자, 그리고 당시 만티네이아의 주교로 있던 소피아의 삼촌에 이르기까지 자신과 친분관계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호소했다. 그가 도움을 청한 이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또한 슐 리만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 터키 점령의 상징인 프랑크탑을 허무는 비용으로 9000드 라크마(그리스의 은하)를 고고학회에 기증했다. 그리스 자유를 지지하는 데 치른 이 보증금 은 발굴허가를 얻어내는 데 일조를 했다. 발굴작업에는 1876년 8월에서 12월까지 인부 100여 명이 동원되었다. 현장에서 아내의 도움을 받고 있던 슐리만은 하루에 400프랑 이상 을 지출해야 했다. 이 작업은 고고학회의 비호하에 젊은 그리스 고고학자인 파나요티스 스타마타키스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슐리만과 이 정부대리인과의 관계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 상대방 을 괴롭히기 위해서 갖은 애를 썼다. 발굴현장에 있었던 소피아는 이 그리스인에세 전혀 사 근사근하지 않았다. 슐리만은 스타마타키스가 읽지 못하도록 발굴기록을 영어로 작성했다. 한편 스타마타키스는 발굴작품들을 흐트려놓는다고 슐리만을 비난했다. 슐리만은 이미 파우사니아스가 보았다고 기록하고 서사시 주인공들의 이름이 붙여져 있던 유적들을 다시 발견하고자 했다. 그는 ‘클리타임네스트라의 것’이라고 불린 무덤을 발굴하는 일을 아내에게 맡기고 ‘아트레우스의 보물’로 접근하는 길을 찾았다. 그는 ‘사자의 문’근처에 서 여러 차례 지형 조사를 벌였다. 그가 택한 방법과 목적을 비난하는 소리가 높았지만 그 런 소리는 성채 안에서 원형묘지가 발견된 뒤 소리없이 잦아들었다. 슐리만의 입장에서 보 면 파우사니아스의 글을 둘러싼 논쟁은 이제 끝났다. 현장 사람이 연구실 안의 학자에 대항 하여 이긴 것이다. 역사적 사실로 간주된 서사시와 고고학적 유적을 대응시킴으로써 호메로스의 세계를 되살리 고자 하는 그의 야심은 변함없었다. 그가 발굴한 다섯 개의 묘혈에서 처음 황금가면들이 출 토되었을때, 그는 그것이 아가멤논의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그리스왕 게오르그 1세에게 전보를 쳤다. “전하께 저는 무한한 기쁨을 가지고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의 정부 아이기스 토스에 의해서 식사 도중에 살해당한 아가멤논, 카산드라, 에우리메돈, 그리고 그들 동료들 의 것으로 전해져 내려왔으며 파우사니아스도 같은 의견을 피력한 바 있는 무덤을 발견했음 을 아룁니다. 저는 무덤 속에서 순금으로 된 어마어마한 보물들을 발견했습니다. 이 보물들 은 그것들만으로도 박물관 하나를 채울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 박물관은 세상에서 가장 경 이로운 박물관이 될 것이며 차후 수세기 동안 각국의 숱한 외국인들을 그리스로 끌어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후 14킬로그램의 금이 그리스 은행의 금고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들은 곧 아테네 폴리테크니콘, 즉 미래의 국립 고고학 박물관의 자랑거리가 된다. 그외 에 상아와 은, 도자기로 된 유물들도 대단한 것이었다. 1882년 슐리만은“이 보물들을 보기 위해서 외국인들이 수없이 몰려온 탓에 아테네에 있는 호텔의 수가 내가 이것들을 발견하기 전에 비해서 10배로 늘어났다. ”고 자랑스럽게 기술했다. 1878년 초<미케네>가 출판된다. 훌륭한 화보가 수록된 이 두꺼운 책에는 그 전해<타임스> 지에 기고했던 기사들이 수정되어 실려 있었다. 비록 신화와 역사를 혼동하기는 했지만 저자는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는 걸작들을 드러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미케네 문명이라는 그리스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슐 리만 이전에 미케네는 하나의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미케네에 관해 알려진 것은 페르시아 전쟁에 비록 미미하게나마 참전했던것과 BC 468년 아르고스에 의해 멸망한 것 정도이다. 사람들은 호메로스의 작품과 그보다 훨씬 후에 쓰여 진 비극에 나오는 이야기 외에는 영웅 시대의 성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슐리만은 BC 1600년부터 BC1125년 청동시대까지 전성시대를 누렸던 이 사라진 세계로 우 리를 초대했다. 그가 발굴한 것은 아르골리스와 그리스 전역에서 다시 발견되는 하나의 문 화의 모델을 제공하게 된다. 그렇지만 슐리만이 발굴한 무덤들은 그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오래된 것들이었다. 이제 사 람들은 1950년에 발견한 것들을 통해서 그것들이 BC 1600-1510년 사이에 사용되던 것이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BC13세기 사람들은 무덤을 원형구조로 둘러싸고 이 무덤에 대한 성주들의 존경심을 증거하기라도 하듯 무덤을 성채 안에 두었다. 그리고 그 무덤을 통해 알 게 된 장례의식, 매장의식은 호메로스가 묘사한 것처럼 죽은 이를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화 장을 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슐리만은 그 무덤들을 미케네 전사들의 것으로 간주하려다 가 오류를 범한 것이다. 제5장 근대의 영웅, 고고학자 이타카, 보이오티아의 오르코메노스 같은다른 발굴작업장에서도 미케네 고고학의 개척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의 발굴결과는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이어서 1883년 테르모필레, 그리고 1884년 마라톤에 도전하지만 실패로 끝난다. 그는 그리스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이 맞 선 이 전쟁터에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는 티린스의 발굴을 시작하지만 크노 소스를 조사하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어 몹시 실망하낟. 금이 사라진 것이다. 슐리 만은 중아 아메리카와 쿠바, 이집트를 방문한다. 1888년에는 트로아스에서 마지막 발굴작업 을 하는 동안 그를 도와주었던 친구이자 의사이며 정치인인 루돌프 비르초브와 함께 이집트 를 다시 찾는다. 마지막 꿈이 슐리만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것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그곳을 건설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을 찾는 일이었다. 바위를 굴리는 시지프스처럼 근대의 영 웅인 이 고고학자는 끊임없이 과거를 되살리기 위해 세계를 누볐다. 1878년 <오디세이>를 안내자 삼아 이타카로 다시 떠나면서 슐리만은 건축가 에른스트 칠 러에게 아테네에 자신의 명성과 성공에 걸맞은 저택을 지어 달라고 맡긴다. 2년 뒤 슐리만 은 큰 무도회를 열어 여러 가지 색의 모자이크들이 있고 벽에는 집주인의 발굴현장을 기념 하는 벽화들이 그려진‘일리우 멜라트론’. 죽 일리온의 집의 입주식을 가진다. 어떤 관리들은 지붕위에 있는 동상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놀리기 좋아하는 슐리만은 그 동상에 원색 옷을 입히며 즐거워했다. 사람들은 그 옷ㅇ르 벗기라고 함으로써 아테네인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유럽 도처에 환영을 받은 이 부르주아 고고학자는 영예의 절정에 있었다. 그는 30만 파운드의 연금을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그중 매년 절반 정도를 쓰는데, 고고학 연구에 대부분을 지출한다고 했다. 그 연구는 고대 지중해의 가장 중요한 명소들로 그를 인 도했다. 1875년 그느 카르타고식으로 지은 건축물에 얽힌 신비를 풀기 위해 시칠리아의 모 티아섬에서, 그리고 로마의 기원에 대한 비밀을 찾아 알바라롱가에서 조사활동을 벌였다. 그 이듬해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도 없고 이미 모든 박물관들이 소유하고 있지 않는 것을 찾아낼 능력이 없다. ”는 이유로 치우지의 발굴을 거절하는 현명함을 보였다. 슐리만은 검 증고고학을 개척하는 공을 세웠다. 그는 또한 텍스트와 유적들을 일치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1880년 그는 <일리아드>에서 암양이 많다고 묘사된 도시이며 파우사니아스가 ‘미니아스의 보물’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는 오르코메노스의 지하묘지를 발굴했다. 그 지하묘지에선 그 리 대단한 것들이 출토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고대 전설과 실제 장소가 항상 일치한다고 확 신할 수는 없었다. 슐리만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된다. 그가 발굴해낸 유물들을 시기하는 대학교수들은 그의 출 신과 규범을 벗어난 지적 행로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데 전 문가용 학술지보다는 신문의 논단을 선호했다. 전문가들의 공격은 학술적이라기보다는 사적 인 것이었다. 당대의 가장 저명한 독일인 고대 그리스학자인 울리히 폰 빌라모비츠 모엘렌 도르프는 슐리만 부부를 빈정거렸고, 사람들은 은퇴한 사업가의 재산을 두고 비난을 퍼부었 다. 그의 재산은 그가 발굴해낸 유물의 기원을 미심쩍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몰래 사들인 것이라거나 모조품이라고 하기도 했다. 슐리만이 그의 재산을 명성을 얻 는데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는 기자들과 박학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자신에게 호의적 인 글을 쓰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광고효과는 일반 대중에게 국한된다. 1881년 권위 있는 베를린 박물관장인 아돌프 푸르트뱅글러는 다음과 같은 지독한 말을 하기도 했다. “슐리만 은 여기서 상당히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발견한 것들의 가 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머릿속이 잘 정리되어 있지 않은 반미치광이입니다. ”트로이와 미케네의 발굴자는 결코 대학에 몸담고 있는 학자들만이 누릴수 있는 영예인 베를린 학술원 의 회원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1881년 7월 7일 그는 아주 성대하게 베를린 명예시민의 칭호를 받게 된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생애를 바침으로써 그는 타 시민들의 모범이 되 었습니다. ” 슐리만이 그때까지 런던에서 전시하던 트로이 유물을 독일 국민들에게 제공한 직후의 일이 었다. 