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루즈 로트레크-밤의 빛을 사랑한 화가 [시공디스커버리총서 040] 지은이: 클레르 프레셰, 조세 프레셰 / 김택 옮김 출판사: (주)시공사 차 례 ======= 톨루즈 로트레크-빛의 밤을 사랑한 화가 제 1장 어린시절 제 2장 몽마르트르의 발견 제 3장 찬란한 시절 제 4장 여인들의 도시 제 5장 "저는 갇혀 있어요. 갇힌 것은 모두 죽게 마련이지요" 기록과 증언 톨루즈 로트레크-빛의 밤을 사랑한 화가 귀족사회의 일원으로 태어난 행운을 맛보기도 전에, 앙일 드 툴루즈 로트레크는 어린 시절 두 다리의 성장이 멈추어 버리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온전하지 못한 신체와 추한 외모로 좌절감을 떨칠수 없었지만, 파리의 밤세계는 그에게 새로운 삶을 안겨 주었다. 카바레의 무용수와 가수, 매춘부와 서커스 단원의 천한 웃음뒤에 가려진 인간의 비애를 그린 그의 그림은, 인간의 닫힌 마음을 열어주는 사랑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지은이: 클레르 프레셰, 조세 프레셰 / 김택 옮김 출판사: (주)시공사 봉사자: 김윤봉 클레르 프레셰(Claire Freches) - 오르세이 미술관의 주임 관리자인 클레르 프레셰는 미술관 설립 당시부터 구상에 참여해 왔다. 오르세이 미술관의 많은 책들의 공저자인 그녀는 카피엘로(1981)와 고갱(1988), 그리고 툴루즈 로트레크(1991)전시회의 개최위원이었으며, 안토니 테라스와 함께 「나비카」(1990)를 저술하였다. 조세 프레셰(Jose Freches) - 프랑스 남서 지방 출신인 조세 프레셰는 1971년부터 1975년까지 프랑스 국립미술관의 큐레이터를 역임했다. 모 산업체의 경영책임자이기도 했던 그는 1987년부터는 프랑스 국립미술관 연합의 예술가 상담을 맡고 있다. 김택 -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4번「렘브란트」와「반 고흐」「모네」등이 있다. 제 1장 어린시절 "앙리의 뼈는 선천적으로 부러지기 쉬운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 결과 1년 사이에 일어난 가벼운 추락사고로 왼쪽과 오른쪽 대퇴골이 차례로 골절되었다."라고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아버지 알퐁스 백작은 기록해 놓았다. 이 사소한 사고는 프로방스의 귀족가문 태생인 어린 앙리의 신체 발육과 인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앙리는 일찍부터 데생과 회화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알비의 성당 그늘에서 앙리 마리 레이몽 드 툴루즈 로트레크 몽파는 1864년 11월 24일 붉은 벽돌로 지은 대성당 근처의 보스크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퐁스 드 툴루즈 로트레크 백작과 타피에 드 셀레이랑가문 출신의 어머니 아델은 사촌간이었다. 이 두 가문 사이에는 통혼이 전통처럼 이어져 내려왔는데 이 근친결혼이 날때부터 허약하고 병약한 앙리가 불구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한다. 그는 750년부터 1271년까지 알비 지방을 지배한 유명한 툴루즈 가문의 직ㅂi 후손이었다. 그의 조상인 보두앵 백작은 1196년 로트레크 가문의 여자작이자 몽파 영지의 상속녀인 알릭스와 결혼했다. 그날 이후로 툴루즈라는 성에 로트레크와 몽파가 덧붙여진 것이다. 여가와 사냥을 즐기기로 유명한 가문에서 태어난 앙리는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해 고통을 받았다. 앙리는 사냥과 매에 열성인 괴팍한 아버지 알퐁스를 이해하지 못해. 서로 서먹서먹한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이 고독하고 몽환적인 백작은 한 아틀리에에서 조각과 데생에 손을 대기도 했다. 1876년 그는 열두 살이 된 아들 앙리에게 매에 관한 작은 책을 주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아들아. 기억해 두렴. 넓은 야외와 광활한 창공의 삶만이 건강한 것이라는 사실을. 자유를 박탈당한 삶은 비뚤어지고 곧 사라진다... 이 책은 열린 대지의 삶을 즐기는 법을 너에게 이해시켜 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네가 삶의 쓴 맛을 보게 된다고 해도 말과 개, 매가 차례대로 너의 귀중한 친구가 되어 너를 위로해 줄 것이다. " 골절상 1978년 5월 30일 보스크성에서 앙리는 의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다. 그는 야외활동의 즐거움을 더 이상 맛볼 수 없게 되었다. 승마와 사냥, 그리고 운동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열세 살이었지만 열 살밖에 안 돼 보였다. 다음해에 그는 피레네 산맥의 온천지인 바레주에서 오른쪽 다리마저 골절상을 입었다. 그 후 그의 다리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아 앙리는 불구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갈수록 그를 멀리했다. 앙리는 나머지 유년기를 보스크성과 나르본 부근 오드현의 셀레이랑, 그리고 바레주와 아멜리레벵, 라말루 등의 온천지에서 보냈다. 로트레크의 어머니는 곧 그의 아들이 화가가 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헌신적이고 말수가 적으며 교양 있는 여성이었던 어머니는 화가라는 직업이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평생동안 아들의 경제적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로트레크는 어머니와 항상 가깝게 지냈으며, 서로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사실은 모자의 믿음과 공감을 보여 주는 것이다. 1883년 작으로 되어 있는, 로트레크가 그린 최초의 주요 작품 가운데 하나는 낙담한 어머니를 그리고 있다. 당시 남편과 별거중이던 그녀는 찻잔을 앞에 두고 식당에 앉아 있다. 전혀 미술지도를 받지않은 로트레크는 여기서 이미 에두아르 마네나 베르트 모리소의 기법을 따라 밝은 색을 활기차게 캔버스에 칠해 놓았다. 조숙한 재능 로트레크는 어린 나이에 데생을 시작했다. 1881년, 그는 '꼬부랑 노트'라 불리는 작은 연습장에다 몇 개의 데생을 했다. 이 연습장에는 "나의 사촌 마들렌 타피에에게. 베르녜트 부인의 교육에서 그녀를 잠시나마 풀어 주기 위해"라고 쓰여 있다. 그러고는 펜과 잉크로 (코코트)에 관한 25점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 ('코코트'는 한 신부와 말에 관한 짧은 이야기이다. 로트레크는 건강 때문에 상당한 시간을 보낸 온천에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 이 이야기의 작가는 그의 친구인 에티엔 드비슴이다. ) 이 그림들은 그의 캐리커처 실력을 보여 주고 있다. 로트레크는 1881년 봄 파리에서 치른 첫 바칼로레아시험에서 낙방했다 그해 11월에야 툴루즈에서 시험에 합격한 그는 파리로 돌아와 아버지의 친구인 르네 프랭스토에게 자기가 그린 데생을 보여 주었다. 르네 프랭스토는 일상생활과 말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던 귀머거리 화가였다. 그는 당시 포부르생오노레가 253번지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거리는 경마 장면이나 볼로뉴 숲을 화폭에 즐겨 담던 존 루이스브라운, 장 루이 포랭 같은 화가들이 드나들던 거리였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트레크는 사를 삼촌의 도움을 받아 화가의 길을 걷기 위해 프랭스토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프랭스토는 그를 화가인 레옹 보나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1882년 3월, 로트레크는 당시 화가지망생이 밟던 일반적인 코스에 따라 보나의 작업실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보나와 코르몽 밑에서 배우다 보나의 작업실은 장 레옹 제롬이나 귀스타브 모로의 작업실과 함께 가장 훌륭한 작업실로꼽혔다. 이 작업실들은 실질적인 미술학교로, 유명한 선생들이 살롱전의 금메달이나 로마의 그랑프리를 꿈꾸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로트레크는 원래 초상화가인 사를 에밀 오귀스트 카롤뤼스 뒤랑에게 지도를 받고 싶었지만, 프랭스토는 그를 보나의 작업실로 보냈다. 보나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나이 많은 유명한 스승이었다 그는 미술전분야에 걸쳐 활동했는데. 후에 로트레크는 이 점을 혐오했다. (로트레크 사후에 보나는 로트레크의 작풀이 국가 소장품으로 선정되는 것을 극력 저지한다. )가차없는 비판을 일삼았던 보나는 젊은 로트레크에게 이렇게 말했으리라. "유화는 괜찮군. 멋을 좀 냈구먼. 어쨌든 나쁘지 않아. 그러나 데생은 솔직히 말해 좀 심하군 " 1882년 9월 보나가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에 임명되는 바람에 그의 작업실은 문을 닫았다 로트레크는 보나의 몇몇 제자들이 페르낭 코르몽에게 급히 요청하여 문을 연 작업실로 자리를 옮겼다. 코르몽은 고대와 』성경S의 주제만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역사화가였다. 그가 그린 대작 (가족과 함께 도주하는 카인)은 대단한 역작으로 이미 당시에 뤽상부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코르몽의 작업실에서 공부하던 제자로는 젊은 에밀 베르나르와 프랑수아 고지가 있었다. 로트레크는 같은 툴루즈 출신인 고지를 보나의 작업실에서부터 알고 있었다 고지의 저서 '나의 친구 툴루즈 로트레크'(1957)는 당시 로트레크의 삶을 세세히 보여 주는 전기로서 중요한 자료이다. 로트레크는 188년에서 1885년 사이에 자신의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는 전위미술의 기법을 발견하고 그것에 신중하게 몰두했다 오전을 코르몽의 작업실에서 보내고 오후에는 화랑을 찾던 그는, 보나, 코르몽, 제롬, 카롤뤼스 뒤랑 등이 포진해 있는 공식 미술과. 인상주의자들이 환호하고 실천하는 미술운동-104년 프랑스의 사진작가 나다르의 옛 작업실에서 인상주의자들이 첫 집단전시회를 연 후에 특히 두드러졌다-사이의 심연을 차츰 이해하기 시작했다. 로트레크는 현대성을 선택했다. 퓌비 드 샤반을 패러디하다 1881년의 살롱전에 피에르 세실 퓌비 드 샤반의 작품 (신성한 숲)이 전시되었다. 이 대작은 열정적인 논구의 대상이 되었다.로트레크는 이틀 만에 드 샤반의 작품을 '고쳐 그린' 수정판을 완성했다 이것은 당시 희극 오페라에서 성행하던 음악적 패러디를 미술에 적용한 것이다. 로트레크는 모델로 삼은 작품의 정적인 선을 과장하는 동시에 공간들을 같은 색깔로칠했다. 웅변의 여신과 역사의 여신이 사라지고. 비극의 여신이 있던 자리에 돌아온 탕자가 자리한 대신, 각각 '맥케이'와 '메소니에'로 서명된 두 개의 캔버스가 놓인 이젤을 마주하고 앉은 비극의 여신의 모습은 원작과 완전히 다른 부분이다 로트레크는 현대적인 모습을 한 인물들 사이사이에 자신을 도발적인 자세를 취한 모습으로. 혹은 일본 사람의 모습으로 슬쩍 끼워 넣었다. 그는 여기서 이미 자신이 가진 재능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 회화적 전통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추출한 후, 그것을 냉정한 유머를 통해 변형시키는 재능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작과 '개작'의 차이가 이러 한 유머를 통해 제시되는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리는 도중에 로트레크는 코르몽의 작업실에서 공부하던 부유한 동료 화가 르네 그르니에와 함께 퐁텐 2가 19번지로 작업실을 옮겼다. 에드가 드가의 작업실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무희들을 즐겨 다루던 화가인 드가와 이웃해 있었던 덕분에 로트레크는 그림의 주제와 더불어 주제에 '틀을 부여하는 법' 등에서 드가의 영향을 받았다. 예컨대 (페르난도 서커스장의 마드무아젤 라라)-페르난도 서커스장에서 라라가 공중그네를 입으로 물고 매달려 있는 그림 -가그러한 영향을 잘 보여 준다.로트레 크는 페르난도 서커스장에서 말을 타는 여성 서커스 단원을 그리기도 했다. 여기에는 일본 판화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특히 소멸선의 사용은 그림에 깊이감과 더불어 그림의 앞쪽에 자리 잡은 사물이나 인물의 형태를 특징적인 각도로 구성해 준다. 이러한 기법은 드가가 탁월하게 구사했는데, 당시 로트레크의 작품에도 이것이 등장하고 있다. 로트레크는 드가의 작품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로트레크의 그림은 드가의 작품 '오페라의 오케스트라'에서 강하게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로트레크는 그 그림을 사촌 디오의 집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그 그림은 파리 오케스트라의 바순 주자였던 데지 레 디오의 초상화이다.) 드가는 모델인 쉬잔 발라동에게 화를 참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나의 옷을 빌려 입었으면서 내 옷을 자기 몸에 맞게 다시 재단했다오." 그의 친구들, 그리고 그의 겸손함 이 무렵 로트레크 주위에는 앙리 라슈, 르네 그르니에, 아돌프 알베르, 프랑수아 고지, 루이 앙크탱 등의 친구가 있었다. 그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섞여 있는 파리 사회와 몽마르트르 태고의 붉은 가로등이 주는 매력과 기쁨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로트레크는 자기 작품에 대해 퍽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훗날 '파리에서 가장 추하고 마른 사장이라고 말한 코르몽밑에서 6년 동안 힘든 도제생활을 인내하며 지냈다. 할머니에게는 조심스러운 용어를 골라 가며 자신의 작업얘기를 했다. "저는 프랑스 미술의 재건에는 전혀 관심이 있습니다. 다만 한 장의 하찮은 종이와 투쟁을 할 뿐입니다. 이 종이 는 저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고, 저 역시 그 위에 제대로 된 것이라곤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 겸손 혹은 기민함으로도 볼 수 있는 이런 특징은 로트레크의 작품관을 대변해 준다 즉 피카소 같은 화가와 달리 로트레크는 역사적이거나 미학적인 흐름 속에 자신을 자리매김하려 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본 현실을 재현하고자 했다. 반면 어떠한 비평적 접근도 빗겨 가게 만드는 이러한 특성은 고도의 위장이자 어마어마한 자부심의 표시로 해석될 수도 있다. 1885년 가을. 그는 몽마르트르 공동묘지 뒤쪽에 자리한 라슈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로트레크는 이곳을 중심으로 유화를 그리고 데생을 했다. 로트레크의 인생은 몽마르트르를 발견하면서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이 유별난 소우주를 그리는 데 쏟아 부었다. 몽마르트르는 비천한 것과 귀족적인 것이 흥미롭게 뒤섞인 세계였다. 로트레크는 물랭 루즈, 물랭 드 라 갈레트, 그리고 미를리통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는 이 구역의 일원인 동시에 날카로운 관찰자였다. 제 2장 몽마르트르의 발견 로트레크는 몽마르트르의 삶에 푹 빠져 들어갔다. 그는 곧 이 공동체의 성벽 안에 사는 다채로운 거주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성격은 프랑스의 작가인 쥘 발레가 말한 대로 "몽마르트르의 쓰라린 웃음"그 자체였다. 블랑슈 궁전과 피갈, 뷔트사이에 펼쳐진 이 비밀스러운 세계에서 로트레크는 비로소 물을 만난 물고기가 되었다. "매일 저녁 작업을 하기 위해 술집으로 갑니다." 로트레크는 가티네 출신의 가수이자 작곡가인 아리스티드 브뤼앙을 알게 되었다. 그는 1885년 7월 미를리통이란 카바레를 열었다. 그곳은 로돌프 살리가 188년에 문을 연 샤 누아르란 카페가 있던 자리로, 샤 누아르가 더 넓은 장소로 옮겨 간 덕분에 브뤼앙은 그곳을 차지할 수 있었다. '미를리들, 당신이 자신을 질책하고 싶을 때 찾는 곳'이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 이 카바레의 성격을 말해 주었다. 이 건물은 로트레크를 사로잡았다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평판이 나뿐 여인인 니니 포 드 시앵 (개가죽 니니)과 로자 라 루즈(붉은 로자)의 공연을 보았다. 그녀들은 중산층과 귀족들인 청중을 두고 무례한 태도로 야유조의 노래를 불렀다. 청중은 천한 사람들 틈에서 야릇한 쾌감을 맛보았다. 로트레크에게 영감을 준 이곳은 그가 결코 떠날 수 없었던 하나의 완전한 세계였다. 당시의 카페 콩세르(식사나 음료를 먹으며 음악, 쇼 등을 즐길 수 있는 곳:역주)는 오늘날의 극장과 같은 곳으로, 엘도라도, 알카자르, 스칼라 등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홀들이 스트라스부르 대로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의 성공에 고무되어 다른 흘들이 개관을 했다. 오페라 극장 옆에는 에덴이, 생라자르역 옆에는 페피니에르, 몽마르트르 옆에는 시갈이 들어섰다. 커다란 건물들 곁에는 소규모의 카페 콩세르들이 숱하게 문을 열었다. 샤 누아르도 그런 장소였다 적당한 가격에 입장할 수 있는 샤 누아르는 언제나 담배연기가 가득했고, 사람들은 거기서 재기와 음담패설이 뒤섞인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카페 콩세르의 인기 스타 중 하나인 브뤼앙은 후에 에밀 졸라의 소설 '파리'에 등장하는 가수 르그라의 모델이 되었다. 각광 로트레크는 무대조명의 효과를 곧 알아차렸다. 이런 효과를 회화에 처음 적용한 사람은 드가였다. 기본적인 빛은 배우의 그림자를 위쪽에 만드는 푸트라이트, 즉 각광이었다. 각광은 배우들의 얼굴을 만화처럼 과장하고 몸짓이나 자세를 강조해 주며 , 배우들의 실루엣을 검은색 배경과 대비시켜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당시 로트레크는 자기가 그린 대상이 배우든, 모델이든, 혹은 에밀 베르나르든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인물이 받는 조명에만 관심을 두었다. 코르몽의 작업실에서 알게 된 에밀 베르나르는 로트레크에게 폴 세관과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수집가인 탕기 영감을 소개해 주었다. 1886년 2월, 빈센트 반 고흐는 파리에서 화랑을 연 동생 테오를 만나기 위해 앙베르를 떠나 파리로 오게 되는데, 이때 코르몽의 작업실에 등록을 하고 로트레크와 친분을 맺었다. 1887년 로트레크는 이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의 파스텔 초상화 한 점을 완성했다. 카페 콩세르는 로트레크에게 수많은 그림의 주제를 제공해 주었는데, 그중 (아리스티드 브뤼앙의 카바레에 있는 루이 13세식 의자의 노래)와 (엘리제 몽마르트르에 걸린 루이 13세식 의자의 카드리유 춤곡)은 카바레 주인인 브뤼앙이 발간한 잡지 '르 미를리통'의 표지로 사용되었다. 이 잡지의 출간에 참여 한 다른 화가로는테오피 유 알렉상드르스탱랭이 있는데, 거리의 삶을 묘사한 그의 그림은 로트레크의 것보다 훨씬 비극적이었지만, 그에게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톨로 세그뢰그, '몽마르트르의 헝가리인' 이 시기에 이뤄진l 로트레크의 작업은 화가이자 판화가인 장 루이 포랭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한때 로트레크의 아버지인 알퐁스 백작의 초상화를 그린 포랭은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하류사회를 바라보며 인생의 기괴하고 비극적인 측면을 풍자적으로 그려 냈다. 그는 로트레크의 유머러스한 데생 작업을 격려해 주었다. 로트레크가 처음으로 중요한 삽화를 그린 것은 그가 잡지와 신문에 삽화를 그리기 시작한 1880년대 후반이었다 그의 첫번째 기고는 1886년 9월 6일 '르 쿠리 에 프랑세'에 실렸다 쥘 로케가 재능 있는 데생가들과 판화가들을 출판에 동원한 덕분이었다 스탱랭, 포랭 ,레옹 아돌프 빌레트 등이 그들이다. 1889년 잡지사의 연례 무도회에 로트레크는 복사 복장으로 참석했다. 성수채 대신 먼지떨이를 들고서 . 사진작가인 시모네가 엘리제 몽마르트르에서 주최한 카자르의 첫번째 무도회에는 인쇄 노동자의 푸른 작업복과 부드러운 펠트 모자를 착용하고 갔다 로트레크는 곧잘 짓궂은 장난을 쳤다. 자신이 전혀 심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이상한 의상을 걸치고 나타나 친구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위장하는 데 매력을 느낀 그는 톨로 세그뢰그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카이로를 방문했고 지금은 친구 집에 머물고 있으며 , 재능이 있어 언젠가는 그 재능을 증명하게 될 몽마르트르의 헝가리인'으로 행세했다 로트레크는 1886년 부조리 미술 전시회에 이 이름으로 출품했다. 제도권 화가들이 중심이 된 살롱전을 패러디한 이 전시회는 유머러스하고 무정부주의적인 화가들이 벌인 일종의 토론회였다 이곳에서 가명을 사용하는 것은 세련된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로트레크는 '탄산수 수채화와 하잘것없는 부스러기 같은 조각부문에 출품했는데, 작품명은 'B.C.3년 반의 바티뇰'이었다. 번호가 332번이었던 이 그림은 금강사를 입힌 종이 위에 그린 유화였다. 1889년에 열린 같은 전시회에도 역시 같은 가명으로 (매독에 걸린 불행한 가족의 초상화)를 출품했다. 이번에는 자신을 '이블라스가의 왼쪽 세번째 가로등이 있는 집에 살며, 노란 파스텔로 배경색을 칠한 가족 초상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쥐비 드 슈발의 제자'로 소개했다. 로트레크는 다다 운동의 선구자들보다 한술 더 떴다. 첫 여자 로트레크는 보통 성인 남자들보다 왕성한 정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나 매음굴에서 돈을 주고 만난 여자들과 격렬한 성행위에 탐닉한 그는 매춘의 세계가 지닌 온갖 아름다움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 모리스 주어양은 말했다. "그는 반라의 여자들에게 엉덩이에 손을 얹고 자동피아노에 맞추어 춤을 춰 달라고 요구하곤 했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봄)이나 베노초 고촐리의 프레스코화를 연상시키는 그들의 자태를 바라보며 로트레크는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로트레크의 삶과 그림에서 여자들은 언제나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그들은 로트레크의 뮤즈이자 조언자였고. 때로는 정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보다도 그의 모델이었다. 로트레크는 그들의 특징을 매우 간략하게 잡아내어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탁월한 몇 개의 선만으로도 그의 날카로운 감각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다. 브뤼앙을 통해 로트레크는 카르망 고댕을 만났다. 당시 카르망은 로자 라 루주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로트레크는 그녀가 '위험한 갈보년'-이말은 카르망이 노래를 통해 자기에게 투사한 이미지이다-이 아니라, 조용하고 병약한 노동계급 출신의, 매우 시간을 잘 지키는 한 소녀임을 알아챘다. 그녀는 곧 그가 아끼는 모델 중 하나가 되었으며, '카르망', '몽루즈에서', '로자 라 루즈', '흰색 상의를 입은 붉은 머리 소녀'같은 작품의 모델이 되었다. 또 다른 모델로는 잔 방즈가 있었다. 그녀는 브뤼앙의 술집에 출연하는 노래의 여왕 니니 포 드 시앵처럼 포즈를 취했다. 또한 르네 그르니에의 아내도 로트레크의 모델이었다. 황홀한 자태를 뽐내는 그녀는 '마담 릴리 그르니에'에서 기모노를 입고 등장한다. 로트레크의 뮤즈, 쉬잔 발라동 아마도 로트레크의 처음이자 유일한 사랑은 쉬잔 잘라동으로 알려진 마리 클레망틴 발라드일 것이다. 프랑스 중부 리무쟁 지방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발라동은 1880년대 중반 파리에서 세탁부로 일하며 유화와 데생을 공부하다가, 몰리에 서커스단의 곡마사 겸 공중곡예사가 되었다. 하지만 사고로 부상을 당한 후에는 모델이 되어 드가나 쥐비 드 샤반 같은 화가들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 특히 드 샤반은 발라동에게 영감을 얻어 (신성한 숲)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그렸다 1889년, 로트레크가 그녀를 만나 열광적으로 사랑에 빠진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로트레크는 미를리통, 샤 누아르. 엘리제 몽마르트르의 젊은 여성 모임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다. 발라동은 자살소동까지 벌여 가며 2년 동안 끈질기게 로트레크에게 구혼을 했지만, 그녀의 기만적인 면모를 알아챈 로트레크는 이 귀여운 파리 여인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관계를 끊으려 했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1891년까지 간간이 이어졌다. 젊고 감수성이 예민한 로트레크는 여성에 대한 냉혹한 관찰자가 되었다.('숙취'와 '쉬잔 발라동'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 그러나 때로는 특정한 모델에게 영감을 얻어 그림에 부드러운 감정을 답아 내기도 했다 1888년, 로트레크는 알려지지 않은 한 젊은 여인의 초상화를 다수 제작했다 어릴 적부터 이웃에서 알고 지내던 엘렌 바리(쥘리에트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라는 매력적인 여성의 용모에 로트레크는 감탄하고 있었다. 로트레크는 그녀의 얼굴을 사진에 담은 후 몇몇 그림을 통해 구체화했다. 페르난도 서커스장 드가와 마찬가지로 로트레크도 서커스를 사랑했다. 1888년에 제작된 '페르난도 서커스장:여자 곡마사'('연기주임'으로도 알려져 있다.)에서 로트레크는 인물들이 구석에서 잘려 나가는 화면구성으로 원형 서커스장을 묘사했다. 중앙에 전속력으로 달리는 얼룩얼룩한 말의 등 위에 여자 곡마사가 앉아 있고, 연기주임의 긴 채찍이 말에 살짝 닿아 있는 그림이다. 물랭 루즈의 창설자인 조제프 올레는 이 그림을 복도에 걸어 두기 위해 구입했다. (근처에 작업실이 있던 조르주 쇠라는 이 그림을 보고 감탄을 길게 늘어놓았다) 이 그림은 서커스를 주제로 제작될 연작들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로트레크는 이 분야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대가가 되었다. 몇 년 후 스크리브가에 자리한 아시유라는 술집에서 로트레크는 누보 서커스장 출신의 두 광대를 알게 되었다. 공연후 춤을 추기 이해 온 포티와 쇼콜라였다. 그들의 화려한 복장은 재기 넘치는 석판화 연작에 영향을 미쳤다.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1888년 브뤼셀에서 열린 23세기 그룹 전시회에 로트레크는.20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이 작품들은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고, 그의 작품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테오 반 고흐는 자신이 경영하던 화랑 명의로 로트레크의 작품을 몇 점 구입했다. 이 무렵부터 로트레크는 몽마르트르의 무도장을 주제로 삼아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1889년에 제작하고 같은 해 앵데팡당 전시회(독립작가 전시회)에 출품한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는, 로트레크가 처음으로 춤추는 모습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포착해 그린 대형 그림이다. 이 그림은 네 사람이 기대고 있는 긴 의자의 대각선이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점차 사라지게 표현해 공간감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그림은 앞으로 로트레크의 주요 작품의 특징으로 등장하게 될 세부묘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 주는 인물화 연작 가운데 하나이다. 이 그림에서는 춤추는 사람들의 앞쪽에 중산모를 쓰고 있는 남자(화가 조제프 알베르) 가 긴 의자에 앉아 있는 세 명의 여자를 바라보고 있다 로트레크는 의도적으로 쥐비 드 샤반의 기법을 통해 인물묘사의 전통적 양식성을 강조했다.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에 자리잡은 물랭 드 라 갈레트는 파리에 남은 마지막 시골풍 무도장이었다. 일요일이 되면 노동자들이 파리의 프티 부르주아들과 어울려 여자들을 사귀기 위해 이곳을 찾곤 했다. 이전에 탈곡장으로 쓰이던 맨땅을 댄스 플로어로 사용한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로트레크를 비롯한 단골손님들과 그가 종종 모델로 삼았던 직업적인 춤꾼들은 한 데 어울려 춤을 추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그리유 데구, 라 몸 프로마주, 그리고 여기서 데뷔한 라 굴뤼가 있었는데, 라 굴뤼는 당시 가장 유명한 카바레인 물랭 루즈의 최고 인기 스타였다. 물랭 루즈의 개장 물랭 루즈는 1889년 10월 5일에 개장했는데 이날은 파리의 벨 에포크(황금기) 중 가장 중요한 날의 하나로 기록된다 흥행주이자 기업가인 사를 지들러가 소박한 대중무도장인 렌블랑슈 자리에 거대한 종합 유흥지를 건설한 것이다. 장식가인 레옹 아돌트 빌레트가 이 건물 위에 올려놓은 우아한 목제 풍차는 그 붉은 날개로 클리시가의 하늘을 선회하였다. 넓은 댄스 플로어에서 사람들은 발랭탱 르 데조세의 지도를 받는 니니 파트 앙 레르, 그리유 데구, 라 몸 카카, 클레르 드륀, 드미 시퐁, 그리고 라 멜리니트를 볼 수 있었다. 커다란 라운지 바, 정원, 훈련받은 원숭이, 나무로 만든 거대한 코끼리 역시 관객을 즐겁게 해주었다. 바로 이 코끼리 밑에서 오케스트라와 배꼽춤을 추는 무희들, 그리고 유럽 전역에서 청중을 끌어들이는 국제적인 카바레 스타인 르 페토만이 공연을 벌였다. 로트레크는 곧 이 유희의 공장을 즐겨 찾게 되었다. 유럽의 저명한 귀족과 왕족, 긔록 파리 시민들이 몽마르트르의 분위기에 이끌려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몰려왔다. 영국의 에드워드 7세도 황태자 시절 이곳을 주기적으로 찾았다. 로트레크는 자신의 가장 큰 작품 두 점을 바에 걸자는 지들러의 제안을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 무렵 로트레크는 삶에서 중요한 것의 우선 순위를 이미 정해 두게 된다. 명예보다는 축제가, 파리 살롱의 고상한 취향보다는 몽마르트르가 그에게는 더 중요했다. "당신 그림에서 내 엉덩이를 보니 정말 아름답군요"(라 굴뤼)로트레크가 물랭 루즈에서 만난 많은 여인들 중에서 그가 최고의 걸작을 제작하는 데 영감을 준 여인은 라 굴뤼였다 본명이 루이즈 베버인 라 굴뤼는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역인 알사스 지방 출신이었다. 그녀는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일하기 전에는 세탁부 생활과 페르난도 서커스에서 단원 생활을 했다. 라 굴뤼는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르누아르를 만나기도 했으며. 1890년에 자르뎅 드 파리로 이주했다. 그녀는 '자연주의 카드리유'라 불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춤을 유행시켰다. 캉캉춤에 근원을 두고 있는 이 춤은 다리를 머리 뒤에 두어야 하며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다리를 최대한 벌리며 끝을 맺었다. 브뤼앙의 카바레 근처에 있는 엘리제 몽마르트르에서 라 굴뤼를 알게 된 로트레크는 그녀가 활동을 그만둘 때까지 8년 동안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퇴락의 길을 걷게 되면서 그녀는 가건물의 서커스장에나 출연하게 되는데, 1895년 로트레크는 오늘날 널리 알려진 두 점의 패널화로 이 가건물을 장식해 주었다. "당신 그림에서 내 엉덩이를 보니 정말 아름답군요."라고 속삭여 주던 여인, 라 굴뤼, 이 여인의 매력에 한없이 사로잡힌 로트레크는 라 굴뤼의 모습을 담은 유화, 포스터, 석판화를 열점 가량 제작했으며, 오늘날 그 중 대다수의 작품이 로트레크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잇다. 제 3장 찬란한 시절 예술적 기량이 절정에 오른 툴루즈 로트레크는 1890년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 유화와 포스터의 명작이 탄생했다. 석판화에도 손을 댄 그는 곧 뛰어난 석판화가가 되었다. 1894년 7월 여배우인 이베트 길베르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선생님이 그린 포스터들을 보면 저는 무척 행복해요. 목요일 7시 반에 저는 집에 있을 거예요. 어쩌면 토요일 2시에도요." 최초의 포스터 미술비평가인 펠릭스 페네옹은 화가인 쥘 세레를 '두블 콜롱비에르(주로 포스터용으로 사용된 옛 종이의 이름)의 티에폴로(이탈리아의 화가:역주)'라고 불렀다 쥘 세레는 1889년 10월에 개관한 물랭 루즈 광고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이 포스터에는 새로운 춤의 전당이 될 건물의 실루엣과 더불어 당나귀를 탄 무희들이 앞쪽언 묘사돼 있다. 셰레를 흠모하던 로트레크는 사를 지들러에게 다음포스터의 디자인을 의뢰받았다. 로트레크는 핵심을 찔렀다. 발랭탱 르 데조세로 알려진 에티엔 르노댕이라는 기묘한 인물과 함께 춤을 추는 라 굴뤼를 그렸다. 변호사의 아들인 르노댕은 새 같은 옆모습과 호두까기 같은 턱의 소유자로. 춤에 열정적이었으며 항상 반질반질 윤이 나는 중산모를 쓰고 있었다. 곧 파리 전역에 퍼진 로트레크의 포스터는 인상적인 색채와 날카로운 실루엣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판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이 작품을 통해 로트레크는 대중의 눈에 깊이 각인되었다 이는 최초의 현대적인 포스터이자 진정한 예술작품이었다. 수집가들이 이 작품처럼 높게 평가한 포스터는 이전에 없었다 수집가들은 벽에 붙은 포스터를 떼어 가지려고 혈안이 되었다 '작품'에서 에밀 졸라는 센가의 이 젊은 화가가 유랑 서커스단을 광고하는, '세 가지 색으로 그린 포스터'가 탄성을 이끌어 내는 모든 곳에서 미술 아카데미를 모욕하고 있다고 기술했다. 무정부주의 잡지인 '르 페르 페나르'에서 펠릭스 페네옹은 독자들에게 "감초즙을 사용해 드러내기 민망한 항문이 쾌락을 느끼게 한 그런 엉터리 그림들보다 훨씬 활력 있는 이 그림을 손에 넣으라."면서 이 최고의 포스터를 파리의 벽에서 메어 가질 것을 부추겼다. 첫 인쇄물 1890년대 초반에는 사진술의 발달로 복제판화를 만드는 일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미술에 조예가 깊고 교양 있는 애호가들은 원판으로 제작된 판화에 더욱더 관심을 나타냈다. 재능 있는 편집자인 앙드레 마르티는 이런 애호가들을 염두에 두고 '원판화'라는 화가들의 판화 시리즈 출판에 착수했다. 로트레크가 1권의 표지를 디자인했다. 모델은 물랭 루즈의 무희인 잔 아브릴이었다 로트레크는 이 분야에서도 조금씩 명성을 쌓아 나갔다. 이 귀족의 그림이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더 화제가 되어 ,그에게 관심을 갖는 수집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892년, 일간지인 '라 데페슈 드 툴루즈'는 로트레크에게 18세기의 소설집인 '툴루즈의 비극' 의 광고 디자인을 의뢰했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교수형 당하는 사나이'이다. 로트레크는 '카페 콩세르'의 무대와 마찬가지로 이 그림에서도 조명을 아래쪽에서 줌으로써, 인물이 어두운 배경에서 돌출되어 보이는 극적인 효과를 냈다. 이것은 로트레크가 불안한 감정을 표현한 몇몇 포스터 가운데 하나이다. 이듬해에 로트레크는 한 교도소 신부의 자서전인 '아침'의 광고를 디자인했다. 이 그림은 도열한 간수들 앞에 사형수가 서 있고, 디자인했다. 이 그림은 도열한 간수들 앞에 사형수가 서 있고 간수들의 불길하고 검은 실루엣이 밝은 배경색과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인물의 비극을 표현한다. 일본의 대가를 모방하다 다른 판화 작품들에서 로트레크는 자신이 살던 시대에 관한 재기 있고 익살맞은 관찰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베트 길베르가 활동하던 카페 콩세르의 이름을 딴 제목의 그림인 '디방 자포네'나 가수이자 무희인 잔 아브릴을 묘사한 그림인 '자르댕 드 파리'(1893)를 보면, 로트레크가 일보느이 대가들인 기타가와 우타마로나 순쇼 가쓰카와, 호쿠사이 가쓰시카의 판화집을 보고 형태와 단색적인 영역이 자아내는 유희에 매료되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로트레크는 이와 같은 양식으로 브뤼앙의 1892년 공연 포스터에 그를 그려 넣었다. 이 포스터에서 브뤼앙은 밝은 적색 스카프를 늘어뜨린 채 테가 넓은 모자를 손에 들고 있다. 브뤼앙은 테아트르 데 앙바사되르의 지배인인 피에르 뒤카르가 로트레크의 포스터를 채택하도록 설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준비단계의 스케치에 만족하지 못한 피에르 뒤카르가 레비라는 무명의 포스터 화가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러나 브뤼앙은 로트레크의 포스터를 쓰지 않으면 공연 취소도 불사하겠다고 을러댔다. 이 그림은 훗날 포스터 분야의 대작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브뤼앙을 그린 포스터는 포스터가 독자적인 미술관을 가져도 될 만한 진정한 예술 형태의 하나라느 ㄴ인식을 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무희, 가수, 그리고 여자광대 1891년 카지노 드 파리가 화려한 선전과 함께 개장함녀서 다소 침체한 물랭 루즈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지들러의 새 동업자인 조제프 올레는 인기배우들을 고용했는데, 누보 서커스장의 여자광대였던 '노란 꽃 여인'차 우 카오(소동), 라 마카로나(달걀 흰자위), 이제는 춤은 추지 않고 연김나 하는 잔 아브릴(강력 폭약), 폼 다무르(사랑과 사과), 레용 도르(금빛), 그리유 데구, 그리고 라 굴뤼가 그들이었다. 이들의 매력에 사로잡힌 로트레크는 콜랭쿠르가에 위치한 작업실에 잇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카페 콩세르에서 보내며 무명의 젊은 인재가 파리 무대의 인기배우로 피어나는 과정을 지켜 보았다. 특히 물랭 루즈에 소속되지 않은 배우인 잔 아브릴과 긴 실루엣과 팔꿈치까지 오는 검은 장갑으로 남자들을 매료시켰던 이베트 길베르가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 결국 로트레크는 이 두 여인에게 영원한 명성을 안겨 주었다. 잔아브릴, '강력 폭약' 1890년 로트레크는 라 멜리니트로 불리는 잔 아브릴과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유복한 이탈리아 이주민인 마르케스 루이지 데 폰트와 화류계 여성인 라 벨르 엘리즈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인 아브릴은 병약해 보일 정도로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실제로 엄청난 정력의 소유자였다. 멜리니트는 다이너마이트에 비견될 폭발력을 가진 화약과 같은 여자였다. 젊은 시절 우연히 사귄 한 의과대학생의 도움으로 그녀는 뷜리에 무도장의 관객들 앞에서 춤을 추었고, 스무 살에 물랭 루즈에 데뷔했다. 후에 디방 자포네와 자르댕 드 파리로 옮겨 커다란 명성을 얻었다. 아브릴은 비평가들에게 '춤의 화신'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녀는 곧 로트레크외 가장 대표적인 모델 중 하나가 되었다. 로트레크는 그녀가 춤을 추는 모습뿐 아니라 모피 목도리에 아름다운 외투를 걸치고 물랭 루즈로 들어서는 모습도 그렸다. 이 그림에 표현된 우아하고 고결한 그녀의 모습에서는, 대중적인 춤인 카드리유를 격렬하게 추는 그녀, 한 일간지가 표현한 대로 '황홀경에 빠진 한송이 난초'처럼 다리를 쳐들어 대는 무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아브릴은 로트레크의 작업실에서 모델을 서다가 그녀가 '천재적인 불구자'라 부르던 로트레크와 함께 자기 친구들이 모이는 일류 레스토랑을 점심을 먹으러 가곤 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교양을 갖추었던 아브릴은 프랑스의 시인인 폴 포르, 레옹 디에르,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 소설가인 조리 카를 위스망스 등과 교제를 가졌다. 1896년 그녀는 입센의 작품 (페르 귄트)를 무대에 올린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로트레크 사후에 그녀는 연극에 전념하다가 언론인이자 데생가인 모리스 비에와 결혼하여 화려한 부르주아의 삶을 향유하였으나, 말년에는 비참한 가난 속에 생을 마쳤다 이베트길베르, '세기말의 재담가' 로트레크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 또 다른 인물로는 검은 장갑의 여인인 이베트 길베르가 있다 그는 그녀에게 두려움과 매혹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그녀는 패션 모델을 하다가 프랭탕 상점의 점원을 거쳐 부프 뒤 노르에서 알렉상드르 뒤마의 (여왕 마고)에 출연하면서 극단생활을 시작했다. 1886년, 그녀는 카바레 엘도라도포 자리를 옮겨 마침내 재담꾼이 되었다. 작 가이자 평론가인 모리스 샤를 도네가 그녀에게 이야기를 써 주었으며, 당대의 영향력 있는 언론인인 장 로랭은 그녀가 디방 자포네에서 한 공연을 호평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1890년 길베르는 길고 가냘픈 몸매에 목이 v자형으로 깊게 팬 녹색 공단 드레스를 입고, 길고 새까만 그물 장갑을 끼고 물랭 루즈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화가들도 그림을 통해 이 '세기말의 재담가'에게 영원성을 부여하려 했다. 그중 유명한 화가들만 열거하면 샤를 뤼시엥 레앙드르, 상, 바크(궤르낭 시지스몽 바흐), 레오네트 카피엘로 등이 있다. 그러나 항상 평론가의 주목을 받았던 이 여성의 모습과 몸짓을 화폭 위에 완벽하게 실현했다는 점에서, 로트레크를 따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 비 파리지엔'이라는 신문은 길베르가 다른 카바레인 스칼라에서 성공리에 공연을 마치자 다음과 같이 찬양했다." '세기말' 샹송의 장려한 경이로움으로 볼 때, 그녀는 자기 특유의 재능을 새로운 장르에 쏟아 붓는 것이 옳다" 프랑스의 소설가인 에드몽 드 공쿠르는 ' 일기'에서 훨씬 객관적인 장 로랭의 평가를 인용했다. 그녀의 노래는 하도 음란하고 음울한 나머지 '외설스러운 저녁기도' 같다는 것이다. 로트레크와 처음 만날 당시 길베르는, 프랑스 작가인 카튈 망데가 에덴에서 공연하기 위해 쓴 대본의 암송을 중단하고 있었다. 물랭 루즈에서 잡일까지 하는 영국 유모의 역할을 소화해 내기 위해서였다. 