그렇게 하도록 그를 설득한 사람은 친구 루돌프 비르초브였다. 1876년부터 슐리만은 티린스궁을 찾아 아르골리스에서 여러 차례 지형조사를 실시해 왔다. 그곳은 <일리아드>에 의하면 ‘공격의 함성이 드높은’디오메데스가 살던 곳이다. 80척의 배 를 소유한 그는 존경받는 지휘관이었고 그의 권위는 에피다우로스와 트로이젠에서도 인정받 았다. 미케네에 이어 트로아스에서의 새로운 조사활동으로 정신이 없던 슐리만은 1884년 3 월에야 성채의 위치에 대한 작업을 재개한다. 슐리만은 다시 되르펠트와 한조를 이루었다. 그는 이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몇 주에 걸친 두 차례의 발굴작업 끝에 최초의 미케네식 궁이 세상에 드러났다. 슐리만에게 이 유적들은 호메로스 시에 나오는 왕들이 기거하던 곳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오디세이>에 나 오는 규방의 안뜰과 일렬로 늘어선 방들, 그리고 페넬로페와 구혼자들이 마주치던 연회실과 유사한 것이 발견되었다. 거대한 성벽터는 왕국을 보호하기 위해서 거인 키클롭스를 7명이 나 부른 프로이토스의 전설에 신빙성을 부여했다. 미케네의 무덤들이 발굴된 이후, <티린스>에서 아카이아 왕실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밝혀졌 다. 독일어, 영어, 불어로 동시에 출간된 이 책은 고고학 관련 출판계에서는 일대 사건이었 다. 이 책은 마지막 곡괭이질이 있은지 꼭 넉 달 만인 1885년 11월에 파리의 서점에 진열 된다. 그러나 이 책은 발굴작업과 마찬가지로 속성으로 작업한데 따르는 결점을 안고 있었 다. 고고학 연구논문이 서문을 대신했다. 그것은 전직 교수이며 되르펠트의 장인인 E. 아들 러가 쓴 것이었다. 삽화를 맡은 되르펠트는 두 개의 주제에 관해 썼는데, 하나는 궁전 건추 과 시설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1885년의 발굴작업에 관한 것이었다. 소아시아 전문 가인 E. 파브리시우스는 마지막 발굴작업에서 발굴한 유물에 대해 설명문을 작성했고, 슐리 만은 가장 오래된 유물들의 카탈로그를 만들고 그 지역의 역사를 간략히 설명했다. 티린스 에서의 ‘태양신이자 영웅’인 헤라클레스의 탄생신화를 분석한 이 짤막한 요약문은 고대 그 리스내에 페니키아인의 존재를 상기시키고 있다. 비교대상이 없었던 관계로, 슐리만은 귀중한 자료를 설명해낼 수는 없었지만 그 자료의 중 요성을 감지하고 그것을 책의 표지에 실었다. 그것은 한 남자가 황소의 등에 뛰어오르는 모 습을 그린 벽화의 일부였다. 이 그림은 15년 후 아서에번스가 크노소스의 벽화를 참조하여 해석해 낸다. 호메로스의 세계와 아르골리스 궁전들 간의 비교는 별의미가 없다. 미케네 문명에 대한 크 레타의 영향이 더 결정적이었다. “위대한 제우스의 절친한 친구 미노스가 9년 주기로 지배 하던 도시”에 대해 호메로스가 한 증언을 확인하려 했던 슐리만은 크레타에선 운수가 좋지 못했다. 한 편지에서 그는 “크레타에 있는 크노소스왕들의 선사시대 궁전을 발굴하기”를 원 하며 그 일을 “100명 정도의 인력을 투입해 1주일 만에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고 했다. 계 획은 성사되지 않았다. 1889년 슐리만이 크노소스에 마지막으로 갔을 때 욕심 많은 당 소유 주들과 벌인 협상은 마지막 순간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들이 요구한 가격은 그들 주장대로 그곳에 심어놓은 2500그루의 월계수를 고려하면 정당한 것이었다. 슐리만은 888그루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거래를 거절했다. 이렇게 놓친 미노스 궁전은 아서 에번스경이 발견하게 된다. ㄷ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은‘랩소디’, 즉 출전이 다른 노래들을 한데 묶어서 독창적ㅇ니 이야 기를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이렇게 잡동사니를 편집하는 기술은 1885년<일리오스, 트로이 인의 도시와 나라>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효력을 발휘했다. 슐리만은 공동작업을 지휘했다. 그는 각 분야의 전공자들로 짠 팀의 작업을 조직하고 주도했다. 그의 동료들은 그의 충복이 건 돈을 받고 고용된 개종자들이건 전적으로 그 일에 매달렸다. 불어로 쓰고 비르초브가 서문을 쓴 1000페이지 가량의 이책은 짤막한 자전적 글로 시작하 며, 전해에 영어와 독일어로 출판한 <트로이아>를 포함하고 있다. 이 책에서 슐리만은 히사 를리크 언덕에서 발견한 7개의 유적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한다. 5명의 저자들이 쓴 부록은 트로이와 그 지역에 관한 고대 기록, 이집트와의 관계, 선사시대의 금속의 역할, 헤라 부피 스와 암소의 숭배, 고대 그리스시대의 일리온, 당시의 의술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서신과 보고서, 분석이 섞여 있는 이책은 비명학, 금석학, 고대 도자기학, 지리학, 지질학, 식물학, 화학, 의학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과학적 고고학을 정당화하 는 현대적인 증거가 되고 있다. 이 고고학자는 사업에 대한 열정도 여전했다. 1886년 쿠바의 노예해방이 임박하자, 그는 자 신이 소유한 사탕수수농장을 관리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이어서 역시 사업상의 이유로 파리, 베를린, 런던을 누볐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7월 3일 고대 그리스 연구회 모임 에서 그가 굴착작업중 파낸 흙에 티린스의 옛 성벽이 매몰됐으며 그 지역의 고대유물들을 크게 손상시켰다는 비난에 대한 해명을 했다. 되르펠트도 그 자리에 있었다. 두 사람은 청 중을 설득할 줄 알았다. 신중한 후원자 슐리만은 1886년 12월 18일에 열린 베를린 신인류학박물관 내에 있는 트 로이실의 개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한 달 전부터 그는 홀로 룩소르까지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간 것은 그로선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7시에 일어나서 30분간 배의 갑판을 걸어다닌 뒤 차를 마신다. 계란 3개를 먹고 또 한 시간 정도 담배를 피우며 슬슬 걸어다닌다. 그리고 나서 한 시간 정도 아랍 책을 보고 에우리피데스 책을 두 시간 정도 읽는다. 그 다음 점심을 먹고 다시 한 시간쯤 걷고 5시 반까지 과학서적 을 또 읽는다. ”슐리만은 클레오파트라와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파라오 사원의 조명문제를 연구하고 있던 그는 파편과 돌조각들을 모았다. 그는 특히 에게해 세계 와 이집트 문명 간의 접점을 찾고자 했다. ‘왕가의 골짜기’에 있는 람세스3세의 무덤 벽에 그려져 있는, 고리가 있는 미케네식 항아리가 그의 관심을 끌었다. 그것은 아르골리스에서 출토된 것들과 비슷했다. 갑자기 이 유물들의 연대가 분명해진 것이다. 람세스3세의 통치기 간은 BC 1198-1166년이었다. 1887년 슐리만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필로스에서 발굴작업을 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네스토르궁이 세상의 빛을 볼 희망이 보였다. 그러나 겨울에 그는 이집트로 돌아갔고, 1888 년 2월 라믈레로 가는 알렉산드리아의 기차역 근처에서 대형 계단의 계단 몇 개와 궁전의 기초를 발굴했다. 그것은 클레오파트라의 궁전일 수 밖에 없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슐리만 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의 맹목적 열정은 위조를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는 대리석으 로 된 여왕의 조각상을 내보였다. 그가 그것을 그곳에서 발견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 다. 분명히 그는 그것을 샀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 로마 시대의 복제품이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의 정부가 아니라 BC5세기경의 시인 핀다로스의 경쟁자인 코린나를 조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슐리만은 나일강을 따라 여행을 하고 비르초브가 여기에 합류한다. 폭동을 일으킨 부족들 때문에 위험했지만 그들은 와디할파에 있는 두 번째 폭포까지 간다. 테베로 돌아오면서 슐 리만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을 찾기 위해 계획한, 네비트 다니일 이 슬람 사원 근처에서 발굴작업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아테네로 돌아온 그는 고리가 있 는 미케네식 항아리가 람세스 2세의 재위기간인 BC 1304-123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파 이움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슐리만은 이집트 땅이 질문을 하는 자에게 그리스 수수께끼의 비밀을 알려준다고 믿게 된다. 파라오의 재위 기간은 무덤 안에 매장된 그리스 유물의 확실한 연대를 제공한다. 비교고고학의 유용성이 여기 있는 것이다. 그 동안 그는 반대자들에게 해명을 해야 했다. 그중 한명인 은퇴한 포병장교 에른스트 보 에티셔는 히사를리크 언덕이 묘지였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발굴작업중 모아놓은 유물들을 가 지고 숱한 책과 팜플렛으로 펴냈다. 그의 주장은 1889년 여름 파리에서 열린 인류학 학술 회의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아테네 주재 프랑스 연구원 출신이며 학술원 회원이자 생제르 맹앙레의 박물관장인 살로몽 레나크는 그의 주장을 <고고학지>에 게재된 <오리엔트 평론> 에서 인용했다. 에 반발한 슐리만은 학자층의 동조를 얻기 위해서 대학에 몸담고 있는 카를 슈흐하르트 박사에게 그의 발굴담과 출토품들을 발표하는 일을 맡긴다. 그 책은 1891년 라 이프치히에 있는 브로크하우스 출판사에서 출판된다. 