로랭은 그녀를 "납작한 가슴과 주먹코 생기 없는 눈, 악마처럼 치켜 올라간 눈썹, 머리 위에 얹혀 있는 밧줄 뭉치 같은 머리카락의 소유자"로 표현했다. 하지만 길베르는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매력은 재담꾼으로서의 재능만이 아니라 인상적인 용모를 통해서도 표현되었다. 성공리에 미국과 영국 순회공연을 마친 이베트 길베르는 테아트르 데 앙바사되르와 폴리 베르제르의 열광하는 청중에게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녀는 가난을 면치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녀를 만나면 부끄러움을 타던 로트레크는 차츰 그런 감정을 극복하고, 1894년 그녀를 그린 판화전집을 만들었다. 이 전집에는 작가이자 미술평론가인 귀스타브 제프루아가 쓴 글이 실려 있다. 로랭은 로트레크의 작품이 지나칠 정도로 양식적이고 원형에 충실하다면서 길베르에게 말했다. "샤토루즈의 벽에 그려진 그림을 그대로 복사한 이 스케치들, 이 황록색의 조잡한 인쇄물, 또 당신의 코와 눈을 되는 대로 마구 칠한 이 긴 그림자들... 달리 표현할 말이 없군요!"같은 해에 로트레크는 모리스 샤를 도네가 길베르를 위해 쓴 시 몇 편에 삽화를 그려 넣었다. 그중에는 '슬픔에 잠긴 청년'과 '지친 에로스'가 포함되어 있다. 예리하고 열성적인 관객 연극을 숭배했던 로트레크는 19세기 후반 파리의 연극계를 후대에 전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품격 높은 코메디 프랑세즈에서부터 좀더 대중적인 극장인 불르바르 뒤 크림 짐나즈, 보드빌, 르네상스, 그리고 아테네에 이르기까지 그는 수많은 극장을 드나들었다. 로트레크는 무대나 무대 뒤쪽에서 배우들, 특히 여자배우들을 뒤쫓아가 그들과 함께 프티 뤼카나 파야르, 카페 앙글레. 혹은 베일에서 저녁을 먹곤 했다. 극장이라는 장소가 주는 마술적인 힘에 매혹된 로트레크는 코메디 프랑세즈의 복도를 연상시키는 붉은 카펫 위에다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온친구이자 사촌인 가브리엘 타피에 드 셀레이랑의 초상화를 그렸다. 로트레크는 테아트르 데 바리에테에서 공연된 에르베의 오페레타 (실페리크)를 39번도 넘게 관람했다.이 오페라에서 마르셀 랑데는 캐스터네츠를 치며 숨죽이고 있는 관객 앞에서 볼레로를 추었다. 화상이 된 로트레크의 어린 시절 친구인 모리스 주아양의 주노하에 파리 구필 화랑의 데오 반 고흐는 몽마르트르와 카페 콩세르에 갇혀있던 로트레크의 미술을 점차 밖으로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로트레크는 쉴 르나르, 장 드 티낭, 트리스탕 베르나르, 쥘리앵 세르메, 그리고 조르주 클레망소 등의 작가들이 쓴 문학작품에 삽화를 그려 주었다. 그러한 작업은 로트레크에게 영감을 주는 요소를 확장시켜 주었고, 몇 년 후 로트레크의 작품들은 지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895년 이후 로트레크는 카페 콩세르보다는 극장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듣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보기 위해서였다. 로트레크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조명의 유희나 뛰어난 남녀 배우의 몸짓을 관심 깊게 보았다. 그래서 종종 떠들썩한 관객들의 분노를 유발하는 모호한 상징주의적인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로트레크는 차분히 앉아 있을 수 있었다. 테아트르 리브르와 테아트르 드 로브르 19세기 말에는 아방가르드 연극이 성행하였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테아트르 리브르의 앙드레 앙투안과 테아트르 드 뢰브르의 오렐리앵 뤼녜포에가 주도했다. 무대 연출가들은 화가에게 프로그램, 포스터, 무대장식을 의뢰했다. 그들은 온갖 예술 형태를 포괄하는 '총체적 공 연'을 시도했다. 이 아방가르드 연극운동은 화가와 조각가들의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질적으로 우수한 많은 화가들이 이 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노르웨이의 에드바르트 뭉크와 프랑스의 피에르 보나르, 에두아르 뷔야르, 모리스 드니가 있었다. 로트레크는 1893년 테아트르 리브르의 공연 포스터를 제작했다. 공연 리허설에는 난해한 상징주의적 작품에 매료된 애호가들이 참석했다. 그들은 '비평의 왕자'라 불리던 카튈 망데를 중심으로 일종의 세력을 형성했다. 로트레크는 돌출된 눈과 살찐 옆모습을 지닌 카튈 망데의 초상화를 기억에 의존해 그리기도 했다. 로트레크는 좀더 고전적인 공연을 하는 극장을 위해서도 그림을 그리고, 오늘날의 영화 스타만큼이나 주목받던 당대의 '스타'들도 그렸다. 예컨대 사라 베르나르가 테아트르 드 라 르네상스(그녀가 1893년 설립했다.)에서 공연된 라신의 비극 (페드르)에 출연했을 때의 모습과 클레오파트라로 분한 모습을 묘사했다. 또 그는 1894년 테아트르 데 바리에테에서 공연한 빅토리앵 사르두와 에두아르 모로의 (버릇없는 부인)에 출연한 유명한 배우 레잔(가브리엘 레쥐)과 1893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공연한 소포클레스의 작품 (안티고네)에 출연한 장 무네 쉴리를 그렸다 이 그림들은 그들의 개성을 몇 개의 선으로 훌릉하게 전달하고 있다 오페라박스 로트레크는 객석에도 무대만큼 관심이 있었다. 이곳은 무절제한 세기말 파리의 삶이라는 생생한 드라마가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 사회현상의 작은 무대였다('금가면을 쓴 사람이 있는 오페라 박스' '극장의 오페라 박스' '파우스트가 공연되는 오페라 박스'). 그러나 역시 캐리커처가로서 그의 면모는, 무대에서 인간의 행동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배우들의 초상화를 그릴 때 가장 자유롭게 표출되었다. 로트레크는 힌두교의 신화를 빅토르 바뤼캉이 각색한 난해한 연극 '도자기 선반'의 무대장치를 디자인하며 '총체적 공연'의 논리를 좀 더 확장하기까지 했다. 그는 무대 왼쪽에 코끼리 한 마리를 배치했다. 이것은 물랭 루즈의 코끼리를 복제한 것이다. 오른쪽에는 커다란 선인장을 배치했다. 뤼녜 포에는 회고록에서 이 무대의 '장려함'을 설명해 놓았다. 1896년 뤼녜 포에가 무대에 올린 알프레드 자리의 '왕 위뷔'를 위해서 로트레크는 무대장치를 위한 한 집단 '비야르와 보나르도 있었다.'에 합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 연극사에서 최초로 '스캔들을 일으킨' 이 연극의 무대장치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라 르뷔 블랑슈' 1889년 벨기에에서 폴프클레르크가 창간한 '라 르뷔 블랑슈'는 1891년 나탕송 형제인 타데와 알프레드에게 인수돼 파리로 이전된다. 이 책은 곧 당대의 아방가르드 작가와 화가들을 이끌어 가는 잡지가 되었고, 재능 있는 예술가 집단의 구심점이 되었다. 로트레크는 이 잡지의 주요 멤버이자 기고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르센 알렉상드르가 같은 해에 창간하여 역시 로트레크의 판화를 정기적으  실어 주었던 '리르'에 비해 '라 르뷔 블랑슈'는 훨씬 야심이 많았다 하지만 '라 르뷔 블랑슈'가 엘리트주의를 지향했다는 것은 아니다. '라 르뷔 블랑슈'에 기고한 걸출한 작가들 가운데에는 쥘 르나르.마르셀 프루스트, 스테판 말라르메가 있고, 삽화가는 피에르 보나르, 펠릭스 발로통, 폴 세뤼지에, 모리스 드니, 에두아르 뷔야르, 케르 사비에 루셀 등이 있으며 ,폴 세잔, 폴 고갱,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에 대한 명쾌한 비평도 실렸다. 1895년 2원 포흐가에 있는 알렉상드르 나탕송의 아파트에서 '알렉상드르 바'의 개업식이 있었다 뷔야르가 장식을 맡은 이 개업식에서 로트레크는 횐 옷에 성조기로 만든 조끼를 착용한 바텐더 복장을 하고 거대한 바의 한편에서 사회를 보았다 이 행사를 위해 특별히 면도를 한 그는 손님들에게 이국적인 칵테일을 권하여 대부분의 사람을 인사불성으로 만들었다. 그의 친구이자 언론인인 폴 르클레르크는 그날 밤을 이렇게 묘사했다. "로트레크의 상상력은 고갈되는 법이 없었다. 단숨에 몇 잔을 들이키고 이어 빨대로 맛있는 핑크 칵테일을 홀짝거리며 몇 잔인가를 마시는 차례가 이어졌다... 그는 독한 칵테일에 진과 포트와인을 곁들인 정어리도 준비해 두었다 이것을 긴 은접시에 내왔는데, 경솔하게 들이키는 사람들의 목구멍에 불을 지르는 데는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매운 후추로 맛을 낸 프레리 오이스터 (날달걀 전체나 노른자위에 소금. 후추, 브랜디 등을 넣어맛을 낸 음료:역주)도 준비되어 있었다 이날 저녁에 로트레크에게 희생된 사람들 중에는 미술평론가 페네옹(후에 로트레크는 그의 인물화를 라 굴뤼의 가설 서커스장의 한 나무판자 위에 그렸다. ) 작가 알프궤드 자리, 음악가 클로드 테라스. 극장 프로모터, 알프레드 아티 (알프레드 나탕송의 필명), 작가이자 유머 작가인 알퐁스 알레와 트리스탕 베르나르, 작가 앙드레 지드와 피에르 루이 정치가 레옹 블쉽 . 배우 뤼시앵 기트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로트레크는 문학예술계의 유명인사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자신의 구미대로 놀고 마시게 만든, 짓궂은 기쁨을 맛본 것이다. 매력 있는 여인, 미시아 나탕송 로트레크는 나탕송 집안, 특히 타데와 그의 매력적인 부인 미시아와 확고한 우정을 맺고 있었다. 로트레크는 퐁텐블로 부근의 발뱅에 있는 그들의 시골집에서 주말을 보내곤 했다. 이곳에서는 '라 르뷔 블랑슈'에 관계된 사람들이 즐겨 모임을 가졌다. 로트레크가 '초연하며 침착하다'는 평가를 내린 보나르, '불안정한 매력과 고독한 웃음'의 뷔야르, 연극광인 '라 르뷔 블랑슈'의 직원 로맹 콜뤼 등이 참석했다. 로트레크는 그들과 노르망디 해변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다.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던 미시아는 친구들을 작곡가인 가브리엘 포레와 클로드 드뷔시에서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음악과 문학과 미술의 세계를 한데 융화시켰다 발뱅에서 멀지 않은 센 강변에 살던 말라르메는 아름다운 미시아와 교제하며 휴식을 취했다. 평론가인 옥타브 미르보, 화가 오딜롱 르동, '메르퀴르 드 프랑스'의 창간자인 발레트, 알프레드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통해 로트레크는 작가인 피에르 루이, 모리스 마에테를링크, 폴 발레리, 펠릭스 페네옹 등과 만났다. 미시아와 로트레크는 밀접한 친분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로트레크의 작업실을 방문했고, 로트레크도 이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에게 매료되었다는 것을 파리 문학예술계에 증명할 수 있어서 몹시 즐거웠을 것이다. 믿음 직한 친구, 모리스주아양 로트레크는 모리스 주아양과 지속적이고 생산적인 우정을 나눌 수 있었다. 이 두 사나이는 19H년 리세 콩도르세의 학생으로 만났지만 그후로 10년간은 별다른 교분이 없었다. 그간 주아양은 프랑스 재무부의 일을 사직하고 당대에 가장 주요한 화상이자 소유하고 있던 구필 밑에서 일했다. 로트레크의 삽화가 처음 실린 신문이 구필의 신문 '르 파리 일뤼스트레'이다.('첫 성찬일', '합승마차 회사의 말'). 주아양은 로트레크에게 삽화의 형태와 디자인의 지면배치에 대해 조언해 주었다. 주아양을 통해 로트레크는 구필 화랑에서 일하던 반 고흐 형제를 알게 되었다. 주아양이 테오 반 고흐를 몽마르트르 대로에 자리잡은 구필 화랑에 배치할 당시, 그는 아르 퐁피에(당시 프랑스 아카데미 미술)나 바르비종 유파의 그림 대신 최고의 인상주의자들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즉, 아방가르드 미술의 옹호자가 된 주아양은 카미유 피사로, 외젠 카리에르, 베르트 모리소, 타히티로 떠나기 전의 폴 고갱의 작품들로 전시회를 조직한 것이다. 로트레크는 오랜 기간 구필 화랑에 자신의 그림을 전시하자는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주아양의 조언에 따라 볼네이 거리의 미술집단과, 발기인의 하나로 친구인 폴 시냐크가 끼어 있는 앵데팡당 전시회에는 매년 몇 점씩 출품했다. 또한 자신이 즐겨 찾던 브뤼셀에서 열리는 20세기 그룹 전시회에도 정기적으로 작품을 전시하였다. 1893년 로트레크는 마침내 친구들의 주장에 굴복하여 30점 가량의 작품을 구필 화랑에 전시했다. 사람 사귀기를 싫어하고 칭찬에 인색한 드가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로트레크에게 경의를 표했다. "자, 로트레크, 당신이 우리 중의 하나라는 것이 분명해졌군!" 제 4장 여인들의 도시 로트레크의 예술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는 바로 여성이다. 신비한 '54호 선실의 승객'에 담신 고결한 미시아 나탕송이든 매음굴의 지친 창녀들이든 간에, 로트레크는 여성을 화폭에 담아 가장 훌륭한 작품들을 낳았다. 그가 다룬 여성 모델들은 사회적으로 최상층에서부터 최하층까지 다양한 계층을 포함하고 있다. 하루살이 스타를 그리는 화가 100년이 지나서야 로트레크는 '쇼 비즈니스 화가'로 분류된 듯하다. 그가 살던 시대의 스타들은 대개 그의 이젤 앞에 앉아 화폭 속으로 들어갔다. 어떤 여자들은 그의 정부가 되었지만 남몰래 그를 동경하던 여자들은 좌절감을 맛보았다. 그는 짐승을 쫓는 날쌘 사냥꾼처럼 그들을 스케치하고 색칠했다. 그의 모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름을 남긴 여자들도 숱하게 많다 그의 붓이 그들에게 명성을 부여한 셈이다. 로트레크는 미국 태생의 무희인 로이 풀러의 불꽃 모양의 실루엣에 영원성을 부여했다. 이것은 풀러가 스스로 창안하고 발전시킨 방식으로, 모슬린을 겹쳐 만든 반투명한 드레스에 빛을 비추면 극적인 효과가 창출되었다. 풀러는 1892년 폴리 베르제르에서 춤을 추었다. 매우 독창적인 그녀의 춤은 '자연주의적'인 춤과 대별되는 의미에서 '상징주의적'인 춤을 대변했다. 미국에서 로댕의 대리인이 되기도 했던 이 여성은 로트레크의 작품에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해 자신의 포스터를 로트레크에게 맡기는 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하지만 로트레크는 그녀의 춤이 지닌 정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메이 벨포트와 메이 밀턴 1895년에 로트레크는 메이 벨포트라는 아일랜드 출신으 젊은 가수에게 심취해 있었다. 그녀는 가까운 친구인 잔 아브릴의 보호를 받으며 퐁텐가에 자리한 카페 콩세르인 데카당에서' 공연을 했다. 부풀고 주름진 소매가 달린 파스텔들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검은 고양이를 안고 노래를 불렀다. "한 마리 작은 고양이, 나는 무척 사랑해요." 당시에는 어느 분야에서나 영국식이 유행이었다. 벨포트는 영국 소녀의 분위기로 아일랜드의 옛 노래를 부르며 청중을 사로잡았다. 로트레크는 이 목가적인 연가를 석판화 연작 여섯 장에 담았는데, 리본이 달린 보닛을 쓰고 꼬리가 말린 작은 고양이를 안고 있는 그림이 그것이다. 레스비언으로 널리 알려진 메이 벨포트는 메이 밀턴이라 불리는 영국 출신의 무희와 함께 살고 있었다. 잔 아브릴을 통해 밀턴을 소개받은 로트레크는 그녀의 연습장면을 구경하다가 곧 '미스오시'(로트레크가 밀턴에게 붙인 별명)의 화려한 머리카락에 반하고 말았다. 그녀는 겨울 한 시즌만 무대에 섰지만, 이중으로 불사의 생명을 부여받았다. 1901년에 피카소가 그린 '푸른방'을 보면, 밀턴을 그린 로트레크의 포스터가 벽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수수께끼의 '54호 선실의 승객' 천성적으로 표현을 자제하는 로트레크가 여자 인물화에 사랑의 감정을 담는 일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1895년 여름, 르 실리호를 타고 르아브르와 보르도를 여행하던 로트레크는 식민지 관리의 아내인 한 신비스러운 승객과 미친 듯이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54호 선실의 손님이었다. 로트레크는 그녀를 따라 리스본까지 가거나, 그럴 수만 있다면 그녀의 목적지인 다카르까지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화가이자 사진작가인 로트레크의 친구 모리스 기베르는 엘 그레코 미술을보기 위해 마드리드와 토레도에서 잠시 체류한 로트레크를 보르도로 되들려 보냈다. 비록 결실을 맺진 못했지만 이 로맨스를 통해 로트레크는 자신의 가장 인상적인 석판화 중 하나를 제작했다. 이 석판화는 1895년 10월에서 이등해 3월까지 살롱 데 상에서 개최된 국제 포스터 전시회의 광고용으로 사용되었다. 매음굴을 담은 그림들 19세기 말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매음굴은 에드몽 드 공쿠르의조리 카를 위스망스의 (마르트), 모파상의 (매음굴 텔리에르) 같은 소설의 소재로 등장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잠시 머물다 가는 매음굴에 거리낌없이 눌러 살았던 로트레크를 비롯하여 포랭, 도미에, 드가 같은 화가들도 창녀들의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시도 때도 없이 로트레크는 주베르가나 앙부아즈가, 혹은 물랭가의 매음굴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온천휴양을 하듯 며칠에서 길게는 11개월이나 틀어박혀 그림과 스케치에 몰두했다. 인상주의자들의 후원자로 유명한 화상 폴 뒤랑 뤼엘이 로트레크에게 작업실을 보고 싶다고 했을 때, 로트레크는 물랭가의 매음굴로 그를 안내했다. 로트레크는 놀라는 척하며 "여길 보고 다들 매음굴이라고 수군대더군. 그러나 나는 여기가 집보다 편해."하고는 호기심 많고 쾌활한 로맹 콜뤼, 막실 데토마, 모리스 기베르를 매음굴로 안내했다. 1892년, 한 매음굴의 여주인이 커다란 응접실의 벽에 걸 여섯 점의 연작그림을 로트레크레게 의뢰했다. 로트레크는 두 개의 패널화는 혼자서 ,나머지는 지방의 도장공과 쥐비 드 샤반의 제자와 함께 완성했다. 이 그림들은 몇 부분으로 잘렸고, 1차대전 직후에 팔려 나갔다. 어떤 매음굴은 사치스러운 가구로 치장하는 것은 물론. 내부장식을 유명한 화가에게 맡기기도 했다. 르 샤바네도 그런 종류의 매음굴이었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이곳에서는 동양과 일본의 의상을 내왔다. 잔뜩 멋을 낸 승마 클럽의 회원들이 즐겨 찾던 이곳은 입구에 '온 국민의 집'이라고 쓰여 있었다. 물랭가에 자리한 한 매음굴의 일본실은 1900년의 국제박람회에서 내부장식으로 상을 받기도 했다. '엘'과 모델 창녀들 비평가들이 심히 외설스럽다고 떠들어 댄 시들을 한데 모은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1857)처럼, 로트레크는 창녀를 소재로 그린 석판화집을 만드는 데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이렇게 하여 1896년에 빛을 본 '엘'에는 10점의 그림이 실려 있는데, 제목이나 번호도 없고 아무런 설명도 넣지 않았다. 반은 채색했지만 나머지 반은 연한 배경색에 초록색이나 장미색만으로 그린 것들이었다. 코르몽의 제자인 보티니의 작품집 ('무도장' '바와 사창가')과 달리 '엘'은 성공을 거두지 못해, 출판사에서는 인쇄물을 낱장으로 처분해야만 했다. 1890년 파리에서 비도덕적인 광고를 금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쥘 세레 같은 몇몇 화가들이 이 도덕십자군에 결합했다. 하지만 로트레크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이 반포르노그래피 캠페인을 즐기며 .계속해서 영감에 따라 유화와 판화를 제작했다. 그가 일상의 삶을 즐거이 공유했던 창녀들을 여전히 모델로 쓰면서. 로트레크는 외설적인 판화 복제품 작품집을 몇몇 친구들에게 보여 주며 기쁨을 느꼈다. 그들의 반응을지켜보며 짓궂은 기쁨을 느꼈던 것이다. 로트례크늘 일본의 위대한 화가 기타가와 우타마로의 판화 사창가의 12시갓)을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이 그림은 매음굴에서의 창녀와 일상사를담고있었다. 에콜 데 보자르에서 주요 일본 판화 전시회가 열렸던 1891년에 공쿠르는 우타마로를 찬양하는 책을 출판했다. 1894년에는 뒤랑 뤼엘이 일본 대가들의 판화 전시회를 개최했다. 여성들 사이의 사랑 특히 몽마르트르 주변의 작은 바인 라 수리와 르 아느통을 비롯한 카페 콩세르와 매음굴에서는 레스비언들의 사랑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사랑을 나누는 레스비언들의 자세에서 예술적 영감을 받은 로트레크는 여성의 동성애 성향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침대에서 서로 얽혀 잠을 자는 두 여성을 보며 로트레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고이다. 다른 어느것도 이처럼 명료하지 않다." 보들레르처럼 로트레크도 금지된 사랑이라는 주제에 덤벼든 것이다. 그는 이 금지된 사랑을 여러 점의 그림을 통해 표현했다. 드가가 단식인쇄 판화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처럼, 로트레크는 부르주아의 도덕성에 추역을 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린 당대의 가장 앞선 화가였다. 1893년 그는 레스비언들의 사랑을 담은 11점의 그림을 제작했다. 그중 5점은 '르 피가로 일뤼스트레'에 실린 귀스타브 제프루아의 기사 '파리의 쾌락'의 삽화로 사용됐다. 1894년과 1895년에 로트레크는 다시 이 주제를 다루게 된다('두친구',(1894), '키스'(1895)). 당시 그는 1년간을 물랭가의 한 매음굴에서 보내고 있었다. 이 매음굴에 대해 그는 "나는 그저 잠깐 그곳에 들르는 것은 싫다"고 말했다. 도덕적 자유와 금기에 대한 경멸이라는 점에서 로트레크는 피카소의 정신적인 선구자였다. 특히 판화를 통해 피카소는 로트레크의 가르침을 자기 것으로 흡수하였음을 보여 주었다. 피카소는 로트레크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화폭에 담으면서 주어진 규범을 주저하지 않고 넘어섰던 것이다. 