현장에서 그의 반대자들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는 트로이에서 첫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1889년 12월 되르펠트가 배석한 가운데 히사를리크에서 보에티셔를 맞이한다. 그리고 슐리만은 증인 자격으로 빈 예술원 회원인 게 오르크 니만과 프로이센왕의 참모장교이며 미케네의 약도와 지도들을 출판했던 베른하르트 슈테펜을 불러왔다. 첫번째 사람은 설득당하지 않은 채 떠났지만, 다음 두 사람은 오기도 전에 설득당했다. 이 회의는 긍정적인 효과를 냈다. 터키 정부는 슐리만에게 새로 발굴허가를 내주었고, 발굴 작업은 1890년 3월 1일 재개된다. 제2회 트로이 학술회의에는 전문가들이 여러 명 참석했 다. 그들의 지적과 연구는 개최자의 입장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때 트로아스 밖에서는 슐리 만이 행사를 위해 세운 ‘슐리마노폴리스’를 비웃는다. 이제 파낸 흙을 옮기기 위해 광차를 사용한 작업현장에서는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첫번째 목표는 트로이2라고 불리는 히사를 리크 선사시대의 두 번째 건축물의 유적을 청소하는 것이었다. 슐리만에 의해 트로이라고 확인되고 가장 오래된 것부터 순서대로 번호를 붙인 7개의 트로이 중에서 슐리만이 호메로 스의 도시라고 간주한 곳이 바로 이 트로이2이다. 두번째 목표는 트로이2의 성벽밖에서 새 로운 발굴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로마 시대 층위에서 , 슐리만은 칼리굴라 황제의 것이라고 간주한 대리석 두상을 발견하게 된다. 더욱 중대한 발견을 한 이는 되르펠트였다. 그는 중 앙에 화덕이 있는 직사각형 방의 터를 발굴했는데 그곳에서 미케네의 묘혈에서 출토된 도자 기류와 비교할 만한 것이 나왔다. 이 층위에서 트로이6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선사시대 유적 이 있었다. 되르펠트는 이전의 것들보다 훨씬 더 크고 튼튼하게 요새화된 이 밀집지역에서 <일리아드>의 도시를 보게 된다. 1890년 되르펠트는 슐리만 사후에 발견하게 될 트로이6의 면적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 6층위의 연대를 알아낼 수 있었고 친구의 주장을 무력화할 능력이 있 었다. 트로이의 ‘프리아모스의 보물’과 미케네의 ‘아가멤논의 마스크’는 슐리만이 생각했듯이 동시대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 사이엔 1000년 정도의 간격의 있었다. 사실 트로이의 6층위 와 미케네 무덤에서만 발견되는 도자기의 한 유형이 트로이6과 미케네의 원형묘지가 동시 대의 것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훨씬 더 오래되고 ‘프리아모스의 보물’이 발견된 트로이2는 헬레나가 살았고 오디세우스 일행이 약탈한 곳이 될 수가 없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슐리만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 그는 마지막 보고서의 결론부에서 그 사실을 강조하기까지 한다. 되르펠트에 의해 호메로스의 문제를 재검토하게 된 그는 새 로운 연구계획을 세우고 7월 22일 비스마르크 재상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인부들 과 저는 피로로 기진맥진해 있습니다. 저는 8월 1일 작업을 중단해야 할 처지입니다. 그러 나 만일 하늘이 제 수명을 더 연장시켜 주신다면 저는 1891년 3월 1일 온 힘을 다해서 작 업을 재개할 생각입니다. ”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그 일은 불가능해졌다. 오래 전부터 슐리만은 귀의 통증으로 고통받아 왔는데 1890년 가을에는 참을 수 없을 정 도가 되었다. 비르초브는 독일에서 전문의의 치료를 받도록 종용했다. 그는 11월 초 할레에 가서 헤르만 슈바르츠 박사에게 진찰을 받고 수술을 받는다. 퇴원하자마자 슐리만은 라이프 치히에 가서 출판사 사장을 만나고 곧바로 12월에 파리로 간다. 그러나 고통은 더욱 심해졌 고, 결국 귀머거리가 된 슐리만은 그리스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폼페이가 다시 보고 싶었던 그는 도중에 나폴리에 들른다. 성탄절 카리타 광장 옆길에서 쓰러진 그는 혼수상태에서 깨 어나지 못한 채 1890년 12월 26일 나폴리의 그랜드 호텔에서 사망한다. 1891년 1월 4일 아테네에서 수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그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트로이 발굴은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되르펠트는 이미 시작된 일을 계속하여 그가 아홉 개까지 발견한 트로이의 역사를 밝혀주었다. 그는 트로이 6을 BC1250년 아가멤 논의 병사들이 파괴한 호메로스의 도시로 간주하고 있었는데, 미국의 고고학자 칼 블레건 (그는 필로스의 궁도 발굴하였다)은 1932년 새로운 연구 끝에 이 주장에 이의을 제기했다. 트로이 6이 지진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확증을 갖게 된 그는 <일리아드>에서 아카이아인들 에 의해 약탈당한 도시는 토로이7, 더 구체적으로는 트로이 7a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이 해석을 인정하기에는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약하다. 확언할수 있는 것 은 단지 트로이7a가 미케네 세계가 어쩌면 이미 와해된 시기에 화재로 인해 폐허가 되었다 는 사실이다. 영국의 역사가 M. I핀리에 의하면“호메로스의 트로이 전쟁은 청동시대의 그리 스 역사와는 분리되어야 한다. ”고 한다. 사실 <일리아드>는 역사적 사실을 말로 옮겨놓은 것이 아니다. 최근의 주장대로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본받을 만한 과거’를 재창조함으로써 BC 9세기와 10세기의 그리스 공동체가 ‘영웅들의 그림자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 시적 허구’인 것이다. 1984년 발굴작업은 만프레드 코르프만의 지도하에 튀빙겐 대학팀에 의해 행해졌다. 이 작 업은 일리온(고대 전설에 의하면 트로이의 뒤를 이었다는 도시)이 히사를리크 언덕 위에 자 리잡고 있었음을 확신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성채에 불과했다. 일리온이 훨씬 더 넓은 면적 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슐리만이 조사한 지역에서 남쪽으로 400미터 떨어진 곳에 세 워진 성벽의 페허를 최근에 발견함으로써 입증되었다. 지금까지 BC약 3000년경의 도시로 추정한 트로이1은 사실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며 BC2500년경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결 국 그 지역엔 BC 3000년대에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트로이의 역사는 사람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으로 밝혀졌다. 고고학자는 진실에 근접할 뿐이다. 평생토록 자신의 꿈과 현실 사이의 간격을 없애보고자 했던 슐리만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부를 얻고 사회에서 인정받기를 갈구한 그는 특 히 인식욕이 강했다. 자신과 우리 문명의 기원을 찾아서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할 태세가 되 어 있었다. 위대하게도 그는 죽음을 앞두고 그가 주장한 학설을 기꺼이 부정했다. 그의 개방성 덕분에 그는 시간적 한계를 뒤로 물려가면서 지중해 고고학의 영역을 넓혔다. 청동기시대의 그리스 는 슐리만 이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원사시대 에게해 세계 연구는 그가 미케네 문명 을 발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종종 슐리만의 발굴방법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의 방법은 돌이킬수 없는 파괴를 수반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 시대의 방법이었다. 방법을 현대화하고자 부심했던 그는 되르 펠트와 같은 층위학자의 도움을 받았다. 훌륭한 도기류 전문가로서 슐리만은 현장에서 어떠 한 표지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정성껏 발굴기록을 적었고 사진첩을 만들 었으며 아주 사소한 유물도 명찰을 붙여 분류했다. 그는 자신이 연구한 것을 발표하는데 아 주 부지런했다. <트로이 유물도해집>은 사진화보를 실은 최초의 고고학 저서 가운데 하나이 다. 이렇게 해서 모든 사람이 곧 사진을 보고 판단을 내릴 수가 있었다. 만약 그 과정이 비 난의 대상이 되었다면 그것은 그 방법이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이다. 역사지리학에 심취해 있었고 지칠 줄 모르는 여행자이며 유물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슐리만은 탐사의 선구자였다. 그는 후진들에게 두 가지 교훈을 남겼다. 우선 고고학은 팀 작업이라는 사실이다. 점점 더 기술적으로 되어가는 그것은 아주 다양한 과학 영역의 전문 가들의 참여를 전제한다. 또 하나는 고고학은 박물관학을 염두에 두고 일반 대중을 향해 열 린 영리활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경우, 그것은 고고학을 발 전시킨 국가의 관광사업과 경제적 이해에 기여한다. 여행이 소명을 낳는다는 사실은 제외하 고 말이다. 폼페이 방문이 안케르샤겐 출신의 한 상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지 않았던가? 기록과 증언 미국인의 꾸며낸 이야기 47세의 하인리히 슐리만이 승객들 틈에 섞여 있고, 그의 옆에는 아돌프 스펜서가 자리잡고 있다. 두 사람은 갑판 난간에 팔꿈치를 괴었다. 하늘은 푸르고, 가벼운 산들바람이 증기선의 갑판을 스친다. 아돌프 스펜서:나는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밀크 초콜릿을 만들어낸 바로 그곳이지요. 당신은 본토인입니까, 귀화인입니까?내가 보기엔 귀화인으로 보 입니다만. 하인리히 슐리만:맞습니다. 조사할 일이 있어 이곳에 왔지요. 신문을 보고 동생이 사망했다 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나는 그의 유해와 유산을 찾아 이 나라를 가로질러 새크라멘토까지 갔었습니다. 내 동생은‘거친 서부’-이 표현은 동생이 한 것입니다-에 묻히기엔 너무 젋은 데.. . 상상이 가십니까?내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낸 첫날 밤이 어떠했을지.. . 대화가 잠시 중단된다. 