제 5장 "저는 갇혀 있어요. 갇힌 것은 모두 죽게 마련이지요" 1898년 로트레크는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작품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의 가족들은 알코올로 인해 황폐해지는 그를 정신병원에 가두지 않을 수 없었다. 몇 개월 후에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병원을 나왔다. 다리가 마비되어 고통받던 로트레크는 1901년 9월 9일 36세의 나이로 어머니 아델의 품안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술의 폐해 1890년대 후반부터 로트레크는 점점 그림은 적게 그리고, 바와 카바레를 드나드는 데 빠져 있었다. 친구인 타데 나탕송의 말에 따르면, 술을 먹는 동안 로트레크는 "끊임없이 웃으며 딸꾹질을 해댔다. 술에 취해 울음이 나올 때까지 웃었다. 노할 때도 잠깐 있었지만 주로 키득거렸다." 그의 행동은 매우 불안했다. 그는 정신착란증을 겪고 있었다. 비예뇌브쉬르욘에서 나탕송과 함께 머물고 있던 1897년 여름에는 상상 속의 거미를 향해 권총을 쏘아댔다. 1898년 가을이 되자 그는 심각할 정도로 불안정한 상태에 이르렀다. 언젠가 한번은 길을 걷던 로트레크가 경찰이 자신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에 친구집에 숨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일이 있기 몇 달 전에 모리스 주아양은 런던의 구필 화랑에서 로트레크 회고전을 열었다. 하지만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국에서는 혹평을 받았다. 장차 에드워드 7세가 될 황태자가 개막식에 참석해 자리를 빛냈는데도, 정작 로트레크 자신은 그 시간에 잠에 빠져 있었다. 육체와 정신이 악화된 증거였다. 그 전해에는 운수가 좋았다. 로트레크는 투를라크가를 떠나 프로쇼 대로으 나무들로 둘러싸인 매력적인 별장으로 이사를 갔다. 그 와중에 몇몇 작품을 잃어버렸다. 새로 온 주인이 그 그림들을 천장의 구멍으로 막는 데 사용했던 것이다 구필 화랑에서 계속해서 그림 주문이 들어오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로트레크가 작품을 함부로 취급했다는 사실은 무척 놀랍다. 우유와 크림치즈가 넘쳐나고 잔들이 오고 가며 즐거운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로트레크가 새로운 화실로 이사 온 걸 기념하는 연회가 벌어졌다. 초대장에는 터질 듯한 젖을 가진 암소를 채찍으로 때리는 동물조련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감금 로트레크의 계속되는 과음을 막기 위해 그의 가족은 그를 돌봐줄 시중꾼을 한 사람 고용했다. 1899년 3월 17일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격렬한 발작을 일으킨 후, 로트레크는 뇌일리의 마드리드가에 있는 병원에 감금되었다. 자물쇠를 채운 방에 갇힌 로트레크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 자비를 베푸실 기회가 생겼습니다. 저는 갇혀 있어요. 갇힌 것은 모두 죽게 마련이지요."로트레크의 친구인 의사 앙리 부르주와 가브리 엘 타피에 드 셀레이랑은 모리스 셀레이 랑의 조언과는 달리 로트레크의 어머니에게 그의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선 감금이 필요하다는 점을 납득시켰다. 로트레크의 상태를 둘러싼 논쟁이 언론을 통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스캔들은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의 작품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켜 주었다. 그는 논쟁거리가 되었다. 5월 17일, 그는 서커스를 주제로 그린 한 권의 스케치북을 들고 요양소를 나왔다. 주아양은 로트레크의 삶과 작품에 대한 열정을 불어넣을 목적으로 이 스케치북을 출판학로 결심했다. 서커스에 대한 향수 광기에 휩싸인 로트레크와 그가 그린 광대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의 스케치북인 '서커스'는 로트레크가 마지막으로 그린 대작의 하나로, 완벽한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다. 여자 광대 차 우카오, 광대 포티(당시 그에게는 상대역이던 쇼콜라가 없었다.), 푸들 강아지, 사자 조련사... 선에 대한 눈부신 안목으로 로트레크는 감금되어 있던 시절 친구가 되어 주었던 이 상상의 대상들에 생명을 부여했다 로트레크는 주아양에게 자신이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데생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나온 로트레크는 보르도출신의 친구이자 먼 친척인 폴 비오와 함께 살았다. 위장병 때문에 술은 한 모금도 먹을 수 없었던 이 커다란 체구의 말쑥한 친구는 로트레크의 감시자로 적합했다 로트레크는 계속 감시를 받았다. 그의 가족은 매달 꼭 필요한 돈만을 부쳐 주었다. 로트레크는 이 돈에 주아양을 통해 그림을 판 수입을 보태 생활을 꾸렸다 그 시절에 로트레크는 가끔 놀라운 행동을 보여 주었다. 빨간 바지에 파란 우산을 쓰고. 도자기로 만든 개를 들거나 마분지로 만든 코끼리를 끌고 거리를 활보했다. 로트레크는 서둘러 파리를 떠나 르크로투아를 거쳐 르아브르로 향했다. 그곳에서 카페 콩세르의 여급인 미스 돌리를 만난 후, 로트레크는 다시금 그림에 대한 열정이 일었다 금발의 귀여운 영국 여인 돌리는 로트레크에게 파리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고, 이것이 그를 고무시켰던 것이다. 하긴 그가 카페와 카페를 자유로이 오가던 시절이 그리 먼 과거는 아니었다. 1899년 7월 20일, 비오와 로트레크는 이맘때가 되면 매년 하던대로 다르카숑으로 떠났다. 그리고 포도 수확기에는 말로메에 있는 어머니의 집에서 머물었다. 10월에 로트레크는 다시 파리로 되돌아왔다. 파리에서 보낸 마지막 시간들 걷는 것이 너무 힘들고 지친 로트레크는 퐁텐가에 사는 이웃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이웃은 탈 것을 임대해 주고 있었다. 로트레크에게 조랑말이 끄는 작은 이륜마차를 제공해 준 그는 로트레크의 마지막 술친구가 되었다 로트레크는 초기의 말 타는 사람의 주제로 되돌아가 가장 아름다운 석판화 중 하나인 '기수'를 제작했다. 이 그림에서 그는 등을 보인 말과 기수를 적절하고도 생동감 있는 각도에서 포착했다 로트레크는 사촌인 가브리엘 타피에 드 셀레이랑과 함께 자동차를 퍽 홍미롭게 생각했다 1898년, 로트레크는 경주용차처럼 보이는 탈 것에 앉아 있는 셀레이랑을 그렸다. 셀레이랑은 모피옷을 입고 보호경을 쓴 채, 개와 산책하는 우아한 여인을 지나쳐 달리고 있다. 또한 로트레크는 잔 아브릴을 담은 마지막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여기서 그녀는 팔을 허공으로 쳐들고 있고, 구렁이가 그녀의 몸을 감고 있다 아브릴의 매니저는 이를 돌려 보냈지만, 아브릴은 극찬했다. 몇 주 후에 로트레크는, 1897년에 자기가 인물화를 그린 적이 있는 마르트 멜로 주연의 장 리슈팽의 연극 '집시 여인'의 광고 포스터를 완성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포스터였다. 그 와중에 로트레크는 루이즈 마르구앵과 마지막으로 사랑의 유희를 즐겼다. 재단사였던 이 여인은 그의 오랜 친구인 로맹 콜뤼의 시를 통해 유명해졌다. 루이즈 마르구앵이라는 이름은 '재단사'라는 뜻의 은어였다 본명이 루이즈 블루에인 그녀는 의상제작가인 르네 베르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티치아노의 그림의 여주인공 같은 그녀의 황갈색 머리는 곧 로트레크를 사로잡았다 나무 위에 그린 '여재단사'는 어두운 배경 위에 빛의 효과를 대비시킨, 로트레크의 마지막 미술적 연구가 결실을 맺은 작품이다 마지막 나날들 1900년 봄 로트레크의 건강은 점점 더 나빠졌다. 농장과 포도밭에 홍수가 나 경제적 고통을 받던 가족들은 로트레크에게 부치는 돈을 줄였다. 그는 이것을 부당한 처사로 여겼다. 게다가 그는 심각한 건망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5월 중순에 로트레크는 르크로투아로 되돌아와 노란색 양털옷을 입고 갑판에 서 있는 주아양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옹플뢰르에서는 친구인 작가 뤼시엥 기트리가 로트레크에게 졸라의 소설 '목로주점'을 토대로 한 연극의 프로그램 디자인과 삽화를 외뢰했다. 아르카숑의 바다에서 3개월간 해수욕을 한 로트레크는 마를로메에서 가족들과 몇 주간을 보낸 후 보르도로 떠났다. 그는 앵베르티 화랑으로부터 인수한 작업실에서 1901년 4월까지 머물렀다. 당시 보르도의 그랑 테아트르에서 공연하던 이지도르 드라라의 오페라 '메살리나'와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라 '아름다운 엘렌'을 보고 영감을 받은 로트레크는 열광적으로 작업에 빠져들어 두 개의 연작을 제작했다. 로트레크가 기진맥진해 있다는 사실을 안 주아양은 그에게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대회고전을 제안했다,. 이에 열광적으로 동의한 로트레크는 몇몇 스케치들을 수정, 분류, 완성하거나 빼 버리는 작업을 하며 파리의 작업실에서 100여 일을 보냈다. 마치 모든 것을 정리해 두어야겠다는 충동을 느낀 듯이, 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듯이 그는 일했다. 서명을 남겨 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이름의 머리글자를 써 두었다. 7월에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파리 의학부의 시험'을 그렸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의학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구두시험을 보는 사촌 가브리엘 타피에 드 셀레이랑을 그렸다. 로트레크는 작업실을 말끔히 정리하고 파리를 떠나 아르카숑으로 갔다. 8월 중순 심한 마비증상을 겪은 로트레크는 아르카숑을 떠나 어머니가 있는 마를로메로 갔다. 1901년 9월 9일 로트레크는 36세의 나이로 어머니의 품에서 사망했다. 불멸에 이르는길 살아 있을 때에는 포스터 디자이너와 삽화가로 명성을 얻은 로트레크는 죽은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화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친구이자 화상인 모리스 주아양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었다. 1902년, 주아양은 뒤랑 뤼 엘 화랑에서 첫번 째 회고전을 개최했다. 로트레크의 그림들은 놀라운 가격에 팔려 나갔다. 1914년, 로젠베르 화랑은 좀더 큰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 전시회를 통해 로트레크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1904년, 로트레크의 옛 스승이자 당시에는 프랑스 국립미술관의 이사장이었던 보나는 몽마르트르에서 광고업을 하던 레옹 델라포르트를 그런 로트레크의 인물화를 파리의 뤽상부르 미술관에서 입수하는 데 반대했다 주아양은 로트레크의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고 싶어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일반 심의회를 설득해, 베르비 궁전의 알비 주교가 쓰던 장소에 로트레크의 작품만을 전시하는 미술관을 건립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이 미술관은 1922년 프랑스의 교육예술부 장관인 레옹 베라르가 참석한 가운데 개관되었다. 비록 늦은 감이 있었지만, 이것은 분명 작가가 모델의 관계에 혁명을 일으킨 한 장애자 귀족의 작품이 대중과 국가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기록과 증언 삶의 단편 데생과 재미난 일화를 섞어 친구에겐 보내거나 가족에게 띄운 편지에서, 혹은 사업상 보낸 편지에서도 로트레크는 자기 개성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한 나머지, 어머니의 도덕심에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이야기까지 속속들이 전하려 했다. 이 편지들은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에르베르 D. 심멜이 편집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편지'에서 인용한 것이다. 할머니들, 사촌들, 그리고 카나리아, 개, 고양이들 1871년에서 1877년 사이에 로트레크는 정기적으로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여기에 소개된 친할머니이자 외할머니의 동생이며 레이몽 카시미르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미망인인 가브리엘 댕베르 뒤 보스크에게 보낸 편지도 그중 하나이다. 그의 관심사는 어린아이다운 것이었지만, 자신의 건강에 대한 근심도 이미 드러나 있다. 1872년 12월 30일, 파리 사랑하는 할머니에게. 복되고 밝은 새해를 기원하는 이 편지를 보내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저는 휴가에 맞추어 보스크(로데 근방의 고셀에 자리한 할머니의 영지)로 돌아가길 손꼽아 기다립니다. 물론 이곳 파리도 나쁘지 는 않아요. 아주 즐겁게 이번 휴가를 보낼 작정 입니다. 여드름이 생겨 그것을 짜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는 것이 유감이 에요. 에밀리 숙모에게 나의 작은 카나리아 롤로가 노래를 잘 부르고 있다는 말을 전해 주세요. 이놈은 무척이나 멋있어요. 새해선물로 받은 아주 아름다운 새장에 녀석을 넣어 두었지요. 안녕히 계세요. 사랑하는 할머니, 진심어린 키스를 보냅니다. 그리고 모두들 저의 새해 인사를 받아 주세요 경의를 표하며 손자 앙리가 1873년 6월 19일, 파리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에게 머물러 달라고 말씀드릴 때, 저는 어머니 곁을 떠나는 사람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어머니를 부를 수 있고 또 매우 행복하게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어머니께서도 제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 한다는 것을 믿고 계시겠죠. 오늘 저는 비 때문에 하루종일 집에만 있었습니다. 레비씨가 어머니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더군요. 저는 롤로트(로트레크의 카나리아)와 침실에서 흘로 지냈습니다 숙제를 못 끝냈거든요. 어머니와 함께 있지 못해 죄송합니다. 영어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어요. 어제 저녁에는 미 셀 부인의 아들이 망투아씨(퐁타네 고등학교의 로트레크의 첫 담임)의 명령으로 저를 학교 층계의 난간에 집어 던졌어요. 저는 저에게 벌을 주라고 한 그의 어머니에게 따졌습니다. 아침에는 장엄미사에 참석 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사랑하는 어머니 귀염둥이 H. 드T. 로트레크 사촌의 사랑 앙리는 사촌 마들렌 타피에 드 셀리이랑을 특히 좋아했다. 1882년 그녀는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1874년 1월, 파리 사랑하는 마들렌. 너의 훌릉한 편지에 서둘러 답장을 보낸다. 덕분에 스스로를 되돌아본 나는 지금처럼 서들 편지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너와 함께 그라바스(보스크성 근처의 숲)나 셀레이랑의 산책로에서 하루종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구나.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많은 인형이 있는 거리를 너와 걷고 싶다. 할머니와 알릭스 숙모에게 좋은 편지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드려라. 잘 있어라, 그리운 사촌. 좋은 새해가 되길 빌며 뜨거운 사랑을 보낸다 그리고 나에게 잘해 주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잘해 주기 바란다. 너를 깊이 사랑하는 너의 사촌 앙리 드 T. 로트레크 "절뚝거리며 걷는 것이 정말 피곤합니다" 첫 번째 사고가 일어난 지 1년 정도 후에 앙리는 친할머니에게 고충을 털어놓았다. 1877년 3월 1일, 파리 그리운 할머니 전기충격요법을 받기 위해 엄마가 선생님 댁에서 저를 데리고 나와서 저는 요즘 자유롭게 지냅니다. 이것은 예전에 샤를 삼촌도 받았던 치료법이지요. 오른쪽 다리는 치료가 되었지 만, 왼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는 것이 정말 피곤합니다. 단지 치료후의 후유증이길 바랍니다. 레이몽 박사는 제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올해에는 분명히 피레네 산맥의 물을 마실 수 있을 거예요. 저희와 함께 가시지 않을래요? 할머니를 존경하는 손자 앙리 드 T. 로트레크 1878~ 1879년, 사고의 시절 로트레크는 틈만 나면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신을 불구로 만든 불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외상을 입은 것은 월요일이었다. (사촌인 라을 타피에 드 셀레이랑에게 보낸 편지들을 소개한다. 1878년 5월 22일, 알비에서 그리운 라울. 너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어 이것이 결코 쉽거나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는 점을 믿어 다오 이미 들어 알겠지만 내 왼쪽 다리가 부러졌어 나는 지금 어떤 기구에 묶여 있기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어. 이렇게 해야 다리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거야 ...모든 이에게 나의 사랑을 전해 주기 바란다 특히 작은 앞발을부러뜨리지 않는 방법에 대한 조언과 함께 나의 작은 피네 (개)에게 너의 사촌 앙리 -다리 가 부러진!!! 로트레크는 바레주에서 대모인 루이즈 타피에드 셀레이랑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사고의 원인을 자신의 부주의에 돌리고 있다. 1979년 8월에서 9월 사이 , 바레주 그리운 대모님 . 제가 곧 좋아질 것이며 아프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별로 지루하지도 않습니다 저 때문에 너무 속태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처럼 한심한 녀석은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앙리 드 툴루즈 '외과적인 사고' 로트레크는 1878년 바레주에서 만난 친구 에티엔 드비슴을 신뢰했다. 당시 그들은 요양중이었다. 1879년 9월. 바레주 외상을 입은 것은 월요일이었다. (물론 나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외과의사의 시각에서 무척이나 심각한 골절이 일어난 것이다. 의사는 증상이 나아졌다며 오늘아침까지 나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오늘아침 그는 나를 일으켜 세운다는 말도 안 되는 구실로 나의 다리를 오른쪽 구석에 잡아매었다. 이 때문에 나는 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 네가 하루에 5분만이라도 내 곁에 있어준다면...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익살스러운 자화상 그는 보스크의 대고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1879년, 셀레이랑, 사랑하는 고모할머니. 우아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고 커다란 엉덩이에 감자 같은 코를 가진 저 모습을 보세요... 그는 인상이 좋지 않기 때문에 그가 문을 두드리자 곧바로 문지기인 강아지 플라비가 놀라서 멍멍 짖어댑니다... 그는 자신의 다리(두 번이나 부러졌지요. 불쌍하게도!)가 허락하는 한 빨리 층계를 올라갑니다...앙리 드 툴루즈 1881년, 거동의 변화 1880년 바칼로레아에서 낙방한 로트레크는 이듬해에 시험을 통과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꼬부랑 노트'를 사촌인 마들렌 타피에 드 셀레이랑에게 헌정했다. 이 노트는 니스 시절에 대한 그림 기록이다. 1881년 1월, 니스 ...그리운 사촌, 나를 용서해 다오! 게으름과 좋지 않은 날씨 때문에 너에게 편지를 쓰지 못했다! ! 비 가 죽죽 쏟아진다. 진창과 진혼. 제기랄, 하느님 아버지께서 엄청나게 쏟아 부으시는구나 정말 질색이다. 그렇지 않니? 강베타의 풍선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로트레크는 화가로서의 첫 포부를 사를 드 툴루즈 로트레크 삼촌에게 설명했다 삼촌은 미술에 관심을 갖는 그를 늘 격려해 주었다. 1881년 5월 토요일, 파리 예언자!!!! 예언자!!!! 마호메트와도 같은 그리운 삼촌, 밤색 당나귀에 대해 예언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삼촌께 경의를 보냅니다. 판에 박힌 말이지만 "어머니와 아들이 잘 지내리라."는 소망도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삼촌께 제 앞날의 계획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저의 미술공부 말이에요. 사람들의 칭찬을 들을 때마다 저는 레옹 강베타의 풍선(1870년 프랑스의 정치가 강베타가 풍선을 타고 프로이센인들이 포위한 파리를 탈출한 사건을 말하는 것임)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농담은 그만하고요 저는 무척이나 당황스럽습니다. 