슐리만은 허공을 바라본다. 넬리가 갑판으로 나온다. 스펜서가 슐리 만을 바라보면서 술병을 꺼내 훌짝훌짝 술을 마신다. 하인리히 슐리만:대단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비명과 사이렌 소리에 단잠을 깼습니다. 유니 온 호텔 43호실에서 창문을 통해 작은 상가들이 늘어선 광장 쪽을 내다보니, 화염이 바로 앞 건물의 골조를 뒤엎고 있었어요. 위생상 당연한 일이지만 수돗물이 여전히 나오고 있었 습니다. 불길이 호텔로 옮겨붙는 바람에 나는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는 화재의 중 심지로부터 클레이가, 이어서 몽고메리가를 거쳐 텔레그라프힐까지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그동안 화재는 워싱턴가, 키니가, 캘리포니아가, 샌섬가로 번져, 부시가, 배터리가까지 집어 삼키고 있었지요.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십니까?나는 불길에 휩싸인 사람들이 마치 횃불같 이 타오르는 광경을 250미터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한 식당에서 보고 있었습니다. 아 이제 뉴욕의 해안이 보이지 않는군요. 길고 긴 항해가 되겠군 아돌프 스펜서:여전히 날씨가 좋군요. 게다가 모두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술렁대고 있군요. 우리는 그냥 지나가는 여행자일 뿐인데도 주변의 사정이 우릴 가만히 놔두지 않으 니 스펜서는 호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거내 계속 만지작거린다. 슐리만은 무슨 이유에선지 신경 질적인 표정을 짓는다. 아돌프 스펜서:계속하시지요.. 하인리히 슐리만:나는 그곳에서 유리창 밖을 내다보며 아침 6시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 시의 그 높은 곳에 있으면서 갑자기 내집에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오렌지색 화염에 물든 그 황폐한 거리들이 가족이 있는 집 이상으로 친밀하게 다가왔다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만, 영원성에 대한 감정,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열광이 밀려와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화재의 중심지를 향해 다시 내려오면 서, 불타버린 집 앞에서 절망에 빠진 늙은 유럽인들을 보았습니다. 독일인, 프랑스인, 영국 인 등등. 그들은 폐허 한가운데서 넑을 잃고 있었지요. 그러나 미국인들은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아무 일고 없었다는 듯이 그들은 아직불기운을 품은 재로 뒤덮인 땅바닥 위에 새 건물들의 설계도를 그리고 있었어요. 농담을 건네고 웃으면서 말입니다. 도시의 언 덕 위에 있는 묘지는 저 아래쪽으로 옮기자, 높은 지역에 놓인 묘석들을 날라다가 시내에 은행을 짓는데 쓰자, 그런데 그 현장에서 나도 도시를 발굴할 방법이 떠오르는 겁니다. 그 래서 지체 없이 은행을 개설해 일요일도 휴일도 없이 사금을 사모았지요. 나는 동생의 무덤 을 다시 찾았습니다만, 유산 문제는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동업자라는 짐승 같은 모든 걸 꿀꺽 집어삼켰거든요. 아무튼 나는 한 보험회사가 옛 묘지자리에 지으려는 건물의 주식을 50퍼센트 확보한 다음 소송을 포기했습니다. 그 보험회사는 유명한 캘리포니아 생명보험입 니다. 그리고 동생을 위해 호화로운 무덤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올해 7월 4일을 기해 미국 내의 모든 거주자들이 ‘이땅에 있다는 사실만으로’귀화하게 되었죠. 그래서 나도 미국인이 될 겁니다. 브루노 바이엔<슐리만,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들>갈리마르 출판사, 1982년 중국와 일본 텐진에 도착한 다음날인 4월 29일, 나는 당나귀 두 마리가 끄는 수레 두 대를 이끌고 베이 징으로 떠났다. 한 대에는 하인 아트숀이 짐과 함계 탔고, 나는 다른 수레에 탔다. 도심의 도로 사정이나 간선 도로의 조건으로 볼때, 수레는 중국에서 유일하고도 특이한 교통수단이 다. 이것은 바퀴가 두 개에다 푸른 천을 천장처럼 덮어씌었다. 내부가 사람이 누울 수 있을 만큼 길지도 않고, 유럽식처럼 앉아서 갈만큼 높지도 않은 이 수레는 충격완화 장치도 없었 다. 유럽인이 이 수레를 타기는 몹시 곤혹스러웠다. 중국인이 이 수레를 이용하는데 별 어 려움이 없다면, 그들은 신경체계에 결함이 있거나 아니면 아주 훌륭한 신경체계를 지녔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나는 수레 채에 걸터앉는 수밖에 없없었다. 흔들릴 때마다 겪는 고통을 좀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중에 쌀과 달걀, 양고기까지 구할 수 있어 먹을 것 때문에 푸 념할 일은 없었다. 이렇게 점심을 때운 뒤, 만리장성 성벽을 오르기 위해 안내인과 함께 출발했다. 거리에 나 서자마자 호기심으로 가득 찬 군중이 엄청나게 따라왔다. 이들은 성벽 위 첫 번쩨 가파른 비탈까지 따라왔으나, 그곳에 다다르자 모두들 가버렸다. 경사면을 오르다 지칠 걱정이 호 기심보다 더 강했던 것이다. 다만 퉁명스럽게 따라오던 아트숀이 계속 동행해 주었다. 처음 으로 위험한 장소에 이르렀다. 이 지점에서 성벽이 무너져내려 폭이 34센티미터밖에 남지 않았는데, 성벽 양쪽은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이렇게 좁은 공간을 비틀거리지 않고 지나가 려면 ‘네 발’로 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걸 본 아트숀도 겁이 났는지 더 이상 따라오려 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 계속 나아갔다. 망원경으로 북쪽을 바라보자, 높은 산봉우리들 너머로 만 주 고원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서 있는 지점900미터 아래로 길고 좁다란 계곡이 보였다. 북쪽에서부터 흘러온 강이 그 계곡을 따라 길게 굽이쳐 흐르며 평야를 비옥하게 해준다. 강 은 이리저리 휘돌며 쿠파쿠의 아름다운 마을 복판을 지난다. 그래서 강물을 중심으로 나누 어진 마을의 한 편은 3면이 물로 둘러싸여 마치 반도처럼 보였다. 이 긴 성벽은 높은 산등 성이 위로 이어지다가 계곡을 향해 내려올 때면 같은 높이의 세 갈래 성벽으로 나뉘는데, 가운데 성벽은 마을을 끼고 있으며, 다른 두 개는 마을 주위를 빙 둘러 에워싼다. 세 갈래 가 난 성벽은 계곡 위에 이르러 다시 하나로 합쳐져 한결같이 구불구불 이어지며, 가장 높 은 산의 능선을 타다가, 마침내 바위들이 톱날 모양으로 연달아 솟아오른 곳에 닿게 된다. 이 지점에서 바위능선의 깎아지른 허리를 민첩하게 치달은 성벽은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능 선을 넘어 마침내 구름 속으로 꼬리를 감춘다. 망원경 덕분에 나는 성벽을 60킬로미터나 더 눈으로 뒤쫓을수 있었다. 성벽의 수많은 구비를 다 헤아리지 못했지만 말이다. 또한 대포 구멍을 뚫어놓은 망루도 비록 상당수 시야에서 놓치긴 했으나, 동쪽으로 펼쳐진 것만도 250개나 셀 수 있었다. 상하이에서 동방 반도 증기해운회사의 여객선 베이징호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로 향했다. 쾌 적한 증기선으로 사흘 만에 손쉽게 여정을 마치는 대가로 우리는 900프랑이나 지불했다. 안락한 항해 끝에 6월 1일 아침6시, 일본이라는 나라의 첫 번째 작은 바위섬이 시야에 들 어왔다. 그동안 여행자들이 이 섬나라에 대해 쏟아놓은 열광적인 찬사를 익히 들어온 터라 나도 꼭 이나라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들뜬 마음으로 이 땅에 첫 인사를 보냈다. 아침 10 시에 이보가시마라는 화산 옆을 지나갔다. 이 화산은 해발 833미터로, 한창활동중이었다. 원추형 화산 꼭대기의 대분화구에서는 김이 자욱이 솟아오르고, 산허리에서 입을 벌린 둘째 분화구에서는 불덩이 같은 용암이 땅을 뒤덮으며 쏟아지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용암은 4 킬로미터를 흘러 바다에 닿아 바닷물을 끓어오르게 한다. 용암이 분출하면서 땅속 깊은 곳에서 희미한 소리가 울리는데, 그 소리가 마치 먼데서 울리 는 천둥 같았다. 우리가 탄 증기선의 요란한 소음에 놀란 날치들이 번번이 떼를 지어 수면 위로 끊임없이 솟구쳐 올라, 200-600미터 가량 공중을 난 다음, 다시 떨어져 물 속으로 들 어갔다. 멀리서 보면 이 물고기들은 꼭 바닷새처럼 보인다. 때때로 몇 마리가 배의 갑판 위 로 떨어지곤 했다. 그것들은 퍼덕이며 달아나려고 하지만, 선원들의 탐욕스러운 손길이 달 아나도록 그냥 두지 않았다. 이 생선들은 네덜란드산 청어보다도 갑절이나 큰 데다가 맛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슐리만<오늘날의 중국과 일본>상트랄 출판사, 1867년 이타카 여행 7월 10일, 해수욕을 하고 블랙커피를 한 잔 마신 후 새벽5시에 나는 일꾼들과 함께 문을 나섰다. 7시. 우리는 땀에 흠뻑 젖어 아에토스 정상에 올랐다. 나는 우선 4명에게 키 작은 나무들을 뽑게 한 후 북동쪽 모서리를 파게 했다. 오디세우스가 밀월의 침상을 만든 그 유명한 올리브나무를 그 자리에서 발견할 수도 있으므로, 오디세우 스는 그 나무 둘레에 자신의 신방을 꾸몄던 것이다. “뜰 안에는 잎이 울창한 올리브나무가 있었는데. 높이 자라 단단하고 밑동이 기둥만큼이나 굵었지. 이 나무 주위에 나의 신방 침 실을 만들었다네. 큰 돌을 빙 둘러쌓아 벽을 만들고. 그 위에 지붕을 덮었네. 신방에는 단단 하고 두꺼운 문을 달았지. 그리고 잎이 무성한 올리브 나무의 가지들을 잘라내고. 뿌리 바 로 위로부터 몸통의 표면을 깎아 청동칼로 매끈하게 문지르고 먹줄을 대어 고르게 다듬은 다음. 나무의 몸통을 침대의 다리로 삼아. 긴 송곳으로 여기저기 구멍을 뚫었다네. 이 침대 다리 위에 눈부신 진홍으로 물들인 쇠가죽 끈을 엮어. 금과 은. 상아를 박아넣고 나의 침상 을 펼쳤네. ”그렇지만 우리가 발견한 건 기와 조각과 그릇 파편뿐이었다. 66센티미터 깊이 에서 바위가 맨몸을 드러냈다. 그 바위에는 올리브나무의 뿌리가 뻗어나가면서 만든듯한 수 많은 균열이 나 있었다. 그러나 고고학 유물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내 희망은 깡그리 사 라졌다. 나는 곧이어 그 옆의 땅을 파게 했다. 담벽의 일부분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재 두 장을 그 곳에서 발견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3시간의 작업 끝에 2개의 바닥층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폭 3미터. 길이 4. 75미터 정도 되는 작은 건축물이었다. 문을 냈던 자리는 폭이 1 미터였다. 석재들은 사방 33미터로 반듯하게 재단되어 있었다. 돌과 돌 사이에는 눈처럼 흰 점토를 충분히 이겨 넣었는데, 나는 이 백토 조각을 몇 개 가져왔다. 돌바닥층 밑에도 역시 흰 점토가 두껍게 깔려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영웅 시대’의 건축물에서 돌과 돌을 점토로 이어붙인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점토가 나온 이상 이 건축물이 트로이 전쟁보다 적어 도 700년 후의 것이라고 확신한다. 여기서는 또한 애벌구이 한 기와 파편이 무더기로 나왔 다. 이 기왓장은 흰 모양이었고, 이어붙이면 한 장의 전체 폭과 길이가 각각 66센티미터에 달했다. 그외에 다른 그릇 조각들도 많았다. 인부들이 이곳을 파는 동안, 나는 오디세우스 궁전의 유적을 더듬어 그 자리 전체를 꼼꼼하 게 살펴보았다. 드러난 한쪽면 끝이 희미한 곡선을 그려보이는 커다란 돌을 발견한 나는-아 마도 원형 벽의 일부분일 듯해서-지니고 있던 칼로 돌에서 흙을 조심스럽게 털어냈다. 이돌 은 반원형이었다. 칼로 좀더 파자, 이 반원형 돌에 연결해서 반대편에 원형으로 이어지며 차곡차곡 쌓아올린 작은 돌들이 담벽의 축소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 차릴수 있었다. 우선 이 둥근 돌벽의 안쪽을 칼로 파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석회화된 뼛가루로 보이는 흰색 물질이 섞인 흙은 돌만큼이나 단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곡괭이로 파기 시작했다. 하지만 10센티미터도 나아가지 못해 유골의 재가 들어 있는 아주 작지만 아 름다운 단지를 깨뜨리고 말았다. 그 때문에 몹시 조심스레 발굴을 계속한 나는 20개 가량의 단지를 발견했다. 그 단지들은 기묘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각각 모양이 달랐다. 어떤 것 들은 누워 있고, 어떤 것들은 바로 서 있었다. 그런데 땅이 너무 단단했고 연장도 시원치 않았던 탓에 그것들을 파내는 도중 불행하게도 대부분을 깨드렸고, 온전한 상태로 가져온 것은 5개뿐이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높이가 고작 11센티미터, 주둥이의 지름은 1센티미 터이며, 주둥이가 6밀리미터에 불과한 것도 있다. 흙에서 파낼 때 사람의 형상이 정교하게 그려진 것이 2개 있었다. 이 그림들은 햇빛을 보자마자 희미해져 버렸는데, 알코올을 물에 섞어 문지르면 되살릴 수 있으리라 예상한다. 이 단지들 속에는 전부 화장한 유골의 재가 담겨 있다. 이 작은 가묘에서는 제물을 바치는 칼날도 찾아냈다. 길이 13센티미터의 굽은 형태로, 녹이 잔뜩 슬었지만 그런 대로 양호했다. 흙으로 구운 작은 여신상도 있는데, 입에 2개의 피리를 물고 있다. 철검의 파편과 멧돼지의 어금니, 동물들의 작은 뼛조각, 청동 철사를 엮어 만든 그릇 손잡이도 함께 찾아냈다. 비문을 찾을 수 있었다면 내 수명의 5년쯤은 기꺼이 바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보고는 없었다. 이 유물들의 연대를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이 단지들은 나폴리 박물관에 있는 가장 오래된 항아리보다 훨씬 이전의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내가 가져온 5개의 작은 단지에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혹은 그 자손의 유해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둥그런 돌벽 의 안쪽을 바닥까지 판 다음 측량해 보니, 남쪽 면의 깊이는 76센티미터, 북쪽은 92. 5센티 미터였고, 지름은 1. 25미터였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고된 발굴작업을 하다 보면 몹시 갈 증이 난다. 우리는 커다란 물항아리 3개와 포도주 4리터가 든 큰 술병 하나를 미리 가져왔 다. 포도주는 충분했다. 이타카의 포도주가 보르도 포도주보다 3배는 더 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은 곧 바닥이 나, 우리는 물을 길어오기 위해 그후에도 두 번이나 더 사람을 보내 야 했다. 호메로스 시대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 그 집터의 발굴을 인부들이 끝내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나는 작은 원형묘를 거의 다 팠다. 내 쪽이 더 성과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을 탓하지는 않 았다. 그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으니까. 정오가 되었다. 우리는 아침5시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래서 정상에서 약15 미터 아래, 양면이 벽으로 막힌 안뜰의 올리브나무 아래에서 점심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우 리의 식사거리는 마른 빵에다 온도가 30도 이하로는 느껴지지 않는 포도주와 물이었다. 그 러나 내가 먹고 있는 것은 이타카의 땅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더구나 나는 그것을 오디세우 스의 궁전 뜰에서 먹고 있었다. 아마도 이 자리는 오디세우스왕이 자신이 사랑하는 애견 아 르고스를 다시 만나 눈물을 흘리던 바로 그 자리일 것이다. 여기서 이 짐승은 20년만에 돌 아온 주인을 알아보고 기쁨 속에서 숨을 거두고, 신의 목동은 저 유명한 시구절을 읊게 된 다. 하인리히 슐리만<이타카, 펠로폰네소스, 트로이>라인발트 출판사, 1869년 사랑의 고백 헨리 슐리만은 눈에 띄는 것 가운데 가장 큰 돛단배를 빌려싸. 그러나 소피아는 그 배조차 초라하고 약해 보였다. 항구를 벗어나기까지 배 위에서는 한마디 말도 오가지 않았다. 소피 아는 체면을 잃지 않고 하루가 무사히 지나기만 빌었다. 그러나 배가 작은 만을 벗어나 넓 은 바다로 나서자 바람이 일었다. 배가 곧 뒤집어질 것처럼 요동쳤다. 소피아는 실신할 지 경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초대한 남자는 배가 흔들리는 것도, 평상시 홍조를 띠던 이 젊은 여인의 안색이 새파래진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다만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등지고 있 다는 사실만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주 진지한 애정을 담은 어조로 말을 꺼냈다. “소피아 양, 왜 나와 결혼하려 합니까?” ‘아, 안 돼요. 지금은 그런 말을 꺼낼 때가 아니에요. 갑판 위로 쓰러질 것만 같아요.. . ’소 피아는 속으로 외쳤다. 그의 캐묻는 듯한 강렬한 눈빛을 피할 수도, 긴장한 얼굴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녀 가 이 중대한 질문에 답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치밀어오르는 구토증을 안간힘을 써서 되 삼킨 그녀는 두팔로 가슴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그녀로서는 가장 정직한 대답을 했다.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셔서요. ”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녀는 그의 몸이 안 좋은가보다 생각했으나, 곧 격한 분노가 남자의 눈에 떠올랐다. 그녀는 그의 눈빛이 이렇게 번쩍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소피아 양, 방금 한 대답을 들으니 몹시 괴롭군요. 그건 노예에게나 어울릴 말입니다. 게다 가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말이 교육을 받은 아가씨 입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나 자 신은 순박하고 명예를 아는 남자로서,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결혼하면 당신도 나와 함께 발굴작업에 참여하고 호메로스에 대한 사랑도 공유해야 합니다. 목표와 열정에서 나와 일체가 되어야 하니까요. ” 바다가 더욱 거칠어졌다. 흰 거품을 머금은 파도가 일렁였다. 소피아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울렸다. ‘하느님, 이 배에서 내릴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런 다시는 물 위에 서 있지 않겠습 니다. ’ 그녀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자신이 지금 신에게 한 약속이 경건하지 못했음을 알아차 리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신의 아들이 바로 물결 위를 걸은 유일한 사람이 아닌가. 곧이어 이 예측불가능한 남자와의 관계를 다시금 부드럽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이야기를 언짢게 생각지 마세요. 그리스에서는 딸의 혼사를 부모님이 정해 줍니다. 부 모는 딸에게 가장 훌륭한 남편감을 찾아주려 애쓰지요. 그래서 저는 부모님의 결정을 받아 들인 겁니다. 제가 좋은 딸이라는 건 또한 좋은 아내가 될거라는 의미이니까, 제가 아까 한 말은 당신께 칭찬받을 만하지요. ” 반쯤 기분이 풀린 헨리는 한결 부드럽긴 해도 여전히 엄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와 결혼하려는 다른 이유는 없나요? 부모님에 대한 순종 이외에는 다른 뭔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소피아는 구토증이 목구멍까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더 오래 버틸 자신이 없어진 그녀가 혼 자 중얼거렸다. ‘내가 이 사람을 선택한 다른 이유를 대려면 뭐라고 해야 하나?호메로스에 대한 강한 신념 때문에 존경한다는 말은 이미 했다. 그가 쓴 글을 신뢰한다는 사실도 벌써 설명했고, 이 두가지 포부가 삶의 목표라는 이 사람은 자신의 또 다른 어떤 장점에 내가 경 탄해 주기를 바라는 걸까?꿈의 실현을 도와줄 그리스 여인이 필요한 걸까?내가 눈치채지 못 한 무엇인가가 있나 보다. 하지만 죽고 싶은 생각밖에 없는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곰곰히 생각해 본다. ’ 문득 그녀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장점. 그리고 혼기를 맞은 딸을 둔 그리스의 모든 집안 이 반기는 장점은 바로 백만장자라는 것이다. 이 사람만큼 돈이 많은 사람은 이제껏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이다. 