르네 프랭스토는 열광했고(화가이자 조각가인)뒤 파사주는 울었지만 아버지는 매우 당황하셨지요. 우리는 별생각을 다 했어요 에밀 오귀스트 카롤뤼 뒤 랑까지 꿈꾸었을 정도니까요. 어쨌든 제가 성공할 최고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에콜 데 보자르,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작업실. 그리고 르네의 작업실에 참여하는 것 말입니다. 저는 말을 타고 있는 (사촌인) 루이 파스칼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래요 저는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삼촌도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삼촌은 제가 갖고 있는 화가로서의 능력을 일깨워 주신 분이니까요. 모든 것이 잘 되어갑니다. 안녕히 계세요. 보스크에서 양산이 달린 접는 의자에 앉아 이야기 할 날을 고대하며 제 스케치 근사하지요!!! 조카 앙리 '나는 이상보다는 진실을추구한다' 로트레크의 친구인 에티엔 드비슴은 로트레크에게 (코코트)의 원고를 보냈다. 이것은 덕망 있는 시골 성직자 곁에서 생을 마감한 늙은 군마의 불행한 이야기이다. (1881년 8월) 라말루 레 뱅 그리운 친구에게 ...그저께서야 너의 귀중한 편지를 받았다. 나는 지금 붉은 흙으로 만든 구덩이 속에서 끔찍스러운 찜질을 하고 있어. 그러나 바늘의 풍경은 봐줄 만해 이제 작업을 하러 내려갈 거야 네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 둘이 공동작업을 하길 내가 얼마나 바라는지 아니 ? 네가 내 몽당연필을 보면 좋을 텐데. 이 연필은 그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단다 너도 내 연필만 믿고 있어 자, 이제 나는 (코코트)의 주제에 몇 가지를 덧붙여야겠다. 빨리 해치워야지... H. 드 툴루즈 로트레크 로트레크는 같은 해에 에티엔 드비슴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라말루 랑시앵 (에로)수치료원 1881년 10월 그리운 친구에게 나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고 있어 23일자 편지 에 23점의 데생을 동봉했다. 그중 착오로 같은 것이 2점 들어갔구나. 그것들은 유쾌한 분위기를 풍기는 러프 스케치이다. 내가 보기에는 글도 마찬가지지만 말이야. 불쌍한 성직자! 나는 너의 의견을 가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 려고 해. 그러니 바꾸고 싶은 것이 있거나. 사용하지 않을 그림을 돌려주고 싶거나, 혹은 새로운 그림이 필요하면 편지를 쓰기 바란다. 네가 나의 러프 스케치를 검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기쁘니 까 나는 이상보다는 진실을 추구하고자 한다. 물론 이게 착각일 수도 있지. 나는 사마귀를 그릴 때 그대로 그리기보다는 우스꽝스러운 털을 달거나 둥그렇게 그리거나 끝 부분을 반짝이 게 하는 것을 더 좋아하니 까 잘 있어라. 다정하게 너의 손을 잡아 주고 싶구나. 어머니와 친구 앙드레에게도 안부 전해라. 초보 화가 H. 드 T. L. 1882년,보나의 작업실 1882년 ,3월 22일. 파리 사랑하는 샤를 삼촌 지금까지 저는 삼촌과의 약속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만장일치로 제가 일요일이나 월요일에 레옹 보나를 방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르네 프랭스토가 저를 안내해 줄 것입니다. 그간 저는 보나의 제자이자 페레올의 친구인 젊은 화가 앙리 라슈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는 혼자 작업할 거라고 하더군요. 그는 전시회 (1882년 살롱전) 그림을 출품중입니다... 저도 그럴 계획입니다 보나의 작업실에 머무는 동안 출품할 수 있도록 에콜 데 보자르 학생이 되려고 합니다. 조카 H. 드 툴」 로트레크가 할머니 R.C. 드 툴루즈 로트레프께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1882년 4월 6일. 파리 5월 26일 화요일. 르네 프랭스토가 레옹 보나를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저는 서투른 그럼 두세 점만을 가지고 갔지요. 엄지손가락을 빠는 제르멘(타피에 드 셀레이 랑 제르멘)의 그림도 가지고 갔지요. 선생님은 저와 제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씀하셨습니다 "데생 할 줄 아나?" "바로 그것 때문에 파리로 왔습니다. " "좋아. 유화는 괜찮군 멋을 좀 냈구먼. 어쨌든 나쁘지 않아. 그러나 데생은 솔직히 말해 좀 심하군." 그는 어디선가 자신의 작업실의 제자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증명서와 암호를 꺼내 저에게 주었습니다... 프랭스토는 점점 더 저를 다정하게 대해 줍니다. 저는 그림공부를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지냅니다. 그림은 쉽게 그려지는 게 아니니까요... "어머니에게는 '수천 번의 키스를, 아버지에게는 존경을' 로트레크는 어머니와 떨어져 사는 데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1882년 봄에 그는 이에 대해 항의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 팔이 부러지기라도 하셨습니까? 아니면 어머니에게 이 아들이 있다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무슨 일이 있는지 간단히라도 전해 주세요. 여기에서는 모든 게 잘 되어갑니다. 저는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뤼 시앵 골드슈미트와 에르베르 D 심 멜이 편집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미출간 편지3(1967)에서 로트레크는 증요한 결정을 앞두고 조언이나 허락이 필요할 때에만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던 것 같다. 르보스크, (1882년 9월) 목요일 그리운 아버지 보나는 자신의 모든 제자를 내보냈습니다. 저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친구들과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저는 코르몽의 작업실에 자리를 하나 얻었습니다. 그는 뤽 상부르 미술관에 전시된 (가족과 함께 도주하는 카인)이라는 대작을 그린 젊고 저명한 화가로, 유능하고 엄격하며 재능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라슈가 저에게 전보를 보내 그곳에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지 않겠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저는 승낙했습니다. 프랭스토는 저의 그 결정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저는 카롤뤼 뒤 랑에게 가고 싶었지만, 이 색채의 왕자는 평범한 그림쟁이만을 배출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저에게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어쨌든 저는 이런 상황에 얽매여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스승을 선택하는 문제는 아무리 해도 결정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의 충직한 아들, 앙리 코르몽문하에서 싸우다 외 삼촌 아메데 타피에 드 셀레이랑에게 1882년 12월 1일 금요일. 파리 그리운 외삼촌 ...저의 새 스승(코르몽)은 파리에서 제일 마른 사람입니다 가끔 우리를 찾아오는 그는 우리가 가능한 한 작업실 밖에서 그림을 그리기를 바랍니다... 저의 따스한 마음을 미망인과 처녀들에게 보냅니다. 삼촌과 집게손가락으로 장중한 악수를 나누며. 조카 H. 몽파 로트레크는 작업실을 바꿨다는 사실을 친할머니에게 편지로 알렸다. 1882년 12월 」H일 파리 그리운 할머니 . 저는 제가 화가의 길로 들어서서 지나온 여정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스승을 보나에서 코르몽으로 바꾼 것 때문에 저는 뭔가를 잃은 걸까요? 저는 '아니오'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저의 새로운 스승은 저를 훈련시키기 위해 예전에 자신이 가졌던 신선한 판타지를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의 재능은 능히 올해의 메달을 딸 수 있을 만한 것이며 놀랄 정도로 선한 의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원했던 것 이상의 발전을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아침과 오후 내내 붓질을 하며 보냅니다. 포에서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서툰 제 그림 한 점이 전시됩니다. 이제 저도 출품자가 된 셈이지요. 손자 H 드 툴루즈 로트레크 1853-l8Sf년, 벼랑끝에 몰린 듯한기분 삼촌인 샤를에게 보내는 또 다른 편지 1895년 2월 10일 . 파리에서 그리운 삼촌. ...저는 코르몽이 어떤 이인지 차차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가장 추하고 마른 사람입니다 회저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술을 마셨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코르몽의 비평은 보나보다 훨씬 부드럽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제시한 모든 그림에 격려를 해줍니다. 이 것이 사람들을 기쁘게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전임 스승님의 매는 저에게 격려가 되었고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벼랑 끝에 몰린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리 좋지도 않은 것이 코르몽의 눈에는 좋게 보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데생을 하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지난 2주 동안 그는 저를 포함한 많은 제자들에게 반대와 불만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니 저도 정력적으로 일해야겠지요... 조카 H. 드 T 로트I 그는 어머니에게 열광적으로 편지를 썼다. 1883년 4월. 파리 혁명 만세! 마네 만세! 인상주의의 바람이 작업실 안에 불고 있습니다. 저는 너무나 즐겁습니다. 왜냐하면 상당 기간 저는 코르몽의 벼락을 혼자서 맞고 지냈거든요. 저는 낮과 저녁을 밥티스트 폐종(동물조련사)의 집에서 맹수들을 보며 지냅니다. "태양아라썬의 작업" 작업실 동료인 외젠 보슈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파리로 돌아가 작업하려는 생각이 담겨 있다. 쿠르상 부근의 셀레이랑성 1893년 9월 1일 오랜 친구에게 . 10월 1일 파리로 가기 전에 코르몽이 스케치 여행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구나 또한 작업실이 폐쇄되는지, 그리고 폭발할 것 같은 영감이 끓어오르는 우리 젊은 두뇌들이 피난처를 마련했는지. 혹은 친구들이 돌아갈 것인지, 갈 거라면 누가 갈 것인지... 내가 태양 아래에서 한 손에 붓을 들고 이러저런 빌어먹을 색으로 나의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던 이야기는 나중에 만나서 자세히 하기로 하자 행운이 있기를 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간단하게 내막을 알려 주면 좋겠구나. 젊은 건달 H. 드 툴루즈 로트레크 1886~1887년, 화실 견습생이 미술가가 되다. 1981년 1월, 파리 사랑하는 어머니 ...방금 주문을 받았습니다. 이 전에 저는 아메리켕 카페에서 작은 데생을 그린 적이 있는데, 제가 아는 언론인 한 분이 이것을 앙리 알렉시스 드 콩티에게 보며 주었습니다 이 사람은 콩티 여행안내서를 만들고 있는 사람으로 지금은 니스와 몬테카를로의 안내서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그는 저의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저는 그의 여행안내서에 꽃축제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그러나 결국 로트레크의 데 생은 사용되지 않았다.) 제가 꿈꾸어 오던 행운의 시작일까요. 당신의 앙리 로트레크의 편지들은 점점 더 쪼들리는 경제사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886년 후반, 파리 저는 지금 막 아버지에게 돈을 부쳐 달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 가능한 빨리 저에게300프랑을 등기우편으로 부쳐 주세요. 등기로 보내는 것이 간편하니까요. 그 정도면 당분간은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요... 저는 열심히 일하고 술은 마시지 않을 것입니다. 점잖은 알베르가 어머니께 안부를 전했습니다. 저는 제 허약한 몸이 허락하는 한 어머니를 꼭 안아 드리고 싶습니다... 친할머니에게 쓰는 이 편지께서 로트레크는 자신의 작업과 아버지의 불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1886년 12월 28일. 파리 프랑스 미술의 재건 그건 전혀 저의 관심 밖입니다. 다만 저는 한 장의 하찮은 종이와 투쟁하고 있을 뿐입니다. 종이는 저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고 저 역시 종이 위에 제대로 된 것이라곤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할머니에게 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 것은 매우 특별한 것이며 '법칙을 벗어난' 것입니다. 아버지가 저를 아웃사이더라고 부르신 것 기억나시죠. (이미 다 아시겠지만) 저는 의지에 저항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저는 보헤미안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분위기에 쉽게 적응할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하려면 반드시 잊어야 할 감상적인 생각들에 제가 휩싸여 있음을 느낍니다 이것이 몽마르트르 언덕에서의 생활을 더욱 쉽게 병들게 합니다... 1885-1891년, "즐겁게 지내세요" 로트레크의 작품이 팔리고 전시되기 시작했다. 또한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자부심을 가지고. 로트레크는 어머니에게 정기적으로 자신의 발전에 대해 이야기했다. 1888년 1월 파리 사랑하는 어머니 . 이틀 동안 무시무시한 분위기에서 지냈습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불안정한 하늘이 비를 흩뿌립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야광파 화가들에게 얼마나 관심 이 없는지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빼면 다른 일은 잘 되어 갑니다. 저는 2월에 벨기에에서 전시회를 열 계획입니다. 두 명의 벨기에 아방가르드 화가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매력적이지만 쓸데없는 칭찬을 늘어놓더군요. 어쩌면 제 그림이 팔릴 듯합니다 물론 김칫국부터 마셔서는 안 되지만요. 저는 매우 기분이 좋습니 다. 어머니의 아리(앙리의 애칭 ·역주)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미간행 편지(1967)에서 1888년 1월 9일 월요일 (파리) 사랑하는 어머니 . ...반고흐의 작업실에 갔습니다. 그는 제가 이번 여름에 그린 작품 중 하나가 이번 주 안으로 구필 화랑의 사진부장에게 팔릴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미셸 만지는 제가 오래 전부터 알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상당히 낮은 가격에 팔아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제 그림을 많은 사람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저는 만족합니다. 즐겁게 지내세요. 어머니의 귀염둥이. 앙리 일련의 개막전 1889년 9월 3일 앵데팡당 전시회에서. 1889년 9월 초, 파리 사랑하는 어머니 . 개막하는 날 우리 모두는 들뜬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비는 왔지만 매우 기쁜 날이었죠. 오동 삼촌과 숙모가 그곳에 와서 언제 어떻게 어머니가 오시느냐고 묻더군요. 어머니의 앙리 1890년 3월 20일 제 6회 앵데팡당 전시회에서 1890년 3월 20일, 파리 사랑하는 어머니 2차 전시회의 개막식 을 생각하면 아직도 어찔어찔합니다 정말 굉장한 날이었어요. 게다가 성공적이었지요. 살롱전은 뺨을 맞는다 해도 그로부터 금방 회복되겠지요. 그러나 이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어머니의 앙리 1891년 1-2월 미술과 문학 서클 전시회에서. 1891년 1월, 파리 사랑하는 어머니. 어제 제 그림이 볼네 전시회에 전시되었습니다. 그리 나쁜 위치에 놓이진 않았지만 지난해만큼 좋은 자리는 아니에요. 무희를 주제로 한두 점을 만지에게 팔았습니다. 어머니의 앙리 재미있는 농담 명랑한 내용의 편지에서 로트레크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성공을 알렸다. 1891년 3월 중순, 파리 사랑하는 어머니. 지금 전시회(제 7회 앵데팡당 전시회)준비로 무척 바쁩니다. 늦어도 작품이 토요일까지는 배달되어야 하거든요. 안녕히 계세요. 할머니들과 다른 친척분들께도 키스를 전합니다. 어머니의 앙리 새집으로 이사했을 때 로트레크는 요리연습에 빠져 있었다. 1891년 12월 사랑하는 어머니. 거위 간 요리의 계절이 시작되었지요? 그렇다면 통조림을 열 개쯤 보내 주시는 것 잊지 마세요. 편지를 다시 읽는 동안 저는 이 요리의 특징을 알았습니다. 저의 포스터('물랭 루즈: 라 굴뤼 ')가 오늘 담벼락에 붙었습니다. 저는 지금 다른 작품('교수형 당하는 사나이'를 말 하는 듯하다.)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애정 어린 안부를 전해 주세요. 키스를 보냅니다 어머니 의 앙리 1892년, 로제 마르크스 작가이자 비평가인 로제 마르크스는 로트레크에게 공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892년 4월 12일. 파리에서 존경하는 선생님 이벨이 선생님께서 라 굴뤼를 그린 그림의 사진을 원하신다고 말하더군요 원하는 모든 사진을 사용하실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잡지와 관련된 불행한 기억이 있는 저로서는 사진을 다시 데생하는 것은 허락해 드릴 수 없군요. ('르 쿠리에 프랑세'의 쥘 로케와 관련된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충실한 H. T. 로트레크 파스칼 가족의 불행 파스칼 사촌들의 파산에 충격을 받은 로트레크는 편지를 통해 어머니를 진정시키려 했다 어머니는 그들을 돕기보다는 비난했다 1892년 6월. 파리 사랑하는 어머니 . 어머니께서 레스피드에 대해 하신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그러나 제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감정을 잘 추스리시고 저에게 편지를 주십시오. 불행히도 저는 너무나 회의적이어서 감사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레스피드에서 우리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가정 말입니다. 당신의 H. 1892년 8월 6일 토요일 (파리) 사랑하는 어머니 . 파스칼 집안은 풍비박산 났습니다. 어머니에게 어떤 피해가 갈지는 몰라도 숙모에게 잠시나마 페레의 집에 가 계시라고 편지를 써 주세요 제가 보기엔 그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입니다. 숙모에게 동의 한다는 편지를 써 주세요. 불행하게도 그들은 완전히 망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절대 이 점을 잊지 마시고 감정적인 문제는 접어 두세요 그들이 어떤 말로 둘러대든 말이지요 관용을 베풀어 주세요. 어머니의 앙리 '확실한 근거를 통해' 사촌인 루이의 불행을 전하며 로트레크는 어머니를 간곡히 설득했다 1892년 8월 20일 토사 사랑하는 어머니 그의 완전한 파멸과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것의 소멸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그를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는 그에게 남아 있는 적은 돈으로 최선을 다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삼촌께서 도와 주지 않으신다면 그는 빛을 갚지 못할 것입니다. 200프랑을 그에게 보내 주세요. 12월 전까지는 더 이상 그를 도와 주시라고 하지 않을게요 어머니의 앙리 1892년 10월 21일 일요일. 파리 사랑하는 어머니. 지난 이야기를 좀더 하겠습니다 저는 숙모를 위한 호텔방과 마차 대금 등으로 70프랑을 썼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습니다. 