공부를 하지 못했어도, 가족의 도움 을 받지 못했어도, 든든한 배경이 없었어도 말이다. 정말이지 그는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 할 만하지 않은가. ’ 그녀는 그를 바라보면서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다는 그 칭찬을 했다. “당신이 부자이기 때문이지요” 슐리만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신이 나와 결혼하려는 이유가 내가 지닌 인간적 미덕 때문이 아니라, 내가 부자이기 때 문이라니.. 당신과는 대화를 계속할 수가 없군요. 지금 이 순간부터는 더 이상 당신을 생각 하고 싶지 않습니다. ”슐리만은 몸을 돌려 선원들을 향해 무뚝뚝하게 소리쳤다. “항구로 돌아갑시다. ” 어빙 스톤<그리스의 보물>알뱅 미셸 출판사, 1979년 미케네 8월 24일 목요일 아침. 현장에 도착했을때는 지하층 내실 발굴이 진행중이었다. 나는 슐리 만 씨에게 나로서는 이새 작업을 감리할 수 없고, 따라서 작업을 허가할 수도 없다고 했다. 슐리만 씨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자신은 지하 내실 입구를 정리하는 작업을 할텐데, 만약 내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문화부에서 대리인을 새로 파견하라는 것이다. 나는 문화부가 내준 발굴허가가 50-60명의 인부들이 작업하는 조건이었지 90명의 더구나 입방미터당 품 삯을 받는 인부를 써도 된다고 한 것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반박했다. 자신은 원하는 발굴작업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으며, 그 방법도 자신이 마음대로 택할 수 있 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임무는 유물발굴에 입회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내 임무가 단지 발굴한 유물을 접수한는 것이 아니라, 미케네에서 이루어지는 작업 전반을 감 시하고 법률이나 당국의 지침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임을 지적해 주었다. 그리고 고문화재관리국에 문의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덧붙였다. 만약 당국에서 지금 벌이는 작업을 승인한다면 문제는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발굴작업은 하나만 빼고 다 중단해야 한다. 그 래야만 발굴품들을 제대로 수합할 수 있으며, 인부들이 빼돌리는 일이 없도록 단속할 수 있 고, 유물을 몰래 훔친다는 소문이 며칠 전부터 아르고스에 나돌고 있는데, 그래야만 발굴일 지를 매일 철저히 기록할 수 있다고 했다. 다음날 지하 내실 밖의 발굴터에서 네모난 돌로 쌓은 벽이 드러났다. 그 벽 옆으로 좀 더 깊은 곳에는 다른 벽이 하나 더 있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슐리만은 인부들에게 이 벽들을 부수라고 지시했다. 나는 나중에 돌아와 그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인부들에게 벽체 를 꼼꼼히 조사하기 전에 허물어버리지 말라고 했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질 경우에 만 없애도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벽은 보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슐리만 씨가 없었으 므로 인부들은 내 지침을 따랐다. 그러나 하루 뒤인 토요일, 슐리만 씨가 아주 이른 시각에 현장에 왔다. 그는 인부들에게 파다가 벽이 나오면 부수라고 지시했다. 나중에 내가 와서 벽을 부수지 못하게 할 경우에 대비해서 그는 아내에게 인부들의 감시를 맡기고, 자신은 아 크로폴리스 발굴현장으로 갔다. 조금 뒤에 온 나는 인부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일렀는데도 벽을 부수는 이유를 추궁했다. 슐리만 부인이 대답했다. 나는 그러한 지시를 내릴 아무 권 리도 없으며, 자신의 남편은 이 분야에 조예가 깊은데, 남편이 말하기를 출토된 벽들은 로 마 시대 것이며 인부들이 작업하는 데 방해가 되므로 부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그리 고 나는 이런 것들에 대해 문외한이므로 공연히 그런 지시를 내려 슐리만씨를 방해하는 일 이 없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성격이 불 같아서 이 발굴작업을 그만둘 수도 있다는 설 명까지 덧붙였다. 나는 그녀에게 그도 트로이에서 한 것처럼 고대유물을 마음대로 다룰 자 유는 없으며, 그가 미케네의 발굴감독권을 얻기 위해 법률준수를 약속했다고 응수했다. 그 리고 즉시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 그를 만나, 이 일에 대해 고문화재관리국에 전보 두 통을 보냈다고 전하라 했다. 슐리만씨는 이 발굴작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우려되는 점이 있었다. 그가 보존할 만한 가 치가 있다고 본 것은 건축물과 유사 이전 펠라스가족의 무덤뿐이었으며, 이러한 범주에 속 하는 것이 아니면 그리스 시대의 유물이건 로마시대의 것이건 마구 훼손해 버렸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항아리 파편들을 발견할때마다 그는 그것들을 함부로 다루었다. 그런 것들이 발굴작업중 자신의 손에 들어오면 멀리 던져버리기까기 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유사 이전의 유물이건 그리스 시대 것이건 로마 시대 것이건 가리지 않고 빠짐없이 주워모았던 것이다. E. 루트비히<트로이의 슐리만>, 런던, 1933년 미케네, 1876년 8월 24일. 오늘 디미트리가 인부 40명을 데려왔다. 나에게는 일꾼 다섯과 짐수레 하나 밖에 없었다. 샤르바티가 이끄는 팀에는 26명이 있었고, 나는 탐사용 구덩이를 파기 위해 피히차 팀의 14명을 불러왔다. 발굴품은 상부와 한쪽 측면에 나선형 장식이 달린, 묘석으로 쓰인 듯한 큼직한 포석 조각 하나, 그밖에 여인상들과 암소 형상의 조상 몇 점, 암소 조상 중 어떤 것들은 커다란 머리 아랫부분이 마치 여인의 몸체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 다. 미케네, 8월25일. 디미트리는 오늘도 40명을 데려왔고, 나에게도 5명이 있었다. 그러나 짐 수레는 마련하지 못했다. 샤르바티 팀의 26명도 함께 작업했다. 오늘 발굴품 중에는 흥미로 운 것이 많다. 1. 손잡이가 달린 샴페인잔 모양의 물커. 2. 색채가 뛰어난 수반형 작은 그릇. 점토로 구운 이 그릇은 다리가 4개인 점으로 보아, 향 로였을 것이다. 3. 쌍십자가 5개가 채색으로 그려진 원반. 4. 암소 조상 5점 5. 여인상 60점. 그중 하나는 젓가슴이 두드러진 반면 얼굴 형상이 없으며, 몸체 여기저기 문자가 새겨져 있다. 6. 돌도끼 한점. 7. 두 줄의 나선형 장식이 달린 돌. 8. 붉은색 반암으로 된 벽돌. 이것 역시 같은 형태의 나선형 장식이 있다. 9. 고대 그리스의 항아리 파편. 여기에는 아폴론 혹은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켜는 모습이 그 려져 있다. 10. 청동제 발굴품 중에는 a. 길이가 27센티미터인 긴 칼, 혹은 검 b. 18센티미터 길이의 굽은 단도 c. 작은 칼 3점 d. 길이 10센티미터의 칼집. 혹은 창싸개 e. 작은 바퀴 두 개. 지름이 9센티미터이며 바퀴의 용도로 쓰였던 것 같지는 않다. f. 22센티미터 길이의 예리한 손도끼 두 점 g. 머리핀들 h. 심하게 녹슨 항아리 두 점 I. 다른 항아리 네 점의 파편들 다음은 데이비드 트레일이 최근 출판한 슐리만의 발굴수첩 중에서 일부분을 발췌한 것으로, 미케네 발굴작업중 특히 성과가 좋았던 이틀간의 기록이다. 미케네, 1876년 11월 25일. 오늘 아침 다음번 무덤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 무덤 위에는 키클롭스족이 제물을 바치던 제단이 있었다. 발굴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골이 발견 되었다. 그리고 청동으로 된 큰 항아리 5점도 발견했는데, 그중 하나는 1000여 개의 크고 작은 돋을무늬가 나선형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황금 뿔이 달린 커다란 은제 암소 두상도 있었는데, 나무에 금은을 입혀 만든 것 같았다. 또 청동 창과 검이 한무더기 나왔는 데, 일부는 목재 칼집이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무에 금박을 입혀 칼받침이 조금씩 붙 은 것도 많았는데, 그 끝에는 뼛조각 또는 흰 대리석 같은 것이 구멍 4개를 낸 다음 거기에 각각 돌기를 만들어 장식을 물려놓은 방식으로 단단히 박혀 있었다. 무기들은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땅속에서 꺼내자마자 대부분 우리 눈앞에서 바스러져버렸다. 창도 자루의 모양새 를 부분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많았지만, 나무로 된 자루는 갈라지거나 부서졌다. 금으 로 칠한 나무조각이 상당수 나왔고, 청동에 금을 입힌 것들도 있었다. 그외에도 금으로 만든 그릇이 5개 있는데, 그중 하나는 양 옆면에 비둘기가 새겨져 있었고, 적어도 3개는 물이나 술을 마시기 위한 잔이다. 동쪽 작업장을 마무리하고 서쪽 편으로 작 업을 진척시켜 나가던 우리는 골격이 아주 장대한 유골의 잔해를 발견했다. 거기에도 역시 청동 항아리가 5개 있었다. 항아리 하나에는 은그릇 몇 점이 담겨 있었다. 크고 작은 단추 들도 100여 개 나왔다. 은그릇은 모두 9개를 발견했는데, 아름다운 술잔형 그릇을 포함, 3 개만 온전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아주 작은 금조각들이 그곳에는 무수히 흩어져 있었고, 어떤 조각들은 꽤 큼지막했다. 장대한 체구에나 맞을 듯한 묵직한 금제 허리띠는 구멍에 고 리를 걸어 채우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귀중한 그릇과 기타 여러 물건을 커다란 청동 항아리 에 넣어 보관한 점은 아주 흥미롭다. 청동 항아리들이 하나씩 포개져 쌓여 있는 점 역시 특 별한 관심이 간다. 미케네, 11월 28일, 펜디클레스가 도착한 오늘에야 겨우 작업을 재개했다. 전번의 그 무덤 발굴작업을 계속했는데, 순장된 유골들이 발견되었다. 유골의 숫자로 볼 때 4-6명으로 헤아 릴 수 있으며, 그중 두구의 유골은 치아가 작고 여자용 장신구를 걸치고 있어 여자인 것으 로 추정된다. 금으로 치장한 이 유골들은 모두 지배계층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거기서 함께 발견한 것들은, -뽀족한 장식이 달린 왕관 두 점과 여인네를 위한 머리빗, 이 머리빗은 금제 모양틀에 빗살 은 뼈로 만들어졌다. -동물벼를 갈아 만든 단추 여러 개 -수많은 금조각들 -호박 목걸이 -커다란 금제 가슴 장식 -유골의 얼굴에 덮인 금제 가면 3개, 이 가면중 하나는 치아가 듬성듬성 빠진 늙은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 머리빗과 여자 장신구들이 함께 놓여 있었다. 