숙모는 레스피드 선박사고 때 건져 올린 많은 트렁크를 기차역 창고에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 트렁크 안에는 숙모와 조제프의 옷도 들어 있습니다. (앙리) 부르제가 조제프의 몫을 지불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숙모의 몫 100프랑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액수가 많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숙모가 새로운 옷을 장만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보관료가 점점 더 누적되는 기차역에 트렁크를 맡겨 놓았다는 점을 참작해 주세요 어머니는 이런 부탁이 지겨우시겠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방관하지 마시고 이리로 와 주세요. 이러다간 불쌍한 숙모가 병들고 말 겁니다. 키스를 보냅니다. 어머니의 H 플랑드르출신의 사나이 벨기에의 시인이자 미술비평가인 에밀 베레랑은 프랑스와 벨기에의 예술교류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1891년 20세기 그룹 전시회에서 로트레크를 높게 되었다. 1892년 10월, 파리 그리운 베레랑. 무엇인가 그리거든 연락해 달라고 말씀하셨지요. (물랭 루즈의 라 굴뤼)의 채색 인쇄가 막 끝났습니다 판화작업은 원화에 맞추어 제가 했습니다. 이건 원화를 보다 고차원적으로 변형했다고 할 수 있지요. 이것이 필요하시면 주아양 씨와 만나세요. 가격은 1루이화입니다. 그림은 1번부터 100번까지 있으며 인쇄원판은 지워 버렸습니다. 연작의 첫 번 째 번호를 가지시기 바라며, 그것이 진귀한 희소가치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친구 H T.로트레크 포스터의 전성시대 1892년 12월 금요일. 파리 그리운 어머니. 어머니는 천성적으로 남의 기쁨이나 슬픔을 잘 나누는 분이므로 분명 제게 찾아온 행운에 감동 받으실 겁니다 니스에서 어머니와 함께 있었던 쥘 쿠르토씨가 가수 이 베트 길베르에 게 저에 대해 말했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어제 분장실에서 저에게 자신의 포스터를 그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꿈꿔 온 최고의 성공입니다. 유명한 화가들(샤를 레 앙드르. 쥘 세 레. 그리고 페르디낭 바크)이 그녀를 그린 적이 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저에게 요구했다는 것은 저더러 특별히 잘해 달라는 부탁이겠지요. 가족 누구도 저의 즐거움을 함께하지 못할 겁니다. 어머니를 제외하고요‥ 어머니의 앙리 또 다른 벨기에인과의 만남 변호사이자 저널 리스트. 작가. 미술평론가였던 벨기에인 옥타브 모스는 정기간행물인 '현대의 예술'을 창간했고 1883년에는 '20세기' 그룹을 결성했다. 그는 로트레크 작품의 액자 작업과 홍보를 담당했으며. 특히 로트레크의 작품 판매에 앞장섰다. 1893년 1월 27일 파리 친애하는 모스 씨 이제 곧 제 그림 석 점(채색 석판화)이 도착할 겁니다. 브뤼 셀에서 열리는 전람회 개막식에 참석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석 점의 그림에 붙은 (위쪽 구석의) 꼬리표를 잘라 내 가능하면 유리병 속에 잘 보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람회용 액자의 계산서는 저에게 보내 주세요. 그리고 제 그림의 교정쇄를 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전은 화가들이 공동작업으로 이룬 출판물에 대한 안내 역할을 할 것입니다. (로트레크는 앙드레 마르티가 출판한 '원판화'의 표지를 제작했다.) 또 누가 브뤼셀에서 우리의 대리인이 될지를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책임자는 롬가 17번지에 사는 마르티입니다. 그나 저에게 직접 편지를 써 주십시오. 그들이 견본과 요금표를 보내 드릴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판화들의 경우는 몽마르트르가 19번지 구필 화랑에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원판화는 모두 거기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가격은 20프랑입니다. 라굴뤼를 그린 제 그림은 600프랑 다른 그림'침대에서'은 400프랑에 내놓았습니다. 20세기 전시회는 언제 열릴 예정인지 알고 싶군요. 편지나 전보로 알려 주십시오. 될 수 있으면 참석하겠습니다.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H T 로트레크 로렌 지방 출신의 로제 마르크스를 통해 로트레크는 낭시 출신의 제본업자인 르네 위네를 만나게 되었다. 로트레크는 위네가 만든 책 '인상주의 미술'과 '고야의 투우'에 들어갈 데생을 그렸다. 로트레크의 편지들은 로트레크가 엄격한 기법의 표준을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1893년 3월에서 5월 사이, 파리 존경하는 선생님 여기 투사도가 두 장 있습니다 그림의 전체적인 균형을 생각하며 정확하게 선들을 따라가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머리와 부리 부분을 말입니다. 선박 부분은 사진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깃털로 싸인 새의 몸통은 좀더 밝게 보이도록 다크 그린색으로 합니다. 목부분과 머리의 측면은 오렌지 옐로. 눈은 말라키트 그린, 하늘은 다크 울트라마린. 오른쪽 물 부분은 에메랄드 그린입니다. 선박과 모래 부분을 위해 배경은 가죽 그대로 두십시오. 부리의 안쪽은 옐로 그레이 입니다. 뒤쪽의 가죽보다 밝게 보이도록 말이지요. 목구멍은 크림색이 도는 횐색입니다 성공적으로 일을 마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결과를 꼭 알고 싶군요. 경의를 보내며. H. 드 툴루즈 로트레크 이베트길베르의 작품집 1893년 12월 10일 일요일, 파리 경애하는 마르티 월요일이 되는 내일 '라 쥐스티스'(제프루아가 정기적인 기고를 하던 자유주의의 신문은)로 올 때 당신의 화가가 그린 견본을 몇 점 가지고 오시겠습니까? 제프루아가 선택을 할 수 있게끔 말이지요. 그가 이 방식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당신의 H.1 로트레크 1893년 12월 금요일, 파리 경애하는 제프루아 마르티는 당신의 이베트 길베르 계획이 실행되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가능한 시 기에 판을 새길 준비를 해주세요. 저는 그에 맞추어 데생을 하겠습니다. 자. 제목은 무엇으로? 괜찮으시다면 그냥 단순히 '이 베트'라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이 베트는 벨기에적이라고 하더군요. 당신의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H T 로트레크 버터의 가격 1893l년 12월 29일 금요일, 파리 그리운 할머니. 할머니는 이제 곧 유명한 의사인 가브리엘을 보시게 될 거예요. 아니 이미 보셨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는 할머니에게 우리가 한 많은 일을 이야기 할 거예요. 피를 보는 그의 일과 저의 판화일 말이지요. 그가 말씀드리겠지만 친구인 부르제가 결혼하는 바람에 아파트를 옮겨 야 할 상황입니다. 별로 유쾌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는 저의 작업실이 있는 구역에서 적당한 집을 하나 봐 두었습니다 이제 자신만의 집을 가지고 정확한 버터의 가격을 알아야 하는 신성한 기쁨을 느끼게 될 거예요. 매력적인 일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할머니를 존경 하는 손자 H 드 툴루즈 로트레크 1894- 1896년, 극장에서 일하다 1894년 2월 5일 목요일, 암스테르담 그리운 어머니 3일간 우리는 어머니가 하는 프랑스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네덜란드인 사이에서 지냈지요 다행히 제가 영어를 좀 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무언극이 이어졌죠... 우리는 맥주를 헤아릴 수 없이 마셨어요. 앙크탱이 베푼 친절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고요. 그는 작고 느린 저에게 맞추느라 자신의 평소 속도대로 걷지 못했지요. 하지만 그는 절대로 짜증을 내지 않았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전해 드리겠습니다. 어머니 의 앙리 1894년 후반에 로트레크는 연극 '질그릇 샤리오'의 무대장식과 프로그램을 디자인했다. 테아트르 프 뢰브르에서 공연된 이 연극은 고대 힌두교도들의 작품을 각색한 것이다. 1894년 후반, 파리 그리운 어머니 난필을 용서하십시오. 저는 정신없이 일을 하느라 약간 지친 상태이지요. 일보 전진. 일보 후퇴를 거듭하고 있지요 저는 무대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일에 착수했습니다. '질그릇 샤리 오'라는 힌두교 작품 번역극의 무대를 꾸미는 일입니다. 재미는 있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물론 해보기도 전에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말이지요 어머니의 HLT "심슨 기어 체인" 로트레크는 뷔팔로 자전거 경기장에서 벌어진 자전거 경주를 데생에 담았다. 이 그림들을 가지고 로트레크는 자진거 체인을 만드는 회사의 경영인인 루이 부글레가 주선한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 1896년 5-6월 금요일, 파리 사랑하는 어머니. 이틀안에 런던에서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군요. 저는 목요일부터 월요일까지 그곳에서 지내며, 도버 해협 반대편에서 조국의 깃발을 휘날리는 사이클 경주팀과 함께 있었습니다. 저는 야외에서 3일간을 보내고 '심슨기어 체인'의 광고 포스터를 만들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이 포스터는 눈부신 성공을 거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앙리 1897년, 시나이산 아래에서 어머니에게 자신의 흥분과 감동, 최근의 활동, 그리고 돈 문제를 간결하게 말하고 있다. 1897년 5월, 파리 사랑하는 어머니 저는 클레망소와 함께 유태인에 대한 책 한 권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저에게1200프랑을 지불하기로 했습니다. 그중 300프랑은 내일 받기로 했는데, 나머지 900프랑 중 500프랑을 어머니가 저에게 선불로 주실 수 없을까요? 6개월 안에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없으시다면 다른 곳을 알아봐야지요. 하녀를 두려면 좀더 좋은 집이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꼬마, 앙리 계산을 해댄 것 용서하세요. 하지만 사업은 사업이니까요... "다시 집에 머물 수 있게 될까요?" 1898년 로트레크는 에칭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이베트 길베르의 영어판 작품집에 대해 수많은 편지를 썼으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는 뜸했다. 1898년 초, 파리 빨리 답장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자주 무기력상태에 빠지고 있습니다. 프로쇼 거리의 고요함을 음미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서둘러 해야 할 일은 많지만 그림 그리는 것은 고통입니다... 어머니가 그곳에 계시는 것이 크나큰 위안입니다. 다시 집에 머물 수 있게 될까요? 키스를 보냅니다. 어머니의 앙리 로트리크는 항상 술에 빠져 지냈으며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1899년 그는 감금되었다. 도움을 청하는 소리 뇌일리의 휴앙원에서 로트레크는 아버지에게 감동적인 호소의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 자비를 베푸실 기회가 생겼습니다 저는 갇혀 있습니다. 갇힌 것은 모두 죽게 마련이지요... 그리고 절친한 친구 모릭스 주아양에게는... 1899년.3월 17일, 마드리드가 16번지 (파리의 세멜레 뉴 박사의 휴양원에서 )친구에게. 편지 잘 받았네 나를 보러 오게. 자네의 T L 결이 있는 돌과 수채화 물감, 붓, 석판화, 크레용, 품질 좋은 인도 잉크와 종이가 필요하네 베르트사라쟁 베르트 사라쟁은 로트레크의 어머니가 파리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와 로트레크를 돌보도록 파리로 보낸 그녀를 신뢰한 로트레크는 그녀에게 비밀스럽게 자신의 요구를 털어놓았다 1899년 4월 12, 혹은 13일. 뇌일리 마드리 드가 16번지 친애하는 부인에게 아침에 품질 좋은 커피 1파운드를 갈아 가지고 마드리드가 16번지로 와 주기 바라오. 럼주도 한 병 가지고 오고요. 자물쇠가 있는 가방에 넣어 가지고 말이오. 누가 뭐라고 하거든 나에게 말하라고 하세요 H. 드 툴루즈 로트레프 신문 인쇄물 등등 우편물도 전부 가지고 와요. 베르트 사라쟁은 매일 매일 로트렌크의 어머니에게 로트레크의 건강에 대해 보고했다. 걱정으로 가득 찬 그녀의 편지는 그녀가 얼마나 헌신적이었는가를 말해준다. 1899년 1월 4일. 파리 백작 부인 어제 저녁 저는 앙리씨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혼자서 저녁식사를 준비했더군요 제가 그에게 부인께서 떠나셨다고 말하자 그는 화를 버럭 냈습니다. 마구 욕을 퍼부으며 지팡이로 마루를 두드려 댔지요. 그러고는 마차를 타고 집으로 가서 초인종을 부서져라 눌러댔습니다. 문지기가 아무도 없다고 말해 주었지요... 그는 저에게 아파트의 열쇠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그는 조금씩 기억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며칠 안으로 이 증상은 다 나을 것 같습니다 그는 저에게 사람들이 뭐가 그렇게 바빠서 자신을 몰아대는지,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늘 자신에게 먼저 이야기해 주었는데 이번에는 왜 부인께서 말해 주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부인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또한 앙리 씨를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베르트 사라쟁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미간행 편지'(1967)에서 1899년 1월 10일. 파리 백작 부인 새로운 이야기를 전해 드리고 싶지만 불행히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좀 진정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분별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부인께서도 그를 자극하지 마시 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어제 점심시간에 그는 오렌지 잼이 담긴 접시에 럼주를 부으려 했습니다 제가 제지하려고 하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저를 자리에 앉혔습니다. 주인은 자기라면서요. 부인에서는 언제나 그에게 '그래'라고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모든 이에게 선물을 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11시 10분에 에드몽 카메즈(로트레크의 음주습관을 부추긴 마차업자)의 심부름으로 마차를 모는 소년이 선생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점심을 같이 할 모양입니다. 저는 조금 후에 돌아갈 겁니다 저는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곁에 있으려 합니다. 그는 술 마시는 것을 잊었습니다. 누군가 그와 함께 있으며 그를 바쁘게 해주면 그는 더 이상 술 생각을 하지 않을 겁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미간행 편지'(1967)에서 1899년 1월 15일. 파리 백작 부인 . 선생님은 집세를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문지기가 계산서를 보여 주자 그는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으므로 1주일 후에나 고려해 보겠다고 하더군요... '앙리 드 툴루즈 로트리크의 미간행 편지'(1967)에서 1899년 1월 16일, 파리 백작 부인 선생님은 좀 나아지셨지만 돈 문제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그는 저에게 칼메스가 자신에게 3할의 고리 대금업자를 소개시켜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이상한 짓이라도 하면 정말 위험합니다 방금 그의 집에서 오는 길인데 그곳에는 낯선 남자 두 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뚱뚱한 가브리엘 양(창녀), 마차를 모는 소년을 비롯한 모든 사람에 게 포도주를 약속했습니다 포도주가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요. 하지만 저는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이 약속을 잊어 버렸습니다. 지금 그는 가브리엘씨를 더 이상 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는 저에게 가브리엘씨가 오면 밖으로 던져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가 첩자라면서요... '앙리 드 툴루즈 로트례크의 미간행 편지'(1967)에서 보르도, 오페라, 그리고 작품의 판매 로트레크의 마지막 편지들은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모리스 주아양에게 보내는 것들이었다. 주아양에게 로트레크는 자신의 열광적인 활동을 적은 편지를 보냈다. 1900년 12월 6일, 보르도 사랑하는 친구에게. 나는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네. 자네에게 '졸라의' '목로주점'의 복사본 두세 점을 보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해도 될 것 같군. 보르도의 코데랑가로 이것들을 보내 주게. '아름다운 엘렌'은 너무나도 매혹적이야. 훌륭하게 무대에 올릴 수 있겠어. 벌써 한 가지 착상이 떠올랐네. 엘렌의 역을 코키트라는 뚱뚱한 여자에게 맡기는 것이 어떨까... 자네의 친구 T. L 1900년 12월 중순, 보르도 친애하는 모리스 드 라라의 '오페라' 메살리나'에 관한 사진을 좀 가지고 있나? 사진 상태가 좋든 나쁘든 상관없네. 나는 이 오페라에 반했어. 신문에서는 나의 서툰 그림을 좋게 평가해 주었더군. 자네를 안아 주고 싶네. 자네의 친구 T. L 주아양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1901년 6월 4일자 편지는 '물랭 루즈를 떠나는 잔 아브릴'의 대금 3000프랑에 대한 영수증이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라는 사람 로트레크는 기형적인 육체와 음주벽을 갖고 있었다. 이 점에 관한 한 친구들과 논적들의 견해는 일치했다. 단 친구들은 동정과 감탄을, 논적들은 의혹과 불쾌감을 느꼈다. 과연 툴루즈 로트레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루아얄가의 미국식 바 툴루즈 출신의 화가 프랑수아 고지는 코르몽의 작업실에서 로트레크와 함께 견습생 생활을 했다. 그는 로트레크의 중요한 작품들을 툴루즈의 오귀스탱 미술관에 기증했다. 나는 미리 약속을 해야 로트레크를 보는 습관이 있다. 그가 "오늘은 완전히 망쳤어 나를 보려면 루아얄가의 미국식 바로 와 나는 언제나 거기 있으니까" 하고 말할 때, 나는 그가 손님들과 무슨 문제가 있는지, 또는 그가 바텐더 일에 점점 피곤을 느끼는지 잘 모른다. 나는 그를 보기 위해 바로 갔다. 그는 바 쪽의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주사위 놀이를 하면서. 그는 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바깥쪽 탁자에 앉았다 "뭘 마시고 싶니 ?" "아무거나 네가 마시는 걸로 하지." 그는 포트와인을 두 잔 시켰다. 모친과 부르주 박사의 간청으로 그는 금주치료를 받고 있어서 와인만 마셨다. 어디서든 로트레크는 사람들의 특징을 주시했다. 그는 바에서 정말 유별난 사람을 하나 발견했다 "저기 카운터에 있는 몸집이 큰 사람 보이지? 중산모를 쓰고 단춧구멍에 꽃을 꽃은 사람 말이야. 톰이야. 로트실드의 마부야. 정말 멋있지 않아?" 그는 바의 단골손님이었다. 로트레크는 1896년에 그를 자주 그렸다. 1897년 작업실을 코랭쿠르가에서 포쇼가로 옮길 때 그가 말했다. "절대 들어가지 않을 거야. 만약 들어가면 문을 열지 않겠어 어쨌든 친구여 나의 둥지를 보여 주지!" 그곳은 캔버스를 저장하는 창고 같았다.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캔버스는 일렬로 벽에 기대어져 있었고, 이젤에는 그림이 걸려 있지 않았다. 사막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프랑수아 고지 '로트레크와 그의 시대'. 1954년 바클 데 보자르에서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게 없었다. 상당히 무거웠을 텐데 그는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서 말이다 그는 여름에도 검정이나 짙은 청 색 옷을 단정하게 입었다. 그의 뺨은 청결했고 혈색이 좋았다. 정성들여 빗은 그의 머리카락은 윤이 났다. 턱 부분에서부터 곱슬거리는 구레나룻도 매우 검었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안경 뒤에서 뚫어지게 보고 있는 석탄처럼 까만 두 눈이었다. 