이 유골 또한 커다란 가슴 장식을 달고 있고, 가면으로 덮인 부분 아래로는 부서진 뼛조각들이 남아 있었다. -작은 금제 그릇 두 점 -손잡이 달린 금제 항아리 두 점 -금박을 입힌 칼자루 세 점과 여러 가지 모양의 뼈단추 상당수 -술장식이거나 칼의 어깨끈으로 쓰였을 금줄, 그중 하나는 길이가 아주 길다. -작은 금제 술병 -손잡이가 둘 달린 큰 항아리(칸타로스) -무게가 200그램 이상인 커다란 팔지 -그밖에 작은 팔지 하나 -금반지 두 개, 하나에는 사냥 장면이, 다른 하나에는 전투 장면이 새겨져 있다. -깨진 은제 그릇 -금제 투구 -작은 사자상 -큼지막한 브로치3점, 하나는 숫염소의 형상이다. -긴 뿔이 달린 숫사슴 형상의 납항아리 -부싯돌 25점 -금제 각반 장식 -큰 주전자, 혹은 냄비 13점 -크고 작은 검 여러검. 몇몇은 칼받이가 흰 대리석이고, 금박을 입힌 나무 칼받이가 달린 것들도 있다. -동일한 칼받이가 달린 단도 여러 개 -강철이나 유리로 만든 것은 전혀 없음 -트로이에서 발굴했던 것과 같은 전투용 손도끼 여러 점 데이비드 트레일 <슐리만 논쟁과 초판 미케네 일지>, <신화, 풍문, 그리고 역사> 디트로이트. 1986년 호메로스를 열렬히 숭배한 여인 전세계를 통틀어 저의 조국 그리스의 정치제도, 통치자, 웅변가, 철학자, 그리고 시인들은 후손들에게 경이와 찬탄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은 높은 교양을 쌓고 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완성형을 구현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그들을 모른 다면 진정한 교양인이라고 여길 수 없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리스의 고서 적들은 예술작품들과 동일한 운명을 겪여왔으며, 확신하건대 파괴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유산의 100분의 1도 안 될 겁니다.. . 트로이와 미케네 왕묘 5기의 발굴,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보물을 발견한 것은 슐리만 박사가 호메로스에 대해 지닌 열정 덕분에 기능했던 일이며, 아울러 거기에는 제 자신의 열정도 한 부분을 차지했다고 생각합니다. 미케네에서나 트로이에서 제가 해낸 몫은 미미합니다. 저는 단지 30명의 일꾼을 감독했을 뿐입니다. 트로이에서 제가 맡은 일 중의 하나는 커다란 무덤 을 파보는 작업이었는데, 호메로스에 의하면 그 무덤은 영원한 신들이 아마존의 여전사 미 린에게 마련해준 것이며, 인간의 역사에는 다르다니아의 여왕 바티샤의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케네에서 저는 ‘사자의 문’이라는 귀중한 보물을 밝은 빛 아래 드러내 보였습니 다. 우리가 해온 작업들 중에서 가장 힘든 일로 꼽히는 이 발굴에는 넉 달이 소요되었는데, 비록 보물은 발견하지 못했어도 이 발굴작업은 학문적으로 상당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장소에서 조각품 몇 점외에도 아주 흥미로운 도기들을 꽤 많이 발견했습니다. 이 도기들 은 우리에게 그것이 묻혔던 먼 상고시대에 대해서 알여줄 것입니다. 또한 저는 미케네 아크로폴리스의 왕묘 5기의 발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분묘 들은 모두 바위산을 깎아 만든 것으로, 지표에서8-10미터에 이르는 다양한 깊이에 자리해 있었습니다. 이 무덤들의 바닥은 자갈로 평평하게 덮여 있었는데, 이 자갈층은 그 위에 쌓 은 화장단에 바람을 통하게 해서 불이 쉽게 타오르도록 하는 목적외에 다른 용도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화장단에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시신을 눕혔던 것이지요. 무덤 속 에서 발견한 유해는 모두 열다섯이며, 이들은 각각 별도의 화장단을 쌓아 장례를 지냈습니 다. 화장단의 불꽃은 흰색 점토를 한층 두텁게 덮은 후에야 꺼지는데, 그 다음에 다시 자갈 을 한 층 더 깔고 흙으로 덮어두었습니다. 무덤 위에 묘석을 세우고, 세월의 흙먼지가 묘석 에 1미터쯤 쌓이면 다른 묘석을 세우곤 했습니다. 무덤의 상층부에 접근하기는 쉬웠으나, 그 다음 작업부터는 상황이 전혀 달라져 큰 어려움에 마주치곤 했습니다. 저와 제 남편은 진창에 무릎을 꿇은 채 자갈들을 들어내고 점토층을 깎아냈으며, 귀한 보배들을 하나씩 주 워모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 어떤 성과를 얻을 때마다 기쁨을 느끼며 이러한 어려 움들을 잊었으며, 열정에 사로잡혀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식사를 한 것처럼 생각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인들은 영국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 대국의 풍부한 지원이 없었다면, 그 리스는 독립국가의 지위를 결코 지켜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최근에도 영국은 너그러운 아량 으로 이오니아해의 아름다운 섬들을 우리나라에 양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 뒤에는, 다음번에 받을 은혜를 간절히 기대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지라, 저는 감히 영국에 바라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그리스가 겪고 있는 위기에서 우리의 대의를 지켜줄 것 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영국 여성들에게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자녀들이 호메로스와 영원한 우리의 고 전들을 읽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우리 선조의 운율이 살아 있는 언어을 가르쳐주십시오. 영 국 어린이들은 지적 능력이 뛰어나므로, 고대 그리스어에 앞서 현대 그리스어부터 배우기 시작하면 우리 고대 언어의 난해함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방법으로 어린이 들은 10년이 아니라 적어도 1년 안에 고대 그리스어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을 것이며, 아울러 우리의 현대어를 구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 언어를 말하고 들음으로써 플라톤과 호메로스의 언어도 결코 잊지 않겠지요. 바로 이런 이유로 저 는 영국의 모든 교사들이 그리스를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되길 간절히 기원하는 바입니다. 저와 같은 열렬한 호메로스 숭배자의 말을 너그럽게 경청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 리며, 이만 마치겠습니다. 소피아 슐리만, 대영제국 및 아일랜드 왕립 고고학협회가 그녀의 업적에 경의를 표해 개최 한 특별총회에서 행한 연설<고고학 저널>, 1877년 티린스 발굴현장의 하루 연구를 위해 고대 건축물의 잔해가 제공하는 정보를 하나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으므 로, 이번에도 나는 아테네 주재 독일 제국 고고학회에 소속된 저명한 건축가의 협조를 얻었 다. 그는 베를린 출신의 빌헬름 되르펠트 박사로서, 독일 제국의 올림피아 발굴작업에서 4 년동안 기술 분야를 책임졌고, 1882년에는 트로이에서 5개월간 나를 도와줬다. 현장 감독으 로는 마룰리아나 출신의 게오르기오스 바실로풀로스를 한달에 180프랑을 주기로 하고 고용 했다. 그는 트로이에서도 일로스라는 이름으로 같은 일을 맡아 나를 도왔고, 티린스에서도 같은 일을 했다. 테라섬 출신인 니케타스 시미달라스도 월급150프랑에 감독으로 고용했다. 나의 성실한 하인 외디푸스 피로말레스도 당시 시간 여유가 있어 앞의 두 사람과 함께 감독 일을 맡아주었다. 그는 1882녀에 트로이에서 나와 함께 일한 적이 있다. 작업에 필요한 연장이나 기구는 내가 아테네에서 챙겨왔다. 쇠바퀴가 달린 튼튼한 영국식 외발손수레 40대와 큰 쇠지렛대 20개, 권양기 작은 것 2대와 큰 것1대, 큼지막한 쇠삽50개, 곡괭이 50개, 커다란 괭이 모양의 연장도 25개가 있었는데, 이것은 동방에서는 차파라고 하 는 것으로 포도밭을 가는데 쓰이는데, 이번 작업에서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우리가 보물을 주워담을 때 쓴 바구니들은 그리스인들이 센빌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나우플리온에서 사왔 다. 감독들이 묵고 도구라고 갈무리해둘 곳이 필요했으므로, 티린스 남쪽 벽 아래 있는 모 범 농장의 건물을 월 50프랑씩 주기로 하고 빌렸다. 이 모범농장은 이 나라의 훌륭한 정치 가 카포 디스트리아가 세운 것으로 이제는 쇠락해 황폐해졌다. 그래도 우리는 그곳에 방 몇 개를 마련하고, 내 말을 매어둘 외양간도 한 채 빌렸다. 되르펠트박사와 내가 묵기에 이 농 가는 너무 지저분했다. 티린스 근처에 편히 지낼 만한 숙소가 한 군데 있었지만, 그곳은 3 개월치 방세로 2000프랑을 요구했다. 그래서 나우플리온의 에트랑제 그랜드 호텔에 머물기 로 했다. 호텔에서는 깨끗한 방 두 개를 우리 둘이 각각 쓰고, 게다가 하인 외디푸스에게 방 하나를 주고도 숙박비로 하루에6프랑이면 되었다. 호텔 주인인 게오르기오스 알로샤스 씨는 친철하고 싹싹한 사람이어서, 우리가 지내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세세히 신경써주었다. 나는 일찍 잠을 깨는 습관이 있어, 새벽 3시45분이면 일어났다. 일어나서는 말라리아에 걸 리지 않도록 키니네 4알을 먹고 해수욕을 하곤 했다. 뱃사공이 매일 1프랑의 품삯을 받고 정확히 새벽 4시에 항구에 나와서 기다렸다가 나를 태우고 탁트인 바다로 나갔다. 그럼 나 는 5-10문 가량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즐겼다. 이 뱃사공의 배에는 발판이 없어서 다시 배위로 오르려면 노를 붙잡고 기어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곧 익숙해져서 나 는 어렵지 않게 노를 붙잡고 올라올 수 있었다. 해수욕을 마쳐도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그 다음 나느 늘 아가멤논 카페에 가서 진한 블랙커피 한 잔을 마셨다. 모든 물가가 하루가 다 르게 뛰어올랐지만, 그 카페의 커피값은 예전처럼 아직도 한 잔에 10상팀이었다. 하루 6프 랑씩 주고 빌려 타는 말이 카페 앞에서 기다렸다가 나를 태우고 티린스로 가는 데는 25분 이 걸렸다. 