무엇이든 보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관찰을 수행하는 눈 말이다. 그리고 쑥 내민 입술이었다. 도착한 순간부터 그는 모든 것에 반응했다 떠날 때까지 그는 그 누구보다 탁월했다. 타데 나탕송 '인간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1951년 로트레3의 모습 작고 검은 로트레크는 난쟁이처럼 보였다. 일반인과 똑같은 그의 몸통이 그 무게와 또 그의 큰 머리를 감안할 때 빈약한 두 다리를 짓뭉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더 그렇게 보였다 몸통과 그런 대로 어울리는 손과 머리는 전체적으로 더욱 비례가 안 맞아 보였다. 머리가 마치 무겁게 매달려 있는 물체처럼 끄덕였기 때문이다. 정성들여 빗어 넘기고 기름을 바른 머리와. 새카만 턱수염 사이에는 구레나룻이 점점이 난 입술이 있었다 손가락이 기다란그의 큰 손은 팔레트와 모든 붓을 쥐고도 남을 정도였으며 골동품을 섬세하게 다를 수도 있었다 또 머리 부분이 둥근 작은 나무 막대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지팡이라고 했다 이 어린이용 지팡이는 그가 걷거나 서는 데 도움을 주었다 어딘가 갈 때 그는 언제나 마차를 타고 다녔고. 아니면 휠체어에 앉은 채로 친구들에게 천천히 살롱까지 동행하자고 했다. 그는 걷는 괴로움을 은폐하기 위해 농담과 술수를 부렸다 그의 벗은 몸을 본 사람은 '다리 위의 성기'라는 그의 별명이 얼마나 적절한 것인가를 새삼 깨달으며 그의 남성다움에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그 자신은 어느 것 하나 특출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배우들이 하듯이 흉측하게 찡그린 얼굴로 자신을 위장했다. 그를 흠모하고 그의 학대를 받았던 우리들은 더 이상 우리 앞에 놓인 초상화를 알아볼 수 없었고 그의 콧소리도 들을 수 없을 뿐더러, 악센트를 통해 단어를 왜곡시켰던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우리는 단지 그의 작고 불행한 모습과 지혜와 사랑이 빛나던 눈. 예나 지금이나 분노의 섬광이 번쩍이던 눈을 보았을 뿐이다. 안경 알 때문에 그의 눈은 더욱 빛나 보였다 타데 나탕송 '인간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1951년 사이클경기장 '라 레뷔 블랑슈'의 창간인인 폴 르클레르크는 로트레크의 독특하고도 모방할 수 없는 모습에 대한 묘사와 함께 그에 대한 매혹적인 회고담을 남겼다. 파리 시절 초기 로트레크는 육상경기장과 당시 인기가 있던 사이클 경기장, 그리고 음악홀과 서커스장 등 야외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운동경기를 사랑했다. 양지 바른 잔디밭, 경쾌하고도 무사태평하게 달리는 종마, 혹은 사이클 경기장에서 볼 수 있는 강하고도 멋진 근육을 가진 경기자들... 이 작은 불구의 인간에게 이들을 보는 것만큼 흥미를 끄는 일은 없었다. 트리스탕 베르나르는 당시 뷔팔로 사이클 경기장의 책임자였다. 그는 매일 저녁 기자들과 시간 기록원이 우글대는 경기장에 나와 모자를 뒤로 젖혀 쓰고 손에 권총을 든 채 여러 경기의 출발을 집행하며 바쁘게 지냈다 그의 친한 친구인 로트레크는 사이클 경기장의 구석구석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로트레크는 아침시간을 트랙의 코너와 중간 부분, 그리고 선수대기소 등을 돌아다니며 즐겁게 보냈다 로트레크는 작은 육체로 거대한 운동 선수들과 함께 길을 가로질러 갔다. 그는 그들의 힘과 동물 같은 머리를 보고 감탄했다 로트레크는 그들의 복장을 보면서도 즐거워했다. 그들 바로 뒤로 키 큰 사람 하나가 뒤따랐다 구부정한 모습에 어깨가 둥근 그 사람은 코를 내밀고 걸었다. 로트레크는 가끔 돌아보며 손가락을 들어 짐승 같은 근육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들의 몸집에 압도당한 로트레크가 중얼거렸다 "멋지군!" 깡마른 사촌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이러한 아침 외출에 로트레크는 짧은 담황색 외투와 맨손처럼 보이는 살색 장갑을 끼었다... 신체 장애가 있던 로트레크는 운동을 할 수는 없었지만 운동경기에 대해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로트레크가 정상인이었다면 그림보다는 사냥을 했을 거라고 여러 차례 확신했다. 폴 르클레르크 '툴루즈 로트레크의 곁에서', 1954년 물랭 루즈에서 작가이자 비평가인 스타브 코키오는 키술사에 대한 저술. 특히 반 고흐와 쇠라에 대한 저서로 유명하다 친구이자 비평가로서 그는 로트레크에 대한 글을 남겼다 오래 전 어느 날 저녁 물랭 루즈에 들렀을 때 로트레크의 작품을 보고 매우 놀란 적이 있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특이 한 그의 그림 두 점이 계단에 걸려 있었다 '페르난도 서커스장' 과 '무희'. 나는 평생 이 그림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은 아주 새롭고 이상했다... 내가 그 그림들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라는 이름을 말했다 그 순간 갑자기 한 가지 상상이 나에게 떠올랐다 나는 속으로 확신했다 이 화가는 분명히 육체적으로 일반인과 다를 것이라고, 그렇다. 그 그림은 내 마음에 어떤 이상한 존재, 화가에 대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범주의 존재를 떠올려 주었다. 그는 짬이 나면 그림을 그리는 곡예사가 아닐까? 아니면 광대나 기수는 아닐까? 처음으로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된 나는 생각에 빠졌다. 이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찼기 때문에 어느 날 저녁 나는 그 그림을 다시 찾았다. 하지만 화가가 불안하고 비정상적인 사람일 거라는 점 외에는 별다른 추측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 나는 훗날 로트레크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지는 콩스탕탱 기스 같은 다른 화가들이 그린 평화스럽고 뚱뚱한 여성의 이미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쨌든 나는 커다란 붓으로 틀어 올린 머리를 그려 넣은 이 뾰족한 얼굴들에서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특히 덧문같은 눈꺼풀 뒤에서 응시하는 그 눈들이 그러했다! 비쩍 마른 옆얼굴과 굵은 목은 어떤가! 아! 이 야수들! 나는 그 자극적인 냄새를 식별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것들에 감탄했다... 그때 한 친구가 팔을 잡아끌며 춤을 추자고 했다. 귀스타브 코키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1913년 바다에서 로트레크는 7월과 8월, 때로는 9월까지 아르카숑에서 보냈다 수영을 매우 좋아한 로트레크는 오후를 물 속에서 보냈다. 익사를 두려워 한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수영은 그의 건강에 이래저래 도움이 되었다... 그는 무릎까지 걷어올린 붉은 실크 바지와 꼭 끼는 푸른 스웨터를 입은 채 드니스 별장에서 맨발로 내려왔다. 그는 장식줄을 멘 해군 장교모자를 썼다. 토사에서 그는 가마우지를 길들이는 데에도 열정을 쏟았다. 그는 가마우지 한 마리를 자주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함께 해변을 걸은 후에는 더 이상 그 동반자를 찾지 않았다 로트레크는 이색적인 옷을 입고 동양식 모임을 열며 여름을 즐겼다. 신도들에게 기도시간을 알리는 회교도처럼 그는 별장 꼭대기의 창문까지 올라가곤 했다 귀스타브 코키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1913년 매음굴에서 가끔 로트레크는 며칠씩 모습을 감춘 채 몽마르트르 밖으로 진출했다 친한 친구들은 곧 이 비밀을 알게 되었다 물랭가. 앙부아즈가, 주메르가 등에 위치한 매음굴이 그의 본부가 된 것이다 그곳에서 로트레크는 누드 모델을 보았다 움직이는 누드 모델 말이다 그들은 "저는 부게로와 카바넬씨의 모델로 섰죠 체너씨에게는 몸 전체가 아니라 얼굴만으로 모델을 섰어요." 라고 말하며 틀에 박힌 포즈를 취하는 작업실의 전문 누드 모델이 아니었다. 전문적인 모델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보다 자연스러운 걸 원했다 몸짓과 태도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모델이 필요했다. 그는 동물의 움직임 같은 자연스러움을 원했다. 로트레크의 의사 친구들은 이 매음굴의 여주인공을 요양소로 가야 할 정신병자로 진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트레크는 그곳에서 이 은둔자들의 생활을 관찰하며 끊임없이 데생과 채색을 했다. 모리스 주아양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1927년 신문에서 로트레크가 요양소에 가 있는 동안 신문에서는 그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로트레크의 친구들은 자신들은 놀라지 않았으며 이건 필연적인 결과라고 말할 것이다. 로트레크는 요양원에 갈 운명에 처했다. 가면이 벗겨져 광기가 드러난 그는 어제 감금되었다. 유화와 데생, 그리고 포스터에 대한 창조자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그가 말이다. 하지만 이 살짝 돈 광인은 특히 현실에 대한 인식을 통해 정체를 드러냈다. 로트레크의 말은 그가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는 자신에 비하면 그 누구도 재능을 갖지 못했으며, 자신의 감정에 비하면 아무도 감정을 갖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다른 사람은 모두 바보, 불쌍한 놈, 치사한 놈이었다 모두 정신병원으로 보내야 했다. 여자들의 경우는 좀더 간단했다 여자들은 소들이 풀을 뜯는 목초지로 가야 한다고 했다 칼렉상드르 에프 '라 주르날'. 1899년. 3월 26일 "그는 부러움을 사게 될 것이다." 오늘. 최근에 요양원으로 들어 간 화가 로트레크에 대한 동정이 일제히 울려 퍼졌다. 이 화가의 이야기는 경고처럼 화가와 작가 등 여러 사회집단에 혼란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친구에게 찾아온 병과 사고에 대해 별로 알지 못하는 우리는 광기에 붙여진 무시무시한 물음표 때문에 혼란스럽다... 우리가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부러움을 사게 될 것이다. 베랑제가 노래한 것처럼 행복한 사람은 거지가 아니라 광인이다 인간의 조건은 각각에게 고유하고, 끔찍할 정도로 지긋지긋하며 무력한 욕망과 채워지지 못한 만족 사이에서 혹독하게 동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을 바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정신병원밖에 없다. 아! 행운아 로트레크! 그가 광기의 시련을 이기고 마침내 여느 사람들처럼 모든 광기에 대한 신성한 망각을 얻기 위한 싸움을 벌일 때 그 고통은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으리라. 에밀 르펠르티에 '레코 드 파리'. 1899년. 3월 28일 "너무나 슬프다" 진실을 발견할 수단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이 시대에 파리에서는 진실을 가로막는 하찮은 장애물이 얼마나 많은지! 하지만 가면 뒤에 가려진 얼굴을 알아내려는 노력 은 얼마나 소홀한가! 위대한 재능과 심오하고 사려 깊은 정신들로 가득 차 때로는 곰 사육장처럼 떠들썩한 분위기를 자아냈던 이 숭고한 도시에서... 로트레크에 대한 글들은 놀라운 것이었다. 기사 전체를 로트레크로 채운 이들 가운데 그를 만나 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 기사들에 의하면 의사에게 사망선고를 받은 이 불쌍한 친구는 전신마비로 희생될 운명에 처했는데, 병세는 지금까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미쳤을지도 모른다. 또 기억을 상실했을 수도 있다. 또한 세계를 투명하고 유머러스하게 파악하던 시력을 상실했을 수도 있으며 날카롭고도 섬세하게 연필을 놀리던 손이 마비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놀랍도록 빼어난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은 그가 가엾게도 파멸했으며 비참한 착란상태에 놓여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화가이다 그는 그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그려도 될 만큼 재산이 있었다 그는 15년간 순수한 열정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는 진정한 열정이었으며 결국 그는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이것을 제외하면 그에 대한 기사는 사실에 가깝다... 지금부터 내가 본 것을 말하겠다. 나는 파리 근교 숲 근처 센 강변의 어떤 집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루이 16세 시절에 막강한 권력을 가진 부자 관리 비용을 아끼지 않고 지은 기가 막힌 저택이었다... 그러나 이 곳은 이제 고통스러운 장소가 되었다 속아서 그곳에 가, 강제로 알코올 중독치료를 받고 있는 로트레크는 이곳에서 건강과 정신적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것인가? 내일? 2주 후에? 아니면 석 달 후에? 진과 맥주 그리고 럼의 향기가 파리의 거리에서 올라오는 수증기처럼 콧구멍을 스쳐 지나갈 때 그는 어떻게 할 것인가? 태연한 술꾼들 얻어먹고 사는 젊은이들, 혹은 섬뜩하고 수상쩍은 떠돌이 노동자 패거리가 먼 곳에서 온 그에게 더욱 호기심 을 느끼고 그를 사냥감이나 놀잇감으로 여긴다면, 또는 그의 친구들이 또다시 그가 충동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무력하게 만들어 버린다면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지만 나는 안심을 했고 또 안심이 된다. 그것은 너무나 비극적이다! 누군가 나를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한 한 사나이에 대해 너무나 심각하게 말한다면서 나를 힐난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그것은 별 이유도 없이 너무나 심각해져 있는 사람을 조롱하는 기쁨을 알지 못하는 정의의 기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카르센 알렉상 '르 피가로', 1899년 3월 30일 사망기사 중 몇 편 "투우나 공개처형 등 무시무시한 광경을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툴루즈 로트레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쥘 로케의 어투는 이런 식이었다. 모리스 주아양은 좀더 쾌활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로트레크는 공원에서 놀고 있는 소년처럼 인생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렸다." "그와같은 부류의 화가가 거의 없다는 점은 인류에게 다랭스러운 일이다" 프랑스의 가장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마지막 후예인 화가 드 툴루즈 로트레크씨가 수차례 감금되었던 요양소에서 36세로 사망했다. 그의 육신은 가장 불행한 표본의 하나였고, '노트르담의 꼽추'의 주인공처럼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인간을 혐오하고 화가로서의 생애 중 몇 년을 자신의 모든 모델을 해체하고 익살맞게 그리고 천박하게 만드는 데 몰두했던 것은 그 때문일까? 감정을 고취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던 그는 사랑에 대해 복수하고 몽마르트르 여성들의 우스꽝스럽고 천하고 야비하며 통속적이고 음란한 모습을 묘사하는 데 전념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좀더 인간적이고 약간의 동정심과 감상적인 방식으로 대했을 그들을 말이다 부유한 화가였던 로트레크는 몽마르트르의 보헤미안적인 분위기를 받아들였다. 경제적인 조건과 가족과의 관계 덕분에 그는 자신의 많은 석판화를 출판하며 비평가들이 그에게 '관심을 돌릴 수' 있게끔 했다. 주요 신문들은 그를 진지하게 고야와 비교했다. 이 것은 그를 파멸시켰다. 살아 있는 동안 갈채를 받던 화가들은 빨리도 잊혀 진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미쳤고 감금되었다. 다시 밖으로 나왔어도 그는 돌봐 주는 사람 없이는 외출할 수 없었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한 달 전 점심시간에 아르므농빌 전시관에서였다 그는 화려한 차림의 여인들이 지나가는 것 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몇 년 전에 나는 툴루즈 로트레크를 소개받았다. 내가 알기로는 그의 그림이 처음 출판된 것은 '르 쿠리에 프랑세'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당시 원본 그림은 드루오 호텔에서 6프랑에 팔고 있었다. 광고를 해도 아직 유명해지기 전이었다 천성적으로 그는 모든 고결한 표현에 무감각한 채 증오로 가득 차있었다 오늘날의 민법과 상법상으로 볼 때 이 부유한 화가는 그의 작품을 거래하는 화상들에게 1전의 가치도 없다. 자신이 직접 회계원과 집행관 역할을 한 그는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의 이익이 걸린 문제에는 정의를 들먹이며 관료적인 견해를 퍼부었다. "한 번이 라도 판대하게 행동하고 싶지 않으세요?"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그건 자신을 저버리는 짓이지요" 그가 말했다. 투우나 공개처형 등 무시무시한 광경을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툴루즈 로트레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와 같은 부류의 화가가 거의 없다는 점은 인류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론 그의 재능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툴루즈 로트레크의 재능은 그 악영향과 음울함을 생각할 때 치명적이다 쥘 로케 '르 쿠리에 프랑세'. 1901년 9월 15일 채찍질을 하는 로트레크의 연필 앙드레 질과 마찬가지로 캐리커처가인 로트레크가 끔찍한 위기를 맞아 자신의 건강과 삶을 위해 격렬하고 정력적으로 투쟁하던 끝에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3년 전에도 그는 요양소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그는 용케 무시무시한 정신병원을 벗어나 정상적인 생활을 되찾았을 수 있었다. 그는 초췌한 얼굴로 알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며 다시 파리에 모습을 드러내어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곧 그는 그가 죽음을 맞은 무시무시한 건물로 되돌아가야 했다. 프랑스의 가장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중 하나로 과거에 공주와 결혼한 툴루즈 백작의 가문. 1차 십자군 원정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가 배출된 가문의 마지막 후예였던 로트레크는 몸집이 작고 뚱뚱했다. 작은 키와 큰 머리, 눈구멍에서 빠져 나온 듯한 눈을 지닌 기괴한 난쟁이... 이 밭장다리의 눈에는 슬픔이 배여 있었다. 그는 자연의 가장 불행한 표본이었다. 몽마르트르에서 이 불구의 난쟁이를 모르는 카페 웨이터나 호텔 지배인, 여자는 없었다 그의 낭비벽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궁중 광대처럼 보이는 이 사나이는 선술집이나 심야 레스토랑에서 파리의 매춘과 유흥, 방탕, 주벽을 연구했다. 이러한 그의 연구를 통해 우리는 (교수형당하는 사나이 ) (쾌락의 여왕) (독일의 바빌로니아) (물랭 루즈로 들어가는 라 굴뤼 ) 등을 비롯하여 기괴한 매춘과 타락한 유흥. 음란한 방탕을 소재로 한 수백 점의 작품을 볼 수 있게 피었다... 로트레크는 이렇게 정의 내릴 수밖에 없다. 그의 재능은 지독한 외고집과 끔찍한 유희의 소산이다. 로트레크의 연필은 채찍질을 하고 낙인을 찍으며 고통과 죽음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 소름끼치는 집단과 살기로 한 병약한 툴루즈 로트레크는 그가 표현하려 했던 인물들, 즉 그의 영웅들의 광기에 사로잡혔다. 그의 주변에 항상 존재하던 광인들을 바라보며 그 자신도 미친 것이다... 그의 작품은 그를 지치게 만들었고 마침내 그를 죽였다... 로트레크는 몽마르트르의 장면을 담은 작품을 기껏해야 40여 점밖에 남기지 못했다. 그는 매우 특이한 포스터들, 특히 브뤼앙의 모습을 담은 뛰어난 포스터를 남겼다 또한 그는 수백 점의 석판화와 완성되지 않은 습작들을 남겼다. 이 시대의 모든 화가들 가운데에서 로트레크는 이름을 길이 남길 화가 중 하나이다 매우 기묘한 재능과 해로운 재능. 그리고 불구자의 재능을 가진 화가로서 말이다 주위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한 것을 본 이 불구자는 삶의 추한 면을 과장하고 모든 결점과 사악함, 그리고 모든 현실을 끄집어냈다... 케밀 르펠르티에 '레코 드 파리', 1901년 9월 10일 "추한 장르에서 얻은 명성" 며칠 전 추한 장르에서 명성을 얻은 한 화가가 사라졌다. 툴루즈 로트레크. 그는 괴팍하고 비뚤어진 성격의 소유자로 그의 세계관은 자신의 신체적 결함 때문에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툴루즈 백 작의 후예인 툴루즈 로트레크는 기괴하고도 음란한 캐리커처를 그리는 데 몰두했다. 