그곳에 도착해도 아직 해가 뜨기 전인데, 그때 나는 타고 온 말을 보내 되르펠 트 박사를 데려오게 했다. 우리는 항상 아침 8시경에 식사를 했다. 이때가 인부들의 첫 휴식시간이었다. 식사 때면 티 린스의 옛 궁터 안 기둥받침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메뉴는 주로 쇠고기 통조림이었는데, 이것은 나의 든든한 후원자인 런던의 헨리 슈뢰더 상사에서 넉넉하게 보내주었다. 그밖에 빵과 신선한 양젖 치즈, 오렌지2개를 먹었다. 여기에 수지향 백포도주를 곁들였는데, 이 포 도주의 쌉쌀한 맛은 키니네와 잘 어울렸다. 더위와 힘든 일을 견뎌야만 할 때는 적포도주보 다 이 술이 부담이 적었다. 정오경에 인부들은 두 번째 휴식시간을 가졌다. 처음에는 한 시 간을 주었지만, 한낮의 무더위로 말미암아 조금씩 시간이 늘어나, 거의 두 시간쯤 쉬게 되 었다. 인부들이 쉬는 동안 우리도 휴식을 취했다. 성채의 남쪽 후미진 곳에 가서 돌을 베개 삼아 둘이 드러누웠다.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는 나중에 비잔틴 교회를 발견했다. 고된 노 동이야말로 잠을 부르는 데는 최고이다. 나는 티린스의 성채에서 청하는 정오의 낮잠보다 더 달콤한 수면을 맛본 적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비록 누운 자리가 결리고, 태 양의 열기를 가릴것이라고는 얼굴에 덮은 모자뿐이지만, 오수에서 깨어나면 다시 원기가 솟 곤 했다. 하루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인 식사는 저녁에 호텔로 돌아와 허름한 식당에서 했다. 런던 친 구들이 쇠고기 농축액을 공급해 주어서 우리는 언제나 근사한 수프를 끓일 수 있었다. 올리 브 기름에 튀긴 생선이나 양고기, 치즈, 오렌지나 포도주에 곁들이면 식사준비가 끝난다. 이 나라에서는 생선과 여러 가지 야채, 감자, 누에콩, 강낭콩, 완두 등과 아티초크가 맛있다. 그 렇지만 이 모든 음식들이 언제나 올리브 기름에 범벅이 되어 나오기 때문에, 우리 입맛에는 정말 맞지 않았다. 하인리히 슐리만<티린스>, 라인발트 출판사, 1885년 슐리만의 트로이, 그 100년후 1871년 슐리만은 터키 당국으로부터 첫 발굴작업의 허가를 얻어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의 사를 여러 방식으로 되풀이해서 전달했다. 즉 자신은 “트로이 전쟁이 허구가 아니며, 트로 이와 프리아모스왕의 페르가몬 왕국이 실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하는, 순수하게 학문 적인 목적”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는 이 목적을 이루었는가?호메로스가 부분적으로 읊었던 그 전쟁이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이 트로이의 폐허가 확인해 주는가?슐리만은 그것을 확고히 믿었고, 그의 뒤를 이어 되르펠트, 블레건이 그렇다고 되풀이해서 확언했다. 이 세 사람은 고고학 이론의 여지없는 승리,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중요한 성과를 이루어낸 장본인들이 다. 블레건의 명확한 용어들을 여기서 다시 한 번 인용해 본다. “이보다 더 오래 의혹을 품 게 한 일은 없었다.. .. 역사적인 트로이 전쟁은 실재했던 일이다. 이 전쟁에서 아카이아인들, 혹인 미케네인들은 동맹을 맺어 한 왕에게 통솔권을 맡기고, 그 왕의 영도하에 트로이인들 과 그들의 연합군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블레건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트로이에서 필로스가지 진전시켰다. 게다가 그는 발굴작업 최초의 보고서는 단순히 ‘트로이’라고 했던 데 비해 마지막 보고서는 ‘필로스’가 아니라‘필로스 네스토르 궁전’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상 블레건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역사에 대한 그의 결론을 뒷받침해줄 만한 것은 어떤 발굴작업에서도 찾아 볼수 없다. 트로이에서 발견한 그릇 파편 중 어느 하 나도 아가멤논이나 전혀 다른 정복자, 왕, 미케네 동맹, 심지어 전쟁과도 연결되지 않는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캐스키의 주장을 근거로 한다. “트로이7a유적에서 나온 유물들이 그 요새가 점령당했었다는 걸 명백하게 증명하지는 않는다. 사고로 일어나 불행한 대화재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전반적인 파괴를 가져왔을 수도 있다. 한편 만약 이 성채가 약탈당한 적이 없다면-그리고 사실 아가멤논이 이끄는 그리스군에 의해 약탕당 한 것이 아니라면-우리가 이 성채를 트로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 ”이 가정은 고고학자들 이 입증하려고 애써왔고, 현재는 가정이 아닌 기본전제로 자리잡은 사실이다. 사실, 분명한 역사적 자료의 뒷받침이 없는 유물들은 슐리만이 최초로 제기한 그 질문에 답 할 수 있을 만큼 증거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 슐리만의 주장이 나온지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만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즉, 호메로스가 노래한 전쟁과 유사한 어떤 트로이의 전쟁이 있었다면, 이 소아시아 지방에서는 히사를리크가 포위전을 치 를 만한 유일한 요새이며, 트로이7a 유적만이 그 전쟁에 어울린다. 분명 이것은 상당한 의 미가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또한 최근 100년간 집약적이고 더욱 복합적으로 발전 해온 고고학이 근본적으로 상황을 어렵게 했다. 말하자면 고고학은 히타이트의 경우처럼 새 로운 자료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 기본적인 질문에 답할 가능성을 증대시키기보다 감소시키고 말았다. 우리가 이러한 난처한 지경에 직면하게 된 것은 호메로스가 그 문제에 대해 어떤 상황도 설 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전쟁, 시구와 전설로 전해져온 그 전쟁은 시간 밖에 놓여 있는 사건이다. 시간적 지표가 없는 세계 속을 부유하는, 즉 상황이 설정되지 않은 세 계속에 놓인 사건인 것이다. 파리스, 헬레나, 그리고 메넬라오스의 이야기는 1914년의 사라 예보 암살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 원인이 된 것처럼 전쟁의 표면적인 원인은 될 수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다. 세계를 큰 전쟁속으로 몰아넣지 않고도 왕자들은 암살당하 고, 귀부인들은 납치되었다. ‘상황’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갈등하는 ‘민족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복합성과 정치 적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경우에 따라 전쟁을 낳거나 그렇지 않았던 거이다. 여기서 전쟁이란 지역적 전투들에 의해 수행되는 한정된 규모의 국지전을 말한다. 트로이에 대한 고고학이 그 이후로 보여준 성과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 본토와 소아시아, 키프로스, 시리아에 대한 고고학 연구는 중요한 새 자료들을 내 놓음으로써, 지금까지 몰랐 거나 간과한 가능성들을 제시해 준다. 우리가 알기로 BC13세기 말엽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중부는 광범위하게 유린당했고, 히타이트 제국은 붕괴되었고, 키프로스와 시라아 북 부는 폐허가 되었다. 시라아 북부에 남아 있는 키프로스와 우가리트의 기록들은 비록 수수 께끼 같고 단편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침략에 뒤이어 거의 동시에 광범위한 약탈이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 문제를 연구해 왔고, 드디어 이 약탈행 위를 이집트 원전이 전해 주는 사건에 결부시키기에 이르렀다. 오래 전부터 알려져온 그 두 권의 이집트 문서에서 이집트인들은 바다를 건너온 약탈자들을 ‘해양민’이라고 불렀는데, 당 시 전반적인 약탈은 이렇게 불린 침략자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트로이7a구역의 파괴 도 점차 이런 맥락으로 설명하게 되었다. 트로이 자체가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고, 오늘날 그와 관련된 자료가 나오지 않 고 있는 만큼, 이런한 설명은 가설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판별이 가능하고 수 긍할수 있는 상황을 제공한다. 이 상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의 대지에서 솟아난 것이지,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다. 트로이 전쟁이 ‘붕괴해 가는 제국을 살이기 위한 불행한 시도’ 였다느니, 혹은 트로이가 ‘믿지 못할 문지기’가 되는 바람에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원정’이었다느니 하는 최근의 가설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 대영제국 박물관의 고대 그리스 로마 담당 학예연구관인 찰스 뉴턴은 미케네에 대한 슐리만 의 저서를 1878년 <에딘버러 리뷰>에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아감멤논의 이야기 중에서 우리가 실제 사실로 받아들일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다른 그리 스 전설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신화의 외피를 벗겨내면 그속에 실제 역사의 잔류물이 있을 텐데, 어떤 기준으로 이것을 허구와 분간할까?이 분야에서 학문적 성과가 쌓이고 탁월한 비 평이 쏟아져 나왔어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가 내린 결론은 현재 의 정황으로 볼 때 오늘날 가장 받아들일 만한 결론으로 여겨진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회 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여기서 우리가 제의하는 바는 호메로스의 트로이 전쟁을 청동기시대 의 그리스 역사로부터 떼어내서 생각해야만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M. I. 핀리. <오디세우스의 세계>라 데쿠베르트 출판사, 197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