그는 값싼 유흥가 매음굴, 댄스홀에서 모델을 찾았다 그는 타락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곳, 추한 영혼이 드러난 곳을 찾아가 포주나 매춘부 창백한 부랑자와 알코올 중독자를 즐겨 그렸다 이 세계를 드나들며 불행에 파묻힌 로트레크는 그러다가 그 자신도 전염되고 말았다. 그는 몸과 마음이 파멸된 채 광기의 무시무시한 공격을 받으며 정신병원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슬픈 삶에 슬픈 종말이 찾아온 것이다! 쥐멜 '리옹 레퓌블리켕'. 1901년 9월 15일 "독립적인 정신" 로트레크의 재능이 절정에 달하고 정신적 힘이 충만해 있을 때 트리스탕 베르나르는 그를 알게 되었다. 이 작은 거인은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가! 그가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죽은 게 아니라 초자연적인 세계로 돌아갔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로트레크를 초자연적인 존재로 느끼고 있다. 이 것은 그가 극히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정신이다. 그리고 그의 독립적인 정신에는 어떠한 뿌리 깊은 편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기존에 존재하는 사상을 경멸하지 않았다. 단지 모든 종류의 권위를 거부할 뿐이었다... 그것들을 회피하는 방법이 너무나 비체계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타당하게 여겨지면 그것을 기꺼이 채택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듯 진정으로 독립적으로 결정된 그의 의사가 우연히 일반인들의 의사와 합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택한 그는 인생 행로에서 사회적인 관습이나 음악회 시간 때문이 아니라 우연히 대중들과 예기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툴루즈 로트레크 미술관 툴루즈 로트레크 미술관이 1922년 7월 30일 개관되었다. 이것은 1905년 교회와 중앙정부로부터 분리되어 타른 지방의 재산이 된 아름다운 베르비 궁전에 자리잡고 있다. 알퐁스 드 툴루즈 로트레크 백작의 편지 죽은 내 아들의 작품에 대한 상속인이 될 만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당신에게 내가 가진 아버지로서의 권리를 양도한다는 관대한 제안을 하지는 않을 거요. 하지만 당신의 우정이 나의 미약한 영향력을 말없이 대신해 왔기에 나는 이 관대한 몸짓을 멈출 수 없소 물론 당신이 순전히 급우를 위하는 마음에서 원한다면 말이오. 나는 이 계획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소. 아들이 죽었으니 그의 생전에 내가 허무맹랑한 습작이 라고 치부했던 그의 작품들을 하늘을 보며 찬양하는 수밖에 없소 에르베르 D. 심멜이 편집한 '앙리 툴루즈 로트레크의 서한들' 1991년 대부분 어머니 가 작업실에서 알비로 옮긴 로트레크의 유화, 데생, 포스터들은 한때 이 지역 고고학의 산실이었던 작은 지방 미술관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주아양 타피에드 셀레이 랑을 비롯한 친구들과 로트레크의 친척들이 어머니가 기증한 작품에다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을 추가했다 툴루즈로트레크 미술관의 개관사 언제나 새로움을 추구하며 로트레크는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풍경은 단지 배경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가 화려한 여성이나 귀족. 유명한 예술가만 그리려 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돌이킬 수 없는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충분히 평가받지 못할 거 라는 공포와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기인으로 보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화가는 다시금 대중의 세계에 가까이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 인물을 몇 개월간 관찰한 후 그 모델에게서 기쁨을 찾을 수 있을 때 초상화를 제작하곤 했습니다. 그는 돈 문제에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초상화가 그의 작품의 근간을 이룬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의 작품들은 1882년에서 1901년 사이에 관찰한 요란하고 열광적인 삶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발전했습니다 병원, 경마장, 사이클 경기장, 서커스장, 카페 콩세르, 몽마르트르의 무도장, 극장, 그리고 나체로(물론 정식 누드 모델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곳에서 말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약 400점에 달하는 원판 석판화와 유명한 포스터, 수천 점의 스케치 그리고 수많은 그림들과 지금 여러분들이 소장하신 인상적인 작품들을 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든 미술애호가들이 순례의 대상으로 삼을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들을 영원히 여러분의 보호에 맡깁니다. 모리스 주아양의 연설 발췌문 1922년 7월. 30일 비좁은 전시장에 진열된 로트레크의 작픔들은 신임 박물관장인 에두아르 쥘 리앙에 의해 1934년 재배치되었다 나중에는 현대미술관이 로트레크의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로트레크의 작품이 지닌 현대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다음은 헌대미술관 개관식 때 교육예술부 장판인 레옹 베라르가 연설한 내용이다 신사 숙녀 여러분. 공식 행사를 비꼬는 사람들은 종종 장관의 방문이 무의미하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것이 필요성을 지니지 않았다는 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제가 오늘 여기에 온 이유는 보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9년 전 몽토방 미술관에서 앵그르의 작품들이 새 전시실에 전시되었을 때 예술부 차관은 그 위대한 고전파 화가를 극구 찬양하며 자신이 툴루즈 로트레크의 '창녀'에 감탄을 아끼지 않고 있노라는 말을 했습니다. 지리적 근접성만을 놓고 보면 이 두 화가의 교류는 보수적인 전통의 풍부하고도 빛나는 전당에 속한 이에게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파들 간의 경쟁과 논쟁은 화가의 삶에 본질적인 부분을 형성하기 때문에 종종 화가들이 생전에 정당하게 평가받는 것을 방해합니다. 게다가 회화의 경우 작품의 완전한 가치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제대로 평가되는 듯이 보입니다. 예술부 차관은 몽토방에서 로트레크의 고귀한 조상과 훌륭한 이웃을 찬양한 다음 1913년 알비 시 당국은 툴루즈 로트레크의 고향이 그에게 갈채를 보낼 수 있도록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초대해 준 것에 대해 치하했습니다. 위대한 정신적 재능을 지닌 사람이 자신에 대한 전설과 불운으로 고통받을 때 그에 대한 찬사는 보상의 성격을 띱니다. 일반적으로 그것이 이런 예술 행사의 의의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넓은 아량과 탁월한 안목을 지니고 이 행사를 열도록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 니다. 툴루즈 로트레크 가문에서는 한 분도 빠짐없이 고향에 독창적이고 힘이 넘치며 순수한 미술작품을 기증하여 주셨습니다 로트레크의 모델이자 친구인 주아양 씨는 친구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귀중한 기념품과 보물을 양도하셨습니다. 알비시와 미술관 직원 및 큐레이터들은 로트레크의 데생과 유화들을 정리해 툴루즈와 몽토방, 카스트르 사이에 순례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남부의 조형 예술의 천재를 보려고 찾아오는 로트레크의 수많은 찬양자들을 위해서 말이지요. 로트레크가 알코올과 담배 연기에 찌든 공기 속에서 타락한 인간성의 표본들을 습작하는 데 주력하는 대신, 파란 하늘과 건강한 시골 아낙네들을 관찰했다면 그의 명예가 좀더 높아지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 점에 대해 이렇게 생각합니다. 36세의 나이로 죽은 로트레크의 작품세계는 대단히 폭이 넓어, 어떤 불행도 그의 삶의 방식이나 성격을 편협하게 하여 그의 재능을 제한하거나 그의 붓을 묶어 둘 수 없었을 겁니다 즉. 어떤 화가가 자신의 동시대인들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만큼이나 그들의 쾌락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트레크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포즈를 취하려고 신경 쓰지 않을 때 그들을 그리려 했습니다. 로트레크는 인물의 특징 을 파악하고 표현하는 데 뛰어났으며, 사교계와 독특한 분위기 묘사에 탁월했습니다. 또한 그는 놀이를 하는 사람들의 비참한 부조리를 씁쓸하게 그렸습니 다. 어느 누가 로트레크가 품격을 높이거나 영 확대하기 위해 화가로서의 상징과 진실의 징표를 버리길 바라겠습니까?... 로트레크는 모델이 된 여인들의 일상적 특질을 잘 다루었습니다 로트레크는 이것을 자신의 미술만이 가지는 완벽한 특성으로 만들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인들의 특질 중 몇 가지는 로트레크가 부여한 양식을 통해 새롭게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대하기 힘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화가의 마술이자 정신의 신비로운 창조물인 양식은 로트레크를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이르게 되는 주제입니다. 이 막연한 단어를 써서 우리는 그의 작품에 진실로 찬사를 표하려 합니다. 굵고 날카로운 선으로 묘사된 그의 작품에는 위대한 화가 자신의 개성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그는 이런 찬사를 들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그의 동향인들이 보여 주는 열광과 열의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눈부신 능력과 섬세한 지성을 인간이 벌이는 희극의 여러 광경들과 영웅들, 그리고 사소한 인물들을 묘사하는 데 적용하면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는 그의 명성이나 출신 가문, 조국에 전혀 손색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랜 역사와 아름다움을 지닌 그의 고향에서는 그를 고향에 새로운 영광을 안겨 준 사람으로서 맞아들이고 있습니다 때때로 생활의 긴장과 일상사에서 벗어나 유구한 명성이 서려 있는 이 도시와 지방에 남겨진 귀중한 것을 연구하고 찬양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런 정신적 보물들은 크나큰 기쁨이자 영광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비평적 견해 다음은 로트레크의 작품에 대한 비평적인 감상과 주해의 한 부분이다. 앞의 두 글은 구필 화랑에서 그의 첫 번째 회고전이 열렸을 때 쓰인 것이다. 세 번째 글은 로트레크의 업적에 대한 현대적인 평가이다. 로제 마르크스는 진부한 것을 경멸하는 로트레크를 찬양했다. 로제 마르크스는 권위 있는 미술비평가로. 그의 글은 여러 신문에 발표되었다 그는 앙드레 마르티와 함께 석판화의 부흥에 일조를 찬 '원판화' 시리즈를 출판했다. 그는 19세기말 장식예술의 르네상스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툴루즈 로트레크와 샤를 모랭의 근작 전시회가 파리 몽마르트르가 19번지 구필 화랑에서 열린다 툴루즈 로트레크처 럼 재능 있는 화가가 등장한 지도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그의 힘은 그가 가진 여러 능력의 상호작용 즉 그의 분석적인 통찰력과 예리한 표현방법의 조합을 통해 나오는 것 같다. 가혹할 정도로 준엄한 관찰을 통해 사물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그는 인간의 외적인 인상과 가면, 내면의 성격을 연구했던 위스망스. 베크에 근접해 있다 초기시절의 표현방법이 포랭이나 드가를 연상시키는 툴루즈 로트레크는 자신만의 개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그의 모델들과 단절을 했다 완전하고 근본적으로 그 자신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로트레크의 관점이 정당한가를 판단하려면 지금 개최되는 전시회를 돌아보는 것이 좋겠다 그는 분명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의 내적인 재능은 단절 없이 발전, 증폭되어 왔다. 사상가, 풍자가, 화가로서의 재능을 지닌 그는 늘 새롭고도 인상적인 방법으로 색과 형태를 구사했다 그러나 1887년에서 1888년 사이의 작품들(여성의 초상화, 극장의 내부)에서 이미 오늘날의 미술적 성과(춤추는 여인, 탁자가 들어간 장면)를 거두게 한 맹아를 확인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툴루즈 로트레크와 샤를 모랭은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다 서로 극단적으로 다르긴 하지만 전적으로 독립적인 그들의 재능은 그림에 대해 타고난 애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이 그들의 이름과 작품이 함께 언급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전시회 기간은 짧았지만 복제화와 모방작품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재능 있는 두 인물에 대한 가슴 벅찬 기억을 간직할 것이다 그들은 진부한 것과 평범한 것을 경멸하는 자존심을 지녔다. 그들은 거장다운 솜씨를 분명하고 강력하게 표출했다. 로저」 마르크스 '르 라피드', 1893년 2월 13일 "실천적인 윤리의 교훈"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인 귀스타브 제프루아는 조르주 클레 망소의 신문 '라 쥐스티스'를 통해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저술들은 후에 '화가의 삶'이라는 여덟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는 특히 시슬리와 모네를 포함한 인상주의자들에 정통했으며, 툴루즈 포트레크를 포함한 새로운 세대의 화가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1893년 로트레크를 처음 알게 되었다. 툴루즈 로트레크 전시회 몽마르트르 툴루즈 로트레크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양식을 보여 준다 그의 미술은 논리적이며 은밀한 내적 추진력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 풍경'을 묘사하고 색을 배치하는 그의 능력은 그가 기획하고 제작한 포스터를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브뤼 앙과 라 굴뤼의 모습, 그리고 좀더 최근에는 (일본식 의자)가 거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무도 그 그림들에 담긴 풍부한 선과 아름다운 색채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주제에 따라 때로는 풍부하면서도 가라앉은 색으로, 때로는 지저분해 보일 정도로 탁한 색으로 바꾸어 가는 유화가이자 파스텔 화가인 로트레크는 인물들의 순간적인 동작, 예컨대 자연스러운 몸짓이나 움직임, 이리저리 움직이는 여자의 걸음걸이, 빙빙 돌며 왈츠를 추는 사람의 모습을 포착하는 데 한결같은 테크닉을 구사했다. 그 어떤 경우든 로트레크가 보여 주는 삶의 존재 방식에는 기대치 않았던 뭔가가 담겨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해 있으며 많은 작품을 통해 광범위하게 재현했던 포즈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포즈. 무한히 자연스러운 포즈에서 비롯된다 이것을 통해 다른 화가들과 구분되는 로트레크의 예리한 시각은. 삶에 대한 심리적이며 사회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전통적인 측면이 있다 우리는 이 전통을 만들고 실행에 옮긴 수많은 대가들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다... 그가 댄스홀이나 창녀촌 등 이단시되는 장소에서 그린 작품에는 복잡하게 뒤섞인 조롱과 잔인함이 서려 있다 그러나 그의 미술적 고결함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그의 철저한 관찰력은 삶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악의 철학을 파악하고 있다 때로는 선동적인 과시의 형태로, 또는 힘이 넘치는 데생. 그리고 철저한 분석을 통해 실천적인 윤리의 모습으로 제시하는 악의 철학 말이다. 귀스타브 제프루아 '라 쥐스티스', 1893년 2월 15일 로트레크의 업적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로트레크의 업적을 개인숭배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그가 미래의 서양미술 양식에 끼친 영향은 그의 개별적인 작품이 가진 가치 이상으로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아마도 그의 가장 큰 공헌은, '취향'이 라고 하는 화가와 일반대중 사이에 자리한 무인지대의 순수한 미학적 영역보다 훨씬 광대한 영역에 자리할 것이다. 미술의 집단적인 혁명은 19세기 말 인상파에 의해 처음 개시되었다. 이들은 단지 '미술애호가'라고 알려진 상대적으로 제한된 대중의 영역을 파고들었다. 판화와 포스터를 통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로트레크는 미술의 혁명을 성취한 장본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자유로운 색채의 구사, 보여지는 '현실'에 의존하는 선과 형태로부터의 해방, 묘사적인 특질을 넘어설 정도의 장식적인 특질에 대한 관심, 그리고 미술작품이 대상에 대한 독자적인 구조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여타의 혁명적인 화가들보다 더욱 유명해진 것이다. 전통적인 원근체계를 무시한 로트레크는 종종 순수하게 자의적인 기반에서 선택한 단조로운 색채를 병렬시켰다. 또한 20∼30년 전이라면 조롱거리가 되었을 해부학적인 왜곡을 창출했다. 파리의 거리를 흠모하던 그의 작품들은 극장 팜플렛이나 광고, 그리고 수많은 판화와 출판물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세잔이나 반 고흐의 작품에 가해졌던 어떠한 종류의 적대적인 비평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사실상 그는 현대의 미술을 기술을 통한 재현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얼마 전의 위대한 혁신자들도 아직 이 영역에서는 폭넓은 탐구를 벌이지 못한 터였다. 만약 그들이 이 영역에 과감히 도전하려 했다 해도 로트레크가 닦아 놓은 제작과정의 기술적인 측면에 의존하지 않으면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뷔 야르 같은 횔씬 '신중한' 당대인들도 채색석판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을 때에는 주저하면서 불안정한 태도를 보였다. 로트레크는 유화와의 관련성을 강화시키며 삽화 분야의 모든 미술에 어마어마한 힘을 불어넣었다 창조적인 자부심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의 사후 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 로트레크의 영향은 광고와 연재만화(특히'아스트릭스'처럼 색채가 풍부한 만화), 그리고 공상과학 소설의 삽화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지금까지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로트레크의 작품이 지닌 가장 뚜렷하고 중요한 선적인 양상은 그것들이 채색과 데생의 엄청난 하부구조 위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그는 스케치북과 캔버스 위에서 이미지를 구성하고 또 구성했다. 그를 통해 로트레크는 필요 없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을 끊임없이 잘라 내어 외관의 본질 즉, 자세의 의미를 잡아냈다 또한 로트레크는 인상파들이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으로 색채를 실험하고. 인지하고 있는 실제적인 것에서 색채를 해방했다 그는 서양미술의 진보에서 보면 의미심장한 인물이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겠지만, 포스트 인상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방법을 통해 20세기 전체 미술의 발전을 거의 다 예견한 포스트 인상파 말이다. 베르나르 당비르 '툴루즈 로트레크'. 1991년